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욱 서강대학교사학과졸업 서강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미국 Kansas 대학교 대학원 인류학과 수학 캐 나다 Briti sh Columbia 대 학교 대 학원 인류학 • 사회 학과 Post Docto r al Fellow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부교수 현재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저서 『신라국가형성사연구』 『고조선사연구』 『신라골품제연구』
아르케 (arche, d px 서)는 ‘시초’, ‘시작: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가지며, 학술적으로는 원리’ 를 의미합니다.
한국의 초기국가
한국의 초기국가
머리말 이 책은 하나의 새로운 이론체계를 토대로 사회 • 정치 발전을 중시 하는 역사적 관점과 사회구조 전체를 중시하는 구조적인 관점에서 비 교사적 방법을 가지고 한국사상 존재하였던 초기국가의 실체를 해명하 는 데 목적을 두고 작성되었다. 필자는 이 책의 작업을 통하여 그 동 안 본격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여 온 초기국가 형성기 수백 년 간의 역사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는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한편 고대사의 특성으로 인하여 개별적이고 세부적인 사실·사건보다 구조적인 면에서 한국의 초기국가에 대한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은 학계의 다수가 수긍하고 있는 통설과는 크게 다르다. 그 이유는 이 책 전체의 이론체계가 통설과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에 대한 이론체계의 통설은 부족국가-부 족연맹 단계설과 그것을 비판하고 제기된 성읍국가 -연 맹왕국 단계설 둥이 있다. 그런데 필자로서는 이러한 학계의 통설로 한국의 초기국가 에 대해 해명하려 할 때 풀리지 않는 중요한 문제들이 있다고 본다 . 첫째로 성읍국가(부족국가) 단계는 촌락(추장)사회 단계와 소국 단계 로 구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 실제로 사로 6 촌과 사로국, 가락 9 촌 과 가락국을 서로 다른 정치발전단계로 구분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로 연맹왕국(부족연맹) 단계는 소국연맹 단계와 소 국병합 단계 를 구분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사로국을 맹주국으로 한 소국연맹과 가락국 을 맹주국으로 한 소국연맹 중 전자는 소국을 병합하는 단계로 발전하 였으나 후자는 소국연맹으로 지속된 바 있다. 지금까지 필자는 학계의 통설과는 달리 국가형성의 전조가 되는 촌 락(추장)사회에 이어 나타나는 국가단계인 소국 -소 국연맹 -소 국병합 단계를 초기국가 (earl y sta t e ) 단계로 구분하여 왔다. 여기서 말하는 초기국가는 중국, 인도 등 외부로부터의 영향이 없이 독자적으로 국가 를 형성 • 발전시킨 원초적 국가(pri s ti ne sta t e 또는 earlies t s t a t e) 와 는 구별된다. 필자는 『 삼국사기 』 신라본기나 백제본기의 초기 기록들을 적극적으 로 이용하였다. 이 역시 초기 기록을 불신하여 온 학계의 기존 통설과 는 다른 연구방법을 의미한다. 사실 초기 기록을 불신하는 근거에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필자는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들을 불신할 이유 를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초기 기록에 대한 사료비판 없이 그 대로 활용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초기 기록들을 사료로 이용해야 초 기국가 형성의 대세를 옳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삼국사기 』 의 초기 기록을 불신하여 온 학계의 통설은 한국의 초기국가를 이해하는 데 한 계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런가 하면 국가형성신화를 초기국가의 실 체를 해명하는 중요한 자료로 이용하였다. 국가형성신화는 역사연구의 자료로 그대로 이용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국가형성신화에 들어 있는 여러 내용들을 역사발전의 대세에 근거하여 역사적인 자료로 바꾸고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중요한 사실들을 찾아낼 수 있다. 국가 형성신화를 통하여 건국세력, 건국시기, 영역, 정치체의 발전, 국가형성 요인 둥 실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과정에 존재하였던 정치체는 그 수가 매우 많 다 . 그러한 정치체들이 소멸 • 통합 과정을 거쳐 소국연맹, 소국병합 단
계에 이른 것으로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 가야 등이 있다 . 이 책에서는 한국사상 나타나고 있는 초기국가의 형성신화(설화), 형 성 • 발전 단계(과정), 대외관계, 그리고 정치형태, 정치지배세력, 초기 국가 형성 • 발전의 주요 요인 등에 대한 문제를 정리할 것이다 . 필자 는 이와 같은 일련의 작업을 통하여 한국의 초기국가에 대한 실체를 밝히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 책은 기존의 통설이 없었다면 작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단지 다 수의 연구자들이 통설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론체계로는 해명되지 않 는 사실들이 나타나고 있기에 이를 해명하기 위하여 필자는 새로운 사 회 • 정치 발전단계설을 제시하였고 그것이 이 책의 작성에 있어 중요 한 이론체계가 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이론체계를 가지고 작성된 이 책은 기존의 통설과는 다룰 수밖에 없다. 한편 한국사의 구조적인 틀 이 초기국가의 형성 • 발전 과정에서 만들어졌기에 이 책의 연구는 한 국의 초기국가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 새로운 한국사 체계를 세우는 출발점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 그런데 완성된 이론이란 있을 수 없다. 이에 필자가 제기한 이론체계도 문제들이 나타날 것이 며 새로운 이론체계가 제기될 것이 분명하다. 1989 년 ‘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에 대한 연구를 가지고 대우재단으로 부터 지원을 받게 되었다. 당시 필자는 1976 년 백제의 국가형성에 대 한 논문을 발표한 이래 적지 않은 초기국가 형성 • 발전에 대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특히 1982 년에는 신라의 국가형성에 대한 책을 발표 하였고 그 때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 과정에 나타나는 정치발전 단계를 촌락(추장)사회, 소국, 소국연맹, 소국병합 단계로 설정할 수 있 었다. 필자는 그러한 구분을 인류학에서 제기된 사회 • 정치적 발전단 계론의 c hi e f dom 과 sta te 단계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확인하고 있었 다. 필자는 그 동안의 작업들을 가지고 어렵지 않게 책을 마칠 수 있 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막상 작업을 시작하고 보니 한국의 초
기국가에 대한 학계의 통설에 따르기 어려운 사실 들 이 있는 것 을 알게 되었다. 이에 한국의 초기국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를 나름대로 새롭 게 시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지금까지 국가형성과 관련 된 20 편 정도의 논문과 이 책을 포함하여 『古朝 鮮史 硏究』 (1993), 『한 국 초기국가의 형성 • 발전 단계 』 (근간) 동 3 권의 책을 집필하게 되었 다. 지금까지 필자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에 대한 작업 결과를 이같이 책으로 묶어 학계에 보고하고 비판의 대상이 되어 중간 점검을 받고자 한다. 필자에게 있어 이 책의 작업은 한국의 초기국가에 대한 또 다른 출 발점이 된다. 앞으로 고조선과 백제 외의 건국신화 • 설화에 대한 문제 를 정리하여야 하고, 고구려 • 백제 • 부여 둥의 국가 형성 • 발전에 대 한 해명 작업을 하여야 하며, 초기국가의 대외관계에 대한 연구도 할 필요가 있다 . 이 같은 작업을 어느 정도 이루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하며 혼자의 힘으로 다 하기 어려운 것이 분명하다. 이 책 의 연구가 그와 같은 연구를 촉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필자가 1976 년 이래 국가형성에 대한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던 데에 는 이유가 있다. 우선 1973 년 서강대 대학원에 입학하여 1981 년 졸업 할 때까지 李基白 선생님의 지도 하에 국가형성에 대한 문제들을 발표 한 바 있는데, 그 이후 지금까지 필자는 국가형성에 대한 해명 작업을 하나의 과제로 삼아 오고 있다. 그리고 1976 년 브리티시 컬럼비아
형성 • 발전 단계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세울 바탕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필자에게 평생을 짊어지고 갈 과제를 주신 李基白 선생님께 감사드 린댜 그리고 인류학을 공부할 기회를 주신 리처드 피어슨(Ri chard Pearson)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필자의 새로운 한국사 체계를 수강 한 서강의 학생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이 책의 모든 잘못은 필자에게 있댜 위의 분들에게 누가 돌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끝으로 햇수로 10 년 간 이 연구를 기다린 대우재단에 감사드린다 . 1998 년 9 월 9 일 紫谷洞에서 저자
한국의 초기국가
차례머리말 5서론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에 대한 연구의 새로운 방향 151 한국 초기국가 형성 • 발전에 대한 기존 연구의 문제점 162 한국 초기국가 형성 • 발전에 대한 이해의 방향 183 이 책에서 다루려는 내용과 기대하는 결과 20제 1 장 한국 초기국가 형성 과정에 나타나는 정치체와 그 성격 231 이 책에서 다루는 정치체 24(1) 고조선 24(2) 부여 26(3) 고구려 28(4) 백제 32(5) 신라 33(6) 가야 342 문제가 되는 정치체 35(1) 진국의 문제와 중국의 존재 35(2) 삼한의 성격 37제 2 장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신화(또는 설화) 45
1 고조선 건국신화로서의 단군신화 46(1) 단군신화에 대한 기록들의 비교검토 47(2) 단군신화의 특성 54(3) 단군신화에 나타난 고조선의 국가형성 702 백제의 건국설화로서의 온조설화 95(1) 백제 건국설화에 대한 검토 97(2) 온조설화의 성격 106(3) 백제 건국설화로서의 온조설화 113(4) 온조설화의 성격과 연구자료로서의 중요성 129제 3 장 한국 초기국가의 형성 • 발전 과정의 예 1331 촌락(추장)사회 : 촌락(추장)사회로서의 사로6촌 134(1) 사로6촌 추장사회의 형 성과 구조 135(2) 사로6촌의 정치세력 151(3) 사로6촌의 정치조직과 운용 그리고 그 변동 161(4) 사로6촌 추장사회의 특성 1722 소국 : 백제 초기국가로서 십제의 형성 175(1) 십제의 건국세력 178(2) 십제의 건국시기 198(3) 십제의 영역과 한지역 정치세력과의 관계 209(4) 십제의 통치조직 213(5) 십제의 국가 형성 요인 222(6) 십제의 정치적 성격 2243 소국연맹 : 가락국의 소국형성과 가야연맹의 전개 228(1) 가락9촌 촌락(추장)사회의 전개 229(2) 가락국의 소국 형성과 발전 233
(3) 가야연맹의 형성과 전개 248(4) 가야연맹의 정치적 성격 2584 소국병합 : 삼국의 소국병합 261(1) 고구려의 소국병합 262(2) 백제의 소국병합 263(3) 신라의 소국병합 268제 4 장 한국 초기국가 형성 • 발전기의 대외관계 2711 한 등의 정치세력과 낙랑군 • 대방군과의 관계 273(1) 기원전 2세기 말 ~1 세기의 관계 276(2) 기원후 1~2세기의 관계 281(3) 기원후 3~4세기 초의 관계 286(4) 한국 초기국가와 중국 군현 간 관계의 성격 2922 고구려의 국가 형성 • 발전과 대중국 관계의 전개 297(1) 고구려 소국의 형성과 예군 남려 • 창해군 298(2) 고구려의 현토군 축출과 소국연맹 맹주국으로의 성장 308(3) 고구려의 소국 병합과 대중국 관계의 전개 313(4) 태조대왕대의 대중국 관계의 전개 320(5) 고구려의 정치적 성장과 그 의의 329제 5 장 한국 초기국가 형성의 제 문제 3331 한국 초기국가 형성기의 정치형태 333(1) 촌락(추장)사회 단계의 정치형태 335(2) 소국 단계의 정치형태 341(3) 소국연맹 단계의 정치형태 350(4) 소국병합 단계의 정치형태 357
(5) 한국 초기국가 형성기 정치형태의 특성 3672 한국 초기국가 형성기의 정치지배세력 373(1) 기존 연구와 문제점 374(2) 촌락사회 단계의 정치지배세력 380(3) 소국 단계의 정치지배세력 384(4) 소국연맹 단계의 정치지배세력 393(5) 소국병합 단계의 정치지배세력 395(6) 국가형성기 정치지배세력의 성격 4003 한국 초기국가 형성 • 발전의 주요 요인 402(1) 소국 형성의 주요 요인 404(2) 소국연맹 형성의 주요 요인 428(3) 소국병 합의 주요 요인 435(4) 한국 초기국가 형성 • 발전 요인의 특성 438결론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단계 4411 촌락(추장)사회 단계 4442 소국 단계 4553 소국연맹 단계 4634 소국병합 단계 4685 중앙집권적 왕국 단계 4716 한국 초기국가 형성 • 발전단계론의 특성 473찾아보기 477서론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에 대한 연구의 새로운방향 한국의 초기국가에 대한 이해는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을까? 필자 가 사용하는 초기국가라는 용어의 개념은 국가 형성 • 발전 과정에 나 타나는 소국, 소국연맹, 소국병합 단계에 있었던 국가들을 가리킨다. 이 같은 초기 국가라는 용어 는 early s t a t e 를 가리 키 며 earlie s t s tat e 를 가리키는 원초적 국가(pri s ti ne s t a t e) 와는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밝혀 둔다.I) 한국사상 초기국가 형성 • 발전 과정을 거쳐 소국병합 단계에 이르렀 던 국가들로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둥이 있다. 가야는 소 국연맹 단계에 머물다가 신라에 병합되었다. 따라서 소국연맹, 소국병 합 단계에 이르렀던 정치체는 그 수를 쉽게 헤아릴 수 있다. 그에 비 하여 한국사상 찾아지는 십제, 사로국, 가락국과 같은 소국들은 그 수 를 모두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국가형성 이전의 정치발전단계에 있던 촌락(추장)사회는, 사로 6 촌이
1) 필자는 이미 초기국가 (earl y s tate)와 원초적 국가{pri s ti ne s tate)를 구별한 바 있다(李鍾旭, 『古朝鮮史硏究』, 1003, p, 11, 206).
통합되어 사로국이 되었고 가락 9 촌이 통합되어 가락국이 된 것으로 미루어, 그 수가 소국들보다 몇 배는 되었다. 결국 한국의 초기국가 형 성 • 발전 과정은 단위정치체의 통합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같 은 국가 형성 • 발전 과정에 단위정치체는 숫적으로 줄어들었고 그 영 역 • 인구는 상대적으로 늘어났고 정치조직 역시 누층적으로 편제되어 점점 복잡하게 편성된 것이 분명하다. 이 책은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에 대한 해명에 1 차적인 목적을 두고 있다. 그와 같은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 과정에 한국사의 구조적인 틀이 편성되었다. 초기국가 형성 • 발전 과정에 만들어진 중 앙과 지방의 정치조직, 지배세력, 신분제도 등을 포함하는 통치체제는 그 후 한국사의 전개에 중요한 구조를 결정하여 왔고 현재의 한국 사 회에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에 대한 연구는 초기국가 자체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그 후 전개된 한국 사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 된다. 이것이 이 책의 2 차 적인 목적이 된다. 1 한국 초기국가 형성 • 발전에 대한 기존 연구의 문제점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에 대한 연구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 다. 하나는 개별 국가들의 형성과 발전에 대한 것이고 다론 하나는 초 기국가 전체에 대한 이해롤 통하여 얻어진 국가 형성 • 발전론이다. 전 자의 연구는 개별 국가의 형성 • 발전에 대한 구체적 연구가 되고 후자 의 연구는 그러한 개별 연구를 토대로 한 이론적인 연구가 된다. 그런 데 두 가지의 연구는 서로 뗄 수 없다. 개별적인 연구에 이론적인 연 구가 있어야 하고 이론적 연구에 개별적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한국 초기국가 형성 • 발전에 대한 연구는 개별적인 연구
와 이론 적 안 연구 모두 적지 않은 문제가 있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 중 신라의 국가형성에 대한 필자의 연구는 신라의 국가형성에 대한 해 명을 위하여 국가형성기 신라의 정치적 성장 과정, 정치지배세력의 형 성과 정치 • 신분적 성격, 정치조직에 대한 체계를 나름대로 세워 보았 다 ? 지금까지 이와 같은 형태의 연구들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나 결코 충분할 정도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 실제로 고조선에 대한 이 해를 위하여 필자 스스로 연구를 할 수밖에 없었다 . 4) 그런가 하면 한 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는 시대구분론으로 나 타나게 되는데 이 역시 필자의 연구와는 크게 다르며 적지 않은 문제 점이 발견되고 있다. 1960 년대부터 받아들여진 部族國 家 , 部 族 聯盟, 古 代 國家 라는 시대구분 5) 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1970 년대에는 城邑國家, 聯盟王國 으로 이어지는 시대구분이 제기되었다 . 6) 그런데 부족국가는 성읍국가로 , 부족연맹은 연맹왕국으로 시대구분 용어가 바뀌었을 뿐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연구는 진전된 것이 많지 않다 . 그리고 그와 같은 기존의 시대구분론에는 문제가 찾아진다 . 하나는 사로 6 촌과 사 로국, 가락 9 촌과 가락국의 예에서 보는 것과 같이 촌락(추장)사회와 소국 단계를 구분하지 않을 수 없는데 기존의 시대구분론에서는 이것 을 부족국가 또는 성읍국가 한단계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 는 독립된 소국들이 진한, 변한(가야)이라는 소국연맹체를 형성한 바 있는데 그 중 진한에서는 사로국이 소국연맹의 소국들을 병합한 데 반 하여, 변한(가야) 소국연맹에서는 그와 같은 소국병합이 이루어지지 않
2) 李鍾 旭, 『 新 羅國家形成 史硏究 』 , 1982. 3) 李賢惠 『三韓社會 形 成 過程硏究 』, 1984. 盧重 國, 『 百 濟 政治史硏究 』 , 1988. 金 泰植 , 『 加耶 聯 盟史 』 , 1993. 4) 李鍾 旭, 『古 朝鮮 史硏究 J , 1993. 5) 金哲浚, r 韓 國古代 國家發達史 』 , 『韓國 民族文化史大系 』 I, 1964, pp. 455~546. 6) 李基 白 , Ii'韓國 史新 論』 (改正版), lfJ7 6 , pp. 20~8. 3.
았다. 이에 부족연맹 또는 연맹왕국이라고 하 는 시대 구분 도 소 국연맹 과 소국병합 단계를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에 대한 해명을 위해서는 한국사상 존재 했던 여러 정치체에 대한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그와 동시에 연구의 진전을 위하여 새로운 시대구분론의 적용이 필요한 것 을 알 수 있다. 2 한국 초기국가 형성 • 발전에 대한 이해의 방향 이 책은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에 대한 해명을 위하여 개별적 인 주제에 대한 연구가 중심이 된다 . 실제로 건국신화 • 설화, 사로 6 촌, 십제, 가야연맹, 삼국의 소국병합 그리고 한 둥 정치체의 대외관계 , 고구려의 정치적 성장과 대외관계 둥은 이론적인 연구이기보다 개별 주제에 대한 연구가 된다. 이와 같은 주제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위해 서 크게 두 가지 주목할 사실이 있다. 하나는 연구의 자료에 대한 것 이고, 다른 하나는 연구의 수행을 위한 관점 또는 연구 체계에 대한 것이다 . 먼저 한국의 초기국가에 대한 연구자료로 문헌자료와 고고학적 자료 룰 들 수 있다. 그런데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 신라 , 가야의 국가 형성 • 발전에 대한 이해롤 얻을 수 있는 자료는 별로 없다. 우선 문헌 자료를 보기로 한다. 한정되어 있는 자료 중에는 신화 , 설화화한 자료 들도 있다 . 그런데 많거나 충분하지는 않지만 현재 남아 있는 문헌자 • 료는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의 줄거리를 잡을 수 있고 또한 문제 를 해명할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있다. 심지어 건국신 화나 설화를 통하여 초기국가 형성의 줄거리를 잡을 수 있다. 단군신 화나 온조설화를 통하여 국가형성세력, 국가형성 과정, 통치체제 등에
대한 커다란 줄거리를 잡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사로국 • 가락국의 건국설화룰 통하여 촌락(추장)사회와 소국 단계를 구분하고 촌락사회 에서 소국으로 발전하는 과정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이는 초기 국가 형성에 대한 이해에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 그리고 촌락(추장)사 회에서 소국으로 발전하는 시대구분론을 증명하는 증거도 된다. 다음은 고고학적인 자료를 들 수 있다. 필자는 고조선의 경우 비파 형동검과 세형동검을 표지적인 유물로 삼았다. 그리고 신라의 촌락(추 장)사회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지석묘를 표지적인 유적으로 이용하였 다. 고조선의 유적과 유물들은 비파형동검이나 세형동검 이외에도 많 이 찾아진다. 그러나 초기국가 형성 • 발전에 대한 연구는 고고학 자체 에 대한 연구가 아니기에 그 모든 유적과 유물을 이용할 필요가 없고 또 그것을 이용할 수도 없다. 실제로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을 표지적 인 유물로 삼음으로써 정치지배세력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 분포 지 역이 중국이나 북방민족들과는 관계가 없는 고조선의 영역임을 확인하 게 되었다. 그리고 사로 6 촌을 지석묘와 연관시킴으로써 사로국 형성 이전 사로 6 촌의 촌락과 마을의 구조, 권력자의 양상 등에 대한 문제 를 풀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보다 확실한 분석 결과를 이용할 것 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분석 결과를 이용하지 않았 지만 표지적인 유적과 유물만을 이용하여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 의 주요 대세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이후 다양한 분석 결과 를 이용한 연구가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의 연구는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 들을 해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현재 그 모든 문제를 충분히 정리할 수는 없다. 자료의 한계와 연구방법의 한계로 인하여 끝까지 추적하는 작업은 어렵다. 그리고 이 책에서 수행하고 있는 정 도의 연구도 역사적인 사실을 어느 정도 파헤치고 있는지 확인하기도 어렵다. 여기서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에 대한 해명 작업에 연구
의 틀이 필요하게 된댜 그 틀은 기존의 시대구분론일 수도 있고 인류 학에서 주장된 사회 • 정치적 발전단계론일 수도 있다 . 그런가 하면 다 른 나라 다른 사회에 대한 연구결과일 수도 있다 . 한 마디로 비교사적 인 관점에서 역사발전의 대세 파악을 토대로 한국의 초기국가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ch i e f dom 과 sta t e 단계가 구 별된다는 사실을 토대로 사로 6 촌과 사로국, 가락 9 촌과 가락국을 이 해한 결과 촌락(추장)사회와 소국이 구별되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 걸 음 나아가 한국사에서 찾아지는 촌락(추장)사회는 인류학에서 주장 되고 있는 정치발전단계안 c hi e f dom 에 해당한다는 점도 생각하게 되 었다. 그에 비하여 한국사의 시대구분론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촌락 (추장)사회 단계와 소국 단계를 구분하지 않고 있어 따르기 어려운 것 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인류학의 사회 • 정치적 발전단계론의 특정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예컨대, chie f d o m 단계만 하여도 그 영역, 인구가 매우 다양하기에 한국사에 쉽게 적용 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인류학의 이론을 통하여 일반성을 찾아 그것을 통하여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을 해명할 필요가 있다. 결 국 한국 초기국가 형성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도 시대구분론이나 인류 학의 사회 • 정치적 발전단계론을 통하여 역사발전의 대세를 파악한 토 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다른 나라 예컨대 그리스의 chi ef d o m 단계와 도시국가 단계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한국의 촌락 (추장)사회와 소국 단계에 대한 확인도 얻을 필요가 있다. 역사발전의 대세를 파악하고 보면 많지 않은 자료에 대한 해석 가능성이 확대되는 것을 알수 있다.
3 이 책에서 다루려는 내용과 기대하는 결과 이 책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이 책에서 다루는 정치체 와 문제가 되는 정치체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둘째, 단군신화와 온조 설화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그와 같은 신화와 설화가 고조선과 십제의 국가형성에 대한 줄거리를 잡을 수 있음을 밝혔다. 신화와 설화 역시 역사다 단지 신화 • 설화화한 부분을 역사적인 사실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같은 작업을 통하여 신화와 설화를 역사 연구의 자료로 만들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 둘째,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_. 발전 과정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예를 들었다. 추장사회 단계는 사로 6 촌, 소국 단계 는 십제, 소국연맹 단계는 가야연맹, 소국병합 단계는 삼국의 소국병합 을 예로 들었다 . 그 중 가야와 고구려에 대한 예는 소국 단계부터 다 룬 것이다. 이와 같은 예들은 다른 나라에서도 찾을 수 있다. 여기서는 그 중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았다. 셋째, 한국 초기국가 형성기의 대외관계에 대하여 다루었다. 그 하나 는 韓 • 澈와 중국 군현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구려 의 정치적 성장과 대외관계의 전개에 대한 것이다. 넷째, 한국 초기국 가 형성 • 발전 과정에 나타나는 정치형태, 정치지배세력, 국가 형성 • 발전의 주요 요인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다. 다섯째, 이 같은 작업을 통 하여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 과정에 나타나는 정치발전단계를 결 론으로 제시하였다. 이는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 단계론에 대한 연구를 위한 기초작업이 된다. 이 책의 연구결과는 앞으로 새로운 연구를 이끌 수 있을 것으로 본 다. 그 중에는 건국신화 • 설화에 대한 연구, 백제나 고구려 또는 가야 등 개별 국가의 형성에 대한 연구, 초기국가 형성기의 대외관계에 대 한 연구 둥을 촉발할 것으로 기대한다.
제 1 장 한국 초기국가 형성 과정에 나타나는 정치체와 그 성격 한국 초기국가의 형성 • 발전에 대한 해명을 위하여 먼저 이 책에서 다루게 될 당시의 정치체에 대하여 정리하기로 한다.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과정은 단위정치체의 숫적 감소와 단위정치체의 영역 • 인구의 확 대 그리고 통치조직의 누층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이었다. 초기국가로서 소국이 형성되기 이전에 존재하였던 추장사회 단계의 촌락을 단위로 한 정치체는 그 수가 많았던 것이 틀림없다. 일정 지역의 촌락들이 통 합되어 사로국, 가락국과 같은 소국을 형성하였다. 일정 지역에서 그러 한 소국들이 소국연맹을 형성하였고, 후에 하나의 소국이 연맹 내의 소국들을 병합해 나가게 되었다. 한국사상 소국병합을 전개하여 하나 의 커다란 정치체를 형성한 나라들로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그 리고 신라가 있었다. 가야의 경우 소국연맹 단계에서 정치적 성장이 멈추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와 같은 정치체의 성격에 대하여 간단히 정리하기로 한다. 이어 辰國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衆國 과 三韓에 대한 문제도 정리하기로 한다.
1 이 책에서 다루는 정치체 (1) 고조선 한민족 최초의 국가였던 고조선은 오랜 기간 동안 역사적인 변동을 거치며 존속한 나라였다. 따라서 고조선의 역사도 소국, 소국연맹, 소 국병합 단계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고조선은 요동지역에서 소국을 형성하였고 이어 소국연맹, 소국병합 단계로 발전하였다고 헤 아려진다. 고조선이 초기국가로서 소국을 형성한 시기는 기원전 12 세 기 말에서 11 세기에 이르는 기간이었다고 생각하여 보았다. 그리고 소 국연맹은 기원전 8 세기에 형성되었고 소국병합은 기원전 5 세기 말경부 터 기원전 4 세기 말까지는 고조선 소국이 요동지역의 여러 소국을 병 합하였다고 생각하여 보았다 .I) 고조선은 기원전 4 세기 말에서 3 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 중 언제인가 중국 燕나라의 침략을 받아 요동지역을 상실하고 평양지역으로 정치적 중심을 옮기게 되었다. 그 이후 위만집단이 고조선의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기까지의 기간을 평양고조선시대로 본 바 있다? 평양고조선시 대의 정치조직에 대한 모습은 어느 정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되는 사실은 평양고조선시대 말기에 燕人 衛滿 이 망명하여 왔을 때 準王은 그를 믿고 총애하여 博士에 임명하고 圭 를 하사하고 백 리의 땅을 봉하여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한 것이 다. 당시 위만이 머문 지역은 秦의 空地로서 고조선의 정상적인 통치 영역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위만에게 백 리의 땅을 봉하여 준 것은 당시 지방통치가 중앙정부에서 직접 행한 것이 아니라 지방의 제후적인 존재들을 통하여 행해졌음을 뜻한다. 실제로 위만에게 주었
1) 李鍾旭 『古朝鮮史硏究』, 1993, pp. 296~298. 2) 위의 책, pp. 167~205.
던 규는 제후가 조근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위만을 고조선의 제후로 삼았던 것을 뜻한다. 따라서 평양고조선의 지방통치는 기본적으로 제 후적인 존재를 지방세력으로 인정하여 주고 그들을 통하여 수행된 것 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봉건제적 지방통치라고 할 수 있다 .3) 그러 면서도 중국의 봉건제와 고조선의 봉건제가 동일한 형태의 것이었다고 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중국의 봉건제를 시행한 주왕실에서는 주 왕실의 자제와 일족 및 동맹부족들을 제후로 임명하여 전국의 전략적 요충지에 분봉 • 배치하여, 은유민의 감시와 주변 이적들의 준동 • 침입 에 대비하였던 것에 비해 ,4) 고조선에서는 위만의 예를 제의하고는 다 른 제후들의 출신이 어떠하였는지 잘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같은 평양고조선대의 정치형태를 연맹왕국으로 보는 견해 가 주목된다 . 5) 그러나 고조선은 이미 요동고조선시대부터 소국병합 단 계에 들어서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 따라서 평양고조선의 정치발전단계 를 단순히 성읍국가의 연맹에 의한 연맹왕국 단계로 볼 수는 없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평양고조선의 지방에서 세력을 뿌리내리고 있던 집 단은 고조선왕실의 제후적인 존재들로, 그들은 독립 소국의 지배세력 들이기보다 이미 고조선에 병합되어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았다고 여겨 진다. 여기서 평양고조선시대의 정치형태를 연맹왕국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한 문제는 위만조선의 정치형태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다. 위만 조선은 비록 철기문화에 보다 친숙한 중국인 유망민의 세력을 배경으 로 했다고 하더라도 중국안의 식민정권일 수는 없으며 오히려 고조선 인의 세력을 바탕으로 한 연맹왕국적인 정권이었다고 한다 .6) 그와 같 은 연맹왕국은 성읍국가의 지배자로 추정되는 위만조선시대의 相의 직
3) 위의 책, pp. 205~256. 4) 李春植, 『中國 古代史의 展開』, 1986, p. 63. 5) 李基白, 『韓國史新論』(新修版), 1990, p. 38. 6) 위의 책, p. 34.
위를 가진 자들의 연맹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이해된다 . 7) 그런데 위 만조선시대의 상들은 독립된 성읍국가의 지배세력 들 일 수 없다고 생각 된다. 그들은 이미 고조선 중앙정부에 복속하고 고조선왕실에 의하여 지방세력으로 인정받은 일종의 제후적 존재들로 여겨진다 . 8) 고조선왕실과 지방세력들과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지방세력 들 중에는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상이라는 관직을 부여받고 왕 밑에서 국정을 처리하는 임무를 갖기도 하였다. 그들은 특정한 임무를 맡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왕에 대한 자문을 담당하고 왕검성에 거처를 잡게 되 었다고 헤아려진다. 물론 그 때에도 각자의 세력 근거지가 되는 지방 에 대한 지배권은 행사하였다고 여겨진다. 당시 조선의 지방세력들은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고조선왕 실에서는 개별적으로 지방세력을 통제할 수 있었다고 믿어진다 . 9) 여기 서 한 가지 분명히 하고 넘어갈 문제는 위만조선시대의 조선상, 니계 상과 같은 존재들이 과연 독립 성읍국가 또는 소국의 지배세력이었나 하는 문제이다. 필자는 당시의 조선상, 니계상과 같은 지방세력들은 이 미 고조선왕실에 복속하였으나 일종의 제후적인 존재로 인정을 받은 정치세력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위만조선을 연맹왕국 단계에 있 었다고 볼 수 없다. (2) 부여 부여의 국가형성과 정치적 성장에 대한 문제는 사료의 부족으로 인 하여 정리하기 쉽지 않다. 『後漢 書 』 東夷傳 夫餘國전에 後漢 建武 25 년에 夫餘王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이와 같이
7) 위의 책, p. 51. 8) 쭤鶴 앞의 책, 1993, p. 237. 9) 위의 책, p. 230.
왕호를 사용한 것을 연맹왕국 형성의 증거로 보는 견해가 있다.J O I 한편 부여에 대한 기록은 『史記 』 貨殖列傳에도 나오고 있다. 대체로 한이 홍기하며 해내가 통일되자 관소와 교량의 제한이 철폐되고 산림 • 소택 의 이용울 금하는 법령도 완화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대상인들이 천하를 주류하며 구석구석까지 물자를 교역, 유통시켰고 모두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발해만과 갈석산에 위치한 燕 도 상업이 번영한 도회로 북으로는 오환 • 부여와 교역하고, 동으로는 예맥 • 조선 • 진번과의 무역을 독점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기 』 화식열전의 기록은 기원전 3 세기 말에서 2 세기 초의 한 초에 해당한다 고 여겨진다. 『사기』 화식열전의 기록을 통하여 보면 늦어도 기원전 3 세기 말경에 부여는 중국과 원거리교역을 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부여가 중국과 원거리교역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소국연맹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 그것은 사로국이 진한연맹의 맹주국이 되어 중국 군현인 낙랑군과 원거리교역을 하였던 것과 비교하여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고 보면 부여의 소국형성 시기를 분명히 말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기원전 3 세기 이전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49 년 왕호를 칭하며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였던 부여는 단순한 소국연맹 단 계는 넘어섰던 것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부여에서 소국 병합이 전개되었는지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늦어도 1 세기 초까지는 소 국병합을 이루었다고 생각된다. 다음은 부여의 정치형태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이에 대한 이해 롤 위하여 다음 기록을 보기로 한다. 나라에는 君王이 있고 6 축으로 관의 이름을 붙였는데 마가 • 우가 • 구가 • 저가· 견사· 견사자·사자가 있고 읍락에는 호민 • 민 • 하호가 있었는데
10) 李基白, 앞의 책, 1990, p, 43.
모두 노복과 같았으며 諸加는 따로 4 출도를 다스 렸는데 大者는 수천 가, 소자는 수백 가를 다스렀다. … 적이 있으면 제가들이 스스로 전투를 하 였는데, 하호는 식량을 져 날랐고 그것을 먹었다.( Ii' 三 國志』 魏 書 東夷傳 夫餘 ) 위의 사료를 보면 언제인가 부여에 君王이 존재한 것을 알 수 있고, 그 밑에 관직이 설치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제 가의 존재들이다. 제가는 수천 가에서 수백 가를 다스리던 지방세력들 로 보아 무리가 없다고 여겨진다. 그들은 스스로 군사적인 기반을 가 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부여의 제가들은 과거 소국 지배 세력들의 후손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제가들은 일종 의 제후적 존재로 보여진다. 여기서 고조선과 같이 부여도 그들 제후 적인 지방세력에 의하여 지방을 통치한 것을 볼 수 있다. 부여의 대가들은 성읍국가의 지배자 자체일 수는 없다고 한다 . 그들 은 다분히 중앙의 귀족적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11) 그 러면 과연 지방의 제가들이 중앙의 귀족적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고 있 었을지 궁금하다. 제가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한 것 자체를 부인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지방에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던 제가들이 중 앙 정치세력으로 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3) 고구려 고구려의 정치적인 성장 과정에 대하여 먼저 보기로 한다. 『삼국사 기』에는 고구려는 주몽에 의하여 기원전 37 년에 국가형성을 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고구려 건국시기는 믿을 수 없다. 여기 서 고구려의 초기국가로서 소국형성 시기에 대하여 잠시 볼 필요가 있
11) 위의 책, p. 54.
다. 『사기』 화식열전에 나오는 예맥을 고구려의 선구적인 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1 2) 예맥이 『 사기 』 화식열전에 나 온 시기는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기원전 3 세기 말경이라고 헤아려 진댜 『後漢 書 』 東夷傳澈전에는 기원전 128 년 예군 남려가 우거에 반대하 여 28 만 구를 거느리고 요동에 나아가 내속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에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았으나 수년 만에 파한 것으로 나 오고 있다 .13) 예군 남려가 거느렸다고 하는 28 만여 구는 한 소국의 인 구일 수 없다. 이는 적어도 십여 국 이상의 소국의 인구를 합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당시 예군 남려는 소국병합 단계의 정치적 지배 자였을까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소국연맹 단계까지는 발전한 정치체의 지배세력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면 고구려라는 나라는 언제 형성되었을까. 현토군이 설치될 때 그 치소는 고구려현이 되고 있다. 이는 압록강 유역에 현토군이 설치 되기 이전에 고구려가 존재한 것을 뜻하며, 적어도 기원전 75 년에는 고구려가 국가 형태를 취하고 주위의 국가들과 연합하고 있었다고 보 는 것이 타당하다는 李基白의 견해를 주목할 수 있다 .14) 여기서 고구려 가 예군 남려를 맹주국왕으로 하는 소국연맹이거나 그를 정치지배자로 하는 소국병합 단계의 예지역에서 정치적으로 성장하였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고구려는 소국형성을 한 시기가 구체적으로 언제였을 까. 두 가지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예군 남려의 통제를 받던 모든 소국들과 거의 동시에 국가를 형성하였을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는 여러 소국들이 이미 형성되어 있는 상황에서 어쩌면 그러한 소 국들이 적어도 소국연맹을 형성하고 있을 때 주몽집단에 의하여 새로
12) 위의 책, p. 44. 13) 『史記』 102, 平津侯主父列傳 52, 公孫弘 14) 李基白, 『高句麗의 國家形成 問題』, 『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1985, p. 80.
이 소국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다. 두 가지의 가능성 중 어느 것이 타 당한지 단정하기 어렵다. 그렇더라도 고구려라고 하는 소국은 기원전 75 년에는 현토군의 치소를 몰아낸 중심세력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1 5) 그 리고 기원전 1 세기 말경에는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기원전 1 세기 말경에 고구려가 소국병합 단계로 들 어간 것을 의미한다 . 고구려의 정치형태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실은 『三國志』 魏書 東夷傳에 나오고 있는 大加의 정치적 성격이다. 아래의 사료를 보면 고구려의 대가들은 왕과 마찬가지로 사자, 조의, 선인을 거느린 것을 알수있다. 諸大加들은 또한 스스로 사자, 조의 , 선인을 두었는데 그 명단을 모두 왕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마치 (중국의) 경, 대부의 가신과 같은데 회동하 여 앉고 일어설 때에는 왕가의 사자, 조의, 선인과 같은 열에 있을 수 없 다.(『三國志』 魏害 東夷傳 高句麗전) 위의 기록에 나오는 대가들이 사회적인 지배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고는 하지만 삼한의 신지나 읍차와 같이 성읍국가의 지배자 자체일 수 는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대체로 중앙의 귀족적 정치세력으로 성장하 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연맹왕국의 조직은 크게 변형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왕권이 강화되었다고 한다 .16) 이와 같은 李基白의 견해는 타당한 것이다. 여기서 우선 大加들이 使者, 早衣, 先人을 거느리고 있던 정치발전단 계의 실상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위의 기록을 보면 대가 들이 거느렸던 사자, 조의 선인은 중국의 경, 대부들이 거느렸던 가신
15) 위 의 논문, p. 80. 16) 李基白, 앞의 책, 1990, p. 54.
과 같은 존재인 것 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제후들은 주왕실로부터 토지 와 백성에 대한 지배권 및 기타 특전을 부여받았으며 각기 본지에서 城 邑을 조성하여 封 國 또는 國 이라 하였다고 한댜 그리고 제후(國 君 ) 를 보필하여 일반 국정을 통괄하였던 사람을 경이라고 하였으며, 경 밑에는 대부가 있어 일반 정사에 참여하였으며 그 수도 많았고 직은 세습되었다고 한다 .1 7) 이와 같은 경, 대부는 중국 周의 봉건사회에 존 재하던 세력집단이 분명하다. 그러면 고구려의 제가, 경, 대부로 이야기되는 세력집단의 정치적인 성격은 어떠한 것일까 .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사실은 고구려의 제가 들 이 중국 주나라의 제후에 해당하였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만일 이러 한 생각이 타당한 것이라면 고구려의 정치조직에는 주나라의 봉건제적 인 성격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주에서는 주왕실의 일족이었던 姬 姓諸侯, 은 멸망시 주에 협조하였던 동맹부족의 이성제후, 은의 복속국 가였으나 은이 망하자 주에 복속한 토착제후 등으로 제후들이 구성되 었다고 한다 1 8) 고구려 대가들의 구성이 어떠하였는지 잘 알 수는 없으 나 어쩌면 주의 제후들과 유사한 것은 아니었나 생각된다. 중국 은나라는 상읍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성읍 간의 연합과 결속에 의한 일종의 성읍연맹국가라고 한다 .1 9) 그에 비하여 주에서는 봉건제도 룰 일국의 통치제도로서 채택하였다고 한다 .20 )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의 제가들이 가신적인 존재를 거느리고 국정에 참여하던 시기의 정치형태 를 성읍국가의 연맹에 의하여 이루어진 연맹왕국이라고 하기보다 한 단계 정치적으로 발전하였던 봉건제적인 형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고구려의 정치형태가 봉건제였다고 단정하는
17) 李春植 , 앞의 책, 1986, p. 87. 18) 위의 책, p. 64. 19) 위의 책, p. 35. 20) 위의 책, p. 62.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방의 제후들의 기원에 대하여 잘 알 수 없고 또 봉건제적인 성격이 있었던 것은 생각하기 어렵지 않지만 구체적인 성격이 周의 그것과 같았다고 단정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 2 1 ) (4) 백제 백제는 십제라는 소국으로부터 성장, 발전한 나라였다. 그러한 백제 가 한강 유역의 여러 성읍국가를 거느리는 연맹왕국 단계를 거쳐 중앙 집권적인 귀족국가로 성장한 것이 언제였는지 확실치 않다고 한다. 다 만 246 년 낙랑군과 대방군이 대규모로 침략해 왔을 때 대방태수 궁준 을 죽일 정도로 한강 유역에는 결집된 세력이 강대하게 성장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세력은 마한이 아니라 새로 크게 성장한 백제였고, 당시 의 왕은 古爾王 (234~286) 이 었다고 한다 . 22) 그런데 필자는 이미 백제 소국의 형성시기는 위만조선시기 언제였던 것으로 본 바 있다 .23 ) 당시 고구려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밀려난 세력이 었던 온조집단은 한강 유역에 정착하여 십제라고 하는 나라를 세웠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따르면 미추홀의 비류세력을 통합한 후 십제는 국호를 백제로 바꾼 것으로 나오고 있다. % ) 그런데 『三國志』 東 夷傳 韓전에 나오는 伯濟國은 마한의 한 소국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삼국지』의 기록이 백제의 정치적인 성장에 대하여 언급 할 필요가 없었고 또 실제로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있던 고이왕대의 백 제에 대하여 다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기록 을 보면 백제는 기원전 1 세기 말경부터 이미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할
21) 이에 대한 문제는 후일 해명할 필요가 있다. 22) 李基白 , 앞의 책, 1990, pp. 61 ~62. 23) 李鍾 旭 r 百濟 初期國 家 로서 十濟의 形成』, 《 國史館 論鼓》 69, 1996, p. 56. 24) 『 三國史 記』 23, 百 濟 本紀 1, 百 濟 始祖溫 祚 王조.
정도로 정치적인 성장을 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25) 여기서 온조집단이 십제라는 소국을 세울 때 동 지역의 정치적인 상 황은 어떠하였나 생각할 필요가 있다. 『 삼국사기 』 온조왕 24 년조의 기 록을 보면 온조왕이 웅천책을 만드니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어 꾸짖어 말하기를 〈 (온조)왕이 처음 강을 건넜을 때 발붙일 곳이 없자 내가 동 북방 1 백 리 되는 땅을 떼어 편히 살도록 하였으니 내가 왕을 대우한 것이 후하지 않음이 없었다. 마땅히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해야 하 는데 지금 나라가 완전해지고 백성이 모이니 자기와 대적할 자가 없다 고 하여 城池를 설치함으로 우리의 땅을 침범하니 이것이 의리라 할 것인가? 〉 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나오고 있어 주목된다. 여기서 백제가 소국을 형성할 때 이미 마한이라는 정치세력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 다. 마한의 정치적 성격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소국연맹 단계에 이르렀던 것을 알 수 있다 흐 마한의 소국형성 시기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단지 낙랑군과 같은 한군현 의 설치 이후에 소국연맹을 형성한 것이 아니었나 짐작은 간다. 한편 백제가 마한이라는 소국연맹이 형성된 지역에서 소국을 형성한 것은 고구려 소국이 예라는 정치체가 성장하고 있던 지역에서 국가를 형성 한 것과 같은 예가 된다. (5) 신라 사로국은 신라의 모체가 되었던 한 소국이었다. 사로국은 주위의 여 러 성읍국가들과 연맹체 형성을 위한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昔氏의 출 현이 그러한 움직임의 표현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한 견해에
25) 『 三 國 史記 』 23, 百 濟 本紀 l 에 나오는 온조왕 27 년 馬韓을 멸하였다는 기록은 그 러한 사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 26) 李 鍾 旭 , 『百 濟 의 建 國 과 統治 體 制의 編 成』, 《 百 濟 論 幾 》 4, 1994, p. 38.
따르면 奈勿麻立干代 (356~402) 에 이르러 이미 낙동강 동쪽과 경북 일 대를 지배하는 상당히 큰 연맹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로국 은 정복과 동맹에 의하여 신라로 비약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27 ) 이와 같은 이기백의 견해는 내물마립간대의 신라를 상당히 큰 연맹왕 국으로 보고 있어 주목된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사로국은 일찍이 脫解 王代 ( 57~80) 에 이 미 이웃한 소국을 병합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 28) 그 이후 파사왕 대 (80~112) 에는 음즙벌국을 伐하고 실직국과 압독국의 내항을 받았 다 .29) 이는 사로국이 1 세기 후반경부터 이웃 소국들을 병합하여 정치적 인 성장을 한 것을 뜻한다. 그런데 과연 내물마립간대의 신라를 연맹 왕국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긴다. 탈해왕, 파사왕 이후의 신라 는 단순히 소국 간의 연맹관계만으로는 볼 수 없다. 오히려 당시 소국 병합이 한창 진행되어 다음 단계의 정치적인 성장을 시작한 때로 보아 야 한다.l)) (6) 가야 낙동강 하류지방에는 원래 弁韓 12 국이 있었는데 그 중 狗邪國은 首 露를 시조로 받들고 본가야로 발전하였고, 彌烏邪馬國은 伊珍阿鼓룰 시조로 받들고 대가야로 발전하여, 그 지방의 다른 여러 성읍국가들과 연합하여 가야연맹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3 1) 낙동강 하류의 경상남도 일 대에서 성장하였던 여러 소국들이 그 후 소국연맹을 형성하였던 사실
업) 李基白, 앞의 책, 1990, p. 67. 28) 『三國史記』 44, 列傳 4, 居道전. 29) 『三國 史記』 1, 新羅本紀 1, 婆娑尼師今 23 년. 30) 李鍾旭 『新羅國家形成史硏究』, 1982, pp. 83~90. 31) 李基白, 앞의 책, 1990, p. 67.
은 위와 같은 견해를 통하여 알 수 있다 . 그러나 가야지역의 여러 소 국들은 병합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다고 여겨진다 . 가야지역의 초기국가로서 소국들이 형성된 시기는 언제였는지 잘 알 수 없다 . 『三國 遺事 』 篤 洛國記의 기록에는 수로왕이 가락국의 왕이 된 시기가 42 년이라고 하나 기원후 1 세기 전반경에는 이미 한반도 남부지 역에 국가를 형성하였던 소국들이 단순한 소국 단계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그러한 예는 백제와 신라를 통하여 볼 수 있다. 따라서 가야의 여러 소국들도 1 세기 전반에는 소국을 형성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 단 계 더 발전하여 소국연맹을 형성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최근 발견된 다호리유적의 유물들은 중국 군현들과 원거리교역이 행해진 것을 보여 준다 . 그러한 원거리교역 과정에 소국들이 교역을 위한 연맹을 형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지금까지 초기국가 발전단계로 설정되어 온 부족연맹, 연맹 왕국의 성격에 대하여 분명히 하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그 중 연맹왕 국 단계는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소국병합이 한참 진행된 내물마립간대 의 신라와 소국병합이 이루어지지 않고 연맹관계에 머물러 있던 가야 라는 정치체에 같이 사용될 수는 없다고 헤아려진다. 물론 신라는 상 당히 큰 연맹왕국으로 성장하였다고 하였으나, 본질적으로 연맹과 병 합의 차이를 구별하여야 한다고 본다. 2 문제가 되는 정치체 (1) 진국의 문제와 중국의 존재 이제 衆國의 존재와 진국의 실체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우선 정치세력에 대하여 주목하기로 한다 . 여기서는 먼저 중국과 진국에 대
하여 간단히 보기로 한다. 辰國은 과연 존재하였을까. 이에 대한 해명 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료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아들을 거쳐 손자인 右渠 때에 이르러 유인한 漢 人 망명자 수가 대 단히 많았으며, 천자를 입견하지 않을 뿐 아니라, 眞番 주변의 여러 나라 들(衆國)이 글을 올려 천자를 보고자 하였으나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 하게 하였다.(『史記 』 朝 鮮 列傳) (2) 아들을 거쳐 손자인 우거 때에 이르러 유인한 한인 망명자 수가 대 단히 많았으며 천자를 입견하지 않을 뿐 아니라 , 眞番 과 辰國 이 글을 올려 천자를 보고자 하였으나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漢書』 朝 鮮傳) 위와 같은 『사기』와 『한서』의 기록은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것이 분 명하다 . 그런데 두 기록의 원문은 거의 같으나 단지 『사기 』 에는 〈眞 番 芳衆國〉 으로 나오고 있고 『한서 』 에는 〈眞番辰 國〉 으로 되어 있다. 衆 國과 辰國이라는 자구상의 차이는 어느 기록을 택하느냐에 따라 정치 체에 대한 이해가 크게 달라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는 많 은 학자들이 辰國설을 따라 한반도 남부지역에 우거왕 당시 辰國이라 는 정치체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 사기』의 기록을 따르 면 그것은 辰國이 아니라 眞番 주변의 衆國 즉 여러 나라들이 된다 .32) 그러면 『사기』의 衆國와 『한서 』 의 辰國 중 어느 기록이 타당한 것일 까. 필자는 『한서』보다 먼저 편찬되었던 『사기 』 의 기록이 타당한 것으 로 본다. 따라서 우거왕 당시에 진번의 주변에는 중국, 즉 여러 나라들 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와 같은 여러 나라들은 앞에서 언급
32) 三品 彰 英 , r 史 實 考證 -魏 志東夷傳辰國辰王 -』, 《 史 學 雜志 》 55-1, 1944, pp. 70~ 88. 全海宗, 『東夷傳의 文 獻 的 硏究 』 , 1980, p. 121.
한 것과 같이 소국들을 뜻한다 . 그런데 『 한서 』 등에 나오고 있는 辰國 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그것이 衆國 가운데 하나인 辰國이라고 보는 견 해가 있다 .33) 그러나 위에 제시한 『 사기』와 『 한서』의 사료는 동일한 사 건을 기록한 것으로 『한서 』 에 나오는 辰國이라는 존재는 인정할 수 없 댜 이와 같이 생각하고 보면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魏 略』 인용 기 록에 나오고 있는 조선상 歷鈴卿 이 망명하였다고 하는 辰國도 『사기』 의 기록이 아닌 『한서 』 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작성된 때문이라고 생각 할수 있다. (2) 삼한의 성격 다음은 三韓이라는 정치체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위만에게 쫓겨 망 명하였던 준왕, 우거왕 시 2 천여 호를 거느리고 辰國으로 이주한 역계 경 등을 예로 들어 辰國사회는 그들 유이민을 통하여 발달된 철기문화 의 혜택울 받았고, 그에 따라 사회적 변화도 급속히 진전되었다고 하 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유이민들은 그들이 가지는 정치적 방법과 금 속문화에 대한 지식으로써 진국의 토착세력과 결합하여 점차 그 힘을 키워 나가게 되었다고도 하였다 . 그 결과 새로 개편된 것이 마한 • 진 한 • 변한의 삼한이었다고 하였다언 그런데 필자는 앞에서 辰國의 존재 를 인정할 수 없음을 밝혔다. 辰國은 한반도 남부에서 성장하였던 하 나의 커다란 정치체가 아니라 여러 소국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더라도 유이민의 이주에 의하여 한반도 남부에 있던 정치체 가 성장한 것은 틀림없다. 단지 필자는 그러한 유이민들에 의하여 斯 盧國, 十濟, 篤洛國 등과 같은 여러 소국들이 초기국가로 발전할 수 있
33) 金貞培, r 辰國의 政治發展段階』, 『韓國古代 의 國家起源과 形成』, 1986, pp. 286 ~287. 34) 李基白, 앞의 책, 1990, p. 48.
었다고 본다. 이는 이주민들이 국가 형성세력으로 되어 촌락사회 를 통 합하여 국가를 세운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 시기를 c hi e f dom 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프 한편 의창 다호리와 경주 조양동과 같은 지 역에서 발굴 조사된 토광묘, 토광목곽묘의 주인공들은 이미 소국 단계 에 들어섰고 한 걸음 나아가 낙랑과 같은 중국의 군현과 원거리교역을 하며 소국연맹을 형성하고 있던 정치세력들이었다고 헤아려진다 . 여기서 삼한의 실체가 어떠한 것인가 잠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지 금까지 삼한에 대한 이해는 『 삼국지』 동이전 한전의 기록에 의하여 이 루어진 바 있다 . 그런데 필자는 『 삼국지 』 한전에 나오고 있는 삼한 관 계 기록은 삼한의 정치적인 실상을 해명하는 자료가 될 수 없다고 본 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연구자들이 『삼국지 』 한전에 나오고 있는 내용 을 토대로 삼한이 부족연맹 또는 연맹왕국 단계에 있었다고 하여 왔으 나 『삼국지 』 의 기록은 삼한지역의 정치적인 실상을 옳게 파악하지 않 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삼국지』 한전의 삼한 관계 기록을 통한 삼한 의 실상을 해석하는 연구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기로 한다. 성읍국가의 연맹에 의하여 연맹왕국이 형성되었다는 견해는 타당하 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위의 견해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 삼국지』 동 이전에 나오고 있는 78 국이 성읍국가 단계에 있으며 과연 연맹왕국을 형성하였나 보기로 한다. 『삼국사기 』 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의 모체 가 되었던 사로국은 이미 1 세기 후반경부터 이웃한 나라들을 병합하여 나갔던 것으로 되어 있다 . 36) 그리고 백제본기의 기록을 보면 백제는 기 원전 1 세기에 이웃한 나라인 비류가 세웠던 소국을 병합한 것을 알 수 있다.'!7) 이러한 사실온 『 삼국지』 韓傳의 기록을 근거로 삼한이 성읍국 가의 연맹에 의한 연맹왕국이라고 할 수 없음을 뜻한다.
3.5) 위의 책, p. 48. 36) 『칵 國史記 』 44, 列 傳 4, 居道전. 37) 『三國史 記 』 23, 百 濟 本紀 1, 百 濟 始祖溫 祚 王 즉위조 .
그리고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이 소위 삼한의 정치체들의 정치적 성장에 대한 이해를 옳게 하고 있지 않았던 점을 또한 지적할 수 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비교하면 그러한 잘못을 곧 알 수 있다. (1) 部從 事 吳林은 본래 낙랑이 韓國을 통할했기에 진한 8 국을 분할하 여 낙랑에 주었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는 데 잘못이 있어 臣智가 韓人들을 격분시켜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그 때 (대방)태 수 宮違과 낙랑태수 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벌하였는데 준이 전사 하였다. 2 군은 마침내 韓 울 멸하였다 . (『三國志 』 魏 書 東夷傳 韓) (2) 13 년 가을 8 월 魏의 幽州刺史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왕준과 함께 고구려를 벌하였는데 왕이 빈틈을 타서 左將 眞忠을 시켜 낙 랑의 변민을 잡아왔더니 유무가 이를 듣고 노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침 토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그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 (『三國史記 』 24, 百濟本 紀 2, 古爾王 13 년조)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한 시기는 244~245 년이었다. 한편 고이왕 13 년은 246 년이 된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동천 왕 20 년 (246) 에 유주자사가 고구려를 공격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삼 국지』와 『삼국사기』의 기록 연대에 다소의 차이가 있다. 어쩌면 『삼국 사기』의 기록이 같은 사건을 1~2 년 정도 늦은 것으로 기록하였을 가 능성이 크다. 여기서 당시 백제는 낙랑군 • 대방군울 공격한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지』에는 韓의 臣智에 의하여 동원된 韓人들이 대방군을 공격한 것으로 나오고 있고,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고이왕의 명을 받 은 좌장 진충이 낙랑군을 공격한 것으로 나오고 있으나 두 기록은 동 일한 사건을 말하여 주고 있다고 헤아려진다. 이러한 생각이 가능하다 면 『삼국사기』에 나오고 있는 백제는 『삼국지』에 나오고 있는 삼한 78
국의 한 나라로만 다룰 수는 없다. 오히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 여 백제의 정치적인 성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 이는 3 세기 중반경의 백제는 이미 대방군 • 낙랑군과 맞서 싸울 정도의 왕국으로 성장하였던 것을 의미하며 단순한 연맹왕국의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았던 사실을 의미한다. 여기서 한국의 초기국가와 낙랑군을 비롯한 한군현과의 관계에 대한 종래의 견해가 가지는 문제점을 알아보기로 한다. 그러한 견해들은 대 체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을 해석하여 나온 것이라 할 수 있 다. 金哲浚은 『삼국지』 동이전에 나타나는 정치세력의 성장 과정에 대 한 상이한 성격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그는 漢이 변방 이민족을 지배 하는 방법은 토착사회의 통일세력의 성장을 방해하여 각 군장들에게 왕, 후, 옵군 둥의 중국 관작을 주고 개별적으로는 조복의책 둥을 주었 는데 조복의책은 군현에 대한 신속과 무역권의 부여를 의미한다고 하 였다. 군현은 각 족장에게 무역권을 개별적으로 주어 분열과 대립을 획책하는 조종 방법을 취하였는데 부여와 고구려는 그러한 방법을 막 아 냈으나 가야, 신라 등 남부의 소위 부족연맹에 대한 한군현의 지배 력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고 하였다 .38) 한편 李基白온 연맹왕국의 전형 적인 예가 되는 삼한의 성읍국가들에 대하여 한군현은 개별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통일을 방해하는 분열정책을 써서 그들의 정치적 성장을 방해하였다고 하였다 .39) 한군현의 분열정책에 의하여 삼한의 여러 나라들이 정치적 성장이 방해받았다는 위와 같은 견해는 과연 타당한 것인가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삼국지』의 기록 (1) 과 『삼국사기』의 기 록 (2) 이 서로 크게 차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삼국지』 동이전의
38) 金哲浚 『韓國古代國家發達史」, 『韓國民族文化史大系』 I, 1 964/『韓國古代國家發 達史』, 1CJ 75 , pp. 60~61. 39) 釋白, 앞의 책, 1990, p. 52.
기록이 삼한의 정치적인 성장에 대한 내용을 옳게 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따라서 『삼국지 』 의 기록에 나오는 자료를 근거로 중국의 한군현이 삼한에 대해 분열정책을 썼다는 주장은 따를 수 없 다. 실제로 백제는 기원전 1 세기 후반부터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하였 고, 신라의 모체가 되었던 사로국은 기원후 1 세기 중엽부터 이웃한 소 국들을 병합하였던 사실을 생각하면 4 0 ) 한군현이 삼한의 소국들에 대한 분열정책을 써서 정치적인 성장을 방해하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여기서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은 중국인의 관점에서 그들이 경험하고 또 필요한 사실만을 기록한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생각을 하 고 보면 삼한의 정치적인 성장에 대한 이해는 『삼국지』의 기록을 토대 로 하기보다 『삼국사기』와 같은 한국측 사료를 갖고 수행하여야 되는 것을 알 수 있댜 그런데 『삼국지』에 나오고 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은 어떠한 의미를 가진 것인지 궁금하다. 景初年間에 明帝가 몰래 대방태수 劉斬과 낙랑태수 鮮于嗣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2 군을 평정하고 諸韓國 臣智에게 읍군의 인수를 더하여 주고 그 다음에 게는 읍장을 주었다.(『 三 國志』 魏 書 東夷傳 韓傳) 위에 제시한 기록의 시기는 景初年間 (237~239) 으로 나오고 있다. 당시 낙랑태수와 대방태수를 파견하여 2 군의 체제를 강화하려고 한 것 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이전 建安 중 (196~220) 에는 공손강이 둔유 현 이남의 땅을 나누어 대방군을 설치한 바 있다 .4 1) 따라서 그 이후 경 초 연간에 이르기까지는 중국 중앙정부에서 낙랑과 대방군에 대한 통 제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경초 연간에 이르러 위에서
40) 李鍾旭, 앞의 책, 1982, pp. 83~90. 41) 『三國志』 30, 魏팜 30, 東夷傳 韓傳
2 군 태수를 임명하고 그들을 파견한 것을 알 수 있다. 2 군의 태수는 삼한의 신지 동에게 읍군, 읍장 인수를 주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조 치를 취하였다. 그런데 당시 백제에는 고이왕 (234~286) 이 재위하고 있었다. 따라서 『삼국지 』 에 나오는 기록을 가지고 삼한의 정치세력들 이 한군현의 분열정책으로 인하여 통합이 안 된 것으로 보는 데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고이왕대의 백제는 이미 적지 않은 수의 소국들을 병합하여 당당한 왕국으로 성장한 바 있다. 따라서 위의 기 록을 가지고 낙랑군과 대방군이 삼한 소국들에 대하여 분열정책을 써 서 통합을 가로막았다고 할 수는 없다. 당시 낙랑군과 대방군에서 삼한지역의 정치세력들에게 읍군, 읍장의 인수를 준 것은 사실이나 읍군과 읍장의 인수를 받았던 세력들이 독립 소국의 왕들일 수는 없다고 믿어진다. 그러한 읍군과 읍장들 중에는 백제와 신라에 병합된 지역의 정치세력들도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리 고 그 외에 아직 신라에 병합되지 않았던 소국의 정치지배세력들이거 나 가야의 정치세력들도 포함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같이 생 각하고 보면 삼한의 정치적인 성장이 한군현에 의하여 늦어졌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오히려 『삼국사기』 백제본기나 신라본기에 나오는 것과 같이 백제와 신라의 소국병합이 일찍이 진행되어 3 세기 전반경에는 두 나라가 모두 당당한 왕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삼국지』 동이전 한전에 나오는 삼한이 3 세기 전반에 각기 부족국가 또는 연맹왕국으로 존재하였다고 보는 견해에 강한 의 문을 제기하게 된다. 『삼국지』 한전에 나오는 삼한은 각기 독립된 정 치체일 수 없다. 3 세기 전반에는 이미 마한지역에서는 백제가, 진한지 역에서는 신라가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였기에 그러한 정치체를 소국들의 연맹체로 볼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단지 변한의 여러 소국 들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지역에는 그 후에도 가야의 소국들이 각기 독 립을 유지하며 소국연맹을 유지하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삼한의 소국연맹 형성시기가 언제였는지 문제가 된다. 그 상 한에 대하여 갑자기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변한 또는 가야로 알려지고 있는 소국연맹은 후일 6 세기에 신라에 병합될 때까지 존속한 것을 알 수 있다 . 그에 비하여 마한지역에서는 기원전 1 세기 말에 이미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하기 시작하였고, 진한연맹에서는 사로국이 기원후 1 세 기 후반경부터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 42) 이는 마한과 진한의 정치적 변동을 뜻한다. 따라서 삼한의 소국연맹 형성시기는 기원전 1 세기 말 이전 언제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위만조선의 우거왕대 진번의 주변에 衆國들이 있었다고 한 것을 보아 한사군이 설치된 기원전 2 세기 말 이후에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있댜
42) 李 鍾 旭, 앞의 책 , 1982, pp. 83~90.
제 2 장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신화(또는 설화)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에 대한 해명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극히 제한 되어 있는 자료지만 세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건국신 화이며 다른 하나는 고고학적인 자료들이고 나머지는 문헌자료들이다. 그 중 여기서는 건국신화를 주목하기로 한다. 건국신화는 한정된 내용 을 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건국신화는 분석하기에 따라 한국의 초기국가들이 언제, 어떻게 국가를 형성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 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 초기국가 형성과 관련된 건국신화 또는 설화를 전하는 나라들은 고 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들을 들 수 있다. 그 중 이 책에 서는 고조선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와 십제(백제)의 건국설화인 온조 설화에 대하여 정리하기로 한다. 단군신화와 온조설화에 대한 연구는 부여, 고구려, 신라 가야의 건국신화나 설화에 대한 연구의 길잡이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1 고조선 건국신화로서의 단군신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동에 나오고 있는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 국신화 및 한민족의 시조신화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와 같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단군신화에 대한 연구는 적지 않게 있어 왔다 .I) 지금까지의 연구를 보면 역사적인 관점뿐 아니라 사상적, 종교적, 정신 분석학적, 문학적인 관점에서 다룬 것들도 있다. 여기서는 고조선의 건 국신화로서 단군신화가 갖는 의의를 알아보기로 한다. 고조선의 국가형성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사료를 달리 구할 수 없는 현재 단군신화가 가지는 의의는 매우 크다. 그것은 신화도 역 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단군신화에 나오는 기록 모두를 있는 그대로 사료로 이용할 수는 없다. 단군신화의 기록을 사료로 이용하기 위해서 는 신화가 가지는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단군신화가 가지는 신 화로서의 특성을 이해한다면 고조선의 국가형성과 그 형성 요인을 밝 혀 낼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나아가 고조선은 언제, 어디서 국가를 형성하였으며 국가를 형성한 사람들은 누구였는지 알아 낼 수 있다고 믿는다. 본고의 이해롤 돕기 위하여 우선 신화의 몇 가지 특성에 대하여 언 급하기로 한다.” 첫째, 신화는 구전을 통하여 발전하고 성장하여 왔다 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구전을 통하여 신화가 전해지는 과정에 후대인 의 필요에 따라 그 내용과 양식이 조정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
1) 지금까지 단군신화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어 왔다. 그 중 李基白 편, 『檀君神話 論(중보판), 새문사, 1990 에 수록된 단군신화에 대한 연구논문들은 본고의 작 성에 큰 도움이 되었다 . 2) 신화 그 자체를 역사연구의 자료로 이용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신화가 상징하는 의미를 파악하면 그 안에서 역사연구의 자료를 얻을 수 있다 . 3) Allan J. Lic h tm a n and Valeri e French, Hi st o r i ans and the Liv i n g Past, 1978, pp. 79 ~8.5.
러한 사실은 단군신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음이 분명하다. 둘째, 신 화는 자연과 인간, 신과 인간에 대한 구분을 하지 않는다. 그 결과 과 학적 기준에 의하여 신화를 해석하고 진위를 판단하는 일은 의미가 없 다. 실제로 단군신화를 과학적인 기준을 갖고 해석하고 판단하면 그것 이 잘못된 믿음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에 신화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 사건에 대한 구전 과정에 과학 이상으로 직관이 확대되고 상상력이 유발된 결과 나타난 산물이라고 이해하여야 한다 . 셋째, 신화는 시간적 인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실제로 단군 신화에 나오는 단군의 생존 연대와 통치 기간은 시간적인 변화를 무시 한 예가 된다 . 이러한 예는 뒤에 정리하려는 바와 같이 그 밖에도 더 있다. 위에 언급한 신화의 세 가지 특성을 상기하며 단군신화가 가진 사료 로서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단군신화에 대한 기록들을 제사 하고, 단군신화의 구조를 정리하기로 한다. 이어 단군신화의 특성에 대 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나아가 고조선의 건국신화로서 단군신화가 지 닌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기로 한다. (1) 단군신화에 대한 기록들의 비교검토 단군신화는 『三國遺事 』 기 이 1, 『帝王韻記』 하권, 『應製詩証』 제 20 장, 『世宗實錄』 지리지 평양편 등에 나오고 있다. 이들 네 자료에 나오 는 단군신화의 내용은 각기 일치하는 면들도 있으나 차이가 나는 대목 이 있다. 그 중 단군의 탄생에 대한 내용을 보면 『삼국유사』와 『옹제 시주』의 기록이 일치하고, 『제왕운기』와 『세종실록』의 기록이 또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에 『삼국유사』와 『옹제시주』의 기록을 먼저 제 시하고 『제왕운기』와 『세종실록』의 기록을 뒤에 제시하기로 한다. 우선 고려시대의 승려였던 一然 (1206~1289) 의 저작인 『삼국유사』
권 1, 기이 2, 고조선(왕검조선)조에 나오는 단군신화를 보기로 한다. 『 삼국유사 』 의 정확한 편찬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281 년경 또는 늦게 잡아 1289 년까지는 저작이 완료되었다고 헤아려진다 ? 이에 『 삼국유 사 』 의 단군신화는 13 세기 말 일연이 참고한 古 記를 토대로 하여 정리 된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는 앞으로의 작업을 위하여 『 삼국유사 』 고조 선조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기로 한다. 가) 『위서 』 에 이르기를 〈 지금으로부터 2 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아 사달(경에는 무엽산이라고 일렀고 또 백악이라고도 하였으니 백주 땅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도 하니 지금의 백악궁이 이것이다)에 도읍 올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이름하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였다 〉 고 하였다. A (1) 고기에 이르기를 <(2 ) 옛날에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있어 (3) 늘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세상의 일을 탐구하였다. (4)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매 가히 인간들을 이롭게 할 만 하였다 . (5)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고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6) 환웅이 무리 3 천을 이끌고 (7) 태백산 꼭대기 [(10) 태백은 지금의 묘향산] 의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8) 이를 일러 신시라고 하였으니 (9) 그가 이 른바 환옹천왕이었다 . (11) 풍백 • 우사 •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 인명 • 질 병 • 형벌 • 선악 둥을 주관하고 무릇 인간의 360 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 상에 머무르며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 B (1) 그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
4) 崔南 善 은 『 三 國 遺 墓』 의 권 3 이하는 一 然 이 70 세에서 76 세 사이 (1275~1281) 에 찬술한 것으로 보고 있다(『 三 國遺 事』 , 민중서관 , 1946, p. 50). 리상호 역, 『 삼국 유사 』 해제, p. 10 에서는 1281~1287 년 사이에 찬술된 것으로 보고 있다. 채상 식은 『 三國 遺事』 의 전편이 일연의 73 세에서 76 세 사이에 본격적으로 찬술되었 다고 하였다(『지원사년 (1278) 인홍사간 역대연표와 삼국유사」, 『 고려사의 제문 제』, 삼영사, 1986, p. 70). 한편 김상현은 『삼국유사 』 찬술의 하한 연대를 1289 년까지로 잡고 있다(『삼국유사의 서지학적 고찰」, 『삼국유사의 종합적 검토』 , 한 국정신문화연구원, 19 얽, p. 33).
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신령스러운 환웅에게 사람으로 탈바꿈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 때에 신은 영험 있는 쑥 한 줌과 마늘 20 개를 주면 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 람의 형체를 얻을 것이다’라 하였다. 곰과 범이 이것을 얻어 먹고 스무하 루 동안 기를 하여 곰은 여자의 몸이 되고 범은 기를 하지 못하여 사람의 몸으로 되지 못하였다. (3) 옹녀는 더불어 혼인할 사람이 없으므로 매양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배도록 해 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 뒤 그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5) 이름하여 단군왕검이라고 하 였다 . (6) 그는 唐高가 즉위한 지 50 년인 경인(당나라 요임금이 즉위한 첫 해는 무진년인죽 50 년은 정사년이요 경인년이 아니다. 사실이 아닌가 의 심스럽다)에 (7)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하고 (8) 비로소 조선이라 칭 하였다. (9)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기었는데 그 곳을 궁(방으로도 쓴다)홀산이라고도 하고 또 금미달이라고도 하니 (10 ) 1 천 5 백년 동안 나 라를 다스렸다. (11) 주나라 호왕이 즉위한 기묘년(기원전 1122) 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12 )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기었다가 후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었는데 그 때 나이가 (15) 1 천 9 백 8 세였다〉 라고 하였 다. 당나라 배구전에는 〈 고려는 본래 고죽국(지금의 해주)인데 주나라에서 이 곳에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라 하였고, 한이 3 군을 두어 현도 • 낙랑 • 대방이라 하였다 〉 고 하였다. 통전에도 역시 이와 같다(『漢 書 』에는 진번 • 임둔 • 낙랑 • 현도의 4 군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3 군이라고 하고 이름 도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三國遺 事 』 1, 紀異 2, 古朝鮮) 위에 제시한 『삼국유사』 고조선(왕검조선)조에서 인용한 『古記』와 『魏 書 』는 그 원전을 찾을 수 없다. 그 중 『고기』는 우리 나라에서 작 성되어 전하여지던 것이 분명하다. 그에 비하여 『위서』는 중국의 曹魏 (220~264) 이거나 拓拔魏 (386~534) 에 대한 것이다 .5) 이들에 대한 사
5) 리지린은 『삼국유사』에 인용된 위서가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 삼국
지 』 이전에 있던 『 위서 』 라고 보아, 3 세기 초 이전에 단군신화가 존재하였다고 보았다( 『 고조선연구 』 , 열사람, 1963, p. 104).
서인 『삼국지 』 위지와 『위서 』 에는 단군신화에 대한 기 록 이 없다 . 따라 서 일연이 인용한 『 위서 』 가 어떠한 사서인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 위서 』 를 인용한 기록은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데 그 내용을 보면 고 기의 인용 기록과 어긋나지 않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 다음은 『삼국유사 』 의 단군신화와 내용이 적지 않게 일치하는 『옹제 시주 』 에 나오는 단군신화를 주목할 수 있다 . 『 응제시주 』 는 權 近 (1352 ~1409) 이 지은 시에 손자인 權藍 (1416~1465) 이 주석을 가한 책이다. 이 책 안에 命題 10 수라고 하는 큰 제목과 始古開關이라고 하는 작은 제목 아래에 自許와 增託가 있어 아래에 제시하기로 한다. 그 중 『 고 기 』 를 인용하고 있는 증주는 『 삼국유사 』 에 나오고 있는 단군신화와 내 용과 크게 일치하고 있다. 여기에 제시하는 『응제시주 』 는 세조 8 년 (1462) 에 판각된 것이다. 나) (自社) 옛적에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 들 이 그 룰 세워서 임금으로 삼고 인하여 단군이라고 불렀다. 그 때는 요임금 첫 해인 무진이었다. (增 誌 ) A (1) 고기에 이르기 를 <(2 ) 상제 환인에게는 서 자가 있었는데 옹이라고 하였다. (3) 인간세상에 내려가 교화하려는 생각 을 갖고 (5) 天印 셋을 받고 (6) 무리 3 천을 거느리고 (7) 태백산의 신단 수 아래에 내려오니 (8) 이를 일러 환웅천왕이라고 하였다 . 桓 은 혹 은 檀 이라고도 한다. (10) 산은 곧 지금의 평안도 熙 川郡 妙香山이다 . (11) 풍 백 • 우사 •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 인명 • 질병 • 형벌 • 선악 동을 주관하고 무릇 인간의 360 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상에 머무르며 다스리고 교화하 였다. B (1) 그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면서 늘 옹에 게 기도하여 사람으로 탈바꿈하도록 해 달라고 빌었다. 옹이 영험이 있는 쑥 한 줌과 마늘 20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형체를 얻으리라’ 하였다. 곰과 범이 이를 먹었는 데 범은 기를 하지 못하였고 곰은 스무하루를 기하여 여자의 몸이 되었다. (3) 더불어 혼인할 사람이 없으므로 매양 신수 아래에서 아이를 배게 해 달라고 빌었다. 옹이 잠시 사람으로 변신하여 아이를 배게 하여 아들을 낳으니 (5) 단군이라 하였다 . (6) 唐堯와 더불어 같은 날 즉위하였다. (8)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고 (7) 처음에는 평양에 도읍하였는데 후에는 白岳 에 도읍하였다. (14) 非西i 1 1jl 하백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夫婁 인데 그가 동부여왕이 되었다. 禹임금이 塗山에서 제후들을 모을 때에는 단군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12) 단군이 禹夏를 거쳐 은나라 무정 8 년 을미에 이르러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지금의 황해도 문 화현 구월산이다. (13 ) 廟가 지금도 있다. (10) 향년은 1 천 4 십 8 년이었 다 〉 라 하였다.(『應製 詩託』 제 20 장) 단군신화를 전하고 있는 또 다른 기록인 『제왕운기』는 고려 충렬왕 때 사람인 李承休 (1224~1301) 가 저술하였다. 단군신화는 하권 제 1 부 東國君王開國年代의 첫머리에 읊은 7 언시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本 紀』를 인용한 기록이 『삼국유사』와 『응제시주』의 단군신화와 차이가 나고 있어 아래와 같이 제시하기로 한다. 다) A 누가 처음 나라를 세워 풍운을 이끌었는가? 釋帝의 손자로서 이 름은 단군이다. (1) 本紀에 이르기를 (2) 上帝 환인에게 서자가 있었는데 옹이라 하였다. 云云 (4) 일러서 말하기를 〈아래로 三危太白에 내려가서 인간을 크게 이롭게 하라 하였다. (5) 이 까닭에 웅이 천부인 3 개를 받고 (6) 귀신 3 천을 거느리고 (7)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내려오니 (9) 이를 일러 檀熊天王이라 하였다 . 云云 B (2)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고 사 람의 몸으로 되 게 한 다음 (4) 단수신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5) 이 름이 단군이 었다. (8) 조선의 지 경 에 옹거 하여 왕이 되 었다. (9) 이 까닭에
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扶餘, 祿와 額이 모두 단군의 壽 였다. (10) 1 천 38 년을 다스리고 (12)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니 죽지 않는 때문이 다〉 라 하였다. 요임금과 더불어 무진년에 일어나서 與夏가 다 지나도록 왕위에 있다가 은나라 무정 8 년 을미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지금의 구월산이니 궁홀이라고도 하고 삼위라고도 한다 . 사당이 아직도 있다). 1 천 28 년을 임금으로 있었으니 환인으로부터 그런 변화를 받은 것 이 아닌가? 그런지 1 백 64 년 후에 어진 사람이 君臣을 다시 열었다(또는 이후 1 백 64 년에는 부자는 있었지만 군신은 없었다고도 한다) . (『帝王韻記 』 하권) 단군신화는 단종 2 년 (1454) 에 편찬된 『세종실록』 154, 지리지 평안 도 평양편에 들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해당 기록은 고구려 건 국신화의 앞 부분에 기록되어 있어 주몽에 대한 기록에 앞서 해모수와 금와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고 그에 앞서 『단군고기』를 인용한 단군신 화를 수록하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단군신화는 『제왕운기』의 그것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라) A (1) 단군고기에 이르기를 <(2 ) 상제 환인에게 서자가 있었는데 이름이 웅이었다. (3) 인간세상에 내려가 교화하려는 뜻을 갖고 (5) 천인 셋을 받고 (7)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오니 (8) 이를 일러 환웅천왕이 라 하였다. B (2)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고 사람의 몸으로 되게 한 다음 (4) 단수신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5) 이름이 단군이었다. (8) 나라 롤 세우고 조선이라 불렀다. (9) 조선, 시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 와 맥은 모두 단군이 다스린 바이다. (14) 단군은 非西曲甲 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인데 그가 동부여의 왕이 되었다. (6) 단군은 당요와 같은 날 왕위에 올랐고 (14) 우임금이 도산에서 회합할 때 태자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10) 1 천 38 년을 임금으로 있었는데 (12) 은나
라 무정 8 년 을미에 이르러 아사달산에 들 어가 신이 되었다 〉 라 하였다. 지금의 문화현 구월산이다.(『世 宗質錄』 154, 지리지, 평안도 평양편) 지금까지 단군신화에 대한 네 가지 기록을 주목하여 왔다. 먼저 단 군신화에 대한 네 가지의 기록들이 작성된 연대를 잠시 생각하여 보기 로 한다. 『 삼국유사 』 는 1281 년에서 1289 년 사이에 편찬되었다고 생각 된다. 그리고 『 제왕운기 』 는 이승휴 (1224~1301) 가 충렬왕 13 년 (1287) 에 관직에서 쫓겨난 후 저술하였다. 이에 『 제왕운기』의 저술 연대가 『 삼국유사 』 의 그것보다 늦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 세종실록』은 단 종 2 년 (1452) 에 편찬되었으며 『 응제시주』의 단군신화는 권근의 손자인 권람 (1416~1465) 이 단 증주에 나오고 있다. 증주를 단 연대는 잘 알 수 없으나 대체로 『 세종실록 』 보다 늦게 정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위에 제시한 기록들 중 『 삼국유사 』 의 고기 인용기록, 『제왕운기』의 본기 인용기록, 『세종실록 』 의 단군고기 인용기록과 『응제시주 』 의 고기 인용기록을 서로 비교 • 검토할 필요가 있다 ? 단군신화의 내용을 차례 대로 정리하면 분명히 알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견해를 보면 『 응제 시주 』 의 단군신화는 『삼국유사 』 의 그것과 거의 일치하고 있으며 『세종 실록 』 의 단군신화는 『 제왕운기』의 그것과 유형을 같이하는 것으로 알 려져 있다? 이러한 견해는 어느 정도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위 에 제시한 네 가지 기록의 단군신화를 자세히 비교하여 보면 『삼국유 사 』 와 『응제시주』 사이에 또 『제왕운기』와 『세종실록』의 기록 사이에 도 차이가 나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 삼국유사 』 , 『 제왕운기 』 , 『 세종실록』 및 『 옹제시주』에 나오는 단군신 화를 분석하여 비교 • 검토한 결과 단군의 출생에 대한 내용은 『삼국유 사』와 『응제시주 』 의 기록이 거의 일치하여 한 유형을 이루고 있고,
6) 보다 자세한 비교의 내용은 李鍾 旭, 『 古朝 鮮 史硏究 』 , 1993, pp. 17~23 을 참조. 7) 李丙 殺, 『韓 國古代史硏究 』 , 1976, p. 28.
『제왕운기』와 『세종실록 』 의 기록이 일치하여 또 한 유형을 이루고 있 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단군이 다스렀다고 하는 나라들에 대한 『제왕운기』와 『세종실록』의 기록이 거의 일치하고 있으며, 단군의 혼 인과 그 아들이라고 하는 동부여왕 부루에 대하여는 『세종실록 』 과 『응 제시주』의 기록이 일치하고 있는 사실도 알 수 있게 되었다 . 이러한 사실로 보아 단군신화를 전하는 기록의 유형 분류가 간단한 문제만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뒤이어 단군신화의 몇 가지 특성에 대하여 정 리하기로 한다. (2) 단군신화의 특성 지금까지 고조선에 대한 연구를 하여 온 많은 학자들은 단군신화를 기본적인 연구자료로 삼아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군신화를 통한 고조선사에 대한 이해에는 문제가 있어 왔다. 그것은 단군신화가 가지 는 신화로서의 특성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신화를 역사자료로 이용하 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헤아려진다. 이에 본고에서는 단 군신화를 새로운 시각에서 역사자료로 활용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한 다. 먼저 단군신화를 전하고 있는 네 가지 기록에 대한 앞에서의 비 교·검토를 토대로 하여 단군신화가 가지는 신화로서의 특성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기로 한다. 이어 단군신화의 전승 과정에 나타나는 신화 내용의 변경에 대한 이해롤 통하여 역사적 사실의 신화화에 대한 문제 를 검토하고 나아가 단군신화가 가지는 역사자료로서의 의미를 파악하 기로한다. 단군신화가 가지는 신화로서의 몇 가지 특성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 신화적인 공간과 세속적인 공간이 구별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단군신화에 나오고 있는 환인은 제석(석제) 또는 上帝라고 부 르고 있다. 물론 제석이나 상제라는 용어는 후대에 붙여진 것이지만
그가 머물던 공간은 세속의 인간들이 살지 않던 천상이 분명하다. 환 인의 아들인 환웅도 원래는 천상세계에 살았댜 환웅이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를 열었는데(사료 가A 8), 그 를 환(단)옹천 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A9). 환웅은 환인으로부터 천부인 3 개를 받아 가지고 3 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인간세상을 다스리기 위하여 왔다. 따 라서 그는 천상세계와 인간들의 세계에 모두 관련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환웅은 신시 를 열었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신화적인 신 성공간에 머문 존재임을 확인하게 된다 . 한편 인간이 되기를 환웅에게 빌었다고 하는 곰과 호랑이(가와 나의 Bl) 는 지상세계에 머물던 존재 들이다. 이러한 지상세계는 인간들이 활동하게 되는 세속적인 공간이 된다 . 여기서 단군신화에 나타나고 있는 신화적인 공간과 세속적인 공 간 구분이 있었던 것을 주목하게 된다. 둘째, 단군신화는 과학적인 기준으로 진위를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환인과 환웅이 살았다고 하는 천상세계의 존재는 과학적 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 그리고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햇빛을 피하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과학적으로는 인정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 리고 단군이 (산)신으로 되었다는 기록도 과학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런데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단군신화를 잘못된 믿음이라고 한다 면 그것은 문제가 된다. 오히려 단군신화는 과거에 있었던 일정한 사 건이 신화로 자리잡아 가며 과학 이상으로 직관이 확대되고, 감정의 원천이 풍부하게 되고, 상상력이 유발된 결과 그와 같이 되었다고 여 겨진다 .81 이에 단군신화가 가지고 있는 신화적 요소를 제거한 후 나타 나는 역사적 진실을 찾을 필요가 있다. 셋째, 단군신화에 나타난 시간은 신화적 시간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환웅과 옹녀 사이에서 출생한 단군은 신적인 존재로 되어 나라를 세우고 통치한 기간이 1 천 5 백년(가B 10) 이라고도
8) Allan J. L ic h tm a n and Valeri e French, 앞의 책 , l'J7 8 , pp. 79~8. 5.
하고, 1 천 38 년(다와 라의 BlO) 또는 1 천 48 년(나 BlO) 둥으로 나오고 있다. 그리고 단군의 수명은 1 천 9 백 8 세였다고도 한다(가 B15). 이 같 은 단군의 통치 기간과 수명은 지극히 신화적인 시간을 보여주고 있 다. 단군의 통치 기간을 세속적이고 역사적인 시간으로 보면 그 기간 동안에 여러 명의 왕들이 재위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넷째, 단군신화는 건국신화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단군신화에 나오고 있는 내용을 보면 고조선의 건국자라고 하는 단군의 출신 계보와 출생에 대한 기록이 먼저 나오고 있다(사료 가·나·다·라의 A). 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지는 부계의 계보와 단군의 출생을 이야기하는 환웅과 옹녀의 혼인(사료 가와 나의 Bl, 3), 또는 환인의 손녀와 단수신의 혼인(다와 라의 B2, 4) 에 대한 기록들이 있다. 그리고 단군의 조선건국과 통치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같은 단 군신화는 기본적으로 고조선의 건국신화인 것을 말한다. 이는 고조선 건국의 역사적 사실이 오랜 기간을 거치며 신화화되어 단군신화로 정 착된 것을뜻한다. 고조선의 건국 사실이 단군신화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의심할 수 없 다. 그런데 단군신화는 전승 과정에 역사적인 변경이 일어났다. 현재 단군신화의 기원을 알아 낼 방법이 없다. 어쩌면 기원을 찾는 작업은 영원히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존하는 문헌을 보면 단군신화의 기록은 『삼국유사』나 『제왕운기』가 쓰여진 고려시대보다 훨씬 이전에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삼국유사』의 찬자인 일연이 인용 한 『위서』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가지고 알 수 있다. 『魏 書 』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 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 (경에는 무엽산이라고 일렀고 또 백악이라고도 하였으니 백주 땅에 있다 .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도 하니 지금의 백악궁이 이것이다)에 도읍을 정 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이름하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였다〉 고 하였
다 . (『 三 國迫 事』 1, 紀 異 2, 古朝鮮 ) 『告유사』에 인용되고 있는 『위서』는 현존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위서가 어느 나라에 대한 사서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이 『위 서 』 가 현존하지 는 않으나 어 쩌 면 曹 魏 (220 ~264) 이 거 나 拓拔魏 (386 ~ 534) 중의 한 나라에 대한 사서였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 위서 』 가 언 제 편찬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 9) 그렇더라도 『삼국유사』를 편찬하 기 훨씬 전에 중국 계통의 사서에 고조선 건국에 대한 매우 간단하고 단순화된 신화적 기록이 있었던 사실을 주목할 수 있댜 10 ) 그런데 위에 인용한 위서의 기록은 고조선 건국신화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극히 축약된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 한편 앞 장에서 검토한 바에 의하면 『삼국유사 』 는 『고기』를 인용하 고 있고(가 Al) , 『 제왕운기 』 에서는 『본기』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다 Al). 그리고 『 세종실록 』 에서는 『단군고기』를 인용하였고(라A l), 『옹제 시주 』 에는 『 삼국유사 』 와 같이 『고기 』 의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나와 있 다(나A l) . 그 중 『삼국유사 』 와 『옹제시주 』 에서 인용한 『고기 』 가 동일 한 사서였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런데 두 기록에 나오고 있는 환 웅의 활동 (All) 과 단군의 탄생과 관련된 사실들(B l, 3) 은 서로 자구 상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 아 서로 일치한다고 볼 여지가 있다. 한편 단군이 신이 된 데 대한 기 록(B 12) 과 단군이 하백의 딸을 맞이하여 부루를 낳고 그로 하여금 중 국에 조공하도록 하였다는 내용(B 14) 은 『삼국유사』에는 없고 오히려 『세종실록』(라 B14) 에 나오는 것과 일치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이 『고기』의 기록 중 일부만 택하여 인용한
9) 리지린은 삼국 위의 『 위서 』 로 보고 있다(앞의 책 , 1963, p. 103). 10) 리지린은 3 세기초 이전에 단군신화가 있었다고 하였다(앞의 책 , 1963, p. 104). 그러나 필자는 고조선시대에 이미 단군신화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본다 .
것이 아니라면 『옹제시주』에 나오는 단군신화의 편찬자는 일연이 인용 한 『고기』를 그대로 인용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어쩌면 권람은 『삼국 유사』의 고조선조와 『세종실록』에 나오는 단군신화를 모두 참조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권람은 『응제시주』의 증주를 달 때 『고기』를 직접 참조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실제로 『옹제시주』의 단군신화는 『세종실록』의 그것과 일치하는 사항이 적지 않다. 이에 권람이 쓴 『 응 제시주 』 의 증주는 단군신화의 원전이 되는 『고기』 둥의 자료를 갖고 정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제왕운기』에 나오는 단군신화의 작성은 『 본기』를 인용한 것으로 나 오고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단군고기』를 인용한 『세종실록』 의 그것과 일치하는 사항이 많다. 그 중에는 환인을 상제라고 한 점 (A2), 환웅천왕이라 하였다는 기록 (A9), 환인의 손녀와 단수신이 혼인 을 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하는 기록(B 2, 4) 을 비롯하여 한국사상에 나 타나는 초기의 국가들을 단군과 연관시킨 것 (B9) 은 『제왕운기』와 『세 종실록』에 나오고 있는 단군신화가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단군과 하 백녀의 혼인과 부루의 출생 둥에 대한 기록(라 B14) 은 『제왕운기』의 단군신화에는 없다. 여기서 『본기』와 『단군고기』가 어떠한 관계에 있 었는지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서로 동일한 내용을 많이 전하고 있던 기 록들로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본기』와 『단군고기』가 일치한다고는 보 기 어렵다. 이에 『세종실록』의 편찬자는 『제왕운기』의 단군신화를 대 체로 참조하였다고 짐작이 간다. 단군신화를 전하고 있는 위의 네 사서가 기본자료로 삼았다고 나오 고 있는 『고기』, 『본기./l, 『단군고기』는 언제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만 들어진 것일까. 그 답을 얻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한 이해롤 위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을 하기로 한다. 그 하나는 『고기』 둥이 언제 만들어진 것인가 짐작하는 작업이다. 다른 하나는 『삼국유사』에 인용된 『위서』의 기록이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가 해명
하는 일이다 . 먼저 『고기』, 『본기』 및 『 단군고기.!I가 언제 만들어진 자료였나 생각 하기로 한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찬자들은 『고기』라고 하는 자료를 인용하고 있다. 이 같은 『고기』는 하나만이 아니고 여러 가지 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 중 단군신화를 전하고 있는 『고기 』 의 편찬 시기는 그 내용 자체가 한국사상 최초로 형성된 고조선에 대한 것이기 에 대체로 가장 이론 시기에 문자로 기록된 『고기.!I가 아니었나 짐작이 간다. 그런데 고구려에는 국초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유기』 1 백 권을 줄이고 정리하여 영양왕 11 년 (600) 에 왕명에 의하여 태학박사 이문진 이 편찬하였다고 하는 『 신집 』 5 권이 있었다. 고구려 초기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할 때 어떤 사람이 기사 백 권을 만들어 이를 『유기.!I라고 했다고 한다 .11 ) 백제에는 근초고왕대 (346~375) 에 박사 고홍이 『서기.!I 를 지었다고 『고기』에 나왔다고 한다 .1 2) 그리고 신라에서는 진흥왕 6 년 (545) 이찬 이사부의 건의에 의하여 왕명으로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 국사』를 편찬하였다고 한다 . 13) 고구려의 『 유기』와 『신집.!I, 백제의 『서기』 그리고 신라의 『국사』 편 찬은 왕명에 의하여 이루어진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그러면 이 같은 사서들이 편찬되기 이전 삼국의 역사는 어떻게 전하여졌을까. 고구려 에서는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하게 될 때 『유기』를 편찬하였고, 백제에 서는 근초고왕대에 『서기』를 편찬하기까지 문자로서 사실을 기록한 것 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백제의 경우 국가가 형성되고 수백 년 동안 문자로 기록된 자기 나라의 역사서가 없었던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와 같은 사실은 그 때까지 백제의 역사는 구전을 통하여 알려지고 있
11) 『三國史記』 20, 高句麗本紀 8, 영양왕 11 년조. 12) r 三國史記 』 24, 百濟本紀 2, 近肖古王 30 년조 기사가 끝난 뒤에 『서기』 편찬에 대한 기사가 나오고 있어 그 정확한 편찬 연대를 알 수는 없다 . 13) 『三國史記』 4, 新羅本紀 4, 眞興王 6 년조 .
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한 사정은 고구려도 마찬가지로 『유기』가 편찬될 때까지는 구전을 통하여 고구려의 역사가 전해졌음에 틀림이 없댜 그리고 고조선에 대한 역사도 문자를 사용하여 사서를 편찬하게 되기까지는 구전을 통하여 전해졌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유기』 의 편찬 시기가 고구려의 국초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보다 앞서 존재 하였던 고조선의 역사가 문자로 기록된 것도 언제라고 단정할 수는 없 지만 비교적 이론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고 그 러한 내용이 『고기』라는 기록으로 남아 『삼국유사』 동에서 인용되고 있다고 헤아려진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일반적으로 고조선이나 삼국의 사실을 전하고 있는 『고기』가 하나뿐인 사서였을지 의심이 간다. 『삼국유사』와 『삼국 사기』의 편찬자가 인용한 『고기』들은 과거의 사실을 전하고 있는 별개 의 사서들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이 타당하다면 『고기』들은 여럿 있 었고 편찬 시기도 차이가 났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유기』의 편찬 시 기가 고구려의 국초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보다 이른 시기에 존재 하였던 고조선의 역사도 정확한 시기롤 알 수는 없으나 비교적 이른 시기에 문자로 정착이 되었고, 그것이 『고기』로 전해졌다고 믿어진다. 여기서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위서』의 기록을 잠시 주목하기로 한 다. 위에 인용한 바에 의하면 『위서』에서 인용하였다는 기록은 단군신 화의 내용을 매우 간단하게 줄인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위서』가 현 존하고 있지 않는 것이기에 그것이 허구로 된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갈 지 모르나, 저자는 『삼국유사』의 인용문들이 때로는 기억의 잘못으로 인한 착오도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정확성을 보증해 주고 있다는 견해 14) 가 타당하다고 본다. 따라서 『고기』를 인용한 단군신화의 내용을 축약 한 『위서』의 기록도 과거에 존재하였고, 일연이 이용한 자료 중의 하 나였다고 헤아려진다. 이같이 생각하고 보면 『위서』는 편찬 당시 중국
14) 李基白, r 三國遺事의 사학사적 의의』, 《菜檀學報) 36, 1976, p. 165.
에 전해져 있던 『고기 』 류에 기재된 고조선의 역사를 축약하여 정리한 것으로 짐작이 간다 . 따라서 『 위서 』 의 편찬에 참고가 되었던 우리측 사서는 『 위서 』 가 편찬되기 이전에 문자로 정착된 것으로 여겨진다. 『 위서 』 가 조위인지 척발위인지 알 수는 없으나 단군신화를 전하는 기 록은 그 이전 언제인가에 작성되었음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히 하고 넘어갈 점은 『위서 』 가 축약한 기록과 『 삼국유사 』 에서 인용한 『 고기 』 가 꼭 같은 것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뒤에 보려는 바와 같이 단군신화는 문자로 기록된 후에도 끊임없이 변 경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앞에 인용한 단군신화를 전하고 있는 네 기록을 비교 • 검토하 여 변경의 유형과 그 이유 및 의의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 인명과 호칭에 변경이 일어나고 있는 사실이 눈에 띈다. 『삼국유사 』 에 는 神 壇 樹 (A7), 垣 君 王 儉(B 5) 으로 나오는 데 비하여 다른 기록에는 神 壇 樹, 壇君 으로 나오고 있다. 그리고 『 삼국유사』와 『 응제시주 』 에 나오 는 桓雄 天王은 다른 기록에는 檀 雄天王으로 나오고 있다. 그 중 환웅 과 단웅으로 된 이유는 환인과 단군 중 누구를 기준으로 삼는가에 따 론 변경이라고 생각된다 . 이는 고려시대 부계 계승의 전통에 의한 때 문이라 여겨진다 .1 5) 한편 환인의 칭호에 대한 변경도 주목된다. 『삼국 유사』에는 일연이 환인을 帝釋이라고 주를 달아 표기하고 있다. 그런 데 이것이 『 제왕운기 』 에 오면 釋帝로 되어 있고 『본기 』 의 인용기사에 는 上帝라고 되어 있으며 『 세종실록』과 『옹제시주』의 기록도 이룰 따 르고 있다. 그 의에도 명칭상의 변경과 차이가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 하기로 한다. 둘째, 신화의 내용에 요약과 생략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컨대, 환웅은 〈늘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세상의 일을 탐구하였다〉 (가A 3) 고 하는 기록이 다른 곳에서는 〈인간세상에 내려가 교화하려는
15) 이 경우 桓이나 培 은 성으로 본 것임을 알 수 있다.
뜻을 갖고〉 (나와 라의 A3) 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환옹의 뜻을 『제왕운기』에서는 〈云云〉 이라 하여 생략하고 있다. 셋째, 신화의 내용에 새로운 사실이 추가되기도 한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제왕운기』와 『세종실록』에는 조선뿐 아니라 尸羅(신라), 古禮 (고려),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와 맥 둥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을 받았 다고 한다 (B9). 그런데 이러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옹제시주』의 단 군신화에는 없다. 그리고 단군이 非西血 F 의 하백녀와 혼인을 하여 부루 롤 낳았다고 하는 기록이 『세종실록』과 댜봉제시주』의 단군신화에는 있 지만 다른 기록에는 없다. 단군이 다스렸다는 나라들과 단군이 하백녀 와 혼인을 하여 부루를 낳았다는 내용은 후대에 추가된 것이라 믿어진 다. 여기서 단군이 다스렸다는 나라들과 단군의 혼인에 대한 기록은 찬자들의 역사관이 작용하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죽 『세종실록』과 『응제시주』에 나오는 단군신화의 찬자들은 단군이 세웠다고 하는 고조 선과 그 후 형성된 우리 나라의 여러 국가들과 연관이 있다고 보았기 에 그와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단군과 부여 왕 부루를 연결시킨 것은 조선과 부여가 왕통 계보상으로 연결이 된다 는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고구려의 건국자라고 하는 주몽이 부여에서 나왔고, 백제의 건국자인 온조는 고구려에서 이 주한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여기서 위의 기록을 인정하면 고조선에서 부여로, 부여에서 고구려로, 고구려에서 백제로 이어지는 국가형성세력 의 존재를 주목하게 된다. 넷째, 내용에 변경이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들 수 있댜 환옹이 인간 세상에 내려올 때 거느렸다고 하는 무리를 〈徒三千〉 이라고도 하고(가 와 나의 A6), 〈鬼三千〉 이라고도 한다(다A 6). 그리고 보다 커다란 변 경은 환인의 활동과 곰이 여자로 변한 일 그리고 환옹과 옹녀의 혼인 에 의한 단군의 탄생에 대한 『삼국유사』와 『옹제시주』의 기록과 다른 기록들이 차이가 나고 있음을 통하여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
과 같이 『제왕운기』와 『세종실록.!l에는 이것을 환인의 손녀가 약을 먹 고 사람의 몸으로 변하여 단수신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은 것으로 기록 하고 있다(다와 라의 B2, 4). 이 같은 차이는 단군신화 편찬자들의 선 택에 의한 것으로 『삼국유사』와 『응제시주』의 찬자들이 보다 신화적인 요소룰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고, 『제왕운기』와 『세종실록』의 찬자들은 그들의 사고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신화를 보다 합리적으로 변경한 내 용을 수록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 준다 . 다섯째, 자구상의 변경과 생략을 들 수 있다. 앞에서 제시한 네 개의 기록을 비교하면 일정한 글자를 동일한 내용의 다른 자로 바꾸거나 일 부 글자를 생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名檀君〉 울 〈曰檀 君〉 이라고 하였거나 앤令〉 나 〈 也〉 와 같은 어조사를 생략하는 일이 있다. 이 같은 사소한 변경과 생략은 찬자의 문장 작성상의 취향에 따 른 것으로 단군신화 자체의 내용을 크게 바꾸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변경도 여러 번 일어나고 한 걸음 나아가 내용을 변경하게 되 면 단군신화의 모습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러한 문제 중에는 단군 의 통치 기간에 대한 차이를 볼 수 있다. 이것이 『삼국유사』에는 1 천 5 백 년으로 나오고 있는데 다른 기록에는 1 천 28 년, 1 천 38 년, 1 천 48 년 등으로 나오고 있다. 물론 단군의 통치 기간이 실제로 위와 같았다 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숫자에 변경이 생긴다는 사실은 단순한 문제만 은아니다. 여섯째,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단군의 통치 연대에 대한 기록에 차이가 나고 있는 예로 미루어 단군신화의 기록 과정에 오류가 생겨나 기도 하였음을 지적할 수 있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환인이 환 옹에게 주었다고 하는 〈天符印三節〉 라는 기록이 『세종실록.!l과 『응제 시주』에는 〈天三印〉 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天三印은 천부인 3 개를 바꾼 것으로 헤아려진다 . 그런데 만일 다른 기록은 없어지고 천삼인에 대한 것만 남았다면 그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그것은 천
삼인이 세 개의 인이 아니고 천삼인이라는 하나의 인으로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화의 전승 과정에 나타나는 사소한 변경이나 생략도 후에는 신화의 의미를 바꾸기도 할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기록의 작성 과정에 이 같은 변경과 생략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기 록이 없던 시대에도 그러한 일들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고 여겨진다. 위에서 고조선의 건국에 대한 사실이 단군신화로 자리잡아 가는 과 정에, 또 일단 신화로 정착된 이후에도 단군신화는 끊임없이 변경된 사실을 헤아려 보았다. 그러한 변경은 신화의 발전과 성장을 뜻하기도 하고 신화의 축소와 쇠퇴를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로 신화는 후대인의 필요에 의하여 내용과 양식의 조정이 허용되고 있다. 그러한 예는 단 군이 다스렸다고 하는 나라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고, 단군과 하백녀 의 혼인을 통하여 부여왕인 부루가 태어났다고 하는 기록을 통하여 볼 수 있다. 단군이 한국사의 초기에 나타나는 여러 나라를 다스렸다는 기록이 단군신화에 들어간 이유는 단군, 나아가 고조선의 역사적 의의 롤 강조하기 위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단군을 동부여의 왕인 부루의 父로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한국의 여러 초기국가의 건국세력 둘이 혈통을 같이한다고 보고자 하였거나 또는 그렇게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16) 그 밖에도 환인을 제석이라고 한 것 둥으로 미루어 단군신화 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변경되기도 하였다. 단군신화의 내용 변경에는 불교사상 의에 유교사상도 작용하였다고 보여진다 .17) 지금까지 보아 온 바에 의하면 단군신화는 13 세기 말경에 편찬된 『삼국유사』로부터 15 세기 중엽경에 편찬된 『옹제시주』 증주에 이르는 2 세기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만들어진 네 개의 기록에 나오고 있다.
16) 檀君과 夫婁가 혈연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古朝鮮과 夫餘 사이에 일정한 정치적 연관이 있었다고는 생각된다. 17) 그러한 예는 『帝王韻記』와 『世宗實錄』에서 단군의 母롤 옹녀가 아니라 단(환)운 천왕의 손녀라고 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런데 불과 2 세기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단군신화에 대한 기록들은 생 각보다 많이 달라지고 있다. 이는 단군신화가 끊임없이 변경되고 수정 되고 생략되고 추가된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이 변경된 이유는 역사적, 사상적, 종교적, 정치적인 면에서 찾을 수 있다. 또는 편찬자의 문장에 대한 취향과 시대적인 요구에서 변경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거기에 더 하여 어떠한 자료를 토대로 하여 단군신화를 정리하였나 하는 문제도 있다. 여하튼 단군신화는 어떠한 이유로건 변경된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단군신화의 성립과 전승 과정에 대한 문제를 잠시 알아보기 로 한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국가형성과 역사를 신화화한 것이다. 윈 래의 신화는 구전을 통하여 전하여졌는데 언제인가 확인하기는 어려우 나 『삼국유사』에서 인용하고 있는 조위의 『위서』가 편찬되기 이전에 우리 나라에서 이미 기록으로 자리잡았다고 여겨진다. 그러한 기록이 『 고기 』 로 알려졌다고 짐작이 간다. 그런데 중국의 산동반도에 있는 武 氏祀堂의 畵像 石에는 단군신화와 내용과 거의 일치하는 그림이 있다고 한다 .18 ) 그 화상석이 세워진 연대는 기원후 2 세기이지만 원본은 기원전 2 세기에 세워진 영광전에 있었다고 한다 .19) 그러한 화상석이 단군신화 와 어떠한 관계에 있던 주인공이 만든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화상석 의 그림 내용이 단군신화와 대체로 일치하는 것은 단군신화가 이미 기 원전 2 세기에 그림으로 정착된 것을 뜻한다”)고 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무씨사당의 화상석에는 곰이 아니라 범의 입에서 첫사람이 탄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범과 곰에 대 한 기록 중 단군이 웅녀에게서 탄생하였다는 것과는 다른 내용을 보여 준다 .21) 따라서 무씨사당의 화상석은 단군신화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18) 金載元, 『檀君神話의 新硏究』, 1947, p. 29. 19) 李基白, 『韓國古代史論』, 1976( 改正版), p. 11. 20) 金載元, 앞의 책, 1947, pp. 29~53.
아니라고 헤아려진다. 그러면서도 단군신화의 골격은 무씨사당의 화 상석이 보여주는 신화로부터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고 짐작이 가기도 한다. 그런데 기원전 2 세기는 고조선의 지배세력이 위만에게 밀려난 시기 이거나 한 무제의 명령을 받은 한나라의 군대에 의하여 위만조선마저 멸망하고 일부의 지배세력이 중국으로 이주한 시기였다. 그러한 과정 이거나 또는 산동반도가 단군신화와 관련이 있는 집단의 거주지였기에 무씨사당의 화상석이 그려진 것은 아닐까. 여기서는 더 이상의 추론은 멈추기로 한다. 단지 기원전 2 세기에 이미 단군신화가 그림으로 정착 되었을 가능성이 있기에 늦어도 당시 구전이나 문자로 단군신화가 정 착되었다고 믿어진다. 여하튼 이후 고구려 최초의 사서인 『유기』가 편 찬될 때까지는 단군신화도 문자로 정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고조선은 중국과의 접촉을 통하여 일찍이 문자를 사용하였다고 생각된 다. 따라서 고조선 시대 언제인가에 그들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가 문 자로 정착되었다고 헤아려진댜 22) 그리고 고조선 시대에 각지에는 단군 사당이 설치되어 단군이 국조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帝王韻記』에 구월산에 사당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고조선의 예는 아니나 『당서』 고구려전에 정관 19 년 (645)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였을 때 요동성에 주몽사당이 있었다 는 기록으로 미루어 그와 같은 추측을 할 수 있다. 단군신화는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신화와 비교하여 신화적 인 요소가 많이 찾아진다.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고구려의 시조 추모 왕은 북부여로부터 나왔다고 하며 그는 천제의 아들이고 그의 어머니
21) 위의 책, p. 45. 22) 고조선시대에 문자를 사용하였다는 적극적인 근거는 없다 . 그러나 중국과 외교 적 • 경제적인 관계를 유지한 것을 보면 문자를 사용하였고 그러한 과정에 단군 신화도 문자로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는 하백의 딸이라고 한댜 단군은 그의 아버지가 상제인 환인의 아들 환웅이라고 되어 있어 단군과 주몽의 아버지 계통이 상제 또는 천제라 고 하는 점에서 어느 정도 비슷하다. 그러나 단군의 어머니는 곰이 여 자로 변한 웅녀로 나오거나(가와 나의 Bl, 3), 환인의 손녀가 변신한 여자라고 하여(다와 라의 B2, 4) 추모왕의 어머니와는 다른 면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단군신화에는 상제인 환인과 그 아들인 환웅에 대 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나타나 있다. 이는 역시 단군신화에 신화적 인 요소가 일충 많은 것을 나타내 준다. 한편 신라의 시조가 되는 혁 거세에 대한 기록은 고구려의 시조에 대한 신화보다 한충 신화적인 요 소가 줄어들었고 ,Z3)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에 대한 기록은 혁거세에 대 한 기록보다도 더욱 사실적이고 단순하게 되어 있다 .U) 이와 같이 고조선의 단군, 부여의 동명왕, 고구려의 주몽, 백제의 온 조, 신라의 혁거세에 대한 기록의 신화적 요소의 정도가 서로 다른 것 은 무엇을 뜻하며 어떠한 이유일까. 이는 바꾸어 말하여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이라는 역사적 사실의 신화화 정도에 대한 척도가 된다. 그 중 고조선의 건국자인 단군에 대한 신화는 만들어진 시기가 오래 되었고 또 그것이 구전으로 전해진 기간이 길었으며 고조 선이 일찍 망하여 단군신화를 그대로 유지할 세력이 사라졌기에 신화 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갔다고 헤아려진다. 그에 비하여 백제의 건국신 화에 나오는 온조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늦은 시기에 백제 건국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고 또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문자로 정착이 되어 신화적인 요소가 적었다고 여겨진다. 한편 부여는 건국시기가 고구려 보다 이르고 문자로 기록된 시기가 상대적으로 늦어 신화적인 요소가
23) 『三國史記』 13, 高句麗本紀 1, 始祖東明聖王조 및 『三國遺事』 1, 紀異 2, 高句麗 조참조` 24) I'三國史記』 1, 新羅本紀 1, 始祖赫居世居西干 죽위조와 『三國史記』 23, 百濟本紀 1, 百濟始祖 溫祚王 즉위조 비교.
많이 들어가게 되었다고 짐작이 간다. 신라의 건국시기는 백제와 그다 지 차이 나지 않을지 모르나 구전된 기간이 비교적 길어 신화적인 요 소가 늘어나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및 가야의 건국신화는 국가의 형성 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신화화한 것이다. 단군신화를 포함하여 이 같은 건국신화는 역사와 마찬가지로 진실되고 실제적인 이야기를 전하고 있 다. 단지 신화에서 이야기되는 내용은 역사적 사실을 신화적인 경험과 생활 속에서 전하고 있어 연대기적이고 계보적인 이야기가 될 수 없 다. 따라서 단군신화와 같은 건국신화를 직접 역사자료로 이용할 수 없다• 이에 건국신화 속에 들어 있는 역사적 사실을 파악할 필요가 있 다. 이는 어떠한 역사적 사건들이 신화로 되었나 하는 문제를 해명하 는 것도 된다. 이제 역사자료로서의 단군신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정리하기로 한 댜 앞에서도 잠시 언급하였듯, 『삼국유사』에 인용되고 있는 『위서』의 기록은 『고기』의 고조선 건국신화를 매우 간략하게 축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위서』의 기록은 신화라고 하기보다 고조선의 건국을 이야기하는 간단한 역사라고 하여도 좋다. 여기서 일단 단군신화를 고 조선의 건국신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고조선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에서 어떻게 역사적인 사실을 찾아 낼 수 있을까. 건국신화를 축약하면 역사적 사실이 찾아지는 것 은 아니다. 앞에서 『삼국유사』에 인용된 『위서』의 기록이 뒤이어 나오 는 『고기』의 기록을 축약한 것으로 보았는데 『위서』의 찬자들이 『삼국 유사』에 나오는 『고기』를 인용하였다고 단정하기도 어렵고 또 다른 기 록을 『위서』가 이용하였을 가능성도 크다. 따라서 신화를 축약하면 역 사적인 사실이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 앞에서 제시한 네 가지의 단군신화들이 모두 동일한 내용을 전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는 단군신화가 오랜 기간에 걸쳐 역사적인 변천 과
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고조선의 건국을 이야기하는 단군 신화는 허구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 같은 건국신화는 역사적인 고찰을 통하여 신화로 확인할 수 있고 또 역사발전의 대세에 대한 이 해 를 바탕으로 하여 일정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그 안에서 역 사적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단군신화 안에서 고조선의 건국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찾아 낼 수 있는 근거로 우선 고조선 자체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단군 신화에는 단군이 조선을 세운 것으로 나오고 있다(사료 B8). 그리고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대로 중국 산동반도의 무씨사당 화상석의 그림 내용이 단군신화의 그것과 유사한 면이 있어 단군신화가 허구로 만들 어졌다고 할 수 없다 . 25) 그 밖에 단군신화에는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 에 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가B 11). 물론 기자를 조선의 제후로 봉하 였다는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중국의 은이 망하고 주 가 들어서며 은의 유민들이 중국의 동북지역으로 일부 이주하였다는 사실을 보면 26) 단군신화에 나오고 있는 기자는 이러한 은족의 유민이 이주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기자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후대의 중국측 기록을 근거로 하여 삽입한 것이고 원래의 단군신화에는 기자에 대한 내용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제왕운기』의 기록에도 기자에 대 한 내용은 단군신화를 전하는 기록과는 관계가 없이 따로 나오고 있어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단군신화에는 원래 기자에 대한 내용은 없었 던 것이 분명하다.
25) 金載元, 앞의 책, 1947, pp. 29~53. 26) 李 成珪 , r 先 秦 文 獻 에 보이는 ‘東 夷’의 성격」, 『 韓 國古代史論 穀』 , 1991, pp. 139 ~141. 李 亨 求, 『大凌河流域의 殷末周初 靑 銅器文化와 箕 子 및 箕子朝 鮮 」, 《韓國上古史 學 報 ) 5, 1991, pp. 7 ~33.
여기서 단군신화에 나오는 기록을 통하여 고조선의 건국세력, 그 건 국시기, 건국장소, 정치조직, 정치발전단계 등에 대한 신화적인 내용을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신화적인 내용은 그대로 역사적인 자료로 이용 할 수 없댜 이에 이 같은 신화적인 내용 속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유 추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는 다음 절에서 정리하기로 한다 . 한편 단군신화를 고조선의 건국신화라고 하였는데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단순히 건국 사실만을 이야기하는 신화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 그 안에는 단군과 기자와의 관계가 나와 있어'Z1 ) 고조선과 중국계 이주 민과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이해를 위한 자료도 있다. 그리고 단군이 다스렸다는 국가에 대한 내용(다와 라의 B9) 은 한국의 여러 초기국가 와 고조선의 관계를 나타내 주는 신화적인 기록이 된다. 또한 단군과 하백녀의 혼인에 의하여 동부여왕이 되었다는 부루의 탄생은 고조선과 동부여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신화적인 기록이 된다. 이러한 신화적인 기록을 통하여 단군신화는 단순히 고조선의 국가형성신화라고만 할 수 는 없게 되었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신화만이 아니라 부여 • 고 구려와 같은 국가들의 형성과 관련된 신화가 되었고 나아가 한민족 형 성의 신화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단군은 (산)신으로 되어 받들어졌고 사당인 廟가 조선 초에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 있었 다고 여겨진다(나 B12). (3) 단군신화에 나타난 고조선의 국가형성 신화는 역사와 마찬가지로 진실되고 실제적인 이야기를 전하고 있 다 . 그러나 신화는 이야기의 전달 방법이 일반적인 사서와는 다르기 때문에 신화 자체의 내용은 연대기적이고 계보적인 이야기가 되기 어 렵다. 신화 안에서는 역사의 주인공들이 신적인 존재로 되고 역사적인
업) 『三國遺 事』 1, 紀異 2, 古朝鮮조.
시간은 신화화되며 시간적인 변화가 인정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신 화는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고 그것이 어떻게, 왜 일어났나 이야기하여 주고 있다. 따라서 단군신화 속에서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 이 일어났고 왜 일어났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 단군신화는 단순히 건국신화뿐 아니라 민족국가들의 형성과 민족 형성의 신화로 생각하였 다 . 여기서는 건국신화로서의 단군신화를 가지고 역사적 사실을 추론 하기로 한다. 그 중 고조선의 국가형성 세력, 국가형성 시기, 국가형성 장소, 정치 • 사회 조직과 정치적 성장에 대한 문제를 차례로 보기로 한댜 이를 위하여 역사발전의 대세에 대한 이해의 바탕 위에 역사적 자료롤 가지고 신화에 나오는 내용을 비교 검토하기로 한다. 먼저 고조선의 국가형성세력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지금까지 단군신화에 나오는 자료를 검토하여 고조선의 국가형성세력에 대한 적 지 않은 연구가 있어 왔다. 여기서 단군신화에 나오고 있는 국가형성 세력에 주목하기로 한다. 그들 세력은 크게 세 집단으로 나누어 보고 자 한다. 첫째는 제석 또는 상제라고 하는 환인과 그의 아들인 환(단) 옹천왕을 들 수 있다. 둘째는 환웅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기 전부터 고 조선지역에 토착해 살고 있던 곰과 호랑이로 나타나고 있는 집단이 있 다. 셋째는 고조선을 세웠다고 하는 단군과 후에 단군을 몰아내고 조 선의 지배세력이 되었다고 하는 기자를 들 수 있다. 그 중 환인과 환웅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집단은 고조선의 건국에 직 접 참여한 집단은 아니었다. 그들 중 하늘로 이야기되는 지역에 거주 하던 환웅이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 시를 열었다고 하는데 그는 고조선의 건국자일 수 없다. 한편 한웅이 신시를 열고 인간의 일을 주관하고 있을 때 원래 토착하여 살고 있으 며 환옹에게 사람으로 변신하기를 원하였던 곰과 호랑이로 이야기되는 집단 역시 국가를 건국한 중심세력은 아니었다. 고조선을 세운 세력은 단군으로 나타나고 있는 집단이었다 .28) 단군신화에 나오는 그러한 집단
28) 檀 君을 古朝 鮮 小國의 건국자로 볼 수 있으나, 고조선 소국 건국세력 집단으로 볼 수도 있지 않나 한다.
들은 역사적으로 어떠한 의의를 가지고 있을까. 여기서 지금까지 나온 그러한 세력집단에 대한 견해를 잠시 주목하 기로 한다. 먼저 최남선의 견해를 보기로 한다. 그는 단군신화에 나오 고 있는 곰과 호랑이에 주목하여 그러한 동물을 가지고 종족 내에 있 는 단체의 칭호로 삼고 그것을 단체의 선조라 하여 숭배하게 되는데 이 때 그러한 동물은 토템이라 하며 이로 인한 신앙을 토테미즘이라고 하였다 . 그리고 환웅은 단군의 탄생 과정에 잠시 나타나고 단군도 옹 모의 아들로만 나타난다고 보아 이를 모계적 사실의 투영이라고 하였 다. 또한 이같이 탄생된 단군이 조선의 건국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는 異族婚의 제도를 받아들여 토템적 종족조직이 완성되고 그 결과로 추장제가 생기고 추장제가 종족조직을 파괴하여 다음의 정치조직을 발 전시켰다고 하였다. 이러한 단군은 어원을 巫인 당굴에 두고 있어 단 군은 天人 즉 事 天者를 뜻하며, 왕검은 왕호 특히 巫君적 칭위라고 하 여 단군왕검을 天君또는 巫君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 29) 김재원은 무씨사당 화상석에 나타나고 있는 화상을 분석하여 단군신 화와 연관을 짓고 있다. 그는 화상석에 나오는 그림의 내용은 적어도 9 할까지가 단군신화에 나오는 내용과 일치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은대 의 청동기에 범이 시조로 표상된 것도 있다고 한 그는 , 북방계의 곰의 수조신화가 무씨사당 화상석의 신화를 충실히 기록하다시피한 단군신 화에서는 호랑이 대신 곰에게서 사람이 난 것으로 하였다고 보았다 . 30) 이병도는 환웅을 天神族이라 하고 옹녀는 고마족인 곰 토템의 여성 으로 地上族인 國神族이라 하였다. 따라서 단군신화는 천신족인 환웅 과 지신족(국신족)인 고마족의 여성이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것을
29) 崔南善, 『 檀 君 及 其硏究J, 李 基白 編 , 앞의 책, 1990, pp. 14~19. 30) 金 載 元, 앞의 책, 1947, pp. 45~49.
설화화한 것이라고 하였다. 『 삼국유사 』 에 옹녀로 나오는 것을 『 제왕운 기』에서 환인의 손녀라 한 것은 동물의 웅자를 피하기 위하여 개작한 것으로 원형을 잃은 설화라 하였다 . 그는 단군이 환웅천왕의 아들인 동시에 그를 봉사하는 후계천왕(천군)으로서 정치적 군장의 의미보다 제사장의 의미를 더 많이 가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왕검은 정치적 군 장의 의미가 더 많다고 하였다. 제정일치시대에는 단군뿐이었으나, 제 정이 분리된 후에는 제사단체의 장은 단군이라 하고 정치단체의 장은 왕검이라 하여 각기 맡았던 지역도 달랐던 것으로 보고 있다 .3 1) 한편 그는 중국 춘추시대(기원전 770~402) 초경 조선에는 지배세력의 교체 가 일어났다고 한다. 새로운 지배씨족이 한씨를 칭하였고 그러한 한씨 조선시대에 기자를 시조로 가식하였기에 그 때부터 기자를 신앙하고 봉사하게 되었다고 하여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 .32) 김정학은 곰과 호랑이에 대한 숭배는 분명히 토테미즘의 신앙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환인은 여신으로서 천제 -태 양신이며 그의 아들이 신 옹이고 그의 孫이 인신으로 세상을 다스렸다는 천손사상이며 삼신사상 의 표현이라고 하였다. 이에 단군신화는 환인기維-천손으로 이어지는 태양신화와 熊女-단군으로 이어지는 토테미즘의 두 계통의 신화가 합 쳐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신화를 달리하는 두 부족이 정치적 또는 사회적으로 통합되었을 때 두 부족의 시조신화가 통합되었기 때문이라 고 하였다 .33) 이는 환인 _ 환웅으로 이어지는 부족과 웅녀 -단 군으로 이 어지는 부족이 다르다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이기백은 단군신화 속에서 샤머니즘의 종교적 세계를 찾아볼 수 있 고 나아가 토테미즘이라는 사회적 요소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34)
31) 李丙 *. , 앞의 책, lf:51 5 , pp. 29~34. 32) 위의 책, pp. 47~5. 5. 33) 金廷 鶴, r 檀 君神話와 토오테미 즘」, 센혼史 學 報 ) 7, 1954, pp. 281 ~沈 7. 34) 李基白, 앞의 책, lf:51 5 , pp. 14 ~15.
