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永植

과학혁명

근대과학의 출현과 그 배경 金永植 民音社

머리말 I6, I7 세기 천문학, 역학, 생리학 분야 동의 과학내용문 아니라 과 학의 방법, 목적 및 그 사회적 위치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고, 그­ 에 따라 유럽사회 전체의 사상적, 사회적 변화에 영향을 준 科學革 命이 과학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현상이었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과학혁명은 유럽 역사 전체적인 면에서 도 중요한 현상이었다. 근대사회와 근대사상의 기원으로서 과학혁 명 의 중요성 에 대 한 Herbert Bu tt er fi eld 의 유명 한 지 적 이 많은 역 사· 학자들의 공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과학혁명은 과학사에 있어서 그 초창기부터 가장 연구 · 가 활발한 분야였으며, 그에 대한 연구들이 과학사 분야의 학문적 성숙에도 크게 기여했다 .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과학혁명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다룬 훌륭한 연구업적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이 책은 이같은 많은 연구업적들로부터 시작해서, 서로 다른 관접 으로부터 얻어진 서로 다른 해석들을 비교하고 종합해 보고, 세부· 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연구결과들로 이를 보완해 서, 과학혁명에 있어 주가 되는 몇 가지 현상 및 측면들과 그. 대표­ 적 문제들에 대해 필자로서 가능한 한 가장 수긍이 가고 홍미있는· 설명을 제시하려는 목적에서 씌어졌다. 이러한 설명을 얻어내는 데에 사용한 수많은 연구업적들은 대부· 분 証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과학혁명에 대한 팔자의 해석과 이해 는 그처럼 구체적으로 분명히 지적할 수는 없는 차원에서도 여러 학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들 중 필자의 과학사 수업을 직접

지 도했 던 Charles C. Gi ll is p i e, Thomas S. Kuhn, Mi ch ael S. Mahoney 교수의 이 름을 볘 놓을 수 없다. 특히 Mahoney 교수의 과학혁 명 강 의와 세미나는 팔자 자신의 〈科學革命觀〉의 기초를 형성하는 데 큰 작용을했다. 이 책의 실제 집필과 출판 과정에서도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 다. 우선 처음 이같은 책의 집팔을 권고해 준 金容駿교수와 이를 지원해 준 대우재단에 감사한다. 그리고 완성된 원고를 읽고 값진 비판을 해준 朴星來교수에게도 謝意를 표한다. 권오형, 김제현, 양 신규, 유지영, 임경순, 정명식, 홍성욱군 등은 바쁜 시간을 내어 원고정리를 도와 주었다. 또한 신속하고 효과적인 편집작업을 해준 民音社 여러분의 노고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의 도움과 수고에 힘 입어 나올 수 있게 된 이 책에 남아 있는 부족함과 착오는 전적으 로 팔자 자신의 책임이다. 1984년 여름 金永植

과학혁명 · 차례

*머리말 7

제 1 장 서론 : 과학혁명 11

제 2 장 천문학의 혁명 19

제 3 장 역학의 혁명 : Ⅰ중세역학과 갈릴레오 45

제 4 장 마술, 기술 및 실험과학 : 베이컨 63

제 5 장 지식의 위기와 그 해결 : 데카르트와 기계적 철학 81

제 6 장 역학의 혁명 : Ⅱ 데카르트에서 뉴돈까지 99

제 7 장 생리학의 혁명 : 하아비와 피의 순환이론 117

제 8 장 과학단체의 출현과 새로운 과학활동 131

제 9 장 과학혁명과 종교 145

제 10 장 과학혁명기의 기술과 과학 161

제 11 장 과학혁명의 완성과 그 영향 :

뉴튼과학과계몽사조 173

*참고문헌 187

*색인 201

제 1 장 서론:과학혁명 1 과학의 어느 한 분야 혹은 여러 분야에서의 급격한 변혁을 〈과학 혁 명 (scie n ti fic revolu ti on) 〉이 라고 부른다. 역 사상 우리 는 과학혁 명 이 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크고 작은 많은 과학상의 변혁을 볼 수가 있 다. 예 를 들어 코페 르니 쿠스 (Co pern i cus, 1473-1543) 의 지 등설에 바탕한 새 로운 우주구조, 다아원 (Charles Darwi n, 1809 ― 1882) 의 전화 론, 타보아지 에 (Anto i n e Laurent Lavois i e r , 1743 ― 1794) 의 새 로운 화학 체계, 아인쉬 타인 (Alber t Ei ns te i n , 1879 一 1955) 의 상대성 이론, 프로 이 트 (S ig mund Freud, 1856-1939) 의 정 신분석 학 등이 모두 크고 작은 과학혁명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반적인 의 마 에 서 의 과학혁 명 에 관한 논의 는 Thomas S. Kuhn 의 『과학혁 명 의 구조 (The St ru ct u re of Scie n ti fic R evolu ti on)』 1) 를 비 롯해 서 많은 사람 들의 처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2) 그러나 우리논 〈과학혁명〉이라는 말을 혼히 이보다 훨씬 좁은 의 미로 사용하며, 역사상의 하나의 독수한 현상, 즉 16,17 세기를 통

1) (U. of Chic a g o Pr., 1962): second enlarge d edit ion (1970). 2) 과학혁명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는 대부분의 경우 Kuhn 의 앞에 말한 객에 대한 비평의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Kuhn 의 책을수제로한 Colloq ui- um 의 토론 내 용을 수록한 I. Lakato s & A. Musg ra ve, eds. , Crit icism and the Growt h of Knowledg e( Cambrid g e U. Pr.,1970) 을 참조할 것 보다 쉬운 논의 로는 필자의 「토마스 쿤의 科學觀」, 〈(현상과 인식》, 제 4 권 제 1 호 (1980, 봉), pp. 133-59 를 참조할 것 .

해서 유럽에서 일어난 과학의 여러 분야에 걷찬 급격한 변화를 〈과 학혁 명 〉이 라고 부른다. 16, 17 세 기 의 〈과학혀 명 > 동안에 는 천문학, 역학, 생리학 등의 과학 분야의 내용에 획기적인 전환이 있었고 다 론 여러 분야들에도 재로운 조류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또 과학혁 명은 비단 과학의 내용에만 국한되지 않고, 과학의 방법, 목적 및 그 사회적 위치에도 큰 변화가 있었으며, 이 밖에도 많은 사상적, 사회적인 변화를 그 배경 또는 결과로서 수반했다. 이 책은 바로 이 16, 17 세기의 과학혁명을· 주제로 한다. 과학혁명은 유럽문화 전체에 배경을 두고 유럽문화 전체에 걷쳐 서 영향을 미찬 혁명적인 역사현상이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는 혼히 인용되 는 Herbert Bu tt er fi eld 의 다음과 감은 주장 3) 이 지 나찬 과 장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과학혁명〉은 유럽史上 기독교의 출현 이태의 어떠한 사전보다도 훨씬 더 중대한 일이었으며, 과학혁명에 비하면 종교개혁이나 르네상스는 중 제 기독교 사회내의 단순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못하는 작은변화였다.… ... 근대 사회와 근대 사상의 전정 한 起源으로서 여 태 까지 동상적 으로 사용 된 유럽사의 시대 구분(죽 종교개혁이나 르네상스를 분수령으로 하는) 온 이계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고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되었다. 따라서 과학혁명은 과학의 역사상에서는 가장 획기적인 일이었으며 과학혁명에 대한 연구는 과학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서 활발히 진행되어 왔다. 그 중요도는 과학사 전공이 있는 미국의 대부분의 박사학위 프로그램의 학위자격종합시험에서 〈과학혁명〉 을 거의 필수분야로 부과하는 것으로부터도 찰 알 수 있다. 사실상 〈과학혁명〉에 대한 연구 자체가 그 내용이나 방법에 있어서 세련되 어 가면서 〈과학사〉를 하나의 독자적 학문분야로 정 립 시 키 는 데 에 도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과학혁명이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광범위에 걷찬 사건이었기 때문에 과학혀명에 대한 연구 역시 광범위에 걸쳐서 여러 방향에서 진행되어 왔다. 그리고 그 때문에

3) H. Butt er fi eld , The Orig ins of Modern Scie n ce, 1300-1800, revis e d edit i- on, (New York, 1957), pp. 7-8.

과학혁명에 관한 연구는 과학사 연구가 취할 수 있는 과학사 목~ 의 여러 방법이나 관접들을 찰 보여주기도 한다. 과학혁명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다룬 책들은 아주 많다. 우선 E. A . Burtt, ~> Alexandre Koy re 5) 및 Bu tt er fi eld6 ) 의 선구적 업 적 들에 서 시작해서 A.R . Hall 과 M. Boas8) 의 책들 그리고 더 근래에 와서는 H.F. Kearne y9)와 Ri ch ardS. Wes tfa ll10 ) 의 책들이 모두 과학혁명 전반 에 대해서 다루고 있고 이들 책들은 모두 아주 훌륭한 업적들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필자가 괴하는 바는 위의 책들을 대체하는 새 로운 책을 쓰겠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 책들을 바탕으로 시 작해서 때로는 서로 다론 관접에 의해서 씌어진 서로 다론 해석들 ­ 울 견주어 종합해 보며, 보다더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 한 연구결과들――그 중 많은 것들은 위의 책들이 씌어질 때에는 아직 나오지 않았던-로서 이를 보완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 다. 또한 이 책은 위의 책들 중 몇 가지가 그런 것처럼 과학혁명 의 모든 면에 대한 전체적이고 완전한 논의를 목표로 할 수도 없 다. 그 대신 이 책이 꾀하는 바논 과학혁명에 있어서 주가 되는 및 가지 현상 및 측면들과 그 대표적 문제들에 대해서 필자로서 가

4) E. A . Burtt, The Meta p hy s i c a l Foundati on of Modern Phys i c a l Scie n ce (London, 1925). 5) A. Koy re , Et 11 des ga li leen nes, 3 volumes, (Paris, 1935-39). 1950 년대 에 등 장한 Thomas S. Kuhn, Charles C. Gi llisp i e 둥의 주로 內的 科學史(i n t ernal his t o ry of sc i ence ) 의 접 근법 에 치 중한 과학사학자들에 게 큰 영 향을 준 Koy re 의 업 적 은 그 후 From the Closed World to the Infi nit e U11i ve rse(Balti - lmuotri eo,n (1 H9 5a7r v) a와rd M Ue.t a pP hr.y, si1 c9 s 6 8a)n d등 으Me로as 1출1r판em되e1었1다t: . E ssays i1I Sc ien t ific R evo, 6) 주 3) 에 언급된 객 , 7) A.R. Hall, The Sc ien t ific R evolt ltion 1500-1800: The Formati on of tlze Modern Scie n ti fic At tit11 de(Bosto n . 1954), second edit ion (1962) ; From . Galile o to Newt on I630-1720(London, 1963). 과학혁 명 에 관한 그 이 후의 Hall 의 견해는 N. F. Canto r , ed., Perspe c ti ve: ; on the Europ ea n Past: Co11- versati on s wi th Hi st o r ia 1 1s(London, 1971), Chap. 17 에 피 력되 어 있다. 8) M. Boas, The Sc ien t ific R enais s ance I450-!630(New York, 1962). 9) H. F. Kearney, Scie n ce and Chang e , I500-I700(London, 1971), Kearne y는 또한 과학혁 명 에 관한 독서 자료를 수록한 Orig ins of the Scie n t ific R evolt ttio11 (New York, 1967) 을 편집 한 바 있 다. 10) R.S . Westfa ll , The Constr n cti on of Modem Sc ien ce. Meclza11i s1 n ., 1J1 1t i Mecha11ic s (New York, 1971).

능한 한 수긍이 가고 흥미있는 설명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최선의 경우에도 이 책은 과학혁명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주기보 다는 과학혁명이라논 현상에 대한 그리고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 을 일깨워 주는 데 그칠 것이고 그것이 이 책의 진정한 목적인 것 이다. 2 어떤 것에 대한 논의도 그 논의의 대상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채 로 시작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 대상이 〈과학혁명〉과 같이 혼 히 언급되지만 깊이 이해되지는 않는 것일 때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본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과학혁명이라 논 것에 대한 아주 간단한 소개를 받을 필요가 있겠다. 과연 〈과학 혀명〉이란 어떤 현상이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간단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과학혁명이 시작되기 전의 한 시접__예를 들어 1500 년경__과 과학혁명이 완결된 후의 한 시접__예를 들어 1700 년경_―에 있어서의 과학 을 비교해 볼 수가 있다. 먼저 1500 년경의 유럽의 과학은 그리스의 과학, 특히 아리 스토텔레 스 (Ar i s t o t eles, BC 384-322) 에 전체 적 인 기 초를 두고 프롤레 마이 오스 (P t olema i os, AD 2 세 기 )의 천문학, 갈레 노 스 (Galenos, 129-199) 의 생 리 학, 유클리 드 (Eucl i d, BC 330-260) 의 기 하학 등으로 보완된 내용이었고, 이런 내용이 중세유럽의 스콜라 학풍 (Scholas ti c i sm) 에 휩 쓸려 서 극히 思辨的이 고 지 엽 적 이 고 세 부적 인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1700 년경에는 분명히 다른 형태의 학문, 다른형태의 학문활동으로서의 과학을 볼 수 있었다. 코페 르니 쿠스에 서 시 작해 서 케 플러 (Jo hannes Kep le r, 1571-1630), 갇 릴레 오 (Gal i leo Galile i, 1564-1642) 둥을 거 쳐 뉴튼 (Isaac Newt on , 1642 -1727) 에서 완성을 본 새로운 천문학 및 우주구조를 비롯해서, 갈 릴레오에서 시작해서 데카르트 (Rene Descarte s , 1596-1650), 호이겐스 (Chris t i an Huyg e ns, 1629-1695) 를 거 쳐 역 시 뉴튼에 서 완성 을 본 古 典力學 (class i cal mechanic s ), 베 살리 우스 (Andreas Vesaliu s , 1514-1564) 이 래 계 속된 해 부학적 지 식 과 하아비 (W illiam Harvey, 1578-1657) 에

의해 얻어전 피의 순환이론을 동해 자리잡힌 생리학, 데카르트, 페 르마 (P i erre Fermat, 1601-1665) 등을 거 쳐 뉴튼과 타이 프니 츠 ( Le i b­ niz , 1646 ― 1716) 에 이 론 새 로운 수학 둥의 참신한 내 용으로 넘 쳐 있 었던 것이다. 다른 면에 서 보면, 1500 년경 의 유럽 과학은 과학 그 자체 만으로. 독자적인 분야를 이루지 못한 채 철학의 한 분야에 지나지 못했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神學울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인데 1700 년경에 가서는 과학이 그 자체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1700 년경의 새로운 과학자들은 철학이나 신학의 문제로부터 과생 된 것이 아닌 자연세계를 이해하려고 하는 홍미 자체에서 과학에 종사하게 된 것이고 더 나아가서 자연세계의 이해를 통해서 자연을 이용하고 조작하려고까지 괴했다. 따라서 1500 년의 유럽사회에서는 우리가 科學者라고 부를 수 있는, 죽 과학만을 했거나 과학에 주된 관십울 가전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던 데 반해 1700 년에는 많은 사람들이 〈 과학자 〉 의 범주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럽의 여러 곳에서 과학을 위한 학술단체가 생겨나고 과학전문 학술잡지까지도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혁은 결과적으로 인간이 자연을 보는 관접의 변혁을 넘 어서서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 자체에도 변화를 가져왔고 더 나아가 서는 과학과 사회구조와의 관계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1500 년경에 는 미미한 정도에 지나지 못했던 사회에서의 과학의 위치도 엄청난 변화를 보여서 1700 년경, 혹은 조금 뒤로 잡아서 1725 년경이 되면 유럽사회가 실제로 과학을, 특히 뉴돈의 이름으로 특칭지어진 선현돈 과학 (New t on i an sc i ence) 〉을, 그 시 대 가 지 닌 현대 성 의 상칭 으로까지 여기게끔 되었다. 죽 자신들의 시대가偶像, 마신, 독단 (do gm a), 假 定 등에 젖 어 있 던 몽매 한 과거 에 서 벗 어 나서 〈과학적 정 신 (sc i en tifi c sp irit )>, 〈경 험 주의 (emp iri c i s m )>, 〈실험 철학 (exp er i men t al ph il o sop h y )> 등으로 무장한 새로운 시대라고 자부했던 것이다. 오늘날 혼히 〈과 학적〉이라는 말이 옳고 믿을 만하고 훌륭한 것을 뜻하는 데 반해 어과학적〉이라는 말은 찰못되고, 믿기 어렵고, 들린 것을 뜻하는 것 도 18 세 기 계 몽사조기 의 볼테 르 (Vol tai re, 1694-1778), 달랑베 르

(d'Alember·t, 1717-1783) 등에 서 찾아볼 수 있 던 과학에 대 한 이 러 한 깊은 선뢰가 연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 볼 때 과학혁명은 유럽문화 전체에 배경을 두고 유럽문화, 나아가서는 세 계문화 전체에 걸쳐 영향을 미찬 혁명적 변화였던 것이다. 3 최근에 와서, 이와 같이 광범위에 걸치고 깊은 의마를 가전 과학 혁명을 유럽사회 전체의 역사와 결부시켜서 설명하는 이른바 〈危機 의 이 론 (Cr i s i s Thes i s) 〉이 주목을 묻고 있 다. 당초 근세 초기 의 유럽 사회의 여러 방면에 걸쳐 있었던 〈일반적 위기〉-어려움, 마찰, 충돌, 갈등, 불안 둥-를 설명하기 위해서 제기된 이 이론 11) 아 과학에 적용되었을 때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형태를 취한다. 죽 16 세기부터 17 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유럽사회 전반에 걸쳐서 〈우] 기〉가 있었고 과학도 그 일반적 위기의 일환으로 과학 자체내의 위 기를 겪었는데 과학이 그 자체의 위기를 해결함으로써 유럽사회 전 반의 위기의 해결에도 기여했고 그 결과로서 과학의 위치를 드높였 다는 것이다 .12) 이 〈우]기이론〉은 역사학적 설명에 있어 제시되는 이론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지나치게 단순화된 홈이 있기는 하지 만 과학혁명에 관해 위에서 본 여러 사실들을 모두 포괄하면서 설 득력있고 찰 요약이 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과학상의 위기는 1543 년 코페르니쿠스의 책 13) 이 출판되면서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시작이 있고서도 본격적인 위 기의 진행이 있기에는 6,70 년의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에는 小康상

11) 근세 초기의 일반적 위기를 다문 가장 대표적인 책으로 학술지 Past & Present 에 실렀던 14 명의 처자의 굴둘을 엮은 T. Asto n , ed., Cris i s in Europ e, 15 60-1600(London, 1965) 이 있으며 이 책에는 이 이론에 가장 근본적안 기여 를 한 Eric Hobsbaum 과 Hug h Trevor-Ro p er 의 선구적 논문들이 실려 있다 . 일 f반o적r S위ta 기b i이l it론y에 in 대E한ar l비y 교 M적o de최rn근 의E1 1해rop설 e서( O로xf는o r d TU.. K . P rR.,a b1b9, 75)T 가he 있S으tr u며 g g여le 기 에 많은 참고문헌이 실려 있다. 12) 이같은 과학혁명에 대한 〈위기이론〉은 아칙 뚜릿한 형태로 발표되지는 않았지 만 예를 둘어 Prin c eto n 대 학의 Mi ch ael S. Mahoney 같은 학자가 주장하는 이론이다. 13) De revoluti on ib u s orbit um coeles till m 이타는 제목으로 타탄어로 씌었음.

태가 지속이 되었다. 그러다가 1600 년대에 들어서서야 본격적인 위기의 내용이 되는 현상과 사건들이 활발히 일어나고 1620-40 년 사이에 우1 기는 극성기를 맞았나 갈릴레오, 케플러, 하아비, 데카 르트 등의 업적이 모두 이 시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과학상 의 위기는 16 세기 초 종교개혁이 시작된 후 천천히 진행되다가 그 후 찾은 종교전쟁둥으로 17 세기 초에 극에 달한 정치, 사회의 위기 와 평행해서 나아갔다 .14) 그리고 후에 가서 새로운 과학이 거의 받 아들여 지 고 새 로운 〈과학자〉, 과학단체 들이 대 두한 1660 년대 에 는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게 된 것은 〈위기이론〉울 어느 정도 뒷받침해 주는 사실로 불 수가 있다.

14) 이 시 기 의 유럽 의 전반적 인 역 사를 다문 재 들로는 C. Hi ll, The Centu r y of Revoluti on 1603-1714(New York, 1961) ; D. Maland; E11rop e · in the Seven- Eteuen rothp e C ienn t Fu er yrm( L eonntd( oL ne,x i1n 9g6 t6o)n ;, MAa.s Ls.. M19o7o0t) e ;, HT.h eK. a Smeevne,n tTe he ne thI r oCne nCteu nrt yu :- ry: Soc ial Chang e in Europ e 1.5.5 0 -1660( Ne w York, 1971) 동이 있다. 그 외 에는 C. Webste r, ed., T he J11t ell ectu a / Revolut ion of the Sevente en th Gen- tttry ( L ondon, 1975) 는 보다 범위를 좁혀 과학과 연관된 면에서의 역사를 다무 고있다.

사실 16 세 기 까지 유럽 사회 에 서 받아들여 져 왔던 우주관은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한 cosmos 라는 개념으로 집약될 수가 있다. 그 자 체가 B.C. 6-5 세기경의 고대 그리스의 문화적 위기의 결과로서 그 이전의 신화적, 종교적 자연관을 대체한 이 cosmos 의 개념은 아 주 조화있고 질서가 잡힌 우주의 관념에 바탕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주의 중십에 무거운 지구가 안정되게 정지해 있고 그 주위에 하 늘과 천체들이 돌며 가장 바깥에 신의 세계가 있는 이런 조화있는 우주구조는 우주구조로만 그치지는 않았고 사람들은 자연에서 본 이런 관계와 조화를 그대로 인간사회에 두영시켜서 국가 형태, 사 회구조 등에서도 그것들을 찾아내었다. 즉 地上界-天上界一入,l의 세계로 三分化된 우주구조와 결부되어서 인간의 지식도 감각―形態 '(v is ib l e fo rm) 一本質(i dea) 이 나 자연철학(p h y s i cs) 一형 이 상학 (me tap h y­ s i cs) -신학(t heolo gy)의 3 분화된 구벌이 지 어 지 게 되 고 더 나아가서 는 인간-교회-신, 왕-교황-人,l, 평만一귀족一왕, 人民-변호사 -법 정 , 匠人―길드(g u i ld) -고객 (pa tr on ) 둥의 여 러 사회 구조가 모

두 이차럼 3 분화된 체계에 맞아들었다. 따라서 조화있고 찰 째인 3 분화된 우주관은 사회의 모든 구조와 구성원이 제각기 제자리가 있 고 서로 조화를 유지하는 3 분화된 구조와도 들어맞았던 것이다. 이 런 가운데 15, 16 세기에 이르면서 도시, 상인, 대학, 기술자 등 이란 안정화된 구조에 맞아들지 않는 새로운그룹이 세력울 가지 기 시작했다. 특히 3 분화된 구조의 안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중간요소와 한 쪽 요소가 연합해서 다른 쪽 요소에 대항함으로써 3 분화된 구조를 불안하게 하거 나 아예 중간요소를 제 거 해 버 림 으로써 3 분화된 구조 자체를 깨뜨리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게 되었고 信 者

가 신과 직접 접함으로써 중간의 교회나 교황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돈 루터 (Ma rti n Luth e r, 1483 ― 1546) 의 종교개 혁 은 이 의 가장 커 다 란 예가 되었다. 이에 따라 사회구조는 불안하게 되고 이른바 〈위 기〉가 닥찬 것인데 이럴 경우 일어날 수 있었을 일은 안정한 3 분화 된 우주구조가 혼들려진 사회구조를 지탱시켜 주거나 거꾸로 3 분화 된 사회구조의 혼들림 때문에 우주구조까지도 깨어지는 두 가지 중 하나였을 것은 침작할 수 있다. 실제로 17 세기 초가 되어서는 이 런 3 분화된 구조중 거의 모돈 것이 다 깨쳐 버리고 남은 것은 3 분 화된 우주구조분이었다. 그리고 이런 우주구조마처 깨어지는 현상 이 바로 과학혁명이었던 것이다. 너무 단순화되어서 약간의 무리도 발견할 수 있지판, 이 설명은 퍽 간결하고 명쾌한 장접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는 쉽게 이것을 그 후의 역사로 연장시켜 볼 수가 있다. 우주구조가 깨어지면서 새로 운 우주구조와 그에 바탕한 우주관이 들어서게 된다. 뉴튼과학의 성립으로 득칭지어지는 이 우주관은 굉장한 성공을 거두게 되고 이 내 사회의 여러 방면에 영향을미친다. 위에서도 본 것처럼 18 세기 의 계 몽사조 (Enl ig h t enmen t)는 이 러 한 뉴돈과학의 영 향을 강하게 받 았고,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독립전쟁 같은 민주주의 혁명의 바탕 에 이란 사조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세계 가 결국은 이에 바탕을 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 모두 과학혁명의 전과로 일어난 새로운 근대 과학의 영향이었다고 볼 수가 있는 것 이다.

제 2 장 천문학의 혁명 과학혁명에 있었던 여러 분야의 혁명들 중에서 가장 눈에 며:rr.. 중십적인것은 천문학의 혁명이다. 지구의 주위를 태양·달둥을 · 비 롯한 여 러 行星(p lane t)들이 회 전하는 프톨레 마이 오스 (P t olema i os,. A.D . 2 세기)의 우주구조로부터 태양울 중십으로 하고 그 주위를 지 구를 비 롯한 행 성 들이 회 전하는 코페 르니 쿠스 (Co pern i cus, 1473 一 1543) 의 우주구조로의 변화와 그것 에 따른 천문학상의 혁 명 적 인 변 혀이 그것이다. 이 장은 이같은 천문학의 혁명에 대해서 다루기로 한다 .1)

l) 천S.문 K학u의hn , 혁T명he의 C o표p준 er 저ni인c a n논 R의e는vo lu그t i o자n 체: P가la 이ne미ta r y고 전A이str o n되o어m y 가in는 t hTe hDomevaes- lopm e nt of Weste r n Thoug h t( H arvard U. Pr., 1957) 을 들 수 있다. 그 외에 주로 Cop e rnic u s, Kep le r 및 Borell i를 중십으로 몇 가지 문제를 좀더 중접적 으로 다문 Alexandre ·Ko y re , La revoluti on astr o nomi q1 1e(Paris , 1961), 영 역판, The Astr o nomi ca l Revoluti on (Cornell U. Pr., 1973) 이 있고 약간 편 견이 개입되어 있지만 위의 책둘보다 훨씬 쉽게 다룬 Arth ur Koestl e r, The Sleepw alkers: A Hi sto r y of Man's Chang ing Vi si o n of the Univ e rse

1 15 세기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침체에 빠져 있던 유럽의 천문학, 특히 관측천문학이 다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유로 둘 수 있는 것은 우선 달력의 개혁 필요성이었다. 그동안 사용해 오던

줄리 우스력 (Ju lia n Calendar ) 은 고대 서 부터 사용해 오던 것 이 었 고 시 칸이 경과하면서 오차가 누적되어 가서 접접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 다. 더구나 15 세기경부터는 빈번한 항해활동을 비롯해서 사회의 정 치적, 경제적, 행정적인 발전이 더 이상은 부정확한 달력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게 했고 따라서 달력의 개혁에 사용될 정확한 천문관 축의 필요성이 심각해졌던것이다 .2) 이와같은관측천문학의 발전과 아울러 천문학적 계산에도 많은 노력이 기울여졌다. 때마침 12 세기 경에 그동안 잊혀져 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제스트 ( Alma g est) 』 가 발굴, 번역이 되었고 이것이 검접 공부되고 이해되어 가서 15 세 기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消化되고 이를 개선하려는 생 각도 가능해지 케 되었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가 천문학에 종사하기 시작할 무렵 에는 꽤 많은 관측 데이타와 천문학적 지석이 쌓여 있었고, 어떤 의미에서 코페르니쿠스는 중세 유럽의 역사상 프톨레마이오스를 완 전히 이해하고 이를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첫번째 제대에 속했던 것이다. 3) 코페르니쿠스는 1490, 1500 년대를 통해서 Cracow, Bolog na , Padua, Ferrara 동의 대 학들에 서 법 학, 의 학을 전공하는 과정 에 서 천문학에 관십울 가지게 되고 1510 년대에 와서는 이미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견해를 발표하지 않고 있 다가 자신이 죽던 해 인 1543 년에 야 『천체의 궤도들의 회전에 관해 서 (De Revoluti on ib u s Orbit um Coele sti um) 』라는 제 목의 책 에 이 것 을 발표하고 그때까지 지구에 주어졌던 여러 천문학적 기능을 태양으 로 옮겨 주게 된 것이다 .4)

2) Co p ern i cus 의 변혁의 배경으로서의 달력개혁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Jer ome R Rave t z 가 강조하고 있 다 : Astr o nomy and Cosmolog y in the Achie v ement of Ni col a11s Cop er nic u s(Warsaw, 1965). 3) Co p ern i cus 의 시기에 있어서의 천문학자둘에 대한 홍미있는 논의가 R.S . West- man, The Astr o nomer's Role in the Six t e e nth Centu r y: A Preli m i na ry Stu dy , Hi st o ry of Scie n ce 18(1980), pp. 105 -4 7 에 주어 져 있다. 4) 이 책 의 영 어 로 된 번역 은 Great Books of the Weste r n World, vol. XVI (Chic a g o, 1952) 에 담겨 있다. Co p ern i cus 가 이 렇게 지 동설의 발표를 늦춘 이 유는 명 확하지 는 않지 만 그것 이 빚을 말썽과 종교져 문제를 염려해서였을 수가 있다. · Co p ern i cus 의 전기로

ruck, 1967) 이 가장 완벼하며, 그 의에 훨씬 짧은 것으로 E. Rosen, Cop er ni- cus, Ni co laus in Charles C. Gi llisp i e, ed., Di ct i on ary of Scie n ti fic B io -gr aph y , vol. 3(1971), pp. 401-11 가 있다. 주 1) 에 언급한 Koes t ler 의 책도 Co p er, n i cus 에 대한 제법 자세한 전기져 내용을 담고 있다.

2 그러면 먼처 코페르니쿠스의 변혁에 의해 대체된 프톨레마이오스 의 우주구조에 대 해 서 살펴 보자. 프톨레 마이 오스의 우주구조는 그 림 1 에 간단히 그려져 있다. 이것은 중세를 통해서 계속해서 천문 학이나 우주론에 대한 초보적인 책들에 실리던 그림들과 아주 비슷 한 그림이다. 이 구조에 의하면 지구는 우주의 중십에 위치해 있고 멘바깥의 〈恒星天球 (S t ellar s p here) 〉가 우주의 바깥 경 계 이 다. 항성 천구 바로 안족부터 행 성 의 天球 (heavenl y s p here) 들이 토성 (Sate r n), 목성 (Ju p iter ), 화성 (Mars), 태 양, 금성 (Venus), 수성 (Mercury) , 달의 순서로 지구를 중십으로 해서 돌고 있으며 이것이 이들 행성들이 지구 주위를 도는 관측결과를 설명해 준다. 그리고 항성천구는 행

그립 1 Pto l emaio s 의 우주구조

그립 2 Co p ern i cus 의 우주구조

성들이 도는 방항과 반대 방항으로 하루에 한 바퀴를 돌며 이것아 털자리가 1 일 1 회전하는 이유인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우주구조 대신 그림 2 와 같은 새로운 우주구 조를 계시한 것이다. 이 새로운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구조는 프톨레 마이오스의 구조와 거의 비슷하고 단지 우주의 중십에 있던 지구와 달을 태양과 그 위치를 바꾸어서 태양이 우주의 중십에 오게 한 것 과 항성천구의 1 일 1 회전의 운동을 없앤 것분이다. 그 대신 지구 가 태양울 중십으로 도는 일방 자체의 축을 중십으로 自轉하게 함 으로서 털자리의 운동을 나타내주고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같은 변혁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구조가 자 니는 몇 가지 문제접을 해전해 주었다. 이 문제접들 중 첫째는 지 구를 주위로한행성들의 배열의 순서와그것들의 주기의 문제였다. 프톨레 마이 오스의 우주구조는 바깥으로부터 화성 까지 는 회 전주기 가 감소하는 순서로 배열이 되어 있고, 멘 안쪽의 달 역시 이 순서에 맞춰서 가장 짧은 주기를 지녔다. 그러나 이 구조에 의하면 태양고1-

금성 및 수성은 모두 지구 주위의 회전 주기가 약 1 년 정도로서 바 숫해서 이것들 사이의 순서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5) 이 문제는 결 국 태양의 주위를 도는 금성과 수성을 지구를 주위로 해서 돌게 했 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고 따라서 태양 주위의 회전주기가 가장 작은 수성으로부터 가장 큰 토성에 이르기까지 순서대로 배열된 코­ 페 르니 쿠스의 우주구조에 서 는 나타나지 않는다.

5) 신제로 고대에 있어서 태양, 금성, 수성의 배열은 한 가지 순서로 고정되지 않 고 여러 가지 순서가 혼용되었다. 여기서는 P t olema i os 가 사용했고 그 후 가장 많이 사용된 순서를 따온다.

두번째 문제 는 행 성 듣의 〈逆運動 (re t ro g rade mo ti on) 〉의 문제 이 다. 그림 3 은 이러한 역운동이 나타나는 이유를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구조하에서 찰 보여주고 있다. 그림에서 EI, E2,… . . ,E1 은 퀘도상에

그림 3

서의 지구의 위치들이고 P1,Pz ...... p~ 지구가 이들 위치들에 있을 때의 행성의 위치들아다. 한편 사람이 행성의 운동을 볼 때에는 지구 위에서 이들 행성의 위치를 멘바깥에 있는 항성천구 에 投射시켜서 관측하기 때문에 그림에서 1,2, … ···7 로 나타난 점들이 사람이 관측하는 행성의 위치들을 나타내 준다. 이 관측 위치가 1-2-3 에서는 제 방향 으로 움칙이다가 3-4 一 5 에서는 오히려 거꾸로 움직이고 다시 5 ― 6-7 에 서 제 방향으로 움직 이 게 되며 이런 식의 운동울 역운 동이타고 부르는 것이다. 이 역 운동은 고대서부터 행성의 운동­ 의 가장 목칭적인 면으로 널리

관측되어 있었지만 프둘레마이오스의 우주구조하에서는 간단히 설

) \!1)

(a) ( b ) 4 3 2 (CJ 그립 4 epi cy c l e, defe r ent 및 행 성 의 역 운동

명할 수가 없었다. 우주의 중십에 정지해 있는 지구 위에서 그 주 위를 도는 행성의 운동을 관측했을 때 이같은 현상이 일어날 수 없 기 때문이다 . 결국 프톨레마이오스가 채덱한 설명은 e pi c y cle 이타는 것을 사용해서 가능했다. 즉 행성이 지구를 중십으로 하는 단순한 원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그림 4(a) 에서 보는 것처럼 원 주위 __ 이 원을 de fe ren t라고 부른다―_에 중십 을 둔 작은 원 (ep icy c l e) 위 를 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실제 행성의 운동은 (b) 와 같아지고 이 것을 지구에서 관측했을 때는 (c) 처럼 2 에서 3 으로의 역운동이 나 타내게 된다. 코페르니쿠스의 변혁은 이같은 행성의 역운동을 굳이 e pi c y cle 을 사용하지 않고 우주구조 자체 로서 설명 할 수 있도록 해 주 었다. 프톨레 마이 오스 우주구조의 세 번째 문제 는 內行星(i n fer i or pla net) _지구보다 안쪽에서 태양의 주위를 도는 행성들(수성과 금성) __ 과 태양 사이의 거리의 한계에 관해서 나타난다. 이 문제 역시 코 페 르니 쿠스 우주구조에 서 는 그림 5 의 (b)에서 보듯이 자연스럽 게 설

E

( a ) (b ) 그립 5 내행성과 태양 사이의 거리의 문제에 관한 설명 (a) Pto l ernaio s 우주구조 (b) Cop e rnic u s 우주구조

명이 된다. 죽 태양을 중심으로 한 내행성 (P) 의 퀘도가 완전히 자 구 (E) 의 궤도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지구에서 봤을 때 태양 과 행성 사이의 각도는 최대한 乙 PES13- J-에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지구 중십의 우주구조에서는 태양과 내행성이 지구를 중십으로 각 각 독자적인 원운동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될 이유가 없게 된다. 프둘레마이오스는 역시 e pic y cle 로써 이 문제를 설명하고 있지만 이 경우에는 그의에 또 하나의 가정이 필요했다. 즉 그림 5 의 (a) 에서 보는 것 처 럼 , 내 행 성 (P) 이 ep icy c le 위 를 돌게 하고 그 e pic y cle 의 중­ 십이 항상 태양과 지구를 연걷한 선상에 오게 함으로써 -e pi c y cl e­ 의 중십의 회전운동이 태양의 회전운동과 완전히 일치하계 함으로 써__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결국 세번째의 문제에 대해서도 코. 페르니쿠스의 변혁은 e pic y cle 이 없이, 그리고 벌도의 가정이 없이, 우주구조 자체만으로서의 설명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변혁에 의해 해결이 된 프몰레마이오스 우주구조 의 문제접은 비단 이것들만이 아니지만 여기서는 마지막으로 한 가· 지 예만 더 둘기로하겠다. 지구에서 관측했을 때 행성이 지구주위 를 한 바퀴 도는 주기가 항상 일정하지가 않은 것이 그것인데 그립 6 이 코페르니쿠스 우주구조에서 이를보여주고 있다. 그립에는지구 (E) 가 태양 주위로 1+ 회전을 하는 동안 1 회전을 하는 행성 (P)

//\. 가4― 〕냐尸 \론2 、성·천구

\ \ il /p// E24 (S) ,E4 그립 6 행성의 지구주위 회전주기의 변화

의 예가 그려져 있다. 지구 가 E1, 행성이 P 의 위치에서 각각 출발했다고 하면 출발 시 지구에서 관측한 행성의 위치는 항성천구상에서는 1 의 위치에 해당된다. 그러나 행성이 한 바퀴 돌아 다시 P 의 위치에 올 때는 지구는 E1 을지나 E2 에 가있고지 구에서 관측한 행성의 위치 는 항성천구상의 2 에 해당 되게 된다. 따라서 행성의 관측위치가 다시 1 에 오기 위해서는 실제 행성이 태양 주위를 도는 주기보다 간 시 간이 필요해진다. 반대로 그

다음 주기는 오히려 실제 주기보다 짧아질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현상 역시 지구중심의 우주구조에서는 간단히 선명될 수가 없 고 프톨레 마이 오스는 ep icy c l e 을 포함한 복잡한 설명 을 필요로 했 던 것이다 .6)

6) 여 기 서 는 생 략하는 P t olema i os 의 설명 이 주 1) 에 언급한 Kuhn 의 객 p. 63 에 나 와있다.

3 위에서 본 것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코페르니쿠스가 일으 킨 변혁에 의해서 지구는 더 이상 우주의 중십에 정지해 있지 않고 하나의 행성으로서 태양의 주위를 1 년에 한 바퀴 돌 분만 아니라 그 자체의 축에 따라 自轉울 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코페르니쿠스 의 이론을 흔히 〈地動說〉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변 혁이 위와 같은 행성의 운동에 관한 천문학적 문제들을 찰 설명해 주었지만 그 결과로서 천문학 外的인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받아들여졌던 프톨레마이오스 우주구조가 단순히 우주구조에 그치지 않고 고대부터 중세를 통해 받아들여져 오던 아리 스토텔레 스 (Ar i s t o t eles, BC 384 ― 322) 적 우주관 전체 와 결부가 되 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톨레마이오스 우주구조를 깨드리는 일은 그와 결부된 아리스토텔레스 우주관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었다. 그러 면 먼저 아리 스토텔레 스의 우주에 대 해 간단히 살펴 보자. 7)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는 크게 두 개의 제계로 나뉘어져 있다. 우 주의 중십 인 지 구로부터 달까지 이 르는 달밀세 계 (sublunar world) 또 는 지 상계 (ter restr i a l world) 와 달부터 그 바깥의 세 계 인 달윗 세 계 (sup e rlunar world) 또는 천상계 (celesti al world) 의 구밀이 그것 이 다. 지상계는 흙, 물, 공기, 불의 4 원소로 이루어진 불완전한 세계여 서 항상 변화가 있으며 생성, 소멸의 과정들이 꿇임없이 있는데 반 해 천상계는 완전한 제 5 원소, 혹은 〈하늘의 원소〉로 이루어전 완전 한 세계여서 영구불변이다. 이런 구벌에 따라 양쪽 세계에서 일어나 는 운동도 지상계에서는 시작과 끝이 있는 칙선운동이 있는 반면에 천상계에서는 시작과 끝이 없이 항상 일정한 속도의 운동인 등속원 운동만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근본적 구벌에 더해서 지상계는 4 원소들이 중십에서부터 무거운 순서로, 죽 흙—물一공기―불의 순 서로, 배열되어서 가장 무거운 흙으로 이루어전 지구가 우주의 중십 에 위치해 있으며 천상계에는 여러 행성들의 천구가 회전하는 구조 가 생겨났다. 달이 이 두 세계의 경계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하늘 에 있기는 하지만 차고 기우는 변화가 있으며 자세히 보면 그 표면 에 어두운 부분이 있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또한 물체의 운동도 이 구조에 의해 설명이 가능해서, 지상계에서 무거운 물체는 무거 운 것의 본연의 위치인 우주의 중십-지구의 중십-울 향해 가

7) 중책 세의 아ch리ap스. 토3 텔과레 M스. 우C주lav관e에li n , 관T한h e 간N단at한u r al논 의Ph가il os주o p h 1)y 에 of언 급G한al i leKou( h Mnl 의T Pher.i,p l,1 9T7h4e), Dcehvaepl. o p1 m에 e n나t 와of 있다P.hy s 이i c 보a l다 T h조eo금ry 자 i세n 한th e 논 M의i둘 dd 로le는 AJg.A e.s (UW .e ios f- Mi ch ig a n Pr., 1959); E. Grant, Phy si c a l Sc ien ce in the Mi dd le Ag e s (Ne w York, 1971) 와 Cosmolog y in David C. Lin d berg, ed., ..S c ie n ce in the Mi dd le Ag e s(U. of Chic a g o Pr., 1978), pp. 265-302 가 있다.

려 하기 때문에 아태로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며, 가벼운 물체는 그­ 본연의 위치인 바깥쪽으로 향해 가려 하기 때문에 위로 울라가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는 이처럼 프톨레 마이오스의 우주구조를 포함하고, 그 의에 물질원소이론과 운동에 대한 설명들도 포함한 짜임새 있고 조화를 갖춘 우주였으며 사람들 의 일상경험과도 부합되는 우주였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에 의한 변혁은 이같은 우주관에 문제를 제기하게 된 것이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무거운 물체가 떨어지고 가벼운 물체가 올라가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코페르니쿠스의 변혁에 의해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중십이 아니면 무거운 물체가 굳이 일개 행성에 불 과한 지구의 중십을 향해야 할 이유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또“ 한 완전불변인 천상계와 불완전하고 변화가 있는 지상계의 엄격한 구별도 지구가 우주의 중십이 아니면 더 이상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그 분만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는중십인지구서부 터 멘바깥의 항성천구까지가 어느 정도의 거리를 지닌 有限하고 꽉 ­ 째인 우주였는데 코페르니쿠스의 변혁은 이것을· 깨뜨렀다. 코페르 니쿠스의 우주구조 내에서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기 때문에 지구 에서 벌을 관측할 때 지구의 위치의 차이에 따라 그립 7 에서 보는 것 같은 視差(p arallax) 가 관측이 되 어 야 한다. 그런데 실제 로는 이

것이 관측되지가 않았고 따라서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구조를 받아둔 이기 위해서는 지구와 항성천구의 거리가 그동안 생각해 오던 것에 비해서는 아주 멀다는―~거의 무한히 멀다는-결론을 내리게 되 었으며 이는 결국 우주의 크기가 거의 무한이 되게 만들었다. 그리 고 이렇게 우주의 크기가 무한하다면 그러한 우주에 있어서 〈중십〉 과 같은 관념은더 이상 의미를지니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의에 도 그렇게 근본적은 아니었지만 더 직관적인 문제로 만약에 지구가 하루 한 바퀴의 빠론 운동울 한다면 왜 그 위에 사는사람이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도 있었고, 왜 지구 위에서 던져 올란 물체가 올라갔다가 다시 떨어지는 동안 지구가 움칙였는데도 불구 하고 다시 제자리에 떨어지는가 하는 문제도 생겨났다. 결국 코페 르니쿠스의 변혁은 일상경험과도 찰 · 맞고 중세를 통해서 계속 받아 들여쳐 오던 안정된 우주관과도 부합되는 우주구조를 깨는 것이었 다. 더구나 그이유가 천문학의 아주 전문적이고 세부적인문제­ 행성의 역운동, 태양과 내행성간의 거리, 행성의 주기의 변화 등의 문제――를 보다 간단히 설명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4 따라서 코페르니쿠스의 변혁을 일반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가 힘들었을 것은 침작할 수가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변혁이 해결해 준 천문학의 세부적 문제들을 그들이 이해하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또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의 천문학적인 지식을 위해서 그렇 게 큰 우주관의 변혁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렇다고 천문학자들로서는 이것을 받아들이기가 쉬었던 것도 아니다. 물론 위와 같은 행성의 운동상의 문제들에 대해서 천문학자들이 定. 性的인 설명을 하는 것은 간단해졌지만 그들이 행성의 위치와 운동­ 을 정량적으로 정확하게 기술하는 데 있어 지니는 어려움은 코페르. 니쿠스의 우주구조에도 촌속했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움의 이유는 실제로 행성의 운동이 동속원운동이 아나 라 부동속 타원운동울 함에도 불구하고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나

(a) mi no r epi cy c l e (b) eccentr ic

IIIk1 A f a- --- -p (c) equ ant 그립 8 mi no r epi cy c l e, eccentr ic 및 equ ant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두 가지 우주구조가 다 하나의 행 성의 운동을 기술하는 데 단순한 원운동 하나로는 불가능하고 위에 서 본 epi cy c l e 또는 eccentr ic, equ ant 같은 것 들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림 8(a) 는 de fe ren t가 한 바퀴 도는 동안 e pi c y cle 이 반대 방향으르 한 바퀴 돌게 함으로써 e pi c y cle 상의 행 성 이 중심 의 태 양(S) 주위 로 타원운동을 하도록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타원 운동을 나타내 주기 위해 서 도입 한 e pi c y cle 을 역 운동을 위 해 도입 한 -epi cy cle 과 구분하기 위 해서 mi no r e pi c y cle 이 라고 부른다. 그림 S(b) 는 eccen tri c 을 보여주는데 행성 (P) 의 원궤도의 중십 (0) 이 티,양 (S) 과

일치하지 않고 벗어나 있고 그에 따라 행성이 O 를 중십으로 등속운 동을 해도 S 를 중십으로 보면 부동속운동을 하는 것을 나타내 준다. 이 와 반대 로 그림 8 ( c ) 의 e q uan t는 행 성 (P) 이 원궤 도의 중십 인 태 양 (S) 을 중십으로 동속운동을 하지 않고 그로부터 벗 어 난 접 A 를 중 심 으로 그 각도 (a ) 에 있 어 서 둥속운동을 하게 함으로써 S 를 중십으 로 볼 때는 부둥속운동을 하는 것을 나타내 준다. 한편 이같은 기하학적 도구들을 사용해서 실제 행성의 움직임을 기술하는 것은 완전한 정확도를 지닐 수가 없었고 항상 어느 정도 의 오차를 수반해 야만 랬 다. 경 우에 따라서 mi no r epi c y cle 과 eccentr i c 만으로 정확한 수치가 얻어지지 않을 때에는 이것들을 복합해서 사 용해야만 랬다. 결국 부등속 타원운동을 이같이 등속원운동들의 복 합으로 취급하는 한에는 어쩔 수 없이 오차가 따르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코페 르니 쿠스 우주구조와 프톨레 마이 오스 우주구조 사이 에 실제계산을 위한 간편함이나 실제 수치면에서의 정확성을 기준으로 해서 어느한쪽을 다른쪽에 비해 취할만한 커다란 차이는 없었다. 코페 르니 쿠스 우주구조 또한 ep icy c l e, eccentr ic 동을 사용해 야만 했 고 얻어낸 수치는 프를레마이오스 우주구조에 의한 수치에 비해 더 정확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행성의 운동에 관해 위에서 본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코 페르니쿠스 우주구조가 더 간단한 설명을 해주었지만 그것은 실제 수치의 정량적 계산을 위한 간단함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이 들 문제 들에 나타난 행 성 의 운동의 주된 특성 들을 e pi c y cle 이 나 그 외의 가정없이 우주구조 자제를 가지고 정성적으로 설명해낸다는 의미에서의 간단함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간단함을 이유로 해서 코페르니쿠스의 변혁을 받아들아기 위해서는 실제 계산이나 수치와 는 무관한 간단함, 조화로움 등을 중요시 하는 독특한 美的 感登 _우리가 혼히 정연한 논리전개나 간단한 수학적 증명에서 느끼 는 종류의 아름다움을 느끼는능력 __ 울 지닐 것이 요구가 되었다 . 그런데 이런 미적 감각을 당시 유럽에 널리 퍼져 있던 新풀라돈주 의 (Neo-Pla t on i sm) 의 분위 기 가 제 공해 주었 던 것 이 다. 신풀라본주의 는 르네 상스 人文主義 (Rena i ssance Human i sm) 의 영 향

울 받아서 당시의 아리스토텔레스 일색의 풍조에 대한 반발에 의해 플라돈 (Pla t en, BC 427- 34 7 경)의 사조를 부활시킨 것으로서 15, 16 세기에 주로 이탈리아를 중십으로 유럽 전역에 크게 떨쳤다 .8) 우 주가 신비한 힘으로 충만되고 조화가 있는 것이라고 믿은 이 사조 의 중요한 특성 한 가지는 숫자와 수학을 중요시하고 그것을 사용 한 조화와 질서를 높이 여겼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플라돈주의자들 은 자연세계에서 간단한 산술적, 혹은 기하학적 규칙성을 발견할 수가 있다고 믿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을 중요시 여겼다. 그렇다면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구조가 프톨레마이오스에 비해 훨씬 이런 대도 와 부합되었을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신플라본주의는 태양 울 우주의 모든 〈생 명 력 (vit al fo rce) 〉의 근원으로서 중요시 하고 숭배 하는 경향까지 지녔고 이 또한 태양 중십의 새로운 우주구조에 아 주 찰 들어맞았다.

8) Renais s ance Neo-Pla t on i sm 에 대한 일반적인 간단한 소개가 P.O . Kris t e l ler, Renais s ance Thoug h t: The Classic , Scholastic _ and Humanis t Str a in s a(Nndew th Ye oArkr,t s (1 N9 6e1 w) cYhaoprk. , 3 ;1 9R6e5n),a ics hs aanpcs . e 4T- h5o 에u g실 h t려 I I있: 다P.ap e 최r s근 o에n H이um들a n책is 들m 로부터 선택해서 엮어 낸 Renais s ance Thoug ht and Its S ources, ed. by M. Mooney (New York: Columbia U. Pr., 1979) 도 참조할 팔요가 있다. 한편 Rena iss ance Neo-Pla t on i sm 의 중십져 인물 0J . Marsil io F i c i no 에 대해서는 여시 Kr i s t eller 의 The Phil o sop hy of Marsil i o Fi ci n o (Columbia U. Pr., 1943) 가있다.

코페르니쿠스 자신이 칙접 이런 신플라본주의의 조류에 개입되었 다는 증거는 없지만 태양에 대한 그리고 수학적인 간단함에 대한 그의 견해 에 신플라톤주의 가 뚜렷 이 나타나 있다. 9) 그리 고 만약 ::::L 가 위와 같은 신플라돈주의적 경향에 것어 있지 않았다면 프톨레마 이 오스 천문학의 여 러 문제 들과 복잡함으로부터 행 성 들의 운동을. 제대로 풀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념해 버리는 대신 그런 복잡 함이나 어려움의 밑바탕에 간단하고 정확한 규칙성이 촌재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우주구조를 얻어낸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힘 든 일인 것이다. 문제가 코페르니쿠스 자신이 변혁을 일으키게 된 이유 10) 가 아니

9) 예문 둘어 De Revoluti on ib u s, Book I, chap. IO 참조 . 10) J.R Rave t z 는 Neo-Pla t on i sm 의 영 향을 무시 하지 는 않으면서 , Co p ern i cus 가

실재로 직면했던 구체적인 천문학적 문제가 어떻게 그로 하여금 지구의 웅칙입 울 가정하도록 랬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즉 그는 Cop er nic u s 당시의 달력 계산상의 큰 문제정이었던 세차운동(p recess i on) 의 불규칙합을 다루는 데 있 어서 관측된 별자리들과 북국간의 거리의 변화까지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항성 천구의 회전이 아닌 지구 자체의 자전이 불가피한 것을 보여주며 계속해서 지 구의 태양 수위로의 회전도 이에 뒤따르는 것을 얘기한다 : 주 2) 에 언급한 Rav- e t z 의 처 술 외 에 그의 “The Orig ins of the Cop er nic an Revoluti on , Scie n t- ific A meric a1 1( 19 66, Octo b er), pp. 88-98 을 참조할 것 . 한견 N. Swerdlow 는 Co p ern i cus 가 그의 변혁을 얻어내게 되었을 시기쯤에 집팔한 것으로 보이는 원 고 Commen t ar i olus” 를 바탕으로 실제로 Co p ern i cus 가 했을 아주 복잡한 계 산과정융 그 자신이 그대로 밟은 아주 끈기있는 연구을 동해서 Co p ern i cus 의 변혁의 동기가 행성, 묵히 화성의 움직임을 실제 천구의 회전으로 나타내 주는 문재를 해결하려는 데 있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 그의 “The Deriv a ti on and Fir st Draft of Cop er nic u s' Planeta r y Theory , Proceedin g s of the Amen·-can Phil o sop ica l Socie ty 117(1973), pp. 423-512 을 참조할 것. 11) Bruno 에 대한 홍마있는 논의로 Frances A. Yate s , Gi or dano Brnno and the Hermeti c Tradit ion (Chic ag o, 1964) 가 있다.

