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桓 1929년 전북 순창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불문학과 졸업 (1955)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수학(1956 - 1958) 문학박사(1974)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불문학과 교수 저서 『 파스칼의 生淮와 思想 』 (博英社, 1976 ) 『 파스칼 硏究 』 (民音社, 1980) 『 파스칼 — 팡세 』 (서울大出阪部, 1985) 『 프랑스 文學』 (공저 , 하서 출판사, 1987) 『 프랑스 문학사상의 理解 』 (民音社, 1988) 『 프랑스 文學노트 』 (한불문화출판사, 1990)

위마프니랑슴에스서고 전고전주주의의 문문학학까 지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

위마니슴에서 고전주의 문학까지 李桓지음 民音社

책 머리에 이 책을 위해 작업을 시작한 지 2 년여 만에 끝을 내면서 우선은 후련함이 있 고 약간의 홉족함도 있다. 마치 오랜 빚을 갚은 듯한 후련함이고, 잘됐건 못됐 건 일단 할 일을 했다는 홉족함이다. 사실 내가 프랑스 고전주의에 진 빚은 엄 청나다. 그리고 이 한 권의 책으로 그 빚을 다 갚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쨌든 이 책 속에 고전주의와의 기나긴 〈교 제 〉 (몽테뉴는 이것을 com- mere 촨 말로 표현했다)를 통해 내가 발견하고 붙잡은 것들을 쏟아 넣을 수 있 었고, 그것은 말하자면 고전주의에 대한 나의 끈끈한 애착의 표현이기도 하다. 내가 고전주의와 인연을 맺은 것은 파스칼을 통해서였다. 젊었을 때 어쩌다 파스칼에게 붙잡힌 것이 인연이 되어 끝내 고전주의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 런데 파스칼은 흔히 문학사에서 다루어지고 있긴 해도 순수히 문학가로 간주되 기는 어려운 사람이다. 그는 보다 많이 과학자이고 철학자이고 기독교 사상가 이다. 그의 진가는 프랑스 문학사에서 보다 근대서구의 사상사에서 더 분명히 드러난다. 서구에 있어서 근대적 사고가 숱한 저항을 무찌르고 자신을 확립해 나가는, 갈등과 위기의 이념적 역사 속에서 말아다. 그러나 그는 17 세기의 사

람기었고 이 시대의 정신적 모험이라는 총체 속에서 다른 영역의 활동과 내밀 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지적 모험과 동시대작가들의 문학적 모험은 그 추 구의 방식과 표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동질의 것이라 할 수 있 다. 이렇게 해서 내가 대학에서 고전주의 강의를 맡게 되었을 때 나는 별 저항 없이 사상에서 문학의 세계로 옮겨갈 수 있었다. 이 이행은 나의 경우 자연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매우 효과적이기도 했다. 파 스칼을 통해 17 세기의 지적 풍토에 대해 내가 가질 수 있었던 이해는 동시대의 문학게 다가서는 니에게 유효한 길잡이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깨달 은 것이지만 문학은 그것의 독자적인 영역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의 지적 • 문화 적 총체와 연계되어 있으며 이 연계에 의해서 비로소 그 위상과 의미가 밝혀질 수 있다. 문학을, 그것이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 전체로부터 도려내어 독립된 자율적 공간으로 삼으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것이다. 물론, 이 공간은 상당 한 심미적 자율성을 누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그것에 매혹된 사람들은 그 안게서 충분히 만족과 희열을 맛볼 수도 있다. 그리고 문학과 예술에서 그 이 상의 것, 그 의의 것을 굳이 개입시킬 필요가 없다고도 말한다. 아니, 그 의의 것들에 문학을 예속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문학을 왜곡 또는 축소시키는 것이라 고도 한다. 그러나 어찌하라 인간의 모든 활동은 그의 삶과 불가분의 것임을. 현실의 삶을 거부하고 삶과의 단절을 지향하는 예술에 있어서조차도 말이다.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삶과의 연결고리를 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연결고리를 찾아 삶의 실체 속에 파고들어 가는 것, 이것은 한 문학을 이 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으로 병행되어야 할 작업이다. 문학의 자율성을 인정하 고 그것의 고유한 법칙에 따른 창조의 비밀을 묻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창 조의 보다 내밀한 비밀, 그것의 원초적 모티프는 더 깊은 곳에 있다. 그의 삶 ―무슨 삶 말인가. 의식적 혹은 보다 많이 무의식적 삶, 지적 • 정신적 • 윤리 적 삶, 사회적 • 집단적 삶 그리고 역사적 삶-~우리는 이 모든 것을 지극히 평범하게 문화 또는 역사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은, 의식하건 안 하건 조l oll, 한 문화 속에서 살아가며 한 역사의 순간 속에서 자신을 의식하고 표현

한다. 그가 가지고 있다고 믿는 영원성이나 보편성은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그것들을 느끼는 방식도 한 문화의 소산이다. 프랑스 고전주의자들은 보 편적 가치에 봉사한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그들의 특정한 문화가 만들어낸 확신 일 뿐이다. 한 문화, 한 역사가 각인된 이데올로기이다. 나는 역설적으로,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학에서 뛰쳐나와야 한다고 말 하고 싶다. 프랑스 신비평의 어떤 사람들은 이와는 반대로 문학을 본래의 문학 의 본향으로 되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그들은 문학을 문학의적인 것들로 설명하려는 오랜 관행에 진저리가 난 사람들이다. 그래서 작가의 전기 적 사실, 정신적 혈연관계, 문헌학적 연계, 그를 에워싼 시대적 상황 등을 들 추어내고 입증하고 재현하는 데 기진맥전하는 구비평을 비웃으면서 그들은 애 당초 창조의 내밀한 세계 속으로 뛰어들었다. 문학의 비밀을 오직 문학으로써 풀어보겠다는것이다. 이들의 탐구가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온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의 조명에 의해 문학 창조의 비밀은 놀랍도록 밝혀졌다. 문학을 문학 창조의 내적 메커니즘으로 환원시키고 그것에 대한 탐구에 국한함으로써 그들이 발견할 수 있었던 것들은 우리를 경악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또 우리를 곤혹스럽게 도 만들었다. 왜냐하면 문학 작품이란 그것이 심미적으로 아무리 아름답고 완 성된 것이라 해도, 그리고 그 아름다움과 완성을 그 어떤 심미적 원리로써 설 명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충족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문학을 문학의 본향으로 되돌려보낸 그들은 이로써 많은 것을 얻은 대신 또 많은 것을 잃었다. 문학을 문학의적인 것에 예속시킨 것이 잘못이라면, 문학이 필연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연결고리에서 차단시킨 것도 잘못이다. 문학 속에서 발견한 구조는 분명히 문 학] 특유한 구조이다. 그러나 이 구조는 결코 그 자체로써 충족된 자족적 구 조는 아니다. 마치 사방에서 물줄기가 닿아 있는 호수와도 같다. 호수의 광대 함은 물줄기를 가리고 있다. 그러나 이 물줄기 없이 호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물줄기를 찾아나서야 한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또 하나의 비유를 들자면 문학은 마

지막에 피어난 꽃과 같다. 한 송이 장미꽃, 그것은 어느 날 홀연히 피어난 것 은 아니다. 그 화사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기까지 임동설한 모진 풍상 속 에서 견뎌야 했던 인고의 세월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문학 작품은 결코 우발적인 것은 아니다. 한 편의 시를 시인의 마음속에 잉태케 한 영감도 돌연 한 것은 아니다. 우발적이고 돌연한 것처럼 보이는 이 드러남은 실은 드러나지 않은 깊은 사연과 역사를 그 안에 숨기고 있다. 우리가 정녕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드러나지 않은 하부구조이다. 문학에 젖줄을 대고 있는 보이지 않는 지하자 원들말이다. 바르트는 이것울 가리켜 〈우 리의 역사, 우리의 언어, 우리의 자유 〉 라고 표현 했고, 우리는 극히 산문적으로 〈문 화 〉 라 불렀다. 문화란 그 안에서 한 인간이 개체로서 혹은 사회적 자아로서 자산울 인식하고 삶의 기교를 익히며 느끼고 사유하고 판단하는 방식을 터득하기에 이르는 또 하나의 모태와도 같다. 인간 은 (어머니의) 모태 속에서 인간의 형상으로 만들어지고, 문화라는 제 2 의 모태 속에서 한 종족, 한 집단, 한 계층, 한 시대의 인간으로 만들어진다. 특정한 감성과 특정한 사고방식과 특정한 가치관과 특정한 윤리의식을 부여받은 인간 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 문화적 총체는 고정된 부동의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 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열린 공간이다. 〈 있음 e t re 〉 이 아니라 〈 되어감 deven i r 〉 의 역동적 공간이다. 오늘의 문화는 생성과 성숙의 기나긴 역사로 뒷받침되어 있고 내일의 새로움을 향해 열려 있다. 이 변화와 새로워짐의 가능성 속에서 인간은 창조성을 획득한다. 우리는 방금 인간을 문화라는 주형이 찍어내는 상 품처럼 묘사했었다. 그러나 그는 결정지어지는 만큼 결정짓는다. 그는 문화의 반복자가 되는 대신 창조자가 될 것이다. 앞서 문학에서 뛰쳐나오라고 한 것은 이런 관점에서이다. 그것은 문학을 공 략하기 위해 넓게 그물을 던지고 포위망을 압축해 가는 방식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문학을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대하고 공감하는 것은 문학을 사랑하 는 모든 사람에 있어 기본이자 출발점이다. 그러나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 비 밀을 알기를 원한다면 한 발짝 물러서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문학은 보다 큰 덩어리의 한 부분이며 수많은 고리로써 이 전체에 연결되어 있 다. 이 전체를 무시하고 부분은 이해될 수 없으며 중요한 것은 양자가 상호 연 관되어 있는 하나하나의 가닥을 더듬으며 관계의 도식을 그려나가는 일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 문학은 곧 문명이다 〉 라는 빅토르 위고의 명제에 공감하 게 될 것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데에는 또 하나의 사연이 있다. 그것은 프랑스 문 학을 의국문학으로 대해 왔던 사람으로서의 입장이다. 우연히 (나는 인생에 있어 필연 따위는 별로 믿지 않으며 선택의 합리성은 더더구나 믿지 않는다) 불문학에 발 울 들여놓게 된 이후로 무척 많은 세월이 홀렀다. 불문학은 나의 평생의 반려 자였고 그래서 그것을 떠나서는 나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되었다. 나는 그 속 에서 켰고 그 방식대로 생각하고 글도 썼다. 니는 내가 쓴 글이 잘 되었는지 아닌지롤 확인하기 위해 프랑스어로 번역될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본다. 내가 글 에 부여하고자 하는 명확성과 논리성은 물론 표현의 방식과 문체도 다분히 프 랑스적이 되었다. 아니, 오랫동안 무의식적으로 그래왔고 근래에는 의식적으로 그래왔다. 니는 프랑스 문학이 나의 문학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터무니없는 착각이었고 웃기는 일이었다. 이런 깨달음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그러니 나는 무척 오랜 세월을 이 미몽 속 에서 살아온 셈이다. 그렇다고 그 기나긴 과거가 온통 물거품이 되는 것은 아 니다. 이 행복한 착각 속에서 그래도 나는 많은 것을 얻었고 붙잡았다. 다만 이것들을 진정 나의 것으로 전환시키는 관점이 나에게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그 자체로서는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랑스 문학은 그 아무리 발버둥쳐도 우리의 문학은 아니다. 우리와는 무관하게 생성 되고 발전되어 온 의국문학이다. 프랑스 문학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유럽의 중세가우리와무슨상관이 있으며, 이 문학의 정신적 뿌리인 기독교와고대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르네상스와 더불어 서구사회에 근대화의 회오리가 일기 시작하고 뒤이어 격동과 갈등 속에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할 때 우리는 전

근대성 속에서 미동도 않고 안주하고 있지 않았던가. 19 세기에 이르러 드디어 동과 서는 만나기 시작했고 서구의 모델에 따라 여기서도 근대화의 발동이 걸 렸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서구의 것은 하루아침에 우리의 것이 될 수는 없고 또 근대화도 우리의 문화적 • 역사적 상황을 떠나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근래, 세계는 하나의 지구촌이 되어 마치 너의 것 나의 것의 구별이 무 의미해진 듯이 보인다. 헐리우드의 영화는 지구 도처에서 동시에 개봉되고, 벌 보드 차트에 오른 히트 송은 전세계의 히트 송이 된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만 해도 상당한 간격을 두고 우리에게 전해 왔지만 지금 푸코, 데리다, 보드리야 르의 이론들은 즉각적이고도 유행가만큼이나 선정적이다. 우리나라에도 최첨단 유행을 좇는 오렌지족처럼 최첨단 이론에 민감한 지식인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이 모든 것들은 결코 우리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의미 있는 새로운 시작이 될 것 이다. 프랑스 문학, 그것은 우리의 것과는 전혀 다른 역사 속에서, 문화적 풍 토 속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문학이다• 언어가 다른 것만큼 그 안에 담겨진 감 성, 사고, 윤리의식, 종교적 감정이 다르다. 그 안에 그려진 인간들은 피부색 과 골격이 다른 것만큼 감정의 표현방식도, 행동의 양식도 다르다. 그들은 우 리가 아니며 그들의 문학은 우리의 문학이 아니다. 인류라는 보편적 개념을 내 세우며 그들을 형제처럼 느끼고 교류의 가능성을 믿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 이다. 그것은 서로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 디음의 문제이다. 공지는 이것을 가리켜 和而不同이라 했다. 그렇다면 의국문학에 어떻게 다가설 것인가. 나는 이 물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때가 되었다고 믿는다. 프랑스의 16 세기 시인들이 고대를 거의 맹목적 으로 모방한 데 뒤이어 다음 세기의 고전주의자들이 고대를 숭상하되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자문한 것처럼 말이다. 사실,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한 것 은 왜 이런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는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문제를 제기하는 가운데 이에 대한 답도 상당히 암시되었다고 생 각한다. 이 점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경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그는 한때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던 중세에 대해 그가 느낀 엄청난 거리 감과 이질감을 실토하면서, 중세 연구는 본질적으로 한 문화에서 전혀 다른 문 §}oi l 로의 이행의 모험이라고 규정지었다. 동일한 문화권에서조차 수백 년을 거 嗣 울라감으로써 문화의 이질성을 이토록 강렬하게 느꼈다면 우리의 경우는 더 할 말이 없다. 의국문학, 그것은 우리가 느끼는 친근감에도 불구하고 기본 적으로 이질적인 것이며 의국문학에 진입하는 것은 정확히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 속으로 이행하는 것과 같다. 아니, 의국문학에 대한 우리의 접근은 이차 원에서 시작되는 것이 옳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을 순수히 문학적 감상과 논의 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한 그루의 나무에 관심 울 갖는 것보다 먼저 숲 전체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한 나라, 한 시대의 삶의 양식과 이념의 총화인 문화 속요로 어떻 게 들어갈 수 있겠는가. 여기 고고학적 방식을 환기하는 것은 유익하다. 이 방 식은 이미 소멸된 과거의 것을 복원 재현하는 기술로 성립되어 있다. 그런데, 과거를 복원하기 위해 고고학자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발굴하는 데 성공한 유물들뿐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과거의 증언이 담겨 있는 하나하나의 단편들을 그지없이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 자체로서는 수수께끼와 같은 기 호에 불과하다.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것들이 속해 있었던 어떤 유 기적 총체-지금은 소멸되었지만 · 역사의 한 시기에 인간의 삶의 양식과 이 념의 원리로써 존재했던 문화적 실체뿐이다. 고고학자들의 최후의 야망은 그들 이 발굴해 낸 단편들로써 하나의 상상적 왕국(왜냐하면 그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 재하기 때문에)을 재현하는 것이며, 이 왕국 속에서 비로소 이 기호들은 분명한 메시지로 되살아날 것이다. 조금은 과장된 이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이다. 고 고학자들은 한정된 무분들을 대상으로 작업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지없이 소중 한 이 부분을 결코 독립된 실체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전체를 구성하 기 위한 자료일 뿐이며 정녕 의미 있는 것은 이 전체이다. 그러기에 고고학자 둘은 개별적인 단편에 관십을 갖되 그것들이 상호 관련을 맺으면서 하나의 통

합 un it e( 개별적 기호를 풀 수 있는 문법은 바로 이 안에 있다)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끈기 있게 지켜본다. 이 등식을 우리의 경우에 적용하면 다음과 갇다. 프랑스 문학은 매우 큰 덩 어리이기는 하지만 역시 하나의 부분-, 프랑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한 문화적 전체 속에 편입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 전체를 이루는 요소들은 다양하다. 프 랑스인들의 일상적 삶의 양식에서부터 미적 감각, 감성적 • 지적 성향, 윤리 적 • 종교적 의식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사회적 관습에서 정치적 • 경제적 체제 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어울려 프랑스적 삶의 양식을 이루 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문화라고 지칭했고, 이것의 역동성을 강조하기 위해 역사라는 개념을 이에 덧붙였다. 문화와 역사, 이것들은 프랑스의 풍요로 운 문학이 뿌리 내리고 있는 비옥한 땅이다. 우리는 이 문학에 접근하면서 이 땅을 파내려가야 한다. 그리하여 고고학자들이 사라진 문명을 재현해 낸 것처 럼, 우리도 우리의 것이 아닌 프랑스를 하나의 문화적 총체로서 재현할 수 있 어야 한다-그것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자문하면서. 오해없기 바란다. 문학을 오직 문학만으로. 대하고 그 매혹의 왕국 속에서 예 비된 황홀을 맛보는 것을 거부하자는 것은 아니다. 문학이 그 자체의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인정했다. 또한 그것은 논리적으로 완벽한 전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구조의 비밀이 밝혀질 수도 있다.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그 자체로 서 있는 구조물을 창조하는 것―—플 로베르는 자신의 미학적 야망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주저앉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원한다. 아니, 그 렇게 할 수밖에 없다. 자국의 문학이라면 다른 생각 없이 그 속에 뛰어 들어가 함께 얼싸안고 윙굴 수도 있다. 한통속이니까. 다같이 한 핏줄이고 문화와 역 사를 공유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의국의 문학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 다. 같이 울고 같이 웃을 수도 있고 한통속인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다음 순간에는 왠지 쑥스러워진다. 나는 정직하기를 선택하고 싶고 그래서 아닌 것 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프랑스 문학은 내가 공감하고 애착을 느끼는 많은

부분게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의국문학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인식은 나에 게 접근방식을 바꿀 것을 요구한다. 나는 이 문학 속에 행복한 포로로 머무는 대신 그것에서 뛰쳐나와 더 큰 전체를 보기를 원하고 그것의 본질을 읽기를 원 한다. 나의 시야는 갈수록 더 확대되어 나갈 것이다. 프랑스 문학을 통해 프랑 스를, 프랑스적인 것의 실체와 비밀울, 그리고 그것이 속해 있는 서구를, 서구 의 문명을, 그리고 또 고대, 중세, 근대로 이어지는 서구 역사의 변천을 읽기 룰 바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해 다시 문학으로- 되돌아가 그것을 새 롭게 읽기를 바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성찰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물음 앞에 다시 설 것이다.) * * 이왕 여기에까지 왔으니 끝으로 프랑스 고전주의에 대해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 니는 고전주의 문학에 평생토록 붙잡히게 된 것을 그지없는 행운으로 생 각한다. 다만 이 문학에 충실하지도 못했고 더 많은 애정을 쏟지도 못했던 것 을 아쉬워할 뿐이다. 젊었을 때 한동안 시류를 따라 오늘의 프랑스 문학과 사 상에 이끌려 사르트르와 카뮈를 탐독했고 그 후 신소설, 신비평에도 눈길을 돌 렸다. 그러나 이것은 나에 있어 한때의 의도였고 결국 나는 다시 고전의 세계 로 되돌아왔다. 젊은이들에게 별로 인기없는 시대의 문학으로 말이다. 그들은 대체로 의무에 의해 고전주의를 수강하고 강의실은 냉냉함이 감돈다. 학기마다 강의가 시작될 때는 이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데 첫 몇 시간을 바쳐야만 했다. 그들의 관심을 일깨우고 열기를 북돋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그들에게 납득시키려 한 것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즉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에 있어 고전주의를 아는 것은 기본이자 필수라는 것. 여기서 그 이유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한 가지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은 그 안에서 근 대 프랑스 문학의, 나아가서는 프랑스적인 것의 기본틀이 짜여졌다는 사실이 다. 현대의 많은 작가, 사상가들이 방황과 위기 속에서 마치 모태로 회귀하기

라도 하듯 고전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것은 프랑스 정 신의 영원한 본향이자 영감의 원천이다. 고전주의가 싹트기 시작하여 완성되는 1@] 기와 17 세기는 과연 어떤 시대인 가. 한마디로, 중세적 구체제에서 근대적 신체제로의 전환, 코페르니쿠스적 대 전환의 시대이다 . 서구의 역사 속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의식 혁 명, 문화 혁명의 세기이다. 에라스무스, 라블레, 루터, 칼뱅, 몽테뉴, 데카르 트, 파스칼이 이 혁명의 주역들이었고, 이들을 통해 중세적 비전에서 근대적 사고에로의 전환이 성취되었다. 엄청난 정신적, 이념적 갈등을 통과하면서. 이 혁명은 의식의 세계에 못지않게 가시적 세계 , 정치 • 사회의 차원에서도 동시적 으로 진행되었다. 우리는 이 혁명적 변화의 핵을 흔히 〈 근대성 〉 이라는 개념으 로규정한다. 근대성이란 무엇인가. 21 세기를 앞에 두고 우리는 지금 탈근대성 또는 포스 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가설이 옳다면 이것은 서구에 있어 (그 리고 거의 직접적으로 우리도 이에 연루되어 있다) 또 하나의 문화적 대폭발의 시 작이 될 것이다. (사실 그 동안에 있었던 프랑스 대혁명, 공산 혁명 따위는 근대성이 라는 체제내에서의 변혁일 뿐이다. )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 너무 현혹되지 마라 고 충고하고 싶다. 새로운 것은 매력 있지만 우리는 조금은 냉정하게, 무엇에 대한 새로움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푸 ,,._E F 더니즘이란 개념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그보다는 우선 모더니즘의 개념을 명확히 정립하는 것으 로부터 시직하자. 아니, 푸 ,,._E P 더니즘과의 관련하에서가 아니라 근대성을 그 자체로서 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여전 히 근대성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경우 바로 지금 근대화가 문제되고 있지 않은가. ) 그래서 나는 이 개념 정립의 작업이 꼭 필요하다면 16 세 기와 17 세기로 되돌아가라고 말하고 싶다-근대성의 여명이 밝아오는 이 전 울하는시대로. 16, 17 세기, 나는 이보다 더 홍미전진한 세기를 알지 못한다. 그중에도 프랑 스의 1 예기는 그 열기와 처철함으로 항상 나를 경악게 하고 흥분시킨다. 서구

안의 의식 속에 대폭발을 일으킨, 말하자면 〈 빅 뱅 〉 의 세기一一이것이 1 어 ~7] 이다. 도처에서 놀라운 변화의 움직임이 일었고 확산되어 갔다. 기독교는 질적 으로 변신했고 중세 속에 살아 있던 이교적 전통은 고대의 부활로 면모를 일신 했다. 요컨대, 1 예기는 거대한 용광로와도 같다. 과거의 모든 지적 유산들이 그 안에 홀러 들어왔고 한동안 뒤섞여 부글거리다 새로운 모습으로 흘러나왔 다. 온갖 이념, 가치, 신앙둘기 어지럽게 교차하는 십자로, 묵은 것과 새 것이 혼합된 카오스――그러기에 l 어]기는 우리에게 엄청난 도전으로 다가온다. 이 세기를 알기 위해서는 중세를 알아야 하고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기독 교와 고대의 이교적 사상을 알아야 하고 이 양자 사이의 마찰과 교류의 역사를 알中갸 한다. 과거의 모든 것, 차라리 이렇게 말해 버리고 싶다. 아니, 미래의 모든 것까지도. 정녕 1 어]기는 과거의 모든 것이 새롭게 문제되기 시작한 세기 이며 이 문제 제기의 새로운 방식으로써 새 미래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 새 로움은 쉽게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한 세기, 아니 근 객]기에 걸쳐 연옥의 모 진 시련이 계속되었고 마침내 그 와중에서 서서히 하나의 그림이 그려져 나갔 다. 고전주의가 완성된 것이다. 1 예기는 이렇듯 서구의 전역사를 한눈으로 조감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 안에 과거가 농축되어 있고 미래가 열려 있다. 하긴 모든 현재는 과거와 미 래의 접합점이다. 그러나 1@] 기는 과거의 역사를 받아들여 그 물줄기를 바꾸 어놓았다. 역사의 궤도수정이 이루어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이 수정 된 궤도 위에서 , 즉 근대성이란 이름의 궤도 위에서 달리고 있다. 위마니슴에서 고전주의에 이르는 문학적 모험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단순히 홀 러간 과거의 것에 대한 지적 호기심에서가 아니다. 이 모험은 오늘의 세계와 직결되어 있다. 오늘의 서구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중세적 비전이 붕 괴된 후 새로운 자아의 정체성 i den tit~을 추구하는 근대 서구인들의 참으로 처 절한 정신적 모험, 우리는 이 모험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증언을 이 시대의 문 학에서 둘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안에서 서구적인 것의 영원한 원형, 프랑스

적 원형을 만나게 될 것이다. 미셸 푸코는 어디선가 지식의 고고학이란 말을 쓴 적이 있다. 우리는 오늘 현재 그리고 최신의 것들에 너무나도 흘려 있다. 그것들이 전부인 것처럼, 그 리고 그 대열에 끼지 못하면 낙오자라도 될 듯이 그것들에 매어달린다. 그러나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고 현재는 과거 속에서 잉태된다. 지식의 뿌리를 찾는 고 고학이 필요하다면 문학에도 고고학이 필요하다. 나에게 이 고고학의 즐거움을 맛보게 한 프랑스 고전주의에 나는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간직할 것이다. 그리 고 고전주의에 대한 이 입문서가 이 고고학의 필요성을 조금이라도 납득시키기 에 성공했다면 다시없는 보람으로 느낄 것이다. 그러니 친구들이여, 문학의 고 고학으로돌아가자. * * 이제 남은 것은 이 작업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사람들에게 감시를· 표하는 행복한 의무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에게 다시 한 번 이 흐뭇함을 느끼게 해준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이 자리에 굳이 이들의 이름은 밝히지 않을 것이다 .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마 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싶다. 그들은 내가 쓴 글의 어떤 부분들을 읽어주기도 했고, 특정한 문제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광범한 세기에 걸쳐 다양한 주제들이 다루어지는 이 작업에 있어 나는 전문가들의 도움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때마다 나의 기대는 충족되었다. 원고를 넘겨주는 즉시 컴퓨터에 입력시킴으로써 나의 교정작업을 용이하게 해준 연구소 조교들의 노고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놀러운 인내심 과 관대함도. 찍으면 고치고, 고치고 나면 또 고치는, 나의 고질적인 수정벽을 그들은 말없이 받아주었으니 말이다. 끝으로 이 직업을 가능하게 해준 대우재단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오래전부터 생각만 했지 감히 덤벼들지 못했던 이 작업에 착수할 수 있 었던 것은 오로지 대우재단과의 계약 때문이다. 나 같은 의지박약자는 강제성 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시작이 반이란 말은 옳다. 대우재단은 나에 게 발동을 걸어주었고 일단 탄력이 붙은 후부터는 맹렬히 달려나갔다. 그만한 추진력이 아직도 내게 남아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갖가지 일로 몇 달씩 중단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여기 종착역에 닿았다. 무거운 짐을 벗은 듯 후련하 다. 1993 년 8 월 저자

프랑스고전주의 문학

차례

책 머리에 5

서론 ………………………………………………………………… 23

제 1 장 16 세기 위마니슴과 플레이아드………………………………… 33

1 위마니슴의 태동 34

중세와 르네상스 34/ 위마니슴-주제와 번모 38/ 인간학의 탄생 44

2 위마니슴 문학 48

2-1 초기 위마니슴 문학-라블레 48 레아리슴 48/ 주관성 51/ 다양성과 혼돈의 미학 54

2-2 플레이아드의 문학적 모험 57

프랑스어의 옹호와 현양 57/ 고대의 모방 61/ 문학적 의식의 각성 63

제 2 장 17 세기 전반기의 문화적 상황 ………………………………… 67

1 세기초의 지적 풍토 68

몽테뉴 이후-회의주의와 자유사상 68/ 데카르트_이성의 재건 74/ 기계론과 인간학 80/ 데카르트 철학과 문학 84

2 세기초의 문학이론-말레르브와 반말레르브 88

말레르브의 출현 88/ 말레르브 이후―자유의 반격 99

제 3 장 17 세기 전반기의 문학 ………………………………………… 103

1〈바로크〉 문학 105

비극적 바로크 105/ 충일한 바로크 112/ 바로크 미학 117

2 프레시오지테 132

프레시오지테――사회적 현상 133/ 프레시오지테의 미학 138/ 프레시오지테의 언어 142

3 프레시오지테 문학 145

프레시오지테와 소설문학 146/ 모험소설과 영웅소설 149/ 영웅주의 • 사랑 • 숭고함 154/ 풍자소설 또는 뷔르레스크 157/ 고전주의 시대의 소설 164

제 4 장 고전주의 ……………………………………………………… 177

1 17 세기 전반기의 희곡 178

비희극 179/ 전원극 185/ 비극―코르네유 이전 189/ 비극과 비희극의 공존 198/ 비극一코르네유 이후 205/ 희극 208

2 고전주의 이론의 탄생과 형성 214

플레이아드 이후 217/ 게 드 발자크 • 보쥬라 • 아카데미 프랑세즈 220/ 이론가들 225

3 고전주의 이론 233

고대의 모방 234/ 자연의 모방 236/ 진실다움 240/ 적합성 247/ 규칙 -삼단일 252 /고전주의의 정수 265

제 5 장 고전주의 작가 ………………………………………………… 277

1 코르네유 277

2 라신 295

3 몰리에르 310

결론 …………………………………………………………………· 325

참고문헌 339

색인 345

서론 프랑스에 고전주의라는 위대한 문학을 탄생시킨 17 세기는 역사적으로 어떤 세기인가. 우리는 여기서부터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볼까 한다. 그것은 고전 주의 문학이 다른 어떤 문학보다 사회적 성격이 두드러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문학은 그것의 자율적 영역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의 역사적 총체, 더 좁게는 문화적 총체의 일부분이라는 기본적 안식에서 우리는 출발하고 있기 때 문이다. 문학을 이 문화적 총체에서 도려내어 개별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우리 에게는 거의 무의미하다. 그리고 또 이 문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비효과적이 다. 고전주의 문학을 그것이 뿌리 내리고 있는 역사적 • 문화적 상황 속에 위치 시키고 이 양자의 상관관계 (혹자는 변증법적 관계라고 거창하게 표현할 것이다)를 통해 이 문학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것, 우리의 소박한 야망은 바로 이런 것이 다. 17 세기는 과연 어떤 세기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위대한 세기, 위대한 통합의 세기라고 규정하고 싶다. 명실공히 유럽의 왕자로 군림하고 그 위용과 권위를 한껏 자랑했던, 그래서 당대의 프랑스인들이 오만에 가까운 긍지를 느꼈고 후

대의 프랑스인들이 영광의 향수를 느끼기에 합당한 세기이다. 프랑스 역사상 아마도 가장 위대했던 왕 루이 14 세가 이 통합의 구심점이었다는 것은 확실하 다. 그에 의해 프랑스는 국가적 통합을 완성시켰을 뿐만 아니라 거듭되는 군사 적 • 의교적 승리로써 국위를 만방에 떨쳤다. 사회적으로도 왕을 정점으로 한 계급화된 통합체계가 정착함으로써 안정과 질서가 확고히 자리잡았다. 궁정은 명실공히 모든 활동의 중심이 되었고 귀족들은 왕의 은총만을 의지하는 충복으 로 길들여졌으며 사회의 새 계층으로 부상한 부르주아지도 이 체제 속에 마찰 없이 동화되었다. 프랑스는 한동안 조화롭고 균형잡힌 통합체로서 그 놀라운 위용을과시할것이다. 이 통합은 단순히 정치적 • 사회적 차원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정 신적 • 문화적 차원에서도 동일한 양상을 발견한다. 이 정신적 통합의 중심은 물론 이성이었다. 이성은 말하자면 정신의 왕국의 루이 l 心1 ] 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이 정신의 새 왕자로 등극하고 합리성의 원리가 지배하게 되 면서 모든 것은 현저히 달라졌다. 정신의 사물들은 이 원리에 따라 재해석되고 이성의 질서 속에 재편성됨으로써 하나의 논리적 총체를 이루었다. 문제의 핵 심은 바로 이성적 질서에 있다‘ 이 질서에 따라 새로운 사고의 유형이 고안되 었고, 새로운 인간학이 규명되었으며, 그리고 새로운 예술과 문학이 창조되었 다.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창설되고 프랑스어의 재정립의 작업이 추진된 것도 우연은 아니며, 르 브링 Le Brun의 그림, 베르사이유의 정원, 라신의 비극이 거의 때를 갇이하여 모습을 드러낸 것도 우연은 아니다. 종교계에서도 통합을 해치는 모든 이단적 움직임은 가차없이 배제되었다. 장세니슴에 대한 줄기찬 탄압은 통합에 대한 집념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반증해 준다. 요컨대, 질서와 규율은 이 시대의 지도이념이었으며 현실적 정치 체제에서 무형의 정신적 창조 에 이르기까지 이 이념의 지배는 강력했다. 이 시대의 놀라운 동질성을 보장하 는 것은 바로 이 이념이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프랑스를 특칭짓는 동합은 어떻게 해서 달성되었는가.

우리는 이 기적적인 통합이 17 세기 후반 정확히 한정된 시기, 죽 1660 년대에서 1680 년대에 걸친 20 여 년에 해당될 뿐이리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이 역사적 우연에 의해 갑작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확실하다. 이 통합은 그 후 서서히 해체되어 1 세기 후에야 완전 붕괴되는 것과 같이 그것이 탄생하여 발전 되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그에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의 기나긴 세월이 필요했다. 이 통합도 자신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역사에 대한 조망없이 는 그것은 불가해한 것이 될 것이다. 먼저 정치적 통합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 통합은 유럽에 있어서 근대 국가의 탄생과 관련되며 그 역사는 거의 중세에까 지 거슬러 울라간다. 중세에도 국가는 존재했고 국가마다 왕이 군림했다. 그러 나 왕은 몇몇 예의적인 경우를 제의하고는 명목상의 대표로 인정받았을 뿐이며 다른 영주들보다 약간 우세한 것이 고작이었다. 중세의 봉건제도하에서 각 영 주들은 지신의 영토 안에서 절대적 권력을 누리는 왕과 같았고, 중세의 국가는 각기 분립된 작은 왕국들의 모자이크와 같은 것이었다. 이 지방분립의 형태에 서 통합된 중앙집권적 체제로의 전환―~유럽 근대사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 정치적 통합은 점진적으로 그리고 긴 시일에 걸쳐 추전되었다. 유능하고 강력한 왕이 출현할 때마다 이 움직임은 촉진되었다. 봉건제도의 툴 속에서 자 신의 세력과 영향력을 확대시켜 나감으로써 통합의 주역을 담당해야 할 사람은 바로 왕이었기 때문이다. 왕은 국내적으로 자신의 위상을 높일 뿐만 아니라 대 의적으로도 국위를 떨쳐야만 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국가의 구심점이 되 고 국민들에게는 국가적 소속감과 긍지, 즉 한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6 세기에 프랑스는 위대한 두 사람의 왕을 맞이했다. 세 기초의 프랑수아 1 세 Fran~ois J er 와 세기말의 앙리 때] Hen ri IV 가 바로 이들 이다. 프랑수아 1 세는 르네상스 여명기에 유럽 제국들의 각축 속에서 프랑스의 국기를 공고히 다졌을 뿐만 아니라 〈문예의 아버지〉라는 칭호에 걸맞게 프랑스 인들의 문화적 각성에도 크게 공헌했다. 앙리 어 l 도 종교전쟁으로 국도의 혼란 속에 빠져든 프랑스를 그 위기에서 건져냈고 이로써 안정의 발판을 마련했다. 17 세기 전반기에는 연소한 왕들로 인해 섭정이 불가피했지만, 이 허약한 체제

에 대응하여 유능한 재상들이 출현함으로써 통합에 박차를 가했다. 디름아닌 리슐리의 R ic he li eu 와 마자렝 Mazar i n 이 이들인데 , 특히 리슐리의는 그의 탁 월한 정치적 수완과 강력한 추진력으로써 왕권의 확립과 국위의 신칭에 결정적 인공헌을했다. 지방분권적 봉건제에서 중앙집권적 통합으로의 이행은 사회구조에 중대한 변 화를 야기시켰다. 이 과정에서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은 귀족 신분이었 다 . 과거 봉건제도하에서 영주로서 절대적 권력을 누렸던 대귀족들은 왕권이 신장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김수할 수밖에 없었 다. 그들은 다스리는 자리에서 디스림을 받는 자리로 강등되었고 신하로 길들 여져야 했다. 이 변화가 심각한 갈등을 야기시킨 것은 당연하다. 기득권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항상 고통스러운 일이며 그들은 저항할 수 있는 데까지 저항하게 마련이다. 왕을 구심점으로 한 국가적 통합에 있어 가장 큰 정치적 저항세력은 다름아닌 귀족이었다. 왕권 신장을 위해 헌신했던 리슐리의 가 귀족의 저항을 잠재우고 이들을 길들이기를 제일의 정치적 목표로 삼은 것 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러나 이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절대왕정의 완성 울 눈앞에 둔 1650 년을 전후하여 프롱드란 la Fronde 이 일어난 것을 상기한다 면 중앙정부에 대한 귀족들의 반응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 을것이다. 이와는 달리 권력의 편에 바싹 다가선 사회의 새 계층이 있다. 다름아닌 부 르주아로 지칭되는 사람들이 이에 해당된다. 이들은 매우 활동적이고 영향력이 컸고 수도 많았다. %넘 때]가 국가 재건에 주력했을 때 왕이 의지한 것은 바 로 이돌이었다. 이들의 구성은 매우 잡다했다. 부유한 상인들이 있었는가 하 면, 의사, 변호사, 공증인들도 있었다. 아마도 가장 많은 수는 법관들이었고 그중에는 고등법원 Parlemen 떠 회원들도 있었다. 일률적으로 그 성격을 규정 하기 어려운 당대의 부르주아지는 그러나 하나의 공통된 특칭을 가지고 있었 다. 다양한 직업과 재산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상당한 교육을 받았고 지 적 활동예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귀족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사물에 대한 지적 판단에 있어서나 문예에 대한 취향에 있어 귀족에 뒤 지지 않았다. 이들이 당대의 독자 또는 관객의 주요한 일부분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많은 문인들이 이 교양 있는 부르주아지에 서 배출되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요컨대, 부르주아지는 (적어도 그중 일부 는) 당대의 문화적 활동에 깊이 관여한 지적 엘리트였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히 지적 엘리트로만 머물지는 않았다. 이들은 국가 동합 의 완성을 향한 과정 속에서 상당한 정치적 역할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귀족 이 견제되고 뒷전으로 밀려난 대신 이들은 왕정의 협력자로서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통합 국가는 많은 유능한 협력자를 필요로 했다. 권력이 왕 으로 집중됨으로써 이 권력의 처질없는 집행을 보장할 강력하고도 효율적인 행 정체계가 수립되어야 했고, 이를 담당할 행정엘리트가 필요했다. 그리고 부르 주아지가 이 필요를 위해 동원되었다. 귀족은 이에 적합하지 않았을 뿐더러 정 치적으로 견제되어야 할 세력이었는 데 반해, 부르주아지는 지적으로 훈련되고 직업적 안목을 갖춘 유능한 인재들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아다. 또한 이들은 왕이나 궁정에 대해 적개감 따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사회 적 신분의 상승에 기대를 걸었고 상류사회의 일원으로서 일체감마저도 느꼈다. 실제로 그들 중에는 귀족의 칭호를 수여받은 사람들도 있었으며, 혈통에 의한 귀족 noblesse de nais s ancei !} 구별하여 〈법복 귀족 noblesse de robe 〉이라 불 리어지기도 했다. 평민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여러 문인들에 의해 무 식한 대중, 〈하층민p e tit peu p le~ 준으로 불린 이들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나 거의 역할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이들 나름의 문화적 공간이나 정치적 표현의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대의 증언들은 평민들 도 부르고뉴와 마레 국장에 출입하였고 비극보다는 소국 la farc eol] 더 많은 갇 채를 보냈다는 것을 전해 주고 있다. 또한 파리에서 프롱드란을 일으켜 4 년 전 쟁의 도화선이 된 것도 그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활동이 사회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이 점에서 그들의 직접적인 영향을 이 야기하는 것은 적합지 않다. 그들이 개입된 프롱드란도 실은 왕권 자체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마자렝 정권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 중요한 것은 중세 말기에서 1 7 세기 중엽에 이르기 까지 간단없이 추진되어 온 근대적 국가 통합의 과정이 심각한 사회적 변동을 수반하였고 이 변동으로 인해 위기와 긴장이 지속되었디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 다. 17 세기 전반기는 이 괴정의 마지막 단계로서 어떤 의미에서 이 긴칭이 최 고조에 달한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17 세기를 루이 14 '\i] 의 절대왕정, 위대한 고전주의, 안정과 질서의 시대로만 규정짓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17 세기 프랑스가 이룩한 이 위대한 걸작품은 기나긴 세월의 각고의 결 실이며 우리는 같은 17 세기 안에 최후의 진통 같은 것을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각고의 노력은 비단 정치적 • 사회적 차원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정신적 • 문화적 차원에서 동일한 갈등과 아픔의 역사를 되돌아볼 까 한다. 모든 것은 중세의 붕괴로부터 시작되었다. 중세는 인간이 품을 수 있 는 가장 완벽한 정신적 • 영적 비전을 제공했었다. 신, 우주, 자연, 인간, 생 물, 모든 것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유기적 전체 속에 편입되었고, 그 속에서 각각의 위상과 정체성을 보장받았다. 이 전체가 와해되면서 인간은 새로운 정 신적 모험 속으로 내던져졌으며 침묵하는 무한한 공간 속에서 자신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해 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새롭게라는 말은 무로부터의 출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세의 해체 는 고대의 발견과 무관하지 않으며 근대인으로서의 모험은 실은 그들을 앞서간 고대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들의 탐구가 ·군 ] 새롭다면 그것은 종래의 중세적 궤도에서 이탈했다는 점에서 새로울 뿐이 다. 정확히 말해 그것은 새롭다기보다 궤도의 전환이다. 그리고 이 궤도 수정 은 단순히 기독교적 인간학에서 고대의 이교적 (자연주의적) 인간학으로의 전환 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거의 같은 시기에 기독교의 내부에서 중세적 개념으 로부터의 탈출이 감행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로써 신과 인간의 관계는 새롭게 조명되었고, 이 관계의 재정립으로써 인간의 위상은 본

질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여기 문제되는 것은 의식의 혁명이다. 1 때] 7] 위마니슴과 종교개혁 은 비록 다론 충위에서일지라도 인간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다시 제기함으로써 다 갑이 정신적 • 영적 모험의 새 장을 연 점에서 일치한다. 그리고 이 모험이 긴장과 위기의 연속이라는 것도 확실하다. 의식의 전환은 옷을 갈아입는 것과 는 다르다. 그것은 수많은 갈등과 방황과 고통을 수반한다. 때로는 육체적인 아픔도 수반하고 전쟁의 값진 희생도 지불해야 한다. 문인, 지식인들이 두옥되 거나 국의 추방되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의식의 대립은 마침내 참혹한 내란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혼돈과 갈등의 와중에서 점차 한가닥 빛이 밝아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몽테뉴 가운데 위마니슴은 마침내 정념의 광란을 참재우고 조 용한 이성적 성찰로 되돌아왔으며 이로써 근대인간의 자아인식을 위한 전지한 탐구가 시작되었다. 17 세기 전반기 데카르트의 출현은 이 탐구를 새로운 차원 으로 진입시켰다. 인간의 문제는 보다 관념적으로 인간 이성의 문제로 압축되 었고 마침내 이 이성적 사고에 의한 천하통일이 달성되었다. Co git야근 중세적 이데올로기의 붕괴 이후 근대안이 겪어온 정체성의 위기에 대한 최초의 답이었 다. 종교의 차원에서도 혼란과 반목은 서서히 진정되었다. 낭트 칙령 이후 구교 와 신교 사이의 갈등은 적어도 표면상 잠잠해졌으며 점차 정통적 가톨릭에 의 한 통합의 기운이 성숙해 갔다. 그러나 지적 • 영적 차원에서 통합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 적어도 17 세기 전반기에 통합은 하나의 참재적 가능성으로 존재했을 뿐이며 전 반적 기류는 오히려 혼란과 위기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그것 은 수많은 사상과 경향들의 어지러운 난립으로 나타났다. 극단적 회의주의에서 오만한 독단론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자유분방한 쾌락주의에서 근엄한 국기주 의에 이르기까지 안간의 관념과 의지가 고안하고 가정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 둘기 거침없이 펼쳐졌다. 한편으로 종교의 신비주의적 체험이 있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단순히 비종교적인 자유사상울 뛰어넘어 거의 무산론에까지 접 근하기도 했다. 사상의 무정부 상태라고 할 이 정신적 상황을 우리는 의식의 위기라는 말 의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다. 17 세기 후반 고전주의와 더불어 질 서와 절도의 새 정신적 풍토가 정착되었다면 그것은 혼돈 뒤에 찾아온 하나의 정신적 승리임에 틀림없다. 문학에 대해서도 우리는 동일한 접근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 고전주의는 정 녕 프랑스 근대문학의 최초의 위대한 완성이다. 그러나 이 완성은 한 시대의 그리고 몇 사람의 창의적인 작가들만의 소산은 아니다. 프랑스의 정치적 통합 이 그러했고 지적 • 윤리적 완성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문학적 완성도 기나긴, 험난한 형성과 성숙의 과정이 있다. 플레이아드로부터 고전주의에까지 이르는 근 1 세기 반의 문학적 모험은 프랑스 문학사상 그 어느 시기에 못지않는 풍요 롭고 극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모험에 대해서도 방금 정신적 모험 에 대해 지적했던 것과 동일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죽 그 가운데 문학적 창 의성과 상상력이 펼칠 수 있는 모든 것들의 어지러운 난립을 보며 우리는 경탄 울 금할 수가 없다. 시, 소설, 희곡, 서한체 등 모든 장르들이 활짝 피어났는 가 하면 각각의 장르 속에서 상이한 경향들이 긱축을 벌였다. 그것들은 과거의 전통과 내밀히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반대로 독자성과 근대성을 고수하기도 했 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그것들은 새 문학을 창조한다는 강한 의식으로 무장되 어 있었다. 고전주의 문학을 이야기할 때 이 문학이 그 안에서 다른 문학들과 의 만남을 통해 자신을 정립해 나갈 수밖에 없었던 이 행복한 무정부 상태를 도의시한다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오류가 될 것이다. 고전주의 또한 이 혼 돈 뒤에 찾아온 하나의 기적, 죽 질서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서론 속에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방향을 설정했고 방법 또한 선택했다. 확실한 것은 부분은 부분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전체 속에 편입되고 전체의 시각에서 조명될 때 비로소 해명될 수 있다

는 것이다. 우리는 프랑스 고전주의를 하나의 부분으로 보기로 했고 그것을 두 차원의 전체 속에 편입시키기로 했다. 즉 문학이 소속되어 있는 역사적 • 문화 적 총체와, 문학이 그 안에서 살아온, 한 자율적 공간으로서의 문학적 총체 말 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조금은 멀리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프랑스 고전주의 연 구에 〈 위마니슴에서 고전주의 문학까지 〉 라는 부제를 단 것은 단순히 멋으로 한 것은 아니다. 고대와의 만남으로 자국된 근대 프랑스인들이 고대에 대한 애착 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문학을 창조해 나가며 그 안에서 프랑스인으로서의 근 대적 자아의 정체성을 확립하기에 이르는 일대 모험을 이제 우리는 차분히 더 듬어나가려 한다.

