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장 경희대학교 중국문학과 졸업 국립 대만대학 고고인류학과 대학원 졸업 (석사) 프랑스 파리 1 대학 고고학과 대학원 수료(고고학 박사) 현재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및 박물관장 저서 『 한국의 구석기문화』 『 중국의 고고학』
고구려 고고학 Il
고구려 고고학 Il
고구려고고학 II
차례 제 6 장 벽화고분 517 l 集安 고구려 고분의 기초 검토 517 2 삼실묘 530 3 산성하 332호 • 983호와 만보정 1368호 551 4 통구 12호분 567 5 장천 1호분 581 6 오회분 4호와 5호 628 7 장천 2호분 656 8 평양역전 안악 1 • 2 • 3호 673 9 덕흥리 688 10 약수리 고분 • 복사리 고분 • 팔청리 고분 • 동명왕릉 • 태성리 저수지 고무덤 698 11 동암리 벽화무덤 • 룡흥리 고분 · 운룡리 고분 · 평정리 고분 • 안학동 • 로산동 일대 고분 736 12 사신도 755 13 벽화를 통해서 본 고구려 초기의 물질 문화 760 14 벽화를 통해 본 사회경제 776제 7 장 토기 791
1 토기의 초보 연구 791 2 토기의 무늬 815 3 유약 토기 • 유약 바른 질그릇의 변천 826 4 명문와당 833 5 부뚜막 843 제 8 장 금속 공예 847 1 마구 847 2 금관 878 3 귀걸이 880 4 무기 893 제 9 장 맺는 말 921 발굴보고서 927참고문헌 935
찾아보기 937고구려고고학 I
차례 시작말 제 1 장 고고학사 1제 2 장 위치 및 영역 29 l 25-220년(後漢) 고구려족 및 5부의 분포 지역 35 2 後漢 시기 고구려 왕국과 도성 39 3 後漢 시기 고구려 왕국과 國內 지구 40 4 後漢 시기 고구려 왕국의 도성 -위나암성 43 5 고구려 왕국이 국내 지구 외에 통치하던 주요 지구 45 6 220-264(三國) 부여 고구려 등의 거주구 48 7 고구려의 疆域과 王城 49 8 고구려 新都 - 平壤城 52 9 265-420(晉代) 부여 및 고구려족의 분포 54 10 고구려 도성 56 11 581-617년(隋代) 고구려의 행정단위 71 12 618-906년(唐代) 고구려족의 분포 73 13 각 史書에 보이는 唐代 동북의 고구려 성 8414 성지 90
제 3 장 성곽 103 1 초기의 도성 103 2 국내성 119 3 산성자산성 142 4 혹구산성 158 5 나통산성 172 6 태자성 188 7 集安 남도와 북도상의 관애와 성보(차단성) 201 8 북한의 대성산성 208 9 평양성 212 제 4 장 건축물 219 1 금강사지 228 2 集安 동대자제단 239 3 평양성 외성 안의 리방 2464 안학궁터의 리방 247
5 장수산 일대의 집터 251 6 광개토대왕릉비 255 7 광개토대왕릉비의 발견과 탁본 259 8 석인상 285 9 集安 通溝 2基의 石碑 286 제 5 장 고분 301 1 고구려 고분 연구 302 2 轉山子 부근의 적석묘 322 3 칠성산 96호 • 우산 68호 적석묘 340 4 우산 • 산성하 • 칠성산 • 마선구 고분군 발굴 355 5 상활룡촌 • 하활룡촌 고분 발굴 372 6 적석묘의 유형과 발전 388 7 노호초 고분 449 8 동대파 고분 458 9 운평리 제4지구 적석묘 47610 덕화리 3호 봉토묘 483
11 낙랑구역 일대 고구려 봉토석실묘 485 12 창매리 돌칸흙무덤 490 13 오국리 무덤 493 찾아보기 497제 6 장 벽화고분 1 集安 고구려 고분의 기초 검토 기 원전 37 년부터 서 기 668 년 (西漢 말년부터 唐總章 元年) 까지 약 7 세 기 동안 중국 동북에서 생활한 語族의 한 가지인 고구려인들은 吉林省 동부 지구의 압록강 중하류와 潭江 일대 유역에 고구려 왕국을 건설하였다. 集安縣城은 그들의 전기 • 중기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십지였다• 고구 려인들은 풍요하고 아름다운 通溝 평원에 약 1 만여 기의 고구려 고분을 남겨 놓았다. 사람들은 통상 그것을 通溝 고분군이라고 부른다. 현재 이 곳에서 발견되는 20 기의 고분 중에서 채색된 벽화는 고구려 문화의 주요 조성 부분이며 일찍이 학자들의 주시를 받았다. 학자들은 전문적 논저와 문장을 발표하였지만 고구려 사회의 생산 발전, 사회풍속, 종교 신앙, 사회의식 형태 등 여러 방면에 대해서는 거의 논급하지 않았다. 李殿福
은 약간의 분석을 제시하였다. I) 1) 集安 벽화의 입장에서 본 고구려 사회의 여러 현상 集安 고분벽화의 주제는 대체로 사회풍속도, 圖案畵, 신선도 등의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앞의 2 종은 고구려 전기 (3 세기 중엽부터 4 세기 중엽), 중기 (4 세기 중엽부터 5 세기 중엽)의 작품이고, 후자는 후기 (5 세기 말에서 6 세기)의 작품이다. 이러한 벽화들의 어떤 측면은 고구려의 사회 풍속과 신앙, 경제발전 수준과 건축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1) 고구려의 사회풍속과 신앙 集安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대 고구려의 거울의 일면으로 고구려 사회 의 여러 방면의 현상을 보여 주고 있어 고구려 고대사회의 면모를 연구 하는 중요한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三國志 魏志』, 『梁書』, 『魏書』, 『北史』 등 서적 내에 고구려의 풍속, 신앙, 幾葬 제도들이 기록되어 있다. 종합하면, 고구려인들은 가무를· 좋 아하여 城鎭과 鄕村울 불문하고 남녀들이 석양에 모여 춤추고 노래하였 다. 고구려인들은 청결(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술을 즐겨 빚었다. 무릎 울 꿇고 철을 할 때 한 다리를 뒤로 뺐으며, 서 있을 때는 앞으로 두 손 울 모으고, 걸을 때는 팔짱울 끼고 걸었다. 사람이 죽으면 厚葬하였는데 금은보화 등을 갇이 부장하였고,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으며 주위에 소나무와 찻나무를 심었다. 백성들은 혈기가 왕성하였고, 상충 통치계급 은 전쟁을 좋아하였다. 일반인들은 10 월에 東盟大會룰 개최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또한 불교를 숭상하고 귀신을 존중하였다. 信佛法, 敬鬼 神 등등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벽화에 묘사되었다.
集安 지구의 1 만 기 이상 고분은 후장습속의 결과이다. 후장의 매장제 도에 따라서 이러한 방대한 수의 고분이 남아 있을 수 있다. 휘황찬란한 벽화예술 역시 후자의 구체적 표현이다. 오회분 4 호, 5 호와 사신묘의 제 1 층 말각상에는 墨陰 面(도철문)과 몸을 휘감고 고개를 돌린 용 등은 모 두 입에 하나의 보주를 상감한 石子 L 이 남아 있다. 오회분 5 호묘 제 2 층 말갈석 옆에 신농씨(소머리의 인신상)의 두 눈에는 녹색 보석이 상감된 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여러 곳에 또한 금의 흔적이 남아 있다. 5 호 고분은 과거에 四頁塚이라고 불렸던 것으로 고분 내에 4 개의 金葉이 부 장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것은 모두 금은재화를 死者에 부장시킨 순장습속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석양에 사람들이 모여 노래하고 춤춘다(暮夜群集 相就歌戱)는 것은 고 구려인이 가무를 좋아한다는 설명이다. 전기 • 중기의 벽화에 이 점이 묘 사되어 있다. 예를 들면 무용총, 장천 1 호분, 마선구 1 호분, 통구 12 호 분 등에 모두 무용도가 있다. 그것들은 독무, 쌍무, 단체무 등이다. 무 용총 남벽과 장천 1 호분 남벽에 그려진 단체무의 장면은 대단히 유사하 다. 남녀가 대등하게 줄을 이루고 있다. 선두에서 춤추는 자는 모범을 보이는 것 같고 옆에는 주악대가 있다. 춤을 추는 자들은 손을 앞으로 길게 뻗었는데 그 긴 옷소매가 나부낀다 . 그 옆에 또 한 줄의 사람들이 서 있는데 마치 노래를 반주하는 사람들 같다. 장천 1 호 현실 북벽상의 절반에 그려진 歌舞百戱圖에는 大人物이 많은데 이러한 그립은 대단히 귀한 것이다. 그림 내용은 씨름, 잡기, 탄금, 무용, 경마 등 여러 가지 의 오락활동이 동시에 교의에서 연출되고 있다. 가무를 좋아하는 고구려 인의 습속이 생동감 있게 화폭에 재현되었다. 삼실묘 제 1 실 남벽에 그려진 出行圖는 대단히 중요한 한 폭의 그림이 다. 묘주인 일가가 시종을 왼쪽에 일렬로 거느리고 있는데, 우산울 들고 있는 두 사람과 집 뒤의 노인을 제의하고 기타 9 인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있다. 이것은 마치 고구려인이 길을 걸을 때 팔짱을 끼는 行必뚫
手 형상과 갇다 .• 통 구 12 호분 복실 남벽의 포로 斬殺圓와 삼실묘 1 실 북 벽의 攻城圖는 고구려인들의 활동과 상층계급의 호전성을 반영한다. 전기, 중기 벽화에는 수렵도도 적지 않다. 예를 들면 무용총, 통구 12 호분, 산성하 332 호분, 삼실묘, 장천 1 호분 등이다. 모두 귀족들의 수렵 장면이다. 고구려인들은 대부분 큰 산, 깊은 계곡에서 살았으며 수렵을 취미로 삼아 생활을 즐겁게 하는 것이 당시 사회의 성행된 분위기였다. 集安의 벽화는 상당히 큰 비중으로 고구려 사회풍속을 묘사하고 있는 데 고구려 사회의 풍모를 잘 나타내 줄 뿐만 아니라 역사서의 난해한 기 록을 충분히 이해하도록 구체적이고 진실한 면모룰 보여 주고 있다. 중기, 후기 벽화 내에는 종교와 신사도(神 靈 圓)가 현저히 증가하여 점 차적으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신령, 불교에 관한 주제가 사 회풍속도를 대신하여 대치되는 추세였다. 이것은 고구려 사회풍속과 신 앙이 후기에 크게 변하여 사회상의 의식형태도 크게 돌변한 것으로 보인 다. 사회의 부단한 발전에 따라서 사회 내부의 계급모순이 점차 격화되 었다. 상층의 통치계급은 그들의 통치지위를 비호하기 위하여 佛法을 믿 고 귀신을 존중(信佛法, 敬鬼神)하도록 적극 권장했다. 중기, 후기 벽화 중 불교에 관한 주제로는 護法力士,奏樂仙人,蓮花仙子, 蓮花紋, 忍冬 文 (보리수) 및 각종 불상도 등이 있다. 신령 (사신도)으로는 四神, 伏 ft , 女姚 신농씨, 王子橋仙人과 日月星辰 등이 있다. 불교가 고구려에 들어 온 것은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소수림왕 2 년, 즉 372 년으로 되어 있고 375 년에 불사를 세우고 392 년에 이르러 고국양왕은 정식으로 〈 崇信佛法 求福 命司立國社修宗廟(불교를 믿고 복을 얻기 위하여 국사룰 세우고 종묘 를 축조하도록 하였다)〉를 명하였다. 이후부터 불교는 국교가 되었다. 불 교가 정식으로 중국에 전입된 것은 東漢 初年이다. 魏晉 南北朝 시기에 불교는 중국에서 대단히 발전되었고, 동시에 중국의 唯心主義철학사상 과 융합되었다. 불교는 매우 빠르게 중국에서 고구려로 전입되었다. 이 것은 고구려와 중원의 밀접한 관계를 설명하고 또한 漢文化가 고구려 문
화의 발전에 추진작용을 하였음을 설명한다. 불교는 고구려에서 전파, 성행되고 국교로 변하는 추진력을 가졌다. 왜냐하면 그것은 통치계급의 생각에 영합될 수 있었고 빈곤한 〈 下戶 〉 의 정신적인 의지물로 영합되었 다. 상충 통치계급은 그들의 통치 지위를 비호하고 내심의 공허를 메우 기 위하여 외래의 종교사상으로부터 영적인 것을 구하여야 했으며, 종교 룰 빙자하여 인민을 통제하여야만 하였다. 이로 인하여 고구려의 〈하호〉 들은 소위 귀족 〈 坐食者 〉 〈 大家 〉 둘의 압박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불교의 전파에 따라 고구려 문화에 새로운 채색이 가해졌으며, 또한 어느 정도 새로운 번영의 시기가 되었 다는 것이다. 이것은 후기의 벽화예술에 충분히 반영되었다. 또한 후기의 벽화 중에서 몸에 깃털옷을 입고 장발이 어깨까지 내려오 고 맨발로 원형연대(統足盤坐 蓮 臺 )에 앉아 있는 卜卦와 머리를 높이 묶 고 연대에 앉아 있는 練丹 그림들은, 고구려가 〈信神崇佛〉하는 동시에 또한 儒家의 陰楊五行과 神仙方術의 도가사상을 믿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벽화를 통해서 고구려인들이 조상과 태양신을 숭배하는 것 의에도 후 기에 대대적으로 불교와 도가의 신선방술사상을 추앙하는 것을 쉽게 볼 수있다. (2) 고구려의 농업, 수렵 경제 상황 고구려 농업생산의 발전상황은 사서 중의 기록은 거의 없으나 고구려 벽화에 귀중한 참고자료가 많이 제시되어 있다. 集安 초기의 벽화고분 중 무용총, 각저 2 기 고분에 모두 牛車가 교의로 가는 장면이 있다. 이 러한 수레는 당연히 귀족의 교통도구이다. 그것은 3 세기 중엽에 고구려 인이 이미 수레를 제조할 수 있었고 동시에 그것을 소가 끌었음을 나타 내 주고 있다. 마차와 소는 사회생산력 발전수준의 일정한 정도를 구체
적으로 표시한다. 귀족이 마차를 이용하는데 설마 수레를 제작하는 사람 들이 마차를 농업에 이용하지 않았겠는가? 다만 그 마차는 귀족의 것보 다 간단하였을 것이다. 또한 마차의 여러 가지 구조는 적지 않게 철제로 제조하였을 것이다. 어느 정도 야철업의 발전도 반영되어 있다. 같은 시 기의 벽화내용 중 수렵도에 화살촉이 있었다. 만보정 1368 호 무덤 중 휘 장을 거는 고리 등은 철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된 것을 설명하고 있다. 集 安 지구에서 또한 西漢 시대의 철제 가래, 쇠삼, 쇠도끼 등의 생산도구 가 발견되었다. 그 철제 가래는 河北滿城中山站王劉勝夫人의 묘도 내에 서 발견된 것과 똑같다. 이것은 西漢 때에 현도군이 고구려현을 관할하 고 이미 그곳에서 철제 가래를 사용하여 耕地했다는 것을 설명하여 준 다. 그렇다면 현도군 고구려현 관할지역에 건립된 고구려 왕국이 어떻게 이미 있는 철제생산 공구방법을 계승하지 않았겠는가? 벽화의 牛車圓를 결합하여 보면 東漢 시기에 고구려 농업생산이 300 여 년의 역사를 가지 고 있었으며 , 그러한 것들이 당연히 발전되었으리라 상상할 수 있다. 비 록 11H 作울 하였지만 충분한 식량은 못 되었다 . 〈 봄佳力 11H 作, 不足以 實 口 腹〉은 아마 건국 전후기의 정황이라고 볼 수 있다. 3 세기 이후 고구려의 농업경제가 발전한 다음에 고구려에 벽화고분이 출현하였다. 고구려 사회의 발전시기는 4 세기 이후 제 19 대 광개토대왕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이 남북 양쪽으로 정복하고 전쟁을 하여 부단히 영토를 확장한 것은 이 시기에 경제의 거대한 발전이 있었 고 풍부한 물자가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중기 벽화에 그려진 두 구와 갑옷 그리고 각종 무기의 대량 출현은 당시의 야철업이 이전보다 더욱 발전했다는 사실을 설명하여 준다. 많은 고분의 벽화에 비단휘장 의 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당시의 고구려 방직업의 발전을 반영하여 주고 있다. 방직업의 발전과 농업생산의 발전수준은 분리될 수 없다 . 중기 벽 화 내의 창고 그림의 출현은 당시의 농업생산이 식량공급을(마復) 충당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잉여물을 저장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문
헌의 기록에 의하면 집집마다 작은 창고가 있는데 부경이라고 불렀다(家 家自有小倉, 名之爲科京). 이러한 작은 창고는 4 세기 이후 농업경제가 발 전되었다는 상징이다. 4 세기 이후 농업경제의 발전은 이후의 고구려 사회를 번영 • 활성화시 키는 기초가 되었다. 후기 벽화는 규모가 휘황찬란하다. 이것 역시 고구 려 사회 번영의 표지이다. 말각조정석 측면에 그려진 바퀴를 제작하는 製輪仙人, 神農 등의 그림은 농업경제의 중시 및 그 발전의 일종의 또 다론 표현이다. 초, 중기 고분벽화에는 수렵풍습이 나타나는데 후기 벽화에는 드물다. 이것은 사회풍속의 변화뿐만 아니라, 수렵이 농업생산의 부족을 메울 필 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농업 발전의 계속적인 발전을 설명하고 있다. (3) 고구려의 고대 건축 集安 20 기의 고구려 고분벽화 중 거의 모든 고분에 고구려 귀족의 가 옥, 성곽, 성담, 각루, 활터, 마구간과 창고 등이 그려졌는데 이것들은 고구려의 고대 건축을 연구하는- 조감도로 제시되고 있다.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의 고대 건축은 하나의 특칭이 있다. 지붕의 결구는 대부분 단첨 (單처마) 四坡水式 또는 兩坡水式이며, 처 마끝이 먼저 돌출되었고 처마각은 위로 올라갔다. 그 양식은 크고 아름 답다. 지붕 허리 양쪽에는 망새(鷄尾)가 있는데 어느 것은 寶珠式火炤의 주둥이를 가졌다. 보주식화염의 주둥이는 일반적으로 세 개가 안치되었 는데 두 개는 양단의 치미, 그리고 한 개는 허리의 중간에 안치하였다. 그것은 마치 寶頂과 같다. 수직 용마루(垂育)와 경사전 용마루(斜育) 위 에도 장식물을 안치하였는데 그것은 또한 위로 치켜 세워졌다. 그것은 한 줄에 네 개씩으로 형상은 파도의 꽃(浪花) 갇아서 대단히 아름답다.
지붕에는 붉은색, 청색, 황색의 기와를 덮었다. 集安 일대의 고구려 건 축 유적에서 발견된 기와는 대부분 홍색, 청색과 황색의 세 종류이다. 와당에는 수면문, 연화문, 인동문, 권운문 등 네 종의 문양이 처리되었 다. 벽화와 대조하여 고구려의 기록을 상상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규모가 크고 아름다우며 나무결구상에 기와를 덮은 단첨(처마)의 사파수 혹은 양파수식 가옥이다. 지붕의 대들보를 받치는 것은 일반적으로 붉은 기둥(紅杭)을 만들었 다. 기둥 위에는 斗扶울 만들었는데 대부분 일두삼승이다. 어느 붉은색 기둥 위에는 .IIIl.板 노두가 있으며 그것은 창방과 연결되어 있다. 어느 기 둥 위에는 사판 좌우에 葉扶이 있으며, 이 화공 상면에는 또한 雀替式散 斗가 있고 그것은 梁架와 연결되고 梁架上面에는 또한 낙타봉이라는 것 이 있으며, 연꽃잎돈(荷葉月k ) 에 울려놓았다. 벽화에서 보이는 건물의 판문은 일반적으로 붉은색을 칠하고 문고리도 가졌다. 무용총의 주실 남벽에 그려진 집에는 아주 오래된 고령창이 보 인다. 그려진 집의 내부에는 모두 커튼이 벽에 걸렸고, 어느 것은 바단 도안 이 그려졌는데 이것은 실내의 장식을 상칭한다. 삼실묘 제 1 실 북벽의 전쟁화 중에 고구려시대의 성곽 일각을 발견할 수 있다 . 거기에는 성벽, 城樓, 角樓와 성문 등이 있다. 성루는 성문의 담 위에 세웠는데 2 층으로 만들어졌으며 각 충은 모두 四波水形 지붕이 다. 城膳持角의 내측에 있는 각루 건물은 2 층 건물로서 지붕은 성루와 같다. 성벽은 높고 두터우며 각루는 우뚝 솟아 있다. 집집마다 작은 창고가 있는데 그것을 相京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 부 경써의 작은 창고에 대하여 『三國志 魏志』 중에 자세히 기록된 것은 없 다. 마선구 1 호의 창고 그립은 〈부경〉식의 창고일 가능성이 크다. 그것 은 四阿式 지붕을 가졌는데, 그 밀에는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가로로 목방울 교차시키고 난간을 만들었다. 중간에 두 개의 창문을 두
었다. 그 저부에는 여섯 개의 붉은색 기둥을 받쳐서 지면과 간격을 두어 2 층 건물을 만들었다. 이러한 건축양식의 도면온 고구려 고대 건축 연구에 대단히 중요한 참 고 자료가 되며 기록 중에 고구려 고대 건축 기록의 부족을 보충해 주기 도한다. 集安 고구려 후기 벽화의 神 靈 주제는 다수가 중원의 산화고사에서 채 취하였다. 예로 사방과 전체 우주를 대표하는 사신은 靑龍, 白虎, 朱雀, 玄武 등의 그림이다. 고대에는 하늘을 둘러싸고 있는 주요 별자리를 방 위에 따라서 4 組로 나누었다. 이것은 『 史記 天官書 』 에 기록되었다. 후 대인들이 四神圖를 사방 또는 우주로 표시하였다. 중원 漢代 건물상의 와당과 고분에 일찍이 사신도가 출현하였다. 남북조 시대에 고분벽화와 墓誌 石稽上에 빠짐없이 나타났다. 集安 고구려 벽화의 사회생활 풍속 화가 사신 위주로 바뀌어졌는데, 이것은 한대의 영향으로 보기는 어렵지 않다. 이것은 그것의 의적 요인이다. 내적 요인을 보면 고구려 후기 사 회가 변화되고, 상충 통치계급은 그들의 통치지위를 비호하기 위하여 사 후에 여전히 사방울 통치하려고 생각하였으며, 동시에 안일 향락적 국면 울 보지하기 위하여 신령의 도움을 빌려서 스스로를 위로받으려고 하였 다. 아로 인하여 중원의 사신사상을 모두 받아들였다. 벽화 중의 伏義, 女禍는 인류의 시조신으로 인간 사후의 보호산이기도 하다. 集安 벽화에서 그려진 복희는 두 손으로 태양을 들고 있으며, 그 림 중간에는 三足烏가 있다. 여와는 두 손으로 달을 들고 있는데 그 중 간에 두꺼비가 있다. 두 사람 모두 人首蛇身이다. 人首蛇身의 복희, 여와상은 西漢 초기의 건물상의 장식그림으로 이용 되어서 중원에 일찍이 이러한 전설이 있었음을 설명하여 준다. 間一多의 『伏羲考』의 글 속에 고증이 정확하다. 복희, 여와는 苗族의 조상으로 西 周襄國 후예의 남쪽 이주자이다. 襄는 婚國夏禹의 후예이다. 그래서 복 희씨의 족속과 夏后는 서로 근집되고 있다. 이것은 중원의 夏 • 苗 두 족
이 최초로 도참숭배한 상칭이 된다. 무덤 안의 복희, 여와의 조각 또는 그림은 死者를 보호하고 사자로 하여금 지하의 쾌락을 맛보도록 하였는 데 이것은 한족 내에 일찍이 성행하였다. 고구려의 후기 벽화 속에 반영 된 것은 고구려가 후기에 대량으로 한문화를 흡수한 것을 설명한다. 죽은 자를 보호하는 신령 중에는 또한 護法力士와 뿔終 面(도철문)이 있는데 이것도 한대의 벽화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것들의 기원은 원시 의 도참에서 나왔다. 이러한 도철면의 그림은 일찍이 商周의 청동기상에 서 흔히 볼 수 있다. 그것은 한대에 이르러서 個邪를 억누르는(압승하는) 풍속으로 변하였다. 그것은 또한 魏 晉 이후의 무덤에서는 일종의 풍속으 로 형성되었다. 集安 고구려 후기 벽화의 주실 네 모서리에 도철면 괴수 가 대들보에 기대어 있다. 이것은 초기, 중기에 나타난 斗扶울 대치하여 個邪를 통제하고 묘주인이 지하에 안락하도록 보호하고 있다. 集安 삼실묘, 오회분 4 호, 5 호 무덤에 모두 牛首人身像이 그려져 있 다. 『 譯史』 권 4 「引帝王世記」에 〈 炎帝神農人身牛首 〉 로 기록되었다. 그 래서 集安 벽화 내의 우수인신상은 炎帝神農氏의 化身이다. 고구려의 통 치자는 무덤 안의 신농울 여러 선인 대열에 끼워 넣었는데, 이것은 농경 의 중시를 표명하는 것 의에 신농을 빌어서 자기 스스로를 미화하려고 시도한 점으로 보인다. 후기 벽화묘의 사신묘, 오회분 4 호, 5 호 무덤에는 학을 탄 선인이 그 려져 있다. 이것 역시 선인이다. 孫作雲의 「說丹朱一中國古代鶴民族硏 究, 說高錢戱源於鶴氏族的圖識挑舞」 글 중에서 〈丹朱是堯之子, 而王子喬 是王之子(단주는 요의 자식이고 왕자 교는 왕의 자식이다) 〉 라고 쓰고 〈 丹朱 以鶴爲圓恨而王子喬是王之子(단주는 학을 도참으로 삼고 왕자 교는 왕의 자 식이다)〉라고 쓰고 있다. 이것은 集安 벽화 내에 학을 탄 선인이 왕자 교가 된다는 것을 자세히 논증하고 있다. 근래 손작운 씨는 그의 「洛陽 西漢卜千秋墓壁畵考」에서 선인 왕자 교를 다시 쓰고 고증하였다. 이것은 集安 고구려 벽화 중의 학을 탄 선인이 중원의 신화고사에서 원류된 것
을 설명하여 준다. 일월성신은 集安 고구려 벽화 중에 자주 묘사되었다. 대부분 頂部溪井 에 그렸는데 그것은 천공을 상징하고 있다. 태양 내에는 三足烏가 있고 달 안에는 두꺼비가 있다는 것은 중원의 신화전설에서 채취되었고 그것 또한 중원의 표현수법을 썼다. 해와 달에 관해서는 『 楚辭 』 , 『 爾雅 』 , 『 山 海經 』 , 『 五經通義 』 , 『 論衡』 등 여러 서적에서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예로 태양 안에 있는 세 발 달린 새는 『 淮南子 精神訓 b 에서 말하기를
는 六朝 시기의 산수화의 표현수법의 영향을 받아 사람과 말이 산보다 크게 표현되었다. 무용총 주실 북벽을 예로 보면 전체 담벽이 수렵하는 장면인데, 산맥은 사람과 말보다 작게 표현되었다. 전체 산간 평지에 4 명의 말탄 수렵인이 있는데 산 앞에 3 인, 산 뒤에 1 인이다. 산 뒤의 수 렵인은 말을 몰아 추격하며 활을 당겨 두 마리의 사슴을 쫓고 있다. 산 앞의 수렵인들도 세로로 말을 몰며 활에 화살을 메기고 호랑이를 추격하 고 사슴을 쫓고 있다. 전체 화면이 살아 있는 듯한 박진감이 있다. 돌출 된 표현은 들에서 사냥하는 인물인데 작게 그려서 차등을 두었다. 이러 한 과장된 표현수법은 六朝 산수화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당대의 張彦遠 이 그의 『歷代名圖記』에서 상기한 표현수법을 다음과 갇이 찬양하고 있 다. 〈群峰之勢, 若細,n m, 或水不容認, 或人大於山〉 集安 벽화에서 그려 진 수렵도와 249 호 고분의 溪井에 그려진 수렵도를 비교하면 양자 간에 많은부분이 유사하다. 초기 벽화는 풍격이 소박하고 주제가 뚜렷하나 비례관계가 깔끔하지 못하다. 중기 벽화는 비록 초기의 특칭을 간직하고 있지만 線條가 세련 되고 형상이 정확히 접근되고 화면이 풍부하다. 그러나 후기 벽화와 비 교하면 항상 비례 방면 또한 손색이 없다. 후기 벽화는 현실을 탈피하고 주로 신령을 주제로 하여 묘사하였다. 그러나 천인상과 供養人物圓 및 새와 짐승들은 생동감이 있으며 선조가 유려하고 변화가 풍부하다. 선조 의 자유스러운 변화는 여러 가지 기교를 낳았다. 그 예로 인물의 얼굴 주름살, 팔의 노출, 가슴이 노출된 근육 등의 부드럽고 섬세한 선조는 사람들에게 육체 감각을 주며, 옷의 문양, 視帶의 선 등이 이동에 따 라 때로는 움직이고 있는데 살아 있는 것처럼 표현수법이 대단히 훌륭하 다. 초기, 중기, 후기 벽화의 서로 다른 특징들은 고구려 회화예술의 발 전과정을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색채 면에서도 초기, 중기, 후기 3 기에 대단한 변화를 가져왔다. 초 기 • 중기의 착색은 담백, 평범하고 후기는 농도가 질고 강렬하다. 사용
된 색상은 홍, 황, 백, 혹, 녹, 자색 등이다. 색상이 선명하고 풍부하였 으며 안료도 순수하여 성능이 안정되었다. 후기의 벽화는 석벽상에 직접 그렸다. 세월이 1400-1500 년이나 경과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색채가 신선하다. 회화의 배치 결구의 입장에서 보면 초기 • 중기의 화면은 어느 것은 여 러 벽을 연결해서 하나의 주제를 다루었고, 어느 것은 하나의 벽을 위아 래로 나누어서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그림 자체 는 조금도 중심사상을 해치지 않았다. 예로 삼실묘 제 1 실 남벽상에는 出 行을 그렸고, 아래에는 수렵도를 그렸다. 장천 1 호분 전실 서벽 위에는 歌舞百戱를 그렸고 아래에는 수렵도를 그렸다. 후기의 벽화묘 4 벽에는 주로 사신을 그렸고 사신도의 여백에는 화염문, 연화문 등 연속도안을 그려서 대단히 풍만하고 격조가 통일된 풍부한 변화를 보여 준다. 청룡 은 고개를 쳐들고 달려가고 백호는 도약하며, 주작은 깃울 펴고 날 기세 를 보이고 현무는 거북과 엉켜 있는 등 그 형태둘이 생동감 있다. 전체 배치를 깊이 살폈으며 또 세부적인 것도 깊이 고려되었다. 예로 주작의 풍만하고 세련된 날개의 펼침, 청룡 비늘의 세부 묘사 등은 모두 대단히 세련되었고, 봇의 한 획도 소홀함이 없이 전체적으로 대단한 음률의 악 장을 구성하고 있다. 종합하면, 集安 고구려 고분벽화는 진실하게 당시 사회의 현상과 고구 려인들의 사상 면모를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가 치가 있다. 그 예술성을 말하면 중원 회화의 기원과 표현방법을 흡수한 기초 위에 고구려 민족의 회화 특색을 창조하였다. 색상과 선의 처리가 기운이 넘치는 생동감의 효과를 나타내었다. 이로 인하여 고분벽화는 대 단히 탁월한 예술적 지위를 가지게 되었으며 동방 회화예술의 보배적 위 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기 2 삼싣묘 1975 년 8 월 通溝 무덤때의 벽화묘를 수리하고 벽화에 대한 화학적 보 존처리를 실시할 때 삼실묘 제 1 실 바닥에서 대단히 두터운 진흙을 발견 하였다. 비록 後人들에 의해 밟혀서 굳어지기는 하였지만 자세히 관찰하 여 본 결과 일찍이 묘실 천장에서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우리들은 이 진흙을 정리하여 보았다. 정리를 마친 후 이 고분을 여러 차례 일본인들 이 묘사하여 갔는데도 불구하고 과학적 발굴을 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 었다. 이번에 발굴한 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2) (1) 삼실묘는 集安 通溝 평원 중부의 大禹上南麗에 있는 封土石室 벽 화고분이다. 평면배치는 曲尺狀으로 연결되어 있다(그림 6-1). 제 1 실은 상당히 크다. 긴 연도(墓道)가 이 방의 서벽 중부를 통과하고 있고 실내에서는 모서리(方)를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네 벽은 안쪽으로 약간 기울었고 네 벽상에 6 층을 안쪽으로 수축되게 쌓은 후에 다시 株角 을 2 층으로 올려 쌓았고 그 위에 2 枚의 직사각형 판석을 덮어 뚜껑돌을 삼았다. 일본인들이 이 고분을 묘사할 때 고분의 개정을 열고 사다리를 놓고 들어갔다. 제 2 실은 제 1 실의 북쪽에 있는데 兩室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복도는 제 1 실 북벽 동단에 위치하고 있다. 제 2 실은 제 1 실보다 약간 작다. 묘실 평면은 사각형이다. 溪井 結構는 제 1 실과 갇은데 다만 안쪽으로 수축되 게 4 층을 쌓고 다시 말각을 2 층 쌓은 다음 그 위에 巨石으로 천장을 봉 하였다.
제 3 실 제 2 실
제 3 실은 제 2 실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제 2 실 4 벽에 서로 연결된 복 도가 있다. 크기는 제 2 실과 거의 같다. 묘정 결구는 제 2 실과 같다. 3 개의 묘실이 동시에 건조되어 하나의 통일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모두 石材로 쌓은 다음 臼灰를 바르고 매끄럽고 평탄한 백회 벽면상에 그림을 그렸다. 이번에는 다만 제 1 실의 진흙만 발굴하였다. 그 나머지 두 묘실에서도 묘바닥이 나타났다. 제 1 실 내의 진흙을 발굴한 후에 원래 묘바닥 위에서 상당수의 사람뼈와 5 종 8 점의 토기를 발견하였다. 묘실 바닥에도 백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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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서 대단히 매끄럽고 평평하다. 묘실 지면의 백회충 아래의 결구를 이해하기 위하여 약간의 면적을 試堀하였는데 백회충 아랫면은 강자갈충 이었고 강자갈 아래는 杏土層, 항토충 아래는 생토였다. 삼실묘를 건조 할 때 먼저 항토하여 지반을 굳건하게 한 다음 항토 지반 위에 강자갈을 깔아 묘실에 습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묘가 있는 곳이 산록이기 때 문에 지하수위가 상당히 높다) (그립 6-2) . (2) 이번에 3 실 중 제 1 실만 발굴하여 모두 8 점의 토기를 발견하였다. 비록 사람들에게 밟혀서 깨졌지만 복원이 가능하여 상당수의 진귀한 자 료를 얻게 되었다. 발견된 8 점의 부장품은 다음과 갇다. 사발 5 점 : 形荷 l j가 서로 갇으며 크기는 차이가 있다. 수직 구연부에 深腹하고 假圈足이 있으며 몸통에 두 줄의 四弦文이 있다. 겉과 안에 茶 綠를 바닥까지 발랐다. 지름 13-16.scm, 높이 6.6-7 . 3cm 이다(그립 6- 3 c, 6-4) . 耳杯(손잡이 달린 잔) 1 점 : 둥근 구연, 板狀의 손잡이, 假圈足(역주 : 신라 高杯의 굽울 圈足이라고 하는대 이러한 高杯와 달리 굽이 낮은 것을 假圈 足이라고 부른다)을 가졌다. 겉과 안에 茶綠柚를 발랐다. 지름 16cm,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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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5.7cm 이다(그립 6~3 a, 6-4). 손잡이가 4 개 달린 登 1 점 : 구연이 의반되고 器腹이 부르며 평저이다• 기복에 4 개의 교량형 손잡이가 있고 어깨에 파도문이 있다. 높이 31. 5 cm, 안지름 24.3cm, 복경 24cm 이다(그립 6-3 d, 6-5), 화로(아궁이) 1 점 : 직사각형이며 위에 둥근 *IJ와 둥근 연동이 있다. 아궁이문은 恒形으로 측면에 있다. 길이 45.6cm, 넓이 24cm, 높이 22.2 cm 이다(그립 6-3 b, 6-6).
그림 6-5 삼실묘 출토 유물 네 귀 달린 호
그 의 상당수의 철못(鐵針)과 동물뼈가 있었다. 이러한 유물은 대단히 중요하다. 유물을 통해 고구려 토기제작의 발전수준과 고구려 벽화고분 의 시대를 연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하기 어려운 상당수의 진 귀한 유물, 손잡이 달린 登, 사발 등은 처음 발견되어 고구려 陶柚의 새 로운 유물로 증가되었다. 그 중 네 개의 손잡이 달린 호와 아궁이의 형 제는 마선구 1 호분에서 출토된 4 개 손잡이 달린 호, 아궁이와 대체로 같 다. 삼실묘의 벽화에 관한 일본인의 묘사는 보잘것없으며 잘못된 점이 많 으므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이번에 발굴하여 얻은 유물만 보고하여 학계의 연구에 참고자료로 제공한다. 吉林, 集安, 通溝三室墓 벽화에 대한 보충 集安通溝古項群의 삼실묘는 1914 년 일본인 關野貞에 의해서 최초로 묘 사되 었다. 그 이후 池內, 濱田, 梅原 등이 1935 년, 1936 년의 2 차에 걸친 集安의 방문에 의해서 삼실묘가 다시 묘사되어 『通溝』 下卷에 실렸다. 삼실묘의 묘실 결구 또는 벽화내용은 고구려 건축사, 회화사에서 중요 한 지위를 차지하여 中外學者에게 중시되고 있다. 고구려 건축, 회화예 술과 고구려 벽화 편년을 연구하는 모든 사람들 중에 삼실묘를 언급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과거에 삼실묘를 과학적으로 발굴한 일이 없 다. 關野貞 池內 등은 삼실묘 제 1 실의 뚜껑돌을 열고 사다리를 타고 들 어갔다는 간단한 묘사만 있다. 1949 년 이후에 삼실묘와 기타 벽화고분이 수리되고 墓門울 닫고 封土 를 하였다. 1975 년 通溝 묘군 봉토석실 벽화고분에 대한 화학적인 보존 처리를 진행하기 위하여 삼실묘 벽화상의 오점을 제거해서 벽화의 색조 를 분명하게 드러내 벽화 원래의 면목을 회복시켰다. 동시에 제 1 실 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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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보존된 진흙을 발굴하여 소량의 사람뼈, 다록유를 바른 손잡이 달린 잔, 사발, 4 개의 손잡이 달린 盛, 아궁이 등 부장된 明器를 발견하였다. 비록 사람들에게 밟혀서 파손되었으나 복원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유물 은 삼실묘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하여 주었고, 더 나아가 고 구려 벽화의 연대 및 고구려 토기공예의 발전수준을 연구하는 데 드문 자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李殿福 3) 이 삼실묘를 여러 차례 방문하여 벽화를 관찰한 결과, 『 通溝 』 一書의 삼실묘 벽화묘사가 간단하고 잘못된 곳이 있고 소홀한 점이 너무 많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예를 들면, 제 1 실 남쪽벽 윗부분의 出行圖는 11 인이 남쪽을 향하여 一字의 긴 열을 지어 邪外로 출행하고 있다(그림 6-7, 6-8). 그러나 『 通溝』 일서에는 〈 每 5 인 1 組로 서로 등을 맞대고 나 아가고 있다 〉 고 묘사되어 있다. 제 1 실 동쪽 벽에 그려진 그림은 墓主人 이 집에 기거하는 정경으로 모두 4 채의 屋宇룰 그리고 있는데, 『 通溝 』 에 서는 3 채로 묘사되었다. 全壁에 모두 7 인이 그려졌는데 『 通溝 』 에는 〈屋 中有人物, 左右各一人(집안에 사람이 있는데 좌우에 각 1 인씩 있다) 〉 이라고 묘사되는 등, 벽화와 부합되지 않는다. 제 1 실은 제 2 실로 통하게 되어 있 고 또 제 2 실은 제 3 실로 통하게 된 복도 양벽에는 力士圖가 그려져 있는 데 (그림 6-9, 6-10) 『通溝』에는 언급이 없다. 그래서 다시 묘사하여 보충 울 하고 있다. (1) 제 2 실 연도, 복도(過道)와 3 개 묘실 네 벽과 조정 전부가 그림으 로 된 벽화이다. 그것은 하나의 사회풍속을 주제로 한 고분벽화이다. 제 1 실 벽화의 네 벽은 사회풍속화를 주제로 하였다. 평행으로 쌓인 조 정상에도 四神, 卷雲文울 그려 하늘을 나타내었다. 묘실 네 모서리에도 朱紅 두공을 그렸고, 네 벽 상단에 紅黃 2 색의 휘장을 그렸고, 남쪽벽 커튼은 바람에 휘날리게 하는 것 의에 영락이 달렸다. 전체 묘실을 마치 집(屋宇)처럼 느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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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壁은 제 1 실의 主壁이다. 남녀 묘주인이 집에서 대좌한 모습을 그렸 다. 전벽 모두 4 채의 집을 그렸다. 대소의 차이가 있지만 배치가 안정되 었다. 『通溝』에 〈大小屋三宇, 左右者近旦大(대소 3 채의 집이 있고 좌우의 크기는 거의 갇다)〉로 기록되었지만 사실과 부합되지 않고 실제로 4 채의 집이 있다. 남쪽의 제 1 집과 북쪽의 제 2 집은 크기가 같고 양식도 같다. 다만 색깔이 다르다. 그 의 나머지 2 채의 집은 앞의 두 집보다 작다. 그 러나 2 층집이다. 서술하는 데 편리하도록 남에서 북까지 1-4 호로 번호를 부여하였다. 1 호 집은 황색 지붕이며 兩坡水式이고 등마루 끝에는 치미가 있고,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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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각은 反헴이며, 혹선이 구불구불 그려져 있고, 붉은 기둥 4 개가 있다. 집안에 여주인은 얼굴을 북쪽으로 향하고 앉아 있는데 머리에는 황색관 을 쓰고 흑색 合托紅服울 입고 두 손은 가슴에 모으고 있다. 몸 아랫부 분은 박락되어 확실하지 않다. 2 호 집은 벽 중앙에 있으며 2 층 건물이다. 홍색 지붕이고 양파수식이 며 등마루 중간에 寶頂울 그렸다. 아래층은 검은색 기둥이다. 집안에 한 여인이 얼굴을 북쪽으로 향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合托(옷싶이 겹 치지 않고 나란히 맞닿는) 황색 치마를 입고 있는데 밀부분은 보이지 않는 다. 상술한 두 여인은 남주인의 처와 첩이다. 무릎을 꿇고 앉은 여인의
뒤에는 시녀가 서 있다. 3 호 집과 1 호 집의 다른 점은 처마 밑에 두 가 지 색의 휘장이 붉은 기둥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집안의 후벽 그림 에는 황금색 비단 도안의 휘장이 있다(바단 도안의 벽장은 『通溝 』 에서는 묘 사되지 않았다). 집안에 남주인은 남쪽을 향하여 앉아 있는데 머리에는 새깃 冠울 쓰고, 붉은 머리에 짧은 수영을 가졌고, 황색 합임의 짧은 웃 옷을 입고 두 손은 가슴에 대고 있다. 하체는 박락당하였다. 4 호 집에 관해서는 『 通溝 』 에 누락되어 있다. 그것이 2 호와 다른 것은 보정이 없고 등마루에 치미가 없다는 것이다. 아래층의 2 인의 남자 奴僕이 북쪽을 향 하여 서 있는데 머리를 높이 묶고 합임 흑점의 노란 옷을 입고 있다. 하 체는 박락당하여 알 수 없다. 전체 벽에 4 채를 그리고 사람은 7 인(남주 인 1 인, 여주인 2 인)으로 각각 1 채의 집을 차지하고 있다. 남녀 주인의 측면에 남녀 노복 4 인을 그렸다. 전체 그림은 묘주인이 집에서 기거하는 모습을그렸다. 남벽은 상하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윗부분에는 출행도를 그렸고, 아 랫부분에는 수렵도를 그렸다. 『 通溝 』 에서는 남벽 아랫부분의 출행도에 관한 묘사가 잘못된 것이 많다. 上見五人左向行 下見狩撮 圓 像 上 圓 五人中 二人 特 大一男 一 女以 爲 夫 婦 一 人 導 於前 二人隨其後服色今不這細述 …… 右半亦五人向右行 前二者張柄之 蓋 (상부에 5 인이 좌행하고 하부에 수렵도가 보인다. 상부의 5 인 중에 2 인은 특별히 큰대 각 1 명의 남녀로서 부부인 것 같다. 1 인은 앞에서 길을 인도하 고, 2 인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의복색은 자세히 서술할 수 없다. 右半 역 시 5 인이 우행하고 있다. 앞의 2 인이 손잡이 달린 양산을 들고 있다. ) 이 글 중에 『 通溝 』 의 저자는 남벽 상부의 출행도 일행이 11 인이며 一 字應行으로 향좌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다만 10 인아 각각 5 인 1 조로 이 루어져 등을 맞대고 있다고 묘사하였다. 어떻게 하여 이러한 착오를 일
으켰는가 살펴보면 저자가 현장에서 묘사한 것이 아니고 사진을 찍어가 지고 귀국하여 묘사한 것 같다. 일행 11 인이 좌행하는 출행도를 두 번으 로 나누어 사진을 찍다가 1 인을 빠뜨린 것이다. 즉, 귀국 후에 사진을 근거하여 묘사하다가 착오를 범하여 두 개의 5 인 1 조가 출행하였고, 등 울 맞대고 간다는 잘못을 범한 것이다. 11 인의 출행도는 어떠한가? 앞 에서부터 제 1 인(첫번째 사람)은 인도하는 남자 노복으로 머리를 풀어 헤 치고 상의는 합임 흑점의 노란색의 짧은 옷을 입었고, 허리를 동여매고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붉은 바닥의 검은색 신발을 신고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제 2 인(두번째 사람)은 남주인이다. 머리에 황색의 折 風울 쓰고 이목이 수려하며 붉은 입술에 짧은 수염을 가졌고 두 손의 소 매 끝을 가슴에 대고 있다. 상의는 합임 흑점의 짧은 옷을 입고 의두는 흑색의 짧은 마고자(패)를 입었고, 허리를 동여매고 하의는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황색의 신발을 신었다. 세번째 사람은(第三人) 여주인이다. 머리에 노란색 머릿수건을 쓰고 몸에서 衣綠울 댄 왼쪽 옷싶, 황색의 치 마를 입고 허리에는 띠(帶)를 두르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대고 있다. 몸 뒤에 1 인의 남자아이가 있는데, 머리를 풀어 헤치고 합임 홍색의 짧은 상의를 입고 하의는 흑점이 있는 황색의 통 넓은 바지를 입고 붉은 바닥 의 신발을 신고 두 손을 모아 가슴 앞에 대고 있다. 다섯번째 사람은 男 相이다. 머리에 절풍울 쓰고 검은 소매를 가전 합임의 황색 상의를 입고 안에는 둥근 것이 달린 內衣를 입고 허리를 동여매고 두 손을 모아 가슴 에 모으고 있으며, 하의는 흑점이 있는 노란색의 통이 넓은 바지롤 입고 붉은 바닥의 검은색 신발을 신었는데 얼굴에 짧은 수염이 있다. 여섯번 째는 女相이다. 검은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리고 衣綠이 달린 합임의 치 마를 입고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대고 있는데 面目은 분명하지 않다. 일 곱번째와 여덟번째는 남녀 2 인의 노복으로 손에 우산을 들고 있다. 남자 는 머리가 벗겨지고 상의는 황색 합임의 옷을 입고 허리를 동여매었으 며, 흑점이 있는 황색의 통 넓은 바지를 입고 붉은 바닥의 검은 신발을
신고 두 손으로 曲柄의 우산을 들었다. 여자는 흑점의 황금색 합임의 치 마를 입고 허리에 띠를 매었다. 아홉번째는 여인상이다. 몸의 크기가 앞 의 남주인의 다음이다. 아마 남주인의 첩인 것 같다. 검은색 머리를 이 마에 동여매고 둥근 것의 내의를 입었으며 의록이 있는 왼쪽 옷싶의 치 마를 입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있다. 열번째와 열한번째의 사람은 두 명의 노복으로 긴 행렬의 뒤를 따르고 있다. 2 인 모두 황색의 절풍을 쓰고 紅帶를 턱 아래에 둘렀다. 수염이 조금 있다. 전자는 흑점이 있는 황색 상의를 입고 허리를 동여매고 자색의 통 넓은 바지를 입었고 두 손 을 가슴에 모으고 있다. 후자는 나이가 많아 허리가 약간 굽고 짧은 수 염에 오른쪽 발을 굽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고 왼손은 주먹을 쥐고 가슴 옆에 대고 있다. 자색의 옷싶이 있는 상의를 입고 허리를 동여매고 황색의 바지를 입었다. 출행도를 관찰하면 一字雅行으로 向左하고 있다. 우산울 들고 있는 2 인의 後尾와 노복을 제의하고 모두 가슴 앞에 손을 모으는 자세가 똑같다. 비록 어리석은 자세로 보이지만 이것이 바로 고 구려인들이 가진 특유한 〈 1T 必捕手〉의 풍속이다. 또한 이것은 화가가 생 활의 풍부함을 그린 것을 설명하고 있다. 남벽 하반부에 절반의 벽화가 남아 있다. 전체 그림이 수렵울 소재로 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묘주인이 생전에 야의에서 사냥한 정경을 묘사한 것이다. 현재 잔존된 그림은 2 인이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다. 전 자의 상반신이 남아 있고 말을 탄 것은 박락당하였으며 사냥하는 사람은 머리에 冠울 썼는데 거기에 새의 깃울 두 개 꽂고 몸에는 황색의 소매를 잡아맨 옷을 입고 허리를 동여매고 활을 쏘는 장면이다. 허리에 화살통 울 차고 있다. 후자는 홍색의 말을 타고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머리는 풀어 헤치고 붉은색 의록의 소매를 동여맨 옷을 입고 허리를 동여매고 왼팔을 앞으로 펼치고 있는데 새매가 팔에 앉아 있고 말 앞에는 새매가 꿩울 쫓고 있다. 북벽에는 攻城圓가 있다. 2 인의 장군이 긴 창을 들고 성 앞에서 적과
싸우는 장면이다. 사람과 말 모두 갑옷을 입었는데 말 한 마리는 赤色이 고 또 한 마리는 흑색이다. 성벽은 구불구불하고 문도 있고 樓도 있으며 성내에는 집도 있다. 성의 左上方에 2 인의 병사가 부등켜안고 싸우는데 승패는 알 수 없다. 성안에 1 인이 담벽에 기대서 겁을 먹은 모습으로 성 밖에서 싸우는 모습을 몰래 보고 있다. 서벽의 중앙으로 연도가 지나게 되어 좌우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좌우의 벽에 보초가 한 사람씩 서 있다. 남측의 보초는 蓮花冠을 머리에 썼는데 이마가 넓고 큰 눈을 가졌으며 짧은 수염이 있고 둥근 것이 달린 긴 옷을 입고 허리는 동여매었다. 북측의 보초는 머리를 높이 동여매고 영락을 달았다. 얼굴색은 검보라색이며, 두 눈을 무섭게 뜨고 붉은 몸에 가슴을 노출하고 어깨에 한 개의 赫石을 걸치고 또한 수건도 걸쳤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하의는 자색 바지를 입었다. 이 벽화에 관하여 『 通溝 』 에서는 다만, 〈 西壁中察茨道 分左右名半 各畵有一人 面兩相對 面 稅服色 已總不可辨 ……(서벽 가운데로 연도가 지나서 좌우 각 반으로 나누 어졌고, 거기에 각 1 인이 있는데 얼굴을 서로 바라보고 있다. 얼굴과 의복색은 이미 박락되어 판별할 수 없다 ……) 〉 라고만 언급하고 있다. 네 벽상의 조 정에도 벽화가 있다. 『 通溝 』 에서는 〈 以雨漏故 頂上途惡 刺落 5台 盡(비가 새서 정상이 회색이 되고 박락이 너무 심하다) 〉 라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실 제로 아직 벽화가 잔존하고 제 1 굉돌 측면에 있는 구름무늬는 벽의 사방 울 통하여 계속된 그림이다. 그 위는 평행으로 쌓여졌는데 각 충의 백회 가 비록 많이 탈락되었지만, 제 2 굉돌 서면에 두 마리의 주작이 서로 바 라보면서 서 있다. 주작 양측에는 보리수가 한 그루씩 있다. 동벽에는 현무 한 쌍이 남아 있다. 동서 제 4 층 측면 남단에 한 마리의 봉황이 있 다. 조정에 잔존한 벽화를 보면 제 2 굉돌 측면에는 쌍사신도를 그렸다. 그리고 현무는 동면에 그리고 주작은 서면에 그렸다. 그것은 묘의 방 향 또는 묘주인 장식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은 그림을 그린 자가 방향을 분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북방신의 상칭인 현무를 동벽에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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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볼수 있다. 연도 양쪽의 벽화는 이미 대부분 박락되었다 . 다만 남벽에 일단의 인 물이 묘실울 향하여 가고 있는 모습이 남아 있다. 연도 천장에 일월성신 도가 그려져 있다. 『 通溝. !I 에는 일월을 환문도로 보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제 2 실 4 벽에 역사, 무사도를 그렸고, 조정에는 연화, 새, 짐승, 祥雲 , 선인, 별을 그렸다(그림 6-11). 『 通溝 』 에는 제 2 실과 3 실의 벽화내용을 종합하여 바교하는 방법을 택하 였다. 이와 갇은 수법은 문자를 세련되게 나열하였을 뿐 소홀히 취급한 점이 상당히 있다. 더욱이 인물 자태의 동작과 입은 옷의 색깔은 묘사되 지 않았다. 상세한 묘사를 위하여 2 개의 묘실을 나누어서 소개하여 『 通 溝 』 의 부족된 내용을 보충하였다. 제 1 실에서 2 실로 통하는 복도 양측에 2 인의 역사가 그려져 있다. 『 通 溝 』 에는 역사가 없었다. 2 인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侍立되어 있다. 제 1 실 쪽에 面向되어 2 실을 수호하고 있다. 2 인의 역사는 모두 노란색의 두구
룰 쓰고 백색 띠를 동여매고 몸의 앞뒤에 날개가 달린 옷을 입고, 얼굴 색은 菊黃 色이며 엄숙한 눈에 짧은 수염이 났고, 두 손에 긴 창을 들고 있다. 홍색 도포를 입고 허리에 띠를 동여매고 쌍창을 세우고 어깨에는 금황색 두건을 두르고 양팔을 동여매어 아래로 내려뜨리고 다리 부분은 박락되어 보이지 않는다. 실내의 서남각과 동북각에 각각 흑색의 두공을 그리고 그 밑에는 흑색 기둥과 초석을 그렸다. 남, 북, 동의 3 벽에 각각 1 인의 역사를 그렸는데, 두 다리는 구부리고 두 손으로 창방울 쳐들고 있는데 자태는 모두 같으나 의복은 다르다. 남벽 역사는 검은 머리를 이마 위에 잡아매고 누런 얼굴에 붉은 입술 이며 큰 귀에 짧은 수염을 가졌다. 둥근 것이 달린 고운 황금색 바단옷 을 입고 고운 무늬의 연판문으로 수놓았다. 황대를 허리에 동여매고 대 되부도 동여매고 등 뒤에 날개옷이 있다 . 아래는 황색의 꼭 끼는 짧은 바지롤 입었다. 발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북벽의 역사는 검은 머리를 이마 위로 잡아매고 누런 얼굴의 큰 귀에 짧은 수염을 가졌고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다. 상의는 황색의 둥 근 것을 가진 우의를 입었다. 허리에 홍대를 매고 녹색의 깃털바지를 입 고 맨발이며 발은 새의 발톱상을 하였다 . 두 마리의 뱀이 몸 뒤를 감고 있다. 동벽의 역사는 검은 머리를 이마 위에 잡아매고 푸른 얼굴, 큰 귀에 수염을 가졌다. 상의는 둥근 것의 고운 홍색 비단옷을 입고 녹색 띠를 몸에서 휘날리게 감았으며, 하의는 황색의 짧은 바지를 입었다. 맨발이 며 몸 뒤에 또한 두 마리의 뱀이 서로 휘감고 있다. 서벽에는 한 무사가 북쪽을 향하여 서 있다. 머리에 두구를 쓰고 두 눈은 전방울 응시하고 있으며, 위에는 홍색의 고운 옷을 입고 밖에는 갑 옷을 걸치고 왼팔에는 두 개의 노란 악기(탁)를 차고 손에는 하나의 환 두대도를 허리 옆에 세로로 들고 있다. 오론손에는 하나의 긴 창을 땅에
짚고 있다. 아래는 갑옷바지를 입고 발에는 가시 돋친 신발을 신고 있는 데 위풍이 당당하다. 무사도 대칭의 복도 측면에는 구름무늬가 있다. 네 벽상에 제 1 굉돌 측 면에 쌍사신도가 있다. 서쪽에는 주작이 날고 중간에는 연꽃봉오리가 하 나 있다. 남쪽에는 두 마리의 청룡이 있는데 한 마리는 앞에 서 있고 한 마리는 뒤에서 머리를 맞대고 서쪽으로 날아가고 있다. 북벽에는 두 마 리의 백호가 입을 벌리고 서쪽으로 질주하고 있다. 이것은 청룡과 대칭 되고 있는 듯하다. 동벽에도 두 마리의 현무가 서로 앞으로 나아가 뱀머 리를 휘감고 있다. 제 2 굉돌로 쌓인 측면에 5 잎의 연꽃이 있고 동벽에도 두 송이가 있고, 북벽에도 네 송이가 있으며, 그 중간에 작은 연꽃이 있다. 서벽에는 세 송이가 있고, 그 중간에 한 송이가 사람에게 꺾여 있다. 남벽에는 네 송 이가 있는데 서쪽으로 두번째 꽃은 칼로 잘린 흔적이 있다. 동, 서, 남, 삼면의 제 3 층은 북벽의 제 2 굉돌로 쌓인 것과 연결되어 있 고, 측면에는 3 組의 구름무늬가 있다. 동 • 서 • 남면의 제 4 층은 북벽 제 3 층과 물려 있다. 서벽에는 두 개의 구름무늬가 있고, 남벽에는 두 마리의 주작이 동쪽으로 날아가고 있으며 그 뒤에는 한 조의 구름무늬가 있다. 북벽 제 4 층 측면에 하나의 뿔울 가 전 짐승이 있고, 그 짐승 뒤에 꽃사슴이 있으며 연꽃 둘 사이에 봉오리 가 있다. 사슴의 뒤에 두 마리의 주작이 날고 있는데 전자는 녹색이고 후자는 황색이다. 제 1 굉돌 말각석 측면에 2 인의 연화선인이 있는데 1 남 1 녀로서 머리에 두광이 있다. 제 1 굉돌 동남 말각석 측면에는 날고 있는 선인과 비파 타는 선인의 그 림이 있다. 날고 있는 선인은 羽衣를 입고 맨발이며, 바파 타는 선인도 身光이 있으며 머리는 높이 묶고, 손에 비파를 들고 왼쪽 다리는 앞으로 내밀고, 오른쪽 다리는 책상다리를 하고 있다.
그립 6 기 2 삼실묘 제 3 실 조정 천마도
제 1 굉돌 서남각 말각석 측면에는 牛首人身像이 있다. 노란색 옷싶의 홍색 우의를 입고 黃帶를 허리에 매고 맨발이며 얼굴은 비파 타는 선인 을 향하고 있다. 오른손의 창은 땅을 짚고 있고 왼손에 한 가지 물건을 들었고, 몸 뒤에는 濕 舞가 있다. 몸 뒤에는 1 인의 연화선인이 있다. 제 2 굉돌 말각석 측면에는 1 인의 날고 있는 선인을 그렸다. 홍색 우의 롤 입고 자태는 대체적으로 다른 선인과 같다. 제 2 굉돌 말각석 저면에 5 개의 잎이 달린 한 송이의 연꽃이 있다. 개정석 저면에 일월과 北斗五星과 南斗六星座가 있다. 제 3 실 벽화는 4 벽에 力士를 그리고 溪井에는 사신, 연꽃, 새, 상운, 짐승, 별 등을 그렸다(그림 6-1 2 , 6-13, 6-14). 2 실에서 3 실로 통하는 복도 양측에 한 사람씩 역사를 그렸는데 그들의 얼굴은 제 3 실을 향하고 있으며 제 3 실을 수호하고 있다. 여기에 그려진 역사들은 제 1 실에서 제 2 실로 동하는 복도의 역사와 같이 긴 창을 들고 서 있다. 梅原 등이 쓴 『 通溝 』 에는 묘사되지 않았다. 묘실 안의 모서리 에는 흑색의 두공이 그려져 있다.
广꾼 rr\l 그림 6-13 這-삼실묘 제 3 실 조정, 뿔 달린 짐승
4 벽에 그려진 역사도, 남 • 북 • 서 3 벽의 역사도 등은 그 자태가 2 실의 역사와 갇다. 다만 동벽의 역사는 상술한 3 벽의 역사와 다르다. 동벽의 역사는 머리를 쳐들고 서 있고, 둥근 눈에 짧은 수염을 가졌다. 위에는 左杜의 고운 짧은 저고리를 입고 허리에 홍대를 두르고 아래에는 홍색의 짧은 바지를 입고 맨발이다. 오른손은 창방 위를 향하였고 왼팔은 뒤로 뻗어 기둥을 잡고 있고, 두 다리는 벌리고 있다. 오른팔에는 뱀 한 마리
가 휘감고 있다. 잠방이에는 다섯 잎 연꽃 한 송이가 있다. 남벽의 역사는 머리를 높이 묶고 푸른 얼굴에 짧은 수염을 가졌고, 둥 근 것에 연꽃무늬가 있는 고운 비단옷을 입었다. 노란 허리띠를 하고 황 금색의 격자무늬 바지를 입었고 맨발이며, 등에는 붉은 띠가 있는 날개 옷을 두르고 작은 다리에 각각 한 마리의 뱀이 감겨 있다 . 오른쪽 위 모 서리에는 두 마리 뱀의 교미도가 있다. 동벽의 역사도는 머리를 높이 묶고 누런 얼굴에 짧은 수염을 가졌으며 귀는 크다. 둥근 것에 연꽃무늬가 있는 홍색 비단옷을 입고 아래는 황색 바지를 입었다. 노란 띠의 날개옷이 몸을 감고 두 개의 작은 다리에는 두 마리의 뱀이 감겨 있다. 북벽의 역사는 매우 붉은 얼굴이며 합임의 백색 연잎무늬의 상의를 입 고 혹대몰 두른 황색 바지를 입고 맨발이며 다리는 발가락이 다섯 개이 다. 녹색 영락의 甄 舞가 팔을 감고 있다. 제 1 층 창방 측면에 쌍사신도가 있다. 서벽의 두 마리의 주작은 날개를 펴고 마주 보고 있고 주작의 뒤에는 연꽃을 배치하고 있다. 동벽에는 두 현무, 거북의 몸을 감은 두 마리의 뱀이 머리를 서로 교 차하면서 머리를 돌려 거북이 머리를 보고 있다. 두 마리의 현무 사이에 하나의 꽃봉오리가 있고 남단의 현무 아래에 백로가 물고기를 물고 있 다. 『 通 溝』 에는 묘사되지 않았다. 남벽의 청룡은 고개를 쳐들고 입을 벌려 혀를 낱름거리고 있으며, 몸 은 황색인데 붉은색 바늘을 가졌다. 용의 발가락은 3 개이다. 북벽은 백호가 두 마리 있는데 청룡과 상대적이다. 입을 벌리고 혀를 날름거리며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앞의 호랑이는 청색이고 뒤의 호랑이 는 황색이다. 제 2 층 석측 남 • 서 • 북, 세 벽에는 연꽃으로 보이는 다섯 잎이 있다. 각 벽마다 세 송이씩 있는데 색은 주홍이며 검은 선으로 가장자리를 둘
렀다. 그 동벽의 제 2 층과 남 • 서 • 북벽의 3 층은 서로 접했고 주홍색의 구름 무늬가 있다. 동벽의 제 3 층은 그 나머지 세 벽의 제 4 층에 상당하며 모두 새와 상운 이 그려져 있다. 동벽 제 4 층은 그 나머지 세 벽의 5 층에 상당하고 역시 각종의 새가 그 려져 있다. 동쪽에는 비둘기가 서 있고 비둘기 뒤에는 주작이 날개를 펴 고 꼬리를 들고 있다. 남쪽에는 長尾鳥가 있고 서쪽에는 두 마리 봉황새 가 있다. 북쪽의 봉황새 한 마리는 날개를 펴고 서 있다. 봉황새 옆에는 백로가 고개를 들고 있다. 제 1 말각석 밀에는 각각 연꽃이 그려져 있다. 제 1 굉돌 말각석측에는 여러 가지 짐승이 있는데, 동남각에는 뿔이 하 나 달린 짐승이 있고, 동북각에는 천마가 한 마리 있고, 서남, 서북각의 두 측면은 확실하지 않다. 제 2 굉돌 말각석측에는 한 송이에 다섯 잎을 가진 연화가 있는데 말각 석 밑으로 뻗어나 있다. 개정석 아랫면에 日月星辰이 그려져 있다. (2) 삼실묘의 배치가 새롭고 안정되어 고구려 석조 건축예술의 발전수 준을 나타내 주고 있다. 묘실 결구 입장에서 보면 수평(평행)으로 여러 충을 쌓으면서 안으로 수축시킨 다음 말각을 쌓는 새로운 기법을 채택하 였다. 그런 연후에 순수한 말각을 쌓는 일정한 기초를 세웠다. 벽화를 말하면 이번 보충묘사 중에 삼실묘 벽화가 通溝 고분군의 각 저, 무용, 통구 12 호, 마선구 1 호 등의 벽화보다 새로운 내용이 풍부함 울 발견하였다. 예를 들면, 쌍사신, 역사, 연화선인, 단뿔짐승, 출행, 공성, 백로, 물고기잡이, 우수인신상 등이다. 이러한 새로운 벽화제재는 고구려 벽화내용의 풍부함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삼실묘의 연대에 대한 유력한 방증을 제공하여 주고 있다. 묘실 결구에 따라서 벽화내용과 제 1
실 출토의 토기를 결합하여 보면 삼실묘의 연대는 대체로 北魏 시기에 해당되고 통구 12 호분, 마선구 1 호분보다 늦고 사신묘, 오회분 4 • 5 호보 다 이른 시기에 해당한다. 대체적으로 5 세기 또는 5 세기 이후의 고분에 해당한다. 벽화내용의 측면에서 보면 묘주인이 거주한 집은 상당히 화려하다. 휘 장이 걷려 있고 그것을 걷어서 가로기둥(창방)에 결박하고 布帶를 내려 뜨린 것을 보면 이러한 것을 할 수 있는 특수한 장치가 있었던 것 같다. 土壁에도 또한 비단 짜는 그림을 그린 화려한 휘장이 있었다. 이러한 건 물은 고구려의 보통사람이 거주하는 것이 아니고 상충 통치계급의 주거 지이다. 1 남 2 녀가 각각 집을 차지하고 있다. 묘실 결구의 재결합은 삼 실이 연결된 것을 말하여 주고 있다. 그리고 제 1 실 동벽 출행도는 1 남 2 녀의 주인이 가솔과 노복을 거느리고 출행하는 것을 그린 것이다. 이것 은 2 실 묘주인은 1 남 1 처 1 첩이라는 것을 단정시켜 주고 있다. 제 1 실 복 벽의 공성도를 분석하면 남자 묘주인은 유명한 장군일 가능성이 크다. 城戰 圓 는 묘주인이 어느 전장에서 승리한 장면을 묘사하였다. 삼실묘의 결구는 근엄하고 배치는 새롭고 양식은 특수하다. 벽화제재 가 광범하고 내용이 풍부하다. 회화기교를 말하면 대단히 높은 造指를 가졌다. 고구려 고분 형제, 건축사, 회화사, 문물 • 전장 제도 등 각 방 면에 대한 연구에 특별한 가치가 있다. 3 산성하 332 호 • 983 호와 만보정 1368 호 1966 년 상반기에 吉林省 集安通溝 고분군의 봉토석실묘 중에서 3 기의 벽화묘(J SM332 호, J SM983 호, J WM1368 호)가 발견되어 발굴하였다. 발굴 약보고서는 다음과 갇다. 4)
1) 산성하 묘구 332 호 봉토석실 벽화묘 J SM332 호는 通溝 고분군 山城下 墓區의 남쪽, 禹山 서쪽 언덕, 거기 에서 서쪽으로 약 lOOm 되는 곳에 通溝河가 있다. 그 고분은 禹山 서쪽 언덕에 있는 봉토석실묘 중 상당히 크고 가장 높은 것 중의 하나이다. 그 동남쪽으로 약 30m 되는 곳에 1 기의 큰 적석묘가 있다. 그 서쪽면에 서 고분은 산 아랫방향으로 모두 7 줄로 배열되었는데 남쪽에서 북쪽 방 향으로 놓였다. 대부분 봉토석실묘인데 파손이 심하다. (1) 묘실 결구 묘실 결구는 截頭方維形의 봉토석실묘이다. 황색 점토에 약간의 작은 석괴를 섞은 토석혼축묘이다. 봉토의 현재 높이는 지면에서 4m 정도아 고 그 저부 지름은 약 10m 이다. 묘 정상의 봉토는 이미 유실되었고 천 장석은 도굴범에 의해서 절반이 옮겨져서 묘실로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있었다. 고분은 墓道(연도), 雨道(사잇길), 두 개의 側室과 하나의 主室 (玄室) 등 내 개로 나누어졌다(그립 6~ 15 , 6-16a). 방향은 150° 정도이다. 남겨진 묘도의 길이는 2m 정도이다. 묘도는 뒤에 있는 용도와 연결되 고 연결부분에는 가로막는 담이 있었다. 그것은 석괴로 쌓고 臼灰로 툼 사이를 막았다. 대단히 견고하다. 그 상부는 도굴시 파괴되었다. 용도의 전체 길이 3.Bom, 양벽은 가볍게 내경되었고 3 매의 큰 판석으로 천장을 덮었다. 바닥과 묘바닥은 평탄하다. 양쪽 벽, 바닥과 천장에 모두 백회 를 발랐다. 용도 안쪽 입구, 죽 묘실문은 아직 문이 있던 흔적이 있다. 묘문 위쪽에 문지방이 있어 안과 밖을 이등분하였다. 그 중간에 문을 달 았다. 양측 상면에 모두 문의 흔적이 있다. 바깥쪽 문지방과 문은 높고 안쪽 문지방은 낮다. 그것은 두 짝의 문을 맞춘 것으로 볼 수 있다 . 문 위쪽 너비는 0.80m, 아래쪽 너비는 0.96m, 높이는 1. 64m 이다. 主室 안
\ 북쪽
쪽 입구에서 용도 양측으로 1.06 m 되는 곳에 각각 하나씩 측실(耳室)을 구축하였다. 동쪽 측실은 너비 0.58m, 깊이 0.9 5 m, 높이 1. 42m 이다. 서 쪽 측실은 0.58m, 깊이 1.0 4m, 높이 1. 42m 이다. 측실 각 벽은 안쪽으로 내경되었고 벽과 천장에 모두 백회를 발랐다. 묘실은 사각형에 가깝다. 벽 길이는 3.18-3 . 26m 로 일정하지 않다. 네 벽은 가볍게 안으로 기울었다. 남벽 높이 1.5 3m, 상면에는 창방(梁杓) 이
a. 묘실 조정
있고, 창방은 담면 방향으로 5-Iocm 돌출되었다. 그것의 높이는 30cm 이다. 남벽의 높이는 1 . 8m 이고 나머지 각 벽은 1. 9m 이다. 네 벽 위에는 9 층으로 안으로 좁혀지는 평행쌓음과 거석으로 천장을 덮은 溪井이다. 그 각충은 약 10cm 정도 안으로 좁혀지고 그 높이는 12-15cm 가 된다. 묘실 전체 높이는 3 . 24m 이다. 묘실 서쪽의 서벽에서 40cm 되는 곳에 남 북 방향의 관대가 하나 있다. 그것은 석괴로 쌓여졌으며 그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다. 그리고 중앙은 약간 움푹 들어갔다. 의부에는 석회를 발랐 고 주변은 능각이 융기되었다. 남북 길이 2.35m, 동서 너바 0.95m, 높 이 1. 6m 이다. 묘실 네 벽, 조정과 묘바닥에 모두 백회를 발랐는데 두께는 1-3cm 로 일정하지 않다. 묘바닥은 북쪽이 약간 높고, 남쪽이 약간 낮다. 묘바닥 백회가 떨어져 나간 곳에 숯이 깔려 있는 것이 보였다. 동, 서, 북 세 벽상에 각각 6 개의 네모 반듯한 못구멍이 있는데 깊이는 5cm 이고 그 간 격은 4o-5ocm 이다. 휘장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내에 불탄 혼적이 보인다. 진흙 속에 소량의 종지뼈와 엉덩이뼈 및 팔다리의 뼈가 있었다. {2) 벽화 묘실 네 벽, 조정 및 용도 양쪽 벽에 모두 벽화가 그려져 있다. 묘실 네 벽에 구름무늬와 〈王〉자 조합으로 된 도안이 가득 채워져 있 다. 상부에 선을 그려 구획을 정하고 하부에는 검은 선으로 연결시켰다. 붉은색 구름과 황색 예서체의 〈王〉자 그리고 녹색 구름과 혹색 예서체의 〈王〉자가 나누어져 수직으로 쓰여졌다. 각 벽이 24 행이며 각 행은 20 여 組이다. 전체 묘실에 약 2000 여 조가 있다. 유일하게 묘문 4 段 제 2 행 녹 색 구름무늬와 붉은색 예서체의 〈王〉자부터 제 8 자까지는 예서체의 〈工〉 자이고 이하는 다시 〈王〉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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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 제 1 층 下稷에 흑색 창방이 그려졌고 그 위의 각총에는 백회벽상 에 옆에서 본 연화문을 그렸다. 대부분 다섯 잎이다. 황색 또는 붉은색 의 꽃술을 그리고 흑색으로 가장자리를 처리하였다. 양 측실에서 묘실의 용도로 통하는 두 벽에 각각 말을 타고 묘문 방향 으로 향하는 기사를 그렸다. 동벽의 靑馬롤 타고 있는 기사는 옷싶이 홍, 녹, 황색의 상의를 입었고, 허리를 졸라매고, 붉은색 바지를 입고, 몸 뒤에 네 개의 화살이 있는 화살통을 메고, 한편 활을 당겨 어떤 목 표물을 겨냥하고 있다(그림 6-16b, 6-17). 앞쪽의 기마인은 박락되어 뚜 렷하지 않다. 서벽의 붉은 말을 탄 무사는 붉은색 折風울 쓰고, 뒷머리 는 잡아 묶고, 옷싶이 홍, 녹, 황색의 상의를 입고, 허리를 잡아매고, 노란 바지를 입었다. 뒤쪽을 향하여 활을 당겨 쫓아오는 호랑이를 쏘고
있다. 호랑이 몸체는 대부분 박락당하였다. 이 말 오른쪽 밑에 한 여인 이 그려졌다. 황색 바탕에 붉은 점이 있는 긴 치마를 입고 손에는 작은 상을 들었으며 그 위에 器物이 있는데 밖은 검은색이고 안은 붉은색이 다. 천장의 도굴 구멍으로 빗물이 스며들어 벽화가 상당히 훼손되었다. 측 실의 백회 바른 벽은 모두 훼손되어 벽화의 존재 여부를 알 수 없다. (3) 부장품 ®토기 네 귀 항아리(손잡이 네 개 달린 登) : 고운 진흙질 태토의 회색 토기 이다. 手製 輪修되었다. 둥근 구연, 목이 길고, 어깨가 넓으며, 배가 부 르고, 밀은 편평하다. 네 개의 다리형 耳가 있다. 어깨 위에는 두 줄의 압인호선문이 있다. 안지름 22.4 c m, 전체 높이 30cm, 묘실 동남쪽 모퉁 이에서 출토되었다(그림 6-1 8 , 6-16c). ® 철기 문고리 2 점 : 크기가 같다. 쇠고리와 고리를 끼우는 것(못)이 한 組를 이루었다. 그 끼우는 못의 5cm 되는 곳이 휘어졌다. 그것은 문의 두께 가 5cm 임을 알려준다. 쇠고리 지름은 10cm 이다(그림 6-16e). 용도 안쪽 입구와 묘도 진흙 내에서 각각 출토되었다.