라 일단 그에 의해서 제기된 변혁을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된 동기에 미치게 되면 신풀라돈주의 사조는 더욱더 강한 해답이 된다. 처음에는 일반인들 사이에는 거의 관십을 끌지 못한 채로 천문학자 들 사이 에 주로 계 산상의 편의 나 프톨레 마이 오스의 Alma g es t에 비 해 더 정 확한 데 이 타를 지 닌 때 문에 사용되 어 오던 De Revolu ti on i bus 가 점차로 성경에 십하게 집착하던 改新敎측으로부터 강한 반대에 직면 하게 되면서도 많은 추종자를 얻게 된 데에는 당시의 신풀라돈주의 적 경향이 크게 기여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우주구조를 토대로 해서 국도로 신비적인 우주관을 퍼다가 처형되었던 브루노 (G i ordano Bruno, 1548 — 1600 齊 같은 사람은 :::L 대 표적 인 예 가 되 겠으며 그 후 에 코페 르니 쿠스 체 계 의 수용에 큰 역 할울 한 케 플러 (Jo hannes Ke- pier, 1571 ― 1630) 나 갈릴레 오 (Gal i leo Galile i, 1564-1642) 동도 강력 한 신플라돈주의자였다. 특히 케플러는 나중에 보게 될 것처럼 수학적, 선비적 색채에 있어서나 태양숭배의 경향에 있어서 신풀라톤주의의 태도를 가장 강력히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이 그로 하여금 코패르니 쿠스 우주구조의 핵십을 철저하게 받아들이게 했던 것이다. 5 위에서 취급한 코페르니쿠스의 변혁은 능히 혁명적이었다고 얘기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 자신에 의해서 표현된 상태에 서는 그것은 아주 제한된 변혁이었다. 죽 아리스토텔레스와 프 톨 레 마이오스의 우주관의 전체 골격은 그대로 두고 제부만 바꾼 변혁아 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우주구조의 기본요 소인 天球는 그대로 촌재했고 행성과 지구는 여전히 이 천구들에 고정되어 돌도록 되어 있었다. 더구나 당초 벌자리의 하루 한 바퀴 의 회전을 나타내주기 위해 도입되었던 항성천구가 지구의 자전에

춘분

하지 동 X i 추분 (a) 지구의 운동 지구의 축의 북쪽끝 (b) 천구에 고정된 지구의 운동 (c) 지구의 축의 운동 그립 9 지 구의 축의 회 전 운동

의해 더 이상 소용되지 않은데도 그대로 정지한 채 남겨져 있게 과 었다. 또한 지구가 천구에 고정된 채 태양 주위를 회전하도록 했기 때문에 지구에는 태양 주위의 회전과 자전 외에 또 한 가지의 회전 운동울 가정 해 야만 했다. 즉 그림 9(a) 에 나타나듯이 실제 로 지 구 의 축은 태양 주위를 도는 퀘도면과 항상 일정한 각도를 유지하는 데 만약 지구가 천구에 고정되어서 돈다면 그림 9(b) 와 같은 움직 임을 하게 되고 그런 움직임을 9(a) 와 같도록 해주기 위해서는 지구 의 축이 9(c) 와 같은 회전운동을 해야만 했다. 지구가 천구에 고정 되지 않았다면 이 세번째 회전운동이 필요없었으리라는 것은 더말 할 나위도 없다. 이처 럼 코페르니쿠스가 천구를 고수했다는 것은 아 리스토텔레스에 바탕한 중세 우주관의 강한 득칭인 圓울 중요시하 틀 논 경향을 코페르니쿠스가 그대로 고수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리 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원은 중심에서의 거리가모두 같고, 시작과끝· 이 없으며, 어느 일부분을 데어내도다돈 어느부분에나 겁칠 수 있 는 둥의 이유 때문에 가장 완전한 기하학적 도형이고 원이 돈다는王 것은 가장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등속원운동은 가장 자연스러운 운 동이었는데 이것을 코페르니쿠스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12) 그에 따라­ 행 성 의 운동을 기 술하기 위 해 ep icy c l e, eccentr i c 둥 이 그대 로 사용되 어야만 했던 것이다.

12) De Revoluti on ib u s, Book I , chap s. 1-5 에서 Co p ern i cus 는 우주의 모양이나 천체 의 운동이 원운동이 어 야 하는 이 유로서 이 같은 Ar i s t o t eles 져 주장을 펴 고. 있다. 실제로 여기 실란 Co p ern i cus 의 주장은 원운동의 중요성에 대한 그때까 지의 어떤 주장보다도 가장 강력했다.

천구를 그대로 사용하고 원운동을 고수한 것보다도 더 큰 코페르 니쿠스의 한계성은 그가 자신이 일으킨 변혁이 가지는 천문학 의적 인 의미에 거의 무관십했다는 접에 있다. 위에서 우리논 코페르니쿠 ­ 스의 변혁이 야기한 천문학 의적인 문제접들-~지상계 •천상계의 구벌, 무거운 물체의 낙하와 가벼운 물체의 상승에 대한 설명, 유한 하고 곽 짜인 우주의 관념과 같은 당시의 안정된 우주관과의 마찰 _울 살펴보았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 자신은 이런 것들울 문제 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코페르니쿠스에게는 천문학­ 내의 몇 가지 문제들의 간단한 해결에 가려서 우주관전체에 걸치는

이와 같이 더 크고 십 각한 문제들은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자신 의 변혁이 지니는 이같은천문학의적인 혁명적 의미에는관십이 없 는 채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프톨레마이오스의 전반적 우주관내 에 안주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코페르니쿠스의 변혁은 그 자신에 계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一프 톨 레마이오스 우주를 지탱하기 위 한 사소한 수정에 지나지 않았고 Kuhn 이 코페르니쿠스의 De Revolu- .tion ib u s 가 〈혁 명 적 (revolu ti onar y)〉이 었 다기 보다는 〈혁 명 을 시 작하는 (revoluti on -makin g )> 것 이 었 다고 얘 기 한 것 은 이 같은 한계 성 을 지 적 한 것이다 .l3) 이같은 코페르니쿠스의 한계성은 케플러와 갈릴레오가 깨뜨려 주 었다. 케플러는 등속원운동에의 固守에서 벗어나서 행성에 부동속 타원운동을 적용시켰으며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변혁이 제기 하는 역학적 문제접을 파고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13) 주 1) 에 언급한 Kuhn 의 책 , p. 134.

6 앞에서도 본대로 케플러는 열렬한 신풀라본주의자였고 태양중십 의 코페르니쿠스 우주구조를 열렬히 옹호했다. 그러나 그가 받아들 였 던 것은 코페 르니 쿠스가 De Revolu ti on i bus 에 서 채 덱 하고 있는 세 부적인 수학적 취급에 대해서가 아니라 태양중십의 핵심적 구조에 대해서였고, 오히려 태양과 지구의 위치를 바꾸는 첫단계의 혁신을 얻어낸 후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에 너무 가까이 머물렀다고 코페 르니 쿠스를 비 판하기 까지 했 다. 다시 말해 서 그는 De Revoluti - .(J n i bus 의 한계성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며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그 자신이 이런 한계성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케플러가 이 일에 성공하기 위해 서는 코페르니쿠스 우주구조에 대한 신플라돈주의적 확신 의에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필요했고, 그것 이 Pra g ue 왕실 천문가로서 그 의 전임자였던 티코 브라헤 (T y cho Brahe, 1546-1601) 의 정확한 관측 데이타였다 .14) 티코 브라해는 그때까지는 볼 수 없었던 정확한 데

14) Ke p ler 의 천문학에 관한 논의는 주 1) 에 언급한 A. Ko yre 의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재 0 부에 실려 있고그외에 W . Pauli , TheInfl tlen ceof A rchety pa l Ideas on the Sc ien t ific T heorie s of Kep l er (New York, 1955) 와 G. Ho!- ton , Jo hannes Kepl e r's Univ e rse: Its Phy s ic s and Meta p h y si c s , Americ an ]011rnal of Phy s ic s 24(1956), pp. 340-351 및 J.L.E . Dreye r , Hi st o r y of the Planeta r y Sy s te m s fro m Thales to Kep l er(Cambrid g e U. Pr., 1906), chap. 15 에도 Ke p ler 의 천문학적 사고에 대한 유용한 논의가 담겨 있다. Kep le r 의 전기 로논 M. Caspa r , Joh annes Kep l er(St ut t ga rt, 1948), 영 역 판 (New York, 1959) 가 아직 도 표준저 이 며 Ke p ler 의 숭배 자인 A. Koes tl er 의 수 l) 에 언급한 책의 pa rt 4 는 The Wa t ershed 라는 제목으로 별도로 출판 (Garden Cit y, N.Y. , 1959) 되 기 도 한 Ke p ler 의 전기 이 다. 위의 Koes tl er 의 책은 그 일부로서 Ty ch o Brahe 의 전기도 답고 있다. 그러 나 T y cho 에 대한 아직도 가장 권위있는 논의는 J.L .E. Dre yer 의 것으로서 그 의 앞에서 언급한 객의 chap. 14 에 T y cho 에 관한 간단한 논의가 있으며 Ty ch (J Brahe (Edin b urgh , 1890) 은 T y cho 만을 다루고 있다.

이타들을 얻어내었는데 그러는 가운데서 하늘에서 새로운 털이 생 겨나는 것과 혜성이 탈윗세계의 현상이라는 것을 관측랬다. 그리고 이들 사실들은 그간의 달윗세계-달밀세계의 구별을 깨뜨리게 랬 다. 그는 또한 행성들이 지구를 중십으로 하지 않고 태양울 중십으 로 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것도 밝혀내었다. 그러나 티코 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구조물 받아들이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시차(p arallax) 를 관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대 신에 그는 혼히 〈티 코의 우주구조〉라고 불리 는 그림 10 과 같은 우 주구조를 제 창했 다. 티 코의 우주구조에 서 는 지 구 (E) 는 역 시 우주의 중십에 정지해 있고 그 주위를 달과 태양 (S) 이 돈다. 그러나 다른 행성들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으로 되어 있다 . 이 렇게 지구를 그대로 우주의 중십에 위치시킴으로써 그는 코페르니 쿠스의 변혁이 야기한 반론들을 제거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 십의 우주구조의 장접을 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순전히 천문학적 관측결과만을 놓고서 티코의 구조는 코페르니쿠스의 구조와 〈수학 적 으로 동등 (ma t hema ti call y e qu i valen t)〉했 던 것 이 다. 15) 또한 티 코의 구조는 프볼레마이오스구조의 기본요소인 천구의 존재에도 일격을 가랬다. 그림에서 보듯이 티코의 구조에서는 화성의 천구와 태양의 천구가 서로 교차하게 되어 있고 천구가 단순히 계산을 위한 수학 적 도구가 아니타 물리적 실재라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

15) 수 1) 에 언급한 Kuhn 의 책 , p. 203,

떨 1 회의회전

그림 10 T y cho 의 우주구조

다. 결국 티코는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와는 어긋 나는 여러 사실을 얻어냈으면서도 코페르니쿠스의 구조를 받아들아 지 못했던 과도기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케플러는 달랐다. 처음서부터 태양중십의 코페르니쿠스 우주를 신봉했던 그는티코와같은 미봉책으로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오히려 티코의 구조가 제기한 아리스토텔레스-프돌레마이오 스의 우주의 문제접에 의해 더욱 무장되어서, 이제는 티코가 남긴 아주 정확한 데이타를 사용해서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구조를 완성시 키려고 했다 .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거의 십 년 동안 케플러는 및 개의 원운동의 복합으로 행성들의 운동에 대한 티코의 데이타들을 얻어내려고 노력했지만 계속해서 실패했다. 화성이 득 히 큰 문제를 제기해서 16) 그의 끈질간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8 분 (1 分 =60 분의 1 度) 이상의 오차를 내었다. 이 정도의 오차는 코 16) 화성의 타원궤도가 모돈 행성듣 중 원으로부터 벗어난 정도가 가장 크다.

페르니쿠스에 이르기까지는 어느 천문학자나 받아들였겠지만 4 분 이내의 오차를 지닌 티코의 데이타를 사용한 케플러로서는 이를 받 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원운동들의 복합으로서 행성 의 퀘도를 나타내려는 노력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한 포기가 있고서 케플러는 행성에 대한 타원퀘도를 도입하 게 되고 이내 행성의 운동에 대한 속도의 법칙도 얻어졌다 . 이것이 1()09 년에 발표된 케 플러 의 제 1, 제 2 법 칙 들이 고 그림 11 에 나타나

P

P (a) 제 1 법칙 (b) 제 2 법칙 그립 11 행 성의 타원궤도와 Ke p ler 의 두 법칙

있다 .17) 제 1 법칙은 그림 ll(a) 에 나타난 것처럼 행성 (P) 이 태양을 두 개의 촛점 ( F1 과 F2) 중의 하나로 가진 타원궤도를 돈다는 것이고 제 2 법칙은 이때 행성의 속도는 행성과 태양을 연결한 선이 같은 시 간 동안에 휩쓰는 면적 (그립 ll(b) 에서의 빗금천 면적)이 항상 같다는­ 것 이 다. 이 두 법 칙 에 의 해 케 플러 에 게 는 ep icy cl e, eccentr ic, eq ua nt 같은 것들이 팔요없어지게 되고 단일한 기하학적 도형과 간단한 속 도 법칙에 의해 행성의 운동을 거의 완전히 기술할 수 있게 된 것 이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구조는 순전히 천문학적인 면에 서는 케플러에 의해서 이처럼 일단락이 된 샘이다 . 18)

17) Ke p ler 가 그의 두 법칙 을 발견한과정에 대한쉽고흥미있는 논의가 C . W ils on, How Di d Kepl e r Di sc ov~r Hi s Fir s t Two Laws?, Sc ie11 t 1j ic A ,ne ric a n (—1972K, epMl e arr c자h)신 , 은 pp . 이9에2- 1훨06씬 에 더나 와깊 은있다 홍. 미를 나타냈지만, 우리에게는 이것이 18) Ke p ler 의 제 3 법칙은 행성들의 주기와 태양으로부터의 평군거리와의 관계에 대 한 법칙으로서-행성의 주기의 제곱이 평균거리의 제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 Ke p ler 의 신플라돈주의 적 數的 神秘主 義 를 증거 해 주는 의 에는 더 큰 홍미 를 주 지 못한다. 그는 이 제 3 법칙 의에도 비숫한 성격의 여러 법칙들에 관십올 가지

고 있어서, 예를들어 행성들의 숫자와크기, 태양으로부터의 거리 등을 간단한 기하학적 도형과 수적 관계를 가지고 얻어내려고도 했다 .

그러나 천문학의적인 면에서는 케플 러 의 법칙들 은 오히려 문제믈 제기했다. 케플러에 이르기까지는 행성들 은 복 합된 형 태로서 였 을망 정 등속원운동들만으로 기술되었고 그 런 한에서는 운동의 원안에 대한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다. 위에서 본 대로 둥 속 원운동이 자연스 러운 운등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견 해 는 고대에서부터 지속되어 서 받아들여졌고 그러한 자연스러운 운동에 대한 원인은 묻지 않았 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성이 부등속 타원운동을 하게 되면 문제는 달랐다. 왜 행성이 그러한 운동을 하는가, 무엇이 그러한 운동의 원인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케플러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고 해서, 한때 그는 당시 발표된 길버트 (W i l­ liam Gi lb ert, 1540-1603) 의 『자석 에 대 해 서 』 (D e Mag n ete , 1600) 에 영 향받아 태양에서 방출되는 磁 氣 的 힘에 의해 행성이 움직인다는 대 답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찰 아는 대로 이 문제의 해결은 결국 뉴튼(I saac Newt o n, 1642-1727) 의 萬 有引力의 개 념과 새로운 역 학체계의 출현을 기다려야만 했다. 8 케플러의 법칙들과 그에 의한 정확한 계산들에 의해 대다수의 천 문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구조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19) 그러 나 일반사람들에게는 천문학자들과는 다른 종류의 설득이 팔요했고 7갈 릴레오가 이를 제공했다. 갈릴레오는 1609 년에 새로 고안한 망원경을 통해서 하늘을 관측 하고 코페르니쿠스 우주구조를 위한 증거로 사용될 만한 여러 사실 들을 발표했다. 20) 우선 그논 하늘에 무수히 많은 벌들이 있음을 관

19) Ke p ler 의 법칙둘을 17 세기 전반의 유럽 천문학계가 받아들이는 과정에 관한 논 의 로 J.L . Russell, Kep le r's Laws of Moti on : 1609-1666, Brit ish fou r- nal for the Hi st o ry of Scie n ce 2(1964), pp. 1-24 가 있다. 20) Ga lil eo 의 천문학적 업 져 에 관한 논의 는 많지 않다. 이 것 은 Ga lil eo 의 공헌 이 천문학의 전문적 인 문제 에서 가 아니 라 Cop e rnic u s 우주구조가 제 기 하는 일반져 인 문제들의 해결 및 Aris t o t e l es-Pto l emaio s 우주에 대한 반쳐아있다는 점을 생 각하면 이해해 줄 수 있다. 또한 Ga lil eo 의 업적 중 머 학문적이고 근본적인 업

적적 이인 연역구학인에 서E였tt다t de 는s G사a실lil도 e e n이ne와s, 관3 계vo가ls . (있P다ar .i s 따 19라3서5- 39A). 의 Ko거 y 의처 는전 그부의문 선역 구학 에만 할애하고 있고 정작 천문학의 혁명에 관한 주 1) 에 언급한 그의 저서에 서는 Gal i leo 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최근에 있어서 Gal i leo 연구의 가장 큰 역작을 낸 M. Clavel i n 도 주 7) 에 언급한 그의 책에서 Ga li leo 의 천문 학을 그의 역학에 있어서의 회기적 공헌의 한 측면으로 취급하고 있다. 또한 Gali leo 탄생 400 주년 기 념 s y m p os i um 의 논문집 에 나타난 23 편의 논문 중 단 1 편이 천문학에 관해서였다는 것도 이러한 사실올 보여준다 : E. McMull in, ed., Galile o: Man of Scie n ce(New York 1967). 이 한편의 논문은 W. Har- tne r, Galil eo 's Contr i b u ti on to Astr o nomy , pp. 178-194 임 . 이런 의마에서 Galile o 천문학 연구의 가장 큰 기여는 주로 번역에 치중했자 만 S. Drake 가 랬다고 할 수 있다. S. Drake, tr. , Galile o: Di al og ue Gonce- rniu g the Two Chie f World Sy s te ms-Pto l emaic & Cop e rnic a n(U. Cali - for nia Pr. , 1970) : Di sc overie s and Op inio n s of Galil e o(Garden Cit y, N. Y . , 1957), 이 중 후자에는 Gal i leo 의 The St a rry Messe11g er (1610), Lett er to thtr Grand Dt tch ess Chr i s ti 11a(161s) 의 전부와 Lett er s on S1111sp o ts ( 1613), The Assa y er(1623) 의 일부가 번역되어 있다. 그 외에도 S. Drake and C.D. O'M- alley, The Contr o versy on the Comets ( Phil ad elph ia , 1960) 를 참조할 것 . 최 근에 와서 S. Drake 는 그의 그간의 연구를 토대 로 Gal i leo 의 연구과정 을 깊고 자세 하게 추적 한 전기 Galil e o at Work: Hi s Scie n t ific B io g r a ph y (U . Chi- cag o Pr., 1978) 을 낸 바 있다. 한편 L. Ge y mona t와 W .R. Shea 는 그들의 Gali le o 연구에서 그의 천문학을 상당히 충실하게 취급하고 있고 더구나 Shea 는 D i alo gi ,e 를 자세하게 분석해 주고 있 다 : L. Geym onat, Galile o Gali lei: A Bi og ra ph y and Inq u ir y in - to Hi s Phil o sop h y of Scie n ce, tr. by S. Drake(New York, 1965) 와 W .R Shea, Galil e o's Inte l lectu a l Revol11t io11 : Mi dd le Perio d 1610-1632(New York, 1972) 을 참조할 것 . 그러 나 이 들의 연구 역 시 실제 로는 Ga li leo 의 과학 의 방법 에 관한 생 각이 나 교회와의 충돌을 빚 으면서 그가 Co p ern i cus 체 계 를 옹 호한 배겅에 주로 관십을 둔 것이었다.

축했고, 특히 벌들의 크기가 육안으로 보았을 때 벌빛이 퍼져서 크 게 보이는 것에 비해서 실제로는 아주 작은 것을 보았다. 이것은 그만큼 벌들의 거티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나타내고 앞에서 본 것처럼 시차가 관측 안 될 정도로 벌들의 거리가 먼, 거의 무한한 우주의 관념에 관한 뒷받침이 되었나 또 망원경으로 본 달의 표면 이 아주 울퉁불퉁하고 거의 지구의 표면과 같은 것을 보았는데 이 것은 완전한 천상계와 불완전한 지상계의 엄격한 구벌에 타격을 가 했다. 더구나 천체 중에서도 가장 고귀하다고 생각되어 온 태양마 저도 완전하지 못하고 黑뻗 h 이 있을 분만 아니라 그것이 움직이고 그 움직임이 불규칙하다는 관측은 천상계가 완전하고 불변이라는 아티스토텔레스적 관념을 깨뜨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편 목성에

도 달이 있다는 갈릴레오의 관측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구조에 있 어서 달이 지니는 문제―—죽 행성인 지구가 그 자체의 衛星 울 지 니는 문제―~를 제거해 주었다. 목성에도 달이 있다면 행성이 그 자체의 달을 지니는 것은 코페르니쿠스 우주구조만의 문제가 아니 라 프톨레마이오스 구조에도 나타날 문제이기 때문이다. 갈릴레오의 망원경을 통한 관측결과들 중 코페르니쿠스 우주구조 에 대해 지금까지 본 것들에 비해 보다 더 직접적안 증거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는데 금성이 달처럼 차고 기우는 것을 관측한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그림 12 에 나타나 있다. 그립 12 ( a) 에서 보. 듯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구조에 의하면 지구 (E) 에서는 항상 금 성의 태양 반대쪽 면만 보기 때문에 초생달 모양만 보여야 할 것인 데 반해 (b) 와 같은 코페르니쿠스 구조에서는초생탈 모양, 반달모 양, 보름달 모양이 모두 가능하고, 특히 보름달 모양의 경우는 지구 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크기가 작고 반대의 경우는 커야 한다. 망

E() 立

( a) Ptole mai os 휴 l b ) Cop ern ic u s 구조 • • J I ’ (c) ~~경에 의한관측결과 그립 12 금성의 차고 기울음

원경의 관측견과인 (c) 는 바로 코페르니쿠스 구조에서 예측된 결과 를 보여주었고 이것이 코페르니쿠스 구조에 대한 강력한 증거로서 생각되었다. 이같은 망원경을 통한 증거둘은_一금성의 차고 기울음의 관측도 ―물론 코페르니쿠스의 구조에 대한 완전한 증명은 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티코의 구조로도 이것을 설명할 수 있었겠기 때문이다. 또한 이같은 중거둘은 이미 케플러의 업적에 의해 천문학자들이 코 패르니쿠스의 우주구조를 받아들인 후에 나타났다. 그리고 이 증거 둘의 기여는 천문학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쉽고 비 수학적인 차원에서 주어졌기 때문에 그들이 코패르니쿠스 체계를 받아들이기 쉽게 하는 데 있었다. 갈릴레오는 그 후로도 계속해서 r.lJ페르니쿠스의 우주구조를 여러 측면에서 옹호했고 나중에는 이 때문에 교회당국과의 충돌도 빚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웅 호는 대부분의 경우 천문학 의적인 측면_一일반적 우주관이나 역 학의 측면―_에서 행해졌다. 천문학의 혁명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이것으로 그찬다. 물론 천 문학의 혁명의 완성은 뉴튼에 의해서야 얻어지게 되지만 여기서부 터 뉴튼까지의 일들은 천문학이라기보다는 역학에 속하고 따라서 역 학의 혁명을 다루면서 취급될 것이다. 한편 코페르니쿠스 우주구조 를 둘러싼 갈릴레오와 교회와의 충돌도 천문학의 혁명 중의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이에 대한 논의논 과학혁명 중의 교회와 종교의 관 계를 다룬 제 9 장으로 미문다.

제 3 장 역학의 혁명 : 1 중세 여학과 갈릴레오 力學의 혁명은 과학혁명기를 통해서 고대 및 중세에 받아들여져 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이 뉴튼에 의해 완성된 古典力學 (class i cal mechan i cs) 으로 대체된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역학의 혁명은 천문 학의 혁명에서와 같이 우주의 중십이던 지구가 일개 행성으로 전락 하는 것 같은 눈에 머는 획기적인 전환이나 갈릴레오와 교회 사이 의 충돌과 같은 홍미있는 사건이 없었기 때문에 科學史 자체에 홍 · 미를 갖지 않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천문학의 혁명에 비해 그리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 과학적인 내용이나 그것이 다른· 과학의 내용에 미찬 영향면에서 볼 때는 역학의 혁명은 천문학의 혁명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십오한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천 문학의 혁명을 역학의 혁명의 일부였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역학 의 혁명이 천문학을 역학의 일부로 만들어 버렀다고까지 할 수가 있겠다 .1) 1) 역학의 혁명 전반에 관한 가장 완전하고 훌륭한 논의는 RS. Westfa ll , Force in Newt on 's Phys i c s : The Sc ien ce of Dy na mi cs in the Sevente e nth Cent1 1 ry, (New York, 1971) 이 다. 혼히 인용되 는 R. Dug as , La Mecaniq u e du XVII' sie c / e( Neuchate l, 1954), tr. by F. Jac q uo t , Mechanic s in the Sevente e nth Centt try ( N euchate l , 1958) 도 유용한 자료들운 많이 담고 있 다. 그 의 에 E. Mach 의 고전 The Sc ien ce of Mechanic s : A Criti cal and Hi st o r ic a l' Acco11nt of Its D evelop me nt, tr. by T.J . McCormack, 6th edit ion (La Salle, Illin o is , 1960) 도 이 시기의 역사를 많이 다루고 있으며 E.J. D ij ks te r huis , The Mechaniz a ti on of the World Pic t11 re, tr. by C Dik s hoorn(Oxfo r d U. Pr., 1961) 은 고대에서 시작해서 역학의 혁명으로 끌윤 내고 있다. I.B. Cohen, The

Bi rth of a New Phys i c s (Garden Cit y, N. Y, 1960 ) 은 아주 쉽고 간건한 논의 를 담고 있다. Na한tu편 r a l역 P학h의il o s혁op명 h의y o기f 원G과ali l배e o경: 에E ss관ay한 o n좋 은the 논O의rig로 in는s aMnd. FColarmvealit ni o, n Tohfe Classic a l Mechanic s (MIT Pr. 197 4 ) 와 S. Drake & I.E . Drabkin , eds., Mechanic s in Six tee nth - Centu ry Ita l y: Selecti on s fro m Tarta g lia, Bene- dett i, Guid o Ubaldo & Gali/e o(U. W isc onsin Pr. 1969) 가 있 다.

한편 천문학의 혁 명 이 코페 르니 쿠스의 De R ev olu ti on i bus 의 발표라 는 명백한 시접을 계기로 시작이 되었음에 반해 역학에서는 그런 분명한 전환접을 찾을 수 없이 새로운 개념과 법칙들이 과거의 그 것들과 공존해 가며 서서히 그것들을 대체시켜 갔다. 그러면 먼저 이렇게 역학상의 혁명에 의해 대체된 고대 이래 중세를 통해서의 역학__아리스토텔레스 역학――울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1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은 그의 Phy s i ca 를 비못한 몇몇 처술들에 탄 편적으로 나타나 있는 〈운동〉에 관한 언급과 생각들을 바탕으로 고 대와 중세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자들이 발전시킨 체계이다 .2) 먼처 아리 스토텔 레 스는 운동을 〈자 연스러 운 운동 (na t ural mo ti on ) 〉 과 그렇 지 않은 〈비 자연적 운동 (v i olen t mo ti on) 〉 으로 나누어 생 각했 다. 우선 그는 앞 장에서 천문학의 혁명에 대해서 다물 때 봤듯이 무거 운 물체가 우주의 중십인 지구의 중십을 향해 내려가고 가벼운 물 체가 위로 울라가는 운동윤 자연스러운 운동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두 가지 직선운동 외에 천체의 원운동을 포함 지켜서 세 가지 자연스러운 운동을 얘기했다. 이들 운동들은 모두 물체 자체의 본연의 성질 때문에 생기는 운동들인 것이다. 반면 이

:2) APhriys s ti oc t ae ll e sW 자o신rld의: A운 동Co에m p 관ar한 is o 견n 해w 는it hF . HSio sl r nPserned, eAcersisso t or st l( eC'so rSnye sllt e m U .o f Pthre. 1960), chap s. 9-10 과 주 1) 에 언급한 Clave li n 의 책, chap. 1 에 나와 있다. 중 세에 있어서의 Ar i s t o t eles 역학의 전개는 J.E . Murdoch and E.D. Sy ll a The Scie n ce of Moti on , in D. C. Lin d berg, ed., Sc ien ce in the Mi dd le Ag e s (U. Chic a g o Pr. 1978), pp. 206-64 및 . E. Grant, Phys i c a l Scie n ce in the Mi dd le Ag e s(New York, 1971), chap . 4 에 간단히 나와 있 다 . 중제 역 학에 M대 한i dd 가le 장A g완 e 전s(U한. 논W의i s 는c o nMsin. CPlra.g, e1 t9t ,5 9 T) h이e 다.S cie n ce of Mechanic s in the

렇게 자연스러운 운동이 아닌 모든 운동__예를 들어 수레를 밀어 서 움직이거나 돌을 던지는 것과 같은 운동-은 비자연적 운동이 었는데 비자연적 운동은 반드시 의부로부터 〈運動原 因 (mover) 〉 의 작 용이 있어야 했다. 의부로부터 운동원인의 작용이 범추면 그 물체 의 운동은 중지되어야 했던 것이다. 또한 이 운동원인은 반드시 운 동하는 물체에 접촉해서 작용해야만 했다. 운동원인에 대한 이같은 생각은 곧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물체 몰 던졌을 때 그것이 손을 떠난 후에도 운동을 계속하는 현상에 대 한 문제가 그것이었다. 물론 처음 던질 때는 사람의 손이 물체에 접촉해서 운동원인으로서 힘을 작용하지만, 일단 손을 떠난 후에도 계속하는 운동에 대한 운동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제시된 설명은 웅칙이는 물체가 통과해 가는 媒體가 운동원 인으로 작용한다는―一물체가 처음 움직일 때 매체를 움직여서 그 움직임 때문에 매체가 다시 물체에 운동원인으로 작용한다는_~모 호한 설명이었다 .3 ) 이 설명은 우터에게는 생소하고 모호할 뿐만 아 니라 구차하게까지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그런 구차해 보이 논 설명을 해야만 할 정도로 아리스토텔레스역학에서는 운동을 위 해서는 운동하는 물체와 접촉해서 작용하는 의부의 〈운동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3) 주로 Ar i s t o t eles 의 Phys i c a , Book \ffl, 10 에 나와 있는 이 설명 에 관한 간단한 논의가 주 1) 에 언급된 Clave li n 의 책의 pp. 54-5 와 주 2) 에 언급된 Gran t의 책 의 pp. 41-2 에 나와 있 다.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의 이같은 견해는 결국은 그것이 운동의 본 질을 무엇으로 보느냐 하는 접올 드러내 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울 한 상태에서 다론 상태로의 변화과정으로 보았다. 의부의 운동원인의 작용이 이같은 상태의 변화를, 죽 운동을 일으키는 것 이고 운동원인이 없을 때는 운동이 있을 수 없고 정지해야 하는 것 이다. 이것은 뉴튼 역학의 산물인 우리의 운동에 관한 견해와는 근 본적으로 다르다. 우리에게는 운동 자체가 상태이다• 즉 우리에게 는 물체의 정지상태와 운동상태가 다같이 물체의 상태인 것이며 이 접에서 운동을 하나의 정지상태에서 다론 정지상태로의 변환과정으.

로 본 아리스토텔레스와는 크게 대조적이 된다. 또 이렇게 운동 자 체를 물체의 상태로 보게 된 결과, 의부에서 가해지는 작용은 물체 의 운동상태를 변화시키게 되고, 결국은 물체의 운동속도를 변화시 키게 되며, 의부의 작용이 없으면 물체는 같은 운동상대를 유지해 서 같은 속도로 운동을 계속하는 것이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에 관한 견해를 다루면서 주목해야 ’ 할 일은 아리 스토텔레 스에 게 〈운동 〉 이 란 비 단 〈장소의 이 동(l ocal mo ti on) 〉 만이 아니었으며 다른 여러 가지 성질의 변화를 다 〈운동 〉 이타고 불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찬 것이 덥게 되거나 어린이가 자 라서 어른이 되는 것 등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모두 〈운동 〉 으로 불리었다. 결국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운동의 定 義 에도 나 타나서 그는 운동이 란 〈潛在性의 實際 1 t 〉 를 나타낸다고 정 의 했 던 것 이다 .4) 이 정의가 장소의 이동보다는 일반적인 성질의 변화에 더 적합하다는 것은 쉽게 알 수가 있다.

4) 이 정 의 는 Ar i s t o t eles 의 Plt ysi c a , Book ID , 2 에 나와 있고 이 구철에 대 한 아주 정 밀한 논의 가 L.A. Kosman Aris t o t l e's Defi ni t ion of Moti on , Phronesis 14 (1969), pp. 40-62 에 나와 있다. Kosman 은 이 구철을 Moti on is the actu a li - zati on of what po te n ti all y is, as such 타고 번역 하고 있다.

2 위 절에서 본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의 성격은 중세의 역학에 거의 그대로 계승되었다. 특히 〈운동〉이타는 것이 장소의 이동을 나타내 는 물리적 운동만이 아닌 여러 성질의 변화에 그대로 적용되는 접온 더욱 십해져서, 실제로 중세를 통해 운동에 대해 다루면서 온도의 변화, 색깔의 변화 같은 성질의 변화와 함께 慈 善 心의 증가, 심지 어는 神性의 증가 같은 변화들이 자주 예로 들어졌던 것이다. 중세 의 운동이론”은 이처럼 그 대상이 물리적이 아닌 것을 많이 포함했 울 분만 아니라 그 관십도 물리적이기보다는 철학적인 경우가 많았

5) 중세에 있어 서 는 오늘날 〈역 학〉을 나타내 는 말인 mechan i cs” 는 기 계 의 구조, 작용 등에 관한 지 식 을 나타나는 데 쓰였고 역 학은 〈운동이 론 (sc i ence of moti on )> 이 라고 불리 었다. mechan i cs” 라는 단어 의 이 같은 의 미 에서 의 사용은 17 세 기 까 지 그대로 계속되었었다 .

다 .6 ) 예를 들어 장소의 이동인 물리적 운동을 어떤 물체가 始熟을 떠 나서 終路 에 도달했다는 의미에서 〈종점을 얻은 것 〉 이라고 정의한 후에 중세 역학자들이 물은 질문들은 〈그러면 운동과 장소(p lace) 자체는 어떻게 구닌김하는가?〉, 〈장소가 움직일 수 있는가?〉, 〈운 동이 란 실제 로 촌재 하는가, 단순한 이 름인가 ? >, 〈운동은 시 간을 소모하는 데 시간을 소모한다는 것이 운동의 본질적 성질인가, 아 니던 처항 때문에 시간을 소모하는가?〉, 〈운동을 위해서는 저항이 꼭 팔요한가?〉와 같은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질문들이었던 것이 다. 14 세기에 접어들어서야 당시 신학과 철학의 새로운 조류였던 唯名論 (nom i na li sm) 의 영향을 받은 경험주의에 의해서 운동의 본질· 원인들에 관한 철학적 논의보다는 운동의 記述에 관십을 가전 경향 이 나타났고, 이런 경향을 지닌 14 세기 역학자들에 의해서야 속 도와 속도의 변화 둥이 다루어지고 동속운동, 부등속운동 등이 기 하학적으로 취급되기에 이르렀다 .7)

6) 중세 역 학이 론과 철학과의 관계 에 관한 주의 깊은 논의 로는 A. Maie r , Zwi sc hen Phil o sop hi e tm d Mechanik ( Rome, 1958) 가 있으며 이 브다 필,,.J. 간단한 논의 인 J. E. Murdoch, Phil o sop h y and the Ente r pr i s e of Scie n ce in the Late r Mi dd le Ag e s in Y. Elkana, ed., The lnte r act1 0 11 betw een Sc ien ce and Plilo sop lzy (A t la nti c Hi gh lands, NJ , 1974), pp. 51-7~ 그에 대한 좋은 요약 이다. 7) 운동의 기술에 관십을 가졌던 이들 14 세기 역학자둘에 대해서는 수 1) 에 언급된 Clave li n 의 책의 chap. 2 에서 다루고 있으며 M. Clag et t , Ni co le Oresme and the Medie v al Geometr y of Qu ali ties and Moti on s(U. W isc onsin Pr., 1968) 온 그 대표져 인물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

이같은 중세의 역학에서 끝내 완전히 해결되지는 못한 두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그 첫번째는 운동의 원인인 힘 및 저항과 그 결과인 속도 사이의 관계를 구하는 일이었는데, 이 문제 역시 그 기원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했다. Ph y s i ca 와 De Caelo 의 여 기저기에는 웅칙이는 물체의 무게, 속도, 힘, 처항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 언급들이 종종 나타난다. 예를 들어 무거 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같은 거리를 웅직이는 데 더 짧은 시간 이 걸리고 이때 무게의 비와 시간의 逆比가 같다거나, 공기가 물에 비해 희박한 만큼 공기속에서 물체는 물속에서에 비해 더 빨리 떨

어진다는 얘기가 있다 •8) 아리스토텔레스의 말 하나하나에 굉장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그것들을 글자 그대로 해석했던 중세의 해석자 들은 이 로부터 곧 속도 (v) 는 힘 (F : 작용)에 비 례 하고 저 항 (R) 에 반 비례한다는 식

8) Ar i s t o t eles 의 이 같은 언급들의 진정 한 의 미 에 대 해 다룬 논의 로 H. Carte r on, Does Ar ist o le Have a Mechanic s ? in J.B arnes, M. Schofi el d and R. Sorabji, eds., Arti cle s on Aris t o t l e J. Sc ien ce(London, 1975), pp. 161-74 가 있다.

voe -RF - (1)

을 얻어내었는데 이것이 문제를 자아낸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식을 사용하면 힘 이 처 굽J-보다 작은 경 우 (F

voc(F-R) (2)

과 같은 것을 나타낸다는 해석이었다. 그러나 석 (2) 는 더욱더 큰 문제를 일으켜 이제는 F

v ex: lo g(운) (3)

이 석에 의하면 처음에 F>R 이었기만 하면 항상 그 조건이 그대 로 유지가 되기 때문에 문제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식 (3) 도 실제와 맞는 식이 아님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으며 중세의 야 리스토텔레스 해석자들도 조금만 실험을 했거나 관찰을 했더라면

이것이 들렀음을 알 았 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중요 랬 던 것은· 실제 물체의 운동의 속도와 힘, 처굽J- 사이의 관계를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이 지니는 문제접을 해결하는 것이었 고 일단 석 (3 ) 과 같은 식이 얻어져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보이 자 더 이상 그것을 과고들지 않았다. 결국 이것은 중세에 있어서 역학이 논의된 맥락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겠다. 두번째 문제는 위 절에서도 본 바 있는 던져진 물체의 〈 운동원인 (mover) 〉 의 문제이다. 매체에서 운동원인을 찾은 아리스토 텔 레스의 설명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이것은 고대 말에서부터 이미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9) 그리고 공기와 같은 가벼운 매 체가 어떻게 무거운 물체의 운동원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서부터 팽이가 돌 때와 같이 매체에 변형을 가하지 않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 설명을 적용시키는가 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자 여러 문제들이 결국은 〈 바물질적 운동원인(i ncor p oreal moti ve forc e)> 울 가정하도록 만들었다. 이 개념이 이슬람에서는 ma i l 이라고 불 리다가 중세역학에서 i m p e t us 라고 불리는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 것 이다.

9) 예를 둘어 Joh n Ph i lo p onus(5 세기 말 -6 세기)의 반대에 대해서는 P. Duhem, Le sys t e m e d11 monde, vol. l(Paris ,1 913), p. 380 ff참조.

Im p e t us 의 개 념 은 뷔 리 당(J ean Burid a n, 1300-1358 년 경 )에 의 해 서 완성되고 14 세기 파리대학을 중십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는데 운동하 논 물체가 그 처음의 운동원인 때문에 얻게 되는 양으로서 이것이 물체에 남아 운동원인으로 계속 작용해서 그 운동을 계속시켜 주 는 것으로서 그 크기는 물체의 속도와 질량에 의해 정해진다 .10) 이 개념을 낙하하는 물체에 적용시키면 낙하하는 동안 무게가 계속 작 용하므로 i m p e t us 가 계 속 증가하게 되 고 이 것 이 낙하하는 물체 의 속 ­ 도가 증가하는 원안이라는 설명이 얻어진다. 또한 보통 물체의

10) Im p e t us 이 론에 관한 훌 륭한 논의 로 A. Maie r , Zwei Grundp ro bleme der scho-lasti scl zen Nat1 1 rp hi l o sop hie, second edn.(Rome, 1951), par t ll 가 있고 그 의 에 A. Funkenste i n , Some Remarks on the Concep t of Imp e tu s and th e Dete r mi na ti on of Sim p le Moti on , Vi at o r 2 (1971), pp. 329-48; S. Drake Imp e tu s Theory Reap pra is e d , Jou rnal of the Hi st o ry of Ideas 36(1975) 慶

i m p e t us 는 불완전해서 접접 줄어들어 결국은 운동이 정지해 버리고 마는 데 반해 천체는 완전한 i m p e t us 를 지녀서 이것이 영원히 보존 되고 운동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중세의 역학은 아리스토텔 레스의 〈운동원인〉의 개념을 고수하기 위해서 관념적인 〈 운동원인 〉 인 i m p e t us 의 개 념 울 도입 했 던 것 이 다. Im p e t us 라는 개념은 여러 면에서 근대역학의 개념들과 비슷하고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의 체계에서 벗어나려는 면을 보여준다. Imp e tu s 의 크기는 근대역학에서의 운동량 (momen t um) 의 크기와 같이 정의되 어 있으며 운동을 지 속시 킨다는 면에 서 는 i m p e t us 는 관성 (i ner ti a) 의 개 념 을 떠 오르게 하기 도 한다. 또한 i m p e t us 라는 양으로서 동시 에 지상의 물체와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게 된 점에서는 앞 장에서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상계一천상계의 구별을 깨뜨리는 역할을 하기 도 했다. 그러나 이런 면에도 불구하고 i m p e t us 는 철저하게 아리스 토텔레스의 역학체계하의 개념이었다. 그것의 존재 자체가 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운동원인〉을 필요로 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의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며 관성의 개념이 받아들여지면 그런 양의 존 재 가 불팔요해지 는 것 이 다. 또한 i m p e t us 의 크기 가 운동량과 같은 것은 순전히 표면적인 일치에 불과할 분 두 가지 양 사이의 내용상 의 관계는 전혀 없다. 위의 두 가지 문제들이 중세역학이 지녔던 가장 어렵고 중요한 문제이긴 했지만 중세역학에 그 의의 다른 문제가 없었던 것은 물 론 아니었다. 예를 들어 무거운 물체가 떨어지는 이유는 그 물체의 우거움 때문이고 따라서 물체의 무게가 그 운동원인이라면 물체의 떨어지는 속도가 무게에 비례해야 할 텐데 왜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 같은 것이 그 대표적 예였다. 그리고 이들 문제들은 15,16 세 기에 접어들어서는 완전히 스콜라 학문의 일부를 이루어서 대학에 서 논의되게 되었으며 갈릴레오가 역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던 때의 형편이 대략 이러했던 것이다. 3 갈릴레오는 자신의 출생지인 P i sa 의 대학에서 1588 년부터 1592

년까지 강의를 했는데 II) 이 시기에 속하는 1590 년킹에 쓴 것으로 보이는 『운동에 대해서 (De Mo t u ) 』 라는 습작노트에 그의 초기의 역 학적인 견해가 담겨져 있다 .12) 그 후 1592 년에는 당시 실험적 방법 과 새로운 과학의 근거지였고 해부학, 생리학 등이 크게 발전되어 있 던 Padua 대 학으로 옮겨 갔다. 이 곳에 서 1610 년까지 수학 및 천문 학 교수로서 이 과목들을 강의하면서 그는 한편으로 대학의 의부에 서 실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건축, 기계, 역학 등의 강의도 하게 되었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후의 『두 가지 새로운 과학 에 관한 논술 (D i scors i int o rno d due nu01 Je sc i enze) 』 13) 의 기 초가 되 는 내용이 뮐 역학의 업적을 얻어내었다. Padua 시기의 말에 갈릴레오 는 앞 장에서 본 것처럼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측하게 되었고 이대부 터는 그의 관십은 거의 전적으로 코패르니쿠스 우주구조의 옹호에 쏠려서 그 후 그가 역학의 문제를 살폈다면 그것은 코페르니쿠스 구 조를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1632 년에 교황청당국으로 부터 유최판결을 받은 후에는 다시 역학의 연구에만 몰두해 그간의 업적을 정리해서 1638 년에는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관한 논술』 울 발표했던 것이다 .14)

11) Gal i leo 의 전기는 무수히 많으나 제 2 장의 주 20) 에서 언급한 Gey m onat 및 s. Drake 의 책둘이 가장 대표적이다. E. McMull i n 의 책은 Gal i leo 의 생애와 과학 의 여 러 측면에 대해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그 외에 주로 Gal il eo 와 교최의 관계에 촛점을 맞춘 전기들은 제 9 장에서 언급할 것이다. 12) 이 습작 no t e 는 또 하나의 습작 note Le Macan i clze 와 함께 번역되어 I.E . Drabkin and S. Drake, trs ., Galil e o: 011 Mot ion and On Mec /za nic s (U. W isc onsin Pr , 1960) 로 출판되 었다. l3) 이 객 의 현 대 영 어 판으로. S. Drake, Galil e o: Two Nez/) Sc ien ces(U. W isc onsin l4) PGar.l, i l1e9o 7의4 ) 역가 학 있에 다 .관 한 논의 로는 A. Ko yre 의 선구적 업 적 인 Etu d es Galile en11es, 3 vols.(Paris, 1935-39) 가 있고 주 1) 에 언급한 Clave li n 의 책은 이에 대한 훌 등한 보완이다.

『운동에 대해서』에 나타난 갈릴레오 초기의 역학은 갈릴레오의 역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의 문제에서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곳 에서 그는 im p e tu s 이론을 받아들였으며 속도와 힘, 처항 사이의 관 계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문제를 다루 는 과정 에 서 는 아르키 메 데 스 (Arch i medes, BC 287-212 경 )의 영 향이

드러나서 그는 위 철에서 본 석 (2) 대신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 (v) 는 처항을 가하는 물체의 무게와 처항의 차이가 아니라 물체의 밀 도 (d) 와 저 항을 가하는 매 체 의 밀도 (dm) 와의 차이 에 비 례 한다는 식

V OC (d-dm) (4)

울 제시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 갈릴레오는 모든 물체는 종류나 크기에 상관 없이 같은 속도로 낙하한다는 법칙을 얻어냈는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서로 다른 종류의 물체 A 와 B 가 있다면 그것들의 낙하속 도는 서로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의 속도의 차이는 매체의 밀도 가 작으면 줄어든다. 예를 들어 물속에서 낙하할 때의 두 물체의 속 도의 차이에 비해 물보다 밀도가 작은 공기 중에서 낙하할 때의 두 물체의 속도의 차이는 더 작은 것이다. 그렇다면 매체의 밀도가 접 접 줄어들면 두물체의 속도의 차이도 접접 줄어들 것이고 매체의 밀 도가 零이 되는 진공중의 낙하에 있어서는 A 와 B 의 속도의 차이도 零이 되어 두 물체의 속도가 같아질 것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한편 갈릴레오가 이 결론을 얻어낸 과정이 우리가 혼히 들어온 일화 15)_ ―갈릴레오가 P i sa 의 탑 위에 올라가서 실제로 무게가 다른 물체를 떨어뜨려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다는-와 달리 이 론적 사고에 의해서였다는 것울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 과정 에는 실제로는 촌재하지 않은 밀도가 零인 전공의 조건을 사용하는 抽象化, 理想化가 개입되었음울 주목해야 한다. 물론 여기에는 물 속에서에 비해 공기 중에서 낙하할 때에 밀도가 다론 두 가지 물체 의 속도 차이가 작다는 경험적 지석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이것은· 별도의 실험에 의해서 얻어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얻게 되는 평범한 일상적 경험의 지식이었다. 이런 점은 같은 법칙 에 대해 후에 갈릴레오가 제시한 설명도 마찬가지였다. 죽 나중에 가서 그는 모든 물체는 한 가지의 물질입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성질과 밀도가 서로 다른 것은 이 입자들이 얼마나 조밀하게 구성

D) 주 1) 에 언급한 S. Drake 의 Gali leo at Work 의 pp, 19-21 에 이 일화에 대한

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다른 것일 따름이므로 같은 속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 했 던 것인데 이 역시 순전히 이론적인 사고에 의한 추 몬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같은 과정에서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의 중요한 요소 한 가지를 수정했다. 그것은 물체의 무거움과 가벼움이 철대 적인 성질이 아니고 상대적인 성질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가 어떤 물 체 가 가법기 때문에 올라간다고 했을 때는 그 가벼움은` 그 물체의 철대적 성질이며 그 주위의 것과 비교해서의 가벼움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 물체는 그 주위에 더 가벼운 것으로- 둘러싸였 울 경우에도 올라갔을 것이었다. 갈릴레오는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것은 석 (4) 에 찰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초기 갈릴레오의 역학의 성격은 1600 년을 전후해서 커다· 란 전환울 보였다. 이때부터 갈릴레오는 운동의 원인이나 목적보다 는 운동 자체의 정확한 기술에 주력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무엇이 물체를 떨어지게 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형태로 떨어지는가에 관십 을 가지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같은 전환은 갈릴레오로 하여금 〈 물체 의 낙하거 리 는 시 간의 제 곱에 비 례 한다 (soc t 2) 〉는 널리 알려 진 법칙을 얻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법칙 역시 실험에 의해서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까지에는 이 법칙은 어떤 식으론가 알려져 있었고 갈릴레오의 실제공헌은 이 법칙을 간단한 속도법칙으로.부타 수학적 으로 __ 좀더 정 확히 말하자면 기 하학적 으로_유도해 낸 데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갈릴레오는 자연세계의 모든 현상은 가능 한 한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원칙에 입각해서 물체가낙 하하는 데 따른 속도의 증가도 가장 간단한 형태로 일어날 것이라 는 믿음으로부터 시작했고, 처음에는 속도가 낙하한 거리에 비례해 서 증가한다는 옳지 않은 가정 (voes) 에서 출발해서 수학적으로 률 얻어내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물론 갈릴레오는 계산의 실수· 를 법했던 것이고 후에 가서 속도가 낙하시간에 비례해서 증가한다 는 옳은 가정 (voc t)으로부터 다시 제 대 로 〈 soc t 2 〉를 얻어 내 었 다. 16)

갈릴레오가 〈 soc i2 〉 를 얻어낸 과정도 혼히 듣게 되는 일화-죽 갈릴레오가 물체를 떨어뜨리고백박을 이용해서 시간과 거리와의 관 계를 측정해서 위의 법칙을 얻어내었다는-와는 달리 이론적 사 고와 수학적 추론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앞서의 일화나 또는 뉴튼 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만유인력을 발견했다는 이들보다 더 널리 알려진 일화가 사 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단 순히 역사적 사실들의 有無룰 밝히는 것 이상의 훨씬 중대한 의의 를 지닌다. 이 일화들은 그런 식으로 발견되었다고 얘기된 역학의 기본 원리들에 대해서도 크게 그릇된 인상울 주는 것이기 때문이 다. 죽 이 일화들은 이들 역학의 원리들이 단순한 관찰이나 측정에 의해서 직관적으로 얻어질 수 있는 개벌적인 사실인 듯한 느낌을 준다. 물체의 낙하에 관한 위의 기본적 원리들이 높은 곳에서 두 개의 물체를 떨어뜨려서 둘이 같이 땅에 떨어지는 사실이나 낙하시 간과 거리 사이의 관계의 관측으로부터 바로 얻어낼 수 있었고 이 런 관측들만 있으면 그 원리들을 얻어내기에 충분했었을 것 같은 인상을 이 일화들은 주는 것이다. 실제로 그 원리들이 물체가 낙하 하는 사실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물체의 운동에 대해 그동안 받 아들여져 온 역학의 일반적 개념들이나 우주관 전체와 전혀 부합되 지 못하고 십지어는 그때까지의 우주관하에서는 의미조차 가지지 못할 것들이었다는 것에는 이 일화들은 전혀 눈을 돌리게 하지 못 한다. 그래서 이 일화들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 원리들의 발견이 새 로운 역학체계나 새로운 우주관의 형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 다는 것을 看過하기가 쉽다. 더 나아가서는 그 원리들의 발견이 물 체의 낙하에 관한 단순한 사실들의 발견이 아니라 새로운 역학의 개념체계 전체와 새로운 우주관에 바탕을 둔 깊은 사고와 노력의 결과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위의 일화들은 아무런 힌트조차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4 낙하에 관한 위의 두 가지 법칙을 얻어낸 것만으로도 갈릴레오는 여학에 큰 기여를 한 샘이다. 그러나그의 더 근본적인 기여들은 코

페르니쿠스의 우 주 구조 를 받아 들 이면서 그가 집하게 된 역학적 문게 들에 의해 그의 역학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게 된 이후에 나왔다. 이 문제들 중 가장 중요 했 던 것은 왜 높은 탑에서 떨어뜨린 공이 그. 사이에 지구가 움직이는데도 뒤로 처지지 않고 바로 탑의 아래에 떨 어지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갈릴레오의 설명은 지상의 모. 돈 물체는 그 자체가 지구의 원운동을 그대로 지니기 때문에 떨어 지면서 한편으로는 지구의 원운동을 좇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떨어 지면서 수직방향의 속도는 증가하겠지만 수평방향의 속도는 지구의 원운동의 속도와 똑같이 유지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여 기서 더 나아가서 만약에 지구의 운동에 의한 속도 의에 공이 처음­ 부터 수평방향의 속도를 지니고 있으면 공은 그 속도를 계속 유지 하 면서 지구의 원운동보다 앞서서 지구의 주위를 회전하게 될 것이 라는 생각을 랬 다. 따라서 만약 마찰이 없는 수평면에서 공을 굴리 면 공 은 같은 속도로 계속해서 굴러갈 것이다. 그 이유는 갈릴레~ 에 의하면 수평면온 그 위의 어느 접이나 지구의 중십으로부터 거 리가 같 은 면이기 때문이었다. 물체가 한번 주어전 속도로 운동을 계속한다는 이 생각은 〈관성 (i ner ti a ) 〉 의 개 념 과 아주 가깝지 만 갈릴레 오가 직 접 이 단어 를 사용­ 한 적은 없었고 갈릴레오의 생각은 우리의 관성의 개념과는 달랐 다. 그것은 지구의 중십을 주위로 한 원운동이 계속될 것이라는 생 각에 바탕했고 이것은 자연스러운 운동으로서의 원운동의 중요성에 대한 아리스토 텔 레스적 경향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뜻한다. 후에 갈릴레오는 던전 물체의 포물선 운동을 분석하면서 수평방향의 운 동을 마치 직선관성운등인 것처럼 취급했지만 그것은 물체를 던쳐 서 움직이는 지구 주위의 아주 작은 부분에서는 그에 해당하는 원의 , 일부를 칙선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17) 그의 관성의 개념은 어 더까지나 〈동속원운동 〉 의 관성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턴 제 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물체가 의부의 계속적인 작용없이 운동을­ 계속할 것이라는 생각은 일단 아리스토텔레스적 운동이론으로부터 17) 예 폴 들어 R.H . Nay lo r, Gali leo 's Theory of Proje c ti le Moti on , Isis 1 훌 (1980), pp. 550-70 을 참조할 것.

