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장 경희대학교 중국문학과 졸업 국립 대만대학 고고인류학과 대학원 졸업 (석사) 프랑스 파리 1 대학 고고학과대학원 수료(고고학 박사) 현재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및 박물관장 저서 『 한국의 구석기문화』 『중국의 고고학 』
고구려 고고학 1
고구려 고고학 I
시작말 「고구려 고고학」이라는 제목으로 고구려의 위치 • 영역 • 성지 • 고분 등 에 관한 그간의 연구들을 정리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느꼈다. 중국의 학 자들은 고구려의 영역을 압록강 유역 일대로 축소하려고 시도하고, 북한 의 학자들은 대단히 확대된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고구려 고고학은 중 국 동북지구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해야 하며, 중국 동복지구의 遼亭 省과 吉林省 내의 고고학적 결과는 철저히 분석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 면 중국 학자들의 고고학적 발굴 보고서나 연구 논문들을 참고하지 않고 고구려 고고학을 논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고구려 민족은 기원전 1 세 기, 동북지역에서 나라를 세워 국토를 확장하고 고구려 정치, 경제, 문 화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한반도 북부의 평양으로 수도 를 옮긴 것은 장수왕 15 년 (427) 에 이르러서다. 고구려는 평양에서 241 년 간 존속하였다. 〈 고구려 고고학 〉 은 엄격한 학술적인 접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정치적 인 입장이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북한 학자들의 주장은 실망스러 운 부분이 많았다. 물론 중국 학자의 연구가 객관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국내에 중국 학자의 입장을 소개한다고 해서 그들의 대변자 역할 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이웃의 학문을 폭넓게 연구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언 제나 가지고 있다. 학문의 순수성과 객관성은 국내에서도 물론 문제점으 로 제기되고 있다. 아직까지 학연이나 지연의 무리가 많은 쪽이 그 위세 를 학문상에 내세우고, 애국적인 입장을 강조하여야만 학자 같은 인상을
주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고구려 위치와 영역 그리고 성곽 • 고분 • 광개토왕릉비 발견 경위 • 토 기 • 금속 등에 대한 전반적인 자료를 정리하여 보았다. 물론 북한 자료 도 가능한 많이 참고하였다. 자료를 정리한 후 또한 불만이다. 중국 동 북지역의 고구려 전기 • 중기의 문화와 북한지역의 고구려 후기 문화를 어떻게 접목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단히 어려웠다. 예를 들면 북 한의 학자들이 고구려 벽화고분이 지금까지 약 80 기가 발견되었다고 주 장하고 있는데 그 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 책을 쓸 수 있도록 배려하여 준 대우재단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원고와 도면을 정리하여 준 대학원생 최형수 군, 컴퓨터를 처음부터 끝 까지 쳐준 사학과 4 년 조준용 군과 기타 여러 가지 일을 도와 준 사학과 4 년 오민정 양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한다. 1995 년 8 월 10 일
고구려고고학 I
차례 시작말 제 1 장 고고학사 -- 1 제 2 장 위치 및 영역 -- 29 1 25-220년(後漢) 고구려족 및 5부의 분포 지역 35 2 後漢 시기 고구려 왕국과 도성 39 3 後漢 시기 고구려 왕국과 國內 지구 40 4 後漢 시기 고구려 왕국의 도성 -- 위나암성 43 5 고구려 왕국이 국내 지구 의에 통치하던 주요 지구 45 6 220-264(三國) 부여 고구려 등의 거주구 48 7 고구려의 疆域과 王城 49 8 고구려 新都 -- 平壤城 52 9 265-420(晉代) 부여 및 고구려족의 분포 54 10 고구려 도성 56 11 581-617년(隋代) 고구려의 행정단위 71 12 618-906년(唐代) 고구려족의 분포 73 13 각 史睿에 보이는 唐代 동북의 고구려 성 8414 성지 90
제 3 장 성곽 -- 103 1 초기의 도성 103 2 국내성 119 3 산성자산성 142 4 혹구산성 158 5 나통산성 172 6 태자성 188 7 集安 남도와 북도상의 관애와 성보(차단성) 201 8 북한의 대성산성 208 9 평양성 212 제 4 장 건축물 -- 219 1 금강사지 228 2 集安 동대자제단 239 3 평양성 의성 안의 리방 2464 안학궁터의 리방 247
5 장수산 일대의 집터 251 6 광개토대왕릉비 255 7 광개토대왕릉비의 발견과 탁본 259 8 석인상 285 9 集安 通溝 2基의 石碑 286 제 5 장 고분 -- 301 1 고구려 고분 연구 302 2 轉山子 부근의 적석묘 322 3 칠성산 96호 • 우산 68호 적석묘 340 4 우산·산성하·칠성산·마선구 고분군 발굴 355 5 상활롱촌 • 하활룡촌 고분 발굴 372 6 적석묘의 유형과 발전 388 7 노호초 고분 449 8 동대파 고분 458 9 운평리 제4지구 적석묘 47610 덕화리 3호 봉토묘 483
11 낙랑구역 일대 고구려 봉토석실묘 485 12 창매리 돌칸흙무덤 490 13 오국리 무덤 493 찾아보기 497고구려고고학 Il 차례 제 6 장 벽화고분 -- 517 1 集安 고구려 고분의 기초 검토 517 2 삼실묘 530 3 산성하 332호 • 983호와 만보정 1368호 551 4 통구 12호분 567 5 장천 1호분 581 6 오회분 4호와 5호 628 7 장천 2호분 656 8 평양역전 안악 1 • 2 • 3호 673 9 덕흥리 688 10 약수리 고분 • 복사리 고분 • 팔청리 고분 • 동명왕릉 • 태 성리 저수지 고무덤 698 11 동암리 벽화무덤 • 룡흥리 고분 • 운룡리 고분 • 평정리 고분 • 안학동 • 로산동 일대 고분 736 12 사신도 755 13 벽화를 통해서 본 고구려 초기의 물질 문화 760 14 벽화를 통해 본 사회경제 776
제 7 장 토기 791 1 토기의 초보 연구 791 2 토기의 무늬 815 3 유약 토기 • 유약 바른 질그릇의 변천 826 4 명문와당 833 5 부뚜막 843 제 8 장 금속공예 -- 847 1 마구 847 2 금관 878 3 귀걸이 880 4 무기 893 제 9 장 맺는 말 -- 921 발굴보고서 927
참고문헌 935 찾아보기 937
제 l 장 고고학사 일본 학자들의 고구려 연구 성과, 중국의 발굴보고서, 그리고 북한의 자료들을 수집된 범위 내에서 정리해 보자. 먼저 일본인들이 조사, 보고한 내용을 살펴보면, 일본 문헌 『 通溝 』 에 기 록되기를 고구려 都城은 일반적으로는 조선 평안남도의 평양으로 알려져 있지만, 漢代에서 唐代까지를 전후하여 약 700-800 년의 역사를 가전 고 구려가 시종 그곳에만 도성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전 • 후 兩漢의 시대 (기원전 1 세기-서기 2 세기) 고구려 본거지는 중국 동북지역의 遼寧省 관내 桓仁의 부근에 있었다. 桓仁의 옛이름은 懷仁이며 그곳은 압록강으로 유 입되는 潭江의 중류 지역이다. 三國, 西晉, 東晉의 시대 (3 세기 - 5 세기)를 中代(중기)라고 부르는 기간에 國都의 소재지는 桓仁의 동쪽, 같은 通化 省(구 안동성 중부)의 관내가 되는 압록강변의 集安이었다. 평양을 수도로 한 것은 下代(후기)에 속한다. 죽 평양은 南北朝의 시 작부터 唐fl]에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5 세기 -7 세기 중영)의 수도였다. 集安은 압록강 중류의 西岸에 위치하고 있으며 桓仁, 通化, 臨江 등과 함께 압록강 북변의 요지의 하나이다. 속칭 通溝는 洞溝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集安縣의 通溝에는 고구려의 古者 B, 광개토대왕의 비석, 太王陵, 장군총 등의 무덤이 있다. 通溝에 대한 학술조사는 1884 년 일본 육군 포병 대위 酒句景明이 官命
울 받아서 조선 및 중국을 여행하던 도중에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通 溝에 이르러 광개토대왕릉비의 탁본을 구해 온 것이 처음이다. 그 후 1889 년, 橫井忠植이 몇 년에 걸쳐서 그 내용을 편집하여 아시아협회 발 행의 《雜誌倉餘錄 》 제 5 집에 실었는데 그 제목은 「高句麗碑出土記」였다. 通溝의 巨碑 및 장군총에 대한 견문을 세상에 소개한 것이다. 그 내용에 의해서 菅政友의 「高句麗好太王碑考」, 那河通世의 「高句麗古碑考」, 三宅 光吉의 「高句麗古碑考」 등이 제시되었다. 城으로는 丸都城과 國內城이 소개되었다. 즉, 通溝 평야는 환도성(일 명 국내성)의 소재지였다고 제시되었다. 鷄兒i I( 通 溝 河) 하류의 동쪽, 압 록강 중의 伐登島와 상대되는 평지는 通溝 평야의 중심지이다. 넓은 그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성곽을 通溝城이라고 부르며, 1902 년 集安縣이 세 워지면서 縣城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通溝 지방의 유적은 일본인 鳥居가 조사하였다. 그의 조사에 따르면 通溝城울 중국인들은 陵安城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고 通溝城의 북서 쪽으로 약 3297m 지점에 山城子라 부르는 山城이 있다. 고구려의 고분으로 장군총, 태왕릉, 천추묘 그리고 土壇으로는 五盛 壤 牟頭婁塚 등이 있는대, 그 중 모두루총은 下羊魚頭(부락명 ; 압록강의 對岸 상류는 上羊魚頭라고 칭함)의 산언덕에 산재된 10 여 기의 작은 토분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 주위에 環文塚, 東岡의 舞踊塚,角抵塚, 五盛 壤의 여러 토분 및 四神塚 등이 있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고분, 즉 石塚과 土壤의 연대는 장수왕 15 년 (427) 울 전후하여 그 이전을 석총시대, 그리고 평양 천도 이후의 시대를 토분 시대로보았다 .I) 『通溝』 하칸에는 벽화고분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소개된 벽화고분은 무용총, 각저총, 삼실묘, 사신총, 모두루총, 및 환문총 등이다. 특히 벽화는 석총 내부에는 없고 토분 내에 있다고 보았다 .2) 상기한 바와 같이 일본인들의 고구려에 대한 연구는 일제 강점기에 활 발히 진행되었다. 漢武帝가 세운 四郡의 하나인 眞番郡은 樂浪郡의 북쪽 압록강 바깥의 {冬佳江 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 유역은 前漢의 昭帝의 始元 5 년에 고구려인의 홍기로 점거, 폐지되었다. 고구려 의 발전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그 후 고구려는 後漢 말에 公孫氏의 공 격 때문에 {冬佳江의 구도를 떠나 현 通溝의 환도성으로 옮겨 갔다. 西晉 말에는 遼東 방면과 낙랑군을 병합했다. 그리고 19 대 광개토대왕 때 영 역이 확대되었으며, 장수왕 때 도읍을 현재의 평양으로 옮겼다. 불교는 17 대 소수림왕 2 년에 전해졌으며, 소수림왕 5 년에 省門寺를 세 우고 그 후 伊弗蘭寺롤 세웠으며, 광개토대왕 2 년에는 九寺를 평양에 세 우고 문자왕 때는 金剛寺를 세웠다. 당시 국도였던 通溝와 평양 부근에는 都城址, 寺址, 土壤 등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에 평양 부근의 평안남도 평원군 덕산면 원 오리 사지 등이 발굴되 었으며 평 양 청 암리 사지가 1938 년에 발굴되 었다. 분묘의 예로는 당시 滿洲國 集安縣 通溝 장군총 그리고 낙랑의 고분으 로 정백리 21 호 등이 있다. 1) 고분 고분은 集安, 通溝의 평지에 있는 山城子, 輸樹林子와 평안북도 위원 군, 초산군 등의 압록강 유역과 평양 부근에 대단히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고분은 일본인 關野 등에 의해서 조사되었다. 평양 부근의 고 분은 朝鮮古蹟硏究會의 小場, 小泉 등이 조사했다. 특히 평안남도 강동 군 일토달산 고분에서 금속제 유물과 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通
溝평야는 濱田, 池內, 梅元등과 藤田, 小場 등이 조사했다. 고분은 봉토의 성격에 따라서 石塚과 土塚으로 구별되는데, 벽화고분 은 토총에서 보인다. 벽화가 그려진 室은 石室이며, 가장 보편적인 구조 는 정사각형 또는 사각형이다. 거친 돌을 쌓거나 하나의 돌을 세워서 벽 울 만들고, 그 위에 2 단 또는 3 단의 굉돌(中 : 重頂石, B : 持送)을 놓고 그 위의 네 귀퉁이에 삼각형의 株角을 쌓고 정상에는 天井頂石(뚜껑돌) 을 놓았다. 그리고 벽 위에 백회를 바르고 벽화를 그리거나 직접 그림을 그렸다. 벽화내용은 당시의 풍속, 생활, 건축술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제 시해 주고 있다. 당시에 알려진 벽화고분 사신총 滿洲國 通化省(현 吉林省) 集安縣 通溝, 현실 네 벽의 사신도 각저총 상동 소재, 전실 안의 기둥, 상량, 수목, 남자 인물상 무용총 상동 소재, 전실 안의 기둥, 창방, 말안장, 남자 인물상, 지붕 삼실총 상동 소재, 연도 안의 장막, 인물행렬도, 환문도 환문총 상동 소재, 현실 네 벽상의 환문(각벽), 인물도 散蓮花塚 상동 소재, 현실 네 벽상의 만개한 연화문 龜甲塚 상동 소재, 현실 네 벽상의 연화문을 배치시킨 귀갑문, 당초문 美人塚 상동 소재, 부인 입상 모두루총 상동 소재, 주실 모두루묘명 遇賢里大墓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현실 네 벽, 동벽, 남벽 입구 등의 사신 인물도 遇賢里中墓 상동 소재, 현실 네 벽상의 사신도 田里 古墓(蓮華塚) 평안남도 강서군 진림면 간성리, 주실의 三角狀봉 황, 기린, 천인상 등의 두공(네 귀퉁이) 등
雙稽塚 평안남도 룡강군 지운면 안성리, 연도의 牛車, 기마인물상, 남 녀 입상(동서 양벽), 雲 紋(천장), 力士像(연도에서 전실) 大塚 상동 소재, 주실 네 벽 사신도 狩狼塚 평안남도 룡강군 대대면 매산리, 현실 네 벽의 玄武, 장막, 남 녀 좌상, 産馬亂 北斗星文(북벽), 靑龍, 기마인물도, 日像(동벽), 白 虎, 狩臘文, 月像(서벽), 朱雀(남벽) 籠神塚 평안남도 룡강군 신령면 신덕리, 전실 네 벽상의 마차바퀴, 인 물상(남벽), 무릎 꿇은 공양도, 신상, 시자, 장막, 화영문, 인물상(동 벽 방감), 두공(네 귀퉁이), 王字문양 星塚 상동 소재, 현실 네 벽의 사신, 연화문, 그 의 小인물상(북벽), 기 둥, 두공(네 귀퉁이) 天王地神塚 평안남도 순천군 북창면 북창리, 전실의 家屋狀, 龍文像 鐘馬塚 평안남도 대동군 시족면 노산리, 현실 . 네 벽상의 사신도 湖南里 四神塚 평안남도 대동군 시족면 호남리, 현실 네 벽상의 사신도 南京里 제 1 호분 평안남도 대동군 시족면 남경리, 현실 안의 唐草文의 黑 線및붉은색흔적 內里 제 1 호분 평안남도 대동군 시족면 내리, 현실 네 벽의 사신, 飛雲 (동벽) 高山里 제 1 호분 평안남도 대동군 임원면 고산리, 연도 안의 기둥(柱), 기타 고산리 제 9 호분 상동 소재, 현실 네 벽 기둥(네 귀퉁이), 사신도 이들 고분의 특색은 다섯 가지로 나뉘는데, 天體 묘사, 사신, 풍속, 건축 意匠 단순한 裝飾文 3) 등이다. 상기한 24 기 벽화고분은 중국 동북 지역과 북한 지역에 있는 것들이 다. 그 중에 集安縣 通溝에 있는 고분이 9 기, 북한의 것들이 15 기이다.
일본인 藤田亮策은 상기한 내용보다 좀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 通溝 』 상, 하권에 대한 부분적인 보완을 제시하고 있다. 通溝 분지의 고분, 수 천의 大小項丘가 사각형의 기초 위에서 세워졌다. 석총은 예의 없이 사 각형이며 2 기, 3 기가 병렬되어 직사각형의감防址를 남기고 있다. 토분은 원형을 찾기가 어렵지만 봉토의 혼적에 의하면 사각형으로 보 고 있다. 즉, 고구려 고분의 기본형은 토분과 석총 모두를 사각형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남도 각지의 고분은 소형 토분 의 경우는 원형에 가까운 것이 있지만, 토분은 반드시 方臺狀으로 낙랑 고분과유사하다. 滿洲에서 사각형분의 현저한 예는 間島省 龍井 水南村의 고분군으로, 토분으로는 사각형과 원형이 있지만 석총은 직사각형의 기단을 가전 3 단, 4 단의 층계의 형태를 가진 것이 많다. 고구려 고분 석실을 크게 3 종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CD 橫穴式石室墓 (고구려 고유 분묘형식), ® 사각형 折上式 석실 또는 궁륭식 석실, ® 四方평행고임 (B : 持送) 隅重式 석실 등이 그것이다 : a. 西周 제 229 호분 서강 제 110 호분(감총) 서강 제 113 호분(산연화총) 삼실총 b. 通溝 부근의 대소 석총 東岡의 大王陵 장군총, 臨江塚, 西岡의 北大陵(溫和堡中大塚), 南大陵 (西大塚), 麻線溝의 千秋塚, 西大塚 등의 7 기는 거대한 고분이다. c. 通溝 부근의 大石陵의 특징 첫째, 능의 주위에 礎石울 깔아서 일정한 陵域울 정했으며, 둘째, 능
의 背面에 그와 같은 小石陵을 병렬하여 陸塚시켰고, 셋째, 능의 부근에 건물지가 있다. 이러한 것은 능의 제사 또는 능에 관계된 건물이다. d. 通溝 부근의 土築大陵 서강 제 51 호분은 서강 고분군 중 가장 크다. 오회분은 서강 제 51 호 대릉의 서쪽에 5 기가 있는데 方壇形 토분이다. 서강 제 62 호분 사신총은 부근에 서 강 62 호, 57 호, 61 호와 60 호 등 4 기 가 있다. 북한에서 위의 土築大陵과 비교되는 것으로는 평안남도 강동군 마산면 의 속칭 皇帝墓(漢墓), 대동군 시족면 호남리의 사신총, 강서군 강서면 삼묘리 三墓 대동군 대보면 서기리 大墓 등이 있다. 석총과 토분과의 관계를 살피기 위하여 通溝 평야의 고분 분포를 고찰 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 1 구 東江 동부(임강총), 서부(대왕릉), 북부(장군총) 제 2 구 西江 북부(北大石陵), 중부(오회분 기타), 남부(通溝省 北大陵) 제 3 구 尾溝 동부(河西浦), 서부(!要尾溝) 제 4 구 麻線溝 남부(천추총) , 동부, 서부(西大塚) 제 5 구 山城子溪 북부(南門外), 중부, 남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東江은 3 대 석릉 중심, 석총이 대부분, 西江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 며 고분 수량이 제일 많다. 석총과 토분이 교차, 조성되었다. 고구려 고분은 그 위치의 土質에 따라서 석총을 만들거나 또는 토분을 만들었다고 보았다. {冬佳江 유역, 桓仁(懷仁) 부근에서는 토분이 대부분 울 차지하고 槍樹林子방면에서는 석총이 많다. 복한 쪽에도 滑原, 楚山
방면에 작은 석총이 많고 高山鎭 부근에는 토분이 많다. 만포 상류 文岳 里 및 그 對岸 평지에는 토분, 석총이 공존하고 있다 .4)濟藤忠이 1943 년 제시한 위의 벽화무덤 9 기 의에 통구 12 호와 오회분 5 호가 더 추가되어 1949 년 이전까지 11 기의 벽화고분이 알려졌다. 1949 년 이후 중국 학자들이 발견한 것은 9 기이다. 마선구 1 호, 오회분 4 호, 산성하 322, 983 호, 만보정 1368 호, 하해방 31 호, 장천 1, 2 호, 우산하 4 호 등이다 .5) 현재 중국 동북지역 벽화고분은 모두 20 기이다. 고구려 고분은 遼寧 桓仁과 吉林 集安 두 곳에 집중되어 있다. 桓仁 경내 潭江 兩岸 고구려 무덤의 조사는 1956-1959 년 사이에 실시되어 그 곳에서 모두 750 기가 발견되었다. 그 후 그 중에서 44 기를 발굴하였다. 集安 경내의 고구려 무덤은 老嶺山의 嶺前과 嶺後에 분포되었다. 그 중에서 무덤이 집중된 곳은 嶺前이다. 1962 년 嶺前 무덤이 가장 밀집된 通溝를 조사하여 하해방, 우산하, 산 성하, 만보정, 칠성산과 마선구 등 6 개 지구로 나누었다. 그곳 무덤에 대한 일련 번호는 모두 11,300 여 기이다. 그 중에 발굴된 무덤은 마선구 1 호묘, 우산하 41 호묘와 68 호묘, 오회분 4 호묘, 만보정 78 호묘와 983 호 등이다. 동시에 과거에 발견한 상당수의 봉토석실 벽화묘에 대한 보호 조치를 취하고, 그 중 오회분 5 호와 통구 12 호 등은 다시 정리와 실측을 하였 다. 삼실묘 제 1 실 묘 내의 진흙 속에서 인골편과 토기편이 거 발견되었다. 동시에 槍林河유역과 압록강 서안의 大高力墓子,小高力墓子, 朱仙溝, 長 )II 등지의 무덤 등이 조사, 발굴되었다. 장천 묘군에서는 1 호와 2 호의 봉토석실 벽화묘가 발굴되었다. 그 의 嶺後의 고구려 무덤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어 여러 유형의 무덤 160 여 기를 발견하였다. 상기한 두 곳 의에 遼寧 撫順 등지에서 소형의 고구려 무덤들이 발견되었다. 桓仁 지구는 고구려가 수도를 丸都로 옮기기 이전의 정치 중심지였다. 그곳에서 발견된 무덤은 모두 積石墓이다. 절대 다수가 가공되지 않은 石境로 축조되었다. 潭江 東岸의 고력묘자촌 부근의 무덤군은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이다. 그 무덤군은 남북 방향으로 연속적으로 놓 여 있는데 그 길이가 lOOOm 나 된다. 무덤은 대 • 중 • 소 등의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모두 지상에 자연 석괴를 이용하여 묘실을 쌓았다. 대형 적석묘로는 15 호묘가 대표적이다. 그 묘는 2 개의 묘실을 가졌으며 기단 남북 길아가 약 13m, 동서의 너비가 10m, 높이가 약 1.2 m 이다. 그 무덤은 먼저 남쪽을 절반 쌓은 후 북쪽을 절반 쌓았다. 그리고 그 기 단상에 다시 높이 약 o.6m 되는 묘실을 쌓았다. 역시 남쪽 실을 먼저 쌓고, 그 다음 북쪽 실을 쌓았다. 기단 주위에 한 줄의 너비가 약 lm 되는 담(園培)이 있다. 산언덕을 따라서 축조된 무덤들은 남쪽은 높고 북쪽은 낮다. 또, 기단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 북쪽에는 담 이의에 하나 의 너비가 약 1.6 m 되는 보호벽(護瑞)이 있다. 시체와 부장품은 묘실 바 닥에 있다. 그런 다음 천장에 석괴를 덮었다. 중간형의 적석묘에는 기 단, 담과 보호벽이 없다. 직사각의 묘실은 석괴와 석판으로 축조되었다. 보통 길이 2m, 너비 1m, 전면에 사잇길(雨道)이 있으며 單室 의에 2 실 과 3 실도 있다. 천장은 석괴로 봉하였다. 어떤 묘실 주위에는 비교적 큰 석괴를 받쳐 놓았다(예; 1 호). 소수의 중형 적석묘는 封石 의에 한 충의 봉토를 덮었다(예; 8 호). 그것은 봉토석실 무덤의 전신이다. 소형 적석 묘의 결구가 간단하다. 석괴 또는 석판을 쌓아 만들었는데 길이가 2m 가 안 되며, 너비 lm, 높이 0.5m 의 직사각형 석실로 사잇길도 없으며 천장 은 석괴로 봉하였다. 어느 것은 작은 석판만으로 네 벽을 세우고 천장을 하나의 판석으로 덮었다. 발굴된 중, 소형의 적석묘 내에는 모두 부장품 이 없으며, 다만 대형 적석묘 내에서 소량의 철제 무기와 마구, 칼, 창, 촉, 재갈 그리고 혁대고리 등이 출토되고, 약간의 단지(!編鏞)와 登, 금 동 장식 의에 은제 팔찌, 동제 팔찌 등이 출토되었다. 상기한 3 종 유형의 적석묘는 뚜렷하게 3 개 등급으로 형성되었다. 그것 은 死者의 여러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무덤군 내의 분포정황도 같은 현상으로 나타나 있다. 高力墓子 고분군은 남쪽의 산언
덕 정상으로부터 산세를 따라서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남쪽에서 북쪽으 로 배열되었다. 전술한 15 호의 대형 적석묘는 가장 큰 무덤 중의 하나이 다. 그 무덤은 남쪽 산언덕의 정상에 있다. 그 북쪽으로 2 기의 대형 적 석묘가 있다. 그리고 다시 북쪽으로 네 줄의 대형 적석묘가 배열되어 있 다. 가장 긴 배열은 70m 나 되며 그러한 적석묘는 북쪽에 있다. 남쪽에 면한 1 기 묘는 북벽에 기대어 축조되었다. 그로 인하여 그것들은 모두 독립된 남벽이 없다. 또한 그것들의 축조시기는 남쪽면과 인접한 무덤들 보다 늦은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북향과 동서향으로 갈수록 양측에 축조된 무덤은 그 축조 시기가 늦어진다. 북쪽에서 점차 낮은 곳으로 내 려가면서 대형 적석묘로부터 중형의 적석묘와 소형의 적석묘가 분포되었 다. 그것은 산정상의 대형 적석묘가 왕실귀족의 분묘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언덕 중간의 중형 적석묘는 통치계급보다 낮은 신분의 분묘이고, 분산되어 분포된 소형 적석묘는 일반 고구려인의 분묘이다. 고구려가 丸者 B 로 천도함에 따라서 정치, 경제의 중심도 현 集安縣 縣 境으로 옮겨 왔다. 그러므로 그곳에 현존한 고구려 시기의 분묘의 수량 은 桓仁 경내의 고구려 무덤군보다 많다. 또, 초기에 유행된 적석묘 의 에 시대가 늦은 대량의 봉토석실묘가 출현하였다. 동시에 桓仁 고력묘자 무덤군에서 볼 수 있었던 대형 적석묘의 배열순서, 묘실 축조정황 등 은 集安 경내에서는 볼 수 없다. 다만 무덤군의 배열은 비교적 규칙적이 다. 일반 적석묘가 묻힌 지세는 비교적 높아서 대부분 산의 정상 또는 산언덕 위에 있었는데, 봉토묘가 묻힌 곳은 비교적 낮아서 대부분이 산 의 발치 또는 강가의 계지상에 있다. 그 예로 槍林河 좌안의 大高力墓子 무덤군은 적석묘와 봉토묘가 비록 교차 · 분포되었지만, 적석묘는 대체로 무덤군의 앞쪽에 있으며, 또 규모가 비교적 커서 변장이 8-12m 사이다. 봉토묘는 대부분 뒤쪽에 있으며 규모가 작다. 이미 발굴된 43 호의 邊膳 길이는 겨우 5m 정도이다. 무덤군 중에 길이가 2m 도 못 되는 소형 석 관묘가 있다. 조사에 의하면 集安 지구의 고구려 묘구는 적석묘와 봉토
묘 두 구로 나뉘고 있다. ' 적석묘 중에는 또한 方 壇 적석묘, 方 壇 階稀 적 석묘, 방단계제형 석실묘와 봉토洞室 墓 등 5 식으로 나뉘고 있다. 봉토묘 도 방단봉토 석실묘, 방단계제 봉토석실묘, 土石混封 석실묘와 봉토석실 묘 등 4 식으로 나뉘고 있다. 시기적으로 보아 적석묘가 일반적으로 이른 시기에 해당된다고 보고 있다. 그 다음에는 적석묘와 봉토묘가 공존하는 일단의 과도기가 있다. 그 이후의 무덤은 대부분 봉토석실묘이다. 集安 지구의 비교적 이른 시기의 적석묘는 桓仁 지역과 감이 산아래 한편에 보호벽을 쌓는 방법이 보인다. 예로 良民墓地의 적석묘의 기단은 상당히 높다. 그러나 산언덕 가파른 곳에 위치하고 있는 무덤은 기단 바깥에 한 줄 또는 여러 줄의 보호용의 낮은 담을 쌓고 있다. 그것은 봉토의 붕괴 와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계단형식으로 축조되었다. 계단식 적석묘의 초 기 형태이다. 集安 지구에서 최근에 발굴된 고구려 무덤은 중 • 소형의 적석묘와 봉 토석실 벽화묘 등이다. 그 발굴을 통하여 무덤 形制의 변천과정이 알려 졌다. 과거에 발견된 고구려 묘실벽화는 모두 봉토석실묘 안에 그려진 것이 상례였으나, 1974 년에 발굴된 우산하 41 호묘는 새로운 정황을 보여 주었 다. 그것은 1 기 정사각형 기단의 적석묘였다. 기단 중앙에 판석으로 평 면 직사각형의 묘실을 구축하고, 그 벽면에 백회를 바른 후 벽화를 그렸 다. 벽화는 목재의 가옥구조로서 상량과 기둥, 처마, 나무들과 사람들을 그렸다. 고구려시대의 묘실 내 벽화를 그리는 풍습을 보여 주었다. 과거 에는 봉토석실묘 내에만 벽화가 있는 것으로 연구되었다. 새로 발굴된 봉토석실묘 중 중요한 것은 만보정 1368 호, 마선구 1 호, 장천 1 호와 2 호묘, 오회분 4 호묘 등이다. 1966 년 발굴된 만보정 1368 호 묘는 1 기 單室墓이다. 벽화는 백회 위에 그렸다. 다만 네 벽과 蕩井上에 는 먹으로 가옥구조를 그리고 채색은 하지 않았다. 그와 갇이 간단한 벽 화는 集安 고구려 벽화무덤 중 드문 일이다. 또한 그 무덤의 형제는 상
당히 작다. 묘주인의 신분이 낮기 때문에 벽화가 간단한 것으로 보고 있 다. 그러한 가옥구조의 작법은 초기 형태를 반영한다. 그 시기를 3 세기 중엽 또는 4 세기 초 무렵으로 보고 있다. 마선구 1 호 무덤은 1962 년에 발굴되었다. 主室은 정사각형이며 사잇길 양측에 각각 하나의 측실 (耳室) 이 있고, 墓頂 (천장)은 궁륭상이다. 묘실 가운데에 하나의 석괴도 있다. 묘실 내와 양측실에 모두 벽화가 있다. 벽화내용은 생활묘사로서 부부대좌, 무도, 수렵 등이며, 그 밖에 갑옷을 입은 무사(군인)의 모습을 그렸는데 무사가 탄 말도 갑옷을 입고 있다. 마선구 1 호 무덤과 시기가 같은 다른 벽화무덤으로 1962 년 봄에 발굴된 통구 1 호묘가 있다. 이 무덤에도 갑옷 입은 군인이 적을 살해하는 그림 이 있다. 그것은 4 세기 중엽 이후에 고구려 지역에서 전쟁이 빈번하게 있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1970 년 장천 무덤군에서 발굴된 1 호묘는 가장 중요한 1 기 봉토석실 벽 화묘이다. 앞, 뒤에 두 개의 묘실이 있고, 후실 네 벽 및 조정에는 연화 무늬(도안)가 가득 그려져 있다. 천장 뚜껑돌 중앙에는 해, 달, 별들이 그려져 있으며 붉은 글씨로 〈~t斗七靑(星)〉의 명문이 있다. 앞(前) 묘실 네 벽에는 사냥, 유희(百戱), 가무, 마구간 등의 그림이 있다. 사람들이 입은 옷은 모두 고구려의 전통 의복이다. 그것은 이른 시기 벽화의 특칭 울 나타낸다. 조정 네 모서리의 株角石 위에 力士가 그려져 있다. 그것 의 제 1 굉돌(重頂石)에는 靑龍 • 臼虎 • 朱雀 • 玄武 등 四神이 그려져 있 다. 제 2 굉돌의 벽화내용은 주로 불교에 관한 것이다. 정면 중앙에 불상 이 있고, 그 좌우에 護法의 사자가 엎드려 있으며, 불상의 오른쪽에 공 양하는 비천상이 있다. 불상 좌우에 두 남자가 엎드려 예배를 드리고 있 으며, 왼쪽에는 서서 우산울 들고 공양하는 여자가 있다. 좌우 양측의 제 2 굉돌에는 각각 네 명의 보살이 그려져 있는데 그들은 蓮臺 위에 서 있으며, 그 양측에 또한 〈연꽃 속의 동자(蓮花化生)〉가 그려져 있다. 그 위의 제 3, 4 굉돌에는 공양하는 비천상과 주악(使樂)인물이 그려져 있다.
과거에 비록 고구려 묘실벽화 중에 불교적 내용(예를 들면 연꽃 속의 동 자, 비천상 등)이 있었지만, 불상과 보살상의 출현은 처음이다. 그것은 불교가 4 세기 중엽에 고구려에 전파된 이후로 상충의 통치계급이 崇信한 것을 반영하여 준다. 1972 년 장천 1 호묘 서북방쪽에서 불에 탄 벽화묘가 발견되었다. 그것 이 2 호이다. 이 벽화묘는 심하게 파괴되었다. 主室 네 벽에는 연화가 가 득 그려져 있었다. 다만 오른쪽 측실에는 〈 王〉字가 띠 (帶)를 이루며 그 려져 있었다. 아마 화려한 비단 휘장(壁衣)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특 히 묘실 내의 돌관대(石稽 臺 ) 위에서 한 조각의 천이 발견되었다. 천조 각은 조직이 치밀하고 經線으로부터 꽃문양을 처리하였는데, 전한 황색 바탕에 붉고 전한 남색의 문양이다. 장천 2 호와 마찬가지로 바단 휘장을 그린 벽화가 1966 년 발굴된 산성하 332 호묘에서도 발견되었다. 그 묘의 평면은 장천 2 호와 마찬가지로 사각형 主室을 가졌고 사잇길 양측에 각 각 측실이 있다. 묘실과 사잇길에 모두 벽화가 있다. 사잇길 벽화에는 사람만 그려져 있으며 묘실 네 벽에는 면직 (錦織 비단)의 도안이 가득 그 려져 있다. 가로 세로로 놓인 구름무늬를 모방한 것이며 홍색, 녹색 등 의 색채를 번갈아 사용하였다. 홍색의 구름무늬 사이에 예서체로 쓴 황 색의 〈 王 〉 字가 있으며, 녹색 구름무늬 사이에는 검은색 또는 붉은색으로 〈 王 〉 字를 그렸다. 발견된 면직의 벽화와 면직 천조각은 당시 고구려 상 층계급에서 색채가 화려하고 선명한 면직품이 유행했음을 나타내 준다. 1962 년 정식 발굴된 오회분 4 호묘는 후기 봉토석실 벽화묘의 대표적인 무덤이다. 시기는 6 세기 중엽 또는 7 세기 초에 해당된다. 봉토는 截頭方 維形(끝 잘린 방추형)이며 높이 8m, 둘레 160m 이다. 묘실 네 벽, 조정 (천장) 및 사잇길 양벽과 관대 위에 모두 채색 벽화를 그렸다. 백회를 바르지 않고 직접 돌벽 위에 벽화를 그렸으며, 내 벽 벽화의 내용은 四 神圖이고 아랫부분에 인동, 연화, 화영무늬 등이 보충되었다. 묘의 천장 석 위에 龍虎가 교류된 그립, 말각석 위에 交龍, 비천상, 주악인물상,
신선, 神島 해, 달, 별 등이 그려졌다. 네 벽의 공간에는 모자, 허리띠 등 의관을 정제한 많은 인물상이 보충되었는데, 고구려 전통의복은 보이 지 않았다. 4 호묘를 발굴할 때 동시 에 동쪽에 있는 5 호묘도 다시 정 리 하 였다. 이 무렵의 벽화내용과 풍격은 4 호와 거의 같았다. 고구려 묘는 대부분 도굴당하였다. 그러나 시기가 비교적 이른 칠성산 의 96 호, 우산하의 68 호, 만보정 78 호 등 적석묘 내에서 다량의 청동기, 금동제, 철기와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청동기 중에는 세발솥(鼎), 대 야(i先), 鎖斗(자루 달린 솥), 盆, 시루 등이 있었다. 솥, 자루 달린 솥 등은 중국 東漢의 것들과 같다. 금동기와 철기는 주로 마구와 무기 등 이다. 안장, 등자, 재갈과 각종 말장식 등의 마구는 대단히 정교하게 제작되었다. 무기는 주로 칼(7J), 창(牙), 촉과 갑옷편 등이다. 그 중 에는 고구려 민족의 특칭인 납작한 꼭지가 중앙에 달린 화살촉(荷鐵)이 있다. 대량의 마구와 무기의 출토는 당시 고구려가 기마와 작전을 중시 하였음을, 또한 고구려 공예수준이 최고에 이르렀음을 표명하여 준다. 토기는 갈색 토기와 회색 토기 2 종으로 거칠게 만들어진 편이다. 기형은 호와 단지(塗 耀) 두 종이다. 평저의 호는 구연이 넓고 의반되었다. 그 것은 桓仁 출토의 호와 같다. 그 밖에 소량의 황색 유약의 편이 출토되 었다. 비교적 늦은 봉토석실 벽화묘에는 금동제와 철제의 마구, 무기가 주된 부장품이었다. 도금기술은 대단히 발전되어 있었다. 부장된 토기는 대부 분 황색 유약의 토기가 많았다. 그 특징의 기형은 구연이 크고 입술이 해바라진 登이다. 적석묘 출토의 호구연보다 넓다. 어깨 부분에는 4 개의 손잡이(또는 귀)가 있다. 그 밖에 대접(盆), 손잡이 달린 잔(孟)과 바리 그리고 정사각형의 토제 아궁이가 있다. 토기공예도 대단히 향상되었다. 묘 내에서 漆稽片도 출토되었다 .6)
1981-1990 년까지의 연구를 살펴보자. 상기한 바와 갇이 고구려 문화유적은 주로 遼寧의 桓仁과 吉林의 集安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集安 일대가 가장 풍부하다. 그곳은 또한 고구려 역사상 2 기의 중요한 수도(都城)가 있었다. 기원전 37 년부 터 427 년까지 그 일대가 고구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그곳에는 지금까지 고구려시대의 많은 古城, 벽화고분, 비석, 차단성 (검 문소 또는 關~) 등이 남아 있다. 제 1 단계로 1950 년에서 1966 년까지 고구려 유적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 어 그 정황이 파악되고 목록이 발간되었으며, 보호구역이 확정되고 보호 관리 기구가 건립되었다. 동시에 약간의 발굴이 실시되고 보수가 이루어 졌다. 또한 이 기간에 조사보고서와 발굴보고서가 출판되었으나 아직까 지 비교적 상세한 계통적 연구는 없다. 제 2 단계인 1967 년부터 1977 년까지 10 년 동안 소위 문화혁명 기간에는 문물 보호작업이 거의 중단된 상태였다. 다만 후기에 이르러서 몇 곳에 서 대규모 고구려 고분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제 3 단계 1978 년부터 1990 년까지는 비교적 활발한 조사작업이 이루어졌 다. 吉林, 遼寧두 성의 문물 조사자들은 集安, 桓仁의 고구려 문화유 적을 전면적으로 조사하였고 그 결과를 『 集安縣文物誌 』 와 『 桓仁縣文物 誌 』 로 편집, 출판하였다. 王健群이 『 好太王碑硏究 』 (임동석 번역)를 출판 하였고, 李 殿福 • 孫玉良이 『 高句麗簡史 』 (강인구 등 번역)를, 耿鐵華는 「好太王碑新考」를 서술하였다. 劉永은 광개토대왕릉비 (好太王碑의 연구) 에 관한 논저를 제출하였다. 集安에서는 方起東이 주관하여 100 기 이상 의 고구려 무덤을 발굴하고, 광개토대왕 등 묘실을 정리하였다. 또, 압 록강변 유적, 國內城 馬面 유적의 정리를 하였다. 1981 년부터 1990 년까지는 동북지 역 전체 고구려 문물 고고에 관한 전 면적인 논술과 연구의 글은 없다. 다만 대표적으로 吉林省 고고연구실과 集安縣 박물관의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稷」이 方起東 • 林至德에 의해서
《文物》 1984 년 제 1 기에 제시되어 1949 년 이후 1970 년부터 1980 년 초까지 吉林省 문물 고고 연구가들이 集安 경내에서 작업한 결과를 제시하고 있 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荒威子, 東川, 長川, 勝利, 二道 威子 등지에서 신석기 시대 후기 부터 청동기 시대 유적에 대한 자료를 제시 ® 국내성 조사와 시굴 내용의 소개, 城內 주요 건물 등은 중앙과 북 쪽에 집중되어 있다. 守備城울 동시에 축조한 丸都山城은 고구려의 新城 이다. ® 고구려 南北 二道의 조사와 확인, 北道에서는 大川의 검문소 (Ih末 ) 의 발견 @ 압록강 水路 조사, 국내성 동남쪽의 압록강 강변에 석재로 축조된 제방(江堤) 유적 발견 ® 이미 알려진 東 臺 子 유적을 연구하여 392 년 봄에 축조된 고구려 왕 족의 제사(廟) 殿堂임을 확인 ® 集安城서북 방향으로 23km 지점의 綠水橋 子 일대에서 고구려 시 대의 採石場 발견 ® 石壇과 土頃 두 종류의 고구려 고분 연구에 대한 많은 전전 제시 ® 集安 通溝 고분군 내에서 발해시대 무덤 발견 ® 고구려 벽화묘의 새로운 발견, 그 예로 장천 1, 2 호의 발굴 ® 고구려 벽화의 보존 연구에 대한 새로운 진전 제시 @ 고구려 무덤 2 기에서 문자 없는 石碑 발견 張雪岩의 「集安考古署述」( 『 遼東丹東本溪地區考古 學 術討論文集 』 )에서 1985 년 1 월에 集安 고고 발굴의 새로운 작업을 소개한 바 있다고 한다. 集安 시내에 國防 도로를 만들기 위하여 우산 고분군을 통과하게 되어서 그곳 에 있는 120 여 기의 고분을 발굴해야만 했다. 이미 발굴된 무덤들은 石 壤과 土壤으로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며, 形制는 복잡하다. 또한 끝 잘 린 방추형 봉토묘도 있었으며, 바교적 거대한 적석묘는 연결되어 고리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 중 M3296 호, M3105 호는 邊 箱結構(상자형 결 구)로 나타났으며, 부장품으로 토기, 순금제 유물, 도금기물, 철기 등이 있었다. M3283 호의 방단계단 적석묘 내에서는 토제 어망추가 250 여 점 출토되고, 철제 작살이 40 여 점이 출토되었다. 어느 적석묘에서는 완정 한 붉은색 판와(기와)가 출토되었다. 모두 최초의 일들이다. 魏存成의 「高句麗 • 渤海文化的發展及其關係」 ( 《 吉林大學社會科學 學 報 》 ) 에 대한 연구가 1989 년 제 4 기에 발표되었는데 고구려의 문화발전의 내용들 울 서술하고 발해 문화와 비교하였다. 그리고 두 나라 문화의 都城 • 土 城 건축, 건축물 장식, 무덤 形制,특징, 부장품, 그리고 유약 바론 토 기 등을 다루면서 각 민족의 특색을 설명하였다. 2) 古城 연구 고구려가 建都한 訖升骨城은 학계에서 遼寧城 桓仁縣의 五女山으로 인 정되고 있다. 서기 3 년에 國內로 수도를 옮겨서 〈 築尉那巖城〉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國內城 유적은 集安城 내에 있다. 성의 북쪽에는 丸都山城 이 있다. 죽 당시의 尉那巖城이다. 그 의 吉林省과 遼寧省의 동부 지구 에 크고 작은 고구려 산성이 많이 있다. 遼寧省과 吉林省 내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조사보고서와 연구논분은 다음과 같다. 集安縣文管所, 「集安高句麗國內城址的調査與試堀」, 《文物》 , 1984 년 제 1 기. 李殿福 「高句麗丸都山城」, 《文物》, 1982 년 제 6 기. 林至德 • 張雪岩, 「高句麗兩都城」, 《文物天地》, 1984 년 제 6 기 (필자, 자 료 없음) .
吉林省文物工作隊 「高句麗羅通山城」, ((文物》, 1985 년 제 6 기. 撫順市博物館 • 新賓縣文化局 「遼寧省新賓縣黑溝高句麗早期山城」, 《 文 物》, 1985 년 제 2 기 . 董學增 「吉林市龍潭山高句麗山城及其附近衛城調査報告」, 《 北方文物 》 , 1986 년 제 4 기 (자료 없음). 栗谷의 「關於高句麗山城」〔 〈〈 博物館硏究 》 ; 1983 년 제 1 기 (자료 없음)〕에서 桓仁의 五女山城, 集安의 山城子山城, 覇王朝山城, 平壤의 大城山城, 順 川의 慈母山城, 黃龍山城, 泰川의 龍吾里山城의 예를 들어 고구려 산성 의 축조법, 사용, 방어 등의 특칭을 제시하고 있다. 산성의 위치 확정 또는 자연지세의 이용을 연구한 결과 고구려인들은 가장 적합한 장소를 선택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모든 산성은 산세의 험준함, 수륙 교통의 요충지, 군사상의 유리한 지대 등을 선택해 축조되었다. 둘 째, 고구려는 산성 구축시 자연지세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思考하는 데 사용하였다. 셋째, 산성에는 女培, 維樓, 角樓, 望 樓, 水溝(水溝門) 등의 성벽에 관계된 것이 있으며, 성문, 壅門, 暗門 등의 문과 관계된 것들이 있고, 성안에는 將臺, 봉수, 창고, 兵營, 연못 지 등의 각종 시설이 있다는 것이다. 넷째로 고구려 산성은 기본적으로 완정한 방어체계를 갖추었다 한다. 魏存成의 「高句麗初 • 中期的都城」(《北方文物》, 1985 년 제 2 기)은 문헌자 료와 고고자료를 이용하여 연구한 고구려 도성에 대한 논문이다. 초기 도성은 卒本川 서변의 높은 산 위에 건립되었으며, 그것의 명칭은 訖升 骨城으로 보았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돌로 담을 쌓고 성안에는 전망대와 연못이 있었으며, 산세가 험준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덧붙여서 산성 부 근에 고구려 무덤이 있으며, 그곳은 遼寧省 桓仁縣의 오녀산성으로 알려 져 있다. 중기 도성은 集安 경내에 있으며, 그것은 오랫동안 고고 조사, 발굴과 연구에 근거하여 확장될 수 있다고 보았다. 위나암성은 縣城(集
安) 북쪽에 있는 산성자산성으로 보고 있으며, 후에 그것은 환도산성으 로 불렀다. 국내성은 현 集安縣城에 소재하고 있다. 平壤城에 대한 동천 왕 21 년 (247) 과 미천왕 3 년 (302) 의 문헌기록은 원래의 낙랑군이 위치한 곳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 후기의 평양성으로서 오늘날 集安縣城 소재의 국내성이라는 것이다. 王健群의 「玄萊郡的西遷和高句麗的發展」 ( 《 社會科學戰線 》 , 1987 년 제 2 기) 에서 고구려의 첫번째 왕도는 沃沮城으로 오늘날의 咸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集安縣城 古城은 국내성이라고 부르며 集安縣城에서 북쪽 으로 2.5km 되는 지점의 산성을 환도성 또는 위나암성이라고 칭하는 것 은 모두 옳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 두번째의 왕도는 국내성으 로 〈 乃在東部近海地區, 有人考訂在永興一帶, 似有道理(국내성은 東部 近 海 지구에 있으며, 어느 학자의 고증에 의하면 영흥 일대로 보는데 그것은 합 당하다) 〉 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의 세번째 왕도는 환도성으로, 오늘 날 集安 고성이라고 주장하면서 후인들이 환도성이 국내성에 부속되었다 고 하는데, 산성인 환도성, 즉 위나암성에 부착된 것은 착오라는 것이 다. 고구려의 네번째 왕도는 평양이다. 전체적으로 개괄하면, 고구려는 沃沮城에 建部하고 다시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세번째로 환도(集安)에 천도하며 네번째로 평양에 천도하고, 다시 환도로 천도하였다가 재차 평 양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즉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계속 천도하여 발전 하였다는 주장이다. 李殿福 • 孫玉良의 「高句麗的 都城」 〔《博物館硏究》, 1990 년 제 1 기 (자료 없 음)〕에서는 오녀산성이 고구려 산성임을 부정하고, 국내성이 集安에 있 는 것도 부정하고, 集安산성자산성이 환도성, 즉 위나암성이라는 관점 울 부정한 것에 대하여 쐐기를 박으면서 문헌과 고고 자료를 바탕으로 고구려의 첫번째 도성은 홀승골성, 즉 遼寧 桓仁의 오녀산성이고, 두번 째 도성은 환도성으로 국내성에서 북쪽으로 2.5km 지점의 산성으로 원 래 위나암성이다. 네번째 도성은 평양성이며, 다섯째는 長安城으로 모두
한반도 북부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다. 方起東의 「集安東 臺 子高句麗建築遺址的性質和年代」 ( 《 東北考古與 歷 史 》 ) , 1982 년 제 1 집)는 유일하게 고구려 도성 건축에 관한 논문이다. 발굴된 보 고서와 문헌자료를 토대로 〈 東 臺 子 건축 유적의 Il 室은 農神一稷(사직) 에 제사 지내는 장소로서 그 건축 연대는 고국양왕 9 년 (392) 3 월 〉 로 주 장하고 있다. 무덤 발굴과 연구, 조사보고와 발굴보고는 다음과 같다. 集安縣文物保管所, 「集安發現靑鋼短劍墓」, 《 考古 》 , 1981 년 제 5 기. 集安縣文管所, 「集安萬 賓 汀 242 古墓淸理簡報」, 《 考古與文物 》 , 1982 년 제 6 기. 方起東 • 林至德, 「集安通溝兩座樹立石碑的高句麗古 墓 」, 《 考古與文物 》 , 1983 년 제 2 기. 集安縣文物保管所, 「集安高句麗墓葬發堀簡報」, 《 考古 》 , 1983 년 제 4 기. 集安縣文物保管所, 「集安縣上下活龍古墓發堀簡報」, 「集安老虎'肖古墓發 堀簡報」, 《文物》, 1984 년 제 1 기. 柳風 • 張雪岩, 「 1976 년 集安洞溝古墓淸理」, 《 考古 》 , 1984 년 제 1 기 . 集安縣文物保管所, 「集安縣新發現的兩處高句麗墓群」, 《 博物館硏究 》 , 1984 년 제 1 기 (자료 없음) . 孫仁杰 • 運勇 「在東方金字塔上」, 《文物天地》, 1984 년 제 6 기 (자료 없음) . 孫仁杰 「折天井墓調査捨 零 」, 《博物館硏究》, 1988 년 제 3 기 (자료 없음) . 張雪岩, 「集安兩座高句麗封土墓」, 《博物館硏究》, 1988 년 제 1 기 (자료 없음). 이 기간에 고구려 고분의 유형, 발전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전전되었 다. 李殿福의 「高句麗墓硏究」 (《考古學報》, 1980 년 제 2 기)의 글은 고구려
고분 연구의 시작인 셈이다. 李殿亂젊은 集安 고구려 무덤을 석분과 토분의 두 종류로 크게 나누고 있다. 석분류는 1 식 ; 적석묘, Il 식 ; 방단적석묘, 매식 ; 방단계단 적석묘, W 삭 방단계단 석실묘, V 식 ; 封石 洞室墓 등이며, 土項類는 1식 ; 방 단봉토 석실묘, Il 식 ; 방단계단 석실묘, 冊식 ; 방단계단 봉토석실묘, W 식 ; 봉토석실묘 등이다. 陳大爲의 「試論桓仁高句麗積石墓的類型, 年代及其演變」 (寧省考古博物館 學會成立大會刊 1981 년)에서 桓仁縣 내의 고구려 적석묘를 세 종류로 나누고 있다 : O 圓丘式 적석묘, ® 階台式 적석묘, ® 階台式 석실묘. 무덤의 발전 정형을 개괄해 보면, 묘실이 없는 것에서 간단한 광실로 발전된다. 그리고 광실은 직사각형에서 사각형으로 변한다. 그런 다음 광실은 또한 묘실로 발전한다. 묘실의 위치는 상부에서 점차 아래로 내 려와 평지로 옮겨진다. 이러한 것을 총괄하여 그것은 규칙적으로 발전되 었으며, 積石爲封의 의형은 장구한 시간 동안 계속되어 한민족의 전통습 속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 내부 결구는 계속적으로 의래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묘 내의 결구가 고항실로 축조되고, 門道가 있으며 천장에 개석 울 덮었고 墓日가 안으로 수축되거나 또는 말각천장 등으로 발전된다. 여러 단계의 돌로 축조된 피라미드식의 석곽목곽분 장군총 이후에 비로 소 봉석이 제거되거나 중단된다. 죽 적석위봉의 오래된 관습이 사라전 다. 동시에 봉토묘가 발전된다. 方起東의 「高句麗石墓的硏究」〔《博物館硏究》, 1985 년 제 2 기(자료 없음)〕에 서는 석묘를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다 : O 적석묘, ® 방구식 적석묘, ® 有基壇 積石墓, @ 方壇적석묘, ® 階壇적석묘. 많은 고구려 석묘의 예를 제시하였으며, 고구려 석묘가 상기한 발전 서열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方起東의 간접적 자료보다는 魏存成의 「高句麗積石墓的類型和演變」(《考古學報》, 1987 년 제 3 기)에서 자
세히 분류되고 있다 : O 無壇石城墓 ® 方壇석광묘, ® 방단계제 석광 묘, ® 방단석실묘, ® 방단계제 석실묘. 각 단계의 연대와 발전 단계도 추론하고 있다. 方起東의 「千秋墓 太王陵和將軍壇墓主人的推定」 〔《博物館硏究》, 1986 년 제 2 기 (자료 없음)〕에서는 고구려 왕릉의 연구에 대한 시작이라고 한다. 천추묘는 고국양왕의 능묘로 보고, 태왕릉은 광개토대왕의 능묘이며, 장 군총은 장수왕의 능묘로 보고 있다고 한다. 3) 벽화 연구 고구려 벽화고분은 集安 압록강 右岸 평원상에 집중 분포되었다. 桓仁
장군총 내에서도 고구려 벽화는 발견된 바가 있다. 10 년 동안 集安 고구려 벽화무덤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발굴과 보수를 하였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吉林省文物工作隊集安縣文物保管所, 「吉林集安洞溝三室墓淸理記」, 《考 古與文物》, 1981 년 제 3 기. 李殿福 「集安洞溝三室墓壁畵著錄補正」, 《考古與文物》, 1983 년 제 3 기. 吉林省文物工作除集安縣文物保管所, 「集安長川一號壁畵墓」, 《東北考古 與歷史》, 1982 년 제 1 집. 陳相偉 「集安長川二號封土發堀簡記」, 《考古與文物》, 1983 년 제 1 기. 李殿福 「集安洞溝三座壁畵墓」, 《考古》, 1983 년 제 4 기. 吉林省文物工作隊 「吉林集安五盛壇四號墓」, 《考古學報》, 1984 년 제 1 기. 고구려 벽화에 대한 연구는 일찍이 方起東이 시작하였다. 그 의 「集安 高句麗墓壁畵中的舞樂」(《文物》, 1980 년 제 7 기)의 글 속에서 고구려의 춤 과 음악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 벽화 분류에 대한 새로운 길을 제공하였다.陳兆復은 「高句麗壁畵藝術」( 《 中國 畵硏 究 》 , 1982 년 제 2 기 (자료 없음 H 의 글 속에서 고구려 유적의 발견, 고구려 고분벽화의 발견경부터 시작해서 集安 고구려 벽화고분을 전기와 후기로 분류하고 있다. 그 내용 중에 인 간의 쾌락이 전기 벽화의 주제이고, 천국으로 가는 길이 후기 벽화의 주 제라고 한다. 劉永智의 「高句麗壁畵與中國文化的關係」〔《學術硏究穀f l] 》, 1982 년 제 4 기 (자료 없음)〕에서는 韓國 金元龍, 「韓國壁畵古壇」의 내용에 대한 토론을 제기하였다 한다. 孫仁杰의 「談高句麗壁畵中的蓮花圖案」 ( 《 北方文物》, 1986 년 제 4 기) 에서는 集安 고구려 벽화고분의 연꽃무늬도안을 무덤 연구의 정황에 의해 4 기로 나누고 있다. 1 기는 연꽃이 조정에만 있으며, 사실 위주이며 종류의 변 화가 많지 않다. 2 기는 연꽃이 전체 조정을 차지하고, 꽃문양이 풍부하 며 변화도 크다. 3 기는 연꽃이 묘벽상에 나타나며 도안이 대단히 풍부하 고 종류도 많다. 어느 경우 심지어 전체 묘실을 연꽃으로 처리하였다. 과거 사실 위주의 연꽃은 사라지고 기타 꽃문양과 연결되어 연속도안으 로 처리되었다. 4 기의 연꽃은 기타 그림의 중간에 나타난다. 연꽃이 대 부분 변형되고 과장되었다. 종류도 감소되었다. 그리고 묘실 서벽상에 직접 처리되었다. 벽화에서 연꽃의 출현은 불교의 전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耿鐵華의 「高句麗壁畵中的社會經濟」 (《北方文物》, 1986 년 제 3 기)에서는 벽화를 통한 고구려의 경제상황을 언급하였다. 농업생산과 관계된 창고, 마구간 그리고 산림 중에서의 수렵장면, 황새가 물고기를 쪼는 장면 등 은 수렵경제의 자료로 보았다. 수공업 방면으로는 건축, 야금, 제도(製 陶), 목기제작, 방직 등의 상황을 제시하였다. 벽화를 통한 고구려 사회 경제 측면의 초보적 분석이다. 耿鐵華의 「高句麗壁畵中的宗敎與祭祀」 〔《遼海文物學f l j》, 1988 년, 제 2 기 (자료 없음)〕에서 고구려 벽화 중의 종교와 제사 장면 등을 통하여 고구
려 신앙, 의식관념 등 사상관념을 분석하였다고 한다. 또한 문헌에 의하 면 漢末부터 唐구J]까지 유교, 불교, 도교 등 3 교가 중국에서 고구려로 전 입되었다. 벽화 내에 현저하게 표현된 것은 불교로 보고 있다. 장천 1 호 벽화 중의 예불도, 불상, 보살, 연꽃동자(蓮花化生) 등의 예를 들었다. 오회분 4 호묘 내에 道士가 八卦를 그리는 형상이 있다. 공양인들이 일률 적으로 높은 모자를 쓰고 儒服울 입은 것은 유자의 風 度 로 보고 있다. 벽화내용 중 제사의 내용이 상당히 많다. 그 예로 해, 달신, 별, 선인, 역사 등이다. 耿鐵華의 「高句麗壁 畵 中的 貴 族生活」〔 《 博物館硏究 》 , 1987 년 제 2 기(자료 없 음)〕에는 고구려 벽화 중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귀족의 연회, 가무, 씨 름, 유희, 수렵, 출행 등의 생활을 살펴보고 있다. 결론은 고구려 귀족 들이 대단히 호화로운 생활을 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耿鐵華 • 阿英의 「從高句麗壁 畵 中戰爭, 題材, 看 高句麗軍除 戰 爭」 ( 《 北方 文物》, 1987 년 제 3 기)에서는 전쟁의 규모, 작전계획, 포로정책, 군사장비 와 군대조직의 편성 등을 논하고 있다. 4) 器物 연구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1 만여 점으로 알려져 있으며, 주로 集 安市, 吉林省, 延邊 遼寧省 박물관, 桓仁縣 문관소 등에 진열되어 있다 한다. 유물은 토기, 와당, 순금제 기물, 금동제 기물, 동경, 청동제 도 장등이다.
(1) 토기 耿鐵華 • 林至德의 「集安高句麗陶器的初學硏究」( 《 文物 》 , 1984 년 제 1 기) 는 고구려 토기와 기물을 연구한 논문이다. 고구려 토기를 3 기로 나누고 있다. 1 기는 전기로서 고구려 건국으로부터 3 세기 말까지, 토기로는 호, 단지, 잔 등이 있으며 소성도는 높지 않고 거칠게 만들어졌다. 2 기는 4 세기 초부터 5 세기 말로 약 200 년, 대부분 돌림판을 사용하여 제작하였 고 수제는 소량이며, 고운 태토의 사용이 증가하였고 소성도는 높다. 기 형은 호, 단지, 병, 바리, 뚜껑 있는 밥그릇, 곡물 저장 그릇, 옹기, 대 접, 손잡이 달린 잔과 솥, 아궁이 등이다. 후기는 6 세기 이후이며 대부 분 고운 태토의 토기, 기본은 돌림판 사용, 소성도는 높다. 기벽은 견고 하고 기형으로는 호, 단지 , 쟁반(盤), 대접, 바리, 벼루, 베개와 虎子 등이다. 토기의 종류와 기형의 발달은 고분 연구와 시대 편년에 증거를 제공하 고있다. 魏存成의 「高句麗四耳展沿登的演變及有關的幾個問題」 (《文物》, 1985 년 제 5 기)는 토기 중에서 기형의 특칭이 뚜렷한 네 손잡이 호에 대한 연구 내용을 담고 있다. 集安에서 출토된 5 점의 토기를 기초로 하고 있다. 기 형의 변화로부터 어깨, 배 등의 발전 과정을 분석하고 그것의 시기는 5 세기 전후로보고 있다. (2) 와당 李殿福의 「集安卷雲文金名文瓦當考辨」 (《社會科學戰線〉〉, 1984 년 제 4 기) 에 는 集安 출토의 권운문와당 10 점을 제시하고 그것은 대체로 5 식으로 나 누고있다. 林至德 • 耿鐵華의 「集安出土的高句麗瓦當及其年代」 (《文物》, 1985 년 제 7
기)에서는 集安출토의 와당을 크게 네 종류로 나누고 있다 : 1 류는 명 문와당으로 모두 7 종 10 점, 혹회색에 권운문, 명문이 있고 4 세기로 보고 있다. 2 류는 연화문와당으로 수량이 많다. 대체로 15 식으로 나누고 있 다. 혹회색, 홍색 등으로 4 세기에서 5 세기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3 류는 짐승얼굴와당으로 수량이 상당히 많으며 4 식으로 나누고 있다. 모두 붉 은색이고 연대는 4 세기 말에서 5 세기로 본다. 4 류는 인동문와당으로 수 량이 많지 않다. 이것은 4 식으로 나누고 있는데 모두 붉은색이며 연대는 짐승얼굴와당과 근접하고 있다. 고구려 와당은 궁실 전물, 관청 건물, 왕릉묘상에 사용되었다. 嚴長錄 • 楊再林의 「延邊地區高句麗渤海時期紋飾板瓦묶l]i采」 〔 《博 物館硏究 〉〉 , 1988 년 제 2 기(자료 없음)〕의 내용은 延邊 지구의 고구려와 발해 시기, 고 성, 고건축 유적과 무덤 출토의 문양 있는 암키와를 분석하고 있다. 암 키와 등을 분류하여 고구려 시대의 암키와와 기타 지구 출토물과 비교하 고 유적의 성격과 연대를 논하였다 한다. (3) 순금제 기물 孫仁杰의 「集安出土的高句麗金飾」 K 博物館硏究》, 1985 년 제 1 기 (자료 없 음 D 에서는 순금제 기물을 반지, 머리장식, 팔찌, 환식, 귀걸이 등 6 종 류로 분류했는데, 그 중에 귀걸이가 가장 많고 양식도 풍부하였다. 그러 한 장식들은 일종의 복식인 동시에 부장품도 되었다 한다. (4) 금동기 達生의 「高句麗的婆金銅針桂」(《博物館硏究》, 1983 년 제 1 기)에서는 吉林 省 박물관 소장의 유일한 고구려 금동 못신발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한 다. 그것은 集安縣 麻線溝에서 출토되었다. 그것은 또한 무덤의 명기로
사용되었다 한다. 銅針신은 소모성이 대단히 큰 생활용품으로 청동기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였을 때만 신으로서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耿鐵華의 「高句麗文物古遊四題」( 《 文物春秋 》 , 1989 년 제 4 기)에서는 금동 제 못신발의 전체를 소개하고 있다. 1986 년 이전까지 集安에서 5 점의 비 교적 완정한 금동제 신이 출토되었다 한다. 이것은 고구려 귀족軍의 우 두머리가 겨울에 빙판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신으로 벽화 무덤과 고고학 자료로 확인되었다 한다. (5) 청동제 도장 華岩 • 杰勇의 「集安出土的幾方銅印」( 《 北方文物 》 , 1985 년 제 4 기)에서는 集安 출토의 고구려 시기의 청동제 도장을 소개하고 있다 : 〈晉高句麗李 善邑長 〉 도장, 〈晉高句麗率善百長 〉 도장 등으로 모두 짐승의 꼭지가 달 린 청동제 도장이다. 제작이 정교하며 東晉이 고구려 귀족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 天如郞〉이라는 명문의 도장은 양면에 구멍을 뚫은 도장이다. 고구려에서 제작된 부장용 도장으로 연대는 4 세기에서 5 세기 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고구려의 것으로는 유일한 청동제 도장이다 .1) 1) 池內宏 『 通溝』 上卷 日 滿文化協會f l], 1937, pp. 1-73 . 2) 池內宏 • 梅原末治, 『 通溝 』 下卷 B 滿文化協會f l], 1940, pp. 1-51 . 3) 濟藤忠, 『朝鮮古代文化(1)硏究 』 , 他人書館, 1943, pp. 57-89. 4) 藤田亮策, 『朝鮮考古學硏究』, 高相書院, 1948, pp. 497-539. 5) 李殿福 「集安高句麗墓硏究」, 《考古學報》 6) 楊亂 「高句麗和鮮卑族的考古新發現」, 『 新中國的考古發現和硏究』, 文物出版社, 1984, pp. 554-558. 7) 耿鐵華, 「中國高句麗文化硏究十年 (1981-1990) 」, 『高句麗硏究文集』, 延邊大學 出 版社, 1993, pp. 1-18.
제 2 장 위치 및 영역 중국의 孫進己 등이 제시한 고구려 민족의 구성과 후한(東漢 )I) 때부터 삼국(魏), 晉代, 三燕 시기, 북위(魏), 수, 당까지의 영역 및 행정구역 울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또한 고구려의 영역에 대한 리지린의 의견 도 제시하고 孫進己 등이 제시한 遼寧 지구의 성지 54 곳, 吉林의 42 곳의 위치를 살펴보겠다. 고구려의 위치 및 영역에 대해서는 孫進己 등이 編한 『東北歷史地理』 에 자세히 기록되어 2) 있으므로 그 내용을 살펴보자. 고구려의 위치 및 영역을 살펴볼 때, 먼저 고구려족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澈語族에 대한 내용들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예와 맥은 商 • 周 시대에 중국 동북의 중부에 거주하는 2 개의 族群이었 다. 戰國 이후부터 간혹 예맥이라고 연결해서 불렀다. 그러나 이전에는 계 속 나누어 불러서 당시에 서로 다른 두 족으로 기술되었다.
표 2-1 중국의 역사 연대표
(1) 滋 예의 명칭은 西周에서 보이기 시작하였다. 『 逸周書王會篇 』 에는 周初 에 예인이 周의 북쪽, 稷晉(지금의 牧丹江 유역)과 良夷(즉 樂浪夷 현 한 반도 서북부) 부근에 살았다고 기록되었다. 『 後漢書 東夷傳 』 에도 기록이 있는데, 周묶l}에 한반도 북부에 거주한 사람들은 예인들이고 후에 箕子朝 鮮이 통치하였다는 내용이다. 春秋 때에 예의 명칭이 『管子 小匡篇 』 과 『 呂氏春秋 侍君賢』에 보이는 데, 예가 동해의 濱, 조선의 땅(東海之濱, 朝鮮之地)으로 인식되었다. 초기에는 예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다. 예의 분포범위를 조금 더 탐색 하면 후기의 사료에 예의 소재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 三國志 夫餘傳 』 에도 기록이 보인다. 그것은 夫餘가 통치한 지역 중 상당 부분의 지역이 원래 예의 땅이었고, 부여의 통치자가 타지역에서 도망와서 그 지역의 예인을 통치하였다는 것을 표명하고 있다. 그 지역은 당연히 부여 강역 중 동남편의 일부이다. 『 三國志 東夷傳』에도 기록이 있다. 즉, 예는 현 한반도 동북부에 · 있었다. 또한 일찍 이 한반도에서 발견된 『 夫祖減君之tp 』 에 따르면 〈夫祖〉는 沃 沮로 예인의 한 줄기였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옥저의 지 역 (현 함경도 및 중국 延邊 지구)은 예인의 거주지였다. 『 後漢書 武帝紀 』 의 기록에는 28 만여 인이 등장한다. 『三國志 東夷傳 』 의 기록에 따르면 東澈는 2 만 호에 약 10 만 인으로 되어 있다. 상기의 28 만여 인의 기록보 다 약 18 만 인이 적다. 즉 옥저의 5 천 호 2 만여 인을 제의하더라도 10 만 여 인의 차이가 나타난다. 이에 따르면, 漢初 예의 분포범위는 후대의 예보다 상당히 광범위하였다. 그래서 당연히 그 이후 부여, 고구려에 점 령당한 지구, 지금의 松花江상류 지역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상기한 기록에 따르면, 예인의 최초의 분포범위는 북으로는 松花江 상 류에서 시작하여 동남쪽으로 지금의 한반도 북부까지 이르렀다. 근래에
이 지역에 상당히 많은 고고학적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 은 기본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이 공통점들은 대체적으로 문화의 분포범위를 규정지어 주는데, 그것은 특히 예인의 분포 지역에 대단히 접근되고 있다. 이에 의해서 몇 사람의 학자는 이 문화의 전형적 유형인 西團山 문화는 減文化에 속한다고 주장하며, 동시에 예의 분포 범위를 추정하고 있다. 동시에 이 문화의 上限은 西周에 해당되며 예인 은 西周 때에 동북지역에 거주했던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과거에 몇몇 학자는 예인이 春秋 때에 중원으로부터 이주하였다고 주장하였는 데, 그것은 문헌상이나 고고학상 근거를 찾을 수 없다(표 2-1 참조). {2) ffi 衍 또는 絡이라고 칭하며 商 • 周 시대에 최초로 보인다. 『尙書』 와 『詩 經 韓突 』 에 기록이 있다. 『詩經 魯碩』에 〈淮夷, 鹽語〉 이라 제시되어 있 다. 여기에 지방으로 제시된 〈맥〉은 모두 북방의 유목민족을 지칭하였 다. 그로 인해서 『 周禮 』 에서는 〈 九衍 〉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衍은 많은 부락을 가지고 있었다. 상기한 기록에 따르면 맥은 하나의 커다란 族系였다. 이 족계는 동북지구에 분포되었고 또한 많은 부락을 가지고 있었다. 史書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초기에 北發,衍國, 臼民, 高夷 등의 기록 이 있었고, 그 이후에는 사서에 夫餘, 高句麗, 梁ffi, 小水衍 등이 기록 되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衍系의 부락들이다. 맥계의 분포범위는 대략 동 쪽으로 農安, 遼源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通植, 瀋陽에 이르며, 남쪽으 로는 本溪 丹東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濟齊哈爾(지지할)에 이른다. 그 동쪽은 浪 서쪽은 東胡 남쪽은 東夷 등이다. 이 분포범위는 문헌자료 와 고고학자료를 바탕으로 확정지울 수 있다. 근래 동북지역에서 발견된 많은 고고학자료 속에 그 지역, 시기, 문화 등이 상당히 많아서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 © 白金賓 • 漢書下層 문화와 望海屯-한서 하층 문화, ® 農安田家 陀子 유형, ® 東遼河 유역 문화유적, @ 康平 ]I 頂山屯 유형, ® 高臺山 • 新樂 상충 유형 등이다. 이것들은 모두 공통성을 가졌으며 이것들의 분포범위는 맥계와 대체로 같다. 先秦 시대의 문헌기록에 北發, 循國,백민, 고이 등이 보인다. 北發은 기록에 자주 나타났다. 發과 語의 발음은 같다 . 그것은 맥의 다른 칭호 이다. 『大載禮 記 少間篇 』 과 『 大載禮記 五帝德 』 에도 기록되었다. 이러한 기록에 의하면, 舜 禹, 商湯 周文時에 존재한 것이 표명되어 있다. 그 분포범위도 상기한 기록에 의하면 모두 바다 밖, 즉 지금의 동북지구로 서 山我(지금의 大 凌i iiJ 유역) 및 肅愼 (지금의 松花江 동쪽) 사이에 있었다. 『逸 周 書 王會篇』의 〈정잦 人, 應者若鹿, 迅走 〉 의 기록에 孔昆는 〈 發, 亦 東夷〉라고 주를 달았다. 『管子 檢度篇』과 『管子 經重甲』에는 發에서 濟 까지 8 천여 리이며 朝鮮과 인접되었고, 두 곳은 濟와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며 發이 비교적 가깝다고 설명되었다. 또한 發은 조선 앞에 있다. 이 조선은 지금의 한반도 서북쪽에 있으며, 濟는 현재 山東省에 있었다. 죽 發은 대략 지금의 遼寧省 동북부에 있었다. 顧韻l:ij lj 의 『 中國歷史地圖 集』에서는 發울 지금의 吉林市 부근에 있었다고 보며, 신판 『 中國歷史地 圖集』에는 發울 지금의 輝發河 유역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곳은 모두 山戒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여러 책에 기록된 山 戒과 發의 연속적 칭위가 맞지 않는다. 그리고 두 곳에서 발견된 고고학 적 문화는 澈系에 속하고 있다. 그래서 發이 맥계에 속함은 타당하지 않 다. 또한 이 두 가지 설을 채택하지 않고 北發울 지금의 瀋陽 일대라고 보는데, 이 점도 장래의 고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3) ffi國 맥국의 명칭은 기록에 비교적 늦게 보여 戰國 시기에 이른다. 그러나 맥국의 존재는 그 시기가 전국보다 이르며, 전국 때에 燕에 의해서 멸망 된다. 『 山海經 海內西經 』 에 그 기록이 보인다. 吳承志의 『山海經地理今釋 』 에 는 漢 7k 를 지금의 東遼iiiJ로 보고 맥국은 지금의 東遼河 동북에 있었다고 보고 있는데, 이 역시 앞으로 고증이 필요하다. (4) 白民 先秦 때에 동북에 거주하던 종족명이다. 『 逸周 書 王會篇 』 에 그 기록이 있는데, 孔昴는 〈白民, 亦東南夷 〉 라 주를 달고 있다. 臼民은 孔昴의 주 에 따르면 동북지역과 무관하고 오히려 夷類에 해당된다. 그러나 『 山海
經 海外西經 』 과 『 山海經 大荒東經 』 에서는 臼民國울 肅愼의 남쪽으로 보 고 있다. 또한 『 大荒東經 』 에서는 지금의 동북지구로 기록하고 있다. 『 淮南子 地形』에서는 白民과 肅愼, 그리고 沃民(후의 沃i.Ii, 지금의 延邊 지구)의 사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북 여러 종족 중 최초의 기록으로 백민과 관계된 것은 부여이다. 『 三國志 夫餘傳 』 에 그 기록이 있다. 또 부여의 동북은 읍루이다. 죽, 백민은 부여의 조상일 가능성이 크다. 백 민의 명칭은 부여의 조상들이 언제나 흰옷을 입은 데서 유래되었다. 백 민은 衍 A 의 한 갈래로 추측되고 있다. (5) 高夷 『逸周書 王會篇』의 기록에 孔昴는 〈高夷, 東北夷高句麗〉라고 주를 달 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주에 근거하여 고이를 고구려의 조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고구려의 명칭은 漢 代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리 고 고이가 이 일대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었다. 이로 인하여 고이 는 고구려 조상의 명칭으로 史 畵 에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고이의 지역 은 여기에 따르면 지금의 新賓 등지일 가능성이 있다. 고이는 衍族의 한 갈래이다. 1 25-220 년(後漢) 고구려족 및 5 부의 분포 지역 後漢 시기에 고구려는 병합된 인근의 각 예맥 부락의 기초 위에서 점 차 하나의 거대한 민족으로 형성되었다. 원래 각자 독립된 부락이 융합 되어 고구려 민족은 다섯 개 지역성의 부락을 이루었다. 고구려 고분의 분포범위는 곧 고구려 민족의 분포범위이다. 고구려 민족의 분포범위와 고구려 왕국의 관할범위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문제이다. 고구려 왕국의 관할범위 내에는 고구려 민족에게 통치당한 다른 민족의 거주지도 포함 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沃沮 梁衍 등이다. 과거의 학자들은 고구려 왕 국의 강역만 살펴보았지 고구려 민족의 분포범위는 고증하지 않았다. 고구려족의 5 부는 고구려의 다섯 개 부락, 또는 고구려의 다섯 개 지 구이다. 그것은 고구려 건국 후에 나타났지만 원래의 부락이 아니고 새 로이 형성된 지역성 부락이다. 최초로 기록된 고구려의 5 부는 『 후한서 』 와 『 삼국지 』 였다. 『 후한서 고 구려전』에는〈凡有五族, 有消奴部, 絶奴部, 順奴部,漏奴部, 桂婁部, 本 洞奴部爲王, 稽微弱, 後桂婁部代之〉로 기록되었고, 『 삼국지 고구려전 』 에 기록된 것도 대체적으로 같다. 그러나 消奴部는 洞奴部가 되고 또한 〈絶 奴部世與王婚〉으로 제시되었다. 상기한 두 책은 모두 五部의 출현연대, 來源 및 분포범위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였다. 과거 상당수의 학자들
이 고구려 5 부의 형성과정을 논하였지만 구체적으로 5 부의 소재를 토의 하지는 않았다. 최초로 기록된 고구려 5 부의 소재는 唐代 李 賢 의 『 후한서 고구려전 』 에 대한 주석에서 발견된다. 그는 〈 案今高句麗分爲五部, 一日內部, 一名黃 部, 卽桂婁部也, 二日北部, 一名後部, 卽絶奴部也, 三日東部, 一名左部, 卽順奴部也, 四日南部, 一名前部, 卽潘奴部也, 五日西部,一名右部, 卽 消奴部也 〉 로 풀이하였다. 그는 비록 5 부의 구체적 소재지를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5 부의 상대적 방위를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이 고구려 5 부의 위 치를 고증할 수 있도록 논거를 제시하였다. 어느 학자는 계루부가 源江과 富爾江 사이에 있었다고 보는데, 그곳은 지금의 集安,桓仁, 通化 일대이다. 소노부 지역은 浦流水 일대로 지금 의 新賓 富爾江 상류이다. 소노부는 梁祖 즉 小水衍울 포함하고 있다. 북부는 계루부의 북쪽으로 지금의 吉林省 輝發河 유역의 柳iiiJ' 海龍, 盤 石, 棒句 일대이다. 순노부는 고구려의 동부이다. 그것은 태백산 동쪽을 지칭하고 沃沮에 속한다. 남부의 관노부는 지금의 集安 臨江縣等과 압록 강 이남, 청천강 이북의 지역이다. 이것이 고구려 5 부의 소재지에 대한 구체적 검토 내용이다. 고구려 5 부의 소재지에 대한 것을 연구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것 은, 고구려 5 부는 고구려 민족의 5 부라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고구 려 민족의 여러 부에 융합된 사람들만 포함시켰고, 단독으로 존재하여 고구려 민족 부락에 융합되지 않은 곳은 沃沮 梁ffi, 小水衍 등이었다. 주의하여야 될 점은 梁衍(지금의 太子河 상류), 沃沮(지금의 延邊지구 및 함경도) 등은 후한 초에 모두 고구려에 정복당하였지만 후한 시대에 아 직 고구려 민족 내에 융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옥저는 『 後漢書 』 및 『三國志』에 모두 독립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梁語은 『삼국사기 』 에는 고구려 민족이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인하여 위의 두 곳은 모두 고구려의 동부 및 서부에 포함시킬 수 없다. 고구려의 거주지역은
후한 때에는 棒句, 盤石 등지에 이르지 못하였다. 남부 역시 청천강에 이르지 못하였다. 어느 학자는 〈 朱蒙倉皇容至此 所帶隨從畢意是極少數人 〉 이며, 그가 의 뢰한 것은 당연히 〈 言語法月 1 j多同 〉 의 혈연적으로 가까운 溝流, 菩人, 梁 祖 易思 蓋馬 등의 부락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부락둘은 기원 전 1 세기를 전후하여 이미 다섯 개의 비교적 커다란 부락연맹을 형성하 고 있었다. 계루부는 5 부의 중심지였다. 즉, 고구려 최초의 건국 도성인 訖升骨城 일대는 계루부의 소재지이며 또한 桓仁 오녀산산성 부근이다. 이에 따르면 북부, 죽 절노부로서 홀승골성의 북쪽에 소재하며 지금의 通化縣 일대이다. 순노부는 동부로서 右部라고 칭하며 홀승골성의 동쪽, 즉 지금의 集安縣境에 있다. 관노부는 남부이며 前部로 칭하였고 홀승골 성의 남쪽, 즉 지금의 桓仁縣 남부와 寬句縣 북부에 있었다. 소노부는 西部로서 左部라고 칭하였으며 홀승골성의 서쪽 지금의 新賓縣 일대의 지역이다. 『 삼국사기려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1 세기에는 고구려 5 부가 형성될 수 없었다. 5 부의 형성과정은 중앙의 계루부가 기원전 37 년 주몽이 졸본 부여에 이르러서 조성되었다. 이 부는 기원전 1 세기에 이미 존재하였다. 그러나 당시 졸본부여는 계루부라고 부르지 않았다. 계루부로 개칭된 것 은 고구려 5 부의 형성 이후의 일이었다. 서부 소노부는 동명왕 4 년(기원전 34) 주몽이 비류수 상류의 비류국을 멸한 후에 조성되었다. 그의 최초의 명칭은 비류부였다. 『삼국사기 』 에 기록된 것을 보면 적어도 1 세기 상반경에는 여전히 비류부라고 불렀고 소노부라고 칭하지는 않았다. 소노부의 출현은 1 세기보다 이르지 않다. 동부 순노부는 동명왕 6 년(기원전 32) 태백산 동남의 存人國울 멸한 후 에 조성되었다. 『 삼국사기 』 권 15 의 기록을 동하여 당시 潘那部라고 칭 하였던 것으로 알 수 있다. 어느 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관나는 순노부이 다. 그러나 언제 순노부로 개칭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상기한 기록에
의하면 소노부와 순노부의 형성 시기는 기원전 1 세기 초이다. 그러나 정 식으로 고구려 5 부의 하나가 된 것은 1 세기이다. 북부 절노부, 죽 연나부는 1 세기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 삼국사기 』 권 14 의 기록은 두 가지로 해석되는데, 하나는 고구려가 부여의 항복인들을 위하여 연나부를 설치한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고구려에 원래 연나부 가 있었는데 부여인들이 항복한 후에 연나부 내로 합류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설에 의하면 연나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불분명하다. 남부의 관노부는 『 삼국사기 』 에 관나부로 칭하고 있다. 그것은 서기 26 년 고구려가 蓋馬國과 句茶國울 멸한 후에 형성되었다. 관나부는 『 삼국 사기』 태조왕 21 년(서기 72) 조에 보인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 5 부의 형성은 1 세기경이다. 사실상 기원전 1 세기 후반에 주몽이 졸본부여에 도달해서 비로소 점차 부근의 부를 병합하였 다. 그러나 겨우 30 년 동안에 고구려 5 부를 형성하기는 불가능하였다. 더욱이 기원전 1 세기에 이미 5 개 부락연맹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은 없다. 고구려 5 부는 당연히 1 세기에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고구려 5 부는 1 세기에 형성되었다. 그리고 서기 3 년에 고구려가 홀승 골성으로부터 國內 尉那巖城으로 천도한 것을 고려하면 5 부의 위치를 추 론할 수 있는데, 홀승골성은 중심지가 될 수 없고 당연히 국내 위나암성 이 중심 이 된다. 죽 기 원전 37 년에 주몽이 졸본부여 에 도달한 후 30 년이 경과한 기원전 1 세기 말경에 고구려 5 부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서기 3 년 에 고구려가 국내 위나암성에 천도하여 5 부가 홀승골성을 중심으로 이루 어졌다면 그 기간이 겨우 10 여 년 정도가 되는데 실제로 불가능하다. 이 에 따르면 고구려 5 부 소재지의 고증은 반드시 국내 위나암성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국내 위나암성은 지금의 集安覇王朝山 山城으로서, 이에 따르면 계루 부의 위치 역시 지금의 集安縣 패왕조산성 일대이다. 서부 소노부는 비 류부로부터 조성되었다. 그곳의 거주지는 비류수(지금의 富爾江) 상류이
다. 북부 절노부는 위나암성 (지금의 集安縣 패왕조산성)의 북쪽에 있었으 며, 그곳은 당연히 지금의 通化 경내의 潭江 상류이다. 동부 순노부는 지금의 集安縣 동쪽 경계 長白縣 일대이다. 남부 관노부는 지금의 集安
縣 서남 경계의 압록강 양안에 있었다. 고구려 5 부의 계속된 확장과 천도 과정 중 여러 시기 동안의 5 부의 분 포범위는 당연히 갇을 수 없다. 2 後漢 시기 고구려 왕국과 도성 고구려 수령에 대한 왕의 칭호는 서한 때에 시작되었다. 왕망이 고구 려왕을 下句耀侯로 낮추어 지칭한 예도 있으나 후한 광무제 때 다시 왕 위가 복귀되었다. 『후한서 백관지』에 따르면 고구려 왕국은 漢代 〈比郡 縣〉의 하나의 만족으로 건치되었다. 그것은 고구려가 漢代에 정식으로 漢의 판도에 들어간 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후한 때에 고구려는 여러 차례 漢에 대하여 저항하여 군현을 침범하고 백성을 노략하였으나 오랫동안 한조에 신복하였다. 『후한서 고구려전』과 『삼국지 고구려전』에 그 기록이 있다. 고구려 왕국의 관할범위는 『후한서 고구려전』에 〈南與朝鮮, 減語, 東 與沃沮 北與夫餘接, 地方二千里〉라고 기록되어 있다. 〈南與朝鮮〉은 구칭호를 따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후한 때에 조선 지 역에 낙랑군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남쪽은 당연히 낙랑 군이다. 후한 초에 고구려가 비록 한 차례 낙랑군을 점령한 일이 있지만 얼마 안 되어 다시 漢의 소유가 되었다. 『삼국사기』 권 14 에 의하면, 후 한 때에 고구려 왕국 남쪽이 薩 7k( 지금의 청천강)와 낙랑군의 접경지역이 라는 것을 제시하여 준다.또한 『삼국사기 』 권 15 의 기록은 고구려 〈 南至薩 7k 〉 를 지칭한다. 동시 에 고구려 왕국의 동쪽 경계는 후한 때에 이미 〈 東與沃i11. 〉 가 아니고 〈 東 至浦海 〉 라는 것을 설명해 준다. 『 후한서 』 에 기록된 〈 東與沃i11. 〉 는 서기 56 년 이전의 정황이다. 고구려 남쪽의 예맥은, 즉 『삼국지 동예전 』 에 기 록된 減이다. 예와 고구려의 분계 지점은 대략 지금의 한반도 동북부의 龍興江이다. 고구려의 북쪽은 부여였다. 당시 고구려는 지금의 西豊, 遼源 일대의 부여를 공멸하였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의 북쪽 경계는 이미 지금의 吉 林省 哈達嶺울 넘어섰다. 西平市 박물관의 고고 조사에 따르면 吉林 伊 通으로부터 遼寧 西豊에 이르는 사이에 漢代의 성벽유적이 있는데, 이것 은 부여와 고구려 사이의 邊膳일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 왕국의 서쪽은 한의 玄菊郡 및 遼東郡이다. 『 삼국사기 』 권 13 에 따르면 후한 때 고구려현지 (지금의 新賓縣境) 및 梁衍境(지금의 太子河 상류)은 한 번 고구려에 점령당했다는 것울 나타내 준다. 후한 때 현도 군지는 지금의 撫順市 노동공원 古城으로 옮겨졌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 의 서쪽 경계는 지금의 撫順과 新賓 사이이다. 3 後漢 시기 고구려 왕국의 國內 지구 國內의 의미는 국가의 안(內)이라는 뜻이다. 그곳은 고구려 민족(자칭 國人)의 후한 때 취거지역이다. 『 삼국사기』 권 16 의 기록에 의하면 국내 에 거주한 사람들은 국인이다. 즉 고구려 민족이라고 표명하고 있다. 거 기에는 고구려 민족(인들)에게 정복당한 기타 민족의 거주지가 포함되지 않는다. 당시 기타 민족은 아직 고구려 국인의 자격을 얻지 못하였다. 〈국인〉의 명칭은 후한 말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삼국사기』 권 13 의
기록에서 국내는 일개 지역의 명칭이라는 것을 명확히 지칭하고 위나암 성은 이 지역의 하나의 성이라는 것도 표명하였다. 고구려 강역의 확대에 따라서 국내는 새로운 뜻을 함유하였는데, 그것 은 곧 고구려 왕국의 왕성 및 부근 지역, 즉 王畿 F眉 E 를 지칭하였다. 5 세기에 이르러 고구려가 대동강 유역으로 천도한 후에 국내는 또한 고구 려 왕국 중 하나의 특정 지구의 명칭이 되었다. 후한 시기 국내 지역의 범위는 고구려 5 부의 거주구가 포함되었다. 즉, 동쪽으로는 지금의 長臼縣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지금의 集安縣 압록 강 유역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지금의 富爾江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지금 의 海 }1 에까지 이르렀다. 國內 지역은 고구려 초기의 주요한 建都 지구이다. 졸본 지역의 訖升
骨城을 제의하고 고구려 초기의 도성, 즉 尉那巖城, 丸都城, 平壤城(非 대동강 유역), 黃城(평양의 동쪽) 등 모두 국내 지구에 있었다. 위나암성 이 국내 지구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 삼국사기 』 권 13 에 기록되어 있다. 환도, 평양 등이 국내 지구에 속해 있다는 사실도 다음 자료에서 볼 수 있다. 즉 『 삼국사기 』 권 17 에서 보면, 환도에 수도를 정하였는데 그것이 국내이다. 즉 환도가 국내에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 밖에 동 천왕조의 기사와 중천왕조의 기사는 평양성이 국내에 있지 않고 이미 대 동강으로 천도한 것 같다. 죽, 평양성은 국내에 있지 않았다. 혹자는 이 시기에 평양은 아직 국내에 있었다고 보고 있기도 하다. 『삼국사기』 권 37 에 의하면 서기 3 년부터 국내의 위나암성에 천도하였다. 209 년에 환도 성에 천도하고 247 년에 평양으로 천도했으며 343 년에 다시 평양 동황성 에 천도하였는데 모두 국내 지구이다. 〈國內〉에 城名울 붙인 것은 사적에 뒤늦게 보이는데, 그것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4 세기다. 『삼국사기』 권 18 고국원왕조에 국내성은 평양성, 환도성과 결코 동등하게 보지 않는 것이 증명되었다. 왜냐하면 평양 성은 〈증축〉이라고 기록하고 환도성은 〈수습〉이라고 기록한 것은 두 성이 모두 일찍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설명하여 준다. 국내성에 대한 稱築 은 당연히 始築이라는 뜻이다. 이 국내성은 당연히 지금의 集安縣에서 북쪽으로 10 리 지점에 있는 山城子山城이다. 그 이후에 고구려 도성이 대동강 유역으로 천도하였는데 여전히 新都룰 평양성이라 불렀다. 원래 국내 지구에 있었던 평양성은 국내성과 더불어 총칭하여 국내성이라고 불렀다 .3) 그러나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 王健群은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고구려 왕도의 천도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발전하였고 그 천도 순서 는 〈沃沮城 ➔ 國內城 ➔ 丸都城(集安縣古城) ➔ 平壤城 〉 이라는 것이다. 고 구려 최초의 王者!에 대하여 그는 먼저 고구려현이 있었고, 그 후에 고구 려국이 되었는데 그 시간은 70 년이 걸렸으며, 고구려가 고구려현을 점령 한 후 그 지명을 국명으로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고구려 제 1 차 建都의 지방은 원 고구려현의 舊 址 沃ill.城이라는 것이다. 그 지역은 지 금의 함흥 지방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 제 2 왕도, 즉 두번째 왕도에 대하여 그는 서한 말년에 고구려가 옥저성에 입국한 후 부근 부락들을 정복하였으며, 玄萊郡이 서쪽으로 이 전됨에 따라서 점차 서쪽으로 발전하였다고 보았다. 즉, 『 삼국사기 』 기 록을 인용하여 유리왕 22 년에 국내에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세웠다는 것 이다. 즉, 국내는 不而t로서 嶺東七縣 중의 하나이고, 그곳은 東部都尉 治所로서 당연히 古城이 있는데, 그곳이 곧 국내성이라는 것이다. 고구려 세번째 왕도는 『삼국사기 』 의 기록에서, 산상왕 2 년 (198) 에 환 도성을 쌓고, 12 년 10 월에 丸都에 천도한 것을 인용하고 있다. 이 환도 성은 西蓋馬와 玄菱城(高句麗城)의 舊 址, 죽 지금의 集安古城으로 보고 있다. 죽 , 세번째 國都는 환도성이라는 것이다. 고구려의 네번째 왕도, 그 이후 두 차례의 천도에 대하여 그는 산상왕 이 환도에 왕도를 세운 지 35 년 이후에 동천왕은 위나라 장군 毋丘儉에 게 환도성이 함락되자 대동강가의 평양성으로 천도하였으며, 그리고 고
국원왕 12 년 (342) 에 다시 환도로 수도를 옮긴 후 장수왕 15 년 (427) 에 다 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그곳에서 고구려 멸망 (668) 까지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종합하면, 王健群은 고구려가 옥저성에 建都, 국내성 2 차 천도, 환도 (集安) 3 차 천도, 4 차 평양 천도, 5 차 환도로 재천도, 6 차 평양에 천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4) 그러면 孫進己 등의 주장을 계속 살펴보자. 4 後漢 시기 고구려 왕국의 도성 -~위나암성 後漢 시기 고구려 왕국의 도성은 國內 尉那巖城이다. 『삼국사기』 권 13 동명왕조의 기록은 이를 잘 나타내 준다. 산상왕 12 년 (209) 에 이르러 서 〈移都干丸都〉하였다. 220 년에 이르러 후한이 멸망하였다. 그러나 결 국 후한의 세계가 되었다. 즉 고구려의 왕성은 기본적으로 國內의 위나 암성이다. 과거에 위나암성, 죽 국내성은 지금의 集安縣城으로 인정되어 왔다. 그 근거는 『삼국사기』 권 37 에 〈國內州, -=--云不討, 或云尉那巖城〉으로 기록되었다. 그래서 국내성은 위나암성으로 인정되어 왔다. 또한 후한의 여러 기록에서도 국내성의 위치는 바로 위나암성이 지금의 集安縣城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삼국사기』 권 13 의 기 록에 〈往移都於國內, 築尉那巖城〉으로 되어 있는데, 국내는 일개 지구의 명칭이다. 그리고 尉那巖은 국내 지구에 천도하여 수축한 하나의 도성이 다. 국내 지구에는 기타 여러 성이 있다. 이로 인하여 국내와 위나암성 으로 혼동하여 하나의 城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삼국사
기 』 권 14 대무신왕조에 따르면 위나암성은 암석의 땅이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연못은 산성을 만들 때 수축한 것이다. 그곳은 平地城이 아니 다. 동시에 그곳은 평시에는 성밖에 거주하다가 의침이 있울 때는 성안으 로 들어가 적을 수비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위나암성은 평지성의 集安 縣城에 속할 수가 없다. 셋째, 고구려 原都는 홀승골성 (桓仁縣 五女山山 城)이다. 교의에서 돼지를 추격하여 국내 위나암에서 그것을 붙잡았다는 기록은 위나암성과 홀승골성의 거리가 멀지 않은 것을 설명하여 준다. 지금의 集安縣城과 桓仁 오녀산산성과의 거리는 200 여 리가 되며 그 중 간에 높은 산이 있다. 홀승골성의 교의에서 돼지물 추격하여 200 여 리 밖에 있는 지금의 集安縣城까지 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넷째, 중 국 학자들은 蓋馬縣이 압록강 유역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 개마국은 대 무신왕 9 년(서기 26) 에 고구려에 의해서 소멸되었다. 그리고 고구려가 국내 위나암성으로 수도를 정한 것은 서기 3 년이다. 그리고 당시는 고구 려가 아직 개마국을 멸하지 않은 때이다. 당시에 또한 압록강변의 지금 의 集安縣城에 도달하여 위나암성을 축조한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어느 학자는 국내 위나암성이 곧 지금의 集安縣에서 북쪽으로 10 리 되는 산성자산성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동시에 〈 위나암성은 곧 후대 의 환도성〉이라고 주장한 예도 있다. 그러나 이 설은 더욱 이해하기가 어렵다. 『삼국사기』에 고구려는 서기 3 년에 국내 위나암성에 수도를 정 하고 서기 209 년에 환도로 천도하였다고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만약 위 나암성이 ·곧 환도성, 죽 오늘날의 산성자산성이라면, 고구려는 산성자산 성으로부터 다시 산성자산성으로 천도한 것이 되므로 이 설은 불가능하 다. 어느 학자는 위나암성이 오늘날 桓仁縣의 오녀산산성으로 보고 있지만 이 이론도 옳지 않다. 오녀산산성은 고구려 최초의 수도인 홀승골성이지 결코 위나암성은 아니다. 어느 학자는 위나암성은 오늘날 集安縣의 패왕조산산성이라고 주장하
고 있다. 이 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즉, 패왕조산산성은 富爾江과 潭 江이 합류되는 동남쪽, 新開河가 북쪽으로 潭江에 들어가는 서안에 위치 하고 있다. 그곳은 3 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고 뒤에는 높은 산이 있다. 이것은 〈 山水深險 〉 설과 부합된다. 또한 그곳에서 홀승골성까지 60 리다. 이 또한 홀승골성 교의에서 돼지를 추격하여 국내 위나암성에서 잡았다 는 기록과 일치한다. 즉 패왕조성은 산성이다. 그 성은 높은 산으로 둘 러싸여 있다. 그 산의 가장 높은 곳은 해발 262 . Srn 였다. 산성 내에는 하나의 泉水 흔적이 있다. 이것 또한 『삼국사기』에 위나암성은 암석의 땅 위에 있었고 그 안에 泉 7k 가 있었다는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그 의 패왕조산산성의 서북쪽으로 몇 리 떨어진 지점에 毋背嶺 고분군이 있으 며, 산성의 동남 방향에는 橫路村除의 고분군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고 구려 초기, 중기에 속한다. 이것 또한 위나암성이 고구려 초기의 도성이 라는 것과 일치한다. 이에 따르면 패왕조산산성이 위나암성이라는 설은 합당하다. 5 고구려 왕국이 국내 지구 외에 통치하던 주요 지구 (1) 졸본 주몽이 최초로 나라를 세운 지구이다. 서기 3 년 고구려는 졸본의 홀승 골성으로부터 국내의 위나암성에 천도하고 다시 환도성으로 천도하였다. 원래의 졸본부여 지구는 고구려의 발상지로서 시조(주몽)의 묘를 세웠 다. 역대 고구려 왕들은 언제나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이로 인하여 졸본은 하나의 독립지구로서 사적에 기록되었다. 『삼국사기』 권 13 의 기록에서는 당시 이 지구를 졸본이라고 칭하지 않
고 古접 B 로 칭하였음을 보여 준다• 『 삼국사기』 권 16 신대왕조와 권 17 의 동천왕조, 권 18 의 고국원왕조에도 그 기록이 있다. 졸본의 명칭은 2 세기에 보이기 시작하고, 졸본의 땅에는 시조묘가 있 으며 주몽이 건국한 지역으로 볼 수 있으며, 즉 졸본수(지금의 海江)와 비류수(지금의 富爾江)의 합류 지점의 뒷부분인 홀승골성 (지금의 桓仁縣 오녀산산성) 일대 및 그 부근 지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梁衍 고구려에 병합된 부락이다. 그러나 아직 고구려 민족 내에 융합되지 않고 오랫동안 고구려 민족 이의의 부락으로 존재하였다. 그래서 고구려 국 중 하나의 단독지구가 되었다. 그 지역은 현 太子河 상류이다. (3) 夫餘 부여는 전한 말에 고구려에 의해서 소멸되었고 동한 말에 고구려국 중 의 하나가되었다. 『 삼국사기 』 권 14 에 그 지역이 고구려에 귀속되었음을 알리는 기사가 있다. 또 권 15 에는 부여가 후한 때에 고구려에 예속되었다는 기록이 있 다. 고구려 왕이 부여에 가서 太后墓에 제사를 지내고 1 개월 간 머물렀 다. 이 태후는 주몽의 모친이다. 여기서의 부여는 후한 때의 부여로서 현 西風 遼原 일대이다. 후한에 이르러 새로이 형성된 부여는 이미 다른 지역에 있었다. 후한 의 夫餘故地는 고구려국 중의 하나의 독립 지구였다.
