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히다之 口기- 서울대학교 문리대 중문과 졸업 국립대만대학 國 文 硏究所 졸업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 현재 서울대학교 중문과 교수 저서 『 중국문학서설 』 『 공자의 생애와 사상 』 『 중국고대문학사 』 『 논어 』 외 다수

중국 고대의 가무희

중국희극사의 새로운 정립을 위하여 金學主 지음 미L,으口 A t

산서성 (山西省) 홍동현(洪洞縣) 수신묘(水神廟)에 있는 원(元)대의 희극을 하는 벽화(壁 畵 )의 모사(模 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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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漢) 사천(四川) 성도(成都) 천회산(天回山) 무덤에서 나온 설창(說唱)을 하는 도용(陶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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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이 책은 중국희극사 를 새로 쓴다는 입장에서 이룩한 것이다. 책 제명을 『중국 고대의 〈가무희〉』라 한 것은 대부분의 학자들 이 본격적인 연극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상고시대로부터 송(宋)대에 이르는 〈중국 고대〉의 연극발전사를 〈가무희녔t 중심 으로 추구해 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 (jc) • 명 (明) • 청 (淸)의 〈가무희〉와 현재의 〈나희 (灘戱)〉에 관한 논술은, 그것들을 소개하는 성격을 크게 넘어서지 못한 〈부록〉과 같은 내용의 것들 이다. 곧 〈새류 쓰고자〉 한 『중국희극사』의 중요 부분이 상고시대 로부터 송대에 이르는 시기의 〈고대〉임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중국의 희극徵劇)은 크게 〈소희 (小戱)〉와 〈대희 8 漏i)〉로 나누 어진다. 〈소희注근 옛날 중국에 유행하던 〈산악(散樂)〉 이하 여러 가지의 간단한 놀이 또는 연극 등을 가리키는데, 〈가무회〉가 그 중심을 이룬다. 〈대회 X 근 북송(北宋) 말년 (1126) 무렵에 생겨난 〈회문徵文)冷t 비롯하여, 원대의 〈잡극燁劇)〉 • 명대의 〈전기 (傳 奇)〉 • 청대의 〈화부회 (花部戱)〉 등울 가리킨다. 그런데 중국 학자 들은 거의 모두가 〈소희冷근 성숙되지 못하고 아직 제대로 발전하 지 못한 불완전한 희극이고, 〈대희〉야말로 성숙되고 제대로 발전 된 완전한 희극이라 믿고 있다. 그 때문에 이제까지 나온 중국회 극사 들은 왕국유任國維)의 『송원희곡사(宋元戱曲史)』를 비롯하여 거의 모두가 〈대희녔t 위주로 하여 씌어진 것이다. 그것은 모든 학자들이 중국의 희극을 연구하면서도 근대 희극의

개념 또는 서양 희극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연 극뿐만 아니라 중국의 모든 전통적인 예술은 상칭적이고 함축적인 미의 표현을 추구하는 시적인 기법을 존중해 왔다. 그 중에서도 연 극은 특히 〈 소희 〉 에서 〈 대희 〉 에 이르기까지 모두 시가와 음악과 무용을 그 미학적인 기초로 삼아 연출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 소 희났근 민간의 종교나 계절제 등과 관련이 깊고, 민중의 생활에서 우러난 것이기 때문에 연출자와 관중이 한데 어울리어 즐기는 오락 적인 놀이로서의 성격도 두드러졌다. 곧 〈 소희났근 제의 (祭儀)와 더 불어 연출되는 경우가 많았고, 또 〈 가무회只룹 중심으로 하여 단순 한 가무와 여러 가지 잡희 (雜戱)가 뒤섞여 연출되는 것이 보통이었 다. 따라서 근대연극의 개념에서 보면 중국의 〈 가무희片근 연극이 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성격의 것이다. 그러나 〈소 희〉 중에서도 〈노래와 춤으로 간단한 고사(故事)를 연 출하는〉 〈가무희났큰 중국의 정통문화를 대표하는 중국의 희극인 것이다. 왕국유가 『희곡고원~ 〈 대희녔t 중심으로 하 는 중국희극을 정의하여 〈노 래와 춤으로 고사를 연출하는 것 〉 이라 말하고 있는 것은 〈가무희 〉 의 중국 회국사상의 의의를 확인시켜 준다. 제여산(齊如山)은 그의 『국극예술휘고(國劇藝術 葉 考)』의 전 언(前言)에서 지금 중국에 연출되고 있는 〈 대희 〉 의 대표적인 극종 인 경회 (京戱)의 특징을 대략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요약하고 있 다. 첫째, 유성필가(有聲必歌), 모든 연극에서의 소리는 가창의 성격 울띤다는것이다. 둘째, 1 동철무(無動不舞), 모든출연자의 움직임은무용의 성격 을띤다는것이다. 셋째, 진짜 물건이나 그릇은 무대 위에 올려 놓지 못한다. 소도 구도 모두 상칭적인 물건을 쓴다.

넷째, 사실적이어서는 안 된다. 조금이라도 사실적인 동작이 있 어서는안된다. 이상의 특징은 경희뿐만 아니라 원 잡극(雜劇) • 명 전기 (傳奇)는 물론 중국의 모든 고전희극에 적용되는 특징이다. 그리고 그것 모 두 옛 〈가무회〉에서 나온 것임을 누구나 쉽사리 알 수 있다. 이 때 문에 〈가무희〉야말로 중국의 정통문화를 대표하는 연극이라고 할 수있는것이다. 이 〈가무희났근 은(殷)나라 이전부터 무습~ 민간신앙에 의하여, 계절 따라 신에게 풍년을 기원하거나 여러 가지 소망을 빌 고, 또 신의 힘을 빌려 불행이나 역귀 峻魂)를 쫓아낼 때 , 또는 신 에게 빈 소원이 이루어져 감사하는 의식을 행할 때 생겨난 것이었 다. 이 때 신을 상칭하기 위하여 가면을 만들어 썼기 때문에 일찍 부터 〈가무희났三 가면놀이가 그 중심을 이루었다. 후세에 신과의 관계는 멀어지고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가무회〉로 발전하기도 하 고, 도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평소에는 점잖던 사람이 남 앞에서 마음껏 춤추고 노래 부르기 위해서도 가면이 필 요했던 듯하다. 은나라 때의 가면이 여러 개 출토되었고, 주 OO) 나 라 때 나 (1 難)에서는 방상씨 (方相氏)를 비롯한 수많은 가무를 하던 주역들이 가면을 썼으며, 『초사礎辭)』 「구가(九歌)」에서 신에게 제서를 지내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을 적에도 무당들이 가면을 썼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한(漢) ·위진(魏晋) ·남북조(南北朝) • 수당(隋唐) • 송(宋)을 동하여 〈가무희只三 계속 발전하여 중국의 전 통적인 연극으로자리를잡게 된다. 다만 중당(中唐)시대에 와서는 〈가무희〉에서 가면이 사라지는 한 편 후세의 〈대희〉에서 두드러지는 여러 가지 정식 (程式)이 그 연출 방식이나 구성에 생겨난다. 그렇게 변화하는 〈소희났든 결국 송 (宋) 잡국(雜劇)과 금(金) 원본(院本)을 이룩하게 된다.

〈 가무희 〉 가 중국의 정통문화를 대표하는 연극이라는 말은, 곧 남송 (南宋) 이후에 발전한 원 잡국 • 명 전기 • 청 ( 淸 ) 화부회 (花部 戱) 등의 이른바 〈 대희 〉 가 중국의 정통문화라는 개념으로부터 벗 어난 성격의 것임을 뜻하기도 한다. 중국의 고전희극은 시가와 음 악과 무용을 그 미학적인 기초로 삼는 종합예술이기 때문에, 북송 말년 (1126) 무렵울 경계로 하여 중국희극이 〈소 희 〉 로부터 〈 대회 〉 로 급변하였다는 것은 바로 중국문화 전반에 걸친 일대 변전을 뜻 하게도 된다 . 곧 북송 말을 계기로 하여 중국의 문학이나 음악 • 무 용 등 중국의 전통문화나 예술이 전반적으로 크게 변화하였다는 것 이다. 〈가무희 〉 의 연구롤 통해서 확인된 중당시대의 변화와 북송 말엽의 일대 급변은 연극뿐만 아니라 중국문화사나 중국사상사 등 여러 각도에서 그 원인이나 성격 등울 더 깊이 연구해야만 할 큰 과제로남게 되었다. 이 책과 거의 동시에 서울대 출판부에서는 『 한 • 중 두 나라의 가 무倻녔을)와 잡희 (雜載)』가 출간된다. 그 책에 실린 논문들이 이 책 의 중요한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으니 참고하기 바라며, 이 책 끝 머리의 「제 7 장 현 중국의 나희 (灘戱)」는 고대의 〈 가무희처} 이해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져 참고삼아 덧붙인 것이다. 〈가무희〉에 관하여는 연구자료나 기록이 매우 적어 그 발전의 맥락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중 국희극사 』 를 새로운 입장 에서 쓴다는 거창한 의욕을 앞세워 착수한 것이기는 하나, 결과를 놓고 볼 때 그에 관한 문제라도 올바로 제기한 것인가 하는 두려운 마음조차 갖게 된다. 독자 여러분들의 거리낌없는 고견과 가르침 이 있기를간절히 빈다. 1994 년 6 월 12 일 김학주씀

차례

머리말 7

제1장 서론-13

1 가무희란 무엇인가 • 13

2 〈가무희〉의 특징 • 19

3 중국 고전희극의 종류 • 29

4 중국문화 속의 가무희 32

제2장 선진(先秦)의 〈가무희〉-37

1 선진시대 〈악(樂)〉의 개념 • 37

2 정악(正樂) 속의 〈가무희〉 • 41

3 산악(散樂)과 나( ) • 48

4 무무(巫舞) • 58

5 우희(優戱) • 79

제3장 진한(秦漢)의 〈가무회〉-85

1 한(漢)초 초풍(楚風)의 성행 • 85

2 무(巫)와 나(難) • 90

3 산악(散樂)과 잡희 (雜戱) • 103

4 〈가무희〉 • 117

제4장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의 〈가무희〉-133

1 위진(213-419)의 〈가무회〉 • 133

2 남조(南朝)의 〈가무회〉 • 149

3 북조(北朝)의 〈가무희〉 • 175

제5장 수당(隋唐)의 〈가무희〉-187

1 수대의 가무희 • 187

2 당대 〈가무희〉의 대체적 상황 • 193

3 옛 것을 계승한 〈가무회〉 • 201

4 호희 (胡戱) • 226

5 당대에 생겨난 〈가무희〉 • 251

6 오대(五代)의 〈가무희> • 263

제6장 송(宋)과 그 후의 〈가무희〉-269

1 송대〈가무희〉의 발전 • 269

2 송잡극(宋雜劇) • 273

3 악곡(樂曲)을 사용한 잡극(雜劇) • 288

4 나희( 戱)의 발전 • 295

5 금(金) 원본(院本) • 302

6 원(元) • 명(明) • 청(淸)의 〈가무희〉 • 306

제7장 현대 중국의 〈나희( 戱)〉-323

부록 그림으로 보는 중국회극사 • 351

찾아보기 • 377

제 1 장 서론 1 가무희(歌舞戱)란 무엇인가? 〈가무희〉란 한 마디로 설명하면 〈노래와 춤으로 엮어지는 일종 의 놀이 〉 라 할 수 있다• 『구당서 (舊唐書)』 권 29 「악지 偶g志)」에, 가무회에는 대면 8 面) • 발두(擦頭) • 답요낭價瀋線) ·굴뢰자(窟連 子) 등의 희 債戈)가 있다. 1)

1) 면輝書』 여님贛財접漁面 • 擦頭 • 踏描娘 • 窟邊子等戱 側f 杜佑의 『通典』 권 14 어도 보임).〉

라고 한 것이 그러한 쓰임의 보기이다. 〈대면〉 〈발두〉 〈답요낭 X 는 노래와 춤으로 간단한 정철 (情節)이 있는 이야기를 연출한 당대 璃; 代)에 유행했던 가무회의 이름이며 ,2) 〈굴뢰자났근 괴뢰희(偶偏戱) 라 부르는 우리나라 꼭두각시놀이와 같은 것인데, 같은 책에 〈인

2) 뒤 唐代의 歌舞戱를 설명할 때 자세히 논의될 것임 .

형을 만들어서 하는 놀이인데, 노래와 춤을 잘 하였다 〉 3) 라는 설명 이 덧붙여 있다.

3) 〈作偶人以戱, 善歌舞.〉

그러나 중국에 옛날부터 〈 가무희〉라는 특수한 종류의 놀이나 연 극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주례 (周禮)』에도 이미 보이는 〈산악(散 樂) 〉이나 〈나 (1 難) >같 은 종교의식 , 옛 민간의 〈가무 (歌舞) 〉 와 〈 잡 기 (雜使)只룹 바롯하여, 한대 (漢代)에 성행한 〈각저희 (角抵載) 〉〈 참 군희 (參軍戱) >〈 골계희 (滑稽戱) >〈 백희 (百戱) >속 에 섞 여 〈 가무희 > 는 연출되어 왔다. 다만 여기에서 〈 가무회只문 문제로 삼게 되는 것은, 〈가무회 〉 야말로 북송(北宋) 이전의 중국 정통문화를 대변할 만한 연극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증영의 (曾永義)는 중국의 희극徵劇)을 크게 〈소희 (小戱)〉와 〈 대 희 8 滋)〉로 니누고 있는데 ,4) 〈 소희〉란 북송 이전 중국에 유행하 던 〈산악〉 이하 여러 가지 간단한 놀이 또는 연극 등을 가리키고, 〈대희〉란 북송 말년 (1126) 무렵에 생겨난 〈 희문®i文, 또는 南戱) 〉 울 비롯하여 〈원집극保雜劇 또는 ~t曲) >〈 명전기 (明傳奇) > 및 지 금도 중국 각지에 성행되고 있는 〈 경희 (京戱, 또는 京劇) 〉 와 여러 가지 지방희 (地方戱) 동 규모가 비교적 커진 연극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중국에 태고적부터 있어 온 〈소희처t 대표하는 연극을 〈 가 무희〉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증영의는 〈 ‘ 소희 ' 는 희극의 추형(難型)이고, ‘ 대회’는 희극예술의 완성된 형식이다〉 5) 라고 말하였고,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이 중국희

4) 曾永義, 『詩꼽맘렐戌曲 』 ( 臺北 , 聯 經 ) , 「中國地方戱曲形成與發展的經路」 생邱謂 ‘小戱 ' , 就是演員少至兩三個, 情節極爲簡單, 藝 術形式尙未脫離鄕土 歌j之驛 ; 反之, 則稱爲大戱, 也就是演員足以粉飾各色人物, 情 節複雜曲折, 藝 術形式已屬完整的戱劇之總稱. > 5) 上同 〈'j벤 E' 是戱劇的誰型, ‘大戱'是戱劇 藝 術完成的形式. >

극은 북송 말년 무렵의 〈 회문 〉 과 〈 잡극 〉 에서 시작된 것이라 보고 있다. 6) 그러나 상고시대로부터 북송에 이르는 중국의 역사를· 통하 여 그 희극을 대표하는 것은 〈 소희 〉 인 〈 가무회 〉 인 것이다. 다만 〈 가무회 〉 의 연극적인 성격이 문제가 되는데, 이에 대하여는 뒤에 다시 논의할예정이다.

6) 李肖泳 • 黃天謨 • 袁鶴翔 • 夏寫時 共編, 『 中國戱劇起源』 U:海, 知識出版 社) 참조.

〈 가무희冷근 노래와 음악과 춤을 위주로 연출되는 일종의 종합예 술이다. 예부터 위로는 임금과 귀족들, 아래로는 민간의 백성들에 이르는 온 국민이 좋아하고 줄기던 연예였다. 따라서 〈 가무회났즌 다른 어떤 종류의 예술보다도 중국의 전통문화를 가장 잘 대변한다 고볼수가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학자들조차도 희극으로서의 〈가무희녔t 소홀히 여기게 된 까닭은, 무엇보다도 원대 保;代) 이후 중국의 희 극계가 〈 대희 〉 인 집국(雜劇)과 전기 (傳奇) 등에 압도당하였기 때문 일 것이다. 〈 대희 〉 가 나온 뒤에는 중국사람들 스스로 본격적인 중 국의 고극(古劇)은 희문徵文)과 잡극(雜劇)에서 비로소 시작되었 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희극연구는 근세에 이르러 활발 해졌고 거기에는 서양희곡의 개념도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간단한 정절(情節)의 얘기를 노래와 춤으로 연출하는 〈가무희녔t 연극으로 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게다가 〈가무희났근 그 대본이 나 각본도 전하는 게 하나도 없고, 심지어 그 연출상황에 대한 기 록도 간단한 것들이 얼마간 있을 따름이어서, 일반적으로 〈가무 희녔} 연극이나 예술로서 다룰 만한 게 못 된다고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가무희 X 드 시대와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발 전되어 온 연희인데다가, 그것에 관한 기록마저도 별로 많지 않아 그 실상을 올바로 파악하고 이해하기조차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가무희〉의 연극으로서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희 徵)〉 자에 대한 중국사람들의 개념을 올바로 파악할 필요가 있 을 것이다. 동한(東漢) 허신(許障 55-147) 의 『설문해자(說文解 字)』를보면, 회 倻)는 삼군(三軍)의 편(偏)이다. 일설에는 병 (兵)의 뜻이라고도 한다. 과(戈)에서 뜻을 취하고 희 (澄)에서 소리를 취하였다. 7)

7) 『說文解字』 (,Ji, 三軍之偏也. 一曰,兵也. 八戈澄聲. >

라는 설명을 하고 있다. 〈삼군冷든 제후(諸侯)의 군대를 뜻하며, 〈편냈는 『주례 (周禮)』 지관(地官)에서 〈 50 명이 편(偏)을 이룬다 〉 하 였고, 『 사마법 (司馬法)』에선 〈전차 25 승(乘)이 편을 이룬다〉 하였 으니, 션 D 은 군부대의 단위임이 분명하다. 〈병 (兵 )X 본 무기를 뜻 한다. 어떻든 〈희〉지는 본시 군대와 관계가 있는 글자였는데, 〈서 로 싸운다났큰 뜻에서 〈서로 힘을 겨룬다〉, 〈서로 재주를 겨룬다〉 는 뜻으로 발전하고, 다시 〈놀이하며 즐긴다* 뜻까지 이루게 된 것이다 .8)

8) r 說文解字』 「段玉裁 注」 참조.

다시 〈희 (澄)〉자에 대하여는 『설문해자』에서 〈옛 도기 (陶器)이 다. 두澄)에서 뜻을 취하고 호悼)의 소리를 취하였다〉 9) 라고 설 명하고 있다. 〈호悼)났근 〈호랑이 무늬〉이며, 〈두遷)났근 제기 ~ 器)이니, 〈희 (澄)났근 곧 〈호랑이 무늬가 새겨진 제기〉이다. 옛 사 람들은 조상 앞에 힘을 상칭하기 위하여 그러한 그릇을 썼는데, 뒤 에는 그 뜻을 창과 같은 무기를 들고 추는 춤으로도 나타내게 되어 〈희 滋)〉자가 이루어전 것이다. 〈희(戱)났근후세에 생겨난 속체의 글자이다.

9) 『說文解字』 〈慮 古陶器也. A 豆虎聲. >

청대 (淸代)의 요회 0( 姚華 1876-1930) 는 『담희극(談戱劇)』에서 희 倻)는 무기로써 다투는 데서 시작하여 힘을 겨룬다는 뜻으로 넓 혀지고, 다시 지혜를 다투는 것으로 발전하여 입으로 다투는 데에까 지 이르고 있는데, 이것이 과(戈)의 뜻을 취한 경위이다. 희倻t)는 제사에 근원을 두고, 그 뜻은 희(澄)에 것들여 있으며, 춤으로 표현하는 데까지 발전했는데, 모두가 무사(武事)이다. 10)

10) 『談戱劇』 여問兵, 廣于鬪力, 而沒造于鬪智, 極于鬪口 , 是 A 戈之義 也. >여 罰原于祭, 意寫于澄,演暢于舞, 皆武事也. >

라고 이를 설명하고 있다. 다시 요화와 같은 시대의 마존포(馬尊 抱)는 『희원 徵源)』에서 『설문해자』에 보인 〈삼군지편 (三軍之偏) > 이란 말과 관련된 희 徵)자의 뜻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삼군(三軍)의 편 (偏)이란 편군(偏軍)이라 말하는 것과 같고 또 후 세의 기병 (奇兵)이란 말과도 같다. 그것은 적을 희롱하는 것이므로 뜻이 발전하여 서로 희롱한다는 뜻이 생기게 된 것이다. 희 個;)는 처 음엔 서로 농지거리하는 것이었는데 간혹 희 僚t)는 희 (禧, 희롱하다) 의 뜻이니, 사람들로 하여금 희롱하며 줄기게 한다는 뜻이라고도 한 다. 이것도 늘어난 뜻에서 나온 것이나, 반드시 서로 희롱한다는 뜻 이 올바론 해석이라 할 것이다. 11)

11) 『戱源』 〈三軍之偏, 猶謂偏軍, 亦猶後世謂奇兵, 蓋所以弄敵, 引申有相弄 之血 戱初以相階祖, …… · 或謂戱, 禧也, 令人禧樂也. 此以得引申之諭, 然必以相弄之諱爲正. >

이것도 〈희〉 자가 군대에 관한 일로부터 〈서로 희롱한다났큰 뜻으 로의 발전을 설명한 것이다. 옛날에는 무무(武舞)는 〈무(武)〉라 부

르고 문무(文舞)는 〈무(舞)〉라 불렀는데, 이것도 군대와 춤의 관계 를 암시하는 것이어서, 희 ~ 자의 뜻의 발전에 참고가 된다. 『좌전 佐傳)』울 보면 여러 곳에 전쟁터에서 악사(樂師)가 일정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12) 이것도 춘추(春 秋)시대에 있어서의 음악과 전쟁의 연관을 암시해 준다. 다시 『좌 전』 권 16 희공(僖公) 28 년의 유명한 〈성복지전(城液之戰)〉의 기록 울 보면, 초湜)나라 자옥(子玉)이 진(晉)나라 임금에게 도전할 때 〈청컨대 임금님의 군사와 희 倻i)를 벌이도록 합시다〉 13) 라고 말하 고 있다. 여기의 〈희 徵)났근 〈무술을 겨룬다났즌 뜻이 주이면서도 유희성 (遊拔性) 또는 연희성 (演戱性)도 지닌 무술의 겨룹을 뜻하는 말인듯이 여겨진다.

12) 『左傳』 襄公 1 핵, 晋의 師廣, 成公 액리 楚의 樂師 鍾儀, 僖公 2 객컴 師籍 등에 관한 기록들이 그 보기이다. 13) 『左傳』 〈請與君之士戱. >

이미 춘추시대에 〈희 徵;)〉라는 말은 무술을 겨루는 데서 시작하 여 유희 (遊鼓)와 일락(逸樂)을 거쳐 잡기 (雜使)와 가무傳舞)에까지 이르는 광범한 〈놀이〉와 〈연예녔卜 뜻하는 것으로 발전하고 있다. 『설문해자./1에서 〈배 (俳)〉 자를 〈희 徵)의 뜻〉이라 설명하고 있고, 『정운(正韻)』에서 〈우(優)〉 자를 〈조희 (調戱)〉의 뜻이라 설명하고 있는 것 등이 모두 그 때문이다. 참고로 희극徵劇)의 〈극(l;IJ)〉 지를 보아도 〈칼도(刀)〉변이니, 군사와 관련이 있는 글자임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설문해자』를 보 면, 또 〈거 (康)는 풀리지 않고 서로 디툰다는 뜻이다. 시 (~) 자와 호情) 자로 이루어진 것은, 멧돼지와 호랑이가 멈추지 않고 다툼 울 뜻한댜 일설에는 호랑이가 두 발을 들고 있는 형상이라고도 한 다〉 14) 라고 설명하고 있다. 〈시 (家)와 호僚;)〉 자는 단순한 군사뿐

14) 『說文解字』 〈慮 相持不解也. 八家虎, 家虎之鬪不捨也. 一曰, 虎兩足

만이 아니라 옛 사람들의 사냥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사냥을 하 는 것도 일종의 솜씨를 겨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극 ®l) 〉 자 도 전쟁이나 사냥에서 다투고 겨룬다는 뜻에서 희극이나 연극의 뜻 으로까지 발전하였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본시 〈희 儒;) > 또는 〈희극~J)〉이란 말에는 〈다툰다· 겨룬다났근 뜻에서 놀이를 하고 즐긴다는 뜻이 모두 담겨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무희났근 〈노래와 춤으로 연출되는 놀이〉이지만, 무술 울 겨루는 일〔角抵) • 재주를 부리고 겨루는 일〔雜使〕 • 우스개놀이 〔滑稽戱〕 • 노래와 춤〔歌~) -인 형국〔偶f副伐〕 • 연극 등 여러 가지 연 예 (演藝)가 모두 연관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무희〉의 주 종은 〈노래와 춤으로 간단한 얘기를 연출하는 일종의 놀이 또는 연 극〉이다. 대부분의 중국희극 연구가들은 이처럼 여러 가지 연예가 복합적으로 연출되었기 때문에 〈가무희녔t 완전한 연극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많지만, 〈가무회〉야말로 북송 이전의 중국 정통문화 를 대표하는 연극이며 예술이라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2 〈가무회〉의 특징 〈가무희났근 중국의 희극학자들로부터도 별로 중시되고 있지 않 다. 그러나 〈가무희났근 북송 이전의 중국 정통문화를 대표하는 연 극이기 때문에, 이미 거기에는 〈대희〉까지도 포함하여 중국 고전 연극이 지니는 여러 중요한 특칭들이 다 갖추어져 있다. 모든 중국 고전희극의 미학~ 기초는 시가• ' 음악과 충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15) 노래와 춤으로 얘기를 연출해 내는 것이 옛날

擧〉 15) 曾永義, 『中國古典戱劇論集』 (臺北, 聯經) , 「中國古典戱劇的待質」 참조.

의 〈가무희〉에서 시작하여 원잡극~J) 명전기 (明傳奇)를 거쳐 지금의 경희 (京戱)에 이르는 중국 고전희극 연출의 기본형식이다. 가곡闇 k 曲)과 무용을 바탕으로 하여 희극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중 국에선 연극을 〈곡(曲)〉 또는 〈희곡徵曲)〉이라 부르기도 하였던 것이다 .16)

16) 明 王世貞 『曲漢』 등의 曲論 및 元 陶宗儀, 『綴耕錄』에서 〈粹官廢而傳 奇투, 傳奇作而戱曲繼. 金季國fJJ, 樂府猶宋詞之流, 傳奇猶宋戱曲之變, 世 傳謂之雜劇〉이라 한 것이 그러한 보기이다.

앞에서 〈희 徵)〉라는 말 자체가 제사와 관계가 있다는 설명을 하 였지만, 〈가무회〉도 일찍부터 여러 신들에 대한 제사나 신과 관계 되는 행사와 밀집한 관계 아래 발달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가무· 희冷곤 일찍부터 신 또는 귀신과 관계가 있는 탈을 쓰고 하는 가면 극 또는 가면놀이가 그 주종을 이루어 왔다. 다음 장에서 설명할 은대 (殷代)의 가면 및 고대의 〈나 (1 難)〉, 『초사礎辭)』의 「구가(九 歌)」, 그 밖에 당대 傅代)에 이르기까지 행해지던 대표적인 〈가무­ 희冷回 모두 가면회이다. 따라서 중국의 〈가무희났즌 다시 〈가면 희〉가 그 중심을 이루어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송대 (宋代) 이후로 도 그 전통은 그대로 민간에 전승되어 마지막 장에서 소개할 중국 각지에서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나희 (1 勘敗)〉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중국의 고전희극은 연극이면서도 시가 • 음악과 춤 을 그 미학 기초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 표현기법은 사실적이지 않고 상징적일 수밖에 없다. 제여산(齊如山)은 『국국예술휘고(國劇 藝)』의 제 1 장 「전언(前言)」에서 〈국국(國劇)〉의 원리를 다음 과 같은 몇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는 유성필가(有聲必歌)이다-극히 간단한 소리도 가창倻k 唱)의 뜻을 지녀야만 한다.

둘째는 무동 절-무 (無動不舞)이다――극히 미소한 동작도 충의 뜻을 지녀야만한다. 셋째는 진짜 물건과 그릇은 무대 위에 올려놓지 못한다―_-모든 전 짜 같은 물건들은 무대 위에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넷째는 사실적이어서는 안 된다――-조금이라도 진짜 같은 동작이 있어서는 안 된다. 17)

17) 『國劇藝術紹』 〈有聲必歌, 極簡單的聲音, 也得有歌唱之義. 無動不舞, 極微小的動作,也得有舞之義.不許眞物器上臺,一切像眞的東西,在臺上不 許應用. 不許寫眞, 一點像眞的動作不許有. >

여기의 〈국국-(國劇)〉이란 바로 경희 (京戱)를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에서 논한 〈 국극의 원리났근 이미 노래와 춤을 위주로 하는 〈가무희〉의 상칭적인 성격에서 모두 이루어진 원리인 것이다. 따라서 〈가무희注근 일정한 정절(情節)이 있는 얘기를 연출하면서 도, 그 이야기의 줄거리는 별로 중시되지 않는다. 얘기는 가창倻: 唱)이나 춤의 기량을 발휘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러 한 특칭은 원잡극債雜劇) 이하 경희 (京戱)에 이르는 〈대희녔텨]도 그대로 계승되어, 중국의 고전희극에서는 이야기 줄거리의 새로운 창작을 별로 중시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중국 고전희극에서의 이 야기 줄거리는 중국사람이라면 위아래를 막론하고 누구나 찰 아는 역사적인 이야기나 전설을 활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무희〉 는 연극에 가까운 연회 (演戱)이면서도 보다 서정적 (托謝內)이고 시 적 (詩的)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연예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연극의 상연장소를 〈무대 (舞 臺 )〉라 부르고 있는 것 도 〈가무희〉에서 유래된 것임이 분명하다. 근년 여러 곳에서 발굴 된 북송대 (北宋代)의 무대의 비기 (碑記) 중의 호칭만 보더라도 〈무 정 (舞亭) >〈 무루 (舞樓) >등 이 보인다. 18)

18) 北宋 天禧四年 {1020) 에 세운 山西 萬榮縣 橋上村 后土廟 碑文에 〈 舞 亭〉 이란 기록이 보이고, 北宋元豊三年 {1080) 에 세운 山西 t硏縣 關帝廟碑文 과 北宋元符三年 {1100) 에 세운 山西 平 )I 圓縣 東河村 九天聖母廟 碑文에 〈舞樓〉라는 기록이 보인다(『宋金元戱曲文物圓論』, 山西師範大學 戱曲文物 硏究所 編, 山西人民出版社 刊 참조) .

다시 맹원로(孟元老 1126 년 전후)의 『 동경몽화록(東京 夢華 錄)』 유월이십사일신보관신생일(六月二十四日神保觀神 生 日) 같은 곳에는 〈노 대 ( 露물 ) 〉 란 말이 보이는데 , 〈 노천 ( 露 天) 에 만든 무대 ( 舞臺 ) 씨t 뜻할 것이다. 특히 민간 연예인들은 대체로 노천의 무대에서 연회 룰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동경몽회~ 비롯하여 내득 옹(尉得翁 1235 년 전후)의 『 도성기승(都城紀勝)』, 오자목(吳自牧, 1270 년 전후)의 『 몽량록(夢梁錄) 』 등에 보이는 〈구 란(句桐) 〉 이나 〈악붕(樂桐)〉 〈산붕(山楠) 〉 등의 말도 가설무대를 나무때기로 간략 하게 만든 데서 비롯된 호칭일 것이다. 무대가 이처럼 간단하였기 때문에 〈가무희녔十 비롯한 중국의 옛날 연희는 출연자와 관중의 사이가 극히 밀접하였다. 그것은 〈 가무희 〉 가 〈관중 중심〉의 것이 었다고 할 수도 있을 정도이다. 각본(脚本)을 만든 이가 따로 있고 연출자도 다르지만, 〈가무희났근 그 놀이의 구성이나 연출까지도 관중의 참여를 통해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뒤에 실제로 옛날 〈 가무희 〉 의 성격 검토를 통 해서 다시 설명하게 될 것이다. 많은 경우엔 특별한 무대도 없이 널찍한 마당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적당히 놀이판을 벌이는 경우도 많았던 듯하다. 〈 가장(歌 場)〉 19) 〈회장徵場)〉 20) 이라는 〈놀 이마당〉과 같은 뜻의 말이 흔히

19) 段安節, 『樂府雜錄』 명辰中郞」 〈每有꼽쌌島, 輯入獨舞.〉 敦燒曲(任二jt, 며燒曲校錄』, 8 緖),「皇帝感」 第一首 〈新歌舊 曲通州荊t, 未聞典籍入歌 場.〉 20) 錢易 『 南部新 書』 戊 〈長安戱場, 多集於慈恩〉, 『通鑑』 「宣宗紀」 Q여그二

年冬 …… 還問公主何在 ? 曰, 慈恩寺觀戱場. >

쓰인 것도 그 때문이다. 당情 · ) 현종(玄宗) 때의 사람인 상비월(常 非月 )이 「영담용낭(味談容娘)」 시에서 말은 길거리에 빽빽이 둘러 매여 있고, 사람들 수복이 마당을 둥글 게 에워싸고 구경하네 .21)

21) 〈馬園行處Ii[, 人篠看場圓. >

라고 읊고 있는 것은, 〈회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둥글게 에워싸고 〈답요낭韓描娘)〉이란 〈가무회녔} 구경하는 모습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국장®陽)〉 및 〈등장澄場)〉 〈퇴장(退場)〉 등 의 말도 여기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한바탕 놀이를 벌이는 것 을 송(宋)나라 육유(陶旅 1125-1210) 의 시에서는 〈작장(作場)〉 22) 이라 표현하기도 하였다. 물론 궁중의 극장 OOJ 場)이나 귀족들의 잔 치자리에서 벌어지는 놀이는 노천도 아니고 분위기도 좀 달랐을 것 이다. 곧 〈무각(舞閣)〉 〈무연(舞庭)〉 〈금연(錦雜)〉 23) 등의 표현이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가무희는 극장®陽) 자체가 연희자(演戱 者)와 간희자(看戱者)가 서로의 간격 없이 함께 어울리도록 되어 있었다.

22) 陸游 「少舟遊近村三首」의 第三首 僚湘옮古柳趙家莊, 負鼓盲翁正作場. > 23) 孟浩然 「奉先張明府休泳還鄕妄集」 〈樹低新舞닳n , 山對薔 뺨 齋〉, 白居易, 「靑熊帳二十韻」 〈側置低歌座, 平錦小舞廷〉, 花芸`夫人, 「宮詞百首」(玉蕭 改移柱, 備換紅羅編舞廷〉, 白居易, 「拓枝技」 〈平錦一合쏴避淵〉, 元 積, 「立部使」 〈胡部新聲錦延坐. >

〈희 儒)〉 또는 〈놀이〉라는 말이 나타내듯이 가무회에 있어서는 또 오락성이 매우 중시되었다. 한대 (漢代)의 환관(桓寬, 기원전 73 년 전후)이 『영철론(鹽鐵論)』 「산부족셔(散不足)」 편에서

희 倻)로서는 포인잡부(蒲人雜婦) • 백수(百獸) • 마희 (馬戱) • 투호 (鬪虎) • 당제 (唐~) • 추인 (追人) • 기충(奇蟲) • 호달(胡旭)을 농(弄) 하였다 .24)

24) 『鹽鐵論』 徵弄蒲人雜婦 • 百獸 • 馬戱 • 鬪虎 • 唐錄 • 追人 • 奇蟲 • 胡女..!!. >

라고 하였고, 단안절 (段安節 890 년 전후)의 『악부잡록 (樂府雜錄)』 「배우(俳優)」에는 〈참군(參軍)을 농(弄)하였다났근 표현이 보인다. 이러한 쓰임의 보기는 그 밖에도 수없이 보이는데 모두 가무회나 기예 (技藝)들을 〈연출하였다났근 뜻으로 〈농(弄)〉이란 말을 쓰고 있 는 것이다. 〈농(弄)冷는 본시 〈조롱(調弄)〉 〈희롱徵弄)〉의 뜻이 있 으므로, 그것들의 오락적인 성격에서 나온 말일 듯하다. 따라서 〈답요낭師描娘) 〉이나 〈참군희 (參軍戱) 〉처럼 골계희 (滑稽戱)와 구 별이 어려운 가무희들도 있었다. 그리고 앞에 인용한 『영철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가무희〉가 여러 가지 디른? 기예 (使藝)와 함께 연출된 것 25) 도 모두 오락을 위주로 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습 성일 것이다. 뒤에 설명할 〈상운악辻雲樂)〉이나 〈서량기 (西涼使)〉 같은 것을 보면, 가무희에 골계적 (滑稽的)인 연출이 합쳐져 있을 뿐만 아니라, 사자무(獅子舞)도 함께 공연되고 있다. 노래와 춤 자 체가 예술성 못지않게 오락성이 더 중시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 떻든 가두희는 기본적으로 줄거운 것이기 때문에 위로는 황제로부 터 아래로는 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좋아했을 것이다. 청 대(淸代)의 초순(魚亂 1763-1820) 이 『극설(JjlJ說)』 권 1 에서 희극 이 생겨난 원인과 그 기능을 설명하여 사람들에 관한 형용을 비슷하게 하여, 사람들의 기쁨과 웃음을 움

25) 뒤에 詳;습할 漢代 張衡의 갸§京試』에 보이는 平樂館에서의 演戱와 『樂府 雜錄』 「鼓架部」의 기록 등이 모두 그러하다.

직이게 하는 것 26)

26) 『劇說』 〈肖人之形容, 動人之勸深. >

이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끝으로, 앞의 절에서 이마 지적하였듯이 〈가무회났즌 내놓을 만 한 대본(臺本)이나 각본個本)도 없을 뿐더러, 전체적으로 예술이 나 문학으로 다룰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죽, 현대문학의 희곡 Drama 이란 개념과는 먼 거리에 놓여 있는 것이다. 시가(詩歌)를 그 미학 기초로 삼고 있지만, 가무회가 내어 놓는 시적인 성격은 일반적으로 매우 통속적이고도 그 중의 적은 일부분의 성분에 불과 하다. 이상과 같이 설명한 가무희의 특징을 여러 조목으로 간단히 정리 하면다음과같다. (1) 시가와 음악과 춤을 그 미학 기초로 삼으며, 노래와 춤으로 간단한 이야기 줄거리를 연출한다. (2) 중국의 〈가무희났근 가면극 또는 가면놀이가 그 주종을 이루 어왔다. (3) 그 연출은 전체적으로 사실적이 아닌 상칭적인 기법을 사용하 였다. (4) 연극의 일종이면서도 연출되는 이야기의 줄거리는 그다지 중 시하지 않는다. 얘기는 노래와 충과 같은 기예 (使藝)를 발휘하 기 위한구실에 불과한듯한양상이었다. (5) 무대는 간단하거나 마당 같은 곳을 이용하므로, 연출자와 관 객의 거리가 없이 한데 어울리어 모두가 함께 줄기는 것이었 다. (6) 오락성이 중시되어 골계희 (滑稽戱)와 구분이 되지 않는 경우

가 많았고, 심지어는 연출하는 이야기 줄거리와는 아무런 관 계도 없는 여러 가지 기예들도 함께 연출되었다. (7) 위로는 황제와 귀족들, 아래로는 낮은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모든 계층 사람들이 좋아하고 즐겼다. (8) 〈가무회났큰 각본이나 대본이 없어서 문학으로 디루기는 어려 운성격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상과 같은 특징을 지닌 〈 가무회났근 연극이라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 이에 관하여는 1988 년 9 월 신강성 (新疆省) 우루무치 (烏魯木齊) 시에서 열렸던 〈중국희극기원연토회 (中國戱劇 起源硏討會)〉 회의석상에서 섭장해 (葉長海)가 발표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 27) 이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 문제해결의 열쇠를 제공한다. 그는 희극의 기원문제나 형성문제를 논하려면 먼저 희 극의 개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 〈희극이란 무엇인가 〉 하 는 문제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구별에 대하여 주의하여 야만한다는것이다.

27) 『 中國戱劇起源』 (李肖泳 等 編, 上海, 知識出版社)에 「부록」으로 붙어 있 는 濱沖園戱劇之起源-中國戱劇起源硏討會紀實」 의거.

첫째로, 근대의 희극개념과 고대의 희극개념은 다르다. 그런데 도 흔히 근대의 희극을 준칙 (準則)으로 고대희극이나 현대희극을 헤아리기 일쑤였다. 둘째로, 중국희극과 의국희극은 같지 않다. 흔히 유럽의 근대희극을 준칙으로- 삼고 온 세계의 희극을 헤아리기 일쑤였다. 셋째로, 희극문화와 희극문학의 범위는 같지 않다. 〈희 극沒는 전체 희극예술문화를 가리키는 말이고, 〈희극문학녔든 그 중 에서도 문학부분, 곧 극본부분만을 뜻하는 것이다. 섭장해의 이 말은 매우 옳다. 그의 말에 따라 〈가무회났근 첫째, 고대 희극개념을 바탕으로 논의되어야 하고, 둘째 그것은 의국의 것이 아닌 중국의 희극임을 명심해야 하며, 셋째 희극문학이 아니

라 희극문화라는 방향에서 검토하고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가 무희났근 고대의 희극이기 때문에 그 구성이 간략하고 변화가 많다. 중국의 희극이란 면에서 보더라도 그 노래와 춤은 물론 전체 적인 구성면에서 아직 정식화(程式化)되지 않은 상태의 것들이 중 심을 이룬다. 따라서 희극으로서는 매우 유치하게 느껴지기 쉽다. 그러나 그 노래와 춤의 예술성이나 표현능력은 선진(先秦)시대에도 이미 유치한 단계를 훨씬 넘어섰고, 전체적으로 관중에게 〈 가무 희 〉 가 주는 감동이나 즐거움은 근현대의 희극 못지않았다. 그리고 중국희극은 〈 가무희〉에서 〈 대희 〉 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시와 음악과 무용을 이용하여 표현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 전 384-322) 의 『시학(詩學)』이 아니더라도 희극은 특히 〈모방只끌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런데 인간 행위의 모방수단으로는 시와 음악과 무용은 사람들의 보통 언어와 행동보다도 훨씬 부적합하다. 특히, 음악의 모방속성(模微屬性)은 아주 약하며, 시도 모방속성은 약한 편이고, 무용도 특수한 경우 에 한하여서만 비교적 강한 모방속성을 보여줄 뿐이다. 따라서 인 간행위의 모방이란 면에 있어서는 서양의 화극(話劇)에 비하여 형 편없이 박약할 수밖에 없다. 희극이면서도 이야기 줄거리가 그다 지 중시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시와 음악 • 무용 을 통한 모방은 사실적이지 못하고 상칭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는 문자로 기록하는 예술 중 기법이 상징적이기는 하나 일정한 형상僚설t)과 감정을 짧은 글 속에 응축시켜 작가의 영감이 나 미감을 강하게 담아 냄으로써 독자들에게 다른 어떤 형식의 문 학보다도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음악은 소리로 표현하 는 예술 중 시와 같이 가장 세련된 기법으로 가장 큰 감동을 주는 예술이며, 무용은 또한 사람의 동작으로 표현하는 예술로서, 시나 음악처럼 가장 세련되고 가장 큰 감동을 주는 예술형식이다. 중국

의 희극은 이러한 예술양식 중에서도 말과 소리와 동작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예술적이고도 가장 세련된 세 가지 예술을 종합하여 이룩되는 것이다. 그 중 〈 가무희났근 그에 관한 기록도 많지 않거 니와 내용의 구성이 가장 박약하고 문학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완 전한 희극으로-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중국희극은 근 본적으로 시와 음악과 무용을 통한 상징적인 기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이야기 내용의 표현이나 사실적인 모방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시와 음악과 무용에 있어서는 〈 가무희 〉 가 〈 대희 〉 보다 뒤지는 것이라 할 수 없으며, 〈 대희 〉 가 희 극이라면 〈가무희〉만이 희극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끝으로 〈 가무희났근 희극문학이 아니라 희극문화의 입장에서 파 악하고 이해하여야만 한다. 시와 음악과 무용 이의에 분장이나 무 대도구 등에는 미술적인 감각도 발휘되었을 것이므로, 그러한 예 술들을 종합하여 이루어지는 희극은 문학적인 의의보다도 문화적 인 의의를 더 중시하여야만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 가무회冷근 무엇보다도 중국의 정통문화를 잘 대표하는 연예 ( 演藝 )이기 때문에 더욱더 문화적인 접근이 요구되는 것이다. 또 〈가무회 〉 가 다른 어떤 형식의 희극보다도 관중중십적이어서, 폭넓은 계층의 온 인민들의 호응을 통해서 완성되었다는 점도 이를 문학보다는 희극문화라는 측면에서 파악하여야만 할 이유이다. 온 국민이 함께 즐기고 다 같이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면, 연극으 로서는 무엇보다도 이상적인 형태의 것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근 세의 경희 (京~戱)가 문학성에 있어서는 원집극保雜劇)이나 명전기 (明傳奇)에 비하여 보찰것없는 것이 되고 말았지만, 온 중국사람들 의 호응과 즐김은 그것들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점에 서, 경희를 더욱 훌륭한 희극으로 발전시킨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나 같은 논거 (論操)이다.

〈 가무희注곤 훌륭한 희극이며 중국 사람들의 진정한 〈 놀이 〉 였다 는 입장에서 이 책을 쓴다. 3 중국 고전희극의 종류 중국의 고대 희극사는 대체로 북송(北宋) 말년 (1126) 무렵울 분 계전 (시分기界)는로 〈하소여희 (앞小뒤戱)로〉 중시심대의를 시크대게이 고둘,로 이나후눌의 수 시가기 있는다 .〈 대그희 o이: 戱) 〉 중심의 시대이다. 〈소 희冷 말할 것도 없이 〈가무희〉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가무회〉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학자 들에 따라 의견이 다르다. 왕국유(王國維 1877-1927) 는 『 희곡고 원 徵曲考原)』에서 〈희곡이란 가무로써 고사(故事)를 연출하는 것〉 이라 전제하고 나서, 〈가무로 고사를 연출하는 것은 당대 個代)의 〈대면伏面)〉 〈발두(擦頭)〉 〈답요낭師描娘)〉 등에서 시작되고 있 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임이북(任二 4 t)은 「희곡 • 희농여회상 倻曲 • 戱弄與戱象)」에서 〈희곡 자체는 늦어도 춘추(春秋)시대에는 이미 있었으며, 그것은 사회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물건이다〉 28) 라 고 주장하였다. 다시 왕국유가 『송원희곡고(宋元戱曲考) 』 등에서 〈전정한 희곡은 송대에 이루어졌다〉라고 하면서, 원잡극이나 회문 OM:) 같은 〈대희녔t 〈전정한 희곡〉이라 한 데 대하여, 임반당(任 半塘)은 그것은 잘못된 표현이며 〈성숙된 희극〉으로 표현함이 옳다 고도 주장하였다. 29) 곧, 왕국유는 앞 시기의 〈가무회났근 〈전정한

28) 「戱曲 • 戱弄與戱象」 여체 h 本身, 至運春秋時已有, 是社會上自然産生的 東西. >( 『戱劇論羲』, 第一集 所載) 29) 任半塘, 『唐戱弄』 「後記」.

희곡 X 본 되지 못하는 것이라 여긴 데 대하여, 임반당은 〈 덜 성숙 된 희극 〉 일 뿐이지 진정한 희곡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 한것이다. 〈 가무희 〉 가 이룩된 시기나 그 성격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이 처럼 이해의 큰 차이가 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 가무회 〉 에 관한 기 록이 매우 적다는 데 원인이 있다. 중국 고대에 행해전 연예에는 무용 • 악곡偶曲) • 잡희 (雜戱) • 가무회 • 골계희 (滑稽戱) • 괴뢰희 (偶 偏戱) • 영회 (影戱) • 강창( 講 唱) 등이 있었는데 , 이들은 한 가지만 이 연출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서로 뒤섞이거나 함께 연출되어 그 한계가 분명치 않았다. 심지어 공자 GL 子)가 〈 예 (tt f ) > 와 함께 존중했던 〈악(樂) 〉 이란 말에도 노래 • 음악 이의에 무용까지도 그 뜻 속에 포함되어 있다. 30) 옛날에 연출되었던 한 종류의 놀이가 단순한 무용인지, 〈 가무회〉 또는 골계희나 잡희인지 그 분계 (分界) 가 분명치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30) 명 願 l 「樂記」 참조.

따라서 옛날 연회 (演戱)의 희극적인 성격에 대한 이해가 학자들 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며, 희극의 발생시기에 대하여도 의견이 크 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고대희극의 중심을 이 루어 온 것이 〈가무희〉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북송 말기 이전의 〈소희〉의 종류를 이야기함에 있어서는 희극성은 너무 따지지 말고 대중 사이에 유행되었던 전체적인 연희를 모두 망라하 는것이 옳을듯하다. 이미 구양여천 (氐場予債 1889-1962) 은 『중국희곡 연구자료초집 (中國戱曲硏究資料初輯) 』 의 서언에서 민간의 〈소희〉에 대하여 다음 과같이 말하고있다.

민간 소희의 발전은 균형적 (均衡的)이지 못하다. 어떤 것은 더디 고, 어떤 것은 빠르며, 어떤 것은 대형의 놀이로 이루어졌고, 어떤 것은 줄곧 원시적인 형식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31)

31) 『中國戱曲硏究資料初輯 』 「序言」 〈民間小戱的發展是不平衡的, 有的漫, 有的快 , 有的成了大型的戱, 有的就一直停留在原始形式的階段上. >( 1957 年 北京, 中園戱劇出版社 于 I J} .

이처럼 중국의 〈 소희冷詩는 지방에 따라 각양각색의 발전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총괄하여 정리하기도 매우 힘들다. 게다가 〈 소희났큰 문학성이 약할 뿐 아니라 상세한 기록도 극히 적기 때문에, 희곡사적인 정리를 위하여는 문자자료보다는 그 연 출양식을 중심으로 하여야 한다. 그러나 옛 〈소희 〉 의 연출양식이 나 음악과 노래, 연출자와 관중의 관계 등을 규명하기는 매우 어렵 기 때문에 그 연출상황을 알아내기도 매우 쉽지 않다. 그러나 대체로 기록에 드러니는 옛날 〈소희났둥의 종류를 보면, 〈 가무회 只룹 비롯하여 나희 (灘戱) • 골계희 (滑稽戱) • 우희 (優戱) • 잡 회 (雜戱) 등과 함께 각저희 (角抵戱) • 참군희 (參軍戱) • 송잡극(宋雜 劇) • 금원본(金院本) 등이 있었다. 이들 〈소희났근 대부분이 노래와 춤으로 연출되는 것이어서, 실제로 〈 가무회〉와 구분이 어려운 경 우가 많다. 자세한 내용에 대하여는 뒤에 다시 설명할 것이다. 〈대희 〉 에 있어서는 북송 말엽울 전후하여 희문~ 또는 남희 (南戱)가 가장 먼저 생겨났다. 그러나 곧 원대에 들어와서는 다시 북곡(北曲)인 원잡극保雜劇)이 성행하게 된다. 남회는 원말에 다 시 고개를 들어 유행하기 시작하여 명대 (明代)에 와서는 전기 (傳 奇)란 이름 아래 성행하게 된다. 〈원잡극 X 본 원칙적으로- 한 작품 이 4 절(折)로 이루어지고, 그 밖에 필요에 따라 짧은 설자(模子) 가 하나 첨가되는 형식이었던 데 비하여, 〈남희〉나 〈전기冷근 대체

로 수십 착(齡)으로 이루어지는 장편이다. 명대에는 남잡극(南雜 劇) 및 단극(短劇) 등의 형식상의 여러 가지 변화도 생겨났다. 뒤 이어 청대 ( 淸 代)에 와서는 화부희 (花部戱) 또는 난탄(亂 彈 )이라고 도 부르는 경회 (京戱)를 비롯한 여러 지방의 지방희 (地方戱)들이 성행하게 된다. 보통 『중국희곡사(中國戱曲史) 』 에서는 〈 대회 〉 중의 〈 원잡국 〉 과 〈명전기 〉 만을 문학성을 지닌 중국의 고전희극으로 보고. 희곡사를 논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가무회 〉 야말로 정통적인 중국의 고전희극이며, 〈 대희처준도 성격상 크게 변질되기는 하였지만 〈 가 무회只룹 바탕으로 발전한 것이라는 입장에서 이 글울 쓰고 있다. 4 중국문화 속의 가무희 앞에서 중국회국사는 대체로 북송 말년 (1126) 무렵울 분계로 하 여 이전의 〈소희〉 중심의 시대와 이후의 〈대희〉 중심의 시대로 나 누어진다고 하였다. 그런데 중국희극은 시가와 음악과 춤을 통해 서 연출되는 종합예술이기 때문에, 그러한 예술의 성격상의 변화 는 곧 중국의 문화 또는 예술 전반에 걸친 변화를 증명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댜 따라서 실상은 희극뿐만이 아니라 중국문화사 전체 가 북송 말엽을 전후하여 앞뒤로 크게 니누어진다. 따라서 중국의 문학사도 그 시기를 분계로 하여 크게 전후로 나누어짐은 물론이 다. 문화사상 앞의 시기는 이른바 한문화(漢文化)가 생성된 이래 계 속 눈부신 발전을 이룩해왔던 시기이다. 그러나 뒤의 시기는 문화 정도가 낮은 이족漠族)의 중원지배로 말미암아 한문화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이질화~ 길로 빠졌던 시기이다.

중국 역사상 중국 주변의 이족(異族)은 한족에 홉수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때에도 만주족(滿洲族) 은 남량 (南喇 • 서전 (西秦) • 전연 (前燕) • 후연 (後燕) • 남연 (南燕) 등 울 세웠고, 몽고족( 蒙 古族)은 북량(北凉) ·전조(前趙) •후조(後趙) • 하(夏) 등의 나라를 세워 중원을 지배했다. 그러나 이들 이족들은 중원에 살게 되면서 곧 문화적으로 한족에 동화(同化)되어 결국은 그들 자신의 독자적인 성격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북송(北 宋) 때 중국의 동북지방을 차지했던 요(遼)와 서북지방을 차지했던 서하(西夏)는 제각기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어 쓰면서 중국을- 각자 자신들의 민족의식을 가지고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1115 년 여진 (女眞)의 아골타(阿骨打, 1115-1123 년 재위)에 의하여 세워진 금(金)나라는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어 쓰며 더욱 뚜렷이 자신들의 민족의식을 드러내며 국세를 확장한 끝에 1126 년에는 북송의 수도 변경 (?卞京)까지 쳐들어와 상황다~ 휘종(徽宗, 1101-1125 년 재위)과 황제 흠종(欽宗, 1126 년 재위) 이하 종실의 남녀 3000 여 명을 잡아 북쪽으로 끌고 갔다. 이에 송은 일단 멸망했으나 다 시 휘종의 아우 고종(高宗, 1127-1162 년 재위)이 남쪽 임안(臨安, 지금의 杭州)으로 옮겨가 제위에 오름으로써 남송(南宋)이 시작 된다. 이로부터 한족과 한문화는 이족을 단순히 동화시켜 흡수하지 못 하고, 오히려 문화적으로 낙후한 이족에게 지배당하면서 한족과 한문화 자체가 그들에 의하여 변질되어 갔다. 1206 년 몽고의 칭기 즈 칸偉吉思汗, 1206-1227 년 재위)이 몽고의 제부(諸部)를 통일한 후 서하와 금나라를 모두 멸망시키며 강성해지고, 세조(世祖) 쿠빌 라이 (忽必烈, 1260-1294 년 재위)는 나라를 원保;)이라 고치고 마침 내는 남송까지도 완전히 멸망시키고 온 중국을 지배하게 된다 {1279). 원나라는 무력으로 유럽까지도 휩쓸어 그 위세를 온 세계

에 떨친 제국이며, 독자적인 문지를 만들어 쓰고 자신들만의 문화 롤 강조하며 자기 민족과 한족을 엄연히 구별하며 중국을 지배한 나라이다. 32) 몽고족은 본디 중국 서북지방의 유목민족으로 문화적 으로 뒤져 있던 민족이었으므로, 이들이 한족과 한문화를 흡수하 지는 못하였지만 한족과 한문화를 크게 변질시켜 이로부터 중국사 로 하여금 더 이상 문명사회사(文明社會史)를 향하여 발전하지 못 하게 하였다.

32) 元나라 통치지들은 여러 민족을 四等으로- 나누고 정치 • 사회 • 경제 등 여러 면에서 크게 차별대우를 하였다. 第一等은 蒙 古人, 第二等은 色目人 ~U · 維吾爾人 • 西域人 • 回回人 포함) , 第三等은 漢 人 (金朝 統治下의 漢人 • 契丹人 • 女眞人 • 高麗人 포함) , 第四等은 南人 (南宋 統治下의 漢人 및 西南의 各族 人民) ( 『 元史 』 참조) .

이러한 한문화의 변질은 원나라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이미 변 질에 젖은 남방 출신의 명 (明)나라 33) 로서는 그 대세를 만회할 수가 없었고, 만주족의 청 (淸)나라에 이르러서는 더욱 변질의 정도가 심 해졌다. 따라서 북송 말엽 이전의 시대란 한족이 이족들을 동화시 키며 끊임없이 고도의 문화를 창조하여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정통문화를 발전시켰던 시기이며, 그 이후의 시대는 한족이 이족 의 지배로 말미암아 낙후된 문화의 영향 아래 변질됨으로써 서양보 다 뒤떨어지기 시작했던 시대이다.

33) 明 太祖 朱元璋은 安徽 鳳陽 출신이며, 太祖 {1368-1398 在位)는 南京에 도읍을 정했는데, 惠帝 {1399-1402 在位)를 거쳐 成祖 {1403-1424 在位) 의 永樂 1 앗J:- (1421) 에 다시 北京으로 천도하였다.

그것은 중국문학사에 있어서도 엄연히 드러나는 사실이다. 북송 말엽 이전의 시대란 시 (詩) • 문(文)을 중심으로 한 정통문학이 선 진(先秦) 이래로 꾸준히 위대한 발전을 이룩한 시기이나, 그 이후 로는 더 이상 발전을 못 하고 옛 것을 배우기에만 급급한 상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후기에는 이전에는 저속한 것으로 여겼던 희곡

과 소설이 새로이 등장하여 그 시대를 대표하게 된다. 중국문학에 있어서 북송 말엽 이전에는 고사를· 위주로 하는 문학 은 별로 발달하지 못하였다. 하사시 (夏 寫 時)가 지적했듯이 〈서 정예 술(托情藝術)은 중시했지만 고사예술(故事藝術)은 가벼이 여겨, 서 정문학은 중국문학의 정종(正宗)으로 여겨지고, 서사문학은 방지 (帝支)라고 배척되던 시대였다. >34 ) 「공작동남비 GL 雀東南飛)」나 백 거이 (白居易, 772-846) 의 「장한가(長恨歌)」 같은 고사를 디룬- 장시 도 있었지만, 이들도 실은 초중경 (魚仲卿) 부처 (夫妻)의 이야기나 현종(玄宗)과 양귀비 (楊 貴 妃)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알리는 것보 다도, 이들의 이야기로 말미암아 우러나는 감정을 아름다운 필치 로 그려내는 데 주력한 것들이었다. 이 시대는 서정 위주의, 시 위 주의 문학이 정통을 이루던 때였다. 지괴 (志怪)나 전기 (傳奇) 같은 고사를 다룬 작품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어느 시대든지 본격적인 문 학으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따라서 북송 말엽 이후의 시대에 있어서도 희곡과 소설이 문학발전의 중심을 이루지만, 이전 정통 문학의 영향으로 고사의 창신(創新)을 그다지 중시하지 아니하며 수사(修辭)를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경향도 함께 지니게 되었던 것이 다.

34) 『 中國戱劇起源 』 , 李初泳 等 編u.海, 知識出版社, 1990) 의 夏寫時 「序 言」 @g人重好情 藝 術, 輕敍 事藝 術, 好情文學被認爲是中國文學的正宗, 敍 事文 學 .ll lj 斤之爲帝支. >

무엇보다도 북송 말엽 전후의 문화적인 특징을 잘 대변하는 것은 앞에서도 이미 이야기했듯이 희극이라 할 수 있다. 곧 이전의 시대 는 〈 소희 〉 가 대표하고, 이후의 시대는 〈대희〉가 대표하는 것이다. 〈 소희났 다시 〈 가무희〉가 그 중심을 이루고, 〈가무희 X 근 또 가면 희가 그 주류를 이룬다. 실상 〈가무희났드 여러 가지 잡희 (雜鉉)와 함께 연출되고 연출자와 관중이 한 덩어리가 되어 즐기는 형식이었

다. 거기에는 그 시대의 음악 • 시가 • 무용뿐만이 아니라, 연출에 는 회화·조각· 건축 등의 미술 및 재주넘기 • 줄타기 • 공놀이 • 힘 겨루기 등 온갖 스포츠까지 동원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그 시대의 문화를 잘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가무희났근 이 시 대의 서정 위주의 문학정신, 시 위주의 문학정통을 가장 잘 대변하 는 형식과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가무희 X 즌 가면희가 다시 주류를 이룬다고 했지만, 얼굴 화장 만 보더라도 이전의 시대는 가면이 위주였던 데 비하여 이후의 시 대는 도면 (塗面) 위주로 변한다. 물론 이전에도 도면을 하는 경우 가 있었고, 이후에도 가면이 남아 있었지만 그 주류를 그렇게 파악 할수있다는것이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정통문화를 대변하는 것은 〈가무희〉라 할 수 있다. 원 잡극이나 명 전기 같은 〈대희只탉곤 그 규모나 구성면에 서 〈가무희〉보다 훨씬 발달한 것이고, 또 〈가무회〉가 지니지 못했 던 문학성도 지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희극의 중요한 표현 수단인 시가와 음악과 무용에 있어서 〈대희注근 〈가무희〉보다도 오 히려 어느 면에서는 뒤지는 수준으로 변질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희〉에 있어서는 이전의 시가와 음악이 이루었던 우아함과 세련 미를 상실했고 중국무용이 지녔던 예술성을 저하시켰다고 보여지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집극保雜劇)으로부터 명전기 (明傳奇) • 청피황(淸皮黃)으로 이어지는 〈대희〉의 용속화예裕化)는 바로 위 대한 중국문명의 쇠로과정을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 이다. 끝으로, 〈가무희났곤 중국의 정통문화를 대변하는 종합예술의 성 격을 띤 희극이기 때문에, 가무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결국 중국 의 정통문화를 올바로 파악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 한다.

제 2 장 선전(先秦)의 〈가무희〉 기원전 247 년 이전 1 선진시대 〈악(樂)〉의 개념 중국 고대의 전통적인 악론傑論)의 기록으로는 『예기 때記)』의 「악기 (樂記)」, 『순자』의 「악론偶뎁습)」, 『여씨춘추(呂氏春秋) 』 의 「중 하기 (仲夏紀)」 「계하기 (季夏紀)」 등의 기록이 가장 구체적이다. 그 밖에 『 묵자(墨子)』의 「비악(非樂)」, 『한비자(韓非子) 』 의 「십과(十 過)」 등, 악론을 펴고 있는 기록은 선전시대 책들 중에 상당히 많 은편이다 . 이들을 종합해 보면, 그 시대의 〈악〉이란 말에는 시가 • 음악과 무용이 다 포함됨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곽말약(郭洙 若, 1892-1978) 같은 이는 「악기 偶챕 E) 」를 논하면서, 옛날의 〈악〉 에는 이상의 세 가지뿐만 아니라 회화 • 조각 • 건축 등 조형미술(造 形美術)도 포함되며 , 심지어는 의장(儀杖) • 전렵 (田臘) • 효찬(希 傑) 등까지도 포함되는 말이라 하였다. 1) 그러나 아무래도 시가 •

1) 郭洙, 『靑銅時代』 「公孫尼子與其音樂理論」 참조.

음악 • 무용이 삼위일체를 이룬 것이 그 뜻의 중심을 이루고 있음은 부인할길이 없다. 한편 傷웅(악)은 樂(락)의 뜻이다 〉 라는 정의도 『 예기』 『 순자』 등 에 거듭 보인다. 죽, 〈악〉에는 본시 〈즐긴다났근 오락적인 성격의 뜻도 담겨 있다는 것이다. 〈 시 (詩)란 그 뜻을 표현한 것이요, 가 여k ) 란 그 소리를 길게 늘여 읊은 것이요, 무(舞)란 그 모습을 움 직이는 것인데, 이 세 가지는 마음에 근본을 두고 있다 〉 2) 또는 〈기뻐서 그것을 말로 표현하게 되며, 말로 표현해도 부족하여 말을 길게 늘이게 되고, 말을 길게 늘여도 부족하여 차탄(陸暎)을 하게 되며, 차탄을 해도 부족하여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손을 혼들고 발 울 구르며 춤추게 되는 것이다〉 3) 는 등, 「악기」의 기본적인 악론도 말하자면 사람의 기쁨이나 줄거움을 자연스럽게 〈 시와 노래와 춤 〉 으로 표현하는 것이 〈악〉이리는 ·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다.

2) 『禮記 』 「樂記」 〈詩言其志也, 歌, 味其聲也, 舞, 動其容也, 三者本平 心.〉 3) 『禮記』 「樂記」 따故言之, 言之不足故長言之, 長言之不足故暖暎之, 唯 暎之不足故不知手之舞之, 足之踏之也. >

그런데 이 〈즐긴다冷근 〈악 〉 의 성격이 약간 속화(俗化)되면서 그 노래와 춤에 〈놀이〉의 성격이 보태져 쉽사리 〈가무희 〉 로 발전하였 던 듯하다. 「악기」에는 위문후(魏文侯)와 자하(子夏)가 음악을 논 하는 대목이 있는데, 거기에서 자하는 〈고악(古樂)〉의 대가 되는 〈신악(新樂)只끌 다음과 감이 설명하고 있다. 지금의 신악이란, 나아가다 구부리고 물러나다 구부리고 하며, 간 사한 소리가 넘쳐 홀러 사람들이 빠져도 멈추지를 못하고, 배우와 난 쟁이들이 어울리며, 원숭이처럼 남녀가 뒤섞여 춤추고, 아비와 지식 사이도 모르게 된다. 4)

4) 『禮記 』 「樂記」 〈 今夫新樂 進僚退f){f, ~ 聲 以溫 , i弱而不止, 及優 保儒, 優 雜子女, 不知父子. 〉

여기에서 〈 배우와 난쟁이들이 어울린다 〉 고 한 것은 〈 배우잡희 (俳俊雜戱) 〉 의 모양을 설명한 것이 분명하고, 〈 원숭이처럼 남녀가 뒤섞여 춤춘다 〉 라고 한 것은 일종의 〈 가무희 〉 연출을 두고 한 말 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 악 〉 의 개념 속에는 골계희 (滑稽 戱)나 가무희도 포함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유가(儒家)에서는 〈 예 며漫 ) 〉 와 함께 〈 악只끝 매우 존중하였 다. 〈 ‘악 ’ 은 마음속으로부터 나오지만 ‘예'는 밖에서 생겨나는 것 〉 5) 이라 하여, 〈 악 〉 으로써 사람들의 성정 (性情)을 다스리고 〈예 〉 로써 사람들의 몸가짐을 다스리려 했었다. 그러기에 〈 악冷든 무엇보다도 위대하고 거창한 것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악기」만 보더라도 위대한 음악은 천지와 동화(同和)된다. 악이란 천지의 조화이다. 6)

5) 따 山 「樂記」 생由中出, 禮 自外作. > 6) 따山 성벽꽝 D 天地同和. >생 섬t, 天地之和也. >

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 악났는 그 시대와 사회를 대표하고 〈그 춤을 보면 그들의 덕 (德)을 알게 된다 〉 ”고도 하였다.

7) 『禮 記 』 〈故觀其舞 知其德. >

유가에서는 이처럼 〈 악 〉 을 존중하였기 때문에 민간의 속된 음악 울 경계하고 가무의 〈놀이〉화(化)를 멀리하려 하였다. 「악기」에는 〈 정 (鄭)나라 음악은 넘쳐나길 좋아하여 뜻을 음란케 하며, 송(宋) 나라 음악은 여자를 좋아하여 뜻이 빠져들어가게 하며, 위 (衛)나라 음악은 절주가 다급하여 뜻을 번거롭게 하고, 제 (齊)나라 음악은 분에 넘치고 편벽되어 뜻을 오만하게 한다. 이 네 가지 것들은 모

두 여색 (女色)으로 음란하고 덕 (德)에 해가 되는 것이어서 제사에 는 쓰지 않는 것이다 〉 8) 라고 하며 지방의 민간음악을 내치고 있 댜 이러한 민간음악은 궁중의 아악(雅樂)보다는 훨씬 〈놀 이 〉 의 성 격이 질고 가무희 종류의 것도 많았을 것이다. 〈 여색으로 음란하 다〉 할 정도였기 때문에 제사에 쓸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8) 'l劃山 생音好溫器志, 宋音燕女漏志, 衛音趙數傾志,齊音敷牌喬志. 此 四女而害於德, 是以祭祀不用也.〉

그러나 아정 (雅正)하지 못하다, 곧 〈덕에 해가 된다〉고 생각된 민간음악이 궁중에서 완전히 행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악 맹)이란 樂(락)의 뜻났t 지닌 말이어서, 음악을 통하여 줄기기 위 하여는 〈가무희〉 종류의 〈악〉도 완전히 거부할 수가 없었을 것이 다. 「악기」를 보면 위문후(魏文侯)가 자하(子夏)에게 자신은 〈배우 와 난쟁이들이 어울리고〉 〈원숭이처럼 남녀가 뒤섞여 춤추는〉 신 악(新樂)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한편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주례 (周禮)』 권 24 「모인 (鹿人)」 조를 보면, 모인(鹿人)은 산악(散樂)을 춤추고 이악(夷樂)을 춤추는 것을 가르 치는 일을 관장한다. 9)

9) 『周禮』 〈鹿人掌敎舞散樂, 舞夷樂. >

라고 하였다. 정현 (鄭玄 127-200) 은 주(注)에서 〈산악이란 야인 (野人)으로 음악을 잘 하는 자들로서 지금의 황문창慣門 1 昌)과 갇 은 것으로, 자연히 춤이 있게 된다〉 10) 라고 하였다. 『구당서 (舊唐 書)』의 「음악지 (音樂志)」를 보면 〈산악이란 역대마다 있었으나 정 식 아악이 아닌 배우가무집주(俳優歌舞雜奏)이다〉 11) 라고 하면서 여

10) 『周禮』 「鄭注」 〈散樂, 野人爲樂之善者, 若今黃門偏矣, 自有舞. > 11) 며輝書』 〈散樂者, 歷代有之, 非部任之聲, 俳優歌舞雜奏• >

러 가지 잡희 ( 雜 戱)와 환술(幻術) 및 가무회 등울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해설하고 있다. 〈 이악( 夷 樂) 〉 에 대해서도 정현이 〈 사 이지악(四 夷 之樂)으로 역시 모두 성가(野歌)와 무(舞)가 있다〉 12) 라 고 설명하고 있으니, 역시 〈 산악 〉 이나 마찬가지로 속되고, 〈가무 회 〉 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가무회났즌 아 정 (雅正)한 것이 못 된다고 여겼으면서도 옛날 궁중에서도 일찍부 터 연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12) 『 周禮』 「鄭注」 엔璃웅, 四夷之樂, 亦皆有聲歌及舞. >

중국 고대의 〈악 〉 이란 말에는 시가 • 음악 • 무용이 모두 포함되 었음은 물론 〈 가무희 〉 까지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가 무희注근 상당히 일찍부터 중국의 궁중은 물론 민간에 널리 행해졌 다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2 정악(正樂) 속의 〈가무희〉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음악이 매우 존중 되어 왔다. 그런데 〈가무회났근 일종의 민간의 놀이였기 때문에 주 로 민간에만 이것이 유행했다고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중국의 옛 전적 頃籍)을 보면 궁중을 비롯하여 귀족 및 봉건 (封建) 지배계급 에서 쓰던 〈정 악 〉 중에도 가무회적인 요소가 적지 않게 눈에 띈 다. 여기의 〈정악〉이란 속악(俗樂)의 대가 되는 일반적인 뜻으로 쓰인 것이다. 우선 『서경(害經) 』 을 보면 「순전頃典)」에서는 전악頃樂)인 기 (菱)가 〈제가 경 環)을 치고 두드리니 여러 짐승들도 어울려 춤을 추었습니다〉 13) 라고 말하고 있고, 「익직 違稷)」 편에서는 다시 기

13) 『書毋 〈予 擊 石捨石, 百獸率舞. >

(愛)가 〈뜰 아래에 적 (笛)과 손북과 북을 벌여 놓고 축(祝)과 어 (致)로 음악을 합주케 하고 벚게 하며, 생 (座)과 큰 종(鐘)도 간간 이 쓰니 새와 침승들도 춤을 추었고, 소소구성 (蕭留九成)을 연주하 니 봉황새가 날아와 법식에 따라 춤추었습니다〉 14) 라고 말하고 있 다. 〈침승들도 어울려 춤추고〉 〈새와 짐승들이 춤추고〉 〈봉황새도 춤을 추었다 X 즌 것은, 중국에는 이미 상고시대에서부터 가무회적 인 춤이 있었음을 알려 준다. 이는 실제로 새나 짐승이 춤추었다기 보다는 새나 짐승으로 분장한 사람들이 춤춘 것이으로 보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이는 한대 (漢代)의 〈어룡만연지희 (魚龍憂衍之 戱)〉 15) 같은 동물과 새들의 춤의 선성 (先聲)이었을 것이다.

14) 『書經』 〈下管殺鼓, 合止祝致, 座鏞以間, 鳥獸踏踏;蕭部九成, 鳳凰來 儀〉 15) 張歸 멘 F 虹試」, 『漢書』 멘§域傳贊」 등 참조.

또한, 중국의 제왕들은 태고적부터 이른바 공성작악(功成作樂)하 고, 자신의 정치와 교화(敎化)를 대표하는 음악을 작곡하여 세상을 올바로 다스리는 데에 이바지하려 하였다. 따라서 주대 (周代)까지 도 선왕들의 여러 가지 음악이 전해지고 있었다. 『주례 OO 禮)』 「춘 관(春官)」 대사악난司樂)에는 〈악무(樂舞)로써 국자(國子)들을 가 르쳤는데, 운문(雲門) • 대권 8 海:) • 대함난~) • 대소 8 部) • 대하 tk):) • 대호tJ;.i!i) • 대무伏武)를 추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정현 (鄭玄)의 주에 의하면 운문과 대권은 황제 價帝)의 음악이고, 대함 은 함지 減池)라고도 하는 요(堯)의 음악이며, 대소는 소소구성 (蕭 留九成)이라고도 하는 순頃)의 음악이고, 대하는 우(禹), 대호는 탕(湯), 대무는 주무왕(周武王)의 음악이다. 그리고 운문은 천신 (天神)을 제사 지낼 때, 함지는 지기 (地祗)를 제사 지낼 때, 대소 는 오악따嶽)을 제사 지낼 때, 대하는 산천(山川)을 제사지낼 때, 대호는 선비 (先1 lt, 周의 시조로서 后稷울 낳은 姜源)를 제사지낼 때,

대무는 선조를 제사 지낼 때 추었다고도 하였다. 반고(Jil EI 침, 32- 92) 의 『백호통(白虎通)』 「예악며樂)」 편에는 『예기 며信 C) 』를 인용 하면서 전욱(顯項)의 음악으로 육경(六莖), 제곡(帝魯)의 음악으로 오영 (五英)을 더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 밖에도 소호(少昊)의 음 악으로 구연 (九淵) (『帝王世紀』) , 전욱의 음악으로 오경 (五莖) ( 『 樂 緯』), 요의 음악으로 대장난책t) (『樂緯』), 제욱(帝項)의 음악으로 승운 (承雲) (『呂氏春秋』 「仲夏紀」) 등도 보인다. 『예기 때記)』 권 39 「악기 (樂記)」에는 공자 GL 子)와 빈모가(賓牟 賈)가 〈대무只룹 논하는 대목이 있는데, 공자는 〈대무〉의 연출에 대하여 디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악〉이란 것은 상칭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방패를 들고 우 뚝 서 있는 것은 무왕의 일을 상칭하는 것이요, 소매를 휘두르며 발을 구르는 것은 태공앉~*)의 뜻을 상칭하는 것이요, 춤추던 행렬이 어 지러워지며 모두가 앉는 것은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의 디스림을 상칭하는것이다. 또한 〈무(武)只춘 추기 시작할 적에는 북쪽으로 나아갔다가, 재성 (再成, 곧 第二章)에는 상(商)나라를 멸망시키고, 삼성 (三成, 곧 第 三章)에는 남쪽으로 내려가고, 사성 (四成)에는 남쪽 나라들이 평정되 며, 오성 (五成)에는 섬주停만사)를 나누어 주공價 l 公)은 왼편, 소공 (召公)은 오른편을 디스리게 되며, 육성 (六成)에는 다시 제자리로 돌 아와 자리를 채우게 되는 것이다. 천자와 대장이 방울을 흔들며 춤을 지휘하여, 네 번 치고 찌르고 하 는 것은 온 중국에 위세가 극성 (極盛)함을 뜻하는 것이다. 부서에 따 라 나누어져 나아가는 것은 일이 이미 다 끝났음을· 뜻하는 것이다. 제 자리에 오래 서 있는 것은 제후(諸侯)들의 내조여濁 0) 를 기다리는 것 이다 .16)

16) 며鄧 l 션랙섬g, 象成者也. 抱干而山立,武王之事也. 發揚距廊, 大公之 志也• 武亂皆坐, 周召之治也. 旦웃쵸跋台而北出, 再成而滅商, 三成而南, 四 成而南國是疆,五成而分,周公左, 召公右,六成復綴以崇.天子來進之,而 閉伐, 盛威於中國也. 分來而進, 久立於綴, 以待諸侯之至也. >

이상 공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미 〈대무〉 자체가 상당한 정절(情 節)을 표현하고 있는 가무였음을 알 수 있다. 육성 (六成)의 〈대무〉 가 이러할진대 구성 (九成)인 소소(蕭節)는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 며, 운문 이하 기타의 가무도 상당히 복잡한 정절을 표현히는· 춤이 었다고 여겨진다. 『여씨춘추(呂氏春秋)』 「고악(古樂)」 편에는 옛날 갈천씨 (葛天氏)의 음악은 세 사람이 소꼬리를 들고 발을 구르 며 노래 팔결(八閔)을불렀는데, 첫째 재민(載民), 둘째 현조(玄鳥), 셋째 수초목(遂草木), 넷째 분오곡(舊五穀), 디섯째 경천상(敬天常), 여섯째 달제공(達帝功), 일곱째 의지덕(依地德), 여덟째 총만물지극 (總萬物之極) . 17)

17) 『呂氏春秋』 〈昔葛天氏之業 三人接牛尾, 投足以歌八闇, 一曰載民, 二曰 玄馬三曰遂草木, 四曰奪五穀,五曰敬天常,六曰達帝功,七日依地德, 八 曰總萬物之極.〉

이라 하였다. 갈천씨도 옛 황제의 이름이다. 이 밖에 『예기 떼記)』만 보더라도 「문왕세자汶王世子)」에는 남이 지 악(南夷之樂) 인 〈남 (南) 〉과 함께 무무 (武舞) 인 〈상 여t) 〉과 〈대 무〉가 보이고, 「내칙 (內則)」 편에 문무(文舞)인 〈작(弓)〉과 함께 〈상여)〉과 〈대하 8 효)〉가 보이며, 『장자(莊子)』 「천하(天下)」 편 에는 〈황제(黃帝)에겐 함지徵池)가 있고, 요(堯)에겐 대장伏璋:) 이 있으며, 순僕)에겐 대소伏部)가 있고, 우(禹)에겐 대하tkJ[) 가 있으며, 탕(湯)에겐 대호休t夏)가 있고, 문왕(文王)에겐 벽옹 (群雍)의 음악이 있으며, 무왕(武王)과 주공佛公)은 무(武)를 만들

었다 〉 고 말하고 있다. 다시 『주례 (周禮) 』 권 23 「악사偶器iji)」에서 는 악사가 〈 불무 (拔 舞 ) • 우무 (羽舞) • 황무 遣 舞) • 모무 (施舞) • 간 무(干舞) • 인무(人舞) 〉 의 여섯 가지 〈 소희 (小戱)처} 국자(國子)들 에게 가르쳤다고 하였다. 왕국유(王國維, 1877-1927) 에 의하면 〈 작 (竹) 〉 과 〈 상 (象) 〉 도 〈 소무 (小舞) 〉 라고 할 수 있다. 18) 그 밖에 앞의 예로 든 여러 〈 악只탉즌 〈 대무伏舞) 〉 라고 보아도 좋울 것이 다.

18) 며邸뎨鉢木 』 卷 2 「說더舞象舞」 의거.

『 시경 (詩經)』에도 가무와 〈 가무회 〉 의 자료가 적지 않다. 『 모시 (毛詩) 』 「서 (序)」를 보면 〈 송(碩)이란 덕 (德)의 성대함을 찬미하는 형용으로, 이룩한 공(功)을 신명 (神明)에게 고하는 것이다〉 19) 라고 연합을 설명하고 있다. 공영달 GU尉 흥, 574-648) 은 『소(疏)』에서 〈 형용이란 형상용모 OO 狀容統)이다 〉 라고 하면서 〈송(碩)을 용(容) 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 하였다. 뒤에 다시 완원(阮元, 1764- 1849) 이 「석송(釋碩)」 20) 이란 글에서, 션합은 본시 〈용(容)〉 곧 〈 얼굴 〉 〈 형용 〉 〈 무용(舞踊) 〉 의 뜻임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 러므로 〈송 〉에는 음악의 반주뿐만 아니라 춤도 것들여 있었다는 것이다.

19) 『 毛詩』 「序」 〈碩者, 美盛德之形容, 以其成功, 告於神明者也. > 20) 떻經室一集 』 卷 1 「釋碩」 所載

왕국유는 주송倻碩) 중의 「호천유성명 (昊天有成命)」 「무(武)」 「작個)」 「환(桓)」 「뇌 (質)」 「반徵)」의 여섯 편을 대무난콰;)의 악 장馮章)이라 주장하며, 〈송〉의 모든 시가 무(舞)는 아니라고 하였 다. 21) 어떻든 간에 이들 대무伏武)의 악장들을 「악기 偶뎁t)」에서 공자가 설명한 대무의 구성에 배열시켜 보면, 이들 정악(正樂)이

21) 멤達集林』 卷 2 「周大武樂章考」 및 「說周碩」 참조. 王國維의 연구는 참 신하나, 이에 대하여 異見울 지닌 학자들도 많다.

더욱 가무회적인 악무(樂舞)였음을 느끼게 된다. 『 시경 (詩經)』에는 또 〈 만무 (萬舞) 〉 22) 와 〈 약무 (蓋舞) 〉 23) 가 보이는데 , 만무는 무무 (武 舞)이고 약무는 문무(文舞)이다. 소아(小雅) 「고종(鼓鐘)」에 보이 는 〈 이아이남, 이약불참(以稚以南, 以蓋不{암) 〉 을 『 모전(毛傳)』에서 는 〈 아(雅)를 춤추고 남(南)을 춤추는 것이다. 사방 오랑캐둘의 음 악도 춤추는 것은 위대한 덕이 미치기 때문이다 〉 24) 라고 풀이하고, 정현은 『전澤)』에서 〈 아(雅)는 만무( 萬 舞)이다. 만(萬)과 남(南) 과 약(篇)의 세 춤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는 것은 나아가고 물러나 고 하는 춤을 추는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이다 〉 25) 라고 하였으니, 아 무(雅舞)와 남무(南舞)도 있었던 것이다. 26) 어떻든 『 시경 (詩經)』이 각종의 가무와 관계가 깊은 것은 분명하다.

22) 邸風 「簡令」, 商碩 「那」에 보임 . 23) 小雅 「 賓 之初延」 「鼓鐘」에 보임 . 24) 『 毛傳』 @羽假움南也. 舞四夷之樂, 大德廣所及也. > 25) 『 鄭奎 』 〈雅, 萬舞也. 萬也, 南也, 篇 也, 三舞不潛, 言進退之旅也. > 26) 雅 • 南 • •을 모두 樂器로 보는 학자들도 많고 , 雅 • 南을 二雅 二南의 詩篇으로 보는 학자, 樂調名으로 보는 학자 등등 의견이 구구하다.

「국풍(國風)」에는 또 「전풍(陳風)」의 작품들처럼 무격 (巫親)의 가 무와 관계되는 것들도 있다. 이는 정악이 아니므로 다음의 대목으 로 설명을 미룬다. 그리고 일본의 학자 천상충웅 0I| 上忠雄)은 『 시 경 (詩經)』의 〈「악무偶舞)」의 대부분은 은대 (殷代)에서부터 내려오 던 것이며, 시가와 음악과 무용의 세 가지가 분화되지 않았을 적의 것〉이고, 〈 이들 고대가요는 반드시 무용과 동시에 행하던 행사(祭 禮등 民俗行事, 宮廷의 祭祀 및 冥 製 )를 수반하였다 하니 가무회라 고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 가무희 〉 의 관점에서 『 시경』 울 연구하고 해석하고 있다. 27) 물론 그의 관점에 문제가 없는 것

27) 「中國의 歌垣에 있어서의 歌舞戱-詩經으로부터」 (I ) (Il ) ( 『 千葉商大紀 要 』 第 17 卷 第 4 號) 및 「詩經시대의 樂舞-~『詩經』에 보이는 殷人의 樂

舞」 (I } (II } (1981 年, 日本大學 史學會 發表論文) 참조.

은 아니다. 예를 들면, 그는 논문의 첫머리에서 〈유인 (誘引)의 가 무희 〉 로 정풍(鄭風)의 「탁혜 (器令)」 「동문지선(東門之璋)」 「지금(子 裕)」 「전유(淡淸)」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 시를 들어 번역과 해설을 가하고 있다. 이 부분만을 놓고 보더라도 착상은 기발하나 아들 〈가무희〉의 연출 양상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거의 없는 점이 무 척 아쉽게 느껴집은 필자만의 느낌이 아닐 것이다. 이에 대하여도 뗄 대훈]서 다시 자세히 논의될 것이다. 어떻든 7'--텨] 『 시경』을 통하여 중국 고대의 가무와 〈가무희只룹 이해하는 데에는 좋은 길 잡이가 되는 논문이다. 『시경』이 쓰여졌던 시대에도 〈가무희〉가 상당히 유행하였고, 또 이들 속에는 틀림없이 〈가무희〉에 쓰이던 악가(樂歌)가 실려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주(周)나라 이전 (기원전 1120 여 년 이전)에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규모의 노래와 악무偶용舞)를 수반하는 정악(正樂) 둘이 성행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좌전(1-i:傳)』 「양공(襄公)」 29 년을 보면 오(吳)나라 공자(公子)인 계찰(季札)이 노(魯)나라로 와 서 주악閩樂)을 감상하고 평하는 대목이 있다. 그는 주남 OO 南) • 소남(召南) 등 15 국풍(國風)에 이어 소아(小雅) • 대아tkff) • 송 (碩)을 듣고 하나하나 비평을 가한 뒤에 상소(象罰) • 남약(南篇)과 대무伏武) • 소호(留漫) • 대하伏夏) • 소소(昭罰) 등의 춤을 감상 하며 비평을 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시대의 노나라에까 지도 이 정악들이 전승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음 악이나 무용은 이미 상당한 예술성을 갖춘 세련된 것들이었으며, 〈대무伏舞)났둥 중에는 이미 〈가무희〉의 성격도 지닌, 곧 상당한 정철의 이야기를 연출하는 가무도 있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 다.

3 산악(散樂)과 나 (1 써i) 『주례 (周禮)』 권 24 「춘관(春官)」 경사(磐師)를 보면, 경사는 〈만 악(綾樂)과 연악(燕樂)을 가르친다〉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은 〈만(綾)은 만금(綾錦 곧 비단)의 뜻으로 읽어야 하며, 잡성 (雜聲) 울 화악(和樂)한 것을 말한다〉 〈연악(燕樂)은 방중지악(房中之樂) 이다〉 28) 라고 주를 달고 있다. 두 가지 음악 모두 정악(正樂)이 아 닌 가벼운 음악임을 알 수 있다. 29) 또 같은 책에 〈매사(妹師)는 매 악(昧樂)을 가르치는 일을 관장한다〉라고 하였는데, 주(注)에 따르 면 매악은 〈동이지악(東夷之樂)〉이다. 다시 갇은 책에 〈모인(鹿人) 은 산악(散樂)과 이악(夷樂)의 춤을 가르치는 일을 관장하였다〉라 고 하였는데 , 주에 〈산악은 야인 (野人)들의 훌륭한 음악을 뜻하니 , 지금의 황문창頃門 1 昌)과 같아 자연히 춤이 있는 것이다. 이악은 사방 오랑캐들의 음악으로 역시 모두 노래와 춤이 있는 것이다〉 30)

28) 『周禮』 鄭注 〈玄謂綾讀爲經錦之綾, 謂雜聲之和樂者也.〉 센「생옹, 房中之 樂.〉 29) 郭情, 『樂府詩集』 卷 53 「雜舞敍」 여登自周有榎樂·散樂, 秦漢因之增 廣, 案會所奏, 率非雅舞. > 30) 『周禮』 「鄭注」 〈鹿人掌敎舞散樂, 舞夷樂. >〈 散樂, 野人爲樂之善者, 若 今黃門 1 距듯, 自有舞. 夷樂, 四夷之樂, 亦皆有聲歌及舞. >

라고 하였다. 이악을 〈사방 오랑캐의 음악〉이라 하였지만, 그것은 동이 (東夷)의 음악이 가장 두드러져 그렇게 불렀던 것이 아닌가 여 겨진다. 옛날 동이족들이 가무를 특히 잘 하였음은 뒤에 다시 설명 하게 될 것이다. 곽무천(郭茂情, 1804 년 전후)은 『악부시집偶節詩 集)』 권 56 에서 정현의 주를 보충하여 곧, 『 한서 (漢書)』의 이른바 황문(黃門)의 명창(名 1 昌) 병강伊翔[) • 경무(景武)의 무리들이 그것이다. 한대 (漢代)에는 황문고취 價:門鼓

P'!() 가 있었는데, 천자가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할 때 썼다. 그러므로 아악(雅樂) 이의에 또 연화(妻和)의 음악이 있었던 것이다. 『당서 側t 書 ) 』 「악지 엠志)」에 말하기를, 산악(散樂)이란 부오(部任)의 음악이 아니고 배우가무(俳優歌舞)를 집주(雜奏)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진한 (秦漢) 이래 또 잡기 (雜使)가 있어 그 변화는 같지 않아서 백희 (百 戱)라 불렀으며, 또 그것들을 모두 산악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로부 터 역대로 서로 이어받아 있게 된 것이다. 31)

31) 『樂府詩集』 〈卽漢書所謂黃門名偶丙强 • 景武之屬, 是也. 漢有黃門鼓吹, 天子所以案群臣. 然.IIIJ雅樂之外, 又有妻和之樂焉. 唐書樂志曰; 散樂者, 非 部任之聲,俳優歌舞雜奏.秦漢以來,又有雜使, 其變非一, 名爲百戱, 亦撲 謂之散樂. 自是歷代相承有之. >

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 시대에도 산악 속에는 여러 가지 기예 (使 藝)는 몰라도 〈가무희났근 포함되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므 로 이미 주대 OO 代)의 궁전에는 가벼운 가무들 및 사방 오랑캐들의 음악과 〈가무희〉가 포함된 민간음악도 도입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대의 경우로 보아 이악(夷樂) 속에도 틀림없이 〈가무회〉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예기 떼圈 E) 』 권 31 「명당위 (明堂位)」를 보면, 태묘伏廟)에서 대무伏武)와 대하伏友)를 춤추는 것 이의 에 동이지 악(東夷之樂) 인 매 (味)와 남만지 악(南樣之樂) 인 임 (任)도 쓰게 되어 있고, 같은 책 권 20 「문왕세자(文王世子)」에는 세자(世 子)와 사(士)들이 동서 (如字)에서 문무改舞) • 무무(武舞)와 함께 남이지악(南夷之樂)인 남(南)도 배우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시 『주례 OO 禮)』 권 22 「춘관종백하(春官宗伯下)」의 기록에 의 하면 운문(雲門)은 천신(天神), 함지徵池)는 지기(地祗)로 시작하 여 대무伏武)는 선조를 제사 지낼 때 등, 여섯 가지 춤 모두 제사 지낼 때 쓴다고 하였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모든 음악들도 연향

(燕끊!)이나 의식 (儀式) 이의에 제사 때에도 쓰이는 것으로 되어 있 다. 『주례』 권 24 의 여러 악관(樂官)들의 직분만 보더라도, 경사 圈雨)는 〈제사 지낼 때 만악(綾樂)을 연주〉하고, 종사倒祖雨)는 〈제사와 향사(製食)때 연악(燕樂)을 연주 〉 하며, 매사(昧師)는 〈제 사 때 그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매악(昧樂)을 춤추고 〉 , 모인(鹿人) 은 〈제사와 손님을 대접할 때 산악(散樂)과 이악(夷樂)을 춤추었으 며〉, 약사(蓋師)는 〈제사 때 북을 따라 우약(羽篇)의 춤을 추었 고〉, 악장(樂章)은 〈전조(田祖)에게 풍년을 빌 때 및 사제 (蝶祭)에 서 피리를 불고 토고(土鼓)를 연주하였으며〉, 제루씨 (提樓氏)는 〈제사 때 사이지악(四夷之樂)을 피리로 불고 노래하였다났트 등의 기사(記事)가 있다. 중국에서는 여러 종류의 제사 때마다 언제나 여러 가지의 악무(樂舞)가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천신(天神) • 지기 (地祗)와 오악(五嶽) • 산천 (山川) 등에게 드리는 큰 제사 이의에도, 연중 사철을 따라 궁중과 민간에서 여러 가지 제례 (祭禮)가 행해졌다. 『예기 頃澄記)』 권 14 「월령(月令)」의 〈맹춘지월頃春之月)〉만 보더라도 〈호伊)처} 제 사 32) 지내는 것 의에, 입춘(立春)날엔 동교(東邪)로 나가 〈영춘(迎 春)只全하고, 원일抗日)에는 상제 u.帝)에게 〈기곡(祈穀)〉을 하 며, 〈자전(薛田)〉의 의식을 행하였다. 〈중춘지월(仲春之月)〉에는 백성들에게 〈사(社)只룹 행하도록 명하고, 〈 고매 (高謀)〉 33) 를 제사 지내며, 얼음을- 꺼내어 침묘頃潮)에 바치는 제사를 지냈다. 〈계춘

32) 떠 E 〉 중의 하나. 五祀에는 여러 가지 異說이 있으나, 『禮 記 』 「月令」의 五祀로는 봉엔 샨 3 〉, 여름엔 〈電〉, 가을에는 꾼 T 〉, 겨울에는 〈行났t 제사 지내고, 六月 (中央)에는 土王인 〈中符녔t 제사 지냈다. 33) 〈高謀〉―제비가 떨어뜨린 알을 삼키어 域簡이 契울 낳아 商나라 조상 이 되었다. 契은 高辛氏의 아들이며, 이 때 媒氏之官이 제비 알을 삼키는 데 공이 있었으므로 뒤에 이를 謀神이라 받들고 제사를 모시게 되었던 것 01 다.

지월(季春之月)〉에는 〈국의 (勒衣)녔t 선제 (先帝)에게 바치는 34) 행 사가 있고, 시물(時物)인 〈유어(飾魚)처t 침묘에 울리며, 보리가 잘 여물기를 빌고, 권참(勸蠶)의 행사가 있으며, 국나(國灘)를 행 하였다. 봄에만도 이토록 제례와 관계되는 행사가 많았다.

34) ffi衣는 黃桑으로 만든 옷으로 蠶事가 잘 되게 해주기를 비는 뜻이라 한 다. 先帝는 注에 大嶋 갇은 분들이라 하였다.

그 밖에 영춘지월猛春之月)〉에는 〈악정(樂正)에게 명하여 입학 (入學)하여 습무(習舞)를 하고 제전(祭典)을 닦게 한다〉 35) 라고 하 였으며, 〈중춘지월(仲春之月)〉에도 상정일lt丁日)과 중정일(仲丁 日 )에 두 번 악정 偶証)으로 하여금 춤을 익히게 하였고, @사춘지 월(季春之月)〉에는 길일을 택하여 〈대합악 8: 合樂)났t 하였다. 이 는 모두 제례에 음악이 쓰였기 때문이다. 일찍이 프랑스 학자 마르 셸 그라네 Marcel Grane t가 『중국 고대의 제의 (祭儀)와 노래 Fete s et Chansons Ancie n nes de la Ch in e 』 (1919) 에서, 중국 고대사회 연구의 결과를 바탕으로 『시경』의 시들, 특히 그 중에서도 「국풍 (國風)」은 〈고대 농민들의 전원적 (田園的)인 계절제 (季節祭)에서 젊 은 남녀들이 창화 {P 昌和)한 사랑의 노래 또는 민요〉로서 〈의례적 (儀 禮的)인 무용을 하면서 죽음(卽岭)한, 옛 농제 (農祭)의 주요한 구 두의례 (口頭陶禮)〉라는 입장에서 시를 번역하고 해설하여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 이 제례 (祭禮)들에는 가무뿐만 아니라 〈가무희〉 도 동원되었음이 확실하다.

35) 『禮記』 〈命樂正入學習舞 乃條祭典. >

그 중에서도 〈나 (1 難)났곤 지금까지도 중국 각지에 가면회인 나희 (驛)를 전승하여 행해지게 한, 특히 〈가무희〉와 관계가 깊은 행 사였다. 『예기 때記)』 권 15 「월령 (月令)」에는 계춘지월(季春之月) 에 〈나라에 명하여 나(灘)를 행하게 하고, 아홉 문에 제물을 내걸 어 재난을 막아 봄 기운으로 오는 불행을 그치게 하였다〉, 맹추지

월(孟秋之月)에 〈천자는 이에 나 (1 難)률 행하여 가울 기운을 통달케 하였다〉, 계동지월(季冬之月)에 또 〈 관계관에게 명하여 대나 8: i섯It) 를 행하게 하고, 문 곁에 제물을 내걸며, 흙소를 내놓음으로써 추 운 기운울 보내었다났즌 기록이 있다. 36) 후세와 달리 주(周)나라 때에는 연말 이의에 봄 가을에도 나 (1 難)를 행하였다. 그런데 공영 달 G 냐配達)이 『소(疏)』에서 〈계동(季冬)의 것만을 대나 8 灘)라고 한 것은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모두가 행하기 때문이다〉 37) 라고 하 였듯이 12 월의 나(難)만은 민간에서도 널리 행해졌다.