벗어난 것이었다는 면에서 큰 중요성을 지니며 이러한 개념에 익숙 해지게 된 것이 후에 데카르트 (Rene Descarte s , 1596 — 1662) 에 의해 직선관성운동이 출현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결국 갈릴레오의 관성의 개념은 원운동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중요시 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의 제약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한편으 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몬으로부터는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우주구조가 제기한 또 하나의 역학적 문제는 1 일 1 회전의 빠른 지구의 운동을 어떻게 지구 위의 사람이 느끼지 못하 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한 해답으로 갈릴레오는 운동의 〈상 대 성 (rela ti v ity)〉의 원칙 을 사용했다. 죽 운동은 운동을 하지 않는 물 체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그 운동을 같이 하고 있 는 물체에 대해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운동 하는 물체와 같은 운동을 하고 있는 물체는 그 물체의 운동을 느끼 지 못한다는 것이다. 운동을 이처럼 상대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어떤 물체가 운동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절대적으로 구벌할 수가 없고 따라서 물체의 운동과 정지를 본질적으로 구별할 수도 없게 된다. 그리고 운동은 물체의 본질적 성질과는 관계가 없고 운동에 의해 물체의 성질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결국 운동은 물체가 가 지게 된――또는처하게 된一~ 갈릴레오 자신의 칼을 빌 면 물체 는 운동이 나 정 지 에 대 해 〈무관한(i nd iff eren t)〉 것 이 다. 운동에 대한 이러한 식의 이해도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과 벗어나는 결론을 얻게 해준다. 물론 갈릴레오가 실제로 이 런 생각까지를 했는지는 분명하지가 않지만 물체가 운동상태와 정 지상태에 〈무관〉해지면 운동을 위해서는 항상 외부의 운동원인의 작 용이 필요하고 그것이 없으면 정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생각 울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운동의 견해에서는 의부 의 작용이 일으키는 것은 운동이 아니라 운동상태의 변화, 죽 운동 의 속도의 변화가 되는 것이다. 한편 물체가 운동과 정지상태에 대해 〈무관〉하면 여러 가지 운동 이 한 물체에 동시에 일어날 수 있고 그 결과는 이들 여러 가지 운 동을 그냥 복합하면 된다. 그때까지는 한 물체에 두 가지 작용이

가해지면 각각의 작용이 일으키는 운동은 그냥 복합되는 것이 아니 라 서로 경쟁을 해서 한 쪽의 작용이 다른 쪽의 작용을 이겨내고 이 겨낸 작용에 의한 운동만을 일어나게 한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서 대 포에 서 탄환을 쏘면 탄환에 가해 진 바 자연적 운동 (v i olen t moti on ) 에 의해 탄환의 자연적 운동은 억제되어서 처음 한참 동안은 탄환 이 아래로 떨어지는 운동은 하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운동만 할 것 이라고 믿었단 것이다. 이 목수한 예에 대해서 갈릴레오는 탄환은 수평 방향의 등속운동과 수직 방향의 낙하운동―一낙하거 리 가 시 간의 제 곱에 비 례 하는-의 복합으로 이 루어 진 포물선운동을 하는 것 을 보일 수 있었다. 결국 갈릴레오는 그동안 자연스러운 운동과 비 자연적운동으로 엄격히 구분되던 운동들을 그대로 복합시킵으로써 이것들 사이의 엄격한 구벌을 깨뜨리는 데 기여했고, 그 자신에게 는 〈자 연스러운 운동 〉 이라는 생각이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후에 데 카르트에 의해 이 구벌이 완전히 깨어지게 하는 데 기여했다. 이것 온 갈릴레오가 〈 운동의 복합법칙 〉 을 사용한 것을 보여주며 이에 따 라 그는 복잡한 운동을 간단한 요소로 분해해서 취급해 줄 수가 있 게 되었다. 5 앞 질에서 다룬 역학의 기본적 개념이나 원리들-관성의 개념, 운동의 상대성, 운동의 복합법칙 둥__이 갈릴레오에 의해서 얻어 진 과정 역시 그 앞 철에서 본 낙하운동에 관한 법칙들의 경우와 같이 직접 경험과 간단히 결부되지 않는 십오한 知的 思考를 동해 서였다. 그리고 이것은 갈릴레오가 일상 관측되는 여러 요소들과 효과들이 복합된 복잡한 현상에 매이지 않고 이들을 간단한 요소로 분해할 수 있었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理想化된 조건을 생각 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는 복잡한 포물선 운 동을 간단한 직선운동들로 분해할 수가 있었고, 항상 관측되는 減 速운동으로부터 공기의 저항이나 표면의 마찰이 없는, 실제로는 존 재하지 않고 따라서 관측할 수도 없는 조건을 가정한 관성운동을 생각해넬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런 식으로 간단한 요소로 분해

하고 이상화된 조건을 가정해 줌으로써 갈릴레오는 정확하고 논리 적인 수학적 방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자연세계가 숫 자로 표시되어 있고 따라서 수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그의 풀 라돈 (Pla t on, BC 427-347 경 )주의 적 경 향과 부합이 되 었 다. 18) 그리 고 이처럼 수학의 사용이 가능한 이상화된 세계에 대해서 실제 관측된 세계는 근사함에 불과하다는 플라본적 생각도 이에 뚜렷이 나타나 고 있는 것이다.

18) Pla t on 주의자로서의 Ga lil eo 의 해석은 주 14) 에 언급된 Ko y re 의 처서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같은 풀라돈주의적 경향은 갈릴레오 역학의 배경에서 볼 수 있 는 여러 요소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 의에도 갈릴레오는 16 세기 이탈리아의 대학의 외부에서 실제적인 일에 종사하던 타르탈리아 (Tarta gl ia , 1499?-1557), 베 네 데 티 (Alssandro Benedett i, 1450-1512 경 ), 귀 도 우발도 (Gu i do Ubaldo, 1545-1607) 같은 사람들의 전통으로부터 도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운동이론의 세부적 발전 을 위 주로 했 던 대 학내 의 〈스콜라역 학 (Scholas ti c mechan i cs) 〉 으로부 터 벗어나, 아르키메데스의 영향을 받아 실용적이면서도 수학적인 체계를갖춘새로운역학을향한웅칙임을보였던 것이다 •19) 갈릴 레오는 그 자신이 이 그룹의 후계자적 위치에서 이들로부터 역학을 배운 한편 대학교육을 받고 대학에서 강의를 함으로써 대학내의 전 통적 스콜라역학에도 충분히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두 종류의 역 학의 전동에 모두 깊이 참여해 있었다. 앞서 본 『운동에 대해서』에 서 그가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의 문제에서 시작하고서도 아르키메데 스의 영향을 나타냈었던 것은 이를 찰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20)

19) 이들의 역학에 관해서는 주 1) 에 언급된 S. Drake & I.E. Drabk i n 의 책이 다 루고 있으며 S. Drake 가 쓴 이 책 의 Intr o ducti on (pp . 3-60) 은 16 세 기 역 학의 몇 갇태 전통들에 대한 아주 좋은 논의이다. 20) A. Maie r , M. Clag e tt , E. A. Moody 등에 의 한 연구는 Ga lil eo 의 역 학학습의 중 요한 부분을 이루었을 후기 스콜라 역학, 록히 im p e tu s 이론에 대한 우리의 이 해롤 깊게 해주었고 14 세기 역학자들을 곧찰 〈 Ga lil eo 의 선구자들〉이타고 부론 Mood y나 Ma i er 등은 이 런 면에서 이해해 줄 수가 있다 : 주 2) 의 Cla g e tt의 책, 주 10) 의 Ma i er 의 책 의 에 , A. Maie r , Di e Vorlti1 'fer Gali leis im 14, Jah r hGuonli dneo r, t ( Redo. ,m eG, a1l9i 4le9o) ; REe.Aap.p rM aoiso ed dy (UG.a liCle a ol i faonrdn iHa i sP rP.,r ec1u9r6s6o)r,s p, p.i n2 2-C43.L 을. 참조할 것. 멘 마지막의 Mood y의 논문과 이와 관련된 다른 및 편의 논문이

한편 이같은 16 세기 역학자들과 갈탈레오와의 연결은 과학혁명의 사회적 배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족 대학의 의부에서 실제 적인 직업에 종사하던 이들 16 세기 역학자들의 촌재는 이 시기에 있어서 종태까지 무식하던 계충이 학문적인 능력을 갖춘 계층으로 서 대두하고 그런 과정에서 그 사회적 지위도 浮上했음을 보여주 며 이들의 학문적인 활동이 급기야는 대학에 속했던 갈릴레오 같은 사람에도 연결되어서 역학의 발전에 직접 기여하게 되었음을 말해 주는데 ,21)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E.A . Moody , Stu d ie s in Medie v al Phil oso p hy , Sc ien ce and Log ic (U. Cali forn ia Pr. , 1975) 에 실 려 있 다. 21) 이러한 지저 사회적 음직임은 P. Rossi, Ph ilos op hy , Technolog y and Arts in the Early Modern Era, (New York, 1970), pp. 1-63 이 찰 보여 주고 있 다.

6 위에서 갈릴레오의 업적을 다루면서 우리는 이미 그의 한계성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다• 우선 그의 관성의 개념은 자연스러운 운동 으로서의 둥속원운동의 지속이라는 생각에 바탕한 것이었다. 그 의 에도 그는 그의 우주구조에 있어 항상 원운동을 고수했다. 그리고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갈릴레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음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체계의 구축을 팔요로 했 고 그것은 한 개인이――그가 아무리 갈릴레오와 같은 거인이타고 하더라도――단숨에 이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찬재는 비단 그의 관성의 개념에만 남아 있었 던 것은 아니었다. 갈릴레오가 비록 물체 자체의 철대적인 무거움 이나 가벼움이 물체의 운동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부정했지만 물체가 낙하하게 하는 重力온 그에게도 역시 의 부에서 작용하는 힘이 아니라 물체 자체의 성질이었다• 따라서 그. 는 중력 에 의 한 낙하운동을 〈자연스럽 게 가속되 는 운동 (na t urall y accelerate d moti on )> 이 라고 해 서 다른 일 반적 인 가속운동과는 다르다 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 때문에 시간에 비례해서 속도가 증 가하는 경우에 대해서 〈 soc t 2 〉라는 법칙을 얻어내었으면서도 이것이

속도가 시간에 비례해서 증가하는 등가속도운동에 일반적으로 적용 되는 것을 인석하지 못하고 그 적용울 낙하운동에만 한정시켰다. 이 경우에도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스러운 운동과 비자 연적 운동의 업격한 구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결국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의 체계에서 벗어나는 것과 새로운 체계를 구축하는 일의 시작을 했던 셈이다. 이같은 갈릴레오 역학의 한계는 갈릴레오보다 훨씬 더 이론적이 고 체계적이었던 데카르트가 깨뜨려 주고 우리의 논의는 이제 당연 히 데카르트로 넘어가야 한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역학은 〈기계적 철학 (mechan i cal ph i loso p h y)〉이라고 불리는 그의 전체적 철학체계의 일부로서 존재하며 그것에 대해 먼저 다룰 필요가 있다. 따라서 역 학의 혁명을 다루는 우리의 논의는 여기서 중단하고 과학혁명의 사 최적 사상적 배경과 과학의 방법에 대한 논의를 한 후에 다시 돌아 오기로 한다.

제 4 장 마술, 기술 및 실험과학: 베이컨 1 2 장 및 3 장에서 다룬 천문학 및 역학의 혁명은 과학혁명을 동한 과학의 내용상의 혁명에 있어서 핵십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것들이 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얻어전 과정, 특히 그 방법들은 크게 혁명 적이지는 못했다. 우선 이들 분야의 혁명들은 고대에서부터 존재했 고 연구되어 왔던 문제들의 연구과정에서 얻어졌다. 죽천문학의 혁 명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문제들에, 그리고 역학의 혁명은 아 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의 문제들에 몰두해서 연구하논 과정에서 얻어전 것이다. 또한 이들 혁명으로 이끌고 간 문제들의 연구에 있 어서도 종래 사용해 오던 이론적이고 수학적인 방법들이 그대로 사 용되 었다. 코페 르니 쿠스 천문학의 방법 은 프톨레 마이 오스의 Almag es t 에 사용된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갈탈레오의 방법도 중세를 통한 아리스토텔레스 운동이론의 해석자들이 사용한 방법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분만 아니라 이들 혁명에 있어서 실험적 방법의 역할은 거의 찾 아볼 수 없었다 .I) 역학의 혁명에서의 실험적 방법의 예로 많이 드 1) AKo. yK reo , y rEe 와t1 1 deHs .g aB /ui /tet ee rnfnie esl,d 가3 v처ol s음. (P이a 같ris은, 1입9 3장5-을19 3강9)련 ; 하M게e t수a p 장 h했y s 다i c. s aAnd. Measurement: Essays in Sc ien t ific R evolut ion (Harvard Univ e rsit y Press, 1968) ; H. Butt er fi eld , The Orig ins of Modern Scie n ce, 1300-1800 (Lon- don, 1949) 참조 T.S. Kuhn 은 그의 최근의 논문에서 이 갈은 주장에 동조적 안 입장에서 과학혁명중의 수학적 및 실험져 방법의 역할을 재조명했으며 이 장에

서의 팔자의 논의는 주로 Kuhn 의 이 논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Math ern-ati cal versus Exp e rim e nta l Tradit ion s in the Develop m ent of Phy si c al Scie n ce, ]011mal of Inte r dis c iplina ry Hi st o ry 7 (1976), pp. 1-31 .

는 갈릴레오의 실험들은 많은 경우에 실제로 행해지지 않고 논리의 전개를 위해 머리속으로 행해졌던 思考實 驗 (t hou g h t exp er i men t ) 들 이었거나 ,2) 실제로 행하는 것이 불가능했거나 혹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당시의 형편으로는 행해지기 힘든 실험들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는 실험에 대해 마치 그것을 실제 행한 것같이 자세히 언급하고서도 끝에 가서는 자신의 수학적 또는 이론적 논리전개가 워낙 확실하고 수긍이 가기 때문에 실험을 해보나마나 결과는 뻔하 다는 건론을 내리기조차 한다 .3) 그리고 갈릴레오를 뒤이어 역학의 혀명울 전개시킨 데카르트나 호이젠스 등의 업적이 모두 이론적 • 수학적 추론에 의해 얻어졌음을 후에 보게 될 것이다.

2) Ga lil eo 의 사고실험들을 수로 해서 사고실험에 대해 일반적으로 다룬 논의가 T. S. Kuhn, A Functi on for Thoug ht Exp e rim e nts in 1 'tfela 11g es Alexandre Koy re : L'ave11t1 1 re de la scie n ce (Paris , 1964), vol. 2, pp. 307-34 에 나와 있다. 3) 주 1) 에 언급한 Kuhn 의 논문 p ..1 0f f 참조 한편 T B. Sett le, Galil e o's Use of Exp er im e nt as a Tool of Investig at i on in E. McMullin , ed., Gali leo, Man of Scie n ce (New York, 1967) ; J. MacLachean, The Test of an, a'Ieml aSge ign rae r, y' TEhxep eR riom lee notf oEfx pG e arlimi l ee o n'ts i, n IGsailsi l 6e 4o 's( 19P7h3y) ,s i c sp, p. 3A74rc-9h, iv eM s i fcoh -r the Hi sto r y of Exact Sc ien ces 23 (1980), pp. 227-52 등은 Ko y re 에 서 시 작된 이와 같은 주장에 반대해서 문재된 갈릴레오의 실험들이 실재로 행해졌거 . 나 행해질 수 있었던 것입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Koy r e4 Kuhn 의 수장의 주된 요지는 이런 실험둘의 수행 여부나 수행가능성 여부보다는 그것들이 갈랄 레오의 이론적 추론에 부수저이었으며 따라서 갈릴레오의 이론의 발전에 있어 서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이었고 이런 면에서 Se ttle 둥의 연구결과는 Koy re - Kuhn 의 주장을 뒤엎지는 못한다. 심지어 Se tt le 은 갈 릴 레오가 경사면(i nc li ned pla ne) 실험을 실제로 행했을 수 있음운 주장하면서도 갇랄레오가 실험을 행한 이유가 자신이 철저히 확신하고 있던 등속도이론을 예증하기 위해서였고 결과 가 가속 i 뭉 요 보여 주자 한참온 갈란레오가 그것을 받아둘이지 않고 부정하러 했움을 시사합으로써 갈릴레오에 있어서 실험의 부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천문학의 혁명은 상황이 약간 달라서 실험은 거의 기여를 못했자 만 관찰은 큰 역할울 한 것처럼 보인다. 그 대표적인 예가 티코 브 라헤의 정확한 관측 데이타가 케플러의 천문학 법칙들에 준 영향이 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에 새로 등장한 관측기법에 의해 얻어진 것 이 아니라 고대부터 사용되어 오던 관측방법을 좀더 열십히 집요하

게 사용한 결과였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티코가 사용한 관측방 법은 프톨레마이오스 시기부터 사용했던 방법이었던 것이다. 더구 나 티코의 관측데이타는 케플러로 하여금 그가 이미 받아들인 코페 르니쿠스 우주구조의 세부적 설명에 있어서의 어려움을 인석하게는 랬지만 그로 하여금 새로운 법칙을 얻어내게 하지는 않았다. 그가 행성의 타원궤도를 얻어내게 된 것은 당시 새로이 알려지고 논의되 게 된 고대 의 수학자 아폴로니 우스 (A p ollon i us, BC 3 제 기 후반一 2 제 기 전반)의 圓雜曲線에 대한 저술로부터 접한 타원에 관한 수학적 논의 를 케플러가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4) 한편 갈릴레오의 망원겅을 사용한 관측결과들은 물론 획기적으로 새로운 관측방법의 소산이었지만, 이 경우에는 관측결과들이 학문적으로 천문학에 영 향을 끼찬 바가 아주 작았다. 이미 천문학자들은 케플러의 법칙들 에 의해 새로운 천문학 체계를 받아들이고 있었고 갇탈레오의 망원 경을 통한 관측들은 단지 일반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 이오스의 우주구조를 버리고 코페르니쿠스 우주구조를 받아들이는 일을 쉽게 해준 것분이었다. 오히려 갈릴레오는 천문학에 있어서 케플러와 같은 정확한 수학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은 까닭에 계속해 서 원운동에 바탕한 코페르니쿠스 우주구조에 안주해 있었던 것이다.

4) A p ollon i us 에 관한 간단한 논의 가 G.J . Toomer, Ap o lloniu s of Perga in C.C . Gil lisp i e, ed., Di ct i on ary of Scie n t ific B io g r aph y 1 (1970), pp.1 79 - 93 에 나와 있다.

2 걷국 과학혁명의 핵심을 이루는 천문학과 역학에 있어서의 혁명 적 변혁둘은 이론적 • 수학적 방법으로 언어졌고 실험적 방법이 이 에 기여한 바는 거의 무시할 만했다. 그렇다면 과학혁명 중에 실 험이 기여한 바는 무엇이었는가? 과학혁명을 통해서 실험이 많이 행해지고 큰 중요성을 며게 된 것은 어쨌든 사실이고, 그래서 17 세 기 후반 새 로운 과학을 위 해 창립 된 런던의 왕립 학회 (R oy al Socie t y ), 파리 의 왕립 과학아카데 미 (Academi e roy al e des scie n ces), 풀로렌쓰의 치 멘토아카데 미 (Accademi a de! Cim ento ) 등의 과학단체들 5) 이 모두 실

5) 과학혁명중에 창립된 과학단체둘에 대해서는 이 책의 제 8 장에서 자제히 다문

것 이 지 만 이 에 대 한 고전적 논의 로서 M. Ornste i n , The Role of Scie n t ific Socie t i es in the Sevente e nth Centu ry (Chic a g o , 1928 ) 불 참 조할 것 . R.S . Westfa ll , The Constr u cti on of Modern Sc ien ce: Me ch anis m s and Me ch a-nic s (New York, 1971), Chap. 呼:이 에 대 한 아주 짧 은 소개 로서 주천할 만하다.

험적 방법을 통한 과학연구를 표방한 것이라면 과연 실험은 과학혁 명에 있어서 어떤 역할울 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Kuhn 의 대답 6) 이 가장 수긍이 가고 그것은 다음과 같다. 과학혁명에 있어서 실험이 기여한 곳은 위에서 언급한 내용상의 혁명적인 변혁이 있 었 던 분야가 아닌 다른 곳에서였다• 죽 과학혁 명 동안에 학문상 획기적인 변혁이 있었던 천문학, 역학 등의 분야 논 고대서부터 존재 했 던 분야였고 이들 분야에서는 주로 고대서부 터 사용한 이론적, 수학적 방법에 의해 변혁이 얻어전 데 반해서 실험은 그 전까지는존재하지도 않았던새로운분야들 __ 열, 소리, 빛, 전기, 자기, 기체 및 화학 분야들-에 많 은 경험적 지식을 얻어내게 했던 것이고, 그에 따라 이들 분야가 새로이 출현하게 했 다고까지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과학혁명 중의 실험적 방법의 선 구(R자ob들ert로 H oo간ke주, 되163는5— 1길70버2 )트 동, 의 보과일학 (적Ro b업er 적t B이o y l모e , 두16 2이7 -같16은91 ),새 후로크운 과학분야들에서였다는 것이나 위에서 언급한 새로운 과학단체들의 초기의 실험적 업적들도 거의 대부분이 이들 분야들에서였다는 것 이 이를 잘 말해 준다 .1) 그리고 이같은새로운 분야들의 실험적, 겅 험적 지식의 급격한 증가가 역학, 천문학에 있어서의-그리고 나

6) 주 1) 에 언급한 Kuhn 의 논문. 7) G i lber t의 실험에 대해서는 De mag n ete (London, 1600), Bo y le 에 대해서는 T(Lhoe ndWono,r k1s 77of2 ) ,t h그e 리Ho고n oHuoroabklee 에 R o대b해er서t B는o yP leh , il o6s o vpo hlsic. ,a le dE. x pb eyr im T e.n tBs i r ac nhd, Observati on s of the Late Emi ne nt Dr. Robert Hooke and Ot he r Emi ne nt Vi rt u o sos in Hi s Ti m e, ed. by W. Derham, (London, 1726) 참조 과학단 P체h듣il의 o s op초 h기i c 에a l 있T어ra서n의sa c실ti o험n져 s (R연o구y a둘l 은So c이ie 들t y ), 단M체의em oi학r e 술s 잡de지s 나I' Ac보a고de서m인i e Roy a le des Sc ien ces 및 Sag gi di natu rali esp e rie n ze fa tt e ne/1 'A ccade-Mmii ad d dleetl o nC , i mT ehnet o E(xFplo err einm c een, t 1e 6r s6:6 )A 등 S에tu 서d y 훑of 어 t볼he 수Ac c있a다d.em i 이a 밖de에l CWi m.E en.K t(. l (Jo hns Hop k in s Press, 1971) 을 참조할 것

중에 볼 생리학에 있어서의 8)_ _내용상의 획기적 변혁과 함께 과학 혁명중에 있었던 과학내부의 변혁을 나타내는 두 가지 요소인 것 이다. 또한 이같은 경험적 지식의 증가가 결국은 18 세기 말부터 19 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이들 분야들이 체계화되고 수학화되어 현 대 물리과학의 분야들로 학문적으로 성숙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 다 .9)

8) 이 책의 제 7 장을 참조할 것. 묵히 생리학상의 혁명에 있어서도 변혁이 얻어지 논 과정에는 실험이 벌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팔요가 있다- 9) 주 1) 에 언급한 Kuhn 의 논문, pp. 27-31 참조.

한전 실험이 과학혀명을 동해서 위와 같은 새로운 분야들의 경함 적 지석의 급격한 증가를 가쳐오는 동안 실험에 대한 사람들의 태 도의 변화가 이와 함께 랬다. 즉 실제로 손과 거구를 써서 자연현 상에 대한 이해를 얻어내는 실험적 방법이 비천하고 하찰것없는 것 이 아니 라 충분히 과학의 탐구에 사용할 만하고 나아가서 는 시용되 어야 할 훌륭한 과학적 방법이라는 생각이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과학은 고대와 중세를 통해서 주로 이론적이고 수학적인 채로 남아 있었으며 과학에 있어 실험적 방법의 사용은 예의에 속했다 .10) 비 록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적 방법을 주장했지만 그것이 정교한 관­ 찰이나 실험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머리를 쓰는 정선적 작 업은 귀한 것임에 반해 손을 쓰는 노동은 천한 것이라는 푼라돈적 생각이 실험적 방법의 채용을 막았다. 그리고 업격한 자연 대 인꽁­ 의 아리스토텔레스적 구분도 자연을 그대로 보지 않고 이에 변형을­ 가해서 관측하는 실험적 방법이 자연을 이해하는 올바론 방법으로 생각되는 것을 막은 것이다. 아에 따라 과학은 중세대학에서 철자 하게 이론과 수학 위주로 진행되었으며 바록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석의 경험적 방법을 표방했더라도. 그것은 일상의 초보적 경험에 의 존하거나 또는 책에 기록된 경험적 지식의 되풀이되는 복사에 불과 했다. 반면에 실제로 손과 기구를 써서 자연세계와 접하는 방법은들 비천하고 과학적 지석을 위해서는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

10) 이처럼 예의에 속하는 중세과학의 실험적 전통들의 예를 A.C. Crombie , Rob- ert Grossete s te and the Orig ins of Exp er im enta l Scie n ce, II00-170C> (Oxfo r d Univ e rsit y Press, 1953) 과 J.H . Randall, jr. , The School of Pad11a and the Emerge nce of Modern Scie n ce (Padova, 1961) 가 보여 주고 있다.

그에 따라 대학과는 격리되고 사회의 낮은 총에 속했던 마술사, 연 금술사, 기술자, 匠人 등에 의해 사용되고 있었다. 과학혁명 동안 에는 바로 이처럼 낮게 생각되어 오던 실험적 방법이 과학적 지식울 얻는 참다운 방법으로 생각되는, 실험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이와 같은 태도의 변화에 기여했을까? 이에 대한 해답으로 우리는 16 세기 유럽사회에서 볼 수 있었던 두 가지 사회 척, 사상적 움직임들-마술적이고 신비적인 헤르메티씨즘 (Herme­ :ti c i sm) 의 전통의 영향과 실용적, 기술적 지석의 知的 지위의 상승 ――울 들 수 있는데 이들에 대해서 다음 절들에서 살펴보겠다. 3 헤르메티씨즘이란 중세의 마술 및 연금술의 전통과 연결된 思潮

로서 우주를 신비 적 이 고 마술적 인 힘 들르 짜여 진 〈 네 트웍 (Netw ork)> 으로 보고 인간이 이 힘들과 서로 작용해서 우주의 현상들에 영향 을 미칠 수 있다고 믿었다 .11) 그리고 이 사조가 비슷한 신바적 색 채를 떠고 15, 16 세기 이태리를 중심으로 크게 떨치던 르네상스 신 플라튼주의 (N eo-Pla t on i sm )1 2) 의 한 支流로서 함께 유행 하면서 사람 들의 자연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 기여한 것이다. 중세 를 통해 서 마술은 흑색 마술 (black mag ic) 또는 악마적 마술 (demon i c :m agic) 과 백색마술 (wh it e mag ic) 또는 자연적 마술 (na t ural ma gi c) 로 구분되어서 흑색마술은 실제로 있을 수 없는 일로서 사람을 속이는 것으로 비난받고 억압당했으나 백색마술, 죽 자연적 . 마술은 신기 하기는 하지만 자연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사실로 받아들여 쳤다 .13) 아그리파 (A g r ipp a, 1486-1535) 는 여기에다가 수학적 마술

11) Herme ti c i sm 에 대한 일반적 인 논의 가 F.A. Yate s , The Hermeti c T radit ion in Renais s ance Scie n ce in C.S . Sin g le to n , ed., A rt, Scie n ce and Hi st o ry in tire Renais s ance (Joh ns Hop k in s Press, 1968), pp. 255-74: F.A . . Yate s , Gi or dano Bruno and the Hermeti c T radit ion (Chic a g o , 1964) 에 담겨 져 있 다. '12 ) Renais s ance Nee-Pla t on i sm 에 관한 몇 개의 참고문헌듈이 제 2 장의 주 8) 에 13) 언마술급에되어 대 있한다 논. 의. 로는 K. Thomas, Reli gion and the Declin e of Mag ic

(New York, 1971) 과 이보다 훨씬 방대한 L. Thorndik e , A Hi sto r y of Mag ic and Exp e rim enta l Sc ien ce, B vols. (Columbia Univ e rsit y Press, 1923-1958) 이 있다. 前者는 종교와의 관계에서 後者는 과학과의 관계에서 마술을 다루고 있다.

(math e mati ca l mag ic) 및 종교적 마술 ( religi ous ma gi c) 을 첨 가해 서 수 학적 마술에 는 산술, 음악, 기 하학, 광학, 천문학, 기 계 학 (mecha­ nic s) 14> 및 피 타고라스적 數秘學 (numerolo gy ) 을 포함시 키 고 중교적 마술에 는 종교적 儀 式이 나 천사 ( ang el) 를 부르는 呪術, 종교적 인 기 적 등을 포함시켰다. 한편 그는 자연적 마술을 지상세계(t erres ti al world) 에 수학적 마술을 천상세계 (celesti al world) 에 그리 고 종교적 마술을 하늘 위의 제계 (su p erceles t i al world) 에 대응시킴으로써 결국 은 우주의 모든 차원을 전부 마술로 보는 철저한 마술적 자연관을 제시했다 .15) 그리고 이에 따라 마술은 자연세계에 관한 지석과도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14) 17 세기에 이르기까지 mechan i cs 라는 단어는 오늘날의 의미인 〈力學〉의 뜻으로 쓰이지 않고 기계의 구조 및 작용에 관한 지식을 나타내는 뜻으로 쓰였다. 여 기서는 〈기계학〉아라고 번여한다 . 15) A g r ipp a 에 관한 간단한 논의 는 주 13) 에 언급한 Thornd i ke 의 책 , vol. S, pp. 127-38 에 나와 있 다. - 16) 중세에서 Rena i ssance 기까지의 연금술에 관한 좋은 소개로는 E.J. Holmy ar d, Alchemy (Balti mo re, 1957) 과 F.S. Tay lo r, Tlze A/chemi st s , Founders of Modern Chemi st r y (New York, 1949) 가 있다.

마술을 행 하는 마술사 (ma g us) 는 原罪 이 후 자연을 단지 수동적 으 로 관찰만 하게 되었던 인간의 무능력으로부터 벗어나서 다시 자연 에 무엇을 加하고 변형시켜서 자연에 무엇을 일어나게 하고 무엇을 얻어내고 하는, 천사들이나 지니고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 갈은 마술사들의 태도는 鍊金術士둘의 태도와도 부합되었고 16) 실제 로 두 가지 일에 같은 사람이 종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위의 마술적 자연관을 일컫는 헤르메티씨즘이라는 단어 자체도 연금술의 고전적 자료를 남겼다는 고대 에집트의 전설적 賢人 헤르메스 트리스메기 스두스 (Hermes Tr i sme gi s t us) 의 이 름으로부터 나왔다. 결 국 대 학에 서 의 과학이 자연에 대해서 수동적인 태도를 지난 채 책을 위주로 해 서 철저하게 이론적, 수학적, 思辨的 형태로 남아 있는 동안 마술 과 연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위에서 본 자연에 대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__실험적 태도――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같이 마술과 연금술로부터 유래한 헤르메티씨즘은 그 신 비적인 떤 때문에 역시 선비적 색채를 띠었던 르네상스 신풀라본주 의의 자연관과 결합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서 신플라돈주의 과학자 들의 과학 및 자연관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좋 은 예를 보여 주는 것이 케플러이다. 그는 우선 우주의 구조를 플라돈의 물질구 조 이론을 연상시키는 형태로) 간단한 기하학적 입체들과 球를 內 接 및 外接시킵으로써 수학적으로 결정하려고 했는데, 이는 피타::rr.. 라스의 숫자신비 주의 (number-m y s ti c i sm) 적 색 채 를 찰 드러 내 준다. 행성에 대한 부등속타원운동의 이론에 따라 제기되게 된 행상의 운 동의 원인에 관한문제에 대답하는데 있어서도케플러는태양과가 깝고 먼 거리에 있어서의 행성의 운동의 차이를 天評의 간 팔과 짧 은 팔의 운동의 차이에 비유하거나, 태양으로부터 磁 氣 力이 나와서 행성을 움칙인다는 식의 설명을 하고 있는데 이는 이들 설명이 지 니는 내용면에서의 신비적인 떤분만이 아니라 천평이나 자석 같은 물체들이 연금술사나 마술사들이 혼히 사용하던 물체라는 면에서도 그가 연금술과 마술에서 연유한 헤르메티씨즘의 전동과 연결되어 있음을 지사해 주는 것이다. 또 케플러의 자기력을 동한 설명에 영 향을 미천 길버트 또한 그의 『자석에 대해서』가 설험적 방법의 선 구적 업적으로 떠받들어지기는 하지만 극히 신바적인 〈자기적 철학 (mag ne ti c p h il oso p h y)〉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18)

17) 예를 둘어 G. Vlasto s , Plato 's Univ e rse (Seatt le, 1975), chap. 3 을 참조할 것. 18) E. Z il sel 은 G il ber t의 실험적 방법의 기원을 찾는 논문에서조차 그의 자기적 철학이 지닌 신비적, 物活 論 的 (an i m i s ti c) 색채에 주목하고 있다: E. Zil sel , The Orig ins of Wi lliam Gi lbe rt's Scie n ti fic Meth o d, Jo1 1rnal of the Hi st o ry of Ideas 2 (1941), pp.1 -32. 비숫한 관정에서의 이에 관한 최근의 논의 로는 Gad Freudenth a l, Theory of Matt er and Cosmolog y in Wi lliam Gil be rt's De Mag 11 ete , Isis 74 (1983), pp. 22-37 이 있다.

위의 예들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헤르메티씨즘의 마술적 자연 관은 르네상스기의 유럽에 아주 널리 퍼쳐 있었고, 과학혁명의 시 기에 있어서는 그간의 아리스토텔레스 위주의 학풍으로부터 결과한 知廊 과학적 無用性 및 혼란으로부터 벗어나는 한 가지 형태로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 퍽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 프란시스 베이컨 (F rancis Bacon, 1561-1626 ) 이 나 메 르센느 (Mar i n Mersenne, 1588-1648) 같 은 사람 들 이 마술이나 연금술의 지식으로서의 지위를 반박하는 데 많 은 정력을 소비 했 다는 사실이 헤르메티씨즘의 힘이 얼마나 크게 떨치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들 마술과 연금술 의 전통이 그 처 럼 널리 퍼지게 되면서 이들이 지니는 자연에 관한 앞에서 본 것 같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물 많은 사람들이 받 아들이게 되었고, 이러한 태도는 또한 당시 크게 퍼져 가던――그­ 리고 우리가 그 기원을 살피려 하는_실험과학의 태도이기도 했 던 것이다 .19)

19) 이 철에서 다문 것과 같은 Herme ti c i sm 과 과학혁명의 관계에 대한 견해에 관 한 여러 면에서의 재조 명과 반성이 R.S . Westm an and J.E . McGuir e , Herm-eti cism and the Scie n t ,jic Revo l uti on (Los Ang e les, 1977) 과 P. Ross~ Hermeti ci s m , Rati on ality and the Scie n ti fic R evoluti on in M. L. R Bonell i and W .R. Shea, eds., R eason, Exp er im ent and My st i cis m in the Scie n t ific Revo l uti on (N ew York, 1975), pp. 247-73 에 담겨져 있다 ,

4 마술과 연금술에서 유래한 해르메티씨즘의 전통이 이처럼 큰 영 향 력 을 지니게 되는 것과 같은 시기에 또 한 가지의 움직임이 나타 나서 역시 실 험 적 방법이 널리 받아들여지는데 기여했는대 실제적, 기술적 지석의 지적인 지위의 상승이 그것이다. 고대 이태 중세를­ 통 해서 손이나 기구를 써서 실제 기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항상 사회의 낮은 계층에 속 했 고,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한 이론­ 이나 방법 면에서의 체계를 결여하고 있었으며 시행착오를 되풀이 하는 경험적 방법에만 의존 했 다. 이들은 대학 내에서 학문적으로 과 학 을 탐구하는 사람들과는 격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지석 또한 과학과는 무관한 다른 종류의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대로는 예 의 가 있 어 서 아르키 메 데 스, 해 로 (Hero, AD 1 세 기 ), 파푸스 (Pa pp us, AD 4 세기) 등이 실제 기술적 지식과 과학 양쪽에 다 종사했지만 그 들마저도 이 두 가지 종류의 지석을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았다. 이에 따라 인공적인 물체, 특히 기계의 구조와 작용을 아

해 하려 는 학문인 기 계 학 ( mechan i cs ) 은 학문적 으로도 낮 은 위 치 에 속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기에 와서 이 들 이 지니는 지식들과 그것들을 얻는 데 사용한 방법 그리고 그 들 이 자연에 대 해서 지닌 태도 등에 대한 인식이 접점 달라지게 된 것이다. 이같은 변화는 우선 15, 16 세기를 동해서 경제 활 동과 富 의 증대, 그리고 그에 따른 도시의 발달과 중앙집권적 왕정의 확 립 등의 영향 으로 실제로 무슨 일을 해넬 줄을 알던 사람들-의과의사, 건축 가, 항해사, 기술자, 匠人-의 필요성이 증가하면서 그들의 사회 적 지위가 높아지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이같은 자신들의 지위의 상승을 자각하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지석이 비천하고 하찰 것없는 것이 아니라 지식으로서 훌 륭한 자격을 갖추었음을 내세워 서 그들의 지적 지위의 향상을 꾀하게 되고 그러는 과정에서 자신 들의 분야가 이론적 바탕과 오렌 전봉울 가지고있음도보이려고했 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과거를되돌아보고자신들의 지식과고대 의, 특히 아르키메데스나 혜로 둥의, 전동과를 연 결 하게 되었으며, 이론적인 체계를 세우기 위해 수학도 공부하게 되고 특히 고대 그 리스의 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분야에 대 한 입문교과서나 수련서 등도 쓰게 되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무석 한 상태에서 실제 일에만 종사했던 이들이 유식하고 지적으로 되었 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가장 일찍 그리고 현저하게 나타났던 것은 이태리 의 건축기사들에서 였다. 20) 브루넬레스키 (Brunelleschi, 1377 ― 1446) 로 대표되는 이들 새로운 부류의 전축기사들이 짓게 된 건물둘은 그 전처럼 그냥 많은 사람들이 덤벼들어서 세워 올리는 것이 아니라 미 리 설계를 하고 구조 등에 대한 고려를 한 후에 한 사람의 지휘하 에 지어졌다. 르네상스기에 와서 처음으로 건물과 개 인건축가의 이 몸이 연관되게 된 것은 이 까닭에서인 것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대 부분 길드(g u il d) 에 속했었지만 접차로 개인적인 힘과 권위를 가지 게 되었고 길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운 건축활동을 하게

20) Renais s ance eng ine er 들에 관한 소개 가 B. Gil le, Eng ine ers of the Renais - sance (MI T Press, 1966) 에 담겨쳐 있다.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건축기사들만이 아니라 기계의 생산아 나 이용에 종사하는 사람들, 대포나 총 등의 무기제조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이들은 위에서 본 것과 같 온 이유들에서 수학, 역학의 문제들을 공부하고 과거의 전통을 찾 기도 했으며 책들도 쓰게 되었다• 이 같은 과정 에 서 이 들 〈학문적 기 술자 (academ i c en gi neer) 〉들은 자 신 들 이 사용하는 기계가 자연에 역행하거나 자연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움직임을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측면에서 더 찰 보여 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죽 자연을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자­ 연에 변형을 가 해 서 그 움직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자연에 변형 을 가하는 인공적 과정에 대한 이같은 새로운 인식은 비단 건축, 기 계 동만이 아니고 노동과 실용적 기술 전반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 로 자라나서 16 세기가 되면서는 실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덜 리 퍼 지 게 되 었 고, 陶工이 었 던 팔리 씨 (Bernard Palis s y, 1510-1560 경 ), 항해 사 노르만 ( Rober t Norman, 16 세 기 말), 의 과의 사 베 살리 우스 등의 저술에 찰 나타나 있다 .21) 이들은 한결같이 실용적, 기술적 지식이 훌 륭한 지식임을 강조하고 나아가서는 그러한 지식의 방법이 자연 의 이해에도 도움이 되고 과학에서도 사용되어야 할 것임을 강조했 다. 과학이 진실을 얻기 위해 실생활과 초연한 채 책을 읽고 사고 하고 명상에 참기는 데서 벗어나서 실제 자연을 관찰할 분만 아니 라 자연에 변형을 일으키는一~실험을 하는――방법을 채택해야 한 다는 것이다.

21) 이 둘의 이 갈은 새 로운 인식 에 관한 좋은 논의 가 P. Rossi, Phil o sop hy , Tech- 110/og y and the Arts in the Early Modern Era (New York, 1970), chap. . 1 에 실려 있다.

한편 이같은 생각은 실제 일에 종사하던 사람들만이 주장했던 것 이 아니라 대학과 상류사회의 학자들에게도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 독히 앞에서 본 것 같은 목적에서 이들이 저술한 책들에 이런 생각 이 나타나게 되자 과학자나 철학자들 중에서도 이들의 생각에 동조­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실험적 방법을 중요시한 사람들 일수록 동조하는 정도가 깊었다. 사실 이같은 생각은 르네상스 동

안에 접차로 생기기 시작한 학문적, 사상적인요구와도부합되는것 이었다. 죽 이 시기에 와서는 대학 내에서도 논리적 방법이나 修辭 母 , 先驗的 논의 둥이 벌로 실제 문제 해결의 힘이 없고 그대신 계 속해서 학문을 細分化시키고비생산적으로 만들어서 쇠토 l 로 이끌 따 름이라는 인석이 있게 되었고, 이에 대신해서 실제 현상의 관찰, 싣 제 과정과 조작의 이해, 경험적인 연구 등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나 도타와나게 아 되주었 찰는 데부 합이되것는은 것실이제었적다 .일22에) 그종리사고하 이는렇 사게람 해둘서의 1앞53서0— 본15 태8 0 년경의 유럽사회에 다음과 같은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첫째, 실용적, 기술적인 작업에 사용되는 工程둘이 지 식 의 발전, 특히 자연에 관한 지석의 발전을 위해 가치가 있고, 둘째, 이런 공정이나 그것에 대한 지식들이 하찰것없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적, 문화적으로도 가치가 있으며, 세째, 지식인, 문화인들은 이제 실제 문제나 공정, 조작 등을 무시하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22) 교육과 학문의 개 혁 에 관십 이 많았고 나중 Franc is Bacon 에 게 큰 영 향 을 미 쳤 던 Pete r Ramus 가 대학내에서의 이같은 태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Remus 에 대 해 서 는 R. Hooy ka as, H11manis m e, scie n ce et refo r me. .P ie r re de la Ramee (1515-1572) (Leid e n, 1958) 의 일반적 인 논의 가 있으며 영 국에 서an의d, 그15의00 —영 1향70에0 (대Pr한in c 논et의o n 는 U Wni.v Se .r sHit oyw Perlel,s s L, o1g9 i5c6 ) a 에n서d R찾h 아et볼o r ic수 in있 E다n . g l-

이같은 실제적, 기술적 지식으로부터의 영향을 가장 뚜렷하게 보 이고 그것을 가장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프란시스 베이컨이 었고 후에 보일을 비롯한 새 과학단체들의 주역들은 이런 면에서 베아컨을 아주 철처히 뒤좇았다. 그러나 갈릴레오 또한 깊이 의식 하지는 못한 채로 이런 영향을 보이고 있고 다음 철에서 베이컨에 관한 논의로 들어가기에 앞서 갈릴레오에 대해서 참깐 살펴볼 필요 가 있다. 23) 갈릴레 오는 위 에 서 언급한 르네 상스의 〈 학문적 기 술자〉 둘의 전통과 연결되어 있어서 이들의 저술로부터 역학을 배 웠 고 후 에는 이들에게 역학 및 기술적 지식에 관한 강의를 했었다. 또한 그의 역학의 완성된 형태를 담은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대한 논

23) 이둘 17 세기 학자들에서 보는 이갈은 경향에 대한 논의가 주 21) 에 언급한 Ross i의 책, chap. 3 에 실려 있다.

술』은 실제 기술상의 문제를 많이 다루고 있고, 대화체로 씌어진 이 책의 대화가 행해전 장소 자체를 베니스의 무기창고로 잡고 있 었다. 그러나 갈릴레오에 대한 기술적 전통으로부터의 더 중요한 영향은 역학의 문제를 다루는 그의 방법에 나타나 있다. 앞 장에서 본 것처럼 갈탈레오는 복잡한 문제를 간단한 요소들로 분해해서 다 루는 방법을 많이 취했는데 이런 분석적 방법이 바로 기술자들이 실제 문제에 접해서 흔히 취하는 방법이라는 겁이 그것이다 .24)

24) 십지어는 철처하게 이론적이고 수학적이었던 데카로트마저도 과학자들과 기술 자, 장인들의 접촉과 협동을 위해서 기술의 학교를 설립하자는 주장을 한 저이 있었다 : 주 21) 에서 언급한 Rossi의 책, p. 109 참조.

5 프란시스 베이컨은 교육제도의 개혁에 관십을 가졌던 정치가였고 학문과 과학의 새로운 방법에 관한 그의 견해는 이러한 관심으로부 터 나왔다. 특히 정치적인 어려움 때문에 자신의 뜻을 실현시키기 힘들게 되자 일반 지식대중을 대상으로 학문적인 호응을 얻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그의 많은 저서둘을 낳게 했다 .25) 이같은 노력의 과정에서 베이컨은 주위의 여러 학파들의 자연에 관한 지석, 죽 그들의 자연철학을 살피고 이들에 혼동과 불확실만 이 있고 발전이 없음을 보았다• 먼저 베이컨은 고대에서 유래해서 당시의 학문을 휩쓸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을 말에만 의존 했으며 실제와 거리가 있고 비생산적인 삼단논법에 탐닉했다고 비 난했다. 그는 플라본주의에 대해서도 역시 비난을 퍼부어서 그것이 신학과 과학의 섞임에 의해 이중의 단접을 지닌 〈허황된 철학과 異

25) Francis Bacon 의 전기 는 아주 많이 있으나 이 중 다음 세 가지 가 가장 권할 만하다. F. H. Anderson, Francis Bacon, Hi s Career and Hi s Thoug h t (Los Ang e les, 1962) ; J. G. Crowt h er, Franc is Bacon (London, 1960) ; B. Farrin g ton , Francis Bacon; Phil o sop he r of Industr i a l Sc ien ce (London, 1961). 이밖에 Bacon 의 사상과 철학적, 방법론적 견해에 대한 좋은 논의로는 B. Farrin g ton , Tir e Ph ilos op hy of Fra11c is Bacon (Li ve rpo ol, 1964) 와 P. Rossi, Francis Bacon: From Mag ic to Scie n ce (Univ e rsit y of Chic a g o Press, 1968), 이태리어 원판 (Bar i, 1957) 이 있다. Bacon 자신의 수많은 저술 온 J. Sp e ddin g , R.L . Ellis and D.L. Heath , eds., The Works of Francis Bacon, 7vols. (London, 1857-1859) 에 모아서 수록되 어 있 다.

端의 종교(p han t as t 1c ph il o sop h y and hereti ca l rel igi on ) 〉을 낳았다고 했 다. 또한 역시 고대에서 유래했다가 르네상스기에 다시 떨치기 시작 한 〈원자론 (a t om i sm) 〉에 대 해 서 는 그것 이 순전히 假設的 (h yp o t he ti ca l) 이고 실제와는 전혀 연결이 안 되었다고 해서 거부했다. 한편 數學 에 대해서도 그것이 지식을 얻기 위한 수단일 분 그 자체로서 지식 이나 철학은 아닌데 이것이 찰못 인식되어서 수학 자체를 위한 수 학이 추구됨으로써 접접 사실과 거리가 멀어져 갔다고 비난했다. 연금술과 마술에 대해서도 그의 비난은신랄랬다. 득히 이들이 사 리사욕을 담해서 비밀스럽고, 비공개적이고, 개인적이고 또한 신비 적이며 그에 따라 모호한 방법으로 흘 러서 공개적으로 교육시키기 힘들었고 그 결과 아무런 발전을 하지 못했음을 강력히 비난했다. 따라서 그는 헤르메티씨즘의 조류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브 루노와 길버트 등 헤르메티씨즘의 성격을 지닌 채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구조를 옹호한 사람들도 강력히 비 난했다. 26) 결국 수학이 나 코 페르니쿠스 우주구조 자체에 대한 베이컨의 부정적 태도도 이들이 신비적 해르메티씨즘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 러나 그는 마술과 연금술의 좋은 접은 인식하고 그것은 받아들이려 했다. 즉 마술이 자연에 대해 가전 태도 중 사람이 자연을 제어굴l­ 고 변형시키며 자연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낼 수 있다는 생각은 받아 들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연에 관한 지식은 자연에 대해 힘을 지닐 것을 목표로 해야 하며,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은 다른 사물 둘을 얻어넬 수 있도록 조작될 수 있는 지석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이런 던에서는 베이컨을헤르메티씨즘의 전통으로부터 나 와서 그 나쁜 측면들을 버리고 좋은 접을 받아들이고 발전시켜 나 가려 했 다는 Frances A. Ya t es 나 Paolo Ross i의 해 석 은 적 철한 것 이 다. 27)

26) 주 11) 에 언급된 Ya t es 의 논문의 p. 266££ 참조. 27) 주 11) 에 언급한 Ya t es 의 논문과 주 25) 에 언급한 Ross i의 채 울 참조할 것 . Ross i의 책 의 부제 가 “From Mag ic to Scie n ce 입 을 수목할 만하다.

한편 베이컨은 이같은 마술과 연금술 대신 실제적, 기술적 지식、 올 그것이 공개적이고 객관적이며 인류의 복지를 위하며 협동적아

고 따라서 발전을 보여주었다고 해서 옹호 했 다. 그리고 그가 살펴 본 모든 부류의 지식 중 발전을 보여주는 유일한 예인 실개적, 기 술적 지식의 이같은 면을 과학이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 랬 다. 결국 과학혁명을 거치는 동안 데이컨의 이러한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마 술과기술및 과학사이의 관계는커다란변화가생기게되 었 다. 그. 동안 사회의 낮은 충에서 거의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 던 마술과 기술이 분리가 되어서 기술은 마술과의 연결 대,.(J. 그동 E 안은 분리되어 있던 과학과 연결이 된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본 바 람직한 면은 마술로부터 과학으로 받아들여쳐 가고 결국은 신비적 이고 미신적인 색채만이 마술에 남아서 낮은· 위치에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베이컨온 실제적, 기술적 지식이 발전을 보여주기는 하지 만 그 발전이 아주 느리고 순조롭지가 못함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 ­ 이유로서 기술적 지식에 올바른 방법이 결여되었음과 그에 따라 그­ 것이 최종의 결과를 얻는 데만 관십을 가지고, 일단 결과만을 어떻 게건 얻어내고 나서는 더 이상의 고찰은 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亨 그렇다면 과학은 기술적 지식의 본을 받되 올바론 방법을 얻어내어 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고, Novum Orga num 등에서의 베이컨의 방 법론적 논의는 이에 대한 해답인 것이다. 6 당시에 촌재하던 여러 부류의 지식들에 대한 위에서 본 것 같은­ 베이컨의 평가는 인류의 자연관 및 과학의 변천에 대한 다음과 같­ 은 베이컨 특유의 역사적 관접을 낳았다. 우선 그는 소크라테스 이 전의 철학자들은 올바론 방향으로 자연을 탐구하고 있었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풀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와서 자연 外的인, 즉 인간의 목적이나 관십이 과학에 들어오게 되고 이런 식으로 해서 인간 위’ 주가 된 꽈학은 찰못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중세 에 들어서서는 여기에 종교까지 섞여들어서 과학적 지식과 경쟁을 하게 되고 그에 따라 과학은 베이컨 자선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재

속 타락해 왔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 었다. 28 )

28) 이갈은 역사적 관정은 후에 과학과 기술의 칙접적 관계에 대한 Marx 주의 역사 학자둘의 관접으로 그대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이에 대해서는 제 10 장에서 더 다를 기회가 있을 것이다.

베이컨은 이같은 과학의 찰못됨과 타락을 분석해서 그 원인으로 서 네 가지의 페단을 지적하고 이것을 네 개의 〈偶像(i dol) 〉들――종 족(t r i be), 동굴 (cave ) , 시 장 (marke t pla ce), 극장(t hea t re) 의 우상들―― 이라고 불렀다. 먼처 종족의 우상온 한 종족 전체, 죽 전인류에 공 통된 페 단으로서 인간의 감각의 불완전성 , 인간의 이 성 (reason) 의 한계, 인간의 감정과 욕망의 영향 등에 의해서 인간에게 本有的으 로 존재하는 페단을 가리킨다. 다음에 동굴의 우상은 평생을 동굴 속에서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밝은 바깥 세상에 나왔울 때 드러내 게 될 판단이나 사고의 찰못에 비유한 페탄으로서 각각의 개인에 독 유한 주관과 선입견에 의한 페탄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런 되 1 단은 개인의 자질이나, 그의 생애에 있어서의 교육이나 습관 또는 다른 우연한 환경 등에 의해서 생겨나게 된다. 시장의 우상은 인간이 사 용하는 부호, 특히 언어 로부터 나오는 페 단이 다• 인간은 실제 사물 들에 일정한 단어와 이름을 붙여서 사용하는데, 찰못되고 적합치 못한 언어의 사용이 실제 사물들의 이해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끝 으로 국장의 우상온 학문의 체계나 학파로부터 생기는페단이다. 죽 자연현상을 그대로 보지 않고 하나의 학문체계나 학파에 여지로 맞 춰서 살피려 할 때 생기는 페단이 그것이다. 그리고 예를 들어 아 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은 이 네 가지 우상 모두의 페탄에 젖어 있으 며, 연금술과 마술은 주로 동굴의 우상, 그리고 원자론자들의 주장 온 주로 국장의 우상에 물들었다고 베이컨은 생각했다. 이같은 페탄에 대한 베이컨의 개선책은 및 가지 차원에서 나타났 다. 그러나 그가 가장 강조한 접은 위에서도 본대로 실제적 지식으 로부터 본받는__그 협동적이고 공개적이며 인류전체의 복지를추 구하는 점을-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덧붙여 새로운 방법을 수립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과학의 방법으로 그가 제시한 것 이 바로 그의 〈귀 납적 방법 (ind ucti ve me th od) 〉이 었다. 귀납적 방법은 많은 경험적 데이타를 분류하고 정리한 후 이로부

터 참다운 지식을 얻어내는 방법이다. 어떤 한 가지 문제에 대해 지 식을 얻기 위해서는 그와 관련된 무수히 많은 경험적 사실들을 수 집하고 분류하며 그것들을 순서에 맞춰 정리해서 그것들로부터 처 음에는 사소한 定理둘, 그리고 나중에는 가장 일반적인 정리들을 언어내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용해야 할 것이 적당한 취사선택의 방법이다. 죽 수집된 많은 사실들 중 여러 가지를 否定 해서 제의시키고 나면 결국은 받아들일 수 있는 적합한 경우가 나 타난다는 것이다. 한편 귀납적 방법이 지니는 힘에 대해서 베이컨 온 이와 같이 해서 얻어진 정리는 그것들을 얻게 해준 경험적 사실 둘의 단순한 合보다는 더 범위가 넓으며 애초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을 예측할 수도 있게 해준다고 했고 29) 이것을 그동안 의 귀납법에서의 단순한 경험적 사실들의 나열과 대비했다.

29) Prin c ip ia 서문에서의 New t on 의 유명한 이야기, 〈운동의 현상둘로부터 자연 의 힘을 탐구하고 이들 힘들로부터 다론 현상들을 보이려 한다〉는 바로 이런 귀납적 방법을 New t on 도 표방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귀납적 방법에 의해 얻게 될 결과들은 자연의 많은 현 상들에 대 한 <自 然史 (na t ural his t o ry) > 혹은 q円儉史 (exp er i men ta l h i s t or y)〉들이다. 예를 들어 열, 빛, 전기 등 여러 가지 현상 각각에 대해 모든 경험적 사실들을 수집, 정리해서 얻어내게 될 참다운 겅 험적 지석들인 셈이다 실제로 베이컨 자신이 여러 문제들에 대해 __生과 死, 밀도가 큰 것과 희박한 것, 무거움과 가벼움, 빛 등 에 대해__자연사들을 집필했고 후에 보일 같은 사람도 이러한 형 태의 연구를 했다. 그리고 과학혁명의 영향으로 진행된 18 세기 프 랑스 계 몽주의 사조 (En lig h t enmen t)의 가장 중요한 知的 사업 이 었 던 『백과전서』는 실제로 베이컨의 이같은 자연사의 방법을 모든 문제 들에 대해서 수행해냈다고 말할 수 있겠다 .30) 한편 이같은 방법의 과학연구는 자연히 한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게 되고 여러 사람 들의 협동을 필요하게 했다. 17 세기의 초기 과학단체들의 주역들이 거의 예의없이 강력한 베이컨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은 이 접에서 큰

30) 백 과전서 사업 에 대 한 훌륭한 논의 로 R. Darnto n , Th e Busin e ss of Enli'g h - tUenn miv ee nrst:i t yA PPruesbsl,i s 1h 9 i7n9g) 아H is 있t다 o .r y of the Encyc l op e die . 1775-1800 (Har,ard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31) 실제로 베이컨 자신도 그의 New At la nti :; 에서 과학자들의 이상향을 건설하고 과학연구의 시설과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실험을 하고 귀납적 방법을 사용해 서 과학연구에 종사하도록 하고 그로부터 유용한 지식을 얻어내어 이것이 인류 전체의 복지에 기여하게 하도록 하자는 안을 펴기도 했다.

31) 예를 둘어 Roy al Soc i e ty의 초기에 있어서의 Bacon 의 영향에 대해서 M. Pur-ver, TM Roy al Soc iety : Concept and Creati on (MIT Press, 1967), Part I, chaps . 2-3 참조할 것.