(4) 機城 후한 때 고구려 동부지구의 명칭이다. 『 삼국사기 』 권 15 와 권 16 에 그 기록이 있다. 책성은 후한 기간 중 고구려 주요 지구의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성의 소재지에 관하여 세 가지 설이 있다 : 1) 渤海龍原部 자리로 현 輝 春 八連城이다. 이로 인하여 고구려의 책성은 팔련성으로 주장하고 있 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는 고구려 문물이 발견되지 않아서 1) 설은 채택 될 수 없다. 2) j少基城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홍갈색 繩紋과 방격문 기와 에 의해서 고구려 책성은 현 蓮春 사기성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 성은 輝春縣에서 동남 방향으로 25 리 지점에 있는데 석축 산성으로 주위 길이 는 약 14 리이다. 3) 설은 璟春縣 膳짧子山城울 고구려 산성으로 보고 있 는데 주위 길이는 20 리이고 위치는 運春縣城에서 동북 방향으로 220 리 지점에 있으며 이 일대에서 가장 큰 성이다. 그것을 고구려의 책성으로 보고있다. 어느 학자는 『 삼국지 옥저전 』 의 〈 북옥저, 일명 置溝婁〉에 근거하고, 또한 『 삼국지 고구려전 』 의 〈溝婁者, 句麗名城也〉의 기록에 근거하여 치 구루를 치성으로 보고 있다. 책성은 치성의 전음이다. 책성이 북옥저의 땅에 세워졌다는 것에 의하면 이 설은 믿을 수 있다. 또한 『 심국지 옥저전』과 동서 『 관구검전』의 기록을 종합하면 숙신의 남쪽 경계는 북옥저 (치구루성)를 넘어서 200 여 리이다. 현 북옥저 북쪽 경계는 緩芬iiiJ에까지 이르고 동쪽 경계는 러시아 연해 지구에 아른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치구루, 죽 책성은 현 運春縣 장랍자산성이다. 沙 基城에서 북부여의 동북 경계 및 숙신의 남쪽 경계는 200 여 리가 넘기 때문에 책성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5)
6 220-264 년(三國) 부여, 고구려 등의 거주구 三國(魏) 시기의 부여, 고구려 등 민족의 거주구는 대체적으로 후한 시기와 같았다. 비록 부여의 통치구는 후한 때보다 축소되었지만 고구려 의 통치구는 후한 때보다 확장되었다. 梁衍, 沃沮 . 등의 민족은 후한 때 에 이미 고구려에 통치당하였지만 삼국 시기에는 여전히 독립 부락으로 존재하였다. 『 三國志 魏志 東夷傳 』 에 기록된 네 곳을 과거 많은 학자들은 삼국 시 기 고구려족의 분포지로 생각해 왔다. 사실, 그것이 고구려국의 통치범 위이다. 고구려의 통치범위 내에 또한 피동치 민족의 거주구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한 지구까지 모두 고구려족의 거주구로 생각할 수는 없다. 고구려의 통치범위는 동쪽으로 槍海(여기에는 南北沃 i1 1.地域울 포함한다) 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구려족의 거주구는 남북 옥저가 포함되지 않는 다. 고구려 남부의 통치범위는 지금의 한반도 북부의 청천강 그리고 한 반도, 양맥과 인접된 지역까지 포함되었다. 그러나 청천강 북부에도 또 한 상당수의 조선인과 예맥인이 살고 있었다. 여기에 따르면 지금의 압 록강 이남, 청천강 이북 지구는 결코 모두가 고구려인의 거주지는 아니 었다. 고구려 서부의 통치범위는 대체로 전체 요동산지가 포함되었다. 그러 나 지금의 태자강 상류에 거주하던 양맥과 지금의 毅 河 상류에 거주하던 小水語은 고구려족 내에 융합되지 않았다. 여기에 따르면 상기한 지구는 고구려족의 거주구로 계산할 수가 없다. 고구려족의 거주구는 서쪽으로 현 富爾江까지 이른다. 고구려 북부의 통치범위는 현 吉林 哈達嶺까지 이른다. 그러나 吉林 哈達嶺 이남, 輝發河 이복 등에 본래 거주하던 사람들은 부여인이지 고 구려인은 아니다. 여기에 의하면 고구려인의 거주구로서 주요 분포지는
현 老傾, 龍岡山, 長亂 白頭山, 狼林山 등이다. 『 삼국지 동이전 고구 려 』 에 묘사된 〈 多大山深谷, 無原澤 〉 은 고구려족 거주구의 지리적 특칭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다. 7 고구려의 疆域과 王城 고구려의 강역은 기본적으로 변화가 없다. 그러나 고구려의 왕성은 여 러 차례 변화가 있었다. 이 점에 대하여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다. (1) 고구려의 강역 삼국 시기 고구려의 강역은 『 삼국지 』 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 r 후 한서 고구려전 』 의 기록과 같다. 즉, 후한으로부터 삼국 시기까지 고구려 의 강역은 기본적으로 변화가 없다. 동시에 『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의 기록에 따르면 삼국 시기 동 예는 고구려의 관할범위에 속하지 않았다. r 삼국지 고구려전 』 의 〈東澈, 沃沮皆屬焉 〉 이라는 기록은 삼국 초기의 정황을 지적한 것이다. (2) 고구려 도성 _ 환도성 후한 초기에 고구려의 수도는 국내 위나암성이었다. 그러나 『 삼국지 』 에는 후한 말년에 고구려는 丸都之下에 천도하였고, 지역은 요동의 동쪽 천 리까지 차지하였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삼국사기 』 권 16 산상왕조와 권 17 동천왕조에 의하면 고구려는 38 년 에 환도로 천도하였다.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 동안에 전후 두 차례 毋
丘 1숲 과 慕容競에게 공격을 받았다. 그래서 여러 차례 中原史 普 에 기록되 었고 고구려의 여러 城 가운데 중원에 비교적 잘 알려졌다. 여러 학자들 은 고구려가 환도에 수도를 두었던 기간이 상당히 길다고 생각하지만 실 제로는 39 년간이다. 환도성의 소재지에 대하여 과거에는 모두 『 新唐 書』 및 『 遼書 』 에 의해 현 集安縣境으로 정하였다. 『 신당서 지리지 』 와 『 요사 지리지 』 의 기록에 따르면 대체로 환도는 현 集安縣境으로 판정되지만 현 集安縣의 어느 성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鳥居龍藏의 고증에 의하면 환도성은 현 集安縣城에서 서북 방향으로 5 리 의 지점에 있는 산성자산산성이다. 오랫동안 이 주장이 통용되어 왔다. 심지어 지금도 이 성을 환도성이라고 칭하고 있고, 부근의 산들을 환도 산이라 부르고 있다. 마치 환도는 산성자산산성이 이미 정론으로 된 듯 하였다. 그러나 실제상 문제는 대단히 많다. 산성자산산성을 환도성이라고 보는 주요한 근거는 부근에서 발견된 관 구검 紀功碑에 있다. 그러나 이 비가 발견된 곳이 어디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것이 산성자산산성 부근에서 발견된 것인지의 여부는 문 제로 남아 있다. 『 集安縣文物志 』 및 『 集安縣志 』 의 기록에 의하면 관구검 紀功碑는 현 集安縣城에서 서북쪽으로 17km 지점의 작은 분구에서 출토되었다. 만약 이 출토지가 분명하다면 산성자산산성에서 그곳까지의 거리는 29 리의 지 점이 된다. 그런데 관구검비의 최초의 기록은 『 만주금석지 』 , 『 관당집림 』 에 보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이 비는 集安縣城에서 서북 방향으로 90 리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죽 소위 환도산성에서 85 리의 지점이다. 그 밖에 『東三省古蹟軟聞』의 〈集安縣丸都勒功碑條 〉 와 『동북통사 』 권 2 에 그 기록이 있다. 상기한 초기의 기록들은 모두 이 비의 발견을 集安縣에서 서북 방향으 로 90 리 지점인 板盆嶺으로 되어 있다. 왜 근년에 이르러 集安縣에서 서
북 방향으로 34 리에 있었다고 축소되어 기록되어 있는가? 孫進己 의 4 인의 조사에 따르면 이것은 일본인 鳥居 龍 藏 과 관계가 있다. 鳥 居龍 藏 은 1914 년에 조사를 했는데 두 곳의 판석령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 곳은 대 판석령으로 通化에서 集安으로 가는 도로상에 있으며, 다른 하나는 소판 석령으로 桓仁에서 源江, 富 爾江울 경유하여 集安에 이르는 도중에서 발 견하였다. 그는 비가 소판석령에서 발견된 것으로 단정하였다. 이때부 터 비의 발견지는 集安縣에서 34 리 지점인 소판석령이 된 것이다. 최근 에 발표된 『 毋丘儉紀功碑發現始末 』 이라는 굴에서 비의 발견지를 명확하 게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패왕조를 찾아가 비를 보낸 사람을 찾아 자세 히 물어 보았지 集安縣城에 사람을 보내어 물어 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비가 패왕조 부근에서 발견된 것을 알 수 있다. 그곳은 현성에서 거 리가 상당히 멀다. 패왕조에서 集安縣城까지의 거리는 97km 이다. 만약 현성에서 17km 떨어전 소판석령에서 발견하였다면 가까운 곳에서 그것 울 구하지 멀리까지 갈 필요는 없다. 그래서 현성에서 90 리의 지점에 있 는 대판석령에서 발견하였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鳥居龍藏이 비록 조 사를 하였지만 당시에 비는 그 자리를 떠난 상태여서 추적 조사를 할 수 는 없었다. 그는 다만 선입견으로 환도를 현 산성자산산성으로 인정하고 쉽게 현 소판석령으로 규정하였다. 그 이후부터 그 내용이 와전을 거듭 하였다. 상기한 내용으로 미루어 보건대 관구검 기공비의 발견 지점에 따라서 환도성을 산성자산산성으로 정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더욱이 산성자산 산성은 그 규모, 건축특징, 출토 유물 면에서 보면 모두 고구려 중기에 해당된다. 이 성은 오랜 시간이 경과되어 규모가 커졌다. 결코 초기에 건도한 39 년 전에 이루어전 것은 아니고, 또한 심하게 파괴당한 일도 있 었다. . 최근에 集安縣에서 서북 방향으로 100 여 리 지점의 熱開鄕에서 하나의 산성이 발견되었는데 현지 명칭으로 !십,馬膳山城이다. 성의 동 • 남 • 북쪽
의 세 길은 돌담으로 만들어졌고, 서북쪽에는 하나의 넓은 천곡평원(현 熱闇鄕 소재 평원)인데 거기에는 고구려 초기의 고분인 적석묘가 많다. 부근에서 발견된 다량의 철촉은 전쟁의 산물이다. 이 성은 하곡평원 내 에 있는데 그것은 〈 都於丸都之下 〉 와 부합된다. 그러나 산성자산산성은 산을 의지한 성이다. 이 성은 산 위에 있는데 상기한 것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 성은 관구검 기공비가 발견된 대판석령에서 대단히 가깝다. 遼東으로부터 고구려의 남북까지 바로 이곳에서 만난다. 과거에 丸都는 산성자산산성에 있었다고 정하였기 때문에 이 남북 두 길에 대하여 많은 해석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상으로 말히는- 것은 동서 두 길이었다. 丸都 는 관마장산성에 두었고 또한 관마장산성으로 가는 도로는 확실히 남북 두 길이다. 더욱이 북쪽 길은 源江 상류에서 남쪽의 大蓋沙i마를 따라가 면 관마장산성에 이르게 된다. 남쪽 길은 新開河를 거슬러 올라가 동쪽 으로 대판석령 북쪽을 경유하면 관마장 남쪽에 도달하게 된다. 8 고구려 新都 ――一 平壤城 『 삼국사기 』 권 17 동천왕조의 기사에서 소위 〈 丸都城經亂不可復都 〉 는 魏正始中 (245-246) 에 관구검이 환도를 공격한 것을 말한다. 『삼국지 고 구려전 』 등 모두 관구검이 환도를 공격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고구 려의 천도에 대한 내용은 기록하고 있지 않다. 여기에 따르면 상당수 학 자들이 『 삼국지 고구려전』의 〈都於丸都之下 〉 의 기록에만 근거하여 고구 려가 중국의 삼국 후기까지 환도에 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았다. 더 욱이 동진 시대 모용황이 고구려를 1 차 공격한 때가 바로 고구려가 재차 환도로 천도한 해이다. 그래서 일종의 착오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마 치 247 년에서 342 년까지 시종 환도에 도읍이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삼
국사기 』 의 기록에 의하면 이 시기에 고구려는 평양에 수도를 두었고 환 도에는 없었다. 이 평양의 소재에 관하여 『삼국사기 』 의 저자도 명백하게 알지 못하였 다. 즉, 현 대동강 유역의 평양과 혼동하였던 것이다. 『 삼국사기 』 권 18 및 권 37 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장수왕 15 년 (427) 에 〈 移都平壤 〉 으로 기록되었다. 이 평양은 지금의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다. 그러나 고구려 가 대동강 유역으로 천도하기 전에는 압록강 유역에 있었다. 『 삼국사기 』 권 37 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 위나암성에 수도를 정한 것뿐만 아니라 丸都城, 平壤城, 黃城 등에 수도를 정한 것 등은 모두 國 內 지구의 427 년 동안으로 보고 있다. 또한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성도 국내 지구(현 集安縣境)에 있었다고 증명하고 있다. 더욱이 『 通志 』 에 의 하면 고구려가 대동강 유역으로 천도한 것은 東晉 이래의 일로 보았다. 고구려가 樂浪郡울 점거한 것은 313 년의 일이다. 247 년에 대동강 유역 은 魏의 낙랑군에 속해 있었다. 당시 고구려가 魏의 낙랑군경의 현 대동 강 유역에 천도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일본의 몇몇 학자들의 예를 들면 白鳥庫吉, 鳥居龍藏, 關野貞 등은 조 사 후 삼국 시기에 지금의 한반도 서북부 및 대동강 유역은 魏의 낙랑군 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당시 고구려가 천도한 평양은 대동강 유역이 될 수 없다. 鳥居龍藏은 더욱 진일보하여 274 년에 천도한 평양은 현 集 安縣城의 石城으로 보았다. 현 集安縣城의 石築城址는 國內城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실제적으로 국내 위나암성의 예에 따르면 당연히 국내의 평양성으로 칭하여야 할 것 이다. 그것들은 모두 국내 지구에 속하지만 다른 성들이다 .6)
9 265-420 년(晉代) 부여 및 고구려족의 분포 西晉 시기의 부여와 고구려족의 분포는 대체로 漢 • 魏 시기와 거의 같 다. 다만 慕容部의 여러 차례의 정벌에 의해서 부여는 동쪽으로 천도하 고 고구려는 점차 남쪽으로 내려갔으며 분포범위는 축소되었다. 동시에 부여인과 고구려인들의 상당수가 포로로 서쪽인 遼西로 끌려갔다. 따라 서 遼西 지구에 상당수의 부여와 고구려인들이 분포되어 있다. (1) 고구려족의 분포구 『 진서 』 에는 〈고구려전〉이 없다. 다만 기타 사료에 의해서 추측되는 晉 代 고구려인들의 거주구는 이전보다 확대되었다. 고구려의 분포는 서쪽으로 新城, 南陝 일대에까지 이르렀다. 『 삼국사기 』 권 17 동천왕조의 기록에서 신성의 명칭이 최초로 보인다. 신성은 지금의 撫順 高爾山이다. 이것은 고구려의 서쪽 경계가 撫順에 이론 것을 표명하여 준다. 『 자치통감』 권 97 〈永和元年條〉의 주에 의하면 南蘇城은 현 蘇子河가 潭江으로 들어가는 동쪽으로, 즉 고구려와 燕이 대치하던 곳이다. 남쪽 으로는 고구려가 낙랑군, 대방군을 점유하고 현 한반도 서북부로 천도하 였다. 『자치통감』 권 88 〈愍帝建興條〉의 기록에 의하면 낙랑, 대방 모두 고 구려에 속해 있었다는 내용이다.
(2) 晉代 고구려족의 민족 행정단위 『 진서 』 에 고구려전이 없어 그 행정단위를 고찰하기가 비교적 어렵다. 다만 영세한 자료가 있을 뿐이다. (3) 고구려 왕국과 그 행정단위 『晉書 武帝紀 』 에 〈 東 夷 八國 歸 {t 〉 , 〈 東夷五國內附 〉 등의 기록이 있는데 그 중에 고구려가 포함된다. 『 晉 畵 康帝紀 』 의 〈 建元六年 (343) 二月, 高 句 麗遣 使朝獻 〉 이라는 기사는 『 삼국사기』 권 18 의 고국원왕 13 년조의 기 사와 일치한다. 당시에 燕이 晉 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晉에 전달하여 주었으므로 『晉曹』 에 기록되었다. 두 기록 모두 어떤 관직을 내려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삼국사기 』 권 18, 고국원왕 25 년조에 비 록 연이 독립된 나라로 되어 있지만 〈 封樂浪公, 王如故 〉 는 이전에 내린 관직과 동일하다. 여기에 따르면 晉 {t에 이미 고구려에 왕을 봉하였다. 고고학적 발견에 의해 〈 晉高句麗 率 善 1 f長 〉 〈 晉高句麗率善信長〉 〈晉高 句 麗率善 邑長 〉 등의 명문이 있다. 여기에 1 f長, 信長, 邑長 등은 모두 晉 에서 직접 내려 준 官f l 이다. 이러한 천장, 백장, 읍장을 관리하는 고 구려왕 역시 晉에서 봉하였다. 동시에 고구려 왕국 내에 이미 천장, 백 장, 읍장 등 세 계급의 행정단위가 있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그러나 『 삼 국사기 』 권 17 의 봉상왕조에 따르면 천장, 백장 의에 部(예를 들면 北 部), 太守(예를 들면 新城太守), 宰(예를 들면 新城宰) 등의 관직이 있었 다. 당시 행정단위의 예를 따르면 郡에는 太守, 縣에는 宰를 두었다. 고 구려는 동시에 군현의 행정단위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군현 행 정단위와 천장, 백장의 制는 다르다. 당시 고구려에는 두 가지의 행정단 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郡,縣, 村制로서 晉 A 이 관할하고, 다른 하나는 천장, 백장, 읍장제로서 고구려 및 기타 각 부족이 관할한
것이다 . 晉代에 이르러서 고구려의 행정단위가 점차 완비된 것으로 볼 수 있 다. 그러나 기록에 나타난 당시의 고구려의 행정단위 명칭은 많지 않다. 다만 평양, 환도, 황성 등 몇 곳 도성의 명칭, 그리고 기타 국내, 졸본, 신성, 남소, 남협, 목저, 북치, 압록 등이 있었다. 10 고구려 도성 晉代 고구려 도성지는 네 곳이고, 모두 세 번의 천도가 있었다. 晉初 에는 평양성에 수도가 있었고, 342 년에는 환도에 1 년 있었고, 다시 평양 동쪽의 黃城으로 옮겼다. 최후로 대동강의 평양으로 옮겨 갔다 . 이 내용 울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갇다. O 平壤城 晉初 고구려의 도성아다. 고구려 동천왕 21 년 (247) 평양으로 천도하였 다. 당시 고구려는 아직 현 대동강 유역을 점유하지 못하였다. 고구려가 낙랑군(지금의 대동강 유역)을 차지한 것은 미천왕 14 년 때의 일이다. 이 에 의하면 247 년에 평양은 대동강 유역이 아닌 압록강 유역에 있었다. 이 성을 곧 평양이라고 불렀고 그것은 평지성이었다. 현 압록강 유역의 초기 평지성은 현 集安縣城, 즉 초기의 평양성이다 . 『 삼국사기 』 권 18 고국원왕조에 의하면 晉代에 고구려가 평양에 수도를 가전 기간은 76 년 간이었다. ®丸都城 東漢 말년 (209) 에서 삼국 초기 (247) 까지 고구려의 도성이다. 후에 魏나 라 관구검의 공격에 의해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 삼국사기 』 권 18, 고국원왕조에 의하면 342 년 고구려는 다시 환도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같은 해 11 월 平壤東皇 城으로 기록되었다. 고구려는 환도성을 수복하여 다시 수도를 환도로 옮겼다. 그러나 3 개 월 후에 환도성은 모용황에게 공격당하여 다음해 7 월 평양 동쪽의 黃城 으로 옮겼다. 그러므로 晉{t에 환도성에 수도를 가진 것은 겨우 1 년이 다. 환도성의 소재에 대해서 孫進己 등은 현 集安縣의 관마장산성으로 보고 있다. 과거의 이론으로서 환도성이 集安縣의 산성자산산성으로 보 고 있으나 이 성은 후에 만든 국내성이지 환도성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黃城 晉 代 후기 고구려의 도성이다. 『 삼국사기 』 권 18 고국원왕조에 의하면 황성은 평양성 동쪽이다. 그러나 이 평양은 대동강 유역의 평양은 아니 다. 왜냐하면 『 삼국사기 』 권 37 에는 장수왕 15 년 (427) 이전은 아직 대동 강 유역의 평양으로 옮겨 오지 않았고 여전히 국내 지구에 있었다. 이때 의 평양 및 황성은 모두 국내 지구(현 압록강 유역)에서 찾아야만 된다. 상술한 바와 같이 초기 평양은 현 集安縣城이다. 그러므로 황성도 당연 히 集 安縣 동쪽이다. 최근 출판된 『 集安縣文物志 』 에 보면 集安縣에서 동쪽으로 1 리 지점에 東臺 子 유적이 있는데 아마 〈 帝王宮室和祭祀社稷的地方〉일 가능성이 크 다. 이 유적은 黃城의 소재지로 짐작된다. 이유는 그곳이 압록강 유역의 평양 동쪽이다. 광개토대왕릉비는 바로 이 유적에서 동쪽으로 몇 리의 지점에 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 때에 황성에 수도가 있었다. 1) 晉代 고구려의 여러 성도 ®國內城 國內는 두 가지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하나는 넓은 의미로서 도성 부 근의 지구, 죽 지금의 압록강 유역을 가리킨다. 예로 『 삼국사기 』 권 17
서천왕조에 기록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구체적으로 어느 하나의 성을 지적하고 있다. 『 삼국사기 』 권 18 고국원왕조에 처음으로 국내성의 명칭 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과거에 국내는 모두 넓은 의미로서 하나의 지구 를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위나암성은 국내 위나암성울 지칭한다. 여기에 서 처음으로 국내를 정식 城名으로 사용하였다. 이 성은 당시 國都 평양 성(지금의 集安縣城)의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명칭을 얻게 되었다. 『 삼국 사기 』 를 살펴보면 국내성과 환도성을 나란히 볼 수 있다. 하나는 新築이 고 다른 하나는 수습이다. 그러므로 국내성은 환도성이 아니라는 것이 나타났다. 현 集安縣城에서 북쪽으로 5 리 지점에 있는 산성자산산성이 신축된 국내성이라는 것은 의심스럽다. 고구려의 수도가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천도한 후에 압록강 유역의 평양성(지금의 集安縣城)과 중복된 명칭을 피하기 위하여 이 성들을 국내성으로 총칭하였다. 이후의 국내성 은 이 두 성을 포괄하고 있다. ®卒本城 卒本은 원래 강의 명칭으로 지금의 源江이다. 후에 지역 명칭이 되어 고구려가 최초 건국한 홀승골성 부근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 후에 홀승 공성의 명칭은 기록에 보이지 않고 졸본의 이름만 기록에 여러 차례 보 인다. 『삼국사기 』 권 18 의 기록에 졸본에 시조묘가 있었다는 것으로 보 아 졸본이 고구려 최초의 도성인 홀승골성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 었다. 여기에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졸본성이 홀승골성으로 改 名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졸본성을 홀승골성에 대단히 근접해 . 있 는 다른 성으로 보는 것이다. 고고학 조사에 의해서 발견된 桓仁縣 오녀 산산성과 10 리 거리에 또 하나의 고구려 년 초기 평지성이 있는데 그 성을 下古城子라고 부른다. 桓仁縣에서 서북 방향으로 8 리 지점에 위치한 六 道iiiJ子鄕 古城子村은 동쪽에 潭江이 있다. 그 주위의 길이가 거의 1000m 이다. 이 성이 졸본성으로 추정된다.
®新城 晉代에 그 명칭이 보이기 시작한다. 『 삼국사기』 권 17 서천왕조와 산 상왕조 및 권 18 고국원왕조에 그 기록이 보인다. 이에 따르면 신성은 고구려의 北境으로 鮮卑慕容部와 대단히 가깝다. 『 삼국사기 』 권 17 의 〈 新城爲國之東北大鎭 〉 은 서북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 『자치통감 』 권 201 의 〈 新城高麗西北要害 〉 의 기록에 의해 정정이 된다. 더욱이 신성은 晉에 서 隋唐에 이르는 사이에 고구려가 晉 • 隋 • 唐兵과 여러 차례에 걷쳐 싸 우던 장소이다. 그것이 고구려의 동북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거의 설은 모두 당대에 기록된 新城의 방위에 의해서 新城이 현 撫 順市 海江 北岸의 고이산산성으로 비정하였다. @南蘇城 〈 南蘇 〉 지명은 『한서 지리지』에 현도군 고구려현에 있었던 것으로 처 음 나타나는데 그 誌에 遼 7k 는 이미 大遼 7k 로 홀러들어간 것을 칭하는 것으로 곧 小遼水인데, 현 禪iiiJ이다. 이 南蘇 7k 와 小遼7 k 는 서로 가까운 거리에서 흐르고 있다. 이 강물들은 다시 서북쪽 塞外(변방 밖)로 빠 져 나와서 漢高句麗縣(지금의 新賓永陵鎭西南漢城) 경내로 홀러들어간다. 이상의 여러 조건과 일치하는 것은 지금의 蘇子河이다. 어느 학자는 東 遼河 및 范iiiJ가 南蘇 7k 라고도 하지만 모두 고구려와는 거리가 너무 멀어 이 설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남소성의 기록은 晉代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晉書 載記第九 』 , 『 資治 通鑑』 권 97, 『高麗記』에 기록이 있다. 遼海羲書本 『翰苑』의 후단에 內 藤虎次郞의 跋文이 있는데, 이에 의하면 『 翰苑 』 원문에는 新城이 없고 雜城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內藤이 의도적으로 약간 고쳤기 때문이다. 아니면 남소성 남쪽에 다른 하나의 雜城이 있었을 것이다. 더욱 〈南蘇城在神聖 ➔ t七十里〉의 설은 방위상 추론해 볼 만하다. 『 자치 통감』 권 96 의 成帝咸康條에 의하면 남소성은 결코 新城의 正 ➔ t이 아니 고 동북 방향이다. 이로 인해 몇 사람들이 〈南蘇城在新城北七十里〉로 보
고 남소성이 현 鐵嶺縣 備陣堡山城說울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장래에 다 시 검토할 문제이다. 남소성을 南蘇(지금의 蘇子河)로 칭한다면 그것은 蘇子iiiJ 유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남소성의 소재는 두 가지 조건과 일 치하고 있다. 하나는 蘇子河 유역이고 다른 하나는 신성(지금의 撫順 北 部)이다. 여기에 근거하면 남소성을 지금의 撫順市 鐵背山 山城으로 정 하는 데 무리가 없다. 『 中國東北地圖集東北地區資料麗篇』에서는 今西春秋의 설에 동의하고 있다. 즉 남소성은 현 蘇子iiiJ 및 潭iiiJ의 합류 지점에 있다. 그곳은 대략 현 鐵背山 또는 薩爾游上의 하나의 산성이 될 것이다. 과거에 오랫동안 鐵背山 일대에서 고구려 성지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근래 撫順市 博物館 에서 조사를 실시하여 현 鐵背山 界藩城城膳 밀충에서 模形 石魂를 쌓아 놓은 것을 발견하였다. 계형 석괴(쐐기형 석괴)는 고구려 축성의 특허품 이다. 이로 인하여 이 성은 본래 고구려 성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明末 에 建州 女眞이 舊址 위에 다시 축성하였다. 이 성은 현 蘇子河와 海河 사이에 있다. 그래서 남소성지로 추정할 수 있다. ®南陝 晉代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晉書 載記第九』와 『 魏書 高句麗傳』, 『자 치통감』 권 97, 『삼국사기 j 권 18 의 기록에 의하면 南陝은 모용황이 고 구려를 정벌하는 南道上에 있으며 木底 부근이다. 당시 慕容氏가 고구려 를 공격하는 데에는 남, 북 두 길아 있었다. 南道는 蘇子河, 富爾江울 경유하여 현 集安에 이르고, 北道는 潭河를 경유하여 동진한 후 다시 남 쪽으로 꺾어져야만 했다. 현 蘇子河 하류 서안, 죽 新賓縣 위쪽 옆에 있 는 하향에 勝堡山城이 있고, 또 고구려 산성이 하나 있는데 五龍山城이 라고 부른다. 이 성이 바로 慕容氏가 고구려를 공격하던 南道上에 있다. 木底(현 新賓縣 木奇鎭) 서북쪽에 있는 것으로 南陝城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胡三省이 『 자치통감』 권 97 의 穆帝永和元年에 대한 託에는 〈南 蘇城, 在南陝之東〉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약 南蘇城울 현 撫順 鐵背山의
界藩城으로 정한다면 그곳은 五龍山城의 서북 방향이지 동쪽은 아니다. 그곳은 또한 南陝 또는 鐵背山 서쪽으로 볼 수 있다. 1956 년 東北文物工 作除가 撫順 大伏房댐 수몰지구의 潭河 北岸 前屯, 轄子伏洛, 佳子 {ki各 등지의 조사에서 대량의 고구려 고분을 발견하였다. 그 부근에서 성지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南陝이 이 일대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곳은 南道上이 아니고 北道로 가려면 반드시 이 길을 지나가야만 되었다. 그 러므로 胡三省의 〈 南蘇城在南陝之東 〉 은 의심스럽거나 또는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댜 南陝은 南蘇의 동쪽이 되어야 한다. 이 문제도 과제로 남아 있다. ®木底城 상기한 사료에 의하면 木底城은 慕 容部가 고구려를 공격하는 南道上에 있다. 과거의 학설은 모두 木奇는 晉代의 고구려 목저성으로 주장되었 다. 근래 撫順博物館에서 木奇鄕울 조사하여 樞子石山城과 平地城을 발 견하였는데 모두 고구려 성이다. 목저성이 현 新賓縣 木奇緖t에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北置城 北置의 명칭은 『 晉書 載記第九 』 에 보이며, 『 자치통감 』 에도 그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한 胡三省의 託는 〈 北道從北置而進, 南道從南蘇入木底城〉 이다. 상기한 자료에 의하면 北置는 慕容部가 고구려를 공격하러 가는 북도상에 있다. 이곳은 지금의 撫順 동쪽의 潭河 유역이다. 최근에 淸原 縣 英額門 長春屯西山에서 하나의 고구려 산성을 발견하였는데 주위의 길이가 600 여 미터다. 이 성이 복치성이다. ®鴨綠 『삼국사기 』 권 17, 미천왕조에 의하면 압록은 하나의 縣인 것 같다. 따라서 宰도 있다. 압록강 중류이며 浦流iiiJ(지금의 富爾江)과 가깝다. ®訖升骨城 산성은 晉代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존재하였다. 그곳은 현
遼寧省 桓仁縣 오녀산산성이다. ®尉那嚴城 이 성 역시 晉代의 기록에는 없지만 여전히 현 吉林省 集安縣 패왕조 산성에 있었다. @楠城 이 성 역시 晉代의 기록에는 없으나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위치는 현 吉林省 蓮春縣城 膳瑢子山城이다. @沃沮城 이 성 역시 晉代의 기록에는 없으나 함경도에 존재하고 있었다. 2) 352-431 년(三燕) 고구려 인의 분포 三燕 시기는 고구려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대왕, 장수 왕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고구려 국가의 강역이 거대하게 확장되었다. 고구려는 서쪽으로 遼東 반도를 점령하였고, 남쪽으로는 신라와 백제를 격파하여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고 대동강 유역에 대한 통치를 공고히 하 였으며, 동시에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또한 북쪽으로 동 부여를 정복하였다. 고구려 국가 강역의 확대에 따라서 고구려인들은 새 로 정복한 지역으로 옮겨 갔다. 그러나 고구려가 정복한 지구를 모두 고 구려민족의 거주구로 볼 수는 없다. 이는 부여 지구에 원래 거주한 사람 들은 부여인이고, 요동 지구는 漢 A 이며, 대동강 유역에는 조선인과 한 인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랜 기간 동안 고구려 민족 내 로 융합되지 않았다. 그리고 사료의 부족으로 이 지역의 고구려인들과 기타 각 민족 자체의 분포범위는 구체적으로 분별하기 어렵다. 이 시기에 고구려인들이 가장 많이 옮겨 간 지구는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이다. 장기간 동안 고구려인들은 단지 청천강까지만 내려와 있었다.
西 晉 말년에 낙랑군의 일부 漢 人울 내쫓고 대동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대동강 유역으로의 고구려인들의 대량 이주는 427 년 고구려가 압 록강 유역에서 대동강 유역으로 천도한 것과 관계가 있었다. 이후부터 대동강 유역은 고구려인들의 주요 거주지의 하나가 되었다. 대동강 유역 에서 발견된 많은 고구려 유적은 이 점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것은 402 년이다. 이후에 고구려인들이 요동 지구로 계속 옮겨 갔다. 여기에 대한 문헌기록은 없으나 근래 요동 지구 에서 많은 고구려 산성과 유적이 발견되어 고구려인들이 요동에 이주한 사실을 증명하여 주고 있다. 다만 그 당시 이주 시기가 발견된 산성과 연대가 일치하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문헌에 나타난 많은 요동 지구 의 고구려 산성의 이름은 魏晉 때의 옛 명칭을 그대로 쓰고 있다. 고구려가 부여를 정복한 해는 410 년이다. 그러나 〈 호태왕비 〉 에는 얼마 정도의 고구려인들이 그곳을 鎭 守하기 위하여 왔는지 설명하고 있지 않 다. 이후에는 고구려인들이 부여 지구에 이주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고고학상에 아직 부여 거주구에서 고구려 문화유적이 발견되고 있지 않다. 이에 의하면 고구려인들이 原夫餘 A 의 거주구에 대량으로 이 주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밖에 고구려 고국원왕 12 년 (342) 에 모용황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남 녀 5 만 명을 포로로 잡아 갔다. 5 만여 고구려인들은 三燕 시기에 燕의 城都 和龍(지금의 朝陽) 부근에 살았다. 『 진서 』 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 이주한 곳은 도성 부근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 서쪽으로 옮겨 갔는 지의 여부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北燕의 첫번째 왕 高雲이 407 년에 죽 위하였는데 그는 고구려인이다. 『 晉書 載記第二十四 』 에서는 고구려인이 後燕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高雲 죽위시는 모용황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구려인들을 포로로 잡아다가 요서에 둔 시간과 65 년의 차이가 있다. 高雲의 조상은 아때 포로로 잡혀 와서 요서 에 살던 사람이다 .
3) 고구려의 建置 고구려는 三燕 시기에 前燕과 臣屬 관계였다. 『 삼국사기』 권 18 고국 원왕조와 소수림왕조, 광개토대왕 9 년조 및 장수왕 원년조에 의하면, 당 시에 고구려는 燕과 부단히 싸웠고 요동 지역을 점령하였지만 기본적으 로 장기간 조공이 이어졌기 때문에 前燕,前晉, 後燕 및 晉의 속국으로 존재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建置는 중국 동북 지구의 당시 행정단위이 다. 당시 기록에 보이는 고구려 행정단위 명칭은, 다만 平壤, 遼東城, 新 城, 南蘇 木底 國東秀山, 六城, 餘城,北豊, 力城 등이다. O 平壤城 『삼국사기』 권 18, 고국원왕 41 년조에 의하면 백제가 능히 침범할 수 있었던 곳은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다. 이것은 압록강 유역의 평양과 동 시에 병존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下平壤의 칭호로 미루어 보 아 다른 곳에 上平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 上平壤 〉 은 압록강 유역 에 있었으며 下平壤은 대동강 유역으로 본다. 〈 王巡下平壤 〉 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 下平壤은 결코 王都가 아니다. 이유는 〈 巡 〉 이라고 칭하는 것 은 평양이 대동강 유역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대동강 유역으로 천도한 것은 427 년이다. 『 삼국사기』 권 18 의 장수왕조와 권 37, 『위서 고구려전』에 그 기록이 있다. 당시 평 양성 은 이미 요동에서 동남 방향으로 1000 리의 지점에 있었는데 그곳은 지금 의 대동강 유역이다. 고구려가 대동강 유역으로 천도한 이후 압록강 유 역의 평양은 기록에서 다시 보이지 않았다. 黃城이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그곳은 이미 병입되어 國內城으로 개칭되었다. ®遼東城 『삼국사기』 권 ,18 광개토왕조와 『 晉書 載記第二十四』의 기록에 의하면 405 년에 요동성이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김육
불의 『 東國通距 권 3 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가 요동군을 점령한 구체 적인 시간은 〈 晉元興三年 (404) 而遼東再路 〉 으로 되어 있다. 『 東史倉桐 』 과 『 삼국사기』 권 18 에 그 기록이 비교적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내용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宿軍地는 현 北 鎭 부근이며 요동성 서쪽이다. 요동성에 근거하면, 즉 漢魏 이래 요동군이 통치하던 襄 平縣城으로 상기한 바와 같이 그곳은 현 遼陽舊城 區地下의 古城울 말한다. 고구려 때에 다른 성을 수축하지 않고 곧 그곳 울 사용하였다. ®新城및南蘇 『 삼국사기 』 권 18 광개토왕조에 의하면 三燕 시기에 新城 및 南蘇는 그 지역이 兩晉 시기와 같았다. 新城은 지금의 撫順 高爾山城이고 南蘇 는 지금의 撫 順 鐵背山 山城이다. ® 木底城 『 晉書 載 記第二十四 』 에 그 기록이 보이는데, 三燕 시기에 고구려에 木 底城이 있었으며 그 지역은 西晉時와 같이 현 新賓縣 木奇 高句麗古城이 다. ® 國東秀山 등 六城 『삼국사기 』 권 18 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고구려는 黃城(지금의 集安縣 동쪽)에 수도를 두고 있었다 . 따라서 소위 國東의 免山 등 六城은 현 集 安縣 동부이다. ®餘城 죽 夫餘城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餘城이 부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부여성은 고구려에 예속되었다. 그 지역은 현 吉林省 農安境 0] 다. ®北豊 力城 j떄 R 은 삼국 시기에 魏나라 요동군의 현에 속해 있었다. 晉代에 이르 러 요동군에 이 현이 소속되지 않았다. 力城은 晉代에 고구려에 병입되
었다. 지역은 현 本溪縣境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보면 永樂 5 년 碑麗를 破한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 서 제시한 陣離는 『 진서 』 에서 제시한 陣離의 방위, 거리에 해당되지 않 는다. 어느 학자는 『 遼史 』 에서 기록된 陣離에 해당된다고 본다. 『 요사 지리지 』 , 『 성경동지 』 에 기록이 있다. 고구려 호태왕이 출병한 곳은 서북 방향으로 지금의 撫順 남쪽이다. 여기 鹽 7k 는 통례에 따라 漢의 鹽難水 로서 현 潭江이다. 그 방위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곳이 지금의 潭江울 지적하는지의 여부는 고찰이 더 필요하다. 대개 호태왕은 陣離에 도착한 후 襄平道로부터 동쪽으로 돌아서 고구려 왕도로 갔을 것이다. 양평도는 양평(遼陽)으로부터 고구려 왕성(지금의 集安境)에 이르는 교통 도로이다. 그곳은 현 太子iiiJ 동쪽에 연해 있다. 力城, 北豊은 이 도로상 에 있다. 그곳은 현 太子iiiJ 강둑에서 찾을 수 있다. 力城은 먼저 경유하 는 곳이고 北豊은 끝에 경유하는 곳이다. 현 本溪市牛心鄕의 북쪽으로 7 리 지점의 上牛村老官i立子에 官山城이 있다. 太子河는 이 성의 옆을 흐른다. 이곳은 당연히 力城이다. 또한 현 本溪縣城小市鎭의 북쪽 下堡村東山에 小城子가 있다. 주위가 900m 이다. 이 성을 北豊城으로 본다. 그곳에서 더 동쪽으로 新賓縣下奭iiiJ 및 萊子浴에 모두 고구려 산성 이 있다. 이곳이 梁語의 옛 땅이다. 이곳을 지나 현 桓仁境에 들어가면 고 구려 초기 도 소재지이다. 4) 384-534 년(北魏)과 557-580 년(北黃) 고구려의 분포 북위, 북제 때 고구려족의 분포지역에 관하여 문헌상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일반적으로 『魏書』의 기록에 의해서 고구려의 四方(四至), 죽 고 구려족의 분포범위를 인식하고 있다. 『위서 고구려전 』 에서 소위 〈遼東南
一千里 〉 는 평양성의 위치를 지적하는 말이고, 〈 東至楊城, 北至 舊 夫餘 〉 는 그 국경의 사방이 된다. 그 남쪽은 실제상 대동강과 한강 사이를 말하 며, 〈 南至小海 〉 를 칭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서쪽은 遼 7k 가 된다. 그러나 이 지역 내에는 고구려인의 거주지는 없고 기타 부족이 거주하였다. 예를 들면 북부에는 아직 부여인아 살고 있었다. 『 삼국사기 』 권 19 문 자명왕조와 『위서 고구려전 』 의 기록에 모두 고구려 경내에 거주하고 있 는 부여인들을 명백히 나타내고 있다. 남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말갈인이다. 『 삼국사기 』 권 19 문자명왕조 에 그 기록이 있다. 서부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은 한인이다.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기 전 에 요동은 한인의 거주구였다.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후에 한인은 또 요동으로 옮겨 갔다. 북위가 북연을 멸하였다. 『 위서 』 권 97 과 『 삼국사 기』 권 18 장수왕조에 의하면 고구려 서부 지구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 은 한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북위, 북제 시기 고구려인의 주요 거주지는 압록강 유역 및 대 동강 유역이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기타 지구는 다론 민족이 雜居하고 있었다. 5) 고구려의 행정단위 북위, 북제 시기 동북지구의 각 민족은 契丹, 庫莫溪, 失韋, 烏洛侯, 勿吉 등이다. 비록 북위, 북제에 누차 조공하였지만 史書 중에 정식으로 北朝의 관직을 받은 것은 없다. 당시에 복위, 북제로부터 관직을 받아서 행정단위를 세운 것은 주로 고구려국이다. 중국 남북조 시기에 고구려가 중국 남북조 정권과 예속관계에 있었던 것은 대단히 명확하다. 고구려는 북조에게 稱臣하는 동시에 남조에게도
稱臣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두 나라로부터 관직을 받았다. 그러나 지리 적 조건 관계로 인해서 북조에게만 비교적 많은 공헌을 하였다. 『 魏 書 高句麗傳 』 과 『 北齊 畵 文宣帝紀 』 에 당시 고구려가 이미 고려라고 개칭되 었음을 보이고 있다. 이는 『 北 濟書 廢王紀 』 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고구려는 남조에도 進貢하여 남조로부터 거의 갇은 관직 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 宋 書 高句麗傳 』 에도 그러한 기록이 있는데, 구별되는 점은 북위가 통치하던 營 과 平 두 州를 동시에 고구려왕에게 내려 주었는데 그것은 고구려가 북위를 향하여 진격하는· 것을 장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 梁書 高句麗傳 』 에도 그 기록이 있다. 고구려가 시종 동시에 남북조의 관직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 심국·사 기』에도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 따라서 당연히 당시의 고구려의 각급 행정단위는 중국 동북지구로 간주할 수 있다. 고구려는 北燕 이래 통치구역이 요동까지 확대되었다. 『 周 書 高麗 傳 』 에서는 각 성의 급별 및 상호 예속관계는 기록하지 않았다 . 여기에서는 다만 문헌기록에 의해서 북조 시기에 볼 수 있는 고구려 성을 고증하였 다. 당시의 기록에 보이는 것들은 遼東, 玄英, 平郭,北豊, 白 巖, 卒本, 國內, 丸都 黃城,平壤, 漢城 등이다. 그것들을 차례로 살펴보면 다음 과갇다. O 遼東城 『 周書 高句麗傳』에 의하면 고구려에 요동성이 있었다. 고구려가 요동 울 점령할 때는 5 세기로 北燕 시기였다. 北燕 때 遼城의 명칭이 있었고, 北朝 때에 와서도 요동성의 명칭은 史籍에 있었다. 이 요동성은 戰國과 秦漢 이래의 遼東郡首縣의 襄平으로 현 遼寧省遼陽市舊城區이다. 고구려 가 그곳을 점령한 이후에 요동성으로 이름을 고쳤다. 근 40 년 동안 遼陽 市 부근에서 고고학 조사와 발굴을 한 결과 秦漢으로부터 魏晉 시기까지 의 유물이 대량으로 발견되었고 동시에 현 遼陽市舊城北部에서 상당량의 고구려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고구려 때에 이 성을 사용한 것을 확
인시켜 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요동성이 漢魏 이래의 襄平城 舊址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玄至城 『 周書 高句麗傳 』 에 고구려에 〈 玄菱城이 있었다 〉 고 기록되어 있다. 玄 菱는 원래 西漢武帝 때에 설치한 四郡 중의 하나이다. 그 郡治는 삼국 시기에 현 撫順市區東部 潭河 남쪽의 勞動公園古城으로 옮겨 갔다. 근래 에 그 성지 내에서 고구려 시대의 붉은색 大瓦가 발견되어 이 성이 고구 려 시기에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平郭城 『 魏 書 馮文通傳』과 『 삼국사기 』 에 그 기록이 있는데, 平郭은 漢縣으로 서 현 遼寧省蓋縣縣城下古城址이다. 고구려의 平郭城은 舊 址를 계속 이 용한 것이다. ®北豊城 상기한 平郭條에서 안용한 『 魏 書』 및 『 삼국사기 』 에 모두 기록이 있어 당시 고구려에 北豊城이 있었다는 것을 표명하고 있다. 이 지구는 상기 한 현 本溪縣境에서 살펴보았고 北朝시기에 고구려는 舊址를 사용하였다. ® 白巖城 『 삼국사기』 권 19 에 기록이 있는데 북조 시기에 백암성이 있었고 개축 되었다고 한다. 백암성의 始築은 그 이전에 이루어졌다. 突販이 新城을 공격할 수 없어 백암성으로 옮겨 공격한다는 내용을 고찰하면 이 성은 고구려의 西北境에 있으며 新城(현 撫順 高爾山山城)과 거리가 그다지 멀 지 않음을알수있다. 백암성은 隋唐 시기의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고구려 북부의 주요 성지이다. 그 장소는 현 遼寧城 遼楊市 동북 방향의 燈塔縣 서쪽의 大察鄕城門口村石城山上에 있는 것으로 燕州城이라고 칭한다. 燕 州는 巖州의 轉音이다 .
®卒本城 『 삼국사기 』 권 19 〈 안장왕조 〉 와 〈 평원왕조 〉 에 기록이 있다. 졸본성은 북조 시기에 존재하였으며 동시에 주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始祖墓를 세운 것은 시조의 초기 도성 소재지라는 것 울 표명한다. 상기한 내용 중 이미 졸본성은 . 고구려 초기 홀승골성 부근 의 平地城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그곳은 현 桓仁縣城에서 서북 방향 으로 8 리 지점에 있는 六道河子鄕下古城子村이다. (j) 國內城 『 周書 高句麗傳 』 에 고구려는 도성 평양성 의에 국내성 및 漢 城, 別都 가 있었다. 국내성이 북조 시기에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 었다. 국내성의 始築은 고국원왕 12 년 (342) 에 이루어졌다. 상기한 바와 같이 국내성은 현 吉林省 集安縣城에서 북쪽 방향에 있는 산성자산성이 다. 과거에는 국내 위나암성과 국내성이 혼동된 바가 있었다. ®丸都城 『 삼국사기 』 권 19 〈 F옳 原王條 〉 에 기록이 있는데 , 丸都城은 고구려 초기 도성이다. 전후 2 차에 걸쳐 관구검 및 모용황에 의해 공격당하였다. 그 지구는 현 吉林省 集安縣 關駐薔山城이다. ®黃城 『 삼국사기 』 권 19 에 기록이 있는데 고국원왕 13 년 (343) 에 처음으로 보 인다. 그곳은 당시 고구려 도성으로 평양 동쪽이다. 427 년에 이르러 黃 城으로부터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옮겨 갔다. 그러므로 옮기기 이전의 黃城은 국내 지구에 있었는데 지금의 압록강 유역이다. 지금의 吉林城 集安縣城에서 동쪽으로 1 리 지점에 있는 東 臺 子 유적이 舊 址이다. ®平壤城 『周書 高麗傳』과 『魏書 高句麗傳 』 에 의하면 평양성은 대동강 유역이 다. 『 삼국사기 』 권 37 에 장수왕 15 년 이후 평양은 국내 지구에 있지 않 았다.
張博泉의 『東北地方史稿 』 제 4 장에서 前期의 평양과 혼동하고 있다. 이 미 상기한 내용에 따르면 초기의 평양성은 압록강 유역, 죽 集安縣境에 있었다. 北朝 시기의 평양은 대동강 유역에 옮겨 왔다. 그곳은 요동에서 남쪽으로 1 천여 리로서 남쪽으로 沮水(지금의 대동강)에 면하고 있다. 北朝 시기에 현 한반도의 고구려성은 상당히 많았다. 예를 들면 황성 등이다. 평양은 고구려 도성으로 압록강 유역에서 대동강 유역으로 옮겨 갔다. 전후 두 개의 평양이 있었다 .7) 11 581-617 년(隋代) 고구려의 행정단위 隋代 고구려 왕국의 관할범위는 중국 遼東城 동부, 吉林省 동남부, 그 리고 한반도의 북부였고 그 도성은 대동강 유역이었다. 隋代의 사서에 보이는 고구려성은 많지 않다. 그것들은 平壤, 國內城, 漢城, 遼東城, 新城, 卑者城, 烏骨城, 武廊退등 8 성이다. 다른 성은 隋代의 사적에 없 다. 8 성은 다음과 같다. ®平壤城 『 隋 書』 권 4 와 同書 「고구려전」, 『 資治通鑑 』 의 기록에 의하면 陸代 평 양성은 鴨綠水(현 압록강) 및 薩 7k( 현 청천강)의 동쪽에 있었는데 남쪽은 沮水(현 대동강)에 면해 있었다. 곧, 지금의 평양시 부근이다. 단 『 隋書 』 에서는 평양성 및 長安城울 혼동하고 있다. 『삼국사기 』 권 37 처럼 장수왕대에 수도를 처음 옮겼으나 동일 지구로 두 성이 하나로 혼합된 것이다. ®國內城 『隋書 고려전 』 에 기록이 있으며, 국내성의 소재는 종전과 같이 현 集 安縣城 북쪽의 산성자산산성이다. 漢城의 소재지도 종전과 같이 현 한반
도의 漢城이다. ®遼東城 『 隋書 陽帝紀 』 와 『 자치통감 』 권 181 에 그 기록이 있다. 隋代 고구려의 요동성은 遼河 東岸에 있었고 결코 隋가 요서에 세운 요동군은 아니고 漢의 양평성이다. 그곳은 현 遼陽市 舊 城區이다. ®新城 『 陸書 王仁恭傳 』 에 그 기록이 있는데, 이 신성은 夫餘道上에 있으며, 죽 지금의 撫順 高爾山山城이다. ®卑著城 『 隋書 來護兒傳 』 에 기록이 있다. 이 卑쯤城은 현 遼寧省 金縣城東大黑 山 山城이다. 唐代 高麗篇울 참고 바란다. ®烏骨城 『 隋書 于仲文傳』과 〈薛世雄傳 〉 에 의하면 오골성은 鴨綠 7k 의 서북 방향 에 있는 현 鳳城縣鳳凰山 山城이다. 唐代 고려편을 참고 바란다. ®武屬還 『 隋書 李景傳 』 과 〈 고려전〉에 기록이 있다. 그것은 隋가 고구려 北道上 울 공격할 때 경과한 성이다. 隋代 행정단위는 여기에 근거하여 通定 鎭 은 현 新民縣 高臺山동쪽의 고려성이다. 고려의 武鷹遇城이 바로 이 성 이다 .8)
12 618-906 년(唐代) 고구려족의 분포 1) 唐代 초기 고구려족의 분포 唐代 사서에 고구려족의 분포범위를 직접 기록해 놓은 것은 없다. 다 만 고구려의 강역에 대한 기록은 있다. 『 신당서 고려전 』 에서 고구려국의 강역을 말하고 있으나 이것이 고구려족의 분포범위를 말한 것은 아니다. 이 강역 내에 다른 민족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드시 이러한 민족의 거주구를 밝혀야만 비로소 고구려족의 분포를 알 수 있다. 하나의 다민족국가 내에서 주체민족의 분포구를 확정하는 데에는 두 가지 과정이 있다. 하나는 이러한 국가 내에 어떠한 민족들이 독립되어 있는가를 고찰하고, 그들이 아직 융합되지 않고 있다면 하나의 민족의 존재로 보아야 할 것이다. 때때로 그러한 국가의 존재 시간과 공간을 판 별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국가가 멸망 후에도 아직 주체민족과 융합되지 않았을 때에는 하나의 독립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민족의 분포 구를 제의한 것이 비로소 주체민족의 거주구이다. 둘째, 이러한 민족의 문화유적의 분포범위를 고찰하여야 한다. 각 민족은 각자 독특한 민족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고고학적으로 민족의 유적과 구별이 가능하다. 이 지구에 모종 민족문화의 유적이 없다면 당연히 이 지구에 모종 민족이 분포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고구려족을 논하면 고구려국의 강역 내에 명확히 많은 기 타 민족이 거주하였다. 그들은 昧幅人, 夫餘 A 과 漢人 등이다. 예를 들 면 고구려 범위 내에 현 중국 吉林省 동남부 延邊 지구 거주자는 白山昧 幅이며 중부 지구 松花江 유역 거주자는 栗末昧輯이고, 서부 지구 農安 長春 등은 浮i兪昧輯이었다. 현 중국 遼寧省 동북부에는 越喜妹輯, 동서 부에는 漢人 등이 거주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는 당초에 비록 동북의
상당히 거대한 지역을 지배하였지만 실제로 고구려족에 속하는 취락지는 현 集安, 桓仁 등지로서, 즉 현 압록강 유역에서 輝發河 지역까지다. 기 타 지구는 高麗故地로 칭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그러한 지구의 거주자 는 다른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고고학적 입장에서 보면 대체적으로 상술한 정황과 같다. 전형적 고구 려 문화는 주로 압록강 유역에 분포되었다. 현 延 邊 지구, 通化 지구는 고구려 문화와 기타 문화유적이 혼합되었다. 吉林省 북부 부여족의 거주 구에는 전형적 고구려 문물이 드물다. 이것은 대체로 고구려인의 분포 상황을나타낸다. 2) 唐代 후기 고구려족의 분포 668 년 唐과 신라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고구려의 통치를 받 던 각 민족들이 독립하였다 . 즉, 고구려인들은 중원으로 옮겨 가거나 분 산되어 突歌, 昧輯人들 사이로 들어갔다. 『신당서 고려전』에 중원으로 옮긴 고구려인에 대한 내용의 기록이 있다. 또한 상당수의 고구려인이 신라에 두항하였다. 이는 『 신당서 고려전 』 과 同書 「신라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동북 지구의 고구려인은 말갈에 두항하였다. 『 신당서 발해전』 에 의하면 최초로 발해에 투항한 자는 고구려인이다. 그들은 동쪽으로 현 敦化 부근까지 옮겨 갔다. 또한 『구당서 발해 말갈전 』 에서는 東牟山 에 도달한 대조영에게 고구려인이 두항하였다는 것이다. 이 가능성은 고 구려 고지에 머물던 고구려인들을 말한다 . 발해 강역 내에서 고구려인의 일부분은 고구려 고지에 머물고 일부분은 지금의 延邊 지구로 가서 살았 다. 고구려가 망한 후 또한 일부분의 고구려인들은 돌궐에 두항하였다.
『 신당서 고려전 』 에 〈 遺人散葬突歌〉로 나타나고 있으나, 고구려의 투항자 가 얼마나 되며 또한 어디에 머물렀는지 기록이 없다 .9) 3) 고구려의 행정단위 唐代 고구려국의 행정단위에 관하여 이미 『 滿洲歷史地理 』 , 『東北通 史 』 , 『中國東北地圓集東北地區資料麗編 』 , 『東北民族史稿 』,『 東北歷代福 域史 』 등에서 고증하고 논술하였지만 완정한 것이 없다. 또한 고고학 자 료와 결합시키지도 않고 있다. 현 문헌상에 고구려의 府, 州, 縣이 상당 히 많다. 그리고 이미 발견된 고구려 古城遺址도 상당히 많다. 여기에서는 문헌 자료와 고고학 자료를 종합하여 부, 주, 현의 장소를 살펴보겠다. 唐구J1에 당과 고구려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당에 조 공하고 동시에 내려 준 관직을 받았다. 619 년 고구려가 사산울 파견 조 공한 이래, 唐 高祖 시기의 종료 후에도 당과 고구려는 시종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고구려가 후에 비록 당에 부속되었지만 모든 면에서 자주 권은 유지되었다. 唐 太宗 초년에도 이러한 관계가 유지되었으나, 貞觀 5 년 廣州都督部 司馬長孫tiji를 파견하고 고구려가 세운 경관을 훼손시키자, 고구려에서는 거국적으로 長城울 쌓음으로써 비록 당과의 관계가 결렬되기는 하였으나 평화적 依附 관계는 지속되었다. 종합하면 唐 초기 50 년 동안은 당과 고구려가 싸웠다. 그 후 45 년은 고구려가 기본적으로 당에 의부하여 당의 藩屬으로 존재하였다. 따라서 唐代 고구려의 행정단위는 중국 행정단위 내에 들어갔다. 더욱 唐代에 고구려가 중국 동복지구에 설치한 행정단위들은 중국 唐代 행정단위의 일부분이 되었다.
唐代 고구려국의 크기는 동서 3100 리, 남북 2000 리이고 여기에 3 대 지 구, 즉 중국 遼寧省 동부지구, 吉林省 남부지구 및 한반도 북부지구가 포함되었다. 이 광활한 지역 내에 고구려는 여러 등급의 행정단위를 설 립하였다. 『 구당서 고려전 』 의 기록은 모두 하나의 모순을 가지고 있다. 전면의 내용에서 주 • 현 60 여 곳을 제시하고 있는데 고구려가 마치 주 • 현 2 級 의 행정단위만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 후면의 내용은 槪薩 및 處間近支 또한 부 • 주 2 급의 행정단위만 기록하고 縣一級建置에 어떤 등급의 官울 두었는지 설명이 없다. 더 나아가 소위 주 • 현 60 여 곳은 기타 다른 기 록과 다르다. 『 구당서 고려전』과 『 신당서 고려전 』 의 기록은 일치한다. 모두 60 여 곳 이상이다. 『 삼국사기 』 권 37 에는 상기한 기록과는 달리 12 성이 적다. 그러나 州, 縣 60 곳보다는 많다. 『 구당서 고려전 』 에 당이 고구려를 멸하고 도독부 9, 주 42, 현 100 을 설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 신당서 고려 전 』 , r 唐會要 高麗 』 등의 기록과 같다. 이러한 부, 주, 현은 대체로 고 구려 舊 制를 계승하였다. 옛 고구려 시대의 176 성보다 25 성이 적다. 예 를 들면 오골성에 고구려가 補薩울 두었는데 그것은 府一級에 해당된다. 단, 『 신당서 지리지 』 에 기록된 九都督府는 이미 이러한 부는 아니다. 따 라서 고구려 시기의 부 • 주는 당이 설치한 부 9, 주 40 보다 많다. 상기한 내용에 의하면 대체적으로 당대 고구려의 행정단위는 부, 주, 현 3 級이 있었다는 것이 인정된다. 부와 주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설치 된 51 개의 부 • 주보다 많다. 『 신당서 고려전』에 소위 〈 其州縣六十 〉 은 당 연히 府州六十의 잘못이다. 주 • 현의 숫자는 60 개보다 훨씬 많다. 『 신당 서』에는 실제상 현의 수가 기록되지 않았고 , 따라서 현 하나의 관직에 대한 설명도 없다. 다만 大城, 즉 부에 楠薩울 두고, 나머지 성, 즉 주 에는 處間近支라는 벼슬을 두었다. 이 176 개 부 • 주 • 현은 고구려의 삼대 지구에 분포되어 있었다. 그 중
중국 동북 지구에 설치된 부 • 주 • 현은 100 개 이상이다. 『 신당서 지리 지 』 에 의하면 9 개 도독부가 상존한 의에 42 개 주는 겨우 14 개만 유지되 었다. 『구당서 지리지』에 기록된 곳은 겨우 新城,遼城, 哥勿, 建安 등 4 개 都督府와 南蘇木底 蓋牟, 代 }l, 蒼巖, 磨米,積利, 委山, 延津, 安市 등 10 개이다. 또한 5 개 도독부, 4 개 주가 적어졌다. 이것은 唐朝 관할범위가 좁아전 것이다. 한반도 북부로부터 遼東으로 철회되었다. 즉 한반도 북부 및 吉林省에 대한 직접 관할은 포기되었다. 따라서 상당수 폐기된 주 • 부는 당연히 한반도 또는 吉林省이었다. 이 9 부, 14 주는 모 두 고구려가 원래 가졌던 부 • 주이다. 그 중에 적어도 17 개 부 • 주는 중 국 경내에 있었다. 그 의에 여러 사적에 산발적으로 기록된 고구려 성은 또한 安地, 石 城, 卑沙, 大行, 橫山, 銀山, 泊f-J, 長安, 平壤, 辱夷, 玄藥, 烏骨, 麥 谷, 金山 등 14 성이다. 또한 前代 사서에 보였으나 唐代 사서에 없는 것 은 그 성이 상응 존재한 성으로 볼 수 있다. 그것들은 訖升骨, 卒本, 尉 那巖丸都 舊 平壤, 黃城,楊城, 沃沮 北豊, 力城, 鴨綠, 南陝 등 12 개 성이다. 『삼국사기』 권 37 에 기록된 압록강 이복의 未降城 11, 巳降城 11, 逃 城 7, 打得城 3 등이다. 기록된 압록강 이북의 성은 모두 33 곳이다. 이상 唐代 동북 지구의 고구려성의 명칭이 사적에 보이는 곳은 모두 60 여 성이다. 이러한 성들의 소재지가 확인된 곳은 그 중 일부분이다. 상당부분의 기록이 상세하지 않아 고증할 방법이 없다. 그 동안 계속된 고고학 조사로 중국 경내에서 대량의 고구려 성지가 발견되었다. 그 중 에 상당수가 어떤 성인지 확정되었으나, 상당수는 성의 이름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삼국사기』 권 37 에 고구려 주, 군, 현이 모두 164 곳으로 기록되었지 만 그 명칭과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 지리적 위 치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唐이 降戶를 설치한 府州는 본래 고구려 성이다. 『신당서 지리지』와 『 구당서 지리지 』 에는 都督府 4 곳만 기록되어 있는 데 『신당서』에 도독부가 5 개, 주가 4 개 더 있다. 이는 安東府가 遼東으 로 옮겨 간 후 폐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폐기된 여러 州 중에 결코 모 두가 한반도 북부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중에 예를 들면 越喜都督 府, 掃混州 등은 중국 동북지구에 있었고 그 의는 알 수 없다. (1) 고구려의 도독부 『구당서 고려전』에 도독을 둔 것이 보이기는 하나 고구려에 몇 개의 도독이 있었는지는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현재 알려진 것은 南部楠薩, 北部楠薩 烏骨城楠薩 3 곳뿐이다. 고구려에 5 부가 있었고, 남부 및 북부에 욕살을 두었고, 기타 3 부, 예 를 들면 동부, 서부, 내부 역시 욕살을 두었다. 그 의에 몇 곳에 욕살을 두었는지 알 수 없다. 『신당서 지리지』의 기록에는 9 개의 도독부를 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여기에 5 개 욕살의 명칭은 보이지 않고 또한 오골성 욕살의 명칭도 보이 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이 이미 폐기되었는지, 또 당이 따로 설치하였는 지 아니면 당이 그 이름을 개명하였는지 알 수 없으며, 이상의 6 개 욕살 이 또한 9 개 도독부 내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이 9 개·도독부는 전체 고구려 강역 내에 분포되어 있었다. 그것은 결 코 지금의 중국 동북지구에 전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구당서』에 기록된 新城州, 遼城州, 哥勿州, 建安州 및 越喜州都督府는 중국 동북지구에 있었다. 그것들을 차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O 新城州都督府 新城은 이미 상술하였다. 唐代에 이르러서도 이름이 보인다. 新城은 遼 7k 의 동쪽에 있으며 玄菱와 가깝고 蓋牟에서 渤海長嶺府 사이에 있는
곳으로 高麗西境鎭城이다. 즉, 현 撫順地城으로 撫順市 高爾山山城이다. ® 遼城州都督府 遼城 1 사는 遼東省이다. 遼城 1 사는 처음에 遼 1 사로 개명하여 이로 인해서 遼城)사라고 불렀다. 그 지점은 遼河의 동쪽으로 蓋牟城과 馬首山에 가깝 다. 현 遼陽市 舊城이다. ® 哥勿州都督府 哥勿州는 甘勿州로서 『삼국사기』와 『신당서』에 의해 南蘇, 蒼巖 부근 으로 확인되었다. 『삼국사기』 권 13 에 의하면 哥勿은 多勿이며 溝流故地 이고 溝流水(현 富爾江) 상류이다. 근래 撫順博物館에서 黑溝山城울 조사 할 때 新賓縣 旺淸門鄕轉水湖에서 1 기의 고구려 산성을 발견하였다. 그 곳은 바로 비류수 상류로 哥勿城의 소재지이다. @ 建安州都督府 建安의 이름은 唐代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漢平郭과 같은 곳으로 異城 이다. 후에 개명된 것으로 보인다. 建安은 安東都護府에 있었으며 또한 遼東省의 서쪽(실제로는 서남) 300 리 지점이며 遼河 동쪽, 安市 남쪽, 卑 沙 북쪽이라는 것으로 알게 되었다. 그곳은 현 蓋縣境이다. 현 蓋縣에서 동북 방향으로 15 리 지점 되는 靑石關堡高麗城村의 동쪽 石城山 위에 산 성이 있다. 주위는 10 여 리이며·동쪽에 1 기, 서쪽에 2 기의 문이 있다. 중앙에 하나의 작은 산이 융기되어 있으며 그 위에 대지가 있다. 성 안 에서 회색 細繩紋碩 홍색 繩紋, 方格紋瓦片과 회색 陶器片 등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성이 건안성이다. ® 越喜州都督府 越喜는 본래 昧輯部落 이름이다. 越喜州都督府는 비록 당이 고구려를 멸한 후 항호를 설치하였지만 고구려 시대에 본래 이곳에 있었다. 그곳 은 吉林省 西部 懷德縣이다. 기타 4 개 都督府는 衛樂州都督府, 金利州都督府, 居素州都督府, 去旦 州都督府 등이 『신당서 지리지』에 보인다. 이곳들은 현 韓國境으로 보인다.
(2) 고구려의 여러 주 『신당서 지리지 』 에 고구려의 降戶롤 南蘇州,蓋牟州, 代那州, 蒼巖州, 磨米 1사 , 積利州, 委山 1 사, 延津州, 木底州, 安市州, 諸jt 1 사, 識利州, 佛 混 1 사, 拜漢州 등 14 개 주에 배치한 것이 보인다. 그리고 『 구당서 지리 지 』 에는 다만 10 개 주만 기록되었다. 후에 4 주가 빠졌다. 이 10 주는 원 래 고구려의 주이다. O 南蘇州 南蘇城과 木底는 蒼巖城 부근이며 新城道에 있는 것으로 新城과 木底 사이에 있다. 그곳은 현 撫順 鐵背山界藩城下層城址이다. ®蓋牟州 蓋牟城은 遼iiiJ의 동쪽에 있었으며 安東都護府 (현 遼陽) 에서 新城 (현 撫 順 高爾山山城)에 이르는 사이에 있었다. 『 中國歷史地圖集東北地區資料區 篇 』 에는 蓋牟城은 지금의 撫順市 勞動公園古城에 위치하고 있다. 이유는 蓋牟城과 新城이 인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인접거리에 대한 설명은 없다. 수십 리의 차이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撫順勞動公 園古城은 후한 때 玄菱郡治였다. 그래서 蓋牟城은 현 撫順勞動公園에 있 울 수 없다. 현 撫陽市蘇家屯區陳相屯塔山上에 산성이 있는데 남쪽은 沙 河에 면해 있고 산능선을 따라서 土築되었다. 주위는 2 리 정도, 문은 동남향이다. 이것이 즉 蓋牟城이다. 이 성에서 新城(현 撫順 高爾山山城) 이 겨우 수십 리 정도의 거리에 인접된 것으로 계산할 수 있다. ®代那州 이 주는 고구려의 항호를 배치한 14 개 주 중에 보인다. 그 소재지에 대하여, 王懷中은 현 압록강 이북 지역으로 보고 있고, 張博泉 등은 현 淸河상류 부근으로 보고 있다. 『 요서 지리지』에 따르면 현 新賓縣 永陵 부근을 이곳으로 정한다.
®蒼巖州 사서들에 蒼巖城과 南蘇, 木底, 哥勿 등이 모두 인접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南蘇는 현 撫順 鐵背山上에 있으며, 木底는 新賓縣 木奇에 있으며 哥勿은 新賓縣 旺淸門轉水湖山城에 있다. 따라서 蒼巖은 이 사이 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中國歷史地圖集東北地區資料區篇 』 에서는 蒼巖 울 현 集安縣 패왕조산성으로 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성은 상술의 고 찰에 따르면 고구려 초기 도성인 국내의 위나암성으로 보고 있다. 그러 나 이 성은 상기한 諸城(南蘇 등)과 거리가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다. 王懷中은 蒼巖城울 지금의 新賓縣으로 정하고 있는데, 차이가 상당히 좁 혀지고 있다. 그러나 어디라고 하는 것은 기록하지 않았다. 孫進己는 아 성이 南山城子에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南山城子는 현 淸原縣에 속하 며 新賓縣 동북 방향으로 보고 있다. 南蘇, 木底, 哥勿로부터 150 리 정 도 거리에 있다. ®磨米州 磨米城은 고구려 항호를 설치한 성으로서 『 자치통감 』 의 기록에 의하면 蓋牟城(현 瀋陽陳相屯塔山山城), 遼東(현 遼楊舊城)과 인접되어 있다. 현 本溪邊牛村에 하나의 고구려 성 이 있는데 磨米州로 보고 있다. ®積利州 당이 고구려 항호를 배치한 州 내에 모두 이 성이 있는데, 원래 고구 려의 성이다. 張博泉 등의 r 東北歷代疆域考』 등에서는 『 신당서』와 『讀史 方與紀要 E] 기록에 근거하여 積利城이 石城과 泊杓城 사이에 있었다고 보고있다. 『 中國歷史地圖集東北地區資料區篇』은 『 자치통감』의 기록에 의거하여 石城이 현 莊iiiJ縣에서 서북 방향으로 50 리 지점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 현 莊河縣 城山鄕 沙iiiJ村城山의 고구려 성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또 한 積利城이 현 復縣 得利寺山城에 있다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당시 牛進達軍이 山東萊州認海로부터 遼東에 이르러 상륙한 곳은 遼東
반도 남단이며 그 진군 방향은 동북쪽이다. 군대가 石城(현 莊河 縣 城山山 城)에 이르렀고 다시 군대를 돌려 復縣의 得利寺山城울 공격하기는 불가 능하였다. 당연히 계속 동북쪽으로 전군하였다. 그러므로 積 利城이 石城 (莊河縣 서북 50 리의 城山山城) 동북 방향으로 100 여 리 지점의 柚 巖 縣 娘 娘城村山城에 있었다고 정하였다. 성은 산의 정상에 있었고 주위는 7 리 01 다. @委山州 r 신당서 』 , 『구당서 』 에 모두 고구려의 항호를 배치한 주로 기록되고 있 다. 그곳은 본래 고구려의 주성으로 加尸達忽이라고도 불렀다. 압록강 이북이며 蓋牟城의 동남쪽이다. 당시에 唐이 이미 개모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加尸城은 아직 당이 점령하지 못하였다. 唐兵이 後面 남쪽으로 遼東城 및 安市城울 공격할 때도 委山城울 경유하지 않았다. 들리는 바 에 의하면 後黃城, 銀城 등이 있었고 委山城은 없었다. 즉, 이 성은 蓋
牟의 동남 방향에 있었는데 명확한 거리는 알 수 없다고 한다. ®延津州 본래 고구려성으로서, 『신당서 지리지』에 의하면 고구려의 항호를 배 치한 州로 되어 있다. 『 요사 지리지 』 에 따르면 東京道銀州附郭縣이 延津 縣이다. 遼銀州가 鐵嶺市에 있었다고 하면 延津州는 그 부근이다. 현 鐵 嶺의 동북 방향으로 20 여 리에 開原縣의 馬家塞山城이 있는데, 때로 柴 河堡山城이라고 부른다. 이 성은 고구려 성이다. ®木底州 『 신당서 고려전 』 에 의하면 木底와 南蘇가 가까이 新城道에 있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晉代章에서 木底가 고구려 南道上에 있다는 것을 서술하 였다. 그곳은 현 新賓縣木奇鄕 樞子石山城이다. ® 安市州(附安地) 安市는 원래 漢縣이었는데 후에 고구려로 편입되었다. 당이 고구려를 멸한 후 고구려 降戶를 安市州에 배치하였다. 고구려 고성이기 때문에설치되었다. 建安아 현 蓋縣 靑石關山城이라는 점에 의해서 현 營IJ와 海城 일대에서 그곳을 찾아야 한다. 현 海城縣 동남 방향으로 15 리 지점 에 있는 英城子屯 동북 방향에 하나의 고구려 산성이 있다. 주위는 8 리 이며 산성 동남 방향에 하나의 인공적인 작은 산이 있다. 이 성이 죽 고 구려의 安市城이다 . 李文信主編의 『 遼東事蹟資料 』 에 제일 먼저 이 설을 제시하고 있으며, 『 中國歷史地圖集東北地區資料區篇 』 도 역시 이 설을 택 하고 있다. 또한 安市城에 대하여 두 가지 설이 있다. 『 구당서』 〈薛仁貴 傳 〉 과 〈 薛萬徹傳 〉 및 〈 高麗傳 〉 에 같은 기록이 있으나, 하나는 安地이고, 다른 하나는 安市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 양자는 당연히 하나의 성 이다. @識利州 『 신당서 지리지 』 에는 당이 고구려 항호를 배치한 州 중에 識利州가 있 었다고 기록하였는데 그곳은 고구려 舊州이다 . 이 주는 기타 사서에는 보이지 않는다. 또는 識利州 죽 積利州로 보고 있는데, 이 兩州가 『 신당 서 지리지』에 보인다. 모두 당이 항호를 배치한 주이다. 따라서 2 주라고 할 수 있다. 王懷中은 이를 鐵利州로 생각하고 있다. 金疏截 역시 鐵利 1 사로 보고 있다. 당시 고구려가 북쪽으로 舊夫餘, 즉 掃埋, 鐵利를 한 차례 예속하였으므로 불가능한 설은 아니다. 단 이 鐵利는 현 鐵力에 있 지 않고 현 呼蘭河 및 敏江의 사이에 있다. @挑混州 당이 고구려 항호를 배치한 주 중에 하나이다. 掃混은 妹幅諸部의 하 나로서 지금의 黑龍江省 拉林河 유역이다. 隋末, 고구려가 栗末部地롤 차지한 후 그 동북부의 掃混部 역시 한 차례 고구려에 依附되었다. 당이 고구려를 멸한 후 이 주는 당에 귀속되었다. 그 주 역시 현 拉林河 유역 이다. 『신당서 지리지』에 기록된 고구려에 항호가 배치된 주 중에 諸~t州 및 拜漢州들은 고구려의 고지이다. 단, 그 소재지는 알 수 없다.
13 각 史書에 보이는 唐代 동북의 고구려 성 (1) 각 史書에 산발적으로 보이는 唐代 동북의 고구려 성 唐대 동북지구의 고구려 성은 상기한 내용 의에 각 사서에 약 10 여 성이 기록되었다. 또한 상당수의 고구려 성이 唐대 사서에 보이지 않지 만 그것들은 唐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고 당시도 폐기되지 않은 것들이 약 10 여 성이 된다. 唐 이전의 고구려 성을 차례대로 살펴보자. ®卑沙城 『舊 唐書張亭傳 』 과 『 자치통감 』 권 197 에 의하면 卑沙城은 遼東반도 登陸處와 근접되고 建安에 이르기 직전에 있다. 『 遼東地 』 에 의해 金縣 大黑山 山城이 고구려 卑沙城으로 정하고 있다. ®石城 『 신당서 고려전 』 에 의하면 이 石城은 山東 반도로부터 遼東 반도에 이 르는 登陸處로서 바다에 근접해 있다. 단, 『 자치통감.!I에 의하면 石城 공 격 에 100 여 번 싸움을 하였는데 , 登陸(上陸) 후에 石城까지는 상당한 거 리가 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石城은 기록에 4 개가 나타나 있 다. 단, 遼楊 동쪽의 석성은 遼巖州가 되며, 金石城縣은 唐의 石城이 아 니다. 蓋平 동쪽의 石城은 靑石關石城으로 唐의 建安이며 이 石城은 아 니다. 蓋州 (현 鳳城) 동남 방향으로 60 리 지점 이 唐大行城, 泊杓城 등의 소재지이지 석성의 소재지는 아니다. 『 中國歷史地圖集東北地區資料區篇 』 에 석성은 蓋平 동남 방향으로 200 리 지점의 間河山의 石城에 있으며, 동시에 이 석성은 현 莊河縣서북 방향으로 50 리 지점에 있는 것으로 칭 하고 있다. 즉, 莊河縣城山鄕城山古城이다. 당시 唐軍은 바다와 육지로 나누어 공격하였다. 해로는 山東 반도 出 海로부터 遼東에 이르러 동북쪽으로 공격하였고, 육로는 營州(현 朝陽)
로부터 新道城(현 撫順)을 경유하여 동남 방향으로 공격하였다. 고로 牛進達은 현 遼東반도 南端(남쪽 끝) 의 상륙하는 곳에 있으며 100 여 희 의 전두를 치르며 石城울 공격하였다. 즉, 蓋平 동남 방향으로 200 리 정 도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橫山 이는 현 湯河와 蘭河 사이의 분수령으로서 唐代 고구려의 橫山이다. 성은 산 부근으로부터 이름을 얻었다. 그곳은 安平 북쪽의 姑渡城村이 다. 구체적 성지는 앞으로 고찰이 필요하다. @安平城 『신당서 고려전 』 에 安市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安平의 오류이다. 馬自水, 즉 鴨綠江과 鹽難水, 즉 潭江의 두 강물이 합류한 후 安平城에 도달하는데, 그곳이 곧 漢의 西漢平縣이다. 지금의 丹東市振安區九連城 鄕援河尖村古城이다. 『 신당서 지리지 』 에 당이 고구려를 멸한 후 安平縣
은 이미 폐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故安平縣으로 칭한다. 唐묶l)에 고구려에 이 현이 없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泊杓城은 故安 平縣境에 있다. 고로 故安平縣地로 칭한다. 安平縣을 泊杓城으로 고쳤다 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 大行城, 泊 l5 城, 附辱夷城 등 이 성들은 連帶 관계가 있기 때문에 함께 고찰할 필요가 있다. 『 구당 서 설만철전』과 『신당서 설만철전』, 『 신당서 고려전』, 『 삼국사기 』 권 23 보장왕조에 의하면 마치 하나의 일처럼 되어 있으나 각각 다른 기록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비교적 자세히 나타나 있는데 귀납하면 薛萬 徹이 압록강구를 건너간 후 제일 먼저 騎兵이 大行城울 습격한다. 고로 이 성은 압록강구에 있었다 . 『 中國歷史地圖集東北地區資料區篇』에서는 大行城이 현 遼寧省 丹東市에서 서북 방향으로 32 리의 娘娘廟山城에 있 다고 정하고 있다. 이 성은 바로 압록강구 北岸에 있는 大行城이 확실하 다. 둘째, 泊杓城에서 40 리 지점에 舍가 있는데 그것은 夫孫戰과 관계가있다. 『 삼국사기』에 의하면 泊杓城 남쪽으로 40 리 지점이다. 이곳은 安 東市毅iiiJ尖古城으로 西安平縣址이다. 『 신당서 』 에 安平縣으로 버 리고 갔 다는 기록이 있다. 전두가 없어서 故安平의 이름은 생략되어 기록되지 않았다. 『中國歷史地圖集東北地區資料區 篇 』에서는 泊杓城울 현 丹東市 九連城古城으로 정하고 있다. 泊杓l::J는 九連城 동쪽으로 40 리 지점의 蒲 石河口東岸이다. 이 설은 근거가 불충분하고 고고학 조사와 일치하지 않 는다. 셋째는 唐軍이 泊杓城울 비로소 공격한다. 현 蒲石河口의 서쪽 압 록강 이북에 하나의 고구려 산성이 있는데 그곳이 泊杓城의 지리적 위치 와 일치하고 因山設險의 특징과 일치한다. 『신당서 지리지 』 에 泊杓城은 故安平縣境에 있으며 그것은 반드시 安平 縣城故址라고 정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즉, 泊杓城은 현 蒲石河口에 있 었다. 또한 『 자치통감』에 의하면 당시 李勤의 전군 방향은 평양이다. 따라서 鴨綠橋울 공략한 후 다시 전격하여 200 여 리 지점의 辱夷城울 공략하였 다. 이곳은 압록강 남쪽으로 현 한국경이다. ® 烏骨城 오골성은 建安(현 蓋縣靑石關山城) 및 安市(海城英城子山城)의 동남 방향 에 있으며 압록강의 북쪽, 卑沙城(현 黑山山城) 信宿에서 갈 수 있는 곳 이다. 『한원』에 焉骨城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는 오골성이다. 『 요동사적 자료 』 에서 오골성은 현 鳳城縣 鳳凰山 山城으로 정하고 있다. 『 중국역사 지도집동북지구자료회편 』 도 이 설을 따르고 있다. ® 後黃城, 銀城 後黃城 및 銀城은 모두 安市(현 海城英城子山城) 부근 수백 리 내에 있 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곳은 安市의 동남 방향에서 오골성에 이르는 사이에 있었다. 현 本溪縣 草河鄕 李家堡山城은 고구려 산성으로 주위가 11 리이다. 또한 柚巖縣黃花句鄕 郭家嶺村河西屯松樹溝上에 역시 고구 려성이 있는데 주위 길이는 5 리이다. 이 두 성은 安市(현 海城英城子) 및
오골성 (현 瓜城鳳凰山山城)의 사이에 있었다. 後黃城 및 銀城의 지리적 위치는 일치한다. 잠정적으로 本溪縣 草河鄕 馬圈溝山城은 後黃城이고 柚巖縣 黃花句鄕 松樹溝山城은 銀城으로 정한다. ®玄英城 이는 通定鎭(현 新民遼濱塔) 부근에 있으며 遼水 동쪽이고 또한 新城 (현 撫順 고이산산성)과 가까이 있다. 魏晉 이래의 玄菱城은 현 撫順市 勞動公園古城이다. 후에 고구려에 점령당하여 玄菱郡橋는 遼西로 옮겨 갔다. 단, 이 玄菱城은 遼東에 있는 것이며 燕橋가 옮겨 간 玄英郡이 아 니고 고구려가 점령한 玄都郡이다. 그곳은 현 撫順市 동쪽 勞動公園古城 이다. ® 金山 이는 新城의 동북 방향에 있고 金山은 현 農安 서쪽으로 정하고 있다. 당시 唐兵의 전군 목적은 국내성을 함락하는 것이었다. 泉男生軍과 회합 하여 동남쪽으로 공격하기로 하였고 동북쪽으로 공격하려는 것은 아니었 다. 당시 同善 등은 新城(현 撫順)으로부터 동쪽으로 전군하였으나 고구 려에게 패하였다. 고구려는 승리한 기회를 이용하여 추격하였고 薛仁貴 가 그들을 橫擊하였다. 그 결과 점령한 성은 南蘇(현 鐵背山界藩城下層), 木底(현 新賓縣木奇高麗城), 蒼巖(현 淸原縣 南山城子山城) 등이다. 이 성 모두가 현 撫順의 동쪽에 있다. 당시 仁貴 등은 金山에서 선전하고 후에 南蘇 등 성을 함락하였다. 이 金山은 현 撫順과 鐵背山의 사이에 있었 다. 현 撫順 동북부의 여러 산은 현 吉林省의 金山과 관계가 없다. 金山 城은 현 章黨 부근에 있었다. ®頓利城 『 만주역사지리 』 에서 李勤이 건너간 黃巖 7k 는 遼河 상류의 이름이고 白 狼 7k 는 현 養息牧河이다. 따라서 顔利城과 武腐遷 등은 현 遼濱塔 부근 에 같이 있다. 그러나 李勤 등이 강을 건너기 전에 顔利城에 도착되었다 고 기록되었는데, 그렇다면 顔利城은 遼河의 동쪽에 있고 通定鎭이 遼河
의 서쪽에 있는 것과는 다르다. @ 平壤城, 長安城, 漢城 이 성들은 모두 현 한국경에 있다. 그 결과 고구려 경성 소재지를 여 기에 묶는다. 평양성과 장안성은 모두 현 한반도 평양에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성은 결코 아니다• 단, 두 성 모두 대동강 유역의 평양 부근에 있었다. 과거 몇몇 기록에서는 두 성을 하나로 혼동하였다. 漢城 은 한강 유역의 한 성이다. (2) 唐代 史書에 기록되지 않은 고구려성 唐代 史書에 기록되지 않고 계속 존재한 고구려성은 다음과 같다. 訖升骨城: 고구려 최초의 王者 B 로 현 桓仁縣 五女山山城이다. 卒本城: 홀승골성과 인접하고 있고 卒本水, 즉 潭江 옆에 있었다. 현 桓仁縣城에서 서북 방향으로 8 리 지점의 六道河子鄕 下古城子村이다. 동 쪽에 潭江이 면해 있고 오녀산산성과의 거리는 10 리이다. 尉那巖城: 고구려의 두번째 도성으로 현 集安縣 覇王朝山山城이다. 丸都城 : 고구려의 세번째 도성으로 현 집안현 關馬膳山山城이다. 平壤城: 이 성은 압록강 유역의 평양성을 지적하며 고구려의 네번째 도성으로 현 集安縣縣城이다. 黃城: 고구려의 다섯번째 도성으로 현 集安縣 동쪽의 東 臺 子遺址이다. 露 : 현 理春縣城城膳'立子山城이다. 北豊 현 本溪縣城(駐小市鎭) 북쪽의 下堡村 동쪽 산에 있는 산성이 다. 力城: 현 本溪市 牛心臺鄕上牛村老官t立子官山城이다. 南陝: 현 新賓縣 上來河鄕五龍山城이다. 北置 : 현 淸原縣 英額門山城子山城이다. 10)
(3) 고구려의 영역 북한 학자들 11) 의 고구려의 영역에 대한 견해를 간단히 살펴보자. 고구려는 그 전성기에 서쪽으로 열하 부근과 만리장성까지, 동북쪽으 로는 우수리강 연안, 남쪽으로는 충청도와 경상북도 북부 지대, 동쪽으 로는 동해에 이르는 동북아의 최대 강국이었다. 구체적인 예로 고구려는 기원전 2 세기 말에 졸본(桓仁)에서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고구려는 서 기 14 년에 梁語國(太子iiiJ 상류에 위치)을 통합하고, 기원전 26 년에 개마 국을 병합하고, 서기 50 년에 동옥저를 병합하고, · 동명왕 10 년에 동옥저 를 치고 성 • 읍으로 만들었다. 이리하여 3 세기까지 고구려 영역은 서북 으로 撫順 부근, 남으로 살수, 동으로 동해, 동북으로 연해주 일대까지 포괄된다. 4-6 세기 전반기에는 서쪽으로 열하와 장성 부근까지, 남쪽으 로 현 충청도와 경상북도의 북부 지대, 동쪽으로 우수리강 연안까지 이 르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였다. 5 세기 초까지 고구려의 서변은 능원 동쪽 과 대능하 서쪽, 즉 열하 동부 지역까지 미쳤다. 4-6 세기에 전나라 동변 군들인 현도, 낙랑, 대방, 요동군 등을 점령하고, 5 세기에 들어서면서 북연의 지역에 전출, 그 중심지인 화룡성까지 전출하니 지금의 용원현 경계선까지 서변을 확장하였다. 4-6 세기 전반기에는 백제, 신라에 대한 통합을 실시하여 남쪽으로 직 산, 충주, 영덕을 연결하는 충청도, 경상북도 등 3 도의 북부 지대를 차 지하였다. 고구려는 6 세기 후반기에 임진강 이남 지역, 7 세기 초에 遼河 서쪽 지역을 내놓게 되었다. 신라는 고구려가 멸망 (668 년 9 월)하기 직전인 668 년 3 월에 安邊 지역에 다시 比列忽州를 설치하였다. 고구려는 6 세기 후반에서 7 세기 중엽에 서쪽으로 遼河, 남쪽으로 임전 강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였다는 것이다. 북한 학자들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중국 학자들과의 견해 차이가 심하
다. 이 문제는 앞으로 더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14 성지 성지는 상기한 위치와 영역 및 성지명에서 살펴본 대로 遼寧과 吉林 두 곳에 있는 고구려 성지의 숫자만 해도 약 100 곳이 된다. 고고학 발굴에서 확인된 중국의 산성자산성, 국내성, 태자성, 나통산 성, 혹구산성 그리고 북한의 대성산성 등을 살펴보겠다. 1) 고구려 성지 고구려의 행정단위(建置)는 대단히 많아서 역사적 문헌에 많이 기록되 어 있다. 예를 들면 『당서 지리지 .!I , 『 삼국사기 』 의 두 권에 기록된 城名 은 약 100 여 곳이 되며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자료가 된다. 오늘날 역 사, 지리를 연구할 때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이다. 상기한 문헌내용 중 모호한 점이 상당히 많이 있다. 그러나 고고학 조 사에 의해서 상당수의 城址, 주로 산성이 발견되었다. 지역, 城制 및 출 토 유물 등 고고학 조사에서 얻은 자료를 분석해서 그러한 성지는 고구 려 때 건립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문헌기록과 연계시키 기는 어렵다. 다음의 성지들은 비교적 큰 것들(보통 주위 길이가 soom 이상)만 열거 하였다. 遼寧 지구 고구려 성지가 54 곳, 吉林의 성지가 42 곳이다. 12)
(1) 遼寧 지구의 고구려 성지 金縣大黑山山城: 金縣城 동쪽의 友諒鄕八里村 동쪽 大黑山 위에 위치. 성은 산세를 따라 修築했는데, 石魂로 쌓았고 주위 길이는 10 리이다. 이 성이 고구려 卑者城이다. 新金吳姑城山山城 : 新金縣 東部 星臺鄕郭屯 북쪽의 吳故城山 위에 위 치. 또한 魏覇山城이라고 칭함. 성은 직사각형 석괴로 산세를 따라 수축 되었고 주위 길이 10 여 리다. 新金馬屯高麗城山山城 : 新金縣 西部 默盤鄕馬屯村 西山 위에 위치. 성 벽은 산허리를 따라 석괴로 쌓았고 주위 길이 8 리다. 新金老白山山城: 新金縣 西部 元 臺 鄕二陶村 동쪽의 老白山 위에 위치. 돌로 담을 쌓았다. 瓦房店得利寺山山城 : 瓦房店市(原復縣) 북쪽홉] 得利寺鄕龍潭山 위에 위 치. 성은 산세의 기복에 따라 대석괴로 수축되었고 주위 길이는 10m 이 다. 瓦房店馬圈子山山城: 瓦房店市得利寺鄕 崔屯村下崔村南,馬回子山 위에 위치. 이 성과 得利寺龍潭山 山城은 동서로 대치하고 있다. 담은 산허 리의 가파른 곳을 따라 석괴로 수축하였다. 瓦房店高麗城山山城: 瓦房店市 서북 방향의 太陽升鄕 那屯村 高麗城村 남쪽의 高麗城山 위에 위치. 山巖의 험준함이 담장 갇아 이것을 이용하 여 성을 만들었다. 瓦房麗店嵐固山山城: 瓦房店市 南部 李店鄕嵐固店村 서쪽의 嵐固山 위 에 위치. 城은 산세를 따라 修築하였고 성벽은 자연 석괴를 쌓았다. 주 위 길이 2000m 이다. 莊河城山 山城 : 莊iiiJ縣 西部 城山鄕 沙iiiJ村 萬德屯西北 城山 위 에 위 치. 성벽은 산허리를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 2898m 이고 담은 석괴 로쌓았다.
