姜仁求 서울대학교 문리 대 및 동 대학원 사학과 졸업. 日 本 九J朴大學校 문학박사. 국립부여박물관장, 국립중앙박물관 考古部長, 영남대학교 문과 대학 교수, 한국학대학원장 역입 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저서 『百濟古 壇硏究 』 『 三 國時代 壇丘墓 硏究』 『考古學 으로 본 韓國古代史』 『韓國의 前方後圓壇 舞岐山과 長鼓山』 『자 라봉 古壇』 『華城 白 谷里古壇』 『漢代考古學槪說』(譯) 『高句麗簡史』(共譯) 등. 아르케 (arche, d p x 서)는 ‘시 초’, ‘시작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가지며, 학술적으로는 ‘원 리’ 를 의미합니다
韓半島 의 古項
韓半島의 古壇
序文 古壇을 학문으로 專攻한다고 뜻을 세운지 근 사십년에 이른다. 고분의 개개를 대상으로 한 논문 작업은 쉴 새 없이 해 왔지만, 고 분에 관한 知識울 한 줄거리의 體系를 세워 종합적으로 한 冊에 실 을 기회를 얻지 못하고, 단지 가슴 속에서 벼르고만 살아 오다가, 마침 대우재단의 큰 뜻에 은혜를 입어 겨우 所願울 풀게 되었다. 그 렇지만 집필기간이 길어서 작업하다가 중단하기를 수없이 거듭한데 다, 그간 국토는 경제발전과 함께 끊임없이 開發되고, 그에 따른 발 굴조사로 새로운 資料는 미처 살필 시간도 없이 山積해 작업을 더 욱 더 어렵게 하곤 하였다. 작은 所願을 이루었다 하여 自足感에 젖을 여유도 없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정보를 검토하고 修正 補完하려면 큰 일은 정작 이제부터가 아닌가 念慮되기도 한다. 좋은 기회를 마련하여 주신 대우재단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江 湖諸賢의 애정어린 北正울 기다린다. 1999 년 8 월 8 일 淸溪山 南麗 悠山書堂에서 姜仁求
차례
序文 ·5 제 1 장 總論 ·23 l 古壇의 槪念 23 l.l 古壇의 意義와 名稱 • 23 1.2 古 의 構成要素 • 26 1.3 墓地와 分布狀 • 28 1.4 古 의 形( 壇丘型式) • 37 1.5 葬法 ·43 1.5.l 死體處理 • 43 1.5.2 埋葬姿勢 • 52 1.6 葬具 • 55 1.6.1 • 55 1.6.2 • 61 1.6.3 室 • 63 2 硏究方法論―遺蹟學的 方法 65제 2 장 古 의 型式 • 69
1 先史時代 69 2 靑銅器時代(古朝鮮 • 辰國) 71 2.1 石墓 • 72 2.2 支石墓 • 76 2.2.1 分布 • 76 2.2.2 立地 • 77 2.2.3 構造와 型式 • 78 2.2.4 葬法 • 101 2.2.5 副葬遺物 • 106 2.2.6 編年 • 108 2.2 .7 支石墓의 起源問題 • 114 2.3 石 墓 • 117 2.3.l 分布와 墓地 • 117 2.3.2 構造와 型式 • 119 2.3.3 副葬遺物 • 125 2.3.4 葬法 • 126 2.3.5 石 墓의 編年과 起源問題 • 127 2.4 石 墓 •129 2.4.1 分布와 墓地 • 129 2.4.2 構造와 出土遺物 • 133 2.4.3 葬法 • 135 2.4.4 石 墓의 系統과 編年 • 1352.5 土 墓 • 136
3 初期鐵器時代(樂浪 • 三韓) 137 3.1 土 墓 • 137 3,2 塘室壇 • 144 3.3 壅 墓 • 149 4 鐵器時代(三國~高麗) 151 4.1 高句 및 渤海古 • 152 4.1.1 積石塚 · 152 4.1.2 封土石室 · 173 4.1.3 渤海古壇 • 207 4.2 百濟古 • 213 4.2.1 土 墓 • 土築墓 • 214 4.2.2 周溝土 墓 • 221 4.2.3 積石塚 • 227 4.2.4 石 墓 • 239 4.2.5 墓 • 239 4.2.6 火葬墓 • 242 4.2.7 石室 • 245 4.2 . 8 塘築 • 265 4.3 新羅 및 統一新羅 古 • 279 4.3.1 土 墓 • 279 4.3.2 石 墓 • 283 4.3.3 積石木 • 2844.3.4 橫穴式石室 • 306
4.3.5 統一新羅 古 (石室火葬墓) • 318 4.4 加耶古 • 343 4.4.1 土 墓 • 343 4.4.2 石 墓 • 347 4.4.3 石室 • 348 4.5 圓方形 (前方後圓形 ) • 368 4.6 高麗古壇 • 396 4.6.1 分布와 墓地 • 396 4.6.2 構造型式 • 397 4.6.3 副葬遺物 • 413 4.6.4 葬法 • 416 4.6.5 古 壁畵 • 417 4.6.6 高 古 의 系統 • 418 제 3 장 古 에 보이는 古代國家形成 • 421 1 古朝鮮 421 2 辰國 424 3 馬韓 429 4 高句麗 431 5 百濟 432 6 新羅 4337 加耶 434
8 榮山江流域의 勢力集團 437 제 4 장 結論 • 441 참고문헌 · 443 찾아보기 · 453그림 차례
그림 1 屈葬의 姿勢形態 / 54 그림 2 積石墓 / 74 그림 3 岡上 積石墓 / 75 그림 4 긴洞 支石墓 實測圓 / 80 그림 5 平安南道 龍岡郡 石泉山 支石墓 / 80 그림 6 大坪里 遺跡 / 89 그림 7 遼東半島 支石墓 略測圓 / 90 그림 8 五德里 10號 支石墓와 出土遺物 / 91 그림 9 沈村里 支石墓群과 出土遺物 / 92 그림 10 堤川 黃石里 13號 支石墓와 出土遺物 / 93 그림 11 大邱 大鳳洞 支石墓 石室 實測圓 / 94 그림 12 達城郡 月背邑 辰泉洞 1號 • 2號 石郡 實測圓 / 103 그립 13 達城郡 月背邑 辰泉洞 3號 A • B石稽 實測圖 / 104 그립 14 江華 富近里 支石墓 / llO 그림 15 江華 富近里 支石墓 側面 / llO 그림 16 坡州 德隱里 支石墓 / lll 그림 17 海南 雲田里 支石墓群 / lll 그림 18 堤 黃石里 支石墓 / l12 그림 19 大邱 大鳳洞 支石墓 / 112 그림 20 日本 九州 志登 支石墓 / 113 그림 21 保寧 寬倉里 石稽墓 / l18 그림 22 中國 吉林省 吉林 題達溝 石稽墓 / l19 그림 23 黃海道 延安郡 長谷里 石相墓 / 121 그림 24 江界 公貴里 石稽墓 / 121그림 25 西 ·山 子 l 號훨/1 22
그림 26 #(餘 中井里 堂山 I 號 石格짧시 22 그림 27 #(餘 佳뺑里 m 凰.山 石室 配置圖/1 23 그림 28 南山根 102 號힘 平面圖 •斷 面圖/1 30 그림 29 金海 會~~里 貝援 地形圖시 31 그림 3 。 牙山 南城里 石椰훌/1 32 그림 31 石嚴里 9 號혐 1 앗뼈 IJ 圖/1 39 그림 32 石嚴里 9 號樓 內部 :n i 則圖/1 40 그림 33 黃海道 股票휠 1 ‘ 雲城里 古境시 41 그립 34 樂浪區域-帶 發抽境의 位置/1 42 그림 35 貞相洞 西南쪽 언덕 古境群 分布圖/1 42 그림 36 貞相洞 3 號樓 ·2 號椰 143 그림 37 平壞 永和 9 年在銘햄出土古劃 146 그림 38 樂浪 *홈野里 25 號境시 47 그림 39 大同江面 1 號境 玄室 平面圖/1 48 그림 40 通構 將軍흉 正面/1 58 그림 41 通構 將軍援 東南面/1 58 그림 42 通滿 將軍援頂上部 /159 그림 43 通滿 將軍援 F 홉城/1 59 그림 44 었울寧省 桓仁縣 高力훌子村 古樓群 分布圖/1 62 그림 45 었울寧省 桓仁縣 高力훌子村 古樓群 중 서로 잇대어 쌓은 積石훌/1 63 그림 46 選寧省 桓仁縣 高力훌子村 21 號境 實뼈 IJ 圖/1 64 그림 47 通構 古購후 分布圖/1 65 그림 48 積石혔古境群 /166 그림 49 沈貴里 古項群과 南城洞 古境群 /167 그림 5。 松岩里 古境/1 68 그림 51 良民 73 號樓 質測圖/1 69 그림 52 良民 74 號境 實測圖/1 70 그림 53 集安의 巨石積石城/1 71 그림 54 安훌훌洞 基훨積石혔 1 號 實測圖/1 72
그림 55 集安 萬寶汀墓區 1368 號墓 / 177
그림 56 룡봉리 遼東城塚 / 178 그림 57 安岳 3 號壇(1) / 1 79 그림 58 安岳 3 號壇 (2) / 1 80 그립 59 安岳 3 號壇 (3)/ 181 그림 60 東明王陵 / 182 그림 61 單室墓(1) / 186 그림 62 單室墓 (2) / 1 87 그림 63 單室墓 (3) / 1 88 그림 64 籠側室墓(1) / 188 그림 65 籠側室墓 (2) / 1 89 그림 66 二室墓 / 190 그림 67 三室墓 / 191 그림 68 多室墓(1) / 191 그림 69 多室墓 (2) / 192 그립 70 德興里 古壇의 構造圖 / 193 그림 71 水山里 壁畵壇의 構造圖 / 193 그림 72 藥水里 壁畵項의 實測圖 / 194 그림 73 高山洞 古壇群 / 195 그림 74 高山洞 7 號壤 / 196 그림 75 雪梅里 11 號壇 / 197 그림 76 壁畵噴 內部 透視圖(1) / 198 그림 77 壁畵壇 內部 透視圖 (2) / 199 그림 78 安岳 3 號壇 內部 / 200 그림 79 安岳 3 號壇 主人公圖 / 200 그림 80 安岳 3 號項 墨書銘 / 201 그림 81 集安 五 壇 外形 / 201 그림 82 集安 五 壇 內部 / 202 그림 83 德興里 古壇 天井部(1) / 203 그림 84 德興里 古壇 天井部(2) / 203그림 85 德興里 古壇 主人公圖 / 204
그림 86 德興里 古壇 墨習銘 / 204 그림 87 大同郡 大寶面 7號項 / 205 그림 88 江西 大墓 / 206 그림 89 江西 大墓 靑龍圓 / 206 그림 90 貞惠公主墓 / 208 그림 91 貞孝公主墓 / 208 그림 92 三靈屯 古壇 / 209 그립 93 東寧大城子 Ml / 209 그림 94 江蘇句容浮山果園 1 號 土激墓 / 220 구림 95 天安 淸堂洞 古壇群 / 223 그림 96 公州 下鳳里 周溝土坡墓 / 224 그립 97 益山 永登洞 周溝墓 / 224 그림 98 蔚山 茶雲洞 遺跡 가 • 나區域 遺構 分布圖 / 225 그림 99 中國 北京 軍 都山 玉皇廟 M156 / 226 그림 100 中國 赤峰 藥王廟 11 號墓 /226 그림 101 中國 新疆 察吾平溝口 M8 / 226 그림 102 中國 新疆 柏米彌高原 M37 / 226 그림 103 서울 可樂洞 2 號壇 平面圖 • 斷面圖 / 229 그림 104 서울 石村洞 破壤壇 遺構 分布圖 / 230 그림 105 서울 石村洞 A號 積石塚 / 231 그림 106 서울 石村洞 5號壇 實測圖 / 232 그림 107 서울 石村洞 5號壇 細部 實測圖 / 233 그림 108 서울 石村洞 1號壇 平面圖 / 234 그림 109 서울 石村洞 4號壇 平面圖 • 斷面圖 / 235 그림 110 서울 石村洞 3號壇 東쪽 古壇群 發堀地 層位 槪念圖 / 236 그림 111 서울 石村洞 1號項 / 237 그림 112 서울 石村洞 4 號壇 / 237 그림 113 서울 石村洞 3 號壇 / 238 그림 114 楊平 汶湖里 古壇 墓鄒 實 測圖 / 238그림 115 扶餘鹽倉里軍石部落 盡稽墓 質ifti]圖 /241
그림 116 扶餘 中井里 1 號壇 / 243 그림 117 扶餘 中井里 2 號浪 / 243 그림 118 扶餘 雙北里 火葬壇墓 / 244 그림 119 華城 白谷里 5號壇 石室 內部 / 246 그림 120 論山 表井里 9號壇 築造狀態 / 247 그립 121 公州 宋山里 5號壇 實測圓 / 252 그림 122 서울 中谷洞 石室項 實jff l] 圖 / 253 그림 123 耀州 梅龍里 石室壇 質jff l] 圖 / 254 그림 124 서 울 芳黃洞 1 號壇 實i RI] 岡 / 255 그림 125 서울 芳黃洞 石室 內部(1) / 255 그림 126 서울 芳夷洞 石室 內部 (2) / 256 그림 127 서울 可樂洞 3 號壇 石室 實測圖 / 256 그림 128 大同郡 南井里 119 號壇 / 257 그림 129 公州 錦洞 1 號項 / 257 그림 130 論山 六谷里 石室壇 實測圖 / 258 그림 131 扶餘 陵山里 古壇群 1 次 工事圖 / 258 그림 132 扶餘 陵山里 古壇群 / 259 그림 133 扶餘 陵山里 1號壇(東下塚) 內部(1) / 259 그림 134 扶餘 陵山里 1號噴(東下塚) 內部 (2) / 260 그림 135 扶餘 陵山里 東1號壇 內部/ 260 그림 136 扶餘 陵山里 3號壇(西下塚) / 261 그림 137 扶餘 陵山里 4號壇 護石 / 261 그립 138 扶餘 陵山里 1號壇(東下塚) 實測圖 / 262 그림 139 扶餘 陵山里 2號壇(中下塚) 實jff l] 圖 / 262 그림 140 扶餘 陵山里 3號壇(西下塚) 實iffiJ圖 / 263 그립 141 扶餘 陵山里 東 1號壇 實淵圖 / 263 그림 142 扶餘 陵山里 東 4號積 實iffi]圖 / 264 그림 143 扶餘 陵山 割石塚 實測岡 / 264 그림 144 公州 宋山里 古壇群 / 266그림 145 公州 宋山里 古壇群 6號壇(左) • 5號項(右) / 266
그림 146 公州 宋山里 6號壇 平面岡 • 立面圖 / 267 그림 147 公州 宋山里 6號壇 內部 / 268 그림 148 公州 武寧王陵 封土圓 / 269 그림 149 公州 武寧王陵 內部 / 270 그림 150 公州 武寧王陵 遺物 配置狀態 / 270 그림 151 大同郡 南四里 2號壇 壇丘 實測圓 / 271 그림 152 大同郡 南四里 2號壇 實測圓 / 272 그림 153 平壤 永和9年在銘地室壇 / 273 그림 154 慶州 朝陽洞 60 號壇 /281 그림 155 • 慶州 九政洞 1號壤 / 282 그림 156 慶州 芳內里 石郡墓 / 283 그림 157 慶州 皇南洞 古壇群 遠景 / 288 그림 158 慶州 天馬塚 / 288 그림 159 鹿州 皇南大塚 / 289 그림 160 座州 皇南洞 甄形壇 / 289 그림 161 鹿州 皇南洞 l09 \號壇 實測圖 / 290 그립 162 慶州 皇吾里 14號壇 實測圖 / 291 그림 163 慶州 皇南大塚 實測圖 / 292 그림 164 座州 天馬塚 積石部 平面圖 / 293 그립 165 慶州 天馬塚 壇丘 斷面圓 / 293 그림 166 慶州 天馬塚 主鄕 平面圖 • 斷面圓 / 294 그림 167 慶州 未鄒王陵地區 第1區域 古壇群 / 295 그림 168 慶州 未鄒王陵地區 第5mi域 全體配置岡 / 296 그립 169 慶州 未鄒王陵地區 第9區域 古壇群 / 297 그립 170 Chirikta Kurgan 封壇 및 木郡部 斷面圖 / 303 그림 171 Pazyryk Kurgan 3號壇 木郡部 斷面圓 / 304 그림 172 Shibe Kurgan 木鄒部 斷面圓 / 304 그립 173 Noin - Ula Kurgan 6號壇 木柳部 斷面圓 / 304 그림 174 Bessatyr Kurgan 壇丘 斷面圓 / 305그림 175 Ili江流域의 Kurgan 小形項 / 305
그림 176 慶州 皇南洞 151號壇 實測岡 / 310 그림 177 慶州 普 洞 夫婦塚의 婦塚 / 310 그림 178 榮州 順興面 邑內里 壁畵噴 /311 그림 179 榮州 順興面 邑內里 3號噴 內部 /311 그림 180 迎日 冷水里 古壇 / 312 그림 181 迎日 冷水里 古壇 外形 / 313 그림 182 迎日 冷水里 古壇 內部 / 313 그림 183 慶州 雙床塚 / 314 그림 184 慶州 忠孝里 10號項 石室 質i n lj圖 / 315 그림 185 北濟樓敎基園 平面 • 斷面 / 316 그림 186 隋姬威基圓 平面 • 斷面 / 316 그림 187 唐永泰公主墓 / 317 그립 188 座州 西岳洞 古項群 / 331 그림 189 善德女王陵 護石 / 331 그립 190 武烈王陵 / 332 그림 191 傳定康王陵 / 332 그림 192 傳定康王陵 護石 • 床石 / 333 그림 193 傳神文王陵 / 333 그림 194 傳閔哀王陵 / 334 그림 195 傳聖德王陵 / 334 그림 196 傳金庚信墓 護石 • 桐干 / 335 그림 197 傳金庚信墓 午像 / 335 그림 198 慶州 石杭塚 頭杭石 / 336 그림 199 傳憲德王陵 / 336 그림 200 掛陵 / 337 그림 201 掛陵 武人石 / 337 그림 202 傳景德王陵 / 338 그림 203 傳眞德王陵 / 338 그림 204 慶州 九政洞 方形項(I) / 339그림 205 慶州 九政洞 方形項(2) / 339
그림 206 西漢 皇帝陵 分布鬪 / 340 그림 207 唐皇帝陵 分布岡 / 341 그림 208 昭陵과 階葬墓 / 341 그립 209 乾陵 / 342 그림 210 金海 大成洞 土城木構墓 / 346 그림 211 義城 塔里 古慣 第2墓鄒 / 350 그림 212 釜山 福泉洞 D815號壇 內部 / 351 그림 213 釜山 福泉洞 11號壇 造物 出土狀態 / 351 그림 214 高靈 池山洞 古項群 / 352 그림 215 高磁 本館洞 古壇群 / 352 그림 216 咸安 道項里 • 末山里 末伊山 古壇群 / 353 그림 217 咸安 道項里 末伊山 16號壇 / 353 그립 218 漆谷 鳩岩洞 古壇 / 354 그림 219 義 塔里 古噴 壇丘 實 I略圖 / 354 그림 220 安東 造塔洞 古壇 質測圓 / 355 그림 221 安東 造塔洞 古壇 小石柳과 壅稽 平面圖 • 斷面圖 / 356 그림 222 安東 中佳邱洞 古噴 石柳 平面圓 • 斷面岡 / 356 그림 223 咸安 末山丘群 附道項丘群 古壇 分布圖 / 357 그림 224 咸安 末伊里 22號項 噴丘 實測圖 / 358 그림 225 達成郡 解顔面 1號壇 / 359 그립 226 梁山 夫婦塚 石室 斷面圖 • 平面圓 / 360 그림 227 大邱 內唐洞 50號項 項丘 實測圖 / 360 그림 228 高藍 古衛洞 壁畵古壇 / 361 그림 229 昌寧 桂城里 桂南北 古項群 分布圓 / 364 그림 230 昌寧 桂城里 桂南北 5號壇 壇丘 平面및 斷面圖,, 石室 位置圖 / 365 그림 231 昌寧 桂城里 桂南北 5號噴 平面岡 • 斷面圓 / 366 그림 232 昌寧 桂城里 桂南北 5號壇 石室內 遺物 配置圖 / 367 그림 233 서울 芳冀洞 1號項 / 371 그림 234 咸平 萬家村 古坡 / 371그림 235 岩 泰測里 자라봉 古項 / 372
그림 236 銀岩 泰洞里 자라봉 古項 石室(1) / 372 그림 237 岩 泰測里 자라봉 古項 石室 (2) / 373 그립 238 大板 黃金塚(上), 固城 舞岐山 古壇(下) / 373 그림 239 固城 舞岐山 古壇(1) / 374 그림 240 固城 舞岐山 古壇 (2) / 374 그림 241 羅州 潘南面 德山里 • 新村里 古坦群 / 375 그림 242 靈岩 新燕里 土築壇(裵稽 • 土塘) / 375 그림 243 海南 龍頭里 말무덤 古壇 / 376 그림 244 咸安 道項里 末伊山 22 號項 / 376 그림 245 海南 方山里 長鼓山 古壇 / 377 그림 246 光州 月桂洞 1號壇 / 377 그림 247 光州 月桂洞 1號壇 石室 / 378 그림 248 光州 明花洞 古壇 壇丘 實iJII] 圓 / 378 그림 249 光州 明花洞 古壇 / 379 그립 250 咸平 禮德里 新德 古壇 / 379 그림 251 靈岩 萬樹里 4號壇 平面圓 / 380 그림 252 羅州 潘南面 紫薇山 附近 古壇 配置圖 / 381 그림 253 羅州 潘南面 新村里 9號壇 實測圓 / 381 그림 254 羅州 潘南面 德山里 3號壇 實測圖 / 382 그림 255 羅州 潘南面 大安里 8 • 9號壇 實測圖 / 383 그림 256 岡山縣 都月坂 2號 壇丘墓 / 384 그림 257 彌生時代 壇丘墓 / 385 그림 258 岡山縣 梧築 積丘墓 / 386 그립 259 千葉縣 神門 4號壇 / 386 그림 260 岡山縣 宮山墓 / 386 그림 261 壇丘墓의 規模(模式 l / 1000) / 387 그림 262 椿大塚山 古壇 外形 實測圖 / 388 그림 263 奈良縣 著墓 古壇 / 389 그림 264 서울 石村洞 6 • 7號壇 / 390그림 265 咸平 萬家村 古項群 等高線 測量岡와 周溝 / 391
그림 266 서울 芳茂洞 1 •2號項 位岡 / 392 그림 267 羅州 潘南面 新村里 6號撰 實測岡 / 393 그림 268 固城 舞岐山 古壇 / 394 그림 269 海南 長鼓山 古棋 / 395 그림 270 海南 龍頭里 古項 / 396 그림 271 開城 恭愍王陵 正面圓 / 399 그림 272 開城 恭愍王陵 / 400 그림 273 安東 무덤 質測圖 / 401 그림 274 咸平 新德 古壇 石室 / 401 그립 275 晉州 平居洞 古壇(1) / 403 그림 276 晉州 平居洞 古壇(2) / 403 그림 277 晉州 平居洞 古壇(3) / 404 그림 278 晉州 平居洞 古壇(4) / 403 그림 279 居昌 屯馬里 壁畵古壇 位置圖 / 406 그림 280 居昌 屯馬里 壁畵古壇 前面 / 407 그림 281 居昌 屯馬里 壁畵古壇 後面 • 側面 / 407 그림 282 居昌 屯馬里 壁畵古壇 石室 配置圓 / 408/ 그립 283 居昌 屯馬里 壁畵古壇의 東郡壁畵 詳細圖 / 409 그림 284 論山 得尹里 1 號壇 實測圖/ 410 그림 285 茂朱 柳洞里 土塘과 遺物 配置圖/ 412제 1 장 總論 1 古壇의 槪念 1.1 古壇의 意義와 名稱 古壇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일정하지 않으며 학 자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다. 두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金元龍은 ‘古壇이란 옛 무덤이란 뜻으로, 가까운 과거나 현대의 무덤(분묘) 중에서 역사적 또는 考古學的 資料가 될 수 있는 분묘 를 말한다.’ 라고 정의하였다.1) 이 말을 줄이면 古壇이란 옛 무덤 중 에서 학문적 가치가 있는 무덤만을 일컫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생각 컨대 학술적 가치 유무와는 관계없이 모든 분묘시설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齋藤忠은 ‘어떤 지역에 오래된 옛날의 흙을 쌓아올린 墓가 남아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혹 古壇이라고 하고. 혹 古塚 이라든가 塚穴이라고 습관적으로 부른다.’ 라고 하였다힙 여기서 1) 金元龍 : 『한국의 고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교양국사 총서 2. 1974. 12. p39 . 2) 齋藤忠 : 『日本古壇(1)硏究』 東京 吉 )l| 弘文館 1974. pl.
흙을 쌓아올린 墓’ 란 말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이 말은 ‘흙을 쌓 아올리지 않은 묘’ 는 古噴이 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이와 비슷 한 정의로 흙을 높이 쌓아올린 고대의 묘를 일컫는 말’ 이라고 하 는 水野淸 一 • 小林行雄의 정의가 있다힉 또 大塚初重과 小林三朗은 古태t은 일반적으로 고대의 분묘라는 의미를 갖지만, 일본의 考古學 硏究에서는 약간 한정적으로 사용하는데, 규모의 대소는 별도로 하 고 흙 또는 돌을 쌓아올린 분구를 갖고, 그 내부에 유해 매장을 위 한 시설을 갖고 있다.’ 라는 정의를 내린 바 있다 .4)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두 번째의 세 견해는 일본학자들의 통설 적인 정의인데, 모두 ‘흙을 쌓아올린 묘’ 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본학계에서는 ‘墓’ 와 ‘壇' 을 엄격히 구분하고 高塚壇墓’ 만을 古壇이라고 하고, 고총분묘가 주로 만들어지던 시대 를 특히 古壇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은 · 古壇시대의 전 시대인 彌生(야요이)시대에는 낮은 분구(低壇丘墓)의 무덤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고대 국가의 형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어] 생긴 구분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지하에 시체를 매장하고 지상에 아무런 표지를 만들지 않는 무덤을 ‘墓’ 라고 하였고, 반대로 지상에 봉토 둥 표지 물을 설치하는 것을 蹟:’ 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누가 묻혀 있는지 주인공을 알 수 없는 무덤을 塚t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일본에서의 ‘墓' 壇:’ 의 구분은 고대 중국의 예를 충실 히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考古學的으로 밝혀진 고대 중국의 경 우를 보면, 殷代에는 지하에 시체를 매장하고 지상에는 아무런 표지 나 시설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은대의 古壇은 지하에만 십자형의 거대한 土塘과 木柳이 있을 뿐, 지상에는 아무 것도 없고 편평하게 되어 있는 無丘墓이다. 지상에 분구 (Mound) 가 생긴 것은 북방의 Kur g an 의 영향을 받아 周-春秋시대에 비로소 생겨났다고 한댜 5) 3) 水野淸一 • 小林行雄 : 『岡解 考古學辭典』 「古壇」 東京創元社 1959. p35 6. 4) 大塚初重 • 小林三朗 : 『古壇辭典』 東京堂出版 1982. p34 5. 5) 關野雄 : 『中國考古學硏究』 東京大學出版會 1972. pp5 65 ~587.
그러므로 인류가 무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먼 태고 구석기시대 (전기)로 올라가지만. 原初形 무덤은 지면을 약간 파고 시체를 묻는 정도의 시설. 즉 平土俺埋 또는 平土葬이었다. 이 형상이 발전하여 지상에 분구가 생긴 것인데. 신석기시대 이후로 추측된다. 분묘의 발생문제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겠다. 현대 중국 고고학계의 경우는 壇:’ 이나 塚t 이라는 용어는 사용 하지 않으며, 無丘墓 • 有丘墓를 가리지 않고 모든 무덤에 대하여 墓’ 라는 용어로 통일하여 사용하고, 묘에 내장된 종합적인 문화를 논할 때는 墓葬’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6)
6) 중국의 春秋 이전에는 墓’ 라는 용어 외에 ‘丘墓’ 讀墓' ‘塚墓’ 등의 명칭은 없었다고 한다(楊寬 : 『中國皇帝陵의 起源과 變遷』 東京學生)ml:. 1981. p2 4.).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墓 • 壇울 엄격히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였고, 또 근래에 와서는 ‘壇墓’ 라는 합성어로도 사용하기도 하는데. 학계에서 주로 사용하는 古珪t’ 이란 용어는 일제시대의 용 어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古壇이란 무엇인가?’ 의 해답을 정리하면, ‘옛날 사람의 시체를 매장한 시설물 을 일컫는다. 따라서 古項은 만 든 재료에 관계없이, 그리고 지하에 있건 지상에 있건. 또 수중에 있건 일체 위치에 관계없이 옛 사람의 무덤이면 모두 古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선사 이래 현대까지도 분묘가 만들어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일본과는 달리 ‘古壇시대 ’7) 라고 하는 특정한 시대를 설정하는 것은 사실에 잘 맞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모 든 古壇은 규모의 대소와 부장유물의 다소에 관계없이 인류문화를 추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일반적으로 또는 학문적으로 통칭되는 古壇이란 명칭에는 여러
7) 일본 고고학계에서는 3C 말 또는 4C 초에 高塚古壇이 彌生時代의 분묘에서 발 생하여 7C 중엽에 고분이 소멸하고, 모든 葬法이 火葬으로 변화 변경되었다고 하 여. 고총고분이 존재한 시기를 고고학상 古壇時代’ 라고 시대구분한다.
종류의 무덤이 포함되어 있다. 묘 • 분 • 총에 관해서는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왕과 왕비의 무덤은 陵:' ‘山` ‘丘’ 라 불리며, 왕자 • 공주 등의 무덤은 ‘園 이라고 한다. 그리고 일반 古壇의 경우 도 시대에 따라 또는 구조형식에 따라서 여러 종류의 명칭이 있다 . 우리나라의 경우 선사시대에는 토광묘 • 지석묘 • 석관묘 • 석곽묘 • 적석묘 • 옹관묘 • 화장묘 등이 있었고 , 청동기시대, 三國時代 이후에 도 이들 무덤의 대부분은 존속되었으나 지석묘만은 단절되었다. 유럽 등 서양에서는 매장시설의 용어로서 Tumulus • Barrow • Ca irn • Cis t 등을 사용하고 있으나,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댜 죽 Tumulus 는 중부와 동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청동기시 대 (BC1500 년 ~BC1200 년) 분묘로서 원형 봉토의 분구 아래 석관을 격납하고 尻體葬 또는 火葬한다. Tumulus 는 BC 1200 년 이후에 옹관 묘로 대체되면서 사라졌다. Barrow 는 盛土에 의한 분구가 있는 분묘 형태로서 봉토분을 가리킨다. C airn은 지면 위에 돌로 쌓아 분구를 만든 분묘로서 서유럽에서는 巨石墓에서, 시베리아에서는 Kur g an 에 서 볼 수 있다. 지하의 매장주체시설에는 토광, 석관 등 여러 종류 가 있으며, 역사시대까지 이어져 왔다• C i s t는 판석으로 만들어진 사 체를 안치하는 용기로서 Tumulus 또는 Barrow 의 내부시설로서 존재 한다. 이상에 든 예는 서양 분묘의 종류이지만, 매장법의 기본이기 도 하다 .8) 1.2 古壇의 構成要素 사람의 시체를 매장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설물인 무덤은 어떤 요소로 이루어졌는가? 8 ) Warwi ck Bray & David Trump , 'The Peng uin Di ct i on a ry Of Archaeolog y 1970. Great Brit ain.
이 질문의 답으로 첫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瑾 沮t’ 이다. 시체 를 매장할 장소로서 어떤 위치에 어떤 지형의 장소를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매장 관념상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가령 구석기시대에는 인간이 거처하던 동굴 속을 택하였으며, 청동 기시대의 지석묘는 하천변의 평원을, 그리고 가야시대에는 산의 능 선상을 골라 무덤을 축조하였다. 말하자면 墓 地選定은 인간의 주거 생활과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 변천되어 왔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시체를 안치하고 보호할 수 있는 空間施 設로, 죽 매장의 주체시설, 일반적으로 內部施設이라고도 하는데. 지 면을 간단히 판 구덩이에서 시작하여 土塘과 鄒室로까지 발전하였 댜 이 시설은 대체로 地面下에 형성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때로는 地上 壇丘 中에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 지석묘 • 적석총 • 土築墓 9) 가 여기에 속한다. 다음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시체와 함께 매장하는 副葬遺物(隨 葬品)이다 . 일반적으로 부장유물을 토광이나 곽실 안에 격납하는 것 은 人智 발달수준에 따라 변화되어 왔고, 인간의 내세관이라든가 현 세의 신앙에 의하여 지배되어 왔다. 끝으로 네 번째의 중요한 요소는 내부시설을 보호하는 시설인 壇 丘이다. 후세로 내려오면서 분구의 기능은 내부시설의 보호라는 원 초적 기능 이외에 墓의 標識 • 記念物로서 또는 사회적 신분의 표현 수단으로서도 중요해졌다. 이상 네 가지의 중요한 부분이 무덤을 구성하는 기본으로, 이를 ‘무덤의 4 요소’ 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 시체를 근접하여 보호 기 능을 가진 稽이라든가 , 묘역을 표시하고 분구를 보호하는 護石(土留 石列)의 시설이라든가, 또는 분구와 그 주위에 설치되는 外護飾物이 라든가 하는 부대시설들이 부가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원시적인 무 9) 土築 墓 에 관하여는 댜f 濟 古壇」에서 상세히 설명하였다 .
덤의 요소는 展體 • 土城 • 覆土만으로 형성되었으며. 여기에 인지의 발달과 더불어 위에서 말한 새로운 기능이 하나씩 부가되어 현재 우리가 조사연구대상으로서 보는 바와 같은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 었다. 앞에서 잠깐 말한 바와 같이 古壇은 그것이 어떠한 형상을 하고 있든지 옛날 사람들의 생활 • 사상 • 문화 • 역사를 복원하는 데 없어 서는 안 될 중요한 학문적 자료가 된다. 현대를 기준으로 하여 보 면 고대로 올라가면 갈수록 문자를 수단으로 하여 남겨진 기록이 적기 때문에 부득이 당시 인간이 남겨 놓은 유적이나 유물을 활용 하는 수밖에 없다. 유적에는 生活遺罰[ 古壇遺蹟 • 記念遺蹟 등의 여러 종류가 있으나, 생활유적은 인간이 같은 장소에서 계속 거주하 며 생활해 왔기 때문에 대부분 파괴 일실되어 오늘날 남아 있는 것 이 매우 드물다. 또한 기념유적은 유적의 성질상 단일성이 강조된 것이기 때문에 복합적인 인간의 문화를 복원하는 데는 충분치가 않 다. 그러나 古項遺蹟은 시체매장으로 발생한 유적이기 때문에 구조 자체는 자연적 • 인위적인 침해로부터 가장 잘 보호되도록 되어 있 다. 따라서 그것이 소재하고 있는 장소에서부터 시작하여, 내부의 묘실 • 부장유물 • 분구을 통하여 당시 생존하였던 사람들의 정치 • 사회 • 사상 • 건축기술 • 회화 • 공예 등 여러 방면에서 연구할 수 있 다. 古項을 ‘인류의 문화와 역사의 보고’ 라고 일컫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1.3 墓地와 分布狀 古壇의 축조는 묘지의 선택에서부터 시작된다. 묘지의 선택은 遠 古時代의 인류가 시체 처리 방법을 放棄로부터 매장으로 바꾼 뒤부 터 내려온 관념의 소산이다. 인류의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생활 주 거지가 바뀌고, 주거지가 바뀜에 따라 묘지 선택의 기준도 달라졌
다 . 사회가 점차적으로 발전하고, 원시적인 국가형태가 형성되고부 터는 묘지 선택의 원칙은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별도의 공간으로 변화해 갔댜 이하 시대별로 나누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구석기시대의 분묘가 한반도에서 발견 보고된 예는 아직 없다 . 이웃 중국의 예에서 간접적으로 살펴보는 수밖에 없다. 北京 교외 周口店의 山頂洞窟(석회암 동굴)은 洞口 • 上室 • 下室 • 下 容 등으로 구분되는데, 상실은 거주구역이고 하실은 장지로서 완전한 人頭骨 과 體骨이 있고, 이들 주위에는 赤鐵鑛粉末이 수장품으로서 산포되 었다. 이 동굴에서 나온 인골과 석기는 후기 구석기시대에 해 당하는 약 1 만 8000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고 이 동굴은 중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묘로 추정된다 .10) 周口店의 山頂洞보다 더 오래 된 中期 舊 石器時代(약 8~7 만 년 전)의 묘는 세계 몇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중 프랑스의 도르도뉴 지방의 동굴에서는 지면을 약간 파고 성인 남녀 2 인과 어린이 2 인 을 매장한 묘를 발견하였다. 성인 남자는 머리에 판석을 덮고, 다른 성인 여자는 屈身葬울 한 상태였다고 한다 .11) 앞으로 한반도에서 구석기시대의 매장유적이 발견된다면, 중기 구석시시대의 도르도뉴 와 후기 구석기시대의 周口店의 동굴과 마찬가지로, 동굴 내의 주거 구역 옆에 따로 매장구역을 만들어 지면을 약간 파고 시체를 매장 한 양상일 것으로 추측된다. 구석기시대의 이와 같은 洞窟埋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리고 있다. 죽, 매장은 시체에 대한 공포나 신앙에서가 아니라, 자기 집단의 成貝을 죽은 후에도 보살펴 주려는 감정에서 나왔다고 한댜 12) 그러나 이것은 그처럼 단순하지 않으며 결국 무덤의 발생 과도 관련이 있는 문제로서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시체의 위생 10) 『中國大百科全 書 』 「考古學」 中國大百科全 書 出版社 198.6 . p43 3. 11 ) 앞에 든 『한국의 고분』 p40 . 12) 김용간 : 『조선의 구석기시대』 사회과학출판사 1984. p58 .
적 처리와 人智 발달에 의한 가족에 대한 애정의 표시. 또는 그것의 ‘기념물화 과정’ 이라고 해석함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13) 한반도에서는 신석기시대의 분묘도 매우 귀한 편이다. 현재까지 조사 보고된 유적으로는 부산 동삼동 패총 • 금곡동 율리 패총 둥에 서의 유구와 경남 통영 욕지도 동항리에서 발견된 유구 등이 있다. 동삼동 둥의 패총은 산사면에 위치하였고, 매장유구는 생토면에 한 벌 정도의 돌을 깔고 그 위에 시체를 안치한 상태였다 .14)15) 욕지도 의 경우는 평지성 구릉 사면의 잔돌이 깔린 지면 아래에서 인골 출 토 유구가 2 기 발견되었다. 이상에서 보면 신석기시대의 분묘는 남 해안의 패총지대에서 발견되었는데, 매장시설로서 토광이라던가 적 석구조가 있는 것도 아닌, 극히 간단하게 지면이나 지면을 약간 판 정도로 보이는 유구이다. 그러나 앞으로 한반도에서 신석기시대의 분묘가 발견된다고 하면, 하천변의 일반적인 주거지 부근에서 중국 이나 일본 열도의 그것들과 비슷한 구조가 나타날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의 仰紹文化 묘지의 경우를 보면, 裵李岡遺蹟에서 발견된 묘 지에서는 모두 114 기의 토광묘가 조밀하게 배치되었는데, 유적 자체 가 하천변의 낮은 대지에서 生活遺構, 즉 灰抗 16) • 蒸址 등과 가까 운 거리에 분포되어 있다 .17) 또 유명한 西安 半坡遺蹟에는 하천변 의 낮은 대지에 취락이 형성되어 있고, 묘지는 그 뒤편 북쪽으로 약 간 떨어진 곳에 氏族共同墓地를 마련하였다. 250 기의 묘광을 규칙성 있게 배열하고, 頭位 방향도 기본적으로 일치시키고, 그리고 대다수 13) 姜仁求 : 「中國地域火葬墓硏究」 『袁檀學報』 46 • 47 合輯 1979. 14) 釜山大學校博物館 : 『金谷洞栗里貝塚』 1980. p6. 15) 姜仁求 : 「中國東北地方의 古文化에 대한 論評」 E 韋國學報』 65 집 一志社 1991 . p15 4. 16) 灰抗은 중국의 商 • 殷代 이후 漢代까지 生活遺蹟 부근에서 주로 발견되는 일종 의 구덩이다. 생활쓰레기 • 돼지 • 개 등을 묻기도 하고, 간혹 人間의 死體를 埋 葬하는 경우도 있다(關野雄 監譯 : 若f中國(1)考古學』 平凡社 1988. p61 ). 17)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 璋f中國的考古發現和硏究』 文物出版社 1984. p36 .
가 單葬 으로 仰臥伸 展葬 이다. 부장품은 토기 5~6 개가 일반적이고 많고 적음의 차이가 별로 없다고 한다 . 유아의 경우는 성인과는 달 리 공동묘지에 오지 않고 주거 주변에 壅 稽 울 사용하여 매장하였 다 . 18 ) 山 東 半 島 의 大汶口文化 묘지에서도 墓 城配列의 규칙성 • 두향 의 일치 • 장법 등이 앙소문화의 경우와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황하유역에서의 이러한 여러 특징은 이후 중국의 묘제에 하나의 전 통이 되었고, 이것을 통하여 당시의 가족제도 • 씨족공동체사회 • 조 상숭배사상 등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묘제에 관한 여러 문화요소, 즉 토장 • 옹관 형식과 매장의 배열 • 침 향 등은 주거의 형태, 토기의 제법 등과 함께 黃 河口에서 해안을 거 쳐서 한반도에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어 앞으로 발견이 기대된다. 한편 일본 열도의 경우를 보기로 하자. 繩文時代의 매장유적은 대지에 먼저 주거지를 정하고 그 주변 한 귀퉁이에 매장을 하여 여 러 세대가 내려가면 자연히 묘지가 조성되었다. 패총의 경우에도 주 거지에서 가까운 거리에 형성되고. 그 패총 안에 시체를 매장하는 습속이 있었다. 묘지의 형상은 一直線을 띤 것도 있지만, 주거지군 과 같이 環狀으로 형성된 묘지도 있다. 묘의 종류에는 토광묘 • 석관 묘 • 配石 墓 등이 있다 . 19) 일본 열도의 묘지와 분묘의 구조가 한반 도에 영향을 미쳤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한반도의 분묘 • 住居形 式 • 曾 畑土器 등과 함께 묘지형 • 묘제가 渡日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럴 경우 일본 열도의 예는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분묘추구에 참고 가 될 것으로 보안댜 청동기시대 묘지와 묘의 분포상태는 우리에게 많은 문제를 시사 해 주고 있다. 이 시대에는 이미 인류가 원시적인 국가형태 20) 를 갖 18) 中 國 科 學 院 考 古硏究所 .` 陝西省西安半坡博物館 : T5 安半坡』 文物出版社 1963. pl9 8. 19) 齋藤 忠 : 『日本考古 學 槪 論 』 吉川弘文館 1982. pp6 8~75. 20) 中 國 의 商殷 등의 국가 . 印度의 인더스강유역의 모헨조-다로 (mohen j o-daro). 그리스의 도시국가 등도 청동기시대부터 출현하였다 .
추기 시작하였고, 일부 생산과정에서 공동작업과 기술적인 분업이 행해졌으며, 잉여생산과 빈부의 차이 등이 분묘에서 나타나고 있다. 분묘의 종류와 형태도 전 시대에 비하여 매우 다양해져 지석묘 • 석 관묘·석곽묘·적석묘·토광묘·옹관묘·화장묘 등 거의 모든 형태 의 분묘가 형식을 갖추고 출현하게 되었다. 묘지는 역시 주거와 관 계가 있으나, 상호 거리를 보면 전기에는 주거와 가까운 거리에 정 해지던 것이 후기로 갈수록 주거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약간 떨어진 장소에 정해지고 있다. 支石墓의 경우 하천변 대지성 구릉이나 평지(산이 가깝거나 谷底 平野) 또는 산록에 축조하는 것이 보통이고, 그것도 수기 또는 수십 기씩 분포하고 있다. 파주 옥석리에는 구릉의 능선상에 소형의 卓子 式 支石墓 10 여 기가 분포되어 있으며, 강화 부근리 산록대지의 평 탄부에는 漢水以南 최대의 탁자식 지석묘가 있고, 그 동편에 10 여 기의 소형 탁자식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다 .21) 또 고창 상갑리와 매 산리의 산기슭 평야에 면한 대지에 약간의 탁자식 지석묘를 포함한 基盤式 支石墓 백수십 기가 삼삼오오 또는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화순 벽송리에서는 거대한 기반식 지석묘를 중심으로 하여 주위에 環狀으로 수십 기를 배치한 예도 있다 .22)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 는 안 될 것은 옥석리 지석묘지대, 즉 Bl 호 지석묘의 지하에서 규 모가 큰 장방형의 뿜穴住居址가 발견되었고, 강화 삼거리 소동부락 에서 지석묘와 가까운 곳에서 역시 방형계 수혈주거지가 발견된 점 이다 .23) 물론 이 주거지들과 지상의 지석묘가 직접 관계가 있는지 에 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석묘를 조영한 주민의 宅地와 묘 지의 選定思想의 일부를 알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21 ) 金載元 • 尹武柄 : 야韋國支石 墓 硏究』 國立博物館 1967. pp6 5 ~78. 22) 李榮文 : 『和順郡文化遺蹟地表調査報告 書』 和 ) I 頂郡 1985. 참조. 23) 이상 고창상감리지석묘 • 파주옥석리주거지 • 강화삼거리주거지 등에 관하여는 앞에 든 먀韋國支石墓硏究』 를 참조함 .
石稽 墓 의 경우도 대체로 구릉의 정상이나 대지에 수기가 하나의 집단을 이루어 밀집 분포되어 있다. 부여 가중리에서는 舌狀 대지성 구릉에 5 기의 석관묘가 일렬로 분포되었고 , 24) 김해 회현동 패총에 서는 馬駿形의 구릉에 지석묘 • 옹관묘와 함께 5 기의 석관묘가 발견 된 바 있댜 25) 결국 석관묘는 묘지의 입지나 분포상 밀집도에서 지 석묘와는 크게 다른 양상울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石鄒墓의 경우, 대전 괴정동 • 아산 남성리 • 예산 동서리 둥지에서 발견된 석곽묘들은 지하 깊은 곳에 매장시설을 마련하고 세형동검 과 儀器를 부장한 비슷한 구조들로, 낮은 구릉에 묘지를 선택하고 있댜 그리고 지석묘나 석관묘와는 달리 單獨項墓로 존재하고 있어 서 이것들이 어느 정도의 권력을 가진 ‘地域首長의 墓’ 라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積 石墓의 경우는 어떠한가? 선사시대 또는 삼국시대 이전의 것으 로 볼 만한 확실한 적석묘는 매우 드물어 일반 원칙을 도출하는 데 는 문제가 있다 . 춘천 천전리의 적석묘는 소양강 북안의 물가 충적 대지에 3~4 기 정도가 분포되어 있다 . 물론 이 곳의 적석총은 탁자 식지석묘와 함께 섞여 있고 출토유물도 같은 성격을 지닌 것이라서 축조연대를 같은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같은 한강 수계인 中島 • 양 평 문호리 • 제천 도화리 둥지에서도 적석총이 발견된 바 있는데, 이 것들은 모두 삼국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江岸의 충적대지를 선택하고 있다 . 土塘墓의 경우는 인간이 만들어 낸 분묘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 룰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보편적인 매장시설의 형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공통적인 구조형식으로 변천 해 오다가 고대 국가 출현과 거의 때를 맞추어 地域化하기 시작하 24) 有光敎 一 : 『朝鮮 磨 製石 §|l (f)硏究』 京都大學文 學 部考古 學衆書 第 5 冊 1957. p59 . 25) 楠本杜人 : 「金 海 貝塚(f)壅稽之箱式石稽-金海貝塚(f)再檢討(承前)」 『考古 學 雜 誌 』 43-1. 1957.
였다. 한반도의 토광묘는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특징을 갖추게 되었 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아직 발견된 바 없고. 그 구 조형상은 중국의 예를 참고로 하여 앞에서 잠깐 예상하였다. 청동기 시대 전기에도 재래식 토광은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고, 가령 눈에 띄는 시설 없이 부토 중에서 우연히 출토되고 있는 마제석기나 무 문토기 등은 이들 토광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 청동기시대 후기 이후와 초기 철기시대의 토광묘는 순수토광묘 • 土坡木稽墓 • 土塘木鄕墓의 세 종류를 포함하며. 가장 뚜렷한 유적 으로서는 세형동검이 출토된 대동강 유역의 토광묘이다. 이 지역의 토광묘는 대동강 남안의 구릉지대에 밀집 분포되어 있는데, 토광묘 는 주로 낮은 구릉의 정상부와 사면에 분포되어 있다. 이 외에도 永 川 漁隱洞 토광묘 • 慶州 朝陽洞 토광묘 • 義昌 . 茶戶里 토광묘 등도 수기로 이루어진 古壇群의 형태로 산기슭에서 평야로 흘러내린 대 지에 묘지를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지형은 인간의 居住環境뿐 아니 라 城郭또는 農耕地와도 근거리에 있는 종합적으로 ‘人間의 活動 適合地形’ 이라고 판단된다. 삼국시대 초기에 오면. 대지성 구릉지를 떠나 평지로 내려오고 있다. 경주의 陸城洞 • 月城路 • 皇南洞 등지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 다. 그러다 중기로 오면 다시 구릉이나 산의 사면에 묘지를 선택하 고 있댜 瑞山 大山面의 토광묘군이라던가, 扶餘 素砂里의 토광묘가 그 좋은 예이다. 중기 이후에는 모든 종류의 古項들이 風水地理思想의 영향을 강 하게 받고 이것이 원칙으로 정착하게 된다. 토광묘와는 약간 성격을 달리하는 한강유역의 토축묘는 石村洞의 적석묘와 같이 하천 유역 의 丘陵性 平地에 축조되어 있으며. 분포상에 있어서도 수기씩 밀집 상태를 보이고 있다. 삼국시대의 적석총에 대하여 한강유역의 일부는 앞에서 잠시 언 급한 바 있다. 고구려의 적석총은 대략 두 類型의 지형을 선택하여
묘지를 마련하였다. 하나는 압록강과 그 지류 유역에서 보는 것처럼 강안의 沖積 臺 地(강탁) 높은 곳에 밀집해 있고. 다른 하나는 산중턱 이나 기슭의 사면에 밀집해 있는 것이다. 한강유역의 石村洞의 경우 는 강안에서 약간 거리를 두고 平地性 丘陵지대에 축조하고 있다. 이것은 원류지인 압록강유역과는 달리 移住地인 한강유역에서 先住 古項의 영향으로 나타난 새로운 양상. 즉 石村洞類型으로 판단할 수 있댜 그러나 적석총이라 할지라도 칠곡 구암동 적석총의 경우는 산 기슭의 낮은 구릉을 선택하고 있어서 지역화된 성격을 살필 수 있다. 신라의 積石木鄒壇의 경우는 경주 분지의 평지에 大形古壇을 중 심으로 수기 또는 수십 기씩 분구가 서로 접할 정도로 밀집해 있어 서, 血族集團의 共同墓地 성격을 엿볼 수 있다 . 그러나 경주를 벗어 난 교외나 울산 • 창녕 등지에서는 산사면이나 낮은 구릉에 묘지를 정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에 가장 보편적으로 유행한 古壇의 형식은 석실분이다. 압록강유역에서는 3C 경에 이미 상당히 확산되었는데, 묘지는 강안 에서 적석총 분포구역의 다음 구역에서 밀집상태로 분묘를 축조하 였다. 대동강유역에서는 약간 늦은 시기인 4C 경에 널리 보급되었는 데, 이른 시기에는 산 구릉의 정상부에 묘지를 마련하고 3~5 기씩 家族單位로 묘지를 마련하였다. 한강유역에서는 4C 후반경부터 급 속도로 확대되어 나갔는데, 이른 시기에는 적석총과 같이 강안에서 멀지 않은 평지성 구릉에 서로 혼재하는 형상으로 존재하였다. 금강 유역에서는 5C 후반 이후 주묘제로 등장하기 시작하여 6C 경에는 일 반화되었는데, 산이나 구릉의 사면에서 수기씩 군을 이루어 가족묘 지 형태로 존재하였다. 이 시기의 가족 단위의 공동묘지는 南朝의 영향을 받은 풍수지리사상의 원리에 따라 선정이 이루어졌다. 경주 지방과 낙동강 유역에서는 4C 를 전후한 시기에 확산되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경주 평지에서는 積石木郡壇의 사이사이에 축조되다가 6C 에 들어와서는 교외의 산기슭 사면에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이
경우 경주 서악동 왕릉군 역시 풍수지리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 신라에서의 첫 등장을 알리고 있으며, 7C 에 와서 풍수지리사 상은 왕가를 중심으로 묘지선정의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게 되었 다. 낙동강 유역과 남해안 지대에서는 같은 석실분이라도 장방형의 橫口式 石室울 주로 하였는데, 백제나 신라 지역과는 달리 산 구릉 의 정상이나 두드러진 장소에 묘지를 구하고 있으며, 大形古壇을 중 심으로 수기 또는 수십 기씩 군을 이루고 있었다. 어느 지역을 막론 하고 석실분의 기본원리로 작용한 墓地選定思想은 가까운 가족 중 심의 共同墓地가 평지를 벗어나 산지로 향하고 있는 것이며, 백제와 신라 지역에서는 점차 풍수지리사상이 절대적인 원리로서 성행하게 된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 지역이 산 구릉의 高地를 선 호한 것이라든가 백제와 신라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풍수지리사상이 유독 가야 지역에서만은 시종 외면당한 것은 墓制系統이 다른 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7C 경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 지역에 퍼져 나가기 시작한 풍수지리 사상은 통일 이후, 이미 일반화된 백제 지역을 포함하여 한반도 전 역으로 확산되어 9C 이후에는 묘지선정에서 절대적 원리로 자리잡 게 되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가족공동묘지와 통일신라에 서 전수받은 풍수지리사상의 구현이 지향해야 할 시대적 埋葬~念 으로서 또는 일상생활의 가치관으로까지 철저하게 뿌리내렸다. 중국에서 신석기시대에 질서정연한 묘광배치 체계와 부장품의 수 량 둥으로 확립된 모계사회에서의 부녀와 노인에 대한 존중 사상과 가족공동묘지 사상 26) 이 한반도에서는 청동기시대에 지석묘 등으로 출현하여 절대적 원리로서 현재까지도 우리 생활과 매장관념을 지 26) 半坡遺蹟 둥 仰船文化遺蹟에서는 住居區域은 周溝로 돌려 있고, 氏族共同 墓 地
는 주구의 北後方에 설치한다. 墓地 내에서의 墓塘은 질서정연하고, 부장품에는 수량의 다과가 있으며, 栗米가 담긴 작은 항아리 둥 祭祀狼遊이 보여, 이미 이시기에 祖上崇拜思想과 母系社會에서의 婦 女와 老人의 尊重思想이 있었다고 보 고 있다( 中國科學院考古硏究所 • 陝西省西安半坡博物館 : 『西安半坡』 文物出版 社 1963. pp2 18-228).