한편 베이컨은 앞서 본 네 개의 우상들에 대한 해결책도 제시했 다. 먼처 종족의 우상에 대해서는 감각에만 얽매이지 말고 이성 (reason) 을 사용하고 감각의 불완전성을 보충하기 위해 기구(i ns t ru­ men t)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다음 동굴의 우상에 대해서는 개인 의 주관이나선입견에 영향받지 않기 위해서 여러 사람의 협동과상 호비판을, 그리고 시장의 우상에 대해서는 말만이 아니라실제 물체 와 현상에 의지하기 위해서 실험을 할 것을 제의했다. 끝으로 극장 의 우상에 대해서는 어떤 체계나 학파에 매이지 않는 위에서 본 〈귀 납적 방법〉을 사용할 것을 강조했다. 결국 이런 석으로 해서 베이 컨에 의해 실험적 방법의 중요성이 주장되었을 분만이 아니라그방 법론적 기반이 주어전 것이다.

제 5 장 지식의 위기와 그 해결:데카르트와 기계적 철학 제 1 장에 서 다루었 던 〈우1 기 의 이 론 (Cr i s i s Thes i s) 〉에 의 하면 근세 초기에 유럽사회 전반에 걷찬 위기가 있었고 과학도 그 일환으로:위 기를 겪었었다• 그런데 이 과학의 위기의 밑바탕에는 보다 근본적 인 지 식 의 위 기 (int e l lectu al cr i s i s) 가 있 었고 이 장은 그에 대 한 논의 로부터 시작한다. 1 15, 16 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사회에서는 知的인 권위가 없어지고 지식에 대한 보장이 혼들리게 되었다. 어떤 지식이 참지식임을 보 장해 주는 근거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위기가 가장 현저하게 나타났던 것은 종교개혁 (Re fo rma ti on) 시기에 있어서의 성경해석의 문제에서였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가톨릭 교회 당국이 성경해석상 의 여러 문제를 결정했고 이의 권위가 그대로 받아들여쳐 왔었다. 그러 나 루터 (Marti n Luth e r, 1483 ― 1546) 가 이 를 거 부하면서 그를 대 체할 만한 새로운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ll 죽 자기 자신 의 해석과 관접만을 주장했을 분 그것에 대한 근거는 내놓지 않았 1) Lu t her 의 견해에 대한 논의로 E.G. Rup p, The Rig h te o 11S11essof G od:Luth e r S있t는u d i논e s 의(L 로on는do nG,. B 1. 95L3a)d 을n e참r, 조Th할e I만d하ea고 o f종 R교e개fo 혁r m 사: 상It s전 I반m에p a c관 t 한on C가h장ri s t권 i a위n T19h5o9u)g 가h t 있 a다n.d Acti on in the Ag e of Fath e rs(Harvard Univ e rsit y Press,

던 것이다. 이는 곧 교리상의 많은 논쟁을 낳았고 가톨릭 교회 당 국 내에서나 신교측의 여러 종파들에서 분쟁이 잇달았다. 2,

2) 종교개혁기의 지적 위기에 대한 간단한 논의가 R. H. Pop k in , The Hi st o ry of Skep ticism fro m Erasmus to Sp ino za(Univ e rsity of Cali forn ia Press, 1979), chap. 1 에 담겨쳐 있다.

그러나 지식의 위기에 보다 더 크게 영향을 미천 원인은 르네상 스 시기에 쏟아져 나온 많은 고대의 학파들과 학설들이었다. 아리 스토텔레스 일색이었던 중세의 학문에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과 풀라톤을 비롯해서 데모크리두스 (Democr it us, BC 5 세기 후반). 아르키 메 데 스, 파푸스, 칼레 노스 (Galenas, 130 ― 200 년 경 ) 및 고대 그. 리스 수학자들의 학설과 이론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15 세기 말부 터 16 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는 갑자기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해 서 마치 고대의 〈황금기 (go lden a g e) 〉가 다시 찾아온 것 같은 느낌 이었다. 더구나 이와 함께 새로운 바판적인 학풍이 동장하고, 라탄 어 번역이 아닌,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同化되치 않은, 그 리스어로 씌어전 원전을 읽게 되면서 고대에 아주 다양한 견해들 이 있었다는 것을 사람듈이 인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부터 촌 재하던 反아리스토텔레스적 경향들이 더욱 강해져 이 당시 떨찬 신 풀라본주의 (Neo-Pla t on i sm) 나 타무스 (Ramus, 1515 ― 1572) 의 反아리 스 토텔레스적 교육이론 3) 은 그 좋은 예로 볼 수 있다. 한편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다양한 견해들 사이에는 자연히 서로 들어맞지 않고 모 순되는 접둘이 있었고 그에 따라 이런 다양하고 서로 상반되는 이 론들과 학설들 사이에서 단일성, 통일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6 세기 말경의 시기는 많은 학설과 이론 들이 만발한 〈황금기〉이간 했지만 사람들은 이들로부터 어느 것을 믿고 어느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알지 못했고 아무런 지적 권위 (int e l lectu a l au t hor ity)가 촌재 하지 않는 지 식 의 위 기 를 맞이 했 던 것이다. 당시 유럽사회의 이같은 배경 속으로 들어와서 지적 위기를 더욱 심 화시 킨 것 이 고대 의 국단적 회 의 론 (ske pti c i sm) 안 피 론주의 (Py rr h·

3) Ramus 에 대한 좋은 논의 로 R Hooy k aas, H11manis m e, scie n ce et refo r me. Pie r re de la Ramee(IJ IJ- IJ7 2) (Leid e n, 1958) 이 있다.

on i sm) 이 다. 이 의 바탕이 되 는 피 론 (P y rrhon, BC 360-270 겅 ) 의 견해 가 섹스두스 엠피리쿠스 ( Sex t us Emp iri c u s, AD 2 제기 후반 ) 의 책 에 실 려 있는 것이 14,15 세기경에 발굴되어 소개가 되었던 것 이다 .4 ) 펴 돈은 아무것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학문, 지식, 교육 둥 모든 것을 공박했다. 이같은 그의 국단적 회의론에 의하면 전실이 나 참다운 지식은 있을 수도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기준 ( cr it er i on ) 이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감각은 믿을 수가 없으며, 설사 그것을 믿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 의부세계의 현상들이나 그 것 둘의 본질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또 수학도 그 자체가 전리일지는 모르지만 의부세계에 적용이 되는지는 알 수 ­ 없으며,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상단논법 (s y llo gi sm ) 도 아는 사 실에 바탕을 두고 그것을 전제로 해서 새로운 사실을 결론짓는 것 이기 때문에 결국은 불확실한 것을 바탕에 두었을 따름인 것이다.

4) P y rrhon 의 견해 를 핵 으로 굴 H 근 고대 회의론의 부활에 대해서는 수 2) 에 언급판 Po pk i n 의 책 , chap s. 2-4 에 논의 되 어 있 다 .

이같은 펴본의 회의론은 16 세기 말에서 17 세기 초에 들어 극히 성 했고 1620 년경에 이르러서는 지식에 있어서의 기존의 질서, 근거, 권위에 대한 否定과 파괴는 거의 철저랬던 반면에 그것들을 대체할 새로운 체계는 출현하지 못하고 있는상태였다. 여기서 우리에게 득 · 히 의미가 있는 것은 이런 일이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역시 혼동과­ 불확실만이 있던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했다는 접이다. 그리고 결국 이런 지적인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질서와 체계가 壘 얻어져야 한다는 생각―~지식의 위기를 해결하려는 생각-이 대 두하게 되었는데, 위기에 처한 구체적인 지식의 분야들의 예로 몇몇 과학분야들을 들 수가 있고 이들 과학분야들에서의 위기 해결의 ~ 력이 가장 눈에 띄게 성공적이어서 지식의 위기의 해결을 증명해 주· 고 예시해 준 것이 과학혁명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 회의론자들에 대항해서 지식의 위기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여러 차­ 원에서 괴해졌다. 첫번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근거해서 회

의론자들의 근본 주장 자체를 반격하는 것이다. 즉 보통 사람들이 보통의 경우에 정상의 감각기관에 의해서 얻어낸 감각은 믿을 만하 고 보통 사람들은 그들의 경험이 참인가 아닌가를 가릴 수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실제로 아주 업밀한 철학적 취향울 가전 사람들 울 제의하고 대부분 수긍하는 주장이었고 갈릴레오나 프란시스 베 이컨도 그런 부류에 속했다. 사실 앞 장에서 본 베이컨의 새로운 방 법론은, 그가 비록 퍼론주의자들과 같은 십한회의론에 빠지지는 않 았지만 그 나름대로 당시의 여러 학과들의 지식들이 지닌 불확실 함과 無用性으르부터 지식의 위기를 겪고서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회의론자들에게는 이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반격은 아무 힘을 지니지 못했다. 회의론자 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 자체를 거부하는 마당인데 그 체계내 에서 그들에게 반격하는 것이 제대로의 반격이 될 수가 없었던 것 이다.

,) 주 2) 에 언급된 Po pk i n 의 책 , chap. 7. 6) rsMeenrnsee nonue 의la 생na애is와 s a n사ce상 에d 관me한ca n가is장 m e완(P벽a 한ris , 논 1의94 논3) 이아 다직. 도 R Leonoble, Me-

,(M회i t i의ga 론 te d자 S들ke에 pt i c대 i s 항m)하 〉이는 라 두고번 째부 론시 도형 는태 로Po p나 k i 타n 이났 다.〈 완”화 된이 회입 의장 론을 취하는 사람들――완화된 회의론자들-온 회의론자들이 절대 확 실한 지석의 근거 및 그 가능성에 대해 지니는 회의를 완전히 받아 들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와는 별도로 철대 확실한 전리는 아니더 라도 어느 정도 확신이 가고, 蓋然性이 있으며, 실제 경험과도 부 합되는 진리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수학적 지식과 기계에 관 한 지식 등은 실제로 해답을 얻고 어떤 일을 행하게 해주는 지식으 로서 훌륭히 받아들일 수 있는 지식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초기의 데카르트와 그의 찬구이자 신부였던 메르센 느가 찰 보여주는데 여기서는 데르센느를 중십으로 살펴보기로 한 다 .6) 메 르센느는 無神論者, 理神論者 (de i s t), 마술종사자 등으로부터 가 톨릭의 믿음을 방어하고 교회의 권위를 옹호하려는 깊은 사명감을

가졌다. 그는 이같은 노력을 우선 자 연철 학으로부터 시작해서 바록 지엽적이기는 하지만 다방면에 걷찬 과학적 지석을 바탕으로 회의 본자들을 반격했다• 예를 들어 성경의 기적에 대해 과학적인 해석 울 가해 이를 기적이 아닌 것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의 과학의 내용 상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그. 는 자기 자신의 과학적 지식도 걷국은 굳건한 바탕 위에 있지 못함 을 인석하게 되었다. 죽 회의론자들의 주장을 그리고 그 주장이 가 지는 힘을 충분 히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론 한편으로 는 엄연히 지석이 존재하는 것에도 주목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사 람들이 지석을 사용해서 전물을 만들면 그것이 쓰러지지 않고 서 있으며, 기계 를 만들면 그것이 주어전 일을 해내며, 도 일정한 천 문학 지 식을 사용하면 천체의 운동을 기술해 내는데 이런 것들이 지석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는 반문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는 지석의 근거의 불가능성에 대한 회의론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한편 엄연한 지식이 있음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완화 된 회의론〉은 이런 서로 상반된 인식으로부터 그것들을 서 로 융합시키려는 노력에서 나오게 된 것이었다. 메르센느는 회의론 자들의 주장을 파고들어 그 중 약한 접 두 곳을 발견하고, 이것을 非회의론적 주장으로 만들었다. 우선 그는 회의론자들로 하여금 수 학이 실제 의부세계를 나타내 주는가 여부와는 별도로 그 자체로서 논 확실한 지식이라는 것을받아들이도록했다. 그리고는 그들로하 여금 실제로 사람들이 기계를 만들어서 그것을 움직이고 주어전 일 을 해낼 매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은__죽 환상이나 오류가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은_―사실임을 받아 들이도록 했다. 이 두 가지로부터 그는 결국 다음과같은 주장을 얻 게 되었다. 〈어떠한 지식의 체계이든지, 그것이 만약 수학적으로표 현이 되 어 있 고 무엇 을 얻게 해 주는 지 식 (op er ati ve knowled g e) 이 면, 죽 요구되는 작업을 하게 해주는 지석이면, 이 지식의 체계는 훌륭 한 지식의 기준을 만족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비록절 대 확실한 지식은 아닐지 모르지만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지식이라 논 것이다. 그리고 절대 확실한 지식을 요구하지 않고 실제로 충분

한 지식을 요구하는 이같은실용주의적 입장은 결국은 새로운과학. 새로운 과학자들로부터 받아들여 졌 고, 이것이 근본적으로 오늘날의 과학에서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입 장 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 완 화 된 회 의론자 〉 들의 실용주의적 견해는 처음부 터 받아들여전 것은 아니었다• 우선은 절대진리의 존재를 믿는 〈新 獨斷論 ( New Do g ma ti sm) 〉 이 나타나 한동안을 풍미하고서 쇠퇴한 후 에야 완화된 회의론자둘의 실용주의적 견해가 받아들여 졌 던 것이다. 그리고 이 〈 선독단론〉이 회의론자들의 주장에 대항해서 제시된 세번 째의 해결의 시도였다. 독단론자들은회의론자들의 주장에 정면으로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체계를 형성하려고 했다. 죽 〈 완화된 회의 론자 〉 들과는 달리, 인간이 실제 의부세계에 대한 참된 전리를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 이같은 독단론은 후기의 대카르트에 의 해서 대표될 수 있는데 이제 그에 대해서 다루기로 한다.

3 데카르트는 피론의 극단적 회의론의 주장과 그 힘을 완전히 받아 들인 후에야 그들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다고 믿었다. 즉 데카르트 논 누구보다도 지식의 위기를 철처히 인석하고 이의 완전한 해결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는 이 완전한 해결을 철대적인 전리만이 가쳐 올 수 있다고 믿고 그것을 얻어내려고 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체 계 적 의 십 의 방법 (meth o d of sys t e m ati c doub t)〉에 의 해 서 수행 되 었 다. 데카르트는 지식에 대한 절대 확실한 근거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전혀 의십할 나위없이 확실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머리속에 비쳐진 생각 의에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체계적 의십의 7) 희의론자둘에 대한 Descar t es 의 대항은 주 2) 에 언급된 Po pk i n 의 책, chaps . 10 -11 과 E. M. Curley, Descarte s ag a in s t the Skep tics (Harvard Univ e rsity Press, 1978) 에 나와 있다. Descar t es 의 철학에 대한 보다 일반져 인 논의는 E. Gi lson , Di sc ours de la meth o d: tex te e t commenta i r e (Paris, 1925); A. Koy re , Entr e ti en s sur Descarte s (Pari s, 1944) ; W. Doney, ed. , Descarte s : A Co/l ee- tion of Crit ica l Essays ( New_ York, 1967) ; A. Kenny, Descarte s, A Stu d y of Hi' s Phi/ os op hy ( N ew York, 1968) 등이 있고 보다 최근의 논의 인 B. Wi lli- ams, Descarte s : The Proje c t of Pure lnq ui r y ( N ew York, 1978) 는 Descarte e

방법 〉 이란 그런 목적하에서 조금이라도 의십이 가는 것은 하나하나· 차례로 부정해 나가는 방법이었다 . 이런 식으로 조금이라도 의십이 가는 것을 모두 부정하면 그래도 남는 것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 는 절대 확실한 생각일 것이라는 것이다. 이 방법에 의해 데카르트는 인간의 지식을 한 가지 한 가지씩 부 정해 나갔다. 우선 인간의 감각에 의한 경험이 정확지 않으므로 의 심할 수 있고 따라서 부정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어떤 의부의 존재도 의십하고 부정렀으며 십지어는 자신이 사는 세계가존재한다 는 것도 부정했다• 이 방법은 피론주의자들보다 더한, 생 각할 수 있 는 가장 극단적인 회의의 방법이어서, 데카르트는 결국 가장 정상적 이고 양호한 조건하에서 자신이 지니는 의석 자체도 그것이 어쩌면 악마의 놀음에 현혹되고 있을 수도 있다고 해서 의십하고 부정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을 부정한 후에 남게 된 것은 자신이 〈생각 한다 (co git o) 〉 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 생각의 내용은 악마의 속­ 임수일 수도 있어서 의십이 가능하지만, 생각한다는 사실만은 의십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전혀 의십할 수 없는 자신이 생 각한다는 바로 이 사실이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으­ 로 생 각했다 (co git o, ergo sum). 한편 이렇게 해서 자신이 생각한다는 사실을 철대 확실한 지식으. 로 받아들인 데카르트는 이 지식이 지닌 어떠한 독성이 그것을 의 십할 나위 없이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나를――즉 절대 확실 한 지석의 근거가 무엇인가를――듣게 되었고, 그 대답으로 이 지 식 이 지 닌 〈명 칭 성 (clarity , d i s ti nc t ness) 〉을 들게 되 었 다. 그리 고 다· 론 지식들도 이같은 〈명칭성〉을 지니면 참지식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은 이런 식으로 해서 참다운 지식의 기준이 얻어진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데카르트는 새로운 지식 의 체계를 구축했다. 우선 神의 존재와 그 完全性울 증명했고 그어 l 바탕해서 의부세계의 존재 및 여러 현상들에 관한 지식울 증명해 • 나가고 결국은 인간까지를 포함한 우주 전체에 대한 체계를 세웠던 것 이 다. 후에 가서 다루게 될 기 계 적 철학 (mechan i cal p h i loso p h y)은 바로 데카르트의 우주에 대한 이러한 지식체계의 바탕을 이룬 것야

었다. 이같은 데카르트의 지식체계는 아주 널리 받아들여졌고 특히 프 랑스에서는 17 세기가 끝 나도 록 까지 큰 영 향을 미 쳤 다. 그러나 이 큰 영향의 원인은 그것이 우주 전체의 모 든 물체와 현상을 포괄하 논 체계성을 지녔기 때문이었으며 위에서 본 인식론적 기초가 지닌 설득력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방법은 누구나가 수긍하고 받아들이 기에는 힘돈 약점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메문에 그의 우주에 관한 지석의 체계가 한창 받아들여지고 있던 동안에도 그 인식론적 기초 는 거부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의 방법의 결정적인 약접은 그 가 〈나는 생각한다〉는 지석이 지닌 〈명칭성 〉 을 모든 참다운 지석의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주관적으로 인식한 사실을 객관적 사실에 대 한 기준으로 사용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 기준은 그 자신의 〈체계적 의십〉의 방법을 사용해서도 쉽게 부정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데카르트의 방법은 회의론자들이나 反회의론자들 모두에 의해 서 반박되었다. 회의론자들의 눈에는 그가 주관적 독단론자로 보였 으며 반회의론자들에게는 가망없는 피론주의자로 보였던 것이다. 4 앞에서도 얘기한 대로 데카르트의 독단론적 입장은 한참을 떨치다 가 쇠퇴하고 결국은 그동안 널리 퍼져 간 〈 완화된 회의론자 〉 둘의 실 용주의적 입장이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것이 받아들여지게 되면 서는 참다운 과학지식의 기준에 대한 기대는 현저하게 감소되어서 과학자들은 더 이상은 절대 확실한 진리를 요구하지 않고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지식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그들이 과학 에서 묻게 되는 질문도 달라졌다. 더 이상은 의부현상의 本 體 , 목 적, 原因 같은 것에 대한 〈논의〉와 〈 證 明〉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타 現象의 의 적 효과에 대 한 〈記述〉과 〈섣명 〉 을 요구하게 된 것 이 다. 그리고 과학의 지식에 대한 입 칭이 이처럼 실용주의적이 된 17 세기 말쯤이 되어서는 그동안 철학의 일부였던 과학이 철학으로부터 분 리가 되었다. 이제 과학은 현상의 의적 효과에 대한 기술과 설명을 하게 되고 그 본체, 목적, 원인에 대한 논의와 증명은 철학에 남아

서 행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지식의 근거에 대해서 걷국은 〈완화된 회의론자 〉 들의 실용주의적 입장이 받아들여지게 된 데는 그것이 과학혀명의 결과로 출현한 새 로운 과학의 목성과 부합된다는 사실이 크계 기여했다. 그리고 이 독성은 지식의 위기와 그 해걷이 있던 시기에 발달된 새로운 수학 에 가장 찰 드러 나 있 다. 8) 〈 해 석 (anal y s i s) 〉 이 라고 불리 었 던 이 새 로운 수학은 문제의 해답을 얻는 것을 중요시해서 일단 얻어전 해 답이 옳은 해답임을 증명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기하학과는 대조적 이었다. 오히려 중세 아랍에서 발전된 대수학 (al g ebra) 이나 그 영향 으로 이태리의 상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 COSS 技法〉과 훨씬 가까운 방 법 이 었 다. 비 에 트 (Franc i s Vi et e , 1540 — 1603) 를 비 못한 새 로운 수학 자들은, 사실 그동안 수학에서 많은 것을 증명해 왔지만 더욱 중요 한 것은 오히려 증명할 사실들을 어떻게 알아내는가임을 강조했으­ 며 참다운 해석의 방법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9) 이같은 새로운 수학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역시 데카르트였 다. 그는 x, y, z 등을 未知數로 사용하는 관습이나 x 와 y의 곱을· x y로, x 의 제곱을 났으로 표시하는 등의 관습을 처음 사용해서 해 석적 논의를 간단하게 하고 수학적 구조의 파악을 아주 쉽게 했을 분만 아니라, 이런 관습을 사용해서 방정식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 __예 를 들어 방정 식 의 구조와 그 解 (solu ti on) 사이 의 관계 에 관한 이 론__울 발전시 켰 다. 10) 또한 그는 페 르마 (P i erre de Fermat, 1601

8) 이 시기의 수학의 상황에 대한 아주 간단한 소개가 M. S. Mahoney, The Ma- tlz emati ca l Career of Pi er re de Fermat J6 01-65(Prin c eto n Univ e rsit y Press, 1973), pp. 1-14 에 나와 있다. P.L. Rose, The Ita l i an Renais s ance of Math e mati cs. ' Stu d ie s on Humanis t s and Math e mati cian s fro m Petr a rclr to Galil e o(Geneva, 1975) 는 이탈리아를 중십으로 한 훨씬 상세한 논의이다. 9) V i e t e 를 중심으로 한 이 시기의 해석의 방법에 대한 좋은 논의가 주 8) 에 언급된 Mahone y의 책 , chap. 2 에 나와 있 다. 그 의 에 J. Klein , Greek Math e mati ca l Thoug h t and the Orig in of Alge bra(Cambri dg e Univ e rsit y Press, 1968) 과 M.S. Mahoney, Di e Anfl lng e der alge brais c hen Denkweis e im 17 Jah rhun-dert , Rete 1(1971), pp .15-30 은 이 시기의 대수적 방법의 발전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다. 10) Descar t es 의 수학에 관한 논의 는 J. Vuil lem i n, Math e mati qttes et meta p hy si q u e clzez Descarte s (Paris , 1960 ) 과 C.B. Boy e r, A Hi st o ry of Analyt ica l Ge<>- metr y ( N ew York, 1956) 에 나와 있 다.

― 1665)11) 와 함께 기하학적 곡선들을 대수적 수식을 통해서 다루게 해 주는 해 석 기 하학 (anal ytical g eome t r y)을 발전시 키 기 도 했 다. 한편 페 르마는 극대 (max i mum) 와 극소 (m i n i mum ) 의 개 념 을 발전시 켰으며 이 들을 바탕으로 후에 뉴돈과 라이 프니 츠 ( Go ttfri ed W ilh elm Leib n iz , 1646 ― 1716) 가 미적분법 (calculus) 을 고안해서 해석학의 완전한 성 립 울 가져오게 되었다 .12)

11) Ferma t의 수학에 관한 아주 좋은 논의로 주 8) 에 언급한 Mahone y의 책이 있 다. 12) 이 시기의 미저분법의 발전에 대한 논의는 C.B . Boy er , The Hi sto r y of the Calc11/11s and Its Concept ua l Develop m ent( N ew York, 1959), chap s. 4-5 에 나와있다 .

이렇게 발전이 된 새로운 수학이 자연현상의 記述에 있어서의 문 재에서 지니게 되는 힘은 바로 데카르트 자신에 의해서 보여졌다. 그의 『광학 (D i op t r iq ue) 』에 서 데 카르트는 빛 의 반사법 칙 과 굴철 법 칙 을 사용하고 그가 개발한 해석기하학의 방법을 사용해서 시력의 교 정에 사용할 렌즈의 곡면의 형태를 수학적으로 예측하고, 실제로 렌 츠. 깎는 기구를 고안해서 이 예측이 들어맞음을 증명해 보여주었 다. 13) 『광학』은 위 의 해 석 기 하학의 내 용을 담은 『기 하학 (Geome­ tr i e) 』 그리고 기계적 철학의 입장에서 많은 자연현상이 설명된 『기 상학 (M 毋 ores) 』과 한 책으로 1637 년에 출판되었고 위에서 본 것과 같은 데 카르트의 방법 론이 실 린 『방법 론서 설 (Di sc ours de la me t hod) 』 온 이 책의 서론 형석으로 발표가 되었는데 14) 눈의 작용과 시력에

13) Descar t es 의 光 學 에 관한 논의 는 A.I. Sabra, Theorie s of Lig h t fro m De sc - artes to Newt on (London, 1967), chap s. 1-4 에 실려 있다. Descarte s 이전 의 시력에 관한 논의들에 관해서는 최근에 아주 좋은 논의, D. C. Lin d berg, Theorie s of Vi si o n fro m Al-Ki nd i to Kep le r(Univ e rsit y of Chic a g o Press, 1976) 가 나왔으며 광학의 역 사에 관한 전반적 인 개 요로는 V. Ronchi, The Natu r e of Lig h t: A Hi sto r ic al Survey (L ondon, 1970) 가 있 다. ,14 ) 이 네 가지 처술이 역시 D. J. Olscam p의 번역으로 ( Ind i anap ol i s, 1965) 로서 한 권으로 출 판되었다. Descar t es 의 모든 처술이 C. Adam and P. Tannery, eds., Oeuvres de Descarte s , 12 vols. (Paris , 1897-1913) 에 실려 있으며 그의 서신들은 C. Adam and G. Mi lh aud, eds., Corresp ondence 에 실려 있다. 그 의에 Descar t es 의 저술들을 모아 영어로 번역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들 로는 E.S. Haldane and G.R .T . Ross, Phil o sop h ic al Works, 2 vols.(Cambrid g e Univ e rsit y Press, 1911); E. Anscombe and P.T . Geach, eds., Descarte s ' Phil os oph i c a l Writ ing s( lndia n ap ol i s, 1954) 등이 있다.

관한 문제물 수학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정확하게 기술하고 예측해 서 시력의 교정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는 면에서 큰 감동울 주었 다. 그리고 아렇게 수학적인 지식이 자연현상을 설명해 주고 그에 관련된 문제를 해결해 주는 능력이 있음울 보임으로써 〈완화된 최 의론자〉들의 지석에 대한 실용주의적 입장을 뒷받침해 준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데카르트의 독단론에 바탕한 지석체계도 그 인석 론적 기초로부터보다는 그것이 가지는 체계적인 우주에 관한 지식 때문에 큰 설득력을 지니고 널리 받아들여졌음을 보았다. 이 경우 에도 역시 일반적인 지식의 위기의 해결방법으로 제시된 그의 방법 론에 자연에 관한 지식이 뒷받침을 해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제 1 장에서 다문 과학혁명에 대한 〈 위기이론〉의 축소된 한 측면을 보 게 된다. 죽 지식의 위기의 일환으로 위기를 겪던 과학이 재로운 과학에 의해 자체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일반적인 지식의 위기의 해결을 뒷받침했다는 접이다. 그리고 이런 관접에서는 앞 장에서 다룬 베이컨도 결국 그 나름의 지석의 위기의 해결을 꾀하는 과정 에서 과학의 지식에 대한 새로운 방법론을 펴고 그것을 지식 일반 에 대한 방법론으로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5 지석의 위기를 돌이켜보면, 그 핵십이 되는 문제는 사람의 감각 과 실재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제였다. 즉 사람이 감각하는 것이 실제로 촌재하는 것을 정확하게 나타내 주느냐 하는 문제가 그것이 다. 이 문제에 관한 견해들은 고대에서부터 아주 다양했다. 우선 풀라돈은 인간이 실제 세계를 감각으로 지각해 낼 수 있는 능력을 부정하고 실제 세계에 대한 참다운 지식은 인간의 머리속에 있을분 인간의 감각은 실제 세 계 를 모방하는 영 상(i ma g e) 에 불과하다고 주 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풀라돈의 이같은 견해를 거부하고, 반대 로 유일한 지식은 의부세계의 현상으로부터 인간이 감각을 통해 얻 논 감각데이타 (sense da t a) 들로부터 얻어진다고 주장했다. 이는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홍미를 가졌던 분야인 생물학, 혹은 더 세분했을 때 비교생물학 자체가 매우 경험적인 분야이고 자연계의 관측데이

타에 전적으로 의촌하는 분야인 데서 연유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같은 주장에 바탕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색깔, 소리, 냄 새, 맛, 모. 양, 〈질감(t ex t ure) 〉 등 인간의 감각데이타를 모두 〈실재 〉 하는 것으 로 취급하고 더 이상 분석하려 들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아리스토 텔레스에게는 색깔, 소리, 냄새 같은 인간의 감각 으로 지 각하는 성 질들이 모두 〈일차적 성 질 (pr im ary q ual ity) 〉 이 었 던 것 이 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석이론에 대한 회의론자듄의 공격의 주된 표 적은 바로 이 접이었다. 즉 그 것이 믿을 수 없는 인간의 감각데이타 에 바탕랬다는 첨이었다. 데카르트는 1626 년부터 1629 년까지 집팔 한 그의 초기의 저서 『규칙들 (Rules) 』에서 주로 光學, 視力 및 인간 의 思考에 관한 견해들을 가지고 이러한 회의론자들의 공격에 대처 하려 했나 우선 그는 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 죽 의부 세계의 물체나 현상의 존재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실재하는 의부세계와 인간의 머리속 사이에 1 대 1 의 대응 관계가 있음울 주장했다. 이의 증거로서 그는 당시 새로 나온 케플 러의 시력에 관한 이론을 들었다. 즉 의부의 물체를 사람이 시력을 동해 지각했을 때 단순히 머리속에 그 물체에 대한 생각만이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물체의 한 점 한 접에서 나온 빛이 눈의 망막에 한 접 한 접씩 물리적인 상을 맺는다는, 다시 말해서 의부 물체와 사람 눈의 망막의 상 사이에 1 대 1 의 대웅관계가 있다는 것 이다. 여기서 더 나가서 데카르트는 단순한 감각이 아난 인간의 사 고는 이같은 상들의 결합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해서 인간의 사고를 의부세계에 실재하는 물체에 바탕을 두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시도에는 이내 문제가 생겼고 그것은 그 자 신이 그 형성에 크게 기여한 대수학에서 드러났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따 +l=O 이라는 2 차방정식은 x= 표라는 虛數로된 根울 가지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데 이것이 인간이 실재하지 않는 것을 생각해 넬 수 있는 능력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실재와 思 考 사이의 1 대 1 의 대웅관계는 깨어지게 되고 이에 따라 데카르트는 접 차로 대 수학이 실재 하는 물체 에 대 한 것 이 아니 라 관계 (rela ti on) 에 대한 것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인간의 머리는 이처럼 실재만이 야

니타 관계까지도 다물 수가 있고 다라서 의부제계의 실재와 머리~ 의 사고 사이의 정확한 대응을 포기해야만 했 던 것이다. 이와 같은 포기 이후 데카르트는 새로운 질문을 하게 되었다. 만 약 인간의 사고에 실재와 대응되지 않는 부분이 개입이 된다면 우­ 리의 사고의 일마만한 부분이 실제 의부세계의 감각으로부터 연유 했 는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먼저 그는 인간의 감각, 특히 視磁 과 관련해서 순전히 물리적 인 기구로 볼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주 목렀다 . 예컨대 렌즈인 눈동자와 망막 그리고 그 사이의 공간으­ 로 이 루 어진 인간의 눈은 마치 카메라와 같은 역할을 하고 이것은­ 순전히 물리적 기구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외부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식에 착각이나 오류가 있다면 그러한 착각이나 오류는 물리적 가 구로 볼 수 있는 눈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망막의 상이 머리에 의해서 읽혀지는 도중, 죽 두뇌를 통한 판단의 과정에서 일어난다­ 고 결론지었다. 여기시 데카르트는 또 그 특유의 인식론적 방법을 사용했다. 즉 · 위와 같은 감각과 관단에 있어서 누구라도 결코 의십하거나 부정하­ 지 못할 절대 확실하고 〈 명칭한〉 요소가 무엇인가를 찾은 것이다. 그 대답으로 데카르트는 의부세계에 위어 1 본 물체에 대웅이 되고 망 막의 상의 원인이 되는, 일정한 공간을 접하는 그 무엇이 촌재하는 것은 분명함을 주장했다. 처음 그는 이것을 그것이 접하는 공간과 그 한도를 뜻하는 〈外延 (ex t ens i on) 〉이라는 말로 부르다가 곧의부세 계의 모든 공간이 결국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음을 근거로 해서 〈의 연〉이 바로 물질임을 결론지었다. 데카르트는 또 의부세계에 이같 온 물질 의 에 도 운동 (mo ti on) 이 실재 하는 것 이 분명 함도 주장했다. 의연, 혹은 물질로 이루어진 의부 물체의 상이 망막에 전달되는 것 은 반드시 무엇인가의一―이 경우에는 물론 빛이 되겠지만――움직 임에 의한 것이 분명하기 대문이다• 결국 이런 식으로 해서 의부세 계 에 서 가장 근본이 되 고 철 대 확실한 실재 로서 물질 (ma tt er) 과 운 동 (mo ti on) 이 얻어진 것이다. 그리고 물질과 그것의 운동, 이 두 가 지 요소가 바로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의 근본요소가 되었다.

6 일단 의부세계에 실재하는 근본요소로 물질과 그 운동을 想定하 고, 따라서 의부세계의 모든 것이 그 두 가지로 이루어쳐 있고 그 두 가지로 설명이 됨을 주장한 데카르트는 그에 바탕해서 의부세계 의 모돈 물체, 성질, 현상을 실제로 물질과 그 운동으로 설명하는 자연철학 체계를 세웠다. 그리고 이에 따라 위에서 본 것처럼 색깔, 소리, 냄새, 맛 둥을 실재로 규정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반대해서 이 것들이 모두 그런 성질을 내는 물체를 이루는 아주 미세한 물질입 자들의 결합과 그것들의 운동상태에 의해 설명이 됨을 주장했다. 우선 물질에 관한 그의 견해J S) 논 의부세계가 전공이 없고 완전히 곽 찬 物質空fa ~ ( p lenum) 의 상태 라는 생 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 서 의부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물질입자들로 구성되어 있 고 물질입자들 사이의 공간도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작은 물 질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 런 식으로 세 종 류의 물질입자들을 설정했다. 한편 물질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운동을 취급하기 위 해 그는 세 개의 기본이 되는 운동법칙들을 설정했다. 다음 장에서 자세 히 다루겠지 만 그가 세 개 의 〈자연의 법 칙 (law of na t ure) 〉둘이 라 부론 이 제 개의 법칙들이란 다음과 같다 16)•

15) 물질에 관한 Descar t es 의 견해에 대한 간단한 논의는 Marie Boas, The Esta · bli sh ment of the Mechanic a l Phil o sop h y , Osir i s 10 (1952), pp. 413-541 을 참조할것. 16 ) 주 14) 에 언급된 Adam and Tannery, eds., Oe11vres, vol. 9, pp. 84-6,

첫째, 모든· 물체는 다른 것이 그. 상태를 변화시키지 않는 한똑같은상태 에 남아 있으려 한다. 둘째 , 운동하는 물체 는 직 선으로 그 운동을 계 속하려 한다. 세째, 운동하는 물체가 자산보다 강한 것에 부딪히면 그 운동을 잃지 않 고, 약한 것에 부딪혀서 그것을 움직이게 하면 그것에 준 만큼의 운동을 잃는다. 처음 두 법칙은 관성의 법칙이고 세째 법칙은 데카로트가 〈운동의 양(q uan tity of mo ti on) 〉이 라고 부론 양의 보촌을 나타내 는 법 칙 인 것

이다. 데카르트는 이 법칙들을 바탕으로 해서 빛, 중력, 천체의 운동. 인체의 작용 둥을 포함한 전우주를 물질입자와 그 운동을 통해 설 평했다. 그 중 그는 빛을 가장 중요시했는데 빛의 直進하는 성질과 그 움직임이 즉각적인 접을 들어 빛을 물질 자체의 운동이 아니라 운동의 〈압력 (p ressure) 〉으로 보고서 그에 바탕해 서 반사와 굴철의 법칙들을 얻어내었다. 한편 천체의 운동과 중력의 문제에 대해서 는, 〈소용돌이 (vorte x )> 이 론이 란 것 을 동해 우주가 태 양 주위 , 그. 리고 여러 천체 주위의 물질입자들의 〈소용돌이〉에 의해 이루어졌 다고 보고 이런 〈소용돌이〉 운동울 하는 물질입자들의 遠心的 壓力 (centr i fu ga l p ressure) 에 의해 천체의 궤도가 결정이 되고 중력의 효 과가나타난다고 설명했다 .17) 물론그의의 자연세계의 모든현상 과 성질들도 이와 같은 〈기계적〉 형태로――물질과 그 운동만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으며 실제로 많은 구체적 현상들과 성질들에 대한 그 같은 설명들이 앞서 언급한 『기상학』에 실려 있는 것이다.

17) Descar t es 의 vorte x 이론에 관한 논의로는 E.J. Ai ton , The Vorte x Theory oJ Planeta r y Moti on s(London: MacDonald, 1972), chap . 3 가 있다.

7 이같은 기계적 철학의 입장은 데카르트 한 사람만의 것은 아니었 고 데카르트 시기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주장되던 것이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에 의해 주장된 기계적 철학이 그 구체적인 내 용에 있어서는 서로 크게 다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 데카르트를 중십으로 기계적 철학을 논의하는 것은 그가 기계적 철학을 가장 근본적으로 논의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전우주에 관한 지 석 의 체 계 _혼히 〈데 카르트의 체 계 (Carte s ia n s y s t em) 〉라고 불려지는――를 형성시켰기 때문이다. 기계적 철학의 기원은 기원전 5 세기 후반의 레우키푸스(L euc ipp us) 와 데 모크리 두스에 의 해 유래 한 고대 의 원자론 (a t om i sm) 으로 거 슬러

올라간다. 18) 16 세 기 중엽 쯤에 는 이 들과 에 피 큐루스 (E pi curus, BC., .34 1-270), 루크레 티 우스 (Lucre ti us, BC. 95 一 55 경 )의 원자론적 견해 들 이 유럽 에 널리 퍼 지 게 되 었 다. 주로 르네 상스 인문주의 (Renais sa nce Human i sm) 의 영향에 의한 고대 그리스 문헌의 발굴의 일환으로 이 들의 처 숟둘이 서 유럽 에 전해 지 게 되 고, 특히 디 오게 네 스 (D i o g enes Laer ti us) 의 『철학자들의 생 애 』에 담간 고대 원자론의 내 용은 널리 알려졌던 것이다. 그러나 고대 원자론은 당시의 유럽사회에 받아들 여지기 위해서는 중요한 문제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고대 원자론이 지닌 無神 論 的인 경향이었다. 죽 무한한 眞 空인 우주에 무한히 많고 각양각색인 물질입자__原子-가 임의로 무질서한 운동을 계속하며, 이들 원자들이 그같은 운동을 하려는 경향이 원 자둘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라는 원자론의 주장은 신이 준비해 준 조 화와 질서와 有限의 우주라는 개념에 젖어 있던 사람들에게는 충격 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대 원자론을 유럽사회가 받아들이기 위 해서는 이같은 무신론적 경향을 벗어나서 신과 종교에 이 이론을부 합시키는 일이 어떤 식으로라도 이루어져야만 했다.

18) E고a대r ly원 G자r론ee에k P관hi한l o s간op단 hy한 ( B o논s의to n 로: 는H ouJg.M h t.o n R oMbii nf fsl oinn,, 1A96n8 ),I nchtra op ds u. c t1i0 o-n1 1.t o

고대 원자론에 신의 개념을 도입해서 이같은 일을 수행하는 것은 결국 데카르트와 보일에게 맡겨졌는데 이들에 앞서 기계적 철학의 기본 입장을 처음으로 뚜렷이 제시한 것은 갈릴레오였다. 갈릴레오 는 일차적 성 질 (pr im ary q ual ity)과 이 차적 성 질 (secondary q ual ity)을 구벌하면서 크기 , 모양, 운동, 數, 배 열 (con fig ura ti on) 과 같이 아무 리 해도 물질 자체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성질, 죽 물질 자체 의 성질을 일차적 성질로, 그리고 색깔, 맛, 냄새, 소리처럼 물질 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성질들을 이차적 성질로 불렀던 것이 다. 물론 이것은 갈릴레오가 명확히 기계적 철학의 입장을 취한 것 을 보여준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이것을 자신의 과학의 근거로 삼 지는 않았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한 과학의 체계를 세우지도 않았다. 또한 갇릴레오는 기계적 철학이 지니는 문제접둘-특히 위에서 본 무신론적 경향-에도 벌 관십을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갈릴레오

의 기계적 철학은 그의 사상과 과학의 핵십을 이운 것이 아니었고 물리적 성질들에 대한 일시적인 철학적 고찰에 지나지 못했던 것 이다. 이에 반해 데카르트와 보일에게는 기계적 철학이 그들의 사상과 과학의 기초를 이루었다. 목히 이들은 기계적 철학을 신에 대한 믿 음과 적응시키기 위해 기계적 철학의 근본 주장에 신울 도입했다. 즉 신이 물질을 창조했고 그것에 운동을 부여했으며 그 운동을 브 존해 줄 분만 아니라 그 운동이 만족해야 할 법칙도 마련하고 그것 을 유지시켜 준다는 것이다. 앞에서 본 데카르트의 세 개의 운동법 칙들은 이렇게 신에 의해 만들어진 법칙들이었던 것이다. 이들 중 데카르트는 한 걷음 더 나아가서 전공의 존재까지도 부인하고 전우 주가 물질로 꽉 차 있는 〈물질공간(p lenum) 〉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 장했음은 이미 보았다. 또한 그는 원자론자들과는 달리 물질입자의 더 이상 쪼겔 수 없는 궁극적 단위 __- 원자_~ 존재를 거부하고 신은 원한다면 물질입자를 얼마든지 쪼겔 수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보일은 특히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기계적 철학을 주장했다. 〈기 계 적 철학 (mechan i cal p h i loso p h y)〉이 라는 이 름 자체 가 보일로부터 연 유했으며 기계적 철학을 얘기할 때 가장 전형적으로 보일이 머리에 G떠a오sse르nd게i, 1된59다2— .1196) 55 이) 같접은은 사보람일들의의 시 업기 적에 에는 데의 카해르 트기, 계 적가 쌍철디학 (이P i er이re 미 어느 정도 받아들여쳐 있었던 사실과도 관계가 있다. 득히 보일 온 수많은 실험을 동해서 기계적 철학의 타당성을 주장했다. 물론 눈에 보이 지 않는 미 시 적 (mi cr oscop ic) 물질 입 자들의 작용과 운동을 통해서 거시적 (macrosco pic) 인 물리적 성질들을 설명하는 것은 당시 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보일이 직접 실험을 동해 물리 적 성질들에 대한 구체적인 기계적 설명과 메카니즘 (mechan i sm) 을

19) Bo y le 의 기계적 철학에 대해서는 주 15) 에 언급한 저술 의에 M.B. Hall, ed., Robert Boy le on Nat1 1 ral Ph ilos op hy (l ndia n a Univ e rsit y Press, 1966) 과 Robert H. Kargo n , At om i sm i11 Eng la nd fro m Hario t to Newt on (Ox for d: Clarendon Press, 1966), chap. 9 를 참조할 것 . Boy le 자신의 처 술은 Thomas Bir c h, ed., The Works of the Honourable Robert Boy le , 6 vols.(London, 1772) 에 수록되어 있다.

제시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실험들은 기계적 철학과 반대가 되는 아리스토텔레스나 전통적 화학자들의 이론이 타당하지 못하다 는 것을 찰 보여주었으며 ,20) 실험결과들을 발표하면서 제시한 그의 논의들은 기계적 철학의 타당성과 설명 가능성을 역설해 주었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은 보일이 실험을 통해 기계적 철학을 입증 했다고까지 믿게 되었다. 물질과 그것의 운동으로 자연세계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기계적 철학은 모든 자연현상을 물질과 운동으로 드 러냄으로써 실험에 의해 검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17 세기 후반의 새로운 과학을 지칭하면서 〈자연철학 (natu ral ph il o sop h y )>, 〈기 계 적 철학〉, 〈실험 적 철학 (exp er i men t al ph i loso p h y)〉이 라는 말들이 거 의 同義語인 것 처 럼 사용된 것 은 이 런 상황을 나타내 준다. 보일의 시기에 이르러서는 기계적 철학과 실 험적 방법은 새로운 과학의 완전히 확립된 부분들이 된 것이다.

20) 예 를 둘어 Keit h Hutc h is o n, What Hap pe ned to Occult Qu ali ties in th e Scie n ti fic Revoluti on ?, Isis 73 (1982), pp. 233-53 을 참조할 것 .

제 6 장 역 학의 혁 명 : Il 데 카르트에 서 뉴튼까지 제 3 장에서 우리논 역학의 혁명에 대한 논의를 갈릴레오의 여학의 한계에 대해 언급하면서 중단했다. 갈릴레오의 한계를 넘어섰던 데 카르트의 역학에 대해서 취급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바탕이 되는 기 계적 철학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 했었기 때문이다. 앞 장에서 주­ 로 데카르트를 중십으로 기계적 철학을 논의했으므로 이제 다시 역 학의 논의를 계속할 수가 있게 되었다. 1 데카르트 역학은 관성(i ner ti a) 의 원리를 기초로 해서 세워졌다.l)> 그리고 갈릴레오의 경우와는 달리 데카르트는 직선관성운동의 개념 을 명확히 제시했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이같은 관성의 개념을 얻 어낸 과정은 역시 그의 기계적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1) Descar t es 의 역 학은 제 5 장 주 15) 에 언급된 Oeuvres de Descarte s , vol. IX 에 실려 있는 Prin c ip es de la ph il o sop h ie (1647) 에 담겨 있다. 그에 대한 현뱌 의 논의 로논 제 3 장 주 1) 에 언급된 Westf all , Force in Newt on 's Phys i c s . chap. 2 문 참조할 것 .

우선 데카르트는 자연세계의 모든 현상의 근원인 물질의 운동의 원인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물질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성질이나 活性 (ac ti v ity)을 지니지 않았으므로 물질 자체가 그것의 운동의 원 인이 될 수는 없었다. 데카르트는 결국 神울 물질의 운동의 기원~

로 보게 되었다. 죽 신이 물질을 창조하고 그것이 운동하도록 해주 었다는 것아다. 다음에 데카르트가 뭄게 된 질문은 운동을 지속시 켜 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다. 역시 물질의 불활성은 그렇 게 운동을 지속시켜 주는 것은 아무것도 있을 수 없게 했기 때문이 다. 데카르트의 관성의 개념은 이 문제에 대해 답하는 과정에서 나 타났다. 운동을 지속시켜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운동은 물질 이 처하는 하나의 상태이고 의부의 작용이 없는 한 물질은 자신의 운동의 상태를 그대로 지속하려는 경향_—관성-울 지닌다고 보 게 된 것이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이 관성의 원리를 신의 永遠不 裝 性에 의존해서 주장했다. 영원불변인 신은 자신이 창조한 물질에 자신이 부여한 운동도 불변하도록 유지하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앞 장에서 언급한 데카르트의 제 1, 제 2 법칙이다. 한편 운동하는 물체에 의부에서 작용이 가해지면 그 운동의 상태 는 변화한다• 그러나 신은 이러한 변화도 아무렇게나 일어나게 하 는 것이 아니타 작용을 가하는 물체와 작용을 받는 물체의 운동의 합은 일정하도록 유지해 준다. 이를 위해 데카르트는 〈운동의 양 ,(q u anti ty of mo ti on) 〉이타는 양을 정의해서 운동의 쳐도로 사용했다. 그 크기는 운동하는 물체의 〈물질의 양(q uan tity of ma tt er) 〉-죽 質 墓―과 속력의 곱 (mv) 으로서 나타내어졌다. 그리고 이 새로운 양 울 사용하면 앞 장에서의 데카르트의 제 3 법칙은 운동의 양의 보존 의 법칙이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갈릴레오에서는 등속원운동에 제한되어 있던 관성의 개념은 데카르트에 의해 오늘날 우리의 관성의 개념처럼 직선운동 에 적용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데카르트는 갈릴 레오의 역학에는 아직도 존재하던 〈자연스러운 운동 (na t ural moti on )> 과 〈비 자연적 운동〉 또는 〈강제 된 운동 (v i olen t mo ti on) 〉의 구분도 타파했다. 모든 운동을 〈운동〉이라는 접에서 동일하게 취급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에 따라 운동의 정의도 명확하게 상대적이 되었다. 철대적인 운동이란 존재할 수가 없고 한 물체가 다론 물체에 비해 상대적인 위치가 달라지는 것을 운동으로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체 A 와 B 의 상대적 위치가 달라지면 A 는 B 에 대해, B 는 A 에

대해서 운동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 B 가 정지해 있고 A 가 운 동한 것인지, A 가 정지해 있고 B 가 반대방향으로 운동한 것인지, 또는 A 와 B 가 둘다 운동한 것인지를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이렇 게 〈운동〉이 상대적이 되면서 〈운동〉 과 〈 정지 〉 의 업격한 구별 같은 것은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물체는 운동을 위해 運動 原因 (mover) 을 팔요로 하고 운동원인이 없으면 정지한다는 아티스 토텔레스의 역학과는 완전히 다른 역학체계가 이렇게 형성이 된 것 이다. 2 운동에 관한 데카르트의 논의에서 그가 가장 중요시 여기고 자세 히 취 급했 던 것 은 〈충 돌(i m p ac t )〉 의 문제 였 다. 그리 고 그 이 유는 쉽 게 침작할 수 있다. 물체의 운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의부 의 작용에 의해서 분 이고 그러한 의부의 작용은 물체간의 직접충돌 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칙접 접촉하는 충돌에 의하 지 않는 작용은 서로 거리가 떨어전 것들 사이의 작용, 소위 〈분리 된 상태 의 작용 ( ac ti on at a d i s t ance) 〉 이 고 이 러 한 작용을 받아들이 는 것은 기계적 철학이 강력히 거부한 신비스러운, 초자연적인 작용을 다시 가정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데카르트의 〈물 질공간 〉 에는 진공이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분리된 상태의 작용〉 온 그에게는 더욱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데카르트가 충 돌의 문제를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충돌에 관한 그의 논의는 그로 서는 드물게 보는 定量的 성격까지 며었고 그의 7 개의 충돌법칙 들이 이를 보여준다.” 이 충돌법칙들은 물론 그의 운동법칙의 주 된 요소들-죽 물체가 그 자체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 그리 고 그렇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운동의 양의 보존의 경향-에 바 탕했다. 따라서 물체는 충돌을 겪고 나서도 계속 같은 상태를 유지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두 물체가 서로 충돌했을 때 항상 둘 다

2) 주 1) 에 언급한 Prin c ip es , par t D, pa rag ra p h s 45-53, Descar t es 의 충돌법 칙 에 대한 간단한 논의로 Desmond M. Clarke, The Imp ac t Rule of Descarte s ' Phy si c s , Isis 68(1977), pp. 55-66 이 있다.

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운동하는 작은 물체가 정지해 있는 큰 물체를 만나면 그운동을 그대로 유지할 것이다. 왜 냐하면 큰 물체의 정지해 있으려는 경향이 작은 물체의 움직이려는 경향보다 클 것이고 따라서 작은 물체가 큰 물체를 움직일 수 없으 며, 큰 물체의 운동의 양이 그대로 있으면 작은 물체의 운동의 양 에도 변화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물체는 정지해 있 는 큰 물체가 그것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원래의 방향으로 운동 을 계속할 수도 없다. 결국 데카르트는 작은 물체가 충돌 후 반대 방향으로 원래의 속도로 되튀어나간다는 결론을 얻어낸다. 이 결론 의 이해에 중요한 것은 데카르트에게는 속도가 크기와 방향을 지닌 〈벡 터 (vecto r)> 양 이 아니 고 크기 만 있 는 〈스칼라 (scalar) 〉 양이 라는 점 이다. 그렇게 되면 아 경우에 있어 충돌 전후의 운동의 양(속도와 질량의 꼽)은 보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충돌의 제 4 법칙이다(그립 1 참조). 이 반대의 예―一-정지해 있는 작은 물체에 운동하는 큰 물 체가 충돌하는 경우-에 대한 데카르트의 결론도 감은 형태로 얻 어졌다. 이 경우에는 큰 물체의 운동을 계속하려는 경향이 작은 물 체의 계속 정지해 있으려는 경향을 이겨넬 것이므로 작은 물체를 움칙이게 된다. 그러나 이대 작은 물체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것 이 얻은 만큼의 운동의 양을 큰 물체가 잃어야 한다• 따라서 충돌 후 큰 물체와 작은 물체는 처음 큰 물체가 지녔던 것보다는 작은 속도로 같이 운동을계속하게 된다 (그림 1, 제 5 법칙). 그리고 그의의 다른 법칙들도 모두 이런 식으로 얻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데카르트의 충돌법칙들은 순전히 이론적인 사고에 의해서 얻어졌고 실제 충돌현상과는 어굿난다. 설제로 제 1 법칙만율 제외하 떤 이들 법칙들은 정확히 옳은 법칙들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데카 르트의 충돌법칙들의 오류는 호이겐스와 라이프니츠에 의해서야 명 확히 지적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적된 과정도 실험이 아닌 이론 적 추론에 바탕했었다. 이를 위해 호이겐스와 라이프니츠는 운동에 대한――그리고 더 넓게는 자연현상 전반에 관한――근본적인 일반 원리들을 사용했다. 호이겐스는 제 3 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갈릴레~ 가 처음 사용했고 데카르트가 더욱 분명히 표현해 준 운동의 상대

1

2 _O.., V1m 1=> m V 2z O ._ 一

367 _-0_O。.-vm。下。+. Vll.mv1m= 1111 >=m ,vm 0 v !mv 므!2m!.:2I- I2 .O v l. . 4 5 -수\f l v2= 0 一 v:m2 V1-_ _.Vi 그 립 I Descar t es 의 충돌법 칙

성의 관념을 사용해서 데카르트의 충돌법칙 의 오류를 밝혔다 .3: 이 관념에 의하면 충돌하는 물체들을 운동하는 좌표계에서 관측했 을 메에도 정지한좌표계에서와똑같은 충돌법 칙들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법칙들은 운동하는 좌표계에서는 정지해 있는 좌표계와는 다른 결론들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제 2 법칙에서와 같 이 큰 물체와 작은 물체가 같은 속도로 충돌하는 것을 큰 물체와 같은 방향, ` 같은 속도 (v1) 로 운동하는 배 위 에 서 관측하면, 제 4 법 칙 에서와 같은 충돌로-정지해 있는 큰 물체에 작은 물체가 충돌하 논 것으로――보일 것이지만 충돌 후의 결과는 제 4 법칙의 결과를 좇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두 법칙 중 적어도 하나는 찰못되었 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한편 타이프니츠는 자연세계 에 있어 원인에 있어서의 연속적인 변화는 결과에 있어서도 연속적 인 변화를 낳아야 한다는 〈 연속성 의 원리 (pr in c ip le of con ti nuity)〉를 사용했다 .4) 그에 의하면 데카르트의 제 2 법칙에 나타난 충돌의 결 과는 m1 의 크기 가 m2 의 크기 에 접 근해 감에 따라 m 훈} m2 가 같은 경우, 족 제 1 법칙의 경우의 결과에 접근해 가야 한다. 그러나 데카 르트에 있어서는 m 이 m2 에 비해 조금이라도 크면 계속해서 두 물 체는 함께 운동하다가 m1 이 m2 와 같아전 순간 갑자기 두 물체가 반 대방향으로 튀어나가게 된다. 이것은 연속성의 원리에 위배되며 결 국 제 1 법칙과 제 2 법칙 중 적어도 하나는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얻게 되는 것이다.