莊河旋城山山城: 莊iiiJ縣城의 서쪽 平山鄕 旋城村東北山 위에 위치. 담 은 석괴로 쌓음.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 1300m 이다. 蓋屈高麗城山山城: 蓋縣城 東北 靑石嶺鄕高麗城村 동쪽의 산 위에 위 치. 성은 산허리를 따라 수축하였고, 담때番)은 석괴와 杏土로 쌓았고 주 위 길이는 10 리다. 이 성이 고구려 建安城이다. 蓋縣煙簡山山城 : 蓋縣城 東南 徐屯鄕 盧東混村 서쪽의 煙簡山 위에 위 치. 성은 石築하였고 주위 길이는 1 리이다. 蓋縣赤山山城: 蓋縣 南部 羅屯鄕 貴子溝村 동쪽의 赤山 위에 위치. 성 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10 리이다. 蓋縣高麗城山山城 : 蓋縣 南部 仕字街鄕 田屯村 동쪽의 高力城山 위에 위치. 석축 성벽이며 서쪽은 단애를 이용하였다. 蓋縣舊東山城 : 蓋縣 南部 楊運鄕 奪 東村 동쪽 산 위에 위치. 성벽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며, 주위 길이는 2200m 이다. 蓋縣城子溝山城 : 蓋縣城 남쪽의 雙 臺 子鄕 破 臺 子村 南城子溝屯 동쪽의 高力城山 위에 위치.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다. 營口馬圈子山山城: 營口縣城 서쪽의 百塞子鄕 高莊村 북쪽의 馬圈子山 위에 위치. 성은 돌로 쌓았다. 海城英城子山山城: 海城市 동남 방향의 英城子村 동쪽 산 위에 위치. 城은 산허리를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8 리이며 담은 흙으로 쌓았 다. 이 성이 고구려 安市城이다. 燈塔岩州城 : 燈塔縣 東南部 西大塞 輝莊官屯村城門 口 屯 동쪽 산 위 에 위치. 산허리를 따라 수축하였고 석괴로 담을 쌓았다. 주위 길이는 5 리 다. 아 성은 고구려 白巖城이다. 瀋陽塔山山城 : 瀋陽市 동남 방향의 蘇家屯區陳相屯驛의 北塔山 위에 위 치. 성은 산허리를 따라 수축하였고 담은 흙으로 쌓았다. 주위 길이는 약 2 리다. 이 성이 고구려 蓋牟城이다. 鐵嶺借陳堡山城: 鐵嶺縣城 동남 방향의 備陳堡鄕 所在地 i凡河北岸山
위에 위치. 산성은 단애절벽을 충분히 이용하였다. 담은 돌로 쌓았고 주 위 길이 14 리다. 鐵嶺靑龍山山城: 鐵嶺縣城 동남 방향의 備陳堡鄕 沮河南岸靑龍山 산 위에 위치. 동북 방향으로 沮iiiJ를 지나면 곧 陳堡山城이다.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담은 흙으로 쌓았다. 주위 길이는 4 리이다. 開原龍潭山山城: 開原縣東北部 威遠堡鄕 所在地 威遠堡村 북쪽냉의 龍 潭山 위에 위치. 성은 산허리를 따라 수축하였고 담은 흙으로 쌓았다. 주위 길이는 2 리다. 開原古城子山城 : 開原縣 東部 八根樹鄕 古城子村 동쪽의 산 위에 위 치.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llOOm 이며 담은 흙으로 쌓았다. 西豊城子山山城 : 西豊縣 南部의 凉泉鎭 남쪽의 城子山 위에 위치. 성 은 산허리를 따라 수축하였고 담은 돌로 쌓았다. 주위 길이는 5 리다 . 西 門 밖에 土築外園城이 있다. 이 성을 과거에는 고구려 夫餘城으로 인정 하였으나 고구려 夫餘城은 아니고 당연히 層夫婁城이다. 西豊張家堡山城 : 西豊縣 東南部와 隆鄕城山村 長家堡 북쪽의 산 위에 위치.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4 리다. 撫順高爾山山城: 撫順市 潭河北岸 高爾山 위에 위치. 성은 산허리를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8 리다. 담은 흙으로 쌓았다. 東城, 西城과 南衛城으로 나누어지며, 北衛城과 東南部 3 개는 衛城과 연결됨. 이 성이 고구려 新城이다. 撫順馬和寺山城 : 撫順縣 南部 小東鄕馬와 寺村 동쪽의 산 위에 위치.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2600m 이다. 담은 흙으로 쌓 았다. 撫順鐵背山山城: 撫順市東大伏房 7k 庫東端鐵背山 위에 위치. 현 撫順縣 章黨鄕高麗營子村에 속함. 後金 시기에는 鐵背山 위에 界藩城울 건립. 고고조사를 통하여 성 주위 3 리의 界藩城울 발견. 東城담의 기단 밑에서
고구려 돌담(石瑞)을 발견. 이 성은 고구려가 시축한 성으로 고구려 南 蘇城 0] 다. 撫順城子溝山山城: 撫順縣 北部大柳鄕 太平溝村 북쪽의 城子溝山 위에 위치.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1200m 이며 담은 돌로 쌓았다. 新賓轉水湖山城: 新賓滿族自治縣 東部 響水河子鄕 轉水湖村 북쪽 산 위에 위치. 성은 산 주위를 따라 수축하였고 평면은 거의 직사각형이다. 주위 길이는 3 리이며 담은 석담(石瑞)이다. 新賓黑溝山城 : 新賓縣 東南部 紅廟子鄕 黑溝村 북쪽의 山城嶺上에 위 치. 성은 산의 능선을 따라 수축하였고 많은 계단(地段)은 단애를 이용 하였다. 주위 길이는 1493m 이며 담은 장대석으로 쌓았다. 新賓太子城山城: 新賓縣 西南部 下來河鄕 太子城村 북쪽의 산 위에 위 치.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석축으로 담을 쌓았다. 新賓杉松山城: 新賓縣西南部 莘子裕鄕 杉松村 東北山 위에 위치.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담은 석축이다. 新賓木奇城址: 新賓絲 西部 木奇鎭 서쪽 하나의 岡地上에 위치. 담은 흙으로 쌓았고 주위 길이는 2 리 정도이다. 新賓五龍山城: 新賓縣西北部 上奭河鄕 五龍村下巖子屯 남쪽의 산 위에 위치.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담은 석축이며 주위 길이는 2 리이 다. 淸原山城子山城: 淸原縣 英額門鄕 長春屯村 서쪽의 산 위에 위치. 성 은 山頂 단애에 면하여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 lOOm 이다. 담은 흙으로 쌓았다. 淸原南山城山城: 淸原縣 南山城所在地 南山城村 동쪽의 산 위에 위치. 山頂은 평탄하다. 사방이 현무암 단애이다. 주위 길이는 2 리 정도이며 안에 못(池)이 있다. 다만 남쪽에 一門이 있다. 北城山頂에 현무암이 보 이며 그 색깔이 검푸르다. 고구려 蒼岩城의 가능성이 있다.
本溪邊牛山城: 本溪市 교의의 西北部 石橋子鄕 邊牛村 동쪽의 산 위에 위치.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1141m 이다. 담은 토축 이다. 本溪李家堡山城: 本溪縣 南部 草河口鎭 范草村 李家堡 북쪽의 산 위에 위치. 성은 산의 능선을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11리 이다. 담은 석축이다. 本溪下堡山城 : 本溪縣城(小市) 북쪽의 太子河北岸下堡村 동쪽의 산 위 에 위치.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900m 이다. 西壁은 돌담(石瑞)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토축이다. 桓仁五女山山城: 桓仁縣城 東北방향의 潭江右岸五女山 위에 위치. 성 은 山項部에 수축하였고 단애절벽을 충분히 이용하였다. 평면은 직사각 형이며 주위 길이는 2600m 이다. 담은 석축이며 이 성은 고구려 초기 도 성인 訖升骨城이다. 桓仁下古城子城址 : 桓仁縣城 西北 방향의 六道河子鄕 下古城子村에 위 치. 이 성은 平地城이며 오녀산산성 서쪽으로 10 리에 위치. 담은 토축이 며 주위 길이는 약 2 리이다. 桓仁高儉地山城 : 桓仁縣 西北部 木孟子鄕 高儉地村 북쪽의 山城子山 위에 위치. 성은 산세롤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16m 이며 담은 석 축 0] 다. 桓仁城膳粒子山城 : 桓仁縣 東南部 沙尖子鄕 下句子村 西南 방향의 城 膳粒子山 위에 위치.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2 리이 다. 峨岩娘娘城山城 : 柚岩縣城 남쪽의 楊家堡鄕 娘娘城村山 위에 위치. 성 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담은 대석괴로 쌓았으며 주위 길이는 7 리이 다. 이 성은 고구려 積利城이다. 柚岩馬圈子山山城: 柚岩縣城 西南 방향의 前營鄕 新屯村 동북 방향의 馬圈子山 위에 위치.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1314m
이다. 峨岩松樹溝山山城: 柚岩縣 東北部의 黃 花句鄕홉[ 家 嶺村 河西屯松樹 溝 山 위에 위치. 성은 산능선을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5 리이다. 柚岩老城溝山山城: 柚岩縣東北部 黃 花句鄕 老席村下河南屯 동남 방향 의 老城溝山 위에 위치.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3 리 다. 담은 돌로 쌓았다. 柚岩南溝山城 : 柚岩縣 東北部 黃花句鄕 陳家堡村 南溝屯 동쪽의 산 위 에 위치.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많은 地段은 단애를 이용하였다. 주위 길이는 1 리다. 담은 돌로 쌓았다. 柚岩古城山山城: 柚岩縣 北部 非菜溝鄕 永泉村 동쪽의 古城山 위에 위 치.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성의 주위 길이는 2 리이며 담은 토석 혼축이다. 風城鳳凰山山城: 鳳城南族自治縣城 동쪽의 滿鳳凰山과 高麗城山 위에 위치. 성벽(膳)은 양쪽 산의 산허리를 따라서 수축하였다. 담은 돌(石) 과 흙을 섞어 쌓았다. 성의 주위 길이는 30 리이며 이 성이 고구려 烏骨 城이다. 鳳城山城溝山城: 鳳城縣西北部 通遠堡鎭山城溝村 북쪽의 산 위에 위 치.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800m 다. 담은 석괴상에 흙을 쌓았다. 寬句高力城山山城: 寬句縣 西北部 潘水鄕 高召堡村 동남쪽의 高力城山 위에 위치.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으며 산세를 많이 이용하였다. 주 위 길이는 1800m 이며 담은 석축이다. 丹東煙河尖城址 : 丹東市東邪 振安區九連城鄕 援河尖村中에 위치한 평 지성이다. 아래층은 漠西安平縣城이다. 고고 조사에 의하여 고구려 문화 충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다. 고구려는 이 성을 계속 사용하였다.
{2) 吉林 지구의 고구려 성지 集安山城子山山城 : 集安縣城의 북쪽 산 위에 위치. 성은 산능선을 따 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6951m 이고 담은 돌로 쌓았다. 과거 학계에 서 이 성이 고구려 환도산성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 성은 고구려 國 內城이다. 集安城址: 集安縣城內에 위치. 성지는 거의 사각형이며 평지성이다. 주위 길이는 268m 이며 담은 석축이다. 과거 학계에서 고구려 國內城으 로 인정하였으나 이 성은 고구려 전기의 平壤城이다. 集安覇王朝山山城 : 集安縣 西北部 財源鄕 覇王朝村 東北 방향의 산 위 에 위치. 성은 산능선을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1260m 이고 담은 석축이다. 이 성은 고구려의 尉那巖城이다. 集安關馬塘山城: 集安縣 北部 熱間鄕所在地 남쪽의 산 위에 위치. 성 의 동, 남, 북 3 면에 담(糖) 이 있다. 중간이 연결되지 않았다. 산세를 충분히 이용하였는데, 즉 단애를 이용하였다. 성은 산 계곡의 남북 길이 가 960m 를 점거하고 동서의 너비가 120-340m 이다. 柳河羅通山城 : 柳河縣 東北部 大通溝鄕所在地 西北 방향의 羅通山 위 에 위치. 성은 산능선 따라 수축하였고, 동 • 서쪽 두 성으로 나누어졌 다. 주위 길이는 15 리이며 담은 석축이다. 通化自安山城: 通化市江東鄕 自安村奭心屯 북쪽의 산 위에 위치. 성지 는 산세를 이용하여 수축하였고, 단애가 천연의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주위 길이는 2773m 이며 담은 석축이다. 靖宇橘樹川山城: 靖宇縣東南部 槍樹川鄕所在地 槍樹川村 서남쪽의 산 위에 위치. 성지는 산세를 이용하여 수축하였으며 산의 험준한 곳을 이 용하였다. 담은 굴곡이 졌다. 주위 길이는 1455m 이고 담은 토석혼축이 다. 敦化城山子山城 : 敦化市區 西南 방향의 紅山鄕城山子村 동북쪽의 산
위에 위치. 성담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4 리이며 담은 흙과 석괴를 혼합하여 쌓았다. 延吉興安城 : 延吉市 北部 興安鄕所在地 북쪽의 완만한 언덕에 위치. 성벽은 동쪽이 높고 서쪽은 낮다. 아래는 煙集河에 면해 있다. 주위 길 이는 1800m 이다. 담은 基部가 현존하고 있고 석괴로 축성했다. 龍井金谷山城: 龍井縣城 동남 방향의 德新向金谷村 서쪽 산 위에 위 치. 성은 산능선을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1415m 이며 담은 토축 이다. 이 성은 고구려 때 始建되었다. 龍井船口山城: 龍井縣 東部 光開鄕 船口村五屯서북쪽 산 위에 위치. 성은 산능선을 따라 수축하였고 두 성 중간에 하나의 道膳이 있어 동남 성과 서북 성을 형성한다. 동남 성의 주위 길이는 1960m 이며 서북 성의 주위 길이 1814m 이다. 이 성벽은 지리적 위치와 특칭에 따르면 고구려 때 시건되었고 그 후에도 이용되었다. 龍井城子溝山城: 龍井縣城 서쪽의 桃源鄕 太陽村城子溝山 위에 위치. 성벽은 산능선을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5 리다. 이 성은 고구려 때 시건되었고 후대에 이용되었다. 龍井城子山山城: 龍井縣 東北部 長安鎭磨盤村山城 내의 屯西城子山 위 에 위치.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4454m 다. 담은 석 괴로 쌓은 후에 흙으로 덮었다. 이 성 역시 고구려 때 시건되었다. 龍井淸水山城 : 龍井縣 東南部 三合鎭淸水村 淸水洞屯西~t山 위에 위 치. 성은 산능선을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2053m 다. 담은 토석혼 축이다. 성벽 밖에 附加瑞울 세웠다. 이 산성의 결구 특징 등을 미루어 보아고구려 산성이다. 龍井朝東山城 : 龍井縣 南部 富裕鄕朝東村 서쪽의 汗王山 위에 위치. 성벽은 산세와 단애를 이용하여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1502m 다. 담은 석축이다. 이 성은 위치와 형제 특칭상 고구려의 始建山城이다. 龍井養參峰山城 : 龍井縣城 동남쪽의 智新鄕城 南村西南이 養參峰山 위
에 위치. 성은 산능선을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1952m 이고 담은 토축이다. 이 성은 그 특징상 고구려 산성이다. 圖 1 f’滿臺城山城: 圓 1 門市 北部 石峴鎭 永昌村 滿臺城屯 북쪽 산 위에 위치.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2755m 이며 이 산성은 고구려 때 시건되었다. 理春薩其山山城 : 蓮春縣城 동쪽의 楊泡鄕 泡子沿村 남쪽의 산 위에 위 치. 성은 산능선을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14 리이며, 담은 석축 이다. 이 성의 특징에 근거하면 고구려 때 시건되었다. 璟亭岩山城: 理春縣城 북쪽의 凉水鄕亭岩村 북쪽의 산 위에 위치. 성은 산능선을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2800m 이며 담은 석축이 다. 이 성은 고구려 때 始建되었고 후대에도 계속하여 이용되었다. 璟春通肯山城: 運春縣 東北部 春化鄕 蘭家趙子村 북쪽의 通肯山 위에 위치. 성은 험준한 자연 능선을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6 리이며 담은 석축이다. 이 성은 고구려 때 始建하여 후세에 계속 사용하였다. 璟春城塘社子山城 : 理春縣 東北部 春代鄕 草坪村東城膳f立子山 위에 위치. 산성은 험준한 산능선을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20 리이다. 이 성은 고구려가 수축한 산성이다. 璟春乾溝子山城: 蓮春縣城 東北 방향의 哈達門鄕 乾溝子東北山 위에 위치. 성은 험준한 산능선을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5 리이고 담은 토축 또는 토석혼축이다. 城轉角된 곳에 石結溝가 있다. 지리적 위치와 산성의 형제로 보아 고구려 때 시건하였고 후세에 계속 이용되었다. 璟春水流峰山城: 理春縣 南部 敬信鄕 水流峰山 위에 위치. 성은 산세 를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2 리이며 담은 석축이다. 이 성은 고구 려 산성이다. 江淸廣興山城: 注淸縣城 西北 방향의 給候塘鄕 廣興西北山 위에 위치. 성은 산능선을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2288m 이며 담은 토축이 다. 이 성은 고구려가 수축하였고 후세에 계속 이용되었다.
;王淸東西方 臺 山城 : 注淸縣城 西北 방향의 岭 模 塘鄕 동쪽의 陽村 北東 의 四方 臺 山 위에 위치. 성은 山頂울 따라서 가파른 지대와 단애에 수축 하였고 주위 길이는 10 리이다. 담은 흙 또는 돌로 축성되었다. 이 성은 지리적 위치와 산성의 형제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 때 시건되었다. 和龍楊木頂子山城 : 和龍縣 東北部 龍水鄕 石國水庫 東南十里의 楊木頂 子山 위에 위치 . 성은 산능선을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2680m 이 며 담은 토석혼축이다. 의벽을 魂石으로 축성하였고 이 산성 역시 고구 려 때 시건되었다. 和龍八家子山城: 和龍縣城東北 八家子鎭 남쪽의 산 위에 위치. 성담은 가파른 자연 산세를 이용하여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3 리이며, 담은 토 석혼축이다. 이 성 역시 고구려 때 시축되었다. 和龍松月山城: 和龍縣城 서남 방향의 富興鄕松月村 서남쪽의 산 위에 위치. 성은 산능선을 따라 수축하였고 부분적으로 자연 지세를 이용하 였다. 주위 길이는 2480m 이고 담은 토축이다. 이 산성 역시 고구려 때 수축되었다. 和龍三層嶺山城: 和龍縣 東南部 勇化鄕所在地 남쪽의 三 層 嶺山 위에 위치. 성은 산능선을 따라 수축되었다. 주위 길이는 1000 여 미터이며 담은 석축이다. 어느 곳은 자연 지세를 이용하였다. 이 성은 고구려 산 성이다. 安圖五峰山城 : 安圖縣城 북쪽의 長興鄕五峰村 북쪽의 산 위에 위치. 성은 산능선을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4 리이며 담은 토석혼축이 다. 남면 성문 내에 一道城膳울 증축하였고 五峰山城의 지리적 위치와 형제 특징에 의하면 고구려 때 始建되었다. 후세에 이용되고 증축되었 다. 安圖五虎山山城 : 安圓縣城동남 방향의 石門鎭槍樹川村 서북 방향의 五虎山 위에 위치. 성은 가파른 산능선에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10 리 다. 담은 석괴로 축성하였다. 이 성은 고구려 때 시건되었다.
安圖城門山山城 : 安圖縣城동남 방향의 石門鎭舞鶴村 남쪽 城門山 위 에 위치. 성은 산 계곡 주위의 가파른 능선상에 수축하였는데, 주위 길 이는 5 리이고 담은 석축이다. 이 성은 고구려 때 시건되었다. 東豊城子山山城: 東豊縣 南部의 橫道河子鎭 서쪽의 城子山 위에 위치.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는데, 주위 길이는 1980m 이고 담은 黃砂土 또는 砂土石魂 혼합 축성이다. 遼源龍首山山城 : 遼i原市區 동갇우의 龍首山 위에 위치. 성은 자연 산세 를 따라 수축하였는데, 주위는 길이 1200m 이고 담은 토축이다. 遼源工農山山城 : 遼源市區 동남쪽의 龍山區工農鄕工農村 동쪽 산 위에 위치.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1431m 이며 담은 黃砂 土와 黑福土로 축성하였다. 遼源城子山山城 : 遼i原市區 동쪽 龍山區山城鄕七一村 북쪽 산 위에 위 치. 성은 산능선을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726m 이며 담은 토축 이다. 이 성은 龍首山山城에서 3 리 지점에 있다. 農安城址 : 農安縣城內에 위치. 성담 평면은 사각형이며 平地城이다. 주위 길이는 384m 이며 성은 토축이다. 이 성은 夫餘 때 시건되었고 고 구려 및 그 이후에도 사용되었다. 고구려 시기 이 성은 夫餘城이다. 吉林龍潭山山城: 吉林市區 동부의 龍潭山 위에 위치. 성은 주위 산능 선을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2396m 이다. 담은 황토 또는 황토와 부서진 돌을 혼합하여 쌓았다. 吉林東團山山城 : 吉林市 동쪽 교의의 江南鄕永安村 서남쪽의 東園山 위에 위치. 성은 山頂과 산허리 사이에 수축하였고 성이 外城, 中城, 內城의 삼중으로 형성되었다. 바깥 성의 주위 길이는 650m 이고 그 의 東團山東南麗平地上에 하나의 近圓形 土城이 있다. 유물은 몇 개 여러 시기가 겹쳤다. 그 중 고구려 것도 있다. 이 성은 고구려 때 사용되었 다. 이 2 기 산성은 고구려 산성하의 평지성과 관계 있다. 般下橫道子山城 : 鼓河縣 南部의 標河鎭橫道子村 남쪽의 산 위에 위치.
성은 산세를 따라 수축하였고 주위 길이는 99Bm 이며 담은 토축이다. 磐石城子溝山城 : 磐石縣城 남쪽의 賓山鄕大靑云屯 북쪽의 大鎬盛山 위 에 위치. 성의 동서 양면은 산의 가파른 곳을 이용하였고 남면은 橫築城 薔 평면은 삼각형이다. 주위 길이는 1200m 이고 담은 砂石溝築이다• 이 성은 고구려가 건립한 산성이다. 磐石紙房溝山城 : 磐石縣城 남쪽의 賓山鄕과 盛村 西~t의 小鎬盛山 위 에 위치. 산성은 가파른 산능선을 이용하여 수축하였고 남쪽 계곡 입구 에 一道城膳올 구축하였다. 성의 주위 길이는 약 10 리이며 담은 砂石土 로 축성되었다. 1) 역사연대표 2) 孫進已 등 編 『 東北歷史地理 』 , 1 • 2 권, 黑 龍江人民出版社 , 1987. 3) 孫進己 등, 위 의 책 , pp. 405-409. 4) 王健群, 「玄萊郡的西遷和高句麗的發展」, 《 社會科學戰線 》 2, 1987, pp. 199- 201 . 5) 孫進已 등 編 『 東北歷史地理』 , 제 1 권, pp. 409-414. 6) 孫進己 등, 위의 책 제 2 권, 黑龍江人民出版社, pp. 11-40. 7) 孫進己 등, 위의 책, pp. 46-182. 8) 孫進己 등, 위의 책, pp. 207-209. 9) 孫進己 등, 위의 책, pp. 218-219. 10) 孫進己 등, 위의 책, pp. 303-327. 미 리지린 • 강인숙, 『 고구려사연구 』 , 사회과학원출판사, 1976, pp. 39-92. 12) 孫進己 等, 위의 책, 1989, pp. 333-349.
제 3 장 성 곽 상기한 吉林省 • 遼寧省 성지 약 100 곳의 위치 의에 고고학 발굴 결과 로 확인된 성지들을 살펴보겠다. 먼저 고구려 초기 도성에 대한 내용, 그리고 도성으로 국내성, 초기 산성으로서 산성자산성, 혹구산성, 나통 산성, 태자성 등 그 밖에 성의 제 1 차 저지선인 검문소 또는 차단성을 살 펴보겠다. 또한 북한의 태자산성과 평양성도 살펴보겠다. 1 초기의 都城 고구려는 기원전 37 년에 나라를 세워 668 년에 나당연힙군에 의해서 멸 망될 때까지 모두 705 년간 존속하였는데, 이 기간 도성의 옮김을 초기, 중기, 말기의 3 기로 나눌 수 있다. 초 • 중기의 분계선은 유리명왕 22 년 (서기 3 년경)으로 〈王遷都於國內, 築尉那巖城〉 시기이며, 중 • 후기의 분 계 선은 장수왕 15 년 (427) 〈移都平壤〉 시 기 이 다.
그러면 고구려의 초기와 중기 도성을 살펴보자. 이 문제는 몇십 년 동 안 토론되어 왔는데 지금도 어느 문제점은 많은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되 고 어느 문제점은 아직 쟁점으로 남아 있다. I) 1) 초기의 도성 고구려는 적어도 西漢 때부터 潭江 유역과 압록강 중류 일대에 살고 있었던 오래된 민족이다. 고구려족의 건국신화에 의하면 그들은 동북지 구 중부의 다른 하나의 오래된 소수민족인 부여족의 한 갈래로부터 창시 되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姓 高 氏, 諱 朱蒙 또는 鄒牟 또는 衆有후라고 稱)은 기원전 37 년(漢孝元建昭二年)에 卒本川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 觀其土地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朱 蒙退作宮훅 但結麻於浦流水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 로 기록되었 다. 당시 처음에는 비류강 유역에 간단한 가옥을 건립하고 살았다. 정식 으로 〈 營作城郭宮室 〉 한 것은 3 년 이후인 동명성왕 4 년(기원전 34) 에 이루 어졌다. 이 〈 城郭宮室 〉 의 내용이 〈 廣開土大王碑(好太王碑) 〉 에 기록된 〈 於 浦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한 산성일 가능성이 있으며, 더욱이 그 산성 은 고구려가 수축한 것이다. 그곳 명칭의 여부에 대해서는 『 魏書』에 기 록된 〈訖升骨城 〉 인데, 왜냐하면 고구려 창시에 대한 여러 기록 중 다른 명칭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 위서』에 기록된 〈 朱蒙至訖升骨城 〉 은 실질 적으로 주몽이 그곳에 오기 전에 이미 그 성은 존재한 것으로 보고 있는 데 그것은 〈광개토대왕릉비〉에도 기록되었다. 종합하면 고구려가 건국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비류수, 비류곡, 홀본, 졸본천, 홀승골성 등의 여러 가지 명칭은 당연히 한 곳에 있었던 것인데 그 지시물이 달랐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류수, 비류곡은 7k 를 지적한 말이다. 홀본, 졸본은 같은 곳이며 졸본천은 산간의 평지를 지적한 것이
다. 또한 비류수가 산간을 거쳐 흐르는 동안 쌓인 충적토를 지적할 가능 성도 있다. 고구려의 초기 도성은 졸본천 서쪽의 높은 산 위에 건립되었 으며, 그 명칭을 홀승골성으로 불렀다. 그러면 고구려 초기의 도성은 구체적으로 어느 지방인가? 고고학 발 견에 의하면 遼寧省의 桓仁縣이고, 비류수는 즉 潭江이다. 홀승골성은 桓仁縣城에서 동북 방향으로 7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潭江앞쪽 언 덕에는 五女山山城이 있다. 오녀산산성은 해발 800m 로 주위의 산 중 가 장 높다. 산의 主峰은 산허리에서 곧 수직으로 위로 울라가서 몇백 미터 높이의 단애절벽을 이루고 있어서 바라보면 위압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 나 산 정상은 광활한 평지여서 남북 길이가 약 lOOOm 이며 너비가 300m 나 된다. 산성은 바로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서, 북, 남 삼면은 단 애의 절벽이나 다만 동남쪽의 산세가 다소 완만하여 산허리부터 납작한 석괴로 한 줄의 돌담을 쌓았다. 잔존된 바깥 높이는 3-6m, 내측 높이는 1-2m, 위쪽 너비 l.5- 2m, 기반 너바는 약 5m 이다. 성내 동남쪽 모서리 에 望樓가 있으며 중간에 돌로 쌓은 연못이 있는데, 오늘날도 깨끗한 물 이 가득 차 있어서 관광객들이 마실 수 있다. 오녀산산성은 넓고 험준하 여 공략하기는 어렵고 수비하기는 편리하다. 또 성내의 전망대와 연못은 고구려 산성의 특칭과 부합한다. 다만 성내에서 지금까지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오녀산산성이 고구려 초기 도성으로 유력한 증거가 되는 것은 산성 부 근에서 다량의 고구려 고분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 오녀산 산성에서 남쪽으로 5km 되는 지점의 潭江 동쪽 언덕 高力墓子村 남쪽 언덕 (岡)의 고분들이 가장 크다. 1950 년 말과 1960 년 초에 이 고분군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곳에는 700 기 이상의 고분이 있는데 이것은 중국 국경 내 集安울 제의하고 가장 많은 수이다. 그곳의 부분적인 발굴에 따 르면 고분의 형태는 〈圓丘式積石墓〉와 〈階段式積石墓〉가 대표적이다. 어 느 곳에는 십수 거의 묘가 밀집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연결되어 있다. 桓仁, 集安 등지의 고구려 고분의 종합적 비교와 분석에 의하면 그것은 모두 고구려 초기 고분의 특징이다. 고분에서 출토된 손 잡이 달린 잔(祀手杯), 단지(荷淵)와 環頭大刀등은 漢의 영향이 보이고 있 다. 다만 부장된 馬具 중에 등자는 아직 없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5 세기 이후, 즉 고구려 후기 도성의 특징은 산성과 평지성의 결합이다. 이러한 특칭은 고구려 중기 도성에서 보인다. 산세 가 험준하여 상하의 출입이 어려운 오녀산성에서 고구려는 초기 40 여 년 동안 정치, 경제 및 일상생활이 대단히 불편하였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 다. 산 위의 면적이 제한되어 있어 전체 정부기구와 필요한 인구를 수용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산 아래 평지가 당연히 정부기구와 주민거주의 초 점이 되었다. 근래에 桓仁絲城에서 서쪽으로 약 2km 되는 潭江앞쪽 언덕의 평지상 에서 1 기의 古城이 발견되어 그곳을 古城子古城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1978 년 魏存成 등이 그곳을 조사하였다. 성은 직사각형이며 방향은 북쪽 의 偏東이고 동쪽벽은 源江의 물에 의해서 파괴되었으며, 서쪽벽의 남은 길이는 160m, 북쪽벽 길이 약 250m, 남벽 길이는 약 200m 였다. 성 벽 은 토축이며 그 중 북벽과 서벽의 보존상태가 양호한데 그 높이는 2m 정도이다. 북벽 東段과 성 서북 모서리에는 杏土層이 보인다. 서쪽벽의 의곽을 따라서 하나의 양어장이 있는데 그곳은 원래 성의 해자(城淡)다. 북벽 바깥은 비교적 낮다. 현재 성내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 성내 에서 고구려의 獸面文와당이 출토된 바 있다. 당시 고구려에는 성을 쌓 는 습관이 없었는데 만약 고성자고성이 고구려 초기에 존재하였다고 하 면 원래 漢代의 城址롤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중기의 도성 『 삼국사기 지리지 』 의 기록에 의하면 〈 自朱 蒙 立訖升骨城, 歷四十年, 稽 留王(琉璃明王)二十二年移都國內城(或傳尉那巖城, 或傳不而城) …… 都國內 歷 四百二十五年, 長 壽 王五十五年移都平壤 〉 이라고 되어 있다. 더욱 구체 적인 기록은 당시에 고구려 궁실 이전과 도성의 증축과 발전에 관한 것 이다. 그것들은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와 중국 문헌에 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의 기록 : 琉璃明王, 〈 二十二年(서기 3) 冬十月, 王遷都於國 內, 築尉那巖城 〉 . 山上王, 〈 十三年 (209} 冬十月, 王移都於丸都 〉 . 東川 王, 〈 二十一年 (247} 春二月 , 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 廟社 〉 , 故國原王十二年 (342} 〈 秋八月 , 移居丸都城 〉 . 故國原王十三年 (343} 〈 秋七月, 移居平壤東黃城 〉 등이다. 상기한 내용의 구체적 고증은 고고학 적인 조사, 즉 발굴과 연구 결과 그곳은 集安縣경내로 확인되었다.그 곳에 10000 기 정도의 고구려 무덤이 있는대, 그 중 몇 기의 규모가 거대 한 것과 정교한 것들은 고구려 왕의 능묘이다. 유명한 광개토대왕릉 및 광개토대왕릉비 등이 모두 그곳에 있으며, 그 의 묘실 내에 아름다운 벽 화를 그린 19 기의 토분과 1 기의 석분이 있다. 또한 2 기의 고구려 성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현 集安縣城 소재지의 평지성, 다른 하나는 현성에서 멀지 않은 山城子山城이다. 集安縣城은 通溝iiiJ로 들어오는 강 입구 좌측에 있는데, 그 주위에 압 록강을 따라서 좁고 긴 충적평야가 있다. 성은 사각형이며 방향은 155° 이고 동쪽벽 길이는 554.7m, 서쪽벽 664.6m, 남쪽벽 길이는 751 .5 m, 북 쪽벽 715 . 2m 이며, 그 주위 길이는 2666m 이다. 벽의 높이는 l-4m 로 일 정하지 않고 너비는 7-lOm 이다. 동쪽벽, 북쪽벽, 서쪽벽 남단 등은 고 구려시기에 속하는데, 그 중 북쪽벽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모두 가공 된 사각형 또는 직사각형 석재를 교차하여 쌓았다. 벽 기단부는 부분적 으로 안으로 수축되었고, 적은 것은 4 단, 많은 것은 11 단이다. 벽 자체
는 평탄하게 쌓았으며, 馬面과 角樓의 흔적이 있고, 성내에 현대식 건물 이 있다. 1963 년 성내에서 명문 〈 太寧四年太 歲 □□ 問月六 B 己巳吉保子宜 孫 〉 이 기록된 회색의 권운문와당이 발견되었다. 고증에 따르면 〈 太寧四 年 〉 는 東晉明帝 太寧三年의 誤記인 325 년으로 보고 있다. 또한 성내의 중앙에서 북편 방향으로 고대의 벽 기단부와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팔롱 형, 覆盆形의 초석 및 고구려 시기의 와당편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것은 그 일대가 고구려 왕실 관청소재지라는 것을 나타낸다. 산성자산성은 集安縣城에서 서북 방향으로 2.5 k m 지점의 還 都山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通溝iiiJ가 산성의 남쪽을 돌아서 흐르고 있다. 전체 산 성의 지세는 삼태기형이다. 동, 서, 북, 삼면은 산마루를 따라서 성의 벽을 돌로 쌓았다. 남쪽의 지세는 비교적 낮으며, 그곳에 內向한 굴곡의 壅城門울 건립하였다. 작은 개천이 성문으로부터 의부로 흘러 나간다. 성 주위의 길이는 6951m 이며 보존이 양호한 곳의 높이는 5m 이상이다. 동시에 女膳도 설치하였다. 남문의 안쪽으로 약 200m 지점에 돌을 쌓아 전망대를 구축하였는데 그곳을 〈 點將 臺〉 라고 칭한다. 그곳의 전체 높이 는 1 1.7 5m 이며, 전망대에 오르면 通溝 하곡의 남쪽을 따라서 集安縣城 및 부근 산천이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점장대의 동남쪽에 50 - 60m 떠 돌로 쌓은 연못아 있는데, 전설적으로 그곳을 〈 飮馬池 〉 또는 〈 蓮花池 〉 라 고 부른다. 지금도 물이 있으며 목초가 무성하다. 점장대 북쪽에 군대가 주둔했던 곳으로 보이는 건물지가 있는데, 그 남북 길이는 92m, 동서 너비는 @m 이다. 땅속으로 깊게 3 층 계단의 기단부를 만들었는데, 각 계단은 높이가 lm 정도이다 . 각층의 기단 위에 초석이 질서정연하게 배 열되었으며 대량의 고구려 붉은색 와편이 산포되어 있었다. 그곳은 궁전 건물지일 가능성이 있다. 集安縣城과 산성자산성은 고구려 중기의 도성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 이다. 다음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에 기록된 고구려 중기 도성 및 도성과
관계된 城址를 순서대로 살펴보겠다. (1) 尉那巖城 위나암성은 유리명왕 22 년(서기 3) 에 축조되었는데, 그 성 소재지의 발견과 확정은 그 1 년 전에 이루어졌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의 기록 에 의하면 〈 (琉璃明王)二十一年(서기 2) 春二月, 效原逸, 王命掌性薛支逐 之, 至國內尉那巖得之, 拘於國內人家養之, 返見王日: 臣逐脫至國內尉那 巖, 見其山水深險 地宜五谷, 又多度 鹿魚醫之産, 王若移都, 則不唯民利 之無窮, 又可免兵革之患也 〉〈 九月, 王如國內地勢〉로 되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위나암성과 국내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나 양자는 서로 달랐다. 즉 위나암은 산을 지적하고 그 다음해(서기 2) 에 위나암성을 축조하였는 데 그것은 그 산 위에 세웠고 그 산이름을 따서 성의 명칭을 붙였다. 그 것은 위나암성이 산성임을 증명한다. 그 『고구려본기 』 의 기록에 의하면 대무신왕 11 년(서기 28) 에 漢 遼東太守가 공격해 와서 고구려 왕이 위나 암성에 들어가 고수하였다고 되어 있다. 〈 十一年 七月, 漢遼東太守來伐, …… (王)入尉那巖城, 固守數句, 漢兵園不解. 王以力盡兵庚, 謂豆智日 : 勢不能守, 爲之奈何豆智日: 漢人謂我巖石之地無水泉, 是以長園, 以待吾 人之困 宜取池中經魚, 包以水草, 兼旨酒若干, 致稿漢軍. 王從之 …… 遂弓|退 〉 아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위나암성 은 산성이며 성내에 水泉이 있으며 그것은 성을 고수하는 데 이용되었 다. 둘째, 고구려 왕은 평소에 이 성에 머물지 않고 전쟁시에만 산성으 로 들어온다. 위의 조건에 부합되는 성은 금일 集安縣城 소재의 평지성이 아니고 縣 城 북쪽에 있는 산성자산성이다.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는데, 集安에서 桓仁까지는 200-300 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대부분 큰 산이며 깊은 계곡이 있는 데 돼지를 추격하여 그곳까지 갈 수 있었는지, 또한 유리명왕이 천도할 때 古者 B 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갈 것인지의 여부다. 혹시 모두 桓仁縣城 부근에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모두 集安縣城 부근일까? 하 지만 상기한 두 가지 모두 가능성이 없는데 그 이유는, 첫째, 돼지를 추 격한 사건은 전설 또는 미신적인 것으로 그 전실을 고려할 가치가 없다 는 것이다. 고구려에서 돼지는 祭天之性(하늘에 제사 지내는 신성한 동물) 이다. 죽, 吉祥의 짐승이다. 그 이후에 산상왕이 돼지를 잡기 위해 교의 에 나갔다가 아들을 얻은 일이 있어 그 이름을 〈 效就 〉 라고 하였다. 그래 서 돼지를 추격하여 〈 山水深險 …… >등 은 吉祥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의 『 고구려본기 』 기록에 의하면 유리명왕이 천도 후 태자 解明울 古者!에 남겨 놓았는데, 해명은 〈 有力而好勇 〉 하여 黃 龍國王이 선사한 强 弓을 손으로 절단해서 황룡국과 관계가 악화되었다. 유리명왕이 그 사실 을 알고 사람을 파견하여 해명에게 말하기를 〈吾遷 都欲安民以固邦 業 , 汝 不我隨 而侍剛力, 結怨隣國, 太子之道其若是平 ? 〉 라고 하며 태자가 자 살하도록 사약을 내렸다. 이 내용은 유리명왕의 천도가 확실하고 동시에 新都가 고도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임을 확인해 준다. 만약 그 도성과 의 거리가 멀었다면 고도에 태자를 남겨 놓아 황룡국과 충돌한 것을 유 리명왕이 금방 알 수 없었을 것이다. (2) 丸都城 환도성은 고구려 중기 도성에 속한다. 환도성이 도성이 되고, 또한 그 구체적 수축과정 그리고 당시 고구려 왕조의 교체 등은 모두 산상왕과 밀집한 관계가 있다. 여기에 대한 고증 결과는 新大王 伯固 (179) ➔ 故國 川王 南武 (197) ➔ 山上王 延優(伊夷模) (227) ➔ 東川王 俊位居(位宮)이다. 이 고증으로 『 三國志 高句麗傳 』 에 없는 고국천왕 남무를 보충하고 동시
에 『 삼국사기 』 에서 伊夷模롤 고국천왕 남무로, 位宮울 산상왕 연우로 한 것을 바로잡게 되었다. 『 삼국사기 』 에는 환도성 수축시기가 산상왕 2 년 (198) 으로 되어 있다. 산상왕은 즉위한 그 다음해에 무엇 때문에 환도성을 수축하였는가? 顧 銘學은 그 이유를 형제들 싸움에 公孫度를 끌어들였고 그 결과 산상왕 13 년 (209) 에 〈 移都於丸都 〉 로 보고 있다. 산상왕이 수축한 환도성은 즉 『 삼국지 고구려 전 』 과 『 通典 』 에 기록된 伊夷模更作의 〈 新國 〉 이다. 『 삼국지 毋丘儉傳 』 에 의하면 〈 환도성 〉 은 환도 산 위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 新唐書 지리지 』 에 의하면 환도성은 오 늘날 集安縣城 부근이다. 그리고 산성자산성은 바로 이곳에 위치하고 있 으며 관구검의 공덕비도 산성자산성으로부터 멀지 않은 板盆嶺에서 발견 되었다. 그러므로 환도성은 산성자산성이다. 산상왕은 그가 즉위한 다음 해 (198) 부터 〈 築丸都城〉을 시작하여 13 년 (209) 에 〈移 都於丸都 〉 하였는대 모두 10 여 년이 걸렸다. 현재 산성자산성의 주된 성벽과 대형 궁전유적 은 그때 수축한 것이다. 유리명왕 22 년(서기 3) 에는 다만 〈築尉那巖城〉 한 것이며 결코 도성으로 삼은 것은 아니므로 그 다음 환도산성이 도성 이 되었다. 왜 하나의 성에 두 개의 명칭이 부여되었는가? 魏存成은 위나암성의 도성 이전의 명칭이고, 환도성은 도성 이후의 명칭으로 보고 있다. 중국 사서의 확실한 기록은 고구려의 도성은 丸都로의 천도 이후부터 시작되 기 때문에 위나암성의 명칭이 없다고 보고 있다. 『 삼국사기 』 내에는 위 나암성의 기록이 다만 산상왕의 천도 이전에 보이고, 천도 이후에는 위 나암성의 명칭이 보이지 않는다. 동시에 환도의 명칭은 산상왕 이전에 나타났다. 그것은 태조대왕 90 년 (142) 에 〈京都〉 두 자의 잘못으로 나타 난 것 의에는 발견되지 않았다. 즉 산상왕이 천도를 시작한 때부터 그것 은 명백하지 않게 되었다. 이 성이 도성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에 성의 이 름에 〈者!〉자가 있게 되었으며, 〈환〉자는 〈위나암〉이라는 세 글자가 변해
서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환도성이 1 차로 도성이 되어 3 세기 중엽에 魏將 관구검에게 공략당하 고, 고국원왕 때에 다시 제 3 차 수축이 이루어진다. 당시 고구려는 前燕 의 慕容氏와 오랫동안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한편 고구려는 崔瑟, 宇文, 段氏 등과 연합하여 慕容氏를 공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遼東도 수차 공략 하였다. 예를 들면 고국원왕 9 년 (339) 에 慕容統이 고구려를 정벌하여 군 대가 新城에 도달하자 고구려왕이 동맹을 요구하여 이에 물러갔다. 이로 인하여 모용씨의 공격을 방어하였다. 그 후 고구려는 前燕의 침공에 대 비하기 위하여 고국원왕 12 년 (342) 에 〈 春二月, 修葬丸都城秋八月, 移居 丸都城〉하였다. 그 뒤로 3 개월이 경과한 후 다시 모용황의 대공격을 받 게 되었는데, 모용황은 고구려의 오판을 유도하였다. 그것은 북쪽 길의 〈平間 〉 로 가는 척하다가 남쪽 길의 〈 險秋 〉 으로 진격하여 고구려를 공격, 대파한 것이다. 그래서 〈遂入丸都 〉 해서 王母 및 王妃를 사로잡고 〈 정針 含 |j (故國原王)父乙利(美川王)墓, 斬其尸, 收其府庫累世之賓, 擔男女五萬餘 口, 燒其宮훅 殿丸都而還〔그 결과 환도에 진입하여 고국원왕의 父 乙利(美 川王)의 묘를 파헤치고 그 시체를 자른 다음 대대로 내려온 보물을 수집하고 남녀 50,000 명을 포로로 잡고 궁실을 불태우고 돌아갔다〕 〉 하였다. 그것은 『 遼史 지리지』에 기록된 〈 桓州 …… 高句麗中都城, 高句麗王於此倉 l j立宮 關 國人謂之新國 五世孫욤 I], 晉康帝建元tJJ爲慕容銃 所敗, 宮室禁 蕩〉 등 의 내용과 일치한다. 그와 같이 환도성은 〈修暮(修築)〉한 이후 1 년도 되지 않아 또다시 한 차례 훼손을 당하였으며, 그 이후에 다시 환도성을 수축한 예는 없다. 다만 환도성은 계속 기록에 남아 있다. 예를 돌면 양원왕 4 년 (546) 秋九 月에 환도에 嘉禾가 들어간다는 기사와, 양원왕 13 년 (557) 冬十月에 환 도성의 干朱理가 모반하여 주살된다는 기사가 그것이다. 죽 고구려 후기 에도 환도성은 여전히 하나의 중요한 산성으로 남아 있었다.
(3) 國內城 국내성은 현 集安縣城 소재지이다. 『 通典 』 권 186 에 〈 馬 普 水一名鴨綠 水, …… 去遼東五百里, 經 國內城南 又西與一 7k 合, 卽監灘水也 〉 라고 기 록되었다. 그 馬 觜 7k, 鴨綠 7k 는 압록강이며, 監灘 7k 는 潭江이다. 그래서 국내성의 위치는 바로 集安縣城과 일치한다. 고구려가 국내성을 도성으 로 삼은 것은 유리명왕 22 년의 일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에 〈(琉璃明 王) 二十二年冬十月, 王遷都於國內, 築尉那巖城 〉 이라고 기록되었다. 여 기서는 다만 〈 국내 〉 로 기록되었고 〈 국내성 〉 으로 기록되지 않았으나, 『 삼 국사기 지리지 』 에서는 오히려 〈 播留王(琉璃明王) 二十二年移都國內城 〉 으 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 국내 〉 는 성을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 국사기 본기와 지리지에는 비록 도를 그 성으로 옮긴 것으로 되어 있으 나 그 성을 수축한 기록은 없다. 그러면 그 성은 당시에 존재하였을까? 근래 고고학 성과가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1975 - 1977 년 사이에 集安縣 문물관리소에서 국내성 남쪽벽에 T( 트렌 치 )4, T5, 그리고 북쪽벽에 T7 등 3 개의 긴 구덩이를 팠다. 그 결과 돌 벽 밑에서 견고한 봉분을 발견하였다. 그 토층은 너비 7-8m, 높이 1.7 -2m 였다. 그 단면은 弓形이다. 흙은 황갈색 모래질 토양으로 그 안에 소량의 강자갈이 포함되었다. 그 견고성으로 보아 인공을 가한 봉분이 다. 다만 杏席는 보이지 않았다. 그 봉분에서 불에 탄 붉은 흙과 재구덩 이(灰抗)가 발견되었으며, 동시에 그곳에서 돌도끼, 돌칼, 석기 손잡이 (石柄), 環狀石器와 14 점의 토기편이 발견되었다. 발굴자들은 그 봉분을 국내성 건축의 최초 기초로 인정하고 국내성의 규모를 대략 확정하였으 며, 출토된 유물에 따라 그 흙벽의 수축연대를 戰國 시기, 죽 고구려 건 국 이전으로보았다. 漢 武帝 때인 기원전 108 년에 4 郡을 설치하였는데, 그 중 현도군 밀에 고구려현을 두었다. 그 흙벽이 漢代의 고구려치소인지 여부는 장래 검토
되어야 하는데, 張博泉은 集安 부근이 西蓋馬縣 소재지라고 주장하고 있 다. 여하튼 그 토성은 西 漢 城址가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고구려는 서기 3 년에 그곳으로 천도하였다. 즉, 그 성지를 사용한 것이다. 그 성은 평 지에 있기 때문에 방어를 위하여 천도와 동시에 그 성 북쪽의 멀지 않은 곳에 위나암성을 수축하였다. 그 후 산상왕 즉위 초에 그의 형 拔奇는 公孫度의 군대를 빌려서 〈 破 其國, 禁燒邑落 〉 하니 훼손된 것은 원래 西漢城이었다. 그래서 산상왕은 新國 환도성을 다시 만든다. 3 세기 중엽에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환도성 울 공략하니 동천왕은 〈 王以丸都 經 亂 不可復都 築平 壤 城 移民及廟社(왕 은 환도가 난리를 만나서 다시 도성으로 복구할 수 없다. 그래서 평양성을 수 축하여 백성과 종묘사직을 이주시켰다) 〉 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낙랑군을 아 직 공략하지 않았다. 그 〈 平壤 〉 은 산 아래 평지성인데 그 것 으로 고구려 는 산 아래 평지성을 최초로 수축하게 된다. 즉 〈 故國原王 十二年 (342) 春二月, 修暮丸都城, 又築國內城 〉 이 된다. 그 기록 속에 국내성의 모든 명칭이 정식 출현한다. 여기에 또한 〈 又築(再修築) 〉 이 기록되었는데 , 그 것은 그 성은 원래 수축되어 있었다는 뜻으로 동천왕 때 수축된 일로 볼 수 있다. 集安縣 문물관리소에서 국내성 돌담을 발굴하였는데, 그곳에는 고구려 시기에 재수축된 혼적이 있었다. 더욱이 토석혼축의 성벽 내에서 고구려 시기의 토기, 철기, 청동기 등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그 돌담이 〈高句麗遷都於此之後過了一段時期修築的(고구려가 그곳에 도성을 정한 후 일단의 시기를 거쳐 수축하였다)〉이라는 내용과 합치된다. 고국원왕이 비 록 동시에 환도성과 국내성을 수축하고, 모용황이 공격할 때에 〈 移都丸 都城〉 하지만, 다시 모용황의 공격을 받는다. 즉 모용황이 궁실을 불태 우고 환도성을 폐허로 만든 후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 거기에 따르면 환도성 의에 산 아래 국내성으로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삼국사기 지 리지 』 에 고구려 중기 도성에 대한 기록이 있다. 거기에 따르면 국내성은 集安縣에 소재하고 그 아래에는 〈都國內歷四百二十五年〉의 기록이 있다.
〈 국내 〉 의 뒤에 〈 성 〉 자가 없다. 그러나 425 년 동안 시종 국내성을 도성으 로 하지 않고 때로 환도성을·도로 삼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의 〈 국 내 〉 는 국내성과 환도성을 하나의 전체 또는 지구에 포함시키는 것이 합 당하다고 보고 있다. 고구려 후기에는 옛 낙랑군치소로 천도한 후 국내성은 〈 別都 〉 가 되지 만 계속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즉, 보장왕 4 년 (645) 에 唐軍이 遼東城울 공격하자 고구려는 新城(現 撫順 高爾山城), 국내성에서 보병, 기마병 40,000 명을 증원하여 遼東울 구하러 보낸다. (4) 平壤 여기서 논하는 평양은 원래 낙랑군치소와 고구려 후기의 성도였던 평 양이 아니고 고구려 중기의 역사기록에 출현한 평양을 뜻한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중 최초로 평양이란 명칭이 출현한 것은 동천 왕 21 년 (247) 春三月이다. 당시는 환도성이 관구검에 의해서 훼손되어 〈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者 B, 築平壤城, 移民及廟社〉로 기록된 후 미천왕 〈 三年 (302} 秋九月 , 王率兵侵玄英郡, 虛獲八千人, 移之平壤〉에 평 양이 또 한 번 보인다. 두 곳에 기록된 평양은 모두 현 集安縣예 있던 국내성 이다. 왜냐하면 고구려가 낙랑군을 공략한 것은 313 년이며 고구려왕이 樂浪公에 봉해지는 것은 그 이후 고국원왕 25 년 (355) 이다. 그것은 313 년 이전에는 고구려가 낙랑군치소인 평양을 성도로 할 수 없었음을 뜻한다. 313 년 이전에 출현한 평양이란 명칭은 〈국내성〉의 오류이며, 동시에 『 삼 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국내성〉 全名의 출현은 그 후의 일이다. 따라서 그 이전에 국내성지 또는 평양의 명칭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상기할 점은 모용황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궁실을 불사르고 환도성을 훼손시킨 그 다음해 (343) 7 월에 고국원왕이 〈移居於平壤東黃城, 城在今 西京東木党山之中〉이라는 내용이다. 거기에 고구려왕이 〈평양〉과 직접
연계된 것이 보이고 또한 〈黃城〉이란 명칭이 고구려 후기에 또 한 번 나 타난다. 즉 안장왕 11 년 (529) 〈春 三月 王冊文(사냥)於黃城之東 〉 이란 기록이 있다. 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이미 낙랑군치소를 점령하였다. 〈黃 城 〉 의 구체적 소재지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국내성의 동쪽으로 현 集安縣城 동쪽에서 이미 고급의 건물지가 여러 곳 발견된 바 있다. 이곳 은 현성에서 동쪽으로 0.5 k m 되는 東臺子 유적이다. 다른 한 곳은 集安 역 좌측이다. 또 다론 한 곳은 국내성 東門 外 현 제 2 백화점의 북쪽이 다. 그 중 동대자 유적은 1957 년 발굴해서 4 기 주거지를 확인하였다. 그 대부분이 滿州國철로 부설로 인해 파괴되었다.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옛 낙랑군치소이다. 즉 고구려 후기의 도성 평양 부근이다. 평양은 고구 려 이후 고구려 왕조의 西京이다. 어느 쪽의 가능성에 속하든 간에 그곳 은 다만 고구려 군대가 모용황에게 패한 후 임시로 주거한 곳이다. 그래 서 그곳을 도성이라고 볼 수 없다. 상기한 내용 의에 고구려가 낙랑군치 소를 점령한 이후 427 년 이전까지 『 고구려본기』 내에 또한 평양성에 대 한 기록이 몇 곳 있다. 그 중 두 곳은 백제가 공격하여 온 내용이다. 그 곳에서 말하는 평양은 옛 낙랑군치소의 평양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정식 으로 도성을 낙랑군치소로 옮긴 것은 장수왕 15 년 (427) 이다. 그것은 『 삼 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지리지』에 명확히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 好 太王碑(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에서 傍證울 찾을 수 있다. 광개토대왕릉 비문 기록은 호태왕 9 년 己亥 399 년이며 『삼국사기』 광개토대왕 9 년 庚 子年은 죽 400 년으로 되어 있고, 그 비문 내용 중 〈 王巡下平稽(平壤)〉 (왕의 평양 순시)은 고구려 왕은 평소에 그곳에 오지 않았으며 또한 그 성이 도성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평양성의 지위는 당시의 도성 보다 낮았다고 판단하고 있다.
3) 맺는 말 상기한 내용에 따라서 고구려 전기 (초기), 중기 도성의 수축과 천도 내용을 다음과 같이 표 3-1 로 제시하고 있다. 『 周書』에 고구려 후기의 도성 평양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 其城,
표 3-1 고구려 초기, 중기 도성
東西六里,南監沮*· 城內唯 積倉 , 儒器, 備送, 賊至 B, 方入固守, 王ff l J 別爲宅於其側 不常居之. 〉 거기에 기록된 〈 唯 積倉 , 儒器, 備71!., 賊至日, 方入固守 〉 등은 산성을 지적하는 뜻으로 고구려왕이 평소에 그곳에 머문 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 ~l j爲宅於其側(따로 주거를 정 하다) 〉 이라고 했다. 즉 山城之俳 l, 山城의 측면에 주거지가 있었다는 것 인데, 더욱이 그곳은 산 아래이며 물과 토양이 적합하고 교통이 편리한 평원 위에 주택을 건립하였다. 당연 그 〈 宅 〉 은 영구한 장소로서 안전을 위하여 그 주위에 성을 건설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그것은 평지성이다. 〈賊至 B 〉 즉, 적이 공격해 오면 산성으로 들어가지만 왕은 평소에 평지 성에서 산다. 그것들(山城, 平原城)의 위치와 작용은 똑같이 중요하다. 죽 고구려 도성의 산성과 평지성은 연합된 특칭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특칭은 고구려 후기에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중기에도 존재하 였으며, 아마 고구려 초기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중기를 예로 들 면 고구려는 〈 都國內, 歷四百二十五年(고구려는 國內에서 都를 정하여 425 년을 경과하였다) 〉 이라고 되어 있다. 만약 고국원왕 13 년 (343) 이후의 85 년간을 잠정적으로 계산에 넣지 않더라도 고구려가 지금의 集安縣城 평 지성을 도성으로 정한 것은 301 년간이며 산성자산성을 도로 정한 것은 39 년간이다. 실질적으로 集安縣城 평지성을 도로 사용한 301 년 중 산성 자산성의 위치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산성자산성을 도성으로 사 용한 39 년 동안에도 일단 형세가 안정되면 고구려 왕이 다시 산 아래의 평지성으로 돌아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고구려 도성을 논술할 때 산성과 평지성을 둘로 나눌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서 로 없어서는 안 되는 하나의 조합된 整體이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왜 그러한 도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 원인은 다음 과같다. 첫째로, 고구려족과 고구려국은 오랫동안 潭江 유역과 압록강 중류 지 역에서 활동하였다. 그곳은 〈多山深谷, 無原澤(대부분 큰 산과 깊은 계곡
으로 늪지가 없었다) 〉 이어서 산성을 수축할 지리조건이 이루어졌으며, 고 구려인들은 〈 隨山谷以爲居, 食潤 7k( 고구려인들은 계곡을 따라서 주거지를 정하고 흐르는 물을 마셨다) 〉 하였고, 〈 無良田, 難力 11H 作, 不足以實口腹(良 田이 없어서 전력을 다하여 농사를 짓지만 배를 채우기에는 부족하였다) 〉 , ~ 평원의 良田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고구려가 무덤을 산 위에 수축하여 농지를 차지하는 것을 방지하고 경작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둘째로, 고구려국은 건국일부터 계속해서 전쟁을 하였다. 때로 고구려 는 통치구역을 확장하기 위하여 의부를 공격하였다. 『삼국지 고구려전』 에 〈 其A' I 生凶急 喜送紗(고구려 사람들은 성질이 흉악하고 급하며 의국에 쳐 들어가 재물을 빼앗아 가기를 좋아하였다)〉라고 기록되었다. 이 내용은 상 기한 내용을 지적한다. 때로 의부세력이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하였는데, 상기한 내용대로 고구려 도성이 여러 차례 공격당하였다. 그러므로 주로 의부세력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고구려는 평지성을 건립함과 동시에 부근에 산성을 수축하였다. 이 점이 고구려 도성의 특징을 형성하는 주 요인이다. 2 국내성 國內城址는 고구려 왕조 건립 후의 두번째 도성 유적이다. 그곳은 지 금까지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고구려 평지성지로서 고구려 역사를 연구 하는 데 주요한 유적이다. 과거에 이 성지에 대하여 상당한 고찰과 연구 를 하였지만 자세하지 못하였고 착오도 있었다. 최근에 국내성 유적에 대한 새로운 조사를 실시하였다. 동시에 실측과 시굴을 하였다. 조사와 시굴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2)
1) 국내성의 위치, 환경과 현상 (1) 국내성의 위치와 환경 국내성은 현재의 吉林省 集安縣城이다. 그곳은 吉林省 압록강 중류 右 岸, 通溝 분지의 서부에 있다(그립 3-1). 성에서 동쪽으로 6km 지점이 龍山이고, 성에서 북쪽으로 1km 지점이 禹山이고, 성에서 서쪽으로 通 溝iiiJ를 건너서 1.5k m 거리에 七星山아 있다. 압록강은 동북쪽으로부터
그립 3 가 국내성 위치도
성의 측면을 경유하여 서남쪽으로 홀러들어간다. 老嶺山脈에서 발원하는 通溝iiiJ는 구불구불 북쪽으로부터 흘러나와서 城의 서쪽을 경유하여 서남 쪽으로 돌아서 동남쪽으로 홀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성의 남쪽에는 東 에서 서쪽 방향의 성벽 의측을 따라서 通溝河 방향으로 흐르는 天然 7k i豪 가 있다. 국내성의 수축은 자연조건을 충분히 이용하였다. 성의 동북쪽 산맥을 천연의 居[章으로 삼고, 성의 서쪽 通溝河와 성 남쪽의 수호, 압 록강은 천연적 護城江이 되었고 그 위에 城防울 보충시켰다. 이 의에 국 내성의 동쪽, 북쪽 沿城에는 2 개의 견고한 護城溝 또는 강이 있는데 너 바는 10m 정도이다. 1949 년 초에 그러한 것들을 확실히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주택들이 건립되고 城溝는 이미 매몰되었다. 국내성의 북면에는 通溝 하곡을 따라서 북쪽으로 2.5km 의 지점에 국 내성의 守備城인 丸都山城이 있다. 환도산성은 지세가 험준하고 높은 곳 에 위치하여 북쪽 도로로부터 진격해 오는 국내성의 칩입자를 충분히 방 어할 수 있는 곳이다. (2) 국내성의 현상 國內城原은 1 基의 견고한 石城이다. 그 내의 양쪽 벽 (그림 3-2) 은 모두 직사각형과 사각형 돌로 쌓았다. 이미 연대가 상당히 오래되어 몇 번의 수축을 거치는 동안 성벽의 대부분은 이미 원형을 상실하였다. 1980 년 봄에 縣文物保管 F Jj-에서 國內城址의 현상을 실측하였다. 성은 거의 사각 형이며 방향은 155° 이고, 길이는 동벽 554.7m, 서벽 664.6m, 남벽 751 . 5m, 그리고 북벽 (그립 3-3) 은 715.2m 이다. 성 주변의 전체 길이는 2686m 이다. 남쪽 성벽 西段은 보존이 상당히 양호하며 높이는 보통 약 3-4rn 이다. 東段 殘高는 약 2-3rn 이다. 동쪽 성벽에는 이미 많은 가옥이 건립되어 城址가 대부분 파괴되었다. 다만 몇 부분의 벽 기단부가 끊기 고 또는 연결이 되어 있다. 북성벽 기단부는 보존이 비교적 양호하다.
그림 3-2 국내성 성벽의
그림 3-3 국내성 T7( 복벽)
다만 東段 한 부분과 西北角 一段 벽 기단부가 심히 파괴되었다. 벽의 殘高는 l-2m 이다. 1975 년에 북성벽을 간단히 改修하였다. 서쪽 성벽은 原西城門이 경계로 되어 있다. 北段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벽의 殘高 는 약 224cm 이다. 南段은 심하게 파괴되었다. 성벽은 기본적으로 파손 되었다. 국내성에 잔존해 있는 성벽의 너비는 약 7-lOm 이다. 국내성 주위 성벽의 각 문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馬面(雄, 城市의 방 어시설의 하나, 성벽 의부에 부가 수축된 담. 정면이 말머리처럼 생겼다)을 수축하였다(그림 3-4). 성벽 주위 마면의 수량은 일정하지 않다. 잔존한 흔적을 보면 북벽에 8 곳, 서벽, 남벽, 동벽에 각각 2 곳으로 모두 14 곳이 다. 각 마면의 길이와 너비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보통 길이 8-10m, 너비 6-8m 이다. 국내성의 西北角 西南角과 東南角은 거의 직각이다. 완곡한 곳에는 모두 占된 벽면의 方臺가 있는데 그것은 角樓建築의 유적으로 보고 있 다. 東北角은 孤形이다. 벽을 의지하여 꺾인 곳이 있고 동벽과 북벽에 각각 하나의 마면이 있으며 그 사이의 거리는 40m 이다. 성문은 원래 6 곳이다. 남북에 각각 1 곳이 있고 동서에 각각 2 곳이 있 으며 모두 壅門을 가졌다. 『 集安縣志 』 의 기록에 의하면 〈民國十年 (1921)
그림 3-4 국내성의 마면
門 3 基를 다시 수축하였다. 동쪽을 輯文門이라고 칭하고, 서쪽을 安武 門, 남쪽을 樣江門이라고 칭하였다〉. 그 이후부터 나머지 세 문은 모두 폐쇄되었다. 성내에 지금은 街道가 있다. 동서 방향의 길을 勝利路라고 하는데 동쪽으로 〈輯文門〉과 연결되고, 서쪽으로 〈安武門〉의 가도와 연 결되었다. 勝利路 북면에는 團結路가 있으며, 그 동쪽 양끝은 바로 동벽 과 서벽 편 북측의 2 곳 門址이다. 승리로와 단결로는 고구려 때 국내성 중의 옛 도로였을 가능성이 크다. 남북 방향인 東盛街양끝은 국내성의 남문과 북문이다(그림 3-5). 국내성 성벽 옛 기단부의 수축시 지표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단계를 나누어 좁아지도록 하였다. 보통 각 단계를 10-15cm 좁혔다. 현상 관찰 에 의하면 북벽 內收層序가 가장 많아서 11 단계에 이른다. 서벽 남단은 4 단, 동벽은 6 단이다. 벽 기단부 위의 벽은 똑바로 쌓았다. 서벽 북단과 남벽 기단부는 內收현상이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후대에 수축했을 가능
북쪽
성이 크다(그림 3-6). 국내성의 구축 방식은 대체적으로 3 종이다. 제 1 종은 찰 가공된 사각형과 직사각형 석재를 교차로 편평하게 쌓았 다. 벽면 석괴는 가로로 평탄하게 쌓고 툼을 평탄하게 메웠다. 북쪽 면 은 바깥쪽으로 약간 占되었다. 이러한 구축은 성벽의 기단부가 그 부근 에서 보인다. 동벽, 북벽, 서벽 모두 이러한 구축방식에 속한다. 이것은 고구려 시기의 성벽이다(그립 3-7).
그림 3-6 국내성 성벽 기단부
그림 3 구 국내성 성벽 제 1 종 구축방식
제 2 종의 석재는 거칠다. 수축이 횡행으로 그리 평탄하지 못하다. 석재 사이의 톰은 碑石(부서진 돌조각)으로 메웠다. 이러한 구축방식은 성벽 중상부, 남벽의 전부와 서벽의 북단에서 보인다. 후대에 수축한 것으로 보인 다 (그립 3-8) . 제 3 종은 석재 크기, 石質 등이 일정하지 않고 돌을 쌓은 순서도 무질 서하다. 이러한 구축은 성벽의 상부에 집중되었는데 이것은 만주국 또는 중국내전시 수축된 것이다(그림 3-9). 국내성 서벽 外偏北 부근 구부러진 곳 지하에 동서 방향으로 놓인 배 수구가 있다(그림 3-10), 너비 80cm, 길이 870cm, 높이 95cm 이다. 석 재로 2 층을 쌓았고 頂上울 7 枚 大境石으로 덮었다. 석판의 두께는 70- 75cm 이다. 그 동쪽 배수구에서 동쪽으로 lOm 거리에 서벽이 있다. 배 수구 밑바닥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며 경사는 약 10° 이다. 배수구 이북의 서벽은 모두 제 2 종 구축형식으로 쌓았으며 배수구 이남에서 곧바 로 서문에 이른다. 성벽 기단부와 부분 담벽은 제 1 종 구축형식에 속한 다. 이로 인하여 배수구는 국내성 석축벽 형성 이전에 만들어전 지하 배 수구임을 알 수 있다(그림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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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10 국내성 서벽 바깥의 배수구 입구
국내성에는 현재 주택이 건립되어 있다. 그래서 유적의 배치는 1949 년 이후 현성 건축공정조사소에서 구할 수 있었던 영세한 자료를 근거하여 분석한 것이다. 1963 년 성에서 浴池를 수축할 때 建築址를 한 곳 발견하 였다. 그곳에서 출토된 1 점의 회색 구름무늬 瓦當에는 〈 太寧四年太歲仁] □ r.%.1 月六日 己巳造吉保子宜孫 〉 이라는 銘文이 있다(그립 3-12). 1971 년 縣 운동장 서부에서 모래를 채취할 때 고대 벽 기단부, 주춧돌, 그리고 고 구려 암키와편이 발견되었다. 벽 기단부는 약 1.5m 인데 이미 훼손되었 다. 주춧돌 상부는 覆盤形이다. 1975 년 縣政府建物에서 기단 구덩이를 팔 때도 동일한 고대 벽 기단부와 고구려 紅瓦片이 대량 발견되었다. 이 의에 縣公安局院內에 동서 나란히 큰 주춧돌이 두 줄로 보관되어 있다. 그 상부는 八校形으로 구멍이 뚫려 있으며 지름은 85cm 이다. 그 의에 주춧돌이 2 점 있는데 상부는 복반형이며 지름은 60cm 다(그립 3-13). 1970 년대 발견된 3 곳 유적은 동서로 하나의 직선을 이루었는데, 이곳은 바로 국내성지의 중부로 그 범위는 동서 약 240m 이다. 이것은 같은 建築址의 기초벽이다. 유적의 규모와 위치를 보면 국내성의 주요 건축물로 궁궐유적일 가능성이 크다.
〈二三言三
그림 3-12 명문와당
Y 510cm
2) 국내성의 시굴 1975 년 5 월부터 1977 년 5 월까지 국내성 유적이 발굴되었다. 모두 10 개 의 트렌치 (긴 구덩이)를 팠다. 그 중 남쪽 성벽에 5 개의 트렌치 (Trench ; Tl-T5) 를 팠고, 동쪽 성벽에 1 개의 트렌치 (T6) 를 팠고, 북쪽 성벽에 2 개의 트렌치 (T7, Ts) 를 마련했으며 서쪽 성 벽 남단에 2 개의 트렌치 (T9, T10) 를 팠다(그립 3-5). 발굴한 면적은 모두 960m 이다. 성벽의 내외벽은 모두 석재로 구축하였다. 성벽 최상면의 표토는 근, 현대의 교란층이다. 두께는 0.2-lm 이고 어느 곳은 개간되어 채소를 재 배하고 있다. 각 트렌치의 정황은 다음과 같다. (1) 동쪽 성벽 T6, 북쪽 성벽 T7, T8 과 서쪽 성벽 남단 T9, TIO 은 모두 제 1 종 구축방식을 선택하였다. 벽 구축은 잘 정돈되었고 지표에서 울라간 나머지 높이는 0.9-2.2m 이다. 벽 기단부는 모두 거대한 화강암으 로 쌓아서 상당히 견고하다. 석재는 윗부분이 넓고 아래가 좁은 직사각 형이다. 보통 길이 50cm, 두께 20cm, 윗부분 너비 약 36cm, 아랫부분 너비 약 24cm 이다. 이 석재를 쌓을 때 石材 아랫부분을 안쪽으로 놓고 윗부분을 바깥쪽으로 해서 아래에서 위로 점점 좁혔다. 각 충은 10- 15cm 씩 좁아져서 벽면은 계단형이다. 이러한 구축방식은 대단히 견고 하여 상당히 큰 압력도 견딜 수 있다. 트렌치에서 나타난 3 면 성벽의 계 던충서와 높이는 일정하지 않다. 최저는 4 층으로 높이가 약 lm 이며 높 은 것은 11 층으로 높이가 약 2 .4 m 이다. 계단상의 기단부에서 다시 위쪽 으로 벽을 쌓았다. 석재 가공규격은 대체적으로 일치하며 벽 자체의 結 構는 짜임새 있고 벽면이 정제되어 아름답다. 외벽 면에는 규정된 직사 각형 석재를 쌓았다. 안쪽으로 4m 정도 들어가서는 가공되지 않은 석재 룰 쌓았다. 돌 톰은 모두 쇄석으로 메웠다. 내벽은 불규칙한 석재로 차 츰 좁아지게 쌓았으며, 벽면은 상당히 정제되었다. 전체 벽 절단면은 사
다리꼴이다. 벽 내부에서 내벽까지는 5-6m 가 된다. 그 사이는 흙과 돌 을 섞어서 메웠다(그림 3-14). 메운 흙(t眞土) 속에서 고구려 청동기 2 점, 철기 3 점, 토기편 62 점과 회색 와편 1 점 등이 발견되었다. 토기편 중에 구연부편이 있다. 구연부가 넓고 둥근(散口圓팜), 고운 전 흙 태토의 회갈색 1 점 (T1: 9, 그림 3-15a) 과 구연부 단면이 사각형(折 沿方뮴)인 고운 진흙 태토의 연한 황색 1 점 (T4: 9, 그립 3-15b), 구연이 넓고 목이 의반되었으며 어깨가 넓은 모래 섞인 백회색 토기 1 점 (T10 : 2, 그립 3-15 c) 등이다. 소성도가 상당히 낮은, 구연이 넓고 네모 난 입 술의 모래가 섞인 태토의 회색 토기편 1 점 (Ts : 14, 그림 3-15d) 등이다. 회색 암키와편 1 점 (T9 : 9) 은 등(背)에 돗자리무늬 (繩文), 배면(腹面) 에는 헝검무늬 (布文)가 있다. 청동기 구연편 1 점 (T8-9) 은 구연이 넓고(廣I]) 배가 부르(圓腹)다. 청동제 방울 1 점 (T7 : 6) 은 위에 동그란 고리가 달렸고 밑부분에는 경 사전 구멍이 있다. 그 안에는 하나의 小石粒으로 혀를 만들었다. 배 부 분에는 한 줄의 돌기한 승문이 있고 배 상면(上!度)에는 12 개의 일정한 거리의 빗살무늬(斜延文)가 있다. 철제 마치 1 점 (T8 : 9) 은 4 校柱形이다. 길이 9cm, 너비 5 . 5cm 이다. 마 치의 공부는 직사각형이며 길이 2cm, 너비 1. 4cm( 그립 3-16a) 이다. 철제 화살촉 1 점은 납작한 삽형(福鍾形)이다. 길이 7.5 c m(T6 : 3) 이다. 다른 1 점은 마름모형으로 길이 10cm(T4 : s, 그림 3-1 6 b, c) 이다. 상기한 담벽초, 수축 특징 및 출토된 文物에 의하면 동벽, 북벽과 서 벽 남단은 고구려 시기에 건립되었다. (2) 남쪽 성벽 Tl, T3, T5 의 의벽에서 두 줄의 담벽을 발견하였다. 북쪽 성벽 T7, T8 의 내벽에서도 두 줄의 담벽을 발견하였다. Tl, T3, T5 의 두 줄 담벽 벽면의 거리는 lm 정도이다. T7, T8 의 두 줄 담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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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_a그림~ 3 -151 국내 1성 출 토 토bd기 〕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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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고는 1. 4 ~ 1 . 8m 이다. 벽면 상호 거리는 1.4 m 이다. 벽 남부에 위치한 첫 째번 담벽은 석재 규격이 일정하지 않고 수축한 돌충 역시 상당히 문란 하며 수축 결구가 엄격하지 못하다. 두 줄 담 사이는 검은 흙과 돌부스 러기로 메웠는데 토질이 상당히 물링하다. 이 충 속에서 靑花姿器片 5 점 과 〈 光緖通賓 〉 라고 쓰인 동전 1 매가 출토되었다. 이 줄의 담벽은 民國年 間에 수축된 것이다. 둘째번 담벽 수축방법 및 출토된 토기편은 전술한 제 1 종 방식으로 쌓은 벽 트렌치의 정황과 기본적으로 같다. 다만 기초 부분에 충들이 좁아진 흔적은 없다. 이것은 국내성 시기의 벽을 복원한 것이다. 이로 인해서 첫째번 담벽은 城址의 제 2 차 건축에 속하고 둘째 번 담벽은 제 1 차 건축에 속한다(그림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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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쪽 성벽의 T4 는 하나의 馬面址에서 잘렸다. 이 트렌치 내에서 세 줄의 담벽이 발견되었다. 바깥면 가까이에 있는 첫째번과 둘째번은 모두 군사상 방어용 건축물이다. 첫째번은 잔고 2.8m 이며 수직으로 쌓 였다. 양쪽 담벽 사이에 충전된 진흙 속에서 1 枚의 만주국 화폐가 출토 되었다. 이것은 첫째번 담벽이 만주국 시대에 수축된 석질의 작은 성(!i周 堡)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둘째번 담벽 양면 구부러진 곳은 남쪽 성벽 Tl, T3, T5 의 첫번째 담벽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민국 연간에 수 축된 석질의 작은 성(li/!I堡)이다. 셋째번 담벽은 하나의 잔존된 벽이다. 이것은 국내성 원래의 벽이다. 그 최하부 벽 기단부 내에는 아직도 馬面 의 기초가 남아 있다. 그것은 후에 어디로 옮겨졌다. 동시에 이 담은 고 구려 시기에 복원된 것이다(그림 3-18). (4) 성벽 馬面址의 시굴에는 남쪽 성벽 T4 의에 북쪽 성벽 T8 도 포 함된다. 이 마면은 지표에서는 흔적을 볼 수 없다. 지면 밀에 기초가 남 아 있는데 동서 길이 l0m, 남북 너비 6.S m , 깊이 2m 이다. 마면지의 기 초는 성벽의 기초와 같이 모두 거대한 화강암 석재로 상호 맞물려서 쌓 았다. 마면지 내에서 출토된 손잡이 달린 토기, 삽형 석촉 등의 기형은 국내성 시기의 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같다. 이것은 마면이 국내성 시기 에 건립되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며, 후에 복원될 때 그것은 폐기되었다. (5) 남쪽 성벽 트렌치 T4, T5, 북쪽 성벽 T8 내와 성벽의 하부에서 한 줄의 견고한 흙더미가 발견되었다. 흙더미 너비는 7-8m, 높이 1.7 - 2m 이다. 단면은 弓形이고 토질은 진흙에 모래가 섞인 황갈토인데 거기 에 소량의 자갈이 섞였다. 그 견고한 정도로 보아 인공으로 다져진 것 같지만 다져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토롱 내에서 불에 탄 흙과 재구덩 이(그림 3-14, 3-19} 그리고 다음과 같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민 진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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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石器 4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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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22 돌칼 (Tl @: 14) 과 환상석기 (T9 ©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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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몇 가지 인식 시굴을 통하여 국내성의 건축 결구, 성벽 건축과 수축연대에 대한 초 보적 인식을 갖게 되었다. {1) 국내성 유적 남북 양면 성벽의 트렌치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국내 성 성벽 밀부분에는 하나의 단면 弓形 토축벽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 한 토벽은 국내성 건축의 최초의 기초이다. 이것에 의하여 후에 국내성 의 규모가 확정되었다. 토벽 내에서 출토된 돌도끼, 돌칼, 별도끼 등은 개별적으로 타제된 것 의에 대부분 마제이다. 이 중 돌도끼는 吉林省 長 蛇山 유적에서 출토된 I 식 마제석부와 기형이 일치한다. 바퀴날도끼 역 시 장사산 출토의 유물과 유사하다. 다만 중앙의 구멍이 없다. 이러한 석기는 또한 旅大市 長海縣 출토의 어깨 있는 작은 도끼, 돌마치의 기형 과유사하다. 吉林省 長蛇山과 旅大市 長海縣 두 유적의 연대는 中原 지구의 戰國 시기에 해당된다. 그 토벽의 수축연대는 戰國과 고구려 건국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漢武帝는 元封 4 년(기원전 107) 에 4 郡울 설치하였다. 그 중 玄英郡에 高句麗縣이 속하였다. 이 토벽이 한대의 고구려현치소인지 여부는 장래의 연구가 필요하다. 고구려는 기원전 37 년에 訖升骨城에 수도를 정하였고 제 2 대 유리명왕 때에 〈二十二年년(서기 3) 冬十月 遷都於國內, 築尉那巖城(죽, 國內城의 守備城 丸都山城,編者)〉한 것으로 되어 있다. 국내로 천도한 후 축성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당시 국내에 이미 성벽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가능성은 바로 이러한 토벽이다. 토벽의 발견은 국내성지 시굴작업의 중 대한수확이다. (2) 국내성지 석성벽 내에서 출토된 고구려 유물에 의하면, 석벽은 고
구려가 이곳에 천도한 후에 얼마간 시간이 경과한 후에 수축하였음을 설 명하여 준다. 발굴 중에 발견한 것은 동벽, 북벽, 남벽과 서벽 남단 석 축 성벽의 기초가 일치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모두 토벽 위에 구축되었 다. 여기서 단정할 수 있는 것은 남·동·북 삼면 성벽 및 서벽 남단은 원래의 터라는 점이다. 다만 서쪽 성벽 북단은 서쪽 성벽 남단과 직선상 에 놓여 있지 않았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점점 좁아졌다. 그 벽 기단부 는 다론 곳과 같지 않다. 이것은 이 부분 벽이 기초부터 상부까지 여러 번 개축되고 옮겨진 것을 나타낸다. 서벽 의변에 배수구가 하나 있다. 그러나 석축 성벽의 기단부에서는 배수구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이 배수구의 건축연대가 석축 성벽보다 이르다는 것을 설명하고, 또한 이것 은 토벽과 동시대일 가능성이 있으며 토벽의 기단부에 설치되어 있었다. 만약 이러한 추측이 툴리지 않다면, 국내성 서벽의 북단은 토벽에서 석 벽으로 개축될 때 이미 동쪽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개수와 빈번한 이동 은 通溝iiiJ의 流 7k 가 끊임없이 성벽 서북부를 침식하였기 때문이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국내성을 여러 차례 개수한다. 예를 들면 고국원왕은 〈十二年 (342) 春二月 修洋丸都城 又築國內城〉했다고 되어 있 다. 이번에 발굴한 트렌치 중에 남쪽 성벽 Tl, T3, T5 의 둘째 벽과 T4 셋째 벽 부분 석벽의 구축 결구와 사용된 석재는 다른 곳과 다르다. 이것은 고구려 시기에 복원한 흔적이다. 기타 壁段의 복원은 분명하지 않다. 국내성은 3 년부터 427 년까지 고구려 도성이었다. 그곳은 425 년간 고구 려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이번 국내성지에 대한 발굴은 국내 성 연구를 위하여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내성지 저 부의 토벽 구축시기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漢代에 설치한 〈四郡〉과 어 떤 관계가 있는지는 장래의 연구를 기대한다.
3 산성자산성 고구려 초기의 산성은 山城子山城이다. 集安縣 山城子山城에 대하여 과거에 일부 학자들이 조사하였으며, 또 한 일부 학자들이 문헌상으로 考證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모두 문제 가 있었다. 그러므로 비교적 믿을 수 있는 과학적 자료를 얻기 위하여 吉林省 文物工作除와 集安縣 文物管理所가 산성자산성에 대하여 여러 차 례 고고학적인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정황과 몇 가지 초보적인 고증은 다음과 같다 .3) 1) 지리환경 산성자산성은 集安縣 通溝 평원의 서북단에 위치하며 남쪽으로 5 리 떨 어전 지점에 縣城이 있다(그립 3-24). 장백산계에 속하는 老嶺산맥은 동 북 • 서남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다. 그것은 集安 전지역을 통과하여 압 록강의 지류인 通溝iiiJ 하류 右岸에 우뚝 서 있어서 하나의 반원형 봉우 리를 이루고 있다. 죽 강을 대하고 둘러싸여 있다.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곳은 676m 이며, 산성은 산봉우리에 자리잡고 있어 산성에 오르면 주위가 잘 보인다. 산봉우리는 겹쳐져서 대단히 험 준하며 산성의 북쪽으로 깊은 계곡을 넘으면 높은 봉우리가 구름을 꿰뚫 고 있다. 이렇게 산성은 자연적인 병풍으로 이루어져 車馬의 통행이 어 렵다. 남쪽에는 通溝iiiJ가 있고 그 강 남쪽에는 충적된 좁고 긴 강 계곡 이 있으며, 이 강 계곡에 바둑판처럼 고구려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다. 通溝iiiJ는 성의 남쪽을 에워싸고 있으며 서쪽은 높은 산으로 막혀 있다. 강물은 남쪽으로 급히 돌아 集安縣城 서남쪽으로 흘러서 압록강으로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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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간다. 산성의 서쪽은 七星山이며, 산성의 서벽 중앙은 主峰과 연접되 어 남북 방향으로 펼쳐져서 압록강안까지 뻗어 있어 천연적으로 오른쪽 어깨 역할을 하고 있다. 산성 동쪽은 바교적 넓은 산계곡이며 성에서 半 里 거리에 山城子村이 있다. 산성자산성은 높은 곳에 위치하며 아래는 경사가 급하여 그 지세가 상 당히 험하다. 그리고 通溝 평원으로 가는 2 개 古道를 통제할 수 있게 되
어 있는데, 그 첫째는 산성자촌을 경유하여 老嶺을 지나서 大 淸i iiJ의 小 芸沙iiiJ를 따라서 通化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고 , 둘째 길은 國內城을 경 유하여 서쪽으로 가는데, 七星山 남단을 돌면 麻線溝에 도달한다. 거기 서 다시 북행하여 石廟子롤 경유해서 小板盆嶺을 지나서 新開iiiJ를 따라 서 내려가면 富爾江口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강을 건너면 遼 寧 省의 桓仁 縣境에 도달한다. 죽 遼寧省으로 가는 〈 南道 〉 이다. 산성에 泉 7k 가 두 곳 있는데, 한 곳은 성의 서북 모서리에 있으며 다 론 한 곳은 동쪽 산마루에 있다. 그것은 두 개의 작은 개천으로 산성 南 壅城 부근에서 합류하여 通溝iiiJ로 흘러든다(그림 3-2 5). 2) 산성 형제 산성자산성은 산봉우리의 허리를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동, 서, 북 삼면의 성벽은 반원형의 산봉우리처럼 쌓았고, 밖은 가파른 절벽아다. 그 내부는 비교적 넓은 언덕이며, 남쪽 성벽의 지세는 비교적 낮다. 전 체 산성은 마치 키의 형태이다(그림 3-2 4). 산성자산성의 건축은 자연지세를 충분히 이용하였는데 그것은 고대 고 구려 산성의 특색이다. 예를 들면 성의 동남각은 가파른 석벽을 담으로 삼았으며, 때로 빈 곳은 다듬은 돌로 쌓아 메웠다. 산허리의 완만한 곳 은 화강암을 다듬어서 성벽을 쌓았는데, 석재는 평탄하고, 보통 길이 20-50cm, 너비 29-40cm, 두께 10-27cm 이다. 그 의벽은 위에서 아래로 내 려오면서 수축되었다(그림 3-2 5). 이러한 건축기술은 수준이 대단히 높은 것이며, 산허리의 기복에 따라서 성벽의 높낮이도 일정하지 않다. 산허 리의 움푹 들어간 곳이 깊으면 깊을수록 축담의 높이도 따라서 높다. 산성자산성은 산봉우리의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는데, 그 평면은 타원형이어서 각 면의 벽은 구분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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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인 네 곳을 찾을 수 있다. 죽 A, B, C, D 는 성의 사각이다. A- B 는 남벽 , B - C 는 동벽 , C-D 는 북벽 , A-D 는 서 벽 (그림 3-26) 이다. 동 벽의 길이는 1716m, 서벽은 244om, 남벽은 1789m, 북벽은 1009m 이며 전체 길이는 69,511m 이다. 동벽, 북벽의 산허리는 비교적 평탄하며 대부분 돌로 쌓았다. 서벽 산 허리는 기복이 대단히 크며 중간에 높은 봉우리가 하나 있다. 이 봉우리 양쪽의 산세가 험준하여 자연적으로 벽이 되었다. 남단은 대부분 다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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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쌓았기 때문에 훼손된 곳이 많다. 서벽 북단 산허리는 상당히 평탄 하고 산봉우리의 허리 의부에 쌓았다. 벽 높이는 4-5m 이다. 남벽은 단 애 위에 길게 놓여 있는데, 단애 높이는 15-20m 이다. 단애는 강에 면해 있으며 많이 붕괴되었으나 그 흔적은 남아 있다. 그리고 남벽의 서단에 는 높이 l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다. 현재 동벽의 남단, 서벽의 북단 과 북벽의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북벽의 가장 높고 험준한 곳은 보통 5m 이상이다. 각 벽 모두 女膳이 있다. 여장 높이는 0.78-l. 3m , 너비 0.73-lm 로 일 정하지 않으며, 그 여장 내벽 밀에 기둥구멍이 있다. 보통 간격은 1.7 m, 또는 2m 이다. 기둥구멍은 직사각형으로 입구 길이 10cm, 너비 25cm, 깊이 45-SOcm 이다(그림 3-27), 동벽 남단에도 기동구멍이 20 여 개 보이고 북벽과 서벽에도 보인다. 성에서 모두 다섯 곳의 門址가 발견되었다. 동벽과 북벽에 각각 두 곳 의 문지, 남벽에 옹문(그립 3-28) 한 곳이 있었으나 서벽에는 문지가 없 었다. 남벽의 옹문은 남벽 정중앙에서 휘어지면서 안으로 축소된 곳에 있었 다 . 출입구는 평탄한 通 溝 河 계곡으로 나 있어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산 성으로 들어가는 주요한 통로가 되었는데, 그 지세는 험준하다 . 통로 좌 우 양벽에 각각 안쪽으로 펼쳐진 직사각형의 平 臺 를 쌓았다. 대의 너비 lOm, 길이 15-20m 이며 잔고는 15m 이다 .. 오 른쪽 벽 평대 바깥면(平 臺 外 面)에 강자갈을 쌓아 門道룰 가로막았다. 아깝게도 근래에 와서 小路가 절단되어 흔적만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옹성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 다. 옹문 아래에 배수구가 있는데 이미 물에 씻겨 내려갔다. 다만 배수 구에 있었던 다듬은 직사각형 거석 7, 8 괴가 남아 있다 . 길이는 보통 lm, 너비, 두께는 각각 50cm 정도이다. 배수구 동벽의 자연돌 위에 인 공을 가한 直角檀가 있다. 그것은 당시에 채석하여 배수구를 만든 흔적 이다. 성내의 개천물이 배수구로 빠져나가 通溝河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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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벽 (그립 3-27) 에 두 개 의 문이 있다. 남쪽에 있는 것은 동남 모서 리 에서 214m 지점에 있고 다른 것은 동북 모서리에서 522m 지점에 있다. 두 문 간의 거리는 980m 이다. 문도의 넓이는 각 3m 이며 문지 내의에서 붉은색 기와편이 보였다. 두 문 밖의 언덕은 비교적 완만하다. 모두 돌 로 쌓은 7, 8 단의 계단이 있었다. 그 남단 문지는 바로 通溝河 계곡 정 면에 있는데 흙과 돌을 쌓아서 산성의 고도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역할 울 하였다. 그 북단 문지는 양쪽 협곡의 산길 바로 앞에 있다. 그 남쪽 으로 가면 산성자촌에 도달할 수 있다. 북벽에는 성문이 두 곳 있다. 동쪽에 있는 것은 동북 모서리에서 293m 지점에 있다. 그것은 남벽 옹문과 상대적이다. 다른 하나는 북벽
西f못에 있는 것으로 서북 모서리에서 175m 지점에 있다. 두 문 간의 거 리는 451m 이다. 문 너비는 모두 2m 이며 문 밖에는 석괴를 부정형으로 쌓은 7-9 단의 계단이 있다. 현재까지 작은 길이가 안팎으로 서로 통한 다. 東段문지에서 압인방격문의 홍색 板瓦片이 채집되었다. 서벽에는 성문지가 없고 다만 한두 곳의 구멍이 있는데, 유물은 없었 다. 단구 밀은 깊은 계곡의 단애로서 문을 설치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산성 서북 모서리에 봉우리가 하나 있다. 성벽은 산봉우리의 바깥쪽을 에워싸고 반원형을 이루었다. 산봉우리는 평탄하며 그곳에 지름 8m 되 는 圓 臺 가 있다. 平 臺 에 서서 서쪽을 보면 麻 線溝里가 보아고 북쪽으로 는 小板盆峰嶺이 일목요연하게 보인다. 이 평대를 군사상의 전망대로 볼 수있다. 3) 성내 건물지와 문화유물 산성에서 건물지 세 곳, 옛 연못지 한 곳, 고분 37 기가 발견되었다(그 림 3-2 9 , 3-30) . (1) 건물지 1 호 건물지는 동단 내측 산마루 비교적 넓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 쪽으로 2.5 리에 옹성이 있다 . 남북 길이 95.m , 동서 너비 65m, 3 층의 계 지가 있으며 각 계지의 높이는 lm 정도이다. 제 1 층과 3 층 계지는 좁고, 제 2 층 계지는 넓다. 각층 계지에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주춧돌이 수십 개 놓여 있다. 그곳은 이미 경작지로 개간되었으므로 노출된 지표의 주 춧돌은 이미 옮겨졌다. 측량시 벼를 심기 위하여 파헤친 흙 속에 주춧돌 이 있었음이 발견되었고 그것들은 남북 방향으로 배열된 것을 알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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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그림 3-29), 각층의 계단벽상에 흙이 쌓이고 붕괴된 흔적이 있는데 아직 주춧돌이 남아 있다. 현재 나타난 상황을 보면 제 2 층 계지 주춧돌 이 가장 많아서 50 여 개이다. 제 1 층과 제 2 층 계지는 비교적 적다. 제 2 층 계지 북단에 아직 3 층으로 비교적 정교한 긴 돌을 쌓아서 계제벽을 만들 었다. 그것은 제 2 층 계지의 기반토가 제 1 층으로 퇴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남겨진 높이는 27cm 이다. 제 1 층 돌의 길이 40cm, 두께 12cm 이다. 제 2 층 돌의 길이 30cm, 두께 18cm 이고, 제 3 층 돌의 길이 35cm, 두께 7cm 이다. 이 건물을 정식 U갈 굴하지 않아 건축 형제를 말할 수 없다. 유적이 산울 뒤로 하고 계지가 서쪽으로 향한 것은 남편서 60° 로 건물지가 서향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유적 지표에 기와편이 산포해 있는데 그 중에 홍색 기와편이 많고 회 색 기와편은 드물다. 기와 문양은 압인사방격문, 능형문, 人字文, 方格 文 등이다. 또 銘文의 붉은색 수키와편과 각종 劃文의 수키와편이 채집
•
되었다. 채집된 와당에는 인동문, 연화문, 짐승얼굴 문양 등 3 종이 있었 다. 유적이 노출된 상태에서 보면 1 호의 건물지는 규모가 상당히 크다. 2 호 건물지는 남옹문에서 200m 정도 되는 臺地上에 있다. 제 1 적석의 高臺(통占將臺)는 충위가 위로 올라가면서 쌓였다. 전체 높이가 11. 75 m
이다. 臺 의 정상은 사각형에 가깝고 변의 길이는 6m 이다. 대의 정 상에 올라가서 남쪽을 바라보면 通溝河 하류 및 〈 國內城 〉 전경이 뚜렷이 보인다. 3 호 건물지는 고대 건축으로부터 북쪽으로 15m 의 평지에 위치했다. 길이 26m, 너비 8m 의 범위 내에서 붉은색 기와편이 많이 산포되었고, 초석 20 여 개가 질서정연하게 세 줄로 정돈되었다(그립 3-15). 이 건물지 에서 완전한 붉은색 짐승얼굴와당과 여섯 잎의 연화문와당이 각각 1 점씩 채집되었다. (2) 고대 연못지 석축 高臺의 동남쪽에 있는데 약 50-60m2 의 연못지이다. 일명 飮馬池 또는 蓮花池라고 부르나 지금은 물이 고갈되었다. 연못지 북쪽 가장자리 담벽에는 다듬은 돌을 쌓은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연못지는 대부분 개 간되었고, 움푹 들어간 곳은 소택지가 되어 수초가 7~ 추하다 . (3) 고분 성내에 모두 37 기의 고분이 석분과 토분으로 나뉘어 있다. 석분은 대 부분 적석묘로 산성 서반부의 산언덕에 많다. 토분은 성내의 평지에 드 물게 분포되었다. 그 중에 2 기의 거대한 고분이 있는데, 하나는 방단적 석묘이고 다른 하나는 봉토석실묘이다. 방단적석묘는 남벽 동단 안쪽 가 장자리에 위치했는데 남쪽벽 밑으로 약 6m 지점이다. 서남쪽으로 200m 정도에 남옹문이 있다 . 직사각형 돌을 方壇으로 3 층 쌓았고 위에는 불규 칙한 석괴로 천장을 봉하였다. 변두리 길이 20m, 묘정은 붕괴되었는데 길게 관목으로 채웠다. 봉토석실묘는 1 호 건물지 서남각 앞에서 30m 정 도에 있으며 남아 있는 봉토 높이는 4-Sm, 주위 길이 30m 이며 절두방
추형이다. 서쪽 봉토의 붕괴된 곳에서 보면 밖에 백회를 바론 석실이다. 천장은 궁륭식 결구의 조정이고 서쪽에는 용도가 있고 남쪽에는 다른 묘 실로 통하는 구멍이 있는데 그곳은 흙으로 막았다. 아 고분에서 일찍이 황색 토기관이 출토되었는데 구연부에 가로 손잡이가 달렸다. 고운 태토 의 황색 무문관은 구경 8.5 c m, 저경 13.5 c m, 잔고 18.8cm 이다(그립 3-31 d). 그 밖에 성내에서 3 점의 무기 (2 점의 철촉, 1 점의 쇠창)가 출토되었다(그 림 3-31} . 철촉 1 은 마름모형 촉, 슴베는 뾰족하고 길이` 10 .4 cm 이다(그립 3-31 a). 철촉 2 는 긴 마름모형 촉, 전체 길이 23 . 2cm 이다(그림 3-31 b). 쇠창 은 양지의 마름모형 창, 전체 길이 35.5cm 이다(그림 3-31 c}. 4) 산성자산성의 몇 가지 초보 고증 集安 산성자산성은 험준하고 높은 산에 건축되었다. 사각형으로 구축 되었으며 주위 길이는 3.5km 정도이다. 吉林省에서 가장 큰 古城 중 하 나이다. 산성의 건축 형제, 성내 건물의 규모 및 출토된 유물로 보아 고 구려시대 전형적 초기 산성이다. 산성자산성의 몇 가지 초보 고증은 다 음과같다. (1) 산성자산성은 丸都山城 集安縣 전체 역사유적, 유물분포 등을 조사할 때 潭江 左岸에서 압록 강 중류 右岸까지의 넓은 범위 내에서 고구려시대의 산성은 겨우 3 기만 발견되었다. 하나는 覇王朝山城, 둘째는 關馬瑞山城, 셋째는 集安 산성 자산성이다. 패왕조산성은 潭江 중류 좌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集安縣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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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부터 180 리 지점 되는 覇王朝村의 高山에 있다. 그곳은 또한 集安縣 경내 고도의 하나로 일명 남래도에 위치하며 富爾江口에서 동쪽으로 海 江을 건너 新開河谷으로 올라가는 것을 통제하는, 즉 고구려 고도를 동 남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통제하는 국내성의 주요 방어 城堡이다. 성벽을 축조한 기술로 보면 集安 산성자산성보다 늦어서 고구려 중 • 후기에 속 한다. 규모는 비교적 작은 방원으로 길이는 겨우 1km 정도이다. 성내에 사람들이 거주하기도 어렵고 경작하기도 어렵게 되어 있다. 관마장산성 은 集安縣城에서 3.25km(13 華里) 지점에 있다. 集安縣 경내에 두 古道
중 하나로 北直道라고 부르는 하나의 차단성이다. 이 성은 더욱 작다. 상기한 두 성은 모두 산성자산성과 비교가 안 된다. 산성자산성의 규모 는 대단히 크다. 성의 주위 길이가 3.5km 이다. 남쪽으로 평지성과 국내 성이 5 리 지점에 있다. 지세가 대단히 험한 곳에 위치해서 남북 두 고도 룰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 또한 성내에 대형 건물지가 있고 비옥한 경 작지가 있다. 산성 소재의 지리에서 보거나 唐의 『 賈耿皇華四達記 』 에 기 록된 바에 따르면 <自 鴨綠 ~I 口 , 舟行百里, 至泊杓 口, 又朔流五百里丸都〉 의 이정 기록과 오늘날 산성자산성에서 압록강 입구까지 600 여 리는 일 치한다. 이로 인하여 集安 산성자산성은 환도산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관구검이 새긴 석비가 발견되어 산성자산성이 환도산성이라는 것 울 더욱 증명해준다. 3 세기 중엽에 魏의 관구검과 고구려는 두 차례의 충돌이 있었다. 제 2 차는 바로 245 년이다. 『 심국지 위지 』 의 기록에 의하 면 正始 6 년 (245) 관구검이 싸움터에서 돌아울 때 환도산과 不討城에 석 비롤 세웠다. 1904 년에 산성자산성에서 북쪽으로 2 리 정도 되는 小板盆 嶺에서 관구검이 세운 석비편이 발견되었다. 바로 r 삼국지 위지 』 에 기록 된 〈 刊丸都之山 〉 의 그 비석편이었다. 이로 인하여 관구검의 석비 발견은 小板盆嶺 부근의 산이 환도산맥이라는 것을 증명했고 부근 산의 험준한 곳에 있는 산성이 환도산성이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또한 그것은 관구검 〈 東馬縣車, 以登丸都 〉 의 환도라는 것의 유력한 증거이다. 문헌상으로 보아도 이 산성은 환도산성이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 』 에 기록된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澈語, 東與沃沮, 北與扶餘接, 都於丸都之下 〉 라는 말은 고구려 古都 〈국내성〉을 〈丸都之下〉에 건립한 것을 지적한다. 국내성 舊址는 곧 오늘의 集安縣城의 소재지이다. 이것 은 모든 사람이 주지하고 있다. 그리고 〈都於丸都之下〉의 〈환도〉는 산을 지칭한 말이다. 이 산은 국내성 북쪽의 큰 산울 지칭한다. 이것은 또한 국내성의 서북 큰 산이 환도산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吳承志의 『 唐賈耿 記邊州入四夷道里考實 』 권 2 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丸都城在遼東
之東千里, 是在西安平東北五百里, 城源鴨綠江, 西有丸都山爲障〉 이것은 환도성이 遼東의 동쪽으로 천 리에 있고 서안평(즉 泊溝1J, 현 丹東의 尖 古城)에서 동북으로 오백 리 지점에 있으며 그곳은 압록강에 근접해 있 고 더 서쪽은 환도산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로 인하 여 문헌, 관구검의 석비 및 集安전지역의 조사에 의하면 小板盆嶺 일대 는 환도산맥이며 환도산 위의 성은 곧 환도산성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2) 산성자산성 시축연대 『삼국사기』 유리명왕 본기에 〈二十二年 冬十月 遷都於國內, 築尉那巖 城〉으로 기록되었다. 이것은 유리명왕 32 년(서기 3) 10 월에 訖升骨城에 서 국내로 천도함과 동시에 〈尉那巖城〉을 축성한 것을 지적한다. 여기에 서 지적한 위나암성은 곧 오늘날의 산성자산성이자 환도산성이다. 『 삼국 사기』 대무신왕 본기에 〈大武神王 十一年(서기 28) 秋七月, 漢遼太守將 兵來伐 王會群臣問戰守之計 王日 ‘謀伐若何 ? ' 對日 : ‘今漢兵遠斗, 其錄 不可當也 大王閉城自固待其兵師老出而擊之可也' 王然之 入尉那巖城, 固 守數句 漢兵園不解. 王以力盡兵炭謂乙豆智日 : ‘勢不能守爲之奈何?' 乙 豆智日 : ‘漢人謂我巖石之地, , 無水泉是以長園, 以待吾人之困 宜取地中煙 魚包以水草, 兼旨酒若乾, 致稿漢軍’ 王從之 於是漢謂城內有 7k, 不可 5 對技 遂引退〉라는 기록에 의하면 대무신왕 11 년 7 월 국내에서 위나암성으로 물러갔다. 죽 〈至國內尉那巖得之, 拘於國內人家養之〉는 국내와 위나암은 서로 다른 곳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入尉那巖城 固守數句〉로 표현되었다. 漢兵은 위나암성이 지세가 험준하여 난공의 군사 요새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左輔乙豆智와 대무신왕의 대화내용으로 보아 〈漢 人謂我巖石之地, 無 7k 泉是以長園, 以待吾人之困, 宜取地中經魚包以水草, 兼旨酒若干, 致稿漢軍〉 대무신왕은 여기에 근거하여 행동하였다. 그 결 과 〈是漢謂城內有水, 不可粹技 遂引退〉하였다. 소위 〈岩石之地〉의 지적
과 성내의 저수지에 붕어가 있었다는 지리형세, 그리고 산성자산성 내에 두 개의 개천과 물이 마른 연못지, 또한 광활한 경작지 등아 있었다는 내용은 일치하고 있다. 산성 내에 〈 地宜五谷又多棄鹿魚踏之産〉이라고 말 할 수 있으며 그래서 산성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었다. 죽 〈又可免兵革 之患也〉이다. 이로 인하여 산성자산성은 곧 위나암성이라고 말할 수 있 다. 더욱이 국내성 부근에 다른 성지는 없다. 소위 산성의 시축은 유리 명왕 22 년 10 월에 국내에 천도하면서 이루어졌다. 시축은 서기 3 년에 시 작하여 제 10 대 산상왕 2 년 (198) 에 이르기까지 산성자의 자연지세를 이용 하여 계속 축조하여 산성자산성이 완성된 이후에 환도성이라 부르기 시 작하였다. (3) 산성은 제 2 차의 수도가 됨 京畿 지역에 위치한 환도산성은 고구려 때에 두 차례 도성이 되었다. 산상왕이 1 차이고 그 다음이 고국원왕이다. 〈建安中, 公孫康出軍擊之, 破其國, 梵燒邑落〉 이후에 국내성에 더 머무를 수가 없어서 산상왕 13 년 (漢獻帝 건안 14 년) 처음으로 환도산성으로 천도하여 전체 36 년, 즉 동천 왕 21 년 (247) 에 다시 국내로 돌아가서 96 년 이후 고국원왕 12 년 (342) 2 월 에 환도를 수축하여 같은 해 8 월 국내에서 환도산성으로 천도하였다. 그 러나 짧은 기간 머문 다음, 다시 다음해 7 월 국내로 천도하였다. 고구려가 두 차례나 그곳을 수도로 삼았기 때문에 산성자산성은 역사 적 광채가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 세력이 점차 남쪽으로 발전하여 정치, 경제, 군사의 중심지가 남쪽으로 옮겨졌다. 산성자산성은 고구려 장수왕 이 427 년 集安으로부터 한반도의 평양에 천도한 이후부터 중요성을 점차 상실하여 산성의 발전이 점차 축소되었다. 산성자산성은 고구려 초기의 전형적 城址이다. 그곳은 당연히 중요시 되어야 할 것이다.