배하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류가 시체 매장묘를 만들기 시작한 이유가 일면 시체를 위생적으 로 처리하면서. 또 일면에서는 인류의 지혜가 발달하면서 일기 시작 한 가족간의 애정 등 혈연의식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묘는 곧 ‘家族意識의 i疑集體’ 인 것이다. 묘지선정사상의 변천을 다시 정리하면, 주거생활 근거지에서 인 간과 동거하다가 혈연집단이 확대되면서 주거구역과 구분하여 별도 의 구역을 만들어 묘지를 마련하고. 더 확대되어 城邑國家(도시 국 가)가 출현하면, 인간 생활에 불편을 주지 않는 산지로 묘지를 국한 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대륙으로부터 들어온 다양한 사상, 즉 高地 崇拜思想, 親水性의 原理, 絶對權力의 諦示手段 등의 원리는 뒤에 오는 풍수지리사상, 불교의 매장관념 등과 함께 한반도에서 造墓를 住居나 마울(城)의 형성과 동등한 槪念으로 확립되었다. 특히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또 현재까지도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풍수지리사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풍수지리사상 은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풍수지리는 사상적으로 또 지리 학적으로 올바른 究明이 요청되어 왔으나, 여기서는 묘지선정과 관 련하여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기로 한다. 1.4 古壤의 形(壇丘型式) 여기서 古떄t의 形’ 이라고 하는 말의 뜻은 현대의 인간이 매장시 설로서 외형을 인식하는 객체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三國時代 고분에 있어서 분형을 뜻하는 것이다. 분구의 외형에는 축조된 주시 설물과 그 시설물의 표면에 부가된 시설, 죽 段築이라던가 暮石 또
는 護石 등을 포함한다. 분구가 발견되지 않는 선사분묘에서는 地表 上에 나타난 시설물과 형상을 뜻한다 . 역사시대로 들어온 이후에 축 조된 고분의 형 중 일부는 현대의 분묘에서도 그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로 끈질기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것은 方形壇과 圓形壇이 댜 方形壇에는 정방형보다는 장방형이 많이 남아 있다. 이들 두 가 지의 형은 이미 三國時代에 형이 확립되어, 그 후대의 분형으로서 주류를 이루어 온 것이다. 그러면 三 國時代 이전의 분형. 즉 무덤의 형상은 어떠한 것들이 존재하는가? 먼저 이에 대하여 설명해 나가 기로한다. 고분을 형성한 요소는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내부시설 인 매장주체시설과 외부시설인 분구가 그것이다. 여기서 고분의 형 은 이 외부시설을 가리킨다. 외부시설은 내부시설을 보호하는 기능 과 기념물로서의 표지기능이 있다. ‘ 內部施設의 保護機能’ 에는 내부 시설을 보호한다는 물질적 보호개념과 동시에, 사체의 영혼의 안식 울 도모한다는 개념이 함께 들어 있다. ‘標識機能’ 은 혈연이나 지연 둥 공동체 의식을 개념화하여 대외적으로 선양하고자 하는 사회의 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곧 조직과 직결되기도 한다. 그래서 분묘는 고대사회에서 궁궐 • 도성 • 복식과 함께 국가의 메르 크멀 (merkmal) 로 인정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고분의 외형은 위 와 같은 여러 요소가 집합되어 결정된다. 내부시설 보호기능은 매장시설의 외부 형상과 규모에 영향을 미 친다. 분묘에 정치적 집단의 의사를 직접 표현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는 내부의 매장주체시설 구조에 따라서 외형이 이루어졌다. 신석기시대의 분묘는 앞에서 밝힌 바 있듯이 그다지 많이 발견되 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단정지어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웃 나라 인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중국의 경우 신석기시대 분묘는 황하유역과 장강유역 그리고 북 방지역에서 다수 발견된 바 있다• 그 시대 고분이 집중되어 있는 황
하유역의 半坡유적이나 甘肅省 半山 유적에서 보면, 土抗墓(흙구덩 이묘)와 幾稽墓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무덤의 형은 지하구 조만을 알 수 있고, 지상에서는 아무런 시설이나 標識도 발견할 수 없댜 편편한 지면 그대로이댜 일본 열도의 경우에는 繩文時代의 무덤으로는 土玩墓와 石稽墓 • 配石 墓 • 環狀土羅 • 洞穴墓 • 岩陰墓 • 家屋墓 등이 있다. 그 가운데 토갱묘 • 석관묘 • 동혈묘는 중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상에서는 분구 등의 시설이 보이지 않는다. 배석묘는 지하에 광이 없이 시체 를 낮게 묻거나, 또는 再葬으로 뼈만 낮게 묻고, 지상에는 자연석을 배치하여 여러 형태를 만들었다. ®돌로 방형 • 원형 • 타원형으로 배치하고 중앙에 입석이나 평석을 놓은 것. ®중앙에 입석을 세우 고 주위에 放射狀으로 돌을 배치하는 것. ®자연석을 방형 또는 원 형으로 깐 것 등 여러 종류의 형태가 있다. 環狀土籠는 지상에 土堤 狀으로 흙을 올려 원형으로 돌리고, 그 내부와 土堤에 토광을 파고 시체를 묻는 형식이다. 가옥묘는 주거지 안에서 시체가 발생하면 시 체를 그대로 두고 집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 서 土砂가 쌓여 일종의 분구형이 된 것이다 .27) 앞으로 한반도에서 신석기시대의 무덤이 다수 발견될 경우 일반적인 무덤의 형식은 토 광묘가 될 것이고, 특수형식으로 배석묘 등의 형식이 나타날 것으로 보인댜 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의 무덤은 본격적인 형식을 갖추어 변천해 왔으며, 종류도 다양한 편이다. 지석묘 • 석관묘 • 석곽묘 • 토광묘 • 응관묘 등의 종류가 있다. 이들 중 지석묘는 분포구역이 한반도 전 체와 중국의 일부지방, 일본의 구주지방 등이다. 지석묘는 지상구조 가 거석으로만 이루어지고 봉토가 없는 특수한 형식이다. 형식에 있 어서 탁자식이건 기반식이건 또는 변형식이건 대형의 암괴를 사용 27) 앞에 든 『日本考古學槪論』 pp7 2-76.
하여 상석으로 하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분묘에 비해 현저하다 . 거 석을 분묘의 표지로 사용하는 사상에는 다분이 정치적 의식이 내포 되어 있을 것이다(지석묘의 형식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룬다.). 석관 묘와 석곽묘의 분구의 존재는 인정되나 분구의 형상은 아직 밝혀진 바 없다. ' 다만 분구가 있어도 낮은 ‘低壇丘'였을 것이란 점은 충분 히 추측된댜 일본 彌生시대의 경우 석곽을 내장한 소위 분구묘에 방형의 저분구가 많은 것을 보면, 초기 철기시대 한반도 문화의 영 향을 고려할 때. 석관묘와 석곽묘의 분구는 방형이었을 가능성이 높 다고 하겠다. 다음 중국의 경우를 보자. 殷代와 같이 매장시설을 지하 깊숙이 시설하는 경우에는 지면 위에는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았다. 지면 위에 분구가 없이 평지로 놓아. 지하의 시설을 감추고, 송백을 심어 표시하기도 하고, 亨堂을 건설하여 표시하고 제사에 이용하기도 하 였다. 지하 깊숙이 내려갔던 매장시설이 점차 위로 올라와 지면에 가까워지자, 대신 지면 위에 토양이 두꺼워지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분구의 발생이다. 중국에서의 분구의 발생은 전국시대 초기 북방의 Kur gan 의 영향이라고 전해진다 .28) 매장시설이 완전히 지면 위로 올라오면, 상대적으로 지상의 분구는 점차 거대해진다 . 경주 皇南大塚의 분구와 通溝 將軍塚 둥의 분구는 좋은 예 이 다. 그러면 한반도의 분구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 되는 중국의 발생기의 분구 형상은 어떠했을까? 戰國時代의 몇 곳 의 분구 형상을 알아보자. 山東省 臨溫縣에 있는 齊의 田氏 四王塚 은 方基圓壇으로 높이 7 척이고, 河北省 郡郡城에 있는 趙의 三王陵 은 직경 50m 와 20~30m 의 圓壇이며, 安徽省 壽 縣朱家塞에 있는 楚 의 고분은 둘레 가 약 300m, 높이 2~6m 의 圓壇인 점 29) 으로 미루어 보아 . 방분과 원분이 함께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북방의 28) 關野雄 : 『中國考古學硏究』 東京大學出版會 1972. pp5 78-582. 29) 앞에 든 『中國考古 學 硏究』 pp5 70-573.
Kur gan 에도 방형과 원형이 혼재하고 ,30 ) 전국시대 말기의 진시황의 능이 방형이며, 서한의 帝陵이 모두 방형인 것을 고려하면, 원형분 에서 곧바로 방형분으로 통일되어 가는 추세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三 國時代에 들어와서 고대의 城邑國家가 여기저기 성립되면서 중 국의 선진문화를 저마다 경쟁적으로 받아들이는 환경에서, 분구도 중국식으로 高塚이 되면서, 방형분과 원형분이 함께 유행하게 되었 다 . 대동강유역의 소위 樂浪古壇의 분구가 대부분 원형이고 ,31) 고 구려의 초기 적석총과 초기 봉토분의 분구는 방형으로 일원화되었 댜 한반도 내의 원형분구는 대동강유역에서 개시되어 32) 한강유역 의 漢城百濟로 전달되었다 . 초기의 석실분과 토축묘에서 확인되고, 또 그 후기에 출현하는 적석토축묘 33) 의 경우 외면의 적석 부분은 방형이고, 내부의 성토 부분이 원형으로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 댜 신라의 경우는 오히려 방형의 분구는 積石木鄕壇의 적석부에서 찾을 수 있을 뿐, 초기의 土塘木稽墓와 土城木郡墓 및 積石木鄕壇의 封土壇丘 등 원형분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경주 시내에 모두 18 기 나 되는 소위 雙壤('記形壇)은, 지배계층의 분묘로서 가족합장을 실 현하기 위하여 同營異壇 合葬의 형식을 취한 분구 형상이다. 이런 형의 분구는 본격적인 합장의 횡혈식석실분이 유입된 시기까지만 존속한 것으로 추측된다 . 가야 지역 고분의 분구는 일반적으로 원형 의 분구를 하고 있다. 30) 江上波夫 : 『世界考古學大系』 9 平凡社 1966. pp6 4-71 . 31) 낙랑고분이 黃河유역의 중원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 그렇지 않으면 長江 유역의 吳越문화의 영향을 더 받았는지에 관하여는 앞으로 정밀한 겁토가 이루 어져야 할 것이다. 우선은 피상적인 관찰이지만, 분구는 장강유역의 영향이 더 큰 것으로 보이고, 또 그 곳 土激墓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32) 社會科學院考古學硏究所 : 『考古學자료집』 제 6 집. 1983. p37 , p40, p49 , p80 , p86 , pl4 3, pl4 6, pl5 5 등 土塘木鄒墓와 전실분에서 확인된다. 33) 石村洞의 3 호 토광적석묘는 내원외방형으로 되어 있다(앞에 든 T i村洞 1 • 2 號壤』 p6. 도면 3 . 「發堀區劃과 遣溝分布圖」) .
구체적으로 역대 고분의 분구 형식에는 형상을 기준으로 圓形 壇 • 方形壇 • 圓方形項이 있고, 분구의 높낮이로 高 塚古項과 低噴丘 古壇이 있으며, 분구의 규모로 대형분 • 중형분 • 소형분 등으로 나 눌수 있다. 한반도 고분의 분구 중 가장 특이한 형은 두말할 것도 없이 圓方 形(前方後圓壇形)과 四隅突出形이다. 두 가지 형 모두 압록강유역 에서 나타났고, 전자는 남한 각지 특히 남해안지대에서 많이 발견 된다. 圓方形壇丘는 圓丘와 方壇이 결합한 A 형과 원구에 긴 堤防形의 祭壇이 형성된 B 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원구와 방단 모두 성토로 이루어졌고, 매장주체시설도 양방에 모두 배치하는 경우가 있다. 후자는 원구만을 성토로 형성하고, 제방형은 자연지형을 삭토 정비하여 만드는데, 원구에만 매장주체시설을 배치한다 .34) 이 형의 분구는 형상이 다른 두 개의 형체가 단순하게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분묘의 중심인 원구에 대한 제사의식을 위하여 방단을 마련한 것으로, 이데올로기적 결합으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이 형의 근본은 원형분에 있다. 이 형의 발생은 중국 고분에서 제사기능이 전래된 후 형성된 것이므로, 선진과 한대의 능묘에 부설된 형당이나 침전 또는 제단의 기능을 도입하여 한반도에서 창안해 낸 새로운 시설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4C 를 전후하여 왕릉울 비롯한 대형분에 사당 등 제당이 건축된 시기부터 圓方形壇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다. 34) 姜仁求 : 「韓國의 前方後圓壇」 야韋國史論』 14. 國史編纂委貝會 1984. pp1 84- 185.
1,5 葬法 l.5,1 死體處理 장법이라고 하는 것은 시체를 어떻게 처리하는냐 하는 방법에 관 한 것으로, 본고에서는 고분을 시체매장 후 생긴 시설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장법도 시체발생부터 매장에 이르는 시체처리의 중간 과정에 관한 방식을 일컫는다. 여기에는 여러 종류의 방법이 있는데 시체처리 단계에 따라 一次葬 • 二次葬이 있다. 일차장은 시 체를 육체 그대로 매장하는 방법으로 土葬 • 水葬이 있고 , 이차장은 시체를 한 번에 처리하지 않고 육체와 嚴骨을 분리시키는 단계를 거쳐 해골만을 최종으로 매장하는 방법으로, 火葬 • 風葬 • 洗骨葬 • 草壇 • 嬪葬 등이 이에 속한다. (1) 土葬 토장은 가장 일반적인 매장법으로 그 유래도 가장 오래 된 장법 이다. 지면 위에 시체를 놓고 그 위에 흙을 얇게 덮는 방법과, 지면 을 약간 파고 시체를 넣고 그 위에 흙을 얇게 덮어서 시체를 처리 하고 동시에 보존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또 우리나라의 三國時 代 전기에는 지면 위에 형성한 분구 중에 시체를 매장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도 토장의 한 종류이다. 그리고 토장은 인류가 가장 일찍 고안해 낸 매장법으로 세계 각 지에서 구석기시대 이래 이 장법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앞에서 도 말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서는 구석기시대나 신석기시대의 무 덤이 잘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무덤의 구조형식과 함께 장법 에 관해서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의 예를 보면, 앞 으로 발견될 수도 있는 우리나라 구석기시대 무덤의 장법을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北京 교외의 周口店 山頂洞 제 3 층의 경우에 는 주거생활을 하던 동굴의 바닥을 약간 파고 7 체분의 시체를 매장
하였다 .35) 이것은 동굴장이면서 동시에 토장을 행한 예라고 할 수 있댜 화석인골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한반도에서 구석기시대의 토 장이 발견될 것인지에 관해서는 예측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만 일 발견된다면 아마도 석회암 대지층에 속하는 동굴일 가능성이 가 장 높다고 하겠다. 구석기시대의 다음 단계인 細石器시대의 유적이 중국의 黑龍江 省 昴昴溪에서 발견된 일이 있다. 이것은 지면을 파거나 별다른 시설이 없이 腦野平地에 시체를 방치하고 그 위에 약간의 흙을 덮음으로써 매장을 완료한 구조였다. 비록 시대는 세석기시대이지만, 무덤의 형 태나 구조면에서 보면 가장 초보 단계의 토장 무덤임에 틀림 없다. 무덤이 발견된 지역이 건조지대이며 토질 또한 모래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혼적이 남은 것으로 생각되며, 한반도의 경우 이 런 형식의 무덤이 발견되리라는 기대는 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신석기시대에 해당되는 무덤의 발견도 아주 드문 일이다. 지금까 지 발견된 예는 부산의 동삼동 패총 • 금곡동 율리 패총 • 통영의 욕 지도 유구 등이 알려져 있지만, 패총과 관련이 있으며 순수 토장은 아니다. 중국의 경우 잘 알려진 半坡 둥의 유적처럼 仰紹文化나 龍 山文化遺蹟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무덤은 역시 토장이었다. 그리 고 山頂洞의 예와 같이 동굴의 바닥을 간단히 파서 抗을 만들고 그 안에 시체를 屈睦坐의 상태로 묻은 예가 黑龍江 依蘭縣의 한 洞穴 에서 발견되어 보고된 일이 있다. 이러한 동혈의 토장법도 앞으로 발견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 신석기시대에는 패총이나 인간 거 주지 가까운 평지와 동혈 등지에서 신전장 또는 굴신장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한반도에서도 여러 형식의 무덤이 발견될 것으로 보이지 만. 가장 일반적인 장법은 역시 토장일 것으로 생각된다. 암사동이 35) 王仲殊 : 「墓 葬略說」 『考古通試』 中國科 學 院考古硏究所 1955- 創刊 號 姜仁求 : 「中國地域火葬 墓 硏究」 『 袁 檀學報』 46 • 47 合{#號 1979,
나 미사리 • 오산리 같은 砂丘推積地에 형성된 주거유적지 주변에서 는 아직 매장유적이 발견 보고된 적이 없지만, 조사구역을 더 확대 하고 모래층에 포함된 유기물질을 精査 하고 분석한다면. 모래층을 파고 간단한 토갱을 만든 무덤의 구조가 발견될 것임에 틀림없다.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에는 가장 다양한 형식의 무덤과 장 법이 행해졌고, 그 흔적이 유적으로 남아 발굴 조사되고 있다. 역시 가장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무덤과 장법은 토광묘와 토장이라고 할 수 있다. 토광묘는 순수토광으로서 중국에서 들어온 목관토광묘보 다 규모가 작고 얕으며, 장구를 일체 사용하지 않은 토장으로서 尻 體直葬法이다. 이것은 당시에 가장 혼하게 행해진 장법으로 무덤의 구조임에 틀림없다고 여겨지지만, 현재 유적으로서 우리 앞에는 극 히 드물게 나타날 뿐이다. 구조가 너무 간단하고 부장유물도 없는 簡階한 형식이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20C 에 들어와서도 가장 일반적인 장법으로 성행하고 있는 현대의 토장도 사실은 이미 청동 기시대부터 일반화된 장법이 계속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간단한 토광과 토장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본적이고 서민들의 장법으로서 유행되어 왔다. 그러나 삼국 시대에 토장으로서 다른 시대와는 다른 특징을 가진 장법의 형식이 있댜 그것은 토축묘의 기본 장법으로서의 토장이다. 토장은 토광을 기본 구조로 하고 그 위에 시행되는 장법이지만, 토광을 지면 아래 에 마련하지 않은 방법으로서의 토장이 바로 토축묘의 토장이다. 지 면 위에 형성된 분구 중에 시체를 눕힐 만한 면적의 지면을 고르고, 그 곳에 시체를 稽郡 시설 없이 바로 지면 위에 안치하고, 그 위에 흙을 덮어서 시체를 감추고(藏) 동시에 분구를 완성하는 방법은 우 리나라 全時代의 葬法史룰 통해서도 두드러진 방법이라고 할 수 있 다 . 이 방법은 매장 시설을 지면 위 분구 중에 마련한다는 의미에서 전통적인 토광이나 토갱의 토장법과 큰 차이가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무덤의 구조형식도 토축묘로 새로이 분류한 것이다. 이 장
법은 계통상으로 볼 때. 장강유역의 소위 吳越民族의 土激墓葬法 이 황해를 건너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36) (토돈묘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은 뒤에서 다룰 것임). (2) 火葬 화장은 우리나라를 바롯한 동북아시아의 경우, 선사시대의 화장 과 불교 유입 이후의 화장이라는 두 가지 계통과 형식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화장의 역사는 매우 오래 되었다. 아마도 장법상으로는 토장의 역사 만큼이나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화장은 高溫多濕한 熱 帶나 亞熱帶지방에서 시체를 위생적으로 처리하는 한 가지 방법으 로서 고안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인류가 불을 발견하여 실 생활에 활용하던 구석기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현재로서 가장 오래 된 화장의 혼적은 앞에서 소개한 바 있는 산정 동에서 발견된 불에 탄 骨絡이댜 37) 그런데 이것이 일부러 시체를 불에 태운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자연발화나 화재에 의해 탄 골락 을 그대로 매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현단계에서는 단언할 수 없다. 다음 신석기시대의 화장유구가 중국의 甘肅省 臨洗縣 寺羅山유적 에서 발견된 일이 있다. 이 유적은 1923 년 스웨덴의 안더슨에 의하 여 처음 조사된 후 1956 년에도 재조사되었는데, 토광묘의 토광안에 서 불에 탄 골락이 발견됨으로써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 말기 (BC 1400~BC 1100 년)의 것으로 추정된다 .38) 일본의 繩文시대의 長野 縣 野口遺蹟과 新潟유적에서는 지면을 약간 파고 장방형과 원형으 로 돌린 配石遺構 안에 燒人骨 몇인분을 매장한 유적이 발견된 바 36) 앞에 든 『三國時代壇丘 墓硏究 』 37) 앞에 든 멀녑g略說』 38) 夏而 : 「臨洗寺窟山發堀記」 『中國考古學報』 商務印書館 1949-4. 安志敏 : 「甘 肅遠古 文化及其有關的數個問題」 『考古通試』 1956-6.
있댜 이것은 집단적인 장법의 하나로 조상숭배와 관련이 있다고 보 고 있댜 39) 중국의 殷代에 해당하는 土城火葬墓의 예도 있다. 鄭州 市 銘功路 西 {R lj에서는 일반적인 은대의 토광묘의 내부 한편에서 火 葬骨灰를 담은 骨盡룰 안치한 형식이 발견되었다 .40) 이러한 형식은 아주 귀한 예에 속하지만, 은대에 中原지방에서의 火葬도 역시 드문 예이댜 그러나 중원지방의 전국시대 혹은 漢代 에, 변방에서는 금석 병용기 또는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의 화장묘는 더러 발견된 일이 있댜 四川省의 眠江 상류지방에서는 토광의 내부에 설치한 일 종의 石稽墓에서 화장한 골회가 발견된 일 41) 이 있고, 중국 동북지 방인 遼寧省 旅順 後牧城의 樓上積石塚, 또 요녕성의 柚岩縣 吳西의 지석묘 42) 와 吉林省永吉縣 紅旗屯鄕固山子의 1 호 석관묘 43) 에서도 화장한 골회와 불에 탄 흙이 발견되어 화장의 사실이 확인되었다.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화장을 금지해 왔으나 변방의 소수민족과 멀 리 나가 있던 관리가 객지에서 사망할 경우 고향으로 歸葬하기 위 하여 부득이 화장을 허용한 일이 있다 .44) 이 사상은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들어와 시행되었으며, 佛家와 그 신도들만이 화장울 하게 되 었다. 중국의 변방지역에서의 화장의 성행, 특히 동북지방의 적석 총 • 지석묘 • 석관묘에서의 화장이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댜 한반도에서도 청동기시대에 부분적으로 존재하였고, 그 전통이 39) 設樂博已 : 「蓋 稽再葬墓(l)起源 之 展開」 『考古學雜誌』 79-4, 日 本考古學it 1994. 40) 馬全 : 「鄭州市銘功路西側的商代造存 1 『文物參考資料』 1956-10. 41) 馮漢謨 • 童恩正 : 대跋[上流的石稽葬」 『考古學報』 1973-2. 42) 遼寧省博物館 : 「遼東半島石桐的新發現」 『考古』 1985-2. 姜仁求 : 「中園東北地方의 古壇」 『韓國上古史의 諸問題』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7. p47 . 43) 三上次男 : 『滿鮮原始壤墓(l)硏究』 吉川弘文館 1961 . p32 3. 앞에 든 「中國東北地方의 古項」 p51 . 44) 앞에 든 「中國地域火葬 墓 硏究」
일부에서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불교식 화장묘의 출현은 5C 경부터로 보이며. 불교 의 보급에 따라 점차 성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교식 화장묘도 불 교가 중국에서 들어온 것과 마찬가지로 일단 중국화된 화장묘가 들 어와서 유행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중국에서 불교식 화장묘는 문 헌기록에 따르면 漢 • 後漢代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지만, 실제의 유적은 唐 • 宋 • 元시대 것이 많이 발견되고, 漢과 南北朝시대의 유 적은 아직 보고된 바 없다. 唐시대에는 여러 곳에서 高僧의 舍利塔 건축이 일반화되었는데, 그 사리탑의 基壇 하부에 화장한 골회를 담 은 석관을 매장하였다 .45) 또 원대에 화장묘가 가장 성행하여 유적 이 많이 남아 있는 雲南省 일대에서는 骨盡에 화장골회가 담긴 상 태로 발견되고 있다 .46) 이 밖에도 송 • 원대의 화장묘는 전국에 골 고루 분포되어 있는데, 때로는 전축분 土洞墓 陶稽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 형식들은 당시 일반적으로 유행하는 묘제에 따라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에서는 화장을 일면 금지하면서 일면 허용(行旅病死者 • 歸葬者)하는 정책이 있었 고, 佛家에서는 신앙과 종교의식에 따라 자유롭게 화장을 선택한 것 으로보인댜 (3) 水葬 시체를 바다나 호수·강·우물 동의 물 속에 던져 처리하고. 또 는 물고기의 먹이가 되게 하는 . 장법이다. 시체를 물 속에 던짐으로 써 시체처리의 최종단계를 끝낸다는 의미에서 일차장으로 분류된다. 주로 해양민족이 많이 이용하는데, 항해 중 선박에서 시체가 발생하 면 행해지기도 한다. 장법으로서는 비용이 가장 적게 들고 절차와 45) 山西省文物管理委貝會考古硏究所 : 「山西長治唐代舍利稽的發見」 『考古』 1961- 5. 46) 萬斯年 : 「雲南劍 )1| 元代火葬墓之發堀」 『考古通試』 1957-1.
방법이 간편하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서는 신분과 지위가 낮은 계층 에서 애용하기도 한다. 이 장법은 동남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는데 특히 Polyn e sia • Mi cr onesia • Melanesia 지 역 의 제 민족에 서 성 행 한 댜 47) 동아시아 대륙에 들어와서는 중국의 西藏지방과 黑龍江省의 강안지방의 토착민에게서도 행해지고 있다 .48) 수장 방법에 따라 ® 시체를 그대로 물 속에 던져 넣는 법, ®흑룡강지방에서처럼 목관 에 시체를 넣어 물 속에 가라앉게 하는 방법, ®시체를 배에 태워 서 떠 내려가게 하는 방법, ®필리핀의 Bata n g as Verde 島에서처럼 lm 미만의 舟形稽에 수개체분의 二次葬 유골을 넣어 보내는 방법 49) 둥 지역과 종족에 따라 다양한 수장의 방법이 이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수장의 역사는 신라의 제 4 대 脫解王으로부터 비롯 된다. 『三國遺事』 「王曆第一」 脫解王條에 ‘水葬未召疏井丘中’ 이라는 기사는 바로 탈해왕을 未召라는 장소의 疏井丘라는 무덤에 수장하 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소정구는 무덤의 이름이면서 무덤의 구조형식을 동시에 나타내 주는 용어로 볼 수 있다. 疏자는 通자와 뜻이 통하고, 井자는 우물을 표시하는 0 자형으로 된 구조를 뜻하 며, 丘자는 무덤을 뜻하는 문자라고 생각된다. 이것을 무덤의 형식 에 맞추어 보면, 0 자로 된 周溝 가운데에 무덤을 만들어 매장하였 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형식을 가진 무덤은 최근에 필자가 발표한 周溝土塘墓라고 할 수 있다 .50) 天安의 淸堂洞 51) • 鎭 JII 의 松斗里 52) • 淸州의 松節洞 53) • 公州의 下鳳里 54) • 保寧의 寬倉 47) 大林太良 : 댜卿](1)起源』 角川選 書 92 角川書店 1977 p87 . 48) 劉仕謨 : 『中國葬俗授奇』 香港上海 害 局 1957. pp8 8-89. 49) 『世界考古學事典』 平凡社 p61 8. 50) 姜仁求 : 「周溝土塘墓에 관한 몇 가지 問題」 F精 神文化硏究』 제 17 권 제 3 호 1994. 51 ) 國立中央博物館 : 『淸堂洞』 1993. 52) 忠北大學校博物館 : 『鎭 )II 松斗里遺蹟發堀調査報告활』 1991 . 53) 忠北大學校博物館 : 『年報』 2 「5. 學術調査報告」 1993. 54) 이한상 : 「공주하봉리유적발굴조사개보」 『박물관신문』 제 275 호 國立中央博物館 1994 년 7 월 1 일.
里 55) 등지에서 그 유구가 발견 조사된 바 있다. 이상은 『 三 國遺事』 의 기사를 분석하여 고고학 자료에 비춰 본 것인데. 이 탈해왕 장례 기사 외에는 이렇다 할 만한 역사적 기사는 보이지 않고 있다. 『三 國史記』 기사에 의하면, 전투시 군령을 위반하였거나 전투에 실패한 경우에 벌로 사형에 처하고 그 시체를 우물이나 강에 投棄하는 형 벌이 있지만. 그 의 정상적인 葬禮나 埋葬 형식으로 수장을 선택한 예는 보이지 않는다 .56) 역시 전통적으로 유학과 불교사상을 지도이 념으로 삼은 삼국시대 • 통일신라 • 고려 • 조선에서 정상적인 장법으 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55) 『京鄕新聞』 1995 년 3 월 1 일(火曜日)자 기사. 필자도 1995 년 1 월 21 일 고려대학교 발굴단의 李弘種씨의 안내로 발굴 현장을 답사한 바 있다 . 윤세영 • 이홍종 : 『寬 倉里 周溝墓』 高麗大學校埋藏文 化硏究所 • (株)大宇 1997. 56) 이상 水葬에 관하여는 姜仁求의 「新羅王陵의 再檢討 (2) -脫解王陵-」(『尹武柄博 士回甲紀念論照』 1984) 을 참고로 하였다 .
(4) 風葬(樹上葬) 시체를 바위 또는 나무 위에 방치하여 짐승이 먹게 하거나 바람 에 썩어 없어지게 하는 장법. 중국 新疆省의 喇麻敎 풍속에는 시체 를 암반 위에 내버려 두어 독수리가 먹게 하는 장법(鳥葬이라고도 함)이 있다. 또 아메리칸 인디언의 葬俗· 중에 시체가 발생하면 인가 에서 약간 떨어진 곳(이 곳은 聖所가 됨)의 나무 위에 원두막과 같 은 나무로 엮은 선반 위에 시체를 놓아 두어 자연적으로 썩어 뼈만 남게 하는 풍속이 있다 .57) 한반도에서 풍장에 관한 역사기록은 아 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어린이가 죽거나 악질(천연두 • 호열자 등) 이 유행하여 죽으면 시체를 인가 근처의 산림 속 나무에 걸어 놓거 나 山林原野에 방치하여 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거나, 또는 자연적으
57) 앞에 든 며g制 l (J)起源』 pp5 9-61 .
로 썩어 없어지게 하는 풍속이 지방에 따라서는 1920 년대까지도 있 었다고 전한댜 58) 이 장법은 유적으로 남지 않기 때문에 고고학적 조사대상이 될 수 없고, 역사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하여 인류학의 대 상으로 조사 연구되고 있다. (5) 洗骨葬 시체를 임시로 지하에 매장하거나(嬪), 原野에 일정기간(대개의 경우 3 개월 ~3 년)을 놓아 두어, 肉脫되어 육체가 없어지게 되면 이 때 뼈만 취하여 다시 매장하는 방법이다. 이 때 뼈를 깨끗이 씻는 의식이 있다고 해서 세골장이란 명칭이 붙게 되었다. 臺 灣 • 중국의 동해안 • 남미의 태평양 연안지방 등 環太平洋 연안에 넓게 퍼져 있 다. 우리나라의 移葬도 세골장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이장의 경우 는 뼈를 취하여 仰臥伸展葬의 형상대로 재배치하여 매장하며, 특별 히 세골 의식은 행하지 않는다. (6) 草壤 시체를 원야에 방치하여 일정기간이 지난 후 뼈만 취하여 다시 매장하는 것으로, 시체를 원야에 방치할 때 풀로 엮은 막을 씌워 시 체를 직접 풍우로부터 보호하기 때문에 초분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우리나라의 서남해안 지방에서 성행하고 내륙 산간 지방에서도 더 러 행해졌다고 하는데, 현재는 극히 일부 도서지방에만 잔존한다고 한다 .59) (7) 殖 시체를 매장 • 화장 등의 처리 전에 임시로 보존하는 조치를 말한 58) 靑野義雄 • 金性烈 : 『朝鮮墓制』 巖松堂京城店 1924. p76 . 59) 李光奎 : 「草島의 草壇」 『民族文化硏究』 第 3 號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69.
다. 요즈음도 시체발생 후 3 일장 • 5 일장 등이 있어서 그 기간 동안 시체를 목관에 입관한 후 조문을 받다가 정해진 날에 장례를 치르 는데, 장례일까지 시체를 보존하는 일이 殖에 해당한다. 빈은 장소 에 따라 家殖 • 野殖 • 草殖 • 土殖 등의 여러 종류가 있는데, 앞에서 말한 현대의 일반적인 빈은 가빈에 해당한다. 야빈은 산야에 假小屋 을 짓고 그 안에 시체를 보존하는 것이고, 초빈은 야외에 자리를 깔 고 관을 안치하고 그 위에 풀과 나뭇가지를 덮어 일정기간 보존하 는 것이다. 토빈은 일종의 假埋葬으로, 임시로 매장지 부근에 토광 을 파고 관을 안치하여 일정기간 보존하는 방법을 일컫는다. 우리나 라에서 빈의 역사는 상당히 올라간다. 『三國史記』 『三國遺事』 등의 기사에 의하면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 둥 三國時代에 널리 행해 졌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무령왕릉에서 나온 誌石과 買地券에 의 하면 왕과 왕비는 시기는 각기 달라도 사후 28 개월만에 王陵에 歸 葬하는 것은 같았다. 이 기간 동안은 빈의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경우 빈이 6 개월 이상일 경우는 육탈되어 정식 매장 할 때에는 取骨하여 稽 안에 해골을 원상태로 다시 배치하여 매장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형식의 빈 상태를 거치는 장법은 이차장인 것이다 .60) 그러나 무령왕릉에서 본 것과 같이 관을 다시 개봉하여 시체에 손을 대지 않고 관 속에서 육탈의 과정을 거치게 하는 방식 도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1.5.2 埋葬姿勢 매장 자세는 시체를 매장할 때의 자세. 즉 시체를 어떤 형상으로 매장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로 土葬에서 볼 수 있다. 매장 자세에는 仰臥伸展葬 • 側臥葬 • 屈身葬 • W 身葬 • 坐葬 등의 여러 종 류가 있다. 60) 金元龍 외 : 『武寧王陵』 文化財管理局 1972. 앞에 든 「武寧王陵의 葬法과 墓制」
앙와신전장은 시체의 얼굴을 하늘을 향하게 뉘고, 四股를 곧게 펴서 몸에 밀착시키며, 몸 전체를 바르게 눕혀 매장하는 방법을 말 한댜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장법으로, 장구로는 대개의 경우 목관을 사용한다 . 측와장은 시체를 옆으로 뉘어 얼굴이 측면을 향하게 하는 자세이 지 만 경우에 따라서는 몸은 바르게 뉘고 얼굴만 옆으로 향하게 하 는 자세도 있다 . 굴신장은 시체를 구부리고 지체도 구부려서 몸통에 밀착시켜 매 장하는 자세이다. 전세계적으로 가장 넓게 퍼져 있는 자세의 하나로 서, 굴장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첫째, 묘광을 파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묘실의 면적을 최소로 하기 위하여 굴정 울 한다는 의견. 둘째, 사자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사후에 다시 나 타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사지를 구부리고 묶어 놓는다는 의견, 셋째 胎兒의 자세로 母體와 같은 大地로 돌아가기 위하여 굴신장을 한다는 의견 넷째, 사후에는 睦眠의 자세, 휴식의 자세를 취하게 한 다는 의견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청동기시대의 지석묘나 석관 묘의 내부가 성인을 신전장하기에 짧고 좁아(대개의 경우 묘실의 길이가 lm 내외인 경우) 굴신장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大邱 辰泉洞의 지석묘의 하부에서 발견된 석관에서는 굴신장한 인 골의 흔적 이 발견되 기 도 하였다 .6 1) 부신장은 시체를 엎어서 얼굴과 몸의 전면이 아래 지면을 향하게 하고 등이 위로 향하게 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도 시체 를 신전하는 경우와 굴신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발견 되지 않고 있으나 중국에서는 殷캘蓮代에 자주 발견되며, 특히 奴~ 의 拘葬에서 볼 수 있다. 좌장은 문자 그대로 앉은 자세를 말하는 것인데, 대개의 경우 굴 61 ) 姜仁求 : 「達城辰泉洞의 支石墓」 며韋國史硏究』 28 집 1980.
신장과 비슷하며. 단지 굴신장에 비해 편안한 자세를 취하게 하고 있다. 즉 발을 엉덩이에서 떨어지게 하여 앞으로 내민 자세가 보통 이다. 아프리카에서의 경우를 보면. 시체를 묘실의 벽에 기대앉은 자세로 매장하고 있다. 이 자세에 관해서는 굴신장이 사자의 공포와 관계가 있으나 좌장은 그 공포가 없다고 하고, 母權農耕民文化와 관 계가 있다는 견해가 있댜 62) 한반도에서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 1.6 葬具 장구는 시체를 매장하는 데 필요한 도구, 즉 壽 衣.稽·鄒 등을 말한댜 수의는 綿 • 組類로 만들기 때문에 후세에 잘 남아 있지 않 아 고고학이라기보다는 민속학적 대상이 되고 있다. 여기서는 생략 하고 稽과 柳 그리고 室에 관하여 다루기로 한다. 1.6,l 稽 관은 시체를 보호하기 위하여 입히는 수의 다음에 가장 가까운 尻體保護裝置로서 內皮 기능을 갖고 있다. 관에는 재료에 따라 목 관·석관·옹관·陶稽전藍稽·瓦稽·銅稽 등의 여러 종류가 있고, 관을 겹쳐 놓은 상태에 따라 내관·외관·이중관·삼중관·오중 관 • 칠중관 등이 있는데, 사회적 신분에 따라 다르다. (1) 목관 목관은 구성방식에 따라 組合式(箱形)과 구유式(削拔式)의 두 종 류가 있다. 조합식은 현재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목관과 같은 형식으로 얇은 판자 6 매로 조립한 관이다. 구유식은 말이나 소 62) 이상 시체의 姿勢에 관하여는 앞에 든 다關i l fl)起源』을 참고로 하였음 .
가 여물을 먹을 때 사용하는 옆으로 긴 여물통과 같이 굵은 통나무 를 쪼개고 굵은 쪽의 안을 파내어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시체를 넣고 뚜껑을 덮는 형식을 말한다. 고대로 올라가면 목관은 신분이 높을수록 두껍고 튼튼한 재료를 사용하며, 표면을 黑漆하고 호화로 운 錬金의 장식을 붙여 장중하고 사치스럽게 만들었다. 의창 다호리 1 號壇에서 발견된 목관은 이른바 구유식으로 직경 lm 정도의 참나무를 길이 방향으로 쪼개고, 그 쪼갠 면을 구유식으 로 파내 각각 稽身과 稽蓋로 사용하였다. 관개와 관신의 접합은 상 하로 구멍을 뚫어 쐐기를 박아서 연결시키고 고정되도록 하였다. 관 의 길이는 2.4m 너비 0.85m 지름 0.65m 이다 .63) 아마도 철제도끼가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대개 이러한 형식의 목관을 만들어 사용하였 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동강유역의 낙랑고분에서 발견된 梧野里 19 호분의 제 2 목관은 길이 8 척 1 촌, 폭 2 척 4 촌 ~2 척 2 촌, 높이 3 척 1 촌의 규모인데, 머리 쪽은 높고 넓게, 발쪽은 좁고 낮게 만들어 前高後低 頭寬足俠이 되 게 하였다. 稽蓋는 약간의 曲面이 되게 하고, 상하 양쪽 끝을 약간 씩 밖으로 길게 연장하여 마치 맞배지붕의 蓋板을 달기 위한 공간 처럼 하였다. 관재의 연결과 조립방식은 나비형 장식으로 하였다. 관개의 두께는 7 촌 7 푼이고 측판의 두께는 5 촌이나 된다. 그리고 측 판에 금동의 四葉座文의 장식을 부착시키고, 표면에는 혹칠을 내면 에는 朱漆울 두텁게 하여 장중하고도 호화롭게 꾸몄다 .64) 공주 송산리에서 발견된 백제 무령왕릉의 목관은 삼국시대의 목 관으로서 가장 호화로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관은 조합식 箱 形稽으로 몇 개의 좁은 板材를 이용하여 만들었다. 관개는 屋蓋形으 63) 李健茂 외 : 「義昌茶戶里遺蹟 發堀進展報告(1)」 『考古學誌』 제 1 집 韓國考古美 術硏究所 1989. p14 . 64) 朝鮮總督府 : 『昭和五年度古蹟調査報告第二冊 平安南道大同郡大同江面梧野里古 壇調査報告』 p34 , 圖版 14-15.
로 특이하게 구성하였는데. 王 妃稽은 판재 3 매를 이용하여. 2 매는 맞배식으로 하고 두 판재 위에 다시 1 매의 판재를 올려놓아 용마루 형을 만들고 지붕의 全面은 曲面 지붕형을 만들었다. 왕의 관은 판 재를 더 좁게 하여 한쪽 사면에 . 2 매씩하여 양쪽 합하여 4 매를 기와 잇기식(계단식)으로 연결하고, 중앙 맨 위에는 다시 1 매의 판재를 올려놓아 역시 용마루형을 연출하고 전면은 곡면 지붕이 되게 하였 댜 판재의 연결과 고정은 鐵製花形針을 사용하였으며, 稽身의 長側 板에는 2 개, 단측판에는 1 개의 손잡이용 고리를 부착시키고, 내외 표면은 흑칠을 하였다. 길이 2.5m. 목관은 부식이 잘 되어 현재 남아 있는 자료는 아주 희귀하다. 最古의 목관은 중국 半坡유적의 152 호묘에서 발견되었는데, 소아를 사면에서 목판으로 돌린 목관형이었다 .65) (2) 석관 석관은 목관 다음으로 널리 이용된 관인데. 여기에도 목관의 경 우와 같이 조립식 석관과 구유식 석관의 두 종류가 있다. 전자에는 箱子形 석관이 있고, 후자에는 舟形 석관 • 家形 석관 등의 형식이 포함된댜 상자형 석관은 板石을 사용하여 상자형으로 조립하여 만드는데. 석관의 대부분은 이 종류에 속한다. 청동기시대의 지석묘, 석관묘로 부터 시작하여 삼국시대 석실분과 고려시대의 화장묘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널리 사용되었다. 석관은 토광에 매납하는 경우와 석실에 격 납하는 경우로 나누어진다. 또 長側板을 1 매의 판석만을 사용하는 경우, 수매의 판석을 사용하는 경우, 판석과 일부에 적석벽을 사용 하는 경우 등으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석실에 격납하는 경우로는 가 야의 지산동 고분형식이 있고. 고려시대 석실 내에 화장골회를 담아 65) 앞에 든 『中國考古學大系』 1 p24 2.
안치하는 소형의 석관도 있다. 고려 석관에는 四神 岡 등 선각화를 그려서 장식하는 예가 많다. 주형 석관은 우리나라에서는 경주 지방에서 신라시대의 것으로 짐작되는 유물이 단 1 개 발견되어 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66) 앞에서 말한 다호리의 구유식 목관의 예라던가 . 주형 토우를 보면, 주형 석관은 어느 정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발견 예는 극 히 드물다. 중국의 경우는 四川省지방에서 한대와 후한대의 주형 석 관이 다수 발견되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고분시대의 석실에 격납한 석관이 다수 발견되었다. 가형 석관도 희귀하기는 주형 석관과 마찬가지이며, 일본의 석실 고분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다. 일본의 4C 대 고분시대 초기에는 割 竹形 석관이라고 하여. 횡단면이 대나무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은 형상을 한 석관이 자주 발견되기도 한다. 할죽형 • 주형 • 가형 등 象 形 석관은 석관재료의 수집 •운 반 • 제작 등의 난이도로 미루어 보 아 경제력이 풍부한 높은 신분 계층에서 주로 애용한 것으로 보인 다. (3) 옹관 응관은 시체 또는 이차장한 후 뼈만 골라서 壅 에 넣어서 매장하 는 토기의 관을 일컫는다. 대개의 경우 專 用壅울 제작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일상 용기의 옹이나 蓋를 轉 用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옹관은 乳兒 • 幼兒 • 小兒用이 많고, 약간은 이차 장용으로도 사용되며. 옹관이 길고 큰 경우에는 시체를 신전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옹관은 옹 1 기만을 사용한 경우, 2 기를 사용한 경우. 3 기를 사용한 경우 둥이 있다. 옹관의 매장방법에는 1 기의 옹 을 적립으로 매장한 경우와 옹 2 기 또는 3 기를 연결하여 관의 길이 66) 『 慶 州博物館과 座州』 1965 년.
를 연장하고 橫臥로 매장한 경우가 있다. 單幾核 의 경우 뚜껑은 판 석을 사용하기도 하고, 또는 파손된 토기의 일부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며, 간혹 뚜껑이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사용한 木 蓋 가 부식되어 이미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형식을 合蓋式 이라 고 한다. 옹 2 개나 3 개를 연결한 경우는 옹의 구연을 서로 합하였다 하여 合口式이라고 하는데, 대개 대형의 경우 또는 신전장의 경우는 합구식을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옹관은 중국의 경우 신석기시대부터 애용되어 온 전통 깊은 관의 한 형식으로, 한반도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나타나고 있다. 가장 이 른 시기의 옹관은 충청남도 공주군 탄천면 송학리 소라실 부락의 뒤편 능선상과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의 住居址群 주변에서 발견된 무문토기 응관이다. 다음 시기의 옹관은 기원 전후의 것으로 光州市 新昌洞(구지명 :光山郡 飛雅面 新昌里)에서 소형 응관 수십 기가 집단으로 분포된 채 발견된 일이 있는데, 이것들도 무문토기 옹관이 었다. 2~3C 의 응관으로서는 대동강 유역에서 전축분과 함께 나온 瓦質土器幾稽이 있고,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백제 • 신라 • 가야의 고분지대에서 대부분 석실 또는 석곽과 함께 발견되는 일이 · 많다. 특히 영산강유역에서는 대형 옹관이 토축묘의 분구 내에서 土葬 • 敷石葬 • 敷炭葬과 함께 발견되고 있다. 이 현상은 지역적 특징으로 평가할 수 있다. 옹관의 사용도 환태평양 지역에 넓게 분포하고 있 으며, 대개 세골장의 분포와 일치하고 있다 . 옹관은 한반도에서는 목관보다 뒤에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나, 중국의 경우는 半坡 등 仰紹 文化期에 황토지대에서 사용되고 있어서 목관보다 사용시기가 반드 시 늦다고 할 수만은 없을 것 같고, 지역의 자연환경에 따라서 산림 이 풍부한 곳에서는 목곽과 목관이 성행하고, 산림이 없는 황토지대 에서는 옹관이 성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반도의 옹관은 중국의 河北地方 등 동복지 방의 응관 형식 이 들 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67) 영산강 유역의 토축묘에서 발견되는 대
형 옹관은 산림은 적으나 토기가 발달한 지역에서 목관 대용으로. 그리고 지리적으로 하천이 많고 고온다습한 지역적 환경에서 특별 히 신전장의 대형 옹관이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대형 옹관 이 발달한 장강 하류역이나 영산강 하류역 또는 일본의 구주지방의 자연환경에서 짐작할 수 있다. (4) 호관 盡稽은 크게 보면 옹관의 일종인데, 한반도에서는 專用壅稽 대신 에 일상용기 중 호를 轉用하여 관으로 사용한 형식을 특별히 호관 이라고 부른다 .68) 이것도 역시 독립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석곽 • 석 실 둥 주묘제의 부속 묘제로서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도 형 식으로는 합개식과 합구식이 있는데, 蓋로는 광구형의 자배기 • 器 臺의 하부 등을 이용하였다. 호는 대체로 球形身으로 廣口 • 短頭의 硬質토기를 사용하였다. 골호 • 옹관 • 호관 등 용기를 사용하는 구조의 매장법은 시체를 위생적으로 처리하여 버리다가, 인지가 발달하면서 보존하고 기념하 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옹관과 호관은 이차장에서 육탈 후 뼈만 용기에 담아 다시 매장하면서 생긴 장법이다. 그 후 옹관이 유아 • 소아용으로 바뀌면서 일부에서는 성인을 신전장하는 장법도 병행하 게 된 듯하다. (5) 도관 陶稽은 용기를 목관과 유사한 형으로 만들려는 아이디어에서 나 온 것으로, 토기와 기와가마에서 같은 재료를 사용하여 만든 陶質토 기의 일종이며, 소형 상자형의 용기에 火葬骨灰를 넣어 매장한 관을 67) 三上次男 : 「中國古代(l)壅稽墓-附 朝鮮(l)壅稽墓-」 『中國古代史硏究』 1960 東 京 68) 앞에 든 갸캡円古壇硏究』 ppl 39-167.
말한댜 한반도에서는 고려시대 불교와 관련하여 사용한 예가 많다. 예를 들면. 석실분 • 석곽묘 • 토광묘의 화장한 골회의 埋葬葬具로서 주로 사용하고. 또 佛家의 사리탑이나 부도탑의 부속매장용기로 사 용하였댜 1.6.2 構 곽은 시체의 제 2 차적 보호구로서, 관의 외측에서 관을 보호하는 기능을 가진 시설이며, 관이 이동할 수 있는 용구인 반면에 곽은 움 직일 수 없는 고정시설이라는 점이 다르다. 시체의 보호기능면에서 관을 제 1 차적인 내피시설이라고 한다면, 곽은 제 2 차적인 외피시설 이라고 할 수 있다. 관은 墓室 밖에서 시체를 격납한 후 무덤의 묘 실 내로 移動安置하는 데 비해, 곽은 처음부터 무덤의 핵심장소에 結架하고, 그 내부에 관을 안치한 후, 다음 순서로 墓室과 봉토작업 울 진행하게 된다. 곽 안에는 관이 놓일 장소와 부장품이 놓일 장소 로 구분된다. 곽에는 축조하는 재료에 따라 목곽 • 석곽 • 塘郡 • 礎鄕 • 帖土柳 • 木炭鄒 • 蒸郡 • 貝鄕 등의 여러 종류가 있다. (1) 목곽 목곽은 가장 일반적인 곽의 형태이며, 목곽을 설치하는 기본적인 무덤의 형식은 토광묘이고, 전곽과 석실에 설치하기도 한다. 대개의 경우는 一稽에 -柳이 보통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이관(二稽) • 삼관 (三稽) 등 복수의 관을 하나의 곽내에 안치하기도 한다. 전곽의 경 우가 많지만, 대형의 목곽에는 출입시설로서 문이 있는 경우도 있 다. 이 경우는 엄밀히 말하면 木室이라고 해야 하나, 일반적으로 목 곽으로 통칭하고 있다. 목재도 시대가 올라갈수록 원목을 그대로 사 용하였으나, 시대가 내려올수록 가공한 각재나 판재를 많이 사용하 였댜 목곽은 대개 사면벽과 천정을 봉하는 시설인데, 이와 유사한
시설로서 木 樞 이 있다. 목곽이 자리하는 위치에 시설되는 것은 같 으나 벽면과 천정을 판자로 막지 않고. 기둥 등 골격만 세우고 그 안에 목관을 격납하는 시설이다. 한반도에는 삼국시대 전기 주구 토 광묘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중국의 북부지역 塞外民 族 文化의 영향으 로 생각된다 .69) (2) 석곽 석곽은 토광의 벽에 기대 할석이나 괴석으로 사면벽을 축조하여 소형의 묘실을 만든 것인데, 형상은 석실과 흡사하나 규모가 작고 출입시설이 없는 점이 다르다. 석곽은 일반적으로 석곽묘의 내부구 조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데, 청동기시대의 석곽은 지하 깊이 내려가고 재료로서 괴석을 많이 사용하고, 삼국시대 낙동강유역지 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석곽은 지면에서 그리 깊지 않은 곳에 축 조하고 할석 • 냇돌 • 판상석 등을 사용하는 점에 차이가 있다. 지석 묘의 하부구조로도 사용되나 지면 위의 상석만 없다면 석곽묘의 석 곽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기본구조가 같다. 석곽벽의 상면은 대 부분 판상석 수매를 덮어 蓋石으로 하나 , 경우에 따라서는 木 蓋 룰 사용하기도 한다. 석곽의 내부에는 목관을 격납하는 것이 가장 보편 적이고, 때로는 옹관을 안치하는 경우도 있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청동기시대의 석곽묘를 석관묘에 포함시키기도 하나, 석곽과 석관 은 축조법과 유물 둥 문화와 계통이 다르므로 엄연히 구별해야 할 것이다. (3) 전곽 塘柳은 토광 내부에 석재 대신에 塘올 사용하여 만든 소형의 묘 실을 이르는 말이다. 중국의 한대 이후 당송시대까지 많이 이용된 69) 앞에 든 「周 溝 土 塘 墓에 관한 몇 가지 問題」 pll 4. 및 pl2 1 .