제 1 장 16 세기 위마니슴과 플레이아드 17 세기의 정신적 • 문학적 상황에 대한 고찰은 우리를 필연적으로 1@1] 기로 거슬러 울라가게 한다. 서구의 역사에 있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근대 a g e moderne 〉 의 시발점은 바로 16 세기이며 l) 17 세기는 그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 는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또는 위마니슴 huma ni sm~ 특칭 지어지는 16 세기는 분명히 경이적인 전환의 세기였다. 정치적으로는 봉건제도 로, 문화적으로는 기독교로 다져졌던 중세의 기나긴, 너무나도 견고한 체제에 서 탈피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일대 모험을 감행한 이 세기는 아마도 서구 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의 세기로 평가받기에 합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혁명 울 통해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으며, 이 변화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러 나 여기 우리의 관심은 16 세기 그 자체에 있지 않다. 다만 이 세기에 일어난 1) 논자에 따라서는 이 일반화된 관점에 이의를 제기하여 〈근대〉의 기점을 13 세기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논의에 깊이 들어가지 않은 채 종래 의 입장에 서기로한다.

변화의 본질을 규명하되 그것이 뒤이은 세기와 어떤 관련을 맺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질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프랑스 고전주의의 한 머나먼 원류로서의 1 예기의 문화적 혁명에 주목하려 한다. 고전주의라는 찬란한 꽃이 피기까지 씨가 뿌려져 오랫동안 배태되고 성장해 나갈 토양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 한 시대의 문화적 발현이 그 어떤 기나긴, 복잡하고도 미묘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성숙되어 나가는가를 확인하는 것도홍미로운일이다. 1 위마니슴의 태동 15 세기에서 16 세기에 걸쳐 유럽 전역에 번져나간 어떤 정신적 움직임을 가리 켜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은 근 3 세기가 지난 19 세기 초에 이 르러서였다. 이때 비로소 문예의 부흥 또는 고대의 부활을 공통된 특칭으로 하 여 〈근대의 여명〉이라는 기본적 성격이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사실상, 이 광범 하고 자연발생적인 움직임은 바로 그러한 양상으로 인해 혼돈과 모호성을 면할 수가 없었으며, 그 가운데 하나의 주도적 방향을 탐지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 이 홀러야만했다. 중세와르네상스 그러나 프랑스의 경우 1@ ]기 초에 어떤 〈새로움冷t 향한 의지가 강렬하게 발동했었다는 것은 당대의 여러 증언들을 통해 쉽게 인지할 수 있다. 초기 위 마니스트들 그리고 뒤이은 클레망 마로 Clemen t Marot, 기욤 뷔데 Gu ill aume Bude, 라블레 Fran c;: o i s Rabelais 등은 분명히 〈빛의 시대치골 맞이하고 있다는 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기본적으로 중세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판 적인 시각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가령, 라블레의 작품 속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말하자면 〈현재의 광명과 과거의 암흑, 문예의 부활 또는 부흥과…… 여

러 세기에 걸쳐 지속되었던 문예의 매몰 사이의 대조 〉 2 ) 이며, 한편 에라스무스 Erasrn 혀 같은 사람계 의해 시도된 것은 중세의 〈 야만인들 〉 에 의해 망각되었 던 참된 신학적 탐구의 부활이었다.

2) D. Menage r , Intr o ductio n a !,a vie l itte ra ir e du xv1e siecl e, 꾹 :

훗날 르네상스가 새롭게 문제되었을 때 중세를 암혹시대로 단정하고 중세와 의 결별 위에 새 시대의 장이 열렸다는 해석이 일반화된 것은 일차적으로 여기 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르네상스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문 예 의 부흥 〉 또는 보다 정확하게 〈 고대의 부활汗든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중세에 대한 대립적 개념을 전제로 정립되었다. 가령 , 19 세기 초 독일에서는 〈위마니 스무스 huma ni srnus 〉라는 말로써 고대의 언어 및 문예의 부흥과 관련된 지적 움직임을 지칭하고 그 본질을 〈인간에 대한 새로운 관심, 개적 자아에 대한 새 로운 감정 〉 으로 규정지었는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중세적 기독교 정신 대신에 고대 그리스 정신을 반영하는 모든 것〉 3) 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후 르네상스 와 위마니슴을 동일시한 헤겔 He g el 및 독일 관념론지들이 〈인간과 현세와의 화해서卜 추구한 새로운 태도와 중세와의 단절을 유난히 강조한 것은 당연한 일 이었다. 프랑스에서도 사정은 다를 바가 없었다. 미슈레 M ic hele t와 같은 사 가는 처음으로 르네상스를 유럽사의 한 시대로 설정하면서 인간을 중세적 미신 과 예속에서 해방시킨 위대한 창조적 운동으로 규정지음으로써 동일한 해석에 합류하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가장 뛰어난 연구가 부르크하르트]. Burck- hard t의 경우도 여기서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르네상스 가 운데 〈개 인주의〉와 〈근대성〉이라는 새로운 두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고 지적 •

3) W. K. Fergu so n, La Renais san ce dans /,a pen see hist or iq u e, 147 쪽 : <••• une att i- tud e int e ll ectu el le comp or t an t un nouvel inter et p ou r l'homme, un nouveau senti - ment de la per sonnalit e individu elle •• • le tou t refl et a n t I'es pr it grec anci en au lieu de !'espr i t chreti en medie v al .... >

창조적 활동을 주도하였는가를 추적하였는데, 이로써 그는 중세에 대한 대립적 시각을 한층 강화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중세와의 단절을 근거로 한 이러한 해석들에 대한 반격이 없었던 것 은 아니다. 사실상 이 해석들은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반 성과 비판의 소리가 제법 강력하게 일어났던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 움직임은 주로 중세 연구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 샤토브리앙 Cha t eaubr i and 울 위시한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표명된 중세에 대한 관십이 그 후 보다 진지한 학문적 연 구로 이어졌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시실이다. 특히 금세기 초, 질송 E. Gil - son, 뒤이은 레뉘치 P . Renucci , 르노데 A. Renaudet 등은 중세에 새로운 조 명을 비춘 대표적인 중세학자들이다. 샤를르마뉴 시대의 알쿠인 Alcu i n 의 위마 니슴을 비롯하여 1 끄1 ] 기 전후 샤르트르학교 Ecole de Chartr e ~ 중심으로 한 왕성한 고전연구,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한 기독교와 고대 철학과의 접합 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이들의 연구는 중세 속의 고대의 전통을 무시하거나 과 소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큰 과오인가를 보여주었다. 요컨대 이들은 중세가 결 코 암흑의 시대가 아니었다는 것, 또한 고대와 완전히 차단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나름대로 고대의 지적 전통과 활빌히 교류했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입증했다. 실제로 유럽 최초의 대학이 설립되고 고대의 고전들에 대한 관심이 비상하게 고조되었던 12 세기의 성 루이왕 시대는 가히 중세의 르네상스라 불리 어지기에 합당했으며, 한편 『 장미소설 Le Roman de la Rose 』 과 같은 작품 속 에 묘사된 다분히 자연주의적 감성과 강렬한 지적 호기심은 중세가 기독교 의 의 이교적 전통에 얼마나 깊이 감염되었었는가를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다. 위 에서 언급됐던 미슈레가 르네상스에 대해 시뭇 흥분된 어조로 〈 이것은 무로부 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거대한 의지의 영웅적 폭발이었다 〉 4) 라고 말한 것은 전 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운, 과장된 편견처럼 느껴진다. 4) < Celap artit de rien . C e fut l'he roiq u e exp l osio n d'une im mense volont e .> c i te p ar Fergu so n, 위의 책, 16~.

요컨대, 16 세기 르네상스의 주역으로 되살아난 고대가 16 세기인들만에 의해 되찾아진 것이 아니라 기나긴 중세를 통해 보존되고 계승되어 왔었다는 것은 사실이며, 이 점에서는 중세와 근대와의 단절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르네상스라고 불리어진 이 시대에 고대가 중세에 있어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는 점에 있다. 말하자면, 그 자체로서는 동일한 고대를 바라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다. 모든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각의 전환 에 혁명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는데 동의한다면 위에 인용한 미슈레의 단언도 수 긍 못할 것은 없다. 전적으로 새롭게 인식한 고대 위마니슴을 지도 원리로 삼 은 16 세기는 어떤 의미에서 〈 무로부터 〉 창조했다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 16 세기에 되살아난 고대는 중세의 고대와 같지 않았으 며 이 차이가 곧 새 시대를 창조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다면 아 차이는 어 디에 있는 것일까. 한마디로 그것은 기독교의 엄격한 후견하에 놓였던 고대와, 원형 그대로의 순수성 가운데 되살아난 고대와의 차이이다. 중세에 있어서 고 대 문헌에 대한 연구나 이교적 사상에 대한 관심이 그 아무리 왕성한 것아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당대의 공식적 이념이었던 기독교의 감시하에 놓여 있었으며, 성스러운 지식의 범위 안에서만 허용되었던 이 세속적 지석은 말하자면 신적 지식에 봉사하는 시녀로서만 인정받았다. 이에 반해 16 세기의 위마니스트들은 그 어떤 이유에서도 왜곡되거나 훼손되지 않은, 본연의 모습 그대로의 고대와 만나기를 원했다. 그들은 중세를 뛰어넘어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기독교의 간섭 이나 제약을 받지 않은 고대의 순수한 원류와 합류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 순수한 원천으로의 회귀야말로 그들의 새로운 지적 모험의 출발점이었다. 이 시점에서 고대에 대한 연구가 문헌학과 깊이 관련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 치 고고학자들이 깊숙이 파묻힌 유물을 발굴하려 할 때 흙을 들어내고 부착물 울 제거하며 부서전 파편들을 재조립함으로써 원형을 복원하는 것과 같이 그들 도 기나긴 망각 속에 묻혀온 문헌들을 찾아냄은 물론 온갖 편견과 곡해로 뒤덮 인 문헌들의 때를 벗겨냄으로써 순수한 모습을 되살려내야만 했다. 그들이 만 나기를 원했던 고대는 그대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비상한 노력에 의해

서만 비로소 되찾아지는 그 무엇이었다. 고대에 본연의 순수성을 되돌려주기 위한 그들의 작업은 이렇듯 본질적으로 바판적 성격의 것이었으며 反중세를 기 본명제로삼고있었다. 반중세의 명제는 16 세기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사건인 종교개혁 운동을 우리 에게 상기시킨다. 이 운동은 기독교의 중세적 개념과 체제에 대한 단호한 거부 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로써 16 세기의 전반적인 탈중세의 흐름 속에 편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위마니슴이 고대의 순수로 회귀하기 위해 단순히 중세에서 탈피하기를 기도했던 데 반해 종교개혁은 중세와의 정면 승부를 출발 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중세인을 억압했던 영적 속박에서 해방시킴으 로써 새로운 정신적 모험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전정한 인간해방의 기수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중세로부터의 해방울, 바로 중세가 서 있는 정신적 기 반 그 자체에 도전함으로써 완성시킨 것은 종교개혁이었다. 그런데, 여기 홍미 로운 것은 이 종교적 운동도 위마니슴과 동일한 행동방식을 따르고 있다는 점 이다. 위마니슴이 고대의 때묻지 않은 원천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것처럼 종 교개혁도 기독교의 원시적 순수성을 되살리기를 바랐으며 이를 위해 중세의 오 염에서 벗어나기에 주력했다• 다만 이들은 중세의 오염의 실체롤 각기 상반된 대상에서 찾았을 뿐이다. 즉, 위마니스트들은 중세 기독교의 간섭으로 인해 고 대의 지적 전통이 왜곡되었다고 믿은 데 반해, 종교개혁자들은 이교적 사상의 침투로 인해 기독교의 순수성이 훼손되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초기 종교개혁 자들은 중세의 온갖 이교적 세속적 잔재를 불식하고 기독교의 원초적 순수를 회복시키기 위해 그 원류로 거슬러 울라갔으며 그들의 작업도 위마니슴의 경우 와 마찬가지로 엄밀히 비판적이고 문헌학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위마니슴-주제와번모 다시 위마니슴으로 돌아오자. 우리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16 세기의 위마 니스트들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고대와 만나기를 원했고 또 이 새로운 만남

이 곧 새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발견하기 시작한 고대는 그들에 있어 충격 그 자체였으며 이 충격은 생명의 왕성한 활력, 열렬한 지적 호기심 그리고 창조의 의욕을 고취시켰다. 우리는 16 세기 위마니슴이 과거를 복원하기 위해 그 어떤 학문적 열정과 방법적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잠시 되돌 아보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정신적 모험을 위한 서곡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그 진실성 가운데 되살아난 고대는 그들이 일찍이 알지 못했던 삶의 새로운 지평 울 활짝 열어주었고 그들은 이 경이로운 신천지를 향해 달려나갈 것이기 때문 이다. 새 왕국을 수립하기 위한 치열한, 그리고 지국히 험난한 모험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먼저 우리는 16 세기인들이 이렇듯 계시된 고대에서 무엇을 얻었는가를, 그리 고 이것이 어떤 지적 • 윤리적 탐구를 자극하였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전반 적인 지적 분위기의 변화와 관련하여 우선 지적할 것은 인간의 문제에 대한 관 십의 놀라운 증대이다. 다시 말해, 1 6).1 ] 기인들의 관심과 성찰의 핵은 인간 그 자체였다. 물론 중세가 인간의 문제를 전적으로 배제했던 것은 아니며 중세의 신학과 철학 속에서 차지하는 인간학의 몫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중세의 인간학은 신학의 일부분으로서만 존재했고 인간은 신의 질서 속에서만 논의되고 규정지어졌다. 이와 반대로 16 세기인들이 대면하게 된 것은 오직 있 는 그대로의 인간, 그 무엇에도 예속되지 않은 독립된 주체로서의 인간이었으 며 이 인간들이 엮어가는 지극히 인간적인 드라마였다. 그들이 경탄의 눈으로` 바라본 것은 다름아닌 이 새로운-아니, 어떤 의미에서 영원한 인간의 모습 이었으며 이로써 그들의 인간탐구는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되도록 운명지어질 것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신에 예속되었던 인간을 본래의 인간의 위치로 되돌 려놓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의 문제를 순수히 인간적인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것 을 의미한다. 고대의 발견이 가능케 한, 인간에 대한 시각의 혁명적인 변화, 그리고 인간의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의 변화는 바야흐로 인간학의 새 공간을 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인간학의 모든 것을 두루 섭렵할 겨를이 없다. 또한 그 주

제들은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가령, 부르크하르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한 본질로서 제시했던 〈개 인주의났근 가장 주목할 만한 주제임에 틀림없다. 즉, 인간을 독립된 한 개체로 자각한다는 것은, 중세가 전적으로. 영적 • 세속적 공 동체 의식에 의존했었디는 점을 감안할 때 분명히 새로운 각성이며 이 각성 가 운데 서구의 근대적 모험을 촉발시킨 의식의 혁명을 보는 것은 과장된 일은 아 니다. 5) 이 개체의 자각이 인간의 위엄에 대한 의식으로 뒷받침되고 있다는 것 도 분명하다. 독립된 주체라 함은 전적인 자유의지와 창조적 기능을 부여받은 자율적 존재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소원과 결정에 따라 자신의 운명 울 선택할 권리와 자유를 누리게 된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과거 신의 주권에 속해 있던 모든 것을 이양받은 것과 같으며, 이로써 새 인간의 탄생과 더불어 세계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인간의 위엄에 대한 이 러한 믿음이 인간에 대한 신뢰와 불가분의 것이라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 다. 왜냐하면 자유와 주권을 인정받은 인간은 극히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감당 하고 향유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부여받았다고 믿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우 리는 초기 위마니슴이 그 어떤 밝고 낙천적인 빛깔로 물들여져 있는가를 익히 알고 있다. 과거의 종교적 • 인습적 금기에서 풀려난 자유인들은 활짝 펼쳐진 공간 앞에서 전율과 흥분을 느끼며 마치 인간에게 허용된 모든 가능성을 남김 5) 이 관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종교개혁의 결정적 공헌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개 혁이 중세의 영적 속박에서, 그리고 종교적 체제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영적 • 정신적 모험 의 새 장을 열었다는 것은 본문에서 지적한 바와 갇지만, 가령 루터가 〈 만인사제주의 sacerdoce uni verse! 潟t 제창함으로써 신과 인간(더 정확하게는 개인)과의 관계를 새롭 게 인식한 것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인간은 주체적 인격을 가진 한 개체로서 신 앞에 서며, 구원은 아 개체가 신과 맺는 관계의 한 방식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영적 모 험의 핵심적 단위로서의 개인의 위상을 새롭게 설정한 것과 같다. Luc ien Goldmann .g. 데카르트의 co git o 를 서구인들의 개인적 자각의 기점으로 인정하고 있지만(cf. Dieu cac 脇 3 皓) , 우리는 이 시점을 메기 전으로 되돌려 놓기를 원한다. 개인의 의식이 철 학적 실체에 앞서 종교적 실체 속에 싹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아다.

없이 불사르기라도 할 듯 그 안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매우 소박하게도 모든 것은 자신들의 의지적 선택과 이성적 판단에 따라 이루어지며, 이 의지와 이성 의 행사는 궁극적으로 선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었다. 다시 한 번 환기하자. 우리의 목적은 16세 기의 인간학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앞으로 다루게 될 17 세기와 관련하여 논의의 핵심이 될 주요한 두 개념을 여기서 만난 셈이다. 자유의지와 이성이 바로 그것이다. 위마니슴 초기에 그것들이 전폭적 신뢰의 대상이었고 선과 정의의 근원이었다는 것은 위 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그러나 16 세기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초기의 낙관주의 가 뢰색하면서 보다 신중하고 현실적인 위마니슴으로 변모해 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변모의 과정을 뒤따라가 보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할 것으 로 믿어진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17 세기를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 01 다. 여기 먼저 이성의 경우가 있다. 우리는 위마니스트들의 지적 탐구에 있어 이 성이 차지하는 절대적 우위에 대해 누차 주목한 바 있다. 모든 인간이 부여받 은, 그리고 인간의 위엄의 근원이기도 한 이성은 이제 시대의 새 우상으로 등 장하였고 위마니스트들은 탐구의 가장 신뢰할 만한 향도로서 이성에 의지하였 다. 중세에 있어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원리는 권위였고 이성은 한낱 이 권위 에 봉사하는 시녀와 같은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이성은 그 자체의 독립 적 기능을 인정받으며 독자적인 방법과 언어를 갖게 된 것이다. 이성의 가장 뛰어난 권능은 자유로운 검증과 창조적 탐구에 있다. 초기 위마니스트들이 고 전을 복원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은 다름아닌 자유로운 검증에 입각한 비판적 방법이었고, 그들이 고대를 추종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고대를 능가할 수 있 다는 야망을 품게 된 것은 이성의 창조적 탐구의 기능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의 이와 같은 등장을 너무 화려하게 묘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다. 왜냐하면 16 세기의 이성은 만물을 밝히는 유일한 지배자로 군림하기에는 아직도 허약했을 뿐만 아니라 지난날의 초이성적 사고의 습성은 여전히 유효했

기 때문이다. 가령, 여기 〈 소우주 - 대우주 〉 의 개념이 있다. 인간의 육체와 영혼 이 소우주라면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자연은 대우주이며, 동일한 구조를 가지 고 있는 이 양자는 부단한 교류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대우 주, 죽 〈 전체 〉 의 축소판이고 전체는 〈 개체 〉 의 확대판인 만큼 이 양자 사이에 교감의 망이 짜여져 있다는 것은 딩연하다. 이성적 사고와 경험적 지식이 존중 되기 시작한 16 세기에 우주에 대한 다분히 신비주의적인 비전이 살아남아 있었 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16 세기인들에게 우주는 물리적 현상인 동시 에 영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우리는 이 양자 사이에 내밀히 교감하는, 이른바 보편적 상응의 관계를 인정하는 태도가 중세의 아니미슴 an i m i sm@} 별로 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 세기에 몇몇 과학적 • 기술적 혁신이 성 취되고 이로 인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주목할 만한 시각의 변화가 있었다 할지 라도 그것을 17 세기의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와 유사한 것으로 보려 한다면 그것 은 큰 잘못이다. 우주의 모든 현상을 엄밀한 인과율의 지배하에 둠으로써 우주 롤 하나의 방대한 기계론적 공간으로 재편성하기까지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고 넘어야 할 고비가 많다. 이 고비 중의 하나로서 우리는 이성의 주권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움직임울 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성에 대한 부정적 시각, 일종 의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위마니슴 초기의 열기와 흥분이 가시자마자, 사고의 새 도구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이성 그 자체에 대한 기본적 회의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검증과 비판을 생명으로 하는 이성이 마침내 자신을 대상으로 삼게 되 는 것은 하나의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실상, 이성은 자신의 존재와 기능에 대한 엄밀한 검증이 있기 전에는 한발짝도 전진할 수 없다. 잠에서 깨어나 주 위를 두리번거리던, · 그리고 자못 자신의 위력에 도취되어 있던 이성은 어느 시 접에선가 차분히 자신과 만나야만 했다. 이 만남은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프랑스가 겪어야 했던 종교적 • 정신적 시련은 엄청난 것이었으며 이 기간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것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 시련은 초기 위마니스트들의 찬란한 꿈, 유토피아의 환상을 일시에 무산시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 좌절과 환멸 속에서 하나의 반성적 사고가 태어났다. 온 세상이 광기와도 같은 증오와 복수 심에 사로잡혀 살육의 처참한 놀이에 몰두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의 철학자가 있 어 이 비극의 의미를 되씹으며 인간조건에 대한 본질적 물음을- 묻기 시작한 것 이다. 미셸 에이켕 드 몽테뉴M ic hel Eyq u em de Monta i g ne (I533-1592). 그 는 목전에서 전개되는 비극의 근원을 인간의 오만에서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했 다. 유혈의 침극으로 치달은 종교전쟁은 실은 두 교리의 대립에서 발단된 것이 지만 문제는 이 교리가 각기 배타적이고 맹목적인 독단으로 변질된 데 있다. 하나의 이론이 가능한 여러 이론들 중의 하나로 머무르는 대신 자신을 절대화 하고 유일무이한 진리로서 군림하려고 할 때 그것은 가공할 폭군으로 변신한 다. 폭군으로 변모한 독단에 대해 우리는 파나티슴fa na ti smeo] 란 이름을 붙이 기도 한다. 서로를 인정하고 타협하기를 포기한 두 파나티슴 사이의 충돌은 필 연적이고 그 양상은 국단적이다. 이렇게 전단한 몽테뉴는 이제 차분히, 과연 인간에게 그러한 절대적 진리가 가능한가를, 아니, 도대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우리는 여기서 몽테뉴의 전면적 회의의 작업을 일일이 환기할 필요는 없다. 이 작업 자체는 반드시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그는 이미 고대 철학 속에서 논의되었던 주제들을 그의 방식대로 재론하며 자신의 전체적 구도 속에 편입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그의 결론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일찍이 인간이 인간과 세계에 대 해 가질 수 있었던 모든 지식과 확신들을 비웃는 그의 회의주의는 인간의 확신 이란 환각자의 꿈과 같은 것이고, 그의 지식은 한낱 현학적 무지에 불과하며, 인간이 보편적 가치로서 인정하는 사회적 질서, 법, 정의는 습관에 의해 정당 화된 우연의 소산이라는 것을 결론으로 제시한다. 그는 끝으로 묻는다――도 대체 인간이 확실히 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확실히 모른다 라고 단언할 수도 없는 우리가 최후로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무엇을 아는가 Qu e sais -je ? 〉라고 묻는 것뿐이다. 그의 극단적 회의주의가 모든 단언을 회피

하고 물음으로 끝니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나 는 이 저자 가운데서 그 자신의 무기에 의해 여지없이 강타당한 오만한 이성, 그리고 자신의 허약한 힘으로 올라섰던 신과의 교제에서 인간을 짐승의 자연으로 떨어뜨리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피비린내 니는 노 반란을 기쁨 없이는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6) 이것은 몽테뉴에 대한 파스칼의 한 증언이다. 사실상 몽테뉴는 마치 파괴의 악마에 붙잡히기라도 한 듯 모든 것에 대해 무차별 공격 을 가했으며 인간을 그의 오만의 자리에서 여지없이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러 나 우리는 몽데뉴가 단순히 파괴만을 위해 파괴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단 순히 인간을 조롱하기 위해 그의 오만을 무찌르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의 회의는 인간을 지적 오만의 산물인 맹목적 독단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사고의 균 형을 되찾게 하기 위한 것, 다시 말해 자신의 존재와 사물에 대한 환상 없는 비전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허황된 환각에 사로잡혀 있던 인간은 사고의 명석성을 되찾고 겸손히 인간의 본래의 영역, 즉 그가 즐겨 말히는 바 인간의 〈 자연 〉 으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의 회의주의가 그의 최후의 결론 이 아니라 진정한 정신적 모험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에 있 어 회의주의는 일종의 정지작업과 같은 것이었으며 그 터전 위에서 그의 전정 한 삶의 추구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이 추구는 인간이 그 안에서 살도록 운명지어진 〈 자연 〉 이란 무엇이며 이 자연에 따라 산디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묻는 것으로 귀착된다.

6) Pascal, Entr e ti en avec de Sa,ci in Oe uv res comp le't e s, l'Int e g r al e, Seuil, 29 ~ : <·•• qu e je n e puis v oir s ans joi e dans cet aute u r la sup er be rais o n si i nv i nc i bl ement froi ss ee pa r ses pro p re s armes, et cett e revolte si s ang la nte de l'homme contr e l'ho mme, q따 de la socie t e avec Dieu oil ii s'elevait pa r les maxim es de sa faibl e rais o n le pre ci pite dans la natu r e des bete s .. ,. >

인간학의 탄생 이 물음과 더불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식의 문제에서 구체적 삶의 문제, 즉

윤리적 명제로 이행한다. 물론, 이 양자는 서로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인간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삶을 영위해 나가는 방식이 결 정되기 때문이다. 몽테뉴의 경우 〈 자연을 따라 산다片근 그의 윤리적 태도는 이 미 그의 희의론적 인식 속에 예고되어 있었다. 아성의 독단을 비웃는 그의 회 의주의는 인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게 하는 한 방식이었으며 이 환상 없 는 인식에서 행동의 한 원리가 자연스럽게 도출되었다. 〈자 연을 따라 산다났근 것은 인간이 그 안에서 살도록 운명지어진 조건들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그것 들에 순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시대를 휩쓸고 있는 온갖 광기와 파나티슴 의 열병에 대한 그의 처방은 그 이상의 것도 이하의 것도 아니다. 그 가공할 열병의 회오리가 결국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인간의 오만과 이성의 독단에 기 인한다는 것을 간파한 그는 인간이 자신의 본래의 위치로 돌아울 것을, 그리고 자신의 조건을 뛰어넘으려는 무모한 욕망을 제어하면서 인간의 치수 mesur 혀] 따라 스스로를 조절하는 기교를 배울 것을 권유하였다. 우리는 몽테뉴의 이른바 〈 삶의 기교 a rt de vi vre 〉 에 대해 더 깊이 관여하지 는 않을 것이다. 다만, 1 Q1 l 기의 정신적 모험과 관련하여 몽테뉴 가운데 다음 몇 가지를 확인하기를 원한다. 첫째로, 우리는 16 세기 위마니슴의 한 성숙을 그 안에서 보고자 한다. 몽테뉴에 의해 감행된 이성에 대한 도전은 이성 그 자 체로서는 분명히 쓰라린 시련이었고 좌절의 경험이었다. 그러나 이성은 그를 통해 자신의 반성적 비판의 기능을 성실히 수행한 점에서, 그리고 그 결과로써 비록 자신의 권위는 크게 실추했다 할지라도 또 하나의 명석성을 창출해 낸 점 에서 이성의 좌절은 단순한 좌절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 또 하나의 명석성과 더불어 16 세기 위마니슴은 새로운 차원으로 이행한다. 세기초 그처럼 현란한 꿈과 환상을 향해 달려나가며 일시에 우주의 모든 신비를 풀기라도 할 듯 지적 정복의 야망에 둘떴던 위마니슴은 시대의 비극과 시련을 통과한 끝에 마침내 몽테뉴에 이르러 자신의 참된 영역으로 되돌아오며 자신의 기반을 되찾기에 이 르른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허황한 꿈 대신 한계의 의식이 자리잡았 고, 열기와 흥분 대신 차분한 반성적 사고가 가동하기 시작했으며, 무모한 낙

관주의는 절도 있는 계산된 낙관주의에 자리를 넘겼다. 결국 , 위마니슴은 인간 과 자연에 대한 침착하고 명석한, 매우 현실주의적인 인식이 도입됨으로써 한 결 현명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그것은 라블레식의 거인의 위마니슴도 아 니고 플레이아드 시안들의 다분히 신비주의적인 위마니슴도 아니다. 말의 모순 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 인간적인 〉 위마니슴이라 부르고 싶다. 그것은 〈 인간의 차원 〉 으로 되돌려진 것을 의미하며, 이 관점에서는 몽테뉴에 의해 비 로소 근대적 의미의 인간학이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17 세기에 심도 있게 다듬어져 나갈 고전적 인간학은 사실상 몽테뉴 없이는 상상하기 어 렵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학의 새 영역으로 부상한 〈 인간의 차원 〉 이 구체적으로 무 엇을 가리키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몽테뉴에 의해 회복된 의식 의 명석성이 어떤 인간 현실과 마주치게 되었는가를 아는 것이 문제이다. 그것 은 한마디로 인간의 내적 자아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 이 내 적 자아는 그 어떤 관념적 또는 선험적 정의도 비웃으며 단순히 있는 그대로 있을뿐인 실체, (철학적인 용어를사용한다면) 하나의 내재적 실체이다. 몽테뉴 의 가장 뛰어난 공헌은 내적 자아를 성찰의 대상으로 삼되 이 성찰에 있어 모 든 관념과 환상을 배제한 채 그것을 하나의 내재적 실체로 가청한 데 있다. 그 는 어떤 의미에서 〈 너 자신을 알라 〉 라는 소크라데스의 권유를· 가장 충실하게 받아동인사람이었다. 그의 공헌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모든 관념과 환상을 배제한 그의 성찰은 그로 하여금 인간 현실의 놀라운 부피와 모호성을 발견하게 했기 때문이다. 물 론 인간 자아에 대한 성찰은 위마니슴만의 독점물은 아니다. 중세의 최초의 그 리고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어거스틴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인간학 의 심오함은 가히 경이적이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내적 성찰의 전통이 중 세의 기독교 사상가들 가운데 면면히 이어져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의 성찰을 궁극적으로 주도한 것은 기독교적 비전이었으며 결국 인간의 운명은 신 이 통치하는 우주의 질서 속에서 확실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그들에 있어 한

때의 어둠은 영원한 밝음으로, 한때의 의혹은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대치되 었다. 그러나 16 세기에 이르러 〈 너 자산울 알라 〉 라는 해묵은 가르침은 전혀 새 로운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여기 몽테뉴의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그가 자신의 내적 자아에서 점차 인간 전반으로 확대되어 나간 성찰이 어떤 기본적 태도와 방법에 따라 진행되었는가에 대해 산발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의 성찰이 갈수록 내면화되고 심리적 부피를 더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마침내는 이 내적 • 심리적 현실의 모호성 과 마주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마치 신비에 매료되기라도 한 듯 자신의 내면 을 들여다보며 그 깊은 심연 속에서 들끓는 온갖 정념들, 때로는 상국하는 욕 망들의 정체를 밝혀냄으로써 지신의 비밀을, 나아가서는 인간의 비밀을 밝히기 를 시도했던 몽데뉴는 분명히 인간학의 새 장을 연 사람이다. 문제의 중요성은 인간을 신학적 정의에서 벗어난 하나의 심연, 쉽게 잡히지 않는 유동적이고 불확정한 존재, 두과하기 어려운 수수께끼로 인식한 데 있다. 1 세기에 걸친 무수한 혼란과 방황 끝에 이제 비로소 위마니스트들은 자신의 대 상과 팀구의 방법론에 대해 확실한 인식을 갖게 된 것일까. 인간의 내적 자아 에 대한 성찰로 요약되는 새 인간학은 종교적 처원에서 세속적 차원으로 내려 섰으며 자신의 탐구를 위해 부여받은 자연적 도구 의의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자연적 도구는 기적을 낳지 않으며 신적인 조명과는 달리 일시에 밝음을 가져다 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 앞에 부상한 새로운 대 상, 즉 신바의 부피를 지니고 있는 인간의 내적 현실을 확인하며 자신의 모험 이 쉽게 아물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감하는 것이 고작이다. 말하자면, 내적 탐구의 모험은 이제 그 막이 올려졌으며, 그것은 본질적으로 열린 모험이다. 인간의 문제를 모든 초월적 • 선험적 시긱이 배제된, 순수히 인간적 차원으로 환원시키고, 마침내는 그것을 모호하고 불확실한 인간의 내적 자아의 문제로 제기함으로써 l@ ]기의 인간학은 다음 세대의 인간학의 새 영역을 활짝 열어준 것 0] 다.

2 위마니슴문학 위마니슴을 중심으로 한 16 세기의 정신적 • 지적 기류에 뒤이어 우리는 그것 이 구체적으로 당대의 문학 가운데 어떻게 발현되었는가를 추적해 보고자 한 다. 위마니슴은 16 세기의 전체 지식인들의 개인적 또는 집단적 작업의 결집이 었고 그 가운데서도 문학인들이 차지한 몫은 매우 컸다. 가령, 초기 위마니슴 은 라블레에 의해 가장 현란하게 대변되었는가 하면, 고대를 모방하고 독창적 창조의 가능성을 믿었던 플레이아드의 시인들을 떠나서는 위마니슴의 성숙을 이야기할 수 없다. 여기서도 우리는 16 세기의 문학을 그 자체로서 논하는 대신 뒤이은 17 세기 문학과의 관련하에서 접근하게 될 것이다. 2-1 초기 위마니슴 문학―一라블레 16 세기 문학이 적어도 그 초기에 있어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은 그것 의 놀라운 〈풍요로움 〉 때문이다. 우리는 위마니슴의 지적 세계가 그 얼마나 다 양하고 복합적인 것인가를 이미 확인한 바 있지만, 이제 예민한 감수성과 자유 분방한 상상력이 문제되는 문학 창조 가운데 이 다양성과 복합성의 가장 극적 인 표현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위마니슴의 기본적 명제 는 인간과 사물을 그 어떤 초월적 • 선험적 관념의 간섭도 없이 오직 그것들의 자연적 상태 그대로 접근하는 데 있었던 것인데, 여기 중요한 것은 이 자연적 상태가 거의 혼돈에 가까운, 다양하고 모순된 모습으로 비쳐졌다는 사실이다. 〈풍요로움〉이란 한마디로 인간의 삶과 세계의 온갖 양상들이 그것들의 원초적 현존 가운데 표현된 것을 의미한다. 레 0 固슴 이 인간과 세계와의 새로운 만남을 주도할 가장 적합한 문학적 원리는 아마 도 〈레아리슴 real i sme 〉일 것이다. 과거의 편견과 금기를 뿌리치며 전적으로

새롭게 존재와 서물들을 바라보고 인간의 자연적 삶을 경험하기를 원했던 위마 니스트들에게 자연의 충실한 모방을 기본원리로 하는 레아리슴은 당연히 유효 한 향도로 받아들여졌다. 레아리슴은 무엇보다 먼저 현존하는 것들의 절대적 우위를 인정하고 현실적 삶을 촌중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인간이 오랫동안 멀 리하고 의면했던 (혹은 그렇게 하도록 강요당해 왔던) 인간의 삶의 현실적 공간을 확긴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적 드라마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 안기를 원했던 위마니스트들은 먼저 레아리스트로서 그들의 지적 모험을 살아 갈 것이다. 삶과 사물들의 자연적 • 현실적 공간으로의 복귀, 모든 것은 여기서 부터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l Q1 ] 기 문학의 출발점이자 영원한주제가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 여기 문제되는 것은 삶과 현실을 문학 속에 도입하는 것이다. 과거의 문학 속에 이런 것들이 배제되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 다만 중 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 • 원초적 상태 그대로의 삶의 모습이 되살아 난 데 있다. 이 새로운 삶과의 만남이 초기 위마니스트들에 있어 하나의 놀라 운 발견, 충격적인 계시가 되었던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들의 문학, 특히 라블레 Fran~o i s Rabela i s(1494?-1553) 의 문학 가운데 넘실거리는 흥분과 열기의 파장은 이 발견의 충격에서 연유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삶과 자연 은 그들에게 분명히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으며 그들은 전율과 흥분 속에서 그것들을 맞이했다. 갖가지 관념과 사회적 인습의 탈을 벗어던진 인간이 자신 에게 회복된 자유와 권능만으로 세계의 새 주인이 될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한 때 사로잡혔다고 해서 굳이 탓할 일은 아니다. 그들이 발견한 원초적 생명의 디나미슴 d yn a mi srne, 그리고 그들이 예감한 인간의 새로운 가능성은 그들을 그토록 현혹시키고 말았기 때문이다. 라블레는 애당초 거인의 이미지로밖에는 자신의 주인공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현실적 삶과 자연으로의 복귀는 흥분과 감격만을 가져다 준 것은 ' 아 니다. 사실, 이러한 감정적 반응은 레아리슴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 감정 적 반응에 뒤이어, 혹은 때를 같이하여 우리는 현실에 대한 보다 차분한 관심, 보다 치밀한 관찰이 병행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로써 이 문학 속에 레아리슴

은 보다 확실하게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세기초의 문학이 현실에 대해 쏟았 던 관심은 정녕 주목할 만하다. 가령, 라블레의 소설 가운데 전원의 목가적 삶 에서부터 끊이지 않는 전쟁놀이에 이르기까지 일상적 생활과 현실의 모든 광경 들, 그리고 믿으로는 농민과 서민에서 위로는 승려, 귀족, 왕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분, 모든 계층의 인간들은, 이 모두를 에워싸고 있는 과장된, 때로는 환상적인 장치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진실성 가운데 재현되어 있다. 러블레 의 에도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 Mar gu er it e de Navarre, 데 페리에 Des Perie r s 등의 콩트 속에서 일상적 삶이나 역사적 사건들을 묘사하는 방식의 레아리슴적 요소는 그리 어렵지 않게 감지될 수 있다. 그것들은 혼히 당대의 시사적 문제 와 직접 관련되어 있기도 하다. 가령 리블레의 전쟁이야기는 그 허구적 설정에 도 불구하고 당대 실제로 일어났던 전쟁을 소재로 삼았던 것이 분명하다. 7) 작 품 속에 사용된 지명이나 묘사된 지형은 실제 그대로의 것이었고, 왕이나 거인 들과 감은 작중인물들의 언행은 그가 직접 알고 지냈던 시골 귀족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서정성을 귀히 여겼던 플레이아드파 시인들도 삶의 일상적 모 습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레아리슴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고대 시인들의 모방에 열울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못지않 게 혹은 그 이상으로 지신들의 일상적 삶의 경험둘을 소중히 여겼으며, 주변의 그 어떤 하찮은 사물들 속에서도 그들은 시적 영감의 주제를 발견하기를 꺼리 지 않았다. 〈삶의 모든 순간을 위해 쓰기서} 염원했던 그들은 삶의 현장에 대 한 깊은 관심으로써 레아리슴 경향에 상당 부분 호응했었다고 말할 수 있다.

7} 가령 , Gar gan t ua 와 그의 이웃 P ic rochole2 料 전쟁은 실제로 라블레의 생가가 있는 laDein ier e 근방의 Ch ino nnais 지방을 그 무대로 하고 있으며, 지명이나 지형도 실제 의 지리대로 사용되고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러한 레아리슴이 적어도 16 세기 위마니스트들 의 경우 단순히 문학적 • 심미적 관심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보다 심층적으로 세 계를 향한 지적 탐구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인은 학자와 마찬

가지로 세계를 인지할 능력이 있으며, 그러기에 그둘은 인간의 삶과 서물들의 다양한 현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들이 삶의 현장 속에서 감지된 모든 것을 충실히 옮기는 것은 재현 그 자체에 의미가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들에 있어 전정 중요한 것은 이렇듯 일차적으로 감지된 삶의 의형적 현실 속에서 삶 의 숨겨진 비밀과 내밀한 움직임을 드러나게 하는 일이다. 이제 문학은 자연의 단순한 모방이나 현실에 대한 피동적 복종이 되기를 거부하고 창조적이고 적극 적인 탐구의 징이 되기를 선택함으로써 필경 레아리슴의 범주를 넘어선다. 주관성 우리는 16 세기의 위마니슴을 개관하면서 그것이 현실로의 복귀와 이성적 존 재로서의 인간의 회복을 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질은 신비주의적 색깔 에 물들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중세적 신비주의의 맥은 여전히 유 효했고 게다가 신풀라톤주의까지 가세하였는가 하면 한 세기를 통해 점차 증대 되어 간 불안의 감정은 신비주의적 경향을 더욱더 부채질한 것으로 보인다. 다 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16 세기인들이 세계를 단순히 표면적 현상으로 한정시키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세계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세력들(이것들은 흔히 〈 마술적 〉 이라는 표현을 수반한다)을 예감했었다는 .사 실이 다. 이 예감이 문학 속에서 그들의 상상적 세계를 확대시켜 나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는 이성적 성찰과 객관적 인식의 영역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몽상과 환상의 공간이 있었다. 아니, 이 양자는 따로 분리되 어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개인적 비전 속에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그 것들은 동일한 사물의 겉과 안과 갇은 것이며,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겉冷t 통해 〈 안 〉 과 만나는 일이다. 이 점, 라블레가 『 가르강튀아 Garg a n t血』의 서문 속에서 제시한 실렌느 S i lene 毗 이름의 약상자의 비유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온갖 기괴한 침승 들과 환상적인 형상들이 그려져 있는, 장난기 섞인 의양의 이 상자 속에 실은 매우 소중한 약이 보관되어 있는 것처럼, 이 세계의 모든 것은 헛된 의관 속에

또 하나의 세계, 전정한 세계를 숨기고 있으며,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이 내면의 세계이다. 뒤이어 소크라데스를 예로 들어 그가 보기 흉한, 우쓰벽} 스럽기까지 한 의모 속에 〈초 인간적인 지성, 놀라운 덕, 무찌를 수 없는 용기, 비할 데 없는 절도, 완벽한 확신…… 〉 8) 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지적한 라 블레는 독자들을 향해 〈 뼈를 부수고 자양분 많은 골수를 빨아먹을 것 〉 9 )을 간절 히 권유한다• 요컨대 그의 소설은 약상자 실렌느나 소크라테스의 의모와 흡사 한 것이 되겠지만 그는 이 겉모양에 현혹되지 말고 그 안에 숨겨진 내밀한 전 실을 읽어주기를 당부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소설은 때로는 희극적이고 때 로는 환상적인 장치 속에서, 그리고 나아가서는 신화적 부풀림 속에서 사건을 전개시켜 나갈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단순히 희극적 효과를 노리거나 상 상적 놀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문제는 이 가공적 의양 속에 숨겨진 실체, 그의 순전한 듯한 장난 속에 함축된 계산된 의도를 간파하는 데 있다. 그는 결코 그의 작품 속에서 이 실체와 의도를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 는다. 그는 끝까지 세계의 현상들과 삶의 모습을 그의 특유한 희극적 • 환상적 레아리슴으로써 그려나간다. 그의 예술의 뛰어난 특성은 삶과 세계를 그 생생 한 현실성 속에 재현하는 그의 묘사의 수법을 통해 묘사된 것 이상의 것을 환 기시키는 데 있다 . 요컨대 그의 작품은 레아리슴으로 규정지어지는 모든 특칭 에도 불구하고 깊은 주관성에 물들어져 있다.