4 혹구산성 1976 년 撫順市 博物館考古除와 新賓縣 文化局은 新賓縣 紅廟子緖!에서 黑溝山城울 발견하였다. 1980 년과 1983 년에 다시 2 차의 조사를 실시하였 다. 혹구산성은 山城子 또는 高麗城子라고 부른다. 그 서쪽에 길이 2. 5km 나 되는 大山溝가 있는데 이름하여 黑溝라고 부른다. 遼東山區에 있 는데 대부분 산성이 있다. 당지 주민들은 山城子 또는 高麗城子라고 불 렀다. 그러나 그곳의 지명은 중복이 심하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여기 서는 혹구산성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4) 1) 산성의 지리적 위치와 자연환경 혹구산성은 遼寧 • 吉林 2 省의 분계와 撫順市 관할의 新賓縣과 本溪市 관할인 桓仁縣과의 경계 부근이다. 산성 남쪽 비탈 아래는 혹구촌이고 서북 방향으로 30km 지점에 新縣城이 있으며 桓仁縣城은 남쪽 방향으로 35km 지점에, 동쪽으로 3km 거리에 潭i의 지류인 富爾江이 있고 남쪽 으로 2km 지점에 緊流iiiJ가 있다(그립 3-32). 이곳은 산들이 중첩되어 있 고 江河가 만나며 나무가 무성하고 토지가 바옥하다. 이러한 풍요로움과 험준한 요새의 자연적 조건은 일찍부터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활하며 戰 守攻防의 훌륭한 조건을 제공받았다. 혹구산성 부근 기타 城址의 존재 및 최근 紅廟子鄕에서 발견된 지석묘와 적석묘 등은 富爾江 유역이 일찍 부터 고대인의 이상적인 거주지라는 것을 설명하여 준다. 혹구산성의 위 치 선택도 바로 이러한 지리와 자연환경의 객관적인 인수로 고려된다.
新견 〈 吉 林 省
2) 산성의 전체적인 면모 혹구산성은 해발 700m 에 있다. 이 산성은 높이가 수십 미터 되는 8 곳 의 좁고 긴 산마루로 둘러싸여 있다. 각 산 사이의 넓은 장소는 인공적 으로 쌓은 돌벽이 연결되어 있다. 산성 주변의 절벽과 돌벽 의에 산성을 에워싸고 있는 넓은 산언덕은 길이가 약 2km 에 달한다. 산성 평면은 직사각형으로 남북으로 길게 놓 여 있다. 방위는 정복이다(그림 3-33). 성내 지세는 낮다. 남쪽은 상당히 높고 북쪽은 낮으며 중부에서 북쪽으로 낮게 굽어 있다. 면적은 5o,ooom2 이다. O 城糖 산성은 가파른 철벽을 충분히 이용하여 벽을 쌓았다. 철벽의 보통 높 이는 40-80m 로서 城膳에 해당된다. 이러한 것을 성벽이라고 칭하겠다. ® 割口 (자연적인 균열 공간), 溝口(강물에 의한 공간) 지세가 낮은 산마루상에 석재를 대량 이용하여 담벽을 쌓아 놓거나 또 는 높이거나 봉쇄시킨 것으로 인공벽이라고 칭하겠다. 혹구산성의 성벽 은 8 단의 인공벽으로 구성되 었다. 주위의 길이는 1493m 이다. 그 중 인
그림 3-33 혹구산성 평면도
공벽은 전체 길이가 447m 이며 초벽담은 1046m 이다. 이것은 견고하고 완전한 방어체계를 형성한 것이다. ®東膳 동벽은 길이가 571m 이며 4 단 초벽담과 3 단 인공벽으로 이루어졌다. 제 1 단은 초벽담(북쪽에서 남쪽으로 순서를 정함)으로 길이가 95m 이다. 그 북단은 北膳에 연결되어 있다. 제 2 단은 인공벽이며 길이는 20m 이고 높이는 5m 이다. 남부에 東門울 설치하였다. 全城의 물이 빠져나가는 중요한 장소이다. 성벽은 산언덕을 뒷면에 두고 쌓는 築城護坡式膳으로 東城 壅門의 조성 부분이 되고 있다. 제 3 단은 초벽담이며 길이는 68m 이다. 북쪽이 동문과 연결되어 있다. 제 4 단은 인공벽으로 길이 10m, 너비 lrn, 높이 lrn 이다. 석괴를 자유 스럽게 쌓아서 구축방법이 조잡하다. 매끄러운 벽면이 없다. 성벽 아래 는 높이 약 30m 의 절벽이다. 제 5 단은 초벽담으로 길이 230m 이다. 그 중 10m 길이의 산마루가 있 는데 정상은 자연 巨石平臺이다. 너비는 10m 이고 石外峨壁울 초벽담으 로삼았다. 제 6 단은 인공벽으로 길이는 64m 이다. 산세를 따라서 구축하였다. 이 것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북단은 lOrn 이상 되는 거석에 건립하였다. 길이 24m, 너비 2m, 높이 lrn 이다. 거석 사이의 깊은 톰은 석재를 이
용하여 믿으로부터 위까지 22 층을 쌓았다. 높이는 5m 이다. 중부 성벽은 낮다. 길이 20m, 너비 1.5 m, 높이 1.5 m 이 다. 구축 질량이 상당히 나쁘 고 양단 성벽의 견고성에 미치지 못한다. 성벽 기부는 4 층을 쌓아 벽기 단을 삼았다. 그것은 사다리꼴로 충마다 5cm 씩 안쪽으로 경사졌다. 남 부 성벽은 길이 20m, 높이 4m, 너비 4m 이다. 성벽 총체는 四字形이 다. 양쪽 머리부분은 높고 중간은 낮으며 더 낮은 곳은 제 2 의 배수구를 만들었다. 제 7 단은 초벽담으로 길이 84m 이다. 남단이 남쪽 성벽과 연결되었다. 남단의 1 단만 인공벽이다(그립 3-3 4 ). 성의 地勢에서 가장 높은 1 단 성벽 이며 길이는 54m, 너비는 4.4 m , 높이는 5 .4 m 이다. 현재 22 석충이다• 성벽 평면은 內孤形이다. 벽 기단 아래는 석괴로 편평하게 쌓았다. 이 편평한 것을 기초로 하여 벽 기단을 쌓았다. 벽 기단 4 층을 축조하였는 데 역시 사다리꼴로 5cm 씩 안쪽으로 경사졌다. 벽 기단 이상의 벽 자체 는 平直하고 약간 안으로 기울었다. 성 내측에 흙을 쌓았는데 내벽은 높 이가 lm 이다. 내측 서단 13.2m 되는 곳에 돌로 結構된 丁字形 벽이 主 城벽과 맞물려 있다. 길이 6.l m , 너비 1.6 m, 나타난 높이 0.5m 이다. 이것은 성에 오르는 도로이다. 남쪽벽 의에 동서 양쪽으로 초벽담이 펼 쳐져 있다. 안으로 수축된 것이 소뿔처럼 앞으로 뻗어나왔다• 남쪽벽 밖
그림 3-34
대치되는 곳에 洪衛 남쪽벽이 있어서 수비하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게 만 둘었다. @ 서쪽벅 서쪽벽은 전체 길이 639m 로 3 단 인공벽과 3 단 초벽담이 있다. 서쪽 벽이 있는 언덕 아래는 南北縱貫의 黑溝이다. 제 1 단은 인공벽(북에서 남으로 순서를 정함)으로 북에서 角台頂端까지 길이 200m, 너비 l-2m, 殘高 l.5 -2m 이다. 가장 긴 1 단은 인공벽이다. 본단 성벽은 약간 낮은 산마루에 축조하였다. 성벽 밖은 70° 정도의 가 파른 등반로이다. 성벽 안쪽은 약 6m 의 매끄러운 초벽이다. 벽을 쌓은 사람들은 초벽을 성벽 내벽으로 삼았다. 초벽 의에는 움직이는 돌을 파 내고 편평하게 기초를 만든 다음 초벽을 의지하고 돌벽을 쌓았다. 그래 서 성벽 의벽을 만들었다. 내의벽 석벽 사이에 길쭉한 돌을 쌓고 쇄석으 로 메웠다. 성벽 위에는 직선으로 배열한 25 개 평면 사각형의 돌구멍이 있다(그립 3-35). 돌구멍은 수직이다. 변의 길이는 보통 20-35cm, 깊이 는 30-60cm 이며 하나는 깊이가 108cm 이다. 돌구멍 사이의 거리는 1.5m 이며 성벽 가장자리에서 0.83-l. 2m 거리에 있고 모두 석괴로 만들었다. 제 2 단은 초벽담으로 길이는 295m 이다. 제 3 단은 인공벽으로 길이는 13m, 높이는 lm, 너비는 lm 이다. 석괴
를 이용하여 간단히 축조하였다. 담 아래는 절벽이다. 제 4 단은 초벽담으로 길이는 55m 이다. 제 5 단은 인공벽으로 길이는 6m 이다. 구축 방법은 제 3 단과 동일하다. 그 아래 역시 절벽이다. 제 6 단은 초벽담으로 길이는 124m 이며 남벽과 연결되어 있다. ®북쪽벅 북쪽벽은 길이가 175m 로 2 단의 인공벽이며 1 단 초벽담이 여기에 포함 된다. 제 1 단은 인공벽(동에서 서로 순서를 정함)으로 동쪽이 동쪽벽과 연결되 어 있다. 길이 30m, 너비 1.5 m, 높이는 3m 이다. 기단부는 석괴로 4 층 울 쌓았으며 사다리꼴로 충마다 5cm 씩 안쪽으로 경사졌다. 서단 5m 되 는 곳에 길이 1.9 m, 너바 l.lm , 나타난 높이는 o .4 m 의 丁字形 돌담이 다. 그 작용은 남쪽벽 정자형 담과 같다. 제 2 단은 초벽담으로, 이 담은 북벽에서 바깥쪽으로 펼쳐진 좁고 긴 산 마루를 이용하였다. 길이 95m, 높이 약 20m, 頂端에는 望 臺 가 건립되 었다 . 제 3 단은 인공벽으로 서쪽은 角 臺 와 접해 있고 동쪽은 산마루에 있는 망대와 연결되어 있으며 북문을 세웠다. 성벽의 길이는 30.lm, 너비는 1m, 높이는 4m 이다. 성담은 기부에서 위로 충위가 사다리꼴로 5-lOcm 안쪽으로 경사지게 쌓였다. ®城門 동문(돌제방과 샘 포함)은 동벽 제 2 단에 위치하고 있다. 동문은 좁고 긴 2 개의 산마루가 대치되는 너비 약 20m 되는 곳에 건립되었다. 문 밖 은 넓은 언덕이다. 그곳은 富爾江 河谷 평원으로 통한다. 문 안의 지세 는 삼각형 깔때기 모양의 상당히 넓은 언덕이다. 바로 깔때기 주둥이 부 분에 있는 동문은 방어, 교통, 배수 등의 여러 가지 기능을 하고 있다. 동문은 두 줄 보호벽이다. 이것은 충분히 배수할 수 있는 壅城이다. 두
줄 보호벽은 모두 언덕 지면을 기저로 삼고 전후 거리는 lOm 정도이다. 둘째 보호벽은 첫째 보호벽보다 높다. 이것은 2 급 계단식, 평면 직사각 형으로 구성된 옹성이다(그림 3-36b). 길 입구는 언덕 보호벽 남쪽으로 기울어졌으며 너비는 lm 이다. 옹성의 성벽은 댐 방파제의 언덕 보호벽 과 유사하다. 옹성 밖 남쪽에는 하나의 초벽과 서로 연결된 자연적 小平 臺 가 있다 . 길이는 15m, 너바는 5m 이다. 그 평대상에는 돌담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아래는 높이가 약 30m 되는 초벽인데, 옹성을 보호하는 防守 臺 이다. 성문 밖에는 하나의 석괴를 깐 盤山路가 있어서 북쪽에서 보호벽 아래를 통과해서 방어대에 직접 도착할 수 있다. 그런 다음 꺾어 서 동문으로들어간다. 동문의 돌제방은 지세의 높낮이에 따라서 깔때기 모양의 언덕에 분포 되었다. 거대한 석괴로 2 층으로 축조되었다. 높이는 약 0 . 5m 이다. 배수 로에 이용되는 진흙과 모래가 돌제방 한쪽에 쌓여 있는데 이것은 흙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옹성 안쪽에서 10m 되는 곳에 제 1 돌제방 과 2 호 샘(井)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과 品字形으로 배열된 세 줄의 돌 제방이 있다. 맨 끝에 1 조의 긴 돌제방이 있고 돌제방 뒤 언덕에는 1 호 샘이 있다. 북쪽 보호벽에는 두 줄의 돌제방이 있고 남쪽 보호벽에는 한 줄의 돌제방이 있는데 모두 보호제방이다.
북쪽 빼
두 곳의 생은 모두 동문 안 깔때기 모양 언덕의 중간에 만들어졌다. 그것은 동문 옹성과 직선 배열이다. 1 호 샘은 2 호 샘보다 높다. 2 호 샘 은 또한 옹성보다 높다. 2 호 샘에서 옹성까지 거리는 14m 이다. 그것은 쐐기형 돌로 구축하였다. 샘 입구는 원형이다. 지름은 1.5 m, 현 깊이는 o . 5m 이다. 샘 아래로 2m 되는 곳에 돌제방울 쌓았다. 1 호 샘은 2 호 샘 에서 33m 되는 곳에 있다. 샘벽은 쐐기형 석재로 구축하였다. 샘 입구 는 원형으로 지름은 lm, 현 깊이는 0 . 8m 이다. 샘 아래쪽에 돌제방울 쌓 았다. 이와 같이 샘 아래쪽 돌제방은 샘벽을 보호하는 시설이다. 흙의 유실로 샘벽이 붕괴되지 않도록 하는, 소위 샘의 보호제방이다. 북문은 북벽 제 3 단 가운데에 세웠다. 문의 너비는 1.2 m, 밑에는 0.3 m 높이의 돌난간이 있다. 북문과 통하는 길은 파괴되었다. 길이는 15.3 m , 높이는 알 수 없다. 角 臺 와 望 臺 롤 산마루에 축조한 것은 북문을 보호하 기 위한 것이다. 각대를 산성 서북각에 건립하였다. 그것은 서벽, 북벽과 연결되었다. 밖으로 돌출된 석축 장대는 평면 사다리이다. 서벽 길이는 12.6m, 동벽 의 길이는 13.2 m , 북벽의 너비는 6m, 잔고는 4m 이다. 기단부 벽에는 4 충으로 석축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다리꼴로 각 충이 5cm 씩 안쪽으로 기울었다. 기단부 상부는 직벽이다. 각대 밖은 쐐기형 석축벽이다. 내부 는 불규칙한 장대석을 삽입하고 틈 사이는 쇄석으로 메웠다. ®望 臺 북벽 제 2 단은 바깥으로 펼쳐진 약 27m 의 산마루이다. 그 頂端에 履斗 狀 망대를 구축하였다. 동서 너비 6m, 남북 길이 6.3m, 잔고 3.3 m 이 다. 현재 14 층으로 쌓였다. 모두 사다리꼴로 위로 올라가면서 각 충마다 5cm 씩 안쪽으로 경사졌다. 그 결구는 角臺와 같다. 망대 정중앙에는 지 름 약 2m, 깊이 0.5m 의 구덩이가 있다. 망대는 성밖으로 돌출되었다. 그곳은 산마루 정상부에 해당된다. 그곳에서 산성 북부와 혹구산성의 해 자가 직접 관찰되고 전체 富爾江하곡을 볼 수 있으며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북문 호위, 관찰, 작전 연락 등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이에 따르 면 망대 頂部의 구덩이는 경보용 봉화시설이다. ® 將臺(군사지휘처) 장대는 서쪽벽에서 入城되는 혓바닥형 산마루에 건립되었다. 쐐기형 석축의 사다리꼴 方壇이다. 바닥 각 변의 길이 7m, 項 각 변의 길이 5m, 높이 2m 이다. 장대 지세는 상당히 높다. 산성 남부 일부분 지방울 제의하고 대부분 지방은 모두 장대에서 시야에 들어온다. ® 住居址(址房) 주거지는 모두 6 기가 발견되었는데 모두 산성 북부에 분포되었다. Fl : 직사각형 單室 동서 길이 10m, 남북 너비 7m 이다. F2 : 직사각형 三室 남북 길이 16m, 동서 길이 6 .4 m 이다. 각 室마 다 문이 하나씩 있고 모두 동향이다. 너비 lm, 膳垣잔고 o . 6m 이다. F3 : 칙사각형 단실, 동서 길이 6.2m, 남북 너비 4.5m, 문은 남향, 너비 lm 이다. F4 : 동서 길이 5m, 남북 너비 5m 이다. 문은 서향, 너바 lm, 방 안 의 북부에는 고래 시설이 있다. F5 : 직사각형 단실, 남북 길이 4.5 m , 동서 너비 4m, 문은 동쪽, 너 비 lm 이다. F6: 직사각형 단실, 남북 길이 8m, 동서 너비 5m, 문은 남향, 너비 lm 이다. 3) 유물 및 건축 재료 흑구산성의 유물은 거의 드물다. 소량의 평저기와 토기편이 채집되었 으며 三足器는 없다. 토기의 태토는 고운 모래가 섞인 것과 거친 모래가 섞인 것 2 종이고 점토질 토기는 보이지 않는데 색조는 홍갈색과 회갈색
이다. 토기는 手製이며 무문이고 소성도는 높지 않고 녹로제 및 무늬 있 는 토기이나 철기도 없다. 혹구산성의 석재는 현지에서 산출된 것이다. 성을 쌓을 때 머리 부분 은 크고 끝부분은 작게 하는 방추형의 쐐기형 돌, 불규칙한 條石(길쭉한 돌)과 쇄석 등을 만들어 사용하였고, 쐐기형 돌은 성벽 內外壁울 축성하 는 데 사용하였다. 그 석재의 머리 부분은 매끄럽게 가공한 직사각형 평 면이다. 그것은 벽을 쌓는 데 조합된다. 각 쐐기형 석재의 크기, 길이, 두께는 일정하지 않다. 그 중 가장 큰 것이 길이 90cm, 머리 너비 83cm, 두께 25cm, 끝부분 너바 40cm, 두께 10cm 이고 가장 작은 것이 길이 35cm, 머리 너비 30cm, 두께 16cm, 끝부분 너비 10cm, 두께 5cm 이다. 벽 중앙은 대량의 길고 불규칙한 돌과 쇄석으로 메웠다. 쇄석 은 틈 사이를 메우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쇄석의 크기는 거의 일정하다. 혹구산성의 언덕 아래는 방사형태(부채형태)로 많은 돌이 퇴적 되었다. 모두 불규칙한 쐐기형 돌 또는 긴 돌 등은 성담을 구축하는 데 사용된 석재가 아니라 석재 가공 후의 폐기물이다. 폐기된 돌은 守城울 목적으로 굴리는 돌(i哀石)로 이용되었다(그림 3-37). 4) 산성의 건축특징 및 방어체계 혹구산성은 인공벽과 초벽(가파른 벽)담으로 상호 결합하여 자연지세를 충분히 이용하여 구축하였다. 벽의 각 충 두께는 모두 일정하고 그 整齊 가 획일적이며 상·하층이 서로 교차되었다. 그 안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방추형 긴 돌충이고 이러한 것들은 쐐기형의 벽 내부에 쌓이고 그 톰은 다시 쇄석으로 메워서 석괴로 결합된 하나의 전체를 이루었다. 東門 壅城은 주요 통로와 배수구 역할을 하였는데 이것은 보호식 벽을 이용하였고 流 7k 는 담 위에서 처리되었다. 동문 옹성의 방어는 옹성 2 층
그림 3-37 서벽 밖에 동여맨 浪木 確 石 圖 (굴리는 번갯돌)
보호벽 위주였고, 보조 방어는 문밖의 방어대로부터 자유스럽게 되고 양 측 산마루도 통제하게 되었다. 동벽 제 6 단의 1!!l字形 벽은 동문 옹성의 제 2 종 배수능력을 갖춘 성벽과 다르다. 이곳은 2 개의 배수구, 그 너비는 동문보다 크고 지세도 상당히 높다. 그래서 양단 축벽으로부터 자연적 균열공간을 축소하고 중앙에는 양단의 높은 담보다 낮은 담을 구축해서 물이 스며들게 만들었다. 왜냐 하면 수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보호벽이 필요 없고 우물도 설치할 필요 가 없었으며 그 방어는 양측 높은 담에서 통제하게 되어 있었다. 서벽 제 1 단 인공벽의 구멍은 특별히 만들어진 방어시설이다 . 성벽은 산마루의 낮은 곳에 구축되었다. 밖은 절벽이며 안은 초벽이고 성벽 정 상부는 활동범위가 상당히 좁다. 원래 女膳이며 그 너비는 활동범위가 lm 정도이다. 그래서 많은 병력과 성을 지키는 기재 등은 배치하지 않 는다. 이로 인하여 혹구산성의 士兵은 성벽 밖에 동여맨 浪木瑠石울 사 용하였다. 서벽의 구멍은 이러한 방어시설의 흔적이다. 돌구멍은 石柱洞이다. 구멍 안에 수직으로 세워진 나무기둥이 있다.
여기에다 木確石(그림 3 - 37) 을 동여매었다. 城腦頂部는 좁고 안쪽 아래는 목뢰석이다. 그래서 새끼로 浪木울 매달아서 膳頂柱身에 연결하고 나무 를 벽 밖의 가파른 언덕에 달아 놓고 浪木 안에 대량의 석괴를 쌓아 두 었다가 적이 공격하면 기둥의 새끼를 잘라 낸다. 그러면 돌들이 일시에 아래로 내려간다. 현재 서벽 아래의 편평한 언덕에 있는 돌들은 모두 굴 린 돌이다. 혹구산성 주변은 모두 높은 산봉우리가 있다. 그래서 북벽에 각대와 망대를 설치할 필요가 있었다. 망대는 北部制高里k 에 있는데, 그곳은 혹 구산성 북부의 방어 중심지이다. 북문에는 각대가 있는데 이것은 망대가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보호물이다. 각대, 망대와 북문 등은 산성 북 부의 완전한 방어 계통을 조성한 것이다. 山城水源 문제는 성안에서 생활할 수 있느냐의 여부를 가리는 근본이 된다. 혹구산성의 수원은 저수된 물이나 지하수를 아용하였다. 성안의 남, 북, 서는 높고 동은 낮은 깔때기 모양의 지형이다. 그래서 대량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은 먼저 1 호 샘에 들어가고 샘이 가득 차면 샘의 보호제방울 통과하여 다시 2 호 샘에 들어가고 최후로 동문 옹성의 배수구로 빠져 나간다. 물 이 많을 때 샘이 넘치고 물이 적을 때 샘이 마른다. 물은 높이가 다른 두 샘에 나뉘어 저장되며 샘울 중심으로 하여 샘 보호제방울 설치하였 다. 샘 보호제방과 동문 옹성은 과학적으로 완전하게 물의 저장과 배수 및 방어체계를 조성하였다. 5) 몇 가지 인식 富爾江은 옛날에 浦流 7k 라고 하였다. 이 강은 고구려 민족 초기 활동 의 주요한 지역이다. 고구려 始祖 朱蒙은 북부여로부터 <…… 至卒本川,
觀其土壤肥美, 山iiiJ險固 遂欲都焉, 而未違作宮室, 但結盧於湘流水, 上 居之, 國號高句麗 …… > 하였다. 그때는 기원전 37 년이다. 오래되지 않 아서 <…… 王見溝流水中, 有菜葉隨流下, 知有人在上流者, 因以猫王尋至 溝流國 …… > 하니, 때는 기원전 36 년이다. 비류수 상류에 터전을 잡은 비류국왕 松讓은 주몽에 臣服하여 〈 以國來降 〉 하였다. 사료에 따르면 비 류국은 富爾江 상류에 있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 준다. 그 상한연대는 주몽 건국 후 2 년이다.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기 이전에 비류국 등 고 대 민족 또는 집단이 富爾江상류를 개척하였다. 1960 년대 고고학자들은 覇王朝와 五女山城에 대한 자료를 발표하였다. 이 두 성은 富爾江 하류 와 潭江이 만나는 지점 부근에 있는 고구려 초기 산성이다. 海江 중류, 富爾江 하류에서 대량의 석관묘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고구려 초기 묘 장의 특칭이며 출토된 유물도 역시 고구려 초기에 속한다. 그러나 富爾 江 상류 지역에서 고구려 초기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는 富爾江 하류에서 강을 따라서 위로 울라가면서 혹구산성과 晴水下鄕의 轉水湖山 城울 알게 되었다. 최근에 혹구산성 부근을 조사한 결과 이 지역에서 발 견된 지석묘와 소형 적석묘장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중 소형 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묘장의 특징을 구비하고 있다. 주몽은 비류에서 마을을 결 합시켜 訖升骨城에 定都하였다. 홀승골성의 확실한 위치에 관해서는 지 금까지 정론이 없다. 그러나 『三國史記』에 따르면 주몽이 훌승골성에 수 도를 정한 이후에 비류수 상류에서 바류국을 발견하였다. 그러므로 홀승 골성은 반드시 비류수 하류 부근에 있을 것이다. 패왕조, 오녀산성은 모 두 富爾江과 潭江이 맞닿는 지역에 위치했다. 물론 두 성 중 어느 것이 홀승골성인지가 비류국을 탐색하는 주요 변수가 되고 있다. 혹구산성의 지리적 위치는 패왕조, 오녀산성과 비교하면 비류수의 상류에 위치하고 패왕조, 오녀산성은 하류에 위치한다. 비류수에 관한 〈亦認指潭江而言〉 은 확실히 潭江 및 그 지류의 認稱이다. 그러나 潭江 상류는 북쪽으로 치우쳐 위치하여 주몽이 북부여에서 남하하여 졸본에 이르렀다는 설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富 爾江 상류는 海i I 상류보다 남쪽에 치우쳐 있다. 이 곳이 사료 기록 중의 비류수 상류이다. 이로 인하여 富爾江 상류 지역의 고구려 고고학 작업은 대단히 중시된다. 혹구산성은 富爾江 상류를 통제하였다. 패왕조, 오녀산성과도 거리가 멀지 않고 源江流域도 마찬가지이다. 혹구산성의 성벽을 방추형 쐐기형 돌로 구축한 담벽의 作法은 패왕조, 오녀, 환도 등 고구려 초기 산성과 같다. 이것은 고구려 후기 성지의 土石混築法과는 다르다. 혹구산성 성 벽 頂部의 사각형 돌구멍(石洞)은 패왕조, 환도산성에서도 발견되었다. 위의 두 성의 돌구멍의 규격은 30-35cm, 각 구멍의 거리는 보통 1. 5m 이 다. 이것은 혹구산성과 일치한다. 이러한 방어시설은 고구려 초기 성지 의 특칭의 하나이다. 혹구산성 동문 옹성 평면은 직사각형으로 고구려 후기 산성의 반원형 옹성과는 다른, 초기의 특칭이 있다. 혹구산성의 각 대, 망대, 벽 기단부는 사다리꼴으로 각 충마다 조금씩 안쪽으로 경사지 는 작법을 썼는데, 이것은 고구려 산성의 전통이다. 고구려 토기의 분기 연구에 근거하면 고구려 초기 토기는 기본적으로 手製이며, 태토에 거친 모래가 섞안 토기이다. 개별적으로 고운 모래가 섞인 것도 있다. 그러나 고운 점토 토기는 보이지 않는다. 색조는 기본적으로 황갈색, 회갈색 등 으로 일정하지 않다. 기형은 단지, 호, 잔 등이다. 혹구산성에서 출토된 것은 모두 수제이며 태토에 모래가 섞였다. 거칠고 고운 모래가 섞인 2 종 태토이다. 고운 점토를 태토로 한 것은 없다. 색조는 홍갈색, 회갈색 이며 무문이고 녹로로 만든 것도 없다. 모두 고구려 초기 토기의 풍격을 구비한 고구려 초기 유물이다. 이상의 분석에 의하면 혹구산성의 연대는 고구려 초기에 속한다. 혹구산성의 주거지는 불규칙한 석괴로 건립되어 산성 담벽의 정교한 건축 풍격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연대상 주거지와 산성의 관계는 장래 고고학 발굴에서 해명될 것이다. 혹구산성은 고구려 초기 역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리고 富
爾江 유역에서 비류국과 주몽 건국 사료를 탐색하는 데 주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5 나통산성 1980 년 5 월 吉林省 제 2 차 重點文物 보호 단위를 연구, 확정하는 과정 에 通化地區文管倉의 王光普, 王志敏, 그리고 柳iiiJ縣 도서관의 孫玉震 등과 함께 柳iiiJ縣 境內 고구려 시기의 羅通山城에 대한 조사룰 12 일간 실시하였다. 작업 중에 산성을 실측하면서 성내에 2mX5m 의 2 개 피트 (pit)를 설정, 발굴하고, 동시에 西城 북문 한 부분을 국지적으로 발굴 하였다. 조사 내용은 다음과 갇다. 5) 1) 지리적 위치 羅通山은 羅通位子라고도 불린다. 이 산은 龍尙山脈 북부 지맥에 속하 며, 柳(河), 海(龍), 輝(南) 등 三縣의 경계 지역에 웅립되어 있다. 그 산세의 옹립이 준수하고 동, 북 두 곳은 柳河, 一統河 충적 평야이며, 남쪽은 三統河谷으로 멀리 龍岡山을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서쪽은 산세 가 백 리까지 펼쳐졌는데, 그곳은 해발 1200m 의 安口項子와 대치되어 通化 북쪽의 第 1 道門戶로 되 어 있다. 輝發iiiJ의 2 대 원류는 三統iiiJ와 一 統河인데, 이 강들은 양쪽 산날개를 경유하여 북쪽으로 굽이쳐 흐른다. 산성은 나통산 북단 해받 960m 의 主峰에 있다. 그곳에서 서남 방향으 로 45m 지점에 柳河縣城이 있다. 토지는 柳河縣 大通講公社에 속하는데 그 공사는 남쪽으로 6km 지점에 있다(그립 3-38).
그림 3-38
2) 산성 형제 羅通山城은 밀접하게 연결된 동, 서 2 성으로 조성되었다. 전체는 마치 사람의 좌, 우 폐와 같다. 일단은 집결되어 있고, 일단은 좌우로 나뉘어 있으며 그 중간 일단 벽은 상호 맞물려 있다. 주위 길이는 약 7.5km 이 다(그림 3-3 9 ). 산성은 기복이 있는 산중턱에 구축되었는데 산세의 험준함을 충분히 이용하였다. 東城은 하나의 거대한 분지를 에워싸고 있는데, 주위의 산 세를 이용하여 벽을 삼고 다만 지세가 낮은 움푹 패안 곳만 낮은 벽을 쌓았다. 서쪽 성은 몇 개의 작은 산을 둘러싸고 있는대 그러한 산언덕은 6 개의 소분지로 나뉜다. 동쪽 벽은 일단이 수직의 철벽을 이용한 것 의에 대부 분 성원은 모두 산언덕 사이에 담을 구축하였다(그립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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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40
축성에 사용된 석재는 모두 이 산에서 채취한 석회암이다. 그것은 손 질이 잘 된 장석이다. 석재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은데, 작은 것이 길이 30cm, 너비 20cm, 두께 15cm 이고, 큰 것은 길이 115cm, 너비 %cm, 두께 35cm 이며 대개 길이 50cm, 너비 35cm, 두께 25cm 정도의 직사각 형이다. 성벽의 보존은 양호하다. 다만 정상 부분이 약간 파괴되었다. 西城 북
문 서쪽의 門埃(문의 살받이터) 정황을 살펴보면, 성벽은 흙과 자갈을 섞 어 쌓았다. 그 건조과정은 먼저 산언덕을 평편하게 한 다음 2-5 층의 기 단석을 쌓고, 그 위에 손질이 잘 된 석재를 쌓아 양쪽 面石으로 삼았다. 그 중간에는 흙과 잡석으로 메웠다. 메운 흙울 다지지 않은 門埃 측벽이 무너졌는데, 그 중간에 잡석과 흙들이 벽 밖으로 나와 있다(그립 3-41). 성벽에 사용한 석재는 잘 다듬어져 맞물림이 잘 되어 있다. 面石 표면은 잘 정돈되어 있다. 성벽의 두께는 기본적으로 일치한다(그림 3-42). 바깥 은 거의 수직이고, 내면은 약간 안쪽으로 수축되어 단면은 사다리형으로 나타난다. 벽의 정상은 파괴되었지만, 일반적으로 바깥이 안쪽보다 높 다. 당시 에 女膳이 구축되 었을 가능성 이 있다. 두 성 모두 성문이 5 곳 있다. 그 중에 東城 남쪽벽의 두 문은 천연석 을 쪼아서 자연 성문을 만들었다. 門址는 일반적으로 지세가 평탄한 곳 울 택하여 출입이 용이하게 · 만들었다. 먼저 두 날개형의 성벽을 孤形의 四 내에 진입시킨 다음 1!!1부분 중간에 성문을 구축하였다. 그것은 반원 형의 內强 壅門울 형성하였다(그립 3-43). (1) 西城 서성 주위 길이는 3737m 이며 평면은 불규칙 사변형이다. 즉 중간 서 벽 길이 724m, 북벽 길이 910m, 동벽 길이 12,888m, 남벽 길이 815m 이다. 동벽 남단과 남벽 동단이 단애 절벽으로 된 자연 성벽 의에 그 나 머지 부분은 산세를 따라서 돌담을 쌓았다. 산세가 평원하면 할수록 지 세가 점차 낮아지면서 돌담은 점점 높아졌다. 가장 높은 곳은 18 층으로 그 높이가 4m 에 달한다. 성으로 들어가는 小路 몇 군데가 산 밑에 사는 주민들에 의하여 파헤쳐져서 인위적인 구멍이 생긴 것 의에 모든 돌담은 기본적으로 연결되어 구축이 대단히 질서정연하다. 현존 성벽 보존이 양 호한 곳은 기저 너비 7.2m, 정상 너비 6-6.Bm, 잔고 2-4m 이다.
그림 3-41 서성 성벽 결구 단면
그림 3-42 서성 북벽 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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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쪽 모서리에서 약 350m 거리의 남벽 중부는 구축방법이 특이하 다. 성벽이 양쪽으로 구부러져 뻗어 나와 내의 두 길의 벽을 형성하였 다. 바깥벽은 직각으로 안으로 구부러져서 안의 벽과 연결되어 〈 E 〉자를 이루었고, 중간에 길이 25m, 너비 8m 의 빈터를 남겨 놓았다. 方塘(네모 진 빈터)은 상당히 작고 건축물의 흔적이 없으며, 그것은 〈 重城 〉 인 것 같지는 않고 〈 馬面 〉 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축성시 방향에 편차 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최초의 일개 便門일 가능성이 크다. 그것 은 후에 봉쇄되었다. 西城의 城角 4 개는 모두 峰頂에 있다. 東北角과 西北角에는 角樓의 기 대 유적이 있다. 기대는 토석으로 구축되었는데, 지표에서 3m 이상 솟 았다. 그것의 꼭대기와 성벽은 높이가 같다. 지표에서는 유물이 발견되 지 않았다. 서북 각루는 성밖으로 돌출되었다. 기대의 길이는 10m, 너 바는 8m 이다. 동북 각루 기대는 길이 20m, 너바 12m 로 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이곳에서는 동, 서 2 성을 바라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멀 리 柳iiiJ' 海龍, 輝南 平原을 관망할 수 있고, 또한 산 밀의 동정을 감시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동남각과 서남각은 모두 험준한 절벽이다. 그래 서 그곳은 성문의 전초 보루 역할을 했다. 동남각의 峰을 속칭 〈칼끝〉이 라고 부른다. 그곳은 3 면이 절벽이다. 절벽은 下面 산언덕에서 30-40m 높이로 솟아 있다. 정상은 평탄 광활하여 東城 서남문의 〈十八盤〉 大路 울 통행하는 것이 보인다. 서남각은 속칭 〈독수리부리형 암석〉이라고 부 르는데 산세가 험준하다. 그곳의 왕래를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완곡 부 분에 낮은 성벽을 축조하였다. 성벽 이의에 좁고 길게 펼쳐진 산마루가 있는데 이 양쪽이 단애에 직립되어 30m 를 솟아 있다. 이것은 마치 매의 부리처럼 돌출되어 西城 남문을 옹호하고 있다. 盤山路는 단애를 돌아서 다니게 되어 있다. 西城 門址는 두 곳으로 남북에 각각 하나씩 있다. 남문은 남벽 서단의 城角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그 문은 평탄한 대지에 건립되었다. 그 아
래 성벽은 양쪽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반지름 약 30m 되는 內孤를 이루었다. 그것은 지형의 제한울 받기 때문이다. 성문은 內孤 일단을 벽 개해서 만들었다. 산곡을 향하는데 門向은 250 ' 이다. 門道의 길이는 6.8 m, 의관 6.5 m , 내관 6m 이며 형상은 나팔주둥이 모양이다. 양측의 성벽 은 십하게 붕괴되었다. 하부는 진흙이나 나뭇잎으로 덮여 있다. 잔고 2. 5m 이다. 동측벽상 부근 지표상에 높이 40cm, 너 비 20cm, 깊 이 4ocm 의 壁 籠 이 있는데 용도는 알 수 없다(그립 3-44). 문 밖에 너비 4m 의 盤山 路가 있는데, 이 길은 〈 독수리부리형 암석 〉 을 돌아서 산곡을 따라 서향 으로 가다가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小泉眼溝村을 경유하여 평원으로 들어간다. 도로는 인력으로 정비되어 마차가 통행하게 되어 있다. 그것 은 예부터 서성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대로이다. 북문은 북벽 서부에 있다. 그곳은 西北城角에서 295m 지점이다. 門道 너비는 3m, 양측 벽의 두께는 5 . 5m 이다. 그것은 반원형 壅 r, 으로 만들 어졌다. 양측 성벽을 통과하면, 門址에 이르는데, 그곳도 여전히 안쪽으 로 축소되어 壅圈울 이루었다. 반지름은 20m 미만이다. 문밖에는 협소한 대지가 있고, 그 아래는 산곡이 험준하다. 작은 길 하나가 구불구설 돌아서 小 L男 蝶村을 경유하여 평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門道 양측 城埃는 진흙에 묻히고 붕괴되었다. 높이는 겨우 1-2m 로 거의 평지와 같다. 처음에는 城裕으로 추측하였으나, 발굴 후에 성문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림 3-45, 3-4 6 ). 진흙에 묻힌 부분은 깊이가 1.7 m 이다. 門 址가 틀림없다. 그곳 주민의 말에 의하면 30 년 전에는 이 門城埃 높이가 2 丈에 달하였다고 하는데 그곳은 당시 便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2} 東城 東城 주위는 3479m 이고 대부분 자연산세를 이용하여 벽을 삼았다. 다 만 낮게 움푹 패인 곳에만 낮은 벽을 쌓았는데 그 형상은 불규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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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4 6 서성 북문 서벽 외측
또한 남, 북 협장이 타원형이어서 성의 네 벽을 확인하기가 상당히 어렵 다. 현재는 비교적 높은 山峰이 角이 되고 있다 . 대체로 그림 3-39 의 A- B 는 북벽, 길이는 784m, B-C 는 동벽, 길이는 11s1m, C - D 는 남벽, 길 이는 76Bm, D-A 는 서벽, 길이는 764m 이다. 東城은 훼손이 상당히 심하다. 그래서 각루 유적이 보이지 않는다. 인 공으로 쌓은 벽단으로 가장 넓은 곳이 4m 이고, 최고 殘高는 .2m 미만이 다. 西城과 비교해 보면 웅장하거나 짜임새가 훌륭한 기세는 없다. 석재 도 상당히 거칠다. 東城 서벽의 북단은 西城의 동벽을 이용하여 성벽을 만들었다. 西北角 兩城이 접촉되는 곳으로부터 東城 북벽이 西城 북벽과 낮게 연결된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이러한 〈 公共檀 〉 의 전체 길이가 352m 이며, 좁고 낮 다. 보도 너비 3.5 m -lm 정도이다. 벽에는 성문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 러나 중간 1 단이 상당히 낮아(현 小路가 두 성과 연결되어 있음) 벽을 넘 어 충분히 통행할 수 있다. 東城 門址는 모두 3 곳인데, 남쪽에 2 곳, 북쪽에 1 곳이다. 북문은 북벽 東部에 위치했고 문의 너비는 7m 이다. 그 안에 四의 반원형 壅 門이 있 는데 전체 길이가 41m 이며, 반지름은 약 20m 이다. 성문 양쪽의 높이 lOm 의 . ruI.子이다. 그 정상에 너비 7m, 잔고 2m 의 돌벽을 쌓았는데 형 세는 험준하다. 문밖에 너바 약 BOm, 세로(수칙)로 깊이 50m 되는 門間 地가 있다. 서쪽에는 盤山路가 하나 있는대 그것은 七株樹村울 경유해서 산 아래 평원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산로가 평탄하여 마차 통행이 가능 하고, 예부터 북쪽에서 입성하는 주요 도로이다. 남문은 2 곳인데, 동쪽, 서쪽에 있으며 그 사이의 거리는 300m 이고 모 두 砲壁한 자연 활구이다. 서남문의 너비는 18m 이고 양쪽 서벽의 높이 는 10m 에 달한다. 문밖에 인공으로 굴착한 〈 十八盤 〉 도로가 있다. 그것 은 우회하여 西城 東南角의 〈칼끝형 암석 〉 을 경유하여 위아래로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동서 2 성 남쪽의 유일한 대로이다. 성 남문의
너비는 22m 이다. 양쪽 절벽 높이는 13m 로서 〈 南天門 〉 이라고 불린다. 그 바깥쪽으로 험준한 작은 길이 있는데 그것은 산 밑으로 내려가는 便 門이다. (3) 城內 유적과 유물 羅通山城은 크고 성내 지세가 넓어서 유적이 상당히 많다. 東城의 지세는 북에서 남쪽으로 경사되었다. 성 남쪽 분지에 샘이 하 나 있는데, 샘물이 많고 수질이 상당히 좋다. 물은 지하에서 솟아나 서 북쪽으로 300m 정도 홀러서 盆谷 가운데의 웅덩이 쪽으로 홀러들어간 다. 泉流룰 에워싸고 성안에는 네 가지의 크기가 같지 않은 臺地가 있 다. 그것을 서쪽으로부터 동쪽까지 놓인 순서로 1-4 까지 번호를 배열하 였다. 그 중 1, 2 호 대지에서 채집된 토기편은 모래가 섞인 갈색 토기가 많고, 3, 4 호 대지의 것은 고운 점토의 갈색 토기편이 많다. 토기편이 너무 분쇄되어 기형은 확인할 수 없다. 西城 안에는 다섯 곳의 칭검다리(山梁)가 있다. 중심이 된 것은 東南 角의 〈 칼끝형 암석 〉 에서 시작하여 서북 방향으로 7 일 , 걸 놓여 있다. 약 500m 지점에서 동북 방향으로 전환하는 곳이 있다. 동시에 그 앞뒤 에 두 개의 산마루가 서남 방향으로 펼쳐져서 남벽과 서벽을 통과하여 산밑으로 뻗어 있다. 중심이 된 것은 또한 동북 방향으로 200m 되는 지 점에서 동향으로 전환점이 있다. 그것은 동쪽벽의 철벽과 연결되어 있 다. 동시에 동북 방향과 서북 角樓 방향으로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 각 루 남쪽은 점점 낮아지는 低平 지대이다. 다른 하나는 東北角과 北門사 이에 있는데 산밀을 향한다. 몇 곳의 산마루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 과 인공적으로 만들어전 산 입구가 있다. 그것은 산세가 독립적이고 크 기가 일치하지 않은 6 개의 小盆地룰 연결시키고 있다. 그래서 왕래가 대 단히 편리하게 되어 있다. 西城 내의 유적으로는 저수지, 點將臺, 臺地
등이 있다. 점장대는 〈 刀尖{立子 〉 서북쪽 산마루에 있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325m 되는 지점에 남문이 있다. 여기서 西城남부 최대의 분지를 볼 수 있고, 멀리 남문 및 門外盤道도 볼 수 있다. 점장대는 한 변의 길이가 5m 되는 사각형의 臺 基이다. 네 변을 석회암 대괴석으로 쌓았고, 그 중간을 흙으로 메웠다. 殘高는 40cm 이다(그림 3-47). 그 메운 흙은 굳게 다져지 지 않았다. 이 점장대 서쪽과 남문 사이에 상당히 넓고 평탄한 언덕이 있다. 이곳에서 일찍이 대량의 鐵甲片이 채집되었기에 연병장으로 추측 할수있다. 저수지는 西城 남부 최대 분지에 샘이 두 곳 있다. 북쪽 샘의 물은 많 지 않아서 북쪽으로 약 100m 정도 흘러내리고 있다. 북문에 있는 것은 소실되었는데 이것은 배수구를 경유하여 성밖으로 흘러나간 것으로 추측 된다. 남쪽 샘은 물이 맑고 맛도 좋다. 그 물은 동쪽으로 약 50m 흘러 서 저수지로 들어간다(그림 3-3 9). 서쪽 성에 상당히 편평한 臺 地가 5 괴 있다. 그것은 성 동부 2 개의 대 분지에 분포되어 있으며 면적은 일정하지 않다. 길이 40- 1 15cm, 너비
그림 3-47
25-75cm 이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일련번호를 부여하면 1-5 호가 된다. 그 중 1, 2 호 대지 면적이 상당히 크다. 그것은 북문 부근에 위치하고 그 중간에 실개천이 흐른다. 그곳은 중요한 건축 소재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3, 4 호 대지는 모두 산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은 상당히 좁 다. 지상에는 유물이 없다. 5 호 대지는 남쪽 샘의 북쪽 언덕 아래에 있 다. 면적은 상당히 크다. 그 위에 근대 절터와 폐기된 가옥이 하나씩 있 다. 지상에는 벽돌과 기와편들이 많다. 남쪽으로 5 호 대지 동쪽에 30 - 4 0m 의 언덕 이 있는데 그곳에 남북 길이 약 6m, 동서 너바 4m, 깊이 o.4m 되는 직사각형 구덩이가 25 개 있다. 대체적으로 4 줄로 배열이 밀 집되어 있다. 구덩이 내에 유물은 없으며 그 용도는 알 수 없다. 2 개의 트렌치를 西城 내에 설치하였는데 Tl 은 西 2 대지의 東南角에 설치하였다. 충위를 보면 표토층(암갈색 부식토)은 그 두께가 35cm 이다. 내부에서 녹로제의 갈색 토기편, 백자편과 鐵器殘片이 출토되었다. 제 2 충은 황갈색토로 두께는 25 - 35cm 로 유물은 황갈색 고운 점토 토기편이 다. 이 토기편에 옹기편과 단지편이 포함되어 있다. 제 2 층 아래는 생황 토층이다. T2 는 西 5 대지 남쪽 가장자리에 설치하였다. 역시 2 개의 충으로 구분 된다. 표토충(황갈색)은 두께가 30cm 로 소량의 기와편이 출토되었고, 제 2 층 황갈토는 두께가 70cm 로 소량의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그 아래는 생토이다. 트렌치 내에서 출토된 것과 성내에서 채집된 유물은 다음과 같다(그립 3-4 8 ) . ®토기 고운 점토제 토기와 모래가 섞인 토기로 나뉜다. 모래가 섞인 토기는 많지 않다. 대부분 T2 의 2 층과 東城 1, 2 호 대지 에서 출토되었다. 砂粒이 균일하고 태토는 상당히 거칠며 소성도는 높지 않다. 색조는 반점, 홍갈색, 회갈색, 혹회색 등이다 . 완정한 토기는 없
으며, 토기편이 대부분 작다. 고운 점토제 토기편은 수량이 상당히 많고 兩城에서 모두 발견되었다. 태토는 상당히 곱고, 기벽은 균일한데 모두 황갈색이며 소성도는 일정하 지 않다. 완정한 것이 3 점인데 그 중에 2 점은 단지이고 1 점은 뚜껑이다. 단지 2 점 : 모두 手製인데 녹로로 마무리를 지었고, 무문이다. 첫째 단 지는 구연이 예리하며 의반되었고, 배가 부르며 평저이다. 구경 15cm, 저경 12.5cm, 전체 높이 9.8cm 이다. 다른 것은 2 중 구연으로 구연이 편 평하고 목이 짧으며, 어깨가 있다. 복부가 가볍게 경사되고, 평저이다. 저경 13.6cm, 높이 3.9cm 이다(그림 3-4 8 j) , 뚜껑 1 점 : 형태는 豆盤울 뒤집은 것과 같은대 꼭지가 파손되었고 직경 8.6cm, 잔고 3cm 이다. 상부에 둥근 구멍을 만들었던 흔적이 있다(그림 3-4 8 j) . ®철기 철기는 철촉 등으로 모두 4 점이다. 이것들은 2 식으로 나뉜다. 1 식 2 점 : 촉신은 편방하고 잤은 평제하며 밀에 슴베 (莖)가 있는 것의 길이 1 1.5 cm( 그림 3-48 e). 다른 1 점은 슴베가 부러졌다(그립 3-48 d). 2 식 2 접 : 촉신이 납작한 마름모꼴이며 양측 날인데 촉신은 넓어서 슴 베보다 크다. 1 점의 길이는 10.8 c m, 刃의 너비는 5 . 9cm 이다(그림 3-48 b). 다른 1 점의 촉신은 점점 작아진다(그림 3-4 8c). 이 밖에 트렌치 (구덩이) 1 의 2 층에서 출토된 철기편은 모두 주철이며 상당히 작다. 打銀具 또는 가래편 갇다. ®옥기 2 점으로 모두 성안에서 채집되었다. 1 점은 내경 5.6cm, 의경 7.3cm 이 고 단면은 타원형인 玉環인데 담록색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졌으며 화려하 다(그립 3-48 f}. 다른 하나는 담황색으로 管狀이며 한쪽 끝의 내측을 경 사지게 도려낸 반지다. 안지름은 2cm, 바깥지름 2.9 c m, 높이는 2.3 cm 이다(그립 3-48 a).
® 도금장식
:白乙已
®동전 모두 23 매로 성안에서 채집되었다. 그 중에서는 唐代의 〈 開元通 賓〉 〈 乾元重寶 〉 , 宋代의 〈 宋元通 賓〉 〈 皇宋通 賓〉 〈 聖宋通 賓〉 및 遼와 金의 동 전이 있다. 연대가 상당히 이른 것으로 2 매의 漢代 五鍊錢이 있다. 그 중 1 매의 표면에는 〈 五 〉 자가 있는데, 중간 것은 兩筆紋直한 鍊字의 朱方 折으로 金의 傍字는 화살촉과 같다. 그것은 西漢 宣帝 때의 五鍊이다. 다른 1 매도 五字 중간에 兩筆 皆 曲된 것으로 鍊字의 朱는 크고 짧다. 金 字傍의 字는 다소 크다. 이것은 東漢 시기의 오수전이다. 3) 맺는 말 나통산성은 일찍이 발견되었다. 1949 년 이전에 이미 조사되어 1958 년 吉林師大에서 편집한 『柳河縣志 』 중에 간략하게 소개되었다. 이번의 조 사와 실측은 이 성의 규모, 形制, 結構 배치에 대해 이해와 인식을 새롭 게 하였다. 나통산성의 동, 서 2 성은 하나의 완전한 통일체이다. 그곳을 비교하여 보면 석재의 선택, 가공, 성문, 성원의 구축 방법뿐만 아니라 성내 유물 의 풍격, 특칭 등 모두가 상당히 일치한다. 그곳은 시간상 큰 차이가 없 는 동일 시기에 속한다. 나통산성의 결구, 배치, 축성의 특징은 고구려 오녀산성, 환도산성, 패왕조산성 및 평양 대성산성 등과 비교하면 비교적 유사점이 많다. 채 집된 유물과 트렌치 1 의 발굴 정황으로 보면 나통산성은 기본적으로 두 시기의 유적이다. 첫번째는 점토제의 고운 단지 위주로 기형은 구연이 예리하게 의반되었고 배가 부른 단지와 목이 짧고 구연이 평정한 斜腹 단지 등이다. 두번째 시기는 고운 점토제의 炭陶와 遼白荒가 포함되고 송대의 동전 등이 여기에 들어가는데, 이것은 대체적으로 遼, 金 시기의
유적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혁대고리와 도금된 花形 · 장식은 고구려 시기 의 集安 마선구 1 호 벽화분, 만보정 78 호분, 칠성산 96 호분, 41 호분 및 장천 2 호분에서 출토된 유물과 완전히 같다. 특히 Il 식 철촉은 고구려 유물 중에 가장 혼하다. 여기에 근거하면 나통산성은 고구려 시기에 구 축되어 遼, 金 시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두 산성은 자매성처럼 연결되었다. 고구려 산성 중에 이런 형제는 많 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형제로 건립한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으로 추측된다. 나통산성의 西城은 남, 서, 북 3 면이 모두 험준한 절벽이고 유일하게 동쪽 산세만 평탄하여 위험이 없는 곳으로 그곳에 다시 附郭울 건립해서 지세의 약점을 보강하여 수비를 강화하고 방어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산 아래서 평원성이 보이지 않아 戰時에 산성 내에 사람들을 모집할 수 있고, 성안에서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하나의 성을 분 소로 건립하였다. 양성의 구축정황을 보면 서성은 엄정 웅위하고, 벽이 견고하게 세워졌고, 동성은 상대적으로 ·조출하여 유적, 유물이 서성에 미치지 못한다. 서성은 당시 방어의 중심이고, 동성은 인구를 소산시키 고, 물자를 저장하고 가축을 기르던 곳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는 유리명왕 22 년(서기 3 년)에 國內(현 集安縣城)로 천도하여 尉 那巖城(죽 환도산성)을 건립하고, 그 세력을 가속하여 輝發河 유역까지 확장해서 漢의 玄英郡울 다시 서쪽으로 몰아내고 이 일대를 고구려 后部 絶奴部地로 삼았다. 魏, 晉 시대에는 세력이 지금 遼河 일대까지 확대되 어 335 년에 國北 新城(즉 撫順 高爾山山城)을 세웠다. 輝發iiiJ 상류에 있 는 나통산성은 그 구축 연대가 국내로 천도한 이후, 즉 신성을 세우기 이전(서기 3) 에서 신성을 세운 335 년 사이일 것이다. 나통산성의 옹성 형제는 고구려 산성의 초기 특칭 중 하나이다. 그와 동일한 축성법은 환 도산성의 남문에서 볼 수 있다. 환도산성은 유리명왕이 국내로 천도할 때 시작되어(서기 3) 제 10 대 산상왕 2 년 (198) 에 마침내 완성되었다. 나통
산성 옹문의 축성법은 환도산성의 방법을 모방하였다. 다만, 성원 축성 기술은 더욱 세련되었다. 그 강역의 발전 상황에서 보면 당연히 환도산 성보다 늦다. 이로 인하여 나통산성의 건축 연대는 3 세기에서 4 세기 초 로 본다. 즉 魏 晉 시대이다. 나통산성은 三統, 一統과 輝發河 상류를 통제하고 고구려 국도 국내성 과 환도산성의 북쪽에서 오는 길을 관장하는 북부 요새 중 하나로 중요 한 城堡였다. 그 위치와 작용은 당시 고구려 활동범위 내에서 작은 것이 아니었다. 吉林省 인민정부는 이 성을 중요문물보호단위로 발표하였다. 6 태자성 撫順市博物館 文物詞査除는 1980 년부터 지금까지 太子城울 세 차례 조 사, 실측하였다 .6) 1) 지리 형세 태자성은 新濱縣 서남 下奭河鄕 太子城村 북쪽에 있다. 太子河 . 의 지류 인 北太子i마는 산성 북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동서 양면에는 또한 小奭河가 산성을 따라 흐르면서 산성의 동북쪽 돌출부에서 北太子 河로 홀러들어간다. 산성 남쪽벽 아래는 현 태자성촌이며, 산성 서쪽의 아래는 산맥과 연결되어 主峰인 老母猪岡과 마주보고 있다. 산성은 이 산맥의 끝부분에 위치했다. 산성과 산성은 하나의 낮고 깊은 산허리에서 연결되며, 현 新濱縣에서 馬架子鎭까지의 도로가 남북으로 놓였다. 태자성은 太子河葬에 위치해서 얻은 명칭이며, 太子河라는 이름은 전
국 시대 燕太子 丹이 秦始皇에 의해서 유배된 일에서 유래했으며, 그 후 에 遼東 衍 7k 에 피난간 역사와 관계되어 있다. 또한 『 i負史方與經要 』 에 〈 太子河卽故衍 7k, 燕太子丹뿔於衍水中, 後人因名爲太子河 〉 라고 되어 있 다. 太子河는 이렇게 이름을 얻었지만 태자성이 태자 단이 머물던 성인 가 하는 것은 고찰할 방법이 없다. 이 성은 고구려 산성이므로 태자 단 과 관계되었다는 근거는 없다. 단, 태자성이란 명칭은 오랫동안 사용되 었으므로 여기서 그대로 사용한다.
그림 3-49 태자성 평면도
2) 산성 개관 산성은 남북선상의 老母猪 OO 이 동북 방향으로 펼쳐진 산허리에 건립되 었다. 북쪽은 높이가 30-4om 의 가파른 언덕이고, 동남쪽은 40-80m 높 이의 가파른 단애이며, 서쪽은 도로에서 보면 약 20m 높이의 언덕이다. 산성의 평면은 타원형으로 동서으로 가로놓여 있다. 지세는 동, 서 양끝 이 높고 중간이 낮고 깊은 말안장형이다. 산성 중앙의 낮고 깊은 지대는 남북선상으로 놓여 있는데 남쪽은 높고 북쪽은 낮다. 산성벽의 길이는 1425m, 면적은 132,500m 이다. 성의 동, 서 끝 가장 높은 곳에 烽 火 臺 가 설치되었고, 성 동쪽 끝의 완만한 대지에 內城이 건립되었다(그림 3-49). (1) 성벽 (城緖) 북쪽벅 : 北門에서 북벽과 內城 벽의 교차점까지의 길이는 280m 이며, 성벽은 동쪽으로 가면서 산세를 따라 높아진다. 협소하게 돌출된 산허리 에 돌로 架構를 만들고 양쪽에는 하벽을 만들었다. 돌담은 위로 울라가 면서 좁아졌다. 내벽 높이 6m, 의벽 높이 8-lOm, 기단 너비 4-6m, 정 상 너비 lm 이다(그립 3-50). 동쪽벅 : 내성벽 북쪽 끝에서 내성벽 남쪽 끝까지는 395m 이며, 평면 은 弓形이다. 모두 가파른 단애벽 가장자리에 낮게 벽을 쌓았다. 기단 너비와 정상 너비 lm, 높이 0 . 5-lm 이다. 낮은 벽은 수직이고 위로 울라 가면서 좁아지지 않았다. 남쪽박 동쪽벽과 내성벽의 교차점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남문까지 는 260m 이며, 성벽 축조법에 따라서 동서 2 단으로 나뉘었다. 동쪽단의 축조법은 동쪽벽과 같으며 대부분 낮은 벽이다. 다만 지세에 따라서 성 벽이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한다 . 서쪽 단은 가파른 언덕 또는 깊
고 낮은 단애 상부를 2m 깊이로 굴착한 다음 높이 5m 되는 의부로 노 출된 성벽 기단 구덩이(禮)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기단 구덩이 의부에 壁石울 쌓고 내부에는 쇄석을 채웠다. 벽석(諸石)과 기단 구덩이의 정상 부가 평평해지면 상부가 결합되도록 높이 o.sm, 정상 너비와 기단 너비 가 lm 되는 낮은 돌벽을 쌓았다(그립 3-51). 서쪽벽 : 남문에서 북문까지는 490m 이며, 성벽 평면은 半環形이다. 남문에서 산성 서쪽 끝까지는 서쪽벽의 南段과 西段으로 이루어졌다. 이 2 단 성벽은 흙과 돌을 섞어 쌓았는데, 대체로 그리 가파르지 않은 언덕 허리에 벽 기단부를 조성하는 방법이었다. 그런 다음 돌로 외벽을 쌓고 중간에 흙과 쇄석을 채웠다. 그런 다음 벽석과 토석으로 채운 벽 적심이 산허리 흙구덩이와 같은 높이가 될 때까지 쌓고 다시 위에 높이 1-1. 5 m, 너비 lm 의 낮은 돌담을 쌓아서 결합시키고(그림 3-52) 2 단 성벽의 가장자리에 보호석을 쌓았다. 서쪽벽은 四段으로부터 휘어져서 동쪽으로 접근하여 북문의 일단에 이르렀다. 즉 그것이 서쪽 북단의 성벽이다. 언 덕이 비교적 완만하여 외벽 높이 3-4m, 내벽 높이 3m, 기단 너비와 정 상 너비 3m 의 높은 돌담을 쌓았다. 이 段 성벽 일부의 地段이 노출된 것에 의하면 기단부는 벽 의부로 O.Sm 나와 있고 높이는 0.5-lm 로 일정 하지 않다. 성벽은 높고 크며, 의벽의 쌓음은 상당히 작다. 1 段의 성벽 은 의부로 경사되었고, 어느 곳은 무너질 위험을 안고 있다. 다론 1 段의 벽 의부는 언덕 아래부터 벽 정상까지 돌을 쌓았는데 30-40m 의 높이이 고, 언덕의 경사도는 60° 로 대규모 보호벽을 쌓았다(그림 3-53). 내성벽 : 산성 동쪽 언덕에 남북으로 구축된 한 줄의 돌벽 안에 內城 이 있다. 길이 280m, 기단 너바 2.5 m , 정상 너비 2m, 잔고 3m 이다. 벽 기단은 거대한 돌로 3-4 층 쌓았고, 그 위에 성벽(糖)을 위로 좁혀가 면서 쌓았다.
그림 3-50 태자성 북벽 국부 단면도
그림 3-51 태자성 남벽 서단 단면도
f
그림 3-53 태자성 서벽 서단 성담
(2) 城門 北門: 壅城의 평면은 말안장형으로 안쪽으로 좁아졌는데 , 산성 교통 과 배수의 주요 통로이다. 말안장 부분에는 가로로 거대한 돌벽이 있는 데 길이 25m, 기단 너비 5m, 정상 너비와 높이가 각각 3m 이다. 성벽 이 붕괴되어 문의 짜임새가 확실하지 않다. 북문 동쪽에 있는 馬面은 돌 출된 舌形이며, 그 위는 손질해서 상당히 평탄하고 남북 길이 18m, 동 서 너비 lOm, 높이 20m 정도이다. 북문 서쪽의 성 의부 벽을 따라서 바깥쪽의 작은 대지에 방어용의 방벽인 膳 憂 를 구축하였는데 그것은 마 면과 대칭으로 되어 있다. 장대의 북벽 길이는 45m, 동벽 너비는 30m, 서벽 너비는 0.5m 이다. 남쪽은 성벽을 의지하였고 다른 시설물은 없다. 북문 안쪽으로 54m 지점에 우물이 하나 있으며 우물벽은 돌로 쌓았는 데, 그 지름은 1 . 5m 이고 깊이 0.5m 이다. 성안을 개간해서 그곳은 이미 메워졌다. 南門 : 성의 남쪽벽에 입구를 만들었다. 너비 2m, 눈에 잘 뜨이지 않 는 곳에 두었다. 內城門 : 직사각형 壅 F1 으로 내성벽의 중심부에 있다. 북단 내성벽은 문지에서 안쪽으로 돌아서 90° 밖에 있다. 길이 lOm 의 옹문 안쪽 담장 은 돌로 축조되었다. 南段 내성 담장은 門段까지 똑바로 이어지며 옹문 안쪽 담장과 교차되어 그것이 옹문의 바깥 담장이 된다. 옹문 내의 담장 사이는 5m 이고 문 너비는 3m 이다. (3) 烽火臺 봉화대는 각각 동서 양끝 높은 곳에 설치하였다. 서쪽 봉화대는 해발 348.2m 에 있으며 그곳이 산성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서쪽 벽이 봉화대 아래를 둘러싸고 있다. 봉화대는 기반 지름 25m, 정상 지름 4m, 높이
6m 이고 주위에는 너비 2m, 깊이 0.5 - lm 되는 해자가 있다. 봉화대는 토석으로 구축하고 의부는 돌로 쌓았다. 동쪽 봉화대는 내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설치하였는데 가파른 단애를 이용하였으며, 기반 지름 15m, 정상 지름 2.5 m , 높이 4m 이다. 이 봉화 대는 판석으로 쌓았으며 주위에서 明代의 청색 벽돌이 채집되었다. 3) 유물과 건축자재 유물은 주로 수키와(簡瓦)와 암키와(板瓦)로 대부분 파손되어 30-40 점 이 채집되었다. 암키와의 등면에 세밀한 헝깊무늬가 있으며, 기와 정면 에는 주로 돗자리무늬가 있다. 그 중에는 종행의 거친 돗자리무늬도 있 다. 기와 색깔은 질은 갈색이며 두께 1 . 6-1.8cm 이다. 돗자리무늬 기와는 두께가 1. 8cm 이고 고운 돗자리무늬 기와는 두께가 2.5cm 이다. 또한 어 떤 암키와는 종행의 거친 승문이 있는대, 그 중간에 손톱으로 누른 몇 줄의 가로 홈이 있다. 기와의 가운데는 2 . 5cm 의 두께이며, 가장자리는 1. 8cm 이다. 그 의 소량의 회색 돗자리무늬 기와가 있는데 두께는 2-2. 5cm 이다. 수키와는 모두 무문으로 색깔은 붉은색이고 두께는 1. 6cm 이다. 성안 에서 토기편의 출토는 드물지만 고운 태토에 輪製로 처리된 것이 여러 점 채집되었다. 단지(海溫) 또는 登의 의반된 구연편들이다. 또한 고운 태 토를 가전 紅陶의 평저 1 점과 전황록색의 유약 바른 토기편 1 점을 채집 하였다. 內城에서는 모래 섞인 토기편이 1 점 채집되었는데 색깔은 홍갈 색과 혹갈색의 중간, 태토와 내벽은 모두 혹회색이다. 건축 재료로는 내의벽에 방추형의 쐐기형 돌을 이용하였고, 직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에 가까운 석재도 이용하였다. 벽의 積心울 구축하는 데는 불규칙한 석재를 이용하였다. 그 중에서 머리 부분이 크고 꼬리 부분이
가느다란 방추형의 쐐기형 석재는 주로 내성벽에 사용되었는데 가공이 정교하다. 크기는 보통 길이 78cm, 너비 75cm, 두께 15cm 이고 가장 긴 것은 76cm, 너비 90cm, 두께 43cm, 작은 것은 길이 35cm, 너비 30cm, 두께 10cm 이 다. 바깥 벽 (! 喜 ) 에는 직 사각형 또는 직 사각형 에 가까 운 석재를 사용하였다. 후자는 편방추형 쐐기형이며 일반적으로 작고 두 껍다. 방추형의 뾰족한 것은 없고 직사각형에 가까운 석재의 규격은 보 통 30cm, 너 비 24cm, 두께 24cm 이 다. 담 특히 벽 기 단부에 는 사용하였 는데, 그것은 길이 42cm, 너바 44cm, 두께 22cm 이다. 4) 산성 건축의 특징 및 방어계통 태자성은 老母猪 OO 이 동남 방향으로 전개된 산언덕에 축조되었는데, 그곳은 북쪽이 가파른 언덕이고, 동남 양쪽은 단애 절벽을 이룬 말안장 형 산언덕이다. 산성은 3 면이 가파르고 한 면만 주위의 평지와 연결되었 다. 또한 산성의 북쪽, 동쪽, 남쪽 3 면에는 北太子iiiJ와 小灰iiiJ가 홀러 의부를 차단하는 자연 방어막이 되었고, 산성 서쪽의 낮은 언덕이 산성 과 연결되어 의부와 접촉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따라서 이 서쪽 모 서리가 유일하게 산성 방어에 불리한 곳으로 인공 방어가 필요한 곳이 다. 그러므로 그곳의 낮은 산언덕에 넓은 해자를 만들었다. 서쪽 봉화대 는 4 층의 입체적 방어시설을 구축하였다. 상기한 서술은 산성 서쪽 모서 리의 인위적 방어시설을 다른 3 면의 자연 방어시설과 연계하여 완벽한 방어 시설을 설명하여 주고 있다. 북문도 마찬가지로 문 의부의 太子iiiJ가 보호벽 이 된다. 그리고 성 안에 는 말안장 형태의 옹성벽 양쪽에서 성문의 옹성을 통제하는 방어 계통이 있었다. 내성 평면은 반원형으로 북, 동, 남쪽 삼면이 모두 단애이며, 그곳의
봉화대는 군사상 대의용이 아니고 대내용이다. 실제로 내성벽은 방어시 설과 연결되어 있는데, 일단 적이 성을 공략하면 내성은 고수될 수 있고 더 나아가 봉화대는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보조 방어시설이 될 수 있 다. 태자성의 두 봉화대는 통일된 방어계통이지만 그것은 각각 독립작전 의 단위가 될 수 있다. 그것들은 동서에 각각 대치되어 상호입지를 유지 하고 있어, 만약 적이 북, 남문으로 입성하면 동, 서 봉화대에서 견제할 수 있다. 서쪽 봉화대는 산성 서쪽의 중요한 방어시설이다. 높은 곳에서 경보를 울릴 수 있고 동시에 성 전체를 살펴볼 수 있는 전망대가 되어 전세에 유리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곳이다. 산성 성벽의 축조와 그 구조는 지세에 따라 이루어졌다. 동쪽벽 아래 는 수십 미터의 절벽이라 인공벽(! 音 )이 필요 없다. 안쪽으로 내성의 평 탄하고 높은 언덕 사이에는 인공적으로 벽을 만들었는데 그곳에는 낮은 담벽을 만들어서 전시에는 사병들을 보호하고 평시에는 안전시설이 된 다. 그것이 곧 단애 위의 女膳(낮은 담)이다. 남쪽벽 대부분의 地段에도 절벽이 있다. 단 지세가 깊이 들어간 말안장 지대는, 비록 단애로 높지 않고 내측에도 경사진 언덕이지만, 군사상 필요한 곳에는 높고 큰 성벽 울 구축하였다. 따라서 유일하게 높지 않은 단애벽 상부에는 의부로 향 한 개방식의 구덩이룰 팠는데, 그것은 성벽 기초 부분이 기반암과 굳건 히 결합되도록 하였다. 그 결과 기반암과 더불어 벽 기단부와 담벽은 일 체가 되었는데, 즉 성벽의 높이가 해결되고 그것들이 무너질 우려도 없 게 되었다. 서벽의 남단, 서단에도 성벽의 기초를 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의부에 석벽만 쌓았다. 안쪽으로는 산언덕을 의지하였고, 그 위 에 낮은 담을 쌓은 것에 기대어 성벽과 산언덕이 결합되도록 하였다. 그 것은 담장의 離心力울 극복하여 벽 자체가 의부로 도궤되도록 축조한 것 이며, 산세를 잘 이용해서 길게 한 줄로 늘어선 산허리 돌을 골간으로 하여 그 내의 양면을 둘러싼 것처럼 돌벽을 쌓았다. 그래서 성벽이 내의 로 도궤되지 못하도록 하였다.
5) 맺는 말 태자성의 축조 방식은 黑溝, 覇王朝, 丸者 B, 轉水湖山城 등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비교된 산성들은 모두 절벽을 성벽의 地段으로 삼았으며 혹구산성은 단애벽(崎壁糖), 태자성에는 단순한 단애벽은 보이지 않고 모든 단애벽 상부에 인공벽을 쌓았다. 단애벽 위를 굴착하여 성벽 기단 구덩이를 만들고 산허리 돌을 돌로 에워싸서 벽 적심 골간을 만들었는 데, 그러한 방법은 고구려 산성에서 혼한 예가 아니다. 북문 옹성의 단면은 말안장형으로 축조법은 羅通山城의 西城 남문과 거의 같은데, 黑溝 동문, 五女 동문, 國內 西膳門 등의 옹성은 모두 직 사각형이며 고구려 산성 중 초기의 옹성 축조법이다. 반원형 즉 말안장 형의 옹성은 시기가 직사각형의 옹성보다 늦다. 태자성 북문의 옹성 축 조법은 혹구산성 등 고구려 초기 산성보다 늦은 것이다. 건축 자재는 태자성 의성은 모두 項端方形 또는 사각형에 가까운 석재 를 이용하여 석벽을 쌓았다. 이 축조법은 혹구, 패왕조, 오녀산성 등 고 구려 초기 산성이 대부분이 頂端 직사각형의 편방체 쐐기형 석재로 석벽 쌓음과 다르다. 그 석재 가공기술은 현저히 발달되었다. 나통산성의 서 성 성벽은 내의벽을 돌로 쌓고, 벽(!音) 적심은 흙과 쇄석을 충전하여, 토석혼축담을 만들었다. 같은 방법의 토석혼축벽 이 태자성 서벽의 남단 과 서단에 보이나 태자성의 벽은 산언덕을 의지하고 내벽을 쌓지 않은 것과 구별된다. 나통산성과 태자성의 벽은 주로 석재로 축조하였다. 그 중에 토석혼축벽도 있지만 거의 다 규정된 석재로 석벽을 쌓았는데, 그 점은 高爾山城의 항토 축조법과 완전히 다르며 고이산성의 성벽 축조법 울 나통, 태자 두 성의 성벽 축조법과 비교하면 한 단계 늦다. 태자성에서는 고구려 산성에서 흔히 보이는 角樓, 전망대 및 將臺는 없고 두 개의 봉화대에서 성 전체를 관장하였다. 지적할 내용은 동쪽 봉 화대 주위에는 明代의 벽돌이 있고, 서쪽 봉화대 주위에는 해자가 있는
데 그러한 해자는 明代 遼東邊 벽의 봉화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 일 대가 明代 遼東邊 벽이 경과한 구역으로 본다면 봉화대는 明代에도 모두 사용되었다. 태자성 내성벽은 일률적으로 편방추 쐐기형 석재를 사용하여 축조하였 고, 반대로 의성은 직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에 가까운 석재를 사용하였 다. 그것을 비교하면 건축 양식이 서로 다른 것이 뚜렷하다. 내성문은 직사각형 옹성으로 오녀산성의 동문과 같다. 오녀산성의 동문은 한 줄의 벽이 다른 벽을 에워쌌다. 태자성의 양단 내성벽이 교차되는 곳은 막혀 있는데 건축 양식상 하나의 수레바퀴 자국(轍)과 같다. 모두 고구려 초 기 산성의 옹성 축조방법에 속한다. 그러나 그 성의 북문 옹성과는 현저 한 차이가 있다. 내 • 의성 건축 자재, 축조 양식과 옹성문의 여러 가지 다양성은 내 • 의성 축조시기가 달랐음울 나타내 준다. 상기한 바와 같이 내성은 자체 방어를 구축한 하나의 單元으로 의성과 별도이며, 또한 성 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내성 축조 시기는 의성보다 이르며, 의성은 다 론 시기에 계속 축조되었는데 내성을 따라서 내의성을 배치하였다. 太子河상류는 고대 梁衍 민족의 활동무대였다. 그러므로 일찍이 梁水 라 불렸다. 張博泉의 『東北疆域史』에는 〈梁衍卽居於梁水之ffi, 梁 7k gp今 太子河, 其部當在今太子河上源附近〉으로 기록되었으며, r 삼국사기』 권 13 에도 기록이 있다. 태자성지는 梁衍故地의 太子iiiJ 상류에 위치하며, 그 내성은 고구려 초기 산성의 건축양식이다. 따라서 내성은 고구려 건 국시 이미 이곳이 양맥인의 활동무대였음을 보여 준다. 그 건축연대는 서기 15 년 이전으로 보이는데, 고구려가 양맥인의 거주지, 죽 太子河 상 류를 잠식한 후 그곳을 고수하였고, 太子iiiJ 상류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태자성을 사용해야 하였다. 따라서 내성은 서기 15 년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의성의 축조연대는 상기한 바와 같이 혹구 등 고구려 초기 산성보다 늦으나 고이산성보다는 이른 시기이다. 의성의 축조는 고구려가 계속하
여 遼東으로 확장된 것과 관계가 있다. 즉, 그 방어권 내를 산성으로 차 단하였다. 魏 晉 시기에 고구려 영역은 遼東 일대까지 확장되었고 , 고 구려는 그곳에 고이산성 등 서쪽 성들을 중건해서 새로운 방어권을 형성 하였는데 그것이 소위 고구려 장성이다. 당시 고구려 초기 방어권에 있 던 태자성은 고구려의 중심지역이 되었고, 군사 작전시에는 초기 방어의 요새가 새로운 방어진의 후방 역할을 하였다. 의성은 당연히 그러한 군 사상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성내에서는 많지 않은 수키와, 암키 와 등이 출토되었는데, 고구려가 와당을 사용한 시기는 3 세기 중, 후엽 이다. 그런데 태자성은 고구려 수도 集安에서 그리 멀지 않으므로, 건물 에 기와를 덮은 시기는 集安에서 기와를 사용한 것보다 그리 늦지 않다. 또한 고구려 토기의 분류에 의하면 고구려 중기의 토기는 대부분 고운 태토의 輪製 토기로 색깔은 회색, 흑색, 황토색 등이다. 또한 거기에는 소량의 모래가 섞인 토기편, 그리고 소성도가 낮은 유약 바른 토기도 있 었다. 태자성에서 출토된 토기의 수량은 많지 않지만 그 시기 고구려 토 기의 특징과 비슷하다. 고구려 중기의 토기 연대는 4 세기 초에서 5 세기 말까지이므로 여기에 미루어 추측하면 의성의 축조연대는 늦어도 4 세기 이전이다. 『 삼국사기 』 권 15 중에 新城, 즉 고이산성은 서천왕 때에 나 타나는데 그 시기는 276 년이다. 서천왕이 신성으로 간 것은 3 세기 중, 후기이며, 이때 고이산성은 이미 존재하였다. 그것은 고구려의 방어권이 이미 기초를 세웠음을 설명하여 준다. 고구려의 통일된 신 방어권상의 중요한 계기가 되는 태자성 의성은 그 시기에 완성된 것이다. 즉 태자성 의성은 고이산성의 건립 이전인 276 년보다 앞서 건립되었다. 성에서 출 토된 토기편은 비록 4 세기 초에서 5 세기에 속하는 것이지만 고구려 산성 중 유물의 연대는 언제나 산성의 축조 연대보다 늦다. 따라서 의성의 축 조 연대는 토기편에 의해 4-5 세기로 보게 되면 모순이 생긴다. 종합하면 태자성의 시기 분류는 서기 15 년 이전에 太子河 상류에서 활 동하던 양맥 유적과 분리된다. 그리고 5 세기 이후에 계속 사용되어 고구
려 초기 방어권의 요새였으며, 3 세기 중, 후기 이전에 의성이 건립되었 다. 또한 계속하여 고구려가 遼東으로 확장한 후에도 새로운 방어권상의 중요한 방어진으로 확립되었다. 상기한 산성 의에 고구려 시기의 關 l益 (검문소 또는 차단성)와 城堡를 살펴보자. 7 集安 남도와 북도상의 관애와 성보(차단성) 集安縣은 吉林省 남단에 있는데 서북쪽으로는 源江에 접하고 동쪽으로 는 압록강에 접하고 있다. 集安縣境內에는 높은 산이 많고, 하천들이 종 횡으로 흐르며 長白山의 한 가지인 老휴嶺 산맥이 동북쪽에서 서남쪽으 로 관통하고 있다. 吉林縣境은 (동)남, (서)북 두 곳으로 분리되어 남쪽 을 嶺前 북쪽을 嶺後라고 부른다. 현재 嶺前縣城에서 嶺後 潭江 연안으 로 가려면 통로가 두 개 있다. 하나는 麻線溝(또는 橘樹林子)를 경유하여 板盆嶺에 울라가서 新開河 협곡을 따라서 믿으로 내려가는 길인데 그것 이 남쪽 길이다. 다른 하나는 老츄嶺울 지나서 萊沙河(大靑iiiJ)를 통과해 서 가는 길인데 이를 북쪽 길이라고 부른다. 북쪽 길은 상당히 넓다. 현 재 集安通化 公路가 되어 통행이 원활하고 교통이 빈번하다. 남쪽 길은 도로가 좁고 험난해서 인적아 드물다. 1962 년 吉林省 박물관과 集安縣 文管所에서 전체 縣境內의 고고조사 시 남쪽 길, 북쪽 길을 돌아서 답사하며 남쪽 길의 패왕조산성, 望波嶺 의 검문소와 북쪽 길의 관마장산성을 조사하였다. 상기한 두 차례의 조 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7) 관마장산성의 동남쪽으로 약 65km 지점에 縣城이 있다. 그곳은 높은 산이 중첩해 있고 협곡이다. 북쪽 길에서 가장 협소한 요새지이다. 협곡
서쪽으로 험준하고 높은 산이 있으며 동쪽에는 수직의 大鐵頭山과 僚荒 頂子山이 있다. 높이는 lOOm 정도이다. 華沙河는 동변의 山臘를 따라서 북쪽으로 흐른다. 木鐵頭 개천이 있는데 그 너비는 80m 정도이다. 木鐵 頭 개천은 남쪽의 探荒頂子山을 따라서 서쪽의 華沙河로 흘러들어간다. 협곡에서 서북 방향으로 광활한 川谷 평원이 있다. 그곳은 현 熱間公社 소재지이다. 관마장산성 즉 이 험한 계곡에 있는 播距(넓은 땅을 차지하 고 있는 세력)는 협곡 남북 양끝의 가장 좁고 험한 길목 및 木鐵頭溝里 115m 되는 곳에 나누어서 남벽, 북벽, 동벽을 수축하고 산세가 험한 곳 에 하나의 城堡룰 만들었다. 가로질러서 북쪽 길로 가는 길이 있다(그립 3-54, 3-55), 산성은 구곡의 남북 길이 6oom, 동서 너비 70-200m 를 차지 하고 있으며 벽은 대부분 붕괴되었는데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강자갈로 축조되었다. 어느 강자갈은 가볍게 손질되었다. 그것들의 평균 크기는 30cmx30cmx50cm 정도이다. 북벽은 속칭 頭道關馬膳이라고 부른다. 장원, 참호, 제방울 만들어 그 구성이 대단히 엄밀하다. 동쪽 끝은 芸沙河에 있으며 강을 건너서 가파 론 암벽(그림 3-56) 이 있고 서쪽 1 변은 산언덕까지 축조되어서 그것이 산 허리의 돌무더기 아래까지 연결되었다. 그 돌무더기의 길이는 77.6 m , 붕괴된 벽 기단부 너바는 0.5m, 높이 2.3 m , 방향은 240° 이다. 서쪽 산언 덕에는 벽면 원래의 의벽이 한 군데 남아 있는데, 축조시 石魂의 평탄한 면을 바깥으로 향하게 -아래부터 위로 좁혀 쌓은 것을 볼 수 있다. 벽 바 깥 1-.4. 6m 되는 곳에 참호가 있으며 그 양쪽 끝이 장원과 연결되 어 있 었다. 그 중간을 넘어 벽에서 멀리 떨어져서 원래의 성문이 장원보다 돌 출되어 있었다. 그리고 참호는 반드시 그 문 앞을 지나가게 되어 있었 다. 그 문의 잔존 길이는 53m, 너비 3.5m, 두께 0.8m 이다• 操 안에는 못이 있어서 무릎 아래까지 빠졌다. 참호 바깥에 제방이 있었는데 그 잔 존 길이는 4om, 기단 너비는 4.8m, 높이는 1. 45m 이다. 강자갈로 기초 를 세우고 그 위에 모래자갈과 황토를 덮었다. 북벽 중간이 도로이기 때
그림 3-54 관마장산성도
그림 3-55 관마장산성 소처 협곡 원경 (북 ➔ 남)
그림 3-56 관마장산성 소처 일구(남 一 북)
-------輯通-公路
그림 3-58 관마장산성도 북단 서단 평, 단면도 (1 / 500)
문에 절단되었다. 장원, 참호와 제방은 모두 파괴되었다. 단, 도로 서쪽 의 벽 기단 강자갈이 내의로 너비 24m 정도 연장되었는데 원래 門道 서 벽의 유적이다(그림 3-57). 남벽은 속칭 二道關馬膳이라고 부르는데 훼손이 심하다. 그곳의 형세 는 북벽과 같다. 중간이 도로 때문에 잘렸고, 門址도 이미 파괴되어 혼 적이 없다. 다만 참호와 제방이 매몰되어 있다. 그 잔존 킬이는 69.7 m , 너바 7m, 잔고 2.l m , 방향은 255 ° 이다. 동벽 역시 三道關馬膳이라고 부른다. 형제는 남벽과 같다. 그 북단은 木 鐵 頭 산언덕까지 연결되었으며 남쪽으로는 木鐵頭개천을 건너 棟荒頂 子山을 경유해서 산허리의 돌무더기 있는 곳까지 연계되었다. 그 전체 길이 125m, 기단 너비 6.5-6.9 m , 잔고 0.5 - 0.7m, 방향은 310° 이다. 장원 중간에 關 口(빈 터)가 있는데 그 너비는 4m 이다. 그 좌우에 벽 기단부가 내의로 연장되어 2m 의 길이룰 구성하고 있는대 그것은 길이 9.6 m , 너비 3m 의 대칭적인 長方台를 만들었다. 그것은 곧 동벽의 門址이다(그림 3- 58). 이 성의 규모는 작다. 그러나 형세가 대단히 험준하여 군사방어상의성 보가 되었다. 성안에 수림이 울창하여 고고조사시 유적과 유물을 발견하 지 못하였으나 그곳 주민들 말에 의하면 그곳에서 많은 철촉이 출토된 바 있다고 한다.
望波嶺 關裕(검문소, 수비문) 新開河 하류 계곡은 광활하여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산세가 밀집한 협곡 지대에 들어가게 된다. 더욱 황위자에서 망파령까지의 10 리는 협곡 이 대단히 좁아서 그 너비가 lOOm 가 되지 못한다. 망파령은 雙盆公社에 서 서북 방향으로 10km 지점에 위치하는데 북쪽 언덕은 대단히 험준하 며 또한 상기한 좁고 험준한 협곡 가까이에 있다. 그곳은 높이가 약 6om 이상이며 山嶺은 동남, 서북 방향이다. 서북 산언덕 끝은 다시 융 기되어 남북향의 높은 언덕(이곳을 龍頭嶺이라고 부른다)을 이루었으며, 그 산세가 병풍처럼 되어 협곡을 가리고 있다. 신개하는 남쪽에서 북쪽 으로 흐르며 용두령을 급히 돌아서 동쪽으로 흐른다. 강을 건너서 산세 가 우뚝 솟은 높은 산이다(그립 3-59). 망파령 관애는 돌로 쌓은 벽으로 용두령 언덕의 중심지까지 축조되었 는데 현재는 붕괴되었다. 그 길이 260m, 기단 너비 10m, 잔고 l.5- 2m, 방향은 350° 이다. 장원 북쪽 끝이 신개하와 연결되었고 벽 발치에 강을 따라서 돌제방이 있다. 남은 길이는 13m, 높이 0 . 5-0.Sm 이다. 용두령 남쪽, 망파령과 연결된 곳에 四된 공터가 있는데 도로가 바로 이곳을 지 나갔다• 도로 북쪽 변에 장원의 斷層이 남아 있다. 그곳은 대형의 강자 갈로 기초를 쌓았고, 그 위 좁혀 쌓인 곳에는 작은 강자갈을 사용하였 다. 그 중에 손질된 것도 있는데 보통 2ocmX35cmX45cm 정도이다. 장원 남단의 90m 가 일찍이 수축되었는데 강자갈을 쌓고 한 충 두께 10 -20cm 의 진흙을 발랐다. 관애의 門址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미 도로가 된듯하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장원의 가까운 곳에서 철촉이 출토되었다. 조사 시 0.5km 장원 정도의 경작지에서 돌방아 1 개를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거친 화강암의 납작한 면에 홈울 파서 만든 것으로 구경 20cm, 깊이 20cm 이 다 (그립 3-60) .
그립 3-59 망파령 관애 약도
그립 3-60 망파령 관애 남면 평지상 출토
아래의 사실들을 살펴보면 몇몇 문제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 資治通鑑 』 권 96 에 〈高句麗有二道 其北道平鬪 南道險俠(고구려 에 두 도로가 있는데 北道는 평탄하고 넓으며, 南道는 험하고 좁다)〉라는 기 록이 있다. 조사를 통해서 기록 중의 소위 남, 북 2 도는 대체로 현재의
남쪽 길, 북쪽 길과 같다. 즉, 嶺前 集安縣城에서 출발하여 老츄嶺산맥 을 넘어서 新開iiiJ와 莘沙iiiJ 하천과 계곡이 나뉘는 곳을 따라가면 嶺後 潭江 연안의 그 두 길로 들어선다. 둘째, 고구려 산성은 土築도 있고 石築도 있다. 패왕조산성, 망파령관 애와 관마장산성은 모두 석축이다. 그것들은 엄격하게 남도와 북도에 배 치되었다. 그리고 요새의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도로를 통제하였다. 그것은 당시에 중요한 군사시설이며 그 공격 능력은 대단히 중요하였다. 여기에서 關裕와 城堡를 북한 학자들은 차단성이라고 부른다. 8 북한의 대성산성 대성산은 남쪽으로 대동강을 끼고 있으며 대동강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4km 이다. 대동강은 대성산 남쪽에서 호형으로 대성산을 돌고 있다. 대성산성은 안학궁터와 더불어 1958-1961 년에 발굴되었는데 대성산성 은 주위가 7218m 이다(그림 3-61, 3-62). 이 대성산성의 옹성, i桑 陸, 將 臺, 門, 角模 維城, 池 및 식량창고와 무기고 등이 연구되었다. 성의 해자는 淡 또는 陸이라고 부르는데, 중국에서는 평지성을 平原城이라고 부르며 북한의 학자들은 平城이라고 한다. 평지성에는 성벽 방어를 위한 호, 즉 해자 시설이 있으며 산성에는 호 대신 황을 설치하였다. 대성산성에는 內陸이 있었고 18 개의 건물지 (그림 3-63) 가 있었으며 그 중에는 북장대도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문과 문루가 있었는데 문루는 2 층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성안에는 못이 10 여 개소 남아 있으며 큰 식량창고터가 있다. 이러한 대성산성은 집안의 山城子山城 및 平壤城의 內城과 같은 규모 였다고 보며 그 축조연대는 4 세기 말에서 5 세기 초로 보고 있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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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평양성 평양성은 고구려 시대에 축조되었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의 평양성의 축조 기록은 551 년의 장안성 축조 관계이다. 그리고 586 년 평원왕 28 년에 장안성으로 천도한 기록은 이 성이 수도 를 옮기려고 축성 한 것으로 보고 있다. 『 삼국사기 』 의 기록에 의해서 장안성을 552 년에 축조하고 평양성 (대성 산 평양성)으로부터 그곳으로 천도한 것은 558 년이고 그 성이 수도였던 기 간은 586-668 년까지 83 년 동안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 때에 축조된 평양성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하여 조선 말의 평양 성 구조(의성, 중성, 내성, 북성의 네 개 부분)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고구려 때의 평양성은 북성과 내성, 의성의 세 부분으로 구성 된다. 왕궁성은 내성이었고 북성은 내성의 방어력을 담당하는 동시에 종 묘, 사원 등 시설의 중심지였으며 의성은 수도 시민의 거주지로 보았다. 산성을 거점으로 하고 평지도성을 건축한 실례는 6 세기의 백제 수도인 부여 사비성과 비교하고 있다. 영변성 역시 4 개 부분으로 구성된 산성과 평지성을 겸한 성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 시기의 산성에도 내성을 쌓은 실례로 대성산성을 들고 있다. 상기한 내용에 따라서 평양성 (장안성)은 고구려 시기의 수도로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9) 1) 평양성을 쌓은 연대와 규모 최희림은 평양성(장안성)은 내성, 중성, 의성, 북성 4 개 부분으로 이 루어졌다고 채희국과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그림 3-64), 상기한 내용 중 채희국은 고구려 시대의 장안성은 북성, 내성, 의성의 3 성으로 구성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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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보았는데 채희림은 대담하게 중성을 삽입시킨다. 그는 내성은 566 년(병술)에 축조되고 의성은 569 년(기축)에 축조, 중성은 579 년에 축조하 였다고 본다. 또한 북성은 대개 586 년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 고 평양성은 내성은 궁성, 중성은 행정기구가 있는 성, 의성은 백성이 거주하고 북성은 궁성의 보호성으로 보고 있다. 10 ) 2) 평양성(장안성)의 성벽 축조형식과 시설물의 배치상태 평양성 북벽은 모란봉의 산과 만수대와 청유벽의 절벽 등 천연적인 지 형을 이용하여 동, 서, 남 삼면은 대동강과 보통강 등을 해자로 하고 강 안 철벽과 언덕을 이용하여 평지대가 가지는 방어상 장점과 산 지형의 자연적 조건을 이용하였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약 23km 이며, 성 안의 총 면적은 1185m 히다(북성 포함). 그 중 내성은 130 만 m2 이고, 중성은 300 만 m2, 의성은 730 만 m2, 북성은 25 만 m 이다. 평양성 벽은 평지와 산등성을 따라 돌과 진흙으로 쌓았다. 성들의 모 양은 거의 같다. 큰 성벽돌 의면의 너비는 대개 60cm 이며, 높이는 40cm, 뿌리는 70cm 이다(그립 3-65). 작은 것은 너바 20cm, 높이 15cm 정도이며 그 중 다수가 너비 35cm, 높이 25cm 정도이다. 성돌은 암회 색 사암과 혈암, 화강암 등이다. 숭령전과 보통전 등에 쓰인 주춧돌인 부벽루의 . 전면 기둥에 쓰인 주춧 돌 3 개와 계단석들과 우석 등은 모두 고구려 때의 〈 용강석 〉 으로 보고 있 다(그립 3-66). 성벽의 기초(그림 3-67, 3-68) 는 기반을 깊이 파내고 맨 밀에 진흙과 자 갈을 섞어 다졌고, 그 위에 정연하게 돌을 쌓았다. 맨 밀에는 바닥돌로 큼직하고 모난 돌을 가로로 놓고 그 위에 사각추로 다듬은 돌을 쌓았다. 칠성문 쪽의 비교적 거칠게 다듬은 큰 돌(네모 난 돌의 크기는 59cm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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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cm, 60cm x3 9cm, 40cm x3 9cm, 58cmx41cm) 을 가로놓아 바닥돌을 삼 고 그 위에 다듬은 성돌로 면과 선을 맞추어 정연하게 기초를 쌓았다. 성벽과 관련된 시설로서 여장, 문터, 황(해자) 등이 있었다. 최희림은 평양성의 내성, 중성, 의성과 북성이 축조형식을 보아 모두 고구려 패에 쌓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중성은 고려시대 (922) 에 쌓고 내성 과 북성은 조선시대 (1624) 때에 쌓았다는 것은 고고학자료와 맞지 않는 잘못이라고 보고 있다 .I I) 1) 魏存成, 「高句麗初中期的都城」, 《 北方文物 》 第 2 JJl, 1985, pp. 28-36. 2) 集安縣文物保管所, 「集安高句麗 國內城址的調査與始堀」, 《 文物 〉〉 第 1 期, 1984, pp. 47-54. 3) 李殿福 「集安高句麗山城子山城調査與考察」, 《 文物考古江編 〉〉 第 1 期, 1982, pp. 21-29. 4) 撫 |l !Ii市博物館 • 新賓縣文化局 「遼寧省新賓縣黑溝高句麗早期山城」, 《 文物 》 第 2 期, 1985, pp. 46-51 . 5) 吉林省文物工作除, 「高句麗羅通山城調査簡報」, ((文物 》 第 2 期, 1985, pp. 39-45. 6) 撫順市博物館 「遼寧新濱高句麗太子城」, 《 考古 》 第 4 期, 1992, pp. 318-323. 7) 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除 • 集安蘇文物管理所, 「吉林集安高句麗南道和北道的關造 和城堡」, 《 考古 》 第 2 期, 1964, pp. 76-78. 8) 채희국, 「대성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관한 연구」, 《 유적발굴보고 》 제 9 집, 사 회과학원출판사, 1964, pp. 1-72 . 9) 채희국, 「평양성 (장안성)의 축조과정에 대하여」, 《 고고민속》 3, 1965, pp. 20 -27 . 10) 최희림, 「평양성을 쌓은 연대와 규모」, 《 고고민속》 2, 1967, pp. 27-35. 11) 최희립, 「고구려 평양성(장안성)의 성벽 축조형식과 시설물의 배치상태」, 《고 고민속 》 3, 1967, pp. 20-28.