36) 『禮記』 〈命國難 九 F 幣趙볼, 以畢春氣 >又 연현가 5 難, 以達秋氣. > 又 〈命有司, 大難,芳森, 出土牛, 以送寒氣.〉 (여기의 생佳 X 근 〈灘〉와 같은 글자임). 37) l'1;t 〈季冬稱大, 則貴賤皆爲也. >

『주례 OO 禮)』 권 25 「춘관점몽(春官占夢)」에는 또 〈계동(季冬)이 되면……마침내 영을 내려 비로소 나 (1 難)를 행하여 역귀(疾鬼)들 울 쫓아냈다〉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은 주(注)에서 〈영을 내린 다는 것은 방상씨 (方相氏)에게 영을 내린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같은 책 권 31 「하관사마頃官司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방상씨 (方相氏)는 곰가죽을 뒤집어 쓰고, 황금(黃金)의 네 눈을 달 고, 검은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고, 창과 방패를 들고, 또 여러 부 하들을 거느리고 시나(時灘)를 행함으로써 집안을 뒤지며 역귀를 쫓 아 내는 일을 관장한다. 38)

38) 『周禮』 〈季冬…… 遂令始難歐疾. >又 〈方相氏掌蒙熊皮, 黃金四目 , 玄衣 朱훅 執揚后, 帥百隸而時難, 以索室而歐疾. >

라고하였다. 『여씨춘추(呂氏春秋)』의 「계춘기제삼(季春紀第三)」 「중추기제팔

(仲秋紀第 A) 」 「계동기제십이 (季冬紀第十二)」에도 각각 『예기 여証 E) 』 「월령 (月令)」과 거의 같은 나 (1 難)에 관한 기록이 있다. 『논어 (論 語)』 「향당(鄕黨)」 편을 보면 공자가 향인(鄕人)들이 나 (1 難)률 행할 적에는 조복(朝服)을 입고 동쪽 섬 돌에 섰다 .39)

39) 『論語』 센 5 人灘, 朝服而立於祚階. >

라는 기록도 있다. 공자는 민간의 〈나〉에 참석하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확실히 말하고 있지 않지만 〈나〉의 주역 (主役)인 방상 씨 (方相氏)는 〈황금사목濱金四目)〉이라 하였고, 또 한대 (漢代) 이 후의 〈나〉로 보아 가면희였음이 분명하다. 왕국유(王國維)는 『고국 각색고(古劇角色考)』에서 이미 이 곳의 방상씨가 〈곰가죽을 뒤집어 쓰고 황금의 네 눈을 달고 있으니〉 아마도 여기에서 가면이 시작된 듯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방상씨는 백예 (百媒)를 거느리고 를 행한다 하였으니 그 규모도 이미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리 고 『주례 閩禮)』 권 28 「하관사마頃演司馬)」에 〈방상씨는 광부 네 사람이 맡았다(方相氏, 狂夫四人)〉라고 하였다. 방상씨를 담당하는 사(士)만을 굉부(狂夫)로 부르고 있는 것은 그가 주관하는 〈나〉가 광적인 동작을 수반하는 희례 徵禮)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리 고 방상씨가 네 명이나 등장하는 〈나〉도 있었던 듯하다. 고대 연말의 제의로는 납庫)과 사(緖)도 있었다. 동한(東漢)의 웅소(應助, 178 년 전후)는 『풍속통의 價俗通義)』에서 『예전頃潤-)』 울인용하여 하頃)나라 때는 가평(嘉平), 은(殷)나라 때는 청사(淸祀), 주 OO) 나라 때는 대사난려}), 한(漢)나라 때는 · 납(臘)이라 고쳐 불렀

다 .40)

40) 『風俗通義』 G 董接禮傳 夏曰嘉平, 殷曰淸祀, 周曰大蝶漢改爲臘 >

라고 하였다. 『예기 G澄 記)』 권 26 「교특생 肉降性t)」에는 천자의 대사伏璋:)에는 여덟 신(神)을 제사지낸다. 이기씨 (伊耆氏) 가 사(緖)를 시작하였는데, 사(緖)는 찾는다며g〕의 뜻으로, 매년 12 월에 백성들에게 도움이 된 만물을 모아 찾아서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 는 것이다 .41)

41) 며劃山 연든子大蝶八, 伊耆氏始爲蝶. 蝶也者, 索也, 歲十二月 , 合奈萬物 而之也.〉

라고 하면서, 〈여덟 신〉인 선색 (先薔 神農 갇은 분) • 사색 (司薔, 后稷 같은 분) • 농 (農, 田峻) • 우표철 (郵表綴 田峻이 농민들을 발과 우물가게서 督勘하는 곳) • 고양이와 호랑이 • 제방 • 도랑 • 곤충 등의 제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고양이와 호랑이〉에 대한 대목만 보더라도 옛날의 군자(君子)는 부린 것에 대하여는 반드시 보답을 하였다. 고양이룰 맞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둘쥐둘을 잡아먹어 주었기 때문이 다. 호랑이를 맞아들이는 것은 그것들이 멧돼지롤 잡아먹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맞아들여 제사 지내 주는 것이다. 42)

라고하였다. 그러므로 이 대사伏緖)는 〈나〉 못지않은 성대한 희례 馮~)였 고, 고양이와 호랑이 등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역시 가면희였을 수

42) WCJ 〈古之君子, 使之必報之. 迎猫, 爲其食田鼠也. 迎虎, 爲其食田家 也. 迎而祭之也.〉

밖에 없을듯하다. 『예기 며澄記)』 권 17 「월령 (月令)」 맹동지월 (ffi冬之月 )에는 천자가 해와 달과 별 들에게 내년의 풍년을 빌며, 공사(公社)와 문 려 (門 OO) 에 여러 희생 (磯性)들을 크게 마련하여 제사 지내고, 선조에 게 납제 (臘祭)를 울리며, 오사(五踊 E) 를 지낸다 .43)

43) 『禮記』 연乃祈來年于天宗, 大割祠于公社, 及門間, 臘先祖, 五屈:. >

라는 기록이 보인다. 정현(鄭玄)은 주(注)에서 이것들이 바로 『주 례』에 보이는 〈사제 (蝶祭)〉라 하고, 〈납(臘)이란 전렵 (田臘)을 해 서 잡은 날짐승으로 제사 지내는 것을 뜻한다〉 44) 라고 하였다. 이 에 따르면 납(臘)은 사燁)의 일부가 되고 있으며, 그 제사의 뜻이 서로다르다.

44) 『禮記』 「鄭注 〈Jli謂以田臘所得萬祭也. >

다시 『예기』 권 43 「잡기 (雜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자공(子貢)이 사(緖)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공자가 물었다. 〈사(Jm) 야! 줄거우냐?〉 자공이 대답하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미친 것만 같습니다. 저는 무엇이 즐거운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 공자가 말하였다. 〈백일 동안의 노고에 대하여 사(皓)를 행함으로써 하루의 은택이 베풀어지는 것이니, 너로서는 알 바가 못 될 것이다. 당기기 만 하고 늦추어 주지 않는다면 문왕(文王) ·무왕(武王)도 다스릴 수 없게 된다. 늦추기만 하고 당기지는 않는 일은 문왕 • 무왕이라면 하 지 않는다. 한 번 당기었다가 한 번은 늦추어 주는 것이 문왕 • 무왕의 도(道)인 것이다. >45 )

45) 『禮記』 〈子貢觀於婦 孔子曰, 賜也, 樂平 ? 對曰, 一國之人, 皆若狂,

賜未知其樂也.子曰,百日之蝶,一日之澤, 非爾所知也.張而不强, 文武弗 能也, 池而不張, 文武不爲也. 一張一强, 文武之道也. >( 다 L 子 家 語 』 卷 7 며寸」 편에도 비슷한 글이 보임 ) .

여기서 자공( 子貢 )이 사( 緖 )를 행하는 모습을 보고 〈 온 나라 사 람들이 모두 미친 것만 같다 〉 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사(皓)도 〈 나 〉 못지않은 행사였음을 알 수 있다. 후세의 소식 (森試 1036- 1101) 이 『 동파지림 (東坡志林)』 권 2 에서 〈 팔사(八緖)는 삼대 (三代) 의 희례 儒 禮 ) 〉 라고 말하고 있거니와, 이것 역시 〈 나 〉 나 마찬가지 로 온 나라에 행해지던 성대한 가무희였을 가능성이 많다. 가면은 이미 상(商)나라 때에도 존재하였다. 은허 (殷樓)의 갑골 복사(甲骨卜辭) 중에는 隨 자가 있는데 한 사람의 머리에 두 쌍의 눈이 달린 가면을 쓰고 있는 모양이며, 곽말약(郭洙 若 )은 이것을 〈기 (旭) 〉자로 풀이하였다. 46) 상주 (商周)의 청동기 ( 靑 銅器)에 새 겨 진 금문(金文) 중에는 한 얼굴에 네 개의 눈이 달린 가면을 쓴 모 양의 글자 ?「 가 있는데, 주법고(周法高)와 여영량(余永梁)은 그 것도 역시 〈기(旭)〉자라고 풀이하였다 .4 미국의 시애틀 미술관과 시카고 예술학원에는 각각 중국 고대의 청동가면이 소장되어 있는 데, 주화빈(周華斌)의 고증에 의하면 모두 상(商)말 주(周)초의 것 이라 한다. 48) 그러니 상대 (商代)에도 이미 가면이 있었음이 사실이 고, 또 이것들은 모두 제의 (祭儀)와 가면희에 사용되던 것들임에 틀림없다.

46) 郭洙若, 『 卜 辭通纂 』 10 1¼!문 참조. 47) 周法高 『 金文話林補 』 附錄 (國立中央硏究院 歷史 語言 硏究所 專 刊之 77) 및 余永梁, 『 殷猿文字考 』 참조. 48) 周華斌 멤璃古面具和方相氏福鬼」 (((中華戱曲)) 第 6 輯 1988) 참조.

〈 기 (建)났즌 Xi • 題 • 默 • fJt • 側등으로도 쓰는데, 모두 가면의 뜻이며, 주(周)나라에 와서는 가면을 〈 기두(健頭) 〉 또는 〈 피기 (皮 OO)> 등 으로 불렀다. 49) 그리고 요순(堯舜)시대의 악정 (樂正)이었던

49) 『 周禮 』 정[官司馬」 〈 方相氏 〉 「鄭玄注」 〈冒 熊皮者, 以驚歐疾腐之鬼, 如今 悲頭也. 〉 『 愼子 』 , 〈 毛婚 • 西施, 天下之至}탔也, 衣之以皮個 則見之者皆走. >( 魏 徵 • 蕭言 『 諸子治要 』 本 의거)

기 (愛)도 『 설문해자(說文解 字 ) 』 에서 〈 기 (愛)는 곧 호(旭)이다. 용 (龍)과 같고 다리가 하나이며 쇠 (失)변을 따랐다. 뿔과 손이 달린 것을 나타내고 있고 사람 얼굴의 모양이다 〉 50) 라고 하였다. 〈 호 (怒)冷 도깨비 종류이며, 〈 수(首)났근 사람의 얼굴을 뜻한다. 〈기 (愛)났 악무(樂舞)를 주관하는 장관(長官)이지만 아무래도 그 당 시 성행하던 가면희 때문에 이런 글자가 이루어진 듯하다.

50) 『 說文解字 』 〈愛 卽悠也. 如龍,一足, M.~. 象有角手,人面之形. >

타옛날 8얼굴 .을 因 뜻 이하 는예 서글체자 (인謀 獻면릎( ,面 )『 說 •文 수解(字首) 』 의• 혈거()頁인)데 ,등 은모 두각 가각 면과 관계가 있을 성싶다. 특히 『 설문해자 』 에서 〈 @J은 얼굴의 앞 圖)이다 〉 고 설명하고 있는데, 얼굴을 뜻하는 <色 >밖 에 또 하 나의 〈 〔)까 있으니, 얼굴 위에 대던 가면을 뜻하는 것일 가능 성이 많다. 다시 가면희는 역귀 (疾鬼)를 쫓는 나 (1 難)와 관계가 깊어 가면을 〈 귀검 凍服) 〉 또는 〈 귀면(鬼面) 〉 이라고도 후세에는 부르게 되었다. 『 설문해자 』 에 <: J, 사람이 죽으면 귀 백)가 된다. 인 (사변을 따 르고 귀두凍頭) ° 형상을 따랐다 〉 51) 라고 설명하고 있다. 〈귀두凍, 頭) 〉 인 〈 순初를 문자학자들은 보통 〈머리가 큰 것이다(頭大也)〉라 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것도 가면에서 온 모양일 가능성이 많다. 곧 〈 귀두馮頭)冷 〈 기 -두 (悲頭) 〉 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갑골 문자(甲骨文字)에는 <홍 〉 로 되어 있다. 52)

51) 『 說文解字 』 Ol, 人所歸爲鬼. M.A, 象鬼頭. > 52) 『 殷虛文字甲編 』 3407.

어떻든 간에 이상을 종합하면 이미 상(商)나라 이전에 가면이 존

재하였고, 그 가면은 제의 (祭 儀 )와 가면희에 쓰이던 것이 대부분이 었을 것이다. 그리고 〈 기 (愛) 〉 의 경우로 보아 요순(堯舜) 때부터도 가면회인 〈가무회났근 이미 〈 악( 樂 ) 〉 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 었음을짐작하게 된다. 4 무무(巫舞) 일찍이 왕국유(王國維)가 『 송원희곡고(宋元戱曲考) 』 의 첫머리에서 중국희극의 근원인 가무闇녔돕)가 고대의 무격 (巫親)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논하였다. 뒤에 여러 학자들이 〈상고시대부터 이미 가무는 있었다〉라고 주장하면서, 왕국유의 이론을 비판하며 가무의 시원 을 인류문화가 시작된 때로 끌어올리고도 있다. 53) 그러나 〈 희극의 가무녔룽 논하는 데 있어서 그 근원을 〈무(巫)〉에서 찾았던 왕국유 의 견해는 높이 평가되어야만 할 것이다.

53) 許之衡, 『 中國戱曲史 』 , 董每 截, 『 中國戱劇簡史 』 등.

『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보면, 최, 무축(巫祝)이다. 여자로써 무형 (無形)을 섬기어, 춤으로써 신 (神)을 내리게 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양 소매로 춤추는 모양을 상 칭한 것이다. 공(I)자와 같은 뜻이다. 54)

54) 『 說文解字 』 @., 巫祝也. 女能 事 無形, 以舞降神者也. 象人兩裵舞形, 與 工同 意 〉

라고 〈무只룹 설명하고 있다. 단옥재 (段玉裁, 1735-1815) 는 「주 健)」에서 〈축(祝) X 본 〈남자무당只全 뜻하는 〈격 (親) 〉자의 찰못일 거라고 하였다. 〈무형 (無形)〉이란 신(神)을 뜻한다. 이 글자가 〈양

소매로 춤추는 모양只끌 나타낸 것이라 설명한 데 대하여는 이견이 많지만, 〈 무났즌 〈 무당 〉 이며 〈 춤으로써 신을 섬기는 사람 〉 임에 틀 림없다. 그리고 『 국어 (國語) 』 「초어하(楚 語下 )」에는 〈남자는 격 (親), 여지는 무(巫)라 한다 〉 라고 쓰여 있어, 대체로 후세에서 이 풀이를 따르게 되었다. 〈 무(巫) 〉 와 〈 무(舞) 〉 자는 옛날에는 본디 한 자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많으며, 〈무(舞) 〉 와 〈 무(無, 無 形) 〉 , 〈 무(巫)海 모두 관계가 깊은 글자로 보는 학자들이 많은 데, 55) 이유가 있다고 여겨진다.

55) 章炳麟 『 文始 』 「文五」, 日本 中島鍊, 『睿 契淵源 』 8겨 t堂, 1928) 第 1 冊등.

전몽가(陳夢家)는 〈 무(舞)〉자 자형의 변화· 발전을 다음과 같이 배열하여 나타내었다 .56)

56) 董每跋 『 中國穀劇簡史 』 第二章 巫舞에서 인용.

宁-맛-奭一更-正三 위의 옛 글자의 배열은 무(舞)와 무(巫)의 관계를 무엇보다도 잘 설명해 준다. 갑골문(甲骨文)에 무(無)자는 <맛 〉로 보이는데, 많 은 학자들이 그것은 〈무(舞)자의 초문(初文)〉이라 설명하고도 있 다. 무(無)는 무형 (無形), 곧 신과 관계되는 글자이다. 중국에는 이 무(巫)가 상당히 일찍부터 활약하였고, 상고의 제정 일치 (祭政一致) 시대에는 〈무 〉 의 사회적 지위가 대단히 높았다. 하 (][) • 상(商) 때만 하더라도 〈임금과 관리가 모두 무맨狂)에서 나왔 고〉 〈축(祝) • 종(宗) • 복( 卜 ) • 사使) 등의 여러 관원도 모두가 무 (巫)의 변체(變體)로서, 모두 무(巫)로부터 나왔다〉라고 추측되고 있다. 57) 옛날 춤의 기본 보법 (步法) 인 〈무보(舞步) 났근 〈우보(禹

57) 李宗個 『 中國古代社會史』 ( 臺北 , 華岡出版社, 1954) 〈君及官吏皆出自

巫. >〈 f兄 • 宗 • ~ • 史等百官, 皆是巫的 變 體, 皆出自巫. >

步)〉에서 나왔고, 뒤에는 〈 무보(巫步) 〉 또는 〈 무조(巫挑D 로 발전 했다고도 한다. 양웅(揚雄, 기원전 53 - 기원후 18 년)의 『 법언 (法 言 ) 』 「중려( 重 黎)」 편에 〈 옛날 서씨(似氏)가 물과 땅을 다스렸는데, 무 (巫)는 보법 (步法)에서 우(禹)를 많이 따른다 〉 58) 라고 한 말이 보이 는데, 이궤 (李軌)의 주(注)에서는 이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 다.

58) 『 法言』 〈昔 者, 似氏治水土,而巫步多禹. >

사씨(似氏)는 우(禹)이다. 물과 땅을 다스리느라 산천을 지나다니 다 보니 발병이 나서 절롬거리게 되었다. 우(禹)는 성인이기 때문에 귀신이나 맹수 나설 • 전갈 • 뱀 • 독사 등도 그를 해치지 못하였다. 그 래서 세상의 무 (巫)들이 흔히 우보 (禹步)를 본뜨게 된 것이다. 59)

59) ~暎, 禹也 治水土, 涉山川 , 病足 , 故行跋也. 禹自聖人, 是 以鬼神猛 獸 , 蜂蓋蛇底 莫之 盤 耳, 而俗巫多效禹步. >이 밖에 대 i子 』 「非相」 〈 禹挑 湯偏〉 「楊係 注」 〈尸子曰, 禹之勞十年, 不裵其家, 手不瓜, 麗 不生毛, 偏 柏之病 , 步不相過,人曰禹步. >皇 甫諸 『 帝王世紀』 성 8 命禹以爲司空…… 手足膳ij~. 故世傳禹偏祐, 足不相過, 至今巫稱禹步是也. >등 의 기록이 보 인다. 日 人 藤野岩夫의 「禹步考」 ( 『 中國CT)文學히얽谷 』 角川 書 店, 1976 所 載)라는論文도있음.

상대 (商代)에도 〈무 〉 의 지위나 사회적인 역할은 대단하였다. 『 서 경 ( 書 經)』 「상서 (商 書 ) 이훈(伊訓)」 편에 보면, 〈 감히 언제나 집안 에서 춤추고 방에서 취하여 노래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이 바로 무 풍(巫風)이라 이르는 것 〉 60) 이라고 하면서 탕(湯)임금의 재상 이윤 (伊尹)이 무풍(巫風)에 대하여 관형 (官ff l j)울 제정하고 있다. 『묵자 ( 墨 子)』에도 탕임금이 관형을 제정하면서 〈언제나 집안에서 춤추고

60) 『 書 經 』 徵有恒舞于宮, 師歌于室, 時謂巫風. >

있는 것을 바로 무풍맨風)이라 한다 〉 61) 라고 경계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상(商)나라는 통치자 자신들까지도 염려해야만 할 정도로 〈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는 〉 무풍(巫風)이 널리 만연하였음울 알 수있다.

61) 『墨 子 』 「非樂」 〈 先王之 智 , 湯之官刑有之, 日, 其恒舞于宮, 是謂巫風.〉

『서경』 「주서 (周 睿 ) 군석 (君奭)」 편에는 〈태무 ~) 때에는 …… 무함(巫成)이 임금의 나라를 다스렸고, 조을(祖乙) 때에는 또 무현 (巫賢) 같은 사람이 있었다 〉 62) 라고 하였다. 마융(馬融, 79-166 년) 은 무함(巫成)에 대하여 〈무(巫)는 남무(男巫)로써 이름이 함減;) 인데, 은(殷)나라의 무(fil)이다 〉 63) 라고 주(注)에서 설명하고 있으 며, 『 설문해자』 무(巫)자의 해설 끝머리에 〈 옛날에 무함따威)이 처음으로 무(巫)가 되었었다〉 64) 라는 설명이 첨가되어 있다. 그의 이름은 『 초사礎辭) .!I 의 「이소(離駿)」, 『장자(莊子) 』 「천운(天運)」 편 등에도 보인다. 또한 그는 『열자(列子)』 「황제 ( 黃 帝)」 편, 『 장 자(莊子) 』 「응제왕(應帝王)」 편 등에 보이는 후세의 계함(季威)과 같이 신무(神巫)로 유명한 사람이다. 무현~ 『공전떠傳) 』 에 서 〈무 함(巫咸)의 아들 〉 이라 하였고, 『 죽서기년(竹 書 紀年) 』 「상 (商) 조울삼년(祖乙三年)」에도 보이는 인물이다. 어떻든 간에 〈무〉 를 세전(世傳)의 직업으로 삼는 무함(巫咸) ·무현맥賢)의 부자가 상(商)나라의 재상 노릇까지 하였다. 이 밖에 갑골문(甲骨文)에도 무멘)자 <단 • 엽정 〉 65) 가 여러 곳에 보이고, 점복(占 卜 )을 하는

62) 『書經』 〈在 太戊時, …… 巫威又王家, 在祖乙時, 則有若巫빴. > 63) 『書 經 』 「馬融 注」 여 l, 男巫也, 名威, 殷之巫也. > 64) 『 說文解字 』 〈古者, 巫威初作巫.〉 65) 앞 글자는 李孝定, 『 甲骨文字集釋』 (中央硏究院 歷史語言硏究所, 1965) 第 5 冊 참조. 이 글자를 唐蘭 • 郭洙若 • 陳夢家 내鳥宗願 • 屈萬里 등이 巫 자로보고 있다. 뒷 글자는 『鐵 雲 藏龜』 143 葉, 『 殷城 睿 契後編 』 下 4 葉 등 에 보이며 羅振玉이 巫자로 풀이함.

일 자체가 〈 무 〉 의 직책 중 하나이니, 상나라 때 〈 무 〉 가 성행하였 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상나라 때 왕은 무사장(巫師長)이고, 무 함(巫咸) • 무현 (巫~) 같은 사람은 그 밀에서 일을 돕는 유력한 무 사(巫師)였을 거라는 학자들도 있다. 따라서 상나라 임금둘은 당 (湯)을 비롯하여 모두가 사제장(司祭長)이고 무사장(巫師長)이며, 이척 (伊涉) • 이윤 (伊尹) • 감반 (甘盤) • 부열 (傅說) 등 역대의 명재 상들도 〈무〉였으리라는 것이다. 66)

66) 『呂氏春秋』 「 )I~ <:Jo:.1¥-, 五年不收, 湯乃以身禪於桑林. > 『淮南子』 「修務訓」 〈湯苦早 以身禧於桑林之山. >湯 은 직접 비를 빈 巫임이 분명하 며, 其他 具塚茂樹, 『中國古代史學®發展』 第 2 部 第 2 章 第 2 節 및 藤野 岩夫 『巫系文學論』 (東京 大學 耆 店 昭和 44 &f-增 補版) 맹샤凉t b 、 T 」 三. 巫 m 神政참조.

『 주례 (周禮) 』 권 22 「춘관(春官)」 대사악 8 司樂)울 보면 천신 (天 神)을 제사 지낼 때에는 〈황종(黃鐘)을 연주하고, 태려 0 幸,)를 노 래하고, 운문(雲門)을 춤추었다〉라고 했고, 지기 (地祗)를 제사 지 낼 때엔 〈태주 8 翁})를 연주하고, 응종(應鐘)을 노래하고, 함지 ~ 池)를 춤추었다〉라고 했으며, 사망(四望)의 제사에는 〈고선個갔先) 울 연주하고, 남려 (南呂)를 노래하고, 대소난흉홍)를 춤추었다〉 했 고, 산천(山川)의 제사에는 〈유빈(薛賓)을 연주하고, 함종(函鐘)을 노래하고, 대하伏夏)를 춤추었다〉라고 했으며, 선비 (先姚)의 제사 에는 〈이칙 (夷則)을 연주하고, 소려 (小呂)를 노래하고, 대호 0 레§) 롤 춤추었다〉 했고, 선조의 제사에는 〈무역 (無射)울 연주하고, 협 종(來鐘)을 노래하고, 대무 8 武)를 춤추었다〉 했으며, 이런 음악 을 연주하면 〈사람과 신이 예 때!)를 지킬 수 있게 된다〉 67) 라고 하 였으니, 앞에서 논한 고대의 정악(正樂)도 〈무〉와 관계가 있는 듯 하다.

67) 『周禮』 0 여申可得而禮. >

〈무冷 본디 가무로써 신(神)을 부르고 또 즐겁게 해주었기 때문 에(,卜 辭)상 대중 에(商 기代우)(에細는禪 무) 무등여과 E 舞 관)도계 되성는행 되골편었(을骨 片것)이에다 .무 (그舞,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무풍(巫風)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은허 (殷~) 복사 자도 여러 곳에 보이고 있다. 그리고 무무(巫舞)는 춤을 추고 노래 하며 신을 내리게 하고, 신에게 바람을 나타내며, 다시 그 바람을 이루어 주도록 유인해야 하고, 일이 끝난 다음에는 신을 전송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가무회적인 성격을 띠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주聞)나라로 들어와서는 주공聞公)이 제례작악(祭禮作樂)함으 로써 무풍맨風)이 현저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러나 『주례』 권 26 「춘관(春官)」에는 사무(司巫)와 남무(男巫) • 여무(女巫)에 관한 기록이 있다. 사무 (司巫)는 여러 〈무只출의 정령 (政令)울 관장한다. 만약 나라에 큰 가뭄이 들면, 곧 〈무녔t 거느리고, 우( 零 , 비를 내리는 의식)를 춤춘다. 니러에 큰 재앙이 있을 때에는… ... 제사(祭祀) 때에는……. 제사(祭事)에는……. 상사(喪事)에는 ……. 남무(男巫)는 망사偉覽) ·망연 偉!衍) ·수호(授號)를 관장하고……. 겨울에는 역귀 僚魂)를 쫓고……• 봄에는 복 OO 區)과 평안을 빌며 ……. 왕의 조사(市事)에는……. 여무(女巫)는 삼월 상사U::巳)날 향초(香草)로 목욕하고 불제 (載 除)하는 일을 관장하며, 가뭄이 들면 우( 零 )를 춤춘다. 왕후의 조사 (市事)에는……. 나라에 큰 재난이 있으면 노래하고 곡하며 재난이 물 러가길 빈다 .68)

68) 『周禮』 〈司巫掌群巫之政令. 若國大早, 則帥巫而舞 等 . 國有大裁, 則帥巫 而造舞恒.祭祀則共恒主, 及道布, 及租館.凡祭祀, 守煙.凡喪事,掌巫降 之禮 > 〈男巫掌望祀 • 望衍 • 授號, 芳招以茅. 冬堂贈, 無方無等. 春招强, 以除疾病 王if;, 則與祝前. > 〈女巫掌歲時跋除翼浴. 若王后Ip, 則與祝前. 凡之大裁, 歌吳而請. >

이 밖에 『예기 며登記)』 『의례 (儀禮) 』 69) 등에도 보이는데, 주(周) 나라의 무관(巫官)은, 첫째 가뭄이 들었을 때 춤을 추며 비를 비는 일, 둘째 큰 재난을 막는 일, 셋째 여러 가지 제시에 참석하여 일 정한 일을 하며, 넷째 상사(喪事)에서의 일정한 일, 다섯째 왕이나 왕후의 조문(市問)하는 일 등을 담당하였다. 『순자(荀子)』 「왕제 (王制)」 편 서관(序官)에는 음양(陰陽)을 살피고, 음양과 자연의 조짐을 점치며, 거북점과 역 (易)점을 치며, 불상(不祥)을 몰아내고 길한 것을 취하며 날짜를 점 쳐서, 그 길흉(吉凶)과 요상(妖祥)을 알아내는 것이 곱추 무(巫)와 절름발이 격 (親)의 하는 일이다. 70)

69) 'l함山 「檀弓下」 • 「喪服大記」, 『儀禮』 「士喪禮」 등에 보임. 70) l':fij子』 〈相陰陽, 占設兆, 錢龜陳卦, 主撲擇五 卜 , 知其吉凶妖祥, 樞巫跋 擊(親)之事也.〉

라고 하였다. 『여씨춘추(呂氏春秋)』 「물궁(勿射)」 편에서는 무팽 (巫彭)은 의원 노릇을 했고, 무함 (巫咸)은 점을 쳤다. 71)

71) 『呂氏春秋』 Q떄끼年醫 巫威作莖 >

라고 하였으며, 『국어 (園語)』에서는 〈의 (醫)〉자를 모두 〈의 (登)〉로 쓰고 있다. 또한, 『관자(管子)』 「권수(權修)」 편에서는 〈임금은 점 울 믿고 무의 (巫登)를 잘 썼다〉 72) 라고 하며 〈무의 (巫醫)녔卜 연이어

72) 『國語』 (J:侍龜莖, 好用巫醫. >

쓰고 있으니,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일도 〈무 〉 의 주요한 업무였 다. 그 밖에 『좌전佑傳) 』 을 보면 전장(戰場)에 수행하여 전쟁의 결과를 예언하기도 하고, 임금의 꿈을 점쳐주기도 한다. 그 밖에 도 『주례』 「춘관(春官)」에서 설명하고 있는 태복体; 卜 ) • 복사( 卜 師) • 구인 (龜人) • 수씨 ( 華 氏) • 점인 (占人) • 서인 ( 怒 人) • 점몽(占夢) • 시침 (眠設) • 대축 난하6?.) • 소축 (小祝) • 성축 (喪祝) • 전축 (句祝) • 저축 (祖祝) • 태사난史) • 풍상씨 ( 馮 相氏) • 보장씨 (保 章 氏) • 내사(內史) • 의사어`史) • 어사(御史) 등도 실은 모두 무격 맨親)류에 속하는 관 직들이다. 『예기 』 「월령 (月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년 사철을 두고 여 러 가지 제례 ~ 행사(行 事 )가 행해졌다. 그 중에서도 농경사 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사는 그 해의 풍작을 비는 여러 가지 제의 (祭儀)이다. 『 주례 』 권 24 「춘관(春官)」 약장(蓋 章 )의 직분을 보면, 나라에서 풍년이 들기를 전조(田祖)에게 빌 때, 빈(園)의 음악을 피리로 불고 토고(土鼓)를 두드립으로써 전준(田峻)을 즐겁게 했 다 .73)

73) 『 周禮 』 산 L 國祈年于田祖, 飮幽雅, 擊土鼓, 以樂田峻. >

라고 하였다. 〈전조(田祖)났근 〈발의 신〉으로, 정주(鄭注)에는 〈처 음 농사를 지은 사람으로 신농(神農)을 뜻한다〉 74) 라고 하였다. 다 시 〈전준(田峻 )X 본 주(注)에 정사농(鄭司農)을 인용하여 〈옛날에 제일 먼저 밭농사를 가르친 사람〉 75) 이라 하였다.

74) 『 周禮 』 「鄭注」 OO 耕田者, 謂神農也. > 75) 『 周禮』 「注」 〈古之先敎田者. >

『시경(詩經)』의 소아(小雅) 「보전(甫田)」의 제 2 장·제 3 장에도 전

조(田祖)와 전준(田峻)이 보인다. 수북이 담은젯밥과 양을잡아제물로바치며 땅의 신 사방의 신께 제사 지내니, 우리 밭농사잘되는것 농군들복이네. 금술隔瑟) 뜯고북치며 전조(田祖) 마중하고, 단비빌고 우리 곡식 찰자라길 빌며 남녀 모두 잘살게 되길 비네. 증손(曾孫)이 와서 부자(婦子)를시키어 남쪽밭에 음식 울리니 전준(田峻) 매우 기뻐하며 좌우의 음식 들어 맛있는가먹어 보네. 벼 밭모두김매니 훌륭하고도풍성하여, 증손(曾孫) 성낼 일 없고 농부들 더욱 부지런히 일하게 되네. 76}

76) 『詩經』 「甫田」 〈以我齊明, 與我磯羊, 以社以方. 我田銃威,農夫之慶. 琴, 以御田祖. 以祈甘雨, 以介我稷委,以穀我士女. /曾孫來止, 以 其婦子, 結彼南敵, 田峻至喜. 撲其左右, 當其旨否. 禾易長欽, 終善旦有. 曾孫不怒 農夫克敏.〉

바로 뒤의 「대전伏田)」 시에도 〈전조(田祖)〉가 보이고, 〈전준 (田峻)〉과 〈증손(曾孫)〉 〈부자(婦子)〉가 나오는 「보전(甫田)」 제 3 장의 첫머리 4 구와 똑같은 글이 들어 있다. 빈풍(幽風) 「칠월(七 月)」 시에도 이월달엔 밭을가는데, 부자(婦子)도 함께 가서 남쪽밭에 음식 올리면, 전준(田峻) 매우 기뻐하네 .77)

77) 『詩經』 , 七月 〈四之 B 擧ill:, 同我婦子, 結彼南스臥, 田峻至喜. >

란 대목이 보인다. 중국학자들은 〈전준(田峻)났t 일반적으로 〈권 농지관(勸農之官)〉이라 풀이하고 있으나, 앞 『주례』의 정사농·(鄭司 農)의 해석도 참작하면 〈농신 濃神) 역할을 하는 〈시 (尸) 〉가 〈전 준〉이라 보는 게 옳을 듯하다. 78) 주회 佛熹, 1130-1200) 는 『시집 전(詩集傳)』에서 〈증손(曾孫)只끌 〈주제자지칭 (主祭者之稱)〉이라 하 였다. 그리고 남묘(南노 )에 음식을 올리는 〈부자(婦子)〉란 단순한 여자가 아닌 무(巫)일 것이다 .79) 따라서 〈전준(田峻)沼븐 신무(神 巫)이고, 〈부자(婦子)났근 축무(祝巫)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보전 (甫田)」시는 『주례』에서 설명했듯이 , 〈나라에서 풍년이 둘기 를 전조(田祖)에게 빌 때〉 약장(篇章)이 〈빈(幽)의 음악을 피리로 불고 토고(土鼓)를 두드릴 때〉 축무(祝巫)가 전조(田祖)로 분장한 전준(田峻)인 신무(神巫)를 즐겁게 하려고 함께 어울리어 춤을 추

78) 日本 白川歷 『詩經硏究 A 朋友害店, 昭和 56) 의 「農事詩刃硏究」, 藤田 忠, 「田峻考」 (國士館大學文學部, 『人文學會紀要』 15) 등. 79) 中鉢雅量 『中國 m 祭祀之文學』 (創文社, 1989) 第 6 章 詩經i적 ':>l tQ神婚 儀祖

며 주고받던 노래의 일장이었을 것이다. 『주례』에서 약장(蓋章)이 피리로 분다는 〈빈庫)의 음악〉도 정현(鄭玄) 이하 많은 학지들이 빈풍(鹿風) 「칠월(七月)」 시를 가리킨다고 설명하고 있으니, 그것 도 이 때 〈무〉가 부른 노래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 밖에 소아(小 雅)의 「대전 U 田)」과 「초자어홍茨)」 「신남산(信南山)」 시를 비롯하 여 주송(周碩)의 「신공(臣工)」 「희희 (P, jJJ喜)」 「풍년 (豊年)」 「재삼(載 支)」 「양사(良相)」 등도 모두 자전璋田)이나 풍년을 비는 제례의 식에서 쓰던 악기들이다. 관무(官巫)의 활동이 이러하니 민간의 무격 (巫親)은 그 역할과 가무가 더욱 다양했었으리라 여겨진다. 「보전 (甫田)」에서 땅의 신 인 〈사(社)녔문 제사 지낸다고 했는데, 『예기』 권 14 「월령 (月令)」 에는 〈중춘지월(仲春之月)〉에 〈백성들에 명하여 사(社)를 제사 지 내게 하였다〉라고 했으니, 땅의 산에게 풍년을 비는 @D 는 민간 에서도 성행되었을 것이다. 앞에서 이미 이야기했듯이, 마르셀 그 라네가 『시경』 중에서도 「국풍(國風)」 대부분의 시들을 고대 농민 들의 전원적인 계절제에서 젊은 남녀들이 춤울 추며 창화 (P 昌和)한 노래로 본 것은 매우 빼어난 견해라 여겨진다. 『시경』의 시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가무희〉의 가사로 보고 새로 운 해석을 시도한 일본학자로 천상충웅 OII J:,忠~雄)이 있다. 그에게 는 「중국의 가원濁炳굴)에 있어서의 〈가무희〉-시경으로부터」 (I ) (I) 와 「시경 시대의 악무偶瓚)-시경에 보이는 은인(殷 人)의 악무맴舞)」 ( I ) (I )라는 논문이 있다. 80) 그는 정풍(鄭風) 의 「동문지선(東門之坤)」 같은 간단한 시도 남녀가 춤추며 창화 (P 昌 和)한 시라고 해석하고 있다.

80) 「中國첵禪'::i:i l tQ歌舞戱-詩經力냐」 (I ) (Il ) (((千葉商大紀要)} 第 17 卷 4 號) 「詩經時代(7)樂舞-詩經'::見之 5 殷人(7)樂舞」 (I ) ( II ) ( 日 本大學 史 學會발표논문).

동문밖의 제 터에는 꼭두서니가 비탈진 곳에 자라고 있네. 그이 집은가까운데 그분은퍽 멀리 있는듯하네. 동문밖밤나무사이엔 집들이 늘어서 있네. 어이 그대 그립지 않으리 ? 그대가 내게 가까이 안 오는 것이지. 81)

81) r 詩經』 「東門之璋」 OO1 之環 莊蘆在陝. 其室則通,其人若速. /東門之 栗, 有錢家室 . 登不爾思,子不我卽. >

곧 이 시의 앞장은 남자의 발창(發唱)이고, 뒷장은 여자의 창화 (P 昌和)이며, 집단 중 젊은 두 남녀가 서로를 유인하기 위하여 춤추 며 노래 부른 것이라는 것이다. 정풍(鄭風)의 「여왈계명 (女日鷄 鳴)」이나 「전유(淡淸)」 같은 시들은 본디부터 남녀가 주고받은 노 래로 해석되고 있으므로 크게 새로울 것이 없으나, 「탁해 (擇令)」 「자금(子裕)」 등 많은 시들을 그런 방향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리 고 좀더 건 위풍(魏風)의 「맹 (峨)」 갇은 시는 주인공 • 장사꾼 • 노 파 및 2 명의 여자 등이 등장하여 춤을 추며 연기도 하고 노래를 주 고받는 〈가무희〉로 구성을 하여 풀이하고도 있다. 「국풍(國風)」 중에서도 「전풍(陳風)」은 예로부터 특히 무귀음사 따鬼苗記)와 관계되는 시들로 풀이해 왔으니, 〈무〉의 가무·와 관계 가 깊은 시들일 수밖에 없다. 정현(鄭玄)은 「전보(陳譜)」에서 태희 0 건臣)는 자식이 없었는데, 무격 셍孩見)과 기도 들이고 귀신과 가무하는 놀이를 좋아하여 , 민속도 변화하여 그렇게 되었다. 82)

82) 鄭玄, 『陳譜』 Q간찜熙子, 好巫親蘆祈鬼神歌舞之樂, 民俗산예面盜之. >

라고 하였다. 『한서 (漢書)』 「지리지 (地理志)」에서는 다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순(舜)의 후손 규만(僞滿)을 진(陳)나라 에 봉했는데, 그가 호공(胡公)이며 원녀 傾汝:)인 태희 난해로)를 처로 삼아 주었다. 부인이 존귀한 신분이었으나 제사를 좋아하고 사무(史 巫)를써서, 그곳풍속이 무귀(巫鬼)를좋아하게 되었다 .83)

83) 『漢書』 馮武王封舜後僞滿於陳, 是爲胡公, 妻以元女大姬. 婦人尊貢, 好 祭祀, 用史巫, 故其俗巫鬼. >

라고 설명하고 있다. 같은 책의 「광형전 (匡衡傳)」에도 〈전부인 (陳 夫人)이 〈무녔운 좋아하여 백성들도 음사(浩祀)를 좋아했다〉 84) 라고 하였다. 첫머리 「완구(苑丘)」 시를 읽어 보자.

84) 『漢書』 ®E 夫人好巫, 而民淮祀. >

그대 거침없이 완구위에 놀고있는데, 정말정이 끌리나 어쩌는수없네. 덩 덩 북을치며 완구아래에서 노는데, 겨울여름도없이 백로것들고춤추네. 둥둥부(告) 두드리며 완구길에서 노는데, 겨울여름도없이

백로 깃 들고 춤추네. 85)

85) 『詩經』 「苑丘」 〈子之湯令, 苑丘之上令. 油有情分, 而無望分. /次其擊 鼓, 苑丘之下. 無冬無夏, 値其鷺羽. /次其擊늄, 苑丘之道. 無冬無夏, 値 其鷺翻.〉

이 시에 나오는 북과 부(岳)와 백로 것은 〈무冷군이 쓰던 주구(呪 具)이며, 이 시는 무녀 (巫女)의 가무를 보고 그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 0] 다. 그 뒤의 「동문지분(東門之粉)」 등 거의 모든 시들이 〈무〉의 가무 와 관계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주책종(周策縱)은 『 고무의여「육시」 고(古巫쁩與「六詩」考) 』 86) 의 하편 (下篇) 「고무대악무급시가발전적 공헌 (古巫對樂舞及詩歌發展的貢獻)」에서 이른바 〈시지육의 (詩之六 義)〉인 풍偶) • 홍(興) • 부(lffit) • 비 (比) • 아(雅) • 송(碩)은 본디 〈여 섯 가지 시체 (詩體)〉였다고 보면서, 그 명칭은 모두 고무(古巫) 또 는 그들의 가무와 관계 있는 것임을 증명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 중편(中篇) 「무의의 공작과 고사倻醫的工作與古史)」에서는, 〈무〉가 고대의 구생저 L( 求生祭)인 〈고매 (高謀)〉와 관계가 있어서 남녀관계 가 비교적 자유롭고 방임적이었으며, 또 늘 그러한 가사와 악무로 신과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무술여겜 5) 은 중국 고대의 시가 • 문학 • 예술의 낭만적인 전통의 기원과 발전에 중대한 작용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결론을 내리 고 있다. 그가 말한 〈낭만적〉이란 실은 〈음란함났t 뜻하며, 「국풍 (國風)」 중에서도 전 (陳) • 제 (濟) • 정 (鄭) • 위 (衛)의 미영 僖潭!)한 정시 (情詩)들은 모두 〈무〉의 영향 아래 이루어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시경』에도 실은 직접 간접으로 〈무〉의 가무와 관계가 깊 은 시가 상당히 많고, 〈가무희〉의 가사로 볼 수 있는 작품들도. 적

86) 臺北 聯經出版社 刊, 1986,

지 않게 들어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주(周)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이르기까지 주공(周公)의 제례작 악(制禮作樂)으로 말미암아 중원(中原)에서는 무풍(巫風)이 크게 사 라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남쪽 초湜)나라를 중심으로 한 지방에 는 무습(巫習)이 매우 성행하였다. 『한서 (漢 書 )』 「지리지 (地理志)」 에는 초礎)나라는……〈무〉와 귀신울 믿으며, 음사(浩祀)를 중히 여긴 다 .87)

87) 『漢』 湜……信巫鬼, 重埋祀. >

라고 하였는데, 『수서 (隋書)』 「지리지 (地理志)」와 『송사(宋史)』 「지 리지(地理志)」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88) 『열자(列子)』 「설부(說 符)」 편에도 초湜)나라 사람둘은 귀신을 믿고, 월 使홈)나라 사람들은 기상(視 祥)을 중히 여긴다. 89)

88) 『隋書』 「地理志」 (;k.抵荊州率敬鬼, 尤重祠祀之事, 昔屈原爲制九歌, 蓋 由此也.〉 『宋史』 「地理志」 @湖北路……歸硏 l) • 峽 0H), 信巫鬼, 重浩 祀.〉 89) IJ 1 j子』 션츈人鬼而越人禍. >『 淮南子』에도 비슷한 말이 있음.

라고 하였다. 초湜)나라는 임금들도 모두 무당과 귀신을 좋아하였 다. 초나라 임금 중에서도 뛰어난 영왕(靈王)이 나는 왼편에 귀신에 관한 기록을- 들고 있고, 오른편에는 죽은 자들 의 처소를 잡고 있다. 90)

90) 『國語』 땅홍語上」 〈余左執鬼中, 右執殘宮. >

라고 말하고 있다. 『태평어람앉귀濁晩)』 권 735 에서는 환담(桓譯) 의 『신론(新論)』을 인용하여 옛날 초나라 영왕(靈王)은 교만하고 아랫사람들을 가벼이 여기며, 무축센穆t)의 도술(道術)을 믿고 친히 신단(神壇) 앞에서 춤도 추었 다. 오(吳)나라 사람들이 공격해 울 적에도 나라 사람들이 다급함을 알렸으나 영왕은 그대로 태연히 북치며 춤을 추었다. 91)

91) 『太平街曜 l 〈昔楚靈王壓逸輕下, 信巫祝之道, 射舞壇前. 吳人來攻, 其國 人告急, 而靈王鼓舞自若. >

리는 기록을 싣고 있다. 「구가(九歌)」의 왕일(王逸 89?-158? ) 『장구(章句)』를 보면 〈영 (靈)沼t 〈무야(巫也)〉라고 해석하고, 〈초 나라 사람들은 무당을 영자(靈子)라고 부른다〉라고도 했으니, 영왕 스스로가 〈무〉였음이 틀림없다. 『한서 (漢書)』 「교사지하僚隊祀志 下)」를 보면 성제 微帝) 때의 곡영 (谷永)이 초나라 회왕(懷王)은 제서를 성대히 지내고 귀신을 섬기며, 복@1;) 과 도움을 받아 가지고 진 僚小)나라 군사들을 물리치려 했었다. 92)

92) 『漢書』 선협裏王隆祭祀, 事鬼神, 欲以獲福助, 郁秦師. >

라고 말하고 있다. 『국어 (國語)』 「초어하~語下)」에서는 소왕(昭 王) 때의 관사보(觀射父)가 〈무〉의 기원과 전승 및 그 역할 등을 임금에게 설명하고 있다. 이 밖에도 초나라에 무풍맨風)이 성행하였음을 알리는 기록은 옛 전적 여러 곳에 보인다. 앞에서 이야기한 『시경』 「국풍(國風)」 중에서도 전(陳)나라 노래에 무습~ 두드러지는 것은 초에 인접된 나라이기 때문이며, 초에 가까운 남쪽의 오(吳) • 월湜i)에

도 무풍이 성행되었다고 하였다. 『사기 (史記)』 「봉선서 (封禪書)」에 월나라 사람둘의 풍속은 귀신을 중히 여기어 그들이 제사 지낼 적에 는 언제나 귀신이 나타나 자주 효험이 있었다. 93)

93) 『史記』 使人俗鬼, 其祠皆見鬼, 數有功. >

라고 하였다. 응소(應助 178 년 전후)의 『풍속통偶俗通)』 권 9 에도 회계 (會稽)의 풍속은 음사(浩祀)가 많고 복서 ( 卜莖)를 좋아한다. 무제 (武帝) 때에는 귀신에게 미혹되어 특히 월무徒凶 E) 를 믿었다. 94)

94) 『風俗通』 〈會稽俗多埋祗 好 卜 莖. 〉〈武帝時迷於鬼神, 尤信越巫. >

라고하였다. 따라서 전국(戰國)시대 초나라에서 이루어졌다는 『초사礎辭)』는 무습(巫習)과 관계가 깊은 시가이다. 『초사礎辭)』에 실려 있는 굴 원(屈原, 기원전 343?-290?) 의 작품 「이소(離駿)」 이하 모두가 무가(巫歌)의 영향 아래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으며 ,95) 실은 송옥 (宋玉)의 작품은 물론 한부(漢賊) 모두가 무가(巫歌)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굴원(屈原)의 「구가(九歌)」 는 옛날부터 무격 맨親)의 가무를 보고 굴원이 새로 지었거나(王逸 『章知), 그 가사를 다시 고쳐 쓴 것이라고 알려져 왔다洙熹 『集 注』) . 주희 (朱熹 1130-1200) 의 「구가서 (九歌序)」를 읽어 보자.

95) 日人 藤野岩夫논 『巫系文學論A 東京 大學書房)에서 屈原의 작품을 모두 巫歌系의 歌辭로 보고, 設問文學 • 自序文學 • 問答文學 • 神舞劇文學 • 招魂 文學으로 분류하고 있다.

「구가」는 굴원이 지은 것이다. 옛날 초나라 남영 (南里 F) 의 고을과

원수(玩水) • 상수(湘水) 지방은, 풍속이 귀신을 믿고 제사를 좋아했 었다. 그들이 제사를 지낼 적에는 반드시 무격 @孩見)으로 하여금 작 악(作樂)케 하여 가무로써 귀신을 즐겁게 하도록 하였다. 오랑캐 초 지방은 풍속이 비루하여 가사도 이속 (1里 俗)하였으며, 사람과 귀신의 음양(陰陽) 사이의 관계라서 간혹 지나치게 외설적이고 황음(荒浩)하 는 잡된 부분이 없을 수가 없었다. 굴원은 이미 방축(H)r.}~ 처지 라 이것들은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았다. 그러므로 그 가사들을 상당히 개정하여 지나친 점은 없애 버렸다. 그리고 또 그들이 귀신을 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충군애국(忠君愛國)과 권련불망(卷戀不忘)하는 뜻에 기탁하였다. 96)

96) 땅辭集注』 「九歌序」 OL歌 者, 屈原之所作也. 昔楚南郞之邑, 玩湘之間, 其俗信鬼而好祀. 其祀, 必使巫親作樂歌舞以疑神. , 變荊兩俗, '司銃鉛但, 而 其陰陽人鬼之間,又或不能無襄漫浩荒之雜.原紙放逐,見而感之.故顔爲更 定其詞, 去其泰若. 而又因彼事神之心, 以寄吾忠君愛國, 卷戀不忘之意. >

왕일(王逸)의 서문울 대체로 본떴으나, 왕일은 〈그 가사가 바루 하여 그래서 「구가」의 노래를 지었다〉 97) 라고 설명한 데 비하여, 주희는 〈그 가시를 상당히 개정하여 지은 것처t 「구가」라고 한 접 이 크게 다르다. 전본례 (陳本禮 1739-1818) 가 『굴사정의 恨由精 義)』에서

97) 王逸 「九. 序」 섭 C 詞鄒屈 因爲作九歌之曲. >

「구가」의 음악에는 남무(男巫)가 노래하는 것이 있고 여무(女巫)가 노래하는 것이 있으며, 무예 E) 와 격 (親)이 나란히 춤추며 노래하는 것이 있고, 한 무당이 노래한 뒤 여러 무당이 화(和)하는 것이 있어, 빠르고도 변화가 많으며, 소리가 처철하므로 사람과 귀신을 감동시키 는 것이다 .98)

98) 『屈辭租義』 〈九歌之樂, 有男巫歌者, 有女巫歌者, 有巫親竝舞而歌者, 有 一巫偶而衆巫和者, 激楚揚阿, 聲音凌楚, 所以動人而感神也. >

라고 설명하였고, 다시 그 뒤로 호적 (胡適 1891-1962) 이 「구가」 는 〈당시 상강민족{ifll江民族)의 종교무가〉라고 단언하였다. 99) 그리 고 중국희극의 기원을 〈무〉에서 찾은 왕국유(王國維)는 『송원희곡 고(宋元戱曲考)』에서 「구가」에 보이는 〈영보(靈保)났큰 『시경』의 〈신 보(神保)〉와 같은 말로 신울 대표하는 〈시 (尸)〉임을 논하고, 결론 으로 그러니 영 (靈)의 직분 100) 은, 혹은 옷자락 너풀거리며 신을 상징하 기도 하고, 혹은 너울너울 춤추면서 신을 즐겁게 하기도 하는 것이었 으니, 후세 희극의 싹은 이미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101)

99) 『胡適文存』 第 2 集 「讀楚辭」. 100) 王逸 땅辭章句』에서 성t只t 〈神也〉 (淸賤配 「九~) 또는 여떄 l 〉라 注 룰 달고 있음을 참조할 것. 101) 『宋元戱曲考』 G 맘i l j靈之爲職, 或個塞以象神,或婆娑以樂神. 蓋後世戱劇 之萌茅, 已有存焉者矣. >

라고말하고있다. 여기에 자극을 받아 일본학자 청목정아(靑木正兒)는 「초사~辭) 구가(九歌)의 무곡적 (巫曲的)인 구성」 102) 이란 논문에서 「구가」 11 편을 독창독무(獨唱獨舞) • 대창대무(對唱對舞) • 합창합무(合唱合舞) 의 세 종류로 구분하고, 등장하는 무당을 신무(神巫)와 제무(祭巫) 또는 주제무(主祭巫)와 조제무(助祭巫), 남무(男巫)와 여무(女巫)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문일다(開一多 1899-1946) 는 『구가신편 (九歌 新編)』에서 이 「구가」 11 편의 글을 일투(一奎)의 완전한 구성을 이 루고 있는 무대가극(舞臺꼽鴻 lj )으로 보고 장절 (章節)을 다시 나누었

102) 명캔防文學藝術考』 文學考 땅문辭九歌(l)巫曲的結構」.

다. 동야암부燁野 岩 夫)는 『 무계문학론따系文學論) 』 에서 「구가」를 신무국문학(神舞劇文 學 )이라 분류하고 「구가」 전체를 「예혼 며 璃)」 울 영신곡(迎神曲)으로 한 일조(一組)의 신무가곡(神舞歌曲)으로 보 며 이를 풀이하고 있다. 어떻든 간에 이해의 정도는 서로 다르지만 지금에 와서 「구가」가 〈무 〉 에 의하여 연출되었던 〈가무희〉의 가사 임을 부인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구가」 11 편이 한 조의 〈가무 희 〉 의 가사였을 가능성도 매우 크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동군(東 君)」 한 편을 대창대무(對唱對舞)하는 〈가무희〉의 가사로 보고, 가 무의 구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103) 동군(東君)은 해의 신이다.

103) 藤野岩夫의 『 巫系文學論』 및 林河의 『 九. 與玩湘民俗A 上海 三聯書店, 1990) 을 주로 참조.

먼저 아름다운 여무(女巫)가 등장하여 음악에 맞추어 가벼이 춤을 추면서 동쪽울 바라보며 노래 부른다. -영신 (迎神) 훤히 동쪽밝아지며 부상(扶桑)을 거쳐 우리 집 난간 비추려 하네. 우리 화룡마(火龍馬) 쓰다듬으며 편히 수레 달리니 밤부영게 밝아오네. 敵將出令東方, 照吾監令扶桑. 撫余馬令安惡, 夜岐綾令銃明. 날이 밝아 오자 여무는 춤을 추며 여러 사람들과 함께 노래한다. —강신(降神) 용이 수레를 끄는 뇌거 (雷車)를 타셨는데

구름깃발너울거리네. 나오시려다가는 긴 한숨 지으시고 심사 어지러운 듯 머뭇거리시네. 아아, 그러나 음악과 여인들 아름다워 한 번 본 이 넋빠져 돌아가지 못하게 하네. 驚龍精令乘雷, 載雲旗令委蛇. 長太息令將上, 心低個令顧懷.

光聲色分誤人,觀者惟分忘歸. 노랫소리와 미모에 넋이 빠진 동군이 나와 여무와 어울리어 신나는 춤을 춘다. 여무가 동군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춤을 추며 노래한다. ―악무이오신 (樂舞以誤神) 슬~) 줄을 튀기며 북을 맞추어 두드리고 편종(編鐘)을 치니 종대 혼들거리네. 퉁소불고생황부노니 신 내린 남무(男巫) 현명하고 멋지네. 너울너울 나는 듯한 춤 비취새 노는 듯하고 노래하며 춤 맞추어 추네. 악률(樂律)에 조화되고 음절 잘 맞는데 신은 많은 종자 거느리고 해를 가리며 내려오네. 維瑟分交鼓, 蕭鐘令描誕. 鳴銀分吹宇, 思靈保分賢ttw. 翻飛令琴曾, 展詩分會舞. 應律分合節, 靈之來令薇日.

동군은 여무의 가무에 넋울 잃고 좋아하며, 여무가 사람들을 대신 하여 재난(災難)을 없애달라고 비는 요구에 응답하며 노래한다. 푸른 구름 저고리에 흰 무지개 바지 입고 긴 화살 들어 하늘의 이리를 쏘네. 내 천궁(天弓)을 들고 서쪽으로 내려가며 북두(北斗)로 계장(桂菜)을 떠서 싸움으로 마른 목을 적시고, 내 말고삐 다시 잡고높이 날아 아득히 어둠속에 동쪽으로돌아가네. 靑雲衣分白 寬 裝, 擧長矢令射天狼. 操余孤令反治降, 援~t斗令酷桂紫. 撰余쁩令高駐翔, 杏冥冥令以東行. 「구가」의 한 편이 이 정도이니, 실제로 주대佛代)의 무당들의 가무는 상당한 수준의 〈가무희〉로 발전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으로 분장하는 무당, 또는 〈영보(靈保 )X근 가면을 썼을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구가」는 가면희 (假面戱)의 가사였을 듯하 다. 더욱이 『초사礎辭)』며 한부(漢斌) 모두가 〈무〉의 가무와 관계 있는 문학이라고 볼 때, 그 시대 〈가무희〉의 발달 정도는 우리의 상상을넘어설듯하다. 5 우희(優戱) 은(殷)나라 말엽에 이미 조희(調戱)와 가무를 전문으로 하는 〈우 (優)〉가 있었다. 〈우났근 〈창우(借優)〉 〈배우(俳優)〉 등으로도. 불리

었다. 유향(劉廊 기원전 77~ 기원전 6 년)의 『열녀전 (列女傳)』에 하 (夏)나라 걸 (架)왕과 말희 (末喜)의 작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창우(借優) • 주유(保儒) • 압도(押徒) 등 기이하고 뛰어난 놀이를 할 수 있는 자들을 거두어들이어 옆에 모아 놓고, 난만淵賤)한 줄김 을 하게 하였다. 104)

104) 『列女傳』 卷 7 壁嬰傳 夏架末喜 ; 〈收偏優保儒押徒, 能爲奇偉戱者, 栗之 於帝, 造薄賤之樂.〉

『국어 (國語)』 「정어 (鄭語)」에서도 사백 (史伯)이 주빈왕(周幽王)은 〈주유(保)와 척시 誠施)를 곁에 두고 시중들게 하였다〉라고 하였 는데, 위소(韋昭)의 주(注)에 〈주유(保儒)와 척시 誠施)는 모두 우 소(優笑)를 하는 사림들이다〉 105) 라고 하였다. 여기의 〈주유났근 난 쟁이이고, 〈척시났근 꼽추의 일종이다. 106) 그리고 우스갯짓으로 사 람들을 즐겁게 하는 재주를 갖고 있어, 옛 임금둘은 이런 사람들을 궁전에 모아들였던 것이다. 『예기 여固)』 「악기 옙器 E) 」에서도 자하 (子夏)가 신악(新樂)을 논하면서 〈배우와 난쟁이들이 어울리고, 원 숭이와 남녀가 뒤섞여 부자 사이도 모르게 된다〉 107) 라고 말하고 있 다. 이 밖에도 옛 책에서 흔히 〈배우〉와 〈주유〉라는 말을 함께 연 이어 쓰고 있으니 ,108) 이들을모두같은부류의 사람들로 여겼음이

105) 『國語』 〈保儒咸施, 寒街在側. >「 注」 〈保儒 • 威施, 皆優笑之人. 御, 侍 也.〉 106) 명븀山 「王制」 여頂! • 跋覽 • 斷者 • 保儒 • 百工, 各以其器食之. >「 鄭注」 〈保儒 短人也. > 『國語』 며f語四」 야掃 F 不可信暖. > 「韋昭注」 〈保儒, 短 者. >上 同 어합壓不可使仰 >「 韋昭注」 여訪恒, 率者. > 107) 『禮記』 「樂記」 〈及優保儒極雜子女, 不知父子. > 108) 다 L 子家語』 卷 1 「相魯」 8 芹奏宮中之樂, 俳優保儒戱於前.〉 대j子』 卷 7

「王覇」 〈俳優保儒婦女之請賜.〉 %店 F 子』 卷 1611 距깁 〈俳優保儒, 固人主 之所與燕也.〉

분명하다. 『국어 (園語)』 「진어 ( 晉 語)」를 보면 진헌공( 晉 戱公)의 궁전에서 활 약한 창우(偏優)인 우시 (0) 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말이나 동작으로 사람들을 웃기고 즐겁게 할 뿐만이 아니라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춘다. 헌공(獻公)의 애희 (愛姬)인 여희 (隨姬)는 태자인 신 생 (申生)을 죽이고 자기의 아들 해제 (溪齊)를 태자로 삼으려는 음 모를 꾸미는데, 헌공의 내락까지도 받았으나 오직 이극(里克)이란 강직한 대신이 있어 방해가 되었다. 이에 여회는 우시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우시는 응낙울 하고는, 양을 잡고 안주를 마련하여 술 자리를 벌여놓고 자기와 이극이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한다. 여희는 곧 술자리를 마련해놓고 이들을 한자리에 앉힌 다. 우시는 이극과 술을 마시다가 중도에 일어나 춤을 추면서 노래 를부른다. 한가히 즐기면서도 멍청히 가까이는 못 하고 지내니 새나 까마귀만도 못한 소견일세. 남들은 모두 무성한 나무 위에 모여 쉬고 노는데 자기만이 홀로 말라 죽은 나무 위에 앉아 있네 . 109)

109) 『 國語』 애뭇豫之吾吾, 不如鳥烏. /人皆集於苑, 己獨集於柏. >

이극이 〈무엇이 무성한 나무이고, 무엇이 말라 죽은 나무인 가 ? 〉하고 묻자 우시는 이런 대답을 한다. 어머니는 부인 伊라`)이 되고 그 아들은 임금이 될 것이라면 무성한 나무라 말할 수 없겠습니까 ? 어머니는 이미 죽고 그의 아들은 공격을

받고 있다면 마른 나무라 할 수 없겠습니까 ? 이 마론 나무엔 상처까 지 나 있습니다. llO)

llO) 『國語』 섭g母爲夫人, 其子爲君, 可不謂苑平 ? 其母匠死, 其子又有誘, 可?村沮有傷.〉

또 『곡량전 (穀梁傳)』 정공(定公) 10 년울 보면, 유명한 〈협곡지회 (類谷之會)〉에서 제 (齊)나라 사람들이 우시 (優施)로 하여금 노(魯) 나라 임금의 막하(幕下)에서 춤을 추게 한다. 공자 GL 子)는 이 때 〈임금을 비웃는 자는 사형이 원칙이다〉고 선언하며 우시를 처형한 다. 『공자가어 GL 子家語)』와 하휴(何休, 129-182) 의 『공양해고(公 羊解話)』에서는 협곡(類谷)에서 춤춘 사람을 〈주유(保儒)〉라 하고 있다. 이싱을 종합해 보건대, 옛날 〈우(優, 借優·俳優)〉의 기능은 우 스갯짓을 위주로 하면서도 노래와 춤을 겸하여 잘 하였음을 알겠 다. 사마천 (司馬遷 기원전 145~ 기원전 86 ? )의 『사기 (史記)』 권 126 「골계열전(滑稽列傳)」에는 우스갯짓을 본업으로 하면서도 뜻있 는 풍자를 통하여 임금의 잘못을 깨우쳐 준 우맹 (優孟) • 우전 (優 病) 등의 배우들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중에서도 〈우맹의 관(優孟衣冠)〉이라 하여 우맹이 초장왕礎泊王) 앞에서 이전의 유 명한 초나라 재상 손숙오(孫叔敷)로 분장했던 일은 회국사마다 연 극분장의 시초로서 흔히 인용되고 있다. 우맹이 손숙오의 아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을 알고는, 손숙오로 분장해 가지고 장왕 앞에 나 타나 다시 살아난 손숙오로 행세하면서 나라롤 위해 많은 일을 한 재상의 후손을 박대하는 잘못을 깨우쳐 준다는 줄거리이다. 여기 에서 우맹은 가무를 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창우(借優)나 주유 (保)들은 임금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하는 말재주나 특이한 몸짓 이의에 노래나 춤도 익혔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가무는 특히

〈 가무회 〉 적인 성격을 많이 띠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민간에는 이들처럼 우스갯짓과 가무를 전문으로 하는 연예인들이 있었을 것 이다. 『주례 (周禮)』에 보인 〈 산악(散樂)浮든 이러한 민간의 연예인 둘 중 가무에 뛰어난 자들이 궁중으로 불려 들어간 보기이다.

제 3 장 전한(秦漢)의 〈가무회〉 기원전 246- 기원후 219 1 한(漢)초 초풍(楚風)의 성행 춘추전국(春秋戰國)의 정치적 혼란은 예악제도며樂制度)의 붕괴 를 가져와 정악(正樂)은 날로 쇠미해져 갔다. 『 한서 (漢書)』 권 22 「예악지 며뿡誌)」를 보면 진僚)나라 때 주 OO) 의 방중악(房中樂)을 고쳐 「수인( 壽 人)」이라 하고, 주聞)의 무무(武舞)를 전시황(秦始 皇) 26 년에 「오행 (五行)」이라 고쳤다 한다. 한(漢)나러에 와서 고 조(高祖, 기원전 206- 기원전 195 년 재위) 때에는 종묘(宗廟)에서 옛 주무(周舞)를 고천 무덕 (武德) • 문시 改始) • 오행 (li行) 1) 같은 춤 을 추었다 하였는데, 이것들은 모두 대체로 전(秦)나라 제도를 따 른 것이며, 내용은 더욱 형식화 또는 의식화(儀式化)한 것이어서 〈가무희〉와는 완전히 무관한 가무가 되고 말았다.

1) 孝文廟에선 昭德·文始·四時·五行의 춤을, 孝武廟에선 盛德·文始•四 時 • 五行의 춤을 추었고, 이후 대체로 이것들을 약간 고쳐 사용하였다.

1) 초가(楚歌) 그러나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함으로 말미암아 넓고 물산 이 풍부한 남만(南營)의 지역들이 정식으로 중국 영역에 편입되었 는데, 특히 전국(戰園)시대에 강성하였던 초礎尹)의 영향이 한나라 문화에 크게 작용하였던 듯하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 및 그 와 천하를 다투었던 항우(項羽 기원전 232- 기원전 202) 가 모두 〈초가礎歌)淸 짓고 있는데, 2) 특히 「홍곡가(鴻웁崎K ) 」는 고조가 척 부인 倻夫人)에게 〈나를 위해 초무礎舞)를 추어 주시오. 나는 당 신을 위해 〈초가녔t 부르리다〉라고 말하며 노래한 것으로 되어 있 다. 3) 그러므로 〈초가〉에는 충도 곁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 『한서 (漢書)』 권 22 「예악지 여뽑誌)」에 의하면 〈고조가 초성 礎聲)을 좋 아하여〉 그의 당산부인~ 방중사악(房中祠樂 )4) 인 「안세 방중가(安世房中歌)」 17 장을 초성으로 지었다 한다. 그 중 둘째 장 울보기로든다.

2) 高祖의 「大展국知 「鴻鷄歌」, 項羽의 「核下歌」. 3) 『史記』 卷 55 「留侯世家」 @봅탔핍홉 吾爲若楚歌. 歌 El, 鴻鷄高飛, 一擧 千里. 羽翻巳就, 橫絶四海. 橫絶四海, 當可奈何? 難有增級, 尙安所施 ! > 4) 『儀禮』 멤정 L 엔中之樂〉 注 @玄歌周南召南之詩, 而不用鐘磐之節也. 謂 之房中者, 后夫人之所腦踊以事其君子. > @甫築 X 곤 神울 제사 지낼 때 쓰는 음악. 따라서 생 H 中祠樂났는 鉉樂器의 伴奏만으로 神을 제사 지낼 적에 쓰 던樂歌를뜻함.

칠시 (七始)와 화시 (華始)를 공경히 노래하고 화(和)하니, 신이 내려오셔서 편히 줄기시며 잘들어 주시기 바라네. 정성스러이 음악으로 전송하니 미세한 감동으로 인정을 엄숙게 하네.

문득 푸른 하늘로 울라가시는데 복받는 일 다 이루어 주셨네. 맑은생각그옥하고 하늘의 조화심오하네. 七始華始,肅借和聲; 神來姜媒 庶幾是聽. 弼音送,細齊人情; 忽乘靑玄, 熙事備成. 淸思恥蘭, 經緯冥冥. 「구가(九歌)」에 비하여 훨씬 형식화된 것은 사실이나, 이 17 장이 가무를 함께하는 하나의 조곡御旦曲)이었을 것이다. 『사기 (史記)』 권 28 봉선서 (封禪書)에 무제 (武帝, 기원전 140- 기 원전 87 년 재위)는 처음 천자에 죽위하여는 〈더욱 귀신에 대한 제 사를 공경히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직접 「호자가(懿子 歌)」 2 수 및 「추풍사(秋風辭)」라는 〈초가녔十 남기고 있다• 『사기』 권 24 「악서 燁書)」를 보면 원수玩狩) 3 년(기원전 120) 에 악와수 (退苗k ) 속에서 신마(神馬)를 얻고는 「태일지가伏一之歌)」를 작곡 하였는데 ,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태일신 8: 一神)께서 보내시어 천마(天馬) 내려왔는데, 붉은땀촉촉하고 흐르는땀빨갛네. 달리는모습의것하고 만리를단숨에 뛰네.

지금그무엇에 견주리? 용과벗할만하지. 太一貢令天馬下, 霜赤汗令洙流緖. 駿容與令蹴萬里, 今安四分龍爲友. 이것도 초가체礎華體)이다. 다시 태초앉공]) 4 년(기원전 101) 에 서역의 대완 8 汝i)을 정벌하여 포소(蒲相)라는 천리마(千里馬)를 얻고는 「태일지가」와 비슷한 형식의 「천마가(天忠次)」를 짓는다. 그런데 이에 관한 기록에 뒤이어 중위 (中尉)인 급암(波器)의 디옴­ 과 같은 진언 (進言)을 싣고 있다. 왕자(王者)가 작악(作樂)을 하는 것은 그것을 가지고 위로는 조종 (祖宗)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교화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폐하 께서 말을 얻어서 시를 지어 노래하게 하여 종묘에서 쓰고 계신데, 선 제 (先帝)나 백성둘이 어찌 그 음악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 5)

5) 『史갑 E 』 〈月 ;E검 針伊樂, 」:J;J쳐져目J宗 , 下以個 U. 今睦下得馮 , 詩以爲歌, 協於宗廟,先帝百姓堂能知其音邪?〉

그러니 이 노래들은 바로 제사에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한서 (漢 害)』 「예악지 여뽑誌)」에는 「안세방중가(安世房中歌)」 17 장에 이어 「교사가例[祀歌)」 19 장이 실려 있는데, 그 중 제 10 장이 「천마(天 馬)」로서 앞의 「태일지가얹:一之歌)」와 「천마가(天際次)」의 가사룰 상당히 개정한 뒤 이를 합쳐서 싣고 있다. 이 「교사가」 19 장도 한 나라 궁실에서 제사 때 쓰이던 한편의 조곡個.ll曲)으로, 무제 (武帝) 때까지만 하더라도 〈초가〉로서 속악적 (俗樂的)인 퍽 자유로운 형식 의 가무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하튼 한나라 초기에는 〈초가〉가

상당히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사부(辭賊) 『사기』 「악서傑 畵 )」에는 〈 한나리에서는 늘 정월 상신辻辛)날 태일伏一)과 감천(甘泉)울 제사 지냈다 〉 하였고, 같은 책 「효무본 기 (孝武本紀)」와 「봉선서 (封禪 書 )」에는 무제 (武帝)가 사당을 세우고 태 일신 伏--:-神)을 제사 지내는 기록이 거듭 보이고 있다. 「봉선서 (封 禪書 )」에서는 〈 천신귀자태일(天神 貴 者太一) 〉 이라 하였는데, 『초 사礎辭)』의 「구가(九歌)」에서도 동황태일(東皇太一)을 가장 존귀한 신으로 모시며, 사가(祠歌)의 첫머리에 놓고 있으니 이 태일신앙 앉一信仰)도 분명히 『 초사 』 와 관계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굴원의 『 초사 』 가 사람들에게 읽혀지기 시작한 것도 한나 라 초기이고 , 『 초사 』 와 똑같은 문체인 부個;)의 창작이 성행하기 시작한 것도 한나라 초기이다. 굴원의 제자인 송옥(宋玉, 기원전 290 ? -223 ? )의 「구변 (九 辯 )」 「고당부(高唐試)」 「등도자호색부澄 徒子好色試)」 등은 말할 것도 없고, 한초의 가의 ( 賈 諒, 기원전 201- 169 년)의 「조굴원부(弓屈原默)」 「복조부(鵬鳥試)」, 매승(枚乘 ?- 기원전 141 년)의 「칠발(七發)」, 사마상여 (司馬相如, 기원전 179- 118 년)의 「자허부(子虛試)」 「상립부辻林試)」 「대인부伏:人試)」 「장 문부(長門試)」 및 그 뒤 한부(漢試) 작가들의 작품이 모두 〈초풍 麟) 〉 의 계승인 것이다. 그런데 이 〈초 풍沼 7 말을 바꾸면 무풍偶風)을 뜻하기도 한다. 위에서 말한 초풍礎風)과 관계되는 문학들은 곧 〈무〉와도 관련이 깊은 것이다. 따라서 한부(漢試)도 『초사』와 함께 무가偶歌)의 형 식을 계승한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악부偶節:)와 오언시 (li言詩)도 그것을 바탕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풍토는 〈무〉의 가무를 통하여 이루어전 것이며, 한편 그것은

〈가무회〉의 성행을 뜻하게도 되는 것이다. 2 무(巫)와 나 (1 難) 1) 무(巫) 진시황(秦始皇)은 분서 (禁 書 )를 하면서도 〈의약(醫藥) • 복서 ( 卜 莖) • 종수(種樹)에 관한 책 X 본 제의시키는데, 6) 〈의약 • 복서났근 주 로 〈무〉와 관계가 많은 책들이다. 다시 그는 팔신(八神)울 제사 지 냈는데, 천주(天主) • 지주(地主) • 병주(兵主) • 음주·(陰主) • 양주(陽 主) • 월주(月主) • 일주(日主) • 사시주(四時主)의 여덟 가지이며, 무 축멘祝)이 이룰 주관하였다 .7) 그 밖에 불로장생을 논했던 방사 (方士)들이란 실상 〈무〉의 일종이며,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다 니며 제사를 지낸 것도 〈무〉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진(秦)나라 때 는 무풍(巫風)이 성행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6) 『 史記 』 卷 6 「秦始皇本紀」. 7) 『 史記 』 卷 28 「封禪 書」 .

한고조(漢高祖)는 재위 6 년 (기원전 201) 에 장안(長安)에 사당을 세우고 축관(祝官) • 여무(女巫) 등을 둔다. 그 중 〈양무傑連)났즌 천(天) ·지(地) ·천사(天社) ·천수(天水) ·방중(房中) ·당상(堂上) 갇 은 종류롤 제사 지내게 하고, 〈진무(晉巫)났근 오제 (五帝) • 동군(東 君) • 운중(군) 〔雲中 (君)〕 • 사명 (司命) • 무사(巫社) • 무사(巫祠) • 족 인 (族人) • 선취 (先次) 같은 종류를 제사 지내게 하고, 〈진무(秦 巫)冷근 사주(祠主) • 무보(巫保) • 족루(族景) 같은 종류를 제사 지 내게 하고, 〈형무佛巫)났즌 당하(堂下) • 무선 따先) • 사명 (司命) • 시미 燁廉) 같은 종류를 제사 지내게 하고, 〈구천무(九天巫)冷근 구 천(九天)울제사지내게 하였는데, 모두세시償時)에 궁중에서 제

사 지내었다. 그리고 〈하무(河巫)冷곤 임전(臨晉)에서 하(河)를 제 사 지내고, 〈남산무(南山巫)났즌 전중(秦中)에서 남산(南山)을 제사 지내었다 .8)

8) 『 史記』 「封禪書」 〈長安置祠祝官 • 女巫. 其梁巫, 祠天 • 地 • 天社 • 天 7k • 房中 • 堂上之屬, 晉巫, 祠五帝 • 東君 • 雲中 (君) • 司命 • 巫社 • 巫祠 • 族 人·先炫之屬, 秦巫, 祠社主•巫保·族繁之屬, 荊巫, 祠堂下•巫先·司 名·施菜之屬, 九天巫,祠九天,皆以歲時祠宮中.其河巫 , 祠河於臨晉,而 南山巫 , 祠南山秦中. >又 『漢 書 』 卷 1 엠 5 帝紀贊」, Q如高祖卽位, 置祠祀 官,則有秦·晉·梁·荊之巫〉

무제 (武帝)도 〈귀신의 제사只룹 중히 여겨, 여러 가지 신의 사당 을 세우고 〈무〉로 하여금 이들을 모시게 했다. 그리고 관무(官巫) 로는 〈월무遷巫)녔t 두어 〈천신(天神) • 상제 U:帝) • 백귀 (百鬼)〉 를 제사 지내도록 했다 .9) 무제 밀에서 활약했던 이소군(李少君), 제 (齊)나라 사람 소옹(少翁) • 공손경 (公孫卿) 등도 모두 〈무〉였다. 무제가 이연년(李延年)을 기용하여 악부偶節:)롤 설치한 것도 〈민 간의 제사에도 고무악(鼓舞樂)이 있는데, 지금 교사礎祀)에 음악 이 없으니 될 일이겠는가?〉 10) 하는 것이 중요한 동기였다. 따라 서 『한서(漢書)』 「예악지여뽑誌:)」에서

9) 『史記』 「封禪書」. 10) 『史記』 「封禪書」 〈民間祠尙有鼓舞樂, 今部祀而無樂, 登稱平 ? >

무제에 이르러 교사僚 b 祀)의 예 頃澄)를 정하고서 악부(樂府)를 세 워, 시 (詩)를 채집하여 밤도와 읊게 함으로써 조(tt) • 대 (代) • 진 (秦) ·초湜) 지방의 민요가 있게 되었다 .11) 고 하였는데, 〈조· 대 • 진 ·초 지방의 노래〉란 것도 모두 제사 또

11) 『漢書』 여武帝定邪祀之禮, 乃立樂府 , 採詩夜踊 , 有趙 • ft • 秦 • 楚之 腦.〉

는 무가와 관계되는 노래들이 주종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 에서도 설명한 「안세방중가(安世 房 中歌)」 17 장과 「교사가僚 b 祀歌)」 19 장도 모두 〈무 〉 와 관계가 깊은 〈가 무회 〉 적인 악가였다고 생각된 다. 환관(桓 寬 기원전 73 년 전후)의 Ii' 영철론(鹽鐵論) 』 권 29 「산부 족(散不足)」 편을 보면 지금 부자들은 명악(名 嶽 )에 기도를 드리고 산천에 망제 (望祭)를 지냄에 있어, 소를 잡고 북을 치며 희창 ~1 昌) • 무상(傑 像)을 하고 있다 .12)

12) 『 鹽鐵論』 〈今富者祈名 嶽 , 望山川 , 椎牛 擊 鼓, 戱偏債像. >

고 하였다. 여기의 〈희창冷든 〈 가무회 〉 이고, 〈 무상茂든 〈 가면희 〉 였 울 가능성이 많으며, 또 거기에는 잡희 (雜戱)도 함께 연출되었을 듯하다. 동한(東漢)에 와서도 사마표(司馬彩)의 『속한서지 億t漢書 志)』 13) 권 26 「백관지삼(百官志三)」 사사령 (祠祀令)에 대한 유소(劉昭)의 주(注)에서는 왕륭(王隆)의 『한관( 漢 官)』을 인용하여 〈가무팔인(家 巫八人) 〉이 있었다 하였다. 다시 같은 책 권 25 「백관지이 (百官志 二)」 태사령 8 史令)의 주에 인용된 왕륭의 『 한관』에 의하면 그 속 관(屬官)으로 〈태사대조 8 史待紹) 37 명이 있었는데, 그 중 6 명은 치력(治曆), 3 명은 귀복(龜卜), 3 명은 여택(IJI宅) , 4 명은 일시(日 時) , 3 명은 역서 (易莖) , 2 명은 전양頃祿) , 9 명은 적씨 (籍氏) • 허 씨 (許氏) • 전창씨 頃昌氏) 각 3 명, 가법 (嘉法) • 청우(請雨) • 해사 (解) 각 2 명, 의 (醫) 1 명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직 책들의 대부분을 〈무〉가 맡았을 것이다.

13) 范華의 『後 漢 書 』 뒷부분에 合刊되어 있음.

한대에 일어났던 반란들을 보면 특히 〈무〉의 활약이 두드러진

다. 신망(新拜)의 천봉(天鳳) 연간 (14-19) 에 일어났던 산동(山東) 일대의 적미적 (赤眉賊) 중에서는 제무(齊巫)가 큰 활약을 하고 있 고, 14) 동한(東漢) 광무제 (光武帝) 때에도 건무湜武) 17 년 (41) 에는 요무(妖巫) 이광(李廣)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건무 1 9\:! (43) 에는 요무(妖巫) 인 선신 (單臣) • 부전 (傅鎭) 등이 반란울 일으켰다. 15) 다 시 영제 (靈帝)의 중원(中元) 원년 (184) 에 이른바 오두미도(li斗米 道)로 반란을 일으켰던 정수(張節 일당도 요무(妖巫)였고, 16) 〈대 의 伏醫)〉라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던 태평도댜弁道)의 장각徵: 角) 17) 역시 〈무〉였다고 할 수 있다.

14) 『後漢書』 卷 11 「劉玄劉盆子列傳」 〈軍中常有齊巫鼓舞祠城陽景王 , 以求 福助 巫狂言景王大怒, 曰, 當爲縣官, 何故爲賊? 有笑巫者輔病, 軍中驚 動.〉 15) 『後漢書』 卷 1 下 「光武帝紀」. 16) 『後漢書』 卷 8 「孝靈帝紀」. 17) 袁宏 『後漢紀』 卷 24 「孝靈皇帝紀」 中卷.

2) 신사(神祀) 그 밖에 한대 민간에 성행한 여러 잡신들의 제사들도 거의 모두 〈무〉와 관계가 있고, 또 거기에는 모두 여러 가지 〈가무회〉가 쓰 였다. 『사기 (史記)』 권 28 「봉선서 (封禪書)」를 보면 한고조(漢高祖)는 재위 8 년(기원전 199) 에 나라의 온 고을에 명하여 영성사(靈星祠)롤 세우고 늘 제때에 소를 잡아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18)

18) 『史記』 성其後二歲 , 或曰周興而邑部, 立后稷之祠, 至今血食天下. 於是高 祖制紹御史, 其令郡國縣立靈星祠, 常以歲時祠以牛.〉

는 기록이 있다. 여러 주(注)를 종합하면 〈 영성( 靈 星)活폰 천전성 (天田星)이라고도 부르며 농사를 관장하는 신이어서, 그 해의 풍년 울 비는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런데 『 후한서 (後 漢書 )』 지 (志) 제 9 「제사하(祭祀下)」에는 고조(高祖)가 전국 각지에 영성사( 靈 星祠)를 세우고 제서를 지냈으며, 〈영성冷폰 천전성 (天田星)이라고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쓴 다음 다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춤추는 사람으로는 동남(童男) 16 명을 사용하였다. 춤추는 사람들 은 교전(敎田)을 상징하였는데, 처음에는 풀을 뽑고 베고, 다음에는 받을 갈고 씨를 뿌리며, 김을 맨 다음, 참새를 쫓고, 곡식을 베어 거 둬둘이며, 절구질 • 키질하는 형상을 춤추어, 농사일을 상징하는 것이 다 .19)

19) 『後漢 書 志 』 〈舞者用童男十六人. 舞者象敎田 , 初爲支除, 次耕種 • 芸fj • 福爵及稷 ~l j • 春緩之形, 象其功也. > 20) 『 史記 』 卷 28 「封禪 睿 」 〈漢興,……後四歲, 天下已定』沼御史, 令 覽 護治 粉權,常以四時春以羊盆祠之.令祝官立畜尤之祠於長安,長安置祠祝官女 巫 ……高祖十年春, •••. •• 二月及臘祠社稷以羊家, 民里社各自財以祠. >

이에 의하면, 영성사( 靈 星詞)에서 제사 지낼 때 추던 춤은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곡식을 거둬들여 먹을 수 있도록 손질하기까지 의 모든 농사일을 상칭하는 〈가무회〉였다. 고조는 이미 군사를 일으킬 당시에도 고향인 풍(豊)의 분유사(粉 麟)에서 제사를 지냈고, 패공(浦公)이 된 다음엔 치우(崔尤)를 제사 지내고 뒤에 그 사딩을 세우고 축관(視官)과 여무(女巫)를 두 었으며, 후직 偏稷)의 사당도 세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20)

그 뒤에도 한대에는 여러 신들에 대한 제사가 성행하게 된다. 따 라서 각 지방마다 밭의 신을 모시는 사(社)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

고, 다시 선농(先農)과 풍백 (]!\1 自) • 우사(雨師) 등에게도 제사를 지냈다 .21) 이러한 제사들에는 영성사에서 제사를 지낼 때와 비슷 한 여러 가지 〈가무희〉가 때와 장소를 따라 다양하게 연출되었을 것 0] 다.

21) 『後漢書志』 卷 9 「祭祀」 下 생系邑常以乙未日祠先農於乙地, 以丙戌日祠風 伯於戌地, 以己丑日祠雨師於丑地, 用羊家.〉

3) 반무(反巫) 무제 (武帝) 이후 유학(儒學)의 성행으로 한나라의 상충 지배계급 간에는 미신을 배척하려는 경향도 두드러져, 형식상으로는 무풍 (巫風)이 그다지 드러나지 않게 된다. 이미 『예기 며配)』 권 13 「왕제 (王制)」에서도 말을 교묘히 하며 법률을 위반하고, 명분(名分)을 어지럽히며 법도 룰 바꾸고, 그릇된 도리를 주장하며 정치를 어지럽히는 자는 사형이 댜 ……귀신을 빙자하여 시일(時日)을 택하고 점울 침으로써 사람들 울 의혹게 하면 사형이다 .22)

22) 명固山 〈析言破律, 亂名改作, 勃左道, 以亂政, 殺. ……假於鬼神, 時 日 , 卜堂, 以疑衆, 殺.〉 鄭玄注 선己直, 若巫壘及俗禁.〉

라고 하였거니와, 한대에 와서는 〈무녔十 비판하는 이론이 더욱 두 드러진다. 사마천(司馬遷)은 사회의 육불치병(六不治病)을 논하면 서 그 중 하나가 〈신무불신의(信巫才湘~醫)〉라 하였고 ,23) 환관(桓 寬)의 『영철론遷障論)』만 보더라도 제 30 「구궤 (救園)」의 상홍양 (桑弘羊)의 말에

23) 『史記』 卷 105 I]籠爲倉公列傳」.

역병이 도는 해의 무당처럼 부질없이 입만 놀릴 수 있을 뿐이다. 24)

24) 『鹽鐵論』 〈若疾歲之壓, 徒能鼓口耳.〉

라는 대목이 있고, 제 29 「산부족 (散不足)」에서는 세속에서 거짓을 꾸미고 속임수를 쓰게 되자, 백성들 중에는 무축 @祝)이 되어 남이 주는 사례를 받는 자들이 있게 되었는데, 뻔뻔스 런 얼굴로 혀를 놀리어 어떤 자는 기업을 이루어 치부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일하기를 꺼리는 사람들은 농사일을 버리고 그 짓을 배워서, 민간에는 무가 있게 되었고, 동리마다 축이 있게 된 것이다. 25)

라고 비판도 하고 있다. 왕충(王充, 27-97) 같은 이는 『논형 (論 衡)』 「해제 (解除)」 편에서 제사를 논한다면 제서는 도움되는 게 없고, 무축을 따져 보면 무축 은 아무 힘도 없는 것이다. 26)

25) 『鹽鐵論』 〈世俗飾僞行詐, 爲民巫祝,以取蘆謝,堅額健舌, 或以成業致 富. 故懷事之人, 釋本相學, 是以街卷有巫, OO 里有祝. > 26) 『論衡』 @鈴른祀, 祭祀無補, 論巫況, 巫祝無力.〉

라고 잘라 말하고 있고, 중장통(仲長統, 180-220) 은 『창언 (昌言).!I 에서 천도(天道)는 알면서도 인략(人略)이 없는 지는 바로 무의복축(巫 醫卜祝)과 같은 무리로 어리석은 자들도 무시하는 백성들인 것이 다 .27)

27) 『昌言』 〈故知天道而無人署者 , 是巫醫 卜 祝之任 , 下愚不齒之民也. >

라고 말하는 등, 수많은 학자들이 〈무〉의 미신적 행위를 비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의 무습(巫習)은 더욱 성행하여, 그 와 함께 〈가무희〉도 더욱 발달하고 성행하였다. 4) 나 (1 難) 〈나({難)〉에 관한 기록으로는 장형 凍衡, 78-139) 의 「동경부(東京 賊) 」 28) 가 뛰어나다.

28) 蕭統, 『文選』 卷 3 京都 中 所載.

그리고 연말에는 대나 8 揮t)를 하여 여러 역귀 (疾鬼)들을 몰아내는데, 방상씨 (方相氏)는 도끼 들고 무격 (巫親)은 귀신 쫓는 빗자루 들고, 만 명의 아이들 진자(仮子) 되어 붉은 머릿수건에 검은 옷 입고 나와, 복숭아 가지 활에 가시나무 화살 매어 마구쏘아대며, 돌날리는것이 비 뿌리듯하여 억센 귀신들 모두 맞아 죽네. 불꽃 튀듯 별똥 떨어지듯 뛰며 적역 (赤疾)을 사방으로 쫓아 낸 뒤에, 바다 건너고 다리 뛰어넘어가 이매 (璃結)를 쳐죽이고 휼광(~困狂)을 때려죽이고 위사(倭蛇)를 베어 죽이고 방량(方良)의 머리를 부숴 죽이네. 경보(耕父)는 청령수에 잡아 넣고 여발(女越)은 신황수(神演水)에 빠뜨리고, 기허 (菱關)와 망상(岡象)을 죽인 다음

야중(野仲)을 죽이고 유광(游光)을 없애 버리네. 팔방(八方)의 신들도 두려워 떠는데 하물며 작은 귀신 늙은 귀신들이랴 ! 도삭산(度朔山)에서 못된 짓 하는 귀신들 지키고 있다가 울뢰 (鬱壘)와 신도(神茶 )29) 두 사람이 갈대 새끼줄로 묶어 가고, 구석구석 찰살피어 빠뜨린 귀신 다 잡아내니, 정안의 집들깨끗해지고 모두안락해졌다네.