3) Hu yg ens 의 역 학에 관한 논의 는 주 1) 에 언급된 Westfa ll , Force in Newt on 's Phys i c s, chap . 4 참조. Huy ge ns 자신의 역 학의 처 술은 Chris ti aa n. Huy ge ns, Oeuvres Comp le ts , 22 vols. (La Hay e, 1888-1950), vol. 16 (De molt t cor- por um ex p ercuss i one) 에 실려 있다. Hu yg ens 에 관한 최근의 s y m p os i um 의 걷과가 실란 H.J. M . Bos, et al, eds., Stu d ie s on Chris t i aa n Huyg e ns (Lis se : Swets & Zeit lin g er , 1980) 도 그의 역 학에 관한 좋은 논의 를 담고 있 다. 4) Le i bn i z 의 역 학에 관한 논의 는 수 1) 에 언급된 Westfa ll , Force in Newt on 's Phys i c s , chap. 6 의 에 Pie rr e Costa b el, Leib n iz et la dy na mi q11 e (Paris : Hermann, 1960), 영역판 Leib n iz and Dy na mi cs (London: Meth u en & Co., 1973) 을 참조할 것 . Descar t es 의 충돌법 칙 의 오류에 관한 연속성 의 원리 를 사 용한 Le i bn i z 의 논의 는 Nouvel/ es de la rep ub /i q11 e des lett re s (February, 1687), p. 139 에 있음•

데카르트의 충돌법칙이 지닌 이턴 오류는 데카르트 체계 내에서

역학이 지니는 진정한 우 1 치와 의미를 말해 준다. 즉 위와 같은 찰 못을 데카르트가 범할 수 있었고, 데카르트의 추종자들에 의해 꽤 오랫동안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데카르트와 그 추종자들의 역 학에 대한 관십이 충돌과 같은 구체적인 운동에 관한 문제를 풀어 내는 것보다는 데카르트 체계의 포괄성을 보여주는 데__즉 그 체 계에 바탕을 두고 역학의 모든 문제, 그리고 자연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一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 은 구체적인 충돌의 결과가 어떻게 일어나느냐는 구 체 적이고 세부 적인 문제보다는 가능한 모돈 충돌의 겅우를 다 포괄할 수 있는 법 칙의 체계가 있음을 보이는 것에 더 관십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던에서 데카르트의 역학은 역학 자체를 위한 역학이 되지 뭇 하고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 체계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고 얘기할 수있다. 3 데카르트 역학의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원운동의 문제였다. 물 론 데카르트는 직선관성운동의 개념울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는 원운동은 관성운동이 아니었고 〈자연스러운 운동〉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원운동은 가장 중요한 운동이었다. 왜냐하면 앞 장에서 본 대로 그의 우주구조 자체가 원운동하는 물질입자들의 소 용돌이 (vor t ex) 들로 이 루어 진 소용돌이 이 론에 바탕했기 때 문이 었다. 또한 데카르트에게 원운동은 팔수적이기도 했다. 역시 앞 장에서 본 대로 데카르트의 우주는 물질로 곽 찬 __- 전공이 있을 수 없는 ―〈물질공간(p lenum) 〉이었고 그에 따라 모든 운동은 순환적 (c i rcu ­ lar) 이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원운동에 대한 데카르트의 관십은 주로 원운동하는 물체가 지난 원 십 적 경 향 (cen t r ifug al t endenc y)에 주어 졌 다. 줄에 돌을 매 달아 돌 리면 밖으로 잡아당김을 느끼는 것은 이런 원심적 경향 때문이고. 그 때 문에 물체 가 줄의 속박으로부터 벗 어 나면 원운동을 계 속하지 않고 接線方向으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자연세계의 가장 중요한 현상들인 빛과 중력에 관한 데카르트의 설명은 원십적 압력 (centr i-

fuga l p ressure) 을 통해 서 주어 졌 다. 그러나 원운동과 원십력에 관한 데카르트의 논의는 본질적으로 定性 09 인 차원에 머물러 있었고 이것을 定 批 09 인 논의로 발전시킨 것은 역시 호이겐스였다 .5) 호이겐스는 위와 같은 원심적 경향을 〈遠心力 (cen t r ifug al fo rce) 〉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호이겐스에게는 원 심력은 〈무게〉와 같은 靜力學的 개념이었다. 마치 무게를 줄에 매 달면 밑으로 잡아당기는 힘을 가지듯이 원운동을 하는 물체도 바깥 방향으로의 힘을 가지는 것이다• 호이겐스에 의한 원십력과 중력과 의 類推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중력에 의한 자유낙하운동 에 있어서의 낙하시간과 낙하거리와의 관계 〈 soc t 2 〉가 원심력에 의해 원으로부터 벗어나는 가상적 운동의 시간과거리 사이에도 적용됨을 보였던 것이다. 그림 2 와 같이 원운동하는 물체에서 원십력은 모든 접에서 접선방향으로 운동하기 위해 원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물체 의 직선관성으로부터 생겨났다. 따라서 원과 접선 사이의 거리 BC 는 물체가 A 에서 관성에 따르도록 해방되었다면 원으로부터 벗어 났을 거리를 나타낸다. 한편 기하학으로부터 우리는 각 AOB 가 작

5) 주 3) 에 언급된 Oe11vres, vol. 16 (De vi centr i f ug a ).

C A

。 그립 2 원운동

으면 BC 는 AB 의 제곱에 비례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 AB 는 물체의 원운동에 있어서 소요한 시간의 척도로 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호이겐스는 이처럼 원심력울 중력과 연결시켰을 분만 아니라 원 십력의 크기도 정량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먼저 그는 원십력의 크기가 원운동하는 물체를 구성하는 〈 물질의 양 〉 ―一질량――에 비 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복잡한 기하학적인 고찰을 통 해 그것이 속도의 제곱에 비례하고 원의 直 德 에 반비례함을 보였다. 끝으로 원십력과 중력과의 정량적인 비교를 동해서 그는 원십력에 대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식

F= mrv 2 (1)

에 나타나는 관계를 얻어넬 수 있었다 .6)

6)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주 I) 에 언급된 Westfa ll , Force in Newt on 's Phy- sic s , pp. I67-71 참조.

원운동에 관한 데카르트와 호이켄스의 이같은 취급은 원운동에 대한 우리의-뉴튼에 바탕한――이해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우리 는 원운동이 직 선관성 운동으로부터 벗 어 난 가속운동이 라는 접 에 기초해서 원운동을 이해한다. 그리고 무엇이 이같은 벗어남의 원 인 인 가를 찾으며 그것 이 求心力 (centr i p e ta l for ce) 임 을 보게 된다. 이에 반해 데카르트와 호이겐스는 원운동을 하는 물체가 지닌 원십 져 경향에 주목하며 그것이 원운동의 제약을 풀어 주었을 때 원운동 으로부터 벗어나서 접선방향의 운동을 하게 하는 힘임을 주목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그들은 아직도 원운동을 당연한 운동으로 보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경향을 설명이 필요한 것으로 보고 있는 셉이냐 고대 이래 줄곧 목수한 위치를 차지해 온 원운동의 중요성이 쉽게 소믿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샘이다. 4 호이겐스는 데카르트의 충돌법칙의 오류를 지적했을 분만 아니라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법칙들율 제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새 로운 충돌법칙들은 그가 데카르트의 법칙들의 오류를 지적하는 데

gel is ta Torric e lli, 1608-1647)8) 에 의 해 수직 낙하운동에 대 해 처 음 얻 어진 인식__의부의 영향으로부터 고립된 두 물체는 그 중력의 중 십 (cente r of g rav ity)에 있는 한 물체로 취급될 수 있다는-_-을 확 장시키도록 해주었다. 크기가 다른 두 물체의 충돌의 일반적인 경 우를 위에서 본 호이겐스의 〈표준적〉인 경우(식 2) 로 바꾸어 주는 좌표계의 운동은 두 물체의 중력의 중심의 운동과 같을 것이다. 죽 두 물체의 중력의 중심을 기준으로 하면 두 물체의 속도는 항상 그 것들의 크기_~질량_―에 반비례할 것이다. 따라서 충둔 후에 물­ 체들은 원래의 속도와 같은 속도로 되튀어나가게 되고 중력의 중십 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이다. 이로부터 호이겐스는 중력의 중십은 충돌 전과 충돌 후에 같은 방향으로 같은 속도로 운동을 계 속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충돌에 있어서의 힘의 動力學적인 작용에 대해 고려할 팔요가 없는 충돌에 관한 순전하 運動學 ( k i nema ti cs ) 적 인 취 급이 가능해 진 것 이 다.

8) Torr i cell i의 역 학에 관한 논의 는 앞에 언급한 책 , chap. 3, pp. 125-38 참조.

이같은 호이겐스의 순전히 운동학적인 역학은 라이프니츠에까지 계속되지는 않았다. 라이프니츠는 앞서 본 vis v i va_ 〈살 아 있는­ 힘〉_—의 개념에 바탕한 새로운 동역학의 건설을 시도했고 〈동역 학 ( d y nam i cs) 〉이 라는 말 자체 가 그에 게 서 연유랬 다. 그러 나 그의 〈 힘 〉은 오늘날의 〈운동 에 너 지 (kin e ti c ener gy)〉와 같은 양이 었고 물 체에 작용해서 물체의 운동을 변화시키는 것으로서의 뉴튼의 힘의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것은 힘을 운동하는 물체가 지니고­ 있는 어떤 것이라고 보는 기계적 철학의 독특한 전제가 데카르트, 호이 겐스를 거 쳐 라이 프니 츠에 까지 계 속 나타났음을 보여 준다. 그­ 리고 힘에 관해 그와 같은 개념을 지니고 있는 한 뉴돈식의 동역학· 은 출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5 데카르트, 호이켄스, 라이프니츠 등에서 나타나는 힘에 대한 아 같은 개념은 기계적 철학에의 집착이 17 세기의 역학에 가한 제약들·

중의 한 가지를 찰 보여준다. 물론 기계적 철학은 의부 자연세계의 모든 현상을 물질과 그것의 운동으로만 설명함으로써 17 세기를 통 해 운동에 관한 관십과 이해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데카르트 갇은 사람의 역학에의 관심은 거의 전적으로 그의 기계적 철학으로 부터 연유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이 렇 게 역학의 발전에 긍정적이었던 기계적 철학의 영향이 실제 역학의 세 부적인 발전에 있어서는 반드시 긍정적이라고는 볼 수 없는 여러 떤둘을 보였고, 특히 후 에 뉴튼의 역학이 택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상반되는 방향으로 17 세기 역학을 이끌고 간 면이 없지 않다. 앞 절에서 본 힘에 대한 기계적 철학의 독독한 개념은 그 좋은 예인 것이다. 물론 기계적 철학자들은 힘의 작용이 물체의 운동에 변화를 가함 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앞에서 본 대로 그들은 이런 작용이 충돌 에 의해서만 가해진다고 믿었다. 그런데 충돌에 의해서 가해지는 힘이란 운동하는 물체가 그 운동을 계속하려고 하는 경향을 다른 물체에 의해 방해받을때 나타내 주는 힘이고 결국 운동하는 물체가 그 운동 대문에 지니는 험인 것이다• 따라서 기계적 철학자들은 힘 이 운동하는 물체가 지니는 경향임에만 주목하고 그러한 힘이 물체 에 작용해서 그 운동을 변화시키는 것임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9) 데카르트의 우주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호이켄스의 원운동에 대한 이해를 우리의 이해와 근본적으로 다르게 한 원십력 의 개념-원운동을 하는 물체가 지니고 있는 힘으로서의-도 기계적 철학자들이 지녔던 힘에 대한 이같은 편견을 보여주는 것이 다. 그리고 데카르트가 이런 식의 힘의 개념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 문에 그는 자유낙하(fr ee fa ll) 에서의 加速도 의부의 힘의 작용에 의 한 가속으로서가 아니라 원십적 경향을 동해서__죽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보다 원십적 경향이 더 작아서 상대적으로 지구 중심을 향해 밀린다는 것으로-설명했던 것이다 .10)

9) 기계적 철학이 힘의 개념에 미친 영향은 Ri ch ard S. Wes tfa ll 이 처음으로 분 명히 지적해 주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앞에 언급한 책, chap. 5 참 조. 10) Descar t es 의 이런 식의 해석이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이 운동의 수학적인 기술

울 방해하는 효과를 냈다. 이에 비해 Ga lil eo 는 가속의 기계적 설명에는 구애 받지 않고 자유낙하운동을 그냥 수학져 으로 기 술하려 는 과정 에서 낙하의 법 칙 을 발견할 수 있었음을 앞에서 보았다.

기계적 철학이 운동을 변화시키는 작용으로서 충돌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사실은 이보다 좀더 직접적인 형태로도 17 세기의 역학과 힘 의 개념의 발전을 뉴튼 역학과 다론 방향으로 물고 갔다. 우선 앞 에서도 본 대로 직접 접촉하는 충돌에 의하지 않은 작용의 부정은 〈분리 된 상대 의 작용 〉 의 부정 으로 나타났는데 분리 된 물체 들 사이 에 그것들간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있다는 〈 菓 有引力〉 의 개념이 바로 이런 〈 분리된 상태의 작용〉에 해당되는 것이다. 따 라서 기계적 철학자들이 이같은 힘에 바탕한 뉴튼석의 역학을 발전 시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임은 쉽게 알 수 있다. 분 만 아니라 일단 뉴튼의 새로운 역학이 출현하고 케플러의 법칙 둥을 포함한 천체의 운동을 성공적으로 기술해 준 후에도 이같은 만유인 력의 개념은 기계적 철학의 전통이 철저했던 프랑스의 역학자들이 뉴튼의 역학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큰 장애로서 작용했던 것이다 .11)

11) 프랑스에서의 뉴돈 역학의 초기 수용과정에 대해서는 아직도 P. Brunet, L'int- rod11cti on des the orie s de Newt on en France a11 XVIll' sie c le. Avant 1738 (Paris, 1931) 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보다 최근의 연구인 Arnold Thac-kray, At om s and Powers, An Essay on Newt on ia n Matt er -Theory and the Develop m ent of Chemi st r y ( H arvard U. Pr., 1970) 은 수로 뉴돈의 물질 이론을 중십으로 그 수용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한편 뉴튼이 이처럼 기계적 철학이 크게 떨치던 시기에 그것의 전제와 상반되는 인력의 개념을 얻어내게 된 배경으로는 헤르메티 씨즘의 전동을 들 수 있다 .12) 앞에서도 보았듯이 우주를 신비적이 고 마술적인 힘들로 짜여전 네트웍으로 보고 인간이 이 힘들과 서 로 작용해서 자연세계의 현상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었던 헤르메티씨즘과 신플라돈주의의 사조는 15,16 세기 유럽에 널리 퍼 져 있었고 기계적 철학이 크게 떨쳤던 17 세기에도 소멀되지 않고 있었다. 케플러 같은 사람은 행성이 태양 주위를 도는 이유를 그 같은 신비스러운 힘으로부터 찾으려 했으며 후크 같은 사람도 같은 사조의 영향을 보이면서 행성과 태양 사이의 引力에 대해서 얘기했

12) Herme ti c i sm 에 대해서는 제 4 장, 3 절의 논의를 참조할 것.

었다 .13) 사실 인력 ( a tt rac ti on) 이라는 말 자체가 헤르메티씨 즘에서 많 이 사용하던 개 념 들인 〈共感 ( s y m p a t h y)〉이 나 〈 反 感 ( an tip a t h y)〉 등과 유사한 관념을 연상시켜 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조는 뉴돈에게도 영향을 주었음에 돌 림 없다. 물론 그는 전체적인 면에서는 기계적 철학을 받아들였지만 데카르트나 호이겐스 등과 같은 철두철미한 기계적 철학자는 아니었고 이것은 그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연금술 의 이론과 연금술 활 동에 보냈던 것으로부터 알 수 있다. 14 )

13) 이 에 대 한 좀더 자세 한 논의 는 주 1) 에 언급된 Westfa ll , • Force in Newt on 's Phy si c s , pp. 268 ff .를 참조할 것. 14) New t on 의 연금술 활동에 대해서는 Ric h ard S. Westfa ll , The Role of Alche- my in Newt on 's Career in . M . L. R. Bonelli and W .R. Shea, eds., Rea-son, Exp er im ent, and My st i cis m in the Scie n t ific R e vo luti on (New York: Scie n ce Hist o r y Public a ti on s, 1975), pp. 189-232 을 참 조할 것 이 밖에 도 Wes tfa ll 은 최근에 와서 방대한 분량의 뉴 몬 의 전기 물 완성했고 그 속에서 pNhey w ot of n 의Is a연ac금 N술e w활 to동 n 의 ( C중am요b성r i을d g e강 조U하. P고r .,있 1 다98 0: )N. evBe.rJ .a Tt . RDe ostb : b As 는B iW og er s at-- fa ll 보다도 더 강력하거 l New t on 의 연금술에 관한 믿음을 지적하고 있다. The Foundati on s of Newt on 's Alchemy , or The Hi st o ry of the Greene Ly on (Cambrid g e U. Pr., 1975). 그의 Newt o n's Alchemy and Hi s Theory of Matt er , Isis 73 (1982), pp. :;11-28 는 이 재 목에 관한 가장 최 근의 논의 이 다.

기계적 철학자들은 충돌만을 중요시 여겼을 분 아니라 충돌에 의 한 운동의 변화를 순간적인 것으로 생각 했 다. 그들의 관십의 대상 은 항상 충돌 전과 충돌 후의 운동의 차이였고 그 차이가 어떤 과 정을 동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문제시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그 둘은 충돌에 의해 물체의 운동량의 변화가 한꺼번에 순간적으로 일 어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때 작용하는 힘도 순간적 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죽 힘이란 물체에 순간적으로 작용해 서 그 운동을 순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으로 이해된 것이다. 힘에 대한 이런 관념은 중력 __ 죽 만유인력-과 같은 계속적으로 작 용하는 힘에 대한 취급과 이해를 어렵게 했다. 더구나 그러한 계속 적인 힘의 작용에 의한 속도의 계속적인 변화 같은 것은 더욱 취급 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물론 17 세기의 역학에 있어서의 제약들이 이처럼 순전히 기계적 철학으로부터만 연유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 역학의 여러 개념들이

확고히 자리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오는 개념의 모호성이나 不的確性 도 자주 혼동을 자아내었다. 특히 靜 力 學 ( s t a ti cs ) 과 動 力 學 ( dy nam i cs ) 의 개념들간의 혼동은 십해서 〈 일 〉 이라는 개념과 〈험〉 이라는 개념, 무게 와 〈충 격 (im p u lse)>, 그리 고 질 량과 무게 둥의 혼동은 역 학의 논의를 자주 어지럽었다. 17 세기 역학의 또 한 가지 難點은 그것이 사용한 수학적 방법이 기하학이었다는 것이다. 갈릴레오, 데카르트, 호이젠스, 뉴돈 둥의 역학의 처술은 모두 유클리드 기하학의 방법을 통해서 씌어졌고, 17 세기를 통해, 그리고 때로는 자기 자신들에 의해, 개발되고 있던 새로운 수학――대수학 및 해석학-의 방법은 사용하지 못했다. 이것은 17 세기 역학의 논의를 계속해서 도형과 증명에 의존하는 복 잡한 방법에 얽매어 두었고 數式과 그것의 演算 울 통한 간단한 취 급을 불가능하게 했다. 이렇게 기하학의 방법을 사용한 것이 뉴튼 역 학을 담은 Pr i nc ipi a 의 국도의 난해 함을 부분적 으로는 설명 해 주 기도한다. 6 주로 앞에서 본 제약들에 의해 17 세기 역학은 호이겐스 이후에도 지엽적이고 세부적인 문제들에만 약간씩 발전하고 있었고 라이프니 츠의 역학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뉴튼 역학과는 전적으로 다른 방향 으로나가고있었다 . 결국뉴튼에 이르러서야 이턴제약들을넘어 선 근대 역 학- 〈古典 力 學 ( class i cal mechan i cs) 〉-의 완성 이 있게 된 것이다. 1687 년에 출판된 『자 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 o sop h ia e natu ralis pr in c ip ia ma t hema ti ca) 』__혼히 약해 서 Pr i nc ipi a ――라는 책 15) 에 담 간 뉴튼 역학은 오늘날의 물리학의 교육에서도 근본이 되는 내용을 15) 원태 La ti n 어로 씌어진 이 책의 가장간편한 영역판으로는 1729 년 AndrewMo- tt e 의 번역에 바탕한 Floria n Cajo r i, tr. , Sir Isaac Newt on 's Math e mati ca l Prin c i ple s of Natu ral Plzt'l o$ op lz y and Hi s Sy st e m of the World (Berke- ley : Univ e rsity of Cali forn ia Pr., 1934) 이 있다. Pr i n cipi a 의 집팔, 여 러 판 본 , 개정 등에 관한 상세한 소개가 I. B. Cohen, Intr o d11cti o11 to Newt on 's Prin c ipia (Harvard U. Pr., 1971) 에 담겨 있다.

제 6 장 역학의 혁명 : n 데카르트에서 뉴튼까지 113

담고 있고 그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벌도의 논의가 필요하지 않 다 .16) 이 철에서는 뉴튼의 운동법칙들을 중십으로 해서 그 형성의 이해에 중요한 몇 가지 중요한 접만을 지적하려고 한다. Pr i nc ipi a 는 먼저 질 량(q uan tity of matt er ), 운동량 ( q uan tity of moti on ) 및 몇 가지 힘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 우리가 뉴튼의 , 운동법칙이라고 부르는 세 개의 법칙을 기본 원리로서 도입하고, 이를 기초로 해서 제 1 권에서 처항이 없는 공간에서의 물질입자의 일반적인 운동을 수학적으로 취급하는 법으로부터 시작해서 2 권에 서 각종의 처항이 있는 공간에서의 운동을 다루고, 3 권에서는 1 권 의 견과들을 사용해서 태양계를 포함한 우주에서의 운동을 기술해 주었다. 뉴튼의 제 1 법칙은 관성(i ner ti a) 의 법칙으로서 이마 갈릴레오를 거 쳐서 데카르트에서 확립이 된 법칙을 뉴튼이 다시 천명한 것이다. 제 3 법칙은 작용 (ac ti on) 과 반작용 (reac ti on) 의 원리로서 뉴튼이 처음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호이겐스가 충돌중의 운동의 변화 를 취급하면서 사용했던 원리-〈아무리 큰 물체도 그것에 부딪히 는 아무리 작은, 그리고 어떠한 속도를 가전, 물체에 의해서라도 . 움직여지게 마련이다〉 17)_ _를 일반적인 경우로 확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뉴튼의 세 법칙 중 가장 독창적인 것은 제 2 법칙 이었다.

16) Newt o n 역 학의 논의 논 주 1) 에 언급된 Westf all , Force in Newt on 's Phy- sic s , chaps . 7-8 에 있다. Joh n Heriv e l, The Backg r ound to Newt on 's Prin - cip ia (Oxfo rd U. Pr., 1965) 은 Prin c ip ia 집필 이전의 New t on 의 역학 연구 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다 17) 주 3) 에 언급된 Huyg e ns, De Motr e ••·, Prop o sit ion m.

〈운동의 변화는 가해 진 힘 (moti ve fo rce) 에 비 례 하며 그 힘 이 가해 진 칙선의 방향으로 나타난다〉-이것이 뉴튼에 의해 표현된 제 2 ' 법칙의 형태이다. 이를 엄격히 해석하면 뉴튼의 말은 F=L1(mv) 에 해 당되 며 오늘날 우리 가 받아들이 는 F=ma 또는 F= d/d t (mv) 와는 다르다 .18) 그리고 이로부터 우리는 뉴튼에게도 전형적인 힘의 개념 은 충돌에 서 나타나는 순간적 인 힘 _순간적으로 작용해 서 순간적

18) 이러한 정은 제 3 장 주 1) 에 언급한 Di jks te r huis , M echaniz a ti on , 그리고 J.W .

J1 4

Heriv e l, Newt on 's Achie v ement in Dy na mi cs , in Robert Falte r ed., The Anmi s M irab i/ is o f Sir Isaac Newt on 1666-1966 (MIT Pr., 1970), pp. 120-35 에 명백히 지저된 바 있다 .

으로 운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힘_―의 그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는 나중에 가서 충돌이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얼 마 만큼의 시 간 (A t ) 을 소요하며 이 시 간 A t가 O 에 접 근하면 F=.J (mv) 가 F=ma 에 접근함을 주장했지만 처음에는 충돌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순간적인 힘의 개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역학의 형성에 있어서의 뉴튼의 정말로 훌륭한 기여는 이같은· 순간적인 힘의 개념에 바탕했던 운동법칙을 동해 만유인력처럼 계 속적으로 작용하는 힘의 효과를 취급해 줄 수 있었던 데 있는 것이 다 .1 0 )

19) 이 접에 관한 더 상세한 논의는 I. Bernard Cohen, Newt o n's Second Law and the Concept of Force in the Prin c ip ia, in Falte r , e d., o p .c it. (주 18). pp. 143-85.

뉴튼의 운동법칙들에서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할 접은 우리에게 논 제 1 법칙이 제 2 법칙의 특수한 경우로 보인다는 접이다. 족 제 2 법 칙에서 힘이 없으면 LJ (mv) 가 O 이 될 것이고, 따라서 속도가 변화­ 하지 않는 관성운동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뉴튼이 제 1 법칙 을 따로 제시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고 이 또한 그의 힘 의 개념이 우리의 그것과 다른 접을 보여준다. 뉴튼에게는 힘이란 실재하는 물리적 양이었고, 우리처럼 단순히 운동의 가속의 효과­ ma 를 힘이타고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운동의 변화를 위해서는 힘이 작용해야 한다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서, 죽 운동의 변화가 저절로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제 1 법칙 을 팔요로 했 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제 1 법칙을 동해서 힘이 작 용하지 않으면 운동의 변화가 있을 수 없음을 보인 후 제 2 법칙은 힘이 작용하는 경우에-그리고 그 경우에 한해서 __ 운동의 변화 가 어떻게 일어 나나를 정해 준 것이다. Pr i nc ipi a 의 제 1 권에서 이처럼 힘과 운동의 변화와의 일반적 관계 를 다룬 후 제 3 권에서 그는 이 세상의 모든 물체들 사이에 그 사아 의 거티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인력이 있음을 가정하고 이 만유인력

에 바탕하고 위의 운동법칙들을 사용해서 행성계의 운동을 기술하 는 케플러의 세 법칙을 유도해내었다. 그리고 이것이 행성과 태양 사이에 인력이 촌재하고 그것의 운동이 앞서 본 운동법칙을 따르며 그것을 수학적인 추론에 의해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는 접 에서 뉴튼 역학의 성공을 결정적으로 보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뉴튼에 의해 고전역학이 형성되게 된 것이다 .20) 20) 또한 제 3 장의 서두에서 말한 바 역학의 혁명이 천문학을一_혹은천체역학을­ 역학의 일부로 만둘었다는 구철의 참뜻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제 7 장 생리학의 혁명 : 하아비와 피의 순환이론 1 생리학의 혁명은 고대 이래 동용되어 오던 갈레노스의 인체구조 및 작용에 관한 이 몬체 계 가 하아비 (W illiam Harvey, 1578 ― 1657) 에 의 한 퍼의 순환이론을 바탕으로 한 인체이론으로 대체된 것을 가리킨 다. 그리고 이같은생리학의 혁명은과학혁명기의 과학내용상의 혁 명의 다른 예들로 우리가 이미 살펴본 분야들의 혁명, 죽 천문학이 나 역학의 혁명에 비해 그 내용이나 영향면에서 훨씬 소규모의 혁 명이었나 천문학과 역학에 있어서는 그 분야의 내용, 근본이 되는 개념들과 문제들까지를 포함한 모든 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 로부터 완전히 탈피한 데 반해서 생리학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피가 순환한다는 것과 인체의 구조에 있어서 몇 가지 사실 적인 내용들만 아리스토텔레스 및 그와 결부된 갈레노스의 이론으 로부터 벗어났을 분 전체적으로논 하아비의 새로운 이몬도 아리스 토텔레스의 체계 안에 남아 있었다. 더구나 생물학 분야 전체에 대해서 볼 때는 생리학의 혁명이 크 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고 이 접은 천문학과 역학에서의 혁명이 물리과학 전체의 커다란 변혁을 일으킨 것과 크게 대조가 된다. 과 학혁명기를 통해서 활발해전 해부학과 분류학의 활동들에 의해 많 온 생물학적 지식이 쌓이고 정리되었으며, 이런 일은 1624 년 현미

경의 발견이 있은 후로는 더욱 더해 갔다 .1) 그러나이같은 많은 지 식의 축적과 정리는 여전히 아티스토텔레스의 테두리 속에서 수행 되었다. 생물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로부터 탈피하는 일은 19 세 기와 20 세기에 들어서서 진화론과 유전학이 확립이 되면서야 가능 해졌던 것이다 .2)

1) 현미경의 발견을 포항한 17 세기 생물학 분야에 관한 전반적 논의는 Emi le Guy en ot, Les Sc ien ces de la vie att x XVII' et XVIII' sie c les (Paris, 1941) 와 Jac q u es Rog e r, Les sc ien ces de la vie dans la pen s e e fra nr; a is e du XVIII' sie c le (Paris, 1963) 에 나와 있다. 영어로 된 책으로는 아직도 Erik Nordenskio l d, The Hi st o r y of Bi ol og y (New York, 1935) 의 해 당 부분을 참 조할수밖에 없다. 2) 19, 20 세 기 의 생 물과학에 대 한 전반져 인 개 요는 W illiam Coleman, Bi ol og y in the Ni ne te e nth Cent1 1r y : Problems of Form, Functi on, and Transfo r ma- tion (New York : Wi ley , 1971) 과 Garland E. Allen, Lt fe S c ien ce in the Twent ieth Centt try (New York : W iley , 1975) 을 참조할 것 .

그러나 생리학의 혁명은 시기적으로 천문학, 역학의 혁명과 같은 시기, 즉 과학혁명의 시기에 일어났고, 그 이전에 받아들여져 오던 바와 새로 밝혀낸 바와의 내용상의 대조가 확연하기 때문에 혼히 위의 두 혁명과 나란히 취급되어 왔다. 물론 과학혁명기 동안에 내용상으로 혁명적인 변화가 있었던 분 야가 천문학, 역학, 생리학의 제 분야분이었던 것은 아니어서 光 學과 氣學(p neuma ti cs)4> 및 수학 5) 에 있어서의 변화도 역시 특기할

3) 과학혁명기의 광학에 대한 논의는 제 4 장 주 13) 의 참고문헌들을 참조할 것. New t on 의 광학에 대해서는 Ric h ard S. Wes tfa ll 의 및 개의 논문을 참조할 것 : The Develop m ent of Newt on 's Theory of Colors, Isis 53 (1962), pp. 339 -58; Isaac Newt on 's Coloured Cir cl es Twi xt Two Conti gu ous Glasses, Archiv e for Hi sto r y of Exact Sc ien ces 2 (1965), pp. 181-96; Huyg e ns' Rin g s and Newt on 's Rin g s : Perio d ic it y and 17th Centu r y Op tics, Rati o IO (1968), pp. 64-77; Uneasily Fit ful Refl ec ti on s on Fi ts of Easy Transmi s- sio n , in R Palte r ed., The Anmt s Mi ra bil is o f Sir Isaac Newt on 1666- 1966 (MI T Pr , 1970), pp. 88-104. 이 에 대 한 최 근의 논의 로는 Joh n Hendry, Newt o n's Theory of Colour, Centa u rus 23 (1980), pp. 230-51 이 있다. 4) B과o학y l혁e '명s 기Ex의p er기 im학 e 에nt s 대 in한 P국n히eu m쉽a고ti c s좋 (은H a논rv의ar로d 는U nJiv. B. .P rC.,o n1a9n48t,) 이e d있. 다R.o be이rt 외 에 C. Webste r, The Di sc overy of Boy le 's Law and the Concep t of the Elastic it y of Ai r in the Sevente e nth Centu r y, Archiv e s Hi st. E xact Sci. 2 (1962), 441-502 을 참조할 것 . 5) 과학혁명기의 수학에 대한 논의둘로 제 5 장의 주 8)-12) 에 언급된 참고문헌들을 참조할것.

만하다. 그리고혁명적인면화는아니었지만화학, 磁 氣 , 電氣등의 분야에서도 과학혁명기 동안에 많은 새로운 경험적, 실험적 사실들 이 쌓여서 나중 18-19 세기룰 통해 이들 분야들이 전문과학 분야들 로 성립되는 데 밑걸음이 되었다• 그러나 내용상의 혁명에 대한 이 책에서의 는의는 위의 세 분야로서 마치기로 한다 .6)

6) 과학혁 명 기 의 화학에 대 한 좋은 논의 는 M. Boas, Robert Boy le and Sevente e nth - Ce11t1 1 ry Chemi st r y (Harvard U. Pr., 1958) 에 실려 있다. 그. 이후의 발전어} d대u해 X서V는I IH' .a M lea tf zi gn e rd 의 u 두X V책,I IIL' essi ed co lce tr (iP n ae rsi sc, h 1i9m 23 i q) 과u e s Neenw tF orna , nSctea hd l1,1 dBeobeur-t /zaave et la doctr i n e chim iq u e (Paris, 1930) 을 참조할 것 . 이 시 기 의 전기 및 자기 분야의 논의 로는 I. Bernard Cohen, Franklin and Newt on (Phil a ddel- phi a , 1956) 과 J.L . Heil br on, Electr i c it y in the 17th and 18th Centu r ie s : A Stu d y of Early Modem Phy si c s (U. Cali for nia Pr., 1979), 특히 par t 2- 가 있다.

2 언처 생리학의 혁명에 의해 대체된 갈레노스의 인체이론체계를­ 살펴보자.” 갈레노스 이론의 목적은 인체의 세 가지 중요기능_ 소화, 호흡 및 신경 __ 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었다. 소화에 의해 음식이 영양분으로 몸에 섭취되며, 호흡에 의해 인체가 생명 력과 열과 기운을 얻게 되고, 신경에 의해 인간의 두뇌 및 정신활· 동이 가능한 것 이 다. 칼레 노스는 이 기 능 감각에 해 당하는 靈 (soul 또는 s pi r it)을 가정했다. 소화에 의한 영 양분은 〈자연의 영 (natu r al, spi rit ) >, 호홈에 의 한 생 명 력 은 〈생 명 의 영 (vit al spi rit ) >, 그리 고 정 신 활동은 〈동물의 영 (anim al s pir it)〉에 의 한 것 이 다. 인체의 구조와 작용에 관한 갇레노스의 설명은 이 세 가지 영의 생성과 전달 및 작용을 포함하는 세 개의 체계로 짜여쳐 있다. 소 ` 화의 체계는 음식물이 몸에 들어와서 위와 장을 거쳐 간에 이르러 서 〈자연의 영〉 즉 피로 바뀌어서 정맥을 통해 온몸으로 전달되고

7) Galenos 이 론의 골자는 .Do nald Flemi ng , Galen on the Moti on of the Blood in the Heart and Lung s, Isis 46(1955), pp. 14-21 ; Leonard G. W ilso n, Erasis tr ~ t us , Galen and the Pneuma, Bulleti n of the Hi sto r y of Medic ine 33 (19 59), 293-314 을 참조할 것. Galenos 의 처술의 영역판으로서는 .M .T. May, Galen, 011 the Usef ul ness of the Parts of tlie Body, 2 vols. (Cornell U. Pr., 1968 ) 이 있 다.

영양분으로 소모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호흡의 체계는 정맥을 통해 심장에 들어온 피(자연의 영)가 허파에서 전달된 공기-그 중에서 가장 精靈스러운 부분一_롤 받아 생명의 영 으로 바뀌어서 동백을 통해 온몸으로 전달되어 생명력, 기운, 열 등으로 소모되는 것으로서 이루어져 있다. 끝으로 신경체계는 동맥의 생명의 영이 해부학적으로 그 위치가 확실치 않은 rete m i rab i le 라는 곳에서 동물 의 영으로 바뀌어서 뇌에 전달이 되고 그것이 신경을 통해서 온몸 에 전달되어 정신활동으로 소모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각각의 체계는 제 가지 영이 생성되는 곳에서만 연결되어 있을 분, 모두 시작과 끝이 있고 서로 다론 영에 의해 채워져 있으며 그 기 능이 전혀 다른 완전히 분리된 체계이다• 이 영들을 전달하는 정 팩, 동맥, 신경도 완전히 서로 다른 분리된 조직인 것이다. 갈레노스의 인체이론에서는 이같은 기본구조 의에 나중 하아비의 변혁을 다루는 데 문제가 될 두 가지 세부적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십장 속에서의 피의 움직임에 대한 것으로서 갈레노 스 이론은 피가 심장의 右心室에 들어오면 좌십실과 우십실을 경계 지어 주는 두터운 격막 (se pt um) 을 통과해서 左心室로 전달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격막에는 피가 통과할 수 있는 작은 〈 격막구멍 (sep ta! p ore) 〉둘이 존재 하는 것 이 다. 둘째 는 맥 박, 즉 심 장의 운동 에 관한 것으로서 갈레노스는 십장의 운동에서 주가 되는 것은 팽 창(또는 이완 : d i as t ole) 이며 십장이 팽창뭘 때 밖으로부터 피를 꿀어 들여서 피가 심장 속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설명을 랬다. 3 갈레노스의 이같은 인체이론은 고대 이래 중세를 통해서 계속 받 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16 세기에 접어들면서 활발해전 해부활동으 로부터 얻어전 인체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에 의해 갈레노스의 체계 는 몇 가지 문제접을 노정하게 되었다. 당시의 해부학자들 중 특히 베살리우스는 해부학의 중흥에 크게 이바지했다 .8) 그 이전에는 칙 8) Vesa li us 에 판한 표준져 논의는 C.D. O'Malley, Andreas Vesaliu s of Brussels JJ1 4 -1J 6 4 (Univ e rsit y of Cali forn ia Pr., 1964) 이 다 ..

접 손을 써서 하는 해부나 수술은 의사들 사이에서 경시되었고, 의 학교육에서도 해부는 벌반 중요성을 갖지 못하고 의사나 의학교수 가 아닌 해부사에 의해 교육되었다. 따라서 당시의 인 체에 관 한 해 부학적 지석은 갈레노스 체계의 지식이 책과 그 속에 담 긴 說明臨 에 나타난 것이 고작이었다. 버 1 살리우스는 이란 상황을 비판하고 손을 써서 행하는 해부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자신이 직접 행한 인체의 해부를 통해서 그간 받아들여져 온 갈레노스의 해부학적 지 식이 많은 경우 인체에 대한 것이 아니타 개나 원숭이 같은 동물의 것이었음을 지적해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해부 활동을 통해 서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의 인체이론에 들어맞지 않는 해부학적 사실들 몇 가지물 밝혀내었다. 그 중 첫째는 〈 격막구멍 〉 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피가 십장의 격막을 동과해서 우십실에서 좌십실로 전달 된다는 갈레노스의 설명이 문제를 빛게 되었다. 둘째는 좌십실과 동맥에 있는 피의 양이 많다 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온 좌십실 에서 피(자연의 영 ) 는 생명의 영으로 바뀌고 이것이 동맥을 동해 전 달이 된다는 갈레노스 체계의 주장과 들어맞지 않았다. 세째는 허 파에 서 십 장으로 오는 허 파정 맥 (pu lmonary ve i n) 에 도 피 가 있다는 것이었는데 갈레노스 체계에 의하면 그 속에는 허파에서 십장으로 전달되는 공기만 들어 있어야 했다. 네째로 십장에서 허파로 가는 허 파동맥 (pu lmonary ar t er y ) 이 굉 장히 크고 백 박이 핀다는 사실이 었 다. 갈레노스 체계에 의하면 허파로 영양분(자연의 영)울 공급해 줄 따몸인 허파동맥이 그렇게 클 팔요가 없을 분 아니라 이것은 십장 의 맥박이 팽창에 의해 피를 끌어들이는 현상이라는 갈레노스의 이 론과도 상반이 되는 사실인 것이다. 다섯째로는 정맥이 십장에 가 까와지면서 커쳐서 간에서 피가 나오기 시작할 때보다 훨씬 크고 두텁다는 접인데 만약에 피가 간에서 생성되어 온몸에 영양분을 공­ 급하는 일환으로 십장에도 피를 공급하는 것이라면 이 사실도 설명 이 볼가능한 것이다. 베살리우스는 이들 문제들을 제기만 했고 그에 대한 대안이 될 설명은 제시하지 않았다 . 그리고 이 접은 생리학과는 분리된 해부

학을 추구했던 그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죽 그는 해부에 의해서 관찰되는 인체의 조직과 구조에 관한 경험적 지식만울 중요시하고 그 작용이나 기능에 대한 이론적 지식을 추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교수로 있던 Padua 대학이 당시의 경험적, 실 험 적 방법의 본거지였던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9) 그러나이같은 베살리우스의 시도는 가능한 것은못되었다. 과학에 있어서 이돈과는 완전히 분리된 철두칠미한 경험적 지식이 란 있을 수 없으며 관찰이나 실험은 항상 그것을 행하는 과학자의 이론에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부를 통해서 인체의 조직과 구조에 대해 관찰하는 사실들은 그것들의 기능이 무엇이고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한 관찰자의 믿음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생리학 적 이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없이는 해부 자체도 불가능해 진다. 베살리우스의 인체해부의 경우에도 그가 해부를 행한 순서는 갈레노스의 인체의 세 가지 체계를 좇았던 것이다.

9) 이 시거의 Padua 대학의 과학활동에 대한 논의로 J.H . Randall, jr., The School of Padua and the Emerge n ce of Modern Sc ien ce (Padua, 1961) 가 있다.

따라서 베살리우스에 의한 해부의 강조에 의해 인체해부가 많이 행해지고 해부학이 의학교육의 일부로서 자리물 잡으면서는 해부학 자들이 갈레노스의 체계와 상반되는-주로 베살리우스에 의해 지 적된-문제점들에 대한 설명을 괴하게 되었다. 이들에 의해 제시 된 설명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피가 십장의 격막을 동과하는 것 이 아니라 우십실에서 허파로 갔다가 다시 좌십실로 돌아온다는 〈허 과의 동과(p ulmonar y tra nsit 또는 pu lmonary cir c uit )>이 론으로서 역 시 Padua 대학의 교수였던 콜롬보 (Realdo Colombo, 1510-1559) 는 허파정 맥 에 피 가 들어 있 다는 사실로부터 , 그리 고 세 르베 두스 (M i chael Ser· vetu s , 1511-1553) 는 허파동맥 이 크고 백 박이 핀다는 사실로부터 - 그러나 주로 신학적인 관십을 가지고-이것을 결론지었다 .10) 그

10) Colombo 와 Serve t us 에 의한 pu lmonary t rans it의 발견에 대해서는 L.G . W ilso n, The Problem of the Di sc overy of the Pulmonary Cir c ulati on , Jou rnal of tlze Hi st o ry of Medic i n e and Al lied Scie n ces 17 (1962), pp. 2i9 -44; E.D . Co _ppo la, The . Disc overy of the Pulmonary Cir c ulati on : A_ New Ap pro ach, Bulleti n of the Hi st o r y of Medic ine 21 (1957), pp. 44-77 을 참 조할것.

리고 후에 하아바에 의한 피의 온 몸의 순환이론에 비해 심장-허 파-십 장 의 작은 순환을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小循環이라고도 불란 이 〈 허파의 동과 〉 이론에 의해 갈레노스 체계의 및 가지 문제들은 일단 해결이 되었다. 그러나 허파동과 이론이 베 살 리우스가 제기한 모든 문제를 해결 해 준 것은 아니었으며 베살리우스 이후에도 계속해서 다른 문제들 이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콜롬보는 허파정맥에 판막 (valve ) 이 있고 이것이 피의 흐르는 방향을 허파에서 십장 쪽으로 향하도록 해준다 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이것은 십장의 맥박의 기능이 팽창에 의해 괴를 빨아들이는 것이 아님을 보였다. 그 후 콜롬보의 제자들은 정 맥의 판막은 허파정백만이 아니라 온몸에 있음을 발견했고 이 판막 둘이 모두 피를 십장 쪽으로 흐르게 함을 밝혀냈다. 특히 다리의 정맥의 판막도 위쪽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온 피가 간에서 생성되어 정 맥 을 동해 온몸으로 영 양분 ( 자연의 영)을 공급한다는 갈레 노스의 이돈과 뚜렷이 위배되었다. 결국 16 세기 후반에 들어서서는 이러한 해부학적 발견들에 의해 갈레노스의 이론체계에는 많은 문제접들이 노정되어 있었다. 그러 나 이들 해부학자들은 모두 피가 간에서 생성되어서 온몸에 전달되 어 영양분으로 소모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고, 따라서 〈허파통 과 〉 의 이론 같은 부분적인 수정은 있었지만 7갈 레노스의 체계는 그 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으며, 이들 문제접들을 다 설명해넬 새로운 이론의 출현은 하아비를 기다려야만 했다. 4 하아바 가 1628 년 『십 장과 피 의 운동에 대 해 서 (De motu cordis . a .s an g u i n i s) 』 11 ) 에서 발표한 피의 순환이론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해 야 한다. 하아비 는 1600 년에 서 1602 년까지 Pudua 대 학에 서 의 학을 공부했으며 베살리우스와 콜롬보가 해부학을 강의한 그곳에서 갈레 노스의 체계의 여러 해부학적 문제점들에 접하게 되었을 것은 들립 11) 구하기 쉬운 영역판으로 C.D. Leake, tr. , Anato m i ca l Stu d ie s on the Mot ion of the Heart and Blood, 5th edit ion (Sp r in g field , Ill., 1970) 이 있다.

없는 일이다. 실제 로 위의 책 을 발 표 .하기 10 년쯤 전까지에 하아비 는 이미 그의 순환이론에 뒷받침이 될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 선 그는 피가 〈 허파의 동 과 〉 를 한다는 사실 을 받아들였다. 또 한 그는 좌십실을 포함해서 십 장 이 피로 가득 차 있으며 동백도 역시 괴로 가득차 있다는사실도 알고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동백 이 영 양분울 공급하 는 역 할을 한다는 아리 스토텔레 스의 이론을 받아들였는데 그 건과 로 정 맥의 기능이 모호해지게 되 었다. 하아비는 정맥에 판닥이 있고 그 것이 피를 십장을 항해 흐르 도록 한다는 사실도 명확히 알고 있 었으며, 십장의 맥박의 기능에 대해서도 그것이 수축에 의해 동맥으로 피를 내보내는 것임을 분명 히 알고 있었다 .12 )

12) 이 시 기 의 Harve y의 연구에 관한 논의 는 Gweneth Whit ter id g e , Wi lliam Harvey and the Ci rc ulati on of the Blood (New York : Sc ien ce Hist o r y Publi ca ti on s, 1971), chaps . , 3 -4에 실려 있다.

그러나 이처럼 피의 순환을 지지해 줄 여러 사실들을 이미 1618, 9 년까지에는 하아비가 알고 있었지만 그 역시 음석물이 간에서 펴 로 생성되어 온몸에 영양분을 공급한다는 생각을 아직 그대로 지니 고 있었고 다라서 피의 순환이라는 생각은 얻어내지 못했다. 그러 떤 이때부터 1628 년 De motu cord i s 의 발표까지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서 하아비로 하여금 피의 순환을 결론짓게 했 을까? 이것은 하 아비 연구에 있어서 가장 홍미있는 질문이고 여러 가지 설명이 있 어 왔으며 따라서 이 질문에 단정적으로 대답하기는힘들다 .13) 그 러나 하아비가 피의 순환이론을 얻어내는 데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 울 끼친 요소는 맥박이 뒤면서 십장으로부터 방출되는 피의 양에 대한 정량적 고찰이었던 것은 들림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맥박의 기능이 정확히 이해되어서 맥박이 튈 때 십장이 동맥으로 피를 내 보낸다는 것이 확실히 되고 그에 따라 맥박이 계속 뒤면서 피가 계

13) 이 문제에 대한 여러 면에서의 고찰이 Jer ome J. By le by l, ed., Wi ll ia m Harvey and Hi s ag e: The Profe s sio n al and Socia l Conte x t of the Di sc overy of the Ci rc 11lati o11 (Jo hns Hop k in s Pr. , 1979) 에 실 려 있 다 . 이 문 제의 해답을 얻는 것율 도와줄 De motu cord i s 의 처술 과정에 대한 홍마 있는 추축이 Gweneth Whit ter id g e, De Motu Cordis : Writ ten in Two Sta g e s ? .., Bulleti n of the Hi st o r y of Medic i n e .51 (1977), pp. 130-50 에 실려 있다.

속 십장으로부터 내보내진다고 생각하게 되면 심장이 그렇게 많은­ 양의 피를 어디서 얻는가 하는 질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 논 것이다 .1 4)

14) 이 런 견해는 J.J. By le by l, the Growt h of Harvey 's De Motu Cordis , Bulleti n of the His t o r y of Medic ine 47 (1973), pp . 427-70 에 나타나 있다.

실제로 하아비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 숫자를 사용해 가며 이같은 정량적 고찰을 해보였다. 우선 그는 맥박이 한 번 뛸 때마다 방출 되는 피의 양을 아주 작게 잡아서 +온스(약 7g ) 정도로 잡았다 . 그리고 백박이 뛰는 횟수도 아주 작게 잡아서 30 분에 1000 번 정도 ­ 로 잡았다 . 이렇게 아주 작게 잡아도 15) 30 분 동안에 심장으로부터 방출되는 피의 양은 7k g이나 되고 1 시간에 14kg 정도, 하루에는 · 300k g이 넘는 양의 피가 방출이 되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 람의 몸무게의 몇 배가 되는 이같이 많은 양의 괴가 매일 음식물로壘 부터 새로 생성이 된다는 것온 도처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십장으로부터 나간 피가 소모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사 되돌아온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결론이 되고 괴의 순환이라는 생 각은 이 렇게 해서 얻어졌다. 일단 괴의 순환이라는 생각을 이렇게 얻어낸 후 하아비는 이것을 확인하는 여러 실험들을 행했다. 정맥의 판막의 방향이 십장을 향 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절제된 정맥에 가는 철사를 집어넣 어 한 방향으로만 쉽게 들어감을 보인 것이 그 예이다. 하아비의 실험들 중 가장 중요했고 유명했던 것은 이른바 〈結紫絲(ligat ure) 〉 실험으로서 직접 자신의 팔에다가 행했던 실험이었다. 우선 그는 걷찰사로 팔을 동여매어서 동백과 정맥의 흐름을 모두 중단시켰는 데 팔은 접차 차가와지고 결찰사 위의 동맥이 피로 가득 차서 고동 쳤다. 다음에는 정맥은 그대로 막힌 채로 두고 동맥은 자유스럽도 록 결찰사를 풀어 주었는데 피가 팔을 동해 홀러감에 따라 급히 따­ 뜻한 느낌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팔이 자주색으로 변하면서 정 맥의 결찰사 아랫부분이 눈에 띄게 부풀어 올랐다. 이것은 피가 자-

15) 이 양은 백박수와 매맥박당 방출되는 피의 양을 정확히 잡았을 때 산출될 양의 1/30 도 되 지 않는 작은 양이 다.

유로와전 동맥으로부터 아칙 차단된 정맥으로 건너왔다는 것을 가 리켰고 피가 동맥을 통해 몸의 끝부분으로 갔다가 정맥을 동해 심 장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두럿이 보여주었던 것이다. 5 하아비 의 De motu cord i s 는 이 런 실험 적 증거 들을 포함해 서 피 의 순환이론을 주장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16) 그러나 하아비의 이 책 올 더 주의깊게 살펴보고 그의 인체에 관한, 그리고 더 넓게는 생 물학 전반에 관한 저술과 당시의 배경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순환 이론에 다양한 형태로 기여한 다른 요소들을 찾아볼 수가 있다. 더 구나 하아비가 처음 피의 순환이라는 생각을 하고 그것을 확인하기 까지의 과정에만 국한하지 않고 하아비로 하여금 그러한 가능성을 머리속에 떠올릴 수 있게 한 배경이나 하아바의 결론이 받아들여져 간 과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이들 다양한 요소들이 모두 중요한 기여를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16) 이 런 관점 에서 의 De motu cord i s 의 분석 이 주 12) 에 언급된 Wbit ter id g e , Harvey and Cir c ulati on , chap. 6 에 실려 있다.

이들 요소 중 처음 생각해야 할 것은 역시 정량적 사고법이다. 그것이 하아비로 하여금 피의 순환의 가능성을 생각해야만 하도록 한 것은 들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아비가 사용한 정 량적 방법은 복잡하거나 세련된 방법은 아니었고 수학적 방법이라 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은 더욱더 아니었다. 하아바는 단순히 아주 간단한 수적 계산을 했던 것이며 그 정도의 정량적인 면은 갈레노 스나 그의 추종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피 획 순환이몬에 정량적 방법이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새로 운 정량적 방법의 응용에 의해서 얻어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둘째로 실험의 방법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일단 얻어전 피의 순환의 假說을 하아비 자신이 확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확신 시키는 과정에서는 실험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구러나 이들 실험들이 피의 순환이론을 얻어내게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언어진 이론을 확인하고 확신하는 〈확인실험 (con fi rm i ng exp e•

먀i rnen t) 〉 들이었다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나 이론의 발견에 있어서의 실험의 역할이타는 면에서 주목해야 한다. 위에서 본 〈 걷찰사 〉 실험 같은 것은 피의 순환의 가능성에 대해서 미리 생각하지 않고서는 행할 까닭이 없는 실험이었던 것이다. 해부에 의해 얻어진 경험적 사실도 그 자체들만으로서는 〈 순환 〉 이라는 생각을 끌어내지는 못했 던 접도 이런 면에서 다시 강조할 팔요가 있다. 한편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기계적 철학, 그리고 그에 바탕한 기 계 론적 (mechanis ti c) 사고의 영 향도 무시 할 수 없다. 안체 의 여 러 기관들의 작용을 물질로 이루어전 기구들의 움직임으로 보고, 그에 따라 십장은 퍼를 펌프질해내는 기구로 생각해서 그 양을 계산해 보는 석의 사고법이 괴의 순환이론을 얻어내게 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17) 그러나 기계적 철학의 영향은 이같이 간접적이고 괴상 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하아비가 본질적으로는 기계론자가 아니었 기 때문이다. 이 정은 그가 인체에 들어 있는 〈 靈 (soul) 〉에 대해서 계속 언급했다는 사실, 그리고 나중에 그가 관십을 가전 發生學 (embr y olo gy)에서의 그의 논의나 십지어는 피의 순환 자체에 대한 그의 설명에도 나타나 있다. 인체를 완전히 기계로만 본 철처한 기 계론적 인체이론은 데카르트의 『사람에 관한 논의 (Tra it e de l'ha m• . me) 』 18) 에 실려 있고 이것이 17 세기의 생물학에 하아비의 이론보다 더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하아바는 이같은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인체이론을 강력히 비난하기조차 했다.

17) Ric h ard S. Wes tfa ll 온 그의 과학혁 명 개 선서 에 서 이 런 정 을 강조하고 있 다 : 제 1 장 주 10 ) 에 언급된 책 의 Bi olo g y and the Mechanic al Ph i loso p h y”라는 계 목을 지 닌 chap. 5 를 참조할 것 . 이 외 에 보다 최 근의 Theodore M. Brown , Phys i o lo g y and the Mechanic al Phil os op h y in Mi d-S evente e nth Cent ur y Eng la nd, Bulleti n of the Hi sto r y of Medic i n e 51(1977), pp. 25-54 과 Ho- ward B. Burchell, Mechanic al and Hy dr auli c Analog ies in Harvey 's Di s- covery of the Cir cu lati on , Jou rnal of the Hi sto r y of Medic ine 36 (1981), pp. 260-77 도 같은 입 장을 보이 고 있 다. 18) 제 5 장 수 14) 에 언급된 Adam and Tannery, eds., Oeuvres, vol. XI 울 참조할 것 .