형식인데, 한반도에서는 엄격히 말해서 전곽묘는 아직 발견된 적이 없다. 대동강유역과 공주지방의 地築:tJt은 모두 출입시설이 있는 橫 穴式 地室墓이다. 전곽에도 목관을 격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4) 역곽 • 점토곽 • 목탄곽 礎郡 • 帖土鄒 • 木炭鄒은 앞에서 말한 목곽 • 석곽 • 전곽과는 형상 과 축조법에서 서로 다르다. 점토곽을 대표로 든다면, 토광 안에 먼 저 자갈을 깔아서 배수기능을 만들고, 그 위에 관을 안치하여. 관을 고정시키고 보호하기 위하여 전면적으로 점토로 두껍게 덮어 씌워 만든댜 여기서 토광은 목곽용 토광보다는 깊지 않은 것이 특징이 댜 우리나라에는 많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고분시대의 곽으로 많이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의성 탑리고분의 제 5 호곽은 점토곽일 가능 성도 엿보인다. 역곽이나 목탄곽의 형상이나 축조법은 재료의 차이 만 있을 뿐 점토곽과 크게 다르지 않다 .70) (5) 요곽 蒸郡은 토기와 기와를 굽던 페기된 가마에 시체를 매장하고 밀봉 한 곽인데, 주로 도공들 사회에서 이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발견 보고된 일이 없지만, 일본의 大阪 陶邑의 須惠器無群에서 더러 발견된 일이 있다. 須惠器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삼국시대 토기가 건 너가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요곽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1.6.3 室 실은 墓室 또는 玄室이라고도 하는 매장주체시설을 말한다. 시체 70) 大塚初重 • 小林三朗 : 『古壇辭典』 東京堂出版 1982. p36 6 湖f 의 내용을 참고 로함
를 안치한 관과 토광벽 사이에 있는 보호기능을 가진 시설에는 위 에서 말한 곽과 실이 있는데, 시체로부터 따진다면 관의 바깥쪽에 곽이 시설되고, 곽의 바깥쪽에 묘실이 축조된다. 그러므로 시체로서 는 제 3 차의 외피시설이 된다. 실의 가장 큰 특징(곽과의 차이)은 실 에는 출입할 수 있는 문과 같은 시설이 있으나, 곽에는 그것이 없는 점이다. 물론 소위 횡구식 석실이라고 하는 것처럼 관을 안치하고 삼면벽과 개석을 축조한 다음, 밖으로 나와 밖에서 나머지 벽을 쌓아 막아 버리는 묘실도 室이라고 한다. 또 수혈식 석실처럼 출입 시설이 없어도 규모가 크면 실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문제는 어느 정도의 크기부터 실이라고 할 수 있는가로, 꼭 몇 m 이상이어야 한 다는 정해진 수치는 없으나 대체로 수혈식 석실의 경우는 내부 길 이가 3m 이상이면 석실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3m 정도라면 성인의 시체를 신전장하고도 약 lm 의 부장 공간이 남아 있기 때문이댜 71) 실은 발생적 측면에서 본다면, 追加 葬으로 합장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생겨난 구조이기 때문에, 출 입구시설이 꼭 옆으로 있는 경우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위에서는 주로 單室墓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하였지만, 고구려의 안악 3 호분과 같이 다실인 경우는 후실(현실) 이외의 출입이 가능 한 방은 모두 실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前室·側室·耳室·兪室 등이 그것이다. 요컨대, 출입구시설이 있는 방의 구조를 실이라고 한다. 土塘木柳墓에서 목곽에 가끔 문시설이 있어 목곽을 木室(木室 墓 평양 낙랑구역에서 다수 발견됨)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 경 우 토실묘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71) 金世基는 길이 5m, 폭 Im, 높이 Im 정도면 수혈식이라도 石室로 불러야 한다 는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加耶地域뿜穴式墓制의 硏究」 계명대학교대학원 석사 학위논문 1983. pll .). 그러나 길이 5m 는 너무 긴 것 같이 생각된다. 가령 길이 가 4m 라면, 2m 의 관을 안치하고도 2m 의 공간이 남아 있는데. 이 경우도 석곽 으로 부르기는 불합리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2 硏究方法論― 遺蹟學 的 方法 고고학은 유적과 유물을 대상으로 조사 연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유적과 유물 두 가지 중 특히 유물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방법을 유 물학적 방법이라고 한다. 고고학의 발달과정을 통해 볼 때, 고대부 터 현대까지 유물에 비중을 두고 연구해 온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고고학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톰센의 ‘三時期區分法 ’ 을 보아도 석기 • 청동기 • 철기 등 도구를 만든 재료 중심으로 구분해 놓은 것 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해방 후 일본학자들이 남기고 간 방법 을 그대로 물려받은 우리학계는 당연히 유물 중심의 고고학이 주류 를 이루게 되었다 . 단적으로, 발굴 보고서를 보면 유물에 관한 출토 사항과 해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유물을 중요시하는 방법이 오 랜 동안 그대로 계승되어 온 것은 전통적이라는 측면이 있기는 하 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현대인의 好古的 취향에 편승하고 골 동적 가치에 더 큰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물이 고고학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유물에는 생활에 편리 한 측면을 우선으로 추구하고, 소수인에 의하여 단기간에 만들어지 기 때문에 생산시기의 의식과 가치관이 예민하게 반영되어 있어서, 시기결정에 결정적 자료가 될 수 있다. 또한 각 유물에는 매개별 단 독성이 강하지만, 여러 유물의 집합에는 개념화된 단위사회의 사상 과 관념이 있어 생산시기의 문화연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반면 보완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약점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즉 유물이라는 것은 대부분 규모가 작아서 인간이 가지고 움직이기 에 편리하고, 유통에 목적을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 장소에 고 정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수요자(사용 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존재한다. 다만 생산품이 사용하기에 편리하
다던가 견고하다던가 가격이 저렴하다던가에 따라서 생산이 계속되 기도 하고. 반대로 유통되지 못하고 소멸하는 경우도 있다. 또 생산 과정에서 소수의 인간만이 참여하여 소수의 의사만이 반영된다. 그 렇기 때문에 생산품 자체에는 문화적 대표성이 약하고, 사용자의 선 택에 우연성이 높으며, 수요자 사회와 횡적 연관성이 희박하다. 그 렇기 때문에 다른 사회에서 들어온 물건을 통하여 수입사회의 문화 적 성격을 논한다거나 척도로 사용하는 것은 부적합하다. 유적학적 방법론은 유물에 편중한 연구에서 초래되는 위와 같은 여러 가지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유물을 포장한 외적 • 부동적 구 조물에서 유물의 外延的 가치를 추구하자는 이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종래 조사 보고서에서 유물에 관한 기사 이외에 유적의 위 치와 입지조건, 유적의 구조형식과 유적과 유물의 기원이라던가 원 류라던가 하는 原形에 좀더 주의를 기울이고, 추구하는 방법인 것이 다. 예를 들면, 장군총은 무슨 이유로 그 위치와 그 지형을 선정하 였는가? 그 석재의 취득원은 어디인가? 분구는 왜 계단식이며, 절두 방추형으로 이루어졌는가? 왜 석실은 분구의 중간에 설치하였는가? 그 구조형식은 어디에서 전래하였으며, 기원은 어느 지방인가? 하는 등의 의문에 해답하는 연구가 빠짐없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 이다. 유물에서 찾을 수 없는 유적의 장점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하 나의 유적을 축조하기 위하여 단위사회의 전 구성원이 참여하여 결 정하기 때문에 대표성이 강하다. 거기에는 전통과 새로운 요소가 포 함되지만, 외래문화를 쉽게 수용할 수 없어 전통이 보다 강조되고, 문화의 큰 줄기는 시대 상황을 쫓아 예민하게 변화하지 않으며, 보 수성이 강하다. 전 구성원과 지역을 대표하고 공통성이 인정되기 때 문에 문화권 형성에 바탕이 된다. 가까운 한 예를 들어 보자. 장군총의 입지조건은 그것이 최고 통치자의 분묘로서 당시 고구 려의 전 국가적 관심 속에 선정되었기 때문에, 당시 사회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모든 분야 최고 수준의 사상과 관념이 내포되 어 있댜 장군총의 계단식 절두방추형의 분구는 오래 전 건국 당시 부터 전승되어 온 적석총의 구조형식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정착시 킨 결정체이기 때문에 당시의 건설과 기술을 반영하고 있다. 제 5 단 에 마련된 횡혈식 석실은 후한에서 들여온 새로운 형식이지만, 이미 100 년의 정착기간을 거친 토착 문화산물인 것이다. 요컨대 이상에서 예를 든 여러 문화적 요소를 종합하고 분석한다면, 5C 대의 고구려 의 국력과 문화수준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고분의 입지조건과 분형의 추구는 고분 연구에 있어 서 유적학적 연구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 분구의 형상을 자료 화하는데 필요한 방법과 수단울 특별히 ‘壇丘學‘이라고 한다. 분구 학은 유적학적 연구법에서 당연히 거둔 가장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분구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분구의 시기별 • 지 역별 연구, 특히 미세한 변화까지 파악해야 한다. 그것을 위하여 등 장한 방법이 20~25m 의 등고선 측량이다 .72) 과거 우리학계에서는 분구 그 자체와 분구의 형상을 중요시하지 않고, 오직 내부에서 발 견되는 보물급 유물에만 관심을 집중하였다. 그 결과 한반도의 분구 는 조사를 거치기 전에 모두 변형되어 原形을 알 수 없게 되고, 분 구를 통해 추구되어야 할 당시의 정치 • 경제 • 사회에 관한 많은 지 식을 잃게 되었다. 72) 고분조사에 있어서 분구측량에 20~25m 등고선측량법은 필자가 1984 년 고성의 舞技山 古項 측량에서 시작하여, 장고산 고분 • 자라봉 고분 • 백곡리 고분 등에 서도 채용하였다. 그 이전에는 고분의 측량은 으레 lm 등고선측량을 원칙으로 행하였다.
제 2 장 古壇의 型式 1 先史時代 선사시대라는 개념은 본래 문자로 역사를 기록하기 이전의 시대, 즉 문자가 없던 시대를 말한다. 톰센의 三時期區分法에 따르면 석기 시대 • 청동기시대를 선사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의 경우는 문자를 사용하여 역사를 기록한 시대는 삼국시대에 들어 와서부터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미 청동기시대에 고조선이 건 국되어 일정한 통치행위가 있었고 , 그에 상응한 문화가 발달하였다. 그래서 청동기와 철기를 생활의 도구와 전쟁시의 무기로 사용하여 原始時代를 벗어나 문명 시대로 접어들었다. 또 우리나라와 국경을 접하여 왕래가 빈번하던 중국에서는 이미 BC 18C 에 청동기를 사용 하고 갑골문자를 사용하여 생활과 사건을 기록하는 문화가 발달하 였댜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에는 비록 고유문자는 사용하지 않았 다 해도 우리의 역사가 중국 문헌에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나는 마 땅히 고조선이 건국된 이래의 청동기시대는 역사시대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73) 따라서 여기서의 선사시대는 구석기시대와 신 석기시대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73) 古朝 鮮 을 선사시대에서 제외시키고 歷史時 代에 포함시키는 문제는 학자에 따 라서 견해 를 달리한다 . 古代 國家 의 出 現 은 반드시 金屬製武器 (武 具 )와 道具룰 전제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磨製石器 등으로는 다수의 住民을 통 솔 하고 통 치하는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고대국가의 형성은 금속제 무기와 도구의 사용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古 朝鮮 시대에 직접 기록한 文 獻資料 는 없지만. 『 史記』 『 漢 劃 둥 중국측의 문헌 여러 곳에서 고조선에 관한 기록 을 찾을 수 있다 . 그리고 중국에서는 고조선보다 약 2000 여 년 전에 夏 , 商 殷 등 국가의 자료가 역사에 나오고 있다. 商gE 은 1920 년대 이 후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靑銅器 時代이고 , 夏 에 관하여서도 현재 個tiji二 里 頭 둥지에서 조사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 우선은 넓은 의미에서 早商으로 추정하지만, 夏 時代로 확정하는 학자도 점차 늘어가는 추세이다(「 關 於二 里 頭文化」 『 考 古』 1980-6).
앞장에서도 간단히 언급한 바 있듯이 한반도에서는 아직 구석기 시대의 무덤 유적이 발견 보고된 일이 없으며, 신석기시대의 무덤이 나 매장구조도 극히 드물다. 여기서는 신석기시대의 무덤에 대하여 서술하기로 한다. 신석기시대의 분묘는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발견된 유적이 매우 드물댜 동삼동 패총 • 금곡동 율리 패총 • 통영 욕지도 동항리 • 울 진 후포리 • 연대도 등지에서 확인되었다. 동삼동 패총에서 발견된 유구는 산사면에 위치하여 지면에 돌을 얇게 깔고 그 위에 시체를 안치하였다. 통영 욕지도에서는 해안의 자연 경사면에 돌무지 시설이 있고, 그 사이에 구덩이 시설 없이 시 체를 매장한 간단한 구조이다. 무덤시설이라기보다는 원시적인 俺 埋 정도인 것이다 . 74)75) 이들과는 달리 울진의 후포리에서는 동해에 돌출한 반도형 고지 상에 위치하고, 7 개의 바위덩이로 둘러싸인 동서 4.5m, 남북 3.5 m 규모의 장타원형의 자연 구덩이를 이용하여 시체와 부장품을 매장 하였다. 시체는 세골장하여 무더기로 매장한 일종의 집단묘인데, 하 부 • 중부 • 상부 등으로 층을 이루고 있으나 조직적인 것은 아니다.
74) 國 立 晋 州 博物 館 : 『欲知 島 』 1989. 75) 앞에 든 『 金 谷洞栗里貝塚』과 「中 國東 北地方의 古文化에 대한 論評 」
유물은 거의 전부 석부로 180 개나 되었는데. 모두 연마를 잘 한 것 들로 안골을 덮은 상태로 출토되었다. 석부는 특이하여 폭이 넓으며 길이는 20cm 이상이 많으며 5cm 미만의 소형도 상당수 있다. 연대 는 동해안 일대에서 더러 발견된 바 있는 비실용적 장형의 석부로 미루어 보아 신석기시대 후기로 추측할 뿐이다 .76) 2 靑銅器時代(古朝鮮 • 辰國) 고고학적으로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고조선은 우리나라 역사학에 서 그다지 자세히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원시국가가 석기를 사용 하는 시대가 아닌 금속기를 사용하던 시대에 출현하였다는 것이 일 반적인 통념이다. 즉 다시 말해서 석기는 씨족이 모여 사는 부락 정 도의 정치 집단을 통치할 수 있고, 그 이상의 부족연맹이나 城邑국 가 정도에서는 적어도 청동기 무기가 아니면 통치하고 권력을 유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와 그 주변지역에서 청동기 무기가 처 음 나타난 것은 대략 BC 9~8C 를 넘지 못한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 적인 인식이댜 이 청동기 무기는 昆텔形銅왔 l 과 細形銅劍을 말하는 데, 비파형동검은 생김새가 고대 중국의 昆튬라는 악기와 흡사하다 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중국의 遼寧省지방에서 집중적으로 출토 된다고 하여 遼寧式 銅劍이라고도 부른다. 이 동겁은 요녕성과 한반 도에서만 출토되고 中原지방과 長城地帶에서는 발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파형동검을 이어받아 만들어진 세형동검도 요녕성과 길 림성 남부와 한반도에서만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비파 형동검과 세형동검은 오래 전부터 조선족에 의하여 만들어진 무기 로 인정받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 동검을 만들어 사용한 종족은 고 76) 國立慶州博物館 : 屯狂多厚浦里遺蹟』 1991 .
대 조선족이고 그들이 세운 국가가 바로 고조선이라고 추정하고 있 다 .77) 그러므로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은 고조선의 標識的 유물이 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동검을 출토하는 지역적 범위와 그것 을 출토하는 무덤과 같은 시기의 무덤이 고조선시대의 무덤인 것이 다. 이 시대에 유행한 무덤은 지석묘 • 석관묘 • 석곽묘 • 토광묘 등 비교적 여러 종류의 형식이 있다. 아래에서 이들 무덤에 대해 차례 대로 설명하기로 한다.
77) 遼寧省과 韓半島에서 출토되는 昆登形銅왔 l 을 만든 種族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는 내외 학자간에 견해가 갈려 있다. 그러나 필자는 東胡族으로 추측하는 中 國 • 日本학자의 견해보다는 稿정苗族으로 보는 견해를 취하고 싶다(®金元龍 : 瓚國考古學槪說』 一 志社 1986. p66 , @金廷鶴 : 「考古學上으로 본 古朝鮮」 떄韋 國上古史의 諸問題』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7 pp7 6- 83 , @林炳泰 : n t國靑銅 器文化의 硏究』 學硏文化社 1996 pp1 97-201, @姜仁求 : 「中國東北地方의 古 壇」 • 「考古資料를 통해 본 古朝鮮」『考古學으로 본 韓國古代史』 學硏文化社 1997) .
2.1 積石墓 적석총은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유행한 석묘계통의 무덤 이다. 지상의 돌무지 안에 판석이나 괴석으로 매장시설을 축조하고. 다시 그 상부를 괴석으로 적석하여 분구를 만든 무덤형식이다. 요녕 성에 상당수의 적석총이 분포되어 있으며, 근래에 와서는 길림성의 압록강유역지방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대동강유역과 한강유 역 등 남한지방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점도 분포상의 한 특징이 라 할 수 있댜 그러므로 청동기시대의 적석총은 요녕성지방과 길림 성지방을 대상으로 하며, 그 가운데서도 요동반도의 적석총을 주 대 상으로 한다. ®大凌河流域의 遼寧省 凌源縣 牛河梁, ®遼東半島의 旅大市 旅 順口區 老鐵山 • 將軍山 • 성家村北山, ®旅大市 後牧城 樓上과 岡上
의 積石塚 ®鴨綠江流域의 寬句縣 太平噴公社 泡 子沿大隊, 長句公 社 四平街大隊, 鳳城縣 弟兄山公社 三家子大隊, 集安縣 五道嶺溝門 등지의 적석총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같은 적석총이라 해도 ®과 @. ®, 그리고 ®는 구조와 연대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한반 도에는 없는 이들 적석총을 여기에서 다루는 이유는 고구려 적석총 의 遠祖 • 近ft!l.와 直fft!l.로서의 구조형식을 갖추었고, 또 고조선의 근 거유적으로서의 가능성 때문이다. 牛河梁의 적석총 78) 은 약 5000 년 전의 유적으로서 구릉의 存梁部 남사면에 위치하고, 한 변이 18m 인 方臺形의 적석분구와 그 내부에 2.2m 길이의 석곽이 있다. 중요한 유물로는 玉器가 다수 출토된 점 이다. 老鐵山積石塚 79) 은 7~20m 의 方形項丘에 몇 기의 석곽을 일렬 배 치하고, 벽은 판상석을 2~3 단 중첩하여 벽체를 만들고 개석을 덮었 댜 黑陶와 석기가 발견되었으며, 용산문화계통으로 추측된다. 樓上과 岡上의 적석총 80) 은 土丘 위에 길이 34m, 너비 24m 의 분 구 안에 10 여 기의 석곽이 들어 있다. 특히 중앙의 2 기는 규모가 크 다. 유물로서는 비파형동검 겁同jf= • 明刀錢과 철제낫 등이 발견되 었다. 압록강유역의 적석총 81) 에서는 세형동검이 발견되었는데, 五道嶺 溝門의 경우는 분구가 초기 고구려 적석총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 어 고구려와 직접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법을 보면, 한 壇丘 多葬의 묘이고, 樓上에서는 同穴 부부합장 으로 보이며 화장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岡上의 경우는 한혈에 3 인 이상의 합장이 이루어졌으며, 가장 많은 19 호혈에는 18 인이 들어 있 78) 앞에 든 「遼寧牛河梁紅山文化女神廟與積石塚群發堀間報」 79) 旅大市文物管理組 : 「旅順老鐵山積石墓」 『考古』 1978-2. 80) 朝 • 中合同發堀隊著 東北 7 1/ 7 考古學硏究會譯 : 『岡上 • 樓上』 1963-1965 81) 田村晃一 : 「高句麗積石塚(l)年代&分類 1:-?P -C」 『考古學雜誌』 68-1.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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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압록강유역지방의 세형동검묘에서는 장법을 考 究할 수 있는 인골의 발견이 없어서 잘 알 수 없지만. 同穴 多葬 은 아닌 것으로 판 단된다. 이 점은 구조와 함께 면밀히 검토해야 할 과제이다 . 遼東半島 老鐵山 • 將軍山_岡上 • 樓上一'압록강유역 五道嶺溝門 一고구려식 적석총’ 라는 구조상의 계통을 세울 수 있고, 또 ‘신석 기 시대_청동기 시대 ( 비 파형 동검 ) 一 청동기시 대 (세 형동검 ) ―’고구려 식 적석총’ 이라는 문화의 繼起的變遷을 세울 수 있으며, 고대국가 발전 단계상으로는 ‘고조선―’고구려 라는 민족의 전통을 세울 수 있다. 2.2 支石墓 지석묘라고 부르는 무덤은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 여 지상에 가구하였다. 무덤의 구조와 형상에서, 그리고 原野에 집 단을 이루고 있는 분포상에서 일반적인 무덤의 관념으로는 쉽게 이 해할 수 없는 원시성과 이질감, 무한한 신비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 다. 이 지석묘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정형화된 最古의 무덤으로 군집 을 이루고 있는 집단성은 원시국가의 출현을 예고해 주기도 한다. 2.2.l 分布 지석묘는 함경북도의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한반도 방방곡곡에 없는 곳이 없는 일반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다. 논자에 따라 약간 차 이가 있기는 해도 대략 1 만 5000 기 정도가 아직 남아 있다고 추정 하고 있다.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곳은 대동강유역과 그 남부 황해도 북부지방. 영산강유역과 전라남도의 해안지방, 낙동강 중류지방과 남강유역지방. 남해안지방, 경주지방 등지를 들 수 있다. 지석묘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支石墓, 중국에서는 石湖, 유럽 에서는 Dolmen 이라고 부르는데. 중국에서는 동해안지방의 福建省 •
浙江省지방, 山東半 島 지방, 遼河以東의 遼寧省지방과 遼東半島 및 吉林省 남부지방에 다수 분포되어 있다. 또 일본 九州지방의 福岡 • 熊本 • 長崎 등지에도 다수 분포되어 있다 . 돌멘은 한반도의 지석묘와는 형식면에서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해 도 巨石文化의 유산으로서 歐亞대륙 여러 곳에 분포해 있다. 우선 동남아시아에서 인도차이나반도 • 말레이시아 등지와 인도지방, 중동 지방, 지중해 연안지방·프랑스·에스파냐·포르투갈·벨기에·영 국 등지에도 지석묘와 유사한 구조물이 분포되어 있다 .82) 2.2.2 立地 지석묘는 일반적으로 하천유역의 대지와 낮은 구릉에 많이 축조 되었댜 그래서 넓은 평야지대보다는 산이나 구릉에서 그리 멀지 않 은 평지와 해안지대 • 하천유역의 대지상, 또는 낮은 언덕 위에 주로 자리잡고 있다. 간단히 예를 든다면, 江華郡 河帖面 三巨里의 小洞 부락에서 발견된 지석묘와 주거지, 坡州郡 月籠面德隱里의 玉石부 락에서 발견된 지석묘와 주거지 등은 좋은 예가 된다 .83) 이처럼 넓 은 평야의 중심지를 피하고 구릉 부근의 대지상을 선호한 이유는 당시 사람들의 주거지역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의 넓은 평야는 당시에는 대부분 미개발지로서 특히 하천유역은 습 지라서 사람이 살기에 부적합한 장소였을 것이다. 그 대신 낮은 구 릉 부근에서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주거지가 주로 발견되고 있는 점 에서 보면 그러한 지역에 주거지를 마련하고 주거지역에서 멀지 않 은 곳에 경작지와 무덤을 조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죽 음료수와 경 작에 필요한 관개용 물이 가까운 곳에 있고, 주변에 밭농사와 약간 의 벼농사를 경작할 수 있는 토지가 있으며, 사냥할 수 있는 산 • 原 82) 藤田亮策 : 「朝鮮(J)石器時代」 떄膳岸붕古學硏究』 高桐書院 1948. p93 . 83) 金載元 • 尹武柄 : 먀籠갭支石墓硏究』 國立博物館 1967. pp2 3-76.
野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바다와 하천이 가까이 있는 곳은 당시 로서는 인간 樓息地로서 가장 이상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런 조건을 갖춘 장소에서 住居址와 무덤의 유적이 자주 발견되는 이유를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무덤을 주거지 가까운 곳에 占地하는 사상은 구석기시대 이후 신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 지 지속되어 온 큰 관습으로, 혈연적인 씨족공동체 내에서의 祖先崇 拜思想에 따라 死者와 生者가 가까운 거리에서 생활하기 위한 배려 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주거지와 무덤이 격리되기 시작한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에 들어와서 住居集團의 규모가 氏族血緣 單位에서 氏族聯合集團으로 확대되고 社會化되어 복잡해지기 시작 한 시기부터라고 생각된다. 2.2.3 構造와 型式 지석묘의 구조는 지역에 따라 몇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공통적인 것은 거대한 자연 암석을 上石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먼저 上石울 받천 지석의 유무와 지석이 판석형인가 그렇지 않으 면 괴석인가 하는 데에 기준을 두고 관찰할 때 몇 가지 형식이 있 다. 첫째 판석을 지석으로 사용하여 장방형의 상자형으로 세우고 그 위에 반석을 올려놓아 개석을 겸한 형식, 둘째 지면 위에 석괴를 4 개 놓고 그 위에 암반 또는 岩城를 올려놓은 형식, 셋째 판석이든 괴석이든 받침석 없이 지면 위에 상석으로 암반만을 올려놓은 형식 등의 대체로 3 종류가 있다. 그 다음은 시체를 안치하는 매장주체시설이 지상인가 지하안가 하는 문제와 또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데 기준을 두고 관찰 하면, 첫째 지상에 판상석으로 사면벽을 만들고 그 위에 상석을 올 려놓은 형식, 둘째 매장주체시설을 지하의 토광을 파고 그 안에 축 조한 형식에는 괴석으로 석곽을 만든 것과 판상석으로 석관을 만든 형식이 있다. 그리고 순수 토광에 매장한 형식이 있는가 하면. 토광
내에 옹관을 안치한 형식 등이 있다. 이처럼 상석을 중심으로 지상 의 구조형상과 지하의 매장주체시설의 형상을 결합하여 지석묘의 형 식을 분류한다. 현재 지석묘의 형식분류에는 많은 연구자들의 견해가 제출되어 있는데. 우선 여기서 각 견해들을 소개하고 비판하면서 필자의 새로 운 형식분류를 제안해 볼까 한다. (1) 鳥居龍藏(도리이류우조우)의 분류 鳥 居는 한반도의 지석묘를 전라남북도 • 경상남북도 등 남방의 지 석묘를 第 1 式 基盤型으로, 북방의 지석묘를 第 2 式 祠型 또는 机型으 로 분류한 바 있다 .84) 그리고 그는 제 1 식 • 제 2 식의 지석묘는 처음 에는 碑石(깬자갈)이나 흙으로 덮여 있었다고 보고, 또 支石이 없이 지면에 암반만 놓여 있는 형상, 일반적으로 無支石式이라고 부르는 형식은 지석묘에 포함시키지 않았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 . 85) 만일 그것이 확실하다면 鳥居의 이 관찰은 특기할 만하다 . 鳥居의 이 분 류는 한반도와 중국 • 일본의 지석묘에 대한 학술적 조사(한반도의 지석묘는 1910 년부터 조사를 실시함)를 거친 후 시행한 型式分類라 는 점에서 연구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사실 이후의 많은 연구자들에 의하여 행해진 형식분류는 여기서부터 출발하여 일부 수정하거나 가감하여 제출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로 영향이 컸다. 84) 烏 居龍藏 : 「中國石桐之硏究」 『燕京學報』 第 31 期 北平燕京大學出版 1946. ppl2 5-126. 鳥 居龍藏 : 「滿 蒙 |대§it 5 人類學上(})硏究 E 就 L\ t」 『日本考古學集』 鳥 居龍藏集 下 築地 書 館 1974. pp6 3-64. 85) 앞에 든 「韓國支石 墓 의 形式및 年代問題」 p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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戶남二-`第 --1\-0 號- .\.- . _-支-\--石、- -\墓-- `: 。 2I I\ m \ \ \ ` --, ./多` 、 - `` ----`\-- - --`/-`? 、 / 會 `’I ' I
(2) 藤田亮策(후지다료우사쿠)의 분류 藤田은 만주와 한반도에 있는 지석묘를 두 型 式으로 나누었다. 하 나는 卓子 式으로 만주 , 한반도의 북부 • 중부와 충청남북도 • 강원 도 • 전라북도에 주로 분포되어 있고, 또 하나는 基 盤式으로 경상남 북도에만 한정되어 있으므로 지역적으로 보아 嶺南式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전라남도에는 두 형식이 섞여 있다고 보 았댜 기반식은 다시 甲과 乙의 두 식으로 나누었다. 甲은 비교적 편평하고 넓은 개석 아래에 천석을 깔고 直下 지면에는 板石 또는 川石으로 석실을 만들었으며, 乙은 城狀의 돌을 세우고 그 아래 주 변에는 넓은 범위에 천석을 積 石하고 석실은 이 적석 중에 2~4 기 를 만들었는데 위의 괴석은 단순히 墓標처럼 보일 뿐이라고 하였 다 .86) (3) 孫晋泰의 분류 孫은 「朝鮮 Dolmen 의 硏究」 87) 에서 한국의 고인돌을 支石과 巨石 蓋壇墓의 2 종으로 분류하고 있다. 아주 간단한 분류이지만, 지석이 없이 상석만 지면에 놓인 것은 고인돌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이 관 점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4) 三上次男(미카미츠기오)의 분류 三上은 지석묘를 北方式과 南方式으로 분류하였는데. 北方式은 석조 부분이 모두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巨人의 탁자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이 식은 東部滿洲 • 北朝鮮울 중심으로 하여 한반 도의 중앙부인 경기 • 강원 • 충청남북 제도를 거쳐 남쪽의 전라남북 도 • 경상남도까지 넓게 퍼져 있다고 하였다. 南方式은 지상에 몇 개 86) 藤田亮策 : 『朝鮮考古學硏究』 高桐 書 院 1948. p95 . 87) 孫晋泰 : 「朝鮮의 Dolmen 에 關한 調査硏究」(1 946 년) 댜科晋泰先生全集』 2 太 學社 1981.
의 城狀의 돌을 놓고 그 위에 거대한 魂 石 을 올려놓은 것으로 기반 형에 비유된다고 하였다. 남방식 지석묘는 경상남북도 • 전라남북도 롤 중심으로 하지만, 경기도와 그 이북에도 널리 퍼져 있다. 이 식 은 남조선에서 생긴 특수한 형식의 지석묘라고 하고, 역사적으로 韓 族의 중요한 근거지와 일치한다고 하였다 . 88) 그의 이 지적은 주목 할 만하다고 하겠다. (5) 林炳泰의 분류 임병태는 자신의 「韓國支石墓의 形式 및 年代問題」에서 다움과 같이 분류하였다 .89) I 卓子式 A 地上單石室形 B 地下單石室形 C 地下多石室形 D 變形石室形 ll 基盤式 A 地下石室形 1 單石室形 2 多石室形 B 地下土塘形 血 無支石式 A 地下石室形 1 上石垂直下石室築造形 2 上石周園地下石室築造形 a 單石室形 88) 三上次男 : 「滿鮮古代仁七it 5 支石 墓 社會(J)成立」 『滿鮮原始噴墓(J)硏究』 吉 )ll5L 文館 1961. pp1 39-140. 89) 林炳泰 : 「韓國支石墓의 形式및 年代問題」 『史鼓』 9 高麗大學校史學會 1964.
b 多石室形 (1) 二石室 例 (2) 三石室 例 (3) 四石 室 例 여기서 임은 판상석으로 장방형의 석실형을 만든 것은 그것이 지 상이나 지하를 불문하고 모두 탁자형으로 분류한 점이 특이하다고 하겠다. (6) 황기덕의 분류 황은 한반도와 요동지방의 지석묘를 세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제 1 유형 _지상에 판석을 상자 모양으로 세우고 그 위에 큰 판석 한 장을 덮은 것으로 종래 탁자식 전형적 지석묘라고 부른 것. 제 2 유 형―묘곽 또는 묘관이 지하에 묻히고 그 위의 판석만 지상에 드러 난 것으로 변형식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한 개의 판석 밑에 한 개의 석관 • 석곽이 지하에 묻혀 있다. 제 3 유형―하나 또는 여러 개 의 판석 밑에 적석으로 된 묘역 안에 여러 개의 석관 또는 석곽이 묻힌 것 특히 그는 종래의 남방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황해남북도와 평안남도에서 제 1 유형보다 더 혼하다고 하면서 남방식이란 말은 맞 지 않는다고 강하게 지적하였다 .90) (7) 甲元眞之(코우모토마사유키)의 분류 甲元은 한반도의 지석묘를 우선 지역적으로 서조선 • 중조선 • 남 조선으로 구분하고, 각 지역의 지석묘 중 특징을 들어 型式을 이끌 어 내는 방법을 취하였댜 90) 황기덕 : 「무덤을 통하여 본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사회관계」 『고고민속』 1965- 4. pp8 -9.
서조선(西朝鮮)지역에서는 지석묘가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平 安南道 1介 川郡 墨房里, 平安南道 龍岡郡 後山里의 石泉山 • 黃海道 黃州郡 沈村里의 正方山 등지의 지석묘에서 擇石과 묘실과의 관계 • 묘실의 위치(레벨) • 묘실의 구조와 재료 등에서 묵방리형 • 석천 산형 • 침촌리 A 형 • 침촌리 B 형 • 침촌리 C 형의 다섯 가지로 분류하였 댜 묵방리형은 종래 남방식으로 칭하던 형식으로 제 1 류는 지하에 있는 묘실이 동서가 긴 형식이고, 제 2 류는 지상에 있는 묘실이 남북 으로 긴 형식을 말한다. 석천산형은 종래 탁자상으로 칭하던 형식으 로 묘실이 4 매의 판석으로 짜여진 형식을 말한다. 침촌리 A 형은 擇 石의 무게를 석관이 직접 받는 것. 침촌리 B 형은 석관의 장벽은 坡 石으로 단벽은 판석으로 축조한 것. 침촌리 C 형은 석관은 얇은 판석 으로 조립하고 이룰 보강하기 위하여 주위에 적석으로 석실형을 축 조한 것 이상과 같이 분류하고 다시 위의 탱석을 받는 技法으로 A 계열과 B 계열로 나누었다. 전자는 탱석의 무게를 석관의 측석이 받 는 것으로 침촌리 A 형 • 침촌리 B 형 • 석천산형이 속하고, 후자는 석관 의 측석 외부에 보강을 위한 적석이 탱석의 무게를 받는 것으로 침 촌리 C 형 • 묵방리형이 속한다고 하였다. 중조선(中朝鮮)지역에는 주로 석천산형이 많다. 남조선(南朝鮮)지역에는 침촌리 C 형 • 침촌리 B 형이 있고, 그리고 대구 大鳳洞형식이 있다고 하였다. 대봉동 지석묘의 형식에는 판석 으로 상형석관을 만들고 四周에 적석으로 보강한 것 (a 류)과 석관의 장변은 적석으로 하고 단벽은 판석으로 한 것 (b 류), 석관의 3 벽은 소판석으로 소구적하고 한 벽만 판석으로 한 것 (c 류), 석관 없이 사 주를 적석으로만 석실형울 만든 것 (d 류) 등의 형식으로 나누어진다. 여기서 a 류와 d 류는 대봉동 A 형, b 류와 c 류는 대봉동 B 형, 谷安里型으 로 묶었다. 또 탱석을 괴석으로 핀 종래의 기반형은 곡안리형으로 명명하였다. 결국 남조선에는 침촌리 B 형 • 침촌리 C 형 • 대봉동 A 형 • 대봉동 B 형 • 곡안리형 등 5 종이 있다고 하였다 .91)
(8) 金載元 • 尹武柄의 분류 金 • 尹 두 사람은 1962 년부터 1967 년까지 6 년에 걸쳐 지석묘가 밀집되어 있는 전국 13 개 지역에 소재한 지석묘를 발굴 조사하고 다음과 같은 형식 분류를 행하였다 . (1) 北方式지석묘 (2) 南方式 지석묘 A 無支石南方式 지석묘 B 有支石南方式(바둑판식) 지석묘 이상과 같이 분류하였으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 오류를 범하였다. 하나는 墓標式 지석묘 존재의 부인이다. 소위 묘표식 지 석묘는 대구의 대봉동에서만 발견되었는데, 한국의 지석묘는 모두 一蓋 石下 一石室이라는 원칙을 내세워서, 일개석하에 수기의 석실 이 있는 大鳳洞 지석묘는 지면 위의 개석이 파괴되어 없어진 것으 로 단정하였다. 또 하나는 개석하의 토광묘는 석실이 없어진 것이지 처음부터 토광이 지석묘의 하부구조가 아니라고 하였다 .92) 물론 이 두 가지의 오류는 1960 년 전반기 당시까지 우리나라 지석묘의 조사 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데서 오는 자료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9) 金元龍의 분류 金은 北方式 • 南方式 • 蓋石式의 3 종류로 분류하였는데. 특히 개 석식은 해방 후 북한지역에서 다수 발견된 지석이 없이 판석만이 놓인 형식으로 북방식이 변화하고 퇴보하여 생긴 것이기 때문에, 개 91) 甲元眞之 : 「朝鮮支石墓 m 編年」 『朝鮮學報』 第 66 輯 朝鮮學會 1973. 92) 앞에 든 며植 5 支石墓硏究』 p7,
석식으로 새로이 명명한다고 하였다 .93) (10) 任世權의 분류 任은 「韓半島 고인돌의 綜合的 檢討」에서 支石墓의 型式을 일차 적으로 墓室의 위치를 기준으로 하여 지상형과 지하형으로, 이차적 으로 지하형만을 대상으로 상석의 위치를 기준으로 하여 들린형과 놓인형으로, 삼차적으로는 묘실의 구조를 기준으로 하여 모두 12 종 으로 분류하였댜 묘실의 구조는 판석으로 된 것 A • B • C 형의 3 종 과 천석과 괴석으로 이루어진 석실을 D 형으로, 토광묘실은 E 형으로 하여 5 종을 두었댜 94) 묘실의 구조를 너무 세분한 것이나 일차에서 묘실의 위치룰 기준 으로 하고, 이차에서 상석을 기준으로 한 것은 순서가 바뀐 것으로 보인댜 왜냐하면 분류는 외형에서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 순 서이기 때문이다. 결국 삼차 분류롤 고려에서 뺀다면, 지상형=탁자 식 • 지하형들린형 =기반식 • 지하형놓인형 =무지석식(또는 변형식 개석식)과 같다고 할 수 있다. (11)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분류 1977 년 북한의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에서 간행한 『조선고고학개 요』에서는 앞에서 소개한 황기덕의 전형고안돌과 변형고인돌의 분 류가 고인돌의 구조형식과 선후관계를 명확하게 해 주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다시 분류하였다. 죽 전형고인돌은 오덕형고인돌로, 변 형고인돌은 침촌형고인돌로 제 1 차 분류하고. 다시 제 2 차 분류로 오 덕형은 2 개 유형. 침촌형은 3 개 유형으로 나누었다. 오덕형의 첫째 유형은 탁자형고인돌의 높이가 낮고 묘역표시가 93) 앞에 든 『한국의 고분』 pp5 5-56. 94) 任世權 : 「韓半島 고인돌의 綜合的 檢討」 『白 山學報』 20 白 山學會 1976.
아직 남아 있는데, 예로는 연탄군 중 원산 도동 금교동의 고안돌을 든댜 둘째 유형은 첫째 유형보다 높고 상석이나 지석도 대강 다듬 은 돌을 사용하였으며, 특히 지석의 하부에는 기초 홈을 만들어 지 석을 견고하게 조치한 시설도 있다. 예로는 오덕리 IO 호 고인돌을 든댜 침촌형의 첫째 유형은 한 묘역 안에 5~6 기의 석곽과 석관이 섞 여 있고, 상석의 하부에 있는 석관은 얇은 개석을 갖고 있다 . 침촌 리 긴동 고인돌 • 사리원 광석리 5 호 고인돌을 예로 든다. 둘째 유형 은 석관의 장변은 두꺼운 판석으로 단변은 얇은 판석으로 세운 것 을 말한댜 예로 침촌리 천진동 고인돌떼를 든다. 셋째 유형은 한 묘역 안에 수기의 고인돌이 있지만 모두 두꺼운 판석으로 네 벽을 조립한 것을 말한댜 95) (12) 沈奉證의 분류 沈은 한국의 지석묘를 우선 크게 A. 卓子式 지석묘― I. 無補石 型 11. 有 補石型 B. 蓋 石式 지석묘一 I. 無蓋石型 11. 有蓋石型, C. 基 盤式 지석묘 -I. 有 蓋 石型 II. 無蓋石型의 3 종류로 분류하고, 다 음 2 차는 각각 2 종류로 분류하고, 3 차는 석관 • 석곽 • 토광 또는 옹 관을 더하여 4 종류로 세분하였다. 특히 沈은 여기서 개석식 지석묘 는 엄밀한 의미에서 지석묘라고 말할 수 없으나, 원류 • 동반문화 요 소 • 생성시기 등이 지석묘와 직접 관련해서 성립된 형식이기 때문 에 지석묘의 범주에 넣는다고 하였다 .96) 이상은 1910 년대 처음으로 한반도의 지석묘를 조사 연구하기 시 95)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 『조선고고학개요』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7. pp8 1- 83. 96) 沈 奉護 : 「 靑銅 器時代 墓 制 I (支石 墓 )」 『 韓國 史 論 』 13. 韓國 의考古 學 II • 上鼻 국사편찬위원회 1984. ppl 97-222.
작한 이래 최근까지 실행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하여 IO 여 명의 연 구자들이 지석묘의 형식을 분류한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한 것이다. 이상을 요약해 보면, 북방식 • 남방식과 탁자식 • 기반식으로 먼저 분류되었으며, 그 다음 지석이 없이 상석이 바로 지면에 접한 형태 에 주목하여 변형식 또는 개석식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앞에서 말 한 북방식 • 남방식. 탁자식 • 기반식과 함께 3 종류로 분류해 온 것이 큰 골격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차츰 조사가 확대되어 새로운 형태 의 형식이 나타남에 따라 그것에 적합한 세분류를 더한 분류방식도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학계에 제출되었다. (13) 諸見解에 대한 批判 위에 열거한 여러 분류에 대하여 팔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북방식 • 남방식 등 지역 분류는, 북방식이라는 형식이 한강 유역 에서도 다수 발견되고 남부지방에서도 소수이기는 하나 분포되고 있으며, 특히 남방식이라는 형식이 평안남도에서는 오히려 북방식보 다 많이 분포 97) 되어 있기 때문에 이미 지역적 의미는 상실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지석묘의 외형으로 분류하는 卓子式 • 基盤式 이라는 분류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다만 변형식 또는 개석식이라 는 형식은 엄밀한 의미에서 지석묘가 아니기 때문에 이 기회에 새 로 독립시켜 별개의 묘제로 분류하는 방식이 타당하다고 생각된 다 .98) 필자의 시도를 밝히기 전에 여러 형식분류 중 필자의 견해와 가 장 가깝게 탁자식과 기반식으로 분류한 임병태의 분류와 심봉근의 분류에 대하여 잠시 검토하기로 한다. 먼저 임병태는 제 1 차 분류에서 탁자식과 기반식 이외에 북한에서 97) 앞에 든 「무덤을 통하여 본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사회관계」. 98) 앞에 든 孫晋泰의 논문과 沈奉護의 논문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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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형식이라 하고 金元龍 이 개석식이라고 한 형식을 무지석식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제 2 차 분류에서는 매장주체시설의 지상과 지하를 구 분하고 그것과 함께 단석실 • 다석실을 분류기준으로 삼았다. 그래 서 탁자식에도 지하석실이 들어 있으며. 변형석실도 들어가 있다 . 기반식에서는 지하석실과 지하토광만을 포함시켰다. 여기서 수용할 수 없는 점은 매장주체시설을 모두 석실로만 파악한 점과 탁자식에 서도 지하석실을 인정한 점 등이다. 다음 심봉근의 분류에서도 제 1 차 분류에는 탁자식 다음에 개석식 울 넣고 최종으로 기반식을 배열하였다. 북한에서는 변형식, 임병태 의 무지석식 대신에 金元龍의 개석식을 수용하고 있다. 제 2 차 분류 에서는 매장주체시설보다 앞서 그 주변에 부가한 시설인 보석의 유 무 또는 개석의 유무를 기준으로 하고, 제 3 차 분류에서 매장주체시 설의 형태를 기준으로 하였다. 지석묘에서의 중요도라던가 축조 순 서상으로 볼 때 보석이라던가 개석은 부차적이거나 보다 덜 중요한 것이다. 보석은 일정한 규칙으로서 형식이 있다기보다는 지석묘가 소재한 지반이 약하거나 매장주체시설이 얇은 판석으로 되어 보강 이 꼭 필요한 경우에 시설하는 不定的인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분류의 기준으로는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형식분류라는 것 은 조사나 연구과정 중 번다한 용어를 피하고 특징을 추출하여 유 형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어는 가능한 명확하고 간결한 편이 사용 하기에 편리하다. 형식분류를 너무 세밀하게 하면 오히려 번다하여 형식에 적용시키기 어렵다. 따라서 여기서 새로이 시도하는 필자의 분류는 앞에서 지적한 임병태와 심봉근의 상이점을 수정 보완하는 측면에서 되도록이면 간단 명료하게 제 2 차 분류까지만으로 구성하 였댜. 필자는 제 1 차 분류에서는 외형을 기준으로 하여 탁자식과 기반식 으로 분류하고, 제 2 차 분류에서는 . 매장주체시설의 형태를 기준으로 하여 각 식에 석실형 • 석관형 • 석곽형 • 토광형 등 4 종을 합하여 분
류하고자 한다. 이것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l 탁자식 a 석 실 형 •• • .. • 1 식 a 형 b 석관형 …… 1 식 b 형 2 기반식 b 석관형 …… 2 식 b 형 c 석곽형 …… 2 식 C 형 d 토광형 …… 2 식 d 형 1 식 a 형은 판석을 직립시켜 사면벽을 조립한 매장주체부가 지면 위에 있고, 대형 판상석으로 된 상석이 석실의 개석 역할을 하는 일 반적인 탁자식 중에서 강화 부근리의 지석묘라던가 황해도 은율군 운화리의 지석묘처럼 석실의 규모가 큰 것을 여기에 넣었다. 1 식 b 형은 탁자식 지석묘 중 사면 벽석은 소형 판상석으로 조립한 상자 형의 매장주체시설의 규모가 석실보다 작은 것으로, 파주 옥석리 지 석묘군이 여기에 속한다. 2 식 b 형은 괴석 수개를 지면 위에 놓고 그 위에 대형 괴석을 상석으로 한 기반식 중 매장주체시설이 판상석으 로 조립된 상자형의 석관이 여기에 속한다. 2 식 C 형은 기반식 중 매 장주체시설을 괴석을 사용하여 석곽으로 축조한 형식을 포함시킨다. 2 식 d 형은 기반식 중 매장주체시설이 토광으로 된 형식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기반식 중 매장주체시설을 옹관으로 한 형식은 한반 도보다는 일본 구주지방에 많은데. 굳이 분류 속에 포함시킨다면 2 식 e 형이 될 것이다. 지석묘의 구조를 사례별로 살펴보기로 한다. 1 식 a 형에 속하는 지석묘는 강화 부근리 • 은율 운화리 • 용강 후 산리 석천산 • 연탄 오덕리 • 춘천 천전리 등지의 지석묘들로 규모도 크고 확실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강화 부근리의 지석묘 99) 는 남한지역에서는 최대형에 속하는 것 99) 앞에 든 『滿鮮原始壇墓(I)硏究』 pp3 8-39 表 .
으로 유명하다. 산기슭 대지 위에 장축을 동서로 취하였는데 . 거대 한 판석 2 매(두께 1 척)를 나란하게 수직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길이 21 척, 너비 17 척 , 평균 두께 3 척의 암반이 상석으로 올려져 있으며. 석실의 양 단벽의 판석은 결손되어 보이지 않는다. 양측벽의 길이 14 척, 너비 4 척이다. 이로써 본래의 석실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황해북도 연탄군 오덕리의 지석묘 100) 는 전형적인 탁자형으로 좁 은 계곡 안에 100 여 기의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다. 가장 규모가 큰 오덕리 10 호 지석묘는 상석의 지름이 4.4m 나 되는 둥그스름한 돌이 며, 석실의 규모는 길이 1.95 m, 너비 1.8m , 높이 2.5m 이다. 이 지석 묘는 오덕형 2 유형에 속하는 것이지만, 1 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오덕 리 석장골 2 지점 2 호 지석묘는 상석의 길이 4.4 m , 너비 2~4m, 두께 40cm 인데, 상석은 장방형으로 다듬었다. 석실은 규모가 작아서 석관 과 비슷한데, 지석의 두께는 30cm 이다. 1 유형의 기초는 땅을 깊이 파고 돌과 흙을 섞어 다졌으며, 오덕리 10 호의 경우는 땅 속에 시설 한 기초의 깊이가 1. 05m 나 되어 아주 견고하였다. 춘천 천전리 지석묘는 소양강의 북안에 퇴적한 砂質土段丘 위 70~80m 범위 안에 10 여 기의 지석묘와 적석총이 江水流向과 나란 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 지점 외에도 하류로 내려가면서 다수의 지 석묘가 분포되어 있다. 1966~1967 년에 발굴 조사한 1 호와 2 호는 탁 자식 지석묘이다. 1 호의 경우 상석이 길이 2.6 m , 너비 2.2m, 두께 45cm 이고, 주변에 적석층이 8mX6.5 m 넓이의 타원형으로 형성되었 으며, 지석은 장변 1 개와 단변 1 개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15 년 조사시에는 주변에 적석도 없었고 지석도 4 매가 완전하게 남아 있 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적석충은 아마도 6.2 5 전쟁시 형성되었는지 도 모른다 . 그리고 지석의 하부에는 괴석 2 개가 지석의 기초석으로 깔려 있었다고 한다 . 앞에서 본 오덕리의 지석묘처럼 일정한 기초부 100) 앞에 든 『조선고고학개요』 pp8 2-83.
분을 구축하고 그 위에 지석과 상석을 올리는 방식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지반이 퇴적사질토층으로 약하기 때문에 더욱 필요한 조치였을 것이다. 매장시설은 길이 1.2m. 너비 60cm, 높이 85cm 의 소형 석실이댜 2 호 지석묘도 앞의 1 호와 외관과 구조가 비슷하였으 나, 석실의 내부 크기는 동서 70cm, 남북 75cm 의 정방형에 가까운 형태였고. 이와 같은 유형의 석실은 한반도 지석묘의 매장시설로서 는 극히 보기 드문 형상이다. 그리고 주변의 적석층도 1 호와는 달리 2 호의 적석층은 원래부터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길이 7.8cm, 너 비 5.8cm, 높이는 지표에서 50~60cm 였으나. 당초에는 積 石壇丘였 울 것으로 조사자는 추측하고 있다 ...l 0 l) 1 식 b 형에 속하는 지석묘는 파주 옥석리의 지석묘군 102) 이 좋은 예로 꼽힌다. 이 곳의 지석묘는 20 여기가 확인되었는데, 표고 80~100m 의 비교적 높은 구릉에 2~3 기씩 분포되어 있다. 형식은 전부가 탁자식 지석묘이고. 규모가 작은 것들이다. 1965 년에 6 기의 지석묘를 · 발굴 조사하여. 탁자식 지석묘의 여러 자료를 얻을 수 있 었고, 특기할 만한 것은 A 호 지석묘와 B-1 호 지석묘의 바로 밑에서 뿜穴住居址가 발견된 점이댜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간단히 설명하 기로 한댜 A 호 지석묘의 상석은 lmX87cmX35cm 이고, 석관의 크 가는 50cmX35cm 로서 상석과 석관 모두 아주 소형이댜 이 지석묘 에서는 즐문토기편들이 몇 개 나왔는데, 그것은 밑에서 발견된 수혈 주거와 관계있는 것이었다. 수혈주거는 한벽의 길이가 5 .4 m의 가자 형인데, 깊이는 노쇠한 암반층에서 20~40cm 였다. 이 속에서 즐문 토기편 150 여 편과 삼각형석촉 1 개가 출토되었다. B-1 호 지석묘는 B 지역에는 10 여 기의 지석묘들이 분포되어 있었으나 그 중 B-1 호가 가장 규모가 컸으며, 능선상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능선과 같 101 ) 앞에 든 먀籠갭支石墓硏究』 pp7 9-86. 102) 앞에 든 먀韋國支石墓硏究』 pp2 3-48.
은 방향으로 장축을 두고 있었다. 상석의 크기는 3.3 m x I.9m X0 .4 m 이고. 석관은 1. 4mX0 . 6m 이다. 속에서 길이 7.3cm 의 편평단인석부 l 개가 출토되었다. 여기서 지석은 보강재로 괴석 수개씩을 받쳐 놓았 다. B-1 호 지석묘의 밑에서 발견된 수혈주거는 동서 15.7m, 남북 3.7m 의 장방형으로 깊이는 90cm 였다. 바닥은 진흙을 얇게 바르고 불에 태웠다 . 벽으로 돌아가면서 소형의 기둥구멍들이 줄지어 있었 으며. 동편에서 지름 60cm 의 타원형구덩이식 노지 2 개가 확인되었 고. 서편에서는 지석묘의 부재가 놓여 있기 때문에 찾지 못하였다 . 이 곳에서는 무문토기편 이단병식에 이조의 혈구가 있는 현존길이 16.8cm 의 마제석검 1 개. 마제석촉 22 개. 석제방추차 2 개. 마제석부 2 개. 지석 9 개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곳에서 발견된 목탄편 을 탄소 측정한 결과 2590 土 105 B.P. 라는 연대가 나왔다. 2 식 b 형에 속하는 지석묘는 全南 羅州郡 南平面 蘆洞里의 지석묘 에서 볼 수 있다. 남평읍에서 화천으로 통하는 도로의 좌측 산기슭 에 약 30 기의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다. 1926 년에 조사한 1 기는 12 척 정도 크기의 상석 아래 3 개의 지석이 있고. 그 아래는 판상석으로 조립한 箱形석관이 있었다 . 그 크기는 6 척 8 촌, 폭 5 척 5 촌이었고, 유물로는 석관의 바닥에서 무문토기편(필자 추측)이 출토되었 다 .103) 또 위의 전형적인 2 식 b 형에서 지석으로 괴석 대신에 판상석을 사용한 특수한 예가 있다. 그것은 충청북도 제천시 황석리의 충 6 호 • 충 7 호 지석묘 104) 이댜 황석리의 지석묘들은 남한강의 흐름과 나란하게 퇴적대지상에 분포되어 있다. 충 6 호 지석묘는 지상에 상석 103) 梅原末治 : 「日鮮滿史前末期!J)墓制 ]1 과荀 L` t」 『東亞考古學論政』 第一 星野 書 店 1944. pp3 09-310. 沈 奉i 隨은 앞에 든 논문 p22 0 에서 有 蓋 石形 支石墓의 예로 인용하고 있다. 104) 이융조 : 「堤原黃石里 B 地區遺蹟發堀調査報告」 『忠州댐水沒地區文化遺蹟發堀調 査綜合報告 書 』 考古 • 古壇分野 1 忠北大學校博物館 1984. pp3 94-442.