제 4 장 건축물 건축물은 북한에서 정리한 로남리 집터, 궁의 평면도, 성곽지 등을 살 펴보고, 사지로서 금강사지, 集安 동대자 제단, 평양성 의성의 리방과 안학궁터의 리방, 장수산 일대의 집터,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비 의 발견과 탁본 경위, 그리고 고구려의 유일한 석인상, 集安 通溝의 2 기 석비를 살펴보겠다. 건축 유형은 건물과 구조물로 나뉘고 있다. I) 건축, 죽 건물터로서 남아 있는 것은 살림집, 궁전, 절간, 문루 등이 다. 집터는 자강도 시중군 로남리와 중강군 토성리, 평안남도 북창군 대 평리, 평양시 대성구역의 안학궁터, 력포구역 무전리의 정몽사지, 吉林 省 集安縣의 동대자 등이다. 로남리 집터는 중간에 동서 방향으로 연속된 네 개의 기둥 구멍과 두 개의 온돌 시설이 있다(그림 4-1). 동대자 집터에서는 긴 사각형으로 생 긴 큰 토방과 회랑, 주춧돌과 주추자릿돌, 띠기초 그리고 두 개의 〈기〉 자형 고래온돌과 두 개의 굴뚝이 노출되었다(그립 4-2). 안악 1 호 벽화무덤의 건물도는 마당 한복판에 치미까지 올린 2 층의 큰
집이 있으며 그 주위에는 회랑이 있다. 회랑 가운데는 문루가 있고 그 모서리에는 각루를 세웠으며 집에는 물론 회랑에 이르기까지 두공을 받 친 기둥을 세우고 지붕에는 기와를 올렸다(그림 4-3 ). 고구려 왕궁터로 알려진 곳은 吉林省의 集安縣 국내성터와 평양시 대 성구역 안학궁터, 평양성의 궁터 등이다. 그 중 제일 뚜렷한 것은 안학 궁터이다(그림 4-4). 남포시 강서구역 약수리 벽화무덤 안칸 북벽의 성곽도(동, 남, 북쪽 성 벽)에는 2 층의 문루와 각루가 있고 성 안에는 건물 두 채가 있다(그림 4-5). 평안남도 순천시 료동성 무덤의 성곽도(그림 4-6) 에도 3 층의 건물이 있다. 절터는 평양시 력포구역 무진리의 정릉사지, 평양시 대성구역의 금강 사지, 평양시 대성구역 림흥동의 상오리사지, 평안남도 평원군의 원오리 사지, 모란봉구역의 중흥사지, 영명사지 등이다. 그 중 정몽사지와 금강 사지가 잘 남아 있다(그림 4-7). 구조물 중 주춧돌의 평면은 원형, 사각형, 팔각형이며, 일부 막돌울 약간 다듬은 불규칙한 것도 있다(그립 4-8). 고구려 건축물의 배치에서 두공은 중요하다. 벽화무덤 안과 실물 기둥 위에 있는 두공이 이를 잘 나타내 준다. 두공에 대한 종합적인 내용이 표 4-1 로 나타나 있다 .2) 두공에 대한 그림은 자성군 고분군 내용에 포함 되어 있다. 고구려 건축의 지붕은 벽화무덤의 벽화 그리고 건물지의 평면과 유물 둘로 고구려 시기 온돌 시설의 평면상 특칭은 〈기〉자형으로 꺾인 것이고 그 고래는 의고래 또는 두 고래에 아궁이와 굴뚝도 갖추고 있다. 동대자 집터와 로남리, 대평리, 토성리 집터들의 아궁이자리와 용호동 1 호 무덤과 集安 부근에서 출토된 부뚜막형 모형 그리고 안악 3 호 무덤 과 약수리 벽화무덤의 부엌 그림 등이 있다. 부뚜막에 대한 그림은 부뚜
. I복쪽 。
그립 4-3 안악 1 호 벽화 무덤의 건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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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건축물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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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4-1 벽화무덤에 그려진 기둥과 두공(원 김영숙)
막 내용란에 따로 두었다. 산성자산성, 대성산성, 평양성의 성벽축조 관계를 보면 먼저 밀에 큰 돌을 놓고 위로 울라가면서 점차 작은 돌을 조금씩 물려 쌓았다. 돌들 사이의 세로 이음줄이 겹치지 않도록 〈 6 합 〉 의 방법으로 서로 어긋나게 쌓아 올렸다. 돌을 쌓을 때 돌과 돌 사이, 돌과 바닥 사이에 돌못을 박 거나 턱이 지게 쌓아서 돌이 밀려나지 않고 맞물리도록 멈추개를 하였 다. 장군총, 태왕릉, 천추묘 등 적석총의 맨 믿단 둘레에는 커다란 돌을 3-5 개씩 세워 밀돌들이 밀려나지 않게 하고 장군총과 그 곁에 있는 무 덤, 태왕릉 등은 돌을 네모 나게 잘 다듬고 윗면 의부 쪽에는 턱이 지게 해서 그 위에 놓인 돌들이 밖으로 밀려나지 않게 하였다. 集安 동대자 집터 동대자 집터는 거대한 건축군을 이루고 있다. 집터는 건축군의 남북 중심축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 집터는 직사각형 토방 위에 몸체와 회랑으로 구성되었다. 토방의 윤곽은 모두 노출되지 않았다. 토방은 여러 충 다져 올려 쌓고 그 가장 자리에는 돌을 댔다. 토장의 마감충을 다져서 바닥으로 삼았다. 몸체는 토방의 중심부에 있다. 동서 두 개의 방과 그 사잇길로 이루어전 몸체는 동서로 긴 직사각형이다. 그 길이는 35m, 남북 너비 11m 정도이다. 동서 두 방의 크기는 비슷하다. 각 방의 동서 길이는 각각 15m 씩이며 남북 너비는 11m 정도씩이다. 한 건물 아래에서 기초의 구조는 서로 다 르다(그립 4-9). 동서 두 방의 기초는 주먹 크기의 자갈돌을 너비 l.5 -2m 로 벽체를 따 라 둘러치고 그 사이에 주춧돌을 놓았다. 그것은 소위 띠기초와 독립 기 초를 배합한 형식이다. 그 경우 적당한 크기의 기둥을 쓰는 나무심벽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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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9 동대자 집터 주춧돌
로 하고 벽체 전체가 힘을 받는 지지벽일 때가 많다. 방 가운데에 기초 롤 한 커다란 돌시설이 있다 . 서쪽 방의 기초는 띠기초를 하지 않고 기둥 밑에만 주추자릿돌과 주춧 돌을 놓은 독립 기초를 사용하였다. 그것은 전형적인 나무십벽 형식이며 내리누르는 힘은 기둥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동서 두 방에는 각각 하나씩 구들이 놓여 있다. 그 구조는 방마다 다 르다. 전체로 보면 두 방의 아궁이는 동벽 중앙에 놓였고 고래가 동벽을 따라서 북으로 울라가다가 북벽을 따라 서쪽으로 꺾이고 서벽에 이르러 다시 북으로 꺾여서 토방 밖에 있는 굴뚝과 연결된 점이 공통적이다. 동 쪽 방의 것은 의고래이고 서쪽 방의 것은 두 고래이다. 구들은 전반적으 로 낮고 구들고래는 굴뚝 방향으로 가면서 점차 높아졌다. 구들마다 굴 뚝이 하나씩 있다. 그 지름은 lm 를 넘는다. 굴뚝 밀은 돌로 두껍게 보 강되었다.
집체의 사방에는 회랑이 있다. 집체 벽면에서 토방 가장자리까지는 5m 정도이다. 토방 가장자리에서 lm 정도 지점에 있는 토방 위에는 주 춧돌이 한 번 감돌았다. 주춧돌 중에는 한 단 또는 두 단의 기둥 및 받 치개를 받친 것도 있다 .3) 1 금강사지 평양의 절터로는 금강사지와 정릉사지가 있다. 정릉사는 고구려 고유의 가람 배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정릉사는 남 북 중심축에 中門(그림 4-10), 탑, 中金堂, 강당이 있으며 탑의 동서에는 각각 東金堂, 西金堂이 있고 중금당의 동서에는 종루와 경루가 있다. 그 리고 중문과 강당을 연결하는 남북 직사각형의 회랑이 있다. 주목되는 것은 8 각탑(그림 4 - 11) 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3 금당과 문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가람 배치 형식은 평양시 대성구역의 금강 사지에서도 나타나 있다. 금강사지에는 8 각탑을 중심으로 남쪽에 門址, 북쪽에는 중금당, 동서에 같은 규모의 금당지가 있다(그림 4-12). 금강사지에서 동남 방향으로 약 2km 지점에 상오리사지가 있다. 상오 리의 8 각탑을 중심으로 동금당과 서금당이 있다. 이 배치법을 금강사와 비교하면 탑의 북쪽에 중금당이 있다고 본다. 상오리사지의 가람 배치 형식은 정릉사지, 금강사지와 같다. 상기의 내용에 의하여 8 각탑을 중심으로 그 동서남북에 세 금당과 문 울 배치한 소위 〈 1 탑 3 금당〉식의 가람 배치 형식이 고구려 고유의 가람 배치 형식이며, 정몽사지도 고구려의 1 탑 3 금당식 가람 배치에 속한다. 정몽사 8 각탑의 남쪽 부분에 일정한 너비의 자갈 포장이 중문을 향하 여 남아 있다. 그것은 금강사지, 상오리사지 등에서 탑의 동서남북 4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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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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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중문과 동금당, 서금당, 중금당과 연결되는 통로에 자갈 포장을 한 것과같다. 8 각답지는 2 중 기 단을 가졌다. 탑지는 기초 부분과 물받이 (배수구) 시 설 부분으로 구분된다. 기초 부분은 2m 깊이로 돌기초를 하였고, 물받 이 시설은 기초 부분에서 0.8m, 밖에 o.6m 너비로 돌을 처리하였다. 물 받이 시설 부분의 안둘레에 切石을 세워서 배열하였다. 절석은 아랫기단 의 보호 시설이며, 기초 부분은 윗기단, 즉 기본 기단 부분이다. 이 2 단 기단과 기단 밀의 물받이 시설, 아랫기단 둘레의 절석 처리 등 은 금강사지, 상오리사지, 토성리사지의 탑지와 금당지에서 보였다. 정릉사 건축 계획시 8 각탑의 기준 크기는 기단 너비다. 일반적으로 탑의 기단 너비가 탑신의 기준이 되면서 건축 전체의 평면 및 입면 구성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었다. 그 기준 크기에 따라서 정릉사지 제 1 구역의 평면은 동서의 너비가 약 4 개 기준 크기가 되고, 남북 길이는 6 개 기준 크기로 처리하였다. 즉, 정릉사지 평면은 4 대 6 의 비례로 구획 분할하였다. 또한 남북 중심축의 건물 사이도 1 개 기준 크기의 간격으로 배치하였다. 탑과 중문, 탑과 중 금당, 중금당과 강당의 사이를 모두 1 개 기준 크기로 처리하였다. 서금 당은 1 과 4 분의 1 기준 크기로 놓았다. 건물터의 각 부분 크기는 기준 크기의 10 분의 1 크기에 6, 9, 12, 15 등 의 일정한 배수로 처리하였다. 기준 크기는 35cm 정도 크기의 고구려자(尺)에 기초하였다. 기준 크 기인 탑의 기단 너비 17.6m 는 50 자이며, 개별 건물들의 평면에 나타난 10 분의 1 기준 크기는 5 자이다. 정릉사 건축시에는 5 자가 기본 단위자이며 그것을 다시 10 배의 크기인 50 자를 큰 단위자로 사용하였다. 정릉사지 남쪽 회랑의 두 끝지점에서 그것을 밑변으로 하는 정삼각형 울 그리면 그 정점은 중금당의 동서 중십선에 닿으며 탑의 동서 중심선
의 두 끝지점 정점은 강당의 중심점에 이른다. 상기한 건축 구성 수법이 고구려의 전형적인 것이다. 또한 고구려의 가람 배치형식이 신라 황룡사나 일본의 아스카데라 가 람 배치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고 있다 .4) 금강사는 1938 년에 알려진 평양 〈청암동 폐사 〉 이다. 금강사지에서는 각종 수키와와 막새가 출토되었다(그립 4-13, 4-14). 그 중에는 장군총, 상오리사지, 평양성 등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것들아 있 다. 금강사지의 막새문양(무늬)은 장군총의 것보다 늦고 평양성의 것보 다는 이른 것들이다. 금강사지의 막새는 연꽃잎이 6 개, 장군총의 것은 8 개이다. 상오리사지 와 평양성의 막새들은 꽃잎과 잎사귀를 엇바꾸어 6 개 구간으로 나누고 안팎 꽃술 사이에 띠를 둘렀다. 금강사지는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427 년 이후의 시기로 추정된다. 몇 가지 자료에 의하면 청암동 토성 안의 절터가 곧 고구려 금강사지 이며 그것은 5 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그림 4-12). 금강사, 상오리사지, 정릉사의 탑지 정면은 모두 8 각형이다. 평양과 그 주변의 고구려 사지에는 1 탑이 있으며 그 중심부에 있는 8 각형 평면의 건축지는 모두 8 각답지라고 여겨진다. 금강사지도 중국자(漢尺)가 아닌 고구려자(尺)로 계측되었다고 보고 있 다. 사지 중심의 8 각탑은 내접 지름이 35 자로, 특히 폭이 70 자로 계측되 었다(표 4-2). 탑의 평면 규모, 금당, 東殿 등 개별 건물들의 평면 치수로 탑기단폭 의 절반, 즉 고구려자 35 자의 일정한 배수로 이루어졌다 한다. 금강사지는 탑중심 사지로 그것을 중심으로 동, 서, 남, 북에 각각 건 물들을 배치하였다(그림 4-12). 중심 건축 구조물인 8 각 기단을 고구려자 35 자를 반지름으로 하는 원 에 의집하는 정 8 각형으로 만들고 그 위에 목조탑을 세운 것으로 추측된
讐,, I
그림 4-14 금강사 귀면 와
표 4-2 토성리사지 탑과 금당지 실측 (원 리화선, 단위 : m)
번호 건물 사이 간격 실측치 짜한(척한에 척 )의*한 복m원 실치측와치의와 차복이원 오차융
다. 복원에 의하여 탑은 7 충의 목탑으로 전체 높이가 고구려자 175 척, 즉 6 1. 25m 에 해당된다. 5) 토성리사지 유적은 봉산역에서 남쪽으로 약 1km 지점의 토성리에 위치하고 있다. 토성리 건물지에서는 8 각 건물지와 그것을 중심으로 서쪽과 북쪽의 건 물터 일부와 동남쪽에는 벽돌을 깐 시설물 등이 노출되었다. 터 건물지는 표토에서 약 40cm 깊이에 있었다. 표토층(콘크리투 두 께 15-2ocm) 밑에 붉은색 기와충이 25-30crn 놓여 있었다. 이 붉은색 기 와충 밀에 8 각 건물지의 기초 부분과 물받이(배수구) 부분이 노출되었다. 건물터의 기초 부분과 물받이 시설은 모두 8 각, 물받이 시설 바깥 부
분의 한 변의 길이는 9.l m , 8 각 기초 부분의 한 변의 길이는 7 . 7m 이다 . 8 각의 물받이 시설의 바깥 총둘레는 72.8m 이며, 기초 부분의 총둘레는 63.2m 이다. 물받이 시설을 포함한 8 각 건물지의 지름은 22m, 8 각 기초 부분의 지름은 18.2m 이다. 물받이 너비가 70cm, 그 안에 손바닥 정도의 강자갈을 깔고 그 좌우 에 청회색 점판암울 직선으로 세웠다. 물받이는 물이 바깥으로 흐르도록 50 경사지게 하였다. 8 각 기초 부분은 물받이에서 약 1.15 m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이 훼손 되어 기초 일부만 남았다. 터 건물의 서쪽 지구에서 집터가 노출되었다. 그것은 표토에서 약 30cm 깊이에 있었으며 8 각 건물터의 서쪽 면과 나란히 남북으로 길다. 집터에서도 물받이 시설이 뚜렷이 나타났으며 집의 기초자리가 없어전 것으로 미루어 보아 원래 집터는 물받이 시설보다 약간 높이 있었다. 집터 물받이는 집 주위를 따라 설치되었다. 폭 1 .4 m 로 강자갈을 일차 깔았다. 집의 크기는 길이 l8m, 너비 9.lm, 8 각 건물지의 중심부에서 1s.2 m , 물받이에서 7.4 m 거리이다. 8 각 건물지의 북쪽에서도 집터 일부가 노출되었는데 이 집은 8 각 건물 지의 중심에서 27.3m 의 지점에 있었다. 이 집의 물받이는 너비 1 . 8m 로 서쪽 건물지의 물받이보다 40cm 더 넓다. 물받이 시설 너비는 20cm 가 넘으므로 8 각 건물터 북쪽에는 서쪽 건물보다 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있다. 8 각 건물지의 중심에서 동남쪽으로 약 36m 지점에 벽돌의 원형 시설 물이 노출되었다. 남아 있는 원형 시설물의 지름은 약 2 . 5m 이며 이러한 벽돌의 원형 시설물은 고구려 유적에서 자주 보인다. 8 각 건물터, 집자리에서 고구려 시대의 붉은색 암키와, 수키와, 수키 와막새; 회색 수키와막새편과 질그릇편이 많이 출토되고, 8 각 건물터에 서는 붉은색 기와와 함께 쇠못도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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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각 건물지와 집터에서 동질의 붉은색 기와가 출토되었으며 대표적인 것은 붉은색 수키와와 수키와막새 들이다. 수키와와 막새는 세 종류이다. 하나는 둥근 막새 앞면에 1.3 m 너비의 윤곽선을 만들고, 막새 중심에 반구형의 꽃술 장식, 꽃술 주위는 가는 선으로 다시 원을 이루고 그 밖 으로 네 개의 꽃무늬가 대치되게 처리되었다. 윤곽선 높이는 o.6 m , 막 새의 지름은 14.8cm, 붉은색이다. 두번째는 둥근 막새 앞면에 14.8cm 너비의 윤곽선이 있고, 막새 중심 에 반구형의 꽃술 장식, 꽃술 밖으로 장식한 네 개의 꽃무늬는 상기한 것 과 거의 같다. 막새의 지름은 13.8cm, 윤곽선 높이 1. 4cm 에 붉은색이다. 마지막으로 둥근 막새 앞면에 크지 않은 윤곽선이 있고, 중심에 지름 2cm 의 반구형 꽃술이 있다. 꽃술 주위에 가는 선으로 원 처리, 꽃술을 중심으로 서로 대칭되게 네 개의 꽃잎을 부각시켰다. 막새 지름은 17cm 이고 청회색이다. 상기한 세 종류의 공통점은 중심에 반구형 꽃술, 네 개의 꽃잎이 대칭 되게 장식, 붉은색과 청회색 기와, 고구려 시기의 건물지에서 혼한 막새 둘이다. 이 유물은 정릉사지 등에서도 출토되었다. 터 집터의 기초 너비는 18 . 2m 이다. 서쪽 건물지는 8 각 건물지 중심 에서 기초 너비 1s.2m 지점에 한 벽면을 세웠고, 8 각 건물터 서쪽 면에 도 또한 18.2m 지점에 바깥 벽면을 세웠다. 그것은 8 각 기초 너비 18.2 m 를 기준으로 하여 집을 배치하였다. 북쪽 건물지는 불완전하지만 8 각 건축터 중심에서 27.3m, 북쪽 면에 서 18.2m 지점 내 건물의 한 면을 설치했다. 북쪽 건물은 8 각 건물터 중심에서 8 각 건물터 기초 너바의 1.5 배 되는 지점에 설치했다. 8 각 건 물터 중심에서 8 각 건물터 기초 너비를 1. 5 배 한 27 . 3m 를 반지름으로 원 울 그리면 서쪽 건물터는 바깥 면에 닿고 북쪽 건물지는 안쪽 면에 닿는 다. 더욱이 8 각 기초 너비 18.2m 를 기준으로 원을 그리면 서쪽 건물터
의 안쪽 벽면에, 북쪽 건물터는 8 각 건물지와의 중간 지점에 이른다. 종합하면 토성리 건물지는 8 각 기초 너비 18.2m 를 기준으로 하여 모 든 건물을 배치하였다. 8 각 건물터의 기초 너비는 18 . 2m 이며 고구려자 52 자(고구려자 1 자는 35cm 정도)에 해당된다. 8 각 건물지와 서쪽 건물지의 간격은 9.l m , 서쪽 건물지의 너비 9.lm 는 그 철반인 26 자이다. 8 각 건축터 중심에서 서쪽 건물지까지 78 자, 북쪽 건물터 한 변까지는 78 자이다. 그 의 8 각 건물터 물받이 시설의 한 변의 길이 9.lm 는 26 자, 8 각 기 초의 한 변 길이 7.7m 는 22 자에 해당된다. 건물지는 고구려자에 의하여 설계, 건립되었다. 토성리 집터 유적은 1 대 2 옹근수(整數) 비례법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서쪽 집터 길이는 8 각 기초 너비와 거의 같은 18m, 너비는 8 각 기초 너 비의 절반인 9.lm 아다. 그것은 8 각 기초 너비를 기준 크기로 하여 그의 절반을 집 너비로 했음을 나타내어 준다. 고구려 시기 사원 건축방법은 8 각탑을 중심으로 좌우로 집을 배치하고 그 건물들의 평면 구성은 1 대 2 비례수법으로 처리하였다. 봉산리, 토성리 유적의 8 각 건물지는 정릉사지, 금강사지 등의 고구려 사지와 같이 사지의 중심에 목탑을 세웠다. 고구려의 사원 건축에 8 각탑 형식이 많아 정릉사지, 금강사지, 상오리사지에서도 보였다. 8 각 건물지에 설치된 물받이 시설도 정릉사지, 금강사지의 것과 공통 점이 있다. 물받이 시설은 목탑인 경우 기와와 여러 충으로 연결시켰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하였다. 8 각 건물터의 기와충은 다른 건물지보다 더 두껍고 종류도 다양하다. 8 각탑을 중십으로 좌우 금당과 북금당의 설치는 고구려 사원건축의 하 나의 양식이다. 그러나 토성리사지에서는 동쪽 건물터가 노출되지 않았다. 고구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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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 모두 1 탑 3 금당의 방법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그 유적에서도 동쪽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상기한 바와 같이 토성리 유적의 탑지는 정몽사, 금강사 답지와 같은 데 그 기초 너비는 약간 다르다. 정릉사 탑지의 기초 너비는 17.6 m , 금 강사지의 것은 25m, 토성리의 것은 18.2m 이다. 금강사 탑지의 것은 크 고 정몽사지의 것은 약간 작다. 축조연대가 확인된 것은 498 년 축조된 금강사지와 고구려가 수도를 평 양으로 옮긴 427 년을 전후한 정릉사지 등이다. 그것은 8 각 목탑 형식 이 498 년까지 존재했음을 나타내어 준다. 토성리사지가 축조된 연대는 고구려가 지금의 황해도 일대를 장악한 394 년 이후로 추측된다. 토성리 유적은 고구려 휴암군 소재지였던 지금의 휴류산성에서 남쪽으 로 약 3km 떨어전 지점에 있다. 토성리 유적이 휴류산성으로부터 떨어 진 거리에 있는 것에 의해서 방어수단인 성곽과 사원이 분리된 것으로 보고 있다 .6) 2 集安 동대자제단 集安縣 고구려 國內城址에서 동쪽으로 1 里 정도 되는 곳에 東 臺 子가 있다. 그곳은 융기된 언덕으로 그 지표상에는 다량의 두꺼운 붉은색 기 와와 역석이 분포되어 있다. 고구려 건물지가 가장 집중된 중요 장소의 한 곳이다 .7) 1958 년에 吉林省박물관은 동대자에서 한 곳의 건물지를 발굴하였다. 당시 발굴의 범위가 상당히 제한되어 건축물 중의 동쪽에 편중된 소부분 만을 발굴하였다 . 그러나 결과는 고구려의 웅대한 궁전의 정연한 배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약보고서에 의하면 노출된 부분은 4 기의 회랑이 상통 된 집자리이다. 동 , 서 나란히 배치된 2 기의 正 屋 ( I 室 과 Il 室)의 보존상 태가 양호하며 서북 모퉁이와 동남 모퉁이의 2 기(매室과 W 室 )는 심하게 파괴되었다. 건물의 기단에는 쇄석을 깔고 동시에 그것을 다져서 상당히 견고하다. 그 위에 질서정연하게 큰 돌로 礎石을 놓았다(그립 4-9). 실내 에서는 아무런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1 실과 Il 실에는 모두 온돌 혼 적이 있으며 그 위에 板石울 덮었다. 그 아래는 炯 道 와 통하게 되었다. 불에는 많이 그을리지 않았다. 그것은 오래 사용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 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원래는 상당히 조밀한 건물로서 위에 붉은색 기 와를 덮고 주위에는 회랑이 둘러싸고 있는 웅장한 건물이었다. 이 건축물의 성격에 대하여 약보고서에는 충분한 검토가 없이 다만 초 보적인 추측만 제시하였다. 〈 正屋의 Il 실(죽, 西室)은 침실이고 1 실(즉, 東室)은 일종의 거실아다. 〉 문장의 결론 부분에서 이 웅장한 건물은 帝 王의 궁실이며 사직에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보고 있다. 다만 건물지 성 격을 규명하는 데 과학적 방법이 결여되어 거기에 대한 보충이 제시되고 있다. 규모와 격식에 따르면, 동대자 건물지는 일반 백성의 가옥은 아니다. 『 舊唐書 』 권 199 에 의하면 〈 高句麗其所居必依山谷, 皆以茅草 葬 舍, 惟佛 寺神廟及王宮, 官府及用瓦(고구려는 그 거주하는 집을 반드시 산계곡에 의 지해서 지었다. 모두 띠풀로 지봉을 이은 집이다. 다만 사원, 神 廟 및 왕궁, 관청은 기와를 덮었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 新唐 書』 권 220 의 기록에는 〈居依山谷, 以草茨屋, 惟王宮, 官府, 佛麻以瓦(산계곡을 의지하고 살며 지 봉에 이엉을 이어서 집을 만들었다. 다만 왕궁, 관청, 불사만 기와를 사용하였 다).〉 이 건물은 기와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절, 神廟 또는 왕궁, 관청의 유형에 속한다. 여기에 따라서 설명을 조금 더 하면 고구려의 신 앙은 상당히 복잡하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불교와 도교 의에 오랫동안 天帝, 태양신, 조상, 산천, 별, 사직과 동굴 등을 숭배하여 왔다.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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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의하면 보고서 중의 佛 寺 , 神廟와 佛麻 등은 고구려의 제사 또는 예 배 활동하는 각종 종교 건축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 건축물은 왕궁, 관청 또는 제사 또는 예배의 종교적 건물 이었을까? 우선 I 실을 분석하여 보자. 1 실 가옥의 중앙에 하나의 직 사각형 巨 石이 우뚝 솟아 있다(원보고서에서는 石座). 이것은 조금 특이 한 설치이며 이 건물의 성격을 해결하는 중요한 열쇠이다. 직사각형 거 석은 길이 0.8 m , 너비 o.6 m , 높이 llm 이다. 하반부가 약 o .4 m 로 가옥 기단부에 묻혀 있고 그 나머지는 지표에 노출되어 있다. 거석 주위에는 보호용 강자갈이 놓여 있다. 보호된 이 강자갈은 지표보다 약간 높고 마 치 원형의 기단 같다. 직사각형 거석과 주위의 강자갈은 〈 실내 중앙에 형성된, 하나의 원형기단을 가전 方柱形 石座가 분명하다 〉 라고 원보고자 는 표현하였다. 이 거석이 I 室의 성격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의의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내 중앙의 가장 중요한 장소에 있으며 차지하는 면적이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주위에 놓은 강자갈을 계산하면 그것은 실내 면적의 1/5 울 차지하고 있다. 실내에서 어떤 활동 을 하려면 반드시 그것을 에워싸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 쓰인 각도를 고려하면 가옥 중앙에 있는 이 거석은 그 배치와 시설로 보아 일상생활 과 관계된 것으로 볼 수 없다. 더욱 왕실귀족의 조우와 문무백관들의 활 동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다. I 실은 왕궁 또는 관청과는 관계가 없다. 실내에서 출토된 유물도 거의 없고 건물 자체가 자주 사용되는 곳이 아 니며 그 중앙에 거실이 설치된 건물은 어떤 제사 또는 예배 장소가 분명 하다. 동대자 건물지 중의 I 室은 어떤 神에게 제사하는 장소일까? 만약 I 室 중앙에 놓인 거대한 장석을 하나의 〈石座〉로 판단하면 그 위에 어떤 신이나 또는 우상을 울려놓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실제로 그 거대한 장석은 臺 座의 형상으로는 부적합하다. 그리고 어떤 것과 관계된 흔적도 없고 심지어 의부는 상당히 거칠다. 고구려에서 가
옥 기둥 밑에 놓인 초석은 대부분 인공이 가해진 것이 뚜렷하며 그 조형 이 아름답고 손질한 기술도 세련된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 따르면 이 거 대한 장석은 석좌는 아니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 E 石崇拜 〉 의 유적이 많 이 발견되었으므로 그러한 용도를 배척할 수는 없다. 그 거석은 어떤 산 비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I 室 중앙에 있는 그 거석은 중국에서 역대로 거행되는 社稷에 대한 제사와 대단히 유사하다. 고대 농경 부락에서는 地母와 農神에 대한 숭배가 대단히 성행하였다. 이러한 숭배는 중국 및 인접한 일부 지역에서 역사상 사직에 대한 제사 로 표현되어 왔다 : 社는 地母이고 稷은 農神(以社爲地母, 以稷爲農神)이 다. 『 說文解字 示部 』 에 〈 社, 地主也 〉 , 죽 社는 土地之神이다. 『禮記 月 令 』 편에 鄭玄이 〈社, 后土也, 使民神焉, 神其農業也(社는 토지신으로 사 람들로 하여금 神으로 여기게 하였다. 神은 곧 농업이다) 〉 라고 注롤 달았다. 전일보한 해석을 가한다면 社를 세우고 제사하는 목적은 농업과 관계되 어 있다. 商, 周 이래 중국에서 역대적으로 제사하는 社主는 대체적으로 2 종이다. 하나는 用樹이고 다른 하나는 立石이다. 『論語 八 1 分 』 편에 〈 哀 公間社於宰我, 宰我日, 夏后氏以松, 殷人以柏, 周人以栗(哀公이 社를 세 우는 데 어떠한 나무가 좋은가 하고 물으니 宰我가 대답하기를 夏后氏는 소나 무로 하였고, 殷人둘은 칙백나무로 세웠고, 周人둘은 밤나무로 세웠다고 말하 였다)), 『周禮 • 地官 • 大司徒 』 편에 〈設其社稷之塘而樹之母之, 各以其野之 所宜木, 遂以名其社與其野(사직의 토담을 설치하고 거기에 나무를 심어 主 가 되도록 하였다. 그 들에 있는 나무에 이름을 지으니 그 社와 그 들〔野〕에게 는 이름이 있었다)〉 죽, 나무(樹)가 社主가 되었다. 立石으로 사주를 세 운 예도 상당히 많다. 예를 들면 『周禮 • 春官 • 小宗伯 』 편에 鄭玄이 〈 (軍 社)社主蓋用石爲之((軍社)社主는 거석으로 그 곳을 덮었다)〉라고 주를 달았 다. 『 呂氏春秋 • 責直論』에 〈(晉文公)城謨之戰, 五敗荊人, 園衛取曹, 拔 石社, 定天子之位, 成尊名於天下(城濃 싸움에서 荊 A 을 다섯 차례나 패배시 켰다. 衛롤 포위하여 曹를 체포하고 石社를 뽑아 내고 그 위에 천자의 지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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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여 그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다) 〉 『 淮南子 齊俗깁 II 』 편에 〈 g文人之 禮 , 其 社用石〉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高誘가 〈 以石爲柱主也 〉 라는 注를 달았다 (殷 A 의 禮는 柱를 石으로 세웠다). 『 太平御覽 』 권 531 편에 許鎭의 간i經 定義 』 를 인용하였다 : 〈 今山陽民俗祀有石主(오늘날 山陽의 민속은 石主에 제사를 지낸다). 〉 『 唐會要 • 社稷 』 편에 의하면 東魏天平 4 年과 唐 神龍 내 의 太社 역시 모두 石主롤 사용하였다. 특별히 梁代의 崔靈恩은 『 三禮儀 宗 』 에서 대단히 긍정적인 기록을 하고 있다 : 『 唐會要 』 권 22, 《 社之神 用石 以土地所主最爲 實 , 故用石也(社의 神은 돌로 세워졌다. 대지에서 가장 主 되고 진실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돌로 만들어졌다) 〉 상기한 내용을 종합 하면 商周 이래 社主는 나무(樹)도 있고 돌(石)도 있다. 연대가 점차 늦 어지면서 또는 지리 위치가 동쪽에 편중된 社에는 돌로 신주를 삼은 것 이 보편적이다. 고구려는 동방의 농업 부족의 하나이다. 그래서 中原 지 구와 마찬가지로 사직에 제사를 지냈다. 그 사주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기타 지역의 지리 위치, 中原의 역사 관계 및 건국 연대와 비교적 늦은 배경들을 고려하면 사주를 돌로 세웠을 가능성이 크다. 殷代갑골문자의 기록에도 사주는 지상에 세우고 그것이 상당한 규모 이며 方整한 형상으로 나와 있다. 이것은 동대자 건축 유적 I 室 중앙에 서 발견된 거석과 똑같다. 1965 년 南京박물관은 江蘇銅山丘 灣 에서 한 곳의 殷代 말년의 社祀를 발굴하였다. 이 유적은 殷代 촌락 유적의 공터에 위치하였다. 75m2 범 위 내에서 제사로 희생된 사람뼈 20 구, 사람 두개골 2 구와 개 骨架 12 구 가 있었다. 그것들의 머리는 중앙의 社主를 향하고 있었다. 사주는 4 境 의 大石으로 만들어졌고 인공의 흔적은 없다. 중간의 가장 큰 대석은 方 柱體로서 크기가 0.22mX0.23mX lm 이다. 아랫단은 쐐기형으로 지하에 깊이 묻혀 있었다. 그 석주는 4 괴로 만들어져서 크기가 다소 작은 것 의 에는 세운 방식, 놓인 위치, 형태 면모, 높은 곳은 더 이상 손대지 않은 L점 들이 동대자 유적 I 室 중앙의 직사각형 거석과 같다. 이 자료는 殷末
에 속하여 연대적으로 거리가 멀지만 社祀는 하나의 오래된 풍습으로 오 랜 시간이 경과하면서 유전되었다. 그리고 신주와 공양방식은 고정되어 전래되어 왔다. 예를 들면, 북경 中山公園에 보존된 明 • 淸 시대의 사직 단은 원래 〈 五色土 〉 이다. 중앙에 사주가 * 하나 서 있으며 모양은 사각형 이다. 따라서 시간상의 거리는 상기한 것들과 바교가 어렵지만 고구려와 殷은 모두 동방 부족이라는 점에서 고려하여 볼 수 있다. 상기한 내용에 근거하여 동대자 건물지는 고구려의 제사와 예배 장소 이다. 전체 I 室은 祀奉地母의 社址와 관계되어 있다. 그리고 1 室 중앙 의 직사각 거석은 당연히 사주이다.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에는 〈 國社 〉 가 있다. 동대자 건축유적은 國內城 畿에 위치하고 있다. 그 거대 장석의 규모와 營 造 격식은 모두 환도산성 의 고구려 궁전 건물지 유적과 비교된다 . 그것은 이곳의 社址가 보통 一 般의 향리의 社가 아니고 당연히 당대의 〈 國社 〉 이다. I 室울 社址로 본다면 그곳과 연결된 正屋의 위치가 문제가 되며, 상 당히 커다란 규모의 Il 室도 〈 臥室 〉 이 될 수 없다. 토지와 농업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로 인하여 역사상 社와 稷은 같이 나란히 제시되어 古 語 중에 〈 사직 〉 을 연결시켜 하나의 단어로 사용하면서 〈 국가 〉 와 동의어 로 삼았다. 상기한 『 周禮 • 地官 • 大司徒 』 의 〈 設其社稷之槿而樹之母之 〉 의 기록은 고대에서 사와 직을 거의 같이 설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동대자 유적의 Il 室은 농신에 供奉히는` 一稷의 장소로 추정된다. 『 梁書 』 권 54 에 〈 (高句麗)於所居之左立大屋, 祭鬼神, 又祠 零 ( 靈 )星, 社 稷(고구려인들이 거주하는 왼쪽에 大屋울 세워서 귀신에게 제사 지내고 또한 祠 靈 星, 社稷에 제사 지냈다)〉으로 기록되었다. 이 짧은 글을 동대자 유적 과 연결시켜 보면 於所居之左立大屋과 일치되며 규모가 광대한 殿宇는 바로 〈 立大屋〉과 일치한다. 동대자 유적은 사직 내에서 제사와 예배한 장소가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祭鬼神, 又祠零( 靈 )星, 社稷〉의 기록 과 일치한다. 재미있는 현상은 『 삼국사기 』 에 『 梁書 』 를 인용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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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는 〈 又 〉 를 〈 冬 〉字 로 쓰고 있다. 그 유적 내에 설치된 두 곳의 온 돌의 火琉 社稷之而 E 가 겨울에 진행되었다면, 소위 〈 冬祠 零 ( 編 )星, 社
稷 〉 이라고 할 수 있다.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기록의 일치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동대자 건축 유적 출토의 와당 문양은 대부분 연화문, 인동문과 獸面 文이다. 그것들은 中原曹魏 이후의 와당 문화와 근접된다. 427 년 고구려 가 도성을 國內에서 옮긴 이후에 集安은 이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 지가 아니다. 고구려 왕실이 여기에 〈 國社 〉 를 營建할 가능성은 드물다. 원보고자는 이 건물유적을 고구려 중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데 그것은 타당하다. 『 삼국사기 』 권 18 과 권 32 에 고구려 중기 故國壤王立國社의 정황을 기 술하고 있다 : 〈 九年 (392) 春三月, 命有司立國社, 修宗廟 〉 ; 〈 九年(서기 392) 春三月, 立國社 〉 등으로 기록되었다. 『 三國志 』 와 『 後漢書 』 의 기록 에 의하면 고구려는 일찍이 사직을 세우고 제사 지냈다. 여기의 소위 〈 立國社 〉 는 創始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4 세기 중엽에 前燕의 모용황이 〈 殿丸都而還 〉 후에 중건된 社이다. 예전에 都를 함락시킬 때에는 반드시 사직이 포함되었다. 集安에 4 세기 중엽 이전의 사직이 존재할 수 없다. 392 년과 427 년은 35 년간의 기간이 있다. 이 기간에 〈국내 〉 는 상당히 안 정되었고 또한 更立國社之擧가 있을 수 없다. 427 년 고구려가 천도한 이 후에 고구려가 再立國社룰 위하여 集安에 돌아울 수 없다. 그러므로 동 대자 고구려 건물지는 바로 고국양왕 9 년 (392) 봄 3 월에 興修된 왕실 사 직과 종묘일 가능성이 크다.3 평양성 외성 안의 리방 평양성의 도시 유적은 의성 내에서 확인되었다. 里坊 유적은 1954 년 김책공업종합대학 건설장에서 발굴되었으며 고구 려 때의 도시 리방 구획과 운하터가 확인되었다. 도로의 겉면은 20cm 정도의 두께로 강자갈이 포장되어 있다. 도로 너 비는 12.6 - 12.Sm, 돌포장 길 좌우측에는 60-70cm 너비로 검은색 감탕 충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도로 좌우 옆에 물도랑 자리였다. 큰 길의 좌 우측 도랑을 포함한 너바는 13 . 8 - 14m 이다. 건설장에서 발굴된 도로 사이의 구획 너비는 동서 120m, 남북 너비 84m 이다. 리방 유적은 지금의 평천구역 일대에서도 확인되었다. 직사각형 도로 구획의 가로, 세로, 너비는 각각 84m 이다. 김책공업종합대학 발굴자료에 의하면 함구문 - 정양문 입구 간의 실측치 에 맞게 동서로 직사각형의 리방울 계산하면 다음 표 4 -3 과 같다. 함구문-정양문 구간의 리방은 동서로 1 개 리에 4 개 방 8 개 구로 구획 되며, 김책공업종합대학 건설장에서 발굴된 도로 구획에 따라서 120mX
표 4-3 유적구간별 리방구획배치계산표 (단위 :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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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m 의 동서 직사각형으로 이 구간의 리방 유적을 복원할 수 있다고 한 다. 고구려 도시 리방은 함구문-정양문 구간에서는 김책공업종합대학 건 설장으로 이루어졌다. 측, 한 변의 길이가 84m 되는 정사각형으로 구획 되었다. 리방 구획도 고구려자(尺)에 의해서 계획되었으리라고 추정된 다. 정사각형 구역의 한 변의 길이 84m 는 240 자, 정사각형 구획의 동서 너비 약 120m 되는 곳은 340 자가 적용된다는 것이다. 6 세기 평양성에 발전된 리방 제도를 보여 준다고 제시하고 있다 .8) 4 안학궁터의 리방 안학궁터의 고구려 리방은 최근에 발견된 자료이다. 이에 따라서 안학 궁 도읍 시기의 고구려 도시(里坊)를 복원할 수 있었다 .9) 평양시 대성구역 일대에서는 안학궁터와 대성산성을 중심으로 하여 고 방산성, 청호리 토성, 청암리 토성, 금강사지, 청호리사지, 상오리사지, 대동강의 고구려 나무다리, 고산동 우물, 그 의 집터와 도로 흔적, 기와 등이 발견되었다. 안학궁터 부근 일대는 586 년에 지금의 평양시 중심부에 평양성 (장안 성)을 쌓고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의 고구려 도읍지라고 추측된다(그림 4- 15, 4-16}. 당시 고구려 수도는 안학궁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금강사 지, 상오리사지, 칭호리사지와 새로 복구된 광법사 등이 당시의 도시구 획 부근이거나 또는 구획 내의 사지일 것이다. 지리학적으로 도로구획이 확인된 청호동과 임흥동, 안학궁터의 서쪽 지대는 해발 10m 이상으로 대동강 홍수 피해가 없는 곳이다. 평양성 의성 안에 고구려 리방 유적이 1910 년대의 지형도에 표시되고, 또 같은 시기의 지형도에 청호동, 임흥동, 안학궁터 서쪽 지대의 해발
제 4 장 건축물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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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m 이상 되는 곳에 도로 구획이 표시된 것을 보아 이 일대 고구려 도 로구획이 지금까지 잔존된 것은 당연하다. 안학궁터 부근에 총 484 개의 작은 구획에 121 개의 큰 구획이 전개될 수 있었으며, 리방 구획의 크기는 도로 구획의 크기에 준하여 작은 구획 은 140m, 큰 구획은 280m 로 추정된다. 네 개의 작은 구획아 합쳐져서 형성된 큰 구획은 다시 네 개씩 합쳐져 서 평양성 의성 안의 리방에서와 같이 한 개의 방으로 구성될 수 있다. 그로 인하여 안학궁 도읍 시기에 〈 여전 〉 을 제의하고도 36 개의 방이 존재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을 다시 네 개로 합쳐서 평양성 의성 안의 리 방에서와 같이 어느 곳에서 보아도 〈 4 전 8 구 〉 의 리가 된다. 그러한 리가 9 개 배치된다. 그렇게 되면 한 개 리 안에서 64 개의 작은 구획이 있게 되며 안학궁 도읍 시기의 고구려 수도가 상당히 큰 도시였다고 할 수 있다. 안학궁 부근의 리방 구획은 고구려 시기의 단위와 일치한다. 안학궁 도읍 시기의 리방은 작은 구획 400 자(고구려자), 큰 구획 800 자로 계획되 었다고 하며 한 개의 방 크기는 1600 자, 리의 크기는 3200 자가 된다고 한다. 당시의 리방은 의곽 성곽 같은 의부 제한이 없는 곳에 〈 정정방방 〉 으로 계획되었다고 보고 있다(그림 4-17). 안학궁의 평면은 450 자 단위 기준으로 구획이 분할되어 전체 평면이 4 대 4 의 바례가 된다. 즉, 전체 너비는 1800 자이며 그 절반 크기인 900 자, 1450 자로 나누어졌다. 그로 인해서 안학궁의 전체 평면은 16 구획으로 나 누어졌다. 안학궁 평면 계획은 그 일대의 도시 계획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작은 구획 400 자, 큰 구획 800 자를 더 확대 하면 한 개 의 방은 1600 자, 매개 방에는 16 개의 작은 구획이 배치된다고 한다. 〈 구 〉〈 방 〉〈 리 〉 의 구성 방식에 따르면, 그 일대의 리방은 그 後身이라고 할 수 있는 평양성 의성 안의 리방과 같다. 안학궁 부근의 리방의 작은 구획, 죽 〈구〉의 크기는 400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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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안학궁 부근의 리방은 그 계획방법이나 단위체계가 안학궁 도읍 시기와 부합된다고 볼 수 있다. 5 장수산 일대의 집터 1984 년부터 황해남도 신원군의 장수산과 그 일대의 고구려 유적과 유 물이 조사되교 1985 년 봄부터 1988 년까지 발굴되었다 .10) 장수산은 북위 38 도 5 분, 동경 125 도 45 분경에 높이 솟은 산이다. 북 쪽으로 황해남도 재령군, 남쪽으로 신원군이 접하고 있다(그림 4~18 a). 이 장수산에 위치한 산성의 총둘레는 약 10 , 500m 이다. 그 중 성벽을 쌓은 구간은 6ooom 이다. 산성은 륭소의 서쪽 벼랑을 경계로 해서 분지 와 골짜기를 가로막은 두 개의 성으로 되어 있다. 성벽은 장수산에 혼한 규질암의 돌을 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의 방추 모양으로 다듬어서 6 합으로 맞물려 의면 또는 양면으로 쌓았으며 높이는 250-270cm, 너비는 아랫부 분이 320-350cm, 윗부분이 230-250cm 이다. 성에는 문이 모두 여섯 개 있다. 아래의 성에 남문, 북문, 동문, 위의 성에 남문, 서문, 북문이 있다. 성들 주위에서 기와가 출토된 것에 의하 면 모두 문루를 세웠던 것 같다. 성에는 옹성, 장대, 치, 성가퀴, 사혈, 행궁터 등 수십 개의 건물터, 우물, 못 등이 있었다(그립 4-18b). 평지성은 장수산성에서 남쪽으로 약 1km 지점의 재령강 서안인 아양 동, 성현동의 벌판에 흙으로 축조하였다. 장수산 일대의 고분은 · 남쪽 기슭에 300 여 기, 길재동에 100 여 기 등이 떼를 지어 있다. 무덤 형식은 평천장식 봉토석실묘와 고임천장식 봉토석 실묘이다. 평천장식 봉토석실묘는 하니봉 남쪽 기슭에 300 여 기 분포되 어 있고 그 의에는 모두 고임천장식 봉토석실묘이다.
(• · .::• 장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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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산 일대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기와, 벽돌, 질그릇, 도기류, 옥 돌제 도장, 철제의 개마모형, 쇠아궁이 등이다. 상기한 몇 가지 내용은 장수산 일대가 고구려 남부지방의 정치, 경제, 군사적 거점이라는 것을 나타내어 준다. 죽, 장수산 일대는 고구려의 남 평양이다. 남평양은 고구려의 별도로서 수도 다음가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장수산 일대의 유적과 유물에서 〈 리방 〉 터나 〈 치미 〉 가 발견되었다. 그 것들은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이나 왕궁터였던 안학궁에서 출토된 바 있 다. 고구려는 남평양을 나라의 남부 지역에 있는 임시 수도로 정하였다. 장수산성 1 호 건물 장수산성 일대에서 산성, 평지성, 건축지, 무덤 등 고구려 유적과 유 물이 많이 확인되었다 .11) 내성과 의성으로 구분되어 있는 장수산성 안에 모두 80 여 채분의 건물 터가 있다. 그 중 의성 안에서 발굴한 것이 바로 1 호 건물터이다. 1 호 건물터는 삼치골 동북쪽 산능선의 남향 경사면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1 호 건물 주변에 많은 건물터와 시설물이 있다. 건물터 밀에 40 여 채분의 건물터가 있고 서쪽의 우물 끝에는 10 여 채분의 건물터가 있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5 칸 (21m), 옆면 2 칸 (7m) 이며 주위에 놓인 주추자 릿돌 간격과 배열 상태로 보아 회랑 시설이 파악된다. 회랑의 너비는 1.5 m 이며 회랑까지 포함한 건물의 동서 길이는 24m, 남북 너비는 10m 이 다. 건물터에서 출토된 유물은 기와와 벽돌이다. 기와는 붉은색이며 태 토에는 석면과 모래가 섞였다. 암키와의 두께는 대체로 1-Ucm 이다. 암키와 앞면에는 배천 무늬, 뒷면에는 노끈 무늬, 격자 무늬, 그물 무늬 등이 있다. 수키와의 크기는 47-50cm, 앞면 너비 17-18cm, 높이 10cm, 뒷면 너비 13-14cm, 높이 7cm 이며, 두께는 1. 5-2cm 이다. 수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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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막새는 건물 바닥에서 출토되었다. 막새의 크기는 지름 18 cm, 두께 2.3cm, 막새 테두리 크기는 1. 3cm 이다. 문양은 막새 중심에 반구형 꼭 지가 있고 꼭지롤 중심으로 4 개의 연꽃잎과 감자꽃 모양의 4 개의 나뭇잎 울 엇바꾸어 배치하였다. 그리고 꽃잎의 좌우에 삼각형 꼬리가 달린 모 양으로 된 2 개 꽃술을 각각 배치하였는데 모두 8 개이다. 건물터에서 출토된 벽돌은 태토가 부드러운 점토이며 회색이다. 큰 것 은 길이 30cm, 너비 15cm, 두께 5cm 이고, 작은 것은 길이 25cm, 너비 14cm, 두께 4.5cm 이다. 벽돌에 명문이 있다. 그 형식은 산성 부근에서 발견된 〈 영가 7 년 〉 의 명문 벽돌과 갇다. 건물터에서 출토된 붉은색 기와의 무늬 등은 장수산성 아래 아양리와 월당리 일대의 고구려 건물터를 비롯하여 장수원 일대, 봉산군 토성리 등지의 다른 고구려 유적 등에서 출토된 기와들과 공통성을 가졌다 한다. 건물터에서 붉은 기와와 함께 출토된 회색 벽돌은 고구려 벽돌로 추측 되는데 영가 7 년은 313 년에 해당된다. 따라서 1 호 건물터 연대는 회색 벽돌과 함께 출토된 붉은 기와의 연대로 보아 4 세기 초 • 중엽으로 보고 있다 . 1 호 건물터의 규모는 크다(그립 4-19). 건물의 평면 구성은 건물 중심 부에 기둥을 세우지 않았다. 그 공간은 정면 12.6m, 옆면 7m 이다. 이러 한 형석은 건물의 내부 공간을 넓게 하기 위한 것으로 안학궁을 비롯한 궁전 건축에 많이 적용되고 있다. 6 광개토대왕릉비 吉林省의 비각 중 고구려 시대의 광개토대왕릉비가 연대적으로 가장 이르다. 12) 그것은 대단히 높은 역사, 과학, 예술적 가치가 있어서 〈遼東
제 4 장 건축물 255
0OAO。OQ OcoOoO0戶0 O0 0흙 ob。o ^o) 。 웅 。 o& o` 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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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古碑 〉 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集安시 市區에서 동쪽 으로 4km 지점인 太王征겨頃i에 있다. 호태왕은 고구려 제 19 대 왕으로 이름은 安 또는 談德이라고 한다. 그 는 391 년에 즉위하여 412 년에 殘하기까지 재위 22 년 동안 국토를 확장하 였다. 그는 백제, 부여, 비려를 정벌하였으며 여러 차례 왜구를 공격하 였으나 실패하였다. 그의 사후에 〈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 이라는 시 호를 내렸다. 그의 아들 장수왕은 그 아버지의 공덕을 기념하기 위하여 414 년에 好太王陵의 동쪽에 묘지기의 이름을 銘記한 거대한 호태왕비를 세웠다. 호태왕비는 角礎;疑灰岩울 가공하여 만들었다. 비석의 높이 6.39m, 폭 의 너비는 일정하지 않다. 저부 너비 l.34 -l. 97 m, 정상부 너비 1.0 0- 1. 60m 이 다. 제 3 면의 가장 넓 은 곳은 2 . oom 가 된다. 비 면 4 면을 돌아가면 서 글을 새겼다. 면마다 가로세로의 줄(行)이 맞추어졌는데 글자는 규칙 적인 직사각형이다. 행간의 거리는 12.5-13 . Scm 이다. 각 행의 가장 마지 막 글자는 비석 기단부에서 o.25m 거리이다. 비문은 방정한 예서체이 다. 필체가 단정하며 章法도 갖추어졌다. 행간의 수직으로 刻한 범위(界 格)는 그 배치가 엄격하다. 자형의 규격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아서 큰 것의 길이는 16cm, 작은 것의 길이는 11cm 이다. 다만, 보통은 모두 13-14cm 사이다. 4 면 비문은 모두 44 행으로 1775 자이지만 파손된 것과 박 락된 것을 제의하면 1590 자가 판독된다. 제 1 면은 동남 방향으로 비문이 11 행으로 각 행은 41 자이다. 제 6 행 아 랫부분에서 원문 두 자가 없어서 이 면의 문자는 모두 449 자이다. 제 2 면은 서남 방향으로 비문이 10 행 있다. 제 8, 9, 두 행의 상부가 자 연적으로 파손되었으며 글을 새길 때 7 자와 16 자를 뛰어넘어 공간을 남 겼다. 나머지 각 행은 41 자이고 이 면의 원문은 모두 387 자이다. 제 3 면은 서북 방향이며 비문은 14 행이다. 각 행 41 자로서 모두 574 자 01 다.
제 4 면은 동북 방향에 비문은 9 행이다. 제 1 행 처음에 비석이 자연 훼손 되어 4 자의 공백을 남겼다. 나머지 각 행은 41 자로서 모두 365 자이다. 비문 내용은 먼저 고구려 건국신화를 서술한 후 호태왕의 평생업적을 기술하고 마지막으로 330 명의 묘 관리인을 추천해서 파견한 정황과 묘 관리인이 지켜야 할 법규를 기록하였다(그립 4- 2 0). 1875 에 사람들은 덩굴이 엉킨 풀 속에서 호태왕비를 발견하였다. 비면 에는 푸릇푸릇한 이끼가 가득하였다. 비문을 탁본하기 위하여 말똥울 비 면 위에 바른 다음 그것이 마론 후 불을 지폈다. 그래서 이끼를 제거하 자 비석 자체도 열에 의해서 손상되었다. 맹목적인 탁본과 자연적 풍화 작용이 일어나서 비석은 상당히 손상되었다. 1907 년을 전후해서 일본인 둘은 그 비석을 일본으로 운반하려고 계획했으나 그곳 주민들의 강력한
그림 4-20 광개토대왕릉비
저지를 받게 되었다. 1927 년 集安縣 工商界에서 자금을 모아 광개토대왕 롱비를 보호할 집( 亭 )을 짓기로 하고 그 다음해에 준공을 하였다. 1949 년 이후 광개토대왕릉비는 주목을 받게 되었고 1961 년 通溝고분군(好太 王碑 포함)은 國務院의 발표로 인해서 全國第一批 重 點文物保護單位(국보 급)로 인정되었다. 그런 다음 국가, 성, 현 문물관리 부처에서 그 비석 을 여러 차례 조사, 실측했다. 그리고 일찍이 불에 탄 것, 풍화 작용에 의한 균열(또는 파손) 등에 대해서도 조사를 한 후 보존 처리를 실시해서 좋은 효과를 보게 되었다. 1976 년 비석의 기단부를 보호하기 위해서 64m 떡 정사각형 시멘트 기단부를 설치하였다. 1982 년 5 월, 광개토대왕 릉비의 집을 새롭게 손질하였는데 비석 보호집의 높이는 14.3 0 m, 건물 면적 140 .4 2m2 이댜 중국사회과학원 부원장이며 중국고고연구소장인 고 고학자 夏 籠가 광개토대왕릉비亭의 편액을 썼다. 광개토대왕릉비 바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문은 『 吉林省志 』 212 - 215 쪽에 있는 그대로를 전 재한다. 7 광개토대왕릉비의 발견과 탁본 1) 광개토대왕릉비의 건립 기원전 37 년, 현 遼寧省 桓仁縣과 吉林省 集安 일대에 高句麗 王朝가 세워졌다. 이 왕조는 700 여 년 (705} 동안에 거쳐 많은 유적과 유물을 남 겨 주었다. 광개토대왕릉바는 고구려의 값진 문물 중의 하나이다. 好太王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제 19 대 왕이며 이름은 安이다. 『 삼국사 기』에는 그의 이름이 談德이다. 談은 安과 동일한 音이며 德字는 收音이 다. 비록 묘사법이 다르지만 실은 동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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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태왕은 391 년에 즉위하여 412 년에 서거하였다. 그의 통치 22 년 동안 에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하고 북쪽으로 부여를 침범하고 서쪽으로 비려 를 토벌하였으며 여러 차례 일본을 공격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는 통치 구역을 확대해서 압록강 兩岸과 漢 水以北 지역을 석권해서 그가 죽은 후 시호를 〈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 이라고 내렸다. 근세의 연구가들은 약칭으로 〈 廣開土王 〉〈 平安好太王 〉 〈 好太王 〉 또는 비문기록 칭위를 근거 하여 〈 永樂大王 〉 이라고 부른다. 國岡上은 그의 매장지를 지적하는 것으 로 지금의 吉林省 集安縣에서 동쪽으로 9 화리 되는 太王公社의 大碑街에 있다. 현재 그의 능묘도 존재해서 1 기의 대형 방단적석묘로 남아 있다. 묘에서 〈 愍太王陵安如山固岳 〉 명문이 적힌 불에 탄 벽돌이 출토된 바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그의 아들 장수왕이 부친의 공덕을 기념하고 묘지를 지키는 사람들의 이름을 명기하기 위하여 414 년 장수왕 2 년(중국 東晉 文 熙 10 년)에 광개토대왕릉 동쪽에 세웠다. 2) 광개토대왕릉비의 발견 현재 集安縣에 보존된 고구려 국내성의 성지는 당시 고구려의 왕도이 다. 서기 3 년부터 瑠璃王(유리명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한 때부터 광개토 대왕의 세대까지 고구려 정치의 중심지였다. 427 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후 국내성은 중요한 정치, 군사 지위를 상실하여 쇠락하기 시작 하였다. 고구려 왕조 멸망 (668) 후 安東都護府 관할로 귀속되었다. 그 후에 발해가 桓州를 설립하고 西京鴨綠府에 예속되었다. 賈 I t r 道理記』 속에 그곳은 일찍이 고구려 왕도로 기록되었는데 당시 渤海朝貢道의 하 나의 중요한 지점이었다. 또한 『 遼史 • 地理志 』 에 기록되기를, 그곳에 遼 역시 桓州롤 설치하였고, 또한 그곳은 고구려 고도로 기록되었다• 金代 에 이르러서 東京道의 婆速府관할로 예속되면서 군대를 파견하여 주둔
시켰다. 지하에서 출토된 文物입장에서 보면 비록 옛날처럼 번성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중요한 治,Jj-로 소홀히 취급되지 않았다. 元代에는 東宰 路에, 明{t에는 建州衛에 예속되었다. 그리고 폐허가 되기 시작하였다. 淸朝에서는 滿族祖上의 발상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리고 황실의 특수 이익을 위하여 長白山 일대의 광대한 지역을 출입 금지 지역(封禁之地)으 로 묶어 놓았다. 그로 인하여 인가의 굴뚝 연기가 없는 황량한 지역으로 변하였다. 金代부터 그 고구려 고도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으며, 곧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사라졌다. 史書에 본래 기록이 없었던 광개토대왕릉비는 세 월의 흐름과 더불어 사라지고 비석 자체에 이끼가 자라서 사람들이 그것 울 인식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明代 이후에 조선의 책 속에서 그곳의 大墓와 大碑가 거론되었다. 그 러나 그것은 金나라의 皇帝墓와 皇帝碑로 인정되었으며 그곳은 金나라의 皇城으로 인정되었다. 1536 년 朝鮮晋邊使 沈彦光은 滿浦에서부터 集安 일대를 돌아보고 〈 完顔故國荒城在, 皇帝遺壇巨磯存〉이라는 詩句를 남겼 다. 그 내용은 1444 년의 『 龍飛御天歌』에서 1872 년 『 江界志 』 에 이르기까 지 그와 같이 기록되었다. 또한 북한 과학원 원사였던 朴時亨도 그것에 대하여 〈 명확한 陵碑의 진상은 없다(沒有明確陵碑的眞像)〉라고 발표하였 다. 비록 개별적인 碑가 있다고 알고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고구려 광개 토대왕릉비가 있었다는 것은 몰랐다. 1875 년을 전후해서야 비로소 중국 의 금석학자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그것이 고구려 廣開土墓碑로 명확히 알려졌다. 劉承干의 『 海東金石苑補遺』의 기록에는 〈此碑(指好太王碑拓本)同治末年 傳入京~iji(北京) , 吳縣潘文勤公祖藤先得之〉로 되 어 있다. 張延厚의 『好太 王碑跋語』에는 〈淸光緖初, 吳縣潘鄭盆(潘祖藤)尙書始訪得之〉로 기록되었 다. 東北歷史를 깊이 연구하고 東北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金籠獻은 자 신이 편집한 『 遼東文獻fiE署』에서 그 비가 1875 년에 발견된 것을 인정하
고 동시에 桓仁縣(설치 당시 원래 이름 懷仁縣)의 설치위원인 章樞의 부하 가 발견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금석학에 조예가 깊은 顧燮光은 그의 『 夢 碧籍石言 』 에서, 그의 친구가 集安에 가서 戴蔡甫의 말을 들었는데 그 비 는 光緖 元年 (1875) 에 동쪽 황무지를 개간할 때 발견되었다는 것을 밝혔 다. 다만 葉昌織의 r 語石 』 에는 그것이 光緖 六年에 발견되었다고 기록되 었다. 몇 사람은 葉氏의 기록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 내용을 받아들이기 는 어렵다. 葉氏의 『 語石 』 중 광개토대왕릉비에 관한 기술도 각종 전설 로 전하는 내용을 근거로 하였고 구체적인 조사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그 비는 光緖 初年에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그 절대연대는 충 분히 긍정적은 아니다. 유일하게 戴蔡甫는 1875 년이라고 보고 있다. 葉 昌織이 만약 그러한 주장을 부정한다면 반드시 이유를 제시하여야 될 텐 데 그러한 예가 없다. 다만 光緖 六年에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아마 六년 은 元년을 잘못 기재 또는 잘못 刻한 소치로 볼 수 있다. 이유는 두 글 자가 대단히 비슷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주장을 근거해서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종합하면 그 비의 발 견 시기는 1875 년이 믿을 만하다• 淸代 康熙年間에 柳條邊울 수축하면서 集安 내의 동북 동부 지역의 광 대한 지역을 출입 금지 구역으로 정하였다. 사람들은 그곳에 가서 개간 하거나 몰래 들어가지 못하였다. 법을 어기면 중벌을 가하여 감히 들어 가지 못해서 그곳이 더욱 황폐해졌다. 그러나 금지 구역도 결국 사람들 의 호기심을 막지 못하였다. 소위 〈법이 비록 엄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을 따르지 못하였다(律令難嚴而法下及衆).〉 乾隆 이후 범법자가 늘어났고 淸 代 말기에는 몰래 들어가서 개간하는 자가 점점 늘어나서 법으로 금지할 수 없었다. 그 이후 정부의 재정수입을 증가시키고, 변방의 수비를 공고 히 하기 위하여 光緖 元年에 盛京장군 崇實이 淸 정부에 허락을 요구하 여 파견할 위원을 구성해서 경작지 조사, 호구 정리, 사무 관리 등을 결 정하도록 하였다. 光緖 2 년에 정식으로 懷仁縣(후에 桓仁縣으로 개칭)이
설치되었다. 광개토대왕릉비 소재지는 당시 通溝口子로 불렸고 후에 懷 仁縣 관할로 귀속되었다. 談國桓 『 手札 』 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파견된 懷仁縣 설립 위원은 章槪 였는데 그 이름은 『 桓仁縣志 』 의 기록과 같다. 그의 수하에 서기로서 關 月山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金石學을 대단히 좋아하고 특히 비석 탁본도 좋아하였다. 그는 공무 중에도 여가가 있으면 도처의 고적 울 순방하였다. 결국 그는 우거진 풀 속에서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를 발견하였다. 談 國桓의 『 手札 .!I 이 r 遼東文獻征署 』 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 에 關 月 山의 발견에 관해서 나와 있는대 手拓한 글내용(字)을 金石울 좋 아하는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앞을 다두어 탁본 을 하러 갔고 그것이 京師에 전입되었다( 〈 始傳入京師 〉 ). 談 國桓의 기술이 비교적 자세하고 구체적이다. 비석의 크기에 대해서 도 다론 사람보다 정확하다. 談國才탄이 1929 년 8 월 25 일 호태왕비의 탁본 1 매를 주면서 한 말은 다음과 같다 : 光緖十一年 歲在乙酉, 先君子宰承 德 首邑 晉 引入者!, 章君代理縣事, 其書啓西席關君月 山, 贈余手拓碑字數 枚, 因此碑也. 字基完整, 拓工亦精, 情탐年不知賓賞, 隨手捷葉(광서 11 년, 때는 을유, 부친의 허가를 받아 으뜸 지역에 들어갔다. 그때 章君이 현의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關月 山이 서기로 있었는데 그가 나에게 몇 장의 탁본을 증정하였다. 이 비문이 바로 그것이다. 자체가 완정하고 탁본이 잘 되어 있었 다. 아깝게도 본인이 나이가 어려 그 가치를 몰라서 함무로 취급하였다). 談國桓의 그때 나이 16 세 (1870) 로서 承德衛署中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 다. 그는 關月 山과 왕래를 하고 있었다. 〈字若完整, 拓工亦精〉의 자구로 보면 그는 금석문에 대하여 어느 정도 판별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말한 내용은 믿을 수 있다. 그는 關月 山올 최초의 발견자라고 하였으며, 또한 光緖 初葉의 탁본이라는 것도 關月山이 광개토대왕릉비를 발견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談國桓의 부친 談廣慶은 사람에게 부탁해서 光緖 13 년 (1887) 이후에
수 차례나 桓仁에 사람을 보내서 탁본을 하였다. 그의 집에 자신이 탁본 한 1887 년의 精裝 탁본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 가족이 광개토대 왕릉비의 정황에 대하여 타인보다 더욱 자세히 알고 있음을 증명한다. 상기한 내용을 종합하면 광개토대왕릉비는 1875 년 章槪의 서기, 금석 애호가 關月山이 발견하였다. 3) 광개토대왕릉비의 탁본 (1) 탁본 인원과 탁본 과정 광개토대왕릉비를 발견한 사람은 關月 山이며 최초로 탁본한 사람도 그 사람이다. 다만 완정한 탁본은 하지 못하였다. 발견된 자료에 따르면 완정된 탁본을 한 사람들은 李大龍, 談廣慶, 王 少祖 李雲從, 元丹山, 初鵬度 등이다. 그 의 張明善이 1963 년 탁본을 하였고 周雲台가 1981 년 탁본하였다. 뒤에 두 사람의 탁본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더 거론하지 않겠다. 다음은 여러 학자와 관련된 기록 내용이다 : 張延厚가 발췌한 것은 『 遼東文獻征署』에 기록되었으며 談國桓의 『手札』이 『 遼東文獻征署 』 에 기 록되었고 萊禧의 『 高句麗永樂大王墓碑講言』도 있으며 劉承干이 발췌한 내용이 『 海東金石苑補遺』에 있고 葉昌織의 『 語石 』 에도 기록이 있다. 또 한 일본인 關野貞의 『滿洲輯安縣和平壤附近的高句麗遺述』 1913 년 조사, 1914 년의 《考古學雜志》 제 5 권 제 3, 4 호에 발표한 내용만 살펴보겠다. 〈碑石 부근 초가집에 初鵬度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탁본 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었다. 그는 금년 (1913 년 당시) 66 세이며 30 년 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다. 당시 知縣의 명을 받아 탁본을 하였다. 비 석면에 이끼 (若薛)가 자라서 불로 그것을 태웠다. 그 결과 碑角 (비석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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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이)이 떨어져 나갔다. 또한 비면이 거칠어서 탁본 문자가 뚜렷하지 않 아 10 여 년 전부터 비석면 문자 주변의 공간에 석회를 발랐다. 이후 매 년 석회로 곳곳을 때웠다. 우리들이 자세히 관찰하여 보니 문자 주변에 석회를 발랐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 석회로 자획도 보충하였다. 완전해 보이는 어떤 자는 석회 위에 새로 각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보충된 자는 대개 원자와 근사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믿기는 대단히 어렵다〉라고 기 록하였다. 王健群 등은 상기한 저술들을 근거로 분석하면서 동시에 실지조사를 진행하였다. 그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먼저 그들은 李大龍이 李雲從과 동일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雲從은 李 大龍의 字로 여기고 있다. 중국은 자고 이래 사람의 字와 명(이름)은 언 제나 종속적이다. 예를 들면, 諸葛亮 字 孔明, 周諭 字 公瑾 등이며 현 대에 이르러서 王國維 字 伯!混 談國桓 字 鐵陸 등이다. 李大龍 字 雲 從, 죽 取 〈 雲從龍 〉 은 그 뜻이다. 光緖 初年에 潘祖藤이 李大龍裏根에게 명하여 탁본을 하여 오도록 하였다. 그 결과 50 本울 하여 왔다• 돈 있는 자들이 앞을 다투어 그것을 샀다. 李大龍이 보니 대단히 쉽게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해서 다시 갈 계획을 세웠지만 길이 멀어 포기하였다(傾 欲再往 以道達工巨而止). 1887 년에 盛릎이 자본을 준비하여 다시 가도록 해서 소위 〈裏稽扶墨〉, 〈再往返〉, 〈始得精拓本〉하였다. 오랫동안 많은 학자들이 다시 다녀온다(再往返)는 것을 실천하지 못하였다. 李大龍(李雲 從)은 두 차례 通溝에 가서 당연히 再往返이 되었다. 규丹山은 榮禧의 『調言』에 뚜렷하게 기록되었다. 일본, 한국의 학자들 은 〈규〉字에 대해서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어서 추측울 한 후에 方月 山 또는 卞丹山으로 고쳐 썼다. 규는 원래 古文字이다. 그 자는 姓氏로 자 고 이래 계속 사용되어 왔다. 唐에도 규志가 있고 宋에도 규贊이 있고 明나라에도 규宣이 있었다. 字形이 특수하여 후에 산동에서는 4 大怪姓의 하나가 되었다. 규禧는 그(규姓 가진 자)는 산동 포목상(布衣)이라고 말
하였다. 믿을 수 있는 말이다. 다음은 初鵬度라는 인물에 대하여 살펴보자. 그는 이 사건(탁본 처리) 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일본인 關野貞은 1913 년 集安울 조사할 때 初鵬度를 만났다. 그는 關 野貞에게 많은 정황을 제공하였다. 그의 이름은 初天富라고 불렀고 初鵬 度라고 하지 않았다. 初天富 {1847-1918) 의 형은 初天賞라고 불렀다. 두 형제는 懷仁縣 설치 이전에 산동성 文登縣에서 通溝로 도망왔다. 그는 농부로 〈鵬度〉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것은 품위 있는 이름자로서 그의 형 이름과 관계를 지울 수 없다. 그는 關野貞에게 그가 30 년 전에 知縣의 명령을 받아 그곳에서 비석을 탁본하였다고 말하였다. 30 년을 소 급해서 이야기하였는데, 1883 년(光緖 8 년)에 그가 비석의 탁본을 시작하 였다는 것이다. 당시 章樞은 懷仁縣의 知縣이었다. 關月山도 역시 懷仁 縣에 있었다. 비석은 關月山이 발견하였다. 關은 또한 知縣의 서기 겸 莫友 또는 선생이었다. 따라서 탁본시에는 關月山과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關月 山이 발견한 비석과 탁본에 관해서는 그와 절대적 관계가 필요하였다. 初天富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關野貞과 關月 山의 일들을 이야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상기한 이름(名)과 字의 분석 울 통해서 보면 〈鵬度〉 두 자는 關月山의 자일 가능성이 크다. 즉 〈 關山 度若飛〉의 뜻이다. 당시의 습관에 의하면 상사, 웃어른(長上)에 대해서 심지어 동년배 사이에서도 다만 稱字와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직접 그 이 름을 부르지 않았다. 당시 懷仁縣의 백성들은 關月 山의 자를 칭호하였을 것이다. 이 내용을 생각하여 본 것이다. 여하튼 初天富롤 初鵬度로 부르 지 않았다. 그는 그의 자식 初切德과 함께 비석 부근의 초가집에서 살고 있었다. 부자 2 대가 계속해서 60 여 년 동안 탁본을 하였다. 1938 년 전후 해서 初均德이 그곳을 떠나서 중지되었다. 이것은 사실이다. 1981 년 6 월과 7 월에 王健群 일행은 비석의 서남쪽에 사는 楊維財 노인 과 비석 북쪽에 사는 辛文厚 노인을 방문하였다. 두 사람은 그곳에 오랫
동안 살았다. 그들의 방문기록을 살펴보자. 방문 시간 : 1981 년 6 월 8 일 상오 방문 대상 : 楊維財(男 79 세,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서남쪽으로 200m 지접에 거주) 방문인 : 王健群, 方起東 楊維財의 이야기 내용: 나는: 14 세 때 관동을 떠나 헤매다가 19 세 때 (1921) 集安의 大荒區에 왔다. 나는 큰 마차를 몰고 이곳을 지나다가 初 氏롤 알게 되었다. 그곳 사람들은 그롤 初大碑라고 불렀다. 그는 키가 크고, 전장하였으며 성격이 곧은 사람이었다. 그의 말소리는 山東 文登 人의 소리였다. 그는 비석 뒤편의 조그마한 초가집에 살고 있었다. 집 안에는 온통 먹냄새뿐이었다. 그 사람은 큰 책자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길이 약 50-60cm 정도). 책에는 비석의 비문이 쓰여 있었다. 그는 비석 주위에 架子룰 세워 놓고 그 위에 울라가서 창호지를 비석 위에 붙이고 조금씩 탁본하기 시작하였다. 홈이 있는 곳에 석회를 발라 평탄케 하였 다. 그가 탁본한 비문은 각 세트가 十元에 팔릴 수 있었다. 상당수 의국 인이 그것을 사러 왔으나 의국인이 탁본한 일은 없고 그가 탁본한 것을 타인에게 팔았다. 내가 初大碑에게 문의한 일이 있다. 당신은 언제부터 탁본을 시작하였 는가? 다른 사람이 탁본한 일이 있는가? 初大碑는 언제 시작하였느냐 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만 그의 가족들을 제의하고 탁본한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初大碑가 말하기를, 과거에 비석 위에 이끼가 두텁게 자라고 있었다. 얼마 후에 이끼 위에 쇠똥울 발랐고 쇠똥이 마르 자 거기에 불을 지폈다. 이끼가 불에 타서 떨어지면서 비로소 탁본을 하 였다. 불을 지폈울 때 비석의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初大碑는 후에 그의 조카가 사는 곳으로 이주하였다. 그가 원래 살던 작은 방에는 潘林이 살게 되었고 몇 년 전에 비석 주위에 세웠던 담장이
없어졌다. 후에 王健群 일행은 그 노인이 지적한 初大碑가 初天 富 의 아들 初均德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번째 방문 시간 : 1981 년 7 월 1 일 하오 방문 대상 : 辛文厚(남 83 세,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북쪽으로 50m 지점에 거주) 방문인 : 王健群, 方起東 辛文厚의 이야기 내용 : 내가 12-13 세 때 이곳에 와가지고 17-18 세 때 高 臺 子에서 이곳으로 이사와서 살았다. 듣기로는 비석 위에 원래 이끼가 자랐는데 후에 沈陽에서 사람이 와서는 글자를 보려고 하자 初氏가 방법 울 생각한 것아 비석 위에 쇠똥울 바르는 것이었다. 쇠똥이 마르자 기름 울 봇고 불을 지폈다. 이끼가 사라지고 비석에서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비석을 탁본한 初氏는 부자 두 사람이었다. 내가 10 여 세 때 본 노인 初氏는 60 여 세였다. 당시 그의 아들은 30 여 세였다. 후에 그를 老初頭 라고 불렀고 또한 初大碑라고도 불렀다. 노인 初氏가 죽은 것은 71-72 세 때였으며 그의 시체를 비석 동남쪽의 구덩이에 방치하였다가 上奎라는 곳에 묻었는데 그곳에 그의 친척이 있었다. 初大碑는 그의 부친이 탁본하는 것을 이어받았다. 내가 보기에는 그의 부친은 탁본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고 주로 그의 아들이 하도록 지도 하여 주었다. 初大碑는 民國時代에 탁본을 가장 많이 하였다. 民國 때 그는 4 일에 한 세트(一奎)를 완성하였다. 그는 하루에 한 면을 탁본하였 다. 한 세트는 4 장(卷)이다. 그것을 당시에 大洋十元, 小洋十二元에 팔 았다. 후에 奉票로 바꾸어 가지고 十五元에 팔았다. 그 후에 돈이 고갈 되었는데 어떤 가격으로 팔았는지 기억할 수 없다. 만주국시대 때 그는 계속 탁본하였지만 탁본한 것은 소량이다. 10 일 또는 8 일 만에 1 세트를 하였다. 만주국 康德 5, 6 년 (1938-1939) 에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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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세가 되어 허리가 굽어 더 이상 탁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上 奎 , 즉 그의 조카가 있는 곳으로 옮겨 갔다. 老初頭가 사용한 먹은 솥 밀의 재( 灰 ), 먹, 그리고 풀( 穆 )을 합친 것 이다. 먹은 次 墨 울 사 와서 온수로 물거품을 내게 하였으며, 물거품은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것을 항상 휘저어(먹을 갈아)야만 하였다. 물거품 의 먹이 잘 휘저어(갈아)지면 비로소 탁본을 하였다. 나는 그를 도와서 먹을 갈았다. 탁본시 사용한 솔은 너비가 약 15cm 정도였다. 老初頭는 항상 비석 위에 회를 발랐다. 비석 위에 홈이 있는 곳에 회 롤 발라서 평탄케 하여야만 탁본이 잘 되었다. 바르는 백회는 생석회였 으며 당시 大川에 석회腐가 있어서 회는 그곳에서 가져왔다. 그것을 물 속에 넣어 물거품이 나게 해서 그것을 발랐다. 내가 보기에는 初氏 부자가 탁본을 하였고 의국인이 와서 탁본한 것을 본 일이 없으며 의국인은 탁본을 사러 왔다. 비석 주위의 땅은 李萬和의 소유였다. 후에 越保正의 말에 의하면 李萬和가 그 땅을 老初頭에게 넘 겨 주었다. 상기 사람들이 제공한 내용에 의하면 初大碑의 정황은 명백해졌다. 1981 년 7 월 3 일 王健群 일행은 靑石鎭(원명 上奎)으로 계속 조사를 나갔 다. 파출소장 張局長과 당지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黃柏公社 下奎三隊에 소속된 初大碑의 질녀 初元英을 찾아갔다. 방문 시간은 1981 년 7 월 3 일 하오와 7 월 4 일 상오이다. 初元英은 59 세이다. 방문인들은 王健群과 方 起東이다. 初元英의 이야기 내용 : 나의 부친은 初物盛이며 우리집은 원래 上奎에 서 살았다. 나의 백부는 初物德이라고 부르며 蘇城에서 동쪽에 있는 광 개토대왕릉비가 있는 곳에서 비문을 탁본하였다. 나의 천할아버지는 初 天貴이며 또한 둘째할아버지는 初天富로서 친형제이다. 나의 백부 初均
德은 둘째할아버지 初天富의 자식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山東 文登에서 왔다. 나의 할아버지는 上奎에서 농사일에 종사하였다. 둘째할아버지는 계속해서 광개토대왕릉비 근처에서 탁본을 하였다. 그 이후에 나의 백부 가 탁본일을 이어받았다. 나의 할아버지와 나의 부친 두 사람 중 初鵬度 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나의 백부는 70 세 때 더 이상 탁본을 할 수 없어서 바로 나의 부친이 있는 이곳으로 왔다. 나의 백부는 1946 년 3 월에 죽었는데 그때 그의 나 이는 80 세였다. 나의 백부와 나의 둘째할아버지는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하였지만 비문 은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의 백부가 탁본할 때 사람들은 그를 初先 生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를 또 初大碑라고도 불렀다. 그의 비문탁본 은 관가에서 파견한 것이다. 관가에서 그에게 증명(本)을 주었고 그 중 명상에 그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나의 백부는 碑文原本(底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봇으로 毛頭紙上 에 옮긴 것이다. 모두 4 장이었다. 각각 길이 약 60cm, 너비는 30cm 정 도였다. 그 윗장에 方格線을 긋고 그 네모 안에 글자를 써 넣었다. 그 字는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네모칸은 비어 있었으며 그 종이 위 에 또한 페이지 번호가 주어졌다. 당시 비석상의 字가 떨어졌거나 잘못 쓰여진 것은 그 비문원본을 보고 고쳤다. 나의 백부가 탁본하지 않고 上 奎에 돌아와서 그 비문원본을 나에게 주면서 보존토록 하였다. 나의 백 부 사후에 이 비문원본은 내가 이곳에서 보존하고 있다. 3 년 전 나의 동 생이 와서 보고 그 물건은 문화재이며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하였다. 그 에게 그것을 가져가도록 하였다. 나의 동생 원래 이름은 初文禮인데 현 재 개명하여 初文泰라고 하였다. 그는 夫餘油田醫院政工組에서 일하고 있다• 나는 또한 여동생 初元梅가 있다. 동생 남편은 張殿元으로 城後 3 대에 산다. 나의 백부가 비석 탁본시 사용하던 솜방망이는 하얀천(臼布包)으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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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臼花旗였다. 때로 自面주머니 (袋 子 )를 사용하였는데 1 면의 주머니 가 4 조각(j鬼)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탁본하다가 사용이 어렵게 되면 버 린 것을 집에 가져와서 걸레로 사용하였는데 그 위에 남은 먹물 흔적은 지워지지 않았다. 7 월 7 일 王健群 일행은 城後 3 대에 사는 初元梅 (46 세)를 방문하였으며 10 월 23 일 夫餘油田 醫 院으로 初文泰 (42 세)를 방문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내용은 初元英이 말한 것과 같다. 初文泰는 〈 碑文底子 〉 (비문 원본, 손으 로 베낀 것)와 그의 백부가 일본안과 같이 촬영한 사전을 王健群 일행에 게 주었다. 그 碑文抄本은 봇으로 毛頭紙에 썼는데 모두 4 장이다. 길이 63cm, 너 비 27cm 로 각 장의 길이와 너비는 갑다. 위에는 方格울 그었다. 方格 內에 광개토대왕비문을 베꼈다. 자의 필획은 비문의 문자대로 썼다. 자 가 없는데는 空格(공백)이다. 각 면을 1 장으로 채웠다. 제 4 면에는 페이 지 번호가 있다.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사진촬영 시 간은 1928 년 (사진상 에 碑 亭 )에서 1938 년 사이다(初均德이 광개토대왕릉비를 떠난 시간). 碑亭 의 보존 상태와 初均德의 나이로 보아 1935 년 정도이다. 또한 王健群 일행은 集安縣박물관에서 오래된 기록을 찾았다. 기록인 은 그 박물관의 林至德이다. 때는 1957 년 4 월 4 일, 그는 通溝 李家保子 李淸太를 찾아가서 문의를 하였다. 李淸太 노인은 1957 년에 78 세 였다. 그는 光緖 5 년에 通溝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조부는 同治 初年에 通溝에 와서 오랫동안 광개토대왕릉비의 근방에서 살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가 어렸을 때부터 老初頭가 탁본하는 것을 보았다. 바면의 四占부분의 자를 탁본하면 뚜렷하지 않으니까 老tlJ~Ji가 [!!]부분에 백회를 발랐다. 어 느 곳에는 백회를 바르고 난 다음 原字롤 그곳에 쓰고 탁본을 하였다. 그는 노인의 말을 들었는데 이전에 비석 위에 이끼가 많아서 탁본하기가 어려우니까 비석 위에 말똥(당시 부근에 소는 없었다)을 바론 후 그것이
마른 다음 불로 태웠다. 그리고 비석이 불에 의해서 파손되었다고 들었 다 한다. 그러나 그는 비롤 불태우는 것은 본 일이 없다고 했다. 그의 말 중에 확실한 것은 關野가 발견한 비석면에 백회로 글자를 만 든 것과 비석을 불태운 시기는 光緖 8 년 이전이라는 것이다. 상기한 내용을 종합하면 그곳에서 오랫동안 탁본한 사람은 初天富, 初 均德 부자이다. 그들은 李大龍, 元丹山 및 談廣慶 등 그곳에 파견된 사 람들에게 탁본기술을 배웠다. 대부분 전해져 내려오는 탁본은 初氏 부자 의 손에서 유래되었다. 비석상과 비문에 계속적인 석회 사용 (1900 년 이후) 및 탁본한 사람들의 성실성의 정도도 달라서 탁본 자체도 언제나 차이가 있다. 王健群이 본 전래된 탁본 중 水谷 1 弟二 RB 의 탁본이 비교적 좋은 것으로 평가되었는데 그것은 비석면을 修飾(石灰 `) 하지 않았을 때 탁본한 것이다. 그리고 탁본 수준과 정성의 정도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그것은 아마 談廣慶이 金 州衛署中에 남긴 탁본일 것이다. (2) 묘사(句描), 탁본시 오류의 원인 그 비석이 발견된 이래 백 년이 경과되었다. 중국의 금석학자와 의국 의 漢學者들이 비문의 많은 부분을 읽지(讀通) 못하였다. 상당수의 字가 이미 탈락되어 읽지 못한 것 의에 다른 하나의 주요한 원인은 雙句本句 (윤곽을 그린 것)한 字와 탁본해서 나온 字의 상당수가 비문의 原字가 아 니고 그것은 탁본한 자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조성하였기 때문이 다. 또 다른 원인은 연구자의 오독과 오해이다. 여러 가지 원인은 다음 과같다• ® 초기 윤곽을 그린 墨本에 출현한 오자의 원인 현재 보관된 탁본과 관계된 기록에 의하면 초기의 것은 거의 대부분 모두 雙句加墨本(윤곽을 그린 탁본)이다. 쌍구가묵본이라는 것은, 즉 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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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비석 위에 붙여 놓고 가볍게 두드린 다음 자의 윤곽을 묘사한다. 그리고 떼어 낸 다음 다시 공백(공간)인 곳과 字가 없는 곳에 먹을 바른 다. 그것은 탁본 같지만 실은 탁본이 아니다. 劉承干 『海東金石苑補造 』 에서 〈海東工人不善拓墨, 但就石句勒, 才可器 字而己(해동공인은 탁본을 잘 하지 못하였다. 단 비석의 윤곽을 묘사해서 字 룰 판별할 뿐이다) 〉 는 즉 그러한 쌍구본을 지칭한 것이다. 吳大激 『 皇華 經程 』 에서 〈 鶴丹贈余拓本(好太王碑 墨本울 지칭)一分, 字多淸朗, 文理不 基貫, 蓋以墨 7k 廊壤之本, 與潘伯寅師冊藏拓冊, 紙墨皆同(鶴丹이 나에게 광개토대왕릉비 탁본의 일부를 기증하였다. 字가 모두 뚜렷하나 글의 내용이 순조롭지 않다. 모두 먹물로 윤곽을 그린 것이다. 그것은 潘伯寅tiji가 소장한 탁본책과 종이, 먹 등이 모두 같다)〉 역시 쌍구본을 지칭한 내용이다. 그 것은 초기에 만들어진 것은 모두 쌍구가묵본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원인은 〈 海東工人不善拓墨 〉 이 아닌가? 당연히 그것은 아니다. 隋唐 이래 비석은 대부분 응회암으로 만들어 표면을 편평하게 마연한 다음 글자를 쪼았다. 그러한 비석은 비석면이 평정되어 종이(盡宣紙)로 탁본하기가 적합하다. 그러나 單張宣紙로 탁본한 광개토대왕릉바는 좋지 않았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각력웅회암울 쪼아서 만들었다. 비면이 돌이 (石齒) 인순(峨繩 단애의 몹시 깊은 모양)되어 宣紙 먹탁을 하게 되면 곧 찢어지게(파쇄) 되며 그것을 떼어 내기도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탁본을 할 때 가볍게 때려 낸 후 그 자형의 윤곽을 묘사하고 다시 손질(加工)하 여야 한다. 그것으로 인하여 일찍이 쌍구가묵본이 생긴 것이다. 이후 경 험을 통해서 雙層毛頭紙 또는 高麗紙로 바꾸어 사용해서 상기한 어려움 울 해결해서 탁본을 만들었다. 쌍구가묵본을 만드는 것은 보통 탁본을 만드는 것보다 대단히 어렵고 힘들다. 소위 〈就石句勒〉은 반드시 때려 낸 후 한획 한획을 묘사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의지를 가지고 하면 쉽지만 착오를 유발하는 것은 면할 수 없는 일이다. 탈락되고 남은 자들은 큰 솔로 가볍게 두드려도 나타나지 않는다. 예
룰 들면 제 3 면의 제 1 행과 전체 오른쪽 아래 모퉁이에 있는 자들은 모두 떨어져 나갔다. 또한 기복이 심한 돌이 (石 齒 ) 돌결이 일어난(i Ph ) 흔적의 영향에 의해서 1 자를 묘사하고 또 다른 1 자를 묘사하여야만 하였다. 예 를 들면 제 1 면 제 1 행의 〈 音 1 Jg冊降世 〉 를 〈 音 1 j卵降出 〉 로 묘사하였고, 제 1 면 제 2 행의 〈 國岡上 〉 을 〈 國岡土 〉 로 묘사하였으며, 제 2 면 제 4 행 〈 男女生口一 千人 〉 을 〈 男女生白一千 A 〉 등으로 하였다. 절반 탈락된 자의 부분도 독 립된 자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절대적으로 완전할 수 없는(缺 代全) 정황을 유발했다 . 예를 들면, 제 1 면 제 2 행의 〈 爲我 〉 를 〈 爲本 〉 으로 잘못 썼고, 제 2 면 제 3 행의 〈 五威赫怒 〉 를 〈 五威赫奴 〉 로 잘못 썼다 . 제 2 면 제 10 행의 〈 盡担隨倭 〉 를 묘사하기를 〈 盡臣有尖 〉 으로 만들었다. 상기한 정황에 의하면 쌍구가묵본은 많은 곳의 詞가 의사를 통하지 못 하고 文理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상당수 금석학자들, 역사학자들이 때 때로 그러한 쌍구본을 근거로 무리한 해석을 해서 와전되게 만들게 되었다. @ 20 세기 초 이후의 탁본에 출현한 오자의 원인 비문의 탁본은 비문을 손상시킨다. 시간이 오래갈수록 자획이 손상되 고 문자가 흔히 탈락된다. 그로 인하여 사람들은 초기의 탁본을 중요시 한다. 초기 탁본의 중요한 기준은 탈락된 자가 적고 자획이 전실하다. 따라서 그러한 부분문자 중 결손된 것을 억지로 완벽하게 만들어 이것으 로 다른 것을 대신해서 뚜렷한 광개토대왕릉비 탁본을 모호하게 변모시 켰다. 그러므로 금석학자들은 초기 탁본을 중시한다. 그래서 그 탁본은 비싼 값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착오 위에 착오가 가중되어 그 오류가 와전되게 되었다. 20 세기 초, 대략 1903 년경 탁본지는 광개토대왕릉비 위에 석회를 사용 하여 자를 보충시켰다. 부족한 자를 완전히 보충시켜 모호하고 뚜렷하지 않은 자가 분명하여졌다. 보충된 이러한 자들은 쌍구본을 근거로 하였 다 . 이로 인하여 탁본상에 출현된 오자는 때때로 쌍구본과 같았다. 예를 들면 제 2 면 제 3 행의 〈殘不服義〉는 〈賊不服氣 〉 로 석회가 발라졌다. 같은
면 제 9 행의 〈 1 委送大 淸〉 은 〈 倭滿倭淸 〉 으로 변모되 었다. 그러 한 상황이 전 후 30 여 년 동안 계속해서 되었다. 그래서 국내의 많은 학자들이 속게 되고 심지어 국제적으로 약 20 여 년 동안 격렬한 논쟁의 씨가 되었다. 4) 소위 石灰徐株(바름) 작전 전면에 제시한 조사자료와 현 비석면의 잔존 흔적을 근거해서 석회를 바르고 修字한 사실이 판명되었다. 그러면 비석에 누가 석회를 발랐으 며, 字는 누가 보충하였고, 석회를 바르고 보충한 목적은 무엇인가? 그 것에 대하여서는 견해가 다르다. 일본 明治대학 강사 李進熙는 그의 저서 속에 석희를 바르고 改字한 것은 당시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한 것이라고 제기하였다. 李進熙 : 1884 년, 일본인 酒句景信은 그가 보존한 쌍구본 중에 倭人이 조선반도 등을 入侵한 사실을 위조하였다.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이 내용 (本子)을 이용하여 조선을 침략할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인원을 조직해 서 그것을 해독하였다. 해독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1894 년경 침략군을 通 溝에 파견해 비문을 탁본시켰다. 비문의 많은 부분과 酒句 雙句本이 일 치하지 않음이 노출되었다. 비문을 은폐하기 위하여 假證울 제정해서 다 시 1900 년을 전후하여 대단위의 인원을 通溝에 파견해서 석회를 발라서 비석면에 글자를 만든 다음 탁본을 하였으며 그것으로 일본이 일찍이 조 선을 통치한 일이 있다는 〈永久性〉의 증거를 만들었다. 通溝에서 돌아와 서 개별자의 자형이 酒句본과 일치하지 않음을 발견하고 곧 다시 사람들 울 通溝에 보내서 제 3 차 가공을 진행시켰다. 이 내용이 李進熙가 말하는 소위 〈석회도말 작전〉이다.