그림 6-18 J SM332 호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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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벅고리 (ifiJ) 4 점 : 크기가 약간 다르고 형식은 같다. 전체 길이는 21cm 이며(그립 6-16e), 묘실의 진흙과 묘도의 진흙내에서 출토되었다. 못 8 점 : 이 중 3 점은 부러졌다. 못은 4 稷 방추형이다. 전체 길이 13cm, 이 중 1 점은 못대가리에 은도금을 하였다(그림 6-16 d). 화살촉 12 점 : 그 중 5 점은 파편이다. 몸체 (福體)가 모두날이다. 중간 에 구멍이 하나 있다. 화살촉대는 4 稷이고 촉 부분은 방추형이다. 전체 길이는 17.2cm, 날 너비 2.6cm( 그립 6-16d, 6-19 f)이다. 대부분 묘도 내 에서 발견되었다.
®청동기 손잡이 (提手) 1 점 : 청동편과 청동고리를 연결시킨 것이다. 청동편에 못자리가 있다. 표면을 도금하였다. 못은 부러졌다(그림 6-19 a). 묘도 내에서 발견되었다. 혁대장식 4 점 : 3 식으로 나누어진다. 1 식 1 점은 꽃잎상이다. 표면에 문양이 있다. 위에는 3 점의 소형 못자리가 있다. 직물상에 부착된 못이 다. Il 식 1 점은 사각형이다. 상에는 3 개의 작은 못이 있는데 직물상에 박은 것이다. 못 뒤편에는 원형의 얇은 단추 같은 것이 있다. 가장자리 길이 1.7 -2.3 c m, 못 길이 0 . 7cm 이다(그림 6-19d). III 식 2 점은 삼각형이 며 위에 3 개의 못이 있다. 무문이다. 직변 길이 l.8 c m, 아치 높이 1.4 cm 이다(그립 6-19c). 4 점 혁대장식은 과대이다. 청동제 가는 막대기(銅製 鼻 ) 2 점 : 그 중 1 점은 부러졌다. 청동제 철사 로 만들었다. 위쪽의 꼭지는 원형이다. 직물상에 끼우는 것이다. 전체 길이 2cm 이다(그림 6-19 e). 2) 산성하 묘구 983 호 봉토석실 벽화묘 J SM983 호는 산성하 고분구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으로 70m 지점 에 通溝iiiJ가 있다. 묘의 주위 에 상당수의 소형 적석묘가 있고 좌우 에 하나씩 소형 봉토석실묘가 있다 . (1) 고분 결구 고분은 묘도, 용도, 2 개의 측실, 묘실 등으로 구성되었다. 방향은 280° 이다. 묘도는 서쪽으로 향하였는데 남겨진 길이는 180m 이다. 용도의 전체
복쪼曰
길이는 3 . 86m 이다. 위에는 상당히 거대한 4 매의 판석으로 덮었다. 용도 內口의 높이 1.2 8 m, 너비 0.88m, 外口 높이 1.5 6m, 너비 lm 이다. 용도 。超예 하나씩 측실이 있다. 측실은 용도 안쪽 입구(內口)로부터 0.76-0. 84m 의 지점에 있다. 남쪽 측실의 너비 0.70m, 깊이 0.53m, 높이 o.6 5 m 이다. 북쪽 측실 입구의 너비 0.57m, 깊이 0.50m, 높이 o.62m 이다(그림 6-20},
묘실은 직사각형이다. 동쪽벽 길이 3.2 8 m, 서쪽벽 길이 3.5 8 m, 남쪽 벽 길이 3.7 2 m, 북쪽벽 길이 3 . 76m 이다. 동벽 높이 1.54 m, 서벽 높이 1.66 m, 남북 두 벽의 높이는 1 . 55m 이다. 동, 서벽 위에 창방이 돌출되 었으며 그 길이는 15cm 이다. 側高는 18cm 이다. 묘실의 조정은 8 층부터 평탄하게 쌓아 울라갔다. 2 층의 말각쌓음 및 천장에는 거석을 덮었다. 묘바닥은 용도보다 24cm 높다. 용도 안쪽 입구에 홈이 패인 배수구 하 나가 있다. 배수구 바닥은 용도 바닥과 평탄하게 맞물려 있다. 전체 묘실, 양쪽 측실, 용도, 묘도는 모두 석축을 쌓고 의부에 백회를 발랐다. 묘실 네 벽과 조정의 백회는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기타는 상태 가 좋지 않다. 묘실의 진흙 내에서 영세한 2 인의 인골을 발견하였다. (2) 벽화 묘실 네 벽과 조정에 벽화가 보존되었다. 벽면의 백회가 더러워져서 채색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네 모서리에 몇 군데 붉은 선이 남아 있다. 평행쌓음의 조정 측면에 옆에서 본 5 잎의 연꽃이 그려졌다. 그것은 동복 쪽이 같다. 아래에서 위로 s, 4, 3, 4, 3, 4, 3 줄로 배치하였다. 연꽃은 붉은색으로 기초를 잡고 다시 검은 선으로 처리하였다. 제 8 충 평행쌓음 의 측면에는 구름무늬가 있다. 제 1 층 말각쌓음 밀의 삼각평면상에는 5 잎 의 側視 연꽃이 그려졌고, 그 좌우에는 구름무늬를 배치하였다. 그 중에 동북과 서남 제 1 층(重) 말각의 측면 중앙에 각각 하나씩 주작을 그렸고, 그 양측에 구름무늬를 그렸다. 동남쪽의 주작은 날개를 검은색으로 처리 하고 붉은색으로 주위를 그렸다. 서남쪽에 그린 주작은 주홍색으로 처리 하였다. 제 2 층(重) 말각쌓음의 바닥에 작은 연꽃을 각각 한 송이씩을 그 렸다.
(3) 부장품 토제 아궁이편 : 태토가 곱고 녹유를 발랐다. 토제 靈편 : 태토가 곱다. 녹유를 발랐고 다리형의 耳가 있다. 원형못 2 점 : 하나는 길고 하나는 짧다. 稷維 體 이다. 긴 것은 16cm, 짧은 것은 6cm 이다. 긴 못의 대가리에 은을 입혔다(그립 6-16d). 네모못 1 점 : 못의 몸은 사면체(四稷 體 )이다. 전체를 도금하였고 남겨 전 길이는 3.2cm 이다. 손잡이 달린 두 다리 못(抱手式 雙 脚針) 1 점 : 전체가 네모 난 아치형이 다. 각 못다리에 8 변형 쇠고리가 끼워져 있다(그림 6-16 e). 3) 만보정 고분구 1368 호 봉토석실 벽화묘 J WM1368 호는 만보정 고분구의 서쪽 칠성산 동쪽 산허리에 위치하고 있다. (1) 고분의 결구 봉토석실묘이다. 천장이 이미 붕괴되어 남겨진 높아는 4m 가 안 된다. 묘도, 용도, 묘실로 조성되었다(그림 6-2 1). 방향은 194° 이다. 용도의 길 이 l.Bm , 너비 o.5 5 m 정도, 3 매의 판석으로 천장을 처리하였다. 용도 외부 입구는 비교적 넓다. 좌우에 돌을 쌓아 담을 만들었는데 1.4 5m 의 부로 펼쳐져서 묘도를 만들었다. 묘실은 직사각형이다. 남북 길이 약 3.20m, 동서 너비 2 .4 4m 이다. 네 벽이 안쪽으로 경사되었는데 위로 울라가면서 갑자기 좁혀진다. 4 각이 완만하게 孤形울 이루게 하고 그 위에 천장석을 울려놓았다. 그것은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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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四阿式(지상에 4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건물을 울려놓는 방법) 조정을 이 루었다. 묘실 높이 3,20m, 묘실 네 벽 및 묘바닥에 백회를 발랐다. 묘 실 서쪽에 석재를 쌓아 직사각형의 관대를 만들었다. 그 북서 양면은 북 벽, 서벽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의 남북 길이 2.4 3 m, 동서 너바 1.45 m, 높이 o .4 om 이다. 그 표면에 백회를 발랐다. 아궁이는 직사각형이다. 길 이 Lorn, 너바 0.31-0.36m, 높이 o . 19m 이다. 그 남쪽 끝에 아궁이臺를 만들고 그 대 정가운데에 아궁이 입구를 만들었으며 서쪽에는 아궁이 문 을 만들었다(그립 6-22). 묘실 네 벽 상부에 모두 못자리가 있다. 북벽에 9 개가 있는데 그 간격 은 일정하지 않다. 서벽 6 개의 간격은 0.32-0.62m 이다. 동북에는 두 개 가 있다. 모두 북쪽에 편중되었고 간격은 o . 52m 이다. 남벽에는 네 개가 있는데 그 간격은 0 .4 9-0.69m 이다. 못의 위쪽은 휘어졌다. 그 용도는 휘 장용일 것으로 보고 있다.
(2) 벽화 묘벽 및 조정의 벽면상에 간단히 혹선으로 대들보(梁架)를 그렸다. 혹 색 기둥이 8 개인데 네 개는 각 모서리에 한 개를 제의하고는 동, 서, 복 세 벽의 한가운데에 기둥 하나씩을 그렸다. 유일하게 남벽 정중앙의 기 둥은 동쪽에 편중되었다. 기둥상에 흑색의 대들보를 울려놓고 기둥과 대 들보의 연결부분에는 2 층의 雀으로 대치하였다. 기둥 너바 o:14m, 기둥 높이는 1. 75m 이다. 대들보 너비는 0.13-0.lSm 이다. 대들보 위의 조정 네 모퉁이 및 벽면에 대들보와 기둥을 그렸다. 그 너비는 0 . 10m 이고 동, 서, 북 삼면의 대들보와 기둥은 공교롭게 네 벽의 기등상에 있다. 유일 하게 남벽은 대들보와 기둥이 엇갈려 있다. 이러한 흑색으로 처리된 창 방의 세움은 通溝 고분의 벽화 중 드문 일이다. 관대 가장자리에 o . o6-0.09cm 의 흑색을 칠하였다. 그 동벽 남부에서 남단의 사이 o.64m 지점에 흑색의 기둥이 있으며 그 너비는 0.10m 이다. 4) 맺는 말 상기한 3 기 고분은 비록 심하게 파괴당하였지만 벽화 잔존부분 및 묘 실 결구는 고구려 봉토석실묘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여 주었다. 특히 M1368 호 고분의 간단한 나무 결구의 벽화내용, 흑색으로 처리된 대들보의 立柱 및 M332 主室 네 벽에 처리된 바단 직조의 무늬와 王字 도안 등은 모두 봉토석실묘 벽화 중에서 보이는 작품이다. 3 기 벽화고분의 형제, 내용, 회화작품 및 출토 유물과 이미 발견된 벽 화고분과 비교하면 이 3 기 고분의 연대는 다음과 같이 추정될 수 있다. M332 의 묘실 조정은 9 층의 평행쌓음, 죽 四阿式이다. 네 벽에 그린 구름무늬, 王字, 비단짜기 등은 한국 籠神塚 前室, 籠室 正壁에 그린 구
름문양, 王字, 비단짜기 도안 및 集安 黃柏公社 장천 2 호분 측실 네 벽 에 그린 것과 대단히 유사하다. 말 타고 활 쏘는 그림은 용도 양벽의 것 보다 다음 단계에 이른다. 그리고 묘실 네 벽을 인물, 풍속화 주제로 한 것에 비하면 시기가 늦으나 사신도보다는 이르다. 그것은 양자 사이의 중간이다. 이 고분 결구와 용도 양벽에 그린 말 타고 활 쏘는 그림, 품 격 등은 通溝 12 호 및 그 복실에 그린 말 타고 활 쏘는 그립과 같다. 상 대연대는 4 세기 말엽이다. M938 의 평행쌓음으로 안쪽으로 축소된 조정 상부에 이중말각이 출현 되고 사신도가 그려졌다. 그러나 주요 부분은 通溝 삼실묘의 것과 같다. 동시에 이 고분에서 유약 바른 토기가 출토된다. 그것의 상대연대는 M332 의 것보다 늦다. 通溝 삼실묘와 동시대로 본다. M1368 평면은 중국칼형이며 조정은 사아식이다. 벽화는 흑색으로 단 순한 대들보, 기둥 세운 것을 그렸고, 돌로 만들고 그 위에 백회를 바른 아궁이를 명기로 부장하였다. 모두 초기의 작품이다. 그의 상대연대는 M332 호보다 이르다. 대략 3 세기 중엽에서 4 세기 중엽에 이른다. 集安 초기 벽화묘에 해당된다. 3 기 고분의 결구는 대단히 정제되었다. 당시 건축의 발전수준을 반영 한다. M332 출토의 四耳蓋 도금장식품 및 M983 출토의 유색도기의 입 장에서 보면 당시 공예수준도 일정한 수준에 있었다. M983 호 고분은 그 건축규모와 벽화에 따르면 고구려 귀족계층의 고분이다. M1368 호의 규 모는 전자 2 기보다 작고 벽화도 간단하며 돌로 만들고 백회를 바른 아궁 이를 명기로 부장하였다. 신분이 전자 2 기보다 낮다. 종합하면 상기한 3 기 봉토석실묘의 발견은 集安 고구려 벽화고분에 대 한 새로운 유형을 증가시켰다. 그것들은 또한 고구려 벽화예술과 벽화고 분의 편년 등의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여 줄 것이다.
4 통구 12 호분 集安通溝 제 12 호 벽화고분은 〈 馬檀塚 〉 이라고 부른다. 〈마조총 〉 의 명 칭은 고분 내의 마구간 그립으로 인해 얻어진 것이다. 이 고분은 일찍이 1939 년 6 월 일본인 黑田源 ::k 에 의해서 발굴되었는데, 그가 발굴한 후에 간단한 소개를 하였을 뿐 아직까지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고, 벽화는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이미 대 단히 파괴 되 었다. 1949 년 이후에 集安縣 문화주관부문은 이 고분을 비공개로 보존하고 있다. 1962 년 봄에 吉林省 박물관 集安 고고조사반은 通溝 지역을 조사하는 도중에 이 12 호 고분을 발굴, 설측하였고, 동시에 集安縣 문물관리소에서 이 고분을 수리하였 다. 발굴결과는 다음과 갇다. 5) 고분은 通溝평야 중부 禹山 남쪽의 언덕 위에 있으며, 남쪽에 철로가 있고, 철로를 지나서 약 46om 지점에 오회분 4, 5 호가 있다. 부근에 적 지 않은 고구려 시대의 봉토분과 방단적석묘가 있는데, 그 크기가 모두 제 12 호보다 작다. 북면에 4 기의 봉토분이 인접되어 있는데 그 크기가 모 두 제 12 호보다 작다. 북면의 4 기의 봉토분은 이 12 호 무덤과 한길 직선 으로 놓여 있고, 북쪽으로 2 기의 고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산연화총〉 이다. 그 동쪽에 세로로 소형 고분 3 기가 있어 마치 이 12 호 고분을 둘 러싼 것 같다. 서방과 남방에 각각 1 기의 방단적석묘가 있고 서남에 1 기 의 봉토묘가 있다. 제 12 호 무덤의 봉토는 황색 점토이며, 현고 4.6m, 주위 길이 90 여 m, 의부에서 보면 원래 철두방추형이다. 봉토 아래 주위에 모두 9 개의 거석 울 둘러 놓았는데 그 대소 크기가 모두 lmXlm 정도로서 마치 〈장군 총〉, 〈태왕릉〉의 호석과 같다. 묘문은 서남 방향으로 되어 있고, 오늘날 은 돌과 시멘트로 포장하여 넓은 길을 만들어 놓았다.
1) 묘실 결구 묘는 남 • 북 2 실로 나뉘고, 각각 묘문과 용도를 가지고 있다(그립 6- 23) . 용도는 상호 평 행 이며 방향은 240° 이다. 묘실은 모두 사각형 이다. 묘실 규모는 상당히 크고, 결구는 비교적 좋으며 묘정은 궁륭식으로 되 어 있고, 용도 남측 양측에 각각 籠室이 있다. 복실은 비교적 협소하고, 천장은 四阿式(네 기등식 건물형식)으로 되어 있다(그림 6-24). 이곳에서 는 용도의 북벽에만 하나의 감실이 있다. 남북 묘실 모두 크기가 일정하 지 않은 석재로 쌓고, 안에는 석회를 발랐다. 이 석회 표면에 광택을 내 고 오래 유지하기 위해 아교 물질을 발랐다(그림 6-25, 6-26). (1) 남실 남실의 후벽 길이는 3.4 8 m, 좌벽 길이는 3.5 2 m, 우벽 길이는 3.54m, 전벽 전체 길이는 3 .4 7m 이다. 전벽 중에 용도가 뚫렸는데 그 북쪽 길이 가 1.2 m, 남쪽 길이가 1.2 4m 이다. 남벽 좌단 윗모서리에 파괴된 한 구 멍이 있다. 내 벽의 높이 1. 72m 이고 안쪽으로 약간 경사되었다. 창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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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개 쌓았는데 이 창방이 평행으로 13 층이나 쌓여졌다. 그리고 그 최상 에 돌을 덮은 궁륭식 조정이다(그립 6-25). 높이는 3 .4 8m 이다. 조정으로 쌓은 제 3 층 11 층의 네 모서리에 작은 말각석을 울려놓았다. 묘정 조정상 의 석회가 거의 박락되어 석재가 보인다. 묘정을 좌우에 두 개의 거석으 로 붙여 놓고 그 사이를 봉하였다. 다시 말하면, 표면과 봉합점 사이를 1-2cm 두께의 석회로 발랐다. 관의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 용도 저부가 묘실보다 약간 낮다. 그 이유는 만주국 시대에 그 서단에 있는 묘문을 수리하여 원래의 길이는 추정할 수 없다. 지금 나머지의 길 이는 3.1 8 m, 너비는 1.3 m, 높이는 1.58m 이며 頂部 석회가 대부분 떨어 져서 앞뒤 3 개의 거석을 맞붙여 놓은 것을 볼 수 있으며, 그 사이의 봉 합점에 상당한 간격이 있다. 용도 중부에 남북 상대적으로 감실이 있고 감실 3 벽은 안으로 기울었으며 저부가 파괴당하여 돌바닥과 거의 수평이 다 . 남쪽 감실의 깊이 0.9 3 m, 너비 0.9m, 높이 1. 35m 인데, 부장품을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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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장소로 추측된다. 용도 내부가 묘실과 연접된 곳에 세로로 1 매석의 門艦(문 난간)을 놓 았다. 세로 길이 lm, 두께 0.14m, 묘바닥으로부터 높이가 0.01m 아다. 의부 가까이 용도 양벽에는 원래 문확울 안치한 흔적이 있다. (2) 북실 결구는 대체적으로 남실과 같다. 묘실 후벽의 길이 2.97m, 좌우 양벽 의 길이 2.9 4 m, 벽 전체의 길이 2.66m, 용도 가운데는 좁고, 북단의 길 이 0.98m, 남단의 길이 0.94m 이다. 서벽의 길이는 1. 72m 로 약간 안으로 기울었다. 그 상면에 석회 벽면이 쌓여졌는데 반원의 경사를 이루며 약 간 안으로 좁혀졌고, 최후로 뚜껑돌을 덮어 사아식의 조정을 이루었다. 그 높이는 3.04m 이다. 사아식 조정의 네 모서리에는 위에 하나, 아래 하나씩 각 2 개의 소말각으로 결구되었다(다만 남면 서단의 구멍이 뚫려 서 남 모서리의 말각은 보이지 않는다). 하층 말각에서 묘바닥까지의 거리는 1.1 s-2.24m 이며, 상층 말각에서 묘바닥까지의 거리는 2.7m 이다. 묘바닥 의 석회면은 잘 보존되어 있으나 그곳의 관대는 보이지 않는다. 용도에 다론 하나의 묘문을 세워서 원래의 길이를 실측할 수 없다. 현재의 남은 길이가 2.4 m , 너비 1.0 8 m, 높이 1.5 4m 이며, 저부 및 정부의 모두 대판 석을 편평하게 놓고 그 위에 석회를 발랐다. 용도 북벽 중에 하나의 감 실이 있는데 그 너비가 0.98m, 깊이 1.3 m, 높이 1. lm 이며, 3 벽이 안으 로 기울었고, 원래의 저부가 용도보다 높으며, 저부 바닥에 돌을 깔고, 상연에 회를 발랐다. 남실과 갇은데 일찍이 파손되었다. 제 12 호 무덤의 결구는 지면에서 벽체를 쌓고, 정상에 이르러 작은 말 각석과 뚜껑돌을 올려놓은 과정으로 구축되었다. 이러한 조형은 기본상 橫直相交의 線條이며, 다만 북쪽의 방만 소수 사선과 곡선이 있다. 그래 서 전체 건축이 상당히 간단한데 충서만이 크게 고정되었다.
2) 벽화 12 호 고분 묘실, 감실 및 용도 벽에 모두 벽화가 있다. 벽화는 朱, 白, 赤, 黑, 綠 등의 색으로 직접 하얀 회벽 위에 그렸다. 대부분 이미 박락되어 모호하다. 다만, 나머지 그림이 판별되었는데 그것은 夫婦 對 坐한 것, 전두, 수렵, 舞樂 마구간, 마차행렬, 그림 그리는 장면, 마구 간의 취사도구 등의 장면으로, 선이 뚜렷하고 색채가 풍부하며 형상이 분명하여 集安 通溝지구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중요한 고구 려 인물풍속벽화이다. (1) 남실 벽화 남실 후벽의 전체 벽에 하나의 지붕을 그렸는데 치미가 용마루 위에 있고 청기와를 덮었다(그립 6-27). 집처마의 회색 혹선과 흰 바탕의 붉은 선 사이에 휘장이 그려져 있고 그곳에 실로 된 붉은 휘장띠가 달렸다. 지붕 양측 바깥쪽에 좌우 측면이 그려져 있고, 측면 아래 지붕이 있는 문루가 있다. 그 좌측 하층의 좌변에 문고리가 달린 문이 있으며 그 위 에는 치미식의 四坡水瓦가 있다. 상충에는 붉은색의 기둥두공 위에 노란 색 창방울 놓았으며 그 창방 위를 낙티봉처럼 만들고 그 위에 계속하여
그림 6-27 통구 12 호 남실 후벽 집의 그림 -
연꽃잎돈이 있다. 이것이 또한 용마루 밀의 암키와와 닿고 있다. 우측 하층 문루의 3 門이 나뉘어져 있는데, 좌측에 측문이 있고, 각각에 문고 리가 있으며 중간에 두 개의 붉은색 기둥을 세웠다. 왼쪽 것에는 그릇 형태의 노두가 있고 그 위에 노란색의 사방격문이 그려진 도창방이 이어 졌고, 兩坡 7k 의 푸른색 기와로 지붕을 덮었다. 상충 중부는 벽면의 1/2 넓이에 붉은색 柱斗를 그렸다. 동시에 명판상의 방향이 좌우로 돌출된 兩根이 대단히 가는 花陸이 있으며, 그 위에 雀替式의 산두(散斗, 두공 명칭)를 놓고, 창방을 받쳤다. 지붕 내에 부부대좌도를 그렸다. 왼쪽 장방의 작은 평상에 앉아 있는 남자는 왼손으로 평상을 만지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놓고 있다. 붉은 입술에 수염을 길렀고, 하얀 방책을 쓰고 목둘레선이 넓은 옷싶의 백색 상의를 입고, 허리띠를 매고 아래는 회색 흑점의 통꽃바지를 입고, 오른 쪽 다리는 무릎을 꿇고, 왼쪽 다리는 뻗었다. 여자는 오른쪽에 있는데, 뺨에 둥근 연지가 있고 무릎울 꿇고 두 손을 모았으며 머리에는 백색 건 괵울 쓰고 몸에는 목둘레선이 넓고 옷소매가 넓은 옷싶의 백색 치마를 입었다. 목둘레선과 소매 및 옷싶 주위에는 붉고 검은 색의 꽃잎이 있 고, 치마 뒷자락에는 상당히 넓은 화변이 있다. 남주인 뒤에 1 인의 노복이 그려져 있다. 수염이 났고 오른손을 허리에 대고, 왼손에 백색 수건을 들고 있는데, 시중 드는 모습이다. 벽화 좌단 집 바깥면에 오른쪽으로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3 인이 있다. 모두 짧은 바지를 입고 옷소매는 걷어 올려 팔뚝울 노출시키고 있다. 좌우 두 사람 은 녹색 黑點花 저고리, 노란색 바지를 입고 있다. 왼쪽에 있는 사람만 이 얼굴 생김새를 알아볼 수 있는데 큰 이마와 큰 눈을 가졌다. 집 우측 양쪽에 한 사람의 시녀를 그렸다. 왼쪽을 향한 채, 오른손에 안이 붉은 큰 그릇을 받쳐 들고 있는데, 머리를 잘 빗었고, 뺨에는 홍색 둥근 연지 를 칠했으며, 하얀 바탕의 붉은 점의 소매가 넓은 옷싶의 꽃치마를 입었 는데 치마 뒷자락에는 한 줄의 넓은 띠를 둘렀다. 벽면 우단 집 밖에 한
사람의 시녀가 왼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어떤 물건을 안에 있는 사람에 게 건네 주는 모습이다. 하얀색 건괵울 쓰고, 뺨에는 연지롤 바르고, 홍 색 흑점의 소매가 넓은 옷싶의 꽃치마를 입었다. 집 위쪽에 붉고 검은색이 교차된 연꽃이 일곱 송이 있는데 꽃술에 둥 근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속에 쇠녹의 혼적이 있다. 좌우 양벽에 그려진 마차 행렬도(禮輩圖)는 대부분 이미 박락되었다. 우측 벽 가운데에 아직 하나의 車輩울 볼 수 있다. 이 마차는 붉은색의 아치형 덮개, 검은색의 바퀴로서 바퀴가 상당히 높고, 황색 저고리와 녹 색 바지를 입은 시동이 마차를 끌고 동쪽으로 가는· 모습과 마차의 멍에 측면에 1 인이 녹색 저고리에 황색 바지를 입고 있는데 상당히 모호하다. 마차 앞에 3 인이 있는데 모두 시중 드는 사람이다. 맨 앞사람은 남자인 데 녹색 저고리와 노란 무늬의 바지를 입었고, 그 의에는 잘 보이지 않 는다. 좌측 벽 좌단에 1 인의 남자 하인이 있는데 얼굴은 동쪽을 향하고 노란 색 저고리에 푸른색 바지를 입었고, 두 손에 마차의 멍에를 잡고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멍에 우측에 또한 녹색 저고리에 노란색 바지를 입은 남 자 시자가 있다. 마차는 흑색 바퀴를 가졌고, 붉은색의 완만히 굽은 마 차덮개 (優孤曲蓋)를 갖추었는데 붉은 선으로 마차 칸울 연결하여 그렸다. 2 인의 시녀가 마차 뒤를 따르고 있는데 검은색에 녹색의 옷깃울 단 노란 색의 꽃무늬의 치마를 입었다. 그 뒤에 4 인의 시녀가 확인되는데 앞의 3 인은 치마를 입었고, 그 중에 앞선 자가 우산울 들고 두번째 사람은 혹 색의 方盆울 손에 들었으며 그 의 나머지는 판별이 어렵다(그립 6-28 a). 좌우 벽에 동일한 내용이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남자 하인과 시녀가 마차를 끌고 묘주인에게 예물을 운송하러 가는 장면이다. 전실 묘실 문의 양측에 舞樂圓와 문 지키는 개가 그려져 있다. 묘실 우측 벽 상부에 노란 저고리와 푸른색 바지를 입은 1 인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있다. 양팔을 평행하게 앞으로 내밀고 긴 옷소매를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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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뜨렸으며, 몸을 약간 앞으로 구부린 채 왼발은 땅을 딛고, 오른쪽 발 은 약간 앞으로 쳐들고 춤추는 모습인데 상당히 아름답다. 춤추는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琴을 쳐서 반주를 하는 사람의 얼굴은 박락되어 모호하다 (그립 6-28 d, e ) . 그 하부에 문 지키는 검은색 개를 한 마리 그렸는데 머리는 용도를 향 하고 고개를 쳐들며 귀를 세우고 엎드려 앉은 모습이다. 묘문 좌측의 상부에 1 인이 춤을 추는 장면이 있다. 붉은색 저고리에 푸른 바지를 입고 왼팔을 평행하게 옆으로 들고 오른쪽 팔꿈치를 쳐들고 굽혀서 가슴 앞에 대고 있다. 긴 소매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두 발은 땅 울 밟고, 오른쪽 발은 약간 앞으로 내놓고 엉덩이를 혼들고 있다. 그의 오른쪽에도 한 사람이 긴 치마를 입고 있는데 판별이 어렵다(그림 6-28 c). 그 하부에 또 한 마리의 황색 수문 개가 있는데 머리가 용도 방향으 로 향하여 검은 개와 바로 대칭이 된다. 용도의 우측 감실의 후벽과 좌벽에 마구간을 그렸다(그림 6-28f ). 마 구간은 상당히 정교하여 청기와를 덮었고, 용마루에 치미를 울린 붉은 기둥과 붉은 창방울 가진 건물이다. 마구간 내에 노란 구유를 세로로 놓 았으며, 거기에 홍색, 황색, 청색의 세 마리 말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마구간의 처마와 붉은 기둥과 창방이 한 직선으로 후벽에서 좌벽으로 연 결되어 있다. 좌벽 위에 또한 청색 안장이 그려져 있다. 그 우벽에 벽화 가 약간 남아 있는데 그것은 붉은 저고리를 입은 사람의 상부와 머리끝 의 상투이다. 아마 마구간과 관계 있는 사람인 듯하다. 용도 좌측 감실의 뒤쪽 벽에 그립 그리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립 그리는 사람은 오른쪽에 있으며 머리에 황색 방책을 쓰고 얼굴은 여위고 체격은 크며 수염이 약간 있고, 옷깃이 있는 녹색 저고리에 노란 바지를 입고 소매와 허리를 졸라매고, 오른손에 봇을 들고 그림을 그리 는 모습이다. 화가 앞에 시녀가 한 사람 있는데 노란색의 꽃치마를 입고 머리를 높이 올렸다. 시녀의 전면에 몇 가지 물건이 탁자 위에 놓여 있
는데, 손잡아가 있는 몇 개의 잔이라고 추측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우 측 벽에 집이 하나 있다. 청기와에 붉은 난간과 기둥이 대부분인데 박락 되었다. 전면에 취사도구로 추정되는 두 가지 기물이 있다. 용도 양벽에 수렵도가 있다. 우측 벽에는 청홍색으로 높은 산이 있고 산아래에 한 사람이 밤색의 말을 타고 있는 그립이다. 말머리는 서쪽을 향하였고, 말을 탄 사람은 화살통을 메고, 활에 화살을 메긴 채 말을 달 리는 모습이다(그립 6-28g , 6-2 9 ). 좌측 벽 상부에 커다란 나무가 한 그 루 있는데 붉은 자색의 동체에 초록색 잎을 대단히 거칠게 그렸고, 나무 앞에는 황색의 저고리와 바지를 입은 사람이 둘 있다. 앞의 사람은 몸을 앞으로 숙이고 한 다리를 전면에 내어 놓고 한 다리는 약간 앞으로 구부 려서 곧 활을 쏠 듯한 모습을 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뒤에서 그를 따 르고있다. 수렵도의 대부분은 박락되었으며 묘주인이 생전에 말을 타고 수렵하는 장면을 그린 듯하다. 제 1 굉돌의 창방에는 다이아몬드 형태의 구름무늬를 그렸다. 주홍색 바 탕에 검은색과 노란색의 선으로 처리하였는데 상당히 많은 부분이 모호 하다. 조정 위의 각총에 모두 앙련도를 그렸는데, 그 꽃잎은 9 개의 잎으 로 붉은색과 검은색을 섞어 그렸다. 묘실 4 벽 상부에 각각 6-7 송이의 연 꽃을 그렸다. 주로 붉은색과 검은색을 섞어 처리하였으며 황색 꽃도 있다. 묘실 네 모서리에 나무 결구가 그려졌다. 붉은 기둥 두공이 있고, 기
그림 6-29 동구 12 호분 수렵도
둥상에 검은색, 노란색 선으로 구름무늬를 그렸다. 조정의 네 모서리에 역시 같은 양식의 붉은 기둥이 있는데 그것이 뚜껑돌까지 이르고 있다. (2) 북실 벽화 후벽의 부부대좌도는 이미 대부분이 박락되었다. 벽면 남단에 한 부인 상이 있는데 얼굴은 북쪽을 향하고 무릎을 꿇었으며, 꽃치마를 입고 있 다. 부인 뒤에 한 사람의 시녀가 노란색 치마를 입고 있다. 남지는· 이미 상당히 박락되었다. 북단 하단에 3 인의 시중 드는 남자가 있는데 머리는 남향을 하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있다. 왼쪽에서 시작하여 오른쪽으로 맨 앞사람은 노란 바지에 회색 저고리, 중간 사람이 회색 바지에 노란 저고리를 입고 맨 끝 사람이 노란 바지에 회색 저고리를 입었다. 우측 벽에 있는 수렵도는 대부분 분명하지 않다. 벽화 중앙에 옷깃아 있는 붉은 가죽 갑옷을 입은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산림 속으로 달아나 는 사슴을 활로 겨냥하고 있다. 사슴은 세 마리이고 모두 동쪽을 향하여 달아나고 있다. 앞에 달아나는 두 마리는 암놈과 수놈인데 수놈이 화살 을 맞았다. 뒤의 한 마리는 네 다리와 꼬리만 보일 뿐이다. 다른 1 인이 앞사람의 뒤에 있는데 그는 하얀 갑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활을 쏘면서 사냥을 한다. 그 밖에 홍색과 흑색의 나뭇가지가 있고, 그 가지 위의 새집에 작은 새가 있다. 우측 벽 왼쪽 아랫모서리에 치마를 입은 여인이 있고 오른쪽 아랫모서리에 한 사람의 시중 드는 남자가 안장을 갖춘 말을 끌고 있다. 좌측 벽에 전두도가 있으나 이미 박락되어 분명하지 않다. 좌측 벽 하 단의 무사는 머리에 두구를 쓰고 있는데 주로 홍색이며, 얼굴에 수염이 있어 태도가 당당하며 몸에 물고기비늘 갑옷을 입고 노란 말을 한 마리 끌고 있다. 이 무사는 왼손으로 포로를 잡고 오른손으로 칼을 높이 쳐들 고 있는데 곧 포로를 참살하려는 장면으로 무사의 위엄을 나타내어 준다
(그림 6-28b, 6-30). 좌측 벽 중단에 말을 탄 무사가 있다. 손에 창을 둘 고 머리에 두구를 썼으며, 붉은색 수식을 달았고 얼굴은 박락되었다. 물 고기비늘 갑옷을 입었고 얼굴은 오른쪽으로 향하고 말을 질주하여 곧 전 투에 임할 듯한 태도이며, 손에 들린 공 같은 것이 매달린 깃대는 말안 장 쪽으로 휘날리고 있다. 기마 무사 앞에 3 인이 더 있으나 형상을 구분 할수없다. 전벽 좌측 하부에 개가 머리를 용도 방향에 대고 엎드려 있는데 형상 이 분명하지 않다 . 용도 좌측 감실의 뒤쪽 벽과 우측 벽에 취사도구 그림이 있다. 알아보 기 대단히 어려운 두 가지 물건이다. 아래의 것은 斗狀같고 물고기형 손잡이가 달린 청회색의 뚜껑이 덮여 있다. 또 한 점은 하부가 불을 땔 수 있는 기구로 아마 음식을 삶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묘실 네 벽 위에 쌓여진 아래 연목에 대들보를 그렸고, 그 위에 다이 아몬드형 구름을 그렸는데 주홍 바탕에 흑색 선을 처리하였다. 조정 위 에 3 중의 연꽃 도안을 그렸다(그립 6- 3 1). 제 1 굉돌 네 모서리에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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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 6-31 동구 12 호분 조정의
내려온 2 개의 청회색 연잎이 있고, 중간에 붉은색 앙련이 한 송이 있으 며, 그 꽃잎은 시들고 중간에 각각 꽃봉오리의 청 • 흑색의 연잎이 있다. 제 2 중석 네 모서리의 중앙에 꽃봉오리가 매달린 연잎이 있다. 제 3 중석에 있는 연꽃 • 연잎의 도안은 이미 박락되어 분명하지 않다. 3) 맺는 말 CD 12 호 고분은 쌍실의 결구로 각각 묘문이 있고, 남북 2 실에 각각 부 부대좌도가 있다. 이를 보면, 이 고분은 2 인의 묘주인의 무덤이라고 볼 수 있다. 2 인의 묘주인은 한 봉토 고분에 동시에 매장되었는데 이러한 것은 일종의 族葬制度를 반영하여 주고 있다. ® 묘주인은 고구려의 대귀족이다. 묘의 결구가 근엄하고 건축의 배치 가 정돈되었으며, 화려한 묘실과 풍부한 색채, 형상이 생동하는 벽화가 있는 것 등으로 보아서 어떠한 생활을 하였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 12 호 고분의 벽화내용은 대부분 실제생활을 묘사한 것이다. 채색을 평범하게 처리하고 흑선을 사용하였는데 선이 명백하고 간단하며 세련되 어 곧 고구려 벽화의 성숙한 표현을 나타내 주고 있다. ® 12 호 고분의 결구와 벽화내용에서 보면 무용총, 각저총, 삼실묘와 기본적으로 같고 시간 차이도 그리 크지 않다• 기초적인 관찰에 의하면,
12 호 고분은 무용총과 각저총보다 늦고 삼실묘보다 이론 것으로, 절대연 대가 약 5 세기에 해당된다고 보고 있다. @ 12 호 고분은 고구려 사회사의 많은 자료, 죽 고구려의 건축, 복식, 마차, 사회생활 등 각 방면에 대한 연구자료를 제시하여 주고 있다. 중 71 5 장천 1 호분 長川은 압록강 중, 상류 右岸의 충적분지에 있다. 그곳은 集安縣城으 로부터 동북 방향으로 약 45 리의 지점이다. 분지의 3 면은 산으로 둘러싸 여 있다. 남쪽은 압록강, 동서의 길이가 3 리, 남북 너비가 2 리이다. 강 둑과 산등성이 사이에 1 급 계지와 완만한 2 급 계지가 전개되어 있다. 계 지의 높이 차이는 20m 이다. 분지의 偏西쪽 끝과 중앙에는 각각 하나씩 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있다. 서쪽 끝에 치우친 넓은 하천을 乾溝라고 부르며, 중앙에 있는 좁은 하천을 后林子溝라고 부른다. 長川 고분군의 고구려 고분은 주로 乾溝 西岸의 1 급 계지상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2 급 계지상의 고분의 수량은 많지 않아 드문드문 분포되었으나 체형이 거대 하여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장천 1 호분은 2 급 계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장천 고분군 중 가 장 높은 2 개 봉토무덤 중의 하나이다. 그 서쪽을 격하여 后林子溝와 대 치되어 있다. 그곳에는 形制가 더욱 큰 봉토묘 장천 2 호분이 있다. 이 두 고분 사이의 거리는 173m 이며 모두 벽화가 있고 또한 동북쪽으로 멀 지 않은 곳에 1 기의 작은 고분이 있다.
1970 년 6 월 장천 1 호분의 봉토가 유실되어 묘문이 노출되고 흙탕물이 묘실로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고분의 파손을 방지하기 위하여 같은 해 8 월 吉林省 박물관은 吉林省 문물보관소와 함께 이 고분을 발굴하였다. 고분 의 기본정황은 다음과 같다 .6) 1) 묘실 결구 장천 1 호분은 1 기 봉토의 石築雙室墓이다. 봉토가 截頭方維形(끝이 잘 린 방추형)이며 높이 6m, 주위 길이 88 . 80m 이다. 고분은 묘도, 전실, 용도와 후실 등 몇 개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가공된 큰 괴석으로 구축하 고 표면(묘의 밑바닥 포함)은 백회를 발랐다. 표피가 박락된 곳을 보게 되면 윤택의 표충이 밑에 있으며 석벽의 틈새와 석재의 [!!)부분에는 곡식 의 겨가 혼합된 석회로 메웠다. 후실 내에서 稽臺가 있으며 용도 후단에 열 수 있는 석문이 있다. 묘도 입구를 봉한 돌담이 있다(그림 6-32), 이 고분은 일찍이 도굴당하였다. 도굴 구멍은 묘도 입구를 봉한 위쪽 에 있었다. 고분 내에서는 전실 서남쪽 구석에 사람의 다리뼈 조각과 후 실의 남쪽 관대상에 소나무관 조각 의에 모든 부장 유물은 도난당하였고 석문도 파괴당하였다. 木稽 표면상에 麻布가 있으며 그 위에 흑색의 옻 칠을 하였고 동시에 붉은색 옻칠 선으로 꽃무늬를 그렸다. 관의 잔편상 에 두 줄의 문양이 있다. 평행으로 배열된 것으로 보아 연속도안으로 처 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옆에서 본(側視한) 연꽃과 연잎을 삽입하였다. 문양은 대단히 아름답다. 묘도는 길이 1.4o m, 너비 1.53 m, 높이 1. 90m 이다. 방향은 255° 이다. 바닥에는 네모 반듯한 돌을 깔았다. 좌우 양벽에 백회를 발랐는데 그것 둘은 박락되었고, 다만 돌을 쌓아 만든 담만 보일 뿐이다. 정상에는 하 나의 長方巨石울 덮었다. 묘도 입구를 2 중의 돌로 봉쇄하고 그 사이룰
쇄석과 회반죽으로 메워 대단히 견고하다. 묘도 안끝을 전실 입구에 가 까이 대었다. 장대석의 돌을 쌓아 문지방(門監 문난간)을 만들었다. 그 너비 19cm, 밑바닥에서 높이 2cm 이다. 문지방 위쪽의 묘도 양벽에 또 한 門椎(문틀)의 잔적이 남아 있다. 원래 나무로 만들고 백회를 발랐다. 너비 16cm 이다. 전실은 직사각형으로 들어가는 깊이가 2.37m, 너비 2.90m, 높이 3.35 m 이다. 네 벽이 약간 안으로 축소되었다. 위쪽에 붉은 단선으로 격자(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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格) 형태를 그렸고 천장(J貢部) 溪井은 구분되었다. 전체 높이는 1.8 9m 이다. 서벽은 한가운데가 묘도와 통하게 되었다. 동벽 한가운데에 용도 가 있으며 그곳은 후실과 통하게 되어 있다. 네 벽 위에서 정돈되고 서서히 변화되면서 조정을 만들었다. 결구의 입장에 따르면 조정은 여섯번째 頂石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세 번의 小株角石으로 지탱되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전실 벽면과 평행선을 이루 고 있다. 첫번째 정석은 네 벽을 따라서 그 위쪽에 평면으로 울려놓았으 며 동시에 네 귀퉁이에 말각석을 놓았다. 그래서 위로 올려다보면 截角 의 사각형이 된다. 두번째 정석은 첫번째 정석 위에 울려놓았다. 올려다 보면 사각형이다. 세번째 정석은 두번째 정석을 따라서 그 위에 올려놓 았다. 동시에 네 귀퉁이에 말각을 울려놓았다. 울려다보면 절각의 사각 형이다. 네번째, 다섯번째 정석의 作法은 두번째, 세번째 정석을 쌓은 것과 같다. 여섯번째 정석은 다섯번째 정석 위에 올려놓았다. 올려다보 면 사각형이다. 그리고 그 위에 뚜껑돌을 울려놓아 마지막으로 봉하였 다. 첫번째, 세번째, 다섯번째 정석은 모두 단순하게 벽면을 따라 쌓아 서 稷角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조정의 쌓음이 비록 여러 충이지만 의 형상 대단히 간결하다. 그러나 네 귀퉁이의 소말각이 일종의 조절역할을 해서 결구상의 단조로움을 면하게 해 준다. 반대로 전체 조정의 쌓음 증 가를 율동감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 의 조정 정석은 울라가면서 안쪽으 로 좁혀진다. 고도의 기본을 고려한 것은 아래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체 감된다. 그것은 평행으로 쌓아가면서 각 측면이 순서에 따라서 축소되어 갔다. 이러한 作法은 시각효과를 증가시키고 전체 조정을 세로 깊이의 공간감을 확대시켜 주었다. 용도는 길이 1.1 2m, 너비 1.3 4m, 높이 1. 62m 이다. 후실 一端에 접근 시켜 의부로 열 수 있는 돌문을 만들었다. 긴 돌을 깔아 문지방울 만들 었고 후실 서벽 측면에 구멍을 뚫어 문처마 및 문틀을 만들었는데 그것 둘은 각각 28cm 이다. 문지방과 문미(門上橫梁)는 벽면으로 8cm 솟아 있
다. 그리고 좌우 문광은 벽면 방향으로 8cm 솟아 있다. 문미 바깥의 용 도 천장을 덮은 蓋 石에 좌우 각각으로 하나의 安門의 樞席(돌쩌귀)을 뚫 었다. 그 지름은 11. 5 cm, 깊이는 10cm 이다. 2 개의 돌문은 청회색의 석 회암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표면에 백희를 발랐다. 그 남쪽문(南扇)은 파손되어 바닥이 절단된 채로 남아 있었다. 북쪽 문은 위쪽이 약간 파손 되었다. 남아 있는 문의 높이는 1.3 0m, 너비는 0.62m, 두께는 0 . 08m 이 다. 그 중앙에 손잡이(고리) 구멍이 있다• 아랫모서리에 둥근 기등형 구 멍을 뚫었다. 그 호추 아래에는 직사각형 철편을 부착하였다. 후실은 정 사각형 에 가깝다. 너 비 3.20m, 길이 3.3 0 m, 높이 3.05m 이 다. 構築에 사용된 석재는 대단히 크고 정교하게 가공되었다. 평정한 石 面 위에 석회를 부착하였다. 표면에 바른 석회는 대부분 박락되었다. 네 벽은 4 층으로 쌓았고 높이는 1. 83m 이다. 서벽 정중앙은 용도로 통한다. 그 나머지 동, 남, 북의 세 벽 위에는 제 1 층과 제 2 층이 맞물리는 곳에 등거리의 못구멍이 있다. 동벽에 8 개, 남북 양벽에 각각 7 개이며 원래는 쇠고리가 있어 휘장을 쳤을 가능성이 크다. 네 벽 위에 稷角울 정교하게 쌓은 조정이 있는데 그것들은 5 층으로 쌓았다. 5 층으로 쌓은 돌과 뚜껑 돌은 같은 석재이다. 개정석 아래의 중앙에 사각형의 四檀를 뚫었다. 사 각형 四檀 바닥에는 십자로 교차된 대각선을 음각하였다. 대각선 교차점 은 후실의 가장 높은 곳이며 그 대각선을 격하여 4 개 면은 모두 바깥을 향하여 사방으로 경사되었다. 이 조정 표면에 모두 백회를 발랐다. 후실 가운데에 2 개의 桂臺룰 놓았다• 모두 반듯한 판석을 가공하여 만 든 것으로 표면에 백회를 발랐다. 각 길이는 2.60m, 너비 l.lO m, 두께 0 . 20m 이다. 두 개의 관대 동쪽 끝의 거리는 동벽에서 41cm 거리이고 사 이의 간격은 50cm 이다.
2) 벽화 전실, 후실의 네 벽과 조정, 용도의 양벽, 돌문 정면 및 관대의 표면 (上)에 모두 벽화를 그렸다(그림 6-33, 6-3 4 , 6-35). 벽화는 대부분 윤택이 나는 표면에 그렸다. 석회 표피의 박락에 의해서 많은 화면이 손실되었 지만 전체적인 벽화형상은 뚜렷하며 색깔도 선명하고 내용도 뚜렷하여 대단히 가치 있는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고분벽화는 총체적으로 후실과 전실에 있으며 그것들은 居室과 鹿堂의 격식에 따라서 설계되었다. 후실 네 벽과 조정에는 연화문 도안이 가득 하여 마치 비단옷을 입은 것 같다. 관대에도 編織 문양이 처리되었는데 그것은 돗자리와 같다. 전실 네 귀퉁이에 기둥을 그렸다. 그것은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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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 건축물 같다. 후실 석문 바깥의 용도 양측에는 각각 시녀 한 사람 씩 그려졌다. 전실 동벽 용도 입구에 근접된 양측에도 서 있는 문지기를 한 사람씩 그렸다. 전실 서벽 묘도 입구에 근접된 양측에는 무기를 들고 있는 衛士가 있다. 死者에 대한 인물묘사는 모두 전체 벽에 그려진 〈 肖 像 畵〉 에 엿볼 수 있다. 전실의 남북 양벽에 그려진 그림은 바교적 작다. 넓게 보이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인물풍속도이다. 살아 있는 동안 묘주 인의 사냥, 연회와 춤추는 모습을 감상하는 장면이 상당히 정교하게 그 려져 있다. 전실 조정 아래에 四神이 그려져 있다. 그 위에는 불상, 보 살과 남녀 묘주인의 예불 정형이 묘사되었다. 그 위에는 天界롤 날고 있 는 天 A1 象이 그려져 있다. 후실 석면 정면에 커다란 연꽃이 그려져 있 다. 후실 천장 뚜껑 위에 日月星辰이 있고 동시에 붉은 글씨로 제목이 기록되었다. 벽화는 일반적으로 주홍색의 가는 선으로 윤곽을 그린 다음 검은 먹물 로 다시 정확히 그리고 마지막으로 색을 칠하고 봇으로 휘호를 썼다. 주 요 형상을 먼저 句勒墨線(검은 선으로 윤곽을 그림)한 후 景物울 보충하였 다. 때때로 오로지 색채만을 칠하기도 하였으며 간혹 검은 선으로 단순 히 윤곽만 그리기도 하였다. 사용된 색채는 자색(赫石, 붉은 돌), 청록 색, 황색, 주홍색, 백색, 검은색 등이다. 일반적으로 原色, 분홍, 회색 등 혼합색은 비교적 드물었다. 후실 안의 연화문은 완전히 검은 선 (먹 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난 후 자색, 주홍색, 황색 등을 칠하였다. 어느 꽃심은 자색이고 어느 것은 백색이다. 모두 먹선의 윤곽은 그리지 않았 다. 그것들은 의의로 아름답고 경쾌한 맛을 주었다. 후실 표피 아래의 석벽에 원래 벽화가 있었다. 현재는 다만 네 벽에 자색 기둥을 그린 혼 적이 보이고 용도 입구에는 자색의 문틀(門桓)만 보였다. 동벽상 제 2 층 의 석재에 가로줄의 연화문이 그려졌는데 현재는 네 가지(四梁)만 보인 다. 홍색과 검은색을 서로 간격을 두고 배치하였다. 간격으로 추측하여 보면 한 줄에 일곱 가지가 있었다. 동, 북, 남 3 면의 제 1 층 정석 측면에
또한 가로열로 6 개의 雙人 童 子가 頭光울 쓴 연꽃동자와 얼굴을 맞대고 있다. 다만 이러한 그림은 만족을 주지 못해서인지 그림을 다 마치지 않 고 중도에서 포기한 흔적이 있다. 동시에 백회를 다시 바르고 그 위에 다시 그림을 그렸다. 그 밖에 전실의 남, 북 두 벽의 상부와 연결된 제 1 충 정석 표면상에 그린 표피 위에 희미하게 또 다른 표피가 있다. 이 충 에 따로 칠한 표피가 비록 심하게 박락되었지만 그 윗면에 이미 벽화를 그린 것아 발견되었다. 북벽에 그린 것은 전체 벽상에 나타내었는데 그 것은 동쪽을 향하여 날아가는 청룡이다. 남아 있는 것은 용의 몸, 앞다 리(前股)와 꼬리이다. 그것의 윤곽과 화법은 대체로 고구려 후기의 벽화 묘인 通溝 사신묘, 4 호묘와 5 호묘의 청룡과 같다. 다만 이 용의 발가락 으로 무엇을 잡는 虎踏式은 아직 앞시기의 청룡 형상을 가지고 있다. 따 라서 이 벽화의 연대는 사신묘, 4 호묘와 5 호묘보다 이르다고 본다. 주의 할 가치가 있었던 것은 이 청룡은 결코 동쪽에 머문 것은 아니고 오히려 북쪽에 그린 것이다. 만약 〈 左靑龍 , 右白虎, 前朱雀, 後玄武〉의 배치로 관찰하면 사신묘, 4 호묘, 5 호묘는 묘도를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정반대 로 이 고분의 것은 묘도의 背向울 하였다. 이러한 배치방식과 전실 아래 충 벽화의 사신은 일치한다. 여기에 따르면 상층 벽화의 그린 시기는 하 층 벽화를 그린 시기와 시간 차이가 크지 않다. 어느 상황, 어느 동기로 전실 원래의 벽화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그렸을까? 벽회를 다시 발랐 는데 왜 다만 전실 남북 두 벽과 조정 하부의 일부분 벽화에만 치중하였 는가? 이 문제는 장래에 해결하여야 한다. 벽화의 상세한 정형은 다음과 같다. (1) 전실 벽화 네 벽 위쪽에 자색 단선으로 方格線을 그렸다. 정부 조정을 간격을 두 고 그렸다. 네 귀퉁이에 자색의 기둥을 그렸고 기둥 위에 折四重의 雀替
롤 그렸다. 雀替 위쪽이 바로 조정 제 1 층 정석 네 귀퉁이의 말각 결구이 다. 용도 입구에 자색으로 넓은 띠(帶)를 가진 문골을 그렸다. 네 벽 아 래는 모두 자색으로 처리하였다. 너비는 28cm 이다. ® 서벅 묘도 중앙을 통하여 남북 2 단으로 나누어졌다. 각각 전벽에 묘도 방향 으로 衛士를 그렸는데 대부분 박락되었다. 남단에는 상부에 짐승형의 투 구와 短刀를 오른손에 들고 있는 그림이 남아 있다. 두구 위쪽에 먹선으 로 처리한 심장형의 영락이 그려졌다. 북단에는 그 상부에 力士가 오른 쪽 팔을 들고 있으며 어깨 위에는 짐승형 胃甲울 걸쳤고, 손에는 環頭大 刀를 들고 칼날 아래에는 심장형 영락이 있다. ® 동벅 (그림 6-36, 6- 37 ) 용도 중앙에 남북 양단으로 나누어졌다. 각각 전체 벽에 공손하게 서 있는 문지기가 있다. 모두 용도를 향하여 약간 몸을 숙이고 있다. 그는 높은 백색의 帳冠울 쓰고 있으며 왼쪽 옷싶을 걷어 올렸고, 허리를 잡아 매고 꽃무늬 저고리를 입었으며 넓은 통의 꽃무늬 바지를 입었다. 남쪽 문지기의 신장은 1.5 6m 이고 긴 얼굴에 눈썹과 눈이 원추체로 생겼다. 입술 위쪽에 양쪽으로 갈라전 콧수염이 있으며 길고 큰 아래턱 중앙에도 수염이 있다. 꽃무늬 저고리는 녹색 바탕에 흑색의 菱格文이 있다. 꽃무 늬 바지는 누런 바탕에 흑색 능격문이 있고 소매를 걷어 울려 팔뚝이 보 인다. 두 손을 배 위에 올려놓았다. 북문 문지기의 키는 1.5 3m 이며 둥근 얼굴에 가는 눈썹과 큰 눈을 가졌다. 콧수염이 양쪽으로 나누어졌다. 꽃 무늬의 저고리는 백색 바탕에 가늘고 고운 검은 점과 검은 능격문을 수 놓았다. 꽃무늬 바지는 누런 바탕에 검은 점 무늬가 있다. 오른손으로 왼손의 손등을 잡고 두 손을 가슴 위에 대고 있다. 용도 입구 상부에서 동벽 頂端까지 사이에 가로열로 한 줄의 연꽃화염 문과 연꽃화생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되었다. 연꽃화염문 도안은 4 組이 고 연꽃화생 도안도 역시 뱌ll.이다. 옆에서 본 연꽃상에 雙人童子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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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그렸는데 모두 두광을 가졌다. 그 사이의 공간에는 또한 연꽃봉오리 로보충하였다. ® 남벽 (그림 6-38, 6-39) 벽화가 대부분 박락되었다. 다만 중심부와 양단 부근에 벽화가 부분적 으로 남았다. 전체 벽을 세 줄의 가로 방향으로 자색의 경계를 나누어 4 개의 범위로 만들었다. 위에서 아래로 제 1, 2 의 범위는 좁고 거기에 남 녀 가수, 시종과 群舞 장면이 보이는데 모두 후실을 향하였다. 제 3 범위 는 약간 넓다. 마치 만찬 장면과 같다. 역시 후실을 향하였다. 제 4 범위 는 이미 박락되어 보이지 않는다. 제 1, 2 범위의 左端은 두 개의 범위에 관련되어 있는데 정자에 앉아 있는 주인의 장면이다. 정자를 향하여 악 대와 춤추는 무리가 보인다. 정자는 청기와를 덮었고 용마루는 백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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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용마루는 위로 치켜 올라갔으며 정자 기둥 위에는 .llil板과 柱斗가 있 다. 남녀 묘주인은 높은 의자에 앉아 있고 그 밀에는 호랑이 가죽이 있 으며 그 의자 앞에는 작은 상이 있다. 남주인은 흑색의 짧은 저고리를 입었고 아래에는 백색 바탕에 흑점 꽃무늬의 바지를 입었다. 그의 오른 손은 배 위에 놓고 왼손은 아래턱을 괴고 있다. 여주인은 남주인의 오른 쪽에 기대어 있다. 박락이 대단히 심하다. 백색 합임의 긴치마를 입었 다. 그것의 날개옷(脣岐)과 치마 끝(梧緣)은 흑색이다. 남녀 묘주인의 몸 뒤에 두 개의 수직으로 된 것이 있는데 붉은색의 〈工 〉 자로 조성된 연속 도안이 있다. 마치 정자 뒤편에 담장 또는 병풍이 있었던 것 같다. 정자 왼쪽에 남녀 시중이 서 있다. 여자 시중이 앞에 서 있는데, 꽃무늬로 끝 울 장식한 치맛자락이 보인다. 뒤에 서 있는 남자 시중은 누런 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바지를 입었다. 제 1 범위 내에는 남녀 가수가 가로 일렬로 서 있는데 확인되는 것은 열 사람이다. 다만 오른쪽 끝 대열 말미의 네 사람이 거의 완전하다. 가장
맨 앞줄에 서 있는 2 인의 남자 가수는 머리에 백색 책관을 쓰고 새깃털 울 꽂았으며 턱수염이 있다. 한 사람은 통바지를 입었다. 세번째 사람이 유일하게 짧은 저고리를 입었다. 네번째 사람은 완전히 박락되었는데, 다만 머리에 쓴 절반 잘린 새깃털이 뒤쪽으로 경사된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것은 다섯번째 사람의 머리 위까지 휘날리고 있다. 그는 남자 가수이다. 여기서부터 뒤로는 모두 여자 가수이다. 다섯번째 사람의 머 리 위에는 깃털 비슷한 움직이는 것이 있다. 여섯번째 사람의 머리는 묶 어서 이마 위에 놓았으며 꽃가지 위의 步描가 거기에 꽂혀 있다. 일곱, 여덟번째 사람들은 짧은 머리를 하였고 역시 꽃가지 위의 보요를 꽂았 다. 머리를 뒤로 모아 묶어서 목 뒤로 돌렸는데 그것은 마치 고리 같다. 백색 옷을 입었고 그 위에 흑색의 머플러를 둘렀다. 아홉번째 사람도 백 색 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저고리를 입고 긴 머리를 등에까지 내려뜨리고 오른팔을 여덟번째 사람의 왼팔 밀에 끼우고 왼손으로는 열번째 사람을 잡고 있다. 왼팔을 아래로 뻗어 뒷사람의 오른손을 잡고 있다. 열번째 사람은 얼굴 모습이 잘 남아 있다. 짧은 머리를 목 뒤에 묶었다. 양볼 옆에 머리를 맣아서 귀 밀까지 내려보냈다. 백색 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저고리를 입었다. 이 10 명의 남녀 가수들은 음악대를 조직하여 어깨를 나란히 하고 군무대열의 옆에 서 있다. 무용총 群舞圖의 음악대와 대단 히 유사하다. 음악대 뒤편에 1 단의 거리를 두고 두 손을 배 앞으로 모으 고 한 줄로 서 있는 5 명의 시녀가 있다. 모두 합임의 치마를 입었다. 허 리에는 검은 띠를 잡아매었다. 첫번째 사람은 흰 市幅울 쓰고 흰 치마를 입었다. 두번째 사람도 흰 건괵울 쓰고 흰 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치마를 입었다. 세번째 사람은 머리를 이마 위에 잡아매고 흰 바탕에 검은 꽃무 늬의 치마를 입었다. 네, 다섯번째 사람들은 짧은 머리를 목 뒤에 잡아 묶었다. 양볼 옆에 머리를 닿아 귀 밀까지 내려보냈다. 역시 흰 바탕에 검은 꽃무늬 치마를 입었다. 제 2 범위에는 한 무리의 춤꾼들이 군무를 연출하고 있으나 대부분 박락
되었다. 그 춤꾼들의 뒤에 3 명의 남자 시중이 있다 . 모두 11 인으로 확인 되지만 그 중 형상이 완정하고 비교적 뚜렷한 사람은 6 인이다. 턱수염이 있는 자가 군무대열을 지휘하고 있다. 몸을 약간 숙여 오른팔은 옆으로 벌리고 왼팔은 앞으로 쳐들고 있다 . 마치 부채가 움직이는 형상이다. 이 것은 소위 〈 起法兒 〉 라고 부른다. 그는 백색 책관(머리에 쓰는 수건)을 쓰 고 몸에는 흰 바탕에 검은 접이 있는 긴 소매가 달린 꽃무늬 저고리를 입고 아래는 통바지를 입었다. 춤대열 중에 대부분 혼적만 남고 능히 판 별되는 것은 겨우 6 인이다. 춤 지휘자 앞쪽에는 다만 두 개의 꽃무늬 통 바지의 아랫부분만 보인다. 하나는 누런 바탕에 검은 점, 다른 하나는 녹색 바탕에 검은 점이 있다. 2 인으로 보인다. 신발의 방향을 보면 춤 지휘자의 반대 방향이다. 그 뒤에 다른 1 인이 앞쪽으로 팔을 둘어 옷소 매를 펼치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 일단의 거리를 두고 다시 한바탕 뒤 쪽으로 팔을 뻗어 긴 소매를 혼들고 있다. 1 인이 확인되었다. 그 뒤의 대열 뒤쪽에 2 명의 舞女가 있다. 보존상태가 완전하다. 춤추는 자태와 옷은 앞사람들과 같다. 모두 흰 바탕에 검은 점의 긴 소매가 달리고 허 리를 잡아맨 꽃무늬 저고리와 꽃무늬 통바지를 입었다. 윗몸을 앞쪽으로 약간 숙였다. 두 팔은 뒤쪽으로 펼쳤고 왼쪽 발은 땅을 디디고 오른쪽 발을 약간 위로 올렸다. 앞 무녀의 왼쪽 발잔등에는 허리에 매단 폐식이 늘어져 있으며, 마지막 무녀의 두 눈동자는 옆을 보고 있고 짧은 머리는 목 뒤에 묶여 있다. 남아 있는 벽화 부분을 살펴보면 , 원래 춤추는 사람 과 마주 보고 있는 군무대열은 모두 7 인으로 대열을 이뤄 가볍게 걸으면 서 모두 양팔을 뒤쪽으로 펼쳐서 긴 소매를 높이 펴면서 춤을 추고 있 다. 지휘자는 다른 동작을 취한다. 춤자태가 대단히 정돈되었다. 군무대 열의 뒤편에 3 인의 남자 시중이 서 있다. 모두 백색의 수건모자(책관)를 썼으며 구레나뭇이 있고 합임의 짧은 저고리를 입었고 바지는 통바지롤 입었다. 두 손을 배 앞으로 모았다. 두번째 사람은 흰 바탕에 검은 꽃무 늬 저고리를 입고 녹색 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바지를 입고 두 팔을 교차
해서 배 위에 놓았다. 왼쪽 발잔등에는 허리에서 내려온 수식이 있다. 그 밖에 춤 지휘자의 몸 뒤에 한 사람의 다리만 보인다. 다리가 땅 위에 떠 있다. 원래 왼쪽으로 발을 한 걸음 움직인 것 같다. 제 3 범위에 그려진 것은 회식을 위하여 음식을 가지고 가는 장면이다. 5 인이 확인되었다. 화면 오른쪽 끝에 녹색 지붕의 집이 있고 그 용마루 에 검고 둥근 용마루 장식이 있다. 지붕 아래에는 자색 기둥에 연결된 자주색 梁架(목조 건물 부재의 하나, 기둥 위에 가로로 올려진 나무)가 있고 처마 밀에는 부연이 보인다. 지붕 오른쪽에 또한 아래로 경사진 녹색의 坡 7k 가 있다. 아마 그것은 1 基에 부착된 〈 偏 廈 (행 랑, 또는 결방) 〉 의 건축 물로 보인다. 집의 왼쪽에는 한 줄로 서서 왼쪽 방향으로 음석을 들여오 는 무리가 있다. 왼쪽 끝의 가장 앞선 자는 윗수염이 긴 남자 시중으로 백색의 수전모자를 썼다. 왼쪽 옷싶의 넓은 소매가 달린 짧은 흰 저고리 를 입고 흰 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바지를 입었다. 두 손은 배 앞에 모았 다. 그 뒷사람의 그림은 대부분 박락되었다. 그 뒤를 이어서 흰 바탕에 검은 수직 점무늬가 있는 통바지를 입은 사람의 두 다리만 보인다. 다시 그 뒤에 바싹 붙어서 앞뒤로 물건을 들고 앞으로 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모두 왼쪽 옷싶 꽃무늬 저고리와 꽃무늬 통바지를 입었다. 앞사람은 다 리가 긴 상(案)을 들고 있고, 꽃무늬 저고리는 흰 바탕에 검은 점무늬가 있으며 꽃무늬 바지는 흰 바탕에 검은 십자 문양이 있다. 뒷사람은 소반 울 들고 있다. 소반에는 안은 붉고, 겉은 검은 잔들이 들어 있다. 그의 꽃무늬 저고리는 누런 바탕에 검은 점무늬가 있으며 꽃무늬 바지 역시 흰 바탕에 십자무늬가 있다. 대열 맨 끝에 또한 시자가 있는데 다만 꽃 무늬 저고리의 앞 옷깃 일부가 보인다. ® 북벽 (그림 6-40, 41 a) 벽화내용에 따라서 상하 두 부분으로 나뉜다. 두 부분 사이는 남벽과 같이 그림의 경계(범위)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일목요연한 경계 가 없는데다가 심지어 경관 역시 서로 교차되었다. 배치상 윗부분은 연
회와 주악이고 아랫부분은 산림 속의 사냥장면이다. 그것들은 모두 종횡 으로 화폭을 안배하여 하나의 주제를 중심장면으로 삼았다. 중심장면 주 위의 공백에는 약간의 구성물과 중심주제와 관계된 소재를 삽입하였고, 마지막으로 남은 화면의 빈 공간에는 작은 가지의 연꽃과 연꽃봉오리로 채웠다. 전체 화면의 밀도가 상당히 안정되어 있다. 빈 공간에 안배한 적당한 소재는 풍부한 표현내용을 가지고 있다. 구도적인 면을 보면 전 체 벽면을 거대한 그립으로 가득 채워 主, ;k 의 차이를 분명히 가리기가 쉽지 않고, 또한 주제 화면의 선명성을 약화시키는 것을 모면하지는 못 하였다. 윗부분의 연회와 기악 연주의 장면은 묘주인을 둘러싸고 중심부에서 전개된 원숭이의 재롱을 감상하고 있는 그림이다. 자색의 큰 나무 하나 가 벽면의 오른쪽 위에 있으며 나뭇가지에 과일이 많이 매달려 있다. 나 뭇잎은 주로 자색을 띤 침엽이고 또한 녹색의 활엽도 첨가되었다. 다만 한 마리의 봉황새가 날개를 펴고 나뭇가지를 향하여 날아오고 있다. 나 뭇가지에는 아래로 내려오는 원숭이가 있는데 목에는 쇠고리가 채워져 있다. 몸은 황색이고 머리에는 흰 가면을 썼으며 그 가면의 형상은 누수 현상 때문에 뚜렷하지 않다. 또 다른 원숭이 한 마리가 나무 가장자리에 앉아 왼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몸은 황색이며 머리에는 흰 색의 곰가면을 쓰고 있다. 나무 아래에는 원숭이룰 디루는 - 두 사람이 있 다. 그 중 한 사람은 나무 동체의 왼쪽에 앉아 있다. 그는 녹색 바탕에 검은 꽃무늬가 있는, 허리를 졸라맨 저고리를 입었으며 또한 꽃무늬 바 지도 입었다• 대부분 박락되었다. 다른 원숭이를 다루는 사람은 여자이 며 나무의 오른쪽에 있다. 여인은 녹색 바탕에 검은 꽃무늬가 있는 긴 소매에 허리를 졸라맨 저고리와 누런 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통바지를 입 었다. 여인은 어깨 너머로 긴 머리를 묶고 있는데, 몸을 구부리고 팔을 펴고 있어서 마치 등불을 들고 앞서서 걷어가는 것 갇다. 나무의 왼쪽에 있는 묘주인은 대부분 박락되었다. 다만 혹색의 冠項과 황색의 높은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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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에 앉은 발만 노출되었다. 그리고 흰 바탕에 검은 십자무늬의 통바지 를 입었으며 앞이 뾰족한 하얀 신발을 신었다. 신발과 바지 사이에는 검 은 바탕에 붉은 무늬의 行槿(經衣)이 보인다. 묘주인의 앞쪽에 작은 상 (궤)이 있으며 그 뒤에 뿔모양의 큰 잔이 놓여 있다. 묘주인의 뒤에 남 녀 시중이 서 있다. 남자는 앞쪽에서 두 손으로 우산울 들었는데 머리에 折風울 썼으며 왼쪽 옷싶의 허리를 동여맨 누런 바탕에 검은색의 꽃무늬 저고리를 입었다. 그리고 아래에는 누런 바탕에 검은 꽃무늬 통바지를 입었다. 여자 시중의 왼쪽 팔에 하얀 수건을 걸치고 있다. 그녀는 짧은 머리를 목 뒤에 잡아매었고 붉은 바탕에 왼쪽 옷싶의 꽃무늬 저고리를 입었으며 누런 바탕에 검은 꽃무늬가 있는 통바지를 입었다. 묘주인 아 래에는 누런 개가 앉아 있는데 그 개의 목에는 목걸이가 걸려 있으며 큰 나무를 향하고 있다. 누런 개의 뒤편에 흰 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옷을
입은 여자 시중이 큰 백마를 한 마리 끌고 있는데, 이 말은 붉은색의 말 고삐, 등에는 꽃무늬 말안장이 있으며 손님의 말로 보인다. 백마 뒤편에 발등을 위로 펼치고 앉은 異族 노인이 있다. 턱수영이 있으며 머리에는 녹색 책관을 쓰고 몸에는 흰 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저고리와 바지를 입 었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서 후방으로 말을 타고 질주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 이 형상은 특수한 내용을 보여 주고 있 다. 질주하는 두 사람과 오른쪽의 광경은 연결되어 있다. 기마질주의 두 사람 중 앞사람은 하얀 책관을 쓰고 모자 뒤에 붉은 영락을 달았으며, 흰 바탕에 붉은 꽃무늬의 저고리와 흰 바탕에 검은 십자문이 장식되어 있는 꽃무늬 통바지를 입었다. 장비를 모두 갖춘 말은 보무 당당히 활보 하고 있다. 뒷사람 역시 절풍을 썼다. 누런 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저고 리를 입었고 녹색 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바지를 입었다. 다리는 등자 위 에 울려놓았으며 왼손으로 고삐를 잡고 누런 말을 타고 있다. 말을 타고 달려가는 두 사람을 따라서 하얀 개 한 마리가 달려가고 있는데 그 개의 목에도 목걸아가 있다. 묘주인의 손님은 큰 나무 오른쪽에서 묘주인과 마주 보고 있다. 오른손은 왼팔 위에 올려놓고 백색의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데, 얼굴이 풍만하게 살이 찌고 턱수염이 있으며 새깃털을 두 개 꽂 은 절풍건을 쓰고 있다. 흰 바탕에 검은 꽃무늬 저고리를 입었으며 허리 롤 질끈 동여매었다. 그 옷에는 주홍색의 것이 달렸으며 그 가장자리에 흑색의 岐도 있다. 아래는 붉은 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통바지를 입었다. 손님자리 옆에 상이 하나 있다. 그 위에는 둥근 배에 밑바닥이 납작한 검은색 登가 놓여 있다. 손님 뒤에 두 명의 남자 시중이 서 있다. 모두 오른손을 왼팔 위에 올려놓고 있으며 절풍건을 쓰고 있다. 앞에 있는 사 람은 녹색의 스카프를 어깨에 걸치고 녹색 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저고리 와 누런 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바지를 입었다. 후자는 누런 헝검으로 어 깨를 덮었다. 그는 누런 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적삼을 입고 아래는 녹색 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바지를 입었다. 그 밖에 손님의 아래편에 왼쪽을
향한 두 사람의 남자 시중이 있다. 역시 모두 오른손을 왼팔 위에 올려 놓고 절풍건을 쓰고 있다. 앞사람은 두 무릎을 꿇고 절풍건 위에 검은 영락 하나를 꽂았으며 누런 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저고리와 녹색 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바지를 입었다. 뒷사람은 서 있으며 절풍 위에 새깃털 두 개를 꽂고 흰 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저고리와 누런 바탕에 검은 꽃무늬 의 바지를 입었다. 허리에는 검은 띠를 둘러 몸 앞에서 잡아매었다. 이 상은 모두 묘주인과 손님이 원숭이의 재몽을 감상하는 장면들이다. 그림 은 과다할 정도로 그려서 좌우 모두 벽 끝까지 펼쳐졌다. 원숭이 재롱 장면은 좌측에 있다. 묘주인과 남녀 시중들의 몸 뒤편과 앉아서 돌아보는 노인의 형상은 바로 위에 있다. 또한 춤추는 장면(舞 距)은 묘주인이 생전에 좋아하는 장면들이다. 아래쪽 한 변에 오른쪽을 향하여 남자의 獨舞가 있다. 독무자는 백색의 책관을 쓰고 흰 바탕에 붉 은 십자무늬의 허리를 잡아맨 긴 소매의 저고리와 흰 바탕의 꽃무늬 통 바지를 입었다. 오른쪽 발은 땅을 딛고 왼쪽 발은 가볍게 들었다. 발바 닥은 땅에 대고 있다. 오른쪽 팔은 옆으로 평행하게 펼치고 왼쪽 팔은 측면으로부터 돌려서 가슴 앞까지 이르렀다. 몸을 약간 앞으로 엎드리고 팔 부분은 펼치고 있다. 독무자 앞쪽으로 마주 대하는 곳에 다리를 굽히 고 앉아서 琴을 반주하는 여자가 있다. 머리에는 나뭇잎형의 보요를 꽂 았다. 흑색의 머플러를 어깨부분에 두르고, 흰 바탕의 합임의 긴치마를 입었다. 치마 뒷자락 가까이 독무자를 향하여 꽃뱀 한 마리가 움직이고 있다. 반주하는 여자의 뒤편에 녹색 치마를 입은 여자가 서 있는데 아쉽 게도 그것은 박락되었다. 남자 독무 장면 위쪽에 다른 1 조의 그립이 있 다. 세 명의 연출에 등장한 인물들로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이다. 남 자의 왼쪽편 얼굴은 오른쪽을 향하였으며, 오른팔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리고 왼쪽 손에는 꽃봉오리 하나를 들고 있다. 뒤쪽 얼굴은, 붉은 영 락이 달린 흰색 책관을 쓰고 있으며 흰 바탕에 菱格의 허리를 잡아맨 긴 소매의 꽃저고리를 입고 아래는 흰 바탕에 붉은색 斜方格의 통바지를 입
고 있다. 바지 끝에 검은색의 가는 선 한 줄이 그려져 있다. 앞에는, 두 손을 배 앞에 모으고 화장을 한 여자가 두 줄의 머리를 양쪽 볼에 내리 고 한 묶음의 짧은 머리는 뒤로 묶고 있다. 동시에 비둘기꼬리 형태로 크게 다리를 벌렸다. 얼굴에는 백분을 바르고, 입술에는 연지를 찍고, 이마 중간에 붉은 점을 찍었고, 볼에도 연지를 발랐다. 몸에는 검은색의 머풀러를 어깨에 두르고 엷은 황색의 허리를 졸라맨 합임의 치마를 입었 다. 화장한 여자의 머리 양측에는 연꽃봉오리를 각각 하나씩 꽂았는데 꽃줄기는 휘어져서 가슴 앞쪽으로 기울어졌다. 그것은 하나의 道具로 보 인다. 이 두 사람은 남녀 2 인충의 출연자로 보인다. 화장한 여자 뒤쪽에 또한 琴울 들고 있는 여자는 반주하는 여인이다. 반주자는 단발머리를 목 뒤로 묶었다. 흰 바탕에 검은 점의 허리를 잡아멘 치마를 입고, 왼손 에 琴울 들고 오른손으로 받치고 있다. 琴의 윗면에 14 줄의 弦이 보인 다. 다만 上端은 5 개의 琴軸이 있는데, 즉 五弦琴이다. 원숭이의 재롱과 무도 장면 의에 북벽 상부의 왼쪽 끝, 그 위쪽과 오 른쪽의 위쪽 구석에 枝樂 연주와 관계된 그림이 또 있다. 오른쪽의 위쪽 구석에 있는 두 사람은 모두 왼쪽을 향하고 있다. 그돌은 각각 원숭이의 재롱과 손님 그리고 시중 드는 사람들의 사이에 있다. 앞사람은 일종의 대나무세우기(半頭戱)를 하는 것 같다. 머리는 흩어졌으며 녹색 띠로 허 리를 잡아맨 짧은 옷을 입었고 아래는 주홍색 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녹 색 끈으로 바짓자락을 발목에 묶었다. 오른팔은 들고 있으며 앞으로 내 민 오론손은 박락되었다. 그리고 대나무 위에 울려놓은 平板이 보이고 그 위에 네 개의 둥근 공이 있다. 그 공 위에 다시 떠 있는 평판 하나가 놓였고 그 평판 위에 다시 네 개의 공이 놓여 있다. 等頭戱를 하는 사람 은 한 발은 구부리고 다른 한 발은 앞으로 내밀고 있어서 마치 왼손에 공을 들고 그것을 대나무 끝에 올려놓는 모습 갇다. 대나무 묘기를 하는 사람 뒤에 머리를 산발한 또 한 사람의 마술사가 허리(奎頭)가 짧은 흰 옷을 입고 있다. 누런색 바지를 입고 녹색 띠로 발목을 잡아매었으며 검
은색 신발을 신었다. 그는 두 발을 약간 구부리고 있다. 머리는 쳐들고 오른손으로 곤봉 하나를 들고 춤을 추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앞에 놓여 있는 둥근 바퀴를 차단하려는 모습과 같다. 죽, 어떤 환상술을 표현하는 것과같다. 원숭이 재롱 장면 중에는 묘주인 뒤편에 수건을 들고 있는 여자 시중 과 위쪽에 좌측으로 향하는 뚜껑 있는 마차가 있다. 치마를 입은 여자가 앞에서 두 줄의 마차고삐를 잡고 있다. 마차 앞에는 코가 높은 異族의 여자가 단발머리를 목 뒤로 묶고 짧은 저고리와 누런색의 통이 좁은 바 지를 입고 있다. 손에는 긴 나무막대기를 든 채 고개를 돌려 마차를 끄 는 사람을 보고 있다. 마차 바로 뒤에 붉은 바탕에 검은 점의 좁은 바지 를 입은 또 한 사람이 있다. 두 발을 똑바로 세웠으며 몸자태는 약간 뒤 로 하고 앉았다. 마치 마차를 밀고 있는 것 같다. 북벽 왼쪽 모서리에 씨롬 장면이 있다. 건장한 두 남자가 모두 머리를 이마 위에 묶었다. 윗도리도 벗고 맨발이며 다만 짧은 잠방이를 입었다. 두 사람이 머리를 상대방의 왼쪽 어깨에 대고 있으며 오른팔을 뻗어 상 대방의 왼쪽 겨드랑이 속에 넣고 있다. 두 손으로 상대방 뒤쪽의 잠방이 허리를 잡고 있다. 왼쪽다리는 상대방의 사타구니 아래에 넣고 씨름을 하고 있다(그립 6-36). 씨름 그립의 오른쪽에 한 사람이 오른쪽을 향하여 추격하고 있다. 추 격자는 흑색 책관을 쓰고 턱수염이 났고 누런 바탕에 검은 점의 허리를 잡아맨 奎頭의 꽃무늬의 짧은 저고리를 입고 아래는 흰 바탕에 검은 꽃 무늬의 통바지를 입었다. 왼쪽 손에 채찍을 들고 도망자를 추격하고 있 다. 도망자는 코가 큰 異族人이며 역시 턱수염을 가졌다. 흰색의 짧은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맨발이며 두 손에 무엇인가의 물건을 들고 있는데 어떤 작은 짐승 갇다. 그는 한편 도망가면서도 뒤를 돌아다보고 있다. 마치 도둑질한 사람을 추격하는 장면이다. 씨름 그립의 아래쪽에 안장을 갖춘 백마가 한 필 있다. 뒷다리를 약간
구부리고 왼쪽다리는 쳐들고 있다. 마치 말이 성을 낸 자태이다. 키가 크고 턱수염이 있는 이족인 한 사람은 짧은 저고리를 입고 누런 바탕에 검은 꽃무늬가 있는 좁은 바지를 입었으며 끝이 뾰족한 신발을 신었다• 그는 오른팔로 말의 목을 잡고 왼손에 말채찍을 들고 있다. 그는 한편으 로는 백마 뒤편의 이족인을 돌아보며 또 한편으로는 말을 안정시키고 있 다. 백마 뒤편의 이족인은 긴 머리에 턱수염이 있으며 누런 바탕에 검은 점의 왼쪽 옷싶의 허리를 잡아맨 꽃무늬 저고리를 입고 있다. 아래는 흰 바탕에 검은 점의 통이 좁은 꽃바지를 입었다. 그는 말꼬리를 빗질하는 사람같다. 말꼬리를 빗질하는 이족인의 아래쪽에 코가 큰 이족인 남녀 한 사람씩 있다. 남자는 왼쪽에 있고 머리에 절풍을 썼으며 녹색 바탕에 검은 점의 허리를 잡아매고 긴 소매의 옷싶이 왼쪽인 짧은 저고리와 누런 바탕에 검은 점의 통이 좁은 꽃바지를 입고 있다. 그는 오른손에 말채찍을 들고 혼들고 있으며 따라서 저고리 옷소매가 나부끼고 오른쪽으로 활보하고 있다. 오른쪽의 異族 여자는 짧은 머리를 목 뒤에 잡아매었다. 그녀는 누런 바탕에 검은 꽃무늬 저고리와 녹색 바탕에 검은 점이 있는 통이 좁 은 바지를 입었다. 신발이 오른쪽으로 향한 것은 몸을 돌려 왼쪽으로 가 는 것 같다. 동시에 오른팔을 뻗어 몸 뒤편의 異族 남자를 집하고 있다. 이상은 북벽 상부상에 使樂 연주 주제의 벽화내용이다. 그 다음은 북벽 아래의 산림 속에서 사냥하는 주제의 벽화이다. 북벽 아래 산림에서 사냥하는 주제의 벽화는 대부분 박락되었다. 중앙 과 오른쪽의 화면 역시 대부분 누수되어 분명하지 않다. 다만 전개된 정 황과 대부분 형상은 판별이 가능하다. 전체 북벽 아래의 장면은 대규모 의 수렵도이다. 화면의 왼쪽 끝에 한 그루의 나무는 자색의 동체를 가진 큰 나무이다. 나무뿌리 아래에 나타낸 단면에는 커다란 나무구멍(樹洞) 이 있다. 황색이다. 그 구멍 안에는 개 한 마리가 앉아 있고 녹색 나뭇 잎 사이에는 검은 곰이 있다. 그림의 오른쪽 끝에는 여러 개의 굴곡이
있는 자색의 넓은 띠 속에 산등성이가 그려져 있다. 그 밖에 그림 중간 에 간헐적으로 몇 그루의 작은 나무가 있다. 이러한 광경은 간단하고 생 동감 있게 수렵의 공간 환경을 묘사하고 있다. 수렵도 장면은 세 가지 부분으로 나뉜다. 제 1 부분은 左向으로 추격하 는 수렵대로 화면의 오른쪽 절반을 차지하였으며, 제 2 부분은 세 사람이 右向으로 몰이를 하는 장면인데 그곳은 左端 나무구멍의 옆이다. 셋째 부분은 수렵대와 몰이꾼 사이에 사냥하는 장면이다. 각 방법으로 들짐승 울 공격하고 있다. 左向으로 추격하는 수렵대는 3 열종대이다. 최상면의 제 1 열은 세 명의 사냥꾼이다. 첫째 사람은 맨 앞에 서 있는데 전체 대열 중에 가장 크다. 묘주인일 가능성이 크다. 이 사람은 머리에 절풍을 쓰 고 허리를 동여맨 붉은색 저고리를 입었고 왼쪽다리에 화살통을 찼다. 등에는 화살을 메고 백마를 탔다. 바로 화살을 메겨 호랑이를 향하여 쏘 았다. 호랑이의 목등에 화살 하나가 꽂혔다. 호랑이는 입을 크게 벌리고 뒤를 돌아보며 놀라서 도망가고 있다. 두번째 사냥꾼도 절풍을 쓰고 누 런 바탕에 검은 점의 허리를 잡아맨 꽃저고리를 입었다. 다리는 등자 위 에 울려놓았다. 이 사람이 탄 말도 백마이다. 세번째 사냥꾼은 모호하 다. 다만 누런 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저고리를 입었고 말은 녹색이다. 제 2 열 역시 세 명의 사냥꾼이다. 제 1 열과 나란히 가고 있는데, 첫번째 사냥꾼은 활을 쏘려고 하고 있다. 붉은색 저고리를 입고 누런 말을 타고 있다. 두번째 사냥꾼은 활을 쏘려고 준비하고 있다. 녹색 말을 타고 있 다. 녹색 말 앞에 사냥매가 꿩 한 마리를 추격하는 장면이 있다. 세번째 사냥꾼은 이미 박락되었다. 타고 있는 말은 백마이다. 가장 아래의 제 3 열은 앞부분이 박락되어 분명하지 않다. 다만 작은 나무 한 그루의 앙상 한 가지만 보인다. 세 명의 사냥꾼과 비교하면, 첫번째 사냥꾼은 작은 나무 전면에 있고 위치는 상술한 제 2 열의 첫번째 사냥꾼보다 더 왼쪽에 있다. 작은 나무의 가지 뒤편에 두번째 사냥꾼이 탄 말의 꼬리가 보인 다. 그 뒤에 한 그루의 나무를 사이에 두고 말 한 필이 있는데 사냥꾼은
박락되었다. 말은 황색이다. 그립의 왼쪽 끝, 즉 나무구멍 옆에 세 사람 의 몰이사냥꾼이 있다. 최상면의 백마를 질주시키면서 아래로 몸을 구부 리는 사냥꾼은 머리에 절풍을 쓰고 그 위에 두 개의 새깃털을 꽂았다. 그는 흰 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저고리와 통이 좁은 바지를 입었다. 오른 쪽 다리에 화살이 담긴 화살통을 찼다. 바로 화살을 장전하여 두 마리의 노루를 겨냥하고 있다. 커다란 고라니 한 마리는 사냥꾼 앞에서 고개를 쳐들고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고, 작은 노루 한 마리는 큰 고라니를 따라 가는데 이미 다리 등에 화살을 맞고 놀라서 도망가고 있다. 노루를 추격 하는 사냥꾼의 아래쪽에 백마를 탄 또 다른 사냥꾼은 맹렬히 덤벼드는 호랑이와 대적하고 있다. 호랑이는 입을 벌리고 덤벼들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머리에 화살 하나가 꽂혀 있으며 등에도 화살 하나가 꽂혀 있었 다. 달려드는 호랑이의 공격에 백마가 놀라서 포효하고 있으며, 말을 탄 사냥꾼은 용감하게 몸을 돌려서 또 다른 화살을 쏘려고 조준하고 있다. 그는 머리에 절풍을 썼으며 그 위에 두 개의 꿩꼬리를 꽂았다. 그는 누 런 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저고리를 입었다. 호랑이 아래쪽에 세번째 사 냥꾼울 그렸는데 이미 누수되어 분명하지 않다. 다만 누런 저고리를 입 었고 긴 창을 들고 오른쪽의 다른 호랑이를 찌르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 다. 이 호랑이는 다만 머리, 목과 앞다리의 일부분만 보인다. 이 사냥꾼 의 몸 뒤에 드물게 보이는 흰토끼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이상이 사냥도 에 묘사된 전체 내용이다. 더 보충을 한다면 포위된 짐승들의 상단, 즉 크고 작은 노루의 위쪽에는 있는 힘을 다하여 달아나는 작은 침승이 있 다. 앞선 짐승은 갈색인데 돈피 같고 뒤의 짐승은 검은 선과 흰 줄로 그 려졌는데 족제비 같다. 이 두 마리의 작은 짐승에 대하여 상세하게 그리 지는 않았지만 생동감 있는 산림세계를 그리면서 교묘하게 몰이사냥의 위세롤 묘사하였다. 몰이사냥도의 왼쪽 위의 구석과 오른쪽 위의 구석의 공간에 멧돼지, 노루, 매사냥과 매가 꿩울 추격하는 장면을 그렸다. 이러한 광경은 당시
의 여러 가지 사냥기술을 보여 주며 고구려의 수렵방법을 이해하는 귀중 한 자료가 된다. 멧돼지를 협공하는- 몰이사냥도가 왼쪽 위의 구석에 있다. 녹색의 살찐 멧돼지 한 마리가 있다. 검은 털이 솟구치고 눈을 부라리며 입을 크게 벌리고 다리에 화살을 맞고 경황스럽게 왼쪽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추 격하는 사냥꾼이 활을 당기는 긴박감, 사냥꾼의 머리에 쓴 절풍, 그 위 에 붉은색 영락, 몸에는 짧은 저고리와 통바지를 입고 다리에는 꽃무늬 의 무릎가리개, 왼쪽 다리에 걸친 궁낭, 등에 매단 화살, 백마를 타고 등 위에 또 매단 영락장식 등등. 멧돼지 전면에 바로 몰이사냥의 화면이 전개되는데 좌단의 붉은색 큰 나무 밑에 말을 타고 짐승을 추격하는 자 들과 배합하기 위하여 도보사냥꾼이 있다. 그는 긴 창을 들고 입을 벌린 멧돼지를 공격하고 있으며 그 도보사냥꾼은 머리에 절풍을 쓰고 그 위에 새 깃털을 꽂았다. 그는 붉은 바탕에 검은 점의 허리를 잡아맨 꽃무늬 저고리와 좁은 흰색 바지를 입었다. 꽃무늬 저고리의 가장자리 아래에 두 片의 무릎가리개가 보인다. 몰이사냥의 몰이꾼의 사냥그림이 오른쪽 위의 구석에 있다. 사냥꾼은 흰 바탕에 검은색 십자무늬의 꽃저고리를 입고 백마를 타고 활을 당겨 쏘는 장면, 백마 앞에는 도망가는 짐승은 자색이며 목에 화살을 맞았는 데 노루인 듯하다. 숨어서 노루를 공격하는 사냥 장면의 아래쪽에는 한 그루 작은 나무 아래에 편안히 서식하는 두 마리의 자색 노루가 있다. 왼쪽의 노루는 큰 머리를 쳐들고 오른쪽의 노루는 고개를 숙여 먹을 것을 찾고 있다. 짧은 흰색 저고리를 입은 한 명의 사냥꾼은 오른쪽 산고개 뒤에서 몰래 활을 쏘려고 조준하고 있다. 바로 몰래 공격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누수가 심하다. 매가 꿩울 추격하는 장면은 몰래 숨어서 사냥하는 좌측에, 바로 몰이 사냥 그립 중간의 제 1 열 맨 앞의 사람 위에 있다. 사냥꾼은 두 나무· 사
이의 중간에 서 있는데 머리가 등을 덮고 있다. 누런 바탕에 검은 점의 토시( 奎 頭), 꽃무늬 저고리와 녹색 바탕에 검은 점의 좁은 꽃무늬 바지 를 입었다. 오른쪽 팔 위에는 검은 바탕에 붉은 줄무늬의 활대를 울려놓 았다. 그 위에 사냥매가 있다. 그 앞쪽에 또 다른 사냥매가 혼비백산하 여 도망가는 꿩울 쫓고 있다. 이상이 북벽 벽면의 전체 그림이다. (2) 전실 溪井(그림 6-4 2 , 6-43, 6-4 4 ) 조정 하부의 제 1 층 정석은 네 귀퉁이의 작은 말각석을 제의하고 실제 로 네 벽이 위로 연장된 것이다. 이 부분에는 네 면에 각각 四神을 그렸 다. 이미 상술한 바와 같이 左靑龍,右白虎, 前朱雀 , 後玄武의 배치는 방위를 고찰하였다. 이 사신은 모두 등 뒤의 묘도를 기준으로 하였다. 동쪽면 그림 중앙에는 연꽃 한 가지가 날아오는 주작과 마주하고 있 다. 주작은 붉은색 머리에 녹색 날개를 하고 입에는 둥근 구슬을 물고 있으며 녹색 날개의 아래에는 붉은 점이 점점으로 나타나 있다. 주작 뒤 편에 기린을 그렸다. 그 기린의 몸은 붉은색이고 뿔이 있으며 갈기와 꼬 리털은 모두 화염상이다. 고개를 위로 쳐들고 입을 크게 벌리고 질주하 는 모습이다. 남쪽면에는 왼쪽으로 달려가는 백호를 그렸다. 입을 크게 벌리고 혀를 내놓고 있다. 배는 붉은색이며 뒷부분은 박락되었다. 북면 에는 오른쪽을 향한 청룡이 있다. 목에는 굴곡이 있으며 가슴을 내밀고 가재눈은 먼 곳을 응시하고 몸에는 비늘이 있다. 꽁무니에 가늘고 긴 털 이 하나 있는데 호랑이꼬리 형태이다. 다리에는 비늘이 없고 발톱은 호 랑이 발굽 모양이다. 서쪽면은 이미 거의 다 박락되었다. 다만 우측에 l 조의 현무도상이 판별된다. 원래는 당연히 2 조의 현무가 있어야 된다. 제 2 층 정석은 제 1 층 정석 위에 쌓았는데 그것은 위쪽의 제 3 층 정석과 네 면이 각각 하나의 〈占〉자형의 벽면을 형성하고 있다. 이 부분 벽화의 주된 내용은 예불 장면과 보살형상 등이다. 그곳을 쌓을 때 전실의 아래
그림 6-42 장천 1 호분 전실 조정 동북 모서리
그립 6-44 장천 1 호분 전실 조정 동부
쪽으로 넓게 전개시켜 그곳에 側視 연꽃 몇 가지를 그렸다. 동쪽면 정중 앙에 허리를 졸라맨 須彌座上에 두 손을 모으고 結蹴跋坐로 앉아 있는 부처상이 있다. 수미좌 중간에 博山燒(佛器 제사용 향로)가 하나 그려져 있다. 그리고 좌우에 護法의 흰색 사자가 앉아 있다. 사자는 모두 입을 벌리고 혀를 내놓고 있다. 좌측은 숫놈인데 좌측을 응시하고 있고, 우측 은 어미사자가 고개를 쳐들고 귀를 세웠다. 불상의 얼굴은 풍만하며 육계가 있고 턱수염이 있으며 이마에는 호상 이 있다. 두 눈은 살며시 뜨고 있다. 자태가 단정하다. 흰색의 동경 大 衣룰 입었다. 부처의 등에는 배형의 光背가 있으며 거기에 화영문이 있 다. 광배 상부 중위는 녹색으로 처리되었고 그 안에 자색의 線文이 있는 데 마치 휘장 같다. 불상의 좌측에 두 명의 공양인과 두 명의 시녀가 있다. 공양인은 모두
꽃우산울 가지고 있다.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이다. 앞에 서 있는 남자는 흰색 연꽃관 모자를 쓰고 있으며, 흑색 저고리와 흰 바탕에 검은 십자무늬의 통바지를 입었다. 여자는 뒤에 서 있는데 머리를 이마 위로 잡아매었으며 얼굴의 볼에 연지를 찍고 흰 바탕에 검은 점이 있는 합임 의 꽃치마를 입었다. 치마의 어깨 부분에 검은색 머플러를 둘렀다. 팔 부분에는 흑색의 띠로 장식하였다. 공양인 뒤에 서 있는 두 시녀는 모두 목 뒤에 머리를 묶은 짧은 머리이다. 그리고 왼쪽 팔에 긴 흰 수건을 두 르고 있다. 앞에 서 있는 시녀는 흰 바탕에 녹색 점 꽃무늬 치마를 입었 고 뒷사람은 녹색 바탕에 검은 점 꽃무늬의 저고리와 흰 바탕에 검은 점 꽃무늬의 바지를 입었다. 시녀 뒤편의 한 송이의 꽃 속에 두 사람의 童 子 얼굴의 연꽃이 있다. 불상 우측에는 두 손을 땅에 대고 무릎을 꿇고 있는 남녀 묘주인이 있 다. 남자가 앞에 있는데 머리를 이마 위에 잡아매었고 검은 바탕에 붉은 점 꽃저고리와 흰 바탕에 검은색 십자무늬 그려진 바지를 입었다. 뒤편 에 있는 여주인은 머리를 이마 위에 잡아매었다. 얼굴에는 분을 바르고 입술을 붉게 칠하였으며 검은색 머플러를 두르고 합임 흰색 치마를 입었 다. 허리에는 검은 띠를 둘러 등 뒤에서 잡아매었다. 여주인 뒤편의 왼쪽으로 두 사람의 시녀가 있는데 모두 머리를 목 뒤 에 묶은 단발이다. 앞에 선 자는 흰 바탕에 검은 점 꽃무늬 저고리와 황 색의 통바지를 입었으며, 뒤에 선 자는 황색 합임 치마를 입었다. 남녀 주인묘의 위쪽에 2 인의 엎드린 천인상이 있다. 모두 頂光이며 발 가벗은 상체에 긴바지를 입었다. 두 다리를 굽혔으나 발바닥은 하늘을 향하였고 자태는 대단히 아름다우며 하늘을 날고 있다. 앞에 있는 자는 손에 무엇인가 들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 위의 영락을 만지고 있다. 뒤에 있는 자는 머리를 높이 묶었다. 그 밖에 불상과 공양인, 무릎 꿇은 남녀 묘주인 사이의 공백에는 작은 꽃송이를 흰색으로 윤곽을 그리고 붉은 연꽃봉오리를 나타내었다.