한편 단군은 삼한의 천군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고 하며 천군은 종교적 제사장이었다고 하였다. 환인은 불교의 동방호법신을 나타내는 불교 용어라고 하며 이를 오늘날의 하느님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환인을 하늘 위에 있는 광명의 신으로 보고 이는 태양숭배 를 나타내 준다고 하였다. 그리고 환웅이 행한 일을 보면 그는 巫로서 의 기능을 가졌다고 하였다. 그는 왕검을 정치적인 통치자로 보는 견 해를 따르고 있다. 기자조선에 대하여 그는 한족이 위만조선을 멸하고 기자전설이 생겨나 단군신화와 섞이게 되었다고 하여 기자 전설을 부 인하고 있다프 한편 기자는 우리 나라에는 오지 않았고, 〈箕子〉 는 우 리 나라의 고유한 왕호라는 견해롤 따르고 있다. 그리고 기자로 왕호 가 바뀐 것은 고조선 후기이며 그 때에 고조선은 사회적으로 크게 발 전하였다고 보았다.3;) 단군신화에 나오는 세력집단을 고고학적인 자료와 연관시키며 일정 한 종족집단으로 보는 견해는 김정배에 의하여 제시되었다. 그는 고조 선을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나누어 역사적 의의를 밝히고 있다. 그는 단군신화가 신석기시대인의 사상이며 곰을 숭배하던 고아 시아족의 일파가 남긴 이야기라 하였다. 결국 단군조선은 신석기시대 에 고아시아족의 일 종족이 남긴 역사라는 것이다. 그리고 기자조선의 주민은 고아시아족이 아니라 알타이계의 무문토기인들이었다고 하였 다. 그들은 중국 사서에 자주 나오는 예맥이라고도 하였다. 기자조선의 전 기간에 걸쳐 지석묘와 석관묘가 축조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 시기 에 청동기가 사용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는 전국시대 이후 중국문화의 영향이 조금씩 보이고 있으나 그 이전에는 중국문화와는 관계가 없다 고 하였다. 기자조선에 대하여도 고고학적으로 기자의 동래에 대한 증
35) 李基白, 『古朝鮮의 國家形成』, 《韓國史 市民講座》 2( 特輯 : 古朝鮮의 諸問題), 1988, pp. 17~18. 36) 李基白, 앞의 책, l'J' l5, pp. 24 ~'2:7.
거가 전혀 없다고 하며 그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기자 조선을 한씨조선이라고 하는 주장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편 위만조 선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철기문화를 수용하였으며 그 지배 자와 주민은 거석문화와 청동기문화를 계승한 예맥인이 틀림없다고 하 였다.:fl ) 위에 언급한 김정배의 견해는 고조선을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 만조선의 셋으로 나누어 각기 고고학적 자료와 연관시키고 그 종족이 어떠하였는지 다루고 있다 . 이와 같은 견해에 대한 비판이 있다 . 38 ) 천관우는 단군신화에 선주 어렵민인 고아시아인과 후래 농경민인 북 몽골인의 두 계통의 동화 내지 교체에 의하여 한민족의 원형인 한, 예, 맥이 형성되는 과정과 농경민의 등장에 의하여 농경문화가 본격적으로 반영되었다고 하였다 . 단군조선은 곰과 범을 상징으로 하던 두 개의 족단이 선주하던 곳에 있었으며 영역국가 이전의 문화권에 속해 있었 다고 하였댜 그 곳에 천제의 아들임을 자임하는 어떤 지배자와 그의 족단이 동방으로 이주하여 선주민을 동화 또는 정복하였다고 보았다. 단군은 처음에는 고조선 지역의 어느 대표적인 족단의 지배자였는데 뒤에는 그 족단의 조상신이 되었고, 그 후의 역사 전개에 따라 단군은 점차 韓 • 滿 방면 주민이 공통으로 섬기는 조상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기자는 은인이더라도 중국인을 형성하는 일부요, 동래 후 한국 인을 형성하는 요소 중 일부라고 보고 있다. 기자족은 동이이며 기자 는 동천하여 난하 하류 고죽국 근처에 정착하였고, 언제인가 대동강 하류에 도달하였다고 하였다. 『위략 』 에 나오는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 라 하는 군장은 한국사 최초의 영역국가를 확보한 인물이라고 하였다. 여하튼 단군신화에 나오는 단군은 곰과 범(선주의 어렵민)과 천제의 아들(후래의 농경민) 사이의 동화 내지 교체로 오늘날 한민족의 직계
37) 金貞培, r 古朝 鮮 의 住民構成과 文化的 複合』, 『韓國民族文化의 起源 』 , 1973, pp. 160~209. 38) 李 基 白, 앞의 책, 1988, pp. 9~10.
조상이 형성되는 과정, 우리 역사에서 농경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 는 단계를 반영한 것이라고 하였다 . 39 ) 김두진은 단군고기를 성읍국가인 고조선의 개국신화로 보고 있다. 그는 단군신화(단군고기)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환인이 그 아들인 환 웅을 인간세상에 내려보내고 단군이 탄생하기까지를 한 부분으로 보 고, 단군이 평양성에 도읍하고 후에 산신이 되기까지를 다른 부분으로 보고 있다. 그 중 전자는 고조선 개국 당시 성읍국가의 지배씨족이 가 졌던 관념 체계뿐 아니라 그 이전 신석기 시대의 문화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고, 후자는 고조선 사회에 대한 기록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환옹족이 고조선의 지배민족이었으며 그들은 청동기문화를 가졌고, 선 주 토착씨족인 곰이나 범을 숭상하는 씨족은 신석기시대의 즐문토기 문화를 가졌다고 하였다. 청동기를 사용할 줄 아는 지배집단인 환웅씨 족은 농경도 보급하였다고 하였다 .40) 김두진은 단군신화에 대한 몇 가지 특성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단군신화는 환인-환웅으로 이어지는 천신족의 계보를 분명히 하 여 천손강림에 의한 선민사상이 강하였다고 하고, 웅녀를 예로 하는 지신족 관념이 막연하나마 성립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고조선 왕실은 천신족과 지신족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祖先의 계보를 가졌다고 하였 다. 그리고 천신족과 지신족이 결합된 단군의 가계가 신성시되었고, 옹 녀신앙을 가진 씨족이 환웅족과 결합하여 단군신화의 계보 속에 흡수 됨으로써 호신앙을 가진 씨족보다 우수한 지신족 관념을 형성시켰다고 하였다. 그리고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왕실이 정치적 권능을 강화하면 서 주위의 다른 읍락이나 성읍국가를 결속시키는 과정에 형성되었다고 하였다• 성읍국가로 출발한 고조선은 연맹왕국을 형성하였는데 기자와 위만으로 연맹왕권이 바뀌었다고 하였다 .41) 이에 단군신화는 기자 이전
39) 千寬宇, r 古朝鮮의 몇가지 問題』, 『韓國上古史의 諸問題』, 1987, pp. 121~138. 40) 金杜珍, r 檀君古記의 理解의 方向J, 李基白 編, 앞의 책, 1990, pp, 128~142.
의 고조선 연맹왕실이 성립시킨 개국설화라고 하였다. 고조선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에 나오는 세력집단에 대한 지금까지 의 연구를 앞에 간단히 소개하였다. 이룰 통하여 우리는 몇 가지 사실 을 주목할 수 있다. 첫째,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과 범으로 상징되는 집 단과 환인 - 환웅으로 이어지는 집단을 나누어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중 곰과 범은 토템으로 이 같은 토테미즘을 가진 집단을 인정하고 있는 견해가 보인다. 이들 집단을 종족이라고도 하고 그에 속한 옹녀 를 지신족이라고도 하며 옹녀 -단 군으로 이어지는 부족을 설정하기도 한다 . 그리고 범과 곰을 상징으로 하던 집단을 선주족으로서 어렵민으 로 보기도 하며 이들을 범과 곰을 숭상하던 씨족이라고도 한다. 그리 고 이들 집단이 존재하던 시대는 신석기시대였으며 고아시아족에 의한 단군조선이 있었다고도 한다. 그에 비하여 환인 -환 웅으로 이어지는 집단은 부족으로 보기도 하고, 천신족이라고도 하며, 청동기 시대의 지 배씨족이라고도 하여 왔다. 다음은 단군과 기자에 대한 견해를 들 수 있다. 그 중에는 기자조선 의 존재를 부인하는 견해가 있다. 그에 비하여 단군조선은 성읍국가인 고조선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단군조선을 신석기시대의 고아시아족이 세운 나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편 기자조선은 인정하지 않지만 이 롤 청동기시대의 알타이족이 세운 나라로 보거나, 기자를 중국의 은인 으로 보더라도 중국인을 구성하는 일부이고 동래 후에는 한민족을 구 성하는 일부라고도 보고 있다. 또는 기자와 위만을 연맹왕실을 형성한 세력이라고 보기도 한다. 필자는 단군신화에 나오고 있는 세력집단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보 고자 한다 . 그것은 환인과 환웅으로 이어지는 집단, 곰과 범으로 상징 되는 집단 그리고 단군으로 상징되는 집단들이다. 그 중 먼저 환인과 환웅으로 상징되는 집단이 어떠한 존재들이었는지 생각하여 보기로 한
41) 金杜珍, 『檀君神話의 文化史的 接近」, 《韓國史學》 11, 1990, pp. 4~'n .
다. 상제 또는 제석이라고 하는 환인은 불교사상에 의하여 윤색된 것 이라고 한다 .42) 여기서 환인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를 살피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에 비하여 하늘에 머물고 있는 환인이 그의 아들이라고 하는 환웅을 태백산으로 내려보낸 의미가 무엇인가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환인과 환웅으로 이어지는 집단을 어떠한 존재로 보아야 할지 망설 여진다. 그런데 한국의 여러 초기국가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건국신화 룰 가지고 있다. 이에 그들 다른 여러 나라의 건국신화와 단군신화를 비교 • 검토하여 보기로 한다. 그러한 건국신화를 보면 부여를 세웠다 고 하는 동명은 고(색, 탁)리국으로부터 이주하여 나라를 세웠다고 하 고, 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부여로부터 이주하여 나라를 세웠고, 백제의 시조 온조는 고구려로부터 이주하여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신라의 건국세력인 혁거세집단과 탈해집단은 어 디에서인가 이주하여 온 집단이라고 여겨진다. 김알지집단 역시 이주 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가야를 세운 수로왕도 이주민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한국의 초기국가를 세운 세력집단 들은 모두 이주민이었던 셈이 된다. 여기서 환인과 환웅으로 이어지는 집단 역시 이주민집단과 일정한 관계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 중 단군신화에 나오고 있는 것과 같이 환인은 원래의 거주지라고 여겨지는 곳에 계속 머문 집단이고 환옹이라고 상징되는 집단이 이주 한 것이 아닐까 한다. 환인이 머문 하늘은 실제의 하늘이기보다 환웅 집단이 원래 거주하던 곳이라 헤아려진다. 환웅은 원래 거주하던 곳에 있을 때 인간을 교화하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사료 가나다A 3). 이 는 대체로 환응집단의 이주 이유 또는 이주 동기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이주 동기는 수식이 된 것으로 실제 환옹집단의 이주 동기는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부여로부터
42) 리지린, 앞의 책, 1963, p. 102.
이주한 주몽집단과 고구려로부터 이주한 온조집단의 이주 동기는 정치 적 세력다툼에서 밀려난 때문이기에 환웅집단의 이주도 기록대로 받아 들일 수는 없다 . 따라서 환응집단도 구체적인 내용을 판단하기는 간단 치 않으나 일정한 정치적 이유로 인하여 이주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어디로부터인가 이주를 하여 온 환웅집단은 일정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바와 같이 환웅은 환인으로부터 천부인 3 개를 받았고 무리 3 천을 거느리고 이주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이는 그대로 인정하기 어렵기는 하지만 천부인을 보다 앞선 문명의 산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천부인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는 알 수 없다. 국가를 형성할 무렵 등장한 청동기들을 뜻할 수도 있 다. 그리고 이러한 물건들은 단순한 도구이기보다 정치적, 종교적 의미 를 지닌 것들로 보여진다 .43) 그리고 3 천의 무리는 그 수를 그대로 인정 할 수는 없으나 이주민들이 이주할 때에 일정한 무리를 지었다는 사실 올 상기할 필요가 있다. 주몽이 부여를 떠날 때와, 온조가 고구려를 떠 날 때에도 일정한 무리를 이룬 바 있다. 그 밖에 신라, 가야의 건국신 화 안에도 국가를 건국한 세력들이 이주할 때 무리를 이루었던 사실을 볼 수 있다 .441 환웅집단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를 열었다고 한다(사 료 가 A7, 8). 환웅이 자리잡았던 지역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 나 환응집단은 천부인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문물과 원래의 거주지에 있던 정치조직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던 세력이었다. 그것이 풍백 • 우사 • 운사를 거느리고 인간의 360 가지 일을 주관하였다는 기록으로 나타나 있다. 이주민이었던 환웅집단이 주관하였다는 농경 • 수명 • 질
43) 鄭璟喜, 『韓國古代社會 文化硏究』, 1990, pp. 45~50. 44) 『三國史記』 13, 高句麗本紀 1, 始祖東明聖王조와 『三國史記』 23, 百濟本紀 l 의 百濟始祖溫祚王조 및 『三國遺事』 2, 紀異 2, 鷲洛國記 참조.
병 • 형벌 • 선악과 360 여 가지의 인간의 일들은 고조선지역의 그것보다 선진한 문명의 산물이라고 보면 어떨까 한다. 이러한 선진문명의 사회 통치체제를 이해하고 있던 이주민집단은 고조선지역에서 새로운 사회, 정치조직을 발전시킬 능력이 있던 집단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면서도 환웅집단은 이주하여 곧 고조선이라는 국가를 형성하지 는 못하였다. 그들 집단은 신시라고 하는 일정한 지역에 머물며 정치 적 기반을 다져 나갔다고 짐작이 간다. 이는 사로 6 촌 지역으로 이주 하였던 조선의 유민의 예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언제인가는 알 수 없 지만 고조선에 정치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주민들 일부가 이주를 하게 되었고 그 중 일부가 다시 사로 6 촌까지 왔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이 주를 하자 곧 국가를 세운 것이 아니라 사로 6 촌에 나뉘어 살며 일정 기간을 기다려야 하였다. 그것은 사로 6 촌에 이주한 조선계의 주민들 이 선진 정치조직을 이해하고 있었고 또 선진문물을 제작 • 사용할 능 력이 있었다고 보이지만, 그러한 실력만으로 국가를 당장 세울 수는 없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사정은 환응집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헤아려진다. 실제로 훨씬 후의 일이지만 위만의 정치 적 권력 장악 과정도 유사한 면이 있다.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하는 환응집단은 원래의 고조선 계통의 . 주민 일 수는 없다. 그리고 단군신화에 이들은 신시를 열었다고 나와 있는 데, 이는 이주민의 새로운 거처를 신화화하는 과정에 나타난 표현이 아닌가 한다. 이주민인 환웅집단은 고조선을 건국한 주체는 아니었다 고 여겨진다• 여기서 환응집단이 이주할 무렵 조선지역에 있던 원래의 주민들은 어떤 집단이었나 궁금하여진다. 이와 관련하여 단군신화에 나오고 있는 곰과 범을 주목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이들 곰과 범으로 상징되는 집단의 실체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어 왔다. 그 중 곰 과 범은 일정 집단의 토템으로 보아 크게 두 개의 집단이 있었던 것으 로 보아 왔다. 물론 곰올 토템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있기는 하지
만 45) 그렇더라도 곰과 범으로 상징되는 집단이 있었다고 보아 무리가 없다고 여겨진다. 이후 이룰 곰집단, 범집단이라 부르기로 한다 . 이같이 곰과 범으로 상징되는 집단은 단군신화에 나오고 있는 고조 선 건국과 관련된 두번째 집단이 된다. 여기서 곰과 범을 숭상하는 것 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견해를 잠시 보기로 한다. 김정배는 단군조선 이 신석기시대에 존재한 사회이며 그 주민은 곰을 숭배한 고아시아족 의 일파라고 하였다 . 46 ) 그런데 최남선은 이미 이를 곰 토템으로 주장하 고 이를 토테미즘이라고 하였다 .47 ) 그리고 김정학도 곰과 법에 대한 숭 배는 토테미즘 신앙이라 하고 고대 동이족에 있어 곰과 범의 토템 숭 배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 필자는 곰과 범이 과연 토템이었는지 확 인할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곰과 범으로 상징되는 집단이 고조선의 국가형성 이전에 존재하였던 사실은 인정한다 . 곰과 범에 대한 숭상은 단군신화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삼국 지』 위서 동이전 예전에는 예에서 범을 제사하고 신으로 삼았다고 나 와 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김재원의 견해롤 주목할 수 있다. 그는 중국문화권에서는 곰과 범 모두가 수조신앙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였 다. 그리고 중국에는 범의 입에서 첫사람-씨나 족의 시조-이 탄생되 었다는 것이 오래 전부터 신화로 전해진다고 하여 『삼국유사』의 단군 신화도 옹녀에게서가 아니라 범에게서 단군이 나왔다고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한편 곰 숭배는 시베리아의 각 민족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고 하여, 중국의 곰 수조신화도 북방계의 신화라고 하였다 .48) 곰과 범으로 상징되는 집단은 역사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 을까. 환웅으로 이야기되는 집단이 이주민이라면 곰과 범으로 이야기
45) 金烈圭, 『韓 國의 神話 』 , 1<57 6 , pp. 18~20. 46) 金貞培, 앞의 책, 1<57 3 , p. 178. 47) 崔南善, 앞의 논문, 李基白 編 앞의 책, 1990, p. 14. 48) 金載元, 앞의 책, 1947, p. 46.
되는 집단은 그들보다 먼저 고조선지역에 살던 집단이다. 이에 그들을 지신족 또는 선주족으로 보아 온 바 있다. 이러한 예는 신라에서도 찾 아진다. 신라의 모체가 된 사로 6 촌 지역에 조선의 유민들이 이주할 무렵 그 지역에는 지석묘를 축조하던 세력집단이 있었다 .49) 이에 환웅 집단을 조선유민에 비교한다면 지석묘를 축조하던 주인공들은 대체로 곰과 범으로 상징되는 집단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곰과 범으로 이야기되는 집단이 선주족이라 하더라도 곰과 범이 주는 상징에 대한 역사적 의미룰 알아볼 필요를 느낀다. 그것은 商의 기가 흰색이었다고 『예기』에서 말하고 있으나, 상나라의 나무로 된 의기나 무기에 범의 도안이 많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범이 왕실 의 기에 장식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f,O) 이 는 범의 입에서 사람이 태어난다고 하는 은대의 보편적인 사상과 더불 어 주목된다 .5” 범을 단순히 고조선 지역의 선주족이라고 할 수도 있 다. 그러나 범을 은족과 연관이 있다고 하는 위의 견해를 보면 범으로 상징하는 집단을 가볍게 고조선지역의 선주족이라고만 하기에도 문제 가 있다.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이들 범집단은 은나라와 관계가 있던 집단은 아닐까 하는 짐작이 들기도 한다. 일단 범집단이 온족과 관련이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가능하다면 이들 집단이 언제 고조선지역에 이주하여 곰집단과 어울려 살게 되었 는지 궁금하여진다. 분명한 것을 알기는 어려우나 은나라가 망하고 주 가 들어서며 은나라의 유민들 중에는 중국의 동북지역 대롱하 유역으 로 이주한 집단도 있었다 .52) 이들 중에 단군신화에 나오고 있는 범집단 도 있지는 않았을까. 이 경우 이들 이주민 범집단은 선주 곰집단과 일
49) 李鍾旭, 『新羅國家形成史硏究』, 1982, pp. 12~20. 50) Kwa ng- chi h Chang, Sir ing Civ i l iza t ion , 1980, p. 207. 51) 金載元, 앞의 책, 1947, p. 67. 52) 위의 책, pp. 29~53.
정 기간 동안 공존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의 국 가형성 이전에 사로 6 촌의 원래 주민과 조선유민들이 일정 기간 동안 함께 살았던 예로 짐작할 수 있다 . 그러면 그러한 범집단은 환웅집단과는 어떠한 관계에 있었을까. 어 쩌면 그들은 모두 은이 망한 후 이주한 집단일 수 있다. 은나라가 망 한 후 주의 통치를 피하여 망명하는 집단이 일시에 이주하였다고는 생 각되지 않는다. 그들 은의 유민들은 파상적으로 이주하여 고조선지역 으로 왔다고 여겨진다. 그 같은 이주민집단들은 규모를 달리하였고 세 력 규모에도 차이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들 중 환응집단의 세력 규 모가 컸다고 헤아려진다. 이러한 추측이 타당하다면 고조선지역의 토 착세력인 곰집단이 은나라로부터 온 이주민집단 중 환응집단과 결탁을 하여 다른 이주집단들을 물리치고 고조선의 건국세력인 단군세력을 형 성하였다고 헤아려진다. 이제 단군으로 상징되는 집단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기로 한다. 단군 이 국가를 세운 시기가 언제인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단군신화에 나오는 범집단의 존재를 은나라가 망한 후 이주한 은족이라고 본다면 고조선의 국가형성은 기원전 12 세기 또는 그 이후가 되어야 한다. 그 때 온나라 유민들과 원래부터 고조선지역에 살고 있던 곰집단이 어떠 한 형태로든 관계를 맺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고조선의 표지적 유물 로 이야기되는 비파형동검이나 미송리형토기 둥은 은나라의 그것과 분 명히 차이가 나고 있다. 따라서 고조선을 세운 집단이 단군으로 상징 되는 집단이고 그들이 비파형동겁 둥의 유물을 사용하였다면 그들 집 단은 은족과는 구별이 된다. 여기서 범집단 또는 환웅집단으로 이야기 되는 은족과 곰집단과 단군집단으로 이야기되는 집단을 나누어 볼 필 요가 있다. 그러면 위에 언급한 두 집단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었을까. 고 조선을 세운 집단이 은족 자체는 아니라고 보아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은족의 이주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 경우 고조선지역에 파상적으로 이 주해 온 은족들로부터 고조선의 국가형성세력들이 자극을 받았고 또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진다 . 그러한 자극과 영향 중에는 온나라 의 선진문명과 문물을 받은 것도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 중에는 청동 기의 제조기술, 농업기술, 국가통치 등에 대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 여겨진다. 그러면서도 비파형동검이 고조선의 독특한 청동기였다는 사실을 보면 은나라의 이주민들로부터 청동기 제조기술은 받아들였지 만 그 형태 둥은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정 은 정치제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헤아려진다. 이에 고조선의 주민들은 독자적인 청동기를 제작 사용하였고, 그들 나름대로 독자적 인 정치조직을 발전시켰다고 생각된다. 이는 당시 중국계 이주민은 고 조선지역에서 원래의 주민들을 지배하여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 였고 또 그럴 만한 능력도 없었음을 말하여 준다. 이와 같이 생각하고 보면 『삼국유사』에 나오는 바와 같이 곰과 범이 환옹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는 내용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 다. 죽 환웅이라는 온족의 이주민이 고조선지역에 오기에 앞서 범으로 표현되는 온족이 어느 정도 먼저 이주하여 원래부터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곰으로 표현되고 있는 집단과 일정한 경쟁관계에 있었다고 생각 된다. 그러한 경쟁관계에서 결국 곰집단이 승리를 한 것이다. 그런데 곰집단도 일부 殷계 이주민과의 관계 속에서 자극과 도움을 받아 옹녀 로 표현된 집단이 되었고 다시 고조선의 국가형성세력인 단군세력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한편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만 주무왕이 기자룰 조선에 봉하였다 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B11) . 그런데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기록 은 『상서』 둥 중국 기록에 나오고 있다. 따라서 기자에 대한 기록은 중국측 기록을 옮긴 것이 분명하다. 이에 기자에 대한 기록은 원래 단 군신화와는 관계가 없었다고 믿어진다 . 그리고 기자의 존재에 대한 지
금까지의 연구 중에는 한국사에서 기자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5.'ll 기자의 존재는 인정하더라도 단지 은족의 이주민으로 고조선의 건국과는 관계 가 없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 우 또는 기자집단을 고조선의 주민을 구성 하는 한 요소로 보는 견해도 있다 . 55 1 이 같은 견해들은 서로 크게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서는 모두가 역사적 사실의 부분들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은 과 주가 교체할 때 주의 지배를 피하여 일부 은족들이 중국의 동북지 역으로 이주하게 되었음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그들 은족 중 어떤 집 단은 고조선의 영역 밖에 있으며 고조선의 국가형성에는 아무런 관계 가 없던 집단도 있었다. 그에 비하여 고조선지역까지 이주한 은족도 있었다고 여겨진다 . 이들은 원래 고조선의 주민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 고 고조선 주민을 자극하고 나아가 경쟁관계에 돌입하였다고 헤아려진 다. 그러한 사정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곰과 범의 경쟁에서 곰이 승리하여 사람이 되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물론 곰집단은 환웅집 단의 자극과 영향을 받았고 어쩌면 서로 결탁을 하여 고조선을 건국하 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더라도 은나라로부터의 이주민들은 고조선의 국가형성의 중심세력이 되지는 못하였다고 여겨진다. 이제 단군신화에 나오는 고조선의 건국시기에 대하여 생각하기로 한 다. 먼저 신화 속의 시간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 단군신화에 나오는 단 군의 통치 기간은 1 천 5 백 년(가 Bl0), 1 천 38 년(다, 라B 10), 1 천 48 년 (나 B10) 등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단군의 생존 기간은 1 천 9 백 8 년으 로 되어 있다(가 B15) . 이러한 단군의 통치 기간과 생존 기간은 신화 속의 시간을 뜻한다. 이 같은 신화의 시간은 한 개인의 통치 연대일 수도 없고 생존 기간일 수도 없다 . 따라서 신화 속의 시간은 여러 명
53) 李丙 ,ri , 앞의 책, 1975, pp. 47~5. 5 및 李基白, 앞의 책, 1975, pp. 24~ 없. 54) 金 貞 培, 앞의 책, 1973, pp. 160~209. 55) 千寬宇, 앞의 논문, 19 얽, pp. 121 ~138.
의 통치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그 모든 통치자를 단군 한 사람으 로 묶어 처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단군신화에서도 시간적인 변동과 역사적인 변천을 인정하지 않고 매우 단순하게 처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단군의 통치 기간과 생존 연대로 표시되는 기간 · 동안에 실제로 는 많은 수의 통치자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대를 이어 살았던 것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단군신화에는 단군이 고조선을 세우고 통치자가 된 시기를 중국의 요임금과 연관시키고 있다. 이 같은 국가형성 연대도 신화 속의 시간 이기에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 단군집단이 고조선을 형성한 시기는 중국의 요임금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주장은 단군신화 의에는 없는 셈이다. 그런데 신화 속의 시간은 그 기원을 끌어올리는 특성이 있 다 .56) 따라서 고조선의 국가형성 시기도 단군신화에 따르기보다 고고학 적인 자료와 고조선지역의 역사발전의 대세를 바탕으로 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단군과 기자의 시간적인 관계도 『삼국유사』에 나 오는 대로 인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또한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과 범이 살던 시기도 신화 속의 시간으로 그 역사적인 의의를 밝힐 필요 가있다. 이제 단군신화에 나오는 신화 속의 시간들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에 대하여 헤아려 보기로 한다. 이는 신화 속의 시간을 가지고 역사적인 시간, 실제의 시간을 찾아 내는 작업이 된다. 여기에서 고조선의 국가 형성 시기에 대하여 주목하게 된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건국연대는 신 화적인 시간으로 변경되었다고 믿어진다. 그것은 고조선지역의 고고학 적인 자료를 보면 기원전 24 세기경에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증거를 찾 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하여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의 대세를 주목하게 된다. 죽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둥 한국의 초기국가 룰 형성하였던 정치세력들은 모두가 이주민들이었음을 살펴본 바 있
56) 李基白, 앞의 책, 1975, p. 20.
댜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고조선의 국가형성도 이주민의 존재 를 빼놓 고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여겨진다. 그러면 고조선의 국가형성은 언제 되었을까. 이에 대한 이해를 할 분명한 자료는 없다. 더욱이 고조선의 국가형성 지역과 중심지에 대한 이해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재 국가형성 시기에 대한 명확 한 답은 얻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고조선의 국가형성과 관련된 세력으로 범집단과 환웅집단과 같은 은말, 주초의 은족 이주민집단을 생각하여 본 바 있다. 은나라가 망한 후 은족이 중국 동북지역인 요서 • 요동 지역으로 이주하였던 사실은 의심할 바 없다. 이러한 이주민들 중 범집단과 환웅집단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고조선의 국가형 성은 은나라가 망한 이후 언제라고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고조선의 국가형성 시기에 대한 여러 연구들이 있어 왔다. 그 중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서 각지에 세워진 성읍국가들 중 하나가 초기의 고조선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의 청동기시대 는 기껏 올려 보아도 대략 기원전 1 천년경으로 추정되기에 고조선의 건국도 그 시기쯤이었다고 한다. iii ) 이와 같은 고조선의 국가형성 시기 에 대한 견해는 국가형성을 청동기의 사용이라는 사회적 변화에 초점 을 맞춘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은 그와 같은 요 안도 작용하였으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주민의 존재라고 보아 왔다. 따라서 고조선의 국가형성 요인도 은말 주초의 은족 이주민에 의한 자 극과 영향 및 그 충격이었다고 본다. 이에 그와 같은 이주민의 존재에 관심을 두고 고조선의 국가형성 시기에 대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다. 먼저 중국 사서에 나오는 기자조선과 단군조선은 어떠한 관계를 가 졌는지 보기로 한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고조선의 국가형성 연대는 믿 울 수 없다고 보아 왔다 .58 ) 따라서 단군조선의 건국연대는 앞에서 언급
57) 李基 白, 앞의 논문 , 1988, pp. 7~12. 58) 李 基 白, 앞의 책, 1CJ7 5 , p. 20.
한 대로 은나라가 망한 후가 되는데 이는 기자가 조선으로 왔고 주무 왕이 그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중국측 기록과 비교하여 연대가 거의 일 치하고 있는 셈이 된다. 중국측 기록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고 하 고 있으나 그가 온 지역은 대롱하 유역이라고 여겨진다 . 이는 대룽하 유역에서 箕族을 비롯한 주초 은족계의 청동기가 다수 발견되기 때문 이다 .59) 그런데 이들 은족은 은말 주초에 대롱하 유역까지 진출하였다 고는 하지만 동북아시아의 문화나 역사의 전개와는 거의 무관할 정도 라고 한다 .60) 필자 역시 은족 자체가 고조선을 세우지는 않았다고 본 다. 그러나 은나라가 망하고 중국의 동북지역으로 이주한 은족은 그들 나름대로 정치세력을 형성하기도 하였고 또 고조선의 국가형성에 적지 않은 자극과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 왔다. 이와 같은 생각이 타당하다면 고조선의 국가형성 시기는 기원전 12 세기 은나라가 망한 후 그렇게 멀지 않은 시기였다고 여겨진다. 그러 면 단군신화에는 어떠한 이유로 단군의 국가형성 시기를 요임금 시대 로 보고 그 이후 은나라가 망한 후에 기자가 조선에 봉하여졌다고 나 오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단군신화가 역사가 아닌 신화라는 사실을 상기하여야 한다• 이 같은 신화에서는 연대가 종종 실제보다 위로 치 켜올려진다는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61) 따라서 단군과 기자의 관계는 은말 주초로 그 시기가 거의 일치하고 있다. 고조선은 은족의 자극과 영향을 받아 국가형성을 하였다고 믿어지기에 단군이 기자보다 어쩌면 다소 늦을 수도 있다. 여기서 단군신화에 나오는 단군과 기자는 실제 로는 시간상 병렬적으로 존재하였는데 고조선의 국가형성이라는 역사 적 사실을 신화화하며 단군을 요임금대로 올렸다고 짐작이 간다. 단군신화의 시간은 매우 단순화되어 있다 . 단군의 통치 기간과 수명
59) 李亨求, 앞의 논문, 1991, pp. 13~19. 60) 李成珪, 앞의 논문, 1991, p, 142. 61) 李基白, 앞의 책, 1975, p, 20.
울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여러 명의 통치자가 있었을 긴 기간을 단 군 한 사람이 통치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시간의 구획을 단 순화한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 속에서는 정치적 발전과정과 그 단계를 이해할 수 없다. 또한 단군신화의 시간은 소급되어 있다. 단 군의 국가형성 시기는 중국의 은말 주초 어느 때라고 짐작하여 보았 다 . 그런데 단군신화에는 이것을 요임금대로 소급하고 있다. 이같이 고 조선의 국가형성 시기를 소급한 이유는 단군신화가 민족의 신화로 받 아들여지며 변경된 때문이라 여겨진다. 다음은 단군신화를 통하여 고조선의 건국 지역에 대한 문제를 알아 보기로 한다. 단군신화에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환웅이 태백산 꼭대기 의 신단수 아래에 자리잡고 신시를 열었다고 한다. 신시는 신화에 나 오는 일종의 성역 또는 신성지역을 의미한다. 그리고 단군이 조선을 세우고 도읍으로 정하였다는 평양은 세속적인 공간을 의미한다. 그러면 실제의 고조선 건국 장소와 이주민이라고 여겨지는 환웅이 정착한 장소는 어디였으며 환옹에게 사람이 되도록 빌었다고 하는 곰 과 범이 살던 지역은 어디였을까. 『삼국유사』에는 환웅이 머물렀다고 하는 신시는 묘향산이라고 주기하였고 단군이 도읍한 평양은 고려시대 의 서경이라고 주기하고 있다. 그러한 위치 비정은 적어도 고려 시대 에 이루어진 것으로 그대로 인정하기 어렵다. 여기서 은말 주초의 은 족 이주민들 중 일부가 대릉하 일대까지 진출하여 머물렀다는 견해를 주목하게 된다 .62) 은족 이주민의 일파라고 생각되는 환옹이 머물렀다는 신시는 고조선지역 안에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신시는 이주민들의 거주지로 고조선의 원주민들이 거주하던 지역과는 구별되었다고 여겨 진다. 그 때문에 일종의 성역이라 볼 수 있는 신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짐작이 간다. 이에 신시라고 알려진 이주민의 거처는 고조선 지역의 일정 장소이거나 그 밖의 지역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
62) 李成珪 앞의 논문, 1991, p. 141.
치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곰과 범이 매양 환웅에게 나아가 사람이 되도록 하여 달라고 환웅에게 빌 수 있었다고 여겨진 다. 곰과 범이 환웅에게 간다는 사실은 환웅으로 상징되는 집단과 곰 과 범으로 상징되는 집단의 접촉을 신화화하여 나타낸 기록으로 실제 는 양 집단의 접촉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와 같이 생 각하고 보면 두 세력의 거주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은말 이후 은족이 이주하여 머문 지역은 하북에서 요서지역에 이른 다고 한다 .63) 따라서 신시라고 알려진 장소는 어쩌면 요서지역에 있었 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곰과 범으로 상징되는 집단이 머물던 장소 는 어디였을까 궁금하여진다. 곰집단과 범집단은 단군이 고조선을 건 국하기 이전에 고조선 지역에 거주하던 집단이라고 보아 무리가 없다. 따라서 이들의 거주지는 요하의 동쪽 요동지역이었다고 헤아려진다. 그런데 범집단은 곰집단과 같이 고조선지역의 토착세력이라고 이해되 어 왔지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범을 상징으로 하는 은족의 일파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만일 범집단이 은족이었다면 이들은 요동지역까지 이주하여 그 지역의 토착세력이었던 곰집단과 함께 머물렀던 것이 된 다. 그런데 이들 범집단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기에 고조선의 건 국세력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였다고 짐작이 간다. 여하튼 온 말 주초의 은족 이주민들이 파상적으로 이주하는 과정에 범집단으로 이야기되는 은족이 고조선지역까지 일부 진출하였을 가능성은 생각할 수있다. 초기 고조선의 국가형성 장소는 어디였을까. 단군신화에는 고조선의 최초 도읍지로 평양을 들고 있다. 그 후 단군은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 을 옮겼고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한 후에는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후에 아사달로 환도하여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신화에는 고 조선의 도읍이 평양 -아 사달 -장 당경 -아 사달로 옮긴 것으로 나오고
63) 위 의 논문, p. 135.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신화 속의 도읍 이동은 역사적 사실 을 반영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실제로 요동지역의 한 소국으로 성장하 기 시작한 고조선은 일정 기간 동안 요동지역에 도읍을 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기원전 3 세기 초 연장 진개의 침입을 받은 고조 선은 2 천여 리의 영토를 빼앗겼다고 한다 .64) 이에 고조선의 도읍도 오 늘날의 평양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헤아려진다.6:; ) 따라서 신화 속의 도읍 이동은 역사적인 사실의 반영이라 볼 수 있다. 다음은 고조선의 정치체제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단군신화에는 고조선의 정치체제를 이해할 자료가 거의 없다. 단지 고조선의 건국자 라고 하는 단군, 단군왕검이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에 대 하여 이병도는 단군이 환웅천왕의 아들인 동시에 그를 봉사하는 후계 천왕인 천군으로서 제사장의 의미를 더 많이 갖고 있고, 왕검은 권위 와 권력을 표시하는 존칭 • 존호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단군에는 제주(무군)적 의의가 많고 왕검이라는 칭호에는 정치적 군장이라는 의 의가 더 많다고 하였다. 그는 나아가 제정일치시대에는 단군만이 있었 고, 제정이 분리된 시기에는 제사단체의 장은 단군이 맡았고 정치단체 의 장은 왕검이 맡았는데 각기 맡은 지역이 달랐다고 하였다 .66) 그런데 국가 단계에 이르면 제정이 분리된다고 한다. 따라서 고조선 이 비록 넓지 않은 지역을 차지한 성읍국가 또는 소국을 형성하였다고 하더라도 제정이 분리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에 초기 고조선의 정 치체제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다루는 내용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그 중 하나의 문제는 지방통치조직에 대한 것이다. 단군으로 대표되는 집
64) 徐榮洙는 고조선이, 연에게 패하여 연이 동호로부터 획득한 땅 1 천 리를 제외한, 천산에 이르는 서쪽 땅 1 천 리를 상실하였다고 한다(『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韓國史 市民講座》 2, 1988, p. 41 ). 65) 盧泰敦 , r 古朝鮮史 硏究의 現況과 課題』, 『韓國上古史』, 1989, p. 190. 66) 李丙 薰 , 『韓國史 -古 代篇 -』, 1959, p. 78.
단이 고조선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평양이라고 하는 요동의 한 지역에 성을 축조하고 그 안에서 거주하였다고 여겨진다. 지배세력들이 거주하던 지역은 고조선의 정치중심구역으로 볼 수 있 다. 그리고 정치중심구역 밖에는 다시 몇 개의 단위 지방통치구획으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었나 한다. 이에 성읍국가라고 할 수 있는 초기 고 조선은 전체를 다스리는 정치조직과 단위 지방통치구역을 다스리는 조 직으로 정치조직의 단계가 나뉘었다고 헤아려진다. 그러한 사정은 한 국의 다른 초기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m) 다음은 고조선의 정치적 성장에 따른 정치발전단계에 대하여 알아보 기로 한다. 단군신화에는 정치적 발전단계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는 환인과 환웅의 시대를 생각할 수 있고, 환웅이 태백산에 신시를 열고 곰과 범이 공존하던 시대를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시대를 생각할 수 있다. 나아가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는 단 군의 뒤를 이어 기자가 다스린 시대를 설정하게 된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기자와 단군은 거의 같은 시대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본 바 있다. 이에 고조선의 국가형성 이후 정치적 성장에 대한 내용은 단군신화 안 에서 찾기 어렵다. 단군신화에는 고조선의 긴 역사와 그에 따른 정치 적 성장에 대한 내용이 생략되어 그저 단군의 통치 기간으로 되어 있 다. 이에 고조선의 정치적 성장에 대한 해명은 단군신화가 아닌 고고 학적 자료와 다른 사서의 기록을 통하여 정리할 수밖에 없다. 우리 나라에서 청동기시대가 시작되면서 국가가 건설되었고 만주와 한반도에는 100 개가 넘는 많은 국가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고조선도 그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고조선은 문헌상 가장 오래 된 성읍 국가였다고 한다. 이 같은 고조선은 주변의 여러 성옵국가들을 정복하 거나 혹은 연합하여 최초의 거대한 왕국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고조선
67) 신라의 예를 통하여 그러한 짐작을 할 수 있다(李鍾旭, 앞의 책, 1982, pp. 222 ~242).
은 한국사상 최초의 연맹 형태를 지닌 연맹왕국이었다고 한다. 하나의 성읍국가에서 발전한 고조선이 방대한 영토를 가진 연맹왕국으로 성장 한 시기는 대체로 연의 전성기인 기원전 4 세기였다고 한다 .68 ) 이러한 견해롤 통하여 고조선의 정치적 성장이 성읍국가에서 연맹왕국으로 발 전한 것을 알 수 있다 . 그런데 필자는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 단계를 정리하며 촌락 (추장)사회 -소국-소국연맹 -소국병합-중앙집권적인 왕국 단계를 설 정한 바 있다 .69 ) 그리고 그와 같은 정치발전단계는 비단 사로국의 성장 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다론 초기국가에도 적용할 수 있다 고 본다. 이에 은말 주초에 고조선 소국이 형성되었고, 그 이후 고조선 이 맹주국이 되어 이웃 소국들과 연맹관계를 맺었고 , 맹주국으로서 실 력을 쌓은 고조선은 이웃 소국들을 병합하여 나갔다고 여겨진다. 그런 데 고조선의 소국연맹 형성과 소국병합이 언제 진행되었는지는 현재 잘 알 수 없다. 그러면서도 고조선이 소국연맹을 형성한 시기는 중국과의 교역이 행 해지던 기원전 8 세기경이 아닌가 침작이 간다. 사로국도 진한의 여러 소국들과 연맹관계를 맺은 것이 중국 군현과 교역을 할 때부터였다고 생각한 바 있다. 이에 고조선도 늦어도 기원전 8 세기경까지는 소국연 맹 단계에 들어 있었다고 헤아려진다 . 그리고 그 무렵 고조선의 존재 가 중국에 알려지고 있었다는 사실 70 ) 은 고조선의 교역을 통한 연맹체 형성을 말해 주는 증거가 된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그 후 언제부터인 지는 알 수 없으나 고조선은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하여 나갔다고 여겨 진다. 그런데 고조선은 이웃 소국들을 병합한 후 어떻게 그들 소국을 통치하여 나갔는지는 앞으로 검토하여야 할 문제이다 .
68) 李基白, 앞의 논문, 1988, pp. 14~17. 69) 李鍾旭 , 『韓國 初期國家의 形成 • 發展段階J, 《韓國史硏究》 67, 1989, pp. 1~26. 70) 리지 린, 앞의 책, 1963, p. 11.
한편 은말 주초 고조선의 소국형성 이전의 상황은 어떠하였는지 궁 금하다. 분명한 자료가 없어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신석기 시대의 씨족 사회나 부족사회가 중심이 되는 사회체제 하에서는 국가를 형성할 수 없었다고 여겨진다.71) 실제로 고조선도 소국형성 이전에 이미 사로 6 촌 의 경우와 같이 추장사회 단계에 도달하여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적 어도 추장사회 단계에 접어든 사회에서는 그들의 시조에 대한 신화가 남게 된 것이 아니었나 짐작이 간다. 그것은 사로 6 촌의 시조에 대한 설화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나오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한 사정은 고조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헤아려 진다. 그 결과 추장사회 단계에 해당하던 시기의 지배세력이 곰집단과 범집단으로 단군신화에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국사상 최초로 소국을 형성하였고 나아가 소국연맹, 소국병합 단 계에 이르렀던 고조선은 그 후 한국사에 있어 중요한 역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단군이 신라, 고려, 남북옥저와 동북부여를 다스렸다는 신화의 내용을 통하여 알 수 있다(다, 라 B9). 단군이 그러 한 나라들을 실제로 다스렸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후 대에 단군신화가 전해지며 고조선의 역사적인 중요성을 나타내기 위하 여 그와 같이 내용상의 수식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고조선의 역사 적 중요성은 단군이 하백의 女와 혼인을 하여 부여의 건국자인 부루를 낳았다는 신화의 내용(나, 라 Bl4) 을 통하여도 볼 수 있다. 부여의 건 국자라고 하는 부루가 단군의 아들이라고 하는 기록을 그대로 믿기보 다 부여가 고조선과 일정한 관계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한 단군신화의 기록은 아니지만 『삼국유사』의 왕력편에 고구려를 건국 하였다고 하는 주몽이 단군의 아들이라는 기록도 주목된다 .72) 이 역시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과정에 고조선이 차지하는 역사적 의의를 나타
71) 李基白, 앞의 논문, 1988, p. 10. 72) 『三國遺事』 1, 王曆 1, 高麗 제 1 東明王조
내 주는 것으로 보여진다 . 우리 역사상 최초로 소국 , 소국연맹, 소국병 합 과정을 거쳤던 고조선은 기록에 알려지고 있는 부여, 고구려, 신라, 옥저와 같은 정치세력들의 정치적 성장과 국가형성, 발전에 중요한 영 향을 미쳤다고 믿어진다.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고조선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는 그 후 민족의 신화로 수식, 변경되기에 이르렀다. 2 백제의 건국설화로서의 온조설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조에는 백제의 건국설화가 나오고 있다.7J I 그 중 백제본기 온조왕 죽위조의 본문에 나오고 있는 건국설화 에는 溫祚가 百濟의 모체가 되었던 十濟의 건국자였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리고 같은 즉위조의 협주에는 彌鄒忽에 가서 살았다고 하는 佛 流를 중심으로 한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같은 협주에는 중국 사서인 『북사 』 와 『수서』에 나오고 있는 仇台가 백제의 건국세력으로 나오고 있댜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백제의 건국자에 대한 설화가 여러 가지 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국가형성에 대한 해명을 할 수 있는 사료를 달리 구할 수 없 는 현재 백제 건국설화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물론 현재 우리가
73) 본고 작성과 관련하여 참고한 주요 연구는 다음과 같다 . 李丙 lffe;, I/'韓國史』 , 1959, pp. 337~361. 李弘稙 『百濟建國說話에 대한 再檢討』, 『韓國古代史의 硏究 』 , 1971, pp. 311~ 332. 盧明鎬, 『百濟의 東明神話아 東明廟』, 《歷史 學 硏究》 X, 1981, pp. 39~89. 盧 重 國, 『百濟政治史硏究 』 , 1988, pp. 45~78. 金杜珍, 『百濟始祖 溫祚神 話 의 形成과 그 傳承』, 《韓國 學 論 穀 ) 13, 1990, pp. 5 ~29. 金杜珍, r 百濟 建國神話의 復元試 論 』 , 《國史館論穀》 13, 1990b, pp. fi1~ 90.
알고 있는 백제 건국설화의 내용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것이 분 명하다. 그것은 건국설화가 구전을 통하여 전해지는 과정에 여러 가지 이유로 그 내용에 변동이 생겼다고 헤아려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화 나 설화는 그 전승 과정에 발전하고 성장하며 또 축소되기도 한다. 신 화와 설화는 전승 과정에 개개인의 필요에 따라 내용과 양식의 조종이 허용되는 특성이 있다. 그렇더라도 백제 건국설화는 백제의 소국형성 과 주변 소국의 병합이라는 정치발전에 대한 내용을 전하고 있고 , 건 국세력, 건국시기, 국가의 형성장소 및 영역에 대한 해명의 열쇠를 제 공하여 주고 있다. 온조설화를 중심으로 하는 백제 건국설화는 진실되고 실제적인 사료 로 직접 이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화나 설화도 역사인 것이 분명하 다 . 단지 신화나 설화에 나오는 시간은 압축되어 있어 많은 인간과 사 건들의 존재를 무시하고 하나의 사건이나 인물로 처리하고 있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예는 단군신화를 통하여 볼 수 있다. 여기 서 역사학자의 임무는 그와 같은 신화나 설화에 나오는 시간과 사건 속에서 역사적인 시간과 사건을 찾아 내는 것이다. 지금까지 백제의 건국설화에 대한 연구를 보면 시조가 누구였나 하 는 문제를 중심으로 溫祚說, `溝 流說, 仇台說 및 都慕說 동이 있었던 것 으로 주장되고 있다 .74 ) 그러한 견해는 나아가 백제왕실이 비류계와 온 조계 세력 사이에 교체되었다는 견해로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 다 .75) 필자는 이미 백제의 건국신화는 온조설화였던 것을 밝힌 바 있 다 . 이에 본고에서는 우선 백제의 건국신화가 온조설화인 이유를 밝히 고 온조설화의 구조를 정리할 것이다. 이어 온조설화의 성격을 규명할 것이다. 나아가 온조설화에 나오는 내용을 가지고 백제의 건국세력 , 건
74) 李丙 薰 앞의 책, 1959, pp. 337~352. 75) 李基東, 『百濟王室交代 論 에 대하여』, 《百濟硏究》 12, 1981, pp. 5.5~ 60 참조 ` 盧祖國, 앞의 책 , 1988, pp. 65~78.
국시기, 건국장소와 영역 , 백제의 국가형성과 정치적 성장 및 국가형성 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1) 백제 건국선화에 대한 검토 백제건국설화는 『삼국사기 』 23, 백제본기 1, 온조왕 즉위조와 『삼국 유사 』 2, 기이 2, 남부여조에 나오고 있댜 그리고 중국사서인 I. 북사.!l 94, 열전 82, 백제조와 『수서』 81, 열전 46, 동이 백제조에 나오고 있 댜 76) 이러한 기록들에 나오고 있는 백제 건국설화를 보면 서로 차이가 나는 내용들이 적지 않다 . 그 중 백제를 건국하였다고 하는 시조에 대 하여 자료에 따라 온조설, 비류설, 구태설 및 도모설 등이 있어 서로 내용이 다른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여기서 먼저 백제의 건국시조가 누 구였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해명은 여러 가지 백제 건국 설화 중 어느 것이 실제의 백제 건국설화인지를 밝히는 작업이 된다. 그리고 나아가 다른 백제 건국설화들이 만들어진 이유가 무엇이었나 하는 문제도 정리하기로 한다. 먼저, 『삼국사기』에 나오고 있는 백제 건국설화를 제시하기로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조의 본문에는 백제의 시조가 온조왕 이었다고 되어 있다. 그에 비하여 본문 뒤에 나오는 협주에는 백제시 조가 비류왕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비류왕을 시조로 하는 건국 설화의 뒤에는 『북사』와 『수서』에 나오는 구태가 시조였다는 기록이
76) 그 외에 11'綾 日本紀』 40, 桓武天皇 9 년 7 월조에 〈…眞道等本系出 自百濟國貴須王 貨須王者百濟始興第 十六世王也 夫百濟太祖都慕大王者 日神降 靈 菴扶餘而開國 天 帝授록 總諸韓而稱王 降及近肖古王 ••• >라 는 기록에 百濟太祖가 都慕大王이었다 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李丙幾 는 이러한 백제 시조 都慕가 백제 건국의 태조일 수 없다고 하였다. 도모는 東明 • 鄒牟 • 朱 蒙 과 동명동인으로 고구려의 시조라고 하였다( 『韓國史』 -古 代篇 -, 1959, p. 344). 이는 대체로 타당한 견해라고 생각 된다. 이에 백제 시조 都慕說에 대하여는 본고에서 다루지 않기로 한다 .
있다. 여기서는 우선 본문의 온조설화와 협주의 비류설화를 차례로 제 시하기로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온조설화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A (1) 백제 시조는 溫祚王이다. (2) 그의 아버지는 鄒牟인데 혹은 朱蒙 이라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부여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다만 세 딸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보통 사람 이 아닌 것을 알고 둘째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얼마 후에 부여왕이 세 상을 떠나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고 두 아들을 낳았다. 큰아들은 佛流라 했고, 작은 아들은 溫祚라 하였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越郡女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3) 주몽이 북부여 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 워하여, (4) 마침내 烏干 • 馬黎 동 十臣과 남으로 떠나니 백성 중 따르는 자가 많았다. (5) 마침내 漢山에 이르러 負兒嶽에 올라 가히 살 만한 곳을 살폈다. (6) 비류는 바닷가에 살기를 원하니 (7) 十臣이 간하여 말하였다. 〈생각건대 이 河南의 땅은 북으로 漢水를 띠고, 동으로는 높은 산악에 의 거하였고, 남으로는 沃澤울 바라보고, 서로는 大海가 막고 있으니 그 天險 地利는 얻기 어려운 지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만드는 것이 좋지 않겠습 니까〉 라고 하였다. (6) 비류는 돋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 서 살았다. (8)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9) 十臣울 輔翼으로 삼아 국호를 十濟라 하였다. (10 ) 그 때는 前漢 成帝 鴻嘉 3 년(기원전 18) 이었다. (11) 비류는 미추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었다. 돌아와 위례를 보니 도읍이 완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한지라, 마침내 참회 하며 죽으니 그 신민들이 모두 위 례로 돌아왔다. (12) 후에 올 때의 백성 들이 즐겨 따랐으므로 백제로 국호를 고쳤다• (13) 그 世系는 고구려와 같 이 부여에서 나왔기에 부여로써 성으로 삼았다.(『三國史記』 23, 백제본기 1, 溫祚王 죽위조)
『 삼국유사』 2, 기이 2, 남부여조에 〈史本記云〉 하고 나오는 백제 건 국설화는 위에 제시한 『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온조왕 즉위조 본문에 나오는 건국설화를 옮겨 놓았다. 그런데 『 삼국유사.!I의 백제 건국설화 는 위에 제시한 『삼국사기』의 건국설화와는 달리 나오는 대목이 있다. 그러한 것들 중에는 글자를 더하거나 뺀 것을 들 수 있다. 또는 다른 글자로 쓴 것도 있다. 그리고 〈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越郡女에게 장가 둘어 두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과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 까지의 기록이 『삼국유사』에는 빠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 삼국사기』에 나오고 있는 前漢 成帝 鴻嘉 3 년을 『삼국유사』에서는 漢 成帝 鴻佳 3 년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前漢 成帝의 연호는 鴻嘉가 맞다. 이는 『삼국유 사』의 백제 건국설화에 나오는 기록이 잘못된 것을 뜻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 삼국유사』의 백제 건국설화에는 그 세계가 고 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기에 解로써 성을 삼았다고 하는 기록이다. 이는 백제왕실의 성이 『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설화에는 부여씨로 되어 있는 데 반하여 『삼국유사』에는 해씨로 나오는 것으로 백제왕실의 세 계에 대한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면 백제왕실의 성은 무엇이었을까. 『삼국유사』의 남부여조의 백제 건국설 화 앞에는 〈 또 量 田帳籍올 보면 所夫里郡田丁柱胎이라고 있는데 지금 말하는 부여군은 上古의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백제왕의 성이 扶氏였 기에 그렇게 칭하였다〉 라고 나오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물론 백제왕의 성은 扶氏가 아니라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설화에 나오는 것과 같이 부여씨가 확실하다. 여기서 백제의 王姓올 解氏나 扶氏라고 한 『삼국유사』 남부여조의 기록이 잘못된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백제본기 온조왕 죽위조 협주에 나오고 있는 또 다론 백제 건국설화를 제시하기로 한다. 아래에 제시하는 건국설화는 시조를 비 류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B 일설에는 시조는 귄隨流王 이다 . 그의 아버지 는 優台 이니 북부여왕 解扶 婁 의 庶孫이고, 어머니는 召西奴로서 卒本人 延陀껍l 의 딸이었다. (召西奴 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돌을 낳으니 큰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작은 아들은 온조였다. 우태가 죽고 졸본에서 홀로 살았다. 후에 주몽이 부여에 서 용납되 지 못하여 前漢 建昭 2 년 봄 2 월에 남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 르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召西奴에게 장가들어 왕비로 삼았다. 그가 나라를 세우고 왕업을 여는 데 자못 내조가 있었으므로 , 주 몽이 그녀를 총애함이 자별하였고, 또 비류 등을 마치 친아돌과 같이 대우 하였다. 주몽이 부여에서 낳은 禮氏 의 아들 採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세 우고, 왕위를 잇게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아우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여기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 가 가재를 기울여 방업을 이루는 것을 도와 그 근로가 많았다. 대왕이 세 상을 떠나자, 나라는 播留의 것이 되었으니 우리는 한갓 여기에 있어 혹과 같을 뿐이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別立國 都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마침내 아우와 함께 黨類룰 거느리고 沮水 와 帶水의 2 수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 三國史記』 23, 백제본기 1, 온조왕 죽위조의 협주) 위에 제시한 사료 B 의 건국설화에는 시조를 온조가 아닌 佛流王이 라고 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그러면 비류왕이 백제의 시조일까. 그 렇지 않다. 사료 B 에 나오고 있는 것과 같이 비류는 온조의 형으로 나 오고 있다. 비류와 온조가 졸본부여를 떠나는 이유는 사료 A 에 나오고 있는 내용과 같다. 그러나 비류가 이주하여 미추홀에 거하여 別立國都 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류가 미추홀에 거한 . 것은 사료 A 에도 나오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사료 B 에 나오고 있는 기록을 보면 그것이 十濟나 百濟의 건국설화가 아니라 미추홀의 국가형성을 말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사료 B 는 백제 건국설화와는 관계가 없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십제나 백제의 건국시조는 비류가 아니 라 온조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백제왕실의 성은 부여씨였던 것도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두고자 한다. 여기서 백제 건국설화는 사료 A 에 나오는 온조를 시조로 하는 건국설화인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협주에는 『북사』와 『수서』의 백제 건국 설화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중국 사서의 백제 건국설화는 백제본기의 인용기록을 제시하기보다 원문을 찾아 제시하는 것이 타당 하다. 그런데 중국 사서에는 백제의 계통을 기록한 『위서』와 『 주서』를 주목할 수 있고 나아가 백제의 시조를 온조나 비류가 아닌 仇台로 기 록한 『북사』와 『 수서 』 를 볼 수 있다. 이와 관련된 기록들을 다음과 같 이 제시할 수 있댜 C 1) 백제국은 그 선조가 夫餘로부터 나왔다.(『魏 書』 100, 열전 88, 百 濟國) 2) 백제는 그 선대가 대체로 (1) 마한의 속국이었으며 (2) 夫餘의 別種 이다 . (3) 仇台란 사람이 있어 帶方의 故地에서 국가를 세웠다.( 『 周 書』 49, 열전 41, 異域 上, 百濟) 3) 백제라는 국가는 대체로 (1) 마한에 속하였다 . (2) 索離國에서 출자 하였다. 그 왕이 출행하였는데 그 侍兒가 후에 임신하였다. 왕이 돌아와 그를 죽이 려 하자 시 아가 말하였다. 〈전에 天上에 있는 氣를 보았는데 마 치 큰 계자 같았다. 내려와 감응한 까닭에 임신하였다.〉 왕이 그를 버렸는 데 후에 아들을 낳았다. 왕이 이를 돼지우리에 두었는데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죽지 않았다. 후에 마구에 버 렸는데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 왕이 신 이하다고 여겨 기르도록 명하였다. 이름을 東明이라고 하였다. 자라남에 활을 잘 쏘았다. 왕이 그 용맹스러움을 꺼려 다시 죽이려 하였다. 동명은 이에 도망하여 달려 남쪽의 流淸水에 이르렀다. 활로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가 모두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타고 건너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
었다. (3) 동명 의 후손에 仇台라는 자가 있어 仁f급 을 돈독히 하였는데 처 음으로 대방고지에서 국가를 세웠다. (4) 漢遼東太守 公孫度이 딸로써 처 를 삼게 하였다.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 처음에 百家 가 濟 하였기에 국호를 百濟라 정하였다.(『北史 』 94, 열전 82, 百濟) 4) 백제의 (2) 선조는 고려국에서 출자하였다. 그 나라 국왕에게 한 시 비가 있었는데 홀연히 잉태를 하였다 . 왕이 그를 죽이려 하자 시비가 말 하였다. 〈계자와 같이 생긴 물건이 있어 나에게 와서 감응한 까닭에 임신 을 하였다.〉 왕이 그를 버렸는데 후에 한 남자아이를 낳았다. 이를 뒷간에 버렸는데 오래도록 죽지 않았다. 신기하게 여겨 기르도록 하고 이름을 東 明이라 하였다. 동명이 자라자 고려왕이 이룰 꺼려하였다. 동명이 두려워 하여 도망하여 境水에 이르렀는데 부여인들이 함께 받들었다. (3) 동명의 후손에 仇台란 자가 있어 仁信에 돈독하였다. 처음으로 대방고지에 국가 를 세웠다. (4) 漢遼東太守 公孫度이 딸을 그의 처로 삼게 하였다. 점차 昌盛하여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처음 百家로 濟海하였기에 百濟라고 하 였다.(『隋 書』 81, 열전 46 東夷, 百濟) 위에서 『위서』, 『주서.!J, 『북사』 및 『수서.!J에 나오는 백제 건국과 관 련된 내용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을 보면 그 내용이 역사적인 사실을 전하고 있는 대목도 보이나 그렇지 않은 것도 볼 수 있다. 이 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삼국지』와 『후한서』의 기록을 제시하기로 한다. D 1)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서는 바디를· 한계로 하고 남쪽은 왜와 접하고 있다. 方은 4 천 리가 되며 3 種이 있다. 1 은 馬韓, 2 는 辰韓, 3 은 弁韓이라 한다. … 馬韓온 서쪽에 있으며 … 伯濟國 … 동 50 여 國이 있다. 큰나라는 만여 가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이며 총 십여만 호이다. 辰王이 月支國올 다스린다.(『三國志 』 30, 東夷傳 30, 韓傳)
2) 韓은 3 種이 있다. l 은 馬韓 2 는 辰韓 3 은 弁韓이라 한다. 마한은 서 쪽에 있는데 54 국이 있다 . 그 북쪽은 낙랑과, 남쪽은 왜와 접한다. 진한은 동쪽에 있으며 그 북쪽은 澈청百과 접 한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 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역시 왜와 접한다. 모두 78 국인데 伯濟는 그 1 國이다.(『後漢 書』 85, 東夷列傳 75, 韓) 3) 백제는 그 선대가 동이인데 3 韓國이 있다. 1 은 마한, 2 는 진한, 3 은 변한이다. 변한과 진한은 각기 12 國이고 마한은 54 國이다. 大國은 만여 가이고 小國은 수천 가였으며 총 10 만 호였다. 백제는 그 하나였다. 후 에 점차 疆大하여져서 여러 小國을 병합하였다.(『梁 書』 54, 列傳 48, 諸夷, 百濟) 『삼국지』와 『후한서』의 기록을 보면 伯濟(國)은 마한의 1 國이었다고 되어 있다. 伯濟國은 『삼국사기』에 나오고 있는 百濟와 관련된 나라였 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3 세기 후반경 『삼국지』가 편찬될 때 삼국 중의 한 나라였던 백제는 마한의 한 소국인 伯濟國으로 머물러 있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3 세기 후반의 백제는 마한 50 여 국 중의 1 國이 아니었다.71) 당시 백제는 『양서』에 나오는 것과 같이 이미 이웃 한 소국들을 병합하여 삼국 중의 한 나라로 성장하여 있었다. 여기서 『삼국지』와 『후한서』에 나오고 있는 伯濟(國)는 초기 백제의 성장을 무시한 기록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중국 사서에 나오는 伯濟 國은 중국인의 관점에서 그들의 필요에 따라 기록된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하여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十濟에서 · 百濟로 발전한 것을 기 록한 것이 백제의 정치적인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료 D 의 자료들은 백제가 원래 마한의 한 소국이었던 사실을 말해
77) 이는 『三國志』의 찬자가 百濟의 정치적 성장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였거나,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百濟가 마한의 한 소국으로 기록 된 것이 분명하다.
준다 . 그에 비하여 사료 C 에는 백제의 건국세력에 대한 자료들이 나오 고 있댜 사료 C 를 보면 백제의 선대 또는 선조가 扶 餘(사료 Cl, 2(2) )에서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사료 C3 에는 백제를 세웠다 고 하는 仇台가 부여를 세웠던 東明의 후손으로 나오고 있어 백제왕실 이 부여왕실로부터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사료 C3(2) 에는 백 제의 선조가 索離國에서 나왔다고 되어 있다. 한편 사료 C4(2) 에는 백 제의 선조가 高麗國(高句麗)에서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사료 C 의 『북사』와 『 수서 』 의 기록 중 3(2) 와 4(2) 는 같은 내용을 전 하고 있다. 그런데 3(2) 에서 백제가 색리국에서 출자하였다고 나오고 있으나 4(2) 에서는 고려국이라고 나와 있다. 그리고 동명을 꺼려한 왕 도 그와 같이 달리 나오고 있다. 동명이 건넌 강 이름도 4(2) 에는 생 략되어 있다 . 다음 동명이 세운 나라도 3(2) 에는 부여로 되어 있는데 4(2) 에는 부여인들이 함께 받들었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동명이 이주하여 세운 나라는 부여였 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료 C 에 제시한 『북사』와 『 수서』의 기록에는 백 제가 동명의 후손인 구태에 의해 건국된 것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주목 하게 된다. 이는 백제 건국세력의 기원이 索離國, 扶餘 또는 高句麗라 고 하면서 근본적으로 백제의 왕실은 부여 계통이라고 하는 것을 뜻한 다. 중국측 기록에는 부여가 索離國에서 이주한 세력에 의하여 건국된 것으로 나오고 있다 . 여기서 색리국 -부 여 -고 구려 -백 제로 이어지는 국가형성세력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동명성왕조를 보면 주몽이 부여 에서 도망하여 고구려를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 그리고 백제의 건국자 였다고 하는 온조는 고구려 주몽의 아들로 되어 있다. 여기서 백제 건 국세력의 기원이 부여에서 이주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던 세력과 연결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중국 사서에 위와 같 이 백제의 건국세력들이 부여 또는 고구려 계통으로 나오게 된 것을
생각할 수 있댜 그런데 사료 C2, 3, 4 에는 백제의 건국세력이 仇台라고 나오고 있다. 이 구태가 과연 백제의 건국세력이었을까 . 앞에서 제시한 사료 A 에 나 오고 있는 온조와 구태는 어떠한 관계에 있었을까. 李弘稙은 이미 언 어학적으로 古爾와 仇台를 연결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 781 필자 역시 동 명의 후손으로 나오고 있는 구태는 백제의 건국세력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 요동태수 公孫度이 딸로써 구태의 처로 삼았다는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공손탁이 정권을 장악한 시기는 190 년에서 204 년이었다 . 공손탁이 그의 宗女롤 시집보낸 왕은 백제의 왕이 아니 라 부여의 尉仇台였을 가능성이 있다 .79 ) 이는 백제의 왕이 공손탁의 딸 을 왕비로 맞이한 일이 없었던 것이 잘 말해 준다 . 여기서 한 걸음 나 아가 구태 역시 백제의 왕이 아니라 부여왕이었던 위구태였던 것을 알 수 있다 .OO) 그리고 만일 구태가 고이왕 (234~286) 이었다면 ,811 그의 재위 기간은 公孫度이 정권을 장악한 시기와 차이가 난다. 따라서 구태는 고이왕일 수도 없다. 여기서 중국 사서에 나오는 백제 건국자라고 하 는 구태는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 북사』(사료 C3) 나 『수서』(사료 C4) 에 나오는 부여 건국자인 동명에 대한 기록은 백제 건국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것들이 분명 하다. 이는 중국인 사가들이 백제의 건국자를 구태라고 보고 구태가 동명의 후손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남긴 기록이다. 그러나 위에서 본 것과 같이 중국 사서에 나오는 구태가 백제의 건국자일 수 없기에 사 료 C 에 나오는 동명에 대한 기록은 잘못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정리한 바에 의하면 백제 건국설화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78) 李弘稙 앞의 논문, l
온조왕 죽위조에 나오는 온조설화(사료 A) 인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료 B 에 나오는 설화는 미추홀 소국 형성설화인 것이 분명하다. 그리 고 사료 C 에 나오는 백제시조가 仇台라는 기록은 중국인들의 잘못으 로 인한 오기 일 가능성 이 크다 .82) (2) 온조설화의 성격 앞에서 여러 가지의 백제 건국설화들에 대하여 정리하여 보았다. 그 결과 사료 A 에 제시한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조에 나오는 내용이 실제의 백제 건국설화를 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 다. 이제 고구려에서 이주한 온조집단이 십제를 건국하였고 비류가 세 웠던 미추홀의 소국을 병합한 후 백제로 명칭을 바꾸었다는 온조설화 (사료 A) 의 성격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신화와 설화는 역사다. 그것은 허구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현재 와 다른 경험과 생활에서 야기된 진실되고 실제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화나 설화는 연대기적이거나 계보적인 이야기를 전하 지는 않는다. 여기서 신화와 설화를 그대로 역사연구의 자료로 삼을 수는 없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그러한 자료에서 신화 • 설화적 성격을 벗기고 역사연구의 자료를 찾아 낼 필요가 있다. 온조설화도 백제의 건국설화로 백제의 건국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담고 있다. 실제로 온조설화에는 어떤 세력이 국가형성 울 하였고, 어떠한 이유로 국가를 형성하였으며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 이 어떠하였고, 그 후의 정치적 발전은 어떠하였는지에 대한 내용이 있다. 이에 백제의 국가형성에 대한 자료를 달리 구하기 어려운 상황
82) 그 밖에 백제의 시조를 都慕라고 하는 기록도 있으나 그것이 東明 鄒牟 또는 朱 蒙 가리키며 고구려의 시조를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어(李丙惠, 앞의 책, 1959, p. 344) 본고에서는 都慕룰 백제의 시조로 생각하지 않는다.
에서 온조설화를 백제의 국가형성에 대한 이해를 얻기 위한 기본적인 자료로 활용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하여 설화적인 내용을 역사발전의 대세 속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먼저 온조설화에 대한 검토를 하기에 앞서 일반적인 신화의 특성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첫째, 신화는 자연과 인간의 영역에 대한 구분이 나 설명이 없이 천지창조에서 인간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다루고 있다. 둘째, 신화는 과학적 기준에 의하여 그 진위를 판단할 수 없다. 만일 과학적 기준으로 신화를 판단하면 그것이 잘못된 믿음이라 생각하게 된다 셋째, 신화는 과학 이상으로 직관이 확대되고 상상력이 유발된 것으로 감정의 원천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넷째, 신화는 시간 적으로 지속적 인 변천 과정을 인정하지 않는다 . 83) 위와 같은 신화의 특성에 비추어 보면 온조설화는 신화라고 부르기 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온조설화에는 천지창조나 신적인 존 재에 대한 내용이 없다. 단군신화와 비교하여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단군신화에는 단군의 부라고 하는 환웅과 그 父로서 천제(또는 상제) 라고 하는 환인이 나오고 있다. 환인과 환웅은 신화화된 존재들임에 틀림없다. 그에 비하여 온조설화 자체에는 온조의 부였다고 하는 주몽 이 나오나 그는 신적인 존재로 다루지 않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 그리고 단군신화에는 환웅이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를 열었다고 한다. 신시는 신성 공간으로 신화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온조설화에서 온조가 십제를 세웠다고 하는 하남 위 례성은 신화적인 공간이 아니라 세속적인 공간으로 나타나 있다. 여기 서 온조설화에 신화적인 요소가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온조설화에는 과학 이상으로 직관이 확대된 내용이 없고, 상 상력이 유발된 면도 찾을 수 없다. 단군신화를 보면 단군은 천제의 아
83) Allan J. Lic h tm a n and Valeri e French, Hi st o r i an s and Liv i n g Past, lfJ 'l8, pp. 79~8. 5.
들이었다고 하는 환웅을 부로 하고 곰에서 사람으로 되었다고 하는 옹 녀를 모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단군의 부모는 과학적인 기준으로 진 위를 판단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에 비하여 온조설화에는 그와 같이 과학 이상으로 직관이 확대되고 상상력이 유발된 내용은 없다. 이 역 시 온조설화를 신화로 보기 어려운 이유가 된다. 한편 온조설화는 단군신화와 같이 신화적인 시간을 보여주고 있지도 않다. 단군신화에는 단군의 생존 연대가 1 천 9 백 8 세였다거나 그 통치 기간이 1 천 5 백년이었다고 되어 있다. 이는 단군신화의 신화로서의 모 습을 보여주는 또 다른 면이 된다. 그에 비하여 온조설화는 그와 같은 신화적인 시간은 없댜 그렇다고 해서 온조설화의 시간이 연대기적이 거나 계보적인 시간도 아니다. 구태여 말하자면 온조설화의 시간은 설 화적인 시간이라고나 할지 모르겠다. 여기서 온조설화를 신화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음을 분명히 할 수 있다. 이에 온조설화를 백제의 건국신화라고 하지 않고 건국설화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온조설화는 부여의 동명신 화나, 고구려의 주몽신화, 신라의 혁거세신화와 바교하여 보다 신화적 인 요소가 적은 것을 알 수 있다. 동명 • 주몽 • 혁거세의 탄생을 전하 는 기록을 보면 신화적인 요소들이 찾아진다. 그에 비하여 온조설화에 는 신화적인 요소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온조설화는 주몽설화에 나오 는 주몽의 탄생에 대한 신화적인 요소마저 없앤 것을 볼 수 있다. 이 에 온조설화는 신화로까지 발전하지 못하였거나 발전하지 않았던 백제 의 건국설화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부여 • 고구려 • 신라의 건국 을 전하는 내용을 설화라고 하기보다 신화라고 부르고 백제의 건국을 전하는 내용을 설화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러면 온조설화에서 신화적인 요소를 거의 찾을 수 없는 이유는 무 엇일까. 그것은 백제의 국가형성 시기가 비교적 늦었기 때문일 수 있 다. 그리고 백제 건국설화의 전승 과정에 구전을 통한 시기가 짧았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온조설화가 오랜 구전 과정을 거쳤다면 그 안에도 단군신화와 같이 신화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 댜 그러나 백제의 건국설화는 비교적 짧은 구전 과정을 거쳐, 일찍이 문자로 정착된 것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 백제의 건국을 말하는 이야기 들도 처음에는 구전을 통하여 전해졌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화나 설 화는 구전을 통하여 전해지는 과정에 후대인의 필요에 의하여 내용과 양식이 조정되고 발전, 성장하는 융통성이 있다. 그러한 예는 시기가 오래 된 나라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의 예를 통하여 쉽게 알 수 있다. 부여의 건국신화나 고구려의 건국신화 역시 온조설화보다 오랜 구전 과정을 거치며 신화적인 요소가 더 많이 들어간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신라의 모체가 되었던 사로국은 백제의 모체가 되었던 십제보다 늦게 건국되었다고 여겨지나 그 구전을 통한 전승 과정이 길었기에 온 조설화보다 신라 건국신화가 더 신화적인 요소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 겨진댜 한편 십제(백제)의 건국설화는 온조설화였던 것이 분명한데 사료 B 에 비류설화가 나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비류설화는 앞에서 정리한 것과 같이 미추휼 소국의 건국설화가 분명하다. 그런데 미추홀 소국은 그 건국세력이 十濟를 세웠던 온조세력과 같이 고구려로부터 이주한 세력이고 그 국가형성 시기도 거의 동시가 아니었나 짐작이 간다. 그 러한 사정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6 가야가 거의 동시에 국가 형성을 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십제와 거의 동시에 소국을 형성하였던 미추홀 소국은 갈등 없이 십제에 통합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 결과 십제는 영역과 인구가 늘어나는 정치적 성장을 하게 되 었다. 그러한 정치적 성장은 십제의 국력을 크게 증대시켰던 것이 분 명하댜 이에 십제의 미추홀 통합은 이후 백제의 마한소국들을 가속 적으로 통합할 원동력을 제공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까닭에 미 추홀 소국의 형성을 전하는 설화가 후대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 비류와 온조의 관계가 형제로 강조되었던 사실도 생각할 수 있다. 온조설화도 변동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죽위조의 온조설화와 『삼국유사』 남부여조의 온조설화를 비교하면 그 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를 옮긴 『삼국유사』의 온조설화에 몇 가지 주요한 변동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첫째, 〈扶餘王無子〉 를 〈州之王無子〉 로 기록한 것과 〈扶餘王鹿〉 울 〈扶餘州王混〉 으로 기록 한 것은 『삼국유사』의 찬자가 扶餘를 扶餘州로 본 것으로, 부여의 실 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부여는 부여주라고 할 수 없다. 둘째, 〈次曰溫祚〉 뒤에 나오는 협주 〈惑云 朱蒙到卒本要越郡 女 生二子〉 와 그 다음에 나오는 본문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來爲太 子〉 를 생략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생략은 『삼국유사』의 온조설화에 문 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前漢成帝鴻嘉三年〉 을 〈漢成帝鴻佳三 年〉 으로 기록한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문제가 있는 것을 잘 나타 내 준다. 전한시대에는 鴻佳라는 연호가 없었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온조설화만을 가지고 온조설화의 연대를 정리하기에는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중 〈扶餘 爲氏〉 를 〈解爲氏〉 라고 한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이는 『삼국사기』에 서 백제왕실의 姓올 扶餘氏라고 한 것을 『삼국유사』에서 解氏로 바꾸 어 놓은 것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변동이 오늘날의 연구자들에게 많은 혼동을 불러온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백제의 왕실은 『삼국사기』에 나 오는 것과 같이 부여씨이며 해씨가 아니다. 따라서 백제왕실이 부여씨 와 해씨 사이에 바뀌었다는 여러 연구결과는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삼국사기』에 나오는 온조설화가 기본적인 백제 건국설화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나오는 온조설화를 보면 백제건국에 대한 진실 되고 실제적인 이야기로만 보기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온조설화가 우리와는 다른 경험이나 생활에서 야기된 사실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러한 온조설화가 허구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 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에 무엇보다 먼저 온조설화의 설화적인 성 격을 벗겨 내고 역사연구의 자료를 찾아 낼 필요가 있다. 백제 건국설화인 온조설화를 통하여 어떠한 자료를 구할 수 있을까. 이는 바꾸어 말하여 온조설화를 통하여 무엇을 밝혀 낼 수 있는가 하 는 문제도 된다. 일반적으로 건국신화나 설화를 통하여 국가형성세력, 국가의 위치와 영역, 건국시기, 건국 후의 정치적 성장 등에 대한 역사 적인 자료를 찾아 낼 수 있다. 백제의 건국설화들 중 가장 역사적인 사실을 잘 담고 있다고 생각되 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조에 나오는 온조설화(사료 A) 를 주목하기로 한다. 온조설화에는 백제건국의 시조 (1), 온조의 부모와 형 인 비류 (2), 온조와 비류가 고구려를 떠나 이주하게 된 이유 (3), 온조 등이 이주할 때 거느린 집단 (4), 정착 장소의 선택 (5), 비류의 이주지 결정 (6), 도읍 결정의 이유 (7), 온조의 하남 위례성 정착 (8), 십제의 건 국 (9), 십제의 건국시기 (10), 비류가 다스리던 미추홀세력 통합 (11), 백 제로 국호 변경(1 2) 및 백제의 세계와 성씨 결정에 대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료 A 의 온조설화에 나오는 내용을 가지고 십제(백제)의 건국세력과 그들이 고구려로부터 이주한 이유 등을 알 수 있다. 그리 고 온조가 세웠던 십제와 비류가 세웠던 미추홀 소국의 건국장소에 대 한 문제도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십제라고 하는 소국의 형성에 대한 내용도 짐작할 수 있댜 또한 십제의 건국시기에 대한 문제도 풀 수 있다. 나아가 백제의 미추홀 소국병합과 그에 따른 국호의 변경 및 백 제 건국세력의 출신과 그 성씨에 대한 문제를 밝힐 내용들이 있는 것 을알수있다. 그런데 온조설화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역사이해의 자료로 사용하
기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 온조설화에 담겨 있는 다양한 내용들 은 십제(백제)의 국가형성을 설화화한 것으로 그 자체가 백제의 국가 형성에 관련된 주요한 사항에 대한 역사전개의 순서를 그대로 보여주 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연대기적인 기록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 따라 서 온조설화를 역사 이해의 직접적인 사료로 그대로 이용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온조설화에 있는 여러 사건들은 설화적인 시간으로 정리되어 있다. 실제로 온조설화를 보면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졸본부여로 이주한 시 기, 주몽이 졸본부여의 왕이 된 시기,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태자가 된 시기, 온조와 비류가 졸본부여에서 탄생한 시기, 온조와 비 류가 이주한 시기, 십제가 미추홀 소국을 합친 시기, 백제로 국호를 바 꾼 시기, 부여씨로 왕실의 성씨를 정한 시기 등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단지 온조설화에는 십제의 건국시기를 전한 성제 홍가 3 년(기원전 18) 으로 밝혀 놓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십제의 건국시기를 기원전 18 년 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온조설화에 나오는 여러 사건 들과 그 전개순서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으나 그러한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인 시간을 찾아 낼 필요가 있다. 신화나 설화적인 시간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기 위하여 단군신화에 나오는 신화적 시간을 잠시 생각할 수 있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단군 은 그 수명이 1 천 9 백 8 년이었고 통치 연대는 1 천 5 백 년이었던 것으 로 되어 있다. 여기서 온조설화에 나오는 여러 사건들의 연대를 어떻 게 볼 것인지가 문제로 된다. 온조설화에 있는 주몽의 졸본부여 왕위 계승 시기는 기원전 18 년보다는 올라가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삼 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동명성왕 즉위조의 기록에 주몽이 기원전 37 년에 고구려의 국가형성을 하였다고 한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러 나 주몽이 고구려의 국가형성을 한 시기는 그보다 훨씬 올라가는 것으 로 보인다 .84) 이에 백제의 국가형성 시기도 훨씬 올라갈 수 있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댜 이는 나아가 온조설화의 여러 사건들이 일어났던 시기가 기원전 18 년보다 후대가 아니라 사건에 따라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 (3) 백제 건국설화로서의 온조설화 앞에서 십제(백제)의 건국설화는 『 삼국사기 』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 조에 나오는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었다고 하는 설화(사료 A) 인 것 을 밝혔다. 이를 온조설화라고 불러 왔다. 그런데 이러한 온조설화에는 비류가 세웠던 미추홀 소국을 통합한 사실이 나오고 있다. 이에 『삼국 사기 』 백제본기 온조왕 원년 이후의 기록은 미추홀 소국을 통합하여 성장하였던 백제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온조설 화를 통하여 다룰 수 있는 문제는 십제 건국세력, 건국 장소와 영역, 십제의 형성, 그 형성시기 , 미추홀 소국 통합 및 백제왕실의 세계와 성 씨 등에 대한 것들이다. 이제 이러한 문제들을 온조설화를 통하여 차 례로 정리하여 보기로 한다 . 먼저 백제의 모체가 되었던 십제의 건국세력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앞에 제시한 온조설화(사료 A) 를 보면 백제의 시조로 받들어진 온조는 고구려의 건국자였다고 하는 주몽을 부로 하고 졸본부여왕의 둘째 딸을 모로 하여 비류의 동생으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비류 와 온조는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졸본부여에 와서 태 자가 되자 그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졸본부여를 떠난 것으 로 되어 있다 .
84) 李基 白은 고구려의 건국이 기원전 75 년 이전, 혹은 기원전 l ffl년 이전으로 거슬 러 올라가야 한다고 보았다 (r 高句麗 의 國家形成』, 『韓國 古代의 國家와 社會』, 1985, p. 81). 그런데 필자는 고구려의 국가형성 시기가 기원전 2 세기 후반보다 훨씬 올라간다고 생각한다 .
그러면 온조와 비류가 과연 주몽의 아들이었을까. 이는 단정하기 어 려운 문제이다. 비류설화(사료 B) 를 보면 비류와 온조는 형제간인데, 그들의 부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이고 모는 졸본인 연타발 의 딸인 소서노인 것으로 되어 있다. 부여에서 도망해 온 주몽은 이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소서노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마치 친아들과 같이 대우하였다고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친부 자지간은 아니었다. 즉 비류설화에 따르면, 온조와 비류는 주몽의 아들 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온조와 비류가 주몽의 아들이었다기 보다 오히려 주몽보다 먼저 고구려에 살던 선주세력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온조설화나 비류설화를 보면 온조와 비류 역시 부여와 관계가 아주 없던 세력은 아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온조와 비류세력이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생각할 수 있다. 온조와 비류로 표현되는 세력들은 처음에는 북부여에서 쫓겨 온 주몽세력과는 커다란 갈등 없이 지낼 수 있었지만 그 후에 북부여로부 터 밀려오는 세력들이 주몽세력과 합쳐지며 주몽으로 상징되는 북부여 계통 세력과 온조와 비류로 상징되는 선주세력 사이에는 세력균형이 깨지게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한 세력균형의 파괴가 온조와 비류세력이 고구려지역에서 밀려난 주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온조와 비류를 주몽의 아들로 전하는 설화는 후대인들이 전승 과정 에서 그들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하여 융통성을 발휘하여 조정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백제를 건국하였다는 온조세력의 정통성을 높 여 주기 위한 때문이었다고 짐작이 간다 .85) 다음은 비류가 형이었고 온조는 동생이었다는 설화 문제이다. 온조
85) 盧重國은 비류와 온조가 혈연적인 면에서 형제가 아니라 비류계 소국과 온조계 소국이 연맹을 형성하자 그것을 합리화하고 연맹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시조를 의제적 혈연관계로 표현한 데서 빚어진 산물이라고 하였다(앞의 책, 1988, p. 63).
설화(사료 A) 와 비류설화(사료 B) 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설화에 따라 그들의 부모가 달리 나오고 있으나 그들이 형제였다는 것은 동일하다. 온조와 비류는 함께 졸본부여(고구려)를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 I 단 지 그들이 남래하여 정착한 장소가 서로 달랐던 것을 볼 수 있다. 여 기서 온조와 비류가 과연 형제였을지 의심이 간다. 온조와 비류가 형 제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부여에서 밀려온 세력들에 의하여 고구려에서 밀려난 세력으로서의 동질성을 갖고 있다. 그 결과 십제와 미추홀 소국은 쉽게 소국연맹 관계를 갖게 되었고 또한 미추홀 소국은 십제에 어렵지 않게 통합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십제에 통합된 미추홀의 지배세력이었던 비류계 세력은 어떻 게 되었을까. 노명호는 미추홀집단이 중요하여 그들을 철저히 격하시 키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비류설화를 갖는 미추홀집단은 해씨나 진씨 등의 세력과도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871 한편 노중국은 비류집단의 성은 해씨였다고 하였다 . 그는 나아가 백제의 왕계는 개루 왕까지는 비류왕계 해씨였고 초고왕부터는 온조왕계 부여씨로 교체되 었다고 하였다 .88 ) 필자는 미추홀 소국의 지배세력이었던 비류집단은 백 제에 통합되었다고 본다. 그 중 미추홀 소국의 왕이 되었던 비류가 참 회하여 죽었다고 나오는 기록(사료 A) 을 통하여 비류세력이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십제를 건국하였다고 하는 온조는 혼자의 힘으로 나라를 세운 것은 아니었다. 사료 A 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비류와 오간, 마려 둥 십신
86) 金杜珍은 洗流菓園이 먼저 남하한 것으로 보고 있다 (r 百濟始祖 溫祚神話의 形成 과 그 傳承」, 《韓國學論范》 13, 1990, p. 14). 한편 盧重國은 비류집단이 서해안 울 타고 내려와 인천지역에 정착하였고, 온조집단은 육로로 이동한 것으로 보고 있다(앞의 책, 1988, p. 61). 필자는 온조와 비류집단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동 일한 경로를 통하여 이주한 것으로 본다. 87) 盧明鎬, r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 센쭙史學硏究〉 X, 1981, pp. 78~79. 88) 盧祖國, 앞의 책, 1988, pp. 70~75.
그리고 백성들이 함께 온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 일부 백성들은 비류 를 따라 미추홀로 갔고 십신들과 나머지 백성들이 하남 위례성에 정착 하여 십제를 형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졸본부여(고구려)로부터 함 께 온 세력들이 온조를 중심으로 십제를 건국하였다. 십제를 세울 때 하남 위례성 지역에는 선주세력들이 있었을 것이다. 사로국을 형성할 때 사로 6 촌에는 각기 촌장이 있었고 촌장들에 의하 여 다스려지던 사회는 촌락사회 또는 촌장사회라 부를 수 있다. 그리 고 수로가 가락국을 형성할 때 그 지역에는 9 개 촌이 있었고 각 촌에 는 사로 6 촌과 같이 촌장들이 지배세력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한 9 촌 장들은 추장이라고 한다 .89) 따라서 사로국이나 가락국의 형성 이전 사 회를 추장사회라고 할 수 있다. 십제의 형성 이전에도 그와 같은 촌락 사회 또는 추장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단지 여기서는 구 체적으로 그 존재를 언급할 수 없다. 그런데 노중국은 온조설화(사료 A) 에 나오는 온조를 수행한 십신을 십제를 형성한 선주 토착집단으로 보고 있다. 온조집단에 의한 십제의 건국은 그러한 선주 토착집단들 과 연합하거나 그들을 홉수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 다 .90) 그러나 필자는 온조설화에 나오는 십신은 십제 형성 이전의 선주 세력이 아니고 온조와 함께 이주한 집단으로 보아 노중국과 견해를 달 리한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원년조에 〈立東明王廟〉 라고 나오 고, 다루왕 2 년조에 〈誕始祖東明廟〉 라 나오는 기록의 동명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궁금하다. 동명은 부여의 시조인 것을 알 수 있다안 백제 본기의 동명묘에는 동명을 모신 것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십제(백제)의 건국시조는 온조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어떠한 이유로
89) r 三國遺事』 2, 紀異 2, 篤洛國記 90) 盧重國, 앞의 책, 1988, pp. 52 ~53. 91) 『後漢점』 東夷傳 夫餘國傳.
동명을 시조로 하고 있었을까. 노명호는 백제의 왕족이 동명의 유일한 정통 계승자임을 표방하는 건국신화로서 동명신화에 왕실의 계보설화 를 연결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 92) 거기에 더하여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동명은 북쪽 부여, 고구려 지역으로부터 이주한 세력들의 종족적인 시 조로 받들어진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하다면 백제 에서 동명묘를 부여 및 고구려계 종족의 결속을 이루기 위한 장치로 이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면 온조와 비류로 상징되는 세력집단이 고구려를 떠난 시기는 언제였을까. 온조설화나 비류설화만을 보면 그 이주시기를 분명히 말 할 수 없다. 단지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후인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였다는 시기도 잘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 기서 주몽은 부여에서 밀려난 세력이고 온조는 고구려에서 밀려난 세 력이었던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주몽이나 온조가 이주한 이유는 원래 자신이 살던 지역에 새로운 정치세력들이 들어오면서 세력균형이 깨진 때문이다. 이는 이주민들에 의한 정치적 변동이 새로운 이주민을 발생 시키고 새로운 이주민에 의하여 새로운 나라가 형성되는 것을 보여준 다. 이에 부여나 고구려 또는 고조선 지역에서 정치적인 변란이 일어 나고 이주민들이 발생하는 예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기원전 4 세기 말에서 3 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 중 언제인가 연 장 진개의 침략을 받은 고조선이 서쪽 2 천여 리를 빼앗긴 사건을 들 수 있다. 당시 고조선은 요동지역을 상실하고 그 중심을 평양지역으로 옮겼다고 헤아려진다 .93 1 이 같은 고조선의 중심지 이동은 주변의 부여 나 고구려 지역에 커다란 정치적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것은 요동 을 상실할 때 고조선의 주민들이 평양지역으로만 이주하지 않았을 것 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당시 고조선계의 주민들이 부여나 고구려 지
92) 盧明鎬, 앞의 논문, 1981, p. 66. 93) 李鍾旭, 던 r 朝鮮史硏究』, 1993, pp 168~169.
역으로 이주하여 선주세력과 갈등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갈등에 진 선주세력들은 원래 살던 지역을 떠나 새로운 지역으 로 이주하여 새로운 국가를 형성했을 수 있다. 한편 평양고조선시대에는 중국의 진 • 한 교체가 있었다. 그 과정에 중국 동북지역의 연 • 제 • 조의 주민들이 고조선이나 사로 지역까지 홀 러 들어가는 사건이 있었다.었) 그리고 당시의 이주민 집단 중 위만집단 은 고조선의 정권을 장악하기까지 하였다. 여기서 진 • 한 교체기의 이 주민들이 부여나 고구려에 정치적인 충격을 준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그 결과 부여에서 고구려로, 다시 고구려에서 한강 하류지역으로 이주 민들이 이동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위만조선은 일찍이 진번과 임둔을 복속시켰고 ,95) 나중에는 예에 압력 을 가하여 예군 남려가 28 만 구의 인구를 거느리고 요동에 내속한 것 울 볼 수 있다 .96) 여기서 위만조선이 주변의 정치세력을 복속시키거나 압력을 가하여 정치적 충격을 준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만조선시 대에 그 주변의 정치세력들이 백제지역으로 이주하였을 가능성도 있 다. 그 밖에도 낙랑군을 비롯한 한군현이 설치되었을 때 군현의 통제 를 받게 된 주민들이 이주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지금까지 온조세력이 이주한 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기 위하여 고조선 • 부여 • 고구려 둥의 지역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동과 그 에 따른 이주민의 발생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여기서는 백제의 모체가 된 십제를 건국한 세력들이 언제 이주하였는가는 단정하지 않기로 한 다. 이 점은 십제의 건국시기를 정리할 때 알아보기로 한다. 단지 온조 설화에는 낙랑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십제의 건 국이 낙랑군의 설치 이전이었던 것으로 침작되기도 한다.
94) 『三國志』 魏 참 東夷傳 韓傳 魏略 인용기사 및 辰韓傳 참조. 95) 『史記 』 朝鮮列傳 96) 『後漢 害 』 東夷傳 減傳.
다음은 십제 건국 장소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사료 A 의 온조설화에 는 졸본부여를 떠난 온조집단은 한산의 부아악에 올라 가히 살 만한 곳을 살폈다. 그 때 비류는 바닷가에 살기를 원하여 미추홀로 간 것으 로 나온다 . 그리고 온조집단은 하남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게 되었다. 당시 하남 위례성에 거하게 된 이유는 북에 한수가 있고, 동에는 높은 산악이 있고, 남으로는 옥택이 있으며, 서로는 대해가 막고 있기 때문 인 것을 온조설화를 통하여 알 수 있다 . 이는 하남 위례성이 한수, 높 은 산, 대해로 에워싸여 있어 방어상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옥택이 있 어 농업생산이 용이하였기 때문에 십제를 세우는 터전으로 삼았던 것 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더하여 서쪽의 대해와는 거리가 있지만 한수 (한강) 를 통하여 원거리교역도 가능하였다고 여겨진다 . 그런데 온조가 거했다는 하남 위례성의 경우, 처음부터 위례성이 있었는지는 잘 알 수없댜 지금까지 온조집단이 정착하여 십제를 세운 지역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나왔다 이병도는 백제가 위례성(하북)에서 漢 山下 漢 城(廣州古 邑)으로 남천한 것으로 보고 있다 . 그리고 그 시기는 개국 후 얼마 되 지 않은 때로 보고 있으며 <;JI ) 구체적으로 비류왕 즉위년 (304) 이나 그 이듬해로 보고 있다 . 981 이 같은 이병도의 백제수도 남천설은 최근에 노 중국에 의하여 이어지고 있다. 그는 위만조선의 멸망으로 야기된 이주 민들에 의하여 한강 유역에서 온조집단 둥이 소국을 형성하였다고 보 았다. 당시 온조집단이 형성하였던 소국은 십제였다고 하며, 십제는 중 랑천 부근에 있었다는 설을 따르고 있다. 나아가 미추홀의 비류집단과 연맹을 형성하여 주도권을 잡은 시기를 초고왕대로 보고, 늦어도 초고 왕대에 하남 위례성으로 천도한 것으로 보았다 .99 ) 이들의 견해는 초기
97) 李丙 몫 는 百 濟 의 건국시기 를 古 爾王대 (234~286) 로 보고 있다 . 98) 李丙 m., 『百 濟 의 建國 問題와 馬韓 中心 勢 力의 變 動』, 『韓 國古代史硏究 』 l
백제의 도읍이 한강 북쪽에 있다가 비류왕 또는 초고왕대에 한강 남쪽 의 하남 위례성으로 남천한 것으로 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홍직은 이미 온조설화에 나오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 하였다는 기록을 존중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온조 왕 13 년 한산 아래에 나아가 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를 옮겼다는 기록의 한산은 남한산성이라고 하였다. 그는 백제 시조설화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이에 백제의 도성은 개로왕대에 함락될 때까지 하남에 있었다고 하였다.J OO) 필자는 이홍직의 비판이 타당한 것 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온조설화에 나오는 것과 같이 하남 위례성이 북으로 한수(한강)를 띠었다는 사실을 주목하면 십제의 도읍이 되었던 하남 위례성은 한강 북쪽에 있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이 병도와 노중국 등이 주장한 것과 같이 십제의 도읍이 한강 북쪽에 있 다가 한강 남쪽으로 옮긴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할 수 있다. 다음은 백제의 모체가 되었던 십제의 형성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 다. 사료 A 의 온조설화를 보면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십신을 보익으로 삼아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고 한다 . 이 때 온조와 같이 이주한 비류집단은 미추홀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비류가 세웠던 나라의 이름은 현재 알 수 없다.J O I) 온조집단이 세운 십제는 어떠한 정치발전단계에 있던 존재일까. 『양 서』 백제전 등을 보면 백제는 마한의 한 나라였는데 후에 점차 강대해 져서 諸小國을 겸병한 것으로 나온다 . 102) 백제가 원래 십제라는 나라로 시작하였는데 비류가 미추홀에 세웠던 나라를 통합한 후 백제로 이름 을 바꾼 것은 온조설화(사료 A) 에 나오고 있다. 여기서 원래 십제도
99) 盧重國, 앞의 책, 1988, pp 51 ~58. 100) 李弘稙 앞의 논문, 1971, p. 324. 101) 그것이 어쩌면 彌鄒忽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102) 『梁란』 列傳 諸夷 百濟.
하나의 소국으로 시작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소국의 영역은 대체로 方百里 정도 되는 것으로 추측된다. !OJ ) 실제로 『삼국사기 』 를 보면 온조 24 년 가을 7 월에 왕이 옹천책을 세우자 마한 왕이 책망하기를 〈 왕이 처음 도하하여 발붙일 곳이 없을 때 내가 동북 의 1 백 리의 땅을 떼어 살게 하였다 〉 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 1 여 ) 마 한왕이 떼어 주었다는 1 백 리의 땅은 앞에 언급한 方百里와 같은 의미 로 생각된다 . 이 자료를 통하여 십제가 처음 나라를 세운 영역이 방백 리였으며 이는 한국사상 등장한 다른 소국들과 그 영역이 같았음을 의 미한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온조와 거의 같은 시기에 미추홀을 도읍 으로 삼아 비류가 세운 나라의 영역도 방백리 정도였다고 여겨진다. 십제가 소국형성을 할 때 1 백 리의 땅을 떼어 주었다는 마한의 존재 롤 주목할 수 있댜 『 삼국사기 』 백제본기를 보면, 십제는 소국을 형성 한 후 온조왕 13 년에 천도할 것을 알렸고, 24 년에는 마한의 강역을 침 범하였고, 25 년에는 진한과 마한을 병합할 생각을 하였고, 26 년에는 마한울 병합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사 실은 십제가 형성되기 이전에 한강 남쪽지역에 이미 마한이라는 정치 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십제가 정치적 공백지대에서 국가를 형성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 준다 . 마한이라는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있는 상황에서 십제가 그 동북지역 에 새로운 소국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일까. 십제 가 마한의 동북에 위치하였다기보다는 북방에 위치한 것으로 여겨진 다. 여하튼 십제가 형성될 무렵 북방으로부터 새로운 이주민의 물결이 밀려왔다면 먼저 자리잡고 있던 마한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온조와 비류집단으로 하여금 마한의 북방 경
103) 李鍾 旭, r 韓 國 初期 國家 의 政治 發展 段階와 政治形 態 』, 『韓國 史上의 政治形 態』, 1993, p. 43. 104) 『三國 史 記』 23, 百 濟本 紀 1, 溫祚 王 24 년조.
계지대에 소국을 형성하게 하여 새로이 들어오 는 이주민 들 을 정착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어쩌면 실제로는 마한으로서는 그와 같은 이주민들 을 막을 능력이 없었는지 모른다 . 그리고 온조와 같은 이주민 집단도 이미 마한이라는 정치세력이 자리잡고 있던 지역에 들어가 새로이 나 라를 이룰 능력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 그러한 이유로 십제와 미추홀 소국들이 마한의 북쪽 변경지대인 한강 남쪽지역에 자리잡았던 것이 아닌가 짐 작된다 . 105) 다음은 십제의 건국시기에 대한 문제를 정리하기로 한다 . 지금까지 제시된 백제의 건국시기에 대한 몇 가지 견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병도는 백제의 엄밀한 의미의 건국연대는 고이왕 27 • 28 년경 (260 • 261) 으로 보고 있댜 그는 고이왕을 『 주서 』 이역전 백제조에 나오는 仇台와 동일인으로 보고 이를 백제 건국의 태조로 보고 있다. 한편 『삼국사기 』 백제본기에 나오는 고이왕 이전의 기록에 등장하는 여러 왕들은 부락국가시대의 세습적 거수로 개국 후에 추존되었거나 진위반 잡의 세계를 후세의 사가가 개국 이래의 왕통과 같이 윤색한 것으로 보아 그들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재를 신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1 06 ) 이와 같은 이병도의 견해는 백제의 역사를 적어도 3 세기 이상 끌어내 린 것이 된다 . 이러한 이병도의 견해에 대한 반론이 이홍직에 의하여 제기되었댜 우선 古 爾 와 仇台를 동일인으로 보는 데 대하여 언어학적 인 면에서 문제를 제기하며 백제의 건국연대를 고이왕에 결부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l f17) 노중국은 위만조선 멸망 전후에 대두한 유이민 파동으로 진국세력이
105) 이는 고조선 준왕대에 중국으로부터의 이주민들이 고조선에 들 어오는 상황에서 그들 이주민을 통제하도록 위만을 秦 故空地에 百 里 의 땅을 봉하여 준 것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된다(李 鍾 旭 , 『 古朝 鮮 史硏究 』 , 1993, p. 212). 106) 李 丙 飛 , 앞의 책, 1959, pp. 350~352. lITT) 李弘稿 앞의 책, pp. 331~332.
와해된 후 한강 유역에서는 새로운 소국들이 형성되었는데 십제는 그 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 100 ) 이러한 견해는 십제의 건국시기 를 기원전 2 세기 말 .1 세기 초까지 올려 보는 것이다, 문제는 노중국이 기원후 1 세기 말 • 2 세기 초엽에 미추홀세력과 위례세력 사이에 지역연맹체가 형성되었다고 본 것이다 .I ()'J) 그러나 온조설화(사료 A) 를 보면 미추홀 세력이 십제에 병합된 시기는 기원전 1 세기 후반 어느 때 정도로 여겨 진다. 그러면 십제의 건국시기는 언제였을까. 온조설화에 나오는 대로 기 원전 18 년이었을까 .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된다 . 기원전 18 년은 온조설 화에 나오는 여러 사건들 중 미추홀을 병합한 시기 정도가 아닐까 한 다. 따라서 온조설화에 나오는 미추홀 통합 이전의 사건들은 보다 먼 저 일어난 것들임을 생각할 수 있다 . 여기서 한반도 남쪽지역의 국가형성의 대세가 어떠하였나 보기로 한 다. 먼저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집단에 의하여 정권을 빼앗기고 바다를 통하여 한지에 들어가 살며 韓 王을 칭하였다는 사실 11 0 ) 은 기원전 2 세기 초에 한지에 나라가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그 후 위만조선시대에 진 번 주변에 衆 國들이 있었던 것을 주목할 수 있다 . Ill) 이 는 기 원전 2 세 기 언제인가 위만조선의 남쪽에 여러 나라가 있었던 것을 나타내 준 다. 그런데 廉斯鏞 설화에는 왕망 지황시 (20~23) 에 한인 戶來 등 1500 인이 벌목하러 왔다가 韓 에 잡혀 奴가 되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11 2) 여기서 1 세기 초에 한지에는 중국인 1500 명을 노비로 잡아 쓸 정도 의 정치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십제가 성장
108) 盧重國, 앞의 책, 1988, pp. 49~51. 109) 위의 책, p. 65. 110) 『三國志』 魏꿈 東夷傳韓傳 魏 略 인용기사. 111) 『 史 記』 朝 鮮 列 傳 112) 『 三國志』 魏 꿈 東夷 傳 韓傳魏 略 인용기사.
하여 된 백제라는 근거는 없다. 그러나 당시 낙랑군과 가장 가까운 위 치에 있었던 백제였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1 세기 초 백제는 이미 미 추홀 소국을 병합하였고 나아가 마한의 소국들도 병합하여 나간 것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그 결과 한인 1500 명을 노비로 잡아 썼던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십제의 국가형성 시기가 기원전 1 세기 후반 이전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구체적인 국가형성 시기는 잘 알 수 없다 . 이 문제는 고구려로부터 언제 이주민들이 한강 남쪽 위례지역에 왔는지 생각한 후에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온조집단의 이주시기를 단정하기는 어렵댜 그런데 온조설화를 주목하면 낙랑과의 관계가 나타나 있지 않 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추측이기는 하지만 십제의 형성은 낙 랑과의 관계가 있기 전일 수 있지 않나 생각된다. 어쩌면 고조선의 멸 망과 위만조선의 형성기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제 십제의 소국병합에 대한 문제를 보기로 한다. 사료 A 의 온조설 화에는 미추홀 소국이 십제에 통합된 것으로 나온다. 미추홀 소국을 통합한 십제는 다른 소국들에 비하여 그 영역과 인구가 크게 늘어났고 그에 따라 국력이 커진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후 십제는 명칭을 백 제로 바꾸었다 . 이 같은 미추홀 소국의 병합은 백제가 마한의 소국을 병합할 원동력을 마련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온조왕 26 년에 군대를 동원하여 사냥을 한다고 하며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그 국읍을 병합하였다고 되어 있 다. 그리고 27 년에는 마한을 마침내 멸망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백제가 마한의 모든 소국을 병합한 것은 아니었음에 틀림없다. 그 후 백제본기 초기 기록 중 다루왕과 기루왕대에 나오는 백제와 신라의 전 쟁은 백제와 마한의 전쟁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사기』 의 찬자로서는 온조왕 27 년에 마한을 멸망시켰다고 기록한 후 다시 마 한과의 전쟁을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미추홀 소국을 병합한 백제는 그 후 주변의 소국들을 병합하 여 나간 것이 틀림없다. 그러한 사정은 『 양서 』 와 같은 중국 사서에 나 오고 있댜 『 양서 』 백제전에는 백제가 마한 54 국의 한 소국이었는데 후에 점차 강대하여져 여러 소국을 겸병한 것으로 되어 있다 . 기록에 나오는 여러 소국은 미추홀 소국을 비롯한 마한의 소국들임에 틀림 없다. 그런데 『삼국지』 한전에는 마한 50 여 국 중 한 나라로 伯濟國이 나 오고 있다. 그리고 『후한서』 한전에는 마한 54 국, 진한 12 국, 변한 12 국으로 모두 78 국인데 〈伯濟是其一國焉〉 이라고 나와 있다. 마한의 한 소국으로 나오는 伯濟國은 삼국 중 한 나라인 백제와 관련이 있는 것 은 분명하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 삼국지』의 편찬 시기인 3 세기 후반까지 백제와 관련이 있는 伯濟國이 마한의 한 소국으로 남아 있었 는가 하는 것이다.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추홀 소국을 통 합한 십제는 이미 백제로 그 명칭을 U 尸규었고 그러한 백제의 마한소국 병합은 기원전 1 세기부터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삼국지』와 『후한 서 』 에 나오는 伯濟(國)이 마한의 한 소국으로 되어 있는 기록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그러한 사정은 다음 사료를 보면 알 수 있다 . E 1) 13 년 (246) 가을 魏의 幽州刺使 관구검 이 낙랑태수 劉茂와 朔方太 守 王進과 함께 고구려를 벌하였는데 왕이 빈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시켜 낙랑의 변민을 잡아왔더니 유무가 이를 듣고 노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침토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그 사람들을 돌려보냈다.(『三國史記』 24, 百濟 本紀 2, 古爾王 13 년) 2) 부종사 오림은 본래 낙랑이 한국을 통할했기에 진한 8 국을 분할하여 낙랑에게 주었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는 데 잘못이 있어 신 지가 한인들을 격분시켜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그 때 태수 弓燈
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伐하였는데, 避이 전사하였다. 2 군은 마침내 韓을 멸하였다.( 『 三 國志』 魏 書 東夷傳 韓) 위의 사료 E 를 보면 몇 가지 문제를 풀 수 있다. 사료 El 에 나오는 王違과 2 에 나오는 弓違은 동일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우선 사 료 E2 에 나오고 있는 것과 같이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여 대방태 수 궁준을 전사시킨 韓의 신지가 누구였는지 궁금하다. 이와 관련하여 사료 El 을 주목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고이왕이 246 년에 좌장 진충 을 시켜 낙랑의 변민을 습취한 바 있다. 그러한 작전에서 대방이 아니 라 낙랑을 공격한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백제의 관점에서는 그 구분을 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 삼국지 』 예전에 나 오는 다음 기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正始 6 년 (245) 낙랑태수 劉茂와 대방태수 弓避이 領東의 澈 가 고구려에 복속하자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不尉侯 등이 邑을 들어 항복하였 다.(『三國志 』 魏書· 東夷傳 澈傳) 위의 기록에 따르면 대방태수 궁준이 245 년 滅롤 공격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弓避은 韓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 여기서 弓違이 언제 전사하였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고이왕 13 년 좌장 진충의 군대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것은 아닐까. 단지 백제 측에서는 궁준을 전사시킨 사실을 몰랐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하다면 이 병도의 견해와 같이 고이왕대에 단순히 처음으로 고대국가를 형성한 것일 수는 없다. 그리고 고이왕대에 갑자기 대방태수를 전사시킬 정도 로 국력이 강해졌을 수도 없다. 백제는 일찍이 소국과 소국연맹 단계 를 넘어섰으며 당시는 마한의 소국들을 병합하여 왔기에 그 국력이 크 게 신장되어 있었다. 그 결과 고이왕이 다스리던 백제는 대방태수를
전사시킬 정도였던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삼국지』에 나오는 다음 기록을 볼 필요가 있다. (후한의) 桓帝 • 孟帝 말에 韓과 澈가 강성하여 (漢)군현이 능히 통제를 못하니 많은 백성들이 韓國으로 유입되었다.(『 三國志』 魏 書 東夷傳 韓傳) 위의 기록에 나오는 桓帝(1 47~167) 와 靈帝 (168~188) 기에 韓과 澈 가 강성하여진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낙랑군의 남쪽지역에서는 백제 가 마한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였고 신라는 변한의 여러 소국들을 병 합한 시기였다 . 여기서 많은 백성들이 한국으로 유입되었다는 것은 이 들 백제와 신라가 강성하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백제의 건국시기 를 늦게 잡을 수 없는 근거가 된다. 그 외에 『 삼국지 』 위서 동이전에 나오는 廉斯鏞설화를 보면 왕망의 지황 연간 (20~23) 에 韓에서 漢人 1500 명을 잡아 노비로 삼은 것을 볼 수 있다 .11 3) 당시 한인을 1500 명이나 잡아 노비로 쓸 수 있는 정치세력 이 낙랑군의 남쪽 한지에 있었던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면 그 러한 정치세력의 실체는 무엇일까.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미추홀 소국 을 비롯하여 마한의 소국들을 병합하여 왔던 백제가 아니었을까 침작 된다. 당시 낙랑군의 남쪽에는 백제 의에는 그럴 만한 능력을 가진 정 치세력이 없었다고 여겨진다 . 여기서 백제의 소국병합 시기를 기원전 1 세기 후반경으로 보아 좋지 않나 한다. 다음은 온조설화(사료 A) 에 나오는 백제의 세계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동출하였기에 扶餘로써 씨를 삼았다고 하는 기록을 주목할 수 있다. 김철준은 비류와 온조가 해씨 혈통이라고 하였다 .114) 천관우는 백제왕실의 계통에 優台냐弗流-古爾系의 優氏와 朱蒙-溫祚-肖古系
113)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傳 魏略 인용기사. 114) 金哲俊, r 百濟建國考J, 《百濟硏究》 12, 1982, p. 9.
의 扶餘氏의 두 계통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두 계통 사이에 왕실교 체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 115) 한편 노중국은 초기 백제의 왕 성이 해씨와 부여씨 어느 하나만으로 단정하는 데 찬동하지 않고, 해 씨와 부여씨 두 개의 왕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 그는 多婁 가 그 婁 -蓋 婁 세 왕이 婁 를 왕명말자로 갖고 있기에 그 성이 해씨라고 하 였다 . 그는 초기 백제의 왕계는 해씨왕계와 부여씨왕계가 이원적으로 있었는데 부여씨 중심으로 일원화되는 과정에 해씨왕계가 부여씨왕계 내로 편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나아가 해씨(비류계)에서 부여씨(온조 계)로 교체된 시기를 초고왕대로 보고 있다 . 11 6) 위와 같은 백제왕실의 교체론들은 십제(백제)의 건국설화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필자는 백제의 건국설화는 사 료 A 에 제시한 온조를 시조로 하는 것이라고 보아 왔다 그에 비하여 위의 왕실교체론을 주장하는 견해들은 사료 B 에 나오는 비류가 미추 홀 소국을 세웠다고 하는 설화까지 백제의 건국설화로 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그런데 사료 B 의 비류를 시조로 하는 건국설화는 십제(백 제)의 건국설화와는 관계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백제왕실에 비류가 끼 어들 톰이 없댜 이는 백제왕실이 비류계와 온조계 사이에 교체된 일 이 없었던 것을 뜻한댜 비류는 온조와 동시에 고구려로부터 이주한 세력으로 추측된다 .117) 그러나 비류는 미추홀에 정착하여 소국을 세웠고 후에 온조가 세웠던
115) 千寬宇, 『 三韓 의 國家 形成』(下), 《韓 國 學報》 3, 1976, pp. 134~137. 116) 盧 里國 , 앞의 책, 1988, pp. 65~78. 117) 그러나 온조형제의 건국담이 공동건국, 공동통치라는 역사적 사실을 시사한 것 이라는 李基東 의 견해 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李基東 , r 百 濟 國의 成 長 과 馬韓 硏 合J , 《 百 濟論范》 2, 1990, p. 54). 그리고 金杜珍 온 남하한 집단의 성격이 철기문 화에 익숙한 유이민 집단으로서 무사단적 성격을 가졌고 비류집단이 남하하였다 고 보고 있다(앞의 논문, 1990, p. 14). 그런데 비류집단이 먼저 남하하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십제에 통합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미추홀 소국을 세운 비류계는 그 세력이 약화되어 온조계 세력과 비교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고구려의 시조라고 하는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백제 왕실의 성을 고씨로 하지 않고 부여로 한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일까. 단정하 기는 어려우나 백제에서 왕실의 성씨를 사용한 연대가 문제가 된다. 백제는 근초고왕대 (346~375) 에 이미 고구려와 적대관계에 있었다. 이에 백제에서는 고구려로부터 그 건국세력이 이주한 것은 분명하나 성씨를 고구려 왕실의 성을 따르지 않고 부여에서 찾은 것으로 여겨 진댜 한편 백제왕실이 해씨와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된다. 백제의 왕 실은 온조의 후손들로 이루어졌고 그 성씨로 해씨를 사용한 일이 없었 다. 물론 백제왕실이 아닌 북부의 해씨세력은 분명히 부여인으로 나오 고 있어 118) 백제 지배세력 중에 해씨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북부의 해루는 분명히 백제의 지방세력인 것을 알 수 있다. (4) 온조설화의 성격과 연구자료로서의 중요성 앞에서 백제의 건국설화에 대한 세 가지 문제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첫째, 백제의 건국을 전하는 설화들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삼 국사기』 백제본기 백제시조 온조왕조에 나오는 설화(사료 A) 가 실제 의 십제(백제)의 건국설화인 것을 밝혔다. 한편 사료 B 에 나오는 설화 는 비류에 의한 미추홀 소국 형성설화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북사』와 『수서』에 나오는 백제 시조 仇台에 대한 문제도 정리하였다. 이병도는 구태를 고이왕으로 보았으나 이홍직이 그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댜 실제로 요동태수 公孫度이 宗女를 仇台의 처로 삼게 하였다 는 기록을 보면 백제의 시조가 구태일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공손탁
118) 『 三 國史記 』 23, 百沼本紀 溫祚王 41 년조
이 집권한 시기(1 90~204) 와 고이왕의 재위 기간 (234~286) 은 차이가 나고 있다. 공손탁의 딸을 처로 삼은 사람은 부여의 위구태임이 분명 하다. 따라서 구태를 고이왕으로 볼 수 없다. 『삼국유사 』 남부여조에는 사료 A 의 백제 건국설화를 옮겨 놓고 있는데 몇 가지의 변동이 생긴 것을 볼 수 있다. 그 중 중요한 것은 백제의 왕성을 부여씨가 아닌 해씨로 바꾼 것을 들 수 있다. 그러한 변경은 그 후 연구자들에게 백 제왕실의 교체론을 주장할 하나의 근거를 마련하여 주고 있어 문제가 된다. 둘째, 사료 A 에 제시한 백제 건국설화로서 온조설화의 성격에 대하 여 알아보았다. 십제(백제)의 국가형성에 대한 자료를 달리 구하기 어 려운 상황이기에 온조설화를 백제의 국가형성에 대한 이해를 얻기 위 한 기본적인 자료로 활용할 수밖에 없다. 온조설화는 신화의 특성에 비추어 보면 천지창조나 신적인 존재에 대한 내용이 없고, 신화적인 공간이 없으며, 과학 이상으로 직관이 확대된 내용이 없다. 이에 『삼국 사기 』 백제본기에 나오는 온조설화는 신화라기보다 설화라 부르는 것 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 온조설화는 구전 과정이 짧았거나, 일찍이 문 자로 정착되어 신화화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비류가 세웠던 미추 홀 소국 형성설화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온조설화 뒤에 협주로 나 오는 이유는 십제가 미추홀 소국을 병합한 후 국력이 커져 마한의 소 국들을 병합할 원동력을 얻었기 때문으로 헤아려진다. 온조설화를 보 면 백제의 모체가 되었던 십제의 건국세력과 그들의 이주 동기, 도읍 선택, 소국형성, 건국시기, 미추홀 소국 병합, 백제로의 국호 변경, 백 제 건국세력의 출신 및 그 성씨에 대한 문제를 밝힐 수 있는 내용들이 나온다. 그런데 온조설화에 나오는 여러 정치적 사건들은 설화적인 시 간으로 정리되어 있어 여러 사건들의 전개 순서는 알 수 있으나 그 정 확한 역사적 시간들은 알 수 없다. 이에 각 사건들이 일어났던 실제의 역사적인 시간을 찾아 낼 필요가 있다.
셋째, 백제의 건국설화인 온조설화를 통하여 십제의 건국세력, 건국 장소와 그 영역, 십제의 형성과 그 시기, 미추홀 소국의 통합 및 백제 왕실의 세계와 성씨에 대한 문제를 정리하였다. 온조는 주몽의 아들이 아니었고 , 비류도 온조의 친형은 아니었으나 전승 과정에서 온조세력 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하여 조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온조세력이 고구려지역에서 밀려난 세력인 것은 분명하다. 온조는 고구려를 떠날 때 일정한 십신 등 세력집단을 거느리고 이주하였고 그들이 십제 건국 의 중심세력이 되었댜 물론 십제를 형성할 때 선주세력이 있었을 것 이나, 그들이 십신은 아니었다. 십제와 이웃한 미추홀 소국의 건국세력 둘은 부여와 고구려로부터 이주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백제에서 는 그둘의 종족적인 시조로서 부여의 시조로 알려진 동명을 시조묘에 모시고 그들의 결속을 다진 것으로 생각된다. 십제를 건국한 세력들의 이주시기 를 밝히기는 어렵다. 기원전 18 년으로 나오는 건국연대는 그 대로 믿을 수 없다. 이에 온조설화에 낙랑과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없 는 것으로 추측하면 십제 건국세력의 이주시기는 대체로 고조선의 멸 망과 위만조선의 성립기가 아닌가 여겨진다. 십제의 도읍은 한강 이남 하남 위례성에 자리잡았다 . 따라서 한강 북쪽에서 남쪽으로 천도하였 다는 견해는 따를 수 없다. 십제는 그 영역이 方百里 정도 되는 소국 으로 출발하였다 . 십제를 형성할 무렵 십제의 남쪽에는 마한이라는 소 국연맹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마한은 온조 • 비류 등 부여, 고구려계 이 주민들을 마한의 북방에 정착시켜 이주민들이 마한지역으로 흘러 들어 가는 것을 막았다고 생각된다. 십제의 건국시기는 건국세력의 이주시 기와 큰 차이가 없었다고 여겨진다. 기원전 2 세기 초 고조선이 망하고 위만조선이 형성될 무렵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실제로 대방태수 弓違 의 전사, 韓澈의 강성, 염사착설화 등을 통하여 백제의 건국시기는 고 이왕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 분명하며, 나아가 기원전 18 년이 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기원전 1 세기 말은 십제가 미
추홀 소국을 비롯하여 마한의 소국들을 병합하여 나간 때로 헤아려진 다 . 이에 정치적 대세와 이주민의 발생 둥을 고려하면 백제의 모체가 된 십제는 기원전 2 세기 초 무렵에 형성된 것으로 보고자 한다. 백제 의 왕실은 온조의 후손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백제왕실의 성은 해씨일 수 없다. 그런데 백제에서 왕실의 성을 활발하게 사용한 시기는 고구 려에게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난 후라고 믿어진다. 이에 백제에서는 고구려 왕실의 성인 고씨를 사용하지 않고 부여씨를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류가 세웠던 미추홀 소국이 십제에 통합되며 비류 둥 미추홀 소국의 세력들은 왕실세력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기에 백 제왕실에 비류계가 끼어들 수 없었다.