29) 應助, 『風俗通』 社벵병目 G 樹安黃帝흠, 上古之時有茶與鬱壘昆弟二人 , 性 能執鬼. 度朔山上章桃湘t下 , 簡閔百鬼 , 無道理, 妄爲人禍害, 茶與鬱壘總以 탸,執以食虎.〉

爾乃卒歲大i難 福除群摘, 方相秉鉉,巫親操荊, 仮子萬童 丹首玄製, 桃孤練矢, 所發無泉, 飛礎雨散,剛輝必幣. 煙火駒而星流,逐赤疾於四商, 然後凌天池, 絶飛梁, 捨璃態, 斯橋狂, 斬倭蛇,腦方良, 囚耕父於淸治, 漏女悠於神演, 殘菱越與岡象, 燈野仲而織游光. 八靈爲之震情, 況悠域與畢方! 度朔作硬, 守以鬱壘, 神茶副焉, 對操索*· 目察區障 司執遺鬼,京室密淸, 岡有不越. 여기엔 구나(福灘)의 주역으로 방상(方相)과 무격 倻親)이 등장 하고, 전자만동(仮子萬童)이 나오며, 다시 10 여 종의 역귀 僚魂)와 함께 귀신을 잡는 신도(神茶)와 울뢰 (鬱壘)도 니온다. 『후한서 (後

英書 ) 』 「예의지 頃織志)」에도 〈 나 〉 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다. 섣달……납제 (臘祭) 하루 전날 대나0( 1 難)를 하여 역귀 僚魂))를 쫓는다. 그 의식은, 먼저 중황문(中黃門) 자제 중 나이가 열 살에서 열두 살 사이의 아이들 120 명을 골라 진자(仮子)로 삼는데, 모두 빨 간 두건에 검은 옷을 입히고 큰 손북을 들게 한다. 방상씨 (方相氏)는 황금의 네 눈이 달렸고 곰가죽을 뒤집어썼으며 검은 저고리에 붉은 바 지를 입고 창과 방패를 든다. 십이수(十二獸)는 거기에 맞는 옷을 입 고 털이 나고 뿔도 달렸다. 중황문에서 이를 행하되 용중복---0 F( 亢從僕 射 )30) 가 이를 지휘하여 궁중의 악귀들을 쫓아 낸다. 밤이 깊어지면, 조신(朝臣)들이 모이는데, 시중(侍中) • 상서 (尙 書 ) • 어사(御史) • 알 자(賜者) • 호분(虎實) • 우림 (羽林) • 낭장에때유) • 집사(執事) 둘이 모 두 붉은 두건을 쓰고 대궐 섬돌 위에 모였다가, 수레를 타고 전전 (前 殿)으로 나아간다. 그러면 황문령 濱:門令)이 〈진자(仮子)도 갖추어졌 으니 축역 (逐疾)을 하시오 〉 하고 아뢴다. 그러면 중황문의 노래롤 따 라 진자들이 이렇게 화(和)한다. 〈 갑작(甲作)은 역귀 僚魂,)를 잡아먹 고……. 〉 그러면 방상(方相)과 십이수(十二獸)는 춤을 추고 소리를 지르면서 궁중을 앞뒤로 세 번 돌고 횃불을 들고 역귀 僚魂,)들을 단 문(端門)으로 내보내면, 문밖의 기사(騎士)들이 횃불을 전해 받아 궁 전 궐문 밖으로 나가고, 문밖의 오영기사야營騎士)들이 횃불을 전해 받아 가지고 가서 낙수(維水) 가운데 버린다. 여러 관청에서는 각각 목면수(木面獸)를 만들어서 나인 (1 難人)들로 하여금 일을 잘 마치게 하고, 도경 (桃榎)과 울뢰 (鬱 壘 )와 위교(草菱)를 설치해 놓게 한 다음 에야 집사(執事 )와 섬돌에 있던 사람들도 일을 끝내게 된다. 갈대 창 과 복숭아나무 지팡이는 공경 (公卿) • 장군情軍) • 특후 (特侯) • 제후 (諸侯) 들에게 내려 준다. 31)

30) 中黃門 • 亢從僕身t는 少府에 속하는 관청과 벼슬 이름. 31) 『 後漢 書』 여沮i一日 , 大眞 謂之逐疾. 其儀, 選中黃門子弟, 年十歲以

上,十二以下,百二十人爲仮子,皆赤帳製,執大鼓. 方相氏,黃金四目,蒙 熊皮, 玄衣朱裝, 執戈揚眉. 十二獸, 有衣毛角, 中黃門行之, 亢從僕射將 之, 以逐惡鬼于禁中. 夜漏上 7~, 朝臣會, 侍中 • 尙書 • 御史 • ,尉者 • 虎賀 • 羽林郞將 • 執事, 皆赤帳陸衛, 乘輿街朝殿. 黃門令奏曰, 仮子備, 請逐疾. 於是中黃門信, 仮子和, 曰, 甲作食熟, 勝胃食虎, 雄伯食.ils, 騰簡食不祥, 授諸食씀,伯奇食夢,强梁祖明共食深死寄生,委隨食觀,緖斷食巨,窮奇騰 根食.凡使十二神,追惡凶,赫女樞,拉女幹節,解女肉,抽女肺腸,女 不急去,後者爲稽. 因作方相與十二默槪, 噴呼,周偏前後省三過,持短火送 疾出端門. 門外腐騎, 傳姬出宮, 司馬腦門, 門外五營騎士, 傳火棄雜水中. 百官官府, 各以木面獸, 能爲灘人師, 訖, 設桃硬鬱壘*菱. 畢, 執事陸者, 能. 草裁輝, 以賜公卿將軍, 特侯諸侯云. >

『문선(文選)』 이선(李善, ?-689) 의 주(注)에서는 『한구의 (漢舊 儀)』를 인용하면서 방상씨 (方相氏)가 호피 (虎皮)를 뒤집어썼다. 라고했고, 다시 방상씨가 여러 관리들과 아이들을 거느리고, 복숭아나무 활과 가시 나무 화살과 토고(土鼓)를 준비하여, 북을 치면서 활을 쏘고, 적환 (赤丸)과 오곡(五殿)을 뿌렸다. 32)

32) 『文選』 「李善注」 〈方相氏帥百隸及童子, 以机迎園秩랴흡支, 鼓旦身寸之, 以 赤丸五殿播還之.〉

라고 하였다. 다시 『후한서 (後漢書)』 유소서(劉昭)의 주(注)에서는 「동경부(東京試)」 주(注)를 인용하여 위사천인 (衛士千人)이 단문(端門) 밖에 있고, 다시 오영천기 (五營千騎)가 위사의 밖에 있다가, 삼부(三部)로 나뉘어

번갈아 가며 낙수(維水)로 가서 세 대열로 나뉘어 귀신을 낙수 속에 잡아쳐넣는다 .33)

33) 『後漢書 』 注 〈衛士千人在端門外, 五營千騎在衛士外, 爲三部, 更送至維 水, 凡三號, 逐鬼投維水中. >

라고하였다. 채옹(蔡썹 132-192) 의 『독단(獨斷)』 권상(卷上)에도 이에 방상씨에게 명하여 황금의 눈 네 개를 붙이고 곰가죽을 덮어 쓰고, 검은 저고리에 붉은 바지를 입고 창을 들고 방패를 갖고, 늘 연 말 12 월엔 여러 관리들과 아이들을 거느리고 〈나녔t 행하여 집안을 뒤져 역귀들을 몰아내게 하였다. 복숭아나무 활에 가시나무 화살을 들고 토고(土鼓)를 아침까지 두드리며 쏘고, 붉은 알(판? )과 오곡을 뿌려댐으로써 병과 재앙을 물리쳤다. 그리고 나서는 도인 (桃人)과 위 색 (華索)과 이빨이 간 호랑이를 세우는데, 신도(神茶)와 울뢰 僧뎀i) 가 귀신들을 잡아다가 이빨 긴 호랑이에게 갖다 준다. ……그리고는 신도와 울뢰롤 그리어 위색과 함께 문에 걸어 놓음으로써 흉(凶)함을 막았다 .34)

34) 『獨斷』 생 8 문令方相氏, 黃金四目 , 蒙以熊皮, 玄衣朱裝, 執戈揚權, 常以 歲意十二月,從百猿及童兒而時灘,以索宮中臣疾鬼也.桃孤練矢,土鼓鼓旦 射之, 以赤丸五穀播酒之, 以除疾秩. 已而立桃人 • 蒼索 • 1 危牙虎, 神茶 • 鬱 壘以執之僧牙虎. ……乃薔茶 • 壘, 井慈蒼索於門戶, 以禦凶也. >

라고하였다. 이처럼 서로 다른 기록이 전하는 것은 때에 따라 대나伏 :1 難)의 의식이 약간씩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방상씨 이의에 전자 (仮子)가 만동(萬童 또는 120 명)이나 동원되고, 12 신(또는 巫親)과 10 여 종의 악귀들이 등장하고, 다시 울뢰 (鬱壘)와 신도(神茶 이들

이외에 보조자로 기사 천 명과 오영기사 천 명)가 나오는데, 모두가 가면을 쓴 대규모의 〈가무회〉였을 것이다. 곧, <'-l->는 이미 한대 에 궁중에 있어서도 대규모의 다양한 가면놀이로 발전했음울 알 수 있다. 민간의 〈나〉에 관하여는 자세한 기록이 없지만, 시대와 지역에 따라 더욱 다양하게 발전했을 것이다. 『예기 며樣t)』 권 17 「계동 (季冬)」 〈대나伏灘)〉의 『소(疏)』에서 공영달 GU距 達, 574-648) 이 계동(季冬)의 〈나녔룹 〈대나단灘)〉라 부르는 것은 〈계춘(季春)은 국가의 〈나〉이고 중추는 천자의 〈나〉〉인 데 비하여 〈이것은 아래 로 서인들까지도 행하기 때문〉 35) 이라 말하고 있다. 다시 왕충의 『논형 (論衡)』 권 25 「해제 (解除)」 편에서는

35) 며劃겁 疏 〈言大者, 以季春唯國家之難, 仲秋唯天子之難, 此則下及庶 人.〉

재화생孫周)와 악귀를 쫓는 법은 옛 역귀를 쫓는 예에서 나왔다. 옛 날 전욱씨 (顧項氏)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태어나자 곧 도망가 서, 하나는 강수(江水)에 살며 학귀 頃魂,)가 되고, 하나는 약수(若 水)에 살며 망량(戀經)이 되고, 하나는 톰난 구석에 살며 역병 (疾病) 을 주관하며 사람들을 앓게 하였다. 그러므로 한 해가 다 가고 일이 끝나면 역귀를 쫓아 내고 낡은 것은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이하며 길 한 것을 들여 놓는 것이다. 36)

36) r;*』 여森g之法, 緣古逐疾之禮也. 昔顔項氏有子三人, 生而皆亡, 一居 江水爲虐鬼, 一居若水爲網經, 一居歐隅之間, 主技洋§人. 故歲終事畢, 福逐 疾鬼, 因以送陳迎新內吉也. >

라고 하였다. 왕충은 재액을 막고 역귀를 쫓는 민간의 여러 가지 무속인 해축지법 (解逐之法)이 모두 〈나〉에서 발전한 것이라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민간에는 더욱 다양한 〈나〉 계통의 〈가무희〉

가 발달했었으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3 산악(散樂)과 잡희 (雜戱) 1) 각저희(角抵戱) 한대에 성행한 놀이로 각저희 (角抵戱, 抵는 抵로도 씀)가 있다. 『한서 (漢 書 )』 권 6 「무제기 (武帝紀)」를 보면, 원봉債封) 3 년(기원전 108) 봄에 각저희를 하였는데, 300 리 안에 서는 모두 와서 구경하였다. 37)

37) 『漢書』 〈詞)三年春, 作角抵戱, 三百里內皆來觀. >

라고 하였다. 그 주(注)에서 응소(應助)는 각(角)이란 재주를 겨룬다는 뜻이며, 저 (抵)란 서로 부딪히는 것이 다 .38)

38) 『漢書』 注 q며f, 角技也. 抵者, 相抵觸也. >

라고 하였고, 동한(東漢)말의 문영 改類)은 이 음악을 〈각저〉라 부르게 된 것은 두 사람씩 짝을 지어 힘을 겨루 기도 하고 기예 (技藝)나 사어 僚修p)룰 겨루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 래서 〈각저〉란 명칭이 붙었는데 잡기악(雜技樂)의 일종으로, 파유희 (巴兪戱) • 어룡만연 (魚龍菱延) 같은 종류이다. 한나라에서는 뒤에 평 락관(平樂觀)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39)

39) 『漢書』 注 〈名此樂爲角抵者, 兩兩相當角力, 角技藝射御, 故名角抵, 蓋

雜, 巴兪戱 • 魚龍菱延之屬也. 漢後更名平樂觀. >

라고 하였다. 『한서』 권 23 「형법지 (刑法志)」에서는 그 유래를 다음 과같이 설명하고있다. 춘추(春秋)시대 이후로 약한 나라는 멸망시키고 작은 나라는 병합 시키어, 몇 나라만이 서로 다투는 전국(戰國)시대가 되었는데, 무술 을 닦는 의례 (儀禮)를 약간 보강하여 희악倻導g)으로 삼아 서로 힘을 뽐내려 했었다. 전(秦)나러에 와서는 그것을 〈각저〉라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어 선왕(先王)들의 예 여!)가 음란한 음악 가운데 묻히게 되 었던 것이다 .40)

40) 『漢書』 〈春秋之後, 滅弱香小, 竝爲戰國, 稽增講武之禮, 以爲戱樂, 用相 奇視 而秦更名角抵, 先王之처彬沒於器樂中矣. >

그 근원을 태고적으로 잡는 이도 있다. 양@)나라 임방(任明, 460-508) 은 『술이기 (述異記)』 권상(卷上)에서 전한(秦漢) 무렵에 이르기를, 치우씨 (崔尤氏)는 귀와 귀밀머리가 칼과 창 같고, 머리엔 뿔이 났으며, 헌원씨(軒輯氏)와 씨울- 적에 뿔 로 사람들을 들이받아 사람들은 대항할 수가 없었다. 지금 기주(冀 州)에는 치우희 (嶺尤戱)라는 음악이 있는데, 백성들이 두셋씩 짝을 지어 머리에 쇠뿔을 달고 서로 들이받는 것이다. 한대에 만든 〈각저 희〉도 그 유제 (遺製)일 것이다. 41)

41) 『述異記』 여챙輔罪ft, 밟尤氏耳賢如劍載, 頭有角, 與軒羽團 I, 以角抵人, 人不能向.今冀州有樂, 名짧尤戱, 其民兩兩三三,頭戴牛角而相抵.漢造角 禪, 蓋其遺製也.〉

라고 하였다. 송(宋)나라 진양(陳陽)의 『악서 偶璃:)』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사기』 권 87 「이사열전(李斯列傳)」에

이 때 이세 (二世)는 감천 (甘泉)에 있으면서 각저배우(穀抵俳優)의 연출을 구경하고 있었다. 42)

42) 『史記』 여낸寺二世存甘泉, 方作穀抵優俳之觀. >

라고 하였으니, 각저희 (角抵戱 穀은 角과 같음)는 진대 (秦代)에도 성행하였음이 분명하다. 대체로 〈각저희났근 본시 〈희 ~戱)〉자가 군사와 관계가 있는 굴자 인 것처럼 두 사람이 몸을 부딪치며 힘을 겨루는 씨름 비슷한 놀이 였다. 그것이 무술이나 재주를 겨루는 것으로 발전하고, 뒤에는 서로 겨루는 형식이 남아 있는 놀이나 〈가무회〉로까지 발전하여, 마침내는 여러 가지 잡기 (雜技)와 놀이 및 가무까지도 다 포함하는 말로 발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앞에 인용한 『한서』 문영 (文類)의 주에서도 〈각저〉란 뒤에는 〈잡기악(雜技樂)의 일종으로 파유희 (巴 兪戱) • 어룡만연(魚龍菱延) 같은 종류가 되었다〉고 그러한 뜻을 설 명하고 있다. 그러니 〈각저희났근 앞 장에서 설명한 〈희 ~)〉자의 뜻의 발전과 매우 비슷한 뜻의 변화를 지닌 것이다. 그리고 끝머리 에 다시 〈뒤엔 평락관(平樂觀)이라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였는데, 평락관은 한대의 〈대작악처 난沿作樂處)〉 43) 였다. 이에 관해서는 조금 뒤 「서경부(西京試)」를 인용하는 중에 다시 설명될 것이다.

43) 蕭統 『文選』 卷 2 京都上, 張衡 떤賜떠品幻의 薛綜 注.

그러나 가무잡희가 더욱 발달하고 대희 伏戱)도 생겨났던 후세의 송대 (宋代)에 이르러는 〈각저〉가 다시 본래의 뜻으로 되돌아가 〈가 무희〉와 관계 없는 것이 되었다. 오자목(吳自牧, 1270 년 전후)의 『몽량록頃梁錄)』 권 20 「각저 (角低)」에는 〈각저〉라는 것은 상복(相撲)의 별명으로, 또 쟁교(爭交)라고도 하 였다 .44)

44) 111 빙상싸 선재터출, 相撲之異名也, 又謂之爭交. >

라고 하면서 조정 대회 伏 會 ) 때의 〈 각저 〉 와 민간의 노기인 (路岐 人)에 의한 와시 頂市)에서의 상복(相撲)을 설명하고 있는데, 인원 수나 규모만 다를 뿐 두 가지 모두 무예나 힘겨루기이다. 곧, 일종 의 스포츠이다. 그러므로 〈 각저났근 그 본래의 모습과 뜻을 뒤에 와서 되찾았던 것이라 할 수 있다. 2) 서경부(西京試) 장형 佛衡)의 「서경부(西京試)」를 보면 중간에 평락관(平樂觀)의 〈넓고 평탄한 광장 앞에서 ‘각저'의 묘희 (妙戱)를 연출한다〉라고 하 고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연출된 기예 (技藝)와 가무에 대하여 읊 고있다. 오획 (烏獲) 같은 장사가 무거운 솥을 들어올리고, 도로산(都盧山) 사람들처럼 날래게 장대를 기어오르며, 풀 바퀴 속을 제비가 물차돗 지나가는데, 바퀴에 꽂힌 칼끝 사이룰 가슴으로 스쳐가네. 공과 칼 여러 개를 공중에 던지며 가지고 놀고, 줄 위를 양편에서 춤추며 건너와 공중에서 만나기도 하네. 화산(華山)이 우뚝하고, 봉우리들쑥날쑥한데, 신기한 나무와 신령스런 풀 자랐고, 붉은 과일 주렁주렁 달린 산거 (山車)가 있네. 신선들의 가무늘이 다 모아 놓은 듯하니, 표범 재롱떨고큰곰춤추며, 흰 범이 슬混})울 타고,

푸른용이 퉁소를부네. 아황恨述 l) 과 여영 (女英)이 앉아서 목청 뽑아 노래 부르니 , 그 소리 맑고 아름다운 여운 남기네. 옛 음악가 홍애 (洪淮)가 일어서서 기악(使樂)을 지휘하는데, 푹신한 털과 것으로 몸 둘렀네. 악곡의 연주 끝나기도 전에, 구름일고눈날리니, 처음엔풀풀날리다가, 마침내는평평 쏟아지네. 지붕 덮인 복도(複道) 위로, 돌이 구르며 우레소리 내는데, 이리저리 부딪히며 나는 벽력 같은 소리, 바위가 깨지는 듯 하늘의 위엄 나타내네. 팔백 척 큰짐승이, 만연지희 (菱延之戱)를 연출하고, 높다란 신산(神山)이 , 문득등뒤로나타나니, 곰과 호랑이 기어오르며 서로 다투고, 원숭이들 튀어나와 높이 기어오르네. 괴상한 짐승들 엉금엉금 기고, 큰 공작 어정어정거리며 , 흰 코끼리 새끼를 낳는데, 늘어진 코가 휘청거리고, 바다 물고기 변하여 용이 되면서, 이리저리 꿈틀거리네.

사리 (舍利)라는 짐승이 입 벌리고 숨 내뿜어, 신선의 수레를 만들어 내는데, 네 마리 사슴이 나란히 수레 끌고, 지초(芝草)로 만든 수레 지붕엔 아홉 송이 꽃이 피어 있네. 두꺼비와 거북이가 기어 나오고, 땅꾼은뱀을놀리네. 기이한 환술(幻術)이 변화무쌍해서 모양을 바꾸고 형체를 달리해 놓네. 칼을 삼키고 불을 토해 내거도 하고 , 구름과 안개 자욱이 피어나게 하며, 명을 긋기만 하면 강물 이루어져, 위수 (7 胃水)로 흘러들기도 하고 경수(混水)로 흘러가기도 하네. 동해황공 (東海黃公)이 , 붉은 칼과 월인 使g人)의 주법 (呪法)으로, 흰 호랑이 물리치려다가, 끝내 성공하지 못하니, 부정한 몸가침에 마음도 미혹되어, 제대로하지 못하는것일세. 그리고는 희거 儒~)가 나오는데, 긴 깃대가꽂혀 있고, 여러 아이들 재주 피우며, 오르락내리락하다가는, 갑자기 거꾸로 떨어지다 발꿈치가 걸리는데, 마치 끊어졌다다시 이어지는듯하네. 백 마리 말이 고삐를 가지런히 하고,

발 맞추어 나란히 달리고, 깃대 위에서 재주부리는 모습 다함이 없네. 활을 당겨 서쪽 오랑캐 쏘다가는, 다시 머리 돌려 북쪽오랑캐 쏘네 .45)

45) 頂京試」 〈銃定旦寧, 焉知傾隊 大鷲幸 TT 栗, 張甲乙而襲琴被. 損珍賓 之玩好, 粉魂麗以麥腐. 臨追望之廣場, 程角低之妙戱. /烏獲打鼎, 都盧尋 榎 衝빵溫 胸突鉛錄 挑江 l j之揮堂, 走索上而相逢. /華嶽峨峨, 岡뿐 驛, 神木靈草, 朱實離離. 總會悟信 , 戱約舞鼎 白虎鼓瑟, 蒼龍吹視 / 女峨坐而長꼽k , 聲淸暢而倭蛇. 洪淮立而指磨, 被毛羽之被禮. /度曲未終, 雲起雪飛 初若親翼, 後遂 ~J . 複陸重露n , 轉石成雷. 磁礎激而增響, 傍瑾 象平天威 /巨獸百尋 是爲菱延 神山崔孫,欽從背見. 熊虎升而祭撲, 援 抗越而高援. 怪獸陸梁, 大雀拔拔 白象行lf!., 垂鼻輸困 /海麟變而成龍, 狀l 婚編 舍~Jj~殿 化爲仙車, 廳鷲四鹿, 芝蓋九砲. 漏餘與龜, 水人 弄蛇 /奇幻條忽, 易親分形. 香刀吐火, 雲怨音昊三畵地成川, 流滑通뿐. / 東海黃公, 赤刀奧祝. 冀版白虎, 卒不能救. 快邪{角藍 於是不害. /爾乃建 戱禪. 仮億程材, 上下哥蜀!. 突倒投而眼珪, 警 限絶而復聯. 百馬同 뿜 騎足따也. 槿末之茂 態不可彌 촬弓射平西完, 又顧發平鮮卑. >

이상 평락관(平樂觀)에서 연출되던 〈 각저지묘희 (角抵之妙戱)〉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대략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1) 강정 (才맵~) • 심장( 尋 植) • 연탁(燕漏) • 환검 (丸劍) • 주색 ~索) 등은 지금의 서커스 비슷한 기예 (技藝)이다. (2) 화산(華山) 모양울 한 산거 (山車)가 나오는데 , 거기엔 신목 (神木) • 영초(靈草)에 붉은 과일아 달려 있고, 그 위에선 여러 가지 신선놀이가 행해진다. 표범 • 곰 • 호랑이 • 용 등이 나와 놀이도 하고 춤도 추고 악기도 연주한다. (3) 순비 頃妃)인 아황倻邊)과 여영 (女英)으로 분장한 여인과 옛 음악의 명인 홍애 (洪淮)로 분장한 사람이 나와 노래도 하고 음

악도연주한다. (4) 무대의 구름 일고 우레소리 울리는 장치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5) 거수만연지희(巨獸菱廷之鼓)가 나오고, 신산(神山)에는 곰· 호랑이 • 원숭이 들이 나와 재주를 부리고, 코끼리가 새끼를 낳기도 하고, 큰 물고기가 용으로 변하기도 한다. (6) 다음엔 여러 가지 환상적인 요술이 연출된다. (7) 동해황공(東海黃公)이 백호(白虎)를 물리치려다 실패하는 내 용의 연극이 나온다. (8) 희거 徵車)가 나오는데 그 위에 세워진 깃대에서 아이들이 오 르락내리락하며 재주를 부리기도 하고, 활을 쏘는 인형놀이 46) 도나온다.

46) 『文選』의 「五臣注」에서 李周翰은 〈言假作人形, 灣弓以射西光北胡也. 〉라 설명하고있다.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온갖 재주, 곧 사람의 힘과 재주로 하는 여 러 가지 기예(技藝), 여러 가지 짐승들의 재주부리기, 여러 가지 요술(妖術) • 노래 • 음악과 춤, 연극 및 환상적인 무대장치와 연출 효과 등 온갖 기술이 총동원된 듯하다• 장형 庫衡)은 이것들을 통 틀어 〈각저지묘희慣紙之妙戱)〉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동물 및 아황倻遷) • 여영 (女英) • 홍애 (洪淮) • 동 해황공(東海黃公) 등은 대부분이 가면으로 분장하였을 것이다. 3) 평락관부(平樂觀試) 이우(李尤 55 ?-155 ? )의 「평락관부(平樂觀試)」 47) 에도 비슷한 모습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47) 명뭏文類緊』 卷 63 觀 所載.

희거 個津)에는 높다란 깃대 꽂혀 있고 백 마리 말이 이를끌고달리는데, 높은 곳을 날듯이 오락가락하고 붙었다 떨어졌다 오르락대리릭하네. 간혹달리다가 수레가 거꾸로 뒤집히기도 하네. 오획 (烏獲) 같은 장사가 무거운 솥 들어올리는데 천 균의 무게를 새것 다루듯 하네. 칼을 삼키기도 하고 불을 토하기도 하며 제비가 물을 타듯 까마귀가 뛰어다니듯 몸을 움직이기도 하네. 높다란줄을타면서 팔딱팔딱 뛰고 빙글빙글 돌며 춤도 추네. 여러 개의 공과 칼을 공중에 던져 울리며 노는데 어지럽고 정신 없을 지경이네. 파유무(巴漁舞)를 한 편에서 추는데, 서로 남의 어깨 위를 뛰어넘네. 신선이 공작을 수레에 매어 끌게 하니 그 움직이는 모양 화려하네. 나귀 타고 달리며 활을 쏘니, 여우와토끼 놀라달아나네. 난쟁이와거인이 짝을지어 장난치고, 새 짐승중엔육박(六駿)이 있고 흰 코끼리가 붉은 머리를 달고 있네. 어룡(魚龍)이 만연 (菱延)하여 산 언덕처럼 들쑥날쑥하네. 거북이 교룡두꺼비둘은 금璃)을 뜯고 부(늄)를 두드리네 •48)

48) 「平 m 高種, 駐駒百馬, 連翻九-©, 離合上下.或以駒駿, 覆車 輝]. 烏따十, 千욥祠. 香刃吐*, 燕躍烏埼 陵高履索,踊躍旋舞. 飛 丸, i弗淸回損;. 巴i面混一, 諭眉相受. 有仙鷲雀, 其形螺亂. 騎馨駐謝, 孤兎驚走. 保儒巨人, 戱誠爲精.萬鹿六駿, 白象朱首. 魚龍菱延, 峨誕山 阜. 龜璃때除, 卑琴鼓눔. >

여기엔 파유무(巴漁舞)라는 「서경부(西京試)」에 보이지 않던 놀 이가 한 가지 더 보인다. 다시 환관(桓寬)의 『영철론(鹽鐵論)』 권 29 「산부족갭枚不足)」에도 〈 지금의 민간에서〉 희 個)로써 포인잡부 (蒲人雜婦) • 백수(百獸) • 마희 (馬戱) • 투호 (鬪 虎) • 당제 (唐錄) • 추인 (追人) • 기충(奇蟲) • 호달(胡旭)을 농(弄)하고 있다. 라고 하였는데, 이것 역시 서한(西漢)대에 민간에 성행되던 〈 각저 지묘희 (角抵之妙戱)〉였을 것이다. 4) 호악(胡樂) 『사기』 권 123 「대완열전 9 沼苑列傳)」에 이런 기록이 있다. 이 때 황제께선 자주 바닷가를 순수(巡狩)하였는데 언제나 의국 손 님들울 모두 데리고 다니면서……이에 크게 〈각저녔춘 행하고 기희 (奇)와 괴물(怪物)을 보여 주었으며……. 이에 눈을 돌게 하는 재 주를 더 보태어, 각저기희 (穀抵奇戱)는 해마다 늘어나고 변하였다. 49)

49) 『 史記 』 磯上方數巡翊海上, 乃怨從外國客,……於是大穀抵, 出奇戱諸 怪物,……及加其睦者之工, 而角抵奇戱歲增變.〉

『한서』 권 96 하(下) 「서역전찬(西域傳贊)」에는 또 이런 기록이 있다.

주지육립 (酒池肉林)을 벌여 놓고 사방 오랑캐 손님들울 대접하며, 파유 (巴澈) • 도로(都盧)와 해중탕극 (海中盧極)과 만연어룡 (菱延魚龍) 과 각저지희 (角抵之戱)를 상연하여 구경시켰다. 50)

50) 『漢書』 〈設酒池肉林, 以妻四夷之客 , 作巴兪都盧, 海中陽極, 漫衍魚龍, 角抵之戱, 以觀視之. >

전(晉)나라 최표(崔約)의 『고금주(古今i主)』에는 한나라 때 장건 (張秦)이 서역으로 들어가 호악(胡樂)을 들여 왔는데, 이연년(李延年)은 호곡(胡曲)을 근거로 하여 다시 신성이십팔해 (新 聲二十八解)를 지었다. 51)

51) 『古今注』 〈李延年因胡曲更造新聲二十八解. >( 'l겹 F』 「樂志」에도 보임 . )

라고 하였고, 『후한서 (後漢書)』 권 86 「남만서남이열전(南登西南夷 列傳)」에는, 영녕 (永寧) 원년 (120) 에 탄국(掃國)의 임금 옹유조 6 崔由調)가 다 시 사신을 보내어 천자를 찾아 뵙고 조하(朝賀)하며 음악과 환인(幻 人)을 바쳤는데, 여러 가지 변화와 불을 뿜는 요술, 사지 (四支)를 떼 어 내는 요술, 소와 말의 머리를 바꾸는 요술을 부리고, 조환(jt}L) 도 잘하였는데, 그 숫자는 천 명에 이르렀다. 52)

52) 『後漢書』 〈永寧元年, 擇國王雍由調復遣使者, 指隣朝賀 , 獻樂及幻人, 能 變化吐火, 自支解, 易牛馬頭,又善挑丸, 數乃至千.〉

라는 기록이 있다. 이런 종류의 기록은 그 밖에도 여러 곳에 보인 다. 사마싱여 (司馬相如, 기원전 179 ? -117) 의 「상림부辻林試)」에도 당시의 음악과 춤을 서술한 대목이 있다• 〈도당씨지무偶則唐氏之

舞)〉 • 〈갈천씨지가(葛天氏之歌) 〉 에서 시작하여, 파유무(巴漁舞)와 송(宋) • 채 (蔡)의 노래가 보이고, 회남(淮南)의 간차곡(干進曲)을 문성 (文成)과 전 (類) 사람들이 노래한다. 다시 초湜곤) • 오(吳) • 정 (鄭) • 위 (衛) 지방의 음악과 대소 O 部) • 대호tkt俊) • 무(武) • 상 (象)의 악무(樂舞)도 보이고, 언(郡) • 영(郞)의 춤과 초礎小)나라의 격렬한 악가偶꽝k ) 에 이어 배우(俳優) • 주유(保儒)와 서융(西戒)의 음악인 적제지창(秋堤之 1 昌)도 연출된다. 이 중 파유무(巴兪舞) • 배 우(俳優) • 주유(保儒) • 적제지창(秋提之 1 昌) 등 반수 이상은 〈가무 희〉 또는 〈골계희〉였을 것이다. 뒤이어 보이는 신녀 (神女)인 청금 (靑)과 복비 (窓妃)로 분장한 여인들은 위의 〈가무회녔룹 주도한 여기 (女使)들이었을 것이다. 어떻든 간에 이들 중에는 호악(胡樂) 이 적지 않다. 서역을 중심으로 하여 들어온 호악은 한나라에 유행 하며, 한대 가무와 〈가무희〉의 발전에도 큰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 다. 5) 동이지악(東夷之樂) 『 후당서 (後唐書)』 권 85 「동이열전 (東夷列傳)」을 보면, 이미 하 頃)나라 소강(少康 기원전 2100 년 전후) 때 동이 (東夷)들이 〈그들 의 악무偶舞)를 바쳐 왔고〉, 그들은 〈음주가무(飮酒歌舞)를 좋아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부여국味餘國)은 12 월에 제천 僚 5 天)을 하는데 연일 대회를 열고 음식가무 (飮食歌舞) 하면서 〈영고 (迎鼓) 〉라 불렀다. 53)

53) 『後漢劃 〈以臘月祭天, 大會連日 , 飮食歌舞, 名曰迎鼓. >

라고 하였고, 다시 고구려 (高句麗)는

그 풍속이 음란하나 모두 정결함을 좋아하며, 저녁부터 밤까지 늘 남녀들이 무리로 모여 창악(偏樂)울 한다. 귀신과 사직(社稷) • 영성 ( 零 星)을 제사 지내기 좋아하고, 1 여i에는 제천대회 (祭天大會)를 여 는데 〈 동맹 (東盟) 〉 이라 불렀다. 54)

54) 『 後漢 書 』 상其俗浩, 皆潔淨自 慧 , 暮夜輯男女群緊爲偏樂. 好祠鬼神•社 稷·零星, 以十月祭天大會, 名曰東盟.〉

라고 하였다. 예 (滅)도 늘 1~ 이면 제천(祭天)을 하는데, 밤낮으로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을 추며 그것을 〈무천 (舞天) 〉 이라 불렀다. 55)

55) 『 後漢書』 〈常用十月祭天 , 畫 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라고 하였고, 마한(馬韓)도 언제나 5 월에는 밭가에서 귀신을 제사 지내며 밤낮으로 모여 술 마 시고무리로모여 노래하고춤추었는데, 춤을출적에는늘수십 명이 한데 어울리어 발을 구르며 철도롤 맞추었다. 1~ 농사일이 끝나고 도 또 그렇게 하였다. 여러 지방 고울에서는 각각 한 사람이 주(主) 가 되어 천신(天神)을 제사 지냈는데 이를 〈천군(天君)〉이라 불렀다. 또, 소도여塗)를 세웠는데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 고 귀신을 섭기는 것이었다. 56)

56) 『後漢 書』 〈常以五月 , 田意祭鬼神, 萱 夜酒會, 群緊歌舞, 舞繩數十人相 隨 蹴地爲節 十月農功畢 , 亦復如之. 諸國邑, 各以一人主祭天神, 號爲天 君. 又立蘇塗, 建大木以縣鈴鼓, 事鬼神.〉

라고 하였다• 전한(辰韓)도

풍속이 노래와 춤과 술 마시며 악기 연주하기를 좋아하였다. 57)

57) 『後漢害』 〈俗憲歌舞飮酒鼓瑟. >

라고 하였다. 다시 왜 (倭)도 상사(表事)에 가족을 제외한 가까운 사람들은 노래하고 춤추면서 줄 겼다 .58)

58) 『後漢睿』 (.其死停喪十餘日 , 家人突泣 , 不進酒食 , 而等類就꼽났印찾鹿〉

라고하였다. 이처럼 동쪽에서는 귀신 섬기기를 좋아하고 가무를 즐기는 민족 둘이 있었으니, 이들의 음악은 일찍이 주(周)나라 궁전에까지도 들 어와 〈매 (妹)〉라 불리우며 성행되었다. 59) 그러니 한대 (漢代)의 각 저지회 (角抵之戱)의 발달은 서역 (西域)과 남만(南營) 및 동이 (東夷) 등 외국음악의 영향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59) 『周禮』 卷 24 「春官」에는 〈妹師〉가 있어 東夷之樂인 〈妹樂 X t 가르치고 연주하는 직책을 가졌고, 〈鹿人〉도 〈散樂〉과 함께 〈매녔t 포함한 四夷之 樂인 엔뎀설〉의 춤을 가르치는 직책을 지녔다.

그리고 중국 고대희극의 중심을 이루는 〈가무희났근, 「서경부(西 京試)」 • 「평락관부(平)」 및 여러 지방에서 출토된 한대 (漢代) 의 가무잡희 倻덴璃裁)의 연출 모양이 새겨진 화상석 (畵像石) 등을 통해서 볼 때, 그것 한 가지만이 연출되지 않고 여러 가지 다른 가 무 및 잡기 (雜技)와 기예 (技藝)들이 함께 공연되었음에 주의하여야 만 할 것이다. 사천(四川) 팽현(該縣)에서 출토된 반고무頃鼓舞) 와 함께 농환(弄丸) 등의 잡기가 연출되는 모습이 새겨진 한대의 화상전(畵像碑), 사천 성도(成都)의 양자산(揚子山)에서 출토된 한 대 화상전의 모습, 산동(山東) 대씨형당(戴氏亨堂)에서 나온 한대

악무백희 (樂舞百戱) 화상전 등이 그 보기이다. 4 〈가무희〉 1) 동해황공(東海黃公) 『서경부酒京試)』의 평락관(平樂觀)에서의 〈각저지묘희 (角抵之妙 戱)〉 중 가장 두드러지는 〈가무희났근 〈동해황공(東海黃公)〉이다. 그것은 〈붉은 칼과 월인 燁人)의 주법 (呪法)으로 흰 호랑이를 물리 치려다가 끝내 성공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노래와 춤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이야기는 전(晉)나라 갈홍(葛洪, 250?-330? )이 편찬 했다는 『서경잡기 (西京雜記)』 권 3 에도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다. 내가 아는 국도룡(靴道龍)이란 환술(幻術)을 찰 하는 사람이 내게 이러한 옛날 일을 얘기해 주었다. 동해 (東海)에 사는 황공(黃公)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젊었을 적에는 술법 (術法)으로 용(龍)을 제압하고 호랑이를 부릴 수가 있었다. 그는 붉은 금도(金刀)를 차고 붉은 비단 으로 머리를 묶고 있었는데, 단숨에 구름과 안개를 일으키고 앉은 자 리에서 산과 강물을 만들어 놓았다. 그가 노쇠하여지자 기력도 없어 진데다가 술을 지나치게 마시어 다시는 그 술법을 행할 수가 없게 되 었다. 전 (秦)나라 말년에 흰 호랑이가 동해 (東海) 지방에 나타나자 황공(黃公)은 곧 붉은 칼을 가지고 그 놈울 물리치러 갔었는데, 술법 이 듣지를 않아 마침내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 장안(長安) 근처 사람들은 그것으로써 놀이를 만들었는데, 한(漢)나라 황제도 그것을 가져다가 각저지희 (角抵之戱)를 만들었다. 60)

60) 떤京雜記』 〈余所知有陶道龍, 善爲幻術, 向余說古時事. 有東海人黃公,

少時爲術,能制龍御虎,保赤金刀,以降繪束髮.立興雲霧,坐成山河.及裵老,氣力濕億,飮酒過度,不能復行其術.秦末有臼虎,見于東海,黃公乃以 赤刀往服之,術飮키'IT.遂爲虎所殺.三輔人俗用以爲戱,漢帝亦取以爲角抵 다.〉

이룰 참고로 할 때 『서경부』에 보인 것은 분명히 〈동해황공〉이 〈붉은 칼과 월인燁人)의 주법(呪法)〉으로 흰 호랑이를 물리치려다 가 도리어 잡아먹히는 내용의 〈가무희〉였을 것이다. 황공(黃公)은 〈노쇠하여 기력도 없어진데다가 술을 지나치게 마셨다〉라고 하였 으니, 주인공은 이 〈가무회〉에서 힘도 없으면서 술에 취하여 비틀 거리면서 우스꽝스러운 말과 행동을 함으로써 재미있는 가무를 연 출하였을 것이다. 다시 증조(曾協 1147 년 전후)의 『유설頃i說)』에 서는 다음과 같이 『서경잡기 (西京雜記)』를 인용하고 있다. 국도룡(翰道龍)은 옛날의 황공(黃公)의 술법을 지니어, 호랑이를 제압할 수가 있었고, 또 제자리에서 구름과 비를 일으키고 앉아서 산 과 강물을 변하게 할 수가 있었다. 뒤에 노쇠해지고 술을 지나치게 마 셔서 술법이 신통치 않게 되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그래 서 장안(長安) 지방에서는 그것으로 희상倻頃t)을 만들었다. 61)

61) 『類說』 센道龍, 古有黃公術, 能制虎, 又能立興雲雨 , 坐變山河. 後裵 老, 飮酒亡度,術不能神,爲虎所食. 故三輔間以爲戱象.〉

증조(曾情)가 인용한 『서경잡기』의 기록은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판본의 기록보다 간략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의 눈을 끄는 것 은 끝머리에 〈동해황공只全 〈희상倻~象)〉으로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희상冷는 〈가면희〉의 뜻임이 분명하니, 〈동해황공〉 은 〈가무회〉인 동시에 〈가면희〉였을 것이다. 『한서 (漢書)』 권 22 「예악지여쁨誌)」에는 한대 조하치주(朝賀置酒) 때의 악원偶頃)으 로

상종창 (常從借) 30 명 , 상종상인 (常從象人) 4 명 , …… 진창원 (秦借 員) 29 명 , 전창상인원 (秦偶象人員) 3 명 . 을 들고 있는데, 맹강頃康)은 주(i主)에서 〈상인(象人)은 지금의 희하어사자徵嚴魚師子) 같은 것〉이라 하였고, 위소(韋昭)는 〈가면 을 썼던 것들(著假面者)〉이라 하였다. 한대의 〈상인 (象人)〉이 〈가 면놀이를 하는 사람〉이었으니 〈희상徵象)冷는 가면무희 (假面舞戱) 였을것이다. 그뿐 아니라 「서경부(西京試)」에 보이는 〈총회선창~會仙信)〉이 라 한 여러 가지 신선놀이와 장가(長歌)를 하는 여아(女峨), 모우 (毛羽)를 걸치고 지휘 (指庵)하는 홍애 (洪淮), 거수만연지희 (巨獸冕 延之戱)에 나오는 여러 가지 동물들 모두가 일종의 가면놀이였을 것이다. 그러니 한대 평락관(平樂觀)의 놀이는 줄타기 • 공놀리기 및 요술 등의 잡기 (雜使)와 환술(幻術)을 제의하면 전체적으로 거 대한 규모의 〈가면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아(女峨)가 순 비 頃妃)인 아황倻遷)과 여영 (女英)이고 홍애 (洪淮)가 옛날의 유명 한 음악가라면, 이들의 노래나 지휘 (指庵)에도 일정한 정절과 고사 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환관(桓寬)의 『영철론(鹽鐵論)』 권 29 「산 부족(散不足)」편에도 지금 부자들이 명산(名山)에 기도를 드리고 산천에 망제遷 L祭 )를 지낼 때, 소를잡고북을치면서 희창무상倻淵濱像)을한다 .62)

62) 『鹽鐵論』 〈今富者祈名嶽, 望山川 , 椎牛擊鼓 , 戱借債像. >

하였는데, 〈무상(傑像)녔폰 앞에 나온 〈희상徵像)〉과 아울러 생각 할 때 역시 〈가면희녔t 가리킬 것이다. 감은 책에, 그 시대 사람 둘은 상가(喪家)에서도 술과 고기를 즐기며 〈가무배우倻남翻頃優)〉

와 〈연소기회 (連笑使戱) 只 룹 하였다고 하였으니, 한대에는 그러한 놀이가 얼마나 성행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2) 포인잡부(蒲人雜婦) 다시 『영철론 』 「산부족(散不足)」편에는 당시의 민간에 유행되던 〈 희峨) 〉 로서 포인잡부 (蒲人雜婦) • 백수 (百獸) • 마희 (馬戱) • 투호 (鬪虎) • 당제 (唐 ~) • 추인 (追人) • 기충(奇蟲) • 호달(胡旭)을 농(弄)했다. 라고 쓰고 있다. 이 가운데 〈포인잡부〉와 〈호달냈는 여자가 주인공 노릇을 하는 〈가무희〉인 듯하고 , 〈 당제〉와 〈추인冷는 잡기 (雜使)이 고 , 나머지는 백수지희 (百獸之敗)들이다. 『 서경부(西京試)』의 예로 보아 〈포인잡부〉나 〈호달 〉 도 〈가면희〉였을 가능성이 많으며, 이것 이 후세의 요동요부(遼東妖婦)·농가부인(弄假婦人)·답요낭倻稀 娘) · 등 여인들을 위주로 하는 〈가무희녔준의 선성 (先 聲 )이 되었을 것이다. 하남(河南) 남양(南陽)에서 출토된 한대의 화상전( 畵 像碑) 에는 상아분월(婦峨葬月)의 이야기를 연출한 〈가무회〉가 새겨져 있 는 것이 있다 하니 63) 이것도 참고할 만하다.

63) 阿英, 「中國古代的民間舞踏」 〈南陽 畵 像中 , 最突出的 『 故 事 舞 』 , 是 『 拜月 舞』. 中有一皓月, 月左一鹿, 藤地坐, 頭向右, 月前一羊, 正向左行 . 月右 一 長柚舞女, 頭高冠 , 膜찢盤長綱, 正 1 府舞, 當是婦峨. 其右吳剛 , 撮射姿, 拉 弓似欲射月.左三人 , 中爲老者,左保儒打粉,同以急遠舞步右行,舞姿亦各 異 . 〉

3) 파유무(巴漁舞) 앞에서 인용한 이우(李尤)의 「평락관부(平樂觀試)」에는 장형 여룬

衡)의 평락관(平樂觀)에서의 각저묘희 (角抵妙戱)에는 없는 〈파유(巴 澈) 〉 가 보인다. 역시 앞의 절에서 인용한 『 한서 (漢 耆 )』 「서 역전찬 (西域傳贊)」에도 〈 파유(巴兪) 〉 와 〈 해중당극(海中楊極)〉 • 〈만연어룡 (甄魚龍) 〉 등의 각저지희 (角抵之戱)를 연출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영철론(鹽鐵論)』 권 9 「자권 (iliiJtf{)」에도 당하(堂下)에선 〈명고파유 (P島 鼓巴兪)澤 하였다고 했고, 『한서』 권 22 「예악지여분街志)」에는 〈회남고원 (淮南鼓員) 4 명 〉과 함께 〈파유고원 (巴兪鼓員) 36 명 〉 이 보 인다. 『후한서 (後漢 書 )』 권 86 「남만서남이열전 (南 營 西南夷列傳)」을 보 면 파유무(巴漁舞)의 유래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고조(高祖)가 한왕(漢王)이 되자 이인 (夷人)을 보내어 삼전(三秦) 을 정벌케 하고, 진 (秦)땅이 평정된 뒤에는 파중(巴中)으로 돌려보냈 는데, ……세상에선 그들을 판순만이(板權 稷 夷)라 불렀다. 낭중 (OO 中)에는 유수(漁水)가 있고, 그들은 대부분이 강물 양편에 살았다. 천성이 억세고 용감하여 전에 한나라 전봉(前錄)으로 여러 번 진(陳) 나라를 함락시켰다. 그들 풍속은 노래와 춤을 좋아했는데, 고조(高 祖)가 그것을 보고는 ‘이것은 무왕(武王)이 주(討)를 정벌하는 노래 이다’고 하면서, 곧 악공들게게 명하여 그것을 익히게 하였는데, 이론 바 파유무 (巴漁舞) 이다. 64)

64) 『後 漢書 』 여중高祖爲漢王 , 發夷人還伐三秦 . 秦地銃定 , 乃遣還巴中 , …… 世號爲板樞 營 夷.間中有漁水,其人多居水左右.天性勤勇,初爲漢前錄亨數 格陳.俗喜歌舞,高祖觀之,曰,此武王伐討之歌也.乃命樂人習之,所謂巴 i兪舞也.〉

『진서 (晉 書 )』 권 22 「악지 偶誌)」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촉한(蜀漢)으로부터 삼전(三秦)을 평정하 려 했을 적에 낭중(閔中)의 범인 (范因)이 종인 (哀人)을 거느리고 고 조(高祖)를 따르면서 전봉(前錄)이 되었었다. 진중(秦中)을 평정하자 범인 (范因)을 낭중후 (OO 中侯)로 봉하고 종인 (宏人)들의 칠성 (七姓)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들 풍속은 춤을 좋아하였는데, 고조는 그 사납고 매서운 춤을 좋아하여 자주 그 춤을 구경하였고, 뒤에는 악공들로 하 여금 그것을 익히도록 하였다. 낭중 (OO 中)에는 유수(漁水)가 있는데, 거기에 그들의 사는 고장 이름을 붙여서 그것을 파유무-(巴漁舞)라 불 렀다. 무곡(舞曲)에는 모유본가곡(牙漁本歌曲) • 노유본가곡(懿漁本歌 曲 )65) • 안대본가곡(安 臺 本歌曲) • 행시본가곡(行辭本歌曲)의 네 편이 있다. 그 가사는 오래 되어 그 구두 (句讀)를 알 수도 없다. 66)

65) 『 後漢 書 』에는 여f〉자 앞에 〈安 〉 자가 붙어 있으나, 郭茂情의 『 樂府詩集 』 卷 53, 杜佑 『 通典 』 卷 145, 陳賜 『 樂 書』 에는 이 대목을 인용하고 있는데 모두 〈安〉자가 없으니 , 없는 편이 옳은 듯하다 . 66) 霞 』 〈漢高祖, 自蜀漢將定三秦, OO 中范因率 賓 人以從帝 , 爲前錄 . 及定 秦中,封因爲問中侯,復 賓 人七姓.其俗喜舞,高祖樂其猛銃,數觀其舞,後 使習之. 間中有漁水, 因其所居, 故名曰巴i蔚투. 舞曲有*i兪本歌曲 • lt 표구재·安 臺本 . ·行辭本歌曲, 總 4 篇 . 其辭銃古, 莫能晩其句度.〉

이상을 종합해 보면 파유무(巴諭舞)는 상당히 긴 정절(情節)을 표현하는 가무였음이 분명하다. 고조가 보고서 〈무왕벌주지가(武 王伐討之歌) 〉 라 말하고 있고, 그 가서는 네 편이나 되며, 여러 가 지 잡기 (雜使)와 함께 〈각저희〉로서 한나라에서는 상연되었으니 〈가무희〉적인 춤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4) 공막무(公莫舞) 『전서 (晉書)』 악지 (樂志)에는 다시 다음과 같은 공막무(公莫舞)에 관한기록이 보인다.

공막무(公莫舞)는 지금의 건무(市舞)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항 장(項莊)이 칼춤울 출 때 항백(項伯)이 옷소매로 그를 막아 한고조 (漢高祖)를 해치지 못하게 했었다. 그때 항장에게 ‘공께선 그러지 마 시오(公莫) ! ’ 하고 말했다. 옛 사람들은 상대방울 서로 ‘공(公)’이라 불렀으니, 곧 공께선 한왕(漢王)을 해치지 말라는 말이었다. 지금 수 건을 쓰는 것은 항백의 옷소매를 상칭하는 오래 된 법식 (法式)이 다 .67)

67) 『晉書』 〈公莫舞, 今之市舞也 . 相傳云, 項莊劍舞, 項伯以柚隔之, 使不得 害高祖, 旦語項莊云, 公莫! 古人相呼曰公, 言公莫害漢王也. 今之用市, 蓋像項伯衣柚之遺式. >

괵무천 (郭茂情 1084 년 전후)의 『악부시집 (樂府詩集)』 권 54 에는 『당서 情書)』 「악지 馮志)」를 인용하고 있는데, 글의 내용이 이와 별 차이가 없다. 어떻든 간에 건무(市舞) 또는 공막무(公莫舞)는 유명한 홍문지연(鴻門之妻)을 춤으로 다시 표현한 것이다. 이 춤도 대략 동한(東漢)시대에는 이루어졌을 것이고, 그 성격으로 보아 〈가무희〉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실제 『사기 (史記)』의 기록울 보아 도 홍문연(鴻門冥)에서 항장(項莊)이 발검기무(發劍起舞)하여 한고 조(漢高祖)의 목숨을 노리자 항백 (項伯)도 일어나 춤을 추면서 이 신폐패공(以身萩浦公)하였다고 했다. 그러니 홍문연(鴻門婁)은 그 자체가 〈가무희〉적인 성격의 이야기였으니, 이룰 바탕으로 〈가무 희〉가 발전한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그리고 당대 情代)에 유행했 던 〈가무희〉인 번쾌배군난(吳明非君難) 같은 것은 이 〈공막무녔t 발판으로 발전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5) 관동유현녀 (關東有賢女) 한위 (漢魏)시대의 잡무(雜舞)에는 파유무(巴兪舞) • 건무(市舞)와

함께 비무(梵舞)도 있다 .68) 그런데 이 춤은 『 남제서(南齊 書 ) 』 권 11 「악지 (樂志)」에 의하면,

68) 郭茂情, 『樂府詩集』 卷 53 舞曲歌辭二 雜舞참조 .

한(漢)나라 장제 (章帝, 76-88 년 재위)가 만든 것으로, 비무가(緊 舞歌)에서는 ‘관동 (R 覇東)에 현녀 (緊女)가 있었는데' 하고 노래했었 다. 69)

69) 『南齊書』 〈漢章帝造 . 緊舞歌云 關東有賢女. >

라고 하였다. 그런데 위 (魏)나라 조식 (曹植, 192 - 232) 이 개작한 「정미편(精微篇)」을 보면, 관동의 현녀란 자(字)가 소래경 (森來卿) 이며 장년이 되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여장부(女丈夫)이다. 그와 함께 자기 아버지의 죄를 자기 몸으로 대신하려고 나서서 아버지를 구한한대(漢代)의 제영(提榮)과조~ 부인缺: 人)이 된 여연(女婚)의 이야기도 함께 읊고 있다. 그러므로 이 비 무(登舞)도 본시는 용감한 여인의 이야기를 춤과 노래로 연출하였 던 〈가무희〉였을 가능성이 많다. 적어도 비무(懿舞)는 본시 「관동 유현녀 (關東有賢女)」라는 〈가무희〉에서 발전한 것임이 틀림없다. 6) 해중탕극(海中楊極) 앞에 인용한 『 한서 (漢 書 )』 「서역전찬(西域傳贊)」에서 보인 「해중 탕극(海中楊極)」도 일반적으로는 〈악명 偶路)〉 70) 이라고만 풀이하고 있지만, 파유무(巴兪舞) • 도로(都盧) • 만연어룡 (菱延魚龍) 등과 함 께 〈각저지희 慣抵之戱)〉로서 상연되었으니, 〈가무회〉였을 가능성 이 많다.

70) 보기 『辭海』 碩極條 .

7) 목후무(泳族舞) 『한서 (漢 書 )』 권 77 「개관요전 (蓋寬鏡傳)」을 보면 다음과 같은 목 후무(泳族舞)에 관한 기록이 있다. 황태자의 의조01-il)~ 평은후 (平恩侯) 허백 (許伯)이 새 집을 짓고 베푼 축하연의 귀족과 고관들 이 모인 자리에서의 사건이다. 술이 취하여 음악이 연주되자 장신소부(長信少府) 단장경 (檀長卿) 이 일어나 춤을 추었는데, 원숭이가 개와 싸우는 춤을 추어 자리에 있 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개관요(蓋寬儀)는 기분이 언짢아…… 일어나 떨치고 나와 장신소부(長信少府)가 열경 (列卿)으로서 목후무 (泳狼舞)를 추었으니 예법에 어긋나고 불경한 짓이라고 탄핵하는 상 주를 하였다 .71)

71) 『漢書』 〈平恩侯許伯入第 , 丞相御史將軍中二千石皆賀 , ……酒師樂作, 長 信少府檀長卿起舞, 爲材游澳狗問,坐皆大笑.寬鏡不說……因起趙出. 刻 奏長信少府以jJJ卿而泳狼舞 , 失禮不敬. >

묵후무t 극히 우스꽝스러운 〈가무희〉였을 것이다. 원숭이와 개 가 싸우는 내용이므로 동작은 활발하고 변화가 많은 춤이었음이 분 명하다. 앞에 설명한 각저희들 속의 동물들 중에는 이미 〈목후무〉 종류의 가무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8) 참군희(參軍戱) 참군희(參軍戱)도 동한(東漢) 때 시작되었을 것이다. 단안절(段 安節 890 년 전후)의 『악부잡록偶騎雜錄)』 배우(俳優)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개원 (開元) 연간 (713-741) 에 황번작頃湘緯)과 장야호덴煙拘瓜)가

참군울 연출하였는데, 후한(後漢) 관도령 (館陶令) 석탐(石就 )72) 에게 서 시작된 것이다. 석람은 공물횡령죄 (公物橫領罪)를 범하였으나, 화 제 (和帝, 89-105 년 재위)가 그의 재능을 아끼어 죄를 면하게 해주고, 잔치에서 즐길 때마다 곧 횡령 (橫領)했던 흰 비단옷을 입게 하고는 배우들에게 명하여 그를 희롱하며 욕뵈게 하기를 일 년이 지나도록 하 고서야 용서하여 주었다. 뒤에 73) 그가 참군(參軍)이 되었다는 것은 잘못이다 .74)

72) 〈後漢〉의 〈後〉자는 원본엔 없으나 r 太平御 覽』 卷 569 • 『 文獻通考 』 卷 147 의 기록에 의거 보충된 것임 . @t 〉 자는 『 文 獻 通考 』 에는 야!〉으로 되어 있음. 73) 끝머리 여량 F乃 放, 後爲參軍誤也났근 明紗 『說郭 』 卷 3 의 『 談壘 』 에 들어 있는 板本에서는 야맞 F 乃復, 故爲參 軍 〉으로 되어 있는데 , 文脈上으로는 뒤의 것이 順理한 듯하다. 74) 『 樂府雜錄 』 센元中, 黃幡緯·張野孤弄參軍, 始自後漢館陶令石沈. 妹有 誠 E, 和帝情其才 , 免罪,每妻樂,卽令衣白來杉,命優倍戱弄辱之, 經 年乃 放. 後爲參軍誤也.〉

『태평어람伏平御覽)』 권 569 「우창(優{昌)」에서는 이와는 약간 다른 내용의 『조서 燁 書 ) 』 를 인용하고 있다. 석록참군(石勒參軍) 주연佛]延)은 관도령(館陶令)이 되어 관청의 비단 수백 필을 횡령하여 하옥되었으나, 재판을 거쳐 용서를 받았다. 그 뒤로 큰 모임이 있을 때마다 배우들로 하여금 개책 (介帳)을 쓰고 누런 비단 홑옷을 입고 나와, 배우가 너는 무슨 관원이기에 우리들 툼에 와 끼는가?’라고 물으면, 니는 본시 관도령(館陶令)이었네.' 하고 대답하고는 홑옷을 혼들면서 ‘이걸 좀 떼어먹다 걸렸기 때문에 너희들 틈에 끼게 된거야 ! ' 하고 말하게 하면서 웃음거리로 삼았 다 .75)

75) 『 太平街 魔 3 〈石勒參軍周延爲館陶令, 斷官組數百JE , 下~ 以入 議 有之.

後每大會,使俳俊着介帳,黃組單衣,俊問, 汝爲何官,在我輩中? 日, 我 本爲館陶令 . 斗數單衣日, 政坐取是, 故入汝輩中. 以爲笑 . 〉(『北堂書紗』 卷 112 에도 바슷한 글이 인용됨. )

후조(後趙) 석록(石勒)이 칭제 (稱帝)한 것은 전(晉)나라 성제 (成 帝) 때 (330) 이므로 이는 그 뒤 몇 년 되는 해 무렵에 일어났던 일 이어서 『악부잡록맹都南幽()』의 기록과는 이백 수십 년의 차이가 난다. 왕국유(王國維)는 『송원희곡사(宋元戱曲史)』에서 참군회 (參軍 戱)를 논하면서 〈후한(後漢)의 시대에는 아직 참군(參軍)이란 벼슬 이 없었으니, 『조서 頃庫)』의 이론이 아마도 옳을 것이다〉 76) 고 하 였으나, 『고국각색고(古劇脚色考)』에서는 침군의 근본을 논하는 대 목에 주서 (注書)하기를 〈간혹 후한(後漢)에는 참군이란 벼슬이 아 직 없었으므로 단안절(段安節)의 이론은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마표(司馬彩)의 『속한지 (續漢志)』에는 비록 참군이란 벼 슬이 없으나, 『송서 (宋書)』 「백관지 (百官志)」에서는 침군은 후한 (後漢)의 벼슬이며 손견(孫堅)이 거기참군(車騎參軍)이 되었던 일이 바로 그 보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화제 (和帝) 때에 혹시 이 미 그런 벼슬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77) 고 하였다. 『악 부잡록偶罪雜錄)』의 근거가 확실치는 않지만 당대 (唐代)에 성행하 였던 참군희 78) 는 후한 때부터 시작된 것이라 봄이 옳을 것이다. 『악부잡록』과 『조서 聞書)』의 기록만을 보면 이는 단순한 〈골계희〉

76) 『宋元戱曲史』 〈然後漢之世, 尙無參軍之官 , .IIlj趙書之說玲是. > 77) 『古劇脚色考』 〈或謂後漢未有參軍官, 故段說不足信. 案司馬彩續漢志誰無 參一官, 然宋睿百官志Jllj謂參軍後漢官, 孫堅爲車騎參軍事是也. 則和帝時 或已有此官, 亦未可知.〉 78) 『樂府雜錄』 俳優條에는 開元年間에 參軍戱롤 잘한 黃幡緯 • 張野孤의 이 름이 보이고, 다시 이 놀이를 잘 하여 部州同正參軍이 되었던 李仙鶴의 기 록이 보이고, 武宗 (841-846 년 재위) 때의 曹叔度 • 劉泉 7k, 威通 (860 -873) 이래의 范傳康 • 上官唐卿 • 呂敬遷 등 이 놀이에 관한 전문가들의 기록이 보인다.

인 듯도 하다. 그러나 범터 (范植, 877 년 전후)의 『 운계우의 ( 雲 溪友 議)』 권 9 에는 다음과 같은 육참군(陸參軍)에 관한 기록이 있다. 원진玩棋)이 철동(浙東) 염방사(廉訪使)가 되었을 때, 배우인 주 계남(周季南) • 계승(季崇)과 그의 처 유채춘(劉採春)이 회전 (淮句)으 로부터 왔는데 육참군(陸參軍)놀이를 찰 하였고 노랫소리가 구름 위 로 퍼질 정도였다. 79)

79) 『雲溪友議』 떠印訪浙東, 有俳優周季南 • 季崇 , 及妻多lJH, 自淮句而 來, 善弄陸參軍 , 歌聲徹雲. >

이에 의하면 한대의 〈참군희〉가 이미 〈가무회〉였다는 증거는 없 지만 후세에 와서는 〈가우희〉로도 발전하였음을 알게 한다. 9) 괴뢰희(偶偏戱) 〈가무회〉와 관계가 깊은 중국의 인형극인 〈괴뢰희 (偶f晶鼓)〉도 한 대에는 퍽 유행했던 듯하다. 『열자(列子)』 권 5 「당문(湯問)」편에 는 주(周) 목왕(穆王)의 공인 (I人) 언사(個師)가 나무와 가죽 등으 로 인형을 만들어 진짜 배우처럼 목왕 앞에서 가무를 하게 하는 기 록이 보인다. 진양(陳陽)의 『악서 偶璃:)』 같은 책에서는 이룰 괴뢰 희의 시작이라 하였으나, 이는 믿을 수 없는 기록이라는 게 일반적 인 견해이다. 당情·)나라 단안절(段安節)의 『악부잡록像開雜錄).!I과 송(宋)나라 내득옹(翻競?;, 1235 년 전후)의 『도성기승(都城紀勝)』 같은 곳에서는 한(漢) 고조.(高祖) 때에 시작된 것이라 하고 있다. 『악부잡록』 괴뢰자(偶偏子)의 기록을 소개한다. 괴뢰자(偶偏子)는 예로부터 전해 오기를 한(漢) 고조(高祖)가 평성 (平城)에서 묵특선우(冒頓單于)에게 포위당하였을 때 생겨난 것이라

한다. 평성(平城)의 한 면은 묵특(冒頓)의 처 연지(關氏)가 말고 있 었는데, 병력이 다른 삼면보다 강하였다. 성 안은 양식이 떨어졌었 다. 진평 (陳平)은 연지 (關氏)가 투기심이 세다는 것을 알고 곧 나무 인형을 만들어 기계작동으로 성 위 담의 사이에서 춤을 추게 하였다. 연지는 이것을 보고 산 사람들이라 생각하여, 이 성이 함락되면 묵특 은 반드시 저들을 기녀 (技女)로 맞아들이리라 걱정이 되어 마침내 군 대를 후퇴시켰다. 역사가들이 다만 진평이 비계 偏炯計)로 위기를 모면 했다고만 말하고 있는 것은 그 계책이 지저분하다고 여긴 때문이다. 뒤에 악가맹읍家)들이 이룰 놀이로 만들었는데, 그중 가무를 인도하는 곽랑(郭郞)이란 지는 머리가 벗겨지고 우소(優笑)를 잘 하여 민간에 서는 그를 곽랑(郭郞)이라 불렀는데, 모든 회장儒場)에서 반드시 배 우들의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하였다. 80)

80) 『樂緖廳 〈偶晶子, 自昔傳云;起於漢祖在平城, 爲冒頓所園. 其城一 面, 卽冒頓妻關氏, 兵强於三面. 壘中絶食. 陳平訪知關氏拓思, 卽造木偶 人,運機關,舞於陣間.關氏望見,謂是生人,慮下其城,冒頓必納技女,遂退軍.史家但云,陳平以秘計免,蓋鄒其策下爾.後樂家翻爲戱.其引歌舞有 郭郞者, 髮正完,善優笑, 問里呼爲郭郞, 凡戱場必在俳兒之首也.〉

우리나라 〈꼭두각시놀이〉의 〈꼭두〉도 여기에 보이는 〈곽독(郭 免 겨두)〉에서 나왔음은 이미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일이다. 다시 『예기 며澄記)』 권 9 「단궁하(檀弓下)」를 보면, 공자 GL 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짚으로 허수아비를 만드는 것은 좋지 만은, 용(倫)을 만드는 자는 인(仁)하지 못하니, 거의 사람을 쓰는 것이나 같기 때문이다. 81)

81) 『禮記』

라고 하고, 죽은 이룰 장사지낼 때 땅에 함께 묻는 명기 (明器)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정현(鄭玄)은 용 (1 雨)에 대하여 용(倫)은 인형이다. 얼굴과 눈이 있고 기계로 작동하여 산 사람과 비슷하다. 공자는 옛 풍습을 좋다 하고, 주(周)나라 풍습을 비난한 것이다. 82)

82) 『禮記』 注 애i , 偶人也 . 有面目 , 機發, 有似於生人 . 孔子善古而非周. >

라고 주(注)하였다. 공영달 GU配 達)은 『소(疏)』에서 형체 僚須§)를 조작하여 사람의 모양과 아주 비슷하였다. 그러므로 『사기 (史記)』에도 흙인형 • 나무인형이 있는 것이다. 83)

83) 『禮 記』 注 〈謂造作形體, 偶類人形, 故史記有土偶人 • 木偶人是也. >

라고 보충설명을 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괴뢰희注곤 한대 이전에 발생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한대에는 상당히 널리 보급되었을 것이다. 가의 (賈諱, 기원전 201-169) 의 『신서 (新 書 )』 권 4 「흉노 (句奴)」편에는 흉노의 사자가 왔을 적에 호희 (胡戱)를 연출하고 악 무偶舞)로 즐겁게 하는 것 의에 북을 치며 인형들을 춤추게 하고, 저녁이 되면 오랑캐 음악을 상연 한다 .84)

84) 땅濬』 禪舞其偶人 , 莫時乃爲戒樂. >

라고도하였다. 〈용(倫)〉과의 관계 때문인지는 몰라도 〈괴뢰희났근 본시 상사(喪 事)와 관계가 깊었던 듯하다. 『후한서 (後漢書)』 「오행지 (五行志)」의 〈영제삭유회어서원중(靈帝數遊戱於西園中)〉 대목에 대한 양~) 유

소(劉昭, 510 년 전후)의 주(i主)에 『풍속통傅浴通)』을 인용하여 현재 경사(京師)에서는 손님을 대접하고 혼인하는 잔치에 모두 괴 뢰를 연출히는데, 술에 얼큰히 취한 뒤에는 이어서 만가(晩歌)를 부 론다. 라고하고, 이어서 괴뢰 OO 極)는 상가(喪家)의 음악이다. 만가(晩歌)는 상여줄을 잡고 서로 화창(和唱)하는 것이다 .85)

85) 『後漢書』 注 混 k俗 通旦 時京師賓婚嘉會, 皆作船년. 酒罰之後, 續以換 歌. 船槿 喪家之樂, 換牙k , 執綿相偶和之者.〉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괴뢰희났근 상가악(喪家樂)과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떻든 간에 이들 인형을 인용한 〈가 무희났즌 다른 일반적인 〈가무희〉 발전에도 큰 공헌을 하였을 것이 다. 어느 때부터 생겨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후세에 사람이 인 형의 가무를- 흉내내는 〈육괴뢰 (肉偶偏)〉 86) 의 성행을 아울러 생각하 면, 〈괴뢰희〉도 그대로 〈가무희〉의 일환으로서 그 발전을 이해할 수있을것이다.

86) 宋 面得翁, 『都城紀勝』 瓦舍衆技 , 周密 『武林舊事』 卷 6 諸色使藝人 등 에보임.

10) 여악(女樂) 한대에는 이러한 〈가무회〉가 발달하여 귀족들 중에는 기녀와 놀 이에 빠져 음란한 생활을 하는 자들도 많았던 듯하다. 『한서 (漢 書)』 권 81 「장우전 (張禹傳)」울 보면,

징우(張禹)는 본성이 음악을 잘 알았고 안으로. 사치스럽고 음란하 였다. ……장우는 제자 대승 (U) 을 데리고 후당(後堂)으로 들어가 먹고 마시며, 부녀(婦女)들을 상대로 우희(優戱)를 하며 ,87) 관현(管 鉉)을 연주케 하고 국도로 줄기며 밤이 새어야 그만두었다. 88)

87) 보통 판본에는 생t女相對, 優人第鉉銅鎔〉으로 되어 있으나, 『太 平御覽』 卷 56%l 인용된 글은 생 F 人相對作優, 第鉉總鎔〉으로 되어 있어 문맥이 순리하기에 이를 따랐다. 88) 『漢書』 명頓祐傳」 〈禹性習知音聲 , 內者浩 , …… 禹將崇入後堂飮食 , 婦女相 對作優, 第鉉鑄鎔, 極樂, 香夜乃能.〉

라고 하였다. 여기의 〈우(優)났근 〈가무희〉를 뜻할 것이며, 한대에 는 일반 귀족들도 밤새워 〈가무희녔十 집에서 줄기는 사람이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다시 갇은 책 권 98 「원후전保后傳)」을 보면, 성제 (成帝, 기원전 32-7 년 재위) 때의 왕봉{(王鳳)이란 세도가의 형 제들은 다투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후정(後庭)엔 희첩(姬妄) 이 수십명이나 되었으며, 〈종경 倒圈;)을 벌여 놓고, 정녀 (鄭女)들 을 춤추게 하고, 창우(偏優)들을 공연케 하며, 개와 말을 달리게 하였다〉 89) 고 하였다. 여기의 창우(借優)들도 〈가무희녔문 위주로 하는 배우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귀족들의 집에서는 〈가무회〉 가 성행되었음이 분명하다.

89) 『漢書』 「元后傳」 (jJij五侯群弟, 爭爲者修, ••• …羅鐘磐, 舞鄭女, 作 1 副憂, 狗馬駒逐.〉

제 4 장 위전남북조(魏晉南北朝)의 〈가무회〉 213-588 1 위진 (213-419) 의 〈가무희〉 1) 위진(魏晉)의 산악(散樂) 한(漢)대에서부터 교묘사악礎廟祠樂)을 중심으로 하는 정악(正 樂)들은 완전히 형식화되어, 생기 넘치는 〈가무희〉로부터 상당히 멀어졌다. 그러나 한(漢)말 위 (魏)나라를 일으킨 무제 (武帝) 조조 (曹操, 155-200) 와 그의 아들 문제 (文帝) 조비 (曹丕, 187-226 년), 진사왕(陳思王) 조식 (曹植, 192-232) 의 삼 부자는 모두가 뛰어난 문재 汶才)를 지녀 중국문학을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문인이었을 뿐 아니라, 그들 모두 음악과 무용도 좋아하였다. 『삼국지 (三園志)』 「위서 (魏書)」 무제기 (武帝紀) 배송지 (裝松之, 422 년 전후)의 주(注) 롤 보면, 『위서 (魏書)』률 인용하여 조조濬操)는 〈낮에는 무책 (武 策)을 공부하고, 밤에는 반드시 시를 읊었으며, 새로운 시를 짓게 되면 관현(管鉉)으로 연주하여 모두 악장馮章)을 이루었다〉 1) 라고 하였으며, 또 『조만전(割開專)』을 인용하여 〈음악을 좋아했고 창우

1) 『 三固志 』 注 (jlff lj 講 武策, 夜則思經傳, 登高必試, 及 造 新詩, 被之管鉉, 皆成樂章.〉

(借優)들을 곁에 두고 낮부터 밤까지 늘 함께 하였다 〉 2) 라고도 하였 다. 조비 (曹丕)도 위왕(魏王)이 된 다음 남정 (南fiE)을 마치고 초 準)라는 곳에서 잔치를 크게 베풀었는데, 배송지 ( 裝 松之)의 주 (注)에서는 『위서 (魏 書 )』률 인용하여 이 때 〈 기악백희 (使樂百戱)를 베풀었다 〉 3) 라고 하였다. 〈 기악백희 〉 란 장형 (張衡)이 「서경부(西京 試)」에서 읊은 한( 漢 ) 평 락관(平樂觀)에서 연출되던 〈 각저지묘희 (角 抵之妙戱)〉와 갇은, 여러 가지 〈 가무회서十 비롯하여 어룡만연지희 (魚龍 漫 衍之戱) 및 백희 (百戱)의 상연을 뜻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옛날의 〈 산악 〉 과 같은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조조의 밀에서는 태 악령 8 樂令) 두기 (杜愛)를 바롯하여 등정 (鄧靜) • 윤제 (尹齊) • 윤호 (尹胡) • 풍숙(馮肅) • 복양생短 훈 ) 등 수많은 아악(雅樂)과 가무의 전 문가들이 활약하였고, 조비의 밀에서는 정성 (鄭 聲 )인 신성 (新聲)을 전문으로 하는 좌연년佑延年) ·시옥(柴玉) 등이 총애를 받으며 활 약하였다 .4)

2) 『 三國志』 注 샌子音樂, 偶優在側, 常以日達夕. 〉 3) 『 三國志 』 注 〈設使樂百戱. > 4) 『 三園志 』 권 29 「魏 害 」 杜菱傳 및 『晋 睿』 권 22 「樂志」 참조.

앞에서 이야기한 기악백희(使樂百戱)는 진(晉)나라 때까지 그대 로 이어진다. 『전서 ( 晉書 ) 』 권 23 「악지」를 보면, 동진 (東 晉 ) 성제 의 성강(劇康) 花빈 (341) 에 산기시랑(散騎侍郞) 고전 偏謙)이 상표 U 表)하여 아악(雅樂)에 힘쓰고 〈말세지희 (末世之戱 )X 큰 없앨 것을 건의한 결과, 〈고긍(高組) • 자록(;Wm!) • 기행 (j支行) • 별식 (踏食) • 제왕권의 (齊王持衣) • 작아(符兒) 등의 음악은 없애 버렸다〉 5) 라고

5) 『晋 睿』 〈散騎侍郞顧殘表曰, 臣聞聖王制樂, …… 諸使而傷人者, 皆宜除 之. …… 於是除高組 • 紫鹿 • 跋行 • 籠食及齊王持衣 • 答兒等樂, 又減其棄. 其後復高組 • 紫鹿焉. >

하였다. 이 없애 버렸다는 일부 잡기 僚困가)의 명칭을 통하여, 이 시대의 각저희 (角抵戱)의 규모가 상딩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 삼국지 (三國志)』 권 29 「두기전(杜愛傳)」 배송지 (裝松之)의 주를 보면, 부현(傅玄 217-278) 의 글을 인용하여 마균(馬鈴)이란 사람이 나무를- 조각하여 물의 힘으로 작동하는 정교한 인형을 만들 어 놀이를 하였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여악무상(女樂舞像)을 만들어 놓고, 심지어 나무인형들로 하여금 북을 치고 통소를 불며, 산악(山嶽)도 만들어 놓고, 나무인형으로 하 여금 도환®넌 L) • 척검 (鄕劍) • 연환(緣短) • 도립 (倒立)을 하게 하였 는데, 그들의 출입아 자유로웠으며, 절구질 • 맷돌질과 두계 (問難) 등 변화와 기교가 수없이 많았다. 6)

6) 『三國志』注 〈以大木影構, 使其形若稽「, 平地施之, 潛以水發焉. 設爲女樂 舞僞 至令木人擊鼓吹蕭, 作山嶽, 使木人挑丸損潔], 緣維倒立, 出入自在, 百官行署,春磨鬪鷄,變巧百端. >

이에 의하면 그 시대에 기악백희 (使樂百戱)도 성행되었음은 물론 물을 이용하는 일종의 수괴뢰 (水偶偏)도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 (三國志)』 「위서 (魏書)」 명제기 (明帝紀) 배송지 (裝松之)의 주에서도 『위략(魏略)』을 인용하여, 황제의 밀에는 각종 여관(女 官)과함께 기가(使歌)를 익히는 자들도 각각 천(千)을 헤아릴 정도가 있었 다 .7)

7) 『三國志』注 여건支樂者, 各有千數. >

라고 하고는, 다시 이어서

곡수 (穀水)를 구룡전 (九龍殿) 앞으로 끌어들여 …… 물로 백희 (百 戱)가 돌아가게 하였다. 연초(年初)에는 거수(巨獸)와 어룡만연 (魚龍 漫延)과 승마도기 (昇馬倒騎) 등도 연출케 하여, 모든 것이 한(漢) 서 경 (西京)의 제도와 같았다. 8)

8) 『三國志』注 〈通引穀水過九龍殿前, …… 水轉百戱. 歲首, 建巨獸, 魚龍漫 延, 弄馬倒麻t, 備如漢西京之制. >

하였다. 『진서 (晉 書 )』 권 20 「예지 偏志)」를 보면, 위나라 무제가 정월달에 죽었는데, 위나라 문제는 그 해 7 월에 기 악백희(使樂百戱)를 연출하였으니, 곧 위나라는 상사(喪事) 때문에 음악을 폐하지는 아니하였다. 9)

9) 『晋睿』 성店莊以正月崩, 魏文以其年七月設使樂百戱, 是則魏不以喪廢樂 也.〉

라고 하였다. 이로써도 위진(魏晉)대에 〈기악백희〉 또는 〈산악〉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곽무천(郭茂情)의 『악부시집생卵詩集)』 권 31 「상화가사(相 和歌辭)」 평조곡(平調曲)에는 「동작대 (銅雀 臺 )」 또는 「동작기 (銅雀 技)」라는 시가둘이 실려 있는데, 『업도고사(鄭都故事)』를 인용하여 그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위무제 (魏武帝)가 유언으로 여러 자식들에게 명하여 말하였다. 〈내 가 죽은 뒤에 업 (郡)의 서강(西 OO) 위에 장사지내고 …… 첩과 기인 들을 모두 동작대 (銅雀臺)로 보내어 …… 매월 보름날 아침이면 언제 나 장막 앞에서 작기 (作使)토록 하라• >10 )

10) 『鄭都故事』 여訪t帝遺命諸子日, 吾死之後, 葬於郵之西岡上, …… 妄與使

人, 皆著銅雀臺, …… 每月朝十五, 輯向帳前作使. >

동작대 (銅雀물)는 건안 15 년 (210) 에 조조(曹操)가 업 (郡)에 세운 웅장한 누대이다. 어떻든 이를 통해서도 조조가 가무를 얼마나 사 랑했는가를 알 수 있다. 〈작기 (作使)토록 했다注근 것은 단순한 가 무뿐 아니라 여러 가지 〈기악백희〉 또는 〈산악只끌 연출하도록 했 음을뜻할것이다. 2) 우희(優戱) 위전(魏晉)시대에는 우회(優戱)도 상당히 성행하였던 듯하다. 『삼국지 (三國志)』 권 42 「촉서 (蜀書)」 허자전 (許慈傳)을 보면, 허자 (許慈)는 촉(蜀)나라의 학사(學士)였는데, 같은 학사인 호잠(胡潛) 과 서로 지지 않으려고 뽐내며, 한편으로는 서로 비방하고 헐뜯으 며 디두었고, 책도 서로 빌려주지 않는 등 항상 다투며 상대를 시 기하였다. 이에 선주(先主) 유비(劉備)는 이러한 그들을 가없게 여기고는 군료(群 僚)들이 모일 때면 창우(偶優)들로 하여금 그들의 모습으로 가장케 하고는, 그들이 다투며 헐뜯는 모습을 흉내내게 하면서, 술도 마시고 음악도 연주하며 놀이로써 즐겼다. 처음에는 말로 서로를 비난하다가 마침내는 칼과 몽둥이를 써서 서로 이기려고 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스스로 느끼고 반성케 하였다. 11)

11) 『三國志』 「蜀志」 許慈傳 G 는 E愍 其若斯, 群僚大會, 使偏家假爲二者之 容,儉其松問之狀,酒郡樂作,以爲嬪戱. 初以辭義相難,終以刀杖相屈, 用 感切之.〉

리는 기록이 있다. 두 명 이상의 배우가 등장하여 서로 헐뜯고 싸 우는 모습을 연출하는데, 술도 마시고 음악연주도 있었으니 필경

우스개짓과 함께 가무도 연출하여 〈가무회〉적인 요소도 있었을 듯 하다. 『삼국지 (三國志)』 권 21 「왕찬전 (王菜傳)」 배송지 (裝松之)의 주에 서는 『오질별전(吳質別傳)』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 고있다. 술이 얼큰해지자 오질 (吳質)은 마음껏 즐기고자 하였다. 마침 상장 군다將軍) 조진 (曹眞)은 몸이 뚱뚱하고, 중령군 (中領軍) 주삭 (朱錄) 은 몸이 깡말랐는데, 오질은 배우들을 불러 〈설비수(說肥獲)녔卜 하게 하였다. 조전 (曹眞)은 귀한 신분으로 그런 놀이를 보는 것은 수치스 러운 일이라 여기며 노하여 오질에게 말하였다. ‘경은 나를 낮은 장교 로 대우하시려는 겁니까 ? ' …… 12)

12) 『吳月)J傳』 〈酒fflt, 質欲盡歡 時上將軍曹眞性肥, 中領軍朱錬性 m, 質召 優, 使說肥獲. 眞負貴, 恥見戱, 怒爲質 El, 卿欲以部曲將遇我邪 ? ……>

여기의 〈설비수(說廳떤里)났근 몸이 뚱뚱하고 깡마른 것을 조롱하는` 놀이인데, 술자리에서 행해전 것이니 가무도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많은 놀이이다. 그러나 〈우희났근 원칙적으로 〈골계희〉라고 보는 것이 옳을것이다. 3) 잡무(雜舞) 위나라로 들어오면서 한대의 〈가무희〉인 파유무(巴漁舞) • 전무 (市舞) • 비무(緊舞) 등이 모두 아화(雅化)하여 단순한 가무인 잡무 의 일종으로 변하고 그 명칭까지도 바뀌는 것들이 생겨난다. 그러 나 전(晉)나라 때의 〈잠무只討춘 살펴보면 아직도 〈가무회〉적인 성 격을 간직하고 있는 것들이 여러 가지 전해지고 있었던 듯하다. 『악부시집 偶頭詩集)』 권 54 「무곡가사(舞曲歌辭)」의 집무(雜舞)

에 실려 있는 전(晉)나라 때의 불무가(佛舞歌)를 보면, 작자를 알 수 없는 백구(白 鳩 ) • 제제 (濟濟) • 독록(獨ill) • 갈석 (磁石) • 회남왕 (淮南王)의 다섯 가지가 전한다. 『 송서 (宋 書 )』 권 19 「악지 (樂志)」 에서는 진(晉) 양홍(楊 8L) 의 『무서 (舞序).!I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인용하고있다. 강남으로 와서 백부무(白符舞)를 보았는데, 간혹 백부구무(白堯鳩 舞)라고도 하며, 이미 수십 년을 전해 내려온 춤이라고 한다. 그 가 사의 뜻을 살펴보면, 곧 오(吳)지방 사람들이 손호(孫皓)의 학정 偉: 政)을 걱정하면서 진 (晉)나러에 붙게 되기를 바라는 내용이다. 13)

13) 楊꿉 L, r 舞序』 〈自到江南見白符舞, 或言白亮鳩舞, 云有此來數十年矣. 察 其辭旨 乃是吳人患孫皓之虐政, 思屬晉也. >

백구(白鳩)는 백부(白符) 또는 백부구(白符鳩)라고도 불렀으 며 ,14) 지금 전하는 백구무(白鳩舞)의 전(晉)나라 때의 가사내용이 앞의 양홍(楊꿉 L) 의 설명과 디론 것은 후에 다시 개작된 가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15) 어떻든 백구(白鳩)는 〈가무희〉적인 노래와 춤이 었던듯하다.

14) 『南齊 書』 권 11 樂志에서도 『舞敍』를 인용하여 @i符, 或云百符鳩舞 , 出 江南, 吳人所造 …… 言白者金行, 符, 合也, 鳩亦合也.符鳩誰異, 其義 是同. 〉이라고 하였다. 15) 『宋 書 』 권 19 「樂志」 의거 .

다시 제제무(iffi劑뜹)와 독록무(獨渡舞)에 대하여 『남제서 (南齊 書 )』 권 11 「악지 偶誌)」에서 전 (晉)나라 때 가무는· 두 가지가 각 각 〈육해 (六解)〉였다라고 하였으니, 그 춤과 노래가 표현하는 이야 기 줄거리의 규모가 간단하지 않은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갈석 (磁 石)도 『남제서 (南齊害)』 「악지 偶誌:)」에

위무제(魏武帝)의 가사로써, 진( 晉 )나라에서는 갈석무(磁石舞)도 만들었으며, 그 가사는 4 장이었다 .16)

16) 情齊』 「樂」 〈右一曲, 魏武帝辭, 晉以爲磁石舞歌, 詩四章. >

라고 하였다. 『악부시집 (樂府詩集)』의 「해제 (解題)」에서는 다시 『악 부해제 (樂府解題)』를 인용하여 첫째 장(「觀沿海」)은 동쪽으로 갈석(閩石)에 가서 창해(浦海)의 넓 음과 해와 달이 그 속에서 나왔다 들어갔다 히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둘째 장(「冬十月」)은 농사일이 끝나고 장사꾼들이 왕래하는 것을 표 현하고, 셋째 장(「土不同」)은 향토가 같지 않음을 따라서 사람들의 성격이 각기 다른 것을 표현하고, 넷째 장(「龜難 壽 」)은 늙은 천리마 (千里馬)가 마구 위에 엎드려 있기는 하지만 뜻은 천리 저 멀리에 있 고, 열사는 나이 늙었어도 한창 때 마음이 없어지지 않고 있음을 표현 한 것이다 .17)

17) 『樂府解題』 〈首章言, 東臨磁石, 見浦海之廣, 日月出入其中. 二章言, 農 工畢而商賈往來.三章言,鄕土不同, 人性各異. 四章言,老謨伏極, 志在千 里, 烈士暮年, 壯心不已也. >

라고 하였다. 이 정도의 이야기 줄거리를 지녔으면 가무국濁濁劇) 이라해도좋을듯하다. 끝머리의 회남왕(淮南王)은 악지偶誌)에서 〈전(晉)나라 회남왕 무가(淮南王舞歌)도 육해 (六解)〉라고 하였다. 전(晉)나라 최표(崔 約)의 『고금주(古今注)』에서 회남왕(淮南王)은 회남소산(淮南小山)이 지은 것이다. 회남왕(淮南 王)은 선식 (仙食)을 하면서 신선의 도를 닦으며 방사(方士)들을 두루 찾아다니다가 마침내는 팔공(八公)과 함께 세상을 떠나 간 곳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소산(小山)의 무리들은 그를 사모한 나머지 회남왕곡 (淮南王曲)을 지었던 것이다. 18)

18) 崔約, 『古今注』〈淮南王, 淮南小山之所作也. 淮南王服食求仙, 遇禮方 士, 遂與八公相揚供去, 莫知所往.小山之徒, 思戀不已, 乃作淮南王曲焉. >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회남왕(淮南王)은 한(漢)대에 시작되어 진 (晉)나라 때에도 유행하였던 신선과 관계되는 〈가무희 〉 였다. 다시 『 악부시집』 권 56 「무곡가사(舞曲歌辭)」 잡무(雜舞)에는 제 세창사(齊世昌辭)가 실려 있는데, 『 남제서 (南齊 書 ) 』 「악지 옙誌 1) 」에 서는 오른편의 일곡은 진(晉)나라의 배반가(杯盤歌)이며 lW JI (解)인데 …… 제 (齊)나라에서 제세창(齊世昌)으로 고쳤다. 19)

19) 『 南齊 書 』 〈右一曲, 晉杯盤歌十解, …… 齊改爲齊世昌. >

라는 등의 설명을 하고 있다. 위의 『악부시집 』 과 『 남제서 』 에 실려 있는 가사들이 6 해 (解) 또는 lW~ 로 이루어전 무가(舞歌)의 한 두 해 (解)라면, 이 노래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모두가 〈가무희〉의 가 사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위와 같이 한대의 〈가무희〉였던 잡무 (雜舞)의 대부분이 아화(雅化)하여 단순한 가무로 변해갔다고 했지 만, 전(晉)대까지도 〈가무희〉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보존했던 것 들도 있었음이 분명하다. 4) 요동요부(遼東妖婦) 위진시대에는 위와 같은 것들 이의의 〈가무희〉도 상당히 유행하 였다. 이 시대에 생겨났던 대표적인 〈가무회〉로는 「요동요부(遼東 妖婦)」와 「명군무(明君舞)」 「예필여擇', 또는 文康樂)」을 들 수 있

다. 「요동요부(遼東妖婦)」에 관하여 『 삼국지 (三國志) 』 「위서 (魏 書 )」 삼소제기 (三少帝紀) 배송지 (裝松之)의 주에는 『위서 (魏 書 )』에 실린 사마사(司馬師) 등의 「폐제주(廢帝奏)」를 인용하고 있는데, 거기에 서 황제 조방(曹芳)이 나라일은돌보지 않고 내총(內龍)을 지나치게 좋아하여 여색(女色)에 빠져서 …… 날마다 소우(小優) 곽회 (郭懷)와 원신(袁信) 등을 불러 건시전頃混;殿)과 부 용전 (英容殿) 앞에서 옷을 벗어 젖히고 놀이를 하게 하고, …… 또 곽회 (郭懷)와 원신 (袁信) 등으로 하여금 광망관 (廣望觀) 아래에서 「요동요부(遼東妖婦)」를 연출케 하였는데, 지나치게 의설하여 길을 가던 행인들이 눈을 가릴 지경이었으나, 황제는 관(觀) 위에서 그것 울 줄기고 웃고 하였다. 20)

20) 『魏書』 「三素帝紀」 裝注 여 H f …… 耿淮內籠, 沈漫女色, …. .. 日延小優 郭懷·袁信等, 於建始·英容殿前操担游戱, …. .. 使懷·信等, 於觀下作遼 東妖婦, 禧甄過度, 道路行人俺目, 帝於觀上以爲隱笑.〉

라고 쓰고 있다. 삼소제기 (三少帝紀) 본문의 태후댜活)의 폐제령 (廢帝令)에도 내총(內龍)을 지나치게 좋아하여 여색 (女色)에 빠져서, 날마다 창 우(借優)들을 불러들여 추악한 짓을 멋대로 하였다. 21)

21) 『魏書』 「三少帝紀」 여柱卽內龍, 沈漫女德, B 延偏優, 縱其酸諺.〉

라고 하며 꾸짖고 있다. 여기의 「요동요부(遼東妖婦)」는 배우들이 연출한 일종의 〈가무희〉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가무회〉의 주 인공은 극도로 의설된 행위를 일삼는 요부(妖婦)였다. 한(漢)대에

도 있었던 〈관동유현녀 (關束有贊女)〉 또는 〈부인상대작우(婦人相對 作優)〉 했던 여기 (女技)가 황제의 기호를 좇아 극도로 의설해진 것 이 「요동요부(遼東妖婦)」라는 〈 가무희〉였다고 여겨진다. 5) 왕명군(王明君) 곽무천(郭茂情)의 『악부시집 (樂府詩集)』 권 29 「상화가사(相和歌 辭)」 음탄곡(玲欽曲)에는 진 (晉) 석숭(石業 249-300) 이 지은 「왕 명군(王明君)」이 실려 있는데, 그 해제 (解題)에서는 『당서 情害) 』 「악지 偶誌 1) 」를 인용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명군(明君)」은 한곡(漢曲)이다. 원제 玩겨帝) 때 흉노(句奴)의 선우 (單于)가 입조(入朝)했을 때에, 조명(語命)으로 왕장(王端)을 그에게 짝지어 주었는데, 그가 소군(昭君)이다. 떠나기에 앞서 들어와 인사 룰 드리는데 광채가 사림들에게 비쳐서 좌우 사람들을 감동시키니 천 자도 후회를 하였었다. 한나라 사람들은 그가 멀리 시집 가게 된 것을 동정하여 이 노래를 지었던 것이다. 전(晉)나라 석승(石崇)의 기생 녹주(綠珠)는 춤을 찰 추었는데 이 곡조를 가르치어 스스로 새로운 노래를 짓게 되었다. 22)

22) 『唐촘』 「樂志」 〈明君, 漢曲也. 元帝時, 句奴單于入朝,語以王遣配之. 卽昭君也. 及將去, 入辭, 光彩射人, 棟勳止夫i, 天子梅焉. 漢人情其速隊, 爲作此歌. 晉石崇技綠珠善舞 以此曲敎之,而自製新歌. >

「왕명군(王明君)」은 「왕소군(王昭君)」이라고도 부르는 한대의 노 래인데, 적어도 전(晉)나라 때에 이르러서 그것이 완전히 가무·로 연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진(東晉)의 갈홍(葛洪 250?-330?) 이 지었다는 『서경잡기 (西京雜記)』에는 「왕소군(王昭君)」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원제 玩겨두)에게는 후궁(後宮)이 너무 많아 늘 만니볼 수가 없어서 화공(畵工)으로 하여금 그들의 모양을 그리도록 하고는 그립을 보고` 그들을 불렀다. 후궁 사람들은 모두 화공에게 뇌물을 바쳤는데, 많은 사람은 10 만, 적은 사람도 5 만 금에서 더 내려가지는 않았다. 소군 (昭君)은 자기의 용모만을 믿고 홀로 뇌물을 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화공이 그롤 추하게 그려 끝내 임금을 만날 수가 없었다. 뒤에 흉노 (句奴)가 입조(入朝)하여 미인을 구해 연지 (關氏)로 삼고자 하니, 원 제 어겨帝)는 그립을 보고 소군(昭君)을 골라 보내도록 하였다. 보내기 에 앞서 불러 보니 용모가 후궁 중에서 첫째 갈 정도였으며, 말씨도 훌륭하고 거동도 우아하였다. 황제는 후회를 하였으나, 이미 이름을 알리어 결정한 일이고 의국에 대한 신의도 중하기 때문에 다시 사람을 바꾸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일을 추궁한 끝에, 화공(畵工)들을 모두 기시 여詞f)하였고, 그들의 재산을 조사하여 수만이 넘는 재산 모두를 몰수하였다 .23)

23) 면§京雜記』 G 帝後宮銃多, 不得常見, 乃使畵工圖形, 案圖召幸之. 諸宮 人皆路畵工, 多者十葛, 少者亦不減五萬, 獨王端不肯, 遂不得見. 句奴入 朝, 求美人爲關氏, 於是上案圓以昭君行. 及去召見, 稅爲後宮第一, 善應 對,擧止閑雅.帝梅之,而名籍已定, 帝重信於外國,故不復更人.乃窮案其 事, 畵 工皆棄市,籍其家資, 皆巨萬. >

이토록 복잡한 정절(情節)의 이야기를 가무로 연출하였으니, 그 것은 〈가무회〉적인 성격의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악 부시집 偶騎詩集)J의 「해제 (解題)」에서는 다시 『고금악부(古今樂 府)』를 인용하여 「명군(明君)」 가무란 것은 전 (晉)나라 태강~) 연간 (280-289) 에 계륜(季倫)이 만든 것이다. 왕명군(王明君)은 본시 이름이 소군 (昭君)이나 문제 改:帝)의 휘 (諱)에 저촉되어 명군(明君)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24)

24) 『樂府詩集』 권 29 〈古今樂錄 El, 明君꼽났읽t, 晉太康中季倫所作也. 王明 君本名昭君, 以觸文帝諱, 故晉人謂之明君. >

라고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악사(樂忠 930-1007) 의 『녹주전個: 珠傳)』에도 이에 관한 기록이 있다. 녹주(綠珠)는 저 (笛)를 잘 불었고, 또 명군무(明君舞)를 찰 추었 다. 명군(明君)은 한비 (漢妃)이다. 한나라 원제 保;帝) 때 흉노(句奴) 의 선우(單于)가 입조(入朝)했는데, 왕장(王靖)을조명(紹命)으로그 에게 짝지어주었으니, 그가 바로 명군(明君)이다. 떠나기에 앞서 둘 어와 인사를 하는데 광채가 사람들을 쏘는 듯하여 천자가 후회하였으 나 다시 바꾸기가 어려웠다. 한나라 사람들은 그가 멀리 시집 가는 것 을 동정하여 이 노래를 지었다. 석숭(石崇)은 이 곡을 그에게 가르치 고, 또 다음과 같은 새로운 노래를 스스로 지었다. 나는 본시 양가집 딸이 었는데 흉노 선우의 궁전으로 시집 가게 되었네. (이하 『악부시집』에 실린 석숭(石崇)의 시와 같음. )25)

25) 『綠珠傳』 磁能吹笛, 又善舞明君. 明君者, 漢妃也. 漢元帝時, 句奴單 于入朝,認王婚配之, 卽昭君也.及將去,入辭,光彩射人,天子梅焉,重難 改. 漢人隣其遠隊, 爲作此꼽k . 崇以此曲敎之, 而自製新歌曰, 我本良家 子, 將適單于庭…… >

왕소군(王昭君)은 그 시대 〈가무희〉에서 부르던 노래의 가사임이 분명하다.

6) 문강기(文康使) 『수 서 (隋 書 )』 권 15 「음악지 ( 音 樂志)」에는 〈예필 債안 長) 〉 이란 〈 가 무회〉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예필여 N g)이란 것은 본시 진(晉)나라 태위 (ffi) 유량偶璟;)의 집 에서 나왔다. 유량이 죽자 그의 기녀 (技女)가 유량을 추모하여 그와 비슷한 가면을 쓰고 것일산을 들고 춤을 추면서 그의 형용을 드러냈는 데, 그의 시호(盆號)를 따서 이름을 붙여, 그것을 문강악(文康樂)이 라고도 불렀다. 구부악(九部樂)을 연주할 때마다 연주가 끝나면 이것 울 연출하였기 때문에 예필頃澤:)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그 행곡 (行曲)에는 단교로(單交路)가 있고, 무곡(舞曲)에는 산화(散花)가 있 다. 악기 偶쁩片)에는 적 (笛) • 생 (~) • 소(蕭) • 지 (11) • 영반(鈴藥) • 비(牌) ·요고價滋 ~ ) 등의 7 종이 있고, 삼현(三惡)이 일부(一部)를 이루며, 악공 22 명이 연출하였다 .26)

26) 『隋書』 「樂志」 여한岸苗 本出自晉太尉庚亮家. 亮卒, 其使追思亮, 固假 爲其面,執騎以舞像其容,取其益以號之,謂之爲文康樂.每奏九部樂終則 陳之,故以禮畢爲名. 其行曲有單交路,舞曲有散花.樂器有笛座蕭施鈴盤碑 鹿鼓等七種, 三感爲一部, 工二十二人. >

유량陳兎 289-340) 은 진나라 왕실의 외척으로 용모가 빼어났 고 이야기롤 찰 하였다. 노장(老莊)을 좋아하면서도 풍격 價格)이 엄정 (嚴整)하고 예절이 발라서 온 집안을 잘 다스렸었다고 한다. 벼슬은 중서감(中 書 監) • 중서령 (中 書 令) 등을 지냈고 좌위장군佑i 衛將軍) • 정서장군(fiE西將軍)으로 나라에 큰 공도 세웠다. 그리고 그의 시호(盆號)는 문강(文康)이다 .27) 이처럼 좋은 집안 출신으로 빼어난 용모와 우아한 성품을 지닌 데다가 높은 벼슬을 하고 나라 에 큰 공도 세워 아랫사람들이 늘 그롤 홈모하고 있었던 듯하다.

27) 『 晋 書 』 권 73 「庚亮傳」 의거 .

따라서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악기 (樂技)들이 그의 모습울 한 가면 울 쓰고 가무를 하면서 생전의 그의 모습을 재현하였던 듯하다. 〈악공 22 명이 연출하였다〉라는 이 〈예필〉이란 〈가무회났근 규모도 작지 않았을 듯하다. 그리고 수(隋)나라 때 연주되던 칠부악〔七部 樂, 開皇 (589-600) 初 및 구부악〔九部樂 大業 (605-618) 中〕에서도 끝머리에 〈문강기〉 또는 〈예필〉이 연출되었고, 당떄·)나라 초기에 도 한동안은 연주되고 있었던 것 같다. 28)

28) 『隋書』 권 15 「樂志」 및 방f唐警』 권 119 fj험結志」.

안지추個之推, 531-591 ? )의 『안씨가훈頃氏家訓)』 권 17 「서중 (書)」편에서 괴뢰희 (偶1 晶 鼓)를 설명하면서 〈문강기 (文康使)가 유 량僚璋)을 상징한 것과 같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남북조(南北朝) 시대에도 이 〈문강기〉가 유행하였음울 알 수 있다. 또한 그것은 가면희였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상운악U: 雲)은 뒤에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일종의 호악(胡樂)인데, 그 주인공을 문강노호(文康老胡)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이들 〈가무희〉 의 노래나 음악 또는 춤에 서로 통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 른다. 7) 무무(巫舞) 『삼국지 (三國志)』 『위서 (魏書)』 권 3 「명제기 (明帝紀)」를 보면 청 룡(靑龍) 3 년 (235) 에 천신(天神)이 내리어 왕실을 보호하며, 사악 한 것은 내치고 복된 것은 들여 놓으며, 물을 먹이기만 하면 사람 들의 병을 낫게 한다는 농민의 처를 궁전으로 불러들여 총애를 하 였다는 기록이 있다. 황제가 병이 났을 때 물을 먹여도 효과가 없 어 결국은 그를 죽이고 말았다지만, 무습~ 황실에까지도 깊 숙히 파고들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전서 (晉書)』 권 95 「예술열

전(藝術列傳)」에 실린 사람들의 행적울 보더라도 거의 모두가 무격 (巫親)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특히 『전서 (晉 書 )』 권 94 「하통전 (夏 統傳)」에는 장단(章丹)과 진주(陳珠)라는 아름다운 무당들의 무무 (巫舞)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하통(夏統)의 백부(伯父)가 제사를 지내면서 이 무당들을 불러들였는데, 이들은 초저녁부터 음악을 연주하며, 칼로 자기의 혀를 째기도 하고, 칼을 삼키고 불을 토하 기도 하며, 구름과 안개를 자욱하게 피어나게도 하고, 빛이 번쩍 이며 번개가 번뜩이도록 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당 가운데에서 둘 이 춤을추는데, 가벼운 발걸음으로 몸을 돌리며 춤을 추고, 혼령의 말과 귀신의 웃 음을 웃고, 쟁반을 날리고 받고 하며, 덩실덩실 어울려 춤을 추었 다 .29)

29) ~』 정株罰g」 (.其從父敬寧祠先人, 迎女巫章丹 • 陳珠二人, 竝有國色, 莊服若麗, 善歌債, 又能隱形産影. 甲夜之初, 植鐘擊鼓, 間以絲竹, 丹꿨決] 拔刀破舌, 香刀吐火, 雲 霧杏冥, 流光電發. …. .. 入門, 忽見丹꿨沼井中庭, 輕步御麟 靈 談鬼笑, 飛觸挑料 訓醉翻翻 >

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무무(巫舞)는 계속 민간에 널리 전해지 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계속 민간의 〈 가무 희〉의 성행을 뒷받침해 주었을 것이다. 8) 호무(胡舞) 또 한편 위전시대에 〈가무희〉와 〈잡희〉가 성행한 것은 오랑캐 가무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삼국지 (三國志) 』 『위지 (魏志)』 권 21 「왕찬전(王菜傳)」 배송지(裝松之)의 주에는 다음과 같은 위략(魏 略)을 인용한 글이 들어 있다.