동쪽면의 제 2 층 頂石은 전실의 아래쪽까지 연결되도록 쌓았다. 여섯 송이의 옆에서 본 모양의 연꽃은 왼쪽부터 오른쪽 간격 사이에 황색과 홍색으로 처리되었다. 남북 두 곳 제 2, 3 층을 조성한 〈 占 〉 자형 벽면상에는 맨발로 연꽃대좌 상에 서 있는 보살상이 있다. 한 면에 네 보살이 있는데 상호 대칭적이 며 모두 불상을 향하여 몸을 숙였다. 머리에는 일종의 연꽃봉오리를 장 식하였는데 대부분 원형의 화관이다. 화관 뒤에는 또한 한 단씩 묶은 방 사선 형태의 장식이 있으며, 또한 頭光이 있고 天衣룰 입었으며 다리는 오른쪽으로 쭉 뻗어 있다. 남면은 박락이 심하다. 왼쪽에서 제일 첫번째 보살은 하반신의 치마만 보이고 다리는 검은색 끝이 뾰족한 복연화대좌에 있다. 두번째 보살은 다만 머리의 상반부에 화관을 쓰고, 황색의 두광을 가졌으며 다리는 홍색의 복연화대좌에 있 다. 세번째 보살의 얼굴은 청초하며 턱수영이 났고 흰색의 頭光울 가졌 으며 정면을 열 수 있는 옷깃(開杖)의 붉은 치마를 입었다. 그리고 흑색 의 끝아 뾰족한 복연화대좌에 서 있다. 네번째 보살은 턱수염이 있으며 황색 두광을 가졌고 붉은 띠를 두르고 흰색 치마를 입었다. 이 보살은 둥근 복연화대좌에 서 있다. 이 네 보살의 머리 사이의 공간에는 각각 하나씩 瑞雲이 있다. 보살 좌우 양쪽 끝에는 雙人 동자의 연꽃이 그려져 있다. 왼쪽 끝에는 두 송이, 오른쪽 끝에는 한 송이가 있는데 이미 대부 분 박락되었다. 북쪽면에 그려진 네 보살의 보존상태는 비교적 좋다. 오른쪽에서부터 첫번째 보살은 왼손 위에 과일을 올려놓은 것 갇고 오른손은 그것을 잡 고 있다. 붉은색의 두광, 목 뒤의 긴 줄의 영락을 달고 있는데 그것이 배 위에서 교차되었다. 팔에는 녹색의 띠를 두르고 있으며 흰색의 허리 띠를 매었다. 붉은색의 긴치마를 입고 앙련의 붉은색 연화대좌에 서 있 다. 두번째 보살은 녹색의 두광을 하고 있으며 턱수염이 있고, 두 손은 어떤 물건을 들고 오른쪽 어깨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영락을 두르고 짧
은 저고리를 입었으며 팔에는 흰 천을 두르고 흰색의 허리띠를 둘렀으며 녹색의 긴치마를 입었다. 그리고 끝이 뾰족한 복련대좌에 서 있다. 세번 째 보살은 첫번째의 보살과 같이 턱수염이 있고 왼쪽 손바닥을 펴서 왼 쪽 볼에 가까이 대고 있다. 그리고 붉은색의 복련화대좌에 서 있다. 네 번째 보살의 치장과 색깔은 두번째 보살과 같다. 이 보살은 검은색의 끝 이 뾰족한 복련대좌에 서 있다. 네번째 보살 머리와 상반신 사이의 공간 에 각각 두 개의 瑞雲으로 메웠다. 보살 좌우 끝에 雙人 동자 얼굴, 연꽃을 그렸다. 왼쪽 끝에는 두 송 이, 오른쪽은 한 송이이다. 남북 양면 두번째 頂石울 전실의 바닥 가까 이에 연장하여 쌓았다. 여기 또한 옆에서 본 모양의 연꽃을 그렸다. 남 쪽면은 대부분 이미 박락되어 한 송이만 남았으며 붉은색이다. 북면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모두 네 송이가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까지의 사이 에 황색과 흰색을 교차로 칠하였다. 서쪽면 두번째, 세번째 정석으로 조성된 〈 占 〉 자형의 벽면은 파괴가 심 하다. 다만 중간에 갑옷을 입은 기사 한 사람, 장비를 갖춘 준마가 오른 쪽으로 질주하는 모습이다. 기사는 다만 한 팔만 남았고 말은 보이지 않 는다. 말의 배 왼쪽에는 아래쪽을 향한 긴 창이 보이며 장구를 갖춘 말 의 아래쪽에 하나의 구름(瑞雲)이 있고 그 구름의 왼쪽에 장구를 갖춘 말의 앞굽이 보인다. 벽면 오른쪽 끝에는 한 송이의 雙人 동자 연꽃이 잔류되었고 두광 위쪽에 또한 두 송이의 연꽃이 있다. 서쪽면 두번째 정 석은 전실의 바닥측까지 연장되어 있고 벽화는 모두 탈락되었다. 제 4 정석은 제 3 정석 위에 울려져 있다. 그것과 위로 울라가는 다섯번째 정석은 평탄하게 각각 하나의 〈占〉자형 벽면을 만들었다. 이 부분 화면 의 주된 내용은 여러 자태의 飛天像이다. 펼쳐진(연장된) 전실의 바닥측 에 많은 옆에서 본 모양의 연꽃을 그렸다. 동쪽면 대칭의 배치에도 다섯 개의 비천상을 그렸다. 중심의 비천상은 정면으로 엎드려 하강하고 있으 며 가슴은 내밀고 고개는 쳐들고 있다. 또한 용모가 준수하고 이마 위로
머리를 잡아매었으며 두광이 있으며 상반신은 옷을 입지 않고 두 손으로 어떤 물건을 들고 있다. 팔뚝에는 헝겁(띠)을 걸치고 빙글빙글 좌우로 돌고 있으며 홍색의 수직선 무늬의 긴치마를 두르고 머리 위쪽은 부채처 럼 펴고 있다. 치마 좌우에는 벌린 두 발이 노출되어 있으며 발바닥은 하늘을 향하고 있다 . 좌우 양측의 비천은 서로 같은 방향으로 날고 있으 며 좌측 2 인의 비천은 앞에 있는 것이 비교적 크다. 아래를 향하여 엎드 려 하강하고 있으며 이마 위로 머리를 잡아매었고 두광이 있다. 상반신 은 나체이고 붉은 날개옷을 입고 있으며 허리에는 흰 허리띠를 매었다. 아래에는 긴 바지를 입었고 뒤에 있는 것은 비교적 작은데 형상이 뚜렷 하지 않다. 엎드린 몸은 수평 방향으로 움직이고 맨발이다. 우측 두 개 의 바천은 대체로 좌측과 대칭적이다. 앞에 선 자는 날개옷을 입고 이마 위로 머리를 잡아매었고 두광이 있으며 붉은색의 바지를 입었고 맨발이 다. 뒤에 있는 자는 붉은색의 바지를 입었고, 바지 끝은 펼쳐져 있으며 맨발이다. 동쪽면 제 4 정석은 전실의 아래쪽까지 연장되었고 원래 네 송 이의 옆에서 본 모양의 연꽃을 그렸는데 누수 현상으로 정확하지 않다. 남쪽면 제 4, 5 정석에 조성된 〈 占 〉 자형 벽화상에 4 개의 비천상이 좌우 에 각 2 개가 있다. 모두 위쪽으로 날고 있으며 중심에서 아래쪽 가장자 리에 寶 珠가 하나 그려져 있다. 보주는 녹색 바탕에 붉은색 곡선으로 장 식되었고 그 주위는 화염문으로 처리되었다 . 4 개의 비천은 모두 이마 위 로 머리를 잡아매었고 두광이 있으며, 상체는 나체이고 날개옷을 입고 있으며, 아래에는 긴 바지롤 입고 맨발이다. 왼쪽의 앞에 선 자는 아래 쪽으로 엎드려 있으며 다리는 굽히고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고 있다. 두 손에는 어떤 물건을 들고 있으며 붉은색 두광을 가졌고, 날개옷과 녹색 바지를 입고 있다. 뒤에 있는 자는 엎드린 자세인데 가슴을 내밀었고 두 손으로 어떤 물건을 들고 붉은색 두광을 가졌으며 녹색 날개옷과 붉은 바지를 입고 있다. 오른쪽의 앞에 선 자는 아래쪽으로 엎드렸으며 역시 고개를 들고 가슴을 내밀고 두 손으로 盆울 들고 있다. 그리고 누런 날
개옷과 흰 바지를 입었다. 뒤에 있는 자는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쪽 다 리는 뒤로 올려 뻗치고 있고, 하반신을 왼쪽으로 비상하려는 모습이다. 상반신은 오른쪽 방향으로 회전하려는 모습이며 두 손에는 어떤 물건을 들고 있고 붉고 검은색 허리띠를 매었으며 붉은색 바지를 입었다. 화면 상의 4 개의 비천 의에 공간에는 꽃봉오리로 메웠다. 그 밖에 보주의 우 측에는 또한 좌측으로 떠 있는 녹색의 작은 오리가 그려져 있다. 남면의 제 4 정석은 전실의 바닥층까지 연결되어 있고 거기에 다섯 송이의 옆에서 본 모양의 연꽃을 그렸다. 왼쪽으로부터 오른쪽까지 나누어 자홍, 주홍, 흰색, 자홍과 황색으로 처리하였으며 중간의 흰색 측시 연꽃은 잎들도 있다. 북쪽면 제 4, 5 정석에 조성된 〈 占 〉 자형 벽면상에는 날아가는· 한 때의 침승이 그려져 있다. 한가운데의 비천의 側身은 왼쪽으로 하였으며 왼쪽 발은 약간 굽히고 오론쪽 발은 〈 P及 退 〉 의 충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왼손의 손바닥을 세워서 앞쪽으로 밀고 있다. 이마 위에 머리를 묶고, 두광이 있으며 건 바지를 입고 회전띠를 두르고 있다. 오른쪽 변의 비천은 발을 굽히고 오른쪽 위쪽으로 날며 몸을 돌려 왼쪽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머리는 위로 높게 묶고 백색 두광을 가졌고 상반신은 나체로 띠를 두르 고 긴 바지를 입었다. 좌변의 비천은 다리를 굽히고 몸을 아래로 엎드린 자세인데 높게 잡아맨 머리가 앞쪽으로 세워졌으며 녹색 두광을 가졌고 상반신은 나체이며 흰색 띠를 두르고 누런색 건 바지를 입었다. 두 손에 는 영락을 잡은 것 같다. 가장 왼쪽의 비천은 크게 발을 디디면서 오른 쪽으로 날고 있으며 뒤쪽으로 머리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머 리는 이마 위에 묶고, 날개옷을 입었으며 긴 바지를 입고 깃발을 들고 있는데 그 선(線)은 명확하지 않다. 오른쪽 끝의 아래쪽에는 날고 있는 한 쌍의 白鶴으로, 앞의 백학이 고개를 돌려 뒷면의 백학과 마주 대하고 있다. 이 한 쌍의 날아가는 백학의 좌측 위, 우측 위와 아래쪽에 각각 하나의 검은 선으로 나는 새의 윤곽을 그렸는데 그것은 좌측으로 날고
있다. 비천 사이의 공간에는 옆에서 본 모양의 연꽃과 꽃봉오리를 그려 서 메웠다. 북쪽면 네번째 정석은 전실의 바닥층까지 연장되었다. 거기 에 네 송이의 측시 연꽃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처리하여 그 사이에는 교대로 누런색과 붉은색으로 처리하였다. 서쪽면의 제 4, 5 정석에 조성된 〈 占 〉 자형 벽면에도 역시 4 개의 비천과 날아가는 짐승새를 그렸다. 중간의 비천의 오른쪽 발은 구부리고 왼쪽 무릎을 굽혔다. 하반신은 왼쪽으로 향하여 몸을 돌려 오른쪽으로 하였고 머리를 높게 잡아매고 흰색 두광을 가졌으며 양측에 나부끼는 붉은색 날 개옷을 입었다. 그 좌측면은 한 송이의 긴 꽃줄기 연잎에 싸인 童子의 연꽃화생이 있다. 그 오른쪽 면에는 다만 세 마리의 백학이 있는데 제일 위의 백학은 오른쪽 위로 날면서 고개를 돌려 왼쪽 아래를 보고, 중간의 백학은 오른쪽으로 날면서 왼쪽을 돌아보며 아래쪽의 백학은 왼쪽으로 날고 있다. 화면 좌단은 마주 보며 날고 있는 비천이 있다. 오른쪽 비천 은 왼쪽 아래를 향하며 엎드려 내려오고 있는데 그는 머리를 높게 묶고 누런색 두광을 가졌으며, 상체는 나체이고 붉은색의 날개옷을 입고 녹색 의 긴 바지를 입었으며, 두 손에 무엇인가를 들었다. 左端에 있는 것은 모호하여 확인할 수 없고 다만 엎드려서 머리를 쳐들고 가슴을 내밀며 왼손을 내밀고 하강하는 비천만 보인다. 그림 右端에 또 다른 비천이 있 는데 자세는 수평이며 고개를 쳐들고, 왼쪽 다리를 뒤로 높이 들고 오른 쪽 다리는 무릎을 굽힌 상태이다. 서면 제 4 정석을 전실의 바닥측까지 연 장시켜 쌓았다. 거기예 다섯 송이의 측시 연화를 그렸는데 왼쪽부터 오 른쪽까지 사이에 교차로 붉은색과 황색을 처리하였다. 그 중 두 송이의 황색 연꽃은 잎도 그렸다. 제 6 정석 위에는 奏樂天人울 그렸는데 현재 동, 남, 북 삼면에만 보인 다. 각 면에 세 개씩 그렸다. 모두 나체이며 날개옷을 입었다. 동쪽면의 세 개는 모두 양쪽을 향했는데 왼쪽부터 첫번째 주악천인은 가로로 된 퉁소(橫笛)를 불고 있다. 그는 머리를 이마에 잡아매고, 두광을 가졌으
며, 붉은색 띠를 두르고, 흰색의 긴 바지를 입었다. 왼쪽 발과 왼쪽 무 릎을 굽혔다. 두번째는 阮威(月琴의 일종)을 연주하고 있는데 머리는 이 마 위에 묶고 목 뒤에 건 머리가 내려졌다. 두광을 가졌으며 붉은색 가 로선의 검고 긴 바지를 입었으며 왼쪽 다리를 옆으로 뻗었다. 세번째 사 람은 왼쪽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동시에 몸을 돌려서 고개를 숙이고 琴울 타고 있다. 그 사람은 머리를 이마 위에 잡아매고 두광을 가졌고, 겁은 색의 띠를 둘렀으며, 흰색의 긴 바지를 입었다. 동면의 제 6 정석을 전실 의 바닥 측면까지 연장하였는데 거기에 측시 연꽃을 그렸다. 다만 좌측 의 한 송이만 남아 있는데 붉은색이다. 남쪽면 제 6 정석 위에 세 명의 주악천인 역시 좌측을 향하고 있는데 모 두 엎드려 하강하는 자세이다. 왼쪽부터 첫번째 사람은 이마 위에 머리 를 잡아매고 두광을 가졌으며 녹색의 날개옷을 입고 긴 바지를 입었다. 두번째 사람은 두 손으로 꽃줄을 잡고 있으며, 머리는 이마 위에 잡아매 고, 붉은색 두광을 가졌으며, 누런 띠를 둘렀다. 녹색의 긴 바지를 입었 다. 세번째 사람도 이마 위에 머리를 잡아매고, 백색 두광을 가졌으며 띠를 둘렀다. 긴 바지를 입었다. 오른손에 가느다란 막대기를 들고 있 다. 남쪽면 제 6 정석이 전실의 바닥까지 연장되었다. 거기에 세 송이의 측시 연화를 그렸다.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자홍, 주홍, 자홍색 등이다. 북쪽면 제 6 정석 위의 세 사람의 주악천인 그림은 비교적 작다. 모두 이마 위에 머리를 잡아매었다. 형상은 대부분 뚜렷하지 않다. 그림의 공 간은 꽃봉오리로 메웠다. 중간에 있는 자는 側身이 右向하며 완함을 연 주하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자도 側身울 左向하여 세로로 된 퉁소(뿔 笛)를 불고 있다. 왼쪽에 있는 자는 右向하여 긴뿔(長角)을 불고 있다. 북쪽면 제 6 정석이 전실의 바닥까지 연장되었다. 거기에 세 송이 측시 연 꽃이 그려져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자홍, 주홍, 자홍으로 처리되 었다. 서쪽면 여섯번째의 상면, 그리고 그것이 전실의 바닥측 연장된 곳까지
벽화는 거의 다 박락되었다. 조정 제 1, 3, 5 정석 구석의 말각석상은 모두 力士로 가득 채워졌는데 그들의 형상온 기본적으로 같다. 머리술이 많고 턱수염이 났으며 상반신 은 나체이며 녹색의 짧은 바지를 입고 맨발이다. 두 다리를 밖으로 구부 려 뻗고 있다. 두 팔을 위로 울리고 팔에 띠가 감겨져 있다. 두 눈을 부 릅뜨고 위세가 당당하다. 동남쪽 구석의 말각석상의 역사는 붉은색의 띠 를 둘렀고 동북과 서북 두 구석의 말각석상의 역사는 모두 황색의 띠를 둘렀으며 전신에 황색을 칠하였다. 서남쪽 구석의 모든 말각석상의 화면 은 모두 누수 또는 박락되었다. 네 구석 각층 말각석상의 아래측에는 모 두 한 송이의 측시 연화를 그렸다. 천장석의 灰皮가 탈락되어 벽화는 보이지 않는다. (3) 雨道 벽화 용도 남벽 각벽에 각각 한 사람씩 그린 시녀들은 모두 후실 방향으로 서 있다. 그 높이, 너비가 전체 벽을 채웠다. 남벽 시녀의 머리 부분은 박락되었다. 흰 바탕에 검은 점의 합임 꽃치마를 입었다. 치마에는 검은 선무늬가 있으며 허리에는 붉은 띠를 매었다. 무릎 앞에는 패식을 둘렀 는데 그것은 허리에서부터 내려온 수식이다. 두 손으로 긴 대의 부채를 들고 있다. 북벽의 시녀는 이마 위에 머리가 얹혀 있다. 얼굴에 분을 바 르고 입술을 붉게 칠하였으며 이목구비가 준수하다. 桂黃色 바탕에 검은 점의 합임의 꽃치마를 입고 있다. 치마에 역시 선문이 있으며 두 손으로 긴 막대 하나를 들고 있는데 그것 또한 부채(圓扇)이다.
(4) 묘문 벽화 후실로부터 밖으로 열리는 두 개의 문이 있다. 남쪽 문은 파손되었 고, 북쪽 罪는 상부가 일부 파손되었다. 의부의 일면에는 백회를 발랐 다. 그 위에 세 송이 큰 연꽃을 그렸으며 그 주위는 검은색으로 처리하 였다. 한가운데 한 송이는 똑바로 본 연꽃이다. 그 중심에는 여러 개의 구멍을 뚫었고 검은 꽃심에 붉은 잎으로 처리하였다. 지름 약 40cm 이 다. 위쪽의 한 송이는 측시 연꽃인데 꽃받침만 남았다. 아래쪽의 한 송 이 역시 측시 연꽃이며 꽃받침은 검은색이다. (5) 후설 벽화 네 벽과 조정에는 모두 똑바로 본 연꽃을 그렸다. 천장석에는 日月星 辰과 동시에 제목이 朱書로 그려졌다. 네 벽의 연꽃그립은 대부분 박락되어 등거리로 배치된 연꽃그림만 남 아 있다. 가로 세로가 모두 열을 이루고 있으며 배치가 대단히 규칙적이 다. 가로는 각 벽의 위에서 아래로 7 열이다. 연꽃은 모두 똑바로 본 8 잎 이다. 지름은 16-17cm 이며 처음에 검은 선으로 그리고 동시에 자홍, 토 황색과 흰색으로 칠하였다. 어느 꽃심은 홍색이고 어느 것은 흰색이다. 배열은 상호 간격을 따라서 이루어졌다. 동벽상 제 1 열은 일곱 송이고, 제 2 열은 여섯 송이인데 그것은 제 1 열의 공간에 따라서 배치하였다. 제 3 열은 제 2 열의 공간에 따라서 배치하였는데 당연히 일곱 송이이다. 아래 쪽으로 비례를 맞추었다. 남북 두 벽의 길이는 동벽보다 짧다. 위의 제 1 열은 여섯 송이, 제 2 열은 당연히 다섯 송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비례를 맞추었다. 서벽은 용도로 통하게 되어 연꽃그림이 다른 세 벽에 비하여 적다.
(6) 辨井 평행으로 쌓은 5 층( 重 )의 頂石上에 후실 네 벽과 똑같은 정면에서 본 8 영의 연꽃그림을 그렸으며 배열도 후실 네 벽과 같다. 다만 두 종류의 착색만 다른 연꽃을 교차로 배열하였다. 비록 많은 연꽃그림이 박락되었 지만 현재 판명된 것은 제 1 층에 여섯 송이, 제 2 층에 다섯 송이, 제 3 층에 네 송이이며 제 5 층에 두 송이가 그려졌다. 뚜껑돌에는 두 줄의 十字 교차의 대각선이 새겨졌다. 획은 정삼각형이 다. 동변 삼각형 내에 日象이 그려졌다. 회색 헝깊에 자홍색 선으로 세 발 달린 새 L 勳를 그렸다. 서 있는 곳은 동쪽인데 북쪽으로 향해 있다. 머리에는 휘어전 관이 있다. 서변의 삼각형에는 月象울 그렸다. 백색 헝 깊에 두꺼비와 옥토끼를 그렸다. 두꺼비는 네 다리를 크게 벌리고 북쪽 에 있고 옥토끼는 남쪽에 있다. 사람은 서서 공이를 들고 방아를 찡고 있다. 뚜껑돌의 남과 북 양측에 1 組의 별자리를 그렸다. 星辰은 대부분 흰색의 둥근 바탕의 중심에 황색 점으로 그렸다. 남쪽면은 흑색 선으로 일곱 개의 별을 연결시켜서 국자형(더形)의 별자리를 만들었다. 물잔형 의 별자리의 서쪽과 북쪽에는 또한 흩어진 별들을 그렸다. 북면은 흑색 의 선으로 일곱 개의 별을 연결시켜 북두칠성을 만들었다. 북두칠성의 동쪽과 (물잔의) 손잡이 맨 끝의 한 변 남쪽에도 두 개의 별이 있는데 그 것들은 흰색 원으로 처리된 독립별이다. 이와 북두칠성의 다섯번째의 남 쪽과 남쪽면 등은 이등변삼각형에 가깝다. 그곳의 끝에 또한 붉은색 둥 근 원이 있는데 그것도 독립된 별이다. 日月의 그림 중앙에 북쪽에서 남 쪽으로 자색으로 기록된 〈~t斗七靑〉의 네 글자가 예서체로 써 있다. (7) 관대 벽화 관대상의 벽화는 이미 거의 다 박락되었다. 다만 남쪽 관의 동남 모서
리 일부분이 남아 있다. 그 주위에는 흑색을 칠하였으며 중간에는 황, 백색 두 종류의 색깔로 조성된 직물문양이 있다. 윤곽은 검은 선으로 잡 았다. 3) 맺는 말 장천 1 호 벽화고분은 1 기의 중요한 고구려 고분이다. 이 무덤벽화의 배치는 근엄하고 내용이 풍부하며 조형이 생동적이며 도안(그림)이 화려 하고 아름답다. 대단히 광활한 시야로서 100 인 이상의 인물형상을 소화 시키고 있다. 이것은 고구려 사회의 면모를 전개시켰을 뿐만 아니라 의 식형태와 우주를 보는 관점까지 갖추고 있다. 이것들은 진기한 역사과학 적 가치와 대단히 높은 회화예술의 수준을 갖추고 있다. 규모와 배치의 입장에 의하여 장천 1 호는 通溝 고분군 중 염모묘와 상 당히 접근된다. 그리고 묘주인의 신분 • 지위 역시 대체적으로 같다. 염 모묘의 기록에 의하면 영모 출신의 귀족집안으로 관직은 〈 大兄 〉 이었다. 따라서 장천 1 호 및 그 벽화는 고구려 통치집단 내에 상당히 높은 〈 於 〉 에 상당하거나 이것보다 조금 더 높은 관직의 葬儀와 생활장면을 나타내 준다. 장천 1 호 고분에서 보여 준 남녀 묘주인 예불도 등의 장면은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벽화고분 중 드문 예이다. 그것은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 된 정황을 연구하는 데 희귀한 자료가 될 것이다. 『삼국사기 』 에 의하면 고구려 불교는 소수립왕 2 년 (372) 에 前秦에서 전래되었는데 그것은 같은 해 6 월이었다. 〈符堅遺使及浮屠屠 ) 1 i道 〉 고구려에 〈 送佛像, 經文 〉 을 하였 다. 4 년 (374) 에 〈 1 답阿道道來〉하였다. 그리고 5 년 (375) 2 월에 〈始創肖門寺 以置)頓道, 又倉 l j伊佛蘭寺以置阿道〉하였다. 이 사건의 인정으로 〈 海東佛法 之始〉의 표지가 되었다. 고국양왕 9 년 (392) 에 이르러서 정부가 정식으로
〈 下敎 崇 信佛法求福 〉 을 반포하였다. 광개토대왕 2 년 (393) 에 이르러서 또 한 〈 創九寺於平壤 〉 하게 되었다. 여기에 따르면 고구려 통치자의 佛法에 대한 홍보는 여러 대에 거쳐서 장기간 실시되었다. 다만 이 중대한 조치 의 실시 결과가 문헌기록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장천 1 호 고분벽화에 농도 질은 불교 분위기의 표현은 불교가 4 세기 말 고구려 왕실을 거쳐서 崇佛에 대한 장려가 있었고 그것은 상충사회 내에서 강렬한 호응을 얻었 다. 장천 1 호 예불 그림 내의 佛과 菩薩의 배치방식, 頂禮 공양의 형상 등 울 중원 북위의 石窟 예술과 약간 비교하여 보면 고구려의 공양과 예불 방식은 중원과 대단히 유사하다. 예를 들면 義縣萬佛堂石窟大籠西壁의 중간에 1 구의 坐佛이 조각되었다. 그리고 양쪽 옆에는 千佛像이 浮影되 었다. 그것은 장천 1 호와 대단히 유사하다. 또 한 예로 보면 大同雲岡
第九窟은 전후 두 개 室로 나누어져 있다. 전실 입구에 權扶桓(처마 달린 묘)이 있으며 중간에 향로가 있고 좌우에 각각 4 개의 비천상이 있다. 內 籠基(안감실) 단석 위에 공양인이 무릎을 꿇고 있으며 좌우에는 각각 한 마리의 護法 사자가 앉아 있다. 후실의 감중에는 說法坐佛이 있으며 양 쪽에는 연꽃 양산울 들고 있는 5A 의 공양인들이 있는데 이것도 역시 장 천 1 호의 것과 갇다. 이러한 것은 고대 중원과 고구려 문화상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동시에 고구려 불교사상, 불교예술의 윤원문제에 근거 를 제시하여 주고 있다. 장천 1 호 벽화 중 주의할 가치가 있는 것은 남녀 묘주인이 예불을 할 때에 모두 두 무릎을 꿇고 있다는 점이다. 원숭이 재롱 장면에서 원숭이 가 재롱부리도록 하는 한 사람과 그의 오른쪽 아래에 있는 다른 한 명의 남자도 두 무릎을 꿇고 있다. 이렇게 무릎을 꿇고 예배하는 방식과 문헌 기록 및 무용총 묘실 중심벽에 나타난 고구려인들의 〈踏拜良一脚〉(무릎 울 굽힐 때 한 다리를 뒤로 뺀다)의 습관과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세부적 행위의 불교적 전입과 유행은 고구려 사회생활과 의식형태에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완고한 전통, 풍습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고구려 벽화고분은 모두 통치계급의 무덤이다. 그 중 전기에 속하는 고분벽화는 모두 묘주인 생전의 음식, 기거와 오락, 연회생활을 다루었 다. 그것들은 모두 안일하고 자신에 찬 모습이었다. 특히 장천 1 호 고분 연대는 다소 늦다. 이 고분의 생활장면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지위 정도 이다. 이유는 연화문으로 장식한 후실 그림에 거대한 衛士, 문지기와 시 녀들 그리고 四方의 四神을 섬기고 佛法에 구복하는· 장면들에서 볼 수 있다 . 당시의 고분벽화는 이미 功利自的에 편중되어 있다 . 그래서 묘주 인의 육체와 영혼이 능히 수호되고 비호받기를 희구하고 있다. 이것이 엄연한 벽화의 주요 뜻(旨 意 )이다. 고구려 불교의 융성과 고분벽화의 실 현은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장천 1 호 고분벽화에는 수렵형식과 유희, 주악연주 등이 묘사되어 있 다. 그것은 고구려 사회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 밖에 벽화에 나타난 정자, 턱수염 형태의 대좌( 駿 彌座), 박산로, 뿔모양의 잔 등은 고구려 벽화에서 최초로 출현한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의 건축유형, 문물제도와 일용기 등을 연구하는 새로운 자료들이다. 회화예술의 각도에서 보면 장천 1 호의 벽화는 주목할 만한 특색이 있 다. 그것은 먼저 배치의 합리성, 전체감과 예술효과를 중시하였다. 예를 들면 고분벽화 화면의 배치는 전체적 입장에서 통일되게 배치, 설계하였 다. 그러면서 총체적으로 상당히 엄격한 중추적 대칭을 나타내었다. 이 러한 배치방식은 엄숙한 분위기마저 보여 준다. 다시 예를 들면 불상과 보살은 전실 조정 하부의 정면 중앙과 측면 양쪽 복도(麻)에 배치하였 다. 만약 묘도에서 전실로 들어가면 반드시 고개를 위로 쳐들고 그림들 울 보아야 한다. 이러한 시각은 쉽게 사람들로 하여금 일종의 두려운 심 리를 유발하게 한다. 또한 그것은 당대 불교의 의식형태 영역 속에 신성 한 지위를 갖게 하기도 한다. 또한 용도 양측의 시녀와 전실 앞뒤 벽의 위사와 문지기들의 조형은 높고 크다. 그래서 그 형상이 대단히 돌출되
었는데 그것들은 서로 다른 직무수행에 대한 안배 자체를 대단히 적절히 고려하였다. 그것은 묘주인의 존귀함을 뚜렷하게 의탁하였을 뿐만 아니 라 고분벽화 총체 설계의 주요한 뜻이 묘주인의 망령을 위로하고 보호하 는 것임을 선명하게 나타내었다. 그것과 대조적인 것은 전실 남과 북 두 벽의 인물풍속도이다. 그 내용의 풍부함은 후세의 사람들에게 중시를 받 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상 거기에 묘사된 안물형상의 그림은 상당히 작 다. 더욱 북벽의 그립은 중심장면 주위의 공간을 다른 계열의 그림과 독 립된 연꽃을 그려 메웠다. 그 밀도는 대단히 균일하다. 당대의 화가가 의식적으로 두 벽을 대칭적인 〈 灰調子 〉 로 처리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차이(次級)의 그림은 전체 고분벽화의 총체적인 효과의 농도를 희박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총체적 필요에서 출발된 그림은 형평과 각 부분을 처 리할 때 전체 화면의 뜻과 기세를 구현하기 위하여 화면구성의 선명성을 어느 정도 희생시키면서 화가의 예술상의 기백과 수양을 나타내었다. 장천 1 호 고분벽화는 형상의 塾造와 화면조절 방면에서 대단히 깊은 예술의 조예를 나타내 주고 있다. 벽화 중 불상과 보살은 위용의 단정함 을 나타내고 시녀, 문지기들은 공손함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것은 마치 인물의 신분과 지위를 나타낸 것과 같다. 조정에 그려진 천인, 주 악인들의 다양한 자태, 민첩하고 활발한 움직임, 아름다운 자태, 다양한 변화 등은 화가의 생각대로 손이 움직여 주었음을 보여 준다. 그 밖에 中軸의 대칭적인 전체 배치는 때때로 정체되고 생기가 없는 감을 주기도 하지만, 이 고분벽화는 오히려 엄청나게 많은 면이 유려하고 달콤하며 속도감 있는 선들과 민첩 • 활달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형상으로 어떤 미 세한 점들을 조정하여 주고 있다. 더욱이 풍속도 그림 중 흑곰이 앉아서 음식을 모으는(路倉) 모습, 노인이 앉아서 고개를 돌려 보는 모습, 마차 를 몰아서 사람들을 웃게 하는 장면 등에서는 화가의 낙관적 기질과 생 활조절을 충족하기 위한 예술적 소양이 엿보인다. 동시에 어느 정도 대 칭의 배치를 위배한 것은 오히려 그린 사람의 기질을 엿보이게 한다.
장천 1 호 전실벽화에 많은 범위 (한계)가 정해져 있다 . 그림 범위의 설 정은 중원에서는 戰國에서 漢 代까지 성행하였다. 이 고분벽화 중 범위의 적용은 고대 중원에서 그려진 정황과 똑같다. 예를 들면, 네 벽 위쪽의 벽면과 조정 사이의 한계(범위)는 벽면과 조정의 서로 다른 그림으로 구 분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조정의 제 1 차 정석은 네 벽의 벽면을 따라 서 평행하다. 그 사이에는 결구의 한계선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것들은 실제적으로 구분된 결구의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벽에 있는 세 줄(三道) 경계 중 아랫변 두 줄은 음식 나르는 그림으로 위에서 표현된 내용과는 분리되고 있다. 그리고 남벽 세 줄의 경계선 중에 가장 위쪽의 범위는 왼쪽 방향의 그림을 그리지 않은 곳에서 머리(頭) 부분까 지이다. 오히려 왼쪽 끝에는 두 범위의 하복이 관통되었는데 그것은 정 자 밀의 묘주인 남녀를 묘사한 것이다. 그것은 간격이 있는 음악대와 群 舞와 묘주안이 모두 같이 있는 동일 장면으로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 줄의 범위(道界格)는 또한 당연히 동일 장면 중 서로 다른 거리 공간을 구분하는 하나의 표지가 되기 때문이다. 상호 대칭적인 전실 남북 두 벽 에는 남벽은 다만 정원의 경관을 그림의 경계로 하고 복벽은 교의 임야 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오락, 주악과 수렵활동 등의 진행을 묘사하고 있다. 그 내용은 연관되어 있으나 장면은 특히 다르며 그곳의 공간 역시 대단히 달라서 오히려 범위를 구분할 그림은 없다. 여기에 따르면 장천 1 호 벽화 중 범위설정은 직접적으로 풍부한 화면의 표현을 처리하는 일 종의 보조수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가 자신이 수평적인 경계(범위) 를 설정하여 일종의 인상, 즉 정원의 배치는 특히 잘 정돈되었으며, 또 한 정원에서의 활동도 질서정연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마지막으로, 集安 고구려 벽화고분의 발전서열을 배경삼아 장천 1 호 고분의 지위를 검토하고 동시에 그 대체적 연대를 추정하여 보자. 현재 集安縣 경내에서 발견된 고분은 모두 20 기이다. 그 결구와 벽화 의 특칭에 따르면 이 고분들은 대체로 4 期로 나눌 수 있다.