제 3 장 한국 초기국가의 형성 • 발전 과정의 예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 과정에 존재하였던 정치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댜 그러한 정치체들 중에는 국가 형성 • 발전 과정에 추장사 회, 소국, 소국연맹 단계에서 정치발전을 멈춘 것들이 있는가 하면 고 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이 소국병합 단계로 발전한 정치체 도 있었다. 여기서 한국사상 존재하였던 추장사회, 소국, 소국연맹, 소 국병합 단계의 모든 정치체를 다룰 수는 없다. 이에 각 정치발전단계 별로 정치체를 하나씩 뽑아 여러 가지 문제를 해명하기로 한다. 단지 소국병합 단계에 대해서는 삼국의 소국병합에 대하여 간단히 정리하였 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 단계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 중 추장사회로는 사로 6 촌을 다루기로 하였다. 사로 6 촌에 대한 문헌자료는 결코 많은 것은 아니나 사로 6 촌의 실체를 해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가 사로국 형성신화에 나온다. 거기에 더하여 지석묘를 통하여 사로 6 촌의 구조에 대한 해명도 할 수 있다.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과정에 존재하였던 많은 소국들 중 여기서는 십제를 선택하여 소 국의 실체에 대한 이해를 하기로 한다. 소국연맹은 가락국을 맹주국으
로 하는 가야연맹을 다루기로 하였다. 그리고 소국병합 단계에 대한 이해는 3 국의 소국병합을 통하여 보기로 하였다. 그 중 가야의 경우는, 단순히 소국연맹 단계만을 다룬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가야연맹의 형성 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그 이전의 정치적인 성장을 알아야 하기 때문 이다. 이번 장에서의 작업은 신라, 백제, 가야, 고구려의 국가 형성 • 발 전과 관련된 문제를 촌락(추장)사회, 소국, 소국연맹, 소국병합의 과정 을 차례대로 정리한 셈이 된다. 1 촌락(추장)사회 : 촌락(추장)사회로서의 사로 6 촌 이번 절은 사로국 형성 이전 斯盧六寸의 사회 • 정치 조직에 대한 이 해롤 목적으로 한다. 신라는 원래 소국으로부터 성장하였다. 그러면 그 와 같은 소국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사로지역에 어떠한 정치조직이 편 성되어 있었을까. 필자는 소국이 형성되기 이전의 정치조직이 촌락사 회 또는 추장사회였음을 밝힌 바 있다.” 여기서는 앞에서의 연구결과 룰 소개하기로 한다. 한국의 촌락(추장 또는 촌장)사회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자료 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 중 신라의 건국신화를 주목하면 각기 소국 형성 이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자료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추장사회시대로 편년되는 고고학적인 자료들 중에는 정 치적인 권력자의 탄생을 이야기하여 주는 지석묘와 청동기들이 있다. 이와 같은 자료를 가지고 해석하기에 따라 문헌자료를 통하여 얻을 수 없는 생생한 사실을 밝혀 낼 수 있다.
1) 李鍾旭, 『韓國初期國家의 形成 • 發展段階」, 《韓國史硏究》 67, 1989, pp. 4~11 . 李鍾旭, r 翁長社會時代의 斯盧六村」, 《新羅伽倻文化》 12, 1981 pp. 117~143. 李鍾旭, 『新羅國家形成史硏究』, 1982, pp. 12~48.
사로국은 추장사회 단계를 거쳐 국가를 형성하였던 것을 알 수 있 다 ? 따라서 추장사회는 소국형성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여 주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이는 추장사회에 대한 해명이 그 자체로서 의 의가 있을 뿐 아니라 한국의 국가형성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을 말해 준다. 사로 6 촌 추장사회에 대한 해명 결과 얻어진 내용은, 인류학자들 이 다루는 사희 • 정치적 발전단계인 c hi e f dom 과 비교된다. 필자는 국 가 이전 단계인 ch ief d o m 단계의 존재에 주목하여 사로국 형성 이전 의 사로 6 촌 추장사회의 정치적 단계를 생각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한 국사 연구를 통하여 얻은 추장사회가 그 내용상 인류학이론 중의 ch ief d o m 단계에 해당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작업은 ch i e f dom 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예를 제공하게 되었다. 본고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진행하기로 한다. 첫째, 사로 6 촌 추장사회의 형성과 그 구조에 대하여 밝히기로 한다. 둘째, 사로 6 촌의 촌장(추장)에 주목하여 추장사회의 지배세력과 계급 편성에 대하여 알 아보기로 한다. 셋째, 사로 6 촌 추장사회의 정치조직과 그 운용 그리고 변동에 대한 문제를 해명하기로 한다. 한국의 추장사회에 대한 본격적 인 연구는 사로 6 촌에 대한 필자의 논문을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이제 앞으로 한국사상 추장사회시대가 새로이 설정되 어야 할 것이다. (1) 사로 6 촌 추장사회의 형성과 구조 먼저 사로 6 촌 추장사회의 존재에 대한 확인 작업부터 하기로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추장사회 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이 나오고 있다. 신라의 건
2) 李鍾旭, 앞의논문, 1989, pp. 4~11.
국신화에 나오는 사로 6 촌에 대한 기록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시조의 성은 朴氏이고 이름은 赫居世 다 . 前漢 孝宣帝 五鳳 원년 갑 자 4 월 丙辰에 왕위에 오르니 왕호는 居西干이다. 그 때 나이는 열세 살 이었다. 나라 이름을 徐那伐이라 했다. 이보다 앞서 朝鮮遺民들이 산곡 사 이에 나누어 살며 6 村을 이루었는데 1 은 關川楊山村, 2 는 突山高坡村, 3 은 觜山珍支村, 4 는 茂山大樹村, 5 는 金山加利村, 6 은 明活山高耶村이라 하였 으니 이것이 辰韓 6 部로 되었다. 高塘村長 蘇伐公이 양산 기슭 나정 옆의 숲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을 바라보고 곧 가서 보니 문득 말 은 볼 수 없고 단지 큰 알이 있었다 . (그것을) 깨니 갓난아이가 나왔다. 곧 데려다 길렀는데 나이 십여 세가 되자 기골이 준수하고 숙성하였다 . 6 부인들은 그 출생이 신이하여 높이 받들고 존경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임금(君)으로 삼았다.(『三國史記』 1, 始祖 赫居世居西干) (2) 辰韓의 땅에는 옛날에 6 촌이 있었다 . 1 은 알천 양산촌인데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다. (촌)장은 賜平이며 처음에 표암봉에 내려오니 이가 及梁 部 李氏의 조상이 되 었다(驚禮王 9 년에 部를 두어 及梁部라 했는데 高麗 太祖天福 5 년 경자에 이를 中興部라고 고쳤다. 파잠 • 동산 • 피상 • 동촌 이 이에 속한다) . 2 는 돌산 고허촌인데 장은 照伐都利이며 처음에 형산에 내려오니 이가 沙梁部 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 지금은 南山部라 하니 구량 벌 마등오 • 도북 • 회덕 등 남촌이 이에 속한다 . 3 은 무산 대수촌인데 장 은 供禮馬이며 처음 이산에 내려오니 이가 潮梁部 또는 牟梁部 孫氏의 조 상이 되었다 . 지금은 長福部라 하며 박곡촌 둥 서촌이 이에 속한다. 4 는 취산 진지촌인데 장은 智伯虎이며 처음 화산에 내려오니 이가 本彼部 崔 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通仙部라 하며 시파 둥 동남촌이 이에 속한 다 . 崔致遠온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 황룡사 남쪽 미탄사 남쪽에 옛 터가 있으니 이것이 최후의 고택이라고 하는데 거의 분명하다. 5 는 금산 가리 촌인데 장은 祗他이며 처음에 명활산에 내려오니 이가 漢岐部 또는 韓岐
部 裵 氏의 조상이 되었다 . 지금은 加 德部 라 하니 상서지 • 하서지 • 내아 등 동촌이 이에 속한다. 6 은 명 활 산 고야 촌 인데 장은 虎珍 이며 처음에 금 강산에 내려오니 이가 習 比 部 薛 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 금 은 臨 川 部 라 하 며 물이촌 • 잉구미 촌 • 궐곡 등 동촌이 이에 속한다. 前 漢 地節 원년 임자 3 월 1 일 6 부의 祖 들이 각기 자제 들 을 거느리고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 의 논을 하였다. 〈 우리는 위로 君主 가 없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 에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여 저 하고자 하는 대로 하니 어찌 덕이 있는 사 람을 찾 아 君主 로 삼고 立邦設都 하지 않겠는가 〉 하였다.(『 三 國遺事』 1, 紀 異 2, 新羅始祖 赫居 世王) 위의 사료는 신라의 모체가 된 斯 盧 國( 徐 那伐)의 소국형성신화에 나 오는 신라시조 혁거세의 등장과 왕즉위에 대한 기록이다. 그런데 본고 의 작업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실은 사로국 건국 이전에 존재하였던 6 촌과 각 촌마다 있었다고 하는 촌장세력이다. 사로 6 촌의 6 촌장은 각 기 하나씩의 촌을 다스리던 정치세력으로 믿어진다. 이들은 촌을 다스 리던 세력으로 촌장이라 하였으며 사회정치적인 세력을 가졌다는 의미 에서 후일 干으로 지칭한 것이 분명하다. 한편 6 촌장이나 가락 9 촌의 9 간들의 존재는 일반명사화하여 個長으로 지칭하였다고 생각된다 ? 여 기서 소국형성 이전의 정치사회 조직을 그 지배자에 초점을 맞추어 촌 장사회 또는 추장사회라고 부르기로 한다. 한편 촌락(추장)사회는 촌의 영역을 단위로 하는 독립된 정치체였기에 그 영역을 강조하는 의미에 서 촌락사회 라고 부를 수도 있다고 본다 . 4 ) 뒤에 보려는 바와 같이 지석묘는 한반도 사로 6 촌을 포함한 남부지 역 추장사회의 표지적인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석묘가 한 반도 남부에서 활발하게 축조되던 상한은 기원전 7 세기이며 그 하한은
3) 『三國 遺 船 2, 紀 異 2, 盤 洛 國記 4) 李鍾 旭 앞의 논문, 1981, pp. 32~33.
기원전 2 세기경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 . 5) 그 중 지석묘 축조의 하한 시기는 사로국의 형성시기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의 가 설로서 지석묘를 축조하던 사회를 촌락(추장)사회로 보면 어떨까 한다 . 이러한 추측이 타당하다면 한반도 남부의 촌락(추장)사회 시기는 대체 로 기원전 7 세기에서 기원전 2 세기까지가 되는 셈이다. 이제 사로 6 촌 추장사회 형성에 대한 문제를 알아보기로 한다. 사로 6 촌의 추장사회는 어떠한 이유로 생겨났을까 . 무엇보다 먼저 선진 정 치세력의 영향을 들 필요가 있다. 사로 6 촌을 포함한 한반도 남부지역 의 정치조칙은 기원전 7 세기경에 추장사회 단계로 들어섰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이미 형성된 추장사회에 새로운 이주민들이 들어오 면서 추장사회는 새로이 발전한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사로 6 촌을 예 로 들자면 지석묘를 축조한 세력들의 등장으로 인하여 추장사회가 형 성되었다고 생각된다. 추장사회 형성의 또 다른 요인으로 교역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선진 적인 정치세력과 신석기문화를 가지고 있던 부족사회 사이에는 교역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요동지역의 정치세력과 주변세력 사 이에 교역이 행하여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주변 세력들이 추장사회 단 계에 들어섰다는 전제가 필요할 것이다. 한편 사로 6 촌 추장사회의 촌과 그 안의 마을들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한 문제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추장사회시대의 촌락들이 동시에 형 성된 것은 아니었댜 이와 관련하여 『 삼국유사』에 나오는 기록 중 〈지 금 풍속에는 中興部를 어머니라 하고, 長福部를 아버지라 하고, 臨川部 를 아들이라 하고 加德部룰 딸이라 하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 는 대목이 주목된다 .6) 이 기록은 고려시대에 전해지고 있던 설화적인 내 용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사료를 이용하여 사로 6 촌 사이의 관
5) 金載元 • 尹武炳, 『韓國支石 墓 硏究 』, 1967, pp. 18~19. 6) 『三 國遺 事』 1, 紀 異 2, 新 羅 始祖 赫居 世王조 .
계를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줄 안다. 그러나 위의 기록을 통하여 하나의 시사는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사로 6 촌이 신라시대의 왕경 6 부 가 되었고 신라의 왕경 6 부가 고려시대의 6 부로 되었기 때문이다. 이 에 고려시대의 6 부의 관계가 촌락사회 시대 사로 6 촌의 관계를 나타내 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고려시대의 부를 촌락사회 시대의 사로 6 촌으로 바꾸어 정리하면 關 )II 楊山村이 母가 되고 茂山大 樹村이 父가 되며 明活山高耶村은 子가 되고 金山加利村은 女가 된다. 이는 생각하기에 따라 사로 6 촌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로 이용 할수있지않나한다. 위와 같은 추측이 타당하다면, 사로 6 촌은 일시에 형성된 것이 아니 라 알천 양산촌과 무산 대수촌이 먼저 형성되고, 이어 명활산 고야촌 과 금산 가리촌이 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사로 6 촌의 구체적인 형성 순서는 잘 알 수 없다. 그렇더라도 일정한 지역에 하나의 촌이 형성되 면 점차 그 안의 인구가 증가할 것이고, 그 결과 마을 주변의 농경지 나 식량 자원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촌 안의 주민 중 일부가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여 나가게 되었고 한 걸음 나아가 새로운 촌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헤아려진다. 단정하기 는 어려우나 뒤에 정리하려는 것과 같이 하나의 촌은 하나의 씨족집 단을 이루었고 그 안의 마을들은 각기 하나씩의 가계집단으로 이루어 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한국 추장사회의 촌과 그 안의 마을들은 segm enta ry soc i e ty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와 같은 촌락 사회의 형성 과정에 그 성립시기의 선후관계에 의하여 촌락 사이에 는 부 • 모 • 자 • 녀의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것이 아닌가 추정 된다. 다음은 사로 6 촌 추장사회의 촌락 구조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사로국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사로 6 촌에 대한 간단한 문헌자료와 경주 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에서 조사된 지석묘와 같은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하여 추장사회의 촌락 구조에 대한 이해 를 할 수 있다 . 여기서 사로 6 촌을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의 촌락사회의 구조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7) 한반도 남부에서 국가를 형성한 여러 소국 중 한 소국이었던 사로국 은 그 이전에 존재하였던 6 촌을 통합하여 이룩된 나라댜 사로국이 형 성되기 이전 사로 6 촌에는 각기 촌장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집단이 있 었다 . 촌장들이 다스리던 이러한 사회는 촌장사회 또는 추장사회라고 할 수 있으며 당시의 최고 정치체는 촌(락)을 단위로 한 것이기에 촌 락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한반도 남부지역의 촌락(추장)사회는 대체로 지석묘의 축조와 그 시기를 같이하고 있었다 . 이 경우 촌락사 회의 존속 시기는 기원전 7 세기에서 사로국이 형성되는 기원전 2 세기 까지라고 생각하여 보았다 ? 여기서 위의 기간 동안의 사로 6 촌의 영 역, 위치, 촌락 구조, 주민 수, 그리고 그 형성 과정에 대하여 알아보기 로한다. 먼저 사로 6 촌의 영역에 대한 문제부터 정리하기로 한다. 이에 대한 해명은 다른 지역의 추장사회의 영역을 해명하는 작업도 될 것으로 기 대한다. 여기서 사로국의 모체가 되었던 사로 6 촌의 영역을 통합하여 사로국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바꾸어 말하 여 사로 6 촌을 합친 영역이 사로국의 영역이 되었던 것을 뜻한다. 이 와 같이 생각하고 보면 사로국과 이웃하였던 다른 소국들과의 경계에 관심이 간다 . 사로국과 이웃한 소국들과의 경계가 밝혀지면 사로국의 영역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로국과 경계를 접하고 있던 소 국들은 우시산국, 거칠산국, 이서국, 골벌국 등이 있다. 『삼국사기 』 에 나오는 이러한 소국들은 사로국의 남쪽에 우시산국(울주 방면?), 거칠 산국(울산 방면?), 서남쪽에 이서국(청도), 동북쪽에 골벌국(영천)이 위
7) 李鍾旭, 앞의 논문, 1981, pp. 117~143 및 앞의 책, 1982, pp. 12~48. 8) 李鍾風 앞의 책, 1982, p. 53.
치하였다고 한댜 91 뒤에 보려는 바와 같이 이러한 소국들은 그 후의 郡 정도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이웃 소국들과의 경 계를 생각하고 보면 사로 6 촌을 통합하여 형성되었던 사로국의 영토에 대한 이해가 간댜 죽 사로국은 대체로 울주군, 울산시, 청도군, 영천군 등과 경계를 접하고 있는 현재의 경주시, 경주군의 대부분의 지역에 자리잡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사로국의 북쪽 경계는 어디였는지 궁금하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 의창군조의 기록을 보면 ,10 ) 현재 경주군에 속한 안강지역이 의창군의 속현인 안강현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안강지역은 신라시대에 왕경이 된 사로국의 영역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에 사로국, 사로 6 촌의 북쪽 경계는 현재 안강의 남쪽, 모서의 북쪽 어디 인가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이와 같이 생각하고 보면 사로 6 촌의 분포에 대한 이병도와 김원룡 의 견해에 문제가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이 본 것과 같이 사로 6 촌은 경주평야 중 경주시 중심부가 있는 일정 장소에서 찾을 수는 없 다” 오히려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의 기록에 보이듯 사로 6 촌은 각기 보다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2) 물론 사로 6 촌 중에는 경주평야의 중심부에 위치한 촌이 있었을 것이다. 그 러나 다른 촌들은 경주평야의 중심부를 벗어난 곳에 위치하였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9) 위 의 책, pp. 21 ~22. 10) 『三國史記』 34, 地理 1. 11) 사로 6 촌을 현재의 경주시 중심부에서 찾는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그 중 金元龍은 牟梁部만은 현재의 牟梁地域에서 찾았다 . 李丙 m , 『韓國史 』 -占 代篇 -, 1959, pp. 365~369. 金元龍, r 斯盧六村과 慶州古境』, 샌紗i學報》 70, 1976, pp. 1 ~14. 李基東, 『新羅 金入宅考」, I'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1980, p, 194. 12) 李鍾旭 앞의 책, 1982, p. 22.
그러면 사로 6 촌들은 구체적으로 어느 곳에 위치하고 있었을까. 현 재의 경주시와 안강 및 양남면, 양북면 지역을 제외한 경주군 지역을 합친 면적은 대체로 1000km2 정도가 된다. 이를 6 으로 나눌 경우 사 로 6 촌의 각 촌의 면적은 170km2 정도가 된다. 물론 6 촌의 면적이 같 올 수는 없다. 그러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생각하면, 각각의 규모는 대 략 현재의 면 2~3 개를 합친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당시 주민들의 일 상 생활 특히 경작활동을 하던 공간이 아닌 산과 같은 지역도 이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예 당시 주민들이 농경을 할 수 있던 공간만 갖고 보면 6 촌의 규모는 각기 그 직경이 10km 내외의 범위를 가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13) 이 정도의 면적은 사람들이 말과 같은 교통수단의 보조 없이 일상 생활을 하는 데 적당한 규모라고 한다 .14) 이러한 촌의 규모를 생각하고 현재의 경주시와 경주군 지역을 보면 실제로 산 또는 내와 같은 자연조건에 의하여 크게 6 개의 지역으로 나 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로 6 촌 중 알천 양산촌은 월성을 기점으로 하여 표암을 포함한 경주평야의 중심부를 그 영역으로 하였다고 추정 된다. 그리고 알영정이 사량리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는 『삼국유사』 의 기록을 보면 ,15) 현재의 오릉 • 알영정 • 나정 동을 포함하여 그 남쪽 에 펼쳐진 평야에는 사량부의 전신이었던 돌산 고허촌이 위치하였다고 생각된다 .16) 나머지 촌들의 위치도 생각할 수 있다 . 『삼국유사』 신라시 조 혁거세왕조에 나오는 6 촌의 위치에 대한 기록으로 미루어 關川楊山 村의 서쪽에는 무산 대수촌이 있었고, 동남쪽에는 취산 진지촌이 있었 고, 동쪽에는 금산 가리촌이 있었고, 북쪽에는 명활산 고야촌이 있었던
13) 위의 책, p. 22. 14) Kent V Flannery , ed., The Early Mesoameri ca n Villa ge , 1976, pp. 91 ~92. 15) 『三國遺事』 1, 紀異 2, 新羅始祖 赫居世王조` 16) 사량리는 사량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 그렇지 않더라도 사량리는 사량부 의 한 리였을 수 있다. 여하튼 나정, 알영정 둥은 沙梁部에 위치하였던 것이 분 명하다.
것이 된다. 무산 대수촌은 현재의 건천을 중심으로 하여 아화에 이르 는 지역에 펼쳐진 평야지역이 되고, 취산 진지촌은 조양동 • 입실을 포 함하여 모화에 이르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고, 금산 가리촌은 현재의 보문단지 일대에 위치한 평야지역에 위치하였고, 명활산 고야촌은 알 천 양산촌의 북쪽에 있는 모아 • 모서가 있는 일대에 위치하였다고 여 겨진댜 이러한 6 촌의 위치 비정은 다소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대세는 맞을 것으로 본다.
<지도> 추장사회시대의 사로 6 촌
영일
[보기] A—. 지현역재 구의분 시 ·군 경계 ~-6 촌의 경계 B. 6 촌명 1. 關川楊山村 2. 突山高坡村 3. 茂山大樹村 4. 觜山珍支村 5. 金山加利村 6. 明活山高耶村 C. 사로국의 정치중심구역 ® 금성 ® 월성 ® 계립
위에서 사로 6 촌은 대체로 직경 10km 내외의 농경활동 공간으로 구 성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물론 이해를 돕기 위한 하나의 가설이다. 그 러나 일단 이 정도의 규모를 생각하고 보면 당시 각 촌의 인구가 얼마 나 되었나 궁금하여진다. 이에 대한 해명은 문헌자료에 대한 검토와 고고학적인 자료에 대한 해석을 통하여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이룰 밝힐 만한 분명한 문헌자료나 고고학적인 연구결과는 찾기 어려운 실
정이댜 그렇더라도 애써 이에 대한 해명을 하자면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는 찾을 수 있다. 먼저 『삼국지 』 동이전에 마한의 대국에는 만여 가, 소국에는 수천 가가 있어 총 십여만 호가 있고 변한과 진한의 대국에는 4~5 천 가, 소국에는 6~7 백 가가 있어 총 4~5 만 호가 있었다는 기록을 주목할 필요가 있댜 이와 같은 『삼국지』의 기록은 대체로 3 세기의 사정을 말 하여 주는 것이다. 그 중 대국과 소국은 소위 삼한의 78 개 소국 중 규 모가 큰 나라는 대국으로 표현하였고 작은 나라는 소국으로 표현한 것 으로 그 실체는 필자가 말하는 소국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여 하튼 『삼국지』의 사료는 한국 추장사회 시대의 인구를 밝히는 자료로 이용하기에는 시간적인 차이로 인하여 문제가 있다. 그러나 당시 폭발 적인 인구중가는 없었다고 여겨진다 .17) 따라서 위의 자료를 가지고 한 반도 남쪽에 있었던 추장사회의 인구를 추정할 수는 있다고 생각된다 . 『삼국지』의 기록을 가지고 사로 6 촌 추장사회 단계의 인구를 풀어 보기로 한다. 이와 관련하여 기원전 8000 년에서 기원후 1750 년까지는 매년 0.1% 씩 인구가 늘어났고 기원부터 1750 년까지는 매년 0.1 5 ~ 0 .4 0% 씩 인구가 늘어났다는 연구를 다시 주목할 수 있다 .1 81 그런데 사 로국을 비롯한 소위 삼한지역의 소국들이 형성된 시기는 『삼국지』가 작성된 시기보다 5 세기 정도 거슬러 올라간다. 이에 이해를 돕기 위하 여 추측을 하면 위의 기간 동안 매년 연평균 0.2% 씩 인구가 증가하였 다고 할 경우 한국의 추장사회 말에서 3 세기까지는 인구가 대체로 배 정도로 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계산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 으로서 앞으로 보다 분명한 자료를 가지고 재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
17) 기원전 8000 년에서 기원후 1750 년까지의 기간 동안 매년 0 .1%씩 인구가 늘어 났다는 연구가 주목된다 (W illi am T. Sands 의, The Basin of Mexic o , 1980, p. 363). 18) Wi lliam T. Sands 외, 위의 책, p. 363.
렇더라도 기원전 2 세기경 한반도 남쪽에서 추장사회 단계를 넘어 소국 들이 형성된 무렵 호구수는 『삼국지 』 에 나오는 호구수의 반정도로 생 각할 수 있다. 추장사회시대 말기 마한지역에는 인구가 많은 곳이 5 천여 가 정도였 고, 변한과 진한 지역에는 인구가 많은 곳에는 2 천 ~2 천 5 백 가, 적은 곳은 3 백 ~3 백 5 십 가 정도 있었던 것이 된다. 여기서 또 한 번 가정 을 하자면 , 추장사회 말기에는 삼한지역 후일의 각 소국 지역 평균 호 구수는 2 천 ~3 천 정도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가락국은 9 개 촌 이 통합된 나라였고 사로국은 6 개 촌이 통합된 소국이었다. 따라서 가 락 9 촌의 경우 1 개 촌의 호수는 평균 2~3 백 호 정도였고 사로 6 촌의 1 개 촌 평균 호수는 대체로 4~5 백 호 정도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소위 삼한지역 중 마한의 촌락에는 가락 9 촌이나 사로 6 촌보다 많은 수의 호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 같은 짐작이 가능하다면 한반 도 남부에 위치하였던 1 개 추장사회를 구성한 촌에는 5 백여 호가 있었 다고 보면 어떨까 한다.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에 대한 조사 결과를 보면 황해도 송림의 석탄 리유적에서는 커다란 마을의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드러난 혼적으로 보 아 백 개가 넘는 주거지가 있었다고 하며 발굴 조사된 주거지만 30 여 개가 된다 .19) 그리고 한반도 남부지역의 송국리유적과 혼암리유적의 발 굴 조사 결과 청동기시대에 적지 않은 수의 집들이 한 마을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 20) 뒤에 다시 정리하겠지만 추장사회의 단 위영역이 되는 촌 안에는 몇 개의 마을이 있었다. 따라서 사로 6 촌의 각 촌과 같은 추장사회시대의 촌에 살던 인구를 헤아려 볼 수 있다. 당시 주거지의 평균면적은 20m2 가 되고 그 안에는 성 인 2 인과 3 인의
19) 『 우리나라 원시집자리에 관한 연구 』 , 1975, p. 78. 20) 金 元 龍 외, (i' ro.: 岩里 住 居 址 』, 1974 및 姜 仁求 • 李健茂 • 韓永 熙 • 李康承 , 『 송국리 』 I • II, 1979 참조.
자녀가 살았다는 견해가 있댜 2 1) 이에 앞에서 짐작한 촌의 평균 호수를 상기하면 1 개 촌에 대체로 2500 명 정도의 인구가 있었던 셈이 된다. 한편 위에서 추정한 호구수는 추장사회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초기에는 촌락의 수도 적었고 그 규모도 작았다고 여겨진다. 이제 사로 6 촌 추장사회의 촌락 구조가 어떠하였는지 알아보기로 한 댜 추장사회시대에 촌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한곳에 몰려 살았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각 촌에 촌장이 사는 중심적인 마을이 있 었고 그 주변에 보다 규모가 작거나 사회정치적인 비중이 낮은 마을 또는 취락들이 여럿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와 같은 촌락 구조에 대한 이해를 하기로 한다. 앞에서 언급한 직경 10km 정도의 면적은 사회적 • 경제적인 면에서 의미가 있는 공간임을 생각할 수 있다 . 이러한 공간은 대체로 선사시 대 주민들이 자원을 구하던 공간 (ca t chmen t area) 에 해당한다 . 22) 물론 그 안에는 경작지와 그렇지 않은 곳이 있었지만, 그 정도의 지역은 주 민들이 말과 같은 교통수단의 보조 없이 수렵 • 어로 • 채집 그리고 농 경 등을 할 수 있는 공간의 한계라고 한다 .23 ) 그런데 경작지까지의 거 리에 따라 걸어다니는 시간이 달라지는데 이같이 걷는 거리와 그에 따 른 시간의 소요는 catc h ment area 를 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라고 한다. 여기서 농가로부터 거리가 멀어지는 데 따라 경작면적이 줄어드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농가로부터 1km 반경 내의 땅은 100% 경작 이 가능하고, 1km 에서 2km 반경 내의 땅은 50% 정도, 그리고 2km 에서 3km 반경 사이의 땅은 33% 정도가 경작될 수 있다는 연구가 있 다 .24) 이러한 연구결과룰 상기하면 한국 추장사회의 각 촌에도 마을과
21) 金正基, 『韓國堅穴住居址考J 2, 《考古學〉 3, 1974, p. 37. 22) Kent V. Flannery ed., 앞의 책, 1976, pp. 91 ~92. 23) Kent V. Flannery ed., 위 의 책, p. 92 참조. 24) 위의 책, p. 92.
경작지의 거리 관계로 인하여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살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이에 촌락사회의 주민들은 농경을 통하여 보다 큰 수확을 얻 기 위해서라도 여러 개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믿어진다. 그러한 사정은 수렵 • 어로 • 채집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하여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 다. 여기서 주목하려는 것은 지석묘(고인돌)다. 당시의 주거지 분포에 대한 연구가 있다면 이를 통하여 촌의 구조를 해명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일정 지역의 주거지 분포에 대한 고고학적인 연구가 없기에 지석 묘를 당시 촌락 형태를 이해하는 자료로 이용하기로 한다. 그것은 마 을 근처에 지석묘가 축조되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전남 장홍군 일대의 지석묘 분포 조사를 · 주목하기로 한다. 장홍군의 장흥읍에는 32 개 군, 안량면에는 31 개 군, 용산면에는 28 개 군, 관산면에는 37 개 군, 부산면에는 17 개 군, 유치면에는 19 개 군, 장동면에는 12 개 군, 장평면에는 21 개 군 등의 지석묘군과 2251 기 의 지석묘가 조사 보고되었다 . E) 그런데 · 현재 보고된 것보다 많은 수의 지석묘가 추장사회시대에 축조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렇더라도 1 개 면 에 많을 경우 30 여 지석묘군이 축조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사회구조 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26) 지석묘는 당시 주민들이 거주하던 마을 근처에 축조되었다고 생각된다. 파주군 옥석리의 유적에서는 무문토기 를 출토하는 움집 위에 지석묘가 축조된 예를 발견할 수 있다. 동 주 거지에서 발견된 숯으로 C-14 연대측정을 한 결과 2500+105 B.P. 라 는 연대측정치를 얻었다 ZII 이에 무문토기가 출토되는 주거지와 지석묘
25) 崔盛洛 • 幹盛旭, 浪興地方의 先史遺蹟 • 古損. J, 『長興郡의 文化遺蹟 』 , 1989, pp. 55~190. 26) Rich ard Pearson, Lolan g and the Rise of Korean Sta tes and Ch ief d o ms'\ Jou rnal of the Hong Kong Arcfr:J .e olog ica l Soc iet y 7, 1976 • 1978, pp. 88 ~89 참조. 업) 金載元 • 尹武炳, 앞의 책, 1967, pp. 23~49.
는 거의 동시대에 존재한 것을 알 수 있댜 281 이 경우 장홍군에 있는 지석묘군의 근처에도 무문토기를 사용하던 주민들의 주거지가 있었다 고 생각된다 .29 ) 이 경우 장홍군 지역의 촌락사회시대 마을의 수는 지석 묘군 만큼 존재하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생각하 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우선 촌락사회시대 초기에는 많지 않은 수의 마을이 있었고, 또 시간이 지나며 형성된 마을들도 어떠한 이유로건 폐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이 폐기되었던 마을에 새로 운 마을이 들어섰을 수도 있다. 그리고 오랜 기간 존속한 마을에서 지 석묘를 한 곳에만 축조하였다고 보기도 어렵다 . 이에 마을 주변에 몇 개의 지석묘군이 시대를 달리하여 또는 피장자의 세력을 달리하여 여 러 곳에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 이러한 문제는 앞으로 고고학적인 조사에 의하여 해명되기를 기대한다. 여기서 사로 6 촌의 촌락 구조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사로국이 형성 되기 이전 사로 6 촌에는 지석묘를 축조하던 시대가 있었고 당시 여러 개의 마을이 있었다고 짐작된다. 이와 관련하여 慈悲麻立干 12 년에 京 都의 坊里名을 정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주목할 수 있다 .30 ) 여 기서 말하는 경도는 사로 6 촌을 통합하여 형성되었던 사로국이 새로이 편제되었던 신라의 왕경을 의미한다 . 그런데 신라의 전성기에 왕경 안 에는 178,936 호, 1,360 방, 55 리가 있었다고 하는 『삼국유사 』 의 기록 31) 과 왕도의 장은 3,075 보, 광은 3,018 보, 35 리, 6 부가 있었다고 하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주목할 수 있댜 32 ) 위와 같은 사료 중 비록 전성 기 왕경의 호라고는 하지만 178,936 이나 되는 호가 있었다고는 믿을
28) 崔夢龍, r 全南地方所在 支石墓의 形式과 分類」, 센중史學報〉 78, 1978, p. 42. 29) 崔盛洛 • 韓盛旭, 앞의 책, 1989, pp. 162 ~165. 30) 『三國史記』 3, 新羅本紀 3, 慈悲麻立干 12 년조 31) 『三國遺事 』 l, 紀異 2, 辰韓조 . 32) 『三國史記』 34, 雜志 3, 地理 1.
수 없댜 만일 그 수를 그대로 인정한다면 당시 왕경의 인구는 백만 명에 가깝거나 그보다 많을 수 있다 . 33 1 그런데 당시의 정치조직이나 식 량자원의 수급 문제를 감안하면 그와 같이 많은 수의 인구가 신라의 수도에 밀집하여 살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이에 호를 인으로 바꾸어 야 한다고 본다. 그보다 주목되는 사실은 部, 里, 坊의 존재이다. 그 중 방은 신라 王 京 중 王都 의 지역 구분이기에 촌락사회시대의 사로 6 촌과는 관계가 없다. 그에 반하여 부와 리는 촌락사회시대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보 아 틀림없다 신라 왕경에는 6 부, 55 리(또는 35 리)가 있었다고 한다. 이 경우 한 부에 6~9 개 정도의 리가 편제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 다. 자비왕 12 년에 경도의 방리명을 정하였다고 하나 실제는 그 전부 터 있었던 왕경의 지역구분을 토대로 하여 부와 리의 지방행정조직을 편제한 것이 분명하다 . 그런데 신라 왕경 6 부는 사로 6 촌의 영역을 가 지고 신라시대에 행정적으로 편제한 것이고 리는 사로 6 촌의 촌을 이 루었던 마을의 영역을 바탕으로 하여 편제한 지방행정구역이었다고 보 아 틀림이 없다. 한 마디로 사로 6 촌의 촌과 촌을 구성하였던 마을이 신라시대 왕경의 부와 리로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로국 형성 이전 사로 6 촌이 촌락사회 단계에 머물러 있었을 때 각 마을의 주민은 마울 주변에 지석묘를 축조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사로 6 촌의 주민들은 장홍지역의 촌락사회시대 주민들과는 달리 지석 묘를 많이 축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사정은 전라도 지역에 수많 은 지석묘가 발견되고 있는 데 비하여 경상도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지석묘가 발견되고 있는 사실과 일치하는 현상이다. 한편 경주지역은 거의 1 천 년에 걸쳐 신라 왕경으로 기능하면서 이전에 만 들어졌던 많은 수의 지석묘가 파괴되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따라서
33) 촌락문서에 나오는 l 炯당 평균 인구 수는 10 명 정도이다. 이를 가지고 계산하면 왕경인의 수는 더 늘어나게 된다.
경주지역의 지석묘군을 가지고 사로 6 촌의 마을 수 를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부의 전신인 촌은 리의 전신인 마을들 로 나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국립 경주박물관에서 조사한 경주 일대의 지석묘 분포 조사 를 잠시 이용하기로 한댜 34 ) 그 중 알천 양산촌 지역에는 현재 경주시 의 중심부가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신라시대의 왕도가 주로 위치하 고 있었다. 이에 동지역의 지석묘는 많이 파괴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러 나 현재 경주시의 남천 북쪽에서 시작하여 見谷面 일대까지에는 6~7 개의 지석묘군이 조사되었다. 그리고 남천 이남 돌산 고허촌 지역 안 의 서악동, 율동을 비롯하여 내남면까지 포함한 지역에는 7~8 개의 지 석묘군이 조사되었다. 한편 경주시의 낭산지역에서 시작하여 외동면에 이르는 지역에 위치하였던 취산 진지촌에는 9 개의 지석묘군이 조사되 었댜 그런데 금산 가리촌과 명활산 고야촌은 그 영역을 정확하게 단 정하기 어려워 여기서는 일단 지석묘의 수 계산은 하지 않았다. 그에 비하여 무산 대수촌이 위치하였다고 생각되는 건천읍, 서면 지역에는 7 개 정도의 지석묘군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조사 결과를 보면 현재 남아 있는 지석묘군만으로 각 촌에 대체로 6~9 개의 지석묘군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어, 그 정도의 마을 이 있었다고 짐작된다 . 한편 무산 대수촌의 지석묘군 사이의 거리를 보면 1. 5km 에서 4lrm 까지 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사로 6 촌의 마을들도 대체로 위와 같은 정도의 거리를 두고 형성되어 있었다고 여 겨진다.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사로 6 촌의 마울의 영역은 직경 2~3km 또는 3~4lrm 정도의 영역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한다. 결국 이러한 정도의 규모를 가지고 있던 사로 6 촌의 마을들이 신라 왕경의 리로 되 었다고 헤아려진다 . 추장사회시대에 1 개 촌에 있던 몇 개의 마울 중 중심이 되는 마을에는 촌장이 살았고 나머지 마을에는 나름대로 마을
34) 조사 자료의 이용에 협조하여 준 朴方 龍 선생께 감사드린다.
의 장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 여기서 일정 지역의 촌들 사이에, 또 촌 안의 마을 사이에는 사회 • 정치적인 비중에서 차이가 있었고 또 그 규모도 달랐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제 사로 6 촌 추장사회시대에 촌을 구성하고 있던 마을의 영역에 대하여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그 안에는 어느 만 큼의 사람들이 살았을까. 앞에서 추장사회시대 각 촌에는 대체로 500 호 2500 명 정도의 호구가 있었다고 보았다. 여기서 사로 6 촌의 각 촌 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마을의 수도 생각할 수 있다. 즉 신라 왕경 6 부 에 55 개의 리가 편제되었다는 기록을 따르면, 1 개 부에 대체로 평균 9 개의 리가 편제되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 이는 사로 6 촌의 각 촌에 평 균 9 개 정도의 마을이 있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해 준다. 따라서 추장 사회시대에 하나의 마을에는 대체로 50~60 호, 250~300 명 정도의 호 구가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위에서 사로 6 촌 추장사회시대 촌의 규모, 촌을 구성하고 있던 마을 의 규모, 그리고 촌과 마을의 호구를 짐작하여 보았다 . 그 결과 당시 촌락의 규모와 호구수에 대한 대세는 파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어디까지나 대세 파악을 위한 작업일 뿐,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고, 시대가 지남에 따라 대체로 촌이나 마을의 수, 그 안의 호구의 수들이 점차 증가하였을 것이다. 이 역시 앞으로의 연구를 위한 하나 의 가설로 제시하여 두기로 한다. (2) 사로 6 촌의 정치세력 소국이 형성되기 이전 촌락(추장)사회시대의 정치세력에 대한 이해 롤 얻기 위한 자료는 많지 않다 . 그렇더라도 소국형성신화에 나오는 자료와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하여 이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본다. 여기 서 앞에 제시하였던 『삼국사기 』 신라본기에 나오는 시조 혁거세왕 죽
위조와 『삼국유사』 기이편의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의 기록을 주목하면 사로국 형성 이전에 경주지역에는 사로 6 촌이 있었고 각 촌에 촌장세 력이 있었던 것을 알수 있다 . 한편 『삼국유사』 기이편의 가락국기를 보면 수로왕이 가락국을 형성하기 전에 가락 9 촌이 있었고 그 안에 각 기 촌장세력들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프 여기서 촌장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삼국유사』 1, 기이 2, 신라시조 혁거세왕조 에 나오는 6 촌(부)과 촌장 등에 대한 기록을 표로 만들어 한국 추장사 회의 촌장들의 실체에 대한 해명을 하기로 한다.
〈 표 1> F 삼국유사 』 에 나타난 6 촌 (6 부)과 그 지배세력 斯盧六村 王京六部 高麗初六部 六村名 六村長 始臨祖地降 六部名 姓 六部名 部위치의 六관部계의 l 關川楊山村 賜平 甄墓峯 及梁部 李 中興部 (中央) 母 2 突山高樓村 蘇伐都利 兄山 沙梁部 鄭(崔) 南山部 南村 3 茂山大樹村 供禮馬 伊山 牟(潮)梁部 孫 長福部 西村 父 4 觜山珍支村 智伯虎 花山 本彼部 崔(鄭) 通仙部 東南村 5 金山加利村 祗花 明活山 漢岐部 裵 加德部 東村 女 6 明活山高耶村 虎珍 金剛山 習比部 薛 臨川部 東;f t村 子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왕 즉위조에는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록의 나정 근처 숲 속에서 말이 엎드려 울고 있는 것을 보고 그 곳에 가니 알이 있었으며 그 알을 깨자 혁거세가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한 편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6 부조가 각기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 안상에 모여 君主를 모시고 立邦設都할 것을 의논하는 장면이 나온다 . 36) 이 때 나정 근처에서 말이 울고 있어 가 보니 그 곳에 알이 있었고 그 안에
35) 『三國遺事.! 2, 紀異 2, 篤洛國記 36) r 三國遺事』 1, 紀異 2, 新羅始祖 赫居世王조.
서 동남이 나왔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다소의 차 이는 있으나 신라시조인 혁거세의 등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 서는 혁거세의 등장 이전 사로 6 촌장에 대한 기록을 주목하고자 한다. 이 기록은 내용상 빈약하기는 하지만 한국 추장사회에 대한 내용을 가 장 잘 보여주고 있다. 이에 사로 6 촌의 상황을 이해하여 한국 추장사 회에 대한 실상을 파악하는 방법을 취하기로 한다 이에 위의 기록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사로국이라는 소국을 형성한 세력인 혁거세가 등장할 때 경주 지역에는 사로 6 촌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 촌, 취산 진지촌 ,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의 6 촌이 그 것들이다 혁거세세력은 이와 같은 6 촌을 통합하여 사로국이라고 하는 하나의 소국을 형성하였다 . 둘째, 이러한 6 촌에 각기 촌장이 있었던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 삼 국유사』의 기록에는 6 부조와 그들의 자제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삼 국사기 』 의 기록(사료 Bl) 에는 (돌산)고허촌장인 소벌공이 나오고 있고, 『 삼국유사 』 의 기록(사료 B2) 에는 6 촌장의 이름과 그들이 처음 내려온 곳, 그리고 그 후의 6 부의 성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내용 을 읽을 수 있다. 그러면 당시 6 촌장들은 어떠한 성격을 지닌 존재들이었을까. 『삼국 유사 』 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전한 지절 원년(기원전 69) 에 덕이 있는 사람으로 군주를 삼고 입방설도하기 위한 6 촌장들의 회의가 알천 안상 에서 열린 것을 알 수 있다(사료 2). 이 기록을 그대로 믿기에 문제가 있을지 모르나, 그 안에는 일정한 역사적인 사실이 들어 있다고 생각 된다. 특히 6 촌장들이 자제를 거느리고 회의에 참석하였다는 내용은 의미가 있다. 여기에 나오는 자제는 촌장의 자와 제를 뜻하며 촌장의 친족을 의미한다. 이에 당시에는 촌장뿐 아니라 그들의 자제에 해당하 는 친족들이 사회 •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뒤에 보겠지만 촌장 지위의 세습 문제와 관련하여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문제가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혁 거세가 등장할 때 있었다고 하는 6 촌장들이 처음 6 촌에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고 그들이 각기 후일 신라 왕경 6 부의 성씨의 祖로 나오고 있 다(사료 2). 이와 같은 기록을 따르면 사로 6 촌의 촌장들은 혁거세가 등장했을 때 있었던 촌장들이 각기 6 촌의 시조가 되는 셈이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6 부의 촌장들이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그것은 혁거세 동장시 사로 6 촌장은 이미 일정한 사회 • 정치적인 세력으로 성 장해 있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촌장들의 세력 기반은 그 이 전 추장사회 시기에 성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6 촌장의 출생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주목할 수 있다(사료 B2). 6 촌장은 하늘로부터 각기 봉 또는 산에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 다. 이는 대체로 6 촌장의 천강을 의미하는 것이라 믿어진다. 그런데 천 강설화에 나타나는 6 촌의 장들은 어떠한 존재들이었는지 궁금하다. 단 정하기는 어려우나 천강설화는 이주민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삼국사기』에는 혁거세가 경주지역에 등장하기 이전에 조선의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분거하여 6 촌을 이루었다는 기록이 나 오고 있다 .37) 이와 같은 조선유민들은 고조선에서 이주한 세력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 이주한 조선유민들이었는지 잘 알 수 없댜 고조선은 원래 요동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기원전 4 세기 말에서 3 세 기 초에 이르는 기간 중 언제인가 중국 연의 침략을 받아 그 중심을 평양지역으로 옮겼다. 그 후 기원전 190 년대 언제인가 연나라 사람 위 만세력에 의하여 고조선의 준왕은 왕위를 빼앗기고 좌우 궁인을 거느 리고 한반도 남쪽 한지 어디인가에 이르러 왕을 칭하고 자리잡았다고
37) 『三國史記』 1, 新羅本紀 1, 始祖 赫居世 죽위조
한다 . 38 ) 한편 위만조선의 우거왕대에 조선상 역계경은 우거왕과의 갈등 때문에 2 천여 호의 주민을 거느리고 동쪽의 진국으로 갔다고 한다 . 39 l 여기서 말하는 동쪽은 중국인의 관점에서 본 동쪽일 수 있어 역계경이 이주한 곳은 한반도 남쪽일 수 있댜 한편 기록에는 없으나 조선인의 이주는 그 외에도 더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사실로 보면 사로 6 촌에 분거한 조선유민들이 언제 이주한 집단이었는지 단정하기 어렵 다. 한편 대체로 기원전 3 세기 말, 2 세기 초 중국 진 • 한의 교체기에 중국 동북지역의 연 • 제 • 조로부터의 이주민들이 고조선을 비롯한 한 반도 지역으로 이주한 바 있다 전 그 중 위만세력은 고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조선의 왕권을 장악하였다 . 이와 같은 고조선과 중국 계통 이주민들은 추장사회 단계의 사회에 정착하였고 그 중에는 사로 6 촌까 지 온 세력들이 있었다 . 위와 같이 생각하면 한반도 남부 추장사회의 지배세력은 두 계통으 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조선이나 중국 계통의 이주민들이다. 이들은 빨라야 기원전 4 세기 말 이후 이주한 세력들이다. 그 중 고조 선 계통의 주민들은 석관묘를 축조하던 세력이고 위만조선 계통의 주 민들은 토광묘를 축조하던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41) 한편 추장사회 의 또 다른 세력은 지석묘를 축조하던 세력이다. 조선이나 중국 계통 의 유민들이 이주하기 이전에 지석묘를 축조하던 세력들이 있었다. 지 석묘는 정치적 지배자의 무덤으로서 정치적 권력자의 탄생을 보여준 댜 4 2) 따라서 청동기를 사용하고 지석묘를 축조하던 세력들이 기원전 7 세기 이래 한반도 남쪽의 추장세력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기
38) 『三國志』 30, 束夷傳 30, 韓傳 39) 『三國志』 30, 東夷傳 30, 韓傳所收 『魏略』 인용기사 . 40) r 三國志』 30, 東夷傳 30, 減傳 41) 韓炳=, 『 鹿州 朝陽洞 古壤發堀의 意義』, 《韓國考古學年報》 7, 1980, pp. 62~6! 5. 42) 李基白, 『韓國 史新 論』 (新修版) , 1990, p. 32.
원전 4 세기 말에서 3 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요동지역의 고조선은 연에 밀려 그 중심지를 평양으로 옮기게 되었다 . 43) 이 때 고조선 계통 의 주민들이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주하였고, 그들에 의하여 석관묘 도 송국리 둥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축조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4 세기 말 이후 고조선이나 중국 계통의 이주민들이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주한 후 앞에서 언급한 두 계통의 세력들은 어떠한 관 계에 있었을까 한반도 남부에서 지석묘의 축조가 기원전 2 세기까지 내려온 것이 사실이라면 추장사회의 초기 지배세력들은 그 말기까지 존속한 것을 알 수 있댜 거기에 더하여 새로운 세력들이 고조선, 중국 의 정치적 변동기에 동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이주민 들이 추장사회의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되었을까. 잘 알 수 없다. 설령 이들이 새로운 추장세력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기간은 긴 추장사회 의 존속 기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그친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이주민들은 추장사회의 지배세력으로 머물기보다 그 들이 갖고 있던 정치적 실력을 바탕으로 촌락을 통합하여 소국을 형성 하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새로운 이주민들은 처음에 는 소국 정도의 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면 신라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6 촌장과 6 부의 祖에 대한 기록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앞에서 제시한 『삼국유사』의 기록 에 의하면 혁거세가 등장할 때 있었다고 하는 사로 6 촌장이 바로 6 부 의 시조가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44) 이 기록을 따르면 6 촌의 시조가 사로국을 세운 혁거세와 거의 동시에 존재한 것이 된다. 필자는 이와 같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추측이지만 사로 6 촌 의 시조에 대한 인식은 지석묘를 축조할 때부터 있었다고 본다. 물론 새로운 이주민이 6 촌의 촌장세력이 되며 6 촌의 시조에 대한 내용에 변
43) 李鍾旭, 앞의 책, 1993, pp. 166~181. 44) 『三 國遺 事』 1, 紀異 2, 新羅始祖 赫居世王조
동이 생겼을 가능성은 있지만 적어도 추장사회시대의 지배세력들은 촌장의 계보를 파악하고 있었고 그 시조에 대한 인식도 있었다고 생각 된댜 이와 같은 추측이 가능하다면 추장사회의 시조에 대한 신화가 널리 존재하였을 것이다 우 추장사회의 시조신화는 그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 가 있댜 그와 같은 시조신화는 추장의 지위를 강화시키고 유지시켜 주는 장치가 되었을 것이댜 촌락의 시조와 그 뒤를 이었던 촌장들에 대한 기억은 촌장들의 권위를 높이는 기능도 하였다고 믿어진다. 『삼 국유사 』 에 나오는 6 촌의 시조와 촌장에 대한 기록은 변경된 것으로 추 정된다 46) 이와 같은 생각이 타당하다면 사로 6 촌의 시조와 그 뒤를 이 었던 촌장들에 대한 계보를 사로 6 촌의 주민들이 파악하고 있었다고 볼수 있다. 사로 6 촌 추장사회시대 촌락의 시조와 촌장들의 계보에 대한 인식은 당시 보편적으로 존재하였다고 본다. 이와 같은 시조와 촌장 계보에 대한 인식은 사회 •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나의 촌락에 살 던 사람들이 촌락의 시조를 인정한 것은 대체로 그를 시조로 하는 씨 족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뜻한다. 따라서 촌락의 시조는 촌락민의 혈연적인 관계를 정해 주는 기준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한 편 촌락의 촌장에 대한 인식은 촌장이라는 권력자가 있었던 사실을 말 해 준다. 우선 씨족의 존재에 대한 문제부터 보기로 한다. 사로 6 촌의 예를 통하여 이 문제를 정리하기로 한다. 『삼국유사 』 의 기록에 의하면 혁거 세가 동장하던 시기의 6 촌장들이 신라 왕경 6 부에 주어진 鄭, 李, 裵, 崔, 孫 薛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나와 있다 .47) 물론 혁거세의 등장시에
45) 사로 6 촌뿐 아니라 가락 9 촌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 46) 촌락의 시조와 사로국 형성시의 촌장 사이의 계보를 생략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47) 『三國遺事』 1, 紀異 2, 新羅始祖 赫居世王조`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 6 촌장들이 신라시대 6 부에 주어진 성씨의 시 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 오히려 그보다 훨씬 이전 촌락을 이루었던 촌락의 시조들이 있었고 그들을 조상으로 하는 촌락민들이 하나의 혈 연집단을 이루었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촌락민들은 시조와의 관계를 알고 있었기에 그들 사이의 혈연적인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고 여겨진 다. 이는 촌락민들이 촌락 안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를 결정해 주는 장치가 되었을 것이다. 촌장들은 씨족집단의 장이었다고 믿어진 다. 이와 같이 공동 시조를 가지고 있었고 촌장의 계보를 파악하고 있 던 촌락의 주민들은 각기 촌락을 단위로 하는 씨족집단으로 구성되었 다고 여겨진다. 일정 지역의 몇 개 촌락을 통합하여 소국을 형성하기 이전에 한국 추장사회의 각 촌락에는 조상을 달리하는 씨족집단이 존재한 것을 알 게 되었다. 실제로 사로 6 촌의 각 촌에는 하나씩의 씨족집단이 있었고 씨족장인 촌장(추장)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때의 촌장은 각 씨족 집단의 혈연계보상 서열이 앞선 자들이었다고 보여진다 . 48) 그런데 씨족에게는 씨족명이 있었고 씨족을 상징하는 노래가 있었으 며 그 조상에 대한 일정한 제사 의식이 있었다는 견해가 주목된다 . 49) 여기서 사로 6 촌도 각 촌마다 이름이 있었고 또 시조라고 믿어지는 인 물을 당시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그리고 현재는 알 수 없으나 촌락마다 상징적인 노래도 가졌다고 생각된다. 그 당시 에는 농경과 관련된 행사 의식이나 지석묘 축조와 관련된 제사 의식도 있었다고 여겨진다. 한편 씨족은 거주집단이기도 하였으나 주민들이 한곳에 밀집하여 산 것이 아니라 촌 안에 여러 마을을 이루고 분산하여 산 것을 지석묘의 분포를 통하여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여기서 씨족이 나뉜 혈족집단인
48) Elman R. Servic e, Profil es in Eth n olog y, 1971a, p. 302. 49) 위의 책, p. 302.
가계(li nea g e) 집단이 거주집단 (res i den ti al un it)이 된다는 사실을 주목 할 수 있댜 50 1 여기서 사로 6 촌의 예를 통하여 각 촌마다 6~9 개씩의 마을이 있었던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이들 마울은 대체로 직경 2~ 4km 정도의 영역을 갖고 있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단위마을에 살던 주민들이 각기 하나씩의 가계집단을 이룬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각 마을 안에 살던 주민 사이에, 또 마을과 마울 사이에 혈연적인 계보에 따른 서열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 중 마을에서 서열이 높은 자는 마을의 장인 가계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촌 안의 마을 중 서열이 높은 마을의 장은 촌락 전체의 장인 씨족장이 되었다고 여 겨진다. 이와 같은 씨족장이나 가계장들은 그들의 가족과 함께 지석묘 나 석관묘에 매장될 수 있던 존재들이었다 .511 여기서 장홍군의 지석묘 나 송국리의 석관묘를 주목할 수 있다. 앞에서 추장사회시대에는 한 촌락 안에 여러 개의 마을이 있었고 그 안에 살던 가계집단은 촌락 안의 씨족집단에서 차지하는 서열에 의하 여 마을의 서열이 정해져 있었다고 보았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생 각하면 촌 안의 주민들은 씨족집단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그 서열이 정해졌다고 생각된다. 물론 여기서 이야기하는 서열은 혈연적 인 서열을 뜻하며 신분적인 서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 시 아직 국가형성 이후에 나타나는 엄격한 신분제가 없었던 사실로 알 수 있다. 촌 안의 마울들이 형성되는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추장사회시대 농경지 부족 등의 이유로 인하여 일부 가족들이 모체가 되는 혈연집단 의 마을을 떠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새로운 취락을 이루었고 나아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짐작된다 .52l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각 촌에는
50) 위의 책, p. 302. 51) 씨족장들의 매장 시설로 축조된 지석묘는 그 규모도 컸고 일정 지석묘군 안에 축조된 지석묘의 수도 많았다고 여겨진다 .
여러 마을이 생겼고 그 안에 살던 주민들은 각기 새로운 가계집단을 형성해 나갔을 것이다. 촌 안의 여러 마을 중 하나의 마을에는 대대로 촌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촌장이 나왔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촌장(추 장)가계의 세습적 • 우월적인 지위를 생각할 수 있다. 5-1 ) 이 같은 촌장 의 가계와 역대 촌장의 이름은 각 촌에 있던 씨족집단의 성원들에 의 하 여 암송되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소국들이 형성된 이후 촌장세력의 정치적 중요성이 줄어들고 그 계보를 암송할 집단의 힘이 줄어들게 되 어 후일 기록으로 정착할 때는 그 내용들이 거의 탈락되었다고 생각된 다. 국가형성 후에는 촌락을 단위로 일정한 성씨가 부여된 것도 과거 추장사회시대에 촌마다 있었던 씨족집단의 존재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 진다. 한국 추장사회시대 촌락의 촌장(추장)의 지위는 씨족계보상의 상급 서열을 존중하던 원리에 따라 장자상속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짐작이 간다프 그리고 촌장이 거주하는 마을 외의 마을에 있던 가계집단에서 도 그 가계 사이에 존재하는 서열에 의하여 마을의 장이 나오고 그 지 위는 대체로 장자상속에 의하여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촌장을 중심으로 하는 촌 전체의 주민들은 지배자인 촌장으로부터 촌락민 전 원에 이르기까지 혈연에 따른 서열을 가진 하나의 혈연공동체로서의 씨족 (co ni cal clan) 을 형성하였다고 생각된다. 한편 일정 지역의 몇 개 촌락은 서로 일정한 친족으로 생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고려시대의 중홍부는 母, 장복
52) Ch risto p h er S. Peebles & Susan M. Kus, Some Archaeolog ica l Correlate s of Ranked Socie t i es , Ameri ca n Anti qu it y 42-3, 1977, p. 442. 53) Kent V. Flannery , The Cultu ral Evoluti on of Civ i li za tio n s, Annual Revie w of Ecolog y and Sy st e m ati cs 3, 1972 pp. 402 ~403. 54) Elman R. Servic e , Profil es in Et hn olog y, 1971, p. 147. Mashall D. Sahlin s, Trib e smen, 1968, p. 24.
부는 父, 임천부는 子, 가덕부는 女라고 되어 있다.조’ 그런데 고려시대 의 部사이의 관계는 그 이전 사로 6 촌의 전통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사로 6 촌의 촌락들 사이에는 부·모·자·녀와 같은 관 계가 알려져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촌의 형성이 일정한 시기에 동 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의 촌이 형성된 후 이웃한 곳에 새로 운 촌이 형성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위에서 정리한 바에 의하면 한국의 추장사회는 한 마디로 계급사회 (ranked soc i e ty)를 구성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추장 사회는 각 촌락을 단위로 하여 씨족집단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촌락 안에서는 가계집단이 나뉘어 각기 마을을 단위로 하여 살았다고 보았댜 그런데 촌락민 전체를 포함하는 씨족집단에는 씨족장인 촌장 이 있었고 촌락이 나뉘어진 마을의 주민을 포함하는 가계집단에는 가 계장인 마을의 장이 있었다. 이들 씨족장과 마을의 장들은 각기 그들 의 가족들과 함께 지석묘나 석관묘에 매장되던 세력들이 분명하다. 따 라서 지석묘나 석관묘에는 일반 씨족원이나 가계의 성원들이 매장되지 는 않았을 것이댜 여기서 한국의 추장사회가 촌락민 사이에 사회 • 정 치적인 면 또는 경제적인 면에서 서열화된 계급사회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의 계급사회는 씨족과 가계라고 하는 혈연조직을 근 거로 한 것임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지배계급과 일반민 사이에 혈연 적인 원리가 작용한 것을 뜻한다. (3) 사로 6 촌의 정치조직과 운용 그리고 그 변동 국가형성 이전에 존재하던 한국의 추장사회는 대체로 직경 10km 내 외의 촌락이 독립정치체가 되었으며 그 안에는 촌장이라고 하는 정치 적인 지배자가 있어 촌락을 다스렸다고 생각하여 보았다우 그리고 이
55) 『三國遺事』 1, 紀異 2, 新羅始祖 赫居世王조
와 같은 촌락사회는 고고학적으로 볼 때 지석묘와 석관묘를 축조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SI) 이제 한국의 촌락(추장)사회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문제를 정리하기로 한다. 우선 지석묘 분포에 대한 조사 결과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석묘 룰 축조하던 사회는 분명 계급이 나뉜 사회였다. 이는 정치적 권력자 가 등장한 사회를 뜻한다우 실제로 추장사회시대의 정치적 지배자들의 매장 시설로 생각되는 지석묘 중에는 규모가 큰 것들이 있다. 이 같은 지석묘를 축조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을 동원할 수 있었고, 또 그 안에 매장될 수 있던 주인공들은 다름 아니라 당시 사회의 지배계급에 속한 자들이며 동시에 정치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기 어 렵지 않다. 이와 같은 지배계급과 권력자의 존재는 추장사회시대에 사 용되었다고 생각되는 청동검과 청동경과 같은 청동제품의 존재로 미루 어 보아도 알 수 있다 .59) 이들 유물은 일반 씨족원으로 이루어진 계급 의 성원들까지 보편적으로 소유할 수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위와 같이 생각하고 보면 추장사회시대 사로 6 촌의 각 촌의 구조를
56) 이와 같은 필자의 견해는 金貞培의 주장과는 크게 다르다. 金貞培는 『三國志』 東夷傳에 보이는 三韓社會를 c hi e f dom 단계로 보는데 비하여(金貞培, 『蘇塗의 政治史的 意味J, 샌츈史學報》 79, 1978, pp. 1~27 ; 『君長社會의 發展過程試論』, 《百濟文化) 12, 1979, pp. 75~87), 필자는 三韓社會는 c hi e f dom 단계를 넘어선 국가단계로 보고 있다. 예컨대 三韓小國들 중의 한 소국이었던 斯盧國은 c hi e fd om 단계의 斯盧 6 村을 통합하여 형성된 국가였던 것을 들 수 있다. 따라서 c hi e f dom 을 번역하는데 있어 三韓小國의 지배자를 지칭하는 君長을 사용하여 君長社會라고 하는 것은 따를 수 없다. C hi e f dom 은 盤洛 9 村長을 지 칭 한 웁長이 란 용어를 사용하여 曾長社會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추장들이 다스리 던 영역이 촌락이었기에 村落社會라고도 할 수 있다. 57) 한반도 납부지역의 지석묘 축조시기인 기원전 7 세기에서 2 세기 사이에 요동고조 선시대가 끝나며 고조선계 주민들이 이주하여 들어와 고조선 계통의 석관묘를 축조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58) 李基白, 앞의 책, 1990, pp. 31 ~32. 59) 尹武炳, r 靑銅器』, 『한국사』 1, 1973, pp. 298~337.
주목할 수 있다. 사로지역의 촌락은 몇 개의 마을이 모여 이루어졌다 고 생각하여 왔다. 이는 촌락사회의 영역 안에 몇 개의 마울이 있었던 것을 뜻한다. 여기서 이와 같이 촌락을 구성한 마을을 촌락사회의 기 본적인 단위로 보고 사회 • 정치적인 면에서 제 1 단계의 조직으로 생각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마을에는 마을의 장이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마을 중에는 촌락 전체 씨족의 장이며 그가 속한 마을뿐 아니라 촌락 전체를 다스리던 촌장이 살던 마울도 있었다. 이에 이와 같은 촌장이 다스리던 촌락 전체의 정치조직을 1 단계의 마을보다 한 단계 위의, 제 2 단계 사회 • 정치 조직으로 보면 어떨까 한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촌 락사회를 2 개의 단계로 나누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촌락사회 의 마을들 중 마을의 장이나 촌장이 사는 마을들 사이에는 차이보다는 동질성이 강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로 6 촌 촌락사회의 마울들을 도시발전단계에 비추어 보면, 마을들 사이에 큰 차별은 별로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단지 촌장이 살던 마 을이 촌락의 중심 되는 위치에 있었다고 여겨지며 그 규모도 다른 마 을들에 비하여 다소 컸으나 그렇다고 하여 마을 (v ill a g e) 의 단계를 넘 어서서 읍락(t own) 의 단계에 들어설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촌 락의 여러 마을에 있는 집들은 마을의 중심에 몰려 있었고 그 주변에 지석묘가 축조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마을의 모든 집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 안에는 농경 등의 이유로 인하여 집들이 분산되어 있기도 하였다고 여겨진다f,() ) 여기서 앞서 정리한 것과 같이 사로 6 촌의 촌락 안에 몇 개씩의 마 을이 있었고 그러한 마을에는 마을 장들의 무덤으로 지석묘군이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촌이나 마을의 세력의 우열, 촌의 존속 시기 의 차이에 의하여 지석묘군의 규모에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리 고 지역에 따라 문화적인 차이에 의해 지석묘와 석관묘 동 무덤의 축
60) •K ent V. Flannery , 앞의 책, lrr76, p. 92 참조
조 형태에도 차이가 났다고 여겨진다 . 그렇더라도 이와 같이 지석묘군 이 분산되어 여러 곳에 분포되었던 사실은 당시에 촌락을 통합한 정치 세력 또는 사로 6 촌 지역 전체를 통합하여 다스릴 만한 단일한 정치세 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만일 사로 6 촌 전체를 다 스리던 지배자가 존재하였다면 그들이 살던 지역이 정치중심구역이 되 었을 것이고, 그 근처에는 그들의 권력을 상징하는 유적과 유물이 집 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석묘의 분포를 보건대, 사로 6 촌 전체를 다 스린 지배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그런데 같은 촌 안의 여러 지석묘군은 그 규모와 수적인 면에서 차 이가 난다. 하나의 촌 안에 있던 여러 개의 지석묘군 중 규모가 크고 수가 많은 지석묘군이 촌 전체룰 다스린 촌장(추장)의 매장 시설이었 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사회의 지배세력들은 그 집단울 지속할 수 없 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대를 이을 후손이 끊기 거나 전쟁 동의 이유로 일정 가계의 성원이 절멸되어 그 집단을 유지 할 수 없는 경우가 생겼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경우 촌락 안의 다른 마을에서 촌락을 지배하는 세력가인 촌장이 나올 수밖에 없 을 것이다. 실제로 촌장을 배출하던 가계가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면 다른 가계의 세력자가 촌장의 지위를 차지하였다고 여겨진다. 이제 사로 6 촌 추장사회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촌장 에 대하여 주목하기로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왕조의 기록에 나오는 신라의 건국신화를 보면 전한 지절 원년(기원전 69) 에 사로의 6 촌장들이 각기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 안상에 모여 덕이 있는 사람을 군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할 것을 의논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이 기록만으로 본다면 사로국이 형성되기 직전 6 촌장들 은 하나의 완만한 협의체인 6 촌장 회의체를 형성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회의에서 군주를 모셔 나라를 세워야 하겠다는 것은 다름아니라 사로국이 형성되기 이전에 사로 6 촌을 통합하여 통치할 단
일한 정치적 지배자와 그럴 만한 정치조직이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 준 다. 이는 6 촌장들이 비록 완만한 회의체 또는 연맹체를 구성하고 있기 는 하였으나 각 촌장세력이 각기 촌락을 다스리는 정치세력집단으로 독립하여 있었던 것을 뜻한다 자연 당시의 촌장들은 각기 독자적인 정치조직과 통치영역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같이 독립된 정치적 지배자였던 촌장이 가지는 정치적 성격은 어 떠한 것이었을까. 사로 6 촌장을 예로 들면 그들은 각기 일정한 혈연집 단인 씨족에서 혈연상 서열이 높았을 것이다. 그 결과 촌장의 정치적 인 활동도 혈연적인 원리에 기초를 두었다고 생각하여 보았다. 따라서 촌장들이 가지고 있던 개인적인 능력만으로 촌락민들을 마음대로 통치 하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 촌장은 씨족 계보상의 높은 서열에 의하 여 그 지위를 차지하였다고 생각되므로 그 씨족집단에 대한 지배도 혈 연적인 원리를 따라서 행해졌을 것이다. 한 마디로 사로지역의 추장사 회는 행정적인 방법이 아닌 혈연적인 방법에 의하여 다스려진 사회라 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추장사회의 촌장들은 어떠한 이유로 대두하였는지 보기로 한 다 . 이와 관련하여 농경에 대한 요구, 동일 사회 내의 교환과 연맹의 필요, 전쟁의 수행 등을 주목할 수 있다 .61) 사로 6 촌 추장사회의 촌장 들은 대체로 위와 같은 이유로 대두한 것으로 여겨진다. 지석묘를 축조하던 촌락사회는 거의 틀림없이 농경을 주로 하며 정 착생활을 하던 사회였다. 그 결과 정착생활을 하며 농경을 계속하고 점차 인구가 증가하였다고 여겨진다. 이 같은 인구의 증가는 새로운 마을의 형성을 불러왔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촌락도 자연적인 조건 에 따라, 마울에 따라 생산하는 품목이 다른 것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농경을 수행하는 과정에 점차 어디에 무엇을 심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결정할 필요가 생겼고 그 결과 촌장들이 동장하였을 가능
61) Ch rist o p h er S. Peebles & Susan M. Kus, 앞의 뉜곤, l 蜀 p. 443.
성이 있다 한편 촌장(추장)이 등장한 또 다른 이유는 교역에서 찾을 수 있다 . 하나의 촌락도 그 지리적인 위치에 따라 생산하는 물건이 다를 수 있 었다. 이 경우 촌장이 중심이 되어 서로 다른 생산물을 교환하는 일을 주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다른 촌락사회와의 교역도 주관하 였을 것이다 실제로 바닷가의 소금, 해산물 등은 내륙지역의 농산물과 교역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다음은 전쟁의 수행 과정에서 촌장세력이 성장하였을 가능성을 들 수 있다. 실제로 지석묘 축조시기와 때를 같이한다고 생각되는 무문토 기를 사용하던 시대의 주거지 중 많은 수는 화재에 의하여 폐기된 것 을 볼 수 있다. 이는 바로 촌락사회시대에 전투가 많았고 또 그로 인 하여 주거지가 화재를 만나 폐기된 경우가 많은 것을 나타내 준다 .@ 위에서 열거한 몇 가지 이유는 촌장(추장)세력의 형성과 성장 이유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같은 촌장세력의 형성 이유는 촌장의 역할과 관 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여기서 촌장의 역할에 대하여 잠시 정리하기로 한다. 농경이 발달하 면 인구가 증가하고, 인구가 증가하면 경제 • 정치 • 종교 상의 중심지 가 생겨난다. 그런데 인구 증가의 요인은 농경기술의 발달에 의한 것 만이 아니고 생산과 분배의 효과적인 통제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c hi e f dom 은 재분배사회로서 재분배를 수행하기 위한 영속적인 중심기 구가 있다고 한다. 한편 재분배의 이유는 지역적 차이 및 기술적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정착생활을 하면 할수록 재분배의 필요성온 커진다. 여기에서 재분배를 위한 지도력이 필요해진다. 이 경우 교환이 가능한 잉여생산물이 증가하고 이는 토기, 청동기의 제조를 일정 집안 에서 독점케 한다. 그리고 추장은 그의 씨족원들로부터 물건을 받아 이들 기술자 또는 그의 가족을 먹여 살린다. 이 같은 재분배가 계속되
62) 金正基, 앞의 논문, 1974, pp. 45~48.
면 점차 계급이 생겨나게 되고 추장사회는 그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낸 다고 한다. 이들 촌락사회는 이웃한 촌락사회와 공동작업의 필요상 자 주 협동을 하였다고 한다 63) 위와 같이 재분배를 강조한 인류학의 이론을 한국의 추장사회에 그 대로 적용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재분배를 강조한 이 론에 반론이 제기된 바도 있다. ~) 그렇더라도 한국의 촌락사회를 이해 하는 데 있어 위와 같은 이론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한국 촌락사회의 촌장들은 그들의 씨족원인 촌락민들로부터 생산물을 거두어 일정한 장 소에 저장하였고, 필요에 따라 그것을 잔치 등의 형식을 빌어 씨족원 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생각된다. 이 경우 촌장의 관대함이 작용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행위는 재분배에 해당할 것이다. 어찌되었든 위와 같은 촌장의 활동을 위해서는 그 중심지가 필요하 였다고 여겨진다 . 그러한 기능은 촌장이 살고 있던 마을에서 담당하였 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촌장은 대체로 씨족장에 해당하는 존재로서 그 가 살던 마을은 촌락 내의 다른 마을보다는 규모가 컸을 것으로 추정 된다. 그러나 그 증거는 고고학적인 면에서 찾아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같이 촌장이 살던 큰마을에는 촌장 이외에 그의 가족과 가까운 혈 족관계에 있던 가계원들이 살았고 그들이 청동기 등 권위를 나타내는 물건을 제작하였다고 보인다. 이러한 큰마을은 촌락의 다른 마을에 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살았고 엘리트 거주지역이 되었을 것이다. 지역에 따른 차이는 있으나, 이러한 촌락사회에 존재하였던 무문토기를 출토 하는 주거지를 보면 대부분의 경우 기본적으로 농경인들의 거주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사회에는 완전한 신분적인 구별을 나타 내 주는 고고학적인 혼적을 찾기는 힘들다. 결국 촌장을 둘러싼 일정
63) Elman R. Servic e , Prim i tive Soc ial Orga niz a tion , l'il llb , p. 148. 64) Ch rist o p h er S. Peebles & Susan M. Kus, 앞의 논문, l 頭 pp. 423 ~4'l:1 .
집단의 주민들이 지배적인 계급으로 성장은 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그들의 씨족원들과 동일한 혈족집단으로서의 유대관계는 그대로 유지 하였다고 보여진댜 촌장들은 일정 씨족집단의 세습적이고 우월적인 지위에 의하여 그 자리에 오른 존재들로서, 이들을 중심으로 상급 지배계급이 형성되고 나머지 촌락민들은 일반민의 계급으로 되었다 . 이 경우 촌장은 태어날 때부터 지배계급으로 되었으며 신성함이 함께하였다고 한다. 이에 촌 장들은 정치적인 지도자일 뿐 아니라 제사장의 임무도 지녔다고 한다. 이러한 촌장은 수천 명의 인구를 통제하였다. 촌락사회의 이러한 특권 충의 존재는 소아 매장 시설에서도 찾을 수 있다 . 65) 한국의 경우 지석 묘 중에는 성인을 매장할 수 없는 조그마한 것이 있다 . 또 신창리의 옹관묘는 유아 매장 시설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어 66) 위와 같이 생각하 여 보았다. 여하튼 두 개의 계급 (rank) 으로 이루어진 촌락사회는 그 구분이 경 제적인 것이 아니고 기본적으로 사회적 •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러면서 도 촌락사회는 아직 신분이 나뉘어 있지는 않았다. 이러한 촌락사회는 혈연에 근거한 사회였으며 촌장의 관대함이 작용하였고 그에 의한 재 분배가 행하여졌다. 이러한 촌장은 농경의 통제, 전쟁의 지휘, 교역의 수행 등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였다. 그리고 촌장 자신은 사회 • 정치 적인 지도자일 뿐 아니라 제사장의 임무도 지녔기에 한국의 촌락사회 는 제정일치의 사회였다.oi l 이 같은 촌락사회에는 관직, 관등, 관부와 같은 정부조직은 없었으나 촌장을 둘러싼 o ffi ce 와 이를 통한 정치적 활동과 권력행사가 있었다. 사로 6 촌 추장사회에는 후일 국가가 형성된 이후 등장하는 지방통치
65) Kent V. Flannery , 앞의 논문, 1972, pp. 402 ~403. 66) 金元龍, 『新昌里 壅稽 墓 地 』 , 1964, p. 46. 67) Elman R. Serv ice , 앞의 책, 1971b, p. 162 참조.
조직은 있을 수 없댜 그러나 촌과 촌 사이에는 각기 경계가 있었다고 여겨진댜 그러한 경계는 산과 내와 같은 자연적인 조건에 의하여 정 해졌으며 촌의 영역은 인간이 말과 같은 교통수단의 보조 없이 활동하 기에 쾌적한 직경 10lrm 내외의 공간이었다고 여겨진다. 촌과 촌 사이 에는 교역이 이루어졌을 것이댜 그러한 사실은 지역에 따른 자원의 분포 차이에 기인하였댜 그런데 촌락의 경계는 함부로 넘나들 수 없 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댜 그것은 촌락사회의 전통을 보여주는 것이 라 여겨지는 동예의 책화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촌장의 사회 • 정치적인 권력 행사는 해당 촌 안에서 행사되었다. 그 런데 이 권력 행사는 혈연적인 원리를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국가형 성 이후의 정치적인 권력자들에 비하여 촌장의 권력에는 한계가 있었 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비록 소국이라고 하지만 사로국의 예만 보 더라도, 6 촌을 통합한 영역을 통치하는 정치적인 지배자가 등장한 것 으로 알 수 있다. 이는 정치적인 면에서 촌락사회와 소국 사이에 커다 란 차이가 있었던 것을 뜻한다. 촌락사회에서 한 단계 발전한 정치조 직이 소국 단계인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한편 촌락사회의 촌장(추 장)은 시조신화로써 그 지위를 유지하고 씨족장으로서의 지위를 차지 하는 기준으로 삼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장치를 통하여 촌장들은 그 권위를 부여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사로 6 촌 안의 마을이 처음부터 모두 형성 된 것은 아니었다. 일정한 마을이 형성되고 그 안의 인구가 늘어나게 되며 이웃한 지역에 새로운 마울이 형성되었다고 본다. 새로운 마을은 원래의 마을에서 일부 가계집단이 떨어져 나가 이룰 수 있었다. 이에 촌락 안의 마울에 사는 주민들은 공동의 조상을 가졌다고 생각하였으 며 자연 이들은 씨족집단을 이루었다. 그런데 일정 지역의 촌락들도 처음부터 모두 형성되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실제로 사로 6 촌이 추장사회 시기의 초기부터 형성된 것은 아니었고 점차 늘어나 추장사
회의 말기에 이르러 6 촌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 여기서 한국 촌락사회 의 변동에 대한 문제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추장사회를 변동시킨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촌락 간의 갈등과 경쟁을 들 수 있다. 촌락사회시대의 주거지들이 화재로 인하여 폐기된 예가 많은 것은 당시 전투가 많았다는 증거가 된다. 그 리고 당시 사용되었던 청동검과 같은 무기는 단순히 지배자의 권위만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그 때의 전투는 촌락 안의 마을 사이에 벌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 중 촌장을 배출하던 가계집단의 세력 축소가 생길 경우, 촌락 내의 다른 마울에 살던 가계집단이 전투 를 벌여 촌장의 지위를 빼앗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 되는 전투는 촌락 간의 전투이다. 촌락 간의 전투는 촌락의 내부 통합 을 촉진하였다고 생각된다. 다른 촌락과의 대립과 경쟁은 촌락 내의 안정도 가져왔다고 생각된다 . 외부로부터의 위협은 촌락사회의 변동을 이끄는 한 가지 요인이 되었던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 둘째, 추장사회시대 촌락 간에 있었던 교역이 촌락사회의 변동을 가 져왔던 점을 주목할 수 있다 . 그와 같은 교역을 통하여 생활 필수품만 이 거래된 것이 아니고 청동기 • 옥과 같은 물품도 교역되었음에 틀림 없다. 그리고 그러한 교역 과정을 통하여 지석묘 • 석관묘의 축조기술, 청동기의 제작기술, 토기 제작기술, 농경 기술 둥이 전해졌다고 믿어진 다. 그러한 과정에 새로운 개혁이 한국의 추장사회에 전파된 것을 생 각할수 있다. 셋째, 하나의 촌락사회에 일어난 조직상의 변동은 대체로 그 사회 • 정치 조직이 복잡하게 발전하여 나가는 것을 뜻하는데 이러한 변동은 다른 지역의 촌락사회에도 영향을 미쳐 새로운 제도의 탄생을 가져왔 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실제로 촌락사회 중 이웃한 지역에 국가가 성 장하여 있을 경우 그와 같은 국가로부터 사회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영향은 앞에서 언급
한 것과 같이 갈등과 경쟁을 통하여 받을 수도 있고 교역을 통하여 이 루어지기도 하였다. 여하튼 촌락사회의 일정 세력이 그와 같은 영향을 받게 되면 그러한 영향은 곧 이어 이웃한 다른 촌락사회에도 전해졌다 고 헤아려진댜 넷째, 국가 단계에 살던 이주민들이 촌락사회에 이주한 것을 촌락사 회의 변동 요인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예는 사로국의 형성신화 를 통하여 알 수도 있다. 사로국의 시조인 혁거세는 모두 이주민이었 음에 틀림이 없다. 여기서 이주민들이라고 하여 모두 촌락사회룰 국가 단계로 발전시킨 것이 아닌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추장사회시 대에도 이주민들은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촌락사 회에서 다른 촌락사회로 이주할 경우 새로운 정착지에서 사회 • 정치적 인 세력집단으로 성장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대체로 이주민들 중 새 로이 정착한 지역에서 정치적인 세력으로 자리잡은 것은 국가 단계의 사회에서 어떠한 이유로건 이주한 세력이었다고 믿어진다. 신라의 모체가 되었던 사로국에는 조선유민과 중국 진 • 한 교체기 연·제·조 지역으로부터 온 세력이 일부 이주하였던 것을 알 수 있 다 우 이와 같은 이주민들이 언제 경주지역에 나타났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고조선이 요동지역을 상실하였던 기원전 4 세기 말, 3 세기 초에 고조선계의 유민이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 고조선의 준왕이 쫓겨나고 위만이 왕위를 장악하였을 때, 또 위만조선시기 및 위만조선 의 멸망과 漢 四郡의 설치 시기에 고조선계의 이주민들이 사로국을 비 롯한 여러 지역으로 퍼졌다고 여겨진다. 여기서 한반도 남부지역의 추 장사회에 새로운 변동이 생겨난 주요한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4 세기 말에서 3 세기 초부터였고 기원전 3 세기 말 2 세기 초에 보다 많은 이주 민 세력이 등장하였으리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68) 『三國志』 30, 東夷 傳 30, 韓 傳에는 辰 韓 에 秦 役을 피하여 온 〈 古之亡人〉 이 있 었다고 하는데 연 • 제 • 조로부터 온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여겨진다.
고조선 계통이나 중국 계통의 이주민들은 이미 발달된 정치조직을 갖고 있던 국가로부터 온 세력들이다. 그들이 이주 즉시 국가를 세울 수 없었던 것은 추장사회가 가지는 정치적인 한계 때문이었다고 여겨 진다. 추장사회는 그대로 국가가 형성되기에는 아직 그 사회 • 정치 조 직이 성숙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에 고조선계의 이주민 들이 등장한 후 일정 기간을 지난 후에야 소국형성의 기운이 무르익은 것을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 건국신화를 보면 전한 지절 원년(기원전 69) 에 사로 6 촌장들이 알천 안상에 모여 국가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기 위한 회의를 여는 장면이 나온댜 이는 당시 6 촌의 세력들이 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던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 다. 당시 국가를 세울 것을 의논한 촌장들은 지석묘를 축조하던 시대 부터 있었던 촌장 계통이기보다 조선계의 이주민들이었을 가능성도 있 다. 그렇더라도 조선계 이주민들이 촌장의 지위를 장악한 것은 그 기 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여기서 한반도 남부지역의 촌락사회 중에는 부여와 고구려로부터 온 세력이거나 고조선계의 세력이 이주하여 일정 기간 동안을 거치며 그 세력을 신장시킨 과도기적인 시기가 있었던 사 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과도기적인 시기는 추장사회에 중요한 변동이 일어났던 시기였댜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추장사회는 국가를 형성할 바탕이 마련되는 변동을 겪게 되었다. (4) 사로 6 촌 추장사회의 특성 지금까지 사로 6 촌 추장(촌락, 촌장)사회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를 정리하여 왔다. 이러한 추장사회는 초기국가 형성 과정에서 매우 중요 한 정치발전단계가 되고 있다. 그것은 한국의 초기국가들이 추장사회 단계를 거쳐 소국 단계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로 6 촌과 사
로국은 엄연히 구별되는 정치발전단계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사정은 가락 9 촌과 가락국 사이에도 볼 수 있다 . 그 밖에 자료가 없지만 한반 도 남쪽에서 성장하였던 여러 소국들도 소국형성 이전에 촌락(추장사 희) 단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사정은 요동지역에서 한 반도 북부지역에 분포된 지석묘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이제 앞에 서 정리한 내용을 요약하여 맺음말로 삼고자 한다 . 사로 6 촌 추장사회의 독립된 정치체인 촌락은 대체로 직경 10 여 km 정도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시간과 지역에 따라 차 이는 있었으나 대체로 500 호, 2500 명 내외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고 여 겨진댜 그리고 촌락의 주민들은 농경지와의 거리 등으로 인하여 여러 개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마을은 직경 2~ 4km 정도의 공간으로 이루어졌다. 사로 6 촌 추장사회의 단위 촌락사회에는 씨족집단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촌장(추장)세력을 씨족장으로 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촌락사회 의 주민들은 여러 가계집단으로 나뉘어 각기 촌락 안의 마울에 거주하 였다 . 촌장이 살던 마을은 그 규모도 컸고 그 마을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지석묘가 축조되었으며 그 수도 많았다고 여겨진다. 한편 씨족장들 은 그 시조에 대한 설화를 알고 있었고 촌락의 시조로부터 전해 오는 촌장의 계보도 알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촌락사회는 촌장이나 가계장을 지배계급으로 하고 그 밑에 씨족원들이 있었다. 그런데 촌락 사회는 지배세력과 촌락민 사이에 혈연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기에 지배세력들은 촌락민을 다스리는 데 혈연적인 원리를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 추장사회의 마을들에는 수십 호의 집과 수백 명의 주민들이 살았다. 그리고 그러한 마울들은 아직 vil lag e 단계의 도시발전단계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을 간에는 서열이 있어 촌장인 씨족장이 머무는 마을의 서열이 높았다고 여겨진다. 촌장들은 촌락민들과 혈연적인 관계를 유
지하면서 전투 • 교역 • 농경 • 재분배 동을 주관하였다고 믿어진다. 이 들 촌장들은 정치적인 지배자이기보다 지도자적인 성격이 컸다고 추측 된다. 촌장들은 직경 10 여 km 의 공간을 말이나 다른 교통수단의 도움 없이 다스렸다. 사로 6 촌 추장사회는 역사적인 변동을 거쳐 발전하였다. 우선 하나 의 촌락사회에서는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가계가 나뉘어 새로운 마을 들이 늘어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사로지역에서와 같이 일정 지역에서는 촌락사회의 수도 늘어나게 되었다. 사로 6 촌 역시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씩 늘어나 6 개의 촌락사회가 이루어졌다. 그러한 촌락 간에는 경쟁 • 전쟁이 있었고, 교역관계도 있었다. 그리고 한 촌락의 정치적 • 사회적 변동은 다른 촌락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 로 생각된다. 또한 촌락사회에 새로이 들어오는 이주민들은 촌락사회 의 여러 부문에 걸쳐 변동을 불러왔을 것이다. 한국의 촌락사회는 그 형성기를 거쳐 완성기에 이르고 후에는 촌락연맹기에 이론 것을 알 수 있다. 사로국이나 가락국의 형성 직전에 동 지역에서는 촌락연맹이 형 성된 것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사로 6 촌 촌락(추장)사회에 대하여 알아 본바, 그 내용이 인 류학 • 고고학에서 말하는 정치발전단계인 c hi e f dom 에 해당한다는 생 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c hi e fd om 은 추장사회, 촌락 사회, 촌장사회로 부를 수 있다. 이 같은 추장사회 단계를 거쳐 한국사 상 나타나는 여러 소국들이 형성되었다. 신석기시대의 부족사회에서는 소국형성이 불가능하였다고 믿어진다. 이에 한국의 추장사회는 소국이 라는 국가 단계로 정치적인 성장을 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계가 된 것 을 생각할수 있다.
2 소국 : 백제 초기국가로서 십제의 형성 『삼국사기』 23, 백제본기 1, 백제시조 온조왕 즉위조에는 고구려에서 이주한 온조집단이 하남 위례성에 도읍하여 세운 나라의 이름이 십제 였다고 나온다. 이 십제는 고구려에서 이주하였던 비류집단이 미추홀 에 세웠던 나라를 통합한 후에 백제로 국호를 바꾼 것으로 되어 있 다 . 69) 그 밖에 중국측 사서인 『 주서』, 『북사』 및 『수서』 등의 사서에는 백제의 시조가 구태였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이미 정 리한 것과 같이 구태는 백제의 시조일 수 없다 .70) 따라서 십제의 국가 형성에 대한 자료를 달리 구할 수도 없는 현재 우리는 『삼국사기』 온 조왕 즉위조에 나오는 온조의 십제 건국설화를 가장 중요한 자료로 주 목하지 않을 수 없다. 백제의 모체가 되었던 십제의 국가형성에 대한 온조설화는 일찍이 정착되어 덜 신화화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건국설화를 역사적인 연구의 사료로 이용하기에는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 다. 우선 십제의 건국설화인 온조설화는 구전을 통하여 전해지는 과정 에 십제의 실제 건국 사정에 대한 내용이 변경되었다고 헤아려진다. 사실 신화나 설화는 전승 과정에서 그 내용이 확대되거나 축소되기도 한다. 신화나 설화는 구전집단의 필요에 따라 내용과 양식의 변경이 허용되는 특성이 있다. 그렇더라도 백제의 모체가 되었던 십제의 건국 설화는 십제의 소국형성과 미추홀 소국의 통합이라는 정치발전단계를 전하고 있고, 십제의 건국세력, 건국시기, 국가형성 장소 및 그 영역에 대한 자료를 전해 주고 있다. 온조설화는 십제의 건국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을 전하고 있어 그 자 체가 역사적인 자료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설화에 나오는 시간이
69) 『三國史記』 23, 百濟本紀 1, 百濟始祖 溫祚王 즉위조. 70) 李鍾旭, 『百濟의 建國說話』, 《百沿論鼓} 4, 1994, pp. 139~141.
압축되어 있고, 많은 사람으로 이루어진 정치세력집단을 개인으로 바 꾼 것을 볼 수 있다. 역사학자의 임무는 바로 그러한 시간과 정치세력 의 변동을 파헤침으로써 역사적인 실상을 찾는 것이라고 하겠다. 아래 에서는 온조설화에 나오는 정치세력과 시간을 역사적인 것으로 바꾸는 작업을 통하여 백제의 모체가 되었던 십제의 국가형성에 대한 문제들 을 알아보기로 한다. 지금까지 제기된 백제의 국가형성에 대한 견해들을 보면 『삼국사기 』 온조왕 즉위조에 나오는 건국설화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 백제의 건국설화에 대해서는, 온조를 십제의 건국자로 기 록한 설화에 이어 〈 一云 始祖 건 B 流王〉 하고 나오는 협주 기록을 가지 고 백제의 시조가 온조이거나 비류라고 생각하거나 백제의 왕실에 온 조계와 바류계가 서로 교체되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들이 나왔다. 그러 나 뒤에 알아보려는 바와 같이 온조는 십제의 건국세력이고 비류는 미 추홀 소국의 건국세력이었다. 따라서 비류를 백제의 건국세력으로 보 거나 왕실세력으로 보는 견해는 따를 수 없다. 둘째,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하는 견해의 문제점을 들 수 있다. 일본인들 중에는 근초고왕 이전 계왕까지의 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견해를 제기한 사람도 있다 .71) 이와 같은 견해는 『삼국사기 』 에 나오는 백제사의 반 이상을 말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백제가 왜의 보호 하에 나라를 유지하였다는 견해도 나오게 되 었다 .72) 그에 비하여 이병도는 고이왕대 (234~286) 부터 믿을 수 있다고 하였다 .73) 그 후 온조왕 이후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믿는 견해가 제기
71) 津田左右吉, r 百濟i괘십寸& 日本꿈紀(7)記載 」 ,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8, 1921, pp. 105~138. 今西龍, 『百濟史硏究』, 1933, pp. 1 ~267. 72) 今西龍 위 의 책, p. 283. 73) 李丙if.i, r 三韓問題의 新考察」, 《店檀學報》 6, 1936, pp. 71~96.
되었다 .7 41 또한 온조왕대의 기록에 나오는 사건들을 분해하여 그 이후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났던 사건으로 다루는 절충론적인 견해도 있 다 ? 필자는 온조왕대의 기록이 오히려 그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압축하여 뒤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i 61 『 삼국사 기 』 초기 기록을 불신하고는 백제 초기의 역사를 해명할 수 없다. 실 제로 백제 초기에 그 역사에 대한 전승이 이루어졌으며 그러한 전승 내용이 적어도 근초고왕대에 고홍이 『서기 』 를 저술할 때에는 문자로 정착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당시 백제사에 대한 전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사실들을 전하였으나 후에 그 내용들이 생략되 고 빠진 것으로 생각된다. 『 삼국사기 』 백제본기의 초기 기록들을 부정하거나 분해하여 다루려 는 연구자들의 문제는 그러한 기록을 제대로 이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 다. 필요에 따라 기록을 마음대로 무시하고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강조 하는 방법은 백제사를 왜곡시킬 수밖에 없다. 본고에서는 백제본기의 초기 기록을 있는 대로 인정하고 역사의 대세를 파악하는 방법을 택하 고자 한다. 본고에서 십제의 국가형성에 대하여 해명한 결과가 역사의 대세에 어긋난 것이 아니라면 이는 백제본기의 초기 기록이 그와 같은 역사의 대세롤 담고 있가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삼국사기 』 백제본기에 나오는 초기 기록을 통하여 십제 의 국가형성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를 정리하기로 한다. 본고에서는 십제의 건국, 십제의 건국시기, 십제의 영역과 한지역 정치세력과의 관 계, 십제의 통치조직, 십제의 국가형성 요인에 대한 문제를 차례로 정
74) 쭤驛 , r 百濟 初期 史 硏究史 料 의 性 格」, 《 百 濟 硏究 》 17, 1986, pp. 9~34 참조` 75) 盧重國, 『 百 濟 政治史硏究 』 , 1988, p. 27. 權五榮, r 백제의 성립과 발전』, 『 한국사 』 6, 1995, p. 14. 76) 千 寬 宇는 신라의 경우 혁거세와 차차웅으로 불린 시대에는 실제로는 몇 대인가 의 수장이 있었는데 그것을 분리 • 압축하여 2 대로 만든 것이 아닌가 짐작한 바 있어 (r 三韓 의 國家形 成』 上, 《韓國學 報 》 2, 1976, pp. 18~46) 참조가 된다.
리 하고자 한댜 필 자 는 1976 년에 「 白汀釋 의 國家形成 』 이 라는 논문을 발 표한 바 있다 . 7) 그런데 20 년이 지나 는 사이 수정 • 보충할 문제들이 많 이 생겼다. 이에 1994 년에 「 百濟 의 建國 과 統治體 制의 編成」과 r 百濟 의 建國說話- 百濟 初期 國家 形 成 過 程 에 대한 기초적 검토-」라는 논문 을 발표하여 앞서 발표한 논문을 수정 • 보충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 78) 본고는 그러한 일련의 작업 중의 하나로서 작성되었다. (1) 십제의 건국세력 『삼국사기 』 백제본기의 자료를 가지고 백제의 건국세력에 대하여 알 아보기로 한다. 동 백제시조 온조왕조에 나오는 건국설화는 대체로 십 제와 미추홀 소국의 형성과 두 소국의 통합에 의하여 백제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십제라는 소국이 형성된 후 이웃한 미 추홀의 소국을 병합하여 백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 이 에 백제의 모체가 되었던 십제의 소국형성세력에 대하여 알아보는 작 업이 필요한 것을 알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 삼국사기 』 백제본 기에 나오는 십제 건국설화인 온조설화를 다시 제시하기로 한다. A (1) 백제시조는 온조[왕]이다. (2) 그의 아버지는 鄒 牟인데 혹 은 朱 蒙 이라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卒本 扶餘에 이르렀다. 扶 餘 王{州之王}에게는 아들이 없고 다만 세 딸( 三 女[ 子 ])이 있었는데, 주몽 을 보자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둘째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얼마 후에 부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고 두 아들을 낳았다 . 큰아들은 비류라 했고, 작은 아들은 온조라 하였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77) 李 鍾 旭 『百 濟 의 國家 形成J, 《 大丘史 學) 11, 1976, pp. 35~65. 78) 李 鍾 旭, 『百 濟 의 建 國說 話 -百 濟 初期 國家 形成過程에 대한 기초적 검토 -』, 《 百 濟論穀 》 4, 1994, pp, 135~158.
이르러 越郡女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3) 주몽이 북 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4) 마침내 烏干 • 馬黎 동 십신과 남으로 떠 나니 백성 중 따르는 자가 많았다. (5) 마침내 漢山에 이르러 負兒嶽{負兒 岳}에 올라 가히 살 만한 곳을 살폈다. (6) 비류는 바닷가에 살기를 원하 니 (7) 십신이 간하여 말하였다. 〈생각건대 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 漢水를 띠고, 동으로는 높은 산악에 의거하였고, 남으로는 옥택을 바라보고, 서로 는 대해가 막고 있으니 그 천험지리는 얻기 어려운 지세입니다. 여기서 도읍을 만드는 것이 좋지 않겠읍니까〉 라고 하였다 . (6) 비류는 듣지 않 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8)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 읍을 정하고 (9) 십신을 보익으로 삼아 국호를 십제라 하였다. (10) 그 때 는 [前]漢 成帝 鴻嘉{鴻佳} 3 년(기원전 18) 이었다. (11) 비류는 미추 r 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었다. 돌아와 위 례를 보니 도읍이 完 定되고 백성들이 편안한지라, 마침내 참회하여 죽으니 그 신민들이 모 두 慰禮 { 慰禮 城}로 돌아왔다 (12) 후에 올 때의 백성들이 즐겨 따랐으므 로 백제로 국호를 고쳤다. (13) 그 세계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기 에 扶餘{解}로써 성을 삼았댜( 『三 國史記 』 23, 百濟本紀 1, 百濟始祖 溫祚 王 즉위조) (보기 { } : 『삼국유사』의 기록, [ ] : 『삼국유사 』 에 없는 기록, 「』 : 『삼국유사 』 에만 있는 기록) 위에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고 있는 십제 건국설화를 제시하 였다. 이와 같은 내용의 건국설화는 『삼국유사』 남부여 • 전백제조에도 나오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나오는 건국설화의 내용은 『삼국사 기』의 그것과 대체로 같으나 일부 내용을 생략하였고 또 몇 글자를 바 꾸거나 더하고 빼기도 하였다. 그러한 사정은 위의 사료 A 에 표시하였 다. 『삼국유사』의 내용 변경은 현재 백제의 초기역사를 연구하는 사람 들에게 혼란을 주게 하고 있다 그러한 혼란 중 가장 큰 것은 백제왕
실의 성씨에 대한 것이다. 『삼국사기 』 에는 扶餘로 나오고 『삼국유사』 에는 解로 나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백제 왕실교대론을 주장 하는 견해로까지 발전한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백제왕실의 성이 해씨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본다. 한편 십제 • 백제의 건국세력에 대한 이해를 하는 데 이용된 또 다른 자료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 백제시조 온조왕조에는 위에 서 제시한 사료 A 의 내용에 뒤이어 또 다른 건국설화가 주기되어 있 다. 그 내용은 비류왕을 시조로 보는 것으로, 역시 백제왕실의 교대론 을 불러온 근거가 되고 있어 그대로 지나치기 어렵다 . 이해를 돕기 위 하여 비류를 시조로 보는 건국설화를 다시 제시하기로 한다 . B 일설에는 시조는 바류왕이다 . 그의 아버지는 우태이니 북부여왕 해부 루의 서손이고, 어머니는 소서노로서 졸본인 연타발의 딸이었다. (소서노 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을 낳으니 큰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작은 아들은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고 졸본에서 홀로 살았다. 후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前漢 建昭 2 년 봄 2 월에 남으로 도망하여 졸본 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왕 비로 삼았다. 그가 나라를 세우고 왕업을 여는 데 자못 내조가 있었으므 로, 주몽이 그녀를 총애함이 자별하였고, 또 비류 등을 마치 친아들과 같 이 대우하였다. 주몽이 부여에서 낳은 禮氏의 아들 器留가 오자 그롤 태 자로 세우고, 왕위를 잇게 하기에 이르렀다 . 이에 비류가 아우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여기로 도망하여 오자, 우 리 어머니가 가재를 기울여 도와 방업을 이루는 것을 도와 그 근로가 많 았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는 描留의 것이 되었으니 우리는 한갓 여기에 있어 혹과 같을 뿐이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別立國都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마침내 아우와 함께 黨 類를 거느리고 沮水와 帶水의 2 수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 『三 國
史記 』 23, 百濟 本紀 1, 百濟 始祖 溫 祚王 즉위조 협주) 위의 사료 B 를 보면 사료 A 와는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댜 사료 A 에는 백제의 모체가 되었던 십제의 건국세력으로 온조 를 들고 있다. 그에 비하여 사료 B 에는 미추홀에 나라를 세웠던 세력 으로 비류를 들고 있다. 이는 사료 A 가 미추홀 소국을 통합하여 백제 로 성장한 십제의 건국설화안 것을 뜻하고, 사료 B 가 미추홀 소국의 건국설화인 사실을 의미한다. 여기서 십제의 시조는 온조였고 미추홀 소국의 시조는 비류였던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 기된 연구결과를 보면 사료 A 와 B 의 설화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고 있 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여기서 백제 건국세력에 대한 기존 연구의 내용을 알아보고 그 문제점을 밝혀 보기로 한다 . 지금까지의 견해 를 보면, 위에 나오는 온조와 비류의 정치적인 실체 를 옳게 파악하지 못한 것을 주목할 수 있다. 그러한 견해들은 온조와 비류의 관계를 중점 적 으로 다루고 있다 . 이는 십제의 건국세력에 대한 이해를 잘 못하였기 때문에 십제가 이웃한 미추홀 소국을 병합하여 성 장한 후 의 백제의 지배세력들을 잘못 이해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음 을 잘 보여준댜 여기서 온조와 비류의 관계를 혼동하고 있는 여러 견 해들의 주장 내용과 그 문제점을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온조와 비류에 대한 이병도의 견해부터 주목한다 . 그는 사료 A 는 온조 를 수장으로 하는 위례부락 계통의 전설인 것 같고, 사료 B 는 비류를 수장으로 한 미추부락 계통의 전설인 듯하다고 하였다 . i9 ) 나아 가 비류와 온조는 공히 진한이라는 유이 부족사회의 일 후래 요소인 부여씨족단의 시조라고 할지언정 백제 건국의 태조라고는 할 수 없다 고 하였다. &J I 그는 중국 사서인 『주서』 등에 나오는 시조 구태설을 따
79) 李丙 7#. , 『韓國 史 』 古代편, 1959, p. 340. 80) 위의 책, p. 344.
라, 구태가 고이왕이라고 주장하며 고이왕이야말로 백제의 국가체제를 이룬 건국의 태조라고 하였다. 이에 온조왕 비류가 남래하여 백제를 세웠다는 건국연대인 기원전 18 년은 믿기 어렵다고 하며, 백제의 엄밀 한 의미의 건국연대는 고이왕 27 • 28 년 (260 • 261) 이라고 하였다 . 8 ) ) 이와 같은 이병도의 견해는 백제 건국에 대한 그 후의 연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 그러나 이병도의 견해는 문제가 있 댜 우선 구태를 고이왕으로 보는 언어학적인 방법의 문제를 들 수 있 다. 그러한 언어학적 해석 방법의 문제점은 이미 이홍직이 비판한 바 있다 . 82) 필자는 이홍직의 바판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리고 고이왕대의 백제는 이미 정치적인 성장을 하여 대방군과의 전투에서 대방태수 궁 준을 전사시킬 정도의 국력을 갖고 있었다 . 83) 이에 백제가 고이왕대에 갑자기 국가를 형성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이전에 이미 소국을 형성하였고 이후 성장하여 주변의 소국들을 병합 해 나간 것이 분명하다 . 그 결과 고이왕대에는 여러 가지 정치개혁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백제의 초기국가 형성은 십제라는 소국으로 이 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먼저 〈만일 비류와 온조의 형제를 시조로 받드는 전설이 초고왕과 고이왕 양계의 교립에 현실적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라면 이 양계의 교립은 왕실 자체의 교대를 의미하는 것일는지도 모른다는 상상까지가 가능하게 되는 셈이다 〉 라는 견해를 주목할 수 있다 . 84) 이 견해는 단지 왕실의 교대 가능성에 대한 상상을 하였을 뿐이다. 그에 비하여 김철준은 백제왕족은 처음에는 解氏라고 한 것 같으나
81) 위의 책 , pp. 346~352. 82) 李弘稙 『百 沿建國 說 話 에 대한 再檢討 」, 『韓國古 代史의 硏究 』, 1971, p 332. 83) 千 立 宇, r 『三 國志 』 韓 傳의 再 檢討 」, 《短檀學報》 41, 1976, p, 33. 李鍾 旭, r 百 濟 의 國 家形 成」, 《大 丘史 學》 11, 1ITT6, p. 15. 84) 李 基 白, 『百 硏王 位 繼承 考 』, 샌 죤史 學報》 11, p.1 00 주 18.
뒤에 부여의 약칭을 성으로 하여 餘 氏라 하였으며 , 7 대 사반왕에서 방 계인 8 대 고이왕계로, 12 대 계왕에서 본계인 근초고왕계로 왕위가 넘 어가는 등 직계에서 방계로 방계에서 직계로 방계에서 방계로 분파되 는 변천을 거쳤다고 하였다 . 85) 그는 또한 비류와 온조가 해씨의 혈통이 라고 하였고 , 그들이 동복형제라고 하나 실제는 양 집단의 연맹관계를 반영한 것이고, 그것이 사실이라도 시조 비류설화보다 온조설화가 후 기에 성립되어 윤색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백제는 원래 비류의 미추 홀 집단과 온조의 위례집단으로 나뉘어 있다가 온조왕 당시에 합쳐졌다 고 하나 그대로 믿을 수 없고 양 집단의 병립 상태가 상당 기간 계속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나아가 1 대 온조왕에서 7 대 사반왕까지는 미추 홀 집단 세력이 위례집단과 병립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 고이 왕은 원래 온조계의 방계(혹은 비류계 출신인지도 모른다)로 있다가 홍기하여 그 계보 를 개루왕에다 연결시켰다고 하였다. 그는 해안지대 에 있으며 해로이동, 해상교역의 경험을 가진 미추홀집단의 성장 기록 은 온조계에 의하여 통합되며 모두 상실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백제 의 초기 건국은 온조계가 浪 帶지역 한강지역에서 그들이 남하한 경로 룰 통해 오는 후속 집단을 포섭하고 방어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86) 이러한 김철준의 견해는 그 후의 연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바 있다. 그런데 김철준의 견해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비 류가 세웠던 미추홀의 소국이 온조가 세웠던 십제에 일찍이 병합되었 다는 사실을 부정한 데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 제시한 십제 의 건국설화인 온조설화를 보면 비류집단은 일찍이 사라지고 십제의 지배세력으로 자리잡지 못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에 미추홀집 단 세력이 사반왕까지는 위례집단과 병립하였다는 것은 처음부터 상상
85) 金 哲 浚 r 百濟 社 會 와 그 文化』, 『韓國古 代 社會 硏究 』 , 1<5 76 , pp. 47~49. 86) 金哲浚 위의 책, p. 49. 金 哲 竣 『百 沼建國 考J, 『百濟 硏究 』 , 1982, pp. 9~14.
에 의한 잘못된 견해임을 알 수 있다. 천관우는 고이왕의 계통은 온조왕의 후예가 아니라 미추홀 비류의 후예로 보고 있다.'o/) 그는 또한 주몽 -온 조계는 부여씨를 칭하였고 우 태 -비 류계는 우씨를 칭하였는데 비류계의 본거지는 인천지역으로 서 부에 속한 지역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1 대 온조에서 7 대 사반 왕까지는 주몽 -온 조계이고, 8 대 고이왕에서 12 대 계왕까지는 우태 - 비류계 (11 대 비류왕은 온조계)였고 13 대 근초고왕에서 21 대 개로왕까 지는 주몽 -온 조계이고, 22 대 문주왕에서 24 대 동성왕까지는 비온조계 이고, 25 대 무령왕에서 31 대 의자왕까지는 주몽 -온 조계라고 하였다. 그는 구태를 우태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처음에 위례성에 자리잡았 던 주몽-온조계 전설과 아울러 처음에 미추홀에 자리잡았던 우태 -비 류계의 전설이 백제왕계에 뿌리깊게 존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88 ) 이 같 은 천관우의 견해에 따르면, 개로왕과 그의 아들인 문주왕은 서로 계 통이 달랐으며 동성왕의 아들이 분명한 무령왕 또한 계통이 다른 왕 으로 되어 따를 수 없는 견해다. 그리고 고이왕에서 사반왕까지를 우 태 -비 류계로 보고 있으나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미추홀에서 나라 룰 세웠던 비류집단이 일찍이 십제에 통합 • 소멸되어 그 정치적인 지 위를 잃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백제의 왕위계승에 비류집단은 처음 부터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다음은 노중국의 견해를 볼 수 있다. 그는 미추홀의 바류계는 부여 족의 일파로서 해씨를 칭한 집단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위례세력 이 후에 연맹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부여씨를 왕성으로 칭하였다고 하 였다. 부여씨의 영도권 확립의 전기는 미추홀세력과 위례세력이 연맹 한 뒤에 그 주도권이 미추홀의 해씨(비류계)에서 위례의 부여씨로 넘 어오면서부터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이왕의 즉위는 왕위가 단순히 왕
87) 千寬宅 『三韓의 國家形成』(下), 《韓國學報》 3, 1976, 134~137. 88) 千寬宅 『三韓改』, r 古朝鮮史 • 加耶史硏究』, 1989, pp. 325~335.
실 내의 직계에서 방계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직계와 방계의 왕위 계 승싸움에서 방계인 고이왕이 승리함으로써 가능하였다고 하였다 . 89 ) 이 와 같은 노중국의 견해는 고이왕 이전의 백제왕들은 미추홀세력이었다 고 보는 입장에 선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미추 홀세력이 일찍이 온조가 세운 십제에 병합되며 소멸되었기에 성립할 수 없는 견해다 . 이기동은 연맹왕국은 성읍국가의 연맹체라고 하는 국가의 본질적인 성격 때문에 왕실의 교체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 필연적이라고 주장하 고 있다. 그 결과 7 대 사반왕에서 8 대 고이왕으로의 왕위계승은 주 몽 - 온조계 내부의 직계에서 방계로의 변화가 아니라 실은 우태-비류 계로의 왕실교체일 것으로 보는 천관우의 견해를 따르고 있는 실정이 댜 그런가 하면 근초고왕의 계통은 온조왕계가 아닌 전혀 새로운 세 력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OO ) 위와 같은 이기동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댜 우선 연맹왕국이라는 시대구분 자체의 문제를 들 수 있다 .91) 그보다는 소위 연맹왕국이라는 단계에서 왕실의 교체 현상이 일어난다 는 발상 자체에 문제가 있다. 신라의 모체가 되었던 사로국의 경우, 이 웃한 소국들인 골벌국, 이서국, 압독국 등과 진한이라는 소국연맹을 형 성한 시기가 있었다. 사로국은 그러한 이웃 소국의 왕들과 왕실교체를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박혁거세를 시조로 하는 세력과 석탈해를 시조로 하는 세력 그리고 김알지를 시조로 하는 세력들 사이에 왕위가 교체된 것은 사실이다 . 그러나 이러한 세 세력은 어디까지나 연맹왕국 의 여러 나라의 정치세력이기보다 사로국 또는 사로국을 모체로한 신
89) 盧室國 , 『 百濟 王室의 南遷 과 支 配勢 力의 變遷 」 , 《韓國 史 論》 4, 1':J7 8 , pp. 24 ~45. 90) 李基 東, r 百 濟 王 室 交代 論 에 대하여J, 《 百 濟 硏究 》 13, 1981, pp. 54~69. 91) 필자는 이기동이 말하는 연맹왕국을 소국연맹과 소국병합 단계로 나누어야 한다 고 본다(李 鍾 旭, 『新 羅國家 形成史硏究 』 , 1982, pp. 258~261 참조).
라의 최고 정치세력을 배출한 집단이다 . 이는 연맹왕국의 정치형태와 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세력들임을 분명히 말해 준다. 이 경우 백제왕 실이 온조왕의 후손들로 계승되었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백제 초기의 역사를 다루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비류계에서 온조계로의 왕 실의 교대를 주장하고 있으나, 앞에 제시한 온조설화에 따르면 비류계 는 일찍이 백제의 모체가 되었던 십제에 병합되어 그 지배세력이 소멸 되었기에 미추홀의 비류계에서는 백제의 왕을 배출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비류집단이 세웠던 미추홀의 소국은 온조집단이 세웠던 십 제와 연맹관계를 갖고 있었던 점은 시인할 수 있다 . 그러나 미추홀 소 국은 십제에 병합되었다. 그리고 비류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나오 는 것으로 보아 십제에 통합된 이후 그의 후손들은 결코 백제의 왕을 배출할 수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가 하면 근초고 왕 계통이 온조왕계가 아닌 전혀 새로운 계통일 수 있다는 견해는 일 종의 정복왕조설을 바탕에 깔고 나온 주장일 뿐 전혀 근거를 찾을 수 없다. 한편 노중국은 미추홀세력이 해상적 성격이 강하고 위례지역은 농업 에 적합하여 서해안의 해산물과 한강 중류 유역의 농산물과 교환하며 집단 간의 결속을 다지면서 1 세기 말에서 2 세기 초엽에 소연맹체를 형 성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미추홀세력과 위례세력이 중심이 되어 지역 연맹체를 형성하였고 다른 소국들도 이 연맹체에 참여하였다고 하였 다. 그는 천관우가 주장한 우태 -바 류계의 성이 우씨라는 견해를 부정 하고 있다. 대신 비류집단의 성은 해씨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온조집단 은 점차 해씨 집단(비류)을 압도하여 연맹장의 지위를 차지하고 왕족 으로서의 위엄을 높이려 부여족을 상징하는 부여를 성으로 칭했다고 하였다. 그는 부여족 내에서 해씨 칭성집단 출신 왕명의 말자에 婁(留 • 流)가 사용되었다고 추론하며, 백제의 多婁 • 己婁 • 蓋婁의 3 왕을 解 氏(비류집단) 출신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부여씨 출신인 肖古가
해씨세력을 누르고 왕위 를 차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추론 하며 해씨세력을 누르고 연맹장의 지위를 차지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초고왕 때부터 확립된 부여씨 왕실은 직계, 방계가 분립되어 고이왕계 세력이 방계 세력으로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고도 보았다 .92) 이러한 노 중국의 견해는 역시 『삼국사기 』 에 나오는 온조설화의 내용을 인정하지 않은 데서 나온 견해임이 분명하다. 미추홀에 정착하였던 비류집단은 십제에 통합되었으며 백제의 왕실세력이 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왕명의 말자에 婁 • 留 • 流가 있으면 해씨라고 하는 언어학적인 해석도 사실 근거가 없는 견해일 뿐이다. 한편 김두진 역시 비류왕 즉위로 왕실가계가 교체된 것으로 보고 있 다 .93) 노명호는 미추홀집단이 중요하여 그들을 철저히 격하시키지 못하 였다고 하였다 . 그리고 비류설화를 갖는 미추홀집단은 해씨나 진씨 등 의 세력과도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9- 1 ) 그러나 이들의 견해 역시 온조설화와 비류설화가 각기 십제와 미추홀의 소국 건국설화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혼동을 시키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주장이 분명 하댜 그 근거로 되고 있는 것은 비류와 온조가 두 설화에 모두 형제 로 나온다는 점이다 . 그러나 비류와 온조가 형제라는 것이 두 나라의 왕실교체를 의미할 수는 없다. 온조설화에 잘 나타나 있듯 비류가 스 스로 참회하면서 죽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그의 후손들 역시 백제의 왕실을 교체할 만한 세력은 가질 수 없었음이 틀림없다. 다음은 백제왕실에 대한 이해를 하는 과정에 나온 정복왕조설과 그 문제점에 대해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백제의 건국세력을 온조집단이 아니라 285 년 모용씨에 격파된 뒤 함홍지방 옥저로 피난했던 부여왕가
92) 盧困國 , 앞의 책, 1988, pp. 63 ~78. 93) 金 杜 珍 , r 百濟 始祖 溫祚神話 의 形 成 과 그 傳承J, 《韓國學論嚴》 12, 1990, pp.2 3 ~28. 94) 盧 明 鎬, r 百 濟 의 東明神 話 와 東 明廟」, 《 歷史 學 硏究 》 X, 1981, pp. 78~79.
의 일부로 보는 견해가 있다 . 95 ) 그에 따르면 韓族 중 유력세력인 伯 濟 의 걸사 요청을 받아 구원을 하였는데 양 세력이 연합을 하여 통일국 가로서의 百濟 롤 형성하였다고 한다. 그 후 부여족의 수중에 국가의 주권이 넘어가고 百濟 라는 구명을 답습하며 부여족이 지배층이 되고 韓 族 이 피지배층을 구성하였다고 한다 . 末松保 和는 285~286 년경 만주 에서 격파된 부여의 일파가 남하하여 옥저에 들어가 정착하였다가 다 시 서남방으로 들어가 마한의 한 나라였던 伯 濟國 에 거하여 마한 통합 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350 년경 百濟 國을 건국하였다고 하였다 . 00 ) 가디 너 (Ga di ner) 는 근초고왕의 父 인 比流 王 을 온조의 형 이 라고 하는 佛 流 와 동일한 인물로 보고 比流 이전의 10 명의 왕은 허구라고 하였다 . 97 ) 위와 같은 견해들을 검토한 이기동은 근초고왕 때 왕실교체가 이루 어진 것으로 보는 데 찬성하고 있다. 그는 비류왕 • 근초고왕 부자를 정복왕조의 창시자로 보는 일본학계의 경향을 확실히 따른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근초고왕의 계통에 대하여 온조왕계가 아닌 전혀 새로운 세 력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우 한편 이도학은 만주지역에 백 제가 존재하였다는 주장을 하며 분파 작용에 의하여 온조계가 남하하 여 서울지역에서 伯濟國을 세웠는데 만주에 남아 있던 백제는 343 년을 전후하여 前燕과의 전투에서 패하였고 고구려의 압박에 의하여 한반도 로 남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새로이 한강 유역으로 진입한 백제 세력(비류계)은 백제국(온조계) 세력권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비류계가 온조계를 홉수한 것으로 보고 있다 . 그 결과 백제국 세력에 의하여 축 조되던 토광묘와는 달리 석촌동에는 새로이 등장한 백제세력에 의하여 기단식 석실적석총이 축조되었으며 그러한 고분의 변화를 통하여 백제
95) 白 鳥庫吉 , 『 百濟 (1)起 源 t .:?b 、 T 』, 『 白 鳥庫吉全菓 』 3, 1'57 0 , pp. 485~499. 96) 末松 保 和, 『新 羅建國考 』, r 新 羅 史(1) 諸 問題 Jl , 1954, p. 135. '57) K. J. H. Gadi ne r, The Early Hi st o r y of Korea, 1967, p. 45. 98) 李 基東 , 앞의 논문, 1981, pp. 60~64.
왕실의 교체를 설정하고 있다 우 이와 같은 이도학의 견해는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 하나는 만주지역에 존재하였다고 하는 백제의 존 재를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만일 백제라는 나라가 4 세기 중반까지 만주에서 성장하였다면 중국의 사서들에 열전이 실리지 않은 이유가 납득이 안 간다 .1 001 그리고 기단식 석실적석총의 축조를 새로운 정치집단의 등장의 증거로 볼 수만은 없다. 그것은 전축분인 무령왕릉 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우리는 누구도 무령왕릉이 새로이 이주한 정치 세력집단에 의하여 축조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 따라서 석촌동의 석실 전축분도 정치세력의 변동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될 수 없다. 앞에서 본 소위 백제의 정복국가설은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는 견해 들이다. 우선 위와 같은 견해가 나온 이유는 『 삼국사기 』 의 근초고왕 이전의 기록을 무시한 데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 는 『 삼국지 』 보다 늦게 편찬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백제사에 대한 사실 은 『 삼국지 』 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내용을 전하는 것도 사실이다. 『 삼국사기 』 백제본기의 근초고왕 이전의 기록들은 일찍부터 전승되던 기록을 근초고왕이 박사 고흥으로 하여 『서기』를 편찬케 할 때 정리되 어 전하여진 것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 결과 백제사는 『삼국지 』 보다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일단 정리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백제사에 대한 기록이 없는 『 삼국지 』 의 기록은 백제사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없다. 여기서 『 삼국사기 』 에 나오는 근초고왕 이전의 기록을 인 정하고 보면 정복국가설이나 비류와 온조의 왕실교체설은 도저히 성립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99) 李 道 學 , 『 백제 고대국가 연구 』 , 1995, pp. 120~123. 100) 물론 『資治 通 鑑』 97, 晋 紀 19, 穆帝 永和 2 년조에 〈 初夫餘居于鹿山 爲百 濟 所 侵 部 落哀 散西徒近 燕 而 不設 備 〉 라는 기록을 근거로 만주지역의 백제의 존재 를 이야 기하고 있으나 이 기록 자체의 사료적인 가치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사료적인 가치 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사료들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비류왕과 근초고왕 부자 를 정 복왕 조 의 창시자 로 보 는 일본학 계의 견해 를 한층 보강하게 된 이기동이 『 삼국사기 』 백 제본기 초기 기 록을 비판없이 송두리째 취신하는 입장에서 이루어진 백제연구가 불안 정하다고 한 말을 주목할 수 있다 . 10 1) 필자 는 오히려 백제본기의 초기 기록을 무시한 결과 위와 같은 정복왕조설이 나왔다고 본다. 백제본기 의 초기 기록을 통하여 백제의 국가형성과 그 성장에 대한 대세 를 옳 게 파악하면 그와 같은 정복왕조설은 성립할 수 없다 . 그리고 백제 초 기의 역사룰 옳게 파악한 것이 인정된다면 백제본기의 초기 기록들이 역사적인 대세를 전하는 자료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십제의 건국세력에 대한 문제를 정리하기로 한다. 앞에 제시한 백제 건국설화를 통하여 비류는 미추 홀 에서 소국을 형성하였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하여 십제를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 앞에서 온조설 화와 비류설화를 제시하였다 . 그리고 백제의 건국세력 또는 왕실세력 에 대한 지금까지의 견해를 알아보고 온조집단과 비류집단 사이에 백 제왕실이 교체되었다거나 왕실의 단절설을 주장하는 견해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댜 여기서는 그와 같은 견해들이 나온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를 잠시 보기로 한다. 천관우는 주몽 一 온조계 전승(위 례성)과 우태 -비 류계 전승(미추홀)을 근거로 이들이 伯 濟 國의 두 지배세력으로 왕위계 승에서까지 오랫 동안 경쟁적 위치에 있었다고 하였다 .1 02) 그런가 하면 이기동은 위에 제시한 건국설화를 온조 형제의 건국담을 보여주는 것 으로 공동건국 , 공동통치라는 역사적 사실을 시사한다고 말하였다 .1 03 ) 그러나 온조설화는 온조에 의한 십제의 건국설화이고 그 안에 비류가 세웠던 미추홀 소국의 통합에 대한 사실까지 들어 있다. 그에 비하여 비류설화는 비류에 의한 미추홀 소국의 건국에 대한 설화이다. 비류설
101) 李 基東, 앞의 논문, 1981, p. 64. 102) 千 寬 宇, r 三韓 의 國家 形成』( 下 ), 《韓國學報》 3, 1976, p. 134. 103) 李基 東, 『百 濟 의 成 長 과 馬韓供 合」 , 《 百 濟論設》 2, 1990, p. 54.