태조앉祖)가 한단순(郡郡淳)을 보내어 조식 (曹植)을 찾아뵙게 하 였는데 …… 때마침 날씨가 더워 조식 (曹植)은 아랫사람들을 불러 물 울 길어오게 하고 스스로 목욕을 한 다음, 분을 바르고 마침내는 관도 쓰지 않고 알몸으로 박자를 치면서 호무(胡舞)를 추고, 오추단(li椎 銀) • 도환(挑丸) • 격검 (擊劍)을 하며, 배우의 소설 (小說) 오천언 (li 千言)을 암송하였다. 30)

30) 『三國志』 注 성~(1tfl郡)롭liti!. …… 時天暑熱, 植因呼常從取水自溪 訖, 傅粉, 遂科頭, 拍担, 胡舞, 五椎銀 • 挑丸 • 擊§ Ij , 踊俳優小說數千言. >

귀족인 조식 (曹植)이 직접 맨 머리에 옷도 벗은 채 자기 몸으로 박자를 치며 오랑캐 춤을 추고 백희 (百戱)를 하였으니, 호무(胡舞) 는 위나라의 〈가무희〉와 〈잡희〉의 발달에 적지 않은 자극이 되었 울 것이다. 그리고 화장을 하고 오랑캐 모습까지 흉내내며 춘 이 호무(胡舞)는 〈가무희〉적인 춤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끝머 리 〈배우의 소설 오천언〉도 후세의 강창(講唱)과 비슷한 것으로 〈가무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을 것이다. 2 남조(南朝)의 〈가무희〉 남북조(南北朝)시대로 들어오면서 악무偶壅f)도 북방의 흉노(句 奴) • 선비족(鮮卑族), 서쪽의 강족僚族) 및 구자(龜鉉) 같은 서역 여러 나라와 인도 등의 영향을 받아 더욱 다양하게 발전한다. 우선 본래부터는 북방의 통치자였던 사람들이 남쪽으로 옮겨와 세운 남 조(南朝)의 경우를 보면, 한위 (漢魏)의 옛 음악도 그대로 계승하여 아무(雅舞)와 잡무(雜舞)가 교묘조향礎廟朝製)과 연회 (案會) 때 조 정에서 그대로 쓰였다. 특히 잡무(雜舞)의 공막무(公莫舞) • 파유무

(巴漁舞) 등 〈 가무회 〉 였던 악무(樂 舞 )들도 그대로 계승되었는데, 다만 새로운 속악(俗樂)과 외국음악의 수입으로 이것들은 훨씬 아 화(雅化)하여 〈 가무희〉로서의 특성을 크게 상실했던 듯하다. 그러 나 그 시대에 새로 등장했던 민가(民歌)와 의국음악 속에는 〈 가무 희〉의 성격을 지닌 여러 가지의 악무들이 발견되고 있다. 1) 전계가(前溪歌) 먼저 남조(薛p月)의 민가로써 오성가곡(吳聲歌曲)과 서곡가(西曲 歌)가 있는데 ,31) 오성가곡은 『 전서( 晉 書)』 권 15 「악지偶誌:)」에서 〈본시는 모두가 도가(徒歌)〉라고 하였으나, 그 중 「전계가(前 溪 歌)」만을 『악부시집 멤額詩集) 』 「해제 (解題)」에서 『 악부해제 偶騎解 題) 』 를 인용하여 〈무곡(舞曲)〉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 송서 (宋 書 ) 』 권 19 「악지偶誌)」에서는 〈전계가(前溪歌)라는 것은 진( 晉 )나라 거기장군(車騎將軍) 심충(沈充)이 만든 것〉 32) 이라고 하였는데, 일 곱 수로 된 고사(古辭)를 보면 남녀가 창화 (P 昌和)한 가사인 듯하 다. 곧 〈가무희〉의 가사였을 가능성이 많은 노래이다.

31) 郭情 『樂府詩集 』 권 44-47 「淸商曲辭」 吳聲歌曲 및 同 권 47-49 「淸 商曲辭」西曲歌참조. 32) 『 宋 衛 「樂志」 여節溪哥者, 晉車騎將軍沈充所制. >

2) 화산기(華山畿) 「화산기 (華山畿)」 25 수도 『 악부시집 』 의 「해제」에서 『 고금악록(古 今) 』 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그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화산기 (華山畿)」라는 것은 송(宋)나라 소제 (少帝) 때 (423-424) 의 오뇌 (懷個)라는 한 곡조였는데, 또한 변곡( 變 曲)이었다. 소제 때 남 서 (南徐)의 한 선비가 화산기 (華山畿)로부터 운양( 雲 陽)으로 가다가

객사에서 십팔구 세의 여자를 만났는데, 좋아하면서도 어찌할 길이 없어 마침내 마음의 병이 들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묻자 그는 모두 사실대로 이야기하였다. 어머니는 곧 화산(華山)으로 찾 0} 가 그 여자를 만나 아들이 병이 든 까닭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여자 는 앞치마를 벗어 어머니에게 주면서 몰래 아들이 누워 있는 요 밀에 깔아 두면 나울 것이라고 하였다. 며칠 뒤에 정말로 병이 나았다. 그 런데 아들이 우연히 요를 들다가 앞치마를 발견하고는 끌어안고 나서 그것을 삼키고 죽어 버렸다. 숨이 끊어지려 할 때 그가 어머니에게 말 하였다. 〈장사지낼 때 상여를 화산(華山) 아래로 지나가게 해 주십시 오. >어 머니는 그의 뜻을 따라 주었다. 싱여가 여자의 집 문앞에 이르자 싱여를 끌던 소가 움직이지 않아 채찍질을 해도 꼼짝 않았다. 여자가 잠깐 기다려 달라 하고는, 목욕 을 하고 화장을 한 다음 나와서 노래를 불렀다. 화산기(華山畿)에서 님은나때문에 죽었는데 홀로누굴위해 산단말인가? 니를 어여삐 보았을 때처럼 좋아한다면 나위해 관뚜껑 열어 주오! 관 뚜껑이 노랫소리에 따라 열리자 여자는 관 안으로 빨려 둘어갔 다. 가족들이 관을 두드렸지만 어찌할 수가 없어서, 마침내 합장을 하고는 신녀총 (神女家) 이라 부르게 되었다. 33)

33) 『古今樂錄』 曰 〈「華山畿」者, 宋少帝時澳腦一曲, 亦變曲也. 少帝時, 南 徐―士子者, 從華山畿往雲陽. 見客舍有女子年十八九, 稅之無因, 遂感心 疾.母問其故,具以啓母.母爲至華山尋訪,見女具說聞感之因.脫萩藤令母 密置其席下臥之,當已.少日果差•忽擧席見萩藤而抱之, 遂香食而死.氣欲 絶, 謂曰, 葬時車載, 從華山度. ’ 母從其意.比至女門,牛不肯前, 打拍

不動 女旦 ‘旦待須史. ’ 狀點泳浴, 匠而出. 歌日, 華山畿, 君銃爲債死, 獨誰? 歡若見隣時, 稽木爲但開.’相應聲開, 女透入稽, 家人 on 打, 無如之何. 乃合葬, 呼曰神女家. >

이 정도의 이야기 줄거리를 지닌 가무라면 〈가무희〉라 하지 않 울 수가 없지만, 아름다운 여자가 앞치마로 병울 낫게 하고, 이후 에 노래를 부르며 죽은 남자의 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이들을 합장한 뒤에 그 무덤을 신녀총(神女家)이라 불렀다는 전후의 상황 울 미루어 보아 그 여자는 무(巫)였음에 틀림이 없다. 그가 무당이 라면 노래뿐만 아니라 춤도 추었을 것이고, 또 그것은 〈가무희〉의 성격을 띤 것이었을 것이다. 3) 신현가(神弦歌) 다시 청상곡사(淸商曲辭)의 오성가곡(吳聲歌曲) 끝머리에는 「신현 가(神弦歌)」 18 수의 독특한 노래들이 실려 있다. 숙아(宿阿) • 도군 (道君) • 성랑앨浪~) • 교녀 馮女) • 백석 (白石) • 청계소고(靑溪小姑) • 호취고(湖就姑) • 고은(姑恩) • 채릉동(採菱童) • 명하동(明下童) • 동생 (同生)의 11 종의 노래 (이 중 7 종은 2 수임)인데, 육간여 (陸偏如)는 『악부고사고 앰額古辭考)』에서 「신현가(神弦歌)」는 남조(南朝) 민간의 제가(祭歌)이므로 곽무천 (郭茂情)은 이것을 청상곡(淸商曲)에 열입 (列入)하였다. 나는 그것들 모두가 제가(祭歌)여서 오성가(吳聲歌) 및 서가(西歌)와는 비슷하지 않으므로 이에 교묘가僚關廟歌)의 뒤에 옮겨 붙여 놓는다. 34)

34) 『樂府古辭考』 二. 邪廟歌 (丁) 神弦歌 〈 1 慰叫安, 祠弦歌蓋南朝民家的祭歌, 故郭茂情~Jj入淸商曲. 我因爲他衍都是祭歌,與吳聲歌及西歌不類, 故移附邪 廟後.〉

라고 하였다. 이들 곡명 (曲名)이나 가사로 미루어 보더라도 이들은

단순한 제가(祭歌)가 아니라 무가(巫歌)임이 분명하다. 첫번째 「숙 아(宿阿)」는 강신곡(降神曲)임이 확실하다. 소립(森林)이 하늘문 열고 조존頃尊)이 땅의 문 닫네• 신령도길을함께 하여 진관(眞官)께서 지금 내려오시네. 蘇林開天門,趙尊閉地戶. 神靈亦道同, 眞官今來下. 소립(蘇林)과 조존燁尊)은 옛 신선이며, 강신(降神)할 때에 왕 유(王維 701-761) 가 「사어산신녀가(祠漁山神女歌)」의 「영신 (迎神)」 에서 〈무당이 나와, 어지러이 춤~ 粉屬舞)〉 라고 하 며 노래하였듯이 , 음악의 연주와 함께 무당은 노래를 하며 춤을 추 었다. 다시 『악부시집 偶開詩集)』에서는 「청계소고곡(靑溪小姑曲)」 에 해제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양@)나라 오균(吳均, 469-520) 의 『속제해기 (續齊階記)』의 청계묘신 (淸溪廟神)에 관한 기록을나긴용하 고있다. 회계(會稽)의 조문소偵核:節)는 송(宋)나라 원가어潘;) 년간 (424 -453) 에 동궁부시 (東宮扶侍)가 되었는데, 관사가 청계 (淸溪) 중교(中 橋) 옆에 있었다. 가울 밤 달빛 아래 거닐면서 문득 ` 고향생각이 간절 하여 문에 기대여 오비곡(烏飛曲)을 불렀다. 갑자기 나이가 열대여섯 쯤 되는 하녀가 문 앞으로 다가와 말하였다. ‘저희 아가씨께서 노랫소 리를 들으시고는 마음이 끌리시어 달빛을 좇아 노닐다가 일부러 저를 보내어 뵐 수 있을까 여쭈어 보도록 하셨습니다. ' 문소改:昭)는 전혀

그롤 의심하지 아니하고 참시 들러도 좋다고 초청하였다. 참시 후에 아가씨가 오는데 나이는 십팔구 세 정도였고, 용모가 절 색이었다. 그 여자가 문소(文部)에게 말하였다. ‘선생님의 훌륭한 노 래를 들었사온데, 다시 한 곡 불러 주실 수 있겠습니까? ' 문소는 곧 그를 위하여 「초생반석하(草生盤石下)」를 불렀는데 노랫소리가 매우 아름다웠다. 아가씨는 하녀에게 공후(登篠)를 가져오게 하여 연주하 였는데, 깨끗한 것이 초곡礎:曲) 같았다. 다시 다른 하녀에게 「번상 (繁霜)」을 노래하게 하고는, 자신은 금비녀를 빼 공후(塞篠)를 치면 서 이에 화하였다. 하녀는 이런 노래를 불렀다. 된서리 노래하니 된서리 새벽장막으로 스며드네. 무엇 때문에 의로운 밤 지키며 앉아서 된서리 내리기만 기다리나? 그대로 머물며 줄기다 자고난 후에 아침에 떠나갈 때에 금비녀를 문 소에게 주었다• 문소도 그에게 은주발과 유리숟가락을 선물하였다. 다음 날 청계묘(淸溪廟) 안에서 그것들을 발견하고는 곧 지난 밤 만 난 이가 청계신녀 (靑溪神女)임을 알게 되었다. 35)

35) 吳均, r 續齊諸記』 〈會稽趙文部, 宋元嘉中爲東宮扶侍, 磨在靑溪中橋. 秋 夜步月 , 恨然思歸, 乃怖門唱「烏飛曲」. 忽有靑衣, 年可十五六許, 諸門 B ; ‘女郞聞歌聲, 有稅人者, 逐月遊戱, 故遣相 r』 . ’ 文部都不之疑, 遂逆哲過. 須央, 女 H[ 至, 年可十八九許, 容色絶妙. 謂文部曰, ‘聞君善歌, 能爲作一 曲否? ' 文部卽爲歌맥 I 生盤石下」, 聲基淸美. 女郞顧靑衣, 取型篠鼓之, 冷 治曲 又令侍牌歌「繁霜」, 自脫金管, 拍塞篠和之. 牌乃歌曰 ; 엽넙쩝릅, 繁霜侵晩幕 何意空相守, 坐待繁霜落. ’ 留連燕度, 將旦.};Jj去, 以金管遺文 織文館亦贈以銀怨及瑠璃七. 明日,於靑溪廟中得之,乃知得所見靑溪神女 也. >( 『五朝小說大觀 E 本보다는 서술이 간략하며 , 두 곳 그것을 참고로 고 쳤음•)

이 청계소고곡(靑溪小姑曲)의 유래 이야기를 보더라도 신현가(神 弦歌) 18 수는 무무가따舞歌)이며, 〈 가무희 〉 적인 놀이의 가사였음 울알수있다. 4) 서곡가(西曲歌) 서곡가(西曲歌)는 『 고금악록(古今樂錄)』에 「석성악(石城樂)」 「오 °녀 (學譯)」 「막수악(莫험器)」 등 34 곡의 곡명을 열거하며, 다시 「석성악(石城樂)」 등 16 곡의 곡명을 열거한 후에 〈모두가 무곡(舞 曲)〉이라 설명하고 있다. 36) 『 고금악록(古今樂錄).!I에는 이들 무곡­ (舞曲) 대부분이 〈옛날에는 16 명이 춤추었다〉라고 설명하고, 다시 그 중 일부에 〈양傑)나라에서는 8 명이 춤추었다〉라는 말을 덧붙 이고있다.

36) 『樂府詩集』 권 47 頂曲歌」 解題 〈古今樂錄日, 西曲歌有石城樂 • 烏夜 Pf·莫怒樂·佑·襄陽樂·三洲·襄陽蹴銅踏•採桑度•江陵樂·靑陽度· 靑隨白馬•共戱樂·安東平·女兒子·來羅·那떠灘•孟珠•醫樂·夜度娘•長 松標 • 雙行繼 • 黃督 • 黃樓 • 平西樂 • 拳楊枝 • 尋陽樂 • 臼附鳩 • [拔〕蒲 • 壽 陽 樂 • 作蠶絲 • 楊坂兒 • 西烏夜飛 • 月節折楊柳歌三十四曲 (夜黃 한곡이 빠짐). 石城樂·烏夜暗·莫怒樂·佑客樂·襄陽樂·三洲·襄陽蹴銅踏•採桑度•江陵 樂 • 靑隨白馬 • 共戱樂 • 安東平 • 那阿灘 • 孟珠 • 聲樂 • 壽 陽樂, 竝舞曲. >

이 중 「오야제 (烏夜暗)」에 대하여 『악부시집 옘照詩集)』 「해제」에 서 『교방기 (敎卯따를 인용하여 그 노래와 춤의 유래를 디음과 같 이 설명하고있다. 오야제 (烏夜暗)라는 것은, 원가保嘉) 28 년 (451)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이 죄를 짓고 쫓겨나 심양(i尋陽)을 지나다 머물게 되었는 데, 강주자사(江州刺史)인 형양왕(衡陽王) 의계 (義季)가 붙잡아 두고 잔치를 벌여 술을 마시게 하며 열홀이 지나도 떠나 보내지 않았다. 황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노하여 두 사람을 모두 잡아 가두었다. 회계공

주(會稽公主)는 그들의 누님이었는데, 황제와 잔치에서 줄기다가 중 간에 그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였다. 황제는 그 뜻을 알지 못하고 그런 행동을 몸소 만류하였다. 공주는 눈물을 홀리면서 말하였다. '거 자(車子)는 한 해가 저무는 지금도 폐하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 습니다. ’ 거자(車子)는 의강(義康)의 소자(小字)이다. 황제는 장산 燁山)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거요 ! 그렇지 않 다면 곧 아버님 뜻을 어기는 거지요. ’ 무제 (武帝)가 장산燁:山)에 묻 혔기 때문에 선제 (先帝)의 능 (陵)을 가리키며 맹세를 하였던 것이다 . 그리고는 남은 술을 봉하여 의강(義康)에게 보내 주면서 다음 날 아 침에 말하였다. ‘어제는 회계 (會稽)의 누님과 술을 마시며 줄기다가 아우 생각이 났기 때문에 마시던 술을 그 곳으로 보내는 것이오. ’ 그 리고는 마침내 그롤 용서하였다. 사신이 심양( 淸 陽)에 도착하기 전에 형양(衡陽)의 집 사람들이 두 왕이 잡혀 있는 집의 문을 두드리면서 말하였다. ‘어젯밤 까마귀가 밤에 울었으니, 관청에서 마땅히 사면이 있을 것입니다. ’ 조금 뒤에 사신이 도착하여 두 왕이 풀려나 이 곡이 있게 된 것이다 .37)

37) 『 敎坊記』曰 〈烏夜暗者, 元嘉二十八年, 彭城王義康有罪放逐, 行次 淸 陽, 江州刺史衡陽王義季, 留連飮案, 歷句不去. 帝聞而怒, 皆囚之. 會稽公主, 麟, 當 與帝案治, 中席起拜. 帝未達其旨, 射止之. 主流浩日, 車子歲暮, 恐不爲陸下所容 ! 車子, 義康小字也.帝指蔣山曰, 必無此, 不爾, 便負tJJ 寧陵武帝葬於蔣山,故指先帝陵爲 誓 . 因封餘酒寄義康,旦日曰;祚與會稽 妹飮樂,憶弟,故附所飮酒往.遂有之.使未達溝陽,衡陽家人拍二王所囚院 曰, 祚夜烏夜暗, 官當有敎. 少頃使至, 二王得釋, 故有此曲. >

이런 정도의 이야기 줄거리를 지닌 가무라면 〈가무희〉라 불러도 좋을듯싶다. 5) 여아자(女兒子) 『 남제서 (南齊書) 』 권 7 「동혼후전 (東香侯傳)」을 보면,

〈황제는 함덕전 (含德殿)에서 생가(座歌)를 불면서 여아자(女兒子) 를 연출케 하였다. >38 )

38) 『南齊書』 〈帝在含德殿, 吹塞歌, 作女兒子. >

라는 기록이 있다. 〈여아자〉가 어떤 것인지 확실한 기록은 없으 나, 〈여아자를 연출케 하였다(作女兒子)〉라고 하였으니, 이것도 여 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가무희〉였을 가능성이 많다. 이들 이의에도 청상곡사(淸商曲辭)에 보이는 막수악(莫怒樂) • 삼 주가(三洲歌) • 고객악(佑客樂) • 양양악(襄陽樂) 등이 그 악곡의 유 래로 보아 〈가무희〉인 듯하며, 강릉악(江陵樂) • 안동평 (安東平) 등 그 가사의 내용으로 보아 〈가무희〉라고 여겨지는 작품들도 적지 않다. 6) 상운악(上雲樂) 다시 『악부시집 偶額詩集)』 권 51 「청상곡사(淸商曲辭)」에는 양 (m) 무제 (武帝, 502-549 재위)와 주사 OO 捨, 469-524)39) 가 지은 「상운악냐.雲樂)」이 실려 있다. 양@) 무제 (武帝)의 것은 도합 7 곡인데, 모두가 청묘(淸妙)한 선유(仙遊)의 경지롤 노래한 것들이 다. 거기에 비하여 주사 OO 捨)의 작품은 「노호문강사(老胡文康辭)」 라고도 불렀다는데 ,40) 그 내용을 자세히 읽어 보면 「상운악」이란 〈가무희〉의 연출모습을 노래한 것임이 분명하다. 『수서 (隋睿)』 권 13 「음악지 (音樂志)」에는 양(m) 삼조(三朝)의 설악(設樂)으로 사십 구설(四十九設)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제 44 설(設)은

39) 郭茂情은 題辭에서 〈간혹 范雲 (451-503) 의 작품이라고도 한다〉라고 하 였다. 40) 『樂府詩集』 권 51 潭辭」 의거.

사자도(寺子?!l,) • 안식 (安息) ·공작 GL 雀) ·봉황(鳳凰) ·문록(文鹿) • 호무(胡舞)와 상운악U:雲樂) 가무기倻녔計支)를 연이어 상연하는 것 .41)

41) 〈寺子導〉도 무엇인지 알 길이 전혀 없고, 선孩 U 二雲樂歌舞使〉의 연 EE 〉 울 〈연이어 상연하는 것〉이라 번역하였다.

으로 되어 있다. 임반당(任半塘)도 『당희롱(唐戱弄)』(제 1 장 總說 三. 潮源)에서 이 제 44 설(設)에 보이는 전부가 실은 한 가지 〈가 무회〉이며, 그 중심만은 〈상운악〉에 있으나 모두가 연이어 상연된 것일 것이라 하였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싱운악」은 〈가무희〉임 이 확실하다. 두우(杜佑, 735-812) 의 『통전 (通典) 』 권 145 에는 양@)나라의 오안태(吳安泰)는 노래를 잘 하였는데, 뒤에는 악령 高)이 되었으며 성률(聲律)에 정통했고, 처음으로 별강남 {]l j江 南) • 상운악U:雲樂) 네 곡을 개작하였다 .42)

42) 헛麟』 떠吳安泰, 善歌, 後爲樂令,稽解聲律, 初改四曲, 別江南 • 上 雲.〉 네 곡이라 하였으나 곡명은 두 곡만이 보인다.

라고도 하였다. 그러면 주사(周捨)의 「상운악」을 먼저 읽고, 그 〈가무회〉의 구성 및 내용을 분석해 보기로 하자. 서쪽의 늙은오랑캐 그 이름은 문강改康)인데 천지사방을노닐면서 삼황(三皇)에게도 거만하게 구네. 서쪽으론 해지는 몽사(?1-i E) 를 구경하고 동쪽으론 해뜨는 부상(扶桑)에 노니네. 남쪽으론 남극해에 배를 띄우고

북쪽으론 북국 불모의 땅에 이르네. 옛날에는 신선인 약사(若士)와 벗하였고 팽조(彭祖)와 함께 자랐다네. 옛날에 잠시 곤륜산에 갔다가 다시 요지 (瑠池)에서 술을 들게 되었는데 주제 OO 帝)는 맞이하여 윗자리에 앉혔고 왕모(王母)는 불사약 옥장(玉菜)을 대접하였다네. 그래서 목숨은 남산처럼 끝없이 되었고 뜻은 금강(金剛)처럼 단단하게 되었다네. 푸른눈은아련하고 흰머리는길다랗네. 가는 눈썹은 수영난 곳까지 뻗었고 높다란코는 입 위로처져 있네. 놀이룰잘할뿐만아니라 술도찰마신다네. 퉁소와 저가 앞에서 울고 있고 제자들이 뒤를 따르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경스런 모습으로 각기 말은 일을 하고 있네. 봉황새는 늙은 오랑캐 집안의 닭이요, 사자는 늙은 오랑캐 집안의 개라네. 천자께서는 어지러운 세싱을 올바르게 다스리어 다시 해와 달과 별빛을 밝게 하셨네. 은택이 내리는 비처럼 베풀어지고 교화가 바람처럼 백성들을 휩쓸었네.

자연현상을 살피어 모든 이치를 밝혀 내고 양@)나러를 방문하기로 뜻을 세워 수레 끄는 사마(四馬)를 배로 늘이고 길을 닦은 뒤 비로소 천자가 계시는 도읍에 이르렀다네. 궁전 앞에 엎드려 절하면서 옥당(玉堂)을 우러르는데, 따라온 하인들이 줄지어 벌려 섰고 무두가 염치와 절의를 알고 다같이 의로운 도리를 알고 있는 듯하네. 노랫소리 피리소리 은은히 울리고 북소리 둥둥울리어 울림은하늘에 진동하고 소리는봉황새 울음같네. 나서고 물러섭이 모두 규칙에 맞고 나아가고 물러감이 모두 가락에 맞네. 모든 재주가 다 좋기는 하지만 오랑캐춤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추네. 늙은 오랑캐가 부쳐온 상자 속에는 더 기이한 악장들이 있다네. 수만리 길을가져다가 성상께 바치고자 한다는 거네. 이것을 차례차례 이야기하려 하여도 늙은지라 잊은 것이 많다네. 다만 바라건대 밝으신 폐하께서 천만년정수하시어 줄거움이 다하는 일 없으시기를 !

西方老胡,販名文康, 遊遊六合, 微誕三皇• 西觀t-i E, 束戱扶桑. 南沒大蒙之海, 北至無通之鄕. 昔與若士爲友, 共弄彭祖扶床. 往年哲到襄盜, 復値瑠池擧崩.

周帝迎以上席, 王母贈以玉禁. 故乃 壽 如南山, 志若金剛. 靑省, 臼髮長長, 峨臨鹿, 高鼻垂口. 非直能俳,又善飮酒. 蕭管鳴前, 門徒從後, 濟濟翼翼, 各有分部. 鳳凰是老胡家鷄,獅子是老胡家狗. 陸下擦亂反正, 再朗三光, 澤雨施, 化與風翔. 視雲候呂, 志遊大梁, 重閉修路,始居帝鄕. 伏拜金鬪 仰魄玉堂, 從者小子, 羅列成行, 恐如廉潔, 皆識義方. 꿉禪情悟, 煙鼓鑄鎔! 響振鈴天, 聲若鴻皇. 前却中規短, 進退得宮商.

擧無不佳, 胡舞最所長. 老胡寄炭中, 復有奇樂章, 齋持數萬里, 願以奉聖皇. 乃欲次第說,老蓬多所忘. 但願明陸下, 壽 千萬歲, 歡麟. 위의 시를 근거로 하여 양여갈)대 「상운악」은 대체로 어떤 내용과 형식을 지닌 〈가무희〉였는가 분석해 보기로 한다• 등장인물 여기의 주인공은 말할 것도 없이 서역 (西域)으로부터 온 늙은 오 랑캐 〈문강(文康)〉이다. 그는 많은 종자(從者)들을 거느리고, 또 봉황과 사자도 데리고 다닌다. 이 봉황과 사자도 모두 사람들이 분 장했을 것이다. 다시 축수를 받는 천자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으 며, 문강의 내력을 설명하는 앞 대목에서는 약사(若士)와 팽조(彭 祖) • 주제 (周帝) • 서왕모(西王母) 같은 신선과 선녀들이 나와 함께 어울려 춤추었을 것이다. 이 신선들의 춤은 적어도 수십 명에 - 달하 는 인원이 가무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이 신선들의 춤은 「상운악」 본래의 모습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분장 문강汶康)은 눈이 새파랗고 흰 머리가 길며, 긴 눈썹에 높은 코 를 가졌으니 호인 (胡人)의 얼굴모양을 한 가면을 쓰고, 반인반선 (半人半仙)의 모습으로 분장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여러 종자들도 서역인의 복색을 하고 호인(胡人)의 얼굴모양울 한 가면을 모두 썼

을 것이다. 약사와 팽조 • 주제 • 서왕모 등은 제각기 어울리는 분 장과 화장을 하였을 것이며, 역시 가면을 썼을 가능성아 많다. 봉 황과 사자도 제각기 사람들이 봉황새와 사자모양의 껍질을 뒤집어 쓴 것일 것이다. 이야기 줄거리 서역에 문강(幻康)이란 신인(神人)이 있었다. 그는 우주 안을 멋 대로 노닐면서 약사(若士)나 팽조(彭祖) 같은 신선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주제 閩帝)와 서왕모(西王母)의 초청으로 그 곳으로 가서 대 접을 받기도 한다. 그는 의모도 독특하지만 우스갯소리도 잘 하고 술도 찰 마신다. 그리고 많은 종자들과 봉황 및 사자가 따라다니며 함께 춤을 춘다. 그는 마침내 양混;)나라 천자의 성덕 ~德)울 전 해 듣고 멀리 중국을 찾아와 종자들을 거느리고 호무(胡舞)를 추고 기악(奇樂)을 연주하며 축수를 한다. 춤 문강은 처음에 등장하여 화려한 춤을 춘다. 다음엔 약사 나생조 와 어울리어 신선의 춤을 춘다. 그리고 주제와 서왕모의 잔치자리 에서는 술과 옥장을 마시면서 술에 취한 모습과 우스개짓을 하며 호무를 출 것이다. 이 호무는 후세에 더욱 성행한다. 이어 종자들 의 정제한 군무(群舞)가 전개된다. 다음엔 봉황과 사자가 나와 문 강 및 종자들과 어울리어 양나라 천자의 성덕을 기리는 춤을 춘다. 그리고 모두 함께 다양한 춤들을 추며 천자에게 축수를 한다. 대체로 추려 보더라도 신선무 • 봉황무 • 사자무 • 호무 등이 있었 을 것이다. 후세 「서량기 酒涼使)」 43) 등에 보이는 사자무(獅子舞)나

43) ~涼使」는 뒤에 唐代의 가무회를 설명할 때 자세히 소개될 것임 .

호등무(胡騰舞) ”) 같은 것은 이 곳의 사자무와 호무가 발달한 것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후세의 여러 가지 사자춤 과 호인(胡人)이 술 마시고 우스캐짓을 하는 호무는 모두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4) 李端 {785 년 전후), 「胡膳兒」 〈胡誘身是涼州兒, 朋頂如玉鼻如維. 桐布輕 杉前後卷,荀荀長帶一邊垂.帳前踏作本音語,拍樣提柚爲君舞.安西舊牧收 禪, 洛下詞人抄曲與. 揚眉動目踏花1€, 紅汗交流珠情偏. 醉却東傾又西 倒, 雙靴柔弱滿燈前, 環 11 急蹴皆應節, 反手又膜如却月.絲桐忽奏一曲終, 鳴鳴畵角城頭發.胡騰兒,胡騰兒,故鄕路斷知不知?〉

상연절차 대체로 이 「상운악」 가무희는 다음과 같은 7 장으로 이루어졌었 을 것이다. 제 1 장에서는 문강(文康)이 반인반선(半人半仙)의 모습 으로 등장하여 자신을 소개하는 화려한 노래와 춤을 연출하였을 것 이다. 제 2 장에서는 천지사방을 노닐면서 여러 신선들과 어울려 노 는 가무, 제 3 장에서는 술에 취한 문강과 여러 종자들이 어울려 추 는 군무, 제 4 장에서는 봉황새와 사자가 나와 태평세대를 상칭하는 춤, 제 5 장에서는 문강이 양나라 천지롤 찾아 뵙고 공덕을 칭송하 는 가무, 제 6 장에서는 여러 가지 변화가 많은 호무와 새로운 음 악, 제 7 칭에서는 천자의 천년 만년의 수를 비는 가무가 전개되었 을것이다. 양 무제의 「상운악」은 모두 7 곡인데 신선세계를 노래한 것들이 다. 〈상운다雲)〉이란 본시 〈구름을 타고 신선세계로 올라가 노 님〉 45) 을 뜻한다. 그리고 『고금악록(古今樂錄)』에 의하면 이 시들은 천감(天監) 11 년 (512) 겨울에 지은 것인 듯하다. 46) 무제의 작품은

45) 며 E 子』 뎌혀距 〈千歲原世, 去而上仙,彼乘白雲,至於帝鄕. > 『 黃帝九鼎 神 여龍, 上下太淸 >여 기에서 산훔t〉이란 구름을 타고 〈帝鄕〉 이나 성여t〉으로 울라감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46) 『樂府詩集』 권 50 「淸商曲辭」 「江南弄」 題辭.

아래와같은것들이다. 봉대곡 (Jll.豪曲 ) 봉대 (鳳臺) 위는 모두가 영원한 곳 구름 가엔 신비로운 빛이 북극을 향하고, 화려한 수레 포장이 서북녘 연주(延州) 땅에까지 널렸네. 신선들의 우의 (羽衣) 번쩍이는 속에 봄은불려 갔다가도다시 와머무네. (화) 상운은 참되니 영원한 봄 즐기세 ! 鳳臺上, 兩悠悠, 雲之縣 神光朝天極,華蓋過延州. 羽衣笠耀, 春吹去復留. (和) 上雲眞 樂萬春! 동백곡(桐柏曲) 동백산(桐柏山)은 참되니 천제의 손님 올라가서 이수(伊水) 골짜기에서 놀고 낙수(洛水) 가를 유람하네. 길고 짜른 봉황 소리나는 피리 들고 늘어서서 은은히 아름다운 풍악소리 울리네. 바라보기만 했지 갈 수는 없는 곳이라 왔다갔다 하면서 세상사람들은 사절하네• (화) 아름다운 신선의 놀이여 ! 桐柏眞, 昇帝賓, 戱伊谷, 遊洛濱.

參列鳳第, 容與起梁鹿. 望不可至, 俳御謝時人. (和) 可隣眞人遊! 방장곡(方丈曲) 방장산(方丈山) 위엔 겹구름 산봉우리 같은데 신선이 먹는 여덟 가지 구슬 줍고 세 가지 구름 부리네. 금빛 글이 오묘한 이치 드러내고, 푸른 글씨는 현묘한 이치를 표현하네. 지극한 도는 허공에 엉긴 듯한 것인데도 말없이 모두가 지켜가고 있네. 方丈上,峻層雲, 抱八玉, 御三雲. 金書發幽會, 碧簡吐玄門. 至道虛馮, 冥然共所違. 방제곡(方諸曲) 달물 뜨는 거울 위의 상운인 U::雲人)은 인 (仁)을 지킴울 일삼고 있 다네. 징 두드리면 요지 (瑞池)로 모여 빛을 밟으며 옥당(玉堂)에 참례하네. 흰 수레포장의 모습은 길고도 엄숙한데 청허한 이 고장엔 신선들 늘어섰네. (화) 방제 (方諸) 위는 아름다운 환락을 언제나 생각케 하네. 方諸上, 上雲人, 業守仁.

縱金集瑞池 步光禮玉展. 霞蓋容長肅,淸虛任列眞. (和) 方諸上, 可隣歡樂長相思 ! 옥귀곡(玉龜曲) 옥귀산(玉龜山)엔 참되고 영원한 신선 있고, 아홉가지 빛 빛나고오색 구름 이네. 허리에 띤 띠 산뜻하고 머리엔 화려한 갓울 썼네. 목숨은끝이 없어 들락날락 태청궁에서 노니네. (화) 아름다이 놀이를 하세 ! 玉龜山, 眞長仙, 九光耀, 五雲生. 交帶要分影,大華冠晟樓 嶽 n 玄羅, 出入遊太淸 (和) 可隣遊戱來! 금단곡(金丹曲) 지줏빛 서리 반짝이고 붉은 눈 날리는데 쫓아갔단 되돌아 오고 구르다간 다시 날으네. 아홉 신선들도 도가 방금 미력해졌는가. 천년동안전치 않더니 한 벌 신선 옷을 전하였네. (화) 금단의 모임엔 아름답게도 흰 구름을 랐네 ! 紫,降雪飛,

追以還, 轉復飛. 九眞道方微, 千年不傳, 一傳商雲衣. (和) 金丹倉·, 可隣乘白雲 ! 금릉곡(金陵曲) 구곡선 (句曲仙)은 언제나 줄거이 동천 (洞天)을 노닐고 이승 저승 두루 돌아다니네. 묘법 (妙法) 담긴 구슬 판 들고 금문(金門)을 올라가니, 아름다운 샘물이 감도는데 해오라기 나래 타고 내려와 구름을 찾네. 해오라기 나래 한 번 지나가면 아름다운향기 서리네. 句曲仙, 長樂遊洞天, 巡會遊六門. 損玉板, 登金門. 鳳泉廻律, 鷺羽降尋雲, 鷺羽一流, 芳芬鬱氣氣. 이 가사들은 분명히 위의 <5 ) 상연철차〉에서 설명한 「상운악」 가무희의 7 장 중 제 2 장에서 불리도록 지어전 노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상운악」이란 가무희의 본래의 중심을 이루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악부시집 (樂府詩集)』 권 51 에는 이어 서 당情)나라 이백 (李白, 701-762) 과 이하(李翼 791-817) 의 「상 운악」 및 왕무경 (王無競 652-705) 의 「봉대곡馮臺曲)」, 이백 (李 白)의 「봉대곡馮臺曲)」과 「봉황곡馮凰曲)」이 실려 있고, 다시 송

(宋)나라 포조偶照 414-466) 의 「소사곡(蕭史曲)」, 제 (齊)나라 장 융(張融)의 「소사곡(蕭史曲)」, 전(陳)나라 강총(江總, 519-594) 의 「소사곡(籠史曲)」, 진(陳)나라 사변(謝變)의 「방제곡(方諸曲)」이 실 려 있다. 「상운악」 이의의 시들은 모두 「상운악」에서 불리워진 노 래의 한 수이거나 그것을 본뜬 작품일 것이다. 7) 호악(胡樂) 「상운악」은 본시 신선의 가무였는데, 거기에 호악(胡樂)과 사자 춤 • 봉황새춤 등이 합쳐져 보다 큰 규모의 〈가무회〉로 발전한 것 임이 분명하다. 『악부시집』 권 53 「무곡가사(舞曲歌辭)」 잡무(雜 舞)의 「해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송(宋) 명제 (明帝) 때 (456_-4 72), 또 서창(西信) • 강호僚:胡)의 잡 무가 있었는데, 후위 (後魏) • 북제 (北齊)도 모두 호융기 (胡戒使)가 합 쳐져 이로부터 여러 충들이 더욱 성해졌다. 47)

47) 『樂府詩集』 〈明帝時 又有西信先胡雜舞, 後魏北齊亦皆參以胡戒使, 自此 諸.〉

『송서 (宋書)』 권 19 「악지 偶誌)」에도 〈또 서창(西信) • 강호僚 胡)의 여러 잡무(雜舞)가 있었다〉 48) 라고 기록하고 있다. 『남제서 (南齊書)』 권 1 「고제본기 (高帝本紀)」를 보면, 제 (齊)나라 고제 (高 帝)는 광명전僚明殿)에서 부하의 말을 죽이면서 〈신하들과 함께 강호기 (光胡使)를 하며 즐겼다〉 49) 라고 하였고, 같은 책 권 4 「울림 왕본기 儒林王本紀)」에는 세조(世祖)의 상(喪) 중에도 울림왕濁林 王)은 곡을 하다가 후궁(後宮)으로 들어가서 〈호기 (胡使) 이부(二

48) 『宋書』 0 有西信完胡諸雜舞. > 49) 『南齊書』 생한려처伴完胡使爲樂. >

部)룰 합 (OO) 의 양 옆으로 벌여 놓고 연주하게 하였다〉 50) 라고 하였 으며, 같은 책 권 7 「동혼平본기 (東香侯本紀)」에서도 〈 또 수부(數 部)가 있어 모두 강호기 (光胡使)를 고취 (鼓 PX) 하며 연주하고 고각 (鼓角)과 횡취 (橫 PX) 를 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진서 (陳 書 )』 권 11 「장소달전 (彰召達傳)」에서는 〈반드시 여기잡악(女使雜樂)울 성대 히 마련하고 강호(光胡)의 음악을 갖추었었다 〉 51) 라고 하였으니, 그 무렵 남조에는 여악(女樂) 및 〈 가무희〉와 함께 강호기 (先胡使) 도 들어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강호기 감은 것들 이 더욱 발전하여 「상운악辻雲樂)」을 이루게 하였을 것이다.

50) 『 南齊害』 〈在世祖表, 突泣意,入後宮, 當 列胡使二部來閣迎奏. > 51) 『南齊睿 』 〈復有數部, 皆奏鼓吹充胡使, 鼓角橫吹. >又 q싹藍設女使雜華웅, 備之聲.〉

8) 배가사(俳歌辭)와 봉황함서기(鳳凰衡書使) 『 악부시집 』 권 56 에는 무곡가사(舞曲歌辭)의 부록으로 「산악(散 樂)」이 붙어 있는데, 작자를 알 수 없는 「배가사(섬濁~辭)」와 송 (宋) • 제 (齊)의 「봉황함서기사馮凰衍耆使辭)」 두 수가 들어 있다. 「배가사(俳歌辭)」는 그 해제에 〈주유도(保儒導)라고도 부르며, 옛 날부터 있어온 창우희 (1 副砲伐)이다〉 52) 라고 하였다. 『 남제서 (南齊 書)』 권 11 「악지偶誌)」에 같은 「배가사(俳歌辭)」를 인용하고 〈이 주유도(保儒導)는 춤추는 사람 자신이 노래 불렀다. 옛날 가사는 여덟 곡이었는데, 이것은 맨 앞의 한 편이며, 22 구였는데 지금 주 유(保儒)들이 노래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일부를어 취한 것이다.〉 53) 라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다시 『 수서 (隋書)』 권 13 「악지 偶誌 1) 」에

52) 『樂府詩集』 (-El 保儒導 自古有之, 蓋 1 빕配敗也. > 53) 『 南齊 書 』 〈右保儒 導 舞人自歌之. 古辭俳歌 )M 曲, 此是前一篇, 二十二句. 今所,捷取之也.〉

양삼조설악傑三朝設樂)의 제 16 으로 「설배기(設俳使)」가 있고 ,54) 『고금악록(古今樂錄) 』 에서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갇은 설명을 하고 있다.

54) 『隋 書』 「樂志」에는 성鬼晉 때 「保儒導」引이 있었으나 隋文帝 때 그것을 파하였다〉라는 기록도 있다.

연기자가 푸른 천으로 만든 주머니에 대바 ~L 니를 넣고, 다시 그 속 에 두 난쟁이롤 둘어가게 한 다음, 그것을 짊어지고 나와 땅에 쏟아 놓으면 가무를 하는데, 아이들 두 사람이 난쟁이 머리 위에 무등을 서 기도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배가(俳歌)를 읊었다. …… 55)

55) 『 古今樂錄』 〈技兒以靑布 豪 盛竹德, 肝兩踏子, 負束寫地歌舞, 小兒二人, 提삼踏子頭 讀 俳云 ; ……>( 『樂府詩集』 解題引)

이싱을 종합하면, 「배가사(俳歌辭)」는 대체로 난쟁이들이 연출하 던 우희 (優戱)에서 발전한 〈가무희 〉 의 가사였음을 알 수 있다. 난 쟁이가 주연이었기 때문에 「주유도(保儒導)」라고도 불렀고, 전부 여덟 곡이나 되었다니 규모도 작지 않은 가무회였을 것이며, 『 남제 서 』 「악지 偶誌)」 및 『 악부시집 』 과 『 고금악록』 의 「배가사」가 비슷 하면서도 서로 다르고 모두 알 수 없는 구절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보아, 그것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가무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난쟁이들이 연출한 것이니 우스개짓, 곧 골계 (滑稽) 위주의 것이었을 것이다. 「봉황함서기 馮凰衍警使)」는 『 수서 (隋書) 』 권 13 「악지 偶誌:)」에 도 〈송(宋) • 제 (齊) 때부터 있었다〉라고 하였고, r 남제서 (南齊書)』 권 11 「악지 偶誌)」에는 이에 대하여 앞의 「봉황함서기 馮凰衍 害 使)」 가사는 대체로 어룡(魚龍)의 종류

이다. 초하돗날 시중(侍中)이 전전倻t前)에서 꿇어앉아 그 글을 받았 다. 송(宋)나라 때의 굴은 이런 내용이었다. …… 제 (齊)나라 초기에 중서랑(中書郞) 강엄(江海)에게 명을 내리어 개작케 하였다 .56)

56) 『南齊書』 〈右鳳凰街警使꼽녔辛, 蓋魚龍之流也. 元會日 , 侍中於殿前맙레又其 書 宋世辭云, ……. 齊初招中書R [ 江滿改. >

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악부시집』 「해제」에는 〈양@) 무제 (武帝) 보통(普通) 연간 (520-526) 에 조령 (紹令)을 내리어 그것을 파하였다〉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 본시 그것은 봉황새를 빌어 중국이 태평성세임과 천자의 위덕을 기리는 내용의 놀이였던 듯하 다. 사자춤과 함께 봉황새춤이 「상운악~上雲樂)」에 끼여들면서 단 조로운 이 「봉황함서기 馮凰衍耆使)」는 없어지게 된 것인 듯하다. 9) 나(灘) 양傑)나라 종름(宗懷, 500-563 ? )의 『형초세시기 佛楚歲時記)』 에 다음과 같은 연말의 〈나(灘)〉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12 월 8 일은 납일(臘日)인데, 속담에서 말하기를 납고(臘鼓)가 울리 면 봄풀이 솟기 시작한다고 하였다. 마울사람들은 다 같이 장구를 치 며 호두(胡頭)를 쓰고, 또 금강역사(金剛力士) 모습을 해가지고 역귀 둘을 쫓아 내었다. 57)

57) ~歲時記』 〈十二月八日, 爲臘日. 諺言, 臘鼓 PJ , 春草生. 村人竝擊細 腹鼓, 鐵胡頭, 及作金剛力士以逐逃i >

이는 민간의 〈나〉의 모습인데, 기록은 간단하지만 〈나〉의 행사 내용에 많은 변화가 있음을 알게 된다. 우선 〈장고〉가 이전의 나 무(灘舞)에서는 쓰이지 않던 의국에서 들어온 악기이며, 〈호두(胡

頭)났근 〈 호공두(胡公頭) 〉 로 된 판본도 있는데, 아무래도 호인(胡 人)의 모습에 가까운 가면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여전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이는 궁나(宮灘)의 방상씨 (方相氏)와는 다론 종류의 가 면이었음이 분명하다. 『형초세시기 佛楚歲時記)』의 해설부분에서는 여두徵頭)저t 들고 있는데, 그것은 〈가무희 〉 같은 놀이를 할 때 쓰는 가면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끝으로 금강역사(金 剛力士)는 불교의 신이니, 그 시대 불교의 성행이 민간의 풍속에도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게 된다. 『형초세시기 』 의 해설부분에서 〈손 홍공(孫興公) 상(常)이 희두徵頭)를 쓰고 역귀를 쫓는 사람들과 함께 환선무(桓宣武)의 집에 갔었는데, 환선무(桓宣武)는 그의 응 대가 비범힘을 깨닫고 따져 물은 결과 사실이 밝혀졌다〉 58) 라는 기 록도 있으니, 민간에서는 가면을 쓰고 나무(灘舞)를 하는 사람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역귀 僚魂)를 내쫓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시대에도 후세의 〈 나희 (圓鼓)〉와 비슷한 〈가무회〉가 민 간에서 행하여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8) 여t楚歲時記』 여澳凶常 着 戱頭, 與逐除人共至桓宣武家, 宣武覺 其應對不 凡, 推問乃驗也.〉

10) 그 밖의 잡희 (雜戱) 『남제서 (南齊書)』 권 11 「악지 엠喆 이 )」를 보면, 각저 (角抵) • 상형 (f象形) • 잡기 (雜使)는 역대로 전승되어 온 것이 다. 그들의 증손(增損)과 기원에 관한 일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 략 한대의 장형 (張衡) 「서경부(西京試)」가 그 시작이라 할 것이다. …… 강좌(江左)의 함강偏湜t) 중 (335-342) 에 자록여준鹿) • 기행 (跋 行) • 별식 (醫食) • 작서 (符鼠) • 제왕권의 (齊王卷衣) • 절도僚華ij) • 오안 (五案) 등의 기예(使 藝 )를 파하여 중조(中朝)에는 없어졌다. …. .. 태

원(ti) 중 (376-396) 에 부견(符堅)이 패한 뒤 관중(關中)에서 첨장 호기 (擔槿胡使)를 얻어 태악앉浚樂)에 전상(進上)하였다. 59)

59) 『南齊書』 「樂志」 q밖氐 • 像形 • 雜使, 歷代相承有也. 其增損源起, 事不 可詳, 大略漢世張衡西京試是其始也. …… 江左咸康中, 能紫鹿 • 跋行 • 踏 食 • 符鼠 • 齊王卷衣 • 絶팜~j • 五案等使, 中朝所無. …… 太元中, 符堅敗後, 得中擔槿胡使, 進太樂. >

여기의 각저 (角抵)는 한대부터 내려오는 〈가무회只룹 포함한 여러 가지 기예 (使藝)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이다. 상형 (1 象形)은 가 면을 사용하는 〈가무희녔t 뜻하는 말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잡기 (雜使)는 여기에도 보이는 여러 가지 기예들을 일컫는 말이다. 『남제서 (南齊書)』를 보면, 권 7 「동혼후기 (東香侯紀)」 60) 에 남제 (南齊)의 동혼왕(東香王) 소보권(蕭寶卷)이 〈밤낮으로 후당(後堂)에 서 희마徵馬)를 하며 친근한 내시 (內侍) • 창기 (借使)들과 북치며 소리질렀다. > 또 그는 〈높은 장막 안에 오우의 (任羽儀)란 부서를 두고 그 밖에 수부(數部)를 두었는데, 모두 고취강호기(鼓吹先胡 使)와 고각횡취 (鼓角橫吹)를 연주하게 하였다. >, 〈황제는 힘이 세 어 백호장(白虎權)을 들 수 있었는데, 자신이 잡색 (雜色)의 금기의 (錦使衣)를 만들어 입었고 거기에 금화(金花) • 옥경 (玉鏡) 같은 여 러 보배로 장식을 하여 여러 가지 의태를 드러냈다. 〉 61) 는 등의 기 록이 있고 권 28 「최조사전 (崔祖思傳)」 62) 에 〈지금 호구伊口)는 백 만(百萬)이 못 되는데, 태악伏樂)의 아(雅) • 정 (鄭)은 원휘 保漁徽) 때 (473) 교시 (校試)한 것만도 천여 명이나 되며, 후당(後堂)의 잡

60) 情史』 권 5 「廢帝東香侯紀」에도 보임 . 61) 『南齊書』 「東香侯紀」 〈日夜於後堂戱馬 與親近閣人偏使鼓叫.〉, 〈高部之 內, 設部任羽儀, 復有數部, 皆奏鼓吹光胡使, 鼓角橫吹.〉 〈帝有管力, 能擔 白虎植, 自製雜色錦使衣, 綴以金花玉鏡衆寶, 這諸意態. > 62) 情史』 권 47 「崔祖思傳」에도 보임 .

기 (雜使)는 그 수에 들어 있지 않으니, …… 지금 사악함을 바로잡 아 정도로 돌아가게 하려면 잡기를 파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63) 라 는 기록이 보이고, 권 42 「소탄지전(蕭坦之傳)」에 〈후당(後堂)으로 나와서 교활한 잡희를 할 때에 탄지 (坦之)는 언제나 (황제의) 곁에 있었다〉 64) 라는 등의 기록이 보인다. 남조(南朝)에서는 황제와 귀 족들 사이에 〈가무희〉와 〈잡희〉가 상당히 성행하였음을 알게 한 다. 다시 『남사(南史)』 권 70 「순리열전(循吏列傳)」을 보면, 송(宋) 나라 문제 (文帝) 때 (424-453) 에는 〈모든 백 호伊)의 고울이나 저 자가 있는 고장이면 가요와 무용을 하느라 가는 곳마다 무리를 이 루고 있었다〉 65) 라고 하였다. 구체적인 자료는 전하는 것이 없지만 민간에서 가무와 잡희가 더욱 성행하였음을 알게 한다.

63) 『南齊書』 〈今戶 口不能百萬, 而太樂雅鄭, 元徽時校試千有餘人, 後堂雜 使, 不在其數. …… 今欲擦邪歸道, 莫若龍雜使. > 64) 『南齊書』 〈及出後堂, 雜戱波檜, 坦之皆得在側. > 65) 명史』 OL 百戶之鄕,有市之邑, 歌諾舞踏,觸處成群. >

3 북조(北朝)의 〈가무희〉 북조(卯闇月)로 들어와서는 무엇보다도 유명한 구체적인 기록을 지 닌 〈가무희〉로 〈답요낭倻描娘)〉과 〈난릉왕(蘭陵王)〉이 생겨난다. 이들은 당떄卞)대에까지도 그대로 계승되어 연출되었기 때문에 보다 구체적인 기록이 전하는 것이다. 1) 답요낭(踏描娘) 먼저 〈답요낭〉에 관한 기록은 최령홈(崔衍次, 749 년 전후)의 『교 방기 (敎坊記)』, 두우(杜佑, 735-812) 의 『통전 (通典)』 권 146, 단안

절(段安節 890 년 전후)의 『악부잡록(樂府雜錄)』, 『구당서(舊唐 書 ).!l 권 29 「음악지 (音樂志)」 등에 보인다. 다음과 같은 『교방기 (敎坊 記)』의 기록이 가장 자세한 것이다. 〈답요낭價混議)〉 : 북제 (北齊)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성은 소(蘇) 가이고 주먹코롤 하고 있었다. 실은 벼슬을 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스 스로 낭중偵 B 中)이라 불렀다.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술주정을 찰 했 고, 술에 취할 때마다 그의 처를 찰 때렸다. 처는 슬픔을 품고 이웃 사람들에게 호소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것을 놀이로 즐겼는데, 남 자가 여자의 옷을 입고 천천히 걸어 들어오며 노래를 했었다. 노래 한 곡조가 끝날 때마다 결의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디음과 같이 그에 화 창(和唱)하였다. 춤추며 노래하네, 화창하세 ! 춤추며 노래하는 여인 괴롭네, 화창하세 ! 그가 춤추면서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춤추며 노래하네 個溫i) 〉라고 한 것이고, 그가 원망을 드러내기 때문에 〈괴롭다〉라고 말했던 것이 다. 그의 남편이 와서 때리고 싸우는 모습을 함으로써 웃고 줄기었 다. 지금은 여자가 그 역할을 하고, 마침내 닝중(郞中)이라 부르지 않고 아숙자(阿叔子)라고만 부르게 되었다. 놀이하는 중에 전당포도 보태어졌는데, 옛 뜻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간혹 담용낭(談容娘) 이라고도 부르는데 찰못된 것이다. 66)

66) 『敎坊記』 여麟, 北齊有人, 姓蘇,胞鼻. 實不仕, 而自號爲郞中. 暗 飮, N. 每醉 輔章其妻, 妻衛悲, 訴於隣里,時人弄之. 丈夫꿈婦人衣, 徐步入場, 行歌. 每一壘, 帝人齊聲和之云, 踏諾, 和來 ! 踏諾娘苦, 和 來! 以其旦步旦歌,故謂之踏諾, 以其稱究, 故言苦. 及其夫至, 則作阪鬪 之狀,以爲笑樂.今則婦人爲之,遂不呼郞中,但云阿叔子.詞弄又加典庫,

全失舊旨 或呼爲談容娘, 又非 . >

『 구당서 ( 舊 唐 書 )』 「악지 (樂志)」의 기록은 이와 약간 다르다. 답요낭價湘議)은 수(隋)나라 말엽에 생겨났다. 수(隋)나라 말엽 하내 (河內)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의모가 추악하면서도 술을 좋아했 고 늘 낭중예阿中)이라 스스로 불렀다. 술에 취하여 돌아와서는 반드 시 그의 처를 때렸다 . 처는 미색이었고 노래를 잘 하였는데, 원망하 고 괴로워하는 말을 했다. 하삭(河朔)에서는 그 노래를 연출하고 악 기로 그것을 반주하며, 그 남편의 모습을 형용하였다. 처는 슬픔을 호소할 적에 늘 그녀의 몸을 혼들었기 때문에 답요낭頃瀋~娘)이라 부 르게 되었다. 근래의 배우들은 그 제도를 고쳐서 옛날 뜻과는 다르게 되었다 .67)

67) 면罰『書 』 여株값良生于隋末河內. 河內有人, 稅惡而璃酒, 常自號郞中. 醉 歸,必歐其妻.其妻美色善歌,爲怨苦之辭. 河朔演其聲,而被之管鉉, 因寫 其夫之容 . 妻悲訴, 每描頓其身,故號踏描娘. 近代優人改其制度, 非 舊 旨 也.〉

『통전(通典)』의 기록과 매우 비슷한 내용이다. 다시 『악부잡록 偶罪禪)』 「고가부(鼓架部)」에는 또 다른 기록이 있다. 〈 소중랑(蘇中郞) 〉 ; 후주(後周)의 선비 소파(蘇砲)는 술을 좋아한 나머지 건달이 되어, 스스로 중랑(中郞)이라 불렀고, 노래 판이 있으 면 언제나 곧 들어가서 홀로 춤을 추었다. 지금 놀이를 하는 사람은 붉은 옷을 입고 모자를 썼으며 얼굴은 새빨갛게 칠했는데, 그가 취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답요낭價瀋~娘)이 있게 되었다. 68)

68) 『 樂府雜錄』 여辰中郞, 後周士人蘇砲, 濬酒落魄, 自號中郞. 每有歌場, 輯 入獨舞. 今爲 m, 著排, 戴幡, 面正赤 , 皆狀其醉也. 卽有踏描娘. >

임반당(任半塘)은 『 당희롱 傅戱 弄) 』 6 에서 여기의 소중랑(蘇中郞) 은 답요낭倻描娘)과 다른 별개의 〈 가무희 〉 라고 주장하였다. 그러 나 『 구당서 (舊唐 書 )』 「악지 (樂志)」에서 〈 근래의 배우들이 그 제도 를 고쳐서 옛날 뜻과는 다르게 되었다〉 하였으니, 대체로 같은 〈답요낭〉이 때와 장소에 따라 여러 가지 디른· 모습으로 상연되었기 때문에 생긴 차이로 보아야 할 것이다. 『태평어람伏: 平 御 覽 ) 』 권 573 에든 『 악부잡록 』 을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내용이 『 구당 서 』 에 가까운 것울 보면 판본에 따른 차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세 가지 기록을 견주어 보면, 우선 이 〈 가무희〉의 발생시대 가 서로 다르다. 북제 (北齊) • 수말(隋末) • 북주(北周)의 차이가 있 으나 대체로 북조(北朝)시대에 생겨난 것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 답요낭璋諾娘)〉과 〈 답요낭璃描娘)〉으로 다르게 쓴 것은 〈답요障諸)났근 〈춤추면서 노래한다났근 뜻을 담은 것이고, 〈답요 偉楠)冷 〈그의 몸을 혼들며〉 비소(悲訴)했다는 데서 붙여전 이름 이다. 또 스스로 〈낭중偵阿中)〉이라 부론 것이 〈 중랑(中郞)〉으로 바 뀐 것은 전해지는 과정에서 생긴 착오일 것이다.

69) 『唐戱弄』 (1985, 作家出版社) 下冊 , 三. 劇錄 七. 蘇中郞 참조.

어떻든 이 〈가무회났근 〈주먹코〉 70) 가 달린 〈추악한 모습〉의 남편 이 걸핏하면 술을 마시고 취하여 자기 처를 때리는 내용이다. 이 남편은 스스로 낭중예阿中)이라 부르면서 하는 일 없이 술주정이나 하며 지내는 건달이다• 반대로 그의 처는 아름답고 노래를 잘 하는 데, 남편이 때리기만 하면 이웃 사람들에게 슬픔을 호소한다. 남 편은 술에 취하여 까닭도 없이 자신의 처를 때리는 과정에서, 우쓰二 꽝스러운 동작과 춤으로 사람들을 웃겼을 것이다. 남편에게 얻어

70) 따〉의 〈胞났근 『 玉篇』에 의하면 (ffij療〉, 『廣韻』에서는 漁i上 氣 〉라 하 였다 . 얼굴에 종기 같은 것이 난 것인데, 는 〈종기가 난 코〉이니, 〈주먹코녔t 가리키는 듯하다.

맞는 처는 괴롭고 억울한 처지를 춤과 노래로 표현하여 사람들의 동정을 사면서 그의 노래에 함께 화창(和唱)하도록 만들었던 듯하 다. 간혹 술주정뱅이 혼자 나와 춤추고 노래하며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소중랑(蘇中郞)과 같은 경우도 있고, 전당포까지도 등장하는 많은 변화를 지닌 〈답요낭〉도 있었음이 분명하다. 슬픔과 억울함을 〈호소〉하고 〈괴로움쳐t 말하는 과정에 설백 (說 臼), 곧 대화도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주먹코〉에 〈흉악 한 모습〉에다 술취한 〈새빨간 얼굴났t 하기 위해서, 가면을 썼을 것이다. 왕국유(王國維)는 『고국각색고(古劇脚色考)』의 부록 「도면 고(塗面考)」에서 소중랑(蘇中郞)의 붉은 얼굴울 도면 (塗面)이라 하 였고, 임반당(任半塘)은 『당희롱情戱弄)』 삼(三) 「극록®圈:)」 답 요낭璋諾娘)에서, 정전탁(鄭振鎔)이 『문학대강(文學大綱)』 17 에서 〈난릉윙 0 ( 蘭陵王)〉과 함께 〈답요낭났t 모두 〈가면희〉라고 한 의견을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송(宋) 이전의 〈가무회났근 〈가면희〉가 주 류를 이루었음을 생각할 때, 이것들도 모두 가면놀이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것이다. 2) 난릉왕(蘭陵王) 〈난릉왕(蘭陵王)只본 〈대면난面)〉 또는 〈대면(代面)〉이라고도 불 렀다. 최령홈(崔令欽)의 『교방기 (敎坊記)』에 다음과 감은 기록이 있다. 대면 U面 )은 북제(北齊)에서 나온 것이다. 난릉왕(蘭陵王) 장공 (長恭)은 성격이 대담하고 용감하였으나, 모습이 부인과 같아, 스스 로 적군을 위압할 수 없다고 여기고는 곧 나무를- 깎아 가면을 만들어 가지고 진지 (陣地)에 나가서는 그것을 썼었다. 그래서 이 늘이가 이 루어졌고, 또 가곡으로도 불리워졌다. >71 )

71) 『敎坊記』 선通面, 出自北齊, 蘭陵王長恭, 性騰勇而접았춥婦人, 自媒不足以 威敵 乃亥I~假面, 臨陣著之. 因爲此戱, 亦入歌曲. >

『 구당서 (舊唐 音 )』 권 29 「음악지 (音樂志)」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 이 있다. 대면 (代面)은 북제 (北齊)에서 나왔다. 난릉왕(蘭陵王) 장공(長恭) 은 용감한 재질을 지녔지만 얼굴이 아름디워서 늘 가면을 쓰고 적과 싸웠다. 일찍이 주(周)나라 군대를 금용성 (金塘城) 아래에서 친 일이 있었는데, 용감하기가전군의 으뜸이었다. 제(齊)나라사람들은그를 장하게 여기고 이 춤을 만들어, 그가 지휘하며 치고 찌르는 형용을 나 타내었고, 그것을 〈 난릉왕임진곡(蘭陵王入陣曲) 〉 이라 불렀다. 72)

72) 먀書 』 〈代面出於北濟, 蘭陵王長恭才武而面美, 常著假面以對敵. 當 擊 周師金塘城下, 勇冠三軍.齊人壯之,爲此舞,以勅其指揮擊刺之容,謂之蘭 陵王入陣曲.〉

『악부잡록』 「고가부(鼓架部)」에도 〈희유대면倻頃代面)〉 하고 위 와 비슷한 기록이 있는데, 끝머리에 〈놀이하는 사람은 자색 傑色) 옷을 입고, 금띠를 둘렀으며, 채찍을 들었다〉 73) 라고 하였다. 『 북 제서 (北齊 書 ) 』 권 11 「난롱무왕효관전 (蘭陵武王孝瑾傳)」에도 난릉왕 (蘭陵王)의 전기에, 그가 가면을 쓰고 금용성 (金塘城) 아래에서 주 (周)나라 군사들을 크게 무찌른 경위가 보다 자세히 기록되어 있 고, 이 위대한 승리를 기리기 위하여 군인들이 난릉왕임전곡(蘭陵 王入陣曲)을 부르게 되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73) 『樂府雜錄』 따, 衣紫, 膜金, 執腹也. >

어떻든 〈난릉왕 X 는 〈자포傑湘)를 입고 금띠를 두르고 채찍을 든〉 장군이 부하를 〈지휘하며〉 적을 〈치고 무찌르는 모습을 형용 한〉 〈가무회〉였다. 여기에 쓰인 주제음악을 〈난릉왕임전곡(蘭陵王 入陣曲)〉이라 하였고, 장군이 썼던 가면이 크고 위엄이 있는 것이

어서 〈대면 U 面)〉이라고도 부론 듯하다. 〈대면(代面)〉이란 말은 가면이나 비슷한 말로 쓰인 듯하다. 그리고 이 〈난릉왕녔는 〈답요 낭〉과 함께 당傅:)대에까지도 계승되어 더욱 성행하고 발전하였 다. 3) 안악(安樂) 『구당서 (舊唐書)』 권 29 「음악지 (音樂志)」에는 〈안악(安樂)〉에 대 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안악(安樂)이란 후주(後周)의 무제 (武帝)가 제 (齊)나라를 평정하고 지은 것이다. 춤의 행렬이 방정한 것은 성곽을 상징한 것이어서 주 (周)나라에서는 성무(城舞)라 불렀었다. 춤추는 사람은 80 명으로 나 무를 깎아 가면을 만들어 개 주둥이에 짐승 귀를 달고, 금으로 장식을 하고, 실을 늘어뜨려 머리를 만들었으며, 화려한 짐승가죽 모자를 쓰 고 춤을 추는 모습은 또한 서쪽 오랑캐의 모양을 했었다. 74)

74) 면唐書』 〈安樂者, 後周武帝平齊所作也. 行列方正, 象城郭, 周世謂之城 舞.舞八十人,刻木爲面,狗喝獸耳,以金飾之,垂線爲矣,畵撲皮轄,舞 踏姿制, 猶作先胡狀. >

이 곳에는 고사 성분이 매우 적으므로 〈가무회〉라 할 수는 없는 춤이다. 원Gt) 마단립(馬端臨)이 지은 『문헌통고(文獻通考)』 권 145 에서는 이를 〈영안악(永安樂)〉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그러나 80 명의 사람들이 모두 가면을 쓰고 춤을 추었으니, 그 시대에 가 면무 또는 가면회가 상당히 유행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위서 (魏書)』 권 109 「악지 偶誌)」에는 이런 기록이 보인다. 처음에 고조(高祖)가 회 (淮) • 한(漢)지역을 토벌하고 세종(世宗)이

수춘( 壽 春)을 평정했을 때 그 곳의 성기 (聲使)들도 거두어들였다. 강 좌(江左)에 전해지던 중원의 옛 악곡인 명군(明君) • 성주앤!主) • 공 막(公莫) • 백구(白鳩) 갇은 종류들과 강남(江南)의 오가(吳歌)와 형 초(荊楚)의 사성 (四聲)을 전체적으로 청상(淸商)이라 불렀다. 전정 奭)에서 잔치를 벌일 때면 이들을 아울러 연주하였다. 75)

75) 『魏 書』 여議祖討淮漢, 世宗定 壽 春, 收其聲使. 江左所傳中原舊曲, 明 君 간距1: • 公莫 • 臼鳩之屬, 及江南吳歌, 荊楚四聲,總謂淸商. 至於殿庭妻 案, 兼奏之.〉

이상을 보면 앞에서 소개한 〈 가무희〉인 왕명군(王明君) • 공막무 (公莫舞) • 백구무(白鳩舞) 등과 오가(吳歌) 등이 여전히 계승되어 연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실제로 〈 안악 〉 과 아울러 볼 때, 북조(北朝)의 궁중에서도 여러 가지 〈가무희〉가 연출되고 있었 던것이다. 4) 민간의 〈가무희〉 『북사(北史) 』 권 77 「유욱열전 (柳或列傳)」을 보면, 근래에 정월 보름이면 사람들이 서로 다두어 각저희 慣抵戱)를 하며 재력을 낭 비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를 없애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유욱(柳 或)이 상주辻奏)를 하고 있다. 제가 보건대 서울에서부터 바깥 고을들에 이르기까지 늘 정월 보름 밤만 되면 사람들이 길과 골목을 가득 메우고, 온 세상이 요란하게 북 을 치며 횃불로 땅을 밝히고서, 사람들이 짐승 가면을 쓰고 남자들이 여자 옷을 입고 나와 창우잡기 (借優雜使)를 하며 이상한 모양으로 괴 상한 짓들을 합니다. 76)

76) 『北史』 〈萩見京邑, 愛及外州, 每以正月望夜, 充街塞距,鳴鼓話天, 燒短 照地, 人戴獸面, 男爲女服, 偏優雜使,腕狀異形. >

『북제서 (北齊書)』 권 37 「위수전 (魏收傳)」에도 위수 (魏收)는 〈 성 악(聲樂)을 좋아하고 호무(胡舞)를 잘 추었고, 문선제 (文宣帝)의 말년 (599) 에는 자주 동산(東山)에서 여러 배우들과 원숭이와 개가 싸우는 놀이를 하였다〉 77) 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의 원숭이와 개도 가면을 쓴 사람이 연출한 것이었을 것이다. 북조(北朝)에서는 가면 희와 창우잡기 (借優雜使)가 궁전은 물론 민간에서도 상당히 유행하 였음을알수있다.

77) 『 北齊害』 〈收 …… 好聲樂,善胡舞. 文宣末, 數於東山與諸優爲彌換與狗 鬪〉

북조(北朝)에 와서는 호악(胡樂)과 호무(胡舞)를 비롯한 의국 음 악과 춤이 더욱 많이 들어왔던 듯하다. 『수서 (隋書)』 권 15 「음악 지 (音樂志)」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太平廣記』 권 569 에 『後魏書』와 비슷한 글을 인용하고 있음) . 〈서량(西涼)〉이리는 음악은 전진(前秦) 말엽 (394) 에 여광(呂光) • 저거몽손(沮渠蒙遜) 등이 양주(涼州)를 점령했을 때에 구자(龜鉉)의 음악을 변개하여 만든 것이며, 〈전한기 (秦漢使)〉라고 불렀다. 위 (魏) 나라 태무제 얹逐武帝)가 하서 (河西)를 평정하고 그 음악을 얻어 〈서량 악(西涼樂)〉이라 불렀다. 위 (魏) ·주情])나라 무렵에는 마침내 그것 울 〈국기 (國使)〉라 불렀다. 지금 곡조의 …… 등의 악기는 모두 서역 에서 나온 것이니, 중국의 옛 악기가 아니다. 〈양택신성(楊澤新聲)〉 〈신백마(神白馬)〉 같은 것들도 호융(胡戒)에게서 나온 것이다. 호융 의 노래는 …… 그 가곡에 영세악(永世樂)이 있고, 해곡(解曲)에는 만세풍(萬世豊)이 있으며, 무곡(舞曲)에는 우전불곡(于闇佛曲)이 있 다 .78)

78) 『隋書』 @§涼者, 起符氏之末, 呂光· 沮渠蒙遜等, 撮有涼州, 變龜鉉聲爲 之,號爲秦漢使.魏太武銃平河西得之,謂之西涼樂.至魏周之際,遂謂之國 使. 今曲 …… 之徒, 並出自西域,非華夏舊器. 楊澤新聲 • 神白馬之類, 生

於胡戒. 胡戒歌 …… 其歌曲有永世樂, 解曲有萬世豊, 舞曲有于閣佛曲. >

위에 보인 〈서량녔는 남조의 〈상운악u. 雲 樂)〉 및 당나라의 〈서량 기 (西涼使)〉와도 관계가 있는 가무회인 듯하며, 그 밖에 〈양택신 성〉이나 〈신백마〉와 〈우전불곡 〉 도 가무회였을 가능성이 질다. 그 리고 이들 호융(胡戒)의 오랑캐음악은 북조의 가무희 발전에 크게 공헌한 듯하다. 이로부터 중국음악에 큰 영향을 끼친 〈구자(龜鉉)〉 는 후량(後激 386-403) 의 여광(呂光)이 구자(龜鉉)를 멸망시키고 얻은 음악인데, 사라졌다가 후위 (後魏) 때 중원 (中原)을 평정한 후 에 다시 얻었고, 그 뒤로 그 음악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하였 으며 ,79) 다시 그 시대에 깅국康國) ·소록떠瑾力) • 안국(安國) 등의 음악이 수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80)

79) 『 隋書』 〈龜鉉者, 起自呂光減龜鉉, 因得其聲. 呂氏亡, 其樂分散, 後魏平 中原, 復獲之.〉 80) 멤璃書』 권 29 「樂志」에도 이와 비슷한 西涼樂 • 龜炫 • 疏勒 • 安國 • 康 國 • 北秋樂 등이 그 무렵 들어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5) 불교와 호악(胡樂) 『수서 (隋書)』 권 15 「음악지 (音樂志)」를 보면 〈천축 (天笠) 〉에 대 하여 다음과 갇이 기록하고 있다. 천축(天空)이란 장중화옌봉, 前 임금 )81) 가 양주(涼州)를 차지 하고 있을 때 네 종류의 언어의 통역을 거쳐 바쳐진 남기 (男使)로서, 천축(天空)은 바로 그 음악이다. 가곡闇k 曲)에는 사석강(沙石疆)이 있었고, 무곡(舞曲)에는 천곡(天曲)이 있었다 .82)

81) 張華는 前涼 임금 張駿의 둘째 아들로 서기 346 년부터 353 년 사이 涼 王노릇울하였다• 82) 『隋書』 연손핍t, 起自張重華操有涼州, 重四譯來貢男使, 天空卽其樂焉. 歌有沙石疆, 舞曲有天曲. >

이에 의하면 남북조(南北朝)시대에는 불교가 성행하였을 뿐 아니 라 인도의 음악과 춤도 함께 들어왔음을 알게 된다. 그 밖에도 북위 (北魏)의 양현지 (楊衛之)가 지은 『낙양가람기 (洛 陽伽藍記)』를 보면 불교사원에서 행하여전 행사에는 여러 가지 가 무와 잡희가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권 1 의 건중사 遷中寺)에서는 4 월 4 일 석가모니의 불성을 밖으로 내올 때 〈사악 함을 물리치는 사자가 춤을 추면서 그 앞을 인도하며, 탄도(香 刀) • 토화(吐火) 같은 재주가 한 편에서는 요란하게 펼쳐지고, 채 당(採鐘) ·상색辻索) 같은 특이하고 괴상한 재주도 연출되며, 기 이한 재주와 특이한 의복이 전 도시에서 으뜸갔었다〉 83) 라고 하였 고, 경락사(景樂寺)에서는 대재 O 還f) 때 여악(女樂)을 벌였던 광 경, 소의니사(昭儀尼寺)에서는 대단히 성대한 기악(使樂)이 연출되 었던 일들이 기록되고 있다 .84) 그 밖에 권 2 의 종성사(宗聖寺)에서 는 〈묘기잡악(妙使雜樂)〉의 연출에 관한 기록이 보이고, 권 5 의 선 허사(禪虛寺)에서는 저각희 馮角戱)의 연출에 대한 기록 등아 보인 다. 다시 운강석굴(雲岡石窟)이나 용문석굴(龍門石窟)과 여러 지방 의 출토벽화 등에는 북위 (北魏)를 중심으로 한 시대에 만들어진 춤 울 추는 멋진 비천(飛天)의 조각 등이 적지 않다. 이에 의하면 이 시대의 불교사원은 여러 가지 가무와 잡희 연출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던 듯하다. 다시 말하면 불교는 남북조시대부터 가무회나 여 러 가지 곡예 및 잡희 같은 민간연예의 발전에 큰 뒷받침이 되고 있었다고볼수있다.

83) 『洛陽伽藍記』 권 1 병沖寺」 〈四月四日, 此像(釋迪)常出, 群邪師子, 導 引其前, 香刀吐火, 騰壤一面, 採幡上索, 說孟不常,奇使異服, 冠於都市. > 84) 『洛陽伽藍記』 권 1 「景樂寺」 여訪난여운, 常設女樂, ……> 며彌傾芸寺」 〈使樂之盛, 與劉騰相比. >

6) 백희(百戱) 그 밖에 북조에서도 백희 (百戱)가 여전히 성행되고 있었다. 『위 서 (魏書)』 권 109 「악지 (樂志)」를 보면 도무제 (道武帝) 때의 다음과 같은기사가있다. 천흥(天興) 6 년 (403) 겨울에 태악(太樂)에 명을 내리어 고취 (鼓 吹)를 총괄하여 정리하고 잡기(雜使)를 증수(增修)케 하여, 오병(五 兵) • 각저 (角紙) • 기린 ~) • 봉황馮凰) • 선인 (仙人) • 장사(長蛇) • 백상(白象) • 백호(白虎) 및 여러 의수(長獸) • 어룡(魚龍) • 벽사(群 邪) • 녹마선거 얘馮仙車) • 고환백척 (高經百尺) • 장교(長趙) • 연장(緣 槿) • 조환(挑丸) • 오안(五案)을 만들어 백희롤 갖추었다. 큰 잔치를 베풀고 그것들울 전정 偶函흐)에서 연출하니 한(漢) • 전 (晉)대의 옛날 과 같았다. 태종 8: 宗) 초년 (409) 에 또 그것을 증수(增修)하여 대곡 伏曲)도 여기에 맞추어 합치고 종과 북의 절주를 바꾸어 놓았다. 85)

85) r 魏書』 선랜믿 …… 六年冬, 語大樂, 總章鼓吹,增修雜使, 造五兵 • 角 抵 .... 鳳凰·仙人·長蛇•白象·白虎及諸長獸•魚龍·群邪•鹿馬仙車· 高維百尺 • 長趙 • 緣槿 • jJk丸 • 五案:, 以備百戱. 大빛, 設之於殿庭, 如漢晉 之舊也. 太宗구]J, 又增修之, 撰合大曲, 更爲鐘鼓之節.〉

북위 (北魏)에서의 〈백희〉의 성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위서』 권 心 1 「공종기 (恭宗紀)」에 〈또 술을 마시고 〈잡회녔t 하며, 근본 이 되는 일은 버리고 장사나 하는 일들을 금하였다. 〉 86) 라고 한 것 도 〈잡희〉의 성행을 방중하는 것이다.

86) 『魏書』 0 여禁飮酒雜裁, 棄本治販者. >

제 5 장 수당(隋唐)의 〈가무희〉 589-906 1 수대의 〈가무희〉 수(隋)나라는 문제 改帝) 양견(楊堅)이 나라를 세운 뒤 (581) 천 하를 통일하기는 하였으나, 곧 618 년에 당(唐)나러에 의해 망해 버린 나라이다. 천하를 다스린 기간은 짧았으나 수나라는 남북조. (南北朝)시대의 〈가무회〉와 <~:§1)-를 종합 계승하여 당대에 이룩된 눈부신 발전의 터전을 마련한 시대이다. 1) 칠부악(七部樂) 구부악(九部樂) 『수서 (隋書)』 권 15 「음악지 (音樂志)」를 보면 개황(開皇, 589 -600) 초기의 칠부악(七部樂) 1) 과 대업 9 책옹)년간 (605-616) 의 구부 악(九部樂 )2) 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이들 중에는 〈가무희〉도 상당히

1) 『隋書』 〈七部樂, _曰國使, 二曰淸商使, 三曰高麗使, 四日天쁘使, 五曰 安國使, 六曰龜炫使,七日文康使. > 2) 『隋書』 여掃乃定淸樂 • 西涼 • 龜鉉 • 天空 • 康國 • 疏勒 • 安國 • 高麗 • 禮畢,

以爲九部.〉

많은 분량이 포함되어 있었다. 〈칠부악〉을 설명한 뒤에 우홍(牛弘, 545-610) 의 요청으로 비 (¥It!) • 탁(舞) • 건 (市) • 불(t ~B) 의 네 가지 춤을 새로운 기악(使樂)들과 함께 연출토록 하였다는 기록을 적고 있다 .3) 그 중 비무(牌舞)에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한나라 때의 파 유무(巴漁舞)와 관동유현녀 (甘鬪東有贊女)가 들어 있고, 건무(市舞)에 는 홍문연(鴻門妻)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한 공막무(公莫舞)가 들어 있다. 〈칠부악〉 첫머리의 국기 (國使)는 구부(九部)의 서량(西涼)을 북조(北朝) 때에 부르던 이름으로, 4) 거기에 호융(胡戒)에서 생겨난 양랙신성 (楊澤新聲)과 신백마(神白馬) 같은 종류가 있다고 한 것 은 ,5) 뒤에 거기에 쓰인 가곡연k 曲)과 무곡(舞曲)은 따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6) 임반당(任半塘)이 『당희롱傅戱弄)』에서 상상 한 것처럼 〈가무희〉의 이름일 가능성이 많다. 7)

3) 『隋書』 (.其後牛弘請存牌 • 鎔 • 市 • 掃等四舞· 與新枝竝陳. > 4) 『隋書』 선§涼樂, 至魏 • 周之際, 遂謂之園使. > 5) 『隋書』 〈楊澤新聲 • 神白馬之類, 生於胡戒. > 6) 『隋書』 션§涼者, ... … 其歌曲有永世樂, 解曲有萬世豊, 舞曲有于閣佛曲. > 7) 『唐戱弄』 第 1 章 總說 三. 潮源 (己)隋 및 第 3 章 劇錄 10. 神白馬 참조.

칠부악의 두 번째 청상기 (淸商使)는 구부(九部)의 청악(淸樂)인 데, 〈그 가곡微曲)에는 양반(陽伴)이 있고, 무곡(舞曲)에는 명군 (明君) • 병계 (井契)가 있다〉 8) 고 하였다. 명군(明君)이 왕소군(王昭 君)의 이야기를 연출한 〈가무희〉적인 춤이니, 병계 (井契)도 〈가무 희〉였을 가능성이 많다.

8) 『隋書』 (.其歌曲有陽伴, 舞曲有明君 • 井契. >

다시 칠부악 • 구부악에 모두 구자기 (龜鉉使)가 보이는데 , 수대에 와서 서국구자(西國龜炫) ·제조구자(齊朝龜鉉) ·토구자(土龜鉉)의 삼 부(三部)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악정 偶묘:) 백명달(白明達)로 하여금 새로운 음악을 작곡게 했는데, 그 중의 칠석상봉악(七夕相

逢樂) ·옥녀행상(玉女行熊) ·신선류객 (神仙留客) 성 1 전속명 (鄕碑組命) 동은 분명한 고사(故 事 )가 있어 〈가무회 〉 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9) 다시 구부(九部) 끝머리의 예필여擇 : )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문강악(文康樂)이라고도 부르며, 전(晉)나라 유량慣琉尹)의 집 안에서 나온 〈가무회〉이다•

9) 任半塘은 『 唐戱弄 』 第 1 章 三. 潮源 (己) 隋 에서 뒷부분의 세 가지 악곡을 들어 분명한 故事 가 있는 歌舞라 설명하고 있다.

2) 창우노잡 (1 昌優援雜) 수나라는 〈가무희淸녓만 아니라 남북조(南北朝)시대의 온갖 가무 와 잡희를 모두 계승하여 크게 발전시켰었다. 『수서 (隋 書 ) 』 권 13 「음악지 (音樂志)」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양제 (楊帝)는 뽐내고 사치하며 음란한 곡을 늘 즐겼다. 어사대부 (御史大夫)인 배온(裝羅)이 황제의 속뜻을 헤아려 가지고 남북조(南 北朝) 나러들의 악공자제 偶紅汗弟)와 민간의 음악을 잘 하는 사람들 300 여 명을 모아들여 모두 태악얹遷옹)에 소속시켰다. 창우(偶優)와 노잡 (ft) 10) 이 모두 모여들였다. 그 슬픈 가락과 새로운 곡조, 음란 한 선율과 교묘한 소리는 모두 업성 (鄭城) 아래에서 나온 북제 (北齊) 의 구곡( 舊 曲)이었다 .11)

10) 『禮 記』 「樂記」의 〈優雜子女〉 注 〈榎, 種族也. 言舞者如獨狼戱也. > 11) 『隋 書』 야辭奭, 顔玩埋曲, 御史大夫裝墓, 描知帝情, 奏括周 거북 • 梁 • 陳樂工子弟, 及人間善聲調者, 凡三;百餘人, 竝1 士太樂. 偏優優雜, 咸來 莘止. 其哀管新聲, 浩弦巧奏, 皆出鄒城之下, 高齊之 舊 曲云. >

여기의 〈창우(偶優)와 노잡(邊雜) X 본 〈가무희 져본만 아니라 〈백 희〉까지도 다 포함되는 것이다. 『수서』 권 3 의 「양제기 (揚帝紀)」에 는 대업 伏菜) 6 년 (610) 에 〈단문가(端門街)에서 각저대희 慣抵大

戱)를 하였는데, 천하의 기이한 기예(使藝)들이 모두 모였었다〉 12) 라는 기록이 보이고, 『북사(北史) 』 의 권 74 「배온전(裝墓傳)」에는 〈황제의 뜻을 헤아려 가지고 남북조(南北朝) 나라들의 악가자제 像옹 家子弟)들을 모아들여 …… 모든 음악을 잘 하거나 창우({副 I) 백 희를 잘 하는 사람들 모두 태상伏常)에 소속되었다. 이뒤로 기이 한 재주와 음란한 음악이 모두 악부傑府)에 모였다 〉 13) 라고 하였으 며, 『수서』 권 15 「음악지 (音樂志)」에도 〈그리고 천진가(天津街)에 서 백희를 성대히 벌였는데, 천하의 모든 기이한 기예 (使藝)가 모 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14) 라고 하였다.

12) 『隋 書』 @抵大戱於端門街, 天下奇使異藝畢集. > 13) 『北史 』 〈描知帝 意 , 奏括天下周 • 齊 다fl: • 陳樂家子弟. …. .. 凡庶有善音 樂{립 憂 百m , 皆直太常. 是後異技浩聲, 咸莘樂府• > 14) 『 隋 書』 〈及於天津街盛陳百戱, 自海內凡有奇使, 無不總莘. >

사마광(司馬光, 1019-1086) 의 『통감(通鑑)』에도 수양제 (隋湯帝) 때에 성행한 산악(散樂)에 관한 기록이 몇 군데에 보인다. 권 180 에는 대 업 伏業) 2 년 (606) 9 월조에 〈본시 제온공 (齊溫公, 高緯) 때 에 어룡(魚龍)·산거(山車) 등의 희~ 그것울산악 (散樂)이라 하였다〉 15) 라는 설명을 한 뒤

15) 『 通鑑 』 (tl), 齊溫公之世, 有魚龍山車等戱, 謂之散樂. >

태상소경 앉溝少卿) 배온(裝鉉)이 황제의 뜻에 맞추기 위하여 온 천하의 남북조(南北朝) 여러 나라의 악가자제 偶용家子弟)들을 모아 모 두 악호맹任)로 삼고, 육품(六品) 이하 서인 (庶人)에 이르는 자들로 음악을 찰 하는 사람들을 모두 태상 8: 常)에 소속시킬 것을 아뢰었 다. 황제가 그 말을 따르니 사방의 〈산악 〉 아 크게 동경 (東京)으로 모 여들었고, 그것들을 방화원 (芳華苑)의 적취지 (積琴池) 결에서 연출케 하였다 .16)

16) 『 通鑑 』 성常少卿裝慕希旨, 奏括天下周 • 齊 • 梁 • 陳樂家子弟皆爲樂戶,

其六品以下至庶人, 有善音樂者, 皆直太常. 帝從之, 於是四方散樂大集東 京, 問 -華 苑 積 琴池側. >

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업 3 년 7 월조에도 양제가 성동(城東)에서 〈산 악 〉을 연출케 하여, 여러 오랑캐둘을 놀라게 하며 줄기었다는 기록이 있고, 17) 권 181 대업 6 년 (610) 2 월조에도 〈 남북조 여러 나 라들의 〈 산악났t 모아 모두 태상앉:常)에 배치시켰고, 모두 박사 (博士)와 제자(弟子)를 두어 서로 전수케 하니 악공偶虹:)이 3 만여 명에 이르렀었다〉 18) 라는 기록도 보인다.

17) 『 通鑑 』 〈帝於城東供次帳, 備儀衛, 案啓民及其部落, 作散樂, 諸胡該稅. > 18) 『 通鑑 』 여申, 以所徵周 • 齊 • 梁 • 陳散樂恐配太常, 皆置博士弟子, 以相 傳授, 樂工至三萬餘人. >

다시 『 태평광기 8 平廣記) 』 권 226 에는 『 대업습유단정봐沮 : ) 』 를 인용한 『 수식도경 (水飾圖經) .!I 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다 . 『 수식도 경』은 양제 때의 학사(學士) 두보(杜 寶 )가 지은 책인데, 3 월 상사 U:.巳)날에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곡수(曲水)에서 연출한 수식 (水飾)에 관한 내용을 쓴 15 권으로 이루어전 책이다. 우선 신귀 (神 龜)가 팔괘 (八卦)를 짊어지고 황하頃河)로부터 나와 그것을 복희 씨 (伏 義 氏)에게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큰 고래가 배를 삼키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모두 72 세 (勢)의 물 속 또는 물가에서 일어났 던 일들을 곡수(曲水)에서 차례로 연출하는데, 나무를 깎아 만든 모든 인형과 여러 짐승들이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만들어졌 었다고한다. 그 밖에 열두 척의 기항徵航)이 수식 (水飾) 사이룰 누비고 다니 는데, 그 배에는 경종璃鐘)과 쟁슬(答瑟) 등을 연주하는 나무인형 과 조검 (挑劍) • 무륜(舞輪) • 승간(昇半) • 척승還繩) 등 〈백희녔t 연출하는 인형들이 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술통을 실은 작은 배를 니무인형들이 짓고 다니며 곡수(曲水)가 곳곳에 앉아 있는 손

님들의 술잔에 술을 따라 권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것들 모두 황곤(黃哀)이란 사람의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라 하는데,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교가 크게 필요한 것이다. 어떻 든 이 기록은 수(隋)대에는 인형극인 괴뢰희 (健f副設)의 기교가 극 도로 발달한 것 의에 가무와 〈백희〉도 매우 성행되었음을 점직케 하는 기록이라 할 것이다. 『수서』 권 62 「유욱전(柳稙傳)」을 보면 유옥-이 황제에게 울린 글 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제가 보건대 서울에서부터 바깥 고울에 이르기까지 늘 정월 보름날 밤이 되면 길가와 거리를 메우고 무리지어 놀이들을 하는데, 북소리 가하늘을소란스럽게 하고횃불빛이 온땅위를비추게 하고서, 사람 둘은 짐승가면을 쓰고 남자가 여자옷을 입고 창우(借優)와 잡기 (雜 技)의 온갖 괴상한 모양을 다 연출합니다. 지저분한 짓을 기쁨과 즐 거움으로 삼고 야비한 행동으로 웃음과 즐김을 삼으며, 안팎이 함께 보면서도 서로 피하지도 않는 실정입니다. 19)

19) 『隋書』 〈萩見京邑 愛及外州, 每以正月望夜, 充街塞距, 緊戱朋遊 . 鳴鼓 話天, 僚姬照地, 人戴獸面, 男爲女服, 偶優雜技,說狀異形. 以穆錢爲歡 誤, 用郞甄爲笑樂, 內外共觀, 曾不相避. >

이에 의하면 전국의 민간에도 가면놀이를 중심으로 하는 〈가무 희〉와 여러 가지 〈잡회〉가 성행되었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수나 라는 이전의 남북조시대의 〈가무희녔卜 계승 발전시켜, 그것을 당 (唐)나라로 전승시켜 준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당대 〈가무희〉의 대체적 상황 1) 가무잡희의 성행 당대는 바로 전대의 수(隋)나라를 이어받아 처음부터 가무잡희 倻稽)가 성행하였다. 처음 고조(高祖, 618-626 년 재위) • 태종 伏宗, 627-649 년 재위)시대만 하더라도 수나라로부터 전해지는 지 나친 놀이들을 자제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 20) 그러나 당나라 의 기틀이 안정된 뒤로부터 〈가무희〉가 더욱 큰 발달을 이루게 된 다.

20) ll,斤唐書』 卷 2 「禮樂志」 〈隋樂每奏九部樂終, 輔奏文康樂, 一曰禮畢, 太 宗 1 法之, 其後遂亡. 及平高昌, 收其樂.〉 卷 103 f1;탉제叫專」 G 탉犬 伽, …… 高祖武德孤 上言三事, …… 其二, 百戱散樂, 本非正聲, 隋末始 見崇用,此謂浩風,不得不變.近太常假民梧檔五百稱,以衣技工,待玄武門 游戱. >( 『唐會要』 卷 34)

『당서 唐書)』만 보더라도 당나라시대에 산악백희 (散樂百戱)가 성 행하였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구당서 (舊唐 書)』 권 34 「학처준열전(那處俊列傳)」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상원 다:JG) 원년 (674) 에 고종 (高宗) 이 함원전 (含元殿) 동쪽 상란 각(翔鷲閣)에 나가서 대보난:師)를 구경하였다. 그 때 서울의 네 현 倻)과 태상 8 개t)의 음악을 동서의 두 붕倻])으로 나누고, 황제는 옹왕여臼:) 현(賢)에게 동봉(東朋)을, 주왕僚 l 王) 휘 (諱)에게 서붕 (西朋)을 이끌게 하고 힘써 재주를 겨루게 함으로써 줄기었다. 21)

21) 맹唐書』 산급口랸 F, 高宗御含元殿東翔鷲閣觀大踊. 時京城四縣及太常音 樂東西兩朋, 帝令雍王賢爲東朋, 周王諱爲西朋, 務以角勝爲樂. >( 南f唐 書』 권 115, 『通鑑』 권 20)

『구당서』 권 7 「예종본기 (睿宗本紀)」를 보면, 선천(先天) 2 년 (712) 정월 보름날에 상황辻皇)께서 안복문f(安福門)으로 나가 등 불놀이를 구경하였는데, 〈들락거리는 샤람들이 서로 몸을 부비며 노래하며 춤추었고, 모든 관리들도 나와서 구경하며 온 밤을 지새 우고야 끝났다〉 22) 라고 하였으며, 〈이월달까지도 등불놀이가 이어 져 황제도 직접 연희문(延喜門)으로 나아가 등불을 구경하며 마음 껏 줄기기를 사흘 밤이나 계속하였다 〉 23) 라고 하였다.

22) 멘唐書』 〈二年春, …… 上元日夜, 上皇御安福門觀燈, 出內人連快踏歌, 縱百僚觀之, 一夜方能. > 23) 딸唐書』 〈二月 …… 皇帝於延喜門觀燈縱樂, 凡三日夜. >

이처럼 당나라 초기부터 성행한 가무잡희는 음악 황제인 현종(玄 宗, 713-755 년 재위)이 교방(敎坊)을 둠으로써 더욱 크게 발전한 다. 24) 그리고 이러한 산악잡희 (散樂雜載)는 이후로도 계속 성행된 다. 예를 들면, 대종(代宗, 763-779 년 재위) 때 국자학(國子學)에 사당(祠堂) • 논당(論堂) 등이 이루어졌을 때에도 하루종일 교방(敎 坊)의 악부잡기 偶節雜使)를 연출케 하여 즐기고 있었고, 25) 목종 (穆宗, 821-824 년 재위) 같은 황제는 늘 가무잡희를 즐기었다 .26) 이처럼 가무잡희의 성행은 궁중에서만 그치지 않고 귀족과 대신

24) l'ffi唐書』 권 22 「禮樂志」 〈玄宗 …… 及卽位, 命寧王主藩邸樂, 以亢太 常, 分兩朋以角優劣. 置內敎坊於蓬萊宮側, 居新聲 • 散樂 • 1 :M憂之使, 有諸 諒而賜金用朱紫者〉 上소 권 48 「百官志」 太樂署 〈開元二年 (714), 又置內 敎于蓬萊宮側, …… 京都置左右敎現 掌俳優雜技. 自是不隸太常, 以中 官爲敎坊使.〉 25) 면罰『書』 권 24 rd i羲志」 〈永泰二年 (766) …… 八月 , 國子學成祠堂 • 論 堂 • 六館院及官吏所居鹿宇 …… 又有敎坊樂府雜使, 意日而能. > 26) 면§唐書』 권 16 병綜존本紀」 〈二月 保캬’十五年), …… 陳俳優百戱於丹鳳 門內, 上縱觀之. 丁亥, 幸左神策軍觀角抵及雜戱, 日長而麗. …… 秋七月, …… 甲寅 街新成永安殿觀百戱, 極歡而龍. …… 長慶元年 …… 上觀雜使 於. 〉(南唐書』 권 8)

둘 사이에도 크게 퍼졌다. 『신당서 (新唐 害 )』 권 143 「고적전(高適 傳)」을 보면, 고적 (高違 702-765) 이 가서한(哥舒翰)의 군중에서는 감군제장燁軍諸將)들이 군무는 돌보지 않고 〈창우(借優)와 놀음으 로 줄기는 일〉에만 빠져 있음을 비판하고 있고, 27) 『구당서』 권 96 「송경전 (宋)」을 보면, 송경 (完景, 663-737) 의 아들 형제들이 〈모두 술 마시고 놀며 배우잡희 (俳優雜戱)를 잘 하였다〉 28) 라고도 하였다. 원재 玩載 ? 구 77) 의 부자들은 〈창우의설 (借優狼藝)의 놀 이들을 친족들과 함께 보면서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 다〉 29) 라고 하였고, 의종僚宗, 860-873 년 재위) 때의 〈여러 왕자들 은 모두 음악을 익히고 창우잡희 (偶優雜戱)를 하였으며, 천자가 그 들의 집으로 가면 곧 수레를 마중하며 음악을 연주하였다〉 30) 라고 도하였다.