8) Rabelais , Garga n tu a, Prolog ue : <… ente n dement plu s qu' h u main , vertu merveil - leuse, courage inv in cible , sobresse non par eil le… , assurance par f ait e… . >

9) 위의 책 : <.•• romp re l'os et s ucer ~a substa n ti fiqu e moelle… . >

아마도 우리는 이 자리에서, 위마니슴 문학이 의면적 현실을 주관성의 장으 로 변환시키는 데 있어 어떤 방식들을 도입했는가를 이야기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예로 국한시켜 전체적 분위기를 감지하게 하는 것으로 그치려 한다. 여기 라블레의 전작품을 관통하는 〈웃 음 〉 의 주제가 있다. 그에 있어 웃음은 일차적으로 삶의 기쁨의 표현이다. 인간을 신뢰하고 삶을 전적으

로 긍정했던 낙천주의자 라블레가 웃음의 문학을 창조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 운 일이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단순한 삶의 환희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었 다. 그는 삶을 긍정하고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개조해야 할 것으로 인 식했다. 그런데 개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파괴해야 하는데, 웃음은 파괴의 매우 유효한 무기였음에 틀림없다. 일차적으로 웃음은, 몽테뉴의 풍자가 그러했듯이, 쉽사리 기만당하지 않으려 는 의식의 명석성을 보장해 준다. 실없어 보이는 웃음의 이면에서 번득이는 것 은 두명한 의식이며, 이 의식은 우리에게 이중의 해방울 가져다 준다. 그중 하 나는 우리를 억누르는 기존의 권위와 관습, 그리고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모 든 종류의 독단과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웃음은 이런 것들에 대해 정면으 로 혹은 논리적으로 대항하지 않는다. 웃음은 보다 은근하고 다소곳하다. 그것 은 단지 진지함을 가장하는 모든 것을 희극화시킬 따름인데, 이때 가면은 순식 조례 녹아버리고 허구성은 백일하에 노출된다. 웃음의 가공할 파괴력을 견디어 내는 것은 이 지상에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칭안해 낸 모든 것은 때 때로 관념과 외양의 장엄함에도 불구하고 필경 우연과 허무로 귀착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블레도 몽테뉴도 허무주의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그들이 웃음과 풍자를 통해 인간을 기존의 틀에서 해방시키려 한 것은 인간으로 하여 금 인간의 자연으로, 다시 밀해 인간적 진실의 차원으로 되돌아오게 하기 위해 서였다. 그런데, 인간은 기존의 틀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이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이념과 체제에 대해서도 항상 경계할 필요가 있다. 여기 웃음이 지속적으로 해 방의 역할을 담당해야 할 이유가 있다. 인간을 새롭게 발견하고 세계를 새롭게 조직하기를 원했던 위마니스트들은 이번에는 그들 자신 지적 오만에 이끌려 이 념의 포로가 되고 독단에 눈이 어두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웃지 않는 자들, 라블레가 〈 a g elas t es 〉란 이름으로 부론 이 자들은 단순히 권태로울 뿐만 아니 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자신들의 신념에 대한 맹목적인 정열로 말미암아 세계 에 증오와 대립과 분란만을 가져오는 이 자들은 흔히 광신자라는 이름으로 불

리어전다. 이들은 절대적 진리의 소유자로 자처한 접에서 인간 조 건을 넘어선 사람이며 인간의 삶을 거부한 괴물들이라 할 수 있다. 웃음은 이들의 망상을 일시에 허물어뜨림으로써 그들의 인간화의 길을 열어놓을 것이다. 이 웃음은 말하자면 정념의 카타르시스로서의 웃음이다. 과거의 부조리한 권위와 관습들 의 허구를 단숨에 무찌른 웃음은 이제 동일한 기능으로써 이념과 독단에 결부 된 광적인 정념의 허구를 무찌른다. 양지에 있어 다 같이 문제되는 것은 인간 으로 하여금 인간의 진실, 즉 온갖 정신적 • 사회적 장치들로 가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광신적 정념의 소용돌아로 흐려져 있는 인간의 진실을 정직하게 받아들 이게 하는 일이다. 웃음은 의양의 허구를 통해 내면적 실체에 도전하려는 16 세 기의 정신적 모험의 매우 상징적인 한 단면이다. 다양성과혼돈의 미학 여기서 우리가 디시 한 번 확인하고 싶은 것은 16 세기인들이 대면하기에 이 르른 세계의 무한한 다양성과 복합성이다. 그들의 문학적 모험은 이 다양성과 복합성에 문학적 표현을 부여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무한히 확대되고 다양화된 현실을 총체적으로 포용하고자 시도하였지만, 이러한 레아 리슴적 경향은 결코 세계의 이중적 • 다원적 구조를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왜 냐하면 현실을 단순한 표피적 현상으로 보는 대신 그 안의 비현실의 침투를· 예 감했던 그들은 세계의 넓이에 못지않게 그 깊이 (겹쳐짐 죽 복합성)에 대해서도 민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의 혼돈에 가까운 이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문학 속에 재현할 것인가. 여기 언어의 문제가 대두된다. 새 술을 담을 새 부 대가 필요한 것처럼 새 현실을 담을 새 언어가 필요한 것이다. 다시 한 번 라블레의 경우를 환기하자. 자신 앞에 펼쳐진 세계의 풍요로움과 유동성에 현혹되었던 그의 언어는 한마디로 현란하고 자유분방하다. 작가에 있 어 문체를 특별히 중시했던 아우어바흐 Auerbac b-i곤 이것을 가리켜 〈소 크라데 스적 문체〉 10 봐고 이름 붙인 바 있다.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일상적 삶에 가장 10) E. Auerbach, Mim e sis, 26~ :

가까운 언어, 말하자면 좋은 의미에 있어서의 대중적 문체 말이다. 그런데 여 기 주목할 것은 이 문체가 단순한 표현의 기교가 아니라 특정한 정신적 태도와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우어바흐는 라블레뿐만 아니라 몽테뉴에게서도 이 태도를 공통적으로 발견하며 그것을 〈 광타그뤼엘적 태도p an t agr uel­ i sme 〉 라 부르고 있다. 그것은 인간과 세계의 모든 것을 본래의 혼합된 모습 가 운데, 다시 말해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 표면적인 것과 숨겨진 것의 혼합 가 운데 포착하려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 혼합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 문체 의 혼합 〉 이 필요하다. 현기증 나는 다원적 현실을 떠받치는 라블레의 다원적 문체-익살과 전지함이 교차하는가 하면 서정과 기괴함이 공존하고 야수적 인 것과 순수가 뒤섞이는 그의 문체는 그 자체 현란한 언어의 축제와 같다. 농 부와 서민들의 거칠고 상스런 말투에서 귀족 상류사회의 세련된 표현기법에 이 르기까지, 욕설과 음담패설에서 고차원적인 철학적 언어에 이르기까지 어조와 문체의 이 놀라운 혼합은 우리를 어지럽게 만든다. 언어와 문체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작품의 구성의 문제로 이어진다. 문체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구성에 대해서도 거의 동일하게 적용된다. 문체의 단일성 울 포기하고 혼합과 다원성을 선택한 16 세기 문학은 동일한 이유에서 질서와 통일을 포기하고 혼돈에 가까운 자유분방한구성을 선택한다. 이 점 라블레, 롱사르, 몽테뉴 사이의 유사성은 의심할 바 없다. 그들이 규칙적이고 정돈된 키케로적 문장 대신 보다 자유롭고 박력 있는 세네카나 플루타르크의 글쓰기를 선호했던 것은 이해할 만하다. 또한 1 Q1 ] 기 위마니스트들이 중세문화의 가장 다채롭고 풍요로운 총화라 할 『 장미소설 』 을 그토록 애호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그들은 지적 추구에 있어 지식의 분류와 정돈보다 그것의 무제한의 수 용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세계를 질서와 법칙의 형석하에 재구성함으로써 통일된 구도를 창조해 내는 것보다 오히려 세계를 그 다양성과 복합성 속에 충실히 재현하는 데 주력하였으며 이로써 야기될 혼돈을 두려워하 지 않았다. 아니, 이 혼돈은 때때로 미덕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했다. 이것이 바로 라블레의 경우이다 . 그의 소설에는 주도적 흐름이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는다. 단지 탈선적 일화들을 중심으로 무한히 부풀려 나감으로써 마치 세계 의 원초적 풍요와 혼란에 버금가는, 현란한 혼돈의 총화를 이루어나간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고 이지와 마성이 뒤섞이며 관념의 섬세함과 야성의 두박함이 공 존하는 그의 세계는 마치 창조 전의 카오스와 같으며 만약 그의 작품에 아름다 움이 있다면 그것은 이 카오스의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더 아상 이 문제에 깊이 들어서지 않으려 한다. 다만 다가올 17 세기 의 고전주의와 관련하여 이와 같은 문체의 혼합과 구성의 혼란이 고전주의적 이상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해 두고 싶다. 사실, 우리의 고 찰은 이 확인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6 세기 위마니 슴은 확실히 정신의 새 지평을 열었고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놓았으며 이 전환 에 의해 비로소 17 세기의 창조적 활동은 가능해졌다. 17 세기가 16 세기의 연장 선상에서 접근되고 이해될 수밖에 없다는 우리의 입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 러나 적어도 문학에 있어 16 세기는 방금 우리가 확인한 바와 같이 그렇게 출발 하였고 이 출발은 여러 측면에서 반고전주의적이다. 만약 이와 같은 인식이 옳 다면, 즉 16 세기 초기의 위마니슴 문학이 미래의 가능성을 여는 새로운 요소들 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문학이 지향하게 될 인간학적 • 미학적 이상과 배치되는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면 우리는 16 세기에서 17 세기에 이르는 문학적 모험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 것일까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고전주의라는 완벽 한 하나의 모델이 완성되기까지 우리는 근 1 세기 반을 기다려야 했지만, 그것 은 부단한 정화, 되풀이되는 반전의 기나긴 과정이 될 것이다. 이 정화의 최초의 시도를 1 Q 1l 기 당대에 발견하는 것은 홍미로운 일이다. 그 것은 다름아닌 칼뱅J. Cal vi n 의 경우이다. 라블레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던 그는 라블레의 일부 사상들뿐만 아니라 특히 그의 문체에 대해 맹렬히 비판하 고 나섰다. 그에 의하면, 라블레는 복음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 아름다운· 단순성을 저버리고 대상 없는 사상과 공허한 문체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칼뱅 은 질서와 명료야말로 우리가 따라야 할 이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1 세기 앞서 고전주의의 미덕둘을 옹호한 셈이다. 물론, 그의 관심은 문학적이라기보다 종

교적인 것이었다. 그에 있어 문체의 명료는 사상의 명료와 불가분의 것이며, 이 명료는 궁극적으로 신의 질서 속에서 신의 빛을 받은 영혼의 밝음과 일치한 다. 요컨대 칼뱅의 러블레 비판은 문학사에 있어 하나의 에피소드 이상의 것도 이하의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이 에피소드를 통해 문체에 대한 라블레적 인식과 정반대되는 인식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또한 이 새 로운 인식이 문학의 주도적 세력으로 등장할 때 새로운 문학이 탄생하게 될 것 이라는 것도 조심스럽게 예단하고 싶다. 그러나 이에 이르는 길은 아직도 요원 하며 우리는 그 도정에서 먼저 16 세기의 가장 괄목할 만한 위마니슴 문학의 기 수들, 이른바 플레이아드의 젊은 시인들을 만나보아야 한다. 2-2 플레이아드의 문학적 모험 1550 년울 전후하여 우리는 동일한 문학적 이싱을 표방하며 공동의 작업을 펼 쳐나갈 일단의 젊은 시인들의 출현을 보게 된다. 처음에 (1549) , 롱사르 P i erre Ronsard(1524-1585) 에 의해 〈 분대 Br ig ade 〉 라는 다분히 장난기 섞인 이름으 로 불리어졌던 이들이 그 후 (1556) 알렉상드리아의 게촨설의 이름을 모방하여 〈 플레이아드 la Ple i ade 〉 라고 개칭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과연 이들의 출현은 어떤 의미를 가지며, 이들이 남긴 문학적 업적은 다음 세 기의 문학과 관련하여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 것인가. 프랑스어의 옹호와현양 첫째로, 우리는 플레이아드를 16 세기의 전반적 움직임, 즉 위마니슴의 흐름 속에서 바라보고 싶다. 저명한 고전학자 도라 Dorat의 지도 아래 호머묘스.와 핀 다로스, 호라티우스와 베르길리우스를 발견하고, 뮈레 Mure t와 뷔샤낭 Bu­ chanan 의 가르침을 통해 라틴 희곡의 진수를 음미하기 시작한 이들에 있어 어 떤 새로운 문학적 각성이 문제되었다면 그것은 이 빛나는 고대 유산의 발견에 의해 촉발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점에 있어 그들도 고대와의 새로운 만남, 고

대의 재발견을 출발점으로 삼은 위마니슴의 모험 속에 당연히 편입된다. 사실, 모든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고대는 그들에 있어 하나의 경악, 무궁무진 한 영감의 보고였다. 오직 감탄의 대싱이었고 비할 데 없는 완성의 모범으로 비쳐진 고대를 그들이 거의 맹목적으로 모방하려 했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무조건의 찬양과 모방, 이른바 순진한 〈 약탈 〉 의 축제가 먼저 벌어진 것이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앞을 다투어 〈 델프의 신전에서 성스런 보물둘 〉 을 훔쳐내고, 〈 우리의 사원과 제단冷t 로마의 〈 전리품들 〉 11)..£ 장식하기에 열을 올렸다.

11) Du Bellay, Defe n se et Illustr a ti on de la lang ue fra n,ais e : … <(o mer nos) tem p le s et aute l s (des) serves depo u i lle s (romain e s) . >

그러나 이 〈 약탈 〉 의 내막을 살펴보기 전에 어떤 새로운 각성의 움직임에 주 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언어, 죽 그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선택한 프랑스어와 관련된 의식이다. 1549 년 뒤 벨레J oach i m Du Bellay (1 522-1560) 에 의해 작성된 선언문 『 프랑스어의 옹호와 현양 Def e nse et illu str a ti on de la lang ue fr an~a is~』은 그들의 문학적 의도를 자랑스럽게 증언하고 있다. 프랑 스 문학사상 최초의 것으로 기록될 이 선언문은 이미 그 제목만으로 이중의 목 표를 암시하고도 남는다. 첫째로, 그들의 프랑스어는 옹호되어야 할 그 무엇으 로 제시되어 있다. 사실, 프랑스어로 작품을 써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그들에 앞서, 죽 토리 To ry, 둘레 Dole t, 작 드 본느J ac q ues de Beaune 등에 의해 표명되었고, 라블레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실천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대의 유 수한 지식인과 시인들은 여전히 라틴어를 선호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뛰어난 작품들은 대개가 라틴어로 씌어전 것들이었다. 당시 프랑스어로 된 작품들이 질적으로 낮은 수준의 것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당대의 사람들이 고대의 완 성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고대인의 언어, 즉 라틴어의 사용 가 운데 찾았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말하자면, 라틴어는 그들이 홈모하는 고대

인들의 위임으로 그들 을 인도하는 유일한 보증이었던 셈이다. 그들은 마치 일 반 대중의 언어로써 저질의 작품을 쓰 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혹은 라틴어를 사용하여 고대의 완성에 도전할 것인가러는 갈림길에서 후자를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젊은 플레이아드 시인들은 이 양자택일을 단호히 거부했다. 왜 냐하면 전자나 후자는 각기 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 문이다. 전자의 경우 작품의 질적 빈곤은 마땅히 뛰어넘어야 할 개탄스러운 결 斗]고, 후자의 경우 그 어떤 완성을 창출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언어가 아닌 〈 죽은 언어 녔 十 빌려 쓴다는 것은 국민적 의무의 포기이다. 이 이중의 함정을 피하는 데 있어 그들은 소중한 교훈을 다름아닌 고대에서 발견했다. 그리스의 위대한 지적 유산을 이어받은 로마의 시인들은 그리스어를 답습하는 대신 그들 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과거를 능가하는 문화창조의 위업을 이루지 않았던가. 그들은 라틴어의 거센 물결 속에서 주저없이 그리고 확신에 찬 어조로 프랑스 어의 옹호를 부르짖었다. 문제는 프랑스어가 단순히 옹호되는 것만으로 그칠 수 없는 데 있다. 그들이 그토록 애착하는 모국어는 창조의 견고하고 효율적인 도구가 되기에는 아직도 부족함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이 프랑스어를 〈 현양 〉 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 인 식한 것은 당연하다 .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학 창조가 언어의 쇄신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식한 이들이 〈 프랑스어의 현양 〉 이라는 제꼬] 프로그램에 더 많 은 관심을 쏟은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강조할 것은 그들이 프랑 스어의 가능성에 대해 깊은 신뢰를 가졌었다는 사실이다. 이 신뢰의 저변에는 물론 모국어에 대한 국민적 애착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점에서 〈 현양 〉 의 가능성을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그 어떤 언 어도 다론 언어에 비해 기본적으로 더 우수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가령 라틴 어는 본래의 우수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 프랑스어는 불치의 결함을 가지고 있 다고 생각하는 따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운용되는 언어는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나가느냐에 달려 있으며, 따라서 그것을 더 풍요롭고 섬세한 언어로 완성시키는 것은 순전히 인간의 능력에 달려 있다.

다음으로, 언어를 연마해야 할 재료로 간주할 때 프랑 스 어는 라틴어보다 한결 유연한 재료임에 틀림없다. 라틴어가 〈 술한 세월의 침묵 속에 묻혀 벙어리가 된 〉 1 2 ) 죽은 언어인 데 반해 프랑스어는 살아 움직이며 변신하는 오늘의 언어이 기 때문이다.

12) 위의 책 : <(lan g ue m ort e) muett e et ensevelie s ous le sile n ce de tan t d'espa c es d'ans… . >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프랑스어를 어떻게 완성시켜 나갈 것인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젊은 시인들이 가장 뼈아프게 느꼈던 것은 프랑스어의 詩 語로서의 빈 곤이었다. 이 점 산문과의 비교는 매우 대조적이다. 우리는 그들에 앞서서는 라블레에 의해, 그리고 뒤이어서는 몽테뉴에 의해 16 세기의 프랑스어 산문이 그 어떤 현란함과 풍요로움을 과시하였는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시에 있어 서는 순수성의 명분 아래 언어의 사용이 지나치게 제약되었으며 이로써 시어는 극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뒤 벨레가 프랑스어를 풍요롭게 만들기를 제안했을 때 그것은 오직 시어에만 한정된 것이었다. 그가 제시한 방안들은 그렇게 독창 적이거나 기발한 것은 아니다. 그는 고대어나 현존 의국어에 의지하는 대신 순 수히 프랑스적인 원천에서 새 말들을 발굴해 낼 것을 권유했다. 즉, 프랑스의 여러 지빙에 산재해 있는 방언들 속에서, 그리고 시대를 거슬러 울라가 중세 어, 가령 중세의 소설들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 문제이다. 뒤 벨레는 특히 잊혀 진 옛 말들이 재활용될 때 발휘하는 그 신선함과 박력에 민감했던 것으로 보인 다. 그 의에도 일상 용어 중에서, 직업과 관련된 특수용어들을 개벌하거나, 기 존의 틀을 이용하여 신어를 창조하는 것도 유효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가령, 포도덩굴의 번식p ro vign emen t이라고 불리어지는 방법으로서 기존의 명사에서 동사, 형용사, 부사 따위를 만들거나 말들을 묶어 합성명사를 지어내는 것은 후자에속한다. 시와 관련하여 그들은 시어뿐만 아니라 시작법 vers ifi ca ti on 에 대해서도 관 십을 기울였다. 韻의 구성, 1 뗀철 또는 12 음절과 같은 시구의 리듬, 시구 안

에서의 휴지 cesure, 모음충돌 h i a t us, 다음 行 으로의 연장 en j ambemen t 등은 시직에 있어 그들이 피할 수 없이 마주치는 구체적인 문제들이었는데, 몽사르 나 뒤 벨레는 이에 대해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 문제들에 대한 그들의 성찰 은 프랑스 시구의 본질, 다시 말해 그들이 그토록 찬양하는 라틴 시구와 구별 될 뿐만 아니라 중세 말기의 대압운파gr ands rheto r iq u eur~ 경향과도 구별 되는, 새로운 프랑스어 시구의 본질을 규명하고 나아가서는 이 본질에 가장 적 합한 시작의 규칙들을 모색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고대의모방 그러나 아들의 작업의 독창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이들이 고대에 대해 진 빚을 망각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앞서 고대의 발견이 그들을 어떤 현혹 속으로 빠져들게 하였는가를 확인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감정 적인 반웅으로 그치지는 않았다. 그들은 겸손하게 위대한 고대인들을 스승으로 받아들였고, 완성의 경지에 도달한 이들에게서 이 완성의 비밀을 배우기로 작 정한 것이다. 말하자면 플레이아드의 시인들은 과거 로마인들이 그리스인들을 스승으로 본받음으로써 이룩한 것을 이제 프랑스에서 재현하려는 것이다. 그들 이 고대인들에게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은 시의 장르g enres 였다. 장르는 시가 그 안에 담겨질 그릇과 같은 것으로, 시는 단순히 영감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 니라 그것이 어떤 형태 속에 형상화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영감은 자신을 받아들일 형태와 만남으로써 존재하기 시작하며, 시 는 이 존재의 한 방식일 따름이다. 시적 영감을 하나의 독립된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 안에 홀러 들어가는 틀과 불가분의 것으로 인식한 뒤 벨레는 장르의 중요성을 깨달은 최초의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과거의 프랑 스 시나 현존하는 시들이 그토록 전부한 것은 대부분 사용된 장르에 그 책임이 있다. 뒤 벨레는 과감히 〈롱 도, 발라드, 단시vi rela i s, 왕의 송가, (중세풍) 서 정시 그리고 그 의의 잡동사니셔t 버리라고 권유한다. 그 대신 고대인들에 의 해 개발된 풍자시 e pigr ammes, 비가 ele gi es, 서정단시 ode s2} 서한체 e p 1t r es,

소네트 sonne t s (여기에는 페트라르카의 것 도 포함된다) , 목가 e g lo gu es 그리고 비 극과 희극 등은 새로이 도입되어야 할 장르로 추천된다. 그러나 중세의 장르를 고대의 장르로 대치하는 것만으로, 다시 말해 단순히 의형적 형태를 바꾸는 것 만으로 시의 개혁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의형적 툴을 다루는 방식, 즉 이 틀 속에서 여하히 예술적 완성을 달성하느냐에 있다. 그들아 스틸 s ty l 려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였 다. 사실, 종래의 시에 있어서 시적 문체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그런 점에서 시와 산문은 구별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시의 스틸이 산문의 그것과 동일 한 것일 수가 없다는 전제하에서 새로운 시적 스틸울 창조해야 한다는 생각을 젊은 시인들이 갖게 된 것은 분명히 획기적인 일이다. 물론 이들의 생각이 당 장거] 결실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19 세기 후반, 죽 상징주의 시인들의 출현까지 기다려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 리에게 중요한 것은 1550 년대의 젊은 개혁자들이 그들의 스승인 그리스와 라틴 시인들에게서 발견한 특유한 스틸이야말로 시적 완성의 비결이라는 것을 깨달 았다는 사실, 나아가서는 그들 나름대로 시적 스털을 창조하기 위해 갖가지 시 도를 감행했었다는 사실이다. 시는 산문보다 한결 엄밀하고 주의 깊고 정확하 게 씌어침으로써 한결 박력에 넘치고 깊은 의미가 담겨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서는 사물이나 행동을 단순히 직설적으로 지시하는 대신 상상적 부피를 더할 수 있도록 辻言法, 비유와 같은 묘사의 기법을 개발해야 한다. 묘사에 事 實 的 힘을 부여하되 그것이 단순히 의형적 장식으로 끝나지 않고 인간의 마음과 상 싱속에 커다란 감동과 관념을 불러일으키도록 해야 한다. 마치 〈 피와 혈관과 동맥과 힘줄, 그리고 특히 아름다운 색깔 〉 로써 한 인체의 아름다움이 이루어진 것같이 한 편의 시도 〈(그것의) 힘줄이자 생명인 아름다운 발상, 비교, 묘사 들〉 13)£. 이루어져야 한다-우리는 이러한 주장들이 개념의 정립에 있어서나 13) Cf. Ronsard, Ar tpo etiq u e, chap itre lim ina ir e :

sang, vein e s, art er es et t en dons, e t s urt ou t d'une pla is a nte c ouleur, ains i la poe sie n e peu t e tr e pla is a nte s ans belles inv enti on s, comp ar ais o ns, descri ption s, qui s ont Jes nerfs e t l a vie d u livr e >(c it e p a r Van Tie g h e m, Peti te H is toi re des gra ndes doctr ine s litte ra ir es en France, ~) .

방법의 모색에 있어 아직 초보적인 시도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짐 작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 이 시작되었디는 사실이며, 플레이아드의 시인들은 이것만으로도 프랑스 시사 에 있어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로 기억될 것이다. 문학적 의식의 각성 그렇다면 무엇이 새롭게 시작되었다는 것인가.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해 부분­ 적으로는 이미 답했다고 생각한다. 플레이아드 시인들 가운데 우리는 시에 대 한 인식의 전환, 즉 시는 단순한 영감의 산물이 아니라 시인의 성찰과 작업의 산물기리는 새로운 인식을 지적한 바 있다. 시 창조에 있어 영감에 못지않게 시인의 의식적 작업의 몫을 인정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들 이 시의 장르의 문제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시적 언어와 스틸의 문제를 제 기한 것은 그들이 하나의 문학적 표현양식으로서의 시의 본질에 대해, 그리고 언어라는 제재를 다루는 장인 a rti sa~ 녁昊]의 시인의 작업에 대해 전지하게 묻 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에 대한, 시인들에 의한 최초의 비판적 성찰 ―우리는 조금은 과장해서 이렇게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시에 대한 이와 같은 성찰은 그들에 있어 시인 자신에 대한 물음과 맞물려 있었다. 실은, 시인의 역할 또는 임무에 대한 그들의 각성이 모든 것을 선도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지 모른다. 그들은 시인의 신성한, 거의 신적 인 성격을 확신하고 있었는데 , 14) 시적 창조에 대한 그들의 기본적 개념과 실제

14)A 이b re접g,e d시e 의l'a r기t p원o에e t iq 대u e한 :

et c olorees, les secrets q u' il s n e pou vaie n t comp re ndre, qua nd trop ouvert em ent on leur decouvrait la verite > (cite in 위의 책 , 옆구) .

적 방법론은 바로 여기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인을 하늘의 메시지의 위 탁자로 간주하고 시를 쓰는 행위를 종교의 제의와 같은 것으로 간주할 때 시인 이 자신에게 부과해야 할 의무와 계율이 어떤 것인가는 자명해진다. 첫째로, 그에게 주어진 시적 재능이 소중하기 그지없는 신의 선물이라면 그것을 올바르 게 개발하고 사용하도록 정전하는 것은 그의 딩연한 의무이다. 다음으로, 시를 종교의 위엄으로까지 끌어울리기 위해서는 그것을 개인적 환상에 내맡기는 대 신 엄격하고 보편적인 규율에 따라 다스릴 필요가 있다. 시적 영감은 신의 선 물인 만큼 인위적인 가공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종 교가 신과의 올바른 만남을 위해 일련의 제의와 규율을 설정한 것과 같이 시에 있어서도 하늘의 영김이 인간의 언어 속에 구현되기 위해서는 언어와 형식과 관련된 일정한 규칙이 필요하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시는 영원을 소유하게 되고 시인은 영생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고대인들 이 누리고 있는 몫이 아니겠는가. 여러 세기를 뛰어넘어 오늘날에 이르도록 더 욱더 빛니는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서실이 곧 그들의 완벽성의 보증이기도 하다. 플레이아드의 젊은 시인들이 동일한 영광을 넘겨보며 지신들은 오늘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의 세기를 위해 쓴다고 장담한 것은 단순한 젊음의 호기 에서만은 아니다. 그들은 이러한 야망이 그들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가를 모르지 않았다. 인간의 손과 입으로 날기를 바라는 자는 오랫동안 자기 방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 다. 후세의 기억 속에서 살기를 바라는 자는 자신에게는 죽은 자와 감이 되어 수없 이 땀홀리고 떨어야 한다. 우리의 궁정시인들이 마시고 먹고 평안히 잠자는 것만큼 이나 굶주림과 목마름과 기나긴 밤샘울 견뎌야 한다. 인간이 쓴 글이 하늘로 날게 되는 데 필요한 날개는 이런 것들이다. 15)

15) Du Bellay, Defen se II , 3 :

long ue ment demeurer en sa chanbre, et qu i desire vivr e en la memoir e de la pos te r ite d oit , comme mort a soi- m eme, suer et t rem bler main t e s fois, et a uta n t q ue nos poe te s courtis a ns boiv e nt, m ange n t et d orment a leur ais e , endurer de faim et de soif , e t d e long ue s vigiles . Ce sont Jes aiJe s dont Jes ecrits d es hommes volent au cie J .>

우리는 이 장을 끝내면서, 이상과 같 은 플레이아드의 시적 모험은 다음 세기 의 문학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갖는 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위에서 우리가 시도한 플레이아드에 대한 이해의 방식은 이미 이 물음에 대한 상당한 암시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플레이아드와 더불어 시 에 대한, 넓게는 문학에 대한 심미적 성찰이 프랑스 문학사상 처음으로 시도되 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 이전에도 문학은 존재하였고 시 창조의 전통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자연발생적인 것들이었고 가치 있는 작품은 유능한 작가의 개인적 재능의 소산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6 세기에 이르러 고 대의 찬란한 유산에 자극받은 젊은 시인들은 예술적 완성이 우연의 산물이 아 니라는 것을 직감하였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심미적 조건들에 대해 묻기 시작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문학적 이론을 수립하기 위한 작업에 칙수한 것이다. 시에 있어 유일무이한 스승으로 받들어전 고대인들의 모방울 대전제로 하여 시적 장르의 개혁, 언어의 세련과 풍요화, 산문과 명백 히 구별되는 시적 스틸의 창조 등을 위해 그들이 경주한 노력을 다시 환기할 필요는 없다. 그들의 작업은 한마디로 중세적 전통을 청산하고 보다 높은 예술 적 완성을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원리들을 모색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아마도 가장 의미 깊은 것은 예술적 창조를 우연한 개인적 영감과 재능의 차원에서 일 정한 원리들의 통제하에 수행되는 의식적 작업의 차원으로 옮겨놓은 데 있다. 예술은 그 자체의 법칙을 가지고 있는 만큼 이 법칙을 알고 이에 순응하는 것 은 하나의 필연이다. 이 필연을 깨달음으로써, 그리고 이 깨달음이 그들에게 요구한 과업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플레이아드는 정녕 프랑스 문학사의 새 장 울 열었다. 물론, 그들의 시도는 초보적이고 서두르며 때로는 그들 자신의 원

리에 모순되기도 했다. 또한 이 원리 중 어떤 것들은 계속 이어져 심화되는가 하면 또 어떤 것들은 폐기되기도 할 것이다. 16) 17 세기의 이론가들이 엄밀성과 정확성이 결여된 이들의 이론과 방법론을 멸시했다는 것도 주지하는 바와 같 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7 세기가 1@1] 기의 선각자들에 의해 서툴게나마 다져진 지반 위에서 작업하고 모호하게나마 제시된 원리들을 다시 매만짐으로 써 완성시켜 나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되풀이된 우리의 결론으로 다시 되돌아온댜 플레이아드에 의해 프랑스 문학에는 새 지평이 열렸다. 비유 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에 의해 프랑스 문학의 화단에는 새 씨가 뿌려졌고 수줍 은 새 꽃들이 피어났다. 그러나 더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한 정성 어린 손길 은 끊이지 않고 이어질 것이다.

16) 가령, 신의 대변자로서의 시인의 사명과 같은 개념은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현실주의 적 관십이 고조되고 동시에 시인의 의식적 작업이 강조된 고전주의 시대에는 거의 폐기 되었다. 그 후 낭만주의 및 상칭주의 시인들 가운데 이 개념이 부활되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갇다.

제 2 장 17 세기 전반기의 문화적 상황 플레이아드에 뒤이어 곧바로 17 세기 전반기의 문학에 접근하는 것은 하나의 비약임에 틀림없다. 비록 우리는 위마니슴과 관련하여 몽테뉴 가운데 성숙되고 심화되어 간 새로운 인간학이 다음 세대의 지적 탐구를 위해 어떤 기반을 마련 하였는가를 확인하기는 했으나 플레이아드에 뒤이은 1 어]기 후반의 문학에 대 해서는 거의 언급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기초의 화려한 신기루와는 정 반대로 들끓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 탄생한 이 문학이 매우 특이한 색깔을 띠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으며 그 자체로서뿐만 아니라 17 세기 문학과의 관련 하에서도 우리의 관심을 끌고도 남음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의 논의의 장을 17 세기로 옮기려 한다. 17 세기 전반기의 문학을 논하는 데 있 어 우리는 필연적으로 전세대로 거슬러 울라가게 될 것이며 또한 두 시대의 문 학을 하나의 동일한 흐름 속에 편입시키는 어떤 특정한 시각을 통해 양자에 대 한 이해가 더 깊어질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에 앞서 먼 저 이 시대의 지적 분위기에 눈을 돌려보기로 하자. 문학은 그 자체의 독자적 영역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의 전반적인 지적 • 윤리적 모험과 불가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1 세기초의 지적 풍토 우리는 16 세기의 위마니슴 가운데 지속적으로 견지되어 온 몇 가지 주요한 원리들을 앞서 밝힌 바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인간의 문제에 대한 인석과 관 련된 것들이었다. 다시 말해, 인간을 순수히 인간의 차원으로 환원시키고 순수 히 인간적인 성찰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새로운 인간학의 가능성을 열어놓았 던 것이다. 이러한 시각의 변화와 접근의 새 방식이 고대와의 만남에 의해 자 국되었다는 것은 재언할 필요도 없다. 1 Q 1l 기의 위마니스트들이 고대로 되돌아 감으로써 오히려 근대성을 획득하게 된 것은 단순한 역사의 아이러니만은 아니 다. 그들이 새롭게 펼쳐나갈 근대적 성격의 인간학이 고대의 영감 속에서 촉발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며 고대의 이교적 철학과 윤리학은 그들의 정신 적 모험 속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몽테뉴 이후-회의주의와 자유사상 17 세기에 들어와서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시대의 지적 움직임 울 위마니슴의 연장선상에 위치시키는 것은 지극히 타당한 일로 보인다. 더 정 확하게는, 전세대의 가장 위대한 위마니스트 몽테뉴를 이어받음으로써 그 막이 열렸다고 말할 수 있다. 분명히 위마니슴의 한 성숙을 대변하고 있는 그의 인 간학은 두 개의 축으로- 성립되어 있다. 한편에 한 개체로서의 경험과 성찰을 통한 인간의 인식이 있고, 다른 한편에 절도와 조화 가운데 영위해 가는 삶의 지혜가 있다. 그에 있어 우리가 감탄하는 것은 이 양자, 즉 그의 인식론과 윤 리적 명제가 두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인간적 진실을 추구 하는 그의 지적 편력의 여러 과정들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총체적 종합 속에 용 해됨으로써 놀라운 삶의 예지로 귀결되고 있다.

몽테뉴를 뒤이은 1 7 세기는 이 윤리의 스승에게서 과연 어떤 영향을 받았는 가. 첫째로 , 우리는 그가 제시한 인간의 윤리적 전형을 모방하려는 시도를 상 정할 수 있다. 그가 최후에 도달한 삶의 예지는 분명히 인간의 새 이상을 담고 있으며 이것이 다음 세대에 이어지고 또한 심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급 한 결론을 앞세운다면 이 이상이 곧 고전주의 시대의 고전적 유형으로 발전되 어 갈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피에르 샤롱 P i erre Charron(1541- 160 3 ) 의 경우에 잠시 주목하기로 하자. 몽테뉴의 윤리적 명제가 가장 직접적 으로 메아리치고 있는 것은 바로 그에 있어서이다. 샤롱은 한마디로 그의 스승 몽테뉴를 윤리적 처원에서 재해석하고자 시도했던 사람이다. 1606 년에 출간된 『 예지에 관하여 De la Sag esse 』 는 그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몽테뉴가 의 미했던 〈 삶의 한 기술 un art de vi vre 〉 로서의 예지를 주제로 삼고 있다. 그런 데 여기서 지체없이 지적해야 할 것은 분명히 고대의 이교적 사상과 깊이 관련 지어져 있는 그의 성찰이 기독교의 전통적 틀 속에 무리없이 편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자신 사제이기도 했던 샤롱은 몽데뉴의 윤리학을 수용하는 데 있 어 그의 종교적 정통성을 의십하지 않았음은 물론 자신의 기독교 신앙과도 아 무런 갈등을 느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고대의 예지와 기독 교와의 합일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그는 몽테뉴의 윤리학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보다 의식적으로 기독교와의 대응 속에서 바라보았으며 적어도 이 점에서는 한걸음 앞서 나갔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J} 이룩한 양자의 합일은 그렇게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이 합일의 가능성은 오래 전부터 열려 있었으며 과거의 역사 속에서 그 예를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 고 대철학과 기독교와의 제휴가 만들어낸 중세의 신학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 은 삼가하기로 하자. 고대 위마니슴이 진지하게 문제되기 시작한 16 세기는 양 자의 관계가 새로운 차원에서 재정립되는 것을 보여준 점에서 보다 홍미롭다. 세기초에 반중세라는 동일한 기치 아래 위마니슴과 종교개혁 운동은 한때 동일 한 보조를 취했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반위마니슴적 성향의 종교개혁과 결별 할 수밖에 없었던 위마니숨은 그 후 가톨릭 가운데 보다 편안한 동반자를 발견

하기에 이른다. 신앙의 행위에 있어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고 이성적 선택 의 여백을 인정하는 가톨릭은 적어도 인정되는 인간의 몫만큼의 공동의 영역을 위마니슴과 함께 나눌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서 양자 사이에 상 당한 폭의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가톨릭과 위마니스트들은 다 같이 이성을 중 히 여기고 의지적 결단을 신뢰하였으며 인간성에 대한 낙관적 믿음을· 공유하였 다. 우리가 샤롱 가운데 발견한, 기독교와 고대 윤리학과의 화해도 결국 동일 한 흐름 속에 편입된다. 이른바 기독교적 위마니슴 또는 위마니슴적 기독교라 는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흐름 말이다. 1)

1) 그러나 샤롱의 인간학이 거의 전적으로 위마니슴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강조 될 필요가 있다. 가장 단적인 예로, 그는 인간의 근원적 결함을 자신에 대한 무지에 귀 착시키며 정신의 결함으로 단정짓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치유책이 자신에 대한 올바 른 인식에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두 명제, 죽 원죄와 신의 은총은 그의 인간학 속에 끼여들 자리가 거의 없다. 다만, 소크라테스의 교훈을 따라 〈 자신을 알고〉 완성을 향해 조금씩 정전해 나가는 그의 인간의 모습은 신을 향해 나아가는 종교 적 인간의 모습과 굳이 상국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위마니슴과 기독교가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감의 폭을 확인한 셈이며 말하자면 위마니슴을 기독교로 교묘히 포장했다고 할 수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이 양자의 제휴가 사실상 회의주의보다 스토아주의적 경향과 더불어 보다 용이하게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앞으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다만 여기서는 이 시대가 겪은 역사적 비극 속에서 스토아주의가 하나의 정신적 지주로서 크게 성장했었다는 사실과, 많은 기독교도들이 그들의 종교적 믿음에서뿐만 아니라 이 고대의 윤리학에서 고통과 죽음에 대웅하는 지혜를 배웠디는 사실을 지적하 는 것으로 그치려 한다. 우리는 지금 몽테뉴 이후의 정신적 흐름 속에 있으며 따라서 그에 의해 자국된 회의주의의 새로운 전개에 주목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 0] 다.

왜냐하면 몽테뉴를 윤리의 스승으로서 모방하되 기독교와의 제휴를 통해 매 우 합리적인 기독교적 위마니슴으로 기울어졌던 샤롱과는 달리 몽테뉴를 오로 지 회의의 스승으로 받든 일단의 회의주의자들이야말로 그의 참된 계승자로 보 이기 때문이다. 몽테뉴가 자신의 정신적 편력의 종합으로서 인간이 누릴 수 있 는 행복의 한 이상을 제시했던 것은 사실이며, 그것은 뒤이어 샤롱에 의해 기 독교적 바전 속에 재해석되기도 했다. 그러나 고도의 기교가 요청되는 그의 윤 리학을 따른다는 것은 애당초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그에게는 보다 자극적이 고 쉽게 모방할 수 있는 다른 면모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상파괴자로서 의 몽테뉴의 면모이다. 르네상스 이후 복권된 이성이 점차 그 힘을 더해 가는 시대에 몽테뉴 가운데 펼쳐졌던 이성에 대한 전면적인 반격, 그 권위에 대한 도전은 많은 지식인들을 사로집을 만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지금 우리는 바로 17 세기 초의 회의주의적 흐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17 세기 초에 , 그리고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의 출현에도 불구·하 고 그 후 계속해서 확대되어 나갈 회의주의의 판도를 일일이 점검할 생각은 없 다. 다만 이성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한 수많은 위마니스트들이 몽테뉴의 비판 적 성향을 이어받아 이성 자체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고 이로 써 이른바 자유사상li be rti na g~ 거센 바람을 몰고 왔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한다 . 가상디 Gassen di, 노데 Naude, 라 모트 르 베이예 La Moth e Le Vay er 등의 이름이 우리에게 환기하는 것은 인습적 편견뿐만 아니라 모든 종 류의 독단에서 해방된 정신의 자유와 유연성이다. 이 정신의 해방은 물론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며 사실상 그들의 정신적 힘은 대부분 이 해방을 위한 두쟁 에 바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새것을 창조하기에 앞서 먼저 낡은 것들을 파괴하기에 전념하였고 그것이 거의 전부였다. 세인들의 온갖 우스꽝스 러운 미신과 편견에서부터 확신에 넘친 지난날의 지식과 체계에 이르기까지 그 들의 가공할 공격을 모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을 앗아간 부정의 회오리 속에서 마침내 종교도 예의가 될 수 없었다. 위에 열거한 세 사람 가운데 사고의 방향은 이미 확정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비록 기독교 신앙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확언하고는 있지만 적어 도 지적으로는 기독교적 교리와 단호히 결별했음이 분명하다. 그들 사이에 미 묘한 정도의 차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제이자 신학교수였던 가상디 2) 는 형 이상학에 반기를 들고 정신의 자유를- 옹호하면서도 진지한 신 %Rl 으로 머문 데 반해, 라 모트 르 베이예 3) 는 비록 반종교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해도 회의의 영역을 종교에까지 확대시켜 나갔으며 결국 지적 확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신앙과, 디분히 쾌락주의적인 삶의 지혜로 귀착되는 회의주의를 더욱더 분리시 키기에 이르렀다. 노데 4) 가운데 우리는 한결 극단적인 결론을 발견한다. 고대 의 이교적 종교와 민중을 현혹시키는 마법을 규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 그는 마침내 기독교에 대해서도 비판울 서슴지 않았으며, 한편 모든 이성적, 종교적 도그마를 배척하고 사실의 탐구를 이성의 유일한 과업으로 간주함으로써 근대 적 의미의 실증주의의 길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에 있어 종교는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 되었으며 이로써 무신론은 최초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2) Dign택 사제 신학자 Gassendi. 1624 년, 과거의 모든 형이상학에 대한 선전포고와 갇 은 Exercit ation es para doxi cae adversus A risto te leos 를 발표.

3) 고대인을 모방하겨 『 대화Dia lo g ues 』 (1630) 를 쓴 La Moth e Le Vay er . 이성에 대한 소송장이라 할 이 『 대화 』 속에서 이성적 자명성까지도 포함한 모든 확신을 비웃으며 그것 둘이 한낱 습관의 소산임을 주장. 1631 년에는 다시 다섯 편의 『 대화』 속에서 한결 대담 하게 회의를 종교의 영역에까지 확대.

4) Ap olo gi es pou r tou s les gra nds per sonnage s qui ont ete fau ssement soup~ o nnes de magie(1 625) ;Syn tagm a de stu d io mi lit a ri(1 637) ;Elenchus rerum hec ten us /also cred itariu m( 미완성) 등을 발표. 이교와 마법에 대한 비판을 마침내 기독교에 대 해 적용하기까지 한 그는 사제들의 탐욕과 위선, 통치자들의 이해관계, 대중의 무지를 종교의 3 대 요소로 손꼽는 등 시종 신랄한 비판으로 일관. 그러나 단순히 철학적 • 관념 적 성찰에 머무는 대신 구체적 사실과 현상들에 대한 실증적 탐구에 주력함으로써 R. P int ard 에 의해 〈 참재하고 있는 Bayl e >- unB ayl e en pu i ssance- 이라 평 가되기도 했음 (cf . R. Pin t a r d, Le libe rt ina ge erudit dans I.a pre mi er e moit ie du XVII siec le) .

결국 기독교와 위마니슴 사이의 균형은 깨졌다. 몽테뉴는 암암리에 양자를 별개의 범주로 갈라놓음으로써 마찰을 피했으며 5 ) 위마니슴 속에 거리낌없이 젖 어들었다. 뒤이은 샤몽은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입장이었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양자를 화합시킬 수 있는 묘안을 찾아냈다. 그의 이른바 기독교적 위마니슴이 기독교의 왜곡(차라리 거세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의 산물이라는 것을 여기 반복해서 설명할 필요도 없다. 몽테뉴와 샤롱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말 하자면 종교와 위마니슴이 화해할 수 있는 두 방식이다. 전자는 각각의 영역을 존중하고 서로 마주치지 않게 함으로써 평화적인 공존을, 후자는 종교가 자신 의 특권을 포기하고 이성과 동일한 차원으로 내려움으로써 통합을 이룬 것이 다. 6) 그러나 이러한 양자의 관계가 갈수록 위태로워지리라는 것은 쉽게 내다봉 수 있다. 왜냐하면 양자는 각기 자신의 통치권이 제한받거나 본질이 왜곡되는 것을 감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는 인간의 심정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스리기를 원하며 또한 자신의 초월적 순수성이 오염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자신의 순수성을 고수 또는 회복하려는 두쟁의 역사 이며 그것은 본질적으로 반위마니슴적 투쟁이다. 한편, 이성적 사고를 주축으 로 하는 위마니슴도 총체적 지배를 추구하는 점에서 종교와 다룰 것이 없다. 이성은 자신의 회의적 • 비판적 작업이 모든 대상에 미치기를 원하며 그 저편의

5) 신앙과 이성을 각기 다른 범주로 분리시키는 이 태도는 그 후 많은 지식인들에 의해 채 택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몽테뉴의 경우, 이 태도는 그의 회의주의의 한 귀결이라 볼 수 있다. 죽 , 인간은 이성적으로는 어떤 확신에도 도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에게 어떤 확신이 초이성적인 방식으로 주어졌을 때 그것은 이성이 관여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신 앙을 이성과 전적으로 절연된 초월적 영역의 사건으로 간주하는 이른바 그의 fi de i sm 탁본 상당부분 Pascal 에 의해서도 답습될 것이다•

6) 샤롱의 표현 중에 신과 이성이 종종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접은 주목할 필요가 있 다 : <... . .. je v eux que tu s oit h omme de bie n par ce que natu re e t r ais o n (c'est D ieu ) le veut… …>( De la Sage s se II , 5, cite in Intr o d uctio n a la vie l itt er air e du XV IJe siecl e, 1 쪽).

어떤 것도 인정하기를 거부할 것이다. 오랫동안 종교의 위력에 억눌려왔던 이 성이 초기의 조심스러웠던 행보에서 점차 과감한 투쟁과 정복으로 이행하는 것 은 필연적이다. 17 세기 초, 자유사상이라 불리어지는 일련의 정신적 움직임 속 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다름아닌 위마니슴의 전두적 모습, 스스로의 위력에 현혹되기 시작한 이성의 최초의 공격적 자세이다. 데카르트-이성의재건 우리는 이성이 먼저 부정과 파괴로 치달은 것을 방금 확인했다. 과거의 모든 권위, 모든 지식, 모든 체계를 회의하는 것으로 일관한 이 방대한 비판 작업은 궁극적으로 사고의 주체인 이성 자체에 대한 회의에까지 이르렀다. 이 전반적 회의의 당연한 결과라 할 지적 허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그것 울 정신적 자유의 구실로 삼았고 나아가서는 다분히 쾌락주의적인 삶의 지혜를 도출하기에 전념했다. 그러나 여기 이 거센 회의주의의 흐름에 반기를 들고 일 어선 한 사람의 철학자가 있다. 그에 의해 이성은 오랜 16 세기적 타성에서 벗 어나 본래의 권위를 회복하며 새로운 지적 왕국을 수립해 나갈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 Rene Descar tes {1596-1650).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이성적 확신에 눈뜬 사람은 아니었다. 절대적 확실성에 근거한 사고의 한 체계를 수립 하려고 했던 그는 무에서부터 시작해야 했고 그 방법은 회의주의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현존하는 모든 지식과 확신들을 엄밀히 검증하는 방식이 며 가능한 모든 오류와 환각으로부터 정신을 해방시켜 본래의 순수성을 되찾게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전통적 회의주의의 수동적 자세에 비해 데카르트의 회 의가 보다 전두적이라는 점은 충분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는 단순히 의관에 현혹당하지 않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공격의 대싱을 찾아나 섰으며, 사실상 이 공격에서 제의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요컨대 그는 회 의의 끝을 확인하기를 원했고, 그 끝이 확인되기까지는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과 이론들을 위시하여 세인들 사이에서 공인된 의견들, 거창한 형이상학적 체계, 끝으로 우리의 지각과 사고의 주체인 감각과 이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그의 검증의 그물에 걸러졌으며 거기서 살아남는 것은 야무것도 없는 듯이 보였다. 〈 이렇듯 우리의 감각이 이따금 우리를 기만하기 때문에 나는 이 감각이 우리에게 가정하게 하는 그대로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 생각하고 싶었다. 또한 기하학의 가장 단순한 문제에 대해 논의할 때조차도 착각하고 엉뚱한 추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나도 그 누구나와 마찬가지 로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판단하며 내가 과거에 증명을 위해 동원했던 모든 이론들을 그릇된 것으로 내던져버렸다. 끝으로 우리가 깨어 있을 때 갖고 있는 모든 같은 생각들이 우리가 잠자고 있을 때도-이때는 진실된 것이라곤 하 나도 없는데도 우리에게 찾아든다는 것을 감안하고 나는 내 생각 속에 들어온 모든 것들은 내 꿈 속의 환각만큼이나 전실된 것이 아니라고 가정하기로 결심 했다. 〉 7)

7 ) Descarte s , Oeuvres, ed. Pleia d e, 11 ~ :

그러나 이 극단적이고 전면적인 회의는 놀라운 반전의 순간을 맞이한다. 왜 냐하면 회의는 결정적인 승리 직전에 자신의 패배를 확인해야만 하기 때문이 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회의하고 부정하고자 했던 데카르트의 의지는 마지 막 순간에 벽에 부딪치고 만다. 가령, 극단적으로 나의 존재 자체를 회의하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에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내가 존재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회의의 기나긴 여정은 여기서 종지부가 찍힌다.