사실을 규명하기 위하여 王健群 등은 당시의 역사 정황을 간단히 살펴 보고있다. 일본은 明治유신 이후 군국주의의 길을 가고 팽창주의를 실현하기 위 하여 대의침략의 과정을 제정하였다. 먼저 조선을 탐병한 다음 동북에 進軍하여 중국을 侵占한다. 그 침략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세계여론과 일본 국민을 속여서 그들은 군국주의의 침략 〈 이론 〉 과 구호를 여러 가지 로 만들었다. 그것은 대체적으로 두 종류이다. 하나는 적나라한 약육강 식의 주장이다. 무슨 〈正義代天fiE不義 〉 , 〈 A 糸宏一字 〉 , 〈 生命線之滿itt l 〉 , 〈替 1 尔 1r, 建設王道樂土〉 등등이다. 다른 한 가지는 역사상에서 하나의 유 사한 面非의 구실을 찾아서 제출한 것이 〈 B 韓同祖 〉 論, 〈滿鮮一家 〉 論, 〈滿蒙一家〉論 등이다. 1873 년, 일본 육군참모국에서 간첩활동을 위하여 8 명의 젊은 군인을 중국에 진입시켰다. 1875 년 강화도사건 이후 일본은 조선과 중국을 침략 할 준비롤 강화하였다. 1878 년 육군참모본부가 설립된 후 조선과 중국에 계속 간첩을 파견하여 군사, 지리 등 조사에 종사시켰다. 1880 년 중국에 파견한 간첩 중에 酒句景信 중위가 있었다. 그는 漢語硏究生의 신분으로 가장하고 牛莊울 중심거점으로 삼아 동복각지의 軍用地志, 자료를 수집 하였다. 대략 1883 년 春夏의 계절에 그는 通溝에서 광개토대왕릉비의 쌍 구가묵본을 얻었다. 1884 년 귀국시에 그것을 참모본부에 제시하였다. 그 러기 얼마 전에 참모본부에서 〈任那考〉를 편집하였다. 그것은 조선 침략 의 여론 준비였다. 그러한 과정 중 그 쌍구가묵본을 얻게 되었다. 그리 고 그 내용 중에 〈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 □□ (新)羅, 以爲臣民 〉 의 字體를 발견하였다. 그것을 마치 보물을 얻은 것같이 취급해서 곧 靑江 秀, 橫井忠直 등의 漢學者(참모본부 요원)들로 하여금 해독하게 하였다. 그들은 일본이 8 세경에 편집한 『古事記 』 를 이용하였다. 『 일본서기 』 내에 는 연대가 불확실한 전설 속에 4 세기 후반기부터 일본이 조선반도 남부 의 任那加倻 지방에 통치기구인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임나, 신라, 백
제 등을 2 세기 정도 통치하였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중 辛卯 年紀 事 는 임나일본부의 유력한 注解에 好用될 수 있었다. 이후부터 일본 사학계에서는 연속적으로 문장을 발표해서 〈 임나일본부 〉 를 〈 정설 〉 로 몰 고 갔다. 현재까지 그러한 說法은 일본 사학계의 대디수인들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시작한 허수아비 (個者)는 바로 당시 일본의 육군참 모본부이다. 그러한 것은 모두 사실이다. 제 2 차 세계대전 이후에 조선 사학계와 일본의 정직한 사학자들은 그러한 說法과 제작에 대하여 비판 하여 당시 일본 육군참모부의 음모를 천하에 폭로하였다. 비판, 노출은 필요하다. 그러나 반드시 實事求是하여야 한다. 酒句 景 信이 가지고 간 광개토대왕릉비의 쌍구가목본은 사실이다. 다만 그 쌍구가묵본을 그가 고친 것일까? 참모본부의 기도는 명확하다. 그러 나 석회도말 작전을 하였을까? 그것들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1) 酒句景信의 쌍구가묵본은 通溝 당지 탁본한 곳에서 얻어졌다. 그 것은 그가 탁본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탁본은 대단히 힘이 든다. 즉, 한 명의 숙련된 탁본공이 적어도 반 달 정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酒句 景 信은 간첩이며 대명천지에서 장시간 그 일에 종사할 수 없다. 그 쌍구본상의 改字는 자체가 모두 같다. 서예( 書 法)에 정통하고 文 字 學 에 정통한 금석학자가 아니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일은 酒句 景 信 역시 할 수 없다. 일본군 참모본부, 궁내성에 많은 한학자를 초청 하여 해독시켰지만 酒句 景 信울 초청하지 않은 것도 증명이 된다. (2) 酒句景信이 얻은 묵본은 모두 작은 종이로 나누어 윤곽을 묘사한 것이다. 4 면 모두 132 紙였고 크기도 일정하지 않았다. 거기에 번호가 있 었지만 그것을 맞추기에도 어려웠다. 일본 궁내성에서 일찍이 酒句景信 울 소치하여 그로 하여금 배열하도록 하였지만 그는 그것을 할 능력이 없었다. 최후로 배열을 완성한 묵본은 비록 많은 한학자들의 노력을 거
쳤지만 여전히 제 3 면 오른쪽 아래 모퉁이의 한 장(紙)은 위치가 잘못되 었고, 제 4 면, 죽 정상 끝 두 장도 하단으로 옮겨 왔다. 문자의 연결을 하도록 고려해서 전부 오른쪽 1 행으로 옮겨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의 왼쪽 아래 모퉁이의 〈之〉자는 왼쪽 위 모퉁이로 옮겨 갔다. 만약 酒 句 자신이 만들거나 묵본을 고쳤다면 그러한 정황이 생길 수가 없다. (3) 현재 보존된 酒句본을 비문과 대조하면 비록 상당수의 자묘사가 틀렸지만 문자, 자체, 부위, 점획 모두 충실하게 원비문을 따랐으며 동 시에 의식적으로 고친 흔적은 없다. 그리고 〈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 □□ (新)羅, 以爲臣民〉의 여러 자들에 대해서는 王建群이 다른 글 속에 논술하겠다고 하였다• 다만 〈衆〉(辛)字는 〈米〉字를 잘못 묘사하였다. 그 러나 그것은 원비문의 내용에 충실하였으며 古字의 조성을 모르는 데서 연유된 것이다. (4) 참모본부 편찬과의 주요 구성원, 酒句 쌍구본을 해독하는 책임자 는 橫井忠直이다. 그는 〈비문에 크게 관계한 자는 나다. 그것은 辛卯渡 海, 破百殘新羅, 爲臣民 등 數句이다〉라고 말하였다. 李進熙가 말한 바 와 같이 甲午之役으로 참모본부가 침략군을 通溝에 파견하여 탁본을 가 져오도록 해서 대조하여 본 결과 비문상에 상기한 여러 자와 원래 관계 가 되어 있어 목적을 달성하였는데 어떻게 그러한 대규모의 석회도말 작 전이 진행될 수 있는가? (5) 만약에 석회를 발라서 비문 자체에 맞추어 다시 자를 만들었다면 일본 역시 거기에 대한 방법 (設法)을 강구하였을 텐데 왜 2 차, 3 차 通溝 에 다시 가서 현지에서 거짓자를 만들었겠는가. (6) 일본 침략군 제 57 연대장 小澤德平(원참모본부 구성원)은 集安縣 지
사 吳光國에게 그 비석을 사서 일본으로 운반하고 싶다고 요구한 일아 있다. 그 기사는 1915 년 간행된 『 集安縣鄕土誌 』 에 실려 있고 그것은 또 한 사실이다. 그리고 일본이 그 비석을 가지고 싶어하는 이유는 그 비석 이 그들에게 유리하다고 인정되어 자기네들 손에서 증거를 보존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白鳥庫吉이 말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 비석에 기록되어 있는 조선반도 남부의 신라, 백제, 임나는 일찍이 일본 의 신민이었다. 그것은 역사상 대단히 가치 있는 물건이다. 그래서 그것 울 당연히 信物로 삼아야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의 박물관 또는 공원 안에 놓아야 한다. 또 한 원인은 그 비문 중에 고구려가 왜인을 패배시 킨 기록이 있는데 그것으로 하여금 자손들의 후대를 장려 (고취)시켜 분 발, 노력시켜야 한다. 〉 그러한 야심은 비문의 이해에 포함되었다. 그것 은 모두 당연히 비판받아야 된다. (7) 李進熙는 어떤 탁본의 자로 비교하였는가. 笠格(수직자)을 비교하 였는가. 酒句景信이 고친 비문과 〈 석회도말 작전 〉 의 사실을 확인하는 증 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용된 탁본은 본래(本身)가 착오가 있어서 증명 하기는 실제로 어렵다. 小松宮의 탁본을 王健群은 본 일이 없어서 감히 평가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三宅米吉의 釋文에 의하면 거기에도 역 시 상당히 많은 착오가 있다. 水谷의 탁본은 비교적 좋다. 그것은 도말 석회 이전 탁본이다. 탁본 기술 역시 상당히 정교하다. 그래서 그것은 비문의 원래 모습을 반영할 수 있다. 그러나 李進熙의 편파적인 말은 1930 년 이후의 탁본이다. 석회가 대량으로 떨어전 결과이다. 그것은 옳 지 않다. 석회는 지금도 바석상에 남아 있다. 그리고 水谷의 탁본은 조 금도 석회를 바론 흔적이 없다. 그것은 시간의 전후가 도치되어 착오가 발생된 것을 면할 수 없었다. 비석 위에 석회를 바른 것은 확실하다. 더욱이 행간의 거리 사이의 공 백에 대량의 석회를 발라서 많은 탁본상에 뿔格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
면 어떤 사람이 그와 같이 석회를 발라서 笠格을 덮었는가. 어떻게 그러 한 정황이 생겼는가. 그것은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한 일인가? (8) 비석 아래에서 살던 初天富 부자는 일본인이 석회를 바른 일을 모 른다. 비석 주위에 살던 李淸太 역시 그 사건을 모른다. 적대국가 내에 서 그와 갑이 대규모의 석회도말 작전이 진행될까. 人智는 불가능한 것 이 없다. 역사는 객관성이 존재한다. 역사 연구는 반드시 실사구시하여야 한다. 간첩 酒句景信과 당시 일본 참모본부의 나쁜 사람들과 나쁜 일들은 시간 을 두고 기다리면서 밝혀야 한다. 그들의 죄상을 철저히 파헤쳐야 하며 또한 실제적으로 대면하기 위해서는 조금도 정확하지 않은 내용(詞)을 첨가해서는 안 된다. 王健群 등이 연구한 결과가 긍정적인데 그것은 광개토대왕릉비 비석상 의 도말석회와 자를 수정한 것, 자를 보충(補字)한 것은 중국의 탁본공 둘이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初天富 부자가 한 것이다. 그들이 字를 수정하고 보충한 것 중 많은 것이 착오되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그들은 역사 지식이 없다. 더욱 역사의 핵( 歷 史之心) 울 고치지 않았다. 오늘날의 오해를 일으킨 것은 그들의 책임은 아니다. 이 글의 목적은 다만 사건의 전상을 뚜렷하게 밝혀서 무의미한 쟁론을 피하고 더 나아가 광개토대왕릉비의 연구를 저해하는 것을 피하자는 데 있다 .13)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에 대한 종합적 연구서 14) 가 번역되어 나와 있고 그 내용에 대한 구체적 연구 논문이 5 편 나와 있다.
8 석인상 人像石亥 l] 은 集安市의 북쪽 교의에 있는 禹山언덕 위, 3319 호분의 좌측 앞쪽 9m 지점에 있다. 15) 3319 호분 앞의 좌우에 거석이 하나씩 서 있다. 왼쪽 거석은 길이 1. 04m, 너비 o.5 4 m, 두께 0.90m 이다. 오른쪽의 것은 길이 1.4 2m, 너비 1. lOm, 두께 0.90m 이다. 오른쪽 大巨石上에는 아무런 刻畵가 없다. 왼쪽 石上에 人像이 조각되 었다. A1 象 화면이 전체 돌면(石面)을 차지하고 있다. 반신상이 單線으 로 음각되어 있다. A1 泉은 머리에 마름모꼴의 贛冠울 썼으며 얼굴은 복 숭아 형태로 둥글며 두 눈을 크게 떴다. 눈꼬리가 위쪽으로 가볍게 올라 갔다. 두 개의 눈썹이 孤線(휘어진 선)으로 처리되었고 콧마루는 수직의 단선이며 콧날( 鼻 翼)은 두텁고, 입은 작고 둥글어 대추씨 같다. 두 귀는 둥글며, 오른쪽 귀에 둥근 귀걸이가 달려 있다. 목부위 아래는 다만 간 단한 호선으로 어깨를 표시하였으며 동시에 협소한 몸체로 수축시켰다. 가슴 앞에 두 개의 둥근 원으로 젖꼭지를 표시하였다. 그 像은 남성상이다. 人像의 두 개의 젖의 정중앙에서 약간 위로 20 개의 둥근 점을 쪼아서 원심을 만들었다. 둥근 점 사이의 간격은 비교적 가지런하며 그것은 하 나의 둥근 고리를 만들었다. 그 고리 중간에 또한 가로, 세로 두 줄을 교차시킨 둥근 점은 십자형을 이루고 있다. 원십점 상하좌우에 각각 두 개의 원점이 있다. 전체 도안은 마치 하나의 둥근점(圓點)으로 조성된 십자형 좌표이다. 각 개의 象眼 내에 4 개 원점으로 조성된 孤形이 있다. 4 개 孤形안과 밖에, 즉 人像의 오른쪽 가~합} 목 위쪽에 각각 하나의 둥근 점이 있는데 그것은 대칭적이 아니다. 전체 石亥 11 은 두 충의 圖像이 중첩되었다. 한 충위는 半身人像이고 다른 충위는 원형의 고리이다. 조 각가는 입체적 투시방법을 사용하였다. 人像과 둥근 고리가 융합되어 일
그립 4-21 고구려 석인상
체를 이루었다. 무덤 앞에 세워진 人像石刻은 묘비가 출현할 때 만들어졌다.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墓上立碑〉하였다. 人像울 刻한 묘비는 묘주인의 생전 모습이다(그립 4-21). 9 集安 通溝 2 基의 石碑 고대 고구려에서 〈墓上立碑〉는 守墓제도를 강화하기 위한 조처로 취하 여전 것이다. 묘비의 출현은 다만 守墓 A 의 집을 銘記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특수한 현상은 비록 414 년에 건립된 광개토대왕(好太王)碑의 비문
중에도 명백히 제시되었지만 지금까지 주의한 사람은 없다. 이러한 문제 가 소홀히 취급된 것은 石碑가 수립된 당시 고구려 고분이 상당히 드물 어 고구려 묘비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 데서 연유된 것이다. 과거에 발표 된 자료 중에 集安 通溝 광개토대왕릉 부근의 유명한 광개토대왕릉비를 제의하고는 아직까지 고구려 묘비에 대한 보고는 없다. 오랜 동안의 조사를 통하여 고구려 고분이 가장 집중된 集安 通溝 고 분군 중에서 묘비를 수립한 2 기의 고구려 고분을 발견하였다. 이 2 기 墓 葬과 석비는 고구려 〈 묘상입비 〉 의 정황과 碑刻形制를 이해하는 데 대단 히 중요하여 여기에 소개한다. 16) 1) 山城下 1411 호 고분 산성하 묘구에서 남쪽으로 10km 지점에 集安縣이 있다. 이곳은 通溝 고분군 중 고분이 상당히 집중되고 보존이 잘 된 묘구 중 하나이다. 通 溝江은 깊고 험준한 계곡을 따라서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흐르는데 환 도산성 아래를 경유한다. 그 산성의 서남 모서리에서 강물은 방향을 바 꾸어 남향으로 흘러서 국내성의 서쪽(지금의 集安縣城)을 경유하여 압록 강으로 유입된다. 산성하 묘구는 바로 환도산성 남단 東段과 通溝江 사 이의 평탄한 계곡에 있다. 이 곳에는 많은 대형 고분과 소형 봉토동실 묘, 그리고 대형의 봉토석실묘 8 기가 있다. 1411 호 고분은 산성하 묘구 의 西北角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서쪽으로 약 lOOm 지점에 通溝 대대 제 12 생산대의 個養所, 유명한 兄墓, 弟墓, 折天墓와 龜甲塚 등이 모두 동남 100-5oom 범위 내에 분포되어 있다. 1411 호 고분은 봉토석실의 雙室墓이다. 봉분은 截頭方誰形으로 변의 길이 13.60m, 높이 약 4m 이다. 봉분 동측 북부의 봉토기단 가까이에 석 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碑身이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졌고 底部는 묻혀
있다. 方位와 비 底下에 平整한 초석 등은 없다. 그 석비는 비록 움직여 졌지만 원래는 봉분 정상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석비는 화강암제이 다. 상부는 잘 다듬어지고 하부는 거친 8 각기둥 형태로 한 곳을 집중하 여 뾰족하게 만들었다. 기둥의 8 변의 길이는 일정하지 않으나 形狀은 상 당히 규칙적이다. 그것은 북사(稷具)와 같이 석면은 평정하고 상당히 규 칙적이다. 정부 八角維體의 지름은 0.4 8 m, 높이 0.14m 이고 추체 저부는 지름 o.8 5 m, 전체 높이 1.1 6m 이다. 碑身에 刻字한 흔적은 없다(그립 4-22). 1411 호 고분의 2 기 묘실은 동서로 병 렬되 었다. 각각 墓門과 墓道가 있 고 방향은 편동으로 2· 이다. 동쪽 묘실의 雨道는 열려 있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서쪽 묘실의 용도가 열려서 빗물이 들어가 봉토가 함몰되 었다〉고 한다. 조사시 동쪽 묘실만 실측하고 서쪽 묘실은 발굴하지 않아 서 그 결구는 알수 없다. 동쪽 묘실은 大境石으로 축조하였다. 석재는 거칠게 가공하였고 능선 은 일직선이 아니다. 약간 평정한 면이 묘실을 향하고 그 틈 사이를 백 회로 발랐다. 묘실 평면은 직사각형이다. 남북 길이 3.36m, 동서 너비 는 2 . 02m 이다. 묘실 4 벽은 약간 안으로 경사졌고 높이는 lm 이다. 그 위 에 4 층 평행으로 溪井울 쌓고 頂石울 덮었다. 전체 높이는 2.72m 이다.
그림 4-22 산성하 1411 호 고분 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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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문을 남벽 중앙에 설치하였는데 잘 다듬은 석판으로 구축하였다. 높이 는 1.3 5m, 너비는 0.90m 이다. 좌우 문확은 2~鬼 의 직립한 석판으로 만들 어졌다. 모두 너비 30cm, 두께 15cm 이다. 그 위에 가로로 하나의 장대 석을 울려놓아 門權로 삼았다. 門盤은 두 개의 장석으로 쌓았고 높이는 10cm 이다. 전실 정석에 밀착된 묘문 의측과 錦地石 위에 각각 2 개 圓形 의 門樞孔이 뚫려 있고 안쪽으로는 밖으로 열 수 있는 두 장으로 된 석 판의 門扇가 있다. 그 중 하나는 파괴되고 1 개만 남았으며 전실 높이 1. 6om, 너비 1.2 0m, 깊이 2 . 06m 이다. 좌우 양벽은 약간 가공한 자연석으 로 쌓고 頂꼼 B 에는 2 괴 대판석으로 덮었다. 동쪽 묘실 중에는 아무런 유 물이 없다. 1411 호 고분은 通溝 고분군 중 上中等 규모이며 구축은 거칠다. 이 묘 는 고구려 소귀족 묘장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묘의 방향은 남 쪽이다. 이미 열려진 동쪽 묘실에서 관찰하면 정부는 평행으로 쌓은 4 층 의 조정이다. 通溝 고분군 고구려 고분 형제의 발전 서열에 비교한 결과 에 따라서 이 묘의 연대는 5 세기 중, 말기로 보고 있다. 2) 禹山下 1080 호 고분 1080 호 고분은 集安縣城 동쪽에 있는 太王公社 禹山大除 제 1 生産部落 中에 있다. 아곳은 禹山 남쪽 언덕 중부의 완만한 언덕의 남쪽 가장자리 에 있는데 앞 大路룰 隔하여 광활한 평지가 있다. 1080 호 고분은 서쪽에 서 약간 편북되어 있다. 이 묘는 다른 묘들과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데 그 속에는 3 기의 土頃도 있다. 북쪽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 멀지 않 은 곳에 또 다른 1 기의 토분이 있다. 이러한 토분들은 通溝 고분군 중의 中上等규모에 속한다. 고분 북쪽의 언덕 위에 상당수의 역석이 퇴적되 어 있는데 그것은 파괴된 1 기의 석분으로 규모가 상당히 크다. 고분 동
제 4 장 건축물 289
쪽에서 약 50m 지점에 1041 호 고분이 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 유일하게 벽화를 가진 고구려 石壇이다. 1080 호 고분 봉토에서 관망하면 서쪽 평야 위에 두 줄의 높고 큰 壇丘가 있다. 즉, 通溝 고분 군 중 몇 기의 최대 토분, 즉 오회분 등이 있다. 동편 언덕과 같은 강자 갈로 쌓은 고구려 고분 중 구축이 가장 宏偉한 석분인 광개토대왕릉이다. 1080 호 고분은 대형 봉토석실묘이다. 봉분은 截頭方維形이다. 주위 길 이 약 lOOm, 높이 약 lOm 이다. 묘장이 경사진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 기 때문에 언덕에서 바라보면 봉분이 그다지 거대하게 보이지 않는다. 봉분 동남각에 l 괴의 거대하고 잘 다듬어진 기단석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것은 봉토의 모서리에 석재로 기초를 닦은 것을 표명하여 준다. 그리 고 범위가 지금보다 약간 더 켰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 묘는 일찍이 도굴당하여 도굴 구덩이가 봉분 남측 허리에 있다. 도 굴 구덩이는 수직으로 내려가서 용도 입구를 봉쇄한 돌담 위쪽에 하나의 구멍을 뚫어 용도와 묘실에 직접 들어가게 만들었다. 1976 년 7 월 초 도 굴 구덩이는 함몰되었다. 도굴 구덩이 상부의 매몰된 흙 속에 1 기의 석 비가 거꾸로 박혀 있었다. 碑身은 봉분 중에 꽂혀 있고 정사각형 저부는 하늘을 향하여 노출되어 있었다. 이 비가 원래 봉분 정상에 세워져 있었 는데 도굴당한 후 봉분 정상 남측의 봉토가 점차적으로 유실되어 도굴 구덩이로 들어갔고 석비는 앞으로 넘어지면서 도굴 구덩이에 묻혔다. 묘 장 발굴 이후에 석비를 봉분 앞의 대로변에 옮겨 놓았다. 석비의 형상은 上圓下方의 立石이며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전체 높 이 1. 6m 이다. 왜소한 저부 평면은 직사각형이고 정면 너바는 97cm, 측 면 너비는 73cm, 높이는 27cm 이다. 碑身 하부의 길이와 너비가 저부와 같다. 다만 네 모서리를 일정하게 떼어 내서 가로로 자른 면이 截角의 사각형이다. 碑身上에 八條의 稷線이 상당히 뚜렷하다. 비석의 정상은 둥글게 좁혀졌고 그곳에 희미하게 팔조능선의 연속선이 보인다. 더욱 둥 글게 좁혀진 부분과 비면 사이에 굽혀진 능선이 나타나 있다. 비석 정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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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에 八邊形이 陽刻되었고 그 팔각과 비신의 팔조능선은 상대적이다• 비 신은 높지 않고 능선과 각개면은 다소 밖으로 孤曲되었다. 그래서 전체 석비가 조형상 거칠고 풍만하여서 건강한 인상을 준다. 비면의 풍화 상 태가 상당히 심하다(그림 4-23). 일반 고구려 대형 봉토석실묘와 비교하면 1080 호 고분의 구축상 가장 선명한 특징은 묘실과 甫道(사잇길)가 서로 연접되지 않고 단독 부분으 로 만들어전 점이다. 묘실은 대형 화강암으로 축조되었고 용도는 묘실 의면의 부속 부분이다. 그 사이에는 30cm 의 간격이 있다• 이 간격 부분 은 위쪽으로 窓形울 이루면서 펼쳐졌다. 그 좌우 두 날개가 孤形方울 에 워싸고 있다. 1976 년 발굴시 용도를 돌아서 묘실에 진입하여 아 묘장을 전면 노출시키지 못하였다. 그래서 상기한 간격 부분이 묘실 건축을 전 부 둘러쌌는지의 여부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묘실은 넓고 잘 정돈되었다. 평면은 사각형이고 방향은 편남동 50 이
그림 4-23 우산하 1080 호 고분 석 비
다. 동서 가로 너비 3.l o m, 남북 길이 3.15m, 높이 2 . 95m 이다. 내벽 담 면은 안으로 경사졌고 높이는 2 .4 5m 이다. 네 벽 위에 일단의 株角에 올 려놓은 정석은 그 형태가 斗四溫井이다. 높이는 45cm 이다. 말각에 울려 놓은 정석 윗부분에 정석을 다시 추가시켰다. 뚜껑돌 중앙에 깊이 5cm 의 일개 네모 반듯한 홈을 뚫었다. 그래서 묘실 중앙에서 울려다보면 마 치 말각에 울려놓은 정석상에 다시 일단의 말각을 쌓은 이중말각의 결구 같다. 네 벽 상부 중앙에서 말각을 쌓은 정석까지 18cm 되는 지점에 각 각 하나의 구멍이 있다. 그것은 지름 2.5 c m, 깊이 45cm 이다. 이러한 구 멍은 남벽에 해당하는 묘실 입구의 좌우 上角에도 각각 하나씩 있다. 묘 실을 축조한 화강암 석재는 대단히 거대하다. 전체 묘실을 건축하는 데 모두 17 괴 거석을 사용하였다. 벽면에 3 층의 석재를 쌓았는데 충마다 4 괴의 거석을 사용하였다. 최하층 석재는 모든 면이 1 괴이고 벽면의 1/2 이다. 제 2 층은 더 거석의 角石으로 만들었고 접촉 지점은 모든 면의 중앙에 서 이루어졌다. 제 3 층은 최하 1 층과 같이 모든 면을 一整魂 거석으로 만 들었다. 頂部 말각의 높인 정석과 뚜껑돌은 모두 單魂이다. 묘실의 건축 에 석재를 사용한 것이 간결하고 정확하다. 이것은 석재의 준비가 주도 면밀한 설계에 의해서 이무어졌다는 것을 설명하여 준다. 석재와 석재 사이의 접촉 부분은 平直하고 엄밀하다. 그 사이는 석회로 봉하였고 석 회로 봉한 표면은 연마하여 편평하게 만들었다. 묘실 가운데 평행으로 배열한 남북향의 관상대 3 기가 있다. 중간과 서 변의 관상은 높고 크다. 각각 하나의 완정한 석재로 만들어졌고 다만 양단에 석회를 발랐다. 동변의 관상은 낮고 작다. 북단은 하나의 석재를 나란히 연결시켰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웠다. 서쪽 관상은 길이 2.30m, 너비 o.s6rn, 높이 0.36 m 이다. 가운데 관상은 길이 2.20m, 너비 0.85rn, 높이 0 . 30rn 이다. 동쪽 관상은 길이 2.20m, 너비 o.6 7 m, 높이 0 . 14m 이다.
용도를 통과하는 입구는 남벽 한가운데에 있다. 문동 저부는 묘실보다 o.o 6 m 높다. 그것의 전체 높이는 1.2 8 m, 너비 l.04 m, 깊이 o . 5lm 이다. 문동은 門 道 와 바깥으로 연결되어 있다. 문도 저부는 문동보다 8cm 낮 다. 頂部는 문동보다 16cm 솟아 있다. 좌우 兩翼이 가볍게 의부로 경사 되었다. 문동과 연접된 문도 후단에는 兩扇이 의부로 열리는 門扇가 있 었으나 파괴되었고 파괴된 석회암제 문비 석판이 한쪽에 버려져 있다. 문을 닫는 방법은 문도 정부와 저부 석재상에 의지한 문동의 모서리에 구멍을 뚫은 安門樞의 구멍에서 처리된다. 저부 안문추의 구멍 중에 하 나의 단철된 〈 腕 〉 을 끼워 넣으면 문이 닫힌다. 문도 좌우 安門 부위 (문 울 닫는 부분)의 석벽에 석회가 잔존되어 있는데 그것은 묘문을 닫은 후 석회를 다시 발랐음을 나타내어 준다. 단독 구축된 용도에서 문도 바깥 입구까지 거리는 30cm 정도이다. 길 이 2.7 0 m, 너바 1.2 0-1. 6 5m, 높이 1 . 88m 이다. 저부는 문도보다 0.2 0 m 낮다. 용도 좌우에 석회암울 쌓고 상부는 화강암석으로 덮었다. 용도 內 口와 묘실 前面 문도 外口 사이에는 공백이 있다. 좌우 양익은 孤形으로 묘실 건축의 전방울 에워싸고 있다. 상부는 小魂 석재로 묘실 쪽을 향하 여 쌓아서 경사된 궁륭형을 이루었다. 용도 의구는 좌우 양익의 토담을 향하여 굽어졌다. 토담을 보호하기 위하여 놓인 석재는 거칠게 가공되었 고 대소가 일정하지 않으며 벽면 [!!]下의 지점에는 목판이 깔려 있으며 표면에는 석회를 발랐다. 묘장이 일찍이 도굴당하였으므로 완정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 만 도굴 구덩이의 매몰된 흙 속에서 상당수의 도금된 청동제 못, 도금된 장식못, 도금된 동제 장식편, 金製小環과 길이가 일정하지 않은 金絲線 段 등이 있었다. 이것들을 자세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도금된 청동제 못 2 점 : 배가 부른 모자 형태 표면에 도금하였다. 지름 3.3 c m, 1 점의 길아는 8 . 2cm 이며 다른 1 점의 길이는 4 . 3cm 이다. 도금된 동제 장식못 3 점 : 形制, 크기는 모두 같다. 모두 八稷柱狀이
다. 1 端은 거칠고 다른 1 단은 감축되면서 정교하다. 감축되면서 정교한 1 단은 송곳형이고 거친 1 단 중에는 네모 난 손잡이가 있다. 이것은 황금 과 합쳐졌다. 전체 길이 2.9cm, 지름 9.8cm 이다. 도금된 물고기꼬리형 동제 장식편 1 점 : 남은 길이 6.6cm, 너비 12.3cm 이다. 양면에 도금하고 동시에 魚尾文을 새겼다. 장식편의 가장자리와 새김질한 문양에 의하면 다섯 줄의 작은 구멍을 나열하고 있다. 어느 구 멍 내에는 도금된 동철사가 남아 있고 철사 앞끝의 둥근 고리에는 원래 움직이는 도금된 小葉片이 끼워져 있다. 이것은 일종의 관장식이다. 도금된 원형 동제 장식편 1 점 : 면이 가볍게 융기되었다. 융기된 1 면의 도금상에는 동십원이 나열된 垂媒 4 줄의 돌출된 구름무늬가 있다. 그것 은 菱草狀花文이다. 주연과 중간 부분에 두 줄의 작은 구멍이 있다. 구 멍 내에는 도금된 동철사를 끼웠고 그 고리상에 도금된 圓葉片을 끼웠 다. 지름 - 4.9cm 이다. 과거에 출토된 고구려 도금 기구와 장식편은 素面 울 제의하고 화문장식은 錢空(透窓)방법을 응용하고 동시에 透窓花文추 섭의 연점문이 있었다. 이러한 장식판과 같이 간단한 문양의 기본단위로 부터 반복도안의 추섭공예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것은 과거에 발견된 예 가 없다. 상당히 늦게 발전된 공예일 가능성이 크다. 도금된 삼각형 동제 장식편 ' 2 점 : 1 점은 잔편이다. 모두 양면에 도금되 었다. 좌우대칭으로 두창이 만들어졌고 중간에 뾰족한 心形花辨이 있고 주위에 卷草가 있으며 두창 가장자리에 小點 장식이 있다. 삼각형 邊緣 과 片身上에 소공이 있고 그 안에 도금된 동철사가 매어져 있다. 동시에 철사고리에 원형 소영편이 끼워져 있다. 믿 길이 6.7cm, 높이 4.5cm 이 다. 이러한 장식편 모양과 같은 것이 또 하나 있었으며 양단이 파손되었 고 잔존된 윤곽은 타원형이다. 도금된 삽형 동제 장식편 1 점 : 파손되었다. 1 면만 도금되었다. 주체 . 부 분은 거의 직사각형이다. 단, 양측 長邊이 약간 밖으로 굽어져 있고 표 면도 가볍게 융기되었으며 양단에 정사각형의 구멍이 있다. 구멍 중에
각각 연접된 편원형 장식편이 있다• 주체 부분과 편원형 부분에 모두 작 은 점으로 조성된 문양이 있다. 편원형 부분에 만초문이 있고 주체 부분 도안은 雙曲式 卷曲인데 만초문과 같다. 전체 길이 12.8 c m, 너비 3.2cm 이다. 도금된 투창 동제 장식품 1 점 : 파손되었다. 圓孤形의 부분 가장자리에 남아 있다. 전신이 두창되었다. 그것은 대칭되지 않은 만초문 화문이 세 밀하게 조성된 도안이다. 도안 문양 안에는 문양을 따라서 작은 점무늬 를 이루었다. 도금된 엽편을 끼운 동제 철사고리 3 점 : 모두 원형 융기의 小銅片 중심 에 모두 세 개의 구멍을 뚫었카. 작은 구멍 중에 각각 하나의 도금된 동 철사를 끼웠다. 세 번 꼰 동철사로 조성된 네 개는 나뭇가지 형태의 철 사고리이다. 그 중에 한 가지와 융기된 원형 소영편은 수직이다. 원형 융기의 소동편 가장자리에 다른 세 개의 소공이 있다. 그것들은 보통 양 면을 박은 자리이다. 그 의에 상당수의 도금 동제의 소영편이 있다. 그 것들은 보통 양면을 도금하였다. 어느 것은 원형이고 어느 것은 심형이 다. 또한 어느 것은 절단된 둥근 고리를 부착하고 동시에 움직이는 소엽 편의 장석을 매달았는데 이것은 이 묘장 장식물 중 가장 많다. 銀鐵樞~ 2 점 : 반구형으로 두께가 일정하지 않다. 그 중 1 점의 경 길이 14.7cm, 두께 0.8cm, 다른 한 점은 경 길이 13.6cm, 두께 약 0 . 5cm 이다. 우산하 1080 호 고분의 규모는 상당히 크고 구조 역시 근엄하다. 잔존 유물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장중하고 휘황한 인상을 준다. 通溝고 분군 중 몇 기는 가장 방대한 토묘와 비교하면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그래서 이 묘장은 왕릉이 아니고 일개 王公貴族의 묘장으로 보고 있다. 축조연대는 조정결구 입장에서 고구려 후기에 유행했던 간단하게 말각을 울려놓은 結項의 작법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사신묘와 오회분 4, S 호 분과 비교적 접근되고 있는데 다만 이중말각 구축이 생략되고 개정석 중
앙에 하나의 方檀를 뚫었다. 그래서 연대는 6 세기 중, 후기가 된다. 3) 맺는 말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 석비는 모두 21 기이다. 1 기는 유명한 광개토 대왕(호태왕)릉비로서 414 년 集安通溝 광개토대왕릉 동북쪽에 세워졌 다. 자연석에 인공을 가한 석바인데 사각형 기등으로 碑體가 거대하여 높이가 6m 를 초과하고 사면에 비문이 새겨져 있다. 다른 1 기는 1979 년 4 월에 충청북도 中原郡 可金面龍田里 立石村의 입구에서 발견된 〈 中原 高句麗碑〉이다. 이 비의 形制는 광개토대왕릉비와 거의 다 갇다. 다만 비체가 왜소해 높이는 1. 44m 이다. 비문 역시 사면에 새겼다. 그 연대는 현재 쟁론 중이다. 어느 학자는 고구려 제 20 대 장수왕 후기로 보고 있 고, 어느 학자는 제 21 대 문자왕 초기에 속한다고 보고 있다. 대체적으로 5 세기 말엽이다. 이번에 1411 호 고분과 1080 호 고분 위에서 발견된 제 2 기 석비는 고대 고구려의 사면에 돌아가면서 새기는 環刻 비문의 석비, 그리고 銘文울 조각하지 않은 석비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 비문과 2 기 석비의 고구려 고분이 제공한 자료에 근거 하여 고구려의 〈墓上立碑〉의 전후 정황을 고찰할 수 없다.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의 최후 일단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 自上祖先王以來 墓上不安石碑 致便守墓人塘戶差鎌 惟國岡上廣開土境好太 王盡爲祖先王墓上立碑 銘其炯戶 不今差緖(선조왕 이래부터 묘상에 석비를 세우지 않아서 수묘인의 집안을 서로 어긋나게 이해하였다. 다만 국강상 광 개토왕이 선조왕의 묘상에 비를 세우고 그 수묘인의 집안을 銘刻하여 서로 어긋매김이 없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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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비문에서 표명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고구려 왕릉에는 수묘인을 두어 수묘하고 청소하도록 하였다. 이 항의 유래는 오래된 제도이다. 그러나 광개토대왕 (392 - 412) 전에는 墓上에 비를 세운 선례가 없다. 둘째, 묘상의 立碑는 광개토대왕 집정 시기에 발단하였다. 셋째, 묘상의 입비는 처음에 고구려 왕릉에만 국한되었다. 넷째,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제 19 대 왕이다. 그리고 소위 〈 盡爲祖先王 墓 上立碑 〉 라는 내용은 광개토대왕이 고구려 묘비를 18 기 건립하였다는 뜻이다. • 다 섯 째, 고구려 묘비는 수묘제도를 유지한 산물이다. 이것은 상당히 특수한 성질의 것이다. 〈 묘상입비 〉 는 광개토대왕이 수묘인 집안(炳戶)을 살펴볼 때 부단하게 순서가 틀린 데서 취한 조처이다. 그 목적은 집안을 명기하여 수묘인에 대한 통제와 속박을 강화하는 데 있다. 여섯째, 이러한 상당수의 묘비에는 명각을 해서 비문을 갖게 하였다. 비문 중에 주요 내용이 빠지지 않게 한 것은 당시에 各基 왕릉에 규정된 수묘인 집안의 명단을 분별시킨 것이다. 이상이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중에서 살펴본 광개토대왕 시기의 고구려 〈 묘상입비 〉 초기 단계의 대체적 정황이다. 〈묘상입비 〉 의 구체적 방식은 선발견의 묘비가 분명하게 봉분 정상에 세워진 혼적에서 인지할 수 있 다. 당시 묘비가 〈 묘상 〉 , 즉 봉분 정상에 세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 하게 하여 준다. 광개토대왕 이후 고구려 〈 묘상입비 〉 의 정황에 대해서 주의를 할 수 있 는 것은 광개토대왕릉비 자체이다• 이 비는 고구려 제 20 대 장수왕이 광 개토대왕 사후 2 년에 건립한 것이다. 비의 形制가 비교적 특수할 뿐만 아니라 비문의 내용이 보통의 묘바와 다르다. 그것은 고구려 건국신화, 王族世系와 광개토대왕 평생의 업적을 기술한 것 의에 400 자 이상으로 광개토대왕릉 수묘인 집안 명단, 수묘인 집안의 신분, 來源, 및 구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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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 國炯 〉 또는 〈看 炯 〉 을 포함해서 330 집안을 자세히 명기하였다. 만 약 이 부분 문자를 내용에 가상하여 비문의 최후 일단과 관계를 맺어 보 면, 광개토대왕의 수묘 집안 배치, 묘상입비의 연유 및 수묘인 직책의 매매를 금지하는 규정에 대한 방법 등이 서술된다. 이러한 사항은 다음 과 같은 의미를 제시하여 준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그의 공적을 명기하는 평범한 공덕비(紀功碑)가 아 니고 수묘인 집안 내용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다시 말하면, 수묘인 집안을 명기하는 것도 비를 세운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이다. 고구려 〈 묘상입비 〉 성격의 입장에서 관찰하면 광개토대왕릉비는 독특한 고구려 묘비이며 광개토대왕이 선조왕 묘상입비의 조치를 취했을 당시의 성질과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다만 이 거바의 비체가 대단히 웅대하여 봉분 정 상에 세우기가 불편해서 묘 옆에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의에 광개 토대왕 바문 중에 수묘인 집안 명단 의에 많은 여러 가지 내용을 기술하 고 있다. 이것이 광개토대왕이 선조왕을 위해 건립된 비각과 구별되는 점이다. 만약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이 고구려 묘비 초기 단계의 정황을 설명하 여 준다면, 광개토대왕릉비 자체는 또한 장수왕 집정 초에 고구려가 계 속 선조왕을 위하여 〈 묘상입비 〉 한 사실을 표명하게 될 것이다. 더욱 1411 호 고분과 1080 호 고분의 자료가 제시하여 주고 있는 내용도 있다. 늦어도 5 세기 중, 후기에 시작하여 고구려에서 〈 묘상입비 〉 는 왕릉에만 국한되지 않고 많은 중소 귀족도 〈 묘상입비 〉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정황은 6 세기 중,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 유감스러운 것은 1411 호 고분과 1080 호 고분의 묘비상에 명문이 없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이 2 기 묘비의 성질에 대하여 구체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 이 2 기 묘비도 고구려 왕릉상의 비각과 갇이 수묘인의 집안을 표기할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 귀족 묘장은 왕릉과 동일하게 상당히 일 찍 수묘인의 설치를 시작한 것이다. 왕릉의 수묘인 집안을 잘못 구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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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정황이 발생하였는데 귀족 묘장의 수묘인 집안도 유사한 문제가 발생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 왕족이 〈 묘상입비 〉 와 〈 銘其炳戶 〉 의 조치 를 취하여 수묘인 집안이 계속 오인되는 것을 방지한 것이다. 이 방법을 고구려 귀족도 따랐을 것은 자명한 이치다. 1411 호 고분과 1080 호 고분 상의 석비는 비록 연대가 고구려 왕릉상에 立碑한 4 세기 말에서 5 세기 초보다 늦지만 종국에는 고구려 묘비에 속한다. 즉, 고구려 특유의 묘상 입비의 제도는 일맥상통한 것이다. 더욱 1411 호 고분과 그 석비는 5 세기 초에서 그리 멀지 않다. 그러나 〈묘상입비〉의 이러한 형식을 모방하거나 답습할 수 없는 가능성도 있다. 또한 이러한 조치의 실질과 의의를 조금 도 고려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2 기 묘비상에 문자를 발견하지 못한 원 인 때문이다. 고대 墓誌에 書가 있으나 不刻한 정형도 있다. 이 2 기 묘 비도 유사하거나 연대가 오래되어서 書寫한 비문이 마모되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2 기 묘비가 처음부터 비문을 서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 러한 가능성은 희박하다. 1) 한안호, 「고구려 건축의 역사적 지위」, 《 고고민속논문집 》 9, 1984, pp. 59-96. 2) 김영숙, 「고구려 무덤벽화에 그려진 두공장식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4, 1988, pp. 26~30. 3) 과학백과사전출판사, 『 조선고고학개요 』 , 1977, pp. 213-:215. 4) 하인호, 「정릉사에 대하여」, 《 조선고고연구》 3, 1986, pp. 31-34. 5) 리화선, 「고구려 금강사와 그 터자리 구성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4, 1986, pp. 39-41 . 6) 남일룡, 「황해북도 봉산군 토성리 고구려 절터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4, 1987, pp. 8-12. 7) 方起東, 「集安東台子高句麗建築遺址的性質與年代」, 《東北考古與歷史》, 1 輯, 1982, pp. 85-88. 8) 한인호 • 리호, 「평양성의 의성 안의 고구려 도시 리방과 관련된 몇 가지 문
제」, 《조선고고연구 》 1, 1993, pp. 13- 18 . 9) 한인호 • 리호, 「안학궁터 부근의 리방에 대하여」, 《 조선고고연구 》 4, 1991, pp. 29-33. 10) 안병찬, 「장수산 일대의 고구려유적 유물에 대하여」, 《 고고민속 》 2, 1990, pp. 7-11 . 11} 최승택, 「장수산성 1 호 건물터에 대하여」, 《 조선고고연구 》 4, 1991, pp. 34-38. 12}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編纂 『吉林省志』(卷 43 文物志), 1991, pp. 210-215. 13) 王健群 「好太王碑發現和垂拓」, 《 社倉科學戰線 》 第 4 期, 1983, pp. 171-180. 14) 王健群 저, 林東錫 역, 『廣開土王碑硏究J, 역민사, 1985. 그 의 5 편의 논문이 있다: ® 王仲殊 「關於好太王碑文辛卯年條的釋;目」, 《 考古 》 第 11 期, 1990, pp. 1037 -1044 ® 王仲殊 「再論好太王文辛卯年條的釋i R 」, 《考古 》 第 12 期, 1991, pp. 1125-1131 . ® 손영종, 「광개토왕릉비 왜관기사의 올바론 해석을 위하여」, 《 력사과학 》 1-4 기, 1987, pp. 30-35. ® 채회국, 「광개토왕릉비문의 해석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 력 사과학》 1-4 기, pp. 36-39. ® 조희승, 「광개토왕비문에 대한 몇 가지 문제」, 《 조선고고연구 》 3, 1987, pp. 12-14. 15}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倉編纂, r 吉林省志 』 (卷 43 文物志), 1991, pp. 244. 16) 方起東 • 林至德, 「集安洞溝兩座樹立石碑的高句麗古墓」, 《 考古與文物 》 2, 1983, pp. 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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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고분 고구려 고분에 대한 연구는 상기한 城址 못지않게 잘 되어 있다. 고분 은 고구려 고고학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비교적 구체적으로 연구되어 있다. 먼저 李殿福의 고구려 고분에 대한 일반적 견해를 살펴보고, 그 다음 轉山子 부근의 적석묘, 칠성산, 우산하, 산성하, 마선구 고분군 등 의 발굴 결과, 상 • 하활룡촌 고분, 그리고 魏存成의 적석묘의 · 유형과 발 전에 대한 이론을 살펴보기로 한다. 봉토묘로서 노호초, 동대파 고분 등 을 살펴보겠다. 고구려 벽화고분은 자료를 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전기, 중기로 나 누어 살펴보겠다. 전기에 속하는 삼실묘, 산성하 332 호, 683 호와 만보정 1368 호, 그리고 통구 12 호 등과 중기의 고분으로 장천 1 호, 2 호, 오회분 4 호와 5 호 등을 검토하고, 이론적인 견해로 고구려 초기의 물질 문화와 벽화를 통해 본 사회 • 경제를 살펴보겠다. 북한에 있는 벽화고분은 비교 적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그 중에 평양역전, 안악 1 • 2 • 3 호, 덕흥리, 약수리, 복사리 고분 등, 그리고 아직 북한의 학자들에 의해서 시기가 확정됨이 없이 간략하게 소개된 비교적 후기 벽화고분(사신도)에 속하는
동암리, 룡흥리, 운룡리, 평정리와 안학동, 로산동 일대의 벽화고분도 살펴보겠다. 벽화고분이 아닌 일반묘로서 운평리 제 4 지구 적석묘, 덕화리 3 호 봉토 묘, 낙랑구역, 창매리, 오국리 등의 봉토묘 등을 살펴보고, 북한 학자가 분류한 고분의 유형과 발전관계도 검토해보자. 1 고구려 고분 연구 중국 동북쪽의 오래된 민족이었던 衍族의 한 가지인 고구려 민족은 압 록강 중 • 하류와 潭江 유역 일대에서 생활하였다. 기원전 1 세기에서 7 세 기까지 이곳에서 강대한 국가를 건립했다. 압록강 중류 右岸의 集安은 고구려 전 • 중기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도성 유적이 지금까 지 보존되어 있다. 당시 사람들이 남겨 놓은 고분의 수는 10,000 기 정도 이며 과거에는 集安 洞(通)溝 일대의 고구려 고분을 통상 通溝 고분군이 라고 불러 왔다. 通溝 고분군은 고대 고구려가 남겨 놓은 주요 古壤地의 하나이다. 종 류가 많고,. 數目이 크고, 내용물이 풍부하다는 것은 이미 내의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集安 고구려 고분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바로 고구려 역사고고방면의 중요한 과제이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吉林省 문물고 고연구소의 李殿福이 集安 고구려 고분의 분포, 유형 등과 상대편년 등 울 자세히 조사하였다 .I)
1) 集安 고구려 고분의 분포 개황 集安縣은 吉林省 남부, 압록강 중류 좌안에 위치했다. 경내에는 큰 산 과 깊은 계곡이 많고 뱀처럼 꿈틀거리는 起伏의 老嶺山脈이 남북으로 관 통하여 全縣울 동 • 서로 나누고 있다. 그래서 동쪽을 嶺前, 서쪽을 嶺後 라고 칭한다. 고구려 고분군은 대부분 河谷의 1 단 階地에 분포되어 있 다. 예를 들면, 大路公社 高地 고분군과 太平公社 大平溝 고분군 등이 다. 또한 적지 않은 고분이 산록 지대에 분포되어 있는데, 黃柏公社 長 川 고분군, 良民 고분군 등이 이러한 예이다. 개별적 고분이 江邊灘上에 분포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橘樹林公社 地溝門子 고분군이 그것이다. 고구려 고분에는 석분과 토분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모두 이것들을 혼동 하고 있다. 대체로 산언덕에 의지하여 만든 것은 석분이고 江階地에 만 든 것은 토분이다. 이러한 언덕은 洞(通)溝 고분군에 명백히 나타난다. 嶺前 嶺後에서 고구려 시대 고분군은 모두 32 곳 발견되었다(표 5-1). 嶺前에서 23 곳, 嶺後에서 9 곳이 발견되었으며 무덤은 모두 12,358 기이 다. 고분 분포 상황으로 보면 당시 嶺前에 고구려 주민이 상당히 많았 고, 嶺後에는 비교적 적었음이 나타난다. 嶺前에서도 무덤은 通溝 일대 에 집중되어 있다. 集安縣城 부근의 通溝 고분군을 크게 6 개의 고분구로 나눌 수 있는데 下解放(원명 下羊魚頭) 고분구, 禹山下 고분구, 山城下 고분구, 萬賓汀 고분구, 七星山 고분구와 麻線溝 고분구 등이다. 하해방 고분구는 通溝 고분군의 제일 동쪽 끝에 있다. 이곳의 고분은 모두 51 기이다. 유명한 円牟文字 고분(J XM 001), 環文 고분(J XM 38) 등은 이 고분구에 있다. 우산하 고분구는 후면에 기복이 계속된 禹山이 있고, 남쪽에 압록강이 있으며, 동쪽의 土口子嶺에서 서쪽 通溝iiiJ까지 분포되어 있다. 이와 갇 이 동서로 좁고 긴 평천 지대의 북반 부분에 고분이 3904 기가 분포되어
표 5-1 集安 嶺前·嶺後 고분 통계표
차례 고분군 지 명 수량(기)
通溝 고분군에서 제일 큰 고분구가 된다. 유명한 將軍塚(J YM 001), 太 王陵(J YM 541) 과 角祗壁畵墓(J YM 459), 舞踊塚(J YM 457), 通溝 12 호 (JY M 1894), 三室墓(J YM 2231), 四神墓(J YM 9113), 五盛壤(J YM 2101 -2105) 등의 고분이 이 고분구에 분포되 어 있다. 산성하 고분구는 禹山 北麗의 산성자산성 남쪽, 通溝 하곡 兩岸에 있 는데 이곳에 1582 基의 고분이 있다. 유명한 고분으로 折天井墓(J SM 1298), 兄墓(J SM 635), 弟墓(J SM 636) 및 龜甲壁畵墓(J SM 1304) 등이 있다. 만보정 고분구는 산성자산성의 서남, 칠성산 동쪽 언덕에 있다. 이곳 에 분포된 고구려 고분은 1516 기이다. 칠성산의 남쪽 언덕에 있는 칠성산 고분구에 1708 基의 고분이 있다. 마선구 고분구는 칠성산 고분구 주위와 칠성산 서쪽 언덕에서 麻線溝 河 兩岸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에 2593 기의 고분이 있다. 마선구 고분 구는 우산 고분구 다음으로 커서 通溝 고분군의 제 2 대 고분구가 된다.
표 5-2 通溝 고구려 고분 묘제 동계표
유명 한 千秋墓 (JM M 1000) , 西大墓 (JM M 540) 와 麻線溝 1 호 (JM M 001) 벽화묘가 이 고분구에 있다(표 5-2). 2) 集安 고구려 고분의 유형 현재까지 중국과 의국학자들이 고구려 고분의 形制를 언급할 때 언제 나 석분과 토분으로만 나누고 상세한 구분은 하지 않았다. 그 중요한 원 인은 고구려의 가장 중요한 通溝고분군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수의 학자들만 集安에 가서 通溝 고분군에 대한 일반성을 이해하였을 뿐 다른 학자들은 集安에 가지도 않고 간접적으로 이미 발표 된 類 • 式 구별 재료를 참고삼아 더 세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여러 가지 類 • 式에 대한 명칭도 일치하지 않고 각자가 제각기 명칭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은 학술상 상호 통용에 있어 종합 연구로 발전을 도모할 경우 대단히 불편하다. 예를 들어, 석분류를 말할 경우에는 보통 적석묘라 칭하고, 어떤 이는 그것을 나누어 無基壇과 有基壇 적석묘라고 칭한다. 어떤 이는 소형 적석묘와 대형 적석묘로 구분하고, 이는 대 • 중 • 소형 적석묘 등으로 나눈다. 분류가 불확실하고 또한 석분류의 전모를 반영시키지 못하였다. 그래 서 여러 차례의 현지 답사와 상세한 관찰에 의거하여 얻은 자료를 대비 분석한 것을 기초로 2 類 9 式의 묘제를 다시 새롭게 정리하여 이름지었다. 集安 고구려 고분에는 어느 것은 묘실이 있고, 어느 것은 간단한 곽실 만 있다. 즉, 그 外表는 크게 2 가지로 분류된다. 한 가지는 돌로 봉한 석분이고, 다른 한 가지는 흙으로 봉한 토분이다. 각기 구축 시점에 근 거하여 대체로 9 식으로 나누어 본다. 석분류는 5 식, 토분류는 4 식이다. (1) 석분류 석분류는 그 구축 시점에 의해 5 식으로 나뉜다. I 식 : 적석묘, Il 식 : 방단적석묘, Il1 식 : 방단계단(桃) 적석묘, IV 식 : 방단계단(柳 석실묘 등이다. 이러한 形制의 고분은 대부분 대형으로 규 모가 크고 엄연한 금자탑형과 같아 주목을 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량이 제일 적어 약 20 기에 이른다. V 식은 봉석동 실묘이다. (2) 토분류 4 식으로 나뉜다. 1 식 : 방단봉토 석실묘, Il 식 : 방단계단(梧) 봉토석 실묘, III 식 : 토석혼축 석실묘, W 식 : 봉토석실묘 등이다. 이러한 2 류 9 식 고분 형제는 표 5-3 과 같다.
표 5 성 고구려 고분 유형도
類 式 명칭 墓制 (形) 묘의 形制
(3) 여러 가지 유형의 고분에 대한 상대연대 분석 集安 고구려 고분은 일찍이 도굴되었고, 이미 발굴된 고분과 부장품은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다. 그래서 연대를 결정할 때에는 고분의 결구
자체를 근거로 하지 않을 수 없다. 분묘의 대소가 일반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당시 사회계급과 등급 관계이지 연대를 결정하는 근거는 아니다. 各式의 건축수준은 일치하지 않는다. 일정한 정도에서 석조기술의 발전 과정을 나타낸다. 그러나 일정치 않은 건축이 복잡하면 할수록 시대는 점점 늦어진다. 발전과정 중에 새로운 유형이 출현하는- 것은 소수이며, 일시에 다론 유형을 전부 배척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동일 시 기에 한두 종, 혹은 더 많은 형제가 유행하는 것은 가능하다. 어느 유형 의 수량이 많은 것은 상당히 장기간 유행한 것을 나타내 준다. 어느 수 량이 비교적 소수인 것은 보편적 유형이 없었다는 것을 설명하며, 더 나 아가 존재의 연대가 짧아질 뿐만 아니라 발전 중인 하나의 傍系를 시사 하면서 기타 고분과 병존했음을 설명하여 준다. 유형의 각도에서 각 식 의 절대 연대를 추정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할수 있다. 현재 결구 자체를 출토 유물과 결합시켜 各類式 고분에 대한 상대연대 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여 본다. O 石項類 各式의 연대 분석 集安縣境 32 곳의 고구려 고분군을 보면 석분은 대부분 산언덕에 의지 하여 분포되었고, 토분은 대부분 河谷 지대와 平川 지대에 있다. 보존이 잘 된 지구에서는 매장 선후를 구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七星山 남쪽 기슭의 고분은 명확한 배열 순서를 보여 주는 대, 그것은 산허리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배열되어 있다. 어느 행렬은 小 墓에서 시작하여 大墓까지 이른다. 어느 것은 큰 묘에서 점점 작은 묘로 된다. 이러한 배열 순서의 공간에 토분을 매장하였다. 상기한 현상에서 보면 集安通溝 고분군은 당시 集安 일대에서 생활한 고구려인의 것으로 여러 가족은 각기 자기의 묘지가 있어서 순서에 따라서 규칙적으로 매장 되었다. 분묘의 대소는 신분 고저의 상정일 가능성이 크다. 전체적인 입
장에서 논하면 산언덕에 의지한 석분의 연대가 상당히 이르고 하곡과 평 천 지대에 매장된 것과 석분류 공간에 매장된 토분의 연대는 상대적으로 늦다. 두 종류 고분배열의 비교연구는 건축기술 발전과정을 충분히 볼 수 있 다. 예를 들면, 석분류는 대부분 간단한 곽실을 만들었고, 토분류는 돌 (石材)을 쌓아 묘실(玄室)을 만들었다. 석분류의 곽실은 모두 頂部 중앙 에 구축하고, 토분류의 묘실은 모두 지표 또는 반지하에 돌을 쌓아 만들 었다. 석분류의 방단계단 석실묘에 비록 묘실이 출현하지만 여전히 頂部 중앙에 있다. 석분류의 봉석동실묘와 토분류의 방단봉토 석실묘, 방단계 단 봉토석실묘 등은 두 종류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아마 이것들은 석분에서 토분으로 교체되는 과도기 형제 같다. 종합적으로 관찰하면 고 구려 고분의 형제는 간단한 곽실에서 묘실로 발전하고, 더불어 정부의 중앙에서 낮은 곳으로 점차 변화하였다. 매장 지점은 다수가 높은 곳에 서 평천 지대로 점차 발전하였다. 상대적으로 말하면 석분류의 적석묘는 고구려 초기의 고분 형제다. 다 만 通溝 고분군의 현존 수량 통계를 보면 석분류 5 식 중 가장 많은 것은 1 석으로 전체 9 식의 29/ 100 를 차지한다. 또한 매장 순서로 보면 대부 분이 산허리에서 시작하여 하향식으로 배열되어 있다. 현재 集安의 2 류 9 식 고분 중에 제일 이른 Il 식은 아마 고구려 건국 이전에 있었던 墓葬 形制의 하나이다. 석분류의 방단적석묘는 건축기술상 적석묘보다 한 걸음 발전된 것으로 墓壇 주위에 다듬은 거석을 방단으로 쌓아서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그것들은 通溝 고분군 중 현존 수량이 적석묘의 2 / 5 이고, 兩類式에서 1 / 10 을 차지한다. 출현한 시기도 상대적으로 적석묘보다 늦다. 이러한 고분은 적석묘를 수축한 경험의 축적 결과이거나 혹은 계급 차별에서 나 타난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고분에서 〈明化〉 〈半兩〉 〈五妹〉 〈大泉五十〉 〈貨泉〉 등 戰國에서 東漢시대에 이르는 화폐가 출토되었다. 근년에 만보
정 묘구 78 호 방단적석묘에서 도금한 마구 2 付롤 발견하였는데, 거기에 는 말안장, 등자와 재갈, 고리〔帶釣〕, 桃形葉, 綴管葉의 단추형 장식이 있었다. 또한 黃柚陶片은 고운 점토질 태토로 황유에 녹색이 섞여 약간 어두운 빛을 띠며 안팎에 유약을 받랐다. 바록 복원할 수는 없으나 기물 울 판별할 수 있는데 그것들은 火遣 , 곧은 기벽과 좁은 구연을 가진 盆, 의반된 구연의 耀 , 넓게 벌어전 구연의 登 등이다• 이 登롤 마선구 1 호 묘와 장천 2 호 봉토석실묘에서 출토된 黃 柚陶盛와 비교하면 78 호 방단적 석묘 출토의 陶登 구연부의 벌어진 정도가 상당히 작다. 그래서 이 盡는 이른 시기의 柚陶에 해당된다. 여기에 근거하여 추론하면 방단적석묘는 적석묘 다음에 출현하였으며, 그 유행한 기간이 대단히 길어 4 세기에 이 르러서도 그 형식이 보존되어 있다. 출토된 동전에 근거하면 그 상한은 東漢 fl]年보다 늦지 않다. 방단계단 적석묘는 건축기술상 방단적석묘보다 발전되었는데, 그것은 계단이 출현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의 출현연대는 방단적석묘보다 늦거나 상술한 두 가지 형제보다 높은 신분에만 사용된 일종의 특수한 작법이 다. 1962 년 通溝 고분군 조사시, 우산하 묘구 3319 호 방단계단 적석묘 앞에서 1 점의 銘文 있는 회색 권운문와당을 채집하였다. 그 명문은 〈 丁 巳口曰曰曰歲口曰口曰口口萬歲太 歲 在丁 巳月四 H 〉 이 다. 1963 년 集安縣 城里(죽 國內城 舊 址)의 沿池를 수축할 때 文樣,胎土, 形制가 대체로 상 술한 와당과 갇은 1 점의 명문와당을 발견하였는데, 이 명문은 〈 太寧四年 太歲 □□ rll 月六日己巳造吉保子宜孫 〉 이다. 앞의 명문은 해독할 수 없으나 뒤의 太寧 4 년은 太寧 3 년의 오기로 곧 東晉明帝太寧三年八月六日이며, 그것은 또한 고구려 제 15 대 미천왕 26 년이다. 그리고 전자의 와당 색깔, 문양, 태토, 명문 畵法이 후자와 같다. 그래서 두 개의 연대 차이가 그 리 크지 않거나 혹은 동시일 가능성이 있는 미천왕 시대의 유물이다. 이로 인해서 우산하 묘구 3319 호 방단계단 적석묘의 상대연대를 대체 적으로 4 세기 전반 무렵으로 보는 데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다시 말
하면 방단계단 적석묘는 미천왕 시대에 여전히 유행된 일종의 고분형식 이다. 그러나 이런 類式의 고분이 4 세기 중엽에 출현하였거나 그것보다 이르거나 적석묘와 방단적석묘보다 약간 늦거나 또는 방단적석묘와 동시 에 출현한 형식아라고 말할 수는 없다. 상술한 Il1 식을 발굴할 때 관은 발견하지 못하고 돌로 쌓아 만든 곽실 안에서 목탄과 불에 탄 돌편만이 남아 있었다. 그 의에 곽실의 결구에서 보면, 다만 곽의 四桓(틀)만 있고 뚜껑돌은 없으며 역석으로 봉하였다. 그 형상은 평정한 方丘 같다. 불에 탄 돌들이 상술의 Il1 식 고분 전부에 서 발견되었는데, 불에 탄 돌이 대부분 같은 장소에 있는 것으로 보아 도굴꾼의 행위로 볼 수 없다. 가능성이 커 보이는 것은 죽은 자를 매장 하는 사람들이 일종의 火葬儀式을 거행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 같다. 불 울 피운 이후에 역석으로 봉하였다. 『 南史 』 , 「고구려」에서 말한 〈 有鄒無 稽 〉 한 것은 아마 석분류의 이 I11 식을 지적한 듯하다. 방단계단 석실묘는 방단계단 적석묘의 형제와 같이 유일하게 묘실이 있다. 이러한 형제의 고분은 근래에 발견된 것은 대부분 커서 중, 소형 은 드물며, 그 수량은 헤아릴 수 있을 정도다. 모두 상승통치계급의 陵 墓 같다. 우산하 묘구 541 호묘(과거 太王陵)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이라고 쓰안 銘文博울 발견하여 19 대 廣開土境好太王의 德울 말한 陵이 라는 것이 판명되었으며 마선구 묘구 1000 호묘(과거의 千秋墓)에서 〈千秋 萬歲永固 〉〈 保固乾坤相華 〉 등이 쓰인 명문전이 출토되어 원래 왕릉이라 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러한 類式의 고분 중 보존이 제일 잘 된 것이 우산하 묘구 1 호(과거 의 將軍塚)이다. 이것은 通溝 평원의 동북부, 龍山 발치에 위치하며, 남 쪽으로 10 리 거리에 集安驛이 있다. 塚은 계단식 금자답형으로 높이 12. 4m, 변의 길이 35 . 6m 이다. 대형 화강암석을 7 단으로 쌓았고, 각 면에 頂護石 3 편을 세웠으며, 묘실은 5 단 중앙에 있다. 기세가 등등하고 高大 宏偉하여 충분히 고구려 시대 석조 건축 예술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
다. 주의할 가치가 있는 것은 이 1 호 墓頂의 巨石 蓋頂石 상면 주위에 원형 기둥구멍이 약간 있는 것이다. 아마 1 호 묘정 상면에 또 다른 건축 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남아 있는 회색 연화와당과 명문전은 모두 이 건축물의 유물인데, 이것들은 기타 類式의 것과 다른 특수한 일종이 다. 이러한 형제의 고분 구축방법은 먼저 다듬은 직사각형 대석을 방단 四 桓으로 쌓고 그 안에 역석으로 충전하고, 방단 주위를 위로 좁혀서 쌓아 가면서 그 안에 역석을 충전하여 다섯째 단에 아르면 그 위에 다듬은 板 石을 깐 후에 묘실을 만든다. 이렇게 하여 만든 고분은 의관이 정제되고 宏偉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多層의 높고 큰 건축은 그 안에 역석을 충 진하여 공고한 기초를 잃게 되었다. 즉 불규칙한 역석은 의부로 붕괴되 는 장력을 가졌다. 그러므로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修築할 때 고분 주위 에 거석 3 점에서 5 점까지를 頂護石으로 세워 놓았다. 그러나 어떤 사람 이 項護石 또는 방단 邊桓(가장자리 틀)의 장대석을 제거하면 그 내부의 역석이 밖으로 쏟아져 나와 건축물을 붕괴시킬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로 인해서 이러한 유형의 고분은 대다수 커다란 역석 퇴적으로 변하여 완전 무결한 보존을 강구하였다. 우산하 묘구 41 호 계단석실묘를 정리할 때 네 벽에 그려진 채색벽화가 발견되었다. 잔존한 벽화를 보면 기둥 위에 세워진 창방, 지붕, 연꽃 그 리고 묘주인들의 연회장면과 수렵 등의 생활단면을 그렸다. 부장품은 마 구, 兵器와 손잡이가 네 개 달린 陶蓋이다. 방단계단 석실묘에 대한 연 대결정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마선구 1 호에서 출토된 네 귀 달린 도호 보다 구연부가 약간 작다. 그러나 삼실묘 제 1 실에서 출토된 네 손잡이 도호와는 상당히 가깝다. 이로 인해서 벽화와 네 귀 달린 도호의 제작 방법은 대체로 이 고분시대가 5 세기 정도임을 보여 준다. 방단계단 석실 묘가 석분류 발전의 최고 형제라는 설명이며 또한 이것들은 늦게까지 유 지되었다. 봉토석실묘가 비록 고구려 내부의 통일과 발전에 따라 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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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의 주요 고분 형제로 변화되었다 하더라도 봉토석실묘가 일시에 사 라졌다는, 즉 〈 t上石爲封 〉 의 석분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말이 아니고 개별 적으로 아주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발견으로 전에 池內宏 등이 주장한 것처럼 고구려 토분이 일단 출현하자 석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봉석동실묘는 묘실이 頂部 중앙에서 지상으로 옮겨졌다. 어느 묘실에 는 간단한 株角 溫 井이 출현하여 석물 축조기술이 현저히 발달되었음을 설명하여 주고 있다. 그 의부는 여전히 돌로 봉하여 석분류에 속하나 역 시 토분의 특칭을 가지고 있다. 아마 석분과 토분의 과도형식의 하나가 될 가능성이 있고, 그 출현 연대도 마땅히 석, 토분 교체의 시기로 보아 0F 겠다. 『 三國志 魏志 東夷傳 』 에 고구려에 관한 기록으로, 〈 男女已妹姿 便稽作 送終 之衣 厚葬 金銀財幣盡送于死 積 石爲封 列種松梧 〉 한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 제기한 〈積 石爲封 〉 은 아마 석분류 V 식 형제에 대한 지적인 듯하 다. 이것들은 고구려 전기의 고분 형식이다. ® 토분류 각 식의 연대 분석 토분류 W 식 중 전 Il 식의 수량이 대단히 적고, 石, 土 양류 특칭을 갖춘 것은 아마 석, 토분 교체 형식이다. 토석혼축 석실묘와 봉토석실묘 가 다수를 차지한다. 通溝 묘군을 예로 들면 양자는 양류 각식의 55/100, 즉 반수 이상을 차지한다. 현재 集安 고구려 고분 중 벽화고분이 발견된 20 기 중 19 묘는 봉토석실묘이다. 이것들은 봉토석실묘의 연대를 결정하 는 중요한 근거가 되어 주었다. 여기서 토분의 묘실 결구와 벽화 내용, 회화기법과 약간의 부장품 등을 근거로 종합 분석하여 토분의 상대연대 를 검토하겠다. 당연히 벽화가 있는 봉토석실묘는 봉토석실묘를 전부 대 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여기서 벽화가 없는 봉토석실묘가 벽화가 있는 봉토석실묘보다 이른 시기의 것이라는
표 「 石 化 1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集安 고구려 고분군 중 현재의 19 기 봉토석실 벽화묘는 다음과 같은 특칭을 가지고 있다. 사회풍속과 도안화가 주제로 된 벽화묘는 묘실 벽 에 먼저 백회를 칠한 다음 그림을 그렸다. 백회를 직접 벽에 바르고 중 간에 아무런 진흙을 붙이지 않았다. 신령을 주제로 한 벽화묘는 전부 다 듬은 화강암석을 쌓아 묘실을 만들었는데, 이것의 평정한 석면(벽) 위에 직접 그림을 그렸다. 묘실 결구를 관찰하면 다실과 단실로 나눌 수 있다. 백회를 칠한 벽화 묘의 대다수가 다실묘로, 전후 2 실로 나눈 것과 주실 앞의 용도 양측에 좌우 2 소실을 가전 것, 그리고 평면이 곡절로 연결된 3 개 대소상의 묘실 울 가진 것이 있다. 석면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린 벽화묘는 일반적으로 단실이다. 전자의 묘실 조정은 窓隆式 또는 四阿式(네 기등상의 건축물) 이다. 어느 것은 평행하게 좁혀 가면서 다충을 만든 후에 말각을 쌓고, 그 위에 거석을 덮었다. 후자의 조정은 순수한 말각쌓음에 속한다. 평행 하게 좁혀간 다층 다음에 말각의 묘가 출현하는데 창방 측면에 쌍사신도 가 보인다. 순수한 말각조정은, 다듬은 석벽에 직접 그림을 그린 벽화묘 로서 벽화의 주제는 사신도이다. 상술한 특징에 근거하여 集安 고구려 봉토석실묘 벽화를 대체로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눌 수 있다(표 5-5). 전기 봉토석실 벽화묘는 석재 처리가 거칠고 묘실을 좁히면서 쌓아 울 려 궁륭식 또는 사아식 천장을 이루었다. 명백한 것은 중국의 碑室墓의 결구를 그대로 모방하고, 벽화내용만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전기에 속하 는 것은 만보정 묘구 1368 호분, 각저총, 무용총이다. 만보정 묘구 1368 호분은 묘실 평면이 刀形이며, 羅井은 사아식인데, 다만 흰 벽에 墨으로 지붕과 기둥을 그렸을 뿐 기타 내용이 없는 간단한 구도이다. 무용총, 각저총의 네 모서리에도 역시 간단히 두공 圓樣울 그려서 목조 건축 결 구의 모방울 표현하였을 뿐이다. 무용총, 각저총의 主室 4 벽에 묘주인 생전의 여러 가지 생활장면, 즉 연회, 가무, 각저(씨름), 야의의 牛車行
列, 그리고 사냥하는 장면 등을 그렸다. 묘 정상에는 日 月 • 星辰 • 奇 獸 • 飛仙 등의 하늘 모습을 그렸다. 수렵도의 입장에서 보면 人,馬를 이 용한 산의 회화작풍이다. 두 고분의 주실 조정은 모두 전기의 궁륭식 작 법을 가지고 있다. 그 연대는 대체로 西晉시기에 해당하며, 3 세기 중엽 부터 4 세기 중엽에 이른다. 중기의 봉토석실 벽화묘는 集安 현재의 벽화묘 중 그 수량이 상당히 많다. 예를 들면 통구 1, 2 호, 산성하 332 호, 983 호, 1304( 龜甲)호, 마 선구 1 호, 下解放環壇墓 및 장천 1, 2 호와 삼실묘 등이다. 중기의 벽화 묘는 평면 결구가 전기와 대체적으로 같다. 다만 묘실 조정이 평행으로 좁아지면서 다층을 이룬 것이 특칭이고, 어느 것은 상칭적인 小株角울 나타내고, 평행으로 좁아지면서 다층을 이룬 후에 다시 말각을 1 층에서 2 층까지 쌓은 후 다시 거석으로 정상을 덮었다. 이것은 일종의 새로운 작법으로 후기의 순수한 말각쌓음 조정은 이러한 경험의 축적에서 온 것 이다. 비록 벽화내용은 여전히 묘주인 생활, 기거, 출행 위주의 제재지 만 불교 제재가 현저히 증가하였다. 출토된 부장품은 네 귀 달린 柚陶 登, 柚陶煥, 柚陶鉢, 柚陶耳杯 등이다. 네 귀 달린 柚陶盡, 柚陶遣는 마 선구 1 호 출토의 陶쭙 陶溫 형식과 갑다. 이러한 柚[때는 4-5 세기 고구 려의 전형적 작품이다. 이것들 중 네 귀 달린 도호는 상당히 많은 고분 등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고분은 산성하 332 호묘, 983 호 묘, 삼실묘 제 1 실, 마선구 1 호묘, 만보정 78 호묘 및 장천 2 호 등이다. 이것은 고구려인들 생활 중에 전형적으로 구비되는 유물일 가능성이 크 다. 고분의 결구, 벽 ·화 내용과 출토된 소량의 유물에 의하여 중기의 상대 연대를 추정하면, 대략 4 세기 중엽에서 5 세기 중엽이 된다. 이 시기는 공교롭게도 고구려 사회가 크게 발전된 시기로 전체 고구려의 역사 중 이 시기가 가장 중요한 발전 단계였다. 이러한 발전단계가 있음으로 해 서 이후의 번영, 창성한 시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4 세기 이후의 고 구려는 상충 통치계급으로부터 대의로 확장되어 영토가 원래보다 확대되
표 5-5 集安 고구려묘 벽화 分期表
분 7 l 묘 ` 봉토 석재 묘의 형제 벽화내용 부장품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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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대의 상업의 왕래 역시 빈번하였다. 선진의 생산기술을 의부로부 터 끊임없이 받아들여서 고구려 사회의 생산력을 비약적인 발전단계로 끌어올렸고 이러한 상황은 필연코 고분에 반영되었다. 고구려 중기 벽화묘는 고구려 벽화예술의 주요 발전단계의 하나였으 며, 그 제재의 풍부함, 숙련된 기교, 다양한 벽화내용 등으로 미루어 보 아 충분히 중시할 가치가 있다. 후기 봉토석실 벽화묘는 集安에 있는데 중요한 것은 사신묘와 오회분 4 호, 5 호묘이다. 건축 석재를 매끄럽게 공정하였고, 묘실 결구를 근엄하 게 하였으며, 평면은 정사각형이다. 여기에 단실을 만들고 네 벽 위에 창방울 받치고, 그 위에 말각을 2 층으로 쌓아 斗四斗八溪井울 형성하고 맨 위에 거석을 덮었다. 윤택하고 평정한 석벽 위에 직접 그립을 그렸다. 네 벽에 四神울 그렸 는데 이 그림은 전, 중기의 묘주인 생활장면 등 사회풍속화와 대치되었 다. 네 모서리에 그렸던 두공은 보이지 않고 붕養面怪獸룰 托龍한 項樣 이 나타났다. 창방에 인동문 또는 交龍文 도안을 그렸고, 말각석에 용을 타고 奏樂하는 仙 A 도 그렸으며, 그 사이에 日月星宿울 배열하였으며, 뚜껑돌 아래에 盤龍文 또는 龍虎가 얽혀서 싸우는 그림을 그렸다. 4 호, 5 호의 네 벽 사신도에 網狀火炤文 안에 蓮花文을 섞은 연속 도안을 加筆 하였으며 동시에 이 도안에 供養人物울 나누어 배치하였다. 그 회화 작풍에 의하면 오회분 4 호 개정석의 播龍文은 華縣石窟 중의 반룡문과 같다. 4 호와 5 호 基頂 제 3 重 북면에 쌓인 말각석축의 飛仙과 雲岡石窟 제 12 굴 西小籠平 基飛仙 및 공현굴 중의 비선 등의 자태와 기 법이 모두 갇다. 4 호와 5 호묘 모두 蓮花冠울 쓰고 있는 奏樂仙人도 있는 데 이러한 연화관식은 晉에서 시작하였다. 晉 이전에는 그러한 것이 보 이지 않는다. 5 호묘의 창방 아래의 인동문 등은 長沙爆泥沖 濟永元 元年 (499) 명문전 위에 離刻된 인동문과 갇다. 이로 인해서 集安 후기의 봉 토석실벽화묘의 상대연대는 대략 北朝 末年, 죽 5 세기 중엽에서 6 세기
중엽으로 인정할 수 있다. 集安 후기 봉토석실 벽화묘는 석재건축과 벽화예술이 모두 이전의 各 期롤 초과할 뿐만 아니라 어느 경우 고구려가 集安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에 농업생산이 신속하게 발달된 것을 설명하여 주고 있다. 이것은 사회생산력이 높은 수준에 오른 이후에 비로소 출현한 것이다. 벽화를 설명하면 이것은 사회생활의 현실을 초월한 神 靈 鬼怪를 주제로 하였다 . 이것은 또한 당시 고구려의 통치인들이 신령귀괴의 힘을 빌려 안일한 생 활을 누리려는 표현이기도 하다. 종합하면, 集安 고구려 봉토석실묘가 이른 것은 3 세기 중엽에 출현하 여 4 세기에서 5 세기 중엽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발전하고, 6 세기 중엽에 도달하면 이미 고구려 묘제의 주류가 이루어진다. 고구려가 하루하루 번 영 창성함에 따라서 토분이 후기에 나타나는 중요한 매장제도로 변한다. 과거 어떤 사람은 봉토석실묘의 출현 연대를 427 년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로 보았지만 이것은 실제상황에 부합되지 않는다. 고대 고구려의 매장제도는 석분에서 토분으로 발전되는 과도기에 자체 의 내재적 요소 의에 중국의 선전문화가 고구려에 영향을 끼친 것을 발 견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漢代에 石室과 碑室의 봉토묘가 출현 하였다. 동북지방에서는 戰國 이래로부터 정치, 경제, 문화 중심이 遼東 郡 首府의 遼陽 일대가 되어 대량의 漢代 봉토석실묘가 존재하고 있었 다. 이러한 것은 고구려의 墓葬제도와 葬俗의 발전에 일정하고 적극적인 작용을하였다. 2 轉山子 부근의 적석묘 集安縣에서 수돗물 정수장을 건립하기 위하여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322
集安縣 문물보관소, 省文物工作除 주관하에 1979 년 10 월 10 일부터 11 월 2 일까지 31 기 고구려 고분이 발굴되었다. 발굴에 참가한 학자들은 林至 德, 間毅之, 趙書跡 孫仁杰 運 勇 등이다 .2) 1) 고분의 위치와 형제 고분들은 縣城에서 북쪽으로 1.5k m 되는 禹山 서쪽 끝의 轉山子 정상 부와 동쪽 언덕에 있다. 31 기 고분은 심하게 파손되어 유물은 대단히 적 었다. 고분은 자연지형을 따라서 언덕 아래에서 위로 3 級 臺 地로 나누어 분포되었다. 고분번호는 1965 년 通溝 고분군의 번호순서에 따랐다. 31 기 고분 중 28 기는 적석묘이고 3 기가 봉토동실묘이다. 적석묘는 轉 山의 제 3 대지와 제 2 대지에 있고 봉토동실묘는 제 2 대지와 제 1 대지에 분포 되어 있다(그림 5-1 ). 28 기 적석묘는 고분의 결구에 따라서 2 식으로 나뉜다. 1 식 18 기 : 이 고분들은 石魂로 만들어졌다. 정사각형이며 너비는 9- 10m 이고 그 잔고는 o.60- l.1 5m 이다. 橫抗은 발견하지 못하였고 유물은 드물다. Il 식 10 기 : 형제는 1 식과 기본적으로 같다. 계단식 벽(階!喜)이 있고 없 음에 따라서 구분된다. Ml95 호는 轉山子의 제 3 대지 남쪽 끝에 있다. 1 기는 대개 사각형의 중형 적석묘이다. 각 변의 길이 16m, 잔고 l.40 m, 방향은 150 ° 이다. 묘 정상은 평탄하고 중간에는 함몰된 구덩이가 있다. 결구는 먼저 크고 작은 석괴로 묘 기단부를 만든 다음 가운데에 석괴를 쌓아 불규칙하게 묘광을 만들었다. 남북의 길이 2.som, 동서 최대 너비 2.6 0 m, 광 바닥은 지면보다 20cm 높다. 묘광 의부는 낮은 곳에서 점차 높은 곳으로 향하였다. 내부에서 의부로 향하여 거리가 일정하지 않은 계단식 벽을 쌓았다 . Ml95 호의 북쪽은 轉山子의 높은 곳이고 남쪽으로
’
점차 낮아져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산세를 따라서 축조되었다. 남쪽 은 60, 동, 서, 북쪽은 각각 3 ° 이며 중간에는 크고 작은 강자갈로 채워 졌다. 이러한 계단식 담장의 축조는 위에서 내려오는 석괴를 방지하고 고분 기단부를 보호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석괴로 묘의 정상 부를 덮어서 하나의 구릉 형태를 만들었다. 벽 의부에도 석괴를 둘러 놓 았다. 가장자리가 이미 붕괴되었는데 원래 여러 충의 석괴가 있었을 것 으로 보인 다 (그림 5-2 ) . 봉토동실묘 3 기 : 묘실 바닥에서 지표까지 60-socm 이고 묘벽은 석과로 쌓았고 그 위에는 大板石으로 덮었다. 그리고 그 위에 황토를 덮어 구릉 을 만들었다. 181 호 고분 의부에 불규칙한 긴 돌을 쌓았다. 기단부는 발 견하지 못하였다. 오래되어 봉토가 대부분 유실되었고 축조된 돌들은 의 부로 노출되었다. 묘실 내에는 진흙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그 위의 천장돌은 이미 넘어져 있었다. 묘실은 직사각형이고 동서 길이 2.4 0 m, 남북 너비 1 . 80m 아다. 묘실은 석괴로 쌓았고 벽면은 정제되었다. 벽은 아래쪽에서 위로 울라가면서 좁아졌다. 벽 잔고는 0.60- 1. oom 이며 묘 바 닥에 강자갈을 깔았는데 그 두께는 20cm 이다. 묘문 방향은 140 ° 이다. 墓道는 묘실 남벽에 부착되어 있었다• 묘실은 연도가 한쪽으로 치우친 형이다. 묘도 너비 0.90m, 길이 l. OOm 이며 돌 1 매로 묘문을 막았다. 묘 실 내에서는 사람의 머리뼈 2 편, 넓적다리뼈 2 점이 출토되었다. 葬法은 확인할 방법이 없다(그림 5-3). 묘실은 오래 전에 파손되었고 유물은 드 물다. 2) 부장품 부장품은 대부분 Il 식 적석묘에서 출토되었다. 그것들은 토기, 동전, 금동기, 철기, 옥제품 등이다.
제 5 장 고분 325
그림 5-2 M 195 호 평면도
326
국U 기쪼.\
(1) 마노 구슬 16 점이 集安 通溝 고분군 내에서 최초로 출토되었다. 그 형상과 색깔에 따라 3 가지로 나뉜다. 1 식 1 점: 六稷臺狀, 질은 황색, 가는 구멍이 있다. 길이 1.7 cm, 端 經 0.5cm 이다. I 식 12 점 : 福圓移 질은 홍색에 구멍이 하나 있다. 지름.은 0.5cm, 길이는 0 . 7cm 이다. 매식 2 점 : 타원형, 질은 홍색에 가는 구멍이 하나 있다. 길이 1.4c m, 지름 0.8c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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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토기 17 접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복원 6 점, 기형이 인식된 조각은 11 점이다. ® 登 3 점 모래 섞인 홍갈색 토기, 태토는 거칠고 둥근 어깨에 배가 부르다. 형 식은 2 식으로 나눌 수 있다. 1 식 2 점 : 四耳登(네 귀 항아리), 긴 목, 나팔형태 구연, 어깨와 배가 접한 부분에 다리 형태의 四耳가 있다. 假圈足, 평저이다(그림 5-4 a 5-7 a). 그 밖에는 파편들이 있다. Il 식 1 점 : 어깨와 대칭적인 곳에 아치형의 耳(귀)와 牛角形 耳가 각각 2 개씩 있다. 목이 길고 구연부가 넓으며 평저이다. 구경 13.2 c m, 저경 8.4 c m, 전체 높이 20 .4 cm 이다(그림 5-4b). ® 羅(단지) 7 접 : 기형에 따라서 4 식으로 구분된다. 1 식 2 점 : 모래 섞인 황갈색, 의반 구연, 배가 부르고 평저, 2 점 大小 로 구별, Ml95 1 점 , 구경 13cm, 저 경 95cm, 전체 높이 20cm (그립 5- 5), 큰 것의 구경 20.5 c m, 저경 16cm, 높이 32 . 5cm 이다. 복부에 풀잎
무늬가 있다(그립 5-6a). Il 식 2 점 : 모래 섞임, 둥근 배를 가졌고 평저이다. 1 점은 황갈색이며 어이 깨1가4c m없 이고다 (구그연림 부5가-4 d의, 반그되립었 다5-.7 b)구. 경 다 른1 0.16 점cm은, 저홍갈경색 ,8. 4 c구 m경, 전9체.6c m높, 저경 7cm, 전체 높이 15cm 이다(그림 5-8d, 그림 5-6b). 111 식 1 점 : 모래 섞인 회갈색, 구연부 및 복부만 잔존, 짧은 목에 직 연, 배가 부르며 구연부 부분에 點文이 5 줄 있다. 이러한 기형은 고구려 고분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다(그림 5-8 a). W 식 2 점 : 잔편 존재, 1 점은 거친 모래 섞인 황회색 토기, 직경에 의 반 구연이다(그립 5-sb). 다른 1 점은 모래 섞인 회백색 토기, 곧은(直) 목, 구연부가 의반되었고, 수평 입술, 둥근 어깨, 배가 부르다. 작은 저 부, 평저, 태토가 대단히 얇고 소성도가 상당히 높다(그립 5-9). 회백색 토기는 고구려 고분 내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다. 고구려 토기 연구에 좋 은 자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 병 1 점 : 잔편, 모래 섞인 회백색, 태토가 상당히 두껍다• 수평 구 연으로 입술이 두텁고 목이 가늘다. 목부분에 다섯 줄의 융기현문이 있 다(그림 5-8 c). ® 토제 방추차 1 점 : 모래가 섞인 황갈색, 길이 2cm, 福經 4cm 이다. ® 토제 구슬 5 점 : 모래 섞인 회갈색, 타원형이며 구슬의 耳에 구멍
그림 5~5
료
이 있다. 길이 2-3.5cm 이다. (3) 금동제는 모두 68 점이며 대부분 마구 장식품이다. ® 말안장 장식 2 점 : 모두 片이다. 1 점은 사각형, 다른 1 점은 사다리 꼴이며 두공된 方格울 가지고 있다. 사각형 잔편의 가장자리에 한 줄의 작은 구멍이 있다. 사다리꼴편의 가장자리에 2 개의 못자리가 있다(그림 s-1 0a). 또한 馬형장식 2 점이 있다. 한 끝은 직각이며, 다른 끝은 거의 원형이 다. 가장자리에 각각 하나의 못자리가 있다. 툴 안에는 물고기 문양이 있다(그림 5-11). ® 말안장테(毅橋壓條) 1 점 : 아치형, 너비 0.09cm, 상면에 9 개의 못자 리가 있고 못자리 사이에 작은 원형 단추가 있는데 못머리 같다(그립 5- 10 e) . ® 혁대고리 (帶環) 1 점 : 타원형 고리가 달려 있다. 고리몸은 직사각형 형 小牌이다. 정면에는 곡선문이 있고 양쪽에는 연결된 호선이 있으며 그 중간에 4 개의 대칭으로 두창된 권운문이 있다. 네 모서리에는 각각 하나의 못이 있고 등(背)에는 가죽을 대었던 흔적이 있다. 길이 3.7 c m, 너비 2 . 8cm 이다(그림 5-lOf , 5-12). ® 우산형 장식 5 점 : 8 판(잎)의 우산형이다. 지름 2cm, 그 안에 못 하나를 상감하였다(그립 5-l O d). ® 방울뚜껑 2 점 : 하나는 사발형의 잔편이고 다른 한 점은 집시〔蝶〕 형이,다. 모두 중간에 하나의 구멍이 있다. 지름 5 . 2cm 이다(그립 5-lOg ), ® 복숭아형 장식 1 점 : 감꼭지형이다. 그 중간에 한 줄의 청동제 철 사가 있어 그것으로 둥근 청동편을 잡아매었다(그립 5-lOj , 5-13). ® 새형 장식 1 점 : 새형으로 날개를 펴고 나는 모습이다. 새의 몸을 찌르는 식으로 장식하였다. 머리와 꼬리 부분에 하나의 구멍이 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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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 5-14) . ® 창꼬리(蛇尾) 2 점 :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다. 청동편을 접어서 2 충으로 만들었다. 평면은 사다리꼴이다. 큰 것의 넓은 끝에는 3 개의 못 자리가 있고 작은 것의 넓은 끝에는 2 개의 못자리가 있다. 가죽을 넓은 끝에 삽입시키고 못으로 고정시켰다(그림 5-lOc), ® 청동제 방울 2 점 : 방울은 불규칙적으로 둥글다. 방울상에 대칭적 으로 4 개의 긴 두창이 있다. 그 안에 하나의 작은 둥근 것(球)이 있으며 상단에는 원형 구멍을 가전 콧대 같은 것이 있다(그림 5-10i ). ® 귀걸이 1 점 : 정교하게 도금된 것으로 둥글게 만들었다. 지름 2cm 이다.
그림 5-11 동제 마형 장식 (M195 : 5) 그림 5 기 2 동제 혁대고리 {M152 : 10)
@ 청동제 고리 (圈) 2 점 : 1 점은 지름 2cm 이고 단면은 반원형이며, 다론 1 점은 지름 2.5cm 이고 단면은 원형이다. @ 투구(盛)편 1 점 : 방추형이다. 정면에 刺點文이 있고 하단 양쪽 모 서리와 중간에 각각 하나의 못이 있다. 뾰족한 부분에도 하나의 못이 있 는데 이는 두구상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길이 7.6cm, 너비 1. 4cm 이다 (그림 S-10 h). @ 청동제 구슬 3 점 : 비스듬한 원형이며 크기가 각각 다르다. 구슬상 에 하나의 구멍이 있다. 원 지름 o.6- 1.5 cm 이고 비스듬한 길이는 4-8cm 이다. (4) 동전은 Ml95 호 고분에서 33 매가 출토되었다. 그 중에 半兩錢이 1 매이며 五鍊錢은 32 매이다(그 안에 챔郭五鍊錢은 2 매 있다). 그것들은 모 두 구덩이 서남 모서리에서 출토되었다. 반량전의 지름은 2.3 c m, 무게 는 1. 75 g(그립 5-15 a) 이며, 그것은 文帝 때의 것이다. 오수전은 西漢 때 의 것도 있고 東漢(그립 5-15b, c)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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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철기 O 솥(釜) : 파손이 심하여 복원이 어렵다. 다만 네모난 구연부 입술, 둥근 배와 둥근 어깨가 판별된다. 배에는 0.5cm 의 융기된 선이 한 바퀴 돌려졌다. 이미 출토된 고구려 솥과는 다르다(그림 5-16g ). ® 낫 1 점 : 몸체가 휘어져서 마치 반월형과 같다. 말단이 휘감겨 있 으며 그곳에 손잡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뾰족한 부분이 약간 파손 되었다. 길이 22cm, 너비 2 . 5-2.6cm 이다(그림 5-16f , 그림 5-17), ® 작은 도끼(~) 1 점 : 직사각형이고, 한 면은 날이며 반대편에 공부 (손잡이 끼우는 곳)가 있다. 길이 11. 3 cm, 너비 7.5cm, 날의 너비 9.2 cm, 공부 길이 2.5cm, 공부 너바 1. 6cm 이다(그림 5-16 a, 그림 5-18). @ 쇠 고리 10 점 : 2 식으로 나뉜다. 1 식 2 점 : 고리경은 屬圓이다. 큰 것의 지름은 8.3cm, 작은 것의 지 름은 4cm 이다. Il 식 8 점 : 고리경은 원형이다. 큰 것의 지름은 4.5 c m, 작은 것은 3. 5cm 이다. ® 꺾쇠(肥錫) 10 점 : 비스듬한 사각형의 꺾쇠이다. 큰 것은 길이가 8cm, 작은 것은 7cm 이다(그림 5-16c). ® 활형 벽고리 1 점 : 길이 8 . 5cm 이다(그림 5-16e). @ 갑주편 2 점 : 2 식으로 나뉜다. 1 식 2 점 : 평면은 직사각형이고 네 모서리가 純圓이다. 갑주편의 단 면 전체가 등변으로 약간 휘어졌다. 갑주편상에 작은 구멍 9 개가 4 조로 나뉘어 있다. 길이 4cm, 너비 2.5cm 이다(그립 5-16d), I 식 1 점 : 평면은 사다리꼴이다. 왼쪽 상단이 약간 파손되었다. 이 편은 상당히 크며 아마 앞가슴 또는 등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길 이 13cm, 윗너비 7cm, 아랫너비 8.2cm, 갑주편상에 12 개 작은 구멍이 6 조를 이루고 있다.
二, 'II
그림 5-17
® 혁대고리 7 점 : 한쪽은 원형이고, 다른 한쪽은 직사각형이다. 위에 는 움직이는 바늘이 있다(그림 5-16b). ® 환두칼 1 점 : 칼손잡이 편이다. 손잡이 끝에 하나의 둥근 고리가 있는데 그것은 비스듬한 원형이다. ® 쇠화살촉 4 점 : 각각 다르다. Ml59 호에서 출토된 16 개는 三翼形이 고 길이는 6.7cm, 상단은 평탄하고 하단은 수축되어 뾰족하다. 화살촉 중간에서 3 翼으로 나뉘었다. 각 날개에는 하나의 타원형 구멍이 있다(그 림 5-16 i). M157 호 고분에서 37 개가 출토되었고, 마름모꼴이며, 길이 5cm 이다. M195 호 고분에서는 21 개가 출토되었으며 삽(鍾)형, 길이 8cm 이다. Ml59 호 고분에서는 23 개가 출토되었으며 長庸移 중간이 약간 융기되 었다. 길이 9cm 이다(그립 5-16h, j, k).
31 기 고구려 고분의 발굴에 따라서 몇 가지 새로운 인식이 제시되었다. (1) 적석묘 1식 은 강자갈 또는 자연석을 사용하여 구축하였다. 일반 적으로 Il 식보다 낮으며 가장 높은 것은 1.5m 정도이다. 이러한 유형은 고구려 초기의 일종이다. Il 식 묘에는 계단식 담장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높고 크다. 가장 큰 것은 3m 정도이다. 계단식 담장의 작용은 돌을 언 덕처럼 쌓는 것인데 그것은 1 식에 비하여 시기가 늦다. 그것은 또한 방 단적석묘와 방단계단 석실묘로 발전하는 과도기형이다. 고구려 적석묘의 배열은 대체적으로 규칙적이다. 예를 들면 제 1 대지에 Ml49 호, 150 호, 151 호, 152 호가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배열되었고 제 2 대지에는 Ml58 호, 159 호, 160 호가 동서로 배열되었다. 따라서 그 고분 들은 가족묘로서 차례로 배열되었던 것이다. (2) 고분에서 출토된 모래 섞인 토기는 대부분 手製이다. 개별적으로 輪製도 있다. Ml96 호에서 출토된 3 점의 登는 무문에 홍갈색이다. 긴 목, 네 귀이며 나팔형태의 구연부를 가졌다. 그릇의 표면을 마연하여 古 式 자기 같다. 모두 通溝 고분군 내에서 최초로 출토되었다. 그것은 고 구려 토기의 발전과 고분의 연대를 탐색하는 느 데 새로운 자료를 제공해 준다. 초기의 고구려 토기는 홍갈색 또는 회백색이다. 그것이 점차 발전 되어 회색 토기 또는 황색 토기가 되며 더 나아가 황색 유약 바른 토기 로 대치된다. 태토는 거친 무문으로부터 점차 견고한 것으로 발전되며 문양은 고르게 나타난다. 토기의 형태는 긴 목, 네 귀, 나팔 구연부에서 짧은 목 , 넓은 입술, 네 귀로 발전된다 . 복부(배)는 倭圓(짧고 둥근 배) 에서 배가 부르다. 여기에 근거하여 토기 제작기술의 발전과정을 볼 수 있고 또한 그것들은 고구려 전기 고분의 유물로 볼 수 있다. (3) 금동기는 적석고분 내에서 모두 출토된다. 그것은 고구려 전기에
표 5-6 31 기 고구려 고분 출토 유물
금동기가 생활용구의 장식과 마구의 장식에 이미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 울 설명하여 준다. 동시에 금속 제작기술과 공예에 조예가 상당히 깊었 으며 그 연속시간도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표명해 준다. M1s2 호 출토의 금동제 혁대고리 (帶環)와 중국 洛陽 西晉墓 출토의 금동제 띠고리와는 기형과 문양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크기도 같다. 따라서 中原에서 수입 되었거나 모방했을 가능성이 크다. 3 칠성산 96 호 • 우산 68 호 적석묘 1975 년과 1976 년 사이에 集安縣 문물보관소에서는 農業學대회에 配合 하기 위하여 우산 고분 구역의 68 호와 칠성산 고분 구역의 96 호 등 2 기 적석묘를 발굴하였다. 발굴 정황은 다음과 같다 .3) 1) 칠성산 96 호 적석묘 칠성산 고분 구역은 集安縣城에서 서쪽 교의로 약 1km 지점에 있다. 通溝 고분군 중 고분의 분포가 가장 밀집된 곳이다. 96 호 고분은 칠성산 고분 구역의 동쪽에 있다. 그곳은 通溝大除 제 9 생산대의 작은 언덕이다. 96 호 주위에는 영세한 고분들이 분포되어 있다. 그 서쪽에는 다른 1 기의 적석묘가 가까이 있고 서북쪽의 70-80m 의부에는 넓게 고구려 때의 고 분이 분포되어 있다. 묘지의 뒤편으로 산들이 융기되어 있으며 남쪽의 작은 언덕 아래에는 通溝大除 사원들의 숙사가 있다. 동쪽의 언덕 아래 로 5 리가 안 되는 곳에 북쪽에서 남쪽으로 압록강에 흘러들어가는 通溝 iiiJ가 있다. 동쪽을 향하여 全城의 경 관을 볼 수 있다. 1976 년 봄, 通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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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除는 이곳에 논의 제방울 만들고 集安縣 문물보관소에서는 이곳을 발 굴하였다. 96 호 고분은 1 기의 방단계단 적석묘이다(그림 5-19), 산언덕을 따라서 西面으로부터 동북 방향으로 놓여 있다. 일찍이 심하게 파괴되었는데 발 굴시 잔존된 정황은 고분의 동북과 남쪽은 상태가 양호하여 밀의 2 층에 서 3 층까지의 계단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위쪽의 계단은 모두 파괴되었 다. 남아 있는 고분의 길이 22m, 너비 17.6 m , 높이는 1.8m 이다. 바닥 에는 길이가 30-130cm, 너비 25-60cm, 두께 20-30cm 되는 크기가 다 른 강자갈울 깔았다. 주위에는 60-10ocm 되는 사각형, 그리고 두께가 20-30cm 되는 석회석 할석을 쌓았다. 무덤의 頂部에는 3 개의 교란 구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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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 있으나 일찍이 도굴당하였으며 위치로 보면 원래 묘실이었을 것으 로 추정된다. 제 1 교란충의 정부에는 길이 2m 정도의 대괴석이 있는데 그것은 뚜껑돌이다. 2, 3 호의 교란충의 뚜껑돌은 보이지 않는다. 두번째 교란충은 무덤의 서쪽 가장자리에서 약 6m 되는 곳에 있다. 그것에는 한 줄의 돌담이 있는데 그것은 제 1 묘실의 동벽, 죽 제 2 묘실의 서벽이다. 묘의 서쪽 가장자리로 12m 되는 곳에 또 하나의 돌담 흔적이 있는데 그 것은 제 2 묘실의 동벽 (그림 5-20}, 죽 제 3 묘실의 서벽이다. 묘실은 심하게 파괴되어 그 결구가 정확하지 않다. 그 의 제 2 묘실의 남쪽에는 한 줄의 묘도의 흔적이 있다. 따라서 이 1 기 묘실은 비교적 낮은 곳에 묘도가 있 는 3 실의 적석묘이다. 묘도가 연결된 묘실에서 상당히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것들은 청 동기, 철기와 도금된 마구 및 노란 유약을 바론 토기편들이다. 발굴시 당지 주민의 신고에 의해서 1976 년에 확인된 유적에서 또 하나의 큰 대 야(盤) 1 점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의 무게는 20 斤 이상이다. 그 밖에 이 무덤 서쪽 가장자리에서도 기단석 부근에서 30 여 개의 말이빨과 깨진 말
뼈를 발견하였다.