만이 접지하여 놓여 있고 괴석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하에 7~8 개의 판상석을 세워서 1.9 5mx 1. 3mX40~50cm 의 범위를 만들 고. 그 안에 다시 1.95mX60cmX30cm 의 석관을 조립하였댜 여기서 바깥 범위를 구성한 직립 판상석들이 지석으로 보이며, 이것이 괴석 이 아닌 이유는 이 일대에는 괴석은 귀하고 대신에 판상석을 구하 기 쉬웠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바로 옆에 있는 충 7 호 지석묘에 서는 판석의 개석도 석관 위에 덮여 있었고, 완전한 인골도 출토되 었는데, 1962 년 조사한 13 호 지석묘에 이어서 두 번째 인골 출토묘 이다. 2 식 C 형은 고창 상감리의 B 호 지석묘 105) 를 들 수 있다. 이 곳의 지석묘는 대군집을 이루고 있는데, 표고 180m 의 산기슭 상갑리에서 매산리에 이르는 1. 5km 의 범위 안에 약 100 기의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다. 그 중 상갑리 B 호는 상석의 크기가 2.lmX1.8mX65cm 인데, 그 아래는 4 개의 괴석으로 핀 전형적인 기반식이다. 지석 아래에는 괴석으로 축조한 1. 5mx40cmx35cm 의 석곽이 있었으며, 석곽의 바 닥과 벽체의 하부는 괴석으로 기초를 만들었다. 석곽의 개석은 시체 의 머리부분이 놓인 것으로 보이는 동쪽에만 판석을 덮고 나머지 석곽의 상면은 목개를 덮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 식 d 형은 상석 아래 괴석으로 된 지석이 있고, 지석 아래 토광 이 있는 형식이다. 全南 昇州郡 송광면 우산리 내우부락에 분포되어 있는 소형 지석묘군 106) 에서 여러 예를 발견할 수 있다. 10 호는 l.1 8mX l.1 2mX71cm 의 상석 아래에 6 개의 괴석으로 된 지석이 떠받 치고 있고, 그 지석 아래에는 원형에 가까운 형태의 토광이 있었는 데, 크기는 장축 65cm, 너비 62cm, 깊이 12~14cm 이다. 그 바로 옆 에서 발견된 10-1 호 지석묘에서도 거의 같은 규모와 형태를 가진 105) 앞에 든 갸韋國支石墓硏究』 ppl 44-146. 106) 崔盛洛 • 高龍圭 • 安裁澈 : 『승주 우산리 고인돌』 목포大學校博物館 • 전라남 도 1993. pp8 0-83.
구조가 발견되었다 . 10 호의 내부에서는 석촉과 무문토기편이 출토 되었다. 2.2 .4 葬法 지석묘는 거대한 암반을 사용하여 어마어마하게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하부의 매장주체시설 규모는 대체로 소형이다. 형식분류에서 l 식 a 형에 해당하는 탁자식에서 석실이 있고, 2 식 b 형의 석관이 있긴 하지만 그 수량은 매우 적은 편이다 . 대부분의 지석묘 매장주체시설 은 석관 • 석곽 • 토광 • 옹관 등으로 이루어져 다른 종류의 무덤에 비하여 작은 편이다. 매장주체시설이 작다는 것은 바로 시체를 매장 하는 장법이 다르다는 뜻인데, 그것은 매장주체시설의 규모가 장법 에 맞게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장법에는 극소수의 仰臥伸展葬과 屈身葬이 있을 뿐이다. 장법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근거는 두말할 것도 없이 남아 있는 유골과 그 혼적이다 . 앙와신전장의 예는 제천 황석리의 13 호 • 충 6 호 • 충 7 호에서 볼 수 있다. 13 호 지석묘에서는 작은 판석을 세워서 동서길이 1.8 5m, 남북 너비 60cm, 깊이 30cm 의 석관이 있었는데, 그 안에서 신장 1. 74m 의 유골이 거의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얼굴은 남향하고, 양팔은 팔꿈치에서 굴절하였는데, 왼팔은 가슴에 오른팔은 직각으로 하여 배 위를 횡단하게 하였댜 107) 또 충 6 호 지석묘에서는 1. 95m 의 석관 안에 인골이 불완전하게 부분적으로 남아 있었는데, 왼쪽 아래턱 뼈 • 이빨 • 위팔뼈 • 정강이뼈 등이 신전장한 상태의 위치에서 발견 되었댜 충 7 호 지석묘에서는 석관의 길이가 1.70 m 이상으로 보이는 데, 그 안에 신전장한 20 대 후반 ~30 대 초반의 인골이 거의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었고, 가슴부위에서 소형곡옥 1 개와 관옥 1 개도 함께 발견되 었댜 108) 지석묘에서 인골이 발견되는 일은 대단히 희귀한 107) 앞에 든 먀籠갭支石墓硏究』 p10 9. 108) 앞에 든 『忠州댐水沒地區文化遺蹟發堀調査 綜合報告 書 』 p39 3.
편이고, 이처럼 황석리에서만 3 구의 인골이 발견된 것은 특기할 만 하다고 하겠다. 이 지역은 지질학적으로 조선계의 대석회암통 지역 으로 알칼리성 때문에 뼈가 썩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 다. 이것의 예로 보아 매장주체시설이 人 身大 정도의 크기이면 모두 신전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굴신장의 예는 대구 진천동 지석묘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일대는 지석묘가 밀집 분포되어 있는 평지인데, 그 중 상석이 여러 해 전에 없어진 3 호 석관의 B 관에서 필자가 직접 조사한 자료이다. 석관은 片岩板石으로 조립한 複式 석관으로 관의 폭이 좁은 A 관은 서쪽에, 관의 폭이 좀더 넓은 B 관은 동쪽에 배치하였다. 굴신장한 인골의 혼적은 B 관에서 발견되었는데 , 관의 크기를 잠깐 설명하면 다움과 같다. B 관의 길이 l.lm, 폭 47cm, 깊이 40cm 이고, A 관의 크기는 길 이 1.16 m, 폭 22cm, 깊이 31cm 이댜 조립방법은 A 관의 서변 • A 관과 B 관의 남변 • B 관의 동변 • A 관과 B 관의 북변을 1~3 매의 판석으로 직립시키고, 중간에 좀더 길고 두꺼운 판석 1 매를 세워 간벽으로 하 여 A 관과 B 관을 나누었다. 인골은 거의 다 부식되어 상체부는 별로 남아 있지 않았는데, 대퇴골 2 개, 하지 2 개, 치아 11 개분과 두개골의 부식된 가루가 원형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골울 대퇴골과 겹치도록 나란하게 구부렸는데, 두개골부터 하지골까지를 伸展하면 신장은 1.5 ~1 .6 m 가량 된댜 치아의 마모상태로 보아 인골은 20 여 세의 여 자로 판정된다. A 관의 길이는 B 관과 큰 차이는 없으나 폭은 B 관의 반도 안 되는 22cm 밖에 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도 乳兒나 幼兒 일 것으로 판단되고, 전염병 등에 의해 동시에 사망하여 여기에 묻 힌 것으로 보인다 .109) 초점은 B 관의 길이 1.lm , 폭 47cm 라는 규모 에 모아지는데, 짧은 길이에 비해 폭이 넓은 것을 보면 처음부터 굴 신장하기 위하여 석관의 길이와 폭을 조정한 것으로 보인다. 109) 姜 仁求 : 「達城辰泉洞의 支石 墓 」 먀 韋 國史硏究』 28 韓 國史硏究 會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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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동 지석묘와 같은 예는 황해도 황주군 긴동의 지석묘에서도 발견되었다 . 긴동의 지석묘군은 정방산의 서북록에서 1 기의 탁자식 과 7 기의 변형식 지석묘가 1958 년 발굴 조사되었는데. 그 중 5 호 지 석묘에서 인골이 발견되었다. 편암으로 조립한 석관의 크기는 길이 1.0 ~1 .lm , 너비 약 50cm 인데. 팔과 다리뼈가 무질서하게 놓여 있었 다고 한다. 인골이 놓인 상태로 굴신장인지의 여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석관의 길이가 l.l m 이고 너비가 50cm 인 점으로 미루어 굴신장한 것이 틀림없다 .110) 굴신장한 인골의 길이는 두개골 끝에서 하지골을 구부려서 나타 나는 무릎 부분까지의 길이에 해당하는데, 보통 성인의 경우 80~150cm 정도 될 것으로 보이고, 석관의 길이가 80cm 이상, 1.5m 미만이면 굴신장으로 추정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 다. 그러면 길이가 40~60cm 인 매장시설을 갖춘 지석묘의 장법은 어떤 것일까? 이 정도 크기의 매장시설도 상당수 존재하는데, 굴신 장하기에는 길이가 너무 짧다. 여기서 필자는 洗骨葬, 再葬 등을 생 각한다. 세골장 등의 인골 혼적은 한반도에서 아직 발견된 예는 없 다. 그러나 충분히 그 존재는 추정할 수 있다. 지석묘의 매장시설의 규모와 장법에 관하여 좀더 살펴보기로 하 자. 황해도 연탄군 오덕리에서 1971 년에 조사된 탁자식 지석묘에서 는 지상의 석실을 판석으로 칸막이하여 여러 개의 소형 석관을 만 들었다. 즉 송신동 31 호 • 20 호 • 22 호의 지석묘가 그것인데. 가장 큰 22 호는 길이 1.6m , 너비 lm 의 석실을 중간에 2 매의 판석을 세워 40cmX50cm, 37cmX50cm, 83cmX50cm 의 소형 석관을 만들었다. 이 정도의 석관으로는 굴신장도 어려워 보인다 .lll) 그래서 여기서 가 능한 장법은 이차장법의 하나인 시체를 가매장하거나 풍장하여 육 110) 황기덕 : 「황해북도 황주군 긴동 고인돌 發堀報告(1)」 『문화유산』 1961-3. 111 ) 석광준 : 「오덕리고인돌 發堀報告」 『考古學자료집』 제 4 집 1974.
탈된 후 取骨하여 다시 매장하는 장법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 댜 31 호에서는 너비 50~60cm 의 소형 석관을 4 개 만들었으며. 20 호 에서는 석관의 너비 35cm, 40cm, 60cm 의 소형 석관 3 개를 만들었댜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22 호는 이차장용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지 만. 31 호와 20 호는 굴신장 또는 신전장도 가능하다 . 이상에서 보아 온 예들에서 우리는 지석묘의 경우 신전장은 극히 드물고. 대부분의 지석묘들은 굴신장이거나 이차장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본다면 청동기시대의 장법의 주류는 이차장과 굴신장이라고 할수 있다. 2.2.5 副葬遺物 무덤으로서는 특이하게 어마어마하게 큰 돌로 형성된 外觀과는 달리 지석묘 내부에 부장된 유물은 한반도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무 덤 중에서는 가장 적고 빈약하다. 대체로 마제석기 몇 개와 무문토 기편과 간혹 홍도가 발견되기도 하나 그 수량은 적은 편이며, 특히 청동기, 철기 등 금속제품은 지극히 드문 편으로 이것은 지석묘의 한 특징으로 되어 있다 .112) 부장유물의 수준과 수량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마제석기 중에는 마제석검 • 마제석촉 • 반월형석도 • 마제석부 등 의 여러 종류가 있으나 가장 대표적인 유물은 마제석검과 마제석촉 이고, 그 외의 반월형석도 석부는 수량이 적다. 대개는 마제석검 l 개와 석촉 수개가 한 세트로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경우에 따라서 는 석촉 수개만이 발견되기도 한다. 무문토기는 완형이 발견되는 경우는 극히 드문 편이고 대개는 파 편 몇 조각만이 발견된다. 그리고 매장주체시설의 내부에서보다 그 주변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의식용이라고 보고 있다. 紅 112) 앞에 든 E 輔갭支石墓硏究』 p13 .
陶도 드물기는 하지만. 같은 시대의 석곽묘나 석관묘에 비해서 지석 묘에서 많은 편이댜 113) 그리고 주거지 등 생활유적에서는 잘 나오 지 않고 있기 때문에 홍도를 특히 매장의례용 토기라고 일컫기도 한다. 청동기의 발견 예는 극히 드문 편으로 지금까지 2~3 개의 예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의 지석묘에 서는 판석으로 조립한 석실에서 마제석검 4 개, 마제석촉 15 개와 함 께 하부만 남아 있는 비파형동검편이 발견되었다. 여기는 30 여 기의 지석묘가 군집되어 있는 지역인데 대부분 석곽이고 석관형은 잘 보 이지 않아서 이것이 지석묘의 하부구조인지 확언할 수 없으나 일단 지석묘로 간주하였다 .114)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의 1 호 지 석묘는 매장주체시설이 토광으로 되어 있는데, 그 속에서 다른 공반 유물 없이 세형동검 1 개만이 발견되었다 .115) 경상남도 의창군 진동 리에서도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일이 있다 .116) 또 최근에는 전라남 도 지방에서 다수 출토되고 있는데. 승주군 우산리 내우 지석묘 117) • 보성군 덕치리 118) • 여수시 오림동 119) • 여수시 봉계동 120) 과 평여동 나군 2 호 지석묘 121) 등지에서 1 개씩의 청동검이 나온 일이 113) 이상 支石墓에서 발견되는 유물에 관해서는 앞에 든 먀 韋國支 石墓~ 를 참 고로 하였다 . 114) 有光敎一 : 「朝鮮 磨製 石 n lJ (1)硏究」 『有光敎一 著 作 集 』 第一卷 1990. p18 2. 115) 秦弘燮 • 崔淑卿 : 「楊平郡上紫浦里支石墓發堀報告」 『八堂昭陽댐 水沒地區遺 蹟發堀綜合調査報告』 文化公報部文化財 管 理局 1974. p48 . 116) 沈 奉証 : 「鹿南地方出土 靑銅遺物의 新例」 『釜山史學』 4. 1980. 117) 宋正炫 • 李榮文 : 「牛山里 내우支石 墓 」 『住岩댐水沒地 域 文化遺蹟發堀調査報 告왑』 (II) 全南大學校博物館 • 全羅南道 1986. 118) 尹德香 : 「德時里 신기支石墓」 앞에 든 『住岩댐水沒地域文化遺蹟發堀調査報告 書 』 (m) 119) 李榮文 • 鄭基鎭 : 『麗水 五林洞支石墓』 全南大 學校博 物館 • 麗水市 1992. 120) 李榮文 : 『麗川市鳳溪洞支石墓』 全南大學校博物館 • OO JII 市 1990. 121) 李榮文 외 : 『麗 )II 平呂洞 산본支石墓』 全南大學校博物館 • 麗 )1| 市 1993.
있고. 또 같은 여천군의 적량동 상적의 지석묘군에서 다수의 청동기 가 출토되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적량동 상적의 2 호 석곽에서 비 파형동검, 동모 각 1 개, 그리고 주변의 석실에서 비파형동검 1 개씩 모두 7 개를 합하여 8 개의 청동기가 출토되었다. 하나의 지석묘군에 서 여기와 같이 많은 청동기. 그것도 연대가 올라가는 비파형청동검 이 발견된 예는 처음으로 특기할 만하다 .122) 이들 청동검류가 출토된 지석묘는 대개 기반식으로 매장시설은 대부분 석곽이었다. 이 점은 같은 기반식이면서 석관과 토광으로 이 루어진 형식이나 탁자식과는 큰 차이가 있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 다. 이것을 청동기시대의 석곽묘에서 다른 구조형식보다 청동기가 다수 출토되는 점과 서로 비교하면 홍미가 있다. 지석묘의 부장유물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매장시설에 유물 을 전혀 부장하지 않은 지석묘가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극히 일부 지석묘에 청동기가 부장되는 예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 장유물을 갖춘 지석묘는 1 개의 마제석검과 수개의 마제석촉 그리고 무문토기편과 간혹 홍도 등이 거의 定型化되다시피 부장된 것과 비 교하면, 부장유물을 하나도 넣지 않은 지석묘는 확실히 특이하며 그 것도 의외로 많다는 점은 검토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된다. 2.2.6 編年 지석묘의 상한연대와 하한연대에 관해서는 학설이 다양하다. 크 게는 신석기시대설과 청동기시대설로 갈라진다. 한반도의 지석묘가 신석기시대에 축조되기 시작하였다고 보는 학 설은 소수에 지나지 않다. 朴喜顯은 그의 「한국의 고인돌문화에 대 한 한 고찰―그 상한연대를 중심으로」에서 양평 양수리 고인돌· 양평 앙덕리 고인돌 • 옥천 석탄리 안터 고인돌 등의 구조형식과 출 122) 李榮文 • 鄭基鎭 『麗川積良洞 상적支石墓』 全南大學校博物館 • 麗川市 1993.
토유물을 고찰하여 이들을 중기 신석기시대에 축조된 고인돌로 조 심스럽게 추정한 바 있댜 123 ) 여기서 그는 고인돌 그 자체만을 고 찰한 것이 아니라 고인돌 사회와 농경문제. 고인돌 사회와 계급문제 등 당시의 사회문제를 동시에 추구함으로써 고인돌이 신석기시대의 문화전통을 많이 갖고 있음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론적 발전에 기여한 바도 없지 않으나 앞에서 든 구체적인 고인 돌의 신석기적 요소가 아직은 부족하므로, 앞으로 더 많은 자료를 기다려 신중히 결론을 이끌어 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 외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중요한 묘제 임에 틀림없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같은 청동기시대로 보고 있어도 구체적인 연대관은 각양각색으로 나타나 있다. 중요한 몇 가지 견해 를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韓國支石墓硏究』의 견해를 보기로 하자. 저자인 金載 元과 尹武柄은 파주 옥석리와 제천 황석리에서 출토된 인골 등 자 료를 카본 데이팅하여 얻은 BC 7C 와 BC 5~4C 를 근거로 하여 북 방식 지석묘는 늦어도 BC 8C에, 남방식은 기원전 7C 에는 축조되었 다고 주장하였다 .124) 두 번째로 평양의 『조선고고학개요』의 견해를 소개한다. 구체 적인 필자가 밝혀져 있지 않은 공동의 견해로서 평양의 통설인 것 으로 짐작된댜 여기서는 오덕리의 전형고인돌과 침촌리의 변형고 인돌의 연대를 BC 2000 년 후반기, 즉 BC lOC 이전에 이미 유행하 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침촌리에는 팽이형토기 • 뿌리나래활 촉 • 돌단검 • 돌도끼 • 턱자귀 • 대롱구슬 등이 있고, 오덕리에는 돌 도끼 • 단검 • 활촉 • 대패날 • 청동활촉 등이 있다고 하였다. 이들 유 물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요소가 많이 없어지기는 하였으나 아직 조 123) 朴喜顯 : 「한국의 고인돌 문화에 대한 한 고찰 -그 상한연대를 중심으로-」 瓚國史硏究』 46. 韓國史硏究會 1984. 124) 앞에 든 먀韋國支石墓硏究』 pl9 .
그림 14 江 華 富近里 支石墓
그립 15 江華 富 近里 支石墓 側面
그림 16 坡州 德隱里 支石墓
그림 17 海南 雲 田里 支石墓群
그립 18 堤JI I 黃石里 支石墓
그림 19 大邱 大鳳洞 支石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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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남아 있고, 같은 시기의 집터에서도 나오고 있어서 이른 시기의 지석묘의 연대를 추정하는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125) 세 번째로는 일본의 甲元眞之의 연대관을 소개한다. 그는 「朝鮮 支石墓(1)編年」에서 서북지방의 지석묘 중 오래 된 형식인 침촌리 A 형은 금탄리 유적에서 나온 有莖式 石劍과 요녕식 동검의 연대 그 리고 팽이형토기의 연대 등을 고려하여 BC 5C 로 편년하였다 . 남부 지방의 지석묘에 대하여는 침촌리 B 형은 천안 두정리의 마제석검과 같은 형식으로 BC 4C 로 비정하고, 침촌리 C 형인 황석리 지석묘는 無二段柄式 石劍과 초현단계의 단도마연토기 등에서 BC 3C 로 , 또 대구 대봉동 지석묘는 BC 3~2C 로 편년한 바 있다 .126) 네 번째로 소개할 연대관은 가장 최근의 것으로 李榮文의 견해이 125) 앞에 든 『조선고고학개요』 pp 81 一 83 . 126) 앞에 든 「 朝鮮支石墓{/) 編年 」 pp3 0- 31 .
댜 그는 특히 전라남도 지방의 지석묘의 연대에 관한 견해를 제시 한 바 있는데, 승주와 고홍의 지석묘에서 출토된 청동단검을 근거로 상한연대를 BC 8~7C 로 추정하였다 . 127) 평양학계의 BC lOC 이전은 남한지역에서의 대체적인 연대인 BC 8C 보다 훨씬 앞서는 연대인데, 이것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지석 묘의 발생이 석관묘에서 파생되었다고 보고, 석관묘의 원류는 赤峰 등지의 석관묘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입장에서 일단은 수긍할 수 있다. 이상은 上限年代觀울 소개한 것이고, 하한연대는 대략 BC 3C, BC 2C, BC IC 등으로 추정하고 있다. 상한연대와 마찬가지로 하한 연대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이것은 새로운 문화와의 접촉과 수용과정에서 일어나며 전체적으로는 사회발전단계에 기인한다. 하 한은 지석묘의 쇠퇴, 소멸시기임으로 상한연대 즉 발생보다는 덜 중 요한 문제라고 하겠다. 2.2.7 支石墓의 起源問題 한반도의 지석묘는 어디서 왔는가? 즉 기원문제는 아주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이다. 이에 관해서는 몇 가지의 학설이 나와 있다. 그 중 한반도 자생설과 석관묘 파생설이 중요하다. 후자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지하의 석관묘가 지상화하여 지석묘가 되었다는 金元龍의 설이고 ,128) 또 하나는 최근에 제출된 견해로 요 녕지방에 있는 대석개묘 • 석개석관묘 • 석개석곽묘 • 석개토광묘와 祭壇지석묘가 결합하여 일반 묘제로 정형화되었다는 李榮文의 학설 이다 .129) 127) 李榮文 : 『全南地方 支石墓社會의 硏究』 韓國敎貝大學校博士學位論文 1993. pp2 22-225. 128) 앞에 든 頂韋國考古學槪說』 pp9 5-96. 129) 앞에 든 『全南地方 支石墓社會의 硏究』 pp2 12-213.
金說은 석관묘가 지상에서 거대한 석재를 사용하게 된 이유에 대 한 설명이 없다. 李說은 좀더 구체적이나 여기에는 두 가지의 전제 가 필요하다. 하나는 요녕지방의 지석묘가 한반도의 지석묘보다 연 대가 올라가야 하고, 또 하나는 당시 사회에서 제단의 이용이 보편 화되어 있어야 한다. 이를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요녕지방의 지석묘와 대석개묘 등의 연대는 춘추 전국시대 로 추정 130) 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한반도의 지석묘보다 올라간 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다음 제단의 일반적 사용은 충 분히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遼寧省 凌源縣의 牛河梁 女神廟 는 제단의 기능보다 더 상설적인 제사시설로서 강한 성격을 갖고 있는데 연대는 대략 BC 19C 정도까지 올라간다 .13 1) 또 제단지석묘 로 추정되는 유적이 장성 원덕리 • 영광 대전리 • 나주 송촌리 등지 의 지석묘군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132) 이렇게 볼 때 李榮文의 요 녕성지방 발생설은 불안하게 된다. 그러므로 석관묘 • 석곽묘 • 토광 묘에 石祭壇機能이 결합되어 지석묘가 발생한 지역은 한반도로 바 뀌어야 한다. 여기서 필자는 지석묘 발생단계에서부터 앞에서 李榮 文이 제시한 大石蓋墓 • 石蓋石稽墓 • 石蓋土塘墓 등 3 종의 매장시설 에 석제단기능이 결합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의문을 갖는다. 다시 말 해서 무문토기 확산기에 가장 일반적인 묘제였던 석관묘에서 지석 묘가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고, 다음으로 시기를 달리하여 지석묘의 하부구조로서 토광을 채택하였다고 생각한다. 대석개묘라는 것도 구조상으로 보면 석관묘에 1 매의 거대한 판석을 130) 許玉林 • ’午明綱 • 高美葉 : 「旅大地區新石器時代文化和靑銀代文化槪述」 『東北 考古與歷史』 1982-1. 姜仁求 : 「中國東北地方의 古壇」 먀韋國上古史의 諸問題』 pp5 1-52. 131 )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 「遼寧牛河梁 紅山文化 女神廟與積石塚群發堀間報」 『文物』 1986-8. 姜仁求 : 「中國東北地方遺蹟의 硏究」 먀韋國史學』 11 집 1990. p91 . 132) 앞에 든 『全南地方 支石墓社會의 硏究』 p20 8.
개석으로 사용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석관묘 파생설에 지장이 없을 것이다. 결국 한반도 자생설로 귀일한 셈이다 . 그러면 한반도의 어느 지역에서 지석묘가 발생하였을까? 여기에 는 석관묘가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 연대가 올라가는 석관 묘가 분포되어 있는 지역. 연대가 올라가는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는 지역 등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석관묘가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은 대동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평안남도와 황해도지역이다. 이종선의 석관묘 집성표에 의하면 총 100 여 기 중 낙동강유역이 35 기, 대동강유역이 25 기. 한 강유역이 16 기 등의 순으로 나타나 있다 .133) 낙동강유역지역은 분 석하면 광범한 지역에 분산되어 있고. 대구지방에만 다수가 밀집되 어 있다. 여기에 비하면 대동강유역지역은 훨씬 집중 밀집상태를 보 이고 있댜 둘째 연대가 올라가는 석관묘가 집중되어 있는 지역도 역시 대동강유역으로 나타나 있다. 여기의 석관묘들에서는 연대가 올라가는 미송리형토기와 有莖血溝式 石劍이 출토되고 있다 .134) 셋 째 카본 데이팅한 근거에 의하면 한강유역의 양평 양수리 • 파주 옥 석리 등지의 지석묘가 BC 9~8C 까지 연대가 올라간다 .135) 그러나 이와는 달리 침촌리 A 형을 가장 이른 시기의 지석묘로 추정하는 견 해 136) 도 있고, 황해도 북부지방의 지석묘를 가장 이른 시기의 지석 묘로 추정하는 견해 137) 도 있다. 이들 견해는 구체적인 연대에는 차 이가 있어도 축조서열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한편 한반도의 석관묘 133) 李鍾宣 : 「韓國石稽 墓 의 硏究」 『韓國考古學報』 1. 1976. 134) 앞에 든 「韓國石稽墓의 硏究」 사회과학원고고학연구소 : 『조선고고학개요』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 7. p84 . 사리원 상매리 • 연탄읍 옹장골 등지의 석관묘에서는 팽이형토기가 출토되는 데, 대략 BC 1000 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 135) 앞에 든 『全南地方支石墓社會의 硏究』 p21 8. 136) 앞에 든 甲元浜之의 논문 137) 앞에 든 『조선고고학개요』 pp1 12-113.
가 적봉지방의 홍산문화 석관묘가 들어와 퍼진 것으로 볼 때 ,138) 한반도의 서북지방에서 가장 오래 된 석관묘가 축조되었을 가능성 은 높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반도의 지석묘는 대동강유역지역에서 석관 묘와 석제단이 결합하여 발생하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2,3 石稽墓 석관묘는 지면하에 板狀石으로 사면벽(일부의 벽은 城石을 사용 하기도 함)을 조립하여 상자형을 만들고 그 안에 시체를 격납하는 무덤형식인데, 지석묘와 함께 청동기시대 묘제의 대종을 이루었다. 2.3.l 分布와 墓地 석관묘의 분포는 집중도와 밀집도에서는 지석묘보다 성글어도 한 반도 전역에 걸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지역적으로는 두만강 하 류·압록강 중류·대동강·남한강·금강 중류·낙동강 하류·남강 등 대하천의 유역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고, 지석묘가 없거나 적은 압록강유역과 두만강유역에서 오히려 더 많이 발견된 바 있다. 석관 묘는 단독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고, 그 외 2~3 기 혹은 5~6 기씩 작은 무리를 이루어 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석묘의 경우처럼 수 십 기 또는 수백 기씩의 큰 무리를 이루어 분포된 예는 없다. 무리 를 이루어 발견된 예는 황해도 연산군 공포리 • 사리원시 상매리 • 연탄군 옹장골 • 부여 가증리 등지에서 있었는데. 가증리의 경우는 구릉의 능선 방향과 평행하게 열을 이루고 있었다 .139) 扶餘 中井里 138) 앞에 든 이종선의 논문 앞에 든 「中國東北地方의 遺蹟硏究」 139) 앞에 든 『조선고고학개요』 p84 . 앞에 든 「朝鮮磨製石왔1J(1)硏究」 p18 0.
그림 21 保 寧 寬 倉里 石稽 墓
堂山의 석관묘는 산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지형 울 선정한 예도 가끔 보인댜 140) 석관묘갸 소재한 지점의 지형은 하천에서 가까운 낮은 구릉상이 나 약간 높은 대지상을 보이고 있으며, 평지에서는 별로 발견되고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지석묘 소재지보다는 약간 높은 장소를 선택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大邱 大鳳洞 지석묘군에서 보는 것처럼 지석묘군 속에서 上石없이 지하 매장주체시설로서 더러 석곽이나 토광시설과 함께 발견되는 경우도 있는데, 주로 墓標式 지석묘의 묘 역 에 존재 한다 .14 1) 140) 姜仁求 : 「扶餘堂山의 石稽 墓 」 『歷史學報』 88. 1980. 141 ) 앞에 든 「大邱大鳳町支石 墓 群!:?t》f」
그림 22 中國 吉林省 吉林 疑達溝 石稽墓
2,3,2 構造와 型式 (1) 石稽의 存在樣相 석관묘는 일반적으로 1 인 매장용의 1 관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예의적으로 한 묘혈에 2 개의 석관을 구성한 예가 몇 가지 있다. 하 나는 한 석관 내에 판석을 세워 경계벽으로 사용하여 2 인용의 관을 만든 것이 吉林省 延吉지방에서 발견되었다 .142) 또 어떤 경우는 기 본관에 측관을 부설하여, 1 인을 추가한 2 인용의 2 관으로 형성된 구
조도 존재한댜 강계 공귀리의 경우와 대구 진천동의 경우는 기본관 의 1 장벽을 공용하고, 밖으로 1 장벽과 2 단벽을 세워 側稽을 만들어 서 모두 2 인용의 복식 석관을 구성하였다 .143 ) 또 이와는 달리 석관 의 개석을 바닥으로 이용하고 그 위에 사면벽을 조립하여 2 重 (2 層 ) 의 석관을 형성한 예도 있는데, 한반도 내에서는 아직 보고된 일이 없고 延吉지방에서 몇 개의 예가 알려져 있다 .144) (2) 벽 석관묘의 가장 기본구조는 사면벽을 각 . 1 매의 판상석으로 조립하 는 것인데. 이와 같은 기본구조는 그렇게 많지 않다. 가장 많은 구 조는 주로 장벽이 되겠지만, 1 벽을 수매의 판상석으로 잇대어 조립 한 것이다. 또 l 벽 또는 벽의 일부분만을 괴석으로 적석하여 판상석 과 섞어서 조립한 경우도 상당수 눈에 띈다. 벽의 일부를 판상석 대 신에 괴석을 사용한 경우는 판상석의 재료부족에서 오는 것으로 이 해된다. 만일 사면벽을 전부 괴석을 사용하였을 경우는 석관묘라기 보다는 석곽묘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송국리의 경우는 동서장벽은 각각 4 매와 5 매의 판상석을 직립하였고, 남북 양 단벽은 각각 2 매, 1 매의 판상석을 사용하였다. 벽높이는 0.81m 이다 .145) (3) 바닥 석관묘의 바닥처리는 일정하지 않다 . 가령 송국리의 경우는 길이 lm 정도의 판석을 석관의 중간에 놓고, 그 북쪽(머리방향)과 남쪽 142) 앞에 든 『 滿鮮原 始 噴墓 (l)硏究』 p35 8. 143) 김용간 : 「강계시공귀리유적발굴보고」 『유적발굴보고』 6. 1959. 앞에 든 「大邱辰泉洞의 支石 墓 」 144) 앞에 든 『 滿鮮 原始 慣墓 (l)硏究』 p35 8. 145) 金永 培 • 安承周 : 「扶 餘 松 菊里 遼 寧 式 銅 劍出土 石稽 墓 」 程i 濟 文化』 7 • 8 合 輯 1975.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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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방향)에 길이 70cm 의 판석을 직각방향으로 놓아 3 매의 판석 배 치는 工 자형으로 하였으며. 공간에는 작은 판석을 놓아 큰 공간을 채워서 간단한 尻床 을 만들었다 .146 ) 같은 부여의 중정리 당산의 경 우는 두 손바닥 크기의 판상석을 드문드문 놓고 그 위에 굴신장한 시체 또는 遺般를 놓은 것으로 보인다. 황석리 6 호의 경우는 자갈을 깔아 시상을 마련하였다 .147 ) 서홍 천곡리의 경우는 바닥에 괴석과 모래흙을 섞어서 굳게 다져서 시상을 만들었음이 확인되었다 .148) 그리고 부여 가중리 3 호, 5 호의 경우는 석비례의 맨바닥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149) 대체로 보면, 석관묘의 바닥은 판상석 수매를 깐 것과 맨바닥을 그대로 이용한 예가 숫자상으로 가장 많은 것 같다. 또 경우에 따라 서는 바닥의 구조형식은 장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송국리의 경우, 머리쪽과 발쪽에 가로놓인 판석은 중간의 판석보다 약간 높게 놓였고, 유물 중 목에 거는 목걸이용의 관옥들이 중간의 판석상에 집중되어 있는 상태를 보아서, 머리는 중 간 판석상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럴 경우 시체는 길이 lm 정도의 중간 판석 위에만 놓이게 되므로, 시체는 小兒이거 나 아니면 성인인 경우는 屈身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50) (4) 개석 석관묘의 개석은 대개 벽석과 같이 수매의 판석을 가로로 올려 놓아 덮음으로써 稽 蓋 로 하였다. 그러나 송국리에서는 1 매의 거대한 판석(길이 2.6m, 너비 1.5m, 두께 20cm) 을 올려놓아 개석으로 하였 146) 앞에 든 「扶餘松菊 里 遼 寧 式 銅 Qij出土 石稽 墓 」 147) 앞에 든 먀 輔 밉支 石墓 硏究』 pl0 5. 148) 백련행 : 「천곡리 돌상자무덤」 『고고민속』 1 1966. 149) 앞에 든 『朝鮮磨製石§|j m 硏究』 p18 1. 150) 앞에 든 「扶 餘 松 菊 里 遼 寧 式 銅 劍出土 石稽 墓 」 p9 및 pp 23-27 의 圖 面.
는데. 마치 기반식 지석묘의 상석을 올려놓은 것과 같은 느낌을 준 댜 IS i) 이와 같은 예는 별로 없으며 요녕성이나 길림성지방의 소위 大石 蓋墓 에서나 자주 볼 수 있다. 또 석관묘를 발굴하여 보면 개석 이 없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 경우 개석이 지표에서 얕게 묻혔기 때문에 노출되어 없어진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축조 당시부터 개석 이 없이 木 蓋 를 하였는지 알 수 없다 . 기반식 지석묘에서 상석 아래 개석이 없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경우는 목개가 부식되어 없어 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석관묘의 경우도 목개를 사용하였을 가능 성은 있댜 그러나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석 관묘의 경우 분구가 없이 지하 깊이 묻히지 않는 상태에서 개석은 시체와 매장시설을 보호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데, 만약 목개라면 하 부 보호에 안전을 기할 수 없을 것이란 점이다. 따라서 목개의 경우 는 지석묘처럼 보호시설로서 상석이 있든지, 아니면 低壇丘라도 있 어야 할 것이다. 2.3.3 副葬遺物 석관묘에 부장되는 유물은 지석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물의 종류가 간단하고 수량도 빈약한 편이다. 일반적으로 마제석기 1~2 개, 무문토기 약간, 단도마연토기 1 개와 간혹 대롱구슬 약간이 들어 있거나, 좀 많은 경우는 석제 또는 토제 방추차 l~2 개 정도가 들어 있댜 부여 당산리의 1 호 석관묘에서는 마제석검 1 개, 석촉 3 개, 무 문토기편 약간이 발견되었다 .152) 또 특별한 예에 속하기는 하지만, 부여 송국리 석관묘는 분묘의 규모도 탁월하고, 그 속에서 발견된 유물도 일반의 경우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마제석검 • 석촉 • 무문토기 • 청동비파형동검 • 곡옥 • 관옥 등 우수한 유물이 다수 발 151) 앞에 든 「扶餘松菊里 遼寧式銅劍出土 石稽墓」 p9. 152) 앞에 든 「부여 당산의 석관묘」 plO .
견되어 학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 153) 2.3.4 葬法 석관묘는 앞에서 말한 지석묘의 경우와 같이 신전장과 굴신장이 모두 유행하였다. 석관묘 중에는 강계 풍룡리의 석관묘처럼 길이가 2.6m, 너비 0.4 5 ~0.9m, 깊이 0 .4 m의 규모가 되어 성인을 신전장하 여도 충분한 규모가 있는가 하면, 부여 가증리의 2 호 석관묘처럼 길 이 Im, 너비 0.4 2 m 밖에 안 되는 것도 있댜 오히려 성인남자의 신 장을 넘는 길이의 석관보다 1~1.5m 정도의 작은 규모가 다수를 점 한다. 이 현상은 신전장보다 굴신장이 더 많았다는 판단을 가능케 한다. 종종 석관의 길이가 Im 이내인 경우도 눈에 띄는데, 이 경우 의 장법은 이차장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송국리의 경우는 석관 의 내부길이와 너비 등은 성인을 신전장하기에 충분히 크지만, 유물 의 배치와 바닥돌의 상태로 미루어 보건대, 굴신장과 이차장일 가능 성이 높다 .154) 죽 다른 곳에 가매장(殖葬 등)하여 일정한 기일이 지나 육탈되면 本葬으로 가는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앞에 서 예로 든 대구 진천동의 석관은 지상에 상석이 있었다고 보이지 만, B 석관은 길이 I.Im , 너비 0 .4 7m 에 지나지 않았으며 성인여성의 인골이 굴신장의 형태로 발견되었다. A 관은 B 관과 한 벽을 공용하 는데 길이 1.1m, 너비 0.22m 로 유아나 소아를 매장한 것으로 추측되 었다 .155) 이처럼 석관의 규모로 장식을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석관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조합상으로 성별을 구분할 수 있고, 규모와 유물의 호화 정도로 그 주인공의 당시 사회적 신분을 판단할 수 있다. 가령 송국리 석관묘의 경우 묘의 규모와 탁월한 유 물은 바로 묘주인공의 지위와 성, 연령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으 153) 앞에 든 「扶餘松菊里 遼寧式銀劍出土 石稽墓」 ppl 0-11. 154) 앞에 든 「扶餘松菊里 遼寧式銅劍出土 石稽墓」 p 23 의 圖面 2. 155) 앞에 든 姜仁求의 논문 「達城辰泉洞의 支石墓」 p47 ,
로 지역의 首長 墓 로 추정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무기와 방추차는 피장자의 성별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 죽 석검 • 석촉 등 무기는 남성의 소유물로 보고 사냥이나 전쟁을 연상시칸다. 또 尖頭 器 • 방추차는 여성이 담당하였던 가내공업의 도구로 추측하는 것이 다 . 156) 이것은 또한 확실한 사회적 분업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신석 가시대 이후 사냥과 농경 등 옥외의 힘든 작업은 남성, 방직 • 토기 제작 둥 옥내의 힘이 덜 들고 섬세한 작업은 대체로 여성의 영역으 로 가름하여 왔으며, 청동기시대 후기에 와서는 확실하게 구분되어 사회 구조화되었다. 2.3.5 石稽墓의 編年과 起源問題 한반도의 석관묘 연대에 대하여 三上次男은 평안도 • 황해도지방 의 석관묘를 BC 3C 말에서 BC 2C 전반으로 가장 빠르게 보며, 남 부의 석 관묘는 BC 1C 에 나타나는 것으로 편년하고 있다 .157) 송국 리 석관묘의 경우는 출토된 비파형동검을 근거로 하여 BC 7C158) 와 BC 4C159) 로, 또 당산 석관묘의 경우는 BC 7C160) 로 각각 추정하고 있어 일치된 연대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석관묘는 지상에 뚜렷한 분구가 보이지 않아 대개의 경우는 우연 히 발견되어 조사를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석묘 처럼 지상에 뚜렷한 구조가 노출되어 있는 무덤과는 달리 분포상황 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비록 수량면에서는 그렇게 많이 발 견되어 있지 않지만, 한반도 전역에 골고루 퍼져 있는 것을 보면, 156) 앞에 든 『滿鮮原始壇墓(l)硏究』 p28 3. 157) 앞에 든 『滿鮮原始積墓(l)硏究』 p64 8. 158) 岡內三眞 : 「朝鮮 l 각하t 5 銅§lj(l)始源之終焉」 『小林行雄博士古稀記念論文集 考古學諦政』 1982. pp7 87-844. 159) 尹武柄 : 「韓國靑銅遺物의 硏究」 『白 山學報』 12 1972. p12 3. 160) 姜仁求 : 「扶餘堂山의 石稽墓」 p15 .
청동기시대에는 지석묘에 못지않은 많은 수의 석관묘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로서 가장 쉽게 들 수 있는 것은, 같은 시 대의 지석묘보다 단체노동력이 적게 필요하며 경비면에서도 훨씬 경제적이어서 집단사회성이 보다 약하기 때문이다. 분포면에서 적 봉 홍산후. 제이송화강유역의 길림 부근의 東團山 • 西團山 • 峰達溝, 두만강하류역지방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시대와 성격이 대략 유사한 한반도의 석관묘도 집단적 밀집분포 상황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석관묘는 남부 시베리아 미누신 스크지방의 청동기시대인 안드로노보기-카라숙기-타가르기의 석관 묘가 유입되었다는 견해 161) 와 중국 동북지방의 적봉 홍산후 • 길림 성 길림지방 • 두만강하류지방의 석관묘가 유입되었다는 견해가 있 다 .162) 그러나 안드로노보기는 연대가 BC 18C 이상으로 소급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다. 한편 중국의 동북지방에서는 遼寧省凌源縣 牛 河梁의 석곽묘 가운데 석관의 형식이 들어 있고 연대가 BC 30C 까 지도 소급 163) 되기는 하나. 이것을 직접 계승한 석관묘 유적이 아직 발견된 바도 없다. 그리고 한반도 석관묘의 구조형식은 우하량쪽보 다는 미누신스크쪽에 가깝다. 앞으로 치밀한 검토가 요청된다. 한반도 석관묘의 기원이 남부시베리아에 있건. 요녕성지방에 있 건 한반도로의 유입경로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오는 두 길이 있 었던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석관묘가 중국 동북지 방 석관묘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두 지방간에는 뚜렷한 차 이가 있다. 첫째, 구조형식에서 한반도의 것은 板石立組 • 板石平 161 ) 앞에 든 며 E 國考古學槪說』 p96 . 162) 앞에 든 『滿鮮原始噴墓 D 硏究』 p66 8. 163)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 「遼寧牛河梁紅山文化女神廟與積石塚群發堀簡報」 『文 物』 1986-8. 姜仁求 : 「中國東北地方의 古壇」 『考古學으로 본 韓國古代史』 1997. p43 .
積 • 板石城石混用 • 城 石 造 등이 골고루 있으나 . 중국 동북지방의 것 은 판석입조가 대부분이다. 둘째. 분포상에 있어서 중국의 것은 대 부분 밀집상을 보이고 있다. 셋째, 입지조건에서 한반도의 것은 대 지 또는 평지에 많으나 중국의 것은 산중턱에 많다. 넷째, 방향에서 중국의 것은 장축을 동서방향에 두고 東f%이 많으나, 한반도의 것은 남북방향이 많다. 다섯째, 복합묘에 있어서 한반도에는 석관과 적석 으로 된 복합형이 많으나 중국에는 전혀 없다 .164) 2.4 石鄒墓 석곽묘의 구조는 지하에 비교적 깊은 토광을 파고, 그 안에 城石 을 축상하여 사면벽을 만들며, 상면에는 개석 또는 목개를 덮는 형 식의 무덤을 말한다 . 삼국시대에 유행한 석곽묘와 구별하기 위해 原 始石室墓라고 부르기도 한다. 학계에서는 오랜 동안 석관묘의 범주 에 넣어 함께 취급해 왔다. 그러나 석곽묘와 석관묘에는 몇 가지 차 이가 있어 구분하는 것이 편리하다. 차이점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입지조건에서 석곽묘는 낮은 구릉의 정상부를 많이 이용하 나, 석관묘는 보다 낮은 구릉이나 평지를 많이 이용한다. 둘째, 구조 면에서 석관묘는 판석을 세워서 조립하나 석곽묘는 괴석을 적석하 여 만든다. 셋째, 유물에 있어 석곽묘에서는 儀器를 비롯한 後期靑 銅器를 많이 매장하나, 석관묘는 대개의 경우 마제석기 • 무문토기 가 주유물이다. 넷째, 장법에 있어 석곽묘는 주로 伸展葬이고, 석관 묘는 屈身葬이 더 많다. 2.4.l 分布와 墓地 석곽묘는 자주 볼 수 있는 형식의 묘는 아니다. 1970 년에 들어 164) 앞에 든 『滿鮮原始項墓(/)硏究』 pp6 65-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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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주로 금강유역지방에서 발 견 되었다. 부여 연화리 • 대 전 괴정 동 • 예산 동서리 • 아산 남성리 등지 165 ) 와 화 순 대곡리 • 함평 초포 리 166 ) 에서만 발견되었댜 과거에는 대구 대봉동 지석묘의 하부구조 로서 이와 같은 석곽이 다수 발견된 바 있어 일부에서는 같은 석관 묘의 4 형으로 다룬 일이 있댜 167)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역시 차 이가 있다 . 대봉동의 경우는 지석묘의 하부구조로서 상면에 상석이 얹혀 있을 뿐만 아니라 출토유물에서도 금속제품이 전혀 출토되지 않는 석기와 무문토기만의, 죽 문화계통이 다른 무덤인 것이다.
165) 학계 일부에서는 황해도 서홍군 천곡리의 돌상자무덤과 청주 비하리의 유적 을 앞에서 예로 들은 석곽묘와 같은 종류의 유적으로 다루고 있다 . 그러나 천 곡리의 돌상자무덤은 토광의 깊이도 얕고 판석조로서 성격이 다르며. 비하리유 적은 유구의 성격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세형동검의 공통성만으로 본고에 서 다루는 석곽묘와 같은 구조형식이라고 할 수 없다 . 166) 趙現鍾 • 張 濟 根 : 『 全 南의 古代 墓 制』 全羅南 道 • 木 浦 大 學 校博物館 1996. p56 7-576. 167) 앞에 든 『滿鮮原始 壤墓 O 硏究』 pp6 18-619.
2.4 .2 構 造와 出 土遺 物 아직까지는 충청남도의 금강수계유역에서만 한정적으로 발견된 석곽묘는 낮은 구릉상에 자리잡고, 분구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낮은 분구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내부구조는 지면에 깊은 토광을 파 고, 괴석(野石)으로 높이 lm 내외의 석곽을 축조하고, 곽실 내와 상면에는 괴석으로 充損하고 덮는 구조형식으로 개석이 없는 점이 공통이댜 대전 괴정동의 석곽묘는 깊이 2.7m 의 토광을 파고, 광벽에 접하여 괴석으로 사면벽을 축조하였는데, 석곽의 규모는 남북길이 약 2.2m, 동서너비 약 0.5 m , 깊이 약 lm 이다 .168) 아산 남성리 석곽묘의 경우를 보자. 낮은 구릉상에 부식암반을
168) 國立博物館 學術資料集(一) 『靑銅遣物圖錄』 1968. pp3 -4.
파고 타원형의 토광(동서길이 3.l m , 남북너바 1.8m , 깊이 2m) 을 아래 로 내려갈수록 벽을 경사지게 하여 바닥면적을 좁히고. 그 내벽에 기대 할석과 괴석을 사용하여 사면벽을 축조하였다 .169) 석곽의 규 모는 동서길이 2.8m, 남북너비 0.8~0.9m, 깊이(벽높이) 0.7m 인데. 개석이 없이 곽내와 시체의 상부는 역시 괴석으로 채운 것으로 보 인다. 예산 동서리 • 부여 연화리 • 청주 비하리의 석곽묘도 대체로 비슷한 구조형식이지만 규모가 작은 편이다.
169) 이 석곽묘는 필자 등이 발굴조사하였으며, 보고서는 韓炳三 • 李健茂가 작성하 였다. 며萩땝믿 石郡墓』 國立中央博物館 1977.
석곽묘는 구조형식뿐 아니라 부장유물에서 後期靑銅器의 儀潘競士 다량 부장하는 점도 공통적이다. 괴정동에서는 고식의 세형동검 • 다뉴조문경 • 동탁 • 방패형동기 • 원개형동기·검파형동기·마제석촉·천하석재식옥·무문토기호·혹 도장경호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동탁과 함께 출토된 동기들은 그 용도를 잘 알 수 없는 것으로 防牌形 • 圓蓋形 • 劍抱形 이라고 임시로 이름을 붙였는데, 아마도 의식용으로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별도로 수집된 유물 중 農耕文銅器라는 것도 괴정동에서 일괄 출토된 유물이 유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농경 문동기에는 따비로 밭을 정연하게 이랑치는 農夫像과 솟대가 함께 음각되어 있어 괴정동의 이들 동기들이 의기임이 분명하다고 하겠 댜 170) 남성리에서는 동검 • 방패형동기 • 검파형동기 • 다뉴조문경 • 동 부 • 동착 • 곡옥 • 관옥 • 米占土帶土器 • 黑陶長頭盛 등의 유물이 출토 되어 앞의 괴정동의 유물과 대동소이한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다 만 다른 점은 동검이 9 개로 다수를 점하고 있고, 방패형동기에 줄꼰 〔絡繩〕문양의 고리 斜行細線文과 稷行細線文 등이 선각되어 있으며.
170) 韓炳三 : 「先史時代農耕文靑銅器에 대하여」 『考古美術』 112. 1971.
검파형동기에는 사슴문양과 魚 骨 문양이 있는 점이다. 역시 의기적 성격이 짙은 문양들이라고 하겠다. 2.4.3 葬 法 석곽묘의 내부석곽의 길이가 괴정동은 길이 2.2m, 너비 O . Sm 이고 , 남성리는 길이 2.35m, 너비 0.7~0 . 5m 인 점으로 보아 성인을 충분히 신전장할 수 있는 규모이다 . 괴정동의 바닥에서 상당한 양의 목질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목관을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2.4.4 石鄒 墓 의 系統과 編年 괴석으로 적석하여 곽을 만드는 석곽묘는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 와 같이 현재로서는 충청남도의 금강수계유역과 그 부근의 한정된 지역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를 벗어난 요녕성 서부지 역에서도 많지는 않지만 몇 기의 예가 보고되어 있다. 寧城縣 南山 根 101 호분, 朝陽縣 十二 臺 營子와 姚金溝, 阜新縣 胡頭溝 등지에서 석곽묘가 발견된 일이 있다. 이들 석곽묘는 지하 깊이 토광을 만들 고, 냇돌로 축조하며, 유물도 昆習形銅劍 등과 西周 또는 春秋中期 의 청동기 등이 출토되고 있어, 시기적으로 충청남도의 석곽묘보다 다소 앞선 것들이지만 연관을 짓는 데는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 인다 . 특히 충청남도의 석곽묘에서는 의기로 보이는 청동기들이 다 수 출토되고 있는데, 이들 유물은 한반도에서는 이 곳 외에는 없는 유물로서 요녕성 서부지역과 통하는 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 충남지역의 석곽묘의 연대를 보면. 괴정동은 BC 4C, 남성리 는 BC 3C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17 1) 한편 요녕성 서부의 것들은 각각 서주말~춘추 초기 또는 춘추 중기이므로 BC 8~5C 로 추정하 고 있다. 171) 앞에 든 명萩t里石鄕 墓 』 p1 9.
2,5 土塘墓 토광묘의 原義는 지면을 파 내고 그 안에 시체를 매장한 후, 위 를 흙으로 덮고, 봉토의 분구를 올리는 분묘의 형식을 말한다. 인류 가 고안해 낸 묘제 중 가장 오래 된 형식이며, 또 가장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한반도 등 일부지역에서는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분묘 중에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비파 형동검이나 이른 시기의 세형동검이 출토되는 토광묘가 촌재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보다는 遼寧省地方에서 다수 찾을 수 있다. 遼河를 기준으로 하여 서부지역과 동부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서부지역의 토광묘에는 중국의 殷 • 周 • 春秋戰國時代의 것들이 있으 나, 여기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한반도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 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周代의 朝陽)縣 魏營子 7603 호분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요하유역과 동부지역에서는 한반도와 연관이 있는 비파형동검이나 이른 시기의 세형동검이 출토된 유적이 약간 조사된 일이 있다. 沈陽의 鄭家窟子 6512 호분은 가장 주목받는 유적이다. 이 고분은 海河에서 3km 거리의 沼澤地 옆의 高地에서 발견되었 는데, 장방형의 수혈토광을 파고 목관과 목곽을 설치하고, 청동기를 다량 부장하였다. 토광의 규모는 길이 5m, 너비 3m, 깊이 1. 4m 이고, 바닥에는 먼저 方木을 한 겹 깔고 그 위에 목곽을 설치하였다. 구조 형식은 위영자의 토광묘와 동일하고, 나아가서는 중원지방의 형식 과도 통하는 것이다. 장법은 單葬 仰身直股葬이며 頭西足東을 취하 였다. 유물은 목관과 목곽 사이에 배치하였는데, 세형동검은 시체의 머리 위에 2 개, 우측 허리에 1 개, 다뉴경은 머리 위, 반월형식옥은 목부분, 원개형동기는 우측 허리의 바깥쪽에 일렬로 4 개를 배치하 고, 또 마구도 이 곳에 함께 배치하였다 .172) 이 고분의 유물은 夏家店上層文化에 속하는 朝陽十二臺營子, 錦 西烏金塘 昭烏達盟石柱子村 동의 유적와 통하지만, 南山根이나 십
이대영자에서 나온 句奴계통의 동물형 투조장식이나 오금당의 中原 銅戈 등은 나온 일이 없다. 그러나 가장 주목되는 점은 앞에서 든 청동기들과 喇'八形馬頭裝飾 • 半月形飾玉 등은 괴정동 • 남성리 • 동 서리 등지에서 나온 유물과 같은 형식이어서 문화상 관련을 짐작하 게 한댜 연대는 BC 6~4C 로 추정하고 있으며. 역시 고조선 유물로 도 추측하고 있댜 173) 3 初期鐵器時代(樂浪 • 三韓 )174)
172) 沈陽古宮博物館 • 沈陽市文物管理辯公室 : 「鄭家窟子的兩座靑銅時代墓葬」 『考 古學報』 1975-1. 173) 앞에 든 金廷鶴과 姜仁求의 논문. 174) 필자는 三國時代의 開始에 관하여는 『三國史記』의 기록을 대체적으로 믿는 입장이다(金元龍 : 「三國時代의 開始에 關한 一考察」 『東亞文化』 제 7 집 1967). 『三園史記』 『三國迫事』와 中國側正史에 의하면. 三韓의 馬韓 • 辰韓 • 卞韓은 백 제 • 신라 • 가야보다 앞서 존재하였다. 삼국시대 초기의 고고학자료는 土塘木鄕 墓.구!t石木柳噴·石柳墓 등이 주류를 이루고` 이들 자료보다 선행한 土塘木稽 墓 • 土坡木鄒墓(초기) • 石鄕墓 • 쟁功官墓 등은 初期 鐵器時代 자료로 추정한다. 그러므로 初期 삼한은 초기 철기시대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樂浪이 漢四郡의 하나로서 오늘날 平壤지방에 존재하고 있었는지에 관하여 필 자는 아직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다. 다만 大同江流域지방에서 발견되는 초기 철기시대의 고고학자료는 넓은 의미에서 漢文化系 자료로 활용하고 싶다.