화에는 소국 병합에 대한 기록은 없다. 여기서 다시 분명히 할 사실은 비류가 세웠던 미추 홀 소국은 일찍이 십제에 통합되고 비류는 참회하여 죽었으며 그의 집단은 소멸되어 십 제(백제)의 지배세력이 된 일이 없다 는 것이다. 따라서 비류설화에 나 오는 것과 같이 일설에 백제의 시조가 비류왕이라는 기록은 잘못일 수 밖에 없댜 『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르면 비류는 미추홀 소국의 건국자 였을 뿐 십제나 백제의 건국세력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에 백제의 시조가 동시에 2 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온조와 비 류에 의하여 각기 십제와 미추홀 소국이 성립된 것은 인정하나 그들의 공동건국과 공동통치는 어느 자료에도 없는 것으로서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면 온조계와 비류계에 의한 백제왕실 의 교체 설 은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다. 그리고 미추홀 소국을 병합한 십제는 그 국명을 백제로 바꾼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백제의 시조는 온조일 수밖에 없다 . 그러면 비류와 온조가 위에 제시한 두 설화에 모두 형제로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 먼저 온조설화에 나오는 기록을 토대로 계보를 그리 면표 2 와같댜 표 2 를 보면 온조와 비류의 아버지는 모두 북부여로부터 피난해 온
〈 표 2> 온 조설화의 계보 ®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 주몽이 졸 본부여로 이주한 후 朱 蒙 To 卒广 또는朱 蒙二 \麟女 太子 O 朱 蒙二 \0 0 麟 溫祚 佛流 溫祚
주몽으로 나오고 있다 . 그런데 온조와 비류의 어머니는 졸본부여왕의 둘째 딸이거나 월군녀였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비류설화의 계 보를 보기로 한다.
〈 표 3> 비류설화의 계보 ®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 주몽이 졸본으로 이주한 후 朱蒙 T 禮氏 北夫餘王 解夫婁 To 福留 6.T 優二召西奴 朱蒙=召西奴 레;流 溫祚
위와 같은 비류설화의 계보는 온조설화의 계보와 다른 것을 알 수 있댜 비류설화의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는 주몽이 아닌 우태로 되어 있다. 단지 두 설화에 모두 비류와 온조가 형제이고 비류가 형인 것으 로 나오고 있다. 두 설화의 계보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우 선 위의 두 건국설화를 통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초기국가 형성세력의 이동에 대하여 주목할 수 있다. 주몽이나 우태가 모두 북부여로부터 졸본(부여)로 도망하여 온 것을 볼 수 있다. 우태가 도망하였다는 기록 은 없으나 북부여왕의 서손인 그가 졸본인인 召西奴와 혼인하였다는 사실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비류설화를 통하여 북부여로부터 온 이 주민들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는데 우태가 주몽보다 먼저 이주하였던 것 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후에 이주한 주몽은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세웠으며 우태와 혼인하였던 소서노를 왕비로 삼았던 것을 주목하게 된다. 그 후 주몽의 아들이 북부여에서 졸본으로 이주
하여 태자가 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비류와 온조는 남쪽으로 이주 하여 別立國都하고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앞의 두 설화에 나오는 이주민들은 우태, 주몽, 온조 및 비류 개인의 이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주민들이 개인적으로 이주할 경 우 새로이 이주한 지역에서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기는 어려웠다고 여 겨진댜 이에 두 설화에 나오는 이주민들은 일정한 세력집단을 이루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실제로 비류와 온조가 烏干 • 馬黎 등 10 신과 남으로 떠나니 백성 중 따르는 자가 많았다는 것으로 미루어 소국을 형성할 정도의 세력집단을 이루어 이주한 것을 알 수 있다 .l 이 ) 그리고 그와 같은 이주민집단은 파상적으로 이주하여 새로이 정착한 지역에서 다시 세력을 규합하여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다고 헤아려진다. 그들 이주민집단은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의 소국을 이루었고 또는 이웃한 지역에 독립된 소국을 형성하고 소국 간의 연맹관계를 전개하여 나간 것도 생각할 수 있다. 다음은 온조와 비류의 관계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두 설화에 나오 고 있듯 비류와 온조가 동모형제라는 견해가 있다 .105 ) 비류와 온조가 실제로 형제였을까.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비류설화에는 두 사람의 부 모가 우태와 소서노로 되어 있고, 온조설화에는 주몽과 졸본부여왕의 둘째 딸로 되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비류의 부모는 비류설화에 나오 는 사람들이고, 온조의 부모는 온조설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러한 생각이 타당하다면 온조와 비류는 형제일 수 없다. 단지 비류와 온조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같은 이유로 졸본을 떠나 이 주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 비류의 세력이 온조의 세력보다 강하여 형으 로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106)
104) 그 중 烏干 • 馬黎는 주몽이 북부여에서 남하할 때 동행하였던 烏伊 • 摩離로 보 는 견해가 있다(權五榮, 앞의 논문, 1995, p. 17). 105) 李丙 ir!c , 앞의 책, 1959, p. 341 .
여기서 비류와 온조가 해씨의 혈통을 이었다거나, 해안지대에 있으 며 해로이동, 해상교역의 경험을 가진 미추홀집단의 성장기록은 온조 계에 의하여 통합되며 모두 상실되었다는 김철준의 견해 1 [17 ) 도 문제가 있다. 노중국은 미추홀의 비류계를 부여족의 일파로서 해씨성을 칭한 집단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비류는 해로로 왔고 온조는 육 로로 이주하였으며 미추홀세력은 해상적 성격이 강하고 위례지역은 농 업에 적합하여 상호 해산물과 농산물을 교환하여 집단 간의 결속을 다 졌고 1 세기 말 ~2 세기 초엽에 소연맹체를 형성하였다고 하였다 .108 ) 그 러나 이러한 견해 역시 비류가 세웠던 미추홀 소국이 3 세기경까지 존 속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필자는 따르지 않는다. 그런데 온조와 비류는 졸본에서 밀려난 세력들이 분명하다. 그리고 새로이 이주하여 소국을 형성한 지역도 인접하여 있었다. 그 결과 온 조집단이 세웠던 십제와 비류집단이 세웠던 미추홀 소국은 각기 독립 을 유지하며 쉽게 연맹관계를 맺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온조와 비 류의 관계를 연맹관계로 본 견해는 타당하지만, 양 집단의 병립 상태 가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는 견해는 따르기 어렵다 .109 ) 노명호 역시 미 추홀집단이 중요하여 그들을 철저히 격하시키지 못하였다고 보았다 .110 ) 그리고 3 세기 전반경 미추홀세력에 의하여 온조 계통 지배집단이 병합 되었다는 천관우의 견해도 따를 수 없다 .11 1) 십제와 미추홀의 두 소국 이 연맹관계에 있었던 기간은 짧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비류가 미추홀에서 제대로 정착도 못하고 죽었다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그
106) 權五榮, 앞의 논문, 1995, p. 16. 107) 金哲浚 『百濟建國考」, 《百濟硏究》 13, 1982, pp. 9~13. 108) 盧重國, 앞의 책, 1988, pp. 61~65. 109) 金哲浚 앞의 논문, 1982, pp. 9~12. 110) 盧明鎬, 앞의 논문, 1981, pp. 78~79. 111) 千寬宇, 앞의 논문, 1976, pp. 134~137. 李基東온 앞의 논문(1 990, p. 54) 에서 千寬宇의 견해가 설득력 이 있다고 하였다.
런데 온조왕대의 기록이 먼저 일어났던 사건들을 압축하여 온조왕대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한 것이라면, 십제와 미추홀 소국이 존속한 시기는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두 소국이 병존한 시기도 온조설화 에 나오는 것과는 달리 바교적 오랜 기간이었을 수 있다. 한편 권오영은 비류로 대표되는 미추홀세력은 전형적인 고구려 계통 의 이주만은 아니었다고 하였다. 그들은 토광묘를 축조하였으며 온조 세력은 적석총을 축조하였다고 하였다. 비류와 온조가 형제로 표기된 이유는 伯濟國과 미추홀을 중심으로 하는 서부세력이 연맹관계를 형성 한 후의 관념적인 표현이라고 하였다 .112 ) 필자는 온조와 비류 설화에 나오고 있듯 온조와 비류는 분명히 졸본으로부터 밀려난 세력으로 본 다 . 따라서 비류를 온조와 다른 계통으로 보는 데는 찬성하지 않는다. 고고학적인 면에서 십제의 서부지역인 미추홀 지역에서는 적석총이 발 견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미추홀 소국의 형성시 비류로 대표되는 세력 은 그 규모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들 세력은 곧 십제에 통합되었으며 졸본에서 이주하여 미추홀에 정착하였던 이주민들은 비류가 죽은 후 십제로 다시 이주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보면 미추홀 지역에서 적석총이 발견되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간다 . 십제의 시조는 온조일 수밖에 없다. 온조설화에는 미추홀에서 소국 을 세웠다고 여겨지는 비류가 정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위례에 돌아와 서 보고 참회하여 죽고 그 신민은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는 거듭 이야기하는 셈이지만 미추홀 소국이 잠시 존속한 사실을 가리키 며, 졸본에서 온조와 함께 이주하였으나 미추홀로 갔던 이주민들이 십 제로 돌아온 것을 의미한다. 미추홀의 통합으로 십제는 고구려 계통의 주민들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미추홀 소국을 통합하여 국력을 크게 신 장시킨 것이 분명하다 . 그 결과 온조설화에 나오는 것과 같이 국호를
112) 權五榮 『初期百濟의 성장과정에 관한 일고찰』, 《韓國史論》 15, 1986, pp. 88~ 89.
십제에서 백제로 바꾼 것을 볼 수 있다. 십제와 미추홀 소국을 형성할 무렵 십제의 주변에는 또 다른 이주민 들이 세웠던 나라들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삼국사기 』 온조왕 41 년조 에 북부 解婁를 우보로 삼았는데 그는 본래 부여인이었다는 기록 113 ) 을 통하여 십제의 북쪽에 부여로부터 이주한 사람들이 소국을 형성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러한 나라가 언제 십제(백제)에 통합되었는 지는 앞으로 정리할 문제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부여 • 고구려로부터 이주한 세력들이 십제의 주변에 형성되었고 그것이 십제에 통합되어 백제의 성장으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삼국사기』의 온조왕 원년조에는 동명왕묘를 세우고, 多婁王 2 년 〈講始祖東明廟〉 한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었다. 그러면 어떠한 이유 때문에 동명을 시조 로 삼았는지 궁금하다 동명은 부여의 건국자였다. 그리고 『삼 국사기 』 고구려 시조동명성왕 19 년조에 주몽의 시호를 東明聖王 이라고 한 것도 볼 수 있다. 노명호는 백제의 왕족이 동명의 유일한 정통 계승자임을 표방하는 건국신화로서 동명신화에 왕실의 계보설화를 연결시킨 것으 로 보고 있다 .114) 십제가 나라를 세울 무렵 주변에는 부여와 고구려로 부터 이주한 세력들이 나라들을 세워 이들이 일찍이 연맹관계를 맺었 고 곧 이어 미추홀 소국과 같이 십제에 통합되기도 하였다고 여겨진 다 .115) 그 결과 온조를 비롯한 백제의 왕들은 이들 부여와 고구려로부 터 이주한 세력들을 하나로 묶기 위하여 그들의 종족적인 시조인 동명 왕을 시조로 모신 것으로 짐작이 간다. 백제의 동명묘는 결국 부여와 고구려로부터 이주한 세력을 종족적으로 결속시키는 구실을 한 것으로 헤아려진다.
113) 『三國史롭e.s 23, 百濟本紀 1, 溫祚王 41 년조. 114) 盧明鎬, r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 센쭙史學硏究》 X, 1981, p. 66. 115) 李鍾旭, 앞의 논문, 1976, pp. 22~23.
위에서 십제의 국가형성에 대한 논문 중 주요한 것을 추려 내용을 알아보고 그 문제점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그 결과 연구자들은 백제의 국가형성설화인 온조설화 를 옳게 이용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할 수 있 다. 그리고 미추홀 소국의 건국설화인 비류설화를 온조설화와 무리하 게 연결시켜 백제의 왕실교체에 대한 주장까지 하고 있는 것을 보았 다 . 이제 온조설화를 중심으로 십제의 건국에 대한 문제를 정리하기로 한댜 먼저 십제를 건국한 온조집단의 남하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하여 알 아보기로 한다. 온조집단이 졸본지역을 떠나 남쪽으로 이주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삼국사기 』 온조왕 즉위조에 나오는 건국설화를 보면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 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남으로 이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북부여로부터 졸본지역으로 들어온 정치세력들은 한 번에 온 것이 아 니었다 . 주몽이나 우태는 1 차 이주집단이라고 할 수 있고 주몽의 아들 로 표현된 유류(유리)는 2 차 이주민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의 에도 파상적으로 이주민들이 흘러 들어왔다고 여겨지나 정치적인 의미 를 지닌 세력집단의 이동은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것을 생각 할수 있다. 그 중 1 차 이주민집단은 졸본의 세력들과 큰 마찰 없이 지냈던 것으 로 여겨진다. 그 결과 주몽은 졸본부여왕의 둘째 딸과 혼인한 것으로 나오고 있고 우태는 소서노와 혼인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들 사이 에 비류와 온조가 출생하였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부터 살던 졸본세력과 이주민 사이에 세력균형이 이루어졌고 서로의 필요에 의해 세력연맹을 맺었던 것으로 헤아려진다. 그에 비하여 유류(유리)로 상징 되는 2 차 이주민집단의 등장은 비류와 온조로 상징되는 졸본세력들과 사이에 형성되어 있던 세력균형을 파괴하게 되어 후자의 세력들이 쫓 겨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여기서 온조와 비류가 주몽의 아들이 아니
고 또 온조와 비류가 형제가 아니었던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 비류나 온조로 기록된 정치세력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세력은 아니었 다. 그들은 졸본지역을 떠나 이주 후 소국을 세운 것으로 보아 일정한 집단을 이루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한 이유로 온조설화에는 십신과 백성을 거느린 것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십제의 건국 지였던 한강 유역 경기도 일대에는 온조와 비류집단 이외에도 북방으 로부터 온 이주민집단이 있었다. 『 삼국사기』 온조왕 41 년조의 기록에 는 北部 解婁룰 右輔로 삼았는데 그는 본래 부여인이었다고 한다. 이 는 십제를 비롯하여 주변에 졸본 및 부여로부터 온 이주민들이 정착했 던 것을 말해 준다. 개중에는 북부여를 떠나 직접 이주한 집단이 있는 가 하면, 이주하는 과정에 졸본지역의 고구려에 머물며 졸본세력과 세 력연맹을 맺고 그 사이에 생긴 새로운 고구려의 세력집단들이 부여로 부터 온 2 차 이주민집단에 밀려 이주한 세력도 있다. 그들 이주민집단 은 파상적으로 이주한 후 십제 주변에 정착하여 그 수는 알 길이 없으 나 십제나 미추홀 소국 외에도 소국을 형성하였는데, 그 중 십제는 미 추홀 소국을 병합하며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고 소국들 사 이의 세력균형은 깨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2) 십제의 건국시기 십제의 건국시기에 대한 지금까지의 견해들은 내용상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에 먼저 그와 같은 견해들을 살펴보고 그 문제점을 정 리한 후 필자의 견해를 제시하기로 한다. 먼저 천관우는 백제의 실질적 인 건국연대를 고이왕대 (234~286) 로 보는 견해를 부정하고, 온조계의 한강 하류 도래와 伯濟國의 형성시기 를 辰國이 존재한 우거왕 당시(기원전 108 년)보다 후인 기원전 1 세기 의 일로 보고 있다 .116) 천관우가 말하는 백제국은 필자가 사용하는 십
제를 뜻한다. 이 같은 십제의 건국시기에 대한 견해는 그 이후의 연구 자들에 의하여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필자 역시 천관우의 십제 건국연대를 따른 바 있다 .117 ) 노중국의 견해를 보기로 한다. 그는 위만조선의 멸망 전후에 야기된 유이민 파동에 의하여 辰國세력이 와해되고 한강 유역에 새로운 소국 들이 형성되었으며 그 중에 미추홀 소국, 십제 둥이 있었던 것으로 보 고 있다. 그리고 1 세기 말 .2 세기 초엽에 미추홀세력과 위례세력이 소 연맹체를 형성하였다고 보았다. 한편 미추홀의 비류집단에서 위례의 온조집단으로 왕실이 교체된 시기는 초고왕대 (166~214) 였다고 하였 다. 백제가 목지국을 병합한 시기는 고이왕대인 3 세기 중엽이라고 하 였다 . 118) 다음은 이기동의 견해를 볼 수 있다. 그는 기원전 108 년 위만조선의 멸망을 전후하여 활발히 전개된 유이민의 남하가 계기가 되어 진국세 력이 해체되고 三韓을 구성한 많은 군소 국가들이 형성되었다는 주장 을 하며 성읍국가로서의 伯濟國의 출발 시기는 위만조선의 멸망을 전 후한 시기로 대략 기원전 1 세기까지 소급해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백제가 미추홀 지방의 정치세력과 연맹관계를 맺은 것은 2 세기 후반 초고왕대로 보고 있다. 그리고 온조왕 13 년에 마한에 천도를 고 하고 강역을 획정한 것은 고이왕대 (234~286) 의 사건으로 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온조왕조의 마한정복 기사는 근초고왕대 (346~375) 의 사 건으로 보아, 백제의 마한정복에 대한 사실은 『삼국사기』 온조왕 27 년 조의 기 록이 『 日 本書紀』 神功紀의 기사보다 360 년 소급 가상된 것으로 보고 있다 .119)
116) 千寬宇, 앞의 논문, l
사상의 영향을 받아 개국 연대를 360 년 전으로 잡은 것으로 보았다(앞의 책, 1975, p. 49). 李基東, 앞의 논문, 1990, pp, 50~63.
십제의 성읍국가 형성시기에 대한 천관우의 견해는 그 후의 연구자 들에 의하여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에 따르면 십제의 형성은 위만조선의 멸망 전후 대두한 이주민(유이민)에 의한 것이 되며 그 시기는 위만조선의 멸망 후가 된댜 따라서 최근에는 십제의 건국시기 를 기원전 1 세기경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십제의 형성시기를 과연 위만조선의 멸망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 에 나오는 온조설화에서 십제를 세 웠던 온조집단이 부여 • 고구려의 정치적인 변동 때문에 이주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온조집단이 이주한 것은 위만조선의 멸망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온조집단의 이주와 관 련하여 위만조선의 정치적인 변동이 아니라 부여 • 고구려의 정치적인 변동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부여나 고구려의 국가형성에 대한 실상을 우리 학계가 제대 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부여나 고구려 지역에 서 있었던 정치적인 변동에 대한 문제도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부여 나 고구려 지역의 정치세력들이 일정한 정치적인 충격을 받았거나 여 러 세력 사이에 갈등을 겪을 때 그 파동에 의하여 이주민이 생긴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동명성왕 즉위조 를 보면 주몽의 이주는 금와왕의 아들들과 여러 신하들이 그를 죽이려 하자 그 사실을 알고 이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 그리고 온조설화를 보 면 뒤늦게 부여로부터 이주한 유리에 밀려 온조와 비류가 이주한 것도 볼 수 있다. 여기서 십제를 세웠던 온조집단이 고구려의 지배세력들의 내부 사정에 의하여 밀려났을 가능성도 있으나, 유리가 이주해 와서
태자가 되자 결국 그에게 밀려 이주를 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수 있 댜 여기서 부여와 고구려 지역에 일정한 정치세력들이 밀려 들어간 사건들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燕의 침입으로 고조선이 요동지역을 상실하고 평양으로 그 중 심을 옮긴 사건을 생각할 수 있다 당시 고조선계 주민들은 단순히 평 양으로만 이주한 것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 고조선계 주민들 중 일부 는 부여 또는 고구려로 이주한 것이 아니었나 짐작이 간다. 그 과정에 부여에서 이주민이 발생하여 남으로 내려온 세력도 있지 않았을까. 그 들 중에 고구려롤 세웠던 주몽집단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 어쩌 면 당시 고조선계의 이주민들이 한반도 남쪽지역으로 이주하여 촌락 (추장)사회 단계에 있던 세력들 위에 자리잡고 그들을 통합하여 소국 들을 형성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중국의 진 • 한 교체기에 등장한 중국 연나라 계통의 이주민 인 위만이 고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도 주목할 수 있댜 진 • 한 교체기에 대두한 중국계의 이주민들은 부여나 고구려에 충격을 주어 새로운 이주민을 발생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사정 은 고주몽의 이주나 온조집단의 이주에 대한 설화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당시 중국계의 이주민들은 멀리 사로 6 촌 지역까지 온 것으로 나오고 있댜 120) 중국계의 이주민들이 부여지역에 들어가 정치세력화 하며 유리왕으로 상징되는 집단의 이주를 유발시켰을 수 있다. 또한 위만조선이 들어서며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준왕은 좌우의 궁인을 거느리고 남쪽 한지로 이주하여 왕을 칭하고 나라를 세웠던 것이 툴 림없다 .121) 당시 고조선계의 이주민들이 사로 6 촌까지 왔을 가능성도 있다 .122)
120) 『 三 國志』 辰韓但i에 秦役을 피해 온 자들이 韓國으로 간 것으로 나오고 있다 . 121) 『史記』 朝鮮列傳 122) r 三國史記』 1, 始祖 赫居世 즉위조
『 三國遺事』 1, 紀異 2, 新羅始祖 赫居世王조 .
그러면 온조집단의 이주는 언제 이루어졌을까. 이와 관련하여 위만 조선의 정치적 성장과 진번 • 임둔의 병합을 주목할 수 있다. 위만은 漢의 외신이 되어 병위재물을 받았으며 그 과정에 군사적인 실력을 키 워 진번과 임둔을 복속한 것을 볼 수 있댜 1 231 그리고 위만조선이 澈에 대한 압력을 가하여 예군 남려가 28 만 구의 주민을 거느리고 한에 내 속한 것 1% ) 은 고구려계 이주민의 발생을 불러온 사건이 아닐까 짐작이 간다. 예군 남려는 한에 내속하여 창해군을 설치하게 만들었다. 그 과 정에 일부 주민들이 남쪽으로 이주하였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예군 남려가 다스렸던 나라는 소국일 수는 없다. 소국연맹 단계에 이 르렀던 정치체로 여겨진다. 그러한 소국연맹 안에 고구려라는 소국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안에 주몽집단이 1 차로 이주하여 정치적 권력 올 장악하였고 위만조선 시기에 유리로 상징되는 집단이 부여로부터 이주하여 일정 기간 동안 머물며 고구려의 정치적인 주도권을 장악하 게 되었다고 보면 어떨까 한다. 그들 유리집단은 온조와 비류로 상징 되는 정치세력을 몰아낸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온조집단이 이주한 시기는 언제였을까. 온조설화를 보면 주 몽이 월군녀와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는 일설도 나오고 있다. 월군녀가 어떠한 세력인지 잘 알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군이 한사군 의 군을 뜻하는지 아니면 한사군 설치 이전의 요동군 등 중국의 어떤 군을 뜻하는지 잘 알 수 없다. 단지 기원전 1 (17년 현토군이 설치되며 고구려는 군치가 되었다. 여기서 월군녀를 군으로 넘어온 여자가 아니 라 군을 넘어온 여자로 보면 어떨까 한다. 이 경우 고구려의 국가형성 시기가 현토군의 설치 이전임이 분명하기에 125) 월군녀는 한사군 설치
123) 『史記』 朝鮮列傳 124) r 後漢 書 』 東夷傳 澈傳 125) 李基白, 『高句麗의 國家形成 問題」, 『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1985, p. 81.
이전에 중국의 요동군 등의 군을 넘어온 여자로 볼 수밖에 없다. 이에 주몽의 아들로 이야기되는 온조집단은 한사군이 설치되기 이전에 이주 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댜 실제로 온조설화나 비류설화에는 낙랑과 같은 한군현에 대한 내용을 볼 수 없다. 이는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온 조집단이 한사군 설치 이전 위만조선기에 이주한 것을 뜻한다. 이는 십제의 건국시기를 생각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십제의 건국시기는 잘 알 수는 없으나 위만조선시기의 언제였다고 짐작할 수 있댜 이는 천관우가 주장하였고 노중국 • 이기동이 따르고 있는 십제 의 형성시기보다 다소 앞선 것을 의미한다. 『삼국사기 』 온조왕 즉위조에 십제의 형성시기를 前漢 成帝鴻 嘉 3 년 (기원전 18) 으로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온조설화가 설 화화되는 과정에 십제 건국과 관련된 시간들이 설화적인 시간으로 정 착되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온조설화나 비류설화에는 주몽의 고구려 이주, 비류와 온조의 탄생, 유리의 고구려 이주 , 비류와 온조집단의 이 주 등의 사건에 대한 선후관계는 있으나 그 실연대를 알 수 있는 자료 는 없다. 이는 온조나 비류와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들이 설화적인 시 간 속으로 들어간 것을 잘 보여준다. 온조설화에 나오는 십제의 건국 시기를 기록과는 달리 천관우 • 노중국 • 이기동 등이 위만조선의 멸망 이후 기원전 1 세기 언제라고 하여 온조설화에 나오는 십제의 건국시기 안 기원전 18 년보다 올려 보는 것은 설화적인 시간에서 역사적인 시간 을 찾는 작업을 한 것을 뜻한다. 필자는 십제의 건국시기를 기존의 견 해와는 달리 위만조선 멸망 이전으로 잡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하나의 소국으로 십제가 존속한 시기와 관련하여 기존 견해 의 문제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노중국은 1 세기 말 • 2 세기 초엽에 십제가 미추홀 소국과 연맹관계를 맺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기동은 2 세기 후반 초고왕대에 십제와 미추홀 소국이 연맹을 맺은 것으로 보고 있댜 노중국과 이기동의 이러한 견해는 온조설화에
나오는 십제와 미추홀 소국의 소 국 연맹 형성시기 를 설화에 나오는 시 간보다 l~2 세기 늦은 것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필자는 이와 같은 소국연맹 형성시기에 대한 견해 를 따 를 수 없다 . 그 이유는 다움 과 같다 . 온조집단에 의하여 십제라는 소국이 형성될 때 미추홀지역에 는 비류집단에 의하여 또 다른 소국이 거의 동시에 형성되었다 . 1 26) 그 런데 당시 십제나 미추홀 소국의 남쪽에는 이미 여러 소국들에 의한 소국연맹이 형성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사정은 『 삼국사기 』 온조왕 24 년조에 나오는 기록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17:/ ) 온조왕 24 년조의 기록을 보면, 십제는 원래 마한의 한 소국으로 형 성되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십제가 형성될 때 미추홀의 소국도 마 한의 (동)북방에 거의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정으로 자리잡은 것을 알 수 있다 . 이 경우 기원전 2 세기에 마한이라는 정치체가 존재하였는 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위만조선시기에 위만조선의 진번 주변에 衆國이 있었던 사실과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준왕이 韓地에 이르러 한왕을 칭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한반도의 남쪽에는 이미 한이라는 세력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십제가 형성될 때 한이 나뉘어 삼한의 하나인 마한이 존재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이라는 정치체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 여기서 그것이 설령 마한이 아니더라도 한이라는 소국연맹 단계의 정치체가 존재하고 있던 지역의 북쪽에 십제와 미추홀 소국이 늦게 소국으로 자리잡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십제가 국가를 형성할 무렵 그 남쪽에 한이라는 소국연맹체의 일원 으로 자리잡았다고 인정하게 된다면 십제와 미추홀 소국이 연맹관계를 갖는 시기는 노중국이나 이기동의 주장과 같이 기원후 1 세기 말 • 2 세
126) 盧重 國은 비류의 미추홀 소국이 먼저 형성되었다고 하나 필자는 온조설화의 내 용 따라 거의 동시에 형성된 것으로 본다. 1'2:1 ) 『 三 國史記 』 23, 百 濟本 紀 1, 溫祚 王 24 년조 .
기 초엽 또는 2 세기 후반일 수 없다 오히려 소국을 형성하면서 십제 나 미추홀 소국은 기존의 소국연맹체에 속하게 되었다고 헤아려진다. 그러한 사정은 온조가 처음 도하하였을 때 마한왕이 동북 1 백 리의 땅 을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댜 128 } 이제 십제가 이웃 소국들을 병합하여 단순한 소국 이상의 단계로 성 장한 시기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십제는 원래 미추홀 소국과 더불어 한이라는 소국연맹체의 한 소국으로 형성되었다. 이 같은 십제는 온조 설화에 따르면 소국형성 후 얼마 안 되어 비류집단이 세운 미추홀 소 국을 병합하고 미추홀 소국의 신민들은 십제로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 댜 십제가 미추홀 소국을 통합한 시기가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러나 온조설화에 나오고 있듯 소국형성 후 얼마 안 된 기원전 1 세기 언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 한편 미추홀 소국을 통합한 십제는 국명을 백제로 바꾼 것을 온조설 화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미추홀 소국을 통합한 백제는 주변의 다른 소국들에 비하여 그 국력이 상대적으로 크게 강화되었다고 여겨진다. 그 결과 이웃한 다른 소국들도 병합해 나간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삼 국사기 』 백제본기에는 온조왕 26 년에 군대를 동원하여 사냥을 한다고 하고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그 국읍을 병합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리 고 온조왕 27 년에는 마한을 멸망시켰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기록 과 달리 당시 백제는 마한의 소국들을 병합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더 라도 백제가 미추홀 소국 이외의 소국들을 병합하여 나간 사정은 『삼 국사기』 온조왕조의 기사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백제의 마한병합에 대한 견해를 보면, 노중국은 고이왕대에 마한의 맹주국인 목지국을 병합하였다고 하였다 .129) 이기동은 온조왕 27 년조의 마한병합 기사는 神功紀 기록보다 360 년 소급 가상된 것이라 하여 백
128) 『三國史記』 23, 百濟本紀 1, 百濟始祖溫祚王 24 년조 . 129) 盧更國, 앞의 책, 1988, pp. 90~94.
제의 마한정복은 근초고왕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130) 노 중국과 이기동의 마한소국 병합시기에 대한 견해는 필자로서는 따를 수 없는 것들이다. 여기서 『삼국지』 한전에 들어 있는 『 위략』의 인용 기사에 나오는 염 사착설화를 주목하게 된다. 염사착설화에는 왕망 지황시 (20~23) 에 漢 人 戶來 둥 1500 명이 재목을 벌목하러 韓에 잡혀가 노가 되었다는 기 록이 나오고 있다. 당시 漢人을 잡아 노로 삼은 한의 정치세력이 어느 나라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십제와 미추홀 소국은 이미 통합되 어 백제로 된 이후였고 어쩌면 또 다른 소국들도 병합하여 가고 있는 상태였기에 국력이 다른 소국에 비하여 강해진 때임이 분명하다 . 따라 서 1500 명이나 되는 장정을 잡아 노로 삼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십제가 소국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면 인구 수 둥으로 미루어 1500 명 이나 되는 사람을 잡아 노예로 삼기란 쉽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그리 고 당시 백제의 위치는 낙랑군에 가장 가까웠기에 漢人들이 백제의 영 역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여기서 십제의 마한소국 병합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늦어도 기원 전후한 시기에 이미 시작된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한 사정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다루왕이나 기루왕대 의 백제와 신라의 전쟁기사가 백제와 신라의 전쟁이 아니라 백제와 마 한소국들과의 전쟁기사로 보아야 한다는 추측을 하게 만들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온조왕 26, 27 년에 마한을 멸망시킨 것으로 나오 는데 그 후 마한과 백제의 전쟁은 기록할 수 없었다고 여겨진다. 따라 서 마한과의 전쟁을 신라와의 전쟁으로 기록하였다고 보면 어떨까 생 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전쟁의 무대가 백제의 중심에서 점차 먼 곳에 서 벌어지는 것도 의미가 있다. 이는 백제의 마한소국 병합이 진전되 며 점차 먼 곳의 소국을 병합해 갔기 때문일 것이다 .13 l) 물론 마한의
130) 李基東, 앞의 논문, 1990, pp. 50 ~63.
소국을 모두 병합한 시기는 훨씬 후였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노중국이나 이기동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백제는 훨씬 일 찍부터 소국 병합을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노중국이나 이기 동은 어떠한 까닭으로 마한소국 병합시기를 늦추어 보고 있는 것일까. 이기동의 주장이 가지는 문제점을 먼저 보기로 한다. 첫째 『삼국지.!J 한전에 나오는 伯濟國을 百濟의 모체로 본 데서 잘못을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伯濟國을 백제의 모체로 보아 온 것이 사실이 다. 그러나 伯濟國에서 백제로 되었다는 견해를 부정하고 십제에서 백 제로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132) 필자 역시 伯濟國에서 百濟로 되었다는 견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온조설화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삼국지』 한전에 나오는 백제국 등 소국이 주는 역사상은 한국의 초기 국가 형성과 발전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 한 견해를 따르면 『삼국지』가 저술된 3 세기 후반까지 삼한지역에는 백 제나 신라라는 왕국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소 국으로서 伯濟國이나 斯盧國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소국들이 삼 한을 구성했을 것이라는 정도의 역사상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 러나 신라의 정치적 성장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삼국지』 한전이 보여 주는 삼한의 정치상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133) 그리고 앞에서 정리한 것과 같이 온조설화를 통하여 『삼국지』 한전에 나오는 伯濟國 이 주는 역사상에 문제가 있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3 세기 후반까지 伯濟國이 소국으로 존재하였고 마한의 한 소국이었다고 나와 있는 기 록을 가지고 백제의 정치적 성장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백제사 연구의
131) 李鍾旭, 『百濟의 建國과 統治體制의 編成」, 《百濟論策) 4, 1994, p, 40. 132) 노중국은 앞의 책(1 988, p, 54) 에서 伯濟國에서 百濟로의 전환이 아니라 십제에 서 백제로 된 것으로 보고 있다. 133) 李鍾旭, 앞의 책, 1982, pp. 48~87. 李鍾旭, 앞의 논문, 1986, pp, 9~33.
출발이 잘못되었음을 뜻한다. 『삼국지 』 한전에 나오는 伯 濟國 은 중국인들의 무지에서 또는 중국인 들의 필요에서 나온 기록이다. 그렇기에 『 삼국지 』 한전의 伯濟國에 대 한 기록이 보다 일찍 쓰여졌다는 이유만으로 『 삼국사기 』 에 나오는 십 제의 정치적 성장을 무시하고 3 세기 후반까지 伯濟國을 비롯한 소국들 이 연맹을 형성한 정도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실제로 『 삼국지』의 백제국을 중시하는 이기동은 온조왕조의 마한정복 기사가 『일본서기 』 신공기보다 360 년 소급 가상되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I J.1) 그러나 마한소국을 병합한 기록이 360 년씩이나 소급 가상되었다는 증 거는 어디에도 없다. 둘째로 온조와 비류 설화는 백제의 건국과 나아가 그 통치체제가 온 조와 비류 두 사람에 의한 공동건국 내지 공동통치라는 역사적 사실을 시사한다는 견해 1 35) 가 가진 심각한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 삼국사 기』 온조왕 즉위조에 나오는 온조설화를 보면 바류가 세웠던 미추홀 소국은 일찍이 십제에 병합되어 십제가 백제로 성장하는 바탕을 마련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록은 완전히 무시하고 비류 가 세웠던 미추홀 소국이 1 세기 말 • 2 세기 초엽 또는 2 세기 후반에 이 르러 비로소 십제와 소국연맹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 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 삼국지』 한전의 기록과 『일본서 기』 신공기의 기록을 신빙한 데서 나온 주장들이다. 그러나 『삼국지』 한전이 보여주는 역사상은 소위 삼한지역의 역사를 이해할 만한 자료 가 못 된다. 그리고 『일본서기』 신공기는 믿을 수 없는 가공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도저히 신빙할 수 없다. 그리고 설령 그것을 믿더라도 십제가 미추홀 소국을 병합한 사정은 읽어 낼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온조와 비류에 의한 공동건국, 공동통치라는 주장은 처음부터
134) 李基東, 앞의 논문, 1990, p. 63. 135) 위 의 논문, p. 54.
성립할 수 없는 것임도 확실하다. 그보다는 온조설화에 나오는 것과 같이 비류와 온조가 함께 떠난 사실을 주목하면 그들이 한산지역에 동 시에 온 것은 거의 분명하다. 그러나 비류는 바닷가인 미추 홀 로 가서 소국을 세웠고 온조는 한강 남쪽인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십제를 세 운 것 을 알 수 있다. 온조와 비류는 처음부터 다른 소국을 형성하였던 것이댜 앞에서 정리한 바에 의하면 십제는 위만조선 시기의 언제인가 소국 을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미추홀 지역에는 비류집 단이 거의 같은 시기에 또 다른 소국을 형성한 것도 알 수 있다. 그런 데 미추 홀 소국은 얼마 되지 않아 십제에 통합되었다. 미추홀 소국을 통합한 십제는 백제로 부르게 되었으며 한지역의 다른 소국들보다 국 력을 크게 신장시켜 기원을 전후한 시기경부터는 이웃한 다른 소국들 을 병합해 나간 것으로 보았다. (3) 십제의 영역과 한지역 정치세력과의 관계 먼저 십제의 영역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온조설화에는 온조와 비류집단이 漢 Ll.J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찾는 장면이 나온다 (A5) . 그 때 십신이 간하여 河南의 땅은 북으로 漢 水를 띠고, 동으로는 높은 산악에 의거하였고, 남으로는 옥택을 바라보고, 서로는 대해가 막고 있으니 그 천험지리는 얻기 어려운 지세이므로 그 곳에 도읍을 만들 것을 이야기하였다 . 이에 온조는 河南慰 禮 城에 도읍을 정 하고 십신을 보익으로 삼아 십제를 세웠다. 온조의 도읍지가 어디인가 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나온 바 있으나 ,136 ) 필자는 온조설화의 기록
136) 李丙 殺 는 하북 위례성에서 하남 위례성으로 옮긴 것으로 보고 있고 (r 慰禮 城考」, 『 韓國古 代史硏究 』 , 1976, pp. 491~4
pp. 321~327). 필자는 이홍직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을 따라 하남의 위례성으로 보고 있다. 위례성은 한강 이남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강의 남쪽에 도읍을 정한 십제의 영역이 어느 정도였는지 궁금하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온조왕 24 년조의 기록을 주목할 수 있다. C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어 꾸짖어 말하기를 〈 왕이 처음 강을 건넜을 때 발붙일 곳이 없자 내가 동북 1 백 리의 땅을 떼어 편히 살게 하였으니 내가 왕을 대우한 것이 후하지 않음이 없었다. (왕은) 마땅히 은혜에 보답 할 것을 생각하여야 하는데 지금 나라가 완전해지고 백성이 모이니 자기 에게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여 성지를 크게 설치하고 우리 땅을 침범하니 이것이 의리라 할 것인가?〉 하였다. 왕이 부끄러이 여겨 웅천책을 헐었 다.(『三國史記 』 23, 百 濟 本紀 1, 온조왕 24 년) 위의 기록을 보면 온조왕이 처음 한강을 건넜울 때 마한왕이 마한의 동북 1 백 리의 땅을 떼어주어 살게 하였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 에 나오는 1 백 리의 땅은 方百里의 영역으로 하나의 소국의 영역으로 보아 틀림이 없다 .Im ) 이 같은 십제는 비류가 세웠다고 하는 미추홀 소 국과 이웃한 것으로 보인댜 이 경우 미추홀과 위례성 사이의 거리로 미루어 미추홀 소국 역시 1 백 리 정도의 영역을 가졌던 것으로 여겨 진다. 십제가 소국을 형성할 즈음 그 남쪽에는 마한이라는 정치체가 있었 던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마한이 삼한의 하나인 마한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것은 기원전 2 세기경에 삼한이 성립되어 있었는지
137) 『三國遺 亭』 1, 紀異 2, 七 十 二國조에 〈朝 鮮遺 民 分 爲 七 十餘國 皆地方百里 〉 라는 구절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잘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위만조선시기 진번의 주변에 衆國이 있 었다는 『사기 』 조선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한반도 남쪽지역에 여러 소 국들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한 나라들이 삼한으로 나뉘어 있었 는지를 알 수 없을 뿐이다. 설령 삼한이 성립되어 있지 않았다고 하더 라도 한강 남쪽의 여러 소국들이 일정한 소국연맹을 형성하였고 그것 이 후일 마한지역이었기에 『 삼국사기 』 온조왕 24 년조의 기록에 마한이 라고 된 것일 수 있다 . 진번의 芳에 있었던 나라들은 위만조선시기 上 書 하여 중국의 천자를 알현하려 하였으나 위만조선이 이룰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 138) 여기서 衆國들이 적어도 소국연맹을 형성하 였던 사실은 짐작하기 어 렵지 않다 . 139) 『 사기 』 조선열전에 나오는 衆國의 형성세력은 어떤 집단이었는지 잘 알 수 없댜 그러나 『 삼국지 』 한전에는 위만에 쫓긴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준왕이 좌우의 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를 지나 한지에 들어가 韓王 울 칭한 것을 주목할 수 있다 . 준왕이 자리잡은 한지가 어디였는 지는 잘 알 수 없다 . 140) 그러나 준왕이 자리잡고 왕을 칭하였다는 사실 은 그가 나라를 세웠던 것을 의미한다. 준왕은 이미 소국병합 단계 또 는 그 이상의 단계에 이르렀던 왕국의 정치지배자였다. 그가 한지에서 왕을 칭한 것은 단순히 소국을 세우고 왕이 되었다는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준왕이 소국연맹장이 되었거나 또는 그들에 자극을 받은 한반 도 남쪽의 衆國들이 소국연맹을 형성하였던 것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당시 십제나 미추홀 소국이 자리잡았던 지역의 상황은 어떠 하였는지 헤아려 보기로 한다 . 대체로 그 북쪽에는 위만조선과 진번이
138) 『史記』 朝 鮮 列 傳 139) 많은 연구자들이 이 를 辰國 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 史 記』 朝 鮮 列傳의 衆國이라 는 판본을 따라 衆國 이라고 보는 견해( 全 海宗, 『 東夷傳의 文 獻 的 硏究 』 , 1980, p. 121) 를 따르고 있다 . 140) 여러 견해들이 있으나 필자는 그 정확한 위치 를 단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본다.
있었는데 진번이 위만조선에 의하여 복속된 것은 『 사기 』 조선열전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들 세력은 한강 남쪽에 자리잡고 있던 衆國세력 돌과 직접적으로 전쟁 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나 衆國에서 천자를 만 나려 하는 것을 가로막은 것은 확실하다. 한편, 십제와 미추홀 소국이 한강 유역 남쪽에 도읍을 잡을 수 있었 던 이유를 알아보기로 한다. 『삼국사기 』 온조왕 24 년조에 온조왕이 처 음 한강을 건넜을 때 발붙일 곳이 없자 마한왕이 동북 1 백 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했다는 기록을 보면 온조와 비류가 각기 도읍을 정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부여나 고구려에서 이주한 집단은 온조와 비류집단만은 아니었다. 그러한 사정은 부여에서 이주한 것이 분명한 해루세력이 후일 백제의 북부지역에 정착한 것으로도 알 수 있 댜 그와 같은 이주민들은 한강 남쪽에 있던 衆國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존재였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衆國의 가장 북쪽인 미 추홀과 위례성 지역에 부여 또는 고구려로부터 이주한 세력들을 정착 시켜 소국을 세우고 소위 마한이라는 소국연맹의 일원이 되도록 한 것 을 짐작할 수 있다. 마한으로서는 부여와 고구려계의 이주민들이 북방 경계지대에 자리 잡음으로 인하여 이후 새로이 이주하는 집단을 십제나 미추홀 소국으 로 하여금 막거나 받아들이게 하려 한 조치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주민들의 둥장으로 인한 여러 가지 혼란과 충격을 흡수하도록 하는 효과도 거두었다고 여겨진다. 그러한 사정은 『삼국지』 한전에 안용된 『위략』의 기록에 위만이 동 쪽으로 도망하여 요동의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秦의 옛 空地인 상 하장에 살았다고 하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위만은 패 수를 건너 준왕에게 항복하고 서쪽 변방에 거주하여 주변 중국의 망명 자를 거두어 조선의 번병이 되겠다고 준왕을 설득한 것으로 나오고 있 다. 준왕은 위만을 고조선의 서쪽 변방인 고조선과 중국 진 • 한과의
경계지대에 있는 일종의 완충지대인 공지에 머물도록 하였다. 준왕은 위만을 번병으로 삼기 위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당시 중국으로부터 고조선으로 밀려드는 이주민 세력이 적지 않아 그들을 위만이 거느리 게 하고 나아가 중국의 침입을 그들로 하여금 막게 하려는 의도가 있 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와 같은 조치로 고조선 사회는 중국으로부 터 들어오는 망명자들로 인한 충격을 막으려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러한 이유로 인하여 공지에 머물게 된 위만은 중국으로부터의 망명세 력을 모아 정치적 • 군사적 실력을 키워 고조선의 왕권을 장악하게 되 었댜 14 1 1 위만이 중국 진 • 한과 고조선의 경계에 설치된 완충지대에 머물며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이주민들에 의한 충격을 막았던 사실은, 온조 와 비류집단이 한강 남쪽에서 십제와 미추홀 소국을 세워 부여와 고구 려로부터 들어오는 이주민 세력을 수용하여 남쪽의 소위 마한으로 지 칭되는 정치세력에 가해지는 충격을 막았던 것과 유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초기국가 형성 과정에 나오는 일반적인 현상 중의 하나가 아닌가 짐작된다. 온조나 비류집단을 바롯한 부여 • 고구려로부터의 이주민들의 국가형성을 막을 힘이 소위 마한으로 이야 기되는 집단에게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온조집단 등으로서는 한강 유역을 넘어 남쪽으로 진출하기가 먼저 성장하였던 정치세력들이 있어 어려웠다고 생각된다. 그 결과 위만조선의 진번과 소위 마한의 중간에 일종의 힘의 공백지대에 십제와 미추홀 소국을 형성하였던 것 을 알 수 있다. (4) 십제의 통치조직 이제 십제의 통치조직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앞에서 정리한 내
141) 李鍾 旭, 『 古 朝鮮 史硏究 』 , 199 3, p. 212.
용을 통하여 십제는 고구려로부터 온 이주민집단에 의하여 국가형성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십제라는 소국에는 온조가 거느리고 온 세력 외에 원래부터 살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 다. 온조를 중심으로 한 소국형성세력들은 십제의 지배층을 이루었다. 여기서 십제는 혈연적인 원리로 통치되는 단계를 넘어선 정치 • 경제 • 사회적인 조직이 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제 십제의 백성은 친족집 단의 성원이 아니라 통치의 대상이 되었다 . 그리고 이주민을 중심으로 지배층이 형성되고 원래 살던 사람들은 그 밑의 신분충을 구성하게 되 었다. 소국 단계에 이르러 친족체계가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조직으로 는 부적합하게 되어 새로운 통치조직이 필요하게 되기에 이르렀던 것 이다. 십제의 경우 소국 단계의 통치조직을 이해할 만한 사료들이 거의 없 다. 그러나 온조설화를 보면 십제의 통치구조를 말하여 주는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온조집단이 漢 山에 이르러 십신의 말에 따라 하남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사실이다. 위례성은 斯盧國 형성시 혁거세집단이 자리잡았던 금성에 해당하는 존재가 틀림 없다. 사로 6 촌을 통합하여 사로국이라는 소국을 형성하였던 혁거세집 단이 사로국 전체의 정치중심지로 금성을 축조한 것은 이미 알아보았 다 .142) 사로국에 설치된 금성은 사로 6 촌 하나 하나의 통치와는 관계 없이 사로국 전체의 최고 지배자인 왕의 거처로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위례성 역시 십제 전체의 통치를 위하여 그 지배자들의 거처로 만들어진 것을 생각할 수 있다 . 그러한 사정은 십제의 경우 온 조설화에 나오는 것과 같이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사료 A8) 나오고 있고, 사로국(서나벌)의 경우 〈立邦設都〉 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한편 사로국에는 원래부터 존재하던 촌락(추장)사회 단계의 단위정
142) 위의 책, p. 65.
치조직인 촌이 6 개가 있었다. 그와 같은 사로 6 촌은 사로국의 지방행 정구획으로 편제되기에 이르렀다. 가락국에서는 9 개의 촌이 지방행정 구역을 이루었다. 그러한 촌(락)사회 단계의 촌들은 독자적인 정치영역 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십제도 사로국이나 가락국과 같이 과거 촌락사회의 촌을 단위로 한 것과 같은 지방행정구역이 편제되었 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자료만으로 그러한 촌 락이 몇이었는지 잘 알 수 없다. 여기서 『삼국지』 한전에 나오는 국읍과 소별읍의 존재를 주목할 수 있댜 『삼국지』 한전에 나오는 관련 자료를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D 1) 그 풍속은 기강이 적어 國邑에 비록 主帥가 있어도 읍락에 잡거 하여 잘 다스리지 못하였다.(韓傳) 2) 귀신을 믿었는데 國邑에 각기 한 사람을 두어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 게 하고 이름하여 천군이 라 하였다. 또한 諸國에는 각기 別邑이 있어 이 름하여 蘇塗라고 하였는데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달아 귀신을 섬 겼다. 무릇 도망한 자가 그 안에 이르면 누구든 도적질하기를 좋아한다. 소도를 세운 의미는 浮屠와 유사하나 행하는 바의 선악이 다르다.(韓傳) 3) 弁辰 역시 12 국이다. 또한 여러 小別邑이 있어 각기 거수가 있었다. (弁辰傳) 위의 자료는 『삼국지』 한전에 나오는 기록으로 십제의 통치구조를 이해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사료 D에 나오는 국읍 • 별읍 둥은 십제의 위례성이라는 도읍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반대로 십제의 위례성이나 사로국의 금성과 같은 도읍의 존재는 『삼국지』 한 전의 국옵 • 별읍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먼저 국읍에 대한 최근에 발표된 권오영의 견해를 보고 그 문제점을
밝혀 보기로 한댜 143 ) 권오영은 국이 하나의 정치체로서 존재할 수 있 었던 원인과 기능에 대한 해답을 국읍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규명을 통하여 밝히려 하였다. 그 결과 농업 생산과 철 • 소금 둥 물자의 확보 라는 경제적인 측면, 정치 • 군사적 측면, 제의권의 장악이라는 종교적 인 측면 등을 국을 형성시킨 국읍의 주요 기능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 리고 국읍 자체가 원래 일반 읍락에서 출발하였기에 그 구성 인자와 내부 구조도 읍락과 대동소이한 양상을 보일 것이라 하고 있다. 그는 일반 읍락과 다른 국읍만의 고유한 구조적 측면에 대하여 자료가 없어 개괄적인 모습을 그리는 데 그쳤다고도 하였다. 그는 국의 구조와 성 격에 대한 고찰은 원시에서 고대로의 이행기의 사회구조에 대한 이해 를 심화시키는 방편이 되며 삼국시대의 사회구성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된다고도 하였다 .144) 위와 같은 권오영의 견해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국읍 자체 가 일반의 읍락에서 출발하였다는 생각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앞에서 알아본 바에 의하면 십제를 세운 온조와 십신집단은 스스로 도읍지를 결정하여 하남의 위례성에 도읍한 것을 알 수 있다 . 1 4.5) 위례성은 그 지 역의 일반적인 읍락일 수 없다. 그러한 사정은 사로국을 세운 혁거세 집단이 처음 자리잡았던 금성 및 석탈해가 자리잡았던 월성, 가락국을 세웠던 수로왕이 자리잡았던 궁성, 고구려를 세웠던 주몽이 자리잡았 던 졸본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구지역에 자리잡은 소국의 도읍이 되었다고 생각되는 달성은 권오영도 국읍의 예로 들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이러한 소국의 국읍들이 일반 읍락에서 출발한 것일 수 없다. 십제, 사로국, 고구려, 가락국 둥의 소국이 형성될 때 왕을 배출하던 세력들은 일반 촌락의 장들이 정치적인 성장을 하여 그 지위를 차지한
143) 權五榮, r 三韓 國邑의 기능과 내부 구조』, 《 釜山史學 》 28, 1995, pp. Z7~53. 144) 위 의 논문, p. 53. 145) 李鍾旭, r 韓國 初期國家 形成 • 發展의 原動力』, 《菜 檀學報 》 78, 1994, p. 12.
것일 수 없다 온조, 혁거세, 수로 등은 이주민집단으로 원래의 읍락에 기반을 둔 세력들이 아니었다. 그 결과 소국을 형성한 그와 같은 세력 들은 소국 안에 원래의 읍락과는 관계 없이 일정한 지역을 새로이 정 하여 도읍으로 만들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필자는 그러한 지역을 정치 중심구역이라고 불러 왔다. 그리고 그러한 소국을 형성한 여러 읍락들 을 촌락이라고 불러 왔댜 圈 둘째, 권오영은 국읍의 경제, 정치 • 군사, 종교적인 기능이 국을 형 성 • 유지 • 발전시칸 주요 기능이라고 하였으나 그러한 기능은 이미 국 가가 형성된 후에 나타난 기능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소국을 형 성시킨 요인들은 한 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 . 그러나 십제, 사로국, 가 락국, 고구려, 부여 등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에 대하여 주목을 하면 소 국의 건국세력으로 이주민집단을 주목할 수 있다. 소국을 형성시킨 주 요 요인으로는 이주민집단과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 군사적 • 경 제적인 실력 등을 들 수 있다 . 1 471 셋째, 國 의 성격에 대한 고찰이 원시에서 고대로 이행하는 시기의 사회구조에 대한 이해 를 심화시키는 방편이 되고 삼국시대의 사회구성 에 대한 논의의 출발점이 된다는 생각 1 481 의 문제를 볼 수 있다. 우선 유물사관에서 이야기되는 원시와 고대라는 시대구분은 인위적인 것으 로서 그 개념조차 분명치 않다. 따라서 그와 같은 시대구분을 한국사 에 적용시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국의 성격에 대한 고찰이 삼국 시대 사회구성에 대한 논의의 출발점이 된다는 주장은 일면 의미가 있 는 듯하다. 그러나 사회구성이라는 개념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앞에 서 언급한 것과 같이 국읍의 형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국
146) 李鍾 旭 , 앞의 책 , 1982, pp. 230~233. 필자는 지금까지 이와 같은 정치중심구역 의 존재 를 계속 주장하여 왔다. 147) 李勳 , 『 韓 國 初期國 家 形成 • 發展의 原 動 力」, 《盤 檀 學報》 78, 1994, pp. 3~17. 148) 權五 榮 , 앞의 논문 , 1995, p. 53.
의 성격을 볼 경우, 국의 역사적인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 분 명하다. 『 삼국지 』 한전에 나오는 국읍과 별읍 둥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삼한 사회의 성격을 파악하는 문제점을 간단히 지적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우선 사료 Dl 에는 국읍에 비록 주수가 있어도 읍락에 잡거하여 잘 다 스리지 못한다는 기록의 사실성이 문제가 된다. 필자는 십제가 소국을 형성하여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미추홀 소국을 병합하고 기원을 전후 한 시기부터 이웃한 다른 소국들을 병합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사 로국 역시 기원후 1 세기 중반에서 후반경부터는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 하여 영토를 넓혀 나갔다고 보았다 . 149) 이 경우 십제를 모체로 한 백제 와 사로국을 모체로 한 신라의 도읍인 국읍은 『삼국지 』 한전에 나오는 국읍과는 그 모습이 같을 수 없다 . 우선 풍납토성 또는 몽촌토성과 월 성 둥의 존재는 국읍의 주수가 읍락에 잡거하여 백성을 제대로 통제하 지 못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삼국지』 한전의 기록이 역사적인 실상 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적극적인 증거가 된다. 이는 나아가 『 삼국지 』 한전에 나오는 국읍이 백제나 신라의 도읍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 히려 백제나 신라예 통합되어 국왕이 사라진 지역에 대한 사정을 전하 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여기서 『 삼국지 』 한전에 나오는 국읍과 관련된 기사를 가지고 삼한 사회의 실상을 파헤치는 작업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 삼국 지 』 에서는 삼한의 여러 나라 중에 伯濟國과 斯 盧國 이 있었던 것으로 나오고 있어 이들 두 나라가 3 세기 후반까지 소국으로 머물러 있었다 고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 두 나라는 적어도 3 세기 후반에는 소국 병합을 거쳐 하나의 커다란 왕국으로 성장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필자와는 다른 견해이나 설령 백제가 1 세기 말 • 2 세기 초엽 에 소국연맹을 이루었다는 노중국의 견해나 고이왕대에 연맹왕국을 이
149) 李 鍾 旭 앞의 책, 1982, pp. 83~90.
루었다는 이기동의 견해 를 따르더라도 3 세기 후반의 사정 을 말하는 것 으로 생각되는 『 삼국지 』 한전 기록의 백제국이나 사로국이 소위 삼한 의 여러 소국들과 같이 취급할 수는 없다. 더욱이 기원을 전후한 시기 에 소국 병합울 전개한 것으로 생각되는 백제를 『 삼국지 』 한전에 백제 국이라는 소국으로 기록한 것을 가지고 백제의 정치 발전에 대한 고찰 올 하는 것은 잘못된 방법임이 분명하다. 『삼국지 』 의 찬자들은 백제나 신라의 정치적 성장울 밝히는 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았던 것이 분명 하다 .150 ) 다음은 십제의 중앙정부조직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십제는 온조라 는 인물을 왕으로 삼아 소국을 형성하였다고 온조설화에 나오고 있다. 온조는 고구려를 떠날 때 십신과 백성들을 거느린 것으로 나와 있다. 당시 온조가 꼭 십신을 거느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더라도 십신은 왕 밑에 중앙정부의 관리로 자리잡았던 것은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온조집단으로 이주한 백성들은 대체로 그 밑의 군사적 • 정치적 임무를 맡았다고 여겨진다 . 현재 당시의 정부조직이 어떻게 편제되었 는지 알 길이 없다 . 단지 왕을 비롯하여 십신으로 표현된 집단은 이제 소국 전체를 다스리는 임무를 맡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들 중 좌보 나 우보가 임명되기 시작하여 관리들 사이에 서열이 나타나고 맡은 바 의 업무가 나뉘는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십제의 지방통치조직이 어떻게 편제되었는지도 자료가 거의 없 어 잘 알 수 없다. 다른 나라의 예를 가지고 추측을 할 수는 있다. 먼 저 사로국은 6 촌을 통합하여 소국을 이루며 각 촌을 지방행정구역으로 편제한 것을 생각하여 보았다. 가락국에서는 9 촌을 지방행정구역으로 삼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십제의 경우 몇 개의 촌을 통합하여 소국을 이루었는지 알 길이 없다. 노중국은 십신을 10 개 읍락의 장으로 보고
150) 李鍾 旭, r 『 三國志니 韓 傳 정치관계 기록의 사료적 가치와 그 한계」, 『 吉 玄益 敎 授 停年 紀 念 史 學論殿』, 1996, pp. 371 ~388.
있으며 그들을 위례지역의 선주 토착세력이라고 하여 온조집단이 그들 과 연합하거나 흡수하여 십제 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 1511 그러나 온조설 화에 나오고 있듯 십신은 선주세력이 아니라 온조와 함께 이주한 세력 이 분명하댜 15 21 따라서 십신이 10 개 읍락의 장이라고 하는 노중국의 견해는 지나친 비약이 틀 림없다 . 현재 십제가 몇 개의 촌락을 통합하 여 소국을 이루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사로국이나 가락국의 예로 미루어 여러 촌락을 통합하여 소국을 이루었던 것만은 짐작할 수 있 다. 그리고 그러한 촌락 밑에는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사로국과 같은 한 단계 낮은 정치조직으로서의 마을들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다음으로 십제의 신분에 대하여 추측해 볼 수 있다. 십제는 온조와 십신으로 이야기되는 이주민집단이 지배세력으로 되었다. 그 중 온조 와 그의 후손들이 십제의 왕위를 장악하였고, 그들이 백제의 전 기간 에 걸쳐 왕위를 차지하였다고 본다. 십제나 백제에서는 미추 홀 을 세웠 던 비류집단이 온조의 후손들과 왕실을 교체하여 왕위를 장악한 일이 없다. 온조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왕실세력 밑에는 십신의 후손으로 이 루어진 귀족세력이 존재하였다 . 그리고 온조를 따라온 것으로 이야기 되는 백성들이 신라의 왕경인과 같은 존재로서 원래부터 촌락에 살던 선주민 집단인 지방민들과 비교하여 한 단계 높은 집단으로 존재하였 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삼국사기』 온조왕 원년조에는 동명묘를 세운 것으로 나오고 있다. 동명은 부여를 건국한 시조이고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시호이다. 이 같은 동명묘의 설치는 다름 아니라 북쪽 부여나 고구려로부터 이주한 세력들을 하나로 묶는 종교적인 장치로 작용하였다고 여겨진다. 그 결
151) 盧重國, 앞의 책 , 1988, p. 53. 152) 그러한 십신으로 표현된 이주민 들 중에 이름이 나오고 있는 烏 干과 馬黎 는 주몽 이 북부여에서 거느리고 남하하였다고 하는 烏 伊와 摩 離와 동일인 들 로 생각하는 견해가 있어(權五榮, 『한국사 』 6, 1995, p. 17) 홍미롭다 .
과 온조를 비롯한 이주민 세력들이 십제의 왕을 중심으로 뭉칠 수 있 었다고 보인댜 따라서 동명묘의 설치는 단순한 종교적인 행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정치세력이나 일반 백성들을 통합하는 실질적 인 기능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제 앞에서 정리한 것을 토대로 십제의 정치발전단계에 대한 문제 를 정리하기로 한댜 십제의 도읍인 위례성을 소국의 국읍이라고 보아 틀림이 없다 . 그러한 국읍을 중심으로 한 소국의 구조에 대한 이해를 할 필요가 있댜 그러나 십제의 경우 더 이상의 자료가 없어 소국의 구조에 대한 이해를 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사로국의 예를 들어 십 제 소국의 구조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이는 십제와 사로국의 구조가 같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이야기이다. 사로국이나 가락국이 모두 이주 민집단이 원래 살던 주민들을 통합하여 소국을 형상하였던 사실을 보 면 십제의 경우도 일반적으로 사로국이나 가락국의 예에 해당할 것으 로 여겨진다. 사로국의 경우 혁거세롤 중심으로 하는 이주만집단이 금 성에 자리잡고 6 촌을 통합하여 소국을 형성하였다. 금성 • 월성 등의 지역은 정치중심지로서 도읍에 해당한다 . 그리고 6 촌지역에는 과거 촌 락사회시대에 각 촌의 중심마을이 있어 촌의 정치중심이 되었으며 촌 락에 살던 씨족집단의 장이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각 촌에 는 중심마을 외에 또 다른 마울들이 있어 씨족이 나뉜 가계집단의 장 과 가계의 성원들이 살던 마을들이 있었다. 6 촌의 각 촌은 직경 10km 정도의 영역으로 이루어졌고 그 밑의 마을들은 직경 3~4km 정도의 영역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아 왔다. 이러한 소국은 3 단계의 정치조직을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1 단계는 칙경 3~4km 의 영역을 다스리던 조직 이고 2 단계는 직경 10km 정도의 영역을 가진 촌을 다스리던 조직이고 3 단계는 그와 같은 몇 개의 촌을 통합한 조직이다 .1 5.'I) 십제 소국 역시
153) 李鍾旭, r 韓 函 初期國家의 政治發展段階와 政治形態J, 『韓國史上의 政治形態』, 1993, pp. 48 ~49.
이와 같은 3 단계의 정치조직을 편성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앞으로 고고학적인 조사를 하기에 따라서는 그 존재를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5) 십제의 국가형성 요인 필자는 r 韓國 初期國家 形成 • 發展의 原動力」이라는 글을 통하여 소 국의 형성과 소국연맹 형성의 원동력에 대한 견해를 발표한 바 있 다모 그 안에서 십제(백제)의 국가형성의 원동력에 대한 문제도 정리 하였다. 그 결과 십제는 고구려로부터의 이주민집단인 온조집단에 의 하여 형성되었으며, 온조집단은 정치적으로 성장하였던 국가의 지배세 력들 사이의 정치적인 갈등에서 밀려난 집단인 것을 알아보았다. 온조 집단은 이주할 때 이미 일정한 정치세력 집단을 이루었던 것을 생각하 였다. 그들 중에는 십신으로 표현된 집단이 있어 십제 건국에 주동적 인 역할을 하였으며 십제 정부의 관리들을 배출하는 집단이 되었다. 그리고 온조집단에는 백성으로 표현된 사람들이 있어 이들이 십제의 도읍인 위례성 주변에 살며 온조집단의 군사적 기반을 마련하여 주었 다고 생각된다. 그와 같은 온조집단은 고구려에 있을 때 이미 말을 길 러 기마를 하고 활을 쏠 줄 알았다고 헤아려진다. 온조집단은 고구려 에서 주몽의 아들인 유리로 표현된 집단의 이주에 의하여 밀려난 것이 분명하나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전투를 하던 전사집단으로서의 면모를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 이주민집단은 결국 군사적인 실력을 가 지고 새로이 이주한 지역에서 선주세력들을 정복하여 그 위에 지배세 력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고 짐작된다. 그 결과 고구려로부터 함께 이주하였던 비류집단이 세웠던 미추홀 소국을 통합한 후 이웃한 한의 소국들을 일찍부터 병합한 것이 분명하다.
154) 李鍾旭, 앞의 논문, 1994.
온조는 새로이 이주한 지역에서 군주가 될 수 있는 정치적인 능력과 지식도 갖추고 있었다. 그 결과 온조와 그 후손들은 백제의 왕위를 이 어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십신집단은 백제의 관료를 배출한 중심집단 이 되었다. 백성으로 표현된 집단은 십제와 그 후 백제의 전사단을 구 성한 중심세력이 되었다고 헤아려진다. 이들 집단은 원래 살던 지역의 선진문화와 선진문명을 익혀 알고 있던 세력들이다 . 그 결과 새로이 정착한 지역에서 정치적 권위를 나타내는 청동기를 제조하였고, 철제 의 무기나 농기구를 제조하여 군사적인 실력과 농업의 발전을 이루었 던 것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한강 유역의 선주세력들과 비교하여 새로운 전투기술을 갖고 있었기에 일찍부터 정복사업을 활발히 전개하 였고, 선진 농업기술도 알고 있었기에 위례성 지역을 중심으로 농업의 발전에도 기여하여 생산력을 늘리기도 하였을 것이다. 온조집단은 온조로 상징된 우수한 지배자와 그 밑에 신료집단과 백 성집단을 거느리고 이주하였으며, 우수한 무기와 전투술을 갖추고 있 었기에 선주세력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소국을 형성할 수 있었다. 온조집단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대의 기사에 마한으로 나오는 세력과 경쟁한 결과 한강 유역에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물론 당시 마한세력들은 북쪽으로부터 이주하는 세력들을 그 북쪽지역 인 한강 유역에 묶어 두려 한 것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온조집단 이 일정한 정치적 • 군사적 실력이 없었다면 소국을 형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십제의 형성 후에도 북쪽으로부터 이주민들이 들어온 것 은 아닌가 생각된다 십제에서는 부여에서 온 것으로 나오는 북부 해 루 등의 세력을 받아들이거나 병합하여 국력을 신장시키고 소국 단계 를 넘어서게 된 것으로 여겨진댜 온조집단은 위례성이라고 하는 도읍을 정하여 선주세력과 거주구역 을 달리한 것을 주목할 수 있다. 그 결과 이주민집단과 선주세력 사이 에는 엄격한 신분구별이 생기게 되었다. 그와 같은 엄격한 신분의 유
지는 국가통치의 원리가 혈연적인 단계를 넘어서서 보다 정치적인 방 법으로 보다 엄하게 행하여진 것을 뜻한다. 이는 나아가 소국의 국력 이 크게 조직화되었음을 생각케 한다. 그런데 온조집단이 소국을 형성할 수 있던 기반은 역시 선주세력들 이었댜 선주세력이 없었다면 십제는 형성될 수 없었음에 틀림없다. 현 재 우리는 십제의 선주세력에 대한 이해를 얻을 사료를 구할 수 없다. 그러나 사로국 형성 이전의 6 촌과 가락국 형성 이전의 9 촌을 보면 소 국형성 이전에 그러한 촌락들이 적어도 연맹을 형성하였던 것을 생각 할 수 있다.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십제의 영역 안에도 십제가 형성될 무렵 몇 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촌락들이 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온조집단이 십제를 형성하기 전에 마한이라는 소국연맹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나오는 온조설화를 보면 한강 유역 십 제의 선주세력들이 이미 정치적으로 소국이나 소국연맹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소국형성의 내적인 기반이라 할 수 있다 . 후일 십제가 미추홀 소국을 통합한 후 주변의 여러 마한소국들을 일 찍이 병합한 것도 온조집단의 정치적 • 군사적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 다. 그런데 소국 병합을 전개하며 위례성의 세력만으로는 새로이 병합 한 지역을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없었다고 여겨진다. 그 결과 북쪽 부 여나 고구려로부터 이주한 또 다른 세력들이 세운 소국들을 병합한 후 그들 세력의 존재를 인정하여 주고 일종의 제후적인 지위를 주어 그들 울 통하여 새로이 정복한 지역을 다스린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온조와 그 후손들은 이들 부여 • 고구려계 이주민들의 후손집단을 하나의 공동 체로 만들기 위하여 동명묘를 설치하여 제사를 지냈다 . 그리고 동명묘 는 각지에 나누어 설치하여 그러한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였으리라 고 짐작되기도 한다.
(6) 십제의 정치적 성격 지금까지 십제의 형성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를 정리하여 왔다. 이 번 절 에서 필자가 주장하는 내용은 기존의 견해들과는 크게 틀린 것이 분명하다 . 그 이유는 기존의 연구들이 대체로 『삼국지 』 한전의 자료만 을 중시하고 『 삼국사기 』 백제본기의 초기 기록을 무시하였거나 그것을 인정하더라도 절충적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 삼국지 』 한전 의 자료에는 백제 • 신라 • 가야의 초기국가 형성을 이해할 자료가 없 댜 따라서 본고는 『삼국사기 』 백제본기의 자료를 중심적인 자료로 삼 아 작성하였다 . 그 중 온조설화는 그 자체가 설화화된 것으로 역사적 인 사료로 직접 이용할 수는 없다. 이에 온조설화를 역사적인 자료로 바꾸는 작업을 하였고 그러한 작업을 통하여 십제의 초기국가로서 소 국을 형성하는 문제에 대하여 정리할 수 있었다. 이제 앞에서 정리한 내용을 요약 • 제시하여 맺음말로 삼기로 한다 . 먼저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온조설화를 중심으로 십제의 건국 세력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십제는 고구려로부터 이주한 온조로 대표 되는 집단에 의하여 소국으로 형성되었다. 그런데 미추홀에는 고구려 로부터 이주한 비류로 대표되는 또 다른 세력이 소국을 형성하였다. 십제와 미추홀 소국의 형성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 그런데 온조설화를 보면 비류는 온조의 형이고 두 사람은 주몽의 아들이었던 것으로 되어 있으며, 함께 고구려를 떠난 것으로 나오고 있다 . 그들이 과연 주몽의 아들이었는지 또 두 사람이 형제였는지는 단정할 수 없 다. 그렇더라도 온조와 비류가 고구려로부터 이주한 세력의 대표였고 각기 소국을 형성하였던 사실은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비류와 온조가 형제였다는 사실을 근거로 온조와 비류가 백제를 공동건국한 공동의 시조라고 하는 견해까지 나왔다. 그리고 심지어는 온조와 비류계에서 백제의 왕위계승을 교대하였다는 견해도 나온 바 있다. 그러나 비류설
화를 보면 비류는 결코 십제나 백제의 건국세력이 될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댜 비류는 미추홀 소국의 건국세력이었고 그러한 사정은 비류설 화에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온조설화와 비류설화를 구별하여 보아야 만 한다. 십제는 소국형성 이후 바류가 세웠던 미추 홀 소국을 병합하 여 국가체제 자체가 한 단계 발전하는 과정을 거치며 국명도 십제에서 백제로 바꾼 것을 주목할 수 있다 . 다음은 십제의 건국시기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 지금까지는 그 형성 시기를 기원전 1 세기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어 왔다. 그런데 온조 집단의 이주시기가 현토군 설치 이전이라고 생각되어 위만조선이 존속 하던 시기였고 십제의 형성시기도 위만조선이 멸망하기 이전이었다고 생각하였다. 십제는 이웃한 미추홀 소국과 더불어 方百里 정도의 영역을 가진 소 국으로 형성되었다. 십제가 처음부터 하남 위례성에 도읍한 것은 『 삼 국사기 』 에 나오는 온조설화를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런데 십제가 형성 될 때 미추홀에는 비류가 세운 소국이 있어 처음부터 소국연맹을 형성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사정은 십제의 남쪽에 이미 소위 마 한이라고 불린 소국연맹체가 형성되어 있던 것을 주목하도록 만든다. 십제는 이미 소국연맹이 형성되어 있던 한반도 중부지역 한강 유역에 서 소국을 형성하였다. 그러한 소국연맹체는 북쪽으로부터 이주하는 세력들을 그 변경에 묶어 두려고 하였고, 온조를 비롯한 이주민들은 소국을 형성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십제의 소국형성은 고구려 소국의 형성과 유형을 같이하고, 사로국이나 가락국과는 그 유 형을 달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십제를 세운 온조집단은 온조와 십신 그리고 그들을 따라온 백성, 미추홀 소국을 합친 후 하남 위례성으로 다시 옮긴 미추홀의 세력들, 그리고 원래부터 한강 유역에 살고 있던 세력들로 구성되었다. 당시의 정부조직에 대한 이해를 하기는 어려우나 온조와 그의 후손이 왕위를
계승하였고 십신으로 이야기되는 세력들이 그 밑의 중앙귀족이 되었다 고 여겨진댜 그들이 최고의 신분충을 구성하였다. 그들 최고 세력들은 하남 위례성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고 생각된다. 십제에서는 왕이 살 던 왕궁이 있는 하남 위례성을 國都로 삼았다. 십제는 사로국의 6 촌 (6 부)과 같이 지방행정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여겨지나 자료가 없어 자세한 내용을 밝힐 수는 없다. 그러한 십제의 지방행정구역은 십신이 다스린 것이 아니었다. 십신은 온조와 같이 온 이주민으로, 사로 6 촌장 과 같은 촌장(읍락의 장)이 아니라 왕 밑의 관리를 배출하는 세력이었 다고 헤아려진다. 한편 십제에는 온조나 십신으로 이야기되는 세력과 그들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이주민 세력들이 원래부터 살고 있던 세력 위의 신분층을 구성하여 엄격한 신분제가 편성되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십제의 국가형성 요인은 한 가지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중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이주민집단의 존재를 들 수 있다. 온조와 십신으로 대 표되는 고구려로부터의 이주민집단은 비록 고구려에서 정치적으로 밀 려나 이주한 세력들이지만 그들 나름대로 국가형성을 할 수 있는 정치 적 • 군사적 • 경제적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강 남쪽에서 소국연맹을 형성하고 있던 정치세력들은 온조집단을 한강 유역에 묶어 두고 북방 으로부터 밀려오는 새로운 이주민집단을 막도록 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당시 온조집단은 일정한 정치적 • 군사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어 그들의 국가형성을 막아 낼 힘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온조집단은 미추홀 소국을 병합하며 북방 고구려 • 부여로부터 이주한 세력들을 통 합하여 다스리기 위하여 그들의 공동조상이 되는 동명을 시조로 받들 게 되었다. 지금까지 1976 년에 발표하였던 「百濟의 國家形成」 이라는 논문을 전 면적으로 수정 • 보충하였다. 앞에서 정리한 십제의 국가형성에 대한 내용이 역사의 대세에 어긋나지 않았기를 바란다.
3 소국연맹 : 가락국의 소국형성과 가야연맹의 전개 이번 절은 가락 9 촌의 실체와 가락국의 소국형성 그리고 가락국을 맹주국으로 하는 소국연맹의 형성과 그 전개에 대한 해명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다루는 시기는 가락 9 촌이 촌락사회 단계에 있던 기원전 7 세기에서부터 가락국을 맹주국으로 한 소국연맹이 형성된 후 낙랑군과 대방군이 소멸되기 전인 3 세기까지가 된다. 지금까지 가락국의 국가형성과 성장에 대한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 지 않았댜 그것은 사료의 부족 때문이다. 그런데 근래에 이르러 과거 가야지역에 대한 고고학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가야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자료에 대한 연구결과는 편년이 옳 게 되지 않고 있어 이롤 가야사 연구에 사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 이에 새로운 연구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필자는 가락국의 국가형성과 소국연맹 형성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두 가지 방법을 택하였다. 하나는 『삼국유사 』 가락국기에 나오는 가야 의 건국신화를 역사적인 자료로 바꾸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비교사 적인 방법으로 이웃한 사로국의 국가형성과 성장 과정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가락국의 국가형성과 성장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방법이다. 필 자는 그 중 『신라국가형성사연구』 (1982) 에서 이미 촌락(추장)사회 -소 국-소국연맹 -소국병합 단계로 이어지는 국가형성 과정에 대하여 정 리하였고 사로국을 교역의 창구로 하는 진한연맹의 낙랑군과의 원거리 교역체제에 대하여 정리한 바 있다. 그와 같은 작업 결과는 소위 삼한 지역의 다른 정치세력들에 적용하여 무리가 없다고 본다. 단지 가락국 의 경우 신라와 같이 소국연맹 내의 다른 소국들을 병합하지는 않았기 에 틀린 면이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차이점이 있더라고 국가형성 과 정의 공통점은 본고의 작업에 커다란 힘이 되었다. 본고에서는 촌락사회 단계의 가락 9 촌의 실체와 가락 9 촌을 통합하
여 형성된 초기국가로서의 소국인 가락국, 그리고 가락국을 맹주로 하 여 형성된 가야연맹의 실체에 대하여 차례로 밝혀 보고자 한다. 이러 한 작업 결과는 많은 추론에 근거하고 있어 거의 모든 면에서 세부적 인 내용이 결핍되어 있을 것이나 일정한 답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 다. 그리고 본고에서 얻은 결과는 고고학 자료에 대한 해석에도 새로 운 시각을 제공할 것으로 생각된다 . (1) 가락 9 촌 촌락(추장)사회의 전개 먼저 『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다음의 기록 울 주목하기로 한다. E (1) (천지가) 개벽한 후 이 땅에는 아직 邦國의 號가 없었고 君臣의 稱도 없었다. 이에 我刀干 • 汝刀干 • 彼刀干 • 五刀干 • 留水干 • 留天干 • 神 天干 • 五天干 • 神鬼干 등 9 干이 있었다. 이들은 個長이다. 백성을 통솔하 였는데 대개 1 백 호, 7 만 5 천 인이었다 . 많이들 山野에 居하며 우물을 파 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었다.(『 三國遺事』 2, 紀異 2, 盤洛國記). (2) 金庚信은 王京人이다 . 그의 12 世祖인 탐露는 어 떠한 사람인지 알 수 없다 . 그런데 後漢建武 18 년 임인에 鑑峰에 올라 想洛九村을 바라보고 드디어 그 곳에 이르러 開國하고 국호를 加耶라고 하였다.( 『三國 史記 』 41, 열전 1, 金庚信 上). 위의 사료 El 을 보면 9 간들은 수로왕을 모시고 6 가야 중의 한 나라 였던 盤洛國이라는 소국을 형성한 세력으로 나오고 있다. 한편 사료 E2 에는 수로가 구봉에 올라 가락 9 촌을 바라보고 그 곳에 나라를 세 운 것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수로가 가락국을 세우기 이전에 동 지 역에는 9 촌이 있었고 각 촌에는 간이라 불린 추장들이 있었는데 그들
은 촌장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9 촌을 다스리 던 9 간을 추장이라고 기록한 사실이 주목된다. 이에 가락지역의 9 간들 이 9 촌을 다스리던 시대를 추장사회 또는 촌장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당시는 소국형성 이전의 촌락이 단위가 된 정치조직이 편성되 어 있었기에 이룰 촌락사회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면 가락 9 촌이 촌락(추장)사회 단계에 있던 시기는 언제였을까. 필자는 한반도 남쪽지역의 촌락사회의 표지적인 자료로 지석묘를 들어 왔다. 지석묘는 정치적 권력자의 무덤으로 생각되며 당시 그러한 지석 묘를 축조할 수 있을 만큼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는 세력집단이 성장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반도 남부지역의 지석묘는 기원전 7 세기에서 기원전 2 세기경까지 축조된 것으로 보아 왔다. 따라서 가락 9 촌의 촌락사회도 기원전 7 세기에서 2 세기까지 존속된 것으로 보면 어 떨까한다. 가락 9 촌의 촌락사회는 기원전 7 세기에 한 번에 형성되었다고는 여 겨지지 않는다. 사로 6 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155) 가락지역의 촌들도 점차 늘어나게 되었으며 기원전 2 세기 가락국이 형성되기 전 언제인가 9 촌이 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가락 9 촌의 형성과 발전은 어 떠한 이유로 이루어졌을까. 여러 가지 요인을 생각할 수 있겠으나 여 기서는 이주민의 존재를 주목하기로 한다. 가락 9 촌을 포함한 한반도 남쪽지역의 촌락사회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는 이주민집단의 존재를 찾아보기로 한다. 이와 관련하여 크게 고조선계와 부여 • 고구려계의 두 계통의 이주민들을 생각할 수 있다. 우선 고조선 계통의 이주민으로 요동지역에서 성장하였던 고조선의 정 치적인 변동 과정에 발생한 이주민집단을 들 수 있다. 단정하기는 어 려우나 기원전 5 세기 말부터 시작된 고조선 소국의 요동지역 소국 병 합 과정 156) 에서 일부 이주민이 발생한 것은 아니었나 짐작이 간다. 당
155) 李鍾旭, 앞의 책, 1982, pp. 32~33.
시 이주한 고조선계의 세력집단은 후기형의 비파형동검을 가지고 이주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다음은 연장 진개의 침입을 받아 고조선이 서 쪽 2 천여 리의 영토를 상실하고 정치중심을 요동에서 평양지역으로 옮 길 때 발생한 이주민 중 한반도 남쪽으로 온 집단이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위만조선이 들어서며 준왕을 비롯한 고조선계 이주민들이 한반도 남쪽으로 이주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위만조선 시대에 역계경의 이주가 있었던 사실로 보아 또 다른 이주민집단이 발 생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부여 • 고구려 계통의 이주민 들이 한강 유역에 정착하여 십제와 미추홀 소국 둥의 소국을 형성하였 던 사실로 보아, 그들 집단 중 한반도 남쪽으로 이주한 세력들이 있었 다고 여겨진댜 그와 같은 이주민집단은 각기 원래 살던 지역에서 축 조하던 석관묘, 토광묘 둥을 새로운 지역에서도 만든 것으로 헤아려진 댜 그리고 원래 살던 지역에서 사용하던 비파형동검, 세형동검 등의 유물을 남겼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사실은 앞으로 고고학적인 조사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위와 같은 계통의 이주민들이 새로이 한반도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동 지역에 정치적인 변동을 초래하였다고 짐작이 간다 . 그들 중에는 한왕이 되었던 준왕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계의 이주민집단, 십제를 세 운 온조집단, 서라벌을 세운 혁거세집단, 가락국을 세운 수로집단이 있 었댜 그와 같이 후에 소국을 형성한 세력들이 있었으나 그 이전의 이 주민들은 소국을 세우기보다 촌락사회에 정치적인 영향을 주어 촌락사 회의 정치적인 성장을 불러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기원전 7 세기 무렵 등장하기 시작한 촌락들은 소국형성 직전에는 일정 지역의 촌락 들 사이에 연맹을 형성한 것을 알 수 있다. 가락지역도 예외는 아니었 다. 실제로 가락 9 촌의 촌장들이 수로를 모시는 장면은 아도간을 촌 락연맹의 장으로 하는 연맹체가 형성되었던 모습을 보여준다고 헤아려
156) 李鍾 旭, 앞의 책, 1993, pp. 141 ~144.
진다 . 다음은 가락 9 촌의 정치세력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가락 9 촌의 간들은 각기 각 촌의 촌장이었으며 그들을 일반적으로 個長이라고 부 른 것을 알 수 있다. 가락 9 촌의 정치세력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 는 더 이상의 자료는 구할 수 없다. 그러나 가락 9 촌의 촌장(추장)들은 사로국 형성 이전의 사로 6 촌의 촌장들과 같은 발전 단계의 정치지배 세력들이었다고 생각하여 왔다. 따라서 비교사적인 방법에 의하여 가 락 9 촌의 정치세력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다. 사로 6 촌의 각 촌에는 씨족집단이 있었고 촌장들은 그와 같은 씨족 집단의 장이었다고 생각하여 보았다. 그리고 각 촌에 있던 씨족의 장 인 촌장(추장)은 씨족집단의 혈연계보상 높은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라 고 보았다 .I Si) 가락 9 촌의 각 촌의 성원들도 씨족집단을 이루고 있었으 며, 가락 9 촌의 촌장 역시 촌의 씨족장에 해당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 한 촌장의 지위는 부계 가계집단의 계승원리에 의하여 이어졌다고 짐 작이 간다. 한편 각 촌의 씨족집단은 한 곳에 몰려 살 수 없었다. 따라 서 각 촌마다 몇 개의 마울을 이루고 살았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 러한 사실은 지석묘의 분포에 대한 조사룰 통하여 알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촌 안의 각 마을에는 씨족이 나뉜 가계집단의 성원들이 거주하 였으며 그 안에는 가계집단의 장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와 같은 구 조를 가진 촌락사회는 혈연조직에 의하여 움직여 나갔으며, 씨족장안 촌장과 가계장인 마을의 장들이 높은 계급을 형성하였다고 보았다. 이 에 가락 9 촌의 촌락사회는 계급사회였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가락국 형성 이전 가락 9 촌의 각 촌은 각기 독립된 정치체였다. 단 지 수로가 등장하여 9 촌을 통합한 가락국을 세우기 전 언제인가부터 9 촌의 연맹이 형성된 것은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촌락사회 단계의 가락 9 촌에는 첫째 촌 안의 마을, 둘째 촌 전체를 다스리는 2 단계의
157) 李鍾旭 앞의 책, 1982, p. 40.
정치조직이 편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가락 9 촌은 현재의 면 정도에 해당하고 마을은 현재의 리 정도에 해당한다. (2) 가락국의 소국형성과 발전 『 삼국유사 』 가락국기에는 가락국의 소국형성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있다. 이에 가락국기의 해당 부분을 제시하기로 한다 . F (1) (천지가) 개벽한 후 이 땅에는 아직 邦國의 號가 없었고 君臣의 稱도 없었다. 이에 我刀干 • 汝刀干 • 彼刀干 • 五刀干 • 留 水干 • 留天干 • 神 天干 • 五天干 • 神鬼干 등 9 干 이 있었다 . 이들은 個長 이다. 백성을 통솔하 였는데 대개 1 백 호, 7 만 5 천 인이었다. 많이들 산야에 거하며 우물을 파 서 마시 고 밭을 갈아 먹 었다 . (2) 마침 後漢 世祖 光武帝 建 武 18 년 (42) 壬寅 3 월 毅浴日 에 사는 곳 북쪽 鑑旨(이는 산봉우리의 이름으로 약 열 마리의 거북이가 엎드린 모양과 같기에 이름하였다)에서 수상한 소리로 소리높이 부름이 있었다 무리 200~300 명이 여기에 집회하였다. (사람의 소리 같은 것이 있어 그 형태는 숨기고 소리만 내어 말하기를 〈여기 사람 이 있느냐? 〉 하였다. 9 干둥이 말하였다. 〈 우리들이 있다.〉 또 말하였다 . 〈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 대답하기를 〈逸旨 다〉 라 하였다. 또 말하였다. 〈皇天 이 나에게 명한 것은 이 곳에 어거하여 邦家롤 새롭게 하고 君后가 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한 까닭에 내려왔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봉우리 위 의 한 줌의 흙을 파고 노래하여 말하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약 내놓지 않으면 불에 구워 먹겠다 하고 춤을 추어라. 곧 이에 대왕을 맞이하여 환희하여 뛸 것이다.〉 9 干 둥이 그 말과 같이 모두 기뻐하며 歌 舞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러러 보니,) 자주색 끈이 하늘로부터 드리 워 땅에 닿았다. 끈의 밑으로 찾아가니 홍보로 싼 금합이 있었다. 열어 보 니 黃金 卵 여섯이 있었는데 둥글기가 해와 같았다. 여러 사람이 모두 다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수없이 절했다. 이어 다시 싸서 안아 가지고 我刀 의 집으로 돌아와 掛 위에 두고 그 무리들은 각기 흩어졌다. 12 일이 지난 笠日 새벽에 무리들이 다시 모여 합을 여니 여섯 개의 알이 모두 童子로 되었다. 용모가 훌륭하였다 . 이내 평상에 앉으니 무리들이 축하하여 절하 고 극진히 공경하였다. 나날이 자라 십여 일이 지나자 신장이 9 척으로 殷 의 天乙과 같았고 얼굴은 용과 같아 漢의 高祖와 같았다 . 눈썹이 8 彩로 唐의 高와 같았다. 눈의 重暗은 炭의 舜과 같았다. (3) 그 달 보름에 왕위 에 올랐다.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首露라 이름하고 혹은 首陵(首陵은 죽은 후의 盆號이다)이라 하였으며 國은 大篤洛이라 칭하였다. 또는 伽耶國이라 고도 칭하였다. 곧 6 伽耶의 하나다. (4) 나머지 5 인도 각기 돌아가 5 伽耶 의 主가 되었다. (5) 동은 황산강, 서남은 창해, 서북은 지리산, 동북은 伽 耶山 그리고 남은 나라의 끝이 되었다. (6) 假宮을 짓도록 하여 거처하였 는데 특히 질박하고 검소하여 이엉울 자르지 않았고 흙계단은 석 자였다. 2 년 (43) 矣卯 봄정월에 왕이 말하였다 . 〈내가 京都를 정하여 두고자 한 다.〉 이에 假宮 남쪽 新깥坪(이는 古來의 閑田인데 새로이 경작한 까닭에 이름하였다. 音은 俗字다)에 타고 가서 사방의 산악을 바라보고 좌우를 돌아보고 말하였다. 〈이 땅이 여뀌잎처럼 협소하다. 그러나 秀異하다. 가 히 16 羅漢이 머물 만하다. l 에서 3 을 이루고 3 에서 7 을 이루니 7 聖이 머 물 곳도 진실로 여기에 합치한다. 이 땅에 근거하여 강토를 개척하면 마 침내 좋을 것이다.〉 1 천 5 백 보 둘레의 羅城과 宮禁殿宇 및 諸有司의 屋 宇, 武庫 • 倉庫의 땅을 마련하여 두었다. 일이 끝나자 환궁하였다. 국내의 丁壯 • 人夫 • 工匠울 두루 징발하여 그 달 20 일 성터를 닦기 시작하여 3 월 10 일에 이르러 역서를 마쳤다. 그 宮閑과 屋舍는 농사의 틈을 타서 그 해 10 월부터 시작하여 甲辰년 (44) 2 월에 이루었는데 길일을 가려 新宮에 어거하여 萬機를 다스리고 庶務에 근면하였다.(『三國遺事』 2, 紀異 2, 篤洛 國記)
사료 Fl 에는 가락국 형성 이전 가락 9 촌의 촌락(추장)사회에 대한 모습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사료 F2 에는 수로가 등장하는 모습이 나 오고 있다. 사료 F3 에는 수로가 6 가야의 한 나라인 가락국 왕으로 오 른 사실이 나오고 있다. 사료 F4 에는 6 가야 중 가락국 외의 5 가야 형 성에 대한 내용이 있다. 사료 F5 에는 6 가야의 영역이 나오고 있다. 그 리고 사료 F6 에는 경도와 궁궐 둥의 건축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있다. 위에 제시한 가락국기에 따르면 가락국의 처음 왕으로 되었던 首露 는 황금알의 형태로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우 선 수로가 가락 9 촌의 선주세력인 9 촌장계와는 계통을 달리하고 있었 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 단정하기는 쉽지 않으나 수로는 어디서인 가 이주하여 온 집단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러한 예는 혁거세의 등장에 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필자는 혁거세 역시 이주민집단으로 보아 왔다. 수로를 일단 가락 9 촌의 연맹단계 말기에 어디에선가 이주한 집단으 로 보면, 가락국 또한 이주민집단에 의하여 건국된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수로의 부인이 되었다고 하는 허황옥의 등장과 관련된 다음 기 록을 주목할 수 있다 . G 마침 建武 24 년 (48) 戊申 7 월 27 일 9 干들이 조알할 때에 말씀을 올 려 말하였다 . 〈대왕께서 강림한 이래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였으니 신들의 딸들 중 가장 좋은 사람을 뽑아 대궐로 들여 왕비를 삼게 하십시 오. 〉 왕이 말하였다. 〈 내가 이 곳에 내려온 것이 天命이니 짐의 배필로 왕 후를 삼음도 역시 천명일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 . 〉 드디어 유천간에게 명하여 빠른 배와 준마를 거느리고 망산도로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 귀간에게 거듭 명하여 승점에 나아가게 하였다. 문득 바다 서남쪽으로부 터 붉은 빛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펼친 배가 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천 간 등이 먼저 섬 위에서 불을 드니 곧 다투어 땅에 내려 달려왔다. 신귀 간이 보고 궁궐에 달려가 아뢰니 왕이 듣고 기뻐하였다. 곧 9 간 둥을 보
내어 키를 바로잡고 노 를 올려 맞으려 하였다 .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 려 하니 왕후가 말하였다 . 〈 나는 너희 들 과 평생에 본디 모르는데 어찌 감 히 가볍게 따라 가겠는가. 〉 유천간 둥이 돌 아와 왕후의 말을 전하였다 . 왕 은 그렇게 여겨 관리 들 을 거느리고 행차하여 대궐 밑 서남 60 보쯤 되는 곳에서 장막의 궁전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 왕 후 는 산 밖의 다른 나루에 배를 매고 땅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었다. 입었던 비단 바지를 벗어 폐 백으로 삼아 산령에게 바쳤다. 그 밖에 시종한 잉신이 두 사람 있었는데 이름이 申幽개와 趙 匡 이었고 그들의 처 두 사람은 慕貞 과 慕 良이라 불렀으 며 노비까지 합하여 20 여 명이었다. 가지고 온 錦絲 와 綾羅 , 의상과 필단, 금은주옥, 보물과 장신구가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왕후가 점점 행재로 다 가오니 왕이 나가 맞아 장막으로 함께 들어갔다. 잉신 이하의 무리들은 섬돌 아래로 나아가 뵙고 곧 물러났다. 왕이 관리에게 명하여 잉신 부처 를 인도케 하며 말하였다. 〈 사람마다 각기 각 방에 안치하고 이하 노비는 한 방에 5~6 명 씩 머물게 하라. 〉 왕은 그들에게 난초로 만든 음료와 좋 은 술을 주게 하고 무늬와 채색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고 , 의복과 필단 및 보화에 이르기까지를 주었다. 군부들을 가려 모아 지키게 하였다. 이에 왕 과 왕후는 함께 국침에 있었는데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하였다. 〈 저는 阿諭 l 包國 공주인데 성은 許 이고 이름은 黃 玉이며 나이는 16 세입니다 . 본 국에 있을 때 금년 5 월 부왕과 황후가 제게 말씀하시기를 부모님께서 어 제 밤 꿈에 하늘의 상제를 함께 보았는데 말하기를 篤 洛國의 왕인 수로는 하늘이 내려보내 왕위에 올랐으니 신성한 사람은 그 사람이다. 또한 새로 이 나라에 임하여 아직 배필을 정하지 않았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어 배필이 되게 하라고 말을 마치고 승천하였는데 상제의 말이 오히려 쟁쟁 하다. 너는 이에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 곳을 향하여 가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바다에 떠서 멀리 蒸栗 를 찾고 하늘로 옮겨 幡桃에 나아가 구하였는 데 지금 아름다운 모습으로 감히 의람되이 용안을 이같이 가까이하게 되 었습니다.〉 왕이 답하여 말하였다. 〈나는 나면서 자못 성스러워 앞서 공주
가 멀리서 이를 것을 알았으므로, 신하들의 납비의 청을 굳이 듣지 않았습 니다 이제 현숙한 그대가 스스로 왔으니 나로서는 다행입니다. 〉 드디어 合 r tx 하여 두 밤과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냈 는데 뱃사공은 15 인이었다. 각기 쌀 10 석과 베 30 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 아가게 하였다. 8 월 1 일 왕의 수레가 돌아오는데 왕후와 함께 타고 잉신 부처도 나란히 수레를 탔다. 漢에서 산 잡물도 모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시각이 오시가 되고 있었다. 왕후는 이에 궁중에 거처하게 하고 잉신 부처와 그들이 거느린 사람들에게는 비어 있는 두 집을 주어 나누어 들게 하였다. 그 밖의 종자에게는 20 여 간이 되는 빈관 한 채를 주어 사 람 수를 참작하여 나누어 안치하고 나날이 주는 것을 풍부하고 넉넉하게 하였댜 싣고 온 진기한 물건은 내고에 간직하고 왕후의 사시 비용으로 삼았다.(Ii' 호 國遺 軍』 2, 紀異 2, 篤洛國記) 위의 가락국기의 기록을 보면 허황옥은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잉신, 노비를 거느리고 집단으로 이주한 것을 알 수 있다. 그와 같은 집단은 수로집단과 세력동맹을 맺어 가락국의 지배세력으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수로의 부인이 되었던 허황옥의 원래 거주지가 어디였는지 궁금하댜 가락국기의 기록에 따르면 허황옥은 아유타국의 공주였다고 나온다. 수로의 왕비가 되었던 허황옥이 실제로 인도의 아유타국으로 부터 이주한 세력인지는 알 수 없다. 확인할 길은 없으나 허황옥이 아 유타국의 공주였다는 내용은 후일 추기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여기 서는 허황옥집단의 출신지와 관련하여 그들이 가지고 온 물건 중에 漢 의 잡물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기로 한다. 그와 같은 漢의 잡물 을 가지고 이주한 것은 허황옥의 집단이 漢과 관계가 있지 않았나 짐 작케 한다. 허황옥이 漢人이었거나 漢人이 아니었으나 漢郡縣 출신의 또 다른 집단으로 한의 문물과 문화를 익힌 집단이었을 가능성을 생각 할수있댜
수로와 허황옥으로 표현된 가락국의 지배세력 들 은 이주민이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가락국기에 나오는 또 다른 이주민집단으로 탈해를 주목할 수 있다. 탈해는 院 夏國 含達王 의 부인이 낳은 알에서 태어난 것으로 나오고 있다. 탈해는 수로가 가락국을 건국한 때에 나타나 왕 위를 빼앗으려 하다 재주다툼에서 패하여 〈 中朝 來 泊 之 水 道〉 를 따라 계림지역으로 쫓겨난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 삼국사기 』 의 기록 에 따르면 탈해는 왜국 동북 1 천 리에 있는 다파나국 소생으로 알에서 태어났는데 상서롭지 않게 여긴 왕이 버리게 하여 왕비가 바다로 띄워 보내 금관국의 해변에 이르렀으나 취하지 아니하여 혁거세 39 년(기원 전 19) 아진포구에 이론 것으로 되어 있다 . 1 58)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가락국에는 수로와 허황옥 외에 또 다른 이주민들이 지나간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탈해는 수로집단이 가락국을 형성한 후에 도착하였으나 수로집단에 의하여 밀려난 것이 분명하다 . 여기서 가락국 형성기에 여러 차례에 걸쳐 이주민집단이 가락국지역 에 둥장하였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이주민집단들이 모두 가락국의 지배세력이 된 것이 아니고 어떤 세력은 정착하여 가락국을 세웠고 어떤 세력은 왕비를 배출하며 지배세력으로 자리잡았고 또 어 떤 세력은 먼저 정착한 세력에 의하여 밀려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한반도 남쪽지역의 초기국가 형성시기에 여러 차례 이주민들의 이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 필자는 그와 같은 초기국가 형성기의 이주민집단의 계통을 크게 둘 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고조선 계통이고 다른 하나는 부여 • 고구려 계통의 이주민이다. 먼저 고조선 계통의 이주민은 다시 몇 차례로 나누어 이주한 것을 볼 수 있다. 첫째, 기원전 4 세기 말 • 3 세기 초 연장 진개의 침입을 받아 고조선이 그 서쪽 2 천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 나라의 중심을 요동의 조선에서 평양으로 옮긴 때 발생한 이
158) 『三國 史 記 』 1, 新 羅本 紀 1, 脫解尼 師 今 즉위조.
주민집단으로, 개중에는 한반도 가락 9 촌이나 사로 6 촌과 같은 한반도 남부지역까지 이주한 세력이 있었다고 본다. 둘째, 위만이 고조선의 왕 위를 장악하며 준왕과 그의 좌우 궁인들이 바다를 통하여 남쪽 한지로 이주한 사실로 미루어 고조선이 망하면서 이주한 또 다른 계통의 조선 계 이주민집단을 들 수 있다. 셋째, 위만조선시대에 조선상 역계경이 2 천여 호를 거느리고 진국으로 이주하였던 사실로 미루어 위만조선시대 의 고조선 계통의 이주민집단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넷째, 낙랑군 • 진 번군 • 임둔군 등의 군현이 설치되며 발생한 이주민집단을 들 수 있다. 한편 부여 • 고구려 계통의 이주민집단은 고조선이 요동을 상실한 시 기, 중국의 진 • 한 교체기, 위만조선시기 등에 걸쳐 여러 차례 발생하 였다고 여겨진다. 그와 같은 이주민집단 중 수로집단과 허황옥집단이 가락국의 왕과 왕비를 배출하는 최고 지배세력이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 이주민 집단은 정치적 • 군사적 • 경제적 둥 각 방면에 걸쳐 9 간충보다는 새롭 고 발달된 정보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 이주민집단은 그와 같은 정치적 • 군사적 • 경제적 실력을 바탕으로 9 간으로 표현된 선주세력들을 제압하고 그 위에 군림하여 9 개의 촌을 통합하여 하나의 나라를 형성하여 가락국을 만들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가락국기에는 9 간들의 추대에 의하여 평화적으로 9 촌을 통합한 것처럼 나오고 있으나 그 실제는 수로집단을 대표로 하는 이주민집단의 각종 실력에 의하여 가락국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 현재 수로, 탈해, 허황옥 둥의 이주민집단이 언제 발생한 이주민집단 이고 어떠한 계통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수로집단의 이주가 가 장 앞섰고, 이어 탈해집단이 이주하였고 보다 후에 허황옥으로 표현된 집단의 이주가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수로는 후한 광무 건무 18 년 (42) 에 이주하여 왕이 되었고, 탈해도 같 은 해에 가락국에 이르렀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허황옥은 건무 24 년
(48) 에 가락국에 이르렀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탈 해왕의 즉위조를 보면 탈해는 혁거세 거서간 39 년인 기원전 19 년에 금관국을 거쳐 아진포구에 이르렀던 것으로 나오고 있어 가락국기의 기록과 차이가 난다. 이러한 차이는 당연하다 . 그 이유는 가락국기의 기록이 신화 • 설화화하는 과정에서 연대에 변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삼국사기 』 탈해왕 즉위조의 연대가 맞는 것만도 아니 다. 따라서 우리는 수로, 탈해, 허황옥의 이주시기와 가락국의 국가형 성 시기에 대하여 새로이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가락국의 형성연대는 언제였을까 . 어느 누구도 이를 명확하 게 밝힐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단지 한반도 남부에서 진행되었 던 초기국가로서 소국의 국가형성의 대세를 파악하여 가락국의 소국형 성 시기를 알아보기로 할 뿐이다. 이병도는 가락국의 부족국가로서의 기원은 가락국기에 나오는 기원후 42 년보다 더 오래 되었을지 모른다 고 하였다. 그러면서 수로의 시대는 중국의 삼국시대나 후한 말경에 해당하며 그보다 더 올라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I fil l 김철준은 수로의 가 락국 건국이 252 년 전후하여 있었다고 하였다 .160 ) 천관우는 수로의 김 해 도착 시기를 167 년에서 184 년 사이에 가까운 162 년으로 보고 있 다 .)61) 최근 김태식은 가락국의 소국형성 시기의 상한을 42 년으로 보고 하한을 늦어도 2 세기 후반 이전으로 보며 대체로 2 세기 전반 무렵으로 보았다 .162) 수로에 의한 가락국의 형성시기에 대해서는 그 견해가 크게 엇갈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의 가락국 건국시기에 대한 견해는 2 세 기에서 3 세기까지로 본다는 특성이 있다. 그에 비하여 이현혜는 기원 을 전후한 시기에서 기원후 1 세기 초엽에 수로집단이 김해지역의 선주
159) 李丙 急 『韓國古代史硏究』, 1976, pp. 306~310. 160) 金哲浚 『新羅上古世系와 그 紀年」, Ii'韓國古代社會硏究 』 , 1976, pp. 104~107. 161) 千買宇, 『加耶史硏究.!), 1991, p. 16. 162) 金泰植, 『加耶聯盟史 』 , 1993, pp. 42~58.
소집단들을 통합하여 狗邪國 즉 가락국을 형성한 것으로 보았다 .163 1 필 자는 사로국 • 가락국과 같은 소국들이 기원전 2 세기, 늦어도 기원전 1 세기 중에는 소국을 형성한 것으로 보았다 .1641 최근 백승충은 삼한 소 국의 형성시기롤 최소한 기원전 2 세기 초로 잡고 가야소국의 형성시기 를 기원전 2 세기로 보았다 .165 1 필자는 혁거세집단이 사로 6 촌을 통합하여 사로국(서나벌)이라고 하 는 소국을 형성한 시기가 기원전 2 세기 말경이라고 보아 왔다.Jf,6 ) 사로 국은 한반도 남부에서 성장한 소국들 중의 한 나라이며 가락국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소국을 형성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가락국 은 위만조선시대의 〈眞番芳衆國〉 중의 한 나라였을 가능성이 있고, 이 경우 가락국의 형성시기는 위만조선시대인 기원전 2 세기 또는 그 이전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수로집단이 어떠한 지역 출신이며 또 언 제 이주한 집단인가에 따라 가락국의 건국연대가 달라질 수 있다 . 여 기서 허황옥이 가지고 왔다는 漢의 잡물들을 주목하면 허황옥은 漢이 들어선 후에 이주한 집단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만조선시대에 漢의 잡물을 가지고 온 이주민집단이 있었는지 단정하기 어렵다 . 어쩌 면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이 설치된 후 그러한 이주민이 가락국지역 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나 짐작이 간다. 여기서 김해와 그 부근에서 발견되고 있는 다호리유적 등지의 漢 계통의 유물들의 주인공에 대하 여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생각이 타당하다면 허 황옥집단은 낙랑군이 설치된 이후에 이주한 세력이고, 수로집단은 그 이전 위만조선시대의 이주민이거나 더 거슬러 올라가 고조선이 망하며
163) 李賢惡 『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J, 1984, p. 93. 164) 李鍾旭, r 韓國 初期國家의 政治發展段階와 政治形態」, 『韓國史上의 政治形態岳, 1993, p. 25. 165) 白承忠, 『加耶 地域聯盟史硏究 』 , 1995, pp. 77~84. 166) 李鍾旭 앞의 책, 1982, p. 52.
발생하였던 이주민집단일 가능성이 있다.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수로집 단은 고조선 석관묘 계통의 이주민들이고, 허황옥은 토광묘 계통의 주 인공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 그와 같은 이주민집단의 존재를 확인해 주 는 고고학적인 자료는 있으나 현재 그 최초의 자료를 찾을 수는 없다 는 데 가락국의 형성연대를 밝히기 어려운 점이 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기원전 42 년 여섯 개의 황금알이 하늘 로부터 내려와 그 알들이 동자로 되었는데 수로가 먼저 나와 같은 달 보름에 大篤洛(伽耶國)의 왕위에 올랐으며, 나머지 다섯 사람들도 각기 돌아가 5 伽耶의 主가 되었다고 나와 있다. 이와 같은 6 란설화를 가야 연맹의 형성을 뜻하는 기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Im ) 필자는 이를 가야소국들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거의 유사한 이주민집단에 의 하여 형성된 사실을 설화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기록으로 보고자 한 다. 이러한 생각이 타당하다면 가락국을 비롯한 6 가야는 기원전 2 세기 경 언제인가 거의 동시에 형성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들 6 가야 소 국들은 언어를 공유하고 거의 비슷한 종교, 사회 • 정치제도를 가졌으 며 비슷한 수준의 농업과 교역 활동을 하였다고 여겨진다. 다음은 가락국의 형성과 京都의 설치에 대한 문제를 보기로 한다. 기록에 따르면 수로는 가락국의 왕이 된 후 경도를 설치하였다(사료 F6). 죽 둘레 1500 보의 나성과 그 안에 궁궐과 전각, 관청, 무기고, 창 고를 지어 44 년 2 월에 신궁으로 들어가 萬機룰 다스리고 庶務에 근면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은 가락국의 경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수로왕이 설치한 경도에는 일반 백성의 거주지 또는 일반 귀족의 거주지는 없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당시의 경도는 왕의 궁전과 관청 그리고 무기고 및 일반 창고가 들어 있었다고 할 수 있 다. 이는 경도가 왕의 거처이고 동시에 왕족을 보호하는 시설이었으며 국정을 처리하는 정청이 들어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도는
167) 白承忠, 『加耶 地域聯盟史硏究』(박사학위논문), 1995, p. 48.
수로 를 받들어 왕으로 삼았던 9 촌장 들 의 거처와는 관계가 없다 . 수로 는 별도로 그의 거처이며 가락국의 정치중심지인 경도를 만든 것을 알 수 있댜 따라서 가락국의 경도는 신라 왕경의 정치중심구역이 발전하 여 이루어진 왕도와 그 정치적 성격이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가락국의 통치조직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먼저 중앙정부 조직에 대하여 주목하기로 한다. 그 중 수로왕을 비롯한 왕에 대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댜 가락국이라는 하나의 소국은 수로를 왕으로 세움 으로써 성립되었다. 수로라는 왕은 하늘에서 황금알의 모습으로 가락 9 촌 지역에 등장한 것으로 신화화되었다. 이는 수로의 탄생을 신성한 것으로 만든 것을 의미한다. 수로의 탄생이 신성한 것으로 된 것은 한 걸음 나아가 가락국 건국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댜 수로는 가락국의 시조로 받들어졌으며 시조묘에 모셔져 후대 의 왕 둘 이 그에 대한 제사를 지냈던 것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시조 묘에 대한 제사는 그 후손들에게 계보에 대한 의식을 갖게 만들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시조묘에 대한 제사는 가락국 역사의 뿌리를 마련한 것이며 조상계보에 대한 파악은 왕실의 유지장치가 되었던 것 을뜻한댜 수로 를 비롯한 가락국의 왕들은 자신과 왕실을 위하여 또는 국민을 위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고 전쟁을 치르며 공공사업을 주관하고 조상 묘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왕들은 권력을 가지고 그와 같은 일을 수행 하였다. 그런데 수로를 비롯한 가락국의 왕들은 9 간이 다스리던 9 촌 세력을 직접적으로 지배하기는 어려웠는지 모른다. 그 결과 왕들은 가 락국 전체의 통치와 관련된 신분질서의 유지, 법의 시행, 정책결정과 의견조정 둥의 일을 하였다. 가락국의 왕들은 9 촌장과 촌락민들과는 별도의 거주지인 경도에 머물며 나라를 다스려 나갔다. 가락국에는 나름대로 정부조직이 편제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와 같 은 정부조직의 운용은 수로나 허황옥으로 대표되는 왕실세력 집단만으
로는 불가능하였다고 여겨진다 그 결과 과거 촌락사회시대의 촌의 지 배세력들을 정부의 관리로 등용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가 락국기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주목할 수 있다 . H (1) 마침내 我刀를 我射 으로, 汝刀를 汝諸로, 彼刀룰 彼藏 으로, 五方 (刀)은 吾常으로 고쳤다. 留水 와 留天 의 이름은 윗글자는 바꾸지 않고 아 랫굴자만 留功과 留 1싶 으로 고쳤다. 神天 은 神道 로 고치고, 五天 은 吾能 으 로 고치고, 神鬼는 음은 바꾸지 않고 訓을 臣貴로 바꾸었다. (2) 신라의 직관제도를 취하여 角干 • 阿比干 • 級干의 관위를 설치하고 그 밑의 관료 들은 주나라와 한나라의 제도에 의하여 나누어 정했다 . 이는 옛 제도를 혁신하고 새 것을 취하여 관직을 설치하고 나눈 방법이다. 이로부터 나라 를 다스리고 집안을 정돈하여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다스림은 야 단스럽지 않아도 위엄이 있고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 하물며 왕후와 함께 살게 된 것은 비유하자면 하늘에 대하여 땅이 있고 해에 대 하여 달이 있는 것과 같다 . 그 공은 우임금의 아내가 하나라를 돕고, 요임 금의 딸들이 순임금의 가문을 일으킨 것과 같다.(『 三國迫事』 2, 紀異 2, 鷲 洛國記) 위의 가락국기에 나오는 기록은 가락국의 설치 후 중앙정부의 관직 설치와 그러한 관직에 9 촌장들을 임명한 것을 보여준다. 이는 역사적 인 사실을 반영한 기록이라고 여겨진다. 실제로 가락국의 왕이 되었던 수로와 그 집단은 가락국 전체를 다스릴 관리들을 모두 배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 과거 촌락사회시대 이래의 촌락의 지배세력들 울 가락국 정부의 관리로 등용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하여 허황옥으로 대표되는 왕비를 배출한 집안의 성원들도 중앙정부의 관직 을 갖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한편 가락국의 정부조직은 신라의 제도를 받아들인 것으로 나오고
있다. 신라의 중앙정부조직은 일시에 편제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 면서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점차 성립된 것을 알 수 있다 . 1 따) 따라서 가락국에서 신라의 관제를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그 시기는 가락국 건국 초기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 가락국에서 신라의 관직제도를 받아 들인 것은 적어도 신라가 관직제도를 어느 정도 설치한 후의 일로서, 가락국기의 기록은 후대에 있었던 사실을 건국 초기의 사실로 기록한 것이 분명하다. 가락국의 정치조직은 적어도 3 단계로 편성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 우선 촌락사회 단계에 9 촌의 각 촌을 다스리던 조직과 촌 안의 여러 마을을 다스리던 조직의 2 단계 조직이 편성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169) 거기에 더하여 9 촌을 통합한 가락국 전체를 다스리던 통치조직을 들 수 있다 .1 70) 이러한 정치조직의 편제는 원래 있던 조직보다 한 단계 위 에 새로운 상급 정치조직을 편성한 것을 뜻한다. 이 경우 종래부터 있 던 조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조직은 하급의 정치조직으 로 그 후에도 남게 되었다. 여기서 가락국의 지방통치조직에 대하여 정리할 수 있다. 가락국이 가락 9 촌을 통합하여 형성되었던 사실로 미루어 가락국 형성 이후에 9 촌은 가락국의 지방행정구역으로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사 정은 사로 6 촌이 사로국 형성 이후에는 사로국의 지방행정구역으로 되 고 6 부로 편제된 사실로 알 수 있다 . 가락 9 촌이 가락국의 9 부로 되었 는지는 알 수 없다 . 여하튼 가락 9 촌의 각 촌에는 다시 몇 개씩의 마 울이 있어 촌 밑의 하급 지방행정구역이 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한 편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가락국의 경도는 정치중심구역으로 기능
168) 李 鍾 )I!! , 앞의 책 , 1982, pp, 196~221. 169) 李鍾 旭 『 韓國 初期 國家 의 政治 發展 段階와 政治形態」, 『 韓 國 史上의 政治形 態』 , 1993, pp. 37~42. 170) 위 의 논문, pp. 42 ~50.
하고 있었으며 9 촌과는 관계 없는 지역으로 편제되었다. 그러한 경도 는 단순히 정치중심구역일 뿐 아니라 경제 • 종교 • 신분적 중심지도 되 었댜 다음으로 가락국의 신분제도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다. 우선 가락국 최고의 신분으로 왕을 배출한 수로왕과 그 후손으로 왕을 배출한 일정 가계의 성원들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수로의 왕비가 되었던 허황옥집 단을 들 수 있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허황옥으로 표현된 집단은 여 자만 있던 집단이 아니고 수로집단과 세력동맹을 맺을 수 있던 가계집 단이었다고 여겨진댜 이에 수로의 후손집단으로 왕을 배출한 가계의 성원과 왕비를 배출한 가계의 성원들이 왕실세력으로서 최고의 신분층 을 구성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들 최고의 신분에 속한 사람들은 9 촌장 계통의 주민들과는 혈연적으로 단절되었으며 그 결과 보다 강력하고 행정적인 통치를 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가락국의 왕실세력 들은 경도에 거주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 왕실세력들은 시간이 지나 면서 왕에서 멀어진 가계의 성원들은 점차 신분이 떨어진 것으로 생각 된다. 왕실세력 밑에는 9 촌장 계통의 후손들이 있었다. 그들은 9 촌의 지방 세력으로 있었으며 가락국 정부의 관직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헤 아려진댜 그들은 주로 9 촌의 중심이 되는 마을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밑 촌 안의 마을에 세력집단이 또 다른 신분층을 형성하 고 있었다고 짐작이 간다. 그 밑에는 일반 백성이 있었는데 이들 백성 들은 가락국 왕의 신민들이 되었다. 한편 백성들보다 낮은 신분으로는 허황옥이 거느렸던 노비의 존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가락국기의 기록(사료 Fl) 에서 가락 9 촌의 촌장들이 수로를 추대하 여 왕으로 삼을 때 1 백 호, 7 만 5 천 인을 거느렸다고 한 데 주목할 필 요가 있다. 이는 가락국 형성 당시의 호구를 추측할 단서를 제공하여 주는 기록이나 그 자체 그대로 믿기에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삼국
지』 위서 동이전 한전에 나오는 인구 기록을 볼 필요가 있다 . 그에 따 르면 마한의 國 들 중 마한에는 大 國은 만여 가, 小國은 수천 가, 총 10 여만 호, 변진에는 大 國은 4 ·5 천 가, 小 國 은 6 ·7 백 가, 총 4 ·5 만 호 라고 되어 있다. 가락국은 『 삼국지 』 에서 말하는 변한지역에 해당하고 일찍이 정치적인 성장을 하고 있었기에 그 안구는 많은 편으로 4, 5 천 가 정도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그러한 인구 자료는 3 세기 후반의 상황을 말하여 줄 가능성이 크기에 가락국 초기에는 그 인구가 적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기원전 2 세기에 가락국이 형성되었다면 당시 가락국의 인구는 『삼국지 』 에 나오는 것의 반정도 되 었을 가능성 이 있댜 171 ) 이 경우 수로왕이 가락 9 촌을 통합하였을 때 인구는 2 천에서 2 천 5 백 가 정도 되었을 수 있다. 단정하기는 어려우 나 그 인구는 1 만에서 1 만 2 천 5 백 정도가 아니었을까 짐작이 간다. 이제 가락국의 소국형성 요인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소국 형성의 기반에 대하여 생각하기로 한다 . 가락국은 가락 9 촌을 통합하 여 형성되었다 . 자연 가락 9 촌이 가락국의 형성 기반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가락 9 촌은 추장이라고 불리는 촌장들에 의하여 다스려지 던 사회였댜 그와 같은 촌락에는 촌장이라고 하는 정치지배자가 존재 한 것이 분명하다. 그들 촌장들은 가락국 형성 이전 언제부터인가 촌 락연맹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가락 9 촌을 다스리던 단일 정치지배 자는 아직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가락 9 촌 연맹은 소국형성 직전 단계까지 정치적인 성장이 이루어진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수로 집단이 등장하여 가락 9 촌을 통합하여 다스리는 정치조직을 편성한 것 을 알수 있다 . 가락국을 형성한 중심세력인 수로집단은 이주민집단이었다. 수로와 허황옥으로 대표되는 그들 이주민집단은 9 촌장들보다 한 단계 높은 신
171) 李 鍾 旭, 앞의 책, 1982, p. 26 에서 사로국의 국가형성기에는 3 세기 인구의 반정 도 인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 이러한 생각은 가락국의 경우에도 해당한다.