제 1 기는 무용총과 각저총을 대표로 한다. 시기는 4 세기 말에서 5 세기 전염, 이 시기의 고분은 方形墓室 의에 橫向으로 길게 조성되었고 橫卷 頂의 전실을 가졌으며 묘실 조정은 다층으로 쌓인 궁륭 천장이다. 벽화 내용은 주로 묘주인 생전의 생활정경으로, 즉 일종의 기념적 성격의 작 품이다. 제 2 기는 통구 12 호, 마선구 1 호와 환문총 등이 대표이다. 시기는 5 세 기 중엽이다. 이 시기의 고분은 사각형 묘실 의에 일반적으로 제 1 기의 묘실을 개조한 측실 또는 감실아 있으며, 묘실 천장 역시 다층으로 쌓였 다. 비록 작은 말각석을 끼웠지만 결구형식은 대단히 풍부하다. 다만 전 체적 윤곽이 四阿式이다. 네 경사면과 네 모퉁이의 稷育은 상당히 분명 하다. 벽화내용은 여전히 묘주인의 생전 생활정경 위주이다. 그러나 그 밖에 일종의 순수한 꽃무늬, 도안 장식이 묘실의 作法이다. 묘실 네 벽 에는 錦織이 벽체를 장식하고 있다. 동시에 묘도 내에 墓獸를 그리고 직 접적으로 묘주인의 망령을 둘러싸고 배치하는 功利傾向으로 전개되었다. 제 3 기는 삼실묘가 대표적이다. 시기는 5 세기 말에서 6 세기 초이다. 연 대와 결구의 각도에 따르면 이 시기에는 또한 영모묘도 해당된다. 이 시 기의 고분 평면은 雙室 또는 三室이다. 조정의 구조는 대체적으로 2 기와 같다. 단, 頂部(천장)에 비교적 커다란 석재를 교차하여 쌓은 간결한 형 식이 출현한다. 벽화내용에 四神이 출현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벽면상에 거대한 화폭으로 역사와 위병(待衛)이 그려진다. 망령을 수호하는 것이 회화의 주요 내용이다. 불교적 색채가 대단히 전하다. 기념적 성격의 묘 주인 생활도는 다만 일종의 잔류된 형식이 남아 있는 것에 불과하다. 退 居한 것은 다음 차례이다. 제 4 기는 사산묘, 4 호묘와 5 호묘가 대표적이다. 시기는 6 세기 중엽이 다. 모두 단실묘이고 조정의 충수는 감소되었다. 동시에 순수히 큰 괴석 으로 교차하여 간결하게 쌓는 방식으로 변천된다. 벽화는 직접 석벽에 그렸다. 생활도는 완전히 사라지고 용도 내에 역사가 그려지고 네 벽에
는 大메곱의 四神이 그려져서 완전히 묘주인의 망령을 상징적으로 보호하 게 되었다. 장천 1 호의 사신 안배는 조정 하부에 있다. 벽면에 큰 화폭의 시자와 위병을 그렸고 불교적 색채가 농후하다. 생활도, 退居 등의 그림은 다음 을 차지하였다. 形象上 연꽃화생, 天界 奏樂人둘로부터 대들보상의 力士 까지 활달 • 진솔한 회화풍격을 가졌다. 이 모든 것들은 제 3 기의 삼실묘 와 대단히 접근된다. 비록 이 고분은 제 2 기의 벽화고분과 상당히 접근되 지만 그 평면이 雙室이고 조정 결구도 보통 제 2 기의 벽화고분보다 더욱 웅장하다. 그리고 벽화배치도 묘주인 망령의 보호에 중점을 둔 점이 현 저하므로 제 2 기로서 포함시킬 수 없다. 더욱이 후실에 나타난 것에 의하 면 석벽상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시도와 전실 상충 벽면에 나타난 청룡 형상을 논하면 이 고분은 심지어 제 4 기의 성분을 가지고 있다. 종합하면 장천 1 호분은 제 3 기에 해당된다. 만약 장천 1 호분 벽화 중의 어떤 그립을 중원 석굴과 비교하면, 중원 석굴 예술 중 獅子 護法은 5 세기 후기에 출현한다. 보살의 天衣와 띠 등 의 갖춤은 北魏 孝文帝太和改制 이후의 양식이다. 보살 발밀의 복련대좌 와 불상 하반신의 기술, 허리와 傾彌座등은 후기에 더욱 유행한 형식이 다. 이러한 정황에 따르면 장천 1 호묘의 연대는 5 세기 말보다 이르지 않 다. 6 오회분 4 호와 5 호 吉林省 集安通溝 평원의 중심부, 자금의 集安驛 북쪽에 5 기의 거대한 봉토분이 있는대, 그것은 마치 두구와 같아서 그곳 사람들이 오회분이라 고 불렀다. 그것들의 번호는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부여하였다. 4 호묘
는 이전에 소위 〈 通溝未編號墓 〉 라고 불렸다. 5 호묘는 이전에 소위 〈 제 17 호묘 〉 또는 〈 四葉塚 〉 이 라고 불렸다. 그 중 4 호묘는 1950 년에 발견되 었 고, 5 호묘는 중일전쟁 중에 굴착당하였다. 1962 년 봄 吉林省 박물관은 문화국의 지시에 따라서 集安縣 문물관리 소와 함께 4 • 5 호를 발굴하였다. 발굴은 6 월에 시작하여 8 월에 기본적으 로 종료하였지만 벽화에 관한 묘사는 계속되었다. 발굴에는 王承禮 • 李 殿福 • 方起東 • 韓淑華 • 劉萱堂 • 林至德 등이 참가하였다. 정식 발굴보고 서를 내기 전에 먼저 간단한 요약보고서를 발표하였는데, 4 호는 王承 禮 • 李殿前물이 집필하고, 5 호는 方起東 • 李殿福이 집필하였다. 7) 1) 4 호묘 (1) 묘실 결구 4 호묘는 절두방추형의 봉토묘(그립 6-45) 이다. 그 잔고는 Sm, 주위 길 이는 160m, 묘 방향은 150° 이다. 묘는 墓道(안길), 雨道와 墓室 3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묘도는 남쪽에 있으며, 현 길이는 6m 이고, 중앙에는 가로로 미가공된 토담이 있고, 그 위에 장석을 쌓고, 그 의면에는 백회를 발랐다. 묘도 뒤는 용도와 이어졌으며, 용도 길이는 1.88m 이다. 용도로부터 묘문에 전입하며, 묘문은 묘실 남벽 동쪽에 치우쳐 있다. 그 높이와 너 비는 각각 1. 75m 이다. 용도 입구 내에 문광이 뚫렸고, 저부에는 묘실보 다 14cm 높게 석편이 깔렸다. 의부는 묘도와 수평이다. 묘실의 평면은 가로가 직사각형이며, 동서 길이는 4.2 m , 남북 너비는 3.6 8 m, 높이는 3.64m 이다. 찰 가공된 대형의 화강암으로 축조되었다. 톰 사이는 백회로 메웠다. 4 벽을 상하 2 층으로 나누어 쌓았는데 가볍게
。 。
안쪽으로 경사가 졌다. 높이는 1. 92m 이다. 벽에 창방(梁接 대들보)이 4 벽에서 12cm 뻗어났으며, 그 높이는 54 . 5cm 이다. 창방 위에 말각을 쌓 고, 2 중 굉돌을 놓아 조정을 만들었다. 제 1 말각의 말각은 창방 네 모서 리상에 비스듬히 놓았다. 울려다보면 마름모꼴이다. 높이는 56cm 이다. 제 2 말각의 말각은 제 1 말각의 네 모서리에 쌓았다. 그것은 창방과 평행해 서 울려다보면 직사각형이다. 높이는 60cm, 그 위에 평정한 거석으로 정상을 덮었다. 묘실 안에 3 개의 돌 尻床 臺 (관상대)가 동서로 나란히 놓여 있다. 북쪽 끝은 모두 북벽과 연결되어 있다. 높이는 0.1 6 m, 길이는 2.4 5 -2.71m, 너 비는 1. 05- l.2 5m 이다. 남벽의 서쪽단에 또한 동서로 향한 하나의 石座가 있는데, 그것은 서남 두 벽과 연결되어 있다. 길이 1.78 m, 너비 o.s7m, 높이는 0 . 2m 로 부장품을 놓는 장소로 보인다. (2) 벽화 묘실 4 벽과 조정 위에 벽화가 있으며(그림 6-46), 용도 양벽과 시상대 위에도 벽화가 있다 . 벽화는 모두 화강암 위에 직접 그렸다. 색채가 대 단히 화려하다. 벽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도 좌우에 1 인씩 力士가 있는데 아깝게도 많이 손상되었다. 묘실 4 벽에는 四神울 그렸다. 남벽의 홍색 주작은 얼굴을 동쪽으로 향 하고, 노란 새부리에 붉은 관을 쓰고, 날개를 펴고, 꼬리를 치켜 세웠 다. 다리는 연화대 위에 있다(그림 6-4 7 ). 북벽에는 현무를 그렸다. 서향 울 하고, 거북이의 등은 자색이고, 뱀의 몸은 오색이다(그립 6-48). 서벽 의 백호는 동벽의 청룡과 함께 남쪽을 향하였다(그립 6-49). 모두 역동적 인 모습이다. 청룡은 등이 자색이고, 배는 노랗고, 몸은 오색이고, 색상 은 화려하다(그림 6-50). 사신도 아래에는 연속적인 연꽃 화영문 도안이 바닥에 깔렸다(그림 6-51, 6-52). 이러한 화영문은 홍, 황, 흑 등 3 색으로
y •.v .-,· . ·· .,
그림 6-49 오회분 4 호묘 서벽 백호도
a b
그림 6-52 오회분 4 호묘 동북각 괴수도
평행선을 묘사하였다. 망문 내에는 3 종 문안을 교차시켰다. 1 종으로는 옆에서 본 모양의 연꽃을 그렸는데, 모두 11 잎으로 황, 자, 녹색 등으로 아래에는 꽃줄기가 있으며, 양측에 화영문이 있다. 화영문 위쪽에 작은 연꽃이 있다. 다른 1 종은 망상문 아래에 좌우로 卷草葉이 있으며, 두 잎 사이에 홍색 3 잎 또는 백색 5 잎의 연꽃이 있다. 마지막 1 종은 망문 저부 로부터 좌우로 향한 두 송이 권초잎인데 거기에 녹, 황, 다색 등 3 색이 있다. 중간에 백색의 복판 연대가 있으며, 그 위에 각종 人像이 있다(그 림 6-53 a, b, c). 인상은 모두 10 人인데 자세가 모두 다르며, 어느 사람은 머리에 籠冠 울 썼으며 얼굴이 준수하고, 몸에 합임의 도포를 입고, 허리에는 띠를 두르고, 손에는 부채를 들었으며, 검은색 신발을 신었다• 어느 사람은 머리에 籠冠울 쓰고 몸에는 긴 도포를 입고, 허리에 채색 띠를 두르고, 검은 신을 신었다. 손에는 부채를 들고 있는데, 자태가 대단히 아름답 다. 어느 사람은 연대에 무릎을 꿇고 또는 도사리고 앉아 있다. 몸에는 羽衣를 입거나 또는 八卦를 그리고, 또 陳丹울 그리거나 열심히 책 읽는 모습을 그렸다. 괴수는 짐승의 얼굴에 사람의 몸으로 뿔이 있고, 나신이 며 왼쪽 다리는 구부린 채, 오른쪽 다리는 뒤로 뻗었으며, 두 팔을 앞으 로 펼치고 두 마리가 얽혀 있다. 두 마리의 용이 얽혀 있는데 머리는 위 로 향하고, 꼬리는 아래로 내려왔다. 배는 창방에 대고 있으며, 발톱은 천장 대들보에 대고 있다. 한 마리 용의 발톱은 괴수 머리 위에 있다. 각 벽에 두 마리씩 창방에 용이 그려져 있다. 용들이 얽혀 있는 연속 도안이다(그립 6-54). 창방 상하 가장자리에 연속된 마름모꼴 영락문이 그려져 있다. 제 1 굉돌에 일월신, 비천상, 바퀴를 만드는 사람이 그려져 있다. 일월 신은 북쪽 모서리 두번째 말각상에도 그려져 있는데 사람 머리에 용의 몸이다(그립 6-55). 남자상의 일신은 오른쪽에 있으며, 머리는 풀어 헤쳤 으며, 두 손으로 태양을 머리 위에 들고 있고, 태양 속에는 세 다리 달
冒~
린 새가 있으며, 합임의 우의를 입었다. 월신은 왼쪽에 있으며, 여자 얼 굴 모양이고, 긴 머리이며 두 손으로 달을 머리 위에 들고 있다. 달 속 에는 두꺼비가 있으며 옷깃 있는 붉은색 우의 저고리를 입고 있으며, 하 얀 띠를 둘렀다. 용신은 오색이며, 다리를 전후로 펼치고, 바로 위쪽으 로 날고 있다. 일월신 중간 및 각자의 몸 뒤에 보리수가 그려져 있다. 동쪽 모서리 두번째 말각석과 접촉되는 곳에 소머리인과 비천상이 그 려져 있다(그림 6-56). 소머리인은 왼쪽에 있으며, 그는 분홍색의 옷싶이 있는 치마를 입고, 검은색 신을 신었다. 오른쪽의 천인상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얼굴에 수염이 조금 있으며, 옷싶 있는 다색의 긴치마를 입었 다. 모서리 두번째 말각상에 治鐵人과 바퀴 제작인이 있다(그림 6-57). 왼쪽에 있는 야철인은 머리를 묶었고, 황색 것에 녹색 옷것의 다색 도포 를 입고, 검은 신을 신고 암석 위에 앉아 있다. 그는 오른손에 쇠집게를 들고 있는데, 그 집게 위에 붉은 첫덩이를 모루 위에 놓고 왼팔은 쇠망 치를 높이 들고 쇠를 두드리고 있다. 바퀴 제작인은 오른쪽에 있는데 황 포를 입고 검은 신을 신었으며, 바퀴 앞에 서 있다. 왼손으로 검은색 마 차바퀴를 잡고, 오른손으로 마치를 들고, 못을 박고 있다. 두 사람 사이 에 두 그루의 보리수가 있다. 서쪽 모서리의 남벽 말각상에 1 인이 있다. 그는 동쪽을 향해 서 있으 며 긴 羽抱룰 입고 있다. 그는 손에 한 가지 물건을 들고 흑색 간돌(磨 石) 앞에 참시 머물러 있다. 서쪽 모서리의 북벽 말각상에 용을 탄 우인 이 있다. 그는 얼굴을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옷깃 있는 도포를 입었
그림 6-55 오회분 4 호묘 북벽 조정 벽화
그림 6-57 오회분 4 호묘 조정 남쪽 모서리 벽화
고, 오색의 용을 타고 있다. 옷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그림 6- 5 8). 네 면 말각석 중간에 한 마리씩 있는 용은 자태가 같다. 모두 고개를 돌려 뒤를 보고 있으며 몸을 움직이고 있다. 몸체는 제 2 굉돌의 말각상에 있다. 조형이 대단히 강건하고 활력이 있다. 제 2 굉돌에 奏樂人과 日月星辰 등이 그려져 있다. 북쪽면에 주악 비천 인 3 명을, 그 사이에 북두성좌를 그렸다. 그 중 우측에 한 사람이 머리 에 연화관을 쓰고 자색 장포를 입고 왼쪽 다리는 책상다리를 하고 오른 쪽 다리는 앞으로 내밀고, 무릎 위에 琴울 울려놓고 오른손으로 弦을 조 정하고 왼손으로 금을 치고 있다. 중간에 한 사람은 남쪽을 향하고 있는 데, 옷싶이 노란 옷을 입고, 膜鼓(장구)를 두드리고 있다. 좌측 한 사람 은 높은 상두를 하였고, 장포를 입었으며, 한 가지 물건을 들고 있으며, 왼손으로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있다. 두 발은 뒤로 구부리고, 고개를 돌 려 돌아보고 있다. 동쪽면의 중간에 태양이 있고, 그 안에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있다(그립 6-59). 용을 탄 주악인이 왼쪽에 있는데, 머리를 묶 어 상투를 하고 다색포를 입었으며, 오른손에는 바람에 혼들리는 깃대
그림 6-59
(方瓚)를 들고 머리와 몸을 돌리면서 왼손에 든 排蕭를 불고 있다. 남쪽 면 중간에 南斗六星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에 한 사람의 주악인이 머리 를 묶고, 다색의 짧은 옷을 입고 공작울 타고 있다. 그는 손에 한가지 물건을 들고 있다. 왼쪽 1 인의 기악인은 半(퉁소)을 불고 있다. 머리를 묶고, 다색포를 입었으며, 두 무릎을 꿇고, 博帶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 는데, 그 자세가 신선 모습이다. 서쪽면 중간에 달이 그려져 있으며, 그 안에 두꺼비가 있다. 좌측에 주악인이 한 사람 그려졌는데 머리를 묶고, 장포를 입었으며 용을 타고 호각을 불고 있다. 오른쪽에 백학을 탄 선인 이 있다. 그는 머리에 臼帳울 썼으며, 자색포를 입었다. 사람들 사이에 모두 구름무늬를 그려 구름을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제 1 • 2 굉돌 말각석의 아래에 용을 한 마리씩 그렸는데 모두 여덟 · 마리 이다. 모두 고개를 쳐들고 또아리를 틀고 있다. 조정 정상에 한 마리의 용이 고개를 쳐들고 빙글빙글 돌고 있다. 생동감이 넘치며, 떠도는 구름 과 성수의 바탕이 되고 있다. (3) 유물 U갈 굴된 유물은 드물다. 다만 도금된 청동제 단추, 도금된 못, 엷은 편 과 쇠못 등이다. 그 밖에 관재편(나무)이 있는데 붉고 검은 칠이 되어 있다(그림 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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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 호묘 (1) 묘실 결구 5 호묘의 결구는 대체로 4 호와 비슷하다(그립 6-61), 그곳 주민들 말에 의하면, 5 호묘의 봉토는 4 호의 것보다 높고 컸다. 현재 1/3 정도 남았는 데 그 잔고는 3m 이다. 석조의 묘실은 지표보다 약 3-4m 낮다. 남벽 한 가운데에 용도가 있으며 방향은 158° 이다. 묘는 묘실, 용도, 묘도 등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용도 길이는 1.9m , 그 남단은 동쪽으로 열려 있 다. 북쪽 너비 1.62 m, 남쪽 너비 1. 87m 이다. 용도상에는 정석 (남벽상의 창방 부분과 연결된 동일 거석의 석재이다)이 있으며, 묘실 한 변은 평탄하 게 가공되었다. 높이는 바닥에서 1. 75m 이다. 다른 한 변의 岩面은 가공 되지 않았다. 그것은 위로 향하였으며, 용도 입구까지의 높이는 2.8 6 m 이다. 용도와 연결된 묘문의 안쪽, 좌우 양벽 및 정부의 가장자리에 파 여진 약간 융기된 문의 처마, 문골이 있는데 너비는 15cm 이다. 저부에 도 같은 너비의 문광이 있는데 높이는 2cm 이다. 용도 남쪽으로는 가로 지른 토담이 있다. 이 토담은 동서 양측으로 약간 돌출되게 쌓았으며, 그 완곡면은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것은 마치 원래의 묘도의 너비 갇지 만 묘도는 이미 파괴되어서 그 형태를 자세히 알 수 없다. 묘도의 후단은 묘도의 입구에서 약 lm 거리이다. 거기에는 상하로 상 호 압축된 두 개의 거형 植門石이 있는데 그 높이는 3.35m 이다. 그 내 면은 규칙적이 아니며 당문석의 서쪽은 가로지론 토담과의 사이에 한 사 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묘실 평면은 잘 짜여전 가로 직사각형이다. 그 동서 길이 4.37m, 남 북 너비 3.56m 이다. 찰 다듬은 화강암 석재로 쌓았으며, 톰 사이는 백 회로 봉하였다. 네 벽의 높이는 2.18m 이며, 안쪽으로 약간 기울었고, 그 위에 창방을 놓았다. 창방은 내벽을 향하여 60-lOcm 돌출되었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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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는 55cm 이다. 창방 위의 조정은 말각쌓음으로 하였다. 묘실의 높이 는 3 . 94m 이다. 그 제 1 말각이 축소되고, 벽면이 정제되었다. 네 모서리 에 놓은 말각석은 올려다보면 팔각형이다. 그 높이는 54cm 이다. 제 2 굉 돌은 제 1 굉돌 중 말각석과 평행하게 쌓았다. 올려다보면 사다리꼴이며, 그 높이는 66cm 이다. 최상에 평정한 하나의 뚜껑돌을 덮었다. 묘 내부에는 세 개의 돌 시상대가 있는데 그것은 동서로 나란히 놓여 있다. 각각 높이는 23cm 이다. 동서 두 개의 시상대는 벽에 붙여 놓았으 며, 그 톰 사이는 백회로 메웠다. 중간 시상대는 완정한 석재로 다듬어 서 만들었다. 그 길이는 2.6 6 m, 너비 1 . 28m 이며 북벽으로부터 o . 29m 의 지점에 있다. 좌우 동서 시상대와의 거리는 31cm, 30m 떨어져 있다. 동쪽 시상대는 북벽에서 35cm 거리에 있으며, 그 길이는 2.62m, 너비 1.2 7m 이다. 석재가 짧아서 남쪽 끝에 하나의 작은 돌을 연결시켰다. 서 쪽 시상대는 북벽에서 26cm 지점에 있으며, 길이 2.6 7 m, 너비는 1.2m 이다. 북단에 작은 돌로 보충하였다. 거기에 보충시킨 돌은 얇고 작다. 그 밖에 한 충의 석회를 발라서 동서 두 시상대를 평평하게 만들었다. 남벽에 붙은 창방 아래, 용도의 동서 양측에 지름 5cm, 깊이 7cm 정 도 되는 3 개의 작은 구멍을 팠다. 동변의 작은 구멍은 동벽에서 0.3m 의 거리에 있으며 서변의 두 개는 서벽에서 각각 0.9 7 m, 1.2 m 거리에 있 다. 놓인 부위로 보아 무엇을 걸치는 못구멍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 밖 에 4 벽 제 1 말각의 중앙에 각각 지름 5cm, 깊이 1 . 5 _ 2m 의 작은 구멍 이 있는데 그 위치는 바로 벽면 벽화상의 용의 입에 해당된다. 원래 보석 등을 양감한 것으로 추측된다. (2) 벽화 전체 묘실의 4 벽과 조정, 그리고 시상대 및 용도 좌우 양벽상에 모두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벽화는 직접 암석상에 그렸다. 화면상으로
벽화의 처리과정이 판명된다. 먼저 섬세한 홍선 또는 혹선으로 윤곽을 그린 다음 홍색, 갈색, 황색, 흰색, 분홍색 등으로 색을 처리하고 마지 막으로 진한 黑線句勒울 하여 처음 윤곽을 완성시켰다. 벽화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도 좌우 양벽 각 면에 한 사람씩 무사를 그렸다. 얼굴은 용도 입구 룰 향하고 있는데 현재 박락이 심해서 분명하지 않다. 동벽의 역사는 머 리 위에 상두를 하고 활에 화살을 장전하고 있으며, 如意 신발을 신고 覆辯 연꽃대 위에 앉아 있다. 서벽 역사도 복판 연꽃대 위에 서 있는데 손에 창(載)을 들고 있다. 용도 안쪽 입구에 파전 문미, 문광에 홍색, 황색, 녹색, 흰색 등의 꽃잎이 있다. 묘실 4 벽에 거대한 사신울 그렸다. 청룡은 동벽을 향해 평행하게 그렸 는데 황색, 녹색, 홍색, 갈색을 칠하고 그 위에 흑색으로 방격의 비늘, 목, 복부를 그린 다음 분홍색을 칠했다. 四股의 색채는 모두 龍身과 같 다. 그리고 후에 하얀 날개를 그렸다. 하부에는 먹선으로 윤곽만 그렸 다. 각 다리에 세 개의 발톱을 붉은색으로 처리하였다(그림 6-62). 이 묘의 벽화 중에는 39 마리의 용이 있는데 크기가 같고, 처리된 색도 같다. 서벽 백호 역시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나부끼는 긴 털을 그렸고, 복부는 분홍색으로 처리하고 다리 뒤로 하얀 날개를 그렸다. 남벽은 용 도를 사이에 두고 동서 2 단으로 이루어졌다. 각각 주작이 그려졌으며(그 림 6-63), 날개를 펴고 위로 날려고 하고 있다. 꼬리가 길며 흰색의 복 판 연좌 위에 있다. 연좌는 박락되어 희미하다. 서쪽 주작의 부리는 예 리하며, 머리에 쓴 관은 화영상이고 갈색 바탕에 흥선으로 처리하였다. 긴 목은 분홍색, 몸은 붉은색이며, 두 날개는 홍색 바탕에 녹색으로 장 식하였다. 꼬리 날개는 황색, 녹색, 홍색으로 나누어 그렸다. 동쪽 주작 의 형상은 기본적으로 같다. 다만 흰색의 범위가 상당히 길다. 의부로 뻗은 뿔과 주작의 몸은 평행으로 갈색, 녹색, 홍색을 칠하고, 복부에는 분홍색을 칠하고, 머리에 쓴 관에는 녹색 바탕에 붉은 선으로 처리하였
그림 6-62
다. 북벽의 현무는 거북이와 뱀이 결부된 것이다. 거북이 몸은 서향으로 고개를 돌려 위를 쳐다보고 아래로 뻗은 뱀의 머리에 상대적이다. 거북 이 등에는 홍갈색을 칠하고 龜甲 문양은 없으며, 네 다리에 세 개의 발 가락을 만들었다. 뱀 몸통에는 청룡과 갇이 비늘문양을 그렸다. 묘실 4 벽에는 사신상 의에 연꽃 화염망문을 가득 그렸다. 망문의 연속 배열은 상당히 규칙적이며 모두 세로로 된 2 組이다. 동서 두 벽 가로열 은 4 조이며 남북 두 벽 가로열은 6 조이다. 홍, 황, 혹 3 색의 평행선으로 망문을 그렸고, 그 상하 모서리에 점철된 분홍색의 작은 연꽃이 있다. 4 호묘와 다른 것은, 인물상은 없고 규칙적인 안배로써 한 송이는 연꽃 의 망문, 그리고 한 송이에는 화염의 망문과 같은 것을 연속적으로 배열 했다는 점이다. 연꽃은 모두 측시된 것이며 11 잎이다. 색은 녹색, 분홍 색, 갈색, 황색 등이다. 아래에는 꽃줄기가 있으며, 좌우에 여러 가지 색으로 小柱 화염을 보충하여 그렸다. 화영문은 모두 세 기둥을 만들었 는데 중간에 있는 기둥은 비교적 크다. 각각 홍색, 녹색, 갈색, 황색 등 울 칠하였고, 그 좌우에 소주 화염을 보충하였다. 그러나 색은 다르다. 묘실 네 모서리에 괴짐승이 용을 탄 대들보를 그렸다. 그 형상은 4 호 와 같다. 동북 모서리 괴수는 동벽에 그렸는데 그 오른쪽 가지가 북벽에 까지 뻗었다. 붉고 큰 주둥이, 푸른 얼굴에 긴 이빨, 두 눈을 부릅떴고, 거꾸로 선 흰색의 긴 눈썹은 마치 쇠뿔 갇다. 상체에는 홍록 우의를 입 고, 가슴은 노출되고, 아래에는 회색 바지를 입고, 왼쪽 다리는 구부리 고, 오른쪽 다리는 뻗었다. 뻗은 앞다리는 각각 한 마리 용을 잡고 있으 며 두 마리 용이 결합되어 위쪽 끝의 창방에 함께 있다. 그 나머지 용의 형상은 모두 완정하나 괴수는 이미 많이 박락되어 희미하다(그림 6-64). 창방상에 8 마리의 용이 얽혀 있으며, 각 면 좌우의 양끝에 용머리가 그려져 있다. 전면의 용은 뒷면의 것과 얽혀 있다. 뒷면의 용은 입을 크 게 벌리고, 전면 용의 몸을 물고 있다. 그와 갇이 연결되어 하나의 고리 를 만들었다. 구성된 한 폭의 근엄한 도안이다(그립 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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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방의 벽면에는 상하에 각각 마름모꼴을 위주로 한 영락상의 연속 꽃 무늬를 장식하였다. 마름모는 紅桓울 만들고 황색, 녹색, 흑색, 흰색 등 으로 채웠다. 마름모형의 양단에는 각각 하나씩 홍색의 작은 圓 珠롤 그 렸다. 원주 사이에 홍색 산호 위에는 가지형의 꽃장식을 하였다. 창방 아래 돌출되게 쌓여전 4 벽의 부위에는 문광상과 같은 아름다운 인동문이 그려져 있다. 제 1 굉돌의 동쪽, 남쪽, 서쪽, 북쪽 4 면에 각각 한 마리 용이 그려져 있다. 창방 위에 서 있고, 배와 등은 정상의 끝부분에 있으며,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고 있는데 입을 크게 벌려서 마치 석벽상의 작은 구멍 울 물고 있는 것 같다. 아직도 백회가 있는 작은 구멍에는 원래 보석류 룰 상감한 것으로 보안다. 조정에도 많은 벽화가 가득하다. 제 1 굉돌 네 모서리(말각석 양단)에 많은 가지가 달린 보리수가 있다. 갈색 가지와 동체, 나뭇잎들은 홍색, 황색, 녹색 둥 3 색으로 처리하였 다. 말각석의 빈 공간 부위에도 모두 구름무늬를 그렸다. 동남쪽에 오른
쪽으로 날고 있는 牛首人身과 비천인 (그림 6-65) 을 그렸고, 우수인신의 눈에는 녹송석(보석)을 양감하였다. 우수인은 갈색의 끝이 뾰족한 목둘 레 것과 넓은 소매의 우의를 입었는데 그 것의 가장자리는 녹색이며, 허 리에는 녹색 두건을 둘렀다. 그리고 검은 신발을 신었으며 오른손에는 벼 이삭을 들고 있다 . 그 뒤에 한 사람의 비천인이 따르고 있다. 그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수염이 있으며 황색의 끝이 예리한 목둘레 것과 넓 은 소매의 장포를 입고 소매를 걷고 옷 끝에 붉은 장식을 대고 허리에는 흰색의 두건을 둘렀다. 오른손에 하나의 횃불을 들고 두 무릎을 꿇었는 데 발은 보이지 않는다. 동북에 人身龍尾의 日月神像이 그려져 있다. 월신은 왼쪽에 있는데 머 리를 풀어 헤치고 여자상이며 예리한 목둘레 것의 녹색 우의를 입고 허 리에는 갈색 두건을 두르고 두 손으로 흰색의 둥근 달을 머리에 들어울 리고 있다. 달 속에 두꺼비는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에 있는 태양신은 남자상이고 예리한 목둘레 깃의 갈색 우의를 입고 허리에는 녹색 두건을 두르고 두 손으로 갈색 태양을 머리 위에 들고 있다. 일월신 사이에 여 러 그루의 보리수가 있다. 서북쪽에는 두 사람의 선인(그림 6- 66 C) 이 있는데 좌향한 앞사람은 용울 타고 임금 옷을 입고, 머리에는 황색의 면류관을 썼으며, 그것의 앞뒤에 붉은색의 玉串이 각각 4 개씩 달려 있으며 몸에는 녹색 장포를 입 었고, 그 위에 붉은색의 작은 점이 글자형처럼 배열된 도안무늬가 있으 며 목둘레 깃 안에 흰색의 內衣가 보이고, 허리에는 꽃두건을 두르고, 오른손에 용의 목을 잡고 왼손에는 하나의 녹색 羽毛 아래에 붉은색 둥 근 점이 점철된 사슴꼬리를 들고 몸을 뒤로 돌리고 있다. 뒤에는 날아가 는 방석을 탄 자가 있는데 그는 귀가 뾰족하게 솟았고, 가늘고 긴 관을 쓰고 갈색의 가슴만 가린 羽抱를 입고 가슴을 약간 노출시켰다. 허리에 는 두건을 두르고 등에는 두 개의 녹색 날개를 달았다. 검은색의 큰 신 발을 신었다. 얼굴은 뒤를 돌아보고 왼손에는 한 가지의 꽃봉오리를 들
그림 6-65 오회분 5 호묘 동남 제 1 핌돌 말각석 벽화
고 오른손에는 하나의 깃대를 들고 있다. 그 깃대에는 2 개의 붉은 영락 이 있으며 영락 사이에는 바람에 나부끼는 녹색 깃대가 있다. 깃대 정상 에 홍색과 갈색의 깃발이 있다. 날아가는 방석을 타고 있는 형상은 사슴 같은데 능형 기둥의 의뿔을 가지고 있고 꼬리는 가늘고 길다. 몸에는 홍 색, 황색, 녹색 등을 채색했고, 배는 흰색이다. 서남쪽에는 바퀴 만드는 그림이다(그림 6-66b). 바퀴를 틀 위에 울려 놓았다. 바퀴데는 16 개이다. 바퀴 왼편과 위편에는 각각 한 사람이 서 있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있는데 왼쪽에 있는 자는 예리한 목둘레에 녹 색의 긴 우의를 입었고, 그 목둘레 것은 붉은색이며 허리에는 갈색 두건 울 둘렀다. 검은 신발을 신고 왼손으로 바퀴를 잡고 오른손에 마치를 둘 고 있다. 오른편 보리수 밑에 서 있는 자는 예리한 목둘레 것에 갈색 긴 우의를 입고 몸을 굽혀 무엇인가 만들고 있다. 제 1 굉돌 말각석 아래에 만개한 여덟 잎의 분홍 연꽃이 있다. 2 층 면 에 풀잎무늬가 있다. 제 2 굉돌 각 면에 용을 탄 주악인이 두 사람씩 있다. 그들은 모두 발이 노출되지 않았다. 빈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채웠다. 동남쪽의 천인은 용 울 타고 좌향하여 있으며, 전자는 피리를 불고 머리를 묶어 상투를 하고 상반신은 노출되었고 팔에는 날개옷을 걸치고, 하반신에는 노란 치마를 입었다. 뒷면에 용을 탄 천인은 머리를 묶어 상무를 올리고 예리한 목둘 레 것의 황색 장포를 입었다. 목둘레 것은 갈색이다. 팔에 걸친 날개옷 은 녹색이다. 그 뒷면에 갈색의 큰 태양이 있으며, 그 안에는 세 발 달 린 까마귀가 있다. 동북쪽에 있는 두 사람의 천인은 용을 타고 우향하고 있다. 전자는 퉁소를 불고 있으며 머리를 묶어 상투를 울리고 예리한 목 둘레 것과 넓은 소매의 녹포를 입었다. 목둘레 것은 갈색이며 홍색의 날 개옷을 입었다. 뒷면에 있는 자는 건뿔나팔을 불고 상투를 하고 황색 목 둘레 것에 소매가 넓은 갈색 장포를 입었다. 치마는 황록색이고 팔에는 날개옷이 있다. 서북 좌측 끝에 회백색 바탕에 둥근 달이 있다. 그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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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두꺼비가 있다. 두 사람의 천인이 용을 타고 좌향하여 있다. 전자는 연꽃관을 쓰고 예리한 목둘레 깃과 넓은 소매의 갈색 장포를 입었다. 황 록색 두건을 허리에 둘렀으며 팔에는 녹색의 날개옷이 있다. 뒷면의 천 인상은 여자상이다. 완함을 두드리고 있으며 붉은 용을 타고 상두를 하 였으며 예리한 목둘레 것에 넓은 소매의 황색 장포를 입었다. 예리한 목 둘레 것과 치마 가장자리는 모두 붉은색이다. 몸 뒤에는 갈색의 날개옷 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서남쪽 모서리에 두 사람의 천인이 용을 타고 좌향하여 있다. 전자는 여자상이다. 머리를 묶고 상투를 하였으며, 머리 를 뒤쪽으로 숙여서 왼쪽 어깨에 닿고 있다. 상반신은 나체이며 가슴 부 분이 융기되었으며 팔에는 녹색의 날개옷을 감고 있다. 아래는 갈색의 긴치마를 입었고 손에는 膜鼓(장고)를 치고 있다. 후자는 가야금을 뜯고 있는데 역시 상두를 하였으며 상반신은 나체이고 팔에는 붉은색 날개옷 울 걸치고 아래에는 녹색 치마를 입었다. 제 2 굉돌의 바닥에는 해, 달, 구름 의에 또한 별들도 그렸다. 북두칠성 이 북쪽에 있는데 제 1, 제 2 별들은 동북쪽 정석에 그렸고, 그 나머지 다 섯 개의 별은 서북쪽에 그렸다. 남두성좌는 남쪽면에 그렸다. 제 1, 제 2 별들은 동남쪽 정석에 그리고 나머지 네 별은 서남쪽에 그렸다. 각 별들 은 원형이다. 흑색 바탕에 붉은 테를 둘렀으며 동시에 붉은 선으로 성좌 둘을 연결시켰다. 제 2 굉돌 하부의 각 모서리에 두 마리 용을 그렸다. 서로 몸을 둥글게 휘감고 있으며 입으로 자신의 몸을 물고 있는 뿔 없는 용의 얽힘이다. 조정의 마름모꼴 뚜껑돌 위에는 용과 호랑이가 엉켜 싸우고 있다. 호 랑이는 서쪽에 있으며 용은 동쪽에 있다. 머리는 모두 남쪽을 향하였다. 그 의 북쪽에 두 개의 별이 있다.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다. 큰 것은 북 극성이다. 시상대 위에 세로의 연꽃무늬가 있는데 현재는 박락되고 다만 측면에 약간의 얼룩진 붉은색이 남아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벽화무덤에 원
래는 점철된 도금의 꽃장식이 있었으며 새나 짐승의 눈에는 청옥이 들어 있었다 한다. 현재 牛頭仙 A 의 오른쪽 눈에 아직 청색의 녹송석이 남아 있는 것 의에 새나 짐승의 눈에 끼워졌던 보석들은 모두 사라졌다. 다만 그것들은 석재의 암면상에 나타났을 뿐이다. 그리고 도금된 꽃장식은 약 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네 벽 망상문의 상하 모서리에 작은 연꽃 의 꽃술 부위가 잔류되었는데, 거기에 원형의 흑색 원료가 접착되어 있 는 흔적이 보인다. 거기에는 원래 도금의 꽃장식이 점철되었다. 이러한 둥근 접착 원료의 흔적은 창방과 조정에서도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규칙 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대부분 벽의 빈 공간을 메운 데 지나지 않 았다. 그것은 또한 창방 각 면에는 약 5 - 6 개, 제 1 굉돌의 아래 가장자리 에는 2 개, 제 2 굉돌의 아래에는 각 면에 3-4개 가 있었고, 그 밖에 묘천장 아랫면 및 제 2 굉돌 하부에도 한두 곳 찾아볼 수 있다. 3) 맺는 말 이 2 기 벽화고분은 고구려 시대의 것이다. 그것들은 通溝평야 고구려 고분군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동복지구의 고구려 고분의 분포, 그리 고 매장시기의 선후관계는 대체로 북쪽에서 남쪽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오회분은 고분군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고구려 후기의 무덤이다. 죽 묘실 결구와 벽화내용, 기법 등으로 추정된 것이다. 그리고 그 절대연대 는 北朝 말년, 약 6 세기의 현저한 반영이다. 즉 4 호묘는 5 호묘보다 조금 O] 르다. 이 고분의 결구는 대단히 웅대하고 방대하다. 사용된 화강암 석재의 거대하고 육중함, 정선된 손질, 말각쌓음 등은 성숙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것은 또한 고도의 석조기술을 나타내어 주며 고구려 건축예술의 하나 의 범례를 제시하여 주고 있다.
고구려 시대 후기의 대부분 土 墓 는 봉토가 지상에 융기되었다. 그러나 通溝墓와 같은 것은 수가 별로 많지 않으며, 또한 묘실구조와 벽화장식 의 화려함 등을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왕족의 묘제임이 확실하다. 4 호와 5 호묘는 같은 오회분 중의 1 기이다. 오회분과 동서로 한 줄로 놓여 있으 며 크기도 같아서 그것들은 국가 왕족에 속함이 뚜렷하다. 이 2 기 고분 내의 벽화는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벽화 중 예술의 조 예가 가장 높은 벽화의 하나이며, 또한 미술사 연구에 진귀한 자료를 제 공하여 주고 있다. 7 장천 2 호분 長川은 集安縣城에서 동북쪽으로 11km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 곳은 하나의 동서로 길게 뻗은 강계곡 분지이다. 뒤에는 산들이 중첩되 어 있고 남쪽에서 서쪽으로 7 불 7 불 압록강이 흐르고 있다. 集(安)靑 (石)道路가 그 사이에 놓여 있으며 강을 건너서 북한이 보인다. 심산협곡에서 발원하는 乾溝iiiJ는 분지 중앙을 경유하여 남쪽으로 압록 강에 주입되고 있다. 長川屯에서 동북쪽으로 200m 지점에 平川이 있다. 더욱이 乾溝河 兩岸울 따라서 100 여 기의 고구려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장천 묘군은 압록강 右岸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들은 集安 通溝 묘군 다 음 가는 주요한 묘군의 하나이다. 이러한 고묘는 절대 다수가 積 石爲封 의 묘이다. 그 사이에 몇 기의 봉토묘가 산록 남면의 丘岡과 언덕상에 분산되어 있다. 장천 2 호 봉토묘는 바로 그 중의 하나이다 .8) 장천 2 호 봉토묘는 분지 동부의 산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에서 서 쪽으로 약 250m 거리에 乾溝河가 있다. 묘는 정동으로 약 8m, 잔고는 5m 이다. 이미 파손된 방단적석묘이다. 그 배치는 集安 장군총 옆의 〈隋
塚 〉 과 유사하다. 동남 방향으로 后林子山油1 을 지나서 약 174m 지점에 장천 1 호 벽화묘가 있다. 1972 년 4 월 하순부터 5 월 중순까지 吉林省 박물관과 集安市 문물관리 소가 이 묘에 대한 발굴을 실시하였다. 이 묘는 일찍이 도굴당하였고 石
桂床에 놓여 있던 목관은 화재를 당하였다. 그래서 쇠못은 불에 탔다. 4 벽 및 조정상의 벽화는 거의 까맣게 불에 그을렸다. 이번 발굴에서 발견 된 자료는 다음과 같다. 1) 墓葬 形制 장천 2 호묘는 1 墓 석축단실봉토묘이다. 의관은 끝이 잘린 방추형(截頭 方維形)으로 底邊 31-41m, 주위 길이 143m, 현재 높이는 9m 이다. 墓葬 은 墓道(연도), 남북 측실(耳室), 용도(前室)와 묘실(玄室) 등 다섯 부분 으로 나누어진다(그림 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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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도 입구 밖에는 1 층의 고운 황색 모래가 깔려 있다. 너비 5.5 m , 두 께 o.25-0 .4 5m 이다. 묘도 입구의 포장된 곳으로부터 봉토의 가장자리까 지 길이가 13m 이다. 묘도 입구 상방의 단면에서 관찰하면 묘의 封山은 황색 점토, 쇄석과 고운 모래충으로 쌓여 있다. 그것은 위에서 아래로 3 충으로 나누어진다. 최상은 부식토충, 회갈색 토양이 부드럽다. 이 사이 에 풀뿌리, 나뭇잎 등이 섞였다. 두께 0.35-o.6om 이다. 부식토층 아래에 는 토석혼축충이다. 황색 점토 위주이고 고운 모래와 자갈이 섞였다. 토 질은 견고하고 두께는 2.10m 이다. 묘도 입구 위의 제 3 층은 쇄석충이다. 쇄석 위주인데 대량의 황색 점토가 섞여 있다. 조화가 잘 이루어졌다. 두께 3 . 70-4.SOm 이다. 묘도 입구 의부에서 도굴당해 교란된 구덩이를 발견하였다. 이곳에서 쇠마치, 鐵刀 및 도금 관 장식편을 발견하였다. 묘도를 돌로 봉한 의부 가까이에는 다량의 숯덩이와 백회가 퇴적되어 있는데 두께가 o.07-l. 20 m 정도이다. 묘도 방향은 254° 이다. 전체 묘도는 가볍게 손질한 직사각 또는 정사 각형 석괴로 봉하였다. 묘도 입구 상면의 봉묘석은 도굴당할 때 2 층으로 나누어졌다. 4 층이 남아 있는데 현 높이는 l. 40m 이다. 묘도 밑부분에는 석판을 깔았고, 頂部에는 뚜껑돌을 덮었다. 길이 2.70m, 너비 l.40 m, 높이 2.10m 이다. 묘도를 봉한 개석을 묘도 입구로부터 직접 측실 서벽 의측에 쌓았다. 그리고 그 위에 회를 발랐다. 묘도 후단에 측실이 있다. 양측실은 상대적이다. 門邊에는 넓은 黑帶 句畵의 門權(문처마)와 門桓(문툴)이 있다. 양실 모두 직사각형이다. 남 측실 동벽은 북측실보다 약간 깊다. 깊이는 북측실이 1.5 2m, 남측실이 1.58m 이며 너비는 각각 1.1 4m, 높이 또한 각각 1.2 6m 이다. 실은 평정하 고 정부 3 벽은 가볍게 안으로 경사졌다. 입구는 모두 용도(사잇길)보다 12cm 높다. 실벽은 모두 백회로 발랐다. 북측실의 진흙 속에서 黃柚陶 辻(아궁이)片 1 점이 출토되었다. 남측실에서는 황유가 발라전 네 손잡이
盛 片이 발견되었다. 측실과 묘실(현실) 사이에 있는 용도는 전체 길이 2.39m, 너비 1.4 0m 높이 1. 60m 이다. 양벽은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4 층을 쌓았다. 벽면은 매끄럽다. 정부는 잘 다듬어진 직사각형의 거대한 석판을 덮었다. 전후 의 2 매로 되어 있는데 전자가 후자보다 18cm 높다. 사잇길 내부는 묘실과 맞붙어 있다. 묘실 의부 0.30m 되는 곳에 사잇 길 후단 좌우 양벽 및 정부의 가장자리가 있다. 그곳에 가볍게 돌기된 문처마, 문골이 있다. 너비 0.70m 이다. 문처마 밖에 밖으로 열 수 있는 두 개의 돌문이 있다. 남쪽의 돌문은 파손되었다. 문처마 상방에 지름 0.12m, 깊이 o.o 7 m 되는 기둥 구멍이 있다. 그곳은 원래 門軸울 놓았던 장소이다. 북쪽 돌문은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하다. 전체 석괴는 잘 다듬은 상태로 너비 0.70m, 높이 1.50m 이다. 문의 주위에 백회를 발랐 다. 용도 뒤는 묘실과 이어졌다. 그것의 평면은 사각형이다. 남북 양벽의 길이는 3.6om, 동벽 3 . 52m 이다. 서벽은 사잇길 중간을 통과하고 있다. 전체 길이 3 .4 8m 이다. 4 벽을 잘 다듬어진 석재로 쌓았다. 그것은 仕중이 며 각 충을 2 매의 돌로 연결시켜 쌓았다. 때로 하나의 석재 또는 3 매의 직사각형의 돌을 연결시켜 쌓고 그 톰 사이를 백회로 메웠다. 벽면상은 1 층의 얇은 회로 발랐다. 벽의 높이는 1.5 6m 이다. 4 벽의 천장돌 밀에 있는 창방의 그림에 忍冬文이 그려졌다. 창방 위에는 4 중의 정석을 쌓았 다. 모두 1 매석으로 쌓았는데 각 층의 높이는 0 . 28-0.51m 이다. 울려다보 면 계단식 직사각형 조정이다. 제일 위에는 납작한 거석으로 봉하였다. 높이는 3.32m 이다. 묘실문 내면의 上方 및 좌우 양측에는 검은색 선으로 鳩雲圖案을 그리 고 문처마와 문틀을 그렸다. 묘실 동벽 남단 및 서벽 북단에는 각각 도금된 쇠고리가 남아 있다. 동일 高度上에 바닥에서 위쪽으로 1.08m 의 네 벽상에 고리를 달았던 둥
근 구멍이 있다. 남북 양벽에 각각 5 개가 있고 그것들 사이의 거리는 o . 58m 이다. 동벽에는 0.36m 간격으로 8 개 있다. 서벽에서도 4 개가 발견 되었다. 묘실 바닥에는 석재를 깔았고 그 위에 두 개의 시상대를 울려놓았다. 동벽으로부터 시상대까지의 길이는 0 . 30m 이다. 그것은 남북으로 나란히 놓여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표면에 백회를 발랐다. 길이 3m, 너비 1.2 2m, 높이 0 . 30m 이다. 두 시상대 사이의 거리는 0 . 50m 이다. 2) 출토 유물, 벽화 묘실 남북 측실과 돌문 위에 채색벽화가 있다. 벽화는 매끄러운 백회 벽상에 그렸다. 내용은 도안 위주이다. 다만 북쪽 돌문의 앞면과 뒷면에 각각 한 사람씩 그렸다. 남북 측실의 비단 벽걸이 모양의 그림 위에 〈 王 〉 자 도안이 그려졌다. 〈王〉자를 붉은색과 심록색으로 번갈아 가면서 썼다. 〈 王 〉 자는 가로로 25 줄, 세로로 23 줄 썼다. 글자는 대단히 규칙적으로 썼다. 동벽상에 모두 575 개의 〈王 〉 자가 질서정연하게 연속적으로 쓰여졌다. 각 〈 王 〉 자는 네모 반듯하고 그 바로 위에는 3 개 진주형의 호선을 그렸다. 선과 〈 王 〉 자는 같은 색깔이다. 〈王〉자의 바깥에는 墨 線으로 구름무늬를 그렸다. 구름 사이에는 홍색, 녹색, 흑색의 細短線을 그렸다. 북쪽 돌문 정면에 문지기를 한 사람 그렸다(그림 6-68 a). 남자인데 머 리에 方帳울 쓰고 오른쪽 귀에 황색 귀걸이를 달았다. 윗저고리는 노란 색깔이며 옷소매에 검은 띠를 둘렀다. 그리고 바지에는 녹색 바탕에 검 은색 꽃무늬가 그려졌고 바짓가랑이를 좁혀서 묶었다. 흰색의 머리띠를 두르고 끝이 뾰족한 신발을 신었다. 두 손을 가슴에 대고 허리를 굽히고 얼굴을 왼쪽으로 돌렸다. 돌문 뒷면 위에는묘실을 향하여 한 사람의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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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하인을 그렸다(그립 6-6 8b). 얼굴은 모호하다. 다만 입술이 붉고 下 身만 남았다. 노란 바탕에 흑색 꽃무늬의 치마 가장자리에 검은 띠를 수 놓았다. 그 여자는 두 손을 가슴에 대고 허리를 굽히고 얼굴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돌문에서 현실까지의 사이에 있는 양측 벽과 천장에 연꽃이 그려져 있 다. 천장에 4 송이가 있으며 모두 8 잎을 가진 붉은 연꽃이다. 양측 벽에 도 각각 4 송이가 양측면 대칭으로 놓여 있다. 모두 5 잎의 홍련인데 꽃잎 의 끝이 시들었고 밀에는 꽃줄기가 있다.
현실 4 벽 및 조정 위에 도안식의 채색 연꽃이 가득 그려져 있다. 대부 분 모호하다. 네 벽 연꽃도안의 배치는 그 형제와 색깔이 동일하다. 연 꽃을 등거리로 배열하였다. 상하에 꽃송이룰 교차시켜 가로와 세로를 자 연적으로 행을 이루게 하였는데 줄마다 모두 9 송이이다. 동, 남, 북 3 벽 각 면의 총계는 81 송이이다. 서벽은 전실 중간으로 통과하기 때문에 수 량이 다른 3 벽보다 현저히 적다. 옆에서 본 모양의 연꽃이 만개한 형상 이고 꽃술(花哀. )은 閔色, 내부의 꽃잎은 붉은색이고 꽃잎 안에 紅線黑班 點이 그려져 있다. 바깥에는 검은색의 꽃잎이다. 꽃술과 꽃잎의 안쪽과 바깥쪽은 모두 16 잎인데 그 지름은 0.30m 이다. 네 충으로 평탄하게 쌓 여진 천장석(JJ{石上)에 5 잎의 연꽃이 그려져 있는데, 끝은 빨갛고 줄기 는 검으며 잎 위에 녹색, 황색, 흰색의 안료롤 발랐다. 각총 頂石(天障 石)에 그려진 연꽃의 숫자는 일치하지 않는다. 위에서 아래로 제 1 층은 4 송이, 제 2 충은 5 송이, 제 3 층은 8 송이, 제 4 층은 반대로 7 송이이다. 각총 의 項中底邊, 죽 연꽃줄기 쪽에는 구름무늬가 그려져 있다. 천장 뚜껑의 벽화는 대단히 모호하다. 다만 희미하게 검은 선으로 9 개 의 方格子가 그려져 있는데 그것의 정중앙에는 네 모서리에 꽃이 그려졌 고 그 나머지 4 格子內에는 능형기하문이 그려져 있다. 3) 유물 현실, 전실 및 남북 측실에서 뜬 흙과 지표상에서 도금 철제 장식품, 黃柚陶器, 목기 및 직물편 등이 출토되었다. 2 기 석제 시상대 위에 각각 목관이 놓여 있었다. 목관의 표면에 옻칠 울 하였고 4 寸 두께의 〈바닥깔판〉을 목관의 아랫면에 깔았는데, 아깝게 거의 다 불에 타서 형상을 판별할 수 없다. 북쪽 시상대에도 약간의 목 탄부스러기와 부러진 철못이 있었다. 남쪽 시상대에 다량의 숯덩이가 퇴
적되어 있고 불에 탄 못, 부러진 목관편 및 목관의 바닥깔판 등이 있었 다. 남쪽 시상대 동단으로부터 lm 의 거리가 되는 곳에서 사람의 두개골 과 하악골(아래턱)조각을 발견하였다. 목관은 직사각형으로 길이 2.20 m, 너비 0.8 0 m 정도이다. 머리의 방향은 동쪽이다. 그 밖에 목관편상 에는 銅 質 의 도금된 매화꽃장식이 있었다.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다음 과같다. {1) 철기 전체 15 점, 모두 단조품이다. 마치 1 점 : 완형이다. 묘도 입구 바깥의 훼손된 구덩이에서 발견되었 다. 직사각의 송곳형이며 가운데에 長方쫓이 있고 墓 이하로부터 좁혀져 서 圓維尖울 이루었다. 維頭(마치 머리)의 단면은 직사각형이다. 길이 11cm, 머리 너비 5cm 이다(그림 6~6 9 g ). 칼 1 점 : 약간 깨졌다. 긴 나뭇가지 형태로 1 단이 굽어서 겹쳐졌다. 그 겹쳐진 부분은 이미 파손되었다. 칼의 끝부분도 절단되었다. 길이 13cm, 머리 너비 3cm 이다(그림 6-6 9o). 문고리 (門 鏡 ) 2 점 : 1 점은 완형 이고 1 점은 파손되 었다. 문에 꽂는 것 (門 空)으로 문고리(門環)와 둥근 판으로 조성되었다. 방추체의 門空은 문고 리와 연결되어 있는데 한 끝에는 둥근 쇠편이 있고, 다른 한 끝에는 둥 근 쇠판이 있다. 문에 꽂는 양끝의 쇠판과 문에 꽂는 것은 원래 분리되 게 문의 바른(正)쪽에 부착되었고 등의 양면에서 문에 꽂는 것을 고정시 키는 것이다. 그것은 전실에서 뜬 흙에서 출토되었다. 전체 길이 21cm, 문고리 지름 8.5cm 이다(그립 6-69n). 鐵鎌 5 점 : 형제는 모두 같다. 그 중에서 1 점은 완형이다. 납작한 머 리에 몸체는 둥글다. 鐵身은 직사각형이고 그 가운데에 하나의 도치된 三角 톱니의 구멍이 있다. 슴베에는 나무에 꽂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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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길이 14.5cm, 촉날 너비 3 . 7cm 이다(그림 6-63 p). 혁대고리 2 점 : 1 점은 고리에 끼우는 바늘이 빠졌다. 短形이며 고리의 전단은 양단의 둥근 원이고 고리 후미에는 2 개의 가로로 된 쇠기둥이 있 다. 바늘은 앞의 가로기둥에 매달려 있다. 고리 가로기둥 및 바늘의 단 면은 모두 원형이다. 後根의 가로기둥에 아직도 혁대로 사용된 헝깊의 잔편이 남아 있다. 길이 5.2 c m, 너비 4cm 이다(그림 6-69h). 못 4 점 : 3 점은 완형이고 1 점은 못대가리가 떨어져 나갔다. 길이 5cm, 머리 지름 3.5cm 이다(그림 6-69 k). (2) 도금류 출토 수량이 상당히 많아 모두 25 점이다. 모두 청동제로 표면에 도금 하였다. 출토시 도금이 떨어져 나간 곳에는 녹이 있다. 십엽형 장식물 1 점 : 완형이다. 동편을 두드려서 심영형 銅片의 십자가 에 구멍을 뚫고 11 개의 황금색 못으로 상하 2 층의 심영형 銅片울 고정시 켰다. 심영형 장식물상에 가로로 된 하나의 편 위에 연결시켰다. 길이 8cm, 너 비 8cm 이 다 (그림 6-69 g) . 혁대고리 2 점 : 1 점은 크고 1 점은 작은데 모두 완형이다. 형제는 철제 혁대고리와 같다. 큰 것의 바늘은 자유롭게 움직이고 작은 것의 뒤쪽 가 로기둥상에 반원형 돌기의 쇠판이 있는데, 위쪽에 3 개의 황금못으로 박 아서 연결시켰다. 큰 것의 길이는 4cm, 너비 3.5 c m, 작은 것의 길이 3cm, 너 비 5cm 이 다 (그림 6-6 9 f) . 직사각형 장식품: 2 점으로 모두 완형이다. 가로의 직사각형은 가로도 금편 양측을 굽혀서 원통관을 만들었다. 동편상에 8 개의 황금못이 있다. 길이 3cm, 너비 5cm 이다(그립 6-69e). 작은잔형기 (小杯) 2 점 : 모두 완형 이 다. 그릇의 양다리를 銅絲로 꼬아 서 하나의 몸통(視棒) 형태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관을 하나 끼운 후에
그 한가운데에 또다시 하나의 단추형태의 것을 끼웠다. 상단에 心形銅葉 울 잇대고 하단에는 다른 물건으로 고정시켰다. 전체 길이는 4cm 이다 (그림 6-69 d). 梅花稽飾物 : 대소 2 식으로 나누어전다. 표면을 도금하여 상당히 광택 이 난다. 등면에는 布文의 흔적이 남아 있다. 1 식은 6 점이다. 그 중에 4 점은 완형이고 1 점은 약간 파손되었고 나머지 1 점은 절반 이상이 손상 되었다. 銅片울 망치로 때려서 8 잎의 매화를 만들고 그 중심에 편평한 황금못을 박았다. 지름 5cm 이다(그림 6-69c). Il 식은 5 점이다. 그 중 2 점은 완형이다. 그 형제는 1 식과 완전히 같고 다만 기형이 상당히 작 다. 지름은 2 . 5cm 이다(그립 6-69b). 벅고리( 柱 拘) 2 점 : 약간 파손되었다. §向身울 벽 속에 삽입하였다. g맘身 에 하나의 원형 쇠판을 끼워서 벽면에 고정시켰다. 벽 속에 삽입한 §何身 의 最長은 10 . 5cm 이고 벽면에 부은 §맘身長은 6cm 이며, 쇠판 지름은 4.5 cm 이다(그림 6-69j ). 못(針) 6 점 : 1 점은 완형이고 3 점은 몸체가 절단되고, 2 점은 못대가리 룰 보존하고 있다. 형제는 철못과 같다. 도금이 상당히 두터워 전체에 광채가 난다. 몸체 위에 木質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목관에 사용한 것 갇다. 완형 1 점은 전체 길이가 18cm, 머리 지름이 3cm 이다 (그립 6-6 9 m). 고리(環) 1 점 : 완형이다. 지름이 1.5 cm 의 銅線으로 고리를 만들었는데 중간의 접합점을 봉하지 않았다. 고리의 지름은 5cm 이다(그림 6-69i ). 1973 년 4 월 그러한 도금류 유물 중에서 몇 종류의 파편을 선택하여 吉 林省 야금연구소에 보내어 성분 분석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갇다. 화학적 성분 분석에 따라서 이러한 도금기물의 금속성분과 각종 성분 이 차지하는 바율이 나타났다. 도금기물의 조칙 결구를 이해하기 위하여 다시 半圖片에서 一段울 떼어 내어 金相試料를 제작하여 보았다• 그리고
표 6 기 유물의 성분 (단위 : %)
그 결과를 현미경으로 살펴보아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첫째, 두께 0 . 3 - 0.55cm 이며, 둘째, 조성 성분은 주로 동과 황금으로 이루어졌다. 동은 약 95% 이고 황금은 2% 정도이다. 동의 산은 試化物 3%, 은과 기타 원소는 부존 황금과 동 속에 혼임물이 되었다. 셋째, 황 금은 薄層狀으로 금속편의 의층상에 분포되었다. 두께의 변화는 0.O 1 - 0.0 0 5mm 사아이고 黃金薄層의 내의면 모두 비교적 일정하다. 넷째, 산 화동은 금속편 내충에 분포되었다. 이러한 도금 銅器와 包金된 두께를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하여 1973 년 4 월 제작된 金相 시료를 吉林省 지질국실험실에 보내서 光片 감정을 의뢰 하였다. 그 감정 결과와 지난번 감정을 비교해 본 결과, 수치가 대단히 접근될 뿐만 아니라 더욱 상세하고 정확해졌다. 그 다음 보고는 다음과 같다. 금속고리 (環)의 성분은 斑銅鑛 위주이다. 금속고리의 가장자리의 얇은 황금의 엷은 껍질의 두께는 균일하지 않고 약 o.oos-o.0 1 25mm 정도이 다. 금의 껍질이 있는 고리의 끝부분과 銅環은 긴밀하게 밀착되었고, 고 리의 완곡 부분에는 금의 껍질 태반이 벗겨졌거나 홈이 생겼거나 굽혀졌 다. 금속고리의 두께는 일정하지 않고 약 o.58-0.2 9 mm 정도이다. 금속
고리는 부분적으로 부식되었고, 고리의 안쪽 변 또는 그 내부에서도 부 분적으로 蘭銅確의 불규칙한, 가늘고 얇은 집합체가 보였다. (3) 黃柚 토기 아궁이 1 점 : 직사각형이다. 전면에 短形의 문이 있고 문머리상에 도 치된 3 각 문양이 있으며 門前에 혀형의 가장자리가 있다. 위에는 원형의 솥울 놓는 구멍이 있고 아궁이 바닥 좌우에는 각각 원형의 구멍이 있다. 뒷부분 왼쪽 윗모서리에는 타원형의 연통이 있다. 전체에 유약을 발랐 다. 유약 색깔은 澄黃微閃綠色으로 광택이 찬란하다. 길이 76.5cm, 너 비 34cm, 높이 30cm 이 다 (그림 6-69 a) . 네 손잡이 壅 1 점 : 의반 구연을 가진 短經이다. 배가 부른 평저이다. 복부 중앙에 네 개의 귀가 달렸고 어깨 부분에 菱格과 휘장문을 양각하 였다. 전체에 黃稚를 발랐고 그 중에 녹색이 물들어 있다. 유약 색은 청 신하게 윤택되어 있다. 구경 37cm, 받침대 높이(底柱) 20cm, 전체 높이 56cm 아다(그림 6-691). (4) 기타 비단조각은 남쪽 시상대 서북쪽 모서리에서 출토되었다. 이러한 비단 조각은 23cm 인데 정밀하게 짜여졌고 조직이 고르며 치밀하다` 가로실은 느슨하고 세로실은 조밀하다. 또한 세로선이 뚜렷하고 붉은 황색 헝깊바 탕에 심홍색과 진한 남색의 도안 꽃무늬을 수놓았다. 파손이 심하여 도 안의 복원은 어렵다. 그러나 비단에 희미하게 판별할 수 있는 명백한 부 분이 있다. 석영 알갱이 같은 것으로 아마 비단에 양감한 장식품 같다. 그 비단을 북경 고궁박물관에 보내서 감정을 받은 결과 〈비단조각은 2 중 째의 평문경 비단에 속하며 …… 가로 56 根은 1cm 이고 세로 32 根도
1cm 이다. 세로의 지름이 o.2-0 . 3mm 이며, 가로의 지름은 0 . 2mm 이다 〉 라 며 동시에 지적하기를 〈 직조 방면은 기본상 漢 錦織造方法을 답습하였다 〉 라고 했다. 그들은 비단의 아홉 줄의 가로선을 근거하여 가로단면(그림 6-70) 을 그렸다. 木 靈 牌片의 남쪽 시상대 중앙부에서 출토되었는데 다만 靈 牌額頭만 존 재하고 있다. 그것은 말각 직사각형으로 표면에 옻칠울 하였으며 남겨진 길이는 12.2cm, 너비 24.7 c m, 두께 0.5cm 이다 . 목기편이 묘도 앞의 교란된 구덩이에서 출토되었다. 나무기둥인데 절 반 이상 파손되었다. 표면에 옻칠을 하여 광택이 있다. 기둥에 圓球狀울 조각하였고 위에는 鐵製의 [!!]文이 있다. 정교하게 제작하였다. 목기 위 에 사용된 것 같다. 남겨진 길이는 31cm 이다. 大板瓦가 남쪽 시상대 서편에서 출토되었다. 거의 완형인 이 기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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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 불에 탄 흔적이 있고 그 위에는 숯덩이가 쌓여 있다. 고운 진흙의 회색 태토이며 무문이고, 배면에는 헝검무늬가 있다. 길이 45.5 c m, 너 비 30cm, 두께 2cm 이 다. 4) 맺는 말 장천 2 호 봉토묘는 장천 고분군 봉토묘 중에서 형체가 제일 커다란 1 기이다. 웅장한 현실, 정교한 목관, 수려한 벽화, 그리고 대량의 도금 장식품의 출토는 묘주인이 출중한 귀족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왕족 중에 대단히 권세 있는 주요 인물일 수도 있다. 고구려 고분이 지상에 노출된 것은 완정한 것이 대단히 드물고 그 葬 具와 葬式의 재료도 대단히 드물게 발견되었다. 이번 발굴에서 돌 시상 대에 목관을 놓고 동시에 목관을 받치는 나무토막도 발견되었다. 목관에 는 쇠못을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도금 銅製의 梅花稽飾片과 도 금못을 사용하였다. 도금 동제 벽걸이의 출토는 벽화 중에서 흔히 보는 휘장의 형상을 실물로서 나타내어 준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의 장구와 장속을 연구하는 데 새로운 실물자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주의할 가 치가 있는 것은 대량의 동제, 그리고 철제의 생산공구와 생활용구가 출 토된 것이다. 이것은 동, 철제품을 널리 사용한 증거를 나타내 주고, 또 한 고구려의 동, 철제 수공업의 고도한 발전을 입증하여 주고 있다. 이 번 출토된 비단은 고구려 고고학 작업의 새로운 발견이다. 그것은 고구 려가 오랫동안 중원과 정치와 문화상의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는 진일보 한 증명을 해주고 있다. 장천 2 호 봉토묘의 벽화에는 분명한 특칭이 있다. 예를 들면 벽화를 그린 곳은 전부 남북 측실과 현실에 집중되었고, 전실과 묘도 양벽에는 벽화가 보이지 않았다. 제재상에도 초기에 나타난 현실생활의 인물풍속
화가 없고, 또한 후기에 풍부한 종교적 색채의 사신도도 없다. 이 고분 에서 그린 제재는 석문상의 두 사람의 인물화를 제의하고 기타 전부가 벽걸이 비단상의 〈 王 〉 자 연속 도안, 그리고 종교적 색채를 나타내는 〈 王 〉 자와 측시 연꽃 도안이다. 더욱이 〈 王 〉 자 도안 벽화가 발견된 묘는 대단히 드물다. 이것은 고구려 벽화고분에 새로운 내용을 첨가시켜 주고 있다. 이 고분에서 화면 처리상에 어느 것은 간단하고 어느 것은 복잡하 지만 배치는 모두 조화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고대 예술가의 총명한 才 智와 창조력을 나타내어 주고 있는 것이다. 장천 2 호 봉토묘와 통구 12 호 고분은 대단히 비슷한 점이 많다(참고 《 考古》 2 期 1964) . 결구상 2 기 고분은 모두 전실, 남과 북 측실을 가졌 고 현실 조정이 모두 평행하게 쌓여졌다 . 벽화상에서 보면 장천 2 호 봉 토묘 석문의 배면에 시녀가 그려졌는데, 그 형태와 복식은 모두 통구 12 호분 시녀와 대단히 유사하다. 벽화의 기법상으로도 2 기 고분 모두 黑線 을 사용하였으며 채색을 하였다. 그려진 측시 연꽃은 모두 홍색 연꽃잎 인데꽃잎은 뾰족하고 쇠약하다. 이상을 대비하여 보면 장천 2 호 봉토묘 의 상대연대가 통구 12 호 고분과 거리가 멀지 않은 것을 인식할 수 있으 며, 그것은 약 5 세기 중엽 또는 약간 후라고 볼 수 있다. 통구 12 호 고 분은 그 벽화가 대부분 현실생활을 취급하였는데, 장천 2 호 봉토묘는 즉 도안 위주이고 인물이 대단히 드물다. 양자가 모두 연관되면서 또한 구 별도 된다. 이것은 아마 모종 유형상의 차이룰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 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장천 2 호 봉토묘는 고구려 벽화고분 중에서 일정한 역사와 예술 가치가 있는 것이다.
8 평 양역 전 안악 1 • 2 • 3 호 1) 평양역전 고분 ® 위치 고분은 평양역 청사에서 스탈린 거리로 향하는 동북 약 200m 지점인 도로 중앙에 있다. 고분은 너비 약 3m, 깊이 2.5 m 대로를 횡단하여 대 동강 방향의 오수관 도랑의 북쪽 단면 지표 아래 150m 지점에 변질화강 암 편석으로 쌓고 석회를 바른 묘실의 남향 연도부가 파괴되어 나타난다 (그립 6-71). ®묘실 구조 무덤은 파괴가 심하여 봉분 형태와 곽실 천장도 사라지고, 전실벽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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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가 잔존되어 있었다. 묘실은 동쪽으로 10° 치우친 남향, 전실 남벽 중 앙에 연도가 위치하였다. 전실 동서벽에는 각각 조그마한 감실이 있으 며, 전실 북벽과 통하는 후실이 있다. 전실 평면 크기는 312cm, 남북 88cm 정도 되며 벽은 직선이다. 천장은 궁륭식으로, 천장 상부는 1 매 판석으로 처리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실 천장의 높이는 약 290cm 로 추정된다(그림 6-72). 전실 밑바닥은 흙 위에 석회를 1cm 정도 깐 후 그 위에 숯을 5cm 정 도 깔았으며, 또다시 그 위에 석회를 1cm 정도 깐 다음 벽돌을 두 겹으 로 가로 한 줄, 세로 한 줄씩 깔고 그 사이에 석회로 봉하였다. 전실 동쪽 감실의 크기는 남북 길이 89cm, 동서 길이 48cm, 높이 97cm 이며, 서쪽 감실은 남북 길이 100cm, 동서 길이 39cm, 높이 100cm 로서 兩室의 크기는 비슷하다. 후실은 동서 길이 378cm, 남북 길이 345cm 로 전실보다 약간 크고, 동서벽에서 상하와 좌우로 만곡이 있다. 연도의 남겨진 길이는 약 100cm, 너비는 96cm 이고 바닥은 전실과 동일하다. ®출토유물 금제 심영형 장식품 3 개, 금제 화판형 장식품 3 개, 금제 보요형 장식 품 1 개, 금제 단추형 장식품 1 개, 금동제 귀걸이 1 개, 금제 구슬 3 개, 은제 가락지 1 개, 금동제 화판형 장식못 . 2 개, 철제 관못 ® 벅화 전실과 감실 일부에 잔존되었다. 전실 서벽에는 검을 든 武人, 도끼를 들고있는 사람(芹鍊手), 악사(樂手), 기마인물, 방아 찜는 여인 등의 그 림이 있다. 전실 북벽에는 기마인물의 흔적이 있다. ®맺는말 고분구조와 출토 유물은 인접한 354 년 在銘博出土壤과 유사한 점이 있 다. 이 2 기 고분은 모두 석재와 벽돌을 섞어서 쌓았다. 순금제 귀걸이는 신라 고분의 것과 흡사하며, 벽화내용은 안악 3 호분과 홉사하다. 이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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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의 연대는 354 년 재명전 출토분 연대, 또는 안악 3 호분 연대 (356) 와 접근된 시기로 보고 있다. 9) 2) 안악 1 호분 1 호분은 안악읍에서 신환포로 가는 대로를 따라 동남 약 6km 지점인 황해남도 안악군 대추리 상지부락(구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산상리 상지동) 의 경사진 기슭에 있다. 그리고 2 호분은 1 호분에서 약 4oom 지점인 북 쪽 구릉 위에 있다. 그리고 서남쪽으로 약 6km 지점에는 벽화고분인 안 악 3 호분이 있으며, 남쪽 약 5km 지점인 안악군 신들리에는 풍속도가 그려진 파손된 벽화고분 1 기가 있다. 1 호분은 봉분 의형의 크기가 주위 약 som, 높이는 남쪽이 3.5m, 북쪽 이 2.5 m , 서쪽이 2.5 m , 그리고 동쪽은 봉분 꼭대기에서 약 lm 내려와 서 깎여 내렸다. 봉분의 기저 남북이 17m, 동서가 13m 이다(그림 6-7 3 ). O 출토유물로는 관못, 금제 단추형 장식품, 금제 심영형 장식품 등 이 있다. ® 묘실은 석회암, 화강암 등의 한 면이 평평한 대소 편석을 진흙과 석회를 섞어 쌓아 올렸다. 묘실은 지하로 15cm 들어갔고, 주축은 정남 북에서 서쪽으로 20 기울어졌다. 연도는 현실 남벽 동측에서 약간 치우 쳐져 있다. 현실 동벽에서 입문 동벽까지의 길이는 48cm 이고, 너비는 97cm, 높이는 155cm 이며 연도의 길이는 247cm 이다. 현실 천장은 고임식 천장이다. 네 벽면을 끝낸 다음 먼저 벽면과 평행 하게 3 단의 평행고임으로 울려 좁히고, 다시 2 단의 3 각 고임으로 공간을 좁히고 꼭대기에 한 장의 판석을 덮었다. 현실과 연도 바닥에는 진흙을 다졌다. 현실의 크기는 동벽 하부 길이 288cm, 서벽 하부 길이는 28.5cm, 남벽 하부 길이는 253.5cm, 북벽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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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74 안악 1 호분 현실 남쪽 천장 벽화
부 길이는 255cm, 벽면 높이는 225cm, 밑바닥에서 천장까지 높이 335cm 이다. ® 벽화의 내용은 각 벽에 殿閣圖, 狩臘圖 行列亂 女人群像圖 등이 있고, 천장에 忍冬文,火炤文,寶輪文, 天人, 瑞獸, B1 象, 月 1 象, 星宿, 등이 그려져 있다(그립 6-7 4). 안악 1 호분의 연대를 안악 3 호분의 연대에 접근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고분 발굴 이후, 永和 13 년의 명문이 있는 안악 3 호분과 왕망 시기의 화폐인 대천오십이 출토된 평남 강서군 태성리 1 호분에 대한 연대 추정 에 새로운 자료가 제시되어 안악 1 호분의 연대는 앞으로 재고되어야 한 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기는 중기에 해당된다.
3) 안악 2 호분 1949 년 4 월 〈 문화유적 조사보존위원회 〉 에서 안악 1 호분을 조사, 정리 하는 과정 중 인근에서 고분 1 기가 더 발견되었다. 그 결과 1 호분 조사 가 끝난 1 개월 후인 1949 년 5 월에 안악 2 호분의 발굴이 시작되었다• 1957 년 5 월에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 자료편찬실에서는 안악 1 호분과 2 호분을 동시에 재조사하였다. 이 발굴보고서에 사용된 자료는 대부분 제 2 차 조사시 작성된 것이라 한다. 안악 2 호분은 1 호분의 북쪽 약 4oom 지점인 낮은 언덕 위에 있다. 고 분의 봉토 크기는 주위 약 95m, 후방의 높이 3.5m, 전방의 높이 약 5m 아다. 무덤의 북쪽과 동쪽 모서리에는 아직도 방대형의 기저가 남아 있다. ® 출토 유물로는 관못(완정품 14 점, 못대가리편 11 점, 머리 없는 편 16 점), 토기 (漢式과 관련된 편 2 점)과, 稽材片 여러 편이 있다• ® 묘실의 주축은 정남북에서 서쪽으로 5• 기울어져 있으며, 연도는 현실 남벽 동쪽으로 치우쳐 있다. 묘실은 1 호분과 동일하게 화강암, 석 회암 등의 편석으로 축조되었으며, 그 위에 석회를 6-lOcm 두께로 발랐다. 묘실은 단실분이고, 현실 동쪽벽에 小籠(작은 감실)이 있으며, 서벽에 접하여 치석한 화강암 판석으로 된 관대가 있다. 바닥에는 석회를 발랐다. 곽실 내부 크기는 다음과 같다. 현실 (저변의 길이)은 동벽 344cm, 서벽 347cm, 남벽 341cm, 북벽 342cm 이며 벽의 높이는 227cm 이다. 감실은 높이 34cm, 너비 65cm, 앞으로 들어간 깊이 43.5cm, 현실 바 닥에서 감실의 저변까지의 높이 42cm, 현실 동벽 남단에서 감실의 남변 까지의 거리 62cm 이다. 관대는 길이 260cm, 너비 138cm, 높이 24cm 이다. 현실 입문의 너비 는 108cm, 동변의 높이 146cm, 서변의 높이는 148cm 이다. 연도는 총 길이 223cm, 입구의 높이 170cm, 입구 너비 160cm 이다(그립 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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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화의 내용은 주인공의 생활풍습(현실 4 벽, 연도 좌우벽), 武人, 飛 天圖 등이다. 안악 1 호분 벽화는 안악 2 호분의 주제 내용과 유사하다. 2 호분에서도 생활풍속들의 복식, 시녀, 호위 무인, 비천과 산화상 등이 나타나 있다 (그립 6-76, 6-77) . 발표자는 연대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고 자료제공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10) 시기는 전기와 중기에 해당된다.
4) 안악 3 호분 안악읍에서 약 7km 지점에 있는 용순면 유순리(현 안아군 유설리)는 面의 중심 부락이다. 그 마을의 서북쪽으로 낮은 구릉이 연접하여 있고 安岳 • 信川 間 도로가 구릉 옆으로 지나간다. 안악 3 호는 그 대지형의 구릉 서편 끝 등마루 위에 올라앉아 있다. 고분은 자연구릉산에 부식된 암충을 파고 掃室울 조성하였다. 곽실의 방위는 서쪽으로 경사도 5• 의 正南이다. 전체의 構室은 회백색의 석회석 이다. 다만 벽화를 그린 석판은 水磨한 정교한 석재를 사용하였다. 석재 와 석재가 연결된 틈 사이는 석회로 메웠다. 석재는 대단히 클 뿐만 아 니라 또한 대단히 얇다. 한 벽면을 하나의 석판으로 조성하였다. 그 중 큰 석판은 크기가 5m 이다. 곽실 내부의 구조는 연도, 前室, 左側室,右側室, 后室, 회랑 등 6 개 의 방들로 이루어졌다. 전체 면적은 70m 이며 동서로 8m, 남북으로 llm, 전실의 지면에서 천장(그림 6-78, 6-79, 6-80) 개석까지는 약 3.50m 의 높이다. 현실 입구의 좌우에 각각 하나의 버팀기둥머리(柱頭)의 4 각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큰 석판으로 입구를 막았다. 그 중 한 장은 도굴 범에 의해 파손되었다. 현재는 한 장의 안정된 석판만 남았다. 출토 유물은 심회색 접시 3 점, 사발(鉢) 2 점, 홍색 盡 1 점, 심회색 소 옹기 2 점, 쇠창 3 점, 쇠못, 木桂片 등이다. 벽화는 붉은색(朱), 혹, 청, 붉은색, 흰색 등으로 석판에 직접 그렸는 데, 그 내용은 주인 부부의 생활도(그립 6-81, 6-82), 帳下督 및 墓誌銘, 奏樂圖 병사 및 도끼를 든 사람, 씨름, 부엌과 육고간, 車庫 및 마구 간, 출행대행렬도, 무악도 의에 여러 가지가 있다. 고분의 축조연대를 살펴보자.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이 고분에 대한 개요가 중국어로 제시되어 있는 데 비교적 솔직한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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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80 안악 3 호분 전실 천장 구조
3 호분의 축조연대 및 그 피장자의 문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많다. 3 호분 부근 여기저기에 지탱식 운화판의 고구려 고분과 전축의 한나라계 고분이 있다. 3 호분에서 동북 방향으로 6km 지점의 신천군과 청산리 및 그 부근에 漢系 유물이 분포된 토성과 많은 漢系의 석축 고분이 있다. 그러한 유물 분포의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인과 한나라 유민 사이의 문화 상의 연계성이 있는데, 3 호분이 그 전형을 표현하였다. 말각지탱식 (그림 6-78, 6-7 9 , 6-8 0 ) 천화판의 석곽분의 형식으로 축조된 그 고분의 구조에서 보면 그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고분의 일반적 특칭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평면구조와 방(屋子)들의 안배를 살펴보 면, 漢系의 석곽묘와 중국의 遼陽, 祈南 등지에 알려진 석곽묘와 유사한 요소들도 갖추고 있다. 변화상의 주제 내용, 복식, 의장, 무기, 악기, 습속, 마차 행렬, 관직명은 漢系와 부분적으로 유사한 점도 있다. 연대에 무엇보다도 결정적 작용을 한 것은 묘지명이다. 먼저 그것의
그림 6-81 안악 3 호분 남자 주인공
그림 6~8 2 안악 3 호분 서측실 남벽 여자 주인공과 시녀
자체는 晉代의 鳥經體이며, 그 관점에서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 가장 유력한 것은 묘지명 내용 속에 쓰여진 人名 〈 冬 壽〉 2 자이 다. 여기서 말하는 〈壽 〉는 4 세기 초, 중국 燕의 慕容仁의 부속인이다. 336 년에 慕容仁과 그의 형 慕容銃 등이 싸웠는데, 慕容仁이 패하자 壽 는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이렇게 고구려로 망명한 壽 는 356 년에 죽었을 가 능성이 크며, 그 후 안악 지방에 매장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안악 3 호분 피장자의 성격에 관한 문제는 앞으로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 안악 3 호분은 고구려 역사 및 문화, 예술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 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당시의 중국 문물에 대한 연구에도 대단히 도움이 되는 귀중한 자료 중의 하나이다. II) 9 덕홍리 덕흥리 벽화무덤은 408 년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무덤의 위치는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 무학산 기슭의 언덕 위에 있다. 무덤은 무덤안길, 앞칸 과 안(內)칸의 사잇길(角道)로 조성되었다. 안길과 사잇길은 무덤칸의 중 심축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쳤다. 안길은 남북 길이 1.5 4m, 동서 너비 1. 02m 의 직사각형의 평면이며 안쪽은 약간 높다. 높이는 1. 43m 이다. 앞 칸은 동서로 길게 놓였다. 동서 2.97m, 남북 2.02m, 높이 2.85m 이다. 앞칸의 서북쪽 묘주인 밀에는 길이 95.5cm, 너비 55cm, 높이 17.5cm 되는 제상이 있다. 앞칸과 안칸의 사잇길은 남북 길이 1.1 8m, 동서 너 비 0.9m, 높이 1. 37m 이다. 안칸은 동서와 남북이 각각 3.28m 의 정사각형 평면이며 높이는 2.9m 이다. 북쪽 중앙에 높이 21cm 의 관대가 있다. 관대의 크기는 동서 너비 2.51m, 남북 길이 2m 이다. 벽면은 2 중 곡선으로 이루어졌다.
그림 6-83 덕흥리 벽화무덤 전실 북벽 주인공
앞칸과 안칸의 천장은 궁륭평행고임식이다. 앞칸에서는 2 단의 평행고 임, 안칸에서는 4-5 단의 평행고임 위에 뚜껑돌을 놓았다. 안칸의 천장고임이 나선형 형식으로 되어 있다. 무덤칸의 모양과 크기 에 따르면 고구려자(尺)를 기준으로 축조되었다고 보고 있다. 덕흥리 무덤에는 600 여 자의 명문이 있다. 무덤 안길 좌우의 벽면에 문지기 괴물과 소수의 사람이 있다. 그 명문 에는 무덤문을 409 년 2 월 2 일에 닫았다고 기록되었다. 안칸의 북쪽벽 정면에 묘주인의 약력이 적혀 있다. 무덤 주인은 〈鎭〉
이라는 이름의 고구려 유주 지방을 다스리던 지방장관이며, 나이 77 세에 사망하여 408 년 12 월 25 일에 여기에 옮겨 묻혔다• 앞칸의 벽화내용은 유주자사 鎭의 공직생활과 관계된 벽화가 있다. 북 벽 서쪽 부분에는 묘주인이 장방 안에 앉아 관리들과 시중들을 거느리고 집사를 보는 장면이다(그립 6-83 a). 앞칸 서쪽벽에는 두 단으로 나누어 13 개 군의 태수들이 나란히 서서 유주자사인 鎭에게 찾아와 인사를 드리거나 지시를 받고 있다. 남벽 서쪽 부분에는 유주자사 鎭의 막부에서 일하는 여러 벼슬아치들 이 그려져 있다(그림 6-84}. 앞칸의 동쪽벽 절반에는 주인공의 행렬장면이 있다. 행렬은 5 열 종대 이며 남쪽 부분에 그려진 것은 행렬의 선두 대열이다. 거기에는 뿔나팔, 멜북, 혼들북으로 이루어진 고취악대와 깃발수, 유주의 소재지인 북경 남방인 冀縣의 현령이 말을 타고 큰 기계활을 쳐들면서 가는 모습을 담 고있다. 동쪽벽에는 행렬의 중심 대열이 있다. 좌우 바깥 줄에는 갑옷 입힌 말 을 탄 무사들이 서 있으며, 그 안쪽 줄에는 무관과 문관 대열이 있다. 행렬 가운데에는 수레를 탄 높은 관리들이 부하를 거느리고 나아가고 있 다. 그곳에 꽃수레를 탄 주인공도 있다. 북벽 동쪽 부분의 그림은 행렬 의 마지막 부분이다(그림 6-85). 앞칸 동쪽 천장에는 사냥 그립이 있다. 말을 탄 사냥꾼들이 범, 사슴 과 노루, 멧돼지 등을 사냥하고 있다. 앞칸 남쪽 천장에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소를 끌고 가는 〈견우〉와 검정개를 데리고 서 있는 〈직녀〉가 있다(그립 6-86). 앞칸 천장에는 별그립과 선인, 괴물 등의 그림이 있다. 앞칸 뚜껑돌 위에는 연꽃무늬 하나가 있다(그립 6~87}. 앞칸의 네 모서리에는 기둥과 두공, · 그 사이사이에는 도리 그림이 있 다. 기둥에는 @형의 연속무늬가 있으며, 도리에는 구름물결무늬가 있고
그림 6-84 덕흥리 벽화무덤 전실 서측 천장 벽화
도리 위에는 불꽃무늬가 있다. 앞칸과 안칸의 사잇길(雨道) 좌우 벽에는 묘주인 부부의 나들이 장면 이 있다. 사잇길 동쪽벽 윗부분에는 여주인의 나들이 장면이 있다. 이 그림에는 가마수레 뒤에 신분이 높은 여인들이 따르는 장면이다. 여인들은 색동 주름치마를 입고 있다. 이 색동치마 그림은 수산리 벽화무덤의 색동치마 그림보다 이론 시기이다. 앞칸 천장의 선인도(그립 6-88, 6-89, 6-90) 는 여 러 가지 다양성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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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칸의 벽화내용은 주로 주인공의 사생활과 관계된 그림이다. 북쪽 벽 에는 주인공이 큰 집의 장방에서 관리들을 거느리고 시중들의 시중을 받 고있다. 서벽 북쪽 부분에는 창고와 다락집이 있다. 서벽 남쪽 부분에는 말울 타고 활을 쏘는 경기를 하는 그립(馬射圓)이 있다(그립 6-91). 그 밖에 안칸에는 주인공이 타는 큰 말, 여물을 먹는 말과 소, 여물을 써는 아이들, 수레, 크고 작은 연꽃, 칠보행사 등의 그 립이 있다.
흙.
그립 6-87 덕흥리 벽화무덤 전실 남측 천장 연꽃을 든 선인
그림 6-89 덕흥리 벽화무덤 전실 서측 천장의 쟁반을 든 옥녀
그립 6-91 덕흥리 벽화무덤 현실 서벽 상단의 활쏘기 대회 벽화
안칸 천장 아랫부분에는 도리, 기둥과 주두 및 활개 그림이 있다. 특 히 그곳의 이중 두공 그림은 독특하다. 12) 金元龍은 덕흥리 고분의 주인 공은 중국인이며 5 세기 초 고구려 고분의 구조와 벽화양식을 뚜렷하게 보여 주는 중요한 무덤으로 보고 있다 .13) 무덤 안길(연도), 앞칸(전실), 사잇길(용도), 안칸(현실)로 이루어전 두 칸 무덤이다. 천장은 평행고임식 천장이다. 4 세기 말에서 5 세기의 유형 이며 동일한 유형으로 씨름무덤, 춤무덤, 모두루무덤, 동암리 벽화무덤, 약수리무덤, 대안리 1 호 무덤 등이 있다. 덕흥리와 가장 근접된 무덤은 集安 모두루무덤이다. 다만 덕흥리 벽화 무덤은 궁륭식 평행고임 천장인 데 비해 모두루무덤은 앞칸(前室)이 궁 륭식 천장이고, 앞칸은 궁륭식 평행삼각고임이다 .14) 덕흥리 벽화무덤은 묘지명이 永樂 18 년 (408) 으로 되어 있는데, 5 세기 초에 해당된다. 북한의 박진욱은 모두루무덤 피장자도 고구려 귀족으로 보고 있다. 그
는 일부 학자가 주장하는 돌각담무덤 (적석총)은 4 세기까지 계속되며, 5 세기 이후에는 돌칸흙무덤으로 대치된다는 설을 부인하면서 集安 만보정 1368 호가 3 세기 중엽에 해당된다고 보고 있다. 또한 덕흥리 무덤은 魏 • 晉 시기의 무덤 특성을 반영하고 낙랑 고분의 계승, 발전이라는 주장도 거부하고 있다. 그러면서 5 세기 벽화무덤의 벽화배치를 제시하고 있다. 벽화는 5 세기에 인물풍속도와 인물풍속도 및 사신도 무덤이 병존하는 시기로 보고 있다. 다만 앞칸에는 행렬, 사신, 들놀이가 묘사되고 안칸 에는 주인공방 장방도, 저부 내부생활 등이며, 천장에는 해, 달, 별과 구름무늬 등 천상세계의 묘사가 공통적이다. 덕흥리 무덤의 복식 벽화에는 유주자사인 주인공 鎭으로부터 그 밖의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다. 남자는 저고리와 바지를 입었으며 저고리에 띠를 댔다. 지위가 있 는 자는 겉에 두루마기(도포)를 입었다. 여자는 저고리와 주름치마 또는 무지개치마를 입었으며, 간혹 바지도 입었다. 그러한 남녀의 옷차림은 고국원왕 무덤, 약수리 벽화무덤, 수산리 벽화무덤 4-5 세기 무덤의 공통 된 현상이라고 보고 있다. 그 밖에 안칸 남벽의 마구간 결에 두 아이가 작두로 여물을 써는 장면 이 있는데 이것은 약수리 앞칸 서벽의 여물을 써는 그림과 같다고 한다. 상기한 바와 같이 덕흥리 벽화내용이 다른 고구려 벽화무덤의 벽화내 용과 같고, 중국의 그것들과도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鎭의 출생지도 현 평안북도 운전군 가산리, 삼광리 일대라는 것이다. 또한 덕흥리 벽화고분의 유주는 중국의 유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끝으 로 박진욱은 무덤 앞칸 벽에 그려진 벽화는 고구려 사람인 鎭이 자기 일 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유주자사 벼슬을 할 때의 인상적인 몇 장면을 그려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덕흥리 벽화고분의 주인공인 鎭 이 고구려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학자는 없다.