3.1 土塘墓 여기서 다루는 토광묘는 일반적인 간단한 구조에 간략한 유물이 부장된 그런 형식이 아니라, 토광 내에 목관을 격납하였거나 목곽울 시설하였으며. 청동기와 철기를 다수 부장한 분묘의 형식을 말한다. 토광묘는 대동강유역 • 낙동강유역 • 경주지방 • 영산강유역 등 넓 은 지역에 고르게 분포하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잘 알려진 곳은 平
壤 樂浪區域(舊 大同郡 大同江面)과 台城里 • 黃 海道 殷栗郡 雲城 里 • 慶州 九政洞 등지가 있다. 낙랑구역에서는 석암리 • 토성동 • 정 오동 • 남사동 등지에 집중되어 있다. 이 시기의 토광묘는 낮은 구릉의 말단부에 위치하는데, 목관을 내장한 것과 목곽을 내장한 두 형식으로 나누어진다. 목관 1 개만을 내장한 유적은 좁은 토광에 단장으로 관 1 개만을 묻고. 세형동검 B I 식과 세문경 등과 철부를 부장하였다. 유적으로는 대동군 반천리 유적 • 남형제산유적 • 배천군 석산리유적 • 신창군 하세동리유적 • 인 홍군 용산리유적 • 함주군 대성리유적 등이 여기에 속한다. 내부에 목곽을 설치하고 목관을 내장한 토광묘는 5cm 두께의 판 자로 협장한 곽을 조립하고, 그 안에 목관을 안치하였다. 어떤 것은 목곽을 내의 이중으로 한 것도 있고, 또 목곽 내에 2 개의 목관을 내 장한 부부합장의 형식도 있다. 2 목관의 경우는 이미 되어 있는 분구 와 목곽을 훼손하고 추가장하고 매장 후 복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형동검과 철제단검 둥 철제무기와 동제의 거여구, 그리고 일광 경 • 소명경 등 동경과 오수전을 부장하였다. 앞의 목관묘에서는 청 동기가 다수이고 철기가 소수인 데 비해, 목곽묘에서는 반대로 청동 기는 줄어들고 철기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 이들 형식에 속하는 토광묘는 토성동 4 호분 • 정백동 3 호분 등이며, 이들 목관토광묘와 토광목관묘는 BC 4~BC 2C 로 추정하고 있다 .175) 이 시기는 역사적 으로 위만조선보다 약간 앞선 시기로 추정된다. 이상은 후기 고조선 북한 대동강유역의 유적인데, 같은 형식의 토 광묘로 남한에는 어떤 유적이 있고 그 출토유물은 무엇인지 알아보 기로 한다. 慶州 九政洞의 토광묘를 보자. 九政洞 方形壇의 서쪽에 175) 사회과학원고고학연구소 : 『조선고고학개요』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7. pp1 44-146. 岡內三眞 : 「朝鮮銅iiJ(l)始源之終焉」 『小林行雄博士古稀記念論文集考古學論考』 平凡社 1982. pp8 20-824. pp8 3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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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발견되었는데, 유구의 구체상은 알 수 없으나 돌이 없었던 점에 서 토광묘로 추정하고 있으며. 유물은 세형동검 • 동탁 • 동모 • 동령 과 철제장도 • 철부 등 철기가 발견되었다. 경주 입실리유적도 상태 는 앞의 九政洞 토광묘와 같으며 유물도 세형동겁을 바롯하여 동 모 • 동탁 • 세형동과 등 다수의 청동기가 출토되었다. 시기는 BC 100 년 전후로 추정하고 있댜 176) 이 시기. 이런 형식의 토광묘 유적은 북한에서는 대동강유역에 집 중되어 있고, 남한에서는 경주에 2 기가 알려져 있다. 그러나 초기의 세형동검의 발견 예가 많은 점으로 미루어 토광묘는 많이 축조되었 다고 생각한다. 다만 토광묘의 구조상 대개 우연한 기회에 유물만 발견 • 인출 • 보고되고 유구의 확인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3.2 地室壇 전실분 177) 은 앞절의 토광묘와 함께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강면(현 평양시 낙랑구역)과 황해도 북부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176) 金元龍 : 「慶州九政里出土 金石{#用期 遺物에 對하여」 『歷史學報』 제 1 집 1952. 177) 낙랑전실묘에 관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 『朝鮮古蹟圖譜』 朝鮮總督府 1915. 野守健 • 樞本龜次郞 • 神田慧藏 : 「平安南道大同郡大同江面梧野里古 壇調査報 告」 멜孫]五年度古蹟調査報告』 朝鮮總督府 1935. 樞本龜次郞 • 野守健 : 「永和九年在銘地出土古壇調査報告」 『昭和七年度古蹟調 査報告』第一冊 朝鮮總督府 1933. 關野貞 : 『平壤附近仁於付 5 樂浪時代(l)壇墓』(古蹟調査特別報告) 朝鮮總督府 1919. 關野貞 外 : 『樂浪郡時代(l)遺蹟』(古蹟調査特別報告第 4 冊) 本文 圓版上 • 下 朝鮮總督府 1927. 藤田亮策 : 「昭和八年度i:於 I t 5 樂浪(古壇)(l)調査」 『昭和八年度古蹟調査槪 報』 朝鮮古蹟硏究會 1934. 有光敎一 : 「昭和九年度仁於 I t죠樂浪古壇調査事業」 『昭和九年度古蹟調査槪 報』 朝鮮古蹟硏究會 1935.
梅原末治 : 「昭和十年度樂浪迫蹟(古壇土城蹟)調査經過」 『昭和十年度古蹟調 査槪報』 朝鮮古蹟硏究會 1936. 田窟眞吾 • 梅原末治 : 「樂浪梧野里 二 五號坦(J)調査」 『昭和十二年度古蹟調査 報告』 1938. 梅原末治 • 藤田亮策編著 : 『朝鮮古文化綜鑑』 第 - • 第二 • 第三卷 養德社 天理 1947 • 1948 • 1959. 小場恒吉 • 小泉顯夫 • 樞本杜人 外 : 『樂浪漢墓第一冊-大正十三年度發堀調査 報告』 樂浪漢墓刊行會 1974. 椎本杜人 • 中村春 ~ : 『樂浪漢 墓 第二冊-石巖里二一九號壇發堀調査報告』 樂 浪漢 墓 刊行會 1975. 리순진 : 「운성리유적발굴보고」 『고고학자료집』 제 4 집(사회과학원고고학연구 소) 사회 과학출판사 평 양 1974. 사회과학원고고학연구소 : 「정백동분묘군발굴보고」 『고고학자료집』 제 5 집 사 회과학출판사 평양 1978.
낙랑의 묘제 중 하나로서 중국의 束 漢 과 魏 晋 ·시기에 유행한 형식이 대동강유역에 들어와 유행한 묘제이다. 전실분은 지면을 파서 토광을 만든 후 그 내부에 地울 사용하여 묘실을 축조한 지하식구조이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전축벽체 위에 목재 또는 판상석으로 架構한 형식도 있다. 구조형식은 대체로 현실과 연도만으로 형성된 單室墓와 현실 외 에 전실이 있는 二 室墓, 그리고 전실의 일측 또는 양측에 側室이 있 는 三 室墓로 나누어진다 .178) 천정형식은 窓篠狀天井이 주류를 이루 고, 목재 또는 석재의 가구인 경우는 平天井을 형성하였다. 현실의 평면형상은 거의 방형에 가까운 형상이 많고 예외적으로 장방형이 있다. 그리고 벽체는 外뿔한 鼓腹形 또는 桐張形이 많으 며, 이 현상은 특히 이실묘 • 삼실묘와 후기로 갈수록 두드러진다. 방형의 묘실이 많은 것은 본래 合葬을 전제로 발생한 묘제이고, 지
178) 전실묘에 관한 연구는 洪滑植(「樂浪坤築墓에 대한 一考察」 『釜大史學』 17 釜 山大學校史學會)과 高久健二(『樂浪古項文化硏究』 學硏文化社 1995) 의 연구가 있다. 전실분의 형식분류도 자세하게 되어 있어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여기서 는 보다 간결하게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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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옥을 이상으로 한 궁륭상천정을 실현하기 위한 구조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 묘실을 축조한 전 중에는 전의 작은 단면에 突起形 으로 돌출된 부분이 있고, 그에 대응되는 다른 전에는 方穴이 있어 서로 맞게 되 어 있댜 이것은 일탈하기 쉬운 전을 고정시키고 측면에서 오는 압 력을 고루 분산시키기 위한 기술적 배려로 보인다. 바닥은 전을 側笠하여 삿자리문양식으로 배열하였다. 전실분은 대략 목곽묘가 쇠퇴하기 시작하는 lC 경에 출현하여 3C 말경 또는 4C 초에 소멸 횡혈식 석실분과 대체되어 자취를 감춘다. 塘壁體石蓋는 전실분에서 횡혈식 석실분으로의 각기 형식 발전상 과도기적 구조를 보여 주는 것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전실분이 목곽묘와 석실분과는 달리 고구려에서 계승되지 못한 것은, 전을 만 들어 축조하는 데 경비가 너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목재와 돌이 많이 산출되기 때문일 것이다. 약 300 년 후에 백제의 웅진시대에 재 출현하는데 이것은 중국 남조의 영향이다. 3.3 壅稽墓 한반도에서 그 시기가 최고로 올라가는 옹관은 청동기시대의 무 문토가 옹관이댜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신석기시대인 仰紹文化期 에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西安의 半坡遺蹟에서는 대체로 유 • 소아의 무덤으로 다수 나타나는데, 성인의 공동묘지와는 구역을 달 리하여 住居 주변에 매장하였다. 여기서도 대개 직립이 일반적이며, 신석기시대 이후 한대까지도 옹관은 계승된다. 장강하류역에서도 신석시시대 이후 전국시대까지의 토돈묘 내에 하나의 매장형식으로 서 옹관이 흔히 끼어 있다. 한반도의 옹관은 중국의 신석기시대 이 후의 황하유역의 앙소문화 옹관의 전통과 토돈묘의 옹관이 함께 영 향을 미천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의 경우도 繩文時代 單壅의 직립옹
관이 유행하였고, 彌生時代는 특히 九州지방에서 대형 전용관의 옹 관이 성행하였다. 부여 송국리의 석관묘와 주거지군에서 발견된 옹관은 4 기이다. 구조는 15 지 구의 경 우를 보면 지 름 0.9m, 깊 이 O.Sm 의 얕은 구덩 이 롤 파고. 다시 그 안에 장축 0.52m, 단축 0.48m. 깊이 0.7m 의 타원 형 內穴을 판 후. 그 바닥에 지름 O.llm, 깊이 0.6m 의 排水孔을 뚫 었는데. 이것이 옹관의 土玩(구덩이)이다. 구덩이 안에는 높이 0.57m, 구경 0.23m 의 무문토기 옹( 바닥에 구멍 이 뚫려 있는) 을 직 립 하고, 길이 0.27m, 두께 0.12m 의 판상석을 덮은 合蓋式 裵稽이다. 나 머지 3 기의 형식도 이와 비슷하다 .179) 公州市 松鶴里 소라실에서 발견된 옹관은 기고가 78cm 에 달하는 무문토기 壅으로서 구경이 32cm 이고, 기형은 마치 고구마의 머리를 잘라 낸 밑동과 비슷하고. 축약된 平底에는 구멍이 나 있다. 恒 Im, 깊이 Im 의 토광 안에 다 시 너비 0.2~0.3m, 깊이 O.Sm 의 內穴올 파고, 이 내혈에 옹을 直立 시키고, 판석으로 덮었다 .180) 또 공주시 남산리의 경우는 옹을 橫置 한 형식이었다 .18 1) 토갱 바닥에 구멍을 뚫고, 옹의 바닥에도 구멍을 뚫는 것은 배수공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광주 신창동에서 발견된 옹관은 응관묘 단지에 집중 분포된 옹관 이다. 한반도의 응관은 거의 대부분이 다른 형식의 분묘에 副從의 위치에 존재하는 데 반해. 이 곳은 중국이나 일본에서와 같이 옹관 묘만의 공동묘지이다. 여기는 極樂江邊의 微高地의 末端部에 위치 하며, 4mX28m 면적에서 모두 53 개가 지면 아래 0.2~0 .3 m 에서 발 견되었다. 형식은 혼히 보는 고구마형의 무문토기 옹 2 개를 횡치 合 口한 형식이며. 길이는 0 .4 5~1.3m 의 크기이다. 발견유물로는 무문 179) 姜仁求 • 李健茂 • 韓永熙 • 李康承 : 『松菊里 1 』 本文 國立中央博物館 1979. pp9 5-98. 180) 앞에 든 먀稽무古噴硏究』 ppl3 9-140. 181) 앞에 든 갸稽円古壇硏究』 ppl 41-160.
토기 3 개. 마제석기 4 개. 청동제검파두식 1 개. 철편 3 개 등이 있는 데, 토기와 청동기로 보아 BC 1~ A D IC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182) 초기 철기시대의 옹관은 중국에서 신석기시대 이후 계속해서 한반 도로 영향을 미쳐 무문토기옹관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영산강 유역의 토축묘 내의 옹관과 삼국시대 석실분. 석곽분의 분구 내에 副 從式으로 존재하는 옹관묘에 대해서는 각 시대에서 다루기로 한다. 4 鐵器時代(三國~高麗)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가 중국의 제국과 왜와 더불어 국제관계를 형성하고, 보다 나은 경제 • 사회적 조건에서 선 진문화를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소화하여 빛나는 문화를 이룩하였다. 그것이 당연히 고분문화에도 잘 나타났다. 古壇은 전시대에 비하여 종류가 다양해지고. 부장유물의 수준도 높아졌다. 고분의 종류에는 석묘계통의 積石塚 • 積石木鄒壤 • 石鄒墓 • 石室 壇과 토묘계통의 土塘墓(土塘木稽墓 • 土塘木郡墓) • 周溝土塘墓 • 土 築墓 • 壅稽墓 • 火葬墓 등의 고분이 발전하고 변천해 갔다. 이들 종 류 중 적석총·석곽묘·토광묘·옹관묘는 토착화된지 오래 되었으 나 그 외 積石木鄒壇과 토축묘 그리고 석실분만은 삼국시대에 와서 발생하거나 새로 형성되어 출현한 새로운 묘제이다. 전통적인 묘제 중 순수토광묘와 석곽묘처럼 청동기시대, 신석기시대까지 소급하여 그 기원을 확실히 파악할 수 없는 형식도 있지만, 적석총 • 土塘木稽 墓 • 土塘木柳墓처럼 청동기시대에 유입되어 일찍 토착화된 것들도 있다. 이들은 종족 이동시 함께 들어온 것도 있지만. 종족과는 별도 로 문화만 전래된 것도 있다. 아무튼 묘제는 기원과 계통상으로 보 182) 金元龍 : 璋 H 昌里壅稽墓地』 서울大學校出版部 1964.
면. 土坡 木 稽 墓 · 土 坡木鄒 墓 ·토축묘·옹관묘·화장묘·석실분들은 중국지역에서. 적석총 • 석관묘는 장성지대 • 몽고 • 시베리아지방으 로부터 요녕성지방에 정착한 후 에 각각 한반도로 유입되었다. 그리 고 積 石木鄕 壇 만은 경주지방에서 적석총 요소와 土 城木鄒 墓 요소가 合成되어 발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새로운 묘제가 발생한다거나 외부로부터 전래 유입되는 경우 국 내 사회의 자체적인 변화 발전의 분위기 속에서 新文物과 함께 同 伴流入되어 역사 발전상 새로운 轉機 를 마련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 삼국시대 묘제의 변천은 각국의 사회발전과 동아시아의 國 際情勢 와 관련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다음에 각국의 주류를 이루었던 묘제를 중심으로 설명해 나가기로 한다. 4.1 高句麗 및 渤海古壇 고구려 고분은, 고분의 분구를 축조한 재료에 따라 돌로 축조한 적석총과 흙으로 분구를 축조한 봉토분의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이 두 종류의 고분은 계기적으로 출현하여 고구려 묘제의 주류를 이루 며 발전하였다. 이외의 토광묘와 석곽묘는 남부지방의 다른 나라와 는 달리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 점은 지금까지 중국과 북한학계 에서 적석총과 석실분에 대한 조사연구에만 치중해 왔기 때문이라 고 생각된댜 적석총과 석실분은 재료와 구조면에서 뿐만 아니라, 유행한 시기와 분포구역에서도 차이가 있고, 또 기원과 계통에서도 相異하다. 적석총 • 봉토분의 순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4.1.1 積石塚 (1) 積石塚의 分布와 構造型式 적석총의 분포구역은 압록강유역과 대동강유역에 주로 밀집 분포
되어 있댜 고구려의 초기 중심지였던 압록강 본류유역의 洞溝 평야 와 주변 산록 • 鳥牙里 • 西海里 • 法洞里 • 雲 坪里 • 蓮舞里 등지. 지 류인 長慈江 • 慈城江 유역의 深賞里 • 魯南里 와 松 岩里 • 農淸里 등지, 海江 4 富爾江 (冬 佳江 )유역의 高力墓子 村, 植林 河유역의 大高 力 墓 子 村 등지에 수십 기 또는 수백 기씩 무리를 지은 고분군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대동강유역의 평양지방에는 大 成山 • 晩 達 山 등지 에 분포되어 있으나 , 압록강유역에 비하면 수량도 적고 규모도 빈약 한편이다. 고분군은 산중턱에서 시작하여 산록과 평지로 내려오면서 시기를 달리하여 분포된 경우도 있고, 또 강의 流水 가까운 推 積層 언덕(강 탁)에서 강안의 편평한 충적대지로 전개되는 형태로 분포되어 있는 경우도 있댜 강탁에 자리잡은 고분은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강 물을 내려다볼 수 있고,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거대하게 보여 지위 높은 사람의 무덤으로서 위관을 나타낸다. 적석총을 축조하는 방식은 초기의 소형인 경우는 먼저 지면의 부 토층을 걷어 내고 고르게 정지한 후 냇돌로 기초가 되는 墓壇 (墓 臺 )을 만들고, 그 위에 郡 室을 만든 후 그 위와 주위에 적석하여 분 구를 만든다. 적석의 분구는 일정하지 않으나 초기의 것들은 단순한 돌무지처 럼 되었고, 다음 단계에는 피라미드형의 윗머리를 잘라 낸 것과 같 은 方 臺 形( 截 頭方 雜形 )의 돌무지 형태를 이루며, 중기 이후로 내려 가면 분구는 定型을 이루며 계단형으로 변한다 . 규모는 방대형의 한 변이 대략 13~15m 이다. 계단식의 경우 治石한 長 臺 形의 돌울 사용 한댜 계단은 3 단이 일반적이고 洞 溝 의 장군총과 같이 7 단을 이룬 것도 있댜 183) 183) 姜 仁 求 : 「 平壤學界 의 高 句 麗 古 噴 調査 硏究의 成 果 分析」 『北 韓 의 韓國學 硏究 成 果 分析』 ( 歷 史 藝術篇 ) 韓國精神 文化硏究院 1991 .
내부시설로는 석곽과 석실이 있는데. 석곽의 경우는 묘단 위에 설치하며 장방형이다. 석실의 경우는 장군총에서 보는 바와 같이 횡 혈식으로서 疾道와 玄室로 이루어진 것도 있다. 이 경우는 봉토분의 횡혈식 석실이 출현한 후에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압록강유역에 분포하고 있는 적석총 중에는 두 종류의 異形壇丘 가 있댜 한 종류는 四隅突出形고분이고, 다른 한 종류는 圓方形(前 方後圓形)古壇이다. 전자는 慈江道 楚山郡 蓮舞里에서 발견되었는 데, 분구는 無基壇積石塚으로 깬돌로 축조한 묘곽이 있고, 분구의 네 모서리에 일정한 면적의 돌을 깔아서 돌출시킨 부분이 발견되었 다. 후자는 자강도 초산군 雲坪里 6 호분과 자성군 송암리 고분군의 33 호분 • 88 호분 • 106 호분 등이 알려졌다. 무기단적석총인 이들 고 분은 圓丘 앞에 方壇이 부설된 형식을 하고 있다. 앞에 든 이들 異 形古壇은 특히 日本古項의 源流로서 주목받고 있다 .184) 앞에 든 예와 같은 구조의 적석총은 일반적인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분구와 내부시설의 구조형식 차이에 기준을 두고 적석총의 형식을 분류한다. 여기에는 鄭相雲 ,185) 鄭燦永 ,186) 朱榮憲 ,187) 李殿 福 ,188) 田村晃一 ,189) 魏存誠 ,190) 姜仁求 191) 등 비교적 많은 연구자 들의 형식분류가 제출되어 있다. 이들 중 필자의 형식분류를 간단히 184) 앞의 駐와 같음 . 185) 정백운 : 「조선고대 무덤에 관한 연구 (2) 」 『문화유산』 1957-2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186) 정찬영 : 「고구려적석총에 관하여」 『문화유산』 1961-5. 187) 주영헌 : 「고구려 적석 무덤에 관한 연구」 『문화유산』 1962-2. 188) 李殿福 : 「集安高句麗墓硏究」 『考古學報』 1980-2. 189) 田村晃一 : 5 句麗(T)東 71 / 7 (J)考古學』 東京六興出版 1990. 190) 魏存誠 : 「高句麗積石墓的類型和演變」 『考古學報』 1987- 3. 191 ) 姜仁求 : 「新羅積石封土壇의 구조와 계통」 야韋國史論』 7 서울대학교국사학과 1981 . 앞에 든 논문 「평양학계의 고구려고분 조사연구의 성과분석」 p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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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純粹積石塚 : 심귀리 75 호 • 78 호 • 92 호가 여기에 속한다. ® 無基壇式鄒積石塚 : 심귀리 73 호를 들 수 있다. 이 두 형식은 외관이 그저 단순한 돌무지처럼 보이고 내부의 매 장주체시설이 분명하지 않은 구조이다. 당초부터 鄒과 같은 시설이 없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발굴시 돌을 하나씩 들어낼 때 명확한 구 분을 지울 수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 ® 基壇式 鄒 積 石塚 : 良民 73 호가 여기에 속한다. ® 基壇 階段式 鄕積石塚 : 高力墓子村 15 호가 여기에 속한다. ® 基壇階段式 石室積石塚 : 고력묘자촌 11 호 • 將軍塚 등이 여기 에 속한댜 ® 封石石室塚 : 적석총류 중에서 후기에 출현한 것으로, 封土석 실분의 封土 대신에 규모가 작은 자갈 등으로 분구를 형성한 것이 다. 橋樹林河유역 대고력묘군 43 호가 여기에 속한다 .192) (2) 積石塚의 起源과 編年 고구려 적석총의 기원에 관해서는 일제시대부터 논의되기 시작하 여, 석관묘기원설 • 지석묘기원설 • 원시돌각담무덤기원설 등 여러 견해가 제출되어 있다. 1973 년에 정찬영 등은 고구려의 적석총은 고조선시기인 요동의 노철산 • 장군산의 돌각담무덤이 강상 • 누상 • 쌍타자의 돌각담무덤 으로 이어지고, 이것은 다시 장자강유역의 돌각담무덤으로 계승된 다고 하여 해방 전 연구자들의 기원설을 부정하였다 . 193) 또 이와는 달리 田村晃一은 集安의 五道嶺溝門, 寬句縣의 太平暗公社 泡子沿大 隊 같은 현의 長句公社 四平街大隊, 鳳城縣 弟兄山公社三家子大隊 192) 앞의 注 와 같음 p65 . 193) 정찬영 : 「기원 4 세기까지의 고구려묘제에 관한 연구」 『고고민속논문집』 5 사 회과학출판사 1973. pp48 -5 1 .
등지에서 청동유물이 나온 적석총이 고구려 적석총의 기원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처럼 적석총에서 細形銅劍이 출토되고 있어서 종 래 기원 전후 시기로 보았던 견해는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리고 적석총은 3C 이후 封土壇의 출현과 더불어 공존하다가 5C 초 장군총을 끝으로 봉토분과 대체되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적 석총의 開始와 고구려의 건국시기에 관한 문제이다. 학계에서 고구 려의 건국시기에 대하여 『三國史記』 등의 기사를 근거로 하여 기원 전후 시기로 보아 왔던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근년에 李基白이 『三國志』 東夷傳 東沃沮傳의 13C 75 년에 第一玄英郡이 蘇子河유역 으로 옮겨간’ 기사를 근거로 하여, 고구려의 존재는 압록강유역에서 BC 75 년이나 그 이전인 BC 107 년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하였 댜 194) 필자도 이 견해에 찬동하는 바이다. 그 이유는 앞에서 든 압 록강유역의 集安에서 丹東까지 청동기를 출토하는 적석총은 바로 고구려의 근거라고 믿어지고, 현토군의 首縣인 高句麗)縣은 漢武帝가 관할하에 두고자 하였던 바로 그 실체이며, 이것이 고구려의 城邑國 家 단계라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集安의 오도령구문 적석총의 연대는 BC 3C 까지 올려볼 수 있는 초기의 적석총임이 이미 밝혀졌다 .195) 그러므로 압록강유역에 분포 하고 있는 적석총의 시기는 이 시기 이후부터 편년될 수 있다. (3) 積石塚과 王陵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왕릉은 壁畵古壇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것 은 적석총은 외형이 돌무지와 같은 형상을 하고, 내부시설이 비교적 소형 석곽으로 되어 있으며. 호화로운 벽화가 없는 둥 횡혈식 석실 194) 李基白 : 「고구려의 국가형성문제」 『한국 고대의 국가와 사회』 역사학회편 一 潮閣 1990. p81 . 195) 集安縣文物保管所 : 「集安發現靑銅短劍墓」 『考古』 1981-5. p46 7-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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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비해 소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壁畵古項의 개시는 3C 경 으로 소급한다 하더라도 대형석실분의 호화로운 벽화의 연대는 거 의 모두 4C 후반 이후로 내려가기 때문에 국내성 시대의 왕릉은 대 부분 적석총에서 찾아야 한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에는 동명성왕 이후 19 대 왕 중 4 왕을 제외한 15 왕의 왕릉 위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대수 와o 며o 사망시기 장지 1 대 始祖東明聖王 BC 19 년 9 월 龍山 2 대 琉璃明王 AD 17 년 10 월 豆谷東原 豆谷離宮 3 대 大武神王 44 년 IO 월 大獸村原 4 대 閔中王 48 년 閔中原(石窟) 5 대 慕本王 53 년 11 월 慕本原 피살 6 대 太祖大王 165 년 3 월 ? 7 대 次大王 165 년 10 월 ? 피살 8 대 新大王 179 년 12 월 故國原 9 대 故國川王 197 년 5 월 故國 )1I 原 10 대 山上王 227 년 5 월 山上陵 11 대 東),,王 248 년 9 월 柴原 12 대 中川王 270 년 10 월 中川原 13 대 西川王 292 년 西 )II 原 14 대 烽上王 300 년 烽山原 자살 15 대 美川王 331 년 2 월 美川原 16 대 故國原王 371 년 10 월 故國原 전사 17 대 小獸林王 384 년 11 월 1 j、獸林 18 대 故國壤王 392 년 5 월 故國壤 19 대 廣開土王 414 년 10 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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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1 通溝將軍塚東南面
그림 42 通溝 將 軍 塚 頂上部
그립 43 通溝 將軍塚 階塚
이상의 자료로 왕릉 소재지명에 따라서 왕의 시호를 정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지명에는 용산 등 단순한 고유명사가 있고, 고 국원 등 관념화된 지명이 있는가 하면. 중천원 등 지형을 표시한 지 명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에 대하여 하나씩 비정하여 보자. 시조 동명성왕은 용산에 장사하였는데, 集 安시의 동북방 5.5km 거리에 있는 土口子山(해발 705m) 을 예로부터 용산으로 불러 왔다. 장군총은 용산의 남록 구릉상에 위 치 한다. 관념화된 지명으로 고국원 • 고국천원 • 고국양 등이 있고, 이 곳 에 4 왕의 능이 축조되었다. ‘고국’이란 명칭은 유래가 있는 것으로 보인댜 죽 압록강유역의 楠정百(大水정目)의 중심지로서 浪君南間의 근거지였고, 후일 漢의 流海郡이 잠시 설치되었던 곳이 洞 溝 이며, 洞溝의 옛치소가 ‘故國' 으로 표현되어 온 것이 아닌가 추측한 다 .196) 그 곳이 바로 이차에 걸쳐 도성이 있었던 還都山城으로 추 정된다. 환도성 안의 서측 경사지에도 37 기의 고분 (36 기는 적석총이 고 1 기는 봉토석실분임)이 있고 ,197) 또 산성의 동남 지근거리 小淸 河유역에 折天井塚 • 龜甲塚 • 蓮花塚 • 五字塚 • 兄塚 • 弟塚 등이 포 함된 山城下墓區의 고분군이 있다 . 산성 내의 적석총에는 無 基壇積 石塚 • 基壇積石塚 • 基壇階段式 積 石塚 등이 분포되어 있어, 3C 이 전의 고식과 4C 대의 형식이 함께 들어 있다. 억측이겠지만, 산성 내 의 적석총군은 고국원, 산성하묘 구내의 적석총은 고국천원, 고국양 등으로 표현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뿐이다 . 198) 196) 이에 대하여는 李丙 照 의 견해 참조(『韓 國 古代史硏究』 pp3 55-357). 197) 앞에 든 「 集 安 m 歷 史文物& 高 句 麗 遺 蹟 」 『好太王碑& 高 句麗遣 蹟 』 p19 5. 李殿福 : 「 高 句麗丸都山城」 『文物』 1982-6. pp8 4-85. 198) 필자는 안악 3 호분을 고국원왕의 능으로 추정한 바 있다(앞에 든 『북한의 한 국학연구성과 분석』 pp9 4-99). 그러나 거기서는 반드시 고국원왕릉이라기보다. 변방의 일개 귀화장군의 무덤으로 보기에는 석실의 규모와 벽화의 호화면에서 볼 때 왕릉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더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다시 환도성 내의 적석총에서 고국원왕릉을 찾는 노력을 해 본다. 결론은 앞으로 더 많은 자료를
기다려 검토한 뒤에 내보려고 한다.
중천왕의 능이 있는 곳은 중천원이라 하였다. 중천원은 중천유역 의 언덕이다. 중천은 洞溝에서 동 • 중 • 서의 세 하천 가운데 중간 하천에 해당할 것이다. 중천은 洞溝河(魏兒江)로 비정되고, 고분군 은 만보정묘구일 것으로 추측되는데. 특히 이 묘구에는 萬費汀 1368 호묘 등 고식고분이 포함되어 있다. 서천왕릉이 있는 서천원은 洞溝의 서쪽에 있는 하천으로 현재의 麻線溝河가 있으며, 이 하천양안에는 마선구묘구의 고분군이 있으 며, 천추총 • 西大塚 등이 들어 있다. 천추총은 고구려 최대의 적석 총으로 일변 80~85m, 높이 15m 이며. 여기서는 ‘千秋萬歲永固 ‘保 固乾坤相畢’ 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 塘이 출토된 바 있다. 4C 말의 고국양왕릉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199) 같은 마선구묘구에 있는 西大塚에 관하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적석총으로는 최대 5 기 에 포함되는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200) 동천왕의 능은 柴原에 있다고 하였는데, 『三國史記』의 기록에 의 하면 장사 당일 많은 自死者를 나무를 꺾어서 덮었다고 하여 시원 이라고 한다 하였다. 본래의 지명은 동천왕의 명과 같이 東川原이었 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동천은 洞溝의 동측에 있는 하천일 텐데. 주변에 이렇다 할 큰 하천은 없으며, 소하천 가까이 下解放墓 區(下羊魚頭)의 고분군이 있다. 이 곳 용산의 남록에서 압록강 연안 에 이르는 사면과 평지에 31 기의 고분군이 있고. 이 속에 牟頭婁 塚 • 環文塚 • 31 호 벽화묘 등이 들어 있다. 왕릉소재지로서 용산을 제외한 개별지명은 유리왕의 두곡동원 • 대무신왕의 대수촌원 • 민중왕의 민중원(석굴) • 모본왕의 모본원 • 산상왕의 산상원 • 봉상왕의 봉산원 • 미천왕의 미천원 • 소수림왕의 소수림 둥이 있는데, 이 왕릉들은 따로 별개의 장소에 소재하는 것
199) 앞에 든 「千秋墓 太王陵 將軍塚」 『好太王碑&高句麗遺蹟』 p28 5. 200) 앞에 든 「千秋墓 太王陵 將軍塚」 『好太王碑&高句麗遺蹟』 p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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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2 良民 따노 ”國祚3學m 報』 19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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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니라, 우산하묘구 중에 포함된 개별묘지가 아닌가 추측된다. 禹山墓區는, 남북은 우산(如山, 해발 773m) 록에서 압록강안까지 . 동 서는 용산록에서 洞溝하까지 길이 6km 에 달하는 가장 넓은 묘구이 며. 수천 기의 묘가 집중되어 있고 거대묘도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 는 곳이다. 유명한 고분만도 장군총 • 태왕릉 • 임강총(이상 3 기는 거대한 적석총으로 왕릉으로 비정되는 고분이다) • 오회분 • 사신 총 • 삼실총 • 무용총 • 각저총(이상 壁畵古壇) 등과 광개토왕릉바가 있는 곳이다 .20 1) 여기의 벽화분들은 천도 후에 이 곳에 남아 있던 201 ) 동명성왕 사망 후 유리왕은 국내성으로의 천도를 구체적으로 계획하고(유리 왕 21 년, AD 2 년) 이듬해(유리왕 23 년, AD 3 년) 결행하였다. 유리왕은 이미 부왕의 능을 國內城龍山麗에 축조하였는데, 이것도 천도와 함께 동명성왕의 건 국 이전부터 이 지역에 있던 예맥집단과의 세력관계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 아 닌가추측된다.
재지세력가들의 묘로 추정되며, 유리왕 때 국내성으로 천도한 후에 도 여전히 集安의 중추부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4.1.2 封土石室項 봉토분은 내부구조형식에 따라 여러 종류로 분류되고 있으며. 그 중 석실분은 고구려의 전기 중반 이후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가장 중 요한 묘제이다. (1) 封土石室頃의 分布와 構造型式 봉토분은 앞에서 말한 적석총과 함께 고구려 묘제의 대종을 이루 고 있는 형식이댜 적석총이 주로 압록강유역에만 분포되어 있는 데 비해, 봉토분은 압록강유역과 대동강유역 모두에 다량으로 분포되어 있다. 압록강유역에서는 강턱에 적석총이 있고, 그 뒤쪽 평야지대에 봉토분이 분포하고 있다. 대동강유역에서는 산의 중턱이나 산록의 남 사면에 봉토분이 다수 분포하고, 후기에 와서는 보다 평지로 내려온 다. 그리고 대체로 고분군을 이루고 나타나는데, 압록강유역에서는 集 安의 洞溝평야와 산록, 자강도 초산군의 심귀리 • 로남리 • 豊淸里 등지의 고분군, 자성군 송암리 고분군, 桓仁縣 고력묘자촌의 고분군, 植林河의 大高力墓子村의 고분군 등이 유명하다. 洞溝에서는 분포 하고 있는 지형에 따라 6 구의 고분군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체적으 로 약 1 만 5000 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대동강유역에서는 평양 지방의 龍山里·戊進里·高山里·土浦里·內里·伏獅里, 그 외 江 西 • 安岳 등지에 수기 또는 수십 기의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다 .202) 봉토분으로 분류되는 고분은 구조상 분구는 봉토로 이루어지고, 내부시설은 횡혈식 석실을 갖춘 고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따라 202) 姜仁求 : 「高句麗封土石室壇의 再檢討」 먀韋國考古學報』 25 집 한국고고학회 1990. p62 .
서 구조에 관한 논의는 분구와 석실 양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분 구의 형상은 方 臺 形(截頭方垂形)과 원형분의 2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분구를 형성한 재료면에서 보면 순수한 봉토로 이루어진 분 구가 일반적이지만, 평양지방의 소수의 분구에는 壇丘 下돕못에 치석 한 장대석으로 기단을 돌린 基壇式 봉토분이 있다. 석실은 대개 할석을 재료로 하여, 연도와 현실을 기본구조로 단실 묘를 축조하나, 여기에 側室이나 籠室이 더 시설된 것도 있고, 또 前室과 後室 2 실로 이루어진 것도 있다. 그리고 천정의 형식도 다양하여 平天井(벽상에서 판석 수매만을 연결하여 덮은 것) • 折天井(판석으로 4 면 벽상에서 접어 올린 것) • 窓綴狀天井 (4 면 벽상에서 할석을 사용하여 둥근 곡면으로 올 리고 최상부에 1 매의 판석으로 마무리한 것) • 고임천정 (4 면 벽상에 서 장대석으로 가로 올려놓는 것과 네 귀퉁이에서 가로질러 올려놓 아 천정면적을 좁히면서 올리고 최후에 판석으로 마무리한 것) 둥 여러 구조가 나타나고 있다. • 연도의 위치도 3 종이나 있는데, 1 은 남벽의 중앙에, 2 는 남벽의 우측에, 3 은 남벽의 좌측에 부설하기도 한다. 연대상으로 보면 향전 좌측의 경우가 고식이다. 바닥은 판상석을 잇대어 전면을 깐 경우도 있고, 또 稽 臺 를 만들 어서 그 위에 관을 올려놓게 하는 것 등이 있다. 앞에서 잠깐 말한 바 있듯이 벽과 천정은 대개 할석으로 축조하나 경우에 따라서는 판석을 잘 치석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표면에 회를 두껍게 발라서 고르게 整面하고, 그 위에 벽화를 그리기도 한다. 봉토석실분은 대체로 3~7C 까지 적석총에 이어서 고구려 묘제의 주류를 이룬 고분형식으로서 고구려 영역은 말할 것도 없고, 남쪽의 백제 • 신라 • 가야와 倭에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만큼 구조가 부분적으로 변화하여 복잡하고 형식도 다양하다. 그러나 형식분류
에 대한 연구는 매우 드문 편이다. 근년에 필자가 시도한 형식분류 를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203) 제 1 형 기단봉토석실분 A 식 : 單室墓 a 유형 : 평 천정 단실묘(l Aa 식 ) 제 2 형 봉토석실분(무기단의 봉토석실분) A 식 : 單室墓 a 유형 : 평천정단실묘 (2Aa 식) b 유형 : 절천정단실묘 (2Ab 식) c 유형 : 궁륭천정단실묘 (2Ac 식) d 유형 : 고임천정단실묘 (2Ad 식) B 식 : 籠側室墓 (2B 식 ) C 식 : 二室墓 (2C 식 ) (2) 封土石室壤의 起源과 編年 고구려 봉토석실분의 기원은 壁畵古壇의 기원과 함께 밝혀지고 있다. 그것은 기원을 밝힐 수 있는 자료를 壁畵古壇에서 많이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壁畵古壇의 기원문제는 두 가지의 문제를 내포하 고 있다. 하나는 횡혈식 석실분의 기원이고, 다른 하나는 壁盡古壇 의 기원이다. 전자는 家族合葬을 실현하기 위한 묘실의 확장과 관계 가 있는데, 묘실확장을 위해서는 묘실의 天井架構技術의 발전이 수 반되어야 했고, 이 문제는 중국의 漢代에 해결되었다. 그러므로 고 구려 횡혈식 석실분의 개시는 遼東지방에 들어와 있던 漢의 塘室壇 구조에서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고 생각되며, 그 시기는 대략 3C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204) 후자에 대해서는 集安의 萬寶汀 1368 호 가 발견되기까지는 375 년의 墨書銘이 있는 安岳 3 號壇이 시원양식 203) 이상은 앞에 든 「高句麗封土石室壇의 再檢討」 p4 9 를 참조합. 204) 앞에 든 李殿福의 논문 pl7 6.
으로 추정되어 205) 왔으나. 현재는 대체로 3C 경의 만보정 1368 호분 의 벽화를 가장 오래 된 것으로 보는 추세에 있다. 그 근거는 다음 과 같댜 즉 석실분의 구조는 ‘기' 자형의 단실묘로서 천정구조가 窓 篠式 또는 四阿式으로 地築噴을 모방하였고, 벽화 내용에 목조건물 의 간단한 科扶양식과 石製부뚜막 등이 있으며. 이것들이 초기의 양 식이란 점에서 현재 고구려 최고의 벽화로 추정하고 있다. (3) 壁畵古壤 고구려의 석실분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壁 畵 古壇이 많이 축 조되었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발견 보고된 壁 畵 古壇은 90 여 기에 달 한다고 전한다. 벽화는 석실의 벽면과 천정에 주로 그리는데, 灰壁 에 그리는 경우는 회가 젖은 상태에서 그림을 그려 회가 마르면서 속으로 깊이 스며들게 하는 프레스코 기법을 채용한 예가 있으며, 墨線으로 먼저 輪廊을 그리고 彩色하였다 .206) 벽화의 내용은 주제 별로 보면 人物 圖 • 人物風俗圖 • 四神圖 등으로 나누어진다. 유명한 壁 畵 古壇으로는 洞 溝 지방의 舞踊塚 • 角抵塚 • 通 溝 四神塚 • 五盜壇 5 號 • 牟頭 婁 塚 , 평양지방의 眞 坡里 1 號壇 • 藥 水里 벽화분 • 江西大 墓 • 江西中墓 • 水山里 벽화분 • 兪神塚 ·雙盆塚 • 遼東城塚 • 安岳 3 號壇·德興里 벽화분 등이 잘 알려져 있다 . 이 중 牟頭 婁 塚·安岳 3 號壤 • 德興里古壇은 墨書 墓誌銘이 있어 壁 畵 古壇 편년에 좋은 자료 가 되고 있다. 이 고분들을 차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牟頭婁塚은 洞溝의 龍山 남록에 위치하는 원형 봉토석실분으 로 분구의 주위는 약 70m 이고 높이는 4m 이며, 석실은 연도 전실 甫 道 후실로 이루어진 二室墓이다. 전실의 천정은 四阿天井이고, 주실 은 採角漢井式으로 되어 있댜 벽화가 없는 대신 모두루묘지 800 자 205) 金元龍 : 「高句麗 壁盡 古壇의 起源에 대한 硏究」 『 袁 檀學 報』 21 집 1960. 206) 金元龍 : 瓚國美術史』 沮文社 1968. p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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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岳 第 3 號壤 墓室 斷面圖(南北 斷面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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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검/홍二岳 第 3 號壤二°E壁畵 配置:二圖( 後室東壁)巴요3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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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남아 있어 귀 중 한 자료가 되 고 있 다. 묵서명 중 중요한 부분은 •. . 奴 客 ···’ 도· 河伯之 孫 日月之子 鄒牟聖王元出 北 夫餘 …' •. .. 聖太王 …' •. .. 北 夫餘大 兄 円牟 … ' 도· 國 堅 上大開土 地好太 聖王 •• .' 등이 들어 있댜 명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모두루는 광개토대왕 시 大使 者 이며, 그의 조상 牟는 大 兄으로 왕을 도와 북부여 침략을 물리쳤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 무덤은 5C 중엽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 安岳 3 號壇은 황해도 안악군 五局里(구명 兪順里 • 柳 雪 里)의 구릉상에 위치한다. 분구는 방대형으로 남북 33m, 동서 30m, 높이 6m 이며, 내부 석실은 판석으로 축조하였는데, 연도 • 연실 • 전실 • 동측실 • 서측실 • 주실 • 회랑으로 이루어진 多室墓이다. 벽화의 내 용은, 전실 입구에 귀면, 전실에 무인 • 의장대 • 고취악대 • 씨름꾼, 서측실에 주인공 부부의 초상과 측근자의 생활, 동측실에 부엌 살림 살이 • 수레 • 우마, 회랑에 주인공의 출행행렬, 주실에 주인공의 실 내 무악, 연실에 호위병, 천정부에 연화문 • 일상 • 월상 • 장식문양 등으로 대단히 호화롭고 장중하게 그려져 있어 고구려 壁 畵 古壇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호화롭다. 묵서명은 다음과 같다. 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二十六日 쫒丑使持節都 督 諸 軍事 平東將 軍護 撫 夷 校尉 樂 浪 口昌黎玄 帶方太守都 □ 口幽州遼東平郭 口鄕敬上里冬 壽 字 口年六十九堯官 ® 德興里고분은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홍리의 舞鶴山 서
남줄기의 능선상에 위치한다. 가까운 거리에 강서 삼묘 를 비롯하여 水山里와 藥 水里의 壁盡古項 등이 있다. 분구의 형상은 잘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실되었다. 내부석실은 연도 • 전실 • 용도 • 주실로 이루어진 이실묘이고, 천정의 하부는 궁륭상의 곡면으로 좁히고 그 위는 平行漢井式으로 되어 있다 . 벽화는 전실에 주인공과 시중드는 사람, 太守群 행렬도 • 고취악대 • 수레 기둥 • 두공 등, 천정에 奉 牛 織 女 圖 ·은하수·신선들·환상적인 동물·일월성진·星宿 圖 ·三足 烏 와 두꺼비, 주실에 주인공 생활도 • 창고 • 활쏘기 • 불교행사 • 사 냥도 • 마구간 • 칠보행사도 등을 주제로 그렸다 . 주인공 鎭 은 409 년 인 광개토대왕 18 년에 사망하였다. 이 시기는 평양 천도 17 년 전으 로 아직 國內城에 도읍하고 있을 때인데, 원격지인 대동강유역에 이 와 같이 호화스러운 벽화가 있는 무덤을 축조했다는 사실은 당시에 이미 평양지방이 정치 • 경제 • 문화적으로 首都 다음가는 중요한 지 방이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묘지명은 다음과 같다. □□ 郡信都 0 都鄕 0 甘里 釋 加文佛弟子 □□ 氏 鎭 仕 位建威將 軍 口小大兄左將 軍 龍將軍遼東太守使持 節東 0 校尉幽州刺史鎭 年七十七堯 0 以永樂十八年 太 歲 在戊申十二月辛酉朔二十五日 乙酉成遷移玉柄周公相地 ••• 등 600 자의 명문이 있다. (4) 被葬者(主人公)問題 고구려의 고분은 규모면이나 축조 기술면에서 또 찬란한 벽화가 그려져 있는 점에서 삼국 중 단연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피장자가 알려져 있는 고분은 매우 드물다• 洞溝지방의 모두루총 • 평양지방
의 안악 3 호분 • 덕흥리 고분은 묵서명에 의하여 각각 ‘牟頭嬰' ‘冬 壽 ' ‘D 鎭 이라는 피장자의 이름이 밝혀져 있다. 그러나 이 중 안악 3 호분은 고분의 규모, 벽화의 호화로움과 다양함, 묵서명의 위치, 동 수라는 地方官의 지위와 묵서명의 내용 . 등을 이유로 美川王陵 또는 故國原王陵으로 수정 추정되고 있다 .207) 이외에 중요고분에 대하여는 그 나름의 피장자가 추정되고 있다. 集安의 장군총-광개토대왕릉 또는 장수왕릉, 태왕릉 -광개토대왕 릉 ,208) 平壤 眞坡里 10 호분 -東 明王陵 ,209) 平成 慶新里 1 호분(漢王 墓) -장 수왕릉, 平壤 土浦里 大塚 一 文咨王陵 또는 安藏王陵, 平壤 湖南里 四神塚 -安 原王陵 또는 陽原王陵 ,210) 江西大墓 -婦 陽王 陵 ,211 ) 江西 中墓 -陽 原王陵 또는 平原王陵 212) 등으로 각각 추정 되 고 있다. 묘지가 없는 상황에서 주인공을 추정하는 근거로는 고분의 위치, 고분의 규모, 축조기술, 벽화의 수준과 내용, 부장품의 수준 등 을 일차적 자료로 보고 있다. 集安지방의 경우는 『三國史記』에 장지 를 표시한 경우도 있고, 대개 왕의 왕호를 장지명으로 결정한 경우 가 많기 때문에 그것이 근거가 되기도 한댜 예를 들면, 慕本王 -慕 本原, 故國)||王-故國川原, 山上王-山上陵, 中川王-中 )1| 原, 西川 王-西川原, 峰上王-峰上原, 美川王 -美川原, 故國原王-故國原, 小 獸林王-小獸林, 故國壤王-故國壤 등이다. 이러한 관례는 다른 나 라에서는 찾을 수 없는 고구려만의 독특한 것이다. 이 예의 기준에 따르면, 논의가 분분한 ‘안악 3 호분 -미 천왕릉설 • 고국원왕릉설’ 은 207) 앞에 든 「平壤學界의 高句麗古項 調査硏究의 成果分析」 pp9 7-99. 208) 方起東 : 「千秋塚太王陵將軍塚」 『好太王碑之高句麗遺蹟』 讀賣新聞社 1992. pp2 30-252. 209) 최택선 : 「고구려 벽화무덤의 피장자에 관한 연구」 『고고민속논문집』 11 1988. pp45 -49. 210) 이상 앞에 든 「高句麗封土石室噴의 再檢討」 p69 . 211) 앞에 든 최택선의 논문 212) 앞에 든 「高句麗封土石室壇의 再檢討」 p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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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4 籠側室墓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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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子河北方의 石柳墓 遼陽三道邊 1 號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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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岳 3 號壤 內部 透視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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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8 安岳 3 號壇 內部(三佛)
그림 79 安岳 3 號壇 主人公 肖像
그림 80 安岳 3 號壇 墨耆銘
그림 81 集 安 五盜壇 外形
그림 82 集 安 五 蓋積 內部
그림 83 德興里 古壤 天井部(1)
그림 84 德興里 古壇 天井部 (2)
그림 85 德興里 古壇 主人公岡
그림 86 德興里古項墨書銘
그림 87 大同郡 大寶面 7 號壇
그림 88 江西 大墓
그림 89 江西 大墓 靑龍圓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4.1.3 渤海古項 (1) 分布와 構造型式 발해는 알다시피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지배계층은 고구려 의 귀족 관료층의 후예가, 일반 주민은 고구려 유민과 주변에 거주 하는 말갈 등 소수민족이 포함되어 있다. 또 발해는 동모산에서 진 국을 건국한 후 중경 • 상경 • 동경으로 차례로 천도하였다 .213) 그래 서 발해의 중요한 고분은 이들 수도의 부근에 분포하고 있다. 발해 의 이와 같은 전통에 따라서 고분의 형식도 지배계층에서는 고구려 식의 횡혈식 석실분이 주류를 이루었고, 피지배계층에서는 소형 석 곽분과 토광묘를 채 택 하였다 .214) 발해 고분은 대 략 1949 년 六頂山 에서 貞惠公主 墓 가 발견되면서부터 조사되기 시작하였다. 주요 분 포지는 吉林省 敦化縣 六頂山 • 和龍縣 北大, 黑龍江省 寧安縣 三 靈 屯과 南陽 大朱屯 • 林口縣 頭道河子 둥지가 알려져 있다. 이들 지역 의 고분은 수기 내지 수십 기씩 고분군을 이루고 있다. 육정산에는 약 80 기의 고분이 밀집 분포되어 있는데, 그 중 32 기 가 발굴 조사되었댜 이들은 敦化縣城에서 약 5km 떨어진 평야 중 에 6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야산의 서남 • 동남면의 산록과 중턱의 남사면에 두 개의 큰 군으로 나뉘어져 있다. 서측의 제 1 고분군에 30 여기, 동측의 제 2 고분군에 50 여 · 기가 있다. 제 1 고분군의 남측에 비 213) 방학봉 : 「발해수도의 변화발전에 관한 연구」 『渤海史硏究』 3. 1992. 214) 발해고분에 관한 자료는 다음의 논저를 참고로 하여 작성하였다. 朱榮 憲 (在日朝鮮人科學者協 會 歷史部會 譯 ) : 『渤海文化』 1978. 정영진 : 「발해무덤연구」 . 방학봉 : 「정혜공주묘와 정효공주묘에 대하여」 『渤海史硏究』 l 연변대학출판 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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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적 대형고분이 모여 있고, 그 중에 유명한 貞 惠公 主 (文 王 의 二 女) 묘가 조사되었다. 북대고분군은 頭道溝평야의 西古城 부근 평지에 약 300 기가 분포 되어 있다. 삼령둔고분군은 上京龍泉部의 북측 牧丹江의 대안평지에 분포되 어 있는데, 왕릉으로 알려진 대형고분군이 있다. 대주둔고분군은 역시 상경용천부의 서측 목단강 대안 台地上에 약 70 기 가 분포해 있다. 남양고분군은 상경용천부의 서북방 평지에 있다. 두도하자고분군은 약 70 기가 분포되어 있는데, 貞孝公主墓가 있다.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석실분은 원형봉토분이며, 내부구조는 현실 과 연도로 이루어진 단실묘이고, 완전지하식과 반지하식이 있다. 대 형석실의 경우는 천정이 고임식(妹角漢井式)천정과 平斜天井(折天 井)으로 형식이 나뉘고, 연도는 석실의 규모에 비해 약간 길며, 그 밖에는 긴 묘도가 있다. 貞惠公主墓는 방형의 현실에 남벽 중앙에 연도가 부설되었는데, 長臺石形의 자연석을 길이로 축조하고 천정부는 판상석으로 3 단축 한 후 최후에 큰 판석으로 덮었다. 규모는 길이 2.7m, 너비 2.9m, 잔 고 l.5m, 연도길이 2m 이다. 석실 벽면은 회를 발랐으나 연도 벽면에 약간 남아 있고, 尻床은 塘으로 축조하였다. 묘도는 길이가 11m 로 전을 깔아 만들었다. 연도에서 貞惠公主墓誌가 발견되었다. 珍陵으로 추정되고 있는 6 호분도 정혜공주묘와 구조형식은 같으 며, 내부에서 벽화편과 석사자편 등이 발견되었다. 삼령둔고분은 방형봉토분으로 되어 있으나, 분구상면에는 일변 4 개의 초석이 줄지어 있고 와편이 다수 산재되어 있어 분구상에 亨 堂式 또는 불상을 안치한 목조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내부 석실은 반지하식으로 현실은 장방형이며, 천정은 평사천정식이다. 남벽 중앙에 설치된 연도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규모는 현실이
길이 3.9m, 너비 2.l m , 높이 2 .4 m 이고. 연 도는 길 이 4m, 너비 1. 36~ 1. 8m 이댜 석실의 벽면은 회 를 발랐으며. 석재는 현무암을 잘 가공하여 장대석으로 만들어 벽돌쌓기식으로 축조하였다 . 고분의 주위는 묘역을 표시한 방형의 흙담이 둘려져 있으며, 동서 123m, 남 북 121m 이댜 貞孝公 主墓 는 和龍)縣 龍 水鄕 用海 村의 龍 頭 山 중턱에서 발견되었 다. 분구는 많이 유실되어 잘 알 수 없으나, 분구상면에 塘 塔礎石과 벽돌이 다수 있었다. 내부 구조는 塘室 壇으로 현실과 연도 • 묘도로 이루어졌댜 현실은 길이 3.I m , 너비 2.lm, 높이 1. 9m 이고 , 연도는 길이 1.9m , 너비 1.6m , 높이 1. 8m 이며, 묘도의 길이는 7 .l m 이다. 분 구상의 탑기초는 5 . 6mX5.6m 이댜 현실의 천정은 평행고임식으로 하고 최후에 큰 판석을 개석으로 하였다. 현실 중간에는 塘築의 稽 臺 가 있고, 바닥은 전을 깔았다. 연도는 나팔형이고 두 부분으로 나 누어진댜 현실에서 25~40 세의 남녀 2 인의 유골이 발견되어 부부합 장임을 알려주고 있댜 그리고 여기서도 벽화와 貞孝公主墓誌가 발 견되었댜 벽화는 현실과 연도 벽에 다 그렸는데 , 전축벽면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먼저 먹으로 윤곽을 그리고 紅 • 赤 • 黑 • 白色계의 색소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주제는 현실의 북벽에는 2 인의 시 종, 동벽에는 내시와 시위 4 인, 서벽에는 악사와 호위 4 인, 연도에 는 동서 양벽에 각 1 인의 무사를 그리고 있다. 중형석실분은 대개 地上式으로 현실과 연도를 지면 위에 축조하 였댜 대주둔 1 호분은 방형봉토분으로, 현실은 장방형이고 연도는 남벽 중앙에 있으나 현실보다 짧다. 석실벽은 비교적 큰 할석으로 벽면을 축상하면서, 벽 외면에 흙을 동시에 축상하는 식으로 올리고 최후에 판상석으로 덮었다. 그리고 흙으로 축상한 토벽의 두께는 거의 현실 의 너비와 같게 하여 , 지상식에서 오는 불안을 해소하였다. 소형석곽분은 방형봉토분이고, 장방형석곽에 횡구식으로 되어 있
으며 평천정식이댜 석곽 의 주위는 바교 적 큰 할석 으로 적 석하여 적 석부를 만들고 그 위에 얇게 봉토를 올린 구조로 되었다. 규모는 남 북길이 2m, 너비 1m. 높이 0 . 9m 이고. 바닥은 율석을 깔 았다 . 토광묘는 2 종류로 분류된다 . 하나는 토광에 시체 를 매장하고 損 土 를 덮은 후 그 위에 판상석을 한 겹으로 깐 후 다시 그 위에 봉 토를 올린 형식이다 . 또 하나는 토광에 시체를 매장한 후 전토와 봉 토를 올린 순수 토광묘이다 . 후자는 대개 관을 사용하지 않으며, 개 중에는 화장도 섞여 있다 . (2) 葬法 대형의 횡혈식 석실과 전실분은 목관을 사용하였으며, 대개의 경 우 부부합장 또는 가족합장이 많다. 중형석실분의 장법은 여러 가지 가 있댜 단장 • 부부합장 • 가족합장 • 多人 葬 등과 화장이 있다. 대 주둔 1 호분, 육정산 105 호 • 206 호 • 215 호분 등에서는 3 인 이상 10 인 이내의 다수를 합장하였다. 목관을 사용한 인골도 있고, 또 어떤 것 은 목관없이 시체적장한 것도 있다. 화장의 대표적인 것은 대주둔 l 호분인데, 여기서는 현실의 중앙에 2 인을 목관에, 다른 2 인은 목관 없이 횡와하였고, 북쪽 구석에는 4 인을 모아 안치하였는데, 이것은 二次葬으로 다른 곳에서 肉脫된 후 이 곳에 재매장한 것으로 보인 다 .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石天井石室에는 화장이 없다는 점이다. 다인장에 대하여 가족합장으로 보는 견해 215) 가 있는가 하면, 또 한 편에서는 拘葬으로 보는 견해 216) 도 있다 . 필자는 가족장으로 보고 자 한다. 이 시기에는 중국에서도 순장을 실시하는 풍습이 사라진 지 오래이고, 불교가 크게 성행하였기 때문에 순장을 생각할 수 없다. 215) 앞에 든 정영진의 「발해무덤연구」 『渤海史硏究』 l 연변대학 출 판사 1990. pl1 2. 216) 송기호 : 「渤海의 多人 葬 ’ 에 대한 연구」 ” 韋國 史 論 』 11 집 서울대학교국사학 과 1984.