분충을 이루었으며 왕과 왕비를 배출해 내게 되었다. 가락국을 세운 이주민집단은 각종 정보를 소유한 집단이었고 그와 같은 정보는 소국 을 형성할 실력을 제공하여 주었다 . 특히 수로라고 하는 유능한 지도 자 아래 우수한 무기를 갖고 있었고 일정한 인적 자원을 갖춘 이주민 집단은 9 촌장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경도에 거주하 였으며 정치 • 군사 조직을 유지하여 나갔다 . 가락국을 형성한 이주민 세력집단은 당시 정치 • 군사 • 경제 • 종교 • 문화적 역량이 소국을 형성 할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가락국의 주변에는 가락국기에 나오는 것과 같이 거의 동시에 또 다른 5 개의 소국들이 형성되었던 것을 알 수 있 댜 과연 가락국을 포함하여 6 가야만이 형성되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 다 . 단지 가락국과 거의 비슷한 과정을 거쳐 소국을 형성한 나라들이 가락국 주변에 5 개가 더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있다. 그와 같은 6 개 가야 소국의 밖에는 또 다른 소국들이 형성되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 다. 그러한 6 가야의 소국들은 소국 이상의 정치적인 성장을 하기가 쉽 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당시 가야지역의 소국들은 다른 소국을 통합하 여 보다 큰 국가를 형성하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 될 수도 있 었다고 여겨진다. (3) 가야연맹의 형성과 전개 『삼국유사 』 가락국기에는 6 가야 중의 한 나라였던 가락국의 형성과 발전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있다 . 그 중에 가락국 이외에 5 가야가 형 성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6 가야의 영역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 6 가야의 영역은 동은 황산강, 서남은 창해, 서북은 지리산이고 동북은 가야산이 고 남은 나라의 끝이 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삼국유사』 五伽耶조를 보기로 한다•
五伽耶(烈i洛記贊에 말한 것을 보면 한 가닥 자줏빛 끈이 내려와 6 개의 둥근 알을 내려주었는데 다섯은 각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에 있었 는데 곧 하나는 수로왕이 되었다. 나머지 다섯도 각기 5 가야의 主가 되었 댜 지금 금관이 다섯의 수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당연하댜 그런데 本朝 史略에 금관을 함께 넣고 昌寧을 함부로 넣은 것은 잘못이다) 阿羅(一作耶)伽耶(今含安), 古寧伽耶(今咸寧), 大伽耶(今高靈), 星山伽耶 (今京山 一云碧珍), 小伽耶(今固城)이다. 또 本朝史略에 말하기를 태조 천 복 5 년 경자년 (940) 에 5 가야의 이름을 고쳤으니 1 은 金官(金海府가 되었 다), 2 는 古寧(加利縣이 되었다), 3 은 非火(지금의 昌寧 인데 高寧의 잘못인 듯하다), 나머지 둘은 阿羅와 星山이다(위와 같다. 星山은 혹은 碧珍伽耶 라 한다).(『 三 國遺事 』 1, 紀異 2, 五伽耶) 한편 중국측 기록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전에는 弁辰또는 弁자 가 붙은 弁辰彌離彌凍國, 弁辰接塗國, 弁辰古資彌凍國, 弁辰古淳是國, 弁辰半路國, 弁樂奴國,弁軍彌國, 弁辰彌烏邪馬國, 弁辰甘路國, 弁辰狗 邪國, 弁辰走淸馬國, 弁辰安邪國, 弁辰濱盧國 등의 13 개 국명이 나오고 있다. 弁韓과 辰韓에는 각기 12 국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13 국 으로 나오고 있어 문제가 된다. 그 중 弁軍彌國은 진한의 軍彌國이 중 복된 것으로 원래 진한의 국명이라고 보면 변한에 12 국이 있었던 셈이 된다. 그러면 『삼국유사』 가락국기 등에 나오는 6 가야와 『삼국지』 한전에 나오는 변진 12 국은 어떠한 성격을 지닌 것일까. 필자는 『삼국지』 한 전의 기록은 소위 삼한의 정치적 성장에 대한 내용을 전하는 것이 아 니라고 보아 왔다 .1721 『삼국지』 한전의 기록은 낙랑군 • 대방군과 변진 12 국으로 나오는 세력 사이의 원거리교역관계를 중심으로 전하는 것으
172) 李鍾)g, 『『三國 志』 韓傳 정치관계 기록의 사료적 가치와 그 한계」, 『吉玄益敎授 停年紀念 史學 論策』 , 1996, pp. 371~388.
로 본다. 따라서 『 삼국지 』 한전의 내용은 소위 삼한의 소국형성이나 정치적 성장에 대한 본격적인 사료는 아니다. 단지 낙랑군 • 대방군과 소위 변진의 관계에 대한 기록 속에서 변진지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자료를 일부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에 비하여 가락국기의 기록은 가락국의 소국형성과 관련된 내용을 전하고 있다 . 이에 『삼국지 』 한전에 나오는 12 국이 과연 3 세기 후반 『 삼국지 』 가 저술될 때 소국연맹을 형성하고 있던 소국들이었는지도 생각해 볼 문 제댜 그러한 사정은 마한지역에서는 백제가, 진한지역에서는 신라가 이미 소국들을 병합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 국명들을 열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한과 진한조에 나오는 國들 중에는 이미 백제와 사로국에 게 병합된 소국들이 있었으나 중국인들의 원거리교역의 대상을 밝힐 필요에서 기록된 국들이 있었다. 가야연맹은 원래 『 삼국유사 』 가락국 기에 나오는 것과 같이 6 가야가 연맹을 형성하였고 가락국이 맹주국의 지위를 차지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가야지역에서 소국연맹이 형성될 때 구태여 12 개의 소국들이 연맹을 형성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 락국기에 나오고 있는 것과 같이 6 개의 소국들이 연맹을 형성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가야지역의 소국들이 형성하였던 소국연맹체를 弁辰 또는 弁韓이라고 하기보다 가야연맹이라고 불러 두고자 한다. 그와 같은 가야연맹의 형성은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기원전 108 년 낙랑군이 설치된 후 낙랑군에 온 〈內郡賈人〉 들이 낙랑군과 가야의 소 국들 사이에서 원거리교역을 행하는 중에 가야지역의 소국들을 묶어 하나의 교역망을 이루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가락국은 그와 같은 원거리교역의 창구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가락국이 위치한 장소는 낙 동강의 하구로서, 낙동강 중하류 지역에서 소국을 형성하였던 가야의 여러 소국들이 원거리교역을 하는 창구로 삼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 던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고고학적인 면에서 기원전 1 세기 가야의 소국들과 낙랑군 사이에 원
거리교역이 행해진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당시 가야지역 소국들의 지 배자들은 정치적인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위세품 들 을 낙랑군으로부터 수입하기를 원하였다. 그 결과 前漢 대의 유물들이 가야지역에서 발굴 되고 있다 . 다호리유적에서 발굴된 전한대의 유물들은 좋은 예가 된다. 낙랑군을 통하여 가야의 소국에서 수입한 물건들은 원가가 얼마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물건들은 가야의 지배세력들이 정치 적 • 사회적 권위를 나타낼 수 있는 위세품(p res tig e - g oods) 들이었다. 동경이나 동탁과 같은 물건들은 원래 중국에서는 위세품은 아니었다고 여겨지나 가야지역에 수입된 후 실용품으로 사용되기보다 권위를 상징 하는 위세품으로 용도가 변경된 것을 알 수 있다. 낙랑을 통하여 수입 된 대부분의 물건들은 그와 같이 용도변경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 대신 가야의 소국들은 낙랑군에 철, 포 등의 원자재에 해당하는 물건을 훨 씬 많이 수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교역은 원거리교역 또는 위세 품 교역체제(p res tig e- g oods s y s t em) 라고 할 수 있다 . 1 73 1 그러 한 원거리교역은 우리 눈으로 보면 불평등한 교역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 가야소국의 지배세력들은 그와 같은 교역을 통하 여 구한 물건들로 정치적인 권위를 백성들에게 과시할 수 있었기에 낙 랑과의 교역을 계속한 것을 볼 수 있다. 『삼국지 』 弁辰전에는 〈(弁辰 의) 國 들은 철을 생산하였는데, 韓 • 澈 • 倭에서 모두 와서 가져간다. 여러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데 모두 철을 사용한다. 마치 중국에서 화 페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또 2 군(낙랑군 • 대방군)에 공급한다〉 고 하 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기원전 1 세기에는 주로 낙랑에 온 〈內郡賈 人 〉 즉 중국 본토에서 온 상인들이 한반도 남쪽지역에 왕래하며 교역 을 하였는데 그 중 낙동강 하구에 자리잡은 가락국은 주요 교역대상이
173) 필자는 이미 이와 같은 원거리교역체제에 대하여 정리한 바 있다(앞의 책, 1982, pp. 100~104). 당시 진한연맹을 중심으로 다루었으나 삼한지역의 다른 소국연 맹체인 변한과 마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틀림없다 .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낙랑에서 온 중국인 상인들은 가야의 정치세 력들 에 필요한 위세품을 비롯하여 선진문명의 산물들을 주로 가지고 왔다. 그러한 물건들은 부 피도 크지 않았고 원가도 얼마 되지 않았으나 가야를 비롯한 소위 삼 한지역의 정치세력 들 이 즐겨 찾던 물 건들이었다. 따라서 기원전 1 세 기에 그와 같은 원거리교역이 활 발하게 전개되었으며 가야지역에서 교 역의 창구가 되었던 가락국이 가야 여러 소국들을 대표하여 중간무역 을 하였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가락국은 원거리교역의 창구가 되어 중간무역의 이익을 차지한 것도 알 수 있다. 가락국은 철 제 무기나 농 기구도 먼저 장악하고 나아가 그러한 물건들의 제조기술이나 농업기술 도 알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에 가야의 다른 소국들보다 먼저 군사 적 • 경제적 • 정치적으로 성장한 가락국은 가야지역 소국들의 맹주국이 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가야라는 소국연맹이 형성된 것을 생각 할 수 있다. 여기서 가야지역의 소국들 사이에 형성되었던 소국연맹의 실체에 대 하여 잠시 보기로 한다 . 소국연맹의 맹주국이 되었던 가락국과 가야연 맹의 다른 소국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 소국연맹의 소국들 은 맹주국의 부용국이 되거나 속국이 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러한 사정은 마한과 백제 사이에 또는 고구려와 바류국이라는 소국들 사이 에서 벌어졌던 관계를 통하여 알 수 있다 .1 74) 여기서 그와 같은 부용국 과 속국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마한의 속국 이었다고 하는 백제는 마한연맹의 한 소국으로 있을 때인 온조왕 10 년 에 神鹿을 잡아 마한에 보낸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맹주국에 공납을 바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가 하면 온조왕 13 년에는 漢 山 아래에 桐 울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를 옮긴 후 사신을 마한에 보내어 천도한다는 사실을 고하고 이듬해에 천도를 하였다. 그리고 온조왕 24 년에는 웅천
174) 李 鍾 旭, 앞의 논문, 『韓國 史上의 政治 形態』 , 1993, pp. 26~29.
책을 만들자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어, 나라가 완전해지고 백성이 모이 니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여 크게 성지를 만들고 마한의 강역을 침범 하니 의리에 그럴 수가 있는가 하고 꾸짖었다. 이에 온조왕은 부끄러 이 여겨 드디어 책을 헐었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백제와 마한과의 관 계는 소국연맹 단계의 맹주국과 연맹소국들 사이의 관계를 잘 보여준 다. 연맹의 소국들은 맹주국에 신록을 바치는 등 사대의 예를 취하고 공납을 하며 천도 사실을 보고하는 등의 일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여 기서 마한의 맹주국이 백제에 어떤 구체적인 통치력을 행사한 것은 찾 을 수 없댜 이와 같은 관계는 맹주국인 가락국과 가야연맹의 다른 소 국들 사이에도 있었던 관계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가야연맹 안의 일부 소국들 사이에서 특별한 관계가 전개되 기도 한 것을 볼 수 있다. 즉 가야연맹에 속하였던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는 浦上八國이 가야의 맹주국이었다고 생각되는 가라(가락국)를 공 격하여 6 천 명이나 되는 포로를 잡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소국연 맹 속에서 또 다른 소규모의 소국연맹 관계가 형성, 전개된 것을 의미 한댜 소국연맹 안에서 보이는 소규모의 소국연맹은 포상 8 국이 가라를 공 격한 것으로 보건대 군사적 동맹을 위한 소국연맹일 수도 있다. 이는 소국연맹의 여러 소국들 사이에 갈등관계가 전개되고 그 때문에 소국 연맹이 나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가야연맹은 원거리교역을 하는 과 정에서 만들어진 소국연맹이기에 결속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고 여 겨진다. 따라서 소국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소국연맹은 나뉠 수 있 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가야연맹은 연맹을 형성한 소국들이 후일 신라에 병합될 때까지 결속력이 약한 상태에 있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가야연맹의 정치적 • 군사적 활동에 대하여 주목하기로 한다. 가야사에 대한 본격적인 사료를 찾을 수 없기에 『삼국사기』 신라본기
에 나오는 자료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풀어 나갈 필요가 있다 . 여기서 먼저 가야연맹은 시간이 지나면서 신라와의 관계가 변한 것을 주목할 수 있댜 기원전 1 세기에 낙랑의 상인들은 바다의 길을 따라 배를 타고 왕래 하며 소위 삼한지역의 여러 세력들과 원거리교역을 하였다. 낙랑에 온 중국 본토의 상인들은 가락국에도 들렀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한 사정 은 I, 삼국유사 』 가락국기에 수로와 탈해가 재주를 겨루어 탈해가 패배 하자 가락국을 떠나는데 〈 中朝來泊之水道 〉 로 갔다는 사실로 알 수 있 다. 가락국에는 중국에서 온 배들이 머무는 곳이 만들어져 있었고, 기 원전 1 세기에 중국의 배들이 소위 삼한지역에 활발하게 왕래한 것으로 짐작이 간다. 그런데 기원후 1 세기 초부터는 중국 상인들이 중국의 배 를 가지고 삼한지역으로 온 것이 아니라 원거리교역을 원하게 된 삼한 의 세력들이 오히려 낙랑의 치소인 조선현에 가서 몇 대에 걸쳐 머물 며 원거리교역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 그러한 예로 『 삼국지 』 한전에 인용된 『魏略』의 기록에 廉斯鏞에 대한 기록이 있어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처럼 교역을 위하여 사람을 낙랑에 보내는 원거리교역을 감당할 소국들은 많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그 결과 기원전 1 세기에 원 거리교역을 통하여 가야연맹의 맹주국이 되었던 가락국이 1 세기 이후 에도 위세품 교역을 주관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에 가야연맹의 맹 주국이었던 가락국은 군사적 • 경제적 실력을 키울 수 있었을 것이다 . 『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을 통하여 그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 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르면 1 세기 후반에서 2 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가야와 신라 사이에 여러 차례 전쟁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탈해왕 21 년 (77) 에는 아찬 吉門과 加耶兵이 黃 山津口에서 전투 를 벌여 1 천여 급을 베었다. 파사왕 8 년 8 월에 영을 내리는 중에 서쪽 으로 백제와 이웃하고 남으로 가야와 접하였는데 덕은 능히 편안케 하 지 못하였고 위엄은 두렵게 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성루를 수리해서
침범에 대비할 것이라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달에 加 召 와 馬頭 의 2 성을 쌓았다. 파사왕 15 년 2 월에 가야의 적이 마두성을 포위하여 아 찬 吉元 을 보내어 기병 1 천으로 쳐서 물리쳤다 . 파사왕 17 년에는 加耶 人이 남쪽 변경을 습격하므로 加城 主 張 世를 보내어 막게 하였는데 적 에게 살해되었다. 왕이 노하여 용사 5 천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적을 물 리치니 포로가 매우 많았다. 파사왕 18 년에는 군대를 일으켜 가야를 치고자 하였으나 그 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청죄하였으므로 멈추었다. 지마왕 4 년 (115) 2 월에 가야가 남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7 월에 왕이 친히 가야를 親征하였는데 步騎롤 거느리고 黃山河 롤 건너니 가야인들 이 군사를 수풀 속에 숨겨 두고 기다렸다. 왕이 모르고 바로 나가자 복병이 일어나 몇 겹으로 에워싸니 왕이 군사를 격려하여 포위를 풀고 물러났댜 지마왕 5 년 8 월에 장수를 보내어 가야를 침범케 하고 왕은 정병 1 만을 거느리고 뒤따르니 가야가 성을 지켰는데 오랫동안 비가 내려 돌아왔다 . 『 삼국사기 』 에는 신라와 가야의 전투에 대한 기록들이 위와 같이 나 오고 있다. 위의 기록을 통하여 신라와 가야 사이에는 77 년에서 116 년 까지 죽 1 세기 후반에서 2 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전투가 벌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전투 장소는 신라와 가야 사이였으며 황산강인 낙동강 유역도 전투지역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야가 과연 어떤 나라였는지 잘 알 수 없다.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가야연맹의 맹 주국인 가락국울 생각할 수 있다. 만일 신라와 전쟁을 한 가야가 가락 국이라고 한다면 당시 가락국은 가야연맹의 맹주국이 된 지 오래 되었 고 그 과정에서 군사적 • 경제적으로 국력을 신장하여 신라와 전쟁을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신라는 사 로국으로, 사로국도 가야와 마찬가지로 경상도 북부의 소국들을 하나 의 연맹으로 만들어 그 맹주국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 로국과 가락국이라고 하는 두 맹주국들이 서로 전쟁을 벌인 것을 알
수있댜 그런데 당시 가락국과 사로국은 전투만 한 것은 아니었다고 여겨진 다. 그것은 파사왕 23 년 (102)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이 영토를 가지고 분쟁을 벌일 때 파사왕이 처리하기 어렵다고 하여 수로왕에게 그 처리 를 부탁한 일로 알 수 있댜 이러한 기록은 다소 설화적인 내용을 담 고 있댜 그러나 그 자체가 일정한 역사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 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당시 신라와 가야 사이에 항상 전쟁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신라와 사로국 사이에 평화적인 관계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기록을 통하여 어쩌면 2 세 기 초에는 가락국세력이 사로국보다 강하였던 것은 아니었나 짐작이 간다. 가야와 신라 사이의 관계는 3 세기 초에 이르면 그 내용이 달라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그와 관련된 기록들 이 있다. 나해왕 6 년 (201) 2 월에 가야가 화친을 청했다. 나해왕 14 년 (209) 7 월에 포상 8 국이 加羅를 침범할 것을 꾀하였으므로 가라 왕자 가 와서 구원을 청했다. 이에 왕은 태자 于老와 이벌찬 利音에게 명하 여 6 부병을 거느리고 가서 구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8 국의 장군을 격 살하고 포로가 되었던 6 천 인을 빼앗아 돌려보냈다 . 나해왕 17 년 (212) 에는 가야가 왕자를 보내어 인질로 삼았다. 나해왕대에 있었던 이러한 사건을 통하여 3 세기 초에 가야와 신라의 관계가 바뀐 것을 알 수 있 다. 가야에서 화해를 청하고 가야의 왕자를 보내어 신라에 구원을 요 청하는가 하면 왕자를 신라에 인질로 보내고 있다. 이는 3 세기에 이르 러 가야의 국력이 신라보다 약해진 것을 나타내 준다. 실제로 3 세기에 이르면 신라는 진한연맹의 소국들을 병합하여 하나의 왕국으로 발전하 였는데 가야는 소국연맹 단계에 머무르고 있어 국력이 신라에 미칠 수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가야는 신라에 원병을 요청하는가 하면 왕자를 인질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면 어떠한 이유로 가야는 3 세기까지 소국연맹에 머물고 더 이상 의 정치적인 발전을 하지 못했을까. 가야연맹의 소국들은 대체로 정치 적 • 군사적 • 경제적인 힘의 균형을 이룬 것이 아니었나 짐작이 간 댜 1 751 그러한 사정은 가야소국들이 위치하였던 지역에서 보이는 고분 들의 규모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가야소국들 사이에 완전하 게 세력균형이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한 소국이 다른 소국을 병합할 수 있을 정도로 세력의 불균형을 이루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물론 가야의 소국들 사이에 전쟁도 있고 포로를 잡아가기도 하였으 나 전쟁에서 승리한 소국이 다른 소국을 완전히 병합하여 그 왕을 제 거하고 통합을 이루어 피병합국을 직접 통치할 만한 힘을 가진 나라는 없었다고 여겨진다. 또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침략을 받은 소국의 지 배세력들은 전쟁에서 패하면 다른 지역으로 아주 이주하거나 참시 피 하였다가 침략세력이 물러나면 다시 돌아와 나라를 유지하였을 가능성 도 있댜 가야의 소국들은 외부의 침략을 받으면 왜로 갔을 가능성도 있다. 가야가 끝까지 소국연맹체를 유지한 것은 소국들이 일찍이 의교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다른 나라의 지원을 받아 소국의 멸망을 피할 수 있 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예컨대 포상 8 국의 침략을 받아 6 천 명 이 포로로 잡혔던 가라는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 나 가라는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포상 8 국의 침략을 물리치고 포로 로 되었던 사람들을 되찾은 것으로 그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가 야의 소국들은 원거리교역을 통하여 비교적 완만한 연맹체를 형성하였 으며 상황에 따라 연맹 안의 소국들 사이에 전쟁도 벌였다. 그런데 가 야의 소국들은 일찍부터 의교적인 활동을 잘 벌여 외국세력의 힘을 빌
175) 金廷懿은 변한의 여러 옵락들은 어느 한 우세한 읍락국가에 의한 정복통합이 이 루어지지 못했다고 하였다 (r 加耶史硏究의 現況」,
어 병합과 피병합 관계까지는 이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가 야는 일찍이 신라에 화친을 청하고 인질을 파견하였으며, 필요에 따라 백제, 왜까지 끌어들이는 국제관계를 전개한 것으로 보아 우리들이 생 각하는 것보다 국제적인 외교술에 능한 소국들로 이루어졌던 것을 짐 작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가야의 소국들은 각기 원거리교역을 수행하며 경제적 • 군사적 실력을 키웠고 맹주국이 위세품이나 무기 또는 농기구를 독점 하지도 못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나아가 낙랑군이나 대방군과 같은 중국 군현을 통하여 선진문명에서 구할 수 있는 각종 정보도 각 소국 이 거의 비슷하게 장악한 것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 과정에 각 소국 은 철이나 포와 같은 수출품도 독자적으로 만들어 수출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가락국을 맹주국으로 하는 가야연맹의 맹주국의 지위 는 한정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가야의 여러 소국들과 비교 하면 가락국온 낙동강 하구에 위치하여 교역의 창구 역할을 하기에 적 합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때문에 『삼국지』가 편찬될 때 까지 가락국이 가야소국들의 원거리교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로 인하 여 맹주국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으로 헤아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소국연맹 단계를 넘어서서 연맹의 소국들을 거의 병합한 상황에 있었다. 그와 같이 상대적으로 국력이 크게 강화된 신라에 대 적하는 과정에서 가야는 더욱 그 세력을 성장시키기 어려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대신 가야는 군사적 • 정치적 실력보다 경제적으로 의교적으 로 주변 세력들의 침략을 막아 낸 것을 생각할 수 있다. (4) 가야연맹의 정치적 성격 지금까지 가락 9 촌, 가락국의 형성과 성장 그리고 가락국을 맹주국 으로 하는 가야연맹의 형성과 그 전개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이제 앞
에서 정리한 내용을 요약하여 맺음말을 삼고자 한다. 『삼국유사 』 가락국기와 『 삼국사기 』 열전 김유신전에 나오는 자료를 보면 수로왕이 등장하기 전 가락지역에는 9 촌이 있었고 각 촌에는 촌 장이 있었으며 이들 촌장을 〈 추장 〉 이라고 불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에 초기국가로서 소국이 형성되기 이전 가락지역의 정치체를 촌락 (촌장 또는 추장)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 촌락사회로서 가락 9 촌은 대 체로 기원전 7 세기에서 2 세기까지 존속하였다. 소국형성 이전 이 같은 촌락사회에는 고조선이나 부여 • 고구려 계통의 이주민들이 들어와 점 차 정치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각 촌에는 몇 개의 마울들이 나뉘어 있었고 촌 안에는 하나의 씨족집단이 살았고 마 을에는 씨족이 나뉜 가계집단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각 촌의 촌장과 마울의 장은 높은 계급을 이루어 촌락사회는 계급사회를 이루었다. 촌 락사회에는 마울과 각 촌을 다스리는 2 단계의 정치조직이 편성되어 있 었댜 기원전 2 세기 가락국이 형성되기 이전 언제부터인가 9 촌 사이에 는 연맹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한반도 남쪽지역의 초기국가 형성에 대한 대세를 상기하며 『삼국유 사』 가락국기의 건국신화를 역사적인 자료로 바꾸면 가락국 형성에 대 한 많은 자료를 찾을 수 있다 . 가락국의 건국세력인 수로집단과 수로 의 부인이 되었다고 하는 허황옥집단은 모두 이주민집단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탈해를 비롯한 여러 이주민집단이 가락국지역을 거쳐갔다고 여겨진다. 그와 같은 이주민집단 중 수로와 허황옥으로 나 오는 집단이 가락 9 촌을 통합한 세력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수로와 허황옥집단은 어느 계통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이주민 이동의 대세상 고조선이나 부여 • 고구려 계통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이들 가락 국 건국집단은 가락 9 촌장 위에 군림하여 초기국가로서 가락국이라는 소국을 형성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가 락국의 형성시기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한반도 남부지역의 다
른 소국들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국가를 형성한 것으로 헤아려진다.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수로집단은 석관묘를 축조하던 고조선 계통으로 위만조선시대에 이주하였고, 허황옥집단은 토광묘 축조집단으로 낙랑 군 설치 이후에 등장한 집단이었을 가능성도 있댜 또한 가락국을 포 함한 6 가야 소국의 건국시기는 사로국과 마찬가지로 늦어도 기원전 2 세기 말경이었다고 짐작이 간댜 6 가야 소국들은 언어를 공유하였고 유사한 사회 • 정치 제도를 가졌으며 비슷한 수준의 농업과 교역 활동 을 하였다고 헤아려진다. 가락국에는 왕의 거처인 궁실 등이 있는 京 都가 만들어졌고 경도를 중심으로 정치중심구역이 형성되었다. 가락국 에는 9 촌을 통합한 소국을 통치하기 위한 정부조직과 9 촌을 통치하기 위한 지방통치조직이 편성되었다. 9 촌은 지방통치룰 위한 행정구역이 되었다. 그리고 수로집단과 허황옥집단과 그 후손들로 이루어진 지배 세력으로 이루어진 최고의 신분층 밑에는 9 촌장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촌락의 지배세력들이 그 아래 신분층을 형성하였다. 가락국에는 소국 전체를 다스리기 위한 3 단계의 통치조직이 편성되었다. 가락국은 수로 집단을 비롯한 이주민집단이 가지는 여러 가지의 실력에 의하여 형성 되었다. 기원전 1 세기에 이르면 가야의 소국들은 낙랑군과의 원거리교역을 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교역망을 형성하였고, 가락국이 이 원거리교역 의 창구가 되었다 .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야의 소국들이 가락국을 맹 주국으로 하여 소국연맹을 형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가야지역 소국들의 지배자들은 정치적인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위세품들을 낙랑 군으로부터 수입하기를 원하였다. 다호리유적에서 발굴되고 있는 전한 대의 유물들은 좋은 예가 된다. 기원전 1 세기에는 주로 낙랑에 온 중 국의 內郡賈人들이 배를 타고 왕래하며 그와 같은 교역을 하였다. 가 야의 소국들 중 가락국은 지리적인 위치로 인하여 쉽게 원거리교역의 창구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가락국은 가야의 소국들로 이루어진 소국
연맹의 맹주국이 되었다고 헤아려진다 . 그런데 포상 8 국이 가락국을 공격한 것으로 미루어 낙동강 유역의 소국들 사이에는 또 다른 소국연 맹이 존재하였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동 지역의 소국들 사이 에는 원거리교역과 전쟁을 위한 소국연맹이 복수로 존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맹주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소국연맹의 결속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던 것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가락국 자체는 원 거리교역의 창구로서 국력을 키워 1 세기 후반에서 2 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는 사로국을 맹주국으로 하는 정치세력과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2 세기 전반까지는 가락국이 사로국보다 국력이 강하였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된다. 3 세기에 이르면, 소국 병합 을 통하여 커다란 나라로 성장한 신라에 비교하여 가락국은 국력이 열 세에 있었다. 그 결과 포상 8 국이 가락국을 공격할 때 신라에 원병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가야지역의 소국들은 신라에 병합될 때까지 소 국연맹을 형성하기는 하였으나 각 소국들은 병합관계로는 발전하지 않 았다. 그것은 소국들 사이에 세력균형이 이루어졌고 서로 간의 외교관 계를 발전시켜 한 소국이 일방적으로 강해질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여 겨진다. 4 소국병합 : 삼국의 소국병합 한국의 초기국가 중 소국병합 단계에 이르렀던 정치체는 많지 않다. 이 단계에 이른 것은 고조선 • 부여 • 고구려 • 백제 • 신라 동 정도이다. 그 중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소국병합 사실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 하여 확인된다. 그에 비하여 고조선과 부여의 소국병합에 대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그러나 역사발전의 대세에 비추어 보면 고조선이나 부여 역시 소국들을 병합하여 하나의 커다란 왕국으로 성장하였던 것을 생
각할 수 있댜 17 6) 여기서는 삼국의 소국병합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1) 고구려의 소국병합 기원전 75 년에는 현토군의 치소가 홍경 방면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현토군은 과거 예군 남려가 맹주로 있던 소국연맹체 안의 여러 소국들 의 반발에 의하여 쫓겨난 것이라 생각된다. 당시 현토군을 몰아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세력은 소국 고구려였다고 믿어진다. 현토군을 몰아 낸 후 고구려는 예군 남려가 맹주로 있던 소국연맹체의 맹주국으 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현토군을 축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고구려는 그 후 얼마 안 있어 주변의 소국들을 병합하여 나가기 시작하였다. 고구려의 소국병 합과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들을 볼 수 있다. (1) 2 년 여름 6 월 송양이 나라를 들어 來降하니 그 땅을 多勿都로 삼고 송양을 봉하여 主로 삼았다. 고구려 말에 苗土를 회복하는 것을 다물이라 하였다. 이에 이름을 지었다.(『 三國史記』 13, 始祖東明聖王 2 년) (2) 겨울 10 월에 왕이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의 행인국 을 취하고 그 땅을 城邑으로 삼았다.( 『三國史記』 13, 始祖東明聖王 6 년) (3) 33 년 … 가을 8 월에 왕이 오이와 마리에게 명하여 군사 2 만을 거느 리고 서쪽으로 양맥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하고 군대를 나아가게 하여 漢의 高 句麗縣을 습취 하였다.(『三國史記 』 13, 琉璃明王 33 년) (4) 9 년 겨울 10 월에 왕이 蓋馬國을 親征하여 그 왕을 죽이고 백성들을 위안하고 노략질하지 않고 다만 그 땅을 郡縣으로 삼았다 . (『 三國史記』 14, 大武神王 9 년) (5) 12 월 句茶國왕이 蓋馬國이 멸했다는 것을 듣고 해가 자신에게 미칠
176) 李鍾旭 『古朝鮮史硏究』, 1993, pp. 141 ~164.
까 두려워하여 나라를 들어 내항하였다. 이로써 땅을 넓힘이 매우 넓었 다 .(『三國史記』 14, 大武神王 9 년) 위의 기록만 가지고 고구려 초기의 소국병합에 대한 이해를 하기에 는 충분치 않댜 그렇더라도 朱蒙대에 시작하여 琉璃王 • 大武神王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이미 여러 소국들이 병합되었고 그 결과 拓地浚廣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위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 시조동명성왕 2 년에는 松讓王의 佛流國의 來降을 받았고 6 년에는 行人國을 취하여 城邑으로 삼은 것으로 나오고 있다. 유리왕 33 년에는 梁柄國울 멸하고 漢의 高句麗縣울 습취한 것으 로 나오고 있다. 그리고 대무신왕 9 년에는 개마국을 親征하고, 句茶國 의 내항을 받았다. 여기서 연대 문제를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 삼국사기 』 의 기록을 따르면 동명성왕 2 년은 기원전 36 년이고, 유리왕 33 년은 기원후 14 년 , 대무신왕 9 년은 26 년이 된다. 지금까지 고구려의 소국형성 시기는 기원전 107 년 현토군이 설치되기 이전이라고 하여 왔 다. 당시 주몽세력이 소국을 형성하였다면 이는 『삼국사기』의 연대와 맞지 않는 셈이 된다. 필자는 『삼국사기』의 기록 중에 현토군 설치 이 전 고구려의 소국형성에서 소국연맹의 맹주가 되는 기간 동안의 역사 는 주몽대의 기사로 압축되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와 같 이 압축된 기록에도 국가형성의 모습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의 사건들이 벌어졌던 시기를 역사의 대세에 비추어 정리할 필요 가 있다 여기서 실제로 고구려의 소국형성이 있었던 시기는 기원전 2 세기 후반 이전 언제였다고 생각된다. 소국 고구려의 지배자가 과거 예군 남려가 차지하였던 소국연맹체의 맹주 지위를 차지한 시기는 기 원전 75 년 현토군을 축출한 이후였다고 헤아려진다. 그리고 고구려가 이웃한 소국을 병합하기 시작한 시기는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기원전 1 세기 후반경부터가 아니었나 짐작하여 보았다.
(2) 백제의 소국병합 『삼국사기 』 백제본기의 백제 건국신화에 나오는 기록을 통하여 온조 가 세웠던 소국인 십제는 비류가 세웠던 미추홀의 소국을 통합한 후 백제로 국호를 고쳤던 것을 알 수 있다. 온조집단이 세웠던 십제가 비 류집단이 세웠던 미추홀의 소국을 병합한 시기는 언제였을까. 『 삼국사 기 』 온조왕 즉위조의 건국신화를 보면 십제가 미추홀의 소국을 통합한 내용은 온조왕 원년조 앞에 나오는 백제 건국신화에 들어 있다. 따라 서 십제의 미추홀 소국 통합은 건국 후 얼마 안 지난 때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미추홀 소국의 통합 시기를 추측하면, 대체로 현토군 의 설치로 인하여 고구려의 일부 정치지배세력들이 남하하여 십제와 미추홀의 소국을 형성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인 기원전 1 세기 언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당시 미추홀 소국이 십제에 쉽게 병합된 이 유는 두 소국의 지배세력들이 부여계 고구려 이주민들이었기 때문이라 고 여겨진다. 십제가 미추홀 소국을 통합하여 백제로 성장한 것은 정치적인 면에 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 백제의 영역은 단순한 소국 이상 으로 확대되었고 인구 또한 크게 중가하게 되었다. 백제는 마한 소국 연맹의 다론 소국들에 비하여 국력이 상대적으로 크게 강화되기에 이 르렀다. 한편 백제는 한강을 통하여 또는 미추홀지역을 통하여 바다로 낙랑과 교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백제는 낙랑 및 마한세력과 정치적 • 경제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먼저 백제와 낙랑과의 관계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삼국사기』에는 온조왕대에 백제와 낙랑 사이에 벌어졌던 사건들이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다. 그 기록을 보면 1) 온조왕 4 년조에 사신을 파견하여 낙랑과 수 호한 것을 알 수 있다. 2) 8 년조에는 마수성을 쌓고 병산책을 세운 데 대하여 낙랑에서 사신을 보내어 성책을 허물지 않으면 일전을 하여 승
부를 내겠다고 하자, 온조왕은 낙랑이 강한 것을 믿고 군사 를 일으킨 다면 百濟 역시 이에 대응할 것이라고 하여 낙랑과의 사이에 화친이 깨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3) 온조왕 11 년조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공격하였고, 독산과 구천에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과의 통로 를 차단하였으며 4) 온조왕 13 년조에는 낙랑과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 여 한산하에 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를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 5) 17 년조에는 낙랑이 쳐들어와 위례성을 불살랐고, 이듬해에는 왕이 낙 랑을 공격하다가 돌아온 사실을 전하고 있다. 여기서 백제와 낙랑과의 관계는 우호적인 관계 (1) 를 거쳐 서로 경계하는 관계 (2) 에 이르렀고 끝내는 적대관계 (3 • 4 • 5) 에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낙랑과의 관계는 온조왕대의 짧은 기간에 전개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 우호적인 관계는 기원전 1 세기경에 전개되었고, 백제 가 마한의 일부 소국들을 병합하기 직전에는 낙랑과 경계관계로 접어 들었고, 소국병합을 거쳐 경기도 일원으로 영역을 확대한 후에는 적대 관계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댜 경계관계가 전개된 시기는 기원전 1 세 기 후반 낙랑세력이 적극적으로 한반도 남쪽의 정치세력들과 교역을 하던 시기로 생각되며, 적대관계에 이론 시기는 1 세기 전반경이 아닌 가 짐작된댜 『삼국지』 한전 인용 『魏略』의 기록에 나오는 廉斯鏞설화 중에 漢 人 戶 來 등 1500 명이 벌목을 위하여 韓지역에 왔다가 잡혀 노 비가 되었다는 기록을 주목할 수 있다. 염사착설화의 배경이 되는 시 기는 왕망의 지황 연간 (20~23) 이며, 호래 등이 잡혀 노비가 된 시기 는 그 이전이었다. 호래 등의 한인을 노비로 삼았던 세력이 백제였는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시 백제는 삼한세력 중 낙랑과 가장 가까 운 위치에 있었기에 백제에서 중국인을 잡아 노비로 삼았을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기원전 1 세기경 백제는 낙랑과의 원거리교역 과 전쟁관계를 통하여 국력을 신장시킬 수 있었다고 헤아려진다. 한편 백제와 낙랑의 관계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음에 틀림없다. 1 세
기 전반 이후 낙랑과의 원거리교역은 韓人들이 낙랑지역에 가서 머물 며 전개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낙랑에 온 중국 상인들은 기원전 1 세기에는 韓지역에 직접 다니며 교역을 하고 습격하여 물건을 약탈하 였는데 1 세기 전반 이후에는 그러한 행동을 취하지 않게 되었다고 믿 어진댜 이에 『삼국사기』에도 그러한 사정이 반영되어 그 이후 낙랑과 의 관계에 대한 기록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데 2 세기 후반에는 백제를 포함한 韓지역의 정치세력들이 강성해져 낙 랑에 가서 머물던 韓人들이 되돌아오게 되었다. 다음은 백제와 마한과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삼국사 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보면 백제와 마한 사이의 관계는 몇 단계의 과 정을 거친 것을 알 수 있댜 우선 온조왕이 마한왕에게 신록을 보내고 (10 년), 천도를 고하고 (13 년), 말갈추장을 잡아 보낸 사실 (18 년)을 주 목할 수 있다. 이는 대체로 마한이라는 소국연맹의 맹주국에 대한 백 제왕의 사대의 예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은 웅천책을 만들어 마한을 경계하였고 (24 년),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가 나타나자 진한과 마한 울 병합할 생각을 갖게 된 일 (25 년) 둥을 주목할 수 있다. 이 단계에 서는 백제가 마한을 병합할 준비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어 마한의 國邑을 병합하고 (26 년), 원산과 금현 두 성의 항복을 받아 마한을 멸 한 사건이 일어났다 (27 년). 그리고 馬韓 舊將 의 반란도 진압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34 년).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이로써 마한 을 병합하였다. 그런데 마한은 그 후에도 존속하였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초기 기록에는 온조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던 다루왕 이후 백제와 신라의 전쟁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오고 있는데, 이는 어 쩌면 백제와 마한 사이의 전쟁을 전하는 것이 아닌가 짐작이 간다. 그 것은 『삼국사기』의 찬자들이 백제가 마한을 멸하였다고 기록한 이후 다시 마한과의 전쟁을 기록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여기서 온조왕대에 있었다고 하는 백제의 몇 단계에 걸친 영역 확장
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기로 한다. 첫째, 십제가 미추홀의 소국을 병합 하여 백제로 되었던 단계를 들 수 있다 . 둘째, 온조왕 13 년에 천도를 하고 나라의 영역을 획정하여 북은 沮河, 남은 熊川, 서는 大海, 동은 走壤에 이르렀다고 하는 단계를 들 수 있다. 이는 백제의 영역이 확대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패하, 옹천, 주양이 어디였는지 는 잘 알 수 없다 .1T1 ) 그렇더라도 백제가 이웃한 몇 소국들을 병합하여 강역을 확장한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셋째 단계로 백제가 마한을 멸한 것을 들 수 있다. 당시 마한은 백제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던 마한 의 맹주국이었다고 짐작된다. 그와 같이 백제에 병합된 마한의 맹주국 은 어쩌면 직산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178) 그 후 마한의 맹 주국은 현재의 충청도 이남지역에 새로이 대두하였다고 여겨진다. 여 하튼 백제가 온조왕 26~27 년에 마한의 맹주국을 멸하였다는 사실은 동왕 13 년에 획정한 강역이 더욱 늘어난 것을 의미한다. 위와 같은 백 제의 영역확장단계가 『삼국사기』에 나오는 연대와 일치한다고는 생각 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1 세기 전반경에는 3 단계까지 전개된 것이 아 니었나 추측된다 .179) 당시 백제의 영토는 대체로 경기도 일원으로 늘어 났다고 여겨진다. 그 후 1 세기 후반에서 2 세기에 걸친 기간에는 백제 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던 마한의 여러 소국들을 점차 병합하여 나갔다 고 생각된댜 이러한 생각은 백제본기의 다루왕대부터 나오는 백제와 신라의 전투를 백제와 마한의 전투로 볼 경우 가능하다. 여기서 百濟의 소국 병합 요인에 대하여 잠시 정리하기로 한다. 우 선 백제의 건국세력이었던 부여계 고구려 이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실
177) 李丙몫의 『國譯 三國史記』 ( 1977, p. 356) 에서는 패하가 예성강, 옹천은 안성천, 주양은 춘천이라고 하였다. 한편 千寬宇는 패하는 예성강, 동은 춘천, 남은 직산 이라고 하였다(『三韓의 國家形成』, 《韓國學報) 3, 1976, pp. 112~134). 178) 盧重國, 『百濟政治史硏究』, 1988, p. 88. 179) 위의 책, p. 94 에서는 3 세기 중엽 고이왕대로 보고 있다.
력을 들 수 있다. 백제 건국세력들은 비록 고구려로부터 밀려난 세력 이었다고는 하지만 이미 국가를 세울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조직을 편성할 능력이 있었고, 기마와 철제무기 둥 군사적인 실력 도 갖추고 있었음에 틀림없댜 그러한 실력은 십제를 건국하게 만들었 다. 미추홀 소국을 통합한 백제는 낙랑이나 마한과의 원거리교역 또는 전쟁을 거치며 국력을 신장시켰고, 그러한 국력을 바탕으로 이웃한 소 국들을 병합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 미추홀 소국을 병합한 것은 그 후 의 소국 병합을 가속화시켰다고 여겨진다. (3) 신라의 소국 병합 신라는 탈해왕대 (57~80) 에 居道가 于尸山國과 居柴山國이라는 소국 들을 병합한 이래 160 ) 소국 병합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파사왕 23 년 (102) 에 音汗伐國 • 怒直國 • 押督國의 왕이 내항하였다 . 18 1) 파사왕 29 년 에는 군사를 보내어 比只國 • 多伐國 • 草八國울 병합하였다 .1 82 ) 『삼국사 기』 지리지에는 압독국을 병합한 것이 祗味王(祗 摩王 : 112~134) 대였 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183) 그렇더라도 2 세기 초에 신라는 여러 소국들 을 병합한 것이 분명하다. 伐休王 2 년(1 85) 에는 召文國울 병합하였 고 ,Ia) 助賀王 2 년 (231) 에는 甘文國을 병합하였으며 ,1 85) 浩解王대 (247~ 261) 에는 沙伐國을 병합하였다 .186) 신라의 소국 병합은 다른 나라에 비 하여 상대적으로 늦게 시작되었다.
180) 『三國史記』 44, 列傳 4, 居道 181) 『三國史記』 1, 新羅本紀 1, 婆娑尼師今 23 년 182) r 三國 史記 』 1, 新羅本紀 1, 婆娑尼師今 29 년. 183) r 三國史記』 34, 雜志 3, 地理 1. 184) 『三國史記』 2, 新羅本紀 2, 伐休尼師今 2 년. 18. 5) r 三國史記』 2, 新羅本紀 2, 助買尼師今 2 년. 186) 『三國史記』 34, 雜 志 3, 地理 1.
신라의 소국 병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押督國은 婆娑工 23 년에 항복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逸聖王 13 년 (146) 에 반란을 일으키자 신라에서는 군대를 보내어 반란을 토평하고 무리들을 남쪽지방으로 사 민시켰다 .187 ) 『 삼국사기 』 열전 昔于老전에는 첨해왕대에 沙梁伐國(沙伐 國)도 신라에 속하였는데 배반하여 백제로 돌아가므로 于老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멸한 것으로 되어 있다 .1 881 이 기록에 나오는 沙伐國 은 원래 사로국을 맹주국으로 하는 소국연맹체의 한 소국이었다고 생 각된댜 그런데 3 세기 중엽 백제가 그 영역을 넓혀 충청도 지역을 병 합하고 경상도의 상주지역에 위치하였다고 생각되는 사벌국과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신라에서는 군사를 보내어 사벌국을 병 합하였다. 사로국은 일단 병합하였던 소국들이 배반을 하면 다시 병합 울 한 바 있다 . 그러한 사정은 사로국이 이웃한 골벌국을 助質王 2 년 (231) 에 병합한 것으로 확인된다 I 田) 경상도의 먼 지역에 있는 소국들 을 병합한 신라가 이웃한 골벌국을 뒤늦게 병합한 것은 아무래도 일찍 이 병합하였던 골벌국의 잔존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 병합한 것으로 생각된다. 儒禮王 14 년 (297) 에는 伊西古國이 신라의 금성을 공 격한 사건이 있댜 100) 여기에 나오는 이서고국은 이서국과 연관된 것으 로 이서국은 이미 신라에 병합이 되었기에 古國으로 표현한 것이 분명 하다. 여기서 압독국 • 골벌국 • 이서국 등을 3 세기대에 다시 병합한 것 은 아무래도 그러한 소국을 완전히 병합하지 못하였기에 반발이 있었 고 그것을 재토멸한 것으로 헤아려진다. 신라 역시 고조선, 부여, 고구 려, 백제와 마찬가지로 소국 병합을 통하여 하나의 소국병합왕국 단계 로 넘어가게 되었다.
187) 『三國史記』 1, 新羅本紀 1, 逸聖尼師今 13 년. 188) 『三國史記』 45, 列傳 5, 昔于老 189) 『三國史記』 34, 雜志 3, 地理 1. 190) 『三國史記』 2, 新羅本紀 2, 信福尼師今 14 년.
신라의 모체가 되었던 사로국의 소국 병합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기원전 1 세기 경상도 북부의 소국들이 기원전 1 세기 낙랑과 원거리교 역을 하는 과정에서 사로국이 그 창구가 되었다. 중간무역의 이익을 차지한 사로국은 원거리교역망을 구성한 여러 소국들의 맹주국으로서 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사로국을 맹주국으로 하는 원거리교 역체는 하나의 소국연맹을 형성하게 되었다. 소국연맹의 맹주국이고 낙랑과의 원거리교역의 창구가 되었던 사로국에는 인구가 늘어났다고 생각된다. 사로국의 인구부양 능력 (c arryi n g ca p a city)이 늘어난 것만 은 틀림없으나 실제 인구중가가 커서 문제가 생긴 것으로 짐작이 간 다. 이에 사로국은 정복전쟁을 벌여 이웃한 소국을 병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원거리교역의 창구가 되었던 진한의 맹주국이었던 사로국은 중국 군현과의 원거리교역 과정에 선진 문물과 무기 등을 다 른 소국들에 앞서 장악하였고 정치적 • 경제적 • 군사적 정보를 차지하 여 국력을 키울 수 있었다. 사로국의 이 같은 국력은 소국연맹체 안의 다른 소국들을 병합할 수 있게 하였다.
제 4 장 한국 초기국가 형성 • 발전기의 대외관계 이제 한국 초기국가 형성기 각 정치체의 대의관계에 대하여 알아보 기로 한다. 그러한 관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한 정 치체와 이웃한 다른 정치체와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멀리 떨어진 정치세력과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지금까지 필자는 古朝鮮, 高句麗, 新 羅 百濟, 韓 등의 대외관계에 대하여 정리하여 왔다.” 그와 같은 작업 결과를 통하여 먼저 이웃한 정치체와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 한 관계는 정치발전단계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였다. 신라의 경우를 통 하여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국가형성기 신라의 대외관 계에 대한 논문 2) 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사로 6 촌이 촌락사회
1) 李鍾旭, 『古朝鮮史硏究』, 1993. 李鍾旭, 『新羅國家形成史硏究』, 1982. 李鍾旭, r 高句麗 初期의 政治的成長과 對中國關係의 展開』, 『東亞史의 比校硏 究』, 1987, pp. 59~88. 李鍾旭, r 韓 • 倭의 政治勢力과 樂浪郡 • 帶方郡의 關係』, 『韓日古代文化의 連繁』, 1994, pp. 215 ~237. 李鍾旭, 『百濟 初期國家로서 十濟의 形成』, 《國史館論ii) 69, 1996, pp. 56~59. 2) 李鍾旭 앞의 책, 1982, pp. 90~115.
단계에 있을 때는 촌락 간에 관계가 있었고 사로국 형성 전에는 촌락 연맹체가 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가 하면 사로국은 이웃한 소국 들과 관계 속에서 소국연맹을 형성한 것을 알아보았다. 다음은 멀리 떨어진 정치체와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국 가형성기 신라의 대외관계를 보면 사로국이 맹주국이 되어 진한연맹이 낙랑군과 원거리교역(l on g dist a n ce t rade) 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와 같은 원거리교역 과정에 사로국은 진한 소국들의 교역의 창구로서 낙랑군으로부터 위세품을 수입하여 진한 소국들에게 분배하는 교역 체 계(p res tig e- g oods s y s t em) 를 유지한 것을 생각할 수 있었댜 그 과 정에 사로국은 정치 • 군사 • 경제적으로 성장하였고 그러한 실력을 바 탕으로 소국 병합을 한 것을 알아보았다. 이는 초기국가 형성기에 원 거리교역이 갖는 정치 • 군사 • 경제적 의미가 매우 컸던 것을 의미한 다. 한국사에서 그와 같은 원거리교역체제에 대한 연구는 필자가 처음 으로 하였다 .3 ) 필자는 고구려의 정치적 성장과 대외관계의 전개에 대하여 정리한 바 있는데 ,4) 그것을 이 책의 4 장 2 절에 옮겼다. 여기서는 주로 중국 군 현과 중국 본국과 고구려의 관계를 정리하였다. 그런가 하면 고조선의 대외관계에 대한 문제도 정리한 바 있다. 고조선의 경우도 신라와 마 찬가지로 이웃한 소국들과의 관계에서 소국연맹을 형성한 것을 알아보 았고 중국이나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 대한 많은 문제를 정리하였다 .5) 한국 초기국가 형성기의 대외관계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필자가 정리 한 고조선의 대외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韓 둥의 정치세력과 중국 군현과의 관계에 대한 논문을 먼저 수록한다. 이는 중국의 관점에서 韓과 중국 군현과의 관계를 본
3) 위의 책, pp. 104~115. 4) 李鍾旭, 앞의 논문, 1989, pp. 59~88. 5) 李鍾旭, 앞의 책, 1993, pp. 132~138, 193~198, 240~250, 259-294.
것이 아니라 韓의 관점에서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韓뿐 아니라 그 안 에서 성장한 백제 • 신라 • 가야를 비롯하여 澈와 倭의 대외관계를 함께 정리하는 작업이 된다.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 과정에 나타나는 대외관계는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 모든 것을 이 책에서 다룰 수는 없다. 이에 다음의 두 논문을 수록하여 대외관계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밝힌다. 1 한 등의 정치세력과 낙랑군 • 대방군과의 관계 이번 절은 낙랑군이 존속하는 동안 韓 • 澈와 倭지역의 정치세력이 낙랑군 • 대방군과 같은 중국 군현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를 알아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낙랑군 • 대방군의 설치 이유, 변천, 영역, 사회 등에 대하여 다루어 왔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들은 거의 대부분이 중국사의 한 부분으로 다루고 있다. 이에 한 이나 예와 같은 세력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낙랑 등과 관계를 맺었 으며 그 결과는 어떠하였고, 관계의 시대적 변천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한· 예의 관 점에서 대낙랑 • 대방 관계의 실상에 대하여 밝혀 보고자 한다. 낙랑군 • 대방군은 고구려 • 예와도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 구려는 慕本王, 太祖大王 이후로는 주로 幽州 • 遼東郡 • 玄英郡 둥의 州郡과 관계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고구려에 대한 문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澈도 후일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기에 여 기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이에 낙랑군 • 대방군과 주로 관계된 세력 은 한·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한·왜 지역의 정치세력과 낙랑군• 대방군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정리하기로 한다. 그 중 대방군은 3 세기 초에 설치되었기에 그 이후의 관계를 다루기로 한다.
지금까지 낙랑군에 대한 연구 중 중국의 대이민족 관계의 성격에 대 한 연구를 볼 수 있다. 그 중 栗原朋信 의 견해를 보면, 중국이 韓人 에 대해서는 封君制를 실시하여 외신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倭에 대해서는 외신이 아니라 외신과 조공국의 사이에 해당하는 관계를 맺 었다고 하였다 .6 ) 그 결과 낙랑군과의 관계에 있어 韓人 과의 관계보다 倭와의 관계가 다소 긴밀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한편 金翰奎는 중국이 韓에 대해서는 전형적인 內屬 II 체제의 관계를 맺었고 왜에 대해서는 전한대 화친 1 관계에서 후한대 화친 II 관계로 발 전하여 동한 말까지 지속하였으며 중국의 삼국시대에는 내속 II 체제가 성립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은 기본적으로 중국적 세 계질서 관계룰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 그에 비해 낙랑군이 주변 정치세력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를 찾아 볼 수 있다. 三上次男은 주로 낙랑이 토착사회에 미친 영향을 강조하 였다. 그는 낙랑군(후에는 낙랑 • 대방 2 군)은 기원전 108 년에서 기원 후 313 년까지 420 여 년이란 긴 기간 동안 서북 조선의 일부를 지배하 여 중국정권의 반도 지배의 근거지로서 역할하였고 동시에 중국의 발 달된 선진문화가 반도에 들어오는 일대 거점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 결과 토착세력이 정치 • 경제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지만 낙랑의 세력신 장에 문제가 될 때는 이를 탄압하였다고 보았다. 이에 중국 군현의 영 향력을 무시하고는 반도 고대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여 한국 고대사에서 낙랑군 • 대방군의 존재 의의를 크게 강조하고 있다 .8 ) 한편 金哲浚은 漢이 변방의 이민족을 지배하는 방법으로 토착사회의 통일세력 성장을 방해하여 각 족장에게 무역권을 개별적으로 주어 분 열과 대립을 획책하는 조정 방법을 취했다고 하였다 .9 ) 그 중 고구려는
6) 栗原朋信, 『上代日本對外關係f1)硏究』, l 얽 8, p. 5. 7) 金翰奎, 『古代中國的 世系秩序硏究』, 1982, pp. 363~366. 8) 三上次男, r 古代東北 7 :J 7 史硏究』, 1966, pp. 24~25.
일찍이 그러한 관계를 단절하였지만 남쪽 目支國을 중심으로 한 지역 에서는 낙랑 • 대방의 토착사회에 대한 정치상 • 경제상의 조종책으로 인하여 통일세력의 성립이 다움 단계까지 늦어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 ) 0 ) 이러한 견해들은 낙랑군 • 대방군이 한국 토착사회에 미친 정치 • 경 제 • 문화적인 영향력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들이며 그 안에 문제가 있 다고 생각하여 본고를 작성하게 되었다. 한편 金元龍은 낙랑군 • 대방군이 광대한 지역과 절대적인 정치력을 가졌던 소위 식민지가 아니고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일대의 조그 만 租界地 같은 존재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존재는 정치 • 군사적으 로 토착 한국인의 왕국 건설을 방지할 수도 없었다고 하였다. 그럼에 도 낙랑군 • 대방군을 잘못 이해하게 되었던 것은 『삼국사기』 초기 기 록을 중국측 사료와 비교하여 불신한 데 근거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불신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JI) 이와 같은 고고학적 • 역사학적 견해는 앞에 언급한 三 上次男과 金哲浚의 견해와는 크게 다론 것이다. 필자도 기본적으로 검원룡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한 • 왜와 낙랑과 같은 중국 군현 사이의 관계가 밝혀진 것은 아니다. 이에 한 • 왜와 중국 군현과의 관계의 실상을 파 헤쳐 보기로 한다. 이를 위하여 우선 한 • 왜 지역에서 성장한 정치세 력에 대하여 알아보고 이들과 낙랑군 • 대방군의 관계가 어떠하였는지 정리하기로 한다. 이러한 관계는 기원전 2 세기에서 기원후 1 세기 초까 지, 1 세기 초에서 2 세기 후반까지 그리고 2 세기 후반에서 4 세기 초 낙 랑군 • 대방군의 소멸까지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보기로 한다. 그리고 결론에 대신하여 앞에서 얻어진 내용을 토대로 한 • 왜와 중국 군현 사 이에 존재했던 관계의 특성을 정리하기로 한다.
9) 金哲浚, r 韓國古代國家發達史』, 『 韓國文化史大系 』 1, 1964, p. 478. 10) 위 의 논문, p. 501. 11) 金元龍 『三國時代의 開始에 關한 一考察J, 0 댄 E 文化) 7, 1967, pp. 16~31.
지금까지 중국 군현이 한국의 여러 정치세력을 지배했다는 견해가 있었고 그에 맞서 낙랑군 둥은 일개 조계지 정도에 불과했다는 견해가 있었다. 이제 본고의 작업을 통하여 한 • 왜와 중국 군현의 관계가 해 명되고 나아가 한국 초기국가 형성기의 역사가 옳게 정리될 수 있기를 바란다. (1) 기원전 2 세기 말 ~1 세기의 관계 한 • 왜와 중국 군현 사이의 관계는 양측의 정치적 성장과 군사적 통 제력의 발달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졌다고 보여진다. 이에 한 • 왜 지 역에서 성장한 여러 나라들의 정치적 발전에 대하여 간단히 정리하고 나아가 이들과 중국 군현과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그런데 낙랑군은 그 존속 기간이 420 여 년이나 되었다. 따라서 그 모든 기간 에 대하여 동시에 다룰 수는 없다. 이에 여기서는 한의 초기국가 형성 기에서 기원후 1 세기 초까지의 기간 동안의 관계에 대하여 정리하기로 한다. 기원전 2 세기 초 조선의 準王은 衛滿에게 쫓겨 좌우 궁인을 거느리 고 바다를 건너 韓地에 가서 韓王을 칭했다고 한다 .12) 따라서 기원전 2 세기 초에는 한지역에 정치집단이 존재하였고 이들은 각기 초기국가로 서의 소국을 세웠다고 믿어진다. 실제 위만의 손자였던 右渠王대에는 글을 올려 중국의 천자를 만나고자 한 眞番芳衆國들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衆國들은 한지역에 위치하였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이러 한 국가들은 늦어도 기원전 2 세기 말에는 형성되어 있었다고 헤아려진 다 .13) 伯濟國이나 斯盧國도 이 무렵에 형성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14)
12) 『三國志』 30, 魏 맘 東夷傳 韓傳 13) 李鍾旭, 앞의 책, 1982, pp. 50~51. 14) 필자는 백제의 건국시기를 기원전 1 세기로 본 바 있으나 여기서 이를 수정한다
( 李鍾 旭, r 百 濟 의 國家 形 成 』 , 《 大丘史 學) 11, 1976, p. 5).
그에 비해 왜에서 소국이 형성된 시기는 기원전 1 세기 중엽 내지 후반 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 1 51 한편 낙랑군의 설치에 대하여 잠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 하여 『사기 』 115, 조선열전의 기록을 주목할 수 있다. 처음 위만이 왕 검에 거하여 왕이 되었을 때 중국에서는 그를 외신으로 삼아 중국변방 을 지키고 토착 군장들이 천자를 보러 가는 것을 막지 못하도록 하였 댜 그러나 조선에서는 兵 威財物을 얻어 주변의 소국을 침강하고 진 번 • 임둔을 모두 복속하여 방이 수천 리에 이르게 되었다. 우거왕에 이르러 漢 으로부터의 유망민을 많이 받아들이고 중국에 입견도 하지 않았으며 眞 番 芳의 衆 國들이 글을 올려 천자를 보려 하는 것도 막았 댜 이러한 우거왕에 대하여 한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회유하였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漢 使로 왔었던 涉何가 조선군대에게 죽 임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이를 구실로 삼아 漢 武帝는 조선 침략에 나섰다 . 이러한 침략은 근본적으로 무제의 영역확대 기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 조선을 멸한 漢 은 조선이 관할하던 지역에 4 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그 중 조선의 중심지역에는 낙랑군과 속현들이 설치되었다. 그런데 이 같은 중국 군현에 사민된 중국인들이 주목된다. 『한서』 지리지 낙랑군 조에는 낙랑군의 도읍에 放效 吏 및 內郡賈人이 많았던 것으로 나오고 있댜 군에 온 중국인들은 吏 와 賈 人으로 나뉘고 있다. 그 중 군이 설 치될 때 吏룰 요동에서 뽑아 왔음에 틀림없다. 이와 같은 吏는 그 규 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그들이 군의 통치 업무를 맡 아 본 것만은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한편 내군고인들은 중국 본토에서 온 상인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
15) 山 尾 幸久, r 朝 鮮 l :H! tJ.>兩 淡 (J)郡 縣 &倭人」, C 召命館史 學) 439~441 합, 1982, p. 269.
인들의 존재는 낙랑군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 는 교역을 통한 이익 취득에 목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군의 설치를 통한 중국의 영역확대가 표면적인 이유라면, 교역의 이익을 취하려는 것은 숨은 이유로 볼 수 있다 . 이 같은 교역관계는 중국 측에서도 중 요하게 여겼다고 생각되지만 韓이나 倭와 같은 지역의 정치세력들 사 이에는 정치적인 관계보다 오히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여하튼 한사군 설치 후 20 여 년 만인 기원전 82 년에 진번 • 임둔의 2 군이 폐지되었고 그 관할 하의 여러 현 중 일부는 포기되었고 나머지 는 낙랑군과 현토군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기원전 75 년에는 현토군 도 홍경 • 노성 부근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군현의 변 동은 토착세력의 반발 때문이었다 . 이후 원래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지 역의 대부분이 낙랑군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중 임둔군이 설치되었던 지역의 예와 진번군 이남에서 성장하였던 중국들을 토대로 발전한 삼한이 낙랑군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한편, 『한서』 지리지에 〈무릇 낙랑의 해중에는 왜인이 있었는데 백여 국으로 나뉘었고 해마 다 와서 조공하고 알현했다고 한다〉 라고 나오기는 하지만 실제 왜에 서 낙랑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기원후 1 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 다. 따라서 기원전 1 세기에 왜는 낙랑과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였다. 진번군 • 임둔군이 폐지되고 현토군이 쫓겨난 후 낙랑은 韓지역의 여 러 세력과의 교역에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낙 랑인 • 낙랑병들이 신라의 모체가 되었던 사로국에까지 갔던 기록들을 주목할 수 있다 .16) 赫居世나 南解王대에 낙랑인 또는 낙랑병들이 신라 의 수도에까지 쳐들어왔다. 이는 낙랑군에 와 있던 중국인 관리나 상 인들이 교역을 위하여 한지역에 왕래하던 중 일어난 사건으로 본 바 있다 .17) 그리고 앞에서 제시한 사료에 나오는 것과 같이 낙랑군에 온
16) 『三國史記』 1, 新羅本紀 1, 赫居世居西干 30 년 및 南海尼師今 원년. 17) 李鍾旭, 앞의 책, 1982, p. 98.
吏나 賈 人 往者들이 밤에 도둑질을 한 것도 그들의 교역에 대한 욕구 를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그런데 이들 중국인 吏 나 賈 人들은 주로 배 를 타고 한지역에 갔다고 믿어진다 .18 1 실제 기원전 1 세기에 낙랑에 와 있던 중국인들은 배를 타고 韓지역 올 다니며 교역을 하였다고 믿어진다. 그것은 김해패총에서 나왔던 五 鍊 錢 이나 경주 朝陽 洞에서 발굴된 일광경, 동탁, 철제무가 등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당시 韓지역에서 받아들였던 교역품은 동경, 동탁, 무기 등으로 정치적 권위를 나타내고 군사적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것 들이다 . 그에 비해 韓 에서 가져간 물건으로는 목재, 포와 같은 원자재 에 해당하는 물건과 노비 등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기원전 1 세기 중반경이 되면 한지역의 여러 소국들은 크게 세 집단으로 나뉘게 된다 . 19) 마한 • 변한 • 진한의 삼한이 그것이다. 이 같은 삼한은 대체로 낙랑과의 교역 과정에서 생겨났다고 짐작된다. 즉 낙랑은 한지역의 여러 소국들과 개별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도 없었으 며 동시에 한의 소국 들 도 여러 사정으로 인하여 개별적으로 낙랑과 관 계를 맺기보다 여러 소국이 모여 하나의 교역집단을 이루는 것이 유리 하였다고 생각된다. 경상북도 일원에 있던 소국들은 사로국을 대표로 하는 진한연맹을 이루게 되었다 . 20) 마한은 목지국이 중심이 되었고, 변 한에서는 낙동강 하류 김해지역의 소국인 구야국이 중심이 되었다. 이 들 소국들이 각기 일정 지역 소국들을 대표하여 교역을 하게 되었다. 이들 삼한은 각기 지리적 위치의 차이, 문화적 차이 등으로 나뉘기도 하였겠지만 교역권을 이루고, 그것을 통해 각기 소국연맹체를 형성 • 발전시켜 나갔다고 헤아려진다.
18) 『三國 遺 事』 2, 熟洛國i 8 에 나오는 〈 中朝來泊之水道〉 라는 기록으로 그것을 짐작 할수 있다. 19) 李鍾 旭 앞의 책 , 1982, pp. 102~104. 20) 위의 책, pp. 102~104.
이러한 교역을 위한 연맹체의 맹주국은 교역이 진행됨에 따라 그 정 치적 • 군사적 • 경제적 지위가 커지게 되었댜 당시 원자재에 해당하는 물건들을 낙랑에 보내고 대신 정치적 산물을 받아들인 삼한 소국들의 정치지배자는 그 권위를 높이게 되었다 그런데 삼한의 맹주국들은 대 체로 낙랑으로부터 선진 문화 • 문물을 다른 소국들보다 먼저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정치조직에 대한 정보도 있고 발달된 무기 • 농 기구도 있었다. 이에 그러한 정보와 무기 • 농기구를 먼저 받아들인 맹 주국들은 연맹체 내의 다른 소국들보다 일찍이 정치 • 군사 • 경제적으 로 성장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맹주국들은 연맹체의 다른 소국들보다 점차 우월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마한의 여러 소국 중 비교적 낙랑과 가까운 위치에 있던 백 제는 일찍이 그 국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그것은 백제의 건국세력이 가 지는 여러 가지 실력도 원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기원전 1 세기 낙랑의 선진문물을 용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 이 세력을 성장시킨 백제는 기원전 1 세기 후반에 이미 마한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자적인 실력을 키우게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1 세기 말 이나 늦어도 기원후 1 세기 초에는 낙랑과의 관계를 끊고 오히려 낙랑 과의 통로를 차단하게 되었다 .2 1) 그리고 이어 백제 주변의 여러 소국들 을 복속하여 나갔다. 이같이 한강 유역에서 백제가 성장하게 되고 그 남쪽 어디엔가에 마한연맹이 발전하게 되었다 . 22) 마한연맹에서는 그 후 에도 낙랑과 관계롤 맺었다. 그에 비해 진한의 맹주국이었던 사로국은 기원후 1 세기 후반까지 그러한 지위를 유지하여 나갔다. 그러나 1 세기 후반부터 사로국은 주변 소국들을 복속하여 나가게 되었다. 이후 사로
21) 『三國 史記 』 23, 百濟本紀 1, 溫祚王 11 년. 22) 지금까지 目支國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나와 있다. 그 중 金貞培는 예산 일대라고 주장하였다 (r 目支國小考』, 『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史學論菜』, 198 .5, pp. 121 ~133).
국은 단순한 진한연맹의 맹주국일 수는 없게 되었다. 그리고 백제와 마찬가지로 이후 낙랑과의 공식적인 교역관계도 단절하게 되었다고 여 겨진다. 한편 변한의 맹주국이었던 狗邪 國 은 낙랑이 소멸될 때까지 주 변 소국들에 대한 복속사업을 전개하지 않고 연맹체의 맹주국으로 머 물러 있었다고 여겨진다. (2) 기원후 l ~2 세기의 관계 본 절에서는 기원후 l~2 세기에 걸친 기간 동안 낙랑과 한 • 왜의 관 계에 대하여 정리하기로 한댜 기원후 1 세기 초에 들어서게 되면 삼한 지역의 정치세력과 낙랑 사이의 관계에 변동이 일어났다. 우선 王葬의 新 건국과 같은 중국 본토에서의 정치적 변동과 낙랑과 王調 의 난 (23 ~30) 등으로 인하여 낙랑에 온 중국인들이 직접 韓 지역에 왕래하며 교역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 그것은 『 삼국지 』 한전의 『 위략』 인용기사 중에 나오는 辰韓右渠 帥 廉 斯鑛 2) 과 『후한서』 한전에 나오는 韓人 廉斯人 蘇馬提~) 등을 통하여 생각할 수 있다. 염사착은 王拜 의 地 皇年間 (20~23) 에 낙랑으로 가서 항복하였다. 그 때 漢 人을 구해 주고 또 진한인과 모(변)한포를 거두어 가는 일을 도 운 공으로 낙랑으로부터 관책과 전택을 받았다. 그리고 125 년에는 그 후손들이 復除 를 받았다. 한편 韓 人 염사인 소마시 등은 건무 20 년 (44) 에 낙랑에 공헌을 하여 광무가 그를 漢廉斯邑君으로 삼고 낙랑군 에 속하도록 하였으며 그는 사시 조알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두 가지 예는 모두 1 세기 초 왕망의 新이 섰을 때와 그 얼마 후에 벌어진 일들 이다 . 그런데 염사착은 분명히 낙랑에 가서 거주하였으나 소마시는 염 사읍군에 봉해지고 사시 조알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염사지역에 머물
23) 『三國志』 30, 魏習 東夷傳 韓傳 24) 『後淡函 8.5, 東夷傳 75, 韓 傳
러 살았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당시 한 • 예의 주민으로 낙랑의 치소에 가서 거주하는 자들 이 적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 중의 한 명이 夫租澈 君 이 아니었나 한 다. 1958 년 평양 정백동에서 발견된 토광묘에서는 부조예군이라 새겨 진 은제 도장이 나왔다. 이 도장은 중국 측에서 부조예의 한 세력가에 게 준 것이라 헤아려진댜 그것은 소마시에게 염사읍군을 봉한 것과 비교하여 쉽게 짐작이 간다. 여하튼 기원후 1 세기 전반경 중국 본토와 낙랑에서 정변이 일어난 관계로 중국 관리나 상인들이 토착사회를 왕 래하는 행위가 줄어들게 되자 한 • 예의 세력가들이 낙랑을 찾는 일들 이 벌어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댜 그것은 대체로 중국의 선진문물에 대한 필요 때문이었다고 여겨진다. 당시 韓이나 澈에서 낙랑의 치소에 가서 거주한 자들은 중국인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고 그 후손들도 계속 韓人 또는 澈 人으로 남게 되 었다고 보여진다. 이들은 낙랑 치소에 형성된 중국인촌 안이나 그 근 처에 별도의 거주구역을 가졌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낙랑지역으로 옮 겨 간 한이나 예의 주민들은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지 궁금하다. 염사 착은 낙랑에 간 후 牟韓의 布와 辰韓人을 거두어 가는 일을 도와 주었 다. 그리고 그와 그 후손들은 낙랑에 머물러 살았다. 따라서 염사착은 한인이기는 하였지만 주로 낙랑을 위해 활동한 집단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한편 소마시는 염사읍군에 봉해져 자기의 세력 본거지에 머물러 살며 사시 조알을 하였는데 이는 한이나 예인돌로서 자기 세력 본거지 에 살면서 중국 군현과 관계를 맺었던 집단의 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낙랑지역에 무덤을 남긴 부조예군은 자기의 세력 본거지를 떠나 낙랑 에 이주하여 살았던 집단의 예로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세 집단은 각 기 그 형태는 다르나 낙랑과 한 • 예의 사이에서 그 관계를 맺게 하는 중심세력들이 되었다. 그 중 염사착은 낙랑을 도와 활동한 세력이라 생각되어 제외하더라도 나머지 소마시나 부조예군은 낙랑군에 사시로
조헌을 하던 집단이다 이 같은 조헌은 중국측 관점에서 보면 조공이 되겠지만 한 • 예의 관점에서 보면 선진문물의 수입을 위한 교역으로서 의 의미를 강하게 지니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런데 한지역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이미 성장하여 있었다. 백제는 기원전 1 세기 말경 마한연맹에서 벗어났고 기원후 1 세기 초에는 낙랑 과도 공식적으로는 통로 를 차단하였다. 그에 비해 나머지 마한세력들 은 그들의 맹주국이었던 목지국을 중심으로 낙랑과의 교역을 계속하였 댜 그리고 진한 소국들은 1 세기 후반까지는 사로국을 중심으로 낙랑 과의 교역을 하였다. 변한 소국들도 狗邪國울 중심으로 교역을 진행하 였댜 한편 왜는 이 시기에 중국과 관계를 갖기 시작하였다 . 『후한서』의 기록을 보면, 기원후 57 년과 107 년에 왜국에서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 어 봉헌한 것을 알 수 있다 흐 이 때 봉헌한 곳이 낙랑이었는지 중국 본국이었는지는 앞으로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할 문제이다. 여하튼 당 시 왜는 중국 또는 그 군현과 본격적인 관계를 지속시키지는 못하였다 고 헤아려진다 그 중 왜노국은 개별 소국으로서 봉헌한 것이라 믿어 진댜 그에 비해 107 년의 봉헌은 倭面土地王 師升 등의 봉헌현 ) 으로 여 러 소국이 함께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倭에는 기원후 2 세기 초 소 국연맹체가 생겼다고 보여지기도 한다.'1:1) 그 후 2 세기 후반 桓 盜 연간 에 왜에 대란이 있었고 오랫동안 무주로 있었는데 그 때 卑彌呼를 공 립하여 왕으로 삼았다고 한다 흐 당시의 대란은 대체로 복속사업의 전
25) 『後漢밥』 에 따르면 光 武 帝 中元 2 년 (57) 과 孝安帝 永初元年 (107) 에 봉헌한 것 으로 나오고 있다 . 26) 『通典』 邊 防門 東夷 倭傳 그런데 『後漢꿈』 8.5, 東夷 傳 倭조에는 <… 倭國王師升 等 …〉 으로 나오고 있다 . 없) 山 尾 幸久 , 앞의 논문, 1982, p. 269 에서는 57 년경에 이미 여러 집단의 결합체가 생겼다고 하였다. 28) 『後淡꿈』 8.5, 魏 땀 東夷傳 倭傳
개를 뜻한다고 믿어진다 . 여하튼 이러한 소국들 간의 복속사업은 卑彌 呼의 邪馬퓰國에 의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더라도 왜의 모든 소국 울 복속한 것은 아니었댜 그리고 실제로 邪馬 臺 國을 중심으로 한 왜 에서는 기원후 239 년에 비로소 중국과 그 군현에 조공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왜는 기원 1 세기에서 2 세기까지 중국 군현과 밀접한 관계를 맺 지는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1 세기 초 이후 한 • 예와 낙랑의 관계를 교역에 초점을 맞추 어 정리할 수 있다. 그러한 교역관계는 한 • 예의 세력들이 중국의 변 군이었던 낙랑군에 조헌할 때 보냈던 물건과 낙랑군으로부터 받았던 물건들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중국인들은 예에서는 文창성 • 果下馬 등 을 원하였고 韓에서는 포 • 목재 또는 노비로 삼기 위한 사람들을 원하 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물건들은 토산물이거나 노비로 삼기 위한 것이다. 그에 비하여 낙랑군으로부터 받아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다음 가록을 주목할 수 있다. 景初 연간에 明帝가 몰래 帶方太守 劉斬과 樂浪太守 鮮于嗣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 2 군을 평정하고 諸韓國 臣智들에게 邑君 印緩를 더해 주고 그 다음에게는 邑長을 주었다. 그 세상에는 衣鎖을 좋아하여 下戶들이 郡 에 나아가 朝賜할 때 모두 임시 의책으로 하며 인수의책을 몸소 입은 자 가 천여 인이다.(『 三國志』 30, 魏 書 東夷傳 韓傳) 위의 사료는 明帝 景初 연간 (237~239) 에 일어난 사건을 보여준다. 따라서 1, 2 세기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는 문제가 있을지 모 른다. 그러나 蘇馬提를 邑君으로 삼았던 것과 위의 사료에 읍군인수를 준 일은 일치한다. 그리고 염사착에게 冠帳울 준 것과 위의 사료에 나오는 의책은 서로 연결이 된다. 따라서 낙랑군에서는 1 세기에 이미 한 • 예의 세력가들을 읍군으로 삼거나 의책 • 관책 • 인수 등을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주로 관리들이 받았던 직명이고 관리들이 사용 하였던 물건들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한 마디로 정치적인 산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중국의 정치적 산물을 알게 된 한 • 예의 세력가들은 그들의 정치적 성장에 큰 자극을 받게 되었음에 틀림없다. 여기서 말하는 한 • 예의 세력가들은 백제나 신라의 지배자들이기보 다 그들에 의해 병합된 소국의 잔존 세력가이거나 아직 병합되지 않았 던 소국의 지배세력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 세력이 낙랑과 적극적 인 관계를 맺으려 했던 움칙임은 2 세기 후반에 끝이 나고 있다. 그것 은 『삼국지 』 한전에 桓靈 연간 말에 한 • 예가 강성하여 郡縣이 통제할 수 없었기에 사람들이 한국으로 많이 흘러 들어갔다(民多流入韓國)고 하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 한편, 고구려의 太 祖大 王 은 146 년에 요동의 西安平縣올 습격하여 대 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납치한 적이 있다 . 29) 이러한 고구려 의 중국 군현에 대한 공격은 육로를 통한 교통로의 차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낙랑군의 쇠퇴를 촉진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桓 靈 연 간 (147~188) 의 失 政으로 인하여 중국이 혼란해져 낙랑지역에까지 관심을 기울일 수도 없었다고 보인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예가 강성해진 것을 들 수 있다. 그것은 고구려 • 백제 ·신라의 정 치적 성장을 뜻하며 그로 인하여 한 • 예 지역에서 낙랑의 영향이 크게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2 세기 후반에 낙랑의 존재 의의도 줄어들게 되었다. 그것은 다음 기 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 樂浪郡 … 幽j ' I ' I 에 속하고 62,812 戶, 406,748 명, 25 縣이다.( 『 漢 書』 28, 地理志 8 下 1) (2) 樂浪郡은 18 城, 61 ,4 92 戶, 257,050 명 이 다.(『後 漢書』 23, 郡國志 5,
29) 『三國 史 記』 15, 高 句 麗 本紀 3, 太 祖大王 94 년조
23 下) 위에 나오는 호수는 前 漢 이나 後漢 이나 비슷하다. 그에 비해 인구수 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물론 여기 나오는 호수는 중국인만을 가리 키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파악하고 있는 낙랑군지역의 토착사회 주민 들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믿어진다 . 그런데 후한대에 들어선 후 인구수 가 크게 줄어든 것은 낙랑의 영향이 미치던 지역의 축소와 더불어 이 와 관련된 주민수의 감소를 뜻한다 . 이는 어쩌면 앞에서 언급한 〈 民 多 流入韓國〉 과도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낙랑은 주변의 여러 세력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속할 수 있었다. 그 런데 2 세기 후반에 이르게 되면 韓 지역에서 성장한 百濟 • 新羅 가 주변 소국에 대한 복속사업을 확대시켜 그 국력을 크게 신장시키고 있었다. 이 무렵 백제 • 신라의 중앙정부에서는 나름대로의 통치조직을 확대 •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으며 더 이상 중국을 통한 정치조직에 대한 지식 은 필요치 않을 정도로 되어 있었댜 그리고 낙랑군을 통해 수입하던 여러 가지 물품도 자체 생산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그 결과 중앙의 지 배세력들은 구태여 낙랑과 교역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러한 백제 • 신 라의 대두는 2 세기 후반에 이르러 낙랑에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 그 결과 주민들이 낙랑을 떠나 한으로 이주하게 되고 교역의 거점으로서 낙랑의 존재도 위협을 받게 되었다. 물론 이 때에 이르러 백제나 신라 의 중앙정부에서는 낙랑과 공식적인 관계를 유지하지는 않았지만 낙랑 을 통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이나 기술을 제공받기도 하였다고 생각된 다. 그 결과 금 • 은 세공기술이나 칠기 • 유리 제작 등의 기술을 받아 들이게 되지 않았나 한다.
(3) 기원후 3 ~4 세기 초의 관계 앞에서 알아본 바에 의하면 2 세기 후반에 이르러 낙랑은 축소되고 약화되었다. 이에 중국에서는 3 세기에 들어서면서 군현의 기능 강화를 위하여 일련의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 본 절에서는 3 세기 초부터 4 세 기 초 낙랑 • 대방이 소멸될 때까지의 기간 동안 중국 군현과 한 • 왜의 정치세력과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3 세기 초에는 요동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公孫康이 20 4 년경 낙랑군 둔유현 이남의 땅에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30 ) 3 세기 초 대방군이 설치된 후 韓과 倭는 낙랑군이 아니라 대방군에 속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 〈獨帶方〉 하였다는 것은 신속이 아니라 교역권의 배정을 의미한다고 믿어진다. 『 삼국지 』 한전의 기록에 나오는 것과 같 이 吳林 이 辰韓 8 국을 낙랑에게 준 것이 문제가 되었다 . 이는 대방군 설치 후 교역권의 배정과 관련된 문제를 가리킨다. 이 때 대방군을 공 격한 臣智는 백제인이 아니었나 한다. 그는 백제의 左將 眞忠이거나 古爾王 자신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3 1) 이렇게 보면 대방군을 설치하여 한의 세력과 교역하려 했지만, 백제 고이왕의 명을 받은 진충이 帶方 太守 弓違 을 전사시킬 정도였기에 대방은 적어도 백제에서 그 뜻을 펼 수가 없었다 32) 여하튼 대방에서는 그 남쪽에 강하게 성장한 백제와 우호적인 관계 롤 유지하기 위하여 비상수단을 쓰고 있다. 그 중의 하나로 대방태수 의 딸을 古爾王의 아들인 責稽 와 혼인시켰으며, 후일 이를 이용하여 고구려가 대방을 공격할 때 백제의 도움을 받고자 한 바 있다 .33 ) 한편
30) 『三國志』 30, 魏 합 東夷傳 韓傳 31) 『三國史記』 24, 百濟本紀 2, 古爾王 13 년조. 32) 李鍾 旭 , 앞의 논문, 1976, p. 15. 33) 『三國史記』 24, 百濟本紀 2, 責稽王 죽위조.
이 무렵 다소의 차 이 는 있 겠지 만 신라 역시 백제 못지않게 성장해 있 었댜 어) 따라서 한지역에서 성장한 백제 • 신라 는 중국 군 현 에 조공을 바치려 하지 않았고 자연 교역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까닭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낙랑 둥 중국 군현을 통하여 받아 들 이던 정치조직 편성에 대한 지식이나 정치적 산물을 스스로 터득하고 또 만들게 되었 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여 3 세기에 들어선 후에 신라나 백제에 이미 병합된 소국 지역의 잔존 지배세력 들 은 낙랑 • 대방과의 교역을 계속 원하였다고 보 인댜 그러한 내용을 보여주는 자료가 『삼국지 』 나 『 후한서 』 한전에 나 오는 70 여 소국들에 대한 기록이라 생각된다 . 이러한 소국들의 성격에 대한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나 , 그러한 연구결과에는 문제가 있다. 실 제, 『삼국지 』 가 편찬된 3 세기 후반경 한지역에 70 여 개의 독립 소국들 이 있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 35) 특히 그 때는 백제나 신라가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한 후였다. 그리고 중국인들은 百濟 (伯 濟 )나 新 羅 (斯盧)를 각기 하나의 소국 정도로만 보고 있었으나 실제 이들 두 나 라는 단순한 소국일 수 없었다 . 중국인들의 관점에서 또는 필요에서 그와 같이 소국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 36) 한편 백제와 신라가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였다고는 하지만 마한지역 의 소국이나 진한의 소국 중에도 아직 병합되지 않는 나라들이 있었 고, 피병합 소국의 지배세력 또한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여 주고 그들을 통하여 피병합국을 다스려 나갔 다. 따라서 이들 피병합국의 지배세력이나 그 안의 하호들이 낙랑과의
34) 李鍾 旭 앞의 책, 1982, pp. 83 ~90. 35) 그러한 소국들 중에는 이미 백제 • 신라에 복속된 나라 들 이 있었 을 것이다 . 그러 면서도 일부 소국이나 변한의 소국들은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 36) 『三 國志 』 魏 書 東 夷傳 倭 人 傳 에는 여러 소국명을 열거한 후 〈此女 王境 界所 盡〉 이라 나오고 있다. 이는 2 세기 후반의 대란 후 여왕이 복속한 소국 들 을 가리킨 다고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
교역에 나섰고 때로는 郡에 찾 아가 조알하는 자들이 천여 인이나 되었 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 삼국지 .!I 에 나오는 소국들 중에는 당 시 백제나 신라에 병합되지 않았던 마한 • 진한의 나라들도 있고 변한 의 여러 나라들도 있었다 . 특히 변한지역의 소국들은 힘의 균형이 이 루어져 어느 한 나라에 의해 통합되지 않고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소국의 지배세력이나 하호들도 역시 낙랑 • 대방과 독자적인 관 계를 맺고 있었고 그러한 까닭에 그 국명이 『삼국지 』 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앞서 제시한 『삼국지』 한전의 기록 중 景初 중에 諸韓國 臣 智 에게 邑君 • 邑 長 인수를 주었으며 其俗이 의책을 좋아하였다는 내용 을 주목할 수 있다. 이 기록에 나오는 신지는 백제나 신라에 의해 병 합된 나라이건 아니건 간에 각 소국의 지배세력에 해당하는 자들일 것 이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읍군 • 읍장 정도의 칭호를 부여하였고 印緩 룰 준 것이다. 그리고 군에 조알하러 간 하호들도 일반적으로 백제나 신라의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하호로 표현 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것과 같이 백제나 신라의 왕이나 귀족세력들 은 그들의 권위를 나타낼 칭호와 물건들을 스스로 만들어 사용하게 되 었다. 그러나 3 세기 백제나 신라의 중앙정부는 피정복 소국이나 삼한 연맹의 독립소국들의 지배세력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충분히 생산 공 급할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삼한지역 여러 소국의 지배세 력의 활동을 완전히 제압할 수도 없었다. 이에 삼한지역의 여러 소국 들의 토착 지배세력들이 독자적으로 대방군 둥에 가서 조알하고 관작 이나 인수 • 의책 등을 구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에 비해 3 세기 중반경부터 왜는 대방, 중국의 魏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3 세기에 들어서면 백제의 고이왕은 246 년에 좌장 진충을 시켜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시키기도 하였다. 따
라서 한지역의 백제 • 신라와 같은 나라에서는 중국 군현과의 관계를 중요시하지 않게 된 데 비해, 왜는 그 관계를 맺기 위하여 노력을 기 울이고 있어 크게 비교가 된다. 왜는 2 세기 후반 대란이 있어 서로 공벌하였고 여러 해 동안 主 가 없었는데, 마침내 卑彌呼가 이러한 소국들의 분쟁을 수습하고 일정 지 역 안의 소국들을 다스리게 되었댜-.r/ 1 그 시기는 2 세기 말이나 3 세기 전반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卑彌呼는 239 년 사신을 대방군에 보 내어 중국의 천자에게 조헌하기를 청하니, 郡에서 주선하여 왜인을 중 국으로 보내 준 바 있다. 중국에서는 왜의 여왕에게 親魏倭王의 칭호 롤 주고 金印紫緩를 내려주었다 . 38) 이로써 卑彌呼와 대방군 및 왜와의 관계가 열리게 되었다. 이 때 왜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위 • 대방과 관 계를 맺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대체로 2 세기 후반 이래 공벌을 하여 온 결과 그 주도권을 잡게 된 邪馬臺國의 卑彌呼가 중국 의 작호를 받고 또 중국 지배자로부터 여러 가지 선물을 받아, 그것을 나라 사람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그 자신 중국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를 통하여 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때문이었다 .39 ) 당시 왜 邪馬臺國의 卑彌呼는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위 • 대방뿐 아 니라 諸韓國에도 사신을 보낸 바 있다 .40) 『삼국지』 왜인전에 京都 • 帶 方郡 • 諸韓國에 遣使한 일과 『삼국사기』 阿達羅 尼師今 20 년에 卑彌呼 가 신라에 견사한 일은 무관한 것이 아니라 믿는다. 따라서 왜에서는 대방이 설치되기 이전에 그 사신을 신라에도 보냈다고 보아 좋다. 신 라에 사신을 파견한 시기가 정확히 언제였는지 확실히 단정하기는 어
37) 『後漢書』 &i, 東夷傳 倭傳 38) 『三國志』 30, 魏꿉 東夷傳 倭人傳 39) 『三國志』 30, 魏볍 束夷傳 倭人{반 40) 『三國志』 30, 魏홈 東夷傳 倭人傳 『三國史記』 2, 新羅本紀 2, 阿達羅尼師今 20 년 (173).
려우나 사신 파견의 목적은 중국에 사신을 파견한 것과 같았다고 생각 된다. 여하튼 당시의 백제 • 신라는 각기 소국들을 복속하여 왕국으로서의 기틀을 다지고 있었다 . 따라서 이들 나라들은 구태여 위나 대방과 관 계를 맺을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백제에게 대방은 하나 의 적으로 생각되어 그들 사이에는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고 또 대방 의 태수가 전사하기도 하였다. 이에 위 • 대방 측에서 보면 백제나 신 라가 성장하여 있던 한지역보다는 그들에게 조헌하기를 원하는 왜가 중요하였음에 틀림없다 . 그 결과 중국인들은 『삼국지 』 한전에 나오듯 대방 설치 후 왜 • 한이 마침내 대방에 속했다라 하여 왜를 중시하였음 을 볼 수 있다 . 대방 측에서 보면 한지역의 정치세력은 대방에 적대적 이거나 무관심하였고 일부 소국의 토착 지배세력이나 하호들만이 그들 과 관계를 맺으려 한 데 비하여 왜는 여러 나라를 거느린 邪馬 臺 國의 卑 彌 呼가 중심이 되어 親魏 적인 태도를 분명히 하여 그에게 親魏倭王 의 칭호를 주게 되었다. 이는 한지역의 군소 세력에게 읍군 • 읍장 칭 호를 준 사실과 비교가 된다. 한편 왜는 3 세기 중반경 위 • 대방과의 관계를 통하여 실질적인 면에 서 교역을 행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죽 왜에 대하여 위에서는 親魏 倭王이란 칭호와 금인자수를 주고 그 외에도 卑彌呼의 권위를 나타낼 수 있는 각종 비단, 금, 오척도, 동경, 진주 둥의 물건을 주었다. 이러 한 물건을 주면서 위에서는 왜의 국중인들에게 그것을 보여 중국이 卑 彌呼를 중시하고 있음을 알리도록 명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물건들은 정치적 권위를 높일 수 있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왜에서 는 生口를 비롯하여 각종 특산물을 바쳤다 .41 ) 이 같은 정치적 산물과 원자재의 교역이 삼한지역에서는 기원전부터 있었던 것은 앞에서 언급 한바 있다.
41) 『三國志』 30, 魏꿉 東 夷傳 倭人 傳 에 나오는 正始 4 년 獻 上品들을 볼 수 있다.
그 후 중국의 삼국시대 를 거쳐 晋 대에 이르게 되면 고구려 • 백제는 낙랑 • 대방에 대하여 공격을 가하게 되었다 . 이 때에 이르러 고구려 • 백제는 일개 중국 군현을 상대하기 를 원치 않게 되었다. 이에 낙랑 • 대방의 규모도 크게 축소되었다. 『晋書』 에는 낙랑군이 6 현을 거느리고 호는 3,700 으로 되어 있으며 대방군은 7 현을 거느리고 4 , 900 호를 거느 린 것으로 나와 있다 . 42) 이로 보아 진대에 낙랑군 • 대방군의 규모가 축 소되었고 또 그 활동도 현저하게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고 구려의 美 川王에 의하여 낙랑군 • 대방군이 소멸되기에 이르렀다 . 실제 는 3 세기 후반에 이미 낙랑군 • 대방군은 소멸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왜는 泰始 (265~274) 초에 重 譯 入貢한 바 있으나 , 43) 이후 대방이나 晋 과의 사이에 관계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4) 한국 초기국가와 중국 군현 간 관계의 성격 앞에서 한 • 왜의 세력과 낙랑 • 대방 등 중국 군현과의 관계에 대하 여 정리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중국측 관점에서 보면 朝 獻 • 朝 賜 등으 로 표현하여 조공관계를 맺은 것으로 볼 수 있다 . 그리고 한 • 왜에는 조헌하기를 원하는 세력도 있었다. 그러나 한 • 왜의 관점에서 보면, 그 러한 관계를 통해 실질적으로 교역관계가 열린 것을 알 수 있다 . 특히 이러한 관계를 통하여 한 • 왜의 정치세력 중에는 그 정치적 권위를 높 인 집단도 있었다. 그러나 일단 어느 정도 정치지배자의 세력이 강해 진 후에는 중국 군현과의 교역을 단절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 실제 기 원후 1 세기 초 이후의 백제와 1 세기 후반 이후의 신라는 중국에 조 알 • 조헌하여 정치지배세력의 권위를 높일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 다. 그러면서도 고구려의 帳溝澳體制와 유사한 중국의 문물과 기술의
42) 『晋書』 14, 志 4, 地理 上. 43) 『通典 』 邊 防門東夷 倭 傳 .
도입 창구는 열어 놓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앞에서 얻어진 결과를 토대로 한 • 왜 측의 관점을 가지고 교역의 의미에 대하여 정리 하여 보기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교역은 조공 형식을 빌어 행해진 원 거리교역 (lon g dist a n ce tr ade) 을 가리킨댜 먼저 마한 • 백제의 대낙랑 관계에 대하여 볼 수 있다. 한지역에는 낙랑이 설치된 후 마한이란 소국연맹체가 형성되어 낙랑과의 교역에 임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마한소국 중의 한 나라로 자리잡았 던 백제는 그 지배세력들이 가진 실력과 낙랑과의 교역 등을 통하여 일찍이 정치적 • 군사적 •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백제는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늦어도 기원후 1 세기 초에는 이미 마한연맹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주변의 소국들을 병합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물론 현재의 충청도 • 전라도 지역에 있던 소국들은 그 후에도 마한연맹을 유지하였 다고 생각된다. 그렇더라도 낙랑과 가까이서 성장한 백제는 기원후 1 세기 초에 이미 낙랑과의 공식적인 조알 • 교역 관계는 단절한 바 있 다. 그에 비해 남쪽의 목지국을 맹주로 한 마한연맹에서는 그 후 일정 기간에 걸쳐 낙랑 • 대방 등의 중국 군현과 관계를 지속하였다고 보여 진다. 한편 辰 韓 • 斯盧國(新 羅 )의 대낙랑 관계를 볼 수 있다. 진한소국들 중의 한 나라로 성장했던 사로국은 기원후 1 세기 중반경에 진한맹주국 의 자리를 차지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다른 소국들보다 먼저 받아돌 이게 되었다. 그 결과 사로국은 정치 • 경제 • 군사적 실력을 어느 정도 키울 수 있었고 1 세기 후반부터는 주변의 소국들을 복속해 나가게 되 었다. 이후 신라는 점차 낙랑과의 관계를 단절하게 되었다. 이같이 낙 랑과의 관계를 단절한 백제 • 신라에서는 종래 낙랑을 통해 구하던 정 치적 권위를 나타내던 물건들을 스스로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다. 한편 변한지역의 소국들은 그 맹주국을 중심으로 그 후에도 중국 군 현과 교역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변한 소국들 사이에는 정복사업
이 전개되지 않았으며 멸망할 때까지 각기 독립을 유지하며 연맹을 이 루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이러한 소국들은 국력을 신장하는 데 어려 움이 있었다. 이에 이들 변한의 소국들은 3 세기에도 변한의 생산물인 철을 주요 교역품으로 하여 韓지역의 여러 나라들을 비롯하여 滅 • 倭 및 낙랑 • 대방의 군과도 교역을 지속하였다. 이것은 순수 교역의 의미 를 강하게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왜는 57, 107 년에 중국 측에 사신을 파견한 바 있다. 왜는 1 세기 중 반 또는 2 세기 초에 이르러 소국연맹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세력이 대중국 관계에 임하였다고 보여진다. 그 후 2 세기 후반에 이르 러 소국들 사이에 난이 일어났고 3 세기 초에 卑彌呼의 邪馬臺國세력에 의해 난이 일단 수습되었댜 이에 이르러 왜에는 단순한 연맹 단계를 넘어서는 정치집단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후 239 년 이래 수년 사이에 왜는 대방군 • 위에 사신을 파견하여 중국세력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제 낙랑 • 대방의 중국 군과 한 • 왜의 여러 정치세력들 사이에 있 었던 관계의 특성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먼저 그들 사이에 오고 간 교역품들을 주목할 수 있다. 기원전의 대부분의 기간에는 주로 낙랑의 상인들이 육로 또는 배를 타고 韓지역에 진출하여 동경 • 동탁 • 철제무 기 ·농기구 둥을 팔았고 포·목재 ·사람 등을 구하여 갔다. 이러한 교 역관계를유지하는과정에서 마한·진한·변한이 해당지역의 여러 소 국을 묶어 교역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삼한에는 각기 맹주국이 나타나 중국 군현과의 교역을 맡아 처리하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진한의 맹주국이었던 사로국이 정치적 • 군사적 • 경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낙랑과 가까이에 있던 백제가 성장하여 주변 소국을 병합하고 마한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기원후 1 세기 초 이후 한지역의 세력가들 중에는 낙랑에 간 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때에 이르러 낙랑은 한지역의 여러 정치세력자들 에게 중국의 관작 • 인수 동 정치적 지위와 그것을 증명하는 도장 둥을
주게 되었댜 이에 대해 한에서는 그들의 특산물을 보냈다. 여하튼 이 러한 관계를 통하여 한의 소국들 중에는 정치조직 편성에 대한 이해를 얻게 되었고 군사적 실력을 키울 수 있었으며 농업생산력을 높여 경제 력을 증가시키는 나라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결과 2 세기 후반에 한 • 예가 강성해져 낙랑의 주민들이 한국으로 이주하는 사태가 벌어지 게 되었다. 이 떄 백제, 신라를 비롯한 나라에서는 그 국력을 키우게 되었고 점차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문물을 자체 생산하게 되었다. 이에 백제나 신라의 중앙정부에서는 낙랑과의 교역을 단절하게 되었다. 그 러나 백제 • 신라는 낙랑을 통한 선진 기술이나 문물을 도입하는 통로 는 열어 놓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백제나 신라에 병합되었던 소 국의 지배세력이나 하호들은 낙랑 • 대방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여 중 국문물을 수입하게 되었다. 이들에 대해 중국 군현에서는 왕이 아니라 읍군 • 읍장의 지위를 부여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3 세기 중반경 왜의 卑彌呼는 대방군 • 위와 관계를 맺기 시작 하여 왜에서 그 정치적 권위를 내세우게 되었다. 魏에서는 이 같은 친 위적인 왜왕에게 親魏倭王의 칭호를 주고 여러 가지 정치적 권위를 나 타낼 수 있는 물건들을 주었다. 여기서 한 • 왜의 정치세력과 중국 군현 사이에 맺어졌던 관계를 마 야 (Ma y a) 에서 행해졌던 위세품 교역체제(p res tig e- g oods s y s t em) 로 보면 어떨까 한다 . 44) 그러한 관계의 첫 단계는 한 • 왜의 정치세력이 중 국의 발달된 문물 중 지배자의 권위롤 높이고 군사력을 키우며 농업생 산을 높일 수 있는 물건들을 받아들이고 대신 원자재에 해당하는 물건 들을 보내는 관계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교역 과정에서 소국들은 연 맹체를 이루고 그 맹주국이 교역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 때 교역만 하 기 위해 소국들의 연맹체가 형성된 것은 아니나 그것을 촉진시킨 것으
44) Wi lliam L. Rath j e , Prai se the Gods and Pass the Meta tes , Conte m - pora r y Archaeolog y, 1
로 생각할 수는 있다 여하튼 연맹체의 맹주국은 중국 군현과의 교역 을 주로 하며 여러 주요 문물이나 정보 를 먼저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것을 바탕으로 정치 • 군사 • 경제적 발전을 하게 되어 점차 연맹체의 소국들을 병합하여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정도 단계에 이르면 중 국 군현과의 교역에서 수입하던 물건들을 스스로 만들어 정치지배자의 권위를 높이게 되었다 . 그러나 이들은 피병합국의 지배세력을 완전히 제거할 만한 힘이 없었다 . 그리고 그들이 원하던 물건을 충분히 공급 할 수도 없었다. 죽 신라 • 백제와 같은 나라에서는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어 피병합국의 세력가들에 제공하였으나 충분히 공급할 수는 없었 다. 따라서 피병합국의 세력가들은 중국 군현과 독자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것이 『삼국지 』 한전에 나오는 70 여 소국으로 기록되었다고 보여진다. 이같은 위세품 교역체제를 통하여 중국 군현 주변의 여러 정치세력 들이 정치 • 군사 • 경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 특히 각 지역에서 교 역을 주도한 맹주국은 대체로 보아 일찍이 국력을 성장시킬 수 있었 다.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맹주국들이 주변 소국을 병합해 나가게 되 었고 또 피병합국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면서 낙랑 • 대방은 교역의 상 대를 잃고 멀리 왜 • 가야와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여기서 낙랑 • 대 방 주변의 정치세력이 보다 일찍 성장하여 관계를 단절하고 적대관계 에 들어서게 된 데 비하여, 멀리 떨어진 세력인 왜는 그 발전단계도 늦었고 또 늦게까지 중국 측과 위세품 교역체제를 유지한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3 세기 중반에 이르러 대방 • 낙랑을 위협하게 된 백제에 대해서 는 비상수단으로 대방태수의 딸을 백제의 왕자에게 보내어 혼인시킨 일도 있었다. 이 같은 혼인은 교역의 한 방법으로 볼 수 있다. 중국 측 에서는 실제 원가는 얼마 되지 않으면서 정치적 권위를 나타낼 수 있 는 물건을 한 • 왜에 제공하고 많은 원자재를 구할 수 있었다 . 그런데
한의 여러 세력이 그러한 정치적 산물을 독자적으로 만들어 쓰게 되면 서 이들에게 줄 물건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에 태수의 딸을 보내 백제 의 공격을 막고 오히려 군사적인 도움을 받고자 한 것이다. 여하튼 낙랑군 • 대방군이 존속한 동안 한 • 왜의 정치세력들은 중국 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며 정치 • 경제 • 군사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각 정치세력마다 성장의 시기에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중국 측과 위세품 교역체제를 유지한 시기에도 차이가 있었다. 그 중 백제 는 기원후 1 세기에 이미 낙랑과의 공식적 관계를 단절했고 신라는 1 세 기 후반에 이르러 그러한 관계를 단절하였다. 그에 비하여 왜는 3 세기 중엽까지도 그러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여기서 백제 • 신라 • 왜의 정 치적 발전단계의 차이룰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三上 次男 • 金哲峻의 견해처럼 45 ) 낙랑군 • 대방군이 한반도를 식민지 통치한 것이 아니며 한 • 왜의 여러 정치세력과 위세품 교역체제 정도의 관계 를 맺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2 고구려의 국가 형성 • 발전과 대중국 관계의 전개 고구려는 일찍부터 중국과 관계를 맺어 왔다. 『史記』의 貨殖列傳에 는 중국과 국경을 집한 세력으로 동에는 減額 • 朝鮮 • 眞番 등이 있었 다고 나오고 있다 .46) 그 중 예맥은 후일 고구려와 관련된 세력으로 생 각된다 .47) 따라서 고구려가 성장하였던 지역 또는 그 지역의 주민들은 일찍이 중국인들과 관계를 맺었던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에 이 책에서는 고구려의 국가형성기로부터 태조대왕 (53~146? )까지의 기
45) 주 7 과 8 참조. 46) 『史記』 129, 貨殖列傳 69. 47) 李丙 흙 , 『韓國史』 -古 代篇 -, 1959, p. 126.
간 동안 고구려와 중국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이루어졌는지 알아보기 로 한댜 이를 위하여 크게 네 개의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기로 한다. 첫째, 예맥이 중국인들에게 알려진 후 澈君 南區1 가 遼東郡에 內昴하 기를 청하여 蒼海郡울 설치하고 그것을 폐지할 때까지를 하나의 시기 로 다루기로 한다. 둘째, 漢武帝가 玄英郡을 설치한 후 고구려가 정치 적으로 성장해 나갔다고 헤아려지는데 이 때의 대중국 관계는 어떠한 것이었나 보기로 한다. 셋째, 기원전 1 세기 후반에 이르면 고구려는 이 웃 소국들을 병합해 나가게 되었는데 이 시기의 대중국 관계는 어떠하 였나 정리하기로 한다. 끝으로 太祖大王대의 고구려와 중국 간의 관계 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이 책에서는 중국 측의 관점이 아니라 ,48) 고구려 측의 관점에서 대중 국 관계를 어떻게 맺었으며 그 성격은 어떠하였나 정리하고자 한다. 그러한 관계 중 內屬의 문제, 전쟁관계, 교역관계 둥에 초점을 맞추어 그 표면적인 기능뿐 아니라 숨은 기능에 대하여 가능한 한 밝혀 보고 자 한다. 이러한 작업 내용이 고구려의 정치적 성장과 대중국 관계의 실체를 보다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 1 ) 고구려 소국의 형성과 예군 남려 • 창해군
본 장에서는 玄英郡 설치 이전 고구려지역에서 성장하였던 정치세력 과 중국세력 사이에 있었던 관계에 대하여 정리하기로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중국측 사서 중 고구려가 성장하였던 지역의 정치세 력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史記』 貨殖列傳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따르 면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漢代 또는 그 이전 언제인가에 중국의 燕48) 고대의 중국인들이 한국을 어떻게 보았는가에 대한 견해가 있어 참고가 된다(全 海宗, 『古代 中國人의 韓國觀 -正 史 朝鮮傳울 중심으로 -J , 『韓國과 中國』, 1'57 9 , pp. 7~36).
과 국경을 접한 세력을 열거한 중 북에는 오환 • 부여, 동에는 澈多百 • 朝鮮 • 眞番 둥이 있었던 것으로 나오고 있댜 49) 이로써 보면 중국의 동 북지역에는 일찍부터 정치세력들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기』에는 고구려가 아니고 예맥으로 나오고 있다. 후일의 고 구려가 성장한 지역은 당시에는 예맥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 된다우 따라서 이 장에서는 滅와 蒼 海郡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문제 를 정리하고자 한다 . 그런데 예군 남려의 內屈에 의하여 창해군이 설치될 때(기원전 128 년)까지 예맥과 중국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자료가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기원전 128 년 창해군이 설치될 때 예군 남려가 이끌었던 예의 정치세력은 어떠한 것이었나 알아보고 그러한 예의 세 력과 중국은 어떠한 관계에 있었나 차례로 정리하기로 한다. 이러한 문제를 정리하기 위하여 예군 남려에 대한 다음 기록을 주목하기로 한다. A (1) 燕人 衛滿이 準을 격파하고 스스로 조선의 왕이 되었다. 나라를 손자인 右渠에게까지 전했다. 元朔 元年(武帝의 연호이다) 減君 南間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 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에 나아가 內屬하였다. 武帝는 그 땅을 蒼海郡으로 삼았는데 수년 만에 폐지하였다.(『後漢 書 』 85, 東夷傳 75, 澈傳) (2) 東夷澈君 南閣 둥 28 만 명 이 항복하여 蒼海郡올 삼았다.(『後漢 書 』 6, 武帝紀, 元朔 元年, 기원전 128 년) 위의 기록을 검토하기에 앞서 예군 납려가 거느렸던 예의 정치세력 의 성격에 대한 李丙 驚 의 견해를 주목할 수 있다. 그는 예군 남려가
49) 『史記 』 129, 貨殖列傳 69. 50) 李丙 魚 , 앞의 책, 1959, p. 126.
대수맥과 소수맥으로 이루어진 예라고 하는 대조직체(연맹사회)의 최 고 맹주로서 대수맥의 수장이었다고 하였다. 또 예군 남려는 그 본거 지를 오늘의 통구지방에 두고 있었다고 하였다 . 자위상 위씨조선에 예 속적 관계(부용관계)를 맺고 있었던 예군 남려는 조선왕 우거와의 관 계를 끊고 漢 의 보호를 받고자 하여 그 지배 하에 전 예맥 사회의 인 구를 들어 요동군에 가서 내속을 청한 것이라 보았다 . 그리고 그는 예 맥이 고구려의 전신이라고도 하였댜 5 1) 그런데 필자는 예군 납려가 거 느렸던 정치세력의 성격을 좀더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다. 이와 관련하여 위만조선과 그 주변의 토착세력들과 관련된 다음 기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B 遼東太守는 곧 約으로 滿 을 外 臣 으로 삼아 국경 밖의 오랑캐 롤 지키 고,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고, 모든 鹽夷 의 君長 이 天 子 를 入見 하고 자 하면, 금하지 않도록 하였다. 보고 를 듣고 천자가 이 를 허락하였다. 이 로써 滿은 兵威財物을 얻고 그 주변의 소읍을 侵降 시키니 眞番 • 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여 方이 수천 리가 되었다 . 아들에서 손자에게 전하여 꼬여 낸 漢 人이 심히 많았고 또한 入見을 하지 않았고 眞番 주변의 衆國 들이 글을 올려 天子를 入見하려는 것을 또한 가로막고 不通 케 하였다. ( 『 史記 』 115, 朝 鮮 列 傳 55) 위의 기록에 의하면 위만은 요동태수에 의하여 外臣으로 되었고 그 결과 兵威財物울 얻을 수 있었다. 위만은 이룰 가지고 그 주변의 소읍 에 쳐들어가 항복을 받고 진번 • 임둔을 복속시켜 영토를 확대시킨 것 울 알 수 있다. 중국의 외신으로 있던 위만조선은 하나의 독립국으로 서 중국으로부터 정치적 간섭을 받지 않았다. 결국 외신체제는 정치적 으로는 명분과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였으나 경제적으로는 위만조선이
51) 李丙 ti, 『 韓國 古代史硏究 』 , 1976, pp. 84~86.
외신이 됨으로 인하여 중국과 토착사회의 교역 창구 역할을 하였던 실 질적인 면을 볼 수 있다. 여하튼 위만과 그 손자인 右 渠에 이르기까지 예맥지역을 복속하였다 는 내용은 없댜 그러면서 예군 남려는 당시 28 만여 구를 거느릴 수 있던 정치세력으로 되어 있었다. 예군 남려가 많은 인구를 거느리고 요동군에 나아가 내속할 때까지 위만조선의 정치적 • 군사적 간섭을 받 았을 가능성은 있으나5 21 당시 예군 납려의 세력은 기본적으로 독립을 유지하였고 우거에게 복속되지는 않았다고 여겨진다 . 예군 남려가 右渠를 板할 때 그가 거느렸던 정치세력은 어떠한 성격 을 지니고 있었을까. 우선 28 만 구나 되는 주민을 거느리고 예군 남려 가 요동으로 가지는 않았다고 여겨진댜 오히려 예군 남려의 지배 하 에 있던 주민의 수가 그 정도였지 않았나 한다. 그런데 그 정도의 주 민들이 모두 한 나라의 국민이었는지 궁금하다.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현재 그 수는 알 수 없으나 여러 개의 독립 소국들로 이루어진 소국연 맹체의 주민 수가 바로 28 만 명이었다고 생각된다. 당시에 28 만 명이 나 되는 인구를 가진 소국은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후일 고주몽이 세웠다고 하는 고구려라고 하는 소국이 점차 주변의 소국을 복속시켜 나간 것으로 미루어 당시 예군 남려는 여러 소국으로 이루어진 소국연 맹체의 맹주였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모) 그것은 마한소국의 맹주국인 目支國, 변한 소국의 맹주국인 김해지역의 篤洛國, 진한 소국의 맹주국 이었던 斯盧國과 비교되는 존재라고 헤아려진다. 기원전 2 세기 말 예군 남려를 맹주로 하는 소국연맹체가 형성되었던
52) 李丙 点 , 앞의 책, 1959, pp. 173~174 에서는 에속관계에 있었다고 보고 있으나 구체적인 관계가 어떠하였는지는 언급이 없는 셈이다. 53) 李丙 兪 는 〈玄玩郡 開置 이전의 고구려 예맥사회의 중심지는 죽 압록강의 중류역 인 지금의 통구평야인데, 당시 그 곳에는 南間란 강력한 최고 맹주가 있어 제 부족사회의 다수한 인민을 통솔하고 있으면서 자위상 위씨조선과의 부용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 하였다(앞의 책, 1959, p. 175).
것을 생각할 수 있으나 그와 같은 소국연맹체가 언제 생겨났는지 궁금 하다. 이와 관련하여 『사기.!l에 나오는 다음 기록을 주목할 수 있다. 대체로 燕도 역시 발해와 갈석산 사이의 한 주요한 도회이다 . 남쪽으로 는 제와 조에 통하고 북동으로는 胡와 접경하며, 상곡에서 요동까지는 한 쪽으로 치우친 먼 곳으로 인구는 희박하며 자주 침구를 받는다. 조나 대 의 민속과 비슷하지만 이 땅의 주민은 독수리처럼 날쌔고 사나운 반면에 사려가 부족하댜 생선, 소금, 대추, 밤이 풍요하게 생산된다. 북쪽으로는 오환, 부여와 교역하고 동으로는 예맥, 조선, 전번과의 교역의 이익을 독점 하고 있다.(『史記』 129, 貨殖列傳 69) 위의 기록을 보면 燕의 동쪽의 滅(祿)정 B • 朝鮮 • 眞番의 利롤 취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중국의 전 국시대 언제인 것은 알 수 있다. 이 경우 예맥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정치적인 실체로 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국의 전국시대 언제인가 예맥이 하나의 소국연맹체를 형성하였던 것을 짐작 하게 된다. 기원전 2 세기 말 漢에 내속을 요청하였던 예군 남려가 맹 주로 있던 소국연맹체 안에는 고구려 소국도 포함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면 어떠한 이유로 澈 소국들의 맹주국의 지배자였던 예군 남려 가 右渠에게 坂하였다고 나오고 있을까. 먼저 예군 남려의 세력과 우 거와의 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남려가 다스렸던 예는 위만조선에 복속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예는 위만조 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예군 남려가 우거에 板하여 요동으 로 갔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위만조선의 대외관계 일반올 생각할 수 있다. 위만조선은 중국의 外臣으로 되어 있으며 무기를 비롯한 중 국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이고 그 중 무기를 제외한 재물들을 주변의 여러 소국들에게 내려주었다고 짐작된다. 위만조선뿐 아니라 중국인들
이 필요로 하는 원자료에 해당하는 물건들을 주변 여러 나라로부터 받 아들여 중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541 그 결과 위 만조선은 그 주변의 토착세력들이 중국과 직접 교역하는 것을 막게 되 었다고 여겨진다. 그러한 관계는 眞番 帝의 衆國들이 중국의 천자를 직접 보고자 하는 것을 막았던 사실로 알 수 있다. 중국의 외신으로 인정을 받았던 위만조선은 예군 남려에 대해서도 진번 방의 중국과 같 은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었을까. 거기에 더하여 우거의 조선은 예를 侵降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결과 예군 남려는 위만조선을 경유 하여 간접적으로 중국과 관계를 가지는 데 불만을 품게 되었다고 여겨 진댜 이에 중국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위하여 위만조선과의 관계를 끊 고 예군 남려가 요동군에 가서 내속하게 되었다고 헤아려진다. 이러한 예군 남려의 움직임은, 결국 위만조선을 외신으로 삼아 조선 주변의 정치세력들의 중국 침입을 막고 한편 그들과의 접촉을 마다하지 않던 중국의 대동이정책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것은 처음으로 동이 의 한 정치집단인 예의 내속을 받아들인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요 동군의 처지에서 보면, 우거왕대에 이르러 조선이 많은 漢人을 꾀어 받아들이고 늘 入見하지도 않았고 주변 여러 나라들이 직접 천자에게 글을 올려 보고자 하는 것도 막게 되자 토착세력과 직접 관계를 맺기 롤 바라게 되었다 . 앞의 사료에 나오는 것과 같이 예군 남려가 요동에 나아가 내속하자 武帝는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았으나 수년 내에 파하게 되었다고 한 다. 여기서 예의 내속과 창해군의 설치를 둘로 나누어 정리할 수 있다. 우선 내속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었나 궁금하다. 이병도는 내속에는 정 치적인 보호보다는 문화 • 경제상 직접적인 교류 • 교역을 행하려는 의 도가 내포되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55) 실제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
54) 이 때 위만조선의 지배세력들은 복속한 진번 • 임둔 등으로부터 조세를 거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예군 남려는 위만조선의 침략을 막고 위만조선을 통한 대중국 간접 교역을 끊기 위하여 요동군에 나아가 내속을 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 따라서 예군 남려의 내속을 통하여 중국과 예는 직접 관계 를 맺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하여 정치적으로 중국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내속은 주로 요동군과 예군 남 려 사이에 맺어진 관계였다고 보여진다 . 물론 요동군을 통하여 중국 중앙정부에 내속한 형식이었겠으나 당시 예의 세력들이 직접 중국의 武帝를 만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 자연 요동군은 중 국의 대동이관계의 중심적인 존재로 되었다고 믿어진다. 여하튼 예군 남려가 요동에 내속은 하였으나 실질적인 관계는 깊지 않았다. 그것은 한 무제 자신이 예의 독립을 인정하는 내속만에 만족할 수 없었기 때 문이다 . 이에 무제는 예의 땅에 창해군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창 해군은 수년 내에 파하였다. 그러면 武帝가 창해군을 설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제의 창해군 설 치 목적은 예군 남려가 스스로 내속해 온 기회에 요동군을 벗어난 지 역에 중국의 郡을 설치하여 통치 영역을 확대하려는 것이었다고 생각 된다. 군을 설치하고 중국인 관리를 보내어 통치를 하게 되면 단순한 내속관계와는 달리 무제의 통치력이 예지역 주민들에게 직접 미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민족인 예의 주민들에게 대해서는 漢 人에 대한 군현제를 통한 통치와는 다른 지방통치방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 었을 것이다. 그러나 창해군은 설치는 되었으나 실제로 경영되지는 못 하였다. 元朔 3 년(기원전 126) 에 창해군이 폐지된 이유는 요동지방에 서 창해군까지의 교통로 개척에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 56) 여기서 창해군 설치시의 계획은 중국에서 창해군까지의 교통로
55) 李丙 Ji., 앞의 책, 1959, p. 85. 56) 『 史記 』 112, 平津侯主父列傳 52, 公孫弘 『史記 』 6, 武帝紀 6, 元朔 3 년조.
롤 개척하고 그것을 통하여 예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자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창해군까지의 교통로 개척과 관련된 다음 기록을 주 목할 필요가 있다. C (1) 彭吳 가 예맥 • 조선의 길을 열고(彭吳察祿청祖朝鮮) 창해군을 설치 하였다. 그 후 연 • 제 사이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Ii' 漢害.!I 24, 食貨 志 4 下) (2) 彭吳 가 예 • 조선과 장사하고( 彭 吳賈滅朝鮮)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그 후 연 • 제 사이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史記 』 30, 平準 꿈 8) 위의 기록 중에 나오는 ~(Cl) 은 開馨을 의미하고 滅 (C2) 은 澈 의 잘못이며, 賈 (C2) 는 容의 잘못이라는 견해가 있다 . 57) 그런데 賈롤 容의 잘못이라고 보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東賈眞番之 利 〉 (『 漢書』 28, 地理志 8 下 2) 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시 漢人 들이 이민족과 교역을 하였고 거기서 이익을 취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彭吳 역시 예맥과 조선에 대하여 교역을 했다고 보 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제 창해군 설치의 숨은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죽 武帝는 창해군 을 설치하고 교통로를 개척하여 직접 교역을 꾀한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창해군의 설치는 위만조선의 정치적 • 경제적 성장에 따론 漢의 경제력 확보와 예의 위만조선에 대한 반발이 그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면서도 창해군의 설치로 인하여 내면적으로는 漢과 澈가 중간무역 의 방법을 배제하고 직접 교역하는 길이 열리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58 ) 물론 이 때 예지역의 여러 정치세력은 창해군에 와서 조공 • 조알의 형 식을 취하고 실질적으로는 對漢交易을 꾀하는 형태의 관계를 가졌을
57) 이 병도, 앞의 책, 1959, p, 8.5 및 pp. 175~176. 58) 위의 책, pp, 174~175.
것이나 창해군이 파하게 되어 그 관계는 맺어질 수 없었다. 한편 예군 남려는 요동에 나아가 내속하는 정도 를 원하였지 자기가 관할하는 예지역에 창해군의 설치를 원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 그 결 과 창해군까지의 교통로 개척은 전적으로 중국 측에서 부담하도록 되 었는데 그 비용이 과중한 때문에 창해군 자체가 운영 • 유지되지 못하 였댜 여기서 예가 중국에 내속하였고 중국은 그 지역에 창해군을 설 치하였으나 중국인들이 예의 주민을 직접 다스릴 수 없었던 것도 생각 할 수 있다. 결국 창해군이 파할 때까지 예지역의 여러 소국으로 이루 어진 정치집단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정치적인 독립을 유지하였던 것을 알수 있다. 예군 남려를 맹주로 한 소국연맹체 안에 고구려가 한 소국으로 있었 던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먼저 광개토왕릉비의 자료 를 보기로 한다. D 옛날 시조 鄒 牟 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북부여로부터 출자하였다 . (추 모왕은)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며,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 다. 나면서부터 성스러움을 지녔으며 … 명을 받들어 수레를 타고 순행하 여 남하하였는데 도중에 부여의 엄리대수가 있었다 . 왕이 나루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가 바로 황천의 아들이며 어머니가 하백의 딸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띠를 잇고 거북이들을 떠오르게 하라〉 고 하였다. 소리에 옹 하여 곧 띠를 잇고 거북이가 떠올랐다. 그 후에 강을 건너게 되었다 . 비류 곡의 홀본서성 산상에 도읍을 세웠다 . 세상의 왕위를 즐기지 않게 되니 이에 황룡을 아래로 보내어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타고 승천하였다. 세자에게 나라 일을 부탁하였는데 유류왕은 도 로써 다스림을 일으켰다. 대주류왕이 왕업을 계승하고 17 세 손인 국강상 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위의 사료 를 보면 추모왕이 고구려를 세웠 는 데 그의 출 신은 北 夫餘 였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 삼국사기 』 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 를 건국한 세력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고 있다. 그에 따르면 始祖 東 明 聖王 의 이름은 朱 蒙 이며 그의 父 는 天帝의 아들인 解慕澈 이 고 母 는 河伯의 딸인 柳花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부여에서 태어난 주 몽은 부여왕인 금와의 아들들의 미움을 받아 끝내 그 곳을 떠나 새로 운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그 때 부여에서부터 주몽을 따라온 세력이 있었다 . 그리고 이주 도중에 만난 세력들도 있었다. 이들 세력을 거느 린 주몽은 졸본천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궁실을 만들어 고구려를 세 운 것으로 되어 있다 . 59) 그 시기는 漢 孝元帝建昭 2 년으로 기원전 37 년에 해당한다. 이 때 고구려 건국의 소식을 듣고 사방에서 來附하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고구려의 건국시기가 기원전 37 년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고주몽은 국가를 세운 이듬해에 이미 松 讓 王이 다스리던 나라의 항복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60 ) 과연 국가를 세운 이듬해에 다른 나라의 내항을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심이 간다. 따라서 기원 전 37 년에 고구려를 건국하였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것은 주몽이 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운 때와 그 이듬해 송양왕이 다스리던 비류국의 내항을 받은 때 사이에는 보다 오랜 기간이 있었는데 그것이 기원전 37 년의 사건으로 크게 축소 • 압축되어 남았다고 여겨진다. 이 경우 고 구려의 건국시기는 더 거슬러 올라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 고구 려의 건국은 기원전 75 년 이전 혹은 기원전 107 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견해가 있어 주목된다 . 6 1) 고구려의 초기국가로서 소국의 형성시기에 대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
59) 『三國 史 記 CJ 13, 高 句 麗本紀 1, 始祖 東 明 聖 王 즉위조 . 60) 『三 國史 記』 13, 高 句 麗本 紀 1, 始祖 東 明聖 王 2 년조 . 61) 李基白, 『 高 句 麗 의 國家 形成 問題』 , 『韓國 古代의 國家 와 社會』, 198. 5, p. 81.