〈모 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을 때 그렇게 생각하는 니는 필연적으로 그 무엇이어야만 했다. >8) 그는 이 결론을 확정짓기 전에 회의의 마지막 시도를 펼친다. 이른바 〈 악령 rnal i n g en i e 〉 의 가설이 그것이다. 죽, 그는 추론의 현단 계에서 진리의 보장자로서의 선한 신을 개입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인간에게 진리의 환각을 갖게 함으로써 인간을 농락하는 악령을 가정하는 것이 다. 그러나 〈 나를 항상 기만하는 데 온갖 술책을 다 쓰는 매우 강력하고 매우 교활한 기만자 〉 가 있다 하더라도 상황은 조금도 달라질 것이 없다. 왜냐하면 〈 그가 나를 기만할 때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가 원대로 나를 기만해 봤자 내가 그 무엇인가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동안 나를 무로 만 들 수는 없는 것이다. >9)

8) 위의 책 , 11 ~ : <…pe ndant q ue je voulais ain s i p en ser que tou t eta i t fau x, ii fa!- Iait necessair em ent que moi q떠 le pe nsais f us se que lqu e chose.>

9) 위 의 책 , 167 쪽 : <… ii y a je ne sais q ue l trom p eu r tres pui s s ant et t re s ruse qui emp lo ie t ou te son ind ustr ie i l. me tram p er tou jo u rs··· il n 'y a done poi n t d e doute que je s uis s 'il m e trom p e, et q u' il m e trom p e tan t qu' il v oudra, ii ne saurait jam ais f aire que je n e sois r ien , tan t que je p en serai @ tre que lqu e chose.>

Co git뼈 명제는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내가 회의하는 동안, 즉 생각하는 동안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확고부동한 사실이다. 물론 이때의 나는 〈 생각하는 실체 res cog ita ns 〉 로서의 나이다. 또한 회의의 끝에서, 그 전면적 파괴의 잿더 미 속에서 하나의 기적처럼 솟아난 co git야곤 추론의 결과가 아니라 사실의 확 인이며 정신아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필연이다. 그리고 이 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것의 시작이라는 것도 두말 할 나위 없다. 데카르트 의 회의는 파괴 그 자체에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어떤 회의에도 저 항하는 확실성을 만나기를 고대했으며, 이제 이 확실성의 발견과 더불어 회의 는 끝이 나고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 여기 cog it~ 더불어 그는 위대한 지적 모험의 출발점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형이상학적 정복의 기나긴 여정을 일일이 확인하지는 않을 것이 다. 그러나 그것의 몇 가지 특징을 밝히는 것은 우리의 문학적 성찰에 적지 않 은 도움을 줄 것으로 믿는다. 이 점과 관련하여 그의 철학적 기도가 이성의 신 분i den tit e 에 대한 최초의 , 가장 확실한 보증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르네상스와 더불어 새롭게 태어난 인간적 사고는 자신의 독자적 영역을 점차 확대시키고 세계의 새 주인으로서의 권위를 확립시키기에 주력했다. 그러나 그의 전도는 순탄하지 않았다. 우리는 16 세기를 통해 이 인 간적 사고가, 아직도 살아남아 위력을 발휘하는 초자연적 영감들과의 혼전 속 에서 악전고두하는 것을 보았다. 이성은 때로는 자신을 넘어서는 것들과 타협 하였는가 하면 또 때로는 자신의 무력에 재빨리 절망해 버리기도 했다. 그리하 여 이 지적 절망을 바탕으로 하나의 실제적이고도 유효한 행복의 철학을 고안 해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절대를 향한 지적 추구에 있어 절망하는 대신 삶의 상대성과 다양성 속에서 행복의 공식을 찾아낸 사람은 다름아닌 몽테뉴였다. 그러나 데카르트에 있어 지적 절망은 모든 것의 절망을 의미하며 그러기에 그 는 쉽게 절망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가 끝을 확인할 때까지 집요하게 달라붙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는 파산 직전에 이성을 건졌으며, 모든 시련을 이기고 살아난 이성은 이제 확실한 존재 이유를 인정받은 셈이다. 결국, 이성은 새 주 역으로 행세하기에 앞서 자신의 정체에 대한 확인을 받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 다. 물론, 그의 노고가 이 확인과 정지작업만으로 그친 것은 아니다. 자신에 대 한 검증 절차를 마친, 그리고 실제적 운용의 방법론으로 무장된 이성은 형이상 학에서부터 각종의 실용과학에 이르기까지 전우주를 포용하는 지식의 통합적 체계를 완성시키기에 이르를 것이다. 이 체계의 뿌리는 당연히 형이상학이었 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의 출발점은 〈사유하는 주체〉였던 만큼, 사유의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 자체 정신 또는 영이라고 할 신에 대한 인식이 모든 지 식의 기반을 이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오직 정신을 통해 인식하는 인 간기 자신 안에 있는 사유의 실체 res cog ita ns 와 자신 밖에 있는 정신적 존재 ,

죽 신을 그 무엇보다도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도 자명하다. 지식의 체계가 형이상학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다. 세계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지향하는 지식은 개별적이고 복합적인 지식으로 나아가기에 앞 서 먼저 가장 일반적인 진리, 즉 존재 그 자체와 관련된 진리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새 인식의 방향은 어떤 의미에서 회의와 정반대의 것이 될 것이다. 회의 가 다양한 부정의 과정을 거쳐 사유의 실체의 발견으로 귀착된 것과는 반대로 이제 인식은 co git여]서 출발하여 다양한 대상들로 점차 확대되어 나간다. 데 카르트는 모든 철학을 나무에 비유하여, 〈그 뿌리는 형이상학이고, 기둥은 물 리학이며, 이 기둥에서 뻗어난 가지들은 세 개의 주된 학문, 죽 의학, 기계학, 윤리학으로 귀착되는 다른 모든 학문들 〉 10) 이라고 말한 바 있다.

10) Pri nc i pe s de Phil os op h ie :

여기서 암암리에 강조된 것은 다름아닌 지식의 통합적 성격이다. 형이상학, 물리학 및 여타의 학문들은 각기 개별적으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체계 안게 통합되어 있으며 상호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그가 앞의 인용문에 뒤이어 윤리학에 대해 〈다시 말해 다른 학문들에 대한 전적인 인식을 전제로 지혜의 최후의 단계를 이루는 가장 높고 가창 완벽한 윤리학〉 11) 이라고 부연 설명할 때 그는 지식의 각 부분들 사이의 연계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데 이 지식의 통합에는 넘어야 할 하나의 벽이 있다. 그것은 사유를 주축으로 하는 관념의 세계와 사유가 배제된 의부의 物의 세계와의 단절을 국복하는 문 제이다. 사실 데카르트의 체계에 있어 관념과 의적 세계, 죽 그가 말하는 바 外et endue 또는 공간 es p ac~ 세계와의 분리는 핵심적인 개념들 중의 하나

11) 위의 책, 428 쪽: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을 지향하는 체계는 이 이원론의 딜레마를 해소 할 것을 요구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확실한 것은 물적 세계가 관념의 연장선싱에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적 세계의 관념은 그것을 우리의 정신 속에서 생각하게는 할지언정 그것이 존재한 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정신적 존재인 신 과 함께 나누어 가지고 있는 동질성으로 인하여 인간 속의 신의 관념이 곧 신 의 존재를 입증하게 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인간의 관념과 아무런 동질성도 없는 물적 세계에 대해 인간은 이론상 아무런 구속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러나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이 관념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가 의지할 것도 이것 밖에 없다. 문제는 이 관념의 정당성을 자신의 능력으로는 입증할 수 없는 데 있다. 이 논리적 딜레마에서 데카르트는 이미 형이상학적 직관에 의해 확립된 신의 선함과 능력에 호소한다. 즉, 우리의 정신이 의적 세계에 적용되어 올바 른 추론 속에서 어떤 관념을 갖게 되었을 때 그것은 우리를 기만할 리 없는 신 이 보장해 준 것과 같으며 따라서 그것은 오류일 수가 없다. 〈나는 이것들의 전실성을 어떤 방식으로도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만약 그것들을 검토하기 위해 나의 모든 감각과 기억과 오성을 동원한 다음 그중 어떤 것에 대해서도 다른 것들에 의해 내게 제시되었던 것과 상치되는 어떤 것도 제시되지 않는다 면. 왜냐하면 신이 기만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이 모든 일에 있어 내가 기 만당하지 않았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결과지어지기 때문이다. >12 )

12) Six iem e medita tion , 위의 글, 22~:

이렇듯 신의 선함은 우리의 관념의 진정성을 보장해 준다. 물론, 여기 문제 되어 있는 우리의 관념은 그 어떤 것이나 다 해당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

의 정신 속에 확연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이미 확인된 다른 관념들과 상치되 지 않아야 한다는 엄격한 규제를 받는다. 형이상학이라는 공동의 뿌리에서 나 온 모든 지식이 하나의 체계 속에 통합된다는 것은 이미 밝힌 바 있지만 역으 로 이 통합이 각 지식의 정당성을 보장해 준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한 체계 안에서 모든 지식들은 상호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또 한 이 연관성이야말로 그것들을 보장해 주는 근거가 된다. 인식의 모든 대상이 동일한 창조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하나의 보편적 체계 속에 편입되고 또 이 체계 속에서만 그 인식이 가능해진디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계론과인간학 이 체계의 개념은 곧바로 데카르트의 의적 세계에 대한 개념으로 우리를 이 끌어간다. 지난날의 자연주의 또는 신 아리스토텔리슴에 의하면 모든 물질은 그 자체의 내밀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마치 생명체처럼 고유한 삶을 살고 있 다. 데카르트가 우리의 의식 밖에 존재하는 세계를 운동과 의연에 귀속시켰을 때 그는 바로 과거의 물활론 a ni m i sm 려서 우리를 해방시켜 준 것과 다름없 다. 그에 의하면, 세계는 그 안의 모든 물체들이 특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상호간에 작용하는 공간이다. 다시 말해, 세계를 구성하는 물체들은 그 자체 하나의 의연인바, 그것들은 예의없이 동일한 법칙에 순응하되 (왜냐하면 동질적 인 공간 속에 있기 때문에) 상호간에 작용하고 반작용함으로써 부단히 유동적인 하나의 총체를 이루고 있다.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이해하는 이른바 기 계론은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물질 속에 은밀한 생명을 감지하려 했던 신비주 의는 사라지고 이제 이성의 밝은 조명 아래 세계는 질서와 법칙에 따라 재구성 되어 가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신에 뒤이어 그리고 그의 완벽한 법칙 울 따라 세계를 재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자연의 법칙들이 어떤 것인 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의 이성을 신의 무한한 완벽성 의의 다른 어떤 원 리에도 의지하지 않은 채, 나는 사람들이 어떤 의심을 품을 수도 있는 법칙들

울 입증하기에 힘썼으며, 또한 그 법칙들은, 설사 신이 여러 개의 세계를 창조 했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어떤 세계도 있을 수 없는, 그 런 성질의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에 힘썼다. >13 ) 데카르트에 의해 세계는 오랫 동안 드리웠던 신비의 그늘에서 빠져나와 이성의 밝은 태양 아래 알몸을 드러 내 놓았다. 세계의 이 변모, 아니 세계에 대한 이 인식의 전환을 하나의 혁명, 서구에 있어 가장 의미 깊은 의식의 혁명이라 단정한다고 해서 과장된 것은 아 니다. 자연은 신비와 몽상의 대상이기를 멈추고 이제 분석과 해체, 가공과 정 복의 대상으로 변해 갈 것이다. 자연의 법칙을 풀 열쇠를 손에 넣은 서구인은 말하자면 신의 창조의 비밀을 훔쳐낸 사람과 같으며 앞으로 자신의 욕망과 기 도에 따라 세계를 개조해 나갈 것이다.

13) Disco urs de la Meth o de, 위의 글, 121 쪽 :

그러나 여기 우리의 관심은 물적 세계에 대한 데카르트의 개념, 즉 기계론 그 자체에 있지 않다 . 문제는 그것이 그의 인간학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를 알아보는 데 있다. 모든 지식들의 상호 연관성이라는 그의 기본 명제에 비 추어볼 때 기계론과 인간학이 별개의 것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사실상, 그의 인간학은 인간에 대한 기계론적 인식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한 육체로 서의 인간은 자연의 다른 물체와 다를 것이 없는 하나의 기계이며, 만약 어떤 특징이 있다면 그중에서 가장 정교한 기계라는 것뿐이다. 이른바 〈자동기계 au t oma t es 〉 와 동물뭏기 그렇듯이 인간의 육체도 의부에서 가해지는 작용예 의 해 일정한 운동의 법칙에 따라 반응하고 움직이는 각종의 기관들의 총체이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전 기계에 비해 무한히 더 복잡하고 미묘한 것임에는 틀림 없지만-왜냐하면 그것은 전지전능한 신의 작품이기 때문에-그것이 하

나의 기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자신의 내부로부터 자 신을 주관하는 또 하나의 실체, 즉 정신이 있다. 기계로서의 인간이 세계의 법 칙, 다시 말해 필연의 법칙하에 놓여 있는 데 반해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인간 은 전적으로 자유롭다. 인간에 있어 어떤 완전성이 문제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이며 그것은 신의 완전에 버금가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 〈 신의 영상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 고 믿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정신, 이른바 지유의 지 li bre arbit re 때문이라고, 데카르트는 말한다. 14) 인간에게 이 자유의지가 부여되었다는 것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물론 정신은 육체를 통해 행동 하고 육체의 감각적 파장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정신은 빼앗길 수도 버릴 수도 없는 판단의 자유가 주어져 있으며 따라서 안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은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돌아온다. 데카르트의 윤리학의 기본 명제는 이렇듯, 인간의 모든 의지적 결정과 행동은 오직 자유의지의 동의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

14) Cf Quatriem e medito ,tion , 위의 글, 196 쪽:

우리는 그가 지적 추구의 처원에서 자유의지의 요청에 어떻게 순응하였는가 를 이미 확인한 바 있다. 〈감각의 증언났t 비롯한 모든 지식과 개념들을 전면 적으로 거부하는 그의 회의의 직업은 다름아닌 그의 자유의지에 의해 유도되었 다. 단순히 오류에 빠지는 것을 방지할 뿐인 부정적 성격의 자유(데카르트는 이 것을 최하위의 자유로 보고 있다)가 있는가 하면 진리를 발견하고 수릭하는 긍정 적 자유도 있다. 그가 『 방법론 서설 D isc ours de la Met hode 』 에서 사고의 제 1 규칙으로 제시했던 것, 죽 〈자명하게 전실한 것으로인식되지 않는 어떤 것도 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15) 바꾸어 말하면 〈자 명하게 진실한 것으로

15 ) Disco urs de kz Meth o de, 위 의 글, 103 쪽 : <… ne recevoir j am ais a ucune chose

pou r vraie qu' il ne la connOt evid e mment l!tre tell e.>

인식되는 것만을 받아들인다 〉 라는 원리는 바로 이 긍정적 자유의 범주에 속한 다. 그러나 〈자 명한 것 ev i dence)¾ 받아들이는 것은 자유의 행위라기보다는 오히려 필연의 행위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것의 명증성은 정신에게 수락을 강 요하는 강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면적 회의 끝에 마주치게 된 cog ito 의 명제는 그 자명성으로 인해 받이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이것은 회의를 이끌어왔던 자유의지에게는 하나의 패배이며 자유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자유와 자명성은 이렇듯 상호 모순되는 것으로만 보아야 하 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정신이 회의의 궁극적 실패 속에서 cog it~ 명 증을 받아들인 것은 어떤 의적인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고의 이성 적 법칙 속에서 자신의 보다 내밀한 법칙을 발견한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회의가 이성의 자유로운 행위였다면 회의를 거부하는 자명성의 수락 또한 정신 의 자주적인 결정의 소산이다. 다시 말해, 정신은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존재 의 가장 기본적인 요청에 따라 스스로를 결정짓는 것이다. 여기 한계의 의식이 개입한다. 회의의 실패는 단적으로 자유의지의 한계를 의미한다. 사실, 지유의지는 그 본질에 있어 무제한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우 리에게 감각의 증언들을 거부할 자유가 있다면 마찬가지로 그 어떤 환각을 진 실한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도 동시에 있게 된다. 자유의 무제한의 행사는 오 류의 길을 넓게 열어놓을 것이다. 만약 자명한 것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거부 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지 않는다면 사고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 것 이다. 확실과 불확실, 진실과 오류를 분간할 그 어떤 기준도 없어질 것이기 때 문이다. 전면적 회의 속에서 모든 확실성을 단념한 회의주의자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지적 혼돈이었으며 그것은 한마디로 지성의 파탄 이었다. 데카르트의 가장 위대한 공헌은 회의의 지유와 자명성의 필연이 맞닿 는 자리에서 인간의 자유가 그 안에서 행사되어야 할 한계를 설정하고 동시에 인간의 정신이 그 한계 안에서 오직 자신의 힘으로써 진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제시한 데 있다. 이 한계가 곧 이성에 의해 수락된 한계라는 것, 그리고 이 방법이 곧 이성을 유효한 발견의 수단으로써 활용하게 하는 사 고의 규칙이라는 것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16)

16) 데카르트는 co git여운 발견한 후 잠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규제할 윤리적 지침을 제시한 다 . 그가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총체적 지식의 체계 (그가 이것을 한 그루의 나무에 비유 했다는 것은 이미 밝힌 바 있다)가 완성됨으로써 완전한 지혜가 실현되기 전에도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참정적 윤리는 『 방법론 서설 』 제 3 장에 해당한다.

데카르트철학과문학 우리는 데카르트에 의해 마침내 확립된 사고의 지주적 주체로서의 이성의 권 위와, 이성의 정당한 운용을 위해 요구되는 규제, 즉 규칙의 개념에 도달하기 위해 꽤 먼 길을 걸어왔다. 우리는 루이 1 心 1l 에 의해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지 기에 앞서 정신의 분야에서 데카르트가 달성한 천하통일의 대장정을 뒤따라온 셈이다. 이 정신적 정복이 미치는 파장이 보다 광범하고 보다 지속적이라는 것 은 명백하다. 정치적 통합이 한 시대, 한 나라에 한정된 것인 데 반해 정신적 정복은 모든 인간, 모든 시대에 공통된 보편적 진리를 문제삼기 때문이다. 데 카르트의 모험이 〈 생각하는 주체 〉 로서의 자아의 발견을 기점으로 삼고 있는 점 에서 개인적 성격이 질은 것은 사실이며, 실제로 그의 『 방법론 서설 』 은 하나의 자서전으로서 씌어져 있다. 그러나 그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모험이 갖는 보 편적 의미를 간파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에 의해 추구의 유일한 주체로서 인식된 이성의 본질, 지식의 총체적 체계를 지향하는 그의 야심적 기도, 그리고 이 추구에 동원된 방법들의 객관성을 환기하는 것으 로족하다. 여기서 우리는 데카르트의 철학적 원리들과 문학과의 관계에 대해 참시 주목 하지 않을 수 없다. 진리의 보편성의 개념과 아울러 이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 의 필요성을 확인함으로써 그는 고전주의를 예고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상,

고전주의는 다음 두 가지 원리, 즉 인간과 세계를 지배하는 하나의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리가 있디는 것, 마찬가지로 아 전리로 인도하는 단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러는 것으로 귀착된다. 고전주의는 한 인간을 그가 처한 시대와 공간 속에서 그리되 궁극적으로는 역사의 의적 제약을 뛰어넘은, 영원불변한 인간적 진실에 도전한다. 여기 방법과 규칙의 문제가 제기된다. 어떤 고유한 주관적 전리가 문제될 때 거기에는 한 개인의 내밀한 영감만으로 족하며 방법적 추구 의 문제는 애당초 제기되지 않을 수도 있다. 진실의 보편성, 다시 말해 객관적 전정성을 추구하는 고전주의에 있어 방법론, 즉 규칙의 문제가 그토록 중요성 울 갖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선결 문제이기도 했 다. 고전주의는 〈 무엇冷t 할 것인가에 앞서 〈 어떻게 〉 하는가에 먼저 집착했다. 영감이 때때로 위대한 작품을 낳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류로 인도 할 가능성도 동시에 있는 우연에 의지하는 대신 항상 전실로 유도하는 확실한 방법의 필연에 스스로를 굴복시키는 데 있다. 드높은, 영원한 전실에 도전하는 야심적 정신은 실제에 있어서는 규율에 순종하는 겸손을 배워야 한다. 이런 상 황하에서 우리는 고전주의 가운데 모든 것을 〈 법규화 〉 하려는, 거의 병적인 열 의를 발견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사고의 주체에 대한 근원적 검증에서부 터 시작하여 인간이 획득하는 진리의 전정성을 보장하는 조건과 방법들에 대한 성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데카르트의 시대에 문학이 바야흐로 그런 모습 으로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이기도 하다. 문학과 관련하여 우리는 또 하나의 측면을 조심스럽게 환기하고자 한다. 그 것은 문학의 내적 세계와 관계되는 것으로서 당대의 스토아주의적 경향과 상응 한다. 우리는 앞서 데카르트의 기계론을 논하는 가운데 인간의 자유의지의 독 자적 영역을 확인하였고 이것이 인간에게 자유로운 결정과 선택의 가능성을 보 장해 줌으로써 가치의 창조를 실현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여기 서 데카르트와 기존의 스토아주의와의 관계를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 는 자신의 인간학의 테두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인간의 도덕적 의지를 발견하였 고 이 의지의 선용에 의한 삶의 규제를 주장했던 것인데, 이런 입장이 당대의

스토아주의적 경향과 상당부분 일치했던 것뿐이다. 실제로, 17 세기 전반기에 스토아주의는 고대에서 이어받은 정신적 유산으로서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가 지고 있었다. 우리는 몽테뉴 가운데, 그리고 뒤이은 세대 가운데 회의주의와 자유사상의 흐름이 어떻게 형성되고 번져나갔는가를 추적한 바 있지만,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 인간의 도덕적 힘과 의지적 규제를 믿는 스토아주의도 시대의 혼란과 불행에 직면한 지식인들에게 삶의 적국적 원리로서 크게 부각되었던 것 이 사실이다. 몽테뉴 자신도 한때 세네카를 통해 스토아주의에 이끌리지 않았 던가. 또한 회의주의가 궁극적으로 포기와 무관심으로 귀착된 데 반해, 스토아 주의는 자아의 통제와 훈련을 지향하는 적극적 윤리로서 기독교와의 공존이 더 용이했던 것으로도 보인다. 어쨌든, 인간의 자율적 의지를 존중하고 지신의 결 정의 국한을 사는 〈영웅 〉 의 윤리학, 이른바 새로운 형태의 영웅주의는 루이 13 세 시대의 한 보편적 흐름으로 부상하였다. 우리는 장차 코르네유의 작품 속에서 이 영웅들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 이 영웅들의 탄생에 데카르트가 특별히 기여한 것은 없다. 사실, 데카르트가 『 정념론 Tra it e des pass z·ons de l'a m e, 』 (1649) 을 발표한 것은 시기적으로도 그 후의 일이었다. 도대체 데카르트의 철학이 일반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7 세기 후반게 집어들어서였다 . 굳이 데카르트의 공헌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그 것은 그의 인간학의 논리 속에서 이 〈 영웅 〉 에게 합리적 근거와 명확한 정의를 제공한 것이 될 것이다. 『 방법론 서설』에서 잠정적으로 행동의 원리를 설정한 데 뒤이어 그는 『정념론』에서 이른바 인간 품성의 〈 고귀함g eneros it e 〉 의 개념 울 정의함으로써 윤리의 새 유형을 제시하였다. 〈이렇듯 나는, 한 인간이 정당 하게 자신을 존중할 수 있는 최고의 한도에까지 자신을 존중하게 만드는 참된 〈고귀함).g., 한편으로는 참으로 자신에게 속한 것은 자신의 의지의 자유로운 처분 의에 아무것도 없고 또 그가 찬양받거나 비난받는 것은 이 의지를 올바르 게 사용하느냐 그릇되게 사용하느냐 의에 아무런 기준도 없다는 것을 아는 데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자신 속에 이 의지를 올바르게 사용하겠다는 결의, 다 시 말해 그가 최선의 것이라고 판단하는 모든 것을 기획하고 실천하기 위한

_―이것이 곧 완벽하게 덕을 따르는 것이다 __ 의지를 결코 상실하지 않겠다 는 확고하고도 변함없는 결의를 느끼는 데 있다. >17 ) 데카르트의 정의는 철학적 또는 과학적 정의와도 같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직선적이다. 그러기에 문학 작품 속에 그려지는 영웅들의 모습과 대비할 때 적지않은 뉘앙스의 차이가 있 게 마련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 고귀함 〉 의 개념과 코르네유가 그려 보여 준 〈고 귀한 정신a. me gen ereuse)- g. 분명히 동일한 혈통에 속한다. 〈 나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고,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소…… 〉 〈 내가 그렇게 해야만 한다면 다시 한 번 그렇게 할 것이오……〉 18)

17) Traite des passion s de l'fim e III, 155 쪽:

18) Corneil le, Le Cid III, v.:

코르네유적 영웅주의의 모든 것이 입축되어 있는 듯한 이 짧은 인용문 속에 서 단순히 의무의 개념만을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 의무는 의부에서 부과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유롭게 선택한 것이며 이 의무에 대한 충실은 사실상 자 신에 대한, 더 정확하게는 자신의 내적 요청에 따라 설정한 이상에 대한 충성 의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 자유로운 의지적 결단이 그 어떤 희생과 아픔의 대

가를 요구한다 할지라도 끝까지 이를 견지하며 결연히 그 시련을 감내하되 후 회하지 않는 영웅_~한 시대가 추구했던 인간 이상의 유형은 이런 것이었으 며, 우리는 이것을 데카르트의 인간학을 포함한 스토아주의적 흐름 속에서 그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시대의 문학에 깊이 들어서기 전 에 우리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 먼저 17 세기 초의 한 위대한 선구자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 그에 의해 문학적 모험은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2 세기초의 문학이론――말레르브와 반말레르브 l 이기 중반 플레이아드의 젊은 시인들에 의한 최초의 그리고 야심적인 문학 창조의 시도가 있은 후 프랑스 문학은 종교전쟁의 광란과 열풍 속에서 한동안 표류하는 듯이 보였다. 이 시대의 문학은 이른바 침여문학의 모든 특징을 지니 고 있었지만 문학적으로는 플레이아드의 미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 로 보인다. 다시 말해, 롱사르, 뒤 벨레에 의해 제시된 문학의 개념과 시 창조 의 방식은 이 시대에 여전히 유효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은 격양되고 흥분된 정신적 상황 속에서 한결 증폭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이 시 대의 문학을 17 세기 초의 특정한 문학과 관련하여 〈 바로크 〉 의 개념하에 좀더 깊이 다루게 될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1@1] 기 후반의 문학 속에서 새로운 문 학적 성찰의 징후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려 한다. 말레르브의 출현 만약 방금 제시한 전제가 정당한 것이라면 우리는 〈 마침내 말레르브 왔도 다〉 19 봐는 브왈로 Bo il eau 의 단언에 동의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 특별히 강조 된 것은 〈마침내〉라는 말이다. 죽 말레르브 Malherbe(1555-162s) 는 오랫동안 19) Boil ea u, Ar t poe tiq u e, Chant I : < En fin M alherbe vint … . >

기다려졌던 사람으로, 그리고 당연히 왔어야 할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다. 적어 도 브왈로에 의하면,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하면 그는 프랑스 문학이 새로워지기 위해 꼭 필요로 했던 사람이다. 그들은 이 문학이 무엇을 위해 변신해야 하는가를, 즉 문학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 목표를 이미 알고 있 었는데, 말레르브는 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 해야 할 사람이었던 셈이다. 말레르브에 의해 시가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가불 당대 또는 그 이전의 시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대체로 롱사르적 경향의 것이었다. 롱사르를 중심으로 한 플레이아드의 미학이 신의 전령으로서의 시인 의 드높은 사명에 대한 인석을 바탕으로 시 창조에 있어서의 영감의 우위를 강 조하였고 아울러 시적 언어의 풍요로움과 현란함을 지향했었다는 것은 여기서 새삼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다만 우리는 이 미학이 위대한 시인, 위대한 작품 울 탄생시켰다는 것, 그리고 롱사르, 데포르트 Des p o rt es, 도비녜 d'Aub ign e, 뒤 바르타스 Du Barta s 2 -} 같은 시인들의 작품이 한 시대의 특이한 시적 경향을 대변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그것은 한마디로 〈 이성과 규칙의 조정에 대한 시적 ‘홍취', 창조적 열기의 지배 〉 20)로 서 특칭지어질 수 있다. 위에 열거 한 시인들에게는(아마도 데포르트는 제의하고) 놀라운 상상력, 대담한 창조적 영 감, 고귀한 이상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하나의 공통된 결함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창조적 열기에 이끌린 나머지 오직 시 적 영감에 스스로를 위탁하며 너무나도 성급히 언어의 혼돈 속으로 뛰어들었 다. 언어가 제공하는 모든 놀이에 절제 없이 탐닉한 그들은 온갖 과장과 비유 와 장식의 기교를 구사하며 각기 독창적인 수사의 찬란한 축제를 벌였다. 이 축제가 언어의 과잉, 수다스러움, 표현의 모호성, 어휘와 구문의 혼란 등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사실 플레이아드의 이 20) ].M orel, L a Renaiss an ce II 1570-1624, Lit tera tu re f ran~ ais e, t.5, Artau d: <·· ·la domi na ti on de la verve creatr ice sur !'arbit rag e de la rais o n et d e la regl e .>

론 가운데 시 창조에 있어서의 신중함과 의식적 작업의 필요성이 강조되지 않 았던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불확실하고 변덕스러운 개인적 영감에 대신하 는 시작의 원리와 규칙울 최초로 객관화하려고 시도한 것도 바로 플레이아드였 다. 다만 반 티겜 Van T i e g hem 이 적절히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새로운 지침 이 충실히 준수되지 못한 것은 당대의 격앙된 정신적 분위기 탓이었는지 모른 다 .21)

21 ) Cf. Van Tie g h e m, Petit e His toi re des Grandes Doctr ine s litte ra ir es en France , 1 쭉 :

말레르브가 출현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였다. 예술적 완성에 대한 강 렬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한 비평가로서 그는 당대의 예술의 무절제하고 방 만한 경향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예술 적 의식에 눈떴던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상당 기간 동안 당대의 일반적 흐름 속에 몸을 담기까지 했다. 『 성 베드로의 눈물 Les Larmes de Sain t Pi erre 』 과 같은 그의 초기 작품들은 현란한 이미지, 기발하고 충격적인 비유 , 장식적이고 화려한 언어를 추구했던 당대의 시풍에 기꺼이 동조하는 것 들이었다. 따라서 그가 훗날 보다 신중하고 이지적인 통제의 예술로 방향전환 울 한 것은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통한 일종의 개종과 감은 것이다. 그에 있어 변화의 증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592 년경 그가 『 클레오퐁에의 위안 Consolati on a Cleop hon 』 을 쓸 무렵부터이다 . 6년 후 『 뒤 페리에의 위안 Consolati on a Du Pe ri er 』으로 개작된 이 시 속에서 그는 어린 딸을 잃은 친 구를 위로하기 위해 이성에 호소했울 뿐만 아니라 시작에 있어서도 자유분방한 언어의 장식적 효과 대신 절제와 규율을 새 원리로 삼으려 했던 것이 역력하 다. 그는 죽음이라는 진부한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 상상적으로 비약하거나 과

장함으로써 효과를 노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투적인 성찰의 범주 안에 머물면서 엄밀한 비유와 이지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여기 표현된 위안은, 실은 이미 두 아들과 사별한 말레르브 자신에 대한 위안이기도 했다. 그가 초 기의 다분히 쾌락주의적인 성향에서 벗어나 이성적이고 스토아적인 체념으로 기울어졌다는 사실은 그의 시작 및 시의 개념에 있어서의 변화와 아울러 크게 주목할만하다. 물론, 말레르브의 이론이 이것으로써 완전히 정립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 직도 좀더 기다려야 하며, 르베그 R. Leb 速 u~ 말을 믿는다면 〈브뤼노가 데포 르트 해설에서 도출한 말레르브의 이론은 1598-1599 년에 이미 확립된 것이 명 백하다 〉 . 22) 그렇다면 그의 이론은 무엇으로 성립되어 있는가. 23) 먼저 시인에 대한 그의 인식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에 있어 시인은 한 職人, 한 장 인 ar ti san 의의 아무것도 아니다. 훗날 라 브뤼예르 La Bruye r e7} 〈책을 만드 는 것은 시계를 만드는 것과 같은 하나의 직업이다〉타·고 말한 것과 완전히 동일한 관점이다. 시인이 장인이라면 詩作은 당연히 정확한 기교를 요구한다. 장인으로서 시인이 힘써야 할 일은 오직 시를 찰 쓰는 일뿐이며 그것은 마치 목수가 튼튼하고 편리하고 보기에 아름다운 가구를 만들기 위해 힘쓰는 것과 같다. 플레이아드의 시인들에 의해 그토록 고양되었던 시의 위엄, 예언자의 위 치로 드높여졌던 시인의 고귀함을 상기할 때 말레르브의 이와 같은 개념은 정

22) J. M orel, 위의 책, 202-20 딱:

23) 말레르브는 자신의 시 이론을 전개하기 위해 단 한 권의 책도, 단 한 편의 논문도 쓰지 않았다. 시작에 대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지침을 . 주고 싶었던 그는 비평의 이론보다 바 평작업의 현장으로 우리를 인도하기를 택한 것 같다. 데포르트의 시집 여백에 적어 넣은 그지없이 면밀하고 세부적인 지적들이 바로 그것이다. 또 하나의 문헌으로는 라캉 Raca 뼈 『회고록 Memo i re 』을 통해 전해지는 그의 재치 있는 어록둘기 있다.

24) La Bruy er e, Les Caracte re s, Des Ouvrage s de !'espr i t , ed. Pleia d e, 6 혹 :

녕 시와 시인의 비참한 실추를 의미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말레르브는 이 기교의 완성이야말로 시의 영생의 유일한 보장이라고 믿었다. 그는 시의 위엄 울 다른 곳에서 찾은 셈이다. 물론 봉사르에게서 시의 기교의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실제로 그에 의해 비로소 한 작업으로서의 시 창조의 개념이 도 입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시인의 초월적 위상을 강조하였 고 시를 위대한 전리의 장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롱사르가 이렇듯 양다리를 걸 친 데 반해 말레르브는 단연코 하니를 선택하였으며 시가 기교의 차원에 머물 기를원했다. 왜냐하면, 시는 그 자체 의의 다른 목적이 없고 따라서 그 자체의 완성만이 추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시는 하나의 유회, 언어의 놀이에 불과하다. 시에 대한 이 인식의 변화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하다. 모든 것은 여기서부 터 시작되었다. 조금 전에 우리는 시를 가구 제작에 바유했지만 더 적절한 비 유는 차라리 운동의 경기, 가령 공놀이와 같은 것일 것이다. 여기서는 모든 유 용성의 개념이 배제되고 오직 경기에 있어서의 기술만이 문제된다. 공놀이에 있어 공을 의도했던 데로 보내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시인은 〈 언어에 대한 강 력한 지배력을 가지고 〉 그것들을 디스림으로써 〈 음절의 탁월한 조립자 〉 2 5) 가 되 는 것이 문제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 여기에는 어떤 다른 목적이 있는 것 은 아니고 실용적 용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 훌륭한 시인은 훌륭한 九柱戱 경 기자와 마찬가지로 국가에 대해 유용하지 않다. >26) 다만 놀이룰 훌륭하게 해내 는것, 이것뿐아다. (말레르브는) 산문울 보통의 걸음에, 시를 춤에 비유하였고, 또 우리가 어쩔 수 없 25 ) Racan, Me -mo ire : <••• q u' on dira que nous avons ete deux exccellen ts arrange u rs de syll abes, et q ue nous avons eu une gra nde puis s an ce sur !es par oles pou r !es pla cer si a pro p os chacune en leur rang ·· ·> ( c ite in Van Tie g h e m, 위의 책, 1 쪽). 26) 위의 책 :

이 하는 일에 있어서는 소홀함 까 지도 눈감아주어야겠지만 우리가 자랑삼아 하는 일 에 있어서 초라한 꼴을 보이는 것 은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27)

27) Racan, Lett re XI a Chapl ai n : <(M alherbe) comp ar ait la pro se au marcher ordin a ir e , et l a poe sie a la danse, et d is a it qu' aux choses que nous sommes oblig e s de faire on y doit tol erer meme negl ig e n ce, mais q ue ce que nous faiso ns par van ite, c'est e tr e ridi c u le que de n'y e tr e que medio c re> (cite par Van Tie g h e m, 위의 책, I~).

우리가 걷는 것은 어디엔가 가기 위해서이고 따라서 걷기 위해 행하는 동작 과 운동은 이 목적에 봉사한다. 설사 걸음걸이가 서툴거나 비틀거린다 할지라 도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기만 하면 크게 탓할 것이 없다. 그러나 충은 춤 그 자체가 목적인 만큼 잘 추는 것만이 문제이며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웃음거리 가 될 것이다. 춤을 잘 추기 위해서는 하나하나의 동작과 운동이 아름다워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 속에서 조절되고 통합될 필요 가 있다. 다시 말해 춤을 지배하는 내재적 법칙에 순응해야 한다. 시에 대해서 도 우리는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동 작과 운동 〉 에 〈 음절과 어휘셔t 대치시 키기만 하면 이 정의는 시에 그대로 적용된다. 시로 하여금 시가 되게 하는 것 은 시인의 신비로운 기원도, 그 안에 담긴 신적인 메시지도 아니다. 시는 각각 의 말들이 모여 이루어진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 말들의 아름답고 정교한 조립 품일 뿐이다. 이 조립이 시인의 자의나 변덕에 내맡겨질 수 없다는 것은 너무 나도 당연하다. 시작이 결국 하나의 놀이, 조립의 한 놀이라면 이 놀이는 그 자체의 법칙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말레르브의 가장 큰 공헌은 플레이아드 에 의해 어렵풋이 예감되었던 시 창조의 내재적 법칙의 개념을 명확하게 그리 고 시작의 핵심적 요소로 확립시킨 점에 있다. 이제 구체적으로 이 법칙과 관련된 말레르브의 성찰을 따라가보기로 하자.

여기 먼저 언어의 문제가 있다. 이 점에 관한 말레르브의 견해는 일반적 관용 의 존중으로 요약된다. 관용이라 함은 이론상 궁정과 파리 상류사회의 화법을 가리킨다. 이것은 정확하고 품위 있는 어법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일반 시민 의 그것과 유리된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서민들에게도 완전히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시가 씌어져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어떤 단어에 대해 그의 의견을 묻자, 장바닥의 침꾼들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는 〈그들이야말로 나의 말 선생들이라고 〉 2 8) 말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을 잘못 해석하여, 그들처럼 말해야 한다는 따위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다만 그는 일반 서민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프랑스어라 할 수 없디는 것을 말하고 싶었고, 아울러 시를 쓴다는 핑계로 무슨 말이나 만들어내는 경박한 풍 조에 경고를 울렸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플레이아드의 미학과 정면으로 상 치된다는 것을 안다. 이들이 갖가지 파생어와 신어를 만들어내고 잊혀진 고어, 방언, 심지어는 고대어를 되살려 활용함으로써 시어롤 풍요롭게 하기 위해 기 울였던 모든 노력은 여기 말레르브에 의해 제동이 걸렸을 뿐만 아니라 명분을 잃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시작에 있어 언어에 대한 인위적 조작을 거부하 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시어 그 자체에 대한 회의를 제기하기까지 했기 때문이 다. 그가 시를 언어의 일반적 관용의 범주 안으로 복귀시키고 양식과 이성에 순왕세 한 것은 그 자체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것은 시어에 대한 회의에 기인한다• 말레르브에 의하면 일반 언어, 즉 산문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언어 체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라고 해서 산문이 갖는 권리 이상의 것을 누릴 특권이 있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시도 당연히 일반 어법을 준수해 야 한다. 시인은 이제 기인도 초인도 아니다. 그는 평범한 한 시민일 뿐이며 지상의 법에 순종해야 한다. 2s) Racan, 위의 책 : (cite i n 위의 책, l~}.

시어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시의 스타일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시 라고 해서 특별한 스타일이 있는 것은 아니며 시는 무엇보다 훌륭한 산문, 즉 그것의 모든 장점을 갖춘 산문이어야 한다. 관념들의 명확하고 완전한 표현, 각각의 문장의 엄밀한 구성, 각 행, 절 그리고 시 전체의 견고한 짜임새―― 이 모든 특징은 결국 명확성과 논리성으로 요약된다. 우리는 말레르브의 아 교 훈이 매우 위험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실제로 1 앙1 ] 기에 사람들은, 좋은 시를 만둘기 위해서는 좋은 산문에 운을 붙이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말레르브의 의도는 그런 데 있지 않았다. 좋은 시가 좋은 산문 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기본적인 필요 조건일 뿐 충분 조건은 아니다. 단지 그는, 시라고 해서 문체의 일반적 관용을 벗어날 수 있는 특권, 다시 말 해 어떤 초법적 자유가 허용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는 시 창조가 그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한계를 명확히 그어준 것뿐이다. 시작법에 있어서도 특권적 자유가 거부되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여기 먼저 운 r i m 려 문제가 있다. 운에 대해 몹시 엄격했던 그는 음의 일치에 만족 하지 않고 시각적 일치까지도 요구했다. 그에 의하면, i nnocenc 惑} puis- sance, a pp aren t과 con q ueran t은 청각적으로는 일치하지만 눈에는 거슬린 다. 그는 또 단음절과 복합절을 운으로 묶는 것에도 반대한다. mi l i eu 와li eu, m i nu it와 nu it는 잘된 운의 일치라고는 할 수 없다. 운 의에도 시작법과 관련 된 그의 검토와 비판은 이를 데 없이 면밀하고 준엄했다. 가령, 문장과 시행 vers9- j 리듬이 일치되기를 바랐던 그는 〈첫 행 속에 담긴 뜻이 제 2 행 중간에서 종료되고 또 제 2 행이 제 3 행 중간에서 종료되는〉 29) 시를 용닙하지 않았는가 하 면, 〈한 뜻이 종료될 때 그것은 두번째 운에서 그렇게 되기를, 그래서 한쌍의 운 중에서 하나는 뜻의 종료가 되고 또 하나는 뜻의 시작이 되는 따위의 일이 29) Commenta ire de Des po rte s : <… oil le pre m ier vers acheve son sens a la moit ie du second ; le second a Ia moit ie du troi si e m e …>( cite par J. Morel, 위 의 책, 20~).

일어나지 않기를 〉 3 0) 요구했다. 우리는 다음 行에 걸치가 enj ambemen t를 위시 한 각종의 금기에 대해서 일일이 언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 데포르트 해설 Commenta £ re sur D esp o rt es』 속에 펼쳐진 그의 섬세하고도 준엄한 비판 작업 은 〈말과 음절의 폭군 〉 이라는 그의 칭호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30) (c it e in 위의 책, 20~ 우).

말레르브가 시의 쇄신을 위해 제시한 처방은 대략 이상과 같다. 그는 장황하 게 이론을 펼치기보다 시작의 현장에서 구체적이고 명확한 충고를 주고 또 실 용적인 규칙들을 제시하기를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전세대의 젊은 시 인들처럼 거창한 선언문들을 발표하지도 않았고 이론적 정립을 위해 시학 따위 를 쓰지도 않았다. 우리가 시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은 한 구체적 작품게 대한 검증의 작업 (데포르트 해설』)과 라캉 Racan 의 증언을 통해서뿐이 다. 자신의 오랜 시작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전세대와 당대의 작품들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어떤 성숙의 경지에 도달한 한 사려 깊은 시인은 시를 본래 의 터전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데 있어 고답적인 시이론보다 시작에 따른 실체 적 조건들에 대한 조언이 더 유효하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시를 본래의 자리로 환원시키는 것 __- 말레르브의 근원적 기도는 바로 여기 에 있다. 그것은 시의 재건이라는 표현으로 바꿔 말해도 좋다. 그의 작업은 사 실상 플레이아드의 실패를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전세기의 패기 넘 친 젊은 시인들은 시를 새로운 위엄의 자리로 끌어울리려는 야심적인 포부를­ 안고 화려한 개혁의 청사전을 펼쳤었다. 그리고 그들이 프랑스의 시를 한 단계 도약시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시의 특권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고 시인의 위상을 지나치게 드높였다. 위대한 불멸의 전리에 봉사하~근 시인은 지상의 모든 구속과 제한에서 풀려난, 전적으로 자유로운 창조자로 군

림하고, 시는 영감의 전율, 거칠 데 없는 상상의 나래 , 관념의 신비로 만들어 지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되었다. 문제는 시가 결코 그것만으로 족하지 않다는 데 있다. 말레르브는, 말하자면, 이 사실을 깨달은 최초의 사람이었던 셉이다. 그는 이들이 지향했던 정신의 고귀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이것에만 집착한 나머지 이들의 시가 갈수록 더 혼미와 모호와 방만으로. 홀러가는 것을 발견했 다. 그는 시의 위기를 직감했고 이에 대한 해결의 방안을 모색했다. 구체적으 로는 그들에게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가를 찾아내는 일이었는데 결국 그는 그것 을찾아냈다. 시는 위대한 관념이기에 앞서 하나의 기술, 언어를 디루는 기술이라는 것, 따라서 시인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최초의 덕목은 바로 이 기술이라는 것, 그리하여 시에 있어서의 완성은 이 기술의 완성 이의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요컨대 말레르브는 프랑스의 시에 예술적 (더 정확하게는, 기술적) 완성의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는 이 완성의 개념에 있어 비할 대 없이 준엄하고 바타협적이었으며, 그것의 실현에 있어 세심하고 방법 적이었다. 이로써 그는 플레이아드 이후 프랑스 시가 새롭게 반전할 수 있는 바탕을 마 련했다. 그는 시인을 흥분과 황홀에서 신중함과 이성으로 되돌아오게 하였고, 시를 관념과 산비에서 문법과 구문의 차원으로 내려서게 했다. 레니에 Re gni er 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롱사르는 〈운 으로 산문체를 쓰고 산문으로 운문체를 쓰는 데 〉 전념하는 〈 무식한 시작자 vers ifi ca t eur~ 비웃었다고 한다. 말레르 브는 어떤 의미에서 이 시작자(그러나 결코 무식하지 않은)가 되기를 택한 사람 이다. 그는 과거의 시가 빠져들었던 혼미와 방종에서 시를 건져내기 위해 산문 의 미덕이 시의 미덕아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이로써 시와 산문의 경계를 거의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와 같은 말레르브의 시론이 훗날 비난의 대상이 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고전주의의 대변자 브왈로의 칭찬은 오히려 그에게 해를 입히는 결과가 되어, 낭만주의자들의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게 했다. 브런티에르

Brune ti er 러 같은 문학사가에 의하면 그는 참된 시인이 아니라 한낱 〈 시작 자〉_―우리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안다-일 뿐이다. 요컨대 그 는 향후 2 세기에 걸쳐 프랑스에서 시를 말살한 장본인으로 지탄받게 될 것이 다. 그에 대한 비난이 부분적으로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서실이다. 그는 시 창조에 있어 개인적 독창성, 상상의 바약, 관념과 감정의 숭고함, 주제의 대담 성 등이 차지하는 몫을 거의 무시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것들에 앞 서, 그리고 아마도 이 내적 자질들이 충일하게 표현될 수 있기 위해 먼저 시적 표현의 기교를 익히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마치 아름답고 대담 한 춤을 동경하며 상상 속에 그리기에 앞서 춤을 구성하는 동작과 운동의 기본 부터 배워야 하는 것과 같다. 시인은 언어라는 제재, 그리고 시를 구성하는 일 련의 형식들과 싸워 그것들을 제어하는 기술을 익히는 장인으로서 출발한다. 발레리가 그의 작업을 가리켜 〈 표현 방석들의 사려 깊은 재편성 〉 31 ) 이라고 규정 한 것은 음미해 볼 만하다.

31) P. Valery , Vari lte, Bib l io th e qu e de Ia Pleia d e, 6 04-60 쪽

말레르브는 이렇듯 프랑스 문학에 규율의 개념을 도입했다. 그것은 겸손의 덕과도 일치한다. 그는, 열정과 광기에 휩싸인 프랑스 정신에게 겸손의 미덕을 가르치며 양식과 절도를 되찾게 했던 몽테뉴의 역할을 문학 속에서 수행한 사 람이었다. 그에 의해 프랑스 시는 명료와 두명함을 회복하였고 시인은 이성과 판별력을 되찾았다. 앞으로 시는 우연의 소산이 아니라 의식적이고 비판적인 작업의 산물이 될 것이다. 말레르브와 더불어 마침내 새로운 문학, 이른바 고 전주의의 터전이 닦여졌다. 다시 한 번 발레리의 정의를 믿는다면 그 자신 고 전주의자의 최초의 본보기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는 〈자산 속에 한 비평 가를 지니고 이 비평가를 자신의 작업에 내밀히 동참시키기〉 32) 를 바랐기 때문 01 다.