@ 登 2 점 : 회백색 토기이고 기형은 같다. 1 점은 복원되었다. 의반 구 연이고 입술이 넓다. 배는 둥글고 높이 37cm, 구경 22.2cm, 저경은 13.4 cm 이다. 2 점 모두 색깔과 문양이 다르다. 1 점은 회황색이고 어깨에는 두 줄의 현문이 있으며 그 사이에 빗살무늬와 절치문을 교차시켰다. 그 의 1 점은 회색이고 어깨에 있는 두 줄의 현문 사이에 빗살무늬와 절치문 울 처리하였다(그림 5-21 a, 그림 5-22 b). ® 황유토기 : 모두 파편이며 복원이 불가능하다. 편들로 보면 3 점의 盡이다. 기형은 灰陶査와 같고 태토는 고운 桂紅色이며 안팎으로 유약을 발랐다. 3 점 모두 유약과 문양이 다르다. 하나는 노란 유약에 갈색 이 있 으며 토황색이다. 유약의 두께가 불규칙하며 광택이 거의 없다. 登의 어 깨 부분과 배 부분에 각각 두 줄의 현문이 있고 그 사이에 垂帳紋(휘장 무늬)이 있다(그림 5-21e). 두번째는 태토가 경질이고 황록색의 유약이 두텁게 처리되었다. 登는 윤택이 난다. 다른 1 점의 문양은 두 줄의 현문 사이에 빗살무늬가 교차되었다(그림 5-21d). 다른 1 점은 어깨의 아래에 휘장무늬가 있고 배 부분에는 빗살, 절치문이 있다(그림 5-21 c), {2) 청동기 4 점 0 세발솥(鼎) 2 점 : 뚜껑이 있으며 뚜껑 위에 둥근 고리형의 꼭지가 있다. 어깨에는 2 개의 원형 손잡이 (뿔耳)가 있다. 배 부분에는 한 줄의 융기된 현문이 있고, 3 개의 말발굽형 다리가 있다. 전체 높이 17.2cm, 구경 10.scm 이다(그림 5-23 C, e, f, 그림 5~24). ® 청동제 釜 1 점 : 뚜껑이 있고 뚜껑 위에 하나의 십자형 꼭지가 있 다. 盆 아래의 가장자리에 두 줄의 [!!]현문이 있는데 그 간격은 1cm 이 다. 전체 높이 13.8cm 이다(그림 5-23 g, 그림 5-25). ® 錦斗(자루 솥) 1 점 : 대야형이며 구연이 의반되었다. 평저이며 짐 승다리를 가졌고 용머리 손잡이이다. 전체 높이 10cm, 지름 13.6cm, 용
\ -=_二
그립 5-24
머리 손잡이 길이 6 .4 m 이다(그립 5-23 d, 그림 5-26). (3) 철기 12 점 ® 쇠 창손잡이 1 점 : 부식되었다(그립 5-27k). ® 쇠촉 2 점 : 삽형(슴베가 가운데 있음)이며 전체 길이 19.5cm 이고, 그 중 대의 길이 7.7cm, 슴베 길이 8.2cm, 날 너비 3cm 이다(그림 5-27j ,
J'h L
그림 5-27 금속유물 a. 도금 매화꽃 장식 b,d . 도금 안장 C. 도금 등자 e. 도금 복 숭아형 장식 f. 철제 꺾쇠 g, 0. 도금 혁대고리 h, m, n. 활형 쇠 고리 i. 도금 사각형 말장식 j. 쇠촉 k. 쇠 창손잡이 l .•도 금 5 잎 매화꽃 장식 p. 걸쇠고리 q. 도금 굽은 장식 r. 머리 있는 도금 혁대고리 s. 도금 행엽 (b, C, d 는 실제크기의 1 / 4, 나머지 실 제크기)
그립 5~28). ® 꺾쇠 3 점 : 길이 9 . 8cm 이다(그립 5-27 f). ® 활형 쇠고리 6 점 : 큰 것 3 점의 길이는 14cm 이고 작은 것 3 점의 길이는 5-7cm 이다(그림 5-27h, m, n). (4) 도금 장식 57 점 O 말안장 1 점 : 전륜〔前橋〕과 후륜〔後橋〕이 모두 아치형이며 전륜이 비교적 작다. 안장의 중심에 두께 0.05cm 인 도금된 청동편이 하나 있 다. 청동편의 의부는 너비 3.2cm 되는 도금된 동철판으로 덮여 있고 그 양끝에는 각각 하나씩 못자리가 있다. 안장의 안쪽에는 8cm 너비의 도 금된 동판이 있다 . 상면에는 길이 1.4 cm 되는 4 개의 못자리가 있다. 그 것은 그 동편과 안장의 다른 것들과 결합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그 림 5-27 b, d, 그림 5-29) . ® 등자 1 세트 2 점 : 목심이며 그 의부를 도금 동편으로 포장하고 가 는못을 박아 고정시켰다. 제작술이 정교하여 못의 혼적은 보기가 어렵 다. 등자 위의 가로로 된 구멍은 가죽끈울 안장과 연결시키는 데 사용된 것이다(그립 5-2 7 c, 그림 5-30). ® 재갈 1 점 : 쇠로 만들어졌다. 4 단의 각 길이는 11cm 이며 그것들을 연결시켜 만든 전체 길이는 40.6cm 이다. 연결고리 끝에 두 개의 타원형 의 장식이 있고 그 장식 위에 직사각형 구멍이 하나 있다(그림 5-31), @ 복숭아형 말장식 9 점 : 주위가 가볍게 융기되었다. 8 개의 못을 이 용하여 다른 동편과 연결시켰다. 상단에는 네모 구멍이 있어서 밀치와 연결시키는 데 사용되었다(그립 5-27 e, 그립 5-32). ® 杏葉 3 점 : 위에 움직이는 고리가 하나 있고 아래에는 행엽이 있 다. 행엽에는 4 개의 못자리가 있다(그립 5-27s). ® 4 잎 매화꽃 장식 21 점 : 중간에 융기된 圓心이 하나 있으며 그 주
그림 5-28
위에 4 잎이 달렸다. 잎마다 3 개의 못자리가 있는데 그것은 가죽을 대는 데 사용된 것이다(그림 5-27 a). ® 5 잎 매화꽃 장식 : 4 잎 장식과 같다. 다만 잎이 하나 더 있다(그림 5-27 l) . ® 걸쇠고리 1 점 : 도금된 청동판을 접어서 만들었다. 연결고리 부분 에 하나의 1cm 되는 못이 있다(그림 5-27 p). ® 굽은장식 1 점 : 孤形이다. 양끝에 각각 1cm 길이의 도금된 못이 있다(그림 5-27 q). ® 머리 있는 혁대고리 5 점 : 위에 고리가 있고 아래에는 고리머리가 있다(그림 5-27 r). @ 혁대고리 6 점 : 3 점은 크고 3 점은 작다. 아치형이고 고리 내에는 자유로이 움직이는 바늘이 있다(그림 5-27g , o). 2) 우산 68 호 적석묘 우산 고분 구역은 集安 通溝 고분군 북쪽에 있는 곳으로 고분이 상당 히 밀집되어 있다. 그곳은 集安縣城 동북부의 禹山의 발치에 있다. 68 호 고분은 고분군의 중심부에 있으며 大王公社 禹山大除 제 3 생산대대의 밭 속에 있다. 이 고분도 일찍이 파괴되었다. 이 고분은 1975 년 8 월에 발굴 되었다. 68 호의 방향은 336, 남아 있는 고분의 길이는 23m, 너바 17. 2m, 높이 lm 이다(그립 5-33). 묘바닥은 杏土된 황토충이다. 황토층에 大石魂로 方壇울 쌓았는데 파괴가 심하여 계단 여부를 확인할 수 없으며 묘실도 심하게 파괴당하였다. 발굴 당시에 묘에서 남쪽으로 약 9m 떨어 전 지접에서 4 점의 청동기를 발견하였는데 세발솥(開}), 시루, 솥(釜), 대야 등으로 각각 1 점씩이다. ® 세발솥(鼎) : 뚜껑이 있다. 그 뚜껑 위에 아치형의 둥근 꼭지가 있
二]。D0一- 8b(0一 —8 {-i o옛[〉 00- 、\1l\ \d{1I1I,I1I`1I_I1I,l'0I1 1,I1I°1 I0I
고 양각한 〈 호 〉 자가 있다. 배에는 융기된 현문이 한 줄 있으며 어깨에는 두 개의 둥근 손잡이 (笠耳)가 있고 3 개의 말발굽형 다리가 있다. 전체 높이 16cm, 구경 10cm 이다(그립 5-23 b). ® 시루: 구연이 의반되었으며, 굽다리이고 시루 바닥에 5 개의 둥근 구멍이 있다. 높이 9.2cm, 구경 19.6cm 이다(그림 5-23 a, 그림 5-34).
그림 5-34
® 솥(釜) : 구연이 수직이고, 배가 부르며 배의 중상부에 한 줄의 너 비 o.o s cm 되는 선이 있다. 굽다리를 가지고 있다. 높이 12.6cm, 구경 11cm 이다(그림 5-23 a, 그림 5-34), ® 대야(洗) : 구연이 의반되었으며 가볍게 펼쳐져 있다. 배에는 세 줄의 융기된 현문이 있다. 다리가 세 개 있다. 구경 28cm, 복경 24. 5cm, 높이 6.3cm . 이다(그림 5-23 d). 3) 몇 가지 견해 (1) 고분의 연대 문제 일반적으로 발굴된 고구려 고분은 유물이 드물다. 그러나 96 호와 68 호 에서는 상당히 많은 청동 용기가 출토되었다. 이 두 무덤에서 출토된 청 동기는 東漢에서 魏뜸 시기에 이르는 시기의 것들과 같다. 96 호 출토 용 머리 초두는 구연이 의반되고 평저이며 3 개의 짐승다리는 湖北漢陽 蔡句 1 호의 西晉 무덤 및 南京 登底山 西晉墓 출토의 초두와 대단히 유사하 다. 68 호 출토의 銅製대야 역시 호북 채전 1 호의 서전묘 출토의 것과 같다. 따라서 이러한 청동제 용기들은 고구려의 생산품으로 볼 수 없다.
96 호 고분 출토의 黃系錢盛는 고구려에서 제작된 것이다. 황유호의 태토 등은 삼실묘의 것과 갇다. 다만 형제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삼실묘 출 토의 황유호는 구연부가 넓고 배에 4 개의 가로 손잡이(橫耳)가 있다. 삼 실묘의 연대는.일반적으로 5 세기 초에서 5 세기 중엽에 해당된다. 삼실묘 연대와 동일한 마선구 1 호 봉토벽화묘에서 장천 2 호 봉토벽화묘 출토의 황유호와 동일한 것이 출토되었다. 그것은 4-5 세기 이후에 고구려의 제 도 공예기술이 대단히 향상된 것을 설명해 준다. 그 중 구연부가 넓고 4 개의 손잡이(四耳)가 달린 것은 고구려 황유 토기 중 독특한 풍격을 나 타내 준다. 96 호분 황유호는 비록 구연부가 의반되었지만 구연이 비교적 좁고 배 부분에 손잡이 (耳)가 없으며 그 형제의 측면에서 보면 같은 무 덤에서 출토된 2 점의 灰陶登와 갇다. 그것들은 모두 漢代의 풍격을 가졌 으며 漢 代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소성기술은 높지 않다. 어느 유 약은 얇고 광택이 없다. 상당수의 편들은 태토가 연약하고 박리되어 떨 어져 나갔다. 그래서 연대로 보아 삼실묘보다 이르다. 삼실묘의 연대는 5 세기 이후이다. 따라서 96 호묘는 4 세기 중영일 가능성이 크며 상한은 4 세기 초기로 보고 있다. 68 호는 비록 황유호가 출토되지 않았지만 청동기의 풍격은 96 호와 완 전히 일치하므로 동시기 산물로 보고 있다. (2) 고분의 형제 문제 이 2 기 고분은 고구려 적석고분 중 중형에 해당된다. 형제 측면에서 보면 비록 파괴가 심하지만 68 호묘의 잔존 형태로 보아서는 방단적석묘 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따라서 묘실의 결구도 뚜렷하지 않지만 출토된 뚜껑돌에 의하면 묘실은 비교적 낮고 축조 상태도 조잡하며 묘도가 있 다. 따라서 이러한 고분을 〈 방단계단(階桃) 동실묘〉로 보고 있다. 적석묘 중에 묘실도 비교적 높고 축조도 정교한 무덤들은 折天井塚,
장군총 등으로 그것들은 〈 방단계단 석실묘 〉 라고 부르고 있다. 봉토묘 중 씨름무덤, 무용총, 삼실묘 등은 〈 봉토석실묘 〉 라고 부론다. 그것들은 묘 실이 낮은 방단계단 동실묘와 구별된다. 이러한 방단계단 동실묘는 석광적석묘로서 방단계단 석실묘로 발전되 는 중간단계의 무덤이다. 4 세기가 되면서 방단계단 석실묘와 봉토 석실 묘가 모두 일찍이 출현하지만 방단계단 동실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 은 방단계단 동실묘와 방단계단 석실묘가 뚜렷한 교체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방단계단 석실묘라는 새로운 무덤이 나타난 이후에 구묘제 인 방단계단 동실묘가 여전히 존재하고 동시에 방단계단 석실묘와 봉토 석실묘가 동시에 오래까지 존속한 것을 설명하여 주고 있다. (3) 葬俗 및 기타 문제 발견된 고구려 무덤 중 무덤에서 짐승뼈가 출토된 바 있다. 96 호 고분 에서는 말뼈가 기단석 부분에서 출토되었는데 그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이것은 도굴범의 소행인가? 예를 들면 『北史 高句麗傳 』 에 고구려의 풍 속에 대한 기록이 있다: 〈死者殖在屋內 …… 구J]終吳泣, 葬則鼓舞, 樂以 送之, 埋訖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於墓側, 會葬者爭取而去(사람이 죽게 되 면 집 안에 빈소를 차리고 처음에 며칠은 곡을 한 다음 묻게 되는데 묻울 때 북 치고 춤을 추면서 죽은 자를 즐겁게 보낸다. 매장시 죽은 자가 평소에 사 용하던 말과 마차를 무덤 옆에 묻어서 피장자로 하여금 그것을 사용하게 한 다)〉라는 것을 실현한 것인지도 모를 사실을 이 발굴에서 보여 주고 있다. 고분에서 출토된 관의 쇠고리와 꺾쇠는 방단계단 동실묘에서는 관이 있었다는 것울 보여 준다. 쇠고리 (鐵句)는 관 위에 박든가 또는 묘벽상 에 박아서 사용된다. 흔히 만장(커튼) 등을 거는 데 사용된다. 고구려 고분은 모두 지상 위에 건립하기 때문에 나무관의 부식이 심하여 그 혼 적을 찾을 수 없다.
集安 출토의 도금 기물은 고구려에서 만든 것이다. 도금기는 대부분 적석묘에서 출토된다. 봉토묘에서 비록 영세하게 출토되는 예가 있지만 대단히 드문데, 이는 아마 봉토묘의 유물이 쉽게 도굴되어 잔존 유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적석묘 출토의 도금기는 대부분 마 구이며 기타의 장식품은 드물다. 集安의 고구려인들은 산 지역에 머무르 고, 말들은 대부분 전쟁에 이용되었기 때문에 말이 많이 이용되었고 따 라서 마구는 대단히 중요히 여겨졌을 것이다. 4 우산, 산성하, 칠성산, 마선구 고분군 발굴 集安縣 通溝 고분군은 국가 중점 문물보호 단위이다. 국가문물사업관 리국에서 국무원에 보고, 비준을 받아서 1976 년 4 월부터 7 월 중순까지 고분을 부분적으로 발굴하였다. 吉林省 박물관 考古除가 주관하고 集安 縣 第一批~t余文物考古 훈련반원과 吉林大學 고고전업반의 선생과 학생 그리고 集安縣 문물관리소원들이 발굴에 참가하였다. 通溝 고분군의 고분은 대부분 산의 남쪽 언덕과 남향의 산계곡 양쪽의 河上 臺 地에 분포되어 있다. 이번에 발굴된 고분은 남향으로 놓여 있는 데, 산세에 따라서 약간의 偏東과 偏西로 놓여 있었다. 각 고분은 산세 에 따라서 교차하여 배열되었는데 그것들은 일정한 규칙이 있다. 188 기가 발굴되었고 그것들은 4 개의 고분 구역으로 나뉘었다• 우산 고 분 구역에 56 기, 산성하 묘구에 37 기, 칠성산 묘구에 26 기, 마선구 묘구 에 69 기가 있었다. 우산 묘구에서 발굴된 고분은 다수가 集安縣 과수장 서측의 大禹山 남쪽 언덕 위에 있었다. 산성하 고분은 다수가 通溝河의 東單 동쪽 큰 언덕의 산허리 일대에 있었다. 칠성산 고분은 通溝iiiJ의 서안, 通溝 일대촌 뒤편의 산허리에 있었다. 마선구 고분은 모두 마선공
총 총총 총 갑묘 호60
사 소재지가 있는 麻北山의 남쪽 언덕에 놓여 있었다. 188 기 고분 중 심 하게 파괴된 92 기는 발굴할 가치가 없어, 실제 발굴된 것은 96 기였다(그 립 S-35). 고구려 고분의 형제와 발전서열은 국내의 고고학자들이 이미 많은 연 구를 하였고, 동시에 상당수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그것들은 큰 고분 에만 편중되었다. 集安에 있는 1 만여 기의 고분 중에는 봉토묘가 다수이 다. 이번 발굴된 것은 대부분 소형 봉토묘이다. 그리고 부장품은 드물 다. 단 고구려 봉토묘의 발전, 결구와 葬俗울 연구하는 데 새로운 내용 울 제시해 주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4) 1) 고분의 형제 96 기 고분의 의부 형제에 의하면 적석묘와 봉토묘 2 종이다. 적석묘는 모두 3 기로 사각형인데 이미 도굴당하였다. 3 기의 크기는 갇 고 都室은 모두 고분 정상의 가운데에 있다. 고분 주위의 사각형 기단석 은 훼손되어 이미 원형이 상실되었다. 이룰 칠성산 고분의 M879 호를 예 로 살펴보겠다. M879 호(그림 5-36) 는 직사각형 방단적석묘로서 현 잔존 길이 24m 이며 너비 18m 이다. 곽실은 함몰되어 훼손되었다. 발굴 후 곽실의 남벽은 상 당히 보존상태가 양호하게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작은 석괴로 쌓은 것이 었다. 동 • 서벽도 일부가 잔존되어 있었지만 북벽은 혼적도 없었다. 곽 실은 직사각형으로 길이 2.3 0 m, 잔존 너비 1.50 m, 잔존 높이 o .4 om 이 다. 遼寧 桓仁縣 高力墓子村 8 호 고분과 기본적으로 같다. 봉토묘, 죽 봉토석실묘도 도굴당하였다. 대부분 고분의 천장석은 이미 의부로 노출되었다. 이번에 발굴한 봉토묘는 모두 93 기로 그 내부 결구 는 단실과 2 실, 3 실 등 3 종으로 나눌 수 있으며 또한 각종 형제를 몇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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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각종 형제의 묘실 네 벽에 사용 된 석재도 구별할 수 있다. 다만 묘도의 축조방법은 갇다. 묘 평면의 입 장에서 보면 長條形, 중국칼형〔刀形, 묘도가 한쪽(서남편)에 치우친 것〕 ' 삽형 (묘도가 중간에 있는 것)의 3 종이다. 묘 정상의 처리는 평천장(蓋頂), 평행쌓음식(憂造頂), 말각쌓음식(株角憂頂)으로 구분된다. (1) 단실묘 모두 73 기로 그 평면 배치 및 천장 결구는 5 종으로 나뉜다.
麟鬪
® 1 식 14 기 묘의 평면은 중국칼형이다. 즉 묘도가 묘실 남벽의 한쪽에 있다. 천장 은 평정석을 덮었다. 묘실은 낮고, 보통 길이는 2m, 너비 1.5 0m, 높이 lm 를 초과하지 않는다. 산성하 묘구 331 호는 이 종류에 속한다. 이 고 분은 비록 오랫동안 바람에 풍화되었고 천장석이 노출되었지만 보존 상 태가 거의 완전하다. 봉토 제거 후 3 괴의 판석으로 천장을 덮었고 묘도 는 석괴로 폐쇄시켰다. 길이 o.66m, 너비 o.s2m, 높이 o .4 m 이다. 묘실 네 벽은 가공된 석재로 쌓았고 일반적으로 바닥충은 하나의 거석을 사용 하고 그 위에 작은 석괴를 맞물려 쌓고 톰 사이는 작은 석괴로 메웠다. 묘 바닥은 쇄석을 깔았다. 묘실의 크기는 1. ssmx 1. 20mx0 . 62m 이다. 墓 向은 남편서 66°( 그림 5-37) 이다. 이 고분은 桓仁縣 高力墓子村 12 호와 같다. ® Il 식 14 기 묘실 평면은 I 식과 같다. 묘실 천장은 평행으로 쌓아 덮었다. 마선구 의 1479 호 고분을 예로 들어 보자. 묘실 바닥은 쇄석으로 깔았으며 묘실
4 벽과 묘도 벽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자연 석괴로 쌓고, 그 틈 사이는 쇄석으로 메웠다. 묘도는 일직선이다. 그 크기는 l.70 m xo .s o m x1 .20 m 이다. 묘도 입구는 작은 석괴로 막았다. 묘실의 크기는 2.s o mx 2 .4 0 m x 1 . 80m 이다. 墓向은 190°( 그립 5-38 a) 이다. 이 고분은 遼寧 撫順과 澤木 고구려묘 13 호와 같다. ® III 식 4 기 묘 바닥 평면은 삽형이다. 묘도는 남벽 가운데에 있고 묘실 4 벽과 묘 도를 가공된 석괴로 상당히 정교하게 쌓았다. 그 듬 사이는 백회로 메웠 다. 묘 천장은 Il 식과 같아서 평행쌓음식이다. 234 호를 예를 들면, 墓向 은 230° 이고 묘실 크기는 2 .4 omx 1. 90m x 1. 70m 이다. 묘도 길이는 1.80 m x o . som x o . som 이다(그림 5-38b). 이 식과 桓仁縣 고력묘자촌 3 호 분 은 기본적으로 같다. ® W 식 20 기 묘의 평면은 1 식과 같다. 묘 천장은 말각쌓음식이다. 어느 것은 株一 角이고, 어느 것은 株二角 또는 株三角이며 , 어느 것은 4 각이 모두 말각 이다. 또 어떤 것은 3 층을 평행으로 쌓고 상충에 말각이 있다. 상기한 몇 종은 모두 거석으로 천장을 봉하였다. 묘바닥은 쇄석 또는 강자갈 그 리고 소판석으로 깔았으며 묘실 벽에는 백회를 발랐다. 묘실 크기는 보 통 2.50mx 1.9 0mx 1. som 이다. 그 의에 이 식에 속하는 산성하 325 호분(그립 5-38 C) 은 묘실 바닥에서 묘벽 가까이 15cm 지점에서 높이 7cm, 너비 28cm 의 정사각형 杏土園膳 을 만들었다. 묘 바닥에는 두께 2cm 정도의 숯울 깔았다. 이러한 결구 는 과거에 발견된 예가 없다. 그것은 지하수 침투 방지를 위한 방수시설 로 보인다. 묘실 크기는 2.2 4 mX 1.s smx 1.57 m, 묘도 깊이는 2.4 0 mX 0.9 2 m X l. 06m 이 다. ® V 식 21 기 묘의 평면은 III 식과 갇다. 천장(墓頂)은 말각쌓음식이다. 일반적으로
三/g三 三
2-6 층까지 쌓고, 말각은 1-4 충까지이다. 위로 올려보면 斗四, 斗)답墓井 이다. 이러한 형식의 고분축조는 高大하고 넓은 고분을 위해 고안된 것 이다. 840 호의 예는 묘실 크기 2.36mx2.10mx 1. 73m 이다. 묘도의 길이 는 1.4 omx 1.o omx 1. oom 이다(그림 5-3s d). 그 중 4 기의 거대한 고분의 길이, 너비, 높이는 3m 이상이다. 이것은 오회분 4 호, 5 호묘와 같다. (2) 2 실묘 18 기 모두 同壤異穴(한 봉분에 2 기의 구덩이)이다. 묘의 평면과 墓頂결구의 異同울 근거하여 6 종으로 나눌 수 있다. (l) I 식 1 기 우산묘의 678 호이다. 묘의 평면은 長條形이고 천장은 평천장이다. 묘 도와 묘실의 뚜렷한 경계선은 없지만 묘도를 석괴로 막았다. 묘실 벽과 묘도 벽을 한꺼번에 석괴로 쌓고 그 톰재를 쇄석으로 충전시켰다. 그런 다음 몇 개의 거석으로 묘정과 묘도를 막았다. 묘 바닥은 쇄석으로 깔았 다. 양쪽 묘도는 평행이며 방향은 모두 145° 이다. 서쪽 묘실 크기는 4mx0.90mx0.96m 이다. 동쪽 묘실의 길이는 3.30 m, 너비 o.s o m, 높이 lm 이다. 그것은 단실 1 식 평천장의 도형보다 낮다(그립 5-39 a). 이러한 형제의 고구려 고분은 최초로 발견된 것으로 고구려 고분의 형제와 결구 룰 연구하는 데 새로운 자료이다. ® Il 식 4 기 모두 우산 묘구에 있다. 이 쌍실 묘의 쌍실형제는 서로 다르다. 그 중 1 기의 평면은 장조형이고, 천장은 평천장이다. 雙室類 1 식과 완전히 같 다. 다른 1 기의 평면은 중국칼형식으로 천장은 쌓음식이다. 예로 733 호 (그립 5-39b) 를 들 수 있는데 서묘 평면은 장조형, 천장은 평천장, 묘실 은 좁고 길며, 낮고 작다. 그 크기는 3.l O mxo.s o mx 1.1 0m 이다. 동묘의 평면은 중국칼형식이며 천장은 쌓음식이다. 묘실 크기는 2.3 0 mX 1 .6 0
星巴:工\\)복M 76 북8 호4평 쪽)\]·)]r\\ 면b円도 와단 \[f言kl~(\면 도 》巴b._날 潟I,l 식一틀 [M 북7I33쪽\) 호]노 \ \평 ~면도一广와니 튤단(면[도t
mx uom 이다. 묘도 길이는 0.86m, 너비 0.80m, 높이 0.90m 이다. 묘 실 방향은 각기 다른데 서묘실 방향은 165°, 동묘실 방향은 160° 이다. 洞化市江口村 8 호묘와 거의 같다. ® III 식 3 기 묘 바닥 평면은 모두 중국칼형식의 쌍실묘이다. 그 중 1 기는 칼등(刀 背)면을 맞대고 있는 듯한 상대적인 쌍실묘이다. 다른 2 기는 연도가 한 방향으로 된 쌍실묘이다. 묘 바닥은 모두 쇄석과 판석을 깔았고, 천장은 모두 쌓음식이다. 예로 우산구 711 호는 2 묘실 평면 모두 중국칼형식이며 동시에 모두 묘실과 묘도의 벽을 공유하고 있다. 묘의 내벽은 자연석괴 로 서로 맞물려 쌓고 묘실 바닥은 판석을 깔았다. 천장은 쌓음식인데, 맨 위에는 1 매의 판석을 덮었다. 서묘실의 크기는 2.4 0 mx l.14 mx 1.54 m 이며, 묘도 크기는 l.5 4mX0 . 98mX 1. oom 이다. 동묘실의 크기는 2.4 0 mX l.56 mx 1. 38m 이며, 묘도 크기는 1.2 omx 1.o omx 1. oom 이다. 두 묘도는 평행이고 방향은 모두 168° 이다(그립 5-3 9c). ® IV 식 1 기 마선구의 1440 호 고분이다. 평면이 삽형(연도가 중앙에 있는 것)의 쌍실 묘이다. 천장은 雙室類 壓]과 같이 평행쌓음식이다. 묘실의 내벽과 묘 도는 모두 잘 가공된 큰 돌로 쌓고 백회로 그 틈새를 메웠다. 서실 내에 논 2 개의 稽臺가 있다. 양 실의 크기는 기본적으로 같다. 서실의 크기는 2.7 o mx2.2omx2.4 0 m, 묘도의 크기는 2.2omxo . somx 1. oom 이다. 동실 의 크기는 2.7omx2 . 10mx2 . som 이고, 묘도 크기는 2.oomx1 .o omx1 .00 m 이다. 이 형제의 쌍실묘의 묘실은 넓고 크다. 그 의부는 반원형의 봉토로서 높이가 3.10m 이고 주위 길이는 48m 이다. 두 묘도는 평행이며, 墓向은 모두 265' 이다(그립 5-40). ® V 식 8 기 2 묘의 평면은 모두 중국칼형식이다. 천장은 모두 말각쌓음식이다. 예 는 마선구 1437 호이다. 천장은 1 층 말각쌓음식의 2 실묘이다. 2 실묘와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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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모두 가공된 석괴로 쌓았으며, 백회로 툼을 메웠다. 서실 크기는 2.S O mX l.50 mX 1.3 6m, 묘도 크기는 0.7 5 mX0.64m X l. OOm 이다. 동실 크 기는 2.50mX l.90 mX 1. 20m 이고, 묘도 크기는 0.7 5 mX0.6 4 m X l. OOm 이 다. 두 묘도 사이의 거리는 l.l Om 이다. 묘도는 모두 평행이고 묘향은 190° 이다(그립 5-39 d). ® VI 식 1 기 마선구 705 호묘. 묘의 평면은 중국칼형식이다. 천장은 말각쌓음식이 다. 서실은 3 층 말각 2 층 평행쌓음식의 천장이고, 동실은 1 층 말각쌓음 식이다. 그것의 네 벽과 묘도는 다듬은 긴 돌로 쌓았다. 묘 바닥에는 정 교한 판석을 깔았다. 서실의 크기는 3.00mx2 . somx2.35m 이며 동실의 크기는 2 . 70mx2.30mx2.30m 이다. 묘도의 크기는 2.65mx 1.o sm x 1.4 4m 이다. 두 묘도 사이의 거리는 1. 60m 이다. 묘도는 모두 평행이며 방향은 255° 이다. (3) 3 실묘 모두 2 기로 묘실 봉토는 모두 높고 크다. 그리고 동일 봉토 내에 3 개 의 서로 다른 묘실이 있다. 이 묘실은 결구에 따라서 2 식으로 나뉜다. CD I 식, 마선구 1445 호 고분 3 묘실의 평면이 서로 다르다. 서실 평면은 삽형이고, 동실과 가운데실 평면은 중국칼형이다. 천장은 쌓음식이다. 3 개 묘실의 내벽과 묘도는 모 두 가공된 석재로 쌓고, 백회로 툼 사이를 메웠다. 서실과 가운데실 바 닥에 각각 1 층 2cm 의 백회를 발랐다. 3 개 묘실 모두 평행이며 방향은 175° 이다. 서실의 크기는 3.oomx2.6 0 mx3.oom, 묘도의 크기는 4.2 0 mX 0.90mX l.5 0m 이다. 가운데실의 크기는 2.55mX2.05mX3.0om 이고, 묘도 의 크기는 4.20mx0 . 90mx 1.5 0m 이다. 동실 크기는 2.5 o mx2.25mX3.oo m 이고, 묘도의 크기는 4.2omx 1. oomx 1. 30m 이다(그림 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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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o mx 1. 30m 이다. 동실의 크기는 2.4 0 mX l.56 mx 1. 23m 이고, 묘도의 크기는 2.1 0 mxo.s o mx 1. 10m 이다(그림 5-42). 종합하면, 봉토묘의 묘실은 왜소한 것에서 高大해졌으며, 천장은 간단 한 平頂石(평천장)으로부터 복잡한 쌓음식과 말각쌓음식으로 발전하였 다. 평정석 묘의 평면은 장조형이고 중국칼형인 고분 내에 존재한다. 쌓 음천장과 말각쌓음천장은 묘의 평면이 중국칼형과 삽형인 고분 내에 있 다. 이러한 묘의 묘벽은 모두 백회로 툼 사이를 메웠다. 그리고 석재가 약간 가공되었다.
2) 유물 고분들은 대부분 소형 봉토묘였으며 또한 이미 도굴당하여 유물이 대 단히 빈약하였다. 다만 20 기의 봉토묘와 2 기의 적석묘에서 모두 132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것은 철기 127 점, 包金圈 2 점, 금제 장식품 2 점, 토기 1 점 등이다. (1) 토기 1 점 이번 발굴에서 출토된 토기는 모두 파편이다. 태토는 모두 고운 진흙 질 홍도, 회도와 모래 섞인 황갈도 등이다. 문양은 斜方格文과 斜線文, 그리고 회색 토기호에는 융기된 현문 등이 있다. 그 의의 어떤 고분에서 는 회색의 옹기 질의 조각이 출토되었다. 기형으로는 대접, 호, 사발 등 이 있다. 복원된 1 점이 산성하 321 호 고분에서 출토되었는데, 그것은 홍 색 사발이다. 구경 18.5 c m, 높이 9.3 c m, 저경 14 . 6cm 이다(그림 5-43 g). (2) 철기 대부분 고분 출토의 관못과 관고리이고, 기타는 쇠도끼 1 점, 쇠칼 2 점 등이다. ® 관못(桂針) : 보통 길이가 13.7cm 이고, 또한 작은 것도 있다. 모두 방추형으로 머리는 둥근 모자형이다. ® 관고리 (桂環) : 하나의 4 務울 가전 쇠철사(철좌) 위의 중간에 2 개의 둥근 구멍의 원판이 끼워져 있다. 철사의 끝에 혼들리는 고리가 하나 달 려 있는데 , 관을 움직일 때 쓰이는 고리로 보인다. 관고리의 총 길이는 15cm 이 다 (그림 5-43 e) . ® 쇠칼(鐵刀) : 1 점은 전체 길이가 54 . 6cm 이며 그 중 손잡이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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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f�� ���l�0�X� 1/2, C, g�� 1/4, b �� 1/6) 8cm, �t� 2 .1cm, P�خ 0.6cm t��. ������@� 43.8cm, �t� 2 .4 c m t�� (���� 5-43 a). �
x� 1 �@� ȴ� 8�t�� 15.3cm, ����t� ����@� 3.3cm, P�خ 0.9cm t��(���� 5-43b). �길이 28cm, 두께 2.6cm, 너비 1.3 cm 이다(그립 5-43 c). (3) 도금 유물 도금된 복숭아형 장식품이다. 위쪽 끝에 투공의 사각 조각 장식이 달 려 있다. 상하에 각각 3 개의 못자루가 있고, 하단에는 무공된 복숭아형 장식이 있다. 투공의 주위에는 못구멍이 많이 있다(그립 5-43f ). 도금된 사각형 장석편은 중간에 두공되었고, 네 모서리에 각각 하나의 못자리가 있다 (그림 5-43 d) . 3) 맺는 말 유물이 적기 때문에 다만 고분의 결구상 이미 발견된 고분의 연대와· 비교하여 고분들의 상대연대를 추론하여 보겠다. 3 기 적석묘는 결구상 하부가 모두 방단이며 상부는 적석이고, 묘실은 묘의 정상 중앙에 있다. 그것들은 桓仁 고력묘자촌 적석묘와 대체적으로 같은 것으로 고구려 초기의 고분에 해당된다. 봉토묘의 연대는 형제 면 에서 보면 이론 것과 늦은 것 등 2 시기로 나누어진다. 쌍실묘 내에는 2 개 모두 장조형, 또는 하나는 장조형이고 하나는 중국칼형과 삽형의 同 壇異穴雙室墓이다. 그러나 장조형 묘실과 삽형 묘실이 하나의 봉토 내에 서 발견된 예는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중국칼형 묘실은`장조형 묘 실과 삽형 묘실의 사이의 중간 형제이다. 集安 지구에서 장조형 묘실과 삽형 묘실의 전 • 후기 관계를 보면 일반적으로 적석묘가 봉토묘보다 이 르고, 봉토묘 내의 평천장의 것이 쌓음식의 것보다 이르나 말각쌓음식의 것보다는 늦다. 이 2 종 묘실을 비교하여 보면, 장조형 묘의 묘실은 왜소 하고 초라하며 葬具와 부장품이 없다. 그러나 전기 (이른 시기)의 특칭을
많이 보존하고 있는 것은 평천장의 묘이다. 초기 적석묘의 절대다수는 묘도가 없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장조형 묘에도 역시 뚜렷한 묘도는 없 다. 다만 좁고 긴 묘실 남단에는 석괴를 채웠는데, 이것은 후기 고분의 특칭이다. 따라서 그것은 일종의 과도기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유형 의 고분이 상당히 적기 때문에 그 존재하였던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을 것이다. 즉, 평천장 묘실은 빠른 시간에 중국칼형과 삽형 쌓음식 천장의 봉토묘로 바꾸어졌을 것이다. 우산 묘구 733 호(쌍실 Il 식)에서는 장조형 묘의 평면(평천장)과 중국칼형묘의 평면(쌓음식)이 동시에 한 봉토 내에 서 출현되었다. 그것은 2 종 형제의 경질이 교착되어 나타난 것이다. 따 라서 장조형이 중국칼형과 삽형보다 이를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또한 쌓음식 천장은 평천장과 접근되어 출현되었고, 말각쌓음식 천장과 늦게 교체되었다. 이러한 봉토묘의 연대는 서전으로부터 남북조 시기 사이로 볼수있다. 5 상활룡촌 • 하활룡촌 고분 발굴 老虎噴 수력발전소 건설 공정에 따라서 集安縣 문물보관소에서는 麻線 鄕의 上活龍과 下活龍에 있는 상당수의 고구려 고분을 발굴하였다. 발굴 작업은 1982 년 5 월부터 10 월까지 실시되었다. 발굴결과는 다음과 같다 .5) 1) 상활룡촌 고분군 상활룡촌 고구려 고분은 集安縣城에서 서남쪽으로 8km 지점에 있다. 모두 14 기로서 村~t의 충적 평지에 놓여 있다. 그곳에서 동쪽으로 320m
거리에 압록강이 있고 서쪽으로는 一漫岡과 접하고 있으며 배후에는 산 둘이 중첩되어 있다. 그곳 사람들은 이를 後山이라고 부른다(그립 5-44). 발굴된 14 기의 고구려 고분은 적석묘, 계단적석묘, 봉토동실묘 3 종으 로 나누어진다. ® 적석묘 3 기 (Ml, M2, M7) 이 중 Ml, M2 는 크기가 기본적으로 같고 동서로 나란히 묘군의 최동 단에 놓여 있다. M7 은 묘군의 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3 기 고분은 이 미 파괴당하였다. M2 의 예를 들면 무덤의 평면은 직사각형이고 지름 10-20cm 되는 강자갈을 지표상에 높게 쌓았다. 길이 9m, 너비 7m, 높이 lm, 방향은 180° 이다. 닙갈굴 전에 墓頂部가 편북측으로 놓여 있었으며 길이, 너비가 3m 되는 함몰抗이다. 墓城은 묘 중앙에 있었고 바닥은 지 표와 같은 수준이다. 네 벽이 대부분 파괴되어 범위를 알 수 없다. 다만 남면에 동서 방향의 塘壁이 있다. 모두 지름 30cm x 50cm 의 강자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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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았고 길이 4.som, 殘高 o . 30m 이다(그림 5-4 5 ). 城中에 상당수의 토기 편이® 발계견단되적었석는묘데 5 기그 (M 기3,형 M은5 , 陶M鏞lO과, M陶l祗1(, 시M루l2)) 등이다. 룡태 가기묘단 군가석의장이 중좋대앙은부에 분M 5 위 이의치 동하예되고를어 있들많다겠은.다 .고길 분이그들 8의묘m는 , 원 너2형 급비이 계8상m단실, 되적높었석이다 묘.2이 m며 보의 존상方 활丘상 는서-이이1 루데3고 괴기었 를방다그초.향 것를사 은은 용계만 하들단1거8였었0칠은°다다 이게 ..지다 (름가전그그공 체립 2된위0 - 높5의4-석o4이 c6회멘m ). 석 0이되.기을7는 0단 m안 3이을강 층쪽다 자으으지 . 갈로로표기로 의 쌓단1 -쌓은 2작내m았 은것 에으수 이는강며축다 자.되강높갈 면자이각 서갈위 0에을충 .계 7 은0층깔쌓m 을 아았1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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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계단 내에는 다시 석괴로 메운 후에 내수하면서 묘실을 쌓았으며 묘 실 바닥은 지표에서 1. 4om 의 높이에 있다. 네 벽이 일찍이 파괴되었는 데 다만 동 • 남 • 북 3 면에 아직 몇 점의 잘 다듬어진 석괴가 보이고 있 고 그 크기는 약 50cmx20cmx10cm 이다. 묘실은 남북향의 칙사각형이 다. 길이는 약 3m 이며 너비는 확인할 수 없다. 墓塘 상부에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강자갈로 봉토를 만들었다. 묘광 내에서 출토된 고운 점토 회도 구연부는 파손되었다. 이것은 녹 로제로서 소성도가 높고 경질이다. 그 의 기단에서 2m 거리의 東南角 지표 밑 30cm 되는 곳에서 1 점의 파손된 연화문 와당이 출토되었다. ® 봉토동실묘 6 기 모두 파괴되고 蓋頂石이 대부분 결실되었다. 묘실과 묘도는 대부분 석 재로 쌓았다. 위에 개정석이 있는 곳에 후에 황토로 封護하였다. 봉토는 圓丘狀이다. 결구는 2 식으로 나누어진다.
국닌기쯔/ ` '/,, '2 ,--二-·-二--論--` ``` \\
I 식 2 기 (M13, Ml4) : 묘실 평면은 묘도가 한쪽에 치우쳐 있는 형이다. M13 묘 바닥에는 1 충의 작은 강자갈을 깔았는데 이것은 지표보다 20cm 낮다. 네 벽은 화 강암으로 세웠다. 묘실 길이 1.7 5m, 너비 1.1 0m, 높이 0.75m 이며 방향 은 180° 이다. 묘도는 남벽의 좌측에 있고 길이 1.2 0m, 너비 o.6om, 높이 o.65m 이다. 묘도 중에 문을 봉하는 석벽을 쌓았다(그림 5-4 7 ). 묘실 뒤 쪽에서 발견된 사람 머리뼈로 보면 葬式은 머리 방향을 북쪽에 두고 있 다. 부장 유물은 모두 토기편이다. 고운 점토의 灰陶와 福陶이다. 모래 가 섞인 회도는 모두 녹로로 만들어졌으며 소성도가 높다. Il 식 4 기 (M4, M6, Ms, M9) : 묘실 평면은 묘도가 중앙에 있는 형이다. 네 벽은 상향하면서 내수되 었다. M4 묘실은 원래 지표 밀에서 10cm 되는 곳에 있다. 네 벽은 석 괴로 3, 4 층까지 쌓았으며 길이 2.5m, 너비 1.3 5m, 높이 l.l m 이다. 북 측 頂部에는 아직 兩魂의 뚜껑돌이 남아 있다. 묘도는 남벽 중앙에 있고 길이 lm, 너비 o.64m, 높이 0.8m 이다. 묘도 중앙에 문을 봉한 돌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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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그림 5-48). 묘실 중부에서 서벽으로 40cm 되는 곳에서 銅鏡片 1 점, 모래 섞인 회 도, 모래 섞인 갈도, 고운 점토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편은 모두 녹로제이고 소성도가 높다. 2) 하활룡촌 고분군 하활룡촌은 集安縣城에서 서남 방향으로 16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 며 북쪽 8km 거리에 상활룡촌이 있다. 반원형 충적분지 내에 위치하고 있는데 동서 너비 1km, 남북 길이 1.5 km 이다. 동 • 남 양면은 압록강이 고 서 • 북 양면은 가파른 大黑[立子山이다. 묘군은 분지 동단의 언덕 위 에 위치하고 있으며 압록강 수면보다 약 5m 높은 곳에 있다(그림 5-49). 하활룡촌에는 고구려 고분이 34 기가 있는데 모두 적석묘이고 이번에 모두 발굴되었다. 묘광의 크기에 따라서 2 식으로 구분된다. 1 식 29 기의 형제는 상당히 크다. 변의 길이가 대부분 8-15m 사이다.
二下活龍村
M8 의 예를 들면 묘는 남쪽으로 경사된 언덕상에 위치하고 있고 보존 상 태가 상당히 양호하다. 동서 너비 7.5m, 남북 길이 9.5m, 높이 0.5-1. 2 m 이다. 평면은 원형으로 먼저 지름 50cmx50cm 되는 강자갈을 묘 주 위에 깐 다음 모래와 강자갈을 섞어 지표의 중간에서 직접 묘광을 쌓았 다. 묘광은 모두 지름 30cmx4ocm 정도의 강자갈로 쌓았고 동벽 길이 1.7m , 높이 0.8m, 서벽 길이 l.8 m , 높이 0.9m, 방향은 남편서 35° 이다. 塘 상부는 작은 강자갈로 封部를 쌓았다. 묘변과 묘광 사이에는 상당히 커다란 강자갈로 충을 이루어 쌓고 그 틈 사이를 작은 자갈로 메웠다(그 립 5-50). M20 묘광 내에서 불에 탄 1 점의 작은 人骨과 재 (灰)를 발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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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유물은 모두 M8 의 묘실 바닥에서 출토되었다. 그것들은 環頭鐵刀, 철 제 혁대고리, 鐵辨 철제 낫, 철제 부속품 및 토기편 등이다. Il 식 5 기 (M24, M3, M4, MB, M14) 는 墓邊의 길이가 5-6m 사이이고 조영 방법이 1 식 묘와 동일하다. 그러나 묘실이 특별히 작아 보통 길이 0.8 - 1. lm , 너비 o.25-0.6m 이다. M24 는 묘의 길이 5m, 너비 3m, 높이 o.6m 이며 평면은 직사각형이다. 묘광은 동서 길이 l.lm , 동단 너비 o. 25m, 서단 너비 0.4 5 m, 높이 o .4 m 이다. 방향은 남편서 30° 이다(그립 5 -51) . 유물은 오직 M24 묘실 남벽 지표상에서 고운 점토의 갈색 토기편이
二
출토되었울뿐이다. 3) 부장유물 이번에 발굴한 고분은 대부분 일찍이 도굴당하여 유물이 거의 드물다. 이것들은 다음과 갇다. O 철기 6 점 : 모두 하활룡 1 식 묘 내에서 출토되었다(그림 5-52). ® 환두철도 2 접 : 2 식으로 구분된다. 1 식 1 점 : 刀背와 刃部가 평탄하며 손잡이는 뚜렷하지 않으며 전단의 경사가 孤形울 이루고 있다. 길이 32cm, 너비 1. 8cm 이다(그립 5-53 a). Il 식 1 점 : 손잡이가 刀身보다 좁다. 계열은 1 식과 동일하다. 길이
46cm, 너비 2 .4 cm 이다(그림 5-53 b). ® 작은 도끼(~) 1 점 : 형은 銃(도끼)과 같고 상부의 중앙에 쌓部(자 루 끼우는 구멍)가 있다. 墓部口에는 두 줄의 占文과 弦文이 있고 刃部는 孤形이다. 이것은 器身보다 넓다 .. 길이 11cm, 너비 8.4 c m, 刃寬 10. 4cm, ~長 7.2cm, 너비 2cm 이다(그립 5-54 a). ® 철제 낫 1 점 : 前端이 굽어지고 좁다. 후부는 약간 넓고 말단은 앞 쪽으로 굽혀졌으며 刃部는 內向이다. 길이 l8cm, 너비 3cm, 두께 0.4 cm 이다(그림 5-54 b). ® 철제 혁대고리 1 점 : 고리는 環方形이다. 前端이 약간 굽어졌고 그 안에 움직이는 바늘이 들어 있다. 단면은 모두 원형이다(그림 5-55 b). ® 철제 부속품 1 점 : 평면은 대팻날 같고 단면은 孤曲되었다. 길이 34cm, 윗부분 너비 14cm, 아랫부분 너비 4.8cm, 두께 0 . 2cm 이다. 화살 집의 부착물일 가능성도 있다(그립 5-55 a). ® 동제 거울 1 점 : 파손되었으며, 사각형에 가깝다. 四角孤曲에는 [!!) 缺되었다. 無文이며 邊緣은 돌기되고 중간에는 半球狀의 꼭지가 있다. 鏡面은 하얗다. 변의 길이 12.1cm, 두께 0.1cm 이다(그립 5-56). ® 동제 장식 2 점 : 1 점은 파손되었는데 鍾처럼 생겼다. 높이 1.0 cm, 구경 1.2 cm, 孔程 0.15cm 이다(그립 5-57 e). ® 동제 단추 1 점 : 표면이 돌기되었다. 지름 3.4cm, 공경 0.5cm 이다 (그립 5-57 a). ® 토기 梅緖 6 점 : 2 점이 복원되었으며 3 식으로 나뉜다. I 식 2 점 : 고운 점토의 灰福陶(소량의 고운 모래 섞임), 大口, 직립 구 연이며 어깨 부분이 좁다. 복부는 平直이고, 어깨와 배 사이에 두 개의 다리 형태의 손잡이가 있으며 平底이다. 手製이며 소성도는 일치하지 않 고 표면은 마연하였다. 구경 10cm, 목 길이 4.4 c m, 견경 12cm, 저경 5.8cm, 높이 14.8cm 이다(그립 5-58 a). 그 의 1 점은 어깨와 배 사이에 4 개의 손잡이가 있다. 저부가 파손되었으며 그 의에는 위와 동일하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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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58 a. I 식 단지 (s2J XM s : 7) b. I 식 단지 (s2J XM s : 2) c. Il 식 단지 (s2 J XM2:1) d. Il 식 단지 (s2 J XM2:4) e. III 식 단지 (s2J X M 3 : 1) f. III 식 단지 (s2J XM 3 : 1) g_ 시루 (s2 J XM 2 : 2)
a b
립 5-58 b). I 식 2 점 : 고운 점토에 모래가 섞인 黑福陶이고 의반 구연이며 둥근 입술, 평저이다. 구연 내벽에는 한 줄의 수직선 송곳무늬가 있다. 수제 이며 소성도가 낮고 표면은 마연되 었다. 높이는 14.6 c m, 구경 14cm, 복 경 14.4 c m, 저경 8cm 이다(그립 5~5 8 C). 그 의 1 점은 고운 점토제의 黑 灰陶로, 구연 내부에 문양이 없고, 저부는 파손되었다(그림 5-58d). l11 식 2 점 : 모래 섞인 福色陶로 둥근 입술, 의반 구연이고 長身이며 하부는 파손되었다. 녹로제이며 경질이고 소성도가 상당히 높다(그림 5 -58 e, f), @ 陶話(시루) 1 점 : 黃福陶이고 태토에 모래가 약간 섞였다. 뚜껑을 덮을 수 있게 된 구연부(子母口)이고 견부에는 두줄의 (!!]현문이 있고 그 사이에 휘장문이 음각되었다. 아래에는 손잡이가 있고 복부가 약간 부르 고 저부에 구멍이 뚫렸다. 녹로제로서 상당히 경질이다(그림 5-58g ). @ 銘文 토기편 : 모래가 섞인 灰陶이고 정면에 〈黑〉字가 음각되었다. 이 자는 광개토대왕 비문의 〈堅〉字와 일치한다(그립 5-59b). @ 와당 1 점 : 이미 파손되었다. 고운 점토의 회도이고 邊i유이 상당히
높고 변연 가까이 두 줄의 돌기된 현문이 있으며 현문 내에 대칭되는 여 덟 잎 연화문이 시문되고 연화문 사이에 두 줄의 돌기된 笠線이 있고, 연판 좌우에 2 개의 젖꼭지가 있다. 동류 와당이 通溝 장군총에서 출토되 었다(그림 5-5 9 a). @ 토제 방추차 1 점 : 福鼓形이고 고운 점토로 만들어졌다. 지름 3.8 cm, 높이 1.5 cm, 공경 0 . 8cm 이다. 표면은 마연되었다(그림 5-57 d). @ 토제 어망추 1 점 : 파손되었고 고운 점토제이며 갈색이다. 1 단은 오목하고 지름은 1.1 cm 이다(그림 5-57 f). ® 마노 장식구슬 6 점 : 이것들은 2 식으로 구분된다. l 식 5 점 : 3 점이 파손되었으며 형제는 일치한다. 모두 원주형이며 그 가운데 구멍 이 뚫렸고 암홍색 이 다. 길 이 2.3cm, 지 름 0.9cm, 공경 0.3 cm 이다(그림 5-5 7 c). Il 식 1 점 : 형은 腹鼓이고 황갈색인데 약간 두명하다. 길이 1.8cm, 지 름 0.5cm, 복경 o.scm, 공경 0.2cm 이다(그림 5-57 b). (1) 하활룡식 묘 내에서 출토된 鐵鍊, 鐵刀, 철제 낫 등은 河南新安鐵 門鎭 漢墓 洛賜燒溝 漢墓 및 河北溝城 漢墓에서 출토된 철기와 기본적 으로 일치한다. Il 식 묘 내에서 출토된 고운 점토의 灰福!創수과 I 식 묘 내에서 출토된 직립 구연의 목 긴 단지의 태토는 일치한다. 모두 수제이 며 화력이 고르지 못하다. 이것은 고구려 초기 토기의 풍격을 나타내 준 다. 고분 형제 및 출토된 유물로 추측하면 하활룡 고분군의 연대는 東漢 시기에 해당되며 하한은 漢, 魏의 교체기보다 늦지 않다. 상활룡촌의 적석묘와 계단적석묘에서 출토된 토기의 태토, 제작법과 형제는 서로 비슷하며 연대도 큰 차이가 없다. 토기를 하활룡의 것과 비 교하면 녹로제가 상당히 많고 소성도가 높으며 고분 연대는 다소 늦어 대략 남북조 시기에 해당된다. 상활룡촌 Il 식 봉토동실묘 결구와 서로 같은 고분은 통구 고분군 및
集安 기타 묘군 내에서 흔히 발견된다. 이러한 묘 내에서는 유물이 드물 게 출토되기 때문에 과거에는 연대를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이번에 상활 룡촌 M4 내에서 출토된 1 枚 亞字形 銅鏡은 湖南益楊縣赫山廟 唐墓에서 출토된 동경과 대단히 근사하다. 이러한 유형의 동경은 唐代 중 • 후기에 비교적 유행하던 것이다. 이에 의하면 集安의 이러한 고분 일부분이 발 해 시기에 해당되고 그 절대 연대는 약 8 세기가 된다. (2) 과거에 발표된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는 대부분 대, 중형 고분이고 봉분 평면은 사각형이며 묘광의 위치는 墓頂이라고 하였다. 이번 하활룡 발굴결과에 따르면 고구려 초기에는 평면 원형의 적석묘도 있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고구려 초기 적석묘 중에는 묘광이 지상(지표)에 있는 것도 밝혀졌다. 하활룡 묘군 중에서 묘광이 작은 적석묘를 상당수 발견하였는데 이러 한 적석묘 묘실은 시체를 안치하기에 부족하다. 이것은 고구려 적석묘 중에서 최초로 발견된 것이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 死者殖在屋 內, 經三年, 擇日而葬〉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고구려에 2 차장의 습속 이 존재함을 보여 준다. 이러한 소묘실의 고분은 고구려가 骨徹를 매장 한 가능성을 보여 주며 당연히 어린아이를 매장했을 가능성도 있음을 보 여 주고 있다. 6 적석묘의 유형과 발전 그 동안에 중국 지역에서 발홉된 고분 발굴 보고서와 李殿福의 「集安 高句麗墓硏究」 (《考古學報》 2 期 1980, 163-184 쪽) 에 대 한 의 견으로 魏存成 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6)
1) 無壇積石墓 강자갈 또는 석괴로 지표상에 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의 기단부를 만들 고, 그 중간에 석광을 구축한 유형이다. 석광 바닥은 대부분 지표와 일 치하거나 때로는 약간 높다. 석광 윗면은 쇄석으로 봉한다. 이 유형의 고분이 조사된 것은 많으나 발표된 것은 별로 많지 않다. 1984 년까지 발표된 고분으로는 Ml68 호, 集安 上和龍 3 기, 下和龍 I 석 29 기 (그림 5-60), n 식 5 기 등이 있는데, 그것들 중 전형적인 고분은 표 5-7 에서 볼 수 있다. 無壇적석묘의 유행시기를 李殿福은 가장 이른 형식의 일종으로 구분하 며 그것은 고구려 건국 전의 고분 형제의 하나로 보고 있다. 方起東은 이 유형의 고분에서 출토된 동전이 대부분 西漢 때의 五鍊錢과 新 王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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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5-7 고구려 無壇積石墓
의 貨泉으로 그 연대는 당연히 기원 전후가 된다고 보고 있다. 즉, 고구 려 건국(기원전 37) 전후 시기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표 5-7 에서 제시 된 하화룡 고분 출토의 토기와 토기편은 모두 수제이고 소성도도 높지 않아서 고구려 초기 토기의 풍격을 가지고 있다. 또한 출토된 낫, 작은 도끼, 환두대도 등도 중국 漢代 작풍이 비교적 농후하다(표 5-8, 그립 5 -61 a, c). 고구려 고분 중 同類 기물 출토가 많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同lj l j로서 삽입시킬 수 있다. 하화룡 M8 출토의 쇠화살통은 그 연대가 東漢 초기 또는 약간 늦은 시기의 것인 吉林省 橘樹縣 老河深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같다. 이 고분은 무단적석묘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고구려 건국 이전의 유형의 하나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은 크다. 무단적석묘의 하한은 어디까지일까? 과거에 이 문제는 밝혀지지 않았 다. 표 5 구 내의 상화룡 고분으로 이 문제의 회답을 할 수 있다. 상화룡 M2 호 고분 부장의 토기는 대부분 輪製이며 소성도가 높다. 특히 일종의
표 5-8 고구려 고분 출토 금속기
무덤유형 낫 작은도끼 환두대도 궁형꺾쇠
b
사발(鉢)형 병은 子母口이며 다리형 耳를 가져 자모구 구연부의 아랫변 에 빙 둘러서 한 줄의 커튼 문양을 처리하였다. 이 문양은 고구려 토기 중 5 세기를 전후해서 주로 유행되었다. 集安 장천 M2 봉토석실묘 벽화 출토의 四耳盛(네 귀 항아리)에도 그러한 문양이 있다(그림 5-62). 그와 동시에 상화룡 M7 호 고분에서 명문토기편이 출토되었다. 양각된 〈堅〉자 는(그림 5-52 a)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내의 〈里〉자와 같다. 광개토대왕릉 비는 414 년에 건립되었다. 여기에 근거하면 무단석광묘의 하한은 5 세기 까지이다. 2) 方壇積石墓 이 유형의 내부 결구와 무단적석묘의 것은 갇다. 의부 적석 주위를 대 형 석괴 또는 장대석으로 1 층의 방단을 쌓았다. 이 유형의 고분에 대한 발표는 드물다. 지금까지 集安 良民 M73 호와 集安 七星山 M879 등 소수가 있다(그림 5-63, 표 5-9). 방단석광묘의 유행시기는 도표 내의 2 기로서는 단정할 수 없다. 李殿
曰
표 5-9 고구려 방단적석묘 (단위 : m)
福은 이 러한 고분 내 에서 〈 明化 〉〈 半兩 〉〈 五鍊 〉 〈 大泉五十 〉〈 貨泉 〉 등 戰國에서 東漢 시기의 화폐가 출토되어 그의 상한연대는 東漢 初年보다 늦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 3) 方壇階段積石墓 이 유형의 내부 결구는 방단적석묘와 같다. 다른 것은 그 의부의 방단 위에 더 방단을 증가시킨 것인데 보통 3 층이다. 그것들의 충위는 안으로 좁혀져서 계단(사다리)형이 된다. 그래서 방단계단 적석묘라고 칭한다. 각총 방단은 또한 일총계단이라고 부른다. 그 축조과정은 먼저 대형 석 괴 또는 장대석 (石條)으로 처음 1 층을 쌓는다. 이때 높이는 lm 를 초과 하지 않는다. 그리고 방단 내에는 강자갈 또는 소석괴를 충전시켜 평탄 하게 만든다. 이 평탄면 위에 주위를 안쪽으로 1-5m 정도 축소시켜 제 2 충의 방단을 쌓는다. 그리고 계속하여 같은 방법으로 제 3 층의 방단을 쌓 는다. 석광은 대부분 제 1 층 방단 또는 제 2 층 방단의 평면상에 축조한다. 이러한 축조 방법을 〈 分層平築法〉이라고 부른다(그림 5-64), 이 유형으로 발표된 자료는 상당히 많다. 그것들은 Mu, 1s, 19, 23, 32 호 그리고 集安 만보정 M242, 양민 M74, 集安 상화룡 M3, 5, 10, 12 호 등이다. 방단계단 적석묘의 출현시기를 살펴보면, 桓仁 M1s 호 고분에서는 말 의 등자는 없고 다만 말재갈만 출토되었다. 말재갇 도면은 발표되지 않 았지만 이미 발표된 같은 종류의 자료에 의하면, 예로 桓仁 Ml9 출토의 말재갈은 양끝이 둥근 고리로서 고리 중간에 재갈멈치는 없었고 다만 고 리가 상당히 크다. 이는 원래 角形 재갈멈치 또는 S 형 재갈멈치로 추측 하고 있다. 楊i 5L 과 孫機 등의 연구에 의하면 角形 재갇멈치의 유행시기 는 주로 西周에서 戰國 시기이며 아마도 늦게 西漢에 영향을 주었을 것
·-··-·
이다. S 형 재갈멈치는 西周 시기에 이미 출현되었고 秦漢 때 유행되었 다. 秦始皇陵 측면의 도용 구덩이 속의 기마병 도용의 말에 있는 것은 S 형 재갈멈치이다. 그러므로 방단계단 석광묘의 출현 시기는 방단석광 묘와 기본적으로같다. 방단계단 석광묘의 연대 하한울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상화룡 M5 고 분 기단 동남 모서리의 2m 지점의 지하 30cm 되는 곳에서 장군총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연화문와당이 출토되었다. 장군총의 연대는 5 세기에 속하며 태왕릉보다 약간 늦다. 이 와당이 墓上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증거 자료로 삼을 수는 없지만 묘광 내에서 출토된 고운 태 토질의 토기 구연부는 輪製로 만들어졌고 소성도도 높다. 耿鐵華 • 林至 德의 연구에 의하면 고구려 토기의 輪製 제작은 4 세기에 시작되며 고운 태토 토기는 4 세기 이후에 유행된다. 이것은 이 고분의 연대가 4 세기 이 후라는 것을 설명하여 준다. 李殿福은 集安 우산 묘구 3319 호 방단계단 석광묘에서 출토된 〈 丁巳 〉 명문의 구름무늬와당을 4 세기 상반쯤으로 보 고 있다. 그 밖에 이 고분에서 출토된 東晉 청자 둥근 구연 登는 방단계 단 석광묘의 하한연대를 알려 주는 하나의 좋은 증거가 되고 있다. 다른 일종 적석묘는 묘 기단부 지세가 상당히 가파르다. 평기단부를 택하여 積石의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낮은 곳에 여러 차례 돌계단 울 쌓았다. 上高下低의 차례로 보호석을 놓았다. 의관상 몇 충의 계단 (사다리) 같다. 기타 다른 축조법과 分層 축조법과도 다르다. 더욱 묘 기단부 지세가 높은 곳은 드물게 쌓거나 또는 돌담을 하지 않았다. 그러 한 고분은 대부분 계단식 담의 적석묘(帶階膳的積石墓)라고 칭한다. 또는 그것을 간단히 칭하여 階膳積石墓라고 칭한다. 지금까지 발표된 이러한 유형 의 고분은 1978 년 集安 太平公社에서 발견된 靑鋼短劍墓와 1979 년 10 월 발굴된 集安 우산 10 기 Il 식 적석묘이다. 階段적석묘의 내부 구조는 대부분 석광을 가졌다. 단, 어느 고분에는 석광이 없다(적석묘 중 석광이 없는 것). 이 고분의 유행시기는 그 중 集 安 청동단검묘가 있는데 청동단검묘의 편년 연구에 의하면 원보고자는 이 고분의 상한연대를 戰國 시기로 추측하고 있다. 단, 많은 학자들은 이 고분의 연대 및 고분 결구 자체에 많은 의심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 나 그 고분의 시기는 비교적 이르다. 集安 우산 Il 식 적석묘에서 東漢 五鍊, 활형 벽고리와 도금 기물이 출 토되었다. 활형 벽고리의 다른 몇 가지 예가 방단계단 석실묘와 봉토석
실묘 내에서 출토되었는데 그것들은 고리가 원형의 호선을 거쳐 수직으 로 발전되었다(그립 5-61 h, i, k, 1). Ml52 호에서는 말안장태 (그립 5-65 f) 가 출토되고 말등자는 출토되지 않았다. 부장된 傍帶와 혁대고리는 중국 洛陽 晉墓 江蘇宜興 297 년의 周速墓, 廣州 324 년 東晉墓 및 일본 5 세기 중기의 고분 내에서도 발견되었다. 또한 北京 琉璃河 西晉 말년의 소형 浦室墓와 朝陽 遠臺子 東晉 벽화묘에서도 한 세트로 사용된 혁대고리와 창끝(蛇尾)이 발견되었다. 시대는 西晉보다 빠르지 않다. 여기에 관하여 夏篇과 楊溫 등이 언급한 바가 있다. 그 의 우산 Il 식 적석묘 내에서 출 토된 토기는 상당히 원시적이다. 그것들은 수제이며 모래가 섞였다. 그 중 Ml96 호 출토의 네 귀 장경호는 그 이후에 연계된 네 귀 호와 비교하 여 그 시대가 4 세기까지 올라갈 수 있다. 이러한 고분의 수가 적지 않기 때문에 3 세기 중엽에서 4 세기 초로 보아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방단계단 적석묘와 階膳적석묘에서 사용된 分層平築法과 계단 담은 다르다. 중요한 것은 고분기단 지세의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면, 桓仁 M15 호 방단계단 적석묘의 축조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 저 남북 방향으로 墓臺를 쌓고 그 위에 다시 계단을 쌓았으며 동시에 남 북 묘대 주위에 계단 담을 한 줄 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쪽 지세 가 상당히 낮아지자 그 의부에 한 줄의 계단 담을 쌓았다. 그 고분은 2 가지 축조법의 결합이다(그림 5-66). 의관상 양자의 효과는 같다. 따라서 階膳의 적석묘를 방단계단 적석묘의 범위에 넣는 것이 불가한 것은 아니 다. 방단계단 적석묘의 배치는 때때로 여러 기의 무덤이 연결되어 있다. 그것들은 수십 미터 혹은 수백 미터 이상으로 연결되었다. 또한 어느 것 은 1 기의 묘 기단상에 2 개의 塘을 축조하였다. 그것은 원시 가족장의 습 속이다. 무단적석묘와 방단적석묘 내에도 그러한 현상은 있다.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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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方壇石室墓 이 유형은 묘 ; 주위에 방단 결구를 축조하고 묘실은 그 가운데의 지표 에 설치한 것이다. 네 벽은 때로 일정한 석괴, 장대석으로 축조하고 때 로 板石울 세워서 축조하는 경우도 있으며 천장에는 거석을 덮어 평천장 울 이루거나 때때로 말각쌓음식도 있다. 묘도는 대부분 한쪽에 설치하였 다. 전체 묘실, 묘도는 평면으로 묘도가 한쪽으로 치우친 형을 만들었 다. 한 고분 내에 단실, 2 실, 때로 3 실도 있는데 2 실, 3 실은 나란히 배
치하고 묘도는 각각 따로 설치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연결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강자갈과 쇄석으로 묘실을 봉하였다. 석실묘(방단계단 석실묘 포함)는 당연히 석재가공이 거친 것과 정교한 것, 석실이 높고 낮음도 구별된다. 어느 학자는 낮은 석실을 〈 橫穴式 石 室墓 〉 라고 칭한다. 그러나 석실의 고저는 상대적이다. 특히 중, 소형 묘 로서 구체적으로 어느 규격은 횡혈이고 어느 규격은 횡혈이 아니라는 것 등이 결코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 횡혈식 석실묘 〉 를 석실묘 내에 넣고 통일시켜 살펴보겠다. 방단석실묘는 방단석광묘와 마찬가지로 발표된 재료가 드물다.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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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5-10 고구려 방단석실묘 (단위 : m)
桓仁 Ml 호(그립 5-67), 集安 槍林河 M21, M31 호 등 몇 기가 있다. 그 중 M31 호는 3 층 계단으로 보고되었다. 「集安高句麗墓硏究」에서는 〈 봉석 동실묘〉의 예로서 43 호 고분을 제시하였는데, 그 고분의 평면 단면이 완 전히 일치하여 동일 고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원보고자의 43 호 고분 의 1 기 봉토석실묘는 당연히 31 호가 되어야 한다. 그 고분은 방단석실묘 에 해당되어 표 5-10 의 분류에 놓는다. 5) 方壇階段石室墓 이 유형 고분의 내부 결구는 방단석실묘와 기본적으로 같다. 다만 의 부에 방단계단 결구가 있다. 이 유형 고분의 조사와 발굴 재료는 많다. 만보정 M242-2, 3, 4, 桓仁 M21( 그림 5-68)I 칠성산 M96, 우산하 M41 과 태왕릉, 장군총 등도 모두 이 유형에 속한다(표 5-11). 방단계단 석실묘의 유행시기와 그 하한연대는 상당히 명확하다. 예로
o 2m
칠성산 M96 호의 묘실은 상당히 낮다. 그러나 천장석, 묘도가 있는 것은 석실묘의 기본 조건을 갖추었다. 그 고분에서 유약 바른 토기에 현문, 휘장무늬와 교차빗살무늬 또는 절치빗살무늬가 처리되어 있었다. 유약 토기와 동반된 원형의 재갈멈치, 수직 말안장과 두 쌍의 등자를 갖춘 금 동 마구 등은 그 시기가 5 세기에 이른다는 것을 증명하여 준다(그림 5-65 o, P). 또한 우산하 M41 호의 형제 결구와 장군총 배총과 유사하다. 고분 내에서 출토된 것은 칠성산 M96 호의 것과 유사한 유약 바른 토기와 마 구(그림 5-65v-x) 가 있는데 그것들은 비교할 만하다. 그 2 기 고분의 시 대와 같은 봉토석실묘 내에서 출토된 마구와 금속기도 상기한 것들과 갇 은 범위 내에 들어갈 수 있다(그림 5-65 t, u, y, z). 또한 묘실 내에 그린 벽화내용도 가정생활과 연화문 위주로 모두 그 연대가 5 세기가 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태왕릉과 장군총은 그 연대가 5 세기에 속함은 이미 알려 진 사실이다. 방단계단 석실묘의 시작(上限)연대는 언제인가? 이 문제는 集安 만보 정 M242 호를 예로 들어 살펴보자. M242 호는 동일 고분 기단상에 4 기
표 5 기 | 고구려 방단계단 석실묘
만보정 桓仁 칠성산 우산하 태왕릉 장군총
묘를 수축하였다. 그것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배열되었다. 북에서 시작하 여 첫번째 묘는 석광 결구이고 네번째는 파괴가 심하여 알 수 없으며 세 번째는 2 실을 가졌다. 정상부는 · 여러 매의 대석을 남북으로 놓아 천장을 봉하였다. 그리고 그 상부는 강자갈을 쌓아 놓았으며 묘도는 없다. 두번 째 묘에서는 천장석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잔류된 석벽 높이는 1. 45m 였 는데, 이는 최근에 발견된 모든 석광묘의 석광보다도 높다. 석벽은 지상 에서 직접 수축했으며 묘도도 있다. 따라서 두번째 묘는 석실 결구이다. 전체 고분의 결구와 수축순서에 의하면 석실은 그때에 비로소 출현한다. 고분 내에서 漢代에 유행하던 두창의 구름무늬의 S 형 재갈멈치가 출토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금동 안장태도 출토되었다• 그것은 당시에 마 구에 대단히 장식을 많이 했다는 것을 설명하여 주며 그 예가 고급의 말 안장이다. 楊i 5L 의 고증에 의하면 그러한 말안장은 晉代에 대단히 유행하 였다. 그러나 고분 내에서 등자는 출토되지 않았다. 이에 의하면 그 고 분은 대략 3 세기 말에서 4 세기 초에 해당되며 상기한 集安 우산의 계단 식 담의 Il 식 적석묘의 시기와 비슷하다. 죽, 방단계단 석실묘의 상한연 대는 곧 이 시기에 해당된다. 만보정 M242 호의 축조법은 상당히 특수하다. 계단 의부에 몇몇 보호 석이 있다. 더욱이 M242-1, 2 의 계단 내에는 지표로부터 위로 울라가면 서 여러 줄의 종횡 돌담을 쌓았다. 그리고 강자갈과 석괴를 종횡 돌담의 빈 공간에 채워서 붕괴 위험을 방지시켰다. 그 중 M242-1 호의 석광은 돌담 끝 부분의 돌을 깐 위에 있었다. 그러나 M242-2 호의 석실은 돌담 공간상에 수축하였다. 그러한 종횡 석담의 수축법은 내부에서는 封石 압 력을 분산시키고 의부에서는 충수를 증가하는 계단식 담의 작용이라는 異曲同工法을 사용하였다. 이상에서 고구려 적석묘의 몇 가지 유형과 그 연대를 살펴보았다. 종 합하여 표 5-12 에서 정리하여 본다. 표 5-12 에는 공백이 있다. 적석묘의 의부 결구인 무단, 방단과 방단계
표 5-12 고구려 적석묘 유형과 연대
단의 측면에서 보면 무단의 출현은 상당히 이르다. 단, 고구려 건국 이 후 이 3 종의 결구는 상당 기간 병행, 발전하였다. 하한연대는 무단과 방 단계단은 모두 5 세기까지 이르며, 방단에 관해서는 아직 예를 들 만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다만 그것은 방단계단의 시기를 초과하지는 못할 것이다. 무단, 방단, 방단계단 등 몇 종의 결구 구별의 주된 요소 는 시기의 선후 구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의부가 같은 방단, 방단계단 결구의 고분들은 내부에 각각 석광과 석실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석광, 석실 등은 의부 결구와 대응관계가 없다. 이로 인하여 그것들의 대표적 의의는 의부 결구의 차이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문제를 정확하게 해결하기 위하여 적석묘의 내의 결구를 다음과 갇이 분석한다. 적석묘의 의부 결구를 표 5-13 에서 보자. 표 5-13 의 각항은 무단석광묘, 방단석광묘와 방단석실묘의 封石 규모, 변장(길이)이 10m 를 초과하지 않는 것이고 부장품도 드물다. 다만 소수 의 토기와 철기가 있다. 방단계단 석광묘와 방단계단 석실묘는 차이가 있다. 積石邊長이 20m 정도이고 왕릉은 수십 미터 이상이다. 부장품의 종류는 토기, 철기뿐만 아니라 유약 토기와 귀중한 청동기, 금동기, 銀器 등이 있다. 그 중에는 中原 또는 南方에서 수입한 것도 있다. 그 의에 직물편, 칠기편 등과 아 름다운 벽화가 있다.
표 5-13 고구려 적석묘의 의부 결구 (단위 : m)
이에 의하면 의부 결구가 다른 고분 유형은 고분의 규모와 부장품 종 류, 수량 등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不同한 결구의 유행 기간은 기본적으로 같으며 그것들 사이의 차이는 다만 등급상의 구 별이다. 적석묘 내부 결구의 차이를 표 5-14 에서 보자. 표 5-14 에 의하면 종횡 배열의 원시가족장 현상은 석광 결구의 고분 내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석실 결구의 고분 중에는 드물다. 석광, 석실은 고분 내에 위치한다. 무단석광은 방단이 구비되지 않았 기 때문에 규모가 작다. 따라서 석광을 직접 지상에 수축하였다. 방단 석광묘와 방단계단 서광묘는 의부 결구의 복잡한 규모에 따라서 석광의 위치가 점차 높이 울라갔다. 석실 결구의 고분은 다르다. 방단석실묘의 석실은 지상에 수축하였다. 방단계단 석실묘는 일부분 대형 왕실귀족묘, 즉 태왕릉과 장군총 등 그 규모와 등급 관계에 의해서 석실을 고분 상부 에 수축하는 것 의에 기타는 지상(지표상) 또는 지표보다 약간 낮게 수 축하였다. 만약에 그 이후에 봉토석실묘의 석실을 모두 지상 또는 지표
보다 약간 낮게 수축하였다고 본다면 석실의 고분 내에서의 위치는 석광 과다르다. 고분의 방향, 석광 결구의 고분 절대다수에 문과 묘도가 없다. 아직까 지 석광 내에서 뼈가 발견된 예가 없다. 뼈가 거의 없기 때문에 묘 방향 울 알 수 없다. 표에 표시된 방향은 모두 석광의 긴 벽을 따라 결정하였 다. 전체적으로 보면 적석묘의 방향은 일치하지 않고 상당히 혼란되어 있다. 다만 기본적으로 서남향 위주이다. 그것은 이후에 남향 위주의 석 실묘와 구별된다. 표 5-12 에서 제시된 석광, 석실 출현의 선후관계는 석광과 석실 사이 의 구별을 설명한다. 그것은 시간 선후의 차이이다. 적석묘의 내의 결구를 명확히 확인하려면 파괴가 심한 고분은 어려움 에 봉착하게 되어서 원래의 결구를 추측할 수밖에 없다. 예로 표 5-15 에 제시 된 集安 만보정 M78 과 우산 M63 호를 보자.
표 5-14 적석묘 내부 결구
集安 만보정 M78 호는 주위의 기단부를 크고 정제된 석괴로 방단을 쌓 았다. 상부가 붕괴되어 원래 무계단인지 여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변 길이 17m, 석재가 거대하고 동시에 유색 토기와 2 부 금동제 마구, 마구의 문양과 그 공예술은 특색이 있다(그립 5-65g -n ). 그러한 유물은 보통 고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고분에서 출토된 혁대고리의 2 중 받침 등, 그림 5-65 에 제시된 각 고분의 유물조합에 따라 혁대의 이중고리가 마구에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그립 5-65 b, d, g, o, t, v, y). 우산 M68 호 에서만 방단을 볼 수 있는데 계단의 여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단, 이 고분은 만보정 M78 호보다 규모가 크고 또한 集安 칠성산 96 호 방단계단 석실묘에 출토된 것과 같은 청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
표 5-15 만보정 M78 호와 우산 M68 의 결구 비교 (단위 : m)
하여 만보정 78 호와 우산 M68 두 고분의 의부는 원래 방단계단 결구에 해당되며 그 연대도 출토된 유물에 의하면 5 세기에 이른다. 만보정 M78 호에는 묘도가 있었고 그 규모도 다른 석광 결구에 비하여 그 규모가 크 다. 그러면 이 고분은 석실 결구를 가졌는가. 당시에 석광결구가 여전히 존재하였기 때문에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석실 결구가 시작된 과도기라고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적석묘의 여러 유형의 구체적 발전의 검토는 적석묘 내의 결구가 나타나는 여러 가지 의의를 참조하여야 한다. 그것들의 상호관계 를 표 5-16 으로 제시한다. 비교의 편리를 위하여 봉토묘도 삽입한다. 적석묘의 몇 가지 유형, 내부 결구는 석광이라는 점으로 적석석광묘라 고 총칭할 수 있고, 석실이라는 것으로는 적석석실묘라고 총칭할 수 있 다. 고분 의부의 결구를 주로 대표하는 등급 고저, 내부 결구를 대표하 는 시기의 선후 등을 근거하여 적석석광묘가 적석석실묘로 발전하는 것 울 동일 등급 내로 살펴볼 수 있다. 죽, 방단석광묘가 방단석실묘로 발 전하고 방단계단 석광묘는 방단계단 석실묘로 발전한다. 이 결과에 따르 면 무단석광묘는 무엇으로 발전하였는가. 당연히 일종의 무단석실묘 유 형으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李殿福 구분의 〈봉토동실묘〉는 묘실을 지표에 축조하였다. 그리고 묘 실 상부에 간단한 말각쌓음이 출현된다. 그 위에는 거석으로 천장을 봉 하고 그 의부는 돌로 봉하였다. 어느 묘실은 또한 방단이 있다. 그 서술
표 5-16 적석묘 내의 결구 비교
내용에 근거하면 〈 무단석실묘 〉 로 볼 수 있다. 다만 제시한 예는 유단에 속한다. 이 유형의 고분은 규모가 작고 파손이 심해서 아직 정확히 발표 된 것이 없다. 게다가 조사할 때는 그러한 내용을 간과한다. 방단 석실 묘의 자료가 많지 않은 것 또한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이 유형 고분의 등급은 낮고 보존이 드물고 쉽게 변화되었다. 또한 후대의 많은 소형 봉 토석실묘로 대치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문제는 앞으로 더 검토되어야 한 다. 여기에 보충설명을 첨부하면 다음과 같다. 즉, 의부 결구가 무단 또는 방단계단의 적석 고분 내에 소량의 구덩이가 없는 결구 현상이 발견된 것이다. 예를 들면, 1979 년 集安 우산 고분군에서 발굴된 28 기의 의부 결구가 무단인 적석묘군 중에 18 기는 모두 석괴로 쌓아졌고 정사각형에 가깝다. 길이, 너비가 약 9-lOm 로 일치하지 않고 殘高도 약 o.6 - l. 15 m 로 일치하지 않는다 . 광(구덩이)을 발견하지 못했고 유물 또한 극히 드 물었다. 또한 의부 결구가 방단계단인 桓仁 M15 호는 동일 고분 기단상 에 2 실을 구축하였다. 고분기단 지세는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으며 북쪽 고분은 남쪽 고분을 의지하여 쌓았다. 남쪽 고분에는 광이 없고 북쪽에 는 광이 있다. 이러한 무광의 결구가 만약 원상태로 보존되었다면 당연 히 석광의 것보다 시기가 이른 것이다. 고구려 고분이 오랫동안 지속되 면서 파괴된 사실을 감안하면 그것이 후대에 파괴되었거나 기타 원인으 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문제는 장래의 연구에 기대 한다. 고구려의 적석묘 중에 일종의 석관묘가 있는데 그것들은 규모가 작고 축조도 간단하다. 桓仁 M12 호를 예로 보면 남북 길이 3.8 m , 너비 2m, 높이 o.5m 이다. 바닥에는 강자갈과 쇄석편을 깔았고 네 벽은 석괴를 2 충으로 쌓아 만들었다. 문은 없고 천장은 2 매의 大板石으로 덮었다(그림 5-6 9). 원보고자는 이 고분의 外頂部에는 封石이 없고 어떤 것은 원래 봉석이 있었다고 서술하였다. 만약 원래 봉석이 있었으면 그것은 봉석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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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묘, 죽 적석석관묘이다. 상기한 集安 만보정 M242-3 호는 석관 또는 석곽에 해당된다. 그것은 북쪽으로 M242-2 호 석실과 접해 있고 또한 하 나의 고분 기단상에 축조되었다• 이에 의하면 적석석관묘와 적석석실묘 의 유행기간은 상당히 길었고 그 이후의 봉토석관묘와 승계관계를 가지 고 있다. 다만 이러한 고분 수량은 많지 않다. 그래서 일종의 유형 속에 예입시킬 수 없다. 고구려의 적석석광묘는 고구려 건국 시기를 전후하여 5 세기까지 지속 되었고, 그 사이 3 세기 말 -4 세기 초에 또한 적석석실묘가 출현하였다. 이러한 발전 및 고구려 세력의 확장은 의래 영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구려는 건국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그 통치 구역을 확장했다. 4 세기 초에 고구려는 낙랑군을 점령하였다. 낙랑군은 수백 년 동안 중국의 통 치 중심이었으며 漢文化의 영향이 상당히 깊었다. 그 중에 의부를 봉토 하고 내부에 木構울 두고 浦室과 石室울 두는 고분 축조방법과 결구가 포함된다. 고구려가 중원 문화를 받아들일 때 고분의 내부 결구로서 묘 실의 축조방법과 의부에 봉토를 덮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동시에 고구려 는 서쪽으로 계속 지역을 확장시켜 5 세기 초에는 중원의 동복지구 통치 중심지인 요동을 점령하였다. 이 과정 중 대량의 漢族과 소수 민족이 고 구려에 유입되어 고구려 문화의 발전과 변화를 가속시켰다. 북한 안악군 에서 발견된 東晉永和 13 년 (357) 의 冬壽墓는 피장자의 명확한 신분과 연대를 알려 주는 하나의 예가 되었다. 集安 고구려 고분의 입장에서 보 면 석광은 석실로 발전하고 적석은 봉토로 발전하는 두 번의 과정을 거 쳤는데 그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간단히 서술하면 전자의 시작은 3 세기 말에서 4 세기 초에 이루어졌고 후자는 봉토석실 벽화묘의 연구에 의하면 대략 4 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었다. 그것들의 완성시기는 모두 5 세 기 때이다. 죽, 3 세기 말 -4 세기 초에 시작, 5 세기에 이르러서 일종의 과 도기적 고분인 적석석실묘가 출현된다. 그 수량은 많지 않다. 즉, 4 세기 중엽에 봉토석실묘가 출현하게 되고 또한 바로 봉토석실묘로 발전된다. 그것들의 발전 서열은 다음과 같다.
------ 적석석광묘 •
적석 석광은 고구려 민족 고유의 葬俗으로 木稽이 없다. 그것은 문헌 기록의 〈有都無稽〉의 제도와 관계가 있다. 의부에 봉토를 씌우고 墓穴울
지하에 파고 다시 木鄒또는 벽돌을 쌓는 것 그리고 木杭울 사용하는 것 은 中原과 南方의 葬俗이다. 고구려는 적석석실묘로부터 시작하여 그러 한 발전으로 나아갔다. 봉토석실묘의 출현과 유행은 이러한 발전의 완성 울 나타낸다. 그러한 발전 과정 중에서 고구려는 고유의 장속을 버리지 않았다. 그 예로 돌로써 묘실을 구축한 것은 당시에 중원과 남방에 유행 되었다. 그러나 소형 고분 축조에는 보편화되지 않았다. 고구려는 적석 석광으로부터 적석석실을 경유하여 봉토석실로 발전하였다. 의부 결구가 비록 변하였지만 내부는 여전히 돌로 구축하였다. 그것은 돌이 많은 주 변의 지리환경에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고유 장속을 지속시 켰기 때문이다. 3 개 석광 또는 석실의 병렬, 석실마다 묘도의 설치와 그 것들은 상통하지 않는다. 더욱 그것들은 하나의 적석 혹은 봉토하에 있 는 고분 형제 결구구조로서 중원과 기타 지역에서는 볼 수 없다. 고구려 가 적석석광으로부터 적석석실을 경유하여 봉토석실로 발전한 과정이 모 두 발견되는 것은 그것의 일맥상통을 엿보게 한다. 반대로 전후로 축조 된 묘실, 중간에 雨道(사잇길)가 상통되는 중원의 고분 형제는 고구려 적석석광, 적석석실묘 중 발견된 예가 없다. 그러나 대형 봉토석실묘가 출현하는 것은 중원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종합하면, 고구려 고분 유형의 발전은 고구려 민족문화가 중원문화와 상호융합과 발전을 이룬 것임을 나타내 준다. 그리고 이러한 융합과 발전은 역사상 민족관계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필연적 추세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의 정찬영은 그의 논문에서 중국 동복지역의 고구려 문화 연구를 바교적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7) 즉 고구려가 427 년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의 고구려 묘제에 관한 연구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용어 자체도 石墓룰 積石墓(돌각담무덤)와 封石墓로 나누었으며, 봉석묘는 무덤무지를 흙 대신에 돌로 덮었다는 뜻에서 나왔다고 해석하 였다. 또한 적석묘는 기단적석묘와 무기단적석묘로 나누고, 다시 기단은
장군총과 같은 계단 축조물을 지칭하며 무기단은 지상 축조가 없는 무덤 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평안북도 (자강도) 일대에서 적석총을 각담 또는 돌각담이라고 지칭하 기 때문에 적석총을 돌각담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 으며, 절석 기단의 유무를 돌각담무덤과 돌기단무덤을 나누는 기준으로 삼고있다. 정찬영은 고구려 무덤에 관계된 내용을 1-3 장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다. 제 1 장은 무덤군의 특칭으로, 무덤 중 가장 알맞은 크기를 가전 것은 각 시기의 특징적인 묘제가 대체로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고, 특수형이 적은 중간 정도 크기의 무덤이라고 규정짓고 있다. 또한 고구려 무덤군 은 대개 수십 기에서 200 기 정도에 이른다고 보고 있다. 그 예로 독로강 의 심귀리 (그림 5-70 a, b) 와 로남리 (그림 5-71), 연하리 무덤군, 자성강 유역의 송암리 무덤군, 富爾江({冬佳江) .유 역의 고력묘자촌 무덤군, 橘林 河 유역의 대고력묘자촌 무덤군 등을 제시하고 있으며 독로강 유역 및 자성강 유역의 고분들과 富爾江 유역의 무덤들도 그 예로 제시하고 있 다. 集安 이북의 무덤군으로는 조아리(다음 글 참조) 등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集安의 고분으로 만포군 문악리에서 남상리에 이르는 문악리 고 분을 비롯하여 별오리, 미타동, 분토, 고산지, 남상리 등과 集安縣 황백 인민공사 장천대대를 비롯하여 하양어두, 동강, 서강, 산성자산성의 계 곡, 마선구에 이르는 곳까지의 고구려 고분을 소개하고 있다. 제 2 장 「돌각담무덤의 짜임새와 변천」이라는 글에서는 돌무덤과 흙무덤 의 선후관계, 무덤방향의 변천 등을 제시하고 있다.
돌각담무덤과 돌기단무덤을 나누는 기준으로서 계단 축조상의 유무를 가지고 보아야 한다고 제시하였다. 돌기단무덤의 형식과 변천의 예로서 수혈식 돌기단무덤 (고력묘자촌 15 호, 21 호 무덤, 남파동 33 호, 100 호 무덤, 장군총)의 무덤칸을 말하고 있으며 그 형식과 변천과정을 다음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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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고구려 돌각담무덤의 연대와 그 연원」에서는 무덤이 강돌로 된 돌각담무덤과 절석기단을 사용한 돌기단무덤은 고분군 내에서 무리를 달 리하여 떼를 이루고 또한 산자갈의 돌각담무덤은 강돌의 돌각담 무덤과 섞여 있지 않고 다른 무리로 보았다. 돌각담 무덤의 출토 유물로서 토기와 금속제 유물이 있는데, 토기는 태토와 색깔에 따라서 세 종류로 분류되고 있다. 즉, 첫째로 모래 섞인 갈색 간그릇, 둘째로 진흙 태토에 고운 모래를 섞은 검은 간그릇, 셋째 로 태토에 활석을 많이 섞은 그릇 등이다. 그리고 상기한 토기들은 로남 리와 태성리 유적 철기시대충에서 나온 것과 같다고 보고 있다. 금속제 유물이 비교적 많이 나온 유적은 강돌 돌각담무덤인 법동리 하 구의 돌각담무덤으로 보고 있는데 철 제품이 기원전 3-2 세기 서북 조선 의 유적에서 출토되었으며, 로남리 유적의 쇠도끼는 현재 알려진 돌각담 무덤의 유물과 같은 시기, 또는 조금 이론 시기로 보고 있다. 돌기단 무 덤의 출토 유물은 칼, 창, 마구류, 관모장식 등과 일상생활에 사용된 질 그릇등이다. 돌기단에서 출토된 질그릇은, 첫째, 갈색 간그릇(예 : 로남리 고분 중 남파동 163 호 무덤 출토), 둘째, 흑색의 모래가 많이 섞인 그릇, 셋째, 부 분적으로 회색빛을 띠는 갈색 그릇(녹로를 사용하여 제작), 넷째, 녹로제 의 회색 그릇(예 :고력묘자촌 고분 출토) . 등이다.
금속 유물은 창, 칼, 손칼, 활촉, 말재갈 등이며 치레걸이는 팔찌, 귀 걸이, 가락지, 띠고리, 닭의 벗모양 장식, 반달장식, 철제 곤로 등이다. 이러한 돌기단무덤의 유물은 기단 없는 돌각담무덤의 것들과 공통점이 있으면서 후기적인 특칭이 있다고 보고 있다. 돌기단무덤의 연대를 다음과 같은 도표로 제시하고 있다.
강돌돌각담 무덤 |수혈식 돌기단 무덤 I-
또한 돌각담무덤의 연원에 대하여 정찬영은 그 특징을 여섯 가지로 요 약하고 있다. 첫째, 무덤 위치는 강안(岸) 또는 산기슭 능선이다. 둘째, 무덤의 의 형은 아랫부분은 직사각형 기단, 그 다음부터는 방대형으로 축조하였으 며 무덤의 의모는 계단형이다. 때로는 축조 상태가 나타나지 않는다. 셋 째, 무덤의 주곽은 수혈식 석곽이며, 바닥 위치는 지표보다 높다. 첫 기 단은 곽실 바닥이다. 넷째, 1 개의 곽실로 1 인용이며, 합장할 때에는 무 덤 범위 내에서 또 하나의 곽실을 마련하였다. 다섯째, 연속 합장할 때에 는 무덤을 일직선상으로 배열하였다. 여섯째, 부장품으로 소형 단지 두 세 개와 무기류를 시신 곁에 놓고 피장자가 장신구를 착용한 채로 묻었다. 원시 돌각담무덤이 존재하였다고 보는 곳은 8 곳이 있는데 그 위치는 다음과 같다. @ 자강도 만포군 동공리(舊 평안북도 강계군 리서면 동공리)
© 자강도 만포군 건하리 © 자강도 위원군 용연리 @ 평 안북도 향산군 향산읍 @ 강원도 춘천시 신북면 울문리 @ 강원도 춘천시 신북면 천전리 ®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 석화리 ©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 부근 상기한 @, ©, ©, @은 돌각담무덤들이 존재했었거나 또는 그러했 을 것으로 추측되는 장소에 불과하며 ®, ©은 동일 장소를 지적했을 가 능성이 많다. 결론적으로 고구려 돌각담무덤의 기본 분포지인 자강도 일대에 원시 돌각담 무덤이 있다고 지적된 곳은 강돌 돌각담무덤이 있 는 장소로 보고 있다. 고구려 초기 제철 기술의 발전에 관하여는 로남리 남파동 유적 등을 비롯한 몇 곳에서 출토된 철제품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고구려 철기 분석표에 의하면 심귀리 73 호 무덤의 것보다 늦은 풍청리 의 돌기단무덤 출토의 유무와 심귀리 150 호 무덤(돌칸흙무덤) 및 장성 리의 산자갈 무덤 출토의 유물을 비교해 보면 서로 공통성이 있다는 것 이다. 즉, 로남리 유적이나 토성리 유적 철제 유물의 화학 조성과 금속 학적 조직이 돌칸흙무덤을 주로 사용하던 고구려 중기 이후에 있어서도 거의 같은 상태라는 것이다 .8) 또한 고구려가 기원전 2 세기경 나라를 세웠다는 증거로 명도전 사용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나라 명도전 출토 유적지는 20 여 곳이 되며 1 개 유 적에서 몇천 매에서 몇십 매씩 출토되었다 한다.
표 5-17 고구려 철기 분석표
명도전 출토 장소 자강도 자성군 서해리, 자강도 전천군 중암리, 자강도 전천군 전천읍, 자강도 전천군 길상리, 자강도 시중군 로남리, 자강도 위원군 용연리, 자강도 용림군 용문리, 자강도 고풍군 고풍읍, 자강도 희천군 청상리,
자강도 희천군 부흥리, 평안북도 동창군 이천리, 평안북도 구장군 도관 리, 평안북도 영변군 세죽리, 평안북도 철산군 등곳, 평안북도 철산군 가도, 평안남도 영원군 온양리, 평안남도 덕천군 청송리, 평양시 락랑구 역 정백동 명도전이 출토된 유적이 청천강 유역과 독로강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 되어 있는 것은 두 강을 연결하는 선이 기원전 3-2 세기에 중요한 통상로 였음을 보여 준다. 그러한 당시의 높은 생산력 수준 덕택에 고구려인들 이 기원전 1 세기 후반기에는 국가를 세울 수 있었다고 추정된다. 고구려 돌칸 흙무덤의 연원에 대하여 주영헌은 고구려에 두 가지 형식 의 무덤이 존재하였는데 그것은 적석총과 돌칸흙무덤이라고 서술하고 전자는 후자보다 이르다고 전제한 후, 돌각담무덤으로 대표되는 것은 심 귀리 75 호, 78 호, 로남리 남파동 108 호, 112 호이며 돌기단무덤은 로남리 남파동 32 호, 33 호, 100 호, 163 호 등이 라고 하였다. 그리고 돌칸 흙무덤은 적석총이 변화,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고유한 무덤형식이라고 보며 그 발전과정을 다음과 같은 도표로 제시하 고 있다 (그림 5-72 a, b, c) .