댜 중국의 한 무제는 기원전 107 년에 현토군을 설치하고 그 치소를 고구려현에 두었던 것으로 짐작이 간다. 그것은 『漢 書 』 地 理志 玄英郡 조에 그 치소에 해당하는 首縣 이 고구려현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 어 알 수 있다. 『 한서』 지리지의 현토군의 고구려는 현토군의 치소가 1 차 이동된 후의 사정을 전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원래 현토군의 치소 명을 옮겨 사용한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62) 그런데 낙랑군의 치 소인 조선현은 위만조선의 도읍에 설치된 것을 상기하면 현토군이 설 치될 때 고구려라는 나라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당 시 고구려라는 소국이 성장한 지역에는 예군 남려가 맹주로 있던 소국 연맹체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은 앞에서 보았다. 이 경우 고구려는 그 러한 소국연맹의 한 소국으로 되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현토군의 설치로 인하여 예군 남려의 세력은 소멸되고 현토군의 치소 가 자리잡았던 고구려 소국이 현토군과의 관계에서 정치적 • 군사적 실 력을 키우게 되어 기원전 75 년에는 현토군을 몰아낸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처음 환인 지역의 홀본(졸본)에 도읍하였다고 생각되기에 현 토군의 치소도 그 곳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2) 고구려의 현토군 축출과 소국연맹 맹주국으로의 성장 창해군을 파한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한 무제는 한층 적극적인 동 방아시아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위만조선을 멸 한 것과 한군현을 설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료 B 에 나오는 것과 같이 위만의 손자인 우거는 많은 漢 亡人울 꾀어들였고 入見울 하지 않 고 오히려 眞番 芳의 여러 나라들이 上書하여 천자를 만나려고 하는 것을 막았다 .63) 그러던 중 기원전 109 년 漢使 涉何가 와서 설득하였으나
62) 李丙薰 앞의 책, 1959, p. 163. 63) 앞의 사료 B 참조.
우거가 끝내 紹 받들기를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涉何는 귀로에 朝鮮碑王 長을 살해하고 그 공으로 요동 동부도위에 임명되었다. 그러 나 조선에서는 그를 원망하여 군대를 내어 涉何를 살해하였다. 이에 무제는 군대를 파견하여 어렵게 위만조선을 멸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 에 낙랑군을 설치하고 그밖에 임둔군 • 진번군을 두었다(기원전 108 년). 그 이듬해에는 현토군을 예맥의 땅에 설치하였다. 이 현토군은 高句麗 縣(제 1 차 고구려현)인 오늘의 통구평야를 중심으로 설치되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 .64 ) 그리고 이 같은 고구려현은 후일 고구려국의 중심지였 음에 틀림이 없다고 한다 .65 ) 그런데 한사군 중 현토군은 기원전 75 년에 이르러 그 군치를 揮河 상류인 興京老城 부근으로 옮겨 갔다는 견해가 있다우 이 때 현토군이 옮겨 간 이유는, E 후에 夷성百의 침락을 받은 바 되어 郡을 句麗서북으로 옮겼다. 지금 의 玄英 故府가 이것이다.(『三國志』 30, 魏 書 30, 東沃沮傳) 라는 기록에서와 같이 夷括세력의 침략에 의한 것일 수 있다. 여기서 현토군이 고구려지역에 군치를 둔 기간은 32 년 정도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夷창百이라는 존재에 의한 현토군 축출은, 일반적으로 압록강 방면에 서 일어난 고구려 신홍세력과 현토군의 충돌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 되고 있다 . 67) 그러면 고구려의 신홍세력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세력이었 을까.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고구려 건국에 대한 기록을 주목할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가 통구지역에 자리잡았던 현토군을 홍경지역으로
64) 李丙 魚 , 앞의 책, 1959, p. 176. 65) 위의 책, p. 355. 66) 위의 책, p. 159. 67) 李基白, 『韓國史新論』(개정판), 1'51 6 , p. 32.
몰아 내기까지에는 고구려세력 자체의 정치적 • 군사적 성장뿐 아니라 현토군과의 관계에서 그 실력을 키운 데에도 그 이유가 있다고 본다. 이에 우선 현토군은 어떠한 존재였나 생각하기로 한다. 현재 당시의 현토군 자체의 실체를 이해할 만한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한서』 지리지에는 비록 낙랑군에 대한 것이나 ,68) 현토군이 설치될 때의 사정 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있다. 첫째, 낙랑군의 吏를 요동에서 뽑아 온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현토군은 낙랑군보다 1 년 뒤에 설치 되었으나 그 설치 목적이나 과정이 같았다고 여겨진다 . 자연 현토군이 설치될 때에도 그 운용을 위하여 요동지역에서 관리를 뽑아 왔다고 생 각된다. 그들 요동군으로부터 온 관리들은 중국을 대표하여 고구려인 들과 접촉하였고 그들로부터 토착사회의 주민들이 자극을 받았다고 여 겨진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사실은 內郡賈人의 존재이다. 중국의 內郡으로부 터 낙랑군에 상인들이 온 것으로 보아 현토군에도 그러한 상인들이 왔 음에 틀림이 없다. 이들 중국의 內郡에서 온 상인돌은 경제적인 면에 서 토착사회 주민들에게 자극을 주었다고 믿어진다. 셋째로 낙랑에 온 상인들이 조선인들로부터 물건을 훔쳐 가게 되면서부터 그 풍속이 점 차 나빠지게 되어 犯禁이 크게 늘어난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중국인의 도둑질은 토착사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쳐 사회 통제의 필요성을 강 화시키게 되었다. 그러한 현상은 현토군 지역에서도 나타났다고 여겨 진다. 여하튼 현토군의 설치는 고구려인들을 여러 방면에서 자극하기에 충 분하였다. 당시 요동에서 온 중국인 관리와 중국 본국의 내군에서 온 상인들은 토착세력들의 거주지와는 따로 떨어진 현토군 군치의 일정한 장소에서 살았다고 믿어진다. 그러면서도 고구려인들은 독자적인 세력 을 유지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O) 그러한 상황 아래서 부여로부터 고
68) 『漢간』 28, 地理志 8 下2 .
구려지역에 이주하여 고구려 를 세운 주몽세력이 중심이 되어 정치 • 군 사적 실력을 키워 나가게 되었댜 주몽은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길렀 다고 한다 . 70) 이는 주몽 한 사람만의 능력일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고 구려인들의 군사적인 실력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한 실력을 토대로 이주민인 주몽세력은 토착민을 규합하여 현토군의 설치 이전 언제인가 에 고구려라고 하는 초기국가로서의 소국을 세웠으며 현토군이 설치된 후에는 그 세력을 크게 신장시켜 결국은 현토군을 축출한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다. 그 결과 고구려는 현토군을 몰아 낸 기원전 75 년 이후 과 거 예군 남려가 맹주로 있던 소국연맹의 맹주국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 다고 여겨진다. 현토군의 치소가 고구려에 위치하였을 때 고구려인들은 중국인들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러한 사실을 토대로 하여 힘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현토군을 몰아 낸 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 漢 과 원 거리교역이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러한 사정은 다음 기록을 통 하여알수있다. F 漢 나라 때에 鼓吹技 人을 주었는데 늘 玄英郡에 나아가 朝服衣積을 받 았다 . 高 句 麗 令이 그 名 籍 을 주관하였다 . (『 三 國志 』 30, 魏 書 30, 高句 麗 傳) 위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는 한나라로부터 鼓吹技人을 받은 것이 보 인다. 그리고 현토군에 나아가 朝服 衣 帳 을 받은 것도 볼 수 있다. 이 때 고구려인들은 각종 원자재에 해당하는 물건을 현토군을 통하여 중 국에 공급하였다고 헤아려진다. 이로써 보면 현토군과 고구려 사이에
69) 실제로 현토군에 온 관리 들 은 고구려인들을 정치적으로 통제할 힘이 없었다고 여겨진다 . 이에 현토군에 온 중국인 들 은 정치적인 통제보다는 경제적인 교역에 큰 비중을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 70) 『三國 史 記』 13, 高 句 麗本 紀 1, 始 祖東 明 聖 王 죽위조.
는 실질적인 면에서 원거리교역 관계가 유지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데 이 같은 중국 측의 조복의책과 고구려지역 여러 나라의 원자재 교 역을 주관한 것이 고구려 소국이었음은, 위의 사료에 나오는 것과 같 이 그 名籍울 고구려령이 주관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결국 고구려는 과거 예군 남려가 장악하고 있던 소국연맹체의 맹주국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원거리교역을 주관해 나가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조 복의책은 중국의 발달된 정치제도 운영의 산물임에 틀림이 없다. 고구 려인들은 조복의책을 현토군으로부터 받아 착용하게 되며 중국의 정치 제도에 대한 이해도 일정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때 조복의책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위만조선에서 중국의 병위재물을 받 았던 예로 미루어 고구려에서도 무기와 기타의 재물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71) 당시 발달된 무기는 고구려 소국이 차지하고 다른 물건들 은 소국연맹체 내의 다른 소국에 분배하였다고 여겨진다 .72) 이로써 소 국연맹 내의 다른 소국들에 비하여 고구려의 군사력이 성장하게 되었 다고 침작된다. 한편 당시 고구려인들의 정치적인 수준이 중국제도를 그대로 받아들 일 단계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현토군과의 원거리교역을 통 하여 국가 통치체제 전반에 대한 정보를 다른 어느 소국보다 먼저 받 아들이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고구려는 그러한 정보를 가 지고 국가 통치체제를 그들 나름대로 정비하고 국력을 키워 나갔다고 헤아려진다. 그 결과 고구려 소국은 소국연맹체의 맹주국으로서의 위 치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하는 단계로 넘어간 것을 볼 수 있다• 현토군의 치소가 환인지역에 있을 때 고구려를 비롯한 주변의 여러
71) 金翰奎, 앞의 책, 1982, p. 143 참조. 72) 그러한 예는 신라에서도 찾을 수 있다(李鍾旭, 『新羅國家形成史硏究』, 1982, p.10 4).
소국들은 고구려지역으로부터 조복의책 등을 받아가게 되었다고 생각 된댜 그런데 고구려가 현토군을 축출한 후에는 그러한 관계 를 어떻게 유지하였을지 궁금하다. 여기서 추측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고구려 를 주축으로 하여 원거리교역이 유지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고구려 를 비롯한 주변의 여러 소국에서 아직 중국의 발달된 문물을 필요로 하였고 중국 측에서는 고구려지역의 토산물 • 원자재를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댜 단지 고구려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은 구태여 각기 현토군에 사람을 보낼 필요가 없이 고구려를 원거리교역의 창구로 하여 물건을 교환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고 헤아려진다. 이러한 원거리교역은 위세품 교역체제(p res tig e- g oods s y s t em) 로 볼 수 있댜 (3) 고구려의 소국 병합과 대중국 관계의 전개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소국연맹체는 기원전 75 년에는 玄英郡의 치 소를 홍경 방면으로 몰아 내었다. 이후 고구려는 예군 남려가 맹주로 있던 소국연맹체의 맹주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현토군을 축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고구려는 곧 주변 소국들을 병합하여 나갔다. 그와 같은 소국 병합은 朱 蒙 대에 시작하여 琉璃王 • 大武神王에 이르 는 기간 동안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그 결과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 었다. 고구려 시조동명성왕 2 년에는 松讓王의 셈 B 流國의 내항을 받았고 ,73 l 6 년에 는 7 毛人國을 취 하여 城邑으로 삼은 바 있다 .74) 琉璃王 33 년에는 梁 참 8 國을 멸하였고 漢의 高句麗縣을 습취하였다 .75) 그리고 大武神王 9 년 에는 개마국을 親征하고, 句茶國의 내항을 받았다.i 6) 여기서 고구려가
73) 『 三 國史記』 13, 商句麗本紀 1, 始祖東明聖王 2 년. 74) 主 國史 J B 』 13, 高句麗本紀 1, 始祖東明聖 .1 : 6 년. 75) 『二國史記』 13, 高句麗木紀 1, 琉璃明王 33 년.
이웃한 소국을 병합하기 시작한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1 세기 후반경부 터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Tl ) 고구려가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한 결과 고구려 중앙정부의 통치력은 한충 강화되었댜 그리고 그와 같은 고구려의 정치적인 성장은 대중국 관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헤아려진다. 그 결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중국 관계의 내용이 달라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먼저 『삼국지』의 다음 기록을 검토하기로 한다. G 후에 점차 교만하고 방자하여져 다시는 (玄英)郡에 오지 않았다. 동 쪽의 경계에 小城을 쌓고 朝服衣帳을 그 안에 두면 해마다 와서 가져갔다. 지금도 오랑캐들이 이 성을 敍溝浪라고 한다. 溝澳는 句麗 이름으로 성이 다 . ( 『三 國志』 30, 魏 舊 30, 高句麗傳) 위의 자료는 앞에 제시한 사료 F 에 뒤이어 나오는 기록이다 . 위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후에 점차 縣窓하게 되어 다시 현토군에 나가 지 않고 동쪽 경계에 小城울 쌓아 놓고 중국 측에서 朝服衣帳올 그 안 에 가져다 놓아 두면 해마다 와서 그것을 가져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 溝渡는 고구려의 이름으로 城을 뜻한다고 한다. 帳溝樓의 禎은 朝服衣 帳의 帳울 의미한다. 이에 帳溝樓는 帳울 두던 城이거나 帳울 공급한 城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책구루를 통하여 이루어진 고구려 와 현토군의 관계를 帳溝浪體制라 일단 부르기로 한다. 이 때 책구루 에서의 물건교환을 주관한 세력은 환인에서 통구지역으로 나라를 옮긴 후 이웃 소국들을 병합해 나가던 고구려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책구루 체제는 소국연맹 단계의 중국 현토군과의 원거리교역인 위세 품 교역체제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체제임을 알 수 있다. 전단계와는
76) 『 三 國史記』 14, 高句麗本紀 2, 大武神王 9 년. 77) 李基白, 앞의 논문, 1985, p. 81.
달리 책구루 체제에 있어 중국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크게 줄었고 오히 려 고구려의 세력이 강해진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후 고 구려는 종래 중국으로부터 받아 오던 의책 등을 점차 자체 생산하게 되었다고 헤아려진다. 그러면서도 고구려는 중국 선진문물에 대한 관 심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예는 유리왕이 계실로서 고구려인 과 漢 人을 받아들였던 사실로 짐작할 수 있다 . 78) 이 때 漢 人울 부인으 로 맞음으로써 유리왕이 중국문명을 수용하기 용이하였다고 보여진다. 여기서 고구려와 현토군 사이의 책구루 체제가 유지된 시기를 생각 할 필요가 있다 . 李丙 飛 는 사료 G 에 나오는 것과 같이 후에 점차 교만 방자해져 다시는 郡울 찾지 않았다고 한 기록은 적어도 고구려의 사회 체제와 자주정신이 강화되어 현토군과의 관계가 희박해진 것을 의미한 다고 보았으며 , 그 시기는 大 武神 王 이후 건국기에 속한다고 하였다 .19 ) 그런데 필자는 책구루 체제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시기를 대체로 대무 신왕보다 앞선 유리왕대로 보아 李 丙 熹 와 견해를 달리한다. 그것은 뒤 에 보려는 바와 같이 王 拜과 유리왕대의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짐작할 수 있다 . 왕망은 胡를 치기 위하여 고구려병을 동원하려 하였으나 고 구려에서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구려인들을 추격하던 요서 대윤을 고구려인들이 살해하였다 . 80) 이와 같은 고구려와 新나라 사이에 있었던 사건과 고구려의 현토군 공격(유리왕 33 년)울 통하여 고구려와 중국의 사이가 기원후 1 세기 초에 나빠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당 시 구태여 책구루 체제가 유지되었을지 의심이 간다 . 그러면 책구루 체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통구지역으로부터 현토군치를 몰아 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책 구루 체제가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비록 고구려가 현토군의 군치
78) 『 三國 史記 』 13, 高 句 麗本紀 1, 琉璃明王 3 년. 79) 李 丙 HJ. , 앞의 책, 1959, p. 236. 80) 『三國志』 30, 東夷 傳 30, 高 句 麗傳
를 홍경지역으로 몰아 내기는 하였으나 고구려에서는 아직 중국의 선 진문물이 필요하였다고 짐작된다. 그러한 필요는 책구루 체제를 유지 함으로써 충족시킬 수 있었으며 고구려는 주변 소국들과 사이에서 중 간무역의 이익을 차지하였다고 헤아려진다 . 그 결과 고구려는 정치적 • 군사적인 면에서 주변의 다른 소국들보다 먼저 국력을 신장시켰고 그러한 국력을 바탕으로 주변 소국들을 병합하여 나가게 되었다고 여 겨진다. 다음,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과 같이 유리왕대에 이르게 되면 고구 려와 중국 사이에는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삼국 사기 』 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琉璃明 王 31 년(기원후 12) 王拜 이 胡를 치기 위해 고구려인을 동원하려 했으나 고구려에서는 그 요청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81 ) 오히려 강박하여 보내려 하니 고구려 측에서는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벗어나 법을 어기고 도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구려가 실제로 도적이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구려인을 강박하던 요서대윤 全 諱 이 고구려인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이에 왕망은 고구려를 下句 麗 로 바꾸어 부르고 그 왕을 侯로 삼았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고구려는 漢 의 邊地를 더욱 심 하게 공격하였다. 실제로 유리왕 33 년에는 제 2 현토군의 치소인 홍경 • 노성 부근의 고구려현을 공격한 바 있다 . 82) 이와 같이 고구려는 왕망 의 요구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현토군지역을 공격하여 들어갔다. 大武神王 (18~44) 에 이르게 되면 고구려와 중국 사이의 관계는 한층 달라지게 되었다 . 대무신왕은 소국 병합을 추진하고 그 영토를 확장하 여 나갔다. 그 결과 중국 측에서도 고구려를 견제할 필요가 생긴 것 같다 . 그러한 예는 다음 기록으로 살펴볼 수 있다.
81) 『三 國史記 』 13, 高 句 麗 本紀 1, 琉璃明王 31 년 . 82) 李丙 点, 『國譯 三國 史 記』, 1977, p, 2'Z7 .
H 11 년 가을 7 월에 漢 의 요동태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왕 은 群臣을 모아 戰守의 계책을 물었다. 우보 송옥구가 말하였다 . 〈 신이 듣 건대 덕을 믿는 자는 번창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고 합니다. 지금 중 국은 흉년이 들었고 도적이 봉기하는데 명분 없이 출병하였습니다. 이는 君臣이 정한 정책이 아니라 변장이 이익을 노려 함부로 우리 나라를 침략 한 것입니다 . 하늘을 거역하고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니 군대는 공이 없을 것입니다. 험한 것을 의지하여 기묘한 계책을 내면 반드시 캘 것입니다〉 하였다 . … 漢將은 성 안에 물이 있으므로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답하였댜(『 三 國史記 』 14, 大武神王 11 년) 위의 기록에 나오는 漢將은 요동의 장수일 것이다. 그는 중국 황제 가 보내어 고구려에 쳐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은 松屋句가 이야 기한 것처럼 요동태수 자신의 이해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831 여하튼 주변 소국을 병합하며 국력을 키운 고구려가 현토군을 공격하 게 되자 그 후방에 있던 요동태수가 고구려울 견제하기 위해 쳐들어온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 이로써 고구려는 기원후 1 세기 전반에 요동군 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나라로 성장한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대무신왕은 요동에서 온 중국 군대의 침입을 잘 막아 냈을 뿐 아니라 낙랑군까지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바 있다. 『삼국사기』에 는 大武神王 15 년에 왕자 好童이 樂浪王 崔理의 항복을 받은 것으로 나오고 있다 .84) 낙랑왕 최리가 어떠한 존재인지 궁금하다. 대체로 그는 낙랑군의 실력자로서 옥저지역에 출행했을 때 대무신왕의 아들인 好童 을 만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호동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그의 딸과 혼인시킨 것으로 나오기도 하고 고구려에서 낙랑을 멸하기
83) 중국의 황제는 당시 고구려지역에까지 직접 관심을 기울일 단계는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84) 『三國史記 』 13, 高句麗本紀 1, 大武神王 15 년.
위하여 청혼을 한 것으로 나오기도 한댜 여기서 두 가지 기록 중 어느 것이 맞는지 단정하기가 여려우나 낙 랑과 고구려의 목적이 서로 달랐다고 여겨진다. 죽 낙랑은 새로이 국 력을 신장시킨 고구려 왕실과 혼인을 맺어 침략을 방지하고 일종의 위 세품 교역체제에 의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을 수 있다 . 낙랑과 고구 려는 그 이전부터 깊은 관계에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국에 대한 복 속사업을 펴던 고구려는 대무신왕대에 이르러 낙랑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여겨진댜 그 결과 대무신왕은 낙랑을 제압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과 최리의 딸 사이의 결혼을 이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 결국 고구 려와 낙랑은 서로의 이해 때문에 혼인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고구려는 대무신왕 15 년 낙랑의 항복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런데 다시 대무신왕 20 년에 낙랑을 멸하였다고 되어 있다 . 85) 위의 사료 에는 당시 고구려가 낙랑을 공격하고 또 멸망시켰다고 되어 있으나 그 후에도 낙랑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알수있다. I 27 년 가을 9 월에 漢 光武帝가 군대 를 보내 바다 를 건너 낙랑을 정벌 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았다. 살수 이남이 漢 에 속하였다.( 『三國史 記 』 13, 大武神王 27 년) 여기서 고구려가 낙랑의 항복을 받고 멸망시켰다는 것은 단지 낙랑 과 중국 사이의 관계를 끊고 고구려가 낙랑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낙랑지역까지 고구려의 영토가 확대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고구려인들은 중국의 선진문명의 산물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한 예는 적병이 오면 스 스로 우는 고각이 낙랑에 있었다는 설화적인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85) 『三 國史 記』 13, 高 句 麗 本紀 1, 大武 神 王 20 년.
그러한 선진문물을 얻기 위하여 낙랑을 공격한 것은 아니었을까. 여하 튼 한 무제는 낙랑에 대한 중국의 지배권을 되돌리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 그런데 중국측 사료를 보면, 광무제가 낙랑을 공격한 것이 建武 6 년 (기원후 30) 이었다. (l;) 이 때 낙랑에서 王調가 난을 일으키자 이룰 제압 하기 위해 왕준을 낙랑태수로 임명하여 보내니 그는 郡吏돌의 도움을 받아 왕조의 난을 평정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위에 나오는 대무신왕 27 년조의 기사도 실은 建武 6 년의 기록인데 고구려본기에서 14 년 뒤 의 사건으로 기록한 것은 아닐까 여겨진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하다면 호동왕자의 설화적인 기록도 실은 그 연대가 다소 올라갈 수 있을 것 이다 . 한편 대무신왕은 낙랑을 공격하면서도 중국의 광무제에게 사신을 파 견하여 조공을 한 바 있다 . III) 즉 建武 6 년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낙랑 의 王調 의 난을 평정한 지 2 년 후 고구려는 사신을 광무제에게 보내고 있댜 이는 고구려 사신이 최초로 중국에 간 것을 뜻하며 나아가 고구 려와 중국 중앙정부 사이에 관계가 맺어진 것을 말해 준다. 이 때 광 무제도 왕망이 高 句 麗 侯로 삼았던 칭호를 바꾸어 주고 있다. 이로써 고구려와 광무제 사이에는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 후 閔 中王대에는 고구려는 蠶 支(右)落의 대가인 戴升 등 만여 가 가 낙랑에 나아가 內 屬 한 바 있다 . 88 ) 蠶支落이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 고 또 어떠한 이유로 낙랑에 내속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기원 후 1 세기 전반경의 낙랑에는 토착사회에 사는 많은 주민들이 흘러 들 어간 것을 알 수 있다 .89 ) 廉斯鏞이나 蘇馬說처럼 생뀔浪土地美 人民燒
86) 『後淡꿈』 1 下, 建 武 6 년조 . 87) 『後漢害』 85, 束 夷 列傳 75, 句耀 健 88) 『三國 史 記,.i 14, 閔中 王 4 년. 『後淡函 85, 東 夷 列傳 句 隨 傳
樂〉 하다는 소문을 듣고 내속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때 1 만여 구 의 주민들을 모두 데리고 낙랑으로 갔다기보다 戴升 동 일부가 낙랑에 가서 내속을 하는 형식을 취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에 고구려의 주민 들 중 일부 세력집단은 개별적으로 낙랑과 관계를 맺었던 예를 볼 수 있다. 이는 고구려의 중앙집권화가 아직 다져지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 진 일이다. 한편 慕本王대 (48~53) 에 이르면 고구려는 중국의 燕지방까지 공격 하고 있다. 『후한서』의 기록을 통하여 고구려가 연지역의 우북평 • 어 양 • 상곡 • 태원 등을 쳐들어간 사실을 알 수 있다 .OO ) 이 때 요동태수 祭形은 恩信 으로 고구려 장수를 대해 주니 다시 화친하였다고 한다. 당시 고구려의 공격은 중국에 대한 영토 확장은 아니었을 것으로 여겨 진다. 그러나 고구려가 요동군 등 중국의 군현들과 국경을 맞댈 정도 로 된 것은 분명하다. 하나의 왕국으로 성장한 고구려는 이러한 공격 을 통하여 그 존재를 과시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현토군을 축출하고 성장하기 시작한 고구려는 주변 소국들을 복속하 여 나갔다. 그 결과 국력을 신장시킨 고구려는 현토군 • 낙랑군과의 관 계를 넘어서서 후한 중앙정부에 사신을 파견하게 되었다. 동시에 고구 려는 현토군과 낙랑군에 대한 군사적인 공격을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우북평 • 어양 • 상곡 • 태원 등지까지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보 면 고구려의 정치적 성장에 맞추어 대중국 관계의 대상도 차원이 높아 지고 공격의 범위도 넓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89) 그러한 예는 『삼국지』 한전에 나오는 廉斯鎭나, 『후 한서』 한전에 나오는 蘇馬設 롤통하여 알수 있다 . 90) 『後淡函 85, 東夷列傳 75, 句議傳
(4) 태조대왕대의 대중국 관계의 전개 고구려의 太祖大 王 (53~146? )은 國祖王이라고도 하는데 91 ) 그 재위 기간이 94 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태조대왕이 그와 같이 오랜 기간 재 위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이 간다. 그렇더라도 여기서는 거의 1 세기 나 되는 태조대왕의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였는지 보기로 한다. 태조대왕대의 고구려는 영토가 확장되었다. 그것은 다음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3 년, 4 년조의 기록에 따 르면 고구려에서 요서 10 성을 쌓아 漢兵을 방비하였다고 하는데 그 위 치가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요동지역의 서쪽에 10 개의 성을 쌓아 한병의 침입을 막았다고 보여지기에 고구려의 서쪽 국경은 遼東 과 맞닿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고구려의 동쪽 경계는 태 조대왕 4 년에 이르러 동옥저를 복속함으로 인하여 동해안까지 이르고 있다. 한편 남쪽은 살수를 경계로 하고 있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북쪽에는 부여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로써 보면 태조 대왕대의 고구려 국토는 대단히 커진 것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이와 같이 확대된 영토와 그 주민들을 통치함으로써 고구려는 국력을 신장 시켰을 뿐 아니라 漢族과 투쟁의 후방기지도 마련하게 되었다 .92) 태조대왕대 고구려의 대중국 관계는 그 상대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누 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중국 본국이고 다른 하나는 幽州·遼東·玄英 등의 州郡지역이다. 고구려는 태조대왕대에 이르러 중국 중앙정부에 사신을 파견하고 있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그와 같은 사신 파견은 태 조 57 년 (109), 59 년 (111), 72 년 (124) 의 3 차례 있었는데 모두 2 세기 초 에 해당한다 .93) 당시 고구려는 영토가 크게 늘어나 있었고 국력이 크게
91) 『三國史記』 15, 高句麗本紀 3, 太祖大王 즉위조 . 92) 李基白, 앞의 책, 1974, p. 37.
신장되어 있었다. 그 결과 고구려는 중국 군현과 상대할 뿐 아니라 중 국 중앙정부의 황제에게도 사신을 파견하게 되었다. 당시 고구려와 중 국 중앙정부와의 사이에는 군사적인 투쟁은 없었다. 그것은 중국의 지 배자가 직접 군사를 보내거나 이끌고 고구려와 전쟁을 한 예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 중앙정부와 고구려의 관계를 보면, 安帝의 대착 식에 사신을 파견하는 것 외에 貢 獻(朝 貢 )을 하고 있다. 조공은 전통적 인 대중국 관계를 뜻한다. 비록 빈번한 것은 아니나 태조대왕대인 2 세 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와 중국 사이에 조공관계가 맺어지고 있 는 것이 주목된다. 여기서는 그와 같은 조공관계에 의한 고구려의 대 중국 관계의 실상을 자세히 다루지는 않기로 한다 .!)l) 그 보다는 태조대왕 59 년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어 방물을 공헌하고 〈求屬玄英〉 하였다는 『삼국사기』 태조대왕 59 년조 기록의 의미를 분 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求 屬 관계는 고구려의 대중국 관계에 있어 중요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당시 중국과 우리 나라의 여러 정치세 력 사이에는 이와 같은 〈 屬〉 관계가 일반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 와 관련하여 다음 기록을 보기로 한다. J ~帝와 安帝 연간에 고구려왕 宮이 자주 요동을 노략질하여 다시 玄 英에 속( 屬 玄英)하였다. … 靈 帝 建 寧 2 년에 玄 英太守 耿 臨 이 토벌하여 수 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으니 伯固가 항복하여 요동에 屬 하였다. 嘉平 중에 백고가 현토에 乞 屬 하였다.( 『三 國志』 30, 魏 書 30, 東夷 傳 高 句 ~ ) 위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 屬玄英〉 하였다가 요동에 속하고 다 시 현토에 걸속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의 기록만으로는 알 수
93) 『三國史記 』 15, 高 句麗本 紀 3. 94) 全海宗은 이를 종속적인 관계라고 하기보다 평화적인 대등관계로 보고 있다( 『韓 中關係史硏究』, 1'57 0 , p. 37).
없으나 고구려는 원래 현토군과 관계를 맺었음에 틀림없다 . 그에 비하여 부여는 존래 현토에 속하였는데 후일 後漢 戱帝代에 요 동군에 求屬한 것을 볼 수 있다 . 95) 그에 비하여 韓은 낙랑에 속한 것을 알 수 있다 우 한편 예는 漢 말에 중국 군현이 아닌 고구려에 다시 속 하였댜ffl ) 그리고 抱 婁 는 漢 이래 부여에 臣展하였는데 부여에서는 租 賊를 무겁게 징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98) 東沃沮는 원래 위만의 조선에 속하였으나 위만조선이 망하고 옥저성에는 현토군이 설치되었다고 하 며, 다시 낙랑에 還屬 하였고 마침내 고구려에 신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구려에 신속하게 된 동옥저는 조부를 바쳐야만 한 것으로 나 오고 있다 . 99 ) 이러한 자료를 근거로 보면 당시 여러 정치세력 사이의 관계는 〈屬〉 과 〈臣屬〉 관계로 나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屬 관계는 중국 군현과 주변의 고구려 • 부여 • 한 등 여러 세력이 맺었던 것이 된다. 그리고 부여에 대하여 읍루가, 고구려에 대하여는 동옥저가 신속한 것 을 볼 수 있다 . 그 중 신속 관계야말로 조부를 징수할 수 있던 속국체 제임을 알 수 있다. 여하튼 고구려 • 부여는 명실상부하게 조부를 부과 하고 병력을 동원할 수 있던 屬 國을 거느린 나라들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고구려 • 부여는 다시 중국의 內郡 또는 邊郡에 속하고 있어 주목된댜 그와 같은 관계의 성격은 어떠한 것일까. 우선 지역적 으로 가까운 세력과 屬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부여 는 현토군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렇기에 원래 고구려 • 부여는 현 토군에 속하였다. 그리고 韓은 낙랑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낙랑에 속
95) 『三國 志 』 30, 魏 합 30, 束 夷 傳 30, 夫餘 96) 『三國 志 』 30, 魏 習 30, 東夷 傳 30, 韓 g-/) Ii'三國志』 30, 魏 왕 30, 東夷 傳 30, 減 98) 『三 國志 』 30, 魏 書 30, 東夷傳 30, 抱婁 99) 『三國志』 30, 魏 꿉 30, 東夷 傳 30, 東 沃沮.
하였다. 그런데 고구려 • 부여가 속하였던 중국의 郡은 그 후 사정에 따라 바 뀌고 있다 . 고구려는 요동군에 속하기도 하였으나 다시 현토군에 속하 게 되었다. 이 때 요동에 降屬하거나 현토에 乞屬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부여에도 나타나 원래 현토에 속했다가 요동에 求屬하 였다. 이로써 보면 고구려 • 부여의 求屈 관계는 중국 측의 요구에 의 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 • 부여 측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대방군 설치 후 진한 8 국을 낙랑에 분할하는 문제로 백제와 낙랑 • 대방 간에 전쟁을 벌인 사실을 통하여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전쟁은 韓의 의견을 무시하는 중국 군현에서 임의 로 진한 소국의 대중국 관계 상대를 바꾸었기 때문예 일어났다고 보여 진다. 물론 고구려 • 부여가 乞屬 • 求屬한 것을 보면 중국 측의 동의를 얻어야 하였을 것이나 기본적으로 그것을 요청한 것은 고구려 • 부여의 필요에 의한 것이라 믿어진다. 그러면 당시 고구려 • 부여 • 한 등이 중국의 현토 • 요동 • 낙랑 등의 군에 속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 우선, 고구려 • 부여 등이 중국 의 군에 속하였으나 조부를 바치거나 병력을 동원당하지는 않았음을 주목할 수 있다 .100) 이는 중국 측이 이들 정치세력들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를 하지 못하였음을 뜻한다. 그리고 고구려 • 부여 • 한 등은 각기 중국의 속국이 아닌 독립국으로서 중국 및 그 군현과 관계를 맺었음을 말해 준다뻗 반면 한이 낙랑군에 속하고 四時朝謀하였던 것과 같이 이들 고구려 • 부여에서는 그들이 속하게 된 郡에 역시 조알을 하였다 고 여겨진다. 이 경우 한 가지 다른 것은 韓지역의 세력은 2 세기까지 중국 본국에 직접 조공(조알)한 예가 없는 데 비하여 고구려 • 부여는
100) 부여가 군대를 동원하여 중국의 고구려 공격을 도운 일은 있으나 이는 부여의 필요에 의한 일이지 정규적인 租賊나 병력 동원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101) 全海宗, 앞의 책, 1970, p. 30.
기원후 1 세기 전반경부터 중국에 직접 사신을 보내어 貢戱 • 朝貢하였 다. 결국 고구려 • 부여는 중국과 접촉의 통로가 다양하였던 데 비하여 韓은 낙랑(후에 대방군이 추가됨)에 국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 기서 고구려 • 부여 • 한과 중국 郡 사이의 관계는 기본적으로는 독립 정치집단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대외관계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중국 군현의 정치적 중요성이 변함에 따라 토착세력은 그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상대하는 郡을 바꾸게 되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여하튼 고구려가 현토군·낙랑군에 속하였다거나 乞展·求屬하였다 는 것은 고구려와 국경을 접한 중국 변경지역의 郡과 조공(조알)을 매 개로 하는 의교관계가 유지된 것을 뜻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러한 조공관계는 무엇을 의미할까. 필자는 이미 신라의 대낙랑 관계에 대하 여 언급하며 이와 관련된 문제를 잠시 다룬 바 있다 .102 ) 그와 같은 관 계는 고구려에도 일단 적용되기는 한다고 믿어진다. 이 경우 조공관계 는 선진문물을 가졌던 중국 측에서 권위를 나타내는 물건들을 고구려 에 보내주고 고구려에서는 여러 가지 원자재에 해당하는 물건을 보내 는 형식을 취한 일종의 원거리교역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문제는 고구 려 측이나 중국 측에서 이러한 조공을 통한 교역의 의미를 시대적으로 어떻게 달리 파악하였는가에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에 의하면 고국려 는 이미 일찍부터 정치적인 발전을 하였다. 그 결과 현토군의 치소를 통구지역에서 몰아 낸 이후부터는 대체로 책구루 체제에 의해 교역관 계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고구려가 현토 또는 요동에 속하 기를 원한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고구려가 일찍이 중국문물을 받아들일 필요가 줄어들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종래 중국의 군에서 가져오던 朝服 • 衣帳을 고구려인들이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기 에 문제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기록을 볼 수 있다.
102) 李鍾旭, 앞의 책, 1982, pp. 95~115.
K 그 公會의 의복은 모두 비단에 수를 놓았고 금은으로 장식을 한다. 大加와 主簿는 머리에 鎖을 쓰는데 鎖과 같으나 뒤가 없다 그 小加는 절 풍을 쓰는데 모양이 고깔과 같댜(『 三 國志』 30, 魏 書 30, 東夷傳 30, 高句 麗傳) 위의 기록에 나오는 고구려인의 衣帳 사용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대체로 2 • 3 세기의 상황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 이 때 고구려 인들의 의책은 중국인들의 그것과 같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는 대체 로 2 세기 이후 고구려인들 사이에 종래 중국의 의책에 대한 관심이 사 라진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것은 늦어도 太祖大王 이후 2 세기에 고구 려의 독자적인 정치조직이 정비되는 것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고 헤아 려진다. 여기서 태조대왕의 고구려와 중국 간의 관계는 권위를 나타내 는 위세품과 원자재를 주고받는 단계는 벗어났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태조대왕 이후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여기서 상징적인 면에서 조공을 바치는 관계 외에 실제적인 면에서 고 구려와 중국 사이의 전쟁에 대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다. 태조대왕대에 있었던 고구려와 중국 사이의 전쟁관계 기록을 토대로 그 성격에 대하 여 정리하기로 한다. 『삼국사기』나 『삼국지』 • 『후한서』에 나오는 기록 들을 보면, 고구려 측이 공격을 한 예 103) 와 중국 측에서 고구려에 쳐들 어온 것 l 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와 같은 전쟁시 고구려가 공격하 였던 대상은 요동군과 현토군과 그 속현과 낙랑의 華麗城 둥이었다. 그러면 고구려의 중국 군현 침공을 도운 세력으로는 祿額(태조 66 년, 69 년, 70 년의 공격시)과 鮮卑(태조 69 년) 및 마한(태조 69 년, 70 년) 등
103) 太祖大王 53 년, 66 년, 69 년, 70 년, 94 년에 공격한 예가 있다 (r 三國史記』 15, 高 句麗本紀 3, 太祖大王조). 그리고 『三國志』 및 『後漢害』의 고구려전에도 그러한 사실들이 나오고 있다. 104) 『三國史記』 15, 高句麗本紀 3, 太祖大王 69 년조 참조.
이 있었다. 이로써 보면 고구려는 중국을 공격하는 데 당시 중국에 맞 서는 다론 정치세력들 중 연결이 가능하였던 祿 청 百 • 鮮 卑 • 馬 韓 등을 동원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 예맥은 예군 남려에 의해 관할되던 지 역과 어떤 관련이 있었는지 확실치 않댜 단지 澈(稷)는 고구려에 속하 여 있었다고는 여겨진다 . 1 0;; ) 그 결과 고구려는 예의 병력을 동원하여 중국 군현을 공격할 수 있었댜 한편 고구려는 선비를 예속시킨 것은 아니었으나 중국과 국경을 접한 두 세력 사이에 공통된 이해 때문에 공동작전을 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고구려의 중국 군현 공격을 도운 마한은 어떠한 세력이었는지 궁금하댜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 15, 태조대왕 70 년조의 협주에 〈 마한은 온조왕 27 년에 멸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대를 보 낸 것은 대개 멸하였다가 다시 부흥한 것이다 〉 라는 기록이 있어 주목 된다 .1 06) 마한은 삼한의 하나로 백제가 성장해 감에 따라 백제의 남쪽 지역에서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믿어지는 세력이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마한은 어쩌면 백제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하 나 단정할 수 없다. 여하튼 고구려는 중국 군현을 공격하는 데 예맥 • 마한 동의 세력과 공동작전을 펴고 있어 주목된다. 그런데 고구려를 침입하였던 중국세력은 유주 • 요동군 • 현토군 동의 세력이었다 물론 이들 세력은 태조대왕 69 년에 침입한 것과 같이 공 동작전을 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공격한 대상은 주로 요동 군 • 현토군이었기에 이들 군과 그 속현이 개별적으로 고구려의 군대를 맞아 싸웠다. 그런데 태조대왕 69 년 고구려가 현토성을 공격할 때 부 여왕은 그의 아들인 尉仇台를 보내어 현토를 돕고 있다 .1an 그리고 이
105) 『 三國 志 』 30, 澈 傳 참조 그러면서도 고구려는 예에 대하여 중앙집권적인 통치 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 그것은 동옥저에 대한 식민지 통치와 같은 성 격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 106) 『 三國 史 記』 15, 高 句麗 本 紀 3, 太祖大王 70 년조 .
듬해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하니 다시 부여가 요동군을 도와 준 바 있 다 .I OOl 이로써 보면 중국 측은 유주를 중심으로 요동 • 현토가 주로 고 구려에 맞서 싸우고, 부여가 중국의 요동군 • 현토군을 도와 준 것이 된다. 여기서 태조대왕 당시 유주 • 요동군 • 현토군 그리고 부여의 동 맹세력과, 고구려 • 예맥 • 선비 • (마한)의 동맹세력이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후자의 경우 고구려가 주동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당시의 전쟁은 고구려 측이 패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승리를 하 기도 하였다 . 그러한 예로 요동태수 蔡調울 전사시키거나 ,109 ) 대방령을 살해하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포로로 한 일도 있었다 .110 ) 그런데 당시의 전쟁은 어느 경우도 영토 확장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 그 것은 양 세력의 뿌리가 깊어 일시적으로 군대가 진격할 수는 있었으나 그 지역에 머물러 영토를 확장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여러 차례 요동군 • 현토 군을 공격하면서 〈求屬玄英〉 하였던 사실이다 . IIll 고구려는 獨 • 安 年 間 (106~125) 에 요동을 쳐들어갈 때는 현토에 속하기를 원하였고, 169 년 현토 태수의 공격을 받았을 때는 요동에 降屬하였으며 그 후 嘉平 年間 (172~189) 에 다시 현토에 결속한 사실이 주목된다 .11 2) 여기서 〈屬〉 의 의미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기 록을 검토하기로 한다. 『後漢書』 句園傳의 기록에는 고구려가 현토에 降하였고 漢生口를 돌려주었을 때 安帝가 遂成에게 내렸던 紹가 있 다 .113) 그 안에는 당시 중국의 대고구려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사항을
107) 『三國史記』 15, 高句麗本紀 3, 태조대왕 69 년. 108) 『三國史記』 15, 高句麗本紀 3, 태조대왕 70 년. 109) 『三國史記』 15, 高句麗本紀 3, 태조대왕 69 년 夏 4 월조. 110) 『三國史記』 15, 高句麗本紀 3, 태조대왕 94 년 . 111) 『後漢 書』 8.5, 東夷傳 75, 高句麗傳 112) 『三國志』 30, 魏書 30, 東夷傳 30, 高句麗傳 113) 『後漢 害 』 8.5, 東夷傳 75, 句關傳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나온댜 첫째, 대고구려 관계의 최일선에는 현 토군 · 요동군이 나타나지만 그 배후에는 유주, 나아가 중국 황제가 관 계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댜 둘째, 중국 측이 고구려에 바라는 것은 向化之心과 중국 군현과의 전투 중지였다. 이는 바꾸어 말하여 중국을 받드는 마음을 가지고 중국 군현을 침범치 말라는 것이 된다. 이것은 대체로 조공관계를 통하여 얻고자 하는 명목적인 목표가 아니었나 생 각된다. 그러면서도 실질적으로 중국은 그들의 군현을 통하여 고구려지역으 로부터 자기들이 필요로 하던 원자재를 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11 4) 그 런데 고구려는 일찍부터 그와 같은 교역관계에는 관심이 사라진 것 같 댜 오히려 사료 F 의 기록은 현토군 설치 직후의 일로 태조대왕대의 사실은 아니었다고 헤아려진다. 물론 태조대왕대에도 고구려인들이 중 국문물에 대한 관심이 없지는 않았겠으나 중국과의 교역을 통하여 고 구려의 정치제도를 발전시키는 일은 하지 않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그 결과 고구려와 중국 사이의 관계는 비록 고구려가 중국에 조공을 하는 것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고구려는 중국에 당당히 맞서게 된 것을 볼 수있댜 (5) 고구려의 정치적 성장과 그 의의 앞에서 고구려의 국가 형성 • 발전과 그에 따른 대중국 관계의 변화 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고구려가 정치적 성장을 하게 됨에 따 라 대중국 관계의 양상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지금까지 정 리한 바를 요약 • 제시함으로써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전국시대 중국의 동북지역에는 예맥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같은 예
114) 그러한 예는 낙랑과 삼한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李 鍾 旭, 앞의 책, 1982, pp. 95~115)
맥은 고구려의 전신이 되는 세력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기원전 128 년 예의 군장이었던 南閣는 요동군에 나아가 내속을 청한 바 있다. 당시 예군 남려가 거느렸다고 하는 28 만의 口는 여러 소국으로 이루어 진 연맹체의 주민을 합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 무제는 예군 남려가 관 할하던 지역에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창해군은 경영되지 못하 고 설치 몇 년 만에 페지되었다. 그리고 漢온 창해군을 통하여 예를 정치적으로 지배할 수도 없었다. 창해군을 설치한 것은 위만조선을 통 하지 않고 직접 예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였고 그러한 관계를 통하여 교역상의 이익을 얻으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는 漢의 外臣으로 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세력을 키운 위만조선의 정치적 간섭과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漢세력과 직접 교역을 하기 위하여 내속을 청하였다고 여겨진다. 여하튼 창해군의 경영이 불가능했던 요동군은 예맥지역에 대한 통제도 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후 한 무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조선 • 예맥 등의 지역에 대한 진 출을 꾀하였다. 이에 예맥지역에는 현토군을 설치하였다(기원전 107 년). 현토군의 치소였던 고구려현은 후일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통구지 역에 일단 자리잡았다. 그러나 기원전 75 년에 이르러 청 B 세력의 침략을 받아 현토군의 치소는 만주로 옮기게 되었다. 현토군이 통구지역에 있 울 때 고구려세력이 성장하여 현토군을 축출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고구려의 건국시기를 기원전 2 세기 말, 1 세기 초까지 올려볼 수 있지 않나 한다. 앞으로 검토해 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하나의 소국 으로서의 고구려의 성장은 그보다 이전 예맥으로 알려진 시기에 이루 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여하튼 현토군 설치 이후 고구려인들은 중국의 군현을 통하여 중국 과 교역을 하였다. 당시의 교역은 권위를 나타내 주는 위세품을 중국 으로부터 수입하고 원자재에 해당하는 물건을 수출하는 것이었다. 이 와 같은 교역을 통하여 고구려는 정치적 • 군사적 성장을 촉진할 수
있었고 그 결과 현토군을 축출하고 점차 국력을 강화시켜 나가게 되 었댜 초기국가로서 한 소국이었던 고구려는 현토군을 축출하는 과정에 주 변의 여러 나라들과 연맹관계를 맺고 그 맹주국으로 자리잡아 나가게 되었다 . 그 결과 고구려의 통치조직이 새로이 편제되었고 대중국 관계 도 달라지게 되었댜 현토군 축출 후 고구려의 대중국 관계는 책구루 를 통한 교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 그것은 정치적 • 군사적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의 교역을 뜻하고 고구려는 점차 중국문물에 대한 관 심이 줄어들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 그리고 기원후 1 세기 초에는 책구 루 체제마저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때에 이르러 고구려가 현토군 을 공격하게 되었다. 이에 요동군에서도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고구 려는 이 를 잘 막아 내고 낙랑까지도 공격하였다. 그런데 大武神王은 낙랑을 공격하면서도 중국의 광무제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하였 다. 한편 慕本 王대에 이르러 고구려는 燕지방까지 공격한 바 있다 . 이 무렵 고구려의 영토는 크게 확장되어 중국 군현과 경계를 접하게 되었 다. 여하튼 이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중국 관계의 상대는 중국 본국으 로 된 것을 알 수 있다 . 한편 태조대왕의 대중국 관계에 대하여 볼 수 있다 . 태조대왕 초에 이미 고구려는 요서의 10 성을 쌓아 漢 兵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동옥저 룰 복속하여 동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부여와 경계를 맞대고 있 었다. 2 세기 초에는 중국 본국에 사신을 파견하고 현토에 속하기를 청 한 바 있다. 당시 고구려 • 부여는 중국의 내군 또는 변군에 속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대체로 고구려의 필요에 의하여 그 대상 郡이 바뀌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같은 〈속〉 관계에 의하여 고구려 둥은 중국 군현에 조부를 바치거나 병력을 징발당하지는 않았 다. 이는 중국이 실질적으로 고구려 등의 세력을 통치하지 못한 것을 뜻한다. 그런데 고구려 • 부여는 郡에 조알하였고 중국 본국에도 조헌
을 하였댜 한편 고구려와 중국 군현 간에는 전쟁이 계속되었다 . 이 같 은 전쟁에 고구려는 예맥 • 선비 • (마한) 등의 세력을 동원하거나 연합 작전을 폈댜 그리고 중국 군현은 부여와 동맹을 맺었댜 당시 중국은 고구려가 조공을 하여 向化之心을 보여주고 중국의 변경을 괴롭히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고구려는 중국에 대하여 때로 조공을 하고 군 현에 속하기를 원하기도 하였으나 어디까지나 하나의 독립국으로서 중 국에 맞서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앞에서 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를 몇 단계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본 고의 작업은 중국측 관점이 아니라 고구려 측의 관점에서 그 관계를 해명한 것이다.
제 5 장 한국 초기국가 형성의 제 문제 지금까지 한국 초기국가 형성 • 발전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건국신화 와 설화에 대하여 알아보았고, 초기국가 형성 • 발전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았으며, 초기국가 형성기의 대의관계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이 장에서는 초기국가의 형성 • 발전 과정에 나타나는 몇 가지 문제를 정 리한댜 첫째 국가형성기의 정치발전단계별 정치형태의 특성에 대해 해명하기로 한다. 둘째, 초기국가 형성 • 발전 과정에 나타나는 정치지 배세력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셋째, 한국 초기국가 형성 • 발전의 주요 요인들이 무엇이었는지 보기로 한다. 1 한국 초기국가 형성기의 정치형태 필자는 지금까지 한국의 초기국가들이 거쳤던 정치발전단계에 대하 여 정리하였다.” 그 결과 한국의 초기국가들은 촌락(추장)사회 -소국-
1) 李鍾旭, 『新羅國家形成史硏究』, 1982, pp. 253~262. 춰ti!!!, 『韓國 初期國家의 形成 • 發展段階」, 《韓國史硏究》 67, 1989, pp. 1 ~26.
소국연맹 ? 소국병합 단계를 거치며 정치적인 성장을 한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 이제 그와 같은 작업 결과를 토대로 하여 각 정치발전단계별 정치형태가 어떠하였나 알아보기로 한다. 한편 한국사상 성장하였던 많은 정치체들이 동일한 발전 과정을 거 친 것은 아니었다. 우선 몇 개의 촌락사회가 통합되어 소국이 형성되 었던 사실을 보면, 많은 수의 촌락사회는 소국이 형성되면서 사라지고 대신 소국의 지방통치조직으로 편제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소국연 맹 단계에서 소국들은 독립을 유지한 것은 분명하나 이제 여러 소국들 이 연맹 단계에 들어서 소국연맹이라는 정치체의 수는 훨씬 줄어들게 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 그리고 소국병합 단계의 정치체의 수는 더욱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 여기서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과정은 단위정 치체의 수적 감소와 그 영역, 인구의 증가가 이루어진 것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한국사상 성장하였던 정치체들 중 고조선은 이른 시기에 촌락사회 단계를 거쳐 소국, 소국연맹, 소국병합 단계를 거친 것이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통합된 정치체는 정치적 독립을 상실하여 나가게 되었다. 만 주 일대에서는 그보다 늦게 부여가 정치적인 성장을 하였고, 압록강 중류지역에서는 고구려가 정치적인 성장을 하였다. 이어 백제, 신라, 가야의 정치적인 성장이 이루어졌는데 그 시기는 고조선보다 훨씬 후 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치발전단계를 설정하였지만 각 정치체들 이 일정한 발전 과정을 거친 시기에는 차이가 있었던 것을 생각할 필 요가있다. 또한 각 정치체가 앞에 언급한 정치발전단계를 거쳤다고 하더라도 그 정치형태가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앞에서 구분한 정치 발전단계는 보다 포괄적인 구분을 한 것으로 여러 정치체의 정치적인 성장에 대한 이해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이제 각 정치발전 단계별 특성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이를 위하여 일반적인 특성과
각 단계를 거치는 여러 나라들의 정치형태의 특성에 대하여 알아보기 로한다. (1) 촌락(추장)사회 단계의 정치형태 소국형성 이전에 존재하였던 한국의 촌락(추장)사회는 대체로 직경 10km 내외의 촌을 단위로 하는 정치체였으며, 그 안에는 촌장이라고 하는 정치적인 지배자가 있어 촌을 다스렸다고 생각하여 보았다 . 21 그 리고 그러한 촌을 단위로 하는 촌락사회는 고고학적으로 볼 때 지석묘 와 석관묘를 축조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 3) 여기서 한국의 촌락(추장)사 회의 정치형태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한국 촌락사회의 모습을 알아보기 위하여 사로 6 촌을 주목하기 로 한다 . 한국의 촌락사회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으나 사로 6 촌에 대한 자료는 신라의 건국신화와 지석묘에 대한 자 료가 어느 정도 있어 촌락사회를 이해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 여기서 사로 6 촌에 대한 자료를 토대로 표를 작성하여 보았다. 사로 6 촌 지역은 지리적인 조건에 의하여 구분되었다. 촌락사회시대 에 각 촌은 독립된 정치체로 존재하였다 . 사로지역의 각 촌은 그 영역 이 동일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체로 직경 10km 정도의 공간으로 이루 어져 있었다. 사로 6 촌의 각 촌에는 각기 500 호 2500 명 정도의 인구가 있었다고 생각한 바 있다 . 4 ) 그와 같은 촌의 영역은 표 4 의 (2) 에 해당 한다. 그런데 사로지역의 각 촌에는 지금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6~ 9 개의 지석묘군이 축조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5) 그러한 지석묘군은
2) 李鍾 旭, 앞의 책, 1982, pp. 初 ~28. 3) 위의 책, p. 47. 4) 위의 책, p. 37. 5) 위의 책, pp. 28~29.
〈 표 4> 촌락사회의 정치형태
3 단계 ;.'.--:, ·. ·.-· .'-.,... . . -. ,<-.. -..3 .-. .)- ., -^ .-•-. .-. . .· .· ..·. .·. ·.. _-..- . ` -\ - ·.·: ;
[보기] 1. 정치세력 <1> 마을의 장 <2> 촌 장 〈 추장 〉 <3> 촌 락연맹장 2. 영역 (1)마 을 (2) 촌 (3) 촌락연맹
일정한 마울 주변에 축조되었다고 여겨진다. 이에 지석묘의 분포를 통 하여 하나의 촌 안에 여러 개의 마을들이 있었던 사실을 생각할 수 있 다. 표 4 의 (1) 은 마을의 영역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개별 촌락에는 몇 개의 마울들이 동시에 존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러한 마을 들 사이에는 현격한 정치적인 위계는 찾기 어려운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더라도 촌락의 한 마을에는 촌장이 살았음에 틀림없다. 확인하기 는 어려우나 그러한 마을에는 보다 큰 집이 있었고 집의 수도 많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앞으로 고고학적인 연구를 통하여 밝혀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각 마울에는 역시 마을의 장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촌락사회의 촌장도 본질적으로는 다른 마을의 장과 유사한 정치적인 존재였으나 그는 촌락 전체의 통치를 맡았기에 정치적으로는 다른 마 을의 장들과는 격을 달리하였다고 생각된다.
다음은 표 4 를 통하여 마을 주민들에 대한 통치 단계를 생각할 수 있다. 우선 마을 주민들을 직접 다스린 세력은 각 마을의 장이었던 것 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주민을 다스리던 <1> 차적인 단계의 지배세력 들이었다. 그리고 촌락 전체를 다스리던 촌장은 <2 > 차적인 단계의 정 치지배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와 같은 촌락 통치구조를 통 하여 정책결정 과정에 대한 문제도 정리할 수 있다. 이 역시 2 개 단계 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마을의 문제를 결정하는 1 단계와 촌 전체의 문 제를 결정하는 2 단계의 의사결정 기구를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촌락사 회의 통치구역이 마을과 촌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 것과 일치한다 . 촌 락사회의 촌 전체를 다스리던 지배자는 촌의 성원들로 이루어진 씨족 의 장이었으며 촌장 또는 추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마을의 가 계집단을 이끌던 세력가들은 가계장 또는 마을의 장 정도로 부를 수 있다. 한편 사로국이 형성되기 직전 사로 6 촌은 하나의 통합된 정치체를 형성하지 못하였던 것은 분명하나, 6 촌장들 사이에는 함께 모여 6 촌 전체에 대한 문제를 의논하는 일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소 국형성 이전에 촌락사회에 어떠한 형태로든 연맹이 형성되었던 것을 보여준다. 각 촌은 정치적으로 독립을 유지한 것이 분명하지만 촌장 사이에 연맹관계가 이루어졌고 그 연맹을 이끄는 중심적인 존재가 성 장하였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사로 6 촌의 경우 알천 양산촌의 소벌 공이 연맹체를 이끌어 나가는 존재였고广 가락 9 촌의 경우 我刀干이 그러한 존재였다고 생각된다 .7) 그와 같은 촌락연맹을 이끌던 존재는 표 4 의 <3> 에 위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소벌공이나 아 도간은 실제로 각자의 촌락을 다스리던 촌장이었다. 여기서 촌락사회 말기에 촌락연맹이 형성되었다고는 하지만 촌락 연맹장은 다른 촌락에
6) 『 三國史記 』 1, 新羅本紀 1, 始祖赫居世 축위조 ` 7) 『三國遺 事』 2, 紀異 2, 篤洛國記
대한 정치적인 통제는 실질적으로 할 수 없었다고 여겨진다. 그들은 촌락 전체와 관련된 문제를 협의하여 이끌어 나가던 존재들이었다고 여겨진다. 한국 촌락사회의 마을들은 도시발전단계에 비추어 보면 마을들 사이 의 구별은 거의 없지 않았나 여겨진다. 단지 촌장이 살던 마을은 촌락 의 중심이 되는 위치에 있었다고 여겨지며, 그 규모도 다른 마을들에 비하여 다소 컸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을 (v ill a g e) 의 단계 를 넘어 읍락(t own) 의 단계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이제 한국 촌락(추장)사회의 정치형태에 대한 이해를 얻기 위하여 촌장에 대하여 주목하기로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왕 조의 건국신화를 보면 前漢 地節 원년(기원전 69) 에 사로의 6 촌장들이 각기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 안상에 모여 덕이 있는 사람을 군주로 모 시고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기로 의논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이 사료만 가지고 생각하면 사로국이 형성되기 직전 사로 6 촌장들은 하나의 완만한 협의체인 6 촌장 회의체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댜 그런데 그러한 회의에서 군주를 모셔 나라를 세워야 하겠다는 것은 다름아니라 사로국의 형성 이전에 사로 6 촌을 통합하여 통치할 단일한 정치적인 지배자와 정치조직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 이는 6 촌 장들이 비록 완만한 회의체 또는 연맹체를 구성하고 있기는 하였으나 각 촌장들은 촌을 하나씩 다스리던 정치세력이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당시의 촌장들은 각기 독자적인 정치조직과 통치영역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같이 독립된 정치적 지배자였던 촌장들이 가지는 정치적인 성격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사로 6 촌장을 예로 들면 그들은 각기 일정한 혈연 집단인 씨족 안에서 혈연적인 서열이 높은 자들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결과 촌장의 정치적인 활동도 혈연적 원리에 기초를 두었다고 헤아려
진다 . 따라서 촌장들이 가지고 있던 개인적인 능력만으로는 촌락민들 을 마음대로 통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촌장은 씨족계보상 높은 서열 에 의하여 그 지위를 차지하였다고 생각되기에 그 씨족집단에 대한 지 배도 혈연적인 원리에 따라서 행하였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 한 마디 로 한국의 추장사회는 행정적인 방법보다는 혈연적인 원리에 의하여 다스려졌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촌장들은 일정한 씨족집단의 세습적이고 우월적인 지위에 의하여 그 자리에 오른 존재들로 그들을 중심으로 상급 지배세력 집단이 형성되 었고, 나머지 촌락민들은 일반민의 계급으로 되었다고 여겨진다. 여기 서 촌장은 태어날 때부터 지배계급으로 되었으며 일종의 신성함이 함 께한 것은 아니었나 생각된다. 촌장들은 정치적인 지도자일 뿐 아니라 제사장의 임무도 지닌 것으로 믿어진다. 촌장들은 수천 명에 이르는 촌락민들을 다스려 나갔다 . 여하튼 촌락사회 특권계급의 존재는 소아 매장 시설의 존재로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지석묘 중에는 성인을 매 장할 수 없는 조그만 것이 있다. 또 신창리의 옹관묘는 유아매장 시설 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어 8) 위와 같이 생각하여 보았다 . 여하튼 촌락사회의 두 개의 계급 (rank) 의 구분 기준은 경제적인 것 이 아니고 기본적으로 사회적 • 정치적인 것이었다 . 그러면서도 촌락사 회는 아직 신분이 나눠진 것은 아니라고 믿어진다. 그러한 촌락사회는 혈연에 근거한 사회였으며 촌장의 관대함이 작용하였고, 그에 의한 재 분배가 행하여졌다고 생각된다 . 촌장은 농경의 통제, 전투의 지휘, 교 역의 수행 등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였다. 그리고 촌장은 사회정치적 인 지도자일 뿐 아니라 제사장의 임무도 지녔기 때문에 한국 촌락사회 는 제정일치의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9 ) 그러한 촌락사회는 관직, 관 둥, 관부와 같은 발달된 정치조직은 편성되어 있지 않았으며 대체로
8) 金 元龍 『 新昌里 壅 檜 墓 地 』 , 1964, p. 47. 9) 李鍾 旭 , 앞의 책 , 1982, pp. 46~47.
촌장을 둘러싼 지배세력들로 이루어진 o ffi ce 와 그것을 통한 정치활동 과 권력 행사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 이와 같은 촌락사회는 인류학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c hi e f dom 에 해당한다고 믿어진댜 촌장의 사회정치적인 권력 행사는 해당 촌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런 데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촌장의 권력 행사는 혈연적 원리를 바탕 으로 하여 이루어졌댜 따라서 국가형성 이후의 정치적인 권력자들에 비하여 촌장의 권력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비록 소국이라고는 하지만 사로국의 예만 보더라도 6 촌을 통합한 영역을 통 치하던 정치적인 지배자가 등장하였던 것으로 알 수 있다 . 이는 정치 적인 면에서 촌락사회와 소국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던 것을 뜻한 다. 촌락사회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한 정치조직인 소국 단계였던 것이 분명하다. 한편 촌락사회의 촌장(추장)들은 시조신화를 가지고 씨족집 단을 유지하였으며 씨족장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 헤아려 진다. 그러한 장치를 통하여 촌장들은 그 사회 • 정치적인 권위를 부여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촌락사회는 몇 단계의 발전 과정을 거쳤다고 헤아려진다 . 사 로국을 예로 들어 이 문제를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사로국 형성 직전 에 6 촌장들이 모여 회의를 연 것은 촌락사회의 연맹이 형성된 것을 뜻 한다. 여기서 소국형성 직전의 촌락사회의 연맹이 이루어졌던 것을 생 각할 수 있다. 그러한 촌락연맹은 가락국 형성 이전 가락 9 촌에서도 마찬가지였음에 틀림이 없다. 한편 촌락사회의 연맹은 촌락의 맹주가 동장하여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촌락사회의 맹주가 등장하기 이전의 촌락사회를 또 다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촌락사회의 형성기를 또 다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여기서 한국의 촌락사회 자체는 어쩌면 3 단계 정도의 정치적인 발전 과정을 겪었을 가능성을 일단 생각하여 두기로 한다. 한국의 촌장사회는 후일 소국으로 통합되며 독립된 정치체로서의 생
명은 잃었으나, 그 이후에도 소국의 지방행정구획으로 편제되어 그 명 맥을 유지하였다.J OI 촌락사회의 촌락을 새로이 편제하여 형성된 소국의 지방행정구획인 촌들은 그 후 소국연맹, 소국병합 단계에도 그 정치적 인 위치를 유지하였고 후일 삼국, 통일신라를 거치며 행정촌 정도의 지방행정구획으로 편제 운용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한국사의 지방통치구조의 기층 조직이 촌락사회시대의 촌을 바탕으로 편제된 것 을뜻한다. 한국사에서 chi ef d o m 단계를 찾는다면 촌락(추장)사회를 들 수 있 다. 그런데 한국의 촌락사회는 소국으로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로 사로 6 촌이 통합되어 사로국이 되었고, 가락 9 촌이 통합되어 가락 국이 되었다. 이는 c hi e f dom 에서 S t a t e 로 발전하는 좋은 예가 된다. 따라서 한국의 촌락사회가 소국으로 발전하는 데 대한 본고의 고찰은 chi ef d o m 단계에서 Sta te 단계로 발전하는 정치 발전에 대한 인류학 의 이론 발전에도 기여할 것임에 틀림없다. (2) 소국 단계의 정치형태 한국의 소국들은 일정 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촌락사회 단계의 여러 촌을 통합하여 새로운 단계의 정치체로 발전한 것이다. 사로 6 촌, 가락 9 촌을 통합하여 斯 盧國 과 篤 洛國이 형성된 것은 좋은 예가 된다. 한편 일정 지역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여러 소국들이 형성된 것은 아니었나 짐작이 간다. 그런데 소국들 중에는 이미 다른 소국들이 형성되었고 한 걸음 나아가 소국연맹 단계에 들어서 있던 지역에서 새로이 국가를 형성한 예도 찾아볼 수 있다. 마한이라는 소국연맹이 형성되어 있던 지역에서는 고구려로부터 이주한 온조집단이 십제라는 소국을 형성하 였던 것을 통하여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군 남려가 28 만 구의
10) 『三國志』 弁 辰傳 에는 변진 12 국에 小別邑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인구를 다스리던 예지역에는 적어도 소국연맹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여 겨지는데, 그 지역에는 부여로부터 이주한 주몽집단이 고구려라는 소 국을 형성한 바 있다. 이제 한국사상 성장하였던 소국의 정치형태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 다. 우선 소국 영역의 규모는 얼마나 되었을까. 온조집단이 십제를 건 국할 때 영역은 대체로 사방 백 리 정도였다고 헤아려진다 . II) 그러한 사정은 『 삼국유사 』 72 국조에 조선의 유민들이 나뉘어 70 여 국을 세웠 는데 그 땅이 모두 方百里였다고 하는 기록을 통하여도 알 수 있다 . 1 2) 현재 방백리의 영역이 얼마나 되는 공간인지는 단정하기 어려우나 대 체로 직경 30~40km 는 되었다고 여겨진다 .13 ) 그와 같은 한국의 소국들 은 콜린 렌프류 (Co li n Ren fr ew) 가 말하는 early sta t e module 의 영 역 이 대체로 1500krn2 였다는 결과와 거의 일치하고 있어 주목된다 .14) 따 라서 한국의 초기국가로서 성장하였던 소국들은 우리 나라 역사에만 있었던 나라들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와 같은 한국사상의 소국의 인구는 대체로 만여 명이었다고 여겨진다 . 15) 한국의 건국신화를 보면 거의 모든 초기국가들이 이주민들에 의하여 건국된 것을 알 수 있다. 부여의 동명, 고구려의 주몽, 백제의 온조, 가 락국의 수로, 신라의 혁거세와 탈해 그리고 알지는 모두 이주민 세력 으로 소국을 형성한 세력들이다 . 국가형성세력에 대한 기록이 없는 다 른 소국들의 건국도 이주민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인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주민들에 의하여 한국의 초기국가였던 소국들이 형성
11) 『三國史記』 23, 百濟本紀 1, 百濟始祖溫祚王 23 년. 12) 『三國遺康』 1, 紀異 2, 七十二國조 . 13) 李鍾旭, 앞의 책, 1982, p. 53. 14) Coli n Ren frew and Joh n F. Cherr y ed., Peer Poli ty Inte ra cti on and Socio - Poli tica l Chang e , 1986, p. 2. 15) 金貞培, 『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JI, 1986, p. 335 에는 2 만에서 2 만 5 천 명으 로 보고 있다.
된 것이 일반적인 추세가 아니었나 짐작된다. 여기서 초기국가로서 소국의 정치적인 성격에 대하여 짐작할 수 있 댜 우선 소국들은 과거 촌락사회와는 달리 혈연조직을 국가통치의 원 리로 하는 정치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거 촌락사회는 혈연조직을 기반으로 형성된 사회 • 정치적 조직인 데 반하여 소국은 이주민계 건국세력과 그 밑의 촌락세력 사이에 처음부터 혈연적인 단 절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소국의 국민은 하나의 혈연적인 조직을 구성 할 수 없었다. 이에 소국의 백성들은 혈연집단의 성원인 씨족원 또는 사회 • 정치적 인 의미에서의 부족원이 아니라 國 王 의 臣民이 되었다. 그리고 이주민 집단으로 이루어진 소국의 지배층은 그 밑의 신분을 구성하던 세력들 과 혈연적인 단절을 이루고 있었기에 엄격한 신분적인 간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혈연체계 또는 친족체계가 사회 • 정치 조직으로서 부 적합할 정도로 사회 • 정치 집단의 규모가 확대된 상황에서 소국이 형 성된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소국의 구조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사료를 주목할 수 있다. A (1) 그 풍속은 기강아 적어 國 邑에 비록 主帥가 있어도 읍락에 잡거 하여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 『三 國志 』 魏 書 東 夷傳 韓傳) (2) 변진도 역시 12 국으로 되어 있었다. 또 여러 小別邑이 있어서 각기 거수들이 있었다. 大 者 는 신지라고 이름하고, 그 다음은 險側이 있고, 다 음은 興滅 가 있고, 다음은 殺 溪가 있고, 다음은 邑借가 있다 . ( 『三 國志 』 魏 봄 東 夷 傳 弁辰) 위의 기록을 보면 삼한 소국에는 國邑이 있었고 또한 小別邑이 있었 던 것을 알 수 있다 . 여기서 국옵이 소국의 도옵 또는 정치중심지였던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소별읍은 과거 촌락사회시대의 촌 의 중심지가 소국 단계에 이르러 새로이 편제된 곳으로 보아 틀림없다 고 생각된다. 그런데 사로국의 예를 보면 혁거세집단은 금성에 정착하였고 탈해집 단은 월성에 정착하였으며 알지집단은 계림에 자리잡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지역들을 포함하는 지역이 『삼국지 』 에 나오는 국읍에 해 당한다고 생각된다. 구런데 그러한 지역은 사로국의 정치 • 경제 • 종교 • 행정 • 군사적인 중심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에 일단 그러한 국읍 을 소국의 정치중심구역으로 볼 수 있다 . 16) 사로국을 비롯하여 한국의 초기국가로서 성장하였던 소국의 정치중 심구역에는 성이 축조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한국의 소국들을 성읍국가라고 부를 수 있다 . 17) 그런데 소국의 정치중 심구역 또는 국읍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역에 축조되었던 성은 중국이 나 그리스의 성들과는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 중국 은 • 주의 성 안에는 지배세력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이 함께 살았다. 그러한 사정은 그리스의 소국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비 하여 한국사상 성장하였던 소국들의 성에는 일반 백성들은 살 수 없었 다. 이에 한국의 소국에 축조되었던 성에는 李基 白이 말하고 있는 것 과 같이 정치적 지배자들만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18 ) 이는 소국 단계의 성이 소국의 지배세력들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축조된 것을 뜻한다. 당시 소국 건국세력을 괴롭힐 수 있던 세력은 과거 촌락사회시대의 촌 장들의 후예들이거나 또 다른 이주민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소국의 정치조직 편성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소국을 통치하기
16) 李 鍾 旭 , 앞의 책, 1982, p. 233. 17) 단 필자가 말하는 소국 단계는 성읍국가라고 할 수 있으나 촌락사회 단계는 성 옵국가라고 할 수 없다. 18) 李基白, 『 韓國史新 論』 (新 修 版), 1990, p. 32.
위한 중앙정부 조직과 지방통치조직을 구분하여 정리하기로 한다. 소 국의 중앙정부는 정치중심구역인 국읍에 위치하고 있었다. 소국의 중 앙정부에서 활동하던 세력은 주로 이주민 계통의 건국세력들이었다고 여겨진다 . 그리고 그러한 지배세력들의 정치적인 활동을 위한 정치조 직은 아직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사로국을 예로 들면 사로국 초기에는 금성 안에 축조된 궁실은 왕의 거처인 동시에 정청으 로서의 기능을 하였다고 생각하여 보았다 . 19) 궁실을 정청으로 사용한 나라는 사로국만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당시 정치의 최고 권력자는 이주민 계통의 소국 건국세력과 그 후손들 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한 정치적인 지배자의 명칭은 아직 중국식 칭 호인 왕이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 그러한 예는 사로국의 시조를 거서간 이라고 하였고 남해를 차차웅이라고 하였으며 3 대 유리부터는 이사금 이라는 칭호로 부른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지 』 한전에 는 삼한 소국의 지배자를 신지 • 읍차라고 하였다고 나오고 있어 문제 가 된다. 사로국의 예를 통하여 신지 • 읍차라는 칭호는 사로국에서 사 용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 그러면 신지 • 읍차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 신지를 정치적 지배자의 칭호로 사용한 소국이 삼한 소 국들 중에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백제나 신라는 분명 히 그 지배자롤 신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에 신지로 삼한 소국의 지 배자들을 일반명사화하여 칭한 것은 중국인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여기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한국사상 등장하였던 소국들의 정치 적 지배자를 신지라고 부르는 문제점을 생각할 수 있다. 소국의 지배 자들을 신지라고 부르기보다 『사기 』 조선열전에 衆國의 君長이 있었다 고 나오는 기록을 통하여 군장이라고 일반명사화하여 부르는 것이 어 떨까 한다. 한편 신지는 독립소국의 지배자를 칭하는 것이기보다 3 세 기 후반경 『삼국지』의 기록이 작성될 무렵 백제와 신라에 병합된 소국
19) 李鍾 旭, 앞의 책, 1982, pp. 196~205.
지역의 촌락세력들에게 주어진 명칭으로서, 후일 신라에서는 이를 촌 간 또는 촌주라고 부른 것은 아니었을까 짐작되기도 한다. 소국의 왕위는 건국세력과 그 후손들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소국의 왕들은 유능한 정치지도자들이었으며 건국신화를 통하여 그들의 신분 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 나아가 정치적인 권력도 행사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사실은 소국의 왕들도 일찍부터 시조묘에 대한 제사 를 지낸 것으로 알 수 있다 .20) 각 소국의 건국세력의 가계에서는 왕을 비롯한 소국의 정치세력을 배출하였다. 그들은 시조묘를 유지하고 조 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며 가계의 결속을 다지게 되었다고 헤아려진다. 소국의 왕들은 소국을 통치하였다고는 하지만 촌락민들을 완전히 장 악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소국 최상부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신분질서를 유지하고 의견을 수렴하고 조정 역할을 맡았다고 생각된 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점차 왕의 역할이 제도화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왕들은 방어와 공격을 위한 전쟁을 이끌었고 축성사업과 같은 공공사업을 주관하게 되었다. 한편 소국 정부의 관리들은 소국을 형성하였던 이주민 계통에서 나 온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은 왕족이거나 아니더라도 소국의 건 국세력과 함께 이주한 세력 또는 이주 후 세력을 연합한 집단에서 배 출되었다. 그러한 관리들은 일정한 관직을 차지하였는데 당시에는 아 직 관직들이 제대로 세분화되지는 않았다. 신라의 대보, 백제의 좌보 • 우보 그리고 고구려의 좌보 • 우보 등이 당시 최고의 관직이 되었다 .2 1) 소국 초기에 관직을 가졌던 세력들은 그들의 가계를 유지하며 대를 이 어 관직을 차지하였다고 생각된다.
20) 『三國史記』 1, 新羅本紀 l, 南解次次雄 3 년. 21) 李 r 高句麗初期의 左右前i와 國相」, 『全海宗博士 華甲紀念 史學論鼓』, 1979, pp. 486~497. 李鍾旭, 『百濟의 佐平』, ¢검원學報》 45, 1982, pp. 24~30.
다음은 소국의 지방통치에 대한 문제를 정리하기로 한다. 사로국의 경우 6 촌을 통합하여 형성되었던 것은 이미 언급하였다. 소국형성 후 에도 과거 사로 6 촌의 전통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 우선 사로 6 촌은 사 로국의 지방통치조직으로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사로국시대에 6 촌 을 지방구역으로 편제하며 무엇이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후일 그러한 촌은 신라 왕경의 6 부로 되었다. 이러한 소국의 지방통치조직 은 사로국에만 편성된 것은 아니었다. 가락국의 9 촌은 역시 소국의 지 방통치구역으로 편제되었다고 믿어진다 . 그러한 소국의 지방통치구역 은 『 삼국지』에 나오는 소별읍에 해당한다. 22) 여기서 이야기하는 소별읍 은 하나의 마을을 가리키는 동시에 마을의 지배세력들이 다스리던 영 역을 포함하는 의미도 있다. 그리고 소국의 지방행정구역이었던 소별읍에는 대를 이어 존재한 사 희 • 정치적인 세력집단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 삼국사기 』 신라 본기 婆娑 尼師今 23 년조에 나오는 6 부의 지배세력에 대한 기록을 통하 여 알 수 있댜 23) 파사왕 23 년 신라의 모체가 되었던 사로국의 6 부에는 부주, 이찬 그리고 위가 낮은 자들이 정치세력으로 존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부의 정치세력들은 과거 6 촌장 세력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가계에서 나왔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소국아 형성된 이후에 도 과거 촌락사회의 지배세력들은 촌의 지배세력으로 존속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소국형성 이후에도 촌의 주민들은 어느 정도 혈연집단 울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사정은 후일 사로 6 촌을 모체로 하여 편성되었던 신라 왕경 6 부에 각기 하나씩의 성이 주어졌던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소국의 정치조직 편성 단계와 의사결정 단계에 대하여 알아 보기로 한다. 표 5 를 보면 소국 단계의 정치조직은 3 단계로 편성되었
22) 『三國志』 30, 魏習 東夷傳 弁 辰傳 23) 『 三 國 史 급 8 』 1, 新 羅本紀 1, 婆娑 尼 師 今 23 년.
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소국의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정치조직 이 적어도 3 단계로 편성된 것을 뜻한다. 그 1 단계는 촌락사회 단계의 마을들을 다스리기 위한 조직이고, 2 단계는 과거 촌락사회 단계의 촌 을 다스리기 위한 조직, 3 단계는 소국을 다스리기 위한 조직이다. 소국 은 적어도 2 단계의 지방통치조직을 갖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 단 계는 촌락사회 단계의 마을들이고 2 단계는 촌락사회 단계의 단위정치 체였던 촌락들이 편제된 것이다. 한편 촌락을 통합하여 형성된 소국을 다스리던 소국 정부는 3 단계에 위치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을의 장, 촌락의 장, 소국의 왕으로 이어지는 지배체제와 그에 따른 3 단계의 의사결정 기구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 사로국의 경 우 2 단계 조직은 部로 표현되었고 그 장은 부장으로 되었던 것이 아닌 가 생각된다우
〈 표 5> 소국의 정치형태
3 단계
[보기] 1. 정치세력 <1> 마을의 장 <2> 촌장 <3 > 소국의 군장 2. 영역 (1) 마을 (2) 촌 (3) 소국
3 단계로 편성되었던 통치조직을 갖고 있던 소국은 특권층을 보호하 고 신분을 유지하는 기능을 가졌다. 특히 이주민 계통의 지배세력은 과거 촌락사회 단계의 선주세력과 혈연적인 연관이 없어 보다 엄격한 신분제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한편 소국들은 정 치에 근거하여 소국민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후일 소국이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하면서 정치에 근거한 국민집단의 규모는 점차 커지게 되었고 그러한 과정은 결국 민족 형성의 과정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소국 단계에 이르게 되면 소국의 최상부에서만 혈연이 의미를 갖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중 왕위계승에는 혈연적 원리가 작용하여 대체로 부계가계 내에서 왕위가 계승된 것을 볼 수 있다. 때 로는 왕실세력의 세력동맹에 의하여 다른 씨족집단의 성원에게 왕위가 넘어가기도 하였으나 그 경우에도 해당 씨족의 가계 안에서 혈연적인 원리는 작용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소국의 지방행정구획으로 편제 된 촌락의 지배세력들 역시 혈연적인 원리에 의하여 그 지위를 계승한 것으로 생각된다 . 또한 소국의 최상부에서 재분배가 시행된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일반 백성들이 조세를 바치면 왕은 왕국 최상부에 위 치한 지배세력들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그것을 재분배하여 주었던 것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그 때 일반 백성들에게는 재분배가 시행되지 않았다고 헤아려진다 . 소국들은 이웃한 소국들과 대외적인 관계를 맺어 나간 것이 분명하 다. 주몽이 세웠던 고구려는 초기에 송양왕이 다스리던 비류국과 관계 를 갖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온조가 세운 십제는 비류가 세웠다고 하 는 미추홀 소국과 관계를 맺었다. 그런데 소국과 소국 사이의 관계는 여러 가지가 있었겠으나 교역과 전쟁이 중요한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면서도 아직 일정 지역의 소국들 사이에 세력의 우열 관계가 나타 나지 않아 맹주국이 등장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소국 간의 관계에
서 맹주국이 등장하게 되면 정치발전단계도 한 단계 발전하여 소국연 맹 단계로 되었다고 여겨진다. 여기서 말하는 소국은 인류학에서 말하는 s tat e 에 해당한다. 그리스 의 아테네, 코린트, 스파르타와 같은 나라들과 한국사상의 소국들은 모두 c hi e f dom 이 아닌 국가 단계에 들어섰던 것이 분명하다. 필자는 본고의 작업을 통하여 초기국가로서 소국의 형성 이후 어떠한 정치발 전 과정을 거쳤는지 밝히고자 한다 . 따라서 소국 단계에 이어 나타나 는 새로운 정치발전단계인 소국연맹에 대하여 다음 절에서 정리하기로 한댜 (3) 소국연맹 단계의 정치형태 한국사상 소국연맹 단계까지 정치적인 성장을 하였던 정치체는 그 수가 많지 않다. 그 중에는 馬韓 • 辰 韓 • 弁 韓 으로 나뉘어지는 삼한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거기에 더하여 28 만 구를 이끌고 漢에 內 屬하였던 예군 남려가 이끌던 정치체는 적어도 소국연맹 단계에 있었 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조선 • 부여 • 고구려도 일정 기간 동 안 소국연맹 단계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 25) 그 밖에 진 번 • 임둔도 위만조선에 복속되기 이전에는 적어도 소국연맹 단계에 이 르렀던 정치체였다고 헤아려진다. 마한은 54 개 소국이, 진한과 변한은 각기 12 개 소국으로 소국연맹을 형성하였던 예로 보아 소국연맹은 소 국 단계보다 독립된 단위정치체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고, 인구와 영역 의 규모는 크게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예군 남려가 거느렀던 28 만 명의 안구가 소국연맹 정도의 인구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 한 정치체는 소국 단계를 넘어선 소국연맹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 분명 하다. 그리고 소국연맹의 영역은 적어도 소국을 10 여 개 합친 정도로
25) 李鍾旭, 『 古朝鮮史硏究 』 , 1993, pp. 111~140.
서 그 직경은 백여 km 이상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제 이와 같은 소국 연맹의 정치형태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소국연맹은 일정 지역의 소국들 사이에 위계가 나타난 결과 형성되 었음이 분명하다. 그 결과 연맹을 형성하였던 소국들 사이에는 盟主國 이 동장하게 되고 , 맹주국은 다른 연맹소국들의 맹주로서의 역할을 담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히 하여 둘 것은 소국연맹 안의 소국들은 정치적으로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소국연맹은 소국들 사이에 병합관계가 나타나기 이전의 정치형 태를 나타내는 것을 알 수 있다. 소국들 사이의 위계가 나타나는 이유 는 의적의 침입에 공동 대처하거나 원거리교역을 위한 교역체계를 유 지하는 과정에서 군사적인 주도권을 장악한 소국이거나 원거리교역을 주관하게 된 소국이 군사적 • 경제적인 성장을 하게 되고 그 결과 다른 소국들에 비하여 국력이 강성해져 맹주국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 었기 때문이다 26) 그런데 그와 같은 대외적인 요인 이의에 연맹 내의 대내적인 요인도 생각할 수 있다 . 소국들 사이의 분쟁, 전쟁 결과 인구 가 감소하는 소국이 생겨나게 되고 그러한 나라들은 생산이 위축되고 인구도 줄게 되어 점차 이웃한 나라에 비하여 국력이 차이나게 되었 다고 여겨진다. 그 결과 소국들 사이에 병합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국 력에 차이가 생겨나게 되고 자연 맹주국이 나타난 것이 아니었나 여겨 진다. 여기서 소국연맹이라는 정치체의 형성을 생각할 수 있다. 중국의 군 현이었던 낙랑군과의 원거리교역 과정에서 늦어도 기원전 1 세기 중반 경에는 한반도 남부지역에 마한 • 진한 • 변한이라는 소국연맹체가 형성 되었다고 생각된다.'ZI ) 당시 한반도 남부지역에 과연 삼한만이 소국연맹 체를 형성하였는지 잘 알 수 없다 . 현재 그 존재는 알 수 없으나 또
26) 위의 책, pp. 138~140. 27) 李鍾 旭, 앞의 책, 1982, pp. 95~104.
다론 소국연맹체가 있었울 가능성도 없지 않다 . 28) 여기서 한국의 소국연맹의 정치형태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소국연맹 안의 각 소국들은 독립을 유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독립소국들은 각기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었고 건국시 조에 대한 제사룰 지낸 것으로 헤아려진다. 그리고 각 소국에는 정치 적 지배자인 왕과 그 밑에 딸린 관리들이 있었고 그들에 의하여 정치 조직이 운용되었던 것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한편 소국연맹의 맹주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맹주국은 소국연맹 의 원거리교역의 경제적 중심지가 되었고, 소국연맹을 위협하는 의적 울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고 여겨진다. 맹주국 의 왕은 소국연맹 내의 다른 소국 왕들과의 관계에서 그 지위를 확보 하였고 교역 • 군사적 활동 외에도 소국연맹 내의 여러 가지 문제를 관 장하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맹주국왕의 임무 중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소국 간의 국경분쟁을 조정하는 것을 들 수 있다 . 『 삼국사기』 신라본 기 파사왕 23 년조에 나오고 있는 음즙벌국과 실직곡국 사이의 영토분 쟁을 해결하는 사건을 주목할 수 있댜 29 ) 그러한 기록에는 파사왕이 문 제를 해결하기 어려워 수로왕을 불러 분쟁이 되는 지역을 음즙벌국에 준 것으로 나오고 있지만 그와 같은 영토분쟁을 해결한 주체는 파사왕 이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소국연맹의 맹주국왕의 역할 중에 영토분 쟁을 해결하는 일이 포함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맹주국에서는 원 거리교역을 주관하고 그 과정에서 소국연맹 내의 교역도 관장한 것으 로 생각된다우 한편 맹주국은 연맹소국들을 군사적으로 보호하여 주기
28) 한반도 남부에 삼한만이 형성되 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 마한 • 진한 • 변한 지 역의 소국들이 처음에는 몇 개 국씩 모여 연맹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는데 후일 삼한으로 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 29) 『三國史記』 1, 新羅本紀 1, 婆娑尼師今 23 년 . 30) 李鍾旭, 앞의 책, 1982, pp. 74 ~83.
도 하였다고 생각된댜 소국연맹의 맹주국과 다른 소국들 사이에는 附庸腦係가 있었다고 여 겨진댜 그러한 사정은 『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 시조동명성왕 즉위조에 나오는 고구려 건국신화 중에 비류국의 송양왕이 주몽에게 〈 우리는 여 러 세대를 거쳐 왕이 되었는데 땅이 좁아 두 왕을 용납할 수 없다. 그 대는 도읍을 정한 지 얼마 안 되니 나에게 부용하는 것이 어떻겠는 가? 〉 라고 한 말 속에 나타나 있댜 3 1) 소국연맹의 각 소국 사이에는 독 립은 유지되고 있었으나 다른 소국들은 맹주국에 부용하였던 것을 생 각할 수 있댜 당시 맹주국은 다른 소국을 부용관계 이상으로 뛰어넘 어 완전 병합할 수는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소국연맹의 맹주국은 다른 소국들을 어떻게 통제하였을까. 초기 백제는 마한이라는 소국연맹의 한 소국으로 맹주국과 일정한 관 계를 가진 바 있다. 『 삼국사기』에 나오는 기록(사료 E) 을 보면 온조왕 10 년에는 왕이 사냥을 나가 神鹿을 잡아 마한왕에게 보낸 것으로 나오 고 있댜 그리고 13 년에는 온조왕이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천도를 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24 년에는 옹천책을 세운 것을 마한왕이 꾸짖자 이룰 헐은 일이 있었다. 여기서 맹주국과 연맹소국 사이의 관 계를 생각할 수 있다. 『 삼국사기』의 기록에 나오는 마한과 온조왕의 관계는 마한의 맹주국왕과 온조왕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맹주국과 연맹소국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댜 온조왕이 마한에 신록을 보낸 것은 일종의 사대의 예를 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조공에 해당한다. 그리고 천도를 고한 일이나 옹천책을 헐었던 사건은 맹주국이 연맹소국에 대한 정치적 통 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당시 맹주국이 연맹소국을 직접 병합할 능력은 없었으나, 연맹소국들은 정치적인 변동을 맹주국에 보 고할 의무가 있었고, 맹주국온 연맹소국에 대한 정치적인 간섭도 할
31) 『三國史記』 13, 高句麗本紀 1, 始祖東明聖王 즉위조.
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제의 소국형성을 허락하여 주었 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24 년조의 기록을 보면 맹주국은 연 맹소국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나아가 맹주국이 연맹 내의 소국들에 대한 군사적인 통제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맹주국은 그와 같은 군 사적인 실력을 가지고 연맹소국을 보호하기도 하였다고 여겨진다. 소국연맹의 여러 · 소국들은 지리적으로 일정한 영역 안에 위치하고 있었고, 공동언어를 가지고 있었으며, 유사한 신앙체계를 가지고 있었 다고 여겨진다. 그러한 사정은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하나의 소국연맹의 영역 안에서 출토되는 고고학적인 유물과 유적은 그 유형이 거의 비슷한 것을 보아 소국들 사이에 동일한 문화를 갖고 있었던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각 소국의 정치조직 이 유사한 것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각 소국의 정치조직은 과거 소국 단계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여겨진다. 단지 소국연맹 단계에 들어선 이후 연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조직이 추가된 것은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소국연맹의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몇 단계의 정치조직이 편제되었는지 생각하기로 한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표 6 을 제시하기로 한다. 우선 소국연맹 단계의 소국들이 정치적으로 독립하 였던 것으로 미루어 3 단계 통치조직이 편성된 것은 분명히 알 수 있 다. 그 1 단계는 과거 촌락사회의 마울을 다스리던 조직이고, 2 단계는 촌을 다스리던 조직이다. 그리고 3 단계는 촌을 통합하여 형성한 소국 전체를 다스리던 조직이다. 한편 소국연맹 단계에 이르면 일정 지역의 여러 소국들 사이에 연맹이 이루어졌고 그러한 연맹의 군사적인 문 제 또는 경제적인 문제를 처리하는 4 단계의 조직이 새로이 편제된 것 을 알 수 있다. 4 단계의 조직은 소국의 내정에는 간섭을 할 수 없었다 고 여겨지나 소국 사이의 국경분쟁 둥의 문제는 조정하는 기능이 있었
다고 헤아려진다. 4 단계의 조직은 소국연맹 전체와 관련된 교역, 전쟁 동의 문제를 관장하였으며 주로 맹주국에서 그 권력을 행사하였던 것 이 분명하다. 여기서 소국연맹의 맹주국의 왕을 大君長이라고 부르고 나머지 연맹소국의 왕을 君長 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한다. 소국연맹의 대군장은 원거리교역을 주관하고, 외부로부터의 전쟁 위협에 대응하였 으며 어쩌면 종교적인 면에서 소국연맹의 대표가 된 것은 아니었나 생 각된다.
〈 표 6> 소 국연맹 시기의 정치형태
4 단계_. I \
[보기] 1. 정치세력 <1> 마 을의 장 <2> 촌 장 <3> 소 국의 군장 <4> 소 국연맹의 대군장 2. 영역 (1) 마울 (2) 촌 (3) 소국 (4) 소국연맹
위와 같이 생각하여 본 소국연맹의 맹주국과 연맹소국들 사이의 관 계는 중국 殷나라의 그것과 비교된다. 은왕조는 商邑을 중심으로 하는 수많은 城邑 간의 연합과 결속에 의하여 결성된 일종의 城邑聯盟國 家 32) 또는 邦國聯盟3 3) 이었다고 한다. 은에서는 군소 부족들이 강한 부
족을 중심으로 부족연맹을 형성하고 연맹주의 영도 하에 군사 • 경제적 인 혜택과 보호를 구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정치 • 군사적으로 강한 은 족을 중심으로 방국연맹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34) 한국의 소국연맹도 은왕조의 성읍연맹국가 또는 방국연맹과 같은 정치발전단계에 이르렀 다고 짐작이 간다. 한편 그리스의 소국들 사이의 동맹은 헤게몬 영도 하의 동맹으로 세 가지 특성을 볼 수 있다 . 첫째, 헤게몬 국가와 그 동맹국들이 병존하는 구조의 이중성을 들 수 있다. 둘째, 동맹의 공동시민권이 없었다는 것 을 들 수 있다. 셋째, 동맹의 영역은 고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통합성을 지니지 않았고 새로운 동맹국이 들어오거나 나가면 그 범위가 달라졌 던 것을 들 수 있다프 이러한 그리스 동맹의 성격은 한국의 소국연맹 을 이해하는 데에도 크게 시사하여 주는 바가 있다. 실제로 한국의 소 국연맹도 맹주국과 연맹의 다른 소국들 사이에 독립이 유지되고 병존 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소국연맹의 백성이기보다 소속 소국의 백성이 되었다 . 한편 소국연맹은 연맹에 속하는 소국의 수에 따라 그 규모에 변동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여기서 소국연맹의 초기에는 일정 지역에 커다란 소국연맹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몇 개의 소국들이 연맹을 맺었던 것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이 경우 소규모의 소국연맹들이 보다 많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며 맹주국의 지위도 커지고 소국연맹에 속한 소국들의 수도 늘어 난 것이 아니었나 짐작이 간다. 여기서 소국연맹은 시간이 지나며 정치적인 성장을 하게 되고 점차 정치적인 변동이 생겨난 것을 알 수 있다. 원거리교역을 통하여 소국
32) 李春橋 『中國古代史의 展開 .!, 1986, p. 3.5. 33) 李春植 , r 中國古代國家의 二祖構造와 世界觀」, 『亞細亞硏究』, 1992, p. 99. 34) 위의 논문, pp. 100~101. 3.5) 빅터 에렌버그 저, 김진경 역, 『 그리스 국가 』 , 1991, pp. 16.5 ~ 177.
연맹의 모든 소국 들 이 외부 문화 를 수입하여 나가게 되는데, 그 중 맹 주국은 선진 문물을 보다 먼저, 보다 많이 장악하게 되었다고 여겨진 다 . 361 그러한 사건은 맹주국의 국력을 크게 성장시킨 것이 분명하다. 그 결과 맹주국은 점차 문화적 충만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정치조직을 다른 소국보다 앞서 발전시키게 되었으며, 생산력도 증대되었고 사회 질서가 강화되었다고 여겨진다. 이에 맹주국은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 해 나가게 되고 그러한 소국병합이 이루어진 후에는 소국연맹이라는 정치발전단계는 끝이 나고 새로운 정치발전단계인 소국병합 단계로 넘 어가게 되었다. (4) 소국병합 단계의 정치형태 『梁書 』 東夷 列 傳 百濟傳 울 보면 〈 백제는 그에 앞서 삼한국이 있었는 데 1 은 마한, 2 는 진한, 3 은 변한이 었다. 변한과 진한은 각기 12 국이 었 으며 , 마한은 54 국이었다. 大國은 만여 가, 小國은 수천 가였으며 총 10 여만 호였다. 백제는 그 중의 하나였다. 후에 점차 강대해져 諸小國 을 겸병하였다 〉 라고 나타나 있다 .37) 이 같은 기록을 통하여 백제는 원 래 마한의 한 소국이었으나 후일 다른 소국들을 겸병하여 삼국 중의 한 나라로 성장한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사상 소국병합 단계까지 정 치적인 성장을 한 나라로는 고조선 • 부여 • 고구려 • 백제 • 신라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소국병합을 통하여 형성된 정치체는 영역과 인 구가 크게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와 같은 소국병합 단계 까지 정치적인 성장을 하였던 국가의 정치형태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소국병합 단계의 정치조직 중 중앙정부 조직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36) 李鍾 旭, 앞의 책, 1982, pp. 74~83. 37) 『梁函 54, 列 傳 48, 百 濟 傳
먼저 최고의 정치적 지배자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고조선에서는 기원 전 4 세기 후반 燕의 제후가 왕호를 칭할 때 그 지배자가 왕을 칭하였 다고 한댜 38) 부여에서는 언제부터 왕호를 칭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49 년 왕호를 칭한 기록이 『 후한서 』 에 나오고 있다 우 고구려에서는 32 년 에 처음 왕호를 칭하였다고 『삼국지 』 에 나오고 있다. 한편 백제 • 가 야 • 신라의 초기국가 성장에 대한 기록은 중국측 사서에서는 거의 찾 을 수 없다. 따라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 의 기록을 통하여 보면, 백제와 가야는 일찍부터 왕을 칭한 것으로 나오고 있으나 처음부터 중 국식 왕호를 사용하였는지는 의심이 간다. 그러한 사정은 신라에서 거 서간, 차차옹, 이사금,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다가 지증왕 4 년 (503) 에 처음으로 중국식 왕호를 사용한 것에서 볼 수 있다우 중국식 왕호의 사용 시기를 보면 고조선과 신라 사이에는 8 백여 년의 시간적 간격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소국형성 시기를 기원전 12 세기 말에서 11 세기 초경으로 본 바 있고4 1) 사로국의 형성시기를 기원 전 2 세기경일 것으로 짐작한 바 있다 .42) 이는 고조선과 사로국의 소국 형성 시기가 9 백여 년 정도 차이나고 있는 것을 말해 준다. 여기서 한 국사상 성장하였던 소국병합 단계의 정치체들의 정치형태가 같은 것일 수 없다는 짐작이 간다. 여기서 각국의 중앙정부 조직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우선 최고의 정치지배자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조선은 기원전 4 세기 후 반 언제인가 정치적인 지배자가 왕을 칭한 바 있다 .43) 그리고 부여와
38) 『三國志』 30, 魏 書 東夷傳 韓傳 인용 魏略 . 39) 『 後漢 렵 ,I 85, 東夷列傳 夫餘國傳 40) 『 三國史記』 4, 新羅本紀 4, 智證 麻 立干 4 년. 41) 李鍾旭, 앞의 책, 1982, p. 53. 42) 李鍾旭 , 앞의 책, 1993, p. 296. 43) 『三國志』 30, 魏 書 東夷傳 韓傳 인용 魏略.
고구려에서는 1 세기 전반에 정치적인 지배자들이 왕호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소국병합 단계의 최고 정치지배자를 君王 또는 王 으로 칭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다음은 왕 및 정치세력에 대한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 고조선은 기 원전 4 세기 그 지배자가 왕호를 사용할 때에 大夫라고 하는 직이 설치 된 것을 알 수 있다 .44 ) 그 후 고조선 말기 준왕대에 연인 위만이 망명 하여 왔을 때 준왕은 그에게 박사로 삼고 圭를 주었으며 백 리의 땅을 봉한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프 한편 위만조선 말기에는 조선상 로인, 상 한음, 니계상 참, 장군 왕협 등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 있다 .46) 고조 선의 관직을 보면 장군과 같은 존재는 왕의 직속 관직이라고 생각된 다. 그에 반하여 대부 • 상과 같은 관직은 지방세력들로서 중앙에 진출 하여 활동하던 사람들에게 주어진 관직으로 헤아려진다.이) 여기서 고조 선의 상 • 대부와 같은 관직에 임명된 사람들은 지방에 일정한 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던 중국의 제후와 같은 존재들로 여겨진다. 고조선의 지방에는 제후적인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위만에게 백 리의 땅 을 봉하여 주고 제후들이 조근할 때 사용하던 규를 내려준 것으로도 알수 있다. 부여의 중앙정부 조직에 대한 문제도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중앙정 부에 설치되었던 관직을 보면 6 축으로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 마가 • 우 가·구가·저가·견사·견가자·사자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션) 이 러한 관직에 임명되었던 세력들의 출신이 어떠한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加의 존재를 주목하면 그들 중에 일종의 제후적인 존재들이 있
44) 『三國志』 30, 魏書 束夷傳 韓傳 인용 魏略 45) 『史記』 115, 朝鮮列傳 55. 46) 『史記』 115, 朝鮮列傳 55. 47) 李鍾旭, 앞의 책, 1993, p. 151, pp. 228~231. 48) 『三國志』 30, 魏꿉 東夷傳 夫餘傳
었다고 짐작이 간다. 그러한 사정은 고구려의 예를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정부조직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 삼국지 』 의 기록에는 왕이 있고 그 밑에 관으로 상, 가, 대로, 패자, 고추가, 주부, 우대, 승, 사자, 조의, 선인이 있어 각기 존비에 등급이 있었다고 한다 . 49) 한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자료를 보면 다물도주, 대보, 좌보, 우보, 고추가, 중외대부 둥의 관직이 있다 . 그러한 관직에 임명된 사람 들에게는 관동이 주어졌다. 그러한 관등에는 사자, 우대, 패자, 대주부, 조의 둥이 찾아지고 있다.f,()) 그리고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의 출신을 보면 주몽과 같은 계루부지역 출신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연나부, 관나부, 환나부, 주나, 비류나, 남부, 동부와 같이 왕경 이의의 지역 출신들도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고구려의 중앙정부 에서 활약한 인물들 중에는 지방 출신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 들 지방 출신들은 고조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제후적인 존재 들이었다고 생각된다 .51) 백제 초기의 중앙정부 조직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왕이 있 었고 그 밑에 좌보 • 우보라고 하는 최고의 관직이 설치되었던 것을 볼 수 있댜 52) 그들의 출신은 왕족, 북부, 동부 등으로 나오고 있다. 백제 초기의 중앙정부에도 왕경 이외의 지방세력들이 진출하여 활동한 것을 알수 있다. 다음은 국가형성기 신라의 중앙정부 조직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신 라에는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으로 불리던 정치지배자 밑에 대보, 이
49) 『三國志』 30, 魏 書 東夷傳 夫餘傳 50) 李鍾旭, 『高句麗初期의 中央政府組織』, q 5 方學志》 33, 1982, pp. 16~18 의 표 참조 51) 이와 같은 정치세력들은 피정복소국의 지배세력의 후손들이거나 그 전통을 이었 던 정치세력으로 지방통치구역의 장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된다. 52) 李鍾旭 앞의 논문, 1979, pp. 24~30.
찬, 이벌찬, 각간으로 불리던 최고의 관직이 있었던 것으로 나오고 있 다 . 한 가지 홍미로운 사실은 신라 중앙정부에서 활약하던 인물들은 지방세력이 없었다고 생각되는 점이다. 물론 신라 중고시대의 금석문 이나 『삼국사기 』 등의 자료를 보면 왕경 6 부 출신들이 중앙정부의 관 직과 관등을 부여받아 활동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라 왕경 6 부 출신 인물들은 왕경인을 뜻하며 지방세력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말해 준다 여기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의 정치형태와 신라의 정치형태가 달랐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의 중앙 정계에는 지방세력들이 진출하여 활동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신라에서는 그러한 예를 찾을 수 없다. 이는 전자들의 정치형태가 중국 서주시대 또는 동 주시대의 봉건제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고조선, 부 여, 초기 고구려, 초기 백제의 정치형태가 봉건제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주왕조는 成王시에 있었던 은유민의 반란을 진압한 후 봉건제를 본격적으로 시행하였는데, 주왕실의 자제와 일족 및 동맹부 족을 제후로 임명하여 전국의 전략적인 요충지에 분봉, 배치하여 은유 민을 감시하고 주변의 이적의 준동을 대비하였다고 한다 .53) 주왕실의 봉건제를 보면 봉건제후를 왕실에서 분봉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조선, 부여 , 고구려, 백제에서도 그와 같이 제후적인 성격을 지닌 지 방세력을 과연 분봉했을지 의심이 간다. 물론 위만에게 백 리의 땅을 봉하여 주고 서변을 지키도록 한 것은 주왕실의 제후 분봉과 성격을 같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세력들도 중앙정부에서 분봉 한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보다는 소국을 병합한 후 원래의 지 배세력을 지방세력으로 인정하여 주고 지방통치의 임무를 맡기고 그들 중 일부를 중앙정부에 불러 활동하도록 만든 것은 아니었나 생각된다. 여기서 소국병합 단계의 지방통치에 대한 문제를 보기로 한다. 소국
53) 李春 植, 앞의 논문, 1992, p. 101.
병합을 주도한 소국의 영역은 왕의 직할지로 되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백제의 십제국 영역, 신라의 사로국 영역, 고구려의 계루부 영역 은 각기 왕의 직할지로서 왕경이 되었던 것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그 러한 사정은 고조선 • 부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그와 같이 소국병합을 전개한 소국 영역 밖에 위치한 피병합 소국에 대한 통치는 어떻게 하였을까. 고조선 말기 위만이 망명하여 왔을 때 준왕은 그에게 백 리의 땅을 봉하여 주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백 리의 땅은 소국의 영역을 상징하는 方百里로 보인다. 그리 고 위만이 정권을 장악한 후 한의 의신이 되어 힘을 키운 후 侵 降하였 다고 하는 주변의 소읍들은 피병합 소국 정도로 여겨진다 언 여기서 피 병합 소국을 지방통치의 단위로 하였던 사정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러한 지방통치제도의 편제는 고조선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부여, 고구 려, 백제, 신라도 마찬가지였다고 믿어진다. 소국병합 단계에 피병합 소국을 단위로 한 지방통치조직이 편성 • 운 용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라마다 지방통치의 실상은 차이가 있었다 고 여겨진다. 그것은 한국의 국가형성이 독자적으로 국가를 형성하였 던 원초적 국가(pri s ti ne s tat e 또는 ear li es t s tat e) 의 형성이 아니라 2 차 적 국가 (second ary s tat e) 의 형성이었기 때문이다프 한국의 국가형성 은 보다 선진한 정치세력의 영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 과정에 일찍이 국가를 형성하였던 고조선은 중국 은나라 유민들의 영향을 받아 소국형성을 하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후에 고조선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걸친 기간 동안 중국의 정치제도에 영향을 받았 다고 여겨진다. 그 결과 소국병합 단계에는 주왕실의 봉건제적인 통치방법을 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에 비하여 1 세기 중반경부터 이웃 소국을 병합하
54) 李鍾風 앞의 책, 1993, p. 229. 55) 위의 책, p. 206.
기 시작한 사로국은 중국 군현제의 영향을 받아 지방통치조직을 편성 한 것은 아닐까 짐작이 간다. 물론 이 경우 중국 한나라의 군현제를 처음부터 채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 제와는 달리 지방세력의 존재를 엄격하게 통제하였고 그들이 지방에 세력을 유지하며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것은 막았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여 신라에서는 피병합 소국의 지배세력들을 제후적인 존재로 인정 하지 않았던 것으로 헤아려진다. 여기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의 지방통치조직이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고 믿어지나 신라의 지방통치조 직과 비교하여 한 부류로 묶어 보기로 한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형식의 지방의 제후적인 존재의 성격에 대하여 볼 수 있다. 지방의 제후적인 존재인 諸加들은 적의 침입이 있으면 스 스로 전투를 하였으며, 諸加들이 평의하여 범죄자들을 처벌한 것을 볼 수 있댜 561 이러한 사실은 제가들이 군사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사 법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잘 말해 준다. 그러면 소국병합 단계의 통치조직은 몇 단계로 편성되었을까.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표 7 의 통치영역 구분을 보기로 한다. 1 단계는 과 거 촌락사회 단계의 마을들이고 2 단계는 촌들이 새로이 편제된 지방행 정구역이며 3 단계는 과거의 소국이 편제된 것이다. 4 단계는 병합소국 전체를 포함한 영역을 가리킨다. 1 단계는 직경 3~4km 정도의 영역을 다스리던 조직이고, 2 단계는 직경 10km 정도의 영역을 다스리던 조직 이다. 3 단계는 과거 소국의 영역인 직경 30~40km 정도의 영역을 다 스리던 조직이다. 그리고 4 단계의 조직은 직경 100~200km 정도의 넓 은 영역을 통치하기 위한 조직으로 국왕이 통치 책임자가 되었다. 여 기서 소국병합 단계의 의사결정 단계도 마을, 촌, 과거 소국, 전체 왕 국의 4 단계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 단계 조직은 후일 신라의 자연촌이 되었으며 현재의 里정도에 해당한다. 2 단계 조직은
56) 『三國志』 30, 魏習 東夷傳 夫餘傳 및 高句麗傳
신라의 행정촌이 되었고 현재의 面에 해당한다. 3 단계 조직은 신라의 郡이나 縣이 되었으며 현재의 郡이 대체로 이것에 해당한다. 한편 병 합을 주도한 소국의 영역은 왕경이 되고 왕경의 지방행정구역은 신라 의 경우 부와 리로 편성된 것으로 보아 한 단계 작은 편성을 한 것을 알수 있다.
〈 표 7> 소국병합 시기의 정치형태
그런데 고조선 • 부여 • 고구려 둥에서는 3 단계 조직을 다스리는 세력 으로 과거 소국의 지배세력을 大加로 인정하여 주고 그들로 하여금 때 로는 중앙 정계에 진출하도록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에 비하여 신라 에서는 3 단계 조직을 다스리던 세력으로 피정복 소국의 지배세력을 제 거하고 2 단계 조직의 지배세력이었던 촌의 세력들을 인정하여 주어 그 들을 통하여 지방을 통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의 그와 같은 촌락
세력들은 후일 촌간 또는 촌주 세력으로 남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그 에 비하여 피정복 소국의 왕을 비롯한 지배세력 들 은 대체로 제거된 것 으로 헤아려진다 . 물론 그 중 일부는 왕경으로 사민하여 왕경인이 되 었다고 여겨지는데 , 그 경우 사민된 세력은 지방과의 관계를 유지하더 라도 고조선에서와 같이 지방세력으로 남을 수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 삼국지 』 에 나오는 기록 중 諸 大)j n 들이 사자 • 조의 • 선인을 두었는데 그 명단을 왕에게 보고하였다는 기록을 주목할 수 있다. 그 러한 기록의 내용은 중앙정부의 관직과는 별도로 지방의 대가들이 가 신에 해당하는 관 직 을 설치 • 운용하였음을 잘 나타내 준다 . 이는 대가 들이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중국 주나라의 제후에 해당하는 존재들 이었던 것을 말해 준다 . 이제 피정복 소국은 독립을 상실하고 그 지배 세력은 중앙정부의 제후적인 지위를 차지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신 라에서는 지방세력을 인정하였지만 고구려와 같이 3 단계의 세력을 인 정한 것이 아니라 1, 2 단계의 세력 정도를 인정하였다 . 이에 신라의 정 치형태가 한 단계 더 중앙집권적이고 군현제에 가까워진 것을 알 수 있댜 결국 신라의 지방통치조직 편성은 다른 나라보다 국력을 조직화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후일 삼국통일의 원동력을 제공하였던 것으 로 여겨진다. 소국병합 단계에 이르러 피병합 소국 세력에 대한 편제에 있어 고조 선적인 유형과 신라적인 유형으로 나누어 보았다. 소국병합 단계에서 피병합 소국의 지배세력들에 대한 통제의 차이점을 시조묘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기로 한다. 『삼국지 』 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에서는 계루 부 출신 왕의 종족, 연노부 출신 전왕족, 절노부 출신 왕비족의 적통 대인들이 고추가를 칭하였고 종묘를 세워 영성과 사직에 제사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fj/ ) 그런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대무신왕 3 년에 동명묘 룰 세웠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동명묘에 대한 제사는 왕실의 제
57) 『 三 國志J 30, 魏 꿉 東夷 傳 高 句 麗 傳
사일 수 있으나 어쩌면 전국에 분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한 사 정은 신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여겨진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 왕 3 년조에는 시조묘를 세웠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58) 그 이후 신라 의 왕들은 시조묘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신라에서도 시조묘에 대한 제사가 피정복 소국에 분사된 것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것은 보다 후대의 고고학적인 자료이지만 양산 • 경산 • 대구 등지에서 신라 왕경 에서 출토되는 것과 같은 형태의 금동관과 은관이 출토되는 것으로 짐 작할 수 있다. 신라의 금관·금동관·은관의 사용 목적이 무엇이었는 지는 잘 알 수 없다. 혹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 도 한다. 여기서 신라왕실의 제사였던 시조묘에 대한 제사의 분사에 의한 확산을 생각할 수 있다. 신라 시조에 대한 제사의 분사에 의하여 피정복 소국 지역에서 사로국의 시조에 대한 제사를 지내게 되면서 해 당 피정복 소국의 건국시조에 대한 제사는 지낼 수 없게 되었을 것으 로 여겨진다. 이 경우 금동관 • 은관의 연대는 비교적 후대에 해당하기 에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금동관 • 은관을 사용하기 이전에는 또 다른 제사용 의기를 중앙정부에서 공급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소국병합 단계의 정치조직은 시간이 지나며 변동된 것을 알 수 있 다. 그러한 변동은 지금까지 고대국가5 9) 또는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 발전한 것으로 보아 왔다. 한국사상 그와 같은 정치적인 성장을 한 나 라들은 고구려 • 백제 • 신라였다. 필자는 그와 같은 발전 단계를 중앙 집권적 왕국 단계로 주장한 바 있다.f,O) 필자가 말하는 중앙집권적인 왕 국으로 발전한 시기는 나라에 따라 달랐는데 고구려는 태조대왕대, 백 제는 고이왕, 신라는 내물왕대부터였다고 보았다. 중앙집권적인 왕국 단계의 정치형태에 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이 곳에서 다룰 생각은 없
58) 『三國史記』 1, 新羅本紀 1, 南解次次雄 3 년. 59) 邊太燮, 『韓國史通論』, 1986, pp. 68~114. 60) 李鍾旭, 앞의 논문, 1989, pp. 24~25.