32) Cf. P. Valery , Vari lte II, Situ ation de Baudelair e :

po rte u n crit iqu e en 1 떠 -meme et q ui l 'as soc ie i nt ir ne ment a ses trav aux …. >

말레르브 이후― ― 자유의 반격 말레르브의 영향은 크고 강력했다. 궁정시인으로서의 그의 위치나 그의 강인 하고 위압적안 기질 그리고 그의 시작이나 이론적 성찰에 있어서의 엄밀함과 타당성은 그를 명실상부한 〈문 예의 입법자 le gi sla t eur des le tt res 〉 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세빌레 Seb i le t, 롱사르, 뒤 벨레 등이 도회선이 된, 시 창조를 에워 싼 일대 논쟁의 회오리는 마침내 그에 의해 하나의 해답이 주어짐으로써 진정 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사고의 영역에서 거의 동일한 역할을 데카르트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각기 다른 차원에서 기나긴 춘추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위대한 평정자들인 셈이다. 시에 있어 앞으로 말레르브의 교훈 과 지침을 전적으로 무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에 의해, 시작에 있어서의 중세풍의 방임주의는 추방되었고 이에 대신하여 형식적 완성의 새 이 상과 방법적 작업의 규율이 확립되었다. 시, 나아가서는 문학의 궤도수정­ 말레르브가 이룬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렇다면, 말레르브의 이 새로운 기도는 곧바로 고전주의로 이어진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에 대한 저항은 만만치 않았으며 문학은 자신에게 허용된 가 능한 다른 모험들을 계속 설아갈 것이다. 말레르브 이후 고전주의가 확립되기 까지 프랑스 문학이 우리 앞에 펼쳐 보여주는 다채롭고 기이한 풍경들은 이 시 대의 문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요구한다. 그러나 문학을 문제삼기에 앞서 말 레르브와 관련하여 문학이론의 차원에서의 대웅을 먼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여기 이른바 〈 독립파i nde p endan t s 〉 라 불리는 몇몇 재능 있고 개성적인 시인 들의 경우가 있다. 말레르브의 경직된 규율이 시에 있어서의 자발성과 창조성 의 죽음을 가져온다고 믿은 이들은 말레르브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들 이 동경한 것은 차라리 롱사르였는데, 그것은 그의 이론적 주장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시 작품들의 숭고함과 대담성 때문이었다. 사실, 이들은 이론 따위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말레르브의 어떤 특정한 이론에 대해 반격을 가

한 것이 아니라 이론 그 자체를 거부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치 극단적 회의주 의가 이성의 어떤 주장들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이성 그 자체를 회의한 것과 같다. 그들은 말레르브의 이론에 대해 다른 이론을 제시하는 대신, 예술의 본 질적 권리로서의 자유, 절대적 자유만을 고수했다. 이 자유가 전적으로 인정될 때 의형적 규제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따라서 이론도 성립되지 않는다. 창조의 주체는 개인이고 그를 인도하는 것은 그의 개인적 영감과 관념뿐이다. 이들의 생각을 가장 극명하게 대변한 사람은 레니에였다. 그의 유명한 『 풍자 시 Sa ti re 』 의 제 9 편은 말레르브에 대한 신랄한 성토로 채워져 있다. 그의 비난 의 첫번째 항목은 말레르브 및 그의 추종자들의 파당성과 독선이다. 말레르브, 메나르 Ma yn ard, 라캉, 콜롱비 Colomby, 이브랑드 Yvrande 등은 마치 한 종 파와도 같은 유파를 이루며 상호 찬양하면서 독선적 자만에 빠져 있다. 이 유 텨 속하지 않은, 그리고 이 유파의 규범을 따르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여지 없이 경멸받고 버림받는다. 이 폐쇄성과 사고의 경직성이 이에 가담한 사람들 의 개인적 독창성을 극도로 제한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레니에의 비판은 이런 의형적 특징만을 문제삼지는 않는다. 보다 근 원적으로 그것은 시 창조의 본질과 관계된다. 죽, 레니에는 말레르브의 모든 관심사들이 전정한 창조적 활동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이라고 믿었다. 말 레르브는 시작을 문법과 구문의 차원에 내려서게 함으로써 〈 작업의 고귀함을 제쳐놓은 〉 33) 사람이다. 애당초 그들에게는 있지도 않은 이 〈 신적인 자극 〉 , 죽 영감을 전적으로 무시하기로 작정한 그의 추종자들은 〈 니죽이 땅을 기어다니 며〉 오직 〈운으로 산문을 쓰고 산문계 운을 붙이는 〉 34) 시작자일 뿐이다. 그들 33) M. Reg nier, Sati re IX : < Et la is s ant sur le vert le noble de l'ou vrage . > 34) 위의 책 :

이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는· 온갖 규칙 속에서 시는 질식하고 말 것이다. 시인은 자유로운 창조자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몽테뉴와 각별한 교분이 있었던 구르네 Mlle de Gourna y도 이에 가세했다. 롱사르의 열렬한 찬양자였던 그녀는 시인의 특권을 강력하게 옹호하고 나섰다. 시인이 따라야 할 것은 오직 자신의 창조적 힘뿐이다. 시작에 어떤 법이 있다 면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 창조적 재능이지 어법과 문법은 아니다. 우리는 더 이상의 예를 굳이 찾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을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동일한 이론의 차원에서 말레르브를 위시한 이론 가들게게 대적한 것이 아니라 시인의 근원적인, 죽 이론 이전의 존재양식을 문 제삼았다. 그들이 펼친 것은 이론적 주칭이 아니라, 말하자면 시인의 생존권의 요구였다. 이 요구의 핵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시인의 자유, 창조자로서의 전적 인 자유이다. 시인에게 어떤 의무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영감을 충실히 따르 는 것뿐이며 이때 비로소 시는 드높이 비상하며 놀라운 환상 속에서 영원한 전 리와 합체되는 기적을 낳을 것이다. 시가 이 창조를 자유와 특권에 우선하여 다른 의무들과 의적 규제에 종속시킨다면 그것은 시의 죽음을 의미한다. 여기 시에 대한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예술에 대한 상반된 두 개념의 대립 울 보는 것은 홍미로운 일이다. 우리는 앞으로 프랑스 문학의 전개 속에서 이 대립이 갖가지 양상으로 재연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17 세기 초 말레르브의 이론적 정립울 에워싼 일련의 논쟁은 그것의 최초의 예라 할 수 있다. 뿐만 아 니라 이 영원한 대결의 기본적 틀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는 점에서 매우 깊은 상칭성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문학 창조에 있어서의 규제의 개념과 자유의 개념, 지적이고 방법적인 작업의 필요성과 자발성에 부여된 철대적 우위와의 대립이다. 사실, 예술적 창조의 모든 문제는 여기 있으며 새로운 문학의 탄생 은 대개의 경우 이 내적 갈등을 살아온 고뇌 어린 경험의 한 결과라 할 수 있 다. 우리는, 조금은 과장하여 17 세기 전반기의 문학을 이 갈등을 충일하게 살 아가는 문학으로 평가하고 싶다. 이 자유분방한 문학이 후반기에 이르러 고전 주의라는 견고하고 정돈된 틀 속에 정착하게 되는 것으로 보아 이 대립과 갈등

에 있어 끝내 말레르브의 주칭이 승리하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뿐만이 아니 다. 그는 향후 2 세기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충실한 후계자들을 따라가기에는 아직 이르다. 17 세기 전반기의 문학 속 에서, 그리고 문학이론과 관련하여 캐내어야 할 보물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제 3 장 17 세기 전반기의 문학 ―시적 환각과 비현실의 미학 17 세기 후반 프랑스 문학 속에 고전주의가 확고히 자리잡기에 이르기까지 근 반세기에 걸친 전반기의 문학에 대해 종래의 일반적인 견해는 다분히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된 이유 중의 가장 큰 것은 고전주의를 17 세기의, 아니 모든 시대의 프랑스 문학의 가장 빛나는 금자탑으로 보는 관점에서 그것의 완성을 위한 공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은 데 있다. 이 기준에서 볼 때 말레르브는 위 대한 선구자가 되고 여기 문제되어 있는 전반기의 문학은 궤도에서 이탈한 이 단적 문학, 정통성을 더럽힌 잡종의 문학이 될 수밖에 없다. 고전주의를 중심 축으로 할 때 그것은 전기 고전주의p re-class ici sm ecH:곤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것이 고작이고, 고전주의 문학이 탓할 데 없는 완벽한 규격품이라면 이 문학은 홈집무성이의 불량품이 된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문학을 어떤 단일한 흐름으로 환원시키려고 한 점에서 오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은 인간의 삶과 세계가 다양한 것만큼 다양 하고, 그것들의 복합성은 바로 문학의 복합성을 이룬다. 고전주의 문학이 삶의 한 양식과 윤리적 미학적 이싱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고전주의에 앞선 문학도

그 자체로서 표방하는 인간적 가치와 미학이 있다. 모든 문학이 각기 자신이 선택한 관점과 방식에 따라 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 문학 사이 에 우열을 가리는 것은 거의 무의미하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주관적 선택에 따라 어떤 특정한 문학에 대해 편향된 애정을 품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이 애정 이 독단으로 변하여 다른 문학들을 자신의 자의적 기준에 따라 판단하거나 예 속시키려 하는데 있다. 17 세기 전반기의 문학은 오랫동안 이 독단의 희생물이 되어왔다. 아 문학에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위대한 문학과 이웃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프 랑스인돌이 프랑스 정신의 가장 완벽한 전시로서 긍지를 느끼는 고전주의의 존 재와 그 위용은 바로 자신과 이웃한 또 하나의 문학을 완전히 무색하게 만들었 다. 유례없는 걸칙품들을 생산해 냈을 뿐만 아니라 견고한 이론적 체계로 무장 된 고전주의에 비해 이 문학은 지표 없이 표류하고 원리 없이 추구하는, 말하 자면 문학 이전의 문학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독단적 관점의 오류를 이미 지적했다. 필요한 것은 고전 주의의 위압적 영향력에 저항하는 일이며, 이때 비로소 전반기의 문학을 올바 르게 인식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될 것이다. 우리는 올바르게 인식한다는 것이 이 문학을 오직 그 자체로서 평가하는 것임을 암시한 바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 문학이 그 자체의 지표와 추구의 원리를_비록 그것들이 고전주의에 있어서와 같이 명시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표명되어 있지 않다 할지라도 __-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문학에 독자적인, 어쩌면 고전주의에 필 적할 만한 정신적 세계와 미학을 인정한다는 것은 놀라운 시각의 변화를 의미 한다. 우리는 근래의 괄목할 만한 연구들 1) 을 주도한 이 변화된 시각에 따라 이 문학에 접근해 보려 한다. 1) 가장 대표적인 연구가와 문헌은 다음과 갇다 : Jea n Rousset, La litte ra tu r e de !'age baroq ue en France, J. Cort i, 1953 ; Anth o log ie d e la poe sie b aroq ue f ran ~ais e, 2 vol., A. Colin , 1968 ; Marcel Raym o nd, Baroqu e et r enais sa nce poe tiq u e, J. C ort i, 1955 ;

R. Lebegu e , La p o 函 e fr an f a is e de 1560-1630, 2 vol., S.E.D . E . S. ; Le Theatr e b aroq ue en France, Bib l i ot h e qu e d'Human ism e et Renais s ance, 1942.

l 〈 바로크 〉 문학 바로크 le Baro q u 탸근 원래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예술, 특히 건축과 조 각의 한 특정한 유형을 정의하는 데 사용되었던 개념이다. 이 미학적 개념이 그후문학에 적용된 것은독일 문학사에서였는데, 이제 뒤늦게 프랑스문학에 도입됨으로써 16 세기 후반에서 17 세기 전반에 걷천, 다채롭고 독창적인 문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평가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하고 싶은 것 은 바로크가 매우 광범한 시기를 덮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개념 속에서 1@l 기와 17 세기의 시대 구분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 있으며 , 종교전쟁에서 루이 13 세 시대에 이르는 기나긴 시기의 문학 그리고 이 문학을 지탱하고 있는 정신적 상황은 (아마도 정치적, 사회적 배경까지도 포함하여) 하나의 동질적인 흐름으로. 인식되고 있다. 말하자면, 도비녜의 환각적인 시와 코르네유의 화사하고도 장 중한 수사학은 동질의 것이 되고, 말레르브의 초기 작품들도 같은 범주 안에 수용된다. 이 새로운 시각은 종래의 문학사를 뒤엎은 점에서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하다. 이제 우리는 이 시각에 따라 17 세기 전반기의 문학에 다가서려 한 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부득이 전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 거기서부 터 , 다시 말해 그 원류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2)

2) 이제야 독자들은 우리가 1@ ]기의 위마니슴 문학을 논하면서 후반기의 문학을 제의시킨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문학에 있어 세기를 분류의 단위로 삼는 것은 종종 불합리할 때 가있다.

비극적 바로크 여기 먼저 1 Q 1] 기 후반기의 문학이 있다. 세기초 르네상스로서 대변되는, 발 랄하고 열기 가득한 정신적 분위기 그리고 그것을 배경으로 태어난 밝고 낙천

적인 문학에 대해 다시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와 무한한 가능성을 믿으며 지상에서 허용된 온갖 줄거움을 누릴 뿐만 아니라 단 순세 세계를 개조할 수 있기라도 한 듯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초기 위마니스트 둘은 분명히 한 시대의 야망과 이상의 대변자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디오 니소스적인 환희와 낙천주의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어떤 정신 적 기류의 변화는 초기 위마니슴의 가장 호쾌한 선두 주자 라블레에게서조차 감지될 수 있다. 이 변화가 이 시대 안에 잉태되어 있던 그리고 급기야는 역사 적 비국으로 표출되고야 말 정신적 갈등에 의해 자국되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우리는 지금 1 Q1 l 기 정신의 하늘에 먹구름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한 〈 우수二 〉 의 감정을 조심스럽게 암시하고 있다. 정신적 기류의 변화를 곧바로 우수와 관련 짓는 것은 당돌하고도 무모한 일처럼 보일 것이다. 위마니스트들은 그런 상황 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신뢰가 채워지지 않은 공허한 상태로 머물러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우리는 이로 인해 삶에 대한 어떤 비극적 감정이 서서히 움트기 시작했다는 것 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점 종교개혁자들의 경우는 한결 예시적이다. 신의 절대적 위대와 초월성의 인식은 인간의 절대적 공허의 의식과 맞물려 끊임 없는 정신적 긴장과 불안을 자아내게 함으로써 그들의 비극적 감성을 극도로 자극했 기 때문이다. 어쨌든, 여기 16 세기 후반에 점차 심화되어 간 불안과 우수의 감정을 환기하 는 것은 그것이 바로크의 개념과 무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크를 하나 의 미학적 개념으로 정립하는 데 크게 공헌한 독일의 미학자 뵐풀린 H. Wol- ffli n3)은 자신의 이론을 예술 작품과 예술가의 내적 감정과의 함수관계 위에 세 웠다. 그는 대표적인 예로 미켈란젤로를 제시하였는데, 이 불우한 예술가의 작 품들은 그의 불행이 두영된 듯 온통 우수로 덮여 있다. 시인 타소 Le TassoS j 경우도 다를 바가 없다. 〈순진한 삶의 기쁨은 끝나고, 터소는 자신의 기독교 3) Cf. H.Wt ilff li n, Renais san ce et b aroq ue , Le Liv r e de poc he, 1967.

서사시를 위해 이 세상에 지쳐버린 주인공을 선택한다. 尸 문제는 바로크 예술 이 단순히 표현의 스틸로 그치지 않고 예술가의 주관적 상태, 내적 정념과 깊 이 관련지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있다. 바로크롤 굳이 표현의 한 방식 이라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예술가의 내적 상태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스틸이라 고 고쳐 말해도 무방하다.

4) 위의 책, 185 쪽:

이런 관점이 정당하다면 플레이아드의 시도 바로크의 범주 속에 편입될 수 있다. 가령 뒤 벨레는 시가 감동의 표현이 되기를, 그리하여 전율과 감탄을 자 아내는 것이 되기를 바랐다. 이것은 훗날 형식적 완성으로서의 시를 지향하며 신중하고 이지적인 성찰을 중시했던 말레르브와는 극단적으로 상치되는 개념이 다. 마르셀 레이몽이 지적한 바와 같이, 플레아아드는 차라리 표현의 온갖 기 교를 추구하되 그것들이 강렬한 주관성의 표현이 되도록 활용했던 마니에리슴 man i e ri sm 터 맥을 걷기한다. 플레이아드의 시인들도 그 무엇보다 자신들의 내적 감성에 충실했으며 그것들이 충일하게 표현될 수 있는 새로운 시적 언어 를 창조하기에 전념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뒤이어, 아니 이미 그들의 작품 속에서조차(가령, 롱사르의 후기 작품 속에서) 이 감성이 비극적 색조를 띠게 된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1 어] 기 후반의 시 가운데 만물의 끝없는 유동성과 변전, 인간의 허약함과 그의 운 명의 불안정성, 우연의 폭군적 지배,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죽음 등과 같은 주 제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것은 죽음의 주 제 이다. 그것은 샤시네 Chassig ne t, 스퐁드 S p ond~] 시를 지배하고 있고 몽테 뉴의 철학적 성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몽테뉴에 있어 죽음은 인생의 종말이 아니라 삶의 조건 그 자체이며, 말하자면 삶의 내부에 그리고 시시각각 현존하 는 그 무엇이다. 만약 이런 감정들이 바로크적이라면 몽테뉴는 자신 속에 바로 크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연

옥의 시련을 통과한 그가 어떤 정신적 평온과 사려 깊은 삶의 지혜에 도달하였 는가를 잘 알고 있다. 그와는 반대로 끝까지 영적 고뇌와 불안을 실아가며 그 것을 격정적이고 환각적인 문체 가운데 담기를 고집한, 실로 경이적인 시인도 있다. 다름아닌 도비녜 A gripp a d'Aub ign e(l552-16 3 0) 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렇다면 도비녜에 있어서와 같이 바로크는 비극성과 불가분의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프랑스에서 바로크 문학 연구에 크게 기여한 장 루세J eanRousse t 는 바로크를 각기 다른 두 유형으로 분류할 것을 제안했다. 비극성과 무관한 바로크와 그것을 기조로 삼은 바로크, 말하자면 행복한 바로크와 불행한 바로 크. 그에 의하면 루벤스 Ruben~ 베르니니 Bern i n i는 전자에 속하고, 렘브란 트 Rembran t는 후자의 대변자이다. 물론 루세는 이러한 이분법에도 불구하고 루벤스나 베르니니의 예술을 바로크의 진수로 간주하며 그것을 〈충 일한 바로 크〉라고 부르고 있다. 사물들의 끊임없는 생성과 변전에 현혹되고 〈 소용돌이치 며 밖으로 터져나오는 〉 5) 찰나의 움직임들을 화려한 장식적 스틸로 표현하되 그 것들의 내재성 의의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 것-루세가 정의하는 바로크 는 바로 이런 것이다. 이 시각에서 볼 때 16 세기 후반의 문학은 바로크의 개념 에서 상당히 멀어진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도비녜, 스퐁드, 샤시네 등의 시는 지나치게 주관성으로 물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초월성과도 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루세는 도비녜의 시를 가리켜 〈그 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유일자, 절대자, 초월적 신을 끊임없이 열망하는 〉 6) 시라고 평가한다.

5) J. Rousset, La litte ra tu re de !'age baroq ue en France, 24 택 : <… d u baroqu e bern inien et r uMn ien , qui t ou rbil lon ne et e xp lo se au dehors .. · .>

6) 위의 책, 5 4q문: <…quin e cesse pas d'aspi re r a l'un , a l'Etr e, au Dieu tra nscen- dant qui Jes sauvera de la mort… .>

그러나 루세의 행복한 바로크에 대한 편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16 세기 후반 의 비극적 문학을 바로크의 범주 속에 두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이 문학은 바

록 주관성에 짙게 물들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에 있어 단연 바 로크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들어서기 전에 잠시 바로크와 종 교와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상, 바로크는 반종교개혁 Con t re­ Re fo rm 터 깊이 연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예술사가들이 보여준 바 와 같이 이 시대의 종교예술은 형상들의 동적인 움직임, 격정적인 표정, 화려 한 색채와 장식의 효과를 십분 이용함으로써 분명히 새로운 표현의 스틸을 창 조하였다 .7) 그러나 이 표현양식이 단순한 의형적 스틸로 머무는 대신 보다 진 지하고 때로는 비극적이기도 한 감성과 맞물리게 된디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가령, 그레코 Greco 나 틴토레토 T i n t ore tt~ 그림에서와 같이 이 예술 7) V. L. Tapi e ( Le baroq ue , exp re ssio n d'une soc iete, in Bulleti n de la Soc iete du XVIII 's i ecle,N23,1953) 는 보다 구체적으로 바로크의 탄생을 1563 년에 끝난 트리엔트 교의회 le Condie T rente 2-l-관 련시키고 있다. 그의 설명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종교개 혁 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소집된 이 교의회를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 교리를 재천명하고 체제를 정비하며 교세의 확장을 도모했는데, 이 일련의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예술적 표현을 수반하기에 이르렀다. 가령, 가톨릭 교리는 구원에 있어 믿음과 행위의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행위란 각종의 성사 sacremen ts, 미사, 성모와 성자들의 중재, 망자를 위한 기원 등을 의미하는데, 신앙의 내적 삶을 지원하는 이 모든 의적 행 위들은, 말하자면 인간의 감각(가령 성가를 통한 청각, 교회의 장식과 예식의 호사스러 움을 통한 시각)과 내밀히 관련되어 있다. 가톨릭 교회가 제단을 비롯하여 십자가, 마리 아 상, 성자들의 조각, 각종의 성기물, 사제들의 제복, 미사 집전의 의식에 이르기까지 온갖 화려하고도 장엄한 장치들로 채워져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한 교세 확 장을 위해 선교의 새 군단들(예수회J esu it es, 카프친회 Ca p uc i ns, 카르멜 수도회 Car­ melite s, 오라토리오회 Ora t o ri ens 등)이 조직되었고, 그들이 새로이 뻗어나간 곳마 다 새 교회들이 설립되었는데 그때마다 건축가, 조각가, 화가, 장식가, 금은세공사가 동 원되어야만 했다. 유럽의 전가톨릭 국가에 한결같이 번져나간, 한 보편적인 종교예술은 이렇게 해서 모습을 드러냈다(뒤이어 Ta pi e 는 가톨릭교회 못지않게 장중하고 호사한 장 치들을 필요로 한 철대왕정의 출현 그리고 감각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에 유달리 예민 한 농민 대중의 실재를 이 예술의 사회적 배경으로 꼽고 있다) .

이 십자가의 고난과 성자들의 순교 등의 주제를 선호했었디는· 사실은 많은 것 울 말해 준다. 요컨대, 반종교개혁은 위마니슴의 낙관주의에 전적으로 동의하 지는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신교, 특히 칼빈주의 Calv i n i sm e2} 더불어 비극적 감성은 단연 차원 울 달리한다. 앞서 참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한편으로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 과 무력을 확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의 절대적 주권과 구원의 무상성을 믿 음으로써 신교는 인간이 처해 있는 모순된 상황에 대한 극단적인 의식을 대변 하고 있다 . 다시 말해, 신교도들은 자신에 대한 절망과, 신이 무상으로 허락하 는 구원에 대한 희망 사이에서 악전고두한다. 그들이 속해 있는 자연과, 신의 절대적 주권하에 있는 은총을 이어주는 연결의 고리는 적어도 인간의 차원에서 는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자연 속에서 자신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은총을 열망하며 기다리는 그들의 상황은 〈 비참하고도 반논리적이다 〉 . 8)

s) Cf. A. M. Schm idt, Essais . sur le XVIesi ecl e, s~ :

뿐만 아니라 처절한 반목과 혈두의 장으로 화해 버린 이 시대 속에서 그들은 단순히 개인적 운명의 차원에 머무는 대신 전인류의 운명과 역사와 피할 길 없 이 대면해야만 했다. 여기서 고뇌 어린 한 스틸이 탄생했다. 그것은 열정적이 고 힘차고 남성적이다. 그것은 또 신비롭고 환각적이다. 가령, 여기 카인의 살 인을 노래한 도비녜의 시가 있다. 그는 모든 것이 두려웠고 모든 것은 그가 두려웠다. 두려움에 떠는 자가 눈길을 하늘로 돌리자마자 하늘은 구름의 의두로 스스로를 가렸고, 그가 사막으로 도망치자 바위와 나무들은 겁에 질려, 그의 울부짖는소리에 함께 울부짖었다 .9)

9) A. d'Aubig ne, Les Trag iqu es VI, Veng ea nces :

Car le cie l s'aff ai b l oit du mante a u d'une nue Si t os t que le tran si a u ciel tou rnoit la veu ; S'il f uya it au desert, l es rochers et l es bois Eff ray e s , a :b boy oy e n t au son de ses abois .>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인류사상 최초의 살인자 카인의 공포가 우주적 공명 속에 확산되어 있는 점이다. 우주는 무감각한 사물들로 채워져 있는 침묵하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감성이 그 안에서 자신의 파장을 찾으며 공감하는 살아 있는 공간이다. 인간과 의부세계를 각기 차단된 주관과 객체가 아니라 동일한 운명 속에서 싱응하는 동질의 두 세계로 보는 시각이 이른바 대우주-소우주 mac­ rocosme-m i crocosm 려 개념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여기서 우리에게 문제되는 것은 이 우주적 공명이 만들어낸 환각의 미학이다. 이 시 속에서 시인은 하늘에서 〈구 름의 의무녔t 보고 사막에서 바위 와 나무들의 〈 울부짖는 〉 소리를 들으며 전우주가 공포에 떠는 것을 느낀다. 그 의 모든 감각 체계는 마치 어떤 신비로운 파장에 곽란되기라도 한 듯 현실의 사물울 통해 비현실의 환각과 만난다. 먼 훗날 랭보 R i mbaud 에 의해 제시될 〈 견자 vo y an t 〉 로서의 시인의 아마도 최초의 유형을 도비녜 가운데 발견한다고 해서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여기 격정과 광기에 휘말렸던 비극의 시대에, 인간 조건에 대한 비 국적 비전을 바탕으로 태어난 한 문학적 스틸이 있다. 그것은 이 이중의 비국 성에 걸맞게 고뇌에 넘친, 격정적이고도 환각적인 스틸이다. 우리는 이것을 바 로크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슈미트 A. M. Sc hmi d t는 칼비니스트에 관 하여, 〈그 의 상태를 미학의 어휘에서 빌린 말로써 규정하려 한다면 오직 바로 크라는 형용사만이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10 봐교 증언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시각, 즉 바로크를 인간의 주관성과 관련지으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1o) A. M. Sch midt, 앞의 책, 8~ :

이 있다는 것을 안다. 바로크를 변신과 의적 전시의 예술로 보기를 선택한 루 세는 프랑스 정신이 이 의형적 바로크에 대해 조금은 회의적이라고까지 말한 다. 11)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17 세기 초반의 문학 공간 속 에서 바로크가 조심스럽게 변신을 시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11) Cf. J.R ousset, 앞의 책, 238 쪽:

충일한바로크 우리는 바로크의 개념 속에서 16 세기 후반과 17 세기 전반이 하나의 연속선상 에 놓이게 된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사실상, 17 세기 초반에 전세기의 입김은 강하게 느껴지며 정신적 분위기는 거의 변화없이 이어지고 있다. 물론, 지적 • 윤리적 차원에서는 몽테뉴를 통해, 그리고 미학적 처원에서는 말레르브를 통해 어떤 변화의 가능성이 제시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또한 이 가능성은 더욱더 증대되어 멀지 않아 현실화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16 세 기적 전통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몽데뉴나 말레르브 조차도 한때 이 흐름에 동조했었으며, 세기초의 많은 시인들은 기꺼이 롱사르 의 제자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우리는 이른바 〈독 립파들i nde p endan t s 〉 가운데 시 창조의 유일한 원리로서 영감이 존중되고 자유가 신봉되는 것을 이미 확인 하기도했다. 바로크도 당연히 이 전반적 흐름 속에 포함된다. 전세기의 불행한 상황을 배 경으로 피어난 바로크는 그대로 이어져나갈 것이다. 그 안에서 동일한 주제, 동일한 스틸을 발견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그러나 세기초의 역사적 상황 은 비록 긴장된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전의 비극성은 상당히 희석되었고, 이로 인한 정신적 기류의 변화는 바로크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것은 본질의 변화는 아니다. 치이가 있다면 뉘앙스의 차이, 말하자면 색깔이 달라진 것뿐이다. 우선 바로크의 영원한 주제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바로크는 무엇보다 먼 저 움직임의 예술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바로크가 부단히 움직이고 변모하 는 사물들을 효과 있게 묘사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는 뜻에서만은 아 니다. 그보다 앞서 바로크는 사물들의 유동성, 변모, 생성과 소멸 그 자체에 현혹된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크가 대하는 세계는 관념과 개념으로, 죽 추상화된 본질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감각을 강타하는 이미지 로서 다가오며 이때 우선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자연과 삶의 영원한 流轉의 모 습들이다. 바로크는 순진하게도 세계와의 최초의 만남, 지극히 감각적인 만남 의 차원을 고수할 것이다. 이래서 여기 유동성과 변신의 미학이 태어났다. 이 미학의 최초의, 그리고 가장 빛나는 대변자는 아마도 젊은 시인 롱사르일 것이다. 시들어가는 장미, 멈추지 않는 시간, 흘러가는 물 등은 그의 젊은 날의 시의 총애받는 이미지들 이었다. 이 지상에 지속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없다. 시간은 홀러간다, 시간은 흘러간다, 여인이여, 오호라 !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떠나간다, 그리고 불원 무덤의 돌 위에 눕게 되리라. 12) 12 ) P. de Ronsard, Pie c es retr an chees des Amours : (Et des amours desqu e lles nous pa rlons, Qu and serons morts, n'en sera plu s nouvelle. Pour c'aim ez-moi c epe n dant qu' ~tes belle.)

그러나 이 영원한 홀러감은 그에게 절망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그의 에피 큐리슴 e pi cur i sm 군 삶의 순간들을 줄기도록 그에게 권유했기 때문이다. 보다 철학적인 뒤 바르타스 Du Barta s .5 :. 부단한 변화와 불안정을 세계의 원리로 인 식한 점에서 롱사르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는 보다 신중한 사색을 통해 만 물의 변조 속에 숨겨진 자연의 신비를 예감하기에 이르며 끝내 종교적 감성과 합류한다. 사실, 만물의 유전, 인생의 허망과 같은 감정은 서구에 있어 기독교 적 감성에 뿌리 박고 있다. 16 세기 후반, 불행한 상횡에 의해 이 감정들이 한 결같은 비국적 색조를 띠게 되고 바로크라는 이름의 특이한 표현양식을 탄생시 킨 것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17 세기 초에도 이 암울한 분위기가 가시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말하자 면, 우수라는 이름의 감정은 여전히 적지 않은 시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 다. 가령 여기 샤시네의 경우가 있다. 그는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사라져가는 만물을 바라보며 인생을 나본느 광장의 분수에 비유한다. ……그러나너는전에 흘러내렸던 첫 물줄기 중에서 아무것도보지 못하리라, 물은매일같이 달라지고, 매일같이 흘러가건만, 우리는 항상 감은강, 같은물이라부른다. 이렇듯 사람도 변하고 내일이면 하찮은 인간의 육체의 힘은 시간에 의해 단축되고 소진되어 오늘과갇지 않으리라. 이름은 변함없이 죽을 때까지 우리를 따르건만, 오늘의 나는, 비록 갇은 이름으로 불리어질지라도, 지나간 어제 살았던 그 사람은 아니네. 13) 13) J.R ousset, An t加 lo gi e … I, 19~:

<••· M ais t u ne verras rien de cett e onde pre mi er e Qu i n ag ue re coulait, l'eau change tou s Jes jou rs, Tous Jes jou rs elle pan e, et J es nommons tou jo u rs Meme fleu ve, et m eme eau, d'une meme mani re. Ain s i J 'ho mme varie, et n e sera demain Telle comme au j ourd'h 떠 du pau vre corp s humain La forc e que le tem p s abbrevie e t c onsomme ; Le nom sans varie r nous sui t jus qu ' au trep a s , Et combie n qu' aujo u rd'hui c elui ne sois - je p as Qu i v oiv a is h ier pas se, tou jo u rs meme on me nomme.>

방울방울 흩어져 사라지는, 그래서 의양은 갇되 이미 같은 것이 아닌 물과, 시시각각 해체의 운명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완변한 한쌍의 비유를· 이루며 흐트러짐 없이 결론에까지 이른다. 그는 작품 속에 개입하거나 개인적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자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의 묘사의 방식을 통해 묘사 이상의 것을 감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시 전 편에서 배어나오는 불안과 우수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감정은 거의 필연적으로 종교적 감정으로까지 연장될 것이다. 실제로, 우리 는 유전의 시학과 종교적 열정과의 만남을 증언하는 적지 않은 시들을 세기초 에 만나게 된다. 그러나 만물을 앗아가고 삼켜버리는 이 보편적 유전의 의식이 반드시 우수의 감정과 결부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17세 기 초에 우수와는 다른 또 하나의 감수성이 점차 확산되어 가는 것을 보는 것은 홍미로운 일이 다. 이 경향은 초기 롱사르를 연상하게도 한다.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영광 이 찰나의 빛남으로 소멸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 소멸을 슬퍼하는 대신 차라 리 빛나는 찰나를 즐기기를 선택한 롱사르와 같이, 17 세기 초의 많은 시인들은

이 자연의 법칙을 체념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기꺼이 이 우주적 리듬에 자신들을 내맡기기로 한 것처럼 보인다. 만물이 유전하고 변신 하는 이 우주 속에서 자신을 고정시키려는 모든 노력은 애당초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그들은 믿은 것일까. 어쨌든, 그들은 지신의 내면 속에 웅크려 아마도 불가능한 소원과 꿈을 키워나가는 대신 전우주 속에서 펼쳐지는 움직임과 변조 의 화려한 축제 앞에서 가슴을 활짝 열어놓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여기 인간과 세계와의 만남의 새로운 도식이 탄생했다. 이제 그 사이에 걸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한동안 내밀히 작용하며 세계를 어 둡고 신비로운 색깔로 물들였던 주관성의 개입도 끝이 났다. 사실, 세계는 그 리고 모든 대상들은 우리가 이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기에 앞서 그냥 그대로 있는 그 무엇이다. 우리가 우리의 주관적 관념에서 벗어날 때 그것은 우리 자 신의 해방뿐만 아니라 세계의 해방까지도 동시에 가져다 준다. 우리는 잃었던 자유를 되찾게 되고 세계는 원초적 순수로 환원된다. 17 세기 초의 시인들이 순 진하게도 우주의 율동에 자신을 위탁하기로 함으로써 이루어전 것은 이 자유와 순수에로의 회귀였다. 이 양자의 만남에서 하나의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현혹이라는 이름의 기 적이다. 이 현혹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지난날의 비극적 만남과 굳이 대비시 킬 필요는 없다. 비극성에서 탈피하여 사물과 존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는 자유를 획득한 새 세대의 시인들은 그것들 속에 예바된 황홀을 만끽 했을 뿐이다. 이 황홀의 정체는 분명하다. 한마디로 우리의 삶과 세계가 그것 들의 원시적 순수성과 자발성 속에서 간직하고 있는 것. 우리는 바로크와 관련 하여 움직임, 변신, 유전에 대해 무수히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이 이미지들이 상실, 소멸, 죽음의 관념과 결부됨으로써 비국적, 나아가서는 종교적 감성으로 이어지는 것도 확인했다. 그러나 전환된 의식은 이와는 반대로 이 움직임과 변 신 속에 생명의 약동을 보기를 원하며 넘치는 디나미슴, 터져나오는 생명력을 느끼기를 원한다. 이 부단한 운동과 화려한 변신들은 우리의 삶과 자연 속에 잠재된 생명력의 의적 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바로크미학 이래서 여기 새로운 미학의 가능성이 열렸다. 그것은 전우주가-물론 인 간의 삶까지도 포함하여-그 원초적 순수 속에서 펼치는 온갖 역동적 움직 임을 충실히 모방하는 것으로 성립된 미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예술 울 자연의 모방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이 정의가 완전한 것이 되기 위해서 는 예술이 모방하는 〈 자연 〉 이 어떤 것인가를 정확히 가려내야만 한다. 사실, 과거의 예술사는 이 〈 자연 〉 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것만큼이나 다양한 예술들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도 또한 바로크를 규명하는 데 있어 그것이 모방 하는 자연의 정체를 규명하는 데 여지껏 주력했던 셈이다. 다시 한 번 요약하 자. 이 자연은 우리의 순수한 감각에 비치는 그대로의 세계, 그 안에서 모든 생명과 사물들이 숨가쁘게 움직이고 변화하면서 생멸과 홍망을 연출하는, 풍요 롭고 충일한 세계이다. 이 세계를 모방하는 예술이 첫째로 이 풍요와 충일을 남김없이 끌어안으려 한 것은 당연하다. 이 예술은 일차적으로 감각에 포착되 는 모든 것을 그려나갈 것이다. 어떤 선험적 기준이나 주관적 가치에 따라 사 물을 판별하고 의미 있는 것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크가 할 일 이 아니다(이것이 절제와 밀도를 지향하는 고전주의 미학의 몫이라는 것은 멀지 않아 밝혀지게 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바로크는 모든 것에 동등한 존재를 부여하 고 그 어떤 사소한 것들도 버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묘사는 항상 화려하고 풍 성하고 끝내는 넘쳐흐른다. 이래서 바로크는 충일과 과잉의 미학으로 불리어진 다. 바로크에 물들어 있던 초기의 말레르브는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의 회한을 묘사하기 위해 장장 400 행에 가까운 시를 써야만 했다. 모세의 기적을 노래하 는 셍-타망 Sa i n t -Aman t은 그것의 종교적 의미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갈라전 홍해 밑바닥의 황금 모래와 산호의 숲울 묘사하는가 하면 놀라며 기뻐하는 순 진한 아이들의 재롱에 대해, 그리고 양면으로 벽을 이룬 물 속에서 놀란 눈으 로 바라보는 물고기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14) 시인은 이 기적의 14) Sain t - A mant, Mois e Sauve (cit e p ar A. Chassang et C h. Senn inge r, La Disser ta tion litte ra ir e gen erate , H achett e, 31 ~) :

La I'en f an t eveil le… Temoig na nt le pla is ir q ue re~oiv e nt ses yeu x D'un etr an ge cail lou , qu' a ses pied s ii rencontr e Fait au pre mi er venu la pre ci eu se montr e . 저기 깨어난 어린아이는 ..... 그의 눈이 받아들이는기쁨을나타내며 그의 발걸음에 부딪친 기이한 조약돌을 그 누구게게나 자랑스럽게 보여준다. Et la, pre s des remp ar t s q ue l'oeil p eu t tran spe r cer Jes poi ss ons eba his l e rega r dent pas ser. 그리고 눈이 꿰뚫어볼 수 있는 (물의) 벽면 가까이 놀란 물고기들은 그들이 지나는 것을 바라본다. De ce fon d decouvert le senti er i1 (= le peu p le hebreu) admi re . Senti er que la natu re a d'un soin l ibe ral Pare de sablon d'or, et d 'arbres de corail… 드러난 바닥 통로를 그들은 놀라며 바라본다. 자연이 풍성한배려로 황금의 모래알과 산호의 숲으로 장식한 통로를 (여기 인용한 몇 시구 속에서 〈눈이 받아들이는 기쁨〉, 〈눈이 꿰뚫어볼 수 있는 (물의) 〈벽면〉과 갇은 감각의 한 기관을 행동의 주체로 삼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세계와의 감각적 만남을 강조한 것으로 불 수 있다. )

순간을 종교적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지상의 모든 생명들이 함께 벌이는 축제, 경악과 환희의 대축제로서 묘사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모든 것을 포용하고 모든 것을 묘사하려고 한 바로크가 삶의 역동적 움직임에 특별한 관심을 가침으로써 점차 그것의 강렬하고 극단적인 표현에 이 끌려간 점은 크게 주목할 필요기- 있다. 안정, 평화, 조화 따위는 바로크의 몫

이 아니다. 본잘적으로 움직임의 예술인 바로크는 이 움직임의 가장 극적인 긴 장상태 , 즉 그 안에 잠재된 힘이 폭발적으로 터져나오는 극점에 이끌린 듯이 보인다. 모든 움직임은 그것의 원시적 리듬에 전적으로 내맡겨질 때 이 극점을 향해 치닫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의 장렬함과 처절함은 가히 현 혹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국치를 향하는 이 움직임이 한결 현혹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내면세계에서이다. 우주를 지배하는 운동과 변신의 법칙은 바로 우리의 삶과 내면을 지배하는 법칙이기도 하다. 바로크가 동일한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인 간 감정의 모든 굴곡을 지켜보되 특히 그것들의 국단적인 발현에 이끌리는 것 은 당연한 일이다. 종교와 깊이 관련된 16 세기 바로크 예술은 종교적 신비주의 적 감정들의 황홀한 극치와 처절함을 그렸다. 초월성이 희석된 17 세기 초의 문 학 속에서도 극단으로 치닫는, 때로는 광기에 빠져들기까지 하는 격앙된 감정 들의 묘사를 찾아보는 것은 흔한 일이다. 사랑, 질투, 증오, 복수, 절망 이 모 든 정념들은 그 열기와 광기로 우리를 강타한다. 1630 년대에 크게 유행했던 비 희극 la tra gi -c o medie -g. 인간의 정념이 도달할 수 있는 광란의 극한을 보여줄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 바로크 문학이 감정들의 폭발적인 힘과 열기에 사로잡혔던 것은 아마도 그 안에서 생명의 디나미슴-모든 관념적 • 사회적 제약을 꿰뚫고 존재의 심연에서 솟구치는 원시적 생명력 그 자체를 느꼈기 때 문이다. 합리성, 양식, 사회적 관습이 문제되기 이전의 이 힘은, 굳이 철학적 인 용어를 빌린다면, 비합리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신비의 문턱 에 와 있다. 생명의 충동적 움직임에 매료된 바로크는 사실상 신비의 문을 두 드리고 있으며 그의 앞에 마성의 세계는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삶을 전적인 자유로움과 역동성과 충일함 가운데 포착하기를 바랐던 바로크 는 화려하고 장식적이고 과장된 언어와 짝을 이루었다. 이 문학은 묘사 그 자 체에 스스로 도취되기라도 한 듯 단순하고 명시적인 묘사 대신 온갖 은유와 비 유로써 겹겹이 쌓아울리고 과장의 모든 기법을 동원하여 부풀려 나간다. 또한

경악과 감탄의 효괴를 증대시키기 위해 기이한, 때로는 현학적인 어휘를 시용·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크 예술의 가장 뛰어난 특성은 모든 것을 감각적, 특히 시각적 언어로 환원하는 데 있다. 우리는 바로크가 사물과 현상을 관념화하는 것에 대해 극도의 혐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누차 말한 바 있다. 바로크의 본질은 그것들을 감각적 표상 이의의 어떤 것으로도 보지 않는 데 있다. 그의 진실은 감각의 전실이고 그의 언어는 감각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 바로크가 모든 것을, 심지어 관념이나 내적 감정과 같은 추상적 현실까지도 감각적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은 이러한 기본적 태도에만 연유하는 것은 아니 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미학적 선택에 속한다. 실제로, 끊임없는 변화 와 운동을 표방하는 바로크와, 본질적으로 하나의 고정된 영속적 형태를 지향 하는 예술이 갈등을 야기한디는 것은 자주 지적되어 왔다. 15 ) 그러나 바로크가 충실하게 이미지의 예술로 머무는 한 이 갈등을 회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 다. 예술의 고정된 형식이 관념적 분석에 적합한 것이라면 바로크가 고수하는 시각적 재현의 기법은 움직임과 변신을 모방하기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15) Cf J. Rousset, L a litte ra tu r e de ['Og e baroq ue … :

이렇듯, 바로크에 있어 시각적 언어는 절대적 우위를 차지한다. 아니, 이 언 어를 떠나 바로크는 존립하지 않는다. 가령 인생의 유전, 운명의 불안정성과 같은 바로크적 주제들에 대해 철학자가 한낱 철학적 (즉, 관념적) 성찰로 일관한 다면 그는 바로크의 대열에 끼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모든 것을, 관념까지도,

이미지화하는 데 있다. 도비녜가 〈 부활 〉 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방식을 통해 우 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종교적 신앙 또는 신학적 개념에 속하는 부활은 그의 시 속에서 관념이나 종교적 성찰의 대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는 육체들의 부활을 그 지신 목격자이기라도 한 듯 묘사하며 우리를 곧바로 생생한 현장으로 인도한다. 대지는 가슴을 열고 무덤 속에서 묻혔던 자들의 새 얼굴들이 태어난다. 들에서, 숲에서, 밭에서, 거의 모든 곳에서 새 육체들과 새 얼굴들이 나타난다. 이곳, 들려 올린 城둘의 기초는 부활자들에 의해 재빨리 꿰뚫리고, 이곳, 한 니무는 뿌리 가딕에서 상가 있는 머리가 움지럭거리고 가슴팍이 드러나는 것을 느끼며, 저곳, 어지러운 강물이 부금거리더니 이어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한 머리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느낀다…… 16) 16) D'Aubig ne, Les Tragi qu es VII, 665-674 :

곳 ~l 묻혀 아마도 먼지로 변했을 사자들이 새로운 육체를 덧입으며 혹은 흙 속에서 혹은 물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이 우주적 변동을 재현하는 도비녜 의 언어는 이상과 같다. 그는 부활을 마치 우리의 면전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광경처럼 묘사하되 오직 이미지로서 말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그 기이함과 신 비로움에 현혹되었음이 분명한 그의 묘사는 경쾌함과 열기로 넘쳐 있기까지 하 다 . 이 신들린 듯한, 그러나 엄밀히 감각적 언어로 머문 이 묘사가 〈 부활 〉 이라 는 종교적 관념의 신비와 힘을 이토록 강렬하게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 0] 다. 여기서 우리는 아마도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감각적 이미지로 환원시키는 바 로크 예술이 어디까지 발전되어 나아갈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지의 놀이〉로서의 바로크의 극한울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주관성에 질게 물들었던 비극적 바로크에서부터 보다 일반적으로 역동적 움직 임과 연관된 화려하고 장식적인, 이른바 전시의 바로크에까지 이르렀다. 이 전 시의 바로크와 더불어 전면에 크게 부각된 것은 다름아닌 이미지이다. 주관성 이 배제된 만큼 이제 남은 것은 이미지뿐이며, 그것은 말하자면 순수태의 이미 지이다. 우리가 〈순수한 바로크只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이 점에 있 어서가아닌가한다. 그렇다면 바로크 시의 유일한 언어인 이미지란 과연 무엇일까. 일차적으로 그것은 자연의 서물들이 우리의 감각의 스크린에 그려놓은 그림이다. 우리의 감각에 비쳐진 자연의 순진하고 정직한 반사. 그러나 이 영상들은 반사된 형태 로 영원히 고정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자연을 떠나 시인의 상상 속으로 자리 를 옮기자마자 그 자신의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즉, 〈놀이 〉 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놀이는 더 이상 지상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그것들은 자隸방하게 날아다니며 서로 어울려 뒤섞임으로써 마침내는 지상의 왕국을 능가하는 또 하나의 왕국, 우리가 〈환각ill us i on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꿈의 공간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여기 〈 이미지들의 놀이 〉 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뒤 브와 위스 Du Bois H u 혀 시구를 인용해 보자. 이 물속에 내려온 하늘의 얼굴은 그 위에 그려진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 하늘의 불들은 두려움 없이 바닷속을 헤엄친다. 물고기들은 다정스러워 보이는 불꽃들 사이로 겁없이 미끄러져 간다. 이 커다란 거울 깊은 속에서 자연은 이토록 다정히 짝 아룬 물결과 불꽃을 보기를 기뻐하고 이 새 고장에 떨어져 내린 별들은 바다의 불요정이 되어 바닷물 품속에서 한가로이 해업친다. 17) 17) Du Bois H us, cite par J. Rousset, Anth o log ie… I , 17~ :

이 시에서 모든 것은 은유로서 표현되어 있다. 하늘은 〈 얼굴 〉 로 제시되고, 수면에 비쳐지자 〈 그려진 모습 〉 이 된다. 하늘의 별들은 〈 불f eux 〉 로 표현되고, 바닷속에 떨어져 내려와서는 〈 불의 요정들 〉 이 된다. 이 시는 이미 이미지들만 으로도 환각의 세계로 인도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더 욱 놀라운 것은 현실에서 떨어져 나온 이 영상들이 디른 현실 속으로 참입하여 지유로이 어울리며 벌이는 놀이이다. 〈 이토록 다정히 짝 이룬 물결과 불꽃 〉 이 라고 시인은 표현한다. 그보다 앞서 그는 한결 구상적으로 물 속에서 함께 헤 엄치는 〈물 고기 〉 와 〈불 꽃들冷t 그려 보여주었다. 이 이마지들의 만남은 정녕 충격으로 다가온다. 현실 속에서 하늘과 바다는 각기 그 투명성과 깊이를 간직 한 채 저 멀리 갈라 서 있는 두 세계이다. 그런데, 여기 시인의 상상 속에서 하늘의 별들은 바닷물 속으로 떨어져 내려와 물의 요정으로 변신하고 물고기와 한데 어울린다. 차가운 물과 뜨거운 불꽃들과의 만남. 현실의 세계에서는 합쳐 질 수 없는 상국하는 양극의 신비로운 만남은 하나의 기적이라 할 만하다. 상 반되는 것들을 접근 대비시킴으로써 경악과 충격을 자아내는, 이른바 concett i 의 기법이 바로크 시인들에 의해 애용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바 로크 시를 가리켜 〈이미지의 놀이〉라고 정의할 때 그것은 현실의 사물들을 단 순히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실에서 유리된 이 이 미지들은 지상의 인과율을 벗어난 다른 방식에 의해 자유로이 만나며 어울린 다. 무중력 상태 속에서의 이미지들의 환상적인 교합이라고나 하랴. 이 어울림 과 뒤섞임이 마침내는 하나의 〈우주적 교감 s yn es t hes i e un i verselle 〉 으로까지 확대되어 나간다고 해도 크게 잘못된 말은 아니다. 우리는 바로크 시와 관련하여 환각이란 말을 수없이 사용하여 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환각의 정체를 조금은 명확하게 확인하였다고 믿는다. 시의 이 미지들은 분명히 현실의 한 연장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태어난 순간 이미 현실 의 것은 아니며 마치 생명 있는 한 영혼처럼 자신의 고유한 법칙에 따라 살아 가며 수많은 만남과 교합을 통해 또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나간다. 이것은 현실 의 것과 다르기에, 그리고 오직 우리의 상상과 꿈 속에서만 존재하기에 〈환각〉

이란 이름으로 불리어전다. 그러나 시인에 있어 이 〈 환각 〉 보다 더 전실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 환각은 말하자면 그가 끌어안은 진실의 환각이다. 18)

18) 〈 진실의 환각〉이란 표현은 회화의 한 기법 t rom p e-l'oe il를 상기시킨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 눈을 속인다났근 뜻으로, 원근법과 색조의 효과로서 실물의 것으로 착각하게 만 드는 매우 정교한 기법을 가리킨다. 바로크적 창조는 일종의 tr om pe-I' oe il임에 들림없 다. 그것은 한둥간(즉,시의 마법이 작용하고 있는 동안) 그것의 진실성을 믿게 하되 현 실 그 자체의 것은 아니므로 〈환각〉이라 불리어질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연극도 환각의 예술이다. 무대 공연을 본질로 하는 연극은 자신 울 〈 볼거리 〉 로 제공하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바로크적이라 할 수 있다. 현실에 서 도려낸 현실의 단편들을 무대라는 좁은 공간 속에서 특정한 기교와 형식에 따라 재구성하여 관객에게 보여주는 연극은 현실을 반영하되 이미 현실의 것과 는 디른, 그 자체의 논리와 언어를 가전 독자적인 세계라는 강한 인상을 준다. 그 안에서 행동하는 인물들은 분명히 우리의 분신이되 우리 자신은 아니며, 그 둘의 언어는 분명히 우리의 것이되 다른 울림과 힘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 둘의 행동이 타인들에게 보여지기 위해 꾸며졌고, 그들의 말이 분명한 메시지 로 전해지도록 짜여져 있는 점에 있다. 요컨대, 연극 속의 모든 것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의 한 이미지이며, 연국은 이 이미지들의 놀이로써 구성된 뛰어난 환각의 한 공간이다. 이 이미지들의 놀이는 때때로 매우 장중한 분위기 속에서 연출되기도 한다. 우리는 바로크가 삶의 강렬한 디나미슴에 현혹된 예술이라는 것을 강조하였지 만 그것이 삶의 숭고함과 영광스러움에도 이끌렀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 다. 모든 것이 이미지로서 표현된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인간이 밖으로 드러 나는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 깊은 관심 (철학적 용어를 벌린다면, 존재론적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윤리적으로는 자이완성의 의지에 결부될 수 도 있다. 그러나 순수한 바로크에 관한 한 윤리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여기 문제되는 것은 타인들 앞에서 어떤 포즈를 취하는 것, 다시 말해 그들이 자신

에게서 기대하는 그대로 자신을 전시하고 인정받는 일이다. 코르네유의 주인공 들이 영광을 추구할 때 그들은- 사실상 자기 전시의 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 베니슈가 영광을 〈스 스로를 볼거리 s p ec t acl e.£. 제공하는 오만 〉 19) 이 라고 정의한 것은 깊이 음미해 볼 만하다. 인간이 자신에 대해 품을 수 있는 가장 빛나고 숭고한 이미지, 그리고 동시에 타인들 앞에서 이 이미지의 전시 및 보존을 위해 행하는 연출_코르네유의 바국의 원동력은 바로 이런 것이 지만, 이것은 자기 전시라는 바로크적 경향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19) P. Ben ich ou, Morales du gra nd siecl e, Gall im ard, 21 쪽 :

환각의 공간으로서의 연극이 그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특히 희극에 있어서이 다. 가령, 코르네유의 초기 작품들 속에서 연극적 환각 자체를 국의 주제로 삼 고 있는 것은 매우 홍미롭다. 『 연극의 환각 Illus i on com iq ue 』이라는 기이한 제 목의 연국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연극의 특이한 공간 속에서 만들어져 나가 는 자신들의 이미지의 희생자라고 볼 수 있다. 이미 현실의 자신과는 다른 이 인물들이 서로 만나며 엮어나가는 새로운 관계의 도식은 작가에게 홍미로운 관 찰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거짓말쟁이 Le Men t eur 』 는 도랑트 Doran t~ 주인공을 통해 그 자신이 만동거나가는 이미 지들의 위력을 십분 보여주고 있다. 도랑트는 본래 협잡꾼이거나 위선자는 아 니다. 우연한 기회에 거짓말을 하게 된 그는 뒤이어 거짓말에 거짓말을 덧붙이 게 됨으로써 하나의 완벽한 허위의 총체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총 체는 그 자체로서 완전히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것이며, 결국 전실보다 더 전실된 것이 된다. 그것은 타인을 설득하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그 자신까지도 자기가 만들어낸 거짓말을 믿게 한다. 그는 상상과 현실을 혼동하 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의 만족이 있다. 자신의 이미지를 화려하게 분식하여 타인에게 경탄과 존경십을 지아내게 함으로써 느끼는 만족 말이다.