10 약수리 고분 • 복사리 고분 • 팔청리 고분 • 동명왕 롱·태성리 저수지 고무덤 1959 년 가울 운봉수력발전소 건설공사 관계로 그 저수지 구역 내에 유 적을 발굴하였다. 또한 같은 해 가울 송암리 돌각담무덤군을 발굴하였으 며, 그 다음해에는 조아리, 법동리, 연풍리의 무덤을 조사하였다(그립 6- 92). 조아리 무덤군: 압록강 동쪽에 있는 들은 압록강 유역에 있다. 둘의 너비는 약 500m 정도이다. 무덤은 하덕에 많고, 상덕은 드물다. 하덕 무덤은 모두 강자갈로 조성되었으며, 2 기, 3 기 혹은 4 기가 몰려 있다. 하덕에서 2 기의 무덤을 발굴하였다. 서해리 무덤군: 압록강 강변에 있는 서해리 위원회 소재지에 있다. 그 곳의 제 1 무덤군에서 3 기, 제 2 무덤군에서도 3 기를 발굴하였다. 법동리 하구비 무덤군 : 자성강구에서 압록강을 따라 중강 방향으로 2km 지점에 하구비가 있으며, 무덤들은 대개 하구비 마을 전면 강변에 산재해 있다. 돌각담무덤과 기단이 없는 강돌로 된 무덤이 3 기 발굴되었 으며, 출토 유물은 철제 말재갈, 석재 가락바퀴 및 토기편 등이 있다. 법동리 선풍동 무덤군 : 법동리 소재지로부터 자성강을 따라 상류 쪽으 로 가면 선풍동이 나온다. 제 1 무덤군에서 3 기가 발굴되었으며, 제 2 무덤 군에서는 15 기가 발굴되었다. 송암리 무덤군 : 옛 자성군 소재지로부터 자성강에서 10km 지점에 송 암리 소재지가 있다. 그곳에서 4 기의 무덤이 발굴되었다(그림 6-93). 종합적 결론 고구려 돌각담무덤은 1949 년 전에 集安 부근, 평양 대성산 일대 및 강 동군 만달산에서 알려졌다. 무덤 방향은 서향 또는 서남향이 기본 방향
그림 6-92 자성군 조아리, 서해리, 법동리, 송암리 고구려 고분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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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며, 강돌로 된 돌각담무덤과 산자갈로 된 돌각담무덤은 그가 위치한 강변 또는 산이라는 것만 다른 게 아니고, 무덤 방향도 서남향에서 동남 향으로 바뀐 것이다. 시기는 강돌로 된 것은 서기 전후, 산돌은 고구려 중기 또는 그 이후 시기로 보고 있다. 돌각담무덤은 무기단 돌각담무덤 一 기단 돌각담무덤 一 單成 돌각담무덤으로 발전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 리고 그 시기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1) 약수리 벽화고분 약수리 벽화고분은 태성 저수지 건설공사 관계로 발굴되었는데, 약수 리 부근에는 고구려 벽화고분이 많이 산재해 있다. 약수리 벽화무덤에서 북쪽으로 4km 지점에 강서 삼묘리 벽화무덤, 태성리 1 호 • 2 호 무덤, 蓮 華塚 전지동의 雙盆塚과 대총, 그리고 룡강군 대안리 제 1 호 무덤들이 있다 .16) 발굴은 1958 년 4 월부터 7 월까지 전후 3 차에 걸쳐 50 일간 진행 되 었다. 무덤은 언덕을 깎아 내고 반지하로 축조하였으며, 그 방향은 10· 서쪽으 로 치우친 남향이다. 묘실은 연도, 전실, 전실 동서 양벽의 감실 후실도 조성되었다. 전실과 현실의 천장구조는 궁륭식과 3 각고임식의 두 가지 천장형식을 배합한 궁륭 3 각고임 이다(그립 6-94). 시기는 전기에 속한다. 벽화는 전실과 현실의 3 각 고임부를 제의한 전체 벽면에 그려져 있다. 벽화는 회를 바론 벽면에 먼저 검은 선으로 인물 및 기타 물체를 그리 고, 그 다음에 흑색, 황색, 자색으로 채색하였다• 그 내용은 인물, 풍속, 사신, 장식무늬 등이다. 현실 4 벽의 중앙에는 기둥과 주두도리, 상반부에는 묘주인 내의 등의 인물도와 사신도, 일월 성신도 및 각종 괴운무늬가 있다. 전실 네 벽 상단부에는 행렬도, 성곽 도, 수렵도 등이, 하단부에는 부엌, 방앗간, 마구간, 말, 의양간, 수문 장 및 주인을 위시한 인물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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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 유물에는 금귀걸이, 금반지, 심영형 금제 장신구, 은반지, 관정 등이 있다. 주영헌은 〈 약수리 벽화무덤은 인물풍속 및 사신도를 그린 감 실 무덤으로 고구려 시기의 무덤이다 〉 라고 서술하였는데, 고구려 시기의 어느 때에 속하는지 여부는 구체적인 서술이 없다. (2) 복사리 고분 무덤은 복사리 망암동 부락의 뒤편 언덕, 죽 남쪽의 월암산에서 북쪽 으로 뻗은 언덕의 가장 북단 남측 경사면에 위치하였다. 이 복사리 고분 은 안악 3 호분(하무덤) 과 흡사한 특징을 가졌다. 17) 묘실은 한 변이 3.5m 되는 사각형 평면의 단간에 좁다란 연도 입구에 서 위로 올려 쌓았다. 벽면은 두께 10cm 정도의 편마암의 절석으로 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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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으며, 전면에 회를 발랐다. 현실은 네 벽과 궁륭형의 천장부를 가졌으 며, 그 구조는 환문총의 현실구조와 유사하다(그립 6-95). 유물로는 질그릇 조각과 관정 이 4 점 출토되 었다. 벽화는 묘실 네 벽에 주두를 울린 기둥을 그렸다. 그 높이는 바닥에서 140cm 이며, 기둥 위에 도리를 올리고, 그 중앙부에 또 한 개의 기둥을 세워 도리를 받치게 하였으며, 그 좌우에 또다시 층으로 겹쳐 올렸다. 첫째 기본 도리의 위로 올린 2 층의 도리들은 각각 그 밑에서 계속된 화 반으로 받게 하였으며, 그것은 검붉은색으로 칠하였다. 도리와 화반들 사이 간벽에는 변형의 구름무늬, 날아가는 새의 문양 및 봉황을 탄 천인 등을 그렸다. 그 천인상도 오직 서북 모서리 제 1 층 도리 부분에서 얼굴과 꼬리 부분만 남아 있다. 천인은 꿩葉式의 높은 天 冠울 썼다. 그 부분 벽의 모서리 간벽에는 측면 연꽃이 서벽에 2 개, 북
벽에 연꽃봉오리 한 송이가 있다. 천장부는 2 층으로 더 높이 울린 부분을 모두 포함하였다. 하늘은 가장 윗부분의 공간에서 표현되었다. 그 무덤의 하늘은 다른 벽화무덤과는 달 리 순수한 星宿圖(별자리 그립)로 되어 있다. 복사리 벽화무덤의 구조는 간단하다. 그러나 좁다란 연도의 동 • 서벽 에 籠을 마련한 것은 벽화무덤 중 처음 있는 일이다. 무덤은 벽화무덤 중에 비교적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시기는 전기에 속한다. 고구려 벽화무덤의 특성과 사회적 의의에 대하여 정찬영 등이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8) 고구려 벽화무덤은 4 세기에서 7 세기까지 이르는 400 년 동안 만들어졌다. 벽화의 내용에는 생산활동, 씨름, 손치기(手博), 사냥, 경기, 음악, 무용, 건축(궁전, 성곽), 장식〔연꽃(그립 6-96 a, b, c, d, e), 인동문, 연못, 소나무, 산악〕, 여러 가지 신앙 등이 있으며, 벽화의 주제는 인물풍속 (4- 5 세기), 인물풍속 및 사신도 (5-6 세기), 사신도 (6-7 세기) 등이 있다. 개별 무덤에는 동수묘(안악 3 호분), 약수리무덤, 무용총, 장천 1 호 고 분 등이다. 인물풍속화 속에 건축에 관한 그립이 있다. 죽, 무덤칸의 네 모서리에 두공이 있는 기둥을 그렸다(그립 6-97, 6-98). 성곽이 있는 벽화무덤에는 약수리무덤, 요동성, 용강대묘(그림 6-99 a, b) 등이 있다. 인물풍속화에 사용된 무늬는 구름(그림 6-100 a, b, c, d), 연꽃, 괴연, 넝쿨, 보륜, 기하학적 무늬가 사용되었다. 인물풍속화에 행렬도가 있는 무덤으로는 동수묘, 약수리 벽화무덤, 안 악 1 호 등이 있다. 인물풍속화 내의 음악, 무용 그리고 사용된 악기는 다음과 갇은 것들 이 있다. 세운 북(견고), 매단 북(현고), 매는 북(담고), 말북(미장고), 혼들북(도고), 장고(요고) 등의 타악기와 큰 뿔나팔(대각), 작은 뿔나팔 (소각), 두 가닥 뿔나팔(쌍구대각), 퉁소, 첫대, 배소 등의 관악기,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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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거문고, 바파, 완함 등의 현악기가 있으며, 독주, 중주, 합주 등의 연주 장면과 독무, 쌍무, 3 인무, 4 인무, 5 인무, 7 인무의 춤추는 장면이 있다. 고구려 남자옷의 벽화가 있는 무덤으로는, 동수묘(그립 6-101), 약수 리, 대안리 1 호, 무용총 등이 있으며, 치마저고리, 저고리에 띠를 댄 것, 주름치마 등의 여자옷과 올린 머리(동수묘, 약수리 벽화무덤), 내린 머리 등의 여자들의 머리꾸밈새, 끝이 버선코 모양인 여자들의 신발과 양산〔동수묘, 수산리 벽화무덤 (그림 6-102 a, b), 삼실총〕과 부채 (集安 오회 분 4 호묘)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약수리 벽화고분, 무용총, 장천 1 호 무덤에서는 수렵도를 볼 수 있는 데, 여기에는 범, 곰, 여우, 사슴, 사냥개, 매, 꿩 등이 그려져 있으며 활, 창, 칼, 갑옷, 갈고리 창 동이 보이는 전두도가 있다. 종교 관계 그림은 환상적인 침승, 봉황, 기린, 다리와 날개 달린 물고
홍핥,-'.- .곱. ; '< ? .<·.-` · ··~. : .r ? ·『: ·홍~ ·, ., 屈 깊,말 ~~' %` , , 澤'f:·-夕%...:;.. i 11: ~ : .. ;'.·‘b. ~·.: .-. .. 앙• .-그i _ `::' .주~ .·?•• .? :, . \:\' . ...~ •- •~L! . . ·~; ' ,, , ( 2 df Y 中가符떤究宁曲―
기, 날개 달린 말,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새의 모습을 한 괴물, 머리는 소이고 몸은 새의 모습을 한 괴물 등아 있다. 이 밖에도 천상의 상상적인 동물과 청룡 • 백호, 신선 그림 (신선들이 용 이나 학을 타고 나는 것, 비천) 등을 볼 수 있다. 그림 그리는 방법으로는, O 묘사 대상의 특징만을 간결하게 나타내는 간필묘적인 기법 ® 대상의 모든 세부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세화 기법 ® 선으로 대상의 윤곽을 먼저 그리고 채색을 하는 구록법적인 수법 ® 채색만으로 대상을 나타내는 몰골법적인 수법 ® 묘사 대상을 겹치게 해서 크기를 달리하여 원근 관계를 나타내는 원근법 ® 부감식 그리고 산점무시의 방법으로 원근을 나타내는 원근법 ® 가늘고 부드러운 선으로 처리한 유사묘법 ® 가늘고 힘 있는 선으로 처리한 칠선묘법 ® 여러 가지 억양의 벽화를 주는 자유로운 선의 사용과 선의 강약 및 색의 농담으로 대상의 입체감을 나타내는 운영법 등이 사용되었다. (3) 팔청리 벽화무덤 무덤은 팔청리 부락에서 길게 뻗은 장산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한 세 가닥의 언덕 중 가운대 언덕 끝에 있다. 그곳에서 서남 12km 지점에 강 서 세 무덤, 또 남으로 8km 지점에 서기리 큰 무덤군이 있다 .19) 무덤의 봉토가 홀러내려 원형이 되었는데, 지름은 llrn 이고 높이는 약 2m 이다. 내부는 사각형의 玄훅 구형의 前욱 그리고 연도가 있으며, 그 주축은 동으로 8° 이다. 현실과 전실은 사각 기둥이 선 중간 동로로 연결된다(그립 6-103), 중간 통로에 세운 사각 기둥은 모를 죽인 홀립기둥으로 명루받침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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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는 좁고 얕은 받침 위에 주두를 놓았으며, 어느 것이나 기둥과 같이 그 모서리를 죽였다. 유물로는 은비녀 1 집 관정 4 점이 있다. 벽화는 연도를 제의한 전체 벽면에 그려져 있다. 전실, 현실 등은 네 벽 모서리에 기둥을 그렸고, 그 벽 상부에 천장부의 첫째 고임과 약간
사이를 두고 들보를 그렸다. 현실에서는 기둥 및 도리가 그려졌고, 그 안에 연잎 초롱무늬가 있다. 그 도리의 무늬는 안악 2 호 벽화의 도리와 기타 부분에서 보는 연잎 초롱무늬와 같다. 네 모서리 기둥 위에 접시받 침의 주두와 연꽃을 그렸다. 주두에는 무서운 괴수 얼굴을 가득 그렸다. 북벽 구획의 중앙에 큰 기와집이 있고, 주인공에게 공물을 바치는 남 자가 있다. 남자들의 복식은 검은 머릿수건을 쓰고, 긴 저고리에 좁은 바지를 입었다. 기와집 주위에는 변형된 구름무늬가 있다. 대문간에는 누렇고 긴 저고리에 치마를 입은 여자 한 명이 밖울 향하여 있다. 또한 무덤벽화에는 사산도가 배합되었고, 서벽의 왼쪽 반부는 골기와 지붕으로 되어 있는 의양간이 있다. 남벽의 중간 통로 좌우벽에 두 채의 고깃간이 있는데, 고깃간은 3 층으로 꿩 여섯 마리가 오른쪽에 걸려 있 다. 시기는 전기에 속한다. 서벽에는 우산각집이 한 채 있으며 그 안에는 주인공이 앉아 있다. 동벽과 서벽에는 흰 덧관을 쓴 주인공의 출행도가 보이는데, 주인공은 수레를 탔다. 그것은 하무덤이나 약수리 벽화무덤의 출행도와 유사하다. 동벽의 그림은 많은 인원을 거느리고 출행하는 주인공의 앞에 행진 중의 고취와 잡기의 주요 장면이 있다. 서쪽벽에는 초록빛, 검은빛, 자줏빛의 말 세 필이 한 그루의 큰 나무 에 매여 있는데, 그 표현은 도안적이다. 종합하면, 팔청리 무덤은 당시 건축, 풍속, 그리고 예술의 일단을 보 여 주고 있다. 무덤 구조는 쌍영총과 같은 형식에서 더 발전하려는 과도 기적 상태를 보여 준다. 이 무덤벽화는 힘 있는 鐵線描法울 사용하고 있다. (4) 동명왕릉 평양 부근의 고구려 고분 중 이름이 전하는 것은 강동의 〈한왕묘〉, 〈단군묘〉와 중화군 무진리의 〈동명왕릉〉이다. 20)
요
전 동명왕릉도 고구려 큰 기단봉토무덤에 붙여전 이름의 하나이나, 역 시 후세에 붙여진 것이다. 동명왕릉은 평안남도 중화군 무진리 진하동에 있으며, 평양의 동남방 약 24km 지점에 있다. 주제의 벽화무덤은 진파동 무덤군 중 제 1 호와 제 4 호 무덤 2 기인데, 제 1 호 무덤은 사신도 무덤이며, 제 4 호는 사신도와 천인도가 배합된 것이다 (그림 6-104). 그 무덤들은 다른 무덤들과 함께 1941 년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되었으나 보고서는 없다. 1 호는 무덤군의 동쪽에 있다. 내부 묘실의 남북 주축선은 현재 자북선 으로부터 서쪽으로 5• 기울어졌다. 현실 주벽인 북벽에 현무, 그 좌우대 칭적 위치에 두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그립 6-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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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벽에는 청룡, 서벽에는 백호를 북향시켜 벽 전면에 그려 넣었으며, 구름무늬 사이에 꿈틀거리게 하고 있다(그림 6-106 a, b, c). 현실 입구 사이에 둔 남벽에는 좌우에 봉황을 그려 주작을 나타내고 있으며, 천장 중심에는 동쪽에 태양, 서쪽에 달을 나란히 그렸다. 각각 구름 회전무늬로 돌린 큰 원권 내에 태양에는 세 발 까마귀, 달에는 계 수나무 밑에서 방아 찜는 옥토끼의 모습을 그렸다. 벽화는 현실 밖인 연도의 동서쪽 벽에도 있는데, 거기에는 마주 서 있 는 사천왕상이 있다. 1 호는 순몰골법으로 벽화를 그렸는데 북벽의 소나 무가 그 단적인 예이다. 색채는 먹빛을 위주로 하여 주황, 자주, 녹색, 청색, 황색 등을 섞었는데, 간색으로 연주홍, 연자줏빛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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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현실 천장 구조
(5) 제 4 호 무덤군의 가장 후방에 위치하였다. 왕릉은 바로 약 300m 거리에 고립 되어 있고, 제 1 • 2 • 3 호를 제의한 다른 5 기의 무덤들은 전방에서 2 기 또 는 3 기씩 동서로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봉토의 지름은 23m, 전면 지점 에서 높이는 약 6m 이며, 무덤 현실 바닥에서 봉토 꼭대기까지는 4.2m 이 다. 현실은 직사각형으로 동서 2.53m, 남북 3.04m, 높이 2 . 5m 이다. 네 벽 과 천장구조는 1 호와 같다. 다만 무덤의 네 벽은 한 장의 판석으로 조성 되었고, 3 각고임돌이 그 밀의 고임 측면선에 들어간 것이 다르다. 연도 는 남벽 중앙에 있는데, 너비는 1.2 m, 길이는 3.15m 이다. 내부 묘실 남북 주축선은 현재 자북선으로 3• 서쪽으로 기울었다.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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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묘실의 주벽인 북벽에 청룡도가 있으며, 벽 상부의 천인도는 좌우 2 체를 배치하였다. 동벽에서는 하반부에 있는 청룡도의 꼬리와 가슴 부분 을 겨우 찾아보는 정도이다. 서벽의 벽화에는 하반부에 그린 백호의 머 리 부분만 잔존되었다. 이상 동·서 ·북 세 벽의 짐승을 탄 천인도는 集 安 사신묘와 비교할 만하다. 남벽의 하반부에는 봉황을 마주 그려 주작을 나타내었으며, 천장 중심 부에는 금분을 입힌 무수한 별그림이 있다. 제 4 호의 그립과 1 호의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데, 4 호의 사신도와 짐 승을 타고 나는 천인도의 배합은 1 호의 사신도와 무늬 배합과는 다르다. 죽, 4 호 무덤은 1 호의 前身으로 보고 있다. (6) 강서군 태성 리 저수지 고무덤 1958 년 9 월 강서군 태성 저수지 부근을 강서군의 보림리 대동, 소동, 룡강군 후산리 추동, 내동, 그리고 태성리 추동 고인돌군 등 다섯 지역 으로 나누어 발굴하였다. 21) 그 중에서 대표적으로 보림리 대동 고분들만 살펴보겠다(그림 6-107). 무덤군은 떡국뫼 기슭에 분포되었다. 그 구릉의 가장 남쪽 끝에는 사신 도가 그려진 벽화무덤 1 기가 있는데, 산록의 무덤군과는 거리가 있다. 대동구역의 무덤군은 서너 기 또는 예닐곱씩 무리를 지어 있고, 어느 것은 단독으로 있다. 무덤 중 한 봉토에 2 개의 곽이 있는 것과 쌍분을 이룬 것이 있다. 6 , 7 • 18 • 19 • 21 호는 전자에 속하고, 2 • 3 호는 후자에 속한다. 쌍곽은 동서 양곽이 한 장의 판석 또는 깨뜨린 큰 돌로 쌓은 간 벽으로부터 직접 붙은 것 (6 호, 21 호)과 120-150c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만들어진 것도 있다. 전자는 동시에 축조되었으며, 후자는 선후적 관계 가있다. 봉분이 잔존한 것은 4-5 기, 가장 큰 것은 높이 2.Sm, 지름 llm( 제 4 호
무덤)이고, 가장 작은 것은 높이 1.2 5m, 지름 7m 이다. 내부(제 7 호 무덤) ' 곽실의 방향은 대체로 정남향인데, 그 중 10· 내의인 것이 5 기, 15° 내의 인 것이 3 기, 20· 내의인 것이 3 기이다. 현실의 정면형은 직사각형이 대부분이며, 준 사각형을 이룬 것이 4 기 이다(그림 6-108), 네 벽은 깨뜨려 낸 크고 작은 돌을 불규칙적으로 쌓은 징이 대부분이 나 21 호분은 하나의 판돌로 구성되었고, 6 호는 큰 판돌을 주요부에 사용 하면서 깨뜨린 돌을 배합하는 경우도 있다. 벽면은 본래 面灰롤 하였다. 남은 것은 제 5 • 7 • 8 • 11 • 19 호 등 6 기이다. 천장은 고임식이며, 완전한 것은 제 4 호이다. 그것은 평행고임 두 단을 내고 3 단의 3 각고임으로 된 것이다. 바닥은 원토반을 다져 그대로 한 것, 회바닥 처리를 한 것(제 5 • 6 • 7 • 8 • 11 호), 직사각형의 판돌을 이를 맞추어 깐 것 (제 2 • 4 , 19 호, 등곽 20 호) 등 4 종류를 보였다. 제 19 호는 참 나무 숯울 혼합하여 바닥에 깔았다. 연도는 벽화무덤인 제 11 호를 제의하 고 기타는 현실의 남벽 동쪽에 치우쳐 있다. 출토 유물로는 순금 귀걸이 3 종, 판금 씌운 청동고리 및 금동고리, 은 반지, 은비녀, 순금 살구나무잎 모양 장식, 용도 불명의 은장식, 쇠거 울, 작은 칼, 찌르개 모양의 철기, 끌모양 철기 등의 금속 유물과 토기 유물로 작은 단지, 둥글넓적한 토제품과 돌부처, 둥근 옥제품 조각, 인 골 등이 있다. 그 밖에 보림리 소동, 룡강군 후산리 추동, 후산리 내동 등 모든 내용 울 서술하면서 그 출토 유물들(특히 금속제)의 系統史的 원류가 고구려에 있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시대에 대한 언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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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동암리 벽화무덤 • 룡흥리 고분 • 운룡리 고분 • 평 정리 고분·안학동·로산동 일대 고분 (1) 동암리 벽화무덤 동암리 무덤은 평안남도 순천시 동암리의 쌍촌부락에 위치하고 있다. 동암리 소재지에서 1.5k m 거리의 서북쪽에는 대동강이 있으며 그 북동 쪽에는 검산이 있다. 벽화무덤은 검산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서쪽에서 뻗 어 내려 거의 평지의 능선 끝에 있다. 동암리 벽화무덤의 주변에는 고구 려 시기의 무덤들이 상당히 분포되어 있다. 그 중 북쪽으로 약 10km 지 점의 순천시 용봉리에 있는 요동성 벽화무덤이 있고, 그 무덤에서 북쪽 으로 다시 2km 지점에 있는 북창리에 천왕지신 무덤이 있다. 또한 동암 리 벽화무덤에서 남쪽으로 약 24km 정도의 거리에 경신리 1 호 무덤이 있다 .22) 동암리 벽화무덤은 1987 년 9 월 말에서 10 월 초까지 발굴되었다. 발굴 당시 무덤벽화는 다 박락되어 있었으며, 앞칸에는 두께 1.2 m 의 흙이 쌓 여 있었고 안칸에는 흙의 두께가 1.5 m 정도였다. 벽화는 모두 무덤칸의 바닥과 흙 속에서 조각으로 출토되었는데 앞칸에서 제일 많이 나왔다. 안칸에서는 별그립과 장식무늬 그림편이 나왔다. 무덤무지는 지표로부터 2.20m 의 높이로 흙을 다진 다음 그 위에 무덤칸을 축조하고 흙을 덮었 다. 무덤무지의 네 모서리 부분에 모가 잔존한 것으로 보아 본래는 반대 형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덤칸은 안길(墓道), 앞칸(前室), 사잇길(雨道), 안칸(玄室)으로 구성 된 2 칸 무덤이다. 무덤의 방향은 남쪽으로 치우친 서향이다. 안길의 크기는 남벽의 길이 263cm, 북벽의 길이 245cm, 너비 120cm, 높이 182cm 이다. 안길의 양벽은 길이 1m 이상, 두께 약 40cm
의 돌로 쌓은 다음 그 위에 길이 200cm, 너비 280cm 이상, 두께 30cm 인 판석 1 장으로 덮었다. 안길 바닥은 숯울 5cm 정도 깐 다음 그 위에 납작한 점판암과 석회암을 깔았다. 앞칸의 크기는 남벽 길이 187cm, 북벽 길이 188cm, 너비는 서벽 350cm, 동벽 355cm, 높이 280cm, 동서 최대 길이 220cm, 남북 최대 길이 360cm 이다. 안칸의 크기는 길이가 동벽 360cm, 서벽 380cm, 너 비는 북벽 370cm, 남벽 370cm, 높이 360cm, 동서 최대 길이 390cm, 남북 최대 길이 370cm 이다. 벽화무덤의 벽, 천장, 바닥에는 회를 바른 후 벽화를 그렸다. 회는 초 벌, 재미장 등 두 번 칠하였다. 벽화는 박락이 심하여 구체적 배치상태는 모르며, 무덤칸에 퇴적된 벽 화조각을 복원하여 벽화의 배치상태를 인지하였다(그림 6-109 a, b, c, d). 안길과 앞칸 그리고 사잇길 등의 바닥흙 속에서 벽화조각이 출토된 것 으로 보아 모든 벽면에 벽화를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앞칸에서 벽 화조각이 가장 많았다. 벽화내용은 주인공 초상화 등 생활도와 말, 범, 사슴, 노루 등 짐승그 림을 그리고 여러 가지 장식무늬가 있다(그림 6-110). 상기한 내용에 따라서 동암리 벽화무덤은 인물풍속을 주제로 한 벽화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벽화는 가는 주홍색 선으로 윤곽을, 먹선으로 초안을 고정시킨 다음 적당한 색칠을 하였다. 동암리 벽화무덤은 무덤칸을 무덤무지의 중간에 두었는데 그것은 고구 려 적석묘의 구조형식과 같다. 고구려의 벽화무덤으로 이러한 구조의 무 덤은 처음이라 한다. 이 무덤은 1914 년 일본인들에 의해서 조사되었으며 당시의 명칭은 〈검산고분〉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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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룡흥리 무덤군 룡흥리 무덤군은 남포시 룡강군 룡흥리에 있다. 룡흥리에는 고구려 무 덤이 약 300 여 기가 있다. 고구려 돌칸흙무덤 7 기가 발굴되었다 .23) 룡흥리 1 호 무덤은 벽화가 있는 돌칸흙무덤이다. 무덤 주위에 돌칸흙 무덤과 고인돌이 있다. 무덤칸은 도굴이 심한 상태였다. 무덤칸은 무덤 안칸과 안길로 된 의칸 무덤이다. 벽은 납작한 판돌로 축조하고 그 위에 회를 발랐다. 발굴시 벽화는 거의 다 박락되었다. 무덤 안길은 무덤칸 남북의 동쪽으로 약간 치우쳤다. 안길에도 회를 바르고 벽화를 그렸다. 천장은 큰 판돌 2 개를 잇대어 덮은 평천장이다. 무덤 방향은 서남향에 가까운 남향이다. 무덤칸의 크기는 안칸이 남북 길이 3.2 m , 동서 너비 2.9m, 높이 3.0 2 m, 안길은 길이 l.8 2 m, 너비 1.lm , 높이 1. 3m 이다. 관대는 남북 길이 2.Bm, 동서 나비 1.8 m , 높이 0.2m 이고, 관대는 남벽 사이는 40cm 이다 (그림 6-111 a). 벽화는 여러 가지 색깔로 처리하였다. 현재 확인된 것은 안칸 북벽의 장방도이다. 서벽 부근에서 인물들, 말 탄 사람, 무늬 등이 그려진 것이 발견되었고 동쪽벽 부근에서 건물과 인물 등이 나왔으며 바닥 중앙에서 벽화조각이 채집되었는데 그곳에는 사신도의 일부분도 있었다. 부장품은 관못 74 개, 고리 손잡이 4 개, 꺾쇠 4 개, 은반지 1 개, 관편 등이 출토되었다. 1 호 무덤 의의 무덤은 다음과 같다. 2 호 무덤은 1 호에서 남쪽으로 16m 지점에 있다(그림 6-lll c), 3 호 무 덤은 룡흥리 소재지에서 옥도리로 가는 도로를 따라서 동쪽으로 약 800m 지점에 있다. 4 호 무덤은 3 호에서 서북쪽으로 200m 지점에 있다. 5 호는 4 호로부터 북쪽으로 50m 지점에 있다. 6 호 무덤은 3 호에서 서쪽 으로 5m 지점에 있다. 7 호는 6 호의 남쪽으로 180m 지점에 있다. 부장
북쪽广
품은 표 6-2 와 같다. 순금제의 태환식 금귀걸이가 7 호에서 1 개 출토되었다. 길이는 3.5cm, 굵은 고리 의부 지름이 2.2cm, 자름면의 건 축\'--;?:- 1.4 cm, 짧은 축은 0. 7 cm 이다. 가는 고리의 바깥 지름은 2 .4 cm 이며 자름 지름은 0 .4 cm 이다. 이 유물은 평양역전 벽화무덤, 평양역 구내 벽화무덤의 것들과 같다. 반 지는 1 호에서 1 개, 7 호에서 2 개 출토되었다. 7 호의 것은 은을 씌운 철제 로, 지름은 2.3-2.5cm 이며, 자름면의 지름은 1.5mm 이다. 은제 비녀 1 개 가 4 호에서 출토되었는데, 길이는 9cm, 고리 부분은 지름 8mm, 너비 5mm, 두께 1.5mm 이며, 반지의 자름면 지름은 2mm 이다.
질그릇 1 개체분은 복원이 가능하다. 나팔형의 병(그림 6-111b) 과 동일 한 유형이 마선구 1 호, 문악리 돌각담무덤에서 출토되었다. 밀은 납짝 밀이다. 몸체의 중앙에 4 개의 띠손잡이 (4 耳)가 있다. 바탕흙은 회색이 다. 크기는 높이 35cm, 밑굽 지름 14.6cm, 목지름 6cm, 배지름 21cm, 구연부 지름 18cm, 두께 0 . 8cm 이다. 단지는 7 호에서 1 개 출토, 구연부가 두텁고 목이 짧다. 태토는 곱고 색은 검은 회색, 밀굽 지름 15cm, 구연부 지름 14cm, 높이 31 .2 cm, 배 지름 32.4 c m, 목지름 13.2 c m, 두께는 8cm 이다. 오지단지편이 6 호 무덤에서 출토되었고 관못은 머리가 버섯갓 모양이 다. 단면의 사각형, 그것의 크기는 못대가리 지름 2.5 - 3cm, 못대가리 0. 8X 0 .8 - 1 X lcm, 길이는 12-15cm 이다. 그 밖에 꺾쇠, 고리손잡이, 널편, 말뼈가 출토되었으며, 7 호에서는 人 骨片도 있었다. 벽화무덤의 1 호 구조는 우산리 1 호, 2 호, 3 호 그리고 별무덤과 같다. 금귀걷아는 강서 구역 수산리 병방동 무덤, 후산리의 작은 무덤에서도
호 :1\표 』 6-2: 룡 흥』 리 問고 분군갑형 출조토각 부못장 품 ] 잡손이 깁 ; i
순금제가 출토된 예가 있다. 6 호 무덤에서 출토된 기와에 의하면 고구려의 일부 무덤에서 기와로 지붕을 시설한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들은 5 세기경의 장군총, 태왕무덤 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무덤의 위치 선정에서 이른 시기의 것이 밑에 있고 늦은 시기(고려시 기)의 것이 위에 있음을 7 호 무덤(평행고임천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운룡리 벽화무덤 1983 년 4 월 평안남도 평원군 운룡리에서 고구려 벽화무덤이 발견되었 다. 그것이 두번째 벽화무덤의 발견이다. 운룡리는 평원군 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약 13km 거리에 위치하며, 무덤은 불당산 줄기의 남쪽에 위 치하고 있다. 벽화무덤 주위에 고구려 봉토석실묘가 여럿 분포되어 있 다. 운룡리에서 5.8km 남쪽에 청보리 벽화무덤이 있으며 동남쪽으로 약 13.8km 지점에 대동군 덕화리 벽화무덤 2 기가 있다. 24) 벽화무덤은 단실로 된 봉토석실묘이며, 그 방향은 서남쪽으로 치우친 남향이다. 연도 벽의 밑부분이 86cm, 두께 27cm 크기의 가공된 돌로 기초를 세우고, 그 위에 길이 60cm, 두께 30cm 정도의 돌로 벽을 쌓았 다(그립 6-112 a) . 연도 벽의 크기는 다음과 갑다(표 6-3).
표 6-3 운룡리 벽화무덤의 연도 벽의 크기 (단위 :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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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의 크기는 남북 길이 195cm, 너비 110cm, 높이 148cm 이다. 문 턱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 있는 판석에 만들었다. 주실은 정사각형이며 4 단으로 된 8 각고임식 천장 구조이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회를 바르고 그 위에 벽화를 처리하였다. 주실 벽면의 높이는 150cm 이며 천장까지는 높이 240cm 이다. 벽면은 위로 올라가면서 약간 안쪽으로 기울었다. 관대는 바닥 중앙에서 서쪽으로 26cm, 북쪽으로 139cm, 높이 15cm 로 돌을 쌓고 회를 발랐다. 바닥은 10-15cm 두께로 숯울 깔고 그 위에 4-6cm 두께로 회를 발랐다. 바닥의 네 모서리에 배 수로를 만들었다. 주실의 벽면 크기는 남벽 길이 235cm, 동벽 길이 312cm, 북벽 길이 252cm, 서벽 길이 297cm 이다. 벽화는 천장고임과 벽과의 인접한 곳에 일부 있었다. 확인된 것은 주작, 도리에 그려진 무늬, 봉황, 구름무늬 등이다(그립 6-112 b, c). 유물은 관못, 쇠고리, 문손잡이(그립 6-112d), 쇠칼, 단지, 은장도 등 이다. 그 중 관못은 총 16 개가 출토되었다. 못대가리의 크기는 3.2cm, 높이는 1cm, 못의 두께는 1.1 cm, 제 일 긴 것이 13 . 2cm 이다. (4) 평정리 벽화무덤 평정리 벽화무덤은 황해남도 안악군 소재지에서 재령으로 가는 큰 길 울 따라서 약 4km 지접에 평정리 소재지가 있다. 무덤은 소재지에서 동 남쪽으로 약 1km 거리의 5 작업 반포전에 있다. 이 무덤에서 약 4oom 되는 남쪽 지점에 안악 2 호분과 안악 1 호분이 있다. 상기한 세 무덤은 남북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1988 년 5 월에 안악군 평정리와 대추리 일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평정 리 무덤이 확인되었다. 무덤무지의 높이는 3.2 m , 밑부분 동쪽 변의 길 이는 2 1. 4m 이다. 3 기의 무덤의 동서 길이는 44.2m 이다. 상기한 3 기의
무덤을 1 • 2 • 3 호로 번호몰 부여하고 1 호 무덤을 평정리 벽화무덤으로 명명하였다. 1 호 무덤은 천장이 뚫려서 흙이 가득 차 있었다. 무덤은 단실묘로서 정남향이 다. 무덤 길 (墓道) 은 40cm x 20cm 크기 의 막돌을 쌓고 삼화토 (흙 모래, 회)로 매장하였다. 무덤길의 길이는 1.2 5m, 너비는 1.1 2m 이 다. 안길은 동쪽으로 치우쳐 있고, 무덤길보다 약간 좁다. 무덤칸의 평면 은 직사각형이며 무덤칸 벽은 대충 다듬고 벽돌을 쌓듯이 쌓고 회를 발 랐다. 무덤 칸의 크기 는 동서 1.7 5cm, 남북 2.4 5 m, 무덤 칸의 높이 는 1.4 m 이다. 무덤칸의 벽체상에는 3 단의 평행고임이다. 그 높이는 0 . 7m 이다. 그 의에 3 각고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칸 바닥에는 관대가 있다. 관대는 무덤칸의 서쪽벽과 북쪽벽에 붙 여서 만들었다. 그 크기는 동서 1.0 5m, 남북 2.lm, 높이 24cm 이다(그림 6-113) . 1 호 무덤에서 벽화와 글자가 확인되었다. 벽화는 동벽과 서벽에서 보 였다. 벽화내용은 일종의 〈산수도〉이다. 벽화는 검은색으로 그려진 묵화 이며 글자는 해서체이다. 굴자는 모두 11 자인데 그 중 7 자는 판독이 가 능하다. 글자는 위에서 아래로 맞추어 썼으며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왼쪽 으로 썼다. 오른쪽 첫줄 4 자의 글자, 둘째와 셋째 글자 〈日年〉으로 쓰여 졌다. 둘째 줄에서 4 개의 글자를 확인하였다. 첫 글자는 〈吾〉자, 둘째 〈五〉 자 밀에 어떤 획이 있으나 판독 불능이다. 셋째 글자는 〈壬〉자, 넷째 글 자는 〈姜〉자인데 뜻을 모르겠다. 셋째 줄에 2 개의 글자가 있다. 첫째 글 자는 〈大〉자이고 둘째 글자는 〈土〉자이다. 넷째 줄에는 〈王〉자가 있다. 이 무덤 글자는 OB 年 □□ 吾五口壬口 大土王이다. 이 내용은 앞으로 더 연구되어야 한다고 본다. 고구려 벽화내용 중 순수 산수화는 이것이 처음이다. 2 호 무덤은 1 호에서 서쪽으로 10.5m( 무덤칸 거리) 지점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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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무덤칸의 크기는 동서 1.6 m, 남북 1.9 5m, 안길의 너비 0 . 7m 이다. 이 무덤은 심히 파괴되었다. 3 호 무덤 역시 거의 파괴되었다. 무덤칸의 크기는 동서 1.3 6m, 남북 2.25m 이다. 안길의 너바는 0 . 7m 이고, 길이는 1. 05m 이다. 무덤길의 너비 는 0 . 9m 이다. 유물은 세 무덤에서 각각 철제 관못 1 개씩 출토되었다. (5) 안학동 • 로산동 일대 고분군 1988 년 4 월 사이 대성구역 안학동과 삼성구역 로산동 일대에 관한 발 굴이 이루어졌다. 안학동에서는 돌칸흙무덤 10 기와 기단돌각담무덤 4 기, 삼성구역 로산동에서는 돌칸흙무덤 6 기를 발굴하였다 .25) 안학동 9 호 무덤(벽화무덤)은 안학동 버스 종점에서 북쪽으로 6oom 지 점인 소문봉과 울지봉 사이의 남쪽 경사면 중간에 있다. 무덤 주위의 고 분 중 2 기가 9 호 무덤과 4km 간격으로 나란히 놓여 있다. 9 호는 부부합 장의 의칸 무덤이다(그림 6-114b). 무덤칸은 지상에 있으며 방향은 정남 향이다. 무덤 안길(묘도 또는 연도)은 동쪽에 완전히 치우쳐 있으며 , 동 쪽벽과 안길 벽은 일직선상에 있다. 안길 바닥은 무덤칸 바닥과 같은 높 이이며 양벽에 5cm 의 턱을 만들어 막음돌이 걸리게 하였다(표 6-4 , 6-5 참조). 무덤칸은 40cm X3 4cm 정도의 막돌로 4 벽을 쌓고 벽면 전체를 회를
표 6-4 안학동 9 호 무덤의 안길 크기 (단위 :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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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다음 벽화를 그렸다. 관대는 바닥에 돌을 여러 곳에 받쳐 놓고 그 위에 길이 233cm, 너비 72cm, 두께 7cm 크기의 판돌을 울려놓고 그 위에 1cm 두께로 회를 발 랐다. 무덤칸 남벽과 북벽 바닥에 너비 24cm, 깊이 29cm 크기의 홈을 파고 배수시설을 하였다. 천장은 3 각평행고임을 하였으며, 남북벽에 2 단과 동 서벽에 3 단의 평행고임을 하고 그 위에 2 단의 3 각고임을 한 후 천장돌을 놓았다. 천장에도 회를 발랐다. 벽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벽화 흔적은 동쪽과 서쪽 맨 아랫단 일부와 관대 일부에 잔존되어 있다. 벽화 는 벽면 전체를 검붉은색으로 칠하고 그립을 그렸다. 흙 속의 벽화조각 중에 구름무늬, 주작의 머리, 격자무늬 등이 있는데, 황색과 검은색, 검 붉은색으로 처리하였으며 사신도 무덤으로 추정된다. 9 호 무덤의 출토 유물은 관못 13 개, 뼈조각뿐이다(그림 6-114 e, f). 7 호 무덤은 대성구역 안학동 김치공장 뒷산, 즉 대성산 기슭에 위치하 고 있다. 7 호의 천장이 붕괴되어 원래 모습을 알 수 없다. 방향은 동서, 무덤 안길은 서쪽으로 놓여 있는 중심 안길이다. 무덤 안길의 길이는 110cm, 너비 70cm 이다. 무덤칸의 동서 길이 200cm, 남북 너비 175cm , 벽의 현재 높이 80cm 이다(그림 6-114a). 무덤칸에 관대는 없다. 유물은 회색 단지 3 점, 관못 3 개가 무덤길과 안칸 접촉부에서 출토되었다(그림 6-114 g).
표 6-5 안학동 9 호 무덤의 무덤칸 크기 (단위 : cm)
단지의 크기는 높이 12cm, 구연부 지름 8.5 c m, 구연 안의 지름 3.4 cm, 몸체의 가장 넓은 부분은 11.8 c m, 밑창 지름 6.3cm, 두께 0.4 c m, 목지름 6cm 이다. 상기한 대로 안학동 7 호 무덤에서는 고구려 전형적 단 지 3 점이 출토되었다(그림 6-1 1 4 h). 기단돌각담무덤은 안학동 김치공장에서 북쪽으로 약 500m 지점에 있 다. 거기에는 20 여 기의 돌각담무덤이 분포되어 있다. 그 중에 4 기만 발 굴하였다. 4 기 중에 무덤 1 기 (1 호)만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1 호 무덤은 남북 길이 850cm, 동서 너비 920cm 의 사각형에 근접된 기단돌각담무덤이다. 무덤곽은 동남향이다. 무덤곽의 크기는 남북 길이 250cm, 동서 너비 100cm 이다(그림 6-1 1 4 d). 무덤곽의 남쪽벽은 126cmX73cm 크기의 돌 하나로 세우고, 서쪽벽은 146cmX65cm 의 돌을 중심에 놓고 그 양쪽 옆에 47cm X3 3cm 되는 돌로 벽을 만들었다. 현재 벽 높이 96cm 이다. 유물은 2 호와 3 호에서만 출토되었다. 2 호에서 관못 2 개, 3 호에서 1 개 가 출토되었다. 로산동에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발굴하였다. 최초 발굴한 것을 1 호라 한 다(그림 6-114c). 로산동 1 호 무덤은 안학동에서 동쪽으로 약 2km 정도 지점에 있다. 그 무덤 주위에 개마무덤과 더불어 수십 기의 고구려 돌칸 흙무덤이 분포되어 있다. 무덤은 파괴가 심하고 안길이 북쪽으로 치우친 소형의 의칸 벽화무덤이다. 무덤 방향은 동쪽이다. 무덤칸의 막음돌은 무덤길 입구로부터 l.8 0 m 안에 잘 가공된 화강암으로 축조되었으며, 현 재 높이 60cm, 두께 8cm, 너비는 85cm 이다. 무덤칸에는 두 개의 관대 가 벽면에서 15-20cm 거리에 나란히 놓여 있다. 북쪽 관대와 남쪽 관대 의 사이는 30cm 이다(표 6-6, 6-7 참조). 무덤 벽에 회를 바른 다음 네 벽에 벽화를 처리하였다. 동쪽의 바닥에 서부터 45cm 위에 날개를 편 주작을 그렸다. 현재 주작의 두 다리와 몸 체의 아랫부분만 잔존한다. 검은색으로 주작의 테두리를 그리고, 몸체는
표 6-6 로산동 1 호 무덤의 관대 크기 (단위 : cm)
황색과 검은자주색으로 처리하였다. 주작의 크기는 높이 132cm, 너비 45cm, 다리의 굵기는 1. 5cm 이다. 북쪽벽에는 무덤칸 바닥에서 22cm 위에 청룡을 그렸다. 다만 선과 점 선만 잔존한다. 서쪽벽에는 무덤칸 바닥에서 30cm 위에 현무를 그렸다. 거북이를 3 번 감은 구렁이만 잔존한다. 백호의 배 아랫부분만 남아 있다. 백호 주위에 구름무늬를 그렸다(그 립 6-115). 색깔은 검은색, 검은자주색, 황색으로 처리하였다. 무덤 벽 면에 사신만 그린 것에 따라서 사신무덤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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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신도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 고분벽화 중 사신도가 그려진 무덤은 모두 30 여 기이다. 사신도 벽화의 변천과정을 도표로 나타내고 있다(표 6-8}. 상기한 표 6-8 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사신도는 인물풍속도보다 늦게 출현하여 인물풍속도와 함께 나타나다가 어느 시기에 독자적 경지에 이 르게 된다. 다만 우리는 3 호 무덤은 초기 봉토석실묘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러므로 초기 벽화에도 사신도가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 사신 〉 은 음행오행설과 연관된 신앙관념의 산물이라고 보고 있다. 죽 〈 좌청룡 〉 과 〈 우백호 〉 는 상서롭지 않은 것을 피하고, 〈주작 〉 〈현무〉는 음
표 6-8 사신도 벽화의 변천 과정
양을 다룬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천문 점성사상과도 결부되어 있다고 본 다. 하늘의 별자리 가운데 28 개 (28 수)를 7 개 씩 나누어 네 방향으로 놓인 별자리들의 모양을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 환상적인 동물로 보고 그 것을 각각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지키는 수호신을 상칭하고 있다고 믿었 다고본다. 사신은 28 수의 개별적인 방위 별자리들의 집결체로 보았다. 사신은 실 제상 5 신으로 되어 있었으며 중앙의 황룡을 그려 놓고 사신으로 나타내 었다. 사신신앙은 동서남북의 네 방위신에 대한 미신사상으로 고대부터 널리 유행하였다. 우산리 3 호 무덤의 사신도는 당시 고구려에 유행된 사 신신앙을 반영한 것으로 보고 있다. 청룡과 백호는 공포와 무적의 화신 으로, 현무는 신비적으로, 주작은 닭, 공작, 극락조 등의 결합체로 나타 났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는 당시 백제와 신라에 영향을 주었다. 그 예로서 공주군 송산리 6 호 무덤과 부여 능산리 무덤을 들고 있다. 고구려 사신도 등급에 대하여 최태선이 간단히 분류를 하였다(표 6-9, 6-10, 6-11) . 26) 사신도 무덤의 등급을 나누는 기준으로 벽화배치 및 벽화의 세련도와 무덤칸 축조기술을 고려하고 있다. 사신도 무덤에서는 안칸의 청룡, 서 쪽벽에 백호, 남쪽벽에 주작, 북쪽벽에 현무를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황룡이 그려져 있는 무덤을 1 등급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황룡은 왕의 상칭으로 보기 때문이다. 고구려 무덤에서 사신이 그려져 있는 4 벽에 둘 러싸인 천장은 곧 내부로서 거기에 황룡이 그려진 것은 왕의 상칭이 뚜 렷하다고보고 있다. 황룡 대신에 용과 범이 그려진 무덤은 왕릉으로 보기는 어렵고, 용이 있고 용 이의에 범이 있는 것은 왕족의 무덤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 용이 없고 해와 달, 연꽃이 있는 무덤은 일반 귀족들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천장에 아무런 그림이 없는 무덤은 귀족의 무덤이지만 해와 달이
그려진 무덤보다도 낮은 신분의 귀족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또 한 무덤축조법의 발전과정과도 기본적으로 일치한다고 보고 있다. 사신 도의 등급표는 다음과 같다.
표 6-9 사신도 무덤의 등급 분류
표 6-| | 인물풍속도 무덤과 인 물 풍속 및 사신도 무덤의 안칸 크기 (단위 : cm)
안칸크기 고구려자로
13 벽화를 통해서 본 고구려 초기의 물질 문화 고구려족은 예맥 계통에 속하는 오래된 부여족의 한 부족으로서 언어 와 모든 것들이 대부분 부여와 같다. 고구려는 기원전 37 년에 건국되어 668 년에 멸망되기까지 700 여 년 간 지속되었다. 고구려족은 이 오래된 세월 속에서 휘황찬란한 고구려 민족문화를 창조하였다. 고구려 민족문 화에 대한 연구는 중국 학자와 의국 학자, 그리고 고고학계에서 지금까 지 대단한 주목을 받아 왔다. 李殿福 27) 은 고구려 민족의 전체 역사 발전 울 3 단계로 나누고 있는데, 첫째는 兩漢 시대의 고구려, 둘째는 魏晉 南 北朝 시대의 고구려, 셋째는 隋唐 시대로 나누고 있다. 양한 시대는 고 구려 초기(전기) 단계이다. 위진 남북조 시대는 고구려 대발전 단계이 다. 수당 시대는 고구려 전성기로부터 패망 시기까지이다. 발견된 고구 려 유적이나 유물로 보면 셋으로 나눈 이 역사 단계의 여러 가지 특칭이 나타난다. 본문에서는 양한 시대의 고구려의 제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 루어 보겠다. 1) 고구려 건국과 초기 강역 고구려는 西漢 말년인 기원전 37 년에 건국되었다. 고구려 건국에 관해 서는 『魏書』,『周書』,『北史』, 『三國史記』,『三國遺事』, 『朝鮮實錄本紀』 및 광개토대왕릉비, 円牟墓志銘 등과 관련된 사서와 비문이 있는데 모두 여러 가지 고구려 건국신화를 기록하고 있다. 그 예로 『魏書』 권 100 에 기록되기를 〈高句麗者 出夫餘 自言先祖朱蒙〉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건 국신화 고사는 각 사서의 기재가 거의 같다. 예로 『論衡』, 『魏통』과 『後 漢睿 東夷傳』 등의 책에는 東明, 죽 朱蒙으로 기록되었다. 유일하게 광
개토대왕릉비의 서문에 서술된 내용은 약간 간략하면서 또한 신화의 색 채가 있다. 만약 揚棄 신화적 색채라면 이러한 내용은 믿을 수 있다. 그 기록 내용은 고구려 제 1 대 국왕은 부여국 왕의 자식이며, 國人의 해침을 피하여 동남쪽으로 도망가던 도중에 큰 강을 만났다. 그 강을 건넌 다음 3 인을 만났고 그들은 주몽을 따라서 忽本(또한 卒本이라 칭함. 비문의 기 록은 〈卒 本西城山上 訖 升 骨城〉 )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 불렀다 한 다. 고고학 조사와 고고학 발굴의 결과에 의하면 海江 중류의 桓仁縣 五女 山山城, 즉 홀승골성은 고구려 최초의 건국 도성이다. 주몽이 멀리서 와 서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수도를 정한 것은 하나의 일정한 기초이다. 이 러한 기초는 海江 일대에 거주하는 토착 부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곳의 토착인들은 부여국의 민족과 동일 족계로서 모두 예맥 계통에 속 하며, 혈연적으로 근접되고 언어도 거의 같다. 바로 이와 같이 주몽이 이곳으로 도망와서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국을 건립할 수 있었다. 고구려의 칭위는 오래 전부터 유래되었다. 『 逸周 書』 권 7 에 다음과 같 이 기록되었다. 〈 北方 臺 , 正東高夷 …… > 孔顧達이 해석하기를 〈高夷, 東北夷高句麗 〉 , 李巡이 『 爾雅 』 에 注하기를 〈九夷, 其三卽高夷〉라고 기록 하였다. 『 後漢 書 東夷傳 』 에 〈 武帝滅朝鮮, 以高句麗爲縣, 使屬玄英賜鼓吹 使 A 〉 이라고 기록되었다. 여기에 高夷者는 죽 고구려이다. 漢이전에 그 이름이 있어 한무제는 玄英郡에 고구려현을 설치하였다. 죽 고구려를 통 치하여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로 인하여 고구려인은 漢 이전에 압록 강 중류 및 潭江 중 • 하류 일대에서 일하고 생활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주몽이 황망히 이곳에 도망왔는데 데리고 온 사람이 소수였다. 그들은 말이 거의 같았고(言語法相同), 혈연적으로 가까운 浦流, 存人, 梁語, 島 思, 蓋馬 등 부락 사람들과 필연적으로 친하게 되었다. 이 부락들은 기 원전 1 세기경에 이미 다섯 개의 커다란 부락연맹으로 형성되었다. 이것
이 곧 消奴部, 絶奴部,順奴部, 潘奴部, 桂婁部이다. 부락연맹의 군사 추장은 처음에 각 부락 내에서 선출되었지만 나중에는 계루부가 독점하 였다. 李賢은 『 후한서 동이전』을 注할 때 五音 B 의 방위에 대하여 명백히 기록하였다. 〈高麗五部;一日內部, 一名黃部, 卽桂婁部也;二日北部, 一 名後部, 卽絶奴部也 ; 三日東部,一名右部, 卽順奴部也 ; 四日南部, 一名 前部, 卽漏奴部也 ; 五日西部, 一名左部, 卽消奴部也. >李 賢의 주에 의해 서 중심부의 거주자를 내부라 칭하는데, 이것은 계루부가 오부의 중심지 였디는 것을 설명한다. 즉 고구려 최초 건국의 도성은 訖升骨城 일대이 며 계루부의 소재 또한 桓仁縣 오녀산성 부근이다. 이에 따르면 북부 즉 절노부는 홀승골성의 북쪽에 있었으며 오늘날 通化縣 일대이다. 순노부 는 동부이며 또한 우부로 칭하였는데, 그곳은 홀승골성의 동쪽으로 오늘 날 集安縣境이다. 관노부는 남부로서 역시 전부라고 칭하였고, 곧 그곳 은 홀승골성의 남쪽으로 오늘날 桓仁縣남부와 寬句縣 북부 일대이다. 소노부는 서부에 있는 곳으로 또한 좌부라 칭하였다. 이곳은 홀승골성의 서쪽으로 오늘날 新濱縣 일대이다. 주몽이 황망히 홀승골성에서 도망와 서 나라를 세웠는데 그곳의 계루부의 지지를 받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렇지 않으면 立國建者 B 의 기초를 세울 수 없었다. 주몽이 계루부의 지지롤 받아 나라를 세운 후 그의 정부를 공고히 하 기 위하여 먼저 북방울 전압시키고 부여의 침범을 방지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立國安邦의 우선 정책이었다. 그래서 『三國史記』 고구려 본기 제 1 기록은 건국 후 2 년(기원전 36) 에 먼저 潭江 상류의 비류국을 정복하고, 그 지역을 다물부로 삼고 비류국왕 송양을 主로 봉하는 내용이다. 건국 후 6 년(기원전 32) 주몽은 鳥伊, 扶芬奴 등을 파견하여 태백산 동남쪽의 存人國울 정벌하여 그 지역을 성읍으로 삼았다. 건국 10 년(기원전 28) 주 몽은 扶尉版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정벌시켜 그 지역을 성읍으로 삼았다. 계속하여 상술한 3 차의 북벌은 북쪽 변방울 공고하게 하여 부여가 추격 할 수 있는 우려를 제거시켰다. 북부 변방이 공고히 되자 제 2 대 왕인 유
리왕이 즉위한 후 서쪽 변방울 안정시키기 시작하였다. 유리왕 11 년 (기 원전 9) 鮮卑롤 정벌하여 속국으로 삼았다. 건국 33 년(서기 14) 유리왕은 鳥伊 摩 등에 2 만 병력으로 梁衍울 공격하게 해서 그 나라를 멸망시켰 다. 또한 북쪽의 漢 의 〈 고구려현 〉 을 공격했다. 제 3 대 대무신왕 9 년(서기 26) 에 서쪽으로 개마를 정벌하여 그 지역을 군현으로 삼아 최초로 서쪽 변방의 경계를 결정하였다. 이 동안에 유리왕 22 년(서기 3) 국도를 홀승 골성으로부터 압록강 서안의 비옥한 대지 集安 通溝 평원으로 옮겨서 國 內와 丸都에 수도를 정하였다. 이것이 후에 고구려가 번영, 발전된 주요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 삼국사기 』 고구려 본기 권 3 에 의하면 서쪽의 변경지롤 정함에 따라서 동쪽으로 충분히 발전할 수 있게 되자 대무신왕 20 년(서기 37) 에 樂浪을 공략하였다. 제 6 대 태조왕 16 년(서기 68) 에 易思王孫 都頭가 나라를 넘 겨 주며 항복하였다. 태조왕 20 년 (서기 72) 貫 那部浦者 達 賈 등을 파견하여 溪那롤 정벌시키고 그 왕을 포로로 잡았다. 태조왕 22 년(서기 74) 桓那部 浦者 薛儒를 파견하여 朱那를 정 복시키고 그 아들을 포로로 잡았다. 시조 주몽으로부터 태조왕 6 대까지 의 통치자들은 거의 1 세기 동안에 오부 및 오부 이의의 여러 소국을 정 복하고 양한 시대의 고구려의 강역을 확장시켰다. 대체로 북쪽으로는 지 금의 輝發河상류까지이고 서쪽으로는 蓋馬大山 동쪽까지 이르며 남쪽으 로 寬句일대까지 이르렀다. 2) 206 년부터 220 년까지 兩漢 시대 고구려국의 일반 개관 고구려는 서한 말 건국 전에 원시 씨족사회 단계에 있었다.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 등 다섯 개의 비교적 큰 부락이 요동의 동쪽으로 천 리가 되는 압록강 중류 일대, 대부분 大山深谷이며 良田이 드문 지역에 살고 있었다. 5 개 부는 이미 군사 추장을 처음에 소노부가
담당하다가 후에 소노부가 점차 약해짐에 따라 계루부로 대치되었다. 서 한 말 주몽의 건국 이후에 점차 오부가 통일되었고 오부 이의의 구역도 원시 씨족사회로부터 노예제 국가로 전입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비 로소 점차 고구려 민족이 형성되었다. 주몽이 건립한 노예제 국가, 고구려 왕국의 정치기구는 국왕 밀에 相 加, 對盧 浦者, 古 8E 大施 主簿, 優습 使者, 舟衣, 先人 등을 두었다. 고구려 왕국의 귀족 통치계급을 〈 大家 〉 라고 칭하였고 하층의 노동계층을 〈 下戶〉라고 불렀다. 나라의 대가는 일하지 않고 노동자 하호가 대신하였 다. 사서상에 〈 國中大家不側作, 坐食者萬餘口, 下戶遠担米 稽 魚鹽供給之〉 라고 기록되었다. 나라 안에는 감옥이 없고 〈 國內不設半獄, 有罪諸加評 識 便殺之, 沒入妻子爲奴牌 〉 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정황은 부여와 대부 분 유사하다. 사서에 기록되기를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으로 〈 言語諸事, 多與夫餘同〉 하고 다만 〈 性 氣 衣服有差 〉 로 되어 있다. 고구려인의 평상복은 布(베), 用(비단) 및 가죽옷이다. 남자는 〈 頭著折 風 形如#, 七人加捕二鳥羽. 賞 者, 其冠日蘇骨, 大口接, 素 皮帶, 黃革 履 〉, 여자는 머리에 市個을 즐겨 쓰고, 몸에는 치마 끝에 단을 댄 긴치 마를 입었다. 타인을 위하여 깨끗이 하는 것을 좋아하고 저녁이면 남녀 귀천을 불문하고 모두 모여 歌舞를 즐겼다. 술을 마시기 좋아하였는데 그들은 술을 빚었을 뿐만 아니라 좋은 술을 간직하는 습속이 있었다. 〈雄拜東一脚〉 〈坐fflj蹴 〉 〈立ff l J反洪 〉 〈行必捕手〉 〈 好路黑 〉 등이다. 혼인이 이미 약속되면 여자 집에서는 큰 집 뒤에 작은 집을 지었는데 그것을 婚 屋이라 불렀다. 저녁이 되면 사위가 처갓집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처갓 집에서 자도록 해줄 것을 요구하면 여자 부모가 그 성의를 보고 그 작은 방에서 자도록 허락한다. 그 방에는 돈과 비단이 준비되어 있다. 자식을 낳아 성장하면 남자는 처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갈 수 있다. 남녀가 결 혼울 하면 곧 옷들을 교환한다. 고구려인들은 후장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금은 재물을 모두 死者와 갇
이 묻었다. 죽 〈 禾 負 石爲封 列種松柏 〉 근래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서 한 시기의 고구려 고분은 대체적으로 적석묘, 방단적석묘, 방단계단 적 석묘 등이다. 묘실은 대부분 방단의 頂部 중앙에 두었다. 즉 높은 곳에 묻기를 원하였다. 고구려인은 귀신을 믿는 습속이 있었는데 10 월 제천을 〈國中大會, 名 日東盟 〉 이라고 하였다. 국내성 동쪽에 거대한 동굴이 있는데 그것을 盤 穴이라고 불렀다. 10 월 국중대회가 보통 隱穴에서 열리는데 그곳에서 隱 神울 영점하여 나라 동쪽에서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國東盤穴 유적이 존재하고 있다. 양한 시대의 고구려 사회생산은 비교적 낮았다. 이유는 경내에 큰 산 과 깊은 계곡이 많았고 좋은 밭이 없었으며, 이로 인하여 〈無大倉庫, 家 家自有小倉, 名之爲祥京 〉 하는 것이 보편적아었다. 이러한 부경식의 작 은 창고는 고구려 후기 고분벽화에 나타난다. 그 양식은 현대 東部山區 농가의 包米樓子와 같이 2 층 건물로서 아래층에는 4 개의 기둥을 세웠다. 상충에 식량을 저장하고 아래층에 농구를 넣어 두었다. 마선구 1 호 벽화 고분 앞 측실에 그려진 건물이 부경식의 작은 창고이다. 종합하면 양한 시대 고구려의 사회형태는 아직 노예사회 단계에 머물 러 있었고, 국내의 계급은 기본적으로 귀족과 노예로 나뉘어 있었다. 왜 냐하면 국내에 〈多大山深谷 人隨面而居少田業, 誰爲不足以自資〉이며 자 연조건의 제한울 받아 고구려인들은 강한 성격을 갖게 되어 역사에서 말 하는 소위 〈其人性凶急 有氣力, 習戰鬪 好冠紗〉로 묘사되어 있다.
3) 고구려와 중국 兩漢 중앙정부의 관계 양한 시대의 고구려와 중앙 漢 왕조의 관계는 우호적 臣屬 관계였으 며, 또한 대립, 마찰된 시기도 있었다. 주몽이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漢 왕조에서 그를 고구려의 왕으로 책봉하였다. 즉 〈 漢時賜鼓 0X1支 人, 常以徒玄萊郡受朝服衣 帳〉 고구려 통치 자들은 국도의 동쪽에 〈 築小城, 置 朝服衣帳 〉 하였다. 이 성을 〈帳 溝樓 〉 라 고 불렀다. 이것에 따르면 양자의 관계는 신속관계이다. 그러나 고구려 인들의 〈習戰鬪 好冠紗 〉 의 습성은 항상 漢 왕조의 통제에 불복하였다. 서한 말년 왕망이 찬탈한 후 내적으로 고압적 통치정책을 강행하고 주변 소수민족에게는 大漢族主義를 실시하여 소수민족의 반항을 유발시켰다. 이 때 북변의 胡人들이 궐기하여 변방울 침범하였다. 왕망이 〈 정좇 高句麗 兵以伐胡 不欲行, 强迫造之, 皆亡出塞爲冠盜 〉 를 준비하였다 . 후에 遼西 大尹 田譯울 파견하여 추격시켰으나 전사당하였다. 그 후 곧 大將 嚴尤 울 파견, 추격하여 대승하였다. 왕망은 대단히 기뻐서 곧 〈更 名 高 句 麗 王 爲下句麗侯〉로 삼았다. 東漢 광무제 때, 건무 8 년 (서기 32) 12 월에 〈 高句麗王 遺 使朝 貢 , 始見 稱王, 卽復其王號〉 다시 왕호를 칭하게 되었다. 건무 23 년(서기 47) 겨 울 고구려가 落大家戴升 등 1 만여 명을 잠식하자 그들은 낙랑에 내속되 기를 원하였다. 건무 25 년 (서기 49) 고구려가 右北平, 漁陽, 上谷, 大原 등을 침범하자 요동태수 蔡形이 항복하였다. 和帝 元興 원년 (105) 봄, 고구려가 군계를 침범하자 9 월에 요동 태수 耿藥가 고구려를 격파하였다. 安帝永初 8 년 (111) 고구려 왕궁에서 조공 사신을 파견하여 현도에 소 속될 것을 요구하였다. 원초 8 년 (118) 여름 6 월, 고구려가 또 현도군을 침범하였다. 건무 원년 (121) 봄 5 월에 유주자사 馮煥이 二郡 태수를 대 동하여 고구려를 토벌하러 왔으나 아기지 못하였다. 4 월, 고구려가 또
요동을 침범하자 요동태수 蔡誤 이 추격하여 왔으나 전멸되었다. 그 해 12 월에 고구려, 마한, 예맥 등이 현도성을 에워싸고 공략할 때 부여왕은 자식과 軍 병력으로 漢 울 지원하였다. 고구려는 조공사신을 파견하였다. 順帝 陽 嘉 元年 (132) 에 현도군에 屯田六部를 설치하였다. 공손도가 요 동을 점거하기 전까지 고구려는 현도군 관할에 있었다. 상술한 내용에 따르면 고구려는 漢 의 관할에 있었으며 中原에 조공하 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여러 차례 서쪽에 대한 공격을 기도하고 언제나 요동을 침범하였다. 종합하면 漢 왕조는 한편으로 〈 以恩信招之 〉 의 방법 울 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력으로 거항 조치를 취하여 고구려를 예속 화시켰다. 4) 206 년부터 220 년까지 兩漢 시대 고구려의 물질 문화 고구려 민족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눈부신 물질문화도 가지고 있었다. 이 민족은 일찍이 東夷 중 가장 강대한 민족이었다. 주 몽이 건국하기 이전에 압록강과 潭江 중류 일대에 오랫동안 살았다. 양 한 시대 고구려 물질문화의 면모를 명백히 하기 위하여 먼저 고구려의 건국 이전의 문화 면모를 이해하여야겠다. 왜냐하면 한 민족의 물질문화 발전사는 반드시 일정한 윤원이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 건국 이전의 문 화 면모에 관하여 국내의의 사학계에서 계속 커다란 관심을 가져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종류의 고고문화가 고구려 건국 이전의 문화에 속 하는가 지적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흔히 통칭하여 고구려 전기 문 화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고구려 初期 문화와 개념상 혼돈될 우려가 있 다. 이에 대하여 우리들은 고구려 문화를 다음과 같이 몇 단계의 역사단 계로 나누어 보겠다. 건국 이전의 문화를 〈高句麗 五部 文化〉로, 건국 후의 兩漢 시기를 〈고구려 전기 문화〉라고 칭하겠다. 魏晉 南北朝 시기
의 고구려 문화는 〈 고구려 중기 문화 〉 라고 칭하고, 隋 唐 시기를 〈 고구려 후기 문화 〉 라고 칭한다. 본문에서는 다만 고구려 5 부 문화와 고구려 초 (전)기 문화에 대해서만 개괄적으로 논술하고, 후기 두 문화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취급하겠다. 고구려 5 부 문화는 본문 제 1 장에서 서술한 고구려 5 부 위치를 李賢이 注한 『後漢書 東夷傳 』 을 근거하여 대체적으로 나누어 보겠다. 고구려 5 부 중의 하나인 계루부는 5 부 중의 중심으로 주몽이 최초로 건국한 홀승 골성 일대로 보고 있다. 李賢이 注한 4 부의 방위는 주몽 건국지의 지리 座標로 보고 있다. 이로 인하여 홀승골성의 위치는 가장 중요한 열쇠라 고 말하고 있다. 고고학 조사와 발굴 결과에 의하여 학계의 일반적 인식은 桓仁縣의 오 녀산산성이 홀승골성으로 알려져 있다. 오녀산산성은 공교롭게도 潭江 중류의 좌안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潭江 중류 일대의 원시문화는 계 루부의 문화유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순노부는 홀승골성 동쪽에 있는데 그 곳은 오늘날 集安縣境嶺前, 즉 압록강 유역이며, 이 지역 내의 前漢 문화 유적은 당연히 순노부의 문화이다. 集安嶺後는 潭江의 右岸에 속한 다. 이 곳은 오녀산산성과 비교적 가깝다. 그래서 당연히 계루부의 활동 구역으로 보아야 한다. 5 부 중의 절노부는 계루부의 북쪽에 있는 것으 로, 죽 潭江 상류이다. 이 일대의 前漢 문화 유적은 바로 철노부의 문화 이다. 관노부는 계루부의 남쪽에 있었다. 죽 潭江 하류 일대이다. 이곳 은 桓仁縣 남반부와 寬句縣의 북반부이다. 이 일대의 前漢 문화 유적은 관노부 문화이다. 소노부는 계루부의 서쪽에 있었다. 이곳은 遼寧省新 賓縣 일대이다. 이 지역의 前漢 문화 유적은 소노부 문화이다. 고구려 5 부의 문화 면모는 이론상으로 보면 공통점이 많고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그러나 각자 그 내부의 특칭을 가지고 있다. 지금부터 우리들 은 고고학적 입장에서 5 부 각각의 문화적 면모를 살펴보자(그립 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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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루부의 문화 면모 潭江 중류 일대에서 발견된 前漢 시대의 문화 유적들은 通化市 金殿鄕 의 王八 n 幸子 유적, 通化縣 高麗木子鄕江沿村 南山 유적과 富爾江과 潭江 이 합류하는 江口鄕, 그리고 集安縣境 荒巖子, 長岡, 東村, 梨村, 南 臺 子, 二道巖子西溝 등 6 곳 유적 , 모두 10 여 곳이 다. 이 10 여 곳 유적의 유물은 대체적으로 같다. 비록 시간상으로 前後로 나누고 있지만 동일 문화 유형에 속한다. 지표채집과 발굴을 통한 유물을 살펴보면, 타제의 허리가 잘룩한 쟁가비(鎬), 날이 좁은 소형 석재 쟁가비, 도끼형 쟁가비 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상당량의 강자갈제 방추차가 있다. 이것은 이 일대의 계루부인들이 원시 생산농업에 종사하면서 물고기잡이를 겸한 것을 설명하여 준다. 근래에 王八!후子 유적에서 마제의 석창(石牙)이 채 집되었고, 남대자 유적에서는 마제 돌도끼, 작은 도끼(石鍊) ' 마연기, 석창(石牙誕), 석촉 및 타제의 石球, 직사각형 環刃 돌칼 등이 발견되었 다. 타제석기가 점차로 마제석기로 대치된 것은 석기도구 제작의 발전을 설명하여 준다. 석구가 대량으로 존재하는 것은 농경에 이용되는 것 의 에 사냥하는 무기로 사용된 것을 설명하여 준다. 상기한 유적 내에는 토 기편이 석기에 비하여 그 수량이 대단히 적다. 태토는 모래가 섞인 거친 것으로 색깔은 갈색, 홍갈색, 혹갈색, 흑색, 회색 등이며 모두 手製이 다. 평저, 圈足, 假圈足 등은 발견되지 않는다. 集安 二道巖子西溝 유적 에서 모래 섞인 홍갈색 토기와 黑陶 중에 석면이 섞인 것도 많았다. 어 느 것은 또한 고운 운모편이 들어 있는 토기 중에는 돌림판을 쓴 것처럼 고운 태토를 가진 것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이 무문이다. 江口村 에서 발굴된 토기편에는 눌러서 그은 평행선무늬가 있었다. 이러한 토기 편은 桓仁 오녀산산성 부근의 上 H 要段에서 출토된 것과 대단히 유사하다. 상기한 곳에서 출토된 토기의 손잡이는 대부분 둥근 뿔耳와 교량형 가로 손잡이가 있었다. 이러한 손잡이의 특징은 集安 고구려 通溝 고분군 초
기(早期) 고분의 부장품 중에도 보이는데, 이것은 그 원류가 오래되었다 는 것을 설명하여 준다. 현재까지 이 구역 내에서 三足器는 발견된 일이 없다. (2) 순노부 문화 면모 集安嶺前 압록강 좌안에 현재까지 단 세 곳의 원시 문화유적이 발견 되었다. 이곳들은 大朱仙溝 유적, 長川과 勝利 유적 등이다. 大朱仙溝에 서 채집된 타제의 쟁가비 (石鎬) 1 점은 납작하며 양옆에 홈이 있다(아허리 형) . 그 밖에 마제 돌도끼와 돌칼도 있었다. 생활용구로서 平底에 배부 른 大口耀이 있는데 구연부 밑에 劃文이 있다. 장천, 승리 두 유적에서 는 마제석기 위주로 되어 있고, 그 중에는 두구멍뭉칼, 돌도끼, 환상석 기, 석촉과 석제 팔찌 등이 있다. 타제석기는 드물다. 토기는 모래 섞인 홍갈색 토기, 회갈색 토기 위주이며, 무문이 주종을 이루고 부분적으로 구연부에 압문을 처리하거나 톱니문, 雙占弦文 등이 시문되어 있으며 〈 혹모양 〉 의 손잡이가 달려 있기도 하다. 대부분 수제이며 기표를 마연하 였고 기벽은 비교적 얇다. 기형으로는 배부른 단지, 구연이 작은 옹기, 사발 등이다. 三足器는 없다. (3) 절노부 문화 면모 근년의 고고학 조사에 의하면 潭江 상류 및 柳河, 海龍, 短南 일대에 前漢의 문화유적이 있다. 토기는 대부분 수제이고 모래가 섞인 거친 것 으로 대단히 연약하며 소성도도 낮고 기벽은 두텁고 표면 색깔은 일정하 지 않으며 색깔은 홍갈색이다. 때로는 회갈색과 혹갈색도 있는데 태토가 고우며 소성도도 약간 높다. 기형으로는 豆, 사발, 단지 등이 있다. 豆 가 많은데 그 특징을 보면 어느 것은 속이 가득 찬 손잡이를 가졌고, 어
느 것은 속이 텅 빈 것으로 낮은 손잡이를 가전 나팔상 굽 있다. 豆는 둥글고 길지 않으며 어느 것은 구연부 쪽에 하나의 작은 꼭지가 있어서 잡도록 되어 있다. 제작방법은 먼저 손잡이(f丙)를 만들고 반 정도 건조 되었을 때에 상하에 둥근 것(加盤)과 足울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 하면 이 질그릇들에서는 그것들이 떨어져 나가 붙인 흔적을 뚜렷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리, 石腕등 소형 토기가 많으며 형제도 변화가 많 다. 대부분 마연된 무문이며 어느 것은 대단히 매끄럽게 마연되었다. 단, 어떤 것은 송곳무늬와 劃文이 있었다. 생산도구는 주로 마제석기이다. 종류는 도끼, 낫 등이며 석재는 頁岩 과 變質砂岩이다. 돌도끼는 종류가 많아서 福體 사다리형 斜刃과 直刃 모두 있다. 그러나 정상이 둥글고 孤刃의 몽둥이형 도끼도 많고 어느 것 은 날 부분이 넓은 것도 있었다. 돌칼은 대부분 직사각형이며, 사다리형 으로 양면을 마연한 구멍 있는 돌칼, 또 양쪽 모서리가 약간 뾰족한 반 월형도 있다. 어떤 유적 중에는 토제의 방추차도 있었다. 삼족기는 없다. (4) 관노부의 문화 면모 최근에 파악된 정황을 간단히 묘사하겠다. 遼寧 寬句縣下露河緖t에서 발견된 유적들은 老地溝 유적, 連江 유적, 太平噴鄕奭心子 유적, 泡沿 유적, 幸福 유적, 古樓鄕粒子 유적 등이다. 이러한 유적 내에서 채집된 타제와 마제석기들은 돌도끼, 돌쟁가비, 양공석도, 석제 방추차, 돌낫, 돌공이, 돌촉, 톱니형 석기 등이다. 토기편은 모래가 섞인 홍도와 혹도 편과 흑갈도편이다. 모래 섞인 홍도 중에는 활석이 섞인 것도 있으며 대 부분 무문이다. 劃文이 있는 것도 있다. 潭江 일대의 문화 면모와 갇다.