27) 璋H 唐 書』 (ft.子 (玄宗)西幸, …… 翰忠義有素, 而病奪其明, 乃至荒路. 監軍諸將不愼軍務, 以偏優蒲塞相談樂. > 28) 딸唐書』 〈宋璟 …… 子潭 • 怨 …… 然兄弟盡善飮誠, 俳優雜戱. > 29) 면唐書』 권 118 「元載傳」 〈載在相位多年, …… 名妹異樂, 禁中無者有 之. 兄弟各肝技妄于室, 偶優狼藝之戱, 天倫同觀,통無情恥. >( 球利軒書』 권 145) 30) 'lJr唐書』 권 22 ljj쁩喆:」 여訪i間, 諸王多習音聲, 偏優雜敗. 天子幸其 院, 則迎驚奏樂•〉

그리고 이러한 놀이들은 민간에서도 널리 성행되었다. 『구당서』 권 45 「여복지 (輿服志)」에는 태극伏極) 원년 (712) 에 당소傅紹)가 황제에게 올린 글이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전에는 서민들의 천한 것들이 때로는 수레를 막고 술과 음식을 요구 하며 놀이룰 하고 즐겼었습니다. 요새는 이러한 풍습이 더욱 성해져 서 위로는 왕공들에 이르기까지 음악을 크게 연주하며 많은 무리들이 모여 길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31)

31) 맹唐書』 〈往者下1)1!.Jffi亂 時有障車, 遊其酒食, 以爲戱樂. 近日此風轉 盛, 上及王公, 乃廣奏꿉業 多集徒{g, 追塘道路, …… 歌舞噴繩 >( 球邱唐 書』 권 113)

이것은 결혼식 때의 놀이지만 그 밖에 〈 산악 〉 의 공연을 전문으 로 하는 유랑악인들도 많았던 듯하다. 『당회요(唐會要)』 권 34 에는 〈산악冷 공연하는 유랑악단들을 없애려는 개원(開元) 2 년 (714) 10 월 6 일에 내린 디음과 같은 칙령(勅令)이 있다. 산악(散樂)이 마을을 돌아다니는 것을 특별히 금하여 없게 하여야 한다. 만약 이를 범한 자가 있으면, 그들을 받아들인 주인과 촌정 (村 正)은 서른 대를 치고 결과를 관에 보고해야 하며, 산악인(散樂人)들 은 모두 고향으로- 돌려 보내어 중역 (重役)을 시키도록 한다. 32)

32) 『唐會要』 (lffl元二年十月六日勅 ; 散樂巡村, 特宜禁斷. 如有 1E者 , 竝容止 主人及村正, 決三十, 所由官附考奏. 其散樂人, 荀週送本貫, 入重役. >

송(宋) 왕당(王誌 1110 년 전후)의 『당어림 情語林)』 권 l 에는 헌 종(憲宗)의 원화아湘) 원년 {806) 에 고승문(高崇文)이 유벽 (劉關)의 난을 평정하러 성도(成都)에 들어 갔을 적에 우인 (俊人)이 유벽책매극(劉關責買劇)을 연출하려 하였으 나허락하지 않아모두매를맞고수자리를살러 가게 되었다 .33)

33) 『唐語林』 〈高崇文平劉關亂, 入成都, 優人擬演劉關責買劇, 不許, 竝被杖 戌.〉

라는 기록이 있다. 또 단안절(段安節)의 『 악부잡록앰額雜錄)』 「배 우(俳優)」조에 희종(僖宗, 874-888 년 재위)이 촉(蜀)에 갔었을 때 놀이하는 중에

유진(劉眞)이란 자가 있었는데, 특히 잘 하여 뒤에 황제를 따라 서울 로 들어와 교방(敎坊)에 적을 두었다. 34)

34) 『 樂 〈僖宗幸蜀時, 戱中有劉眞者, 尤有g, f亥乃隨鷲入京, 籍于敎 坊.〉

리는 기록이 있다. 다시 범터 (范提 877 년 전후)의 『 운계우의 (雲溪 友議)』 하(下)에는 헌종(憲宗)의 원화玩和) 말년 (820) 원진保;租) 이 절동(浙東)에 있을 때에 배우 주계남(周季南) • 계숭(季崇)과 처 유채춘(劉採春)이 육참군 (陸參軍)을 연출하는데 노랫소리가 구름 위로 치솟는 듯하였다. 35)

35) 『雲溪友議』 〈憲宗元和末 元積在浙東, 俳優周季南 • 季崇及妻劉採春, 弄 陸參軍, 歌聲徹雲.〉 36) 「寒食」 〈使樂州人戱, 使君心寂容. >

라는 기록도 있다. 당대에는 민간에 유랑악인들이 많았고 또 가무 와 잡희 등도 성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밖에 요합(姚合, 831 전후)의 「한식 (寒食)」 시에는 기악(使樂)을 하는 주洲) 사람들이 놀이를 하는데, 주목아|牧)의 마음은 쓸쓸하기만 하다 .36)

37) 「吳女吳」 애腦§遊江筋, 拳援看樂楠. >

고 읊고 있으며, 원전玩稿 779-831) 의 「곡녀번(突女與)」 시에서는 이리저리 강배로 노닐고, 비집고 다니며 악붕偶器})을 구경하네• 37)

38) 任半塘, 『唐戱弄j 一. 總說 六. 中唐 참조.

라는 구절이 보인다. 〈기악(使樂)〉이란 아무래도 〈가무희〉가 중심 이 되는 놀이를 뜻할 것이며, 원진의 시를 통해서 우리는 시골 곳 곳에 여러 가지 기예 (使藝)를 상연하던 악붕(樂開)이 마련되어 있 었음을알게 된다. 이를 종합하면 당나라시대에는 궁중은 물론 상류계급들로부터 아래 서민충에 이르기까지 가무잡희가 매우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 다. 2) 〈가무희〉의 성격변화 당대의 〈가무희났근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난 이후 중당(中唐, 756-835) 때에 와서 크게 성격상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본시 〈가무희冷근 난릉왕(蘭陵王) • 답요낭價瀋~) • 상운악辻雲樂) • 발두 (擦頭) 등이 보여 주듯이 성당~) 때까지만 해도 가면희가 중심 울 이루어 왔었으나, 중당 때부터는 가면희가 자취를 감추게 된 다. 중당 때의 〈가무회녔t 보면 〈서량기〉만이 가면희이고, 한세 (早稅) • 의양주(義陽主) • 유벽책매 (劉關責買) • 우호희 (優胡戱) 등 38) 모두 가면희가 아니다. 이 뒤로 만당(駒音) • 오대 (五代) • 송(宋)으 로 이어지며 〈가무희〉에서 거의 가면을 쓰지 않게 된다. 가면희가 민간의 〈나회〉로 스며들어 지금까지 각지에 전하게 되는 것도 이 때부터 시작된 경향이다. 임반당은 『당희롱情戱弄)』의 1 「총설慣 l 說)」에서 중당시기를 〈과백류(科白類)의 놀이가 공전의 발전을 이 룩한 시기〉라고 하였는데, 〈과백〉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가무倻k 舞)〉의 후퇴를 뜻하고, 또 그것은 가면의 사용문제와도 연결이 되 는일인듯하다. 후세의 중국희극에 갖추어져 있는 여러 가지 정식 (程式)도 중당

무렵에 생겨나기 시작한다. 조린頃!璟, 844 전후)의 『인화록(因話 錄)』 권 1 에는 당나라 숙종頃宗, 756-762 년 재위) 때에 연출된 가 관회 (假官戱)의 출연자 중에 〈참군장(參軍椿)〉이 있었음이 기록되 어 있는데, 왕국유(王國維)는 『고국각색고(古劇脚色考)』에서 39) 〈아 마도 이미 각색 個色)의 호칭이 있었던 것 갇다〉라고 하였다. 도종 의 (陶宗儀 1360 년 전후)는 또 『철경록(綴耕錄)』 권 25 에서 〈부정 (副淨)을 옛날에는 침군(參軍)이라 불렀다〉 40) 라고 하였으니, 표현 을 바꾸면 부정 (副淨)이란 각색이 〈참군〉에서 나왔다는 말이 된다. 만당 이상은(李商隱 813-858) 의 「교아價況)」시를 보면

39) 『古戱脚色考』 〈似已爲脚色之稱 . > 40) fffl}輿 여1Ji爭古謂之參軍. >明 朱才沮 『太和正音譜』 卷 1 에도 〈親古謂 參〉이란말이보인다.

문득 다시 참군(參軍)을 흉내내고 소리 따라 창골 (蒼鶴)을 부른다. 41)

41) re 兒」 〈忽復學參軍, 案聲吹蒼競. >

라고 하였으니, 만당 이전에 〈참군희〉에는 〈참군〉과 함께 〈창골〉 이라는 각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대 (五代)에 가서는 〈가무희〉에도 각색이 더욱 발달하여, 송 (宋) 마령 (馬令)의 『남당서 (南唐書)』 권 22 「귀명전 (歸明傳)」을 보 면, 그 때의 연희에 생 (生) • 단U!) • 말(末) • 산像)의 각색이 있 었다는 기록이 있고, 같은 책 권 25 를 보면 남당의 배우 이가명 (李 家明)이 〈자가하용다배 (自家何用多拜)녔t 연출하였는데, 노생 (老 生) • 노단(老旦) • 소생 (小生) • 소단(小旦) 등의 각색이 등장하고 있다. 임반당은 『당희롱』에서 중당시대의 특색의 하나로 〈가무류회倻:

舞)의 편제 (編制)가 진보하였다 〉 라고 하였는데, 〈 가무류희의 편제가 진보한 것冷돈 구성과 연출면에 있어서도 〈 가무희 〉 가 정식 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음을 뜻한다. 곧 〈의양주(義陽主)〉가 단설 (團 雪 )과 산설 (散雪)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고 있는 것 갇은 것이 다 .42) 그러나 〈가무회〉의 체재상의 정식(程式)은 송집극(宋細別)과 금원본(金院本)에 가서야 제대로 이루어진다. 〈송잡극 X 즌 〈일장양 단(一場兩段) 〉 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영단(虎段)과 정잡극(正雜 劇) 2 단(段)을 뜻한다. 후에 다시 산단(散段)이 뒤에 더 붙여지는 경우도 있게 되었다. 43) 〈금원본〉에는 영단(豊段)이 있었디는· 기록 밖에는 없으나 여러 가지 실정으로 미루어 그 정식은 〈송잡극〉 못 지않게 발달했었을 것이다. 여하튼 중국 고전희극에 있어서의 정 식은 이미 중당대의 〈가무희〉에서 발달하기 시작하여, 송대의 〈가 무희〉에서 거의 완벽한 수준으로까지 발달을 이룬다. 그리고 그 정식은 그대로 후세의 〈대희〉로 흡수되고 있는 것이다. 중당시대에 〈가무회〉 44) 에서 가면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연극의 여러 가지 정식 (程式)이 생겨났다는 것은 중국회국의 커다란 변화 를 뜻한다. 이 변화의 시작은 곧 북송 말엽 중국회국의 〈소희〉로 부터 〈대희〉로의 변신을 준비한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2) 뒤의 「제 6 장 당대에 생겨난 〈가무회〉」절 참조 바람. 43) 뒤의 「제 6 장 송(宋)대와 그 후의 〈가무희〉」, 2 송잡극(宋雜劇) 대목 참조. 44) 「제 6 장 송대와 그 후의 〈가무회〉」, 5 금(金) 원본(院本) 대목 참조.

3 옛 것을 계승한 〈가무희〉 1) 난릉왕(蘭陵王) 이전의 〈가무희〉로써 당대에도 크게 유행하여 그 작품에 대한 발생경위와 그 연출모양 및 음악 등에 관하여 비교적 구체적으로 적어 놓은 기록이 전하는 것은 〈난릉왕(蘭陵王)〉과 〈답요낭~描 娘)〉이다. 이 두 가지 〈가무회〉에 대하여는 북조(北朝)의 〈가무 희只룹 설명하는 앞의 대목에서 이미 자세히 서술하였다. 정만균 (鄭萬鈴)의 「대국장공주비문(代國長公主碑文) 」 45) 울 보면, 전에 칙천태후{fl l j天太后)가 명당(明堂)에 나와 잔치를 벌였을 때, …… 기왕(岐王)은 나이 다섯 살로 위왕(衛王)이었는데 난릉왕(蘭陵 王)을 연출하였다. 46)

45) 『全唐文 권 27 찌 실림. 46) 「代國長公主碑文」 @n, 則天太后御明堂案, …… 岐王年五歲, 爲衛王, 弄蘭陵王.〉

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무후 (武后)의 구시 (久視) 원년 (700) 의 일 이며, 현종(玄宗)의 동생인 기왕(岐王)이 다섯 살 때 추었다니, 난 릉 〈가무회〉의 한 장면의 춤 동작을 연출한 것일 것이다. 당대 사람들의 기록으로는 최령홈(崔令飮 749 년 전후)의 『교방 기 (敎坊記)』와 두우(杜佑, 735-812) 위 『통전 (通典)』 권 146( 멤t唐 書』 「음악지 (音樂志)」와 대체로 같음), 단안절(段安節, 890 년 전후)의 『악부잡록偶罪雜錄)』 「고가부(鼓架部)」가 대표적인 그에 관한 자료 인데, 모두 그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북제(北齊)의 난릉왕 (蘭陵王) 장공(長恭)이 얼굴이 여자처럼 아름다워 위엄이 없다고

해서 니무를 깎아 만든 가면을 쓰고 적과 싸워 이겼던 일을 가무로­ 재현시켰다는 점은 모두 갇다. 그러나 그 가무에 관한 서술은 세 가지가모두다르다. 첫째 『 교방기 (敎坊記)』에서는 〈 그래서 이 놀이를 만들었고, 또한 가곡여k 曲)으로도 지어졌다 〉 4” 라고만 하였고, 『 통전 (通典)』에서는 약간 더 발전하여 〈제 (齊)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장하게 여기어 이 춤을 만들었는데, 그가 지휘하며 치고 찌르던 형용을 본뜬 것이었 으며, 그것을 난릉왕임진곡(蘭陵王入陣曲)이라 하였다〉 48) 라고 하였 다. 끝으로 『악부잡록앰節雜錄)』에서는 〈놀이하는 사람은 자색 傑; 色)옷을 입고, 금띠를 둘렀으며, 채찍을 들었다〉 49) 라고 하였다. 이는 모두 같은 〈난릉왕〉의 연출을 보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때와 장소에 따라 여러 가지 서로 다른 모양의 것이 연출되었음을 짐작 케 한다. 위의 기록은 대략 서기 750 년, 800 년, 850 년 정도로 시 대차이가 나는데,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가무희〉의 연출기 법도 더욱 발전했던 것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거기에 는 춤도 있고 노래도 있었으니, 서기 700 년의 다섯 살 난 기왕(岐 王)처럼 〈난릉왕〉 춤의 일부를 출 수도 있었을 것이고, 또 그 노래 만을 부르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47) 『敎坊記 』 〈因爲此戱 亦入歌曲. > 48) 『通典』 8 북人壯之, 爲此舞, 以勅其指揮擊刺之容, 謂之蘭陵王入陣曲. > 49) 『樂府雜錄』 따, 衣紫, .lltt, 執篤也. >

한편 이를 대면伏面) 또는 대면(代面)이라고도 부르고 있는데, 임반당(任半塘)은 『 당희롱傅戱弄) .!l 50) 에서 〈대면 0 海面)冷든 〈가무 희〉의 유명 頃名)이고 〈난릉왕(蘭陵王)沼본 회명 徵名)이어서, 대면 伏面)과 난룡왕(蘭陵王)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 러나 옛날 사람들이 유명과 회명을 엄격히 구별하였다고는 생각되

50) 『 唐戱弄』 第 2 章 辨體 三. 第三種分類.

지 않는다. 〈난릉왕〉이 유명으로 쓰이지는 않겠지만, 대면 伏:面) 또는 대면 (代面)은 유명과 동시에 희명으로도 쓰였음이 분명하다. 여하튼 당나라에서 〈난릉왕〉이란 〈가무희났큰 초당(初唐)에서 만당 (麟)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연출되었다. 같은 〈가무 희〉라 하더라도 장소와 시대에 따라 연출 기법에 많은 차이를 보이 는 것이 그 특징의 하나라 할 수 있다• 2) 답요낭(踏描娘) 당대에 연출된 답요낭~ 때와 장소에 따라 일찍부터 여 러 가지 다른 형식으로 연출되었다. 우선 최령홈(崔令欽)의 『 교방 기 (敎卯 E) 』만 보더라도 본시는 남자가 여자의 옷을 입고 더딘 걸음으로 입장하여 걸으면서 노래하 는데 , 일첩 (一量)의 노래가 끝날 때마다 결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한 목소리로 그에게 맞추어 딥요個溫i), 화래 (和來) ! 답요낭고價混海! 苦) , 화래 (和來) ! ' 하고 화창하였다. 51)

51) 『敎坊記』 여夫촘婦人衣, 徐步入場, 行歌. 每一壘, 芳人齊聲和之云 ; 踏 益, 和來! 踏諾娘苦, 和來! >

라고 하였다. 그러나 곧 〈지금은 여자가 그 역할을 하여 마침내 낭 중예硏中)이라 부르지 않고, 다만 아숙자(阿叔子)라 하게 되었 다. 〉 52) 라고 설명하고 있다. 본시는 남자가 남편뿐만 아니라 그의 처 역할까지 하던 것이었는데, 현종(玄宗, 713-755 년 재위) 때에 이르러서 남편 역할까지 반대로 여자가 맡게 되었고, 그 남편을 낭 중에阿中)이라 부르지 않고 아숙자(阿叔子)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 다. 그후로도더 많은 변화를 일으켜, 두부부뿐만 아니라전당포

52) 『敎坊記』 〈今則婦人爲之, 遂不呼郞中, 但云阿叔子.〉

도 등장하게 되어 옛날 놀이의 뜻과 전혀 · 다른 것이 되었고, 담용 낭(談容娘)이라고 잘못 불리워지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53)

53) 『敎坊記』 여靜 D 又加典庫, 全失舊旨 . 或呼爲談容娘, 又非. >

한 가지 기록 안에서도 〈답요낭〉이란 가무회는, 남자들이 연출 一여자들이 연출一전당포 등장一담용낭(談容娘)이라 불리워지기 도 함의 순서로 여러 가지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 『구당서 (舊唐書)』 권 189 「유학하(儒學下)」 곽산운전 (郭山揮傳)을 보면, 중종(中宗, 705-709 년 재위)은 가까운 신하들과 수문학사(修 文學士)들을 불러 자주 잔치를 베풀었는데, 한번은 그들에게 각각 자신의 기예 (使藝)를 선보이게 함으로써 웃고 즐겼다. 이 때 공부 상서 (I部尙書) 장석 옌掛;)은 담용낭무(談容娘舞)를 추었다고 했 다 .54) 장석이 춘 담용낭무는 앞의 기왕(岐王)이 추었던 〈난릉왕〉 처럼 〈답요낭〉 가무회의 춤 일부를 추었던 것일 것이다.

54) 먀害』 〈時中宗數引近臣及修文學士, 與之冥集, 當令各勉技藝, 以爲笑 樂. 工部尙뺄張錫爲談容娘舞, ……. >

다시 현종(玄宗) 때의 사람인 상비월(常非月)의 「영담용낭(泳談容 娘)」 55) 이라는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55) 『全唐詩』 第 3 函 第 9:J lltol] 실립.

손 들어 꽃 머리장식 매만지고 몸 날려 비단 자리 위에서 춤추네. 말은 둘레 길거리에 빽맥하고 사람들 빽빽이 놀이마당 둥글게 에워싸네. 노래는 한 목소리로 화창하고 감정은 섬세한 말 통해 전해지네. 마음의 크기는 알 수 없으되 꽤 많은 동정심 받아들이는 듯 !

擧手整花細,翻身舞錦延. 馬園行處風 人篠看場圓. 歌要齊聲和,情敎細語傳. 不知心大小,容得許多隣! 이는 분명히 시골장터 같은 곳에서 연출되고 있던 〈 답요낭〉 가 무희를 구경하는 광경을 읊은 것이다. 대체로 〈담용(談容)졌는 〈답 요倻說)〉가 잘못 전해전 말인 듯하다. 두우(杜佑)의 『통전(通典)』 권 146( 맨 t唐 書』 「音樂志」와 대체로 갇 음)의 기록은 『교방기 (敎坊記)』와는 약간 다르다. 『교방기』는 주인 공 소랑중(蘇郞中)이 북제 (北齊) 사람이라 했는데, 『통전』에서는 수(隋)말 사람이라 하였고, 앞에서는 〈주먹코[胞 鼻 ]〉라 하였는데, 뒤에서는 〈 추한 모습~ 하였으며, 그의 처는 〈용모가 아 름답고 노래를 잘 하였다〉 56) 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처가 슬피 호 소를 할 때에 〈언제나 그의 몸을 혼들었기 때문예 답요~ 부 르게 되었다〉 5 ” 라고 하였다. 위의 답요낭倻盜娘)이 여기서는 답요 낭價瀋議)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끝머리에 〈근래 우인 (優人)들은 그 제도를 많이 고치고 있는데, 옛 뜻은 아니다〉 58) 라고 설명을 덧붙이고 있으니, 두우(杜佑) 때에도 이미 본래의 〈답요낭〉 과 달라전 여러 가지 형태의 〈답요낭〉 놀이가 연출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56) 『 通典 』 여챙達옌猪k . > 57) 『通典 』 〈妻悲訴, 每描其身, 故號踏稀云. > 58) 『 通典』 〈近代優人類改其制度, 非 舊 旨也. >

단안절 (段安節)의 『악부잡록앵額雜錄)』 「고가부 (鼓架部)」의 기록 은 더 다르다. 우선 앞의 낭중예阿中)이 소중랑頃沖郞)으로 변해있 고, 그는 〈후주인(後周人) 소파頃砲)〉라 하였다. 그리고 〈언제나

노래판이 있기만 하면 곧 들어가 홀로 춤추었다〉 59) 라고 하였다. 그러니 이는 〈가무회〉가 아니라 홀로 추는 춤으로써, 〈답요낭〉 가 무회에서 남편의 충만을 가려 한 사람이 춘 것이다. 앞에 인용한 『구당서』의 중종(中宗) 때 공부상서 (I部尙書) 장석 여룹錫)이 임금 앞에서 춘 담용낭무(談容娘舞)가 반대로 그의 처의 춤을 가려 춘 것과 대조가 된다. 그리고 〈지금 이 놀이를 하는 사람은 붉은 옷을 입고, 모자를 썼으며, 얼굴은 새빨간데, 이는 그의 취한 모양을 나타낸 것이다〉 60) 라고 하여 출연자의 옷과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끝으로 〈죽유답요낭(卽有踏描娘)〉이란 구절이 붙어 있는데, 이를 뒤의 문장에 붙여 읽기보다는 소중랑(蘇中郞)을 설명한 글에 붙여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소중랑에 관한 설명을 보면, 〈답요 낭〉과는 너무나 연출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임반당(任半塘)은 『당희 롱(唐戱弄)』에서, 이 소중랑(蘇中郞)은 소랑중(蘇郞中)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옛날의 〈가무희났근 노래와 춤을 분리시킬 수도 있고, 또 때에 따라서는 등장인물들 중 한 사람의 춤 일부만을 가려 추기도 하였음을 전제로 할 때, 이 소중랑(森中 郞)은 〈답요낭〉의 소랑중(蘇郞中)에서 나온 것으로 봄이 무난할 것 ol 다.

59) 『樂 〈每有꿉璃, 繩入獨舞. > 60) 『樂 〈今爲戱者, 著緯 戴幌 面正那 蓋狀其醉也. >

위현 (韋跡 840 년 전후)이 유우석 (劉禹錫, 772-842) 이 한 말을 적었다는 『유빈객가화록(劉賓客嘉話錄)』에는 소랑중(森郞中)을 〈수 (隋)말 하간(河間) 사람〉이라 하고 〈사비 (嚴鼻)〉 61) 라 했는데, 대체 로 『통전』의 기록과 비슷하다. 다만 끝머리에 〈호사자(好事者)가 가면을 쓰고서 그 모양을 연출하고 〈답요낭〉이라 불렀는데, 지금

61) (It鼻 (사비) 났근 코에 무엇이 난 것으로 여賜`〉와 비슷하며 , 역시 〈주먹 코〉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와서는 담낭(談娘)이라고 한다 〉 62) 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에 의 하면 〈답요낭〉도 가면놀이였으며 , 중국의 옛날 〈 가무회났근 가면놀 이가 중심이었음을 뒷받침해 준다. 임이북(任二北) 갇은 이는 『 당 희농』 여러 곳에서 〈답요낭 〉 이 도면(塗面)임을 강조하고 있으나, 이는 옛 〈가무희〉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인 듯하다. 그리고 〈지금은 담낭(談娘)이라 부른다〉라고 하였는데, 담낭(談娘) 은 담용낭(談容娘)의 준말인 듯하다. 이것도 옛날의 〈가무회〉가 여 러 가지 형태로 연출되어, 많은 경우 정확한 그 주제 (主題)조차도 파악하기 어려움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62) 『劉賓客嘉話錄』 여져더힙 H 용假面, 以寫其狀, 呼爲踏描娘, 今謂之談娘. >

3) 상운악(上雲樂) 곽무천 (郭茂情)의 『악부시집 偶額詩集)』 권 51 「청상곡사(淸商曲 辭)」에 양&l2) 무제 (武帝)와 주사 OO 捨)의 「상운악U::雲樂)」에 이 어, 당情)나라 이백 (李臼 701-762) 과 이하(李賀, 791-817) 의 「상운악U::雲樂)」 및 왕무경 (王無競 652-705) 의 「봉대곡馮퓰 曲)」, 이백 (李白)의 「봉대곡馮臺曲)」과 「봉황곡馮凰曲)」이 실려 있다. 그러니 〈상운악〉이란 가무희는 당나라 때에도 연출되고 있 었음이 확실하다. 당나라 시인들의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백의 「상운악」은 그 가무회를 상연하는 모양을 차례대로 묘사한 내용이 어서 양나라 주사의 시와 맞먹는다. 이하(李賀)의 시는 팔월 초하 롯날 궁중에서 연출되는 〈상운악〉 가무희를 보고 그 감상을 노래 한 작품이다. 그리고 왕무경 (王無競)과 이백의 「봉대곡馮臺曲)」과 「봉황곡馮凰曲)」은 모두 그 〈가무희〉에서 불리워지던 한 곡의 노 래가사이거나 그것을 본떠서 지은 작품이다. 당대의 〈상운악〉의 상연모습을 알려 주는 이백의 「상운악」시는 다음과 같다.

서쪽하늘의 서편 해가지는곳, 문강(文康)이라는 늙은 오랑캐가 아기로 그 곳 월굴(月窟)에서 태어났네. 험준한용모에다 잘 다듬어전 풍골偏\骨) 지녔으니 , 두 눈동자 푸른 옥이 빛나는 듯하고 황금빛으로 꾸걸 T 결한 머리의 양편 귀밀머리는 붉네. 아래로 처진 속눈썹은 천자의 수레 지붕 갇고 위에 덮힌 입술은 중악(中岳)인 숭산(高山) 같네. 이처럼 괴이한 모습 보지 않고야 어찌 조물주의 신묘함 알겠는가 ? 대도 8 道)는 문강(文康)의 아버지이고 원기 債:氣)는 바로 문강의 어머니인데, 머리 어루만지며 태고적 반고頃活)를 달래 주고 수레 밀며 하늘 바퀴를 돌리고 있다가 해와 달이 처음 생겨나는 것을 보고서 불의 정기와수은을부어서 만들어졌다네. 해는 아직 골짜기에서 나오지 않고 달은 몸을 반쯤 숨기고 있을 때, 여와(女禍)는 황토흙을 개어 뭉쳐서 어리석은아랫사람들만들어, 이 세상에 뿌려 놓으니 자욱하기 모래먼지 같게 되었네. 낳고 죽음이 다함 없는 자들뿐인데 그 누가 이 오랑캐 전실한 신선임을 밝히겠는가?

서쪽바다해지는곳에 약목(若木) 심고 동쪽 바다 해뜨는 곳엔 부상(扶桑) 심었는데, 떠나온 지 얼마나 되었는지 잎새 무성한 가지 만리나 자라 뻗었네. 중국에는 옛날 일곱 성인 63) 있었으나 중도에 모두 아득한 세상으로 가 버렸는데, 폐하께서 운수를 따라 일어나셔서 용이 날듯 함양減陸)으로 들어가 적미 (赤眉)가 유분자(劉盆子)를 황제로 세웠울 적에 64) 백수(白水 )65) 에서 한(漢)나라 빛이 솟아올랐네. 크게 호령하니 사해(四海)가움직이어 큰파도가물결쳤고, 발 들어 자미성 傑薇微星)을 밟으니 하늘문 스스로 열려졌었네. 늙은 오랑캐 지극한 덕에 감복하여 동쪽으로 와서 신선의 가무 진성하네. 오색의 사자와 구채(九彩)의 봉황은 늙은 오랑캐의 개와 닭 같은 것,

63) 〈일곱 성인 (七聖) 沼 7 黃帝 • 方明 • 昌寫 • 張若 • 讚朋 • 昆閣 • 滑稽의 일 곱 명(멤규 』 徐元鬼), 또는 黃帝·元女·文王·周公•孔子·天老·董仲 舒( 『協 紀辨方 書』 辨僞 上吉七聖) 등 옛날 중국의 일곱 성인을 말함. 64) 赤眉는 西漢 말엽 王拜이 新나라를 세웠을 때, 珉班의 吳崇이 苗에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눈썹울 붉게 칠하여 王拜의 군대와 구별함으로써 그 렇게 불리웠다. 그들은 劉盆子롤 황제로 세우고 세력이 한때 대단했으나 결국은 光武帝에게 평정되었다. 65) 白 7k는 湖北省 襄陽府裏陽縣 옆을 흐르는 강물 이름. 白水가에 後漢 光 武帝의 옛 집이 있어, 張衡이 〈龍飛白水〉라 하였다.

궁전 안을 울면서 춤추고 나는데, 너풀너풀너울너울 나아갔다 물러났다 자연스런 절도 있네. 오랑캐 노래 하면서 한나라술울리는데, 두무릎꿇고 양팔꿈치 나란히 하네. 뒤이어 꽃 뿌리며 하늘 가리켜 흰 손 들어올리고, 황제께 절하면서 성상의 수를축원하는데, 북두칠성 일그러지고 남산이 무너질 때까지 천자께선 구구 팔십일만세 수하시며 오래도록 만세배 기울이시기를 ! 金之西, 白日所沒, 康老胡雄, 生彼月窟. 峴岩儀容, 戌肖 Ij 風骨, 碧玉炅炅雙目暗, 黃金拳拳兩髮紅. 華下,潟嶽臨上脣. 不親話證統, 登知造 {5 車 大道是文康之嚴父, 元氣乃文康之老親. 撫弄盤古, 推車轉天輪. 云見日月初生時, 鑄治火精與 7k 銀. 陽烏未出谷, 顧兎半藏身. 女土,團作愚下人,

散在六合間, i~蒙若沙鹿. 生死了不盡,誰明此胡是仙眞? 西海裁若木, 東潔植扶桑. 別來幾多時, 枝葉萬里長. 中國有七聖, 半路類鴻荒. 陸下應運起, 龍飛入咸陽.

赤眉立盆子, 白水興漢光. 't陀四海動, 洪蕩爲策揚. 擧足蹴紫微, 天關自開張. 老胡感至德, 東來進仙偶. 五色師子, 九范鳳凰• 是老胡鷄犬, 鳴舞飛帝鄕, 油灘媒音, 進退成行. 能胡歌, 獻漢酒, 踏雙藤, 竝兩朋. 散花指天擧素手, 拜龍顔, 獻聖壽. 北斗庚, 南山權, 天子九九八十一萬歲, 長傾萬歲杯. 표현은 다르지만 당대에도 대체로 양나라 때의 〈상운악났t 그대 로 이어받아 상연하였던 것 같다. 앞머리에 늙은 오랑캐 문강~ 康)의 가무가 나오고, 뒤이어 사자춤과 봉황춤이 이어지며, 천자 의 만수무강을 비는 것으로 놀이는 끝난다. 이백의 시에는 문강이 〈우스개짓도 잘 하고 술도 잘 마신다〉라는 묘사가 없는 정도의 차 이밖에 없다.

당대에도 문강의 가무와 함께 신선의 춤이 어우러졌음이 분명하 다. 이하와 왕무경의 시 모두 퉁소를 찰 부는 소사(蕭史)를 따라 신선이 되어 간 전목공(秦穆公)의 딸 농옥(弄玉)의 이야기를 읊고 있고, 왕무경과 이백의 「봉대곡」과 「봉황곡」은 모두 양나라 무제의 시나 포조僚 L照 ) • 강총(江總)의 시들과 같은 성격의 신선세계를 노 래한것들이다. 4) 서량기(西涼使) 중당(中唐)의 백거이 (白居易 772-846) 의 신악부(新樂府)와 원진 保租 779-831) 의 신제악부(新題樂府) 속에는 각각 「서량기 (西涼 使)」라는 시가 실려 있다• 앞에서 북조(北朝)의 〈가무희녔! 설명할 때 『수서 (隋書)』 권 15 「음악지 (音樂志)」를 인용하여 진한기 (秦漢 使, 前秦) ·국기(國使, 北魏·北周)라고도 불리웠던 〈서량악(西涼 樂 )X 분 간단히 소개한 일이 있다. 그러나 당대의 〈서량기났근 아무 래도 이 북조의 〈서량악났t 그대로 계승한 〈가무희났근 아닌 듯하 다. 66) 먼저 〈봉강(封疆)의 신하를 풍자한다〉라는 부제가 붙은 백 거이의 시를 읽어 보자(『全唐詩 』 7 函 1 冊).

66) 혹 崔令欽의 『敎坊記』「曲名」에 보이는 「涼州」 같은 악곡은 후세에 전수 된것인지도모른다.

서량기엔 가면 쓴 오랑캐와 가짜 사자가 등장하는데, 나무 깎아 머리 만들고 실을 꼬아 꼬리 만들고 금철을 한 눈에 은칠 입힌 이빨 달고, 털옷털면서 두귀 흔드는게 마치 서쪽 사막 건너 만릿길 온 듯하네.

자줏빛 수염에 눈 움푹한 오랑캐가 북 장단에 춤추며 뛰어나와 말씀 아뢰이네 . 이르기를 양주(涼州)가 함락되기 전 안서도호부(安西都護部)에서 공물 바칠 적에 왔는데, 조금뒤새소식전해오기를 안서 (安西)로 가는 길 끊기어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라 하네. 사자 마주 보고 두 줄기 눈물 홀리며 울면서 양주(涼州)가 적에게 함락된 걸 아는가 모르는가 묻네. 사자가 머리 돌려 서쪽 바라보며 한 소리 슬피 울자 관객들도 모두 술퍼하네. 정원(貞元, 785-804) 의 변경 장수들이 악곡 좋아하여 술취해 앉아웃으며 구경하면서 물릴줄모르네. 손님 즐겁게 하고 군사들 음식 먹이며 군에서 잔치 벌이는데, 사자와오랑캐는늘눈앞에 있네. 한나이 일흔 된 출정 나온사람 있어 〈서 량기〉 놀이하는 것 보고 머리 숙여 울더니, 울음 그친 뒤 두 손 모아 쥐고 장군께 이렇게 아뢰이네. 임금의 근심이 신하의 욕이 됨은 옛날에 이미 들은 바인데, 천보(天寶) 년간 (742-755) 안록산(安祿山)이 난을 일으킨 뒤로 서쪽 오랑캐둘 밥낮으로 서쪽 변경 침략하여, 양주(涼州)가 함락된 지는 사십 년이요, 하롱(河階)지방은 칠천 리나 침입해 왔소. 평상시는 안서지방의 만리 영토였는데 지금은 봉상馮親)에서 국경 방비하고 있으니, 변경의 십만 군졸은 공연히 주둔하여

배불리 먹고 따스하게 옷입고 한가한 나날 보내고 있소. 버려진 백성들의 창자 양주(涼州)에서 끊어지고 있는데도 장졸들은 서로 쳐다보기만 하고 회복할 뜻도 없는 듯하오. 천자께선 이룰 생각할 때마다 늘 아프고 안타까워하시니 장군들은 말하려도 부끄럽고 죄송스러울 것이거늘, 어찌하여 이처럼 〈서량기〉 구경하며 웃고 줄기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오 ? 비록 땅 되찾을 지혜도 능력도 없다고 해도 어찌 차마 서량僖i涼)으로 놀이하며 즐긴단 말이오 ! 西涼使, 假面胡人假獅子. 刻木爲頭絲作尾, 金鏡眼晴銀帖齒. 舊迅毛衣提雙耳, 如從流沙來萬里. 紫答深目先胡兒, 鼓舞挑梁前致辭. 道是涼州未路日 , 安西都護進來時. 須央云得新消息 安西路絶歸不得. 泣向獅子i弟雙垂, 涼州降沒知不知 ? 獅子回頭向西望, 哀뎃一聲觀者悲. 貞元遠켜휴愛此曲, 醉坐笑看看不足. 誤稿士冥監軍, 獅子胡兒長在目. 有一征夫年七十, 見弄涼州低面泣,

泣龍欽手白將軍, 主憂臣辱昔所聞. 自從天寶兵戈抵 犬戒日夜香西 13. 涼州降來四十年, 河階侵將七千里. 平時安西萬里疆, 今日邊防在鳳翔.

緣邊空屯十萬卒, 砲食溫衣閑過日. 遺斯在涼 1 사, 將卒相看無意收. 天子每思長痛慣 將軍欲說合感墓. 奈何荀看西涼使, 取笑資歡無所 l 鬼. 縱無智力未能收, 忍取西涼弄爲戱! 다음의 것은 원전어沮t)의 「서량기」 시 (『全唐詩』 6 函 IO 冊)에서 그 놀이모습을 묘사한 중간부분을 뽑은 것이다. 가서한(哥舒翰) 장군 부중俺f中)에 성대한 잔치 벌였는데, 온갖좋은음식 귀한술앞머리에 널려 있네. 앞쪽에선 백희 (百戱)를 다투듯 어지러이 연출하고 있는데 튀어오르는 환검 (丸劍)은 서리와 눈 떠오르는 듯. 사자가번쩍이는몸혼드니 털의 광채 뻗치고, 취하여 추는 호등무(胡騰舞).는 근육과 뼈 부드러운 듯하네. 대완아茨i)에선 적한마(赤汗馬)를 바쳐오고 토번 (吐蕃) 임금도 와서 바취색 부드러운 갖옷 바치네. 哥舒開府設高案, 八珍九疆當前頭. 前頭百戱競探亂, 丸劍挑躍霜雪浮. 獅子描光毛彩딸 胡勝醉舞筋骨柔• 大苑來獻赤汗馬, 贊普亦奉琴背裝. 이 시의 앞부분에서는 오링캐들에게 침략당하기 이전 양주(涼州) 지방의 번성했던 상황을 묘사하고 있고, 뒷부분에서는 지금은 서 쪽의 일부 국토가 오랑캐들에게 점령 당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장군 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 놀이룰 줄기고 있는가라며 꾸짖고

있다 .67) 백거이와 원진의 시를 합쳐 보면 〈 서량기났근 대략 다음과 같은놀이였다.

67) 元種의 떤§涼使」시 앞부분과 뒷부분은 각각 다음과 같다. 연罪’昔日西 涼州, 人煙撲地桑拓祠 蒲荀酒熟窓行樂,紅藍靑旗朱粉樓. 樓下當城稱卓 女, 樓頭伴客名莫怒. 鄕人不識離別苦, 更卒多爲沈瀋遊. > 〈一朝燕賊亂中 國, 河池沒盡空遺丘 開遠門前萬里候, 今來聲到行原 1 서. 去京五百而近何其 運天子,縣內半沒爲荒阪,西涼之道爾限條.連城邊將但高會,每聽此曲能不 墓〉

놀이의 내용은 우선 〈 서량기 〉 가 정식으로 시작되기 전에 먼저 환검 (丸劍) 등의 잡희 (雜戱)가 연출되었다. 이것은 먼저 관중들의 홍미를 끄는 방법이기도 하고, 한(漢)대 장형 (張衡)의 「서경부(西 京試)」 평락관(平樂觀)에서의 놀이방법과도 같으니, 이는 전통적인 연출형식이다. 뒤이어 머리가 지줏빛이고 눈이 움푹 들어간 모양 의 가면을 쓴 서쪽 오랑캐가 사자를 끌고 등장한다. 이 오랑캐는 사자를 모는 사자랑(獅子郞)까지 합쳐 두 사람이 등장했을 가능성 이 높다. 68) 사자는 만 리 사막을 건너온 모습이며, 사자와 오랑캐 들이 어울리어 당나라의 성덕을 칭송하며 태평성세를 기리는 춤을 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 오랑캐는 곧 술에 취하여 사람들을 웃기 는 동작을 하면서 호등무(胡騰舞)를 추어 관객을 즐겁게 한다. 연 이어 대완(:;k苑)에서는 적한마(赤汗馬)를 바쳐오고, 토번 (吐蕃)의 임금은 비취색 갖옷을 진상한다.

68) 白居易 시의 성잡합采目光胡兒〉의 @粉은 여i〉으로 된 판본도 있다.

이처럼 한참 태평성세에 젖어 있을 때, 한 사람이 나타나 양주 (涼州)가 오랑캐에게 함락된 것을 알린다. 양주가 적의 수중으로 들어가 지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음을 알자, 오랑캐는 사자와 마주 보며 눈물을 홀리고, 사자도 따라서 서쪽울 향하여 슬 피 울부짖어 관객들까지도 모두 슬픔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 「서량기」시는 백거이의 신악부(新樂府) 속에 헌종(憲宗) 원화

떠 □) 4 년 (809) 이라는 연대의 기록이 있으니 원전의 시까지도 그 무렵에 지어진 것일 것이다. 그 주제는 당나라가 〈 안사(安史)의 난 〉 (755-763 년 무렵) 이후 변경을 돌보지 못하는 사이에 회홀(回 訖)과 토번 (吐蕃)이 서쪽 땅을 침입하여 대종(代宗)의 광덕 (廣德) 2 년 (764) 양주를 함락시키고, 연이어 791 년에 이르기까지 감주(甘 州) • 숙주몌『州) • 과주(瓜)사) • 사주(沙州) • 서주(西州) 등 이른바 눕 ? 육주(뽑財뉴六州)를 차지해 버린다. 이 때 위정자들과 군인들보 다도 많은 시인들이 시를 통하여 잃어버린 조국땅에 대한 비분을 토해 냄으로써, 온 나라 사림들을- 각성시키려 하였다 .69) 백거이가 그의 시 제목 아래 〈변경을 지키는 신하들을 풍자한다〉라는 부제 를 달고 있고, ’ 후반쯤에서 일흔 살의 군인을 내세워 잃어버린 조국 땅을 찾을 생각도 않고 〈서량기〉 놀이만을 즐기는 장수들을· 신랄 하게 비판하고 있으니 역시 그런 뜻에서 지어전 것이다. 원전도 〈이 곡조를 들으면서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느냐 ? 〉라고 하며 변경 의 칭수들을 꾸짖고 있다. 이 하황(河禮)지방은 선종(宣宗)의 대중 닌中) 5 년 (851) 에 장의조(張義潮)에 의하여 다시 완전히 수복된 다. 70) 따라서 이 〈서량기났근 양주(涼州)가 함락된 764 년 이후 몇 년 동안에 만들어졌을 것이며, 851 년 이후에는 그 의의를 잃게 됨 으로 없어지거나 주제가 바뀌어졌을 것이다.

69) 張籍 「涼州詞」 OO 射音承恩主澤, 無人解道取涼州. >杜 牧, 「河禮」 〈唯 有涼州歌舞曲, 流傳天下樂閑 A. 〉 司空圖, 「河禮有感」 〈一自蕭關起戰座, 河禮隔斯異鄕春. 漢兒盡作胡兒語, 却向城頭黑漢人. >李 顔, 대'金吾技唱梁 州」 센腹t一曲古梁胤 驚起黃雲塞上慈. >白 居易, 「感白蓮花詩」 〈忽想西涼 州, 中有天寶民, 埋沒漢父祖, 拳生胡子孫. >

〈서량기〉의 가무는· 크게 호등무(胡騰舞)와 사자충의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둘을 따로 떼어 내어 하나씩 상연

70) 『通鑑』 권 249 의거 .

하기도 하였던 듯하다. 단안절(段安節)의 『 악부잡록(樂府雜錄) 』 무 공 (舞工)의 기록에 따르면 호등 (胡騰)은 능대 (稷大) • 아련 (阿連) • 자지 (拓枝) • 검기 (劍器) • 호선 (胡旋) 등과 함께 건무곡 (健 舞 曲) 에 속하는 것이며, 이단(李端 785 년 전후)에게는 「호동아(胡騰兒)」, 유언사(劉 言 忠 742 ? -813 ? )에게는 「왕중승댁야관무호등(王中丞宅 夜觀舞胡! 俊 )」이란 시가 각각 있다. 이단(李端)의 시 ( 『 全 唐詩』 5 函 3 冊)를 보면 호등무(胡騰 舞 )를 추는 오랑캐의 모습을 형용하여 〈 살 찾은 옥과 갇고 코는 송곳 같다 〉 71) 고 하였으니, 그는 흰 피부에 삐죽한 코롤 달고 있었을 것이다. 〈자줏빛 수염에 깊숙한 눈 〉 이라 형용했던 백거이의 시와 같이 백인의 모습이며, 이는 가면으로 나 타냈을 것이다. 임반당(任半塘)은 『 당희롱』 제 3 장 「극록얘 l 錄)」에 서 이단의 시를 근거로 이 춤을 진짜 호아(胡兒)가 춘 것이라 주장 하였으나 역시 가면무로 봄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 서량기 〉 에 나오는 호인(胡人)인 가면을 쓴 사자랑(獅子郞)과는 다르다고 했는데,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서량기 〉 에도 사자랑 (獅子郞) 이의에 오랑캐춤 또는 호등무(胡騰舞)를 추는 호인 (胡人) 은 따로 있었다. 또 이단의 시에서 〈취하여 비틀거리며 동쪽으으로 기울었다 서쪽으로 넘어졌다 한다〉 72) 하고, 유언사(劉言史)의 시 ( 『全 唐詩 』 7 函 9jjJj-) 에서 〈손에 든 포도주 잔을 아래로 괭개 친다. >73 ) 한 것은, 원진이 〈 취하여 추는 효동무(胡騰舞)는 근육과 뼈 부드러 운 듯하네〉라고 읊은 것처럼 술취한 동작을 춤에 섞음이 확실하 며, 여기에는 관객들을 〈웃으며 보게 하는〉 우스꽝스러운 몸짓들 이 있었을 것이다. 끝으로 이단의 시에서는 〈호등아(胡騰兒)야, 호 등아야! 고향길 끊긴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74) 유언사의 시에

71) 「胡騰兒」 에버 『 如玉 鼻 如維. > 72) 「胡 膜 兒」 여結p東傾又西伊j. > 73) 「王中丞宅夜觀胡曆舞」 〈手中擔 卜荀曲金. >

74) 「胡 臘 兒」 〈胡 務 兒, 胡腦兒, 故鄕路斷知不知 ? >

서는 〈 서쪽 돌아보며 문득 고향길 먼 것을 생각하네 〉 75) 라는 구절 이 있으니, 모두 「서량기」시처럼 잃어버린 서쪽의 조국땅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려는 뜻을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75) 「王中丞宅夜觀胡 騰 舞」 선§顧忽思鄕路遠. >

〈 서량기 〉 의 사자는 〈 나무를 깎아 머리 만들고 실을 꼬아 꼬리 만들고, 금칠한 눈에 은칠 입힌 이빨 달고 〉 , 몸은 〈 털옷〉으로 감 쌌으며, 그 속에 사람이 들어가 놀이룰 하는 것이었다. 본시 오랑 캐는 이 사자와 함께 중국을 방문하여 천자의 성덕을 기리려는 것 이었으나, 뒤에 양주지방이 외족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 자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고국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장면으로 끝을맺고있다. 사자춤은 이미 〈 상운악 〉 에도 보였지만, 당대에는 그 밖에도 여 러 가지 사자춤이 있었다. 우선 『 악부잡록앰節雜錄) 』 「고가부(鼓 架部)」에는 구두사자(九頭獅子)가 보이는데, 양두혼탈(羊頭潭脫) • 농백마(弄臼馬) 냐나전頃錢) 등 가무희적인 놀이로 보이는 것들과 함께 나열되어 있다. 또 구자부(龜炫部)에는 오방사자(五方獅子, (li常獅 子〉 로 된 판본도 있다)가 보이는데, 〈 높이는 일 장(丈)이 넘 고, 각각 오색의 옷을 입었다. 한 사자마다 열두 명이 붙었는데, 붉은 두건을 쓰고 호화로운 빛깔의 옷을 입었으며, 붉은 터리개를 들었는데, 그들을 사자랑(獅子郞)이라 불렀으며 태평악곡伐平樂 曲)을 춤추었다〉 76) 라고 하였다. 두우(杜佑)의 『 통전 (通典) 』 권 146 및 『 구당서 ( 舊 唐 書 )』 등에도 오방사자무(五方獅子舞)가 보이는데, 연출모양은 서로 약간 다르다. 이백의 「상운악」에는 〈오색사자(li 色獅子)〉가 나오는데, 같은 성질의 놀이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 교

76) 『樂府雜錄』 떠五方獅子, 高丈餘, 各衣五色. 每一獅子有十二人, 戴 紅 株, 衣 畵 衣, 執紅掃子, 謂之獅子良t. 舞太平樂曲. >

방기 (敎坊記)』 「곡명 (曲名)」 속에는 서하사자(西河獅子)가 보이고, 남탁(南卓 848 년 전후)의 『갈고록(邦鼓錄)』 「곡명 (曲名)」에는 태주 각伏篠角)에 서하사자삼대무석주(西河獅子三 鹽 舞石州)가 보인다. 이처럼 여러 가지 곡에 따라 춘 사자춤이 각각 어떻게 서로 다른 것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서하(西河)가 섬서성 (陝西省) 황하(黃河)의 서쪽 지방울 가리키는 말로 눕 ? 육주(龍託~六州)와 비 슷한 방향으로 생각되어 〈서량기〉의 사자춤과 비슷한 성격의 것이 었을가능성이 많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결국 〈서량기 〉 란, 대략 8 세기 후반에서 9 세기 전반에 걷천 시대에 하황(河禮) 지방울 토번(吐蕃)에게 빼았 겼던 사실을 온 나라에 일깨우려고, 〈상운악冷t 당시 실정에 맞도 록 개작했던 〈가무회〉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인공인 오랑캐 모두는 눈이 움푹하고 코가 큰 서양사람 모습의 가면을 썼고, 또 이들 모두 호무(胡舞)를 추는데 그 중에는 술에 취하여 우스꽝스러 운 몸짓을 하는 대목들이 들어 있으며, 다 같이 사자춤이 나오고 모두 중국의 성덕을 칭송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당대에 유행한 오 방사자(五方獅子)나 서하사자(西河獅子) 모두 〈상운악〉이나 〈서량 기〉에도 쓰였던 것들인 듯하며, 때로는 구두사자(九頭獅子)까지도 응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다만 〈상운악〉에 들어 있던 신선무(神仙舞)와 봉황충이 〈서량기〉 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이는 태평성세를 상칭하는 놀이라서 〈사량 기〉의 혼란한 시대상을 고발하려는 주제와는 맞지 않기 때문에 빼 버린 것인 듯하다. 따라서 놀이의 주인공인 오랑캐도 〈상운악〉에 서는 신선이나 다름없는 늙은 오랑캐 문강(文康)인 데 비하여, 〈서 량기〉에서는 보통 서양사람 모습의 오랑캐가 나오는 것이다. 〈서량기〉가 〈상운악〉과 다른 점은 우선 오랑캐의 춤이 호동무 (胡騰舞)라는 데 있다. 이는 신선의 성격이 빠진 대표적인 오랑캐

춤으로 새로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 서량기 〉 에서는 오랑캐와 사자가 다 같이 끝머리에서 양주(涼州)의 함락소식을 전해 듣고 둘 아가지 못하게 된 고향을 생각하고는 울부짖는 장면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이는 잃어버린 조국땅에 대한 위정자와 국민들의 관심 울 자국하려는 이 놀이의 주제 때문에 덧붙여전 대목이다. 끝으로 원전의 「서량기」에만 환검 (丸劍) 같은 백희 (百戱)의 연출 이 묘사되고 있는데, 실제로 옛날부터 〈 상운악 〉 이나 〈서량기났근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가무회冷근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백희들도 함께 연출되는 것이 관습이었다. 간혹 〈가무희 〉 만이 연출되는 경 우도 있었겠지만, 〈서량기〉에서의 환검 (丸劍)의 병연은 특별한 경 우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양주지방울 다시 되찾은 851 년 이후의 〈서량기났즌 더 이상 잃어 버린 조국땅을 슬퍼하는 대목이 소용 없게 되었다. 「하황(河禮)」시 에서 잃어버린 양주땅에 대한 비분을 노래했던 두목(杜牧, 803- 852) 도, 그 지방울 수복한 후에 지은 「금황제폐하일조칭병불일공집 하황제군차재귀항신획도성공첩헌가영 (今皇帝陸下一紹徵兵不日功集河 禮諸郡次第歸降臣獲親聖功輯獻歌諒)」이란 건 제목의 시( 『 全唐詩 』 8 函 7 冊) 끝머리에서 〈 성 가득히 울리는 가무곡조 들어 보니, 양주곡 (涼州曲)의 가락도 기쁨에 오르락내리락 하네〉 77) 라고 노래하고 있 다. 세상이 달라지자 같은 놀이의 음악도 바로 악상이 바뀌었던 것 이다. 임이북(任二~t)은 『당희롱』 제 3 장 「극록(IJJ錄)」에서 〈서량 기녔t 논하면서, 송(宋) 태종앉宗) 순화(淳化) 4 년 (993) 분양(沿 陽) 무덕선사(無德禪師)의 『 어록(語錄) 』 하(下, 『 大正藏 』 47 권 628 쪽)에 실린 서하사자(西河師子)를 읊은 다음과 같은 시를 인용하 며, 후세에도 〈서량기〉가 전하여졌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

77) 杜牧 여類又滿城歌舞曲, 涼州聲韻喜 參差.〉

다. 서하사자(西河獅子)는 온 나라에 유명한데 금빛 털 한 번 털기만 하면 모든 짐승 굴복하네. 한 번 울부짖으면 온 천지 고요해지며 온 천하가 명군 (明君) 받들게 되네. 78)

78) 頂河師子」 션§河師子九사 1 聞, 才셔數金毛衆默賓. 祥팬一聲天地靜, 五湖四 海明君.〉

서하사자(西河獅子)도 이제는 못 돌아가게 된 고향을 슬퍼하는 대목은 소용이 없게 된 것이다. 사자춤뿐만 아니라 호등무(胡誘舞)도 852 년 이후로 잃어버린 양 주땅에 대한 비분을 나타낼 필요는 없게 되었다. 『송사(宋史)』 권 142 「악지 맹誌)」를 보면 소아대 (小兒除)의 네 번째로 취호등대 (醉 胡騰隊)가 보이는데, 이것은 호등무(胡騰舞)가 변화한 것일 가능성 이 많다. 여하튼 당대에 한동안 유행했던 〈서량기冷근 그 후에 다 른 성격의 〈가판희〉로 변화하여 민간에 전승되었을 것이다. 79) 5) 참군희(參軍戱) 후한(後漢) 때 관도령 (館陶令) 석담(石航)에게서 시작되었디는· 참군희 (參軍戱)는 당나라시대에도 성행되었다. 단안절 (段安節)의 『악부잡록』 「배우(俳優)」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개원(開元) 연간 (713-741) 에 황번작(黃幡緯) ·장야호엔뎀翔 l) 가 참

79) 任半塘 『 唐戱弄 』 第 3 章 「劇錄」에는, 明 顧景星의 대辨 l 志』의 기록 등 을 인용한 近人 楊憲益의 「民間保存的唐西涼使」 ( 『 零墨新築』에 실림)라는 논문을소개하고있다.

군(參軍)놀이룰 하였다. …… 개원년간에 이선학(李{賊g)이 이 놀이 를 잘 하여 명황(明 皇 )이 소주(留州)의 동정참군(同正參 軍 ) 벼슬을 특별히 내리어 그 녹(ififk)을 먹게 하였다. 그래서 육홍점 (陸鴻浙, 이 름은 羽 鴻浙은 字, ?-804) 이 글을 지어 「소주참군(節州參軍)」이라 하였는데, 대체로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무종(武宗) 때 {841-846) 조숙도(曹叔度) • 유천수(劉泉水)가 있었 는데 함담 (載炎) 80) 울 가장 묘하게 하였다.

80) 載 淡의 뜻에 관하여는 학자들의 의견이 모두 다르며, 이 어蛇炤磁少〉 구 철이 빠진 판본도 있어 (예 『文獻通考 』 ) , 본래는 없던 말이 잘못 끼어든 구 철로보는이도있다 .

함통偏遠i, 860-873) 이래로는 범전강(范傳康) • 상관당경 lt官唐 卿) • 여경천(呂敬遷) 등 세 사람이 있었다 .81)

81) 『樂 府雜錢 U 〈開元中, 黃幡緯 ` ·· 張野孤弄參軍. …… 開元中有李仙鶴善此 戱 明皇特授留州同正參軍, 以食其祿,是以陸鴻浙撰詞云, 照州參軍, 蓋由 此也. 武宗朝有曹叔度 • 울,J泉*, 飯淡最妙. 咸通以來, 卽有范傳康 • 上官唐 卿·呂敬遷等三人.〉

〈참군희冷근 자세한 기록이 없어 대화를 위주로 하여 시사(時$-) 를 풍자하는 일종의 〈 골계희〉로 보려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범 터 (范撮 877 년 전후)의 『운계우의 ( 雲 溪友議)』 하(下) 「영양사遷陽 詞)」조에 배우 주계남 OO 季南)과 계승(季崇) 및 그의 처 유채춘(劉採春)이 회전(淮句)으로부터 왔는데, 육참군(陸參軍) 놀이를 잘 하였고 노랫 소리가 구름 위로 치솟았다. 82)

82) 『 雲 溪友議』 〈有周季南 • 季崇及妻劉採春, 自淮句而來, 善弄陸參軍, 歌聲 徹.〉

라고 하였으며, 설능(薛旅 ?-880) 의 「오희 (吳姬)」( 『 全唐詩』 9 函 2

冊)시에서는 겹겹이 솟은 누각엔 하늘의 구름 자욱한데 둥둥울리는북소리 온세싱에 둘리네. 이 날 버들솜은 눈처럼 날리기 시직하는데 여아는 악기 연주하며 참군(參軍)놀이룰 하네 .83)

83) 「吳 〈樓臺重壘滿天雲, 殷殷鳴最世上聞. 此日楊花初似雪, 女兒弦管弄 參.〉

라고 읊고 있으니, 〈참군회〉에 음악과 노래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앞의 〈육참군(陸參軍)〉이 본래 관리의 부정을 조롱하며 즐기던 〈참 군희〉와 어떻게 달라진 것인지 알 길은 없으나, 놀아내용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주계남(周季南) 형제와 그 의 처 유채춘(劉採春)은 함께 〈육참군〉놀이를 하였음이 분명하니, 출연인원에도 변화가 있은 성싶다. 또 설능(薛能)의 시에 나오는 〈북소리冷 춤의 박자를 맞추었음이 분명하고, 〈참군〉 놀이에서 〈여아(女兒)가 악기를 연주〉하였으니 노래뿐만 아니라 춤도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84) 그리고 여기의 여아(女兒)란 바로 오회(吳姬)이 며, 기생이었을 것이다. 조린聞휴 844 년 전후)은 『인화록(因話 錄)』 권 1 에서

84) 任半塘, 『唐戱弄』 第 2 章 「辨體」 參軍戱 참조.

숙종慣宗, 756-762 재위) 때 궁중에서 잔치를 할 적에 여자 배우 가 가관회(假官戱) 놀이를 하였는데, 그 중 녹색옷을· 입고 죽간(竹 簡)을 들고 있는 사람을 참군장(參軍椿)이라 불렀다. 85)

85) 『因話錄』 예店경t於宮中, 女優有弄假官戱, 其綠衣秉簡者, 謂之參軍椿.〉

라고 하였고, 육우(陸羽)는 「육문학자전(陸文學自傳)」( 『 全 唐 文』 권 433) 에서 옷을 말아 울리고 배우무리들을 찾아가 『 학담(誠談) 』 3 편을 지었 고, 스스로 배우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나무인형 놀이와 가리 (假吏)와 장주(藏珠)의 놀이룰 하였다 .86)

86) 露學自傳」 〈卷衣指倫 黨 , 著誠談三篇 以身爲倍正, 弄木人 • 假吏 • 藏 珠之戱.〉

라고 하였다. 〈 가관희 (假官戱) 〉 나 〈 가리 (假吏) > 모두 〈 참군희 > 계 열의 놀이일 것이나 호칭이 바뀌었고 여자도 가관(假官) 노릇을 하 고 있으니 내용이 모두 같지 않은 듯하다. 『인화록(因話錄) 』 에서는 위의 글바로뒤에, 천보(天寶) 말년에 오랑캐 장수 아포사(阿布思)가 법을 어기어 그 의 처는 궁정에 배정되었는데, 배우 노릇을 잘 하였기 때문에 악공 偶)에 소속되었으며, 그 날로 마침내 가관(假官)의 우두머리가 되 었는데 이른바 ‘장(椿)’이라는 것이다 .87)

87) 멤汶學自傳」 연혀 序 k, 蕃將阿布思伏法, 其妻配液庭, 善爲優, 因此隸樂 工. 是日, 遂爲假官之長, 所爲椿者.〉(끝귀절의 所爲의 爲는謂의 찰못인 듯. 任半塘依 操 )

라고 하며 참군장(參軒春)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가관(假 官)의 우두머리가 있다는 것은 그 가관회 (假官戱)에 아포사(阿布 思)의 처 이의에도 다른 몇 명의 출연자가 더 있었음을· 뜻한다. 어떻든 〈참군희났근 당대에 와서 여러 가지 성격의 놀이로 발전 하였으며, 그 중에는 간단한 고사(故事)를 연출하는 〈가무희〉로 발 전한 것들도 있었음이 확실하다.

이 밖에도 진 ( 晉 )나라 때 만들어진 예필 (tif f) o,] c.}.Jl.£ 부르는 문강악(幻 康 樂)이 한때 연출되었으며 ,88 ) 그 밖에 이전의 여러 가지 〈가 무회났출이 민간에 전승되었었을 것이다. 〈 가무희 〉 와 아주 가까 운 형식의 인형극인 괴뢰희 (偶f蟲敗)도 그대로 이어져 성행되었었 다 .89)

88) 뎅礎 켄 F』 권 21 「 禮 樂志」 〈隋樂每奏九部樂終, 輯奏文康樂, 一曰 禮 畢. 太宗時, 命削去之 , 其後遂亡, 及平 高 昌, 收其樂. …… 自是初有十部樂. > 89) 孫第 『偶 1 出 般考原 』 다흉有出版社, 1952) 및 任半塘, 『 唐戱弄 』 第 2 章 「辨體」 燒1 蟲 敗 참조.

4 호희(胡戱) 1) 소막차(蘇莫進) 당나라는 국세의 신장에 따라 주변 다른 나라와의 접촉도 매우 활발해져 , 이에 따라 호악(胡樂) • 호회 (胡戱)도 더욱 많이 들어와 유행하였다. 먼저 소막차(森莫述)리는 호회가 있다. 『구 당서 ( 舊 唐 書 )』 권 7 「중종기 (中宗紀)」를 보면 신룡(神龍) 원년 (705) 11 월에 발한호희 (澄寒胡戱), 경룡(景龍) 3 년 (709) 12 월에 발호왕걸한희 ( 澄 胡王乞寒 戱)를 임금의 명으로 연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병주 (#-)사) 청원현위 (淸源縣尉) 였던 여원태 (呂元泰)가 다음·과 같은 상소 문 90) 을 올리고 있다.

90) 'lJr唐書 』 권 118 「宋務光傳」, 『 全唐文 』 권 270 등에 실림.

근래에 보건대 고울과 동리마다 다투어 혼탈대 (海脫隊)를 하면서 좋은 말을 타고 오랑캐옷을 입는데, 소막차(森莫連)라 부르고 있습니 다. 깃발 세우고 북치며 서로 디두고 있는 것은 군진(軍陣)의 형세이

고, 날뛰고 뒤쫓으며 소란을 피우는 것은 전쟁의 형상이며, 비단에 수놓은 것을 뽐내고 다투는· 것은 여인들의 하는 일에 해를 끼치는 것 이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서 거두는 것을 독려하는 것은 정치 를 손상시키는 것이며, 오랑캐옷을 입고 서로 좋아하는 것은 우아한 줄김이 못 되고, 혼탈(海脫)이란 칭호는 아름다운 이름이 아닙니다. 어찌 예의를 존중하는 조정에서 오랑캐들의 풍속을 본뜰 수 있겠습니 까? ……어찌 반드시 몸의 옷을 벗고 길거리에 물을 뿌리며 북장단에 춤추고 날뛰며 추위를 추구해야만 한단 말입니까 ? 91)

91) 'l./r唐書』 漁두又有淸源尉呂元泰, 亦上書言時政曰, ....... 比見坊邑, 相率爲 潭脫殿 駿馬胡服, 名日蘇莫追. 旗鼓相當, 軍陣勢也;騰逐빨謀, 戰爭象 也,錦綠奇競,害女工也,督敏貧弱,傷政體也,胡服相歡, 非雅樂也, 潭脫 爲號, 非美名也. 安可以禮義之朝, 法胡磨之俗? ……何必鳳形體, 潘衝路, 鼓舞挑躍而索寒焉?〉

이에 의거하면 발한호회 (澄寒胡戱) 또는 발호왕결한희 (澄胡王乞寒 戱)는 그 놀이를 소막차頃漠進)라고도 부르며 〈걸한(乞寒)只끌 〈색 한영澤, 추위를 추구함)〉이라고도 한다. 그 놀이의 주역은 혼탈대 (i軍脫隊)인데, 좋은 말을 타고 오랑캐옷을 입은 사람들로,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리며 서로 대적하는 모양을 하며, 날뛰고 뒤쫓으며 소란을 피우는 듯한 동작의 춤을 추며 놀이룰 한다. 그리고 그 오 랑캐옷은 화려한 수가 놓인 비단으로 지어전 것이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또 웃통을 벗은 사람들이 등장하여 길거리에 서 물을 뿌리며 추위를 쫓아 냈다. 이 놀이는 지금의 중앙아시아 지방인 서역으로부터 들어온 놀이여서 ,92) 본시는 〈추위를 불러들

92) 먀唐書』 권 198 떤§戒傳」에서 康國은 상t人皆深目高鼻, 多鼓潟. …… 人 多璃酒, 好歌舞於道路. …… 至十一月 , 鼓舞乞寒,以水相澄, 盛爲戱樂; > (球斤唐書』 권 221 下 멘域傳」 略同)이라 했고, 『宋史』 권 490 「高昌傳」 등에도 澄寒戱를 하는 풍속에 대한 기록이 있으니, 이 놀이는 康國 • 高昌 같은 西域 나라들로부터 들어온 것인 듯 하다.

여 더위를 쫓는 〉 놀이였을 것이나, 중국으로 둘어와서 반대로 〈 추 위를 찾아서 쫓는 〉 놀이처럼 변하였을 것이다. 『북주서 (卯頃 書 )』 권 7 「선제기 (宣帝紀)」를 보면 대상 8 象) 원년 (579) 12 월에 정무전 (正武殿)에 나가 백관(百官)과 궁인 (宮人) 및 내의 명부(命 婦)들을 모아 놓고 기악(技樂)을 크게 벌리고, 또 오랑캐 사람들을 풀어놓아 걸한(乞寒)을 하게 하여 물을 뿌리며 놀이를 하고 줄기게 하였다 .93)

93) 『 北周 書』 〈御正武殿 集百官及宮人 • 內外命婦, 大列技樂. 又縱胡人乞 寒, 用水漁沃爲戱樂. >

라는 기록이 있으니, 이 발한호회 (澄寒胡戱)는 이미 북조(北朝)에 도 수입되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 가무회〉로써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당대인 듯하다. 『구당서 ( 舊 唐 書 ) 』 권 97 「장 열전凍說傳)」을 보면, 칙천무후 側天武后, 684-701 년 재위 ) 말년부터 늦은 겨울이 되면 발한호회(澄寒胡戱)를 하였는데, 중종(中宗)도 누긱에 나가 그것을 구경한 일이 있었다. 94)

94) 면唐 害 』 〈自則天末年季冬, 爲澄寒胡戱, 中宗 當 街법比以觀之. >( 球月唐書 』 권 125 멩緖沮i」에도 보임 . )

라고 하였으며, 중종 이후로도 예종( 睿 宗, 710-712 년 재위)의 경운 (景雲) 2 년 12 월에 〈발한호회처卜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95) 장열 (張 說, 667-730) 은 현종(玄宗, 713-755 년 재위) 초년 (712}96) 에 「소마

95) 뎅唐 書』 권 5 「 睿 宗紀」.

96) 軍述 」시 제 5 수에 보이는 倻 1 成皇后났근 睿 宗의 后 寶 氏로 玄宗의 어 머니인데, 則天武后에게 죽음을 당한 뒤 玄宗이 죽위한 다음 다시 皇太后 로 追尊된 데 근거를 둔 것이다.

차(和 奈 連)」시 5 수를 짓고 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장열이 이 놀이 롤 금할 것을 싱주하여, 이듬해인 개원(開元) 원년 (713) 에 이룰 금하는 영을 내리어 이 놀이가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97)

97) 'l禪唐書』 멩綿沮i」 및 『 通典 』 권 146, 『 大唐招令 』 등 참조.

이 〈 발한호희 〉에 보이는 〈혼탈대 (i軍脫隊) 〉 란 혼탈무(i軍脫舞)를 추는 무대 (舞隊)일 것이다. 〈 혼탈(i單脫 D 의 뜻에 대하여는 명 (明) 대 전사원(陳士元, 1550 년 전후)의 『제사이어해의 (諸史夷語解 義 ) 』 에 서는 혼탈(海脫)이란 자루나 주머니를 뜻한다 .98)

98) 『諸史夷語解義 』 〈潭脫, 華言 蔡豪 也. >

라고 하였고, 이심형 (李料衡)의 『금천쇄기 (金川瓊記)』에는 감숙(甘 肅 ) 부근 황하(黃河)의 서녕 (西寧) 일대에는 혼탈(潭脫)이 많은데, 양가죽에서 그 뼈와 고기를 빼내고 만든 것으로 가벼워 물 위 로뜬다 .99 )

99) 『金 Il 卿山 〈甘 肅 隣近黃河之西寧一帶, 多潭脫. 蓋取羊皮, 去骨肉製成, 輕浮水面.〉

라고 하였으며, 섭자기 (葉子奇)의 『초목자(草木子)』에서는 북쪽 사람들은 작은 소를 잡아 등 위에 한 구멍을 뚫고 속의 뼈와 학]를하나하나 돌아가며 뜯어 내면, 밖의 가죽은 온전하면서도 부 드러워 거기에 우유와 술 따위를 담는데, 이것을 혼탈(潭脫)이라 부

른다 .100)

100) 먀子』 〈~t人殺小牛, 育上開一孔, 逐旋取去內頭骨肉, 外皮皆完, 括 軟, 以盛乳酷酒溫, 謂之潭脫. >

고 풀이하였다. 이들과 비슷한 시대인 16 세기 중엽 조선(朝鮮)에서 간행된 중국어 해설서인 『증정주의태고집람(增定奏議擇稿輯覽)』 IOI) 권 4 상(上)에서는 혼탈(潭脫) : 북쪽 사람들이 소롤 잡아 등에 큰 구멍을 뚫고, 그 구 멍을 통하여 머리와 뼈와 고기 등을 모두 빼내고 가죽만을 완전히 남 기어, 거기에 우유제품을 담기도 하고 또 그것을 타고 물을 건너기도 하였다 .102)

101) 韓國 高麗大學校 圖書館 所藏本(『書誌學報』 第 8 號(韓國書誌學會, 1992f lj} 載複印本) 102) 『增定奏議擇稿輯覽』 〈潭脫, 北人殺牛, 作大孔於音, 由孔中去其頭及骨 及肉 令皮皆完, 因用盛ilf, 又乘以渡*. >

라는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니 〈혼탈〉이란 16 세기 무렵에 양이나 소 같은 침승의 살과 뼈를 다 빼내고 그 가죽만을 완전히 남기어, 우유나 술 같은 것을 담는 자루로도 쓰고, 거기에 바람을 넣어 물 위에 띄우고 물을 건너는 데 쓰던 물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당서 (新唐書)』 권 34 「오행지 (五行志)」를 보면 복요倻及 妖)의 예로 디음과 같은 보기를 들고 있다. 태위 dctM) 칭손무기 (長孫元思)가 검은 양털로 혼탈(海脫) 털모자 를 만들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본뜨면서 조공혼탈側i公海脫) 이라불렀다 .103)

103) 딸唐書』 성混長孫元랐 以烏羊毛爲潭脫藍幡, 人多效之, 謂之趙公潭

脫.〉

그래서 임반당(任半塘)은 『당희롱』 제 3 장 「극록®幽*)」 소막차 (蘇莫連)에서 소막차희 頃森莫連戱) 안의 혼탈대 (i軍脫隊)는 혼탈모(海脫幌)를 쓰고 혼탈무(j軍脫舞)를 춘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인들은 오랑캐말 혼 탈(j軍脫)에서 그 속이 비고 주머니 모양이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 104)

104) 『唐戱弄』 여初跋鎖並內之潭脫隊, 乃因戴潭脫情, 作潭脫舞而得名. 漢人 於胡語潭脫, 取其中空與豪形之義. >

라고설명하고있다. 그런데 이 혼탈모(?軍脫隋)란 지루 모양의 털가죽을 뒤집어 쓰는 일종의 가면 모양의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혜립 (慧瑞, 730 년 전후) 의 『일체경음의 (一切經音義)』 권 41 「대승리취육바라밀다경음의 ~ 乘理超六波羅藍多經音義)」를 보면, 소막차頃漠連)는 서융(西戒)의 오랑캐말로서 삽마차(堀歷進)라 말 하는 것과 같다. 이 놀이는 본시 서구자국(西龜炫國)에서 나온 것인 데 지금도 이 곡이 있으며, 그 나라의 혼탈(潭脫) • 대면 8: 面) • 발두 (擦頭)의 종류이다. 혹은 짐승의 얼굴을 하기도 하고 혹은 귀신 모습 울 하기도 하며, 여러 가지 가면의 모양을 빌었었다. 혹은 진흙물을· 행인들에게 뿌리기도 하며, 혹은 올가미를 던져 사람을 얽어 가지고 잡음으로써 놀이를 하였다. 매년 7 월 초에 공개적으로 이 놀이룰 행 하여 7 일에야 멈추었다. 토속적으로 전하는 말에, 늘 이 방법을 가지 고 나찰(羅利)과 악귀(惡鬼)를 물리치고 쫓아 내어, 인민의 재난을 먹어 없앤다고 하였다. 105)

105) 『一切經音義』 여맘跋홉, 西戒胡語也,正云翊磨追. 此戱本出西龜鉉國,

至今猶有此曲, 此國潭脫 • 大面 • 擦頭之類也. 或作獸面,或象鬼神, 假{肖種 種面具形狀. 或以泥水霜漏行人, 或持羅索掛ifi.J. 提人爲戱. 每年七月큐n , 公 行此戱七日乃停.土俗相傳云, 常以此法損原耀超羅利惡鬼,食昭人民之災 也.〉

라는 설명이 있다. 여기에서 소막차를 〈혼탈(海脫) • 대면伏:面) • 발두(擦頭 )106) 의 종류〉라고 한 것은 무엇보다도 이것들 모두가 가 면놀이임을 뜻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106) 擦頭는뒤에 다시 자세히 설명할것임.

임이북(任二~t)은 『당희롱』에서 〈혼탈무只룹 설명하면서, 앞머리 에서 인용한 여원태(呂元泰)의 상소문을 근거로 〈군전(軍陣)의 형 세〉와 〈전쟁의 형상났t 나타내는 춤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말을 타고 오랑캐옷을 입고〉 물을 뿌리며 법석을 떠는 이 놀이의 나쁜 점을 특히 꼬집은 표현이지, 〈혼탈〉이리는· 말과 직접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구당서』 권 24 「예의지 여안羲志)」를 보 면, 대종(代宗)의 영태 (永泰) 년간 (765) 에 국자학(固子學)을 다시 이룩하고 강론(講論)을 하면서 교방(敎坊)의 악부잡기 傑府雜使)를 벌였으며, 얼마 뒤에는 그 곳 논당(論堂) 앞에서 내교방음악(內敎 坊音樂)과 간목혼탈(半木潭脫 )107) 을 벌였다고 하였다. 두보(杜甫, 712 구 70) 의 「관공손대낭무검기행 (觀公孫大娘舞劍器行)」 (『全唐詩』 4 函 2 冊) 시 서문에 검기혼탈億 I j器潭脫)이라는 말이 보이고, 이백 (李白, 701-762) 의 「초서가행 (草書歌行)」 (『全唐詩 』 3 函 4 冊)에 〈공 손대낭혼탈무(公孫大娘潭脫舞)〉라는 말이 보인다. 돈황(敦燒)에서 나온 대곡 8 曲)의 「검기사ffilJ器詞)」 (任二北 맹馮!曲校錄』 第三 大曲) 의 끝머리에 다시 〈칼춤을 얼마나 잘 추는가? 혼탈(?軍脫)이 앞으 로 나오네 {n l J器里多少, 潭脫向前來)〉라는 구절이 보인다. 소악(森 Ji, 890 년 전후)의 『두양잡편(杜陽雜編)』 권 중(中)을 보면, 경종

107) 〈半木潭脫〉인지 〈等木과 潭脫〉인지 분명치 않다.

(敬宗, 825-826 년 재위) 때 궁전에서 음악과 백희 (百戱)를 크게 벌 였는데, 기녀(岐女)인 석화호(石火胡)의 양녀 다섯 명이 그의 지휘 에 따라 백척간상(百尺半上)에서 가무를 하다가 〈갑자기 손발을 한 꺼번에 들면서 답혼탈~ 하는데, 노랫소리가 오르내리면서 마치 평지를 밟는 듯하였다〉 108) 라는 이야기를 적고 있다. 앞에 보 인 간목혼탈(半木海脫)은 『두양잡편(杜陽雜編)』의 백척이나 되는 간 상(半上)에서의 혼탈(海脫)과 같은 것인 듯하며, 〈답혼탈~踏潭脫)〉 은 가무를 하다가 재주를 넘는 것(翻筋斗) 같은 격렬한 동작을 수 반하는 춤인 듯하다. 여원태 (呂元泰)의 상소문에서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며 서로 대적하고〉 〈둘뛰고 뒤쫓으며 법석沼t 떤다고 한 것도 그 춤의 격렬한 동작에서 나온 표현일 것이며, 그런 동작이 칼춤과 결합되어 검기혼탈億 l j器潭脫)이 이루어전 것인 듯하다. 돈 황(敦遠)의 「검기사{ii l j器詞)」에 의하면 칼충과 혼탈(潭脫)은 별개의 것이며, 공손대낭(公孫大娘)은 칼춤에다 혼탈무도 곁들여 추었기 때문에 이백은 칼춤의 명인인 공손대낭의 춤을 혼탈무(潭脫舞)라고 표현했을것이다.

108) 『杜 〈供而手足齊擧, 爲之踏潭脫, 歌呼担賤,, 若履平地. >

『악부잡록멤騎雜錄)』 「고가부(鼓架部)」에는 양두혼탈(羊頭潭脫) 이 구두사자(九頂獅子) • 농백마(弄白馬) 등 동물놀이 등과 함께 보 이고, 『송사(宋史)』 권 142 「악지 偶誌)」의 대무(除舞)에는 일곱 번째로 옥토혼탈대 (玉弼ffi隊)가 보이는데 옥토관任兎冠)을 머리 에 썼다고 하였다. 이런 경우엔 짐승 털가죽으로 만든 자루처럼 덮 어쓰는 가면도 혼탈(潭脫)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교방기 (敎坊記)』 「곡명(曲名)」 속에는 취혼탈(醉潭脫)이 보이는데, 이것은 취호(醉胡)와 관계가 있을 것이며, 가면과 함께 격렬한 동작의 춤 모두 관련이 있는 듯하다.

다음에는 장열여隨t)의 「소막차(森莫述)」 시 5 수( 『 全 唐詩』 2 函 4 冊)를 음미해 보기로 한다. 마차(摩述)는 본시 바다 서쪽 오랑캐에서 나왔으니 유리보배 눈에 자줏빛 수염 지녔네. 황제의 은혜 온 우주에 펼쳐 있다는 말 듣고 와서 노래하고 춤추며 기쁨과 줄거움 돕는 걸세. 만만년줄기세 ! 수놓은 옷에 붉은 천으로 머리 두르고 보배로운 화관 썼으며 오랑캐노래에 말타고춤추어 구경거리 만들어 주네. 스스로 물 뿌려 음기 (陰 氣 ) 이루니 올해 추위와 더위 걱정할 것 없겠네. 만만년즐기세 ! 섣달의 엉긴 음기 (陰氣) 제왕의 누대에 쌓이어 호쾌한 노래와 빠른 북소리에 추위 실리어 오네. 기름자루에 은하수물 담아다가 축수하는 만년술잔에 더 보태어 드리네. 만만년즐기세 ! 찬 기운 사람과 찰 어울리는 것이 가장 좋아서 일부러 찬물을 뜰 앞에 뿌리네. 오직 성군앤君)의 무한한 수 바라노니 영원히 새해로 낡은 해 이으소서 ! 만만년줄기세! 소성황후(昭成皇后)는 황실의 어른

영예와 즐김 사람들 중엔 비할 바 없네. 지난날 서리 앞에 꽃 지듯 하셨으나 올해엔 눈 온 다음 봄 만난 나무처럼 피어나시리 ! 만만년줄기세 ! 摩進本出海西胡, 琉璃賓眼紫器盤. 聞道皇恩遷宇宙, 來將歌舞助歡i吳. 億歲樂! 綠裝柏額賓花冠, 夷歌騎舞借人看. 自能激水成陰氣, 不慮今年寒不寒. 億樂! 臘月疑陰積帝臺,豪歌急鼓送寒來. 油墓取得天河 7k, 將添上 壽 萬年杯. 億! 寒氣宜人最可隣, 故將寒水散庭前. 惟願聖君無限壽, 長取新年續舊年. 億歲樂! 昭成皇后帝家親, 榮樂諸人不比倫. 往日森前化委地, 今年雪後樹逢春. 億! 앞에 인용한 『일체경음의 (一切經音義)』의 소막차頃漠連)에 대한 설명과 이 시 다섯 수를 종합해 보면 좀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소막차났즌 삽마차(堀曆進) 또는 마차(摩進)라고도 불렀는 데 서융(西戒) 오랑캐말이다. 임반당(任半塘)은 혜립 環跡)의 『일

체경음의.!I에서 〈또 소막차모(蘇莫述幡)처럼 사람의 얼굴과 머리를 뒤집어 씌웠다〉 109) 라고 한 말과, 송(宋)대 왕명청 (王明淸, 1127 -1214 ? )의 대주전록(揮臘前錄)』 권 4 의 고창(高昌)의 습속을 설 명하면서 〈부인들이 유모(油幌)를 쓰고서 그것을 소막차(森莫連)라 부르며 …… 은이나 놋쇠통에 물을 퍼다가 서로 뿌리며 끼얹었 다〉 110) 라고 한 것을 근거로, 〈소막차났근 본시 혼탈(海脫)이나 같은 종류의 머리에 뒤집어 씌우는 모자 모양의 가면과 같은 성질의 것 이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109) 『一切經音義』 0( 如蘇莫追幌 覆人面目 . > 110) 『揮曆前錄』 센人戴油幌 謂之蘇莫進, …… 以銀或鉛爲節肝水, 激以相 射.〉

둘째, 이 놀이는 서쪽 오랑캐 또는 서구자국(西龜鉉國)에서 나온 것이어서, 오랑캐노래〔夷哥幻롤 부르기도 하였다. 셋째, 『일체경음의』에서 설명된 〈소막차〉리는 가무희에서는 〈혼 탈〉이 함께 싱연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장열佛說)의 시에서 〈오 랑캐노래에 말타고 춤춘다〉라고 한 것은 〈혼탈무〉일 가능성도 있 다. 넷째, 〈소막차〉에서는 〈유리눈에 자색수염이 달린〉 오랑캐가면 울 쓴 사람이 주역일 것이다. 그 밖에 짐승이나 귀신가면을 쓴 사 람들도 여러 명 등장하여 가무를 하였다. 다섯째, 발한호희 (澄寒胡戱)는 사람들에게 물을 서로 뿌리는 것 으로놀이가절정에 이르게 되는데, 깨끗한물(은하의 물)을쓰기 도 했지만 진흙물을 뿌리기도 하였다. 여섯째, 물을 뿌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 울가미를 던져 사람 들을 잡는 놀이도 하였다. 일곱째, 놀이의 목적은 왕명청의 『휘주전록(揮鷹前錄)』에서 고창 (高昌)의 풍습을 설명하면서 〈혹은 물을 서로 뿌리며 놀이를 하면

서, 양기 (陽氣)를 누르고 병을 쫓는다 〉 Ill) 라고 한 것일 것이다. 그 러나 『 일체경음의』에서는 〈 나찰(羅利)과 악귀 (惡鬼)를 물리치고 쫓 아 내어, 인민의 재난을 없앤다 〉 라고 하였으며, 장열(張說)의 시의 경우는 현종(玄宗)이 칙천무후側天武后)에게 죽임을 당한 어머니 소성황후(昭成皇后)를 황태후頃太后)로 추존(追 尊 )하며 명복울 비 는 뜻에서 행해졌던 놀이인 것처럼 보인다. 그 시의 화성 (和聲)을 〈억만세 (億萬歲)〉라고 하였던 것을 보면 축수(祝壽 )하는 뜻으로도 쓰였던 듯하다.

111) 『揮曆前錄』 〈或助k 交澄爲戱 謂之壓陽氣去病. >

이 〈 소막차 〉 란 가무희도 칙천무후 말년 (704} 무렵부터 현종의 개원 (開元) 원년 (713) 까지의 짧은 기간에 유행했던 호희 (胡戱)인 데, 여원태 (呂元泰) • 혜림 (慧瑞) • 장열(張說) 등의 기록에 모두 차 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연출 때마다 약간씩 다른 형식의 가무를 썼음이 분명하다. 2) 발두(擦頭) 두우(杜佑)의 『통전(通典)』 권 146 울 보면, 가무회에는대면伏面) ·발두(擦頭) ·답요낭價f描娘) •굴뢰자燁덴 子) 등의 놀이가있다. 발두(擦頭)는 서역에서 나왔다. 호인(胡人)이 맹수에게 물려 죽었 는데, 그아들이 짐승을찾아내어 죽였다. 그래서 이 춤을만들어 그 것을 형용하였다. 112)

112) 『 通典 』 여녔續戈, 有大面 • ffl頭 • 踏描娘 • 窟邊子等戱. > 〈擦頭出西域. 胡人爲猛獸所11,1, 其子求獸殺之, 爲此舞以象之也. >( 면 罰 軒 홀 』 권 29 「音樂 志」에도 같은 기록이 있음. )

단안철 (段安節)의 『악부잡록 (樂府雜錄) 』 「고가부 (鼓架部)」에서는 이룰 발두(鉢頭)라 쓰고, 옛날에 어떤 사람의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었는데, 그는 마침내 산으로 울라가 아버지의 시체를 찾아 냈었다. 산에는 여덟 구 비가 있었기 때문에 그 악곡에도 여덟 첩 (發)이 있게 되었으며, 놀이 롤 하는 사람은 머리털을 풀어 헤치고 흰 옷을 입고서 얼굴은 우는 모 습을 했는데, 상(喪)을 당한 형상이었다. 113)

113) 『樂府雜錄』 〈昔有人, 父爲虎 FH g, 遂上山尋其父晟. 山有八折, 故曲八 壘. 戱者被髮 素衣, 面作暗, 蓋遺喪之狀也. >

라고설명하고있다. 위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발두冷근 서호회 (西胡戱)이며 (『通 典 』 ), 어떤 사람이 맹수(『通典 』 ) 또는 호랑이 (『樂府雜錄 , )에게 잡아 먹혔는데, 그 아들이 그 짐승을 찾아가 잡아 죽이고 아버지의 복수 룰 하는 모습을 재현한 〈가무회〉이다. 그런데 산에 여덟 구비가 있음에 비추어 〈발두〉의 악곡도 여덟 첩 (憂)이라 하였으니 (『通 典 』 ), 그 고사의 정절(情節)도 아주 간단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놀이를 하는 사람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흰 옷을 입고서 얼굴은 우는 모습을 하며 상(喪)을 당한 모양을 하였다〉 ( 『 通典』)라고도 하였다. 다시 『통전』에서는 〈발두〉가 〈대면 伏面) • 답요낭~ • 굴뢰 자(窟邊子)와 갇은 가무회〉라 하였고, 앞에서 인용한 『일체경음의』 에서 〈소막차注근 〈이 나라의 혼탈(i軍脫) • 대면 伏:面) • 발두(擦頭) 와 갇은 종류이다. 혹은 짐승가면을 쓰기도 하고 혹은 귀신 형상을· 나타내면서 여러 가지 가면의 모양을 빌었었다〉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에 보이는 대면 • 답요낭 • 소막차 • 혼탈 등이 모두 〈가무희〉이

며 가면놀이였음을 전제로 할 때, 아 〈발두〉도 가면놀이였음이 분 명하다. 곧 〈머리를 풀어 헤치고 우는 모습의 얼굴 모양났t 한 가 면을썼을것이다. 왕국유(王國維)는 『송원희곡사(宋元戱曲史)』 첫째 장에서 〈발두 (擦頭)〉 또는 〈발두(鉢頭)注근 의국어의 역음(譯音)이며, 『북사(北 史)』 「서역전 (西域傳)」에 보이는 발두국(拔豆國)에서 온 것일 것이 라고 하였다. 임반당(任半塘)이 『당희롱』에서 그 근거가 약함을 논 하면서, 대면 8 面) • 소막차(蘇莫連) • 혼탈(i軍脫) 모두 얼굴이나 머리와 관계가 있는 말임을 생각할 때 〈발두(鉢頭)〉란 말도 머리와 의 관계 때문에 생겨난 말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북사(北史)』 권 96 「부국전(附國傳)」에서 〈그 곳 풍속은 가죽으로 모자를 만드는 데, 모양이 둥글고 바리 같았다〉 114) 라는 말도 인용하고 있다. 이 롤 합쳐 생각하면, 〈발두〉란 말이 〈소막차〉나 〈혼탈〉 같은 머리에 뒤집어 쓰는 모자를 뜻하는 말에서 생겨났고, 다시 〈발(鉢)〉자를 음이 갇은 〈발(擦)〉자로도 쓰게 되었을 것도 같다. 그리고 음역된 말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뜻도 암시하는 〈두(頭)〉자를 썼을 것이 다.

114) 『北史』 여俗以皮爲幅 形圓如鉢 >

따라서 이 놀이를 하는 사람도 코가 크고 눈이 움푹 들어간 서쪽 오랑캐의 모양을 한 가면을 썼을 것이며, 〈소막차〉의 경우처럼 맹 수나 호랑이가면을 쓴 자들도 등장했을 것이다. 〈머리를 풀어 헤 치고 흰 옷을 입고 우는 얼굴 모습을 하여, 상을 당한 모양沼t 하 였다는 것도 오랑캐가면 모양에 보태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장호徵祐 ?-853?) 에게는 「용아발두(容兒鉢頭)」(『全唐詩』 8 函 5 冊)라는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금수레 다투어 몰며 가죽띠 두른 소 꾸짖는 속에 웃음소린 오직 천추절(千秋節)을 기뻐하는 것이네. 양편 모퉁이 결문 안에서는 115) 용아(容兒)를 본뜨면서 발두(鉢頭)놀이를 하네. 爭走金車 P 七陝牛, 笑野 I 佳是說千秋. 兩邊角子羊門裏, 猶學容兒弄鉢頭.

115) 이 구철 여日子羊門났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 <'1-r>는 〈모퉁이〉, 〈羊門冷 〈작은 문〉 〈결문〉이란 뜻으로 적당히 번역하였다.

용아(容兒)는 〈발두〉놀이를 찰 하던 기인 (使人)의 이름일 것이 다. 그리고 여기의 〈천추(千秋)났근 당 현종(玄宗)의 생일인 8 월 5 일이니, 황제의 생신을 축하하는 뜻으로 〈발두〉가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맹수에게 잡아 먹힌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내 용의 〈가무회〉나 〈상을 당한 모습〉의 출연자는 분위기와 맞지 않 는다. 그러므로 〈발두〉도 다른 〈가무회冷준과 마찬가지로 성격이 전혀 다른 가무가 연출되기도 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체로 보다 줄거운 모양 또는 우스운운 모습을 한 가면을 쓰고 여러 짐승들 과 어울리어 노래하고 춤추며 축수를 하는 성격의 〈발두〉도 있었 음이 분명하다. 3) 합생(合生) 『신당서(新唐書)』 권 119 「무평일전(武平一傳)」에는 다음과 감은 합생 (合生)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뒤에 양의전 여浦誤支)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황제 (中宗, 705-:709 재위)가 황후의 오빠 광록~ 僚焉沙卿) 영 (嬰)에게 명하여 감주僚i

酒)를 하게 하였다. 영 (嬰)은 웃기는 짓을 잘하고 민첩하여 , 여러 학 사(學士)들에게 명하여 그를 조롱토록 하였으나 영 (嬰)은 여러 명을 잘대적하였다. 술이 얼큰해지자 호인(胡人)인 말자(複子) ·하의(何懿) 등이 합생 (合生)을 노래하였는데, 노래말이 천박하였다. 그리고 오만하여 사농 소경(司農少卿) 송정유(宋廷瑞)에게 하사한 어대(魚袋)를 뺏으려고도 하였다. 무평일 (武平一) 이 글울 올려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음악은 하늘의 조화요, 예의는 땅의 질서입니다. …… 엎드려 생각 하건대 오랑캐음악을 성률(聲律)에 따라 연주케 하는 것은 본시 사방 오랑캐둘의 수를 갖추어 놓으려는 것이었는데, 근래에는 날로 방탕하 여져서 기이한 악곡과 새로운 노래가 슬픔과 애듯함에 빠지게 하고 있 습니다. 왕공(王公)에서 시작하여 서민들에 이르기까지도 요상한 기 예 (使藝)를 지닌 호인들과 거리의 아이들 및 저자사람들이, 혹은 후 비 燁妃)와 공주(公主)들의 실정과 모양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혹은 왕공(王公)의 이름과 실상을 나열하기도 하면서 읊고 노래하며 춤을 추면서 이룰 합생 (合生)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116)

116) 땅唐容』 〈後案兩儀殿 帝命后兄光祿少卿嬰監酒. 嬰滑稽敏給, 認學士 廟之,嬰能抗數人.酒龍胡人複子•何懿等唱合生,歌言浚 a. 因個律,欲 奪司農少卿宋廷諭賜魚.平一上書練日,樂, 天之和;禮,地之序.……伏見 胡樂施於聲律, 本備四夷之數. 比來日益流岩, 異曲新聲, 哀思 lH. 始自王 公,稽及問卷,妖使胡人,街童市子,或言妃主情視,或列王公名質,泳歌踏 舞, 號曰合生. >( 『全唐文』 권 268 ~하蟲:用偶優媒押書」에도 보임 . )

이에 따르면 앞머리에서 〈합생 (合生)을 노래했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술에 취한 호인(胡人) 두 명 이상〉이 불렀으며, 그 〈노랫 말이 천박〉하고, 그 자들이 〈오만하다〉 하였으니 연출자들은 행동 이 천박하면서도 황제의 대우를 잘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뒤의 무평일(武平一)이 간하는 글 속의 〈합생冷든 〈오랑캐

음악〉이며 〈왕공으로부터 서민들 사이〉에 널리 유행하였고, 연기 자에는 〈호인(胡人)〉도 있었지만 〈길거리의 아이들과 저자사람들〉 도 가담하였으며, 그 내용은 〈혹은 후비 (后妃)와 공주(公主)들의 실정과 모양울 이야기하기도 하고, 혹은 왕공의 이름과 실상을· 나 열하기도 하면서〉, 〈읊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분명한 〈가무희〉이 다. 초순(魚循 1763-1820) 은 『극설 ®說)』 권 1 에서 왕당(王業)이 『지신록(知新錄)』에서 위 『구당서 (舊唐書)』에 보이는 〈합생 〉을 〈곧 원본(院本) • 잡극(雜劇)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고 있는 것도, 그 것이 〈가무회〉임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합생〉의 악상은 〈방탕하며〉 〈슬픔과 애톳함에 빠진〉 것이었다. 117)

117) 宋 曾梅의 『類說』 권 @肥]도 『景龍 文館記』의 여탑엥奏合座歌, 其言浚fi. 武平一諒曰, 妖胡 00, 街童市女, 談妃主之情tt, 列王公之名質, 討하썼g 舞, 號曰合座, 不可施於宮禁. 〉이란 글을 싣고 있다.

〈합생〉이란 기예는 송(宋)대에도 크게 성행하여 맹원로頃元老, 1126 년 전후)의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 서호노인(西湖老人, 1210 년 전후)의 『 번승록(繁勝錄)』, 내득옹(兩得翁 1235 년 전후)의 『도성기승(都城紀勝)』, 오자목(吳自牧, 1270 년 전후)의 『 몽량록(夢 梁)』, 주밀(周蓋 1232-1308) 의 『무림구사(武林舊事)』 118) 등에 보이고, 합생 (合座)이라고도 쓰고 있는데, 이소창(李猫倉)의 『송원 기예잡고(宋元使藝雜考)』 「합생고(合生考)」, 임반당(任半塘)의 『당 희롱』 제 2 장 「변체 (辨體)」 합생 (合生) 등에서, 이것들은 당대의 〈합생〉과는 완전히 달라전 강창(講唱)에 속하는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소창(李唱倉)은 송(宋)대 사림들의 〈합생冷든 민간의 영물 (泳物) 또는 서정 (行情) 등의 민가(民歌)와 거기에다 옛 사람들의

118) 『東京夢華錄』 권 5 「京瓦使藝」와 권 8 「六月六 B 崔府君生日 」 『繁勝錄』 瓦市, 『 都城紀勝』 瓦舍衆使, 맹潔錢 U 권 20 「小說諸經史」, 『武林舊事』 권 6 「諸色使藝人」 등에 보임 .