212
(3) 佛敎와의 關係 정효공주묘의 분구상에는 전탑이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삼령둔고 분에서는 분구상에 목조건물이 확인되었는데. 이것은 묘실 내부의 벽화와 함께 불교의 강한 영향을 짐작케 하는 근거이다. 대략 8C 초 이후 高 王 의 불교진흥책으로 隋 • 唐 에서 성행한 墓塔古項이 전래되 었기 때문이댜 분구상에 전탑과 건물을 축조한 예는 발해에서는 이 것들이 각각 유일한 예이댜 217) (4) 編年 발해 고분의 편년은 대체로 고분의 위치와 구조형식을 기준으로 판단한댜 그 이유는 발해 고분에서는 유물의 출토가 적고, 특히 토 기의 수량은 극히 적으며, 네 번에 걸친 遷都로 그 부근에 고분이 다수 분포해 있기 때문이다 .218) 토광묘는 극히 드물다. 육정산에서 4 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속에 서 뜸長身항아리가 출토되어 발해 초기로 편년할 수 있다. 육정산의 고분에는 평천정석실과 석곽분이 다수를 점한다. 그러나 중경(西古 城 AD 742 년) • 上京 (AD 755 년) • 東京(八連城? AD 785 년) 등지의 고분은 고임식 천정석실이 오랜 동안 유행하여 다수를 점한다. 석곽분은 전기에 속하고, 고임식 석실분은 그 다음 시기에 속한 다. 또 전실분은 중기와 후기에 주로 축조되었다. 4.2 百濟古壤 백제 고분은 고구려 고분에 비해 종류가 다양하다. 토광묘 • 周溝 土塘墓·土築墓·석곽묘·적석총·석실분·전축분·壅稽墓·火葬墓 217) 방학봉의 「정혜공주묘와 정효공주묘에 대하여」 pp6 2-64. 218) 앞에 든 정영진의 「발해무덤연구」 plO l.
등의 종류가 있다. 백제의 묘제가 이렇게 다종다양한 이유는. 백제 의 勃興地인 한강유역이 한반도의 중간에 위치하여 선사 이래 북에 서 남으로 내려오는 선진문화를 계승하여 토착화한 후 다시 남부지 방으로 전달하는 소위 문화의 浙移地帶이기 때문이다. 또 백제 후기 의 중심지인 금강유역은 해안을 통하여 韓半島의 남북부지방과 황 해를 건너 중국에서 여러 문화를 개방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기 때 문이다 . 백제 고분의 형식은 도읍지의 위치에 따라서 큰 차이룰 보이고 있다. 즉 漢城시기에는 토광묘 • 토축묘 • 적석총이, 熊津城시기에는 전축분과 할석조석실분이, 泡混城시기에는 판석조석실분 • 화장묘 등이 유행하였다. 이것은 당시기의 문화 성격과 크게 연관되어 있 다. 한성시기는 고구려 • 낙랑 • 대방 등 북방 문화의 영향으로, 웅진 성시기에는 中國 南朝의 영향으로, 사비성시기에는 외래문화를 수 용하고 소화하여 백제 고유의 문화를 건설하는 등 각각의 특징을 나타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4.2.1 土塘墓 • 土築墓 (1 ) 土塀墓의 構造型式 토광묘에는 시체를 바로 매장한 순수토광묘와 토광에 木稽을 안 치한 土塘木稽墓, 그리고 토광에 목관과 목곽을 안치한 土塘木柳墓 가 있다. 이의에 매장주체부는 위의 토광묘들과 다를 바 없으나, 최 근 토광의 주위에. 방형 또는 원형의 도랑(周溝)을 돌린 형태의 주 구토광묘가 219) 발견되고 있댜 石村洞 • 可樂洞 토광묘의 경우를 보 면 沒塘에 한두 개의 부장유물과 함께 목관을 사용하여 시체를 매 장하였다. 石村洞 3 호분의 동쪽 A 지역의 경우 5 기의 토광묘가 확인 219) 姜仁求 : 「周溝土坡 墓 에 관한 몇 가지 問題」 『정신문화연구』 제 17 권 3 호 1994.
되었댜 토광의 평면형은 장방형으로 모서리는 圓 方形 으로 처리하 고, 長軸은 5 기 중 4 기는 대략 동서방향이며 ; 頭 向을 동으로 하였다. 규모는 가장 큰 1 호분의 경우 길이 2.2 6 m, 너비 1.04 m, 깊이 0.3m 이 고, 목관은 길이 1.8 1m, 너비 0.6m, 높이 0.2m 의 규모인데, 각면 1 매 의 큰 판자를 사용하여 조립한 型 式이다. 부장품으로는 소형도자 l 개, 短頭 蓋 1 개가 출토되었을 뿐이다. 이들 토광묘는 평면상으로는 서로 2~3m 의 거리를 두고 밀집상태로 분포되어 있고, 층위도 3 층 으로 되어 있어서, 필자는 이것들이 하나의 큰 분구 안에 포장된 것 으로 본 바 있다 . 220 ) 한강유역지방에서 토광묘를 발견한 예는 극히 드물다. 서산 • 부 여 • 천안 • 진천 • 청주 등지에서 발견된 일이 있으나, 서산과 부여 의 것은 순수토광묘이고, 그 외 지방에는 주구토광묘가 많다. 瑞山
郡 大山面 明 智 里의 토광묘는 야산의 남사면에 분포한 소형의 沒塘 墓 이댜 221) 부여에서는 草 村面 素 沙里 222) 와 親岩面 新里 223) 에서 발 견되었는데, 야산의 남사면에 위치하였다. 여기서와 같은 토광묘 構 造型式은 대동강유역과 압록강유역지방 에서 조사보고된 일이 없다. 그러나 遼河유역지방과 松花江유역지 방에서는 더러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遼 寧 省 西念 溝 유적과 吉林省 槍樹)縣 老河深유적이 그것이다. 이 유적들과 직접 연결시키기에는 거리가 좀 멀기는 하여도, 장차 대동강유역과 압록강유역지방의 유 적이 알려질 것이라 예상하고 관련을 지어 본다. 220) 姜 仁 求 : 「 漢 江 流域 百 濟 古 噴 의 再檢 討 」 먀 韋國考 古 學 報』 22 1989. 221) 金永 培 • 韓 炳三 : 며닮山郡大山面 百 濟 土 城墓 發 堀報告」 『考古 學 』 2 1969 222) 安承周 • 朴 秉國 : 「百 濟 古 壇 文化의 硏究--扶 餘 郡 草 村面 素 沙里 百 濟 土塘 墓 를 中心으로-J '1i 濟 文化』 제 5 집 1971. 223) 姜 仁求 : 「扶餘新里의 百 濟 土坡 墓 」 『考 古美 術』 126 韓 國美術史 學會 1975.(2) 土築墓의 構造型式 土築墓는 종래의 토광묘에서 분리하여 새로 부여한 명칭이다 .224)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石柳이나 석실처럼, 돌을 사용하지 않은 구조의 埋葬施設은 무조건 토광묘로 분류하여 왔다 . 그러나 토광 묘라는 것은, 中國에서 소형은 특별히 土琉 墓 라고 부르고 있듯이, 지면을 파서 塘을 마련하여 시체를 안장하고 다시 그 위에 境土와 封土를 덮는 구조를 말하는 것으로, 인류가 고안한 최초의 매장시설 이다. 그런데 토축묘라고 하는 것은, 매장시설을 지면하에 마련하는 것 이 아니고, 지면 위 項丘 중에 축조하는 土葬으로, 여기서는 土塘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조만 이렇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葬法에 서도 큰 차이가 있다. 즉 토광묘의 경우는 l 壇 1 穴 1 人 매장으로 單 葬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 데 반하여, 토축묘의 경우는 1 壇 2 人 이상 을 매장하는 多葬을 원칙으로 한다. 또 토광묘는 순수토광묘 외에 葬具로 목관과 목곽이 들어가지만, 토축묘의 경우는 목재든 석재든 柳시설은 일체 용납하지 않고, 대신 분구 중의 한 부분을 고르고 ®그 위에 바로 시체를 놓는 토장, ® 판자만을 깔고 시체를 올려놓는 敷板葬. ®자갈 등 작은 돌만을 한 겹 정도 깔고 시체를 올려놓는 敷石葬, ®숯을 얇게 깔고 시체를 올려놓는 敷炭葬. ®이것들과는 달리 옹관에 시체를 넣는 壅稽葬도 있다. 토축묘의 대표유적으로는 土壇의 경우 可樂洞 2 號壇을 들 수 있 다. 이 고분은 모두 4 기의 매장시설이 한 분구 안에 들어 있었는데, 토장 • 부판장 • 부석장 • 옹관장 등이 다른 층위를 이루고 수용되었 으며, 분구는 방대형으로 표토에는 暮石도 시설하였다. 石村洞 破壤 壇 등도 같은 종류에 속하는 土築墓이다. 224) 앞에 든 姜仁求의 『三國時代壇丘墓』 ppl l-40.
石項에 속하는 토축묘로는 石村洞 A 號噴 • 石 村洞 l 號項 • 石才 1 洞 4 號壇 225) 등이 있댜 石村洞 4 호분은 百濟古壇路를 사이에 두고 石村洞 3 號項과 마주 보는 위치에 있고. 복원되어 三 段築의 고구려식 적석총의 외관을 나 타내고 있댜 내부구조는 疾道가 달린 割石造 橫穴式 石室形의 내부 를 점토로 版築하여 충전한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점토층 안에는 3 기의 埋葬穴을 만들었는데. 이 시설들이 모두 지상 분구 중에 있고, 帖土郡으로 판단된댜 이 고분의 당초 구조는 점토를 版築하여 분구 를 올린 토축묘인데. 그 외부에 다시 積石울 올려서 고구려식의 적 석총을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 않다면. 고구려식 적석총의 내부에 점토판축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구조인 것이다. 따라서 이 형식은 한강유역지방에서 토착의 토축묘에 新來의 고구려식 적 석총이 가미된 새로운 형식의 積石土築墓 또는 石村洞式(한강유역 지방식) 적석총으로 명명하여도 좋을 것이다 .226) 석분계통의 土築墓에는 각기 특징이 있다. 즉 A 호분은 부석장한 봉토분에 적석총이 후축된 型式이고, 1 호분의 南壇은 부석장의 소형 분구에 적석총이 후축된 형식이며. 北壇은 토장(토광)의 봉토분에 적석총이 후축된 형식으로 되어 있다 .227) (3) 土塀墓 • 土築墓의 年代 첫째, 각 고분 형식에 대한 상대적 編年을 시도하여 보면 다음과 같댜 石村洞고분군에서 築造순서를 가릴 수 있게 된 것은, 고분들 이 파괴되고 교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石村洞 3 호분 동쪽지역에 대 한 발굴 조사가 행하여지고, 거기서 확실한 충위가 밝혀졌기 때문이 225) 서울大學校博物館 • 同考古學科 : 『石村洞積石塚發堀調査報告』 1975. 226) 앞에 든 「漢江流域 百濟古項의 再檢討」 앞에 든 「初期百濟古壇의 檢討」 pp2 37-238. 227) 앞의 柱와 같음.
댜 228 )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지역은 좁은 면적에 밀집되어 있는 적석총 • 토광묘 • 土 坡 積石墓 • 옹관묘 • 石 鄒壅稽 墓 등의 여러 매장 시설들이 상하의 層序 룰 나타내고 있다. 죽 최하층부터 보면, 大 形토광묘와 토광묘 1 호분 • 2 호분은 생토 층을 파고 광을 만들었으며, 그 위 중간층의 분구 중에 토광묘 3 호 분 • 4 호분 • 5 호분 등이 있다. 그것들과 같은 층위에는 역시 토광묘 6 • 7 • 8 • 9 호분이 석곽옹관묘 • 옹관묘와 함께 평행하게 있고, 이 중간층 위에 다시 토광묘 10 호와 토광적석묘 • 응관묘 3 • 4 • 5 호가 있다. 그리고 현지표인 그 상면에 적석총 3 호분 • 적석총 破 壤壇 • 석 곽묘 등이 있다. 그러므로 여기의 遺構 들은 각기 다른 4 개의 층위를 이루고 있으며, 이것은 바로 이들 매장시설의 相對編年이 되는 것이 다 . 229) 이것을 기초로 한다면, 대형적석총인 石村洞 3 호분과 石村洞 4 호 분은 가장 늦은 시기예 築造된 것이다. 그리고 年代가 가장 올라가 는 것은 토광묘이고 , 그 다음이 토장과 부석장들이 된다. 그런데 石 村洞 A 호분 • 1 호분 • 5 호분 • 4 호분 둥은 일단 土築 墓 로 형성된 뒤에 積 石塚으로 변조한 것이므로, 그것들의 최후 연대는 적석총이 들어 와서 영향을 미친 후의 시기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적석총의 연대 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230) 둘째, 그런데 石村洞 4 호분의 연대는 구조에서 보는 것과 같은 疾道가 부설된 石室形이라는 점에서 이 지방 횡혈식 석실분의 상한 연대를 넘을 수 없으므로, 결국 4~5C 로 추정된다. 石村洞 1 호분의 경우는 상부에 있는 敷石葬(보고서에서는 석곽묘 임)에서 나온 灰白色軟 質 土器가 늦어도 4C 초 이후로는 내려가지 228) 金元龍 • 林永珍 : 『石村洞 3 號 壇 東 쪽古 噴群 整 理 調査報告 』 서울 大學校博 物館 1986. p41. 229) 서울大 學 校博物館 : 『石村洞 3 號噴 東 쪽 古壇群 整 理調 査 報告』 1986. 230) 앞의 柱 와 같음 .
않으므로, 결국 그 하층위에 있는 1 호분은 3C 의 후반기가 될 것으 로 추정된다. 한편 토축묘의 전형유적으로 볼 수 있는 可樂洞 2 號項은 黑色磨 硏土器礎 등으로 미루어 2~3C 대로 추정된 바 있다 .23I) 이상은 불안한 요소가 있고, 또 대략적인 연대추정이라고 생각되 지만, 可樂洞 • 石村洞의 고분은 대략 2~5C 사이에 축조된 것만은 틀림없댜 (4) 土築墓의 系統 다음 토축묘는 榮山江유역지방에서 다수가 발견된 것 외에는 大 同江과 鴨綠江유역지방, 더 소급하여 遼寧省지방과 中原의 黃河유 역지방에서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장강下流域지방에서는 土 激墓라는 유적으로 다수 분포되어 있으며, 太湖 부근과 寧鎭山脈 부 근 지방에서는 신석기시대 후기로부터 戰國時代까지 오랜 기간 동 안 전승된, 이 지방 특유의 매장형식이다. 대표유적으로는 江蘇省의 句容유적으로 그 특징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묘지를 하천과 호수변의 구릉상 또는 평지를 택하고, ®매장시설은 지상에 축조하 며, ®多葬이고, ®葬法은 토장을 원칙으로 하고, 간혹 옹관·자갈 바닥(敷石葬) • 목판바닥(敷板葬)을 만들기도 하나, 특징적인 것은 木質의 관곽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점이다. ®追加葬할 때마다 분 구를 확대하고, ®부장품은 토기가 주종을 이루고 생산공구나 장신 구가 없는 簡!란한 편이댜 232) 이 토돈묘의 요소가 동지나해를 건너 와서 한강과 영산강유역지방의 토축묘(한반도형 토돈묘)를 탄생시 켰다고 추측한다. 231 ) 尹世英 : 댜 I 樂洞百濟古壇第一第二號壇發堀調査略報」 『考古學』 第三輯 1974. pl3 9. 姜仁求 : 「漢江流域의 土築墓社會」 p26 3. 232) 姜仁求 : 『三國時代項丘墓硏究』 영남대학교출판부 1984. pp9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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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 周溝土城墓 주구토광묘는 토광 주위에 周溝(도랑)를 돌린 형태인데, 한반도 내에서 처음 알려지는 고분이다. 현재는 錦江水系와 그 부근지방인 天安 淸堂洞 ,233) 鎭 )1I 松斗里 ,234) 淸州 松節洞 ,235) 公州 下鳳里 ,236) 保寧 寬倉里 237) 에서 발견되었고, 최근에는 舒J II 烏石里, 群山 助村 洞 益山 永登洞 등지 238) 와 蔚山 茶雲洞에서도 발견 239) 되었다는 정 보가 있다. 앞으로 조사에 따라 낙동강유역과 남해안지역까지도 확 대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240) 유적의 명칭에 대하여 각 보고서에서는 ‘原三國時代 壤墓' ‘原三 國時代 木稽墓’ 周溝를 갖춘 壇墓’ 등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日本학계에서도 같은 구조형식의 고분을 ‘方形(圓形)周溝墓’라고 하는 등 통일되어 있지 않다. 필자는 이 형식의 고분이 앞으로 점차 多出할 것으로 보고, 周溝土城墓’ 라는 새로운 명칭을 제안한 바 있 댜 241) 주구의 형상에는 一面溝-一字형, 二面溝 -기 자형과 느자형, 三面溝 -亡 자형, 四面溝 -0 자형, 圓形溝 -0 자형 등 5 종류가 있으 며, 일면구와 이면구는 주로 토광의 위쪽에 있다. 233) 國立中央博物館 : 『淸堂洞』 1993. 234) 忠北大學校博物館 : 『鎭 )II 松斗里遺蹟發堀報告딸』 1991 . 235) 忠北大學校博物館 : 「 5. 학술調査報告」 『年報』 2. 1993. 236) 이 한상 : 「公州下鳳里造蹟發堀調査報告」 『박물관신문』 제 275 호 國立中央博物 館 1994.7.1. 237) 윤세영 • 이홍종 : 『寬倉里周溝墓』 고려대학교 매장문화연구소 • (주)대우 1997. 238) 崔完奎 : 「益山永登洞 周溝墓」 『제 39 회 全國歷史學大會 發表要旨』 제 39 회 천 국역사학대회준비위원회 1996. 239) 李盛周 : 「木稽 墓 에서 木郡墓로」 먀닭羅文化』 第 14 輯 東國大學校新羅文化硏究 所 1997. p 38 의 그림 1-1. 240) 앞에 든 姜仁求 논문 「新羅王陵의 再檢討 (2) -脫解王陵-」 . 241 ) 姜仁求 : 「周溝土塘墓에 관한 몇가지 問題」 『정신문화연구』 17 권 3 호(통권 56 호) 1994.
주구의 기능은 경사면의 流水로부터 토광을 보호하는 防水의 기 능이 가장 기본이고, 그 외에 墓域 의 區削과 토광의 覆土用 흙을 채 취한 자리를 !宁水池로 이용하는 등의 용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 다. 저수시설을 설치하는 목적은 神聖한 場所(蓋의 世界)’ 와 外界 를 구분하는 경계였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242) 매장주체시설안 토광 내에는 木稽과 木鄕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것의 結構에 개'자형 • '1f'자형 등의 방식이 보이고, 목관 내부에 구획을 설치하거나 공간을 연장하여 유물 부장칸으로 사용하는 등 종래 일반적인 목관 • 목곽형과는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의 목 관 • 목곽은 중국의 新疆 • 長城地帶 • 遼寧省지방 등지의 先族 • 句奴 族 등 북방민족의 고분에서 발견되는 木樞시설과 흡사하다 .243) 출토유물 중에는 토기와 靑銅帶具가 가장 중요한데, 그 중 청당 동 유적에서 다량으로 출토된 대구는 특징적이다. 종래 馬形帶銅는 漢문화의 영향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실제로 중국에서 출토된 帶銅 270 여 개 중에는 마형대구가 1 개도 들어 있지 않으며, 동물 전신을 표현한 문양과 간결한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볼 때, 북방계 遊牧民族 의 문화 산물로 추측되며, 古朝鮮시기에 남하하여 영향을 미쳤을 것 으로 생각된다. 주구토광묘의 조영시기는 충남지방에서 대략 BC 1~AD 4C 로 추 정되며, 분포구역 • 주구의 존재 • 토광묘의 구조형식 • 출토유물의 형 식 차이 등에서 한강유역의 초기 백제 문화와는 구별된다. 주구토광 242) 都出比呂志 : 「前方後圓壇出現期(l)社會」 『考古學硏究』 26-3. 1979. 都出은 여기서 주구 내부를 神聖한 장소로. 주구의 외부를 外界로 보고. 주구 가 없는 부분을 陸橋部라 하여 내게와 외계와의 通路로 추측한 바 있다. 243) 고분 내에서의 木槪施設은 이번에 처음 발견한 것이지만. 우리가 무의식중에 목관 또는 목곽으로 추정한 목재시설 중에 각재가 잘 남아 있고 板子의 혼적이 보이지 않는 것은. 처음부터 각재만을 사용한 목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 고분에는 목광시설이 의외로 많다.
天安 淸堂洞 古壤群 分布圖
그림 96 公州 下鳳里 周溝土塘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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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의 분포지역은 後期 馬韓 의 중심지역으로 추정된다 .244) 따라서 백제는 아직 지금의 경기지역에 머물러 있었고, 4C 중엽까지는 安 城川을 南限境界線으로 하고 있었으며, 후기 마한도 끝내 영산강유 역까지는 미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마한의 영역은 현 재의 忠南 • 1 忠北의 서부 • 全北 • 全南의 북부지역에 限하였을 것으 로 생각된다. 주구토광묘의 起源에 관하여 현재로서는 확언하기 어렵다. 한반 도 내에서는 금강수계유역과 그 부근지방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댜 그러나 낙동강유역지방과 남해안지역에서도 가능성이 있 다 . 특히 기원문제와 관련하여 대동강유역지방(平壤 樂浪區域 • 台 城里 등지)에서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의 山西省에 서 BC 4~3C 에 속하는 주구토광묘의 실례가 발견되었으며, 주구토 광묘의 木桐과 馬形帶拘 등이 장성지대와 요녕성지방과 관련이 있 울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의 여러 점을 유의할 때 주구토광묘의 기 원은 중국의 북부지방에 있고, 그것이 압록강유역지방을 . 경유하여 대동강유역지방에 일단 정착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측된 다 .245) 4.2.3 積石塚 石村洞 • 可樂洞에 현재 남아 있는 순수적석총(고구려식)은 石村 洞 3 號壇이 유일하다. 이 고분은 基壇式 石鄕적석총으로 集安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식의 대형고분이다. 1974 년 조사 이후 약 10 년간 의 시간을 들여 복원하였으나, 原形을 찾기에는 시기가 늦었던 것으 로 보인댜 壇丘 上面과 내부는 민가의 건축과 철거시 이미 상당히 244) 주구토광묘를 後期 馬韓의 墓制 l 로 추정하여도、 배타성이 있는 後期馬韓만의 墓制]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脫解王陵(抽稿 「新羅王陵의 再檢討 (2) -脫解王 陵-」)에서 보듯이 辰韓지역에서도 유행하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여진다. 245) 앞에 든 「周溝土塘墓에 관한 몇 가지 問題」 p12 2.
파괴 되어 外形과 내부구조의 조사가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 분구는 힌강에서 1km 정도 떨어진 石 村 洞 의 대지성 평지에 있으 며, 갈색 점토 지면에 자갈을 깔아 정지하고, 그 위에 큼직한 장방 형판석으로 가석을 깔고, 그 위에 할석과 자갈을 교대로 까는 식으 로 축상하여 3 단으로 된 전체형이 피라미드형이었으며, 규모는 밑변 의 길이 약 55.5m, 높이 4.5m 이다. 기단석에서 1.6 m 거리를 두고 깊 이 0.3m, 너비 0.7 m 되는 周 溝 가 돌려 있었댜 246) 석곽은 분구 상면 서북부에 치우쳐서 길이 2m, 너비 1.5m, 깊이 0.8m 의 과히 크지 않은 장방형이 발견되었으며 ,247) 내부에는 4 호분 에서와 같은 土 層 으로 된 시설이라던가 봉토의 原形은 없고, 전부 돌로 채워져 있었다. 구조상으로만 불 때 ` 集 安의 太王陵 • 千秋塚과 같은 전형적인 고구려식 적석총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石村洞 3 호분 과 같은·순수적석총과 石村洞 4 호분과 같은 변형된 石村洞식 적석 총, 즉 積 石土築墓의 적석부는 압록강중유역지방의 고구려식 적석 총이 남하하여 이루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石村洞 3 호분의 연대는 분구형상, 석곽의 구조 , 출토된 토기, 청자 반구호 등을 근거로 할 때 4C 전반으로 추정할 수 있다 .248) 최근에 이 고분의 연대를 4C 후반으로 추정하고, 被 葬 者를 近肖古王으로 보는 견해 가 있다 .249) 246) 서울大學 校博物 館 : 『石 村 洞 積 石 塚 發堀調査報告 』 1975. ppl -9 . 247) 金 元 龍 • 李 熙 濬 : 「서 울 石村 洞 3 號項 의 年 代」 『斗 溪李 丙 燕博 士九句 紀念韓國 史 學論盛 』 지식산업사 1987. 248) 이상은 앞에 든 「 漢江 流 域 의 土築 墓社會 」 『 考 古 學 으로 본 韓國 古代 史 』 p26 0. 249) 앞에 든 논문에서 金元龍은 4C 후반에서 5C 초로 추정하였다 . 그러나 필자는 생각을 달리한다. 石村洞 3 호분의 분구형식도 기단식 곽적석총으로 集 ~ 경 우 4C 전반에 유행하고, 黑 色 磨 硏土器는 可 樂 洞 2 호분에서 완전한 것이 나온 일이 있는데 3C 까지도 가능하며, 靑 充 盤 口 登 도 綠 色기가 있는 黃 色의 유약은 소위 原始 靑 姿라고 하여 西晋과 東 晋 에서 많이 제조되었다 . 따라서 이러한 몇 가지 측면에서 볼 때 石村 洞 3 호분의 연대는 늦어도 4C 중엽 아래로는 내려 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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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2 서울 石村洞 4 號壇
그립 113 서울 石村洞 3 號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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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 石鄕 墓 석곽묘는 토광묘와 함께 선사 이래 전통 깊은 토착 묘제 중의 하 나이댜 한강유역지방에서는 石村洞의 적석총 4 호분과 그 남쪽의 5 호분 사이에서 발견된 고분과. 石村洞 3 호분의 동쪽에서 발견된 고 분이 있을 뿐이다. 금강유역에서도 在來式의 묘제로서 간간히 발견 되고 있다 . 구조를 보면. 지면에 토광을 파고, 토광벽에 기대어 괴석으로 4 벽 을 쌓고 상면에 수매의 板狀石을 蓋石으로 덮고. 그 위에 과히 크지 않은 봉토를 올린 형식이다. 그러나 石村洞의 적석총 1 호분과 2 호분 의 내부 구조는 沒塘을 파고 園石墓와 같이 간단하게 돌을 돌리고 시체를 묻어 낮은 봉토를 올린 것으로 규모도 소형으로 .250) 필자는 이를 석곽묘와 구별하여 토축묘 내의 부석장이라고 수정 명명한 바 있다 . 25 1) 석곽묘는. 내부 구조는 청동기시대의 석곽묘(원시 석실묘) 와 별 차이가 없으나. 다만 토광(청동기 석곽묘의 경우)을 지하 깊 이 파고 축조하는 점 이 다르댜 252) 4.2.5 壅稽墓 옹관묘는 壅稽만의 독립된 묘로 존재하는 경우와 다른 묘의 분구 내에서 副從 89 인 묘로서 존재하는 경우 둥 두 가지가 있다. 전자는 희귀한 편이고, 보통은 후자의 경우가 많다. 한강유역에서의 옹관은 可樂洞 2 號壇 분구 내의 하나의 매장시설 로서 토장 등 3 기의 다른 형식의 매장시설과 함께 들어 있는 형식 이다. 일반적으로 옹관의 형식은 옹의 입을 어떻게 막았느냐에 따라 ~ 蓋式과 合口式으로, 옹을 몇 개 사용하였는냐에 따라 單壅式 • 二壅 250) 앞에 든 『石村洞 1 • 2 號壇』 서울大學校博物館 1989. 251) 앞에 든 「漢江流域 百濟古壇의 再檢討」 p32 . 252) 앞에 든 「漢江流域의 百濟古壇」 『考古學으로 본 韓國古代史』 pp2 87-291.
式 • 三壅式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또 壅을 어떤 형태로 매장하였느 냐에 따라 直立式 • 斜立式 • 橫臥式 등으로 분류한다. 금강유역지방에서 발견되는 옹관묘도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여러 종류로 분류된다. 부여와의 경계지점인 公州 南山里에서는 길이 1.8 m, 너비 0.9m, 깊이 0 .4 m 의 토광 속에 器高 31cm 의 廣口平底盡 2 개를 합구하여 관 울 형성하였는데, 토기는 瓦質土器로 3C 경으로 추정된다 .2 53) 扶餘 鹽倉里에서는 지표하 30cm 깊이에 길이 1.5m , 폭 1.lm , 깊 이 1. 2m 의 U 자형 토광 안에 기 고 97cm 의 大形盛를 橫臥시 키 고 구 부에는 廣口蓋를 합개한 형식이 조사되었다. 호 안에서는 금동이식 1 쌍, 구슬 2 개, 여성 치아 20 여 개가 발견되었다. 이 옹관묘는 북쪽 으로 3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평사천정식의 판석조석실분과 같은 분구 안에 매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실에는 夫, 옹관에는 婦를 각각 매장한 것으로 하나의 夫婦塚으로 생각된다 .254) 능산리에서는 대형호에 대형 器臺를 蓋로 사용한 형식도 발견되 었다 .255) 公州 熊津洞 두리봉의 남사면에서 발견된 옹관묘 1 호는 석비례층 에 길이 1.5 m, 폭 0.38m, 깊이 1. lm 의 토광을 파고, 남측벽만 석벽 을 쌓은 후, 塘 속에 小形壅 3 개를 直立安置시켰다. 옹관묘 9 호는 평면 방형의 小形石柳 안에 1 개의 壅만을 埋葬한 후, 蓋石을 덮고 봉토를 올린 형식이댜 256) 이상의 여러 형식의 응관에 사용된 葬具(토기)는 일상생활용 壅 과 盡를 稽으로 轉用한 것들이다. 礎를 주로 사용한 杭과 墓用壅을 253) 1971 년 3 월 8 일자 『서울신문』 유물은 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 앞에 든 '1i濟古壇硏究』 pp1 41-143. 254) 앞에 든 '1i濟古項硏究』 pp1 47-148. 255) 앞에 든 '1i 濟古壤 硏究』 p14 9. 256) 安承周 : 『公州熊津洞古壇群』 공주사범대학 백제문화연구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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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한 옹관을 구분하기 위하여 礎 稽 墓 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 다 .257) 시대는 다르지만 光州 新昌洞 옹관은 묘용옹이고, 또 나주지 방의 옹관토축묘의 대형옹관도 묘용옹이다.
257) 앞에 든 姜仁求의 耳i 濟 古壇硏究』 pp1 39-167. 일본학계에서는 조몽시대 후기의 소형의 直立 • 石 蓋 • 單 稽에 사용 · 한 토기를 盡 라고 하고, 이 묘를 특별히 盡 稽 墓 라고 칭하기도 한다.
삼국시대 옹관묘 중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영산강하류역의 輯土築墓의 존재이다 .258) 나주군 潘南面과 蓋 岩郡 始終面일대에 다수 분포되어 있는 이들 묘는 거대한 분구 속에 수기의 대형옹관 • 토장 • 부석장 • 부탄장 등과 함께 多葬으로 형성된 특이한 분묘이 다. 연대는 3~6C 로 추정된다 .259) 이들 옹관토축묘의 조영집단은 백 제나 또 그 전대의 마한과는 다른 집단. 예를 들면 『晋 書 』 「張華列 傳」에 나오는 新彌國과도 관련시켜 검토할 필요가 있다 .260) 옹관묘는 중국의 신석기시대一전국시대-한대를 비롯하여 한반도 의 청동기시대 -삼 국시대, 일본의 조몽시대 _ 야요이시대 _ 고분시대 에 성행하였으나 그 기원은 중국의 신석기시대에 있다. 한반도의 삼 국시대 옹관묘는 土激墓의 옹관과 漢代 옹관묘가 들어와 영향을 미 친 것으로 추측된다, 4.2.6 火葬墓 삼국시대의 화장묘는 石稽墓나 無紋土器文化期의 화장묘와는 달 리 대부분 불교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소형의 球形盛에 火 葬骨灰를 담아 지하에 매장하는 것이다. 지하에 骨盡만을 매장하는 경우. 석관이나 석곽 내에 골호를 매장하는 경우, 石函 내에 골호를
258) 앞에 든 『三國時代壇丘 墓 硏究』 pp41 -105. 259) 成洛俊 : 「榮山江流域의 壅稽 墓 硏究」 程f濟文化』 제 15 집 1983. 260) 앞에 든 「周溝土塘 墓 에 관한 몇가지 問題」 p12 0. 姜仁求 : 「三國時代 考古學의 現況과 問題點」 『精 神文化硏究』 통권 71 호 1998. p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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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하는 경우, 統一新羅時代처럼 석실 내에 골호를 매장하는 경 우, 석탑이나 부도의 지대석 하부에 매장하는 경우 등 여러 방식 이 있다. 위치상으로 보면. 寺址나 고분 부근과 山정상부 등지에서 발견되 는데, 전자의 경우는 軍守里사지 • 雙北里건물지 부근, 후자의 경우 는 上錦里 • 中井里 등지가 있다. 구조형식상으로 보면, ®單礎式_球形 身항아리 1 개만을 소형 구 덩이에 묻은 것 ®單確式-완 1 개를 묻은 것 ®重層確式_완을 이 중으로 겹쳐서 묻은 것 ®心盡多確式-중앙에 소형호 1 개를 놓고 그 주위에 소형완을 돌려 놓은 것 ®倒壅式-화장한 骨灰룰 놓고 그 위에 소형독을 엎어서 덮은 것 ®二重盛式-소형호에 골회를 담 은 후. 그 호를 다시 좀더 큰 호 안에 넣고 묻은 것 등이 있다 .261) 화장묘는 인도지방에서 신석기시대 이후 유행한 형식인데 한반도 에는 불교 전래 이후 유입되어 삼국시대 후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하 261 ) 앞에 든 갸제무古壇硏究』 pplO S-138
여 統 一 新羅時代를 거쳐 고려시대에 성행하였다. 불교 이전의 것으 로는 강상 • 누상의 적석묘 262) 와 길림지방의 석관묘에서 다수 발견 할 수 있고. 더러는 지석묘에서도 발견된다. 4.2.7 石室壇 (1) 堅穴式石室壤 華城 白谷里의 석실분은 서해안 가까운 지점의 山정상부(해발 약 100m) 부근에 위치하며, 석실은 장방형이나 한쪽 短壁線만은 半圓 形으로 처리한 수혈식 석실분이다. 구조는 바닥을 판상석으로 먼저 깔고 그 위에 벽체를 축조하였으 며, 천정은 벽상단에서 긴 돌을 안으로 빼면서 내경하면서 축상한 후 개석을 덮은, 일종의 平斜天井式을 구성하였다. 유물로는 와질토기와 경질토기가 함께 나오며 札甲의 존재도 인 정된댜 석실 평면의 한 변을 반원형으로 처리한 구조형식은 한반도에서 는 아직 보고된 일이 없는 새로운 형식으로 그 계통이 주목되며, 연 대는 대략 4C 경으로 추정된다. 당시 백제의 도읍지인 한성에서 멀 지 않은 지점에 이와 같이 구조형식이 전혀 다른 고분문화가 白谷 里 土城 • 唐城 • 花梁石城 • 南陽長城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漢城 과 남양반도 사이에 정치 • 문화적으로 전혀 계통이 다른 단체를 상 정케 한댜 263) 262) 앞에 든 『向上 • 樓上』 p86 . pl lO. 263) 姜仁求 : 『華城白谷里古項群』 韓園精神文化硏究院 1994. p61 . 남양반도에 분포되어 있는 앞에 든 여러 산성은 현재의 유구는 비록 신라시 대의 축성으로 보이지만. 하내부의 原城은 백제시대에 축성한 것도 있다고 생각된다. 화양석성을 항포구로 이용하여 황해로 드나든 것은 이미 백곡리 고분시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림 119 華城 白谷里 5 號壇 石室 內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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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수 혈 식 석 실 분은 금강유역의 공주 • 부여지방을 중심으 로 상당수 분포되어 있다. 소형은 석곽묘로 분류되고, 규모가 약간 큰 장방형석실 정도의 것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부여지방의 경 우 석곽묘와 비교하여 깊이가 약간 깊고 , 재료에 있어서 괴석보다는 할석을 많이 사용한 점이 다르다. (2) 橫口式 • 橫穴式 石室壤 백제의 횡구식 • 횡혈식 석실분은 대략 3 종으로 나눌 수 있다. 한 강유역의 중곡동과 능동에서 발견된 장방형의 橫口式과, 石村洞 • 可樂洞 • 방이동 등지에서 발견된 횡혈식의 궁륭상천정식 등 전기의 석실분이 있다. 그리고 금강유역의 공주와 부여. 만경강유역의 전주 지방 . 영산강유역의 나주 • 해남 등지에서 발견된 판석조횡혈식 등 이 있다. 이 가운데 연대가 올라가는 것은 中谷洞 乙壇 • 可樂洞 4 호 분 • 5 호분 • 6 호분 등인데, 중곡동 을분은 장방형의 묘실에 평천정 형식으로 연도가 짧은 횡혈식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橫 口式 석실로 분류해야 할 것 같으며 고식을 지니고 있다 .264) 可樂洞 4 호분은 묘실의 평면이 短形이고 , · 연도가 동벽과 남벽의 隅角에 설치되어 常式을 벗어난 형식을 하였으며, 천정은 평천정식 울 따르고 있다. 5 호분은 묘실의 평면이 방형에 가까운 장방형이고, 연도는 남벽 중앙에, 천정은 평천정식이며, 벽체는 얇은 괴석으로 쌓았는데. 전 체적으로 南井里 119 호분과 많이 닮아 있다. 연대는 4 호분은 백제 초기로, 5 호분은 4C 대로 각각 추정하고 있 다 .265) 그러 나 5 호분과 6 호분은 남정 리 119 호분과 흡사한 양상을 264) 姜 仁 求 : 「新 羅墓 制 變遷紀 年問 題 」『 古 文化 談衆 』 第 30 集 (小田 富 士雄 代 表 還 曆 紀念 論渠 (1)) 九州古文化硏究 會 1993 p29 1. 265) 小田 富 士雄 : 「 橫 穴式石 室 (J) 휴 入&군(J) i 原流」 『 朝鮮 三 國 之倭國』 學 生社 1980. pp2 88-291.
보이고 있어. 늦어도 4C 대 위로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 또한 한강유 역에서는 이들 석실분보다 연대가 올라가는 初 {!l 의 미숙한 형태의 석실분이 만들어졌을 것으로도 추측된다. 可樂洞의 초기 석실분은 帶方郡지역에서 영향받았을 가능성이 가 장 크댜 3C 후반 고이왕 이후부터 4C 중엽 근초고왕 때까지 백제 는 樂浪 • 高句麗와는 늘 전쟁상태에 있었으나 대방군과는 혼인을 하는 등(책계왕) 화평과 협조가 지속되고 있었다. 이 때 대방군을 통하여 漢 • 魏 • 晋의 선진文物이 백제로 많이 흘러들어왔을 것으로 생 각되 기 된다 .266) 板石造석실분인 금강유역지방의 고분은 공주의 錦洞과 柚木洞에 서 먼저 축조되었는데, 잘 다듬은 판석으로 4 벽과 천정을 구성하고, 천정형식은 판석 2 매를 양쪽에서 내경시켜 상단이 맞닿게 한 형식 으로 단면이 ‘A' 자형으로 아직까지 볼 수 없었던 斜天井式(맞배 식)이다. 그리고 대체로 남벽의 중앙에 짧은 연도를 설치하였다. 이 형식은 後漢代에 유행한 바 있고 ,267) 고구려의 평양 高山里 10 호분 에서도 약간 보인 적이 있다 .268) 그러나 고구려에서 크게 유행한 일이 없으므로 공주의 것은 중국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266) 姜仁求 : 「考古學측면에서 본 三國時代 時期區分問題」 먀韋國史學』 16 한국정 신문화연구원 1995. pl0 4. 267) 평사천정식은 漢代의 博室墓에서 유행하였다. 河南省文化局文物工作隊 : 「一九五五年洛陽洞西區小型漢墓發堀報告」 『考古學 報』 1959-2. 268) 앞에 든 『한국의 고분』 pl0 7.
사비성시대로 넘어오면 공주에서 보이던 전축분이라던가 사천정 식 석실분은 사라지고, 오직 판석조석실분 중 平斜天井式 석실분만 이 유일한 형식으로서 유행하게 되었다. 평사천정식은 평면과 연 도 • 축조재료는 앞의 사천정식 석실과 같으나 천정형식만이 다르다. 벽체의 상면에서 長 臺 石이나 판석으로 내경하고 그 위에 다시 판석
을 올려 덮어서 천정을 완성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천정의 단면이 T]’ 형으로 되었다. 이 형식의 석실은 논산 • 익산 • 전주 • 정주지방 을 거쳐 영산강유역지방으로 확산되어 갔는데. 연대는 대략 6C 후반 이후로 추정된다. 沼混시대의 왕릉군인 扶餘 陵山里 고분군은 대표적 판석조석실분 이다. 1 호분(東下塚)은 여러 면에서 특별한 고분이다. 우선 구조면 에서 현실의 평면은 장방형이고 벽체와 천정은 대형판석을 물갈이 하여 1 매만으로 한벽과 천정에 `사용하였 으며. 천정은 완전한 平天井 式이다. 疾道는 평양에서 볼 、 수 있는 것처럼 내외 二重區域(내 • 외 연도)의 긴 연도로 구성하였다. 외연도의 벽은 판석이 아나라 模塘 石으로 쌓고, 그 위에 두껍게 白灰발이룰 하였다. 관대도 模塘石으 로 조립하였는데, 처음에는 1 인용으로 하였다가 후대에 2 인용으로 확장한 혼적이 보인다. 稽臺下로부터 배수로를 길게 고분의 전면까 지 뽑았는데, 단면을 V 자형으로 파고 그 안은 모래와 잔자갈로 채 우고, 상면은 모전석으로 덮었다. 이러한 배수로는 평사천정식 구조 의 석실에서는 일반적인데, 그것은 이들 형식의 석실이 완전히 지하 깊숙이 축조되는 지하식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 고분의 또 하나의 특색은 4 면벽과 천정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동벽에 靑龍 서벽에 白虎 북벽에 玄武 남벽에 朱雀, 그리고 천정에 流雲 文과 蓮花文을 각각 배치하고 유려한 필치로 그렸다. 공주 宋山里 6 호분의 四神圖와 함께 고구려의 영향으로 추측된다. 능산리 2 호분(中下塚)은 판석 대신에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묘실 을 축조하였다. 구조는 현실의 평면은 장방형이고, 연도는 남벽 중 앙에 부설하였다. 현실의 천정형식은 터널(아취형)형식이고, 연도부 의 천정은 평천정식으로 하였다. 이 형식의 천정은 능산리의 체마소 대총에서도 일례를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대강 다듬은 장대석을 사용하고, 짧은 연도가 동벽에 치우쳐 부설된 점이 다르다. 이들 두 고분은 부여지방뿐만 아니라 다른 석실분 밀집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형식인데. 宋山里의 6 호분이나 武寧 王 陵의 터널식 천정과 같은 형식의 계통으로 보인다. 부여 천도 직후에 축조되어 아직 宋山里의 형식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陵山里 古項群 중에서 위에서 설명한 1 호분과 2 호분을 제외한 다른 고분들은 모두 천정형식에서 만 차이를 보이는데. 판석조의 평사천정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평 사천정식의 석실분은 부여의 전지역과 논산 • 익산 이남의 호남지역 에서 판석조와 할석조 • 괴석조 등 재료에 관계없이 거의 전 석실분 에서 나타나는데, 백제의 후기인 사비시대의 주묘제 형식으로서 크 게 유행 한 듯하다 .269)
269) 이상 陵山里古壇群에 대하여는 일제시대의 調査報告홈에 실려 있다. 『昭和二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 第二冊. 『昭和十二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 앞에 든 갸책무古項硏究』
(3) 橫穴式石室壇 出現의 背景과 源流 백제에 횡혈식 석실이 유입되어 유행한 기간은 3C 후반부터 4C 중엽까지 해당된다 . 이 기간은 한마디로 古代國家가 완성되는 기간 이라고 할 수 있는데, 3C 중 • 후반에 古爾王時 (234~285 년)에는 官 制를 정비하고 법령을 제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西晋에 사신을 보내어 최초로 중국과 교통하였다. 責稽王 (28 6~294 년)은 帶方郡王의 女를 취하여 왕비를 삼는 등 적극적으로 대방과 친교정 책을 폈으나 樂浪郡과는 전쟁에 준하는 불화가 계속되었다. 백제는 이 기간에 대방군을 통하여 중국의 先進文物을 직접 홉수하여 문화 를 발달시킨 계기를 마련한 듯하다. 沿西王에서 比流王과 契王을 거 쳐 近肖古王에 이르는 약 50 년간은 낙랑군과는 긴장이 계속되었으 나 신라와는 화평을 이룩하였다. 근초고왕 때 (346~374 년)에는 대 외적으로는 對麗전쟁을 주도적으로 유리하게 이끌며, 晋과의 친교 를 두터이하고, 신라와도 계속 화평을 유지하였다. 대내적으로는 대 려전을 좀더 유리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前進的으로 漢山으로 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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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4 서울 芳莫洞 1 號壇 實測圖(『文化財』 9, 1975)
그림 125 서울 芳夷洞 1 號壇 石室 內部 (1)
그림 126 서울 芳 夷 洞 1 號壇 石室 內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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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9 公州 錦 洞 1 號 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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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 132 扶餘 陵山理 古壇群
그림 133 扶餘 陵山理 1 號壇(東下塚) 內部 (1)
그립 134 扶餘 陵山理 1 號壇(東下塚) 內部 (2)
그립 135 扶餘 陵山理 東 1 號壇 內部
그림 136 扶餘 陵山理 3 號項(西下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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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高 興의 「 書記 」 편찬사업을 펴는 등 백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기를 맞이하였다. 고이왕 이후 관제정비를 계기로 꾸준히 성장한 귀족관료층이 대방군을 통하여 홉수한 선진문화의 토대 위에 새로 운 국가의 기운이 일어나는 분위기 속에서 원시적이고 多岐的인 묘 제를 경제적이고 발전적인 묘제인 횡혈식 석실로 묘제형식을 통일 하여 보급해 나간 듯 보인다 .270) 4,2,8 塘築噴 (1) 墓地와 構造 전축분은, 2~3C 경 대동강유역에서 塘室墓가 유행한 후, 5C 후반 경 공주에서 다시 나타났다. 이 곳의 전축분은 대동강유역의 그것과 는 달리 중국의 南朝 長江유역지방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묘 제이댜 宋山里 古噴群은 왕릉군일 뿐만 아니라 웅진성 시기의 고분군을 대표하는 유적이다. 우선 묘지선택부터 한강유역의 고분과는 다르 다. 江邊野山의 南斜面 중턱에 묘지를 마련하고, 고분을 橫列로 배 치한 것은 風水地理原理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이다. 분구는 圓 形封土壇으로 규모가 작으며. 塘으로 축조하여 터널식 천정으로 된 매장주체시설은 벽체가 지하로 내려간 半地下式이다. 현재 완전하 게 남아 있는 전축분은 宋山里 6 號壇과 武寧王陵의 단 2 기 뿐이지 만, 당시에는 더 많은 고분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해방 전 에는 校村里에도 일부가 잔존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27 1) 宋山里 6 號壤을 보면, 장방형 현실의 남벽 중앙에 연도를 부설하 였는데, 천정형식은 터널형식으로 하고, 1 인용 稽 臺 를 현실의 동벽 270) 앞에 든 「考古學측면에서 본 三國時代 時期固分問題」 pl0 4. 271) 輕部慈恩 : 「公州 1:: t:i- l f7-> 百濟(1)古項 1-8 」 『考古學雜誌』 23-7. 23-9. 24-3. 24-5. 24-6. 24-9. 26-3. 26-4. 1933-1936.
그림 144 公州 宋山里 古壇群
그림 145 公州 宋山 里 古噴群 6 號壇(左) • 5 號壇(右)
北壁面 東西壁面
그림 147 公州 宋山里 6 號壇 內部
二
그림 149 公州 武寧王陵 內部
그림 150 公州 武寧王陵 遺物 配置狀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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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에 설치하였다. 동서남북 사면벽에는 벽돌 위에 진흙을 바르 고 그 위에 四神 圖를 그렸는데, 고구려 후기 평양지방에서 유행한 양식을 보이고 있어 홍미롭댜 272 ) 1970 년에 발견 조사된 武寧王陵은 장방형 현실의 남벽 중앙에 연 도를 부설한 형식으로, 全面稽 壘 를 설치하고, 천정은 6 호분과 같이 터널형식으로 하였다. 벽체는 벽돌을 四平 一立 울 1 단으로 하여 7 단 을 쌓고, 그 위는 曲面으로 하여 터널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벽체의 상단에 壁兪을 장벽에 2 개, 북쪽 단벽에는 1 개를 각각 만들어 등잔 을 놓았댜 유물은, 왕과 왕비의 관을 중심으로 금제관식 • 금제이 식 • 환두대도 • 동경 • 동제다리미 • 은제탁잔 • 청자광구호 등 모두 2600 여 개의 많은 유물이 부장되었는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墓誌 • 買地券과 一角獸의 鎭墓獸이다. (2) 墓誌와 買地券 묘지석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왕지석) 寧 東大將軍百濟斯 麻王年六十二歲쫒 卯年五月丙戌朔七 日壬辰崩到乙巳年八月 쫒酉朔十二日甲申安層 登稽大墓立志如左 (왕비묘지) 丙午年十一月百濟國王太妃 壽 終居喪在酉地己酉年二月쫒 272) 앞에 든 먀國考古 學槪說 』 p18 6.