기계론적 사고보다 오히려 더 중요했던 것은 하아비가 지녔던 아 리스토텔레스주의의 경향이고 어쩌면 이것이 하아비의 피의 순환이 론이 얻어지는데 근본적으로 가장중요한 역할을했다고도 볼 수 있

다. 19) 하아버 는 순환하는 운동울 가장 완전한 운동으로서 중요시 하 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롤 좇았다. 천체들의 원운동은 순환운동 의 가장 중요한 예이지만 그 의에도 자연에는 많은 순환하는 움직 임듄――예를 들어 비가 하늘에서 내려서 땅속으로 들어가 지하수 가 되었다가 강을 거쳐 바다로 가고 증발하면 다시 하늘로 운타가 는 순환 __ 이 있으며 피가 순환하는 것도 이런 자연스러운 순환운 동의 하나로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하아비는 De motu cord i s 에 서 이 같은 아리 스토텔레 스적 인 믿음으로 순환운동을 뒷 받침 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체에서 심장을 가장 중요한 기관으 로 보았는데 이 점 역시 하아비로 하여금 십장을 중십으로 한 피의 순환이론을 생각하기 쉽도록 해주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아비 는 비교해부학 (com p ara ti ve ana t om y)과 발생학울 중요시했다는 접에 서 20) , 그리고 생물체에서의 〈최종의 원인(fi nal cause) 〉울 중요시했다 는 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와 공동되었는데 이같은 공통점이 역시 그의 순환이론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De motu cord i s 의 많은 부분 에 드러나 있다.

19) Walte r Pa g el 은 W ill ia m Harvey and the Purpo se of Ci rc ulati on , Isis 42 (1951), pp. 22-38 에서 이 정을 강조한 바 있다 . Harve y에 대한 Pa g el 의 그 후 의 연구들도 참조할 팔요가 있다 : Wi ll ia m Harvey' s Bi ol og ica l Ideas (New York, 1967); W ill ia m Harvey Revis i t ed , Hi st o ry of Scie n ce 8 (.~69), pp. 1 -31;9 (1970), pp. 1-141; New Lig h t on Wi ll ia m Harvey (Basel: S.' Karge r, 1976). 20) 예를 둘어 MT. Ghis e li n, Wi lliam Harvey 's Meth o dolog y in De Motu Cordis from the Sta n dp o in t of Comp a rati ve Anato m y , B11llet in of the Hi st o ry of Medic i n e 40 (1966), pp. 314-27 을 참조할 것 .

끝으로 하아비 의 분석 적 (analyt ic) 방법 을 들 수 있 다. 하아비 는 인체 전체를 한꺼번에 생각해서 그 전부를 설명하는 복합된 체계를 세우려 하지 않고 문제 하나하나를 분리해서 살폈다. 죽 갈레노스 에서 보는 것처럼 소화, 신경, 호흡 모두를 다 포괄해서 설명하는 체계를 얻으려 하지 않고 인체내에서의 피와 십장의 움직임만을 본 것이며 그것이 그가 피의 순환이론을 얻어내는 것을 쉽게 해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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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하야비는 이렇게 피의 순환이라는 사실만을 밝혀냈고, 그에 관련 된 자세한 사항들은 알지 못 했 다 . 예를 들어 그는 동맥의 괴를 정 맥으로 전달해 주는 모세관의 존재――순환이론의 걷정적 증거가 될-는 알지 못했다. 이 접은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 우주구조 의 증거 가 되 는 별 들의 視差( p arallax) 를 관측하지 못했 던 것 과 비 교 할 수 있겠다. 또한 하아비는 피가 순환하는 목적도, 그리고 피가 왜 〈 허파의 통과 〉 를 하는지도 알지 못했으며, 순환과 호흡, 순환과 소화의 관계도 모르고 있 었 다. 그리고 이런 접둘은 그의 강한 아리 스토텔레스주의적 경향과 함께 하아비가 생리학의 혁 명을 완 성한 것이 아니라 시작하기만 한 과도기적 인물임을 말해 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생리학의 혁명의 전정한 완성은 하아비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순환과 호 흡 과의 관 계 가 밝혀지면서, 특히 피가 허파를 통 과하면서 겪는 변화와 그 기능에 대해서 밝혀지면서, 얻어졌던 것 이다. 그리고 이 접 역시 코페르니쿠스에 의한 변혁에서 시작한 천 문학의 혁명이 천체의 운동에 대한 역학적 설명을 제공해 준 뉴튼 에 의해서야 완성이 된 것과 비교할 만하다. 하아비의 후계자들의 호 흡 에 관한 연구는 전공에 관한 연구의 일 환으로 보일에 의 해 시 작되 어 서 후크, 로우어 (Ric h ard Lower, 1631 一 1691) 등을 거치면서 피가 허파에서 호흡을 통해 들어온 공기와 접 축해서 그 일부를 흡수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다. 그 후 메이 오우(J ohn May o w, 1645-1679) 는 이 때 공기 에 서 흡수하는 성 분을 n it ro - areal 입자라고 불렀고 이것이 물질의 燃 燒에서도 흡수되는 성 분임을 알아내었다 .21) 그러나 메이오우 이후 이같은 호흡연구의 전 통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호흡의 새로운 이론은 18 세기에 오P 1 21) 이에 대한 간단한 논의는 M. Foste r , Lect1 1 res 011 the Hi st o r y of Phys i o l og y d11rin g the Six te e n th , Sevente e nth and Ei gh te e nth Cent1 1 rie s (Cambri dg e U. Pr., 1901), lectu r e VII 과 L.G. W ilso n, The Transfo r mati on of Ancie n t Concept s of Respi ra ti on in the Sevente e nth Centu r y, Isis 51(1960), pp. 161-72 윤 참조할 것 .

산소에 대한 이해가 얻어지면서 성립이 되게 되었던 것이며 그에 대한 논의는 이 책의 범주를 넘는 것이 되겠다 .22) 22) 이 에 대 한 간단한 논의 는 주 21) 에 언급한 책 , lectu re IX 참조.

제 8 장 과학단체의 출현과 새로운 과학활동 그동안 우리논 과학혁명기에 있어서의 과학분야들의 내용상의 혁 명에 대해 살폈다. 그리고 그같은 내용상의 혁명 의에도 과학의 방 법과 당시의 유럽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몇 가지 기본적 경향이~ 믿음들이 그같은 과학의 내용상의 혁명에 어떻게 기여했나를 살펴 보았다. 그러나 과학혁명은 과학의 내용이나 방법만의 혁명은 아나 었고 과학의 제도상의 혁명도 포함했다. 족 사회 속에서 과학이 행 해지는 양상에도 혁명적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과학혁명기에 출현한 새로운 과학단체들과 그 단 체들에서 행해진 새로운 과학활동이다. 1 과학혁명의 결과로 나타난 새로운 과학은 그 동안의 학문의 전당 이었던 대학이 아니라 새로 출현한 과학단체에서 행해졌다. 물론 과학혁명기의 유수한 과학자들――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데카르 트, 하아비, 뉴튼-은 모두 대학출신들이었고 그들 중 몇몇온 대 학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과학활동의 주무대는 대학 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생애 중 가장 창조적 시기 18 년 동안 Padua 대학의 교수였던 갈릴레오는 결국 Padua 대학을 떠난 후에 그­ 의 주된 저술들인 『두 가지 주된 우주구조들에 관한 대화 (D i alo g<> 에 관

한 논술』울 진필했으며,!) 뉴튼은 오랫동안 캠브리지대학의 수학교 수였지 만 그의 Pr i nc ipi a 는 王立限會 (Ro y al Soc i e ty)의 주도에 의 해 서 야 출판되었던 것이다. 유럽의 대학은 17 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그 리고 많은 경우에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을, 중세의 창립 당시의 형 태와 교과과정을 고수했으며, 다라서 철처하게 아리스토텔레스 위 주였고 과학혁명에 의한 새로운 과학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2) 자연히 새로운 과학은 그것이 처하고 그것이 행해질 장 소__또는 제도-를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새로운 과학 단체들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1) 1632 년과 1638 년에 출판된 이 책들의 구하기 쉬운 영역판들을 위해서는 제 2 장의 주 20) 과 재 3 장의 주 13) 을 볼 것. 2) 이 당시 대학에서의 과학에 대한 간단한 논의가 Marth a Ornste i n , The Role of Scie n ti fic Socie t i es in the Sevente e nth Cenfa r y( U niv e rsity of Chic a g o Press, 1928), Par tJI에 실려 있다.

이들 과학단체들의 출현에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영향이 강했고 특히 여러 단체들 중 더 성공적이었고 따라서 더 지속적이었던 런던 의 왕립 학회 와 파리 의 왕립 과학아카데 미 (Academi e roy al e des scie n ces) 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이들 단체들에서 이같이 베이컨의 영향이 강했던 것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새로운 과학에 대한 베이컨 의 견해로부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죽 그 당시까지의 과학의 페 단을 분석해서 제시한 네 개의 偶像(i dol) 들에 대해 베이컨이 제시한 실험, 과학기구의 사용, 협동연구, 상호비판 둥의 개선방안들은 과 학단체들에 의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었으며, 그가 주장한 귀 납적 방법 (ind ucti ye meth o d) 역 시 많은 사람들에 의 한 실험 과 경 험적 지식의 축적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또한 베이컨이 그의 처서 New At lan ti s 에 서 제 안한 〈살로몬의 집 (Salomon's House) 〉온 과학자 들의 이 상향으로서 그 속에 과학자들이 모여 살게 하고 그들에 게 시설을 주고 재정적인 지원을 해서 실험과 귀납적 방법에 의해 과 학연구를 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과학자들이 유용하고 실제적인 지식을 얻어내고 인류의 복지에 기여하게 될 것 이라는 그의 주장은 과학단체들에서 그대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3)

3) 대이컨의 이같은 견해둘에 대한 논의는 제 4 장 5-6 철에 되어 있음 .

2 과학혁명기의 가장 중요하고 성꽁적이었던 과학단체들――런던 왕립학회와 파리의 과학아카데마-은 1660 년대에야 창립이 되었 다. 그러나 이돌 단 체 의 前身둘 로 볼 수 있는 단 체 들은 17 세기에 들어선 후, 특히 1640 년대에 와 서 ,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동에서 생겨나기 시작 했 다 .4)

4) 초기과학단체 들 에 대한 간단한 논의가 주 2) 에 언급된 Orns t e i n 의 책 Par til에 실려 있다 .

이들 중 가장 앞섰고 실제적으로 처음이었던 과학단체는 로마의 린째 이 아카데 미 (A ccademi a dei Li nc ei) 였 다. 당시 이 탈리 아에 많이 존재하던 人文主 義者 들의 문학적 집단을 본떴지만 그 속에서 자연 철학의 문제들이 자주 논의된 이 아카데미는 당시 실력자였던 체지 (F ederig o Ces i ) 公의 지원을 받아서 1601 년에 창립되었다. 갈릴레오 가 이 아카데미에 속했었으며 그가 자신을 〈아카데미 회원〉이라고 얘기할 때에는 바로 이 아카데미를 가리켰던 것이다 . 그러나 1615 년 이후의 코페르니쿠스 우주구조에 대한 박해에 의해 어느 정도 쇠퇴하기 시작 했 던 린쎄이 아카데미는 1630 년 체지공의 죽음으로 와해되고 말았다.

5) 린쎄이 아카데미의 역사에 대한 극히 짧은 논의가 주 2) 에 언급된 Orns t e i n 의 책 pp .74-6 에 담겨 있으며, 더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아적도 이탈리아어로 된 Domenic o Carutt i, Breve sto r ia de/l a Accademi a dei Li nc ei( R oma, 1883) 를 참조할 수밖에 없다 .

린쎄이 아카데미보다 더 본격적이고 조직이 갖추어졌던 과학단체 가 1657 년에 풀로렌스에 창립이 되었는데 〈실험 아카데미〉라는 뜻 으로 치 멘 토 아카데 미 (Accademi a de] C i men t o) 라고 불리 었 다. 6) 이 아 카데미는 당시 풀로헬스의 실력자들이었던 메디치(M ed ici)家의 후 원을 받았는데 갈릴레오의 제자였던 토리첼리의 후계자들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코페르니쿠스 우주구조에 대한 박

6) 치멘토 아카데미에 대해서는 주 2) 에 언급된 Orns t e i n 의 책, pp .76-90 에 역시 논의되어 있으며 최근의 W.E.K . Mi dd leto n , The Expe rim ente r s: A Stt ldy of the Accademi a del Ci m ento ( Jo h ns Hop k in s Press,1971) 에 머 자세히 논의되어 있다 .

해의 영향으로 천문학이나 우주이론 둥에는 관십을 보이지 못하고 주로 실험 위주의 과학활동에 전념했으며, 이들의 실험연구의 결과 는nat u 1 r6a6l7i 년esp 에 e r i e출nz판e) 된』에 『담자겨연 에있 다대. 한 ” 특실히험 에이 들관은한 실험소 론기 들구의 (S ag 개g i발 에di 도 힘을 써서 온도계와 기압계를 만들어 썼으며 나중에 로버트 보 일이 많이 사용했던 진공실험장치 같은 것들도 이들에게서 유래한 것이 많다. 그러나 약 10 년간 활발히 활동하던 이 아카데미도 1667 년 그 주된 후원자였 던 레 오폴드 (Leo p old) 공이 추기 경 (card i nal) 이 되 어 떠나는 것과 같은 시기에 와해되고 말았다 .8)

7) Sag gi di natu rali es p er i enze 의 영 어 번역 이 주 6) 에 언급한 M i ddle t on 의 책 r chap. 4 에 수록되어 있고 갇은 책 chap. 5 는 출판되지 않은 실험둘에 대해서 다 루고있다 . 8) Ci m ento 아카데미의 와해에 관해서는 주 6) 에 언급한 M i ddle t on 의 책, chap. 7 에서 머 자세히 다루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에도 17 세기 前半에 린쎄이나 치멘토 아카데미와 비슷한 모임들이 이탈리아보다는 좀더 비공석적인 형태로 나타났 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으로는 데카르트의 찬구이자 신부 였던 메르센느를 중십으로 그의 집에서 모여 과학과 자연철학의 문 제들을 토론한 집단을 들수 있다. 수학적인 성격이 강했던 이 메 르센느 집단은 이같은 직접 모임만이 아니라 메르센느를 주축으로 유럽의 여러 과학자들과의 실질적인 서신교류망도 가지고 있어서 모임 때마다 메르센느는 그의 서신교환을 동해 얻은 지석을 구성원 들에게 전했다. 그와 교류가 있던 사람들의 이름들一―갈릴레오, 토리 첼리 , 데 카르트, 홉스 (Thomas Hobbes, 1588— 1679), 페 르마, 가 쌍마 파스칼 (Bla i se Pascal, 1623 一 1662) -울 보면 유럽 의 유수한 과학자들이 망라되어 있었으며, 데르셴느는 이들과의 의견교환분만 아니라 그들의 연구를 격려하기도 하고 출판을 돕기도 하는 등 게 인으로서 나중의 과학단체들이 맡게 될 역할을 수행했다 .10)

9) Mersenne 집 단에 관한 간단한 논의 는 Harcourt Brown, Scie n t tfic O rga niz a - tions in Sevente e nth Centu ry France(I620-I6BO)(New York, 1934), chap s. 2-3 에 실려 있다. Mersenne 자신의 사상과 생애에 대한 주된 논의는 Robert Lenoble, Mersenne ou la nais s ance du mecanis m e, second edn. (Pari s~ 10) VMerrins ,e n1n9e7 1의) 이이 다같. 은 역할에 대한 간단한 논의는 주 9) 에 언급된 Lenoble 의 책,

chap. 15 에 실려 있다.

그러나 명문화된 규칙이 없이 비공석적으로 활동해 나가던 이 집 단은 1644 년 메르센느가 죽으면서 와해되었다. 이 집단의 일부는 E 그후 및 차례 새로운 집단들을 형성했지만 모두들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 다. 우선 르 베 이 의 (L e Ba i lleur) 집 단이 1648 년에 형 성 되 었 다가 1654 년에 중단되 었 고 1657 년에 는 프랑스 아카데 미 (Academi e Franc- a i se ) 의 활동에 자극받은 몽모르 (Haber t de Montm or, 1600 一 1679) 라는 부유한 귀족의 후원으로 보다 더 조직을 갖춘 몽모르 아카데미가 결성이 되었다. 물론이런집단들은그구성원이 바뀌면서 관십을 ­ 가진 주된 주제들도 바뀌었는데, 예를 들어 몽모르 아카데미의 경 우가지는 고원 래있의 었 다메. 르1센66느4 년 집에단 는보 새다 로 더운 폭후넓원게자 자테연 베철 노학 (T h전ev반en에o t, 관16십20을— ­ 1692) 를 중십으로 다시 새로운 그룹이 형성되었는데 바로 이 집단 이 재상 콜베르 (Colber t)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그것이 결국 1666 년 의 왕립과학아카데미의 설립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11)

11) Montm or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이 시기의 프랑스 과학자 집단들에 대해서는 주 9) 에 언급된 Brown 의 객 , chaps . 4-6 과 Rene Tato n , Les orig ine s de /'Academi e roya le des sci e1 1ces(Paris, 1966), pp. 47-54 에 논의 되 어 있 다.

한편 영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과학자들의 비공식집단이 형성되 어 있었다• 1644 년에 런던에 윌킨스(J ohn W ilk in s , 1614 ― 1672) 를 중 십 으로 하고 자선들을 〈철학 칼리 지 (Phil oso p h ic a l Colle g e) 〉라고 부른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그레샴 칼리지 (Gresham Colle g e) 에 정기적 으로 모여 과학의 실험과 토론을 행했었고 젊은 시철의 보일도 이 집단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 집단의 주된 구성원들은 1646 년 크롬­ 웰 (Cromwell) 이 옥스포드 대학을 장악하고 그 개편을 추진할 때 옥 스포드로 옮겨서 그곳에서 주로 실험 위주의 과학활동을 하면서 계 속 도임울 가졌나 이들은 1660 년 王政復古 후 다시 런던으로 복_ 귀해서도 얼마동안 모임을 가졌는데 결국은 이들이 같은 해 11 월 그레샴 칼리지에서 모여 새로운 공식단체인 왕립학회를 결성한 모. 체였던 것이다 .12)

12) 왕립학회 창립 이전의 영국의 과학자 집단에 대해서는 주 2) 에 언급된 Ornste i n 의 책 chap .4 외 에 Henry Ly o ns, The Roy a l Socie t y , 1660-1940: A Hi st o r y

제 8 장 과학단체

of Its Admi ni s t r a ti on ttn der Its Clzarte r s(Cambrid g e U. Pr., _19 4 4 ), chap. 1 ; Doroth y Sti m son, Sc ien ti sts and Amate u rs(New York, 1948), chap s . 1-4 및 Marge ry Purver, The Roy a l Soc iety : Concep t and Creati on (M. I. T . Pr., 1967) 을 참조할 것. 이들 집단들과 왕립학회의 정확한 관계에 대해서는 논 란이 많으며 그갇온 논란의 예를 위해서는 Purver 의 책에 대한 서평 에세이인 Charles Webste r , The Orig ins of the Roy le Socie t y , Hi st o ry of Scie n ce 6(1967), pp. 10 6- 28 을 참조할 것.

지금까지 살펴본 초기 과학집단들은 그 후 신인 왕립과학아카데미 와 왕립학회와는 달리 모두 얼마 계속되지 않아 활 동이 중단되었다. 결국 이들 비공식적 집단들의 조직의 취약성이 그것들의 短 命함 을 낳았던 것이다. 특히 이들 집단들은 귀족이냐 권력자 또는 부호의 개인적 관십이나 그들과의 개인적 찬분에 의한 〈개인적 후원(p a t r­ -o nag e) 〉에 의존한 〈 개인기관 〉 의 성격을 띠었다. 따라서 이들 집단 의 운명은 그같은 지원을 해주던 개인의 운명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었고, 그 개인후원자가 떠나거나 죽거나 도는 다른 이유에 의해 서 관십이 없어지면 와해되었다. 란쎄이 아카데미의 체지공, 치멘 토 아카데미의 레오폴드공 그리고 메르센느 동은 모두 이를 찰 보여 주는 예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초기 과학단체들에서의 과학활동이 계속되어 가는 과정에서 거기에 속한 과학자들은 차츰 더 조칙적이고 지속적인 단 체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조직적 연구와 상호비 판을 위해서 공석적 조직과 제도의 팔요성을 느끼게 되고 과학지석 의 상호교환의 팔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사실상 메르센느 같은 사 람은 개인으로서 광범위한 서신교환과 출판지원 활동 둥을 통해서 거의 과학 학술지의 역한을 수행하기조차 했던 것이다. 또한 이들 과학자 집단에서 자주 행한 실험을 위해서는 시설과 경비가 필요했 으며 과학자들은 이에 대한 배려의 필요성도 느끼게 되었다. 결국 이같은 필요가 이들로 하여금 왕립학회와 왕립과학아카데미 같은 공석적이고 조직화된 단체들은 결성하도록 했던 것이다. 3 왕립 학회 (Ro y a l Soc i e ty)는 앞에 서 본 대 로 1660 년에 런던의 그레

샴 칼리지에 모여서 처음에는 자신들을 그냥 〈 칼리지 〉 라고 부르던 집 단이 새 국왕 찰스 ( Charles) 2 세 로부터 磁 韋 ( Char t er ) 을 부여 받으 면서 구성이 되었다. 그러나 찰스 2 세는 共和政派가 주류인 이들 과학자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하지는 않았고 재정적인 면에서는 학회는 그들 스스로의 재원에 의존해야했으며, 왕의 헌장이 이들에 게 가능하게 했던 것은 집회, 회원선출 및 임원선임 그리고 출판의 권한 등이 었다. 이 에 따라 왕립 학회 는 상당히 任意 65 이 고 자발적 인 단체로 자라났다 .13) 회비를 내는 회원들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학회 의 재정은 빈약했고 經常운영예산도 따로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한참 동안은 보수를 받고 고용된 사람은 후크분이었으며 실험 연구를 위한 시설이나 예산 같은 것은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따 타서 회원들의 실험을 위한 경비와 설비는 개인적으로 마련해야 했 고, 학회의 기능은 과학자들이 그렇게 해서 개인적으로 행한 실험 들을 학회에서 다시 행하거나 학회에 보고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13) 왕립학회의 역사에 대해서는 주 12) 에 언급된 문헌들을 참조할 것. 이외에 왕립 학회 의 첫 번 째 공석 역 사인 Thomas Sp ra t, Hi st o ry of the Royl e Soc iety ( Lon- don, 1667) 와 학회 초창기 의 Secre t ar y였 던 Henry Oldenbur g의 서 신집 , A. Rup e rt Hall and Marie Boas Hall, eds., The Correspo n dence of Henry, Olde11b11rg (M adis o n, 1965- )등의 문헌에도 많은 자료들이 담겨 있다.

이같은 형편에서 학회는 회원들의 설험이나 과학 연구활동에 대 해 별로 영향력이나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또한 학회는 회원 들의 실험과 과학활동에 일관된 방향이나 주된 이돈체계를 제시할 수도 없었다. 회원들이 대체로 모두 베이컨주의자였고 기계적 철학 을 받아들였다는 접 의에는 그들간의 공동접이라고는 찾아보기 힘 들었나 회원들의 기계적 철학의 내용에 있어서도 세부적으로는 많 이 차이가 있었고 이같은 차이들은 그들이 그러한 문제를 깊이 파­ 고들거나 그러한 문제들에 관해 십각하게 논쟁하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노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왕립학회의 실험들은 서로 깊은 연관이 없는 아주 회상적이고 초보적인 실험들에 불과했고 연 구 프로그램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l4)

14) 왕립학회 초기의 실험들에 대해서는 주 l3) 에 언급된 두 가지 문헌 의에 Tho- mas Bir c h, Hi st o ry of the Roy a l Socie t y of London(London, 1756); Robert

Hooke, Phil o sop hica l Exp er im ents and Observati on s(London, 1726) 등을 참 조할 것. 이 밖에 왕립학회에서 출판한 Phil oso p hi c a l Transac ti ons 에도 초기 의 실험들에 대한 정보가 많이 답겨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학회의 주된 기능은 과학적 지석과 정보의 수집이 었다. 회원들이 수행했거나 발표한 연구의 결과로 얻어전 과학지식 과 정보분 아니라 영국내의 다른 과학자들, 그리고 유럽 대륙의 회과 학의 자초들대의 회 과장학이활 었동 던에 모대레한 이 정(R보ob를ert M모o으ray는, 16일08이— 었16던73 ) 는것이 다기. 록 부학 (Re gi s t er) 를 두어 서 국내 의 의 여 러 과학활동에 대 한 정 보를 기 록 보 촌했고 이 런 활동은 학회의 서기 (Secre t ar y)였던 독일 출신 의 올덴버 그 (Henr y Oldenburg, 1618 一 1677) 에 의해 계승되었다. 올덴버그는 과 학지식과 과학활동에 관한 정보수집을 위한 대규모의 서신교환활동 을 행해서 그의 서신집 15) 은 당시의 전유럽의 중요한 과학활동을 기 록해 주고 있 다. 처 음 그가 개 인적 으로 출판했 던 Phil o sop h ic a l Transac tio ns 는 곧 학회의 공석 회보가 되었고 학회의 중요한 과학적 업적들을 간행하는 학술지가 되었다.

15) 주 13) 에 언급됨 .

이같은 과학적 지식의 수집, 전달 등의 활동과 관련해서 왕립학 회가 지니게 되었던 또 하나의 기능은 과학적 지식의 〈확 인 〉 의 기 농이었다. 예를 들어 학회는 학회에 제출된 과학적 업적을 공식으 로 인정하는 역할을 했으며, 특히 실험에 의한 연구결과에 대해서 는 학회가 집단으로서 실험을 다시 행해 봄으로써 그것을 확인해 주기도 했다. 이같은 확인의 기능의 한 형태로서 학회는 과학적 지 식의 〈발견의 우선권(p r i or ity of d i scover y)〉의 확인의 기능도 지니게 되었다. 과학자들은 학회에 자신들의 연구결과를 제출함으로써 자 신의 연구나 발견이 남보다 먼처 였다는 〈우선권〉울 보장받게 되 었 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아직 출판될 수 있는 형태로 다듬어지지 못 한 결과를 순전히 우선권을 보장받을 목적으로 封印된 채로 학회에 제출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일은 과학자들의 태도에 있어서의 중요한 변화를 나타낸다. 그 이전에는, 십치어는 17 세기 초에 있 어서도,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결과를 비밀로 하는 일이 혼했으

며 수학분야의 결과에 대해서는 그런 일이 더욱 십했었다. 왕립학 회와 같은 조칙 화 된 단체가 생겨나면서야 과학상의 업적을 그같은 단체를 동해 발표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으며 그에 따라 그러한 업 적이 확인되고 그 우선권이 보장받게 되었던 것이다 .16)

16) 과학자들이 우선권에 대해서 지니는 강한 관십에 대한 홍미있는 논의로 Robert K. Merto n , Prio r it ies in Scie n ti fic Dis c overy , Americ a n Soc iolo g ica l Revie w 22 (1957) pp. 635-59 가 있다.

왕립학회의 이같은 역할은 올덴버그의 개인적 노력에 크게 힘입 었다. 그리고 그런 접에서 그의 기능은 그 앞 세대의 메르센느의 기능과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메르센느의 활동이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난 것과는 달리 올밴버그의 활동은 그가 죽은 후에도 학회 의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지속되 었고 Phil o sop h ic a l Transa cti ons 는 계속 되어서 현존하는 最 古의 과학학술지로 남게 되었다. 이런 접어 1 서 우리는 17 세기 前半의 개인주도의 비공식적 집단들과 왕립학회와 같은 조직화된 단체의 차이를 또 다시 보게 된다. 메르센느 집단의 경우에는 개인의 죽음과 함께 그 기능이 소멸되어 버린 데 반해 올 덴버그의 경우에는 그 기능이 단체 안에 제도화(i ns tit u ti onal i ze) 되어 있었고 개인이 죽은 후에도 그 기능은 단체 속에서 지속되었던 것 이다. 비슷한 얘기를 학회의 첫 실험 관리인이었던 후크에 대해서 도 할 수 있다. 왕립학회 초기의 실험활동은 거의 전적으로 후크의 개인적 노력에 힘입었지만 그가 활동을 멈춘 1680 년대에 와서도 학회의 실험활동은 ' 중단되지 않았다. 후크의 기능 역시 왕립학회 안에 제도화되어 존속되었던 것이다. 4 파리의 왕립과학아카데미는 창립과정부터 런던의 왕립학회와는 크게 달랐다 .1 7) 앞에서 본 것처럼 1664 년 테베노 집단이 콜베르에 게 지원을 요청했을 때의 그들의 목적은 순전히 경제적인 것이어서

17) 왕립과학아카데미의 역사에 대해서는 주 2) 에 언급된 Orneste i n , 주 9) 에 언급 된 Brown 의 책 의 에 Rog e r Hahn, The Anato m y of a Scie n ti fic Insti t11t i- on:T h e Paris Academy of Sc ien ces, 1666-1803. (Univ e rsit y of Cali forn i a Press, 1971) 가 있다.

실험과 시설을 위한 재정적인 지원을 얻어내기를 꾀 했었 다• 그러나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베이컨적 공리주의 ( Bacon i an U ti l it ar i an i sm) 의 명분·――실험을 동한 과학연구가 유용한 지석을 생산해 내서 국가 에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울 표방했고 이것은 콜베 르의 重商 主 義 ( Mercan ti l i sm) 정 책 과 맞아들었 다. 특히 당시 의 콜베 르는 왕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강력한 관료제의 구 축을 추전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와 관련해서 知的 활동을 포함한 프랑스내의 여러 분야들을 왕을 頂點으로 해서 조직화하는 노력을 행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이같은 노력에 의한 왕권의 신장과 〈 프랑스의 영광〉을 드높이는 데 있어 학문적 • 과학적 탁월함이 기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가 기촌의 프랑스 아카데미를 활성화시킨 일은 이런 접 울 찰 보여주는 예이다. 이런 상황에서 테베노 집단에 의한 지원의 요구는 콜베르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콜베르는 기 촌단체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왕의 직속으로 새로운 단체를 조직하 는 편을 택했고, 물론 몽모르, 테베노 집단에 속했던 과학자들이 포함이 되었지만 그 의의 여러 저명한 과학자들도 포함시킨 왕립과 학아카데미를정부의 한기구로서 조직했던것이다. 그리고그중에 는 네 덜 란드인 호이 겐스와 이 탈리 아인 카씨 니 (Gi an Domenic o Cassin i, 1625-1712) 동의 외국인 과학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과학아카데미는 정부의 한 기관이었기 때문에 그에 속한 과학자들은 정부로부터 봉급을 받았고 그들의 과학활동은 정부의 시설을 사용하고 정부의 경제적 지원하에 수행되었다. 영국의 왕립 학회의 과학자들이 다른 일에 종사하면서 톰툼이 수행한 연구를 학 회에 발표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과학아카데미에서는 과학자들이 아 카데미에 專任으로 속해 있으면서 그 속에서 직접 연구를 수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왕립학회는 그레샴 칼리지의 회의실과 실험실 몇 개를 빌어 썼던 데 반해 아카데미는 정부의 여러 시설, 죽 도서실, 천문대, 식물원 등을 사용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는 또한 정부의 공공기능도 일부 맡게 되어서 과학분야의 출판겁열과 기술의 특허 십사의 임무를 지니기도 했다. 파리 과학아카데 미와 런던 왕립 학회 의 이 같은 차이 는 과학아카데

미에서 수행된 과학활동과 왕립학회의 과학활동과의 차이로도 나타 났다. 앞에서 본 대로 왕립학회는 벨다론 연구프로그램이 없이 구십 접없고 산발적인 연구활동을 보여준 데 반해서 아카데미는 월싼 조. 직 적 이 고 체 계 적 인 연구활동을 했 다. 그들은 협 동연구 (collabora ti ve research) 를 위 한 절차와 조직 을 랐으며 뚜렷 한 묵적 을 가지 고_어 떤 문제를 풀기 위해, 또는 논쟁에 있어서 누가 옳은가를 알아내기 위해__체계적이고 계획이 짜여전 실험을 행했다. 또한 정부에 의 한 풍부한 재정지원은 그들로 하여금 대규모의 연구과제도 수행할· 수 있게 해주었고 아카데미가 地球面의 一分에 해당하는 길이를 측­ 정해서 지구의 크기를 정확하게 결정한 것은 그 좋은· 예이다 .18)

18) 과학아카데 마 초기 의 실험 연구들은 아카데 미 가 출판한 Hi st o i r e de /'Academi • Roy al e des Sc i ences 와 Memo i res,•• 에 담겨 있다.

물론 이같은 조직적이고 체계화된 과학활동이 처음부터 정착했던 것은· 아니었다. 협동적 실험연구의 理想은 베이컨 이래 존재했었고. 과학아카데미는 창립 당시 이 이상을 받아들였었다. 그러나 여기에 속한 과학자들은 개인적인 과학활동을 하던 사람들이었고 __- 몽모틀 르나 테베노 같은 그 이전의 비공석적 집단에 속한 과학자들도 토. 론과 지식교환이 아닌 과학연구 자체는 개인적으로 행했었다-각 각 다른 연구 관십사와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참여했다. 처음에는 그들은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함께 연구하는가는 알지 못하고 있 었나 따라서 그들의 협동연구는 실제 조직과 운영면에서는 시행착 오를 겪어야 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과학적 논쟁이 있을 때에는 위원회를 조직해서 논쟁당사자들로 하여금 관련 사실에 대한 실험을 철저히 해서 결과· 를 보고하도록 했고 위원회로 하여금 옳은 주장을 판정하도록 했 다. 이 철차의 밑바탕에는 과학에 있어서는 두 가지 전리가 있을· 수 없고 실험에 의한 경험적 지식이 옳은 진리를 판정해 넬 것이라 는 믿음이 깔려 있다. 실제로 이같은 믿음 대문에 처음 한참 동안 온 아카데미의 과학자들의 연구는 과학자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야 카데미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과학연구에 있어서는 어느 과학자­ 가 실험을 했는가에 상관없이 똑같은 결과와 똑같은 해석이 얻어졌

을 것이고 마라서 그러한 업적은 개인의 업적이 될 수도 없다고 믿 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과학자들이 거으] 같은 실험 결과로부터 정반대의 주장울 고집하는 예들이 나타나게 되고 그들 온 실험이 그 자체만으로 과학의 전리를 결정해 주지 못하게 됨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익명발표의 관습도 중단되게 되었 던 것이다 .19)

19) 이갈은 논쟁의 전형적인 예가 Joh n M. Hi rs chfi el d, The Academi e Roy a le des Scie n ces(1666- '-l6 83) : Inaug u rati on and Init ial Problems of Meth od, Ph.D. Di ss erta t i on (Univ e rsit y of Chic a g o , 1957), chap. 8 에 다 루 어져 있다.

5 앞 철들에서 본 것과 같은 형태로 창립된 두 과학단체는 그 후 계속 존재해 왔다. 왕립학회는 오늘날까지 중단없이 계속되어 왔으 며 과학아카데미도 후에 이름이 바뀌는 일은 있었지만 오늘날까지 존속되었다. 그리고 이 두 단체는 각각 영국과 대륙에 있어서의 과 학단체들의 모델의 역할을 했다. 18 세기예 들어서면서 영국의 여 러 지방도시들에도 〈왕립학회〉라는 이름을 가진 단체들이 많이 출 현해서 런던의 왕립학회와 같은 형태의 과학활동들을 했다. 프랑스 를 비롯한 유럽대륙의 도시들에서는 파리의 과학아카데미를 본받고 과리아카데미와 밀접한 연결을 맺은 아카데미들이 생겨나서 1700 년 라이프니츠의 주도로 베를린에 세워진 베를린 과학아카데미는 거의 파리 아카데미의 베를린 분회형태를 취하기도 했다 .20)

20) 18 세기 영 국의 과학단체와 활동에 대해서 는 D.S.L . Cardwell, The Orga nis a ti on of Sc ien ce in Eng la nd, revis e d edn.(London: Hein e mann, 1972), chap. 2 를 참조할 것 같은 시기의 프랑스의 과학단체와 활동에 대해서는 Jos ep h Ben-David , The Scie n ti st' s Role in Socie t y ( Eng le wood Clif fs, NJ : Prenti ce Hall, 1971), chaps . 5-6 을 참조할 것.

이들 두 단체는 창립 이후 지속되기는 했지만 순조로운 발전을 계속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창립 후 얼마 동안은 두 단체가 모두 창립초의 열성과 활기로부터 침체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왕립 학회의 경우에는 그같은 침체는 재정의 빈곤과 직결되어 있었다. 물론회원수는처음의 100 명 정도로부터 크게 늘어났지만 회원의

선덱에 있어 회비를 부담할 능력이 주된 기준이었기 때문에 과학적 업적이나 능력에 대한 고려는 할 수 없었고 그에 따라 과학과 관련 이 없는 사람들도 다수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회원들로 구성된 학회에서의 과학활동의 질의 퇴보는 어필 수 없었다. 실제로 1680 년대경의 학회의 발표와 주제들은 순전히 호기십을 자아넬 분 과학 적 가치는 전혀 없는 기이한 현상이나 소문들에 관한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같은 침체는 17 세기의 남은 기간 동안 어느 정도 계속되었고, 18 세기에 들어서서야, 특히 뉴튼이 회장이 되면 서, 왕립학회의 활동이 다시 활기를 떠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l)

21) 이 시기의 왕립학회의 활동에 대해서는 주 12) 에 언급된 L y ons 의 책, chap s. 3-4 를 참조할 것.

과학아카데미도 비슷한 침체를 겪었다. 특히 1680 년대에는 실용 적 결과에 너무 큰 기대를 가졌던 데서 온 실망에 의해 왕실의 재 정적 지원마저 줄어들면서 침체는 더욱더 십해졌다. 그러나 과학아 카데미 역시 1699 년에 대개혁을 단행하면서 다시 활기를 띠게 되 었다. 특히 이 개혁을 통해 과학아카데미의 내부조직이 보다 더 관 료적인 형태로 확립이 되었고 프랑스 과학의 관료적 구조의 중십으 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또한 이 기간 동안에 아카데미가 처음에 지녔던 베이컨주의적 경향은 실험에 의한 과학적 진리의 습득이나 과학적 지식의 실제적 효용 두 가지 면에서 모두 맛본 실망에 의해 크게 되조했다. 그리고 창립 당시에는 너무 가상적이라고 해서 의 도적으로 배제했던 데카르트주의가 주도적 경향이 되어 갔고 나중 에는 라이프니츠의 영향도 여기에 가세했으며 그에 따라 이론적이 고 수학적 인 색 채 가 강하게 나타났다. 22)

22) 이 시기의 과학아카데미의 활동에 대해서는 주 17) 에 언급된 Hahn 의 책 chap .J 율참조할것.

이렇게 이들 단체들이 초창기에 겪었던 어려움은 물론 재정상의 어려움과도 관련이 있지만 과학자들이 집단을 형성해서 수행하는 새로운 형태의 과학활동이 자리잡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의 표현이 었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이들 단체들 이전에는 과학 자들은 개인으로 과학활동을 했었고 따라서 일단 단체를 조직한 후

에는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집단으로서 행할 것인가를 알아내어 야만 했다. 결국 왕립학회와 과학아카데미가 처음에 겪었던 어려움 온 역사상 처음으로 집단으로서의 과학활동에 대해 알아 가는 과정 에 수반되는 어려움이었으며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접차적으로 각각의 과학단체가 그 단체에 맞는 새로운 과학활동의 양석을 형성 시켜 갔고 이것이 17 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자리물 잡은 것이다. 또한 이들 단체들에서의 과학활동이 자리를 잡으면서 그것은 이 들 단체만에 국한되지 않고 각각 영국과 프랑스 과학활동의 특성으­ 로 자라났다. 영국의 과학이 왕립학회의 과학활동의 독성인 경험적 이고 실험 위주이며 산발적인 경향을 보이고 그에 따라 개인과학자 의 천재적 능력에 의한 업적이 잦게 나타나는 데 반해서, 프랑스의 과학은 과학아카데미의 과학의 룻성을 나타내어서 이론적이고 수학 적이며 조칙적이고 체계적인 독성을 떠게 되었고, 18 세기에 두드 러졌던 이같은 차이는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과학혁명기 동안의 과학단체들의 출현이 과학활동의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내었던 것 이다.

제 9 장 과학혁명과 종교 혼히 과학과 종교의 관계는 적대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A, l에 대 한 믿음과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서로 무관하거나, 관련이 있 다 해도 상반되는 것으로 취급된 것이다. 심지어는 과학과 종교 사 이의 〈 전쟁 〉 이라는 표현까지가 사용되고 있다. I) 그러나 과학과 종 학교의의 관마찰계이를 뚜실렷제 이역 드사러물 난동 해다 아보원다 (C 깊ha이rle s살 D펴ar보w면i n,, 18특09히— 1종882교 ) 와이 과전 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러한 생각은 지나친 단순화의 결과 라는 것을 알게 된다 .2) 사실 종교가 과학에 적대적이어야 한다면 과학혁명이 종교적 색채가 극히 강했던 서유럽 문화에서, 그것도 종 교에 대한 믿음과 관십이 극히 강렬했던 시기에 , 일어났다는 것 자 체가 불가사의한 일이 되어 버린다• 오히려 과학혁명이 기독교에 깊 이 젖어 있던 서유럽 문화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종교와 과학이 서 로 부합되고 동조적인 면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해 준다고도볼수있 다. 이 장에서는 과학혁명기의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특히 과학혁 명에 대한 종교의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 그 관계의 다양함 울 보여주는 몇 가지 예를 다루기로 한다.

1) 전형 적 인 예 가 이 제 는 고전이 된 Andrew D. Whit e, A Hi st o r y of the Warfa r e of Sc ien ce wi th Theolog y in Chris t e n dom, 2 vols. (London: Macmi lla n, 1896) 이 다. 2) 실제 역사 를 몽한 과학과 종교와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들로 C.A . Rus- sell, ed., Sc ien ce and Reli gious Belie f : A Selecti on of Recent Hi st o r ic a l Stu die s (Op e n Univ e rsit y Press, 1973); I.A . Barbour, Issues in Scie n ce and Relig ion (Eng le wood-Clif fs, NJ : Prenti ce -Hall, 1966) 이 있다.

1 과학혁명기의 종교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처 머리에 떠오르는 일은 갈릴레오의 재판이다. 혼히 갈릴레오를 자유롭고 전보적인 생 각을 가전 과학자의 표본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재판에 대해서는, 과학적 방법에 의해 확인된 우주에 관한 참된 지식을 그 가 계속 주장하는 것을 보수적인 교회당국이 고집스럽계 받아들이 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권위에의 도전으로 생각해서 억압한 것으­ 로 알고 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어느 정도는 근거를 가지고 있 다. 그러나 이 사건을 자유롭고 진보적인 과학과 보수적이고 退裝 h9 인 종교와의 관계의 전형적인 예로서까지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오랫동안의 많은 역사적 연구들은 사건이 그렇게 단순하 지만은 않았음울 보여준다 .3)

3) 갈릴레오와 교최와의 관계에 대한 가장 흥미있는 논의로는 Gi or g io de San- tillan a, The Crim e of Galile o (Univ e rsit y of Chic a g o Press, 1955) 가 있 다. 이 밖에 Jer ome J. Lang for d, Galile o, Scie n ce and the Church (Univ - ersit y of Mi ch ig a n Press, 1966) ; Ludovic o Geym onat, Galil e o Gali lei: A Bi og r aph y and Inq u ir y in to Hi s Phil o sop hy of Scie n ce (New York. 1965) 도 이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갈릴레오는 1610 년경 당시 새로 고안된 망원경을 자신이 직접 만 들어서 하늘을 관측했다. 그리고 이런 관측으로부터 아리스토텔레 스-프둘레마이오스 우주구조와 背聽되는 많은 사설들을 갈릴레오 가 알아냈고 그에 바탕해서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구조물 강력히 옹 호한 것은 앞에서 보았다. () 1611 년에서 1615 년 사이에 특히 찾았던 갈릴레오의 이러한 주장은 카톨릭 교회당국에 큰 불안을 안겨 주었 다. 그동안 받아들여져 오던 안정된 우주구조, 즉 인간중십의 사고 방식에 맞도록 인간이 사는 지구가 중심에 있고 멘 바깥에 신이 사 논 하늘이 있는 조화된 우주구조가 깨지면 이에 바탕한 기독교의 敎 理까지도 혼들리게 됨은 자명했다. 또한 성경에 분명히 씌어져 있고 우리의 일상경험과도 합치되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말을 단순히 마술사의 장난감처럼 보이는 망원경에 의한 기이한 관측들 에 바탕해서 거짓이타고 물리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4) 이에 대해서는 제 2 장, 8 철에 자세히 논의되어 있음.

이런 이유에서 내려진 것이 1616 년의 코케르니쿠스우주구조에 대 한 금지령이었다. 이 금지령의 내용은 코페르니쿠스 우주구조는 가 · 돌릭교리에는 물론 참된 철학에도 위배되는 그릇된 주장이고, 따라 서 가돌릭교도는 이것을 옳다고 주장해서는 안된다는것이었다. 그­ 러나 갇랄레오는 이 금지령울 어기지 않고도 자신의 주장을 계속할 ­ 수 있었다. 코페르니쿠스 우주구조가 옳다고 말하지 않는 대신, 야 리스토텔레스 우주구조에 바탕이 되는 생각들을 반박하거나 코페 르니쿠스 우주구조에 대한 반론들을 되받아 반박하는 일들을 계속 ‘ 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무거운 지구가 무거운 것의 본연의 위치인 우주의 중심에 있어야만 한다는 주장에 대해, 그는 무거움과 가벼 움 같은 것은 상대적인 개념들로서 무엇보다 무겁고 무엇보다 가벼 운가가 중요하다고 하거나, 지구가 태양보다 무겁다는 것은 아무도. 관측할 수 없고 따라서 알 수도 없다는 식의 반박을 되풀이했다. 이런 상태에서 학식이 높고, 진보적이며, 이해십이 많고, 과학에 도 조예 가 깊 다는 평 판이 있 었 던 새 교황 우르바누스 (Urbanus) 8 세 . 가 1628 년에 즉위 했다. 갈릴레 오의 측근들은 새 교황으로부터 아리 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우주구조와 코페르니쿠스 우주구조에 대한 장단접을 살펴보고 그 이유들을 공정하게 밝혀내는 대화체의 책을 쓸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물론 교황은 1616 년에 코페르나 쿠스 우주구조는 일단금지당했고이것은 요지부동이라는 생각을계 속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허가를 내란 교황의 참뜻은 교회 가 코페르니쿠스 우주구조를 무작정 금지한 것이 아니라 충분히 공· 정한 고찰을 한 후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을 보이기 위해서였던 것 이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이러한 교황의 참뜻을 착각했고, 그 허가 가 이제야말로 코페르니쿠스우주구조의 우수함을 명백히 보여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으로 받아들였다. 갈릴레오는 이미 1624 년경부터 착수해 두었던 책을 완성해서 『두­ 가지 주된 우주구조들에 관한 대화』라는 제목으로 1630 년에 이룰· 출판했다 .5) 책머리에서 참된 진리는 신만이 아는 것이어서 두 가자 5) 1구C'_aw하 loi_기fo Cr hn쉬_iia e운 ·f P _ r영eWs역so, r판l1d으9 7S로0y)_ s 는 이t_ e S있m. 다~D.-r :a-~Peto, l _etrm. , ai(c? a alinle d _ oC:_oDpi e ar ln o1gc au1 e1 C(oU!'_nciev rne risn ig t y thoe l

우주구조_~아리스토텔레스一프 볼 레마이오스 우주구조와 코패르니 쿠스 우주구조――는 모두 假想的인 것에 불과하고, 따라서 그 眞 僞에 대해서는 결국 교회당국이 정하는 바를 쫓아야 한다는 얘기를 내세웠기 때문에 교황청당국의 사전 원고검열을 몽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율 대표하는 십플리치오 ( S i rn p li c i o ) ,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따라서 갈릴레오 자신의 주장을-대표 하는 살비 아티 (Salvia t i ) 그리 고 중립 적 인 위 치 를 표방하는 사그레 도 (Sa gr edo), 이렇게 세 사람 사이의 대화의 형식으로 씌어진 책의 실재 내용은 전혀 달랐다. 처음부터 계속해서 살비아티의 명쾌하고 정연한 주장에 대해 십풀리치오는 바보스러운 반박을 하고 억지 주 장을 해대며, 살비아티의 주장에 사그레도가 加勢하고, 십지어는 둘이 합세해서 심플리치오를 조롱하기까지 해서 끝내는 십플리치오 가 설득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결국 독자들로 하여금 코페르 니쿠스의 우주구조가 분명히 옳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구조를 믿는 것이 극히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의십할 여지가 없도록 하 논 굉장한 설득력을 가졌던 것이다, 또한 갈릴레오의 탁월한 문장 력에 의해 책의 판매도 큰 성공을 거두어서 출판 당시부터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교회당국은 뒤늦게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았다. 물론 갈릴레오의 실제 범법행위는 없었지만 이 책이 루터나 칼빈보다도 교회의 권위 와 교리에 더 위협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 나 그런 내용을 가진 책을 사전검열까지 해서 출판을 허가해 주도 록까지 자신들이 철처히 우롱당했다는 데서 교회당국의 분격은 컸 고, 특히 책 속에서 계속 조롱만 당하는 십풀리치오의 모델이 사실 은 교황 자신이었다는 풍문에까지 접한교황의 분격은굉장했다. 결 국 무엇보다도 교회측의 이러한 분격이 갈릴레오에 대한 가혹한 조 처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이다. 1632 년의 재판에서 교회가 찾아낸 갈릴레오의 구체적 죄목은 그 가 1616 년에 교회에 행한 서약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죽 갈릴레 오 개인이 교회의 명을 받아들여 1616 년의 금지령의 내용에 덧붙여 저, 코페르니쿠스 우주구조에 대해서는 이의 옹호는 물론 여하한

형태로도 굳이나 말로써 논의조차 하지 않겠다 고 한 서약서가 교회 당국에 의해서 제시된 것이다. 이 서약서가 교회측에 의해 理造괴 었다는 주장의 眞否에 대해서는 아직도 역사학자들 사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지만 6) 갈릴레오는 이에 근거해서 유최판결 울 받았다. 그리고 그가 公的으로 그의 최를 시인하고 참회하는 뜻 울 발표하자 그의 처벌은 무기칭역으로 그리고 이내 가내 연금으로 감형되었다. 이후 10 년간 그는 천문학이나 우주구조에 관한 논의는 삼가한 채 力 學 의 연구와 집팔을 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6) 예 를 들어 이에 대한 Sti llm an Drake s} Gi or gi o de San till ana 의 간단한 논의 가 주 3) 에 언급된 Ge y mona t의 책에 부록으로 실려 있다.

이상 살펴본 갈탈레오와 교회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 에서 우리는 단순히 과학과 종교의 대항이 아닌 여러 측면을 찾아 볼 수 있다. 우선 당시의 가톨릭교회가 처했던 정치적 상황이다. 16 세기의 종교개혁 이 후 계속된 改新敎측의 공격에 대처해서 교회 자체의 淨 化둥을 내세워 반격을 괴해야했던 가톨릭교회로서는 교 회의 신학적 배경이 약화되는 일은 그것이 철학적인 사실이건 과학 적인 사실이건 방치할 수는 없었다. 교황 자신의 개인적 환경도 이 에 작용했다. 훌륭한 학문을 지녔고 과학에도 조예가 깊다는 평판 을 받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던 교황이 그와 같이 우롱울 당한 것을 알았을 때 크게 분격했을 것은 쉽게 침작할 수 있는 것이다. 갈릴레오 자신의 낙관적인 생각과 순진한 면도 이에 기여했다. 실 제로 재판을 받기 위해 교황청에 출두할 때까지 그는 자신의 합리 적인 주장으로 교황청당국자들울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여기에는 자신의 철저한 가톨릭신앙에 대한 갈릴레오의 자 신감도 작용해서, 신이 창조한 우주에 대한 참된 지석을 밝혀내는 穴’이 신에 대한 거역이 될 수는 없다고 굳게 믿었고 교회당국이 끝 내 이에 눈을 감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끝으로 교회 당국의 착각도 작용했다. 아직 과학이론의 발전에 대한 올바른 인 식이 없었던 그들은 마치 신학이론의 경우처럼 단순히 과학적 주장 자체만을 억누름으로써 과학이론의 발전과 전과를 막을 수 있을 것

7) 이 시기의 가 를 리 교회가처한정치져 상황에 대한간단한논의가A. G. D i cken 혹 The Counte r Refo r mati on (New York: Harcourt, 1969) 에 실려 있다.

으로 알았던 것이다. 이처럼 갈릴레오와 교회의 충돌은 갈릴레오와 교회당국을 포함한 관련자 개개인의 독독한 개성과 교회를 에워 서J : 정치적 상황이 뒤 얽 힌 여러 측면을 가전 인간관계의 복잡한 사전이었다. 따라서 이를 단순히 과학에 대한 종교의 억압이라는 상두적인 관계로 이해할 수 는 없는 것이다. 2 갈릴레오의 경우에서의 과학과종교와의 관계가어쨌든반목과마 찰의 관계였음에 반해 과학혁명기의 과학과 종교 사이의 직접적이 고 궁정적인 연결과 부합을 보여주는 주장이 과학사회학자 머튼 (Ro bert K. Mer t on) 에 의해 제 기되 었다. 1938 년에 처 음 발표되 어 〈 머 돈 명 제 (Me rto n Thes i s) 〉 타 불리 는 이 주장은 그 후 오렌 동안 많은 물의와 논란을 빚어 왔다. 8) 머돈의 주장은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改 新敎의 영 향에 대 한 막스 베 버 (Max Weber) 의 『改 新敎 윤리 와 자본 주의 정 신 (D i e pr ote s tan ti sch e Et h ik und der Geis t der Ka pit al i smus ) 』 9) 에 서 의 주장을 과학과 淸 敎主 義 (Pur it an i sm) 의 관계 로 옮겨 적 용시 킨 것으로서 17 세기 영국의 새로운 과학이 개신교, 특히 〈 청교도의 윤 티 (Pur ita n e thi c) 〉와 부합되고 그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골자로 하 고있다.

8) Merto n 명 제 는 처 음 Scie n ce, Technolog y and Soc iet y in Sevente e nth Centu ry Eng la nd, Osir i s 4 (1938), pp. 360-632 으로 발표되 었고 이 후 같은­ 제목의 단행본 (New York: Harpe r, 1970) 으로 출 판되 었다 . Merto n 명제에 대 한 수많은 비 판 중 가장 대 표적 인 것 으로는 A. R. Ha ll , Merto n Revis i t ed , or Sc ien ce and Socie t y in the Sevente e nth Centu ry , Hi st o ry of Sc ien ce 2(1963), 1-16 을 둘 수 있다. 이 외에 Charles Webste r , ed., The Inte l lectu al Revolllti on of the Sevente e nth Centu ry (London: Routl e dg e, 1974) 도 이 문 제에 관한 여러 논의둘을 담고 있다· 또한 앞에 언급된 Mer t on 의 단 행 본 말마 의 Selecte d B i b li o g ra p h y”에 많은 참고문헌이 열거되어 있으며, 1970 년에 씌 어진 Merto n 자신의 서문은 그간의 논쟁에 관한 저자 자산의 견해를 밝히고 있 다. Merto n 명제에 대한 가장 최근의 논의로는 Gary A. Abraham, Mi su nd-ersta n din g the Merto n Thesis , Isis 74 (1983), pp. 368-87 이 있 다. 9) 190 4- 1905 년 사이 에 처 음 출판된 이 연구의 구하기 쉬 운 영 역 판으로는 Max Weber, The Prote s ta n t Et hi c and the Sp irit of Cap ital ism , tr. by Talcou Parsons (New York: Scrib n ers, 1958) 가 있다.