잡조(雜廟)가 합쳐져 변화하여 이루어전 것인 듯하다고 주장하며, 이를 증명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 합생 〉 과 잡조(雜朝)를 함께 설명한 보기를 여러 책에서 들며 그 두 가지 기예 (使 藝 )의 관 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 신당서(新唐 書 )』 「무평일전(武平一 傳)」의 기록에서도 맨 앞머리에, 잔치의 감주燁酒) 노릇을 한 황 후의 오빠 영 (嬰)이 〈웃 기는 짓을 잘 하고 민첩하여, 여러 학사(學 士)들에게 명하여 그를 조롱토록 하였는데, 영 (嬰)은 여러 명을 잘 대적하였다〉라고 한 것은 곧 잡조(雜廟)를 한 것이다. 당나라의 가 무희인 〈합생〉도 잡조(雜廟)와 함께 연출되었던 것이다. 이 잡조의 영향을 받아 송대에 이르러서는 〈합생〉에서도 고사(故事 )와 춤이 약화되어 버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또 그와 함께 호악(胡樂) • 호회 (胡戱)의 성격도 없어져 버렸던 듯하다. 무평일(武平一)과 〈합생〉에 관계되는 기록은 다른 책에도 더 보 이기는 하나 『 신당서 (新唐 書 ) 』 의 내용보다 더 자세한 것은 없다. 〈 합생 〉 이 민간에도 유행되었다니, 민간에서는 그 가무회가 더욱 다양하게 발전했을 것이지만, 더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4) 농바라문(弄婆羅門) 당대는 불교가 성행하였으니, 인도 쪽에서 들어온 〈가무회〉도 없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농바라문(弄 婆門)이다. 『 악부잡록 』 「배우(俳優)」 조에 농바라(弄婆羅)로, 대중 9 어 1, 847-859) 초년에 강내 傳迫) • 이백 괴 (李百船) • 석보산 (石寶山) 이 있었다. 119)

119) 『樂府雜錄』 여챕潭, 大中쿠J1, 有康迫 • 李百怒 • 石寶山. >( 守山閣差書 本)

라고 하였다. 이는 수산각총서본(守山閣鼓 書 本)에 의거한 것인데, 〈바라(婆羅)〉 밀에 〈마땅히 문(門)자가 있어야만 할 것 같다〉 120) 는 주(注)가 붙어 있다. 명초(明砂) 『설부(說郭)』본에는 농바라문(弄婆羅門)으로 태화~t □, 827-835) 초년에 강내 偶沮~). 미화가(米禾fi) .미만추어갱&it)가 있었고, 근년에는 이백괴(李百 船) • 석요산(石瑞山)이 있다. 121)

120) ~겜뀜量下, 疑當有門字. > 121) 『樂 〈弄婆羅門, 太和구JJ, 有康酒 • 米禾諒 • 米萬捷, 近年有李百 i'! • 石瑞山也. >( 明紗 r 說郭』本)

라고 하였다. 본시 〈농(弄 )X 즌 동사로 〈놀이를 하다〉의 뜻을 지녔 울 것이며, 〈바라문(婆羅門)冷든 범어 (梵語) 〈 bramana 〉의 음역으 로, 인도사성 (四姓) 중의 하나로 대범천 0 여梵天)을 받들어 정행 (淨 行)을 닦는 일족임을 뜻하고, 또 브라만족이 받드는 브라만교를 뜻 하기도 하며, 인도의 별칭으로도 쓰였다. 농바라문(弄婆羅門)은 〈브라만놀이〉 정도의 뜻을 지녔으나, 그 가무가 어떤 것이었는지 이상의 기록만으로는 알 길이 없다. 문종~ 초년 또는 선종(宣 宗) 초년에 이 놀이의 전문가들로 앞에 예로 든 사람들이 있었고, 〈농 (弄) 〉이라는 동사가 〈농참군 (弄參軍) > 〈농가부인 (弄假婦人) > (『樂府雜錄』 俳優) 〈농대면희 (弄大面戱) >( 鄭萬鈴 「代國長公主碑」) 〈농 육참군(弄陸參軍)〉(范植 『雲溪友議,) 등의 예와 같이 〈가무희〉 등의 〈놀이룰 연출한다났큰 뜻을 지니고 있으니, 〈농바라문(弄婆羅門)〉도 〈가무희〉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구당서 (舊唐書)』 권 29 「음악지 (音樂志)」에는 또, 바라문악(婆羅門樂)은 사방의 오랑캐와 같은 대열의 것이다. 바라 .

문악에서는 옻칠한 피리 둘과 제고(齊鼓) 하나를 썼다. 122)

122) 면唐喜』 생驛t門樂, 與四夷同列. 婆羅門樂, 用漆纂築二, 齊鼓一. >( 杜 佑 『通典』 권 14 6oJ l 도 비슷한 기록이 있음. )

라고 하였다. 진양(陳賜 1105 년 전후)의 『악서 (樂書)』 권 173 「농 바라문(弄婆羅門)」에서는 『구당서』와 『악부잡록』에 보인 그에 관한 기록을 합쳐서 설명을 하고 있으나, 권 184 의 「바러문(婆羅門)」에 서는 약간 다른 설명이 보인다. 바라문무(婆羅門舞)는 은으로 장식한 자색의 옷을 입고 석환장(錫 禪)을 들고 추었다. 당나라 태화얹햐 U) 초년 (827) 에는 강내얘t 酒) • 미화가偉禾;fi) • 미만추億萬提)가 있었고, 뒤에는 이백미 (李百 婚) • 조촉신(曹觸新) • 석보산(石賓山)이 있어, 모두 농바라문(弄婆羅 門)을 잘 했었다. 뒤에는 예상우의 (寬裝羽衣)로 바뀌어졌는데, 그 곡 조는 개원 (開元) 연간 (713-741) 에 서량부(西涼府) 절도사(節度使) 양경술 (楊敬述)이 전상한 것이다. 123)

123) 『樂書』 생瓚門舞 衣排紫色衣, 執錫銅杖. 唐太和f}], 有康酒 • 米禾 fi • 米萬捷, 後有李百婚 • 曹觸新 • 石寶山, 皆善弄婆羅 F 꿔 Rh. 後改爲堯芸 羽衣矣 其曲, 開元中西涼府節度楊敬述所進也. >

바라문무(婆羅門舞)를 〈은으로 장식한 자색의 옷을 입고 석환장 (錫銀杖)을 들고 추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는 불교 호승(胡僧) 의 차림을 하고 춤을 추었던 것이다. 임반당(任半塘)은 『당희롱』에 서 윗글의 끝머리에 〈뒤에는 예상우의 (寬裝羽衣)로 바뀌었다〉라고 한 것은 전양(陳陽)이 전혀 다론 성격의 두 가지 춤을 혼동한 것이 라 하였다. 그러나 정우(鄭唱 859 전후)의 「전양문시 (津陽門詩)」 (『全唐詩』 9 函 3 冊)를 보면, 〈각각인간미시비 (却却人間迷是非)〉라는 구절 아래에 예상우의곡(寬裝羽衣曲)의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주를스스로달고있다. 섭법선(葉法善)이 황제〔玄宗〕를 인도하여 달나라에 들어갔는데, 때 는 가을이 이미 깊어 황제는 서늘함을 괴로워하였으므로 오래 머물 수 가 없었다. 돌아오느라 하늘을 반쯤 오는데 선악(仙樂)이 들려왔다. 뒤에 황제가 돌아와서 기억하고 있던 그 악곡의 반을 마침내 저로써 재현하였다. 그 때 마침 서량도독便i涼都督) 양경술(楊敬述)이 바라문곡(婆羅門 曲)을 진상해 왔는데, 그 가락이 서로 잘 맞아 마침내 달나라에서 둘 은 곡을 그 산서 (散序)로 삼고 양경술이 진상한 곡을 본곡으로 삼아 예상우의법곡(震裝羽衣法曲)이라 부르게 되었다 .124)

124) 「津陽門詩」 自注 성面去善引上入月宮, 時秋已深, 上苦凌冷, 不能久留. 歸於天半, 尙聞{賜築. 後上歸旦記憶其半, 遂於笛中寫之. 會西涼都督楊敬述 進婆羅門曲, 與其聲調相符, 遂以月中所聞爲之散序,用敬述所進曲作其陸, 而名党裝羽衣法曲.〉

『당회요傅會要)』 권 33 에 의하면 바라문(婆羅門)울 예상우의(寬 袋羽衣)로 고친 것은 천보(天寶) 13 년 (754) 이다. 125) 악사偶緩:, 930-1007) 의 『양태진의전 (楊太眞外傳)』에 의하면 천보 4 년 (745) 양태전(楊太眞)을 귀비(貴妃)로 책립馮立)한 날 이미 예성우의곡 (U 羽衣曲)을 연주하고 있었으니, 예상우의곡은 그 전부터 있었 던 것이다• 126) 다시 주밀 (周憲 1232-1308) 은 『제동야어 (齊東野 語)』 권 7 에서 〈예상(寬裝) 한 곡은 모두 36 단으로 이루어진 대곡

125) 『唐會要』 션혀t十三年, 改諸調名, 改婆羅門爲覽裝羽衣. > 126) 『楊太眞外傳』에는 그 이야기 바로 뒤에 注를 달아, 堂裝羽衣曲은 開元 年間 (713-741) 에 玄宗이 三鄕驛에 울라가 女凡山울 바라보고 일어났던 환 상을 작곡한 것이라는 전설과, 天寶 初年 (742) 에 玄宗이 羅公速과 함께 달나라에 가서 보고 둘은 수백 명 선녀들의 歌舞를 뒤에 재현한 것이라는 전설 두 가지를 인용하고 있다.

伏曲)〉 12” 이라 하였고, 백거이 (白居易, 772-846) 의 「예상우의가 ( 寬 裝羽衣歌)」 (『全唐詩 』 7 函 5 冊)를 보면, 〈 산서육주미동의 (散序六奏 未動衣) 〉 라는 구절 아래에 〈 산서 (散序) 6 편은 박자(拍子)가 없기 때문에 춤을 추지 않는다 〉 라고 스스로 주를 달고 있으며, 그 아래 〈중 서 (中序)에서야 비로소 박자(拍子)가 있어서 또한 박서 (拍序)라 고도 부른다〉고 주를 달고, 다시 〈번음급절십이편(繁音急節十二 循) 〉 아래에는 〈 예상파( 寬 裝破)는 모두 12 편으로 끝난다〉라는 주 를 달고 있다. 128) 중서 (中序)는 몇 편인지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제동야어 (齊東野語)』의 말을 참고하면, 중서 (中序) 16 편이 었울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신당서』 권 22 「예악지 며樂志)」를 보면,

127) 『 齊東野語』 , 〈混成集修內司所子 l j本, 古今꼽畑司之 譜 , 磨不備具. 只大曲一 類, 凡數百解, 他可知矣, 然有 譜 無詞者居半. 寬 裝一曲, 共三十六段. > 128) 「 范 芸羽衣歌」 自注 〈散序六偏無拍, 故不舞也.〉 〈中序始有拍, 亦名拍 序 . >성 없店切t十二偏而終. >

그 뒤에 하서(河西) 철도사(節度使) 양경충(楊敬忠)이 예상우의곡 ( 寬 裝羽衣曲) 12 편울 바쳤다. 라고하고, 그뒤에 다시 문종(文宗, 827-840 년 재위)은 아악(雅樂)을 좋아하여 태상경 8: 常卿) 풍정 (馮定)에게 명을 내리어 개원 (開元)년간의 아악(雅樂)을 채택해 가지고 운소법곡( 雲 部法曲)과 예상우의무곡( 寬 裝羽衣舞曲)을 짓게 하였다 .129)

129) 璋舟唐書』 OO友 , 河西節度使楊敬忠獻 党 袁羽衣曲十二這. >@ 며宗好雅樂, 語太常卿馮定采開元雅樂, 製 雲 部法曲及 党 袁羽衣舞曲. >

는 기록이 있다. 이상을 종합하면, 이미 개원 (開元)년간 (713-741) 에 현종(玄宗)이 만든 달나라선녀들의 춤을 상징한 예상우의곡(寬 袋羽衣曲)과 춤이 있었는데, 뒤에 양경술(楊敬述)이 서쪽에서 전상 해 온 바라문곡(婆羅門曲)의 악상이 서로 잘 어울리어, 이들을 합 쳐 모두 12 편의 예상우의법곡(寬裝羽衣法曲)으로 개편하였다. 130) 심팔(沈括, 1030-1094) 이 『몽계필담(夢溪策談)』 권 17 에서 『국사보 (國史補)』를 인용하여 예상곡(寬裝曲)은 모두 12 첩 (登)인데, 앞의 6 첩은 박자가 없고, 제 7 첩에 이르러서야 첩편(聲退)이라 부르며 비로소 박자가 있어 춤 을추게 된다 .131)

130) 楊敬述(방唐睿』{伊 ¢忠〉)이 전상한 것은 본시 婆羅門曲이나 뒤에 寬裝 羽衣曲으로 개작되었기 때문에 'lfin 崩홀』에서는 개작된 호칭을 쓴 것이다. 131) ~溪 따曲凡十二壘. 前六憂無拍, 至第七壘, 方謂之憂il, 始 有拍而舞.〉

라고 한 것도 그 법곡(法曲)을 설명한 것일 것이다. 그리고 문종 改宗) 때에 다시 풍정 (馮定)에게 명하여 이를 더욱 보충하여 개작 함으로써 36 단에 이르는 대곡伏曲)인 예상우의무곡(寬袋羽衣舞曲) 이 이루어졌던듯하다. 진양(陳陽)의 『악서 僕璃:)』 권 188 「호부(胡部)」에는 다시 당나라 호부(胡部)에는 음악에……이 있고, 놀이에는 참군(參 軍) • 바라문(婆羅門) • 양주곡(涼洲曲)이 있다. 132)

132) 『樂書』 簿胡部, 樂有 ……, 戱有參軍 • 婆羅門 • 涼洲曲. >

라고 하였는데, 도교적인 예상우의곡(寬裝羽衣曲)이 문종(文宗) 메

에 바러문곡(婆羅門曲)도 일부 흡수하여 규모가 큰 대곡伏曲)으로 발전하자, 바라문(婆羅門)도 호곡(胡曲)으로서 원래의 성격을 살리 어 〈가무희〉인 농바라문(弄婆羅門)으로 발전하여 한때 유행했던 듯 하다. 당나라 남탁(南卓)의 『갈고록(邦鼓錄)』 「제궁곡(諸宮曲)」의 태주상앉翁商)에는 바라문(婆羅門)이 있고, 『교방기 (敎坊記)』 「곡 명 (曲名)」에는 망월바라문遷月婆羅門)이 보이며, 돈황곡(敦煥曲)에 는 〈망월(望月)〉 두 글자가 허두에 붙은 네 수의 「바라문(婆羅門)」 이 있는데, 133) 모두 농바라문(弄婆羅門)을 연출할 때 불리워지던 악곡 중의 한 가지였을 것이다. 이공좌(李公磁 813 년 전후)의 『남 가태수전(南村太守傳)』올 보면, 〈영지부인(靈芝夫人)을 따라 선지사 (禪智寺)에 가 천축원(天空院)에서 우연(右延)이 바러문(婆羅門)을 춤추는 것울 보았다〉 134) 라고 한 대목이 보이는데, 우연(右延)은 중 의 이름일 것이니, 중당(中唐)시대까지도 절에서 중들에 의해 바라 문이 연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133) 任二北, 여쌌皇曲校錄』 第 1 「普通雜曲」 所載. 134) 『南祠太守傳』 〈從靈芝夫人過禪智寺, 於天쓴院觀右延舞婆羅門. >

왕국유(王國維)는 『고국각색고(古劇脚色考)』에서 바라(婆羅)가 송 (宋)나라 초기에는 포로僚璃)로 변하였고, 135) 그리고 이후에 다시 포라(抱鍾)로 변하였다고 하면서 맹원로頃元老, 1126 년 전후)의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 권 7 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인용하고 있 다.

135) 陳師道, 『後山詩話』에 보이는 楊大年의 「偶偏詩」에 &없겠條쁩광限 b ……> 이라보임.

보전루(寶津樓) 앞에서 백희 (百戱)를 하는데, 가면을 쓰고 긴 이빨 이 달렸으며 입에서 연기와 불을 토하는 귀신과 같은 모양을 한 자가 있었는데 ……그롤 포라(抱鍾)라 하였다. 136)

136) 『束京“錄』 OO 報衡前百戱, 有假面被髮, 口吐狼牙畑*, 如鬼神狀者. ……謂之抱鏞.〉

이룰 참고로 하였을 때 농바라문도 호승(胡僧)의 모습을 한 가면 을 쓰고 하던 놀이가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곽무천 (郭茂情)의 『악부시집』 권 78 「집곡가사(雜曲歌辭)」를 보 면, 이백 (李白, 701-762) 의 「사리불(舍利弗)」 「마다루자(摩多樓 子)」리는 두 수의 시가 실려 있다. 「사리불」은 불곡(佛曲)이다. 황금줄로 보배로운 땅의 경계 짓고 진기한 니무들 요지 (瑞池)가에 우거졌네 . 구름 사이에선 오묘한 음악 들리고 하늘가에선 소라고동 소리 울리네. 金繩界寶地, 珍木藤瑠池. 雲間妙音奏,天際法塗吹. 「마다루자」는 이하(李翼 791-817) 의 것도 한 수 실려 있는데, 내용은 모두가 변새 (邊塞)에 관한 노래이다. 임반당(任半塘)은 『당 희롱』 제 3 장 「극록®麻)」의 사리불(舍利弗)에서 허지산(許地山)과 유무기 (柳無료)가 각각 쓴 『인도문학(印度文學)』이란 책에서 인용한 범국(梵劇)들을 근거로, 이것들이 인도에서 들어온 〈가무회〉의 가 사임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당대에 그런 이름의 〈가무회〉가 유행했다는 확증은 없다. 정초(鄭椎, 1104-1162) 는 『통지 (通志)』 「악략偶韓)」에서 『악부시집』의 같은 권에 실려 있는 「아나괴 (阿那環)」와 「법수곡(法壽曲)」을 합쳐 이들을 〈범축서~(梵 笠四曲)〉이라 들고 있다. 「아나괴」는 고사(古辭)이며 『악부시집』 「해제(解)」에서 『북사(北史)』와 『통전(通典)』울 인용하여 〈아나괴 (阿那環)는 흉노(句奴)인 연연국(螺螺國)의 임금〉이라 설명하고 있

고, 「법수악(法 壽 樂)」은 제 (齊)나라 왕융(王融, 467-493) 의 작품 12 수가 실려 있다. 이 네 가지를 어떤 연유로 「범축사곡(梵쁘四 曲)」이라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혹 〈 농바라문 〉 같은 〈가무회 〉 에 이들이 모두 불리워졌기 때문에 성격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범축사곡」으로 함께 묶여졌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5 당대에 생겨난 〈가무희〉 1) 번쾌배군난(煥哈排君難) 당대에 만들어진 가장 유명한 〈가무희冷근 왕국유(王國維)가 『송 원희곡사 』 첫 장에서 〈 당대에 스스로 만들어전 것 〉 이라고 소개한 번쾌배군난희 (吳暗排君難載)이다. 이는 유명한 한왕(漢王) 유방(劉 邦)과 초왕礎王) 항우(項羽)가 만났던 홍문연(鴻門妻)의 이야기를 가무로 표현한 것이다. 송(宋) 왕부(王浦 922 - 982) 의 『 당회요傅; 會要) 』 권 33 에 광화僚北) 4 년 (901) 정월에 보녕전(保寧殿)에서 잔치를 벌였을 때, 황제께서 찬성공(讚成功)이라는 곡을 만들었다. 그 때 영주僖룬 州) 웅의군사(雄毅軍使) 손덕소(孫德昭) 등이 유계술(劉季述)을 죽이 고 반정 仮正)을 하여, 황제가 곧 작곡을 해 그 공로를 포상한 것이 었다. 그와 함께 번쾌배군난희 (煥噴排君難戱)도 만들어 즐기었다. 137)

137) 『 唐會要 』 0 t化四年正月, 案於保寧殿, 上製曲, 名曰讚成功. 時鹽州雄 毅軍使孫德昭等 , 殺劉季述反正, 帝乃制曲以裵之. 荀作吳唯排君難戱以樂 焉. >( 宋 錢易 『南部新 書』 辛에도 같은 기록이 보임 . )

라고 하였고, 송민구(~' 1019-1079) 의 『 장안지 (長安志)』 권 6

에는 소종(昭宗, 889-903 년 재위)이 이계소(李繼昭) 등의 장수들에게 보녕전에서 잔치를 베풀고, 친히 찬성공(讚成功)이라는 곡을 작곡하 여 그들을 포상하였으며, 또 영관(倫官)들에게 명하여 번쾌배군난(吳 暗排君難)을 연출케 함으로써 그들을 즐겁게 하였다. 138)

138) 『長安志』 償 3 宗妻李繼昭等將於保寧殿, 親制讚成功曲以裵之, 荀命台官 作吳卿諾難以樂之.〉

라고 하였다. 다시 진양(陳陽 1105 년 전후)의 『악서偶璃:)』 권 186 「배달희 (排閣戱)」 조목에서는 소종(昭宗)의 광화僚北) 년간에 손덕소(孫德昭)의 무리들이 유계 술(劉季述)의 목을 벰으로써 황제는 반정(.ociE)½ ~}.::il, 악공들에게 명하여 번쾌배달희 (煥噴排閣戱)를 지어 즐기게 하였다. 139)

139) 『樂書』 債宗光化中, 孫德昭之徒췄劉季述, 帝反正, 命樂工作吳唯排闇 戱凡.〉

라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번쾌배군난(契衍非君難)이라는 놀이는 번쾌배달(藥唯排閣)이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가무희〉가 만들어전 배경은 대강 다음과 같다. 광화 (光化) 3 년 (900) 에 환관 (官官) 인 유계술 (劉季述) 이 소종 (昭 宗)을 폐위시켜 동궁(東宮)에 가두고, 대신 태자를 왕위에 올려 놓 고 천하를 주무르려 하였다. 이 때 재상 최윤(崔胤)이 반정 仮正) 을 꾀하며 의사(義士)를 구하자 손덕소(孫德昭) 등이 이에 호응하 였다. 다음 해 정월달 새벽에 길가에 군인들을 매복시켰다가 유계 술이 조회 (朝會)에 나오는 것을 기습하여 죽여 버렸다. 이어 나머

지 잔당들도 소탕한 뒤 소종(昭宗)을 불러 내어 반정 (Jil)을 이룩 하였다 .140) 소종은 이 때 공신들을 표창한 다음 보녕전(保寧殿)에 서 잔치를 벌이고, 친히 찬성공(讚成功)이란 곡을 작곡하고 또 영 관(倫官)들에게 번쾌배군난희 (與暗排君難鼓)를 연출하게 하였던 것 이다.

140) 'lJi唐書』 권 208 「劉季述傳」, 『五代史記』 권 43 ~昭傳」, 『通鑑』 권 262 떠롄 U t年」 등 참조.

이 〈번쾌배군난희났근 분명 한(漢)대에 만들어져 위전 남북조(魏 晉南北朝)시대까지 유행한 공막무(公莫舞) 또는 건무(市舞)를 발전 시킨 것일 것이다. 『악부시집 偶開詩集)』 권 54 「무곡가사(舞曲歌 辭)」에는 이하(李賀 791-817) 의 「공막무가(公莫舞歌)」가 한 수 실 려 있는데, 홍문연(鴻門妻)의 정경을 읊은 내용이다. 그의 서(序) 에 〈남북의 악부偶開:)에 모두 가인r.tx sI) 이 있는데, 나는 여러 노 래들이 천박하게 여겨져 지금 다시 공막무가(公莫舞歌)를 짓는 것 이다〉 141) 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당나라 때까지도 공막무라는 〈가무회〉가 전해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홍문연(鴻門案)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여 〈가무희쳐본만 아니라 단순한 가무와 시 (詩) • 사(詞) • 부(JIIB:) • 곡(曲)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문학으로도- 읊 어졌다. 142)

141) 「公莫舞歌」序 야i南北樂府, 率有歌引, 賀兩諸家, 今重作公莫舞歌云. > 142) 唐대에만도 張碧의 「鴻溝」, 王穀의 「鴻門冥」 같은 시와, 敦達曲 「酒泉 子」 諒劍, 徐食의 「吳噴入鴻門賊」 등이 있다.

다만 〈번쾌배군난冷폰 소종(昭宗)이 반정 (Jil)을 하고 나서 〈충 성스런 공신들이 황제의 위난을 구해 준〉 그 때의 실황을 좀더 두 드러지게 드러내려 하였을 것이다. 소종이 작곡한 찬성공(讚成功) 도 그러한 〈충신들의 공났t 노래한 것이어서, 그 〈가무희〉의 중심 악곡으로 쓰여졌을 것이다. 그리고 전양(陳陽)의 『악서 생璃:)』에서

번쾌배달(吳唯排閣)이라 한 것은, 번쾌 (興 檜 )가 한왕( 漢 王) 유방(劉 邦)의 위급함을 알고는 홍문(鴻門)을 밀치고 잔치자리로 쳐들어오 는 용맹스런 모습이 그 〈· 가무희 〉 에서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호칭일 것이다 . 서인(徐 腐 873 년 전후)의 「번쾌입홍문부(吳 唯 入鴻 門試)」 ( 『 全唐文 』 권 830) 도 〈 번쾌배군난〉 가무희를 보고 지은 것인 듯한데, 그 부個)의 시작이 번쾌가 맹위를 떨치며 대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 배달(排 閣 )〉의 모습을 읊은 것이다. 한나라 장수들 지혜도 있고 용기 뛰어났었으니 번쾌의 맹위는 더 말해 무엇하랴 ! 죽음 무릅쓰고 칼날 가벼이 여기며 임금 구하려고 홍문으로 곧장 쳐들어가네 ! 浦中之智令勇鵬翻, 舞陽侯分威易論! 冒死而 當 輕白?)., 匡君而直入鴻門! 그리고 소종(昭宗)이 친히 작곡했디는 찬성공(讚成功)은 후세까 지도 유음(遺音)이 전하여 『 화간집 (花間集) 』 권 5 를 보면 모문석 (毛文錫, 913 년 전후)의 「찬성공(讚成功)」이라는 사(詞) 작품이 실 려 있다. 2) 의양주(義陽主) 『구 당서 ( 舊 唐書) 』 권 142 「왕무준(王武俊)」에 붙여 아들 「왕사평 전(王士平傳)」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왕사평 (王士平)은 정원(貞元) 2 년 {786) 에 의양공주(義陽公主)에게 장가들었다. ……공주는 멋대로 불법을 행하였기 때문에 왕사평이 화

가 나서 그와 다투니, 헌종(惡宗)은 노하여 공주를 궁중에 가두고 왕 사평은 그의 집에 가두어 출입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뒤에 풀려나 안 주자사(安)사刺史)로 나갔다가……하주사호(賀州司戶)로 내쳐졌다. 이 때 경박한 문사改감:)인 채남(蔡南) • 독고신숙(獨孤申叔)이 의양 주 (義陽主) 가사를 지었는데 단설 (團雪) • 산설 (散雪) 갇은 곡이었고, · 그들이 찰 놀 때와 틀어져서 이별할 때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자주 술자리에서 노래부르게 되었다. 헌종(憲宗)은 이룰 듣고 싫어하 여 진사과(進士科)를 폐지하려 하였으며, …·· ·· 채남과 독고신숙을 잡 아 내침으로써 어느 정도 연출이 벚게 되었다. 143)

143) 맨唐書』 〈士平, …… 貞元二年, 選尙義陽公主. ……時公主縱窓不法, 士平與之爭念, 憲宗怒, 幽公主於禁中, 士平幽於私第, 不令出入. 後釋之, 出爲安州刺史, ••• …疑賀州司戶. 時輕薄文士蔡南 • 獨孤申叔爲義陽主歌詞, 曰團雪•散雪等曲,言其遊處離異之狀,往往歌於酒席. 憲宗聞而惡之,欲廢 進士科, …… 得南 • 申叔距之, 由是稽止. >

『신당서 (新唐書)』 권 83 「제제공주열전(諸帝公主列傳)」의 덕종십 일녀전 (德宗十一女傳)에도 의양공주(義陽公主)와 왕사평 任士平) 부 부의 관계를 기록하고 나서, 문하객 (門下客) 채남사(蔡南史) • 독고신숙(獨孤申叔) 이 공주를 위 하여 단설(團雪) ·산설(散雪)의 가사를 지었는데, 형용이 기이하고 뜻은 퇴폐적이었다. 황제가 듣고 노하여 남사(南史) 등을 잡아 그들 을 몰아 내었으며, 거의 전사과(進士科)를 폐지할 뻔 하였다 .144) 라는기록이 있다.

144) 球唐書』 성鬼國憲穆公主, 始封義陽, 下隊王士平. …… 門下客蔡南史 • 獨孤申叔爲主作團雪•散雪辭,狀離療意. 帝聞怒,捕南史等逐之,幾廢進士 科.〉

이조(李 肇 813 년 전후)의 『 국사보(國史補) 』 권 3 에도 정원 (貞元) 12 년 (796), 부마(駒馬)인 왕사평 (王士平)과 의양공주 (義陽公主)가 반목을 하자, 채남사(蔡南史)와 독고신숙(猫孤申叔)이 이를 악곡으로 표현하여 의양자( 義 陽子)라 불렀는데, 단설(團 雪 )과 산설(散 雪 )의 노래가 있었다. 덕종(德宗)은 이룰 듣고 노하여 과거 (驛)를 폐지하려 하였다. 뒤에 다만 남사(南史)와 신숙(申叔)을 귀 양보냄으로써 그 일이 결말지어졌다. 145)

145) 『 國史補 』 〈貞元十二年, 麻馬王士平與義陽公主反目 , 蔡南史 • 獨孤申叔 播曲, 號義陽子, 有團雪 • 散 雪 之퓨 x. 德宗聞之怒, 欲廢科擧, 後但流斤 南史·申叔而止.〉

라는기록이 있다. 이룰 종합해 보면, 『구당서』의 헌종(憲宗, 806-820 년 재위)은 덕 종(德宗, 780-804 년 재위)의 잘못이고, 채남(蔡南)은 채남사(蔡南 史)가 옳은 듯하다. 『 구당서 』 에서는 〈 의양주( 義 陽主) 〉 가사, 『 국사 보(國史補)』에서는 〈의양자(義陽子) 〉 라는 악곡을 채남사(蔡南史)와 독고신숙(獨孤申叔)이 지었다고 했는데, 그 내용은 의양공주( 義 陽 公主)가 멋대로 불법적인 행동울 일삼아 남편인 왕사평 (王士平)과 서로 다투게 되자 황제가 노하여 이들을 각각 궁중과 자기 집에 가 두어 놓았다가 뒤에 왕사평을 변방으로 내보냈던 일을 가사 또는 악곡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단설(團雪)과 산설(散 雪)이라는 노래가 쓰였는데, 〈눈이 뭉쳐진다났근 단설(團 雪 )과 〈 눈 이 흩어진다났근 산설(散 雪 )은 공주 부부의 화합과 반목을 상칭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의양주〉란 가무희의 구성도 〈 단설 〉 과 〈 산설〉 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음이 분명하고, 또 이것은 중국의 고전 희 극에 있어서의 구성상의 정식 (程式)의 시초인 듯하다. 그런데 〈그

둘이 놀 때의 기이한 모양을 표현했다〉라고도 하고 〈형용은 기이 하고 뜻은 퇴폐적이었다〉라고 하였으며, 〈황제는 이에 관한 이야 기를 듣고 노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건대 〈의양주冷 단순한 가사 또는 악곡이 아니라 의양공주 부부의 결합 과 반목에서 시작하여, 그들이 각각 집안에 갇혀 있다가 왕사평이 지방의 벼슬살이로 쫓겨나는 과정을 의설적인 대목과 퇴폐적인 표 현을 섞어 가면서 자세히 표현한 〈가무희〉였음이 틀림없다. 황제인 덕종(德宗)이 〈의양주〉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 〈그것을 싫어하고〉 〈노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사과(進士科)도 폐지하려 하였다〉 하였으니, 이 〈가무회〉의 이야기 줄거리 속에는 과거를 풍자하거나 그 제도의 모순 같은 것과 관계되는 이야기도 끼어 있 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황제는 명을 내리어 그것을 지은 채남사 와 독고신숙을 잡아 귀양 보냄으로써 그 연출이 거의 없어지게 되 었다니, 그 유행이 오래 가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한 〈합생 (合生)〉이 〈혹은 왕비와 공주의 실정과 모양을 표현하기도 하였다〉(武平一 上奏文)라고 하였으니, 이를 〈합생〉과 연결시켜 이해하려는 학자들도 있다. l46) 그러나 〈합생只즌 호악(胡樂)이었던 데 비하여 〈의양주났근 당대 사람의 작 곡으로 이루어졌으니, 같은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서로 영 향을 받았다는 것까지도 부정할 수는 없울 것이다.

146) 孫梧第 「宋朝說話人的家數問題」 (1930, 『學文雜誌』), 任半塘, 『唐戱 弄』 제 3 장 「劇錄」 9. 義陽主.

〈의양주〉의 연출자에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채남사와 독고신숙은 이 〈가무희녔t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연출까지 하였을가능성이 많다.

3) 기타 〈가무희〉 이 밖에도 임반당(任半塘)은 『당희롱』에서 당대에 유행한 〈 가무 희〉로 봉귀운(鳳歸雲) • 신백마(神白馬) • 한세 (早稅) • 농공자(弄孔子) 등에 대하여 논술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 연출실황에 대한 설명들 이 자세하지 않다. 그리고 이것들 모두 가면을 쓰지 않았던 듯한 놀이들이다. 가면희는 중국의 옛 〈 가무회〉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 었으나, 이미 중당(中唐)시대로 들어오면서 궁중이나 상류사회의 〈가무회〉에서는 가면이 밀려나기 시작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 은 곧 중당시대부터 〈가무희 〉 자체의 성격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을뜻하는것이다. 4) 나희 (1 難戱) 어떻든 민간의 〈가무희冷근 변함 없이 각지에 성행되고 있었다. 나(灘)만 하더라도 궁중이나 민간에서 모두 더욱 발전하였다. 『신 당서』 권 16 「예악지 個쁩誌)」 〈대나지례 伏 :1 難之禮)〉와 두우(杜佑, 735-812) 의 『 통전 』 권 133, 단안절 (段安節 890 년 전후)의 『 악부잡 록』 「구나(福圖」를 보면, 궁나(宮灘) 또는 관나(官灘)에 관한 설명 이 자세하다. 우선 성당溫唐)시대로 들어와서는 대나(:f(i難)의 규모가 더욱 커 졌다. 무엇보다도 역귀를 쫓아 내는 주역인 네 개의 황금눈이 달린 가면을 쓴 방상씨 (方相氏)가 네 명으로 늘어났고, 147) 열두 살에서 열여섯 살 난 아이들이 가면을 쓰고 하던 전자(仮子)는 500 명으로 늘어났다. 148) 이 밖에도 집사(執事) • 공인 (I人) • 고(鼓) • 각(角)

147) 『 樂府雜錄 』 의거. 맹i 唐 書』 의 大灘之禮에는 方相氏가 한 명이나, 玄宗 때의 『開元禮 』 에서 정한 州縣의 灘(杜佑 『通典』 권 133) 에도 〈方相四人〉 이라 했으니, 宮中의 大灘에서도 네 명의 方相氏룰 쓰는 경우가 많았을 것 이다.

148) 『樂府雜錄』 의거 .

등 각각 10 여 명 또는 수십 명이 동원되었고, 창수 .(P/§~ fjJ) • 고취령 (鼓吹令) • 태복령 앉 卜令) • 무사센Y:ili) • 태축伏銀) • 재랑(齊郞) • 시 백 (寺伯) 등이 역귀를 쫓는 데 침여하였다. 149)

149) 멤i唐書』 권 16 fffl$誌」 의거 .

당대 대나 0 레t)의 한 가지 특칭은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사전에 모두 고취령 (鼓吹令)의 지휘 아래 궁성 문 밖에 모여 대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시백 (寺伯)의 인솔로 북쇼: 리를 울리고 소리치고 기세를 올리며 궁성 문 안으로 쳐들어와, 노 래 부르고 춤추면서 궁성 안을 누비며 역귀들을 잡아 내는 것이다. 교립 (喬麻)의 「대나부tk.灘試)」( 『 全唐文』 권 356) 를 보면, 500 명 전자(仮子)들의 화려한 가무를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전동(仮童)들 붉은 머리로 여러 가지 가락맞추어 춤추는데, 춤추는 옷 봉을 놀라게 하고 노랫소리 봉황새 내려앉게 한다. 仮童丹首, 操緩雜弄, 舞服驚春,歌聲下鳳. 주현洲縣)의 관나(官灘)는 고울의 등급에 따라 그 규모가 축소 되었을 뿐 기본적인 축역 (逐疾) 방식은 같았다. 주 OH) 에서는 〈방 상(方相) 4 명, 창솔 (P 昌率) 4 명, 진자(仮子)가 도독(都督)과 상주 따서)에선 60 명, 중하주(中下州)에선 40 명〉이었고, · 현個硏)에서는 〈방상(方相)과 창솔 (P 昌率)이 각각 2 명에 진자(仮子)는 20 명〉 150) 의

150) 『開元禮』 의거 .

규모였다. 당대의 민간 〈나 X 즌 나은(羅隱 833-909) 이 「시나(市 1 町」 (『全唐 文』 권 896) 에서 〈나〉薛 명칭은 시령 (時令)에 기록되어 있다. 궁중으로부터 민간 에 이르기까지 모두 재난을 쫓고 역귀를 몰아 내었던 것이다. 151)

151) 羅隱, 「市灘」 〈難之爲名, 著於時令웅은. 自宮禁至於下1 里, 皆得以逐災邪 而.〉

라고 하였듯이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돈황(敦遠)에서 니온· 기록들을 보면, 당대로 들어와 민간의 〈나〉에 큰 변화가 일기 시 작했음을 알 수 있다. 152) 본시 관나(官灘)의 주역은 방상씨 (方相 氏)와 십이수(十二默)였다.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양@)나 라 종름(宗鷹 500 ? -563 ? )의 『형초세시기 佛楚歲時記)』에는 민간 의 연말 구나(福灘)에 마을사람들이 〈호공두(胡公頭)를 쓰고 또 금 강역사(金剛力士) 모습을 하고서 축제 (逐除)를 하였다〉라고 하였으 니, 이미 남북조(南北朝)시대부터 민간의 〈나〉에는 여러 가지 속신 (1谷 神)이 등장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돈황문권(敦燒 文卷)을 보면, 중당(中唐) 무렵에 와서는 그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 던듯하다.

152) 이하 高國藩, 「福灘風俗和敦燒民間歌諾兒郞偉」 (『文史』 第 29 輯) , 同 人, 며쌌皇古俗與民俗流變』 (海河大學出版社, 1990}, 黃fiE ~t達民諾兒郞偉 的價値」 (『文史知識』 第 7 期, 1990) 등 참조.

먼저 후세에 민간에서 문신(門神)으로 크게 유명해전 종규(鍾旭) 는 대체로 현종(玄宗)의 개원(開元)년간 (713-741) 부터 문신(門神) 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153) 중당(中唐) 무

153) 宋 沈括 명粹溪筆談』 補 26 卷 所引 「吳道子鍾旭畵之唐人題記」, 趙翼, 『核餘穀考』引터근中記』所引『唐逸史』 등 참조•

렵에는 이미 대나伏緯)의 구역신 (福疾神)으로도 활약하였다. 154) 돈황문권 (敦達文卷)에 는 「제 석 종규구나문(除夕鍾旭縣灘文)」 (s. 2055) , 「아랑위구나(兒郞偉觀難)」에 관한 p. 3270, p. 4011, p. 3552, p. 4976 .9-j 문권 (文卷) 등이 보인다.

154) 麟 「鍾旭의 演變과 處容」 (면困廊狂昭컵 8 卷 9 號, 1965, 高大亞細 亞問題硏究所 刊) 참조 바람.

구나(縣灘)의 법도는 옛 황제 (黃帝)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종규(鍾 旭)와 백랙 (白澤)이 여러 신선들 거느리네. (p. 3552)155)

155) 〈腦難之法, 自昔軒輯. 鍾旭白澤, 統領居仙. >(p . 3552)

닭은 해를 현전(玄津)에서 보내고, 새로운 절기 봄울 맞으려 하는 데, ……떠돌아다니는 못된 귀신들 잡는 일은 종규(鍾旭) 대랑t}d~) 에게 맡겨 처리하네. (p. 4976)156)

156) 〈 薔年初送玄津, 迎取新節靑陽 .•••••• 脣是浮游浪鬼, 付却鍾大R B. >(p . 4976)

앞에 종규(鍾旭)와 함께 보인 백택 (白澤)도 중국에 전설로 전해 지던 귀신에 관하여 잘 안다는 신수(神獸)이다. 157) 그 밖에 배화교 (拜火敎) 인 요교 (歌敎) 의 신도 등장한다. 오늘밤 구나(福灘)의 대열에는 성을 편안케 할 불의 신도 거느리고 있다. (p. 3552) lSS)

157) 宋 張君房, 『雲渡七鐵』 卷 100 引땅 H 財엮山云 〈帝巡狩, 東至海, 登桓 山,于海濱得白澤神獸,能言,達于萬物之情. 因問天下鬼神之事. 自古精氣 爲, 游魂爲變者凡萬一千五百二十種. 白澤言之, 帝令以圓寫之, 以示天 下.〉 158) 〈今夜腦灘除杖, 部領安城火萩. >(p . 3552)

이룰 보면 당대 민간의 〈 나 〉 에는 그 시대에 행해지던 여러 종교 의 신들이 모두 구나(福灘)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고, 이에 따라 여기에서 쫓아 내는 귀신들의 종류도 더욱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한편 〈나 〉 에 쓰이던 가면과 가무의 종류도 때와 곳에 따라 크게 여러 가지로 발전하였음을- 상상케 한다. 앞에서 예를 든 「아 랑위구나(兒郞偉縣灘)」에 관한 돈황문권 (敦煙文卷) 동은 특히 이러 한 〈나 〉 의 성격변화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한 목소리로 아랑위 (兒郞偉) ! 오늘밤낡은해 다가지 않았으나 내일 아침이면 바로 새해일세. 모든낡은해의 잡귀들을 경내로부터 다른 곳으로 몰아내세 . (p. 3270) 159)

159) <.,距岳兒郞偉 ! 今夜 舊 歲未盡, 明招便是新年. 所有舊歲鬼綜, 逐出境內 他. >{p . 3270)

〈아랑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확실치는 않다. 어떤 학자는 대나 因難)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젊은이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뒤 에 가서는 귀신을 쫓을 때의 일종의 고함소리로 변한 것이라 하 고, 160) 어떤 이는 〈아랑위 (兒郞偉)났근 바로 〈위아랑(偉兒郞)〉이며, 나의 (灘儀)에서 역귀를 쫓아 내는 신령 역할을 하던 용감한 남자이 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때 부르던 노래도 「아랑위 (兒郞偉)」라 불 렀다. 돈황(敦達) 부근 사람들은 위아랑(偉兒郞)을 국가를 보위하 는 상징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아랑위 (兒郞偉)〉라 부를 수도 있는 것이었다 161) 라고도 하였다. 〈아랑위〉가 당대의 다른 기록에는 보

160) 耿升 「法國學者近年來對敦燒民俗文化史的硏究」 ( 『 中國史硏究動態』 1990, 第 6 期)

161) 高園藩, 며闇顧炤俗和敦煙民間歌諾兒郞偉」 (『文史』 第 29 輯) .

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민간에만 유행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돈황사본(敦燒寫本)에는 「진야호사(進夜胡詞)」 3 수(p .3468) 가 있는데, 잔문(殘文)이기는 하나 당대 구나(腦灘)의 모습을 비교적 자세히 서술한 기록이다. 그 첫째와 둘째 글만 보더라도 수많은 귀 신들이 등장하고 있어, 이전과는 크게 달라진 〈나〉의 성격을 알려 준다. 그리고 셋째 글에서는 귀신을 백성들을 고난으로 몰아넣는 의족例族) 통치자들에게 비유하고 있어, 〈나〉의 시대적인 의의를 느끼게 한다. 뒤에 이야기할 송(宋)대 민간의 〈타야호(打夜胡)〉도 여기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이러한 〈나〉의 변화는 송(宋)대에 가 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리고 이처럼 변화한 〈나났곤 더욱 먼속화하 여 시대와 지역에 따라 이후에 여러 가지 나희 (灘戱)가 생겨나고 수많은 니신 (灘神)들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 〈나〉의 변화를 통해 보더라도, 중당(中唐) 무렵부터 중국의 〈가무회〉의 성격에 큰 변화가 일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전통적으로 〈가무희〉의 중심을 이루어 오던 〈가면희났근 표면상으 로는 〈가무회〉로부터 밀려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의 〈가면희났트 〈나只문 중심으로 발달하여, 각 지방의 민속에 따라 여 러 가지로 변화하며 민간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던 듯하 다. 6 오대(五代)의 〈가무희〉 오대 (li代)는 90 71,:評터 959 년에 이르는 53 년 사이에 후량(後 梁) • 후당(後唐) • 후진(後晉) • 후한(後漢) • 후주(後周) 등의 나라

가 연이어 일어났다 망한 혼란했던 과도기적인 시대이다. 그러나 임반당(任半塘)이 『당희롱』 {1. 總說 8. 五代)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 럼 이 시대는 풍자극(誤刺劇)이 성행하고 가무국倻稽細j)이 매우 발전하였던 시기이다. 특히 후당(後唐)의 장종(莊宗, 923-925 년 재위) 때에는 황제 스 스로 음악을 좋아하여 많은 작곡을 하였고, 이천하(李天下)라는 예 명을 쓰면서 직접 배우들과 어울려 연극을 하기도 하였다. 162) 따라 서 많은 배우들이 황제의 총애를 받고 정치와 군사에 간섭하게 되 어 결국은 나라를 망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163) 심지어 『신 오대사(新五代史)』 권 37 「영관전(倫官傳)」에는 황제와 황후의 행동 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164)

162) 방.li代史』 권 37 倫官傳 참조. 163) 潭五代史』 권 27 군} 34 멤芸本紀」 참조. 164) 멤五代史』 권 49 「后妃列傳」 莊宗神閔敬皇后劉氏 아래에는 『北夢項言』 에 실린 비슷한 이야기를 싣고 있는데, 倫官傳 「劉山人來省女」를 여기서는 「劉衛推訪女」라 하고 있다.

황후 유씨 (劉氏)는 본시 천한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유수 (劉燮)는 약을 팔며 점을 잘 쳐서 유산인 (劉山人)이라 불렸었다. 유씨는 성질 이 독살스러웠는데, 마침 여러 여자들과 임금의 총애를 다투는 터이 라서 늘 그의 집안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며 그 일을 특히 숨기려 하 고있었다. 장종(莊宗)은 그 때 유수(劉燮)의 옷을 입고 자신이 점가치 전대와 약상자를 둘러 메고서, 그의 아둘 계급偏跋.)에게는 해어진 모자를 들고 자신을 따르게 하여, 그의 내실로 찾아가서 〈유산인 딸을 뵈러 왔소〉 하고 말하였다. 유씨는 크게 노하여 계급을 매질하고 쫓아 내 었다. 궁중에서는 그것을 웃고 줄기는 것으로 삼았었다. 165)

165) 땅五代史』 여話劉氏素微 其父劉里, 賣藥善 卜 , 號劉山人. 劉氏性f투,

方與諸姬爭龍, 常自恥其世家,而特諱其事.莊宗乃爲劉里衣服, 自負耆豪藥 度,使其子繼渡提破幌而隨之, 造其臥內, 日劉山人來省女.劉氏大怒,答繼 度而逐之. 宮中以爲笑樂. >

『구오대사(舊五代史)』 권 49 「후비열전燁妃列傳)」에 인용된 『북 몽쇄 언 (北夢項言)』에서는 장종 (莊宗)이 「유아추방녀 (劉衛推訪女)」 놀이룰 한 기사의 끝머리에 디음괴- 갇은 말을 잇고 있다. 이에 앞서 장종은 스스로 배우가 되어 이름을- 이천하(李天下)라 부 르며, 분장을 하고 배우들이 놀이를 하는 사이에 뒤섞이어 때로는 여 러 배우들과 부딪치고 때리고 하였었다. 그러나 마침내는 시끄러운 여지들과 은총을 입힌 배우들로 말미암아 멸망하게 되었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거울로 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166)

166) 『北夢項言』 (li, 莊宗自爲俳優, 名曰李天下, 雜於塗粉優雜之間, 時 爲諸優朴樹輝, 意爲麟恩倫之傾站, 有國者得不以爲前慧 ! >

이 밖에도 『신오대사(新五代史)』 「영관전 (倍官傳)」에서는 배우 경 신마(敬新磨)가 칭종 앞에서 재치 있는 말로 풍자하여 잘못을 바로 잡아 주고 또 기발한 말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우어 (優語) 가 세 대목 적혀 있고, 또 장종의 총애를 받던 배우 주잡閩區)과 경전(景進) 등에 관한 이야기도 보인다. 임반당(任半塘)이 이미 『당희롱』 (제 1 장 總說, 8. 五代)에서 논하 고 있듯이 후량(後梁) 때 (907-922) 촉(蜀) 고조(高祖) 왕건 (王建) 아래의 배우들이 참군희 (參軍戱)를 연출하였고, 167) 오왕(吳王) 양 융연(楊隆演)은 서지훈(徐知訓)과 참군희(參軍戱)를 함께 연출하였 다니, 168) 이 무렵 참군희가 상당히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오대 (li代)에 연출되었던 희극으로 임반당(任半塘)은 앞에

167) 宋 胡任, 『홈溪漁隱穀話』 後集 16 의거. 168) 땅五代史』 권 61 「楊隆演傳」 의거.

예로 들었던 유산인성녀 (劉山人省女) 이의에, 맥수량기 (麥秀兩 岐) 169) • 약지피 (採地皮) • 초호작달(魚湖作難) 170) • 이왕연위희 (J;J王衍 爲戱 )171) • 자가하용다배 (自家何用多拜 )172) • 오현천자(五縣天子 )173) , 관구신대 (i屈口神隊) 174) 등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169) 『太平廣記』 권 257 引『王氏見聞錄』 170) 위 두 가지는 宋 鄭文寶, 『江表志』에 보임 . 171) 宋 張唐英, 『蜀檔机』 下 의거 . 172) 宋 馬令 『南唐書』 권 25 의거 . 173) 宋 錢易, 頂南新書』 矣 의거 . 174) 宋 張唐英, 『蜀檔杭』 下 의거 .

이만하면 오대 (五代)에도 희극이 상당히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 다. 그러나 이들 희극을 보면 당나라 중영부터 보이기 시작한 변화 가 더욱 두드러지게 자리를 잡고 있음울 알 수 있다. 곧 앞에 든 오대의 희극둘은 모두가 가무를 위주로 하는 〈가무희〉라기보다는 골계 (滑稽)와 풍자(誤刺)를 위주로 하는 것이었으며, 또 대부분의 연출에 있어 가무는 없이 과백 (科白)만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여겨 진다. 이것은 곧 과백과 가무가 나뉘어져 전날과 같은 〈가무희났근 사라져갔음을 뜻한다. 그리고 〈가면극 X 본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되 었음에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 이후에 잡극(雜劇) • 전기(傳奇) 동 대희 8 湯t)에 이르러 크 게 갖추어진 여러 가지 중국 극의 정식 (程式)은 소희 (小戱)이면서 도 중당(中唐)에 갖추어지기 시작하여, 오대에 이르러는 상당한 발 전을 보여주고 있다. 송(宋) 마령 (馬令)의 『남당서 (南唐書)』 권 25 「담해전(談階傳)」에는 후진(後晉) 출제(出帝)의 개운(開運) 원년 (944) 에 남당(南唐)의 영인 (倫人) 이가명 (李家明)이 「자가하용다배 (自家何用多拜)」를 연출하여 원종保宗)을 풍자하였는데, 노생 (老 生) • 노단(老旦) • 소생 (小生) • 소단(小旦) 등이 잡진 (雜陳)되었다

는 기록이 있고, 또 같은 책 권 22 「귀명전(歸明傳)」과 문영 (文 營 , 1060 년 전후)의 『 옥호야사(玉査野史)』 권 10 에는 후주(後周) 세종 (世宗, 954-959 년 재위) 때 남당(南唐)의 한희재 (韓熙載)와 서아(舒 雅)가 시비 (侍牌)들과 뒤섞이어 연희를 한 기록이 실려있는데, 이 미 생 (生) • 단(_§_) • 말(末) • 산(酸)의 여러 각색 個]色)들이 갖추어 져 있었다. 175) 이에 앞서 참군희 (參軍戱)도 이상은(李商 隱 , 812 -858 ? )의 「교아價兒)」 (『全唐詩』 8 函 엔!)시에 문득 다시 참군(參軍)을 흉내내고 소리 따라 창골(蒼鶴)을 부른다. 忽復學參軍,接聲煥蒼鶴. 라는 구절이 보인다. 〈참군〉과 함께 〈창골〉이란 각색이 이미 있었 음울 알 수 있다. 다시 『신오대사(新五代史)』 권 61 「오세가(吳世 家)」에 〈일찍이 누각 위에서 술을 마시는데, 우인 (優人) 고귀경 (高 貴卿)에게 명하여 술시중을 들게 하고, 서지훈(徐知訓)이 참군(參 軍)이 되고, 양륭연(楊隆演)은 해어전 옷을 입고 상주(喪主)가 하 는 상투머리를 하고는 창골(蒼鶴)이 되었었다〉 176) 라고 했다. 적어 도 만당(喇音)시대부터 참군희 (參軍戱)도 정식화(程式化)의 경향을 보여 참군(參軍)과 함께 창골(蒼鶴)이라는 각색 個色)이 있었는데, 오대에 와서는 더욱 보편화 되었던 듯 하다. 177)

175) 任半塘, 『唐戱弄』 제 1 장 總說 8. 五代 의거. 176) 『五代史』 〈 當 飮酒樓上, 命優人高貴卿侍酒 知訓爲參軍, 隆演義衣盤철 爲蒼競.〉 177) 王國維, 『古劇脚色考』 餘說一 센f中葉以後, 乃有參軍 • 蒼鶴. >

이처럼 이 시대의 연극에 여러 가지 각색 個]色)이 갖추어져 있었

다면, 이미 연극의 정식화(程式化)가 상당히 진행되었던 것이 아닐 까 여겨진다. 그리고 그것은 비교적 자유로운 가무의 표현을 위주 로 하던 중국의 옛 전통적인 〈가무회〉에 성격상 큰 변화가 일어났 음을뜻한다. 따라서 이미 오대 (五代) 이전부터 가면놀이를 중심으로 하던 이 전의 〈가무회〉의 전통은 민간으로 스며들어 지금껏 중국 각지에 남아 전하는 여러 가지 나희 (灘戱)에 의하여 전승되고, 표면상으로 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연극이 대신 유행하기 시작했던 듯하다. 만 당(喇音) 이덕유(李德裕, 787-847) 의 『이문요문집 (李文鏡文集)』 권 12 「제 이장봉선령 갱상량주래자(第二狀奉宣令更商量奏來者) 」 178) 에 〈음악기교(音樂使巧)〉에 관한 사람으로 보이는 성도(Jiltt~) 사람으 로 〈자녀금금(子女錦錦), 잡극장부량인(雜劇丈夫兩人)〉이라는 말이 보인다. 179) 여기의 잡극(雜劇)이 어떤 것이었는지 자세히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이 잡극(雜劇)은 이후 송(宋)대의 집극(雜劇)과 연결 시켜 생각할 때, 여기에서 말한 〈가무희〉의 변화와 정식화(程式化) 등이 이미 만당 무렵에도 상당히 전전되었음을 상상케 한다. 그리 고 임반당(任半塘)이 『당희롱』에서 논했듯이, 오대의 〈가무희났즌 특히 촉(蜀)을 중심으로 성행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가무희〉의 변화는 또한 성도微都)를 중심으로 한 지방에서 선도된 것인 듯도 하다.

178) 『四部穀刊』本. 『全唐文』 권 703 에도 보임 . 179) 내錦妹좁州司馬杜元碩追贈」 야바 n 外議, 皆以元類不能緩撫南變, ……變 退後 京城傳說, 福涼五萬餘人, 音樂使巧無不蕩盡. …. •• 營 共棟九千人, 成 都郭下, 成都華陽兩縣, 只有八十人. 其中一人是子女錦錦, 雜劇丈夫兩人, 醫一人.餘竝是尋常百姓,竝非工巧. ……>

제 6 장 송(宋)과 그 후의 〈가무희〉 960-1276 ; 1276-1911 1 송(宋)대 〈가무희〉의 발전 1) 송대 〈가무희〉의 개황 송나라는 국세는 크게 떨치지 못했지만 문화면에 있어서는 중국 역사상 모든 면에 걸쳐 최고의 발전을 이룩하였던 시대이다. 문학 면에 있어서도 중당(中唐)시대에 일기 시작하였던 개혁운동을 바탕 으로 시 (詩) • 고문(古文) • 사(詞) • 강창(講唱) • 소설 (小說) • 희곡~ 曲) 둥이 다양하게 발전하였던 시대이다. 따라서 궁중의 여러 가지 행사에 쓰이던 가무濁海)와 잡희 (雜戱)도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다양하게 널리 발전하였던 시대이다. 그것은 대체로 숭녕 (崇寧)에 서 선화(宣和)에 이르는 사이 (1102-1125) 의 북송(北宋)의 수도인 변량(注梁)의 모습을 적은 맹원로頃元老, 1126 년 전후)의 『 동경몽 화록(東京夢華錄)』만 보더라도 쉽사리 알게 된다. 권 5 의 「경와기 예 (京瓦使藝)」에는 변량(沖梁)의 와사債冷)에서 이름을 날리던 가 수와 괴뢰희 (佛偏戱) 및 춤 • 잡극燁劇)을 포함하는 여러 가지 백

희 (百戱), 각종 강창(講唱 講史 • 小說 • 諸宮調 등), 영희 (影戱)와 신귀 (神鬼) 등에 관한 명인 (名人)들이 소개되고 있다. 권 6 의 「원 소玩淸)」를 보면 정월 보름날 밤 대내 8:內) 앞에서 〈기술이능(奇 術異能) • 가무백희 연녔돕百戱)〉가 연출되는데, 잡극(雜劇) • 잡반(雜 粉)을 비롯하여 격환축국(擊丸蹴~) • 답색상간倻索上半) 동 명인 (名人)들의 백희 (百戱)가 201 념十 가까이 상연되었다고 열거하고 있 다. 권 7 의 「가행임수전관쟁표사연(驚幸臨水殿觀爭標賜婁)」을 보면 임수전 (臨水殿) 앞의 수봉(水桐)에서는 신귀 (神鬼) • 집국(雜劇)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백희〉가 상연되고, 물 안의 배에서는 수괴뢰 (水偶偏) • 수추천 (水秋千) 등의 수희 (水戱)가 연출된다. 그리고 소 룡선 (小龍船) 20 척 • 호두선 僚頭船) 10 척 • 비어선 (飛魚船) 2 척 • 추 어선倻魚船) 2 척과 대룡선伏龍船)이 나와 악무맴용舞)를 연출하며 여러 가지 진열(陣列)을 만들어 보여준다. 같은 권의 「가등보진루제군정백희 (鷲登寶津樓諸軍里百戱)」에서는 여러가지 〈백희〉와 함께 가면을 쓴 각종 귀신들의 다양한 춤과 신 기 (神技)에 가까운 승마술(乘馬術) • 무술 (武術) 등이 연출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도 권 8 「유월육일최부군생일이십사일신보 관신생일(六月六日崔府君生日二十四日神保觀神生日)」, 권 9 「재집친 왕종실백관입내성수(宰執親王宗室百官入內上壽)」, 권 10 의 「제석 (除 夕)」 같은 대목에도 여러 가지 〈백희〉와 가무들이 보인다. 오지목 (吳自牧, 1270 전후)의 『몽량록頃梁錄)』 구구밀 OO 蓋 1232-1308) 의 『무림구사(武林舊事)』 등의 기록을 통해서 볼 때, 그러한 가무 와 〈백희났탉즌 남송(南宋)의 임안(臨安)에서도 못지않게 성행되었 다. 2) 대희(大戱)의 출현 그러나 중국희곡사(中國勘曲史)에 있어서는 송대는 이러한 소희

(小戱)의 성행에도 불구하고 대희 伏戱)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중국 연극의 일대 전기가 마련되었던 시대이다. 이 새로운 〈대희 〉 의 출 현은, 중국의 희곡학자들조차도 이전의 〈소희났근 불완전하고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미숙한 연극이고, 〈대희〉야말로 본격적인 진정한 연극이라 여기도록 만든다. 이에 따라 오랜 세월을 두고 중 국역사와 함께 발전하여 왔던 〈가무희〉 중심의 〈소희났근 연극학자 둘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대체로 중국 최초의 〈대희〉인 남희 (南戱) 또는 희문~ 북 송(北宋) 말엽에 생겨난 듯하다. 축윤명 (祝允明, 1460-1526) 은 『의 담(狼談)』에서 남희 (南戱)는 선화(宣和, 1119-1125) 이후 남도(南渡)할 무렵 (1127) 에 생겨났는데 그것을 온주집국(溫州雜劇)이라고 불렀었다. 1)

1) 『狼 〈南戱出於宣和之後, 南渡之際, 謂之溫州雜劇. >

라고 하였고, 서위 (徐洞 1521-1593) 는 『남사서록(南詞敍錄)』에서 또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남희는 송(宋) 광종僚宗) 때 (1190- 1 194) 시작되었는데, 영가(永 嘉)사람이 만든 〈조정녀 OO 貞女)〉와 〈왕괴 (王船)〉 두 가지가 실로 첫 째 것이었다. ……어떤 이는 선화(宣和)년간에 이미 시작되었고 그것 이 성행된 것은 남도(南渡) 이후라고도 한다. 그것을 영가잡극(永嘉 雜j) 또는 골령성수(鶴倍塾敷)라고도 불렀다. 2)

2) 『南詞敍錄』 〈南戱始於宋光宗朝, 永嘉人所作趙貞女 • 王船二種實首之. …… 或云, 宣和間已澄膳, 其盛行則自南渡, 號 El 永嘉雜劇, 又曰傾倍聲歌. >

영가(永嘉)는 온주(溫써, 浙江)의 옛 이름이다. 대체로 희문~

文)은 북송 말엽에 온주에서 생겨난 것이라 보면 될 것이다. 그 뒤로 금(金)나라가 원債;)나라에게 멸망당한 1234 년 무렵에 는 북쪽에 원집국保雜劇)이 생겨나 성행하기 시작한다. 3) 그렇다 고 〈가무희녔} 중심으로 한 〈소희〉들이 〈대회〉에 밀려 완전히 없 어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남송의 수도인 항주(株)사)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는 북쪽에서 옮겨 온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어, 실제로 ·〈 소희冷 그대로 북송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는 송대의 〈가무희녔卜 논함에 있어 남송을 분명하게 따로 떼어 다 루지 않기로 하고 있다. 다만 이후의 〈소희났근 학자들에 의하여 중국희곡사의 주류가 아니라 하여 〈대희〉에게 밀려난 것도 사실이 다.

3) 張庚 • 郭漢城, 主編 『中國戱曲通史』 등 참조.

3) 송대 〈가무희〉의 변화 송대의 〈가무희났근 중당(中唐)에서 일기 시작한 변화를 이어받은 오대 (1i代)의 것을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이미 오대에 보인 과백 (科白)과 가무의 분리경향은 송대에 이르러 더욱 뚜렷해져서, 이미 왕국유(王國維)는 『송원희곡사(宋元戱曲史)』에서 제 2 장 「송지골계 희 (宋之滑稽戱)」, 제 4 장 「송지악곡(宋之樂曲)」으로- 이를 나누어 논 술하고 있다. 즉, 골계 (滑稽)와 풍자(誤刺)를 위주로 하는 과백희 (科白戱)와 가무를 위주로 하는 악곡偶曲)으로 나뉘고 있는 것이 다. 그러나 가무를 위주로 하는 악곡偶曲) 중에는 고사(故事)의 성 분이 상당히 많은 것들도 있다. 유영제 (劉永濟)가 『송대가무극곡록 요(宋代꼽浮劇曲錄要)』 U:海, 古典文學出版社, 1957) 에 모아 놓은 대 곡伏曲) • 곡파(曲破) • 법곡(法曲)을 사용한 〈가무희〉 등이 그 보

기이다. 다만 아것들은 모두 가무의 연출이나 전체적인 구성에 있 어 정식화(程式化)하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송대 〈 가무희 〉 의 중심 울 이루었던 잡극(雜劇)에 있어서도 각색 (脚色)이나 구성 (構成)에 있어 상당한 정식화(程式化)를 보여 주고 있어, 원집국保雜劇)으 로의 접근을 느끼게 한다• 이 점들에 관하여는 뒤에 다시 상세히 설명될 것이다. 〈가무회〉의 중심을 이루던 〈 가면회났근 대체로 상류사회로부터 자취를 감추고, 각 지방의 〈 나〉와 같은 민속과 결합하여 지금도 중국 각지에 성행하고 있는 나희 (灘戱)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그러 나 이 민속과 결합된 〈나희났근 사대부나 지식인들의 관심 밖으로 벗어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로부터 중국희곡은 〈대회〉인 회문 獻) • 잡극(雜劇)이 온 공간을 독차지하게 된다. 2 송잡극(宋雜劇) 1) 〈잡극〉의 뜻 송대의 〈가무희났三 송잡극(宋雜劇)이 대표한다고 했지만, 실상 송대에 〈 잡극〉이란 말은 상당히 넓은 뜻으로 쓰였던 듯하다. 첫째, 〈집극冷든 〈백희(百戱)〉 중의 일종이었다. 맹원로猛元老) 의 『동경몽화록』만 보더라도 권 6 「원소保;育)」에는 정월 보름날 연출된 〈기술이능(奇術異能) ·가무백희倻炫甲戱)녔t 설명하면서, 격환축국( 擊 丸蹴i$1) .답색상간價漆上半) ·도끽냉도(倒契冷海) ·탄철 검 (香鐵왔Jj) • 약법괴뢰 (藥法幽晶) ·토오색수(吐五色水) ·선소니환자億웅 燒泥丸子) • 회약僚경) 등에 이어 〈잡극 X 을 들고, 다시 혜금(稀 琴) • 소관(蕭管) • 소련약방偏練藥方) • 작극술(作劇術) • 잡반{mt) • 축구僕緖) • 오대사(li代史) • 충의 (虫議) • 고적 (鼓笛) 등의 명인들

과 또다론 잡희 (雜戱)들을 소개하고 있다. 권 7 의 「가행임수전관쟁 표사연(驚幸臨水殿觀爭標賜妻)」에는 〈제군백회 (諸軍百戱) 〉 로 대기 tknJt) • 사표 (獅約) • 도도 (悼刀) • 만패 (鹽牌) • 신귀 (神鬼) 등과 함 께 〈집극只끌 들고 있다. 권 8 의 「유월육일최부군생일이십사일신보 관신생일(六月六日崔府君生日二十四日神保觀神生日)」에서는 신보관 (神保觀)에서 상연된 백희로 상간辻半) • 적농(趙弄) • 조색 (挑索) • 상복 (相撲) • 고판 徵板) • 소창 (小pg) • 두계 (鬪鷄) • 설원화 (說諱話) • 잡반 (雜粉) • 상미 (商誌) • 합생 (合座) • 교근골 (喬筋骨) • 교상복 (喬相 撲) • 낭자 (i良子) • 규과자 (叫果子) • 학상생 (學像生) • 탁도 ({卓刀) • 장귀 (裝鬼) • 아고 闇鼓) • 패봉 (AA!:f$) • 도술 (道術) 등 중간에 〈집극只全 들고있다. 그러므로 〈집국沼든 〈백희(百戱)〉의 일종으로 여겨졌음이 분명한 데, 경우에 따라서는 〈백희〉와 갇은 뜻의 말인 〈잡희〉와 같은 말 로 쓰이기조차 하였던 듯하다. 『동경몽화록』 권 9 「재집천왕종실백 관입내싱수(宰執親王宗室百官入內上 壽 )」를 보면, 〈제오잔(第五蓋)〉 에서 소아대무(小兒除舞)를 연출하고 난 뒤에 일장양단(一場兩段)의 〈집국冷 연출하게 한다. 그리고 그 때의 교방(敎坊) 잡극색 (雜劇 色)울 소개하고 나서, 〈내전(內殿)의 잡희는 잔치에 참여하는 의국 사신들이 있기 때문에 감히 심한 익살을 하지는 못하고, 오직 무리 롤 이용하여 그 비슷한 형상만을 연출했기 때문에 세간의 말로는 예천(投串)이라 불렀다. 잡희가 끝나면 참군색(參軍色)이 직어(作 語)를 하고 소아대 (小兒隊)를 되장시킨다〉 4) 고 하였다. 다시 〈제철 잔(第七蓋)〉에서도 여동대무(女童隊舞)의 끝머리에 〈잡회녔十 인도 하여 들어와 일장양단(一場兩段)의 연출을 하게 한다. 이에 의하면 〈잡호D 는 〈집극〉과 같은 말로 쓰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몽량록

4) 『東京夢華錄』 〈內殿雜載, 爲有使人預案, 不政深作;昔誠, 惟用群隊裝其似 像, 市語謂之拔阜 雜裁畢, 參軍色作語, 放小兒隊. >

(夢梁錄)』 권 3 「재집친왕남반백관입내상수사연 (宰執親王南班百官入 內上 壽 賜妻)」을 보면, 역시 제오잔(第五蓋)과 제칠잔(第七蓋)에서는 〈일장양단(一場兩段) 〉 의 〈잡극저t 연출하고 있으니, 이를 통해서도 앞의 여接 D 는 〈집극 〉 의 뜻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과백 (科白)을 위주로 하는 〈골계희〉도 〈잡극 〉 이라 불렀 다. 그것은 이미 왕국유(王國維)가 『송원희곡사』 제 2 장 「송지골계 희 (宋之滑稽戱)」에서 지적한 바이며, 그가 인용하고 있는 〈골 계희〉 의 예문 중 여러 곳에서 〈잡극 〉 이라 이룰 부르고 있다. 홍매 (洪遇, 1123 ― 1202) 의 『 이견지 (夷堅志)』 「정집 (丁集 권 4) 」에서는 〈잡극〉 의 뜻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배우와 난쟁이는 주 OO) 나라 기예 (使藝) 중에서도 낮고도 천한 자 둘이다. 그러나 농담으로써 정치를 바르게 풍자하여 옛날 장님이 글 을 의우며 악공으로써 간하던 뜻과 합치되는데, 세성에서 〈잡극〉이라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5)

5) ”志』 〈俳優保儒, 周技之下旦賤rt, 然亦能因戱語而策楓時政, 有合于 古職踊工諒之義, 世目爲雜劇者是已. >

죽, 〈골계희只t 세상에서는 〈잡극〉이라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임이북(任二~t)은 『돈황곡초람(敦煙曲初探)』에서 당傅伊)대의 희극을 가무류희 濁濁類戱)와 과백류희 (科白類戱)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누고 있는데, 제 5 장 「잡고여억설(雜考與憶說)」의 당대의 희극의 체재를 논한 대목에서 〈과백류회 안에는 가곡이 중간에 쓰여지는 것들도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과백류희는 〈골계희〉가 그 중심 을 이루고 있고, 과백(科白)이 위주이기는 하지만 몇 곡의 가곡도 쓰인 것을 흔히 발견하게 된다. 셋째, 송잡극(宋雜劇)은 〈가무희녔t 가리키기도 한다 . 『 송사(宋

史)』 권 142 「악지 (樂志)」에 진종(眞宗, 998-1022 년 재위)은 정성 (鄭聲)을 좋아하지 않아 어떤 이가 잡극사(雜劇詞)롤 짓기도 하였으나 밖으로 그것을 선포한 일은 없었다 .6)

6) 『宋史』 생綜허덴濁聲, 而或爲雜劇詞, 未當宣布于外.〉

라고 하였는데, 〈잡국사(雜劇詞)났근 〈가무희〉의 가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자목(吳自牧, 1270 년 전후)의 『몽량록頃:梁錄)』 권 20 「기악(使樂)」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전에 변경 (注京)의 교방대사(敎坊大使) 맹각구頃겐 I~) 가 잡극본자 (雜劇本子)를 지은 일이 있고, 갈수성 (葛守誠)은 사십대곡 (四十大曲) 을 지었으며, 정선현 (丁仙現)은 재주가 뛰어나고 음악을 찰 알았다. 7)

7) 명맷錄』 〈國, i卞京敎坊大使孟角珪曾徹雜劇本子, 葛守誠撰四十大曲, 丁1 ~ 思危才知音.〉

다시 주밀 (周腐 1232-1308) 의 『무립구사(武林舊事)』 권 10 「관 본잡국단수(官本雜劇段數)」에는 모두 28 야 H 本)의 〈집극〉 명목(名 目)이 실려 있는데, 그 중 대곡~ 쓰고 있는 것이 10~, 법 곡(法曲)을 쓴 것이 삭흔, 제궁조(諸宮調)를 쓴 것이 2 본, 보통 사 조(詞調)를 쓴 것이 35 본이나 되니 ,8) 이를 통하여 여기의 〈잡극〉 은 태반이 〈가무회〉였음을 알 수 있다.

8) 王國維 『宋元戱曲史』 「五. 宋官本雜劇段數」 참조.

넷째, 송집극(宋雜劇) 속에는 괴뢰희 (偶f副伐)도 포함되었다. 『동 경몽화록』 권 5 「경와기예 (京瓦使藝)」에 이런 대목이 보인다.

장두괴뢰 (杖頭偶偏)에는 임소삼(任小三)이 있는데, 매일 이론 아침 의 두회 (頭回 )9) 소잡극(小雜劇)은 조금만 늦어도 볼 수가 없다 .10)

9) 禪났 〈得勝頭回〉 • (;켕甄踊g〉라고도 하며, 說話 등에서 정식 이야기 로 들어가기 전에 청중들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하는 짧은 이야기로, 정식 이야기와 비슷하거나 정반대되는 성격의 내용이 보통이다. 10) 『束京夢華錄』 〈杖頭魄f晶任小三, 每日五吏頭回小雜劇, 差晩看不及矣. >

『몽량록』 권 20 「백회기예 (百戱使藝)」에는 또 이런 글도 보인다. 괴뢰 (偶偶)와 연분 ~) • 영괴 (靈怪) • 철기 (鐵騎) • 공안 (公案) • 사서 영書)와 역대 군신 (君臣)과 장상세財目)의 이야기를 연출한다. 화본(話本) 또는 강사(講史)는 혹은 〈잡극〉으로 짓기도 하고 혹은 애 사 예甲]) 11) 와 같게도 된다. 12)

11) 潟司冷 센淮詞〉라고도 쓰며 宋대에 유행하던 講唱의 일종임 . 12) 명梁錄』 산먀郞 • 靈怪 • 鐵騎 • 公案 • 史睿 • 歷代君臣將相故事. 話本或講史, 或{肖麟]j, 或如艦詞. >偏 瀋翁의 『都城紀勝』 瓦舍衆使에도 비 슷한기록이 있음.)

앞에서는 〈소잡극(小雜劇)〉이라 하였으나, 어떻든 간에 이 두 가 지 기록을 통하여 괴뢰 (偶偏)로 〈잡극〉도 연출하며, 〈집국〉이란 말 속에는 〈괴뢰희〉도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경몽화록』 권 7 「가행임수전관쟁표사연(鷲幸臨水殿觀爭標賜案)」에서는 임수전(臨 水殿) 앞의 수봉(水桐)과 배 위의 채루(彩樓)에서 〈대기 (::;kl;X) • 사 표 (獅約) • 도도 (悼刀) • 만패 (機牌) • 신귀 (神鬼) • 집극 (雜劇) 따위 백 희(百戱)를 연출한다〉고 하였는데, 바로 뒤이어 묘사하고 있는 수 괴뢰(水偶偏)가 〈잡국〉임이 분명하다. 원保;)초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汶獻通考)』 권 146 「악고偶緖)」에도 송나라 운소부(雲部 部)에는 괴뢰 (偶1 晶 ) 8 인이 있었는데, 〈잡극냈는 〈괴뢰녔t 사용했었

다고말하고있다. 2) 소잡극(小雜劇) 앞에 인용한 『동경몽화록』에 〈소집국〉이란 말이 보였는데, 이에 의하면 〈잡국〉에는 소잡극(小雜劇)과 대잡극伏雜劇)의 구별이 있 었음이 분명하다. 손해제 (孫稽第)는 『괴뢰희고원 (偶溫戱考原)』 「삼 (三). 송지괴뢰희 (宋之偶偏戱)」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 다. 소잡극이란 대체로 골계소극(滑稽小劇)으로 당시에 진짜 사람들이 연출하던 〈잡극〉과 같은 것이다. 소(小)라는 것은 연분個勅`) • 영괴 (靈怪) • 철기 (鐵騎) • 공안(公案) 갇은 여러 〈괴뢰희〉와 구별해서 말 한 것이다. 당시 진짜 사람들이 연출하던 〈잡극〉에 대소의 구분이 있 어서 그것을 괴뢰희에도 옮겨 적용한 것이 아님이 극히 분명하다. 13)

13) 『偶偏戱考原』 〈小雜劇者, 蓋是滑稽小劇, 與當時以眞人粉演之雜劇同. 小 者, 別於煙粉•靈怪·鐵騎·公案諸偶溫戱而言, 非因當時以眞人粉演之雜劇 有大小之分, 移稱於偶蟲戱基明. >

그리고 그는 그 당시의 사람들이 연출하던 〈잡극 X 본 모두가 〈소 잡극〉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연출하는 〈집극〉에도 대 소伏小)의 구별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송대 홍손(洪興)의 『양곡만 록(陽谷設錄)』을 보면, 〈경도(京都)의 중하(中下)의 집에서는 아들 낳는 것을 중히 여기지 아니하고 딸을 낳기만 하면 구술을 받들고 진주를 위하듯 애호하였다〉고 하면서, 그 이유는 이들이 커서 기 예 (技藝)롤 배워 사대부들을 위해 일하는 신변인 (身邊人) • 본사인 (本事人) • 공과인 (供過人) • 침선인 (針線人) • 당전대집국인 (堂前大雜劇 人) 등의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14) 〈집극(雜劇 )X 본 〈극

14) 『 陽谷設錄』 여中下之戶, 不重生男, 每生女, 則愛護如揮壁京珠. 甫長 成, 則隨其資質, 敎以藝業, 用備士大夫採捨誤侍, 名目不一, 有所謂身邊 人 • 本事人 • 供過人 • 針線人 • 堂前大雜劇人 • 折洗人 • 琴童 • 棋童 • 蔚子. >

잡얘陣)〉으로 된 판본도 있으나 잘못일 것이다. 주밀 (周密)의 『무림구사』 권 1 의 「천기성절배당악차(天基聖節排當 樂次)」를 보면, 초좌(初坐)의 제사잔(第四蓋) 끝머리에 가서 오사 현(吳師賢) 이하의 영인(倫人)들이 먼저 〈소집국沼t 연출하고 나 서, 다시 〈집국〉 「군성신현찬(君聖臣賢墓)」을 연출하고 있다. 여기 에서도 〈소집극冷든 두회 (頭回)의 형식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도 제 오잔(第五蓋)에선 〈잡극〉 「삼경하서 (三京下書)」, 재좌(再坐)의 제사 잔(第四蓋)에선 〈잡극〉 「양반(楊飯)」, 제오잔(第五蓋)에선 〈집국〉 「사야소년유(四倍少年遊)」가 상연되고 있으나 〈소집국沼븐 없다. 어 떻든 이들은 모두 〈대잡극〉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동경몽화 록』 권 8 「중원절(中元節)」 대목울 보면 7 월 칠석이 되며는 보름날 에 이르기까지 「목련구모(目連救母)」 잡극을 연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목련구모의 이야기로 보거나, 후세 각 지방에서 제의 ~儀) 와 함께 연출되고 있는 여러 가지 「목련구모」희를 놓고 볼 때, 이 잡극은 〈대잠극〉일 뿐만이 아니라 그 구성이 거의 후세의 〈대회〉 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이 간다. 같은 『동경몽화록』 권 7 「가등보진루제군정백희 (鷲登寶津樓諸軍里 百戱)」 대목을 보면 〈아집국(亞雜劇)〉이라는 것울 두 세명의 흰 칠 울 몸에 하고 하얀 얼굴에 금빛 눈알을 단 해골 모양의 사람들이 나와 연출한다. 무언극이어서 〈아잡극〉이란 호칭이 붙은 것이 아 닌가 한다• 어떻든 송대의 〈잡극〉에는 성격도 다양하고, 내용도 서로 다른 여러 종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잔치 때 상연한 〈잡극〉 〈잡극沼 궁전의 잔치자리에서도 상연되었다. 『송사(宋史)』 권 142 「악지 (樂志)」를 보면 춘추성절삼대연 (春秋聖節三大妻)의 제십 (第十)과 제십오(第十五)에 〈잡극〉이 보인다. 『동경몽화록』 권 9 「재집친왕종실백관입내싱수(宰執親王宗室百官入內上 壽 )」의 연회 절 차를 보면, 제사잔(第四蓋)에 여러 집국색 (雜劇色)이 등장하여 〈작 어 (作語)서t 하고 대곡伏曲)에 맞추어 춤을 추며, 제오잔(第五蓋) 에선 소아대무(小兒隊舞) 끝머리에, 제칠잔(第七蓋)에선 여동대무 (女童除舞) 끝머리에 〈일장양단(一場兩段) 〉의 〈잡극났t 연출하고 있다. 이 밖에도 궁전의 연회나 행사에 〈집극只全 상연하였다는 기 록은 상당히 많다. 그 밖에 연사(燕射)나 유연(遊妻)을 비롯한 임 금의 여러 가지 행사와 원소保宿) 및 신관(神觀)에서의 행사 등에 도 〈잡극〉이 연출되었고, 15) 다시 집극색 (雜劇色)이 동원된 행사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16) 그러나 무엇보다도 〈집극沼폰 잔치나 술자 리의 오락용이 가장 많았던 듯하다.

15) 『束京夢華錄』 권 6 「元育」, 권 7 「驚幸臨水殿觀爭標賜妻」 「鷲登寶津樓諸 軍里雜胡 U, 권 8 「六月六日崔府君生日二十四日神保觀神生日」 권 10 더: 敎」 및 『武林舊事』 권 1 멤괭f」, 권 3 「迎新」 등 참조. 16) 땅앳錄』 권 1 「車鷲指景靈宮孟妻」, 권 6 「孟冬行朝梨禮遇明程歲行恭謝 禮」, 『武林舊事』 권 1 「大禮」 「恭謝」 등 참조.

그런데 『동경몽화록』을 보면, 제사잔(第四蓋)에는 〈참군색 (參軍 色)이 죽간불자(竹半掃子)를 들고 나와 치어 (致語)와 구호(口號)를 읊으면, 여러 잡극색 (雜劇色)들이 이에 화(和)하고 다시 작어 (作 語)를 하고는 대곡伏曲)에 맞추어 춤을 춘다〉 17) 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집극색 (雜劇色)의 연출은 몇 명이 대곡伏曲)에 맞추어 춤 을 추는 것이다. 대곡에는 음악뿐만 아니라 노래가 있고 고사(故

17) 『束京夢華錄』 〈參軍色執竹휘弗子, 念종虛공口號, 諸雜劇色打和, 再作個語, 幻合大曲舞.〉

事 )도 있었을 것이니, 그것은 가무희 (歌舞戱) 또는 가무극(歌舞劇) 이라 할 만한 성격의 것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남송(南宋)의 기록 인 오자목(吳自牧)의 『몽량록』 권 3 「재집천왕남반백관입내상수사 연(宰執親王南班百官入內上 壽 賜妻)」에서의 제오잔(第五蓋)의 경우도 같다. 앞에 이미 인용했듯이 『몽량록』 권 20 「기악(使樂)」을 보 면 18) 〈전에 변경 (沖京)의 교방대사(敎坊大使) 맹각구頃角桂)가 〈잡극〉의 본자(本子)를 만들었고 갈수성 (葛守誠)은 사십대곡(四十 大曲)을 지었으며, 또 정선현(丁仙現)이 재주가 많고 음악을 잘 알 았다났즌 기록이 있다. 갈수성 (葛守誠)이 지었다는 대곡 8; 曲)은 〈집극冷 위한 것이 분명하며, 〈본자(本子)〉란 대본(臺本)을 뜻할 것이니 상당히 긴 고사(故事)를 연출한 것일 것이며, 정선현(丁仙 現)은 북송(北宋) 신종(神宗, 1068-1085 년 재위) 때에 활약한 유명 한 〈잡극〉의 명인이다. 19) 또 앞에 인용한 주밀의 『무림구사』에 실 린 「관본잡극단수(官本額刻段數)」에는 대곡을 서용한 작품이 10 丸본 (本)이나 실려 있다. 그러므로 여기의 〈잡극活든 대곡의 연주로 어 떤 고사를 연출한 〈가무희〉임이 분명하다. 이에 대하여는 뒤에 좀 더 자세히 논술할 예정이다.

18) 面得翁의 『都城紀勝』 댜 L 舍衆使」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음. 19) 宋 無名氏, 『續墨客揮原』 권 5, 李菌, 『師友談記』 권 10 (以上 王國維, 『宋元戱曲史』 「宋之滑稽戱」 引) .

그러나 제오잔(第五蓋)과 제칠잔(第七蓋)에서 소아대무(小兒隊舞) 와 여동대무(女童隊舞) 뒤에 연출된 〈잡극只논 〈일장양단(一場兩 段)〉이라 하였으니 ,20) 이는 대곡의 연출이 아님이 분명하다. 『몽 량록』 권 20 「기악(使樂)」을 보면 〈잡극〉의 〈일장양단〉에 대하여

20) 명앳錄』 권 3 「宰執親王南班百官入內上 壽 賜案」의 第五蓋봐- 第七蓋에서 는 모두 隊舞 없이 雜劇만을 연출하고 있고, 앞에서는 〈一場兩段〉, 뒤에 서는 〈三段〉이라 하였다.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21)

21) 닭骨翁 『都城紀勝』 명 L舍 衆技」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음.

또한 이르기를 〈잡극〉 중에선 말니 (末泥)가 우두머리이며, 일장(一 場)마다 5 명 또는 6 명이 한다고 한다. 먼저 보통 잘 아는 일을 1 단 (段) 연출하는데, 이룰 영단(豊段)이라 부른다. 그 다음에야 정집극 (正雜劇)을 연출하는데 통틀어 양단(兩段)이라부른다 .22)

22) 명캥꿉싸 (fil円雜劇中, 末泥爲長, 每一場四人或五人. 先微尋常熟事一 段, 名日堯段 次微正雜劇, 通名兩段.〉( 『都 城紀勝』 며;舍衆技」도 비슷 함.)

그러니 이 〈잡극 X 본 염단(甄段) 일장(一場) 정잡극(正雜劇) 양단 OO 段)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같은 책 권 3 「재집친왕남반백관입 내상수사연 (宰執親王南班百官入內上壽 賜案)」의 제칠잔(第七蓋)에서는 통틀어 〈삼단(三段) 〉이라 말하고 있으니 〈장(場) 〉과 〈단(段) 〉의 차 이는 아주 적었던 듯하다. 그런데 그 내용에 대하여는 『 몽량록』 「기악(使樂)」에서 디~과 같이 말하고있다. 대체로모두고사(故事)를 연출하는데, 골계(滑稽)한 것을 창념 (P 昌 念)하기에 힘쓰며, 전체적으로 웅대 (應對)로써 하게 된다. 이것은 본 시 교훈이나 훈계를 하거나, 또는 잘못을· 풍자하는 뜻을 숨기고 있으 므로, 자유스런 방법으로 표현하여 무과충(無過虫)이라고도 말하였 다. 만약 임금 앞에서 연출하더라도 처벌을 받는 일이 없었으며, 일 시적으로 임금의 얼굴에서 웃음을 피게 하면 되었다. 무릇 누가 잘못 을 간(謀)하거나 간관(陳官)이 어떤 일을 아뢰어도 임금이 따라 주지 않으면, 이들이 고사(故事)를 가칭하여 그 실정은 숨긴 채 그 일을 간하였는데, 임금은 얼굴에 노여움이 없었다 .23)

23) 맹梁錄』 鑄全以故事, 務在滑稽唱念, 應對通偏. 此本是整戒, 又隱于 諒訥 故從便統 露 , 謂之無過虫耳. 若欲鷲前承應, 亦無 責 罰, 一時取聖顔 笑. 凡有謙證 或練官陳專 上不從, 則此 輩 敗紋故事, 隱 其情而諒之, 于上 顔亦無怒也. >( 『都城紀勝』 명 L 舍衆技」도 비슷함. )

그러므로 이 일장양단(一場兩段)의 〈 집극冷든 골계 (滑稽)를 위주 로 하고 창녕 (唱念)으로 응대 (應對)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소식 (蘇試 1036-1101) 의 「집영전춘연교방사(集英殿春妄 圖司)」( 『 蘇東坡全集 』 紹集 卷 9 「樂語」)를 보면, 소아대무(小兒隊 舞) 뒤의 「구잡극(句雜劇)」사(詞)에서는 〈잘 웃고 즐기게 하기 위 하여 여러 배우들의 재주를 삼가 연출하겠습니다 〉 라고 하였고, 여 동대무(女童除舞) 뒤의 「구잡극(句雜劇)」사에서는 〈 해는 마당 느티 나무 가지 아래로 처졌지만 익살 피우는 배우들의 놀이를 삼가 연 출하겠습니다 〉 24) 고 하였다. 대무(除舞) 뒤에 연출되던 〈 집극只본 골계와 익살을 위주로 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단순한 골계에 그치지 않고 간쟁 (諒評)의 뜻이 담긴 내용을- 중시하였다.

24) 『句雜劇』 션載笑之歡, 少進群優之技. >又 〈 B 轉庭棟, 少進談優之戱. >

다시 『 몽량록 』 권 20 「기악(使樂 『都 城紀勝 』 頂冷衆技」와 대체로 같음)」을 보면 남송에 와서는 〈잡극〉의 후산단(後散段)으로 또 잡 반(銅分, 雜i·經元子·拔和등으로도부름)이 생겼는데, 시골촌노 인의 모습을 한 배우가 나와 우스개짓을 하는 1 단(段)이라 하였다. 한편 이들 〈잡극汗든 창념 (唱念)으로 응대하는 형식이라 하였지 만, 실제로는 과백희 (科白戱)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장단의 ~端 義, 1235 년 전후)의 『귀이집 (貴耳集)』 권 상u.)과 권 하(下)에 실 린 궁전연회에서의 〈잡극〉 내용을 읽어 보자. 효종(孝宗, 1163-1189 년 재위)이 재상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는데, 황제 앞에서 〈집극冷t 하게 되었다. 수재 傑탸.)로 분장한 세 사람이

등장하자 먼저 물었다. 첫째 수재 僚랴.)님 ! 고향은 어디지요 ? ' ‘상 당U:蒸)사람입니다. ' 둘째에게도 물었다. 둘째 수재님 ! 고향은 어 디지요?' 택주(澤州)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또 물었다. 셋째 수재 님 ! 고향은 어디지요? ' ‘호주(湖州)사람입니다. ' 다시 물었다. ‘상당 수재 U:黨秀才)님 ! 당신 고향에선 어떤 생약(生藥)이 납니까? ' ‘저 의 고향에선 인삼이 납니다. ' 다시 물었다. 텍주수재 (澤州秀才)님 ! 당신 고향에선 무슨 생약이 납니까?' ‘저의 고향에선 감초(甘草)가 납니다.' 다시 물었다. ‘호주(湖州)에선 어떤 생약이 납니까? ' ‘황벽 (黃藥)이 납니다. ’ ‘어째서 호주에선 황벽이 니는 거지요 ? ' ‘무엇보다 도 황벽은 사람들에게 쓰기 때문입니다. ' 당시 황제의 형인 수왕단옹 王)이 호주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던 것이다. 효종은 그날 로 수왕을 불러들여 집을 주고 봉조청 (奉朝請)에 있도록 하였다. 25)

25) 『貴耳集』 〈 壽皇 賜宰執案, 御前雜劇 裝秀才三人. 首問曰, 第一秀才, 仙 鄕何處? 曰. 上黨人. 次問, 第二秀才, 仙鄕何處? 日, 澤州人. 次間, 第 三秀才, 仙鄕何處? 曰, 湖州人. 又問, 上黨秀才, 汝鄕出何生藥? 曰, 菜 鄕出人f;. 次 rR1, 澤州秀才, 汝鄕出基生藥 ? 曰, 菜鄕出甘草. 次問, 湖州 出? 曰, 出黃藥. 如何湖州出黃蔡? 最是黃藥苦人. 當時, 皇伯秀王 在湖州, 故有此語. 壽皇 @0 日 召入, 賜第, 奉朝請. >

원언순(袁彦純)이 경윤(京尹)이 되었는데, 오로지 술의 유통에만 유의하였다. 술을 데워 다 팔아 버리고 나서는 성주·(常州) 의홍현(宜 興縣)의 술과 구주(衛州) 용유현(龍游縣)의 술을 가져다가 도성에서 팔았다. 황제 앞에서 〈잡극只끌 하는데, 세 벼슬아치가 나와 첫째 사 람은 경윤(京尹)이라 하고, 둘째 사람은 상주태수(常州太守)라 하고, 셋째 사람은 구주태수(衛州太守)라 하였다. 이 세 사람들이 자리디툼· 울 하다가, 상주태수가 먼저 경윤에게 양보하였다. ‘ 어찌 우리 두 고 을 밑으로 처져서야 되겠소? ' 그러나 구주태수는 다두면서 말하였다. ‘경윤이 우리 두 고을 아래 있어야만 하오 ! ' 상주태수가 물었다. ‘어

째서 그렇게 말하는 거지요 ? ' 구주태수가 말하였다. ‘ 저 사람은 우리 두 고을의 도매 장사꾼 아니오 ! ' 영종(寧宗, 1195-1224 년 재위)도 크게 웃었다 .26)

26) 『貴 耳集』 〈袁彦純尹京, 專一留意酒政, 燕酒賣盡, 取常州宜興縣酒, 衝州 龍游縣酒在都下賣.御前雜劇,三個官人,一曰京尹,二曰常州太守,三曰 衛州太守. 三人爭坐位, 常守讓京尹曰, 登宜在我二州之下? 衝守爭曰, 京 尹合在我二州之下. 常守 r』 日, 如何有此說? 衛守云, 他是我二州拍戶. 寧 廟亦大笑.〉

〈잡극〉 중에서도 간쟁 (陳評)의 뜻이 있는 것들이 주로 지식인들 의 기록 속에 남아 있고, 또 그 뜻을 전하는 데 목적이 있으므로 완전한 과백희 (科臼戱)인 것처럼 기록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 나 이를 감안하더라도 일장양단(一場兩段)의 〈잡국〉 2” 은 과백희에 가까운 구성이어서, 〈가무희〉와는 거리가 약간 멀어진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정집극(正雜劇)에는 노래와 춤의 성분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을 것이나 앞의 영단(豊段)과 뒤의 산단(散段)은 특 히 골계 (滑稽) 위주의 과백희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27) 『 東京夢華錄』 권 9 「宰執親王宗室百官入內上 壽 」의 冥會節次에서 第五蓋 과 第七蓋의 雜劇을 모두 〈一場兩段〉이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구성이 영단 1 장(場)과 정집극 양단洞政)으로 이루어 졌다는 것은 〈잡극〉이 더욱 정식화(程式化)하였음을 뜻하는 것이 댜 남송에 와서 잡반(ft)이리는 후산단(後散段)이 더 생겨났다 는 것은 〈집극〉의 정식화가 더욱 급속도로 추전되었음을 말해 준 다. 그리고 그것은 남송에 들어와 〈집국〉에 여러 가지 각색명 個宅 名)이 제대로 자리잡았던 것으로도 증명될 수 있는 일이다. 『몽량 록』 권 20 「기악(使樂 『都國랴券』 며;舍衆使」와 대체로 같음)」을 보 면,

또한 〈 잡극 〉 중에서는 말니 (末泥)가 우두머리가 되는데, ……. 말 니색 (末泥色)은 주장(主張)을 하고, 인회색 (引戱色)은 분부(分付)를 하며, 부정색(副淨色)은 발교(發喬)를 하고, 부말색(副末色)은 터윈 (打輝)을 한다. 간혹 한 사람을 더 보태어 장고(裝孤)라고도 한다. 28)

28) 명梁錄』 샨瓚雜劇中末泥爲長, ……. 末泥色主張, 引戱色分付, 副淨色 發喬 副末色打譯. 或添一人, 名曰裝孤. >

라고 하였다. 곧 〈잡극〉에는 말니 (末泥) • 인희 (引戱) • 부정 (副 淨) • 부말(副末) • 장고 (裝孤) 등의 각색 (脚色) 이 있는데 , 말니는 〈잡극只 총지휘하고, 인희는 놀이의 연출을 담당하며, 부정은 어 리석거나 잘못하는 모양을 가장하여 풍자할 자료롤 만들어 주고, 부말은 그것을 근거로 우스캐짓을 하는 것이며, 장고는 관리노릇 울 하는 각색이다 .29) 주밀(周密)의 『무림구사』 권 4 「잡극삼갑(雜 劇三甲)」을 보면 희두 徵頭) • 인회 (引戱) • 차정 (次淨) • 부말(副末) • 장단(裝旦) 등의 각색명이 보이는데, 희두倻馮i)는 말니 (末泥)와 같고, 차정 (次淨)은 부정 (副淨)과 같으며, 장단(裝旦)은 부녀자로 분장하는각색이었다.