未朔十 二 日甲午改葬還 大墓立 志如左 매지권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 (왕비지석의 뒷면) 錢一萬文 右一件 乙巳年八月十二日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以前件錢松土王 土白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 買申地爲墓故立券爲明 不從律令 무령왕릉은 이 매지권으로 피장자와 매장경위 등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삼국시대 고분이 되었다. 이 능의 발견으로 백제의 역사와 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동시대의 신라 • 고구려 • 가야 • 倭의 문화 연구에도 좋은 기준이 되었다 .273) 왕릉 내 왕과 왕비관의 위치와 묘지 • 매지권을 통하여 당시의 葬法울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3) 葬具와 遺物의 位置 왕릉 안은 부부합장을 위하여 전면관상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왕 은 동쪽에, 왕비는 서쪽에 나란히 뉘였다. 그래서 연도를 기준으로 할 때 男右女左’ 의 원칙이 행해졌다. 삼국시대 고분에서 이 원칙을 확인할 수 있는 확실한 예는 드물다. 皇南大塚의 경우 雙陵의 同營 異壤合葬인데. 北壇女 南壇男이어서 東杭에서 男右女左이다 .274) 漢 273) 尹丙 「武寧王陵 및 宋山里六號噴의 地築構造에 관한 考察」 먀羽罰斤究』 5. 1974. 274) 文化公報部文化 H 村節里局 : 『慶州皇南洞 98 號古壇 發堀略報告』 1974. 文化公報部文化財管理局 : 『慶州皇南洞 98 號古項(南壇)發堀略報告』 1976.
代의 帝后陵에서는 帝西后東으로 북침인 경우 남우여좌였고 .275) 南 北朝시대 晋의 경우도 남우여좌였으며 .276) 西晋의 경우도 마찬가지 로 남우여좌의 원칙이었댜 277 ) 백제의 경우는 南朝 등의 영향으로 남우여좌의 원칙이 지켜졌다고 할 수 있다. 발굴 당시 유물의 위치는 원위치를 이탈한 것이 몇 개 있었다 . 예를 들면. 관재 • 왕의 두침 • 왕의 관식 • 왕의 신발 • 왕비의 머 리 • 왕비의 목걸이 등이 원위치를 이탈하고 있는데. 이것은 관재의 부식낙하로 이동하였다기보다 관상하부의 배수로로 물이 잘 빠지지 않고 고여 浮游하여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4) 墓門과 杭向 武寧王陵의 연도는 남향이고 왕과 왕비의 침향(頭向)도 역시 남 향이다. 그런데 백제를 비롯하여 삼국시대의 횡혈식 고분의 침향은 연도와 반대 방향인 북향(현무 방향)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묘지를 풍수지리에 의해 선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宋山里의 고분은 지형 에 따라 남향할 수 밖에 없으나. 금강이 북쪽에 막혀 있는 지형에서 내룡(진정한 현무 방향)은 남쪽에 있는 봉황산 • 우금치 • 계룡산으 로 이어지고 더 멀리는 덕유산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풍수지리상의 현무 방향은 남쪽이므로 침향이 연도와 같은 방향인 남향으로 결정 되어 있는 듯하다. 이와 같은 예는 중국의 남조에서 많은 예를 볼 수 있는데. 그 원리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278) 275) 徐拜芳 : 「 秦漢魏晋南 北朝時代的陵園和 登域 」 『考古』 1981-6 p52 6. 276) 江西省博物館 : 「江西南昌晋墓」 『考古』 1974-6. 277) 北京市文物工作隊 : 「北京市 ]I 傾義縣 大營村 西晋墓葬發堀簡報」 『文物』 1983- 10. 278) 앞에 든 姜仁求의 논문 「武 寧 王陵의 葬法과 墓制 」 pp1 55-156. 南京博物館 • 南京文物管理委貝合 : 「南京柄 霞 山 其家卷 六朝墓葬」 『考古』 1976-5.
(5) 二次葬 (9 賓葬) 왕릉의 묘지석에는 왕과 왕비의 시체는 각기 사망한 날로부터 왕 은 27 개월만에, 왕비는 28 개월만에 왕릉에 안장되었다고 하였다. 2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빈전이나 가릉에 임시 안치하였다가 왕릉에 안장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의 상태를 빈장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빈장은 당시 각국에서 모두 행해졌다. 광개토대왕은 약 3 년간 ,279) 신라의 혁거세왕은 사후 7 일간 ,280 ) 수로왕은 殖宮을 세웠다 281) 는 기사가 있댜 빈장 상태는 그 기간 동안 왕릉을 축조하고 부장유물 을 만드는 등 장례 준비를 하는 동시에, 시체는 肉脫되고 骨~ 남 게 된댜 이 과정이 바로 二次葬에 해당된다 .282) 그리고 중국의 역 대 황제들이 원칙처럼 축조하던 壽陵 은 삼국시대에는 어느 나라에 서도 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79) 『 三國史記 』 「 高句麗本紀 」 第六 廣開土大王 二十二년조에 ’冬十月王署’ 라 하였 고, 廣開土王陵碑文에는 ‘甲寅年九月二十九日乙酉遷就山陵’이라 하였다. 광개 토왕 22 년 IO 월은 391 년 IO 월이고 갑인년 구월은 414 년 9 월이므로, 사망으로 부터 12 개월이 지난 후에 왕릉으로 귀장하였다. 『北史』 「高句麗傳」 '…死者 殖 在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 ’ 라는 기사가 있어서 빈장의 기간이 대체로 3 년임 울 알려 주고 있다. 280) 『 三國遺事 』 卷第一 紀異第 一 「新羅始祖 赫居世王」 281) 『 三國遺事 』 卷第二 「熟洛國記」 282) 殖 기간 중 稽 속에서 육달된 경우는 그대로 관 채로 移安 매장하지만. 관을 사용하지 않은 殖의 경우는 取骨하여 骨器만 매장하는 경우 등이 있다.
(6) 墓誌와 葬法 무령왕릉의 묘지석에는 묘지와 매지권이 앞뒤로 기재되어 있어 겸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근거로는, 첫째, ‘寧東大將軍斯 麻王' ‘百濟國王大妃’ 는 왕과 왕비의 관직 기사로 부족함이 없다. 둘 • 째 이면에 관직명과 사망연월일이 있어 주인공을 확인하고 있다. 셋째, 순수 買地卷이라면 전면과 이면의 관직명은 필요치 않고, 사
망연월일만 필요로 할 것이다. 南朝 의 天監四年銘買地卷 과 元康元 年銘買地卷 283) 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리고 왕을 안장하였을 때는 제 1 석은 묘지로, 제 2 석은 매지권으로 하여 두 매 를 연도에 안치한 것 으로 보인다. 그 후 왕비를 합장할 때 제 2 석의 이면에 왕비의 묘지 와, 제 1 석의 이면에는 方位表를 각각 추가로 각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서체와 수법에서 드러난다 . 다음 묘지의 기사 중 논의가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견해를 밝 혀 둔다、 첫째, 왕의 지석 중 安;’은 ‘ 관을 잠시 안치한다(殖)’ ‘假 埋葬한다’ 로 해석한다 .284 ) 둘째, ‘登冠’ 의 뜻은 ‘가다’ ‘모시다’ 의 뜻으로, 安 登冠大墓’ 는 羽넵투에서 大墓(本陵)로 모셨다 . ’ 라고 해 석한댜 285) 셋째 왕비의 묘지 중 改葬還大 墓 ’도 역시 왕 묘지의 安 登冠大墓’ 와 같은 ‘殖葬으로부터 개장하여 대묘로 돌아오셨다’ 라는 뜻이댜 넷째, 壽終 ’ 의 뜻은 단순히 죽었다는 뜻이 아니라 돌 연사 또는 변사의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286 ) 다섯째, 왕의 묘지 중에 買申地爲大墓’와 왕비의 묘지에 ‘居喪在酉地’라는 283) 湖南省博物館 : 「湖南 慈興晋南朝墓 」『 考古學報 』 1984-3 . 鎭江 博物館 : 「鎭江 束吳西晋墓 」『 考古 』 1984-6. 284) 安源에 대하여. 李丙盛 와 정구복은 ,'t,i:葬’ 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李丙盡 : 「百 濟武寧王陵出土誌石 에 對하 여」 『 學術院論文梨 人文社會科석감編』 11 집 1972, 鄭 求福 : 「武 寧王 誌石解釋 에 대한 一考 」 『 宋俊浩敎授停年紀念論衆 』 1987). 285) 登冠에 대하여. 李丙盛는 ‘대묘에 올려 뫼신다’ 로 해석하였는 바, 필자도 이에 부분적으로 동의하면서 羽葬 으로부터 대묘로 모신다’라는 뜻이 전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 鄭求 f넓 은 ·관을 金冠 으로 해석하고` 모든 遺品을 대표 한다’고 하였다(앞에 든 「武 寧王 誌石解釋 에 대한 一考 」). 286) 앞에 든 天監年間의 매지권에서 •• •• 醉酒哥終. 이라 하여 사망의 원인을 밝혀 놓았고, 또 北 齊 의 武平四年銘 매지권에서도 ‘…忽…命過哥終· 라 하여 忽자를 붙여서 역시 자연사가 아님을 표현하고 있다 . 필자는 무녕왕비는 자연사한 것 이 아니라 변사한 것으로 해석하며. 왕비의 묘지와 매지권에 왕의 경우와는 달 리 생년월일이 생략된 것도 이 문제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간다.
문구가있댜 申· 酉 ’는地 番 을. ‘申地’는대묘의지번을. 酉 地’는 왕비의 빈장이 있던 지번을 각각 가리킨다고 본다. ‘居喪’은 ‘ 관이 머물다’ 라는 뜻으로 ’假 埋葬 }貧 葬 ' 울 뜻한다 .287) 여섯째, ·~ 一 萬 文' 은 말할 것도 없이 대묘의 땅 신지를 구입한 地價를 가리키는 것으로. 중국 고대에서 매지권의 기사는 실생활을 실제 그대로 표현 하고 있는데 .288) 武寧王陵의 경우도 실제의 토지가격이 일만문이었 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287) 居喪 에 대하여 李 丙 盛 는 '{ 亭喪 • 停 抵’ 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 필자도 이에 동의한댜 한편 보고서 『武 寧 王 陵 』에서는 ‘삼년상을 지냈다’ 라고 해석하였다. ‘ 申 地 酉地’ 에 대하여, 보고서 • 李 丙 燕 • 정구복 모두 앞에 든 각자의 논문에 서 西 方 의 땅’ 즉 方向 ’ 으로만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신’ 과 ‘ 유’는 오늘날의 地 番 과 같은 뜻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신지 ’ 는 대묘가 있는 지번 을. ‘유지’는 왕비의 殖葬 이 있던 자리를 각각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앞에 든 「武 寧 王 陵 의 葬法 과 墓 制」) . 288) 앞에 든 논문 「湖南慈 興晋 南朝 墓 」와 「鎭江 東 吳西 晋墓 」
결론적으로 말해서. 宋山里 古壤群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풍 수지리형국의 묘지선정·전축식·전면관대·묘지·매지권·진묘수 의 부장 등은 모두 중국의 南朝에서 크게 성행한 형식이 영향을 미 천 것으로 생각된다 .289) 4.3 新羅 및 統一新羅 古壤 4.3 .1 土塘 墓 신라지역의 토광묘는 백제지역과는 달리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내 려온 전통을 지니고 있다. 九政洞 • 入室里 • 竹東里 등지의 세형동 검 출토 토광묘들이 바로 신라 토광묘의 직접적인 祖型이 된다 . 1980 년대에 들어와서 알려지기 시작한 朝陽洞 • 陸城洞 • 舍羅里 등
289) 앞에 든 「百 濟 의 歷史와 思想」『考古 學 으로 본 韓 國 古代史』 pp3 02-310, 앞에 든 댜 韋 國考古 學 槪說』 p18 6. 姜 仁求 : 「中國 墓 ti 1 가 武 寧 王陵에 미친 影響 」 程f 濟 硏究』 10 1979. pl0 6.
지의 고분은 斯盧國 단계의 근거가 된댜 290) 朝陽洞의 토광묘는 산록의 낮은 평지성 구릉에 위치하였다. 木稽 토광묘와 木郡토광묘의 두 종류가 있다. 목관토광묘는 I 형과 II 형으 로 분류된댜 I 형묘는 토광의 길이 2m, 너비 0.75m, 깊이 2m 이며, 墓口평면은 장타원형이고 토광 바닥으로 내려가면서 중간에 1 단의 계단형을 만들어 좁혔으며, 후기 무문토기가 출토되었다. II 형묘는 토광의 길이 2.5~3m, 너비 l~1.5m, 깊이 l~1.5m 로 평면은 세장방 형이며, 後期 無紋土器 • 瓦質土器 • 약간의 청동기 • 漢鏡 • 철기 • 유 리제식옥 등이 출토되었다. I 형묘는 남부지방 무문토기의 下限연대 인 BC 1C 후반으로. II 형 묘는 38 호묘에서 출토된 前漢鏡과 무문토 기 종말기의 黑色磨硏長頭蓋 등으로 lC 후반으로 각각 추정되고 있 다. 목곽토광묘인 III 형묘는 길이 4m, 너비 1.2m, 깊이 0.6m 의 토광 안에 목곽을 설치하였으며, 토광 벽면에는 I 형묘의 경우와 같이 중 간에 계단을 설치하고, 다량의 철기와 瓦質土器가 출토`되었는데. 철 촉의 형식으로 보아 3C 대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II 형묘에 속하는 5 호분에서 지면 위에 두 겹 정도의 積石이 있고, 또 토광에는 타락한 돌들이 있었다고 하 는데 .291) 이것은 積 石木郡壇의 적석부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측 되고 있댜 292) I 형묘는 구조와 무문토기의 출토로 보아 재래식으 로 보이고, II 형묘와 血형묘는 前漢鏡과 黑陶 등이 출토되는 점에서 대동강유역에서 後來한 형식으로 보인다. 陸城洞에서 발견된 토광은 목곽토광묘이며 와질토기가 출토되었다. 293) 290) 姜仁求 : 「斯盧六村과 國家의 成立段階試考」 먀韋國史學』 16 집 p30 . 291 ) 朝陽洞토광묘에 관한 자료는 崔鍾圭의 「慶州市朝陽洞遺蹟發堀調査槪要 & 군 m 成果」 (『古代文化』 35-8 1983) 를 참고로 하였다. 292) 姜仁求 : 「新羅古項硏究에 있어서의 몇 가지 補正」 『先史와 古代』 1 韓國代學 會 1991. p96 . 293) 李健茂 • 김홍주 : 「慶州陸城洞遺蹟發堀調査報告」 『國立博物館古蹟調査報告』 제 17 책 1985.
’二一一―`―
그립 155 鹿州 九政洞 1 號壇
한편 舍羅里에서는 土塘木稽墓 7 기가 발견되었는데, 능선의 사면 에서 장축을 등고선 방향과 겹치는 동-서향으로 하였다. 그 중 가 장 규모가 큰 130 호 묘는 길이 3.25m, 너비 2.25m, 현깊이 0 . 9m 의 토광을 파고, 토광 바닥의 허리부분에는 지름 0,6~0.74m 규모의 원 형 腹抗을 설치하였다. 토광벽 중간에 계단형을 설치하지 않은 것은 토광이 그리 깊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 그리고 토광 안에 길이 2m, 너비 0.8m 의 목관을 안치하였고, 유물에는 尻床代用으로 판상철부 61 매를 깔았고. 목관의 동남부에 검파부세형동검 1 개가 있고. 그 아 래에는 검파부세형동검 • 검파부철검 • 청동파부철도 • 도자 • 청동팔 찌 • 청동가락지 • 호형대구 • 방제경 • 동포 • 구슬목걸이 등이 부장되 었댜 목관 외에는 판상철부 • 철부 • 철겸 • 방제경 • 철촉 • 牛角形抱 守蓋 • 와질토기소호 • 주머니호 • 칠기 • 鐵 등이 부장되었다. 연대는 세형동검의 형식 • 방제경 • 호형대구 • 와질토기 등으로 미루어 IC 후반 ~2C 초로 추정되고 있댜 294)
이 묘는 군을 이룬 일대에서는 규모면에서나 부장유물의 특이성 에서나 탁월한 위치에 있는 주인공의 무덤으로 사료된다 . 이 토광묘 군의 역사적 위치는 동쪽에서 朝陽洞 고분군의 위치와 같이 경주분 지의 서부에서 지도급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4.3.2 石柳墓 석곽묘는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 등 삼국시대 각 지역에서 자 주 발견되는 간단한 구조의 묘이다. 지하에 城을 파고 그 안에 막돌 〔城石)이나 깬돌〔割石〕로 소규모의 郡울 만든 것인데. 청동기시대 부터 내려오는 토착적인 묘의 일종이다. 청동기시대의 석곽묘와 구 별되는 점은 평지에 많이 축조된 것이다. 土城木鄒墓와 積石木鄒壇 에 비해 규모도 작고 부장유물도 빈약한 편이어서 경비가 적게 드
그림 156 慶州 芳內里 石郡墓
294) 이상 사라리 토광묘의 자료는 朴升圭의 「慶州舍羅里遺蹟 130 號墓에 대하여」 ( 頂羅文化』 14 집 東國大學校新羅文化硏究所 1997) 를 참고로 하였다.
는 이점이 있어서. 일반적으로 중간 이하의 신분계층에서 사용한 묘 제로 신라사회에서는 副次的인 묘제이다. 경주에서는 仁旺洞지역에 서 다수 발견된 바 있다 .295) 4.3.3 積石木鄕壇 ( 1 ) 積石木權壇의 構造와 型式 및 葬法 積石木柳壇은 경주의 신라시대 상고 • 중고기의 묘에서 주류를 이 루었던 중심 묘제이다. 경주분지에 특징적으로 거대하게 솟아 있는 圓形封土壤이다. 분포지역은 우선 경주분지를 중심으로 한 부근일 대에 한정적으로 분포하고, 예외로 昌寧 • 三涉 등지에서도 약간 발 견된 일이 있다. 이 구조형식의 묘에는 규모면에서 본다면, 대형 • 중형 • 소형의 종류가 있다. 이 중 積石木柳壇의 특징을 가장 잘 나 타내 주는 것은 대형분이고, 다음은 중형의 묘이다. 분구가 다른 묘제에 비해 크고 높은 것은 매장주체시설인 목곽부 가 지상에 있고, 그 위에 두껍고 거대한 적석부가 덮이고, 최종적으 로 봉토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중형의 일부와 소형(群集된 多項 포 함)은 분구가 낮고 작으며, 매장주체부도 地面下에 토광을 파고 축 조하였다. 따라서 이들 소형분은 계통과 기원에서 대형분과는 구별 하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대형분에는 金冠塚 • 金鈴塚 • 瑞鳳塚 • 天
馬塚 (60m) • 皇南大塚 (120m) • 鳳凰 臺 고분 (270 尺) 둥이 있는데, 이 중 최대형은 황남대총이다. 대형분은 대개 單獨壇으로 존재하고, 대 형과 중형분에는 분구 2 기가 연접된 雙壇(甄形壇)이 있는데, 皇南大 塚 • 盛朽塚과 銀鈴塚 • 普門洞夫婦塚 • 皇南洞 151 호분 등이 여기에 속한다. 多壇(群集壇)은 傅未鄒王陵 일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296) 대형 積石木柳壇은 지면을 整地하여 그 위에 목곽을 설치하고, 295) 慶熙大學校博物館 : 『慶州仁旺洞古項發堀報告』 1974. 296) 앞에 든 「新羅古壇硏究에 있어서 몇 가지 補正」 p72 .다음 상당한 두께의 적석으로 목곽울 둘러싸며, 다시 봉토를 상당한 높이로 축조하고. 봉토의 자락에는 냇돌로 Im 미만의 돌담장형의 土留石(護石)을 시설한다. 돌 재료는 모두 北川과 西川에서 구할 수 있는 人頭大의 냇돌(J I| 原石)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위와 같은 관점하에서 다음과 같이 2 종류의 유형 과 형식으로 분류한 바 있다. ®項型에 의한 분류에는 大型項 中型 壇 • 小型壇이 있댜 대형분과 중형분에는 單壇과 雙壇이 있고, 소형 분에는 단분과 쌍분 외에 군집분(다분)의 형태가 하나 더 있다. ® 묘곽에 의한 분류에는 묘곽의 위치에 따라서 지상식 • 반지상식 • 지 하식 등의 3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지상식에는 單鄒의 목곽적석식 과 井柳의 목곽적석식 그리고 多柳式이 있다. 반지상식에는 순수적 석식과 목곽적석식이 있는데, 거기에는 단곽 • 병곽 그리고 다곽식 이 포함된다. 지하식에도 반지상식과 같은 형식들이 들어 있다. 이 상의 유형과 형식은 積石木鄒壇의 구조와 계통을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한 것이다 .297) 중형과 소형에 속하는 積石木柳項은 처음 축조시 단을 만들지 않 고 장방형의 토광을 판 다음, 그 토광 안에 목곽과 적석을 쌓아올리 고 나서 봉토를 덮는다. 積石木郡壇은 1 穴 1 人葬을 원칙으로 하며. 유물을 부장하기 위한 副鄒을 主柳의 머리맡 또는 발치에 설치(直 列式)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주곽의 옆에 설치(竝列式)하기 도 한다 .298) 297) 姜仁求 : 「신라 積石封土坦의 構造와 系統」먀陣g史論』 7 서울대학교국사학과 1981 . 298) 주곽과 부곽의 위치형상을 기호화하는데는 주곽의 장축을 기준으로 하여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할 경우 一列보다는 直列이 합리적이다. 崔秉鉉과 金元龍은 一 5 脈t과 竝列式, 또 金元龍은 昌字形과 明字形을 제안하 기도 하였다. 앞에 든 며f羅古壇硏究』 pl8 8. 앞에 든 먀籠月考古學槪說』 p20 6.
대형의 積石木郡壇의 주요 요소는 墓壇 • 목곽부 • 적석부 • 봉토부 로 나누어지는데, 분석하여 보기로 한다. ®매장주체시설을 만들기 위하여 지하에 토광을 파지 않고, 지상 분구 중에 설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면 위에 가초부로서 묘단이 설치된다. 이와 유사한 묘단을 가진 묘제는 고구려의 적석총뿐이다. ®묘단 상면에 목곽부를 설치 한다. 묘단 위에 설치하기 때문에 일종의 목조가옥형 299) 이 된다. 그 런 의미에서 같은 목곽이라 하여도 지하 토광 속에 설치하는 황하 유역식의 土塘木柳墓와 시베리아의 利t石木郡壇의 목곽과는 큰 차이 가 있다. ®적석부는 목곽부(목조가옥형)를 보호하기 위하여 목곽 상부에 축조하는 시설이다. 적석부를 축조함으로써 시체는 외계와 단절되고 무덤으로 개념이 바뀐다. 이와 근사한 구조와 규모의 적석 부시설은 고구려 적석총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봉토의 외피로서 즙석식 개념인 시베리아의 積石木柳項의 적석부와는 근본적인 차이 가 있다 .300) 신라의 적석부는 목곽부와 봉토부에 우선하는 기본구 조의 요소이다. 만일 목곽부가 적석부보다 더 기본적인 구조였다면, 적석부는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점차 두께가 얇아지는 쪽으로 진화 하여 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적석은 축조시 재료구득과 축조작업에 서 흙’ 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불편하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299) 목곽부를 설명하기 위하여 ‘木造家屋形’ 이라는 용어를 試用하여 본다. 그것은 목곽이 목관과 부장유물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서는 과대하게 크고、 또 三國 時代 전기에 유행한 殖殿이 바로 목곽 같은 시설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죽 바로 목곽에 시체(목관)를 안치하였다가 그 목곽의 의부에 적석과 봉토를 올려서 왕릉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 『三國遺 事 』 「鷲洛國記」 에 보이는 金首露王의 사망관계기사에 '… 7貝 落…遂於腦之良方平地組立殖宮 高 一丈 周三百步而葬之 號首陵王廟也’ 라는 기사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300) 시베리아의 Besshaty r Kur g an 은 경주와 같이 목곽부가 지상에 가구되어 있으 나. 지하에 통로와 문시설이 나 있어 祠堂의 개념을 갖고 있으며. 봉토 위에 즙석식의 적석이 또 한 층 있는 등 경주와는· 큰 차이룰 보이고 있다(앞에 든 맹f羅古壇硏究』 p402 . 圖 75 를 참고로 하였다.).
286 .
®봉토부는 본래 목곽부와 적석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올린 시설이 지만, 황남대총과 천마총의 경우 봉토의 양은 내부보호의 차원을 훨 씬 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다한 봉토는 의도적으로 분구를 거대 하게 하기 위하여 토량을 올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현상은 시베 리아의 積石木郡壇과 큰 차이이다. 대형분과 중형분에서는 一 項 一 葬의 원칙을 고수하나 중형분의 일 부와 소형분에서는 一 壇井葬(同壇異穴合葬) 또는 一壇多葬(同項異 多穴合葬)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부부합장이나 가족합장을 위 하여 신라 특유의 쌍분(甄形壇)이 발생하였고, 다장을 위한 다분 다 장이 존재하였다. 葬式은 仰臥伸展直股葬을 원칙으로 하였다 .30 1) (2) 副葬遺物 신라 積石木郡壇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부장유물이 다른 종류의 묘제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厚葬이라는 데 있다. 구조상으로 부장유물만을 위한 부곽을 시설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副葬樞를 설 치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종류도 다양하여 금관을 비롯한 이식 과 대 • 신발 • 頭飾 • 젊 II • 반지 등의 장신구류, 環頭大刀를 비롯한 대도 • 소도 • 도자 등의 도검류, 철모 • 철창 • 철촉 • 단갑 • 규갑 • 有刺利 器 등의 무구류. 고배 • 장경호 • 단경호 • 광구호 • 대호 등의 토기류, 철부·보습·철겸 등의 농구류. 障泥·馬軟具·재갈·행엽·운주· 등자 등의 마구류, 동합 • 동완 • 철부 등의 식기류, 이 외에 鐵築(중 간재 및 교환가치단위로 사용) • 유리제완 • 金製寶劍 등 유물이 다 양하고 풍부하여 당시 일상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도구와 용품을 망라하고 있댜 302)303) 이들 유물들은 고구려 • 백제 • 가야 등 당시의 주변 나라와 양식 301 ) 앞에 든 「新羅古項硏究에 있어서의 몇 가지 補正」 302) 國立慶州博物館 : 명龍윙 李養瑢 筑集文化財』 1987. 303) 『國立鹿州博物館도록』 통천문화사 1988.
그림 157 鹿州 皇南洞 古項群 遠 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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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59 慶州 皇南大塚
그림 160 慶州 皇南洞 甄形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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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 164 慶州 天馬塚 積石部 平面圖(『天馬塚.!l,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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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木權 麟 ``\` 外稽 勿% ,H 內稽 ,'-'',,;'' _. ,- 小 。 _ _2m 찮 ` ` 木構 s 그림 166 慶州 天馬塚 主鄒平面圓 • 斷面圓(『天馬塚』,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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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재료면에서 거 의 비 슷 하나. 신라의 금 관 만은 형식과 양식이 특 이하다 . 금관은 순금제 • 은제 • 금동제가 있다. 얇은 금판을 원형으 로 하고 그 위에 장식을 세우는데, 전면과 양측면에는 主幹 에 맞가 지형을 圖案 化한 出(山) 字 형 立飾 을, 후면에는 鹿 角 形의 입식을 세 우며, 측면에는 曲 玉 과 錬 金 細 工 한 장식을 아래로 늘인다. 이 금관 의 형식은 서아시아의 왕관 계통이 남러시아의 스키타이계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와 시베리아 샤먼의 관에서 유래하였다는 견 해가 있다 .304 ) 금관이 출토된 고분은 금관총 • 금령총 • 서봉총 • 천 마총 • 황남대총 북분 • 교동 고분 등이댜 305 ) 그리고 유리제완과 금 제보검도 중동지방에서 그 형식과 제법이 전래되었다고 보고 있 다 . 306)
304) 金元 龍 : 「新 羅 金冠의 系稅 」『 晩 城趙明 基博 士 華 甲 紀念 佛 敎史學論器 』 1964. 앞에 든 ” 韋國考 古學槪說』 p23 4 및 柱 59. 305) 金元 龍 : 먀 澤考古學 槪說』 一 志社 1986. p23 3. 306) 이인숙 : 『한국의 고대유리』 도서 출 판 創文 1993. plO l .
(3) 積石木柳壇의 起源과 編年 신라의 積 石木構壇은 특히 경주지역에서만 한정적인 분포를 보이 고 있는 신라 상고 • 중고기의 주묘제이다. 이 고분형식이 왜 경주에 서만 발견되는지 큰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신라 積 石木柳 壇 의 기원 을 밝히는 데는 두 가지 학설이 제안되어 있다. 하나는 ‘신라 積 石 木郡壤 남부시베리아 목곽묘 기원설 307) • 이고. 또 하나는 ‘新 羅 積 石木構壤 고구려 적석총 기원설 308 ) • 이다. 이 두 학설의 내용에 대 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 ‘남부시베리아 목곽묘 기원설 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
307) 崔秉鉉 : 뎃祚 羅 古 壇 硏究』 一 志社 1993. 이 설은 金元 龍 이 앞에 든 『한국의 고분』 pp 52-55 에서 처음으로 내놓았는데 , 그 후 李 殷昌도 지지한 바 있다. 308) 앞에 든 「신라 積 石封土壇의 구조와 계통」.
저 남부시베리아 지역 목곽묘의 구체상 을 알아보기로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고 있는 시베리아의 목곽묘에는 대략 다음의 세 종류가 있댜 첫째 형식은 미누신스크의 Shib e Kur g an 을 든댜 지하에 토광을 깊이(지하 6~7m) 파고 . 그 안에 원목을 재료로 하여 대형 목곽을 설치한다 . 목곽 위는 지표면 가까이까지 흙이나 돌 없이 原木만으로 2~3m 높게 쌓고. 그 위에 봉토를 올린댜 이 때까지 돌은 들어가 지 않는다. 낮은 분구의 표피에 다시 최종으로 적석을 얇게 덮어 분 구를 완성한다 . 분구의 면적은 넓으나 높이는 낮은 것이 특징이다. 지름 30m 에 높이 lm, 또는 지름 80~lOOm 에 높이 1.5m 여서 외관은 전체적으로 분구가 낮고 펑퍼짐하게 보인다. 이 부분도 경주 대형 積石 木鄒 壇 과 다른 점이다. 이예 비해 경주의 積 石木郡壇은 대형분 의 경우 , 지면 위에 목곽을 설치하고 그 위에 바로 적석을 올리고 최 종으로 봉토를 축조한다. 그러므로 시베리아의 목곽분은 그야말로 목 곽분의 구조이고 , 적석은 단지 蓬 石형태로 덮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구조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목곽분의 연대는 대략 BC 9~BC 4C 가 일반적 이 댜 3o9) Pazy ryk Kur g an 들도 이 종류에 속한다 .310) 둘째 형식은 Ili강 상류지방 Bessaty r • Ch irikta 유적으로 목곽부가 지상에 올라와 있으며, 그 옆에 적석이 올라가고, 역시 낮은 봉토를 얇게 덮은 후 최종으로 얇은 적석을 덮는다. 외관은 앞의 첫째 형식 과 같이 넓고 낮다. 이것의 특징은 지하에 내부시설로 통하는 통로 와 문을 설치하여 항상 출입할 수 있게 하고, 목곽이라는 구조물은 크고 여러 방으로 되어 있다. 이 종류는 대단히 희귀하며, 통로와 문이 있고 거대한 목실이 다수라는 점에서, ‘展體룰 安葬한 후 封한 다’ 는 壇 墓 의 개념보다는 祠堂 09 기능이 王인 듯하다. Chir ikta 유적 309) 梅原 末治 : 『 束 亞 考 古 學論 敦』 第一 京都星野 番 店 1944. pp3 52-357. 310) Serge i I. Rudenko Frozen Tombs' 1978. Br itish Museum Publica ti on s Ltd . London.
울 실제로 조사한 Khorezm 조사대는 이 유적은 Kur gan 이 아니라 墓 廟라고 유적의 성격을 규정한 바 있다. 연대는 BC 7~BC 4C 로 추 정하고 있댜 311) 셋째 형식은 Enn i se y강 상류지방의 Arzhan Kur g an 인데. 지름 120m 이고 내부는 편평하나 둘레의 높이는 3~4m 이댜 원목으로 정 연하게 중심에 대형 곽실을 두고 주위에 삼중 사중으로 모두 70 개 의 곽실을 만들고 상면에 저석을 덮었으나 현재 적석부는 없어졌다 고 한다. 중앙 곽실을 왕묘라고 하여 왕의 부부를 매장하고 직근에 9 인을 순장하였다 . 중앙 곽실에는 4~5 개의 통로를 통하여 들어가도 록 되어 있댜 이 유적은 적석목곽묘임에 틀림없으나 구조가 너무 다르다. 연대는 BC 7~BC 6C 로 추정되고 있으나 근래 lC 정도 높 이고 있다 .312) 앞에 든 예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선 경주의 적석목곽분과 남 부시베리아의 목곽묘 사이에는 구조상의 큰 차이룰 지적할 수 있고. 그 외에 연대문제와 거리문제가 있다. 남부시베리아의 목곽묘 연대 는 대개 BC 9C 에서 BC 4C 정도인데, 이 연대는 경주의 積 石木鄒壇 의 연대에 비해 lOC 이상 15C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큰 연대 폭으로는 구조형식이 일치한다 해도 직접적인 영향관계를 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양자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청동기시대 한반도에서 1 만 km 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과의 교류가 가능하였을 것인가? 더욱이 중간에는 험준한 산악과 사막지 대가 연이어 가로놓여 있다. 그리고 중간지점에 저쪽의 목관묘와 경 주의 積石木鄒壇과 유사한 구조형식의 고분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311) 香山陽坪 : 「中央 7 :J7 II (西部)」『世界考古學 事 典』 下 平凡社 1979. pl3 40. 앞에 든 「新羅古噴硏究에 있어서 몇 가지 補正」 p80 . 앞에 든 며濱羅古壇硏究』 p4 02 의 固 75. 312) 加藤九祚 : 「久수 卜 • '1/sl ) 7 文化(l)原鄕 I:?L) t-& <1 :7 JI,,1/`/古壇(l)發 堀 I: 關聯 L -C-」 『江上波夫敎授古稀記念論集』 山川出版社 1976.
다는 점은 이 두 지역간에 문화의 교류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단적 으로 표현한다. ® 다음은 ‘新羅 積石木鄒噴 고구려 적석총 기원설’ 의 내용을 보자. 積石木鄒項은 신라 지역 이외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 니라, 그 祖型으로부터 발전해 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자료도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定型化된 典型의 積石木鄒壇만이 알려져 있 기 때문에, 가원을 밝히기가 대단히 어렵다. 따라서 기원을 구명하 기 위해서는 고분을 구성한 요소별로 분석하여 추구하는 방법을 택 할 수밖에 없다. 積石木柳壇 특히 대형에 속하는 고분은 묘단부 • 목곽부 • 적석 부 • 봉토부 • 호석부 등 5 개의 중요한 요소로 형성되었다. 이 5 요소 중 기원을 따질 수 있는 것은 목곽부와 적석부이다. 목곽은 한반도 내에서 이미 세형동검 • 前漢鏡 • 黑陶가 출토되는 土塘木鄒墓에서 설치하여 사용한 바가 있는데, 이 목곽묘는 대동강 • 낙동강 • 영산 강유역지방과 경주지방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이 시기는 BC3~BC 2C 경이다. 다음 적석부는, 고분에서 봉토를 除하면 대략 14'~15m 의 방형적석부만이 남는데, 이 형상과 규모는 압록강유역지방의 고구 려 적석총과 대단히 흡사하다. 이것이 남하하여 미리 와 있던 목곽 묘와 결합하여 경주식의 새로운 묘제를 창출한 것으로 판단된다. 慶 州 朝陽洞의 土塘木柳墓 5 호분에서는 목곽의 상위부분에 두 겹의 적석이 있었고, 또 토광 내의 路沒部에서도 약간의 돌이 발견된 일 이 있어서 313) 필자는 이것이 양은 적지만 초기의 적석부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314) 그리고 慶州 入室里에서 가까운 蔚山郡農所面 中山里의 積石木鄒壇은 연대가 올라가는 고식이지만, 313) 앞에 든 「新羅古壇硏究에 있어서 몇 가지 補正」 p 96 의 柱 48( 崔鍾圭의 발굴조 사담) 참조. 314) 앞에 든 「新羅古壇硏究에 있어서 몇 가지 補正」 p9 6.
이미 적석부가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315) 필자는 고구려의 적 석총이 신라의 경주에 영향을 미친 시기. 죽 경주 積石 木鄒壇의 출 현시기를 2~3C 로 추정한 바 있다 .316) 積石木構壇의 중형묘는 지면하에 광을 파고 그 안 토벽에 기대어 냇돌로 적석하여 석벽을 만들고. 그 안에 목곽을 설치하여 목관을 격납한 후 적석층을 올리는 구조형식이다. 토광의 깊이는 lm 이상 1.5 m 또는 2m 이상 깊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구조적으로 볼 때 대형의 경우와는 달리 土城木鄒墓에 적석총의 구조가 가미되어 출현한 형식으로 보인다. 이 형식 중 연대가 올라가는 고식으로는 월성로 가 6 호분, 월성로 가 13 호분, 皇南洞 109 호분의 3 호 • 4 호곽을 들 수 있댜 전자 2 기는 4C 초 317) 로, 후자 2 기는 4C 전반 318) 으로 각각 추정하고 있다. 積石木鄕壇의 소형묘는 분구의 구분 없이 잇대어 있는 집단묘 형 태를 갖추고 있어, 대형묘와 중형묘와는 구조형식에서 차이가 있다. 미추왕릉지구 제 1 구역 • 제 5 구역 • 제 9 구역의 묘장상태에서 잘 나타 나 있다. 토광 내에 적석은 있으나 적석곽 내의 면적이 좁기 때문에 목곽을 생략하고 목관만을 안치한 구조이다.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積石木稽墓로 불러야 할 것이다 .319) 이와 같은 집단묘의 고분군도 혼하지 않다. 다만, 遼寧省 桓仁縣 高力墓子村의 洞江유역에 이와 같이 여러 적석총이 연하여 축조된 예가 있다 .320) 고구려 초기의 315) 昌原大學校博物館 : 「蔚山中山里유적 2 차발굴조사성과」 보도자료 1993.6 . 1 5 , 316) 앞에 든 「新羅古壇硏究에 있어서 몇 가지 補正」과 「新羅(f) 墓制幾遷 &紀年問 題」 317) 앞에 든 『鹿州市月城路古項群』 p43 9. 318) 앞에 든 먀籠맙考古學槪說』 p21 3. 319) 金廷鶴 • 鄭澄元 : 「味鄒王陵地監 第 5 區域 古噴群發堀調査報告」 『慶州地區 古 項發堀調査報告書』 第 1 輯 文化財管理局 • 座州史蹟管理事務所 1975. 320) 정찬영 : 「기원 4 세기까지의 고구려묘제에 관한 연구」 『고고민속논문집』 5. 사회과학출판사 1973. pp2 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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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74 Bess ha ty r Kurga n 項 丘 斷面 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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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형태의 집단묘는 청동기시대 요동반도의 老鐵 山 Ml • M4, 將 軍 山 Ml • 陀頭墓 둥지 321 ) 로부터 전해진 전통깊은 형식으로 생각 되며. 대형 積石木 鄒項과는 계통을 달리한다. 4.3.4 橫穴式 石室 壇 (1) 橫口式 • 橫穴式石室壤의 構造型式 석실분은 지하에 토광을 파고 그 안에 괴석 • 할석 • 판석 등을 재 료로 하여 방과 같은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시체를 안치하는 구조 의 무덤시설을 일컫는데. 시체를 어느 방향에서 格納하느냐에 따라 서 수혈식 석실과 橫穴式石室로 나누어진다. 횡혈식 석실은 석실의 측면에 통로와 문 시설을 만들고, 그 곳울 통해 시체를 넣는데. 이 구조는 본래 家族合葬을 위하여 설계된 형식이다. ®그런데 횡혈식과 같은 목적으로 마련된 석실에 橫口式 石室이 있다. 이것은 중국에서 횡혈식(석실묘 • 塘室墓)이 축조 유행하였으 나 한반도에서는 疾道 • 門과 天井을 넓히기 위한 기술이 아직 미숙 할 때, 평천정석실의 한쪽 短壁의 일부분을 열고 시체를 넣은 후 다 시 벽을 복원하는 구조형식이다. 橫口式 석실분은 출입시설의 구조 차이에 따라 2 종으로 나누어진 다. 하나는 출입할 때마다 벽을 헐었다 쌓았다 하는 閉塞式과 출입 할 수 있는 시설을 먼저 마련해 두고 출입하는 出入口式이 있다. 폐쇄식은 皇南洞 151 호분 322) 을 대표유적으로 들 수 있는데, 완전 자하식으로 묘실의 평면은 장방형이며, 동서 2 장벽과 북단벽을 쌓고 개석을 올린 후, 남쪽을 통하여 시체를 격납하고 退室한 다움 밖에 서 남단벽을 쌓고 분구를 축조한 것인데, 追加葬시에는 남벽을 헐고 321 ) 束潮 : 며 5 句麗考古學硏究』 p4 3 의 固 4. 322) 文化財管理局 : 『鹿州 皇 吾里第一 三三號 第一五一 號 古噴發堀調査報告』 1969.
매장한 후 복원한다 여기에는 3 인을 추가장하여 모두 4 인을 매장하 였다. 천정은 몇 개의 판상석으로 이루어진 평천정식이며. 벽체는 할석을 성글게 쌓았다. 출입구식은 普門洞 夫婦塚의 婦塚 323) 에서 볼 수 있다. 묘실의 평 면은 장방형이고, 서쪽 단벽의 폭을 약간 좁히고 묘실바닥보다 약간 높게 함으로써 그 벽이 출입구임을 표시하고 있다. 천정은 평천정식 이고, 벽체는 괴석과 할석을 섞어서 성글게 쌓았으나 벽면은 整面 하였댜 ®횡혈식 석실분은 연도의 위치와 천정의 형식을 기준으로 3 종으 로분류한댜 첫째는 順興己未銘壁畵壇 형식이다 .324) 묘실의 평면은 장방형이 고, 연도는 장벽의 한쪽 끝에 붙여서 설치하였다. 천정은 평천정식 으로 벽면과 함께 전면에 두터운 白灰발이룰 한 다음 그 위에 벽화 를 그렸다. 구조도 그렇고 벽화의 내용에서도 고구려 양식이 보여 일단 고구려가 5C 경 남하하였을 당시의 영향으로 추측하고 있다. 둘째는 雙床塚 325) 이나 傳神德王陵 326) 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형식으로 묘실의 평면은 방형이고, 연도는 남벽의 중앙 또는 한쪽에 偏在하여 설치하였으며, 천정은 돔식으로 하였으나 굴뚝처럼 높게 축조한 형식이다. 이런 형식은 集安의 萬寶汀 1368 호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신라에서 유행한 것은 대략 6C 경으로 추측된다. 축조 시 궁륭상천정을 목표로 하였으나 천정을 曲面으로 축조하는 기술 이 발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높이 올리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셋째는 忠孝洞 고분군에서 다수 보는 것과 같은 형식인데. 묘실 의 평면은 방형이고, 연도는 남벽의 중앙과 편재가 골고루 섞여 있 323) 朝鮮總督府 : 『朝鮮古蹟岡譜』 3, 1916. 324) 文化財硏究所 : 『順興邑內里壁畵古壇』 1986 325) 園立博物館 : 『雙床塚馬塚一三八號 調査報告』 1955. 326) 朴日薰 : 「慶州三陵石室古壇-傳新羅神德王陵-」 『美術資料』 8 國立博物館 1963,
으며. 천정은 완전한 窓篠狀 으로 되었다. 이런 형식은 한반도에서 경주에만 특징적으로 분포해 있는데, 횡혈식 석실분의 完成型이라 고 할 수 있다. 신라가 隋 • 唐 과의 빈번한 교통 속에서 유입된 北朝 式의 석실형식인 것이다. 대략 6C 후반에서 7C 경에 유행하였고, 통 일 후에도 성행하였다. 내부에 火葬骨礎를 격납하는 것이 보통이며, 불교와 관계 가 깊댜 327) (2) 橫口式 • 橫穴式石室頃의 出現背景 신라의 경우는 橫口式 石室이 출현하여 보급되고, 繼起的 으로 횡 혈식석실이 출현하여 유행하던 5C 대에서 6C 대에는 고대국가를 완 성하고 삼국통일을 향해 전진하는 기간이었다 . 奈勿王 이후 實聖王 (402~416 년) • 訥祗王 (417~457 년) • 慈悲王 (458~478 년) • 炤知王 (479~499 년) • 智證王 (500~513 년)을 거쳐 法興王에 이르는 약 100 년간은 고대왕국으로서 체제를 완바하고 정복국가로서 도약해 가는 준비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법흥왕 때 (514~539 년)에는 관제를 정비하고 법령을 제정하였으며, 建元이라는 신라 최초의 독자적인 年號를 제정하여 사용하였다. 이미 퍼져 있던 불교를 공인하여 정신 적 지주로 활용하였으며, 밖으로는 金官國울 병합하여 낙동강유역 지방울 확보하였댜 眞興王 때 (540~575 년)에는 전 왕대에 이어 정 복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여 한강유역과 원산만까지 국토를 넓히고, 花郞徒롤 시행하였으며, 國史를 편찬하는 등 文運도 일었다 . 궁륭상 천정식의 횡혈식 석실이 번성한 6C 후반의 眞平王 때에는 다시 官 制를 中國式으로 개편하고, 수 • 당과의 친교를 두텁게 하였으며, 불 교도 크게 진흥하였다. 결국 이 시기에 횡혈식 석실분으로 묘제를 통일한 세력들이 나아가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신라에서 횡혈식 석실분의 개시는 5C 중엽으로 추정되고 있 327) 앞에 든 「新羅(1) 墓制變遷&紀年問題 」 pp2 94-295.
댜 328) (3) 橫口式 • 橫穴式石室壇의 評價 횡혈식 구조형식은 동양사회에서 사용한 묘제 중 가장 편리하고 우수한 구조를 가졌다. 규모면에서 보면, 적석총이나 積石木鄒項 또 는 전축분보다 축조하기 편하고 견고하며 동시에 비용이 덜 들어 실용적이다. 출입구가 있어 추가장이 가능하여 가족합장을 위해 매 우 편리하다. 보통은 부부합장이지만, 많은 경우 5~6 인까지 합장이 가능하며 양산 부부총의 경우에는 5 인의 가족이 합장되었다. 가족단 위의 분묘로서 관리에 매우 합리적이다 . 이와 같은 여러 이점을 토 대로 평한다면, 횡혈식 석실분은 인간이 고안해 낸 장제 중 가장 이 상적인 구조형식이라고 할 수 있댜 329)
328) 앞에 든 「新羅古壇硏究에 있어서 몇 가지 補正」 p10 9. 329) 姜仁求 : 「考古學측면에서 본 三國時代 時期區分問題-橫穴式石室의 유행기를 중십으로-」 먀 k 國史의 時代區分에 관한 硏究』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5. p98 .
그리고 횡혈식 석실분이 중국의 영향으로 처음 출현하여 발전하 고 유행한 시기에 삼국은 중국의 文物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개편하여 나갔다 . 또 사상적으로 불교의 보급이 급격히 확산되어 국 내의 사상통일을 이루고 일반의 의식이 바뀌어 나갔으며, 분묘의 축 조, 불교사원의 건축, 토목사업의 발흥 등에서 신기술의 진작이 일 어났댜 총체적으로 볼 때 횡혈식 석실분이 유행한 시기에 문화사 상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전환하는 계기를 이룬 것으로 평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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婦塚橫斷圖 婦塚縱斷圖
口
그림 179 榮州 順興面 邑內里 3 號壇 內部
0 0.2 0.4 0.6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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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82 迎日 冷水里 古壇 內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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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5 統一新羅 古壇(石室火葬墓) (1) ―般墓 統 一 新羅時代의 고분은 전대인 삼국시대 고분에 비해 몇 가지 특 징으로 표현할 수 있다. 첫째는 구조형식상의 특징이다. 외형적으로는 자그마한 圓形封土 壇이고, 내부는 괴석 또는 할석조로 축조한 方形의 玄室에 천정이 窓隆 狀이며, 疾道가 남벽 중앙에 설치된 구조형식이 보편적으로 유 행하였다. 석실은 대개 地上式이거나 半地上式으로 축조되었다. 그 러므로 통일 전에 삼국에서 각기 특징을 갖고 유행하던 장방형현실 의 석실은 慶州 忠孝洞의 석실형식으로 통일되어 전승되어 나갔다. 여기에는 다분히 隋 • 唐시대 석실분의 구조형식이 영향을 끼친 것 으로 보인다 .330) 둘째는 墓地選定에 風水地理思想의 응용이 일반화되었다 . 풍수지 리사상은 중국에서 삼국시대 · 전기에 전해졌다고 생각되나, 분묘에 구체적으로 응용하기 시작한 것은 각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죽 高 句麗는 安岳 3 號噴에 나타난 것처럼 4C 중엽으로 보이고, 百濟는 宋山里 古壇群에서 찾을 수 있으므로 5C 후반으로 보이며, 新羅는 武烈王陵까지 연속 분포된 西岳洞 古壇群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 다. 그러므로 統一前夜에는 삼국이 모두 묘지선정에 있어서는 풍수 지리의 원리를 보편적으로 활용하였다. 이것이 통일이 되면서 묘지 선정의 원칙으로 정착되었다. 그래서 이 시대의 고분은 산이나 구릉 의 南斜面에서 左靑龍 • 右白虎 • 後玄武 • 前朱雀의 지형에, 전방에는 河 )1| 이 흐르는 지형을 模型으로 하여 분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셋째는 葬法에 있어서 火葬이 보편화되었다. 불교의 보급에 따라 유행하게 된 화장법은 통일 이후에는 佛家뿐 아니라 일반 주민계층 330) 앞에 든 「考古學측면에서 본 三國時代 時期固分 問題」 ppl l0-111.
까지도 따르게 되었으니, 文武王의 水中陵에서 볼 수 있듯이 王室 의 선도 아래에 보편화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래서 화장의 骨灰를 담아 매장하는 骨盛는 새로운 葬具로서 유행하게 되고. 이것이 횡혈 식 석실분과 결합하여 주류를 이룬 묘제가 되었다. 이 시대의 화장묘가 발견 조사된 예는 극히 드물다. 1970 년대 朝 陽洞 부근에서 발견된 화장묘는 家形石函 속에 唐三彩의 骨壅를 내 장한 것이었다. 석함은 원통형 • 상자형 • 家形 등이 있는데. 모두 반 을 잘라서 안쪽 위와 아래를 거의 같게 파 내어 공간을 만든 것이 댜 골호는 盡形 • 盆形 • 振形 등의 형상에 印花文을 연하여 器面에 가득히 채운 형식으로 통일 직전에 나타났으며 통일 후에도 계속 유행하였다. 때로는 朝陽洞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당삼채 新羅三彩 의 도자기 골호도 있었는데, 상류계층의 소유물로 추측된다. 매장형 식에는 위와 같이 석함에 담아 매장하는 형식도 있지만. 통일 전에 는 백제의 부여 당산의 경우와 같이 중앙에 큰 항아리를 놓고 그 주위에 작은 합이나 蓋付鉢을 3~6 개씩 돌려 놓은 형식도 있다. 또 內壅와 外盛가 갖추어진 골호 세트를 단독으로 매장한 형식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댜 33 1) 골호 토기가 수없이 많은 것을 보면 골 호를 이용한 화장묘는 많이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나, 지상에 표지물 이 없고 지면하에 얕게 매장하였기 때문에 많이 파괴되어 원형으로 조사되는 것이 드물 것이다. (2) 王陵 ®槪觀 新羅王陵은 분포지점(묘지선정)을 기준으로 한다면, 大川과 南 )II 변의 산록―따뷰구분지-仙桃山과 南山 산록―봅JJI I 계곡의 산록一》 331 ) 앞에 든 『國立鹿州博物館』 통천문화사 1988, pp 50-53 의 도판 89-98.
원격지 등 5 단계로 변천해 갔다. 그러나 구조형식을 기준으로 할 때, 토광묘一 積 石木柳 壇 一횡구식 석실분―솅혈식 석실분 등 4 단계 로 변화하였다. 제 1 단계인 토광묘( 土 塘木稽 墓 , 土城 木柳 墓 )단계는 사로국 단계로 서 조선의 유이민들이 들어와 청동기와 철기를 가지고 조선에서 경 험한 단체조직 통치의 지식을 바탕으로 부족연맹장 또는 성읍국가 의 장이 되어 고대국가로 향해 발전하던 시기의 고분으로 혈족공동 묘지 내에서 특별히 탁월하지는 않았다 . 朝陽洞 고분 • 사라리 고 분 • 월성로 고분 등이 여기에 속하며, 역사상 인물과 전혀 연관지을 수 없다. 제 2 단계는 積 石木鄒壇이라는 새로운 구조형식을 창안하여 조영하 던 시기로, 대체로 3C 이후 경주분지의 대형분이 여기에 속하며 역 시 구체적 인물은 아직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6C 전반의 지증마 립간까지 분지에 축조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 제 3 단계에 일어난 횡구식 석실분은, 도읍이 확대되고 중국의 선진 文物이 유입되자 제도와 사상이 중국화하여 감에 따라 생겨났다. 이 에 왕릉의 구조형식은 東 漢 형식을 본받아 횡혈식으로 바뀌면서 묘 지도 분지를 벗어나 처음으로 선도산 기슭으로 나갔다 . 그것이 武烈 王陵의 북후방에 일렬로 분포된 서악동 왕릉군이다 . 이 단계부터 진 정한 의미의 왕릉이라 할 수 있으며, 어느 정도 주인공도 추정이 가 능하다 . 제 4 단계인 횡혈식 석실분은 통일 이후 정착되어 전통일기간에 채 용되었으며 남산 서록과 다시 남천계곡간의 산록으로 묘지를 옮기 면서 남천의 북과 남에 일렬로 분포해 있다 . 천북에는 傳神文王陵에 서 시작하여 전신무왕릉 • 전효소왕릉 • 傳聖德王陵을 거쳐 掛陵까지, 천남에는 전헌강왕릉 • 전정강왕릉이 서에서 동으로 분포되었다. 이 형식의 분포상은 한대의 제능이 위수를 사이에 두고 위북 • 위하로 동에서 서로 위수를 따라 일렬로 분포된 상황과 같고 , 또 당대의 제
릉 또한 위수의 북쪽에서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통일기의 남 천변의 왕릉배치와 유사한 점이 많아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댜 332) ®構造型式의 模遷 여기의 대상은 주인공을 추정할 수 있는 서악동 왕릉군에서 시작 하여 통일기 전체 기간의 왕릉이 된다. [規模] 왕릉의 규모는 積石木鄒壇에서 횡혈식 석실분으로 이행해 가면서 분구는 점차 축소되어 갔다. 그러므로 왕릉으로서 가장 규모 가 큰 것은 분지에 분포된 고분들이다. 예를 들면. 황남대총 • 봉황 대고분 등이 제 1 그룹에 속한다. 다음 서악동의 4 기의 고분과 武烈王 陵 보문동의 傳眞平王陵. 낭산의 선덕왕릉 • 傳神文王陵. 남산의 전 헌강왕릉 • 전정강왕릉까지를 제 2 그룹에 넣을 수 있다. 이 나머지의 남천변의 제왕릉과 남산 서북위 제왕릉 둥은 제 3 그룹에 넣을 수 있댜 분구의 규모는 내부의 매장주체시설이 지상인가 아니면 지하인가 에 따라. 또 매장주체시설의 규모에 따라 결정된다. 가령 분지에 있 는 제 1 그룹에 속하는 積石木柳壇의 경우는 지상에 묘단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한 목조건물과 유사한 목곽시설. 다시 그 위에 거대한 적석층이 올라가고. 최종으로 두꺼운 본토가 올라가기 때문에 다른 내부 구조의 고분보다 커지지 않을 수 없다. 다음 제 2 그룹에 속하는 고분은 내부 매장주체시설이 횡구식 석실로서 지상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버금가는 규모가 되었다. 제 3 그룹에 속하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고분들은 매장주체시설이 반지상식이고 횡혈식 석실로 되어 있기 때문에 거대한 분구를 형성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外護施設] 여기서 말하는 외호시설은 護石을 뜻한다. 호석은 봉 332) 앞에 든 「新羅王陵의 再檢討 (3) 」 p37 1.