다 . 단지 이 때에 이르면 국가 통치조직은 5 단계 조직으로 발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촌락사회 단계의 최고 정치체였던 촌을 2 단 계로 하고 과거 소국을 3 단계로 한 점에서는 소국병합 단계와 일치하 지만 그와 같은 3 단계 조직을 몇 개씩 묶어 상급 지방통치조직을 편성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러한 4 단계의 조직은 고구려의 部, 백제의 方, 신라의 州라고 할 수 있다. 그 위에 5 단계 조직으로서 왕국 최고의 통치조직은 왕이 직접 관장하는 중앙정부 조직으로 편성되어 있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5) 한국 초기국가 형성기 정치형태의 특성 지금까지 한국 초기국가의 정치 발전 과정을 촌락(추장)사회 -소 국 三 소국연맹-소국병합 단계로 나누어 시대구분해 보았다. 그리고 각 정치발전단계별 정치형태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여기서는 앞에서 정리 한 사실들을 각 단계별로 요약하여 보기로 한다. 먼저 촌락(추장)사회에 대하여 주목할 수 있다. 한국의 촌락사회의 예는 사로국 형성 이전의 사로 6 촌과 가락국 형성 이전의 가락 9 촌을 들 수 있다. 그 외에도 한반도 남부지역을 비롯하여 한국사상 성장하 였던 여러 소국들은 대체로 촌락사회를 통합하여 이루어졌다고 생각된 다 . 그런데 촌락사회는 지역에 따라 존속 시기가 달랐다• 고조선이 성 장하였던 요동지역에서는 적어도 기원전 20 세기에서 12 세기까지 존속 하였고,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는 기원전 7 세기에서 2 세기까지 존속되었 다고 여겨진다. 여기서 지역에 따라 촌락사회의 존속 시기가 크게 달 랐던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촌락사회의 영역과 인구는 지역과 시기 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사로 6 촌을 예로 들면 그 영역은 대체로 직경 10lrm 정도의 공간이었으며 그 말기의 인구는 2500 명 정도는 되었다고 여겨진댜 촌락에는 촌장(추장)이 있어 촌락
전체에 관련된 문제를 통할하였다. 촌락사회는 몇 개의 마을로 나뉘었 는데 각 마을의 규모는 대체로 직경 3~4km 정도였다고 생각된다. 각 마을에는 마을의 일을 관장하는 장들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 같은 촌락사회에는 엄격한 신분은 나타나지 않았으나 촌장이나 마을의 장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은 우월한 계급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촌 락사회는 혈연적인 원리에 의하여 운용되었다. 이 같은 촌락사회의 통 치는 2 단계 조직으로 짜여졌다. 1 단계는 마을을 통치하던 조직이고 2 단계는 촌 전체를 다스리던 조직이다. 촌락사회는 그 형성기를 거쳐 성립을 보았고 후기에는 촌락 간에 연맹을 이루었으나 촌락 간의 통합 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촌락사회는 지배자를 기준으로 보면 추 장사회 또는 촌장사회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상 수천의 촌락사회가 존재하였다고 헤아려진다. 다음은 소국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 라, 가야와 같은 나라들은 모두 소국으로부터 발전하였다. 사로국이 성 장하여 신라로 되었고 십제가 성장하여 백제가 된 것은 좋은 예가 된 다. 소국의 존속 시기는 지역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있었댜 고조선은 기원전 12 세기 말에서 11 세기 초에 소국을 형성하였다고 생각되는 데 바하여 사로국은 기원전 2 세기 말경에 이르러 소국을 형성하였다고 생 각된다 한편 소국들은 몇 개의 촌락사회를 통합하여 형성되었다. 따라 서 그 영역은 方百里 또는 직경 30~40km 정도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소국들은 건국신화를 따르면, 이주민들에 의하여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소국의 통치조직은 3 단계로 짜여졌다. 그 1, 2 단계는 촌락 사회의 조직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1 단계는 촌락사회의 마을들에 해 당하는 지역에 대한 통치조직이고 2 단계는 촌락에 해당하는 지역에 대 한 통치조직이다 그리고 소국 전체를 다스리던 3 단계 조직이 편성되 었다. 소국의 지배자는 3 단계 조직의 정점에 위치하였다. 소국에는 지 배세력과 피지배세력 사이에 엄격하게 신분이 구별되었다. 그리고 초
보적이기는 하지만 관직을 설치하여 운용하게 되었고 과거 촌락사회의 단위정치체인 촌락을 지방행정구역으로 편제한 지방통치조직을 갖추기 도 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통치는 혈연적인 원리가 아닌 행정적이고 정치적인 방법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군대를 유지하게 되었으 며 중앙정부는 조세를 수취하였다. 지역에 따라 시간적인 차이는 있으 나 한국사상 수백의 소국들이 촌재하였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소국의 정치지배자는 군장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소국연맹 단계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일정 지역의 소국들 사이에 세력의 우열 관계가 생기며 맹주국이 등장하게 되었다. 소국연맹은 결 국 맹주국이 등장함으로써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사에서는 고 조선 , 부여 , 고구려, 마한 , 진한, 변한 등이 소국연맹 단계에 이르렀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임둔, 진번, 옥저, 예 등도 소국연맹 울 형성하였을 가능성이 있댜 소국연맹은 적게는 10 여 국이, 많게는 50 여 국이 연맹을 형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소국연맹의 각국은 독립을 유지하였다. 따라서 소국 단계와 같은 통치조직을 유지한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소국연맹의 맹주국은 소국 간의 영토분쟁을 조정하고, 원거 리교역을 주관하고,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맞서 군사적인 대응을 이끄 는 등 여러 가지 일을 맡아 처리하였다. 따라서 소국연맹 단계에서는 그와 같은 일을 처리하기 위한 4 단계 조직이 편성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 맹주국과 다른 연맹소국들 사이에는 부용관계, 사대관계, 조공관 계가 맺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소국연맹의 백성들은 공동의 시민권 은 없었으며 각기 자기가 속한 소국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소 국연맹의 주민들은 언어, 신앙체계를 공유하였고 유사한 정치조직을 가졌다고 여겨진다. 한편 소국연맹의 정치지배자는 대군장이라고 부르 면 어떨까 한다 . 소국병합 단계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한국사상 소국병합 단계로 발 전하였던 국가는 많지 않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는 분명
히 소국연맹 단계를 거쳐 소국병합 단계까지 정치적인 성장을 하였다. 그에 비하여 가야 등은 소국연맹 단계에서 정치적인 성장을 멈추었다. 소국병합이 이루어진 시기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나고 있다. 북쪽의 고조선은 기원전 5 세기 말경부터 소국병합을 이루었다고 여겨지는 데 비하여 신라는 기원후 1 세기 후반경부터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하기 시 작하였다. 이 단계에 이르러 개별 국가의 영역은 직경 100~200km 이 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확대된 영역과 그 안에 사는 주민 을 통치하기 위하여 4 단계의 통치조직이 편성된 것을 알 수 있다. 1 단 계는 직경 3~4km 의 영역을 다스리기 위한 조직이고 2 단계는 직경 10km 정도의 영역을 다스리기 위한 조직이다. 그리고 3 단계는 과거 소국의 영역을 단위로 하는 통치조직이다. 4 단계는 왕국 전체를 다스 리기 위한 조직이다. 여기서 과거 촌락사회의 마울, 촌락, 그리고 소국 단계의 소국을 영역으로 하는 지방행정구역의 편제를 볼 수 있고, 그 에 따른 의사결정 단계를 생각할 수 있다. 피병합국에 대한 통치는 고 조선 • 부여 • 고구려와 같이 과거 소국 단계의 지방세력을 제후적인 존 재로 인정하여 주는 방법과, 과거 촌락사회 단계의 지배세력을 인정하 여 주는 신라적인 방법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국력의 조직화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편 소국병합 단계의 왕국에 서는 과거 소국병합을 주도한 소국이 왕경으로 편제되었던 것도 주목 할 수 있다. 왕경 밖의 피병합 소국들은 과거의 소국들을 단위로 한 지방행정구획으로 편제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같은 소국병합 단계의 정치적인 지배자는 군왕 또는 왕으로 부르면 어떨까 한다. 한국 초기국가의 정치적 성장과 그에 따른 정치형태의 변동에 대한 정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한국 초기국 가의 정치 발전 과정은 독립 정치체의 수적 감소와 개별 정치체의 영 역, 인구의 중가를 의미한다. 실제로 수천의 촌락사회가 수백의 소국으 로 통합되었고 다시 몇 개의 소국연맹이 형성되었으며, 그보다 적은
수의 소국병합을 이룬 나라들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 둘째, 각 정 치체의 정치 발전 시기는 지역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조선과 사로국의 정치 발전 시기 를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셋째, 한국의 초기국가들은 통합과 피병합 과정을 거치며 정 치적인 발전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전단계의 정치조직은 새로운 단계 의 정치조직의 하부 단위가 된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촌락사회의 마을 은 계속 1 단계의 영역 또는 조직으로 남고, 촌락은 2 단계의 영역 또는 조직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국들은 3 단계의 영역 또는 조직 으로 남았던 것도 볼 수 있다. 실제로 1 단계 마을은 신라의 자연촌이 되었고 2 단계의 촌은 신라의 행정촌이 되었으며 3 단계의 소국 영역은 신라의 군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끝으로 앞에서 정리한 한국 초기국가의 정치발전단계를 인류학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chi ef d o m, s t a t e 와 비교하여 보기로 한다. 여기서는 인류학 이론 자체에 대한 언급은 피하기로 한다. 대신 한국사에서 보 이는 초기국가의 정치발전단계에 대한 연구결과는 인류학 이론에 어떠 한 의미를 지닌 것인가 생각하여 보기로 한다. 먼저 촌락(추장)사회와 ch i e f dom 을 비교할 수 있다 . 사로 6 촌과 가락 9 촌 같은 한국의 촌락 사회는 국가형성 이전의 사회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c hi e f dom 은 국 가형성을 예고하는 정치발전단계가 된다. 이에 한국의 촌락(추장)사회 를 c hi e f dom 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c hi e f dom 은 모두가 sta te 단계 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c hi e f dom 으로 지속되거나 조직이 무너지는 경우도 있다. 한편 지금까지 인류학자들은 개별 사회가 c hi e f dom 인가 s t a t e 인가 하는 문제들을 주로 다루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한 국의 촌락(추장)사회가 인류학의 이론 발전에 기여할 대목을 찾을 수 있다. 죽 한국의 촌락(추장)사회는 발전을 멈춘 것이 아니라 소국 단계 로 발전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 촌락사회에서 국가 단 계로 넘어가는 예를 제시한 것 자체가 인류학적인 연구의 폭을 넓힌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음은 소국 , 소국연맹 , 소국병합 단계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한국 사상 성장하였던 소국들이 국가 단계에 들어섰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 다. 그것은 그리스의 도시국가 또는 소국들의 예로 보아 알 수 있다 .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ch i e f dom 이 아니라 국가였던 것이 분명하다. 한국의 초기국가들은 분명 s t a t e 로서 소국을 형성한 후 중앙집권적 귀 족국가 또는 중앙집권적안 왕국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소국 - 소국연 맹 _ 소국병합 단계를 거쳤다. 지금까지 인류학에서는 이와 같은 정치 발전에 대한 연구를 한 예가 많지 않다. 따라서 본고의 작업 결과는 인류학 연구에 하나의 새로운 예를 제시한다는 의의도 있다 . 소국연맹 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이나 델로스 동맹과 같은 것이 아닐지 라도 서로 비교는 된다 . 그리고 한국의 소국연맹은 중국 은나라의 성 읍국가연맹 또는 방국연맹과 비교된다. 한편 소국병합 단계의 지방통 치체제를 보면 고조선 • 부여 • 고구려는 중국 주나라의 봉건제적인 모 습도 엿보인다. 그에 비하여 보다 늦게 정치적 발전을 이룬 신라는 봉 건제적인 지방통치가 아니라 한층 중앙집권화된 지방통치를 한 것을 볼수 있다. 한국 초기국가에 대한 해명을 통하여 인류학 이론의 발전에도 기여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인류학 이론은 완성된 것도 없고 , 완전한 것도 없 다. 따라서 본고의 연구는 인류학의 이론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믿는 다. 특히 한국 초기국가 형성기에는 많은 나라들이 성장하였고, 또 일 련의 정치적인 발전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제공하고 있기에 그 중요성 이 크다. 한국 초기국가에 대한 해명도 중요하고 본고를 통하여 얻어 진 촌락(추장)사회 -소국-소국연맹 -소국병합 단계는 c hi e f dom 에서 early s tate로 발전한 것을 보여주고 나아가 early s t a t e 에서 연맹, 병 합 단계로 발전한 것을 보여준 사실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2 한국 초기국가 형성기의 정치지배세력 필자는 이미 기존의 견해와는 달리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발전 과 정을 촌락사회 -소국-소국연맹 -소국병합 단계로 나누어 보았다 .61 ) 이 는 한국 초기국가 형성기에 대한 시대구분을 한 것을 뜻한다. 여기서 새로운 시대구분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고 한국 초기국가 형성기의 정치형태를 해명하기 위하여 당시 국가형성과 정치적 성장을 주도한 정치지배세력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한국의 초기국가 발전 과정에 등장하였던 정치지배세력에 대한 이해 없이는 국가형성과 발전에 대한 이해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한 국 초기국가의 정치지배세력들이 신석기시대 또는 청동기시대 이래의 정치세력의 후예들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한국사상 등장하는 초기국가 로서 소국의 국가형성세력은 모두 이주민집단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소국형성세력들에 대한 이해를 새로이 할 필요가 있다. 한편 지 금까지의 견해에 나오는 연맹왕국(부족연맹) 단계를 필자는 대체로 소 국연맹과 소국병합 단계로 나누어 보고 있다. 실제로 소국연맹 단계에 서는 각 소국들이 독립을 유지하였으며 각기 정치지배세력들을 갖고 있었다. 그에 비하여 소국병합 단계에 들어서면 여러 소국을 통합한 나라의 지배세력이 국가 전체의 정치지배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과거 소국들의 지배세력들은 제거되거나 극히 일부의 세력만이 왕경으로 사 민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머지 과거 소국의 세력들은 지방 신분집단 으로 편제되었다. 물론 고조선 • 부여 • 고구려에서는 그러한 지방세력 들이 일종의 제후적인 존재로서 인정받고 왕경의 정치무대에 등장하는 일이 있었다. 그에 비하여 신라에서는 지방세력을 보다 중앙집권적인 방법으로 통제하여 그들이 중앙에 진출하기가 어려웠다. 지금까지 이와 같은 한국 초기국가 형성기의 정치지배세력에 대한
61) 李鍾旭 『韓國初期國家의 形成 • 發展段階』, 《韓國史硏究》 67, 1989, pp. 1~26.
본격적인 연구는 거의 없었다 . 본고에서는 기존의 연구 중 이와 관련 된 것을 찾아보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어 소국형성 이전 의 추장사회 단계의 정치지배세력에 대하여 살펴보고, 소국 • 소국연 맹 • 소국병합 단계의 정치지배세력에 대한 문제를 차례로 정리하기로 한댜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하여 한국 초기국가의 형성에 대한 연구가 한 걸음 진전하기를 기대한다. (1 ) 기존 연구와 문제점 먼저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세력에 대한 견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金哲峻은 씨족사회의 생활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며 가부장 가족이 주체 가 되어 부족국가를 세웠다고 하였다. 그가 말하는 씨족사회는 대체로 신석기시대 이래의 조직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62) 한편 李 基 白은 청동기를 권위의 상징물로 소유하고 고인돌에 묻힐 수 있는 특권을 지 닌 사람들이 城邑國家의 정치적 지배자들이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와 같은 성읍국가의 지배자들은 신석기시대의 부족장의 후예로서 그 전통을 이어받은 자였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63) 여기서 한국의 초기국가 로서 성읍국가를 형성한 세력들이 과연 신석기시대 이래의 부족장의 후예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긴다. 뒤에 소국의 형성세력에 대하 여 정리할 때 다루기로 하겠지만 한국의 초기국가로서 대표적인 나라 들인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건국신화를 주목하면 그 건국세 력들이 모두 이주민 세력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한국 초기국가 의 형성세력들이 신석기시대 이래의 부족장의 후예일 수 없다는 근거 가 된다. 더욱이 소국 또는 성읍국가 형성 이전의 촌락세력들마저 이 주민이었을 가능성이 있기에 촌락사회의 다음 단계에 해당하는 소국의
62) 金哲浚 『 韓國古代國 家 發達史 』 , 1ITT5, pp. 46~49. 63) 李基白 , 『 韓國史新 論』 (新修版), 1990, p. 32.
형성세력은 신석기시대 이래의 지배세력들일 수 없다. 다음은 소국형성세력과 그 이전 촌락사회의 지배세력과의 관계에 대 한 기존 견해의 문제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신라 의 모체가 되었던 斯盧國의 지배세력이었던 박씨족, 석씨족, 김씨족과 촌락사회시대 각 촌의 지배세력이었던 6 촌장 세력의 후예들과의 관계 를 생각할 수 있다. 金哲浚은 신라에서는 박 • 석 • 김 3 부족이 부족연 맹을 형성하였는데 각 부족장들은 居西干이라고 하였고 부족연맹장은 尼師今이라고 하였으며 김씨의 왕위세습권이 확립된 후에는 麻立干이 라고 칭하였으며 6 부는 각기 부족국가라고 하였다.터) 이와 같은 견해에 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 첫째, 박 • 석 • 김씨족들은 부족집단이 아니 었으며 더욱이 부족연맹을 형성한 것은 아니었다. 혁거세를 시조로 하 는 박씨족, 탈해를 시조로 하는 석씨족, 알지를 시조로 하는 김씨족은 대체로 이주민집단으로 여겨지는데 그들이 사로지역에 이주한 시기는 사로국의 국가형성 전후였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그들은 신라 초기에 정치적인 세력동맹을 맺어 정치적인 지배세력이 되었던 것이 틀림없 다. 3 씨족은 세력동맹을 통하여 과거 촌락사회시대 각 촌의 지배세력 이던 6 촌장들의 후손들보다 한 단계 높은 정치세력이 될 수 있었고 나 아가 3 씨족 세력은 6 촌장 계통의 후손들보다 한 단계 높은 신분충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할 것은 박씨족 • 석씨족 • 김씨족 세력들이 각기 居西干이 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신라시 대에는 늘 한 명의 왕이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의 각 왕의 즉위조와 『삼국유사』 王曆편에 나오는 왕들이 왕위를 계승 하여 나간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한 왕위계승에는 일정한 계승원 리와 3 씨족 사이의 정치적인 세력관계가 작용하였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신라의 정치적 성장 과정에서 왕의 지위에도 일정한 변동이 있 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왕호도 변경되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居西干
64) 金哲浚 앞의 책, 1975, p. 76.
이라는 칭호는 혁거세 한 사람을 지칭한 호칭이고 尼 師今은 3 대 儒 理 王에서 16 대 訖解王까지 사용한 칭호였다. 그리고 麻 立干은 17 대 奈 勿 王 또는 19 대 訥祗王부터 사용한 칭호였다. 여기서 金 哲浚이 말하는 것과 같이 3 부족(씨족)의 부족장들이 居西干이라는 칭호를 가졌다는 견해와 부족연맹장이 尼師今이었다는 견해는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6 부가 각기 부족국가라고 한 것도 잘못된 견해임이 분명하 다. 혁거세에 의하여 사로국이 형성된 후에는 과거 촌락사회시대 사로 6 촌 촌장들의 후예들은 6 촌의 지배세력으로 그대로 남게 되었다고 여 겨지지만 사로국의 왕 밑의 제 2 급의 지배세력집단으로 자리잡게 되었 던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사로국 형성 이후에는 6 촌이 부족국가일 수 없다. 오히려 과거 6 촌은 사로국의 지방행정구역으로 되어 후일 6 부로 편제되었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 다음은 사로국의 지배세력에 대한 李基白의 견해롤 주목할 수 있다 . 그는 한국사상 존재한 성읍국가 중 사로국은 及 梁 등 6 개 씨족의 후예 들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혁거세는 급량 출신 이었다고 보며 처음은 급량에서 사로국의 지배자가 선 출 되었다고 하였 다 . 혁거세의 왕비였다고 하는 關英은 사량 출신이었기에 사량은 급량 다음 가는 유력한 존재였다고도 하였다. 그 후 동해안 지역으로부터 진출한 탈해가 주도권을 잡았는데 당시에는 이미 주위의 여러 성읍국 가들과 연맹관계를 맺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견해에서도 사로국의 지배세력인 혁거세집단과 6 촌과의 관계에 대한 혼동이 일어 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우선 혁거세는 6 촌장의 후예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 둘 필 요가 있다. 그러한 사정은 탈해나 알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들의 후손인 박씨족 • 석씨족 • 김씨족은 모두 과거 촌락사회시대의 6 촌장의 후예들일 수 없다 . 혁거세 • 탈해 • 알지 등은 이주민으로 각기
나정 • 월성 • 계림에 정착하였던 것은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In) 그 런데 그와 같은 세 씨족은 신라의 왕을 배출하는 최고 지배세력이 되 었고 상호 결혼을 통한 세력동맹도 맺었다. 그 결과 세 씨족들이 왕과 왕비 둥을 배출하는 왕실세력으로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왕실세력 을 이룬 세 씨족의 성원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들은 나정 • 금성 • 월성 • 계림을 포함하는 사로국의 정치중심구역에 살게 되었으며 점차 그들의 집단 성원이 늘어나면서 정치중심구역도 커지게 되었다 . 그러 한 정치중심구역은 후일 신라 왕경의 王 都로 되었다 . 한편 사로 6 촌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사로국의 지방행정구역으로 되었고 후일 왕 경 6 부로 편제되었다. 종래 촌락사회시대의 6 촌장의 후예들은 6 부의 지배세력으로 되었고 후일 각 부에 사는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姓이 주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부에 주어진 성씨는 과거 촌락사회의 후예들 에게 주어진 것임이 분명하다. 그와는 달리 왕실세력들은 그들의 성인 朴 • 昔 • 金 의 성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사로국의 정치중심구역은 과거 사로 6 촌 중 세 개 촌에 일부 걸쳐 있었다. 나정과 금성은 돌산 고허촌지역인 신라 왕경의 사탁부에 위치하여 있었고 월성과 계림은 알천 양산촌이 개편된 왕경 6 부의 탁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 로국의 정치중심구역은 그 외에 본피부의 일부 지역도 점하였다. 여기 서 한 가지 다시 분명히 하고 넘어갈 문제는 박·석 ·김 세 씨족과 과 거 6 촌장 계통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6 성 집단 사이에는 엄격한 신분적 간격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박 • 석 • 김씨족들이 6 부보다는 정치중심구 역, 후일의 왕도에서 세력을 일으킨 집단이었음을 상기하면 그들을 6 촌장의 후예로 보거나 6 촌 출신이었다고 보는 견해는 따를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사상 등장한 다른 나라들도 대체로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다음은 한국 초기국가의 성장 과정에 편제되었다고 하는 신분제에
65) 李鍾 旭, r 新 羅國家形 成史硏究 』 , 1982, p, 231 .
대한 기존 견해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로 한다. 이는 한국 초기국가의 신분제 편성과 지배세력의 실상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한국의 초기 국가 성장 과정에서 촌을 통합하여 소국을 이루고 소국들의 연맹에 의 하여 소국연맹이 형성되었으며, 나아가 소국들을 통합하여 소국병합을 이룬 정치체가 성장하였다. 이는 바꾸어 말하여 한국의 초기국가 성장 과정은 정치적 통합의 역사라고 할 수도 있다. 그 과정에 새로이 병합 된 지역의 지배세력과 통합을 주도한 국가의 지배세력들은 어떻게 신 분 편제를 하였는지 궁금하다. 여기서 신라의 지배체제의 편성에 대한 견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金哲浚은 신라 고대국가의 지배체제 편성 은 곧 족장 세력의 편제였다고 하며, 신라의 관계 조직을 보면 9 간과 같은 기충에 있는 촌장 또는 씨족장 세력에게는 4 두품 신분을 주고, 그러한 족장급을 통합한 보다 큰 세력에게는 5 두품을 주고, 그 위에 성립된 부족국가의 세력 예컨대, 『삼국지』 위서에서 말하는 君長이나 『삼국사기』에 나오는 居西干 급에게는 6 두품을 주고, 2 개 이상의 부족 을 통합하여 부족연맹을 이룬 세력이나 그것에서 轉化한 중앙귀족에게 는 진골 신분을 준 것으로 주장하였다.f,6) 이러한 견해는 지금까지도 이 어지고 있다. 전덕재는 〈신라국가가 대체로 지방 소국이나 읍락의 수 장충, 지배계층을 중앙의 관둥에 홉수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라고 하였다 .67) 한편 朱甫敵은 〈적어도 관등상으로 干群을 칭하는 것으로 미 루어 진골과 6 두품은 복속 • 피복속의 차이나 세력 기반의 규모에 의한 차이는 있었을지라도 본질적으로 족장적인 기반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 서 동질적이었다〉 고 하였다 .68) 李基白은 연맹왕국시대에 중앙집권적인 지방통치체제가 채용되기 시작하였으나 연맹체적인 유제도 지녔다고 하였다. 부여나 고구려의 대가들은 가신을 거느렸으며 정치의 실권은
66) 金哲浚, 『韓國古代社會硏究』, 1975, p. 2:17 . 67) 全德在, 『新羅 6 部體制의 變動過程 硏究』, 《韓國史硏究》 77, 1992, p. 13. 68) 朱甫暖 『三國時代의 負族과 身分制』, 『韓國社會發展史論』, 1993, p. 40.
오히려 왕족이나 왕비족의 가계장이라고 생각되는 그들 대가들에게 있 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 부여와 고구려의 대가는 삼한의 신지나 읍차와 같은 성읍국가의 지배자들과는 달리 중앙의 귀족적 정치세력으 로 성장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OO ) 그러면 신라의 소국병합 과정에 병합 촌락과 소국의 지배세력을 어 떻게 편제하였을까 . 그리고 과연 지방세력들이 중앙귀족화하는 현상이 있었을까. 먼저 피병합 세력의 신분 편제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신라 의 골품제롤 보면 왕경인의 신분과 지방민의 신분이 다른 체계에 있었 던 것을 알 수 있다 . 이는 신라가 이웃한 소국을 병합하고 또 가야와 같은 소국연맹을 병합한 후 피병합국의 지배세력들은 지방신분제에 편 입한 것을 뜻한다. 따라서 피병합국의 지배세력에 대한 중앙귀족화 문 제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본가야의 마지막 왕이었던 金仇亥와 그의 세 아들들이 신라의 왕경으로 이주되어 신라의 진골 신분으로 편 제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면 피병합국의 지방세력들에 대한 중앙귀족화 현상이 보편적으로 행하여졌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기 본적으로 피병합국 세력들의 중앙귀족화 현상은 거의 불능하였음에 틀 림없다. 따라서 金仇亥 일족의 왕경 이주와 진골 편제라는 사실은 예 외적인 현상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고조선의 조선상, 니계상 등이 중앙 정계에서 활동한 사실과 부여나 고구려의 대가들이 가신을 거느리고 중앙 정계에서 활동한 것 은 어떻게 볼 것인가 궁금해진다. 다음 장에서 다시 다룰 문제이기에 간단히 결론만 언급하자면, 부여나 고구려의 가신을 거느린 大加들은 일종의 제후적인 존재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중앙 정계에 진 출하여 활동을 벌였다고 하더라도 그 본질은 지방의 제후적인 존재였 으며 당시의 통치체제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다음은 연맹왕국 단계에서는 왕실의 교대 현상이 있었으나 정복 활
69) 李基白, 『韓國 史新論 』 , 1990, pp. 52~54.
동이 진행되면서 왕권이 강화되고 왕위도 부자상속에 의하여 세습되었 다고 하는 李基白의 견해를 주목하기로 한다 . 신라 • 고구려 • 부여 등 의 경우에는 왕실의 교대 현상을 찾아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왕실교대 현상 이 연맹왕국 단계의 특성일 수는 없다. 왕실교대는 신라 의 예를 통하여 보면 신라의 모체가 되었던 사로국의 지배세력들이 동 맹을 맺었던 산물일 뿐이다. 그리고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고구려의 왕 실교체는 소국연맹의 맹주국의 변동이거나 신라와 같이 고구려 소국의 지배세력의 동맹체의 지배권 변동 정도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 (2) 촌락사회 단계의 정치지배세력 소국형성 이전 촌락사회시대의 정치세력에 대한 이해를 얻기 위한 자료는 많지 않다. 그러나 앞에서 제시한 『삼국사기 』 와 『 삼국유사』에 나오는 사로국과 가락국의 건국신화의 내용과 지석묘와 같은 고고학적 인 자료를 주목하면 촌락사회의 정치세력에 대한 대체적인 윤곽은 파 악할 수 있다. 여기서 한국 촌장사회의 정치세력들에 대한 이해를 위 하여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나오는 6 촌, 6 부, 촌장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아래와 같은 표를 만들 수 있다.
〈표 8> 『 삼국유사 』 에 나타난 6 촌 • 6 부 斯盧六村 王京六部 高 麗初六部 六村名 六村長 降始臨祖地 六部名 姓 六部名 部위치의 六관部계의 l 關川楊山村 誕平 흙墓峯 及梁部 李 中興部 (中央) 母 2 突山高塘村 蘇伐都利 兄山 沙梁部 鄭(崔) 南山部 南村 3 茂山大樹村 供 禮 馬 伊山 牟(潮)梁部 孫 長福部 西村 父 4 觜山珍支村 智伯虎 花山 本彼部 崔(鄭) 通仙部 東南村 5 金山加利村 祗花 明活山 漢岐部 裵 加德部 東村 女 6 明活山高耶村 虎珍 金剛山 習比部 薛 臨川部 東北村 子
뒤에 제시하는 사료 B4 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할 수 있 다. 첫째, 혁거세가 등장하여 사로국을 형성할 무렵 사로지역에는 6 촌 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댜 사로국은 그와 같은 6 촌을 통합하여 형성 되었던 소국이다 둘째, 사로 6 촌에는 각기 촌장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삼국유사 』 의 기록에는 6 부조와 그들의 자제에 대한 기록이 나 오고 있댜 그런데 『 삼국사기 』 의 기록에는 돌산 고허촌장인 소벌공이 나오고 『삼국유사 』 의 기록에는 6 촌장의 이름과 그들이 내려온 곳 그리 고 그 후 6 부 성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사로국 형성 이전 사로 6 촌의 촌장이 어떠한 정치적 존재였 는지 생각하기로 한다 . 『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前 漢 地節 元年(기 원전 69) 에 6 촌장과 그 자제들이 關川岸上에서 모여 덕이 있는 사람을 君 主 로 삼고 立邦 設 都하기 위한 회의를 여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그 기록 내용을 그대로 믿기에는 문제가 있으나 일정한 역사적인 사실이 담겨 있는 것이 분명하다 . 그 중 6 촌장들이 자제를 거느리고 회의에 참석한 것은 의미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제는 촌장의 혈족집단을 의미한다. 이에 촌락사회시대에는 촌장과 그 일족들이 사회 • 정치적으 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 』 의 기록을 보면, 혁거세가 등장할 때 있었다고 하 는 6 촌장들은 6 촌의 祖로 되어 있고 그들이 처음 6 촌으로 내려온 것으 로 되어 있다. 그러나 6 촌장들이 혁거세가 등장할 무렵 6 촌에 내려온 것으로만 보기에는 어려운 문제가 있다. 그것은 혁거세가 등장할 당시 사로 6 촌에는 고조선계의 유민과 과거 지석묘를 축조하고 있던 시대의 사회 • 정치적 세력집단이 있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 그 중 청동기 롤 사용하고 지석묘를 축조한 주인공들이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활동하 던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7 세기에서 기원전 2 세기경으로 추측되고 있 기에 6 촌장 역시 그러한 기간에 존재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고 보면 6 촌의 조에 대한 인식도 그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
기원전 7 세기경부터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짐작이 간다 .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촌의 시조와 그 촌장에 대한 계보 파악은 청동기시대, 지석묘 를 축조하던 시대 이상으로 올라가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 이는 촌 락사회 단계의 정치적 지배세력 들 이 신석기시대의 전통을 이었다는 견 해와는 다른 것을 뜻하다 . 여기서 『삼국유사 』 에 나오는 기록 중 6 촌장들이 하늘로부터 峰 또는 山에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는 기록을 주목할 수 있다. 이는 6 촌장의 천강설화를 보여주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천강설화가 갖는 역사적 인 의미는 무엇인지 단정하기 어려우나, 6 촌장들이 이주민이었던 사실 을 반영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이 타당하다면 사로 6 촌의 시조와 그 뒤를 이었던 촌장들에 대한 계보를 사로 6 촌의 주민 들이 파악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단지 그 계보 파악은 역사적인 변동을 겪었다고 추측되기에 『삼국유사 』 에도 6 촌의 조가 마치 혁거세가 등장 할 때 있었던 것처럼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촌락사회 단계의 각 촌락에 살던 사람들은 그들이 살던 촌의 시조와 그 후의 촌장들에 대한 계보를 파악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그러한 촌장들에 대한 계보 파악은 사로 6 촌에만 국한하지는 않았다고 여겨진다. 고조선지역의 소국형성 이전의 사회에는 곰을 상징으로 하 는 집단이 있었고 그들이 바로 추장사회 단계에 있었다고 생각하여 보 았다 . 7 0 ) 이에 요동지역에서도 적지 않은 수의 촌락들이 추장사회 단계 에 이르러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그들도 촌의 시조와 촌장들에 대한 계 보를 파악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 그러한 현상온 夫 餘 , 高 句 麗 , 沃沮, 澈 및 가락 9 촌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단지 촌을 통합 하여 소국을 형성한 후 소국 형성세력의 정치적인 중요성이 커졌고 더 욱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사로국 이외의 촌락사회의 정치적 지배세력에 대한 자료는 사라지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70) 李 鍾 旭, 『 古朝 鮮 史硏究 』 , 1993, pp, 62~64.
촌락사회시대 촌락의 시조와 촌장들의 계보에 대한 인식은 당시 보 편적으로 있었다고 믿어진다. 그러한 촌의 시조와 그 뒤를 이었던 촌 장들에 대한 계보 파악은 사회 •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 다. 하나는 촌락에 살던 사람들이 그들의 시조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씨족집단을 구성하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촌락의 시조는 촌 락민의 혈연적인 관계를 정해 주는 기준이 되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 다. 다른 하나는 촌장에 대한 계보 파악은 촌장이라는 정치적 • 사회적 권력자가 존재하였던 사실을 말해 준다. 여기서 촌락사회 단계의 씨족에 대한 문제롤 잠시 정리하기로 한다. 사로 6 촌을 예로 들기로 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혁거세가 등장하던 시기의 6 촌장들이 각각 신라 왕경 6 부의 주민들에게 부여한 鄭·李경~.薛.崔·孫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7“ 그런데 혁거세의 등장시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 6 촌장들이 6 부에 주어진 성씨의 시 조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 훨씬 이전 촌락을 이루었 던 시조들이 있었고, 그들을 조상으로 하는 촌락민들이 하나의 혈연집 단을 이루었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촌락민들은 그들의 시조와의 관계 를 알고 있었고, 그러한 이유로 촌락민들 사이에는 혈연적인 관계를 알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혈연적인 관계는 촌락민들의 지위를 결정하 여 주는 중요한 원리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촌장들은 씨족집단의 장이었다고 헤아려진다. 실제로 공동시조 를 가지고 있었고 촌장의 계보를 파악하고 있던 촌의 주민들은 각기 촌을 단위로 하는 씨족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믿어진다. 물론 촌 락사회시대에도 주민들의 이동은 계속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일단 추장사회에 들어선 사회에 새로이 이주한 세력들은 결혼이나 의제가족 적인 관계에 의하여 점차 촌락민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도태되었다고 생 각된다. 이에 한국 촌락사회는 오랜 기간 동안 씨족집단이 유지되었다
71) 『三國迫康』 1, 紀異 2, 新羅始祖 赫居世王조.
고 보여진댜 그 후 고조선의 정치적인 변동이 생겼을 때 고조선계 주 민들이 주변의 추장사회로 이주하며 점차 소국을 형성할 기운이 익어 가게 되었다. 당시 촌락사회의 정치 • 사회적인 성격에 변동이 나타나 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3) 소국 단계의 정치지배세력 앞에서 촌락사회 단계의 정치지배세력에 대한 문제를 정리하여 보았 다. 이제 몇 개의 촌락을 통합하여 이루어진 소국의 정치지배세력에 대한 문제를 알아보기로 한댜 이에 대한 이해롤 위하여 먼저 한국 초 기국가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정치지배세력에 주목하기로 한다. 이와 관련된 사료를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댜 B (1) 魏略에 말하기를 舊 志에 또 말이 있다. 옛날 북방에 高 離라는 나 라가 있었는데 그 왕의 시비가 임신을 하였다 . 왕이 그를 죽이려 하자 碑 가 말하기롤 달걀 같은 기운이 나에게 내려온 까닭에 임신을 하였다 . 후 에 아들을 낳았다. 왕이 그 아이룰 돼지우리에 버리자 돼지가 입김을 불 어 죽지 않았고, 마구간으로 옮겼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 다. 왕은 천제의 아들이라 생각하여 그 어머니에게 기르도록 하고 동명이 라고 하였다. 늘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동명은 활을 잘 쏘았다. 왕은 그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동명이 달아나서 남쪽 施俺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서 다리를 만들었다 .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홑어지고 추격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동명은 도읍을 정하여 부여의 땅에서 왕이 되었다.(『 三 國志 』 魏 書 東夷傳 夫餘전 所收 魏略) (2) … 朱蒙은 이에 烏伊 • 摩離 • 陝父 둥 세 사람과 더불어 벗이 되어 俺切水에 이르렀는데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 추병이 쫓아올까
두려워하여 강물에 고하여 말하기를 〈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 으로 금일 도망하는데 뒤쫓는 자가 닥치면 어찌하겠는가? 〉 하니 이 때 물 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이루었다. 주몽이 무사히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지고 뒤를 쫓던 기병은 건너지 못하였다 . 주몽이 모둔곡에 이 르러 세 사람을 만났댜 한 사람은 삼베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중의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마름옷을 입었다. ... 주몽은 재사에게 극씨라는 성을 주고, 무골에게는 중실씨, 묵거에게 소실씨라는 성을 주었다 . 이에 여러 사람들에 게 이르기를 〈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를 세우려 하 는데 마침 세 현인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니겠는가? 〉 하고 드디어 그 재능을 헤아려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에 이르렀 다 . 그 토양이 기름지고 산하가 험고함을 보고 마침내 도읍을 정하려고 하였는데 미처 궁실을 지을 겨룰이 없어 비류수 가에 단지 띠를 이어 살 았다.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고 인하여 고로써 성을 삼았다. 이 때 주몽의 나이는 22 세인데 한 효원제 건소 2 년, 신라시조 혁거세 21 년 갑신년이었 다 . ( 『三國 史記 』 13, 高 句 麗 本紀 1, 始祖東明聖王 즉위조) (3) 백제 시조 온조왕은 그의 아버지가 추모인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 다.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부여왕은 아들은 없고 세 딸만 있었다. 주몽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처로 삼게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왕위를 이었 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이고 둘째 아들은 온조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용납되지 못할 까 염려하여 드디어 오간 • 마려 동 十臣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떠나니 백 성들 중 따르는 자가 많았다. …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하고 십신을 보익으로 삼아 국호를 십제라 하니 이 때는 전한 성제 홍가 3 년이었다. (『三國史記』 23, 百濟本紀 1, 百濟始祖 溫祚王) (4) 시조의 성온 박씨이고 이름은 혁거세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 자 4 월에 왕위에 오르니 왕호는 거서간이다. 그 때 나이가 13 세였다. 나라
이름을 徐那伐이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이 산곡 사이에 나 누어 살며 6 촌을 이루었는데 …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 나정 옆의 숲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을 보고 곧 가서 보니 문득 말은 볼 수 없고 단지 큰 알이 있었다. (그것을) 깨니 갓난아이가 나왔다. 곧 데려다 길렀는데 나이 십여 세가 되자 기골이 준수하고 숙성하였다. 6 부 인들은 그 출생이 신이하여 높이 받들고 존경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임 금(君)으로 삼았다.(.『三國史記 』 1, 新羅本紀 1, 始祖赫居世 居西干) (5) … 그 열두 시간이 지난 후 날이 샐 무렵에 무리들이 다시 모여 합 을 열었더니 알 여섯이 동자로 되었는데 용모가 심히 위엄이 있었다. 이 내 걷상에 앉으니 무리들이 배하하고 공경을 그치지 않았다. 나날이 자라 10 여 주야가 지났다. 키가 9 척인데 殷의 天乙과 같고 얼굴은 용과 같아 漢高祖와 같고 눈썹이 八字로 채색이 나는 것은 唐 高祖와 같고, 눈동자 가 두 겹으로 된 것은 漠의 舜과 같다. 그 중 하나가 그 달 보름날에 왕위 에 오르니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수로라고 했는데 혹은 首陵이라 고도 했다. 나라를 大鷲洛이라 칭하였고 또는 伽耶國이라고도 하니 곧 여 섯 가야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갈 곳으로 가서 다섯 가야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이요, 서남쪽은 창해요, 서북쪽은 지리산 이요, 동북쪽은 가야산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대가락의 왕은 임시 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여기에 거처하였는데 질박하고 검소한 것을 승상 했으니 집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았고 흙으로 쌓은 충계는 겨우 3 척이 었다.(『三國遺事』 2, 紀異 2, 鷲洛國記) 위의 기록들은 한국 초기국가의 건국신화들 중 필요한 부분을 인용 한 것이다. 정치지배세력과 관련하여 초기국가의 건국세력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부여의 건국자라고 하는 동명은 고리국으로부터 이주한 세력이고, 고구려를 세웠다고 하는 주몽은 부여로부터 이주한 세력이 었으며, 백제를 세웠다고 하는 온조는 고구려로부터 이주한 세력이었
다. 신라 를 세웠다고 하는 혁거세와 가락국을 세웠다고 하는 수로는 어디서부터 이주하였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들 역시 이주민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다. 여기서 한국의 초기국가로서 소국을 형성하였던 정치세력들은 대부분 선진 정치체로부터의 이주민들이었다 는 생각을 할 수 있다 . 그러면 소국의 건국세력이라고 본 이주민들의 정치적인 성격은 어떠 한 것일까 소국들의 건국세력이었던 이주민들은 정치적으로 선진하였 던 국가로부터 정치적인 갈동 또는 경쟁에서 밀려난 세력들이 분명하 댜 그러나 소국을 형성하였던 이주민들은 선주하고 있던 정치세력들 보다 뛰어난 정치적 • 군사적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 중 유능한 정치적 • 군사적 실력자가 있을 때 촌락사회 단계에 있던 지역에서 초 기국가로서 소국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헤아려진다 . 그러한 예로는 부 여의 동명 , 고구려의 주몽, 백제의 온조, 신라의 혁거세, 가야의 수로 동을 들 수있다. 그런데 소국형성세력들을 보면 하나의 소국을 세우는 데 계통이 다 론 이주민들이 세력을 결탁하기 위한 동맹을 맺는 경우도 있었다. 신 라의 모체가 되었던 사로국의 정치지배세력으로는 혁거세를 시조로 하 는 박씨족 , 탈해를 시조로 하는 석씨족, 알지를 시조로 하는 김씨족이 동맹을 맺었던 것이 분명하다. 고구려는 왕을 배출하던 계루부와 전왕 족이었던 소노부, 왕비를 배출하였다고 하는 절노부 등 세력들의 세력 동맹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 72) 그리고 가야에서는 왕을 배출하던 수로를 시조로 하는 세력과 수로의 비를 배출하였던 허왕후 세력들이 결탁하 여 정치적인 지배세력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초기국가로서 소국을 형성하였던 이주민 계통의 정치지배세력들은 왕위를 차지하였다. 그에 비하여 촌락사회 단계의 지배세력들은 소국 형성 후에도 촌락의 지배세력으로서 그 세력을 유지하였다 . 그러한 예
72) 『三國 志 』 魏꿉 東 夷傳 高 句 麗 傳.
는 사로국 형성 이후 왕위는 박씨족 • 석씨족 • 김씨족에서 차지하였고 과거 6 촌지역에서는 촌락사회 단계의 촌장들의 후손이라고 생각되는 세력들이 세력을 장악한 것으로 알 수 있다 . 73) 소국형성 후에는 이주민 인 정치지배세력들은 촌락을 통합한 보다 큰 정치영역인 소국 전체의 지배세력이 되었고 과거 촌락사회의 후예들은 과거부터 존재하였던 촌 의 세력가로 남았던 것이 된다 . 단지 촌락의 세력집단은 소국의 지방 통치 영역인 촌 또는 부의 지방세력으로 되어 제 2 급의 정치세력으로 편제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선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 사로국을 예로 들어 보면, 과거 사로 6 촌장계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선주세력과 사로국을 세운 박 • 석 • 김씨족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이주민 계통의 지배세력 사이에는 혈연적인 단절이 있었던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 과거 촌락사회 단계의 사로 6 촌에는 촌마다 각기 씨족집단이 있었다고 생각하여 보았다. 당시 촌을 다스리던 중요한 원리는 혈연적인 원리였 다. 그러나 사로국이 형성된 후에는 소국 전체를 다스리는 원리로 혈 연적인 원리는 부적합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주민계 지배세력과 촌락 의 지배세력 사이에 혈연적인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 결국 친족 체계는 국가통치의 적합한 방법일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은 사 로국 이외의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결국 한국 초기국가로서의 소국의 통치는 한충 강력하게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이주민들에 의하여 소국이 형성되면서 신분이 편성된 사실을 생각하기로 한다. 앞에서 촌락사회 단계의 사회에는 엄격한 신분제는 없었고 촌장과 촌락민 사이에 계급은 존재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데 소국이 형성되면서 이주민 계통의 지배세력들이 왕위를 장악하고 촌들을 통합하여 다스리게 되며 그들 이주민 계통의 주민들과 과거 촌
73) 李鍾旭, 앞의 책, 1982, pp, 234~235.
락사회 이래의 선주세력 사이에 는 엄격한 신분적인 간격이 생기게 되 었다 . 이는 이주민 계통의 정치지배세력 들 이 신분제의 상충 신분을 형 성한 것을 뜻한댜 여기서 한국의 소국형성 과정은 종족적인 신분 편 성 과정인 것 을 알 수 있다. 이주민 계통의 상충 신분충과 촌락민 계 통의 그 밑의 신분층은 종족을 달리한 것이 분명하기에 그러한 사실을 생각할 수 있댜 그리고 촌락민 계통의 주민들은 새로이 자리잡은 상 충 신분 계층민의 지배를 피하여 다론 곳으로 이주할 수 없는 상황 하 에서 그러한 신분층이 갈리게 되었던 것도 알 수 있다 . 소국을 형성하며 지배세력으로 왕위를 장악하고 최고의 신분충으로 자리잡았던 이주민 계통의 주민들은 점차 그 집단의 규모가 늘어나게 되었다. 원래 소국을 형성하기 위하여 이주민들 사이에 동맹관계를 맺 은 바 있다. 그와 같은 동맹관계는 결혼을 통하여 나타났다. 그러한 예 는 사로국의 지배세력이 되었던 박씨족 • 석씨족 • 김씨족 사이의 관계 를 통하여 알 수 있다 . 74) 그와 같은 이주민 계통의 지배세력은 왕과 왕 비를 배출하며 왕실세력으로 성장하여 나갔다. 그런데 이들 왕실세력들은 그들의 지배세력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 기 위한 장치를 갖고 있었다. 그러한 예로 건국신화를 들 수 있다. 고 조선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에 나오는 단군은 고조선 소국의 지배세력 의 시조 탄생을 보여주고 있다 . 그러한 사실은 부여 •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초기국가 형성세력들은 각 씨족별로 그들의 존재를 상징하는 장치가 있었다 . 사로국의 건국세력 인 박혁거세집단은 말, 석탈해집단은 까치, 김알지집단은 닭을 그들의 상징으로 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러한 상징적인 존재는 각 씨족 의 토템적인 기능을 가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한편 왕실세력들은 각기 그들의 시조에 대한 제사를 수행한 것을 알 수 있다. 시조묘의 존재는 그러한 사정을 말해 준다. 시조묘에 대한 제사는 종교적인 행
74) 李 鍾 風 『 新 羅 上代王位 繼 承硏究 』, 1980, pp. 194~195.
사일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시조의 후손들을 한데 묶는 기능을 한 것 이 분명하다. 시조묘에 대한 제사를 행할 때에 그 참석자들은 시조의 후손들이 중심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 혈족집단의 계보를 파악하고 있었고 자연 혈족 안에서 그들이 차지 하는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소국형성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왕실세력들은 그들의 혈족집단의 규 모가 확대되었다고 여겨진다. 그 과정에 왕을 배출하는 중심계보에서 멀어진 집단은 가계가 분지되어 나갔다고 믿어진다. 당시 왕으로부터 혈연적으로 멀어진 왕실세력들은 점차 정치적 • 신분적으로 격이 떨어 지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예는 후일 신라의 족강 현상에서 찾 아볼 수 있다. 일단 족강을 당하면 그들의 신분적인 지위도 떨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국가가 형성된 이후 혈연적인 원리는 왕국의 최상부에 서 왕위계승과 같은 중요한 일에만 적용된 것을 알 수 있다. 과거 촌 락사회 단계에서는 혈연적인 원리가 정치적인 원리로 작용한 데 반하 여 국가형성 이후에는 혈연적인 원리는 국가를 다스리는 원리가 될 수 없었다. 다음은 소국 단계의 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지배세력들의 거주지에 대한 문제를 보기로 한다. 고조선의 왕은 왕검성에 살았던 것으로 되 어 있다 .75) 고구려의 주몽은 고구려를 처음 세울 때 겨를이 없어 비류 수 가에 초막을 지온 것으로 되어 있으나(사료 B2), 4 년 7 월에는 성곽 과 궁실을 지온 것으로 되어 있다尸 백제의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 읍을 정하고 십신의 보좌를 받아 십제를 세운 것으로 나오고 있다(사 료 B3). 신라는 혁거세 21 년에 서울에 성을 쌓아 금성이라 한 것을 볼 수 있다. 77) 혁거세왕 26 년 봄 정월에는 금성에 궁실을 지은 것으로 나
75) 『三國遺事』 1, 紀異 2, 古朝鮮조. 76) 『三國史記』 13, 高句麗本紀 1, 始祖東明聖王 4 년 . 77) 『三國史記』 1, 新羅本紀 1, 始祖赫居世 21 년조.
오고 있다 .7Bl 가락국의 수로왕 2 년에 주위 1 천 5 백 보의 羅城에 宮禁殿 宇 및 여러 관청 건물과 무기고, 곡식창고의 자리를 잡고 먼저 성을 쌓고 이어 궁궐과 집들을 지온 것으로 나오고 있다 .79 ) 위와 같이 소국을 건국한 왕들이 성을 축조하고 또 그 안에 궁실을 축조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성과 그 안의 건물들이 갖추 어졌던 사정은 여러 소국들이 같았다고 여겨진다. 그 중 성위 존재는 城邑國家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면 한국의 초기국 가로서 형성되었던 소국들의 성은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을까. 여 기서 李基白의 견해를 주목할 수 있다. 그는 청동기를 권위의 상징물 로 소유하고 고인돌에 묻힐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사람들은 대체로 신 석기시대 부족장의 후예들일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적 인 지배자들은 나지막한 구릉 위에 토성이나 목책을 만들고 스스로를 방위하면서 그 바깥 평야에서 농경에 종사하는 농민들을 지배해 나가 는 정도였다고 하였다.Ir)) 위와 같은 성읍국가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 다. 첫째, 성읍국가의 지배자들이 신석기시대의 부족장의 후예일 것으 로 본 점을 들 수 있다 . 앞에서 정리한 바에 의하면 소국의 형성세력 들은 이주민들로서 신석기시대는 물론이고 소국형성 이전에 존재하였 던 촌락사회의 지배세력들과도 혈연 및 종족을 달리한다는 사실을 생 각할 필요가 있다. 둘째, 한국 초기국가의 성은 정치적 지배세력들의 거주지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중국 은나라와 주나라의 경우 성읍에 는 지배세력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살았다 .8 1) 이에 중국에서는 성 옵국가의 존재를 상정하기 어렵지 않다. 그에 비하여 한국사에 나타
78) 『三國史記』 1, 新羅本紀 1, 始祖 赫居世 26 년조 79) 『三國遺事』 2, 紀異 2, 篤洛國記 80) 李基白, 『韓國史新論』(新修版), 1990, p. 32. 81) 李春植, 『中國古代史의 展開』, 1986, pp. 46~47.
나는 성들은 일반 백성들의 거주지가 될 수 없었기에 같은 성읍국가라 고 하더라도 중국의 그것과는 성격을 달리하였음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한국 초기국가로서 소국들에 축조되었던 성의 성격에 대하여 정리할 수 있다. 소국의 성들은 李基白이 언급한 것과 같이 지배세력 들의 거처로 그들을 방위하던 시설이었던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그 안에는 왕과 그 일족이 거처하던 궁실이 있었고 관청의 청사, 무기고, 곡식창고 둥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한 성의 규모는 큰 것일 수 없 다. 사로국의 경우 금성에서는 박씨족들이 자리잡았고, 월성에는 석씨 족들이 자리잡았으며, 계림에는 김씨족이 자리잡았다고 생각된다 .821 그 와 같은 금성 • 월성 • 계림 지역은 후일 하나의 도시 안에 위치하게 되 었음에 틀림없다. 이에 소국시대의 금성 • 월성 • 계림을 포함하는 지역 은 사로국 전체의 정치중심구역으로 되었다고 여겨진다 .831 이제 한국 초기국가 형성 과정에 존재하였다고 하는 성읍국가에 대 하여 보기로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정치적 지배세력의 거주 지였던 성옵은 중국의 성읍과 그 성격이 다른 것을 알 수 있게 되었 다. 그리고 성읍국가의 지배세력의 기원에 대한 李基白의 견해와 필자 의 견해가 다론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가 사용하는 성읍국 가의 개념과 시기는 종래의 견해와 다룰 수밖에 없다. 필자가 말하는 성읍국가는 지배세력의 보호시설이었다는 면에서는 李基白의 견해와 일치한다. 그러나 성옵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는 청동기를 사용하 고 지석묘를 축조하던 촌락사회를 넘어선 정치단계인 소국 단계부터일 수밖에 없다.
82) 李鍾旭, 앞의 책, 1982, p. 231 . 83) 위의 책, p. 233.
(4) 소국연맹 단계의 정치지배세력 다음은 소국연맹 단계의 정치지배세력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소국연맹 단계의 각 소국들은 독자적인 정치조직을 갖고 있었다. 따라 서 각 소국을 단위로 한 지배세력들이 편제되었던 사실을 생각하기 어 렵지 않다. 여기서 소국연맹의 정치지배세력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다 음과 같은 사료를 제시할 수 있다. C 23 년 가을 8 월에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이 강역을 두고 분쟁을 하였는 데 왕에게 와서 판결을 청하였다. 왕이 처리하기 어려워 금관국 수로왕이 나이 들고 지식이 많아 불러서 물었다. 수로가 의견을 내 분쟁이 된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 때에 왕이 6 부에 명하여 모여 수로왕을 접 대하게 하였다. 5 부는 모두 이찬으로 주인을 삼았는데 오직 한기부만은 위가 낮은 자를 주인으로 삼았다. 수로가 노하여 그의 종 탐하리에게 명 하여 한기부주 보제를 죽이고 돌아오게 하였는데 종이 음즙벌주 타추간의 집으로 도망하여 의지하니 왕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 종을 찾게 하였는데 타추가 보내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대로 음즙벌국을 치니 그 주와 무 리들이 스스로 항복하였다.(『三國史記』 1, 新羅本紀 1, 婆娑尼師今) 위의 기록은 대체로 소국연맹 단계의 사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 중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의 영토분쟁이 생겼을 때 사로국의 왕이 파사왕에 게 해결을 청한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여기서 사로국이 진한이라는 소 국연맹의 맹주국이 되었던 사실을 생각하면, 맹주국의 역할 중에 연맹 소국들의 영토분쟁을 조정하는 것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탈 해가 끼어든 이유는 잘 알 수 없으나 당시 가야와 사로국을 맹주국으 로 하는 소국연맹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파사왕이 군대로 음즙벌국의 항복을 받은 사실은 역
시 진한연맹에서 사로국이 차지하는 정치적 역할이 컸던 것을 뜻한다. 그런데 위와 같은 소국 간의 관계를 생각하더라도 사로국이 음즙벌 국을 항복시키기 전까지는 각 소국에 왕이 있었던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이는 소국병합이 전개되기 전까지 각 소국의 정치지배세력들이 독자적인 기반 위에 존재하였던 것을 뜻한다. 소국연맹의 각 소국에는 나름대로 독자적인 왕실세력들이 있었고 그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들을 유지하였다고 생각된다. 각 소국의 왕실세력들은 건국신화를 갖고 있었고 그들의 시조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고 믿어진다. 그러면 소국연맹의 맹주국의 정치지배세력들은 어떠한 성격을 지니 고 있었을까 소국연맹의 맹주국은 소국 간의 분쟁을 조정하였고 또 원거리교역을 주관하였다고 생각하여 보았다 .84) 그 과정에 맹주국의 정 치지배세력들의 정치적 • 군사적 • 경제적인 역할은 다른 소국의 지배세 력들의 그것보다 확대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면서도 각 소국들 온 독자적인 신분체제를 유지하였음에 틀림없다. 또한 각 소국의 국민 들은 해당 소국의 국민으로서 존재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위에서 본 소국연맹 단계의 정치지배세력의 편제는 중국 은왕조의 국가조직과 비교된다. 은왕조에는 방 • 읍 • 국의 성읍들이 출현하였다 고 한다 . 그러한 성읍 간에는 상호간의 정치적 • 군사적 헤게모니의 장 악, 토지의 확보, 치수관개 사업을 중심한 경제적 이해관계로 상호 충 돌 대립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정치 • 군사 • 경 제적 이해가 일치한 성읍들이 유력 읍을 중심으로 연맹을 형성하게 되 었는데 은왕조도 그러한 방국연맹 85) 또는 성읍연맹국가를 기반으로 출 현하였다고 한다 .86) 한국의 소국연맹도 그러한 은왕조의 성옵연맹과 유 사한 정치발전단계였다고 여겨진다.
84) 李鍾旭, 앞의 논문, 1989, p. 20. 85) 李春植, 『中國古代國家의 二重構造와 世界觀』, G i細亞硏究) 35- 1, 1992, p. 99. 86) 李春植, 앞의 책, 1986, p. 35.
(5) 소국병합 단계의 정치지배세력 소국병합 단계에 이르면 소국이나 소국연맹 단계와는 달리 여러 소 국을 통합하여 영토와 인구가 크게 확대된 왕국이 출현하게 되었다. 한국사상 소국병합 단계까지 정치적 성장을 하였던 나라는 고조선 , 부 여, 고구려, 백제, 신라 둥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각 나라는 소국병합 단계에 이르렀던 시기가 차이가 있었고 주변 여러 나라의 정치적 상황 도 달랐다. 따라서 소국병합 단계에 이르렀던 나라의 정치지배세력들 의 성격이 같은 것만도 아니었다. 이에 소국병합 단계 왕국의 정치지 배세력에 대한 이해롤 위하여 다음과 같은 자료를 제시하기로 한다. D (1) 좌장군이 이미 양군을 합하여 조선을 급히 치니 조선상 로인과 상 한음, 니계상 참, 장군 왕협이 서로 모의하여 말하였다.(『史記』 朝鮮 万 U 傳) (2) 나라에는 군왕이 있었다. 6 축으로 관명을 정하였다. 마가, 우가, 저 가, 구가, 대사, 대사자, 사자가 있다. 부락에는 호민이 있고 하호라 불리 던 백성은 모두 노복과 같았다. 諸加들은 별도로 4 出道롤 주관하였는데 큰 자는 수천 가, 작은 자는 수백 가를 다스렸다.(『三國志』 東夷傳 夫餘傳) (3) 그 나라에는 왕이 있었다. 관으로는 상, 가, 대로, 패자, 고추가, 주 부, 우대, 승, 사자, 조의, 선인이 있었으며 존비에 각기 등급이 있었다. … 왕의 종족으로 대가들은 모두 고추가를 칭하였다 . 연노부는 본래 국주였 기에 지금 왕이 되지 못하지만 적통 대인은 고추가의 칭호를 얻었고 또한 종묘를 세우고 영성사직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 절노부는 대대로 왕과 혼인을 하여 고추의 칭호를 더하였다. 諸大加들은 또한 스스로 사자 • 조 의 • 선인들 두는데 그 명단을 모두 왕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마치 (중국 의) 경, 대부의 가신과 같은데 회동하여 앉고 일어설 때에는 왕가의 사 자 • 조의 • 선인과 같은 열에 있을 수 없다.(『三國志』 東夷傳 高句麗傳)
(4) 7 년 봄 2 월 골벌국왕 아음부가 무리를 이끌고 내항하여 제택과 전 장을 주어 편안히 지내게 하고 그 땅을 군으로 만들었다.( 『 三 國史記』 2, 新羅本紀 2, 助貸尼師今) 위의 기록들은 고조선, 부여, 고구려, 신라가 소국들을 병합한 후 정 치지배세력에 대한 편제의 실상을 밝힐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 기서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소국병합을 통하여 확대된 영역이 단 위가 되어 그 안에 살던 주민들을 하나의 통치질서 속에 묶어 두게 되 었다는 사실이다. 그 중 소국병합을 주도하였던 소국의 지배세력들과 피병합 소국의 지배세력들의 정치적 • 신분적 지위에 차이가 났다는 것 온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구체적인 예로 신라의 골품제를 들 수 있다. 진한소국연맹의 맹주국이었던 사로국이 연맹의 소국들을 모 두 병합한 후 사로국은 새로이 확대된 왕국의 왕경으로 자리잡았다. 그 과정에 왕경인들의 신분적인 지위는 피병합 소국의 세력들에 비하 여 월등히 높은 것으로 되었다. 그 결과 후일 골품제를 편제할 때 왕 경인은 골품신분을 가졌고 피정복 소국이 지방행정구획으로 편제되었 던 지방의 백성들은 지방신분제에 편입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왕경인과 지방인의 신분적인 차별은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 다고 헤아려진다. 단지 피병합 소국들에 대한 통치 방법의 차이에 따 라 그 차별의 정도와 지방인의 중앙정계 진출에 차이가 났다고 헤아려 진다. 여기서 보다 구체적으로 피병합 소국에 대한 신분 편제에 대한 문제 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 먼저 고구려의 지방세력에 대하여 주목하기로 한다• 사료 D3 에는 고구려의 대가들이 사자 • 조의 • 선인을 거느렸는데 마치 중국의 경 • 대부의 가신과 같았다고 하는 기록을 검토하기로 한 다. 대가들 중예는 고추가도 포함될 수 있겠지만 대체로 지방에 존재 하던 정치적 세력가 정도로 생각된다 . 그것은 부여의 제가들이 4 출도
룰 다스렸다는 기록을 통하여 집작할 수 있다. 이 같은 지방세력이었 던 대가들이 중국의 경 • 대부의 가신과 같은 존재를 거느렸다는 것은 고구려의 대가들이 중국의 제후와 같은 존재였던 것을 말해 준다. 여 기서 고구려의 지방통치는 대체로 중국의 제후와 같은 정치세력들에 의하여 행하여진 것을 알 수 있다 . 중국의 경우 은왕조를 멸한 주왕조는 王朝祚命의 근간으로 종법봉건 제도를 실시하였다고 한다. 봉건제의 실시는 먼저 주왕실의 자제, 일족 및 동맹부족들을 제후로 임명하여 전국의 전략적 요충지에 분봉 • 배치 하고 은유민의 감시와 주변 夷秋들의 준동, 침입에 대처토록 하였다고 한다.f17 ) 그러면 고구려는 어떠하였을까.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고구려의 중앙정부에서도 왕족들을 제후로 임명하여 지방통치를 맡겼을 가능성 이 있다. 그런데 그보다는 피병합 소국의 지배세력들을 제후적인 존재 로 인정하고 그들을 통하여 지방통치를 행한 것은 아니었나 짐작이 간 다. 여기서 고구려와 중국의 지방통치세력이라 할 수 있는 제후들의 성격에 차이가 있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에서는 중 국과 같은 형태의 봉건제가 시행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와 같은 형태의 피병합 소국에 대한 지방통치는 부여와 고조 선에서도 행하여졌다고 생각된다. 위만조선의 조선상, 니계상과 같은 존재들(사료 Dl) 은 지방세력들이었음에 틀림없다 .88) 그들은 고조선시 대부터 지방에 세력을 뿌리내리고 있던 세력의 후예들로 연인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후에도 계속하여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헤아려진다. 그들은 위만조선시대에 상의 지위를 부여받고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활동하였으나 실제에 있어 그들의 정치적인 성 격은 제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부여의 대가들이 4 출도를 다스 렸다고 한 것을 보면(사료 D2) 그들 역시 지방세력으로 제후적인 존
87) 李春植, 앞의 논문, 1992, p. 101. 88) 李鍾旭 앞의 책, 1993, p. 229.
재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 고조선 • 부여의 지방세력들은 중국의 제후적인 성격을 지닌 존재들이었다. 그러면 사로국이 병합한 피병합 소국의 지배세력들은 어떻게 편제되었을까. 사료 D4 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골벌국왕 아음부 가 신라에 내항하자 그를 왕경으로 불러들여 살게 한 것을 알 수 있 다. 그리고 그가 다스리던 땅을 군으로 편제한 것을 볼 수 있다 . 이는 고구려와 다른 형태의 지방통치조직을 편성한 것을 뜻한다. 골벌국왕 아음부는 왕경으로 사민되어 살게 되었으나 그가 고구려의 제후와 같 이 중앙 정계에서 활동을 하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신라의 피병합 소국 편제는 봉건제적인 모습을 지녔다기보다 군현제적인 성격 을 지닌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피병합 소국에 대한 고구려적인 편제와 신라적인 편제를 나 누어 볼 수 있다. 전자는 중국의 그것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봉건제적 인 성격을 지녔고 후자는 아직 지방관을 상주시킨 것은 아니라고 생각 되지만 군현제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피병합 소국의 통치와 관련하여 과거 소국왕의 세력은 어떠한 형태로 든 제거되었다고 생각된다. 그에 비하여 고구려 • 부여 • 고조선에서는 지방세력을 제후적인 존재로 인정하여 그들에게 지방통치는 물론이고 중앙 정계에 진출할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제 소국병합을 통하여 형성된 왕국 최고의 지배세력에 대하여 보 기로 한다. 병합을 주도한 소국의 지배세력은 왕국 전체의 지배세력으 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 중 최고의 정치지배자는 왕이었다. 왕국 안에 서는 왕의 계보를 파악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 부여는 사료가 거의 사라졌기에 왕의 계보를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고조선은 현재 구체 적인 계보는 알 수 없으나 40 여 세에 걸친 계보를 준왕대에는 파악하 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89) 한편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왕위계승에
89) 『三國志』 魏 땀 東夷 傳 減傳
대한 계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고 있다 . 이러한 계보 파 악은 왕의 정치적인 지위를 확보하여 주었다. 그리고 정복을 주도한 소국의 건국신화는 왕국 전체의 건국신화로 확대 • 발전하게 되었다. 이에 피병합 소국의 건국신화는 역사적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던 것 도 생각할 수 있다. 소국병합 단계의 지배세력으로는 왕족 이외에 왕비를 배출하던 세력, 전왕족 집단 등도 들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왕족, 전왕족, 왕비족들이 종묘를 세우고 적통 대인들이 고추가의 칭호를 가졌던 것은 그들 세력 의 정치 • 사회적인 지위를 유지하는 장치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한 사정은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왕국의 최상부에서 정치지배세력으로 존재하던 왕족, 왕비족, 전왕족들의 규모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늘어났다고 여겨진다. 그에 따라 일부 가계에 속한 세력들이 정치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지배세력 집단을 재생산하여 나갔을 것이다. 그 결과 가계의 성원들을 결속시키 는 기능을 가진 가계의 사당이 만들어졌다. 미추왕을 모신 것으로 생 각되는 신라의 신궁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여하튼 정치적인 실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를 상실한 세력들은 점차 족강이 되어 정치적 진 출은 물론이고 사회적인 신분도 떨어지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다음은 피병합 소국의 지배세력들을 어떻게 편제하였는지 보기로 한 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고구려 • 부여 • 고조선에서는 피병합국의 지배세력들이 제후적인 존재로 편제되어 피병합 소국에서 가지고 있던 정치적 •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그와 같은 제후적인 세력들이 모두 과거 소국의 지배세력들의 후예들이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렇더라도 중앙정부의 지방통치 능력에 한계가 있 었던 시대에는 지방의 제후적인 존재를 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여겨 진다. 그런데 제후에 해당하던 지방세력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활 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중앙 정계 진출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한편 신라에서는 피병합 소국들을 군으로 편제한 것으로 나오고 있 다(사료 D4). 그런데 일찍부터 군을 칭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 렇더라도 피병합 소국에 대한 통제가 고구려와는 달랐던 것이 분명하 다. 특히 골벌국왕 아음부를 왕경으로 이주시킨 것은 피병합 소국의 최고 지배세력을 사민시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신라의 피병합 소국의 지배세력으로는 일부 과거 소국의 왕족과 촌의 지배세력들을 들 수 있다. 그들은 후일 신라의 촌주세력으로 편제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중앙으로 사민된 피병합 소국의 왕과 그 일족들은 신라 지배세 력 집단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였을까. 후일 본가야의 마지막 왕이 었던 김구해의 세력들은 신라에서 진골 신분을 차지한 일이 있다. 그 러나 그 외 피병합 소국의 정치세력들은 왕경으로 이주하여 신라의 지 배신분으로 편입되기는 어려웠다고 여겨진다. 더욱이 지방세력들 중 제후적인 지위를 부여받은 세력은 없었다고 믿어진다. (6) 국가형성기 정치지배세력의 성격 앞에서 정리한 한국 초기국가 형성기의 정치지배세력에 대한 내용을 요약 • 제시한다. 첫째, 촌락사회의 지배세력에 대한 이해는 篤洛國의 9 촌장과 斯盧國의 6 촌장을 통하여 할 수 있다. 이들 세력은 촌장 또는 추장으로 불렸다. 이들은 가락국을 9 개 촌으로, 사로국을 6 개 촌으로 나눈 정도의 공간을 지배하던 세력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다스리던 시기는 가락국이나 사로국이 형성되기 이전인 청동기시대 또는 지석묘 롤 축조하던 시대였다. 물론 고조선의 경우 청동기시대에 이미 소국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여하튼 촌락사회의 지배세력들도 이주민집단이었 울 가능성이 크다. 한편 촌락사회의 각 촌에 사는 주민들은 대체로 씨족집단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각 촌의 주민들은 다
시 가계집단으로 나뉘어 각기 일정한 마을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생각 된다. 둘째, 소국의 정치지배세력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한국사상 등장하였 던 여러 소국들의 국가형성신화를 보면 소국의 형성세력은 거의 모두 가 이주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 국가형성세력이었던 이주민세 력은 정치적인 선진지역에서 정치적인 갈등 과정에 패하여 이주한 집 단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주민집단은 선진 정치에 대한 정보 를 갖추고 있었고 국가룰 형성하여 통치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 들 이주민들은 새로이 이주한 지역에서 일정 기간을 거치며 정치적인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런데 이주민집단의 규모는 처음부터 큰 것이 아니었댜 그 결과 이주민집단들은 세력연맹을 맺어 정치적인 힘을 모 으기도 하였다. 일단 그와 같은 이주민들에 의하여 소국이 형성된 후 에는 과거 촌락사회의 지배세력들은 제 2 급의 지배세력이 되었다. 그들 은 소국의 지방행정구역으로 편제된 촌락의 지방세력이 되었다. 소국 을 다스리게 된 이주민 계통의 주민과 촌락의 지방세력으로 된 주민들 사이에는 혈연적인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단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 기서 소국 단계에 이르러 본격적인 의미의 신분제가 편성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그 중 소국의 정치지배세력들은 소국의 정치중심지에 그 들을 위한 보호시설인 성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시조묘에 제사 룰 지내며 단결을 꾀하였고 지배세력으로서의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소국의 정치세력들도 그 수가 늘어나게 되며 그 안에 신분적인 격차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한 현상은 소국연맹, 소 국병합 단계를 거치며 크게 나타났다. 셋째, 소국연맹 단계의 정치지배세력들은 기본적으로 소국 단계의 그것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단지 앞에서 생각한 것과 같이 정치 세력들의 수가 늘어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각 소국에 각기 정치지 배세력이 존재하였지만 여러 소국을 하나의 연맹체로 묶는 과정에 소
국들의 맹주국이 등장하게 되었고, 맹주국의 정치지배세력의 지위는 한충 강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맹주국의 지배세력은 점차 다론 소국들의 지배세력들보다 정치적 • 군사적 • 경제적 실력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넷째, 소국연맹의 맹주국들은 점차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하여 하나 의 커다란 왕국으로 발전해 나갔다. 한국사상 소국병합 단계까지 정치 적 발전을 한 나라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정도이다. 소국 병합 단계에 이른 국가에서는 피병합국을 촌락보다는 한 단계 높은 지 방행정구역으로 편제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과거의 소국을 단 위로 편제한 지방행정구역의 지방세력들은 대체로 과거 소국의 정치세 력들로 이루어졌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에서는 그들 과거의 소국지역 의 지배세력을 일종의 제후와 같이 편제하였다• 그 결과 지방세력들이 중앙의 정치무대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하여 신라에서는 보다 중앙집권적인 방법으로 피병합 소국을 통제하게 되어 과거 소국의 지 배세력들은 대체로 제거되었다. 물론 극히 일부의 지배세력이 왕경으 로 사민되었으나 신분적인 한계는 분명히 있었다. 소국병합 단계에 이 르러 왕과 왕비를 배출하던 최고의 정치지배세력의 수가 늘어나게 되 었다. 그 결과 그러한 세력들은 다시 신분을 달리하는 계층으로 구분 되기에 이르렀다. 3 한국 초기국가 형성 • 발전의 주요 요인 본고는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과 그 성장의 주요 요인 또는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필자는 지금까지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과 그 발전단계를 촌락(추장)사회-소국-소국연맹-소 국병합 단계로 이어진 것으로 보았다 .90) 그 중 소국은 한국역사상 둥장
하였던 최초의 국가 형태였다. 그러한 소국들은 지역에 따라 국가형성 시기를 달리하였다. 그 중 요동지역에서는 고조선을 비롯한 소국들이 기원전 12 세기 말에서 기원전 11 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형성되었 으며, 한반도 남부지역에는 사로국 • 가락국과 같은 소국들이 기원전 2 세기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형성되었다. 그러한 소국들 중 고조선, 부 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건국신화들이 남아 있다. 이러한 건국 신화를 주목하면 한국사상 존재하였던 소국들의 국가형성 원동력이 무 엇이었는지 어느 정도 생각할 수 있다. 특히 건국신화에 나오는 소국 건국세력들을 주목하면 국가형성세력들이 이주민들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뒤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한국사상 등장하였던 소국들 의 형성 원동력은 이주민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또는 『사기』와 같은 중국측 사서들을 보면 소국형성 이 후 소국연맹의 원동력은 원거리교역 또는 의부로부터의 압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소국병합 단계로 발전하는 원동력은 전쟁에 의한 소국 병합인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류학과 고고학 분야에서 국가형성의 요인에 대 한 적지 않은 연구들이 이루어져 왔다. 그러한 연구들은 물론 한국 사상 등장하였던 소국들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그 와 같은 연구결과를 보면 국가형성 요인으로 여러 가지를 들고 있으며 한국의 국가형성 요인에 대한 해명에도 도움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제시된 국가형성 요인으로는, 환경압박설 (env ir orunent al circ w nscrip tion ), 사회 적 압박설 (soc i olo gi cal circ w nscrip tion ), 인구 압력설, 교역설, 전쟁설, 관개농경설 둥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 다 .91) 이돌 여러 가지 요인들 중 한국의 국가형성과 성장에 대한 요인
90) 李鍾旭, 『韓國初期國家의 形成 • 發展段階』, 《韓國史硏究》 67, 1989, pp. 1 ~26. 91) Jon ath a n Haas, The Evoluti on of the Prehi sto r i c St.a te, 1982, Columbia Un ive rsity Press.
으로 어떠한 견해가 타당한 것인지 간단히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한 국사의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인류학, 고고학에서 언급되 고 있는 국가형성에 대한 이론들이 특정 지역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 로 한 것이기에 한국사에 어떤 특정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국가형성에 대한 이론들을 상기하며 한국 사에서 찾아지는 국가형성의 요인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본고에서는 소국형성의 원동력으로 이주민들을 주목하고, 소국연맹 의 원동력으로는 원거리교역과 의부로터의 압력을 주목하고, 소국병합 의 원동력으로는 전쟁을 주목하기로 한다. 이는 한국사상 존재하였던 국가들의 정치적 성장 요인이 정치발전단계에 따라 그 중요성이 변동 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필자는 본고에서 국가형성 요인이라는 단어 대신에 국가 형성 •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용어를 쓰기로 한다 .92) 여하튼 본고의 작업은 한국의 초기국가들의 국가형성과 정치적 성장의 원동력 을 밝힐 뿐 아니라 국가형성 요인에 대한 인류학, 고고학의 이론 발전 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1) 소국형성의 주요 요인 이제 한국사상 등장하였던 최초의 국가 형태인 소국의 형성 원동력 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소국형성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주목하기로 한다. E (1) 전한 지절 원년(기원전 69) 임자 3 월 초하룻날 6 부의 祖들이 각
92)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한국의 초기국가 발전의 요인이 한 가지만이 아 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여러 가지 요인 중 가장 중요한 요인을 원동력이 라고 해 보았다.
기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의 언덕 위에 모두 모여 의논하여 말하기를 〈 우리 무리들은 위에 군림하여 백성들을 다스릴 君主가 없어 백성들이 모두 放逸하여 제 마음대로 하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 君主로 삼 고 立邦 設 都하지 않겠는가 〉 하였다.(『 三 國迫事 』 1, 紀異 2, 新羅始祖赫居 世 王 ) (2) 시조의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혁거세이다. 前 漢 孝 宣 帝五 鳳 元年 (기원전 57) 甲子 4 월에 왕위에 오르니 왕호는 居西干이다 . 그 때 나이가 열세 살이었다 . 나라 이름을 徐那伐이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朝鮮의 遺 民이 산곡 사이에 나누어 살며 6 촌을 이루었는데 •••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 나정 옆의 숲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을 바라보고 곧 가서 보니 문득 말은 볼 수 없고 단지 큰 알이 있었다. (그것을) 깨니 갓난아이가 나왔다 . 곧 데려다 길렀는데 나이 십여 세가 되자 기골이 준 수하고 숙성하였다. 6 부인들은 그 출생이 신이하여 높이 받들고 존경하였 는데 이 때에 이르러 君으로 삼았다.(『三國史記 』 1, 新羅本紀 1, 始祖赫居 世 居西 干 ) 『삼국유사』에 나오는 위의 기록을 통하여 사로 6 촌(부)이 통합되어 사로국이 형성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 중 주목되는 사실은 6 촌장 들이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로 삼고 〈立邦設都 〉 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라시조의 즉위조를 보면 당시 나정 근처에 알이 나타났고 그 안에서 혁거세가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혁거세는 그후 前漢 孝宣帝 五鳳 元年(기원전 57) 에 죽위하였으며 號를 居西干이라고 하였으며 국호를 徐那伐이라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혁거세 거서간이 徐那伐(사로국)의 君主가 되기 전에 사로 6 촌에는 朝鮮 遺民들이 산곡 사이에 나누어 살며 6 촌 울 이루었다는 사실도 주목할 수 있다. 사로 6 촌을 통합하여 형성되었던 徐那伐 또는 斯盧國은 하나의 소국
이었음이 분명하다. 그와 같은 소국을 형성하였던 사로 6 촌의 각 촌은 직경 10km 내외의 영역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그리고 소국은 직 경 30~40km 정도의 영역으로 이루어졌다 .93) 사로국 전체를 다스리는 군주는 居西干, 次次雄동으로 불렸다. 그와 같은 사로국의 군주는 6 촌 전체를 다스렸던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삼국유사』에 나오는 〈立邦設 都〉 의 의미를 다시 정리할 수 있다. 立邦은 촌락사회 단계를 넘어서 서 소국 단계로 들어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設都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촌락사회 단계의 단위정치조직이 촌이었고 그 정치중심도 촌 안의 중심마을이 되었다. 그러나 소국 단계에 들어선 후에는 사로 6 촌 전체의 정치중심이 새로 생긴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혁거세가 군주로 되고 나정 근처의 금성이 정치중심이 되면서 사로국의 都로 된 것을 알수 있다. 그런데 촌락사회 단계의 촌들을 통합하여 한 단계 발전한 소국으로 성장한 예로는 篤洛國도 들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와 『삼 국사기』의 다음 기록을 주목하기로 한다. F (1) 開關한 후 이 땅에는 邦國의 칭호가 없었고, 또한 君臣의 칭호 도 없었다. 이 때 我刀干,汝刀干,彼刀干, 五刀干, 留水干,留天干, 五千干, 神貴干 둥 九干이란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音長으로 백성들을 다스렸 는데 모두 1 백 호 7 만 5 천 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몸소 山野에 거하며,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발을 갈아 먹었다. 후한 光武帝 建武 18 년 (42) 壬寅 3 월 계욕일에 거하는 곳 북쪽의 구지에서 수상한 소리가 있었는데 소리 높 이 불렀다. 2~3 백 명이 그 곳에 모였다. … 또 말하기를 皇天이 나에게 명령한 것은 이 곳에 거하여 나라를 새롭게 하고 君后가 되라 하였기에 이것을 위하여 내려왔다. …춤 을 추면 곧 大王을 맞이하여 기뻐서 뛰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九干 둥이 그 말에 따라 모두 기뻐하며 노래하고 춤
93) 李鍾旭, 『新羅國家形成史硏究』, 1982, p. 22 및 53.
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러러 바라보니 紫繩이 하늘로부터 드리워 땅 에 닿았다 . 끈의 밑을 찾으니 금상자를 싼 붉은 보자기가 보였다 . 열어 보 니 황금알 여섯이 있었는데 …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楊 위에 두고 무 리들이 흩어졌다. … 다음 날 새벽에 무리들이 다시 모여 상자를 열었더 니 알 여섯이 모두 童 子가 되었는데 … 그 달 보름에 왕위에 오르니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首露라고 하고 혹 首陵이라 하였다. 나라는 大鷺洛이라 하였고 또는 伽耶國이라 하였다 . 이는 伽耶의 하나였다. 나머지 다섯 사람 도 각기 돌아가 5 伽耶主가 되 었다.(『三國遺事』 2, 鷺洛國記) (2) 金庚信은 왕경인이다 . 그의 12 세 祖인 首露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후한 建武 18 년 임인에 龜峰에 올라 가락 9 촌을 바라보고 드디어 그 곳에 이르러 개국하고 국호를 加耶라고 하였다 . (『三國史記 』 41, 列傳 1, 金庚信 上) 위에 제시한 사료는 가락국기의 필요한 부분을 옮긴 것이다. 위의 자료를 통하여 가락국 역시 가락 9 촌을 통합하여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사로 6 촌을 통합하여 하나의 소국인 사로국이 형성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다. 가락 9 촌의 각 촌에는 〈村長〉 또는 〈個長〉 이라 불리던 존재들이 최고의 정치적 지배자였으나 가락국의 정치적 지배자는 大王또는 왕으로 불린 것을 알 수 있다. 가락 9 촌의 각 촌 역시 직경 10km 내외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가락국은 직경 30 ~40km 정도의 공간으로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촌락사 회 단계의 가락 9 촌에는 각기 정치적 중심이 되는 마을이 있었는데 가 락국 형성 이후에는 9 촌 전체의 정치적 중심이 되는 京都를 정하고 그 곳에 나성과 궁궐 둥을 세운 것을 알 수 있다.읽) 이는 사로국이 혁거세 를 군주로 삼아 立邦設都한 것과 같은 내용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여기서 사로국(徐那伐)이나 가락국의 소국형성의 원동력에 대하여
94) I三國遺 事』 2, 紀異 2, 篤洛國記
알아보기로 한다. 우선 사로국과 가락국이 소국을 형성하였을 때 군주 또는 왕이 되었다고 하는 혁거세와 수로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 다. 그들은 단순히 개인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오히려 일정한 세력집 단을 이루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원래 사로 6 촌이 나 가락 9 촌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세력집단은 아니었다고 헤아려진 다. 사로 6 촌에는 지석묘를 축조하던 세력들이 촌락사회 단계에 들어 서 있었는데, 언제인가 고조선의 정치적 변동이 있을 때 유민들이 이 주하여 6 촌에 분거하여 촌락사회를 유지하여 나갔다. 그 후 혁거세집 단이 이주하여 소국의 지배세력이 되며 정치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가락 9 촌의 경우도 촌장 또는 추장이라고 불리던 세력들이 촌을 단위 로 하는 정치조직을 편성하고 있었는데 수로집단이 동장하여 9 촌을 통 합하고 소국을 형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상기하면 사로국과 가락국의 형성세력은 이주민들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는 이주민집단이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의 원동력을 제공한 것을 뜻한다. 이와 관련하여 부여 • 고구려 • 백제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국가 형성세력들도 주목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자료를 앞 절에서 제시한 바 있으나 편의상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G (1) 『위략』에 말하기를 〈舊志에 또 말이 있다. 옛날 북방에 高離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王의 侍牌가 임신을 하였다. 왕이 그를 죽이려 하자 碑가 말하기를 달걀 같은 기운이 나에게 내려온 까닭에 임신을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자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죽지 않았고, 마구간으로 옮겼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 죽지 않았다. 왕은 天帝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여 그 어머니에게 기르도록 하고 東明이라 고 하였다. 늘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동명은 활을 잘 쏘았다. 왕은 그 나 라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동명이 달아나서 남쪽 施 俺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서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지고 추격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동명은 도읍을 정하여 부여의 땅에서 왕이 되었다.(『 三 國志 』 魏밥 東夷傳 夫餘傳 소수 魏略 인용기사) (2) 朱蒙은 이 에 烏伊 • 庶離 • 陝父 둥 세 사람과 더불어 벗이 되어 俺
切水에 이르렀는데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추병이 쫓아올까 두 려워하여 강물에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天帝의 아돌이요 河伯의 외손으 로 금일 도망하는데 뒤쫓는 자가 닥치면 어찌하겠는가?〉 하니 그 때에 물 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이루었다. 주몽이 무사히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지고 뒤를 쫓던 기병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毛屯谷에 이 르러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삼베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중의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마름옷을 입었다. 주몽이 묻기를 그대들은 어느 곳 사 람들이며, 성과 이름이 무엇인가 하였다. 삼베옷을 입은 자는 이름이 再思 라 하였고, 중의 옷을 입은 자는 武骨이라 하였고, 마름옷을 입은 자는 默 居라고 하였으며 성은 말하지 않았다 . 주몽은 재사에게 克氏, 무골에게 仲 室氏, 묵거에게 少室氏의 성을 주었다. 이내 여러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를 세우려 하는데 마침 세 사람의 현인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드디어 그 재 능을 헤아려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卒本川에 이르렀다. 그 토양 이 기름지고 산하가 험고함을 보고 마침내 거하려 하였는데 미처 궁실을 지을 겨롤이 없어 귄隨流水 上에 단지 띠를 이어 살았다. 국호를 高句麗라 하였고 高로써 성을 삼았다. 이 때 주몽의 나이는 22 세인데 漢 孝元帝 建昭 2 년, 신라시조 赫居世 21 년 甲申年이었다.(『三國史記』 13, 高句麗本紀 1, 시조동명성왕 즉위조) (3) 百濟始祖 溫祚王은 그의 아버지가 鄒牟인데 혹은 朱蒙이라고도 한 다. 주몽이 北夫餘로부터 난을 피하여 卒本扶餘에 이르렀더니 扶餘王은 아들이 없고 세 딸만 있었다. 주몽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처로 삼게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십岡流이고 다음은 溫祚라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용납되지 못할 까 염려하여 드디어 烏干 • 馬黎 동 十臣과 더불어 남쪽으로 떠나니 백성 들 중 따르는 자가 많았다. …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彌鄒忽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河南慰禮城에 도읍하고 십신으로 보익을 삼아 국호 룰 十濟라 하니 그 때는 前漢 成帝鴻嘉 3 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이 땅 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머물 수 없었다. 위례에 돌아와 보고 都邑이 完定되고 人民이 安泰한 것을 보고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며 죽었다. 그의 臣民들은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후에 올 때의 백성들이 즐겨 따라 국호를 고쳐 百濟라 하였다. 그 조상이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扶餘로 氏를 삼았다.(『三國史記』 23, 百濟本紀 1, 百濟始祖 溫祚王) 위의 사료 G 를 보면 부여의 국가형성세력인 동명집단과, 고구려를 세운 주몽집단, 십제(백제)를 세운 온조집단은 모두 이주민들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앞에서 본 사로국의 형성세력인 혁거세집단이나 가락국 의 건국세력인 수로집단이 모두 이주민이었다고 믿어지는 것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의미한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소국의 건국신화나 설화 들은 그 국가형성세력들이 이주민들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 한편 고조선의 건국을 전하고 있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 一웅녀 -단 군으로 이어지는 세력집단은 이주민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여 보았다우 그렇더 라도 단군세력이 고조선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殷族 이주민들의 영향 때문이었던 것을 살펴보았다우 따라서 한국의 초기국가로서 소국의 형 성세력은 이주민들이거나 그들의 영향을 받은 세력들이었던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이주민들이 초기국가로서 소국들을 형성하였던 원동력을 제공
95) 李鍾旭 『古朝鮮史硏究』, 1993, pp. 87~92. 96) 위의 책, pp. 102~106.
한 사실에 대하여 정리하기로 한다 . 우선 이주민 세력이 부여 • 고구려 • 백제 • 신라 및 가야의 소국형성을 할 수 있었던 기반이 무엇이었나 알아보기로 한다. 앞에 제시한 사료 E 와 F 를 보면 사로국 형성 이전 에 사로 6 촌의 각 촌은 촌락(추장)사회 단계에 들어서 있었고 6 촌 간 의 촌락연맹이 형성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그와 같은 촌락연맹의 장 은 돌산 고허촌의 촌장이었던 蘇伐公 또는 蘇伐都利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물론 혁거세가 등장하였던 나정이 돌산 고허촌의 영역 안에 있었기에 혁거세 동장시 소벌공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그렇더라도 사로국의 형성 직전에는 소국형성의 기반이 갖추어 져 있었던 것이 분명하댜 실제로 6 촌장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군주를 모시고 6 촌을 통합하여 立邦設都할 것을 의논한 것은 국가형성의 기반 이 갖추어졌고 또 국가형성이 필요한 단계에 이르렀던 것을 뜻한다. 그러한 사정은 수로가 가락국의 군주로 되어 가락 9 촌을 통합하여 가 락국을 형성하였을 때도 마찬가지였음에 틀림이 없다. 당시 사로 6 촌의 장들이 立邦設都할 것을 의논한 직접적인 이유는 군주가 없어 백성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로국이 형성될 무렵에는 이미 조선 유민들과 중국계 이주민들이 사로 6 촌 지 역으로 이주해 왔고, 그들에 의하여 사로 6 촌의 정치적 성장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을 생각할 수 있댜 그 결과 촌락연맹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고 여겨진다. 한편 이주민의 등장은 사로 6 촌 지역에 인구 압 력을 불러온 것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인구 증가에 따른 사회적인 압박도 늘어났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점차 늘어나는 인구를 수 용하기 위하여 새로운 형태의 농업생산 활동이 시작되었다고 여겨진 다. 그러나 점차 늘어나는 사회적인 압력을 통제하기 위하여 촌락사회 단계의 정치체제만으로는 버틸 수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 결과 경주 분지의 6 촌을 통합한 정치체로서 사로국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러 한 사정은 사로국뿐 아니라 가락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여겨진다.
여기서 소국형성의 요인으로 인구 증가, 사회적 압력 둥을 들 수 있다. 이는 국가형성의 내적 요인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소국형성의 외적 요인을 들 수 있다. 그 중에는 이주민의 정착 과 정치세력의 장악을 생각할 수 있다. 이주민 세력 모두가 국가형성 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여 •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 등 건 국설화를 남기고 있는 나라는 모두 이주민들이 소국을 형성한 것이 분 명하다. 이는 이주민들이 한국의 초기국가로서 소국형성을 한 중심세 력이었고 나아가 그들이 국가형성의 원동력을 제공한 것을 말해 준다. 이제 한국 초기국가 형성의 원동력을 제공하였던 이주민집단의 실체 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소국을 형성한 이주민집단의 구체적 인 예들 들기로 한다. 앞에 제시한 사료에 따르면 부여는 고리국으로 부터 이주하였던 동명을 중심으로 한 이주민들에 의하여 건국된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부여로부터 이주한 주몽세력 집단에 의하여 소 국형성이 이루어졌다.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이주한 온조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집단에 의하여 건국되었다. 가락국을 포함한 가야의 소국들 은 수로를 비롯한 이주민세력 집단이 건국한 것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 다. 그리고 사로국의 국가형성세력은 혁거세집단이었던 것을 알 수 있 다. 그들 혁거세집단은 선주세력인 6 촌장 세력들과는 달리 이주민집단 이었다고 헤아려진다. 이주민집단의 발생과 관련된 문제들을 정리하기로 한다. 이주민 세 력의 발생 원인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고조선의 소국형성세력은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이었다. 기원전 12 세기 말 또는 11 세기 초 단군집단이 고조선 소국을 형성할 무렵 중국 은나라의 유민들이 大凌 河 유역으로 이주한 바 있다. 그와 같은 은족 유민들의 영향을 받은 단군집단이 고조선 소국을 형성하였다. 당시 은족 유민들은 은나라의 멸망이라는 정치적인 이유에 의하여 발생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는 정치적으로 성장하였던 국가의 멸망에 의하여 그 지배세력들이 보
다 정치적으로 후진한 지역으로 이주한 것을 보여준다. 한편 요동지역에서 성장하였던 고조선은 기원전 4 세기 말 또는 기원 전 3 세기 초 언제인가 중국 동북지역에서 성장한 중국 전국시대의 한 제후국이었던 燕나라의 침략을 받았다 . 당시 고조선은 연의 昭王이 보 낸 장군 秦開 의 침입을 받아 서쪽 2 천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 그 중심 을 요동지역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와 같은 고조선의 영 토 상실 결과 고조선계 이주민들이 여러 곳으로 이주하였다고 여겨진 다. 그러한 이주민들 중에는 부여 • 예 지역을 비롯하여 한반도 남부지 역으로도 이주한 집단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중국과 같이 팽창하 는 국가의 침략에 의하여 이주민이 발생한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또 다른 형태의 이주민 발생에 대하여 주목할 수 있다. 부여 를 건국하였다는 동명은 고리국으로부터 이주하였고, 고구려를 건국하 였던 주몽집단은 부여로부터 이주하였고, 백제를 세웠던 온조집단은 고구려로부터 이주하였다. 그 중 동명은 고리국 왕과의 경쟁에서 밀려 이주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 그리고 주몽 역시 부여왕의 아들과 여러 사람의 경계 대상이 되어 제거될 위기에 처하여 망명을 하였다.'ill) 비류 와 온조집단 또한 주몽의 아들이라고 하는 유리가 북부여에서 와 태자 가 되자 그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이주하였던 것으로 나타 나 있다. 동명 • 주몽 • 온조 집단의 이주는 정치적으로 성장하였던 국 가의 지배세력 간의 갈등에서 밀려난 세력의 이주를 의미한다. 한편 위만조선의 우거왕과의 사이에 있었던 정치적 갈등 때문에 이주하였던 역계경도 주목할 수 있다 .98) 한국의 초기국가를 형성하였던 이주민들의 발생 원인이 다양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한국의 초기국가를 형성하였던 이주민의 발 생의 대세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시간적으로 볼 때 고조선이 소
이) 『三國史記』 13, 高句麗本紀 1, 始祖東明聖王 죽위조. 98) 『三國志』 魏맘 東夷傳 韓傳 인용 魏略.
국을 형성할 때 이주하여 왔다고 하는 은족 유민들은 고조선의 건국세 력이 되지는 않았다고 여겨진다. 그 후 요동지역의 고조선이 연의 침 입을 받아 평양지역으로 중심을 옮겼울 때 대규모의 이주민이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이주민들은 부여 또는 고구려지역의 정치적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세력이 되었던 이주민집단의 이동은 일시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사로국의 예를 보면 사로국이라고 하는 소국 이 형성되기 이전에 고조선 계통의 조선 유민, 중국 秦漢 교체기의 秦 漢계 이주민들도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한 이주민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파상적으로 사로지역에 이주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사 로국의 건국세력이었던 혁거세집단과 세력동맹을 맺었던 알지집단, 탈 해집단도 이주민이었다고 헤아려진다. 그와 같이 파상적으로 이주한 집단은 점차 세력을 뿌리내리고 같은 이주민집단과의 세력동맹을 통하 여 소국을 형성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세력을 보면, 원래 살던 곳에서 일정한 세력을 거느리고 이주한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를 세웠다고 하는 주 몽은 부여를 떠날 때 오이 ·마리 ·섬부 둥 3 인을 벗으로 하여 동행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주 도중에 모둔곡에서는 재사 • 무골 • 묵거 등을 만나 함께 이주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세력들은 고구려 소 국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이 분명하다. 백제 소국을 형성하 였던 온조는 고구려를 떠날 때 그의 형이라고 한 비류를 비롯하여 오 간 • 마려 둥 십신과 더불어 백성들을 거느렸던 것을 볼 수 있다 .99) 이 는 이주민집단이 원래의 거주지롤 떠날 때 이미 국가를 건국할 만한 일정한 세력집단을 형성하였던 예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이주민집단의 규모가 주몽이나 온조의 그것과 같았던 것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한 예로 『삼국유사』 가락국기
99) 『三國史記』 23, 百濟本紀 1, 百濟始祖溫祚王조.
에 나오는 탈해와 관련된 다음 기록을 주목할 수 있다. H 院夏國 含達王의 부인이 문득 임신하여 만 십개 월이 되어 알을 낳 았는데 사람으로 되었다 . 이름을 脫解라 하였다 . 바다를 따라 왔는데 키는 3 척이고 머리 둘레는 1 척이었다. 기뻐하며 궁궐에 나아가 왕에게 말하였 다 . 〈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다. 〉 왕이 답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나 에게 명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장차 나라 안을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 한다. 나는 감히 천명을 어기고 왕위를 줄 수 없으며 또 감히 우리 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 없다〉 고 하였다. 탈해가 말하 기를 〈 그러면 너는 재주를 겨룰 수 있느냐〉 하였다. 왕은 〈좋다〉 고 하였 다. 잠깐 사이에 탈해가 변하여 매가 되니, 왕은 변하여 독수리가 되었다.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변해서 새매가 되었다 . 그 사이가 촌 음에 지나지 않았다. 탈해가 본 모양으로 돌아오니 왕 또한 본 모양으로 돌아왔다 . 탈해는 이에 엎드려 항복하기를 〈내가 기술을 다투는 마당에서 매가 독수리에게서, 참새가 새매에게서 죽음을 면한 것은 대개 성인이 죽 이기를 싫어하는 어짊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나는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 투기는 진실로 어렵습니다〉 라고 하였다 . 문득 하직하고 나와 酷鄕 밖의 나루에 이르러 중국배가 와서 대는 뱃길을 따라가려 하였다. 왕은 머물러 몰래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을 실온 배 5 백 척을 내어 추격 하였다. 탈해는 도망하여 계림의 경계로 들어가니 수군은 모두 돌아갔다. (『 三 國遺事』 2, 紀異 2, 鷲洛國記) 위의 사료를 보면 사로국 유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던 탈해는 이주 과정에서 가락국에 들렀던 것으로 되어 있다. 탈해는 수로와의 재주 다툼에서 밀려 계림지역으로 이주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탈해 의 세력이 강력한 것이 아니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탈해집단은 사로국 에 먼저 이주하였던 혁거세집단과 결혼을 통한 세력동맹을 맺어 사로
국의 지배세력이 되었고 왕이 될 수 있었다고 믿어진다. 이는 주몽이 나 온조와는 다른 형태의 이주민에 의한 국가형성을 보여주는 것이 된 다 . 사로국은 파상적으로 이주한 세력집단에 의하여 건국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국가를 형성한 이주민집단의 이주 경로를 생각할 수 있다. 부여를 건국한 동명집단과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집단은 이주 과정에 강을 건넌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동명이나 주몽집단이 육로를 통 하여 이주한 것을 보여준다. 백제를 세웠던 온조집단 역시 육로로 이 주하였다고 여겨진다. 그와 같이 육로로 이주한 집단은 원래 출발할 때부터 규모가 상대적으로 큰 집단을 이루었으며 이주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집단을 거느린 것도 알 수 있다 . 따라서 육로로 이주한 세력집 단은 그들의 힘으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그에 비하여 해로로 이주 한 세력집단은 그 규모가 클 수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 탈해집단의 예를 통하여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탈해집단은 세력 규모가 크지 않 았기에 가락국지역에서 밀려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탈해집단은 계림 즉 사로지역으로 이주하여 혁거세집단과 세력동맹을 맺고 사로국 의 지배세력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국가형성세력으로서 이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실력이 무엇이 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이주민의 이주는 단순히 사람들만의 이동은 아니었다. 이주민집단의 구성을 보면, 첫째 국가를 형성하고 왕위를 장 악한 세력이 있고, 둘째 그들과 함께 이주한 〈좌우 궁인〉 또는 〈 십신〉 둥으로 표현되는 집단이 있다. 셋째로는 위와 같은 세력들을 따라 이 주한 백성들을 들 수 있다. 그 중 첫번째 집단의 실력에 대하여 알아 보기로 한다. 부여를 세웠다고 하는 동명과 고구려를 세웠다고 하는 주몽은 각기 이주 전에 살던 고리국과 부여에서 정치적으로 밀려난 세 력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말을 잘 길렀고 활을 잘 쏘 았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이는 동명과 주몽이 말을 기를 뿐 아니라
기마에도 능하였던 것을 말하여 준다. 실제로 여기서 이주민 세력 중 국가를 세우고 왕이 되었던 집단은 군사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 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함께 이주한 집단들을 거느리고 일종의 전사집 단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이주민집단의 이러한 군사적인 실력 때문에 결국 그들은 정복세력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이주민들은 군사적인 실 력을 가지고 새로이 이주한 지역의 선주세력들을 정복하여 그 위에 지 배세력으로 자리잡았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이주민으로서 군주 가 된 세력은 국가를 형성하고 그 지배자가 될 수 있는 정치적인 능력 과 지식도 갖추었다고 헤아려진다 . 한편 좌우 궁인이나 십신으로 표현되고 있는 세력들은 국가를 형성 한 이주민 출신 군주 밑에서 군주를 보익하였던 존재들이라고 여겨진 다. 이는 이주민집단이 소국을 형성할 때 이미 관료집단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이들 관료집단은 원래 살던 지역에서는 세력을 상실한 집단이지만 새로이 이주한 곳에서는 군주를 도울 만한 정치적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 또한 이주민집단에는 온조 동을 따라온 백성들이 있다. 그들은 비록 백성으로 표현되고 있기는 하지만 원래 살던 지역의 선진문화와 선진문명을 익혀 알고 있던 집단이었다 고 여겨진다. 그 결과 그들 백성집단은 새로이 정착한 지역에서 청동 기 또는 철기를 제조하여 수공업을 발전시켰던 것이 아닐까 침작이 간 다 . 그들이 생산한 물건 중에는 정치적 지배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 건도 있었고, 각종 무기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들 백성들은 선진 농업기술도 알고 있었기에 새로이 정착한 지역의 농업 발전에도 기여하였다고 생각된다 . 여기서 이주민계의 우수한 지도자들은 신료집단과 백성집단을 거느 리고 이주하였으며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선주세력들과의 경 쟁에서 승리하였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이주민 집단은 군주가 되고 도옵울 정하여 거주한 것을 알 수 있다. 사로국
의 건국세력 중 혁거세집단은 나정 근처의 금성에 자리잡았고, 탈해집 단은 월성에 자리잡았으며, 알지집단은 계림에 정착하였는데 그러한 지역은 후일 신라의 왕도로 성장하게 된다. 이주민계 건국세력들이 성 읍을 장악한 예는 더 찾아볼 수 있다. 주몽은 졸본성에 자리잡았었고, 온조집단은 하남 위례성에 자리잡았던 것으로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초기국가를 형성하였던 이주민집단은 선주민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소국의 지배세력이 될 수 있었다. 그러한 이주민들 중에는 혁거세와 같이 6 촌장들의 추대에 의하여 군주가 되거나 수로와 같이 9 촌장들에 의하여 군주가 된 예도 있다 . 이 경우 혁거세와 수로가 과연 평화적인 방법에 의하여 군주가 되었는지는 의심이 간다. 비록 위에 제시한 사료 E 와 F 에서는 혁거세와 수로가 군주가 될 때 어떠한 갈등 의 혼적도 찾아볼 수 없지만, 실제는 혁거세집단과 수로집단은 사로 6 촌장 세력과 가락 9 촌장 세력과의 경쟁에서 이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 와 같은 경쟁에서 승리한 이주민집단은 선주민들 위에 군림하여 대를 이어 군주를 배출하게 되었다. 그러면 국가형성에 있어 선주민들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 까 . 사로국이나 가락국의 형성시 사로 6 촌과 가락 9 촌은 촌장 또는 추 장사회 단계의 발전된 형태인 촌락연맹 단계에 있었다. 그와 같은 촌 락연맹 단계의 각 촌은 독립된 촌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안에 촌락 의 연맹장에 해당하는 존재가 있었다. 사로 6 촌의 연맹장은 돌산 고허 촌의 촌장이었던 소벌도리였고, 가락 9 촌의 연맹장은 아도간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러한 촌락사회·의 각 촌에는 씨족집단이 있었고 촌장은 씨 족장이 되었다고 믿어진다. 씨족장과 그 밑의 촌락민 사이에는 혈연적 인 관계가 유지되었으나 씨족장은 한 단계 높은 계급적 지위를 유지하 였고 또한 정치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여 촌락사회 에는 정치권력이 존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정치적인 바탕은 소
국형성을 가능하게 해 주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소국을 형성한 후 에 사로국이나 가락국에서는 그와 같은 촌락의 지배세력인 촌장 또는 추장을 일정한 정치적 세력으로 인정하여 주었다. 사로국에서는 촌장 들을 사로국의 지방통치구역으로 된 과거 6 촌의 전통을 이은 6 부의 지 배세력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지방을 통치하였다고 생각 된다. 이주민들에 의한 소국형성 과정에서의 지배세력의 동향에 대하여 잠 시 보기로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혁거세집단이 6 촌장 위에 군림하여 군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경쟁에서 승리를 하였기 때문이라고 믿어진다. 그 결과 촌장 또는 추장세력들보다 한 단계 높 온 신분적인 지위를 차지하여 소국 최고의 신분을 갖게 되었다• 그런 데 이주민집단은 그러한 지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여 겨진다. 그것은 이주민집단의 규모가 크지 않아 촌장들 세력 위에 군 림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이주민집 단은 또 다른 이주민들과 세력연합을 맺었다고 헤아려진다. 사로국의 혁거세집단, 탈해집단, 알지집단의 세력동맹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또 한 가락국의 수로왕집단과 허왕후집단의 혼인도 혼인동맹으로 볼 수 있다. 백제에서는 왕실은 온조와 그 후손집단이 장악하였으나 북부의 진씨와 해씨집단 둥을 귀족세력으로 편제하여 지배세력을 형성하게 되 었다. 그 중 해씨는 부여로부터 이주한 세력들이었다. 이주민들의 세력 동맹은 소국의 지배세력이 하나의 이주민집단에 의하여 구성될 수 없 었음을 보여준다. 이주민집단이 소국을 형성할 때 도읍을 정한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나오는 단군신화에는 단군이 평양성에 도옵울 정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 100)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의 국 가형성세력인 주몽집단은 졸본천에 이르러 도읍을 정했으나 겨를이 없
100) 『三國遺事』 1, 紀異 2, 古朝鮮.
어 궁실을 짓지 못했다가 동왕 4 년에 성곽과 궁실을 건축하였다고 나 와 있다 .10 1 ) 한편 백제의 건국시조였던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하였 던 것으로 『삼국사기 』 에 나타나 있다 .1 02 ) 『삼국유사 』 에는 가락국을 세 웠던 수로왕은 羅城과 宮禁殿宇 등을 건축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 I (Il ) 신라의 건국시조인 혁거세는 동왕 21 년에 京城을 축조하였는데 金城이 라고 불렀다고 한다 .1 어 ) 여기서 소국형성시 왕들은 그들 나름대로 성을 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성 안에는 건국세력들이 살았다고 여 겨진다 . 실제로 사로국의 금성에는 사로 6 촌장과 그 후손들은 살 수 없었다고 믿어진다. 이는 초기국가로서 소국을 형성한 지배세력들이 그들을 보호할 시설로 성을 축조하였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성은 당 시 국가형성세력과 그 밑에 있던 촌장세력들 간에 갈등이 존재하였다 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더라도 소국에 축조되었던 성들은 대체 로 그 중심에 위치하였다고 헤아려진다 . 소국을 형성하였던 이주민들 중에는 그들이 세웠던 나라의 위치를 스스로 정한 경우들이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예를 통하여 그것을 알 수 있다 . 부여를 떠나 이주한 주몽집단은 졸본천에 이르러 그 토양이 기름지고 산하가 험고함을 보고 그 곳에 거하게 되었다고 한다 .105) 한 편 고구려를 떠나 이주한 바류와 온조집단은 남하하여 백성을 나누어 비류는 미추홀에 가서 살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하여 십신을 보 익으로 삼아 십제를 세웠다. 그런데 비류가 가서 살았던 미추홀은 땅 이 습하고 물이 짜서 머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비류가 위례에 와서 보니 도읍이 완정되고 인민이 안태한 것을 보고 부끄럽게 여겨 후회하
101) 『三國史記 』 13, 高句麗本紀 1, 始祖 束明聖王 죽위조 및 4 년조. 102) 『三國史記』 23, 百濟本紀 1, 百濟始祖溫祚王 죽위조` 103) 『三國遺 事 』 2, 紀異 2, 篤洛國記 104) 『 三國史記』 1, 新羅本紀 1, 始祖赫居世 죽위조. 105) 『三國史記』 13, 高句麗本紀 1, 始祖 東明聖王 죽위조.
며 죽었다고 한다. 비류를 따라갔던 신민들은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고 한다 .1 따) 그런데 고구려나 백제 모두 소국을 형성할 당시 주변에는 또 다른 소국들이 있었고 그러한 소국들 사이에는 소국연맹 단계까지 이 르렀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24 년조에 온 조왕이 웅천책을 축조하니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어 온조왕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온조왕이 처음 강을 건너와 발붙일 곳이 없을 때 내가 동북 1 백 리 땅을 나누어 주어 살게 하였으니 내가 왕을 대우한 것이 후하 지 않다고 할 수 없다. 은혜를 갚을 생각을 하여야 하는데 이제 나라 가 완정되고 백성이 모이니 대적할 자가 없다고 생각하여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고 마한의 영역을 침범하니 이를 의리라 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온조는 부끄러이 여기고 그 책을 헐었다고 한다 .l rf/) 백제의 건국 시기가 언제인지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백제가 국가를 형성할 무렵 마 한이 성 립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백제가 과연 마한왕이 나누어 준 1 백 리의 땅에 나라를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마한의 북쪽 에 아직 나라가 들어서지 않았던 지역에서 온조집단이 국가를 세운 것 은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한 사정은 고구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주몽집단이 고구려를 건국하였을 때 그 이웃 비류수 상류에는 송양왕 이 다스리던 비류국이 있었다 . 108) 이는 고구려도 이웃한 지역에 이미 국가가 형성되어 있는 상황에서 새로이 국가를 형성하였음을 말해 준 다. 고구려의 건국시기를 분명히 말할 수 없는 현재 단정하기는 어려 우나 그러한 나라들은 어쩌면 滅君 南固가 거느렸던 것으로 나오는 정 치세력 109) 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정치세력은 소국
106) 『三國史i 3 』 23, 百狩本紀 1, 百沿始祖 溫祚王 죽위조. 107) 『三國史記』 23, 百硏木紀 1, 百沼始祖溫祚王 죽위조 108) 『 三國 史i B 』 13, 高句麗本紀 1, 始祖 東明聖王조 109) 『後淡산』 束夷傳 減傅
연맹 정도는 되었다고 여겨진다. 여하튼 고구려 역시 주변에 국가가 형성되어 있는 상황에서 정치적인 세력이 자리잡고 있지 않았던 졸본 천에 이르러 국가를 세웠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고구려와 백제의 국가형성 환경은 사로국이나 가락국의 그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던 것을 알수 있다. 초기국가로서 소국을 형성하였던 이주민들은 각 나라의 지배세력으 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며 그들 중에서 대를 이어 왕을 배출하였다. 요 동지역에서 고조선 소국의 형성세력이었던 단군집단은 그 후 계속하여 고조선 왕을 배출하였다고 믿어진다. 『삼국지』 예전에는 기자의 40 여 세 후손이 조선후 準이었다고 나오는데 준은 기자의 후손이 아니라 단 군의 후손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고조선의 왕을 포함한 지배세력 은 그들의 조상의 계보에 대한 전승을 갖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부여에서는 동명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었다고 헤아려지며 고구려에서 는 주몽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백제에서는 온조의 후손들이 왕위계승을 하였다. 또한 신라에서는 초기국가 형성 세력이었던 혁거세 • 탈해 • 알지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10) 그리고 이들이 왕실세력 (d y nas ti c family)으로 되었다. 이주민 세력들로 이루어졌던 한국의 초기국가들의 왕위는 원칙적으 로 부계가계 안에서 행하여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신라의 경우 박씨 족 • 석씨족 • 김씨족들이 왕위계승을 한 바 있으나 그들 각 씨족집단 에서의 왕위계승은 부계가계 내의 계승이었다. 그리고 신라의 세 씨족 사이에서 왕위계승이 이루어진 것은 정치적인 세력 다툼과 연결시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각국을 세웠던 시조의 후손집단은 여러 가계 집단으로 나뉘어졌고 그러한 가계 안에서 왕위계승 다툼이 벌어 지기도 하였으나 왕위계승은 부계가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110) 李鍾旭 『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 1980, pp. 45~101.
이주민 출신으로 이루어진 왕실세력들은 그들의 정치적 • 사회적 지 위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는 우선 건국시조 를 받든 것을 들 수 있다 . 그 결과 각국에는 시조묘가 설치되었고 후 세의 왕들이 시조묘에 제사지낸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고조선에는 단 군이 시조로 받들어졌기에 단군사당이 각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 다 . 그 밖에 부여의 동명, 고구려의 주몽, 백제의 온조 ,Ill) 신라의 혁거 세, 가락국의 수로 둥은 건국시조로서 각국에서 후대에 시조로 받들어 지고 시조묘에 모셔지게 되었다 . 시조에 대한 숭배와 시조묘의 설치는 왕족의 지위롤 굳혀 주었고, 왕에 대한 신성성을 부여하였다고 헤아려 진다. 초기국가를 형성하였던 이주민들은 선주세력들과는 구분된 거주구역 을 갖기 시작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고조선의 평양성, 고구 려의 성곽 궁실, 백제의 하남 위례성, 가락국의 나성과 궁금전우, 신라 의 금성 둥이 이주민계 지배세력들의 거주지였다• 이는 이주민 세력으 로 이루어진 지배세력들이 별도의 거주구역을 가진 것으로, 자신들에 게 가해질지도 모를 공격의 위험을 막는 의미도 있었으나 자신들의 통 치를 받는 세력과의 신분적 차이를 나타내는 의미도 가졌던 것으로 생 각할 수 있다. 그러한 지배세력들은 그들 사이에서 혼인을 하여 신분 적 지위를 유지하여 나갔던 것이 틀림없다. 이주민계 건국세력과 그 밑의 선주세력 사이의 신분적인 간격은 엄 격하게 유지되었다. 그 결과 사로국의 혁거세, 탈해, 알지와 그들의 후 손으로 이루어진 지배세력들은 사로 6 촌장 위에 군림할 수 있었다. 가
111) 온조 외에 동명을 모신 것을 알 수 있다. 동명은 부여를 건국한 시조이며, 고구 려의 건국세력인 주몽을 동명성왕으로 부른 것과 연관이 있다고 헤아려진다. 백 제의 건국세력들은 부여 또는 고구려와 연관이 있던 집단이다. 이에 동명을 모 신 이유는 부여 • 고구려계 이주민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조치였던 것을 짐작할 수있다.
락국의 수로와 허황후의 집단 역시 가락 9 촌장 위에 군림할 수 있었 다. 이 때에 이르러 각 소국은 혈연적인 원리에 의한 통치 방법을 벗 어나 보다 행정적인 통치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요인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한국 초기국가 형성 요인은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그 중 이주민 집 단은 소국형성의 원동력을 제공하였고 국가형성의 방아쇠를 당겼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초기국가를 형성하였던 이주민에 대한 앞에서의 고 찰을 중심으로 소국형성에 대한 문제를 정리하기로 한다. 먼저 이주민들은 소규모 집단으로 이주하거나 국가를 형성하여 지배 세력 집단으로 되기에 충분한 규모로 이주하는 경우가 있다. 사로국이 나 가락국의 건국세력들은 전자의 예에 해당하고, 고구려나 백제의 건 국세력들은 후자의 예에 해당한다고 여겨진다. 그 결과 사로국이나 가 락국의 건국세력들은 파상적으로 이주한 세력들 사이에 세력동맹을 맺 고 왕을 배출하며 지배세력 집단이 되었고 촌장(추장)세력을 다스려 나가게 되었다. 그에 비하여 고구려나 백제의 지배세력들은 이주할 때 이미 국가를 형성할 수 있을 만한 집단을 이루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어느 경우이건 이주민집단은 소국을 형성할 수 있는 일정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 집단은 이미 정치적으로 선진 한 지역에서 살았기에 국가를 건국하고 통치해 나갈 능력을 갖추고 있 었다. 또한 우수한 무기와 전투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소국형성세력들은 그러한 군사적인 실력을 바탕으로 선주세 력들 위에 군림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들은 군사적인 힘으로 선주 집단 을 정복하여 지배세력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더라도 건국신 화에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로 6 촌장이나 가락 9 촌장들을 지배하게 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건국신화의 변경에 따른 것이라 생각 된다. 이주민집단의 등장은 소국형성 지역에 커다란 변동을 초래하였다고
여겨진다. 그 중 하나는 인구의 증가를 들 수 있다 . 그리고 인구의 중 가는 사회적인 압박을 초래하였다고 여겨진다. 그 결과 사로 6 촌에서 는 소국형성 직전에 6 촌장들이 모여 〈우리 무리들은 위에 군림하여 백 성들을 다스릴 군주가 없어 백성들이 모두 放逸하여 제 마음대로 하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 君主로 삼고 立邦設都하지 않겠는가?〉 한 것을 볼 수 있다(사료 El). 사로 6 촌에는 혁거세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고조선계 이주민 동이 이주하여 촌락사회의 변동이 생겼다고 여 겨진다 . 그 결과 6 촌의 촌락연맹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여 보았다 . 그 런데 촌락연맹만으로는 백성들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져 6 촌 전체를 통합하여 다스릴 군주를 필요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인구 증가에 따른 사회적인 압박이 사로국이나 가락국의 국가형성 요 인으로 작용한 것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당시 사로 6 촌이나 가락 9 촌의 주민들은 이주민들의 통제를 받게 될 때 다른 곳으로 이주할 가 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주변 지역에도 다른 촌락사회 세력들이 자 리잡고 있었기에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고 여겨진다. 그러한 까닭에 촌장사회의 주민들은 이주민들의 통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헤아려진다. 그런데 이주민들이 소국을 형성하게 된 데에는 촌장세력이 이끌던 촌락사회가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촌락사회는 이미 적어 도 정치적 권력이 존재한 사회였고 촌락연맹 단계의 정치조직을 갖추 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촌락연맹 단계에 이르렀던 선주세력들 이 가지고 있던 단위정치체인 촌락을 통합하여 한 단계 높은 정치조직 인 소국을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촌락사회는 촌락을 통합하 여 다스릴 군주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 결국 이주민들은 몇 개의 촌락을 통합하여 소국을 형성하였고 그러한 소국은 대체로 方百里 정도의 영역을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112) 이주민
112) 李鍾旭, 『韓國 初期國家의 政治發展段階와 政治形態』, 『韓國史上의 政治形態』,
1993, p. 43.
세력은 많은 인원으로 이주하였거나 파상적으로 이주한 세력들이 연맹 을 맺어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우수한 지도자에 의하여 강력한 정치세 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러한 이주민들은 선주세력과의 경쟁에서 승리하 여 성읍을 축조하여 장악하고 관료제도를 운용하고 군사적인 방법으로 소국을 통치하였다. 소국형성의 형태가 같은 것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여기서 소 국형성의 유형을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십제(백제) 소국의 형성을 한 유형으로 들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온조집단이 백제를 건국할 때 마한왕이 마한의 동북 1 백 리의 땅을 할양해 준 것으로 나오고 있 다 .113) 이는 온조집단이 그 땅에 십제를 형성하였던 것을 말해 준다. 물 론 마한왕이 온조에게 땅을 할양하여 주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어 쩌면 온조집단이 실력으로 하남 위례성 지역을 장악하고 국가를 형성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더라도 여기서 십제의 국가형성시 그 남쪽 에 마한이라는 정치세력이 존재하였던 것은 알 수 있다. 이는 십제가 소국 또는 소국연맹 단계에 들어서 있던 지역에서 새로이 소국을 형성 한 것을 뜻한다. 이러한 유형의 국가형성은 고구려의 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 역시 소국을 형성하였을 때 이웃한 지역에 비류국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그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사로국이나 가락국의 형성을 또 다른 국가형성의 유형으로 둘 수 있다. 사로국이나 가락국은 촌락연맹 단계에 머물러 있던 지역에서 촌락사회를 통합하여 국가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유형의 국가형성은 국가형성의 터전이 첫째 유형과는 크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더 라도 두 유형 모두 이주민집단이 국가를 형성한 세력이었다는 점에서 는같다. 여기서 셋째 유형의 국가형성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다. 고조선의
113) 『三國史記』 23, 百濟本紀 l, 百濟始祖 溫祚王 24 년.
국가형성세력은 단군집단이었다. 그러한 단군집단은 이주민집단은 아 니었다고 보았다 .114 1 그러면서 단군집단은 환웅이나 기자로 표현된 이 주민 세력의 영향을 받아 국가형성의 힘을 얻었다고 여겨진다. 이와 같이 이주민집단이 아니면서 이주민들의 영향과 자극을 받아 정치적 실력과 군사적 실력을 키워 소국을 형성한 나라들이 있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 물론 구체적으로 어떤 소국들이 이러한 유 형에 속하는지 말하기는 쉽지 않다. 위에서 소국형성의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그런데 고조 선 • 부여 • 신라 • 가야 등의 소국이 형성될 때 이웃에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다른 소국들이 형성되었다고 여겨진다. 한편 둘째 유형의 국가 형성 지역에는 이미 이웃한 지역에 소국 또는 소국연맹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제 한국 초기국가들의 국가형성 시기에 대하여 정리하기로 한다. 고조선은 기원전 12 세기 말에서 기원전 11 세기 초에 소국형성을 하였 다고 보았다 .115 ) 부여의 국가형성 시기에 대하여는 잘 알 수 없으나 기 원전 7 세기 이전으로까지 그 연대를 올리는 견해도 있다 .Il6) 고구려는 적어도 기원전 107 년 현토군 설치 이전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현토 군의 군치가 고구려현이었던 것을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한편 백제의 건국연대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것과는 달리 더 올라가야 한 다고 여겨진다. 대체로 기원전 2 세기까지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118) 신 라의 국가형성은 기원전 2 세기 말에서 아무리 늦어도 기원전 1 세기 중 엽까지 올라간다고 생각한 바 있다 .119) 한편 가야의 소국형성 시기는
114) 李鍾旭, 앞의 책, 1993, pp. 87~91. 115) 위의 책, pp. 68~73. 116) 김병룡, 『부여국의 성립에 대하여」, 『조선고대 및 중세초기사연구』, 1992, pp. 14 ~15. 117) 李基白, r 高句麗의 國家形成 問題』, 『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198 .5, p. 8 1. 118) 李鍾旭 『百濟의 國家形成」, 《大丘史學) 11, 1976.
『삼국유사』와는 달리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본다. 어쩌면 사로국 의 형성과 비슷한 기원전 2 세기에서 기원전 1 세기경이 아니었을까 짐 작된다. 그것은 기원전 4 세기 초 고조선의 요동 상실로 인한 고조선계 이주민의 등장, 기원전 3 세기 후반 중국 진 • 한의 교체기에 중국 燕 • 齊 • 趙人들의 한반도 이주, 기원전 2 세기 초 위만조선의 성립으로 인 한 고조선세력의 이주, 기원전 108 년 낙랑군 등 한군현의 편성시 생겨 난 이주민집단의 존재를 통하여 생각할 수 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이 주한 이주민집단이 모두 국가형성세력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 더라도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의 원동력이 이주민으로부터 나왔다고 보 이므로, 백제 • 가야 • 신라 지역의 소국형성도 『삼국사기』나 『삼국유 사』에 나오는 기록보다 앞섰다고 여겨진다. (2) 소국연맹 형성의 주요 요인 앞에서 소국형성의 원동력을 제공한 것이 이주민 세력이었다고 보았 고, 그 실체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이제 소국연맹 형성의 원동력이 무 엇이었는지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일정 지역에서 하나의 소국이 형성되면 그 주변에 거의 동시에 다른 소국들도 형성되었다고 여겨진 다. 요동지역에서 고조선 소국이 형성되었을 때 이웃한 지역에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여러 소국들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한 현상은 부여 소국, 고구려 소국, 십제(백제), 사로국, 가락국 등의 형성 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특히 앞에 제시한 사료 Fl 에 나오는 6 가야의 형성설화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일정 지역에 여러 독립소국들이 형성된 후에는 각 소국들이 이웃한 소국들과 여러 가지의 관계를 맺어 나가게 되었고 그러한 관계는 점차 발전하여 나갔다. 그리고 그러한 소국들이 모여 원거리교역을 행하게
119) 李鍾旭, 앞의 책, 1982, p. 53.
되었다. 또한 일정 지역의 소국들은 이웃한 정치세력들의 압력에도 공 동대응하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 소국들은 점차 소국연맹을 형성하 여 나갔다. 이제 한국사상 존재하였던 소국연맹 형성의 원동력이 무엇 이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 먼저 한국사상에 존재하였던 소국연맹으로는 고조선 • 부여 • 예(고구 려) • 마한(백제) • 진한(사로국) • 변한(가야) 등을 주목할 수 있다. 백제 의 경우 소국형성을 한 곳이 마한이라는 소국연맹이 형성되어 있던 곳 이다. 따라서 백제는 마한 소국연맹의 한 소국으로서 국가를 형성하였 다 . 그러한 점은 고구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고 짐작된다. 고구려가 소국울 형성할 무렵 압록강 중류 남만주 일대에는 이미 소국연맹이 형 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간다. 경상북도 일원에는 여러 소국이 형성되었는데 그 중 신라의 모체가 되었던 사로국이 있었다. 그리고 경상남도 일대에는 『삼국지』 등에 변한으로 나오는 정치체가 있었으며 변한의 여러 소국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 加耶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한 가야 역시 소국연맹을 형성하고 있었다 . 앞에서 한국의 초기국가로서 성장하였던 소국들은 이주민집단에 의 하여 형성되었던 것을 보았다. 소국들의 국가형성 시기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났으며 요동지역에서는 고조선을 비롯하여 여러 소국들이 적어 도 기원전 12 세기 말에서 11 세기 초에 형성되었다. 그리고 한반도 남 쪽지역에서는 기원전 2 세기경 사로국이나 가락국을 비롯하여 여러 소 국들이 형성되었다. 부여지역에서는 고조선보다는 늦게 소국들이 형성 되었고 고구려지역에서는 부여보다 늦게 소국들이 형성되었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마한, 진한, 변한 동의 지역에서 성장하였던 소국들은 지 역에 따라 각기 유사한 국가형성 과정을 거쳤고 공통의 언어를 갖고 있었고, 신앙체계 • 상징체계를 공유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사실은 고고학적 인 발굴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고조선, 부여, 예(고구려), 마한, 진한, 변한 지역의 소국들은 각기 언
어 • 신앙 • 상징 체계를 공유함으로 인하여 하나의 이해집단을 형성하 여 나간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소국들 사이에는 소국 간의 경쟁 또는 전쟁과 교역 둥의 관계가 전개되었다. 그러한 사실은 일정 지역의 고 분 구조, 출토 유물의 유사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소국들 사이에는 아직 정치적인 연맹이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소국들 사이에 세력의 우열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소국들은 점차 연맹체를 형성하여 나갔다. 여기서 소국연맹 형성 요인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로 소국들 사이의 갈등관계를 주목할 수 있다. 일정 지역의 소국들은 서로간에 병합을 위한 전쟁은 없었으나 전투가 자주 벌어진 것을 생각할 수 있 다. 그것은 소국 단계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각종 무기를 통하여 짐작 할 수 있다. 또한 소국형성과 동시에 성을 축조하는 예를 통하여 당시 전쟁이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120) 그러한 전투 결과 소국들 사이에 는 점차 국력의 강약이 나타난 것은 아닌가 짐작이 간다. 빈번한 전쟁 온 각 소국들의 국력을 소모시켰을 것이다. 그런 속에서도 약탈을 활 발히 전개한 소국들은 오히려 국력을 신장시킬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여기서 소국들 사이에 연맹관계가 맺어지기 전에 이미 국력에 따른 서 열관계가 나타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중 국력이 강했던 소국은 소국연맹이 형성될 때 맹주국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 짐 작이 간다. 둘째, 소국연맹 형성 요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압력을 들 수 있다. 고조선이 소국을 형성하였을 때 중국에서 는 西周時代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데 춘추시대가 전개되며 燕의 세 력이 고조선지역에 압력을 가해 왔다. 또한 山戒의 압력도 고조선에 미친 것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 그것은 齊 桓公이 산융의 침입을 받
120) 그러한 성들은 고조선의 왕검성, 고구려의 졸본성, 백제의 하남 위례성, 신라의 금성, 가락국 수로가 축조한 성 둥을 들 수 있다.