29) 王國維, 『宋元戴曲史』 「七. 古劇之結構」 참조

주밀의 『무림구사』를 보면 잔치자리에서 연출되던 〈집~f〉에 모 두 제명 陣名)이 기록되어 있다. 귄 1 「천기성절배당악차(天基聖節 排當樂次)」를 보면 〈초좌(初坐)〉의 제사잔(第四蓋)에선 〈잡극〉 「군 성신현찬(君聖臣賢襲)」을, 제오잔(第五蓋)에선 〈집국-〉 「삼경하서 (三京下書)」를 연출하고, 〈재좌情坐)〉의 제사잔(第四蓋)에선 〈잡 극〉 「양반(楊飯)」을, 제육잔(第六蓋)에선 〈잡극〉 「사야소년유(四倍 少年遊)」를 연출한다. 권 8 「황후귀알가묘頃后歸賜家廟)」에선 〈사 연초좌馮案fJJ坐)〉의 제사잔(第四蓋)에서 집극색 (雜劇色)이 「요순우 탕(堯舜禹湯)」을, 〈재좌頂坐)〉의 제칠잔(第七蓋)에선 〈잡극〉 「연

년호(年年好)」를 연출한다. 그리고 같은 책 권 10 의 「관본잡극단수 (官本雜劇段數)」에는 28 여흔( 本 )에 달하는 〈잡 극 〉 의 제명 馮名)이 실 려 있다. 앞에 이미 인용한 바와 같이 『 몽량록 』 권 20 「기악(使 樂)」에는 〈 전에 변경 ( i 卞京)의 교방대사(敎坊大使) 맹각구頃角往)가 〈 집극 〉 의 본자(本子)를 만든 일이 있고, 갈수성 (葛守誠)은 사십대 곡(四十大曲)을 지었다 〉 고 하였으니, 이미 북송 때부터 대본( 臺 本) 에 의한 〈집국났공이 연출되었음이 분명하다. 남송에 와서는 〈잡 국 〉 이 더욱 정식화(程式化)하여, 각색명 個色名)도 자리를 잡고 놀 이의 구성도 일정해졌으며 서용하는 음악에도 일정한 규정 ?l 생기 면서, 모두 일정한 대본에 의하여 상연되는 연극으로 발전한 것이 다. 「관본잡극단수(官本雜劇段數)」에도 대곡伏曲)을 사용한 것 10 達(本), 법곡(法曲)을 시용한 것 特본(本) 등이 있으니, 걷수성 (葛守誠)이 지었디는 사십대곡(四十大曲)도 〈잡극났t 위한 것일 것 이며, 또 〈잡극冷는 대곡 0 曲)이나 법곡(法曲) 같은 음악 규범에 의하여도 정식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당시의 극장인 와사(瓦舍)나 구란(때亂)에서 상연되던 〈잡 극저는 술자리에서 연출되던 것들보다는 대체로 규모를 제대로 갖 춘 〈잡극只둘이 위주였을 것이다. 『몽량록』 권 20 「기 악(使樂, 『 都 城紀勝 』 頂;舍衆使」에도 보임 )」 첫머리에서 산악(散樂)은 교방십삼부(敎坊十三部)에서 전해전 것인데, 오직 〈잡극〉으로서 정색 (正色)을 삼는다. 30)

30) 명梁錄』 -三部, 唯以셔陶劃爲正色. >

라고 하였다. 대체로 와사에서 상연되던 여러 가지 잡예 燁藝) 중 에서는 〈잡극〉이 가장 중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경몽화록』 권 8 「중원절(中元節)」울 보면, 〈 7 월 15 일울 중원 절 (中元節)이라 부르는데〉 〈칠석날부터 『존승목련경 (尊勝目連經)』 을 찍어서 팔고〉 〈구사(拘律)의 악인멤以))들은 칠석날이 지나면서 부터 「목련구모(目連救母)」 집국을 상연하기 시작하여 15 일이 되어 야 멈추는데, 구경꾼들은 두 배로 늘어난다〉 31) 고 하였다. 이에 의 하면 이미 북송에서도 와사(瓦舍)에서는 완전한 제명 湜路)도 있고 이야기 줄거리도 상당히 복잡한 큰 규모의 〈잡극〉이 상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잡극〉이 완전한 격식을 갖춘 연극으로 발전 한 것은 남송 때라고 할 것이다.

31) 『束Jj'〈夢華錄』 〈七月十五日 , 中元節. …•• • (七夕)及印賣尊勝目連經. …… 拘, 自過七夕, 便般目連救母雜劇j, 直至十五日至, 觀者增培.〉

3 악곡(樂曲)을 사용한 〈잡극〉 앞에서 송집국(宋雜劇) 중에는 대곡伏曲) 등의 악곡偶曲)을 사 용한 것들이 있음울 지적하였는데, 〈송집국〉 중에서 〈가무희〉라고 불러도 좋은 것은 이 부류에 속하는 것들이다. 유영제 (劉永濟)의 『송대가무극곡록요(宋代歌舞劇曲錄要)』 U:海, 古典文學出版社, 1957) 를 보면 가무극(歌舞劇)으로서 송대의 사람들의 저술이나 사집(詞 集) 중에 보이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수록하고 있다. (1) 대곡난曲)에 속하는 것들 ® 동영 壇源, 1140 년 전후) 「도궁박미 (道宮薄婚)」 10 편 (遷) (曾iii, 1147 년 전후, 『樂府雅詞』 卷 上에 실림 . ) ® 증포(曾布, 1101 년 전후) 「수조가두(水關歌頭)」 7 편(遷) (王 明淸 1127-1214 ? , 『玉照新志』 卷 2 에 실림. )

® 사호(史浩, 1106-1194) 「채련 (採蓮)」 8 편 (返) (본인의 『都峯 眞 隱 大曲 』 卷 1 에 실림. ) (2) 무곡(舞曲 )32) 에 속하는 것들 ® 사호凍浩) 「채련무(採蓮舞)」(이하 모두 『 都峯眞隱大曲 』 卷 1. 卷 2 에 실림. ) ® 「화무(花舞)」 ® 「검무億驛)」 ® 「어부무사(漁父舞)」

32) 劉永濟는 「總論」에서 〈舞曲〉 아래 〈舞曲亦大曲, 但多用入破部ff}, 故前 人亦有名之爲曲破者. 〉라고 注書하고 있음.

(3) 곡파(曲破)에 속히는 것 ® 무명씨 (無名氏), 「석노교(情奴橋)」곡파(曲破) (『高麗史』 卷 71 「樂志」에 실림.) (4) 법곡(法曲)에 속하는 것 ® 조훈(曹凱 ? -1174) , 「법곡도정 (法曲道情)」 (본인의 『松隱樂 府』에 실림.) 그런데 유영제 (劉永濟)는 〈무곡(舞曲) 〉도 역시 대곡伏:曲)으로 대부분 그 임파(入破) 부분을 사용하고 있어 이것을 곡파(曲波)라 부론 사람도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곡파(曲破)났큰 말할 것도 없 이 〈대곡〉의 임파(入破) 부분으로 이루어지고, 〈법곡(法曲)〉도 역 시 〈대곡〉이나 그것이 법곡부(法曲部)에 속했다 하여 법곡이라 부 른 것이라 하였다. 33) 왕국유(王國維)도 『송원희곡사』 「오(五). 송

33) 이상 劉永濟, 며댔輯 lj 曲錄要』 「總論」의 自注 인용.

관본잡극단수(宋官本雜劇段數)」에서 『 사원 ( 詞 源) 』 권 하(下)를 인용 하여 〈 대곡 O 曲)의 편수(片數, 곧 過 數)는 법곡(法曲)과 서로 비슷 하니, 곧 이 두 가지는 대략 비슷한 것이었다 〉 34) 고 설명하고 있 다. 그러니 이것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대곡只끌 사용한 것이라 하 여도좋을것이다.

34) 『宋元戱曲史』 섭瑠原 (卷下)謂, 大曲片數(卽遷數)與法曲相上下, .II lj 二者暑 相似也.〉

송대의 〈 대곡났는 당(唐)의 대곡을 계승 발전시킨 것인데, 『 송사 (宋史) 』 권 142 「악지 (樂志)」에 〈 18 조(調), 40 대곡 8 曲)〉의 곡명 (曲名)이 실려 있고, 왕국유의 『 당송대곡고( 唐 宋大曲考) 』 에 의하면 그 밖에도 송대의 사람들의 저술 속에는 많은 〈 대곡〉의 곡명이 보 인다. 〈대곡 〉 에는 모두 노래와 춤이 쓰였을 것인데, 완전한 〈 대 곡〉의 전편(全通)이 전하는 것은 없어 그 구성의 전모를 알아보기 는힘들다. 그런데 〈대곡〉의 구성과 연창(演唱)방법에 대하여는 다음과 갇은 기록이 있다. 심괄(沈括, 1030 - 1094) 의 『 몽계필담頃溪 筆 談) 』 권 5, 이른바 대편난대i)이란 것에는 서(序) ·인(引) ·가r.Jx) .삽(tJi) • 최 ('i) .초 (P 肖) ·최 (備) ·전 (源) ·곤(袁) ·파(破) ·행 (行) ·중강(中睦) • 답가個濁:)의 종류로 수십 해(解)가 있고, 또 해(解)마다 여러 첩 (憂)이 있다. 그것을 일부 잘라 내어 쓰는 것을 적편(損遠)이라 부른 다. 지금 사람들의 〈대곡 X 는 모두가 잘라 내어 쓰는 것이니, 모두 대 편 8 遷)은 아닌 것이다. 35)

35) 명溪筆談』 산眉胃大遷者, 有序 • 引 • 歌 • gi • 唯 • P 肖 • 備 • f傾 • 袁 • 破 • 行•中性·踏歌之類,凡數十解,每解有數壘者.裁截用之,謂之摘遠.今人 大曲, 皆是裁用, 怨非大這也. >

왕작(王it), 1162 년 전후)의 『벽계만지 여深욥影志)』 권 3, 모든 〈대곡〉에는 산서 (散序) • 삽(級) • 배편 (排通) • 전 (1 傾) • 정전 (正揮) • 입파(入破) ·허최 偏i備) ·실최 (實備) ·곤편 (哀遷) ·헐박(歌拍) • 쇄곤(휴.ffl)이 있어서 비로소 한 곡을 이루며, 그것울 대편 0 대i)이라 한다. 그런데 나는 양주배편 (涼州排遷) 1~ 는(本)을 본 일이 있는데, 24 단(段)이 있었다. 후세에 〈대곡〉의 가사를 짓는 사람들은 간편하게 생략하는 방법을 쓰고, 연주가들도 또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하려 둘 지 않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다 배우지도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36)

36) 명國웜誌』 潟曲有散序 • 級 • 排這 • f傾 • 正 1 沮 入破 • 虛備 • 實備 • 袁 這 • 歡拍 • 殺袁, 始成一曲, 此謂大遷. 而涼0+ 1 排遷予曾見一本, 有二十四 段.後世就大曲製詞者,類從簡省,而管鉉家又不肯從首至尾吹彈,基者學不 能盡.〉

위의 기록 중에서 〈대편伏遠)〉이란 여러 편(通)으로 이루어전 〈대곡처t 이르는 말이며, 편명 (遷名)은 여러 가지가 있었고, 또 한 편(通, 또는 解)은 여러 첩(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배편(排邊)녔는 〈중서 (中序) 또는 박서 (拍序)라고도 하고〉 〈가두 倻頂)라고도 하는〉 37) 〈대곡〉의 편명 (遠名)인데, 24 단(段)에 이르 는 〈양주배편(涼 1 사성鴻)〉이 있었다니 대단히 큰 규모의 〈대곡〉이 있었음을알게 된다.

37) 王國維, 『唐宋大曲考』.

유영제 (劉永濟)는 여러 가지 송대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송의 〈대 곡冷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고 하였다. 38)

38) 『宋代歌舞劇曲錄要』 「總論」.

® 산서 (散序) 1 • 2 • 3 • 4 • 5 • 6 ® 배편 (排這 歌頭 引歌) 1 • 2 • 3 • 4 • 5 • 6 • 7 • 8 • 9 연편 燁

過) • 10 전편 (i傾通) ® 임파(入破) 1 • 2 허최 (虛備) • 3 전곤(前哀) • 4 실최 (實値 備拍) • 國 (中哀) • 6 헐박 (欲拍) • 7 쇄곤 (熱袁 徹) 지금 전하는 송대의 〈대곡〉 • 무곡(舞曲) • 법곡(法曲) 등의 편수 (遠數)는 서로 같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모두 이러한 구성으로 이 루어지는 것이다. 심괄(沈括)의 삽(t瓦) • 최 (P 崔) • 초 (P 肖) • 행 (行) • 중강(中睦) • 답가澤歌)와 왕작(王杓)의 삽(級)은 모두 〈대곡〉의 곡편(曲遠)이 아닌 것으로 여겨져 넣지 않았다고 하였다. 『송대가무국곡록요(宋代歌舞劇曲錄要)』에 실린 〈대곡〉둘은 〈대 곡〉이 큰 규모의 조곡係旦曲)으로서 상당히 복잡하고 긴 고사(故事) 룰 연출한 〈가무회〉였음을 알기에는 충분하다. 동영 燁輝)의 「도궁 박미 (道宮薄嬪)」 10 편은 서시 (西施)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여 춘 추(春秋)시대에 오(吳)나라와 월燁)나라가 싸웠던 일을 연창(演 唱)한 것이고, 증포(曾布)의 「수조가두(水調歌頭)」 7 편은 당傅尹)나 라 심아지 (沈亞之, 825 년 전후)의 전기 (傳奇) 『풍연전 (馮燕傳)』을 연창한 것이며, 사호使浩)의 「채련(採蓮)」은 〈수향사(壽鄕詞)〉란 부제 (副題)가 뜻하듯이 송수연 (碩壽妻) 같은 데서 연창하던 것이 다. 이들보다도 가무濁濁)연창의 내용을 보다 상세히 알려 주는 것 은 무곡(舞曲) 듀문이다. 먼저 사호使浩)의 「채련무(採蓮舞)」의 구 성을보자. (1) 다섯 사람이 일자(一字)로 대청을 향하여 선다. 그리고 죽간 자(竹羊子)가 구대사(句除詞)를 읊는다 (16 句의 句除詞) . (2) 구대사를 읊고 나면 뒤에서 「쌍두련령 廈頭蓮令)」이 연주되 며, 춤이 시작되고 춤추는 사람들이 오방따方)으로 나뉘어져

춤을 춘다. 죽간자(竹等子)가 또 구대사를 읊는다 (10 句의 勿隊 詞). (3) 구대사를 읊고 나면 뒤에서 「채련령 (採蓮令)」이 연주되며, 춤 추는 사람들은 돌아서 한 줄로 서고, 함께 「채련령」을 노래한 다 (21 句의 「採蓮令」). (4) 노래가 끝나면 뒤에서 「채련령」을 연주하고, 춤은 오방(1i方) 으로 니뉘어져 춘다. 죽간자가 구대사를 읊는다 (12 句의 句除 詞). (5) 화심(花心)이 등장하여 아뢰는 말을 읊는다 (12 句의 念詞). (6) 죽간자가 묻는 말을 읊는다 (2 句). 화십이 대답하며 묻는다 (1 句). 죽간자가 다시 묻는 말을 읊는다 (1 句). 화심이 대답을 읊는다 (1 句). (7) 읊고 나면 뒤에서 「채련곡파(採蓮曲破)」를 연주하고 다섯 사 람들이 어울리어 「임파(入破)」를 춤춘다. 먼저 두 사람이 춤추 며 나아와서, 춤을 추다가 깔린 자리 위에 벚었다가 선 곳에서 춤을 끝내며, 다른 두 사람도 춤을 추다가 역시 벚으며 선 곳 에 그대로 있고, 그런 뒤에야 화심 (花心)이 춤을 끝낸다. 죽간 자가 읊는다 (8 句 句除詞). (8) 읊고 나면 화심이 시를 읊는다 (7 言 4 句 詩). (9) 읊고 나면 뒤에서 「어가오(魚家徹)」를 연주한다. 화심이 춤추 며 나아와 꽃을 꺾고 「어가오」를 노래한다 (10 句 「魚家徹」詞). (10) 노래가 끝나면 뒤에서 「어가오」를 연주한다. 다섯 사람이 춤 추다 위치를 바꾸어 앉고, 화심에 해당하는 선 사람이 시를 읊 는다 (7 言 4 句 詩). (11) 읊고 나면 뒤에서 「어가오」를 연주한다. 화심이 춤추며 나와 꽃을 꺾고 「어가오」를 노래한다 (10 句 「魚家徹」詞) .

(12) 노래가 끝나면 뒤에서 「어가오」를 연주한다. 다섯 사람이 춤 추다 위치를 바꾸어 앉고, 화심에 해당하는 선 사람이 시를 읊 는다 (7 言 4 句 詩). (13) 읊고 나면 뒤에서 「어가오」를 연주한다. 화심이 춤추며 나와 꽃을 꺾고 「어가오」를 노래한다 (10 句 「魚家徹」詞). (l4) 노래가 끝나면 뒤에서 「어가오」를 연주한다. 다섯 사람이 춤 추다 위치를 바꾸어 앉고, 화심에 해당하는 선 사람이 시를 읊 는다 (7 言 4 句 詩)• (15 ) 읊고 나면 뒤에서 「어가오」를 연주한다. 화심이 춤추며 나와 꽃을 꺾고 「어가오」를 노래한다 (10 句 [魚家徹]詞). (16) 노래가 끝나면 뒤에서 「어가오」를 연주한다. 다섯 사람이 춤 추다 위치를 바꾸어 앉고, 화심에 해당하는 선 사람이 시를 읊 는다 (7 言 4 句 詩). (1? 읊고 나면 뒤에서 「어가오」를 연주한다. 화심이 춤추며 나와 꽃을 꺾고 「어가오」를 노래한다 (10 句 「魚家微庫]) . (18) 노래가 끝나면 뒤에서 「어가오」를 연주한다. 다섯 사람은 춤 추다가 먼저처럼 위치를 바꾸어 앉는다. 죽간자(竹半子)가 구 대(句隊)하며 읊는다 (16 句 句隊詞). (19) 읊고 나면 모두가 「화당춘( 畵 堂春)」을 합창한다 (9 句 「 畵 堂春」 詞). (20 ) 노래가 끝나면 뒤에서 「화당춘」을 연주한다. 여럿이 춤을 추 고 춤이 끝나면 또 「하전(河傳)」을 노래한다 (13 句 「河傳」詞). (2I ) 노래가 끝나면 뒤에서 「하전」을 연주한다. 여럿이 춤을 추고 춤이 끝나면 죽간자가 견대사(源卿司)를 읊는다 (6 句 淵卿司). (22 ) 읊고 나면 뒤에서 「쌍두련령 廈頭蓮令)」을 연주한다. 다섯 사 람이 춤을 추며 돌아서 한 줄로 늘어서서 대청을 향하여 장고 를치며 퇴장한다.

여기에는 악곡연주도 있고 노래도 하고 읊기도 하며 춤도 춘다. 악곡도 있고 가사도 있으며, 구대사(句除詞) • 견대사(遣隊詞)와 문 답(問答) 및 시 (詩)가 있다. 춤에는 화심무(花心舞) • 오인무야.人 舞) • 이인무(二人舞) • 중무僚舞)가 있고, 꽃을 꺾는 동작도 하고 있다. 악곡에는 「쌍두련령 廈頭蓮令)」 「채련령 (採蓮令)」 「채련곡파 (採蓮曲破)」 「어가오(魚家徹)」 「화당춘(畵堂春)」 「하전(河傳)」 등이 사용되고 있는데, 「쌍두련령」만이 가사가 없다. 이 밖에도 「화무 (花舞)」 「검무(j l j舞)」 「어부무(漁父舞)」 등의 구성을 보면 규모만 서로 작고 클 뿐 비슷한 성격의 것들이다. 특히 「검무(j l j舞)」에는 한(漢)의 홍문연(鴻門案)과 당(唐)의 공손대낭(公孫大娘)의 검무의 고사(故事)가 것들여져 있다• 이것들은 대체로 〈대곡〉의 임파(入 破) 이후의 부분을 약간 변화시켜 만든 것이라 볼 수 있다. 모두 아름다운 글로 이루어전 가사들이니, 여기에 쓰이던 음악과 춤도 고도로 세련되고 우아한 성격의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것들은 모두 당떄:) 이전의 전통적인 〈가무희〉에 비하여 매우 정식 화(程式化)되고 크게 달라전 성격의 것들이다. 4 나희 (1 難戱) 의 발전 1) 〈나〉의 변화 앞에서 이미 이야기했듯이 중당(中唐) 무렵부터 일기 시작한 나 (灘)의 변화는 송대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진다. 『동경몽화록(東京 夢)』 권 10 「제석 (除夕)」을 보면 제일(除 B) 에 행한 북송의 궁 중의 대나伏灘)에 여러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장군情軍) • 문신 (門臣) • 판관 (判官) • 종규 (鍾旭) • 소매 (小妹) • 토지 (土地) • 조신 (麻神) 같은 종류로 분장한 1000 여 명이 나와 〈매수(埋崇)〉라 부르는 역

귀를 쫓는 행사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39) 『몽량록땅:梁錄)』 권 6 「제야(除夜)」에도 궁중의 〈대나 〉 에 여러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장군(將軍) ·부사(符使) ·판관(判官) ·종규(鍾旭) ·육정(六丁) ·육갑 (六甲) • 신병 (神兵) • 오방귀사(五方鬼使) • 조군(暗君) • 토지 (土地) • 문호(門戶) • 신위 (神尉) 등으로 분장하고 구수(縣崇)를 한다 하였 으니, 남송 때도 북송과 비슷했던 듯하다. 『무립구사(武林菌事)』 권 3 「세제 (歲除)」에도 궁중의 구나(福灘)의식에 관하여 『 동경몽화 록 』 의 기록과 비슷한 내용의 글을 남기고 있다. 송대의 〈나〉에는 방상씨 (方相氏)와 전자(仮子) 등이 자취를 감추고 천여 명의 가면 울 쓴 수많은 신들이 등장하여 가무를 하며 역귀를 몰아 냈다• 종 규(鍾旭)의 등장이 특히 두드러진다.

39) r 束京夢華錄』 여除日 , 禁中里大灘儀. …… 諸班直戴假面, 綠畵色衣, 執 金槍龍旗. 敎坊使孟景初身品旭偉, 貫全副金鏡銅甲裝將軍. 用鎭殿將軍二 人, 亦介胃 裝門神. 敎坊南河炭酸惡船肥, 裝判官. 又裝鍾旭•小妹·土 地 • 畜神之類, 共千餘人, 自禁中福崇 ……謂之埋崇而能. >

다시 『몽 량록』 권 6 「십이월 (十二月 )」울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이 날로 들어오면서 거리에는 가난한 거지들 너댓 명이 한 무리가 되어, 신귀(神鬼) ·판관(判官) ·종규(鍾旭) ·소매(小妹) 등의 형상 으로 분장해서 칭을 울리고 북을 치며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돈을 구걸 하는데, 이룰 타야호(打夜胡)라 불렀으며, 역시 구나(福備)의 뜻을 지닌 것이다 .40)

40) 명澳錄』 〈自此入月 , 街市有貧汚者三五人爲一隊, 裝神鬼 • 判官 • 鍾旭 • 小妹等形, 敵鑛擊鼓 沿門乞錢 俗呼爲打夜胡,亦福灘之意也. >

『동경몽화록』 권 10 「십이월(十二月)」에도 타야호(打夜胡)에 관 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도 앞에서 이야기한 당~ 전야호(進 夜胡)에서 발전한 것일 것이다. 조언위 ~ 1195 년 전후)의 『운

록만초(雲麗漫紗)』 권 9 에서도 〈세속(世俗)에서는 한 해가 저물 때 마을사람들이 어울리어 〈나只룹 행하였는데, 민간에선 그것을 타야 호(打夜胡)라 불렀다〉 41) 고 하고 있다.

41) 『雲紗』 〈世俗歲將除, 鄕人相率爲灘, 1里 語謂之打野胡. >

2) 계림나(桂林灘) 주거비 OO 去非, 1177 년 전후)의 『영의대답(嶺外代答)』 권 7 에는 계림나(桂林灘)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계림 (桂林)의 나대 (灘隊)는 평화로웠던 때부터 서울까지 이름이 알 려져 정강제군나(靜江諸軍灘)라 불리웠다. 그리고 그 고장의 거리와 마約]는 또 자연히 백성들의 〈나〉도 있었다. 몸을 꾸미는 물건들이 매우 정교했고, 동작과 언어들이 모두 볼 만하여, 중원(中原)의 분장 한나대(灘隊)보다도뛰어난듯하였다. 그렇게 된 까닭을따져 보니, 대체로 계림사람들은 가면을 잘 만들어 훌륭한 것은 하나에 만 전의 값이 나가고 다른 고장에서도 그것을 귀히 여기기 때문이었다. 42)

42) 『嶺外代答』 〈桂林灘隊, 自承平時, 聞名京師, 曰, 靜江諸軍灘、 而所在坊 卷村落,又自有百姓灘.嚴身之具基飾,進退言語威有可觀,視中州裝隊杖似 優. 推其所以然, 蓋桂人善制戱面, 佳者一直萬錢, 他州 貴 之. >

다시 육유(鹿旅 1125-1210) 의 『노학암필기 (老學菴筆記)』에도 정화(政和)년간 (1111-1117) 의 대나(:ki難)에 계부(桂府)에 가면을 전상하도록 명을 내렸다. 한 죽이라면서 가면을 진상해 왔는데, 처음 에는 너무 적다고 의아해 했는데 알고 보니 그 한 죽은 80~1 었고, 늙고 젊고 이쁘고 못생기고 하여 하나도 서로 비슷한 것이 없어서 그 제서야 크게 놀랐다. 43)

43) 『老 學菴筆記』 야短 F 中大灘, 下桂府進面具. 比進到稱一골 l j, 初誘其少, 乃

是八百枚爲一곱 l j, 老少硏兩無一相似者, 乃大驚. >

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계림 (桂林) 같은 지방은 〈 나 〉 가 대단히 발달하여, 특히 그곳의 가면은 정교하기로 이름이 났었음을 알 수 있다. 3) 군나(軍灘) • 귀 신희 (鬼神戱) 계림지방은 민간에도 〈 나〉가 성행하였지만 그 발전은 군나(軍灘) 가 주도한 듯하다. 『 위서 (魏 書 ) 』 권 108 의 4 「예지 때衡 志 )」에 〈 고종 ( 高 宗) 화평 (和平) 3 년 연말 대나난雅)의 예식을 행할 때 병술과 무술을 과시하였다 〉 44) 고 기록하고 있으니, 군나( 軍 灘)는 일찍부터 성대한 행사로 발전하였다. 특히, 송대에 와서는 군대의 행사에서 는 무위의 과시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백희 (百戱)가 아울러 펼쳐 졌는데, 〈나 〉 의 성격변화에 따라 크게 발전한 여러 가지 귀신가면 을 쓴 귀신놀이가 큰 규모로 연출되었다. 『 동경몽화록 』 권 7 「가등 보진루제군정백희 (鷲登 寶 津樓諸 軍 里百戱)」를 보면, 황제가 보진루 ( 資 津樓)에 행차했을 때 그 누각 아래에서는 제군(諸 軍 )의 백희가 다음과 같이 펼쳐진다. 먼저 수십 명이 줄을 서서 북을 치는 중에 한 사람이 나와 치어 (致語)를 하고 노래를 합창한 뒤에, 사표(獅 約)놀이, 깃발을 들고 충을 추는 박기자(撲旗子), 상간U:半) • 재 주넘기 등의 잡희 (雜戱) , 백여 명의 군사들이 벌이는 여러 가지 형 태의 군전(軍陣), 예닐곱 가지의 무술시합이 진행된다. 그리고 나 서 다음과 같은 놀이가 이어전다.

44) 『 魏 書』 〈高宗和平三年十二月 , 因歲除大灘之 禮 , 遂爆兵示武. >

갑자기 폭장여沼:)이라 부르는 벽력 같은 소리가 나면……연기와 불이 크게 일면서 가면에 헝클어전 머리를 하고, 입에서는 긴 이빨 사 이로 연기와 불을 뿜는 귀신 모양을 한 자가 등장하여 ……나아갔다

물러났다 하며 춤을 추는데 이를 포라(抱鍾)라고 한다. …… 다시 폭장僞附:)이 울리면 악부(樂部)에선 배신월만곡(拜新月漫曲) 을 연주하고, 얼굴에 청록색 칠을 하고 금빛 눈망울의 가면을 쓰고서 표범가죽과 수놓은 비단 넓은 띠 같은 것으로 장식한 사람이 나오는데 경귀 (硬鬼)라 부른다. ……쫓고 잡고 보고 듣는 모양을 한다. 또 폭장이 울리면 간 수염이 달린 가면을 쓰고……종규(鍾旭)의 모 양을 한 사람이 옆의 한 괭과리를 든 사람과 함께 어울리어 춤추며 왔 다갔다하는데, 이를 무판(舞判)이라 한다. 이어서 두세 명의 깡마르고 흰 분을 온 몸에 바론 금빛 눈망울에 흰 얼굴을 지닌 해골 모양을 한 사람들이 ……배회 (排戱) 같은 거동을 하 는데 이를 아잡극(亞雜劇)이라 부른다. 또 폭장이 울리면 연기와 불길이 솟아나와 사람들 얼굴을 서로 분간 할 수 없게 되는데, 연기 속에 일곱 명이 모두 머리를 풀어헤치고 문 신을 하고서 …… 진짜 칼을 들고 서로 싸우며 치고 찌르는데 …… 이것 울 칠성도(七聖刀)라 한다. 갑자기 폭장이 울리고 다시 연기와 불길이 치솟으면……수십 명이 모두 가면에 기이한 옷차림으로 줄지어 나오는데, 마치 사묘(祠廟)의 귀신조각 같으며, 이룰 헐장(歡限)이라 부른다. 다시 폭장이 울리면 모두 물러나고 다음엔 한 사람이 괭과리를 치며 백여 명을 끌고 나오는데 ……황백분濱泊粉)으로 그들의 얼굴을 칠 하였고, 이룰 말창(株路)이라 불렀다. ……함께 소리지르며 몇 차례 군전 (軍陣)을 변화시킨다. 일자전 (一字陣)을 이루고는 두 사람씩 전 (陣)에서 나와 격투를- 하는데……이를 판락(板落)이라고 한다 . ...... 45)

45) 『束京 - 〈忽作一聲如霜震, 謂之爆俠 ……煙火大起, 有假面拔髮, 口吐狼牙煙火, 如鬼神狀者上場 ……步舞而進退, 謂之抱鑛. …… 又一聲爆俠樂府動拜新月優曲,有面塗靑綠,戴面具金晴,飾以約皮錦編 看帶之類, 謂之碩鬼. ……爲腦提視聽之狀.

又爆伏一聲, 有假面長岩……如鍾旭像者, 傍一人以小鑛相招和舞步, 謂 之舞判. 繼有二三裵群, 以粉塗身,金萌臼面, 如潤樓狀, ……擧止若排戱, 謂之 P亞 雜l . 又爆杖響,有煙火就酒出, 人面不相視,煙中有七人,皆被髮文身,……執 眞刀, 互相擊問擊勅j, ……謂之七聖刀. 忽有爆杖響, 又復煙火, … ···5l j數十輩, 皆假面異服, 如祠廟中神鬼塾像, 謂 之歐帳 又爆杖響, 卷退, 次有一擊小銅鏞, 引百餘人, ……以黃白粉塗其 面, 謂之株論. ……喝威變陣子數次. 成一字陣, 兩兩出陣格鬪, ……謂之板 落.……〉

이 뒤로도 시골 남녀로 분장한 사람이 나와 놀이를 하고, 잡극 (雜劇)을 두 단(段) 연출한 다음에는 여러 가지 기마술(騎馬術)과 말을 타고 부리는 재주 등 수십 가지를 상연하고, 두 무리가 겨루 는 격구(擊往)로 끝을 장식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귀신이 등장하는 놀이를 발견하게 된 다. 포라(抱鍾) • 경귀 (硬鬼) • 무판(舞判) 나일장(歐限) 동은 모두 귀신의 탈을 쓴 가면놀이이나 아잡극(亞韻刻) • 칠성도(七聖刀) • 말 창(株it) • 판락(板落) 등의 연출자는 모두 도면(塗面)을 한 귀신은 아니지만 독특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다. 이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연극이 성격의 변화에 따라 가면으로부터 도면(塗面)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현상으로 보여진다. 같은 책의 「가행립수전관쟁표사연 馮幸臨水殿觀爭標賜妻)」에서도 수괴뢰 (水僞偉) 연출의 상세한 기록 에 앞서 임수전(臨水殿)에서 제군(諸軍)의 〈백희〉가 연출되었는데 〈대기 伏旗) • 사표 (1 師約) • 도도(悼刀) • 만패 (鹽牌) • 신귀 (神鬼) • 잡 극(雜劇)〉 같은 종류가 있었다 하였으니, 보전루(賓津樓)에서의 제 군백희 (諸軍百戱)와 비슷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이 밖에도 『몽량록』을 보면 권 1 「원소保宿)」에는 거리에 연출 되는 무대(舞隊) 중에 〈신귀(神鬼)〉가 보이며, 「팔일사산성탄(八日

祠山聖誕)」에는 서호(西湖)에서 놀이를 하던 배에 〈칠성 (七聖) • 이 랑신 (二郞神) • 신귀 (神鬼) >등 을 마련해 놓는다고 하였다. 『 동정몽 화록』 권 8 「유월육일최부군생일이십사일신보관신생일(六月六日崔 府君生日二十四日神保觀神生日)」에는 연출되던 〈백희〉에 〈잡극〉과 함께 〈장귀 (裝鬼) 〉도 끼여 있고, 〈장귀신 (裝鬼神) • 토연화(吐煙 火)〉에 대한 설명도 보인다. 그러므로 〈나〉로 말미암아 발전한 귀 신놀이가 상당히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경몽화록』 권 5 「경와기예 (京瓦使藝)」 30 여 종 속에도 〈신귀 (神鬼) 〉가 들어 있고, 『몽량록』 권 20 「백회기예 (百戱使藝)」 속에도 〈장귀신(裝鬼神) • 무 판관(舞判官)〉이 보이며, 『도성기승(都城紀勝)』 「와사중기 며冷衆 使) 」에는 〈장신귀 (裝神鬼) • 포라 (抱鍾) • 무판 (舞判) 〉이 보이고, 『 무 립구사』 권 6 「제색기예인 (諸色使藝人)」 속에도 〈신귀 (神鬼)〉가 보 이니 송대에는 귀신놀이가 상당히 보편화되고 전문화되었음을 알 수있다. 『무립구사』 권 2 「무대 (舞隊)」에는 「대소전붕괴뢰 (:;k小全槪魄偏)」 라는 제목 아래 「사사귀 며査鬼)」 「할판관(膳判官)」 「포라장귀 (抱鑛 裝)」 등의 명목(名目)이 보이는데, 역시 모두가 귀신놀이임이 분 명하다. 다만 여기에선 연출자인 무대 (舞隊)의 인원이 어디에서 어 디까지가 인형이고 사람인지 구분이 분명치 않다. 여기에는 「대소 작도포로伏小硏刀縮老)」 「교곤포로改芸縮老)」 등이 보이는데, 손 해제 (孫稽第)는 『괴뢰희고원 (佛偏戱考原)』 「일 (一) . 한조인소위괴뢰 (漢朝人所謂船極)」에서 근대의 괴뢰 (偶溫)에는 두 파가 있는데, 하나는 진짜 사람이 〈괴 뢰〉로 분장하는 것이다. 송대의 〈괴뢰〉인 무포로(舞縮老) • 좌화상(姿 和尙) 같은 것이다. 무포로(舞縮老)와 쏴화상(要和尙)은 가수(假首) 를 썼으므로 한(漢)대의 방상무(方相舞)와 같은 것이다. 지금의 무대

에서 귀신으로 분장하거나 정월 보름 〈 괴뢰 〉 로 분장하는 데에, 아직 도 그런 수법이 남아 있는 것이다. 46)

46) 『偶偏戱考原 』 잖랍덴법들有二派. 一以 眞 人粉演, 如宋之佛偏〈舞縮老〉 • 澤和尙〉 等是也. 여贛없;〉 …淡和尙〉戴假首, 與漢之舞方相同. 今戱 臺 粉 鬼神及元夕粉偶偏 , 尙存此制. >

라고 하였다. 귀신놀이의 성행에는 〈 괴뢰희 〉 도 한몫 하였음을 알 게 된다• 이러한 귀신놀이는 앞에서 설명한 계림 (桂林)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각 지방의 민속과 결합하여 이른바 나희 (1 蹴伐)로 발전하게 된다. 즉, 이전 중국 〈 가무희 〉 의 중심을 이루던 가면놀이는 궁전 이나 사대부 계층으로부터 완전히 밀려나 〈나희 〉 로서 민간에 숨어 들게 된다. 본래 귀신과 관계가 깊었던 가면놀이는 한( 漢 ) 이후 〈가무회〉의 발전에 따라 귀신보다도 사람들과의 관계가 가까워지 다가, 송대에 와서는 다시 귀신들과 밀집해지며 〈나희 〉 로 발전하 였던 것이다. 중당(中唐) 무렵부터 일기 시작했던 〈가무희 〉 의 변화 는 송대에 이르러 중국의 연극을 완전히 다른 성격으로 바꿔 놓게 되는것이다. 5 금(金) 원본(院本) 한편 북송 말엽 (1115) 에 건국하여, 북송을 멸망시킨 뒤 남송 때 (1234) 몽고에게 멸망당했던 금(金)나라에는 님송의 〈잡극〉과 비 슷한 성격의 원본(院本)이 유행하였다. 도종의 (陶宗儀, 1360 년 전 후)는 『 철경록(綴耕錄) 』 권 25 「원본명목(院本名目)」의 해제 (解題) 에서

당(唐)에는 전기 (傳奇)가 있고, 송(宋)에는 희곡얘戈曲) • 창원 (P 昌 輝) • 사설 (詞說) 이 있고, 금 (金) 에는 원본 (院本) • 잡극 (雜劇) • 제공 조( 諸 公調)가 있는데, 〈 원본 〉 과 〈 잡극녔든 사실상 같은 것이다. 원 師)나宇] · 와서야 〈 원본〉과 〈 잡극 〉 이 비로소 둘로 변하여 나뉘어졌 다. 〈원본)-.g. 5 명이 하는데 , 부정 (副淨) …… 부말 (副末) …… 인희 (引 戱) • 말니(末泥) ·고장(孤裝)이다. ……또 염단(銀段)이 있는데, 역 시 〈 원본 〉 의 뜻이나 다만 비교적 간단하다. 47)

47) ~ 簿有傳奇, 宋有戱曲 • pg課 • 詞說, 金有院本 • 雜劇 • 諸公調 . 院本 • 雜劇j, 其 實 一也. 國朝, 院本 • 雜劇始 蘆 而二之. 院本則五人, 一 B 副 淨, ……一曰닳 lj 末, ……一曰引戱, 一曰末泥, 一曰孤裝 . ……又有缺段, 亦 院本之 意 , 但差簡耳. >

라고 하였다. 금(金)나라는 남송과 같은 시대이며, 앞에서 설명한 남송의 〈 잡극났는 여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금대의 〈원본〉과 각색명 個色名)이며 영단(銀段 覽段)이 있는 것 등 모두가 같다. 그리고 원대에 와서 〈 잡극 〉 과 〈원본〉이 둘로 나뉘어졌다고 한 〈잡극냈든 원잡극債雜劇)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권保權, ?-1448) 은 『태화정음보伏和正音譜)』에서 〈‘원본'이 란 행원지본(行院之本)이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행원(行院)이란 대체로 금(金) • 원 保)대의 사람들이 창기 (借使)들아 있는 곳울 가 리키는 말로 썼고, 거기서 연창(演唱)하던 대본( 臺 本)을 곧 행원지 본(行院之本)이라 하였다〉 48) 고 왕국유(王國維)는 『 송원희곡사(宋元 戱曲史) 』 「육(六). 금원본명목(金院本名目)」에서 풀이하고 있다• 그 리고 위에서 설명한 『 철경록(綴耕錄)』의 「원본명목(院本名目)」에는 도합 11 류00{) 69 0¾(種)의 제명 陣名)이 실려 있다. 그런데 왕국 유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명목(名目)을 통해서 볼 때 「송관본잡

48) 『 宋元戱曲史』 〈行院者, 大抵金元人 謂 借使所居, 其所演唱之本, 卽謂之院 本云爾.〉

극단수(宋官本雜劇段數)」와 매우 비슷하며, 그보다 좀더 복잡해져 있다〉 49) 는 느낌이다.

49) 『宋元戱曲史』 「六. 金院本名 目」 〈自此目觀之, 基與宋官本雜劇段數相似, 而復雜過之.〉

왕국유는 『송원희곡사』에서 『무림구사』의 「관본잡극단수(官本雜 劇段數)」와 이 「원본명목(院本名目)」을 비교분석하여, 대곡 8: 曲)을 사용한 것은 〈집극〉이 103 종인 데 비하여 〈원본).g. 16 ¾, 법곡(法 曲)을 사용한 것은 〈집국〉이 듄중인 데 비하여 〈원본났본 7 종, 제궁 조(諸額周)를 사용한 것은 〈잡극〉이 2 종인 데 비하여 〈원본冷든 1 종, 보통 사조(詞調)를 사용한 것은 〈잡극〉이 35 종인 데 비하여 〈원본 X 본 37 종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집국〉과 〈원본〉 은 음악이나 구성이 서로 비슷한 성격의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잡극〉이 모두 28 야은인 데 비하여 〈원본冷는 모두 69 0{은 으로 늘어난 데 대하여는 섭옥화(葉玉華)가 『원본고(院本考)』에서 대략 다음과 같은 설명울 하고 있다. 행원(行院)이란 일정한 장소 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곳에서 연출하던 〈원본났는 자연 히 민간의 취미에 알맞게 되어 시골 동리의 잡예 (雜藝)가 끼여듦으 로써, 〈원본〉의 성격을 점차 〈잡극〉과는 다른 독립된 것이 되게 하였다. 그것은 〈원본〉이 〈집극〉에 비하여 대곡 0 패) • 법곡(法 曲) • 제궁조(諸宮調) 및 사조(詞調) 등의 악곡을 이용한 작품이 줄 어든 데 반하여, 설창(說唱) • 잡회 (雜戱) 등이 끼여 있는 「타략전 축(打略捨播)」 13 땡타 「제잡체 (諸雜體)」 3 야중 등으로 늘어난 사실 울 통해서 알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호기 (胡思)는 『송금잡국고(宋金雜劇考)』 제 4 칭에서 「충당인수(沖 境引首)」 (109 종)는 무기 (武使)와 우스갯소리 및 간단한 춤으로 이 루어지는 개장(開場)을 이끌어 내는 것들이며, 「전축염단(捨描覽 段)」 (92 종)은 〈원본〉 및 원찬(院農)의 간단한 형식으로 중간에 끼

어 연출하던 것, 「타략전축(打略捨播)」 (139 종)은 영백(念白)으로 사물명 (寧物名) 같은 것을 이용하여 익살을 떠는 형식으로 역시 중 간에 끼여 연출하던 것이며, 「제잡체(諸雜體)」 (30 종)는 익살과 소 도구(小道具)로 놀이 중간에 변화를 주기 위하여 끼워 넣었던 것이 라 하였다. 곧 이상의 것들은 따로 독립시켜 상연할 수는 없는 것 들이니, 실제의 원본명목(院本名目)은 관본잡극(官本雜劇)보다 많 은 것이라 하기도 어려운 성질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관본잡극은 본래부터 궁전이나 관청의 필요에 의하여 상 연되던 〈집극〉이므로, 민간에 유행하던 〈잡극〉과는 성격이 디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섭옥화(葉玉華)의 추리는 꼭 옳은 것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원본冷는 그 뒤의 원집극玩湖劇)이나 전기(傳奇)에 삽연(推演) 되고 있는 예들이 몇 곳에 발견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참된 그 시 대의 〈원본〉의 모습을 그대로 전하는 것은 아닐 듯하다. 주유돈 保有蹴 ?-1439) 의 「여동빈화월신선회(呂洞賓花月神仙會)」 잡국 제 2 절(才R ) 에는 「장수선헌향첨수(長壽仙獻香添壽)」 원본이 중간에 끼여 상연되고 있는데, 송대의 「헌향잡극®潘雜劇)」 50) 이나 비슷한 성격의 것인 듯하다. 『금병매사화(金甄梅詞話)』에도 권 1 • 권 6 에는 「소악원본傑樂院本)」, 권 8 에는 백희 (百戱)와 함께 〈원본〉의 연출 기록이 있고, 권 죄]는 「왕발원본(王勃院本)」 전부가 실려 있는데 술자리에서 연출되었던 것으로 송잡희 (宋雜載)와 큰 차이가 없는 것인 듯하다.

50) 宋 無名氏, 『續墨客揮展』 권 5

대체로 남송의 〈잡극〉과 금의 〈원본活는 그 형식이나 내용의 성 격이 비슷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잡극〉보다는 〈원본〉이 좀더 정식화(程式化)되어, 각색 Oli'II色)이나 구성 및 음악을 더욱 규식화

凍化)함으로써 한 발자욱 더 대희 0 해戈)인 희문~文)이나 원잡 극保雜劇)에 접근했던 것이라 하겠다. 6 원(元) • 명 (明) • 청 (淸)의 〈가무희〉 중국의 전통적인 연극이었던 〈가무희났근 사회의 표면으로부터 사라져 민간으로 스며들고, 대회 伏戱)인 원잡국玩雜劇)과 전기 (傳奇) 및 경희 (京戱) 등이 등장하여 성행한 시대이다. 곧 이전의 〈가무희注근 나희 (1m) 로 위축되어 연극의 범주에서 밀려나, 희곡 연구가들의 관심으로부터도 벗어나게 되고, 〈대희〉만이 본격적인 중국의 연극이라 믿게 되었던 시기이다. 1) 원(元)대 그러나 원대에도 가면놀이룰 중심으로 하는 〈가무희〉의 유풍이 완전히 표면상으로부터 없어졌던 것은 아니다. 『원사(ft史) 』 권 22 「예악지 며뽑誌)」를 보면 원단保묘)에 사용하던 악대 偶獅小)인 악음 왕대 偶音王除)에서는 〈차삼대 (次三隊)는 남자 세 사람이 붉은 머 리가 달린 파란색 면구(面具)녔t 쓰고 나와 춤을 추었고, 〈차사대 (次四隊)는 남자 한 사람이 공작명왕상 GL 雀明王像)의 면구(面具)를 쓰고〉 〈비사신상(毗沙神像)의 면구(面具)를 쓴 종자(從者) 두 명을 데리고 나왔으며〉 〈차오대 (次파徐)는 남자 다섯 명이 오량관(五梁 冠)에 용왕면구(龍王面具)를 쓰고 나왔으며〉 〈차육대 (次六隊)는 남 자 다섯 명이 비천(飛天)과 야차(夜又)의 형상을 하고 춤추며 나왔 고〉 〈차철대 (次七隊)는 악공偶江) 여덟 명이 패왕관(覇王冠)에 푸 른 면구直具).를 쓰고 나와〉 음악울 연주하였다. 인대 (引隊)인 대 악예관伏樂禮官) 2 명, 집희죽(執戱竹) 2 명, 악공借紅:) 8 명, 차이

대 (次二隊)의 부녀 (婦女) 10 명 , 차팔대 (次八隊)의 부녀 20 명 , 차구 대 (次九隊)의 부녀 20 명, 차십대 (次十隊)의 부녀 8 명은 화려한 치 장을 하였으나 가면을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차육대 (次六隊)의 비 천 (飛天)과 야차(夜又)의 형상을 한 5 명과, 뒤의 오방보살범상(li 方菩薩梵像)을 한 남자 5 명, 악음왕보살범상偶옹音王菩薩梵像)을 한 사람 1 명 등은 모두 가면을 쓰고 분장했을 듯싶다. 이에 의하면 설 날에는 가면을 쓴 사람들이 등장하는 대규모의 〈가무희〉가 벌어졌 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천수절(天壽節)에 쓰이던 수성대(壽星 除)와 조회 (朝會)에 쓰이던 예악대 며분뽑象) 및 설법대 (說法隊)에도 가면 대무(隊舞)가 동원되고 있다. 『원사』 권 77 「제사지 (祭祀志)」의 국속구례 (國俗舊禮)를 보면, 매 년 12 월 하순이면 날을 받아 허수아비 인형과 개를 만들어 놓고 활 로 쏘고 제사를 지내는 〈탈재 僚:災)〉 또는 〈사초구側寸草狗)〉라는 행 사를 하는데, 제사가 끝나면 몽고의 무당이 참석하여 제왕이나 귀족들을 위해 축찬(f磁贊)한다고 하였다. 매년 12 월 16 일 이후에 행하는 〈탈 구재個舊災), 영신복(迎新福)〉의 행사에도무당이 나와의식을주 관한다. 모두 〈나〉와 감은 종류의 행사이다. 『원사』 권 105 「형법사(刑法四)」 금령 (禁令)에는 여러 민간 자제로서 생업에 힘쓰지 아니하고, 늘 성안 저자나 고울 에서 사화(詞話)를 담창(談唱)하거나 잡희 (雜戱)를 교습(敎習)하면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음란한 놀이룰 하는 것은 모두 금하고 다스리겠 다 .51)

51) 『元史』 〈諸民間子弟, 不務生業, 輔於城市坊鎭, 演唱詞話, 敎習雜載, 緊 衆誠 竝禁治之.〉

라고 하였고, 이어 거기의 금령 (禁令)에는 괴뢰 (偶偏)와 각저지희

(角紙之戱) 같은 것도 들어 있다. 『 원전장信洪 章 ) 』 권 57 「형부(刑 部)」 19 금취중(禁衆衆)을 보면, 연우但湘)년간 (1314-1320) 에만도 여러 번 〈 취중창사(衆衆唱詞), 기신새사(祈神察社) 〉 하는 행위를 금하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이는 민간에 사화(詞話) • 잡희 (雜戱) 와 함께 나희 (灘戱)라고 볼 수 있는 〈 기신새사(祈神在社) 〉 가 성행 하였음을뜻한다. 다시 『 원전장 』 권 57 「형부(刑部)」 19 잠금(雜禁)에는 지원 (至 元) 18 년 (1281) 에 내린 금령 (禁令)으로 금후로는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십육천마(十六天 魔 )52) 를 노래하지 말 것이며, 〈잡극났t 연출하지도 말고 연주하지도 말 것이며 , 사대천 왕(四大天王 )53) 을 분장하지 말 것이며, 고루두(結樓頭)를 쓰지 말 것 이다. 위반하는 자는 죄를 물을 것이니 이대로 실행하기 바란다. 54)

52) 『 元史 』 권 43 「順帝紀」 〈以宮女三聖奴 • 妙樂奴 • 文殊奴等一十六人接舞, 名爲十六天 魔 , …… 遇宮中讚佛, 則接舞奏樂. >곧 , 십육천마(十六天魔)는 元나라 궁중에서 讚佛 때 추게 하던 충의 이름임 . 53) 四大天王은 불교에서 持國 • 廣目 • 增長 • 多聞의 四天王울 이름 ( 『 智度 論』 9). 54) 『元典章』 〈今後不棟若廢人, 十六天魔休唱者, 雜劇裏休敗者, 休吹彈者, 四大天王休粧粉者,佑體頭休察戴者. 如有違犯, · 要罪過者, 仰欽此.〉

라고 하였다. 여기의 〈고루두(結體頭)났근 해골 모양을 한 가면을 뜻하는 것이며, 〈사대천왕(四大天王)을 분장하는 것〉과 함께 역시 〈나희〉였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무속화맨 .俗 化) • 민속화(民俗化)한 〈나희〉가 있는가 하면, 불교나 도교의 영향을 받은 〈나희〉도 이미 유행했던듯하다.

2) 명(明)대 고기원 個迪元, 1565-1628) 의 『 7석 좌취어 (客座費語)』 권 10 「국초 방문(國初傍文)」을 보면, 홍무(洪武) 22 년 (1389) 에 군인으로서 창 (P 昌)을 배우는 자는 혀를 자르고, 바둑을 두거나 쌍륙價!陸)놀이 를 하는 자는 손을 자르고, 축원 (ffl圓)을 하는 지는 발을 자른다. 55)

55) 『客座贊語』 〈洪武二十二年……, 在京但有軍官軍人學唱的割了舌頭, 下棋 打雙六的斷手, 蹴圓的師脚. >

라는가혹한금령~내리고 있다 .56) 같은책에는또 영락(永 樂) 9 년 (1411) 에

56) 明 沈德符, 『野獲編補遺』 「三. 諸博廊禁」 및 淸 董含, 『三岡識룡』 一 引 『禪賢』 등에도 비슷한 기록이 보임.

금후로는 인민이나 배우들이 〈집극처「 상연함에 있어서, 법률에 따 른 신선도(神仙道)나 의부절부(義夫節婦)와 효자순손(孝子順孫) 이야 기를 분장하거나 사람들에게 선 (善)을 행할 것을 권하는 것과 태평 8 平)을 줄기는 것들만을 금하지 아니하고, 그 밖에 제왕(帝王)과 성현優賢)을 모독하는 사곡(詞曲)이나 임금을 분장하는 〈잡극〉 같은 법률로 허락되지 않는 것들은 감히 대본을 지니고 있거나 그것을 전송 (傳言雨)하거나 인쇄하여 파는 자가 있다면, 죽시 잡아다가 관계부처로 보내어 처벌케 한다. ……그러한 사곡(詞曲)들을 이 방문이 나간 뒤 에도……감히 지니고 있는 자가 있다면 온 가족을 죽여 버립 것이 다. 57)

57) 『客座贊語』 여앵樂九年……今後人民偏優裝粉雜劇, 除依律神仙道粉義夫 節婦孝子順孫,勸人爲善及歡樂太平者不禁外,但有甄濱帝王聖賢之詞曲鷲頭 雜j, 非律所該載者, 政有收藏傳踊印賣, 一時倉送法司究治• ……但這等詞 曲, 出傍後, …• •• 政有收藏的, 全家殺了. >

라는 금령 (禁令)이 있다. 청 (淸) 동함~. 1659 년 전후)은 『삼강 식략(三岡識룡)』 일 (一)에서 이러한 명 (明)초의 금령을 인용하면서 〈냉혹하기가 거의 걸주(架討)나 같다〉고 말하고 있다. 이상과 갇은 분위기 때문에 〈가무회〉나 가면놀이 같은 것은 표 면상 더욱 기를 펴지 못하고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법률에 따 른 신선도(神仙道)〉에 관한 것은 금령에서 면제되었으니, 민간의 〈나희〉도 금지의 대상온 아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경성 偏i景 星, 1621-1687) 의 『기주지 (斬州志)』에는 기주(朝州, 지금의 湖北省 ”縣 남부)의 민간 〈나희〉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초湜)나라 풍속은 귀신을 숭상하는데, 〈나〉에 있어 더욱 심하다. 기주傳洲)에는 72 가(家)가 있는데, ……황포頃湘!)에 원유관(遠遊 冠)을 쓰고 당명황(唐明皇)이라 하고, 좌우에 붉은 얼굴에 금분(金 粉)을 칠하고 금은색 두구를 쓴 사람 셋이 태위앉源t)라 하며, …… 그 무리 수십 명이 기를 줄로 세우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시 (詩) 도 아니고 사(詞)도 아니나 길고 짧은 것이 구절을 이루며, 한 사람 이 노래하면 여럿이 그에 화(和)하는데 흐느끼듯 애절하였다. 이어 갖가지 물건을 마련하여 태위 성源t)에게 바쳤다. 노래하고 충을 추는 깃발이 올라오면, 주인이 술잔을 을리고, 세 신(神)이 주인에게 반배 하면 주인은 두 번 절을 한다. 조금 뒤에 두 만노(鹽奴)가 고삐롤 잡 고 어슬렁거리는데, 큰 사자가 머리와 꼬리를 흔둘면서 뛰어나온다. 만노(變奴)가 ‘사자는 어디에서 오는 겁니까' 하고 물으면,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양주(涼州)에서 왔습니다’라고 하면서 함께 서쪽을 향하 여 울면서 고향땅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한다. 노래와 춤이 끝나면 신 (神)을 전송하며 , 북과 악기들을 함께 연주한다. 58)

58) 『朝州志』 션헌谷尙鬼, 而灘尤基. 斬有七十二家. ……黃抱, 遠遊冠, 臼唐 明皇, 左右赤面, 塗金粉, 金銀究禁者三, 曰太尉. …… 其徒數十, 列輯歌舞,

非司, 長短成句,一唱衆和, 卿因哀懷. 隨設百獻, 奉太尉. 歌舞籍上, 主人獻麟 三神醉主人, 主人再拜. 須克 二變奴持蝶盤群, 有大獅, 首尾舊 迅而造 奴問獅何來, 一人答曰, 涼州來. 相與西向而泣, 作思鄕懷土之狀. 歌, 送神 鼓吹借作.〉

같은 사람의 『백모당집 (白茅堂集)』 권 24 에는 「향나(鄕灘)」 시도 있다. 봄의 사제 (社祭) 다 끝냈는데 이 곳 풍속으로 구나(縣灘)를 숭상하네 . 가운데엔 현종(玄宗)황제 앉아 있고 좌우엔두미인이 있네. 술 얼큰해지자 백희 (百戱) 불러들이는데 나홍곡(鳴暗曲)은 얼마나 시끄러운가 ! 가짜 사자가 서량무(西涼舞)를 추는데 길고 T7|설 l 길한 털짐승을 만노(稷奴)가 모네. 서량파(西涼破)가 들리자마자 서쪽 향해 슬퍼하며 흐느끼네. 오랜 세월 이미 지난 일 두고 이런춤은왜 또추는가? 春...社...作 已畢, 土風尙福灘 . 中坐天寶帝,左右雙明妹. 酒湘招百戱,壤噴何粉祭! 假獅西涼舞, 慧僞騎後奴. 似聞西涼破, 西向悲曜暖.

千秋事已往,此舞胡爲平? 『기주지 (朝州志)』와 시의 내용이 일치한다. 명 (明)대에는 각 지 방 민간에 〈나희〉가 상당히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지방 지 (地方志)에는 그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기록이 무수히 많다. 명 (明) 만력 (萬曆) 연간 (1573-1619) 의 『자리현지 (慈利縣志)』에는 여름과 가울에 비가 안 오면 무당을 불러다 굴을 파고 물을 불러 내 려 하고, 또 각각 단(壇)을 세우고 신을 맞아다가 기도드린다. 가을 과 겨울에는 밤에 문을 열어 놓고 소재 (素齋)를 마련한 다음 이웃을 모아놓고 노사(老師) 59) 를 청하여 삼성신 (三聖神)을 내리게 하고는 길 흉(吉凶)을 물었는데, 이를 주귀 (微鬼)라 불렀고 계신예嗣小)이라고도 하였는데, 와고頃潭i)와 영도(鈴刀)의 소리가 긴 밤을 두고 끊이지 않았다 .60)

59) 胡健國은 「綿巨數千載洞庭盡巫風」 (『中國灘戱灘文化專輯』 上 臺北 民俗曲 藝 所載)에서 〈老~iii>는 그 지방 여 l 〉의 속칭이라 하였다. 60) 『慈利縣志』 g梧 k 不雨, 則馮巫打洞請水, 又各立壇迎神以祈禧之. 秋冬, 夜排門戶設素齋會郞, 愚老師降三聖神以拘吉凶,謂之微鬼,一謂繼神.瓦鼓 鈴刀之聲, 不絶長夜. >

라고 하였다. 다시 가정 (嘉靖) 연간 (1522-1566) 의 『형주부지 (m,)사 府志)』에는 도주(道버)……섣달이 되면……여러 묘(廟)에 가서 모임을 갖는 데, 대부분 무당들을 부르고 낙신偶願 h) 이라 일컬었다. 여러 사람들 이 돈을 거두어 소원을 빌고, 제사룰 지내고 연희 (演戱)를 하며 화수 (花樹)를 전시하였다. 61)

61) 『衡州府志』 OOH …… 臘月 …… 至各廟意會, 多延巫親, 名曰樂神. 衆隸

金, 打젤 ; .演戱·放花樹.〉

리는 기록이 있다. 같은 가정 (嘉靖) 연간의 『사남부지 (思南府志)』 에는 세상에선 ~ 24 일과 7 월 22 일을 토주(土主)와 천주 OI| 主)의 생일 이라 여기고, 이 날이 되면 경신償喇!)을 하는 행사를 하는데, 백성 들은 신(神)의 모습으로 성대하게 가장하고는 저잣거리를 북을 치며 다녔는데, 이를 영사화(迎社火)라 하였다 .62)

62) 『思南府志』 〈俗以六月二十四日, 七月二十二日爲土主川主生辰, 至日有慶 神之擧, 居民盛裝神像, 鼓行于市, 謂之迎社火. >

라고 하였다. 이 밖에도 이런 종류의 기록이 많으므로, 〈나희〉가 명대에는 각지의 민속으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1985 년 산서(山西)의 노성현(路城縣)에서는 명대 만력(萬曆, 1573-1619) 초본(抄本)인 「영신새사예절전부사십곡궁조(迎神奏社禮 節傳簿四十曲宮調)」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진(晉) 동남지방에서 행해진 대규모 제사활동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 제사 활동에서는 전문연예인인 〈악호偶伊)〉에 의하여 〈잡희〉라 할 수 있는 대희(隊戱) • 아대희(亞除戱)가 연출되었고, 또 〈집국〉과 〈원 본〉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십곡궁조(四十曲宮調)」의 극목 ®l 目) 중에는 대희 • 아대희 • 〈잡극〉 등이 있고, 그 중에는 모두 「파 치우(破뚫尤)」 「관공참요(關公斬妖)」 「관대왕파치우(關大王破밝尤)」 등 파치우와 관계되는 것들이 들어있다 한다. 63) 이는 명대의 〈나 희처t 증명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임이 분명하다.

63) 曲六乙 「漫話灘文化圈的分怖與灘戱的生態環境] (『中國灘戱灘文化專輯』 U 긱 臺北 『民俗曲藝』 61 期) 참조.

『금병매사화(金狀梅詞話)』 제 65 회에서는 서문경 僖i門慶)이 셋째

첩 이병아(李狀兒)의 장사를 치루는데 중간의 10 월 11 일에는 〈지조 (地쿠)〉라 부르는 민간의 나제 (灘祭)의식을 행한다. 이에 앞서 가랑倻畑 B) 이 칭과 북을 나란히 하고 지조(地市)를 하는 데 , 영전 (靈前)으로 와서 참령 (參靈)을 하고 오귀뇨판 (五鬼間判) • 장 천사착귀미 에탑랜萌音鬼迷) ·종규희소귀 (鍾旭戱小鬼) ·노자과함관(老子 過函關) • 육적뇨미타(六賊間彌陀) • 설리매 (雪襄梅) • 장주몽호접 (莊周 夢) • 천왕강지수화풍(天王降地水火風) • 동빈비검참황룡(洞賓飛劍 斬) 같은 여러 가지 백희 (百戱)를 연출한다. 연출이 끝나면 당객 (堂客)들은 모두 발 안쪽에서 구경하고 있다가, 참령 (參靈)을 하고는 돌아간다 .64)

64) 『金 潟, 歌郞竝鏞鼓地市, 來靈前參靈, 弟五鬼間判 • 張天師着鬼 迷·鍾旭戱小鬼·老子過函關·六賊間彌陀·雪裏梅·莊周夢湖蝶·天王降地水 火•洞賓飛劍斬黃龍, 各樣百戱. 市能, 堂客都在篤內觀看, 參龍靈去了.〉

여기의 지조희 (地弟戱)들은 그 제명 馮路)에서 볼 때 대부분이 원명잡극保明雜劇)이나 명전기 (明傳奇)의 일부를- 응용한 것들이 다 .65) 〈나희〉 속에는 연극적인 성격이 상당히 가미된 것들도 있었 음을알게 된다.

65) 「五鬼問判」 및 「鐘旭戱小鬼」는 明 敎坊編演의 雜劇 『慶豊年五鬼間鍾旭』, 霜劍蝶夢冷 元 史棟의 雜劇 『老莊周一杭湖蝶夢』, 「洞賓飛劍斬黃龍」은 明 無名氏의 雜劇 『呂洞賓戱白杜丹飛劍斬黃龍』, 「雪裏梅代: 明 李長祚의 傳奇 『梅雪緣』 등에서 나온 것이다.

명 서복조(徐衡祚 1596 년 전후)의 『화당각총담(花當閣鼓談)』 (借 月山房案紗本)의 「나(灘)」라는 글에는 그의 고향인 상숙(常熟, 江 蘇)의 〈조소億育)〉라는 나제 (1 壓茶)의 광경을 쓴 다음과 같은 대목 이 있다.

여러 귀신들이 흉악한 모습으로 날뛰면서 제각기 한 모퉁이룰 차지 하고는 포악한 짓을 하고 있다. 그 때 세싱에서 천사(天師)라 일컫는 장전인(張眞人)이 나와서 단(i賢)에 올라가 설법(說法)을 하며 흉신 (兒神)에 관한 책을 해설하고 부적을 들고서 그들에게 겁울 주려 하지 만, 여러 귀신들은 더욱 멋대로 날뛴다. 진인(眞人)은 계책이 다하고 나자 도리어 자신의 술법으로 말미암아 가물가물 술 취하여 꿈을 꾸는 듯이 되면서 죽으려는 듯이 보였다. 조금 뒤에 종규(鍾旭)가 나오자 여러 귀신들은 그롤 보자마자 물러나며 머리를 감싸 쥐고 사방으로 도 망치며 죽음을 면하려 하였다. 종규(鍾旭)는 그 놈들을 하나하나 잡 아냈고, 그러자 진인 (眞人)은 비로소 깨어났다. 66)

66) 멤當閣穀談』 〈盡鬼淨猪挑梁, 各撮一隅, 以遠其兒悼. 而張眞人, 卽世所 稱天師幽 登壇作法, 步里書, 推符誤, 冀以攝之. 而靈鬼意律, 眞人計窮, 旋爲所愚附,香香若酒夢欲死.須央,鍾旭出,盡鬼一見粹易,抱頭四童,乞 死不珉. 旭一一收之, 而眞人始蘇. >

이는 앞의 『금병매 (金狀梅)』에 보인 「종규희소귀 (鍾旭戱小鬼)」 같 은 놀이일 것이며, 명대 〈나희〉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 는글이다. 3) 청(淸)대 청 (淸)대에 와서는 〈나희〉가 더욱 민속화하여, 중국의 여러 지 방에 따라 제각기 다른 특칭을 지닌 지금 우리가 보는 〈나희〉로 자 리잡는다. 어느 곳이나 무속(巫俗)이 가장 중요한 종교적 배경을 이루고 있고, 대체로 남쪽지방이 더욱 성행하였던 듯하다. 굴대균(屈大均, 1637 년 전후)의 『광동신어 (廣東新語)』 권 6 「신어 (神語)」를 보면 청 (淸)초 광동(廣東)지방에 행하여졌던 대나 8 遷t) 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데 『후한서 (後漢書)』 「예의지 頃儀志)」의 의

식과거의 같다. 또 홍무예제 (洪武禮制)를 따라서 매 1 리 (里)나 일백 호伊;)마다 단 (壇)을 한 곳에 세우고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을 제사 지냈다. 제사 는 나례 (1 蹴漫)로 행하였는데, 혹 〈나只룹 행하지 못할 적에는 12 월 대 나伏灘)를 행하였다. 〈나〉에는 광부(狂夫) 한 사람이 곰가죽을 뒤집 어쓰고 황금의 네 눈이 달린 귀신가면을 쓰고서 검은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고, 창을 가지고 방패를 든다. 또 띠풀과 갈대를 엮어 만든 긴 채찍을 누런 관을 쓴 한 사람이 들며, 열 살 이상 열두 살 이하의 아이들 열두 명 또는 스물네 명을 골라 모두 붉은 두건을 쓰고 복숭아 나무를 들고 소리치며, 여러 사람들의 집으로 들어가 역귀를 쫓아 내 고 채찍을 울리며 나온다. 여러 집에서는 간혹 식초와 숯으로 역귀들 울 쫓아 보내기도 한다. 누런 관을 쓴 사람들이 창 (P 昌)을 하면 아이 둘은 다음과 같이 화(和)한다. …… 67)

67) 『廣東新語』 (Y..違洪武禮뜹 l j, 每里一百戶, 立壇一 FJ j-, 祭無祀鬼神. 祭行灘 禮, 或不灘則十二月大灘. 1 難用狂夫一人, 蒙熊皮, 黃金四目, 鬼面, 玄衣朱 훅執揚眉又編茅芸爲長¥1,黃冠一人執之,擇童子年十歲以上十二以下 十二人,或二十四人,皆赤帳執挑木而暎, 入各人家室逐疾, 鳴篠而出.各家 或炫. 黃冠低 童子和曰, 甲作食씀, 膳胃食虎, ……. >

끝머리 창사 (P 昌詞)도 『후한서』의 것과 완전히 갇다. 옛 대나 0< 灘)의식이 민간에 그 때까지도 전래되고 있는 곳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희 康熙) 연간 (1662-1721) 에 편찬된 『악창현지 偶용昌縣 志)』에도 〈나희〉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입춘位春) 하루 전날 민간인들은 분장을 하고 희극倻邊 lj )을 한다. ……대보름엔……도깨비와 난쟁이 모양으로 분장하고 아름다운 옷과 장식을 하고 거리를 다니며 춤을 추는데 옛날의 〈나〉와 비슷하였고,

보름 뒤 닷새 동안 계속 그렇게 한다• 68)

68) 『樂昌縣志』 선며杓t一日, 坊民粉戱劇. ……上元, ……粉慧妹保儒之像, 以衣飾相麗 沿制 R, 類古之灘者, 望後五日皆然.〉

이상의 광동(廣東)뿐만이 아니라 호남(湖南) • 귀주(貴州) • 광서 (廣西)지방은 지방지 (地方志)들만 보더라도 〈나희〉가 매우 성행하 였음을 쉽사리 발견하게 된다. 그 예로 몇 가지만 들어 보겠다. 우선, 호남(湖南)을 보면 강희 康熙) 연간의 『원릉현지 (玩陵縣 志)』에는 향조린 (向兆麟 1686 년 전후)의 「신무행 (神巫行)」이라는 시가실려 있다• 네게 병이 났다면, 약은 해서 무엇 하나, 신군(神君)이 모든 병 물 리쳐 줄수있는것을! 네가 복을 빌면, 좋은 보답 있을 것이니, 신군(神君)이 네게 복을 주어 만사가 풍족케 되리라. 가서 신 (神)울 마중하는데 , 무당이 나발 불며 , 삐삐배배 무당 따라 신이 내리네. 동쪽 이웃 찾아가서 또 노래하고 춤추는데, 올해 큰 곳간엔 곡식 가득하고 내년에도 재물 늘고 장사도 잘 될 것이네. 모든 일 뜻대로 되는 것은 오직 네가 하기 달렸으니 한바탕 맹강녀 偉姜女) 노래하려네 . 69)

69) 『況陵縣志』 〈汝有病, 何須藥, 神君能令百病却. /汝祈福, 有嘉告, 神君 福汝萬事足. /走迎神, 巫吹角, p~烏巫來降神. /…… 走過東鄒還歌舞, 今 年高康富禾黎, 明年多財復善賈. /事事稱意淮愚汝, 願 n g一部孟姜女. >

특히 상서 (湘西)지방의 〈나희〉에선 「맹강녀 猛姜女)」고사의 연출

이 일반화되었던 듯하다. 도광(道光) 연간 (1821-1850) 의 『 신계현 지 (辰溪縣志)』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또 환나원(還1 卽碩)이리는 것이 있는데, ……기일이 되면 제물을 갖 추어 놓고 무당을 집으로 불러다 축문(祝文)을 지어 대신 빌게 한다. 칭과 복을 울리며 법사(法事)를 벌이고, 도원동신 (桃源洞神) • 양산토 지 여山土地) • 맹강녀 頃i姜女) 같은 극을 연출하였다. 70)

70) 『辰溪縣志』 0 여哀還個願者, …… 至期備性宇, 延巫至家, 具疏代漏兄 鳴金 鼓, 作法事, 粉演桃源洞神 • 梁山土地, 及孟姜女等劇. >

「맹강녀 頃姜女)」 이의에도 「도원동신 (桃源洞神)」 「양산토지 頃:山 土地)」 같은 연극이 〈나희〉로서 공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광(道 光)년간의 영주(永州) • 영원 (寧遠) • 보경 (寶慶) 등의 지방지 (地方 志)에는 무딩을 불러다 「악백공偶額公)」 「경고파廈姑婆)」 「경삼백 공廈三伯公)」 「경낭낭廈娘娘)」 등의 〈나희녔t 연출한 기록도 보인 다. 건륭(乾隆) 연간 (1736-1795) 의 『 신주부지 康州府志)』 『노계현 지 (溫溪縣志)』 『영순부지 (永順府志) 』 등의 〈나희〉에 관한 기록에도 모두 「맹강녀 猛姜女)」의 연출이 보이는 것울 보면, 그 중에서도 「맹강녀」국이 가장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치 (同治) 연간 (1736-1795) 의 『용산현지 (龍山縣志)』의 〈나희〉 에 관한 기록을 보면 〈무당은 종이로 만든 가면을 쓰고 옛 일을 배 우들처럼 연출하였다〉 71) 고 하였는데, 지금 전하는 이 지방의 〈나 희〉와 아울러 생각할 때 이 〈나희只탉본 모두 가면놀이였음을 알 수있다.

71) 테卽山縣志』 여념입訪璋멉!J,, 演古事如優倫. >

귀주(貴州)지방도 〈나희〉가 성행하였다. 도광(道光)년간의 『준의 부지 (違義府志)』를 보면,

노래와 춤으로 삼성 (三聖)을 제사 지내며 그것을 양희 (陽戱)라 하 였다. 삼성 (三聖)은 천주 OII 主) • 토주(土主) • 약왕(藥王)이다. 72)

72) 『違義府志』 여녑縣庄크里曰陽戱. 三聖, 川主 • 土主 • 藥主也. >

라고 하였는데, 그 곳의 〈양희났근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그 리고 〈나희〉에는 곳에 따라 여러 가지 신이 등장하였다. 광서(廣 西) 연간 {1875-1908) 의 『여평부지 (黎平府志)』에 실린 호봉형 (胡奉 衡)의 「여평죽지사(黎平竹枝詞)」에 〈무당이 가면을 쓰고 덩실덩실 춤을 춘다〉 73) 라고 〈나희〉의 춤을 묘사했듯이, 이 곳의 〈나희〉도 모두가면놀이이다.

73) 「黎平竹枝詞」 여接而鼠面舞佳儀. > 74) 『松桃廳志』 〈自城市及鄕村, 皆有廟宇, 土民祈禧, 各因其事,以時致祭. 有印許戱文, 居時粉演者. >

도광(道光)년간의 『송도청지 (松桃鹿志)』에는 토민 (土民)들이 묘우 (廟宇)에서 기양(祈議)을 하는데, 〈응답이 있을 적에 하는 희문~ 文)을 그때그때 상연하였다〉 74) 하였으니, 이 곳의 〈나희〉에도 연 극이 끼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도광(道光) 연간의 『대정부지 8~ 府志)』에는 「동만죽지사일백수(峴登竹枝詞一百首)」가 실려 있는대, 〈응험이 있을 적엔 양가장(楊家將)을 연출하는데, 삼랑(三郞)을 보 고서는 혀를 공연히 내민다〉고 한 귀절의 주(注)에 〈토인(土人)들 은 매년 초에 조신億神)으로서 <'-+>를 하는데, 노래하는 것은 모 두 양가장(楊家將) 이었고, 육랑(六郞) • 칠랑 (七郞) • 팔랑(八郞)의 호칭이 있었다〉 75) 는 설명도 붙이고 있다. 송(宋)대에 의족의 침략 에 맞서 싸운 양가장(楊家將) 4 대에 걸친 영웅담을 쓴 명대의 작가 롤 알 수 없는 소설 『 양가장연의 (楊家將演義)』의 이야기를 극으로 만든 것이 「양가장(楊家將)」인데, 그것은 중국의 민간에 남~(南

75) 「峴變竹枝詞」 여짠淮認待楊家將, 看到三郞舌浪伸. > 原注, 여까薄消挑 神, 以爲灘, 所唱皆楊家將, 有六.a~ • 七郞 • IU it之稱. >

宋) 때부터 여러 가지 연예형식으로 널리 전해 오던 고사(故事)이 다. 귀주(貴州)의 〈나희〉에도 연극적인 요소가 상당히 두드러진 것 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사남(思南) • 필절(畢節) • 진 녕 (鎭寧) • 연하(沿河) • 안평 (安平) • 귀주(貴州) 등 지방지 (地方志) 에도 모두 〈나희〉에 관한 기록이 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미 남송(南宋) 때 광서 (廣西)에는 계림나 (桂林灘)가 있었으니, 청대에는 그 곳의 〈나회〉가 더욱 발전했을 것이다. 가경 (嘉慶)년간의 『임계현지 (臨桂縣志)』를 보기로 들면 다 음과 같은 〈나희〉에 관한 기록이 있다. 지금 고장사람들이 〈나났룹 행하는데, 늘 1 여i에 무당을 불러 조신 ®直)케 하였다. 그 신은 수십 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 영공(令 公 )76) 이 가창 존귀하였으며, 가면을 쓰고 갑옷을 입고 너울너울 춤을 추며 째지는 소리로 노래하면서 신을 마중하고 전송하며 제사를 지냈 는데, 초사礎f辭)의 유풍(遺風)을 지닌 것이다. 77)

76) 令公은 唐太宗 때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워 衛國公에까지 봉해졌던 李靖 (字는 藥師)을 가리킴. 77) 『臨桂縣志』 〈今鄕人灘, 率于十月 , 用巫者爲之挑神. 其神數+輩, 以令公 爲最貨 戴假面, 훔衣甲, 婆娑而舞, 信停而歌, 爲迎送神祠, 具有楚詞之 遺.〉

이 밖에도 계림 (桂林) • 창오(蒼梧) 나경남(平南) ~서현(貴縣) • 옹녕 (邑寧) 등의 지방지 (地方志)에도 모두 〈나희〉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사천 (lmJ ll) 도 〈나희〉가 예로부터 성행한 곳이다. 동치 (洞治) 연 간 (1862-1874) 의 『유양직례주총지 (酉陽直隸州總志)』에는

주술(兒術)의 춤으로 도움을 빌 적에는 오직 남자무당 한 두 명이 나 서너 명을 썼다. 병이 나거나 해서 놀이를 하는 것은 원양희 玩갯옳 戱)라 하였는데, 많을 적에는 10 여 명의 생 (生) • 단CT!) • 정 (淨) • 축 (丑) 들이 모자를 쓰고 관복保罰反)을 입는 등 온갖 분장을 하고 여단 (女旦)으로 위장도 하여, 이원제자倭실園弟子)들과 전혀 다룰 바가 없 었고, 여색 (女色)으로 사람들을 홀릴 정도였다. 78)

78) lg!j陽直隸總志』 산 Ln 舞求佑, 只用男巫一二人或三四人. 病意還恩, 謂元 陽戱則多至十餘人,生旦淨丑,抱幡冠服無所不及,僞飾女旦,亦居然梨園 弟子, 以色婦人者.〉

라는 기록이 있다. 앞에 보인 귀주( 貴 州)의 〈양희 (陽戱)〉 또는 호 남(湖南)의 〈환나원(還灘頭) 〉 등과 같은 계열의 〈나희 〉 이다. 그 밖 에 『중수성도현지 ( 重修 成都縣志)』 『화양현지 (華陽縣志) 』 등 청대에 편찬한 각지의 지방지에도 〈나희〉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다시 서장(西藏) 같은 곳에도 일찍부터 〈나희 〉 가 발달하였던 듯 하다. 청대 서가(徐河)의 『 청패류초(淸碑類抄)』 「시령류(時令類)」의 서장풍속(西藏風俗)을 쓴 대목을 보면, 2 월 29 일에는 온신(盧神)을 쫓아보내는데 〈 타우마왕(打牛魔王)〉이라고도 불렀고, 얼룩옷에 검은 모자를 쓴 10 여 명이 모자에는 모두 귀두凍 3頂 )를 꽂고, 저고리 앞뒤에는 모두 귀신 모양을 수놓았고, 제단 앞에서 춤 울 추며 송경 (言줍經)을 하였다. 79)

79) 『 淸砂』 〈二月二十九日, 送蓋神, 又名打牛魔王. ……有花衣黑幡者十 數人, 情各描鬼頭, 衣之前後恐 繼 鬼形, 在招前挑舞踊經. >

라고 하였다• 6 월 7 일에는 〈만희 ( 後 戱)只문 창 (P 昌)하였는데, 남녀 둘이 가장을 하고 춤울 추며 당晴井)나라 때의 공주(公主)의 일을 노래하였다 하였고, 6 월 30 일에는 절에서 남녀들이 신귀 (神鬼)로

가장하고 모두 화려한 옷을 입고 노래하고 춤추었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80)

80) 『淸精類紗』 〈六月初七日, 唱變戱, 以後藏之桂爲之, 喬裝男女……一以 挑, 所唱爲唐公主時事, ……三十日, 別持寺及色拉寺掛大佛, 亦裝神鬼, 男女皆畵服, 或唱或歌, 爲翻汗子秩打各種挑舞. >

어떻든 간에 〈나희났근 청대에 이어 이미 중국 각지에 민속으로 서 다양하게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제 7 장 현대 중국의 〈나희 ({難戱) > 1) 〈나희〉의 연구개황 중국에서는 근년에 이르러 〈나희 (灘戱)〉 또는 〈나문화(灘文化)〉 란 이름 아래 다시 가면놀이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열기를 띠고 있 다. 본시 중국학자들은 중국의 전통연극이라면 원집국保雜劇) • 명 전기 (明傳奇) 및 청 (淸)대의 경희 (京戱)를 위시한 지방희 (地方戱) 같은 이른바 대희 伏戱)만을 생각해 왔고, 이전의 〈가무회〉나 〈가 면희〉에 대한 관심은 거의 버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근년에 이르 러 여러 지방 민간에 전해지고 있는 〈나희녔문 새삼 발견하고는, 그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과 그 문화사적 의의가 강조되기 시작하였 다. 1987 \'! 가울 중국문련(中國文聯)의 주석 (主席)이었던 조우(曹 禹, 1910- )가 귀주민족민간나희면구전 (貴州民族民間灘戱面具展)을 보고 나서 〈기적이다 ! 장성 (長城)이 우리의 기적이라면 니회'도 우리의 기적이니, 중국에 또 하나의 기적이 많아전 것이다. 이 전 람회를 보고 나서 나는 중국의 희극사徵劇史)를 디시 고쳐 써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 라고 하였다 한다. 이것은 근래 중국 희 극학계의 〈나희〉에 대한 반응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나문화열 (1 難文化熱 )X 본 중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몇 차례 의 〈나희〉에 관한 국제 학술대회를 통하여 널리 밖으로까지 번져, 지금은 대만 • 일본을 바롯하여 서양의 중국문학계에까지도 크게 파급되고있다.

1) 度修明, 「中國灘文化發堀展覽與硏究成果及意向」 (『中國灘戱灘文化專輯』 下, 臺北 『民俗曲藝』 6 액月, 1991) 의거 .

〈나희 〉에 관한 논문은 중국에서 1982 년에 시작하여 1990 년에 이 르는 사이 전국에서 간행되는 여러 가지 학술잡지에 400 여 편이 넘는 수량이 발표되었고, 이에 관한 총서 (穀書)와 전문연구서 및 참고서적 등은 1987 년에서 1990 년 사이에 25 종이 나왔다고 한다. 이것은 곧 중국의 〈나희〉에 관한 연구가 1982 년에 시작되었고, 또 〈나희〉의 연구열기는 1987 년 무렵부터 고조되었음을 뜻하는· 것으 로 보아도 될 것이다. 1986 년 귀주(貴州)에서 가장 먼저 본격적인 〈나희〉와 〈나문화〉에 관한 자료의 수집과 정리가 시작되었고, 1988 년 11 월에는 정식으로 중국나희학연구회 (中國 1 勘敗學硏究會)가 설립되었다고 한다. 2) 대만의 청화(淸華)대학 역사연구소에서 왕추 계 (王秋桂)교수 중심으로 편집되어 나온 『중국나희니문화통신 (中國 1 勘截灘文化通試)』 제 1 기 (1992.3 간행) 제 2 기 (1993.6 간행)에는 그 사이 나온 〈나희〉에 관한 논문 • 저서 • 회의 • 조사보고 동에 관한 자료가 퍽 소상히 실려 있다. 중국과는 달리 착실히 우리의 가면놀 이를 조사 연구해 온 한국의 학계로서는, 앞으로 세계의 〈나희〉에 관한 연구와 이해를 위하여 크게 공헌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중국의 희극학자들은 근래에 와서야 한국의 필자가 이미 1960 년대 초에 「나례 (灘禮)와 잡희 (雜戱)」 3) 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 〈나희〉에

2) 이상, 『中國灘戱灘文化專輯』 上, 度修明의 • 「前言」 의거 .

3) 면瞬硏究』 6 卷 2 號(高大 亞細亞 r베 題硏究所, 1963) 所載. 中國語譯 『民俗曲藝』 第 38 期, 臺北干 IJ . 日本語譯, 며月鮮硏究年譜』 第 6 號, 日本 京 都刊.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모두 크게 놀라고 있 다 .4)

4) 졸저 『한 • 중 두 나라의 가무와 잡회』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참고 바람.

처음에는 귀주(貴州) • 호남(湖南)지방의 〈나희〉가 학자들의 관심 울 불러 일으켰으나, 일단 관심을 갖고 조사와 연구를 시작하고 보 니 중국의 거의 모든 지방에 〈나희〉가 전래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나희났즌 그 종류와 성격이 다양하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것이 이전의 중국의 정통연극이라 할 수 있는 〈가무희〉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 은 모두 가면회가 중심을 이루고도 있다. 이 때문에 조우(曹禹)도 〈중국의 희극사는 다시 쓰여져야만 한다〉고 했었을 것이다. 2) 〈나〉와 〈나희〉 옛날의 역귀를 쫓는 행사였던 〈나〉로부터 〈나희〉로의 변화에 대 하여는, 중국의 나희학연구회 (灘戱學硏究會)의 회장인 곡륙을(曲六 乙)이 옛 민간 〈나〉의 종교적 배경을 무속여 E俗 )이라 규정하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당이 귀신을 몰아 내고 신을 공경하며 역귀를 쫓고 불행을 물리쳐 재난을 없애고 복이 들어오게 하는 종교적 제사활동을 〈나〉 또는 나 제 (1難 祭) • 나의 (灘儀)라 부른다. 무당이 부르는 노래와 추는 춤을 나 가(灘歌) • 니무(灘舞)라 부른다. 〈나희〉란 바로 나가(灘歌) • 나무 (1 陶居)의 기초 위에 출현한 것이

다. 〈나〉로부터 〈나희 〉 가 생겨나기 위해서 중국은 대단히 긴 세월을 보내야만 하였다. 일반적으로 한족지구(漢族地區)에 유행하는 각종 〈나희〉 중에서 가창 빠른 것은 송(宋)대에 이루어졌고, 가장 늦은 것 이라 하더라도 대략 일이백년 전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 모체 인 〈나났근 역사의 흐름과 사회의 발전을 따라서 필연적으로 세 가지 중요한 전변(轉變)을 거쳐야만 하였다. 이 세 가지 전변에다가 다시 또다른 주관적 • 객관적 조건과 요인이 보태어져야만 비로소 〈나희〉가 형성될 가능성이 갖추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세 가지 전변〉으로써 다음 세 가지를 들고 자세 한설명을가하고있다. ® 사람의 〈신화(神化)〉로부터 신의 〈인화(人化)〉로의 전변 ® 오신 頃神)으로부터 오인 僚人)으로의 전변 ® 예술의 종교화로부터 종교의 예술화로의 전변 5)

5) 이상 曲六乙, 「中國各民族灘戱的分類 • 特微及其엽바셨 5'價 値」 (『中國灘文 化論文選 』 , 貴州民族出版社, 所載) 참조.

3) 〈나희〉의 특징 다시 곡륙을(曲六乙)은 같은 논문에서 〈나〉로부터 발전하여 이루 어전 〈나희〉의 기본적인 특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롤 둘고 자세한 설명을 가하고 있다. ® 〈나희冷 여러 가지 종교문화의 혼합적인 산물이다. ® 〈나회〉에는 상고시대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여러 역사적 시기 의 종교문화와 민간예술이 축적되고 침전되어 있다. ® 가면은 〈나희〉에서 조형예술(蜀羽翻t)의 중요한 수단이다.

® 초기 〈나희〉의 연출자는 대부분 나사(雅師)들이 겸임하였다. 나제 (1 섯縣)를 행하는 중에 희극성 倻凍 l Jt生)을 지닌 인물이 나타날 때 나사(灘師)는 특히 종교와 희극의 두 가지 칙분을 겸했었다. 뒤 에 와서 연출되는 연극의 종류가 늘어나고 극 속의 인물도 많아지 게 되자 적당히 비종교적인 활동을 하는 인원을 흡수하여 참가시키 게 되었다. ® 종교는 〈나희〉의 모체이며, 〈나희났근 종교의 부속물이어서, 종교는 〈나희〉에 생명을 부여하고 〈나희 X 근 종교에 활력을 부여하 였다. 곡륙을(曲六乙)은 아직 정식희극으로서의 품격을 갖추지 못하고 저급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아나희 (亞灘戱)〉 6) 를 제의한 정식 〈나 희只룹 크게 다음과 갇은 세 종류로 분류하였다.

6) 여灘戱冷 〈前灘戱〉 • 〈準灘〉라 부를 수도 있으며, 아직 戱劇으로서의 독립된 품격을 갖추지 못한 灘戱의 誰形이라 曲六乙은 설명하고 있다. 그 러나 이는 大戱에 젖은 중국학자의 선임관 때문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 다.

첫째, 제사의 의식활동 내용에 속하는 가무의 소절목(小節目)으 로, 호남(湖南) • 귀주(貴州) • 사천(四 II) 지방의 〈충나(沖灘)〉의 제 사활동 중의 「출토지 (出土地)」 「출개산(出開山)」 「도원동(桃源洞)」 「반사낭倻獅職)」 「관공목요(關公牧妖)」 등은 〈충나(沖灘)〉 제사활 동의 필수적인 단계이며 과정이다. 이들을 노래하며 춤추는 제사 활동에 점차 예술성분이 더 보태어져 후에 〈나회〉의 소철목(小節 目)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것들의 특성은 〈나희〉가 제사와 하나 로 뒤섞여 있어서, 그것은 〈나희〉인 동시에 제사의식이기도 한 것 이다. 둘째, 나제 (灘祭)활동과 〈나희〉의 연출이 나뉘어져 행해지는 것

으로 앞의 것은 초저녁, 뒤의 것은 밤늦게 진행된다. 초저녁의 제 사활동에서 연출되던 「출개산(出 開 山)」 등은 〈 음희 (陰戱) 〉 라 부르 며, 그것은 신령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연출된 것이다. 밤늦게 놀 이터에서 연출되는 국은 〈 양희 (陽戱) 〉 라 부르며, 그것은 사람들에 게 보이기 위하여 연출된 것이다. 〈 양희 (陽戱) 〉 의 극종은 대체로 세상의 전설을 제재로 한 것들로 「맹강녀 頃姜女)」 「안안송래 (安安 送來)」 「유의전서 (柳毅傳書)」 「유문룡(劉文龍)」 「포삼낭僚抱三娘)」 같 은 것들이 있다. 그 연출형식면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지방 희곡의 영향을받고있다. 셋째, 종교적인 제사와 철에 따른 민속활동과의 연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독립적으로 연출이 진행되는 것으로 귀주(貴州) 안 순(安順)지방의 여러 아마추어 지방희 (地方戱)가 연출하는 「양가장 (楊家將)」 「설가장(薛家將)」 「와강채 混岡塞)」와 「삼국회 (三園戱)」 같은 것인데, 모두 이미 종교적 제사내용과는 관계 없고 그 분위기 조차도 없어진 것이다. 예를 들면 호남(湖南)의 대용시회단 8 捕:市 戱團) 같은 경우로, 그들은 일찍이 종교적 제사활동으로부터 이탈 하여, 그들이 연출하는 여러 가지 극종~ffli)..g. 그 지방의 희곡극 단徵曲劇團)이 연출하는 것들과 같은 것아 되고 말았다. 7)

7) 이상 曲六乙, 「漫話灘文化圈的分怖與個戱的生態環境」 (『中國灘戱灘文化專 輯』 上, 『 民俗曲藝』 臺北 ) 참조.

4) 나문화권 (1 難文化圈)의 분류 곡륙을(曲六乙)은 갇은 글에서 다시 중국 전체의 나문화권(灘文 化圈)을 다음과 갇이 분류하고 있다. ®북방의 샤만문화권 중국의 동북부 • 북부 • 서북부지구. 옛 민족으로는 흉노(句奴) •

숙역이신고 0,而 愼 )지 금• 선은비 만 (주鮮卑 •) 몽 •고 돌 •궐 조 (선突 ~• )어 원• 여커진 〔 那(溫女克眞)〕 • 등어룬이춘 〔활那약倫한春〕 지. 허쩌〔赫哲〕 ·시뻐〔錫伯〕 ·따워얼〔達幹爾〕 ·웨이우얼며諾·ffl) ·커얼커스 〔祠爾克枚〕 • 하싸커〔哈薩克〕 등의 부족이 있는데, 모두 샤만을 믿었 었다. 다만 웨이우얼족 • 커얼커즈족 • 하싸커족 등은 점차 이슬람 교로 종교가 바뀌었고, 몽고족은 원 Ge) 세조(世祖) 무렵부터 불교 (黃敎)를 믿기 시작했다. ® 중원나문화권(中原灘文化圈) 황하유역 중화문화(中華文化)의 중심지역으로, 지금의 감숙(甘 肅) • 섬서 (陝西) • 산서 (山西) • 하남 (河南) • 하북 (河北) 등 한족 (漢 族)들이 사는 곳, 옛날의 〈나〉가 행해지던 고장이다. ® 파초문화권(巴楚文化圈) 운남(雲南)의 북부 • 귀주(貴州)의 대부분 • 사천 (四 Il) • 호남(湖 南) • 호북 (湖北) • 안휘 (安徽) • 강서 (江西) • 강소 (江森) 등에 걸친 지역으로, 대체로 장강(長江)유역의 지방이다. 현재로는 〈나회〉가 가장 성행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족(葬族) • 투쟈족〔土家族〕 . 먀오족〔苗族〕 • 거라오족 U 乞佳族〕 • 둥족〔個族〕 • 뿌이족〔布依族〕 등이 한 족(漢族)과 함께 섞여 살며 제각기 독특한 〈나희났료t 지니고 있 다. @ 백월문화권頂越文化鵬 대체로 동남연해와 주강(珠江)유역 지방, 지금의 절강(浙江) • 복 건 漏健) • 대만(臺灣) • 광동(廣東) • 광서 (廣西)와 운남(雲南) 및 귀 주(貴州)의 일부 지역이다. 한족들과 함께 좡족따族〕 • 리족〔黎 族〕 • 야오족〔瑠劇 • 서족〔舍劇 • 둥족〔個劇 • 먀오족〔苗劇 • 슈이족〔水 族〕 • 무라오족〔僖悟族 • 마오난족〔毛南劇 • 가오샨족〔高山族〕 등이 살 며, 무속倻俗)이 성행되고 있고, 〈나희〉도 상당히 유행하고 있 다.

® 청장〈분〉 8) 불문화권 ( 靑藏〈 *溫文化圈) 청해 (靑海) ~서장(西藏)의 고원지대로, 짱족〔藏族〕 니건빠족〔門巴 族〕 • 뤄빠족還巴劇 등이 살고 있다. 짱족에겐 분교(宋敎)의 무속 (巫俗)에 불교가 보태어졌으나, 먼빠 • 뤄빠족은 분교의 영향 아래 있다.

8) 여玲은 宋敎 또는 宋波敎라고도 하며, 佛敎가 吐蕃에 들어오기 이전 靑 海 • 西藏의 고원지대에 살던 ·藏族이 믿은 〈만물에 모두 靈 이 있음을 믿 는〉 원시종교이며, 그들의 巫師률 莘波라 부른다.

® 서역나문화권(西喇殿文化圈) 감숙(甘肅) 북부와 신강(新疆) 지역으로, 유명한 실크로드의 중 간지역이다. 세계의 각종 문화와 종교가 들어와 뒤섞이고, 수많은 민족과 종족들이 살고 있다. 곡륙을(曲六乙)은 온 중국을 몇 개의 나문화권(i難文化圈)으로 나 누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 그는 지금 한족을 비롯한 56 종의 중국 민족 가운데 한 (漢) • 좡어 : 〕 • 둥〔側 • 먀오〔苗〕 • 투쟈〔土家〕 • 이 ( 葬 ) • 거라오綿佳〕 나강〔藏〕 • 먼빠〔門巴〕 • 멍구〔蒙古〕 등의 부족이 30 종 가량의 서로 다른 수준의 〈나희〉와 〈아나희녔t 갖고 있다고 하였 다. 5) 현 중국 각지의 주요 〈나희〉 소개(총 40 종) 다음에는 지금까지 조사 연구된 중국의 〈나회只룹 타령 (駐鈴)의 「나희극종자료회편 (灘戱劇種資料應編)」 ( 『 中國 1 勤截 • 灘文化專輯 』 (下) 臺北 民俗曲藝)을 중심으로. 하여 간단히 소개한다. ® 이족(葬族)의 나희(灘戱) 「춰 타이 찌〔撮泰吉〕」 귀주(貴州)에서 발굴된 이족의 〈나희〉로, 「춰 타이 찌」는 이어

(葬語)로 〈인류 변화의 놀이 〉 의 뜻이어서 「변인회 (變人戱)」라고도 약칭 (略稱)한다. 해발 1800 미터 높은 산 위에 사는 50 여 호의 이 인촌(非人村)에서 행해지며, 대체로 정월 초에 안녕울 비는 제사와 함께 나무가면을 쓴 사람들이 이족의 창업과 발전을 상칭하는 대화 가 섞인 가무를 한다. 소와 사자의 놀이도 함께 진행된다고 한 다 .9)

9) 度修明, 「葬族個戱어넘른吉〉」 (『民俗藝術 第二期, 1989) , 曲六乙, 「葬族的 變人戱」 (『備戱少數民族戱劇及其他』 中國戱劇出版社 刊 1990, 所載) 참조.