수혈식 곽실이 있는「 1 수혈식 곽실이 「 1 횡혈—식 T곽실 이 있는屯골포
돌칸흙무덤의 출현 시기는 2-3 세기로 추정되고 있으며 최근 集安縣 만 보정에서 3-4 세기로 추정되는 고구려 벽화무덤이 발굴되었다고 하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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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 「集安洞 溝 三基壁 畵墓 」( 《 考古 》 4 尹t.fl, 1983) 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돌칸흙무덤을 축조한 초기에 이미 의칸 무덤이 기본이었고 일부 지배계층은 그 안에 벽화를 그렸으며 그 대표적 무덤이 만보정(만보정 묘 구 1386 호) 이 라고 제 시 하고 있다. 돌칸흙무덤의 짜임새와 벽화내용의 변천과정 역시 고구려의 고유한 변 화, 발전 과정을 가졌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벽화의 발생과 발전과정이 의부의 영향이라는 것을 부인하면서 이론 시기의 안악 3 호분이 東漢 시 기 (25-250) 의 華~t에 있는 망도한묘 (2 세기), 山東성의 기남한화상 석묘 (2 세기), 그리고 漢 , 魏 시기의 요양의 석곽묘 등의 영향을 받아서 생겨났 다는 주장을 일축하고 있다. 즉, 안악 3 호분은 망도한묘와는· 그 구성 자 체부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주영헌은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고구려의 고분벽화가 80 여 기 정도 알 려졌으며, 벽화무덤을 비롯한 돌칸흙무덤은 고구려 자체의 전통적인 풍 습과 문화의 토대 위에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수긍이 가지 않는데, 그 이유는 고구려 벽화무덤의 수량은 중국 동북지역에 정확히 20 기 그리고 최근까지 북한에 43 기로 알려졌는데 그 사이에 17 기 정도가 더 발견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없으며 또한 고구려 문화의 독창성만 주장하는 내용도 그 설득력이 약하다. 고구려 벽화무덤의 연대에 대하여는 리준컬이 제시한 글 속에 어느 정 도 잘 나타나 있다. 물론 논문의 내용은 벽화 중 해와 달의 그립에 관한 것이지만 고분벽화의 시기와 내용 등을 비교적 자세히 제시하고 있다 .9) 북한 학자들이 고구려 무덤의 내용들을 세부적으로 나누어 분류하고 있 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상기한 해와 별 그림 무덤은 그 중 한 예이 다. 벽화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논문들이 있다.
최택선, 「고구려 벽화무덤의 주인공에 대하여」, 《 력사과학 》 1-4 기, 1987, pp. 211-218. 손영종, 「덕흥리 벽화무덤의 주인공의 국적문제에 대하여」, 《 력사과 학》 1-4 기, 1987, pp. 219-224, 전자의 글 속에서는 遼東城 무덤의 주인공에 대하여 그 무덤이 왕릉이 아니고 태대형, 대형급의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평안남도 순천시에 있는 이 遼東城 무덤에 遼陽에 있는 遼東城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은 그 무덤 주인공이 遼東城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것 은 유주자사로서 이름을 날린 鎭의 무덤을 유주 지역에 축조하지 않고, 남포시 장서구역 덕흥리에 축조한 것과 같은 취지라고 하였다. 평안남도 평성시 경신리 1 호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견 해가 있는데, 하나는 동천왕 무덤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수왕 무 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로는 그 해 결이 어려웠으나 최태선은 앞의 글에서 동천왕의 무덤으로 보고 있는데, 그 이유는 集安 일대의 장군무덤, 태왕무덤 등과 돌로 건축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강서 세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강서큰무덤 내의 황룡그림을 보아 서 왕의 무덤이 틀림없고, 7 세기에 죽은 왕의 무덤이라고 보았다. 더욱 이 강서큰무덤은 석조술과 회화술이 최고 수준임을 나타낸다. 비록 강서 세 무덤 중 제일 작은 무덤에는 벽화가 없지만 무덤칸의 크 기와 축조술은 큰 무덤이나 중간 무덤의 크기나 수법과 큰 차이가 없으 며, 세 무덤이 삼각형으로 놓인 점은 그것들이 상호 천연관계를 가전 묘 라는 것이다. 큰 무덤이 제일 앞, 중간 무덤과 작은 무덤이 그 뒤에 놓 여 있다. 세 무덤의 선후 관계는 벽화 기법으로 보아 중무덤야 영양왕의 막내동생인 대양의 것이며, 작은 무덤은 영양왕의 첫째 아우인 영류왕의 것으로보고 있다.
通溝 사신과 集安 다섯무덤의 주인공에 대하여서는 通溝 사신과 集安 다섯무덤의 4 호, 5 호는 왕 또는 왕 등급으로 보며 그것들은 6 세기 말에 서 7 세기 초의 고분으로 보고 있다. 먼저 集安 다섯무덤 중 4 호와 5 호 무덤만이 발굴되고, 나머지 1 • 2 • 3 호는 미발굴되었다. 다만 나머지 3 기도 4 • 5 호와 나란히 동서 한 줄로 놓인 점으로 보아 벽화무덤으로 추측된다. 集安 다섯무덤 중 2 호, 3 호, 4 호, 5 호와 通溝 사신무덤은 왕릉급으로 보고 있다. 通溝 사신무덤과 다섯무덤 중 4 • 5 호 무덤을 비교하여 전자가 후자의 4 • 5 호 무덤보다 이르다는 것이다. 集安 다섯무덤 중 2 • 3 호는 通溝 사 신무덤보다 더 남쪽에 4 • 5 호 무덤들과 나란히 있는 것으로 보아 동구 사신의 것보다 늦다고 보고 있다. 集安 다섯무덤 중 1 호가 다른 것들에 비하여 특별히 작은 것은 왕자무 덤이고, 그 일대에서 왕릉 또는 왕릉급 무덤은 통구 사신무덤, 다섯 무 덤 중 2 • 3 • 4 • 5 호이며, 그 무덤들의 축조도 그런 차례로 되어 있다는 결론이다. 상기한 논문 중 후자 (2 번)에서 살펴본 내용은 덕흥리 벽화고분은 5 세 기 초에 축조된 고분이고, 그 피장자(주인공)는 고구려 귀족인 〈鎭〉이라 고 주장하고 있으며, 일부 학자들은 덕흥리 벽화고분의 주인공을 망명객 으로 보고 있다. 덕흥리 고분 묵서에 나타난 유주는 다름 아닌 고구려 유주이며, 유주 자사 鎭은 고구려 신도 고울 중감리에서 태어나 젊어서부터 고구려 벼슬 울 하다가 40 대의 나이에 유주자사가 된 고구려 귀족관료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덕흥리 벽화 주인공이 중국의 망명객이며 당시 강서 일 대가 망명집단의 반독립적인 거주지역이었다고 보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견해라고 보고 있다. 그 의에 다음과 같은 논문이 있다.
천석근, 「고구려 옷에 반영된 계급신분 관계의 고찰」, 《 력사과학 》 3 기, 1981, pp. 34-40. 장국종, 「고구려에서의 도로 발전」, 《 력사과학 》 2 기, 1985, pp. 11-15. 이 두 편의 내용은 다음 기회에 자세히 살펴보겠다. 「고구려 무덤 벽화의 특성과 그 문화사적 의의」라는 논문 10) 을 살펴보 면, 고구려 무덤은 4 세기부터 7 세기 중엽까지 400 여 년 동안 만들어졌으 며, 그것들은 지배계층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하고 있다. 그 내용은 전 두장면, 생산활동, 씨름, 손치기(수박), 사냥, 음악·무용·교예 등의 예술, 궁전 • 성곽 등의 건축, 연꽃 • 인동 등의 장식, 연못과 소나무 • 산 악 등의 자연환경, 의식주 등의 생활풍습, 여러 가지 신앙, 군사, 정치, 사상, 경제, 문화, 풍습 등 거의 모든 부분을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다. 고구려 벽화무덤은 그 주제 내용에 의해서 인물풍속, 인물풍속 및 사 신, 사신 등 세 가지 그림으로 나누고 있다. 전자는 4-5 세기, 중간은 5- 6 세기, 후자는 6-7 세기경으로 나누고 있다. 벽화에서 인물풍속화는 매우 큰 비중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인물풍속화에는 건축에 관한 그림이 많은데, 무덤칸의 네 모서리에 두공 이 있는 기둥을 그리고, 그 위에 도리를 그렸다. 그 두공에는 1 포, 2 포, 3 포 등아 있다. 벽 위에 그려진 건물로서 팔청리 무덤에는 귀족들의 저 택과 다락집, 무용총에는 푸줏간, 마선구 1 호에는 다락집이 있다. 그리고 벽화에는 성곽도 있는데, 약수리 벽화무덤, 遼東城무덤, 용강 큰 무덤 등에 나타나 있다. 특히 약수리 성곽도에는 네모형의 성벽, 문 에는 문루, 네 모서리에 각루가 있으며, 성안에는 건물들이 있다. 遼東 城무덤의 성곽화에는 성밖에 탑이 있으며, 성 가운데에 한자로 〈遼東城〉 이라고 써 있다. 문양으로는 구름무늬 • 연꽃무늬 • 괴면무늬·넝쿨무늬 ·보륜무늬 • 기하무 늬 등이 있다. 또한 인물풍속화에는 행렬도도 있으며, 음악·무용에 관
한 그림도 있다. 악기들의 연주장면은 독주 • 중주 • 합주 등이 있으며, 관악기와 현악기가 사용되었다. 벽화의 무용장면은 많은 것이 악기연주와 결합되었다. 거기에는 독 무 • 쌍무와 3 인우 • 4 인무 • 5 인무 • 7 인무 등의 군무가 있으며, 이러한 군 무에는 남녀 혼성무용도 있다. 인물풍속화에는 1 인 또는 다수인들의 옷차림 그림이 있다. 남자 복식 은 동수묘, 약수리 무덤, 대안리 1 호 무덤 등에서 보이고 있다.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저고리에는 띠를 둘렀고, 저고리의 깃과 소매의 끝동, 저 고리 밑부분에는 그 의의 부분과 색이 다른 굵은 폭의 천을 달았다. 저 고리에는 점무늬가 찍힌 것이 많으며, 저고리에 띠를 두른 것이 기본이 지만 두루마기(도포)를 입은 것도 있다. 감두에는 왕만이 쓰는 〈 백라관 〉 울 비롯해서 혹관, 뒤운두가 ; 높은 〈 책 〉 이 있으며, 수건을 동여멘 것과 같은 것도 있고 새날개 깃울 몇 개 꽂은 〈 절풍 〉 도 있다. 여지옷은 치마, 저고리를 입고 저고리에는 띠를 두른 것이 많은데 이 것이 옷차림의 기본이다. 치마에는 주름치마가 있으며, 수산리 벽화 여 주인공의 치마는 색동치마이다. 치마 • 저고리와 함께 여자도 바지 • 저고 리를 입고, 저고리에 띠를 둘렀다. 여자의 머리 모양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올린 머리, 다른 하나는 내린 머리이다. 올린 머리도 위로 맣아 울려서 둥글게 틀고 여러 장식을 한 것으로 그 대표적인 것이 약수리 무덤의 벽화이다. 내린 머리 는 머리를 짧게 맣아 아래로 내린 것이다. 그리고 여자신은 모두 버선코 모양의 코신이다. 벽화에는 이러한 옷차 림 의에 양산과 부채가 있다 . 또한 인물풍속화에 등장하는 것으로 씨름과 사냥도가 있다. 기병들은 긴 창으로 무장하고 보병들은 기병을 말에서 끌어내리는 창을 가진 것도 있다. 인물풍속화의 특성은 사냥그립인데 그 대표적인 약수리 수렵화에 는 20 여 명 정도의 말을 탄 사냥군과 몰이꾼이 등장하며, 짐승으로는
범 • 곰 • 여우 • 사슴 등이 있다. 인물풍속화 중의 상서로운 것들 중에는 봉황, 기린, 다리와 날개 달린 물고기, 날개 돋친 말,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새처럼 생긴 괴물 , 머리는 소이고 몸은 새와 같이 생긴 괴물이 있다. 그 의 신선, 깃발을 든 신선, 책 읽는 신선 등과 꽃 사이에 배광을 한 얼굴을 내민 요정 등이 있다. 사신도는 지상세계 동물이 아니고, 하늘세계에 있는 상상의 동물이다. 그것들 중 청룡과 백호의 밭에는 발가락을 3 개 그렸으며, 가슴에는 불꽃 처럼 생긴 날띠 같은 것을 나타내고, 용과 범에는 것까지 그렸다. 또한 용의 목이나 백호의 목에는 독특한 띠를 둘렀다. 쌍영총의 공양도와 장 천 1 호 무덤의 불상 참배도에서는 주인공의 신앙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 하고있다. 사신과 관련하여 여러 신선들의 그림도 있다. 강서큰무덤, 集安의 다 섯무덤 중 4 • 5 호 무덤의 고임 부분에 그려진 그림들은 신선의 세계를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신선들은 새의 것과 같은 것이 달린 날개옷을 입 었다• 화풍상의 특징이 표현된 벽화로서는 후기 사신도들이 대표적이다. 청 룡 • 백호의 힘찬 모습, 현무 • 주작의 부드러운 모습 등 힘 있고 부드러 운 여러 가지 장면들은 당시 고구려 회화의 독특한 화풍과 그 발전 모습 울 보여 주고 있다. 미인도와 비천도 등 고구려 여인들의 풍만한 얼굴, 균형 잡힌 몸매, 단정한 옷차림과 부드러운 율동을 섬세한 선들과 여러 가지 색으로 표현 하였다. 당시의 화가들은 묘사 대상의 특정만을 간략하게 나타내는 간필묘적인 기법과 대상의 모든 세부를 치밀하게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세화적인 기 법, 선으로 먼저 그리고 채색을 하는 구록법과 채색만으로 대상을 나타 내는 몰골법적인 수법, 묘사 대상을 겹치게 배치하고 크기를 달리하여 원근관계를 나타내는 원근법과 부감식 또는 산점두시의 방법을 원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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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리한 원근법, 가늘고 부드러운 선으로 그린 유사묘법과 가늘고 힘 있 는 선으로 처리한 칠선묘법, 여러 가지 억양의 변화를 주는 자유스러운 선의 사용과 선의 강약 및 색의 농담으로 대상의 입체감을 나타내는 운 영법 등 다양한 기법을 알고 있었다. 태성리 고분군 발굴 보고서에 의하면 5 기의 석실묘(제 1 • 2 • 17 • 18 • 19 호)를 발굴하였는데 그것들은 모두 고구려 고분들로 파악되었다 .11) 석실묘들은 고분군 지역 내의 서쪽 부분에 치우쳐 있었다. 제 1 호, 제 2 호 무덤이 한우물 부락의 서쪽 후면 20m 의 거리를 두고 동서로 나란히 있었고 제 17 호, 제 18 호, 제 19 호 묘는 그 북쪽 4oom 떨어전 지점에 집결 되어 있었다. 제 1 호와 제 2 호 묘는 복잡한 구조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벽화는 안악 제 3 호분과 거의 같은 배치를 가졌다. 제 1 호(그림 5-73, 5-74) 와 제 2 호 묘
그림 5-74
의 축조연대는 약 4 세기 후반기로 보고, 제 17, 18, 19 호 묘는 그것보다 더 이론 시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무덤 구축에는 석재를 사용하였고, 현실과 연도가 구별되며, 매장된 목관에 철제 관정이 사용된 것은 5 기의 공통된 점이다. 상원 일대의 고구려 무덤 조사발굴 보고는 대단히 간단하다. 1 장 내용 소개, 2 장 도면으로 나타내어 유적에 대한 소개만 할 뿐 결론에 대한 언 급조차 생략되어 있다. 12) 상원군 상원읍 소재지와 황해북도 연산과 수안을 잇는 도로로부터 약 212m 지점의 〈소구절〉이라는 깊숙한 골짜기에서 수십 기의 고구려 무덤 을 조사하였는데 그 중 3 기의 무덤 (1 , 2 • 3 호)를 발굴하였다. 제 1 호는 의칸 무덤으로 뒤벽만 약간 남아 있었다. 무덤의 방향은 남향 이며, 무덤칸 안쪽에 치우쳤다. 안길의 길이는 130cm 이다. 제 2 호는 제 1 호에서 서남 방향으로 5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무덤 안길은 서쪽으로 치우친 반지하의 의칸 무덤이며, 무덤 안길의 길이는 120cm, 너비는 100cm, 높이는 40cm( 잔존 부분)이다. 제 3 호는 1 호와 2 호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사각형에 가까운 반지하의 의칸 무덤으로 무덤 안길은 중간에 위치하며, 그 크기는 1socmx 80cmx45cm 이다. 제 1 호에서는 무덤칸의 북쪽에서 사람뼈와 둥근 고리의 순금제 귀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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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75 상원군 일대 고구려 무덤 출토 금속품 a. 제 3 호 무덤 평면도 b. 순금제 귀걸이 c. 쇠보습 d. 쇠창 e. 관못 f. 금동 귀걸이
한 쌍(그립 5-75b) 이 출토되었으며, 제 2 호에서는 철제 보습(그림 5-7 5c) 이 출토되었는데, 철제 보습의 길이는 35cm, 중심 너바는 30cm 이다. 그리고 철제 창은 단조된 것으로 길이는 23.2cm, 자루 지름은 4 . 1cm 이 다. 토기로는 완전한 것이 1 점 출토되었는데, 혹회색으로 크기는 구연부 지름 11cm, 복부 지름 16.5cm, 저부 지름 9cm 이다. 관못은 6 개 출토되 었는데 그 크기는 12cm, 머리 지름 2.4 c m, 가로자름면은 구형이다(그림 5-75 e) . 제 3 호에서는 금동제 귀걷이 (그림 5-75 f)와 관못이 출토되었는데, 귀걸 이는 청동판을 타원형으로 둥글게 말고 그 밀에 고리를 달아 매고 그 아 래에는 작은 步描롤 달았다. 그것의 크기는 지름 1.5 cm, 길이 2cm 이다 (그림 5-75 f). 평 양 고산동의 고구려 우물 우물벽의 최상부는 지표로부터 150cm 내려가 나타났다. 우물벽은 대 성산 일대에서 운반된 사암으로 축조되었다. 우물벽은 3 단으로 나누어 쌓았으며 각 단마다 쌓는 방법이 달랐다. 제일 하단에서는 기초 대신에 우물 바닥의 암반 위에 통나무(지름 13-16cm) 로 50cm 높이의 귀틀을 네 모 나게 짜서 놓은 다음에 170cm 높이의 사각의 벽을 축조하였다. 사각 벽 위로부터 265cm 구간까지, 즉 두번째 단에서는 8 각으로 축조하고 그 다음부터 원통형으로 쌓아 마무리하였다. 즉 우물은 하단 4 각, 2 단 8 각, 상단 원통형 형태로 축조되었으며, 그 지름도 아래로부터 115cm, 120 cm, 105cm 등이며 건축학적 입장에서 보면 우물의 견고성을 보강하기 위한 것이다(그림 5-76 a). 우물 안에서는 단지류, 마구류와 벽돌, 숫돌 등이 출토되었다. 약 40 여 점의 유물 중 30 여 점이 질그릇이다. 질그릇은 단지, 버치, 물동이, 몸이 긴 단지, 시루, 뚝배기, 합, 병, 독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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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는 키가 작고 배가 부른 모양이며 목이 좁고 구연부는 의반되었 다. 색은 흑색, 회색, 적색 등이다. 단지 중에는 어깨에 선무늬 두른 것 이 있다. 합은 구연부에서 2cm 아래에 의줄 선을 돌렸다. 색은 흑색이다. 병은 구연부가 나팔처럼 의반되었고 흑색이다(그림 5-76b). 그 의 마구류로서 말재갈과 말관자 등이 출토되었는데 전자는 청동제 의 두쪽 재갈이다. 그리고 기와벽돌과 숫돌 2 점이 출토되었다. 13) 보산리 및 우산리 벽화무덤의 연대에 대해서 안병찬은 이 두 무덤은 평양 일대 고구려 고분 중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보고 있다. 14) 남포시 강서구역에 있는 보산리 고분은 견칸이 없는 의칸 인물풍속 및 사신도 무덤이다. 무덤칸은 사각형에 가까운 정사각형이며 천장은 고임 식이다. 무덤 안길은 중십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쳤다. 벽화는 네 모사 리에 붉은색으로 기둥을 그리고, 기둥과 기둥에 잇대어 세 줄로 용형 띠 무늬를 무덤칸 바닥과 평행되게 가로로 그린 다음, 그 위에 벽화의 주제
표 5-18 용띠무늬 벽화무덤
룰 그렸다. 인물풍속도 및 사신도 무덤은 4 세기 초부터 6 세기 전반 사이 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상기한 보산리 무덤 발견의 용띠무늬는 다음과 같이 다른 무덤에서도 나와있다. 보산리 무덤은 용띠무덤 중 고산동 1 호와 공통성이 있다고 본다. 따라 서 보산리 무덤의 축조 시기도 5 세기 말로 보고 있다. 남포시 우산리에도 3 기 고구려 벽화무덤이 있다(그림 5-77 a, b). 이 고 분들도 인물, 풍속 및 사신도 무덤형에 속하는 의칸무덤들아다. 우산리 1 • 2 호는 · 무덤칸이 사각형에 가까운 직사각형이며 무덤 안길은 동쪽에 약간 치우쳤다. 그리고 3 호는 그것이 긴 직사각형이며 무덤 안길이 동쪽 으로 치우쳤다. 우산리 3 호 무덤과 같은 유형은 만보정 1368 호이다. 시기는 대개 3 세 기 중영 -4 세기 중엽으로 보고 있다. 우산리 벽화무덤 중 2 • 3 호의 벽화 (그립 5-77 a, b) 와 보산리 의 풍속도와 구름무늬 (그림 5-77 c, d) 는 상당히 이론 시기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우산리 벽화무덤의 구조 및 보산리 무 덤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도표로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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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우산리 무덤의 구조 1. 우산리 1 호 무덤 2. 우산리 3 호 무덤 3. 우산리 3 호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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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5-19 우산리 고분과 보산리 고분 구조
(2) 지경동 고구려 고분 1976 년 평성시의 2 기 고분을 발굴하였다. 15) 그 유적의 위치는 평안남 도 평성시 배산점역에서 평성 방향으로 약 2km 지점이다. 2 기의 무덤을 1 호, 2 호로 나누어 발굴하였다. 1 호 무덤은 무덤 안길과 안칸을 전부 막돌로 쌓고 그 위에 회를 발랐으며 무덤 방향은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남향이다(표 5-30). 지경동 2 호 무덤은 1 호 무덤에서 동쪽으로 약 20m 지점에 있다(표 3 -21) . 1 호와 2 호 무덤(그림 5-78) 은 대동강 유역에 널리 분포된 籠이 있는 돌 칸 흙무덤의 일반적인 특칭을 갖추고 있다. 지경동 1 호와 2 호 무덤에서 는 안길과 안길 좌우 벽감에서 유물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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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79 지경동 출토 마구류 a. 안교 금속판과 조각 b. 꽃모양 금동 치레걸이 c. 금동띠고리 d. 운주 e. 행엽 f. 금동 이음고리 g. 재갈 h. 등자 i. 둥근 금동장식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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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5-20 l 호 무덤의 크기 (단위 :cm)
마구류(그립 5-79) 는 전안교와 후안교의 테두리, 꽃모양 금동 치 레 걸 이, 금동 띠고라 운주, 행영, 금동 이음고리, 금동 장식품, 말재갈, 말 등자와 둥근 금동 장식판 등이다. 질그릇(그립 5-80) 은 단지, 솔 시루 등이다. 단지는 1 호와 2 호 무덤의 동쪽 벽감에서 각각 3 점씩 출토되었다. 단지들은 크기와 생김새가 모두 비슷하다. 짧은 목에 몸체가 둥글고 구연부는 나팔모양이다. 그 크기는 구연부 지름 14cm, 밀굽 지름 8cm, 높이 18cm, 두께 8cm 이 다. 단지는 돌림판으로 제작하였고 바탕흙은 부드럽고 검은색이다. 그러한 단지는 대성산성과 안악궁터에서도 출토되었다 . 장식품(몸치레 거리)은 금귀걸이, 금동 대몽구슬 등이다. 기타 유물로는 철제 관못(그림 5-81 a), 철촉(그립 5-81 b), 쇠문손잡이 (그림 5-81 C) 와 쇠칼 등이 있다. 지경동 1 호, 2 호 무덤에서 출토된 마구류는 대단히 중요한 자료이다.
7 노호초 고분 老虎稱는 吉林省 集安縣에서 서남 5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은 3 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고 압록강이 노호초의 동 • 남 • 서쪽을 흘러가 고 있다. 강을 건너면 복한의 위원군이다. 노호초의 북면은 黑駐山이다. 산 밑에는 하나의 남북향의 좁고 길며 완만한 언덕이 있는데 고분은 완 만한 언덕의 중앙에 분포되었다. 1981 년 10 월 集安輯 문물보관소는 노호초 수력발전소의 건립 전에 이 곳의 고분에 대한 발굴을 실시하였다. 16) 1) 고분의 유형과 결구 노호초에는 모두 17 기의 고분군이 있다. 이 중에서 심하게 파괴된 5 기 의에 이번에 12 기를 발굴하였는데 모두 봉토를 가지고 있었다. 결구에 따라서 2 종 유형으로 구분되는데 1 종은 석실묘이고 다른 1 종은 동실묘이 다. 두 종류의 고분 모두 단실 • 쌍실로 나뉜다. 쌍실묘의 동실은 대부분 서실보다 크다. 두 종류 묘의 평면은 또한 묘도가 중앙에 있는 것과 묘 도가 한쪽에 치우친 것, 2 종으로 다른 형상을 가졌다. 유사한 이러한 두 종류 유형의 고분은 集安縣 경내에 수량이 상당히 많다. ® 봉토석실묘 2 기 묘실 4 벽에 모두 불규칙한 境石울 쌓았고 높이는 1- 1.5 m 이다. 상부에 는 간단한 말각을 쌓았다(그립 5-82). 頂部에는 1-2 괴의 판돌로 덮었다. 묘도(연도) 입구에는 대부분 迎門石울 놓았으며 정부에도 역시 큰 판석 으로 복개하였다. 봉토는 丘狀이다. Ml, M4 를 예로 들겠다. Ml 은 석실쌍실묘이다. 주위 길이 35.5m, 잔고 lm 이고, 방향은 南偏
동실E..Cf...의:` . t . · .Ea. 는 석니도'cLrr( 편uwo, 서실의 a 는\ 이빨장.... I.- • 식 :.. .... .. , .忍O i.:.. .5. .? .....g!:5·[2- f.〔〔.f. .b .~ . 와. ?. \..d I 는 석./촉묘 1
東 30° 이다. 양 묘실은 동서로 배열되었다. 동실 墓頂은 이미 함몰되었 으며, 뚜껑돌은 보이지 않는다 . 양실 묘정에는 2 枚의 상당히 커다란 長 臺 石울 덮었다. 양실 네 벽과 묘도는 모두 불규칙한 괴석으로 쌓았다. 평면은 중앙에 묘도가 있는 것이며 4 벽은 약간 내경되었고, 상부에는 板 狀石으로 2 층의 말각을 쌓았다. 묘 바닥에는 지름 5- lO cm 되는 작은 강 자갈을 깔았는데 이 바닥은 현 지표보다 10cm 낮다. 양실의 크기는 같 아서 길이 2.5 m , 너비 1.9m , 높이 1.2 5m 이고 문의 벽 두께는 o.85m 이 다. 동실의 묘도는 길이 2.7m, 너비 0.75m, 높이 0.35-lm 이다. 서실 묘 도는 동실 묘도보다 약간 좁아서 길이 2.6m, 너비 0.7m, 높이 0.2-0. 85m 이다. 동실 문은 더의 대석으로 봉하였다 .. 서 실 문 밖에서 묘도 입 구까지 2.25m 지점에 높이 o.5 m 되는 영문석을 세웠다(그림 5-'8 2 ).
M4 는 봉토석실 단실묘이다(그립 5-83b, 5-8 4 ). 봉분은 丘狀이고 봉분 주위의 길이는 3 1. 6m 이며 잔고는 1.6 m, 방향은 南偏束 20° 이다. 묘실 형제와 축조 방법은 Ml 과 동일하다. 상부에 일충의 말각을 쌓았고, 길 이 1.2 3m, 너비 0.8 5 m, 두께 0.17m 되는 1 매의 대석으로 封頂하였다. 묘실은 길이 2.6 m , 너비 1.6 5m, 높이 1.3 m 이며 문 입구에는 불규칙한 장대석을 쌓아 봉쇄하였다. 묘실 바닥은 현 지표보다 10m 정도 낮으며 바닥에 지름 10-15cm 의 福狀礎石을 쌓았다. 소량의 숯아 발견되 었다. 묘실 서벽은 묘도 서벽까지 뻗어 있어 묘도가 한쪽에 치우친 것을 보여 주며 묘도의 길이는 1.9 m, 너비 0.9m, 높이 1. 9m 이다. 頂部에는 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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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m, 너비 0.8m, 두께 o . 17m 의 직사각형 대석을 덮고 있다. 묘도의 입구에는 1 매의 바닥은 넓고 위로는 뾰족한 삼각형 영문석을 세웠다(그 림 5-8 4 ). ® 동실묘 10 기 이 중에 쌍실묘 3 기, 평면 결구는 모두 묘도가 한쪽에 치우친 것이다. 단실묘 7 기, 평면 결구는 묘도가 중앙에 있는 것과 한쪽에 치우친 것 2 종으로 나뉜다. M8 은 묘도가 중앙에 있는 것 이고, M2 (그림 5-83 c) , M3, M25, M6, M9, Ml1 은 대체적으로 갇다. 그러나 묘실 상부에 말 각이 없고 다만 1 에서 몇 매의 길고 큰 석괴로 頂部를 덮고 있다. 묘실, 묘도의 바닥은 낮으며 높은 것은 - 70-90cm 로 일정 하지 않다. 다수가 영 문석을 가지고 있다. 쌍실묘는 M10, M7 을 예로 들겠다.
MlO 은 봉토 주위 길이 21. 6 m, 잔고 0.9 5 m, 방향은 南偏西 13 ° 이다. 동서 양실 네 벽을 모두 불규칙한 괴석으로 쌓았고 그 듬의 사이는 쇄석 으로 메웠다. 벽면은 상당히 평정하다. 동실의 서벽과 서실의 서벽은 동 일한 석벽이다. 이것을 묘까지 연장시켜 양실과 묘도는 2 개가 대칭되게 한쪽에 치우치고 있다. 간격벽 너비는 o.5m, 전체 길이 2 . 85m 이다. 동 실은 길이 1.7 5m, 너비 0 . 9m 이고 양실 모두 높이 0 . 95m 이다. 묘실 頂部 는 모두 편편하게 蓋頂되었고 묘 바닥에는 작은 강자갈을 여러 충 깔았 는데 두께는 20cm 이다. 묘문에는 석괴를 여러 충 쌓아 봉쇄하였다. 영 문석은 보이지 않는다(그립 5-85). M7 은 봉분 주위 길이가 30m, 잔고 l.lOm , 방향은 남편서 40° 이다. 양실묘의 축법은 MlO 과 동일하다. 간격벽 두께는 0.5 ni이다. 다만 동실 묘도는 동쪽에 있고, 서실 묘도는 서쪽에 있다. 평면 결구는 한쪽에 치 우친 2 개 묘도가 대칭되게 배열되어 있다. 동실은 길이 2.2m, 너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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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m 이고, 서실은 길이 2.2m, 너비 lm 이며, 양실 모두 높이는 0.9m 이다. 양 묘실 모두 길이 1.25 m, 너바 0.8m, 높이 o.6m 이다. 묘실 상부 개정 석은 이미 이동되었다(그림 5-86). 단실묘는 M5 를 예로 들겠다. M5( 그림 5-87) 는 봉분 주위 길이 약 18m, 잔고 1.4 m, 방향은 남편서 5° 이다. 묘의 평면은 묘도가 한쪽에 치우친 모습이다. 묘실 서벽과 상호 연결된 묘도 서벽은 앞으로 연장되었다. 묘실 종단면은 아래가 넓고 위 가 좁은 사다리형이다. 묘실은 길이 2.lm, 너바 1.3 5m, 높이 lm 이고 묘도는 길이 1.7 m, 너비 0,75m, 높이 o .4 m 이다. 묘문은 괴석으로 봉쇄 하였고 발굴했을 때 개정석은 이미 이동되었다. M5 가 기타 단실 봉토동 실묘와 다른 점은 묘실 바닥은 작은 강자갈을 깔고 그 동쪽 묘벽에 기대 어 더의 장대석을 깐 것이다(그림 5-8 3d). 그것들은 남북으로 배열되었 으며, 그것들 사이의 거리는 일정하다. 이것은 塾桂之用의 가능성으로 보고 있다(그림 5-87). 이러한 방법은 集安의 고분 중에서 발견된 예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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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2) 출토 유물 고분이 모두 도굴당하여 출토된 유물이 많지 않아서 모두 25 점이다. 중요한 것은 석기와 토기인데 대부분 깨졌으며, 그 의에 소량의 철기와 은기가 출토되었다. ® 石刀片 1 점 : Ml 동실에서 출토되었다. 청회색 頁岩製이고 전체를 마연하였으며 칼날이 상당히 예리하다. 잔존 길이 9.1 c m, 너비 3.1cm, 두께 0 .4 cm 이다(그립 5-88 a). ® 石織 3 점 : Ml 동실에서 출토되었다. 정교하게 제작되었고 모두 홍갈색이며 전체가 마연되었다. 가운데는 납작하게 갈았고 날 부분은 예 리하며 후부는 [!!]缺되었다. 단면은 납작한 육각형이다. 길이 4.3cm, 너 비 1.2 cm, 두께 0.3cm 이다. 그 중 1 점은 상당히 완정하다. 기타 2 점은 파손되었다(그림 5-88b). ® 토기편 12 점 : 모두 M8 에서 출토되었다. 手製이며 모래가 섞인 갈 색이다. 고운 점토제는 드물고 무문이며 소성도는 높지 않다. 그 중 1 점 은 황갈색 모래가 섞인 토기편으로 사각형 구연이며 의반되었다(그림 5- 89c). 다른 1 점은 저부편인데 태토가 상기한 것과 갑으며 작은 평저이다 (그럽 5-89 d). ® 鐵織 1 점 : M4 에서 출토되었다. 길이 12.2cm, 날의 너비는 10cm, 두께 0.3cm 이다. 단면은 직사각형이다. 첨단의 슴베, 넓은 날을 가졌고 날 부분이 약간 파손되었다(그립 5-89a). ® 쇠칼 1 점 : M2 에서 출토되었다. 양단이 약간 파손되었다. 잔장 11cm, 너비 1.2 cm, 두께 0.3cm 이다(그림 5-89b). ® 은반지 1 점 : M4 의 동벽 중간의 자갈충에서 발견하였다. 銀線으로 동그랗게 만들었고 단면은 원형이며 지름 0.2cm 이다. 반지 지름은 1. 7cm 이다(그립 5-89 e).
b
3) 맺는 말 (1) 族屬과 연대 문제 고분 형제 변화의 서열 입장에서 보면 노호초 고분은 고구려 전기의 묘제와 일맥 상통하고 있다. 지역적 입장에서 보면 이곳은 고구려족 연 속 거주 지역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들은 고구려의 고분으로 보이며, 연대는 고구려 후기에 속한다. (2) 영문석에 관하여 영문석은 과거에 集安 지구 고구려 후기 (6 세기)의 오회분 4 호묘, 5 호
묘와 통구 12 호묘 등 대형 고분 중에 모두 발견되어 〈 影門石 〉 이라고 칭 해졌다. 그것을 前室 앞의 묘도 정중앙에 설치하였으나 전실을 직접 막 지는 않았고 대체로 가옥 앞의 影壁(大門 앞의 특별 시설물)을 방불케 했 다. 이러한 시설은 고구려 소형 봉토묘 중에 발견된 예가 없다. 그러나 중소형 고분 중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된 것은, 노호초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이러한 발견은 고구려 후기 봉토묘의 규모 크기에 차이가 현저 하다는 것을 설명하여 준다. 그러나 구체적 시설에는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고구려 후기 葬俗으로부터 나온 일종의 관념을 표명하고 있다. 8 동대파 고분 東大坡 고분은 通溝 고분군 산성하 묘구의 일부분이다. 산성하 묘구는 集安시에서 서북 방향으로 약 2.5 k m 되는 지점의 산계곡에 있다. 이곳 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丸者圓」과 禹山의 서쪽 언덕은 마치 두 개의 천연적 병풍처럼 되어 있다. 그 사이에 너비가 약 0.5km 되는 아름다운 계곡이 동북쪽에서 서남 방향으로 놓여 있다. 협곡의 동북에 通溝河가 북쪽으로 꺾어지면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강의 서북쪽과 동 남안은 오랫동안 충적된 강계곡 대지가 있다. 동대파 고분은 대지의 동 쪽 산 아래의 완만한 지대에 분포되어 있으며 동쪽 강(河) 건너 서쪽 방 향으로 1km 지점에 丸都山城이 있다. 1976 년 9 월 말에서 11 월 초까지 95 기의 고분을 발굴하였다(그림 5-90). 이 고분 중 54 기는 파괴가 심하고 41 기는 경미하다. 41 기 중 2 기는 적석 유형 고분이고 39 기는 봉토묘이며 출토 유물은 172 점이다. 고분은 산 아래 완만한 지점에 분포되어 있다. 동쪽의 고분들은 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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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에 따라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다. 그 분포범위는 서북에서 동남 방 향으로 길이 4om, 너비 200m 정도이며 고분의 배열은 규칙적이다. 고 분의 남쪽과 언덕상에는 대부분 적석묘(封石墓)가 분포되었고, 북쪽으로 울라가면서 점차 봉토묘가 많아진다. 북쪽은 모두 봉토묘이다 .17)
1) 적석묘 (1) 고분 형제 방단계단 봉석석광묘 2 기, 죽 M262 호, M356 호가 발굴되었다. 2 기의 축조 방법은 같다. 단 1 기는 단묘이고, 다른 1 기는 串墓(연결묘)이다. M262 호는 방단계단 봉석석광묘이다. 묘 방향은 128°, 동서 길이 18m, 남북 너비 14.s-20 . 6m 이고 높이는 2m 정도이다. 묘 정상 동부쪽이 파손 되었다. 구덩이 동남쪽 모퉁이에서 1 점의 철제 혁대고리와 또 1 점의 양 쪽 끝이 뾰족한 청동제 고리를 발견하였다(그림 5-9 1 f). 묘실의 위치는 뚜렷하지 않다. M356 호는 방단계단 봉석석광 연결묘(串 墓 )이다(그림 5-92). 동대파 고 분의 중상부에 있으며 방향은 310· 이다. 이 고분은 3 기 묘로 조성된 하 나의 대형 방단계단 봉석석광이다. 이러한 고분을 연결묘라고 칭한다. 고분의 동서 길이 33m, 남북 너비 13-20m, 높이 2.6m 정도이다. 묘 정 상부에 훼손된 3 개의 함몰 구덩이가 있다. 고분에 불에 탄 鎔 石이 있다. 최동남부의 고분을 M356(1) 호(그립 5-92 a), 가운데 것을 M356(2) 호(그 림 5-92b), 서쪽 것을 M356(3) 호(그림 5-92 C) 로 번호를 부여하였다. 3 기 고분의 길이, 너비는 일치하지 않는다. M356(1) 호는 동서 길이 12. 5m, 남북 너비 19m, 높이 2 . 3m 이다. M356(2) 호는 동서 길이 11. 5 m, 남북 너비 . i9m , 높이 2 . 6m 이며, M356(3) 호는 동서 길이 10.5 m , 남북 너비 16m, 높이 1 . 7m 이다 . 고분의 의모에 의하면 쇄석으로 묘 정상을 한 충 덮어 구릉형태를 만 들었는데 그것은 초기의 방단적석묘이다. 먼저 M356(1) 호를 발굴하였 다. 묘상의 봉석을 제거하자 불규칙적인 4-5 층의 계단이 노출되었다. 계 단은 길이가 보통 15-20cm 되는 석괴로 쌓았고 매충 계단은 석괴를 2-3 충 쌓아 축조하였으며 계 단 사이의 높이는 30-40cm 로 일정 하지 않다.
그림 5-9白1 동대파 고분 출토 유물 ~
계단의 축조는 상당히 복잡하게 이루어졌는데, 의부에서 내부 쪽으로 4 충에서 5 층까지 좁히면서 계단식으로 축조하였다. 즉, 4 층 계단은 지면 에서부터 축조하여 臺 狀울 형성하고 제 5 층은 제 4 층 상면에 다시 축조하 여 계단을 형성하였다(그림 5-92c, 5-93c). 의부의 3 층 계단은 계단식의 축조법이다. 즉, 3 층 계단담도 석괴로 동시에 지면으로부터 축조하고 그 중간은 산돌로 메웠다. 3 층은 일충 낮게 하여 의부의 보호벽으로 만들었 다 (그림 5-93 d) . 3 기 고분의 축조기간은 감지 않다. M356(1) 호와 M3s6(2) 호 등 2 기는 원래 하나의 완전한 고분이며 하나의 고분 기단상에 축조한 것이다. 그 것은 지면으로부터 1.5m 높이까지 축조되었다. M356(1) 에는 동에서 서 로 12.Sm 되는 지점에 북남으로 놓인 너비 약 90cm 되는 공간지대 (간 격)가 하나 있다(그림 5-93b). 그것이 이 고분을 동, 서 2 단으로 분리시 켜 각각 1 기의 고분을 축조하였다. 공간지대의 동쪽은 M356(1) 호의 서 쪽담이고, 공간지대의 서쪽은 M356(2) 의 동쪽담으로, 양쪽 담은 대칭적 이다(그림 5-93a). 동시에 양벽을 축조한 후에 공간지대에 산돌을 채웠 다. 의부 표시는 1 기의 완벽한 고분이다. 상기한 2 기 고분은 하나의 고 분 기단상에 나누어 축조하였으며 동일시기에 속한다. M356(3) 호는 M356(2) 호의 서쪽에 위치한다. M356(2) 호의 서쪽 의부에 경사진 돌담 을 쌓았고 M356(3) 호는 거기에 의지하여 동쪽담을 축조하였다. M356 (3) 는 전자 2 기 축조 후에 축조하였으며 시기도 앞의 2 기보다 늦다. 3 기 묘실이 훼손당하여 묘실의 정확한 범위가 뚜렷하지 않다. 그 예로 M356 (1) 호는 墓頂으로부터 깊이가 약 55cm 이다. 범위의 길이, 너비는 2m 정도로 거기에는 작은 강자갈을 평탄하게 깔았다. 서쪽에는 한 단을 소 형 석괴로 쌓아 돌담을 만들었으며 서쪽 모퉁이에서는 1 점의 單耳 잔을 발견하였다. M356(2) 의 교란 구덩이의 범위는 묘정으로부터 약 80cm 정도 깊이며 길이, 너비는 약 3mX3m 정도이다. 교란 구덩이 북쪽에는 불에 탄 돌들(鎔石)과 강자갈들이 있었다. 또한 불에 탄 청동기와 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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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93 동대파 고분 고분 형제 a. M356(2) 호의 서벽과 M356(3) 호의 서로 집하는 곳(복에서 남쪽 으로 촬영) b. M 356(1), (2) 호 중간의 간격 c. M356(1) 호 제 4,5 층 계단 d. M356(1) 호 의 3 층 계단벽
탄 석괴들이 갑이 섞여 있었고 철제 호미도 불에 탔다. 묘정으로부터 약 2m 지점에 상당수의 강자갈과 쇄석이 혼합되어 같이 쌓여 있었다. M356(3) 호는 묘정으로부터 깊이가 약 60m 이다. 길이, 너비는 약 1.1 -2m 범위이며 거기에 一段이 있는데 그것은 소형 석괴로 정연하게 쌓여 졌다. 그리고 그 안을 강자갈로 평탄하게 깔았다. 그 위에서 철제 꺾쇠 가 1 점 발견되었고 교란 구덩이 의부 남쪽에서 3 편의 토기편이 발견되었 다. 상기한 내용에 의하면 출토 유물의 위치와 강자갈이 깔린 곳은 묘실 일 가능성이 크다. (2) 출토 유물 2 기 묘에서 다만 6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것들은 토기 2 점, 철기 3 점, 청동기 1 점 등이다. 또한 약간의 불에 탄 청동기기가 있다. CD 單耳 잔: 태토에 모래가 섞여 있고, 색깔은 홍갈색이며의반 구연 이고 배가 약간 들어갔다. 작은 저부에 수직된 손잡이가 있으며, 手製이 고, 기형은 불규칙적이다. 높이 12.5m, 구경 9.4 c m, 저경 5.7cm( 그립 5- 91 c) 이다. ® 단지(耀): 고운 태토에 고운 모래가 섞이고, 회황색이며, 소성도 가 낮다. 器身이 작고 파손되었다. 구경 7cm, 잔고 3 . 5cm( 그립 5-91d) 이다. ® 철제 호미 : 보전 상태가 양호하며, 불에 탔고, 직사각형의 공부를 가지고 있다. 공부 너비 6.5cm, 날 너비 8.6cm, 기신 높이 7.3cm, 단제 품이 다 (그림 5-91 a) . ® 철제 꺾쇠 : 길이 13cm, 단제이다(그림 5-91 b). 철제 혁대고리와 양쪽 끝이 뾰족한 청동제 못 1 점 (그림 5-91 e, f) 이 있다.
2) 봉토묘 (1) 고분 형제(축조 방법) 동대파 고분지에는 모두 중, 소형 봉토석실묘가 있다. 대부분 고분지 의 북쪽에 있다. 39 기 소봉토묘 내에 인골이 대부분 부식되어 약간의 뼈 만 출토되었다. 묘실의 결구와 稽臺의 위치에 따라서 1 실묘 37 기가 있는 데 그 중 2 인 합장묘가 3 기이며, 2 실묘가 2 기 있는데 1 기는 두 개의 직 사각형 同壤二穴二室墓이고, 다른 1 기는 오른쪽은 직사각형, 왼쪽은 중 국칼형 연도가 한쪽에 편중된 것의 同壇二穴雙室墓이다. 고분의 평 면 결구에 따르면 3 종류의 유형 이 있다 : 묘실 중간에 묘도 가 딸린 삽형이 있고, 묘도가 묘실 한편에 있는 중국칼형이 있으며 묘도 가 없는 직사각형이 있다. 1 실묘 중 중국칼형은 22 기, 삽형(묘도가 중앙 에 있다)은 13 기, 직사각형 고분은 2 기이다. 이러한 소형 봉토묘는 대부 분 지면(지상)에 축조하였고 때로는 지표보다 약간 낮은 半뿜穴式도 있 다. 묘실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석괴로 쌓았는데 어느 석괴는 가볍게 가공되었고 어느 것은 자연석괴 그대로 사용되었다. 묘정의 결구는 삽형 또는 중국칼형(刀形)과 갑다. 모두 말각쌓음과 평천장쌓음이다. 말각쌓 음 중 1-3 층은 일치하지 않고, 어느 慕井 중의 석괴는 상당히 작고 불규 칙하다. 말각다충은 궁륭과 같다. 어느 일충 말각석은 네 개, 어느 것은 다만 띠 또는 4 괴의 角石으로 처리하여, 규칙적인 것은 없다. 삽형과 중국칼형 고분 중에 평천장은 드물다. 직사각형 고분의 축조는 낮고 좁 으며, 간단하고 거칠고 모두 평천장이다. 상기한 세 종류 고분의 천장은 대석괴 또는 長石으로 덮었고 틈새는 산돌로 메웠으며 그 위는 흙으로 봉하였다. 어떤 삽형과 칼형 고분은 묘실벽을 백회로 바르거나 또는 백 회로 틈새를 메운 것도 있다. 그 중 M365 호의 묘실에 잔류된 백회벽상 에 혹선으로 처리된 벽화가 있다. 묘실의 바닥은 대부분 산돌, 강자갈
또는 작고 납작한 돌을 깔았으며, 어느 고분은 황토로 다지기도 했다. 묘도 입구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석괴를 쌓아 막았거나, 강자갈 또는 산돌을 진흙과 혼합시켜 막았다. 이러한 고분의 방향은 대부분 서남, 동 남 방향이다. 다만 M217 호는 서북 방향이다. 4 기의 고분을 선택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M217 호는 동대파 봉토고분 중 상당히 큰 고분의 하나이다(그림 5-94) .
도
이 고분은 고분군의 언덕 아래쪽에 있었고 방향은 324 ° 이다. 이 묘실 바 닥은 현 지표보다 낮고 고분의 의부 주위와 묘실 내의 동남 모퉁이에는 물이 스며들었다. 묘 정상 서쪽에 도굴 구멍이 한 곳 있었는데 그곳은 묘실 저부로부터 1.6 m 거리이다. 묘실의 평면은 삽형이고 전체 고분은 잘 가공된 석괴로 축조되었다. 묘실의 길이는 3.4 6 m, 너비 2.6 m , 높이 2.8m 이다. 용도 길이 0.3m, 너비 1.3 m, 높이 1.2 m 이며 묘도는 길이 1.2 m, 너비 1.2 m, 높이 l.8m 이다. 묘도 정상부는 가로로 장석을 덮었다. 줍道(사잇길)와 묘도 접촉부분에 높이 1.7 m, 너비 1.1 4m, 두께 0 . 15m 의 靑石板(침적세사암)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屈石門으로 묘도 내의 끝부분을 막은 것과 갇다. 석문의 오른쪽, 지면으로부터 약 lm 떨어진 곳에 하나의 반원형 결구가 있는데 그것은 도굴 구멍으로 보인다. 묘정 은 한의 평행쌓음이고 2 층은 말각쌓음이다. 묘실 내에는 두 개의 관대가 있다. 묘벽과 관대에 4cm 정도 두께의 백회를 발랐다. 묘벽의 백회는 모두 탈락되었다. 묘 바닥 백회 아래에는 9m 정도 두께의 숯이 깔려 있 는데 숯 아래 흙이 굳은 것은 이미 불에 구워진 것이다. 다만 관대상과 묘벽으로 노출된 돌면과 남아 있는 백회면에는 불에 구위전 흔적은 없 다. 그것은 묘실을 축조하기 전에 구워진 것이다. 관대의 서쪽에서는 2 점의 못이 출토되었다. 하나는 도금된 철제로 복 숭아잎 형태의 말장식이고, 다른 한 점은 철제 혁대고리이다. 담의 서북 모퉁이와 동북 모퉁이에서 회색 아궁이편(토기편)이 출토되었다. 무덤의 서쪽, 도굴 구멍 의부에서 철촉 7 점, 관못 7 점, 관고리 2 점, 긴 못 형태 의 도금 말장식을 발견하였다(그림 5-94). M365 호는 삽형의 소봉토석실묘이다. 방향은 220· 이고 동대파 고분군 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발굴 전 도굴당하였다. 묘실의 전체 길이 4.4 m , 그 중 묘실은 길이 2.7m, 너비 2.3m, 높이 2m 이고 묘도는 동서 길이 1.6 7m, 남북 너비 l.Om , 높이 1.2 m 이다. 묘정의 결구는 2 층 말각 이고 그 위에 1 매의 대판석을 덮었다. 묘 바닥에는 소판석을 깔았다. 묘
벽 내의 석재는 가공하지 않았지만 정제되게 처리하였다. 묘실의 네 벽 에는 거칠게 약 2cm 두께의 백회를 발랐는데 서, 북, 남의 세 벽은 거 의 다 떨어졌다. 동벽의 백회에 혹선으로 처리한 벽화가 있는데, 선들이 대단히 가늘며 그린 내용은 알 수 없다. 북쪽 담에서 50cm 지점, 묘도 입구에서 110cm 되는 곳에서 깨진 회색 단지를 발견했고, 그 남쪽, 죽
그림 5-95 동대파 고분 출토 유물
二三
묘도에 근접해서 施柚된 둥근 구연의 병 (그림 5 - 95) 을 1 점 발견하였다. M345 호는 기 자형 (중국칼형) 의 소봉토석 실묘이 다. 고분군의 중앙에 위 치하고 있으며 방향은 235 ° 이고 묘실 길이 2.3 4 m, 너비 2m, 높이 1.4 8 m 이다. 묘도는 북쪽으로 편중되었고 묘도의 크기는 1.9 4m X0 .9 m xo .9 4 m 이다. 묘실의 네 벽은 정제된 석괴로 쌓았고 묘정은 말각이며 묘 바 닥은 황토를 다졌다. 묘도의 남벽, 묘문 가까운 곳에서 한 점의 오리주 둥이형 虎子를 발견하였다. 묘실 내의 흙 속에서는 56 점의 관못과 2 개의 관고리가 출토되었다(그립 5-96). M350 호는 직사각형 봉토묘이며 방향은 210 · 이다(그림 5-97). 고분군의 중앙에 위치하며 벌날f 전 파괴당하였다. 묘실의 범위는 동서 1.9 m, 남 북 너비 0.8 m , 높이 o . 6m 이다. 平頂이다. 고분에 사용된 석재는 가공되 지 않았다. 묘실의 세 면은 상당히 큰 石魂塘울 만들었다. 묘 바닥에는 작은 강자갈을 깔았고 묘 입구는 소석괴로 봉하였으며 묘청은 석판으로 덮었다. 묘 내에서는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2) 출토 유물 이 봉토묘 중 10 기 내에서만 유물이 출토되었다. 토기 8 점 : 고운 태토와 모래 섞인 것 2 점, 색깔은 홍, 황, 혹, 회색 과 1 점의 施柚된 토기가 있었다. 기형으로는 단지, 아궁이, 병, 뚜껑 등 이 있다. 철기 108 점 : 관못 165 점, 관고리 8 점, 철촉 8 점 등이다. 도금 장식품 3 점은 모두 마구 장식으로, 그 중 금제 고리 1 점이 포함된다(그림 5-9 8), ®토기 오리주등이형 호자: 고운 태토의 황색 토기이며 납작하고 둥근 입술이 돌출되었다. 器身은 둥글고 배가 부르며, 끝(꼬리부분)은 텅 빈 원통형으 로 위로 치솟아 마치 오리꼬리 같다. 등 상부에 손잡이 (耳)가 있고 손잡
。 。。 。
그림 5-98 동대파 봉토묘 출토 유물 a. 도금 마구장식 (M211 : 2) b. 쇠 관고리 (M217 : 4) c. 쇠관고리 (M211 : 3) d, 황유 토제 호자 (M345) e. 도금 철제 마구 (M217) f. 도금 마구 (M211 : 1) g. 철촉 (M217 : 6) h. 녹유장경병 (M365) i. 회색 토제 단지 j, 회색 토제 뚜껑 (M346) k. 회색 토기 뚜껑 (M377) I. 쇠 혁대고리 (M217 : 8) m. 회색 토기 단지 (M339) n. 옹기 뚜껑 (M922) (a, e, h, I 은 실제크기의 1/2, d 는 1/8, 나머지 는 1/4)
이 아래 기신 부분에 X 자형의 부호가 있다. 저부가 파손되었다. 잔고 16.4 c m, 길이 24.5cm, 구경 8 . 1cm 이다(그립 5-98 d). 단지(海淵) 3 점 : 1 점은 고운 태토의 황색 토기로 파손되었고, 의반 구연 이며 목이 짧고, 어깨가 둥글다. 잔고 11. 1 cm, 복경 17 .4 cm 이다. 1 점은 회색 토기로 파손되었고 구경 10 .4 cm 이다(그립 5-9 8 m). 다른 1 점은 혹 색 토기로서 구연이 깨졌고, 어깨가 둥글며 배가 수축되고 평저이다. 목 아래, 어깨 아래와 복부에 각각 한 줄씩 융기현문이 있다. 假一굽다리 (圈足) : 물동이 바닥 가운데에 X 부호가 있다. 잔고 11. 9 cm, 어깨 너비 17.2cm, 저경 1 1.1 cm 이다(그림 5-98 i). 施柚장경병 : 고운 태토의 전한 홍색이며 시유가 엷고 광택이 거의 없 다. 단면 네모임술이며 둥근 구연이고 목이 길고 배가 부르다. 어깨와 배에 각각 네 줄의 융기현문이 있다. 전체 높이 25.5cm, 목 길이 8cm, 구경 6.3cm, 저경 13.2cm 이다(그림 5-98h). 뚜껑 3 점 : 1 점은 모래 섞인 홍색 토기로 꼭지가 떨어져 나갔다(그림 5-98n). 다른 1 점은 고운 회색 토기로 꼭지가 융기되었다(그림 5-98k). 또 다른 1 점은 고운 태토의 흑색 토기로 꼭지가 융기되고 꼭지 아래와 어깨 및 구연부 근처에 2 - 3 줄의 오목현문이 있다. 뚜껑 위에 경사진 暗 紋이 있다(그림 5-98j ). ® 철기 관못 : 한 종류는 못머리가 반원형이고 몸체는 사각방추형이며 보통 길이가 10cm 정도이다. 다른 한 종류는 사각형 못머리와 偏方방추형의 몸체이고 보통 길이 8cm 정도이며 또 다른 한 종류는 18cm 정도이다. 관고리 : 사각형 쇠철사에 원형의 철편이 꽂혀 있고 거기에 움직일 수 있는 쇠고리가 매달려 있다(그립 5-98b). 다른 1 점은 몸체가 작고 전체 길이 11 . 8cm 이며 상기한 쇠고리와 거의 같은 형이다(그립 5-9 8c). 철촉 : 한 종류는 날중간이 융기되었고 촉은 삽형이며 길이 8 . 7cm 이
다. 슴베 부분은 사릉(정사각형) 방추형이며, 길이 8.3 c m, 전체 길이 17cm 이다. 다른 종류는 철촉의 끝 부분이 창형(牙狀)이고 중간에 가볍 게 도드리가 나와 있다. 총부분은 7.1 c m, 슴베는 사릉 방추형이다. 슴 베 길 이 는 4.9cm 이 다 (그림 5-98 g) . 도금 장식 3 점 : 긴 철제 말장식이며 도금이 거의 탈락되었고 다만 1 점 의 못 위에 도금이 남아 있다(그림 5-98e). 도금된 말띠드리개 (杏葉)는 길이 6.3 c m, 너비 6.6 c m, 두께 2cm 이고 그 주위는 융기되었다. 또한 그 중간에 융기된 十字가 있고 주위와 十字 위에 17 개의 못이 있는데 이 것은 말안장 뒤가리개의 장식이다(그림 5-98a). 여섯 잎의 해바라기꽃 말장식이 있으며 잎 사이에 융기된 圓心이 있고 각 잎에는 세 개의 못이 있다. 이것도 말안장 뒷부분의 장식이다(그림 5-98f ). (3) 맺는 말 동대파 고분군에서 발굴된 적석묘는 2 기이다. 축조방법은 안에서 밖으 로 먼저 2 층 계단(기단)을 쌓고 그 후에 그 계단의 의부에 다시 세 줄의 기단벽(階壇)을 쌓은 다음 그 주위에 대석괴를 쌓아 바닥울 방단으로 만 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각형을 기초로 한 적석묘(封土墓)는 集安, 懷 仁, 海江 유역 고구려 시기 적석묘의 중요한 특칭의 하나이다. 유사한 M356 호, M262 호 고분들은 西漢 말부터 南北朝 시기까지 존재하여 4-5 세기까지 방단계단 석실묘와 같이 공존하였다 .. 동 대파에서 출토된 유물 에서 보이는 單耳才짜에 모래가 섞이고 거친 태토, 手製, 기형의 불균형 등의 특성과 철제 호미는 西漢의 그것과 가깝다. 따라서 이 고분의 연대 는 상당히 일러서 1-3 세기에 속한다.
3) 봉토묘의 연대 동대파 고분 중에 소형 봉토석실묘는 약 100 여 기가 된다. 1963 년에 M332 호(王字벽화묘)를 발굴했고, 1976 년 5 월에는 14 기를 발굴하였고 1976 년 10 월에는 또한 90 여 기를 발굴하였다. 그 중에 기본적인 것은 39 기이다. 고분 중에 대형 봉토석실묘는 3 기, 죽 이번에 발굴한 M217 호와 1976 년 6 월에 발굴한 M330, 1963 년에 발굴한 M332 호이다. M217 호는 거대한 봉토석실묘이다. 이 고분에서 금동제 말장식, 철촉, 토제 아궁이 등이 발견되었다. 출토된 관못도 다른 고분의 것보다 크고 묘도에는 석문이 있으며 묘 바닥에는 숯을 깔았는데 이러한 현상은 소형 봉토 내에서는 볼 수 없다. 王字墓 (M332 호)는 고분의 중심부에 위치하 고 있었으며, 묘 바닥에 숯이 깔려 있었고 묘도에는 측실이 딸려 있었으 며 시기는 5 세기 정도이다. M217 호는 고분군의 가장 아래쪽에 있었으며 시기는 왕자묘보다 늦어 약 6-7 세기경이다. M365 호는 중소형 봉토석실묘이다. 그 고분에서 사용된 둥근 구연의 장경병이 출토되었다. 유약 바른 토기는 고구려 적석류 고분과 대형 봉 토석실묘, 벽화고분 중에서 출토되었다. 유약 색깔은 황록색, 다록색이 었고 기형은 대부분 넓은 구연 四耳登, 솥, 사발(鉢), 손잡이 달린 잔 (耳杯)과 아궁이 등이었다. M365 호 출토병은 茶柚色이며 기형도 상기한 것들과 다르다. 隋代에는 茶綠柚와 둥글고 목이 긴 병이 상당히 유행되 었는데, M365 호의 병은 隋代의 것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隋代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M365 호의 병은 고구려의 다른 유약 바른 것보다 시기가 늦은 것이다. 또한 그 병은 敦化 六項山 발해 고분 중의 M199 출토의 회색 토기병과 형제상 같다. 고분의 결구 역시 일치한다. 그 고분 연대 (M365 호)는 6 세기 말 -7 세기 초의 고구려 후기 고분에 속 한다. M345 호에서 출토된 고운 태토의 황색 오리형 장군은 集安에서 최 초로 발견된 것인데, 이는 과거에 集安에서 출토된 장군과 기형이 다르
며 오리형 호자의 손잡이 아래에 X 자형 부호가 있다. 그 의 M392 호 봉 토 고분 내에서 출토된 단지 바닥에도 두드려 만든 부호가 있다. 이러한 토기상에 두드린 것과 음각한 부호는 발해시기에 유행되었던 것으로 이 2 기 고분의 연대는 고구려 말기에서 발해 초에 해당된다. 전체 고분 측면에서 보면 봉토묘의 연대는 5 세기 말부터 7 세기까지에 해당된다. 동대파 고분군 중 적석묘와 봉토묘 두 종류 고분의 연대 입장에서 보 면 약 1 세기부터 7 세기까지 그곳에 매장을 하였다. 고분군의 남쪽, 黑請 子溝 일대까지 모두 적석류 고분이 산재되어 있다. 북쪽으로 가면서 봉 토묘가 많아전다. 고분은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매장되었으며 남쪽의 연대가 이르고 북쪽의 연대가 늦다. 4) 葬谷과 葬具 동대파 고분군의 방단계단 봉석석광묘에서 철제 꺾쇠가 출토되었다. 그러나 봉토묘에서는 관못만이 출토되었다. 그것은 두 종류 고분 모두 木製의 葬具가 있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꺾쇠가 사용된 장구는 목재가 두텁고 육중하였으며 제작하기에 비교적 간단하였을 것이다. 목재에 꺾 쇠를 사용한 것은 그 형식이 목곽식임을 설명한다. M356 호의 묘실 입장 에서 보면 묘실의 석광은 뚜렷하지 않으며 가장자리도 정제하지 못한데, 그것은 파손된 것 의에도 축조상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매장을 할 때에 먼저 묘광을 축조하지 않고 관곽을 놓은 다음 석괴로 주 위를 쌓고 다시 돌로 위를 봉하였는데, 장구(稽都)가 부식된 후 묘정(천 장)식과 정성들여 쌓은 석광이 없기 때문에 자연히 붕괴된 것으로 보인 다. 그래서 묘실 천장부는 함몰 구덩이로 형성되었고 발굴시 석광 흔적 (토광선) 이 뚜렷하지 않았다. 동대파의 M356 호에는 불탄 鎔石, 불에 탄
청동기가 불에 탄 석괴와 함께 섞여 있었는데 이에 의하면 어떤 의식이 墓上에서 진행되었던 것 갇다. 고구려에는 화장습속이 있었고 그러한 화 장의 습속은 5 세기 전의 적석류 고분 내에서 유행되었다. 적석묘 중에서 초기, 중기 석관류의 묘실 바닥에는 언제나 작은 강자 갈이 깔려 있었다. M356, M262 호 묘실의 바닥에도 작은 강자갈이 깔려 있었으나 어느 묘실 바닥에는 강자갈이 없는 것도 있는데, 이때에는 묘 실 의부에 충전된 쇄석 내에 강자갈이 섞여 있었다. 이처럼 고구려인들 이 강자갈을 성스럽게 생각하여 묘실 바닥에 사용한 것은 강에 대한 숭 배와 기념으로 볼 수 있다. 9 운평리 제 4 지구 적석묘 자강도 초산군 운평리는 연무리 2 호 무덤의 북쪽에 인접한 里이다. 리 소재지의 서쪽, 압록강 좌안의 넓은 벌에는 200 기 이상의 고구려 무덤들 이 각 지구 (1-4 지구)에 수십 기씩 분포되어 있었다. 그 중 제 4 지구의 무 덤들을 살펴보겠다. 18) 6 호 무덤은 무기단 적석묘로 무덤무지의 동쪽 끝부터 돌을 부석 한(깐) 시설 끝까지는 길이가 22.5m 이다. 무덤무지의 장축 방향은 서서북 20· 2' 이다. 무덤 길이는 20-4om, 너비는 10-30m 정도의 강돌을 쌓아 무덤무 지를 만들었다(그림 5-99). 무덤무지의 규모는 길이 14.5m, 너비 10.5m, 높이 (서쪽)는 1. 95m 이 다. 또 무덤 곽의 크기는 길이 약 2m, 너비 약 0.9 m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유물로는 무덤무지에서 질그릇편, 무덤 곽에서 완전한 동탁(그림 5-100), 부석 시설에서 손칼, 띠고리, 쇠못, 첫조각 등의 철제품들과 기 와편, 단지편들이 출토되었다. 그 중 동탁은 높이 5.3cm, 어깨 부분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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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m, 밀(입) 부분이 3.oscm 이다. 고리의 구멍 지름은 0 .4 5cm 이고 몸체벽 두께는 0.15-2.0cm 이다. 8 호 무덤은 주곽과 부곽이 있는 직사각형의 무기단 적석묘이다• 무덤 의 규모는 길이가 11( 북쪽 )-12( 남쪽 )m, 너비 6( 동쪽 )-7( 서쪽 )m 이고, 높 이는 주곽이 있는 서쪽이 높고 부곽이 있는 동쪽이 약간 낮다. 그 높이 는 서쪽이 l.S m 이고, 동쪽이 1.3 m 이다(그립 5-101), 주곽의 규모는 길이 2.05m, 너비 1. om 이며 동쪽 벽선이 무덤 무지 전 체 길이 (12m) 의 중간쯤 되는 지점 (6m) 과 일치한다. 부곽은 주곽으로부 터 동쪽으로 lm 의 거리에 있다. 그 규모는 길이 1.3 m, 너비 0 . 8m 이며 바닥이 주곽의 바닥보다 1.Sm 가량 높다. 무덤의 장축 방향은 서서북 20·01 다. 출토 유물은 고리자루 긴 칼, 창끝, 도끼(그림 5-102), 비수 2 점과 청 동제 두각편 등이 있으며 그 의에 부곽 내에 질그릇편이 있다. 고리자루 긴 칼은 단조한 민고리의 곧은 칼이다. 크기는 전체 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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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 c m, 날 부분 35.0cm, 자루 부분 16.0cm, 고리 부분 3 . 8cm 이며, 너 비는 날 부분 2.6 c m, 자루 부분 1.6 cm, 고리 부분 5 . 6cm 이다. 두께는 날 부분의 동쪽과 자루 부분이 0 . 6cm 이며, 고리의 굵기 (두께)는 0 . 7cm 이 다. 9 호 무덤은 8 호 무덤과 같이 주곽과 부곽이 있는 무덤이며 축조방법 도 8 호 무덤과 같다. 무덤의 규모는 길이 13m, 너비 7m, 높이 약 1.5m 이다. 주곽과 부곽의 간격은 1. 4m 이며, 그 중간에 길이 85cm, 너비 30cm 의 큰 돌이 놓여 있다(그림 5-103). 주곽의 크기는 길이 1.9 m, 너비 l. Om 이며, 부곽의 크기는 길이 1.6 m, 너비 0 . 9m 이다. 주곽 바닥은 무덤 바닥보다 80cm 높으며, 부곽의 바닥은 그보다 30cm 정도 더 높다. 무 덤의 장축 방향은 서서북 20°7' 이다. 출토 유물은 질그릇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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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호 무덤은 묘실과 무덤무지를 돌로 축조하였다. 적석묘가 움식으로 된 무덤곽이라면 이 무덤은 횡혈식의 묘실이다. 직사각형인 무덤 평면의 규모는 길이 약 13.5 m , 너비는 약 9.0m 이다(그림 5-104). 묘실의 크기는 길이 215cm, 너비 85cm, 높이 96-104cm 이며, 묘도는 길이 197cm, 너 비 65cm 이다. 묘도 입구로부터 묘실의 뒷벽까지의 길이는 412c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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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실의 장축 방향은 정남향이다. 출토 유물로는 묘실에서 발견된 것으로 쇠활촉, 첫덩어리, 가락지 모 양의 뼈제품, 사람뼈 등이 있다. 상기한 4 지구의 6 호 무덤은 부석을 한 사각 시설이 곁달린 특이한 평 면 구조의 무덤이다. 6 호 무덤은 오도령구문 무덤, 자성군 송암리 1 지구 3 호 무덤, 88 호 무덤, 106 호 무덤과 함께 무덤무지 앞에 제단으로 보이 는 시설이 있는 무기단 돌각담무덤의 한 유형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무덤무지의 평면 구조는 일본의 〈 前方後圓壇 〉 의 그것과 통하는 것으로 두 지역 사이의 문화연계를 시사하여 준다고 보고 있다. 8 호 무덤과 9 호 무덤은 한 무덤무지 안에 주곽과 부곽이 있는 무기단 적석묘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한 무덤 내에 주곽과 부곽이 있는 예 는 처음이라 할 수 있다. 10 호 무덤은 적석묘로서 마지막 시기의 유형인 돌칸돌무덤이다. 고구 려 무덤이 돌기단무덤으로부터 돌칸흙무덤으로 이행된다는 것에 따르면 이 무덤은 돌각담무덤의 마지막 유형이다(그립 5-105).
10 덕화리 3 호 봉토묘 덕화리 3 호 무덤은 평안남도 대동군 덕화리에 있다. 그것은 리 소재지 에서 서쪽으로 약 11 km 지점의 봉화산 남쪽 기슭에 있다. 무덤 구조는 안길 시설(墓道, 茨道)이 없는 두 칸의 돌칸 흙무덤이며 무덤무지는 붉은색 점토이다. 현재 크기는 동서 길이 12m, 남북 길이 lOm, 높이 1. 82m 이다. 무지 안에 남북의 긴 직사각형의 무덤칸이 동서 로 나란히 놓여 있다. 벽은 막돌로 면을 맞추어 거의 수직이 되게 올려 쌓았는데, 비교적 큰 돌과 작은 돌을 섞어서 쌓았다. 무덤 안길 시설은 없고 사이벽 남쪽 끝에 두께 약 15cm, 너비 약 35cm, 높이 약 155cm 의 좁고 긴 판돌이 하나 서 있다. 무덤칸의 방향은 서쪽으로 치우친 남향이며 두 무덤칸의 크기는 같다. 남북 길이 238cm, 동서 너비 78.5cm, 높이 107cm 이다(그림 5-106). 부장품은 두 개의 순금가락지, 한 개의 금귀걸이, 두 개의 금단추, 두 개의 은비녀, 한 개의 은머리꽂이, 두 개의 은띠고리(한 쌍), 네 개의 쇠고리 손잡이, 31 개의 관못 등이다. 평양 일대에는 덕화리 3 호 무덤과 같은 하나의 무덤 무지의 속에 둘 또는 세 개의 무덤칸이 있는 예도 있다. 덕화리 3 호 무덤은 아직 부부합 장을 하지 않던 고구려 이전 시기의 잔재이거나 또는 무덤칸을 따로따로 만들어 합장하던 잔재 일 가능성 이 크다. 덕화리 3 호 무덤은 출토된 부장품(금속유물)에 의하면 이른 시기의 무 덤이다. 상기한 몇 가지 예를 보면 덕화리 3 호는 평양 일대의 돌칸흙무덤 중 에서 가장 이론 시기의 무덤이다. 죽 고구려가 평양 일대를 차지하던 초 기의 무덤이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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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낙랑구역 일대 고구려 봉토석실묘 낙랑구역 일대에서 330 기의 고분이 발굴되었는데 그 중에 봉토석실묘 도 있었다. 최근에 낙랑구역 일대에서 새로 발굴된 고구려 봉토석실묘는 낙랑동 19 호, 24 호, 25 호, 29 호, 30 호, 31 호, 34 호, 36 호, 51 호, 53 호, 54 호 무 덤과 정백동 101 호 무덤, 남사리 37 호 무덤 등 모두 13 기이다. 13 기의 봉토석실묘에는 모두 벽화가 없으며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 부 장품도 없다. 상기한 13 기의 봉토석실묘는 그 구조를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 안길 없는 외칸 무덤 그 예로 낙랑동 29 호 무덤이다. 무덤칸은 길게 놓인 직사각형 칸이고 동벽과 서벽 길이는 각각 303cm, 북벽 너비 100cm, 남벽 너비 90cm, 무덤칸 높이 53cm 이다. 지붕은 평천장이다. ® 안길과 안칸으로 이루어진 평천장의 외칸 무덤 그 예로 낙랑동 19 호, 24 호, 25 호, 30 호, 31 호, 34 호, 51 호, 53 호, 54 호 등이다. 이 무덤들의 무덤칸 크기와 방향은 표를 참조하면 된다(표 5- 22). 상기한 도표에 의하면 무덤칸의 방향은 서남향이 압도적 다수이고, 그 의의 것은 동남향 2 기, 정남향이 1 기 있을 뿐이다. ® 안길과 안칸으로 이루어진 평행삼각고임 천장의 외칸 무덤 그 예로 정백동 101 호 무덤(그림 5-107), 낙랑동 36 호, 남사리 37 호 등 이다. 여기에 속하는 무덤은 평행삼각고임을 한 천장을 가진 의칸 무덤 이라는 것은 공통이나, 세부적인 구조와 축조재질은 다르다. 상기한 세 부류를 시기적으로 분류할 때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I
첫째, 안길 없는 -+ 둘째, 안길과 안칸으로 이 -+ 셋째, 안길과 안칸으로 이
시기를 보면 첫째가 가장 이르고 그 다음의 순서로 보고 있다. 정백동 101 호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제 귀걸이는 벽돌 무덤인 낙랑동 27 호 무덤 에서 출토된 것과 생김새와 크기가 갇은데 그것은 정백동 101 호가 벽돌 무덤과 같은 시기임을 추측하게 한다. 평양 일대의 벽돌-무덤이 만들어 전 시기는 2 세기 초부터 3 세기 중엽까지로 보고 있다. 따라서 정백동 101 호도 3 세기 전반에서 중엽으로 볼 수 있다. 정백동 101 호 무덤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 낙랑동 36 호 무덤과 남사리 37 호 무덤의 연대는 어떠한가 ? 낙랑동 36 호 무덤과 남사리 37 호 무덤의 안길 위치와 안칸의 평면 구 조는 선행한 무덤의 것과 뚜렷하게 차이가 난다. 그러한 현상은 상기한 두 무덤이 정백동 101 호보다 늦은 시기라는 것을 보여 준다. 즉, 두 무 덤은 3 세기 후반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낙랑동 29 호(그림 5-108) 의 출토 유물이 관못뿐이며 이 무덤 구조와 유 사한 것으로 평안남도 순천시 남옥리 2 호 무덤이 있다. 남옥리 2 호 무덤 은 무덤 무지의 윗부분 중간에 돌칸을 마련한 의칸 무덤이다. 남옥리 무 덤은 구조에 있어서 적석묘의 요소가 많다. 적석묘에서 봉토석실묘로의 변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수혈식 곽실이 수혈식 곽실이 횡혈식 곽실이 돌칸이 있는 돌 봉
북쪽
표 5-22 무덤칸의 방향과 크기 (cm).
상기한 변천 과정에서 적석묘의 하한에 해당되는 무덤 형식은 횡혈식 곽실이 있는 돌기단무덤아라고 보고 있다. 횡혈식 곽실이 있는 돌기단 무덤인 자강도 시중군 로남리 남파동 33 호 무덤에서 로남리형 질그릇이 출토되었다. 남옥리 2 호 무덤에서는 〈 내행화문장의자손경〉의 청동 거울과 회백색 단지, 혹회색 단지 등이 출토되었다. 그것들은 평양 일대의 귀툴 무덤에 서 흔히 출토된다. 이러한 귀톨 무덤은 1 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 다. 남옥리 2 호 무덤을 1 세기경으로 본다면 낙랑동 2 호 무덤 연대는 2 세기 전반기로 볼 수 있다. 상기한 첫째 부류의 봉토석실묘인 낙랑동 29 호는 연대가 2 세기 전반
기, 셋째 부류의 정백동 101 호가 3 세기 전반기라면 그 중간의 둘째 부류 는 2 세기 후반기라고 할 수 있다 .20) 종합하여 낙랑구역 일대에서 발굴된 고구려 봉토석실묘의 연대는 2-3 세기로 추정할 수 있다. 12 창매리 돌칸흙무덤 창매리 돌칸흙무덤은 황해북도 연탄군 창매리 제 1 작업반 부락에서 서 북쪽으로 약 6oom 지점인 지하리골(현 작참골)이라는 골짜기 맨 끝 정미 산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 유적으로는 창매리 무덤에서 서남쪽으로 약 3km 지점의 수봉리 먹동 마울에 1 기의 돌칸 흙무덤이 있으며, 남동쪽 약 6km 지점의 관제 동 마을 뒷산 골짜기에 10 여 기 돌칸흙무덤이 있고, 동북쪽으로 약 3km 거리에 장수봉의 산성(석성)이 있다. 창매리 무덤은 1988 년 10 월에 발굴하였다 .21) 무덤무지 (봉분)는 지표로부터 흙을 90cm 높이로 쌓아 올린 다음 그 위에 무덤칸을 축조하고 흙을 덮은 흙기단 돌칸 무덤이다. 무덤무지는 크기가 남북 길이 13m, 동서 너비 llm, 높이 3.85m 이다. 무덤은 안길 과 안칸으로 된 의칸 무덤이며 부부 합장묘이다. 무덤칸은 흙을 쌓은 위 에 축조하였으며, 안길은 남쪽벽 중심에 설치하였다. 방향은 정남향이 다. 안길의 두 벽 길이는 60cm, 두께 30cm 정도의 회색 석회암 또는 검은색 석회암으로 곧게 4-5 단 쌓은 디옴- 벽면에 회를 발랐다. 안길 크 기는 남북 길이가 280cm, 동서 너비가 136cm, 천장의 가장 높은 곳이 154cm 이다(그립 5-109 a). 안길에는 뚜껑돌이 없고, 다만 길이 311cm, 너비 72cm, 두께 22cm
리 덤
정도의 뚜껑돌 1 개와, 길이 314cm, 너비 47cm, 두께 26cm 크기의 이 마돌이 잔존되어 있다. 안길 바닥은 무덤칸 바닥과 수평이다. 다만 무덤 칸을 막기 위하여 바닥과 천장에 너비 47cm, 높이 7cm 정도 턱을 만둘 어 막음돌이 걷리게 하였다. 바닥에는 석비례를 깔고 다졌다. 무덤칸은 가공된 큰 판돌을 3 매 세워 막았는데, 발굴 당시에는 1 매만 세워져 있었다. 막음돌은 그 크기가 길이 162cm, 너바 44cm, 두께 12. 5cm 인 것과, 길이 165cm, 너비 47cm, 두께 11cm 인 것이 있다. 무덤칸 의 평면은 직사각형이다. 무덤칸의 네 벽은 깬 돌로 쌓고, 그 위에 삼화 토를 초벌로 바르고 그 위에 두 차례 회를 발랐다. 벽은 수직이며 그 높 이는 170cm 이다. 천장은 네 벽 위에 2 단의 평행고임을 한 후 그 위에 1 단의 3 각고임을 하였다. 크기가 22ocmx170cmx38cm 정도의 큰 판돌 한 개로 덮었다. 무덤칸의 크기는 동쪽벽 294cm, 서쪽벽 293cm, 남북벽 230cm 이며, 바닥에서 뚜껑돌까지의 높이는 242cm 이다. 바닥은 숯을 2cm 정도로 깔고 그 위에 크기가 30cmX20cm, 두께 15cmX25cm 정도의 깬 돌과 자갈을 깔고 그 위에 석비례를 3cm 두께 로 깐 후 회를 발랐다. 두 관대는 무덤칸의 동쪽벽과 서쪽벽에 붙여서 만들었다. 그것들은 북 쪽벽에서 6cm, 남쪽벽에서 51cm 거리에 있다. 관대는 20cmX15cm 정 도의 깬 돌과 자갈을 깔고 그 위에 회를 발랐다. 관대의 크기는 두 개가 비슷한데, 동쪽의 것은 길이 224cm, 너비 76cm, 높이 19cm 이며, 서쪽 의 것은 길이 223cm, 너비 74cm, 높이 19cm 아다. 무덤칸에는 벽화가 희미하게 남아 있으나 확인할 수 없고, 그곳 주민 들 말에 의하면 용과 거북이가 있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서 벽화무 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물은 토기편 여러 점, 단지 1 점과 관못 1 점이다. 배가 부른 단지(그립 s-109b) 는 중간에 각각 다른 간격으로 7 줄의 선
이 둘러쳐 있으며 한 곳에는 노끈무늬를 사선으로 처리하였다. 단지의 크기는 높이 20cm, 배의 지름 20.3cm, 밑바닥 지름 12.7cm, 두께는 0.4 cm 이다. 관못은 고구려의 전형적인 4 각형의 송곳형이다. 크기는 9.8 c m, 머리 지름 2cm, 몸체 지름 0 . 7cm 이다. 이 무덤은 서남부 지역, 즉 황해북도 일대에서 발견된 최초의 무덤이 며 돌칸 흙무덤의 새로운 형식이다 13 오국리 무덤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에서 새로운 고구려 무덤이 발굴되었다. 오국 리 무덤은 안악 3 호분에서 서쪽으로 4km 지점에 있다. 오국리 무덤을 편의상 안악 4 호분으로 부르고 있다(그림 5-1 1 0). 묘실의 방향은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남향이고 2 기의 실로 되어 있다. 묘실은 연도가 없으며 지하에 만들었다. 전실은 동서 길이 210cm, 남북 너비 83cm 크기의 직사각형이다. 바닥에는 두께가 13cm 인 화강암 판석 울 한 장 깔았으며 서쪽 부분에는 다시 그 위에 두께 17cm 되는 화강암 판석을 한장 더 깔았다. 서쪽 바닥은 한 변의 길이가 66cm 인 사각형이 며 그보다 17cm 낮은 동쪽 바닥은 동서 길이 166cm, 남북 너비 66cm 인 직사각형이다. 벽의 높이는 동쪽 부분은 87cm, 서쪽 부분은 80cm 이다. 천장은 한 단의 평행고임 위에 평천장을 한 후 중간에 남겨 놓은 작은 사각형의 공간에 2 단의 삼각고임을 하고 한 장의 개석으로 천장을 덮었 다. 평천장의 크기는 서쪽은 동서 길이 69cm, 남북 너비 56cm 이며, 동 쪽은 동서 길이 50cm, 남북 너비 55cm 이고 각각 두께는 10cm 이다. 주실의 크기는 길이 251cm, 남쪽의 너비 87cm; 북쪽의 너비 85cm 이
a. 무덤 실측도(단면도)
다. 천장은 한 단의 평행교김을 한 후 그 위에 2 장의 판돌로 평천장을 하였다. 묘실 내부에는 유물이 없었고, 무덤 위에서 약간의 기와편과 토 기편이 있었다. 오국리 무덤은 연도와 묘문이 없는데 그것은 묘실이 지하식이기 때문
이다. 고구려 무덤에는 적석묘와 봉토석실묘의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전 자는 이론 시기의 것이며 후자는 늦은 시기의 것이다. 적석묘 중에 늦은 시기의 봉토석실묘를 제의하고 무덤의 연도가 없다. 따라서 오국리 무덤 을 수혈식으로 묻었다면 상대적으로 이론 시기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무덤구조는 이른 시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구려 이론 시기 무덤 은 주검칸을 예의 없이 지상에 놓고 있다. 오국리 무덤은 묘실이 지하에 있다. 이 오국리 무덤은 多室 무덤 유형의 안악 3 호, 태성리 1 호, 요동 성 무덤과 같이 전실에 딸린 동서 2 개의 측실, 주실로 이루어졌으며 서 쪽 측실의 바닥이 다른 실의 바닥보다 한단 높고 전실과 동쪽 측실의 바 닥이 같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실 봉토석실묘의 하나인 오국리 무덤도 4 세기경의 무덤 으로 볼 수 있으며 오국리 무덤과 안악 3 호분의 천장구조는 같다. 따라 서 리순지는 오국리 무덤을 안악 3 호분의 가무덤으로 보고 있다. 그 이 유는 오국리 무덤의 묘실이 안악 3 호분의 묘실과 동서로 나란히 놓여 있 으며 구조도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오국리 무덤의 전실과 주실 사 이에 문턱시설이 있고, 그 위에 이맛돌을 울려놓은 점과 묘실의 바닥을 모두 화강암으로 깐 점 등이 안악 3 호분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의 이유는 묘실에 사람뼈와 관의 혼적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종합하면, 오국리 무덤(안악 4 호분)은 안악 3 호분의 배총이라기보다는 안악 3 호분의 주인공이 일시적으로 묻혀 있었던 가무덤으로 추정하고 있 다 .22) 1) 李殿福 「集安高句麗墓硏究」, 《考古學報》 第 2 期, 1980, pp. 163-184. 2) 集安縣文物保管所, 「集安高句麗墓葬發堀簡報」, 《考古》 第 4 期, 1983, pp. 301 -307, 295. 3) 集安縣文物保管所, 「集安縣兩座高句麗積石墓淸理」, 《考古》第 1 期, 1979, pp. 27 -32, 50.
4) 吉林省文物工作除 • 集安文物管理所, 「 1976 年 集安洞 溝高 句麗 墓淸 理」, 《 考古 》 第 1 期, 1984, pp. 69-76. 5) 集安縣文物保管所, 「集安縣上 , 下活龍村高句麗古項淸理簡報」, 《 文物 》 第 111J l, 1984, pp. 64-70. 6) 魏存成, r 高句麗積石墓的類型和演變」, 《 考古學報 》 第 3 期, 1987, pp. 321-338. 7) 정찬영, 「기원 4 세기까지의 고구려 묘제에 대한 연구」, 《 고고민속논문집 》 5, 1973, pp. 1-62. 8) 주영한 「고구려 돌칸 흙무덤의 연원」, 《 력사과학 》 3 기, 1984, pp. 39-44. 9) 리준걸, 「고구려 벽화무덤의 해와 달그림에 대하여」, 《 력사과학 》 2 기, 1985, pp. 39-44. —, 「덕화리 2 호 무덤의 별그립에 대하여」, 《 력사과학 》 1 기, 1981, pp. 33-37. —, 「 28 수를 그린 진파리 4 호 무덤」, 《 력사과학 》 3 기,. 1984, pp. 46-47. —, 「고구려 별 그림 특칭」, 《 력사과학 》 2 기, 1983, pp. 27- 3 1. 10) 주영헌 • 박진욱 • 정찬영, 「고구려 무덤 벽화의 특징과 그 문화사적 의의」, 《 고 고민속논문집》 6, 1975, pp. 1-12. 11) 과학원 출판사, 「태성리 고분군 발굴보고」, 《 유적발굴보고 》 제 5 집, 1959, pp. 88-111 . 12) 라명관, 「평양시 상원군 일대의 고구려 무덤 조사발굴 보고」, 《 조선고고연구 》 3, 1986. 13) 김사봉, 「고산동의 고구려 우물」, 《 조선고고연구 》 1, 1986, pp. 43-44. 14) 안병찬, 「보산리 및 우산리 고구려 벽화 무덤의 연대에 대하여」, 《 조선고고연 구 》 2 호, 1987, pp. 20-26. 15) 박창수, 「평성시 지경동 고구려 무덤 발굴보고」, 《 조선고고연구 》 4, 1986, pp. 42-48. 16) 集安縣文物保管所, 「集安縣老虎i肖古墓」, 《 文物 》 第 1 期, 1984, pp. 71-74. 17) 張雲岩, 「吉林集安東大被高句麗墓葬發堀簡報」, 《 考古 》 第 7 期, 1991, • pp. 600 -609. 18) 리정남, 「운평리 고구려 무덤떼 제 4 지구 돌각담 무덤 발굴보고」, 《 조선고고연 구》 1, 1990, pp. 35-42. 19) 정세왕, 「덕화리 3 호 무덤」, 《조선고고연구》 1, 1991, pp. 22-25. 20) 리순지 「락랑구역일대의 고구려 돌간 흙무덤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4, 1990, pp. 2-9. 21) 최응선, 「창매리 돌칸 흙무덤 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 4, 1992, pp. 21-23. 22) 리순지, 「새로 발굴된 오국리 무덤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 1986, pp. 30 -36.
7 哥勿 77 각저총 4 감신총 5 강서세무덤 430 개마국 38 개모주 80 開 原龍 潭 山山城 93 蓋 平 84 건치 64 경신리 1 호무덤 430 耿鐵華 24 계단석실묘 314 계단식적석묘 105 계단적석묘 374 계제벽 150 고구려고분출토금속유물 399 고구려적 석묘내부결구 409 고구려적 석묘의구결구 408 고구려적석묘유형과 연대 407 고구려철기분석표 425 고국원왕 62 고산동고구려우물 438 고아산성 198 관구검기공비 51 관마장산성 153 관전현 37 광개토대왕비 57, 255
광서통보 133 국내성 113, 119 국내성지 264 국도 58 궁륭식 319 권운문와당 25 금강사지 219, 228 금동마구 403 금산 87 金縣大 墨 山山城 91 기물 24 길림 8 길림성문물공작대 18 L 나통산성 172 낙랑군 39 낙랑동 29 호무덤 485 낙양서진묘 340 남사리 37 호무덤 487 노령 49 누굽추 7 분 449 누 굽 추 구분출토유물 456 농안성지 101 激江 83
C 多室무덤 495 單室墓 358, 359, 360 單耳杯 462, 473 대고력묘자 10 대나주 80 대성 76 대성산성 208 大行城 85 덕화리 3 호봉토묘 483 덕흥리고분 431 陶權 382 도금유물 371 도성 1 돌각담무덤 423 돌관대 13 돌궐 74 돌기단무덤연대 423 돌칸흙무덤 426, 429 동대자 116 동대자제단 219 동대파 217 호고분 466 동대파고분 458 동대파봉토묘출토유물 470 동대파적석묘출토유물 464 동북민족사고 75 동북역사지리 75 同壤異穴雙室墓 371, 465
동탁 476 동태자 70 동학중 18 두문만대성산성 99 斗四溪井 292 등자 348 등전양책 6 燈塔岩州城 92 2 로남리고분군 416 로남리남파동 33 호무덤 489 로남리집터 219 리방 219, 246 리방구획 249 □ 마노장식 384 마면 112, 135 마미주 81 마선구 201 마선구고분구 305 만보정 M242 호 406 만보정 M78 호 . 410 만보정고분구 305 만주 6 말각조정 315
말갈인 73 망위자 16 정겁 32 맥구 34 명도전 425 명문토기편 386 모배령 45 모용황 50 목저성 61 무기단적석묘 478 무단적석묘 389 무순시 59 n 박시형 265 방기동 20 방단계단석실묘 313, 402 방단계단적석묘 395 방단계제적석묘 11 방단석실묘 400 방단적석묘 11, 264, 311, 393 방대 122 백금보 33 백민 34 백암 68 백암성 69 벽화 22 보산리고분 440
보산향 102 보호벽 9 本溪李 家 堡山城 95 봉석 9 봉석동실묘 315 봉석묘 415 鳳城山城溝山城 96 봉토동실묘 325, 375 봉토묘 357 봉토석실묘 290, 314 봉토석실벽화묘 319 부여 46 부연인 74 부이강 36 부조예군지인 31 북치 56 분충평축법 395 碑麗 66 비류수 46, 79 卑沙 77 卑쯤城 72 比列忽州 89 人 사신도 434 사신묘 321 사신총 4 사아식 319
사이호 328, 393 산상왕 43 산성자 2 산성자산성 42, 107 산성하묘구 287 山由岩高儉地山城 95 삼각고임 493 삼국사기 37 삼실묘 320, 366, 367, 368 삼족기 166 상오리사지 228 상원군일대고구려무덤 436 상활룡촌고분군 372 서강제 62 호분 7 서단산 32 서안성 114 西豊城子山山城 93 석광적석묘 354 城制 90 성지 90 세발솥 14, 344, 350 소수맥 36 소자하 54 손인걸 20 손진기 29 수렵총 5 수묘제도 286 수분하 47 순금제 기물 26
순천시남옥리 2 호무덤 487 시루 385 시조묘 70 識 IH 사 83 신개하 52 신당성 50 新賓木奇城址 94 신성 54, 59, 187 新城州 78 심귀리고분군 416 쌍냐가묵본 276 쌍실묘 287 。 안도오호산산성 100 安市州 82 안악 3 호분 429 안학궁터 220 압록 56 약수리무덤 220 양맥 35, 199 엄장록 26 S 자형재갇멈치 396 여성 65 여장 147 역성 88 연(燕) 55 연결묘 460
연길 홍안성 98 연변 74 연화문와당 397 염수 66 영문석 449, 450, 457 예 31 예맥족 29 오골성 71 오국리무덤 493 오녀산산성 44 오룡산성 61 오리형장군 474 오수전 186, 334 오회분 7, 321 옥저 35 옥저성 62 옹문 122 와당 25, 245 瓦房店馬圈子 91 왕건군 15, 269 왕청광흥산성 99 요동 63 요동성 430 요동성무덤 223 요수 67 요원용수산산성 101 욕살 76 용도 293, 415 용석 462
용정금곡산성 98 용흥강 40 우산 68 호적석묘 340, 350 우산리고분 441 우산하 108 호 289 운평리적석묘군 476 원구식적석묘 105 위나암 43 위나암성 38, 109 위서 67 위존성 17 유기단적석묘 21 유수림자 3 유영지 23 유하나통산성 97 육성 64 은성 86 異曲同工法 406 이불란사 3 이실묘 362, 363 이전복 19 이진희 283 인물풍속화 432, 433 임강 1 임지덕 17
x: 자루달린 솥 14 葬具 475 장군총 313 장령 49 장박량 71 장백현 41 장사산유적 140 장설암 16 장수산성 253 장수왕 53 장안성 212 장천 12 장천고분군 303 莊河旋城 92 적석묘 357, 388, 415 적석묘 52, 373 적석석광 414 전방후원분 482 절노부 187 절두방추형 13 점장대 108 정릉사지 228 정백동 101 호무덤 485 제등총 8 조거용장 51 졸본 45 졸본성 58
주실 12 지경동고분 444 진대위 21 진도복 23 진상위 22 집안 1 집안고성 42 집안성지 97 집안현성 19, 107 * 차단성 15 창매리돌칸흙무덤 490 창암주 81 책성 47 任長 55 철배산 60 철제혁대고리 383 청동제도장 27 청암동토성 232 淸原南山城 94 청천강 48 초두 344 칠성산 96 호적석묘 340
w 태성리고분군 435 태자성 188 태자하 89 토성리건물지 235 토제방추차 387 통구 1 통구고분군 302 통구고분군 355 통구사신무덤 431 통화 1, 39 고: 팔각건물 236 패왕조산성 153 평곽성 69 평양성 41 -_o 하활룡촌고분군 377 한성 68
漢平郭 79 합달령 48 海東金石苑補遺 277 행엽 348 현도군 40 현도성 87 화룡팔가자산성 100 화암 27 환도 10 환도성 1, 110 환두대도 106 환두철도 379, 380, 381 환인 1 환인 M12 호 413 환인 M15 호 412 환인현성 106 황룡사 232 황성 53 橫山 85 횡혈식석실묘 401 後黃城 86 휘발하 33 혹구산성 158 홍승골성 44, 104
최무장 경희대 중국문학과 졸업 국립 대만대학 고고인류학과 대학원 졸업 (석사) 프랑스 파리 1 대학 고고학과 대학원 수료(고고학 박사) 현재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및 박물관장 저서 『 한국의 구석기문화 』 r 중국의 고고학 』 고구려 고고학 1 대우학술총서 • 인문사회과학 85 1 판 1 쇄 찍음_ 1995 년 7 월 30 일 1 판 1 쇄 펴냄 _ - 1995 년 8 월 15 일 지은이_崔茂 藏 펴낸이_朴孟浩 펴낸곳 一― (주) 민음사 전산조판一―동국전산(주) 출판등록 1991 . 12.2 0 . 제 16-490 호 서울 강남구 신사동 506 강남출판문화센터 5 층 515-2000( 대표전화) 515-2007( 팩시밀리) 값 15,500 원 Print e d in Seoul, Korea © 최무장, 1995 역사, 삼국시대 /KDC 911 . 032 ISBN 89-374-3085-1 94910 89-374- 3 000-2 (세트) *지은이와 합의하여 인지를 붙이지 않습니다.
대우학술총서(인문사회과학) 1 한국어의 계통 김 방 한 46 어원론 김방한 2 문학사회학 김현 47 조선의 서학사 강재언 3 商周史 윤 내 현 48 한국음악학 이강숙 4 인간의 지능 황정규 49 中國言語學 문 선 규 5 中國古代文學史 김학주 50 스포츠 심리학 6 日本의 萬葉集 김사엽 류정무 ·이강 헌 7 現代意味論 이 익 환 51 原始儒敎 김승 혜 8 베트남史 유 안선 52 전쟁론 김 홍철 9 印度酉學史 길 희 성 53 삼국시대의 漢字音 10 韓國의 風水思想 최창조 유창 균 11 사회과학과 수학 이승훈 外 54 베르그송의 철학 김형효 12 重商主義 김광수 55 아날학파 검 옹 종 13 方言學 이익 섭 56 자유주의의 원리와 14 構造主義 소 두영 역사 노 명 식 15 외교제도사 김홍철 57 국민투표 구병 삭外 16 아동심리학 최경숙 58 한국서지학 천혜봉 17 언어심리학 조명한 59 조선통신사 이 원식 18 法社會學 양건 60 明末淸初思想 배 영동 19 海洋法 박준호 · 유 병 화 61 한국의場市 이재하 홍순완 20 韓國의 庭園 정동오 62 고려시대의 后妃 정용숙 21 현대도시론 강대가 63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 22 이슬람 사상사 김정위 김욱동 23 동북아시아의 岩刻 畵 황용훈 64 韓國의 服飾美 김영자 24 자연법사상 박 은정 65 정신신경증 이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