이 만족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마치 마술이 풀리듯이 조만간 환각은 깨지고 말 테니까. 바로크와 전통적 희극이 만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우리는 16 세기 후반에서 17 세기 초반에 걸쳐 바로크의 시각에서 문학을 재조 명하기에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바로크의 개념을 정의하려고 시도했고 동시에 그것의 변화에 대해서도 주목했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전반기와 후반기 로 양분한 것은 이 변화를 부각시키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전반기에 시대의 비 극적 상황 속에서 주관성에 질게 물들었던 바로크가 후반기에 이르러 보다 강 한 자유의 욕구와 더불어 전시와 효과의 예술로서의 순수성을 회복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20) 그러나 이 일련의 고찰을 끝맺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일관된 영원 한 바로크의 모습, 그것의 본질에 주목하면서 결론적으로 몇 가지를 지적하려 고한다.

20) Cf Jac q ue s Morel,LaRenaiss ar.ce III, 1570-1624. Lit tera tu re f ran f ais e , Artau d, 10 딱. 우리와 거의 유사한 관접에서 More 達 두 시기의 바로크몰 각각 〈위기의 바로크 baroq ue de c ri se 〉와 〈전시의 바로크 baro q ue de !'os t en tati on 〉라 명명하고 있다.

첫째로, 바로크를 앞선 플레이아드나 뒤이을 고전주의와 같이 하나의 문학적 유파로 간주할 수는 없다. 바로크는 문학적 프로그램이나 미학적 이론에 따라, 그리고 결속된 의식적 집단에 의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단지 근래의 일부 비 평가들이 오랫동안 〈전기 고전주의〉의 이름으로 불리어졌던 이 모호한 시기의 문학 속에서 어떤 공통된 특징들을 발견하였고 이에 바로크라는 이름을 붙인 것뿐이다. 마르셀 레이몽 M. Ra ym ond 이 바로크의 탄생과 관련하여 〈이 문체 에 대하여 어떤 통일성을 부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근대의 비평이라는 사실을 곧 바로 지적해 두자. 대체로 프랑스에 있어서의 문학적 바로크는 자기 자신을 모 르는 예술이다〉 21 봐고 말한 것은 정당하다. 바로크의 작가들은, 말하자면, 각

21 ) M. Raym o nd, Baroqu e et r enais san ce poe tifJ u e, 4~ :

기 자신들의 개인적 지향과 방식에 따라 작품을 쓴 것뿐이며 뒤늦게 그 안에서 동일한 주제 그리고 이 주제를 다루는 동일한 방식이 주목을- 끌게 된 것뿐이 다. 따라서 바로크는 중심도 한계도 없다. 또한 작품들도 무한히 다양하고 다 채롭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작품들을- 감싸 고 있는 어떤 특이한 정신적 분위기와, 그것들의 미학적 특성을 결정짓는 특이 한 문체 s ty l i s tiq u~] 다. 이 양자에 가장 잘 부합된 작품들이 이 문학 속에서 빛을 발하고 또한 그러한 장르가 각광을 받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22)

22} 이 점과 관련하여, 17 세기에 있어서의 연극의 놀라운 풍요로움과 다양성에 주목할 필요 가 있다. 전원국, 기계국pi eces a mach ine , 무용국 comed i es-balle ts, 비회국t ra gi­ comedi es , 오페라 등 각종의 장르들이 제각기 위세를 떨쳤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관객 둘은 라신의 매력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장치, 기발하고 환상적인 연출, 다시 말해 바로 크적인 환각에 이끌렀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바로크를 특칭짓는 정신적 분위기와 문체에 대해서 줄곧 언급해 왔 다. 장 루세가 바로크를 정의하기 위해 신화 속의 마녀 시르세 C i rce 와 공작새 광 Paon 의 두 상칭을 사용한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전자는 〈 변신只끝, 그리 고 후자는 〈전시 또는 과시只룹 상징한다. 우리는 대체로 이 두 개의 조명으로 프랑스의 바로크 문학을 비춰보았지만, 우리는 이 상징들이 의미하는 것 이상 의 것을 발견하였다고 믿는다. 바로크가 움직임과 변신에 관심울 가진 것은 단 순한 감각적 호기심에서만은 아니다. 바로크 예술가들은· 이 숨가쁜 소용돌이와 격동 속에서 〈디나미슴, 삶의 충일, 풍성함〉 23) 을 느꼈다. 그들이 경험한 경악 과 현혹은 바로 여기에 연유하며, 그들의 시는 일차적으로 단단한 지각을 뚫고 폭발하는 화산처럼 온갖 속박과 제약을 무찌르고 솟구치는 원초적 생명력과의 감격적인 만남의 고백이다. 바로크가 강렬한 자유의 욕구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이미지로 그려내는 〈 전시 〉 의

23} Cf Raym o nd Lebegu e : (in D icti o n nair e des Lettr es fran ta i s es , 1954) .

기교도 단순히 효과만을 노리는 기교는 아니다. 현실의 것이 이미지로 전환되 는 순간 이 이미지는 현실에 대치되는 또 하나의 진실로 군림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환각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환각은 시를 낳는다. 그러 나 이 이미지들의 놀이는 무엇에 의해 결정지어지는 것일까. 우리는 다시 우리 의 내면으로, 존재의 심연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미지의 놀이가 단순한 심미적 놀이로 그칠 때에도 그것은 우리의 깊은 내적 존재와의 공모를 전제로 한다. 순진한 이미지의 놀이에서 계산된 자아 전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인 간의 가장 내밀하고 원초적인 욕구와 관련되어 있다. 혹자는 〈무 의식只울 동원 하기까지 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 바로크는…… 보다 광범한 해방울 지향 한다. 무의식의 어두운 심연과 자연적으로 공감을 이루고 있는 시적 활동은 창 조이기에 앞서 폭발이며, 작품의 형식적 가치는 강렬한 주관성의 표현적 가치 보다 덜 중요하다. >24 )

24) J. Duron, E largis s ement de notr e XVW sie c le po etiq u e, in B u lle ti n d e la Soc iete d ' Elud e du XV/le siec le, 195 3 : (cite par A. Chassang et C h. Senn ing e r , 앞의 책 , 3 2~) .

이 말은 우리의 결론으로 삼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크를 단순히 문체의 차원에 위치시키는 것에 우리가 저항감을 느낀 것은 처음부터였 다. 우리는 그것이 16 세기 후반의 불행한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비극적 주관 성의 신비롭고 환각적인 표현으로 탄생한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 후 이른바 〈 순수한 바로크 〉 에 있어서도, 비록 색깔은 다를지라도 삶과 자연에 대한 한 주 관적 비전이 내밀히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기에 주력했다. 이제 우리 는 조금은 자신 있게 바로크가 고유의 미학뿐만 아니라 삶과 존재에 대한 고유 의 인식과 태도를 대변한다고 말하고 싶다 .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유와 결부되어 있다. 바로크가 담고 있는 가장 심오한 메시지는 지유의 메시지이다. 그것은 갖가지 정신적 규범과 제약, 의형적 관습 과 체제가 행사하는 압제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이기도 하다. 정지되고 고정된 세계의 압제하에서는 정신도 고정되고 응고될 것이다. 17 세기 초 사람들은 이 위협이 점차 현실화되는 것을 느꼈던 것일까. 실제로 모든 분야에서 질서가 서 서히 혼란을 대치해 가고 있었다. 루이 13 세 치하에서 질서를 향한 움직임이 점차 확산되어 가는 이 마당에 바로크 시인등은 분명히 반항아로 간주될 만하 다. 그들은 그들의 시적 창조의 유일한 원리로서 자유를 믿었고 자유가 야기시 킬지도 모를 혼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기꺼이 이 혼란 속으로, 창조 이전의 카오스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혼돈이야말로 진정한 창조의 토양 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바로크가 다가올 고전주의와 정면으로 상치된다는 것은 자명하 다. 바로크의 몇몇 요소를 끌어내어 그것들이 은연중 고전주의의 형성에 기여 했다고 우기려 한다면 못 할 것도 없다. 25)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 이다. 17 세기 전반기의 문학울 고전주의와의 종속적 관련하에서 평가하려는 오 랜 관행을 우리는 애당초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 문학이 그 자체의 독자적인 미학을 가지고 있고 또 이 미학은 고유한 삶의 비전의 반영일 것이라는 우리의 전제를 우리는 지금 결론으로서 견지하고 싶다.

25) 가령, 고전주의의 정수가 연극이라는 형식을 빌려 표현된 것은 연극에 경도되었던 바로 크적 취향의 한 연장이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인간의 내면 세계에 대한 고전주의의 깊은 관심과 탐구의 경향을 인간 십리의 격정적이고 때로는 일그러진 발현에 대한 바로크적 관심 속에 그 뿌리가 있다고 설명하는 따위 (이와 마찬가지로 〈프레시오지테〉와의 대조도 가능하다. 이 대조는 필요하고 또 홍미롭다).

이러한 관점이 문학의 판도에 파문을 일으키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 다. 과거 문학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로 양분되어 왔다. 쉽게 말해 전자는 이 성의 질서를, 후자는 심정의 질서를 대변한다. 이 이분법의 툼새를 비집고 여

기 바로크가 들어선 것이다. 고전주의와 상치되는 바로크는 기본적으로 낭만주 의와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결핍과 공허를 느끼고 초자연의 신비 속으로 도약하는 낭만주의와, 자연 속에서 풍요와 충일함을 느끼고 신비 와 환상을 찾되 오직 그 안에서만 찾는 바로크는 완전히 혈통을 달리한다. 전 자는 초월t ranscendanc 여t 지향하고 후자는 내재성i mmanenc~ 녁i 만족한 다. 굳이 소속을 밝혀야 한다면 바로크는 감각의 질서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 다. 바로크가 다른 두 거인에 비해 조금은 왜소하고 빈약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 다. 그에게는 이들에게 대적할 만한 문학적 이론도 없고, 형이상학적 체계도 없다. 이것은 모든 종류의 이론과 체계를 애초에 거부한 바로크의 숙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크는 이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랑으로 여기며, 원시적 순 수성과 자발성 속에서의, 실로 현혹적인 삶을 살며 증언할 것이다. 이 증언은 17 세기 전후의 문학에만 한정된, 일과성의 것일 수는 없다. 인간의 한 특이한 감수성과 비전을 대변하는 바로크는 인간과 더불어 그리고 예술 • 문학과 더불 어 영원할 것이다. 26) 26) A. Chassang et Ch. Senn ing e r , 앞의 책, 322 쪽: 〈 17 세기 밖에도 바로크는 존재했다. 이미 고대에 오비디우스와 갇은 사람은 옛 신화를 장식적으로 다루려는 의도에서, 신화의 주요한 변전올 드러내보임으로써 전정으로 바로 크적인 선택을 했다. 오늘날 콕토와 갇은 사람은 그 안의 모든 것이 변형이고 또한 의양 의 함정일 뿐인 작품과 시나리오를 썼다(『르노와 아르미드』, 『미녀와 야수J, 『오르페』). 에밀 앙리오는 폴 크로델을 ‘바로크의 진정한 왕자’라고 생각했다. >

2 프레시오지테 거의 같은 시기, 즉 루이 13 세 시대에 걸쳐 있는 바로크와 프레시오지데 la Prec i os it底 (앞으로 확인될 것 이지만) 많은 점에서 동일한 정신적 흐름에 속한 다고 말할 수 있다. 정신의 지유롤- 존중하고, 사물과 존재에 대한 현 실 주의적 인식을 거부한 것은 분명히 양자에 공통된 경향이다. 바로크라는 새 개념이 도 입되기 전까지는 17 세기 전반기의 문학을 특칭짓기 위해 오직 프레시오지테의 개념이 동원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크의 시각을 통해 이 시대의 문 학을 조명해 본 우리는 프레시오지테로써 해명될 수 없는 많은 부분들을 - 아 문 학 속에서 확인한 셈이며 결국 이 양자의 공통점에 못지않게 차이점에 대해서 도 민감할 수밖에 없다. 우선 표면적으로, 프레시오지테는 보다 확연하게 구분 지어지는 시대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양자는 한정된 역 사적 현싱이면서 동시에 시대를 초월한 어떤 보편적 경향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 자해쳐 立타人 모하 소이 이르바 ( 바근더 시대 ~aPharo q ue )¾ 되돌아보면 서 농시에 짢헌안 바도크 ) 뮈 연손늘 윅건학/|늘 천앴냐. 마찬가지로 프레시오 지테의 원천도 프랑스의 경우 멀리 중세에까지 거슬러 울라간다. 그러나 우리 는 이 영원한 경향들이 공히 17 세기 초에 보다 충일하게 나타나는 데 있어 양 자가 보여주는 차이에 주목하고 싶다. 즉 , 바로크가 전세기 후반에까지 거슬러 울라감으로써 시대구분이 모호한 기나긴 시기에 방만하게 걸쳐 있는 데 반해, 프레시오지테는 1650 년대를 전후하여 절정을 이룸으로써 시대와의 상관관계가 한결명확하다. 이 사소한 차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프레시오지테가 정신 적 경향이기에 앞서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기 때 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프레시오지테는 일차적으로 사회의 한 특정한 집단과 관련지어져 있으며 이 집단의 생활양식, 사회적 관습의 한 표현이다. 프레시오지데라 불리어지는 미학은 이 특이한 사회적 삶의 방식을 떠나서는 존 재하지 않는다.

프레시오지테가 자신의 미학에 대해 보다 의식적이었다는 것도 이것으로 설 명될 수 있다. 바로크는 다분히 자연발생적이었고, 따라서 〈 자기 스스로를 알 지 못하는 〉 미학이었다. 그러나 프레시오지테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초기에는 자연발생적인 것이었으나 이내 자신의 특성을 자각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단 단한 이론으로 무장되기까지 했다. 그렇기 때문에 프레시오지데는 이 시대에 바로크보다 더 직접적이고 광범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 고 뒤이어 거의 동일한 사회적 주체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수용될 고전주의 문 학과도 상당한 공감의 폭을 나누어 갖게 될 것이다. 프레시오지테一―사회적 현상 프레시오지테를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유효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프레시오지데라는 말 자체가 사회의 한 특정한 부류, 더 정확하게는 상류사회의 일부 사교인들에게 붙여전 이름, 죽 p re ci euse 와 p rec i eux 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것의 사회적 성격은 너무나 자명해진다. 아들은 남들이 조롱삼아 붙여준 이 명칭을 오히려 스스럼 없이 받아들였고 자신들의 삶의 유형을 자랑스럽게 고수했다. 이들이 이 이름으로 불리어지게 된 것은 1650 년대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그들의 기원은 적어도 1620 년대에까지 거슬러 울라간다. 물론, 프랑스에서 상 류 귀족사회의 사교와, 이에 수반된 지적 • 문화적 전통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울라간다. 또한 가장 암담한 시대에도 그 맥이 끊어지지 않았 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전세기의 위마니슴과 관련하여 우리는 발루아 왕조 les Valois 21-특 히 앙리 3 세 시대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으며, 레츠 원수부인 la marechale de Re t z 이나 빌르루와 부인 Mme de Vil lero y 등의 이름을 떠올리 지 않을 수 없다. 17 세기 초에도 몇몇 귀족들의 저택이 문인들에게 개방되었었 는데, 그중에서도 마르그리트 여왕 la rein e Mar gu e rit e(0J 넘 어의 첫 야서)의 살롱은특기할만하다. 그러나 1620 년경 차츰 세인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랑부계관 ho t el de Ram-

bou ill e t과 이를 모방한 살롱들의 출현은 여러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었 다. 한마디로, 이 무렵의 살롱들은 더 이상 문인들과 학자들을 위한 학술원과 갇은 역할을 담당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마르그리트 여왕 주 변에 모여든 시인과 소설가들은 다분히 르네상스적 관념과 취향에 젖어 있었으 며 그리스의 서정시인 핀다로스를 모방한 短詩 ode 나 롱사르풍의 서사시 (Fran cia d떠 모방)를 썼는가 하면 즐겨 풀라톤을 논했다. 다시 말해 이들에게 개방된 살롱은 고상한 詩作과 철학적 담론만을 위한 폐쇄된 공간이었던 셈아 다. 그러나 1620 년 이후, 귀족사회와 문인들은 전혀 다론 방식으로 만나게 되 었다. 아마도 르네상스 시대의 귀부인들만큼 지적으로 세련되지 못했던 루이 13 세 시대의 귀족들은 단순히 상류사회와 몇몇 뛰어난 문인들을 접근시키는 역 할에 만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식인들은 그들의 재능과 재치로서 이 모임 의 분위기를 이끌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동시에 이 모임을 통해 상류사 회 특유의 삶의 양식에 길들여졌으며, 바로 이 점이야말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새로운 요소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이들은 단순한 지식인에서 예절바르고 세 련되고 절도 있는 생활인一―훗날 〈오네톰 honne t e homrne 〉 이라 불리어지게 될 완벽한 인간유형으로 조금씩 변모해 갈 것이다. 잠시 랑부예관의 모임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이곳에 자주 드나든 문인들 중 에 우리는 노년의 말레르브를 위시하여 샤프렝 Chape l ain , 콩라르 Conrar t, 그 리고 1638 년경에는 발자크 Guez de Balzac 등, 당대의 빛나는 얼굴들을 보게 된다. 이 이름들 때문에 랑부예관은 마치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의 요람처럼 잘 못 생각되기도 했다. 물론, 랑부예 부인은 문학을 사랑했고 또한 문학에 대해 어떤 개인적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테오필 Theo phi l 헉끝 싫어하는 대신 말레르브를 선호했고, 언어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법의 엄정한 준수를 주장하는 puri s t뼈 편을 들었다. 그녀가 추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말, 이른바 〈버짐 먹은t eign eux 〉 말들을 형오했다는 것은 전해지는 바와 같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살롱이 그 무엇보다도 사교생활의 줄거움을 추구했었

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학은, 말하자면 이 즐거움에 덧붙여진 또 하나의 홍, 정신적인 여흥에 불과했다. 랑부예 부인은 특히 시를 놀이로 삼 기를 즐겼는데, 이 소망에 가장 잘 부응한 시안이 다름아닌 벵상 브와뒤르 Vin c ent Vo it ure 였다. 그는 후작부인을 즐겁게 하기 위해 순전한 놀이로서 시 를 썼고 정형시 〈 롱도 rondeau~ 十 부활시켰으며, 이로써 파리의 모든 살롱에서 그를 모방한 롱도가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랑부예관에서 문학이 차지한 몫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임의 분위기가 그곳에 함께 출입했던 샤프 렝 콩라르보다 오히려 브와뒤르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은 이 모임의 성격 울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사교생활의 한 놀이로서의 문학과 관련하여 우리는 한두 가지 홍미로 운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그중 첫째는 아마도 이 모임들의 공상적 경향일 것 이다 . 현실에서 유리된 공상적 생각들이 흘러간 과거-우리의 상상과 꿈과 욕망들로써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는 과거에 대한 향수와 결부되는 것은 오히 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당대의 사교인들은 옛 기사들의 삶을 환기시키는 소설 둘(가령, 『 아마디스 A mo, d is 』 27) )을 즐겨 읽었고, 시에 있어서는 마로 Maro 떠 시 풍을 모방했으며, 심지어는 옛 서사시의 주인공들의 이름을 빌려 자기 이름으 로 삼기도 했다. 그들의 주된 화제는 용감한 기사, 불행한 공주, 마술사와 마 녀들이었다. 현실의 상황에 실망한 대귀족들은 옛 시절의 공상적 세계 속으로 도피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27) 1508 년에 스페인에서 편집된 기사 소설인 Amadis de Gaule.g . 1540 년경 프랑스에서 최초로 번역되었고 많은 사람들 , 특히 귀부인들에 의해 애독되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 사교적 집단이 현실로부터의 도피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문학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다시 말해, 이 집단과 문인들과의 만남은 문학의 존재 방식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그 이전 의 문학은 고대의 지식으로 무장된 소수의 지적 엘리트들의 전유물이었다. 풀 레이아드는 애당초 시인을 일반 대중과는 구별된, 특권적인 신의 사자로, 그리

고 시를 하늘의 메시지로 여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제 문학은 이 거룩한 자 리에서 세속적인 사교인들의 세계로 내려앉았다. 여인들이 지배하고, 이들의 취향이 학식이나 사색보다 우선하는 이 세계에서 문학은 더 이상 고매한 사상 에 봉사하는 대신 세련되고 우아한 삶의 한 양식에 스스로 부합하기 위해 변신 을 꾀하는 것이다. 문인들이 사회적 삶 속에서 차지하게 된 새 위상은 필연적 으로 새 문학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당대의 영향력 있는 살롱은 랑부예관 의에도 상당수가 있다. 그중에도 사블레 후작부인 la marqu i s e de Sable 과 스퀴데리 부인 Mlle de Scuder y의 살롱은 특기할 만하다. 랑부예 부인보다 한결 지적이었던 사블 레 부인은 정치에도 깊이 관여할 만큼 당대의 모든 문제에 적국적인 관심을 보 였으며 문학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페레즈 데 히타 Perez de H it a 의 『 그 라나다의 내전 Guerres civil e s de Grenade 』 28) 을 애독했던 그녀는 그 안에서 기사적 영웅주의의 모델과 숭고한 사랑의 유형을 발견하고 찬양함으로써 당대 사교계에 사랑의 중세적 모형을 환기시키기도 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절대적 숭배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행복을 여인의 정복에서가 아니라 이 영원 한 우상에 대한 끝없는 예찬과 헌신에서 찾을 것을 가르친 그녀는 다가 ~7 프레 시오지데를 예고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문학과 관련하여 그녀의 가장 큰 기여는 지적인 관심을 인간 내면의 가장 비밀스러운 움직임으로 향하게 한 데 있다. 그녀는 사랑을 위시한 모든 감정과 정념들이 각기 지니고 있는 미묘 한 차이와 특이한 뉘앙스에 주목했으며, 지적 활동의 기본은 이것들을 감지하 고 명확한 표현으로써 구별해 내는 데 있다고 믿었다. 28) 1 예기에서 17 세기 초에 걸쳐 스페인 문학, 특히 소설의 대대적인 유입은 특기할 만하 다. 여기 문제된 소설들은 공상적이고 관념적인 기사소설이지만 스페인 문학의 영향은 이 분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뒤이어 이른바 〈피카로 소설 〉 로서 풍자와 패러디의 , 다분히 서실적인 문학을 프랑스에 태어나게 하는 데 공헌한 것도 스페인이다•

스퀴데리 부인의 살롱에 이르러 우리는 사교계의 전혀 다른 분위기와 만나게 된다. 독신의 신분을 고수함으로써 Mademo i sell 쵸i 지칭되고 스스로 〈 사포 Sa p ho 〉 라 불리어졌던 그녀는 명문 귀족의 출신도 아니었고 부자도 아니었다. 1653 년경에 시작하여 약 10 년간 지속된 〈 사포의 토요회 Samed i s de Sa p ho 冷근 한마디로 부르주아적 성격의 모임이었다. 물론, 상류사회의 명사들이 완전히 배제되었던 것은 아니며 그녀의 집에서 사블레 부인, 로앙윤남념: 부인 Mme de Rohan-Montb a zon 등의 얼굴을 보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토요회의 주역들은 당대의 싱승하는 부르주아지와 무관하지 않았으며 특히 샤 프랭 콩라르, 펠리송 Pe lli sson 같은 문인들이 이 모임을 주도했디는 것은 크 게 주목할 만하다. 부르주아적 성격의 이 모임은 동시에 매우 문학적이었던 셈 o] 다. 이들의 문학적 성향과 관련하여 (그 주된 논의는 다음 장에서 행하게 되겠지만) 우선 이 자리에서 몇 가지 의양적 특성을 지적해 두고 싶다. 이 모임은 초창기 부터 세인들의 관심을 끌어모았는데, 몇 년 후 몰리에르의 『우스꽝스러운 才女 들 les Precie u ses ri d i cules 』 (1659) 이 발표되기도 전에 사람들의, 특히 전통적 인 작가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이 모임의 풍속도는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판이한 것으로 비쳐졌고, 그곳에서 통용되는 언어와 화제는 상식을 넘어 지극 히 인위적이고 현학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스퀴데리 부인 자신도 〈사포의 집에 서는 오직 시의 규칙과 기이한 문제들과 철학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29 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푸념한 적이 있다. 사실, 그녀의 푸념은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 출입한 문인들은 현학적이기는커녕 화법과 詩作에 있어 오히려 우아함과 멋을 추구했으며 때로는 경박한 놀이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 다. 펠리송과 사라쟁 Saras i n, 심지어는 노년의 콩라르까지도 실없는 연가, 장 29) A. Adam, L 'Ag e clas siqu e J , Lit tera tu re fran ais e, Artau d, 쪽 :

난스러운 즉흥시, 사랑의 우화 등을 다투어 지어내곤 했다. 그러나 이들의 문학 놀이의 경박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 경박성으로 인하여 문학의 고귀성을 믿는 사람들로부터 경멸과 비난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놀이는 그들의 전체 작품의 일부분 혹은 의양에 불과하 다. 이들을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전작품을 읽어보아야 하며, 비 록 그 안게 놀이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구현된 놀이 이상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레시오지테의 미학 프레시오지데가 1620 년대에서 1650 년대에 걸쳐 프랑스 상류사회의 한 특정 한 삶의 양식과 정신적 • 심미적 경향으로서 자리잡게 된 것은 이상과 같다. 우 리는 한 세대가 지나는 사이에 이 집단의 사회적 성격이 다소간 변질된 것에 대해서도 주목했다. 단적으로, 스퀴데리의 살롱은 30 년 전의 랑부예 부인의 살 롱에 비해 덜 귀족적이고 덜 사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의 살롱의 주역 들은 귀족이라기보다는 상류사회의 신참자, 즉 부르주아였고, 이들의 관심은 그 의양에도 불구하고 한결 진지하고 한결 문학적아있다. 우리는 이 변화와 그것의 의미에 대해 다시 언급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먼저, 프레시오지테라고 불리어지는 한 정신적 유형의 일관된 경향들 울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로 지적할 것은 이미 귀족적 살롱에서부터 그 것이 예절과 교양의 세련을 추구했었디는 사실이다. 랑부예관에 출입하도록 허 용받기 위해서는 단순히 혈통적으로. 귀족의 신분을 갖는 것으로는 족하지 않았 다. 이보다 먼저 요구되는 것은 정신적 귀족성이다. 살롱에 출입하는 여인들과 귀족들은, 말하자면, 전쟁에 길들여졌던 지난날의 삶의 거침과 지방 영주의 촌 스러움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사교적 삶이 요구하는 세련과 우아를 배워야만 했 다. 한편, 상류사회에 접근이 허용된 일부 문인과 지식인들도 그들만의 전유물 이었던 폐쇄적이고 현학적인 지식과 이론 따위는 일단 접어두어야만 했고 누구 나가(사교계의 여인들까지도) 이해하는, 양식에 입각한 단순한 언어를 개발해야

만 했다 .30)

30) Cf Cha p ela i n 이 1638 년 Balza 여]게 보낸 편지. -J.-C . Tournand, 6~] 서 인용.

이렇듯, 귀족이건 부르주아이건, 그들은 새롭게 경험하게 된 사교적 삶 속에 서 스스로 변신을 꾀하며 행동의 우아함과 정신의 세련을 익히기에 힘썼다. 이 경향이 결국 〈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 의지와 결부된다고 해서 조금도 놀랄 것은 없다. 프레시오지테의 요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는 멋과 재치의 치 열한 경연장과도 같은 사교계에서 어떻게 타인의 이목을 끌며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가에 있다. 그러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이 동원되는 것은 당연한 일 이다. 가장 쉽게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는 것은 〈외양沿t 통해서이며 이룰 특이하게 가꾸는 것은 초보적인 일에 속한다. 이 의양 속에 옷차림은 물론 거 동과 예의범절도 당연히 포함된다. 그러나 인간에 있어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받는 인상은 더 강렬하고 더 지속적이다. 프레시오지테가 정신의 세련에 그리고 정신적인 것이 표현되는 언어의 세련에 더 큰 비중을 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프레시오지테는 본질적으로 정신의 놀이 그리고 이 놀이에 대 한애착이다. 그것이 의양이건 정신의 놀이이건 여기 일관된 특칭은 그 어떤 특이한 것, 희귀한 것, 범속과 확연히 구별되는 것을 추구하는 데 `있다. 프레시오지테가 가장 협오하는 것은 범속이며 일상적 삶의 진부함이다. 그렇다면 이 범속과 전 부를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가령, 새로움과 진기를 창조해 내기 위해 고심하고 지혜를 짜낼 것인가. 그러나 프레시오지테는 이런 것들을 새로이 만들어내는 대신 이미 존재하는 것들에 새로움을 부여하는 방법을 선택 했다. 그 자체로서는 진부하게 보일지도 모를 사물들을 가치 있는 것으로 전환

시키는 기술 말이다. 이것은 사물을 다루는 하나의 방식, 즉 가장 평범하고 일 상적인 것까지도 놀랍도록 고양시키는 방식이다. 여기 사물이라 할 때 그것은 우리의 관심의 모든 대상을 의미하며 따라서 정신적인 사물, 즉 관념도 포함된 다. 〈 프레시의즈는 판단하고 찬양할 때 또는 바난할 때 모든 것에 특이한 가치 를 갖게 한다. 가령, 어떤 이야기 속에서 형편없는 혹은 그것을 읽거나 듣는 사람에게 기껏해야 표피적인 느낌을 주거나 연하고 맥없는 즐거움을 줄 뿐인, 가장 범속하고 진부한 것들도 프레시의즈의 화술만으로 가치를 더하게 될 것이 다――그녀는 사물을 고양시키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기술에 익숙해 있 다. >31 )프 레시의즈와 관련하여 〈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기술났十 이야기할 때 여기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많이 함축되어 있을 수도 있다. 아베 드 퓌르 abbe de Pure32) 는 프레시오지데의 〈 꾸밈 〉 , 〈 가장 〉 의 경향을 드러내려 했기 때 문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프레시오지테에 관한 매우 소중한 증언임에 틀림 없다. 이 증언은 랑부예관에서 스퀴데리의 살롱에 이르기까지 프레시오지테에 의해 갈고 닦여졌던 사교계의 대화의 기교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침작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문제는 이야기의 내용 그 자체보다 그것이 전해지는 방식, 즉 형 식 la fo rm 여 더 큰중요성이 부여되는 데 있다.

31 ) ( cite par R Bray, La. Preci os i te et ! es pre ci eux , 137 쪽) .

32} 5) 의 인용문은 abbe de Pur~ 소설 La. Prec ie us 쩌 1 서 인용된 것.

아름답고 품위 있는 귀부인을 중심으로 모여든 상류 사교인들 사이에서 삶의 한 미학은 이렇게 해서 서서히 무르익어 갔다. 유럽의 귀족들이 지난날에 이와

감은 사교적 삶의 즐거움을 전혀 몰랐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1 7 세기 전 반기에 이르러 그들이 단연 새로운 사회적 • 정신적 기류 속에 들어섰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33) 그들은 새로운 삶의 양식과 사고의 유형을 몸에 익혀야만 했다. 한마디로, 그것은 혈통적 귀족성에서 정산적 귀족성으로의 이행이라 할 수 있다. 이제 그들이 단순한 신분적 우월성으로써 자신의 위엄을 보장받던 시 대는 지나갔다. 그들은 혈통 이외의 디른 것에 의해, 즉 인간적이고 정신적인 그 무엇에 의해 자신의 귀족적 가치를 입증해야만 하는 것이다. 코르네유가 『 르 시드 Le Ci d 』 속에서 그리는 드높은 기사적 영웅주의는 당대의 새로운 윤 리적 추구의 한 단면임에 틀림없다. 물론, 프레시오지데에 이르러 이 추구는 한결 심미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되고 태도의 우아함과 지적 세련이 더 존중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 일관되게 문제되는 것은 자신을 뛰어난 존재로 드러내보 이는 것이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직 자신의 완성을 통해 그렇게 하려는 방법이다.

33) 이 시대에 귀족들이 처했던 사회적 상황과 관련하여 절대왕정의 접전적인 확립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필요하다. 17 세기 전반기는 1&\ i]기 이래로 접차 신장되어 간 왕권이 절대 왕정 monarch i e absolu 택 형태로 완성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된다. 리슐리의 의 출현은 실제적이고도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 그는 말하자면 절대왕정을 완성 시킨 최후의 봉사자였다. 이 사회적 변혁의 과정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처지에 빠져들어 간 것은 대귀족들이었다. 왕권이 신장되면 될수록 그들의 입지는 축소되었고 그들의 후 광은 빛을 잃었다. 위대한 영주로 군림했던 이 영웅들은 이제 왕의 충실한 신하로 길들 여져야 하는 것이다. 일부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세는 기울어졌으며 그 둘은 무대의 전면에서 물러서야 하는, 이른바 소의된 계층으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 속 에서 그들이 과거에 대한 향수에 젖어들고 공상적 • 관념적 세계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다 . 마치 19 세기 초의 낭만주의적 정신의 기류가 혁명 후에 몰락한 귀족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과 같다.

우리는 이 완성이 어떤 성격의 것인가에 대해, 죽 그것의 기교적아고 인위적 인 경향에 대해 조금은 암시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오지데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출중한, 빛나는 존재로 보이게 하고 그렇게 인정받기를 바리는 인간의 욕망의 산물이다. 이 욕 망에서부터 범속과 진부에 대한 형오가 태어났고 새로움과 진기함을 향한 추구 가 시작되었다. 이 추구를 위해 온갖 감각적 기교와 정신적 놀이가 고안되었고 때때로 그것들은 극단에 치우치기도 했다. 우리는 국단에 다다른 프레시오지테 가 어떤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낳았는가를 알고 있다. 몰리에르가 아니더라도 일부 프레시의즈둘의 작태를 회화화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 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스꽝스러운 의양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겨져 있 울지도 모를 어떤 메시지 __- 감히 진지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인간적인 메 시지를 읽어내는 일이다. 프레시오지테의 언어 이 메시지의 내적 의미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의면적 특성에 대해 주목하 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언어에 대한 비상한 감각이라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앞서 프레시오지테가 새로움과 비범함을 추구하되 새롭고 바 범한 사물들을 창조해 내는 대신 현존하는 대상들을 감지하고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울 고안하기에 주력했었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다시 말해, 프레시오지 데의 새로움은 사물이나 대상의 새로움이 아니라 그것들을 표현하는 방식의 새 로움이다. 여기 언어의 문제가 특별한 관심거리로 대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다. 전쟁터에서 무기가 승패를 가늠하듯이 사교계를 지배하는 것은 말이다. 사 교계는 말로써 전쟁을 치르는 싸움터와도 같다. 말로써 재치를 겨루는 이 비정 한 경연칭에서 승자는 갈채를 받고 영광을 독차지하며 패자는 쓴 잔을 마시고 쓸쓸히 뒷전으로 물러선다. 프레시오지데는 말의 놀이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 는다.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충격을 주고 관십을 사로잡기를 원했던 사교인들은 〈힘없고 평범하고 부르주아적인 표현〉 대신 〈고상하고 특이하고 힘찬 표현只끌 고안해 내기에 전념했다. 그들은 언어를 새롭게 하기 위해 대담한, 때로는 국 단적인 시도를 감행했으며 신어를 만들어내는가 하면 옛 단어에 새 의미를 부

여하거나 밀들의 비관습적인 결합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레시오지테의 새 언어 속에 깊이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 갈 것이 있다. 그것은 말의 놀이와 관련하여 프레시오지테가 보여준 대담성과 참신성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어의 정화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다. 이미 랑臼 부인에게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프레시오지테가 말레르브 이래의 퓌리 슴p ur i sm 여 동조했었다는 것은 크게 주목할 만하다. 아당 A. Adam 은 프레시 의즈에 대해 , 〈 그녀들은 퓌리슴에 열광했었다 〉 라고까지 증언하고 있다. 34) 실제 로 이들 자신도 말과 문법의 규칙을 준수하고 〈옳 은 말 hons mo t s 〉 만을 고수한 퓌리스트였다. 그녀들은 〈불 량한 말 mauva i s mots > 죽 〈시 골풍과 현학적 냄새 가 나는 〉 말들을 추방했는가 하면 식료품에 대해 aim er 동사를 쓰는 것 따위도 거부했다. 물론, 이 순수의 욕구는 단순히 표현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필연적 으로 표현되는 대상, 죽 관념에까지 번져나갈 것이다. 랑부예 부인이 〈추악한 관념冷t 불러일으키는 말들을 규탄했다는 것은 이미 환기시킨 바 있다. 프레시 오지테가 언어뿐만 아니라 (이 언어 속에 담기는) 사물들의 불순성을 추방하고 대화를 드높은 정신성으로 끌어울리려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쨌든, 여기 언 어와 관련하여 프레시오지테가 말레르브에 의해 강력하게 발의된 후 고전주의 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추전되어 나갈 프랑스어 정화의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점은 충분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프레시오지테가 여전히 언어의 특이한 사 용, 문체의 독창적인 개발로서 특징지어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자신을 뛰어난 존재로 드러내고자 원했던 사교인들은 〈고상하고 특이하고 힘찬 표현〉 으로써 타인들의 이목을 끌 수 있기를 바랐다.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과 충격 울 주는 방법으로서 그들이 가장 선호한 것은 (그리고 가장 손쉬운 것은) 과장법 h yp erbol e<> l 었다. 몰리에르는 그의 연극에 등장하는 두 프레시의즈의 입을 통 해 당시의 살롱에서 애용되었던 과장의 화법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조금은 과장 34) A. Adam, 앞의 책 , 9~ : (Elies etai e n t fan atiq u es de purism e.>

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 의에도 상반된 두 요소의 대립을 부각시킴으로써 극적 분위기를 재현하는 대조법 an tit hese , 직설적 표현을 회피하는 우언법p er i­ p hrase 과 은유 me t a p hore 등, 그들의 수법은 다양하고 다채로웠다. 그러나 이 모든 수사학적 文彩들figu re s.g. 하나의 공통된 목적에 봉사하고 있음이 분명하 다. 사물과 대상들이 자연적으로 놓여 있는 현실의 차원에서 그것들을 끌어내 어 비현실의 공간으로 풀어놓는 것이 문제이다. 가령, 여기 우언법이 있어 태 양 sole il 울 가리켜 〈 낮의 별 as t re du j our 〉 이라 말하게 한다. 이것을 단순한 수 식어, 즉 수사학적 놀이로 치부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어떤 대상을 일상 적 구상명사로 지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대상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회피하는 것과 같으며, 우언법은 간접적 언어를 통해 마치 대상에서 그것의 물질성을 제 거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다. 원래 언어는 대상을 지시함으로써 그것을 관 념화시킨다. 우언법은, 말하자면, 이 말을 다시 추상화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 다. 우언법이 단순한 표현의 전환인 데 반해 은유는 또 하나의 현실을 등장시킴 으로써 한결 복합적인 공간으로 확대시켜 나간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상상력 울 자극함으로써 그 효과를 역동적으로 증폭시켜 나간다. 〈 불꽃과 같은 사랑 〉 은 국히 초보적인 직유에 속한다. 그러나 당시 크게 유행했던, 전쟁에 의한 사 랑의 비유와 갇은 것은 고도의 기교와 비상한 상상력을 요구한다. 전쟁의 용어 로써 사랑을 재현하려고 할 때 이 용어들의 의미는 본래의 것과는 다른 용도에 幸 계속적으로 전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각기 다른 두 종류의 현실들 사 이에 내밀한 상관관계를 구축하는 작업은 고도의 지적 기교를 요구한다. 이 인 위적 구성이 우리를 구상적 현실에 접근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유 리시킨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전쟁을 가리켰던 구상명사들은 이제 전 혀 다른 현실의 대싱들에 적용되기 위해 본래의 현실과의 관계를 끊어버림으로 써 구상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여기 문제되는 것은 단순히 대상들의 추상화 만기 아니다. 한 현실을 통해 또 하나의 현실로 우리를 전이시키는 것_이 것이 곧 은유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 은유는 고도의 지적 기교를 요하는

인위적 구성이다. 그러나 이 구성을 대하는 독자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지적 노 력이 요구된다. 표면적 언어의 망 저 너머에 그것들이 환기하는 아득한 현실을 찾아내는 것은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프레시오지테의 언어와 문체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특칭들은 대략 이상과 같다. 〈 자신울 뛰어난 존재 〉 로 보이려는 기본적 욕구에서 출발하여 범 속과 진부를 형오하며 새로움과 비범함을 추구한 프레시오지테는 매우 특이한 언어와 문체를 창안하기에 이르렀다. 그것들의 지나친 기교와 부자연스러움은 적지않은 비난과 비웃음을 자초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표면적 기교와 놀이 속에 프레시오지데의 영원한 지향, 죽 현실에 대한 한 기본적 포즈를 보 기를 원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현실과의 직접적인 접촉의 회피, 그리고 끊임없 는 비현실로의 도약의 시도라 할 수 있다. 너무나도 전부한 현실에 혐오를 느 낀 프레시오지데는 현실 밖에서 아름다움을 찾기를 원했다. 아 아름다움을 자 연적 삶의 테두리 밖에서 찾기 위해, 그리고 살기 위해 프레시오지데가 고안한 수법은 매우 다양하다. 그것들은 흔히 무상의 놀이처럼 경박하고 허무해 보이 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17 세기 전반기 프랑스 상류사회의 한 병적 현상으로 ­ 해석될 만도 하다. 우리는 최초 프레시오지데를 한 특정한 사회적 집단과 관련 시켜 그 기원을 설명했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의 사회적 성격은 그리 중요한 문 제가 아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인간적 전실 이며, 우리는 그것이 현실을, 즉 자신을 뛰어넘으려는 인간의 영원한 욕구와 관련지어져 있는 점에서 그 가운데 전실의 강한 여운을 감지하는 것이다. 그러 나 이 자리에서 프레시오지데에 관한 결론을 맺는 것은 아직 이르다. 우리는 그 문학에 대해 아직 깊이 있게 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프레시오지테 문학 실은 프레시오지데의 언어와 문체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우리는 이미 문학 속

에 한 발짝 들어섰던 셈이다. 프레시오지테가 언어를 통해 표출되어 나오는 방 식들은 그 자체 문학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아다. 특히 문체와 관련한 모든 고 찰은 우리를 문학의 한복판으로 들어서게 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대화의 기교가 상당한 몫을 차지하는 사교생활에서 언어가 갖는 중요성에 주목하고 그 것을 언어의 놀이에 대한 고찰의 출발점으로 삼았지만, 이 모든 것은 프레시오 지데 문학에 그대로 적용된다. 아니, 우리의 고찰의 대부분은 사교생활에서의 대화 그 자체보다 문학과 관련된 것들이었으며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문학적 스 틸에 대해 이야기했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 더 이상 혼동하지 말자. 우리 가 〈말의 놀이 〉 속에서 감지하기를 원했던 정신 또는 관념의 놀이, 즉 바현실 로의 무한한 탈출은 실은 프레시오지테 문학의 영원한 주제였던 것이다. 프레시오지테와 소설문학 우리는 서둘러 결론부터 이야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좀더 치분 히 들여다보기로 하자. 프레시오지테 문학과 관련하여 먼저 지적할 것은 가장 애호하는 장르로서 소설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프레시오지테는 프 랑스에 소설문학을 활짝 꽃피우게 했던 것이다. 아니, 재생시켰다고 말하는 것 이 더 옳다. 중세 로망과 16 세기 초 소설로 이어지는 전통을· 부활시켰디는 말 이다. 플레이아드 이후 문학의 비중은 시에 실렸던 것이 사실이고 바로크도 본 질적으로는 시 문학에 속한다. 그런데, 여기 1620 년대에 살롱의 출현과 더불어 소설의 바림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복고풍의 취향에 젖어 있던 사교인들은 중세의 기사적 삶을 동경하여 옛 소설들을 팀독했다. 랑부예관의 사람들이 가 장 애독했던 소설은 『아마디스』였는데 , 아르노 Arnaul c:P.:근 이 소설의 언어를 모 방하거 『라 미조레아드 la M ij oreade 』라는 건 산문체 이야기를 지어내기까지 했 다. 당시 의국문학의 대량 유입은 소설의 유행에 크게 한몫 거들었다. 기사적 영웅주의를 찬양한 스페인 소설가 페레즈 데 히타 Perez de Hit a 의 소설이 사 블레 부인의 애독서였다는 것은 이미 언급했다. 이른바 스페인의 피카로(혹은 피카레스크) 소설도 함께 소개되었는데 , 세르반데스 Cervan t es 의 작품이 프랑스

에서 번역된 것은 1615 년의 일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이탈리아 소설가들의 영 향도 잊을 수 없다. 1630 년에서 16 4 3 년에 걸쳐 비온디 B i ond i, 루카 아사리노 Luca Assarin o , 망지니 Manz i n i, 로레당 Loredan 등의 소설들이 번역되었다. 이에 앞서 반델로 Bandell @j 『 비극적 이야기 Hi s t o i res t ra giq ues 』 , 보카체 Boccace 의 『 피 아메 타 Fi ame t a 』 , 몽테 메 이 요르 Mon t ema y or 의 『 디 안느 la D i ane 』 등은 이미 전세기 말에 소개된 바 있다. 그런데, 이 무렵 소설에 대한 전반적 선호의 경향을 결정적으로 자극하게 될 한 경이적인 작품이 나타났다. 오노레 뒤르페 Honore d'U rf e( J 567-1625) 의 r 아 스트레 As t ree』 가 바로 그것이다. 장장 20 년에 걸쳐 {1608 - 1627) 씌어진, 총 5 천 페이지에 달하는 이 엄청난 소설은 한세기에 걸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 은 가히 기념바적인 작품이다. 이 소설은 일견 스페인풍의 전원소설처럼 보인 다. 아름다운 전원을 배경으로 젊은 두 연인들(목동 셀라동과 목녀 야스트레)의 사랑의 이야기를 펼쳐나간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화려한 의형적 전시 로써 우리를 사로잡는다. 작가는 광범하게 고대 또는 의국의 소설들로부터 수 많은 일화들을 차용함으로써 자신의 작품을 풍요하게 만들고 있다. 그것들은 대부분 각종의 모험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령 주인공이 사자 우리 속에 던져 지는 것과 같은 국단적 상황이 설정되는가 하면 초인간적인 용맹이 발휘되는 싸움이 장황하게 묘사되기도 한다. 또 때로는 주인공이 자신을 위장하여 신분 을 숨김으로써 환각적 모험을 살아가는가 하면 어느 순간 이 신분이 백일하에 드러남으로써 상황의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극적이고 현란한 의형을 통해 이 소설가가 우리를 꿈과 비현실의 세계로 이끌어가고 있는 점은 주목할 일이다. 중세 기사의 모험을 방불케 하는 이야기들은 우리를 마성적 세계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하다. 그곳은 불가능이 실 현되고 기적과도 같은 승리가 쟁취되는 경이의 나라이다. 뒤르페는 그러나 비 현실의 환각을 조성하기 위해 공상적 모험의 이야기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그 는 두 연인의 사랑이 펼쳐지는 무대로서 그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고장으로 우 리를 인도한다. 이 지방울 묘사하는 데 있어 그는 이를 데 없이 세밀하고 정확

하다. 마을의 옛 성채, 숲과 강 , 다리와 바위, 이 모든 것들은 작품 속에서 지 금도 간직하고 있는 이름들로 불리어져 있고, 그가 묘사한 산책의 길목들을- 더 듬어 따라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젊은 날의 추억과 뒤섞인 이 현실은 그의 붓끝에 따라 재생되면서 아독한 꿈과 환상으로 채색되고 우리는 어느덧 꿈과 현실이 뒤섞인 매혹의 땅에 들어선다. 작품 전체를 감싸고 있는 이 신비 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는 여전히 작품의 의형적 장치에 불과하다. 그것의 영원 한 그리고 유일한 주제는 사랑이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경향들이 메아 리치고 있는 듯한 이 방대하고 잡다한 총체에 어떤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도 이 사랑이다. 어떤 사랑 말인가. 한마디로, 사링에 갓 눈뜬 어린 남녀의 가슴속에 그 온갖 순수와 신선함과 함께 활짝 피어오르는 사랑이다. 우리는 이것을 〈 절 대적 사랑 〉 이라고밖에는 표현할 말이 없다. 이 사랑은 그것에 사로잡힌 마음을 온전히 지배하고 독섭하는 사랑스러운 폭군이다. 사실, 셀라동이 행하는 모든 모험과 초인적인 투쟁은 단지 사랑에 의해 인도된 것이며 결국 사랑의 한 표현 의의 다른 의미가 없다. 자신의 전존재, 전생명을 소진시키는 이 사랑을 셀라 동이 운명적인 것, 죽 신의 뜻에 의해 확정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이상 할 것은 없다. 〈 신이 그것을 원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롤 사랑하는 것은 운명 에 의한 것이니까……. >35 )그 러나 이 절대적이고 운명적인 사랑의 극치는 사랑 하는 대상을 거의 신과 동일시하는 일일 것이다. 이 점, 종교적 신비주의의 모 든 수사학과 은유들은 그대로 사링에 적용된다. 신과의 합체를 경험하는 신비 주의와, 연인과의 정신적 합체를 꿈꾸는 사랑의 신비주의는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셀라동의 절대적 찬양의 대상은 아스트레라는 이름의 여신이 다 . 그는 그녀를 위해 나뭇잎으로 지성소를 만들고 기도를 대신하여 시를 바친 다. 35) ( cite par J.-C . Tournand, 앞의 책, 61 쪽).