우선 머돈은 청교도윤리와 과학에 공동된 여러 요소들을 들고 있 다. 예를 들어 청교도들은 신의 영예를 드높이려 하고 인류와 사회 에의 공헌을 괴한다. 그리고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은 자신 들이 신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믿는데, 이렇게 자신들이 선 택됐음을 알게 되는 근거로서 자신들이 훌륭한 일-신이 좋게 생 각할 일一―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들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논 근면과 열성이 팔요하며 또 자신들의 직업과 임무, 특히 지적인 직업과 임무에 대한 사명감이 크게 요구된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 이 가전 이 성 (reason) 의 역 할을 찬양하며 그와 아울러 교육의 역 할 울 강조한다. 그러나 이들이 강조하는 교육이란 재래식의 교육이 아니라 직접 관찰과 경험울 중요시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그 때까지의 기독교 신앙의 주류였던 내세 위주의 경향에서 탈피해서. 현제 긍정적 요소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으며 현세에서 인류와 사회 의 복지에 기여하는 것을 높이 여겼다. 청교도들의 이같은 경향은 새로운 과학의 관념과 공동된 접이 많으며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고 과학활동에 종사하는 일에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특하 자연에 대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인류의 복지에 공헌이 되어 신 에의 공헌이 되고 신의 영예를 드높인다는 생각에 뒷받침을 해주었 던 것이다. 또한 머돈은 이렇게 청교도윤리와 새로운 과학과의 공· 통접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둘 사이의 실제 관계에 대한­ 증거로서 당시 영국의 과학자 중에 득히 청교도들이 많았음을 주로­ 王立學會 회원들에 관한 자료를 분석해서 보여주었다. 머돈의 이같은 주장은 과학혁명기의 과학과 종교의 한 측면을 보 여주는 유용한 명제이다. 득히 머돈 자신도 주목하고 있듯이 제한· 된 범위하에서는 충분히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10) 예를 들어 머돈 명제논 청교도윤리와 새로운 과학이 서로 부합됨을 보이고 실제로 그 두 가지의 상관관계가 높았음을 동계적으로 보여주었을 분 청교. 도윤리 가 청 교도들로 하여 금 과학에 종사하도록 하거 나 과학에 열 10) 이 런 면에 서 의 Merto n 명 제 에 대 한 새 로운 조명 이 Thomas S. Kuhn, Math e- mati ca l versus Exp e rim enta l Tradit ion s in th e Develop m ent of Phy si c a l S암c시ie 되n c어e , 있J다ou. r nal of Inte r dis c ip lina ry Hi st o r y 7(1976), 1-31 의 pp. 26-7 에

의를 갖노록 하는 원안이었다고는 주장하지 않았다. 또한그것이 영 국에서의 새로운 과학활동에 기여했다고 주장했을 분 과학혁명 전 반에 대한 기여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이런 제약을 잊고 머돈의 원래의 주장을 확대해석해서 청교도윤리가 과학혁명에 기여했다거나 근대과학의 형성을 가져왔다고까지 주장하게 되면 무 리가 따르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확대해석이 수반되지 않은 머돈 명제 자체에도 문제 정들이 있고 그것들 중에는 퍽 심각한 것도 있다. 우선 〈청교도 (Pur it an) 〉라는 낱말이 갖는 부정 확성 을 들 수 있 다. 그 말 자체 가 확연히 정의되어 있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 〈청교도〉인가 아닌가를 명확히 결정하기가 힘이 드는 것이다. 또한 분명한 가돌릭교도나 영 국국교회교도 (An gli can) 들도 새로운 과학에 대해 청교도들과 같은 관념을 지니기도 했고 같은 말을 사용해서 새로운 과학을 옹호하기 도 했다 .11) 이보다 좀 다론 차원에서는 어떤 득정한 사람이 청교도 였고 그 사람이 과학에 대해 어떤 특정한 생각을 가졌을 때 그것이 반드시 그 사람이 청교도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라고 결론지울 수 있느냐 하는 비판도 제기될 수 있다. 그리고 머튼이 청교도들의 경향 중에서 너무 과학에 부합되는 접만을 찾아내지 않았나―—죽 새로운 과학에서 볼 수 있는 겅헝들만을 청교도들의 태도에서 찾으 려 하지 않았나__하는 질문이나, 실제로 그런 경향들의 과학과의 부합이 머튼이 믿는 것처럼 그렇게 명백한 것인가 하는 질문도 제 기될 수 있다.

11) 대체로 이와 비숫한 면에서의 Merto n 명제에 대한 비판이 R. Hooy k aas, Reli gion and the Ri se of Modern Scie n ce (Grand Rap ids , Mi ch ig a n: Eerdmans, 1972) 의 pp .135 켜 9 에 실려 있다. 감은 판정에서 이보다 좀더 상 세한 증거를 둘어 행해진 비판으로는 Doug la s S. Kemsley, Relig iou s Infl ue - nces in the Ris e of Modern Scie n ce: A Revie w and Crit icis m , Parti cu larly of the 'Pr ote s ta n t- P urit an ' Theory , Annals of Scie n ce 24(1968), pp. 199- 226 가 있다.

이런 문제점들은 머돈 명제가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 주장에 계한울 가해서 상당히 약화시켜야만 할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이 지적하고 있는 사실-청교주의와 과학에 대한 熱意가 거

의 같은 시기의 영 국에 나타 났 고 많 은 경우에는 그 두 가지가 같은· 사람들에게 겁쳐서 나타 났 으며 그 겹침의 정도가 눈에 띄게 십했다 ­ 는-만은 부정할 수가 없 다. 또 과학과 청교도와의 이같은 연결 의 사실을 폭을 넓혀서 청 교도만이 아닌 개신교 전체에 대해서도 ­ 할 수 있다. 갈릴레오나 데카르트 같은 탁월한 과학자들 중에는 가 몰 릭 교도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 시기에 과학활동을 한 수 많 은 과학­ 자들 전체를 대상으로 했 을 때, 개신교도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머돈명제는 바슷한­ 시기에 발생해서 근대 서유럽 사회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두 · 가지 커다란 사건-종교개혁과 과학혁명-사이의 연관을 지적 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연관을 뒷받침할 수 있는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사이의 유· 사점은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가 있다. 우선 종교개혁이 信者가 적 접 〈 신의 책 〉 인 성경을 읽어서 신과 접하자는 것이었듯이 과학혁명 기의 새로운 과학은 신의 창조물인 자연 세계를 직접 접해서 이를­ 연구하자는 것이었고 이런 뜻에서 자연 세계를 〈자연의 책 (Book of Na t ure) 〉 이라고까지 불렀던 것이다. 또 종교개혁이 신앙울 교회와­ 교 황 의 권위로부터 해방시키려 했던 것처럼 과학혁명기의 새로운­ 과학은 과학울 고대의 권위-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로부터 해방시켜 자연 자체에 대한 것으로 만들려고 추구했던 것이다. 특 히 영국과 청교도들로 관십을 좁히면 이런 유사접과 연관들은 더욱 늘어난다. 청교주의는 당시 영국 사회의 상승하는 계층__주로 상 인, 기술자, 匠人, 항해사 등――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같은 계층 에 베이컨의 영향이 강했고 그에 따라 새로운 과학과 기술에의 관戶 십이 컸다. 도 청교도들이 득세했던 시기에 선이 구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빛의 시대 (A g e of L ig h t)〉를 지상에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믿 음 그리고 기독교도들은 신을 도와서 그와 같은 새 시대가 빨리 오. 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믿음과 관련해서 과학활동에의 종사, 복음 전파, 교육 등이 큰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베이컨의 섀 로운 과학은 인류에게 유용한 기술적 지식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인류를 질병과 재해에서 해방시킵에 의해서도 그러한 새로운 이상

척인 시기의 도태를 촉진시킬 것이라고 믿어졌다. 결국 청교주의와 새로운 과학 사이의-그리고 넓게 보아서는 종교개혁과 과학혁 명 사이의-이같은 유사접과 연관들이 머돈명제가 그것이 지닌 많은 문제접들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영향력 있는 주장이 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3 머튼 명제보다도 지역이나 시기상으로 더 광범위하게 그리고 신 학적 내용면으로 더 깊은 차원에서 기독교 신앙과 과학과의 관계 를 보여 주는 견해 가 Hoo y kaas 에 의 해 제 시 되 었 다. 12> Hoo y kaas 는 그 리스 이래 과학혁명기까지의 자연관과 과학의 역사를 신의 全能性 을 믿는 성서적 자연관 (B i bl i cal World-V i ew ) 과 아리스토 텔레스적인 합리 주의 적 자연관 (Ra ti onal i s t World-Vi ew ) 사이 의 경 쟁 관계 에 서 해 석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과학혁명이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12) 주 11) 에 언급된 객 Hoo y kaas 보다는 좀더 좁은 범위에서 비슷한 주장을 담은 논의 로 Francis Oakley, Chris t i an Theolog y and the Newt on ia n Sc ien ce: T61h)e, Rppi.s e4 3o3f- 5t7h 이e C있o 다nc.e p t of the Laws of Scie n ce, Church Hi st o ry 30(19

성서적 자연관에 의하면 신은 無로부터 자연세계를 창조했으며 단순히 창조했을 분만 아니라――죽 일단 창조한 후에는 자연세계 가 스스로 작용하도록 놓아 둔 것이 아니라―一자연세계를 계속 유 지하고 지탱시켜 주었다. 물론 자연에는 질서가 촌재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촌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그 질서 자체가 자신의 창조물에 대한 신의 계속된 보살핌을 나타낼 따름인 것이다. 그렇 기 때문에 자연이 지닌 질서와 조화에 의해 자연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신성함이나 신비함은 모두 그와 같은 것울 창조해 낸 신의 신 성함과 신비함인 것이며 따라서 자연은 신의 작품으로서 찬양되고 연구되고 이용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그러나 기독교신앙에 바탕한 이같은 성서적 자연관은 서양문화의 또 하나의 원천인,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해서 기독교가 자리잡기 이전부터 받아들여져 오던, 합리주의적 자연관과 대항해서 그것을

이겨내어야만 했다. 합리주의적 자연관은 신을 단순한造物主 ( dem i­ urg e ) 로 보며 자연은 무로부터 창조된 것 이 아니 라 이 미 존재 하고 있는 물질을 가지고 만들어졌다고 믿으며, 그것도 신의 임의대로가 아니라 합리적이고 조화로운 〈 설계 ( des ig n) 〉 에 따라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또한 합리주의적 자연관에 의하면 일단 이렇게 자연세계 를 만든 후에도 신이 그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 연세계에는 합리적이고 질서에 맞으며 조화로운 일만 일어날 수 있 다. 조물주가 이 세 상을 만든 후 그 움직 임 을 〈우주의 露 ( World­ Soul) 〉 에 맡겼다는 풀라톤의 견해는 바로 이를 뜻하는 것이다 .13)

13) 이갇은 합리주의적 자연관의 원천의 하나인 플라돈의 자연관에 대해서는 Fran ci s M. Confo r d, Plato 's Cosmolog y (India n ap o lis : Bobbs-Merrill , 1957) 과 Grego ry Vlasto s , Plato ' s Univ e rse (Seatt le : Univ e rsit y of Washin g ton Pr., 1975) 를 참조할 것.

고대에 각각 따로 시작된 이 두 가지 견해는 중세를 통해서 다 존 재했으며, 중세 기독교의 압도적인 힘에도 불구하고 성서적 자연관 이 합리주의적 자연관을 완전히 이겨내지는 못했다. 두 가지는 서 로 타협 관계에서 평형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14) 그렇다면 과 학혁명은 이같은 평형상태를 깨고 성서적 자연관이 합리주의적 자 연관을 대체해 낸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 Hoo y kaas 의 견해이다. 그. 리고 이같은 대체의 과정을 Hoo y kaas 는 자연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의 이 성 (reason) 과 경 험 (ex p er i ence) 의 역 할의 상호관계 에 서 살피 고 있다. 우선 과학혁명기에는 종교와의 관련과는 벌도로 이미 경험적 지 식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퍼져 있었다. 그간 받아들여 온 합리주의적 경향에 구애받지 않고 경험적으로 얻어전 실제 지식들을 받아들이 는 태도가 앞에서 본 대로 특히 항해사, 천문가, 기술자, 匠人둘 사이 에 널리 퍼 진 것 이 다. Hoo y kaas 가 〈베 이 컨적 경 험 주의 (Ba conia n Em pir i c i sm) 〉라고 부론 이 경 향은 접 차 많은 과학자들도 받아들이 게 되었고, 이에 따라 그들은 의부 자연 세계를 합리적으로 완전히 설 명할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경험적인 실제 지식을 받아들이는

14) 이 갇은 평 형 • 타협 • 대 치 상태 에 대 한 간단한 논의 가 Edward Grant, Phy si c a l Scie n ce in the Mi d dle Ag e s, chap. 3 에 담겨 있다.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15) 그리고 그러한 경험주의적 경향은 갈릴레 오나 케플러 둥의 수학화된 과학에도 드러나 있었다 .16)

15) 제 4 장 牛선 참조. 16) Ga lil eo 와 Ke p ler 의 이 갈은 경 향을 Hoo y kaas 는 “Math e mati ca l Emp iri c i s m 이 타고 부르면서 앞의 • Bacon 식 의 Natu ral-Hi st o ric a l Em pi r i c i sm 과 구분하고 있다: 주 11) 에 언급된 책 , pp. 35- 40 .

이같은 경험주의적 경향은 14 세기경부터 중세기독교사회에 대두 했 던 主意論的 神學 (Volun t ar i s tt heolo gy)으로부터 크게 지 원을 받았 다. 그 자체가 중세 스콜라 학풍의 철학과 과학에 있어서의 지나찬 합리주의적 색채에 대한 반발로 신의 전능성을 재천명함으로써 대 두한 이 주의론적 신학은 17 세기에 다시 떨쳤고, 그것에 영향받은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 사고능력에 의해서만 자연세계를 이해하려는 합리주의적 자연관에 반대해서 전능한 신은 인간의 합 리적 사고의 수준을 넘는 일도 얼마든지 일으킬 수가 있다고 생각 하게 되었다. 물론 자연세계에는 신이 마련해 준 질서와 법칙들이 있고 인간이 합리적 사고에 의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이지만, 신은 자연 세계에 그렇지 못한 일도 일어나게 할 수가 있 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연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인간에 게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경험주의적 자 연관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본 것과 같이 이미 촌재 해 있던 경험주의적 색채와 서로 합류해서 과학혁명기의 자연관의 주된 조류가 되었으며, 당초에는 주의론적 신학에서 출발했으나 결 국 합리주의적으로 흐르고 만 데카르트적 합리주의를 이겨내고 궁 극적으로 과학혁명의 결과로 태어난 새로운 과학의 자연관으로 받 아들여졌던 것이다. 파스칼, 보일, 뉴튼 둥은 모두 이같은 경향을 보여 주는 과학혁 명 기 과학자들의 좋은 예 들이 다. 17)

17) 주 11) 에 언급된 책 , pp. 41-52, Hoo y kaas 는 Boy le 등의 이 같은 경 험 주의 를 Rati on ali st Em pir ici sm 이라고 부르고있다. 과학혁명기의 새로운 자연관에

4 앞에서 본 머돈과 Hoo y kaas 의 주장은 두 가지가 다 과학혁명기의 종교와 신앙이 그 시기의 과학에 기여한 면을 보여주는 접에서 흥

대한 수의론적 신학의 영향에 관한 보다 자세한 논의로는 J.E . McGuir e ,. pBp.o 5y2 l3e -'s4 2C 가o n있ce다p. ti on of Natu r e, Jo urnal of the Hi st o r y of Ideas 33(1972),

미가 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논의를 마치기 전에 우리는 역사상 과학과 종교와의 상호 관계에 있어서-특히 그 관계가 긍정적일 경우에一―드러나는 한 가지 목칭적인 접을지적할필요가있다. 그 ­ 것은 종교, 그리고 종교에 대한 신앙이 과학에 대한 적극적인 동기 가 되는 일은 극히 드물며 대개의 경우에는 그 역할이 소극적아타 는 접이다. 죽, 어떤 종교적 믿음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과학활동 에 종사하게 되는 일보다는 일단 과학활동에 종사하게 된 사람들이 그들의 활동에 대한 소극적인 변명이나 항리화를 위해 종교적 믿음­ 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혁명의 시기에도 이 접은 예의 가 아니었으며 이 접이 바로 머돈명제의 한계를 드러내 주는 것아 라고 볼 수 있다. 과학혁명기를 동해서 그동안 이미 우리가 살펴본 여러 요인들의 영향하에서 정접 많은 사람들이 과학에 종사하게 되었다. 또한 여 기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개 당시에 그지위가 상승해 가던 계층이가 도 했기 때문에 과학종사자들은 수만 중가한 것이 아니타 사회적인 지위도 상승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이 자선들의 활동과 당시 사­ 회의 지배적 요소였던 기독교 신앙과의 상호적응을 꾀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은 곧 종교의 믿음과 과학과를, 특히 자신들 이 종사하는 새로운 과학과를, 적응시키려 괴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가 지배적이었던 서유럽의 역사상 이런 일은 이때에 한 번만· 일 어 난 것 은 아니 었 다. 중세 초기 성 아우구스티 누스 (S t. Aug us ti nu s, 354-430) 는 그리 스 철학, 특히 플라본주의 철학과 초기 기 독교 신 학을 융화시키려는 노력을 했었으며, 13 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 u in a s, 1225-1274) 는 이 슬람문화로부터 재 수입 되 어 당시 크게 떨치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 및 과학을 중세 기독교신학 과 융화시키려는 노력을 했었다. 두 경우의 노력은 모두 어느 정도 의 성공을 보였지만, 기독교 신학의 풀라톤화나 아리스토텔레스화­ —합리주의화――의 성격을 더 강하게 보였었다. Hoo y kaas 도 지

척하듯이 기독교 신학의 바탕에서 자연에 대한 그리고 과학에 대 한 경험주의적 태도가 확립된 것은 과학혁명기에 이르러서였던 것 이다.

이 런 일을 담당했 던 대 표적 그룹은 〈기 독교도 버 듀오소 (Chr i s ti an V irt uos i)〉라고 불리 는 계 층이 었 다. 보일로 대 표되 며 17 세 기 영 국사 회의 상류 지석계층의 큰 부분을 이루었던 이들은 학문과 과학에 많은 관십을 가지고 있었으며 왕립학회의 회원으로서 많이 참여했 다. 18) 이 들이 과학활동이 기 독교 신앙에 처 촉되 지 않음을 강력 하게 주장하고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기독교로 부터의 과학에 대한 비난이 있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기독교도들 은 과학이 사람들을 知的 교만에 빠지게 하고 자신들의 합리적 판 단을 신보다도 우위에 둔다고 비난했으며, 특히 새로운 과학의 바 랑인 기계적 철학은 사람들을 완전한 唯物論 (ma t er i a li sm) 으로 몰고 간다고 주장했다 .19) 이에 대한 과학자들의 답변은 갈릴레오 이래 기 독교도 과학자들이 계속 지녀 온 태도였다. 신의 창조물인 자연에 대해서 존경십을 가지고 그것을 연구해서 거기에 담겨 있는 조화와 질서를 보여주는 것은 신의 능력에 대한 실제 경험이며 기독교 신 앙과 처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 보일 같은 사람은 이에 머물지

18) V i r t uoso'’ 라는 말의 정확한 뜻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나 당시인들의 생 각을 보여주는 예로는 제목 자체가 그 말을 포합하고 있는 Robert Bo y le 의 책 The Chris t i an V i r t 11oso 를 참고할 수 있다. 거기서 Bo y le 은 v i r t uoso'’ 가 tho se tha t understa n d and cult iva te exp er im enta l ph i loso p h y”라고까지 말 하고 있다: Thomas Bir c h, ed., The Works of the Honourable Robert Boyt e, 6 vols. (London, 1772), vol. 5, pp. 513-14. 조금 다론 입 장에서 이 에 대해 다룬 논의로는 Walte r E. Hq ug h to n , jr., The Eng li sh Vi rtuo so in the Sevente e nth Centu r y , Jo1 1rnat of the Hi st o r y of Ideas 3 (1942), pp. 51-73, pp. 190-219 를 듄 수 있다 . 19) 그러한 공격의 하나의 예에 대한 논의로 J.R. Jac ob, Boy le 's At om i sm and the Resto r ati on Assault on Pag an Natu r ali sm , Soc ial Stu d ie s of Scie n ce 8 (1978), pp. 211-33 가 있다. 20) 이 검을 주로 해서 17 세기의 과학과 종교와의 관계를 다문 논의로 Ri ch ard S. Westfa ll , Scie n ce and Reli gion in Sevente e nth Centu r y Eng la nd (Yale Univ e rsit y Press, 1958) 가 있다. Thomas S p ra t의 Hi st o r y of the Roy a l Soc iety (1667) 는 이 러 한 태 도를 드러 내 주는 당시 의 가장 전형적 인 문헌이 다. 그 의에 최근의 논의로 Marga ret C. Jac ob, Mi llen aria n is m and Scie n ce in the Late Sevente e nth Centu r y , Jo urnal of the Hi st o r y of Ideas 37(1976),

않고 한 걷음 더 나아갔다. 그는 자연 세계의 법칙은 신이 부여한 것이며 이를 연구해서 보여주는 것은 신의 전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고, 따라서 참다운 기독교도들은 그러한 일을해야만한다고까지 주 장한 것이다. 이런 생각에 바탕해서 보일은 그의 여러 글들을 통해 자신이 강력히 주장한 〈기계적 철학 〉 과 〈 실험적 철학 (Ex p er i men ta l Ph i loso p h y) 〉 이 기 독교 신앙과 잘 부합됨 을 강조하고 있다. 21)

pp. 335-41 과 Jam es R. Jac ob and Marga ret C. Jac ob, The Ang lica n Orig ins of Modern Scie n ce: The Meta p h y si c a l Foundati on s of th e Whig Consti tut i on , Isis 71(1980), pp. 251-67 을 참조할 것 . 21) 예 름 들어 The Usef ul ness of Exp er im enta l Natu ral Phil o sop hy (1663) 를 볼 것.

앞에서도 본 대로 이같은 태도는 과학혁명의 결과로 출현한 새로 운 과학의 종사자들에게 공통된 것이 되었다• 과학혁명에 의해 새 로운 중요성을 띠게 된 과학은 당시 사회의 지배적 요소였던 기독 교와 상호적응과 타협을 얻어내야만 했으며 이러한 적응과 타협의 과정에서 새로운 과학의 요소들__실험과 기계적 철학은 이의 두 가지 중요한 예인데――이 기독교 신학에 융합이 되었다. 머돈과 Hooy k aas 등은 이 런 융합의 서 로 다른 측면울 보여 준 것 이 다.

제 10 장 과학혁명기의 기술과 과학 앞 장에서 과학과 종교와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면서 우리는 그 둘 사이의 관계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적대적이 아니었고 퍽 깊 은 관계였으며 과학에 종교가 기여한 요소가 있었음을 여러 측면에 서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 과학혁명기의 과학과 기술과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면서도 우리는 그 둘 사이의 관계 역시 혼히 가지기 쉬 운 생각-둘 사이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는-과는 달랐음을 발견하게 된다. 과학혁명기에 있어 과학과 기술과의 사이에 직접적 인 연결은 없었던 것이다. 1 과학혁명기의 기술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항상 곧게 되는 질문은 기술이 과학혁명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질문이 자주 나오게 되는 이유는 물론 상당히 중요한 역할이 있었 울 것으로 예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를 통해 살펴보 떤 기술은 과학혁명에 직접적으로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기술 이 과학혁명 동안에 있었던 과학의 커다란 변화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I) 물론 앞에서도 본대로 과학혁명기의 기술이 사람 l) 이 갇은 관정 은 Alexandre Koy r e 이 태 많은 과학사학자들이 수긍울 하는 견해 이지만 나중에도 보게 될 것처럽 논란이 없는 견해는 아니다. 그러나 팔자 자 신은 이 견해에 깊이 공감하는 입장이다. Ko y re 의 견해에 대해서는 “The Sig n if ica nce of th e Newt on ia n Sy n th e sis , Newt on ia n St u die s (Ha rvard

Univ e rsit y Press, 1965), pp. 3-24 를 볼 것 .

들의 자연에 관한 태도에 영향을 미찬 접은 인정할 수 있다. 자연 을 이해하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형시키고 제어하고 거 기에 무엇을 일으켜 보고 그로부터 무엇을 얻어내려고 하는 태도들 은 기술로부터 과학에 전해 졌 고 베이컨 같은 사람은 기술이 지닌 이같은 접들을 들어서 기술적 지식으로부터 과학이 본받아야 하는 것이타고 주장했다 .2) 그러나 이것은 간접적인 영향에 불과하고, 기 술이 직접 과학의 내용에 영향을 미천 접, 죽 실제로 어떤 기술의 발전이나 기술에 관한 지석의 발전이 과학의 내용상의 발전에 영향 ­ 울 미찬 접은 거의 없었던 것아다.

2) 제 4 장 4, 5 철을 참조할 것.

혼히 과학혁명기의 과학의 내용에 영향을 미천 기술의 예로 드~ 것이 당시의 총포술의 발전이다. 무기제조, 총포술 등에 종사한 사 람들이 그와 관련된 문제들을 풀기 위해 역학을 연구하게 되었고 그것이 역학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3 ) 그러나 총포술 자체와 그것을 위한 노력이 새로운 역학의 사실을 알아내게 하고 역학의 발전을 가져왔는가 하는 접에 대해서는 우리는 회의작 일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역 학에 관십을 가자 게 했고 결과적으로 역학의 연구에 활력을 가쳐다 준 것은 사실이 었겠지만 실제 역학의 내용에 영향을 미친 접은 찾아보기 힘돈 것 이다. 예를 들어 탄환율 45 도 각도로 쏘아 올렸을 매 가장 멀리 간 다는 사실 같은 것에 총포술 종사자들이 관십울 가질 것은 당연했 고 그런 문제에 대한 관십이 16 세기의 역학자들과 갈릴레오에게 냐 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사실은 총포술 종사자들의 역학의 ' 연구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경험적으로 알려져 있었고, 갈릴레오둥의 역학자들은 앞서도 본대로 수학적, 이론적 연구에 의 해 이미 알려진 사실을 증명한 데 지나지 않았다 .4) 또 그러한 사

3) 그런 유의 대 표적 인 예 로 B, Hessen, The Socia l and Economi c Roots of Newt on 's Pr inc ip ia in N. Bukhari n, ed., Scie n ce at Crossroads (London, 1931) pp. 149-92 를 둘 수 있다. 4) 예문 들어 St illma n Drake and I.E . Drabkin , eds., Mechanic s in Si x te e nt lr Centu ry Ita l y (Univ e rsit y of W isc onsin Press, 1969), p. 25 et p ass i m 를 참 조할 것 무사체의 운동에 관한 Ga li leo 의 논의에 대해서는 R.H . Nay lo r,

Galil e o's Theory of Proje c ti le Moti on , Isis 71 (1980), pp. 550-70 을 참 조할것.

실 자체는 3 장과 6 장에서 살펴본 역학의 심오한 개념적 변화에 있 어서 큰 중요성을 며지 못한 구체적 사실들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총포술의 발전과 그 중요성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역학에 관십~ 가지게 하는 데 기여했다고는 할 수 있지만 역학의 실제 내용의 변 화에 영향을 미천 점은 보기 힘든 것이다. 한편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반대 방향에서는 더욱더 과학과 기술 ­ 의 상호영향을 찾아보기 힘들다. 죽 과학혁명기의 과학의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이 당시의 기술에 영향을 미천 점은 기술이 과학에 미 찬 영향에 비해서도 더욱 찾아 보기가 힘든 것이다. 또한 과학혁명 기는 활발한 기술상의 발전이 있던 바로 그 앞의 시기에 비해 볼 때 기술적으로 극히 침체했던 시기이기조차 했다. 결국 이러한 접들이 과학지석의 기술에의 응용이라는 현대사회에서 거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일이 역사상 항상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깨달음을­ 주게 되며, 이는 다음 절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2 많은 사람들이 과학과 기술 사이의 관계를 앞 철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유기적으로 생각하고 따라서 앞 절의 결론에서 의아함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현대사회에서의 과학과 기술 사이의 밀접한 관· 계 때문이냐 현대사회에서는 어느 분야의 기술에 종사하기 위해서 는 그와 관련된 과학분야의 지 석 의 습득이 필수화되 고, 관련된 과 학분야의 발전이 없이는 그 분야의 기술의 발전은 생각할 수도 없 울 정도이다. 십지어는 〈과학기술 〉 이라는 말이 한 단어처럼 사용될 ­ 정도로 둘 사이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구벌이 불가능해졌다. 그-터 나 과학과 기술 사이의 관계가 항상 이렇게 밀접했던 것은 아니며, 인류의 역사상 대부분을 통해 이 둘은 서로 분리된 채 별 관련 없 이 내려왔다. 결국 현대사회에서 보는 과학과 기술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이 둘 사이에 본질적으로 깊은 연관이 있어서 때문은 아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과학과 기술이 현대사회에서 각각 지니고

있는 독특한 독칭들 때문에 빚어전 특수한 역사적 현상에 불과할 분, 과학과 기술을 본질적으로 살펴볼 때 그런 연관이 있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자연에 관한 합리적, 체계적 지석을 추구하는 과학과 인간 생활의 편안을 괴하는 기술은 그 추구하는 바부터가 다르고 따라서 고대로부터 과학혁명에 이르기까지 다른 취향을 가전, 십지어는 사 회적으로 다른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에 의해 종사되어 왔다. 과 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주로 철학자, 귀 족, 부유한 아마튜어 好 事 家, 또는 대학교수들로서 이들이 주로 이론적 지식의 습득을 위주 로 한 데 반해서, 기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실제 생산과 경제활동 예 종사하면서 지식보다는 실제문제의 해결을 위주로 했다. 따라서 이들 질이 다른 두 부류는 서로 다른 부류의 활동을 질시하거나 불 신해 왔고 그들 사이의 사회적 분리는 거의 당연했다. 그리고 그러 한 분리는 고대로부터 과학혁명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어느 면에 저는 18, 19 세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존재했던 것이다 .5)

5) 과학과 기술의 이갈은 분리상태에 대해서는 A.R. Hall, The Hi st o ric a l Re- lati o1i s of Scie n ce and Technolog y(L ondon, 1963) 을 참조할 것 과학혀 명 기 의 그갇온 분리상대에 대해서는 A.R . Hall, The Scholar and the Craft sm an in the Scie n ti fic Revoluti on , in Marshall Clag e tt , ed., Crit ical Problems in tire Hi st o ry of Scie n ce. (U. W isc onsin Pr., 1959), pp. 3-23 을 참조할 것 이같은 분리상태의 찬재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순수과학자와 산업기술자 사이의 상호불신의 대도에서 어느 정도 찾아볼 수가 있다.

과학과 기술이 이처럼 분리되어 내려왔다는 것은 그 둘이 크게 발전했던 때가 역사상 각각 서로 다른 시대나, 또는 같은 시대의 다른 지역에서였다는 접이 뒷받침해 준다. 가령 고대과학의 큰 번 영이 있었던 그리스에 기술의 발전이 없었던 데 반해서 로마에서 논 기술은 크게 떨쳤으나 과학은 쇠퇴했었다든가, 중세 봉건사회의 붕괴와 새로운 절대주의 사회의 성립에 이바지했던 기술적 변혁둘 이 완료된 14-15 세기에 이르기까지 침체했던 과학이 다시 기술적 으로 벌 발전이 없던 16, 17 세기에 와서 획기적 발전을 보여 주었다 는 사실들은 이의 좋은 예이다• 그리고 시기상으로 과학혁명 이후 이긴 하지만, 18 세기 후기에 일어났던 산업혁명기에 있어서 기술을 크게 떨쳤던 영국이 과학, 득히 수학, 물리학 둥에서 크게 뒤졌고

이 서내의 과학의 본거지는 기술이 상대적으로 낙후했던 프랑스였 다는 것도 과학과 기술 사이의 본질적 연관의 결여를 말해 준다. 만약 두 가지가 본질적으로 관련이 있는 활동이라면 이 두 가지의 발전이 시기적으로나 지역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채로 일어나지는 않았겠기 매문이다. 고대 이례 중세를 풍미하던 아리스트멜레스 사상체계 내에도 과 학과 기술의 연관을 힘들게 했을 몇 가지 요소가 있었다. 우선 아 리스토텔레스 체계 내에서 뚜럿했던 천상계와 지상계의 구별을· 예 로 둘 수 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이 구벌에 의하면 이 두 세계는 완전히 다른 세계이며, 이 두 세계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현상이 일어나고 따라서 이 두 세계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지식이 해당된 다. 이런 구 벌을 받아들이게 되면 주로 천상계의 현상에 대해서 많 이 다루는 과학과 지상계의 문제가 다루어지는 기술 사이의 연관이 힘들어질 것은 당연하다. 이와 관련되었지만 기술과 과학 사이의 관련을 두고서는 이보다 더 치명적이었던 구벌은 자연적 (na t ural) 인 것과 비자연적 ( 또는 인공적, ar tifi c i al) 인 것의 구벌이 었다. 이에 따르 떤 기술은 자연에 비자연적 변화를 가하는 것이고 어느 면에서는 자연을 파괴하고 거역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기술과 자연에 관해서 다루는 과학과의 연결은 불가능해질 것이었다. 3 과학혁명기 동안에는 과학과 기술 사이의 이같은 분리 상태가 깨 드려졌다. 그동안 분리된 채 내려온 과학과 기술에 각각 변화가 있 어서 과학혁명기에 와서 역사상 처음으로 이 둘이 서로 연관되어 서 생각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술이 과학지석의 발전에 조금이라 도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볼 수 있게 되고 과학지식도 기술에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게 되었다. 물론 이 장의 서두에서 본 대로 직접적, 내용상의 연관은 없었지만 간접적인 상호영향에 대 한, 그리고 영향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득 히 과학자의 기술에 대한 태도의 변화는 주목할 만했다. 과거에 비 해 과학자들이 기술을 훨씬 높게 취급했으며 기술의 지식과 방법이

과학의 추구에 있어서도 의미 를 지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같은 변화의 원인 한 가지는 이미 앞에서 보았다 .G) 15, 16 세가 에 이르면서 기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필요성아 증대되고 그에 따라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향상이 되었고 이들은 자 신들의 지적인 지위면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향상을 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기술에서의 지석의 속성들_―실제 결 과를 얻게 해주고, 객관적이고, 발전적이며 인류의 복지에 도움아 된다는 특성들_이 참다운 지식이 지녀야 할 속성들로서 과학도 이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이 접차로 사회에 널리 퍼지면서 주로 대학과 상류사회에 속했던 지식충에까지도 받아들여 지게 되었고 베이컨, 갈릴레오, 보일 둥은 이런 견해를 강력히 보 여주었다.

6) 제牛j 牛선 참조. 머 자세한 것은. 4-'상의 주 20) 에 언급된 Rossi의 책 chap. 1 참조 .

또 다른 원인 한 가지는 앞 철에서 본 구별들의 와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체계 내에 확고히 자리잡고서 과학과 기 술의 연결을 힘들게 했던 천상계-지상계, 자연-인공의 구별은 과 학혁명기에 이르러 아리스토텔레스 체계 자체의 붕괴와 함께 깨뜨 려지게 되었다. 천상계-지상계의 구벌은 이미 천문학의 혁명을 나 물 때 보았듯이 케플러와 갈릴레오 둥에 의해서 무너졌다. 특히 케 플러는 천상계의 행성의 운동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 있어 태양과 행성 사이의 磁 氣 的 힘을 가정하기도 하고, 태양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행성의 속도가 바뀌는 것을 대칭이 아닌 천평의 양팔의 움직 임에 비교하기도 하는 둥 지상계에서의 작용이나 기구를 천상계의 운동의 이해에 적용시켰다.” 갈릴레오 역시 렌즈로 만들어진 지상 의 기구인 망원경을 통해 천상계를 관측했을 분 아니라 그 관측의 견과로 얻어전 경험적 사실들은 천상계―지상계의 구벌에 큰 타격 울 가했다 .8) 자연―인공의 구별도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의 전반적 붕괴의 일환으로 이와 나란히 깨뜨려졌다. 그리고 갈릴레오에서 데

7) 행성의 운동에 관한 Ke p ler 의 견해에 관해서는 제 2 장의 주 14) 에 실려 있는 문헌들을참조할것. 8) 제 2 장 8 철 참조.

카르트를 거치면서 진행된 운동의 개념의 변화와 그에 따른 자연적 운동, 비자연적 운동의 구벨의 소멸 역시 이같은 구벌의 소멀의 예 로 볼 수가 있다 .9 )

9) 제 3 장 6 절, 제 6 장 1 철 참조. 물론 Aris t o t l e s 체계내의 이같은 구벌이 깨드려 진 것이 거꾸로 과학과 기술과의 분리상대의 완화로부터 영향받았을 수도 있 다. 역사상 서로 연관된 현상이 비슷한 시기에 병행해서 나타날 때 흔히 그러 하듯이 이 경우도 어느 한 가지 현상이 다른 것의 원인이었다기보다는 서로가· 서로 영향을 주었거나 두 가지가 다 당시의 더 깊은 현상이나 목성의 표현이었 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렇게 해서 과학과 기술의 분리상태가 깨어지고 과학과 과학자­ 의 기술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생기면서 과학혁명기를 통해서 몇 가지 새로운 현상들이 나타났다. 우선 과학자들이 그동안은 전혀 관십을 쏟지 않던 기술의 제부적인 접들에 관십을 가지고 그것들을 주의깊게 관측하고 연구하며 정리하게 되었다. 과학혁명기 동안에 이런 경향은 아주 널리 퍼져서 베이컨, 갈릴레오, 보일 같은 사람 들은 물론 메르센느, 데카르트 같은 사람들까지도 그들의 글에서 이같은 점을 강조했다 •10) 그리고 이와 병행해서 진행된 것이 역사 앞에서 다룬 기술과 고대 학문의 전통과의 연결이었고 그와 아울러 기술에 이론적 바탕이 부여되기도 했다. 또한 기술은 당시의 지베 적 자연관으로 확고히 자리잡게 된 기계적 철학과도 연결이 되게 되었다. 자연세계의 모든 현상이 물질과 그것의 운동만으로 이루어 져 있다는 의미에서 〈기계적〉이라고 불린 기계적 철학은 결국 자연 세계 전체를 하나의 커다란 기계로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 고 이 생각은 물론 자연-인공의 구벌의 와해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했겠지만 거꾸로 그 구별이 무의미한 것이 되도록 만들어 버리~ 역할도 했으며, 그 구벌에 바탕한 과학과 기술의 분리도 더이상 자 탱될 수 없도록 만들었다.

10) 제 4 장의 주 20) 에 언급된 Rossi의 책, chap . 3 참조. 록히 Descarte ~ Mer- senne 에 대 해 서 는 secti on 2 와 3 참조.

이 장의 시작에서 제기했던 질문-과학혁명에 있어서의 기술와 역할에 관한――에 내한 해답을 구성해야 할 것들은 결국 이런 현 상들이었다. 이 현상들에 의해 기술은 과학지식의 새로운 출처가 되었다. 과학은 더이상 자연세계만을 그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기계 • 기술에 대해서도 살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식의 출처 아 상으로 더 중요한 역할은 기술이 과학지석에 대해 모델로서 작용하 게 되었다는 접이다. 기술이 지닌 자연에 대한 태도_자연을 변 형시키고 그로부터 무엇을 얻어내는 등의――, 기술적 지석의 방법 과 독성―—공개적, 객관적, 협동적, 실용적인__둥을 과학지식이 본받게 된 것이다. 한편 과학혁명이 진행되면서 과학과 기술과의 연결은 이 단계에 서 그치지 않았다. 과학혁명기의 새로운 과학자들은 기술적 지식이 참다운 지석이며 과학이 이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분만 아니 라 이에서 더 나아가서 거꾸로 참다운 과학지석은 실용적 기술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믿음은 17 세기 를 통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고 이것이 실용적 응용을 괴해서 과 학을 연구하는 베 이 컨적 실용주의 (Baconia n Ut ilitar ia n is m ) 과학정 산 의 바탕이 되었다. 8 장에서 살펴본 새로운 과학단체들이 그 설립목 적으로서 실용적 과학을 표방했던 사실온 이를 찰 보여준다. 그리 고 과학의 발전이 기술의 발전을 가쳐온다는 생각은 이때에 생겨난 후 오늘날까지 계속 존재하고 있으며, 그러한 생각이 과학연구에 종사하는 데 대한 합리화의 수단으로서 그리고 과학활동에의 지원 을 얻기 위한 명분으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믿음은 과학혁명기에 있어서는 믿음으로 그쳤다. 앞에서도 본 대로 과학혁명기의 과학의 획기적 발전이 기술에 기여 한 바는 찾아보기 힘들며, 오히려 과학혁명기의 기술은 그 전 시기 인 중세 후기나, 그 후인 산업혁명기에 비해 볼 때 침체상태에 있 었다. 이 시기의 활발한 전쟁, 항해활동과 새로운 사회 • 정치 형태 의 성립에 수반한 상업과 경제활동의 증대는 있었지만 그것이 기술 상의 발전에 힘입은 것은 아니었다. 과학지식의 기술에의 실용적 응용에 대한 그러한 믿음은 과학혁 명기만이 아니라 그 후로도 한참 동안은 믿음인 채로 남아 있었다. 혼히 과학혁명기의 과학의 급격한 발전이 18 세기 후반 이후 산업혁 명기의 산업기술상의 급격한 발전을 가쳐왔다고 믿는 경향이 있지 만 ,Ill 실제로 과학의 지식이, 그것도 17, 18 세기의 과학의 지식이,

산업혁명에 무엇울 기여한 구체적인 예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12} 과학의 지석이 산업기술에 직접 응용되는 일은 19 세기 중반 이후­ ―독일의 유기 영로공업과 그보다 후에 미국의 전기공업에서­ 부터야 나타나게 되었다 .13 ) 그리고 이같은 연관아 일단 지어전 후 에 이 연관이 곧 여러 지역으로 그리고 여러 분야로 확대가 되어서 현대사회에서 보는 것 같은 과학과 산업기술의 밀접한 관계가 정착 한 것이다.

11) 이러한 인상적 표현들온 서양문화사개설서들만이 아니라 기술사의 논의에서도 ­ 나타나 있다. 예를 둘어 Frie d ric h Klemm, A Hi st o ry of Weste r n Te-

clmolog y(L ondon; Allen, 1959) pp. 231££ 를 분 것 . 12) 산업혁명에 크게 기여한 것은 오히려 당시 영국의 지주 및 자본가계층의 기업 가정선__새로운 것은 찾고 능을 및 경제성을 추구하는一―이었다. 그리고 그 ‘ 결과로 얻어진 새로운 기계나 공정, 기술 등도 대부분 과학적, 학문적 연구가­ 아니고 오히려 겅협과 그로부터 나오는 재주, 機智 등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산업혁명에 대한 아주 간단한 개설서르는 T.S. Ashto n ; The Industr i a l Revolut ion J7 60-1830(0xfo r d U. Pr., 1969) 가 있다. 17, 18 세기의 과학과 기 숟과의 관계 에 대 한 다각적 조명 이 Pete r Math ia s , Who Unbound Pro- meth e us? Scie n ce and Technic a l Chang e , 1600-1800 in P. Math i a s , ed., Scie n ce and Socie t y J6 00-J9 00(Cambrid g e U. Pr., 1972), pp. 54-80 에 실려 있다. 13)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그동안 발전되어 있던 재래의 기술분야들인 석탄, 천, 섬유, 기계 등의 분야가 아니라 새로운 기술분야들이었고 그런새로운 분야들에 , 개 태의 과학분야가 아니라 당시 새로 등장한 과학분야들인 유기화학이 나 전자기 학 갈은 분야의 과학지 식 이 웅용되 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만큼 과학지 삭 의 기술에의 응용이라는 현상온 그동안 있었던 것과는 전혀 유가 다른 새로운 종류의 현상이 었던 것이다. W.J. Reader, Imp er ia l Chemi ca l Industr i e s , A Hi st o ry (Oxfo r d Univ e rsit y Press, 1970), H.C. Passer, The Electr i c al Mamt fac tu res 1875-1900 (Harvard Univ e rsit y Press, 1953) 을 참조할 것.

4 이상이 대체로 과학과 기술과의 관계에 대해서 오늘날 받아들여 져 있거나 적어도 설득력이 있다고 인정받고 있는 견해이다. 그러 나 이에 반대하는 의견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 예가 맑스주의 (Marx i s t) 과학사학자들의 견해이다. 인간의 정치, 사 회, 문화상의 제도나 활동이 그 사회의 경제적 조건, 특히 생산수· 단에 의해 정해진다는 맑스의 이론에 따라 과학도 그같은 경제적 조건_―생산수단――에 의해 정해진다는 생각을 받아들인 맑스주

의 과학사학자들은 과학과 생산수단인 산업기술은 본질적으로 연결 이 되어 있다는 전제 위에 출발하 고 있다 .14) 그 가장 강력하고 생 경한 표현은 1930 년대의 소련의 과학사학자들과 그에 영향받은 학 자들에게서 나타나서 이들은 과학혁명이 크게, 또는 거의 전적으 로, 그 시기의 경제적 기술적 여건에 의해 발생했다고까지 주장했 으며 이들의 주장은 그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은연중에 큰 영향 을 미쳐 왔다 .15) 한편 과학과 기술이 본질적으로 깊이 연결된 활동 이라는 생각은 인류의 역사를 계급두쟁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는 맑스주의사관과도 연결이 되었다. 과학은 실제 생산기술에 종사하 는 생산계층과 연결이 되어 있을 때만 제대로 발전하며 그 연결이 깨어전 채 상류 유한계층의 게으르고 명상적인 활동이 되면 쇠퇴하 게 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같은 해석을 보여준 가장세련되고 훌륭한 업적은 철학사학자로 서 고대과학과 프란시스 베이컨에 대한 많은 업적을 남간 Benja m i n Farr i n gt o~ 로부터 나왔다. 16) 과학이 란 실제 생 산기 술과 그에 관 한 지식을 합리적으로 정리한 것이탄 생각에 입각해서 그는 고대에 서부터의 인류의 과학의 역사를 살폈으며 과학과 기술이 분리되었 올 때 에 는 과학이 찰못된 방향으로 나갔다고 주장했다. Farrin g ton 온 우선 고대의 〈소크타테스 이전 (Pre-Socra ti c) 〉 철학자들은 올바론 과학을 가지고 있었다고 믿었다. 즉 그들의 과학은 기술과 결부 가 되었고 그들은 기술적 지식에 대해서도 연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 14) 과K학ar과l 기M 술ar에x 관on한 t h이e 같E은co Mnoamrxi c 의 R이o 론le 의o f 쉬 S c운ie n 해ce석 으in로 P Nerastph e a cn t i Rveos s e0n11b eTreg,- chnolog y (Cambrid g e Univ e rsit y Press, 1976), pp. 126-38 이 있다. 15) Z예il를 se l,둘 어T h주e O3)r 에ig ins언 o급f 된 W H iellsi as m en 의G i l굳b e이rt ' s대 S표ci적e n 인t i fi예c 이 M며,et h o이 d ,외 J에o도u r nEadlg o af r the Hi st o r y of Ideas 2 (1941), pp. 1-32 과 J.D . Bernal, The Socia l Fu11cti o11 of Sc ien ce (London; Routl e dg e , 1939) ; Scie n ce in Hi st o ry (New York; Watt s, 1954) 등이 유명한 예이다. 묵히 Bernal 의 영향온 우리나라에도 아주 강해서 그의 Sc ien ce in H i s t or y는 우리나타의 이공계 대학생들간에 가장 널 리 읽히는 책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16) 이 런 입 장을 보여 주는 Farr i n gt on 의 처 술로 대 표적 인 것 은 Greek Scie n ce: IFtrs a nMceisa n Bin ag c ofno: r P Uhisl, o s2o pv hole sr. o(fB aIlntid mu osrter ,i a M l Sacryiel an ncde; (LPoenngd ou nin, , 1 1996414), 궁1이94 다9.);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상류 유한계충과 결탁함으로써 그들의 과학은 이로부터 벗어나서 게으르고 명상적으로 훌 렀고 그 때문에 고대 과학이 쇠 되 했다고 Farr i n gt on 은 주장한다. 그리 고 이 런 찰못된 방향은 중세를 통해서도 계속되다가 과학혁명기에 와서 프란시스 베이컨이 다시 과학을 올바론 길로 이끌어 주고-실제 생산기술 과 연결을 시켜 주어서__올바론 묵적을 찾도록 해주었다는 것이 Farr i n gt on 의 결 론이 다. Farr i n gt on 의 이 같은 생 각은 물론 어 느 정 도는 수긍울 할 수 있는 견해이며 실제로 프란시스 베이컨 자신의 견해도 이와 상당히 비슷 한 접이 있다 .17) 하지만 이 견해는 여러 결함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중대한 결접은 이 견해가 과학을 완전히 조직화되고 단 일한 사회 활동으로 본다는 접 이 다. 그렇 기 때 문에 Farr i n gt on 은 〈울 바론〉 과학, 〈잘못된〉 과학에 대해서 얘기할 수가 있다. 어느 시기 의 과학이 〈올바르게〉 혹은 〈잘못되어〉 나간다고 얘기할 수가 있었 던 것이다. 여러 방떤에서 여러 형태로 여러 성격을 띠고 나타나는 _그리고 〈과학〉이라는 말로서 과학의 지식, 과학의 방법, 과학 연구활동, 과학자 등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가 있고 그때마다 모 두 의미가 다른――과학울 하나로 보고서 〈과학〉에 대해 지극히 단 순화된 그리고 비역사적인 생각을 할 때에만 가능한 주장인 것 이다.

17) 계 4 장 6 절 참조 .

그러 나 이 같은 결함이 있 다고 해 서 Farr i n gt on 의 주장이 전혀 기 여할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플라돈,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중세를 통해서 과학이 기술과 분리되어 있었다는 지적은 정확하기 때 문이 다. 물론 Farr i n gt on 이 주장하는 바처 럼 소크타테 스 이 전 철 학자들에게서 그 둘 사이에 연결이 있었는가는 분명치 않으며 그가 그 증거로 들고 있는 사실들――그들이 실제 생산활동에서 자주 사 용되는 〈물〉, 〈불〉 같은 것들을 근본 원소로서 들고 있다는 __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더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고 더 자세히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 이후 과학혁명기 이전까지의 과학 과 기술과의 분리상태에 대해서 그리고 과학혁명이 이러한 분리상태

를 끝내고 과학과 기술을 연결시 켜 주었다는 접에 대해서, Farrin g - t on 으로 대 표되 는 맑스주의 과학사학자들이 강력 한 지 적 을 해 주었 고 우리의 인석을 일깨워 준 것은 사실인 것인다 .18) 18) 非맑스주의적 입장에서 과학과 기술과의 연걷운 보여준 초기의 논의로는 Ro• bert K Merto n , Sc ien ce, Technolog y and Socie t y in Sevente e nt h- Centu r y Eng la nd, Osir i s 4 (1938), pa rt 2 가 있다.

제 11 장 과학혁명의 완성과 그 영향 : 뉴튼 과학과 계몽사조 앞 장까지로서, 과학혁명기의 과학상의 획기적인 변화와 그 결과 인 근대과학의 형성에 대해 다루는 우리의 논의는 사실상 끝맺을수 있다. 이 장에서는, 그동안 다룬 과학혁명의 완성과 그 의의, 독하 그것이 유럽사회와 사상에 미찬 영향을 살펴보기로 한다. 1 혼히 과학혁명은 뉴튼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고 얘기한다. 뉴튼이 ’ 萬有 引力이라는 단일한 힘을 도입하고, 몇 개의 운동법칙에 바탕을 둔 수학적인 방법을 써서, 지구를 포함한 천체들의 운동을 정확히 기술해 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과학의 모든 분야의 문제들­ 의 해결은 아니었고, 섬지어는 과학혁명 중에 문제를 노정시켰던 분야들 모두에 대한 해결도 아니었다. 자연을 다루는 여러 분야들 · 에 있어서 해결을 요구하는 문제들은 뉴튼 이후에도 계속 산적해 있었다. 그러나 뉴돈의 성공은 이들 다른 여러 과학분야들에 대한­ 해 결의 〈 例示〉로서 중요한 의 의 를 지 닌다. 죽, 천체 역 학 __- 혹은­ 더 넓게 말해서 고전역학-이라는 하나의 분야의 문제를 완전히 성공적으로 해결해 줌으로써 다론 분야들에서도 같은 석으로 해~ 가면 해결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울 주게 된 것이다. 뉴튼이 과학의 모든 분야를 총괄하는 해결율 제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과학혁 명 의 결과로 형 성 된 근대 과학에 대 해 〈뉴돈과학(N e wt on i an Scie n ce)>

또는 〈 뉴돈종합 (New t on i an S y n t hes i s ) 〉 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이유에서이다. I) 그리고, 이 책의 첫머리에서 간단히 소개했고, 이 책의 논의의 밀에 깔려 있는 〈우]기의 이론 ( Cr i s i s Thes i s) 〉이 말하는 바―~ 과학이 그 자체의 위기를 해 결함으로써 당시 유럽 사회 전반의 위기의 해결에 기여했다논­ 의 핵심도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겠다.

1) 예를 둘어 Alexandre Koy re , The Sig n if ica nce of the Newt on ia n Sy n th e sis , Newt on ia 1 1 St 11 die s (Harvard Univ e rsit y Press, 1965), pp. 3-24 를 참조할 것 .

뉴튼의 처 술 중 중요한 것 으로는, Pr i nc ipi a 와 Op tic ks 의 두 가지 를 들 수 있다. 2) 이 중 Pr i nc ipi a 는 세 권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 1 권은 진공 중에서의 물질 입자의 운동을 다루었는데, 오늘날도 우리가 사용하는 세 개의 운동법칙에 바탕하고 있다. 1 권에서의 취급은 물 질입자의 운동에 대한 일반적 논의로서, 여러 종류의 가능한 힘들 의 수학적 형태를 가정하고 그런 힘에 의한 운동을 수학적으로 추 론하고 있다. 따라서 만유인력과 같은 거리의 자승에 반비례하는 힘 의에도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가상적 힘들에 의한 운동도 취급 되어 있다.

2) Phil o sop h ia e nat1 1 ralis pr in c ipia ma t lzema ti ca 는 1687 년에 La ti n 어 로 출판 되었으며 구하기 쉬운 영역판으로는 제 6 장 주 15) 에 언급한 Ca j or i의 번역판 (Univ e rsit y of Cali forn ia Press, 1934) 이 있다. Op ti cks 는 영 어 로 1704 년에 출판되 었으며 구하기 쉬 운 현대 판본으로.는 (Dover, 1952) 가 있 다 .

제 2 권은 처항이 있는 공간 중에서의 물질 입자의 운동을 취급하 며 오늘날의 유체 역 학 (hy drod y nam i cs) 에 해 당되 는 내 용인데 , 당시 에 큰 힘을 지니고 있던 데카르트의 우주관-〈소용돌이 (vor t ex) 〉 이 론과 〈물질공간(p lenum) 〉이론에 바탕한――을 비판하려는 목적에서 씌어졌다. 제 3 권은 〈우주의 체계_그 수학적 취급〉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데, 바로 제 3 권에서 구체적으로 태양과 행성들로 이루어전 우주 一태양계_-에 대해서 다루었다. 여기서 거리의 자승에 반비례 하는 만유인력을 도입하고 제 1 권의 수학적 취급을 사용해서 행성의 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법칙들-뉴튼은 케플러의 법칙들을 경험적 으로 얻어졌다는 뜻에서 〈현상들(p henomena) 〉이라고 부르고 있다

-울 도출해 냈단 것이다. 결국 제 3 권은 코페르니쿠스에서 시작 되어서 케플러, 갈릴레오를 거쳤던 천문학의 혁명의 종결을 나타내 는 한편, 갇탈레오 이후 데카르트, 호이겐스 등을 통해 형성되어 온 근대역학의 성공을 보여주는 셈이었다. 과학혁명의 〈완성〉이 얻 어진 것이다. 2 위 와 같은 내 용의 Pr i nc ipi a 는 1687 년의 출판과 동시 에 굉 장한 성 공을 거두었다. 이 책의 출판은 그동안 캠브리지 대학의 괴짜 교수 에 불과했던 뉴튼의 명성을 유럽 전역에 떨치게 했고, 여러 학자들 로부터 굉장한 주목을 받게 했다.” 이같은 성공적 반응이 더욱 늘 라운 것은 이 책이 굉장히 어려운 책이었다는 점에서이다• 내용 자 체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방법에 있어서도 간편한 대수학적 방법 이 아닌, 일일이 도형이 수반되고 증명이 요구되는 기하학적 방법 을 채택하고 있어서 이 책의 세부내용을 자세히 이해하는 일은 대 부분의 독자의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일이었다 .4) 더구나 앞에서 보 았듯이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의 영향이 강했던 유럽 대륙에서는 이 책 이 〈분리 된 상태 의 작용 (ac ti on-a t -a-d i s t ance) 〉의 성 격 을 가전 만 유인력을 도입한 사실 때문에 반발이 더욱 거겠고 따라서 받아들여 지기에 힘이 들었다 .5) 그러나 이 책이 커다란 충격과 깊은 인상을 남간 것은 사실인 것이다.