은 연의 구원 요청을 받고 북정을 단행하여 離支 • 孤竹까지 진출하였 다가 회군한 사실로 알 수 있다 .1 2 11 부여는 고조선이나 북방 종족의 압 력을 받았다고 생각되며, 예는 고조선이나 부여의 압력을 받았다고 헤 아려진다. 마한은 한군현의 압력과 말갈족의 압력을 받았다고 생각된 다 .122 ) 그에 비하여 진한이나 변한의 소국들은 의부로부터 군사적인 위 협을 비교적 적게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여하튼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인 압력은 소국들을 묶어 공동 대응하도록 만들었다고 짐작이 간다. 여기서 의부로부터의 압력이 소국연맹 형성의 한 요인이 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 한편 새로운 이주민 세력들도 의부로부터의 압력으로 볼 수 있다. 각지에서 국가를 형성하였던 소국들은 이주민들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고 보았다 . 그런데 일단 소국이 형성된 후에도 이주민들은 계속 등장 하였다고 여겨진다 . 그러나 국가형성 후 새로이 들어오는 이주민들은 왕위를 장악할 기회가 없거나 기존의 왕실세력들과 연맹을 맺었다가 후에 왕위를 장악한 예도 생각할 수 있다 .IZll 따라서 이주민 세력들은 소국연맹 형성의 요인으로 보기 어렵다. 셋째, 원거리교역을 소국연맹 형성의 또 다른 요인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고조선은 이미 기원전 8 세기경부터 중국의 齊와 원거리교역을 행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어『子』 23, 揆度편에 齊의 桓公과 管仲 사이 에 오간 문답 내용이 있다. 그에 따르면, 환공이 해내의 玉幣가 7 가지 가 있다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물으니 관중이 답하는 중에 (발)조선의 문피를 그 하나로 들었다. 또 같은 책에서 관중은 (발)조선이 조공하지 않음은 문피와 털옷 124) 을 공물로 요구하기 때문이니 … 한 마리 표범의
121 ) 盧泰敦 , 『古朝鮮 중심지의 변천에 대한 연구」, 《韓國史論) 23, 1990, 43. 122) 한군현과 말갈족의 압력을 받은 한반도 남쪽의 소국들은 연맹체를 형성하게 되 었고 그 북쪽에 십제와 미추홀 소국의 형성을 막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123) 사로국의 석탈해집단과 알지집단을 통하여 그것을 알 수 있다.
가죽을 금으로 놓아 값을 치르면 이 후 8 천 리 (발)조선도 조공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1 25) 이와 같은 환공과 관중의 대화는 관중이 齊 의 相이 되어 환공을 도왔던 기원전 685 년경에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당시 고조선과 중국 사이에 있었던 관계는 구체적으로 어떠 한 성격을 지닌 것일까 . 위의 기록에 의하면 중국의 齊 는 기원전 7 세 기에 주변의 여러 세력들로부터 각지의 특산물을 구한 것을 알 수 있 다. 그 중 고조선으로부터는 문피 등을 幣로 삼도록 청하였다고 한다 . 여기서 말하는 폐는 폐백 • 예물을 의미하며 대체로 공물 정도로 이해 된다. 조선이 제에 보냈던 물건은 조선의 특산물로 중국인돌이 매우 귀하게 여기던 물건들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조선으로부터 물건을 받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 그러한 까닭에 조선의 특산물인 約皮룰 금 과 같이 귀한 값을 치르도록 한 것이 분명하다. 이는 고조선과 제 사 이의 관계가 단순한 조공관계라기보다 원거리교역이 행해진 관계임을 뜻한다• 고조선과 춘추시대 중국의 제후국들과 사이에 있었던 원거리교역의 교역품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앞에서 언급한 문피와 털옷 외에 비 파형동검을 들 수 있다. 비파형동검은 고조선을 포함한 요동지역 국가 들의 표지적인 유물이다. 그러한 비파형동검이 요서지역뿐 아니라 북 경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는 비파형동검이 당시의 교역품이었을 가능성을 말해 준다. 한편 중국에서 들어온 교역품은 무엇이었을까. 이 와 관련하여 岡上무덤에서 나온 보배조개를 주목할 수 있다 .1 26) 보배조 개는 조선지역에서는 생산되지 않던 것으로 교역을 통해 들어온 것이 다. 여기서 구체적인 교역품은 알 수 없으나 고조선과 중국 사이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교역품들이 오갔다고 생각된다 .
124) 李鍾旭 , 앞의 책, 1993, p. 114 주 7. 125) 위의 책, p. 115 주 8. 126) 위의 책, p. 116 주 10.
요동지역에서 국가를 형성하였던 여러 소국들은 각기 중국의 제후국 들과 교역을 하였을까. 그렇지는 않았다고 짐작된다. 기원전 8~7 세기 경에 이르게 되면 요동지역의 소국들은 고조선을 원거리교역을 위한 창구로 삼게 되었고 고조선이 원거리교역을 주관하여 나가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그 과정에 요동지역의 소국들은 고조선을 맹주국으로 하여 소국연맹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요동지역의 여러 소국들은 비파형동검 둥을 표지적인 유물로 볼 수 있으며 동시에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였고 정치적으로 각 소국의 규모도 비슷하였다고 생각된다. 그 러한 사정은 요동지역에서 발굴 조사된 유적과 유물을 통하여 어느 정 도 알 수 있댜 그 때의 여러 소국들의 존재는 잊혀졌지만 맹주국이었 던 고조선 소국은 그 후 다른 소국을 병합하여 하나의 커다란 왕국으 로 성장하였가에 지금까지 그 존재가 알려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다음은 소위 삼한지역의 소국연맹 형성 요인과 관련하여 원거리교역 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삼국지』에는 마한에 50 여 국, 변한과 진한에 각기 12 개 소국들이 있었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는 우선 12 소 국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진한의 실체를 주목하기로 한다. 사로국을 포함한 삼한의 소국들이 형성된 시기는 늦어도 기원전 2 세기 말에서 기원전 1 세기 초였다고 생각하여 보았다 .I 'll) 그런데 혁거세왕 38 년에 왕이 호공을 마한에 사신으로 보낸 기록을 주목할 수 있다. 혁거세왕 이 호공을 마한에 파견한 것은, 단순히 사로국만의 사신을 파견한 것 이 아니라 진한을 대표하여 보냈던 것으로 생각된다 .128) 여기서 늦어도 기원전 1 세기 중에 삼한이 성립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삼한의 원거리교역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삼한 사이에도 원거 리교역이 행하여졌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삼한과 낙랑군사이 에 있었던 원거리교역을 주목하기로 한다. 기원전 1 세기에는 주로 낙
127) 李鍾旭 『斯盧國의 成長과 辰韓』, 《韓國史硏究) 25, 1':f7 9 , p. 8. 128) 『三國史記』 1, 新羅本紀 1, 赫居世王 38년.
랑에 온 漢 內郡賈人들이 배를 타고 삼한지역을 왕래하며 교역 또는 약탈을 하였다. 그리고 기원후 1 세기 초에 이르러 염사착, 소마시 둥의 세력들이 낙랑군 치소로 이주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낙랑과 삼한 사이의 교역에서는 삼한세력들이 보다 적극성을 띤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삼한지역의 수십 개 소국들이 모두 독자적으로 낙랑과 원거리 교역을 하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실제로 사로국은 진한 여러 나라의 원거리교역의 창구가 되었다고 헤아려진다. 그것은 북쪽의 계립령 • 죽령이 개통되지 않았고 낙동강 하류지역에는 변한으로 이야기되는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진한 소국들 중 낙랑 등 선진문물을 공급하던 세력과 해상통로로 왕래 하기 쉬운 위치에 있던 사로국이 진한의 맹주국으로 등장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해지역의 가락국은 낙동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었기 에 변한 소국들 중 원거리교역을 하기에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 었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하여 가락국은 변한의 맹주국으로 성장하 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 한편 마한에도 원거리교역을 하던 교역의 창구 가 되었던 소국이 있었고 그러한 소국은 마한의 맹주국이 되었다고 여 겨진다. 여기서 원거리교역이 소국연맹 형성의 요인으로 작용한 것을 짐작할수 있다. 낙랑군과 삼한의 원거리교역은 중국인의 관점에서는 조공관계로 보 일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면에서 그러한 교역을 통하여 중국의 선 진문물과 문명을 접하게 된 삼한 소국들은 점차 정치적인 성장을 하여 나가게 되었다. 그 중 교역의 창구가 되었던 맹주국은 연맹 내의 다론 소국에 수입한 물건들을 분배하여 주었고 그 과정에 정치적 • 군사적 • 경제적 정보를 먼저 얻을 수 있었고, 무기 둥 특정한 물품을 독점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그 과정에 맹주국들은 국력을 키워 나갔고 후에 연맹 내의 소국들을 병합하기도 하였다 .129)
129) 李鍾旭, 앞의 책, 1982, pp. 95~107.
이제 앞에서 알아본 바를 토대로 소국연맹 형성의 원동력이 무엇이 었는지 정리하기로 한다 . 먼저 소국연맹 형성의 기반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다. 일정 지역의 소국들은 거의 동시에 형성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소국들은 언어 • 문화 둥을 공유하고 있었고 교역을 하였다 . 그 러한 관계는 일정 지역 소국들과 그 밖의 정치세력 사이를 구분하는 관념을 갖게 만들었고 점차 하나의 이해집단으로 발전하게 하였다. 그 런데 소국들 사이에는 전투 등 경쟁관계도 지속되었다 . 그 결과 일정 지역 소국들 사이에는 국력의 차이에 따른 위계도 나타났다고 여겨 진다 . 이는 소국연맹 형성시 맹주국 등장의 길을 열어 놓은 요인이 되 었다. 다음으로 소국연맹 형성의 원동력은 일정 지역의 여러 소국들이 의 부로부터의 압력에 공동대응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을 들 수 있다. 이 웃한 지역의 세력이 압력을 가할 때 소국들은 이에 대옹하기 위하여 군사적 동맹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때 동맹체의 군사적인 맹주국이 대두하게 되었다. 물론 소국연맹 단계에서는 맹주국이 연맹 내의 다른 소국에 대해 통제를 가할 수 없었다. 한편 원거리교역을 소국연맹의 또 다른 원동력으로 볼 수 있다 . 진 한의 소국들은 낙랑의 선진문물을 필요로 하였고 그것을 수입하는 과 정에서 사로국이 교역의 창구가 되었다. 그런데 사로국은 원거리교역 의 창구로서의 기능을 하는 과정에서 군사적 • 경제적 실력을 신장시켜 나갈 수 있었다 . 이에 사로국은 진한 소국들의 맹주국이 될 수 있었다 고 생각된다. (3) 소국병합의 주요 요인 다음은 소국병합의 원동력이 무엇이었나 보기로 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백제 및 고구려는 소국 단계에 있을 때 이미 이웃한 소국
들과 연맹을 맺는가 하면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로국은 탈해왕대에 居道가 이웃한 于 尸山國 • 居染山國울 멸한 것으 로 나오고 있다 .1 3> ) 고구려는 시조동명성왕 2 년에 이미 송양이 다스리 던 권隨流國이 항복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1 3 1 ) 그리고 『삼국사기』의 백제 시조 온조왕 즉위조를 보면 온조가 십제를 세운 후 미추홀에 세웠던 소국을 통합하여 百濟로 국명을 바꾼 것으로 나오고 있댜 1 32) 고구려와 백제는 비류국과 미추홀 소국의 항복을 받은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그 자체가 과연 단순한 항복이었는지 단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신라와 같이 군사적인 실력을 배경으로 하여 국력을 신장시킨 고구려 • 백제에 항복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고구려, 백제 및 신라는 그 후 여 러 소국들을 군사적인 실력으로 병합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소국병합은 일반적으로 전쟁을 통하여 이룬 것을 알 수 있 다. 일정 지역에 거의 동시에 형성되었던 소국들은 그 국력이 비슷하 였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소국들 사이의 경 쟁관계가 지속되며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소 국 또는 소국연맹 시기 소국들 사이에는 빈번한 전투가 있었던 것으로 침작이 된다. 그러한 사실은 당시 축조된 성의 존재와 고분에서 출토 되고 있는 무기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한편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어 도 원거리교역 등을 통하여 소국들 사이에 국력의 차이가 벌어져 우열 관계가 생겨났다고 헤아려진다 . 그런데 소국 간의 우열이 나타났다고는 하지만 한 소국이 이웃한 소 국을 병합하는 일은 용이하지 않았다. 따라서 소국연맹 단계에서 전투 는 빈번하였다고 여겨지나 전쟁을 통하여 다른 소국을 병합하는 일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소국들이 군사적인 무장을 하고 있었기
130) 『三國史記』 44, 列傳 4, 居道 131) 『 三國史記』 13, 高句麗本紀 1, 始祖東明聖王 2 년조. 132) 『三國史記』 23, 百濟本紀 1, 百濟始祖溫祚王 즉위조.
에 쉽게 그 균형관계가 깨지기 어려웠던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이 같 은 군사적 무장을 한 소국을 병합하기는 쉽지 않으나 어떤 한 소국이 이웃한 소국을 일단 병합한 후에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된다. 다른 소국을 병합한 소국은 그 국력이 거의 배로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처음 소국을 병합한 이후 다른 소국을 병합하는 일은 가속 화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국사상 소국을 병합하여 하나의 왕국을 이룬 나라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및 신라를 들 수 있다. 이러한 나라들은 전쟁에서 승리하 여 소국들을 통합해 나간 것이 분명하다. 물론 항복을 해 온 소국도 있었다• 여하튼 전쟁을 통하여 소국병합을 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 제, 신라는 그 정치영역이 확대되고 인구도 늘어났다. 그러한 영역의 확대와 인구의 중가는 국가의 정치 • 사회 • 경제 • 문화 체제를 변동시 키는 강력한 요인이 되었으며 그 결과 국가 통치를 위한 영속적인 통 치체제를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다. 여기서 소국병합의 방법 또는 수단이 되었던 전쟁이 바로 소국병합 의 원동력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전쟁은 정치발전의 도구가 되었으며, 전쟁을 통한 통합 결과 단위정치체의 수는 줄어들게 되었고, 통합을 이끈 정치체의 규모는 확대되었다. 그리고 전쟁은 새로운 종족집단을 만들어 나갔던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전쟁의 결과 국왕의 정치적인 권 력은 신장되었고, 국가의 신분충은 늘어나게 되었다. 한국사상 성장하였던 소국연맹 단계의 정치체 중 가야는 소국들 사 이에 적지 않은 전투가 있었다고 여겨지나 소국병합 단계로까지는 발 전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소국들 사이의 무장력이 비슷하였던 때문 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가야의 소국들은 이웃한 소국의 침략이 있을 때 그 지배세력들이 倭 둥지로 도망을 갈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에 소국들 사이에 병합관계를 갖는 것이 병합을 주도한 소국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면도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짐작이 간다. 여하튼 소
국연맹 모두가 소국병합 단계로 정치발전을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수 있다. (4) 한국 초기국가 형성 • 발전 요인의 특성 위에서 한국 초기국가 형성 • 발전의 주요 요인에 대하여 정리하였 다. 여기서 그 특성을 요약하여 제시하기로 한다 . 먼저 촌락(추장)사회 에서 소국 단계로 발전하는 요인에 대하여 정리할 수 있다. 한국사상 존재하였던 소국의 수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 중 지금까지 건 국 사정을 전하는 건국신화 또는 설화가 남아 있는 나라들을 보면, 소 국의 건국세력은 이주민들이었던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 이들 이 주민집단은 소국형성의 원동력을 제공한 것이 분명하다. 이주민들은 원래 살던 지역에서 정치적인 경쟁에 밀려 새로운 지역으로 이주한 집 단이다. 그러나 이들 이주민집단은 원래 살던 지역에서 이미 정치적으 로 국가 단계의 경험을 가진 집단이었다. 그들은 새로이 이주한 지역 에서 국가를 형성할 능력이 있었다. 사로국을 형성하였던 혁거세집단 이나 가락국을 형성하였던 수로집단은 촌락사회를 통합하여 소국을 형 성하였다. 그에 비하여 고구려를 형성하였던 주몽집단이나 십제를 형 성한 온조집단은 이미 소국연맹이 형성되어 있던 지역에서 일정 영역 을 차지하고 소국을 형성한 바 있다. 이는 한국사상 존재하였던 소국 의 형성 배경이 같지 않았던 것을 잘 보여준다. 다음은 소국연맹 형성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 보았다. 이와 관련하 여 두 가지의 주요 요인을 생각하여 보았다. 그 하나는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압력이고 다른 하나는 원거리교역이다. 의부로부터 압력을 받 은 일정 지역의 소국들은 연맹을 맺고 맹주국이 대두되어 이민족 동의 침략에 공동 대처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일정 지역의 소국들이 선진문물을 수입하기 위한 원거리교역을 수행하는 과정에 교역의 창구
가 되었던 소국이 맹주국이 되어 소국연맹을 형성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과정에 맹주국은 선진문물과 선진문명을 먼저 접하고 각종 정보도 먼저 갖게 되어 소국연맹 내의 다론 소국들에 비하여 정치적인 성장이 빨랐다고 여겨진다 . 한편 소국병합의 주요 요인으로는 병합을 위한 전쟁을 들 수 있다. 소국연맹의 맹주국은 맹주국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국력을 키웠고 그러한 국력을 바탕으로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하기 시작하였다 . 일단 소국병합을 시작한 나라는 그 국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소국병합을 가속화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소국연맹 중 가야는 소국병합 단계로 발전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모든 소국연맹이 소국병합 단 계로 발전한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결론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단계 이 책은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발전 과정에 대한 이해를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한국사에 나타나는 초기 정치집단은 여럿이 있다. 그 중에 는 古朝鮮, 夫餘, 高句麗, 百濟, 新羅, 加耶를 비롯하여 東澈, 沃沮, 三 韓 등의 정치집단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와 같은 여러 정치집단 의 국가형성과 발전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궁금하다. 위와 같은 여러 정치세력들이 동일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국가를 형성하고 발전한 것 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 형성, 발전 과정을 크게 몇 개의 단계로 나누 어 보면 그들 정치집단은 대체로 일정한 정치발전단계를 거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각 집단마다 세부적인 발전 과정이 다르고 또 모든 세력이 모든 정치발전단계를 거친 것도 아니다. 결론에서는 각 정치집단이 어떠한 과정을 어떻게 거쳤는가 하는 문제를 정리하고자 한다. 이는 한국 초기국가 발전 과정에 대한 시대구분과도 연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한국의 초기국가가 형성되고 발전하여 나가는 과정에 대한 시대구분은 다양하게 주장되어 온 바 있다. 그런데 1960 년대에 들어서 며 (氏族社會-)部族國家-部族聯盟-古代國家로 이어지는 정치발전단
계에 따른 시대구분이 널리 받아들여진 바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시대구분은 구체적인 연구결과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용어 자체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들이다. 이에 1970 년대 초에는 部族 國家 • 部族聯盟이라는 시대구분 용어의 문제점이 지적되기에 이르렀 다 .2 ) 그 후 한국사의 초기 정치발전단계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이 나오 게 되었다. 그 중 千寬宇는 城邑國家 -領 域國家로 이어지는 단계를 설 정하고 있댜 특히 그는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신라 • 백제 • 가야 동 삼한의 국가형성에 대해 새로운 조명을 하며 그와 같은 단계를 설정하였다? 한편 李基白은 城邑國家-聯盟王 國 -王 族中心의 賀族社會로 이어지는 시대를 설정한 바 있다 .4 ) 그에 비하여 李鍾旭 • 李賢惠 • 盧重國 등은 小國 -小 國聯盟이라는 정 치발전단계를 설정하여 시대구분을 하고 있다 .5 ) 이에 대하여 李基白은 소국이라는 용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한국의 초기국가를 성읍국가라 고 부르는 것이 정당하고 또 적절하다고 한 바 있다 .6 ) 필자도 사실 소 국이라는 용어에 문제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성읍국가라는 용어가 가지는 정당성에 대한 이기백의 견해를 타당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뒤에 언급하는 것과 같이 성읍국가라는 용어에 문제가 아주 없 는 것은 아니다. 한편, 金貞培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보이는 君長은 정치발전단 계상 君長社會 (c hi e fd om) 의 지도자를 뜻한다고 보았댜 그에 따르면
1) 金哲浚, r 韓國古代國家發達史J, 『韓國民族文化發達史』 I, 1964. 2) 千寬宇 編, 『韓國上古史의 爭點』, 1ITT6. 3) 千寬宅 『三韓의 國家形成』 上 • 下, 《韓國學報》 2 • 3, 1976. 4) 李基白, 『韓國史新論』(改正版), l 'J7 6/ 『韓國史新論』(新修版), 1990. 5) 李鍾旭 『新羅國家形成史硏究』, 1982. 李賢惠 『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 1984. 盧國, 『百濟政治史硏究』, 1988. 6) 李基白, r 高句麗의 國家形成問題』, 『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1985, pp. 83~90.
삼한 • 옥저 • 예 둥의 사회는 군장사회가 된다 . 그리고 이와 같은 군장 사회는 최소한 청동기문화를 딛고 서는 사회이며 철기문화가 깊숙이 들어온 사회라고 하였댜 그는 군장을 칭하는 사회를 넘어서면 왕을 칭하는 사회단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변태섭 역시 김정배의 견 해와 같이 군장사회가 ch i e f dom 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청 동기시대의 사회조직이 군장사회로 특징지워진다고 하며 한국사상 나 타나는 여러 군장사회에 대하여 다룬 바 있다 ? 뒤에 보다 자세히 다 루겠지만, 필자는 삼한 등의 사회를 ch i e f dom 으로 보는 견해는 따르고 있지 않음을 미 리 밝혀 둔다 .9l 앞에서 최근 나온 한국의 초기국가 발달단계에 대한 여러 견해들에 대하여 간단히 알아보았다. 그런데 그와 같은 정치발전단계 또는 시대 구분을 나타내 주는 용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지금 우리가 관심을 기 울여야 할 대목은 한국 초기국가 발전 과정의 실상에 대한 이해가 아 닌가 한다. 그런데 자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앞에 언급한 여러 정치집 단에 대한 국가 형성, 발전 과정을 모두 정리할 길이 없다. 따라서 여 기서는 보다 잘 정리된 초기국가의 발전 과정에 대한 연구결과에서 얻 어진 발전단계 또는 시대구분에 대한 이해를 작업의 틀로 하여 한국의 초기국가 발전 과정에 대한 고찰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다. 필자는 신라의 국가형성에 대한 해명을 하는 중에 村落(웁長)社會 단계의 斯 盧 6 村, 소국시대의 斯 盧 國, 진한소국연맹시대의 사로국, 진한 소국정복시대의 신라, 삼국시대의 신라라는 다섯의 정치발전단계를 설 정하여 시대구분을 한 바 있다. J O I 이는 추장사회, 소국, 소국연맹 , 소국
7) 金 貞培 , 「 韓 民族의 起 源 과 國 家形 成의 諸 問題」, 《 國史館 論穀 〉 1, 1989, pp. 14~ 26. 8) 邊太燮, 『韓國 史通 論』 , 1986, pp. 40~48. 9) 李鍾 旭 , 『百 濟 初期 史 硏究史 料 의 性格J, 《 百濟硏究》 17, 1986, pp. 20~24 참조. 10) 李 鍾 旭, 앞의 책, 1982, pp. 255~262.
병합, 중앙집권적 왕국으로 성장하였던 것을 뜻한다. 본고에서는 이 같 은 발전단계를 작업의 틀로 삼아 한국의 여러 초기국가들의 성장, 발 전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물론 위에 언급한 초기국가의 성장, 발전단계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시되었던 단계들보다는 세분된 단계 를 설정한 것으로 여러 정치집단의 발전 과정을 비교적 정확하게 설명 할 수 있는 작업의 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것은 종래 부족국가 또는 성읍국가로 다루어지던 단계를 촌락(추장)사회와 소국 단계로 나 누어 보고 부족연맹 또는 연맹왕국 단계로 다루어지던 단계를 소국연 맹과 소국병합 단계로 나누었다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본고는 한국의 초기국가 발전 과정에 대한 이해를 위한 하나의 가설 에 불과하다 . 그리고 위에 제시한 발전 과정을 모든 정치세력이 거치 는 것도 아니었다. 그와 같은 사실들을 가능한 한 밝혀 보고자 한다. 여하튼 한국의 초기국가 성장, 발전에 대한 완벽한 단계 설정과 그에 따른 시대구분은 있기 어렵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앞으로 보다 합리적 인 견해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본고의 작업을 토대로 필자는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 발전단계』에 대한 작업을 하여 왔다. 1 촌락(추장)사회 단계 소국으로서 성읍국가의 형성 이전에는 어떠한 정치조직이 있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 이와 관련하여 사로국 형성 이전의 사로 6 촌의 존재 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을 주목할 수 있다. (1) 시조의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혁거세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 자 4 월 병진에 왕위에 오르니 왕호는 거서간이다. 그 때 나이는 열세 살
이었다 나라 이름은 徐那伐이라 했다.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며 여섯 마을을 이루었는데 l 은 알천 양산촌, 2 는 돌산 고허촌 , 3 은 취산 진지촌, 4 는 무산 대수촌, 5 는 금산 가리촌, 6 은 명활산 고야촌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진한 6 부로 되었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 나정 옆의 숲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을 보고 가서 보니 문득 말은 볼 수 없고 단지 큰 알이 있어 그것을 깨니 갓난아이가 나왔다 . 곧 데려다 길렀는데 나이 십여 세가 되자 기골이 준수하고 숙성하였다. 6 부인들은 그 출생이 신이하여 높이 받들고 존경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임 금으로 삼았다.(『 三 國史記』 1, 新羅本紀 1, 始祖 赫居世王 즉위조) (2) 전한 지절 원년 임자 3 월 1 일 6 부의 祖들이 각기 자제들을 거느리 고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 의논을 하였다. 〈 우리는 위로 군주가 없어 백 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여 저 하고자 하는 대로 하니, 어찌 덕 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로 삼고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삼지 않겠는가〉 하였다 . (『 三 國遺事.!I 1, 紀異 2, 新羅始祖 赫居世王) 위의 사료는 사로국의 시조왕이 되는 혁거세의 등장과 왕 죽위에 대 한 것이댜 여기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사로국 건국 이전의 사로 6 촌 과 각 촌마다 있던 촌장세력이다. 그 중 사로 6 촌은 유리왕 9 년에 6 부 로 개편되었다고 한다.II) 물론 유리왕 9 년에 6 부의 개편이 있었는지 단 정하기 어려우나 사로 6 촌이 후일 신라의 왕경 6 부로 편제된 것만은 사실로 인정할 수 있지 않나 한다. 그리고 신라의 왕경 6 부는 고려 초 에 다시 이름이 고쳐진 바 있다 .12) 한편, 위의 사료에는 고허촌장인 소벌공과 6 부의 조와 그 자제들이 나오고 있다. 당시는 6 부의 개편이 이루어지기 전으로 6 부는 6 촌으로 보아야 한다 . 이 같은 사로 6 촌에는 후일 6 부의 조상으로 받들어지는
11) 『三國史記』 1, 新羅本紀 1, 個理尼師今 9 년조. 12) 『三國遺事』 1, 紀異 2, 新羅始祖 赫居世王條.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후손은 신라시대에 성을 부여받은 것으로 되 어 있다 . 131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사로국 형성 이전 각 촌에 있던 촌 장과 그들의 자제들이다. 이들은 전한 지절 원년에 덕이 있는 사람으 로 군주를 삼고 立邦設都하기 위한 회의에 참가하였다. 이로써 보면 당시 촌장과 그 자제들은 사로 6 촌 안에서는 중요한 정치적 지위에 있 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6 촌장 또는 6 촌인들의 기원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삼국유 사』의 기록에 의하면 6 부의 조들은 모두 하늘에서 6 촌의 봉우리나 산 으로 내려왔다고 되어 있다. 이로써 6 촌인들이 이주민임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중에는 중국 계통의 주민들도 일부 있었다고 여겨지기도 하 지만, 그보다는 고조선 • 위만조선 계통의 이주민들이 적지 않게 있었 다고 헤아려진댜 그것은 경주지역에서 발견되는 석관묘와 토광묘와 같은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그 이전 지석묘 룰 축조하던 주인공들도 생각할 수 있다. 사로국 건국 이전의 사로 6 촌에는 각 촌마다 촌장과 그 자제들이 지 배세력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은 각 촌을 독자 적으로 다스려 나갔다고 보아 틀림없다. 사로국 형성 이전에는 6 촌을 하나로 묶어 다스릴 정치적 지배자는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각 촌은 각기 독립된 정치조직을 구성하고 있었다. 단지 사로국 형성 직전에는 6 촌장들이 모여 회의를 여는 것으로 보아 6 촌 연맹체가 형성된 것은 짐작할 수 있으나 사로 6 촌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통합되는 것은 혁 거세가 군주가 되어 사로국을 형성한 이후였다. 여기서 하나의 소국 또는 성읍국가로서 사로국 형성 이전의 정치조직은 촌을 단위로 하고 있었던 사실을 일단 주목할 수 있다. 그런데 소국형성 이전의 정치조직으로 촌이 존재하였던 것은 사로국 이외의 경우에도 나타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주목할 수
13) 『三國史記 』 1, 新羅本紀 1, 儒理尼師今 9 년조 .
있다. 개벽한 후로 이 곳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이 때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 천간, 신귀간 등의 9 간이 있었다. 이들은 個長으로 백성들을 다스렸으니 무릇 1 백 호 7 만 5 천 인이었다. 산야에 스스로 도읍하여 우물을 파서 마 시고 밭을 갈아 먹었다.(『三國造事 』 2, 紀異 2, 綿洛國記) 위의 사료는 盤洛國(금관가야)의 성립 이전의 사정을 말하여 주고 있다. 수로왕을 군주로 받들고 가락국을 세우기 이전 가락지역에는 9 간이 있었는데 이들은 사로국의 형성 이전 사로지역에 있던 6 촌장과 같은 형태의 정치적 지위에 있었던 존재들이라고 헤아려진다. 이들은 사로 6 촌의 예에서처럼 촌장이라고 부르거나 가락지역의 9 간과 같이 추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촌장 또는 추장들이 다스리 던 사회를 촌장사회 또는 추장사회라고 하면 어떨까 한다. 그리고 6 촌 과 같은 촌에 초점을 둘 때에는 이를 촌락사회라고 할 수 있지 않나 한다. 그런데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과정에 대하여 주목하면 그 밖에도 다 른 사회에서 추장 또는 촌장 사회의 형태를 지닌 예들이 찾아진다. 이 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들을 볼 수 있다. (1) 호는 5 천이고 대군왕은 없으며 대대로 읍락에는 장수가 있다.(『三國 志』 東夷傳 東沃沮전) (2) 옥저의 여러 읍락에는 거수가 있는데 모두 3 노라 자칭하였다.(『三國 志』 東夷傳 沃沮전) (3) 대군장은 없고 읍락에는 각기 대인이 있었는데 산림 사이에 거처하 였다.(『 三國志』 東夷傳 抱婁전)
위의 기록에 나오는 東沃沮, 沃沮, 抱 婁 에는 大君王 , 大 君長 둥은 없 고 長帥, 渠 帥 大 人 등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 동옥저 • 옥 저는 이미 고구려 등에게 병합이 된 이후이기에 문제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들 사회가 『 삼국지 』 의 기록으로 나타날 때까지 스스로 소국 을 형성하지 못하고 소국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다른 나라 에 병합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사로국 • 가락국 외에도 촌락 사회 또는 추장사회 단계에 이르렀던 사회는 더 있었던 것을 알 수 있 다. 고구려도 주몽이 초기국가로서 고구려를 세우기 이전에 추장사회 에 해당하는 사회가 있지 않았나 한다.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加 • 大 )j ll 들이 종래 추장들의 전통을 이은 존재는 아니었나 짐작이 간다. 또는 那들이 국가일 수도 있으나 그 이전의 추장사회에 해당하지는 않았나 생각된다. 부여에서는 諸加들이 과거의 추장의 전통을 지닌 존재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온조에 의하여 백제 소국이 형성되기 전에 10 신으로 표현되는 세력들이 장으로 있던 읍락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 14) 盧重國 이 말하 는 읍락은 중국 사서에 나오는 용어인 읍락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필자 는 이룰 촌에 중심을 두어 촌락사회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 밖에 고조 선지역에서도 국가형성 이전에 추장사회 단계의 정치조직이 있었으리 라고 추정되나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 더 이상 언급할 수는 없다. 한국의 여러 초기국가들이 국가형성 이전에 있던 촌락사회 또는 추 장사회를 바탕으로 하여 국가들을 이루었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그와 같은 촌락의 실체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먼저 촌 락의 구조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사로 6 촌을 예로 들 수 있다. 사로국은 원래 사로 6 촌을 통합하여 이루어진 나라이다. 이 같은 사로국은 현재의 경주시와 월성군의 대부분을 포함 하는 정도의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 이는 대체로 1 천 k군 정도 되는
14) 盧 祖 國, 앞의 책, 1988, pp. 51 ~54.
공간을 뜻한댜 이를 가지고 6 촌의 각 촌의 영역을 생각하면 하나의 촌은 대체로 170km2 정도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것이 되나, 실제는 각 촌에 산 등이 있어 그것을 제하면 평균 직경 10km 정도의 영역을 생 각할 수 있다 물론, 촌에 따라서는 영역이 보다 크기도 하고 좁기도 하겠지만 실제 경주지역의 자연적인 공간 구분은 위와 같은 생각을 뒷 받침해 주고 있댜 직경 10km 정도의 공간은 사람들이 말과 같은 교 통수단의 보조 없이 생활하고 정치조직을 형성하기에 쾌적한 공간이라 고 한다 .1 5) 이와 같은 촌락사회의 각 촌락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 울까. 필자는 사로 6 촌의 경우 촌락사회의 일정한 시점에 500 호, 2500 명의 사람이 산 적이 있다고 생각한 바 있다 .16 1 그런데 그와 같은 호구 에 대한 추정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다소 문제가 있기는 하겠으 나 당시의 호구수를 이해하는 데 큰 무리는 없는 추정이라고 보인다. 그러면서도 촌락사회의 존속 기간이 매우 길어 초기의 촌락사회에는 그보다 훨씬 적은 수의 호구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위의 추정 호구수는 사로지역 촌락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시기의 것으로 당시에도 촌락에 따라 호구의 수가 달랐던 것은 생각하기 어렵지 않 다. 그러한 현상은 한국의 여러 초기국가들이 성장하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고 헤아려진다. 고조선이 성장하던 지역에는 일찍부터 적지 않은 인구가 살았다고 보이며 후일 마한지역으로 파악되는 곳에 는 변한이나 진한으로 되는 곳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고 헤아려 진다 .17) 촌락사회의 각 촌에는 여러 개의 마을이 있었다고 믿어진다. 그것은 지석묘의 분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사로 6 촌 지역에서는 50 여 개의
15) 李鍾旭, 앞의 책, 1982, p. 22. 16) 위의 책, p. 26. 17) 『三國志』, 魏 꿉 東夷傳 韓傳 참조.
지석묘군이 찾아졌다 .18 ) 사로지역의 지석묘군은 그 후 많이 파괴되었다 고 여겨진다. 그렇더라도 지석묘군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생각되기에 각 촌에는 여러 마을이 있었던 사실을 침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최근 조사된 장홍군지역에서는 10 개 옵 면에 213 개 군, 2251 개의 지석묘가 발견되었다. 실제 그 곳에는 촌락 사회시대에 보다 많은 지석묘가 축조되었을 것으로 헤아려진다. 여기 서 사로지역과 장홍군지역의 지석묘군 수가 크게 차이나는 점으로 미 루어 촌락사회시대의 지역별 호구수의 규모에 차이가 났으리라는 사실 울 알 수 있다 .19) 여하튼 이러한 지석묘의 분포를 통하여 당시 주거의 분포를 짐작할 수 있다. 각 촌은 수개의 마을로 나뉘었고, 각 마을은 그 규모가 직경 3~ 4lrm 정도 되는 공간으로 되어 있었다고 헤아려진다. 그런데 그와 같 은 마을 안에는 농경 등의 이유로 다시 몇몇 집으로 이루어진 작은 마 을 또는 취락들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따라서 촌을 몇으로 나 눈 마을에는 수십 호의 집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촌락사회의 정치적 성격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앞에서 초기국가로서 소국형성 이전에 존재하던 정치조직인 촌락사회 안에는 촌장 또는 추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력가들이 있었던 사실을 보았 다. 이들 촌장들에 의하여 다스려지던 각 촌락은 촌장을 중심으로 하 여 하나의 씨족집단으로 이루어졌다고 짐작된다. 그것은 사로 6 촌의 주민들에게 촌을 단위로 하여 姓을 내려주었던 사실을 보아 알 수 있 다프 여기서 촌락사회의 촌장 또는 추장은 촌락민으로 이루어진 씨족 의 씨족장으로 보아 좋다고 여겨진다.
18) 李鍾旭, 앞의 책, 1982, pp. 28~29. 19) 촌락사회시대 지석묘 축조에 지역적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앞으로 규명하여야 할 문제이다. 20) 『三國史記』 1, 新羅本紀 1, 儒理尼師今 9 년조.
그런데 앞에서 각 촌에는 여러 개의 마을이 있었고 각 마을은 다시 몇 개의 취락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촌락사회의 씨족집단 은 몇 개의 가계집단으로 나뉘고 각 가계집단은 각 마을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 그리고 각 마을에 나뉘어 살던 가계집단에는 가계장이 있었다고 헤아려진다. 이러한 촌락의 세력가로서 촌장인 씨 족장과 각 마을의 가계장은 지석묘에 매장된 집단이었을 것으로 믿어 진다. 이 같은 지석묘의 존재는 권력자의 성장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좋다고 여겨진다 . 그러면서도 지석묘의 분포에 대한 조사 결과를 보면 지석묘를 축조하던 촌락사회가 아직은 국가 이전의 단계에 있었음울 분명히 알 수 있다 . 만일 지석묘를 소국 또는 성읍국가의 지배세력의 무덤으로 본다면, 그 분포가 지나치게 광범위한 것이 문제가 된다. 따 라서 지석묘는 정치적 권력자의 존재를 나타내 주는 기념비로 보는 데 는 동의하나 그것이 국가형성의 근거로는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여 두기로 한다. 여기서 소국 또는 성읍국가 형성 이전의 사회가 씨족집단으로 구성 되어 있었고 그것이 나뉘어진 가계집단이 있었다는 사실을 통하여 당 시 사회가 아직은 혈연적 원리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지석묘를 축조하도록 명령하고 그에 매장되던 세력 들은 다른 씨족의 성원이나 가계의 성원들보다는 사회적 • 정치적 지위 가 높았던 것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이를 통하여 사회적 • 정치적 계급분화가 이루어진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씨족장이나 가계 장 집단은 그 밑의 씨족원이나 가계원들과 혈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엄격한 신분이 나타나지는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한국사상에 나타나는 촌락사회는 지역에 따라 그 존속 시기가 서로 달랐다고 보아 틀림없다. 이 같은 촌락사회의 존속 시기를 대체로 지 석묘의 축조 시기와 같은 것으로 생각할 때, 한반도의 남쪽지역에는 기원전 7 세기에서 2 세기까지 축조되었고 북쪽에는 그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가 시작되어 일찍이 축조롤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견해를 주목할 수 있다 . 2 1 ) 따라서 북쪽에서 성장하였던 고조선이나 부여, 고구려의 국가 형성 이전에 촌락사회가 일찍이 성장하였던 사실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북쪽지역에서의 촌락사회의 성립 시기는 그 곳에서의 국가형성 시기가 해명되어야 밝혀질 수 있으나 현재로서는 단정하기 어려운 실 정이다. 한국사상에 나타나는 촌락사회의 형성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농경을 위한 필요, 일정 사회 내의 교환과 연맹의 필요, 전쟁 의 수행 둥을 그 이유로 들 수 있지 않나 한다 . 촌락사회시대는 농경 을 하며 정착생활을 하던 때였다. 이와 같은 농경을 하게 되며 인구의 증가현상이 나타났으며 그에 따라 점차 마을과 취락이 늘어나게 되었 고, 이들에 대한 통제의 필요가 생겨나게 되어 촌장세력이 성장하여 나가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같이 농경이 발달하고 그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게 되자 경제 • 정치 • 종교 상의 중심지가 생겨나게 되었다고 믿 어진다. 이와 같은 중심지에는 촌장세력이 있어 농업의 생산과 분배를 통제할 뿐 아니라 나아가 물자의 교환과 이웃한 촌락사회와의 전쟁도 관장하여 나갔다고 헤아려진다. 그리고 촌장세력은 촌락 내의 질서를 유지하는 중심적인 존재로 성장하여 나가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촌락사회시대의 촌장세력들은 촌락 내의 중심마을에 거주하였고 주 변의 여러 마을에는 씨족집단이 나뉜 가계집단의 성원들이 살았다고 여겨진다. 당시에도 이주민들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겠으나 이주민 들은 씨족집단의 성원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또는 그들을 수용하는 일정 한 장치가 사회 내에 마련되어 있었다고 보여진다. 여하튼 이러한 사 회 를 segm enta ry socie t y 또는 conic a l clan 으로 볼 수 있지 않나 한 다. 그리고 촌락사회에는 씨족집단의 거주지인 촌락 전체를 다스리는 조직과 그것이 나뉜 가계집단의 거주지인 마을을 다스려 나가는 조직
21) 金載元 • 尹武炳 『韓國支石 墓 硏究 』 , 1967, pp. 23 ~49.
이 있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촌락사회의 정치조직이 2 단계 로 편성되었던 것은 알 수 있다. 한편 일정 지역의 촌락사회 간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궁금하 댜 사로 6 촌을 예로 들면 그 모든 촌락이 동시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 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그와 같은 촌락들도 처음부터 많은 인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촌락들은 그 형성시기에 차이가 있었고 점차 그 수도 늘어나게 되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이 촌락사회 의 후기에 이르게 되면 촌들 사이에 완만한 연맹체를 이루고 교역이나 정치적 • 군사적 연맹을 이루기도 하였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예 는 사로 6 촌장이나 가락의 9 촌장들이 새로운 군주를 모시는 장면을 통 하여알수있다. 촌락사회는 시간이 지나며 인구가 늘어나게 되었고 촌장세력과 같은 지배세력의 계급적인 지위도 점차 강화되어 나갔다고 헤아려진다. 그 것은 외래문명의 유입을 통하여 촌락사회에 변동이 일어난 것을 뜻한 다. 특히 촌락사회 단계를 넘어서서 소국을 형성하기 직전에는 외래문 명뿐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이주민들까지 등장하여 촌장 또는 추장의 지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끝내는 새로운 정치발전단계인 국가 단 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지금까지 정리해 본 촌락사회의 성격은 기촌 견해들과는 어떠한 관 계에 있을까. 우선 지석묘를 권력자의 출현을 말해 주는 지표로 보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국가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으로는 볼 수 없 음을 밝힐 필요가 있다. 실제 사로지역이나 장홍군지역의 지석묘 분포 조사 결과를 주목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성읍국가 또든 소국 이전의 촌 장 또는 추장의 존재를 지석묘를 통하여 생각할 수 있다. 성읍국가 형 성 이후에는 지배자의 무덤이 지석묘와 같이 널리 분포되지 않고 일정 장소에 밀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지석묘는 국가형성이 안 된 증거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한편 청동기시대부터 삼한사회
까지를 군장사회 (c hi e f dom) 로 보는 견해도 문제가 있음을 밝혀 둘 필 요가 있다 . 22) 고조선의 경우 청동기시대에 이미 소국 단계에 들어섰다고 믿어지고, 삼한사회에는 촌락사회가 일시에 성립된 것이 아니기에 비교적 늦은 시기까지 촌락사회 단계에 머물러 있던 정치집단도 있었다고 생각된 다. 그러나 삼한사회는 사로국이나 가락국 또는 백제와 같이 일찍이 촌락사회 단계를 넘어서서 소국 단계에 들어섰고 그 이상의 정치발전 단계로 성장하여 간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촌락사회의 존속 기간이 지역에 따라 몇 세기나 차이나는 것을 말해 주며, 나아가 고고학적인 면에서도 청동기시대를 촌락사회라고 단정하거나 성읍국가라고 단정하 기 어려운 면을 찰 보여준다. 한편 촌락사회를 인류학에서 말하는 c hi e f dom 으로 보아 좋다고 생 각된다. 그러면서도 c hi e f dom 의 개념이 분명히 정리된 것도 아니고 c hi e f dom 의 각 사회마다 그 정치적 특성을 달리하고 있기에 어떤 특 정 이론을 도입하여 한국사상에 나타나는 c hi e f dom 에 대하여 다루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오히려 지금까지 얻어진 한국 촌락사회에 대한 여 러 특성 이 한국사상에 나타나는 c hi e f dom 의 성 격으로 보면 어 떨까 한다. 이같은 c hi e f dom 은 君長社會 ,23) 또는 族長社 會 24 ) 라고 부르는 견 해들도 있으나 필자는 이를 앞에서 알아본 것과 같이 齒長社會라고 하 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25 ) 군장은 성읍국가 형성 이후의 정치적인 지 배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족장은 어떤 정치적 권 력자의 존재를 의미하기에 부족한 용어라고 여겨진다.
22) 金貞培, 앞의 논문, 1989, pp. 20~21. 23) 金貞培, 『君長社會의 發展過程 試論』, 『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 』 , 1986, pp. 192 ~209. 24) 崔夢龍, r 全南地方 支石墓 社會와 階級의 發生」, 《韓國史硏究》 35, 1981, p. 3. 2.5) 李鍾旭, 『曾長社會時代의 斯盧六村J, (ffi羅伽倻文化》 12, 1981, p. 6.
지금까지 다루어 온 촌락사회는 영역을 중심으로 한 용어이다 . 그리 고 지배자를 중심으로 본다면 촌락사회를 촌장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촌장들은 가락국기에 나오는 것과 같이 추장이라 부 를 수 있다 . 따라서 촌장사회를 추장사회라고 하여 좋다고 여겨진다 . 그 밖에 『 삼국지 』 위서 동이전의 동옥저와 옥저조에 나오는 것과 같이 장수 • 거수를 가지고 장수사회 또는 거수사회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 나 필자는 『삼국유사 』 의 기록을 중시하여 촌장사회 또는 추장사회라고 부르고자 한다. 2 소국 단계 이제 소국의 형성과 그 성격에 대한 문제를 알아보기로 한다. 사로 국이나 가락국과 같이 몇 개의 촌락사회가 통합되어 형성된 규모가 크 지 않은 나라들은 소국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소국이라는 용어보 다 성읍국가라는 용어가 타당하다는 견해도 있다 .26) 첫째, 각 소국에는 성읍이 있었다고 믿어지는 점을 들고 있다. 둘째, 성읍국가라는 용어는 사회 • 정치 • 경제 • 군사 등 여러 측면을 설명해 주는 유용한 용어라고 한다 . 셋째 , 성읍국가는 도시국가나 성채국가를 연상시켜 주기에 한국 사를 세계사와 연결시켜 주는 구실을 한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넷째, 성읍국가라는 용어는 고고학적 연구에 대하여 성읍의 존재를 규명하는 하나의 새 연구분야를 제시하여 준다고 한다. 위와 같은 견해는 타당 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그러나 城邑國家라는 용어가 아주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용 어가 나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이미 고구려가 병합한 나라를 새로 이 城邑으로 편제한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당시 고
26) 李基白, 앞의 논문, 19& 5, pp. 86~88.
구려에 병합되었던 菩人國등은 독립소국으로 있을 때 성읍이 있어 그 안에서 지배세력이 살았다고 믿어진다. 이러한 독립소국으로서의 행인 국 등은 분명히 성읍국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행인국 등을 병합한 고구려는 성읍국가일 수 없고 또 성읍국가들의 연맹인 연맹왕국일 수 도 없다 . 물론 당시 고구려에는 지배세력이 사는 성읍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소국으로서의 성읍국가의 단계는 이미 넘어선 것이 틀림 없다. 그리고 성읍국가라는 용어를 소국을 뜻하는 것으로 보기에는 문 제가 있다. 그것은 성읍국가라는 용어는 앞에서 본 추장사회와 소국 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기 때문이다. 만일 성읍국가를 소국에 한정하 여 사용한다면 나름대로 의미는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몇 가지 문제 로 인하여 성읍국가라는 용어가 아닌 소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한국의 초기국가 중 이 같은 소국들이 성장한 바 있다. 초기국가로 서 소국의 형성에 대한 건국신화 또는 설화들이 주목된다. 고조선은 檀君王儉이 平壤城에 도읍하고 朝鮮이라 칭하였는데 白岳山 阿斯達로 移都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m) 부여는 藥 離國으로부터 망명한 東 明이 부여 땅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 28 ) 고구려는 시조 鄒牟 王이 북부여로부터 망명하여 忽本西城 산상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웠다 고 한다 .29)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망명한 온조가 河南慰禮城에 도읍하여 十濟롤 세운 후 발전하여 되었다고 한다 .30) 가락국은 하늘로부터 내려 왔다고 하는 수로왕이 세웠다고 한다 .3 1) 신라는 어디로부터인가 사로지 역으로 온 혁거세를 추대하여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32) 그 밖에 고조선
'2:l) 『三國遺事』 1, 紀異 1, 古朝鮮 28) 『三國志 』 魏 書 東夷傳 夫餘傳. 29) 『高句麗廣開土王陵碑」, 『朝鮮金石總覽 』 上, 1919, p. 3. 30) 『三國史記』 23, 百濟本紀 l, 百濟始祖溫祚王 . 31) 『三國遺事』 2, 紀異 2, 篤洛國記
의 마지막 왕이었던 準王 은 좌우의 궁인들을 거느리고 韓 地에서 스스 로 韓王 을 칭하였다고 한댜 33) 한국사상에 나타나는 주요 초기국가의 건국설화는 위와 같다. 그 밖에 많은 소국들이 형성되었다고 헤아려지 나 현재 그러한 나라의 건국설화는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위 의 주요 초기국가들의 건국설화를 통하여 소국의 실체를 파악하여 보 기로 한다. 먼저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세력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다. 위에 제 시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가락국, 신라 등은 다른 지역으로부 터 이주한 세력들에 의하여 국가가 형성된 것으로 이해하여 틀림없다 고 여겨진다. 그와 같은 이주민집단은 원래 거주하던 지역에서 이미 발달된 정치체제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 외에 군사적 • 경제적 실력을 갖추고 이주하여 그러한 실력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되 었다고 헤아려진다. 그 중 고리국-부여 - 고구려-백제로 이어지는 이 주민의 이동과 국가형성을 볼 수 있고 , 고조선 -한 지로 이어지는 이주 민과 국가형성을 주목할 수 있다. 가락국이나 신라의 건국세력이 어디 로부터 왔는지는 찰 알 수 없으나 이들 국가도 이주민에 의하여 세워 진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면 초기국가로서 소국이 세워진 시기는 언제일까. 지역에 따라 또는 이웃 정치집단과의 관계에 따라 그 형성시기가 서로 달랐음은 분 명하다 . 고조선은 청동기시대에 이미 소국으로 성장하여 있었다. 고조 선의 성읍국가 형성시기가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기원전 4 세기 경에 이미 단순한 소국의 단계를 넘어서서 소국연맹 또는 소국병합 단 계에 이르러 있었다고 믿어지기에 고조선의 국가형성 시기는 그보다 수세기 올라갈 수 있다고 헤아려진다 .34) 부여나 고구려 지역에서의 국
32) 『三國史記 』 1, 新 羅 本紀 1, 始祖 죽위조 . 33) 『 三 國志』, 魏 書 東 夷 傳 韓傳 34) 李 鍾 j臥 『古朝 鮮 史硏究 』 , 1993, pp. 141~166.
가형성 시기도 기원전 2 세기 이전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 여진다. 그에 비하여 백제나 가락국, 신라 등은 대체로 고조선의 멸망 이후인 기원전 2 세기경에 국가를 형성하였다고 보여지며 늦어도 기원 전 1 세기경에는 분명히 소국 단계에 있었다. 이와 같이 생각하고 보면 고조선과 백제, 가락국, 신라의 성읍국가 형성시기는 수세기나 차이가 나는 것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이제 한국의 초기국가로서 소국의 성격에 대하여 정리하기로 한다. 먼저 소국의 영역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소국은 몇 개의 촌락사회가 합쳐져 이루어진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로 6 촌이 합쳐져 사로국 이 되었고, 가락 9 촌이 합쳐져 가락국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고구려는 5 那가 합쳐져서 소국을 이루었다고 헤아려진다. 그 밖에 한 국사에 나타나는 여러 소국들도 그러한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경우 사로 6 촌이나 가락 9 촌을 합친 영역은 대체로 직경 30~ 40lrm 정도의 공간을 차지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촌락사회보다 몇 배나 되는 공간으로, 하나의 단위정치집단의 영역이 확대된 것을 뜻한 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에서는 그 지배자들이 말과 같은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통치에 임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부여, 고구려, 백 제, 신라의 건국설화에 나오는 말의 존재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이 러한 소국의 인구는 나라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대체로 수천에서 만여 명 내의가 되지 않았나 한다 .35) 다음은 소국의 지배세력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앞에서 잠시 보았듯 소국의 건국세력은 대체로 이주민들이라 헤아려진다 .36) 이는 선진 정치 집단에 속하였던 세력들이 어떠한 이유로건 원래 살던 곳을 떠나 아직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의 상태인 촌락사회 단계에 있던 지역에 이주하
35) 李鍾旭, 앞의 책, 1982, p. 53. 36) 우선 부여의 동명집단, 고구려의 주몽집단, 백제의 온조집단, 가락국의 수로집단 둥을그 예로 들수 있다.
여 그들의 정치적인 실력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를 세운 것을 뜻한다. 한국의 여러 초기국가들이 모두 위와 같은 이주민 세력에 의하여 건국 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으나 대세는 위와 같지 않나 한다. 초기국가로서의 소국의 지배세력에 대한 위의 이해를 통하여 보면 , 소국의 신분 문제도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최고의 신분은 소국을 세운 이주민들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 이들이 왕위를 장악하고 나 아가 왕비 , 왕모를 배출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 이주민으로 이루어진 소국의 지배세력들은 혈연적인 면에서 원래의 촌락사회의 촌장이나 추 장세력들과는 연관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여기서 소국시대에 들 어서면서 촌락사회와 같이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이 혈연적인 연관을 갖고 있던 계급이 아니라 상층 신분과 그 밑의 신분이 혈연적으로 단 절된 신분계층으로 나누어지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촌락사회시대 에 있던 적어도 두 개의 계급은 점차 두 개의 신분충으로 바뀌어 가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이에 소국 단계에는 적어도 세 개의 신분충으로 나뉘었다고 할 수 있다. 소국의 정치조직은 어떻게 편제되었을까. 우선 몇 개의 촌락사회를 아울러 다스리는 정치적 지배자의 존재를 생각할 수 있다. 신라의 경 우 이들 정치적 지배자들은 居西干, 次次雄, 尼師今 등의 칭호로 불렸 다. 다론 소국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칭호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 그런데 『史記』 朝鮮傳에는 이들을 君長이라고 하고 있다 . '57) 이 군장들 밑에는 大輔 등의 관리가 있어 비록 초보적이기는 하나 중앙정부 조직을 이끌 어 나갔다. 여기서 3 단계의 통치조직 편제를 볼 수 있다. 최고의 단계 는 군장을 중심으로 소국 전체를 다스리는 조직이다. 두번째 단계는 과거 촌락사회를 단위로 하여 편성한 지방통치조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세번째 단계는 과거 촌락사회 단계에서 가계집단이 살았던 영 역을 다스리기 위한 조직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보면 두번째 단계
37) 『 史記』 朝 鮮傳 에 〈鹽 夷君長 〉 이라 나오고 있다 .
는 직경 10km 정도의 공간을 다스리기 위한 조직이고 세번째 단계는 직경 3~4km 정도의 공간을 다스리기 위한 조직이다. 신라에서는 이 들 조직이 후일 사로 6 부와 부가 다시 나뉜 里로 편제된 바 있다 . 381 소국에는 중앙정부 조직과 지방통치조직이 편제된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위와 같은 통치조직을 이용하여 군사동 원체제를 편성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어떠한 형태로건 경제적인 면에 서의 수취제도도 운용하였다고 생각된다. 한편 월성 • 금성 등이 왕의 거처로 정치중심지가 된 것을 생각하면 다른 소국들에도 그와 같은 정 치중심지가 있었고 이들 정치중심지는 그 다음의 정치발전단계에서도 같은 기능을 하였다고 믿어진다 . 여기서 고고학적인 면에서 소국의 특성을 알아보기로 한다. 우선 성 의 축조를 주목할 수 있다. 고조선은 단군이 평양성에 도읍하였다고 한다 .39 ) 그러나 평양성이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구려는 주몽집단이 졸본천에 이르러 임시로 살다가 4 년 7 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고 한다 .40 ) 백제는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웠 다고 한다 . 4 1) 여기서는 하남 위례성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한편 가락국에서는 수로왕이 재위 2 년째 되는 해에 羅城과 宮禁殿宇 등을 축조하고 신궁으로 옮겨 가서 통치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 42 ) 신 라에서는 혁거세왕이 국가를 세운 지 21 년째 되는 해에 金城울 축조한 것으로 나와 있다 .43) 이러한 사료들을 통하여 보면 고구려 • 가락국 • 신 라 등이 모두 소국을 형성한 이후에 성을 축조하여 왕이 거처한 것을
38) 李鍾旭 앞의 책, 1982, pp. 222~252. 39) 『三國遺 船 1, 紀異 2, 古朝鮮 40) 『三國史記』 13, 高句麗本紀 1, 始祖東明聖王 4 년 . 41) 『三國史記』 23, 百濟本紀 1, 百濟始祖溫祚王 즉위조. 42) 『 三國遺事』 2, 紀異 2, 鷲洛國記 43) r 三國史記』 1, 新羅本紀 1, 赫居世 21 년 .
알 수 있댜 이러한 사정은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해아려진 다. 그렇더라도 소국형성 초기에 성들이 만들어졌고 그 안에서 왕이 거처하며 통치를 하여 나갔기에 이들 나라들을 성읍국가라고 부를 수 있댜 그러면서도 당시 지배세력들이 모두 성 안에 거주한 것은 아니 었다. 따라서 서양의 도시국가나 성채국가와 비교하거나 중국의 읍제 국가와 비교하는 문제는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고 여겨진다 .44 ) 한편, 성 읍국가의 왕을 비롯한 지배세력을 매장한 고분은 동일한 형태의 것이 아니고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다룬 내용은 소국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성읍국가 라는 용어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소개한 바 있다. 성읍국 가는 대체로 지석묘를 축조하던 촌락사회와는 관계가 없다고 헤아려진 댜 한편 소국이라는 용어의 문제점이 지적된 바 있다. 그러나 소국이 라는 용어는 소국들을 병합하여 이루어진 나라들과 비교되는 개념으로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그 특성으로 개념 정의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소국이라는 용어는 소국연맹과 나아가 소국들 사이의 병합 관계를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기도 하며, 한국의 초기국가로서의 모습 을 나타내 주기도 한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필자는 성읍국가가 아닌 소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실제 소국이라는 용어는 필자 외 에도 李賢惠4.5) 盧重國心) 등이 최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소국이라는 용어의 사용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소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영토가 작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로국의 영토는 대체로 직 경 30~40km 정도였다고 헤아려지는데 이러한 사정은 다른 소국들도 마찬가지였다고 믿어진다. 둘째, 국민의 수가 적었음을 쉽게 알 수 있
44) 金貞培, 앞의 책, 1986, pp. 301 ~314. 45) 李賢惠 앞의 책, 1984, pp. 197~203. 46) 盧重國, 앞의 책, 1988, pp. 305~309.
게 하여 준다. 사로국은 그 인구가 1 만여 명 정도 되었을 것으로 헤아 려 본 바 있는데, 그와 같은 사정은 다른 소국들도 바슷하였다고 여겨 진다. 셋째, 소국의 통치조직은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으나 아 직은 확대되지 않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하여 준다. 이 경우 신분 의 편제도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나 보다 세분화된 신분 편제는 다음 발 전단계안 소국연맹, 소국병합 단계에 이르러 나타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넷째, 위와 같은 규모의 영토 안에 지배세력의 집중 현상을 고고 학적인 자료를 통하여 고찰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여 준다고 생각되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상 몇 가지 이유로 소국이라는 용어가 단순히 막 연하기만 한 용어가 아니라고 할 수 있고 그러한 까닭에 소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좋지 않나 한다. 일단 소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보면 그 다음의 정치발전단계인 소국연맹, 소국병합 단계에 대한 단계 설정도 수월하여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삼한사회가 c hi e f dom 이 아니 라는 사실은 앞에서 이 미 다룬 바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삼한사회를 부족연맹이나 연맹왕국이라고 단정 하는 데에도 문제가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그것은 『삼국지』에 나오 는 여러 소국들이 독립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중국 측의 필요에서 또는 중국 측과의 관계에서 그와 같이 기록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 다. 실제로 『三國志』 魏書 東夷傳의 삼한 관계 기록이 작성되는 3 세기 후반경에는 삼한지역에 신라와 백제 둥의 세력들이 이미 이웃 소국들 을 병합하여 나가고 있었기에 삼한 소국들이 단순한 연맹관계만을 유 지한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소국은 분명히 국가로서 그 지배세력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보면 『史記』 등에 나오는 君長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군장국가 또는 군장 국이라고 하면 어떨까 생각되기도 한다.
3 소국연맹 단계 소국연맹은 소국의 연맹을 뜻하기도 한댜 그러나 부족연맹 또는 연 맹왕국과는 그 의미를 달리하고 있다. 그것은 뒤에 다루려는 바와 같 이 소국연맹은 소국들 사이에 병합이 아닌 독립소국들 사이에 연맹을 맺은 것을 뜻한다. 한국사에 있어 이와 같은 소국연맹 단계에까지 이 론 몇 개의 정치집단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후 송양왕의 비류국과 일정한 관계를 맺 었다고 여겨지는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47)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 시 조동명성왕조의 기록은 사실들을 압축하여 놓고 있다고 여겨지기에 고 구려와 비류국 사이에는 일정 기간 동안 대체로 연맹관계에 있지 않았 나 생각된다. 그리고 온조에 의하여 하남 위례성에 자리잡았던 백제도 비류에 의하여 미추홀에 세워졌던 소국과 일정 기간 동안 연맹관계를 유지하였다고 보인다 . 48 ) 사로국 역시 이웃한 여러 소국들과 연맹관계를 맺었던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가락국 또한 이웃한 가야지역의 여러 소국들과 연맹관계를 맺었던 것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 4 9 ) 한편 예군 남려가 거느렀던 28 만의 인구는 여러 소국의 인구를 합한 것이라 여겨진다 .50 ) 그것이 소국연맹 단계에 해당하는지 또는 소국병합 단계에 이른 정치세력인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소국연맹 단계에 는 이르러 있었음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고조선은 周가 쇠하게 되 자 燕이 왕을 칭하고 동으로 쳐들어오려 할 때에 조선의 侯가 또한 왕 을 칭하고 군대를 일으켜 오히려 연을 치려고 한 바 있다쁘 이 때의
47) 『三國史記』 13, 高句麗本紀 1, 始祖東明聖王 즉위조 및 2 년조 . 48) 『三國史記』 23, 百濟本紀 1, 百濟始祖溫祖王 죽위조. 49) 『三國遺事』 2, 紀異 2, 想 洛國記 50) 『後漢 書』 6, 武帝紀 6, 元朔 元年. 51) 『三國志』 魏 書 東夷傳 韓傳魏略 인용기사.
고조선의 정치적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는 잘 알 수 없다 . 이를 연맹왕 국으로 보는 견해를 주목할 수 있다 프 기원전 4 세기경의 고조선은 소 국연맹 단계이거나 소국병합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고 여겨진다 프 단정 하기는 어려우나 소국병합 단계에 이르렀기에 그 지배자가 왕을 칭하 고 연나라를 공격하려고 한 것이라 여겨진다. 부여에서도 그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일찍이 소국연맹을 형성하었다고 생각된댜 그 밖에 마한 • 진한 • 변한의 삼한울 연맹왕국으로 보는 견해를 볼 수 있다우 여기서 『삼국지 』 에 나오는 3 세기 후반경의 삼한의 정치적 성격에 대하여 잠시 정리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그 중 진한에는 사로 국을 비롯하여 모두 12 개의 소국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 기 』 의 기록을 따르면 당시 사로국은 이미 경상북도 일원에 있던 여러 소국을 병합한 후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중국측 기록인 『 삼국지 』 에 는 사로국을 진한의 한 소국으로 기록하고 있어 문제가 된다. 여기서 『삼국지 』 의 기록이 신라의 정치적 성장에 대한 이해를 위한 것이 아니 라 중국의 군현인 낙랑군과 대방군과 진한지역의 여러 집단과의 관계 특히 교역관계를 나타내 주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시 사로국이 모체가 되어 성장한 신라는 여러 소국을 병합해 영토를 확장 한 바 있다. 그러나 아직 피병합 소국 지역에는 원래 있던 세력집단이 그대로 존속하여 세력울 유지하고 있었기에 그들이 독자적으로 중국 군현과 교역관계를 갖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삼국지』에 진한에 12 개의 소국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고 생각 된다. 3 세기 후반경의 신라 중앙정부에서는 낙랑과의 원거리교역을 통 한 중국문물의 수입에는 관심이 사라지고 오히려 그들이 필요로 하던 정치적 산물들을 자체 생산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에 지방의 세력
52) 李基白, 앞의 책, 1976, pp. 26~27. 53) 李 鍾 旭 앞의 책, 1993, pp. 141 ~164. 54) 李基白, 앞의 책 , 1976, pp. 38~39.
가들이 중국 군현과 개별적인 관계를 맺어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고 짐작된다 .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등에 의하면 사로국을 맹주국으로 하는 진한소국연맹은 기원전 1 세기 중반 또는 후반경부터 형성되었다고 믿 어진다. 그와 같은 진한연맹은 기원후 1 세기 후반에 들어서며 사로국 의 이웃 소국 병합에 의하여 그 성격이 변했다고 헤아려진다. 사정은 다소 다르나 백제 역시 기원전 1 세기 후반경에 여러 소국들을 이미 병 합하기 시작했다고 믿어진다 .55 ) 그러나 그러한 사정을 『삼국지』에서는 무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한편 마한과 변한으로 불리던 세력은 3 세기에도 존속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한반도 서남부지역에는 아직 백제가 병합의 손길을 뻗치지 않았고, 변한으로 지칭된 가야지역에는 가야의 여러 소국들이 신라에 병합될 때까지 서로 병합관계에 이르지 못했다. 따라서 마한과 변한으로 불리던 지역에는 각기 연맹의 맹주국 을 중심으로 소국연맹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보아 틀림없지 않나 한다. 지금까지 부족연맹 또는 연맹왕국으로 보았던 辰國은 衆國의 잘못이라 고 보여지기에 여기서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자 한다 .56) 지금까지 한국사에 보이는 몇몇 소국연맹을 찾아보았다. 이제 이러 한 소국연맹의 정치적 성격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소국연맹 의 형성 이유부터 생각하기로 한다. 사로국을 맹주국으로 하는 진한연 맹은 낙랑군의 설치 이후 낙랑군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 기 위한 원거리교역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생각한 바 있다.57) 이러한 소국연맹 형성 이유는 마한 • 변한의 소국연맹 형성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고조선 • 고구려 • 예 • 부여 등에서는 어떠
55) 미추홀의 병합을 통하여 그것을 알 수 있다(『三國史記 』 23, 百濟本記 1, 百濟始 祖溫祚王 죽위조). 56) 全海宗, 『東夷傳의 文 獻的硏 究』, 1980, p, 121. 57) 李鍾旭, 앞의 책, 1982, pp. 73~83.
한 이유로 소국연맹을 형성하였는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대외관계 특히 선진문물을 수입하기 위한 원거리교역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소국 연맹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소국연맹의 규모는 어떠하였을까. 『삼국지』의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겠으나, 마한에 54 국, 변한에 12 국, 진한에 12 국이 있었다는 것 을 그대로 지나치기 어렵다. 삼한 소국의 수가 정확히 파악되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대체로 소국연맹의 규모를 파악할 수는 있다. 이 러한 사정은 고조선 • 고구려 • 부여 • 예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여겨진 다. 따라서 소국연맹의 전체 영역도 연맹 내의 소국의 수가 얼마나 되 는가에 따라 달랐음이 분명하다. 소국연맹 안에는 맹주국이 있었다고 헤아려진다. 진한연맹에서는 사 로국, 변한연맹에서는 가락국, 마한연맹에서는 目(月)支國이 맹주국으 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고조선지역에서는 단군이 세웠던 조선, 고구려 지역에서는 주몽이 세웠던 고구려, 부여지역에서는 동명이 세웠던 부 여 소국이 각기 맹주국으로 성장해 나갔다고 헤아려진다. 이들 맹주국 은 대체로 소국을 대표하여 중국의 정치적 산물, 무기나 농기구 등을 수입하고 원자재에 해당하는 물품을 수출하였다. 그 과정에 맹주국은 중간무역의 이익을 차지하게 되어 정치적 • 군사적 • 경제적 실력을 축 적하여 나갔다 .58) 이에 소국연맹의 맹주국의 국력은 점차 증대하게 되 었다고 믿어진다. 그러면서도 소국연맹 안의 각 소국은 아직은 독립관 계를 유지하였다. 이 같은 소국연맹의 정치조직은 기본적으로 각 소국별로 짜여져 있 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세력을 신장시킨 맹주국은 소국연맹 안의 소국들 간에 벌어지는 분쟁을 조정하게 되었다. 이에 과거 소국에 편 제되었다고 본 3 단계의 통치조직은 점차 4 단계의 통치조직으로 발전하 여 나가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 최고 단계의 조직은 소국연맹 내의
58) 위의 책, pp. 95~104.
정치 • 교역 • 군사 등 여러 문제를 처리하는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고 헤아려진다. 한편 각 소국의 신분 편제는 기본적으로 3 단계로 이루어 졌으나, 맹주국 세력의 지위 상승으로 점차 4 계층의 신분 편제로 발전 하여 나가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 거기에 더하여 맹주국의 왕족을 비롯 한 왕실세력들의 지위가 강화되어 지배세력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굳혀 나가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소국연맹의 맹주국은 연맹의 정 치중심구역으로 되어 갔던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지금까지 알아본 소국연맹은 종래의 시대구분인 부족연맹 또는 연맹 왕국과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종래의 시대구분에서는 소국 간의 연맹 과 병합 단계를 구별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보다 분명한 정치 발전 과정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본고에서 다루는 소국연맹 단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소국연맹이라는 용어는 소국들이 독립된 상 태에서 연맹을 형성한 것으로, 그 안에는 맹주국이 있었다. 이 같은 소 국연맹은 그 지배세력을 중심으로 이름한다면 소국 단계나 마찬가지로 군장국가의 연맹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맹주국의 존재를 상기하면 맹주 국의 지배자는 다른 소국의 군장과는 달리 『삼국지』에 나오는 大君長 으로 부를 수 있다고 생각된다 .59 ) 이 경우 소국연맹은 대군장이 이끄는 정치체제로 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소국연맹의 맹주국의 국력 이 신장되면서 이웃 소국들을 병합해 나가게 되는데, 일시에 연맹 내 의 모든 소국을 병합한 것이 아니라 이웃한 나라에서부터 점차 병합해 나갔다. 이 때 소국연맹의 대군장은 그 지위가 독립소국으로 이루어진 소국연맹 때와는 크게 달라진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상 기하면 소국연맹과 소국병합 단계를 시간적으로 가르는 일이 단순하지 않은 것을 알수 있다.
59) 『三國志』 魏 書 東夷傳 邑婁傳, 澈傳
4 소국병합 단계 이제 소국연맹 단계를 넘어선 정치집단을 이해해 보기로 한다 . 소국 연맹 내의 맹주국은 점차 국력을 키워 나갔고 그러한 국력을 바탕으로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해 가게 되었다. 그와 같은 소국병합의 예는 고 구려 • 백제 • 신라 등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 고구려는 대체로 기원전 1 세기 후반경에 이르러 소국들을 병합하여 나갔다 쁘 백제는 기원전 l 세기 말부터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하여 나갔다 . 6 1) 사로국은 기원후 1 세 기 후반경에 이르러 진한의 소국들을 병합하여 가게 되었다 . 62) 한편 고 조선은 기원전 4 세기경에 소국병합 단계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크다 . 63) 그리고 위만조선은 그와 같은 고조선의 정치적 기반 위에서 성장한 나 라이기에 처음부터 소국병합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부 여는 언제부터 소국병합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는 대체로 소국병합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고 여겨진다 . 64) 그에 비하여 변한 또는 가야소국연맹은 소국병합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후 에 신라에 모두 병합되었다 . 여기서 소국병합 단계의 정치적 성격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먼 저 그 영토에 대한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맹주국에 의하여 소국들이 병합되고 병합을 하여 나가는 나라의 영토는 점차 확대되었다 . 이와 같은 병합은 연맹 내의 모든 소국을 병합할 때까지 지속되었고 그에
(3()) 『 三國史記 』 13, 高 句 麗本 紀 1, 始 祖東 明 聖 王 2 년조에 나오는 송양국의 내항을 그 예로들수 있다. 61) 주 5.5 참조. 62) 李 鍾 旭, 앞의 책, 1982, pp. 73~90. 63) 朝鮮의 候가 王을 칭할 무렵에는 소국병합 단계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있다( 『 三 國志 』 魏 書 東夷 傳 韓 傳 魏略 인용기사 참조). 64) 부여왕이 기원후 49 년에 후한에 사신을 파견하는 사실을 통해 어느 정도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 後 漢書』 夫餘國 전).
따라 그 영토는 과거 소국연맹 전체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에는 고구려 • 백제 • 신라와 같이 소국병합을 추진한 정치세력들 사이 에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물론 이 때에도 일정 기간 동안은 가야와 같은 소국연맹 세력이 이웃하여 있기도 하였다. 그 이전의 고조선은 일찍이 병합사업을 벌였고, 위만조선은 그러한 토대 위에서 진번 • 임 둔과 같은 세력을 병합하고 나아가 예의 세력을 위협하게 되었다. 이 같은 위만조선은 연맹 내의 소국을 병합한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소국병합을 하여 나가게 된 맹주국의 지배세력은 점차 그 지위를 강화시켜 나가게 되었다. 그것은 새로이 병합한 지역에 대한 통치의 필요에서 더욱 촉진되었다. 그 중 왕의 지위가 확립되어 갔고, 그 권력이 강화되었다. 왕의 세습권이 확립되는 동시에 지배귀족의 세 력 성장이 따랐다. 그에 비하여 피병합 소국의 군장들은 그 정치적 지 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들 중 극히 일부 군장과 그 혈족집단이 맹주 국으로 이주되었고 나머지 세력은 원래의 소국에 남아 있으면서 지방 통치조직으로 편제된 곳의 통치를 돕는 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여기서 소국병합 단계의 신분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다. 사로국과 같이 소국병합을 하여 나간 맹주국온 점차 왕경으로 자리잡아 갔다. 이에 왕경인과 피정복 소국의 주민으로 이루어진 지방민의 구별이 생 기게 되었다. 당시 왕경인과 지방민 사이에는 엄격한 신분구별이 이루 어지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왕경인 사이에도 왕, 왕비 둥을 배 출하던 집단과 그 밑의 지배세력 사이에 신분이 나뉘고, 나아가 국가 통치를 위한 사회 • 정치적 집단이 대두하여 그들이 또 다른 신분충을 이루어 나가게 되었다. 각 정치세력마다 특성이 있어 신분충의 편성도 각기 달랐음이 분명하다 . 그러나 소국병합 단계에 이르러 신분이 세분 화되고 신분을 통한 통치체제의 운용은 더욱 강화되어 나갔다고 여겨 진다. 다음은 통치조직에 대하여 정리하기로 한다. 왕과 중앙귀족들을 중
심으로 편제된 중앙정부 조직은 병합소국을 포함한 전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소국병합을 통하여 영토와 인구가 늘어나면서 관리의 수가 늘어났고 그들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설치된 관직이 늘어났고 그들에 대한 보수를 주기 위한 체계인 관등이 또한 늘어났다. 한편 지 방통치는 왕경 통치조직과 그 밖의 지방통치조직으로 편제되었다. 신 라왕경은 과거 6 촌이 6 부로 편제되었고 그 밑의 구역도 일정한 지방통 치의 단위로 운용되었다고 헤아려진다. 그리고 피병합 소국은 각기 하 나의 단위행정구역이 되었는데 이들은 후일 군으로 편제되기도 하였 다. 그 밀의 통치조직은 과거 소국의 전통을 이은 2 단계의 조직이 더 편성되어 있었다고 헤아려진다. 이렇게 보면 소국병합 단계의 통치조 직은 적어도 4 단계의 조직으로 편제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피정복 소국을 통치하기 위하여 중앙정부에서 지방관을 아직은 제대로 파견할 수가 없었다고 믿어진다. 앞에서 말한 대로 지방세력의 존재를 인정하여 주고 그들을 통한 간접 지배방식을 취하였다고 여겨진다. 한 편 소국병합 과정에 아직 병합하지 못한 과거 소국연맹 내의 소국들과 의 관계는 어떠하였는지 잘 알 수 없으나 독립소국 사이의 관계와는 다른 모습을 띠게 되었다고 짐작된다. 이와 같은 소국병합 단계에 이르러 국가의 정치적 성장과 왕권강화, 신분 편제 등에 대한 이해롤 할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의 고분과 그 안에 부장된 유물들을 통하여 왕과 지배세력 의 존재 형태를 이해할 수 있고 왕성과 그 안의 궁실 또는 정청의 존 재를 통하여 왕권의 성장과 통치조직의 확대 강화를 생각할 수 있다. 그 외의 대규모 축성사업 둥을 보아 국가의 통치력 행사를 이해할 수 있다. 소국을 병합하여 나가는 과정에 국가의 힘은 가속적으로 성장하여 나갔고 그러한 사정이 고고학적인 자료에 반영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여하튼 국력을 크게 신장시킨 소국병합 단계의 국가들은 대외관계에
있어서도 그 대상을 확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조선은 일찍이 燕과 관계를 가졌고, 부여나 고구려 역시 중국 군현 또는 중국 본국과 관계를 맺었다. 동시에 이들 세력은 영역이 확대되면서 다른 소국병합 단계의 나라들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이 단계에 이르러 각국 중앙 정부에서는 중국 군현과의 원거리교역을 통한 정치적 산물의 수입을 원치 않게 되었다 . 이제 각국은 독자적으로 그러한 물건들을 생산하게 되었고 그러한 증거는 고분의 출토 유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과 정에 지방의 토착세력가들이 독자적으로 중국 군현과 교역을 하게 되 었고 그러한 사정이 『삼국지』 한전에 기록되었다고 본다. 한국의 일부 국가들만이 소국병합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고조선은 일찍이 이 단계에 이르렀고 그 후 부여 • 고구려가 북쪽지역에서 이 단 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소위 삼한지역으로 불리는 한반도 남부에서는 백제 • 신라만이 이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 중 『 삼국지 』 에 나오는 삼 한은 ch ief d o m 단계가 아나라 적어도 마한 • 가야와 같이 소국연맹 단 계에 있었고 신라 • 백제와 같이 소국병합 단계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 단계에 이르러 정치적 지배자의 칭호를 소 국연맹 단계의 대군장이라고 하기보다 君王이라고 하면 어떨까 한다 .65 ) 5 중앙집권적 왕국 단계 소국병합 과정을 거쳐 중앙집권적 왕국 단계까지 성장한 국가로는 고구려 • 백제 • 신라를 들 수 있다. 그리고 고조선 • 위만조선 ·부여 등 도 중앙집권적 왕국 단계에 들어섰을 수 있으나 그 자세한 내용은 잘 알 수 없다. 이에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삼국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적 왕국의 정치적 성격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65) 『三國志 』 魏 書 東夷傳 夫餘傳
지금까지 필자가 말하는 중앙집권적 왕국은 고대국가 또는 왕족중심 의 귀족사회로 불려 온 것이다 . 66) 이러한 왕국들 중 고구려는 대체로 기원후 1 세기 중반경의 太祖大王(國祖王)부터, 백제는 古 爾 王부터, 신 라는 奈勿王부터 중앙집권적인 왕국으로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부 여는 이러한 단계에까지 이르렀을 가능성이 있으나 구체적으로 다룰 수는 없는 실정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삼국 사이에 국경을 접하게 되었고 부여, 가야 , 낙랑 • 대방의 중국 군현과 접하고 있었다. 후일 부여는 고구려에 병합되었고 소국연맹 단계에 머 물러 있던 가야는 신라에 병합되었다. 삼국의 지배세력은 더욱 사회 • 정치적인 실력을 키워 나갔다. 그 중 왕위가 특정 씨족의 특정 가계에 속하게 되어 이같이 왕을 배출하던 왕족가계의 지위는 크게 성장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왕족중심의 귀족사회라는 용어가 타당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삼 국의 신분제도는 그 계층이 더욱 분화되어 갔고 계층 사이의 신분적 간격은 엄격하게 유지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며 신라의 골품제와 같은 엄격한 신분제가 편제되기에 이르렀다. 삼국의 통치조직은 앞에서 언급한 4 단계의 조직을 강화 , 발전시켜 5 단계로 되었다 . 그 중 중앙정부 조직은 전국을 통치하기 위한 것으로 관직이 더욱 분화되었고 관동이 세분되었다. 지방통치조직으로는 왕경 의 지역구분에 의한 왕경 통치조직이 편성되었다. 그리고 왕경 밖의 지방은 대체로 郡을 주요 행정구역으로 편제하고 그 밑에 적어도 2 단 계의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한편 군 위에는 몇 개의 군을 묶어 部, 方 , 州 둥을 편제하였다 . 여기서 통치조직이 5 단계로 편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며 중앙정부에서는 과거와는 달리 지방관을 파견 하여 지방을 통치하게 되었다 . 이 같은 통치조직의 운용을 통하여 조 세를 수취하고 역역동원을 하였으며 군대를 칭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66) 李基白, 앞의 책, 1976, p. 52.
실력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키운 삼국은 정복전쟁을 벌여 부여 • 가야 • 마한의 잔존세력 둥을 병합하였다 . 그리고 중국 군현과의 전투와 중국 본국세력과의 전쟁을 하였고 끝내 중국 군현을 공격하여 없애기도 하 였다. 이와 같은 삼국은 왕족중심의 귀족국가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 러면서도 5 단계의 통치조직을 운용하여 보다 강화된 중앙집권적인 왕 국으로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지 않나 한다. 이 때의 정치적 지배자는 군왕이라 하기보다 王이라고 불러야 하며 그가 다스리는 국가는 왕국 이라 하여 마땅하다. 그런데 소국병합 단계에 이어 나오는 단계를 중앙집권적 왕국 단계 라고 하였으나, 신라의 경우에는 타당하나 고조선 • 부여 • 고구려 • (백 제)의 경우 중앙집권적 왕국 단계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제후국 또는 봉건제적 단계로 들어선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앙집권적 왕국이 라는 용어의 한계를 밝힐 필요가 있다. 6 한국 초기국가 형성 • 발전단계론의 특성 지금까지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 발전에 대하여 정리하여 보았다. 초 기국가의 정치적 성장 과정에 대한 해명 결과, 몇 개의 정치발전단계 를 설정할 수 있었다. 그것은 촌락사회-소국-소국연맹-소국병합 중앙집권적 왕국 단계로 발전하여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같 은 발전 과정에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수천의 촌락사회가 수백의 소 국으로 되었고 다시 몇몇의 소국연맹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다시 그보 다 적은 수의 소국병합 정치세력이 성장하였고 나아가 삼국을 중심으 로 하는 중앙집권적 왕국이 성장하였다 .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단 위정치집단의 수적 감소를 볼 수 있고, 상대적으로 단위정치집단의 영
역확대와 통치주민의 수적 확대 현상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정치적 발전과정에 통치조직의 계층적 편제도 발전하여 나간 것을 알 수 있다. 촌락사회 단계의 2 단계 편제에서 소국의 3 단계 편제, 소국연맹의 3~4 단계의 편제, 소국병합의 4 단계 편제 그리고 중 앙집권적 왕국의 5 단계 편제를 생각할 수 있다. 이 같은 통치조직의 단계 발전은 신분층의 분화와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고 믿어진다. 이 같은 발전 과정을 거치며 남긴 유적 • 유물은 당시 해당 정치발전단계 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고 헤아려진다. 특히 고분은 당시 왕을 비롯한 각급 지배세력의 매장시설로 지배층의 사회 • 정치적 세력의 신장 모습 울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와 같은 정치 발전 과정을 지배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이름한 다면 촌락사회는 촌장사회 또는 추장사회라 할 수 있고, 소국은 군장 이 지배하는 군장국(가)라 할 수 있다. 소국연맹은 대군장이 다스리는 대군장국(가)라고 할 수 있다. 소국병합은 군왕이 지배하는 군왕국(가) 라 할 수 있으며 중앙집권적 왕국은 그대로 왕국이라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정치 발전 과정에 대한 이해는 지금까지의 시대구분과 차 이가 난다. 부족국가 또는 성읍국가는 본고의 작업에 의하면 촌락사회 와 소국의 두 시기로 나뉜다. 그리고 부족연맹 또는 연맹왕국은 소국 연맹과 소국병합 단계로 나뉘고 있음울 생각할 수 있다. 기존 시대구 분은 실제로 구체적인 여러 정치세력에 대한 정치 발전 과정을 다름으 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본고에서의 발전단계 설정에 의한 시대구분이 한충 타당한 것으로 믿어진다. 여러 정치세력을 모두 포괄하여 완벽한 발전단계를 설정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정치세력마다 발전의 시기가 다르고 한 단계에 서 다음 단계로의 성장 이유가 같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하 여 정치세력에 따라 촌락사회, 소국, 소국연맹, 소국병합 및 중앙집권 적 왕국까지 도달하는 단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계 설정을
하는 용어의 일관성에도 문제가 있다. 특히 소국병합에서 중앙집권적 인 왕국으로 단계를 설정한 것을 문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에 있어서 시대구분은 각 단계마다의 특성을 보여주어야 한다면 위와 같 은 단계 설정도 이해될 수 있다. 본고의 작업을 토대로 하여 한국의 초기국가 형성과 그 발전에 대한 해명 작업이 촉진되기를 기대한다. 한편 인접 과학 특히 인류학의 이 론적인 발전에 위와 같은 결과가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지금까지는 한국의 국가형성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일정한 안목을 얻고 분석의 툴 을 얻기 위하여 인류학 이론을 도입하여 작업을 해 온 바 있다. 그러 나 어차피 인류학 이론이 완성된 것도 아니고 학자에 따라 그 내용도 다르기에 언제까지나 그와 같은 이론에 매여 있을 수는 없다. 물론 한 국의 초기국가 형성, 발전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앞으로도 인류학에서 제시하는 이론들을 주시할 필요는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류학의 이 론들은 c hi e f dom 과 국가에 대하여 다루고 있으나 이 책에서와 같이 초기국가로서의 소국형성 이후 몇 단계에 걸치는 발전 과정에 대한 문 제 등은 별로 다루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이 책에서의 작업은 그러한 면을 보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찾 O~ .SV I
기 加 359, 360, 395, 448 가계 (l i nea g e) 159 가계장 159, 161, 232, 337, 379, 451 가계집단 139, 159, 160, 232, 259, 451 加德部 137, 138, 161 가락 9 촌 16, 228, 232, 235, 245, 247, 341, 367, 371, 423 가락 9 촌장 418 篤洛國 16, 37, 228, 229, 239, 248, 252, 254, 255, 301, 341, 347, 380, 387, 391, 400, 406, 407, 410, 411, 422, 447, 456, 463 가신 378, 379 加耶 252, 358, 370, 387, 403, 407, 429 伽耶國 234, 386, 407 加耶兵 254 가야산 248, 386 가야연맹 229, 250, 253, 255 甘文國 268 岡上무덤 432 개로왕 184 개루왕 115 蓋馬國 262, 313 居道 436 居西干 345, 358, 360, 375, 378,
385, 405, 406, 459 渠帥 447, 448 거 주집 단 (res i den ti al unit ) 159 거칠부 59 居柴山國 140, 268, 436 건국설화 108 건국시조 423 건국신화 18, 45, 56, 68, 78, 333, 346, 352, 368, 380, 384, 386, 389, 399, 403, 424 乞屬 324 견가자 359 견사 27, 359 견사자 27 경 397 _ 京都 148, 235, 242, 245, 407 경산 366 京城 420 耿臨 322 경주 조양동 38 階級 (rank) 168, 339, 388 계급사회 (ranked soc iet y ) 161 계루부 360, 362, 365, 387 계림 344, 377, 392, 415, 418 계립령 434 契王 176 高 409 高句麗 28, 62, 104, 117, 202, 231, 292, 328, 350, 357, 361, 363, 364, 369, 386, 403, 409, 413,
422, 429, 471 고구려령 312 高句麗縣 29, 262, 263, 308, 309, 313, 316, 330, 427 高句麗侯 319 『古記』 49, 57 ~61, 68 古代國家 17, 441 古寧伽耶 249 古禮 62 藥離國 386, 412, 413, 456 고아시아족 74, 77, 81 . 古爾王 32, 39, 105, 122, 126, 129, 130, 176, 182, 198, 199, 287, 366, 472 賈人 279 고인돌 374, 391 고조선 24, 46, 49, 62, 71, 80, 213, 357, 358, 361 ~364, 369, 379, 403, 429, 446, 471 고조선적인 유형 365 고주몽 301 고죽국 75 고추가 360, 365, 395, 399 鼓吹技人 311 高興 59, 177 骨伐國 140, 269 골벌국왕 396, 398, 400 골품제 396 곰 65, 67, 71, 75, 77, 80~82, 410
공동시민권 356 공동시조 383 公孫康 41, 287 公孫度 105, 129 空地 24, 212 貢獻 322, 325 果下馬 284 관구검 39 관나부 360 관등 360, 361 관작 289, 294 管仲 431 관직 361 冠帳 281, 284 광개토왕릉비 66, 306 광무제 319, 331 교역 138, 166, 169, 170, 278, 280, 283, 352 교역관계 174 교역권 279, 287 교역망 250, 260 교역의 거점 286 교역의 창구 258 교역품 432 교통로 306 구가 27, 359, 395 九干 406 句茶國 262, 313 供禮馬 136 溝樓 314
求屬 323, 324 狗邪國 34, 241, 279, 281, 283 구월산 70 구전 67, 109 9 촌장 235 仇台 95, 97, 104, 105, 130, 182 國 31, 217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306 『국사』 59 國神族 72 國 王 343 國邑 124, 205, 215 ~218, 266, 343~345 國祖王 321 郡 364, 371, 396, 400, 472 軍彌國 249 君王 27, 28, 359, 370, 471 君長 345, 355, 369, 378, 459, 462 君長國 462 君長國家 462 君長社會 442 君主 164, 338, 381, 405, 425 군치 309 郡縣 262 郡縣制 363, 365 宮 322 宮禁殿宇 420, 423 궁실 345, 390, 391 弓違(帶方太守) 32, 126, 182, 287, 289
宮違 39 權近 50 權藍 50 圭 24, 359 그리스 20, 344, 350, 356, 372 克氏 385, 409 近肖古王 59, 129, 176, 199 금 291 금관 366 금관가야 447 금동관 366 金山加利村 136, 139, 142, 143, 445 金城 216, 221, 344, 345, 377, 390, 392, 418, 420, 423, 460 金桂 307 金印紫緩 290 及梁 376 기단식 석실적석총 188 己婁王 124 箕子 69, 70, 73 ~77, 84, 88, 90, 422, 427 箕子朝鮮 74, 77, 87 箕族 88 金仇亥 379, 400 金氏 377 金氏族 375, 376, 387, 389, 392, 422 김 알지 342, 375, 376, 387, 422, 423
김알지 집단 78, 414, 419 김해패총 279 까치 389 L 那 448 羅城 391, 420, 423, 460 나정 142, 377, 405 樂浪 264 樂浪郡 33, 124, 239, 241, 273, 274, 278, 284, 292, 309, 320, 324, 351, 464 樂浪兵 278 樂浪王 崔理 317, 318 樂浪의 治所 282 樂浪人 278 樂浪太守 41, 285, 328 南北沃沮 62 南山部 136 南解王 278 內郡 310, 323, 331 內郡賈人 250, 251, 260, 277, 310, 434 奈勿王 366, 376, 472 內屬 298, 299, 302, 303, 304, 319, 320, 350 內屬 II 체제 274 노비 279, 284 노성 278
農耕 147 農耕技術 170 農器具 223, 252, 280, 466 農産物 166 農業技術 417 訥祗王 376 尼鷄相 26, 359, 379, 395, 397 E: 多婁王 124 多勿都 262 다물도주 360 多伐國 268 다호리유적 35, 241, 251, 260 檀君 55, 56, 62~64, 67, 70, 71, 73, 75, 77, 83, 88, 91, 410, 412, 422 『단군고기』 52, 58 단군사당 66, 423 단군신화 18, 45 ~47, 54, 56, 64, 68, 70, 74, 78, 108, 389, 410 檀君王儉 456 壇君 王儉 61 단군조선 74, 77, 87 단군 집단 427 단수신 63 檀雄天王 61 닭 389 『唐書』 66
大加 30, 319, 326, 364, 365, 378, 379, 396, 448 大篤洛 234, 386, 407 大 伽耶 34, 249 대구 366 大 國 144, 247, 357 大 君 王 447, 448 大君長 355, 369, 447, 448, 467 대로 360, 395 大凌河 82, 88, 89, 412 大武神王 313, 315, 316, 318 帶方郡 41, 273, 287, 290, 292, 295, 464 대방령 285, 328 帶方太守 41, 126, 287, 296 大輔 346, 360, 459 大夫 359, 397 대사 395 대사자 395 戴升 319 大王 407 大人 448 대주류왕 306 대주부 360 대착식 322 大海 267 델로스 동맹 372 도시국가 20, 372, 461 突山高坡村 136, 142, 377, 411, 445
突山高塘村長 381 동경 251, 291, 294 동맹국 356 동맹세력 328 東明 104, 78, 116, 117, 131, 342, 384, 386, 408, 413, 416, 422 東明廟 117, 220, 224, 365 東明聖王 307 東明神話 116 東明集團 416 동부 360 동부여 64 동북부여 62 東沃沮 321, 323, 331 동주 361 동탁 251, 279, 294 둔유현 41, 287 己 里 149, 150, 363, 364, 460 □ 마가 27, 359, 395 마늘 55 馬黎 193, 410, 414 摩離 409, 414 麻立干 358, 375, 376 마야 (Ma y a) 295
마 ¾
목재 279, 284 目(月)支國 275, 279, 283, 293, 301, 466 木桐 391 몽촌토성 218 巫 74 武骨 385, 409, 414 무기 223, 280, 466 무문토기 147 무문토기인 74 茂山大樹村 136, 139, 142, 445 무씨사당 화상석 65, 69, 72 무역권 274 武帝 277, 303, 304 默居 385, 414, 409 문자 67 문주왕 184 文정 3 284 미송리형토기 83 彌烏邪馬國 34 美川王 292 미추부락 181 미추왕 399 彌鄒忽 95, 119, 120, 212, 410, 420 彌鄒忽 小國 109, 111, 113, 115, 124, 129, 130, 176, 181, 186, 191, 204, 208, 222, 264, 349, 436 민 27
閔中王 319 닌
博士 24, 359 朴氏 377 朴氏族 375, 376, 387, 389, 392, 422 坊 149 方 367, 472 邦國聯盟 355, 372, 394 坊里名 148 방물 322 方百里 121, 210, 342, 362, 368, 425 放效吏 277 裵氏 137, 383 百濟 62, 103, 111, 124, 206, 250, 280, 288, 327, 357, 361, 363, 386, 403, 422, 429, 471 伯濟 288 百濟 建國說話 128 伯濟國 32, 103, 125, 198, 207, 218, 276 百濟始祖 175 百濟王室의 交替論 128 藥澈 343 범 65, 75, 77, 80~82, 90 犯禁 310 범 집단 87邊郡 323, 331 弁軍彌國 249 弁辰 247, 250 弁韓 250, 279, 289, 350, 351, 357, 369, 429 別邑 215, 218 兵威財物 202, 277, 300, 312 병합소국 363 보배조개 432 보제 393 본가야 379 『본기』 58 본피부 377 봉건사회 31 봉건제 361, 362, 372 봉건제적 단계 473 봉건제적 지방통치 25 封國 31 봉헌 283 部 149, 348, 364, _36 7, 460, 472 부계가계 349, 422 부루 57, 62, 64, 94 부아악 118, 209 扶餘 27, 62, 104, 117, 180, 231, 321, 350, 357, 361, 363, 364, 369, 386, 403, 413, 429, 471 扶餘氏 99, 110, 115, 128, 130, 132, 184 扶餘王 385 附庸 353, 369
附庸國 252 부장 348 夫租澈君 282 部族國家 17, 375, 441, 442 部族聯盟 17, 373, 441, 442 部族聯盟長 375 部族長 375 部從事 吳林 39 부주 347 北部 198, 360 北夫餘 66, 112, 114, 192, 198, 307, 409, 413 『北史』 101, 102 분사 366 불교 64 비단 291 海流 95, 106, 110, 113, 114, 120, 131, 176, 193, 349, 385, 410, 413, 420 海流國 263, 307, 313, 349, 353, 421, 426, 436, 463 비류나 360 海流說話 109, 114, 117,. 1 87, 190, 197 佛流王 97, 115, 100 輯集團 186 卑彌呼 283, 284, 290, 291, 294, 295 比只國 268 비파형동검 19, 83, 84, 231, 432
人 『 史記 』 貨殖列傳 298 事大 266, 369 事 大의 禮 353 4 두품 378 沙梁 376 沙 梁伐國 269 斯盧 288 斯盧國(徐那伐) 16, 33, 37, 134, 137, 255, 276, 280, 293, 301, 340, 341, 345, 347, 362, 363, 368, 375, 376, 380, 381, 386, 389, 400, 405, 407, 411, 422, 429, 445 斯盧 6 村 15, 80, 134, 135, 140, 141, 153, 155, 335, 341, 347, 367, 371, 377, 423, 445, 448 斯盧 6 村長 338, 418 사반왕 184 沙伐國 268, 269 四時朝話 324 사자 27, 30, 359, 360, 365, 395, 396 사직 365 4 出道 28, 395 ~397 山戒 430 살수 321 殺~ 343 『三國遺事』 47, 53, 57, 68
『三國造事』 篤洛國記 233, 407 『三國志』 102 『三國志』 韓傳 225 삼신사상 73 三韓 30, 37, 204, 279, 327, 350, 351, 433 相 25, 359, 360, 395 上谷 320 『상서』 84 商邑 355 獨帝 322 上帝 54 상징체계 429 相 한음 359 索離國 104 生口 291 샤머니즘 73 『書記』 59, 177 西安平縣 285 서주 361 昔 377 석관묘 74, 155, 156, 159, 163, 170, 231, 242, 260, 335, 446 昔氏 33 昔氏族 375, 376, 387, 389, 392, 422 釋帝 61 석탄리유적 145 鮮卑 326, 332 鮮于嗣 41
선인 30, 360, 365, 395, 396 선주세력 116 선진문물 319 薛氏 137, 383 說話 106 陝父 409, 414 涉何 277, 308 姓 377 星山伽耶 249 성역 89 城邑 31, 262, 313, 355, 392, 455 城邑國家 17, 76, 77, 92, 344, 374, 376, 391, 442, 455 城邑國家聯盟 372 城邑聯盟國家 355, 394 城池 33 성채국가 461 『世宗實錄』 47, 52, 53, 57, 58 세형동검 19, 231 小加 326 小伽耶 249 小國 91, 144, 153, 156, 204, 223, 247, 248, 250, 311, 333, 334, 341, 348, 354, 356, 357, 363, 372, 387, 404, 442, 455, 456 小國供合 207, 262, 334, 373 小國供合王國 269 小國聯盟 27, 29, 211, 228, 252, 253, 256, 311, 334, 356, 373, 442
小國聯盟體 204, 250, 294, 301, 308, 312, 351 소국 영역 342 소국의 인구 342 소국의 정치조직 344 소국의 지방통치 347 소금 166, 216 소노부 387 蘇塗 215 蘇馬提 281, 282, 284, 434 召文國 268 蘇伐公 136, 381, 386, 405, 411, 445 蘇伐都利 136, 411, 418 小別邑 215, 343, 347 召西奴 114, 192 少室氏 385, 409 昭王 413 소읍 300 屬 323 屬 관계 322 屬國 252 孫氏 136, 383 송국리 156, 159 송양 436 松讓王 307, 313, 349, 353, 421, 463 松屋句 317 首露 34, 234, 235, 239, 259, 342, 387, 407, 412
首 露 王 78, 229, 243, 256, 259, 352, 393, 456 首 露 集固 246, 418 首陵 386, 407 『隋 書 』 101, 102 遂成 328 스파르타 350 丞 360, 395 尸羅 62 시조 157 시조동명성왕 463 시조묘 131, 243, 346, 365, 366, 389, 423 시조신화 46, 157, 169 新 281, 315 神功紀 205 신궁 399 神壇樹 55, 61, 71, 79, 107 新羅 206, 250, 288, 290, 357, 358, 361, 403, 471 神鹿 353 臣民 343 신분제 349, 377, 388 신석기시대 77, 373 신성 공간 107 신성 지역 89 臣屬 323 神市 55, 71, 79, 80, 89, 107 신앙체계 429 臣智 30, 39, 287, 289, 343, 345,
379 『신집』 59 신창리 168, 339 신화 64, 67, 70, 81, 106, 107 신화 속의 시간 86 실직곡국 256, 352, 393 惑直國 34, 268 十臣 l16, 120, 193, 209, 214, 219, 220, 222, 385, 410, 416, 417 十濟 32, 37, 95, 100, 103, 109, 111, 113, 116, 118, 120, 123, 124, 129, 130, 175, 176, 178, 181, 182, 191, 203, 204, 214, 264, 341, 349, 368, 385, 390, 410, 426, 456 十濟國 362 쑥 55 氏族 157, 165, 338, 383, 389 氏族社會 441 氏族長 159, 161, 167, 232, 340, 451 氏族集團 158, 232, 259, 340, 383, 450~452 。 我刀干 231, 418 阿羅(一作耶)伽耶 249 아사달 90
阿諭抱國 237 아음부 396, 398, 400 아진포구 238, 240 아테네 350 안강현 141 安帝 322 關英 376 알영정 142 關川 137, 381 關川楊山村 136, 139, 142, 377, 445 알타이족 77 誕平 136 押督國 34, 268, 269 邪馬臺國 284, 290, 291, 294 約 300 梁창百國 263, 313 양산 366 漁陽 320 엄리대수 306 역 계경 37, 155, 239, 413 燕 154, 155, 201, 298, 302, 331, 430, 463 연나부 360 연노부 365 聯盟王國 17, 93, 373, 442 聯盟長 418 燕人 397 燕將 秦開 91, 117, 231, 238, 413 염사읍군 281, 282
廉斯人 281 廉斯鏞 254, 265, 281, 319, 434 廉斯鎭說話 123, 127 영성 365 영양왕 59 領域國家 75, 442 孟帝 127 영천군 141 澈 62, 202, 273, 369, 429 澈君南間 29, 118, 202, 262, 298 ~304, 306, 327, 330, 350, 421, 463 澈창百 27, 297, 299, 302, 305, 327, 329, 332 薇 8 326 5 伽耶 249 烏干 193, 410, 414 5 두품 378 5 롱 142 吳林 287 五鍊錢 279 烏伊 409, 414 오척도 291 오환 27 옥 170 沃沮 369 옥저성 323 玉幣 431 溫祚 78, 95, 101, 104, 106, 110, 113, 114, 118, 131, 176, 181,
193, 342, 385, 386, 410, 420, 422 溫祚說話 18, 45, 96, 106, 107, 108, 111~113, 115, 130, 175, 187, 190, 197, 208 溫祚王 67, 97, 113, 175, 210, 353, 385, 409, 421 溫祚集團 413 옹관묘 168, 339 완충지대 213 院夏國 415 王 40, 295, 316, 359, 360, 370, 375, 407 왕검 72, 73, 91 왕검성 26, 390 왕검조선 49 王京 148, 149, 347, 362, 365, 370, 373, 377, 396, 400 왕경 6 부 157, 347, 361, 377, 445 왕경 인 361, 365, 396, 469 왕경인의 신분 379 왕국 256, 363, 370, 402, 473, 474 王都 148, 149, 377, 418 王拜 127, 281, 315, 316 王妃 387 王妃族 365, 379, 399 왕실교체론 128 왕실세 력 389, 390, 422 왕실의 교대 현상 380 왕위 계승 349, 398, 422
王 調 319 王 調의 난 281, 319 王族 379, 399 王 族中心의 貴 族國家 442, 473 王避 126, 319 왕호 358 倭 257, 273, 278, 283, 287, 291, 437 倭奴國 283 倭面土地王 師升 283 外臣 202, 274, 277, 300 ~302, 330 外臣體制 300 遼東 24, 87, 90, 92, 117, 156, 302, 432 遼東郡 203, 273, 298, 303, 304, 310, 317, 326, 327, 329 요동 동부도위 309 遼東太守 300, 317 遼東太守祭影 320 遼東太守 蔡誤 328 遼西 87 요서 10 성 321 우가 27, 359, 395 右渠 29, 301, 302 右渠王 37, 155, 276, 413 優台 192, 360, 395 于老 256, 269 右輔 198, 219, 317, 346, 360 右北平 320
우사 79 于尸山國 140, 268, 436 優氏 127, 184 운사 79 울산시 141 울주군 141 熊女 55, 56, 62, 67, 72, 73, 410 熊川 267 熊川桐 121 옹천책 33, 253, 353, 421 원거 리 교역 (lon g dist a nce tra de) 27, 35, 119, 249, 250, 253, 254, 257, 260, 265, 268, 270, 272, 293, 311, 313, 314, 325, 351, 352, 356, 369, 394, 404, 431, 433~435, 464 원거리 교역의 중심지 258 원거리 교역의 창구 252, 270 원자재 280, 295, 329, 330 원초적 국가(p r i s tin e sta te ) 15, 362 越郡女 99, 202 月城 142, 216, 221, 344, 377, 392, 418 魏 289, 295 尉仇台 130, 327 『魏略』 37, 206 위례부락 181 위 례성 212, 214, 221, 222, 224 衛滿 24, 25, 66, 118, 276, 359, 361
위만조선 74, 118, 124, 155, 200, 202, 203, 209, 226, 231, 300, 302, 303, 305, 308, 350, 446, 471 『魏書』 49, 60, 61, 68, 101, 102 위세품(p restig e- g oods) 251, 252, 260, 330 위세품 교역체제(p res tig e- g oods sys te m ) 251, 295, 296, 297, 313, 314, 318 『유기』 59 유류왕 306 琉璃明王 316 琉璃王 313, 315 儒理王 376 劉茂 39 幽州 273, 321, 327, 328, 329 柳花 307 劉!Ur 41 6 加耶 229, 234, 235, 260 6 두품 378 6 부 148, 347, 376 6 부병 256 6 부조 153 6 촌 연맹체 446 6 촌장 153, 347, 376, 377, 381, 412 6 촌장 회의체 164 殷 31, 83, 84 殷 • 周 344
銀冠 366 殷王朝 356 殷遺民 25, 361 殷族 83 ~85, 87, 89, 90, 356, 410, 414 音汗伐國 34, 256, 268, 352, 393 邑君 40, 42, 284, 289, 291, 295 읍군인수 284 읍락(t own) 163, 218, 338 抱婁 323 邑長 42, 289, 291, 295 邑借 30, 343, 345, 379 『應製詩柱』 47, 50, 53, 57 의창군 141 의창 다호리 38 衣帳 284, 311, 314, 325, 326 이문진 59 尼師今 345, 358, 360, 375, 376, . 459 伊西古國 269 伊西國 140 李承休 51 李氏 136, 383 利音 256 이주민 78, 84, 87, 117, 119, 122, 155, 156, 171, 172, 196, 200, 201, 223, 230, 238, 247, 342, 346, 373, 376, 387, 389, 401, 404, 408, 410, 412, 427, 431 이주민 집단 220, 238, 375, 412,
424 伊珍阿鼓 34 2 차적 국가 (seconda ry sta te ) 362 이찬 347, 393 인구 144, 146 인구 중가 412 인류학 371, 372, 475 印緩 284, 289, 294 인질 257 일광경 279 『 日 本 書 紀』 神功紀 199, 208 一 然 47, 58 臨屯 300, 350, 369 臨屯郡 239, 278, 309 臨川部 137, 138, 161 立邦設都 153, 214, 381, 405, 407, 411, 425, 446 大 자연촌 363, 371 蠶支(右)落 319 장군 왕협 359 장당경 90 長福部 136, 138, 160 長帥 447, 448 장자상속 160 장홍군 147, 159, 450 재분배 166, 339, 349 再思 385, 409, 414
저가 27, 359, 395 적석총 195 전국시대 302 全譯 316 전사집단 222 前燕 188 전왕족 365, 387, 399 전쟁 166, 257, 404, 436 전택 281 전투 170, 436 절노부 365, 387, 395 절풍 326 정백동 282 정복왕조설 187, 190 鄭氏 136, 383 정치중심구역 164, 217, 243, 245, 344, 377, 392 정치형태 334 齊 155, 431 諸加 28, 363, 448 제사용 의기 366 제사장 168, 339 帝釋(석 제) 54, 61, 64 『帝王韻記』 47, 51, 53, 57, 58, 66 祭政一致 168, 339 齊 桓公 430, 431 제후 25, 359, 363, 365, 370, 397 제후국 473 제후 분봉 361 제후적 존재 26, 28
趙 155 租界地 275 朝貢 283, 322, 325, 369, 434 朝貢關係 329 朝貢國 274 朝服 311, 314, 325 조복의책 40 租賊 323 조상신 75 朝鮮 27, 62, 297, 299, 302, 305, 350, 456 朝鮮碑王 長 309 朝鮮相 26, 379, 395, 397 朝鮮相 로안 359 朝鮮遺民 82, 154, 171, 405 조선현 254, 308 조선후 75 朝賜 292, 325 朝陽洞 143, 279 조의 30, 360, 365, 395, 396 朝獻 283, 292 족강 390 族長社會 454 族長勢力 378 卒本 194, 308 卒本扶餘 100, 112, 115, 192, 385, 409 卒本扶餘王 197 卒本城 216, 418 卒本川 409, 419
종묘 365, 395 종법봉건제도 397 좌보 219, 346, 360 좌우 궁인 416, 417 좌장군 395 左將 眞 忠 39, 126, 287, 289 周 31, 463 州 367, 472 주거지 145 주나 360 朱蒙 28, 62, 78, 94, 104, 112, 113, 131, 307, 311, 342, 353, 360, 384, 386, 409, 416, 422 朱蒙祠堂 66 朱蒙 集 團 413, 416, 419 周武王 69, 84, 90 主簿 326, 360, 395 『周 書 』 101, 102 主帥 215, 218, 343 走壤 267 주왕실 361, 362 죽령 434 準王 24, 37, 123, 154, 201, 204, 211, 212, 231, 239, 276, 359, 362, 398, 457 중간무역 252, 270, 303, 305, 316 중국 213 衆國 35 ~37, 43, 123, 204, 211, 212, 241, 276, 277, 300, 303, 345, 465
중국인촌 282 仲 室 氏 385, 409 중앙귀족화 379 중앙정부 365 중앙정부 조직 360 중앙집권적 왕국 366, 473, 474 重譯 入貢 292 중의대부 360 中興部 136, 138, 160 지도자 168 지리산 248 , 386 지방민 469 지방민의 신분 379 지방세력 365 지방인 396 지방통치 361 지배계급 162 智伯虎 136 支石 墓 (고인돌) 19, 74, 82, 137, 138, 140, 147 ~149, 155, 156, 158, 159, 162, 163, 170, 230, 335, 339, 380, 381, 408, 446, 451, 453 支石墓群 147, 150, 163, 335, 450 지신족 76 지중왕 358 祗他 136 晋 291 진골 378, 379, 400 辰國 36, 37
眞番 27, 36, 211, 297, 299, 300, 302, 350, 369 眞 番郡 239, 278, 309 진씨 419 진주 291 辰韓 250, 279, 280, 289, 293, 350, 351, 357, 369, 429, 433 辰韓聯盟 228, 272, 279, 465 辰韓 右 渠帥 281 辰 韓 人 282 진홍왕 59 犬 次次雄 345, 358, 360, 406, 459 蒼 海 386 창해군 202, 298, 299, 303 ~305, 330 帳 326 責 稽 287 帳溝澳 314, 331 帳溝澳體制 292, 314, 315, 325, 331 天降說話 154 天君 72, 74 天符印 55, 63, 79 天三印 63 天孫思想 73 天神族 72, 76 天子 211
天帝 107, 409 鐵 216, 251, 294 鐵器 417 鐵製武器 252, 279 청도군 141 청동검 162 청동경 162 청동기 79, 84, 166, 170, 223, 374, 381 청동기문화 76 청 동기 시 대 77, 87, 92, 373 肖古王 115, 119, 199 초기국가 15, 37, 78, 259, 333, 350, 374, 422, 461 草八國 268 촌 159, 221, 232, 259, 335, 354, 363, 364 촌간 346, 365 村落 217 村落民 160, 339, 388 村落社會 15, 134, 137, 140, 230, 333 ~335, 341, 367, 387, 447, 449 村落聯盟 174, 231, 247, 337, 340, 418, 425 촌락의 시조 157, 382 村長 116, 140, 150, 152, 157, 158, 160, 161, 163~165, 167, 232, 247, 259, 335 ~340, 368, 382, 388, 407, 408, 419
村長社會 116, 137, 230 村長勢力 452 村主 346, 365, 400 崔氏 136, 383 崔致遠 136 鄒牟王 66, 306, 307 晉長 137, 229, 232, 247, 259, 337, 406~408, 419 웁長社會 94, 116, 134, 135, 137, 153, 155, 172, 174, 230, 374, 447, 454 웁長社會時代 135 春秋時代 430 春秋戰國時代 362 緊落 159 觜山珍支村 136, 142, 143, 445 親魏倭王 290, 291, 295 구 코린트 350 콜린 렌프류 (Co li n Ren frew ) 342 E 타추간 393 脫解 238, 239, 342, 375, 376, 387, 415, 422, 423 脫解王 34 脫解集團 78, 414, 419
태백산 55, 71, 107 태양숭배 74 太原 320 太祖大王 273, 285, 297, 298, 321, 331, 366, 472 토광목곽묘 38 토광묘 38, 155, 188, 195, 231, 242, 260, 282, 446 토기 170 토성 391 토테미즘 73, 77 토템 72, 77, 389 通仙部 136 통치조직 363 끄 파사왕 34, 352, 393 파주군 옥석리 147 패자 360, 395 浪河 267 彭吳 305 펠로폰네소스 동맹 372 평 양 90, 92, 117, 156 평양고조선 24, 25, 118 平壤城 419, 423, 456, 460 幣 432 布 251, 279, 284 浦上 8 國 253, 256, 257 풍납토성 218
풍백 79 피병합 소국 400 己 下句麗 316 河南慰禮城 119, 120, 190, 209, 214, 385, 390, 410, 418, 420, 423, 456, 460 河伯 57, 307, 409 하백녀 62, 64, 70 下戶 27, 284, 288, 295 韓 204, 222, 272, 273, 278, 287, 323 漢 350 漢四郡 202, 241 韓國 285 漢郡縣 237 한기부 393 한기부주 393 漢亡人 308 漢武帝 277, 298 漢兵 321, 331 漢山 120, 209, 214 漢水(漢江) 120, 209 한씨조선 75 漢廉斯邑君 281 韓王 123, 204, 211, 231, 276 漢의 잡물 237, 241 漢人 127, 206
漢將 317 韓 211, 276, 457 降屈 324 解 慕 澈 307 海産物 166 解氏 99, 110, 115, 130, 180, 184, 419 解氏勢力 129 行人國 263, 313, 456 행정촌 341, 364, 371 허황옥 235, 237, 239, 243, 259, 260, 387, 424 허황옥 집단 246, 419 獻帝 323 險側 343 헤게몬 356 赫居世 67, 137, 156, 278, 342, 375, 376, 381, 385, 387, 422, 423 赫居世王 152, 433 赫居世集團 78, 412, 414, 418, 419 縣 364 玄英郡 29, 30, 202, 262, 273, 278, 298, 308~310, 313, 317, 320, 323, 325 ~327, 329, 330 玄英太守 322. 혈연적 원리 161, 338, 340, 349 혈족집단 390 胡 315, 316 호공 433
호구수 145 好 童 317 戶來 123, 206, 265 호민 27 호수 146 虎珍 137 혼인 296 혼인동맹 419 忽本 308 忽本西城 456 華麗城 326 貨殖列傳 297 화친 I 관계 274 화친 II 관계 274 환나부 360 桓雄 55, 56, 61, 62, 71, 72, 76, 78, 79, 427 桓雄族 76 桓雄集圈 80 桓雄天王 61 桓因 54~56, 61, 62, 64, 71, 74, 76, 78, 79, 308, 312 桓帝 127 황산강 248, 255, 386 侯 40, 316, 463 『後漢書』 102 訖解王 376 홍경 278, 313 catc hment area 146
chie f d o m 20, 135, 340, 341, 371, 443, 454 conic a l clan 160, 452 earlies t sta te 15 , 362
early sta t e 15 , 372 seg m en tar y socie r y 139, 452 sta t e 20, 371
이종욱 서강대 학 교사학과졸업 서강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미국 Kansas 대학교 대학원 안류학과 수학 캐 나다 Briti sh Columbia 대 학교 대 학원 인류학 • 사회 학과 Post Docto r al Fellow 영 남대 학교 국사학과 부교수 현재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저서 『신라국가형성사연구』 『고조선사연구.!l 『 신라골품제연구』 한국의 초기국가 대우학술총서 444 논저 1 판 1 쇄 펴냄 1999 년 4 월 20 일 지은이 이종욱 펴낸이 이형진 펴낸곳 도서출판 아르케 출판등록 1999. 2. 25. 제 2-2759 호 서울 특 별시 중구 남대문로 5 가 526 대표전화 310-0525, 팩시밀리 7?7- 3 809 E-Mail hxl5@nets g o . com 값 24,000 원 © 이종욱, 1999 한국사 • 고대 KDC/911 .02 Pri nt e d in Seoul, Korea ISBN 89- 8 8791-23-1 94910 89-88791-00- 2 (세트)
宇學術羲書는 대우재단 학술사업의 결정체로서 1983 년 『문화사회학』을 시작으로 논저, 연구번역, 공동연구의 형태로 출간되어 왔습니다. 論著는 ‘대학원급 수준의 고급 학술개요서’ 라고 정의되고 있는바, 해당 분아예 대한 개설적 입문서 수준을 넘어서 그 분야에 대한 세계적 연구동향을 집약한 硏究提要的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학술용어 내지 이론적 표현을 정착시키는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硏究鹽譯은 논저를 보완하는 성격을 갖는 것으로서 이 역시 전문연구서가 아닌 고급개요서에 대한 연구번역입니다. 특히 지난 98 년부터는 古典과 古典級 저작의 연구 번역에 중점을 두고 있는뱌 학술용어 및 경합되는 학설 등을 역주로 그리고 해당 저자 및 원저에 대한 학술적 평가는 해제의 형식으로 포함함으로써 원문에 대한 단순한 번역을 지양하고 있습니다. 또한共同硏究는 연관학문간 (In t erd i s cip l in a ry) 공동연구를 통해 점점 세분화· 전문화되어가는 학계의 경향을 극복하고자 하는 재단의 기획의도를 반경한것입니다. 아駒 연구지원에서 연구결과의 출판에 아르기까지 모든 단계를 일관성 있게 지원한다는 학술사업 지원 방침에 따라 ‘대우학술총서’ 는 과제의 지정에서부터 연구계획서, 그리고 연구결과에 이르기까지 엄격한 심사와 평가를 거쳐 출판되고 있습니다.
宇學術殿書는 대우재단 학술사업의 결정체로서 1983 년 『문화사회학』을 시작으로 논저, 연구번역 , 공동연구의 형태로 출간되어 왔습니다. 論著는 ‘대학원급 수준의 고급 학술개요서’ 라고 정의되고 있는l:l}; 해당 분야에 대한 개설적 입문서 수준을 넘어서 그 분야게 대한 세계적 연구동향을 집약한硏究提要的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학술용어 내지 이론적 표현을 정착시키는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硏究謙譯은 논저를 보완하는 성격을 갖는 것으로서 이 역시 전문연구서가 아닌 고급개요서에 대한 연구번역입니다. 특히 지난 98 년부터는 古典과 古典級 저작의 연구 번역에 중점을 두고 있는l:l}; 학술용어 및 경합되는 학설 둥을 역주로 그리고 해당 저자 및 원저에 대한 학술적 평가는 해제의 형식으로 포함함으로써 원문에 대한 단순한 번역을 지양하고 있습니다. 또한 共同 硏究는 연관학문간 (Int e r dis cipli na ry ) 공동연구를통해 점점 세분화·전문화되어가는 학계의 경향을 극복하고자 하는 재단의 기획의도를 반영한것입니다. 이울러 연구지원에서 연구결과의 출판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를 일관성 있게 지원한다는 학술사업 지원 방침에 따라 '대우학술총서’ 는 과제의 지정에서부터 연구계획서, 그리고 연구결과에 이르기까지 엄격한 심사와평가를 거쳐 출판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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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 한중관계사 I 김한규 423 한중관계사 11 김한규 424 두보와 이백 이병주 425 한국의 전통민가 주남철 426 의학철학 울프·페데르센 ·로젠베르그 /이호영 · 이종찬 427 지구환겅정치학 바이츠제커 /이필렬 428 기후학 I : 가후와 대기 순환 오재호 429 기후학 II : 변화하는 기후 오재호 430 앙시앙 레짐 I 구베르/김주식 431 앙서앙 레짐 11 구베르/김주식 432 다양체의 미분위상수학 조용승 433 스페인 피카레스크 소설 김춘진 434 독일의 통일과 위기 코카/김학 이 435 언어학파의 형성과 발달 암스테르담스카 /임혜순 436 성간화학 덜리 • 월리엄스/ 민영기 437 생태학 매킨토시 / 김지홍 438 웨이브렛의 가본이론과 통계에의 응용 김충락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