『 아스트레 』 에 대해 아직도 할 이야기는 많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 소설 의 형식을 통해 한 작가가 쌓아울린 꿈과 환상의 구조물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 치려 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순수와 절대를 향한 작가의 집요한 의지에 의 해 유도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홍미로운 것은 그가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는 데 있어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렸다는 사실이다. 소설은 그에게 하나의 선택된 공간-그가 마주치는 현실의 모든 감각적 • 육적 사물들로써 자신의 꿈과 지 향에 따라 또 하나의 세계를 빚어내는 공간이다. 이 세계를 그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 분명한 것은 현실을 마법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고도의 〈 관념의 놀이 〉 가 여기 개입한다는 사실이다. 모험소설과 영웅소설 『 야삭트레 』 이후 전원소설의 명맥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이른바 〈 모험 소설 〉 이 20 년 가까이 크게 유행했는데, 1620년 에서 1635 년에 걸쳐 이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될 만한 소설은 약 3~ 에 달한다. 이 경향을 대표하는 소 설가는 단연 공베르빌 Gonberv ill e 이었다. 당대 그의 명성은 대단한 것이어서, 라 퐁텐은 그의 소설 『 폴렉상드르 Pol exa, ndre 』 를 〈 수백 번 〉 읽었다고 실토하기 까지했다. 모험소설을 특징짓는 것은 주인공의 경이적인 모험을 이야기하되 역사나 전 설에 의거하는 대신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창안했디는 점이다. 물론, 이 소설 이 역사나 소설적 전통과 전적으로 안연을 끊은 것은 아니며 그렇게 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가령, 데 마레 DesMares t~ 『 아리안느 A ria ne 』 는 네로 황제 시대의 로마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공베르빌은 샤를르 9 세 , 루이 13 세 등을 아나그람을 이용한 명칭으로 36) 작품에 등장시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그는 그리스의 소설, 특히 헬리오드르 He li odor~ 작품에서 영감을 얻 36) Charles XI 는 Ce ri n th e 로, Lou i sXIII 와 Lu yn es 백작은 각기 S i uo[ 와 Sun i l 료」 불 리어진다.

어, 가령 『 에티오피아인들 E t h i o piq ues 』 에서처럼 폭풍, 난파, 해적 이야기, 처 녀들의 납치 등을 즐겨 자신의 소설의 에피소드로 삼았다. 중세 기사소설의 모 방도 간과할 수 없다. 그의 직품에 빈번히 등장하는 거인, 괴물, 방황하는 기 사들은 실은 기사소설 또는 『 아마디스 』 에서 빌려온 것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모방과 차용에도 불구하고 모험소설이 작가의 자유로운 창작 의 산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가 역사나 소설의 전통에서 빌려온 모 든 것들은 말하자면 그의 소설의 소재, 즉 그의 상상력과 환상에 의해 자유롭 게 변형되고 채색되어야 할 원료에 불과하다. 가령, 샤를르 9 세와 루이 13 세를 모델로 한 작중인물들은 프랑스가 아닌 이집트에서, 그리고 17 세기 초가 아닌 제르마니쿠스 .Germa ni cu 혁 시대에 살고 있는 것으로 설정된다. 한편, 중세소 설을 모방한 공베르빌은 본래의 마법의 세계를 더욱더 신비로운 것으로 만들어 간다. 그의 작품이 거듭될수록 이 신비와 경이로움에 대한 그의 취향이 강렬해 지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의 마지막 소설 『 시데레 Cy t heree 』 {1639) 에서 여주인공은 연인들이 끄는 커다란 조가비를 타고 파도 위를 거니는가 하면 아 락세스 Arax 逃를 사로잡고 있는 용을 격파하기도 한다. 이 소설들이 당대의 어떤 정신적 분위기, 죽 강렬한 감동, 경탄과 찬양에 대 한 욕구, 비범함과 영웅주의에 대한 취향 그리고 신비의 동경 등에 호응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거의 동일한 시기에 연극계를 휩쓸었던 이른바 〈 비희극 tra gi -c omedi e> 가 운데서 동일한 상황과 동일한 주제들을 발견하는 것은 우연 한 일이 아니다. 공베르빌의 소설을 애독한 독자와 전원극이나 로트루 Ro t rou, 스퀴데리, 코르네유의 연극에 갈채를 보낸 관객은 동일인이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모험소설의 한 역설적 진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 다. 이 소설은 그것의 복고 취미와 비현실성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인들의 감정 과 관념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의견상 디른 시대에 속해 있고 이제는 흘러간 관념과 꿈에 젖어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의양 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기사의 의모 속에 당대 사교인들의 섬세함을 지 니고 있다. 여주인공의 경우는 한결 두드러진다.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모험소

설冷 7 통해 동시대인들이 소중히 여겼던 정신적 가치와 신화들을 접할 수 있다 는 것은 홍미로운 일이다. 모험소설이 이른바 〈 영웅소설 roman hero iq ue 〉 에 대치되는 것은 1640 년대 의 일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점에서 후자는 전자의 한 연장이라 볼 수 있다. 다같이 영웅들의 모험을 다루고 있는 점에서 양자의 주제는 거의 동일하다. 또 한 영웅소설이 과거의 소설적 전통에서 영감을 얻고 있는 점에서도 모험소설과 같다. 우리는 그 안에서 폭풍과 해적, 납치와 변장, 죽은 줄 알았던 사람들의 귀환 등 헬리오도르가 즐겨 사용했던 주제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영웅갚達}은 분명히 전세대의 소설적 공상적 경향을 충실히 이어받고 있다. 문제는 이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양자를 구별짓는 것은 모험소설이 순 전한 공상적 산물인 데 반해 영웅소설은 역사를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다. 소 설가들은 역사에서 인물들을 빌려왔는데, 이 인물들의 행동양식은 상식의 범주 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소설에서 거인, 괴물, 마법과 같은 초자연 적 경이는 거의 지취를 감추었다. 우리는 조금은 과장하여, 당시 사람들에 의 해 존중되기 시작한 〈 이성의 한계셔t 지키려는 어떤 신중함을 이 소설가들에게 서 감지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 점, 영웅소설의 출현이 비극의 출현과 거의 때를 같이했다는 사실은 우리 의 주목을 끈다. 아니, 우리를 놀라게 한다. 왜냐하면, 영웅~ 여전히 공 상과 황당함으로 가득 차 있으며 따라서 비극이 지향하는 가치들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새 소설가들에게서 〈 진실다움 la vra i semblance 〉 에 대한 그들 나름의 관십을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전세대의 모험소설에 대해 〈전실성도 명확성도 시간관념 도 〉 결여하고 있다고 비난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물론, 이들이 〈전실다 움 〉 에 대해 매우 독창적인 해석을 했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들은 사실과 역 시에 대해 자유로운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그들이 관심을 기울인 대상은 주인 공들기 실제로 〈 이룬〉 행동 그 자체가 아니라 〈 이룰 수도 있는〉 행동, 죽 그렇

게 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행동이다. 그들 은 사실로서 이루어진 일들을 기록하는 대신(이것은 역사가들의 몫이다) 어떤 특정한 인물(대개의 경우 특출한 자질과 강인한 성격을 지닌 영웅들)에 의해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는 일들을 상상하고 창조해 낸다. 말하자면, 그들의 대상은 〈 진실 〉 그 자체가 아니라 〈 진실디움 〉 이며, 〈 현실 〉 이 아니라 〈 가능성의 공간 〉 이다 . 3 7 )

37) 〈진실다움 〉 의 원리에 대해서는 제 4 장의 <3고 전주의 이론 〉 에서 상세히 논하게 될 것이 다.

만약 이러한 관점이 옳다면 영웅소설을 당대의 지배적인 다른 양식들 , 즉 비 극과 서사시에 대항하는 것으로만 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새 소설가들은 비 극이나 서사시에 못지않은 위엄을 획득하기를 영원했었다. 가령, 스퀴데리는 영웅소설을 산문체로 된 서사시로 간주했는데, 그는 소설의 목적을 〈 위대하고 찬란하고 완벽한 행동의 모방 〉 38) 에 두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소설의 형식을 빌려 비극을 쓰기를 바랐던 셈이다.

38) ( cite pa r A. Adam, 앞의 책, 14~ 합.

여기 미학적 규칙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비극을 쓰는 데 적용되어야 할 규칙들이 있다면 이것들은 비극을 소설로 쓰는 데에도 적용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 진실다움 〉 에 대해 방금 언급했다. 여기 문제되는 것은 이른바 〈 단일 un it es 〉 의 규칙들이다. 1642 년 『 카상드르 Cassandre 』 로서 영웅소설의 시작을 알린 라 칼프르네드 La Cal p rened~ 근 이 단일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이다. 소설의 주제는 〈 하나 〉 이어야 하고 도입되는 모든 삽화들은 엄밀히 이 하나의 사건에 종속되어야 한다. 39) 시간도 〈하나 〉 이어야 하고 1 년을 넘어서지 않아야 한다. 장소도 〈 하나 〉 이어야 하고 소 설가는 모든 기교를 다하여 사건이 한 장소에서 전개되도록 조정해야 한다.

39) Scudery , Ibrahim , pre fa c e : (--·u ne acti on pri n ci p a le oil tou te s les autr es sont atta ch ees, e t q ui f ait qu' elles n'y s ont e mp lo y ee s que po ur la conduir e a sa per fe c ti on .... >

고전극의 주된 개념과 규칙들이, 여기 문제된 영웅급과i을 통해 이야기된다는 것은 정녕 놀랍기만 하다. 그러나 1630 년대에서 16 4 0 년대에 걸쳐 고전극의 이 론적 정립을 위한 갖가지 시도들이 활발히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그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당시 소설은 사회적 • 문화적 상황의 변 화를 배경으로 새로이 부상한 장르로서 스스로를 정의하고 자신의 입지를 탐색 하며 규칙을 수립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설가들과 소설 이론가들 은 비극의 이론과 만났고 그것들을 대부분 수용했다. 적어도 이론의 면에서 영 웅소설이 독창적인 기여를 한 것은 없을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고전주 의로 향하는 길목에서 이단자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폭으로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영웅소설, 나아가서는 보다 광범하게 프레시오지데의 소설과 관련하 여 미학적 이론의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이 소설의 경우 이론과 실제 사이에 상당한 괴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 다.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들을 존중하려는 의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상적 주제들로 넘쳐 있으며, 〈 전실디움 〉 의 추구에도 불구하고 〈 진실답지 않음 〉 으로 채워져 있다. 가령, 여기 스퀴데리의 이름으로 씌어진 『 그랑 시뤼스 Le g rand Cy rus 』 의 경우가 있다. 1649 년부터 발표되기 시작한 이 일련의 소설들은 라 칼프르네드 가 이미 제시했던 모델에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문제되는 것은 동일한 공 상적 주인공, 동일한 사랑의 개념, 동일한 사건의 전개 방식 등이었다. 그런 데, 1651 년 10 월에 발표된 제 5 권에서는 페르시아인의 이름으로 스퀴데리 부인 의 친구들이 묘사되기 시작했고 그 후 이 새로운 서술양식은 책을 거듭할수록 확고해졌다. 소설에서 사건, 다시 말해 소설적 요소는 점차 자취를 감추고 대 신 랑부예 부인, 샤프랭 콩라르, 사블레 부인 등 사교계 명사들의 초상화와 신변 이야기들이 판을 쳤다 .40) 뒤이어 1 권의 『 끌레리 Clel i e 』 가 발표되었는데, 40) George s de Scude ry에 의해 씌어지기 시작한 Le gra nd Cy rus는 제 5 권부터는 그의 누이 Madelein e de Scuder y에 의해 씌어진 것으로 믿어진다.

그것들은 한결 분명하게 당대 프랑스 상류 사교계의 묘사로 채워졌다. 여기 등 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로마인이나 그리스인의 이름으로 불리어졌지만, 그들 가 운데 라 파예트 부인 Mme de Lafa ye tt e, 세비녜 부인 Mme de Sevig ne, 푸케 Fouc q ue t와 같은 명사 그리고 토요회의 문인들, 펠리송 사라쟁 등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들은 살롱에서 서로 만나 삶에 대해, 윤리와 예절에 대 해, 사랑과 문예에 대해 끝없는 대화를 나누었고, 이 만남과 대화에 있어 우아 와 재치와 세련된 화법을 한껏 과시했다. 이 소설들은 1650 년을 전후하여 아마도 · 절정에 달한 프레시오지테의 진수를 우리에게 감지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소설 양식에 관한 한 우리는 이 소설 들의 비현실성과 인위성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설을 읽고, 그 안에서 문제된 이야기들이 실제로 로마에서 일어나고 주인공들이 브루터스와 동시대인 둘이라고 인정할 독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미 당대에 몰리에르의 『 우~평­ 스러운 재녀들 』 에 의해 , 그리고 브왈로의 『소설 주인공들의 대화 le Dia lo g ue des /zer os de roman 』 에 의해 영웅급격i의 공상과 황당무계함은 세기의 웃음거 리로 제공되었다. 이들에 앞서 1656 년에는 한 젊은 소설가 스그레 Se gr a i S7} 그의 『누 벨 프랑세즈 Nouvelles fr an f a is es 』 의 서두에서 영웅쇼후}에 대해 신랄 하게 비판한바있다. 영웅주의•사랑•숭고함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해 잠시 후에 다시 언급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여기 우리의 관심의 대상은 이 소설가들이 그들의 작품을 통해 달성하려 했던 순수 히 문학적인 야심이 아니라(이것은 그들에 있어 차라리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들이 작품 가운데 그들 특유의 수사와 기교를 다하여 그려놓은 어떤 특정한 삶의 모 습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한 시대의 꿈과 이상과 신화들이다. 시실, 우리는 여러 곳에서 이것들에 관해 꽤 깊이 있게 언급했었다. 굳이 한마디로 요약하라 면 그것은 영웅주의와 사랑이 지배하는 기사적 세계와 관련된 것들이다. 한편 에 인간과 그의 삶에 대한 이상주의적 개념이 있고 또 한편에 신비주의에까지

고양된 사랑의 관념적 유희가 있다. 그러나 이 양자는 각기 독립된 두 개의 축 울 이루는 대신 그들의 삶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하나의 통합을 이룬다. 영웅들 의 모험은 사랑의 행위의 한 연장이고 사랑의 고귀함은 인간의 고귀함을 요구 한다. 양자는 다 같이 자연과 육체를 뛰어넘어 어떤 숭고함을 지향한 점에서 하나로 용해되어 있다. 여기 숭고함 le sub li meo] 란 말은 우리가 간간이 사용해 왔던 밀들, 죽 이상주의, 관념주의 또는 신비주의 등을 통합하기에 가장 적절 한 표현이다. 다시 한 번 결론적으로 말하자. 프레시오지데의 소설 (그리고 문 학)은 인간의 감성, 사고, 행위, 죽 인간의 삶전체 속에서 숭고함을 추구한 다. 이 추구에 있어 프레시오지데는 과거로 시선을 돌렸고 그 안에서 모델을 찾 았다. 중세는 이 문학이 가장 선호한 영감의 원천이었고 급기야는 고대까지도 관심의 대상 속에 편입되었다. 또한 이 문학은 과거를 재현하는 데 있어 역사 를 존중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외양에 속아서는 안 된다. 소설 속 에서 그려진 역사의 인물들은 실제의 시뤼스, 아르미니우스 A rmini us, 베르셍 제토릭스 Verc i n g e t or i x와 닮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그들은 당대의 프랑스인들에게 낯익은 당대의 영웅들, 그랑 콩데 Grand Conde 나 드 기즈 백 작 le due de Gu i s 려 이미지에 더 가까웠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소설들 이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실은 그 시대의 이상과 꿈을 이야기했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일차적으로 당시 모호한 상황에 처해 있던 젊은 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상승하는 사회계층으로 새롭게 부상하기 시작 한, 그리고 보다 자유롭고 화려하고 위엄 있는 삶을 희구한 부르주아들이 미지 의 경이로운 세계를 펼쳐 보여준 이 소설에 현혹을 느꼈으리라는 것은 추측하 기에 어렵지 않다. 이 소설이 그려 보여준 경이로움의 중심에 자리잡은 것은 물론 사랑이었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영웅주의도 사실상 사랑의 한 변주에 불과하다. 영웅 소설이라 불리어지는 소설 속에서 사랑이 주된, 유일한 주제로서 군림하고 있 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적어도 프레시오지테의 문학에 있어 사랑은 영웅주

의와 함께 인간의 숭고함을 지향하는 점에서 자연적 감정의 범주와 결별한다. 오노레 뒤르페는 이미 사랑의 감정이 감각적 범주를 뛰어넘어 인간의 고귀함, 나아가서는 신비주의와 어떻게 합체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 바 있다. 이 사랑의 개념은 그 후 계속 이어지고 심화되었다. 그러나 소설 속의 중세적, 전원적 배 경이 사교적 배경으로 변해 감에 따라, 다시 말해 프레시오지테가 사회적 삶의 특정한 양식으로 자리잡게 되는 데 따라 사랑의 개념에도 미묘한 변화가 일어 났다. 물론 그것은 본질 자체의 변화는 아니다. 다만, 관념의 놀이로서의 사랑 은 보다 인위적이고 고도로 세련된 것이 될 것이다. 소설들은 앞을 다투어 이 사랑의 놀이의 전형과 같은 것을 제시하려 했고, 사림들은 새로이 제정된 코드 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려 했다. 이 코드 속에는 사랑받는 여인들이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위시하여 사랑의 감정이 통과하는 온갖 미로와 굴곡, 사랑하는 사 람]게 요구되는 덕목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 사 랑의 지형도 〉 41)는 사실상 지극히 관례적인 것이었다. 문제는 이 상두적인 툴 속에서 여하히 자신의 독창성을 발휘하느냐에 있다. 왜냐하면, 프레시오지테의 본령은 바로 자신을 타인과 구별짓게 하는 것, 자신의 독창성을 과시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41) Clelie 속에 나오는 유명한

사랑이 정신의 뛰어난 놀이가 되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이것은 일차 적으로 표현의 놀이라 할 수 있다. 밀하자면, 틀에 박힌 구도를 사용하되 약간 의 변형과 특이한 색조로써 독창적인 그림을 그려내는 것과 같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랑의 표현은 은밀한 개인적인 것으로 머물 수는 없었다. 사랑의 편지와 찬사들은 사교계의 한 관례로서 공개되어야 했고 즉각적으로 사교인들의 논평 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들이 사랑에 대한 관심을 통해 인간 내면의 심연에 점차 끌려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놀이가 다분히 관 념적이고 기교적이라는 것은 인정하기로 하자.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화려한

수사학 뒤에 아무런 진실성도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경솔한 판단이다. 그들의 사랑의 감정들은 독창적으로 전시되기 위해 인위적으로 위장되었을 뿐 감정 그 자체까지도 인위적이거나 위장된 것은 아니었다. 만약 우리가 이 의양에 속은 나머지 그 내면에 숨겨진 감정의 진실 (혹은 진실의 편린들)울 보지 못한다면 프 레시오지데의 참의미는 영영 깨닫지 못할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 이 내 면의 진실들은 자연적으로 그리고 직설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것들은 반대로 관념적 유희의 형식을 통해 그리고 세련되고 화사한 수사학의 겉옷으로 단장되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을 사랑의 심리학 또는 내면의 신 비, 그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 어쨌든 프레시오지테의, 놀이를 통한 인간 내면과의 우연한 만남은 앞으로 보다 진지하고 계산된 탐구에 자리를 넘겨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우리는 이 시대의 소설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측 면에 참시 주목하려 한다. 그것은 다분히 사실적 경향의 소설들의 출현이다. 풍자소설 또는 뷔르레스크 우선 한 가지 변명부터 하기로 하자. 여기 문제된 소설은 모든 점에서 상술 한 프레시오지데 소설과 대립되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는 프레시오지데와 다 른 항목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관례이다. 그것은 혼히 뷔르레스크 leburles q ue 또는 레아리슴 소설이라는 명칭하에 독자적인 장을 이룬다. 우리가 여기서 프 레시오지테의 테두리 안에 이 소설을 포함시키는 것은 이와 같은 관례에 도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이 소설이 기존의 소설들과 확연히 구별지어진 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이 소설에 대한 관례적인 호칭을 그 대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우리는 고찰의 편이와 효과를 위해 프레시오지데라 는 동일한 문화적 구도 속에 양자를 병치시키려고 한다. 왜냐하면, 거의 동시 대에 나타난 상이한 두 형태의 소설들이 동일한 사회적 • 정신적 상황에서 태어 났다는 것은 확실하며, 이것들을 대비시킴으로써 우리는 각각에 대한 이해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양자 사이의 명백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공유하고 있는

상당한 부분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이것들 가운데 때때로 동일한 주 제들, 유사한 인물들을 발견한다. 가령, 여기 자유 연애의 개념이 있다. 이 개 념에 의하면 연애는 결혼과 엄격히 구별지어지는데, 결혼이 예속과 권태만을 낳는다면 연애는 자유와 삶의 참된 쾌락을 보장하는 것이 된다. 사회적 안습으 로서의 결혼을 거부하고 사링에 있어서의 자유를 찬양하고 추구했던 당시 상류 사회의 일반적 경향은 『 아스트레 』 에서 『 끌레리 』 에 이르는 관념적 소설에서나 여기 문제되어 있는 사실적 소설에서나 동일한 주제를 이루고 있다. 또한 당대 지식인들의 한보편적 유형이라 할 리베르펭Ii ber ti~본 이 두 소설 속에 한결같 이 모습을 드러낸다. 『 아스트레 』 속의 일라스 H y la s2} 『 프랑시옹의 익살스런 이야기 Hi st o i re comi qu e de Fran ci a~』 의 주인공 프랑시옹은 바로 리베르팽의 전형으로서 두 사람은 마치 한 핏줄의 두 형제와도 같다. 그러나 두 소설 사이의 차이는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것들은 세계를 각기 다 른 방식으로 접근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상반된 인식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 다. 우리는 앞서 전원소설에서 영웅소설에 이르기까지 기사적 이상과 사랑을 주축으로 한 공상적 세계가 그것들 속에 어떻게 구현되었는가를 확인하기에 주 력했었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기에 이러한 공상적 경향을 바판하고 거부하는 또 다른 시도들이 계속 이어졌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사실, 이 시도들은 17 세기 전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 기원은 멀리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가 고 또 그 이후의 문학 속에 그 파칭을 증폭시켜 나갈 것이다. 현실에 보다 충 실하고 그것들을 미화하거나 관념화하는 대신 그것들의 전실성 속에서 재현하 려는 이 사실적 경향은 말하자면 문학의 영원한 또 하나의 얼굴인 셈이다. 어쨌든, 여기 프레시오지테에 대항하는 일단의 소설가들이 있다. 그들이 기 존의 귀족 소설을 거부하는 이유들은 조금씩 디를 수도 있다. 이 소설을 순전 히 상상의 혹은 환상의 산물이라고 비판하는가 하면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에 대한 인위적인 조작을 바난한다. 도비냑 abbe d'Aubig na C3 !}-같 은 비평가는 이 인물들의 심리적 묘사가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단조로움을 지적하면서 〈 모방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인간들, 항상 고매한 인간들, 항상 충직하고 모든 종류의 뛰어남에 있어서 완벽하고 홈잡을 데 없는 연인들 〉 만을 보여주는 데 대해 진력 이 난 나머지 차라리 〈 못된 인간의 모습 〉 이라도 보고 싶어진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42) 소설 작법에 관한 비판도 큰 몫을 차지했다. 부자연스럽고 비현실적인 소설적 상황의 설정을 비롯하여 장장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고백의 이야기라던 가 엿들은 대화를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고스란히 옮겨놓는 것 따위는 황당한 것으로여겨졌다.

42) ; (cite par A. Adam, 앞의 책 , 15~) .

요컨대, 이 소설들은 이야기의 내용에 있어서나 그것을 꾸려나가는 방식에 있어서나 그 전실성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것들이었다. 이에 대항하는 새 소설들이 〈 전실다움 〉 의 기치를 높이 들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이 소설에 시실적 rea li s t eo] 라는 수식어를 붙이고도 싶어 진다. 실제로 이것들은 그렇게 불리어지기에 합당한 요소들을 상당히 내포하고 있으며 엄밀히 레아리슴 소설로 분류될 만한 작품들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아 당은 1627 년에 발표된 앙드레 마레샬 Andre Mareschal 의 『크리조리트 Ch rysol it e 』와 1648 년에 나온 샤를 소렐 Charles Sorel(1600-1614) 의 『 폴리앙 드르 Poly andre 』 , 단 두 권의 소설만을 순수한 레아리슴 소설로 인정하고 있 다. 이에 덧붙여 그는 카뮈J ean-P i erre Camu 혀 일련의 소설에 대해서도 언 급하였는데, 이 작품들은 당대의 현실적 삶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묘사로서 레 아리슴에 꽤 근접한 것이었지만 사건의 소설적이고 허구적인 구성으로 말미암 아 이 사실적 요소들이 무색해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만약 아당의 관점이 정당하다면 여기 문제되어 있는 소설들을 레아리슴으로 규정짓는 것은 부적합한 일이 될 것이다. 새 소설들이 기존의 소설 양식의 비 현실성과 비사실성에 반기를 들었고 그래서 현실에 접근하기 위해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시도가 곧 전정한 의미에서의 레아리 슴 , 다시 말해 사실 (또는 진실)의 존중, 그것들의 충실한 재현으로 요약되는 레 아리슴을 실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확실한 것은 새 소설이 기존의 소설을 거 부했다는 것, 그것의 공상적 허구성, 전통적 주제들, 구성과 서술의 방식들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구소설의 풍자, 이른바 반소설 an it roman°l 다. 여기 희한한 제목의 한 소설이 있다. 16 2 71,반에 발표된 샤를 소렐의 『 엉뚱한 목자 le Berge r ex t rav aga n t JJ 가 바로 그것이다. 이 소설은 1633 년도판에서 『 반 소설 또는 목동 리지스의 이야기 L'An ti -roman ou l'his toir e du berge r Ly - s is 』 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 소렐의 의도는 명백하다. 그는 목동의 이야기를 하되 종래의 전원소설과는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하겠다는 것이고 그래서 〈 반소 설 〉 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는 전원소설 특유의 환상적인 장치를 거부하지는 않 는다. 이것은 전원소설의 기본적 틀이며 이것 없이는 이 소설이 성립될 수 없 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이 의형적 틀을 빌려, 종래 그토록 고양되었던 플라토 닉한 사랑을 희화화하고 이로써 전원소설의 허구성을 폭로하려 했다. 반전원소 섣 그리고 사랑의 신비주의의 패러디p arod i e __- 소렐이 겨냥한 것은 그 이상 도이하도아니었다. 당대의 반귀족적, 반관념적 경향의 소설들의 특색은 이상과 같다. 끝으로 우 리는 이것들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세기의 걸작으로 인정되는 두 소설에 대해 참시 주목하고자 한다. 여기 먼저 소렐의 『 프랑시옹의 익살스런 이야기 』 가 있 다. 1623 년에 발표된 초판의 경우 주제의 대담성과 묘사의 적나라함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43) 과거 또는 주변의 문학과의 연계하에서 이 소설이 받은 영향의 흔적은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스페인의 이른 43) 그 후 1626 년과 1633 년에 재판, 3 판이 나왔는데, 여기에는 많은 부분이 수정되고 삭제 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의 이러한 신중함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를 짐작 게한다.

바 피카로 소설의 영향일 것이다. 바록 주인공 〈 프랑시옹冷든 피카로 소설에서 와 같이 거렁뱅이는 아닐지라도 모험가로서의 그의 행적들은 상당히 유사한 궤 적을 그려나간다. 또한 파란만장의 한 생애를 구실삼아 사회의 구석구석과 온 갖 계층의 삶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며 그것들의 풍자적 그림을 그려 보여주는 수법은 당시 유행했던 신라틴파 소설들을 연상케 한다. 한편, 그의 대담하고 노골적인 묘사들은 세기초의 풍자소설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소렐은 엄청난 독서가로서 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 니라 두 권의 비평적 작품을 44) 쓰기까지 했다. 그의 소설 가운데 그가 익히 알 고 있었던 모든 소설적 전통의 어떤 것들이 다소간 반영되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없다.

44) Ch. S orel, la Bib li ot h eq u e fran ta i se ( I 664) ; De la connaiss an ce des hons /ivre s(I6TI}.

그러나 그의 개인적 의도는 분명하다. 이 소설은 일차적으로 당대의 사회가 사로잡혀 있던 모든 신화들의 허구성을 폭로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이것을 가리켜 〈 감상적 소설들의 우--0}하고도 관념적인 영감에 대항하는 반항의 의 지 〉 4 5 ) 라고 표현한 사람도 있다 . 인간의 위대, 용기 , 성실, 헌신, 절대적 순종, 이 모든 숭고함과 아름디움을 조롱거리로 만드는 이 소설은 한마디로 영웅소설 의 패러디와 같은 것이다. 이 패러디를 위해 대조적으로 부각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인간의 진부함과 추악함아다. 대귀족들은 허영의 덩어리이고 어 리석으며 부르주아 귀족들은 탐욕스럽고 파렴치하다. 위마니스트들은 어리석은 현학자일 뿐이고 여인들은 의견상 고상하고 순수한 사랑놀이 속에서 육욕에 탐 닉한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오직 야망과 탐욕과 쾌락의 법칙뿐이다.

45) Jea n Serroy et J . -P. Coll ine t, R omanc iers et c onte u rs du XVlles ie cl e, 6~.

이렇듯 , 『프랑시옹 』 은 풍자적 소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여기 주목할 것은 이 풍자가 단순히 풍자로만 끝나지 않고 한 시대에 대한 사실적 관찰과 재현의 기회가 되었다는 점이다. 『 프랑시옹』 가운데 전정한 레아리슴으로 평가될 만한 부분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소렐은 놀라운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관찰한 것을 생동하는 진실성 가운데 재생시키는 박력 있는 문체를 가지 고 있었다. 시골 귀족의 유년시절, 파리 학생들의 학교 생활, 서점에서 주고받 는 문인들의 이야기, 살롱에서의 사교인들의 대화 등이 환기될 때 우리는 이 시대의 생생한 풍속도를 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감 있는 묘사의 문학적 가치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사실적 풍속도, 재현의 문학적 기교 이상의 것이 있다. 소설가가 관찰하고 묘사한 모든 것은 하나의 영속적인 주제, 더 정확하게는 하 나의 철학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프랑시옹은, 그리고 소렐 자신은 분명히 리 베르팽이며, 이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매우 공격적인 자유사상 li ber­ ti na g eo] 다. 그러나 이것은 놀랍게도 하나의 귀족적인 덕목을- 수반하고 있다. 소렐 자신 〈고매함g eneros it e 〉이라 부른 덕목 말이다. 저속한 야심과 추잡한 탐욕에 대한 협오, 삶에 있어서의 자유에 대한 신념으로 요약되는 이 〈고 매함 〉 은 사실 우리에게 낯선 것은 아니다. 우리는 거의 같은 시기에 데카르트에게서 이 말을 들었고, 코르네유에게서도 듣게 될 것이다. 아니, 우리가 문제삼았던 프레시오지테에 있어서도 비록 표현과 추구의 방식은 다를지라도 범속을 뛰어 넘으려는 동일한 귀족적 정신의 놀이를 확인한 바 있다. 사람들에게 〈 신들처럼 살기滑 가르치려고 했던 소렐은 실은 프레시오지데에 등을 돌리고 정반대의 길로 떠나갔지만 기나긴 우회 끝에 동일한 정신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아닌 지 모른다. 처이가 있다면 프레시오지데가 여성적이고 관념적인 놀이인 데 비 해 소렐의 모랄은 매우 전투적이고 비판적이다. 적어도 소렐의 경우 풍자적 사 실적 경향의 소설들을 프레시오지데의 큰 테두리 안에서 고찰한 우리의 입장은 정당화될수있다. 여기 또 하나의 괄목할 만한 소설, 스카롱 Scarron(1610-1660) 의 『배우 이야 기 Roman com iq ue 』가 있다. 이 소설은 『프랑시옹』에 견줄 만한 것은 못 된 다. 풍속의 묘사는 피상적이고 특히 사상의 대담성 따위는 찾아보기 힘들다. 소렐이 『프랑시옹』을 쓸 무렵 누렸던 어떤 사상적 자유는 세기 중엽에 이르러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배우 이야기 』 는 활기에 넘친

서술, 각 장면들의 묘사의 다채로움, 문체의 탁월함으로써 가히 당대의 걸작 중의 하나로 손꼽히기에 손색이 없다. 이 소설도 『 프랑시옹 』 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풍자적 소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유의 소설에 대해 흔히 〈 뷔르레스크 〉 란 이름을 붙인다. 등장인물들은 서 민 또는 하천민이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거칠고 천한 속어이며 그들의 행 동은 난폭하고 상스럽다. 특히 난장판의 연속과도 감은 그들의 일상적 삶은 중 세의 ~l j 〉 에서와 같이 익살스럽게 그려진다. 17 세기 중엽 유행의 절정에 달 한 이 예르레스크 〉 의 흔적은 스카롱의 소설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소 설의 주요 인물은 떠돌이 극단의 배우들로서 지방 각지를 전전하는 이들은 가 는 곳마다 소란을 벌이며 상소리와 주먹을 주고받는다. 서로 뒤엉켜 벌이는 난 두극, 부어오른 눈, 피투성이의 얼굴, 주고받는 고함소리와 절규 등의 묘사는 관찰에 근거한 충실한 사실적 재현 이상의 것이 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스카롱이 노린 것도 결국 영웅소설의 패러디이다. 그의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뷔르레스크 서사시 속에서 익살스럽게 묘사 된 영웅들과 신들의 싸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스카롱은 이 희극적 모험들을 소설 속에 옮겨놓은 것이나 다름없으며 떠돌이 배우들의 이야 기는 실은 떠돌이 기사들의 모험의 희회이다. 그의 패러디는 여기서 그치지 않 는다. 그는 라 칼프르네드의 소설을 비웃으며 그 안에 그려진 사랑의 열병을 웃음거리로만든다. 그렇다고 스카롱의 소설을 뷔르레스크만으로 규정짓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 는 여기서도 단순한 풍자 이상의 것들울 발견하기 때문이다. 스카롱이 공상적 경향의 스페인 소설을 몹시 애호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소 설 속에 네 편의 스페인 소설의 번안을 삽입하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공상 적 • 신비적 문학의 전통적인 주제들, 가령 우연한 만남과 요행, 납치, 결투와 칼싸움 등과 같은 것도 그의 소설 속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그 안에서 두 차 례에 걸친 긴 사랑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이 소설을 모든 소설적인 것에 대 한 풍자로서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우리는 『프 랑시옹 』 에 적용했던 동일한 관점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 프 랑시옹 』 과 『 배우 이야기 』 는 분명히 풍자적 소설이며 프레시오지테 문학의 패러 디이다. 그러나 프레시오지데와 풍자소설은 동일한 사회적 • 문화적 풍토에 뿌 리를 내리고 있다. 다만 각기 선택한 관점과 접근방식의 차이로 말미암아 각기 다른 색깔로 세계를 채색했던 것뿐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양자가 공유하는 공통의 풍토로 인해 그들이 부지불식간에 서로 교차하게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 시대의 배다른 두 형제는 매우 첨예하게 대립하면서도 이따금 정신의 동일한 기류에 함께 몸을 담는다. 프랑시옹은 〈 고매함 〉 이라는 귀족적 모랄을 통해, 그리고 『 배우 이야기 』 에 있어서는 해학적 정신에도 불구하고 끝내 청산 하지 못했던 공상적 취향을 통해서 말이다. 이 사실은 프레시오지데로서 대표 되는 17 세기 전반기의 정신적 풍토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그리고 그것이 당대 의 사람들의 의식 속에 그 어떤 위력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충분히 침작게 한다• 고전주의 시대의 소설 끝으로 우리는 고전주의 시대의 소설, 특히 라 파예트 부인 Mme de La- fay e tt e{l634-1693) 의 『클 레브 공주 La Pri nc esse de Cleves 』 에 대해 간단히 언 급하려 한다. 아마도, 우리는 프레시오지테 문학이 문제되는 이 장에서, 이 소 설에 대해 논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에 대해 먼저 딥해야 할 것이다. 그 녀가 최초의 소설 『자 이드7.tifd e 』 를 두 부분으로. 니누어 발표한 것은 1669 년과 1671 년의 일이고, 『 클레브 공주』 를 내놓은 것은 1678 년의 일이다. 이 연대는 분명히 고전주의 전성기에 해당하며, 사실상 『 클레브 공주 』 에는 오랫동안 고전 주의 소설의 꼬리표가 붙어왔다. 이 소설에 대한 이와 같은 판정은 단순히 발 표연대 때문만은 아니다. 작품을 특칭짓는 여러 요소들, 가령 주제의 단순성, 내적 세계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과 섬세한 심리분석, 의적 사건의 최소화, 절 제된 문체 등은 그것을 고전주의 문학에 귀속시키기에 충분한 것으로 간주되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자리에서 굳이 이 소설을 다루려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로 프레시오지테가 1660 년 이후 이른바 고 전주의 시대에 이르러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프 레시오지테는 루이 14 세 시대에 여전히 명맥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측 면에서는 매우 왕성하게 표현되기조차 했다. 몰리에르는 165911 『 우스꽝스러운 才女들 』 을 발표하여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당대의 사회 속에 프레시오지테가 어 떤 형태로 현존했었는가를 증언했다. 물론 그의 작품 속에서 프레시오지테는 웃음거리로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당대의 교양인들의 취향, 양식 bonsens 에 입각한 규범에 어긋나는 것으로써, 몰리에르가 이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 졌던 것은확실하다. 프레시오지테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타인과 구별되는 독창적인 존재로 현 시함으로써 주위를 압도하고 매료하기를 지향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기 전 시 또는 과시의 기술이며 이 점에서 바로크와 맥을 같이한다. 루이 1 때]의 절 대왕정 시대에 비록 사교의 중심은 궁정으로 옮겨졌다 할지라도 사교생활의 영 원한 속성인 프레시오지테는 여전히 유효했다. 아니, 절대왕정의 스타일 자체 가 바로크적이고 프레시의하다. 절대군주가 추구한 것은 위대와 위엄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감각적으로 감지될 수 있도록 현시되어야 했다. 마치 영적인 성스러움이 시각화되고 형상화되기를 바랐던 것처럼, 그래서 반종교개혁의 열 기를 타고 바로크 예술이 등장한 것처럼, 왕들도 자신의 권력과 위대가 장엄한 형상과 이미지로 구상화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그들은 도시를 세우고 길을 닦고 궁전을 짓고 정원을 가꾸고 또 극장을 지었다. 〈그는 그것들이 자신의 위 대와 버금가는 것이기를 바랐고, 그것들 속에서 자신의 권력의 감각적 이미지 롤 읽기를 원했다. >46 ) 이것은 옳은 말이다. 고전주의의 많은 것들은 사실상 이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모든 것이 왕의 위대에 버금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46) Jea n St a robin sk i, L 'inv enti on de la ltbe rt e, Skir a , 1964 : <... iJ Jes veut a la mesure de sa gran deur, ii veut y lire !'ima ge sensib l e de son pou voir > (cite in XVII 오 XVIII sie c les, Magn a rd, 1 쭉) .

고 말할 때 그것은 문학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비극의 주인공이 제왕과 영웅 들로 구성되는 것은 당연하고 그들이 바범한 운명을 살아가는 것도 당연하다. 희극도 소극의 차원을 뛰어넘어 아른바 〈 대희극gr ande comed i e 〉 이 되어야 하 고 웃음마저도 위엄과 진지함이 갖추어져야 한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베르사유 궁전 안에서 공연될 때 이 궁전의 장엄함과 화사함과 균형을 이루어야 했고, 이 궁정의 뜰에서 공연될 때 이 환상적 공간에 부합된 것이어야 했다.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며 마치 신처럼 만물 위에 군림했던 루이 14 세의 시대에 모든 것 은 그로 말미암아 존재했고, 그를 반영하는 거울로서만 인정됐다. 권력의 화려 한 자기 전시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시대는 확연히 구별되는 고전주의적 특성 과 덕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로크와 프레시오지테의 여운을 깊숙이 간직하 고있었다. 한 시대의 복합성이란 이런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하나의 주도적 원리의 도식 으로 한 시대의 모든 것울 재단할 수 있기를 원한다. 논리적 명석성과 투명에 대한 우리의 지적 갈망은 우리를 그렇게 인도한다. 그러나 현실은 혼미하고 불 두명하며 우리의 도식화를 비웃는다. 루이 14 세 시대의 많은 것들은 분명히 고 전주의의 도식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단순, 절제, 규율, 경허와 같은 덕목들 은 이 시대를 특칭짓는 원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들이 전부는 아니다. 그것들은 자기 현시의 바로크적 전통과 기묘하게 겹쳐져 있다. 그리고 여기 고전주의 시대의 소설들이 있다. 이 시대의 문학을 희곡으로 국 한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루이 1 心1 ] 의 50 년 치하에서 매년 15 권 가량의 새 소설들이 발표되었다는 시실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소설 둘은 〈이론가들〉의 주장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다. 물론 그 가운데 간결, 단 순성, 절제된 문체와 감은 고전주의적 취향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또 한 주된 주제를 이루는 사랑도 한결 격렬하고 위험한 정념으로 묘사됨으로써 전세대의 숭고한 사랑과 구별된다. 그러나 『자이드』에서 『텔레마크 Telema­ q ue 』에 이르기까지 〈소설적인 것 le rornanes q ue )i논 변함없이 유지되었고 여기 프레시오지데는 때늦게 한 편의 걸작 『클레브 공주』를 탄생시켰다.

라 파예트 부인 _ 그녀는 1 66 0 년대 프랑스의 프레시오지테의 화신이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가리켜 〈 최상급의 프레시의즈 〉 4 7) 라고 한 것은 틀린 말이 아니 다. 1655 년 라 파예트 백작과 결혼한 그녀는 한동안 그의 영지에 머문 후 165 8\빈 부터는 파리로 거처를 옮겨 사교계에 드나들었다. 왕족을 위시한 최상류 인사 들과 교분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스그레 Se gr a i s, 위에 Hue t, 메나쥬 Mena ge.2} 같은 문인들에 둘러싸이기도 했다. 특히 라 로슈푸코 La Roche fo ucaul~ 의 친분은 각별했다. 이 사교적이고 동시에 문학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몇 편 의 소설을썼다.