(5) 소노부 문화 면모 新濱 일대의 고고학 조사정황을 아직 이해할 수 없으므로 정확히 말할 수 없다. 고구려 초기 문화, 고구려의 서한 말년 건국의 활동지역은 대체로 현 도군 서쪽과 요동군이 인집되어 한대의 선전문화가 일찍이 이 곳으로 전 파되었다. 근래의 통화, 유하, 휘남, 해룡 諸縣의 문화조사에 따르면 소 위 원시 문화유적 내에서 거의 모두 한대의 선전문화가 보인다. 이것은 中原의 선전농업 생산공구가 서한 시대에 이곳에 이미 전입된 것을 설명하여 준다. 이 지역 내의 계루, 순노, 소노, 철노, 관노의 5 대 부족에 대하여 깊은 영향을 끼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생산력의 향 상은 그 시대의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철기가 고구려 五部지구에 전 입할 때 五部人들에게 철기가 석기보다 발달되었다는 인식을 준 것은 의 심할 여지가 없다. 철기가 처음 출현되었을 때에는 석기와 병용되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실용단계에서 점차로 철기가 석기를 대치하 게 되었다. 1949 년 이후에 고구려 중심지구인 集安 일대에서 漢代의 철 제 농구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예를 들면 철제 가래, 철제 낫, 철제 괭이, 철제 작은 도끼, 쇠도끼, 쇠삽 등이다. 철제 가래의 형제는 河北 滿城中山靖王 劉勝夫人 寶縮墓 등에서 출토된 철제 가래의 형제와 완전 일치한다. 또한 철제 괭이, 낫, 삽 등의 형제는 中原의 동일 시기 철제 공구의 형제와는 같다. 1982 년 集安縣 上 • 下活龍村 고구려 고분 발굴시 82 j XM8 에서 출토된 쇠낫, 철제 작은 도끼, 쇠허리띠고리 등은 漢代의 철제품이다. 82j X M20, M8 호 등에서는 환수도가 출토되었다. 그 중의 쇠낫의 형제는 내 몽고 哲里木盟奈憂旗沙巴營子戰國古城 西漢 후기 문화충 내에서 출토된 철제 낫과 완전히 일치한다. 가래, 삽, 괭이, 작은 도끼 등은 땅을 파는 도구이며 낫은 수확용 도구이다. 이것은 양한 시기의 고구려가 각 계절
에 사용된 농경도구를 거의 모두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여 준다. 또한 주몽이 건국한 후에 고구려는 5 부 시대보다 농업생산에 사용된 공 구가 대단히 전보되었다. 만약 건국 전후한 시기를 금석 병용기라고 말 한다면 이때에는 이미 철기시대로 전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철제의 혁 대고리와 무기류의 환수도의 발견은 이 문제를 설명하여 준다. 철기의 유입과 광범위한 사용은 고구려 사회를 원시의 낮은 씨족사회 경제로부터 일약 노예제 사회로 변화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주몽 건국 후에 고구려는 중앙 한 왕조와 관계가 깊어졌다. 발달된 한문화는 고구 려 초기 문화의 발전에 지대한 작용을 하였다. 고구려 제 2 대 유리명왕 22 년(서기 3) 에 국도를 홀승골성에서 국내성(현 集安縣城)으로 옮기고 동시에 위나암성 (현 集安 환도산성)을 구축하였다. 국내성과 환도산성의 넓은 규모는 고구려 초기의 사회생산력이 건국 이 전보다 크게 향상되었음을 보여 준다. 국내성뿐만 아니라 환도성도 모두 돌로 쌓았는데 이에 사용되는 석재는 산에서 채취하였고 이는 철제 도구 없이는 공정이 불가능하였다. 근래 集安縣城에서 북쪽으로 23km 되는 綠水橋 일대에서 고구려 시대의 채석장을 발견하였는데 그곳의 많은 암 석상에 당시에 암석을 채취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혼적은 고구려 초기 사회생산력이 향상되었음을 나타내 준다. 고구려 초기의 생활용구인 토기는 5 부 문화의 고유전통을 계승하고 또 한 한족의 선전적인 물질문화도 흡수한 것이었다. 이 시기의 토기는 태 토에 모래가 섞인 거친 것이 많고 고운 모래의 것은 드물다. 색깔은 대 부분 황갈색, 홍갈색, 회갈색 등 여러 가지이며 소성도는 높고 수제이 다. 기형은 주로 登, 耀, 才不, 토제 창고, 뚜껑 있는 옹기 등이다. 이 시 기의 토기는 아직 5 부 시대의 무문 특칭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문화 의 영향도 엿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뚜껑 있는 돌사발, 토제 창 등이 고운 태토를 가전 회도로서 [!!)弦文울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민족 전형 기물인 네 손잡이 네귀도호가 이때 출현되는데 그것은
계속되어 후기까지 사용된다. 양한 시기의 고구려에 유약토기가 나타나 는데 그 두께는 일치하지 않고 조형이 고졸하다. 양한 시기의 고구려 고분은 潭江 중류와 압록강 중류 일대에 대체적으 로 3 가지 종류를 나타내 주고 있다. 적석묘, 방단적석묘, 방단계단 적석 묘 등이다. 그리고 기타 유형의 고분은 이후에 계속 출현된다. 그러나 초기의 이 3 종 형식은 지속되어 늦게까지 이어져 왔다. 적석묘는 석괴 또는 큰 강자갈로 평지에 사각형으로 기단을 쌓고 상부 에 직사각형의 곽실을 만들고 그 위에 석괴 또는 강자갈로 봉한다. 전체 는 대체적으로 사각형이며 어느 것은 원구형이다. 일반적으로 매장은 서 열에 따라 배열이 이루어지고 행간에 거리가 있다. 종렬 입장에서 보면 어느 고분은 연계되어 일종의 표주박형 (串墓) 형태를 이룬 것도 있다. 방단적석묘도 상술한 적석묘와 기본적으로 같다. 다만 사각 또는 주위 에 다듬은 거석 석괴 또는 직사각형 거석을 방단으로 쌓았다. 곽실은 정 부의 중앙에 있다. 방단계단 적석묘는 2 층에서 5 층까지 불일치한 방단을 쌓은 것이다. 일 반적으로 3 층이 많고, 위로 올라가면서 수축되어 계단형태를 이루었다. 최상충 계단에 곽실을 만들었고 이를 단실과 쌍실로 나누었으며 그 위에 돌을 쌓아봉하였다. 이 3 종 형제의 고분에서 관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단, 곽실 내 에 목탄과 불에 탄 석괴가 발견되는데 이것은 화장한 흔적인 것 같다. 곽실 결구의 입장에서 보면 다만 곽실의 4 관문(무덤틀)이 있고 뚜껑을 덮지 않았으며 쇄석과 강자갈로 封壇하였다. 기록에서 말하는 〈積石爲 封〉 〈有柳無稽〉과 일치한다. 상기한 3 종 유형의 고분 내에서 발견되는 것은 〈明化〉〈半兩〉 〈五妹〉 〈大泉五十〉 〈貨泉〉 등 戰國과 漢代 화폐 등이다. 이것은 고구려의 후장 습속을 반영하는 것이며, 어느 고분에서 발견된 도금 마구와 금제 귀걸 이 등의 기물도 이 풍습을 설명하여 준다.
종합하면 고구려 초기의 문화 면모는 五部 고유의 문화색채를 가졌으 며, 또한 漢문화의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 즉 원래의 기초 위에 의래문 화를 흡수하여 자체 민족 특유의 고구려 초기 문화를 창조하였다. 14 벽화를 통해 본 사회경제 서기 3 년, 고구려는 국내성(현 吉林省 集安縣城)으로 천도한 후 압록 강, 潭江 유역 산천, 강 계곡의 자연을 충분히 이용하여 생산울 발전시 키고 경제를 번영시켰다. 그리고 농업, 어로 경제의 초보를 형성시키고 또한 수공업 전보의 사회, 경제 구조를 이룩하였다. 근래의 고고학 발굴 성과에 따라서 고구려 都城近畿사회생산 수준과 각 경제부분 발전상황 이 노출되었다. 集安 경내 고구려 벽화고분 중의 벽화는 직접 또는 간접 적으로 4 세기에서 6 세기까지 고구려의 농업, 어로와 수공업의 생산방식 및 일반정황을 나타내 주고 있다. 당시는 고구려 사회경제 발전의 중요 한 시기이다. 벽화내용 중 사회경제의 중요 자료를 정리, 연구함에 따라 서 고구려의 사회경제, 생산수준을 이해할 수 있었고 고구려 사회의 성 질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28) 1) 농업 周, 秦 때에 고구려 민족은 潭江, 압록강 유역에서 땅을 파서 집을 짓 고, 어로를 하면서 동시에 농업생산울 시작하였다• 集安 경내에서 고구 려인들의 건국 이전의 생활 주거지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곳에서 대량의 석기, 토기를 발견하였다. 농업 생산도구는 주로 타제 위주의 石
製 쟁가비(鎬), 돌칼, 돌절구, 돌공이 등이다. 다만 東村 유적 한 곳에 서 석제 쟁가비 90 여 점이 채집되었다. 그것들은 대부분 허리가 잘록한 형, 사다리꼴형, 도끼형 등이었다. 근래에 연대가 조금 늦은 고구려 유 적과 고분구에서 그와 같은 석제 쟁가비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고구려가 건국 후에도 상당 기간 그것들을 농구로 사용한 것을 설명하여 준다. 고구려 건국 후 中原 철공구의 유입에 따라 고구려 야철업의 발전에 자국을 주어 철제 농구가 농업생산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한다. 集 安 출토의 철제 농구로서 쟁기(梨鎌), 삽, 낫, 칼 등 10 여 종이 알려져 있다. 그 중 쟁기 1 점은 상당히 커서 인력으로 사용하기에는 어렵다. 각 저총과 무용총의 벽화에서 소가 마차를 끄는 정황은 고구려에서 이미 牛 耕이 사용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생산공구의 개혁은 농업생산을 진 일보 발전시키고 양식 생산량도 제고시켜서 부유한 자들은 양식을 창고 에 저장했다. 마선구 1 호 고분 남측실 남벽에 1 기 四阿頂(네 기둥 위에 건물세움) 의 창고가 있다 . 이 干桐式 (四阿式 건물과 동일) 건축 용마루 위 에 구름이 떠 있는데, 이것은 창고가 높고 양식 저장량이 많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창고 처마 아래에 네 개의 붉은색 기둥이 있으며, 거기에 가로로 나무판을 고정시켜 사다리 형태를 이루었고 그 중간에 두 개의 방패 같은 막이를 쳤다. 그 바로 밀에는 붉은색 기둥 6 개를 세웠다. 그 것은 창고에 저장된 양식의 습기를 방지하기 위함이다(그림 6-117). 현재 集安 일대 농가, 거의 모든 집에 이러한 나무로 만든 창고가 있으며 그 곳에서는 그것을 〈包米樓子 〉 라고 부른다. 고구려에 〈집집마다 창고가 있 었는데 그것을 부경이라고 불렀다(家家自由小倉, 各之爲祥京)〉는 기록은 곧 그러한 건물을 지칭한다. 그러나 벽화 중의 창고는 상당히 크고 높아 서 보통 농가의 작은 농가가 비교가 안 된다. 그 밖에 洞溝 고분군 禹山 下 묘구의 적석묘 내에서도 토제 곡식 저장용기가 출토되었고, 東臺子 유적에서도 토제 곡식 저장용기편이 출토되었다. 벽화 중 그와 같이 크 고 높은 창고 건물은 소수 귀족 소유이며 창고 내의 양식은 下戶에게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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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또한 기록에 고구려 〈나라의 귀족은 농사 짓지 않고 식객이 만여 명에 이르렀다. 하호들이 멀리서 쌀 등의 양식, 물고기, 소금 등을 그들(귀족)에게 갖다 바쳤다(國中大家不伸作, 坐食者萬 餘口, 下戶遠担米稽魚鹽供給之)〉와 일치한다. 각저총, 무용총 묘실 중심벽 에 모두 부부가 연회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벽화에는 가옥, 창방(梁 杭 : 기등 위에 가로질러진 것), 휘장, 남편, 부인, 첩 등의 대좌한 것, 밥 상 위에 각종 음식이 차려진 것 등이 그려져 있다. 남녀 하인들이 서 있 고 때로 주인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있다. 좌측에 연속된 벽화에는 부엌 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보이고 시녀가 음식을 손에 들고 주인에게 갖다 주고 있다. 그것은 귀족들이 坐食하는 장면이다.
2) 어로와 수렵 고구려인들은 대부분 큰 산 계곡(多大山深谷)과 강물이 흐르는 곳에서 생활하여 어로경제가 발달하였다. 따라서 고구려 사회경제 중 어로는 농 업과 같은 수준에 있었다. 하호들은 귀족에게 양식과 동시에 물고기, 소 금 등을 제공하였다. 어로는 농업의 보충이며 또한 왕족, 귀족들의 오락 의 하나였다. 평민 입장에서 말하면, 중요한 것은 경제적 목적이었다. 자신과 귀족을 위하여 야생동물을 사냥해서 의, 식의 필요를 충당시켰다. 太祖大王은 〈 7 년 4 월에 孤岸에 낚시를 가서 붉은 지느러미의 白魚를 잡았다(七年夏四月, 王如孤岸 觀魚 釣得赤꿨 1 臼魚)〉 〈18 년 8 월에 동쪽에서 흰 사슴을 사냥하였다(十八年秋八月, 東猪得臼鹿)〉 〈 55 년 9 월에 質山陽에 가서 붉은색 (자색) 노루를 잡았다(五十五年秋九月, 王猫質山陽 獲紫璋)〉 등의 기록이 있다. 1984 년 集安 고구려 고분 발굴 중 J YM32s3 호에서 철제 낚시바늘 41 점과 토제 어망추 250 여 점이 출토되었다. 그 중 완정 한 것은 167 점이다. 1 기 고구려 고분 내에서 그와 같이 다량의 고기잡이 도구가 출토된 것은 드문 예이다. 묘주인은 어업 생산관리인 것 같다. 같은 어망추가 勝利 유적에서 108 점 출토되고, 集安 鎭後山의 유적과 고 분에서도 여러 점이 출토되었다. 고구려 벽화 중 물고기 그림은 삼실묘 慕井 현무도 오른쪽에 황새가 물고기를 물고 있는(그립 6-118) 것이 보인 다. 수렵 내용의 벽화는 수량이 많다. 集安 벽화고분 중 7 기에 수렵도가 있다 : O 무용총 묘실 북벽 수렵도, ® 삼실묘 제 1 실 남벽 제 2 인 말을 타고 수렵하는 그림, ® 동구 12 호 북실 북벽 산림 내 수렵도, 용도 양 벽 수렵도, @ J YM1041 호 묘실 북벽 수렵도, @ J SM332 호(王字墓) 용 도 양벽 기사 호랑이 사냥도, ® 마선구 1 호묘 북측실 북벽, 동벽 기마 수렵도, ® 장천 1 호묘 전실 북벽 산림 내 수렵도 등이다. 상기한 수렵벽화 중 가장 정교하고 보존이 찰 된 곳은 무용총과 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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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묘의 산림 내 수렵도이다. 무용총은 묘실 북벽의 전벽에 수렵도를 그렸다. 중앙의 산림을 기준으 로 벽화를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왼쪽 아래 두 사람은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쏠 태세롤 갖추고 호랑이 한 마리와 사슴 한 마리를 쫓고 있다. 호 랑이를 쫓는 기사는 말 앞에 사냥개가 한 마리 있다. 그 위에 말을 달리 면서 활을 쏠 태세를 갖춘 기사는 고개를 돌려 도망가는 사슴을 겨냥하 고 있다. 그 가운데 기사는 천천히 가고 있는데 손에 활과 화살을 들고 있으며 허리에는 화살통을 차고 있다. 머리에는 새깃털 모자를 쓰고 있 다. 산림의 오른쪽, 위, 아래에 각각 한 대의 우마차가 있는데, 이것은 사냥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그림 6-119c). 장천 1 호 묘 전실 북벽 아래의 산림 내 수렵도는 대규모 수렵장면을 생동감 있게 보여 주고 있다. 벽화는 중첩된 것, 나무들, 사냥터 등 사 냥하는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사냥터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묘 사하고 있다. 제 1 부분은 오른쪽 부분으로 짐승을 쫓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제 2 부분은 위쪽 오른편으로 몰이하는 사냥꾼, 왼쪽 끝은 큰 나무 부근을 묘사하고 있다. 제 3 부분은 사냥꾼과 몰이꾼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짐승들울 묘사하고 있다. 전체 장면이 숲속 내에서 생동감 있게 사 냥하는 장면이다. 거기에는 29 인의 기사와 도보사냥꾼(몰이꾼), 활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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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를 당기는 장면, 긴 창을 들고 있는 모습, 짐승을 쫓는 매와 개, 사냥 대상을 죽이는 장면 등이 있다. 왼쪽 위 귀퉁이에는 멧돼지를 협공하는 장면, 화살을 맞은 멧돼지가 광분하는 장면, 몰이꾼이 활을 쏠 준비를 하고 있으며 그 앞에 도보몰이꾼이 긴 창으로 멧돼지를 겨누고 있다. 오 른쪽 위 귀퉁이에는 기마사냥꾼이 활을 맞은 사슴을 쫓고 있다. 한 사냥 꾼이 산고개 뒤에 숨어서 쉬고 있는 노루를 몰래 사냥하려고 하는 장면 도 있다. 멀리서 한 사냥꾼의 어깨 위에 사냥매가 앉아 있으며 다른 매 는 꿩울 쫓고 있다. 아랫부분에는 말을 탄 몇 사람의 사냥꾼이 숲속에서 짐승을 쫓고 있다. 왼쪽 기사는 호랑이, 사슴 등을 겨냥하고 있다. 검은 색 곰 한 마리가 나무 구멍 속에서 이 사냥 위기를 벗어나려고 하고 있 다. 集安 고구려 벽화 중의 수렵도는 묘주인의 사냥생활을 실제와 같이 재 현한 것이다. 수렵도를 그린 벽화묘가 集安에서 발견된 벽화묘의 36.8% 가 된다. 이것으로 수렵이 고구려인의 생산 중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 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진귀한 벽화는 고구려 수렵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알려 주고 있다 : ® 고구려 사냥방식은 기사와 도보 2 종 이 있다. ® 수렵방법은 활로 쏘는 것, 참복습격, 2 인 협공, 다수인 몰 이 (포위), 매나 개의 사용 등이다. 장천 1 호 고분 중에는 20 인 이상이 대규모로 사냥하는 장면이 있다. ® 사냥꾼이 사용하는 무기는 활, 긴 창이다. 集安에서 100 여 점의 철촉, 쇠창, 네 이빨무기(四齒器), 환두대 도 등이 출토되었다. 그 중 철촉은 몽둥이형(棒狀), 뱀머리형, 삽형, 부 채형, 창형(又形), 물고기꼬리형, 버드나무잎형, 삼각형, 마름모꼴, 3 翼 형(날개형) 등 20 여 종이다. 동시에 매, 개 등도 중요한 사냥짐승이다. ® 사냥 대상은 호랑이, 곰, 멧돼지, 사슴, 노루, 돈피, 족제비, 토끼, 꿩과 각종 새들이다.
3) 수공업 고구려인들은 건국 전에 석기와 토기를 만들었다. 그들은 자체에 필요 한 것들을 생산하였다. 고구려가 건국된 후 中原과 遼東 등과 빈번한 교 류가 있었다. 그 결과 고구려 수공업은 점차 독립된 업종으로 발전되었 다. 수공업은 농 • 공업 생산 부분에서 독립되어 나왔다. 그리고 城市주 민의 중요한 조직을 이루게 되어 그들을 〈 城民〉이라고 칭하였다. 그 사 람들은 농사, 어로에 종사하는 〈谷民 〉 과 구별되었다. 수공업이 분업화되 면서 생산품이 날로 정교화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는 직접 또는 간접으로 다음과 같이 분업 관계를 보여 주는 것이 나타나 있다. (1) 건축 集安 삼실묘 제 1 실 북벽에는 攻城圓, 우측에는 交戰하는 장사, 좌측에 는 1 기 古城의 높은 석축 담장, 城門과 각루 등이 묘사되었는데 그것은 현존하는 고구려성과 완전 일치한다. 그것은 상당히 이른 시기의 건축물 이다. 건국 후 訖升骨城에 수도를 정하였다. 서기 3 년 10 월에 유리왕이 〈 국내에 천도하여 尉那巖城울 축조하였다(遷都於國內, 築尉那巖城)〉고 하 였는데 이는 현 集安縣城에서 북쪽으로 2.5km 지점의 丸都山城이다. 그 후 국내성 토담을 보수하고 더 나아가 패왕조산성, 關馬山城을 축조하였 다. 吉林 동남쪽, 遼寧 동부에 많은 고구려 산성이 있다. 平地城, 산성 울 막론하고 사각형 또는 칙사각형 석재를 가공하여 축성하였는대 가장 높은 것은 5m 에 달한다. 또한 거기에는 성문, 옹문, 성루, 馬面, 배수 구 등이 설치되었다. 설계, 시공은 높은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국 가 전문가의 책임하에서 이루어졌다. 상기한 古城 중 다수가 보존되어 있다. 특히 국내성과 환도산성은 고구려 고성 건축연구의 모범이 된다. 건축업의 또 다른 주요 방면은 궁전과 주택 건축이다. 벽화내용 중 가
옥은 고분 중에 각저총, 무용총, JY M1041, 통구 12 호, 삼실묘, J YM1368 호, 마선구 1 호 고분, 장천 1 호 고분 등에서 보인다. 이러한 가옥의 대부분은 귀족의 주택이다. 그것들은 실의의 용마루, 실내의 천 장, 치미와 가옥의 창방 위의 一斗三升 두공 등을 그렸다. 그 밖에 정 자, 주방, 마구간 등의 부속건물도 그렸다. 고구려인들은 〈음식을 아껴 서 궁전과 집들을 호화스럽게 치장하였다. 거주하는 곳의 좌우에 큰 집 을 짓고 귀신에게 제사 지내고 또한 하늘과 사직에게도 제를 지냈다(其 俗節食 好治宮室 于所居之左右立大屋, 祭鬼神, 又祀靈星社稷)〉 등의 기록 이 있다. 최근에 발견된 궁전과 제사 유적은 환도산성 내의 궁전 유적과 동대자 제사 유적 등 두 곳이다. 전지는· 고구려왕의 궁전이고 후자는 사 직에 제사 지내던 곳이다. 그것들은 4 세기 말에 지어졌다. 集安縣城과 근교에서 대량의 건축자재가 출토되었는데, 그것은 벽돌, 板瓦, 와당, 주춧돌, 치미 등이다. 그 중 가장 특색 있는 것은 고구려 와당으로 그것 둘은 銘文와당, 연화문와당, 인동문와당, 獸面와당 등 수백 점이다. 그 러한 문양의 복잡성, 소성도가 정제된 와당 등은 고구려 건축의 발전 수 준을 나타내고 있다. 그 밖에 거대한 方段基壇(계단) 石室墓, 封土石室 壁畵墓, 廣開土大王 碑와 각종 비석, 기둥 등 고구려의 모든 독특한 건축은 건축 전문가의 지혜가 모여서 창조되었다. (2) 야금술 아칙까지 集安 일대에서 고구려 야금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종류의 철촉, 정교하고 풍부한 금장식, 화려한 도금 마구의 출토는 고구려가 자체적인 야금술과 금속제조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해 준다. 고구려 야금술은 시작은 늦었지만 발전속도는 대단히 빨랐 다. 특히 금제제작과 도금공예술은 북방 다른 민족의 수준을 능가하였
다. 고구려 벽화 중 장군과 사냥꾼(병사)들이 사용한 각종 무기, 죽 칼, 창, 활과 화살촉, 갑옷, 두구 및 금동제 말장식, 금동제 신발, 청동, 철 제 의 마차 장식 등은 실물과 완전히 같다. 가장 진귀한 것은 오회분 4 호 및 5 호묘 溪井의 株角 위에 그려진 단 철과 마차바퀴를 제조하는 장인이다. 4 호묘의 것이 뚜렷하다. 단철인이 왼쪽에 앉아 있는데 그는 머리를 잡아매고 윗수염이 있으며 노란 옷싶이 달린 갈색의 도포를 입었고, 허리를 졸라매고 짧은 바지를 입었다. 그리 고 네모 난 돌 위에 앉아 오른손의 쇠집게로 붉게 단 첫조각을 쇠모루 위에 놓고 왼손의 마치로 두드리고 있다(그립 6-120), 마차바퀴를 제조하 는 사람은 오른쪽에 있는데 그는 왼쪽의 단철인과 같이 머리를 잡아매었 고 마차바퀴 앞에 서서 왼쪽 손으로 마차바퀴를 잡고 오른손의 마치로 두드리고 있다. 그 마차바퀴는 각저총, 무용총 벽화의 것과 같다. 마차 바퀴의 제조는 마차 생산의 한 부분으로 그 공정이 상당히 복잡하다. 마 차 제조의 벽화는 고구려 수공업 각 부분의 분업이 찰 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고구려 벽화 및 출토 유물에 의하면 야금과 금속제품은 治鐵, 治銅,
연금, 도금술, 무기제조가 포함된다. 그리고 공구제조와 금, 은기 제조
그림 6-120 오회분 4 호묘 조정의 단철도와 바퀴 제작도
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3) 토기제작 각저총, 무용총, 삼실묘 벽화의 부부연회 장면, 장천 1 호 고분 묘주인 과 손님이 원숭이의 유희를 관상하는 장면 등에서 음식이 가득 차려진 그릇들을 볼 수 있다. 그 색깔과 조형을 살펴보면 모두 질그릇이다. 고 구려 벽화 중에 토기를 제작하는 장면은 없다. 그것은 벽화묘의 주인이 모두 귀족이고 그 내용도 귀족생활을 묘사하였기 때문이다. 신분이 낮은 계층이 하는 작업내용을 벽화내용으로 제시될 수 없다. 벽화내용 중에 그려진 바는 없지만 출토된 시유 토기는 登, 바리(鉢), 아궁이 등이다. 고구려의 製陶 역사는 길다. 대체로 거친 모래 섞인 토기로부터 고운 태토의 토기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手製로부터 輪製로 발전하는 과정이 다. 토기도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발전되었고 동시에 각종의 문양이 발달되었다. 저온의 유약 바른 토기 제조기술이 전입되면서 고구 려 제도 공예상에 새로운 기종이 증가되었다. 일상생활의 실용용기 의에 부장을 위한 명기로서 토제 아궁이, 토제 곡식그릇 등이 제작되었다. 토 기 기형의 발전은 질량의 진보뿐만 아니라 제조공예의 향상이 이루어졌 다. 그것은 사회생활의 수요에 따라서 부단히 진보, 발전된 것을 표명하 여 준다. (4) 목제품(木器) 고구려 벽화내용 중에 연회, 집에 기거하는 장면에 모두 밥상 등 목가 구가 그려져 있다. 또한 어느 벽화에는 나무 침상, 마차바퀴, 목제 창방 등 목제품이 보인다. 목공과 목제품 제작이 일상생활에서 대단히 밀접한 관계임을 보여 주고 있다. 1970 년 장천 1 호 고분 내에서 나무관 조각이
발견되었다. 표면에 麻 布의 흔적, 의부에 혹칠 흔적, 그리고 색깔 있는 문양이 있다. 1972 년 장천 2 호 고분 내에서 나무 위패편과 목기편이 발 견되었는데 옻칠이 되어 있었다• 이는 고고학 발굴상 드문 일이다. 상기 한 소수의 목기는 고구려의 목기제조와 옻칠(칠기) 공예를 연구하는 좋 은 자료이다. (5) 방직 集安 고구려 고분으로 이른 시기의 각저총, 무용총으로부터 늦은 시기 의 오회분 4 • 5 호묘에 이르기까지 벽화에 나오는 인물과 복장은 색채가 선명하고 양식이 다양하다. 장천 1 호 전실 북벽 수렵도 내의 사십여 명 은 때로는 긴치마, 때로는 꽃무늬의 저고리, 긴바지, 색깔 있는 여러 가 지 문양 등이 의복에 나타나 있다. 그것은 고구려 방직업의 발달수준을 보여준다. 출토된 토기편상, 목관편상에 헝깊무늬 또는 속옷의 마포무늬 가 있다. 장천 2 호묘 남쪽 관상대 서북 귀퉁이에는 헝깊조각아 출토되었 다. 길이 23cm 로서 실의 짜임새가 대단히 정교하다. 經線에서부터 무늬 룰 놓았다. 진한 황색 헝깊 위에 진한 붉은색과 진한 남색의 문양을 놓 았다. 부식이 심하여 복원은 어렵다. 비단상에 번쩍이는 무엇이 있는데 그 위에 양감한 장식물이다. 북경 고궁박물관의 감정에 따르면 그 비단 조각은 2 重 3 枚의 經錦이며, 經絲는 56 줄로 1cm 의 너비이고, 緯絲는 32 줄 1cm 의 너비다. 즉 經의 지름은 0.2-0 . 3mm 이고 緯의 지름은 0.2 mm 이다. 방직기술은 기본적으로 漢나라 비단 직조기술을 답습한 것으 로보고 있다. 그 밖에 환문총, 왕자묘, 연화묘, 귀갑문, 장천 1 호묘 후실, 장천 2 호 묘의 벽화 등은 비단헝깊의 문양을 완전히 묘사하여 고리무늬(環紋), 王 字무늬, 연꽃무늬, 자라등무늬 (龜甲紋) 등의 도안을 그렸다. 그러한 벽 화의 출현은 고구려 방직품의 도안과 절대적으로 관계되어 있다.
상기한 내용은 벽화내용 중 경제와 관련된 것을 근거로 해서 고구려의 사회, 경제적 발전상황 및 각 분야의 분업상황에 대하여 종합과 추론을 하여 보았다. 그러한 벽화들은 대체적으로 4-5 세기의 작품이다. 지적하여야 할 것은 과거에 고구려 생산수준과 사회경제 발전에 대한 인식 부족, 자료의 빈곤으로 안하여 고구려 사회경제가 낙후되었다고 단 언하였는데 그것은 잘못이었다는 것이다. 사회경제가 잘 조화되어 있었 고 발전수준과 발전속도가 시대에 순응하여 발전되었다. 공구생산에 대 해 살펴보면 고구려 건국 후 얼마 되지 않아 철기 사용이 광범위하게 이 루어져서 농업, 어로, 수공업 분야에 모두 철제 도구를 생산하여 사용하 였다. 대량의 철기 출토가 일찍이 확인되었다. 고구려 사회가 철기시대 에 진입한 것은 그리 늦지 않다. 적어도 광개토대왕 시기 (4 세기 말에서 5 세기 초)이다. 당시 고구려는 동북에서 강대한 국가 중의 하나였다. 북 방민족으로서 고구려인들은 말 타고 활쏘기에 익숙하여 정벌에 힘썼고, 사회조직은 軍政이 합일되었다. 사회생산은 특별히 수공업에 치중하여 무기와 군사용품의 생산에 주력하였다. 대량의 쇠칼, 환두대도, 긴 창, 철촉, 갑옷, 마구 등이 만들어졌다. 고구려의 금제, 은제 제작도 수준급 이었다. 도금공예도 발달되었다. 당시 북방제국 중 앞 대열에 서 있었 다. 그러한 것은 고구려 사회의 경제와 사회성질을 연구하는 데 소홀히 할수없다. 고구려 사회, 경제의 발전은 불균형을 이루었다. 그것은 생산 부문의 불균형이다. 농업생산은 넓은 충적 평원상에서 발전되었고, 기타 지구는 경지면이 적었다. 어로는 자연환경과 조건의 영향을 받았다. 수공업은 도성 왼쪽에 집중되었다. 전체 통치범위 내에서 사회, 경제 발전의 중심 지구는 도성 近畿 일대였다. 그 다음은 사회, 경제 각 부문 사이의 발전 정황이 불균형이었다. 농업에 비록 철제 농기가 사용되고 牛耕이 확산되 었지만 경지면적이 제한되어 발전속도는 자연조건의 제한 때문에 수공업 보다 낙후되었다. 수공업은 고구려 사회, 경제 각 부분에서 시작이 비교
1) 李殿福 「集安高句麗壁盡구꺼菜」, 社會科學集f l j, 4 期, 1980, pp. 120-125. 2) 集安縣文物管理所 • 吉林文物工作隊 「吉林集安洞溝三室墓理記」, 《考古興文物》 第 3 期, 1981, pp. 71-72 . 3) 李殿福 「集安洞溝三室墓壁著綠補正」 《考古興文物》 第 3 期, 1980, pp. 123-126 과 118. 4) 李殿福 「集安洞溝三座壁畫墓」, 《考古》 第 4 期, 1983, pp. 308-314. 5) 王承禮 • 韓淑華 「吉林集安通沿第十二號高句麗壁畫墓」 《考古》 第 2 期, 1964, pp. 67-72 . 6) 吉林省文物工除 • 集安縣文物保管所, 「集安長川 1 號壁畫墓」 《東北考古興歷史》 fl] 刊號, 1982, pp. 154-173, 도판 1-3. 7) 吉林省博物館, 「吉林集安五盛 壇四號和五號墓淸理略記」, 《考古〉〉 第 2 期, 1964, pp. 59-66. 8) 吉林省 文物工作說 「吉林集安長川二號 封土墓發堀紀要」 《考古興文物〉〉 第 1 期, 1983, pp. 22-27. 9) 과학원출판사, 「대동강유역 고분 발굴보고」 《고고학자료집》 제 1 집, 1958, pp.1 7- 24. 10) 과학원출판사, 『안악 제 1 호 및 2 호 발굴보고』, 1960, pp. 1-21 . 11) 박창수, 「평성시 지경동 고구려 무덤 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 4, 1986, pp. 42-48. 12) 과학백과사전출판사, 『우리나라 역사유적』, 1983, pp. 59-61 .
적 늦었다. 그러나 의부에서 발달된 기술과 공예가 부단히 유입되어 수 공업 생산발전의 속도가 대단히 가속되었다. 더욱이 금 • 은제 기물 제 작, 도금 가공과 무기 생산 발전수준이 대단히 빠르고 수준이 높았다. 대 량의 각종 유형의 화살촉, 칼, 창, 금제 장식, 금제 冠飾, 은제 장식, 도금된 마구, 그리고 각종 문양의 와당들이 만들어졌다. 모두 대단히 풍 부하고 특색 있는 제품이었다. 종합하면, 4-6 세기 고구려 사회, 경제의 발전속도는 대단히 빨랐다. 그것은 전체 사회발전과 진보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고구려 벽화의 제시는 겨우 일부분이고 단지 한 부분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
13) 金元龍 『韓國壁 盡 古培』, 一志社, 1980, pp. 93-96. 14) 박진욱, 「덕흥리 벽화무덤의 주인공과 유주의 소속문제에 대하여」, 《 조선고고 연구 》 2, 1992, pp. 15-21 . 15) 정찬영, 「자성군 조아리, 서해리, 법동리, 송암리, 고구려 고분 발굴보고」, 《 고고학자료집 》 제 3 집, 1963, pp. 102-135. 16) 주영한 「약수리 벽화무덤 발굴보고」 《 고고학 자료집 》 제 3 집, 1963, pp. 136- 152. 17) 전주농, 「황해남도 안악군 복사리 벽화무덤」, 《 고고학자료집 》 제 3 집, 1963, pp. 153-161. 18) 주영헌 • 박진욱 • 정찬영, 「고구려무덤벽화의 특성과 그 문화사적 의의」, 《 고고 민속논문집 》 제 6 집, 1975, pp. 1- 1 7. 19) 전주농, 「대동군 팔청리 벽화무덤」 《 고고학자료집 》 제 3 집, 1963, pp. 162-170. 20) 전주농, 「전 동명왕릉 부근 벽화 무덤」, 《 고고학자료집 》 제 3 집 , 1963, pp. 171- 188. 21) 전주농, r 강서군 태성 저수지 내부지대의 고구려 무덤』, 《 고고학자료집 》 제 3 집, 1963, pp 189-205. 22) 리창언, 「동암리 벽화무덤 발굴보고」 , 《 조선고고연구 》 2, 1988, pp. 37- 4 6. 23) 리준결, 「룡흥리 고구려무덤 발굴보고」, 《 조선고고연구 》 1, 1993, pp. 19-24. 24) 리일남, 「운룡리 벽화무덤발굴보고」 《 조선고고연구 》 2, 1986, pp. 37-38. 25) 김사봉 • 최응선, 「안학동 • 로산동 일대의 고구려 무덤 발굴보고」, 《 조선고고연 구》 4, 1988, pp. 40-43. 26) 최태선, 「고구려 사신도 무덤의 등급에 대하여」, 《 조선고고연구 》 3, 1987, pp. 20-24. 27) 李殿福 「兩漢時代的高句麗及其物質文化」, 《 遼海文物學f ll 》 創f l j號, 1986, pp. 58-66. 28) 耿鐵和, 「高句麗壁 畫 中的社會經濟」, 《北方文物》 第 3 期, 1986, pp. 27-32.
제 7 장 토기 토기 출토품이 많지 않아서 토기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지 못하였지만 어느 정도의 기본 연구는 중국 학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북한 학자들 이 분류한 토기의 무늬, 유약 토기 등의 발전과정 그리고 중국의 李殿福 이 제시한 명문와당과 부뚜막 유형을 살펴보겠다. l 토기의 초보 연구 고구려 토기공예의 정황에 대해서는 전문 연구와 보도가 없었다. 그 이유는 고구려 토기의 출토 수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래에 集安 縣 경내에서 상당수의 고구려 토기와 토기편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다수 는 출토지가 명백하다. 그것들은 고구려 고분과 유적에서 출토되었고 일 부가 채집되었다. 이러한 자료는 고구려 토기공예와 사회생활의 연구에 대단히 중요하다.
\ 표 7 기 集安전출기토 고구려 토중기기 통계표 후기
현재 고구려 고분편년에 대하여 비교적 명확한 인식이 되어 있다• 이 것을 기초로 해서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소량의 토기를 고분 유형을 근거로 해서 몇 조로 나누어 보고, 이것을 다시 조마다 토기 유형, 태토 와 形制 방면의 특칭을 분류하여 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채집된 토기를 연계시켜서 고찰하겠다. 상기한 방법에 따라서 고구려 토기를 고구려 고 분편년과 대응되도록 세 조로 나누고 있다. 이 세 조는 고구려 토기공예 의 발전서열과 3 개의 다른 발전단계를 나타내 준다(표 7-1),I) 고구려 토기 중에서 형식이 많이 변화한 것은 登와 단지이다. 호는 5 식으로 나누어진다. I, Il 식은 다만 1 조에서 보인다. m, W 식은 2 조에 서 보이고 패, V 식은 3 조에서 보인다. 단지도 5 식으로 나누어진다. I, rInl ,, wm, 식은V식 1은 조 에3 조서에 서보 이보고인 다I( ,그 림Il , 7-1W, 식7-은2) . 2 조에서 보인다. I, Il,
.,., ..._ .... .,
a b
1) 제 1 조 토기 이것들은 적석묘(階膳積石墓 포함)와 방단적석묘에서 출토된다. 적석묘 는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이른 시기의 고구려 고분 형제이다. 이 고분에 서 청동단검 및 철기가 출토되었는데 이것들은 洛陽燒溝漢墓 출토 철기 와 대단히 유사하다. 이러한 고분 연대의 상한은 고구려 건국 이전이다. 이것의 사용기간도 대단히 길어서 방단적석묘와 병존하였는데 그것은 3 세기 말까지이다. 적석묘와 방단적석묘에서 출토된 토기는 대략 3 세기 이전에 만든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이른 시기의 고구려 토기로 이것을 고구려 전기 토기라고 부른다. 이 시기의 토기는 기본적으로 手製이다. 소성도가 낮고 태토에 모래가 섞인 거친 토기이다. 개별적으로 고운 모래가 섞인 토기도 있지만 고운 태토의 토기는 대단히 드물다. 색조는 기본적으로 황갈색, 홍갈색, 회갈 색 등이다. 器形은 주로 壅(병), 耀(단지), 杯(잔) 등이다.
(1) 盛 5 점 l 식 2 점 : 이것들은 下活검g M8 에서 출토되었다. 고운 태토의 灰福t周 로서 소량의 고운 모래가 섞였다. 구연부가 크고 직립이며 어깨가 좁고 복부가 수직이고 平底이며 무늬가 없다. 1 점은 어깨와 복부 사이에 4 개 의 교량형 손잡이가 달렸다. 다른 1 점은 2 개의 교량형 손잡이가 달렸으 며 크기는 같다. 높이 14.8 c m, 구경 10cm, 복경 12cm, 저경 5 . 8cm 이다 (그림 7-3 a). Il 식 3 점 : 山城下 墓區 M196 에서 출토된 2 점은 모래가 섞인 紅福!刻인 데 廣1]이고, 長類이며 배가 부르고 평저에 무늬가 없다. 1 점은 어깨에 4 개의 교량형의 가로 손잡이가 있다. 높이 25cm, 구경 14cm, 복경 20cm, 저경 6.6cm( 그립 7 - 3b) 이다. 그 의 1 점은 어깨에 2 개 대칭의 교 량형의 가로 손잡이가 달렸고 2 개 대칭의 오색 구리세의 손잡이가 달렸 다. 높이 20.4 c m, 구경 13.2 c m, 복경 16.2cm, 저경 8 .4 cm 이다(그림 7-3c). (2) 단지 11 점 I 식 2 점 : 산성하 묘구 M196 에서 출토된 1 점은 모래가 섞인 紅福陶이 다. 大口에 의반되었고, 배가 약간 부르고, 평저이며 무문이다. 높이 15cm, 구경 9.6cm, 복경 12.1cm, 저경 7cm 이다(그립 7-3 d, 그림 7-4 ) . Il 식 6 점 : 산성하묘구 M195 에서 출토된 1 점의 모래가 섞인 황갈색 토기로 廣口, 배가 부르고 평저아며 무문이다. 높이 20.5 c m, 구경 13. 2cm, 복경 21. 2 cm, 저경 9.5cm 이다(그림 7-3 e, 그립 7-5). 111 식 3 점 : 산성하 묘구 1 기는 붕괴된 적석묘에서 출토된 무문의 모래 가 섞인 炭福陶耀으로 구연부가 파손되고 廣口이며 短頭, 배가 부르고 평저이다. 최대 복경의 偏下部, 眉腹의 접촉 지점에 두 개의 교량형 가 로 손잡이가 달렸다. 높이 21cm, 복경 17.3 c m, 저경 7cm 이다(그립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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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잔~:fi) 1 점 산성하 묘구 M356 에서 출토되었다. 모래가 섞인 홍갈색 토기로서 廣 口, 배가 약간 부르고, 단일 손잡이에 평저이며 무문이다. 높이 12.4 cm, 구경 9.6cm, 복경 10.2cm, 저경 5 . 6cm 이다(그립 7-3 g).
2) 제 2 조 토기 이것들은 方 壇 階桃 積石墓 , 方 壇積石 洞室 벽화묘, 封 土 石室墓 와 封土 石室 벽화묘에서 출토되었다. 그 중 연대가 비교적 늦은 방단적석묘(예 룰 들어 萬 賓 汀 墓 區 Ml078) 에서 출토된 상당수의 柚陶 殘 片도 이 시기에 포함시킨다. 고분 연대는 4 세기 초에서 5 세기 말로 지속시간은 약 200 년 이다. 이 시기의 토기는 고구려 중기에 해당된다. 기본적으로 녹로로 제작되 었으며 약간의 手製가 保持되었다. 소성도가 점점 높아지고 태토는 다수 가 고운 점토로 만들어졌다. 소량의 모래가 섞인 토기도 있다. 색조는 회색, 흑색, 토황색이다. 태토는 경질이다. 이 시기에 저온에서 구운 柚 陶가 출현하는데 태토는 홍갈색으로 소성도가 상당히 낮다. 기형은 査, 단지, 병, 사발, 뚜껑 있는 사발, 시루(ffl:i), 곡식 저장 그릇( 倉 ) , 옹기, 대야 또는 대접(盆), 손잡이 달린 잔( :i' f.), 솥(釜), 아궁이 등이다. (1) 登 13 점 (그림 7-6) III 식 10 점 : 이 중 내의에 다록, 황록색의 유약을 바른 것이 9 점이다. 산성하 묘구 M332 에서 출토된 1 점의 4 개 손잡이가 달린 호는 고운 태토 로 제작되었다. 회색이며 고운 점토로 만들어졌으며 구연부가 의반되고, 둥근 어깨에 배가 부르고 평저이다. 복부에 4 개의 橋狀 가로 손잡이가 달렸고 어깨에 두 줄로 압인한 孤線文이 있다. 높아 30cm, 구경 22. 4cm, 복경 24cm, 저경 12.3cm 이다(그림 7-7 c). IV 식 3 점 : 七星山 묘구 M1196 에서 출토된 1 점은 고운 점토로 만들어 전 토기로 구연부가 의반되고, 배가 부르고 평저이다. 어깨에 두 줄의 弦文이 있고 그 사이에 第點折齒文(빗살무늬)이 시문되었다. 높이 36.7cm, 구경 22cm, 복경 28.3 c m, 저경 13cm 이다(그립 7-7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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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단지 8 점 1 식 2 점 : 칠성산 묘구 M1196 에서 출토된 1 점은 모래가 섞인 토기로서 구연부가 의반되고 배가 약간 부르며 평저, 무늬가 없다. 높이 18cm, 구경 14.a c rn, 복경 15.7 c m, 저경 8cm 이다(그립 7-3 h). 채집된 대구연 단지는 고운 점토로 제작되었으며 회색이다. [ 식 5 점 : 麻 線 溝 묘구 M940 에서 출토된 1 점의 고운 점토로 만든 토 기는 토황색이며 구연부가 의반되고 배가 부르며 평저이다. 어깨에 두 줄의 [!!)현문이 있고 그 사이 에 維刺文이 시문되 었다. 높이 17.5cm, 구 경 13.4 c m, 복경 19.1 c m, 저경 8cm 이다(그립 7-3 i). IV 식 1 점 : 禹山 묘구 Ml815 에서 출토되었다. 고운 점토로 만들어졌 으며 회색이며 저부가 파손되었다. 敏口, 배는 球形에 가깝고 구연부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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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복부까지 3 조의 [!!)현문이 있다. 각 조는 두 줄이다. 殘高 12cm, 구경 7.6cm, 복경 18.9cm 이다(그립 7-3 m). (3) 병 2 점 마선구 묘구 M832 에서 출토된 1 점은 고운 점토로 만들어졌다. 구연부 가 파손되었고 細頭이며 球狀腹이고 평저이며 무문이다. 잔고 18.2cm, 類程 4.6cm, 복경 19cm, 저경 10.8cm 이다(그림 7-3j ). (4) 사발 5 점 이 중 2 점은 고운 점토로 만들어전 灰福陶이며 3 점은 柚陶이다. 모두 삼실묘에서 출토되었다. 직립 구연이며 深腹이다. 平底假圈足하고 구연 부 밀에 두 줄의 I!!]현문이 있다. 大, 小 2 종으로 나누어진다. 큰 사발은 높이 10cm, 구경 21. 4 cm, 저경 13 .2 cm 이며, 작은 사발은 높이 5.6cm, 구경 13cm, 저경 8cm 이다(그립 7-3k, 7 一 8a). (5) 뚜껑 있는 사발 1 점 마선구 묘구 M940 에서 출토되었다. 고운 접토로 만들어졌다. 흑색이 며 球狀이다. 뚜껑에는 꼭지가 있고 주위에는 세 줄의 四현문이 있다. 腕口는 가볍게 수축되었고 深腹이며 복부에 두 줄의 四현문이 있고 평저 의 假圈足이다. 높이 16cm, 구경 18cm, 복경 18.5cm, 저경 12cm 이디 (그림 7-31). 이 토기는 1940 년에 경주 〈호우총〉(제 140 분)에서 출토된 銅製 호우와 같다. 동제 호우의 저부에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했 汗十〉이라고 적혀 있었다. 당시에 이러한 유물을 〈호우〉라고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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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시루(原) 1 점 우산 묘구 M3317 에서 출토되었다. 내의에 황색 유약이 발라졌다. 大 口에 의반되었고 直腹이며 평저이다. 저부에 13 개의 둥근 구멍이 있다 (그 중 2 개가 뚫어지지 않았음). 높이 8.5 c m, 구경 11. 5c m, 복경 11. 0 cm, 저경 4.8cm 이다(그립 7-3 t). (7) 곡식 저장 그릇(倉) 2 점(그림 7-9) 우산 묘구 M2325 에서 출토된 고운 점토로 토기는 회색이며 경질이고 소성도가 높다. 器形은 원통형이다. 뚜껑은 마치 투구처럼 되어 있고 그 위에는 마고狀의 꼭지가 있다. 두구형 꼭지 밀에 대칭의 桃形孔이 있다. 구멍 사이에는 한 줄의 四文이 있고 뚜껑과 같은 것과 일체로 되어 있 다. 하부 簡程은 상당히 크며 無底이다. 높이 92cm, 上經 18cm, 저경 12cm 이다(그립 7-7f ). 박물관에 소장된 또 하나의 陶倉을 가지고 있다. 상부는 파손되었고 하부는 원통형이고 저부는 三獸昆形의 倭足이다.
그림 7-9 저장용 용기(우산 M2325)
(8) 옹기 2 점 우산 묘구 M2325 에서 출토되었다. 고운 점토로서 황토색, 盤 m 삼, 배 가 약간 부르고 4 점의 橋狀橫의 손잡이가 있고 평저이다. 손잡이 위에 하나의 [!!]현문이 있고 상하에 각각 하나의 파도무늬가 있다. 높이 73cm, 구경 47cm, 복경 51cm, 저경 27cm 이다(그립 7-7 a). 이러한 大 型器의 殘部는 東臺子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고운
점토로 만들어졌으며 색조는 회색 또는 황토색이다. 器形은 상당히 크다. (9) 대접(盆) 2 점 우산 묘구 M1815 에서 출토된 1 점은 안팎에 다록색 유약을 발랐다. 입 술 단면이 둥글며 구연이 의반되고 直腹이며 평저이다. 높이 5.9cm, 구 경 26.4 c m, 저경 6cm 이다(그립 7-3 p). (10) 유약 바른 귀 달린 잔(柚耳杯) 1 점 삼실묘에서 출토되었다. 내의에 다록색 유약을 발랐다. 구연은 타원형 이며 손잡이는 板狀이다. 평저에 假圈足이다. 높이 5.7 c m, 구경의 長經 15. 1c m, 短經 13.4 c m, 저경 8.Ocm 이다(그림 7-3 o). (11) 유약 바른 솥(柚陶釜) 우산 묘구 M1s15 에서 출토되었다. 내의에 황록색 유약을 발랐다. 直 頭이며 平口i유이다. 頭部에 두 줄의 [!!)현문이 있으며 어깨에는 세 줄의 [!!)현문이 있다. 眉腹이 접촉되는 부분에 넓이 1.8cm, 두께 0 . 6cm 의 釜 沿이 있다. 小平底이다. 높이는 16.4 c m, 구경 12.4 c m, 복경 24cm, 저 경 8cm 이 다 (그립 7-3 q, 7-8 d) . {12) 아궁이 4 점 이것들을 2 식으로 나누고 있다. 1식 3 점 : 삼실묘 출토의 1 점은 내의에 황록색 유약을 발랐다. 직사 각체로서 위에는 원형 솥 놓는 구멍이 있으며 短形이고 평저이다. 길이
45.6cm, 너바 24cm, 높이 22 .4 cm 이다. 솥 놓는 구멍의 지름은 14.5cm, 아궁이 문 너비 12.4 c m, 높이 9 . 3cm 이다(그림 7-10}. Il 식 1 점 : 마선구 1 호 벽화묘에서 출토되었다. 의부(표면)에 황색 유 약을 발랐다. 직사각체이며 위에는 원형 銀洞(솥 놓는 곳)이 있고 타원형 연동을 가졌다. 몸체 측면에 있는 아궁이 문은 短形이며 저부가 없다. 길이 55cm, 너비 31cm, 높이 16cm, 鎖洞程 20.5 c m, 아궁이 문 너비 17.5cm, 높이 10.7cm 다. 제 2 조 토기가 출토된 방단계제 적석묘와 봉토석실묘 내에서 소량의 姿 器가 출토되었다. 예를 들면 원형 구연의 청자호 1 점이 우산 묘구 M3319 에서 출토되었다. 청록색 유약을 발랐다. 둥근 구연이며 입술상에 두 줄의 I!!)현문이 있고 장경이며 둥근 배를 가졌다. 견부에 두 줄씩 3 道 현문이 시문되었고 평저이다. 높이 24.4 c m, 구경 14.5cm, 복경 21. 8 cm, 저경 14cm 이다(그립 7-7 d). 또 乳白究登 1 점은 우산 묘구 M2208 에서 출토된 것으로 乳白柚를 발
그림 7-10 유약 바른 아궁이 (삼실묘)
랐다. 태토가 상당히 거칠고 경질이며 저부에는 유약을 바르지 않았다. 구연부 및 경부가 파손되었으며 腹部는 球狀이고 견부에는 하나의 대칭 되는 교상 손잡이가 있다. 손잡이 상부에 一周의 [!!]현문이 있다. 殘高 9.B c m, 복경 11. 7 cm, 저경 7 . 3cm 이다(그림 7-3 u). 그 중 둥근 구연의 청자호는 南京中央門外 郭家山 4 호묘 출토의 盤口靑荒形制와 같다. 그 연대는 東晉 전기에 해당한다. 3) 제 3 조 토기 대부분 봉토동실묘 내에서 출토되었다. 이것들은 고구려 후기에 속하 는데 연대는 약 6 세기 이후가 된다. 태토는 대부분 고운 점토로 만들어 졌으며 색조는 회색, 흑색, 황색 등이다. 소성도가 높아 태토가 경질이 며 기본적으로 녹로로 만들어졌다. 소수의 手製도 있다. 기형은 登, 단 지, 대접 (盤), 바리(鉢), 벼루(視), 베개 (杭), 虎子 등이다. (1) 盛 2 점 111 식 1 점 : 마선구 묘구 M117 에서 출토되었다. 고운 점토로 만들어졌 고 황갈색이며 구연이 의반되고, 圓眉하고 배가 부르며 평저이다. 복부 에는 4 개의 교상 손잡이가 있고 어깨에는 두 줄의 I!!]현문과 두 줄의 파 도문이 시문되었다. 높이 26.5cm, 복경 19.2cm, 저경 13cm 이다(그립 7 -3 x). V 식 1 점 : 通溝河口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고운 점토제로 회도이며 녹로제이고 소성도가 상당히 높게 구워져 경질이다. 목이 길고 구연이 큰 나팔형이며 어깨가 넓고 深腹하고 평저이다. 복부 위에는 4 개의 교량 형 손잡이가 있다. 器身 전체를 마연하였고 규칙적인 方格狀暗文이 시문
그림 7-11 III 식 네 귀 달린 호(상실묘)
되었다. 높이 62.5 c m, 구경 32.8 c m, 복경 29.9cm, 저경 18.6cm 이다. 조 형 이 경 쾌 하고 대 단히 아름답다(그림 7-7 n, 7-11) . (2) 단지 23 점 1 식 3 점 : 만보정 묘구 Ml72 에서 출토된 1 점은 고운 점토로 만들어졌 고 회색이며, 구연이 크며 의반되고, 배가 약간 부르고 평저이며 무문이 다. 높이 12.8 c m, 구경 10.5 c m, 복경 11. 3c m, 저경 8cm 이다(그립 7-31). Il 식 13 점 : 마선 묘구 M118 에서 출토된 1 점은 고운 접토제의 토기로 구연부가 의반되고 圓룝이며 球狀腹하고 평저에 무문이다. 높이 15.6 c m,
구경 10.scm, 복경 19.2cm, 저경 9.6cm 이다(그립 7-3v). 111 식 5 점 : 모두 박물관 수집품이다. 氣象 臺 유적에서 발견된 1 점은 고운 점토제의 토기로 혹회색이며 구연부가 의반되고 입술단면은 원형이 며, 목이 짧고, 배가 부르고 평저이다. 복부에는 2 개의 교상 손잡이가 달렸고 복부 이하에는 불규칙한 暗文이 시문되었다. 높이 29.6cm, 구경 14.scm, 복경 28cm, 저경 14 .4 cm 이다(그림 7-7 e). W 식 1 점 : 산성하 묘구 M250 에서 출토되었다. 고운 점토제로 회색이 며 구연부가 안으로 수축되고, 어깨가 넓고, 直腹이고 평저이며 무문이 다. 높이 12.4 c m, 구경 8cm, 眉寬 15.2cm, 저경 9 . 2cm 이다(그립 7-3 w). V 식 1 점 : 수집품이며 고운 점토로 만들어졌고 회색이다. 직립 구연이 고 어깨가 둥글며, 배가 부르고 복부에 4 개 短柱狀의 손잡이가 있으며 평저이다. 뚜껑이 있으며 그것은 倒鉢狀(사발을 거꾸로 놓은 형)이다. 器 어깨에 두 줄의 [!!]현문과 두 줄의 음각한 톱날 파도문이 시문되었으며 뚜껑의 項部와 구연부에는 여섯 줄의 [!!]현문이 있다. 높이 25cm, 뚜껑 높이 7.4 c m, 뚜껑 구경 16.3cm, 구경 13.5cm, 복경 24.2 c m, 저 경 14.5 cm 이 다 (그립 7-7 j) . (3) 소반(盤) 2 점 산성하 묘구 M25o 에서 출토되었다. 고운 점토제이며 회색이다. 2 점 모두 형제와 크기가 갇다. 직립 구연이고, 평저에 무문이다. 높이 2.5 cm, 구경 11. 2 cm, 저경 9cm 이다(그립 7-7 s). (4) 사발 2 점 중기의 바리 형제와 동일하다. 산성하 묘구 M321 에서 출토된 1 점은
고운 점토제로 암홍색이다. 직립 구연이고 , 深腹, 평저, 假圈足이며 구 연부 밀에 두 줄의 [!!)현문이 있다. 높이 8.4 c m, 구경 18.4 c m, 저 경 14cm 이다(그림 7-3 r). 民主六除 유적 출토의 1 점의 밀부분에는 <* *> 의 부호가 음각되 었다 (그림 7-7 k) . (5) 대야(盆) 1 점 ( Il 식) 우산 묘구 M2321 부근에서 출토되었다. 고운 점토제의 회도로 , 구연 이 의반되고 折i유되며, 折眉, 평저이다. 높이 5.5 c m, 구경 26.4 c m, 庸 寬 25.6cm, 저경 19 . 1cm 이다(그립 7-7 h). (6) 아궁이 1 점( I 식) 산성하 묘구 M217 에서 출토되었다. 고운 점토의 회도인데 유약을 바 르지 않았다. 殘長 42.4 c m, 너비 21. 6c m, 높이 2 1. 6cm 이다. (7) 베개 (tt) 1 점 마선 묘구 M117 에서 출토되었다. 고운 점토제의 토황색이다. 사다리 꼴이며 상부에는 원형 杭席가 있다. 길이 22.3-24.5cm, 너비 14.2cm, 높 이 8.3 - lOcm, 깊이 3.1cm 이다(그립 7-7 r). (8) 虎子 2 점 2 식으로 나뉘고 있다. 1 식 1 점 : 우산 묘구 M2321 부근에서 출토되었다. 고운 점토제로 황 색이며 상부에는 마고狀의 꼭지가 있다. 배는 球狀이고 평저이며 어깨에
그립 7-12 I 식 호자(J SM345) 그림 7-13 Il 식 호자(J SM3 4 5)
하나의 물이 나오는 타원형 구멍이 있다. 최대 구경 6.6 c m, 최소 구경 4.9cm, 높이 23.1 c m, 어깨 너비 20.4 c m, 저부 14 . 5cm 이다(그림 7-7 l). Il 식 1 점 : 산성하 묘구 M345 에서 출토되었다. 고운 점토제이며 황토 색이고 舟形이다. 일단에 圓形口가 있고 일단에는 圓維形尾가 있으며, 상부에는 교상 손잡이가 하나 있고 저부가 파손되었다. 殘高 16.4 c m, 길이 24.5cm, 구경 8.l-8 . 7cm 이다(그림 7-7 i, 7 -12, 7-13). (9) 벼루(現) 2 점 벽옹벼루 1 점은 東 臺 子 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고운 점토제이고 황토 색이며 福圓形이다. 環狀 水池이며 중부는 돌기되고 圈足이다. 높이 4cm, 직경 135cm, 水池 깊이는 1cm 이다(그립 7-7 g). 盆式視(도시락형 벼루) 1 점은 기상대 유적에서 출토되었는데 고운 점토 제로 庸圓形이며 中空은 陶盆과 같고 상부 주위에는 沿이 있다. 중부는 약간 배가 부르고 邊緣 가까이 一大圓子 L, 兩小孔 등이 3 각을 이루면서 분포되었고 평저이다. 높이 4.8cm, 상경 11. 1 cm, 저경 9.2cm( 그림 7-7 m, 7-14, 7-15) ,
제 3 조 토기가 출토된 봉토동실묘(봉석과 토석 혼봉의 동실묘 포함)는 과 거에는 고구려 중, 전기의 고분으로 인정되었으나 , 본문에서는 제 3 조 토 기는 고구려 후기로 정한다. 토기 자체의 발전서열을 보면 당연히 고구 려 후기에 해당된다. 최근의 고고학 자료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봉토동 실묘의 연대는 상당히 늦다. 어느 것은 심지어 발해 후기까지 이른다. 예를 들면 산성하 묘구 M365 에서 출토된 1 점의 유약 바론 장경병은 구 연이 의반되고 입술단면은 사각형이며 細長類, 腹이 球狀이고 평저이다. 견부와 복부에는 각각 1 조 4 줄의 [!!]현문이 시문되었고 다갈색 유약이 발 라졌다. 이것은 敦化六頂山 제 1 묘구 M9 에서 출토된 장경병(그립 7-7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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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龍~t* M35 에서 출토된 長類 寬 眉登와 일치하다. 이것들은 발해 의 전형적 유물이다. 그래서 M365 는 당연히 발해시기의 고분에 속한다. 이 밖에 上活龍 M4 에서 출토된 亞字形 銅鏡 殘片은 이러한 고분이 이미 발해 후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상 3 조의 고구려 토기를 종합해 보면 전기에는 호, 단지, 잔이 있 고, 중기에는 호, 단지 , 병, 사발, 뚜껑 있는 사발, 곡식 그릇, 옹기, 대접, 손잡이 달린 잔, 솥, 아궁이가 있으며, 후기에는 호, 단지, 접시, 사발, 대야, 아궁이, 베개, 호자, 벼루 등이 있다. 고구려 전기의 토기 종류는 많지 않다. 기본적으로 호, 단지, 잔 등이 다. 중기의 토기는 점점 복잡해지며 새로운 토기가 출현한다. 예를 들면 병, 바리, 뚜껑 있는 사발, 곡식 그릇, 옹기, 대접, 손잡이 달린 잔, 솔 아궁이 등이다. 공예 방면에서는 낮은 온도에서 구운 유약 바론 토 기가 증가한다. 후기의 토기 중에 낮은 온도로 구운 유약 바른 토기는 드물고 식용의 盛器가 중기와 비교하여 각각 증가하고, 새로운 토기로서 토제 벼루, 베개 등이 출현한다. 이것은 고구려의 토기 생산이 사회생활 의 수요와 발전에 따라서 부단히 변화된 것을 표명하여 준다(그림 7-16). 이 점은 제조 공예의 변화에서 설명되고 있다. 전기의 토기는 기본적으 로 手製이며 태토가 거칠고 器形이 일정하지 않다. 또 굽는 기술이 세련 되지 못하여 소성도가 상당히 낮고 색조가 고르지 못하며 대부분 홍갈색 과 황갈색이고 문양이 없다. 중기의 토기공예는 상당히 발전하는데 상당 수의 토기를 녹로에서 만들며 부분적으로 토기를 먼저 손으로 성형한 · 다 음에 다시 녹로를 서서히 돌려서 수정한 것도 있다. 태토도 모래가 섞인 것에서 고운 태토 위주로 변하고 동시에 간단한 [!!)현문 , 음각된 파도문, 수직선문 등의 문양이 출현한다. 굽는 기술도 상당히 전보하여 소성도가 높고, 기물의 색조도 고르게 된다. 색상은 대부분 회색, 흑색, 토황색이 며, 토기가 경질이고 기형 공정이나 미관아 실용적이다. 저온 柚陶의 출 현은 고구려 製'周 공예의 수준이 이미 상당히 성숙하였음을 표명하여 준
아궁이 E巳 됴閃
다. 후기의 토기는 기본적으로 녹로로 만들고, 높은 온도에서 토기를 구 웠으며, 색조가 안정되고, 태토가 거의 고운 점토이다. 문양은 여전히 1!!1현문, 파도문이며 동시에 마연한 暗文이 출현된다. 생활 실용 기물이 증가하고 기형이 복잡해지는데, 예를 들어 도시락형 벼루, 배형 호자(舟 形虎子) 등은 대단히 아름답고 실용적이다. 3 조 토기 중 공통된 기물은 4 개의 손잡이 달린 호 (Il' 때, 1\ ' 식), 大口 단지( I 식 羅), 배부론 단지 (Il 식 海淵) 등이다. 이것들은 고구려 토기의 전 형적 기물이다. 이 중 大口 단지의 기형 변화는 크지 않고 다만 태토, 제작방법과 굽는 기술 등이 발전된 추세이다. 배부른 단지(鼓腹鏞)의 변 화는 상당히 뚜렷한데, 점차적으로 頭部(목 부위)가 짧아지고, 최대 복 경이 상승하고 기물의 높이와 너비의 비례가 축소된다. 즉, 전체 기물이 倭寬해지는 방향으로 발전된다 . 가장 변화가 많은 것은 4 개 손잡이 달린 호(四耳査)이다. 경부가 부단히 왜소해지면 경부 이상이 바깥쪽으로 반 전된 각도가 부단히 증대된다. 복부는 倭圓에서 배가 부론 것으로 발전 되고 4 개의 손잡이는 어깨 밑으로부터 眉腹이 접촉되는 곳으로 옮겨지거 나 더 내려가서 복부까지 간 것도 있다. 기물의 표면은 무문에서 현문, 파도문, 수직선문으로 발전하고 후기에는 暗文이 출현하였다. 이러한 4 개 손잡이 달린 호는 고구려 고분과 일반 유적 내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 다. 이것은 고구려 사람들의 일상 생활과 풍습, 습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것은 또한 고구려의 독특한 공예전통과 아름·다운 취미를 체득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제 2 조 중에서 상당수의 柚陶器가 출현하였다. 이것들의 태토가 홍색인 것은 일종의 低溫柚에 속한다. 柚色은 대부분 황록색이다. 이것들은 喪 葬用(부장용)의 明器이다. 고구려 실용의 柚陶器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低溫鉛柚陶는 漢代 陶究 공예의 대표적 예이다. 고고학적 발견 유물에 의하면 이러한 자기가 최초로 출현된 곳은 陝西關中地區이다. 이 것은 漢 宣帝 이후부터 關東의 河東 등지에서 상당히 많이 발견되고 東
漢 시기에 이르러 상당히 광범한 지역으로 파급된다. 출토된 정황에 따 르면 柚陶 공예가 고구려에 전입된 것은 束漢 이후이다. 柚勘가 전입되 어 고구려 製陶 공예에서 새로운 양식이 많이 늘어나게 되었다.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토제 아궁이와 곡식 저장 그릇(倉)은 고구려 인들의 생활과 財富에 대한 추구로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兩漢 이래 토제 아궁이와 곡식 그릇을 부장하는 습속이 북방의 먼 곳까지 영 향을 끼친 것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이 밖에 고구려 고분 내에서 晉代 의 盤口靑姿盛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고구려와 중원 사이에 경제적 교 류와 문화적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토기의 분류에 의해서 제 3 조 토기가 출토된 봉토동실묘는 고구려 후기 에 속함이 증명되었고, 어느 것은 심지어 발해 시기까지 해당된 것을 알 수 있다. 봉토동실묘는 集安 고분 중에 3000 기 이상으로 수량이 상당히 많다. 따라서 봉토동실묘 혹은 전체 通溝 고분군을 재인식하고 평가하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2 토기의 무늬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질그릇의 무늬는 약 20 종이다(그림 7-17),2) 시기는 크게 전기 (고구려 초 -3 세기), 중기 (4-5 세기), 후기 (6-7 세기)로 나 뉘고 있다. (1) 누르기법에 의한 무늬 이 방법은 질그릇을 굽기 전에 무늬가 새겨진 도장 같은 것을 가지고 눌러서 무늬를 그려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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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무늬 : 질그릇의 표면에 끝이 뾰족한 도구로 꾹 눌러서 표시를 한 것이다. 이 무늬 출토 정형은 표 7-2 No. 1 - s 과 같다. 사각형무늬 : 질그릇의 바깥면에 사각형의 도드리가 있는 곰보판때기 같은 도구로 눌러서 처리한 것이다. 표 7-2 No. 10, 11. 긋기법에 의한 무늬 : 끝이 뾰족한 도구로 질그릇의 표면을 그어서 그 린것이다. 줄무늬 : 질그릇 표면에 줄을 그어서 그리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수 가 많다 . 표 7-2 No. 12, 16 . 전기의 이른 시기에는 줄무늬 자체만 처리하였고 , 중기에는 줄무늬로 조형성을 나타내었으며, 중기 이후에는 다른 무늬와 결합되어 쓰였는데 어느 경우 줄을 내려 그은 것도 있다. 톱날무늬(거치문) : 몹날모양으로 오르내린 것으로 표 7-2 No. 17-19 이 다. 톱날 무늬는 모든 시기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다. 전기에는 두 줄의 줄무늬 사이에 한 줄, 중기 이후에는 세 줄의 줄무늬 아래 두 줄 사이에 있는 이와 비슷하다. 곱셈기호무늬 : 곱셈기호 ( X ) 가 연속으로 이어졌다. 원래는 사선격자 무늬인데 사선격자 무늬를 부분적으로 자르면 곱셈기호 무늬가 된다. 예 는 표 7-2 No. 20-40 과 갇다. 우산하 41 호분 발굴에서는 한 줄이 사격 (사선격자) 무늬라고 하였으나 실제는 곱셈기호 무늬이다. 전기에는 두 줄 사이에 끼운 것이 한 줄로 되었다면 중기에는 이런 것과 함께 세 개의 줄무늬 사이에 두 줄로 그려 진 것도 있으며 밀에 다른 무늬들이 있다. 물결무늬 (파랑문) : 파도 모양이다. 예는 표 7-2 No. 25-31 과 갇다. 중기에는 줄무늬 혹은 곱셈기호 무늬 등 다론 무늬 아래에 한 줄씩 그린 것이 기본이다. 특수하게 세 줄의 줄무늬 사이에 두 줄 그린 것이 있다. 후기에는 모두 두 줄씩 그린 것인데 한 줄의 줄무늬 아래에 있거나 두 줄의 줄무늬 사이에 위쪽으로 쏠리게 그렸다.
장막늘임무늬(휘장 무늬) : 장막을 늘여 놓은 것처럼 생긴 것으로 고구 려 무덤벽화의 인물풍속 그립 가운데 장막그림이 많다. 예는 표 7-2 No. 32-38 과 같다. 전기의 이른 시기에는 무늬가 넓으며 세 개의 선으로 처리되었고 점차 네 개의 선으로 전환되면서 좁아지는 경향이 있다. 중 기에는 넓은 형의 무늬도 존재한다. 전기의 무늬들은 모두 줄무늬 안에 있으며 중기부터는 다론 그림 밑에 그려졌다. 격자무늬 (方格文) : 질그릇의 표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가로, 세로선을 그어 네모 살창을 그려 놓은 것으로 예는 표 7-2 No. 39 와 같다. 대체 적으로 중기에 유행하였다. 사선격자무늬(斜方格文, 斜格文) : 격자무늬가 삐뚤어져 각 사각형의 모서리가 우로 향해진 것이다. 글자의 의미대로 기울어진 격자무늬로, 그 예는 표 7-2 No . .4 0-42 와 갇다. 이 무늬는 기 원전부터 있었다. 마름무늬 : 마름풀의 열매가 연속 잇따른 것을 표현한 것으로 두 개의 7 일 , 일한 선등이 서로 교차하며 잘룩잘룩하게 된 것이다. 예는 표 7-2 No.43 과 같으며 중기에 출현하였다. 전나무잎무늬 : 전나무잎 모양으로 예는 표 7-2 No. 44 와 같다. 함께 출토된 질그릇에 의하면 중기에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풀잎무늬 : 질그릇 표면에 풀잎 모양의 금을 그은 것으로 예는 표 7-2 No. 45, 46 과 같다. 중기 이후에 출현하였다. 물결퍼짐무늬 : 물 위에 돌멩이를 던질 때 나타나는 무늬로 예는 표 7 -2 No. 47 과 같다. 아지랑이무늬 :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모양으로 T 불 구설한 선들이 내 리 그어전 것이다. 청암토성 안의 고구려 문화충에서 나온 질그릇 조각 에 출현하였다. 동물무늬 : 역사 박물관에 소장된 질그릇 초두의 걸면에는 상호 대칭 되게 짐승이 그려져 있는데 대체로 청룡이나 백호 종류이다. 각종 글자와 부호무늬 : 글자와 부호를 새겨 넣은 것을 무늬로 칭한 것
이다. 글자무늬의 예는 표 7- 2 No. 4s - so 과 갇다. 부호무늬에는 오각별 과 卍자가 있다. 모두 정릉사지에서 출토되었으며 후기의 것이다. (2) 돋힘법에 의한 무늬 이 무늬는 표면보다 두드러진다. 줄무늬 : 표면에 두드러지므로 줄로 묶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예는 No. 51, 52 와 같다. 대체로 3 세기 이전으로 보고 있다. 오각벌무늬 : 撫順 전둔 13 호에서 출토되었으며 두 줄의 줄무늬 사이 에 오각별무늬가 돋쳤다. 무덤은 중기-후기로 본다. 노끈무늬 : 발이 굵은 노끈울 질그릇의 걷면에 묶어 놓은 것처럼 보인 다. 질그릇의 아구리나 벽을 묶은 것처럼 보이게 하여 든든한 감을 주고 있다. 그 예는 표 7-2 No. 53, 54 와 같다. 대체로 중, 후기로 본다. 꽃무늬 : 토포리 무덤에서 출토되었으며 청자병에 모란이 부각된 예가 있다. 동명왕릉과 같은 시기로 추측되며 중기에 해당한다. (3) 뜯어내기법에 의한 무늬 질그릇의 표면을 일정한 도구로 뜯어 내어 만든 것이다. 초산군 연무 리 2 호 무덤에서 출토된 질그릇 조각상에 이런 무늬가 있으며 전기 초에 해당한다. (4) 그림법에 의한 무늬 질그릇의 표면에 색깔을 사용하여 그린 것으로 표 7-2 No. 55, 56 과 같다. 대체로 중기에 해당된다.
표 7-2 고구려 토기의 문양
번호 무늬 시기 유적 질그릇 무늬 위치 무늬 상태 그립
번호 무늬 시기 유적 질그릇 무늬 위치 무늬 상태 그립
번호 무늬 시기 유적 질그릇 무늬 위치 무늬 상태 그립
번호 무늬 시기 유적 질그릇 무늬 위치 무늬 상태 그립
번호 무종늬류 시기 유적 질종그류릇 무늬 위치 무늬 상태 그번립호
고구려 시기 장식 무늬의 양은 많지 않으나 주제는 다양하다. 사회사상이 반영된 무늬는 용(청룡), 백호, 연꽃 등이다. 고구려의 부 각법과 그립법은 고구려 때에 최초로 등장했으며 후기에 이르러서는 도 자기 장식법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고구려 중엽부터 누르기법 에 의한 무늬가 성행하였으며 이것은 신라에 전파되어 후기 신라의 질그 릇상의 인화무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고구려 질그릇 무늬는 4 세 기 중엽부터 6 세기 말까지 무늬가 가장 성행했으며, 상기한 50 여 개의 무늬 중 연대가 확증되지 않은 것을 제의하고 30 여 개는 이 시기의 것이 다. 3 유약 토기 • 유약 바른 질그릇의 변천 유약 질그릇 출토 무덤 ® 만보정 78 호, 돌각담무덤, ((考古》 1977, 2 기 ® 칠성산 96 호, 돌각담무덤, 《考古〉〉 1979, 1 기 ® 문악리 1 호, 돌각담무덤,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자료실 ® 풍청리 7 호, 돌칸흙무덤, 「압록강, 독로강 유역 고구려유적 발굴보 고」 ® 태성리 2 호, 돌칸흙무덤, 「태성리 고분군 발굴보고」 ® 안악 3 호, 돌칸흙무덤 ® 마선구 1 호, 돌칸흙무덤 , 《考古》 1964, 10 기 3) 문악리 1 호 무덤의 감실에서 출토된 4 개의 손잡이가 달리고 구연부가 의반된 유약 바른 단지는 마선구 1 호의 것과 유사하다(그립 7-18 a, b). 이 무덤 연대는 대략 4 세기 중엽에서 말엽으로 集安의 만보정 78 호 무덤
과 98 호 무덤은 문악리 1 호보다 이론 시기로 추정된다. 만보정 78 호는 수혈식이 횡혈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보고 있다. 시기는 3 세기 초 이 전으로 보고 있다. 출토 유물은 유약 바른 질그릇편과 금동제의 화려한 마구 등이다(그립 7-18e, g). 질그릇은 배가 부르고 구연이 의반된 단지, 배가 곧고 구연부가 의반된 대야, 목이 곧은 단지, 부뚜막 모양 등이다. 그 중 단지들은 4 세기 후반기로 편년된 마선구 1 호 무덤이나 5 세기 중엽 으로 편년된 장천 2 호 무덤의 4 개의 손잡이 있는 단지와 같은 유형이나 손잡이가 없고 구연이 의반된 정도가 작아서 그것들보다 이른 시기로 보 고 있다. 단지에 네 개 손잡이 달린 것으로서 초기의 것은 산성하 196 호의 네 개 손잡이 달린 목 긴 병과 함께 출토된 목 긴 단지이다(그림 7-lSc, d). 또한 자강도 시중군 로남리의 집터 출토 손잡이 네 개의 시루와 단지 등 이 있다. 이것들의 시기는 기원전 3-4 세기로 보고 있다. 질그릇의 손잡이는 모두 세로로 붙은 것들이며 대체로 1-2 개아다. 손 잡이 종류는 반원형, 반타원형, 나무그루형과 꼭지형 등이다. 산성하 196 호의 목 긴 단지의 네 개 손잡이는 두 가지 종류가 결합되었다. 산성 하 196 호와 195 호가 연결되어 그 시기는 3 세기 초나 그 이전으로 보고 있다. 만보정 78 호의 유약 바른 단지는 대체로 3 세기 이전으로 보고 있 다. 칠성산 96 호의 연대, 출토 유물은 질그릇편으로 배가 부르고 구연이 의반된 단지 등과 갇은 무덤에서 나온 회백색 단지도 있다(그림 7- lS h). 단지는 만보정 78 호의 것과 감이 네 개의 손잡이가 없으며 구연부의 퍼 짐이 작다. 이른 시기로 보고 있다. 다만 동반된 동제품의 초두 등에 의 해서 3 세기경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칠성산 96 호에서 출토된 질그릇상의 장막늘임 (휘장)무늬, 곱셈기호 무 늬, 톱날무늬 등은 일찍이 사용되어 왔으며 장막늘임무늬만 새로운 것이 다. 죽, 칠성산 96 호는 4 세기 말 이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a b C
고구려의 유약 바론 질그릇은 3-4 세기와 그 이전 시기에도 있었다. 특 히 3 세기 초 이전의 만보정 78 호에서 풍부한 유약 바른 질그릇이 출토되 었다. 유약 바른 질그릇은 이른 시기에 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자성 이 뚜렷하다고 보고 있다. 1) 유약 바른 질그릇의 변천 3 세기 초 이전에 발생된 고구려의 유약 바른 질그릇 제조기술은 4-5 세 기경에는 매우 높은 경지에 도달되었다. 유약 질그릇의 발전과정은 초기 의 발전상태, 질그릇의 종류, 유약 종류 등으로 구분시켜 살펴보고 있 다 .4) 표 7-3 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만보정 78 호에서 3 세기 초 이전의 유약 질그릇이 출토되었다. 유약 질그릇의 기형은 단지, 대야, 부뚜막 등이 다. 단지는 두 종류인데 하나는 구연부가 의반되고 목이 길며 배가 부른 것으로 전체적으로 수직형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체적으로 수평형인 데 구연부가 의반되고 목이 짧고 배가 볼록한 것이다. 당시 부장된 질그릇의 종류는 단지, 대야, 부뚜막 의에 다른 유형의 단지, 병 등이다. 만보정 78 호에서 출토된 유약 질그릇의 종류는 다른 무덤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 3 세기 초 • 중영의 칠성산 98 호에서는 유약 단지가 3 개 출토되었다. 그 중 한 단지의 유약색은 황색, 약간 갈색을 띠며 다론 것은 황록색으로 두텁고 맑은 빛이 난다. 비록 연유약을 사용하였으나 산화물에 따르는 색변화에 대한 일정한 지식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유약 제조기술은 어려워서 찰못하면 균열이 가거나 기포가 생기며 표 면이 뿌영게 된다. 그러나 상기한 단지들에서는 균열 등이 없었다.