3) Prin c ip ia 출판 직후의 반옹에 대해서는 I. Bernard Cohen, Intr o d11cti on to Newt on 's Prin c ip ia (Harvard Univ e rsit y Press, 1978), chap. 6 을 참조할 것 . New t on 의 전기 중 가장 완벽 한 것 은 Ri ch ard S. Westf all , Never at Rest ; A Bio g r aph y of Isaac Newt on (Cambrid g e U. Pr., 1980) 아 다. 4) 예를 들어 Bi bl i otl z i qu e Un i verselle 에 r .· i 11c ipi a 의 서평을 쓴 것으로. 믿어지 는 Joh n Locke 는 그 책의 수학적 내용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고서 그에 관 한 Hu yg ens 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데 그쳤다 : 예를 들어 Charles C. Gi llisp i e, The Edge of Obj ec ti vit y : An Essay in the Hi st o ry of Sc tn tz j i c Id ea:r (Prin c eto n U. Pr., 1960), p. 160 을 볼 것. '5) 제 6 장 5 철 참조.

한편 O pti cks 는 Pr i nc ipi a 와는 크게 다른 성 격 의 책 이 었 다. 이 책 은 우선 영어로 씌어졌고, 수학적이었던 Pr i nc ipi a 에 바해 볼 때 훨

씬 더 실험적이었으며, 내놓고 실험에 의한 과학 연구를 주장했다. 그 주된 내 용은 1672 년과 1675 년에 완성 된 뉴돈 자신의 논문에 담 겨 있 던 것 으로서 빛 을 입 자(p ar ti cle) 로 보고 프리 즘에 의 해 白 色光 이 굴철되 면서 여 러 單 色光 (monochroma ti c ra y)들로 분리 되 는 데 대 한 실험과 설명을 담고 있었다 .6)

6) New t on 의 빛과 색깔에 관한 논의들은 제 7 장 주 3) 의 문헌들을 참조할 것.

그런데 Op ti cks 에 서 의 뉴튼 광학의 한 가지 독칭 은 그가 색 깔에 관한 미 시 적 메 카니 즘 (m i crosco pi c mechan i sm) 율 제 공하지 않고 거 시 져 현상 (macrosco pic p henomena) 만을 얘 기 하고 있 다는 점 이 다. 뉴튼 은 빛을 입자라고 얘기하면서도 그러한 빛 입자의 구체적 운동과 작용을 동한 색깔에 대한 설명을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접은, 예를 들어 색깔을 내는 물체에서 나오는 빛의 압력이 통과하는 공 간의 물질입자의 회전 속도의 차이로서 색깔의 차이를 설명 했 던 데 카르트와는 크게 대조가 된다. 뉴튼이 그러한 미시적 메카니즘을취 급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입자들에 관 한 것으로서 옳은지 그론지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것이기 때 문이었다. 뉴돈은 이같이 실험이나 관측에 의해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설명을 〈 假說 (h yp o t hes i s) 〉 이라고 불렀고, 과학에 있어서 이 같은 〈가설〉의 개입을 배격했다. 그리고 자연세계의 本 質 이나 原因 등에 대해서 다루지 않고 현상의 記述로 만족한다는 의미에서 제 5 장에서 다문 〈완화된 회의론자〉둘의 영향을 보여주는 이같은 생 각은 뉴튼 과학의 기본 입장이 되었다. 제 1 판의 성공 이후 전문적 인 과학적 내용에 첨가해서 과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포함시킨 Pr i nc ipi a 의 제 2 판과 제 3 판에서는 만유인력의 本 體 論的인 성격과 관 련해 서 이 러 한 생 각이 〈나는 가설을 설정 하지 않는다 (H yp o t heses non fi n g o) 〉는 유명한 구절로 표현되게 되었다. 8)

7) 제 5 장 2 철 참조 8) 1713 년과 1726 년의 재 2 판, 3 판의 배경에 대한 논의는 주 3) 에 언급된 Cohen 의 책, chaps . 9-11 을 참조할 것 문재의 구철은 재 2 판서부터 General Scholi um 에 포함되었다 . 이 구철을 중심으로한 New t on 과학의 방법에 대한 논의로 Ale-xandre Koy re , L'Hy po th e sis et l'ex p er ie n ce chez Newt on , Bulleti n d e la SHocy ipeot e t h Fe srias l l ifna iNs ee wdet oPn h'si l Pohs oipl o hs oiep h sy o , (1P9h5y6s )i, c sp p8. 5(91-97696 와), Ip. p.B 1e6r3n-a8r4d 가 C o있h 다en.,

한편 자신의 과학의 방법 에 대 한 뉴튼의 생 각은 Pr i nc ipi a 의 서 문 에 좀더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9)

9) 이 서문은 Ph i 11 cipi a 의 초판에서부터 실려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철학의 수학적 원리들로서 제시한다. 왜냐하면 철학의 임무 전체가 이것_—운동의 현상들로부터 자연의 함둘을 탐구하고, 그 험 둘로부터 다른 현상들을 보여주는_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현상들――케플러의 법칙들――로부터 그런 현상들을 생기게 한 힘 —만유인력――을 얻어내고, 그 힘으로부터 수학적인 취급에 의 해 그 현상들분만 아니라 다른 현상들까지 얻어넬 수 있다는 것이 다. 이 것 은 뉴튼과학의 방법 의 ――특히 Pr i nc ipi a 에 나타난 형 태 로서 의__골자가 되었고, 10) 18 세기의 여러 과학 분야들이 〈뉴튼과학 (Newt o nia n Sc i ence) 〉 을 표방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것도 바로 이것 이었다.

10) New t on 과학의 방법에 대한 논의들로는 주 8) 에 언급된 Ko yre 와 Cohen 의 굳 외 에 Robert Palte r, Newt o n and th e Inducti ve Meth od, R. Palte r , ed., The An1111s Mi ra /J i/is of Si r Isaac Newt on , 1666-1966 (MIT Pr., 1970), pp. 244-257: Dudley Shap e re, The Phil o sop h ic a l Sig n if ica nce of Newt o n's Scie n ce, i/Jid. , pp. 285-99 동을 참조할 것.

그러나 이 방법의 첫 단계인 현상들로부터 힘을 얻어내는 과정 은 다분히 상상적이고 가정적인 면을 포함했다. 관측된 현상들이 명백한 힘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뉴튼이 만 유인력을 도입했던 과정도 그러했을 것이 들림없지만, 이 과정은 결국 일단은 가상적인 힘을 설정해서 도입하고 그로부터 수학적인 방법에 의해 원래의 현상들을 추론해낼 수 있나를 검증해 보는 형 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렇게 해서 원래의 현상들을 추론해 낼 수 있으면 그렇게 설정된 힘의 존재는 충분히 증명이 된 것으 로 간주되고 그 힘을 이용해서 새로운 현상들울 예측해넬 수도 있 고, 결국은 이것이 위의 인용문에서 뉴돈이 의미한 바가 되겠다. 그러나 처음 힘을 想定하는 과정이 가정적이고 상상적인 성격을 며 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O pti cks 에 포함된 〈질문

들(Q uer i es) 〉은, 특 히 〈질문〉 31 번은, 중력, 전기, 자기, 열, 불, 화 학현상 둥 여러 자연현상들에 해당되는 독특한 〈힘〉들 이 있어서 그 것들의 수학적 형태를 찾아내면 이런 모든 현상들울 수학적으로 -Pr in c ipi a 에 서 행 성 의 운동을 취 급하던 방법 으로__취 급해 낼 ~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11) 그리고 이같은 언급이 그처 럼 성 공적 이 었 던 Pr i nc ipi a 의 저 자의 입 으로부터 나왔다는 데 에 서 그 영향력은 18 세기를 동해 크게 떨치게 되었다.

11) 이 Q uer y둘에 대한 논의로는 Alexandre Koy re , Les Qu erie s de J'O p tiqu e, A있다rc.h iv e s int e r nati on ales d'his to i r e des scie n ces 13 (1960), 15-29 울 둘 수

3 그러한 영향은 〈질문〉 31 번에서 가장 길게 언급된 화학현상의 설 명 에 서 특히 강하게 나타났다. 12) 18 세 기 의 많은 화학자들은 서 로 다른 물질간의 화학결합의 경향의 차이를 〈 화학적 천화도 (chem i cal a ffi n ity)〉의 차이로써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 천화도가 화학 물질들 사이 의 〈근거 리 인 력 (short rang e a ttr ac ti on) 〉 의 세 기 를 · 나타낸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화학적인 힘을 만유인력 처럼 수학적으로 표현하려고까지 했으며, 그에 의해 화학 현상의 수학적 설명을 얻어내려고 시도했다 .13 )

12) 예를 둘어 Arnold Thackray, At om s and Powers, an Essay in Newt on ia n Matt er -Theory and the Develop m ent of Chemi st r y (Harvard U. Pr., 1970> 을 참조할 것 . Helene Metz g er , Newt on , St ah l, Boerhaave et la doctr i n e chim iq u e. (Pari s, 1930) 는 오늘날에도 유용한 좋은 논의 를 담고 있다. 13) 18 세기의 chemi ca l aff ini t y 개념에 관한 논의로 A.M. Duncan, Some Theo- reti ca l Aspe c ts of Eig h te e nth - Centu r y Tables of Af fini t y, Annals Oi Scie n ce 18 (1962), pp. 177-96, pp. 217-32 가 있다.

물론 18 세기 화학의 이같은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전기, 자기 현상 등 다론 분야에서의 비숫한 시도는 성공으로 이끈 것도를 있었다. 특히 전기 분야는 역학과 거의 같은 형태의 성공을 낳아서 쿨롱 (Charles Aug ust i n de Coulomb, 1736-1806) 은 전기 를 떤 물체 들 사이에 거리의 자승에 반비례하는 만유인력과 같은 수학적 형태를 지닌 전기력이 존재함을 보이고, 그에 바탕해서 전기현상을 수학적

으로 취급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 .14) 한편 정확하게 뉴돈 역학의 형태를 취한 것은 아니지만, 각각의 현상에 독특한 〈 무게가 없는 입 자들(im p onderables ) 〉 을 가정 해 서 그것 들의 작용을 통해 열 현상이 나 연소 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들도 뉴돈과학을 표방하면서 행해 졌고, 성공하치는 못했지만 이같은 시도들은 19 세기 초까지 계속되 었다 .15) 또한 이러한 일들은 비단 물리과학 분야들에만 국한된 것 이 아니었다. 생명현상에 대해서 다루는 생명과학 분야, 그리고 사· 회현상에 대해서 다루는 사회과학 분야들에까지도 뉴돈과학의 방법 一이들 현상에 기본이 되는 힘이나 작용을 얻어내고 그로부터 현 상들을 설명하려는-은 열렬히 적용되었던 것이다 .16)

14) New t on 의 영향하의 전기현상의 연구에 대한 논의는 I. Bernard Cohen, Fran- klin and Newt on (Phil ad elph ia , 1956) 에 나와 있 다. Coulomb 에 대 해서 는 C. Ste w art Gi lm or, Coulomb and the Evo/11t io11 of Phys i c s and Eng ine erin g in JB th - Centt try France (Prin c eto n Univ e rsit y Press, 1971) 을 참조할 것 . 15) 예 를 들어 Robert Fox, The Ri se and Fall of Lap la cia n Phy si c s, Hi st o - ric a l St ud ie s in the Phys i c a l Scie n ces 4 (1974), pp. 89-136 을 참조할 것 . 16) 이 같은 분위 기 는 주 4) 에 언급된 G i ll i s pi e 의 책 , chap . 5 에 간단히 기 술되 어 있다.

그러나 18 세기에 이처럼 널리 유행했고 자주 언급되었던 〈뉴튼과 학 〉 , 〈 뉴튼과학의 방법 > 또는 〈뉴튼주의 (New t on i an i sm ) 〉 라는 말은 뚜릿한 하나의 경향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실제로 그런 이름을 표 . 방하고 행해전 과학 분야들을 살펴보면 서로 아주 다른 두 가지 경 향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아주 정확하고 수학적이며 기계 적 (mechanic a !) 인 연구들이 있 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경 험 적 이 고 상상적인 〈 힘〉을 포함하는 가정적 서색듈이 발견된다. 그리고. Pr i nc ipi a 와 O pti cks 의 차이 를 반영 해 주기 도 하는 이 두 가지 경 향은 뉴튼에 의해서 완전히 융화되지 못했고, 뉴돈의 추종자들 -18 세 기에 뉴튼과학을 표방한 사람들-은 시기나 구체적 문제, 분야에 따라 자신들에게 적합한 경향만을 강조했다. 따라서 18 세기를 통해 서 여러 가지 공상적인 〈인력〉과 〈척력〉을 가정한 추축과 사색이 많이 있었지만 ,1 다론 한편으로는-특히 프랑스에서 뉴튼역학이

17) 주 12) 와 주 14) 에 언급된 문헌들 외 에 Robert E. Schofi el d, Mechanis m and Mate r ia l is m : Brit ish Natu r al Phil oso p hy in an Ag e of Reason (Prin c eto t? U. Pr., 1970) 과 Phil ip C. Ri tter bush, Overtu r e to Bi ol og y: The Sp e c-

ulati on s of Eig h te e nth - Centu ry Natu rali sts (Yale U. Pr., 1964) 을 참조 할것.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1730 년경부터는__그때까지 자리가 잡히게 된 해 석 학 (calculus) 의 방법 에 바탕한 뉴튼역 학의 수학적 인 체 계 화가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18 )

18) La p lace 에 의해 완성된 아갈은 시도에 대해서는 Pie r re Brunet, L'i11 t ro d11ct ion des th eorie s de Newt on en France att XVIII' sie c le (Paris, 1931); Cli fford Trusedell, A Prog ra m tow ard Redis c overi ng the Rati on al Mechanic s of the Ag e of Reason, Arch ive for the Hi st o r y of Exact Scie n ces 1 (1960), pp. 3-36; Thomas L. Hankin s , Jea n d'Alembert. Scie n ce and the Enti g- hte n ment (Oxfo r d U. Pr., 1970) 등을 참조할 것.

한편 18 세 기 의 〈뉴튼과학 〉 또는 〈 뉴튼주의 〉 라는 말이 이 같은 과 학의 내용이나 방법면의 구체적인 경향에 못지않게 과학에 대한 하 나의 이미지를 나타내 주었다는 접도 무시할 수가 없다. 서로 분 리된 채 독자적으로 내려오던 자연세계에 대한 지식의 여러 분야들 이 〈뉴튼과학 〉 이라는 단일한 이름을 내세움으로써 이제는 단일한 방법, 단일한 관접으로 접근할 수 있는 〈 과학 〉 이라는 단일한 분야 가 되었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 과학〉이라는 분야가 그 분야 자체의 문제의 해결에 크계 성공을 거두었고 다른 분야의 문제 해결에 본보기를 제시해 주었다는 접에 서 전체 문화와 사회에서의 중요성은 크게 증대되어 인석되게 되었 다. 그동안 사회와 문화의 여러 분야들의 변두리에서 보잘것없이 존재하던 자연제계에 대한 여러 형태의 지식들이 이제는 〈 뉴튼과학 〉 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중요한 분야가 되었다는 인식이 생겼던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막중한 중요성을 차지하게 된 과학의 단일화 된 이미지가 이렇게 형성되었다. 4 앞 철에서는 뉴튼과학이 18 세기의 과학 분야들에 미천 영향에 대 해서 살폈다. 그러나 뉴튼과학은 과학만이 아닌 18 세기의 유럽 思 想 전반에 영향을 미쳐서 많은 18 세기의 철학자, 사상가, 문인들에 게서 그 영향을 찾아볼 수가 있다. 그리고, 이같은 영향은 주로 뉴 돈과학이 가설 (h yp o th es i s) 이나 독단 (do g ma) 이 없이 수학적, 합리적,

경험적, 실험적 방법만을 사용하며, 그 렇 게 해서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는 믿음을 동해서 작용했다. 똑같은 성공을 위해서 사회의 다른 모든 분야들도 그와 같은 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 을 하게 되고, 이에 따라 자연히 철학적, 사색적, 독단적, 형이상 학적인 면은 배격하고, 합리적, 경험적, 실험적――과학적__적인 면 을 존중하는 경향이 지배적이 된 것이다. 또한 이같은 형태로 나아 가면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인간이 해결해낼 수 있다는 인간의 능력 자체에 대한 믿음이 퍼지게 되고, 이것은 더 나아가서 이같은 능력 을 지닌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도 억압이나 구속이 없으면 제대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는 낙관론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뉴튼과학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 이같은 경향들은 18 세기 유럽의 思潮롤 특칭 짓 는 〈계 몽사조 (Enl ig h t enmen t)〉의 중요한 요소들이 되 었 다. 19) 이 시 기 의 〈계 몽철학자(p h i loso p he) 〉들이 과학을 중요시 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으며, 이런 면에서 서양 현대사조의 기원 인 계몽사조의 큰 원천 한 가지가 과학혁명에 의한 근대과학의 형 성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0) 그렇다면 계몽사조에 있어서 과 학의 영향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는가? 이 접에 대해서 다루 기 위해서는 우선 계몽사조 자체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 계 몽사조에 대 한 광범 위 하고 자세 한 논의 로 Pete r Gay, Tlze Enlig h te n ment : An Inte r pr e ta t i on, 2 vols. (New York: Knoff , 1966, 1969) 가 있으며 Ernst Cassir e r, Di e Phil os op lz i e der A11f kl ci rtm g (Tii bi n g en , 1932) 와 Carl L. Becker, The Heavenly Cit y of the Ei gh te e1 1t! z-C ent1 1r y Phil o sop h ers (Yale U. Pr., 1932) 는 오늘날까지도 유용한 홍미있는 논의들이다. 보다 최 근의 논의 로는 Ira 0. Wade, The Str u ctt lre and Form of the French Enli gh te n ment, 2 vols., (Prin c eto n U. Pr., 1977) 가 있다. 20) 이러한 관정은 예를 들어 주 19) 에 언급된 Becker 의 책이나 Herbert Butt er - field , The Orig ins of Modern Scie n ce 1300-1800 (New York; Free Press, 1957) 이 취하고 있다. 수 4) 에 언급된 G illi s pi e 의 책의 Scie n ce and Enli gh - 과t e의nm e관n t계'를’라 는살 제피 목고이 있다불.은 chap. 5 는 이 보다 머 다각져 으로 계몽운동과 과학

〈계몽사조〉란 한 마디로 말해서 18 세기 유럽의 문화와 사고방석 에서 드러나는 유형을 지칭한다. 〈계몽〉이라는 말 자체가 18 세기의 지식인들이 그들 자신에 대해서 사용한 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계몽되었고 (en lig h t ened ) 〉, 자신들의 시대가 그 이전의 미신, 무지, 독단 둥으로부터 깨어난 〈계몽된〉 시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계몽 사조의 주역 들은 〈계 몽철학자(p h i loso p he ) 〉 들이 었는데 , 21) 그들의 구 체적인 견해들에는 차이가 많았고 따라서 그들 사이에는 논쟁도 찾 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이성과 지식에 바탕해서 사고하고 행동하 는 〈계몽된〉 지식인이라는 접에서 일체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같은 일체감 의에도 이들에게 꽁통된 특성온 있었다. 우선 〈계몽 철학자〉둘은 철학자들이타기보다는 사상가, 문인, 집필가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정도로 그들이 주로 관십을 가졌던 문제는 철학 이나 형이상학보다는 윤리의 문제였다. 그리고 윤리 중에서도 개인 의 윤리에 관해서보다는 사회 전체의 윤리에 더 관심을 두어서 〈다 수의 행복〉 같은 문제에 큰 관십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문학도 예술적이거나 창조적이기보다는 비판적이고 도덕적, 윤리적인 면에 치중되었다. 또한 그들은 대체로 낙관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에 현재 非理가 행해지고 있다면, 그것은 사회나 제도의 찰못 이지 인간의 본성의 탓은 아니고 따라서 제대로 이성에 의해――계 몽되어서――행동하면 고쳐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같은 경 향들 때문에 그들은 일반적으로 개인의 〈이성 (reason) 〉이나 개인의 능력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지녔던 반면에, 〈사회〉나 〈권위〉 에 대해서는 강한 부정적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21) p h il oso p he” 는 불어로 〈철학자〉를 뜻하지만 계몽운동기의 사상가들을 지칭할 때는 독특한 뜻을 지너서 영어로 된 굴들에서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

5 그러면 먼처의 질문을 다시 되풀이해서, 이같은 계몽사조에 과학 이 어떻게 개입되어 있었는가? 이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 과학과 계몽사조의 연관을 보이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 예――계몽사조기 의 대 표적 사상가인 볼테 르 (Vo lt a i re, 1694-1778) 와 계 몽사조기 의 가 장 중요한 사회운동이었던 『백과전서 (Ency clop e d i e) 』의 편찬에 나타 난 과학의 역할――를 살펴보겠다.

볼테르는 그의 가장 활동적인 시기의 거의 15 년 동안 (1736-1749 ) 을 과학을, 특히 뉴돈의 과학을, 공부, 연구, 번역 , 소개 하는 데 바쳤 다. 그의 『뉴튼 철학의 요소들 (Elemen t s de la ph il o sop h ie de New t on ) 』 22 ) 은 프랑스에서 일반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뉴튼에 관해 씌어진 최초의 책이었다. 물론 거기에 담간 뉴돈 물리학의 내용이 훌륭했 다고 할 수는 없고, Pr i nc ipi a 의 어 려 운 수학적 내 용보다는 O pti cks 의 내용이 더 강조되었지만, 18 세기의 일반 지석인들에게 비 추어전 뉴튼과학의 이미지의 형성에 이 책은 크게 기여했다. 또-B-J­ 그가 뉴돈과학에 관심을 쏟던 시기에 볼테르의 동거자였던 샤를레 (Mme. du Chate l et, 1706 ― 1749) 부인은 Pr i nc ipi a 를 프랑스어 로 훌륭하 게 번역했으며 볼테르는 이것을 읽었을· 분만 아니라 그에 대해 쓰 기도 했다 .23 )

22) (Amste r dam, 1738). 갈은 해에 London 에서 영 역 판이 출판되 었다. 23) Ch:l tel et 부인의 번역 은 Par i s 에서 1756 년과 1759 년에 출판되 었다. 이 번역 에 대한 논의 로는 I.B . Cohen, The French Translati on of Isaac Newt on 's. Plzil ~ sohia Natu r a/i s P rin c ip ia Math e mati ca (1756, 1759, 1966), Archi- ves int e r nati on ales d'lzis t o i r e des scie n ce 21 (1968), pp. 261-90 이 있다. Vol t a i re 와 Ch :lt ele t부인의 관계에 대해서는 I.O . Wade, Volt ai r e and lvlme. du Chate l et, an Essay on the Jn te l lect1 1 al Acti vit y at Ci re y (Prin c eto n - U. Pr., 1941) 윤 참조할 것.

볼테르가 뉴돈과학에 이처럼 큰 관십을 쏟은 이유는 그의 생애 를 돌이켜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24) 법학울 전공했던 그는­ 일찍부터 작가를 지망하게 되었는데 로앙 (Rohan) 이타는 귀족과의 충 들 때문에 1725 년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영국은 30 대 초의 불 테르에게 자신의 조국 프랑스와는 크게 다르게 보였다. 그의 눈에는­ —물론 억울하게 조국을 떠나야 했던 그의 처지 때문에 미화되어 보이기는 했지만――영국에서는 종교적인 박해가 없었고, 과학자나­ 학문을 갖춘 사람이 존경받았으며, 이들 과학자들과 실제 일에 종· 사하는 사람들이 귀족들과 대등하게 어울리는 것으로. - 보였다. 또한: 영국에 체재하는 동안 그는 뉴튼의 성대한 장례식을 목격하기도 했 으며, 경험주의적인 뉴튼과학의 우수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뉴돈의 . 영향을 받았던 록크(J ohn Locke, 1632 一 1704) 의 저술을 읽은 것도 아

24) Vol t a i re 의 간단한 전기 는 LO. Wade, Inte l lectu a l Develop m ent of Volt ai r t r (Prin c eto n U. Pr.. 1968) 에 담겨 있 다.

때였으며, 특히 록크의 자유주의적인 입헌정치관에 감명을 받았다. 이처럼 종교의 자유, 입헌 정치, 자유주의, 경험주의과학 ( 뉴튼과학) 이 공존하는 것으로부터 볼테르는 이들이 서로 연결된 것이타는 생 각을 하게 되었나 물론 이같은 요소들의 공존은 당시 영국사회의 독특한 상황 대문에 빚어전 목수한 역사적 현상에 지나지 않았지 만, 볼테르는 이들 요소들이 본질적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으 로 생각한 것이다. 프랑스로 돌아온 볼테르는 이같은 생각을 『철학 적 편지 들 (L ett res p h i loso p h iq ues) 』이 라는 제 목으로 출판했 다. 25) 그리 고 계속해서 뉴돈의 과학과 저술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25) 불어로는 1734 년에야출판된 이 책의 영여판이 London 에서 1733 년에 이미 출판 되었었다. 구하기 쉬운 현대판본은 (India n ap o li s: Bobbs-Merrill , 1961) 가 있 다 .

결국 볼데르는 프랑스에서 자신의 눈에 나쁘게 보인 요소들을 비 난하고 그것들을 대체할 요소들을 옹호하는 데에 뉴튼과학을 사용한 셈이다. 그가 보기에는 프랑스의 상류 계층은 편견과 독단 (do g ma) 에 젖어 있었고 하류 계층은 무지와 미신에 싸여 있었다. 그는 이 런 나쁜 요소들이 교회와 전통에 바탕한 것으로 생각했다. 반면에 볼테르가 보기에는 뉴돈과학에는 이 런 것들이 없었다. 뉴튼과학은 단순히 세상이 어떻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그리고 이성에 바탕해 서, 보여줄 분이었고 따라서 사실이 독단에 명백히 우선했으며, 이 런 접에서 당시까지 프랑스를 풍미했던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의 철학체계와는 다른 것으로 보였다. 볼테르는 이처럼 편견이나 독단 이 없이 경험과 이성에 바탕해서 성공적인 설명을 내리는 본보기로 서 뉴튼과학을 소개하려 한 것이다.

26) Enc y clo p ed i e 는 본문 17 권(foli o volume) 과 11 권의 도해로 이루어쳐 있다. 구 하기 쉬운 발제본으로는 (India n ap o li s: Bobbs-Merrill , 1965) 가 있으며 d'Al 다 ember t가 집 팔한 Preli mi n ary Di sc orse 역 시 (India n ap o li s: Bobbs-Merril l

우리 의 또 하나의 예 인 Ii'백 과전서 (Ency clop ed i e) 』는 〈 책 〉 이 타기 보 다는 하나의 사회운동이 었다. 26) 더드로 (Den i s Di de rot, 1713 ― 1784) 와 달랑베르(Je an Le Rond d'Alembert, 1717-1783) 가 주동이 되간 했지 만 당시 의 지 식 인 거 의 모두가 1751 년부터 1765 년까지 에 걷찬 방

대한 분량의 출판사업 에 참여했 던 것이다. 『백과 전서 』 의 저술과 출­ 판사업이 계몽운동기의 사 조에서 지녔던 중요성은 막대해서 〈 백과 전서 파 (Enc y clo p ed i s t )〉 라는 말이 〈 계 몽철학자(p h i loso p he ) 〉 와 거 의 동 의어로 쓰일 정도였다. 물론 제목이 가리키는 대로 그것이 지석의 집합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역시 지식의 집합들이었던 그 이전의 백 과전서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 이전의 것들의 목적이 지석을· 수집해서 보촌하는 것이었는 데 대해서, 이 〈백과전서 〉 는 그에서 더 나아가 그러한 지석에 바탕해서 〈인간의 사고의 형태를 바꾸고〉, 〈세 계를 바꾸는〉 것을 추구했던 것이다. 죽 단순한 이해만이 아나 라 이해에 바탕한 변화를 추구하는 미래지향적인 성격을 떤 것이다. 그리고 이 런 면에서 『백과전서』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프로그램을­ 실제로 수행해낸 것이었다고 볼 수가 있다. 『백과전서』의 이같은 색채는 그 속에 담긴 여러 항목들에 나타났 는데 과학, 특히 베이컨주의 과학이나 그와 P 거의 같은 뜻으로 여 겨진 뉴튼과학의 정선을 표방해서 주장되었고, 과학이나 기술과 관 계가 있는 항목들어 1 표현되었다. 그리고 『백과전서』의 바로 이런 부분들이 이 책을 그 이전의 백과전서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 로 만들었다. 한편 이에 따라 『백과전서』는 이념적인 색채를 떤 책 으로 여겨졌고 당국에 의해 금지되기까지도 했지만, 그것이 이 책 이 이미 거두기 시작한 성공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18 세기 말까지 에는 당시로서는 거의 유례가 없는 25,000 질이 판매되었고, 그 속 에 담간 과학적 지석에 바탕한 변화와 개혁의 이념이 유럽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27 ) 6 〈뉴튼과학〉이라는 말로 표현된, 과학혁명의 산물인 근대과학은 이처럼 근대 유럽사회와 그 사조의 향방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 일단 그같은 중요성을 얻어낸 후에는 그것을 지속해서 지녔다. 물 21) Eofn cEyc nl olipg ehd tei en m 출e1판1t사 : 업 A 에 P관ub한li sh자i제 n g 한 H논i의 st o로 r y R oofb erEt n Dcayrc nl otop ne ,d Tie h, e 1B77u5s-i1n 8e 0s(s) (Harvard U. Pr., 1979) 가 있다.

론 앞서 본 과학선호의 혹 은 과학지상주의적인 데도가 계속된 것은 아니었으며, 역사상 어떤 사조가 극단적으로 십화되었을 경우에는 항상 그러했듯이 그에 대한 반작용도 나타났다. 계몽운동기의 과학 선호의 태도에 대한 반작용은 대체로 두 갈래로 나타났다. 하나는 문화, 예술 전반에 걷찬 낭만주의 (Roman ti c i sm) 의 일환으로서 과학 에 대한, 득히 수학화되고 기계화된 과학이 인간의 욕구와 감정 둥 과는 무관해지고 자연으로부터 조화, 생명력, 신비, 멋 같은 것들 울 제거해 버린 데 대한 반감이었다. 다론 한 가지는 이와 어느 정 도 연결된 것으로서, 과학이 너무 어려워지고 전문화되어서 지적 엘리트들의 전유물이 되었을 분만 아니라 권력과도 결탁해서 통제 와 억압의 수단으로 사용되게 되었다는 생각에서 생겨난, 정치적인 과격파들의 반과학적 태도였다. 18 세기 말에서부터 1 엇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 여러 갈래로 나 타난 이러한 반작용에 대한 논의논 이 책의 범주를 넘어선다 .28) 그 러나 과학혁명의 결과로 대두한 과학의 사회에서의 중요성에 대한 반작용이었다는 데서 그것은 과학혁명이 근대 서양사회에 끼찬 영 향의 또 한 가지 깊은 면을 보여준다고 할수 있다• 한때 몇몇 자 연철학자, 대학교수, 부유한 아마추어 호사가, 의사, 점성술사, 기 숟자, 匠人 둥 사회의 여러 구석들에서 아무런 중요성을 지니지 못 한 채 행해지던 과학이 이제는 사회의 중요 요소로 등장했고, 근대 사회의 구성원들은 어떤 방향으로건 그것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과학혁명의 가장 궁극적인 영향이 되겠 다.

28) 이갈은 반작용에 대한 아주 좋은 논의가 Charles C. Gi llisp i e, The Ency cl o- pe die and the Jac obin Phil os op h y of Scie n ce: A Stu d y in Ideas and Conse- qu ences, in M. Clag e tt , ed., Crit ica l Problems in the Hi st o ry of Sc ien c;1 (U. W isc onsin Pr., 1959), pp. 255-88 에 실려 있다.

참고문헌 이 참고문헌은 완벽함보다는 유용함을 목표로 했다. 따라서 본문 의 証 에 언급된 문헌들 중에서도 과학혁명과 직접 연관되어 있지 않거 나 일반적인 중요성이 희박한 것은 제의시켰으며, 본문의 주에 언급 되지 않은 것들도 중요한 것은 집어넣었다. 특히 일차자료 (p r im ary source) 의 경 우에 는 아주 중요한 것 을 제 의 하고는 모든 원 본들을 나 일하지 않고 구하기 쉬운 영역판을 주로 포함시켰다. 항 목의 분류 또한 원래 서술의 편의를 좇았던 본문의 韋 의 분류를 좇 지 않고 좀더 분석적인 분류를 택했다. 보다 완벽한 문헌자료나 앞으로의 보완을 위 해 서 는, 미 국 Hi sto r y of Scie n ce Soc i e ty의 공식 학 술지 Is i s 가 매 년 발행 하는 Crit ica l B i bl i o g ra p h y를 참조해 야 할 것 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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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

기 가설 (h yp o t hes i s) 176, 180 가쌍디 (Pie r re Gassendi) 97, 134 갈레노스 (Galenos) 14, 82, 117, rx9-22, 126, 128 갈릴레 오 (Gal i leo Galil e i) 14, 17, 33, 36, 40, 42-3, 52, 53-65, 74-5, 84, 96, 99-100, 102, I 13-4, 129, ,13 1, 133-4, 146-50, 153, 156, 158, 162, 166-7, 175 갈릴레오와 교회 43,45, 146, 150 갈릴레오의 재판 146 강제 된 운동 (v i olen t moti on ) 100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D i e Prote s ta n ti sc he Et h ik und der Geis t der Ka pit al i smus) 』 150 개 인적 후원(p a t rona g e) 136 거시적 현상 (macrosco pi c ph enomena) 176 격 막 (se pt um) 120-22 격 막구멍 (sep ta! po re) 120-21 걷찰사(lig a t ure) 125, 127 경 험 주의 (emp iri c i s m ) 15, 49, 156, 158,183-4 계 몽사조 (En lig h t enmen t) 15, 18, 79, 181-2 계 동철학자(p h i loso p he) 181-2, 185 고전역 학 (class i cal mechanic s )

14,45, 113, u6, 173 과학과 기 술 161, 163-5, 168 -9, 172 과학단체 17, 65-6, 79, 131-4, 136, 144, 168 〈과학적 정 신 (sc i en tifi c sp iri t )> I~ 과학혁 명 의 완성 173, 175 관성 (ine rti a) 52, 57-9, 61, 94, 99-100, 105-6, l14-5 Ii'광학 (D i o pt r iq ue) 』 90 Ii'광학 (O pti cks) 』 174-7, 179, 183, 구십 력 (centr i p e ta l for ce) 107 굴철법칙 9°,95 귀 납적 방법 (ind ucti ve meth o d) 78 -80 , 132 『규칙 들 (Rules) 』 92 그레 샴 칼리 지 (Gresham Colleg e> 135,137,140 극장의 우상 78,80 금성의 차고 기울음 43 기계론적 인체이론 127 기 계 적 철학 (mechan i cal ph il oso p h y ) 62, 87, 90, 93, 95, 97-9, 101, 102-12, 127, 137, 158 -9, . 167,175 기 계 학 (mechan i cs) 69, 72 기 독교도 버 뮤오소 (Chr i s ti an Vi rt u o si) 158 Ii'기 상학 (Me te. ores)』 9o, 95 기 술적 지 식 71, 73-4, 76-7, 165- 6, I68, X70

lf7] 하학 (Geome t r i e) 』 90 길리 스피 (Charles C. Gi llisp ie) 8 길버 트 (W illi am Gi lb ert) 40, 66, 70,76 L. 〈나는 생 각한다 (co git o) 〉 87-8 당만주의 (Romanti cis m ) 186 대 행 성 (inf e r io r pl anet) 24-5, 29 네 개 의 우상(i dol) 78, 8_o, 132 노르만 (Rober t Norman) 73 Novum Orga num 77 New Atla nti s 80, 132 뉴튼(I saac New ton ) 14-5, 40, 43, 45, 56, 79, 90, 107, 109, 111-6, 129, 131-2, 143, 156, 173-7, 179 뉴본과학 (Ne wton i an scie n ce) 15, 18, 173, 176-7, 179-81, 183-.5 뉴튼여 학 47, 110-11, 113, 116, 179-80 뉴돈의 운동법 칙 114-5 뉴돈종합 (Ne wton i an Sy n th e sis ) 174 뉴돈주의 . (New ton ia n is m ) 179-:-80 · 『뉴몬철학의 요소들 (Elemen t s de la ph il o sop h ie de New t on) 』 183 nit ro -areal 입 자 129 E: 다아원 (Charles Darwi n ) n 달랑베 르 (d'Alember t) 15, 184

달력 의 개혀 19-20 달밑세 계 (sublunar world) 27, 37 달윗 세 계 (sup e rlunar world) 27, 37 De Caelo 49 데 모크리 두스 (Democ rit us) 82, 95 데 카르트 (Rene Descarte s ) 14, 15, 17, 58 -9, 62, 64, 75, 84, 86-98, 99- II4, 131, 134; 153, 167, 174-6, 184 데카르트의 충돌법칙 101-4, 107 데 카르트의 체 계 (Carte s ia n Sy st e m ) 95, 104-5 데카르트적 합리주의 156 defe r ent 24, 30 동굴의 우상 78,80 동물의 영 (anim al sp iri t ) u9-20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관한 논술 (Disc orsi int o rno a due nuove sc i enze) 』 53, 74, 131 『두 가지 주된 우주구조들에 관한 대 화 (D i alo go sop r a i due massim i sis t e m i del mondo) 』 131, 147 디 드로 (Den i s Di de rot) 184 디 오게 네 스 (D i o g enes) 96 三 라무스 (Ramus) 82 라보아지 에 (Anto in e Laurent Lavois i e r ) 11 라이프니 츠 (Le i bn i z) 15, 90; 102, 104, 108 -9, 113, 142-3, 184 레 오폴드 (Leo p old) 公 I34, I36

레 우키 무스 (Leuc ipp us) 95 rete mi ra bil e 120 로씨 (Paolo Rossi) 76 루크레 티 우스 (Lucre ti us) 96 루터 (Marti n Luth e r) 18, 81, 148 르네 상스 12, 68, 70, 72-5, 82 르네 상스 인문주의 (Renais s ance Humanis m ) 31, 96 르 베 이외 (Le Ba i lleun) 집 단 135 린쎄 이 아카데 미 (Accademi a dei Li nc ei) 133-4, 136 口 마술 68 -71 , 76-8, 84, III 마술적 자연관 69-70 mi no r ep icy c le 30-31 mail 51 만유인력 40, 56, 111-2, u5, 173-7 맑스 (Karl Marx) 169 맑스주의 과학사 169, 172 머 돈 (Rober t K. Merto n) I50-52, l56, .15 9 머 돈 명 제 (Merto n the sis ) 150-54, 157 메 디치 (Med i c i)家 J3 3 메 르센느 (Mar i n Mersenne) 71, 84-5, 134-6, 139, 函 에르센느 집 단 134-5, 139 메 이오우(J ohn Mayo w) 129 명 칭 성 (clarity , dis t i nc tn e ss) 87-8, 93

모레이 (Robert Moray ) 138 몽모르 (Haber t de Montm or) 135, 140-41 몽모르 아카데미 135 무게가 없는 입자들(i m p onderables) 179 물질공간(p lenum) 94, 97, 101, 105, 174 미 시 적 메 카니 즘 (m i crosco pi c mechanis m ) 176 미 적 분법 (calculus) 90 닌 반사법칙 9°,95 반아리 스토텔레 스적 경 향 82 발견의 우선권(p r i or ity of dis c overy) 138 -9 『방법 론 서 설 (Disc ours de la me t hod) 』 90 『백 과전서 (Enc y clo p ed i e)』 79, 182, 184-5 백 색 마술 (wh it e mag ic) 68 버 터 팔드 (Herbe rt Butt er fi el d) 8, 12-3,63 버 트 (E.A. Bu rtt) 13 베 네 데 터 (Alssandro Benedett i) 60 베를린 과학아카데미 142 베 버 (Max Weber) 150 버 1 살리 우스 (Andreas Vesaliu s ) 14,73,120-23 베 이컨 (Fran ci s Bacon) 71, 74-80,

84, 91, 132, 137, 141, 143, 153, 162, 166-7, 171, 185 베 이 컨져 경 험 주의 (Baconia n Emp iric i s m ) 155 베 이 컨척 공리 주의 (Baconia n Ut ilit a r ia n is m ) 140, 168 보일 (Ro bert Boy le ) 66, 74, 79, 96-8, 129, 134-5, 156, 158 -9, 166-7 볼테 르 (Volta i r e ) 15, 182-4 분리 된 상태 의 작용 (ac ti on at a dis t a nce) 101, II 1, 175 분석적 방법 75, 128 뷔 리 당(J ean Burid a n) 51 브래 드와단 (Bradwardin e ) 50 브루넬레 스키 (Brunelleschi) 72 브루노 (G i ordano Bruno) 33, 76 vis viv a 108-9 비 에 트 (Franc i s Vi et e ) 89 비 자연적 운동 (v i olen t moti on ) 46-7, 59, 62, 100, 167 〈빛의 시 대 (Ag e of Lig h t) > 153 A 사Ii고'사실람에험 관(th한o u논g h의 t e(xTpr ea riitm e e dnet ) 64 l' homme) 』 127 산업 혁 명 164, 168-9 삼단논법 (syl l og ism ) 83 살로몬의 집 (Salomon's house) 132 생리학의 혀 명 n7-9, 129 생 명 의 영 (vit al sp iri t ) 119-20

샤를레 부인 (Mme. du Ch9. tel et) 183 성 서 적 자연관 (B i bl i cal World-

vie w ) 154-5 성 아우구스티 누스 (S t. Aug u sti nu s) 157 제 르베 두스 (M i chael Servetu s) 122 섹 스두스 엠 피 리 쿠스 (Sex t us Emp iri c u s) 83 小循環 I23 소용돌이 (vorte x) 95, 105, 174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77, 170-71 수비 학 (numerolo gy) 69-70 수학적 마술 (ma t hema ti cal mag ic) 69 스콜라 역 학 (Scholas ti c mechanic s ) 60 스콜라학풍 (Scholas tici sm) . 14, 52, 156 시장의 우상 78,80 시 차(p arallax) 28, 37, 41, 129 신독단론 (New Dog m ati sm ) 86 신의 영원불변성 100 신풀라돈주의 (Neo-Plato nis m ) 31-3, 36, 68, 70, 82 실험기구 134 실험 사 (ex p er i men t al his t o r y) 79 실험적 방법 63, 65-8, 70-73, 80, 98, 122, 126, 132, 181 실험 철학 (ex p er i men t al ph il oso p h y ) 15, 98, 159

『십장과 피의 운동에 대해서 ( De motu cordis et san gu i n i s) 』 123-4, 126, 128 。 아그리 과 (A g r ipp a) 68 아리 스토텔 레 스 (Ar i s t o t eles) 14, 27-8, 32, 34-6, 40-41, 48-62, 65, 67, 70, 75, 77-8, 82-4, 91-2, 94, 98, 117-8, 124, 127-9, 132, 146-8, 153- 4, 157, 165-6, 171 아리 스토텔 레 스 역 학 45-8, 52-4, 60, 62, IOI 아르키 메 데 스 (Arch i medes) 53, 60, 7I-2,82 아인쉬 타인 (Albert Ei ns te i n ) II 아퀴 나스, 토마스 (Thomas Aq u i• nas) 157 아폴로니 우스 (A p ollon i us) 65 악마적 마술 (demon i c mag ic) 68 Almag es t 20, 33, 63 equ ant 30-3I, 39 ep icy c l e 24-6, 30-31, 35, 39 에 피 큐루스 (E pi curus) 96 eccentr i c 30-31, 3 5, 39 역 운동 (re t ro g rade moti on ) 23-4, 29-30 역 학의 혁 명 43, 45-6, 63-4, 99, II7-8 연금술 68-71, 76, 78, II2 연 속성 의 원 리 (pr in c ip le of

conti nu it y) 104 예 이 츠 (Frances A. Yate s 76 ) 올덴버 그 (Henr y Oldenburg) 138-9 완화된 회 의 론 (M itig a t ed Skep tici s m ) 84-6, 88-9, 91, 176 왕립과학 아카데미 (Academ i e roy a le des scie n ces) 65, 132-3 .. 135-6, 139-44 왕립 학회 (Roy a l Socie t y ) 65, 132-3, 135-44, 151, 158 의 연 (exte n sio n) 93 우르바누스 8 세 (Urbanus \血) 147 우발도 (Gu i do Ubaldo) 60 운동량 (momen t um) 52, 112, u4 Ii'운동에 대해 서 (De Mo t u) 』 53, 60 운동원인 (mover) 47, 51-2, 58, 10 모 운동의 복합법칙 59 운동의 상대 성 (relati vi t y) 58-9, 102, 108 운동의 양(q uan tity of moti on ) 94, 100, 102,108 운동의 양의 보존 100-101 원십 력 106-7, 110 원십 적 경 향 (cen t r ifug al ten dency ) 105-7, 110 원십 적 압력 (centr ifuga l pr essure> 95, 105 원자론 (a t om i sm) 76, 78, 95-7 원추곡선 65 위 기 이 론 (Cr i s i s Thesis ) 16-7, 81, 91, 174

윌킨스(J ohn W ilki n s ) 135 유명 론 (nom i nal i sm) 49 유물론 (ma t er i al i sm) 158 유클리 드(E ucl i d) 14 유클리드 기하학 II3 이 차적 성 질 (secondary qu ali ty) 96 인력 (att rac ti on ) 111~2, m6, I79 일차적 성 질 (pr im ary qu ali ty) 92, 96 임 피 두스(i m p e t us) 51-3 .x: 자기 저 철학 (ma gn e ti c ph il os op h y ) 70 {j'자석 에 대 해 서 (De Ma gn e t e) 』 40, 70 자연사 (na tur al his t o ry) 79 자연스러 운 운동 (na t ural moti on ) 40, 46-7, 57, 59, 61-2, 100, 105, 167 자연스럽 게 가속되 는 운동 (na t u- rally accelerate d moti on ) 61 자연의 영 . (n _ a t ural sp iri t ) u9-21 자연-인공의 구벌 166-7 자연적 마술 (na t ural_ mag ic) 68-9 f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 oso - ph ia e natu r ali s p r in c ip ia ma th ema ti ca)』 II3-5, 132, 174-9, I83 제 5 원소 27 종교게혁 I2, I7-8,.8 I , I49, I53-4 종교져 마술 (re ligi ous mag ic) 69

종족의 우상 78,80 주의 론져 신학(主 意論的 神學; Volunta r is t the olog y) 156 重 力 61, 95, 105-7, ll2 중력 의 중십 (cente r of gr avit y) 109 중상주의 (Mercanti lis m ) 140 지 상계 (ter restr i a l world) 17, 27-8, 35, 41, 52, 69, 165-6 지 식 의 위 기 (int e l lectu a l cris i s ) 81-4, 86, 89, 91 칙 선 관성 운동 57-8, 99, 105, 107 〈질문들(Q uer i es) 〉 177 챤스* 2 세 (Charles II) 13 7 천구 (heavenl y sph ere) 21, 27, 34-5, 37 천문학의 혁 명 19, 43, 45-6, 63-4, II7-8, 166, 175 천상계 (celesti al world) 17, 27-8, 35, 41, 52, 69, 165-6 『천체의 궤도들의 회전에 관해서 (De Revoluti on ib u s Orbit um Coeles ti um) 』 22, 33, 36, 46 『철학자들의 생 애』 96 『철학적 편지 둘 (Le tt res ph il oso - ph iq ues) 』 I84 철학칼리 지 (Phil oso p h ic a l Colleg e ) I35 Ii'철학회 보 (Ph il oso p h i cal

Transact i ons) 』 13 8-9 청 교도 (Pur it an) 152-3 청 교도의 윤리 (Purit an eth ic ) I50-52 청 교주의 (P urita n is m ) 150, 152-3 체계적 의십의 방법 (me t hod of sys t e m ati c doubt) 86, 88 체 지 (Federig o Ces i)公 133,,1 3 6 충돌(i m p ac t) 101-5, 108-12, 114 궁 처 멘토 아카데 미 (Accademi a de! Cim ento ) 65, 133-4, 136 = 카씨 니 (Gi an Domenic o Cassin i ) 140 칼빈(J ohn Calvin ) 148 케 풀러 (Jo hannes Kep l er) 14, 17, ~?, 36, 38, 40, 43, 65, 70, 92, l I I, 156, 166, 175 쿤 (Thomas S. Kuhn) 8, n, 35, 63-4,66 콜베 르 (Colber t) 135, 139-40 콜롬보(R ealdo Colombo) 122-3 코페르니쿠스의 한계성 36 코페 르니 쿠스의 변혁 24-6, 28-9, 31,35-7 케 플러 의 법 칙 40, 64-5, II I, II6, 174,177 코스 기 법 (coss— ) 89 코페 르니 쿠스 (Co p ern i cus) u, 14, 16, 19-42, 46, 53, 58, 63, 65, 76,129,

I3 I, I33, I46-8, I75 코아레 (Alexandre Koy re ) 13, 63- 4, 函 쿨롱 (Charles Aug us ti n de Coulomb) 178 크롬웰 (Cromwell) 135 드 타르탈리 아 (Tar t a gli a) 60 태양 숭배 32-3 테 베 노 집 단 I35, I39-40 토리 첼리 (Evang e lis t a Torric e ll i) 108, 133-4 티 코 브라헤 (Ty ch o Brache) 36-7, 64-5 티 코의 우주구조 37-8, 43 끄 파스칼 (Bla i se Pascal) 134, 156 파푸스 (Pa pp us) 71, 82 판막 (valve) 123-5 팔리 씨 (Bernard Palis s y ) 73 패 링 튼 (Benja m i n Farrin g ton ) 170-72 페르마 (P i erre Fermat) 15, 89, 134 포물선 운동 57,59 퐁킨 (Ri ch ard H. Pop k in ) 84 프랑스 아카데 미 (Academi e Fran~ais e ) 135, 140 프랑스 혁명 I8 프로이 트 (S ig mund Freud) u

프를레 마이 오스(Pt olema i os) 14, 19-38, 42, 63, 65, 146-7 풀라돈(P la t on) 32, 60, 67, 70, 75, 77, 82, 91, 155, 157, 171 펴 론 (P y rrhon) 83, 86 피 론주의 (Py rrh onis m ) 83-4, 87-8 피의 순환이론 15, u7,123-4,126-9 Phy si c a 46, 49 피 타고라스 (P yt ha g oras 〉 69-70 둥 하늘 위 의 세 계 (sup e r celesti al world) 69 하늘의 원소 작 하아비 (W illiam Harvey ) 14, 17, 117, 120, 123-9, 131 하아비의 후계자 I29 학문적 기 술자 (academ i c eng ine er) 73-4 합리주의적 자연관 154-6 항성 천구 (s t ellar sph ere) 21-3, 26, 28-9, 34 해 석 (analys i s ) 89, 113

해 석 기 하학 (anal yti cal ge ometr y ) 90 허 파의 몽과(p ulmonar y tra nsit ) I22~4, 129 헤로 (Hero) 71-2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두스 (Hermes Tris m eg ist u s ) 69 헤 르메 티 2] 즘 (Herme ti c i sm) 68-9, 71, 76, I II 호이 겐스 (Chr i s ti an Huy ge ns) 14, 64, 102, 106-10, .t 1 2-4, 140, 175 호이 카스(R. Hooy k aas) 154-7, 159, 홉스 (Thomas Hobbes) 134 화학적 친화도 (chem i cal aff ini t y) 178 확인실험 (confi rm i ng exp e rim ent) I27 회 의 론 (ske pti c i sm) 82-5, 87-8, 92. 후크(R ober t Hooke) 66, u1, 129, 137, 139 흑색 마술 (black mag ic) 68 혹접 41

金永植 서 울대 학교 화학공학과 졸업 하바드대학교 이학박사 프린스턴대학교 여사학박사 현재 : 서울대학교 자연대교수 편처 : Ii'역 사 속의 科學』 『科 學 史槪 論 』 논문 : “Theory of Forces betw een Closed-Shell Molecules 등의 이 론화학 관계 논문, 그리 고 Natu r al Knowledg e in Tradit ion al Cultu r e 등 과학사학 관계논문 다수

과학혁명 1984. 8-. 15 초판 1986. 3. 30 3 판 저자 金永植 발행인 朴孟浩 발행처 民音社 우편대체계좌번호 010041-31-523282 IIO 서 울 종로구 관철동 44 의 I 734-2000 • 734-4234 • 735-85 꾹 출판등록 1966. 5. 19 재 EI42 호 값 4,200 원 *파본온 바꾸어 드립니다.

대 우학술총서 • 자 연과학 1 소립자와게이지상로삭용 金鎖 퓸 름 / 값 3,600 원 2 動力學特論 학 전룡 / 값 5, 400 원 3 질소고정 宋 承 達著 / 값 2,800 원 4 相轉移와臨界現象 김두절 著 / 값 2 , 800 원 "媒作用 陳宗植 물 / 값 2,800 원 6 뫼스바우어分光學 玉 恒 南 퓸 / 검 2,800 원 7 극미량원소의 영양 昇正 子 뭄 / 값 6 , 500 원 8 *흡 1 t를熹와 有禮틀素 1 t合物 尹 能 民 홈 / ~1 5,000 원 9 抗生物質의全合成 姜錫久 콥 / 값 9, 0 00 원 10 국소적 형태의 A tiy ah-S inge『지표이론 지 동 표 봄 / 값 2 , 8 00 원 11 Muco po l y saccha 『i des 의 生 1 t릎 및 生物理릎 박준우 著 / 값 3, 8 00 원 12 ASTROPHYSICS ( 天體物理學 ) 洪 承 円 콥 / 값 4, 700 원 13 프로스타글란딘 합성 숲 聲 표 著 / ~1 3, 600 원 14 천연물화학연구법 禹源 植 픕 / 값 7, 000 원 15 脂訪營養 金淑喜 븀 / 값 6, 3 00 원 16 結昌化유리 金炳扇 꽁 / 값 4 , 500 원 17 高分子의化學反應 趙 쥴 煥 픕 / ~ 1 4, 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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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정보이른 헌영열 블/값 4,500 원 21 原子核反應論 鄭雲赫 흄/값 8, 500 원 22 破壤力 學 金明지/값 4,700 원 23 분자궤도이른 이익준흄/값 3,300 원 24 반응속도론 정경훈흡/값 4. 야)원 25 미분위상수학 李鉉求 홀/값 2 , 500 원 26 자기공명방법 조성호 꼴 / 값 4, 700 원 27 탸潛리학파 빼웅합 죄덕인 휼&t 4. OOO 원 28 참柱琦파 분석 李時雨 흄 m 4. a %원 29 석탠세너지 변환 기술 金相敦 著 / 값 6, 500 원 30 海洋畵古生物學 白光浩 著 값 6, 400 원 31 편미분방정식른 김종식 흄 /값 4, 00)원 32 大練-理論 소광섭 불 /값 5, 000 원 3 3 金 屬電 子系의 多體理論 金德洲 著/값 6,600 원 3 4 액정중합체 愼正― 者/ 35 복합재료 椎肅 1:: / 값 5,200 원 36 레이저光散亂分光學 金庫員 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