® 덕강 (德江) 나당희 (灘堂戱) 귀주(貴州) 덕강(德江) 투쟈족〔土家族〕의 〈나희〉인데, 무사따師) 에 의하여 연출된다. 〈나당희〉의 연출은 개단(開壇) • 개동(開洞) • 폐단(閉壇)의 세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개동(開洞)이 정희 征戱)이 며, 전당희(全堂戱)는 24 착(齡)의 희~ 반당희(半堂戱)는 12 착 (齡)의 희 徵)가 연출되었고, 정희 (正戱) 중에는 중간에 간단한 삽 희 (捕戱)도 끼어 넣었다 하니 그 규모가 대단함을 알 수 있다• 정 희 (正戱) 중에는 24 개의 가면이 쓰이는데, 모두 나무로 만든 문물 改物)로서의 가치가 있는 수준의 것들이라 한다. 약간 남쪽의 사 남(思男)에는 또다른 특출한 나당희가 행해지고 있다. 10)

10) 度修明, 「貴州德江土家族地區灘堂戱」 (『中央民族學院學報』 第 3 期, 1:9 89) , 『德江灘堂戱』 (貴州民族出版社 干 lj , 1993) , 『思南灘堂戱 』 (貴 州民族 出版社 干 l j, 1993) 참조.

® 도정 (道貞) 충나희 (沖灘戱) 귀주(貴州) 도정(道貞)의 거라오족 U乞 佳族〕 ·먀오족〔苗族〕 자치현 (自治縣)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층나(沖灘)녔춘 〈티아오 다 야 빠 〔挑大牙巴〕〉라고도 한다. 대체로 집 안에서 행해지는데, 내단(內 壇)에선 법사(法事)가 행해지는 한편 의단例壇)에서 〈나희〉가 연 출된다고 한다. 여기에는 20 여 종의 가면이 쓰이는데, 그 중 산대

왕(山大王)가면은 귀주나면(貴州灘面) 중 진품(珍品)으로 알려져 있 다. 그리고 연출되는 〈나희〉의 극종個卿)으로는 「산왕도(山王圖)」 「오악도(五岳圖)」 「금계령 (金鷄嶺)」 등 10 여 종이 알려져 있다. 11)

11) 高倫 『貴州灘戱』 (貴州人民出版社, 1987) 참조.

® 귀주(貴州) 지희 (地戱) 귀주(貴州)의 귀양시 (貴陽市) 교의 및 안순(安)順) 등 20 여 개 현 個)에서 한족(漢族) • 뿌이족〔布依族〕 • 먀오족〔苗族〕 등의 농민들이 연출하는 〈나희〉로, 일종의 농민희극이라 할 만한 것이다. 〈지희〉 는 봄철에 〈완신춘C@w ) 〉이란 이름 아래 20 일 정도 연출되고, 음력 칠월 중순에는 〈도미화산個洙花神)〉이란 이름 아래 닷새 동 안 연출된다. 개재문(開財門) • 소개장(掃開場) • 조신(挑神) • 소수 장(掃收場)의 네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지희〉의 정희 (正戱)는 조 신億神)에서 연출되며, 그 내용은 역대 왕조의 홍망을 다룬 전쟁 이야기와 영웅들의 활약을 표현한 장편의 고사들이 대부분이라 한 다. 여기에 쓰인 가면은 100 여 개나 되는데, 모두 「지희보(地戱 譜)」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예술적인 것들이 많다고 한다. 12)

12) 沈福馨 『安順地戱』 (貴州人民出版社, 1989) , 『安J I 距卽敗論文集』 (貴州省文 聯文藝理論硏究室, 1990) , 度修明, 『神秘 • 猪廊與質撲 • 淸新-貴州民間灘 戱談』 (『戱劇』 第 4 期 中央戱劇學院 fl], 1987) 참조.

® 직금燁璋)의 「조보살(挑菩薩)」 귀주(貴州) 직금燁金)에서 행해지는 가무오신倻濁蝶神)의 〈나 희〉로 〈경단廈壇)〉이라고도 부른다. 오현신(五賢神)을 비롯한 여러 신상(神像)들을 내걸고 행하는데, 제사와 희극을 엇섞어가며 15 장 (場)에 달하는 연출을 한다고 한다. 13)

13) 張成坤, 「織金灘戱初談」 (『織金文史資料選編』 第 2 輯) 참조.

® :iip.o]족〔布依劇 〈나희 > 귀주(貴州) 남쪽 뿌이족•먀오족 자치주의 나전현(羅句縣) 농촌

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양장향(羊場鄕)의 〈 양희 (陽戱) 〉 갇은 것이 대표적인 것으로 굿판을 벌이면서 가면을 쓰고 삼국(三國)의 이야 기나 이랑신(二郞神)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연출한다. 지역에 따라 여러가지 조금씩 다른 지희 (地戱)들이 전해지고 있다 한다. 14)

14) 高偉 『貴州灘戱』, 『貴州地戱簡史』 (貴州人民出版社, 1987) 참조.

® 서주(思州) 둥나 U 同灘〕 「희나신(喜灘神)」 귀주(貴州)의 사주(思州, 本蒙縣)에는 투쟈나〔土家灘〕 • 거라오나 U 乞佳圖 • 등나 U 剛難〕 • 먀오나〔苗灘〕 • 한나〔漢灘〕 등 여러 가지 〈나 희〉가 행해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둥나인 〈희나신〉이 가장 특 출하다 한다. 〈회나신〉의 법사(法事)에는 대체로 38 당(堂)의 과정 이 있는데, 사흘낮 사흘밤에서 7 일낮 7 일밤 동안 진행된다고 한 다. 법사(法事)와 〈나희〉의 놀이를 엇섞어가며 진행시키는데, 여 기에서 연출되는 주요 극종®贈)으로는 「보자(報子)」 「희생 (鐵性)」 「팔랑(八郞)」 「개산(開山)」 「소귀 (小鬼)」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 리고 이 〈나희〉에는 기쁘고 줄거운 정취가 넘친다 한다. 15)

15) 高倫 『貴州灘戱』, 黃透松·姜晴明, 『思州앨t灘神」的調査』 참조.

® 노산漠山) 경단회 僚壇戱) 사천 (四 II ) 에도 나원희 (灘願戱) • 양희 (陽戱) • 경 단회 Qitj:_IM;) • 단 공희 (端公戱) • 동재희 (流粹戱) • 사도회 (師道戱) • 제양희 (提陽戱) 등 여러 가지 〈나희〉가 행해지고 있다. 노산~ 송(宋) 휘종 (徽宗)의 대관 9 項觀)년간 (1107-1110) 에 촉한(蜀漢)의 명장 강유 (姜維)를 기념하는 평양루(平襄樓)가 세워졌는대, 매년 8 월 15 일 에 강유(姜維)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 곳에서 〈경단회녔t 연출하게 되었다 한다. 이는 제사와 희극을 엇섞은 형식이며, 소단(小壇)은 하루에서 사흘, 대단伏壇)은 7 일에서 21 일 동안 연출되며 100 종 에 가까운 극종이 전한다 한다. 그 중에는 가면을 써야 하는 연극 도 있지만, 가면을 쓰지 않는 극종도 있다고 한다. 16)

16) 于一, 「古灘的遺響_蘆山慶壇」 (『灘戱論文選』 四川灘戱學硏究會 籍備組, 1989) 참조.

® 사도희(師造鼓) 사천(四川) 합강(合江)지방에서 행해지며, 도교(道敎)계통과 불 교(佛敎)계통의 두 종류가 있으나 연출되는 국종은 서로 바슷하다 고 한다. 법사(法事) 자체에 희극적인 성격을 띤 것들이 많고, 창 강 (0 副空)에는 곡패 (曲牌, 梅花引 • 調子 등)가 있으며, 그 밖의 연출 에 여러 가지로 천국 OII 劇)과 흡사한 점이 많다고 한다 .17).

17) 四 lll, 『戱曲志動態』 第 14 期 참조.

® 사전 (射籠) 제양희 (提陽戱) 사천 (四川) 경원 廈元)의 사전향倒筋鄕) 이가평 (李家坪)의 이씨 (李氏) 일족에 의하여 연출되고 있는 〈나희〉로, 양희 (陽戱) • 화화 희 (花花載)라고도 부르며 「경단廈壇)」에 속하는 종류의 것이다. 끈으로 조종하는 나무인형과 화장한 사람이 교대로 등장하여 연출 하며, 그 희극은 문장(文場)과 무장(武場)으로 나누어지고 많은 사 람들이 좋아하는 놀이의 일종이라 한다. 18)

18) 熊兆德 「射筋提陽戱」 (『灘戱論文選』, 上同 所載)

@ 검각 ffiiJ!i)) 양희 (陽戱) 사천(四川) 검각현億鼎縣)에 행해지고 있으며, 〈양희났즌 정양희 (定陽戱) 또는 지회 (地戱)라고도 부른다. 법사(法事)와 희극의 연출 이 함께 진행되고, 희극은 필연희 (必演戱)와 배합회 (配合戱)의 두 종류가 있다. 필연(必演) 부분은 첫머리 「출공조(出功曹)」에 이어 「삼성등전 (三聖登殿)」 「기사랑億詞郞)」 「조판자 ®k 判子)」 「조소귀 像小鬼)」 등 여러 극종이 이어지며, 배합희 (配合戱)로는 「오호상장 (五虎旦휴)」 「당신선偏神仙)」 등이 연출된다. 가면놀이와 나무인 형놀이로 대부분이 연출되며, 아들 기예(技藝)는 대대로 세전(世 傳)되는 것이라 한다. 19)

19) 王炎生 • 王興志, 「劍閣陽戱」 (『灘戱論文選』 四川省 灘戱學硏究會 編) 참 조.

@ 노주(激서) 〈나희〉 사천(四川) 노주(滅씨)지방에는 도교(道敎)와 무속따俗)이 성행 하고 많은 수의 나단반 (1 距距 E) 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 곳 〈나희〉의 국종만 보더라도 「왕선침고(王宣閣考)」 「조량화동(離梁畵 棟)」 「도산구모(桃山救母)」 「금화팔두 (金花八奎)」 (8 편의 연속극) 「도화사투(桃花四奎)」 (4 편)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여기에는 맨발로 칼날사다리를 밟고 오르거나, 날카로운 쇠못이 잔뜩 솟은 나무판 위를 걷는 등의 여러 가지 특기도 함께 연출된다고 한다. 20)

20) 童祥銘 「溫州灘戱管類J (『傳戴論文選』 四川 灘戱學硏究會蕃備組 編, 1989) 참조.

@ 천동남민족지구 u,| 東南民族地區) 〈나희〉 이 〈나희났근 사천(四川) 동남의 유양(酉陽) • 수산~山) • 팽팽수 (彭彭水) • 검강僖今江) • 석주(石柱) 등 다섯 개 소수민족 자치현의 투쟈족〔土家族〕 • 먀오족〔苗族〕 등을 중심으로 의진 농촌에서 행해 진다. 따라서 조신희 倒神戱) • 나원희 (灘願戱) • 검각희 ~勘鉉) • 토지희 (土地戱) • 나당희 (灘堂戱) • 신희 (神戱) • 양희 (陽戱) 등 여러 가지 종류의 〈나희〉가 행해진다• 그러나 대체로 모두 청신(請神) • 수신個神) • 송신(送神)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고, 제사가 중심이 되는 정희(正戱)와 희극의 연출이 중심이 되는 잡희(雜戱)로 구분 된다 •21)

21) 張必成, 「川東南民族地區灘戱浚探」 (『灘戱論文選』 四川 灘戱硏究會壽備 성.1l. 編, 1989) 참조.

@ 재동(祥流) 양희 (陽戱) 사천(四川) 서북부의 재동현(粹洞縣)에 행해지고 있으며, 그 곳 의 양회반(陽戱班)을 양회교(陽戱敎)라 부르고, 16 내지 25 명이 한

양회교(陽戱敎)를 이루고 있다. 연출시기와 장소는 다양하다. 재동 양희 (粹洞陽戱)는 음희 (陰戱)와 양희 (陽戱)로 나뉘어지는데, 음희 (陰戱)는 천희 (天鼓)라고도 부르며 끈으로 조종되는 나무인형극이 고, 양희(陽戱)는 지희(地戱)라고도 부르며 이랑(二郞) • 판관(判 官) • 소귀 (小鬼) • 토지 (土地) 등으로 분장한 사람들에 의하여 연출 되는 가면놀이이다. 22)

22) 黃道德 • 于一 主 編 『粹溫陽戱』 (中國戱曲志四川卷編輯部刊, 1991) 참 조.

® 상서 (湘西) 나당정희 (1 難距타戈) 호남(湖南)의 서북부 봉황馮凰) • 길수(吉首) • 노계 (溫溪) • 마양 (麻陽) • 화원(花垣) 등지의 먀오족〔苗族〕들에 의하여 행해지는 먀오 나(苗灘)와 대용伏蒲)의 투쟈나〔土家 1 亂 高偶라고도 함〕와 대용저나 O 에頂譯)가 있다. 먀오나는 법사(法事)가 30 당(堂) 또는 40 당으 로 이루어지는데, 한어 (漢語)로 연출하면서 중간에 먀오가〔苗 歌幻 를 부른다. 대용의 투쟈나도 30 여 당(堂)으로 법사(法事)가 짜여지며, 대용저나 8 淵抵灘)는 한족나( 漢 族雅)로 영순(永順) • 상식현 여漏縣) 등지에서도 행해지고 있고, 법사(法事)는 26 당(堂)으로 이루어진 다. 이 곳의 연희에는 정조(正朝) 또는 신희 (神戱)라고도 부르는 나당정희 (灘堂正戱)와 보통 화조(花朝)라 부르는 본희 (本戱, 또는 折子戱)가 있고, 비교적 넓은 가면을 쓴다고 한다. 여기에 연출되 는 극종으로는 본회 (本戱)에 「맹강녀 頃姜女)」 「방씨녀 예底女)」 「용왕녀 (龍王女)」 「사문경경전 (謝文卿耕田)」 등이 있고, 또 「반선봉 예錄)」 「반개산倻開山)」 「반립장倻麻匠)」 등 많은 것들이 전해 지고 있다 .23)

23) 胡健國, 『灘堂戱志』 (湖南省戱曲硏究所, 1989) , 羅炳輝, 「湘西灘堂正戱」 (명風』 第 6 期, 1989) 참조.

® 투쟈족〔土家族〕 원시희극(原始戱劇) 「마오꾸스〔茅谷斯〕」

호남(湖南)의 투쟈족들이 새해 초에 기양(祈祿)의 뜻으로 오신 個綱)을 위해 연출하는 원시적인 희극이다. 대체로 정월 초사홀부­ 터 이랫날에 이르는 사이에 사흘 정도 연출되고, 제사활동과 연희 가 엇섞이어 7 대단 0 공t)으로 나뉘어 진행되며, 중간에 남근숭배 의 의식도 있는 가면놀이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부르던 노래는 파 수가(提手歌), 그 춤은 파수무(捕手舞), 마오꾸스〔茅谷斯〕가 행해지 던 사당을 파수당(捕手堂) 또는 귀당凍堂)이라 부른다 .24)

24) 彭榮德, 「土家族的茅古斯’」 (『民俗』畵刊 第 8 期, 1989) 및 李昭明, 며눕 土家族〈撮手歌〉的社會功能」 (『民間文學論壇』 第 6 期, 1989) 참조.

@ 사도회(師道戱) 호남(湖南)의 서북부 원수(況水) • 예수(i豊水)유역에서 한족(漢 族) • 먀오족〔苗劇 • 둥족〔個劇 • 야오족〔瑠劇 등에 의하여 널리 행 해지며, 귀주(貴州)와 호북(湖北)의 은시 (恩施)지방에까지도 흘러 들어가 있다. 보통 〈의교이敎)〉라 불리는 양회(陽戱)와 화등(花 燈) 및 〈내교(內敎)〉라 불리는 나당희 (灘堂戱)가 함께 연출되는데, 20 세기 중반 무렵부터는 종교의식에서 벗어나 무대예술로 발전하 기 시작하였다. 극종으로는 「반종규倻灘旭)」 「반판관曲判官)」 「도 산구모(桃山救母)」 등 초기의 가면놀이와 「맹강녀 頃姜女)」 「방씨녀 예抵女)」 「용왕녀 (龍王女)」 「대반동伏盤洞)」 같은 대규모의 것들 도 있다 .25)

25) 『 中國戱曲劇ffit手冊』 p.7 02 (中國戱劇出版社) 참조.

® 신황(新晃) 둥족매劇 〈나희〉 호남(湖南) 서쪽 신황(新晃) 둥족자치구에서 행해지며, 둥어〔個 語〕로는 〈뚱뚱투이 (P 冬味推) > 또는 〈까눠 (護灘) >, 한어 (漢語)로는 〈동가나원희 (個家灘頭戱) > 〈나가희 (灘家戱) > 또는 〈도희 億戱) 〉로 도 불리운다. 연극의 내용을 보면 둥족〔個族〕의 옛 신화전설에서 온 「반사낭偶師娘)」 • 「채향諒香)」 「조가관 (挑加官)」 「반토지 (粉土

地)」 등이 있고, 한족(漢族)의 역사 이야기에서 온 「고성회 (古城 會)」 「운장양상(雲長養傷)」 「운수円방양(雲山放羊)」 등이 있으며, 귀 주(貴州) 동남지방 한족(漢族)의 양희 (陽戱) • 화고희 (花鼓戱) 등에 서 옮겨져 온 「유해감시 (劉海欲柴)」 「기반산(棋盤山)」 「고터금은(持 打金銀)」 등이 있다. 공계(貢溪)에서 연출되는 「조반(造反)」 같은 〈나희 〉에는 둥족의 조상인 강량(姜良) • 강매 (姜妹)와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의 등장인물들 및 귀신과 동물 등 36 종의 각색이 나 오는데, 제각기 다른 가면을 쓴다고 한다. 26)

26) 『中國戱曲劇種手冊』 p. 708 (中國戱劇出版社) 참조.

® 선고 (扇鼓) 〈나희 > 산서 (山西) 곡옥현 (曲沃縣)에 전해오는 〈나희〉이다. 옛 나의 (1 難 儀)에서 12 신(神)이 귀신울 쫓던 의식을 이어 12 신상(神像)이 나 와 〈나희녔t 진행시킨다• 의정 (議定)과 설단(設壇)의 절처~ 한 달 넘게 전행시키고 나서, 정월 14 일부터 사흘 동안 나희를 연출한다 고 한다. 첫째 날은 유촌(遊村) • 입단(入壇) • 청신(請神) • 수재 (收 災) 등의 행사가 있고, 둘째 날에는 「하신(下神)」 「첨신(添神)」 「취 풍(吹風)」 「타창(打倉)」 「반도(拳道)」 등을 연출하며, 셋째 날에는 「시미 (精誌)」 「채상(采桑)」 「좌후토(坐后土)」에 이어 끝으로 12 신 상(神像)에 의하여 「송낭낭(送娘娘)」이 연출된다고 한다. 여기에는 선통 (We) 원년 (1909) 에 베껴 놓은 『선고신보頃鼓神譜)』의 잔본 (殘本)이 전해지고 있어 이 곳 〈나희〉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7)

27) 段士撲 • 許誠, 「扇鼓神譜初探」 (『中華戱曲』 第 2 期, 1988} 참조.

@ 전북(晉北) 새희 (奏戱) 〈새희났즌 새새 (奏奏)라고도 부르며 산서 (山西) 북쪽 농촌에 널리 유행하였던 〈나희〉이나 점차 없어져가고 있다. 농촌의 제례와 대 나伏灘)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나, 일정한 연출 날짜는 없으

며, 연출자와 관중이 함께 어우러지다시피 한다. 일부분 연출자들 이 귀검 凍脈)이라 부르는 가면을 쓰는데, 극종을 보면 옛 역사 이 야기를 취한 「단도부회 (單刀社會)」 「초로차전 (草盧借筋)」 「침유주 (閩幽州)」 「옥랑출가(玉郞出家)」 등이 있고, 불교와 도교에서 나온 「이선전도(二仙傳道)」 「삼세수(三世修)」 등이 있으며, 민간전설에서 온 「영춘신(迎春神)」 「참한발(斬早悠)」 「타조(打栗)」 등이 있다 .28)

28) 趙國閑, r 養戱源流浚探及其宅」 (『中華戱曲』 第 2 期, 1988) 참조.

@ 상당辻黨) 대회(除載) 산서 (山西) 동남 지방인 옛 상당辻黨) 지역에 연출되는 〈나희〉 이며, 많을 적에는 일백여 명에 달하는 영신새사대오(迎神奏社隊 ffi)에 의하여 연출되므로 〈대희〉라 부른다. 몇 개의 마을이 공동 으로 거행할 적에는 참가자가 천 명에 달한다 하며, 길가에 다섯 개의 무대를 만들어 놓고 무대를 바꿔가며 연출한다. 연출되는 〈나희〉의 내용은 정대희 (正除戱) • 공잔대희 (供蓋除戱) • 아대희 (딴 隊) • 향간잡대희 (鄕間雜隊戱 小隊子戱)가 있다. 정대희 (正除戱) 에서는 역사이야기인 「대보도伏報圖)」 「대회해 伏:會核)」 「고성취의 (古城衆義)」 등이 연출되고, 소대자희 (小隊子戱)로는 「송자(送子)」 「충온(沖盧)」 「편타황로귀 (篠打黃勞鬼)」 「참한발(斬早勉)」 「오귀반 차(五鬼盤又)」 등 구역 (縣疾)의 뜻이 담긴 것들이 연출되고 있 다. 29)

@ 나고잡희 (鍾鼓雜敗) 산서 (山西) 남부 운성 (運城) • 만영 (萬榮) • 직산(稷山) 일대에 전 해지는 것으로 요고잡희 (鏡鼓雜戱) • 용암잡희 (龍岩韻設)라고도 부 른다. 민간의 수신기복個神祈福)하는 경신희 (敬神戱)로 송(宋) • 금(金)대부터 전해지는 것으로, 송(宋) 진종(眞宗)이 관우(關羽)를

29) 原雙喜, 「上黨 1 勘鉉及其流變」, 張之中, 「山西灘戱槪述」 (1990, 中國灘戱 學國際學術討論會 論文集) 참조.

불러다가 치우(崔尤)를 베어 버리 게 했다는 신괴(神怪)한 전설에 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국종이 60 여 종인데, 「악의벌제 (樂毅伐齊)」 「임동산(臨流山)」 「삼전여포(三戰呂布)」 「황 학루(黃鶴樓)」 등 역사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 많다. 「관공참치 우(關公斬産尤)」가 가장 전통적인 연극이며, 모두 농민들에 의하여 연출되는데, 옛 구나(福灘)의식이 연극화한 것이다 .30)

30) 張之中, 「山西灘戱槪述니 (1990, 中國個戱學國際學術討論會 論文集) 참 조.

@ 안휘 (安徽) 〈나희 > 1950 년 이전까지 안휘 (安徽)의 귀지 (貴池) • 청양(靑陽)지방에서 정월 중순에 집 안의 사당에서 나홀을 두고 연출되던 〈나희〉이다. 버드나무로 조각한 철면(鐵面)이라고도 부르는 가면을 쓰며, 모두 36 개가 쓰였다 한다. 일종의 신을 즐겁게 하는 제사로써, 중요 극 종으로는 대체로 정월 7 일에 연출한 「유문룡간고(劉文龍趙考)」, 초 열흘날 밤에 연출한 「인종황제불인모(仁宗皇帝不認母, 일명 陳)사放 璟)」, 열사흘날 밤에 연출한 「장문현타사매화녀 佛文賢打死賣花 女)」, 보름날 밤에 연출한 「맹강녀 頃姜女)」가 있고, 그 밖에도 소 희 (小戱)들을 개장(開場)과 수미 (收尾)에 연출하고 또 중간에 삽연 (捕演)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지막 수장(收場)에선 반드시 「관공참 요 (關公斬妖)」로 끝맺는다. 31)

31) 『中國戱曲劇種手冊』 p. 339 (中國戱劇出版社) 참조.

@ 귀지 (貴池) 〈나희 > 안휘 (安徽)의 귀지 (貴池) 동남부지방에 전해 오는 것인데, 그 곳 에는 마울마다 제각기 모두 〈나희녔t 연출하고 있다 한다. 이 곳 에서는 정월 7 일부터 15 일 사이에 토지와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중 심으로 연출되는데, 먼저 〈나희〉에 쓰이는 가면을 제사 지내고 영 신 (迎神)의 의식을 행한 뒤에 〈나희〉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나

희났근 첫머리에 나의 (雅儀)와 나무(灘舞)가 있은 다음 정희 (正戱) 로 들어가며, 정희 뒤에는 「신년재 (新年齋)」 「향사공(向社公)」 「무 판(舞判)」 등을 연출한다. 그리고 중요한 국종으로 「유문룡(劉文 龍)」 「맹강녀 偉姜女)」 「진주조미 (陳州躍米)」 「무산(舞寧)」 「타적조 (打赤鳥)」 「괴성점두俺頃點斗)」 「무회회 (舞回回)」 「무재신 (舞財神)」 등이 있다 .32)

32) 『 安徽貴池個戱簡介』(貴池市 文化局) 참조.

@ 안휘 (安徽) 단공회 (端公戱) 안휘 (安徽) 회하(淮河) 연안의 회원 (懷遠) • 영상(홍U ) • 봉대 (J11, 臺 ) • 수현( 壽 縣) • 부양(阜陽) 등지에 민국(民國) 초까지 유행되던 무사(巫師, 端公)에 의하여 조신頃神)하던 소희(小戱)이다. 하신 (下神)을 할 적에 단공조(端公調)로 귀신이야기를 연창(演唱)한데서 붙여전 호칭이다. 후에 지방희곡들의 영향을 받아 점차 여러 사람 들이 설창(說唱)하는 〈단공희〉로 발전한 것이라 한다. 〈단공회〉의 국종으로 「설봉영 (薛鳳英)」 「하신 (河神, 일명 張相打隊狀 ' )」 「휴정향 (休丁香)」이 있는데, 앞의 두 가지는 3 내지 5 일 저녁울 두고 연출 하나 「휴정향」은 열홀에서 보름을 두고 연출하여 그 희반徵班)을 정향반(丁香班)이라고도 부른다. 극의 내용은 모두 비참하고 음산 한 것이 특칭이라 할 수 있다. 33)

33) 『 中國戱曲劇種手冊·』 p. 344 (中國戱劇出版社) 참조.

® 자금 傑金) 화조희 (花朝戱) 자금傑金)을 중심으로 한 광동(廣東) 동부 산간에 유행하는 역 귀를 쫓는 악무偶舞)이다. 먼저 무사맨師)가 청신강신(請神降神) 을 하는 악무맹용舞)인 〈신조(神朝)녔卜 행하고, 다시 민원(民願)과 풍속을 반영하는 소희 (小戱)로 〈화조(花朝)저} 행한다. 보통 5 내 지 7 명이 연출하는데, 그 연출은 첫째, 개장라고(開場鏞鼓, 間臺라 고도 부름), 둘째, 제사의식인 두출조(頭出朝), 셋째, 〈화조희〉의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매잡화(賣雜貨)」 「일지화(一枝花)」 등이 그 대표적인 국종이다. 34)

34) 黃鏡明, 「華南臘巫文化尋縱」 (1990, 中國灘戱學國際學術討論會 論文集) 참조.

@ 광동(廣東) 사공회 (師公戱) 광동 (廣東)의 〈서공회 났근 광동 북쪽 한족(漢族) • 야오족〔瑠族〕 지구에 행해지고 있는 월북사공희 (腐北師公戱)와 광동 동쪽 해변의 해풍(海뻗) • 육풍(陸~) 지방에 유행하는 해남풍사공회 (海南豊師公 戱)로 크게 나뉘어진다. 월북사공희 (恩北師公戱)는 5, 6 명에서 10 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주인의 요청에 따라 집 안이나 묘회 (廟 會)에서 연출하는 것으로, 타초희 (打熊說 道場戱) • 충나희 (沖灘戱, 挑) • 환원회 (還頭戱 酷神戱)의 세 가지가 있다. 국종으로는 「이십사효(二十四孝)」 「시월희태 (十月懷胎)」 「자고닝히계 頃海議下 界)」 「화리구재 (和利求財)」 「간귀상로(趙鬼上路)」 등이 대표적이며, 모두 가면을 쓴다. 해남풍사공희(海南覽師公戱)는 사공(師公)이 초 청에 따라 도장법사(道場法事)를 끝낸 다음, 또는 그 중간에 연창 (演唱)하는 희곡으로, 극종에는 「후자투단~ 「서왕모전교 (西王母傳敎)」 「이철괴도하선고 (李鐵持渡河仙姑)」 「관공현성 (關公顯 聖)」 「목련구모(目連救母)」 등이 있다. 35)

35) 黃鏡明, 「華南灘巫文化尋縱」 (1990, 中國灘戱學國際學術討論會 論文集) 참조.

@ 남풍(南lf) 〈나희〉 강서 (江西) 남풍현 (南豊縣)에는 87 개의 나반(灘班)에 1700 여 명 의 예인(藝人)들이 있고, 70 여 종류의 전동적인 극종과 100 장 가 까운 종류의 가면이 쇼쓰인다고 한다. 명 (明) 선덕 (宣德)년간 (1426 _1435) 에 세운 나신묘(難神廟)가 있고 24 개의 사신상債喇像)이 있 다고 한다. 일 년에 두 번, 정월 초하루의 〈기나~起灘)〉, 16 일의

〈수나(柳難)〉가 거행되는데, 특히 〈 수나 〉 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축 역 (逐疾)과 축복(祝福)을 하는 성대한 의식이라 한다. 춤에는 지선 무(組辯뜹) • 저취무(待担舞) • 계취무(鷄荷舞) • 개산무(開山舞) 등이 있고, 중간에 여러 가지 잡기 (雜技)의 연출이 있으며, 「맹강녀송한 의 頃姜女送寒衣)」 「음독주(飮毒酒)」 「나공나파(灘公灘婆)」 등의 극 종이 연출된다. 36};

36) 余大喜, 『江西灘舞槪觀』 (資料) 참조.

@ 무원 (姿源) 무귀희 (舞鬼戱) 강서 (江西) 동복 무원 (姿源)을 중심으로 산간지역에 행해지는 나 무 (1 鵬뚫)로 귀무낸璃i) 또는 〈무귀희〉라 흔히 부른다. 이 지방에 는 36 회반徵班) • 72 사반(獅班)이 있었다 하며, 한 사람이 팔십대 왕(八十大王)의 가면을 쓰고 〈탑가(塔架)〉 〈추왕(追王)〉이라 부르 는 전통적인 거사축역 (#去邪逐疾) 의식을 행하는 한편 「개천벽지 (開 天關地)」 「괴성점두衡晶點斗)」 「관공마도(關公磨刀)」 「맹강녀송한 의 頃姜女送寒衣)」 「유해희금섬 (劉海戱金塘)」 등의 극종을 연출한 다. 매년 봄에 행하는데, 쓰이는 가면을 소중히 보관한다. 37)

37) 楊浩 • 胡仁平, 「讀東北姿源山區的債댔沮 E 〉」 (『民俗』 第 7 期, 中國民間藝 術出版社, 1989) 참조.

® 관색희(關索戱) 운남(雲南) 중부 칭강현(澄江縣)에서 음력 정월 초에 16 일간 연 출되는 가면놀이이다. 관색 (關索)은 관우(關羽)의 아들로 공명 어 4 明)이 관우(關羽)를 선봉장으로 삼았고, 그 곳 소둔촌(小屯村)에 관색 (關索)이 주둔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는 무대나 특정한 시간이 필요없는 마당놀이 성격의 것이며, 가면을 쓰고 무기를 든 연출자 둘이 삼국(三國)시대 촉(蜀)나라의 유비 (劉備) • 관우(關羽) • 장비 禪)의 활약상을 주제로 한 극종을 연출한다. 조조慣操)와 손권 (孫權)은 등장하는 일이 없다 한다. 그 극목(Jlj目)은 100 종에 가까

우며, 「삼전여포(三戰呂布)」 「삼청공명 (三請孔明)」 「수주창(收周 倉)」 「수마초(收馬超)」 「과오관참육장(過五關斬六將)」 등이 대표적 인 것들이다. 개중에는 한 번 연출하는 데 세 시간이나 걷리는 「전 고성 (戰古城)」 같은 대희 0 해戈)도 있다. 연출인원은 대략 40 명 정 도이고, 그 밖에 악공 6 명, 호수(號手) 1 명, 기수예評·) 약간 명 이 동원된다 .38)

38) 『中國戱曲劇用 E手 冊』 p. 809 (中國戱劇出版社) 참조.

@ 소통(昭通) 단공회 (端쇼鼓) 운남(雲南) 동북의 소통(昭通)지방을 중심으로 행해지며 조단공 ”公) • 경단償壇) • 경보살償菩薩) • 작도량(作道場) 등으로도 불 리운다. 지금도 모두 50 여 개의 단공희반(端公戱班)이 있고, 백수 십 명의 예능인(藝能人)이 있다고 한다. 〈단공회났근 옛 나무서顯~) 에서 발전한 것으로 음력 섣달에서 정월 16 일 이전에 연출된다. 여기에는 백여 년이 넘은 나무를 깎아 만든 가면들이 보존되고 있 고, 연출되는 국종은 100 종을 넘는데, 「전고간심 (陳姑越婚)」 「천 제갈(蕭諸葛)」 「괴음기 (棟陰記)」 「추한신 (追韓信)」 「출로반(出魯班)」 등이 그 중 대표적인 것들이다. 39)

39) 楊榮生, 멘通端公戱源流初識」 (雲:ftJ I1 戱曲源流沿革硏討會 論文集, 資 料) 참조.

@ 남통(南通) 동자희 (1童 子戱) 강소(江蘇)의 남통(南通)을 중심으로 해안(海安) • 양주(揚州) • 육합(六合)에서 여고~I]阜) • 여동(如東) • 해문(海門) • 계동(啓東) 및 상해 U::海)의 숭명도(崇明島)에 걸쳐 행해지고 있다. 여러 가지 잡 기 (雜使)와 곡예까지 합쳐진 다양한 놀이로, 연중 필요에 따라 수 시로 연출되며, 상동자U::億子)라고도 부른다. 〈동자희〉의 연출은 내표(內表) • 의표例表) • 무동자(武億子)가 하는 의장例場), 문동 자汶億子)가 하는 좌창凶唱)의 네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내표(內

表)는 좌념 (坐念)이라고도 하며, 통속적인 표문(表文)을 읊는 한편 십삼성 (十三聖), 곧 13 명의 신선(神仙)과 보살(菩薩)의 이야기를 연출한다. 의표아表)는 신단(iiitldl ) 밖에서 연출되는 본격적인 〈나 희〉로, 「정삼랑상서천 (鄭三郞上西天)」 「좌당심체 悼堂審替)」 「담경 입고(担輕入庫)」 「터소정원(打掃淨園)」 등의 극종이 연출된다. 의장 例場)에서는 무동자(武億子)가 잡기 (雜技) • 기공(氣功) • 마술讚術) 등을 연출하고, 문동자(文億子)의 좌창(坐 P 昌)에서는 주로 북을 비 롯한 타악기를 치면서 「건륭하강남(乾隆下江南)」 「장사저뇨동경 個: 四旭間東京)」 「양축여접動」 등의 창울 한다. 40)

40) 曹礎 「南通億子祭祀劇麟」 (中園灘戱學國際學術討論會 論文集, 1990) 참조.

@ 성감희(關惑戱) 절강(浙江) 영강현(永康縣)지방에 행해지는 〈선유선보(善有善 報), 악유악보(惡有惡報)〉라는 뜻의 사람들에게 권선(勸善)을 하는 놀이이다. 성감희 (省感戱)라고도 부르고, 아홉 개의 탁자를 높이 쌓아 놓고 그 위에서 잡기 (雜技)를 연출하여 번구루(懿虹婁)라는 호칭도 있다. 그 연출은 「모두화저 (毛頭花姓)」극을 중심으로 하고, 간간이 권선칭악하는 내용의 소희 (小戱)와 잡기 (雜技)를 연출하기 도 하므로 영강모두화저희 (却蔡毛頭花旭戱)라고도 부른다. 〈성감 희〉의 극종으로는 「식녀상礎女箱)」 「호리상(孤雅箱)」 「감성상(感城 箱)」 「익수상(酒水箱)」 「효자상(孝子箱)」 「단원상(團圓箱)」 「초집상 (草)」 「정사상(精思箱)」 「모두상(毛頭箱)」의 9 본(本, 또는 箱)이 있는데, 1 본(本)이 50, 69 착(嗣)에 달하는 내용이어서 10 여 시간 의 연출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41)

41) 『中國戱曲劇種手冊』 p.40 8 (中國戱劇出版社) 참조.

@ 광서 (廣西) 사공회 (師公戱) 광서 (廣西)의 남녕 (南寧) • 무명 (武 P島 ) • 빈양(賓陽)지방의 농민들

사이에 행해지며 〈창사 (P 昌師) 〉 라고도 부른다. 빈양(賓陽)의 농촌에 만도 200 여 개의 아마추어 희반峨班)이 있을 정도이며, 〈사공회〉 에서 연출되는 극종은 300 여 착(齡)이나 된다고 한다. 그 중에는 아이가 출생하여 만월 (滿月 ) 때 연출하는 「송계미 (送鷄米)」, 결혼 식 때 연출하기에 알맞는 「타초(打草)」, 경사償潭;)나 상사(喪事) 에 연출하는 「환등 (歡澄) 」 「팔낭과도 (八娘過渡) 」 「영간죽 (靈簡竹)」 등이 있고, 민간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순지호해 0 範비昇海)」 「막 일대왕(莫一大王)」 「백마고낭(白馬姑娘)」 등이 있다. 그중 「팔낭과 도(八娘過渡)」 같은 것은 이틀 사홀밤을 연출해야 할 정도라 한다. 그리고 〈사공희〉에 쓰이는 가면은 모두 72 종이 있는데, 모두 각각 서로 다른 인물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리고 일부 지역에선 종이 검 보(險譜)를 쓰다가 직접 그 검보를 출연자의 얼굴에 그려 넣는 곳도 있 게 되었다한다 .42)

42) 『廣西灘藝術論文集』 (廣西藝術硏究所 編, 1990) 참조.

®섬남(陝南) 단공회(端公戱) 섬서 (陝西) 님쪽 대파산 8 巴山) 근처에 유행하며, 〈단희 (端戱)〉 라고도 부르고, 주역인 남자무당을 당~ 관직명인 단공(端 公)이라 부르는 데서 붙여전 호칭이다. 〈단공희〉에는 독특한 송신 가(碩神歌)에 민간가요와 민간무용이 섞여 들어가 고사(故事)의 연 출이 발전하였다. 따라서 음악에는 신가본강(神歌本睦)과 민간의 정가(情歌) , 그 곳 지방회인 대통자회 ~ 창강 (P 副空)의 세 종류의 성분이 있고, 200 여 종의 전통 국종이 전한다고 한다. 대 표적인 극목으로 「팔건의 (八件衣)」 「요동궁(間東宮)」 「백화루(百花 樓)」 「청석령 (靑石嶺)」 등 40 여 종이 있다. 43)

® 용암(龍岩) 도사회 (道士戱) 복건偏健) 남서쪽 용암(龍岩)지방에 행해지는 도교(道敎)의 법

43) 『中國戱曲劇種手冊 J p. 207 (中國戱劇出版社) 참조.

사(法事)에서 발전한 것이다. 〈도사회났든 일찌기 재초(齋酸)의식 중에 희극적인 요소가 발전한 것이나 지방희의 영향도 크게 받은 듯하다. 국종은 문희 (幻敗)와 무희 (武戱)로 나뉘어지는데, 문희 (文 戱)는 희곡의 절자회 (折子戱)와 비슷하며, 무희 (武戱)에는 각종 무 술과 잡기 (雜技)가 함께 연출된다. 극목에는 「할자산명 (諸子算命)」 「수혹구정 (收黑狗精)」 「유해희섬 (劉海戱辨)」 「목련구모(目連救母)」 「팔선 (八仙)」 등이 있다. 한국(漢劇) • 조극(潮劇)과 함께 무대에 연출되었을 적에도 〈도사희났근 쉬운 대화와 자유로운 형식으로 말 미암아 관중들의 호응을 크게 받았었다고 한다. 44)

44) 葉明生, 「試論道敎戱劇與〈道士戱〉」 (『民族藝術』 第 1 期, 1989) 참조.

@ 타성희(打城戱) 복건偏健) 천주凍州) • 진강(晉江)일대에 승도법사(僧組去事)를 기초로 하여 발전한 것으로, 법사회 (法事戱) • 화상희 (和尙戱) • 도 사회(道士戱) 등으로도 불리운다. 〈터성희났근 본시 중이나 도사에 의한 법사(法事)가 끝난 뒤에 연출되던 것이었는데, 처츰 민간의 상의 (喪儀)나 우란분회 儒蘭盆會)와 중원절 (中元節) 같은 때에도 연 출되게 되었다. 그 음악은 옛 인형극의 영향이 가장 뚜렷하고, 거 기에 도교와 불교음악이 보태어전 성격의 것이다. 극목(;IJ目)도 옛 인형극의 영향을 받아 신화와 전설, 역사적인 이야기 및 무협극 (武俠劇) 등이 주종을 이룬다. 45)

45) 『中國戱曲劇朋i手冊』 p. 545 (中國戱劇出版社) 참조.

® 호산(湖油) 영가(英歌) 광동(廣東)의 산두(油頭)지방에서 세모頃暮) • 원소玩消:)나 수 신새회 個神奏會) 때 연출되는 것으로 영가희 (英歌戱)라고도 부른 다. 〈영가났근 전봉(前楠) • 중봉(中ffll) • 후봉(後桐)으로 나뉘어 연 출되는데, 간혹 중봉과 후봉을 합쳐 함께 후붕이라 부르기도 한 다. 전봉은 20 내지 30 명이 『 수호전』에 나오는 이규(李達) • 양지

(楊志) • 전명 (秦明)과 노지심 (魯智深) • 무송(武松) 및 손이낭(孫二 娘) • 고대낭(顧大娘) 등으로 분장하여 춤추고 노래하면서, 축역 (逐 疾)과 기복(細福)의 뜻도 나타낸다. 중봉(中桐)과 후붕(後梅)은 간 단한 가무와 잡기 및 무술로써 이루어지는데, 특히 후봉에서 연출 하는 18 종의 무술연출은 「터조기 (打鳥記)」라 부른다. 결국 〈영가〉 는 민간의 각종 연예가 종합되어 이루어전 것이라 할 수 있다. 46) ® 내몽고(內蒙古)의 〈후두커천〔呼圓克 `i , L\ 〕 >

46) 陳人, 멤距流 (댜닳멈釋編 廣東舞踏學校 • 普寧縣 文化 局 編) 참조.

〈후두커친冷 〈축복(f覇m ) 구자(求子)〉의 뜻이라 하며, 하오더꺼 친〔好德歌沈〕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축역 (逐疾)〉의 뜻이라 한 다. 본시 내몽고에 속하던 요녕 (遼寧) 적봉시 (赤峯市) 이북 일대 몽한족(蒙漢族)이 섞여 사는 지역에 행해진다. 〈후투커친 X 는 대체 로 디움과 같은 네 부분으로 나뉘어 연출된다• 첫째 , 출발로 연출 자들이 가면을 쓰고 손오공(孫悟空) ·저팔계(猪八戒) 등으로 분장 한 자들을 앞세우고 중간에 백로두(白老頭)가 자리잡고 노래하고 춤추며 나온다. 둘째,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상서로운 노래와 춤으 로 백로두(白老頭)의 지휘 아래 집주인을 위하여 축복과 구사(福 邪)를 행한다. 셋째, 집안에서 자손의 번창 같은 특별한 축원을 노 래와 춤으로 한다. 넷째, 연출자들이 「청조가(靑鳥歌)」를 노래하면 주인은 이들이 떠나려는 것으로 알고 만류하며, 결국은 이들은 노 래를 부르면서 떠나 다른 집으로 향한다. 연극적인 성격은 다른 고 장의 〈나회〉에 비하여 매우 약하다 .47)

47) 烏國政 • 李寶祥, 「試論蒙古族民間歌舞〈呼圓克 r,C` 〉」 (『民族藝術』 第 2 期, 1989) 참조.

® 장회(藏戱) 티벳에는 〈나〉란 말이나 〈나〉의 개념이 없지만, 서장(西藏) 각

지에는 〈나희〉와 흡사한 것들이 무술.(filffi)3!} 분교(宋敎) • 불교 등 종교의식을 바탕으로 다양하게 발달해 있다. 서장의 산남(山南)지 방에 행해지는 백면구희 (白面具戱, 拔唄戱 • 藏戱로도 부름)는 「낙상 법왕(諾桑法王)」이라는 대표적인 극목®j目)을 지닌 〈나회〉와 아주 가까운 것이다. 일객칙(日瑢則)의 앙인(昴仁)지방의 남면구個面具 戱 阿苗竝祖勘鼓·藏劇幻탸:부름)는 「팔대장희(八大藏戱)」 「영인 공포다길 (1 嚴人貢布多吉)」 「열경와(熱瓊姓)」 「덕파단보(德巴丹保)」 등 의 국종을 지닌 가면극이다. 이 밖에도 창도(昌都)지방의 창도희 (昌 都戱), 사천(四川) 덕격(德格)의 경경사便慶寺)를 중심으로 하는 덕격희 (德格戱) 등 여러 가지 〈나희〉라 볼 수 있는 가면놀이 등이 있다. 특히 안다(安多)지방울 중심으로 청해 (靑海) • 감숙(甘肅) • 사천(四 ll) 의 일부지역에까지 퍼져 있는 안다장희(安多藏載)는 가 면이 정교한 것이 많고, 여러 가지 대표적인 국종을 지니고 있 다 .48)

48) 劉志韋 「藏戱與藏區的灘藝術」 (『民族藝術』 第 3 期, 1989) , 葛文 「安多藏 戱源流及其演變」 (『四川民族史志』 第 1 期, 1989) 참조.

이 밖에도 중국 각지에는 무수한 〈나희〉가 전래되고 있다. 다만 아직도 체계적으로 조사 정리되지 못하고 있고, 〈나희〉의 개념조 차도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각 지방과 여러 민족들의 민속에 의하여 제각기 달라지고, 여러 가지 그들이 믿는 종교에 의하여 제각기 성격이 변화한 것들이어서, 한 마디로 〈나희〉의 뜻이나 성격을 설명하기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 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옛 송(宋) 이전의 중국의 정통적인 희극이라 할 수 있는 〈가무희〉의 명맥이, 사대부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 사이에 민간 각지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로 지금껏 전승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많은 학자들이 〈나희〉에서 새삼 오랫동안 소

홀히 하여 왔던 중국희극의 전통을 발견하고는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희극사의 올바론 이해와 중국희극 발전 의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고대의 ‘가무희'〉의 연구부 터 손을 대어 그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중 국의 〈나희났근 그 자체가 여러 지방희 (地方戱)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학자들 자신이 또한 그 지방희의 영향 때문에 〈나희녔t 올바로 보지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나 희났근 중국 고대의 〈가무희녔卜 올바로 이해하여야만 그 특칭을 제 대로 파악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

부록 그림으로 보는 중국희극사

(1)

(2)

(3)

상(商) 주(周) 청동가면 (1) 미국 시애들 미술관 소장품 모사 (2) 미국 시카고 예술학원 소장품 모사(3) 미국 시카고 예술학원 소장품 모사

중원(中原)에서 출토된 상(商) 주(周) 시대의 청동가면

騎 靑閃 훔尸申

상(商) 주(周) 시대 가면과 관련된 갑골문자(甲骨文字)

상주(商周) 시대의 각종동가면 양서

j

二 사천성 (四川省) 광한(廣漢)에서 출토된 은상(殷商)대 가면

긋〔/\^/e. -二셰니”0 ’ i5l\|_ 》冒言겉T一 三“` 률:e_l5〉Q쩌 广 뻬 (*)가礎머可(困遠B麻報)버(印蟲世忠中)材i뻐曲l(八※m)014

k可전 bi 國골) , 零守

(

한( 漢 )대 사천(四川) 성도 ( 成都) 양자산( 揚子 山)에서 출토된 화상전( 蓋 像蔣) 탁본

사천(四川) 성도(成都)에서 출토된 한(漢)대 화상전( 盡 像浦)

호남(湖南) 장사(長沙)에서 출토된 채최무녀칠령전시도(彩繪舞女漆産展視岡) 모본(慕本).

전국시대(戰國時代)

사천(四川) 성도(成都) 백화담(百花潭)에서 출토된

연락어렵공전문호(冥樂漁撮功戰紋登) 탁본의 일부분. 전국시대

i 연락어렵공전문호의 모본

하남(河南) 님양(南腸)에서 출토된 서한(西漢) 악무화상전(樂舞 盡 像碑) 탁본

산동(山束) 기남(祈南) 고묘에서 발굴된 한대 (漢代)의 백희 (百戱) 화상석 (蓋像石) 탁본

희룡(戱龍) 작무(雀舞)

남북조(南北朝)

하남 (河南) 등현 (鄧縣) 에서 출토된 악무화상전 (樂舞 盡像碑 )

위와같음

(南北朝)

구자악대 (龜炫樂隊) 송(宋)인 그립

하남(河南) 안양(安腸) 범수묘(范粹墓)에서 출토된 황유자편호악부도(黃柚亞 福蓋樂舞圓) 및 그 모본(慕本)

, 1 남양의 귀족 묘실에 출토

당(唐) 서무공(徐戀功)의 무덤벽화

당나라 대무(對舞) 여용(女fm)

막고굴(莫高窟) 18 뼈 일부 모사 막고굴 32~ 일부 모사

성당(盛唐) 돈황벽화(敦煙壁 益 )

만당(晩唐) 돈황벽화. 막고굴 1~ 일부 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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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대(五代) 잔치 그림

고대 집국 그림. 고궁박물원 (故宮博物院)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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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봉산 묘희도(妙峰山 廟會園). 1815 년 그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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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火神 項羽 'l I ...- 1 / ? 責任 秦操

청(淸)대 승평서반상보(昇平署粉相譜), 중국 예술연구원 희곡연구소 소장

朝匡胤 廉顔 關羽 包極

熊費 單雄信 尉迎敬德 龍王 매씨 철옥헌 (梅氏綴玉軒) 소장 명 (明)대 검보(險譜)의 모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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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良 (-\) 廉顔(--t) 關羽(---t) 包極(t) 牛畢(昆) 馬武(-t) 尉迎敬德(昆) 黃業(~) 매씨 철옥헌 소장 청 (淸) 초 곤(昆) 익 (-\;;) 검보(險譜)의 모본

서장(西藏) 산남지구(山南地區)의 가면놀이인 신무(神舞)

찾아보기•인명

기 가서한(哥舒翰) 195 가의 (賈說) 89, 130 갈수성 (葛守城) 276, 281, 287 갈천씨(葛天氏) 44 갈홍(葛洪) u7, 143 감반(甘盤) 62 강엄 (江海) 172 강총(江總) 169, 212 계륜(季倫) 144 계찰(季札) 47 계함(季咸) 6I 고경성(願景星) 310 고기원(顧起元) 3o9 고승문(高崇文) I96 고적 (高適) I95 고전(顧뤽 I34 곡륙을(曲六乙) 325-328 공손경(公孫卿) 9I 공영달(孔疾達) 45, 5:z , IO: Z, IJ O 공자(孔子) 43, 8:z , 129 곽말약(郭洙若) 37, 56 곽무천 (郭茂情) 48, r23, 136, 143, 207, 250 곽회 (郭懷) I42 교림 (喬麻) 259 구양여 천 (歐陽予情) 30 굴대균(屈大均) 3I5

굴원 (屈原) 74, 89 L 나은(羅隱) 260 남탁 (南卓) 220, 249 내득옹(兩得翁) 22, 128, 242 t二 단안절 (段安節) 24, 125, 127, 128, 175, 196, 201, 205, 218, 222, 238, 258 단옥재(段玉裁) 58 단장경 (檀長卿) 125 당소(唐紹) 195 당현종(唐玄宗) 23, 194 도종의 (陶宗儀) 199, 302 독고신숙(獨孤申叔) 255-257 동영 (董~) 288, 292 동함( 董 含) 310 두기 (杜菱) 134 두목(杜牧) 22I 두보(杜甫) 232 두우(杜佑) 158, 175, 201, 205, 237, 258 등야암부(藤野岩夫) 77 등정 (鄧靜) I34

口 마균(馬勘 135 마단림 (馬端臨) 181, 277 마령 (馬令) 199, 266 마르셀 그라네 51, 68 마융(馬融) 61 마존포 (馬尊 II) 17 매승(枚乘) &9 맹각구(孟角tt) 276, 281, 287 맹강(孟康) II9 맹원로(孟元老) 22, 242, 249, 269, 273 모문석 (毛文錫) 254 무덕선사(無德禪師) 22I 묵특선우(冒頓單于) 128 문강(文康) 162, 208 문영 (文聲) 267 문영 (文疾) IO3, IO5 문왕(文王) 44 문일다(聞一多) 76 닌 반고(盤古) 43 배송지 (裝松之) 133-135, 138, 142, 148 배온(装墓) I89 백 거 이 (白居易) 35, 212, 247

백명달(白明達) I88 범인(范因) I22 범전강(范傳康) 223 범 터 (范Ui:) 128, 197, 223 복양(服養) I34 부열(傳說) 62 부현(傅玄) I35 빈모가(賓牟賈) 43 .J.. 사마광(司馬光) 190 사마법 (司馬法) 16 사마상여 (司馬相如) 89, 113 사마천(司馬遷) 82, 95 사마표(司馬)Ji§) 92, I27 사변(謝變) 169 사호 (史浩) 289, 292 상관당경 (上官唐卿) 223 상비월 (常非月 ) 23, 204 서가(徐河) 321 서복조(徐復祚) 314 서위 (徐滑) 271 서인(徐~) 254 서 호로인 (西湖老人) 242 석 숭 (石崇) 143, 145 석 탑 (石람) 126, 222 설능(薛能) 223 섭법선(葉法善) 246 섭옥화(葉玉華) 3o4, 3o5

섭 자기 ( 葉子奇 ) 229 섭장해(葉長海) 26 소보권(蓋賓卷) 174 소식 (孫試) 56, 283 소악(森'g) 232 소옹(少翁) 91 손덕소(孫德昭) 252 손해제 (孫稽第) 278, 301 송경 (宋璟) 195 송고종(宋高宗) 33 송민구(宋敏求) 251 송옥 (宋玉) 74, 89 순(舜) 42, 44 시옥(柴玉) 134 신농(神農) 54 심 괄 (沈括) 248, 290 심 아지 (沈亞之) 292 심충(沈充) 150 。 아골타 33 아리스토텔레스 27 악사 (樂史) 145, 246 안지추(顔之推) I47 양견(楊堅) I87 양경 술 (楊敬述) 245, 246 양웅(揚雄) 60 양현지 (楊衛之) I85 양홍(楊 8L) I39

여경천(呂敬 遷) 223 여영량(余永梁) 56 여 원태 (呂元泰) 232, 233, 237 연지 (關氏) 129 오균(吳均) 153 오안태 (吳安泰) 158 오자목(吳自牧) 22, 105, 242, 270, 276, 281 오질(吳質) 138 옹유조(雍由調) 113 완원(阮元) 45 왕국유(王國維) 9, 29, 45, 53, 58, 76, 127, 199, 239, 249, 251, 272, 275, 289, 290, 303, 3°4 왕당(王業) 242 왕당(王謙) 196 왕륭(王隆) 92 왕명청(王明淸) 236 왕명청(王明 淸 ) 288 왕무경(王無競) 168, 207 왕부(王博) 251 왕사평 (王士平) 254-256 왕유(王維) 153 왕일(王逸) 73 왕작(王j;tJ) 291 왕추계 (王秋桂) 324 왕충(王充) 96, 102 요합(姚合) 197 요화(姚華) 17

우(禹) 42, 44, 60 우맹(優孟) 82 우전(優!m) 82 우홍(牛弘) 188 울림왕(鬱林王) 169 원신(袁信) 142 원재 (元載) 195 원전(元積) 197, 212, 215 위소(韋昭) 80, ll9 위현(韋~) 206 유계술(劉季述) 251, 252 유량(庚亮) 146, 189 유무기 (柳無思) 250 유방(劉邦) 86, 251 유비 (劉備) 137 유소(劉昭) 92, 100, 130 유언사(劉言史) 218 유영제 (劉永濟) 272, 288, 289, 29I 유우석(劉禹錫) 206 유욱(柳或) 182 유채춘(劉採春) 128, 197, 223 유천수(劉泉水) 223 유향(劉向) 80 육간여(陸偏如) 152 육유 (陸游) 23, 225, 297 육홍정 (陸鴻浙) 223 윤제 (尹濟) 134 윤호(尹胡) 134 웅소(應助) 53, 74, 103

의강(義康) I55 의계 (義季) I55 의 양공주(義陽公主) 254-257 이가명 (李家明) I99 이 공좌 (李公佐) 249 이궤 (李軌) 60 이기씨 (伊耆氏) 54 이단(李端) 2I8 이 덕 유 (李德裕) 268 이 백 (李白) 168, 207, 232, 250 이상은(李商隱) I99 이선(李選) IOO 이선학(李仙鶴) 223 이소군(李少君) 9I 이소창(李噴倉) 242 이 심 형 (李心衡) 229 이연년(李延年) 91, II3 이우(李尤) IIO 이윤(伊尹) 60, 62 이조(李肇) 256 이척(伊涉) 62 이하(李賀) 168, 207, 250, 253, 267 임반당(任半塘), 임이북(任二北) 29, 30, I 58, 188, 198, 199, 202, 206, 207, 218, 221, 231, 232, 242, 258, 2 야, 265, 268, 275 임방(任明) 104

x; 자옥(子玉) I8 장단의 (張端義) 283 장석 (張錫) 204 장야호(張野孤) I25, 222 장열 (張說) 228, 234, 236, 237 장융(張融) I69 장의조(張義潮) 2I7 장형 (張衡) 97, 106, 134, 173, 2I6 장호(張祐) 239 정만균(鄭萬鈴) 201, 244 정선현(丁仙現) 정우(鄭唱) 245 정초(鄭椎) 250 정현(鄭玄) 4o, 46, 48, 52, 55, 69, 130 제곡(帝崇) 43 제 여산(齊如山) ·10 , 20 조린 (趙~) 199, 224 조문소(趙文節) I53 조방(曹芳) I42 조비 (曹조) I33, I34 조숙도 (曹叔度) 223 조식 (曹植) I24, I33, I49 조언위 (趙彦衛) 296 조우(曹禹) 323 조조(曹操) 33

조진(曹眞) I38 조훈(曹動) 289 좌연년 (左延年) 134 주거비 (周去非) 297 주계남(周季南) 128, 197, 223 주계승(周季崇) 128, 197, 223 주공(周公) 43, 44 주권(朱權) 3o3 주무왕(周武王) 42, 44, 55, 7° 주밀 (周密) 242, 246, 270, 276, 279, 281, 286 주법고(周法高) 56 주사(周捨) 157, 207 주연(周延) 126 주유돈(朱有jtt) 305 주책종(周策縱) 7I 주화빈(周華斌) 56 주희 (朱熹) 67, 74 중장통(仲長統) 96 증영의 (曾永義) I4 증조(曾梅) m8, 288 증포 (曾布) 288, 292 진몽가(陳夢家) 59 진본례(陳本禮) 75 전사원 (陳士元) 229 진시황(秦始皇) 86 진양(陳陽) 104, 128, 245, 248, 253 진평 (陳平) I29

* 채남(蔡南), 채남사(蔡南史) 255-257 채옹(蔡~) IOI 척시 (威施) 8o 천상충웅(川上忠雄) 46, 68 청목정아(靑木正兒) 76 초순 (魚循) 24, 242 최령홈(崔令欽) I75, I79, 20I, 203 최표(崔約) II3, 140 축윤명 (祝允明) 27I 칭기즈 칸 33 구 쿠빌라이 33 뜨 타령 (駐鈴) 33° 탕(湯) 42, 44 고 포조(結照) 169, 2I2 풍숙(馮肅) I34

굵 하사시(夏寫時) 35 한고조(漢高祖) 85, 90, I2I, 122, 123 한무제(漢武帝) 87 한성제(漢成帝) I32 한장제(漢章帝) 124 한화제(漢和帝) 126 항백(項伯) 123 항우(項羽) 86, 251 항장(項莊) I23 향조린(向兆麟) 317 허백(許伯) 125 허신(許愼) 16 허자(許慈) 137 허지산(許地山) 250 혜림 (慧f#) 231, 235, 237 호기 (胡思) 3o4 호봉형 (胡奉衡) 319 호참(胡潛) I37 호적 (胡適) 76 홍매 (洪遇) 그 75 홍손(洪酉) 278 환관(桓寬) 23, 92, 95, 112, 119 환담(桓譯) 73 환선무(桓宣武) I73 황곤(黃哀) I92 황번작(黃幡緯) 125, 222

황제 (黃帝) 42, 44

회계공주(會稽公主) I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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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갈고록 (邦鼓錄) 220, 249 객좌취어 (客座賢語) 3o9 검기사 (§l j器詞) 232 고국각색고(古劇角色考) 53, 1 27, 199, 249 고금악록(古今樂錄) I50, I55, I 야, I7I 고금악부 (古今樂府) I44 고금주(古今注) II3, 140 고당부(高唐試) 89 고려 사 (高麗史) 악지 (樂志) 289 고무의 여육시고(古壓醫與六詩考) 7I 곡녀번(吳女吳) 197 곡량전(穀梁傳) 82 공막무가(公莫舞歌) 253 공양해고(公羊解喆) 82 공자가어 (孔子家語) 82 공작동남비 (孔雀東南飛) 35 공전(孔傳) 6I 관자(管子) 권수(權修) 64 광동신어 (廣東新語) 315 괴뢰희고원(偶偏戱考原) 278, 301 교방기 (敎坊記) 155, 175, 176, 179, 202, 203, 205, 219, 233, 249

교사가 (邪祀歌) 88, 92 교아(願兒) 267 구가(九歌) I1, 20, 73-79, 89 구가신편 (九歌新編) 76 구당서(舊唐 書 ) 여복지 (輿服志) 195 송경 전 (宋璟傳) 195 예의지 (禮儀志) 232 예종본기 (睿宗本紀) 194 왕무준(王武俊) 254 유학하 (信學下) 204 음악지 (音樂志) 13, 40, 176, 177, 180, 181, 201, 205, 244 장열전 (張說傳) 228 중종기 ( 中 宗紀) 226 학처준열전 (處俊列傳) 193 구변(九辯) 89 구오대 사(舊五代史) 후비 열전 (后妃列傳) 265 구잡극 (句雜劇) 사 (詞) 283 국국예술휘고(國劇藝術案考) 10, 20 국사보(國史補) 248, 256 국어(國語) 64 국어(國語) 정어 (鄭語) 8o 전어 (晉語) 8I 초어 하 (楚語下) 59, 73 국풍(國風) 46, 굴사정의(屈辭精義)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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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이 집 ( 貴 耳集) 283 국설 (劇說) 24, 242 금단곡(金丹曲) 167 금릉곡(金陵曲) 168 금병매사화(金原梅詞話) 3o5, 313 금천쇄기 (金川項記) 229 기주지 (莊州志) 310, 312 L- 나례 (價禮)와 잡희 (雜戱) 324 나희 국종자료회 편 ({難戱劇種資料 區編) 330 낙양가람기 (洛陽伽藍記) I85 남가태수전(南祠太守傳) 249 남당서(南唐 書 ) 귀명전(歸明傳) I99 담해 전 (談階傳) 266 남사 (南史) 순리 열전 (循吏列傳) I74 남사서록(南詞敍錄) 271 남제서 (南齊害) 156, 169, 174, I75 남제서 (南齊書) 악지 (樂志) I24, 139, 141, 170, 171, 173 노학암필기 (老學菴筆記) 297 노호문강사(老胡文康辭) I57 논어 (論語) 향당(鄕黨) 53 녹주전 (綠珠傳) I45

논형 (論衡) 96, 102 뇌 (質) 45 C 담희극(談뜸劇) I7 당서 (唐 書 ) 악지 (樂志) 49, 123, 143 당송대 곡고 (唐宋大曲考) 290 당어림 (唐語林) 196 당회요(唐會要) 196, 246, 251 당희롱(唐戱弄) 158, 188, 198, 199, 202, 206, 207, 218, 221, 231, 242, 258, 2 야, 265, 268 대국장공주비문(代園長公主碑文) 201 대나부(大灘試) 259 대 업습유(大業捨遺) 191 대인부(大人試) 89 대정부지 (大定府志) 319 대정장(大正藏) 221 도궁박미 (道宮薄婚) 288, 292 도성 기 승(都城紀勝) 22, 128, 242 독단(獨斷) IOI 돈황곡교록(敦煙曲校錄) 232 돈황곡초람(敦燒曲初探) 275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 22, 242, 249, 269, 273, 276, 279, 280, 288, 295, 296, 298,

30I 동경 부 (東京試) 97, IOO 동만죽지사(明戀竹枝詞) 319 동문지선(東門之~) 47 동백곡(桐柏曲) I65 동작기 (銅雀技) I36 동작대 (銅雀臺) I36 동파지 림 (東坡志林) 56 두양잡편 (杜陽雜編) 232, 233 등도자호색부(登徒子好色試) 89 EI 마다루자 (摩多樓子) 250 막수악(莫怒樂) I55 맹강녀 (孟姜女) 317, 318 모시 (毛詩) 서 (序) 45 모전(毛傳) 46 목련구모잠극(目連救母雜劇) 279, 288 몽계필담(夢溪筆談) 248 몽량록(夢梁錄) 22, 242, 270, 274, 276, 281-283, 285, 287, 296, 300, 301 무(武) 44, 45 무계문학론(巫系文學論) 77 무덕 선사어 록(無德禪師語錄) 221 무립 구사(武林舊事) 242, 270,

276, 279, 281, 286, 296, 301 무봉진은대 곡(셉峯 眞隱大曲) 289 무서 (舞序) 139 묵자(墨子) 비악(非樂) 37, 60 문선(文選) 100 문헌통고(文獻通考) 181, 277 반(般) 45 방장곡(方丈曲) 166 방제곡(方諸曲) 166, 169 배 가사 (俳歌辭) 170 백모당집 (白茅葉集) 311 백호통(白虎通) 예 악(禮樂) 43 번승록(繁勝錄) 242 번쾌 입홍문부(吳增入鴻門試) 254 법곡도정 (法曲道情) 289 법수곡(法 壽 曲) 250 법 언 (法言) 중려 (重黎) 60 벽계만지 (碧難漫志) 29I 별강남(別江南) I58 복조부(책鳥試) 89 봉대곡(鳳臺曲) 165, 168, 207 봉황곡(鳳凰曲) 168, 207 봉황함서 기 사 (鳳凰衍 耆 使辭) 170 북몽쇄 언 (北夢項言) 265 북사(北史) 182, 190, 239 북제서 (北齊 容 ) 180, 183 북주서 (北周害) 선제 기 (宣帝紀)

228 人 사기 (史記) 123, 130 골계 열전 (滑稽列傳) 82 대완열전(大苑列傳) II2 봉선서 (封禪 書 ) 74, 87, 89, 93 악서 (樂 書 ) 87, 89 이사열전(李斯列傳) 104 효무본기 (孝武本紀) 89 사남부지 (思南府志) 3I3 사리불(舍利弗) 250 사어산신녀가(祠漁山神女歌) I53 사원(詞源) 290 산악(散樂) 170 삼강지략(三岡識홍) 310 삼국지 (三國志) 135, 138 위 서 (魏 書 ) 133, 135, 142, 147, 148 촉서 (蜀 害 ) I37 상림부(上林試) 89 상운악(上雲樂) 24, 170, 219 서경 ( 書 經) 상서 (商劃 이 훈 (伊訓) 60 순전(舜典) 41 익직 (益稷) 41 주서 (周書) 군석 (君奭) 61 서경부(西京試) Io6, m6, II7,

I34, I73, 2I6 서 경 잡기 (西京雜記) II7, 143 서량기 (西涼使) 2I2, 2I5 석노교(借奴~) 곡파(曲破) 289 석성악(石城樂) l55 설문해자(說文解字) I6, I8, 57, 58, 61 설부(說엮) 244 소동파전집 (蘇東坡全集) 283 소마차(蘇摩造) 228 소막차(蘇莫連) 234 소사곡(蕭史曲) l69 소악원본(笑樂院本) 3o5 속제해기 (續齊諸記) I53 속한서 지 (續漢書志) 92, I27 송금잡국고 (宋金雜劇考) 3°4 송대 가무국곡록요(宋代歌舞劇曲 錄要) 272, 288, 292 송도청지 (松桃廳志) 319 송사(宋史) 악지(樂志) 233, 275, 280, 290 송사(宋史) 지리지 (地理志) 72 송서 (宋 書 ) 백 관지 (百官志) I27 송서 (宋書) 악지 (樂志) 138, 150, 169 송원기예잡고(宋元使藝雜考) 242 송원희곡고(宋元戱曲考) 송원회

곡사(宋元戱曲史) 9, 29, 58, 76, 127, 239, 251, 272, 275, 289, 3o3, 3o4 송은악부 (松隱樂府) 289 수서(隋 書 ) 유욱전 (柳描傳) 192 음 악 지 (音 樂 志) 146, 157, 170, 171, 183, 184, 187, 189, 190, 212 지리지 (地理志) 72 수식도경 (水飾圖經) 191 수조가두(水調歌頭) 288, 292 순자(荀子) 악론(樂論) 37 왕제 (王制) 64 술이 기 (述異記) 104 시경 (詩經) 45-47, 51, 73 빈풍(幽風) 칠월(七月) 67 소아(小雅) 대전(大田) 67 소아(小雅) 보전 (甫田) 65 위 풍 (魏風) 맹 (t民) 69 전풍(陳風) 완구(苑丘) 70 시경시대의 악무(樂舞) 68 시나(市價) 260 시집전(詩集傳) 67 시학(詩學) 27 신 당서 (新唐書) 고적 전 (高適傳) 195 무평일전(武平一傳) 240, 243 예악지 (禮樂志) 247, 258

오행 지 (五行志) 230 제 제 공주열 전 (諸帝公主列傳) 255 신론(新論) 73 신무행 (神巫行) 3r7 신서 (新 書 ) 130 신오대 사(新五代史) 영 관전 (倫 官傳) 2 야, 265 신현가(神弦歌) I52·I55 쌍두련령 (雙頭蓮令) 292, 294, 295 O 아나괴 (阿那項) 250 아랑위 구나(兒郞偉隱灘) 261, 262 악부고사고 (樂府故事考) 152 악부시 집 (樂府詩集) 48, 123, 136, 138, 140, 141, 143, 144, 150, 153, 155, 157, 168-172, 207, 250, 253 악부아사(樂府雅詞) 288 악부잡록(樂府雜錄) 24, 125, 127, 128, 176-178, 196, 201, 202, 205, 218, 219, 222, 233, 238, 243, 258 악부해제 (樂府解題) 140, 150 악서 (樂書) 104, 128, 245, 248, 253

악위 (樂緯) 43 악창현지 (樂昌縣志) 3 I6 안세방중가(安世房中歌) 88, 92 안씨가훈(顔氏家訓) I47 양가장(楊家將) 3I9 양가장연의(楊家將演義) 3I9 양곡만록(陽谷設錄) 278 양태진의전(楊太眞外傳) 246 어가오(魚家徹) 293·295 업도고사(鄭都故事) 136 여동빈화월신선회 (呂洞賓花月 神 仙會) 잡극 (雜劇) 3o5 여씨춘추(呂氏春秋) 계동기 (季冬紀) 53 계춘기 (季春紀) 52 계하기(季夏紀) 37 고악(古樂) 44 내칙 (內則) 44 물궁(物~) 64 중추기(仲秋紀) 52 중하기 (仲夏紀) 37, 43 여평부지 (黎平府志) 319 여평죽지사(黎平竹枝詞) 319 열녀전(烈女傳) 80 열자(列子) 설부(說符) 72 당문(湯問) 128 황제 (黃帝) 61 염철론(鹽鐵論) 구궤(救唐) 95

산부족 (散不足) 23, 92, 96, 1 I2, I 19, I 20 자권(刺權) 121 영담용낭(땄談容娘) 23, 204 영신새사례절전부사십곡궁조(迎 神奏社禮節傳簿四十曲宮調) 313 영 의 대 답(嶺外代答) 297 예기 (禮記) 64 계동(季冬) 102 교특생(邪特性) 54 단궁하(檀弓下) 129 명당위 (明堂位) 49 문왕세 자(文王世子) 44, 49 악기 (樂記) 37-4o, 43, 8o 왕제 (王制) 95 월령 (月令) 5°, 51, 55, 65 잡기 (雜記) 55 예 상우의 가(震娑羽衣歌) 247 예전(禮傳) 53 오비곡(烏飛曲) 153 오야제 (烏夜~) 15 5 오질별전 (吳質別傳) 138 오희 (吳姬) 223 옥귀곡(玉龜曲) 167 옥호야사(玉登野史) 267 왕괴 (王船) 271 왕발원본(王勃院本) 3°5 왕소군(王昭君) 143-145, 188 왕중승댁야관무호등(王中丞宅夜

觀舞胡騰) 2I8 외담(狼談) 27I 용산현지(龍山縣志) 3I8 용아발두(容兒鉢頭) 239 운계우의(雲溪友議) 128, I97, 223 운록만초(雲鷲漫妙) 297 원릉현지(玩陵縣志) 317 원본고 (院本考) 3°4 원사(元史) 예 악지 (禮樂志) 306 제 사지 (祭祀志) 3°7 형법사(刑法四) 3°7 원전장(元典章) 형부(刑部) 308 위략(魏흥) I35 위서 (魏書) I33, 181, 186, 298 유빈객가화록(劉賓客家話錄) 206 유설(類說) m8 유양직례주총지 (酉陽直隸州總志) 320 육문학자전(陸文學自傳) 225 의례(儀禮) 64 이견지 (夷堅志) 275 이 문요문집 (李文鏡文集) 268 인도문학(印度文學) 250 인화록(因話錄) 199, 224, 225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231, 235-237

임계현지 (臨桂縣志) 320 A 자금 (子裕) 47, 69 자리현지 (慈利縣志) 312 자허부(子虛試) 89 작(酷) 45 장구(章句) 73, 74 장문부(長門試) 89 장수선헌향첨수(長 壽 仙獻香添 壽 ) 원본 (院本) 3o5 장안지 (長安志) :z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 61 천운(天運) 61 천하(天下) 44 장한가(長限歌) 35 전계가(前溪歌 )150 전당문(全唐文) 225, 259, :z6 0 전당시 (全唐詩) 21:z , :z1 5, 218, 223, :z3 2, :z3 4, :z3 9, :z6 7 정미편(精微篇) 124 정운(正韻) I8 정풍(鄭風) 47 제동야어 (齊東野語) 246 제 사이 어해의 (諸史夷語解義) 229 제 석 종규구나문 (除夕鍾旭福價文) 261

제 왕세 기 (帝王世紀) 43 조굴원부(弟屈原賊) 89 조만전 (曹盛傳) 133 조서 (趙 書 ) 126 조정녀 (趙貞女) 271 좌전 (左傳) 18, 65 좌전 (左傳) 양공 (襄公) 47 주남(周南) 47 주례 (周禮) 14, 16, 40, 83 악사(樂師) 45 춘관 (春官) 42, 48, 49, 52, 62, 63, 65 하관사마(夏官司馬) 52, .53 죽서기년(竹 書 紀年) 61 중국 고대의 제의와 노래 51 중국나희 나문화통신 (中 國灘戱灘 文化通試) 324 중국의 가원(歌垣)에 있어서의 가무희 68 중국희곡연구자료초집 (中國戱曲 硏究資料初輯) 30 증정주의택고집람(增定奏議擇稿 輯覽) 230 지신록(知新錄) 242 전보(陳譜) 69 진서 (晉害) 170 악지 (樂志) 121, 122, 134 예 술열전 (藝術列傳) 147 예지 (禮志) 136 하통전 (夏統傳) I48

진야호사(進夜胡 詞 ) 263 진양문시 (津腸門詩) 245 전유(i奏消) 47 전풍 (陳風) 46, 69 집영전춘연교방사(集英殿春妻敎 坊詞) 283 六 찬성공(讚成功) 254 창언(昌言) 96 채 련 (採蓮) 289, 292 채 련곡파 (採蓮曲破) 293, 295 채련령 (採蓮令) 293, 295 채 련무(採蓮舞) 289, 292 천마가(天馬歌) 88 철경록(綴耕錄) 199, 3°2, 3o3 청계소고곡(靑溪小姑曲) 153 청패류초(淸碑類抄) 32I 초목자(草木子) 229 초사(楚辭) 구가(九歌)의 무곡 적 (巫曲的)인 구성 76 초사 (楚辭) II, 20, 74, 89 초사(楚辭) 이소(離墓) 61, 74 초생 반석 하(草生盤石下) 154 추풍사(秋風辭) 87 칠발(七發) 89

E; 탁혜 (擇令) 47, 69 태일지가(太一之歌) 87 태 평 광기 (太平廣記) I83, I 태평어람(太平御覽) 73, 126 태 화정 음보 (太和正音譜) 3o3 통감(通鑑) I90 통전 (通典) I58, I75, I77, 2OI, 202, 205, 237-238, 250, 258 통지 (通志) 악략(樂홍) 250 고 평 락관부(平樂觀試) IIO-II2, II6, 120 풍속통의 (風俗通義) 53, 74, 131 풍연전(馮燕傳) 292 굵 하전 (河傳) 294, 295 하황(河禮) 22I 한중 두 나라의 가무(歌舞)와 잡희 (雜戱) I2 한구의 (漢舊儀) IOO 한비자(韓非子) 십과(十過) 37 한서(漢書) 개관요전(蓋寬鏡傳) I25

광형전(匡衡傳) 70 교사지 하(숫 b 祀志下) 73 무제기 (武帝紀) IO3 서역전찬(西域傳贊) II2, I2I, 124 예악지(禮樂志) 85, 86, 88, 9I, m8 원후전(元后傳) I32 장우전(張禹傳) l31 지리지(地理志) 70, 72 형법지 (flj法志) 104 한식(寒食) 197 향나(鄕灘) 311 형주부지 (衡州府志) 312 형초세시기 (荊楚歲時記) 172 호등아(胡騰兒) 218 호자가(蓋子歌) 87 호천유성 명 (昊天有成命) 45 홍곡가(鴻稿歌) 86 화간집 (花間集) 254 화당각총담 (花當閣穀談) 3 I4 화당춘 (畵堂春) 294, 295 화산기 (華山畿) 150-152 환(桓) 45 후당서(後唐書) 동이열전(東夷 列傳) 114 후위 서 (後魏書) I83 후한서 (後漢害) 94, 99, 100 남만서 남이 열전 (南戀西南夷列 傳) 113, I2I

예의지 (禮儀志) 3 오행 지 (五行志) l30 휘주전록(揮惡前錄) 236 희곡(戱曲) 희롱여희상(戱弄與

戱象) 29 희곡고원 (戱曲考原) 10, 29 회원(戱源) l7

찾아보기

기 가관회 (假官戱) 224 가리 (假吏) 225 가면 (假面) 56, I I01 258 가면극(假面劇) 25 가면놀이 25, 318, 319 가면희 (假面戱) 20, 36, II9, I98 가무(歌舞) 14, 18, 269 가무극 (歌舞劇) 288 가무류희 (歌舞類劇 199, 275 가장(歌場) 22 가평 (嘉平) 53 각색 (脚色) 199, 267 각저 (角抵) I73 각저대희 (角抵大戱) 190 각저희(角抵戱), 각저지묘희(角 抵之妙戱) I4, 3I, IO3-Io6, I I7, I24, I 34 간목혼탈 (半木潭脫) 232 간무(干舞) 45 간회자(看戱者) 23 갈석무(磁石舞) 140 갑골복사(甲骨 卜 辭) 56 강릉악(江陵樂) 157 강창(講唱) 30, 149, 242, 270 강호(光胡) I69 건무(市舞) 123, 138, 188, 253 검각(劍閣) 양희 (陽戱) 334

검기혼탈 (§l j器海脫) 232 경귀 (硬鬼) 299 경무(景武) 48 경 사 (磐師) 48, 50 경희 (京戱) IO, I4, 2I, 28, 32 계 림 나 (桂林灘) 297-298, 320 고각횡 취 (鼓角橫 nx) 174 고객악(客樂) I57 고구려 (高句麗) II4 고긍(高組) I34 고루두 (祐體頭) 308 고매 (高謀) 50 고사예술(故事藝術) 35 고종(鼓鐘) 46 고취강호기 (鼓吹光胡使) I74 곡파(曲破) 289 골계 회 (滑稽戱) 14, 24, 25, 30, 31, 39, 223, 275 골령 성 수 (f~倫聲敵) 271 공막무(公莫舞) 122-123, 149, l82, I88, 253 공후(笠篠) I54 과백류희 (科白類戱) 275, 285 곽독(郭完) I29 곽랑(郭郞) 129 관구신대 (溫 口 神除) 266 관도령 (館陶令) 126 관동유현녀 (關東有賢女) 123- 124, 143, 188 관무(官巫) 68

찾아보기·사항

관본잡극단수 (官本雜劇段數) 276, 281, 287, 290, 303 관색 희 (關索戱) 343 광동(廣東) 사공희 (師公戱) 342 광서 (廣西) 사공회 (~iji公戱) 345 괴뢰자(偶偏子) 128 괴뢰희(偶偏戱) 13, 30, 128- I3I, 192, 226, 269, 276 교묘사악(숫隋廟祠樂) I33 교방(敎坊) I94 구란 (句 11) 22, 287 구부악 (九部樂) I46, I47, I8T I89 구연(九淵) 43 구자(龜鉉) , 구자기 (龜鉉使) I83, I88 구천무(九天巫) 90 국국(國劇) 20, 2I 국나(國 1 難) 5I 국의 (仰衣) 5I 군나 (軍灘) 298, 299 굴뢰자(窟偏子) I3 귀검 (鬼險) 57 귀면(鬼面) 57 귀 신희 (鬼神戱) 298, 300-302 귀주(貴州) 지희 (地戱) 332 귀 지 (貴池) 나희 (1 難戱) 340 금강역사(金剛力士) 172

금문(金文) 56 금연(錦j!) 23 급암(波縣) 88 기(愛) 57 기 (勉) 56 기곡(祈穀) 50 기두(健頭) 56 기신새사(祈神奏社) 308 기악백희(使樂百戱) 134, 136, I37 기예 (技藝) IO9 기충(奇蟲) 24 기행 (跋行) I34, I73 꼭두각시놀음 13, 129 L 나(灘) II, 14, 20, 48, 51, 52, 54, 57, 97_IO3, I72-I73, 295, 307, 325-326 나고잡희 (鍾鼓雜戱) 339 나희 (灘戱) 9, 20, 31, 51, 173, 258-263, 273, 295-302, 310, 313-322, 323-350 난릉왕(蘭陵王) I79-I8I, I98, 201-203 난롱왕임진곡(蘭陵王入陣曲) 180, 202 난탄(亂彈) 32 남(南) 44,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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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I8I, 202, 23I �4�('Yfk) 4 2, 43, 47, 49 �4�('Y�) 45, 47

306 덕 강 (德江) 나당희 ({難堂戱) 33I 도립 (倒立) 135' 도정 (道貞) 충나희 (沖灘戱) 33I 도환(桃丸) I35 독록무(獨源舞) I39 돈황문권 (敦達文卷) 260-263 동맹 (東盟) II5 동이 지 악 (東夷之樂) 48, II4- II7 동해황공(東海黃公) Io8, IIT 120 두회 (頭回) 277 口 마한(馬韓) II5 마희 (馬戱) 24, II2 막수악 (莫怒樂) I 57 만금(綾錦) 48 만무(萬舞) 46 만악(綾樂) 48 만주족(滿洲族) 33 말(末) I99 말니 (末泥) 282, 286, 303 말창(妹跡) 299 매 (昧) 49 매 (妹) II6

매사(昧師) 48, 50 매수(埋~) 295 매악(昧樂) 48 맥수량기 (麥秀兩政) 266 명군(明君) I88 명 전기 (明傳奇) 14, 20, 28, 36 모무(鹿舞) 45 모방속성 (模微屬性) 27 모유본가곡(牙漁本歌曲) I22 모인 (施人) 40, 48, 50 목후무(泳族舞) I25 몽고족(蒙古族) 33, 34 묘기 잡악 (妙使雜樂) I85 무 (巫) 58-79, 90-97 무가(惡歌) I53 무각(舞閣) 23 무격(惡親) 46, 58, 65, 69, 98, 148 무곡(舞曲) 289 무루(舞樓) 2I 무무(巫舞) 58, I47-I48 무무(武舞) 17, 44, 46, 49 무속(巫俗) 325 무연(舞~) 23 무왕벌주지 가(武王伐討之歌) I22 무용(舞踊) 30 무원(婆源) 무귀 희 (舞 鬼戱) 343 무정(舞亭) 2I

무천(舞天) 115 무판(舞判) 299 무팽(巫彭) 64 무풍(巫風) 60, 61, 89 무함(巫咸) 6x, 64 무현(巫贊) 6I 문강기 (文康使), 문강악(文康樂) 146-147, 189, 226 문무(文舞) 18, 44, 46, 49, 55 민간의 무격 (巫親) 68 1:1 반무(反巫) 95 발두(擦頭) 13, 29, 198, 231, 237- 240 발한호회 (澄寒胡戱) 226-229, 236 발호왕걸한희 (澄胡王乞寒戱) 226 방상씨 (方相氏) II, 52, 53, 97- IOI, 173, 258 一 260 방중사악(房中祠樂) 86 방중지악(房中之樂) 48 배가사(俳歌辭) I70-I 배우(俳優) 24, II4 배 우잡희 (俳優雜戱) 39 백구무(白鳩舞) 139, 182 백수(百獸) 24, II2 백 월문화권 (百越文化圈) 329

백희 (百戱) 14, 49, 134, 186, 269, 273, 274 번쾌배군난(吳暗排君難) I23, 251-254 법곡(法曲) 276, 287, 289, 290 벽옹(群雍) 44 변경 (沖京) 33 별식 (踏食) I34, I73 병강(丙張) 48 병계 (#契) I88 봉귀운(鳳歸 雲 ) 258 봉황함서 기 (風凰衡 書 使) I70- 172 부말(副末) 286, 303 부여국(夫餘國) II4 부인상대작우(婦人相對作俊) 143 부정 (副淨) 199, 286, 303 북량(北凉) 33 북방(北方) 샤먼문화권(文化圈) 328 분유사(粉捨社) 94 불무(재友舞) 45 브라마나 (Bramana) 244 뿌이족〔布依族] 나희 332 A 사(社) 50, 68 사(緖) 53-56

사도회 (師道戱) 334, 337 사부(辭斌) 89 사색 (司薔) 54 사자무 (1 tiii子舞) 24, 163, 219 사전 (射筋) 제 양회 (提陽戱) 334 사주(思州) 둥나({目灘) 회나신 (喜灘神) 333 산(酸) 199 산단 (散段) 200, 285 산봉(山fflll) 22 산악(散樂) 9, 14, 40, 48, 83, 103, 133-137, 190, 191, 196 삼주가(三洲歌) 157 삽마차 (媒磨造) 231 상(象) 44, 45 상당(上黨) 대희 (除戱) 339 상복(相撲) 105 상서 (i椎西) 나당정 희 ({難堂正戱) 336 상소(象罰 ) 47 상운악(上雲樂) 147, 157-169, 184, 198, 207-212, 219 생 (生) 199 서곡가(西曲歌).., 150, 155~156 서량(西凉) 183 서 량기 (西凉使) 24, 163, 184, 2I2-222 서역나문화권(西域灘文化圈) 330

서왕모(西王母) 162 서정예술(敍情藝術) 35 서진(西晉) 33 서창(西僧) 169 서하(西夏) 33 서하사자(西河獅子) 220-222 석록(石勒) 126, 127 석송(釋碩) 45 선고(扇鼓) 나희 338 선색 (先짦) 54 설배기 (說俳使) 171 설비수(說肥獲) 138 설자(模子) 31 섬남(陝南) 단공희 (端公戱) 346 성 감희 (酸感戱) 345 성복지전(城磯之戰) 18 소공(召公) 43 소단(小旦) 199, 266 소막차(蘇莫造) 226-237 소무(小舞) 45 소생 (小生) 199, 266 소소(館罰) 47 소소구성 (蕭館九成) 42 소잡극 (小雜劇) 277-279 소중랑(蘇中郞) 177 소통(昭通) 단공회 (端公戱) 344 소호 (館漫) 43, 47 소희 (小戱) 9, 14, 15, 29, 30, 31,

35, 45, 266, 270-272 송잡극(宋雜劇0 31, 200, 273- 288 송휘종(宋徽宗) 33 송흠종(宋欽宗) 33 수괴뢰 (水偶f晶) I35 수인( 壽 人) 85 승운(承 雲 ) 43 산도(神茶) 98, IOI 신무극문학(神舞劇文學) 77 신백마(神白馬) 183, 188, 258 신사(神祀) 93 신선류객 (神仙留客) I89 신악(新樂) 38 신황(新晃) 둥족({同族) 나희 337 。 아나희 (亞馮戱) 327 아랑위 (兒郞偉) 262 아무(雅舞) 46 아숙자(阿叔子) 203 아악 (雅樂) 4o, 49 아잡극(딴雜劇) 279, 299 악 (樂) 3°, 37-41 악곡 (樂曲) 30, 288, 295 악부(樂府) 89 악봉 (樂 ml) 22, 197 악장(樂章) 50

안대본가곡(安장本歌曲) 122 안동평 (安束平) I 57 안사(安史)의 난 198, 217 안악(安樂) 181-182 안휘 (安徽) 나희 340 안휘 (安徽) 단공희 341 압도(押徒) 80 약무(衛舞) 46 약사(蓋師) 50 약지 피 (涼地皮) 266 양두혼탈(羊頭海脫) 233 양무(梁巫) 90 양반(陽伴) I88 양양악(襄陽樂) I57 양주배편(凉州排遠) 29I 양랙신성 (楊澤新聲) 183, 188 어룡만연지희 (魚龍受衍之戱) 42, I34, I36 언사(限師) I28 여무(女巫) 94 여아자(女兒子) 156 여악(女樂) x31-132 여전(女眞) 33 연악(燕樂) 48 연예 (i寅藝) 18 연화(冥和) · 49 연환(緣短) I35 연희 (i寅戱) 30 연희성(i寅戱性) I8 연희자(演戱者) 23

영 단 (梵段) 200, 282, 285 영가잡극(永 嘉 雜球 l j) 27I 영고(迎鼓) I14 영보( 銀 保) 76, 79 영성사( 磁星 祠) 93 영안악(永安樂) I8I 영춘(迎 春 ) 50 영희 ( 影 戱) 30 예 ( 淑 ) II5 예 ( 禮 ) 3o, 39 예 상우의 ( 寬 裁羽衣) 245 예 필 ( 禮 畢) 146, 189, 226 오경 (五莖) 43 오방사자 (五方獅子) 220 오성가곡(吳聲歌曲) 150, 152 오영 (五英) 43 오행 (五行) 85 오현천자(五縣天子) 266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33 옥녀 행 상 (玉女行 Ai ) 189 온주잡극(溫州雜劇) 271 와사(瓦舍) 287 왕명군(王明君) 143-145, 182 왜 (倭) II6 요(遼) 33, 42, 44 요동요부(遼東妖婦) 141-143 용(個) 130 용암(龍岩) 도사회(道士戱) 346 우루무치 26

우무(羽 舞 ) 45 우스개놀이 18 우표철(郵 表 綴) 54 우호희 (優胡戱) I98 우희 (後戱) 31, 79, 132, I37-I38 운문 ( 雲 門) 42, 49 울뢰 ( 鬱堡 ) 97-99, IOI 원본(院本) II, 31, 200, 242, 302- 306 원본명목(院本名 目) 302-304 원잡극(元雜劇) 14, 20, 2I, 28, 31, 36, 272 월무(越巫) 91 유벽책매극(劉關 責 買劇) 196, I98 유산인성녀 (劉山人省女) 266 유아추방녀 (劉衛推訪女) 265 유희성(遊戱性) I8 육경 (六莖) 43 육괴뢰 (肉1tf:.) 13I 육참군 (陸參軍) I28, I97, 223 의 양주 (義陽主) 198, 200, 254- 257 이 악 (夷樂) 40, 48 이왕연위희 (以王衍爲戱) 266 이족(휴族) 나회 (撮泰吉) 330 인무(人舞) 45 인형극(人形劇) x8, 192 인회 (引戱) 286, 303

일장양단(一場兩段) 281-283, 285 임 (任) 49 임안(臨安) 33 자가하용다배 ( 自 家何用多拜) !99, 266 자금(紫金) 화조희 (花朝戱) 341 자록(紫鹿) 134, 173 자전(羅田) 50 작(CJ) 44, 45 작서 (符鼠) 173 작아(笠兒) 134 작장(作場) 23 잡극 (雜劇) 9, l5, 242, 266, 268, 269, 273-295, 300, 302 잡기 (雜使) 14, 18, 49, 173 잡무(雜舞) 138 잡반(雜粉) 283 잡희 (雜戱) 30, 31, 35, 103, 173- 175, 216, 269, 274 장고 (裝孤) , 고장 (孤裝) 286, 3o3 장단(裝旦) 286 장두괴 뢰 (杖頭備f:.) 277 장희 (藏戱) 348 재동(粹溫) 양희 (陽戱) 335 전기 (傳奇) 9, I5, 3I, 35, 266, 3°3 전연(前燕) 33

전조(前趙) 33 전준 ( 田峻) 54, 65 정식화(程式化) 27, 267, 273, 285, 287, 295, 305 정악(正樂) 41, 48 정 잡극 (正雜劇) 200, 282, 285 제궁조(諸宮調) 276 제세창사(濟世昌辭) I4I 제왕권의 (帝王持衣) 134, 173 제제무(濟濟舞) 139 종규(鍾植) 260-261, 295, 296 종사(鐘師) 50 주유(保儒) 80, 82, 114 주유도(保儒導) 170 주제 (周帝) I62 중국회국기 원연토회 (中國戱劇起 源硏討會) 26 중원나문화권(中原灘文化圈) 329 지괴 (志怪) 35 지방희 (地方戱) 14, 32 지조희 (地弟戱) 314 직금 (織金) 조보살 (挑菩薩) 332 진북(晉北) 새희 (奏戱) 338 진자(i辰子) 98, 99, 258, 259 진한(辰韓) II5 전한기 (秦漢使) I83

六 차정 (次淨) 286 참군(參 軍 ) 24, 126, 199, 267 참군장(參軍椿) 225 참군희 (參軍戱) 14, 24, 31, 125- 128, 222-226, 265, 267 창우 (1 昌優) 8o, I32, I37 창우노잡 (1 昌優被雜) 189-192 창우희 ({昌優戱) 170 척검 (鄕劍) 135 천군(天君) II5 천동남민족지구(川東南民族地區) 나희 335 천축(天空) I84 청사(淸祀) 53 청 상기 ( 淸商 使) I88 청 장분불문화권 (靑藏*佛文化圈) 330 초가(楚歌) 86 초풍(楚風) 85 초호작달 (魚湖作ffil) 266 추인(追人) 24 축관(祝官) 94 칠부악(七部樂) I47, I87-I89 칠석 상봉악(七夕相逢樂) I88 칠성도(七聖刀) 299

E 타성 희 (打城戱) 347 타야호 (打夜胡) 263, 296, 297 탄도(香刀) 185 태공(太公) 43 토화(吐火) 185 투자족(土家族) 원시 회국(元始 戱劇) 마오꾸스(茅谷斯) 336 투호(鬪虎) 24, 112 고 파유무(巴油舞) III, 114, 120- 122, 138, 149, 188 파초문화권 (巴楚文化圈) 329 판락(板落) 299 판순만이 (板桐變夷) I2I 팽조(彭祖) 162 평 락관 (平樂觀) 103, 105, 106, 134, 216 포라 (抱鍾) 249, 299 포인잡부(蒲人雜婦) 24, l12, 120 피기 (皮기) 56 하무(河巫) 9I 한관(漢官) 92 한 대 (漢 代) 화 상 전 ( 畵 像 碩)

김학주 서울대학교 문리대 중문과 졸업 국립대만대학 園文硏究所 졸업(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 현재 서울대학교 중문과 교수 저서 『중국문학서설』 『공자의 생애와 사상』 『 중국고대문학사 』 『 논어 』 의 다수 중국 고대의 가무회 ―중국회국사의 새로운 정립을 위하여 대우학술총서 인문사회과학 77 I 판대 찍음 • I994 년 8 월 5 일 I 판 I 쇄 펴냄 • I994 년 8 월 I5 일 지은이·金學主 펴낸이·朴孟浩 펴낸곳 • (주)民音社 출판등록 I99I. I2. 20 제 16-490 호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06 강남출판문화연구소 5 층 515-2000( 대표전화) 515-2007( 팩시밀리) Prin t e d in Seoul, Korea 예술, 연극, 가면극 KDC/682.12 © 김학주, I994 값 15 , 000 원 ISBN 89-374-3077-0 94680 89-374-3000-2 (세트)

대우학술총서 (인문사회과학) 1 한국어의 계통 김방한 46 어원론 김방한 2 문학사회학 김현 47 조선의 서학사 강재언 3 商周史 윤내현 48 한국음악학 이강숙 4 인간의 지능 황정규 49 中國言語學 문선규 5 中國古代文學史 김학주 50 스포츠 심리학 6 日本의 萬葉集 김사엽 류정무·이강헌 7 現代意味論 이익환 51 原始儒敎 김승혜 8 베트남史 유인선 52 전쟁론 김홍철 9 印度哲學史 길희성 53 삼국시대의 漢字音 10 韓國의 風水思想 최창조 유창균 11 사회과학과 수학 이승훈 外 54 베르그송의 철학 김형효 12 重商主義 김광수 55 아날학파 김응종 13 方言學 이익섭 56 자유주의의 원리와 역사 노명식 14 構造主義 소두영 57 국민투표 구병삭 外 211111068579 海韓아法외언洋國어社교동의法심會심제 學리도리庭박 학사학준園양 호건 김조최·정 홍명경유동철한숙병오 화 666655130298 한포조고明한국려스末선국시서트淸통의대모지初신場의더思학사市 니想 后천이이 즘원혜재妃배의식하봉영 ·정 동이홍용 순론숙완 21 현대도시론 강대기 김욱동 22 이슬람 사상사 김정위 64 韓國의 服飾美 김영자 23 동북아시아의 岩刻畵 황용훈 65 정신신경증 이현수 24 자연법사상 박은정 66 한국住居史 洪亨沃 25 洪大容 評傳 김태준 67 한국어 통사론 권재일

26 역이―사 주•의 이민호 68 러시아어사 강홍주강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