표 7-3 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3 세기경의 유약 질그릇은 단지, 대야, 병, 부뚜막 등이고, 4-5 세기경에는 귀잔, 바리, 보시기, 시루, 그릇뚜 깡 도기쟁반 등이 있다. 특히 4 - 5 세기경에는 그 많은 질그릇 등에 유약 울 발라서 사용하였다. 초기 유약 질그릇은 최상급 무덤에서만 출토되었다. 예로 만보정 78 호, 칠성산 96 호 등은 초기의 무덤으로서 누금동기 등이 출토되어 귀족 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후기에 들어와서는 중류급 귀족과 평민도 그것들을 사용하였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태성리 2 호, 마선구 1 호, 원정리 벽화무덤, 우산하 41 호 등의 중류급 무덤에서 유약 질그릇이 출토되었으며, 遼 寧 省 撫順의 전둔 13, 15 호 무덤과 와훈목 2 호 무덤 등은 고구려 중 • 말엽의 평민 무덤으 로 보이는데 여기에서도 유약 질그릇이 출토되었다. 대성산과 장수산성 부근의 유적, 상천군 고현리 토성안 지방 관청터 등에서도 유약 질그릇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중 • 말엽 (5 - 7 세기)경에는 일반 평민들도 유약 질그릇을 널리 사용한 것을 설명해 준다. 고구려에서는 처음에는 저온에서도 가능한 저온 연유에서 좀더 높은 단계인 붕산질 유약으로, 그 다음에는 더 높은 고온 알칼리질 유약으로 발전하였다. 유약의 종류는 주원료에 따라서 연유약, 봉산질 유약, 알칼리질 유약 으로 나누고 있다. 여기서 어떤 금속화물을 첨가하느냐에 따라서 색깔이 달라진다. 따라서 유약 색깔에 의해서 그 종류를 구분하고 있다. 유약의 종류와 착색제에 의한 색변화를 제시하고 있다. 표 7-3 에 의하면 고구려 유약 발생 초기의 유약 질그릇 색깔은 황갈 색, 황록색이거나 이 두 색깔이 고르지 못하게 섞인 것 등이다. 4 세기 중엽부터는 유약색이 녹색, 토황색, 다록색, 황색, 등황색, 갈색 등으로 다양해진다. 이 색깔둘은 연유 단계를 벗어난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4 세기 중엽부터 저온 연유 단계를 벗어나서 더 높은 단
표 7-3 고구려 유약 바론 질그릇의 종류와 색깔(원 리광호)
번호 유적 연대 종류 색깔 출 처
계인 봉산질 유약 또는 알칼리질 유약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고구려에서 食用器로 사용한 유약 질그릇의 색깔은 모두 녹색, 황토 색, 황색 등이다. 이것들은 연유는 아니다. 고구려의 발전된 유약 제조기술을 도입하여 백제는 후기경에, 신라는 후기 단계에 가서 유약을 생산하였다. 이 유약 제조기술이 발해 질그릇 과 고려자기의 시원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유약 질그릇은 5 세기경에는 일반 평민들에게까지 보편화되었다. 4 명문와당 李殿福의 「集安高句麗墓硏究」 5) 글 중에 集安 지구에서 출토된 2 매의 혹회색 권운문 와당이 있는데, 1 점에는 〈 丁巳〉라는 기년명문이 있고 다 른 1 점에는 〈 太寧四年 〉 이라는 기년명문이 적혀 있다. 이 2 매의 와당을 비교, 고증한 바에 의하면 〈 丁巳 〉 는 3319 호 方壇階段 積石墓와 관련된 유물로 연대는 4 세기 중엽이다. 1) 흑회색 권운문 명문와당 혹회색 권운문 명문와당은 지금까지 모두 10 매가 발견되었다. 그 중에 서 2 매는 1949 년 이전에 출토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1949 년 후 출토되었 다. 集安 지구에서 발견된 흑회색 명문와당(명문이 없는 것도 포함)은 문 양, 형제, 명문이 위치한 곳 등을 고려하여 5 식으로 나뉘고 있다. 1 식 4 점 : 완정한 것, 비교적 완정한 것, 1/4 이 잔존된 것 등으로 나 뉘고 있다. 완정한 1 점은 1949 년 전에 일본군 막사에서 출토되었다. 현
재는 集安縣 박물관 서쪽의 주택가이다. 즉 , 과수원 남쪽 유적이다. 바 교적 완정한 1 점은 1963 년경 集安縣 城里(國內城 舊 址)에서 〈 鴨 綠 江 浴池 〉 를 수축하면서 발견되었으며 〈 太寧四年 〉 의 명문와당과 함께 출토되었다. 1/4 만 잔존된 2 점 중 1 점은 勝利 2 除 부근에서 출토되 었고, 다른 1 점은 麻 線中學에서 서북 방향으로 50m 지점에서 출토되었다. 4 매 와당은 모 두 원형이며 고운 태토질의 혹회색이다. 소성도가 높고 와당 중앙에 원 형돌기가 있고 그 돌기 주위에 융기된 원이 둘러처져 있으며 그 원 밖에 대칭되는 8 개의 복선이 있다. 즉 와당을 8 등분으로 나누었는데 각 2 등분 을 1 區로 만들고 각 구내에 1 조의 대칭적 권운문을 처리하였다. 복선 外 端 안의 孤線과 연결되어 있다. 전체 와당면은 8 角星 권운문 도안이 고, 와당의 주연상에 삼각형 折曲의 연속도안을 처리하였으며, 연결된 호선과 주연은 8 개의 반월형 空地롤 만들었다. 그 안에는 反文隸 書 字銘 이 처리되어 있는데, 각 구에 1 자가 있어서 모두 8 자이다. 1949 년 이전 에 출토된 완정된 것은 중앙 원형돌기상에 〈 泰 〉 자가 양각되었으며, 그 연속된 孤線 내에 〈 歲口戌年造瓦啓記 〉 의 명문이 있다(그림 7-19·a ) , 비교 적 완정된 압록강 浴池 출토의 것은 주연이 파손되었지만 잔존된 자는 <…… 月 造記〉 3 자이다. 전문은 당연히 〈 歲 □□ (年)口月 造記 〉 일 것이다 (그립 7-19b), 그 나머지 2 점은 각각 다만 2 자가 남아 있는데 마선중학 에서 출토된 것은 〈 吉好 〉 이며 (그림 7-1 9b), 승리 2 대 출토의 것은 〈 照行 〉 이다(그림 7-19d), I 식 1 점 : I 식 〈泰〉자 〈歲口戌年造瓦啓記 〉 의 명문와당과 감이 출토 된 것으로 과수원 남쪽 유적이다. 이 와당은 원래 1/4 정도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복원이 가능하다(그림 7-19g ). 이것은 고운 태토의 혹회색이며 소성도가 높고 경질이다. 와당 중앙에 하나의 원형돌기가 있고 그 돌기 주위에 융기된 원형선이 있으며 그 위에 4 개의 복선이 있다. 각 조 두 줄은 평행이다. 따라서 와당면은 자연히 4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 구역에는 대칭의 권운문이 있다. 복선 의단이 내부의 孤文과 연결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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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서 전체 와당면은 4 角 星 권운문 도안이다. 호문의 공간 내에 양각한 隸 書 字銘 〈 十谷民 造〉 의 4 자가 있다. 또한 권운문 사이, 원형돌기 가까운 곳에 〈 去 〉 자가 있는데 이 자는 〈 吉 〉 자의 표시이다. 전체 와당은 두 줄의 環 讀 (돌아가면서 읽는 자)의 자를 가지고 있다. 의곽의 각 구역에 4 자가 있을 것이며 아마 4 구역의 모든 자는 16 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 깝게도 한 구역의 4 자만 잔존하였다. 111 식 2 점 : 모두 우산 묘구 3319 호 방단계단 적석묘 부근에서 출토되 었다. 1 점은 1962 년에 출토되었고 1 점은 1983 년에 출토되었다. 2 점 모두 잔편이며 고운 태토의 혹회색이다. 그 문양 형제는 1 식과 같지만 차이 는 있다. 와당 중심에 역시 한 점의 원형돌기가 있고 원형돌기 주위에 한 줄의 융기된 원형선이 있으며 원형선 바깥에 여덟 줄의 복선이 있다. 원형돌기와 이 복선 사이의 공간에 圭形의 돌기가 있다. 복선 가까이에 는 대칭의 권운문이 있다. 복선 의단은 내향의 호선문과 연결되어 있다. 그 복선 의단과 와당변 주연대 내의 융기선과 연결되어 있다. 連孤文과 주연의 반월형 내에는 다시 작은 권운문으로 처리하였다. 그래서 와당면 은 8 角星 권운문 도안이다(그립 7-19c, f), 명문은 주연상에 있다 . 양각 문은 예서이다. 〈丁巳 □□□□ 歲 □□□□□ 萬世太歲在丁巳五月甘四 ……>, 다른 하나는 〈 ……萬歲 □□□□□□□ 時二時興志 □□□……造 〉 이 다. W 식 2 점 : 1 점은 〈太寧四年 〉 기년 와당이다. 그것은 가장 완정한 것 으로 1963 년 集安縣의 〈압록강 浴池〉를 수축할 때 I 식 의 <( 歲) □□ (年) □ 月造記〉의 명문와당과 갇이 출토되었다. 그 밖의 다른 1 점은 1/4 만 잔 존하였으며 1982 년 集安영화관을 수축할 때 발견되었는데, 영화관에서 국내성 옛터의 동남 모서리까지는 동남 방향으로 50m 가 안 된다. 2 점의 와당은 형제, 크기가 완전히 같다. 모두 고운 태토의 혹회색이며 소성도 도 높다. 와당면 중앙에 하나의 원형돌기가 있고 그 바깥에 4 줄의 복선 이 있으며 와당면은 4 등분으로 나누어졌다. 그래서 그것은 4 구역으로 나
누어졌으며 각 구역에 1 조의 대칭의 권운문이 있다. 이 권운문 의에 한 줄의 環讀된 명문이 있는데, 이는 바로 양각된 反體隸響이다 . 돌아가면 서 읽게 되는 그 명문은 〈 太寧四年太歲(在 )D 問月六日己巳造吉保子宜孫 〉 의 20 자로, 명문의 바깥 가장자리에 하나의 좁은 四占삼각형의 연속도안 이 있다(그림 7-19 i). 그 의 다론 한 점은 파손이 심하다. 다만 〈太寧四 年 〉 만 남아 있다. 그 2 매의 와당은 비록 서로 다른 곳에서 출토되었지만 형제, 크기, 명문 등은 같아서 같은 시기, 감은 가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V 식 1 점 : 마선구 千秋墓 남쪽 부근에서 출토되었다. 이 V식 와당은 I 식과 기본적으로 같다. 다만 여덟 줄의 복선이 주연과 직결되어 있는 데, 이것은 內孤線이 직선으로 변형된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반월형 의 공간이 없다. V 식의 것이 상기한 4 식과 다른 것은 명문이 없다는 것 이다(그립 7-19h). 죽 상기한 5 식 중 4 식에는 모두 명문이 있는데 유일하게 V 식에만 없다. 2) 명문에 대한 인식 탁본에 나타난 I 식 〈泰〉자 권운문 와당은, 田村은 『朝鮮古文化綜뿔 』 권 4 에 集安 출토의 그 2 매 혹회색 명문와당을 참고하였는데, 그 중앙 원 형돌기상의 양각 명문 〈泰〉자가 판독된다. 〈歲口戌年造瓦敗記〉도 정확히 탁본하면 〈歲戊戌年造瓦所記〉가 된다. 〈戊〉자는 단지 〈刀〉자만 보인다. 干支紀年 〈戌〉자는 그 아래에 甲戌, 丙戌,戊戌, 庚戌, 壬戌 등이 있다. 잔존된 자획을 보면 〈戊〉 또는 〈丙〉자의 가능성이 있다. 만약 〈丙〉자로 보면 약자의 보충이 되나 다른 자에 비교하면 약간 넓고 두텁다. 〈戊〉자 로 보면 글자의 상하 너비가 같음으로 〈戊〉자로 인정된다. 그 의 〈敗〉자 는 당연히 〈啓〉字이다. 古時에는 敗로 통하였다. 그래서 명문의 해석은
〈歲戊戌年造瓦啓記 〉 8 자가 합리적이다. 1 식에 속하는 麻線溝 中學 출토의 것은 〈 8 얗 〉 2 자가 잔존되었다. 이 2 자는 〈 吉好 〉 2 자의 反文隸 睿 이 다.
잘못이다. 태령 3 년은 325 년으로 고구려 제 15 대 미천왕 26 년에 해당된 다. 이로써 그 와당은 〈 太 寧 三年(左) □ r.r ., 月六日已巳造吉保子宜孫 〉 의 명 문이다. 1 식 의 <( 歲 ) □□ (年) 0 月 造記 〉 의 권운문 와당은 〈 太寧三年 〉 의 와당과 같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그 연대도 동시기이거나 그 부근이다. III 식 2 점은 모두 3319 호 방단계단 적석묘 부근에서 출토된 것으로 형 제가 완전히 일치한다. 그 2 점은 당연히 동시기에 속한다. 그것들의 문 양 형제는 기년 와당과 기본적으로 같다. 3 자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응당히 東晉 시기에 속한다. 晉과 東晉 시기에 〈 丁巳 〉 의 紀年은 3 곳이 있다. 하나는 晉惠帝 元康 7 년 (297) 이고 두번째는 晉穆帝 昇平 元年 (357) 이다. 세번째는 晉安帝 義熙 10 년 (417) 이다. 297, 357, 417 년의 절대연 대 중에서 357 년이 가장 합당하다. 〈 丁巳 〉 기년 와당은 〈 太寧三年〉 와당 의 형제를 모방하였으며 양자는 시기적으로 그리 멀지 않다. 그 밖의 가 장 유력한 증거는 근래에 3319 호 방단계단 적석묘에서 출토된 푸른 유약 호이다. 이 호와 南京 六朝故都 일대에서 출토된 2 점의 푸른 유약 호는 같다. 魏正瑾은 그 고분의 결구, 출토된 토기, 청동기 및 紀年 벽돌을 근거로 해서 제 2 점 푸른 유약 호는 東晉 시기(東晉立國에서 穆昇平 이전까 지) , 죽 317-357 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297, 357, 417 년 3 개의 절대 연대 중 357 년이 가장 적 합하다. 1 식의 〈 泰 〉 자 권운문은 〈歲(戌)年造瓦敗記〉의 명문와당이다. 陳垣 「二 十史朔間表」에 의하여 晉과 東晉 시기에 戊戌年이 3 번 있었다. 하나는 晉武帝 咸寧 4 년 (278) 이고, 두번째는 晉成帝 咸康 4 년 (338) 이며, 세번째 는 晉安帝 隆安 2 년 (398) 이다. 273 년, 338 년, 398 년 3 개 연대 중 338 년, 죽 晉成帝 威康 4 년이 적합하다고 보고 있다. 그 이유는 〈泰〉자 권운문 의 〈 歲戊戌年造瓦敗記〉 명문와당 형제와 〈太寧三年〉 와당은 갇이 출토된 다른 1 점의 〈 (歲) □□ (年)口月造記〉와 와당 형제, 문양이 같기 때문이 다. 태령 3 년은 325 년이며 이 325 년과 가까운 것은 338 년이다. 이로 인
하여 338 년은 죽 고구려 고국원왕 8 년이라고 볼 수 있다. n 식의 〈十谷民造 〉 와당은 1 식의 〈 泰 〉 자 권운문의 〈 歲(戊)戌年造瓦敗 記 〉 명문와당과 같이 출토되었다. 양자는 동시기이거나 아니면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 않는다. 현재 발견된 5 종 형제의 권운문 와당의 편년은 W 식 태령 연호 와당이 가장 빠른 325 년이고, 1 식, n 식과 V 식 와당은 다음인 338 년이며, ll1 식 은 가장 늦은 357 년이다. 문양의 입장에서 보면 간단한 것으로부터 복잡 한 것으로 발전하였다. 4) 권운문 와당과 관련된 유적, 유물의 연대 Ill 식 〈丁巳〉 기년와당의 절대연대를 357 년으로 정하였다. 즉, 고구려 16 대 고국원왕 27 년이다. 따라서 와당과 관련된 3319 호 방단계단 적석묘 의 연대는 357 년 또는 357 년 이후이다. 李殿福은 방단계단 적석묘의 연 대를 4 세기 중엽으로 보고 있다. 3319 호 방단적석묘 앞에서 좌우 양쪽으로 9m 못 되는 곳에 각각 하나 씩 다듬은 직사각 巨石이 가로 누워 있다. 좌측 전방에 있는 돌 위에 양 각한 半身人物畵像이 있는데, 그 사람은 머리에 帳冠울 쓰고 가슴을 노 출시켰고 두 손을 허리에 교차시키고 있다. 조각한 기술이 유려하고 풍 격은 고졸하다. 이 畵像石刻이 현재까지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 화상석각 이다. 그것은 3319 호 고분의 좌측 전방에 있으며 그것과 대칭적으로 오 른쪽 앞쪽에 하나의 거석이 엎어져 있으나 화상을 조각한 흔적은 없다. 2 개의 거석이 놓여전 위치에 따르면 그것들은 그 무덤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그 석각화상의 절대연대도 그 무덤과 동시기인 晉穆帝 시기, 죽 고구려 고국원왕 시기의 유물로 보고 있다. 1 식에서 〈泰〉자의 〈歲(戊)戌年造瓦敗記〉와 〈十谷民造〉의 2 매 와당은
모두 과수원 남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그 유적 내에서 대형 柱礎石이 발 견되었고 1949 년 이후에는 漢代의 白玉制 귀걷이가 발견되었다. 이 옥석 제는 新疆과 閣玉制로 만든 것이다. 이 밖에도 긴 슴베의 도금 동촉, 도 금 동제 뚜껑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에서 남쪽으로 국내성의 동북 모서 리까지는 300m 가 못 되며 북쪽으로는 우산 고분군 3319 호 방단계단 적 석묘가 대단히 근접해 있다. 〈泰〉字의 〈歲戊戌年造瓦敗記〉의 권운문과 〈十谷民造〉의 명문 와당에 의하면 이 유적은 고국원왕 시기보다 늦지 않 다. 현재 集安 지구에서 알려진 혹회색 권운문 와당은 7 곳에서 발견되었 다. 첫째는 3319 호 방단계단 적석묘, 둘째는 縣박물관 서쪽 과수원 남 유적, 셋째는 集安縣 성내 욕지 유적, 넷째는 영화관 유적, 다섯째는 마 선구, 여섯째는 천추묘 남쪽, 일곱째는 승리 2 대 등이다. 이미 조사된 바 에 의하면 고구려 능묘상에서 발견된 벽돌과 기와는 모두 회색이고 거주 지에서 출토된 것은 붉은 기와이다. 와당의 문양은 대부분 연화문, 인동 문, 獸面文 등이다. 특이한 현상은 상기한 7 곳에서 출토된 와당은 대부 분 혹회색이며 문양은 권운문이다. 그것은 건축 유적의 것들과 차이가 있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於所居之左右立大屋, 祭鬼神, 又祀靈星 社稷〉의 기록은 상기한 몇 곳이 靈星과 社稷에 제사 지내던 곳일 가능성 도보여 준다. 5) 흑회색 권운문 명문와당은 중원 문화의 영향 혹회색 권운문 명문와당은 모두 中原 왕조의 연호와 漢人이 사용해 온 간지기년을 쓰고 있다. 그것은 고구려왕의 연호가 아니다. 이것은 이미 발견된 고구려 와당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이다. 그리고 문양, 형제도 이 미 발견된 고구려 와당과 완연히 다르다. 기존에 발견된 고구려 와당 문
양은 연화문 , 인동문, 짐승얼굴무늬 등이며 권운문은 보이지 않았다. 그 리고 연화문, 인동문, 침승얼굴무늬는 대부분 붉은색이다. 태토를 보면 혹회색 권운문 명문와당은 소성도가 상당히 낮고 연질이다. 장군총 등 고분에서 발견된 회색의 연화문 와당은 대부분 가벼운 회색이지만 권운 문 명문와당은 혹회색이다. 또한 발견된 고구려 연화문, 인동문, 짐승얼 굴무늬 등 와당의 주연대는 일반적으로 와당면 자체보다 높으나 혹회색 권운문 명문와당은 그 주연대와 거의 평등한 높이로 그것 역시 차이가 있다. 주연대와 와당면의 평동은 중원 문화의 독특한 풍격이다. 또한 혹 회색 권운문 와당의 문양선은 대단히 가늘며 배치가 풍만하고 대칭적인 데 이것도 중원 문화의 영향이다. 고구려 와당은 대부분 半浮影式이며 제작이 거칠고 그 풍격이 고졸하다. 혹회색 권운문 명문와당의 형제의 특칭은 농후하게 중원 문화의 영향 울 받았다. 권운문 와당은 중원에서는 일찍이 戰國, 漢代에 성행되었으 며, 魏 • 晉 시대에도 그러한 것들이 보존되었다. 集安 지구 출토의 그러 한 권운문 와당과 魏 • 晉 시기 중원 권운문 와당과는 대단히 가깝다. 상기한 내용의 방증 자료로서 김육불 편집의 『 東北古印釣況 』 에 集安 환도성 고지에서 출토된 1 개의 네모난 청동제 도장을 제시하고 있다. 도 장의 내용은 〈晉高句麗率善信長〉이다. 또한 堅中溶의 『 集古官印考 證』 의 책 권 20 에서 3 개의 네모난 官印울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晉 高句 麗 率善 邑長〉, 두번째는 〈晉高句麗李善任長〉, 세번째는 〈 晉高句麗率善悟長 〉 이 다. 상기한 네 개의 청동제 도장은 두 개는 〈率善信長 〉 이고 〈邑長 〉 , <1t 長〉이 각각 하나씩이다. 네 개의 官~p은 고구려와 晉王朝와의 긴밀한 관 계를 설명하고 있다. 도장 내용 중 〈 率善 〉 , 〈邑長 〉 , 〈 1 t長 〉 과 〈 信長〉 등 은 관직의 長으로 해석하고 있다. 〈十谷民造〉의 명문 와당은 혹회색 명문와당인데 그것은 〈谷民〉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谷民〉 앞의 〈十〉자는 지명 또는 數 量 詞로 보 고 있다. 여기에 대한 방증 자료로서 告牟墓志 중 43 행에 〈城民, 谷民〉
의 칭위가 있으며 그것은 고구려가 5 세기 이후에 城鎭에 거주하는 사람 과 〈隨 山谷以爲居 〉 의 시골사람(鄕下人)으로 구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城鎭居民울 〈 城民 〉 , 山谷에 거주하는 사람을 통칭하여 〈 谷民 〉 이 라고 부르고 있다. 〈城民〉은 현재의 시만이며 〈 谷民〉은 현재의 농민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 시대의 〈 谷民 〉 은 농사일을 하는 농민일 뿐만 아니라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포함된다. 따라서 〈 谷民〉에는 농사에 종사하 는 〈 下戶〉도 포함되고 또한 와당을 만드는 수공업인도 포함된다고 보고 있다. 5 부뚜막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 부뚜막 자료는 다음과 같다(표 7-4). 상기한 도표의 부뚜막 중에서 특칭적인 것을 몇 개 살펴보기로 한다. 용호동 1 호 무덤에서 출토된 부뚜막의 길이는 66.7 c m, 높이는 28.1cm 로 칙사각형으로 철제이다. 아궁이는 밑면이 없는 〈 Il 〉자형으로 우측 끝 에 있으며, 그 위에 가마를 놓는 둥근 구멍이 있다. 아궁이 틀은 3 중으 로 되었으며 틀 위에는 양쪽에 각각 3 개씩의 직선무늬와 구부러진 무늬 가 있다. 그리고 아궁이의 좌측 끝에는 경사지게 구부러진 긴 굴뚝이 있 다. 용호동 1 호 무덤 부뚜막의 특칭은 아궁이와 굴뚝이 〈기〉자 형으로 꺾 여서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만보정 벽화무덤에도 부뚜막이 있다. 길이 100cm, 너비 32-36cm, 높 이 19cm 이다. 아궁이는 부뚜막의 우측 한쪽에 긴 직사각형으로 가로 놓 여 있고, 그 테두리는 2 중이다. 명기로서 나온 부뚜막도 있다. 명기로서는 마선구 1 호 무덤, 장천 2 호
표 7-4 고구려의 부뚜막
무덤, 삼실묘 등에서 출토되었다. 마선구 1 호분의 부뚜막은 길이 55cm, 너비 31cm, 높이 16cm 의 직사각형이다. 아궁이는 좌측 끝에 있고 아궁 이 테두리는 2 중으로 약간 도드라졌으며 윗면에는 가마를 놓는 구멍이 있고 우측 구석에는 굴뚝울 설치하였던 타원형 구멍이 있다. 밀면은 없 고 황록색 유약이 발라졌다.
。
1) 耿鐵華 • 林至德, 「集安高句麗'周器的初步硏究」, 《 文物 〉〉 , 第 1 期, 1984, pp. 55-63. 2) 리광희, 「고구려시기 질그릇에 그려진 장식 무늬에 대하여」, 《 조선고고연구 》 3, 1991, pp. 19-27 . 3) 리광회, 「고구려 무덤을 통하여 본 유약 바른 질그릇의 발생시기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4, 1990, pp. 10-15. 4) 리광희, 「고구려 때 유약 바른 질그릇의 변천」, 《 조선고고연구 》 1, 1991, pp. 17- 21 . 5) 李殿福 「集安卷雲文銘文瓦當考辨」; 《社會科學戰線〉〉 4, 1984, pp. 62-73.
장천 2 호분의 것은 길이 76.5cm, 너비 34cm, 높이 30cm 의 직사각형 부뚜막이다. 아궁이도 역시 직사각형이며 테두리는 2 중이다. 아궁이 윗 면에는 가마를 거는 둥근 구멍이 있으며 좌측 끝에 지름 12cm 정도의 굴뚝이 있다. 삼실묘의 부뚜막은 길이 45cm, 너비 24cm, 높이 22cm 이다. 아궁이 는 3 중틀로 된 직사각형이며 부뚜막의 오른쪽에서 따내는 식으로 만들어 졌다(그립 7-20). 상기한 부뚜막들의 연대는 차이가 있는데, 용호동 1 호 무덤은 2-3 세 기, 묘실에 부뚜막을 설치한 만보정 벽화무덤은 3 세기, 명기인 부뚜막을 넣은 마선구 1 호분, 장천 2 호분, 삼실묘는 4-5 세기, 벽화에 부뚜막을 그 린 안악 3 호분과 약수리 벽화무덤은 4-5 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부뚜막의 연원은 한 마디로 온돌에 있다고 보고 있다. 6)
6) 궁성회, 「고구려 무덤에 보이는 부뚜막에 대하여」, 《 조선고고연구 》 1, 1990, pp. 28-31 .
11 제 8 장 금속공예 금속은 마구류가 비교적 많고 도금류, 장식품, 그리고 소수의 무기와 극소수의 귀걸이 등이 있다. 그 중 중국 학자에 의해 기본 분석이 이루 어전 마구에 대한 내용과, 금관이 출토된 내용울 간단히 살펴보고 귀걸 이와 고구려 무기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1 마구 漢 • 唐 기간 동안에 무술을 습득하여 전두에 출중해서 압록강 兩岸의 방대한 지구에 영웅를 칭한 것은 고구려 민족이다. 그들은 기마전과 활 쏘기에 뛰어났는데 그것은 고구려가 오랫동안 겪은 外攻內守의 과정과 평소에 성행하던 수렵활동 중에서 충분히 표현된다. 『 魏書 』 의 기록에 의 하면 고구려 창시자의 〈朱蒙〉이라는 명칭은 그가 활을 잘 쏘는 데서 왔 다. 더욱이 주몽은 좋은 말과 나쁜 말을 구분할 수 있었다. 재위기간이
근 백 년인 6 대왕 太祖王宮은 121 년 가을에 〈 마한, 예맥의 수천 기마병 울 이끌고 현도를 포위하였다(率馬 韓 , 澈 衍數千 騎園 玄克) 〉 고 기록되어 있 다. 그것은 기마병의 규모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宮의 다 음을 계승한 位宮은 〈 태어나면서 사람을 분별할 수 있었다(生亦能開目視 人)〉고 하는데 이는 宮과 같았다. 또한 〈 용감하고, 말을 잘 타고, 사냥 을 잘하였다(有力勇, 便毅島 善臘射) 〉 는 것 등도 같다. 광개토대왕(好太 王)이 일생 중에 여러 차례 보병, 수병, 기병을 이끌고 전두에 임하여 성을 공격한 내용이 〈 광개토대왕릉비 〉 에 잘 기록되어 있다 . 이에 관해서 는 고구려에는 〈 큰 산과 계곡이 많고, 넓고 비옥한 들이 없다. 고로 산 계곡에 거주하면서 흐르는 물을 마셨다. 좋은 밭이 없어서 농사를 짓지 만 배를 채우지 못하여 사람의 성격이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을 좋아하 였다(多大山深谷, 無原澤 隨山谷以爲居, 食洞*·無良田, 難力個作 , 不足以 實口腹 所以其人性凶急 喜窓砂) 〉 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시에 사냥은 중 요한 생활요소 중 하나였는데, 〈 매년 봄, 가을에 사냥 시합이 있었으며 왕이 친히 그것을 관람하였다(每春秋校撮 王親臨之) 〉 는 내용은 이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수렵은 고구려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 신분 높은 묘주인의 그립이 자주 나타난다. 많은 사냥꾼이 말을 타고 숲속에서 짐승을 쫓는 생생한 장면을 통해 수렵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기마 수렵은 고구려 군사 훈련의 유지와 전쟁준비의 실질적 의의였다. 고구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벽화 중 에 수렵장면이 보이지 않지만 고구려인들은 활 쏘는 전통을 계속 유지시 켜 멈추지 않았다. 고구려의 기마전과 활 쏘는 것을 숭상하는 사회분위기는 고구려의 고 고학 연구 중 많은 관계된 자료에서 발견된다. 상기한 고구려 벽화는 중 요한 항목의 하나로 鐵華 阿英 등이 전문적으로 연구하였다. 본문에서 는 근래에 발견된 고구려 마구를 분석하여 보겠다 .I)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마구는 대부분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부식과
훼손에 의해서 마구에 부착된 가죽, 실, 옷감, 나무 등은 거의 없다. 오 늘날 볼 수 있는 것은 대부분 금속 유물(표 8-1) 이다. 표 8-1 의 고구려 고분, 麻線溝 Ml 호, 禹山下 M41 호와 長川 M2 는 벽 화묘로, 고분의 형제, 결구, 벽화 내용과 출토된 네 귀 달린 登의 특징 등을 비교하면 그 시기는 5 세기로 추정될 수 있다. 그러한 고분들은 일 찍이 도굴당하여 마구는 드물었다. 萬賓汀 M78 호 방단계단(기단) 석광, 七星山 M96 의 방단기단 석실은 모두 〈積石爲封〉의 적석묘에 속한다. 이 들은 그 규모가 상당히 커서 일찍이 도굴당하였으나 적석 교란충 내에서 마구 등의 부속이 상당히 출토되어서 그 중 만보정 M78 호에서 2 점의 마 구가 출토되었다. 고분 유형의 발전과 출토된 유약 토기의 분석에 따르 면 상기한 2 기 고분은 4 세기 말에서 5 세기 중엽에 속한다. 桓仁 M15 호, Ml9 호, 集安 만보정 M242 호와 우산 Il 식 적석묘는 그 유형이 상당히 古式이어서 출토된 마구도 상당히 간단하다. 어느 고분에서는 재갇멈치 만 출토되었으며 시기는 상당히 이르다. 이미 연구된 내용에 따르면 兩晉 南北朝는 마구의 발전 시기로서 마구 의 각 조성 부분은 이때에 기본적으로 완비되었다. 상기한 마구 출토의 고분은 곧 이 시기의 고분이다. 고구려 마구의 특징을 분석하기 위하여 그 인근 지구, 국가의 관계 등을 살펴 나가겠는데, 비교 분석에 앞서서 먼저 몇 기 고분의 연대, 족속 등을 알아보자. 시기가 상당히 이론 것은 安陽 孝民屯 M154 호이다. 고분에서 출토된 마구는 1 개의 발걸이(鐘)였는데 당시의 발걸이는 아직 완전히 갖추어지 지 않은 것이었다. 고분 중에 말머리, 개머리, 개발톱 등을 순장하였는 데, 이 장법에 따라서 원보고자는 鮮卑族의 고분으로 보거나 선비의 영 향을 받았거나 또는 선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 고분 와 시기는 약 4 세기 중영 전후로 보았다. 당시는 慕容 鮮卑의 세력이 황 하 하류 방향으로 발전한 시기이다. 朝陽 袁臺子 東晉 벽화묘에서는 2 개의 발걸이가 출토되었는데, 그 시
표 8 기 고구려 고분 출토 금속유물
철제 청동제 도금 기물 참고문헌
기는 安陽 효민둔 M154 호보다 이르지 않다. 이 고분벽화는 雲南 昭通后 海子의 東晉 霞承嗣 벽화묘 (4 세기 말), 북한의 안악 3 호분(동수벽화묘, 357) 및 덕흥리 유주자사 慕容鎭 벽화묘 (408) 등과 상당히 유사하다. 동 시에 그 고분에서 출토된 청동제(銅旭)는 朝陽 后燕 崔孟墓에서 출토된 것과 형제가 같고 크기 역시 같다. 이러한 점을 볼 때 朝陽원대자 동진 벽화묘의 연대는 4 세기 후엽에 해당된다. 그러나 당시에 그 지역을 점거 한 것은 모용 선비이다. 本溪小市의 晉代 고분은 돌로 묘실을 수축하였다. 주실(현실 또는 묘 실)의 앞쪽에 회랑이 있으며 그 좌우에 측실을 만들었다. 오른쪽 것은 크고 왼쪽 것은 작다. 그 고분은 遼[옳지구 魏晉고분의 전동에 속한다. 그 고분 출토의 토기는 遼西 선비 토기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그 중 1 점의 短頭高腹耀(물동이)의 어깨에는 압인된 휘장 문양이 있는데 그러한 문양은 칠성산 M96, 우산하 M41 호, 장천 M2 호 등 고구려 고분 출토의 토기상에도 있다. 그 고분의 시기에 대해 원보고자는 兩晉보다 늦지 않 다고 말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논하면 東晉 때로 보고 있으며 그 묘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앞으로 고증이 더 필요하다. 다만 그 고분을 볼 때
문화교류를 나타낸 것은 분명하다. 신라 천마총의 시기는 5 세기 말에서 6 세기 초로 보고 있으며 그 고분 에서 출토된 마구는 5 벌이다. 마구가 출토된 산라 고분이 천마총 1 기만 은 아니다. 마구가 출토된 시기는 주로 5, 6 세기에 집중된다. 藤之木 고분의 연대는 6 세기 후반영에 해당된다 . 이 고분에서 출토된 마구는 정교하며 일본 고분시기 마구의 대표적 작품이다. 마구가 일본 고분 내에서 출토되는 시기는 대략 5 세기 중엽부터이고 5-6 세기는 급격 히 증가된다. 멈치다(음衍은堡 )고를구 살려펴 보마자구(를그 림항 목8-별1)로. 재나갈누멈어치 분는석 ,말 머비리교 하고겠삐다장.식 먼부저분 에재서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기타 이마대, 콧대, 뺨대(類), 목대('困帶)와 금 속부품 등이 있다. 이른 시기의 재갈멈치 조형은 뿔형과 S 형이다. 그 중 S 형 재갈멈치는 漢代에 유행하였고 魏晉代에도 여전히 사용되었다. 集安 만보정 M242 호에서 출토된 것이 바로 그러한 종류이다. 그것은 河 北 陽原 西漢 후기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데, 만보정 M242 호는 3 세 기 말에서 4 세기 초에 해당되는 것으로 시기가 그것보다 이르지 않다. 환인 Ml9 호는 만보정 M242 호보다 이른 것으로 그곳에서는 재갈과 말고 삐와 연결된 긴 틀고리(奎環 日稱 引手)가 함께 출토되었다. 재갈과 한 세트를 이루어 사용되는 재갈멈치는 S 형 또는 뿔형으로 생긴 것이었다. 만보정 M78 호와 M96 호 출토의 재갈멈치는 모두 타원형이다. 어느 것은 위쪽에 직사각형 구멍이 있는데 그것은 뺨대를 연결시키는 것이다. 재갈 멈치는 무문인 것 또는 십자형 철사를 덧붙인 것이 있고 어느 투공은 꽃 무늬이다. 그러한 약간의 차이는 安陽 효민둔 M154 호, 朝陽 원대자 동 진 벽화묘와 本溪小市 東晉墓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신라 천마총 시기에 도 유행되었다. 그것들은 일종의 같은 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그러한 유 형은 당시 중국 북방, 한반도와 일본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마구의 두번째 부분은 안장이다(그림 8-2). 그것에는 앞뒤 안장(前後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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橋), 언치(천), 다래 (F章 泥) 등이 포함된다. 오랜 시간아 경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앞뒤 안장의 금속 표면 가리개 (때로 가죽 가리개)가 남아 있다. 몇 예의 고구려 안장가리개 (包片)가 만보정 M78 호, 칠성산 96 호와 우산 하 41 호 등 3 기 묘에서 출토되었다. 기타 몇 기 묘에서 안장편, 또는 안 장가리개편, 안장테두리 등이 출토되었다. 가리개의 아치 (圓供)의 의형 입장에 따르면 그것들은 安陽 효민둔 M154호, 원대자 동전 벽화묘에서 출토된 것들과 갇다. 모두 兩晉 시대부터 유행하던 높은 말안장이다. 신 라 천마총과 일본 藤之木 고분에서 출토된 것도 같은 유형이다. 완정한 안장가리개에 의하면 그것은 상부는 말발굽형의 중심부와, 하부는 좌우 와 연결되거나 연결되지 않는 날개형(日稱 磯金具)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중심부의 의부 가장자리는 금속으로 싸여져 (가려져) 있으며 중심부와 날 개 형태가 연계된 곳은 못으로 눌러 (壓條) 정지시켰다. 칠성산 M96 호에 서는 상부 중심 부분만 출토되었다. 만보정 M78 호에서는 두 부분이 출 토되었는데 한 부분은 다만 하부 날개형 조각이다. 신라의 천마총과 일 본 藤之木 고분에서 출토된 마구에 의하면 고들개(胸繁, 中 胸帶)와 밀치 (尻盤 中 紗帶)는 모두 앞뒤 안장의 날개형 위에 잡아멘다. 왜냐하면 날 개편상에 고정된 帶片 또는 띠고리에 낄 수 있는 구멍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흔적은 상기한 安陽, 원대자 및 고구려 고분 중의 마구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安陽 효민둔 M154 호에서 출토된 2 점에 나란히 2 개의 구멍이 있는 〈灣頭形 안장편〉이 있고, 또한 채집된 것으로 나란히 4 개의 구멍이 있는 〈灣頭形 안장식편〉도 있다. 集安 우산하 M41 호와 마선구 Ml 호에서 그러한 것들이 출토되었다. 복원 후 그것들은 모두 말안장상 에 고정시키는 것이었다. 천마총과 藤之木 고분에서 출토된 고들개, 밀 치 등이 똑같이 앞뒤 안장의 날개형 조각에 연결된 것이라면 中原, 遼西 와 고구려 지구에는 왜 없을까? 어느 안장가리개는 문양이 없고 어느 것은 두공의 문양이 있다. 만보정 M78 호 출토의 1 점은 전체가 무공된 구름무늬이고, 신라 천마총과 일본 藤之木 고분에서 출토된 것은 무공된
육각형 거북이등 문양과 두공된 각종 복잡하고 세밀한 구름무늬와 꽃, 풀, 침승 등 문양이 있다. 특히 藤之木 고분에서 출토된 안장은 그 문양 의 정교함이 극히 드물게 보인다. 거북이등 문양은 西晉 시기, 420 년의 炳靈寺 석굴의 불상에서 출현되고 고구려 귀갑연화총의 벽화에서도 보인 다. 세번째는 발걸이 (馬籠 등자) 이다(그림 8-3). 그것은 마구 발전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발걸이가 있음으로써 사람과 말이 일 체가 되고 더 나아가 말 위에서 활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漢·魏 이전에는 발걸이의 형상을 찾을 수 없다. 주지한 바와 같이 長沙 西晉 302 년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약 바론 陶倫의 좌측 발걸이는 지금까지 발 견된 것 중 가장 이른 것이다. 安陽 효민둔 M154 호에서 의발걸이가 발 견되었다. 北票馮素弗 고분 (415) 에서는 두 개의 발걸이가 출토되었는데 연대가 확실한 한 짝의 실물이다. 초기의 발걸이 특칭은 안에 목심이 있 고 그 의부를 금속으로 포장했다는 것인데 때로는 가죽으로 포장한 것도 있었다. 발걸이대(손잡이, 柄)는 길고 발걸이의 고리는 삼각형 또는 타원 형이었다. 발걸이 고리의 아랫변은 기마인이 발을 대는 부분으로 단면은 윗면과 같다. 기마인이 발 대기 쉽고 발과 발걸이 간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어느 발걸이에는 고리의 아래쪽을 편평하게 하거나 또는 약간 안 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어느 것은 고리의 안쪽(발걸이)에서 의부 쪽으로 몇 개의 큰 못을 박기도 하였다. 그립 8-3 에서 제시된 예들의 고구려 및 고구려 이의의 발걸이 등을 모두 볼 수 있다. 그 중 동래 福泉洞 M10 호 고분과 일본 滋賀縣 新開 고분의 시기는 5 세기 중엽이고 寧夏固原 北魏 고분의 연대는 5 세기 말이다. 거기에서 출토된 발걸이를 보면 고리바닥 이 넓어지기 시작한다. 그림 8-3 마지막 줄에 藤之木 고분에서 출토된 발걸이가 있다. 이것은 발의 앞부분을 감싸고 있는데 그것은 신발의 전 반부와 갇다. 그러한 발걸이는 일본에서 많이 발견되었고 기타 지역에서 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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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의 네번째 부분은 고들개(胸帶 胸緊)와 밀치(妙帶 尻繁)이다. 이 두 가지상에는 언제나 말띠드리개(杏葉), 방울(猶餘 雲珠)과 보행시 움 직아는 장식(步描活葉帶飾) 등을 달고 있다. 말띠드리개는 밀치 양측의 아래쪽에 달리는 장식이다(그립 8-4). 安陽 효민둔 M154 호, 朝陽 원대자 동진 벽화고분과 本溪小市 晉墓에서 출토된 것들은 기본적으로 같은 유 형으로 넥타이형이다. 이러한 유형은 고구려 고분에서는 출토되지 않았 다. 그러나 신라와 일본에서는 발견되었다. 그립 8-4 j는 천마총 출토품 이다. 藤之木 고분도 같은 유형이다. 일본에서는 이것을 대추나뭇잎형 (甄葉形)이라고 칭한다. 集安 고구려 마구의 말띠드리개는 모두 하트형 아다. 어느 것은 그 중간에 十字 또는 세 줄의 굽은 대가 있고 때로는 두공된 꽃무늬도 있다. 그러한 유형은 신라와 일본에도 대단히 유행하였 다. 지적할 것은 말띠드리개의 제작법, 문양 처리는 흔히 재갈멈치, 안 장가리개와 일치하는 것으로 그것은 본문에서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그림 8-4h 의 말띠드리개는 覇王朝山城에서 출토된 것으로 그 산성의 연 대를 고증하는 가장 중요한 참고가 되었다. 그립 8-4m 은 천마총 출토 의 말띠드리개이다. 이것의 형체는 다른 것보다 크다. 세 개의 하트형 말띠드리개로 조성되었으며 그 중간의 십자형대 위에 또한 나뭇가지가 세 개 있는데 그 위에 보행시 움직이는 장석이 있다. 각 하트형 말띠드 리개 상에는 침승 형상이 있다. 그 등 위에 있는 육각형 무늬는 거북이 등 무늬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침승 형상이 安陽 효민둔 M154 호 재갈 멈치에서 보이는 침승 형상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 등 위에 거북 이등 문양을 발견하지 못하여 원보고자는 개구리(桂)라고 보았다. 마선 구 Ml 호, 칠성산 M96 호와 신라 천마총에서 고리와 한 세트롤 이룬 말 띠드리개가 출토되었는데 그 중 마선구 Ml 호 출토의 1 점은 띠고리가 긴 금속편과 함께 달려 있어서 그 사용 위치를 정확히 알려 주고 있다(그림 s-4n, o, p). 그림 8-5 와 그림 8- 여본 방울(中 變鈴)과 보행시 움직이는 장식(中 步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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活葉帶飾) 등으로 나눈다. 방울은 둥근 공형으로 속은 비어 있고 그 안 에 청동제 방울알이 있으며 그 위에는 다른 곳에 매단 구멍 뚫린 대가 있다. 이 유형은 安陽 효민둔에서 2 점이 채집되었고 원대자 동진 벽화고 분에서 5 점이 출토되었다. 복원 후 고들개에 매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 의 다른 일종은 윗부분은 방울 뚜껑, 아랫부분은 방울 몸체이다. 방 울 뚜껑은 둥근 모자형이이거나 편평하고 방울 몸체는 둥근 공형, 또는 둥근 원추형이다. 두공되었고 안에는 청동 방울알 또는 작은 돌이 들어 있다. 이러한 유형의 동제 장식은 많이 출토되었는데 安陽 효민둔 M154 호에서 85 점, 원대자 동진 벽화고분에서 110 점 등이 출토되었다. 그것들 은 소량이 고들개에 매달리고 나머지 대부분이 종횡으로 교차되는 밀치 (尻盤 中 猶帶) 상에 걷리는 것이다( 《 考古 》 1983 년 제 6 기, 安陽 효민둔 Ml54 출토 마구 복원도와 《 文物 》 1984 년 제 6 기 , 원대자 동진 벽화고분 출토 마구 복원도). 보행시 움직이는 장식은 두 종류가 있다. 간단한 것으로는 먼저 가는 동제 철사로 혀형의 쇠조각편을 잡아맨 후 그것을 원통형 대봉에 수직으 로 끼우고 마지막으로 그 밀에는 반원형 받침대를 부착시킨 것이다. 그 리고 복잡한 것으로는 하나의 가는 대몽을 여러 단으로 나누어 그 각각 에 혀형 쇠편을 매단 다음 그것을 연결시켜서 하나의 원통관(대롱)에 수 직으로 세우고 마지막으로 받침대를 부착시킨 것이 있다. 그림 8-6 k 는 천마총 출토의 것이다. 윗변에 쇠편이 달려 있는데 그 쇠편의 상부는 둥 글고 아래쪽은 너비가 일정하지 않게 길다. 이는 그 고분 내에서 출토된 말띠드리개와 유사하다. 보행시 움직이는 장식은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 어 수십 점에 달한다. 그것은 주로 밀치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 考古與文 物》, 1985 년 2 기, 「천마총 출토 마구 복원도」 참고, 그림 8-4). 보행시 움 직이는 장식 중에 어떤 것은 밀치와 교차되는 곳에 십자형 4 엽 장식과 갇이 연결되어 있다(그림 8-6 c, i, n). 십자형 4 엽 장식은 밀치와 고삐에 매달린 장식의 하나이다. 이것은 칠성산 M36 호에서는 32 점이 출토되었
으며 혁대〔劃의 교차점에 사용되는 것으로 못으로 고정시켰다. 아름답 게 하기 위하여 4 잎을 사각형, 원각사각형, 하트형의 여러 가지로 만들 었다. 그 중간에 둥근 꼭지가 있으며 전체를 금으로 도금하였다( 《 考古 》 1983 년 6 기, pp. 559, 「集安 칠성산 96 호 고분 마구 밀치 고삐장식 복원도」 참고). 그림 8-5, 8-6 의 방울(嬰鈴)과 보행시 움직이는 장식을 비교하면 전자 가 후자보다 시기가 이르다. 당시 밀치상의 금속 장식은 먼저 방울을 이 용하고 후에 보행시 움직이는 장식을 사용하였다. 고들개의 장식도 먼저 방울을 이용하고 후에 보행시 움직이는 장식 또는 말띠드리개를 이용하 였다. 보행시 움직이는 장식은 一葉 장식에서 多葉 장식으로 발전하였다. 보행시 움직이는 장식의 기원은 모용 선비의 영향을 받았다. r 晉書, 慕容應傳』에 〈燕은 대대로 움직이는 冠을 썼다. 莫漫跋이 그것을 보고 좋아하게 되었다. 欽도 그 관을 답습하여 썼다. 여러 부족에서 그것을 步描(움직이는 관)라고 불렀고 그 이후에 그 소식이 와전되어 모용으로 되었다(時燕代多冠步描冠 莫漫跋見而好之, 乃欽發襲冠, 諸部因呼之爲步描, 其後昔亂t, 遂爲慕容焉)〉• 遼寧~t票에서 발견된 3 세기 중엽의 모용 선바 고분에 그와 같은 금꽃무늬관이 발견되었다. 관에는 금고리와 원형, 심 엽형의 금잎이 달려 있었고 고리와 잎들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宿白은 문헌에서 慕容部民들이 〈움직이는 장식이 있는 관(步描冠)〉을 즐겨 썼다 는 기록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움직이는 장식은 곧 마구상 에도 이용되었다. 安陽 효민둔 M154 호 고분에는 비록 움직이는 장식이 없지만 當盧上에 움직이는 장식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청동제 대롱을 당로상에 매달았다(그립 8-7). 그러한 움직이는 장식은 신라, 백제, 일본 출토의 금관, 신발과 기타 기구상에도 있다. 신라 천마총의 마구 중에 銅鑄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말의 고들개상에 매달았다. 그러한 동탁은 비록 상기한 기타 고분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지 만 일본에서는 혼하며 中原에서도 적지 않다. 최근 발견된 河北 陽原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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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 후기의 고분 내에서도 그러한 동탁(그림 8-8) 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중국이 한반도, 일본 등에 문화 영향을 준 것이 뚜렷하다는 것을 반영한 다. 상기한 마구는 전체를 포함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당로, 혁대고리 (帶t), 寄生과 火珠 등으로 거의 취급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전쟁이 빈 번하여 기병의 장비가 발전하였고 말에 입히는 갑옷(鍾)과 기병이 입는 두 벌 갑옷 등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北朝 시기 中原 16 국의 도용과 벽화상에서 그러한 장비가 발견되었다. 만약 말몸 위에 갑옷을 입게 되 면 상기한 장식은 필요 없을 것이다. 마선구 Ml 호분과 삼실묘 벽화에 이러한 그림이 있고 적잖은 무덤에서 갑옷편이 출토되었다. 갑옷은 전시 에만 사용되고 평시 사냥시에는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갑옷에 대한 것은 본문에 취급하지 않겠다. 본문에서 논술한 재갈멈치, 발걸이, 안장과 말띠드리개, 방울, 움직이 는 장식 등의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에서 출토된 것은 대부분 그보다 조 금 이른 中原, 遼西 지구에서 사용되었다. 그런 다음 다시 고구려를 통 해서 한반도 남부와 일본에 전해진다. 동시에 마구는 점차 복잡하고 다 양해진다. 그 전파과정 중 고구려는 중개적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자체 의 창조와 공헌을 하게 된다. 그러나 고구려에게 직접 마구에 영향을 준 것은 선비족이다. 그때는 中原, 북방 지구는 16 국 北朝 시기였고 선비족 이 정치, 역사상 대활약한 시기였다. 선비족은 관습적으로 말타고 활쏘 기를 좋아하여 〈병마에 능해서 흉노를 능가하였다(兵利馬疾, 過於句奴)〉 는 기록이 있다. 그들의 마구의 발전과 완비는 중요한 작용을 하였으며 상기한 安陽 원대자 고분 등에서 그것들을 증명한다. 漢 • 魏 이후에 선 비족은 遼西 지구에서 오랫동안 활동한다. 魏 • 晉 시작 때 고구려 세력 이 서쪽으로 확장되어 선비와 직접 경계를 이루게 되었고 따라서 고구려 와 선비 지구의 문화 교류와 인적 왕래는 대단히 빈번하였다. 많은 학자 들이 인정하는 바와 갇이 북한 황해북도 안악 3 호분의 묘주인 冬壽는 前
燕울 통해서 고구려로 들어갔고 그러한 교류 중 선비의 마구 공예와 풍 습이 자연스럽게 유입되었다. 고구려 마구의 특칭을 그 인근 지역과 비교, 분석하면 표 8-2 와 같다. 표 8-2 에서 제시한 것은 안장가리개 앞, 뒷바퀴의 너비, 좁은 것과 높 낮이 숫자이다. 높낮이룰 말하면 상당히 낮은 것은 安陽 효민둔 Ml54 호 출토의 것이고 상당히 높은 것은 藤之木 고분의 것이다. 藤之木 고분의 것은 기타 다른 것보다 현저히 높다. 전형적 개체 특징을 가진 것은 고 분 등급 또는 지역과 관계가 있다. 너바가 좁은 것을 말하면 칠성산 M96 호의 고구려 안장의 전륜이 37cm 로 가장 좁다. 그것과 비슷한 것은 천마총에서 출토된 것으로 38 . 6cm 이다. 기타 각 예는 뚜렷하게 너비가
표 8-2 고구려와 인근 지역 마구 특징 비교 (단위 : cm)
늘어난다. 후륜은 고구려 3 기 묘에서 출토된 것과 기본적으로 같을 뿐만 아니라 천마총 출토의 3 예 또한 같다. 모두 기타 3 묘에서 출토된 것보다 좁다. 왜 그럴까? 각 부분 마구 자체의 만든 방법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기한 숫자의 변화는 일치한다. 안장은 말등 위에 울 려놓는 것으로 좌석을 안정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안장은 말등 의 넓고 좁은 것에 관계가 있다. 말등의 넓고 좁은 것에 관하여 말한다 면, 키가 크고 작은 말, 살이 찐 말과 마론 말 등에 대해서는 결코 일치 할 수 없을 것이지만 차이가 그리 크지는 않아서 마구를 제작할 때 그렇 게 세심하게 고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표 8-2 의 고구려 및 신라 천마총의 안장(특히 후륜)은 安陽, 遼西와 일본 등의 예보다 좁 다. 죽, 말등의 넓고 좁음은 아마 말의 품종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 다. 이 문제에 대하여 문헌자료를 살펴보자. 『 삼국지 고구려전 』 에 〈말은 모두 작다. 그러나 산에 오르기는 편리하다. 나라 사람들은 힘이 많아서 싸움을 연습하였다. 옥저, 동예가 모두 예속되었다(其 馬 皆小, 便登山 國 人有 氣 力, 習 戰 鬪 沃 i1 1. • 東浪 皆屬焉) 〉 고. 기록되었다. 『 魏 書 고구려전 』 에 〈 (고구려에는) 3 척 말이 있는데 주몽이 그 말을 탔다. 말종은 죽 과하마 이다〔(高句麗) 出三尺馬 云朱 蒙 所乘 馬種g떄訂앤때나〉. 〈果下〉라는 명칭 은 『 三國志, 減 傳 』 에서 왔다 : 〈 ( 減 에는) 과하마가 있으며 漢桓 때에 그 것이 헌납되었다( 減 出果下 , 馬漢桓時獻之) 〉 . 裵松之가 주를 달기를 : 〈과하 마는 높이가 3 척이다. 그 말을 타고 과실수 밀을 지날 수 있어서 果下라 고 칭하였다(果下馬高三尺, 乘之可於果樹下行, 故謂之果下)〉라고 하였다. 『 후한서』에 그 기록에 대한 주석이 있으며 그것은 『 삼국지 』 와 갇다. 그 의에 『 博物志』에 유사한 기록이 있다. 〈예맥국의 남쪽은 전한, 북쪽은 고구려, 옥저와 접하고 있으며 동쪽은 큰 바다가 있다(減語國南與辰韓, 北與句麗沃沮接, 東窮大海). 〉 〈바다에는 班魚皮가 나오고 육지에는 표범이 있으며 또한 과하마가 있는데 그 높이가 3 척으로 漢代에 헌납되었고 마
차를 끌고 다녔다(海中出班魚皮, 陸出文g섭, 又出果下島 高三尺, 漢時獻之, 鷲輩車)〉고 기록되었다. 여기의 높이 3 척 되는 말은 과실수 밀을 다닐 수 있어서 〈과하마〉이다. 따라서 이 지역이 〈 큰 산과 계곡이 많고 〉 , 〈 과 하마 〉 가 몸이 작고 동작이 빨라서 큰 산 계곡 내에서 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용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산에 살고, 풍속적으로 말을 타고 활을 쏜다(人皆山居, 1 谷重 騎射) 〉 등은 백제에서도 마찬가지로 과하마가 유행되었다. 『 兩唐 書 , 百 濟傳 』 의 기록에 의하면 唐 초기에 백제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 과하마 〉 를 헌상한 기록이 보인다. 신라에 관한 문헌 기록은 신라는 辰韓에서 출 발하였고 일찍이 〈소를 기르고 말을 탔다(服牛乘馬) 〉 는 습관이 있다고 기 록되었다. 다만 『신당서, 신라전.!I의 기록에는 〈 말이 커서 타기에 불편하 였다(馬難高大, 不善行)〉는 기록과 〈 현종 개원 중 여러 차례 입조하여 과 하마를 헌납하였다(玄宗開元中,數入朝,獻果下馬)〉는 기록이 있다. 당시 백 제, 고구려는 이미 멸망되었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고 과하마를 헌 상하였다. 그 말들은 백제, 고구려 지구의 원산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신라도 일찍이 〈소를 기르고 말을 타는 습속(服牛乘馬) 〉 이 있었다. 만약 높고 큰 말을 잘 타지 못하였을 때에는 불편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신라 가 한반도를 통일하기 이전에 이미 과하마가 있었을 가능성은 부인할 수 없다. 표 8-2 의 천마총 출토의 안장은 그 좋은 예이다. 종합하면 漢唐 기간에 중국 동북지구 동부와 한반도에 몸체가 작고 산 에 오르기에 편리한 〈과하마〉가 널리 이용되었다. 이 결론의 타당 여부 는 장래 연구에 기대한다. 고구려인들은 일찍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다. 이로 인하여 마구 가 대단히 발달하였다. 1970 년 초부터 평안남도 평성시 지경동과 集安 일대의 고구려 고분에 서 마구가 출토되었다. 2) 고구려 마구는 네 가지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있다(그림 8-9).
® 안장, 등자 및 이것들을 장치하기 위한 말띠와 띠고리 ® 재갈, 굴레, 고삐 ® 말띠드리개, 운주, 방울 ® 馬面甲, 말 갑옷, 깃발대 및 기타 장식품 이와 같은 것들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삐
1) 고구려 마구의 구성 (1) 말을 타기 위한 기구 안장은 안교, 안교깔개, 말다래([章泥)로 구성되어 있다. 안교는 사람이 앉는 장구로서 전안교, 안교, 후안교로 구성된다(그립 8-10). 안교는 가죽 또는 나무로 제작되어 발굴시 남아 있는 것은 드물 다. 그러나 고구려 벽화무덤인 쌍영총의 안길에 있는 말탄 사람 그림에 서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전안교와 후안교에는 무늬(문양)를 새긴 청동판 또는 금동판을 씌웠 다. 그러한 장식판이 평성시 지경동 고분, 集安의 만보정 78 호, 만보정 242 호(그림 s-1ob), 우산하 41 호, 우산하 152 호와 칠성산 96 호(그림 8-10 c) 등에서 출토되었다.
o 5cm
그 중에 지경동 고분 출토의 금동판 테두리에 도금 세공기술로 좁쌀무 늬를 처리하였고 만보정 78 호의 것은 도려 내어 무늬를 처리하였다. 안교깔개는 안교로 인해 말의 등이 상하지 않도록 안교 아래에 까는 물건인데 유물은 없고 벽화상에 나타나 있다. 말다래는 말이 질주할 때 흙이 뒤어 오르지 않도록 안교 양옆에 늘어 뜨린 것이다. 말다래도 벽화에서만 볼 수 있다. 벽화상의 말다래는 사각 형 또는 직사각형의 천 또는 가죽으로 추측된다. 안장은 전안교에 연결한 가죽대를 말의 가슴 앞으로 돌리고 후안교에 연결한 가죽띠를 말의 궁둥이 뒤로 돌려서 말등에 고정시킨다. 가슴 앞 으로 돌린 말띠는 가슴걸이, 궁둥이에 돌린 말띠를 고들개라고 칭한다 (그림 8-11). 벽화에 의하면 가슴걸이와 고들개는 각각 두 줄로 만들어졌
。 5cm
a b
다. 가슴걸이와 고들개는 띠고리(교구)로서 전안교와 후안교에 연결되었 는데, 청동제 띠고리 여러 점이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고들개의 교차 부 위에 교차금구를 매달았는데 그러한 유물이 集安의 칠성산 96 호에서 22 개, 그리고 우산하 41 호에서 1 개가 출토되었다(그립 8-11). 말에 올라타기 위한 것으로서 등자가 있다(그림 8-12). 그것은 평성시 지경동 고분, 만보정 78 호, 우산하 41 호, 칠성산 96 호, 撫順의 고이산 성, 集安 하해방대대 등에서 출토되었다. 등자의 형태에는 둥근 등자와 긴 타원형을 절반 끊은 것 등이 있다. 평성시 지경동 고분 출토의 등자는 발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 위한 세 개의 꼭지가 달린 것이며 集安하해방대대 출토의 것은 그 부분이 두 가 닥이다. 동자 속은 나무이고 그 걷에 금속을 씌운 것이 특칭이다. (2) 말 조종 기구 첫번째로 재갈을 살펴보자(그립 8-13), 재갈은 평성시 지경동 고분, 만 보정 242 호, 桓仁의 고력묘자촌 19 호, 련강향 15 호, 자강도 자성군 법동 리 하구비 고분, 자성군 서해리 1 호 등에서 출토되었다. 재갈은 물리개, 재갈멈치, 끌대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물리 개는 말의 입 안에 물리는 것으로 두 개의 쇠꼬챙이를 연결시킨 것이다. 재갈멈치는 I 자형, S 자형, 타원형 등으로 되어 있다. 처음에는 v} 형 또는 S 자형 멈치를 사용하였고 그 다음 판멈치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끌대와 굴레는 쌍기둥 고분의 벽화에서 볼 수 있다. (3) 장식품(치레걸이) 장식품은 가슴걸이와 고들개 등 말띠에 장식하는 것이다. 가슴걸이에 는 가슴 앞에 방울을 달고 고들개에는 말궁둥이 옆에 말띠드리개를,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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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이 위에는 운주를 매달았다(그립 8-14). 말띠드리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그림 8-15). 하나는 살구나뭇잎 형태와 다른 하나는 약간 길고 끝이 뾰족한데 윗부분은 좁고 아랫부분은 넓게 생긴 것이다. 살구나무 잎사귀형의 말띠드리개에는 마선구 1 호 무덤, 만보정 78 호, 장천 2 호 등에서 출토된 것과 같이 테두리와 그 안에 십자형 문양이 처 리된 것이 있다. 윗부분이 좁고 밀부분이 넓은 형태는 쌍영총의 벽화에
그림 8-14 운주, 방울
서만보인다. 운주는 고들개 교차금구 위에 다는 장식으로 1960 년대까지 출토된 적 은 없으나 근래에 평성시 지경동 고분, 만보정 78 호, 마선구 1 호, 서해 리 1 호, 우산하 41 호 등에서 출토되었다(그립 8-14), 말방울도 근래에 集安의 만보정 42 호, 우산하 195 호(그립 8-14c) 등에 서 출토되었다.
(4) 전두용 말장구와 장식품 우선 마면갑과 말갑옷을 살펴보자. 마면갑과 말갑옷은 안악 3 호분과 쌍기둥무덤 등 벽화에서 볼 수 있다. 마면갑은 철판으로 만들어졌다. 말갑옷은 패쪽을 연결하여 만든 札甲이다. 다리를 제의한 말몸 전체를 덮었으며 말갑옷의 아랫부분에는 톱날형의 장식품이 있다. 전두시의 말장식은 쌍기둥무덤 벽화에서의 후안교 뒤에 쇠꼬챙이를 달 고 그 끝에 깃발을 달았다. 깃발의 뒷부분은 세 가닥(三枝)으로 되어 있 다. 다른 장식품은 개마무덤 주인공의 말에 있는 위로 세운 참대숲 모양의 장식이다. 개마무덤의 참대숲 모양의 장식품은 운주를 크게 확대한 것 같은 장식품으로 참대 잎사귀가 여러 가지 색깔로 그려진 것이다. 고구려 마구에서 최초로 출현된 것은 재갈이다. 재갈은 고조선 전기의 것으로 瀋楊市 전가와자 6512 호 고분의 재갈을 예로 들고 있다. 거기에서는 청동 물리개, 청동 재갇멈치, 뼈로 만든 재갈멈치 등이 출 토되었다 한다. 또한 고구려와 가까운 시기의 재갈로 평양시 룡성구역 마람에서 출토된 것도 예로 들고 있다. 그것은 철제의 물리개와 S 자형 의 재갈멈치인데 후기에 속하는 좁은 놋 단검 및 수레 부속품과 함께 출 토된 것으로 기원전 2-1 세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재갈은 고구려 훨씬 이전에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재갈 다음의 것은 안장이다. 고력묘자촌 19 호, 련강향 15 호 등에서는 재갈만 출토되었지만 조금 늦은 시기의 만보정 78 호, 242 호, 우산하 41 호, 칠성산 96 호, 산성하 181 호 고분에서는 재갈과 안장이 일시에 출토 되었다. 안장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구체적 예는 없다. 지금까지 출토된 안장은 모두 기단돌각담 무덤에서만 나왔다. 따라서 안 장의 출현시기는 기단돌각담 사용시기로 보고 있다. 장식품을 제의하고 마구에서 가장 늦게 출현된 것은 등자이다. 그것도
기단돌각담무덤(돌기단무덤)과 돌칸흙무덤에서만 출토되었다. 고분 의에 등자가 출토된 곳은 撫順의 고이산성과 集安의 하해방대대 등이다. 등자의 출현시기는 3 세기 이후, 즉 돌기단무덤 또는 그 이후 시기로 보고 있다. 등자가 출토된 만보정 78 호, 우산하 41 호, 칠성산 96 호 고분들은 돌기 단무덤이며 지경동 고분은 돌칸흙무덤이다. 따라서 등자는 돌기단무덤 시기에 출현된 것으로 보고 있다 . 돌기단무덤의 상한은 기원 전후 시기 , 하한은 4 세기로 추정되고 있다. 돌기단무덤은 오래 사용되었다. 그러나 3-4 세기에는 돌칸흙무덤과 병 존하였으며 돌기단무덤과 돌칸흙무덤의 교체 시기이다. 3 세기 초 또는 그 이전부터 돌칸흙무덤이 출현하면서 돌기단무덤은 서서히 사라지게 되 었으며 4 세기 초에는 특수한 지배 계층만 그것을 사용하고 돌칸흙무덤이 급속히 보편화되었다. 칠성산 96 호에서 출토된 등자와 황유 단지는 시기 가 상당히 이른 것으로 적어도 3 세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고구 려에서는 적어도 3 세기부터 등자를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 마구는 백제, 신라, 가야에 크게 영향을 끼쳤고 그 중에 신라 의 마구는 고구려 마구와 거의 일치한다. 전안교의 금속판의 형태가 갇고 둥근 등자도 같다. 재갈도 임물리개가 모두 두 쪽으로 된 것이 일치하며 재갈멈치의 형태도 같다. 지경동 고분에서도 소량의 마구 일식이 출토되었다(그립 8-16), 그 시 기는 4 세기 말에서 5 세기 전반으로 보고 있다.
a b
2 금관 고구려의 금관은 두 종류로 나뉜다 .3) 하나는 평양시 대성구역 청암동 토성에서 출토된 금동관이다(그림 8- 17). 금동관의 띠모양 보관 테두리 윗줄에는 인동무늬가, 밑줄에는 구름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그 사이에 7 개의 다른 장식이 배합되었다. 테두 리 위에는 화영문이 있으며, 구름과 감이 새겨진 9 개의 가지가 세워져
있다. 그러한 형식의 화영문은 전파리 7 호 무덤에서도 출토되었다. 그 금동관과 나무판 사이에 딱정벌레의 날개를 깔아 금록색의 바탕을 이루고 그것을 배경으로 하여 금동판이 두드러지게 한 것은 매우 세련된 수법이다. 그 의에 화영문으로 된 관으로는 개마무덤 주인공이 쓴 금관 이 있다. 다론 하나는 중국 集安 출토의 금관이다(그림 8-17). 이 금관은 중간에 길쭉한 장식이 있고, 그 양쪽에는 새날개 모양의 깃이 약간 뒤로 기울어 지게 나와 있다. 중앙에 세운 장식에는 가장자리를 돌아가면서 돕날처럼 만든 것이 있으며, 그 가운데 면에는 보요를 달았던 자리가 세 줄 있다. 양쪽의 새날개 모양의 것에도 보요가 달려 있다. 그러한 형태의 관으로 는 개마무덤 벽화에 그려져 있는 주인공의 부하가 쓴 관과 쌍영총 벽화 의 무사가쓴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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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8-3 고구려 유적 출토 금관
고구려 금관아 나온 무덤은 여러 곳으로 기록되고 있다(표 8-3). 고구려의 화염무늬 금관은 해와 달을 중시하고 신성화한 것과 관계가 있다고 보며, 새깃 장식을 한 금관은 고구려의 새깃 꽂은 절풍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3 귀걸이 고구려의 금속공예품으로 잔존하는 것은 금제품으로 귀걸이, 반지, 관 자, 바녀, 단추 등이 있고, 은제품으로는 반지, 비녀 등이 있다 .4) 금귀결이는 굵은 고리형(태환식)과 가는 고리형(세환식)으로 나누고 있 다. 가는 고리형 귀걸이는 꽃바구니(중간), 심영형(드립) 모양의 장식들 로 꾸미고 있다. 꽃바구니 모양에는 여러 개의 작고 둥근 고리로 형상하 거나 달걀 모양의 몸체 네 곳에 둥근 고리로 원형 창문처럼 형상한 것이 있고, 심영형 장식에는 그것을 하나만 매달거나 가운데 큰 것을 달고 양 옆에 그보다 작은 것을 달아 움직이면 서로 부딪쳐 소리가 나게 한 것 등이 있다.
그 위에 가는 고리에 꽃바구니 모양 장식+두 줄의 금사슬+고추 모양 금장식 한 것, 또한 작은 고리밀+표주박 밀부분 절반 자론 것과 고추 모양 장식을 단 것 등이 있다. 금속공예 중에서 수량상 많은 것은 금동 및 청동 공예품이다. 금동, 청동 공예품으로 전하는 것은 금동제 손잡이 붙은 향로, 청동제 초두, 금동제 및 청동제 신발, 청동제 호우 등이다. 금속공예의 독특한 모습은 금동 및 청동 두각 장식에도 나타나 있다. 두각 장식품에는 해모양 두각 보관 장식품과 불꽃무늬 두각 보관 장식품 그리고 광배형, 사각형, 직사각형, 탑형, 꽃잎형 (6 잎 또는 8 잎) 장식품 등이 있다. 이러한 장식품 중 화영무늬 두각 장식품은 화염무늬의 입체감을 나타 내기 위하여 해모양 보관 장식품의 무늬 장식과는 달리 9 줄의 화영무늬 장식 중에 두 곳에 앞뒤 2 중으로 불꽃 장식을 하였으며 화영무늬 자체를 활활 타는 불길처럼 처리하였다. 그리고 무늬 끝을 비틀어 꼬았으며 모 든 무늬 가장자리에 작은 점선무늬를 돋혀 생동감 있게 처리하였다. 금동 두각 장식품 중에는 6 꽃잎, 8 꽃잎 모양의 장식도 있다. 6 꽃잎의 장식품은 크기가 지름 약 8cm 정도이다. 금속 장식품은 공예 기술 측면 에서 볼 때 단조, 주조, 야금, 오목새김, 두각, 선새김, 도금 등이 있으 며 그 중 칠보장식법도 있다. 청암리 금강사터에서 지름 4cm 정도 모양의 꽃모양 칠보장식 금구가 출토되었다. 그것은 5 세기경에 고구려에 칠보장식 금구 제작법이 알려졌 음을 표명하여 준다. 또한 딱정벌레의 날개를 도입하여 두각 금구의 가 장 조화로운 장식수법으로 이용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상기한 것 의에 칼, 두구, 갑옷, 명기, 거울 등의 특색 있는 철 공예품들도 제작하였다. 고구려 귀걸이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고 발굴되었거나 도굴된 것들을 수집한 것이다. 5)
표 8-4 첫고리가 가는 귀걸이 일람표
번호 이름 드립장식 형식 출토지 자료출처
현재 알려진 고구려 귀걸이 종류는 표 8-4, 8-5 와 같다. 고구려 귀걸이는 윗장식, 중간장식, 끝장식, 그리고 연결고리로 구분 할 수 있다. 귀에 접하는 부분을 윗장식, 그 밀장식을 중간장식, 마지막 울 끝장식이라고 하며 이것들을 연결해 주는 고리를 연결고리라고 한다. 그리고 윗장식과 중간장식을 연결한 것을 첫고리, 중간장식과 끝장식을 연결한 고리를 둘째고리라고 하며, 첫고리부터 그 밀부분을 드림장식이 라 한다. 고구려 귀걸이의 구조를 때로 귀에 대는 고리와 드립장식으로 나누고 있다(그림 8-18). 가는 민고리 귀걸이는 초기 형태이지만 때로는 늦은 시기에도 출토된 다(그립 8-18 d) . 과거에는 귀에 대는 고리가 가는 것과 굵은 것 등 귀결이룰 두 종류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다시 제시된 내용은 굵은 고리로서 귀에 부착하는 고리가 아니라 드립장식의 첫 연결고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이 드립 장식의 첫 연결고리라고 하는 것은 고리 한쪽이 터전 듬 사이로 귀망울
표 8-5 첫고리가 굵은 귀걸이 일람표
번호 이름 드립장식 형식 출토지 자료출처
이 끼워질 수 없고 다만 고리만이 끼워진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귀걸이는 드림장식의 첫고리가 가는 것과 굵은 것의 두 유형 으로 분류되며 중간장식과 끝장식의 형태에 따라 몇 가지로 더 세분되고 있다. 첫째로 드립장식의 중간과 끝장식을 붙여서 원추형으로 만든 것으로서 원추형 드립장식은 첫고리가 가는 것과 굵은 것이 있다(표 8-4 의 5-7, 표 8-5 의 1-12), 굵은 고리는 도금으로 넓적하게 만든 것과 감아서 둥근 고 리로 만든 것이 있다. 둘째, 드림 중간장식을 두각의 구슬로 만들고 그 밀에 삼각추를 붙인 것이다(표 8 - 4 의 8, 표 8-5 의 13). 셋째, 두각무늬 구술 밀에 심영형 장식을 둘째고리로 연결한 것이다 (표 8 - 4 의 10-12, 표 8-5 의 14, 15). 둘째, 셋째 유형들 중에는 드립장식 의 첫고리가 가는 것과 굵은 것이 있다. 넷째, 두 개의 반구형 (접시형) 구술을 마주· 엎어 놓은 중간장식 아래 에 심영형 장식을 두번째 고리에 연결한 것이다(표 8-4 의 13). 다섯째, 사각을 이룬 나팔 모양 방울에 심영형 장식을 두번째 고리에 연결한 것이다(표 8-4 의 17).