토를 보호하기 위하여 설 치한 것이라 하여 일명 土留石列 이라고도 한댜 호석이 나타나는 것은 高塚 고분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朝陽 洞과 같이 低壤口의 토광묘에서는 볼 수 없고. 積石木節:tJt 에서부터 나타나서 횡혈식 석실분까지 계승되었다. 분묘에 호석 을 시설하는 풍습은 비단 신라에서만 행해진 것이 아니며, 시베리아의 Kurga n , 중국의 한대 이후 고분. 고구려의 적석총과 봉토석실분, 백제의 할 석조 • 판석조석실분 등 모든 형식에서 볼 수 있는 보편화된 구조라 고 할 수 있댜 따라서 어느 곳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各 地 多發的 으로 생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그런데 이 호석이 시기와 지역에 따라서 양식이 달라지고, 거기 에 따라서 재료도 달라지며 하나의 제도로서 변천하게 되었다. 제 1 그룹의 전 고분과 제 2 그룹에서 서악동 4 기의 고분 및 武烈 王 陵 • 선 덕왕릉에서는 적석층에 사용한 냇돌을 사용하여 2~5 단, 1 열 또는 2 열로 마치 담장형(垣瑞形)으로 축조하는 것이 보통이다. 특별히 거 대하고 높은 분구의 경우는 호석의 높이도 따라〈1 높아져서 황남대 총의 경우는 높이 3.3m, 너비 2.lm 나 되었다. 제 2 그룹에서는 괴석을 치석하여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 장대석을 2~3 단으로 축조하여 築 臺 形으로 한 것도 있는데 , 전헌강왕릉 • 전정강왕릉이 이에 속한 다 . 괴석을 치석하여 마치 판석면을 만들어 群風形으로 돌려 축조한 것으로는 傳神文王陵 • { 專聖德王陵 • 전희강왕릉이 있으며, 그 판석 면에 十 二支神像 울 i휘影한 것으로는 傳金庚信墓 • 掛陵 • {맘景德王 陵 • 興德王陵 • 전헌덕왕릉 • 전진덕왕릉 • 九政洞 方形壤 등이 있 댜 333) 병풍형의 판석면을 보강하기 위하여 외면에서 삼각형의 버 팀석을 설치한 고분도 있는데, {專 神文王陵 • {專聖德 王陵 • 전민애왕 릉 등에서 볼 수 있다 . 이 호석형식의 변천순서를 정리하면 다음과 333) 신라능묘의 십이지신상의 조각에 대하여 高裕斐 은 불교의 藥師信 1 i n 과 중국의 五行思想이 결합하여 신라릉에 타난 것으로 보았다 .(高裕斐 : 「 藥師信 1rn 과 新 羅美術 」『 韓國美術史 及 美學論 5文 』 通文館 1963. pp5 7-67)
같댜 평지돌담장식一산록돌담장식―'적석형기단식一판석형기단식 一십이지신상기단식-->십이지신상 및 외호식물부기단식의 순 이 댜 3 34) 병풍형호석고분의 십이지신상의 조각수법과 양식에는 차이가 있 댜 신상은 모두 의 복을 입고 있는데. 傳金庚信墓 의 것은 민복(관 복?)을 착용하고 있고. 그 외의 모든 고분에서는 융복 (군복)을 착용 하고 있댜 조각수법은 傳金庚信墓의 조각과 掛陵의 조각이 가장 우 수하고. 그 다음이 傳 景德王 陵 • 傳興德王陵이며. 그 뒤가 전헌덕왕 릉 • 전진덕왕릉 • 九政洞方形噴의 순으로 평가할 수 있다 .335 ) [石物制 度 ] 왕릉의 분구 외부에 가하는 장식 석물로는 앞에서 말 한 병풍석 외에 基板石 • 石f衛干 • 床石 • 石獸像(동물상) • 石 人 像( 문 무인석) • 華表 • 陵碑 • 陵寺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이것을 출현순서 로 보면 다음과 같다. ®기판석·석난간 기판석은 분구의 자락둘레에 깐 큰 판석을 말하는 것으로 분구 중심을 圓心 으로 하여, 안쪽은 좁고 바깥쪽은 넓게 하여 한 줄 또는 두줄씩 조직적으로 깔았다. 석난간은 바닥의 기판석 둘레에 육각형 의 석주를 세우고. 석주와 석주 사이를 긴 석주형을 연결하여 난간 을 만든 것인데. 기판석 위를 회랑으로 보고 분구를 佛塔으로 간주 할 때 탑의 보호와 경계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댜 전체적 으로 볼 때. 왕릉의 병풍석에 십이지상을 조각하고 회랑과 난간을 334) 앞에 든 「新 羅王 | 凌의 再檢討 ( 3) 」 p38 3. 335) 有光敎一 : 「 十 二 支生肖 D 石)影순稅:-j L f.:新羅陵墓」 『靑丘學盟』 25 號 1936. 齋藤忠 : 「新 羅項墓 D 封土標識 m i者型式 !: ?L \ t 」 円壯羅文化論考』 1973. 姜友邦 : 「新 羅十二支像 의 分析과 解자형」 『佛敎美術』 1 東國大學校博物館 1973. 姜友邦 : 「統 一 新羅十 二 支像의 樣式的考察 」 『考古美術』 154 • 155 韓國美術史 學合 1982.
시설한 것은 왕릉을 인도의 스투파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36) 이 것은 불교의 국교화 이후. 문무왕릉의 수중릉에 화장법을 도입한 이래 능묘를 화장묘로 전면 轉換하는 과정에서, 당의 정치적 • 법적 제약에서 탈피하려는 강한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336) 高裕燮 은 王陵制度에서 腦干經營思想 등이 印度의 塔婆法에서 터득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하였다( 高裕燮 : 「 二 九 , 高麗王陵 과 그 形式」『松都古蹟』 博 文出版社 1946. p25 1 .). 근래에 와서 姜友 手 I i은 능묘의 십이지상의 조각은 신라의 창안으로 보고. 난 간과 회 랑은 인도의 수투파를 모방한 것이라 하여 高裕燮 의 견해를 따르고 있 다( 姜友邦 : 「新羅十 二支像 의 分析과 解유합新羅十二支像의 Me t amo rp hose- 」 『佛敎美術』 1 束國大學校博物館 1973. p70 ) .
©床石 상석은 분구의 정면 앞에 설치하여 제물을 차려 놓는 돌상으로. 향로석 • 북석 • 혼유석이라고도 한다. 신라 고분에 상석이 나타난 것은 武烈王陵에서 비롯된다 . 이 때는 긴 자연석을 대강 다듬어 木 柱形의 각석을 만들어 10 여 개를 지면 위에 연하여 한 겹 깔아 놓 은 상태이댜 이 형식은 傳眞平王陵에서 폭이 넓은 장대석형으로 바뀌고. 두 겹으로 깔며 규모도 거대해지다가 傳神文王陵에 오면 거의 탁자형까지 높아진다 . 다음은 남산의 전헌강왕릉과 전정강왕 릉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장대석으로 ‘亡' 자형의 구역을 만들고. 그 안에 장대석을 연하여 깐 형식으로 변화된다. 다음으로 나타난 형 식이 傳聖德王陵 • 掛陵 • 興德王陵 • 傳景德王陵에서 보는 바와 같은 완전한 高床의 판석조탁자형을 만들고 4 면에 안상을 조각하여 불구 로서의 면모를 갖춘 형식이다. 이 형식은 지면에 장대석을 깔아서 만든 상석이 점차 높아졌다가 분구 자락의 돌담형호석이 판석면으 로 바뀌면서 상석도 치석한 판석형으로 정형화된 것으로 보인 다 .337)
337) 앞에 든 「新羅王陵의 再檢討 (3) 」 p37 6.
©石獸像 석수상은 분구의 주위 4 방에 석사자를 세우는 형식과 분구의 전 면에 1 쌍의 석사자를 세우는 형식 등 두 가지가 있다 . 傳聖德王陵의 경우 분구의 후방에 1 쌍, 전방에 좀 거리를 두고 1 쌍의 석사자를 설 치하였댜 掛陵의 경우는 분구의 주위에는 없고 전방에만 1 쌍의 석 사자를 배치하였다 . 興德王陵의 경우에는 분구의 주위 4 방에 1 마리 씩 모두 4 마리의 석사자를 배치하였다. 이 興德王陵처럼 분구 주위 에 석사자를 배치하는 형식이 원형이고 傳聖德王陵과 掛陵의 경우 는 변형된 것으로 생각된다 .338)
338) 신라능묘에 석사자를 배치하는 제도는 唐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唐高宗과 則天武后의 합장능인 建陵의 경우는 분구의 주위 동서남북에 1 쌍씩 의 석사자를 배치하고 있다(楊寬 著 • 西嶋定生 監譯 • 尾形勇 • 太田有子 共譯 : 『中國皇帝陵 m 起源之變遷』 學生社版 1981 . p79 ).
®石人像 석 인상은 문인상과 무인상의 두 종류가 있는데, 분구 전면 양쪽 에 각각 하나씩 1 쌍을 배치하였다. 무인상은 안면조각에서 깊은 눈, 넓고 낮은 코, 숱이 많은 수염 둥에서 보듯이 신라인이 아니라 서역 인을 모델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339) @石華表 석화표가 배치되어 있는 왕릉은 掛陵과 興德王陵뿐이다. 분구의 전방 여러 장식물에서 거리를 둔 제일 전방의 좌우에 각 1 주씩 1 쌍 이 배치되어 있다. 중국에서 석화표는 당건릉에만 있고 다른 능에 서는 볼 수 없다. ®陵碑 신라에서 능비의 시작은 武烈王陵에서 비롯되어, 이후 전 왕릉에 능비가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나 현존하는 것은 거의 없고, 귀부
339) 秦弘燮 「三國時代王陵」 『文化財大觀』 上 文化公報部 文化財管理局 1975, pp1 09-113.
만 유존하는 곳은 傳聖德 王 陵과 興德 王 陵뿐이다. 유명한 廣 開 土 大 王 陵碑는 神道碑로 長 壽王 2 년 (AD 414 년)에 건립되었다. 중국에서 황제릉에 비를 세우는 제도는 남북조시대에 비롯되었다 . 340) ®陵寺 능사는 왕릉의 직근거리에 세워져 왕의 명복을 빌고. 능을 관리 하는 임무를 띤 사찰로서. 願刺 • 造泡寺 • 資 福 寺 등으로도 불린다 . 신라에 능사가 남아 있는 예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 三 國史記』 태 종무열왕조에 泳荷店寺北’ 에 장사지냈다는 기사가 있는데, 여기의 영경사는 능사로 추측된다. 이 영경사는 비단 무열왕릉만의 능사가 아니라 진지왕릉의 능사이기도 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외에 『 三 國 史記』와 『 三 國遺 事 』 왕력편의 기사에 의하면 역대 왕릉의 능사를 추정할 수 있다. 미추왕릉:흥륜사. 법흥왕릉·진흥왕릉:애공사. 법 흥왕비능:영흥사, 傳眞平王陵:보문리사지, 善德女王陵:사천왕사지, 문무왕수중능:감은사, 傳神文王陵:배반동건물지 둥 많은 예가 있으 며. 현존 왕릉이 명실상부하지 못하기 때문에 능사의 명칭을 확정 하는 일도 유동적이다. 다만 왕릉의 직근거리에는 대개의 경우 건 물지가 있어 능사를 추측케 한다. 최근 발굴에 의해 알려진 부여 능 산리의 서남쪽 200m 거리에서 발견된 사찰지와 평양의 전동명왕릉 의 定陵寺 등도 능사로서 확실한 예에 속한다. [왕릉급 고분의 축조순서] 이상에 제시한 분구의 구조형식과 외 호식물을 근거로 하면. 현재 왕릉으로 전해 오는 고분들의 축조순 서를 매길 수 있다. ®서악동 왕릉군의 1 호분 • 2 호분 • 3 호분 • 4 호 분 ®傳眞平王陵 ®善德女王陵 ®남산 서북의 제릉(傳祗摩王陵 • 傳逸聖王陵 • {專神德王陵 • 傳景哀王陵) ®傳神文王陵 ®傳 憲 康王 陵 • 傳定康王陵 ®傳閔哀王陵 • 傳憲德王陵 • 傳聖德王陵 • 傳金庚信 墓 • 掛陵 • 傳景德王陵 • 興德王陵 • 傅眞德王陵 • 九政洞 方形壇 등의 340) 앞에 든 『中國皇帝陵(l)起源 & 變遷』 pp6 6-67.
순서가 된다. ® 王陵의 被葬者( E A 公)推定 新羅王陵 중 주인공이 확실한 능은 그리 많지 않다. 고구려의 壁 畵古項의 묵서명이라든지 백제 武寧王陵의 묘지석과 같은 확실한 자료가 없으며. 왕릉을 축조할 당시에는 능비를 대개 건립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근거가 남아 있는 왕릉은 武烈王陵과 興德王陵 2 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 외 사료의 기록에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 게 부합되는 위치에 유존하는 경우는 善德女王陵(낭산지남양)과 문 무왕의 산골처로서 대왕암(특이한 예)이 있을 뿐이다. 이 4 기는 현 전대로 믿을 수 있는 왕릉이다. 그 외 대부분의 新羅 王陵은 주인공 이 확실하지 않아 특별히 고구가 필요하다. 현전하는 왕릉명은 花 溪柳宜健의 羅陵眞股說 341) 에 의하면 1730 년(영조 6 년 庚戌)에 慶 州府尹 金始炯이 박씨들과 타협하여 17 기의 왕릉에 새로운 명칭을 부여한 것이 조선 후기와 일제기를 거쳐 광복 후까지 그대로 전해 내려온 것을 1960 년 이후 文化財보호법에 의해 법적지정을 본 것이 다 342) 경술년에 새로 지정된 명칭은 다음과 같다. 지마왕릉·일성왕릉·아달라왕릉·진지왕릉•진평왕릉·신문왕 릉·효공왕릉·희강왕릉·민애왕릉·신무왕릉·문성왕릉·헌안왕 릉 • 헌강왕릉 • 정강왕릉 • 신덕왕릉 • 경명왕릉 • 경애왕릉 등 17 기이 댜 이보다 앞서 동국여지승람과 동경지에 수록된 왕릉이 있는데. 그것은 11 기이다. 이들 왕릉은 명칭만 기재되어 있을 뿐 소재지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아마도 경술년에 함께 지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댜 이들 11 기의 왕릉은 다음과 같다. 혁거세릉 • 미추왕릉 • 법흥 341) 柳宜健 : 「羅陵眞四說」 『花溪集』 1823( 純fftfl. 23 년 矣未) 342) 앞에 든 「新羅王陵의 再檢討(1)」 pp6 7-71.
왕릉·진흥왕릉·선덕왕릉·태종무열왕릉·효소왕릉·성덕왕릉·헌 덕왕릉 • 흥덕왕릉 • 김유신묘 등이다. 이상과 같이 현전의 왕릉명은 유의건이 지적하였다시피 과학적인 근 거로 지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부 수정하여 새로 지정하고자 한다 . @서악동 4 왕릉은 평지를 벗어나 처음으로 산록으로 나와 선도 산록에 조영되었다 . 분구규모와 호석의 형식에서 초기의 평지 대형 분구에, 호석도 초기의 돌담장형이다. 그리고 무열왕의 직계 선조들 의 무덤으로서 가족 공동묘지로 선정된 장소로 생각된다 . 그리고 『三國史記』 343) 와 『三國遺事』 344) 에 의하면, 법흥 • 진흥 • 진지 • 武烈 王陵은 ‘永敬寺北’ 또는 哀公寺束 ‘ 이라 하였으므로 같은 묘지에 있어야 한댜 따라서 최상위에 있는 1 호분은 법흥왕릉, 2 호분은 진 흥왕릉, 3 호분은 진지왕릉, 최하위에 있는 4 호분은 문흥대왕릉(무열 왕의 생부로 사후 추존됨) 등으로 추정할 수 있고 ,345) 그 다음 위 치에 무열왕릉이 자리한다. ©남산 북록의 傳憲康王陵과 傳定康王陵은 성덕왕릉과 경덕왕릉 으로 각각 추정된댜 『三國遺事』 346) 에 의하면, 성덕왕릉과 경덕왕 릉은 양장곡에 함께 있어야 하고, 치석한 장대석의 호석이 ‘鍊石爲 陵’ 이라고 한 기사 내용과 일치한다. ©傳聖德王陵은 원성왕릉으로 추정한댜 위치가 전형적인 풍수지 리형국에 맞는 자리이고, 판상면의 호석을 돌렸으나 십이지신상의 조각이 아직 출현하기 전이며, 호석을 삼각형의 버팀석으로 받쳤다. 또한 기판석을 깔고 난간을 시설한 회랑이 있고, 원각의 십이지신 343) 『三國史記』 「新羅本記」 第四 法興王二十七年秋七月조. 兵興 三 十七年秋八月조 . 眞智王四年秋七月조. 「新羅本記」 第五 太宗王八年六月 조. 344) 『三國遺 事 』 「王曆」篇 法興王 • 眞興王 • 眞智王 • 太宗武烈王 각 항목 . 345) 秋史金正喜는 「新羅其興王陵改」에서 진흥왕 • 진지왕 • 문성왕 • 헌안왕의 4 왕 릉을 이 곳 서악동 4 왕릉군에서 구하였다(今西龍의 「新羅 舊都慶 州(l)地勢及안 其遺蹟遺物」 뎃莊羅史硏究』 國찹刊行會 1945). 346) 『三國遺 事』 「王曆」 篇 聖德王항목과 景德王항목
상을 호석 앞에 별석으로 세웠는데 크기가 맞지 않으며, 분구 앞의 상석도 크기가 분구의 다른 시설과 조화되지 않게 큰 것을 보면, 이 들은 후대에 가설한 것으로 보인다. 분구 자락에 십이지신상을 설 치한 분구 중 가장 시기가 올라간다. 이상의 여러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시기는 8C 말에서 9C 초에 해당된다 .347)
347) 姜友邦은 傳聖德王陵의 십이지신상은 경덕왕 때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처음 에는 버팀석만 시설되었고 석난간은 후에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와 견해를 달리한다. 전성덕왕릉의 별개석으로 된 십이지신상은 移置候補한 것이고 、 버팀석도 이 때에 보완한 것으로 본다. 그 근거는 회랑의 바닥 基板石 의 일부를 뜯어 내고 설치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시기는 경문왕대쯤이 아닌 가생각한다.
@傳神文王陵은 효소왕릉으로 추정한다. 傳神文王陵은 아직 거대 한 분구를 갖추었으며, 호석도 소형의 장대석으로 축조하고 지대석 과 갑석을 갖춘 초출의 기단식이며 삼각형의 버팀석으로 받쳤다 『三國史記』 348) 와 『三國遺 事 』 349) 에 望德寺東’ 이라고 한 기사와 대 략 일치한댜 350) ©동천동의 傳憲德王陵은 진평왕릉으로 추정한다. 전헌덕왕릉은 북천변 평지에 위치하고 있어 초기 고분군과 가깝고, 분구도 아직 대형에 속하며, 상석도 갖추지 않았다. 현재의 십이지신상을 조각한 병풍석은 후대에 가설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가령 북천의 범람으로 분구가 훼손된 것을 복원할 때 추가한 시설일 수도 있다. 『三國史 記』에 진평왕릉은 漢只 ( 漢岐部 )에 있다고 한 기사 351) 와도 크게 벗 어나지 않는다. @傳眞平王陵은 신문왕릉으로 추정한다. 傳眞平王陵은 시내 초기 고분과의 거리, 분구의 규모 • 호석 • 상석 등의 형식이 武烈王陵과
348) 『三國史記』 「新羅本記」 第八 孝昭王十一年秋七月조 349) 『三國遺 事』 「王曆」篇 孝昭王항목 350) 姜友邦도 傳神文王陵을 효소왕릉으로 추정한 바 있다(앞에 든 논문) . 351) 『三國史記』 「新羅本紀」 第四 眞平王五十四年春正月조
유사하고. 근거리에 황복사지 3 층석탑이 있다. 이 탑에서 나온 금동 사리외함의 명문에서 신문왕과 그의 부인인 神f皇太后, 그리고 효소 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한 석탑으로 되어 있다 .352) ®掛陵은 신무왕릉으로 추정한댜 신무왕릉은 하대 9C 중엽의 왕릉으로서 풍수지리에 맞는 자리에 있어야 하고, 십이지신상이 조 각된 병풍석과 석인상 • 석수상 • 능비 등 완비된 왕릉제도 를 갖추어 야 한다 . 그리고 『 三 國史記』에 있는 ’弟兄山’ 은 현재의 掛陵리의 兄 弟山일 가능성이 높다 . 신무왕은 혁명에 의해 왕위에 오르고, 문성 왕이 18 년간 통치하였으므로 가능하였을 것이다 .353)
352) 李弘稙 : 『韓 國古文 化 論政』 乙酉文化社 1955. p56 . 353) 李丙荊는 신무왕은 영특하고 걸출한 왕이었으므로 왕릉도 제반 설비를 잘 갖 춘 왕릉이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傳金原信墓를 神武王陵으로 추정한 바 있다 (李丙 燕 : 먀籠갭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p73 3).
©傳閔 哀王陵 은 혜공왕릉으로 추정한댜 전민애왕릉은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지형이 풍수지리에 잘 맞는 곳이며, 호 석이 장대석을 사용한 기단식으로 되어 있고 버팀석을 설치한 점, 분구에서 元和 10 년 (815 년) 명 골호가 출토 354) 된 점 등으로 볼 때, 9C 초, 즉 혜공왕릉으로 추정된댜 ®傳 景德王陵 은 경문왕릉으로 추정한다 e 이 능은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전형적인 풍수지리의 형국이며, 탁자형상석의 설치, 그리고 십이지신상의 조각수법은 掛陵과 興德王陵의 것보다 연대가 내려가는 것이댜 경문왕은 원성왕의 직계 후손으로서, 헌강왕 • 정 강왕 • 진성여왕 • 효공왕 등이 그의 후손이므로 傳景德王陵과 같은 완비된 왕릉을 축조하기에 충분한 여건을 갖추었다. ®傳祗 摩王 陵은 진덕여왕릉으로 추정한댜 이 능은 시내에서 근 거리에 있는 산록에 위치하고, 분구의 규모가 중형으로 삼국시대
354) 鄭良謨 • 李健茂 • 蜀li : 『傳閔哀王陵周邊整備報告』 國立慶)· 사博物館 • 慶尙 北道月城郡 1985. pl9 .
그림 188 底州 西岳洞 古壇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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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一소
그림 191 傳定康王陵
그림 192 傳定康王陵 護石 • 床石
그림 193 傳神文王陵
그림 194 傳閔哀王陵
그림 195 傳聖德王陵
그림 196 傳金庚信墓 護石 내 갭干
그림 197 傳金庚信墓 午像
그림 198 慶州 石杭塚 頭杭石
그림 199 傳憲德王陵
그림 200 掛陵
그림 201 掛陵 武人石
그림 202 傳 景 德 王 陵
그림 203 傳眞德 王 陵
그림 204 慶 州 九政 洞 方形項 (1)
그림 205 慶州 九政洞 方形壇 (2)
))))))))`帝景 高祖惠帝文帝哀帝 帝-元帝成帝昭帝武'./帝宣``' /
二t」
후기에 맞는 규모이며. 분구자락의 돌담장식호석에 상석이 없다. 그 리고 『 三 國史記』에 ‘沙梁部에 葬 事 지냈다’는 기사 355) 가 있는데, 남 산 서북록은 사량부지역으로 사료되기 때문이다. 4.4 加耶古壇 가야지역의 고분은 토광묘 • 석곽묘 • 석실분의 4 종류로 크게 나누 어진다. 4.4.1 土塘墓 (1) 土塀木稽墓 土塘木稽墓는 낙동강하유역지방인 金海지방에서 주로 조사되었 댜 義昌郡 東面 茶戶里에서 27 기, 金海郡 酒村面 良洞里에서 17 기. 金海市 大成洞에서 27 기 등 총 65 기 정도가 조사보고되었다. 다호리의 土城木稽墓는 野山(해발 20m 정도)의 지맥 구릉의 자락 40mx150m 범위 내에 밀집 분포되어 있었다. 토광은 장축울 · 동서로 하고 東杭으로 매장되었다. 토광의 평면은 圓方形(株角장방형)으로 묘광벽은 垂直이며, 광저 중간에 接抗이 있는 것도 있다. I 형은 묘 광의 규모가 크고 요갱이 있는 것으로 길이 2.4 ~ 2.9m, 너비 0.86~ 1.36 m, 현깊이 0.75~2.05m 이다. I1 형은 묘광의 규모가 전자 보다 약 간 작고 요갱이 없으며, 묘광의 길이 2~2.7m, 너비 0.8~1 .6m , 현깊 이 0 .4 3~ 1. 7m 이댜 m 형은 묘광의 규모도 작고 요갱이 없는 것으로, 묘광의 길이 1.6 ~2.lm, 너바 0.55~0.8m, 현깊이 0.2~0.8m 이다. 목 관은 原木을 切開하고 속을 파낸 구유형이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은 다양한 편언데, 토기 • 철기 • 청동기 • 장신구 • 칠기 등이 포함되어 있다. 토기에는 무문토기와 와질토기가 있다. 철기에 355) 『三國史記』「新羅本記」 第五 箕德王八年春三月조
는 鑄造의 桃形鐵芹와 銀造의 환두도자·劍.牙·戈.鐵·有眉철 부 • 板狀철부 • 棒狀철부 등이 주요한 품목을 차지한다. 청동기에는 牙 • 細形銅劍 • 劍附屬金具 • 劍肥頭飾 등이 있다. 그리고 星雲鏡 과 帶욥何가 있댜 칠기로는 붓 • 활 • 부채 • 豆 • 杯 • 鉢이 출토되었다. 연 대는 대체로 기원 전후한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 356) 良洞里의 土坡木相墓는 야산(해발 90m) 의 남사면과 서사면에 정 상으로부터 산자락까지 밀집 분포되었다. 2 호분을 예로 보면, 묘광 의 평면은 원방형이며, 장축은 동서로 하였다. 규모는 길이 3.lm, 너비 1.2 5m, 깊이 1. 57m 인대 분구는 削平되었으나 路沒土로 관찰하 면 낮은 분구의 존재를 추측할 수 있다. 출토 유물로는 와질계의 우각형파수부호 • 단경호 • 주머니호 등이 있고, 주조와 단조의 철부 • 철겸 • 도자 등이 소량 발견되었다 . 연대 는 BC 2C~AD lC 로 추정되고 있댜 357) 대성동의 土塘木稽墓는, 김해평야의 중심지에 솟은 구릉의 정상 부에는 土城木構墓가 분포되어 있고, 구릉의 자락과 주변평지에는 土城木稽墓가 분포되어 있다. 묘광의 평면은 원방형이고 규모는 길 이 2.1 5 ~2.7m, 너비 0.62~1 .2m , 현깊이 0.3~1 . 1m 이댜 분구는 확 인되지 않았으나 묘광에 함몰된 퇴적토로 미루어 볼 때 낮은 분구 의 존재가 추정된다 . 묘광 내에서는 板材로 된 목관의 흔적이 확인 되었다. 출토 유물도 묘광의 형상과 마찬가지로 대략 다호리나 良洞 里와 흡사하게 나타났다. 연대는 BC lC 에서 AD 2C 전반으로 추정 되고 있다 .358) 356) 李健茂 외 : 「義 昌茶戶里遺蹟發堀進展報告 」 『考 古學誌 』 1 1989. 姜仁求 : 「前方後圓項 起源에 關한 一檢討 카循築積丘墓룰 中心으로-」 『古代 韓 日 文化交流硏究』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0. 林孝澤 : 『洛東江下流坡 加 l1K 의 土坡木稽墓 硏究』 한양대학교대 학원 박사학 위논문 1993. 357) 앞에 든 林孝澤의 논문 . 358) 앞에 든 林孝澤의 논문.
(2) 土塀木構墓 土城木構墓는 앞에서 본 土城木相墓와 같은 다호리 • 良洞里 • 대 성동의 고분군에서와 같은 장소에 분포되었다. 그러나 다호리 고분 군에서는 土城木稽墓가 주이고, 良洞里 고분군에서는 土城木~墓가 17 기, 土城木鄒墓가 287 기로 목곽묘가 주이다.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토광목곽묘가 구역을 달리하여 구릉의 정상부에 수기가 분포되어 있었댜 良洞里 土城木鄒墓의 구조는, 235 호의 경우 묘광은 길이 7.6m, 너 비 3.9m, 현깊이 1.1 6m 이고 목곽은 길이 5.4 m , 너비 3.2m, 높이 0.73m 이댜 장축을 남북으로 취하고 南杭하였다. 출토유물로는 와질 토기의 단경호 • 고배 • 유개대부장경호 등이 있고, 판상철부 30 개 • 대형철모(길이 227cm) • 철부 • 환두대도 • 銅 • 유리구슬 등이다. 이 무덤은 규모나 출토 유물면에서 보아 首長墓로 추측되며, 연대는 2C 말 ~3C 초로 추정된다. 이들 유물은 漢의 樂浪系 유물이라기보 다는 夫餘 등 북방계 유물이라는 점이 주목되는데, 낙랑 • 대방의 멸 망 등 한반도 서북지방의 정세변화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 댜 359) 그리고 162 호 土塘木鄒墓에서는 다량의 철기와 함께 2 면의 漢鏡과 8 면의 微製鏡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360) 대성동 土塘木柳墓는, 13 호분의 경우 주곽과 부곽이 구비된 토광 묘인데, 주곽은 길이 5.95m, 너바 3.9m, 부곽은 길이 3.7m, 너비 4m 이다. 목곽의 바닥 전면에는 朱漆울 하였으며, 출토유물로는 大形巴 形銅器 6 개, 壁玉製 석촉 • 철촉 50 개, 대도 2 개 등 많은 유물이 출 토되었으며, 3 인 이상의 인골이 확인되었다. 이 고분은 규모의 거대 함과 출토유물의 탁월함, 拘葬 등의 양상으로 미루어 적어도 王墓가 아닌가 추측되고 있댜 파형동기와 석제품이 일부에서 추측하고 있 359) 동의大學校博物館 : 「金海良洞里 제 235 호 토광목곽묘 발굴조사개요」 1992.1 2 . 360) 동의大學校博物館 : 「金海良洞里 제 162 호 토광목곽묘 발굴조사개요」 1991 .11.
그림 210 金海 大成洞 土城木鄒墓
듯이 倭제품이라고 한다면. 당시 금관가야와 倭와의 교통을 짐작하 게 하는 것으로 주목된다 .36 1) (3) 土塀墓의 性格 낙동강하류역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이들 토광묘는 축조연대상으 로 볼 때,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良洞里 70 호는 가야의 전단계로서 初期 鐵器時代로, 다음의 다호리와 良洞里의 . 대부분의 土塘木相墓는 早期 加耶段階로, 대성동의 대형 목곽묘는 3C 후반 ~4C 중엽대의 加耶 前期의 묘제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기원 직후 에 이미 가야국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출토유물상으로 본 다면, 조기 가야단계에 漢鏡과 그 방제품이 섞여 있는 점으로 미루 어 樂浪 • 帶方 등 漢系세력과 무역 둥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361 ) 경성大學校博物館 발굴조사단 : 「김해대성동 제 13 호분 발굴조사의 성과」 1991.4.1 1 .
수 있댜 362 ) 4.4.2 石郡墓 가야지역에서의 석곽묘는 토광묘(목관묘와 목곽묘)의 다음 단계 에 주류를 이룬 묘제로서 수량면에서 동시대의 다른 나라에 비해 특별한 위치에 있댜 낙동강유역지방 전역에 걸쳐서 고루 분포되어 있댜 주요한 지역은 良洞里 • 華明洞 • 禮 安里 • 福泉洞 • 蓮山洞의 고분군이다. 이들 석곽묘는 뿜穴式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릎穴式 石室墓라고도 한다 .363) 그러나 다음 단계에 출현 유행하는 세장형석실보다는 규 모가 작다 . 이들 석곽묘는 고분군으로 밀집분포상태에서 단독분으 로 존재하나, 高靈 池山洞 44 호분의 경우는 하나의 분구 내에 중앙 에 主 석실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 석곽묘 32 기를 배치한 형태도 있 댜 364) 묘지로는 주로 산 또는 구릉의 남사면을 이용하였다. 구조를 보면 지면을 파서 塘을 만들고, 그 벽에 기대어 城石이나 割石을 사용하여 4 벽을 축조하고 그 상단에 판상석 수매를 사용하 여 蓋 石으로 덮는다. 분구는 낮은 覆土보다는 크고 높지만, 高大하 나 본격적인 석실분의 高塚壇丘보다는 낮은 형상이다. 바닥은 판상 석 • 할석 • 굴껍질 등을 깐 것들이 있다. 석곽의 규모는 길이 2~4m, 너비 1~1.5m, 깊이 1~1.5m 가 보통이다. 석곽묘의 계통은 낙동강유역지방의 지석묘의 하부구조에서 왔다 는 견해가 있으나 .365) 그것보다는 고구려지역의 적석총의 내부구조 인 석곽에서 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366) 362) 앞에 든 林孝i롱의 논문을 참조함. 363) 앞에 든 林孝澤의 논문. 364) 尹容鎭 • 金鍾徹 : 『大伽耶古撰發堀調査報告書』 高靈郡 1979. 365) 앞에 든 며韋國考古學槪說』 p22 0. 366) 앞에 든 「신라 積石封土項의 구조와 계통」 p68 .
4.4.3 石室壇 가야지역의 석실분에는 笠穴式 석실분과 橫口式 석실분, 그리고 橫穴式 석실분의 세 종류가 있다. 이들은 각기 가야의 후기와 末期 에 繼起的으로 출현하여 묘제의 주류를 이루기도 하고, 또는 횡혈식 석실분처럼 주로 가야 멸망 후 유행을 보는 것도 있다. (1) 堅穴式石室壤 수혈식 석실분은 낙동강유역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데 , 부산 ·김해·대구·창녕·합천·안동·고령 등지에 다수 분포되어 있 다. 묘지는 구릉 또는 산능선의 정상부에 입지하여 분구도 거대하게 축조하여 장엄한 위관을 자랑한다. 석실은 반지상식 또는 지상식이 많으며, 석실의 형태는 細長形과 장방형의 두 종류가 있다. 석실의 존재 형태로 볼 때, 한 분구 내에 하나의 석실만을 배치한 것, 두 기의 석실을 T 자형 또는 || 자형으로 배치한 것, 세장형석실과 횡혈 식 석실을 함께 배치한 것 등이 있고, 또 主室의 장축방향으로 副室 을조영한것 등이 있다. 석실은 城石이나 割石으로 4 벽을 수직으로 축조하고 그 상단에 수매의 판상석을 덮어 평천정식을 이루었다. 그러나 부산 복천동의 경우는 부실을 주실과는 달리 토광목곽의 형태로 한 것도 있다. 大邱 內唐洞 51 號壤은 하나의 분구 내에 주석실과 부석실을 T 자 형으로 배치한 형식으로 지상식이다 .367) 釜山 福泉洞 11 號壇은 주 석실과 부토광묘로 형성된 석실분이다. 주실의 크기는 길이 4.30m, 너비 1.5m, 깊이 2.2~3.2m 이고, 부실은 길이 6m, 너비 3.5m, 깊이 1. 5~2m 의 수직토광으로 되었다. 대구 불로동 고분(해안면 1 호분) 은 석실의 길이 8.05m, 너비 1.2m , 깊이 2.2m 인데, 석실의 중간에 367) 小泉顯夫 • 野守健 : 「座尙北道達城郡達西面古項調査報告」 『大正十二年度 朝 鮮蹟調査報告』.
界 整 을 설치하여 主 • 副 室 을 구성하였다 .368) 高磁 池山洞 44 號項의 제 1 주석실은 길이 9.4 m , 너비 1.75 m, 높이 2.lm 이며. 옆에는 제 2 • 제 3 석실과 주위에 32 기의 석곽을 배치하였다 .369) 장방형석실의 기원은 석곽묘와 같이 고구려 적석총의 곽실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에서는 지석묘의 하부구조라던 가 선사시대 석곽묘의 석곽이 크게 자라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 도 있으나, 고분의 구조는 편의에 따라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선진지역으로부터 완성형의 새로운 양 식 • 형식이 들어와 정착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세장형석 실의 경우 중국의 黃 河유역지방에서 遼河와 遼東半島룰 거쳐 한반 도에 이르기까지 낙동강유역의 세장형석실과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중국지역에서는 오로지 長江下流域지방에 특정적으로 분포 하는 石室土 激 墓 의 석실에서 유사한 형식을 발견할 수 있다. 석실의 길이와 너비의 比가 낙동강유역의 세장형과 같다. 역시 土葬土激墓 와 함께 한반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370) (2) 橫口式石室境 횡구식 석실은 이미 경주의 신라 석실분에서 일차 언급한 바 있 다. 경주의 보문동 부부총과 같이 장방형이면서 짧은 연도형의 출입 구시설이 있는 梁山 夫婦塚이나 禮安里의 方形석실분과 같은 형식 도 섞여 있지만 .371) 일반적으로 낙동강유역지방의 횡구식 석실은 경주의 그것과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 차이점만 열거하면. 첫째 구릉이나 산정상부에 묘지를 선정한다. 둘째 석실이 더 긴 세 장형이다. 셋째는 석실의 벽체가 반 이상 지면 위로 올라오는 것(半 368) 齋藤忠 : 「大邱市附近 1 대令 L 넋t古坦(J)調査」 『昭和十三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 369) 앞에 든 『大伽倻古噴發堀調査報告꿈』 370) 姜仁求 : 「長方形石室의 系統에 관한 試論」 『淸溪史學』 4 1987. pp2 81-282. 371) 金廷鶴 : 「金海禮安里古浪群發堀調査豫報」 茂雜갭考古學報』 2 1977. p9.
그림 211 義 城塔里 古壇 第 2 墓 柳
地上式)이 일반적이다. 횡구식 석실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咸安의 末伊山 고분군이다. 말이산 34 호(신 4 호)분은 석실의 길이 32 척, 너비 5 척 7 촌, 높이 5 척 5 촌인데, 동서 長壁에 각각 2 개, 後壁에 1 개씩의 兪室을 설치하였다. 유물은 토기류와 다량의 철기류 • 마구류가 있으며, 특히 일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鹿角刀劍裝具가 있어 주목을 끈다. 또 같은 말이산 의 33 호(신 8 호)분은 구조와 형식은 34 호분과 유사한데. 모두 6 인의 유해를 매장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석실의 길이 11m, 너비 1.85 m, 깊이 1.9m 로 국내 최대형의 세장형석실이다. 유물 중에는 馬 胃 • 短 甲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세장형의 횡구식 석실분은 5C 후반경으로 추정되며, 이 지 역 阿羅加耶의 首長墓로 추측되고 있다. 기원은 현단계로서는 앞의 수혈식 석실의 細長形과 함께 장강하 류역지방의 석실토돈묘의 영향으로 추측한다 .372) 372) 앞에 든 「長方形石室의 系統에 관한 試論」 p28 4.
그림 212 釜山 福泉洞 DBl5 號壇 內部
그림 213 釜山 福泉洞 11 號壇 遺物 出土狀態
그립 214 高읊 池山洞 古壇群
그립 215 高靈 本館洞 古壇群
그림 216 咸安 道項里 • 末山里 末伊山 古壇群
그림 217 咸安 道項里 末伊山 16 號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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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 219 義城 塔里 古壇 噴丘 貫測略圖 ( 『義城塔里古壇』,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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達城郡 解顔面 第 1 號頃 壤丘實測圖
그림 226 梁山 夫婦塚 石室 斷面圖 • 平面圖(『古蹟調査特別報告』 5,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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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橫穴式石室頃 낙동강유역지방에서 궁륭상천정으로 된 횡혈식 석실분은 동시대 의 고구려 • 백제 • 신라에 비하여 유행시기도 늦고 수량면에서도 적 댜 잘 알려진 고분으로는 高靈 古街洞 壁畵 壇과 陝川 三嘉 面에서 약간 발견 조사되었을 뿐이다. 고아동의 석실은 평면이 거의 방형에 가깝고 동벽의 연장선상에 二 段의 긴 연도가 부설되었으며, 현실 내 에는 2 개의 稽 臺 를 바닥보다 약간 높게 하여 장축방향으로 시설하
細線黑赤淡赤 紅孤線
였댜 천정은 아직 미숙한 궁륭상을 보이고 있고, 천정에 연화문을 그린 벽화가 약간 남아 있는데, 가야지역에서는 유일한 벽화분이다. 긴 연도와 함께 陵山里 벽화분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백제 석실 분의 영향으로 간주되고 있다. 삼가의 석실은 평면이 거의 방형에 가까운 장방형으로 종래의 장방형석실보다 면적이 상당히 넓어져서 궁륭상천정의 구조가 아니면 판상석으로 된 평천정으로는 거의 불 가능한 구조이다. 여기서 연도는 동벽의 연장선상에 짧게 부설되었 고, 관대는 대개 장축과 직각방향으로 2~4 개 설치하였다 .373) 연대 는 6C 대로 추정된다. (4) 加耶古壤과 狗葬墓 問題 가야지역의 고분에서 순장문제가 제기된 것 374) 은 1922 년 양산 부 부총이 조사 375) 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 창녕 계성리 계남 북 5 호분에서 같은 논의가 있었고,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고령 지 산동 44 호 • 45 호분 376) 과 지산동 32 호분 377) 이 조사되고부터이다. 이 전에도 『三國史記』 「智證麻立干」 3 년조에 ‘春三月下令禁拘葬 前國 王魂ff l jj{jj以男女各五人 至時禁焉’ 라는 기사가 있어, 신라를 비롯한 삼국시대에 순장이 어떤 형태든 행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양산 부부총에서는 횡구식 석실의 玄室에 관대를 설치하고 주인공을 안 치하고, 다시 관대를 옆으로 확장하고 여주인공을 안장하였으며, 관 대와 출입구 사이에 현실과는 직각 방향으로 3 인의 인골이 안치되 372) 앞에 든 「長方形石室의 系統에 관한 試輪」 p28 4. 373 ) 앞에 든 E 輯갭考古學槪說』 p22 5. 374) 姜仁求 : 「昌寧桂城里 桂南北 5 號壇」 『淸溪史學』 13 집 韓國精神文化硏究院 淸 溪史學會 1997. 375) 馬場是一郞 • 小J I| 敬吉 : 『梁山夫婦塚』 本文 朝鮮總督府 1925. pp3 2-33. pp8 4-85. 376) 尹容鎭 • 金鍾徹 : 『大伽倻古壇發堀調査報告』 高靈郡 1979. pl0 5. pp2 74-275. 377) 金鍾徹 : r5 靈池山洞古壇群』 啓明大學校博物館 1981 . p9. p65 . p18 0.
었댜 이 3 인의 인골이 주인공 부부의 매장상태와는 달리 위치와 관 대 등과 유물이 빈약하다 하여. 이것이 순장이 아닌가 추측하게 되 었댜 창녕 계성리에서는 넓은 석실을 동서구역으로 나누고, 동구역의 중앙에 주인공을 북침으로 . 그 발치에 동침으로 2 인의 인골이 있었 으며. 서구역에서는 중앙은 공지로 남아 있고 남벽쪽에 역시 동침으 로 3 인의 인골이 안치되어 있었다. 여기서 동구역의 2 인. 서구역의 3 인을 각각 순장으로 추측하게 되었다. 한편 지산동 고분에서는 한 분구 내에 중앙에 주석실을 두고 그 옆에 부석실 l~2 기를 배치하고. 다시 석실의 주위에 32 기. 12 기 등 많은 석곽을 배치하였다. 주석실의 주인공 외의 인골과 석곽의 주인 공을 모두 순장으로 단정 한 바 있다. 또 부산 복천동 11 호 • 10 호분과 22 호 • 21 호분에서는. 11 호는 석 실이고 10 호는 대형토광묘이고, 22 호는 석실이고 21 호는 토광묘인 데. 여기서 석실은 주인공의 묘이고 토광묘는 순장묘로 추정한 바 있 다. 이 외에도 가야지역의 세장형석실에 2 인 이상 안장되었을 경우 주인공 1 인 외에는 주인공을 위한 순장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 378) 학계의 이러한 추정은 더 많은 자료를 기다려 신중하게 판단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양산 부부총과 계성리 계남석실처럼 횡구식(횡혈식) 석실인 경우는 추가장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매장상태가 약 간 정중하지 못하고 부장유물이 적다고 하여도 일단은 가족합장(자 녀?)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산동의 경우처럼 석실보다 규모와 부 장유물면에서 빈약하다고 하여도 당당한 별개의 독립 매장주체시설 을 갖고 있는 경우는 순장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세장형석실에서도 개폐식의 횡구식 석실이 있고, 수혈식이라 378) 이상의 자료는 앞에 든 보고서와 그 동안에 발표된 논문을 참고로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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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석실 한편의 개석을 열고 추가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참고로 순장이 크게 유행하였던 중국의 경우, 토광인 경우 순장 자는 곽실이나 현실 내에 합장하지 않고, 벽체에 설치된 계단상이나 墓口邊에 토장으로 매장하고 있다. 석실이나 전실일 경우는 묘도와 입구의 外部面에 역시 토장으로 매장하고 있다. 독립된 석곽 등을 갖춘 순장묘는 발견되지 않는다 .379) 따라서 삼국시대 순장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가 야지역의 위와 같은 매장상태를 순장으로 단정하기에는 미비점이 많다는 생각이다. 굳이 확실한 순장의 예를 찾는다면, 경주 황남대 총 남분에서 나온 묘령의 여인 인골은 목곽의 상면이 매장 원위치 이기 때문에 순장이 틀림없을 것으로 본다 .380) 4.5 圓方形壇(前方後圓形壇) 우리나라에서 圓方形壇(전방후원분 )381) 에 관한 본격적인 조사연 구는 1983 년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는 일본 열도에서만 성행한 일본 고유의 묘제로 인식되어 왔다.
379) 앞에 든 「昌寧桂城里 桂南北 5 號壇」 380) 張信堯 • 金達澤 : 「慶州 第 98 號 古噴南壇에서 出土한 古壤 骨 에 관한 硏究」 『文化財』 第十號 文化財管理局 1976 .. p 90 . p93 . 381) 필자도 1984 년 이후 전방후원분이라는 일본학계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왔 으나, 한국학계에서 일본의 고분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 일단 그 명칭을 검토하고` 前方後圓項’ 대신 圓方形壇’이란 명칭을 사용하기로 한다. 姜仁求 : 「韓半島(l)前方後圓形古壇(l)名稱檢討」 『古代(l)日本之渡來(l)文化』 上 田正昭編 學生社 1997.
분구형상은 한쪽에 圓丘 또 한쪽에 方壇이 연접되어 하나의 긴 분구를 형성하고 있다. 일본학계에서는 전방후원분을 표현하는 여 러 용어가 있는데, 예를 들면 열쇠구멍형고분' 같은 것이 그 예이 다.그러나우리나라에서는전통악기인 ‘長鼓形'또는 ‘龍頭形'등으
로 표현하여 왔댜 삼국시대 이후 분묘는 원형분구가 주류를 이루었 기 때문에 ‘方形’ 이라든지 ‘ 長鼓形 ' 분구는 본래부터 분묘로 인식하 지 못하여 왔기 때문에. 圓方形項을 비롯한 圓形 이외의 異形項丘의 분묘는 파괴 훼손이 심하여 유존된 고분의 수량이 적다. 분포는 固城의 舞岐山 古噴 .382) 海南 方山里 長鼓山 古壇, 龍頭里 말무덤 古壇 ,383) 盡岩 泰測里 자라봉 古壇 .384) 咸平 禮德里 新德 古 壤 385) 광주의 明花洞 古壤 .386) 月桂洞 古壇 387)388) 등이 정밀 실측 조사가 이루어졌고, 자라봉 고분과 신덕고분 • 명화동 고분 • 월계동 고분은 발굴 조사를 거쳤다. 그러나 이외에도 서울의 石村洞 6 호 • 7 호분. 芳夷洞 1 호 • 2 호분을 비롯하여 낙동강유역의 고령 本館洞 古 壤群 咸安 末伊山 古壇群, 義城 塔里 古壇. 榮山江유역의 羅州 潘南 面 新村里 6 號壤 德山里 2 號項 389) 등 더 많은 전방후원형 고분이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또 최근에는 鴨綠江유역의 慈江道 楚山 郡 雲坪里 와 慈城郡 松岩里 등지에서도 발견 보고된 바 있는데. 漢 水이남의 고분과는 달리 모두 적석총으로 되어 있다 .390)391) 圓方形項의 墓地는 하천이나 해변 가까운 구릉의 정상부나 능선 의 突端部를 선정하여 축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매장주체시설은 382) 앞에 든 『三國時代壤丘墓硏究』 pp2 03-210. 383) 姜仁求 : 『舞岐山과 長鼓山』 韓園精神文化硏究院 1987. 384) 姜仁求 : 『자라봉古壇』 韓國精神文 化硏究院 1992. 385) 成洛俊 : 「咸 平禮德里新德古項緊急收捨調査略報 」 『제 35 회 전국역사학대회 논 문 및 발표요지』 1992.5 , pp2 9-30. 386) 국립광주박물관 : 「光州明花洞古項發堀調査査科」 1994.5.4 . 387) 전남大學校博物館 : 「光州尖 端科學産業團 地 發堀調査現況」 1993.9.4 . 388) 이들 고분은 일본의 전형적인 전방후원분과 꼭 같다고 하여 일본학계에서 전 방후원분으로 인정하는 고분들이다. 389) 앞에 든 『三國時代項丘墓硏究』 p58 . p27 6. 390)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 『조선유적유물도감』 (고구려편 2) 1990. 391) 이들 고분은 일본학계와는 달리 입지조건. 분구의 형상 등을 고찰하여 전방후 원분으로 추정하는 것들이다.(姜仁求의 앞의 논문들)
세장형의 수혈식 석실과 횡혈식 석실이 가장 보 편적 이고, 그 외에 토장 • 토광 • 석관 등이 있으나 시가와 지역에 따라 변화되었다. 한반도의 圓方形項은 2C 경부터 출현하기 시작하여 4~5C 경에 많 이 축조되다가 삼국이 정복국가로 성장하면서(분구형상이 원형분으 로 통일) 일단 중단되었다가, 6C 후반에서 7C 경에 신덕고분 • 명화 동 고분 • 월계동 고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영산강유역에서만 다시 재개된 것으로 추측된다. 圓方形壇(전방후원형)과 유사한 분구는 한반도와 일본 외에도 중 국의 打虎 亭 古項, 外 蒙古 의 No i n-Ula 古壇 등이 알려져 있어, 그 기 원은 더 다양한 것으로 추정된다 .392) 한반도의 경우는 입지조건 • 분구형상 • 매장주체시설 • 장법 등의 면에서 장강유역의 土激墓에서 제요소가 들어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3C 후반부터 그 原形이 한반도에서 건 너갔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 일본에서 야요이 壇丘墓가 여러 내외 의 사회적 요인에 따라 갑자기 확대되어 전방후원분이 이루어졌다 는 .日本列島自生說‘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야요이시대 의 方形周溝墓 • 四隅突出墓 • 臺 狀墓 등은 분구규모가 l0m 정도로 서 그 일부분이 갑자기 확대 성장한다 하여도 당시 일본의 사회 적 • 문화적 여건은 100m 이상의 거대한 고분을 만들어 낼 수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생기의 전방후원분이라고 하는 綠 向石塚古壇 (90m 이상)이라든가 署墓古壇 (284m) 은 그 분형이 이미 완성된 定型化된 壇丘를 하고 있어 발달과정상의 분구형이 여실히 보이지 않는 이상 그것은 다른 곳에서 정형화된 분구가 들어와서 영향을 미천 것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原鄕이 한반도라 고 판단된다 .393) 앞으로 圓方形壇(전방후원분)의 출현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 각도 에서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392) 姜仁求 : 「束아시아에 있어서의 前方後圓形壇丘의 분포에 대하여」 『擇窓許善 道先生停年紀念 韓國史學論策』 一潮 00 1992. p96 9. 393) 앞에 든 「東아시아에 있어서의 前方後圓形 壇丘의 分布에 대하여」 p98 2.
그림 233 서울 芳冀洞 1 號壇
그림 234 咸平 萬家村 古壇
그림 235 靈岩 泰潤里 자라봉 古壇
그림 236 靈岩 泰洞里 자라봉 古壇 石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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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37 磁岩 泰洞里 자라봉 古壇 石室 (2)
그림 238 大阪 黃金塚(上), 固城舞技山 古壇(下)
그림 239 固城 舞岐山 古壇(1)
그림 240 固城 舞技山 古壇 (2) ( 鳥居 1914 년)
그림 241 羅州 潘南面 德山里 • 新村里 古壇群
그림 242 靈岩 新燕里 土築壇(壅稽 • 土;!$i)
그립 243 海南 龍頭里 말무덤 古壇
그림 244 咸安 道項里 末伊山 22 號壇
그림 245 海南 方山里 長鼓 山 古項
그림 246 光州 月 桂洞 1 號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