二 ?
여섯째, 금사슬의 드립장식 끝에 방울 또는 열매 모양(고추 모양) 추를 달아맨 것이다(표 8-4 의 14, 15). 상기한 것 중에서 넷째, 다섯째, 여섯째 유형은 드립장식의 첫고리가 가는 것이다. 드립장식의 유형을 중간장식과 끝장식의 형태에 따라서 다시 분류 가 능한 것으로보고 있다. 귀걸이의 변천은 드립장식의 형태 변천이며 구체적으로 원추형 드립 장식의 중간장식과 끝장식의 형태가 변한 것이다. 원추형 드립장식 귀걸이는 초기 형식으로 드립장식의 원형이다(표 8- 4 의 5-7). 유적에서 출토된 고구려 귀걸이 중 두각무늬 구슬 중간장식과 심영형 끝장식이 달려 있는 드립장식 귀걸이는 3-4 세기 이전의 유적에서 알려진 바 없으나 드림장식이 없는 귀걷이와 추형 드립장식이 있는 귀걸이 등은 출토된 예가 있어 그 선후관계를 알 수 있다(표 8-4, 8-5). 예를 들면 3 -4 세기 유적으로 알려진 평양시 상원군 소구절 고분에서 드립장식이 없 는 귀걸이와 추형 드립장식이 출토되었으며, 5 세기 초의 유적으로 알려 진 남포시 강서구역 약수리 고분과 평안남도 평성시 지경동 고분에서도 두각의 구슬과 심영형 드립장식이 달린 귀걸이가 출토되었다. 이것은 드 림장식의 초기 형태는 추형이며 그것이 두각의 구슬과 심영형 드립장식 귀걸이로 변천된 것을 보여 준다. 귀걸이의 형태, 드립장식 구조들의 다양한 형태 발전은 금, 은, 동 세 공기술의 발전과 관계되어 있다. 귀걸이 세공기법은 다음과 갇이 요약된 다. 첫째, 판금(도금) 도금법과 아말감 도금법으로 처리했다. 동제 귀걸이 는 아말감 도금과 판금 도금으로 처리되고, 고리는 기본적으로 판금으로 제작되었다. 평안남도 룡강군 후산리 추동 제 19 호분과 보림리 대동 제 13 호분에서 출토된 귀걸이는 고리 안쪽에 판금을 서로 맞붙인 흔적이 실금
으로 되어 있고, 동의 산화충이 부풀어 올라와 판금 이음충이 터전 것도 있었다. 둘째, 누금 세공기법이 도입되었다. 누금 세공기법은 드림 중간장식인 두각무늬 구슬, 반구형 구슬, 드림 끝장식인 심영형 장식에 사용되었다. 두각무늬 구슬은 금줄고리 몇 개를 붙여 만든 것으로 6 면 두각무늬 구 슬은 금줄고리 6 개, 구형의 두각의 구슬은 금줄고리 18 개로 되어 있다. 반구형 구술형에는 몇 개의 금줄고리를 붙여 제작한 것과 테두리에 돋음 무늬를 누금 처리한 것이 있다. 셋째, 금줄 만드는 인발기법이 도입되었다. 두각의 구슬을 형성한 금 줄의 단면 지름은 0 . 07-0 . lcm 이며 그 굵기가 일정하고 표면 정결도가 높 은 것에 의하면 인발기법이 매우 발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넷째, 판금 만드는 압연기술이 도입되었다. 드립장식 첫 굵은 고리와 살구잎형 보요는 판금으로 제작되었으며 두께가 .o.0 2 -o.0 5 cm 정도이다. 판금이 얇고 두께가 일정한 것은 압연기술의 높은 발전면을 보여 준다. 다섯째, 형단조법이 도입되었다. 대성구역 안악궁터 부근에서 출토된 드립장식 첫 굵은 고리의 안쪽과 바깥쪽의 실선의 존재는 형단조하여 제 작된 반쪽고리의 부착 흔적으로 보인다. 여섯째, 주조법이 도입되었다. 주조법은 추형 드립장식에서 확인되는 중간장식과 끝장식을 따로 주조, 조립한 것도 있고 전체를 하나로 조립 한 예도 있다. 귀걸이는 초기에는 드림장식이 없고 그 다음에는 형태가 간소한 원추 형 드립장식으로 발전된다. 그리고 금, 은, 동 세공 기법의 발전과 함께 드립 중간장식과 끝장식의 형태가 우아하고 화려해진다. 평안남도 대동군 덕화리 3 호 무덤에서도 금제 귀걷이가 출토되었다(그 립 8-19}. 그 무덤에서는 금귀걸이와 더불어 은비녀와 은머리꽂이, 은 띠고리 등이 출토되었다. 시기는 이른 시기로 보고 있다 .6) 강서군 태성 저수지 내부 지대의 고구려 고분에서 소량의 금제 귀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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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출토되었다(그립 8-20). 시기에 대한 구체적 기술은 없다 .7) 그 의 「集安 고구려 고고의 신수확」 8) 에서 발표된 내용에 따르면 출토 지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금제 귀걸이 (그림 s-21 a), 반지 (그 림 8- 2 2), 머리비너, 팔찌 등이 출토되었으며 그 중에 귀걸이와 반지의 수량이 많았다. 또한 금동제 신(그림 s-21b), 원형의 뚜껑 있는 사발(그 림 8-23), 청동제 도장(그림 8-24), 그리고 장군총 남쪽 흙더미에서 출토 된 쇠고리 (그림 8-25) 등이 있다. 특히 白玉製의 귀잔(그립 8- 2 6) 은 당시 백자 기술의 우수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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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21 금제 귀걸이, 금동제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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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무기 고구려의 철제 생산 도구로는 쟁기, 호미, 삽, 낫, 도끼, 작은 도끼 (일종의 작은 자귀), 마치, 쇠스랑(三枝 또는 三Jf,) 등이 있다. 여기에 대 한 화학적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 무기류의 발달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었다.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된 무기류는 활촉, 창끝, 창고다리, 긴 칼, 짧은 칼, 도끼, 札甲편 갈고리 등이 있다. 벽화에 나타난 무기로는 長兵器로 창(牙), 칼(刀), 短兵器로 환두대 도, 단도 등이 있으며 원거리용 무기로 활, 방어용 무기로 갑옷, 두구, 못 달린 신발, 말의 갑옷 등이 있다. 그 중 가장 유형이 많은 것은 화살 촉으로 그것들은 삼각형, 마름모형, 슴베가 가운데 달린 것, 뱀머리형, 새날개형, 부채형, 버드나뭇잎형, 바너형, 창손잡이형 등 30 여 종이다. 고구려 벽화고분에 나타난 무기류를 참고해 보자. 8) 고구려는 북방의 군사 대국이었다. 기원전 37 년 전부터 668 년까지 705 년 동안 군사 역량을 최대로 발휘하였다. 4 세기 말에서 5 세기 초까지는 고구려의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하였고 사상 • 문화가 가장 찬란하 게 발전되었으며 군사 역량은 상당히 강성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의 기 록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자체의 군사력으로 여러 차례 전쟁에 출병하 였는데 비려를 토벌하고 동쪽으로 부여를 정벌하고 백제를 정벌하였으며 왜구롤 몰아 내고 신라를 구하였다. 당시에 보병 • 기병 • 수군이 동원되 었는데 병력은 5 만 명이라고 하지만 대략 3 만 5 천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광개토대왕 시기에는 국가 상비군의 수가 7 만 명이 되었다 한다. 물론 수량, 소질, 또한 장비 등의 면에서 고구려 군대의 실력은 대단히 막강하였다. 고구려인의 민족성은 거칠고 호탕하며 성격이 흉하고 성질이 급하며
노략질을 좋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가무를 좋아하고 말 타고 사냥하는 장기를 가졌다. 고구려 벽화 중에 산림에서 사냥하는 장면이 많이 보인다. 무기는 고구려인들의 일상생활 중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 이었다. 언제나 무기를 가지고 다녔으며 죽어서는 사자 옆에 부장시켰 다. 지금까지 集安 경내의 유적과 무덤에서 출토된 금속 무기는 1 천여 점에 달하는데 철기가 가장 많고 청동기는 드물다. 고구려인들이 사용한 무기를 긴 무기, 짧은 무기, 던지는 무기, 방어 무기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1) 긴 무기 (1) 청동제 창 1978 년 5 월 太平鄕五道嶺溝門의 1 기 적석묘에서 3 점이 출토되었다. 그 것을 3 식으로 나누고 있다. 1식 : 표본 JTM 501-2, 둥근 기둥형 등대 (育), 버드나뭇잎형 날, 발 회목(끝부분) 끝의 양쪽에 있는 불규칙한 작은 구멍은 나무 손잡이를 고 정시키는 못구멍이다. 창산등대 양측에는 나뭇잎 문양이 있으며 낱 부분 은 예리하다. 길이 19.1cm, 날의 최대 너비 3.5 c m, 발잎의 길이의 비례 는 1 대 1 정도이다(그립 8-27a). 이러한 종류의 청동 창은 출토된 예가 많지 않으며 그 특칭은 압록강 • i單江 유역의 착민이 제작한 것이다. Il 식 : 표본 JTM 501-3 창신은 버드나뭇잎형이다. 원통형의 속 빈 등대 양측에 [!!)홍이 있다. 날 부분은 예리하고 한쪽이 파손되었다. 발회 목 양측에 작은 구멍이 있다. 길이 18.5 c m, 날 너비 발회목과 잎의 비 례는 1 대 2 이다(그립 s-27b). 11 식 : 표본 JTM 501-1, 형제는 Il 식과 같다. 다만 등대 양쪽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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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철제 창(~) 集安 출토의 철제 창은 상당히 많다. 대체로 11 식으로 나뉘고 있다. 1 식 : 표본 488- 1, 1963 년 도로를 만들 때 판분령에서 출토되었다 . 이곳은 원래 고구려 도성 부근의 군사 검문소이다. 244 년 관구검이 고구 려를 정벌할 때 이 일대가 격전지의 하나였다. 따라서 유적과 유물이 상 당히 많이 있다. 이 창날(牙葉) 부분은 넓고 아랫부분은 마름모형의 꼬 리를 가졌다. 창잎 단면은 마름모형이며 날끝은 예리하다. 발회목은 원 통형이다. 그 부분 끝은 〈 V 〉 자형의 손잡이를 끼우는 곳으로 되어 있다. 창신과 손잡이를 끼우는 부분의 접착 지점에는 한 줄의 [!!]현문이 있다. 길이 34.0cm, 날 너비 4.5cm, 손잡이 끼우는 부분과 잎의 비례는 1 대 1 에 접근된다(그립 8-28a). I 식 : 표본 488-2, I 식과 같이 판분령에서 출토되었다. 창날의 단면 은 마름모형이며, 날끝은 예리하다. 한쪽이 약간 마모되었다. 자루·룰 끼 는 곳은 원통형이며 그 끝부분은 경사진 몹날상이다. 전체 길이 26.5 cm, 날 너비 3.1 c m, 자루 부분과 날의 비례는 4 대 3 이다(그림 8-28b). 側식 : 표본 2323, 1986 년 기상대의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되었고 날은 좁고 길다. 단면은 마름모형이며 날과 자루 끼는 곳의 연결 부분은 뚜렷 한 변화가 없다. 자루 끼는 곳의 끝은 〈 V 〉 자형이며 거기에 작은 못구멍 이 있다. 길이 28.4 c m, 날 너비 1.8 cm, 자루 끼는 곳과 날의 비례는 3 대 2 이다(그림 8-28 c). IV 식 : 표본 JM Y 1, 1988 년 10 월 25 일 麻線鄕尙 家 溝에서 출토되었고 창날은 버드나뭇잎형, 단면은 마름모형, 원추형 자루, 목 부분에 8 줄의 세로선, 자루는 〈 V 〉자형이며 양측에 작은 구멍이 있다. 길이 37.2 c m, 날 너비 2.2 c m, 자루 너비 2.5cm, 자루와 날의 비례는 3 대 2 이다(그림 8 -28 d). V 식 : 표본 JW Yl, 1 986 년 6 월 13 일 환도산성 내의 동쪽 산언덕에서
mm川
출토되었고 형제는 W 식과 비슷하며 원통형 자루 목 부분에 세로선이 없 고 날은 직선이며 끝이 예리하다. 자루 끝은 말발굽형이다. 길이 25.8 cm, 날 너비 2.0cm, 자루와 날의 비례 3 대 2 이다(그림 8-28e). V1 식 : 표본 JYM 2322-1, 형제는 I 식 창과 같다. 자루와 날 사이에 하나의 둥근 고리가 끼워져 있다. 고리 지름 6.0cm, 두께 0.2 c m, 창 길 이 29.5cm, 날 너비 3.0 c m, 자루와 날의 비례는 5 대 4 이다(그립 8-28f ). Vl1 식 : 표본 1844-1, 창신 및 날 부분은 비교적 넓다. 단면은 마름모 형, 등대 양측에 각각 한 줄의 홈이 있다. 자루와 날의 상점 부분에 하 나의 둥근 고리가 끼워져 있다. 지름 6.0cm, 두께 0.2cm, 창 길이
40cm, 날 너비 4.6cm, 자루와 날의 비례는 4 대 3 이다(그림 8-28g ). ’冊식 : 표본 2324, 1986 년 기상대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되었고 창신이 가늘고 길다. 중간에 둥근 기등형의 등대가 있다. 양측 날은 얇다. 길이 46.8cm, 날 너비 2.4 c m, 자루와 날의 비례 1 대 1 이다(그림 8-28h). IX 식 : 표본 JM Y 2, 麻線鄕尙家溝에서 출토되었고 원추형의 창, 자루 상부는 창신이다. 단면은 원형, 하부는 원통형이다. 자루 끝은 〈 V 〉 자 형, 한쪽에 작은 구멍이 있다. 창 길이 34cm, 추경 1.2 cm, 자루 지름 2 . 4cm 이다(그립 8-28 i ). 이러한 송곳형 창은 1984 년 JYM 3105 가 이 미 출토된 일례가 있다. 형체는 작다. 창 길이 l1.8 c m, 추경 1cm 이다. X 식 : 표본 1653, 1975 년 8 월 국내성 남벽의 트랜치 (T5) 에서 출토되 었다. 창날은 납작한 버드나뭇잎형이고 자루 상부는 방추형이며 자루 끝은 파손되었다. 창 길이 15.
로 몹니가 있고 두 개씩 대칭되었으며 네 개의 이빨은 아래쪽에서 모아 졌다. 그것을 다시 나무 손잡이에 끼워 찌르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길이 33.3 c m, 이빨 길이 18cm 이다(그립 8-2 9 a). 이 무기를 단조하는 법은 먼저 두 개의 철사를 두드려 만든 다음 각 철사의 양쪽 끝을 두드 려 톱날처럼 예리하게 만든다. 다시 그것들의 중심을 굽혀서 네 개의 이 빨을 만든 후 아랫부분을 하나로 두드려 만들어 결합시킨다. (4) 삼지창 표본 1644-1, 橘林鄕地溝村에서 출토되었다. 사지창과 제작법이 거의 같다. 양쪽 이빨은 네모기둥상이며 머리 부분이 모두 안쪽으로 톱니처럼 만들어졌다. 가운데 한 이빨은 편방형이며 그 머리는 뱀머리상이다. 아 랫부분은 한 묶음으로 두드려 만들었다. 길이 29.5cm, 이빨 길이 16cm, 이빨경 1cm, 이빨 사이 거리 2-2 .4 cm 이다(그림 s-2 9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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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본 1644-2, 양치 존재. 상기한 것과 감이 출토되었으며 형제도 갇 다. 두 개의 이빨은 방추형이다. 옆이빨 끝은 안쪽으로 굽어지면서 돌출 되었고 작용은 톱니와 같다. 가운데 이빨 끝은 창상이다. 길이 28.4 c m, 이빨 길이 15. 5c m, 이빨 너비 1.3 cm, 이빨 사이 거리 2cm 이다. 삼지창과 사지창은 고구려의 긴 무기로서 출토된 예는 많지 않고 벽화 중에도 없다. 창 끝의 톱니는 찌른 후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상당 히 거칠고 무겁다. 삼지 또는 사지의 구조 원리는 같다. 아랫부분을 한 묶음으로 때려 만든 것은 쇠지루· 또는 긴 손잡이 쇠고리를 끼워서 찌르 거나 던지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실물은 없고 벽화에 있는 두 종류의 무기로 한 종은 긴 칼이다. 상대 를 찌르는 긴 무기이다. 通溝 고분군 삼실묘의 벽화 중에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제 1 실에 북벽성을 공격하는 그림에서 볼 수 있다. 몸에 갑옷 울 입은 기마의 두 장군이 성 밀에서 싸움을 독려하고 있는데 뒤에 긴 칼을 들고 있는 자가 있다 . 또 다른 그림으로 제 2 실 서벽에 한 사람의 무장을 갖춘 무사가 한 손에 긴 칼을 들고 다른 손에는 단도를 들고 있 으며 못 있는 신(針履)을 신고 있다(그림 8-30, 8-31). 그 밖에 긴 무기의 그림은 오회묘 4 호의 사잇길 양쪽에 있다. 화면의 수문장의 인물형상은 누수되어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오른쪽의 무사가 들고 있는 무기는 뚜렷한데 그 무기는 두 끝이 세끝두낱식으로 唐代의 무기 중 悟刀와 같다 한다. 그것은 살상용으로 고구려인들은 예맥계에 속하기 때문에 그러한 悟刀를 사용한 것이 가능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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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짧은 무기 (1) 청동 단검 표본 JTM 501-5, 1978 년 5 월 太平鄕 五道嶺 溝門의 고구려 적석 무덤 에서 출토되었다. 길이 34cm, 날 너비 2 . 8-3cm 이다. 검신을 보면 슴베 부위에서 날이 수축되었고 날은 일직선으로 약간 휘어졌다. 등대는 돌기 되어 6 릉형을 이루고 슴베는 둥근 기등상이다(그림 8-2 7 d). 상기한 단검 과 같이 출토된 劍錄(표본 501-6) 는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타원형의 원 통형이다. 정면에는 돌기된 가늘고 밀집된 삼각형 문양이 있으며 아랫부 분에는 하나의 청동 밥그릇의 장식이 있고 그 아래에는 네모난 구멍이 있다. 이는 무엇을 끼웠던 것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검표 등에는 가 늘고 조밀한 방석무늬가 있고 그 한가운데 네모 구멍이 하나 있다. 검표 길이 12cm, 구연 너비 4.8cm, 아랫부분 너비 3 . 6cm 이다. 이런 청동 단 검은 集安에서만 출토되는데 동북계 청동검의 B 형 II[식에 속하며, 그 연대 하한울 기원전 2 세기로 보고 있다. (2) 청동제 도끼(鐵形~) 청동제 단검과 같이 적석묘에서 4 점이 출토되었으며 2 식으로 나뉘고 있다. 1 식 : 거칠게 만들어졌다. 공부(墓츄, 자루 끼는 구멍) 아래에 한 줄의 뚜렷하지 않은 현문이 있는데 그것은 주조시 남은 것이다. 도끼몸에는 주조 흔적이 있으며 흰 날이 비교적 예리하다. 표본 JTM 501-4 는 높이 7.1 c m, 날 너비 6.4 c m, 공부 구연 6 . 6cmx3 . 1cm( 그림 8-27e) 이다. 표본 JTM 501-7 을 보면 형제는 전자와 같고 날 부분은 손상되었으며 높이 6cm, 墓部구연 5.6 c m x 2 . 2cm 이 다.
ll 식 : 제작은 I 식보다 정교하다. 도끼날이 마연되고 광택이 나며 날부 분은 예리하다. 표본 JTM 501-s 의 裂部 구연 아래에는 두 줄의 현문어 있는 높이 5.8 c m, 쌓部 구연 4cmx2.scm( 그립 8-27 f)이다. 표본 JTM 501-10 의 쌓部 구연 아래에는 한 줄의 돌기된 현문이 있으며 높이 5.8 cm, 날 너비 5.6cm, 墓部 구연 4.6cm x 2.7cm( 그림 8-27 g)이다. 청동제 도끼는 일찍이 集安, 通化, 潭江 등지에서 출토되었다. 형제는 상기한 4 점과 같다. 1985 년 10 월, 중국역사박물관 춘추전국 전시실에서 集安 출토의 1 점의 청동제 도끼와 1 점의 비파형 청동제 창이 전시되었 다. 전자는 상기한 몇 점과 같다. 다만 공부 아래에 한 줄의 사방격문 문양이 있었다. 비파형 창은 속빈 등대이며 자루 끝에는 작은 구멍이 있 었다. 1986 년, 通化縣 문화국 문물부에는 1 점의 石范과 사전이 소장되어 있 었는데 사진에는 동경범 1 점, 창범 1 점, 청동제 도끼범 8 점이 있었다. 그러한 진귀한 석범 등은 1983 년 通化縣 英戈布鄕小都嶺에서 출토되었다 고 한다. 청동제 도끼의 형제는 대체로 같다. 다만 공부 아래의 문양만 다른데 그것들은 중국역사박물관에서 출품한 集安 출토의 도끼와 같다. 1987 년, 吉林省문물고고연구소에서 通化縣 赤伯松古城을 조사할 때 1 점 의 청동 창을 채집하였는데 集安 태평향 오도령 적석묘에서 출토된 1 점 의 창과 같다. 潭江 유역의 集安, 通化, 潭江 등지의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 지역에는 금속 광물 자원이 대단히 풍부하며 동광은 오랜 역사를 가 지고 있다. 그곳에는 또한 연료도 풍부하며 야련 조건이 모두 구비되었 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대량의 청동기가 출토되었을 뿐 아니라, 같은 기 물의 석범도 출토되었다. 그러한 것은 북방 특칭의 청동제 창, 청동 검, 청동제 도끼, 나뭇잎 모양 동경 등이 潭江 유역의 토착민들에 의해서 만 들어졌음을 설명해 준다. 林演의 동북계 동검의 族屬문제 연구에 의하면 그 제작자는 당연히 예맥(고구려, 부여 포함), 진번, 조선 등 族의 조상
들이며, 集茨 通化, 海江 등지에서 출토된 동북계 청동 단검, 청동제 창, 도끼, 동경 및 석범에 근거하면 그곳은 예맥 계통의 고구려인들의 활동 중심지였음이 확실하고, 그러한 대량의 청동기는 고구려인들이 제 작한 것을 확인하였다. 연대는 기원전 250 년경 (戰國 말)으로 보고 있다. 그 2 점은 또한 고구려 건국 전과 건국 초기의 생산상황 및 사회생활 연 구에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3) 쇠칼(鐵刀) 쇠칼은 集安 고구려 고성, 관애(關溫 검문소 또는 차단성), 옛 싸움터, 무덤 등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고구려 벽화고분에서도 칼을 들고 있 는 고구려 남자 형상을 볼 수 있다. 쇠칼은 고구려 군사생활과 일상생활 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集安 출토의 쇠칼은 4 식으로 나뉘고 있 다. 1 식 : 표본 475, 1963 년 9 월 판분령 도로공사시 출토되 었다. 칼등은 직선이며 날 부분은 가볍게 경사되고 하부가 약간 넓다. 칼끝 부분은 등 쪽으로 휘어졌고 손잡이 부분은 날 부분보다 좁으며 사용시에는 칼 손잡 이에 가죽을 매었다. 길이 69.6 c m, 날 너비 2.5 c m, 손잡이 길이 8.5cm 이다(그림 8-32 a). Il 식 : 표본 JYM 3168-1, 1984 년 8 월 우산 묘구에서 발굴 중 출토되 었고 형체는 작다. 등과 날 부분은 초형이며 칼 손잡이와 날 부분의 접 촉 부위는 변화가 크지 않다. 길이 14.2cm, 날 너비 1.2 cm, 손잡이 길 이 3cm 이다(그립 8-32 b). 따식 : 표본 1589, 칼등은 직선이고 날 부분은 칼끝 방향으로 수축하 며 휘어진다. 칼손잡이가 뚜렷이 좁아지고 손잡이 끝은 더욱 좁아졌다. 나무 또는 가죽 손잡이에 끼워 사용하였다. 길이 35cm, 날 너비 2cm, 등 두께 0.6cm. 도신과 손잡이 비 례 4 대 3 이 다(그립 8-32 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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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식 : 표본 1637, 칼등 부분 양끝이 날 부분으로 향하여 휘어진다. 날 은 직선이고 칼몸과 손잡이의 구분이 어렵다. 길이 26.2cm, 날 너비 1.5 cm, 등 두께 0.3cm 이 다(그림 s-32 d) . 각종 칼은 Il 식 이 비교적 작고 일 상생활에 사용된 것 의에 다른 몇 종은 손잡이와 가죽을 동여매어 전쟁 과 사냥에도 사용하였다. m 식, W 식 등은 칼몸이 비교적 짧고 비수에 속하며, I 식은 전형적인 긴 칼이다. (4) 還頭大刀 集安 출토의 환두대도는 출토 수량이 상당히 많다. 원래 쇠칼의 종류 에 속하는데, 다만 그 손잡이 끝이 둥근 머리를 가졌다. 종류와 양식도 다양하며 4 식으로 나누고 있다.
1 식 : 표본 707, 등은 직선이고 날끝은 가볍게 휘어진다. 손잡이가 뚜 렷이 안으로 수축하며 날의 너비와 폭은 같다. 길이 59.5cm, 날 너비 2.5 cm, 몸체와 손잡이의 비례 3 대 1 이다(그림 B-32e). 표본 110, 날 부분이 약간 파손되었고 길이 73cm, 날 너비 3cm, 손잡이 길이 18.5 c m, 몸체 와손잡이의 비례는 4 대 1 이다(그림 8-32f ). Il 식 : 표본 880, 등은 평행 직선이며 환두 부분이 아래로 굽어져 있 다. 날 부분이 일정 하지 않고 손잡이 가 짧다. 길이 43.2cm, 날 너 비 2cm, 몸체와 손잡이의 비례는 5 대 1 이 안 된다(그림 8-32g ). 111 식 : 표본 2304, 1984 년 8 월 19 일 우산 묘구의 JYM 3296 호에서 출 토된 것으로 등은 평행 직선이고 날 부분은 가볍게 휘어져 있다. 손잡이 는 가늘고 길며 환두는 상당히 크다. 날 부분과 손잡이 부분은 분리되 었 다. 길이 26.7cm, 날 너비 1.8 cm, 손잡이 길이 10cm 이다(그림 s-32 h). W 식 : 표본 2364, 1982 년 10 월 16 일 下活龍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되 었 다. 등은 평행 적선이고 날 부분과 손잡이의 접촉 부분은 변화가 크지 않다. 길이 32cm, 너비 1. 8cm 아다(그림 8-32 i). 이처럼 날 부분과 손잡 이 접촉 부위의 변화가 크지 않은 환두대두는 비교적 많다. 표본 2326, 1985 년 9 월 10 일 禹山替道 북쪽 산언덕에서 출토되었다. 길이 58.5 c m, 날 너비 2.7cm 이다. (5) 단순창(三稷形鐵刺) 중국에서는 창이 삼릉형이라고 명명되었는데 창살이 단일하여 단순창 으로 부른다. 표본 2356, 1984 년 8 월 19 일에 장군총 북쪽에서 출토되 었 다. 찌르는 부분이 삼릉형이고 단면은 등변삼각형이다. 손잡이는 원형이 며 손잡이 끝은 버섯상이다. 길이 29.5cm, 너비 2.2cm, 창신과 손잡이 의 비례는 2 대 1 이다(그림 8-29c). 이 무기는 비수와 같아서 몸에 지니고 다니는 방어용이다.
(6) 세 작살 (三瓜器) 표본 464, 1963 년 9 월 동대자 유적에서 출토된 무기는 단제이다. 앞부 분에 3 개의 독수리 발톱형 작살이 있고 하부를 단타하여 결합시켰다. 작 살 길이 4.4 c m, 굽은 길이 4.5 c m, 자루 부분 8cm 이다. 세 작살면 너비 7.5cm, 살 거리 2.5cm 이다(그림 s-29d). 이 세 작살면 무기는 작고 끝이 예리하다. 짧은 손잡이에 끼워서 단거리의 적은 방어할 수 있다. 또한 일종의 등산용 기구이기도 하다. 단병기 중 수량이 가장 많은 것이 쇠칼과 환두대도이다. 쇠칼은 가볍 고 예리하며 청동 무기에 비하여 대단히 발전하였다. 集安 출토의 쇠칼 과 환두대도는 그 형제, 득칭 등이 洛陽 燒溝漢墓 및 滿城漢墓 출토의 것과 같다. 한편은 중국 中原에서 전래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고구려가 漢代의 무기의 영향을 받아서 제조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한 무기는 고 구려 중기에 사용이 되었다. (7) 投兵器 고구려인들은 오랫동안 큰 산 계곡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힘이 세고 싸움에 익숙하였으며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데 더욱 익숙하였다. 고구려 인들은 좋은 활과 화살을 제작하여 소위 衍弓을 제작하였다. 그것은 원 거리의 적을 살해하고 사냥물을 쏠 수 있는 무기였다. 고구려 벽화의 내 용에도 말 타고 사냥하는 장면이 많은데 集安 국내성 부근에만 10 여 폭 의 수렵도가 있다. 가장 전형적인 그림은 舞踊墓와 장천 1 호묘이다. 〈각 저묘〉와 〈무용묘〉의 부부의 연회 그림 중에 남자주인 옆의 상 위에 활과 화살이 놓여 있다. 集安 경내에서 출토된 대량의 고구려 화살촉은 종류 가 많고 양식도 특이하다. 그러한 것들은 중원과 기타 지역에서는 볼 수 없다.
금동촉 : 표본 103, 1960 년 2 월 集安 根庫院 내의 日西根場에서 출토 되었다. 금동촉은 모두 20 매 출토되었는데 형제는 갇으나 크기가 각각 다르다. 그 유물과 함께 白五耳杯(다섯 손잡이 달린 잔), 금동 뚜껑, 금 동 옷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그곳은 고구려 시기의 중요 한 건물지이다. 금동촉의 조형은 대단히 아름답고 선들이 유려하며 정교 하고 아름다운 예술품이다. 촉신은 도금되었는데 촉신의 상부는 버드나 뭇잎형이고 중간에는 능마루가 있으며 촉끝이 예리하고, 하부는 둥근 기 등형이다. 슴베 부분은 도금하지 않았으며 네모 기둥형으로 끝은 수축되 면서 뾰족하다. 그것은 대에 끼우기에 편리하게 되었다. 전체 길이 29.5 c m, 촉 길이 16.5cm, 슴베 길이 13cm, 촉상부 너비 1cm 이다(그림 8-33 a). 그러한 정교하고 아름다운 무기는 함부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왕 또는 왕실 귀 족의 패물로 보인다. 철제 숨베 동촉 : 표본 2193, 1980 년 9 월 과수원 속에 있는 皮溝門 채 석장에서 발견되었다. 일시에 여러 점이 출토되었으며 보존상태 완정하 다. 촉신은 청동질이며 삼릉형이고 길이 3.8cm 이다. 하부 철제 슴베는 원형대이다. 길이 20.2cm, 지름 0 . 3cm( 그립 8-33b) 이다. 이 유형의 화살촉은 중량이 크고 촉신은 짧으며 일반 활에는 사용 되지 못하고 궁노(路機發射用錄)에 사용되었다. 궁노는 戰國 시기 楚琴氏 가 발명하였으며 전국 시대부터 晉漢 시기의 전쟁 중 광범위하게 사용되 었다. 고구려에는 漢末(기원전 220) 경에 유입되었다. 소리나는 화살촉 (P』 鏡) : 표본 2163, 1979 년 환도 산성하의 적석묘 JSM 1590 호에서 출토되었다 . 슴베에 세 날개가 나와 있는데 그 날개의 윗면은 평탄하고 아랫부분은 수축되었다. 타원형의 구멍이 있다. 전체 길이 6.7cm, 날개 길이 5cm, 날개 펼친 길이 3.2cm 이다(그림 8-33 c). 촉머리는 납작하다. 살상력은 없고 날아가는 도중 소리를 내게 하는 작 용을 해서 경보 또는 신호에 사용된다.
철촉 : 集安 출토의 고구려 철촉은 수백 점이 되며 조형은 특수하고 양식이 복잡하다. 보존상태는 양호하며 비교적 전형적인 것은 23 식으로 나뉜다. 1 식은 삼각형이다. 표본 378-1, 촉머리는 첨예한 삼각형이고 중간에 등대가 있다. 전체 길이 9.6cm 이고 최대 너비는 2 . 1cm 이다(그립 8-33 d). Il 식은 마름모형 이다. 표본 378-2, 등대는 없고 전체 길이 10.4 c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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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비 2cm 이다(그림 S-33 e). 표본 378-3, 마름모꼴 날은 얇고 전체 길이 8.8 c m, 너 비 3cm 이 다. I11 식은 작살형이다. 표본 1031, 촉부의 작살형과 중간대는 기등형이 다. 길이 15cm, 촉머 리 길이 2.6cm, 중간대 길이 9.2cm, 슴베 길이 3.2 cm 이다(그림 8-33 f). 표본 1708-2, 전체 길이 13.2cm, 촉의 길이 1.5c m O] 다. W 식은 뱀머리형이다. 표본 112, 촉부의 뱀머리형과 중간대로 조성되 었으며 아래에는 維形의 슴베가 있다. 전체 길이 16.2 c m, 그 중 머리부 분 4cm, 중간대 7cm, 슴베 5 . 2cm 이다(그림 8-33 g). V 식은 삽형이다. 표본 107-2, 촉머리는 삽형이고 머리 부분은 납작하 다. 아래에는 짧은 대가 있고 거기에 원추형 슴베가 접합되었다. 전체 길이 12.2cm, 머리 길이 8.6cm, 머리 너비 3.5cm 이다(그림 8-33 h). V1 식은 삼각형의 삽형이다. 표본 2303, 촉부는 삼각형이고 납작하며 그 양각은 둥글고 촉부는 납작하고 슴베는 능추형이다. 전체 길이 18cm, 머리 너비 3.8cm 이다(그림 8-33 i). VII 식은 좁혀진 삽형이다. 표본 378-4, 촉부는 삽형이며 납작하다. 그 끝부분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좁아지다가 다시 넓어지고 그 중간에 등대 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사각형의 슴베가 접합되었다. 길이 14.5cm, 머 리 너비 3.8cm, 좁아전 곳의 너비 2.2cm 이다(그림 8-33j ). VIII 식은 촉머리끝 삽형이다. 표본 66, 촉머리는 삽형이고 납작하다. 촉 끝이 孤曲되었다. 전체 길이 13.1cm, 머리 너비 2.5cm 이다(그립 8-33 k). 표본 1783, 머리 너비 2.2cm 이다(그림 s-33 I). IX 식은 원형의 삽형이다. 표본 704, 삽머리는 원형이고 납작하며 그 아래에 슴베가 부착되어 있다. 전체 길이 8.7cm, 머리 너비 2 . 2cm 이다 (그립 8-33 m). X 식은 두공두삽형이다. 표본 538-2, 촉신은 납작한 삽형이고 머리 중 간에 빈 삼각형의 두공이 있다. 전체 길이 13.5cm, 머리 너비 3 .4 cm 이
다(그립 8-33 n). 표본 1961, 머리 일각이 손상되어 있으며 머리 중간에 하나의 둥근 구멍이 있다. 전체 길이 14.5 c m, 머리 너비 2.5cm 이다(그림 8-33 o) . XI 식은 작은 삽형에 중간대가 부착되어 있다. 표본 2303, 촉신은 작은 삽형에 중간대가 부착되어 있고 그 아래에 방추형의 슴베가 있다. 전체 길이 11cm, 머리 너비 0.8 c m, 중간대 0 . 5cm 이다(그립 8-33 p). X11 식은 부채형이다. 표본 107-1, 촉신은 납작하고 날 중간 아래에 홈 이 있으며 생선꼬리형이다. 전체 길이 11. 2 cm, 생선꼬리형 너비 4.2cm 이다(그림 8-3 3 r). 표본 1722-2, 전체 길이 9cm, 생선꼬리 너비 3.6cm 이다. 표본 1722- 3, 전체 길이 7.2 c m, 생선꼬리 너비 4cm 이다. XIII 식은 버드나뭇잎형이다. 표본 1078, 촉신은 버드나뭇잎형이고 중간 에 등대가 있으며 그 아래 네모 기등형의 슴베가 부착되어 있다. 슴베 밑부분이 휘어졌다. 전체 길이 11. 4 cm, 날 너비 1.5 cm 이다(그립 8-33s). XN 식은 버드나뭇잎형에 중간대가 연결되어 있다. 표본 1165, 슴베는 촉신과 중간대에 의해서 조성되었으며 그 아래 방추형의 슴베가 부착되 었다. 전체 길이 11cm, 촉신 길이 2.6cm, 중간대 길이 4.6cm, 슴베 길 이 3.8cm 이다(그립 8-33t ). 표본 80, 버드나뭇잎형으로 비교적 길고 슴 베는 짧다. 전체 길이 13.2 c m, 촉신 길이 5.8cm, 중간대 길이 6cm, 슴 베 1. 4cm 이다(그립 8-33 u). XV 식은 긴 검형이다. 표본 1599, 촉신이 검과 같다. 앞부분이 약간 넓고 등대는 높으며 꼬리 부분에 슴베가 부착되어 있다. 전체 길이 16.6 cm, 그 중 촉신 길이 12.1cm, 슴베 길이 4.5 c m, 날 너비 0.8cm 이다(그 립 8-33 v). XVI 식은 송곳형이다. 표본 JSM 19-1, 촉신은 4 릉 추형이고 가볍게 완곡되어 있으며 아래 원형에 슴베가 부착되어 있다. 전체 길이 13.4 cm, 촉 길이 9.6cm, 슴베 길이 3.8cm 이다(그립 8-33w). XVIl 식은 능추형에 중간대가 부착되어 있다. 표본 2309, 촉신은 작은
4 릉추이고 둥근 중간대로 조성되었으며 그 밀에 방추형의 슴베가 부착되 어 있다. 전체 길이 12.8 c m, 촉 길이 9 . 6cm 이다(그림 8-33 x). l' VIII식은 쌍날형이다. 표본 446, 납작하고 한쪽이 부러졌다. 너비 0.9 cm. 날과 날 사이의 거리 4cm, 전체 길이 7cm 이다(그림 8-33y ). XIX 식은 삼릉형이다. 표본 426, 촉신은 삼릉잎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한 잎이 부러져 있다. 전체 길이 B.Bcm, 촉 길이 5.2 c m, 슴베 길이 3 . 6cm 이다(그립 8-33 z). XX 식은 복숭아잎형이다. 표본 2025, 촉신은 복숭아잎형이고 양쪽에 날이 있으며 그 아래에 방추형 슴베가 부착되어 있다. 전체 길이 13. 5 cm, 복숭아잎 길이 7.5cm, 너비 3cm 이다(그림 8-33 a). XXI 식은 큰 복숭아잎형이다. 표본 912, 촉신은 큰 복숭아잎형이고 중 간에 등대가 있으며 그 아래에 슴베가 부착되어 있다. 전체 길이 23cm, 복숭아잎 길이 17cm, 너비 2.9 c m, 슴베 길이 9cm 이다(그림 8-33 /J). m 식은 창머리형이다. 표본 1738, 표준의 긴 창형이다. 조형이 정교 하고 대칭적이며 중간에 등대가 있고 양측 날이 예리하다. 전체 길이는 13.4 c m, 너비 1. 4cm 이다(그립 s-33 r). 이상의 여러 종류의 촉은 소리나는 촉을 제의하고 출토 수량이 상당히 많은데 특히 철촉은 십여 점에서 수십 점까지 출토되었다. 비록 동일 종 류에 속하는 것도 크기는 다르다. 3) 방어 무기 방어 무기는 주로 갑주(두구 • 갑옷), 방패 등으로 적의 공격을 방어하 고 장비의 상해를 방지시킨다. 集安고구려의 벽화 중에 갑옷을 입고 두 구 쓴 무사형상, 갑옷 입은 전두 말도 보인다. 다만 아직까지 완전한 두 구 갑옷이 출토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적과 무덤에서 산발적으로 철갑편
이 출토되었는데 그것은 벽화 중에 그려진 것과 완전히 같다. 그 의에 고구려인들은 산 속에 거주하여 눈 쌓인 계절이 오래도록 계속되었기 때 문에 사병들이 산과 언덕으로 편리하게 올라가게 하기 위하여 특별히 쇠 못이 달린 신이 많이 나왔다. 그것들은 방어 무기에 속한다. (1) 철갑편 集安 경내 통구 고분군, 환도산성, 고건축 유적, 판분령 古戰爭터 및 상당수의 검문소(또는 차단성) 등에서 철갑편이 많이 출토되었다. 그것은 대부분 직사각형이다. 그의 邊角은 말각 또는 완만한 원형이다. 다수가 납작하고 얇으며 소량은 가볍게 휘어졌다. 그것들은 대략 어깨 부분에 부착한 것들이며 갑편 가장자리에 작은 구멍이 있어서 그것을 가는 실 또는 가죽끈으로 연결시켜 갑옷을 만든다. 한 줄의 [!!]현문이 있는 두 가 지로 구분시킬 수 있다. A 식 甲片: 표본 1979-2, 갑편이 짧고 작다. 길이 3.7 c m, 너비 2.4 cm, 가장자리에 4 組의 작은 구멍이 있다. 모두 9 개이다(그림 8-34a). 표본 1797-1, 둥근 각의 긴 형이다. 길이 6.2cm, 너비 2.4 c m, 주위에 6 세트의 12 개의 구멍이 있다(그립 8-34b). 표본 920, 넓고 긴 형이며 한 쪽이 파손되었다. 길이 9.2 c m, 너비 3.6cm 이며 주위에 6 세트의 12 개의 구멍이 있고 중간에 1 개의 구멍이 있다(그림 B-34c). 표본 1793-3, 직사 각형으로 하부가 약간 완곡되어 있다. 길이 7.9 c m, 너비 2.3cm, 가장자 리에 17 개의 구멍이 있다(그립 8-34d). B 식 갑편 : 표본 93-1, 길고 하단은 원형이다. 가장자리에 한 줄의 [!!] 현문이 있다. 길이 9.4 c m, 너비 2.5cm, 가장자리에 14 개의 소원공이 있 고 중앙에도 구멍이 하나 있다(그립 B-34e). 표본 99-2, 길고 중간에 가 볍게 수축이 되어 있다. 상부는 완곡하되 한쪽이 파손되어 있으며 가장 자리에 한 줄의 [!!]현문이 있다. 길이 11. 6 cm, 너비 2.6cm, 9 개의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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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잔존한다(그립 8-34 f) . 표본은 93-3, 길고 하부는 약간 둥글다. 세 변의 가장자리에 [!!]현문이 있다. 길이 7.6 c m, 너비 3.1cm, 주위에는 6 세트의 12 개의 구멍이 있다. 한가운데에 하나의 작은 구멍이 있다(그림 8-34g ), 표본 99-4, 사다리형으로 하부의 한쪽이 약간 파손되어 있고 가 장자리에 한 줄의 [!!]현문이 있으며 주위에 4 세트 8 개의 구멍이 있다. 길 이 6.3 c m, 윗너비 1.9 cm, 아랫너비 2.7cm 이다(그림 8-34h). (2) 쇠못신(鐵針履) 1 식은 표본 1801, 1976 년 환도산성에서 출토되었다. 1 점은 발 앞부분 으로 말발굽형이며 가운데는 비어 있다. 1 단을 격하여 하나의 쇠못이 있
고 주위에 모두 6 개의 못이 있다. 길이 12cm, 너비 10.2 c m, 쇠못 높이 5 .4 cm 이다(그림 B-3 0a). 다른 한 점, 뒷발 부분의 것, 형제상 마치 앞부 분 같다. 뒷부분은 못이 두텁고 짧으며 가운데 속이 비어 있는 사각형이 다. 위에는 5 개의 못이 있다. 길이 너비 모두 9cm, 못 높이 1cm 이다 (그립 s-30b). 사용시 가죽끈으로 발등에 묶는데 이는 눈 위를 걸을 때 나 등산시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는 용도로 쓰였던 것으로 지금의 아이 젠에 해당된다. 이 아이젠을 최초로 고구려가 발명하였을 것으로 본다. Il 식은 표본 1625, 1973 년 3 월 만보정 묘구 JW M 151 에서 출토되 었 다. 모두 4 점으로 바로 두 켤레의 신에 사용된 것이다. 앞뒤 모두 가운 데가 바어 있는 말굽형이다. 앞발용은 길이 11. 5c m, 너비 9.8 c m, 그 위 에 5 개의 둥근 못이 있다. 못 높이 1.4 cm, 뒷발용의 길이 11cm, 너비 9.2cm, 그 위에 4 개의 원추형의 못이 있다. 못 높이는 1. 4cm 이다(그림 8- 30c). 이 두 쌍의 쇠못신은 제작이 정교하여 환도산성에서 출토된 것보 다 아름답고 적당하다. 연대는 상당히 늦다. (3) 청동제 못신 현재까지 集安 경내의 7 점의 고구려 금동제 못신이 출토되었다. 그 중 5 점은 비교적 완정하고 형제도 대부분 같은데, 다만 크기가 다르다. 표 본 2992, 1959 년을 전후해서 마선구 고구려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신 바 닥의 길이 32.5cm, 굽 너비 8.7 c m, 원래 35 개의 못이 있었다. 못 길이 3.3cm 로 현재 吉林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표본 117, 1960 년 麻 線 猪場 부근의 1 기 고구려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신 바닥 주위에 데가 있 고 그 위에 한 줄의 실을 꿰는 작은 구멍이 있다. 신의 바닥 길이 32cm, 중간 너비 11. 5c m, 원래 35 개의 못이 있었다. 27 개가 현존하고 있고 못 길이 3.6cm 이다(그립 8-3l a). 표본 115, 1959 년 3 월 26 일 우산 묘구의 1 기 고구려묘에서 출토되었
다. 신 바닥의 길이 32cm, 중간 너비 11cm. 원래 22 개의 못이 있었다. 현존 19 개의 못이 남아 있다. 못 길이 1. 2cm 이다(그림 8-31 b). 표본 3109-1, 1986 년 7 월 18 일 우산묘의 JYM 3109 적석묘에서 출토되었다. 신 바닥의 주위에 테가 있다. 변의 가장자리에 직사각형과 원형의 구멍 이 있는데 이것은 가죽끈 또는 가는 끈으로 묶는 구멍이다. 신 바닥의 길이 31cm, 중간 너비 12cm, 원래 23 개의 못구멍이 있고 지금은 2 개가 남아 있으며 못 길이는 3 . 2cm 이다(그림 8-31 d). 이러한 금동 못신의 작용과 쇠못신의 작용은 같다. 다만 금동신은 각 신이 완정하고 정교하며 쇠못신보다 더욱 고귀하다. 만약 쇠못신이 사병 용이라면 금동신은 고구려의 귀족 군인의 우두머리가 겨울철에 사용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통구 12 호묘, 삼실묘, 장천 2 호묘 벽화 중에 고구 려 장군과 무사가 쇠신을 신은 내용이 보인다. 출토된 쇠신은 여러 가지 사항으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어느 것은 부식되어 못이 짧게 남 아 있는 것도 있다. 금동제의 신은 파손 균열, 못 등이 빠진 흔적이 보 이는데 그것은 사용했기 때문인 것 갇다. 어느 신은 마모가 가볍고 또 어느 것은 자주 신지 않아서 부식된 것도 있다. 우산 묘구의 발굴 중에 방단계제 적석묘 JYM 묘실에서 한 쌍의 금동쇠신이 출토되었는데 이 신도 파손이 심했다. 못신은 사자의 다리 아래에 있었다. 4) 맺는 말 금속 병기 중 절대 다수가 철제 무기였으며 청동 무기는 국소 부분을 차지한다. 그것은 고구려의 군사 무기는 주로 철제 무기였음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한 가볍고 예리한 무기는 고구려 군사의 역량을 부단히 증강 시켰다. 그것은 또한 고구려의 건국 후 영토를 신속하게 확장시켜 주는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고구려의 무기는 주로 현지에서 제작되었다. 1977 년 가울, 集安城에서 북쪽으로 10km 지점의 高台村에서 趙國의 청동 단검 1 점이 출토되었다. 검신의 양면에 양각의 명문이 있다. 이 청동 단검은 戰國 말년(기원전 250) 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보다 이론 시기의 청동기는 아직 발견된 바가 없다. 즉, 적어도 기원전 250 년경에 중원의 청동기 제조 기 술이 源i I, 압록강 유역에 전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원에서 영향을 받은 금속기술에 의해 고구려인들은 청동기를 생산하 고 제조하였다. 集安,通化, 潭i l 등지에서 출토된 청동 단검, 청동창, 청동제 도끼는 현지의 고구려인들이 제조하였다. 이와 동시에 출토된 나 뭇잎무늬의 동경, 청동제 도끼도 당연히 고구려인들이 제작한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1983 년 通化, 小都嶺에서 출토된 청동 창범, 동경범, 청동제 도끼범 등은 이를 알게 해 주는 최고의 증거물이다. 그것은 또한 고구려 건국 전후에 일정한 기간 동안 청동기 시대였음을 추측케 한다. 고구려의 무기 중 수량이 가장 많은 것은 철촉이다. 그 다음은 철창과 쇠칼이다. 중요한 무기는 철창, 쇠칼 등이다. 그것들은 중국의 漢代의 것과 거의 같다. 아직까지 고구려 시대의 야철 유적과 철제 공구 생산의 작업장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대량의 유물 출토에 의하면 고구려는 야철 지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治鑄 및 철생산의 수준이 모두 상당히 발전되 었음을 알 수 있다. 철기가 발전한 몇 가지 요건을 살펴보자. 우선 고구 려 건국 전후 고구려인들은 漢의 현도군의 고구려현 일대에서 주로 생활 하였다. 따라서 한대의 철공구와 생산기술은 자연스럽게 전입되었다. 그 일대는 철광의 매장량이 풍부하고 각종 연료가 충족되었으며 내의적인 조건이 잘 구비되어 있었다. 따라서 야철 및 철기 생산은 다만 시간문제 였다. 이러한 우월한 자연조건과 의래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빠르게 대량 생산 규모의 철기 작업장이 만들어졌다. 둘째, 고구려의 철창과 쇠칼 등 무기는 중원의 것을 많이 모방하였다. 셋째, 고구려의 철촉은 종류가 다 양하고 양식도 특이하다. 예로 물고기꼬리형, 부채형, 잎이 둥글고 중간
이 좁혀진 형, 두공의 삽형, 능추형에 중간대가 있는 철촉 등은 모두 고 구려 국가의 특유한 것이다. 漢 • 晉 때에 중원과 북방 국가 내에 그러한 종류는 없다. 그것은 고구려 철기 생산의 발전을 설명할 뿐 아니라 고구 려 무기 생산의 대표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고구려 생산 공구 와 생활 용구 중에 독특한 특색의 기물이 있다. 대량 출토된 쇠아궁이, 철제 발등자, 철제 안장, 철제 망치, 철제 고리, 그리고 조형이 특수한 큰 쟁기 등은 모두 고구려 자체 생산의 철기이다. 그것들은 고구려 공인 의 총명과 기지가 충분히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대량의 철 제 병기, 철제 공구는 전쟁과 생산, 생활에 사용되어 고구려 국가 정치, 경제, 문화의 발전, 사회의 진보에 가장 중요한 추전력이 되었다. 고구려의 병기는 전쟁에도 사용되고 생산에도 사용되는 이중의 역할을 하였다. 방어성과 공격성 두 가지 무기가 모두 전쟁에 사용되었다. 고구 려는 서기 3 년에 국내성으로 천도하여 이곳에 425 년간 있는 동안 무수히 많은 전쟁을 하였다. 유명한 싸움은 28 년 遼東軍의 공격을 방어하여 환 도성을 고수한 점이다. 244 년에는 幽州刺史가 고구려를 정벌하였고 342 년에는 모용황이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광개토대왕 때에는 대군을 이끌 고 碑麗를 토벌하고 부여를 정벌하고 백제를 공격하였으며 신라를 구출 하고 왜구를 쫓아 보냈다. 각종 각양의 무기가 모두 중요하게 사용되었 다. 무기는 전쟁 중 소모되기도 하고 전쟁을 통하여 개조되기도 하였다. 천년 전에 무기의 선진 여부는 전쟁의 승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고구려인에게 무기는 수렵생활에도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고구려의 거주지는 주로 큰 산과 깊은 계곡에 있었고 소택지가 많지 않아 농사는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수렵이 경제생활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集安의 20 기 고구려 벽화묘 중 10 여 폭이 산림에서 사냥하는 장면이다. 그 중 무용총의 북벽 수렵도, 장천 1 호의 전실 북벽의 몰이사냥도는 광대하고 기세등등하다. 수렵자가 사용한 칼, 창, 활과 화살촉에 대해서는 이미 상술하였다 .10)
1) 魏存成 「高句麗馬具的發見與硏究」, 《 北方文物 》 第 4 JIJj, 1991, pp. 18-27. 2) 박진 욱, 「고구려의 마구에 대하여」, 《 조선고고연구 》 3, 1986, pp. 2-7. 박창수, 「고구려시기의 마구일식이 드러난 지경동 무덤」, 《 력사과학 》 3 기, 1977, pp. 46-48. 3) 궁성희, 「삼국시기 금관에 대하여」, 《 조선고고연구 》 3, 1992, pp. 9-16. 4) 조대일, 「고구려의 금속공예의 발전과 장공인들의 재능에 대하여」, 《 조선고고 연구 》 4, 1988, pp. 36-39. 5) 이일남, 「고구려 귀고리의 형태와 기법」, 《 조선고고연구 》 3, 1991, pp. 31-36. 6) 정세왕, 「덕화리 3 호무덤 발굴보고」, 《 조선고고연구 》 1, 1991, pp. 22-25. 7) 전주농, 「강서군 태성저수지 내부지대의 고구려무덤」, 《고고학자료집》 3, 1963, pp. 189-205. 8) 吉林省考古硏究所 • 集安縣博物館,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稷」, 《 文物〉〉 第 1 期, 1984, pp. 38-45. 9) 耿鐵華 • 阿英, 「從高句麗壁 盡 中的戰爭題材看高句麗軍除與戰爭」, ((北方文物》 第 체月, 1987, pp. 23-27. 10) 耿鐵華 • 孫仁杰 • 週勇 「高句麗兵器硏究」, 《高句麗硏究文集 3>, 1 993, pp. 199- 223.
제 9 장 맺는말 시작 말에서 고구려 고고학의 정리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서술하였다. 고고학사에서 일본인돌의 중국 동북 지역과 북한지역에 대한 연구 내 용을 제시하였다. 일본인들의 연구로서는 성으로서 환도성과 국내성이 제시되고, 통구성 의 위치, 그곳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산성자산성 그리고 석분으로 장군 총, 태왕릉, 천추묘 등과 토분으로 오괴릉, 모두루총, 황문총, 무용총, 각저총, 오회분 및 사신총, 삼실묘, 산연화총, 귀갑총, 미인총, 우견리 대묘(중묘), 간성리 고분(연화총), 쌍영총, 대총, 수렵총, 감신총, 성총 (별무덤), 천왕지신총, 개마총, 호남리 사신총, 남경리 사신총, 호남리 제 1 호분, 내리 제 1 호분, 고산리 1 호분과 9 호분 등이 제시되었다. 고분의 특색도 천체묘사, 사신, 풍속, 건축 의장과 장식문 등 다섯 가지로 나누 고 있다. 그 의 通溝 부근의 고분의 특징 등도 구별하였으며 북한 지역 에서 조사된 고구려 관계 조사와 보고서 내용도 살펴보았다. 고구려의 위치와 영역에 관해서는 孫進己 등이 정리한 내용이 가장 타 당하다고 생각된다. 손진기 등은 시대별로 고구려 영역과 시기, 행정구
역 등을 상세히 취급하였다. 북한 리지린 등이 제시한 내용도 살펴보 았다. 孫進己 등은 중국적인 입장에서 서술하였지만 대단히 구체적인 실 례까지 제시하고 있다. 죽, 후한부터 당대까지 고구려의 위치 • 영역 • 행 정구역을 자세히 디루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성지의 위치를 遼寧省과 吉林省으로 나누어 제시한 것은 대단히 훌륭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성지에 대한 고고학적인 조사 내용도 살펴보았다. 먼저 고구려 초 • 중 기 도성에 관한 것으로 홀승골성의 명칭이 제시되지만 초기의 도성으로 서는 오녀산산성이 유력하다고 보며 또한 고성자고성도 제시되고 있다. 중기 도성으로서는 산성자산성, 위나암성, 환도성, 국내성, 또는 集安 현 소재의 평양 등이 제시되고 중기에 이르러서 산성과 평지성(평원성) 이 구별되고 있다. 발굴 조사된 산성으로 초기의 산성자산성 조사 내용이 있다. 산성자산 성은 3 년에 시축되어서 198 년에 완성되었다. 혹구산성은 고구려 초기 산 성으로 보고 있으며, 나통산성은 3-4 세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태자성의 시작 연대는 4-5 세기 고구려 중기로 보고 있다. 북한의 장안성 은 552 년에 축조되고 평 양성은 586 년에서 668 년까지 존속된 도성으로 보 고 있다. 건축물로서 사지는 북한의 금강사와 정릉사, 그리고 제단으로서 集安 동대자 유적 그리고 건물 구조로서 요동성 무덤 벽화의 성곽도 등이 있 다. 또한 장수산 일대에서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안학궁터의 도시 구획 의 리방도 확인되었다. 비석으로서 《吉林省志》에 소개된 광개토대왕릉비 의 비문을 그대로 제시하고 王健群의 광개토대왕릉비 발견과 탁본에 대 한 내용을 소개하였다. 고구려 석인상으로서 吉林, 集安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제시하였는데 이는 고구려 조각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그리고 고구려 고 분에 세운 석비 2 기도 함께 살펴보았다. 고분은 중국과 북한에서 모두 폭넓게 연구되어 있다. 중국의 李殿福이
고구려 고분에 대한 유형 분류를 시도하였다. 발굴된 고분 중 시기별로 集安 칠성산 96 호, 우산 68 호 (4 세기 중엽), 전산자 부근 적석묘(서진, 4 세기), 우산, 산성하, 칠성산, 마선구 등(서진 남북조 : 4-5 세기), 봉토묘 로서 노호초 (6 세기), 동대파 고분 1 기의 적석묘는 전기 1-3 세기, 봉토묘 는 5-7 세기 등으로 시기를 나누어 보았다. 4 세기경부터 7 세기에 속하는 상당수 알려진 일반 무덤은 정식 발굴되어 보고된 것은 많지 않다. 상기한 李殿福의 고구려 고분 유형 분류에 대한 논문 의에 魏存成이 다시 고구려 적석묘의 유형과 발전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고구려 벽화고분은 북한 학자들이 80 기가 있다고 하고, 김원룡은 63 기 가 있다고보고 있다. 集安 고구려 벽화고분에 대한 초보 검토로 李殿福의 연구를 살펴보았 다. 그는 고구려 사회의 현상을 고분벽화를 통하여 살펴보고 있다. 사회 풍속도, 도안화, 신선도(사신도) 등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앞의 2 종은 고구려 전기 (3 세기 중엽에서 4 세기 중엽), 중기 (4 세기 중엽에서 5 세기 중엽), 후자는 후기 (5 세기 말에서 6 세기)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전 기 • 중기의 벽화고분으로는 통구 12 호분, 산성하 332 호분, 삼실묘, 장천 1 호분, 마선구 1 호분 등이 있으며, 후기의 것으로는 사신묘, 오회분 4 • 5 호분 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벽화고분은 전기의 인물풍속도, 중기의 인물풍속도와 사신도, 후기의 사신도벽화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북한의 고분 관계를 일괄해서 살펴보았다. 전기 • 중기의 고분으로는 평양역전 2 실분, 안악 1 • 2 • 3 호분 동이 있는데, 안악 2 호와 3 호는 전 기, 안악 1 호는 중기로 보고 있다. 약수리와 복사리 그리고 고구려 벽화 무덤에 나타난 인물풍속화, 구름, 연꽃무늬 등의 내용들을 주제별로 살 펴보았다. 그 의 동명왕릉, 태성리 저수지 고무덤 등을 간략히 요약하였 다. 또한 황해남도 평정리 벽화무덤에 대해서는 시기에 대해서 언급이 없고 벽화 내용 중 산수도가 확인된 것은 벽화 양식의 최초의 예로 보고
있다. 순천시 동암리 벽화무덤은 벽화 자체가 완전히 박락된 것을 복원하여 제시하고 있다. 이 무덤은 일본인들이 〈검산고분〉이라고 칭하였다. 평안 남도 평원군 운룡리에서도 소규모의 벽화가 발견되었다. 시기는 밝히지 않았으나 사신도의 존재로 보아 후기에 속할 것으로 생각된다. 끝으로 후기에 속하는 사신도의 변천 과정에 대해서 한인호가 잘 정리 하였다. 일반 무덤으로 덕화리 3 호 무덤에서는 금속 유물(금제 • 은제 등)이 출 토되었는데, 그 시기는 봉토석실분 중 이른 사기로 보고 있다. 낙랑구역 일대의 고분 조사시에는 고구려 봉토석실묘의 발전 과정이 잘 나타났으 며, 자강도 초산군 운평리의 발굴 결과 이른바 전방후원분과 관계된 고 분이 확인되었다.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 고구려 무덤은 안악 4 호로 명명하면서 안악 3 호의 가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북한의 정찬영은 고구려 고분의 유형과 발전 관계를 제시하고 있으나 중국의 李殿福과 魏存成의 이론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고고학 발굴과 고구려 벽화에 대하여 李殿福의 「고구려 초기의 물질문 화」에 대한 글과 耿鐵華의 「사회경제」 관계의 논문을 살펴보았다. 고구려 토기의 초보검토를 耿鐵華 등이 철저하게 분석하였다. 토기의 수량은 많지 않으나 유형은 고구려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북한 의 리광희는 토기의 문양 분석, 유약 바른 질그릇과 그·발전 과정 등을 간단히 요약하고 있다. 고구려 와당에 대한 연구는 李殿福이 정리하였다. 명문와당은 고구려 문화사 연구의 중요한 내용의 하나가 된다. 금속은 도금류, 장식품, 소수의 무기류 등이 있으며, 금속 공예 기술 이 대단히 뛰어나다• 특히 마구의 발전은 고구려 금속 공예를 대표한다. 이것에 대한 분석을 중국의 魏存成이 잘 정리하였다. 북한의 박진욱도
고구려 마구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다. 금속 공예의 대표적인 몇 점이 상기한 「集安 고구려고분 발굴 간보」 ( 集 安縣 문물관리소)에 소개되고 있다. 귀걸이의 발전 관계를 간략하게 이일남이 제시하고 있다. 종합하면, 고구려의 위치와 영역은 앞으로 더 검토되어야 하겠지만 동 북지구 遼寧省과 吉林省 두 곳에만 약 100 기의 성이 있으며, 산성 특히 도성에 대한 연구도 앞으로 더 필요할 것이다. 북한의 도성과 성곽들은 모두 6-7 세기 늦은 시기의 것들로서 중국 동북 지역의 성곽 축조 기술의 축적된 기술이 잘 나타나고 있다. 고분은 集安通溝 한 곳에만 10,000 기 이상이 있으며 벽화고분에 대해 서는 북한 학자들의 80 기 설이 제시되고 있다. 건축물은 드물게 잔존되어 있다. 산성과 도성 내의 소수의 건축물 의 에 극소수의 사지, 건물지와 탑지가 잔존되어 있다. 또한 북한 지역의 도성 내의 도시 • 里 냐方 등이 확인되었고, 중국 지 역의 나라 제단인 동대자 유적 등도 잔존되어 있다. 질그릇의 수량이 얼마 안 되지만 보통 토기 의에 유약 바른 査들은 아 름다운 여자를 연상시켜 주고 섬세하고 완벽한 금속 예술은 고구려의 문 화 수준의 척도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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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명 유적 소재지 발굴연도 출판물명
유적명 유적 소재지 발굴연도 출판물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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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보 71
기 가무백시 529 가장리벽화무덤 759 간두시 603 간란식 777 간장 842 감실 568 갑옷 788 갑주 850 강서군 733 강서큰무덤 757 개마무덤 879 거형 666 건궈 595 검문소 904 검산고분 924 격자 583 격자무늬 824 결가부좌 611 경물 588 경선 787 경철화 846 후 862 고구려 5 부 768 고구려자 689 高 臺 村 916 고분편년 793 谷民 843
곡선 571 곡식저장그릇 802 곡철상 530 공부 902 공성도 520, 783 공양인 612 공양인물도 528 銀洞 805 과하 867 과하마 869 관대 565 관애 904 관야정 535 관정 598 광개토대왕 623 굉돌 546 교량형 803 구근흑선 588 구름무늬 546 구상 806 구신 667 구연부 743 구축 585 국인 761 군무 592 군사무기 916 궁남 608 궁성희 846 권초영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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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갑 647 그립무늬 825 글자무늬 825 금동귀걸이 882 금동신 916 금속공예 847 금제단추형 676 금제화관엽 674 기단돌각담무덤 752 기마전 848 起法兒 596 기생 865 기악 605 기인 556 冀縣 690 기형 794 긴창 788 桂黃色 619 김원룡 696 김육불 842 꽃술 662 끝장식 886 L 나무구멍 605 나팔형의 병 743 낙락구역 924 남두칠성 640
남자상 636 남포시 741, 883 네귀도호 774 네귀호 566 네모서리 648 네손잡이호 669 노끈무늬 819 녹색 831 녹포 652 籠冠 635 누르기법 815 능격문 590 능추체 562 E: 다래 855 다록색 831 단검 902 단순창 906 단처마 523 단철인 785 대동구역 733 대들보 524 대려 764 대성구역 751 대성산성 820 대접 804 大朱仙溝 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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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리무덤 689 도발산 808 도시 925 도유 535 도철문 519 독무 602 돋험법 819 돌각담무덤 752 돌사발 772 돌쩌귀 585 동경 812 동맹대회 518 동명왕무덤 880 동물무늬 818 동수묘 723 동이 767 동탁 863 동태자 803 두개골 663 두광 613 두꺼비 649 두루마기 697 둥근입술 807 드립장식 884 들보 727 등자 856 藤之木 856 띠고리 873
2 련강향 12 호 876 로산동 749 리 925 □ 마구 852 마구간 576 마름모꼴 654 마름무늬 818 마선구 801 마선구 1 호 827 마선구 1 호고분 784 麻線猪場 915 마차바퀴 785 마포 582 만달산 823 만보정 562, 798 만주국 569 말각석 619 말각지탱식 685 말띠 871 말띠드리개 858 말발굽형 897 말안장 579 망문 647 매사냥 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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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원 547 머리비녀 890 멧돼지 782 면목 541 명문와당 791 명판 594 모두루총 696 모용인 688 모용진 851 모용황 688 목관 662 몰이사냥 608 못 있는 신 900 못자리 564 묘실 657 묘실바닥 531 묘지 525 무기 893 무녀 596 무늬 815 무덤무지 746 무덤안길 751 무덤칸 737 무사도 544 무악도 574 무용총 580, 780 무인 682 묵선 660 문광 583
문물 862 문악리 1 호무덤 822 문축 659 물질문화 760 t::t 바리 772 박사로 624 박진욱 790 박창수 790 박충상 668 반구형 885 반동광 668 반신인물화상 840 반예서체 837 발걸이 849 방 925 방어무기 894 방울 858 방패 911 방형감실 627 배송지 867 個刀 900 白五耳杯 908 백제 877 백착 640 백학 616 백호 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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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회 531 버드나뭇잎형 911 베개 806 벼루 811 벽사 526 벽화배치 628 별자리 756 병 792 보리수 652 보병 848 보석 644 보 595 보요관 863 보정 539 보주 615 복도 537 복사리 고분 698 복식 581 본계소시 851 봉토묘 923 부경 765 부뚜막 829 부장품 557 북두오성 547 붉은기둥 577 碑麗 918 비천도 682 비천상 614 비파 723
人 사각형무늬 817 사냥꾼 606 사다리꼴 642 사방격 602 사신도 755 사아식 564 사영총 629 사지창 898 사직 841 사천왕상 729 四頁塚 519 사회경제 776 삭조 625 산성 925 산성하 795 산성하 332 호 551 산수도 747 삼도 626 삼실묘 530 삼지창 899 삼화토 747 삽 893 삽형 910 상가 764 상장용 814 새 621 石范 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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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축쌍실묘 582 선비 763 선조 571 성루 524 성문 783 星宿圓 704 세공기법 888 세단선 660 세작살 907 세칸무덤 758 소감 679 소나무 728 소노부 762 소주 865 손진기 922 손치기 704 솥 812 쇠못 914 쇠못신 914 쇠벽고리 557 쇠칼 905 수놈 578 수렵 779 수렵도 678, 780 獸面文 841 수미좌상 611 手製 786 순노부 762 슴베 908
시루 798 시상대 631 10 월제천 765 식용기 833 신당서 신라전 869 신라 877 신라 천마총 866 신빈 773 신선그림 725 십형동엽 667 十谷民造 840 쌍사신 550 쌍영총 701, 879 쌍인동자 589, 614 쌍창 545 씨름 604 。 아가리 820 아궁이 533 아이젠 915 안교깔개 870 안악 1, 2, 3 호 673 안악 1 호분 676 안악 2 호분 679 안학동 749 알칼리질 830 암놈 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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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면 641 暗文 808 압록강 776 앙련도 577 야철인 637 약수리고분 698 약수리벽화무덤 844 양감 644 양기 761 양맥 763 양산 540 양서 518 兩坡7J( 573 兩坡 7k 式 538 어깨 804 어로 779 언치 855 여와상 525 역사 544, 631 연꽃그림 620 연꽃무덤 758 연단 521 연도 657 연속도안 672 연유약 829 연호문 836 연화관 543 연화총 701 예서자명 836
예서체 555 오현금 603 오회분 4, 5 호 526 옷깃 576 옹기 792 옻칠 787 와훈목 2 호 830 완함 618 왕릉 731 왕망 766 왕승례 629 왕자 555 왕팔색자 770 요령성 922 요동성무덤 755 용호동 1 호무덤 844 우두선인 655 羽毛 649 우산묘구 799 우차도 522 우포 637 운룡리고분 736 원숭이 598 원형돌기 834 원후첨 663 위병 627 위서 760 위정금 839 위존성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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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모서리 568 유곽무관 775 유리명왕 774 鬪鄕 地溝村 899 유약 791 幽州刺史 918 유하 773 유형 672 輪製 786 衣錄 541 이운도안 659 이전복 537 이족 601 李賢 768 인물 566 인물풍속도 923 인발기법 888 인신용미 648 일두삼승 784 일상 621 일월성신 527 일월신 636 林潔 903 x: 자강도 883 자루 897 자석 543
작법 584 雀替 590 잔 794 참복습격 782 장각 618 장고 654 장군총 921 장막늘임무늬 823 長尾鳥 550 장수산성 부조 832 장식 671 장식품 847 장언원 528 장창 898 장천 1 호 622 장천 2 호분 656 재갈멈치 852 在銘博出土壇 674 쟁가비 777 低溫柚 814 積石爲封 656 전각도 678 戰國 895 전둔 15 호무덤 832 전안교 870 전인상 612 전작 522 전전 622 전촌 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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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각 584 절대연대 655 절두방추형 552 절풍 542 점무늬 817 점토 809 점판암 737 정부 569 정원 626 製輪仙人 523 趙國 917 조대일 919 조정 565 족장제도 580 좌불 623 주벽 538 주서 620 주악선인 520 주악천인 617 주작 645 주축선 731 줄무늬 821 지경동고분 871 鎭 690 秦 895 진파동무덤군 728 진파리 1 호무덤 757 진항 839 집안현성 517
天 창날 896 창방 641 蔡誤 767 책구루 766 천계주악인 628 천상세계 697 천왕지신묘 921 천왕지신무덤 759 천의 613 천장고임 734 천추묘 837 철갑편 913 철도 658 철선묘법 727 철제창 896 청기와 592 鹿堂 586 청동기 559 청동물리개 876 청동제 창 894 청룡 549 靑馬 556 청보리 벽화무덤 744 청암동 토성 880 청자호 805 초두 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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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부 910 側高 561 側視 561 측실 552 치마끝 594 칠성산 96 호 826 칠성산묘구 799 구 큰돌문 642 E 탑형 881 태령 4 년 833 돕날무늬 821 동구 517 통구 12 호 567 통바지 601 두각 885 두구 579 奎頭 604 두병기 907 두창 882 퉁소 617
고: 파도문 533 판금(도금) 886 팔각성 834 팔찌 890 팔청리벽화무덤 725 편직 586 평문경 669 평안남도 744 평양역전 673 평저 807 평정리고분 736 평행고임 734 표주박형 775 풀잎무늬 824 풍청리 7 호 826 -lo 하해방대대 873 하호 521, 843 하활룡 795, 906 한숙화 789 盆式視 811 합임흥복 539 항토 531 행랑 597 행렬도 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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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 881 헝깊띠 551 혁대고리 666 혁대장식 559 현무도상 609 형제 793 호랑이 606 호자 809 虎踏式 589 혼강 770 화살 607 화살동 542 화영문 615 화영상 609 환도산성 913 환두대도 545, 905 환인 M15 850
황룡 756 황유도토 658 황해남도 746 회전무늬 729 灰調子 625 회화 529 회화예술 624 획문 771 효민둔 Ml54 호 849, 866 后林子溝 581 後趙石虎 838 휘장 540 휴암동 822 黑田源次 567 黑點花 573 吸 m 616
최무장 경희대 중국문학과 졸업 국립 대만대학 고고인류학과 대학원 졸업(석사) 프랑스 파리 1 대학 고고학과 대 학원 수료(고고학 박사) 현재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및 박물관장 저서 『한국의 구석기문화』 『중국의 고고학』 고구려 고고학 ll 대우학술총서 • 인문사회과학 86 1 판 1 쇄 찍음 -1995 년 7 월 30 일 1 판 1 쇄 펴냄 -1995 년 8 월 15 일 지은이一―崔茂藏 펴낸이 __- 朴孟浩 펴낸곳-(주)민음사 전산조판―—동국전산(주) 출판등록 1991 . 12.20. 제 16-490 호 서울 강남구 신사동 506 강남출판문화센터 5 층 515-2000( 대표전화) 515-2007( 팩시밀리) 값 13,500 원 Prin t e d in Seoul, Korea © 최무장, 1995 역사, 삼국시대 /KDC 911 . 032 ISBN 89-374-3086-x 94910 89-374-3000-2 (세트) * 지은이와 합의하여 인지를 붙이지 않습니다.
대우학술총서 (인문사회과학) 1 한국어의 계통 검방한 46 어원론 김방한 2 문학사회학 김현 47 조선의 서학사 강재언 3 商周史 윤내현 48 한국음악학 이강숙 4 인간의 지능 황정규 49 中國言語學 문선규 5 中國古代文學史 김학주 50 스포츠 심리학 6 日本의 萬葉集 김사엽 류정무 · 이강헌 7 現代意味論 이익환 51 原始儒敎 검승혜 8 베트남 史 유인선 52 전쟁론 김홍철 9 印度哲學史 길희성 53 삼국시대의 漠字音 10 韓國의 風水思想 최창조 유창균 11 사회과학과 수학 이승훈 外 54 베르그송의 철학 검형효 12 重商主義 김광수 55 아날학파 김응종 13 方言學 이익섭 56 자유주의의 원리와 14 構造主義 소두영 역사 노명식 15 외교제도사 김홍철 57 국민투표 구병삭外 16 아동심리학 최경숙 58 한국서지학 천혜봉 17 언어심리학 조명한 59 조선통신사 이원식 18 法社會學 양건 60 明末淸初思想 배영동 19 海洋法 박준호·유병화 61 한국의場市 이재하홍순완 20 韓國의 庭園 정동오 62 고려시대의 后妃 정용숙 21 현대도시론 강대기 63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 22 이슐람 사상사 김정위 검욱동 23 동북아시아의 岩刻畵 황용훈 64 韓國의 服飾美 김영자 24 자연법사상 박은정 65 정신신경증 이현수 25 洪大容 評傳 김태준 66 한국住居史 洪亨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