47) Cf His toir e de la litte ra tu r efr an ,ais e T, I., Bordas, 22~ :

1662 년 짤막한 단편 『 몽팡시에 공주 La princ esse de Mon tp ens i er 』 가 그 첫 시도였다. 사건의 역사적 배경의 정확한 환기, 내적 감정의 진실성, 문체의 간 결함은 이미 위대한 소설가를 예고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주제는 물론 사랑이 었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통제불능의 정념으로 묘사되었다. 1668 년 그녀는 두번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주위의 문인들, 특히 스그레의 도움을 받은 것 이 확실한,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발표되기까지 한 『 자이드』 는 다분히 전세대 의 영웅소설을 방불케 하는 바로크 .풍 의 소설이다. 마상시합, 난파, 모험 등으 로 엮어진 이야기는 그 유명한 페레즈 데 히타 Perez de Hit a 의 『그 르나드의 내전 Gu e rres civ i le s de Grenade 』 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 소설의 핵은 사랑 의 정념이다. 항상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엄습하는 이 맹목적 사랑은 특히 질투 의 감정을 통해 표출되는데, 『 알퐁스와 벨라지르의 이야기 Hi sto i re d'Al- pho nse et de Belas i re 』 가운데 그 온갖 광적이고 파괴적인 양상으로 묘사된 다. 질투와 관련하여 아마도 프루스트 이전의 가장 예리한 분석을 우리는 그 안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마침내 1678 년 그녀는 『클 레브 공주』를 내놓았다. 1 &,\,J]기 이래로 이 소설은

프랑스의 〈 최초의 참된 소설 〉 로 일컬어졌고 니아가서는 최초의 〈 고전주의 소 설 〉 로 인정받았다. 그것이 최초의 참된 소설이라는 데 대해서는 이제 목청을 높여 부인할 필요도 없다. 한 세대만 거슬러 울라가도 우리는 소설양식의 경이 적인 개화를 볼 수 있다. 아니 소설의 전통을 중세의 크레티엥 드 트루와 Chreti en de Tro y e 허]까지 거슬러 울라가게 한다. 고전주의 소설은 ? 이 문제 는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혹자는 지금도 이 작품을 고전주의 소설로 보 기를 고집한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프레시오지테가 낳은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한다. 고전주의 소설로서의 득칭으로 열거되는 심리적 분석의 경 향, 의적 사건들의 상대적인 감소, 스타일의 절제 등은 실은 프레시오지테 전 성기의 소설 속에서 이미 확립되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여러 관점에서 『 클레브 공주 』 가 당대의 (고전주의) 이론에 뒤쳐져 있었던 것 은 확실한 것 같다. 첫째로 이 소설은 프레시오지테 소설에 특유한 복잡한 구 성의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 궁정 생활은 지루하리만큼 장황하게 묘사되어 있 는가 하면 주된 사건 속에 네 개의 에피소드가 삽입된다. 한편, 〈 전실다움 〉 의 원리보다 〈로 마네스크 〉 에 대한 취향에 이끌리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궁정 생 활과 등장인물들은 과도하게 이상화되어 있고, 우연은 사건 전개의 주요한 모 티프로 빈번히 사용되며, 분실된 편지, 훔친 초상화, 숲속에서의 연인의 탄식 과 같은 비현실적인 상황들이 설정된다. 언어와 표현에 있어서도 프레시오지테 의 흔적은 역력하다. 최상급 형태의 과장법이 남용되는가 하면 -abl~ 끝나는 묘한 억양의 형용사도 빈번하다. 그러나 가장 프레시의한 것은 사랑의 개념이 다. 느무르 Nemour s-e- 프레시오지테의 사랑의 법전에 완전히 부합된 겁먹은 연인으로 묘사된다. 사랑은 위장되어야 하고 절대적 비밀 속에 간직되어야 한 다. 이 비밀의 규칙을 어겼을 때 느무르는 고통을 겪게 된다. 또한 이 작품에 는 이른바 〈사랑의 문답〉이 등장한다. 여인은 다른 남자를 사랑할 때 이를 남 편에게 고백해야 하는가. 남자는 사랑하는 여인이 무도회에 가기를 바라야 하 는가. 그러나 가장 홍미로운 것은 역시 프레시오지테의 도식에 정확히 부합된 사랑의 관계이다. 그것들은 〈사랑의 지도〉 속에 묘사된 그대로의 방식과 어휘

로써 표현되어 있다. 백작은 아내에 대해 〈 존경 es ti me 〉 과 〈 인정 recon­ na i ssance 〉 의 감정만을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 그녀와 느무르는 상호간에 〈 자연적인 사랑i ncl i na ti on 〉 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자연적 (또는 본능적) 사랑 은 대상을 보는 순간 번개가 내리치듯 가슴을 강타한다. 그것뿐이다. 그 다음 에는 이 가공할 정념이 인도하는 대로 이끌려가는 일만이 남아 있다. 그것은 고통의 가시밭길이고 또한 타락과 죄악 속으로의 전락이기도 하다. 이에 저항 하고 그래서 명예를 온전히 보전하리라 기대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라 파 예트 부인은 코르네유의 세대에서 이미 멀어졌고, 더욱이 라 로슈푸코를 가까 이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인간의 위대보다는 인간의 무력과 비참에 더 민감한 세대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라신의 결론을 따르지 않았 다. 클레브 공주는 남편이 죽은 후 느무르의 청혼을 뿌리치고 수녀원에 몸을 숨기며 죽음을 기다린다. 〈 정념과 세상의 속박只분 뿌리치기 위해 그녀는 그 나 름대로 영웅적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 기나긴 비극적 사랑의 여정을 따라오면서 우리는 그것이 프레시오지테와 고전주의 사이를 수없이 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많은 부분이 프레시오지테와 겹쳐져 있는 것은 확실하다. 소설의 배경, 구성의 방식, 사랑의 개념, 문체 …… 그러나 프레시오지데의 유형에 따라 표현된 사랑은 질은 비극적 색조로써 고전주의적 개념에 상당히 접근하고 있다. 라 로슈푸코나 라신과 마찬가지로 라 파예트 부인도 인간에 대한 장세니슴J anse ni sm~ 비관주의에 물들어 있었 다면 그의 작품 속에 아 세대의 암울한 인간학이 표출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 러나 문제는 라신적인 사랑이 〈비극〉이 아닌 다른 양식 가운데 표현된 데 있 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이 양식, 죽 〈소설〉 속에서 삼단일의 규칙이 엄격히 지켜지는 희곡 양식 속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 사랑의 비극이 표현될 수밖 에 없는 데 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클레브 공주』 가 그만큼의 고전주의적 요 소들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대견한 일이며 이것으로써 고전주의 소설이라 불리 어지기에 손색이 없다. 그러나 굳이 이렇게 부른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소설은 본질적으로 바로크적이기 때문이다. 프레시오지테는 그 특성으로

인해 바로크 소설 속에서 행복하게 자신을 표현했고 , 고전주의는 그 안에 쉽게 동화되지 않았다. 『 클레브 공주 』 는 고전주의가 소설과 이룰 수 있는 화해의 최 대한울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소설적인 점에서 영원히 바로크적이고 이 경 우프레시의하다. * * 17 세기 초 말레르브의 출현은 프랑스 문학의 흐름을 일시에 뒤바꿔놓을 듯이 보였다. 그는 프랑스의 언어가 더 이상 혼돈 속에서 표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갔으며 시가 지나친 자유로움 속에 무절제하게 팽창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 는 언어의 구사와 시 작법에 있어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기본적 틀과 규칙을 제시하기에 힘썼고 이로써 오랜 무정부 상태에 종지부를 찍기를 원했다. 말하 자면, 그는 언어의 홍수와 시의 범람 속에서 제방의 역할을, 그리고 고르게 물 줄기를 인도할 배수로의 역할을 담당한 셈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그의 작업이 무엇에 의해 뒷받침되었는가를 확인한 바 있다. 다시 한 번 환기하자면, 그것 은 먼저 모든 지적 활동에 있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규칙의 개념에 대한 자각 이고, 다음으로는 이 규칙에 대한 존중의 의지이다. 말레르브의 출현이 하나의 경이적인 사건이 되는 것은 그에 의해 시적 창조 의 개념이 전적으로 새로워졌다는 데 있다. 시적 창조는 우연과 변덕, 좀더 고 상한 말로 표현하자면, 영감의 소산이 아니라 일정한 규칙에 따라 각고의 노력 으로써 완성되는 의식적이고 방법적인 작업의 소산이다. 그것이 의식의 명철성 뿐만 아니라 인내, 절제, 경허와 같은 도덕적 자질을 동시에 요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볼 때, 말레르브가 그의 새로운 시학과 인간학으로써 고전주 의를 예고했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말레르브보다는 조금 뒤늦게 정신의 세계에서도 무정부 상태에 대한 강력한 반격의 움직임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데카르트는 말레르브가 언어에 대해 시도했던 정화의 작업을 정신에 대해 시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정신아 지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무절제하게 사용한 나머지 빠져들어 갔던 사고 의 혼돈 속에서 정신을 구출해 내고 일정한 사고의 규칙에 순응케 함으로써 고 유한 권위를 되찾게 되기를 원했다. 그에 있어서도 일차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정신으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을 정당하고 유효하게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사고 의 방법론, 즉 규칙이었다. 우리는 그가 이 규칙에 의지하여 어떤 이성적 확신 들에 도달했는가를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마침내 그에 의해 지적 활동의 기반이 공고히 다져졌다는 것, 그리고 그것의 핵심인 이성의 권위 가 요지부동하게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그가 인간의 위대의 개념을 드높이 고양했다는 것도 잊울 수 없 다. 인간 이성의 권위 회복은 그 자체 위대의 개념과 불가분의 것이다. 위마니 슴 이래로 인간의 위대는 다름아닌 사고하는 존재, 즉 이성적 존재로서의 위대 였다. 이제 이성이 오랜 방황과 좌절 끝에 자신의 권위를 회복했다는 것은 바 로 인간 권위의 회복과 감으며 이로써 그의 위대는 확고히 보장되었다. 뿐만 아니라, 의적 세계를 지적으로 지배하는 정신은 자아를 도덕적으로 지배하는 윤리적 힘과 필연적으로 결부된다. 지적 혼돈에 빠져 있는 세계를 질서 가운데 재생시키고 통제하는 정신은 동시에 정념의 혼돈에 빠져 있는 자아를 동일하게 통제할 것이다. 지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질서와 규율을 보장해야 할 정신의 역할은 동일하다. 다만, 자아를 다스리는 이 도덕적 힘은 데카르트에 의해 〈고 매함 〉 이라는 특이한 이름으로 불리어질 뿐이다. 말레르브와 데카르트, 디소의 간격을 두고 세기초에 출현한 이 두 사람이 비 록 다른 충위에서일지라도 정신의 동일한 지향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시 한 번 요약하자. 그것은 인간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의 질서 와 규율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다. 모든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시작은 계속적으로 발전하여 곧바로 위대한 완성, 죽 고전주의로 이어질 듯 이 보였다. 실제로 이 시각에 설 때 고전주의와의 연결의 고리들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고전주의의 정립을 위한 수면 위의 , 혹은 수면 아래의 갖가 지 움직임들은 분명히 어떤 성숙의 점진적 과정을 드러내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17 세기 전반기의 문학을 이와는 디른 시각에서 접근하기를 선 택했다. 이 시대의 문학을 그 자체로서, 다시 말해 그 나름의 미학적 원리와 세계에 대한 바전을 가진 문학으로 말이다. 이렇게 볼 때 말레르브의 시도는 당장은 이어지지 않은 불발의 기도, 오직 시작으로 끝난 시작으로 보인다. 우 리는 그에 대한 반격이 얼마나 거세게 일었는가를, 그리고 그의 강력한 제동과 권유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아드 이래의 시 창조의 전통이 손상받지 않은 채 이 어졌을 뿐만 아니라 더욱더 기승을 부렸디는 것을 알고 있다. 영감을 시 창조 의 유일한 원리로 간주하며 그것이 전적인 자유와 상상의 무중력 속에서 발휘 되고 언어와 이미지의 충일함 속에서 표현되기를 바랐던 이 전통을 우리는 〈 바 로크〉라는 새로운 마학적 개념에 비춰 이해하는 데 동의했었다. 바로크에 의해 이 시대의 상당수의 시인들과 극작가들은 새로이 각광을 받기 에 이르렀다. 고전주의를 향한 왕도에서 일탈한 이들이 오랫동안 이단자 또는 하찮은 반란자쯤으로 평가절하되었던 것을 상기할 때 이 시각의 변화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하다. 그들은 고전주의와의 종속적 관련하에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으로서 평가받기에 충분한, 매우 견고한 미학적 방식들과 감각적 • 지적 감 수성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자리에서 이것들을 재론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들이 말레르브에 의해 제안되었던 시 창조의 원리와 방식과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영감과 상상의 자유의 선택이며 현실의 재현의 미학이 아니라 현실의 환각화의 미학이라는 것을 재확인하는 것 으로그칠까한다. 바로크에 뒤이어 우리는 프레시오지데에도 주목했다. 프레시오지데라는 개념 은 그 자체 새로울 것이 없다. 다만, 그것을 바로크와 동시에 문제삼음으로써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것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에 민감해짐으로써 이 시대의 문 학의 특성 또는 이 문학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변화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 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제 결론을 맺는 이 자리에서 우선 양자를 하나 로 묶는 공동의 바탕을 확인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이 점, 우리논 많은 것 울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바로크와 프레시오지데가 진부한 현실에 대한 동일

한 협오를 니누어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동경과 추구의 대상을 가시의 현실 밖에 설정하는 동일한 정신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차 지적한 바 있 다. 그것들은 다 같이 상상 속에서 혹은 관념 속에서 제 2 의 현실, 그들에 의하 면 유일한 전정한 현실을 구축하기에 주력했으며 오직 그 안에서 삶의 감동과 희열을 느끼기를 원했다. 이 작업을 위해 그리고 삶의 충일한 향유를- 위해 그 들은 현실의 쇠사슬을 차단해야만 했고 뒤이어 상상과 관념의 권유에 아낌없이 몸을 내맡겼다. 자유는 이 모험의 기본적 조건이었고 환상과 비현실은 그것이 펼쳐질 선택된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와 감은 상동성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차이는 명백하다. 우선 표면 적으로 드러니는 것은 프레시오지테가 바로크와는 달리 특정한 사회적 집단과 내밀히 관련됨으로써 매우 질은 사회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프레시오지테 에 있어 일차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한 집단의 감각적 취향, 윤리적 • 관념적 태 도이며 문학 따위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프레시오지테가 한 사회적 집 단과 관련지어져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요컨대 프레시오지 데는 지신의 감수성과 윤리적 원리와 정신적 가치에 따라 한 선택된 집단을 단 련하고 교육시킴으로써 고도로 세련된 새로운 문화적 주체를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48) 48) 이미 프레시오지테 초기에 변화의 조짐은 나타나기 시작했다. 랑부계관과 사블레 부인 의 살롱에서는 그곳에서 벌어진 사교생활의 특이한 분위기로 말미암아 행동거지에 있어 서나 언어의 습관에 있어서나 사교인들의 변신이 촉진되었다. 귀족들은 과거의 武人다운 거김과 촌스러움을 벗어던져야 했고 문인들은 그들 사이에서만 통용되었던 전문적이고 현학적인 언어에서 탈피해야만 했다. 여인들이 지배하는 사교생활에서 모든 것은 다분히 여성화되었던 셈인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미적 • 윤리적 취향의 세련을, 또 한편으로는 언어를 포함한 지적 활동의 보편화를 가져왔다. 다시 말해 언어와 사고는 여성까지도 포 함한 만인에 의해 이해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 후 프레시오지테는 자기 과 시를 위해 극도로 세련을 추구한 나머지, 그리고 지적 유희가 극단적으로 관념화된 나머 지 상당부분 〈우스꽝스러운 프레시오지데〉의 면모를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프레시오지테가 감각적 취향이나 지적 활동에 있어 하나의 보편적 유형을 추구했 다는 것은 확실하다. 프레시오지테가 그 모든 단접과 폐단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의 지적 엘리트들의 정신적 단련의 장이 되었다는 것은 크게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이 집단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금은 변질했다는 것도 확인할 기회 가 있었다. 1620 년대 매우 귀족적이었던 이 사교집단이 점차 부르주아화했고, 1650 년대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사회적 엘리트들의 무대로 탈바꿈했다. 스퀴데 리 부인의 살롱은 구시대의 귀족들을 전적으로 배제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주역 들의 얼굴은 분명히 바뀌었고 이들의 관심사도 달라졌다. 한마디로, 전세대의 복고적이고 공상적인 취향은 지적이고 관념적인 취향에 자리를 넘겼다고 말할 수있다. 우리는 1650 대 프레시오지테의 문학 속에서 고도로 세련되고 기교화된 언어 와 문체를 동해 표현된 관념적 놀이들의 실체를 이해하기에 주력했었다. 이 문 학의 진수는 인간의 현실을 자연적 언어로써 직설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표현의 온갖 기교를 다하여 그것을 관념의 언어로 번역한 데 있다. 현실을 관념의 언 어로 번역할 때, 다시 말해 현실을 관념 또는 정신에 의해 (재)구성하려 할 때 그것은 대상을 정확히 정의하는 것으로부터 시직하여 그것들의 움직임을 면밀 히 분석한 끝에 그것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코드화하여 마침내 총체적인 구도를 그려내야 한다. 프레시오지테의 최대의 관심사였던 사랑은 그들에 의해 완벽하 게 코드화됨으로써 이른바 〈사 랑의 지도 〉 의 형태로 완성된다. 그러나 그들이 매혹되었던 사랑의 신비는 인간의 내적 현실의 일부이며 따라서 그들이 인간 내면의 총체적 현실에 이끌린 것은 필연적이다. 요컨대 그들의 관념적 유희는, 비록 놀이의 형태를 빌리고 있다 할지라도, 그 자체 상당한 현실성을 가전 인 간 심정의 기하학이었던 셈이다. 프레시오지데와 관련하여 현실성을 운운하는 것은 과장된 것으로 보일지 모 른다. 그러나 바로크를 거쳐 프레서오지데에 이르는 사이에 그리고 프레시오지

테의 기원에서 전성기에 이르는 사이에 어떤 정신적 기류의 변화가 있었던 것 은 부인하기 어렵다. 바로크는 현실과의 만남을 단순히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구실로 삼았고 이 만남에서 촉발된 환각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영원한 움직임과 변전 속에서 대성들의 기이한 만남과 교차로써 이루어지는 환각적 이 미지들의 대축제에 현혹된 바로크는 현실과의 결별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 다. 초기 프레시오지테도 과거에 대한 향수로 말미암아 자연적으로 공상적 세 계에 끌려 들어갔다. 용감하고 헌신적인 중세의 기사는 프레시의들의 우상이었 고 그 모험과 사랑은 이들의 상상적 세계를 채우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경향은 그 후에도 지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관념화의 경향이 질어짐으로써 현실과의 유리는 더욱더 두드러져 보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는 이 표면적인 유리 속에서 현실과의 어떤 연결의 고리를 발견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현실의 관 념화는 현실을 의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공략하되 관념적인 방식으로 하는 것을 의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관념적인 방식의 접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해 다시 이야기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여기 강조할 것은 프레시오지테가 인간의 현실, 더 정 확하게는, 내적 현실에 대해 깊이 관여했었다는 사실이다. 이 관여의 방식이 진지성을 결여했었다고 비난해도 상관없다. 프레시오지데에게 진지성을 요구하 는 것은 원래 프레시오지데답지가 않다. 이들은 모든 것을 유희처럼, 매우 고 답적인 장난처럼 하기를 즐겼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유희와 장난 속에서 그들은 불가피하게 인간 현실의 어떤 실체와 마주쳤다. 그리고 어떤 순간엔가 이 사실을 의식하기도 했다. 〈 진실다움 〉 의 원리가 그들 자신에 의해 거론된 것 은우연한일은아니다. 우리는 17 세기 전반기를, 고전주의와 확연히 구별되는 독자적인 관점에서 집 근하기를 선택했었다. 이 관점은 이 시대의 문학의 독창성을 밝히는 데 매우 유효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한 문학을 순전히 배타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 은 위험한 일이다. 한 문학은 그것이 기존의 혹은 현존의 다른 문학들과 갖는

만남과 뒤섞임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17 세기 전반기의 문학을 바로크와 프레시 오지데의 시각을 통해 접근한 우리는 그것의 독창적 세계를 확인하기에 이르렀 지만, 이제 이 일련의 고찰을 끝맺으면서 뒤이을 위대한 문학, 즉 고전주의와 의 관련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답은 이미 충분히 암시되었다고 믿는 다. 고전주의와의 연관이 바로크보다 프레시오지테 가운데 더욱 분명히 드러나 는 것은 확실하다. 바로크의 경우도 고전주의와의 연결을 굳이 찾으려면 못 할 것도 없다. 가령, 효과를 추구하는 예술로서, 격하고 난폭한 정념에 대한 대담 한 접근으로서 바로크가 고전주의 희곡에 영향을 미쳤으리러는 것은 인정할 만 하다. 그러나 프레시오지테의 경우는 차원을 달리한다. 조금 과장해서, 고전주 의 문학은 프레시오지테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말하고 싶어진다. 이 문학에 대한 우리의 결론은 그것이 얼마나 고전주의에 접근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을 통해 형성되고 훈련된 지적 엘리트는 그대로 고전주의의 주체로 이어지 고, 언어와 스타일도 크게 달라지지 않으며 , 현실에 대한 관념적 접근의 방식 도 그대로 답습된다. 다만 없어진 것은 유희와 장난스러움의 분위기이며 새로 나타난 것은 탐구의 진지성과 치열함이다. 〈 진실다움 〉 의 미학과 함께 정신은 환상과 비현실에서 이성과 현실로 되돌아올 것이다. 현실에로의 복귀와 더불어 문학은 새로운 모험으로 접어들며 여기 고전주의의 새 지평이 열린다.

제 4 장 고전주의 앞 장에서 , 1650 년대의 프레시오지데에 이르기까지 17 세기 전반기의 문학을 개관한 우리는 이제 시기적으로 고전주의의 문턱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다. 뿐 만 아니라, 16 세기 위마니슴에서부터 출발하여 떠]기 반에 걸친 정신적 모험의 발자취를 더듬어온 우리는 이 일련의 고찰의 자연스러운 연장으로서 고전주의 라는 이름의 새 문학 속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고전주의를 이야기 하기 위해 그토록 멀리 거슬러 울라간 것은 그리고 앞선 다양한 정신적 움직임 둘을 세심히 살펴본 것은 고전주의와의 만남이 우리에게 당혹스러운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정신의 세계에 있어 그 어떤 것도 우연의 것은 없 으며 여기 문제된 고전주의도 자신의 뿌리와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 론, 이런 것들로 고전주의에 대한 설명의 원리로 삼을 생각은 없다. 그러나 한 문학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한 공시적 접근에 앞서 그것을 역사 속에 위치시키 는 통시적 접근은 필요하고도 유효하다. 한 문학의 탄생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 지며 그것은 과거와의 단절이건 혹은 계승이건간에 과거와 맺는 관련의 한 도 식이기도하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작업은 말하자면 이 관련의 도식들을 그려내는 데 집중된 셈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제 고전주의는 우리에게 별로 낯설지 않 다는 것이다. 16 세기 위마니슴 속에서 고전주의의 머나먼 원류를· 확인한 우리 는 17 세기 전반기의 매우 복잡한 문학적 상황 속에서 표면상의 미학적 • 관념적 (한가지 덧붙인다면, 정치적) 반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문학 창조의 갖가지 조 건들이 성숙되어 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1660 년 루이 14 세의 親政의 시 작과 아울러 새 문학이 활짝 피어나기 시작했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사실, 위대한 왕으로서의 모든 자질을 갖춘 루이 l 心 1l 의 등장은 새로운 것의 탄생을 예고하는 상칭적인 사건이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 루이 14 세 그리고 절대 왕정의 출현이 우연이 아닌 것처럼 고전주의의 출현도 우연이 아니다. 그것이 어떻게 준비되고 무르익어 갔는지를 추적한 우리는 이제 활짝 핀 꽃들을 감상 하기 위해 찬란한 파원 속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우리에게는 아직도 거쳐가야 할 곳이 몇 군데 남아 있다. 프랑스 고전주의는 국문학으로 대표되고 있는 만큼 고전주의에까지 이르는 희 곡의 역사를 더듬어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바로크와 프레시오지테를 통해 우리의 논의는 주로 시와 소설에 집중되었었다. 이제 고전극에 접근하는 데 있 어 우리는 다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프랑스 희곡의 맥을 찾아볼까 한다. 1 17 세기 전반기의 희곡 프랑스의 근대극은 고대를 모방한 플레이아드 시인들이 고대극의 위대한 장 르들의 재현을 시도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1552 년 파리에서 공연된 죠델 Eti en ne Jod ell~ 『사로잡힌 클레오파트라 Cleop a t re cap ti ve 』는 프랑스의 최 초의 고대풍 비극으로서, 이 작품이 거둔 엄청난 성공은 비국을 위시한 고대의 국 형식들의 앞날을 환하게 비춰주는 듯이 보였다. 뒤이어 우리는 이 시대의 가장 빛나는 극작가 로베르 가르니에 Robe rt Ga rni er(1544-1590) 의 출현, 그

리고 그의 7 편의 비극과 더불어 이른바 위마니슴 극의 초석이 놓이는 것을 본 다. 그러나 그 후,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위마니스트들에 의해 부활된 고대 형 식의 국들은 한동안 주충거리다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린다. 1579 년에서 1588 년에 걸쳐 왕의 칙령과 고등법원 le Parlemen t의 법령 중에는 기이하게도 연극 공연에 상당한 제약을 가하는 것들이 눈에 띈다. 이에 대해 문학사가들 중계했에던는 탓아마으도로 극돌 리속는에 사담람겨도진 있지다배.층 ”에 어 쨌대든한, 풍고자대를의 당위대대의한 허장약르,한 권비력극이과 희겅 극이 이렇게 견제딩하는 사이에 여기 새로운 형태의 국들이 점차 모습을 드러 내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새 연국들의 출현이다. 비희극, 전원국, 무용국이야말로 고전극에 앞선 시대의 주역들이었기 때문이다.

1) J. M orel, 앞의 책 , 77 쪽 : <… celles-ci n'eta n t pas exemp tes de trai ts sati riqu es dirige s contr e ! es Grands et q ui risq u a ie n t d'eclabousser un pou voir trop f rag i le …. >

비희극 여기 먼저 비회국 la t ra gi -comed i e 이라 불리어지는 특이한 장르가 있다. 비희극은 당대의 정신적 • 감성적 취향을 가장 강렬하게 대변하고 있는 점에서 분명히 이 시대의 대표적인 장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비희극의 출현은 더디고 오래 기다려야만 했다. 앙리 때] 치하에서는 통틀어 4 편이, 그리고 1619 년에 서 1624 년 사이에는 단 1 편만이 발표되었다. 그러던 것이 162 71;:!부터 상황이 급격히 달라지기 시직하여 1630 년에서 1635 년 사이에는 35 편을 헤아리기에 이 르렀다. 뿐만 아니라 비희극의 성공은 가히 선풍적이었고 피에르 뒤 리에 Pie r re Du R y er 의 주변에 모여든 젊은 극작가들은 비희극을 내놓음으로써 쉽 사리 명성과 영광을 얻었다. 그렇다면 비희극이란 어떤 장르를 말하는 것인가. 호칭은 그것이 비극과 회 극의 어떤 혼합된 형태임울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비극과 희극은 다음 몇 가지 기준에 따라 대립적으로 정의되어 왔다. 죽, 주제가 역사에 근거한 것인가 아

닌가, 등장인물들이 왕과 같은 높은 신분의 사림인가 평민인가, 사건의 결말이 불행한가 행복한가, 문체가 고상한가 평속한가 등에 의해서 말이다. 한 작품이 〈 혼합된 〉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이 요소들 중의 한두 가지가 뒤바뀌어 섞이기만 하면 된다. 가령, 어떤 작품이 비극이면서도 그 주제가 역사에 근거한 것이 아 니고 공상적인 것일 때, 혹은 인물들이 평민의 신분이거나 극이 행복한 결말로 끝날 때, 그리고 말투가 일상적 화법의 것이라면 그것은 바희극으로 분류될 것 이다. 데 로슈 Mlle des Roche~ 『 토비 Tob i e 』 (1579) 라는 국은 역사적인 주 제, 높은 신분의 등장인물들로써 의견상 비극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 구하고 행복한 결말과 일상적 언어표현의 도입에 의해 비희극으로 분류된다. 이와 반대로, 루이 르 자르 Lou i s Le Jar ~] 『 뤼셀 Lucelle 』 은 희극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신분 높은 인물들의 등장과 고상한 문체가 사용됨으로써 희극의 범주 를벗어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최초의 비희극은 단연 위대한 비극작가 로베르 가르니에 의 단 한 편의 비희극 『브라다망트 Bradaman t e 』 (1582) 이다. 귀족들이 등장하 고 거의 예의없이 고상한 문체로 엮어진 이 극은 극의 로마네스크한 주제와 사 건 전개의 역동적인 방식과 행복한 결말로써 정확히 비극과 희극의 중간 지점 에 위치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비희극이 하나의 독자적인 장르, 다시 말해 영 국의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나 스페인의 코미디에 비견할 만한 장르로 정립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바로 이 작품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630 년을 전후하여 마침내 이 가능성은 현실화되었다. 여기 홍미로운 것은 비희극의 화려한 출현이 이른바 〈모 험소설〉의 유행과 때를 같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의 동시에 프랑스 문학의 두 주역으로 등장한 소 설과 비희극은 말하자면 한 시대가 낳은 두 쌍둥이와도 같다. 2) 장르의 차이에 z) A.A d am, 앞의 책, 14~: <... Ja per io d e de 1627 a 1635 est d omi ne e par la trag i - comed ie. Celle-ci off re Jes m~mes the mes que le roman d'aventu res , ou plu s exacte m ent elle les Jui emp ru nte .>

도 불구하고 양자 속에 동일한 주제, 사건의 구성과 전개의 동일한 방식, 동일 한 정신적 취향과 분위기믈 발견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국단적으로, 비 희극은 소설울 극화한 것에 불과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바희극은 당대 와 고대의 소설로부터, 그리고 국내 국의의 소설로부터 그 주제를 빌려오는 것 이 상례였다. 희비극의 주제는 문자 그대로 로마네스크 romanes q ue( 소설적)한 것이었다. 〈 로마네스크 〉 란 말이 함축하는 의미는 명백하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 역사적 h i s t or iq ue 〉 이란 말과 대치된다. 시가 역사에서 주제를 빌려올 때 그것 은 〈 서사시 e p op ee 〉 가 되고, 국이 역사 속의 인물 또는 사건을 주제로 삼을 때 그것은 〈 비극 〉 이 된다. 이와 반대로, 주제가 상상적 또는 허구적인 것일 때 그 것은 산문의 형태로는 〈 소설 〉 이 되고, 극의 형태로는 〈비회국 〉 이 된다. 비극과 희비국의 관계는 정확히 서사시와 소설의 관계와 같다. 상상적 또는 허구적 주제로서 구성되는 국의 특징들을 추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먼저 지적할 것은 그것이 상상과 환상의 자유로운 움직 임만큼이나 다채롭고 복잡한 구성을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비회극은 그 안 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의 놀라운 풍성함과 복잡성으로 특징지어진다. 한 중심인 물 대신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며, 단일한 사건 대신 여러 사건들이 각 장마다 펼쳐지고 또 그것들이 뒤얽힘으로써 극 전체는 일대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둘 어간다. 가령 앙드레 마레샬 Andre Mareschal 의 어떤 작품 속에서는 다섯 번 의 결두가 벌어지고 두 번의 살인 미수가 범해진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부상을 당하고 그중 살해되는 사람도 다섯 명이나 된다. 심지어 결투하는 두 여인까지 등장한다. 우리는 여기서, 비희극 속에 펼쳐지는 이 들끓는 사건들이 갖는 의 미는 무엇일까라고 묻고 싶어진다. 극작가들은 그들의 상상적 세계 속에서 재 현하려고 했던 현실의 삶을 이렇듯 엄청난 혼돈과 복잡성 가운데 인지할 수밖 에 없었던 것일까. 어쨌든, 그들이 삶의 이 소용돌이에 현혹되었던 것은 확실 하다. 그들은 그들의 극 속에서 사건들의 결말보다는 그것들이 전개되어 나가 는 과정, 그 걷잡을 수 없는 뒤얽힘 속에서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는 뒤틀린 궤 적들을 그려나가는 데 더 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논리적으로, 비회국은 반드

시 결말이 지어져야 할 필연성은 없다. 왜냐하면, 인물들이 살아서 숨쉬고 있 는 한(비회국 속에서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그들의 모험은 다시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극의 전정한 결말은 오직 비극에만 있다. 사건들의 이와 같은 전개의 방식이 행동들의 의형적 전시를 수반한디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비희극은 본질적으로 관객들에게 〈 보여주는 〉 극아다. 그것 은 극의 진행과 전개를 이야기 rec it를 통해 전달하거나 인물들의 내적 성찰을 통해 짐작하게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행동으로써 표현되고 그것들은 대개의 경우 격렬하고 때로는 광기 어린 물리적 행동들이다. 결두와 폭력의 장면은 비 희극에 있어 거의 상투적이다. 극작가들은· 마치 삶의 가장 강렬한 발현에 매혹 되기라도 한 듯 그것들을 무대 위에 펼쳐 보여주었고 또한 당대의 관객들은 이 장면들에 열광했다. 비희극은 삶의 의형적 전시, 그리고 그것의 가창 강렬한 발현에 집착함으로써 바로크의 미학과 맥을 감이한다. 비회국의 이와 같은 구성 방식을 통해 필연적으로 크게 부각되는 것은 작중 인물의 압도적인 중요성이다. 복잡한 사건들이 숨가쁘게 전개되는 극 속에서 인물들은 사건을 주도해 나가는 행동의 주역들이다. 물론, 주인공의 의지와는 무관한 수많은 우연의 개입에 의해 극의 진행이 바뀌고 그들의 운명이 뒤바뀌 는 일은 드물지 않다. 급변, 반전, 돌발사건 등은 비회극의 상투적인 메뉴아 며, 그것은 한마디로 파란만장의 기구한 운명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희국은 우리에게 운명에 농락당하기만 하는, 패배하는 인간의 이미 지를 제시하지 않는다. 아니, 반대로 운명의 아이러니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자신의 길을 열어나가는, 모험적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개의 경 우 이 모험적 인간은 자신의 감정과 힘의 극한울 살며 격렬하고 난폭한 행동을 통해 자산을 표현한다. 또 때로는 자신에게 주어전 자유의지와 용기로써 운명 의 도전에 저항하고 자신의 왕국을 쟁취하는 영웅이 되기도 한다. 만약 그들의 패배를 그린다면 그것은 찬란한 패배가 될 것이다. 관객들이 비희극에 갈채를 보낸 것은 실은 이 인물들, 이 영웅들에 대해서였다. 그들은 이들을 보기 위해 극장에 갔고, 이들을 보고 있는 동안 어느덧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며 동일한

감정의 파장 속에 빠져들어 갔을 것이다. 요컨대, 비희극의 중심은 그 안에 갇 힌 인물들이 옴짝달싹 못하는 운명과도 같은 〈 상황 〉 이 아니라, 행동의 여백이 그들 앞에 활짝 열려져 있는 〈 인물들 〉 이다. 비희극은 상황의 예술이 아니라 행 동의 예술이다. 자유의지와 행동의 가능성을 믿는 이 예술이 그 구성에 있어 모든 형식적 속 박에 쉽게 길들여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비희극은 행동 의 자유로움과 허용된 여백만큼 확대된 공간과 시간을 요구한다. 위마니슴 비 극이 고대극을 모방하여 시간과 공간의 규제를 충실히 답습했던 것과는 달리 비희극은 의형적 규제에 대해 전적으로 자유롭기를 선택했다. 비희극 속의 모 험은 24A] 간을 뛰어넘어 한 달, 심지어는 수년에 걸쳐 펼쳐지는가 하면, 영국 에서 덴마크로, 리옹에서 마르실리로 무대가 옮겨진다. 장 드 슈랑드르J ean de Schelandr 려 명작 『 티르와 시동 Ty r et S i dor1s 』 (1628) 은 이 점 우리에게 홍미로운 암시를 제공해 준다. 이 작품은 최초 익명의 소설 『 사랑의 환상 Fan­ tais ie s amoureuses 』을 번안하여 1608 년에 제작했던 비국을 20 년 후에 다시 비 희극으로 개작한 것이다. 1608 년의 바극 속에서 주인공 멜리안느 공주는 살인 의 죄명으로 형벌을 받고 죽는 것으로 끝나고 극 구성에 있어서도 비국의 규칙 울 준수하고 있다. 그러나 비희극 속에서 그녀는 연인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되 고 그와의 결혼을 준비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다론 모든 비희극의 주인공들이 그렇듯이 그녀에게는 고난의 시련 끝에 행복의 미래가 열려 있는데, 문제는 주 인공의 모험이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져 있다는 데 있다. 이 열린 운명을 담기 위해 비희극이 열린 공간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희극의 이론적 대변자는 단연 프랑수아 오지에 Fran~o i sO gi e~ 다. 슈랑 드르의 친구이기도 했던 그는 1628 년의 『티르와 시동』의 서문을 썼는데 , 그 가 운데서 그는 비희극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예술 창조에 있어서의 자유를 부르짖 었다. 형식적 규제를 거부하고 이른바 〈적합성 b i enseances~ 끝 무시한 그는 관 객의 기쁨은 오직 〈사건들의 다채로움〉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과연 비희극의 관객은 어떤 사람들이 었을까. 흔히 비희극을 일반 서민을 위한 연극의 형태로 간주해 온 것은 잘못 이다. 반대로, 그것은 가장 존경받는 극작가들에 의해 씌어졌고, 당대의 어엿 한 상류층 인시들, 이른바 〈오 네톰 只 끌 위해 씌어졌다. 비희극이 즐겨 무대 위 에 펼쳐 보여주었던 극적인 모험들, 격렬한 행동과 열정적인 감정들에 열렬한 갈채를 보낸 것은 다름아닌 당대의 젊은 귀족들이었다. 『 르 시드 』 의 주인공, 젊은 로드리그가 사랑의 비극 속에서 갈등과 절망을 딛고 일어서 자신의 영광 뿐만 아니라 사랑까지도 쟁취하는 찬란한 영웅으로 되살아나는 것을 지켜보면 서 이 관객들은 잃어버린 꿈이 자신 속에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 모험 의 주인공이 된 듯한 환각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비희극은 위마니승의 전통과 결별했다. 그러나 그것은 서민적인 것 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이 결별이 시대의 새로운 감정과 관 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필연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관객들도 연극에서 이 새로움 을 고대했다. 규칙의 준수가 곧 고대 전통의 준수였다면 규칙의 거부는 근대성 mode mit e 의 존중을 의미한다. 한 시대는 그 시대 특유의 감성과 취향과 정신 적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 문학에 있어 문제는 이런 것들을 담을 새 그릇을 만 들어내는 데 있다. 비희극은 분명히 이 그릇들 중의 하나이며 그것은 본질적으 로 근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비회극의 미학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이 물음과 관련하여 우리는 이른바 예술의 쾌릭주의적 개념을 환기하고 싶다. 예술에 있어 오직 쾌 락의 원리만을 인정하는 이 개념은 실제로 여기 문제되어 있는 시기의 이탈리 아 작가들, 가령, 마리노 Mar i n o.2} 그의 추종자들에게 정확히 적용되며, 프랑 스에서도 루이 13 세 시대의 시인들에게 적용된다. 관객들을 충격과 놀라움으로 강타하며 그들 속에 갖가지 감동들의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키기를 바랐던 비희 극의 작가들도 예의는 아니다. 이 효과를 위해 모든 것이 고안되었고 온갖 의 형적 행동들이 화려하게 현시되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동시대의 디른 문학들, 특히 모험소설을 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설의 세계와 비희극의 세계는 완전히 동질의 것이다. 이 양자 속] 펼쳐지는 모험은 몽상적이고 환각적이며 문자 그대로 극적이고 극단적이 다. 행동은 격렬하고 광적이기까지 하며 언어는 자극적이고 화려하다. 모든 것 은 전시의 효과를 위해 꾸며지고 또한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모든 것이 정당화 된다. 이 예술의 유일한 선은 바로 효과이다. 우리는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다. 비희극의 미학을 〈 바로크 〉 에 결부시킨 다고 해서 새삼 놀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시대의 시를 통해 바로크 미학의 본질을 규명하기에 힘썼던 우리는 이제 그것을 소설에 뒤이어 비희극에까지 적 용시키는 데 별 이의가 없으리라 믿는다. 이 시대의 문학 속에 장르의 차이에 도 불구하고 동일한 주제, 동일한 방식을 발견하는 것은 홍미로운 일이다. 이 문학은 전세대의 위마니슴적 전통을 거부하고 시대의 새로운 열망에 보다 충실 하기를 선택했으며 문학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새 바람이 당대의 문학의 전부라고 속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우리는 표면적인 거센 흐름 속에서 도 항상 또 다른 흐름에 주목하며 문학의 다른 목소리에 귀기울여야만 한다. 그에 앞서 먼저 비희극의 또 하나의 가닥에 잠시 주목하기로 하자. 전원극 전원국 la pas to ral~ 일반적으로 비회국의 한 변형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전원극의 변화의 과정은 적어도 프랑스에 있어서는 그것이 하나 의 독자적인 장르로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전원극의 기원은 멀리 거슬러 울라가며 다분히 종교적이다. 베르길리우스의 제 4 유가나 오비디우스의 『 변신보 les Me ta mo rp hoses』 가 보여주는 고대의 이교 적 신비, 구약과 신약에 담긴(가령, 에덴의 동산,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족장들의 역사, 시편의 노래들 목자와 어부의 비유 따위) 기독교적 신비는 전원극의 유래와 무관하지 않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중세의 전원시p as t ourell e2-}- 르네상스 시대 의 목가가 이 전통에 가세하게 되고, 그 후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유입된 소 설들(대표적인 것으로는 Sannazar의 『 아르카디아 Arcad ia』와 Mon tm a y or의 『 디안

느 D ia ne』 )이 적지않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근대 프랑스 전원국의 형성에 결 정적인 자극을 준 것은 역시 이탈리아의 3 편의 전원국(르 타소의 『 아민타 Am i n ta 』 , 1573 년 원작, 1584 년 번역 ; 구아리니 Guar i ni의 『 충직한 목동 Pas t or Fid O J , 1580 년 원작, 1595 년 번역 ; 보나렐리 Bonarell i의 『 시로의 필리스 Ph i ll is de Sci reJ , 160 편 원작, 1609 년 번역)이다. 극 구성에 있어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세 편은 몇 가지 동일한 요소들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 주제는 한결같이 사 랑의 신비로서, 오랫동안 서로 헤어져 있던 두 연인이 다시 만나 결혼으로 맺 어지는 것으로 짜여져 있다. 이 기본적 주제에 죽음과 부활의 모티프가 덧붙여 지고, 특히 구아리니와 보나렐리에 있어서는 희생의 종결이라는 주제가 유난히 부각된다. 전원극에 어떤 메시지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것은 표면상 목가적 배경에서 펼쳐지는 목동들의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사랑 의 이야기이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그 어떤 시련과 수난을 겪는다 할지 라도 그 결말은 항상 아름답고 행복하다는 데 있다. 희생과 수난은 마침내 끝 나고 기쁨과 행복의 찬란한 빛이 밝아온다. 그것은 마치 죽음을 이긴 부활의 기쁨과도 같고 속죄로써 얻어진 순결의 승리와도 같다. 사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그리고 이 사랑의 국이 그 안에서 펼쳐지는 자연은 몸소 이 놀라운 재생 의 신비를 아침이면 어둠을 뚫고 비쳐오는 눈부신 햇빛으로, 그리고 봄이면 되 살아나는 삼라만상으로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전원극은 이 자연의 신비를 배 경으로 마치 잃어버린 에덴의 동산, 황금시대를 상상과 꿈 속에서나마 재현하 려고 했던 것처럼 보인다. 전원극을 행복에 대한 인간의 영원한 갈구, 아마도 인류의 무의식 속에 참재하고 있을지도 모를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향수와 결 부시키는 것은 꼭 무모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여기 프랑스의 전원극이 있다. 최초 그것은 궁정에서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기록에 의하면, 1564 년 폰텐블로궁에서 익명의 『쥬니 에브르 Gen i evre 』라는 국이 공연되었는데, 막간에 롱사르의 시 낭독과 음악 연 주가 곁들여지고 무대는 화려한 장치로 꾸며졌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공연은 되풀이되면서 마침내는 무용국의 형태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최초의 궁정풍

무용극은 1581 년 프티유 L 르봉궁에서 공연된 『 여왕의 무용국 Balle t comi qu e de la Re i n e 』 으로 알려져 있다. 궁정의 무용국에서 독립된, 명실상부한 극으로서의 전원극이 출현한 것은 l@l 기 말경부터이다. 158 4 년의 『 아민타 』 의 불어 번역관은 이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1585 년부터 니콜라 드 몽트뢰 N i colas de Mon t reux 는 『 줄리엣의 목 동 이야기 Berg e ri es de Ju l i e tt e 』 라는 전원소설을 (Ollenix du Mon t - Sacre 의 가 명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각 권마다 한 편의 목동극을 첨부하였다. 그중의 하나인 『 아리멘느 A ri mene 』 는 1596 년 낭트에서 공연되었다. 그 후 1601 년에는 몽크레티엥 Mon t chres ti en 이 12 음절 시가 섞인 산문체의 목동 이 야기를 발표했다. 노래와 합창이 곁들여지기도 한 이 작품은 다분히 우의적 allego r iq u e 성격의 것으로서 , 가령 극의 끝부분에 예고된 황금시대의 복귀는 앙리 머의 치세와 혼동되어 있다. 전원극과 관련하여 프랑스에서 최초의 주목할 만한 작품이 씌어진 것은 크레 티엥 데 크르와 Chre ti en des Cro i x 에 의해서였다. 1613 년에 공연된 그의 『 연 인들 또는 대전원국 Les Arnante s au la gra ri de p as t orelle 』 은 네 쌍의 결혼이 맺어지는 것으로 대단원이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정녕 프랑스적인 사랑의 연 쇄의 전형을 보여준다. 5 편의 전원극을 발표한 , 세기초의 위대한 극작가 아르 디 Alexandre Hard y(그의 5 권의 희곡집 속에는 수많은 비극과 비희극이 주를 이루 고 있다)에 의해 전원극은 마침내 하나의 장르로서 분명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연쇄적으로 전개되는 사랑의 이야기 , 마법과 변신, 부유한 농부에 대한 가난한 목동의 승리, 특히 관능적 사랑(목신 Pan 에 의해 대변)에 대한 순수하고 고결한 사랑(사랑의 신 Cu pi don 에 의해 대변)의 승리, 또한 사랑과 삶의 환희의 거부(달 의 여신 D i an 혜 의해 상징)에 대한 저항들은 앞으로 전원극 속에서 애호받는 주 제로자리잡을것이다. 그 후, 오노레 뒤르페의 영향을 받아 탄생하게 된 수많은 수려한 작품들 중 에서 우리는 가히 전원국의 최대 걸작이라 일컬어지기에 합당한 라캉 Honora t de Bueil, seig ne ur de Racan 의 『목 동 이야기 Berg e ri es 』 와 만나게 된다. 이

작품은 멀지않아 젊은 코르네유가 선보일 희극과 비희극을 사실상 예고하고 있 는 듯이 보인다. 라캉의 전원극은 종래의 수법에 따라 마법과 꿈과 신탁과 풍 자 등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놀랍게도 어떤 레아리슴에 접근함으로써 종전의 전원극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라캉이 이 작품을 쓰는 데 있 어 말레르브의 충고를 따랐다는 사실은 크게 주목할 만하다. 말하자면 그는 극 의 효과를 제일원리로 삼은 전원국(및 비희극)의 요청과, 언어의 사용과 사고에 있어 절제와 통제를 제일의 미덕으로 삼은 말레르브의 충고를 조화시키려고 시 도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는 일방적으로 자연의 아름다운 환기, 환상적인 배경 속에서 사랑의 유희를 재현하는 대신 현실적 삶의 무게와 운명의 압박을 느끼며 조금은 의식적으로 그것들의 여운을 작품 속에 담으려 했던 것 같다. 이승에서 모든 것은 시시각각 변한다. 세상의 富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거나 파도 위에 조각하는 자이다. 인간의 행복이란 한가닥 바람일 뿐, 오늘의 그는 내일이면 사라진다. 그 어떤 것도 하늘에서만 영원하고 시간과 운명이 달 아래서 온전히 지배한다. 3) 3) Racan, Berge r ie s V, 5 : <... .. . Tout s e change ici~b as de moment en moment, Qui le(=le conte n te m ent) pen se trou ver aux rich esses du monde Bati t dessus le sable, ou grav e dessus l'onde, Ce n'est q u' un peu de vent que l'heur du gen re humain , Ce qu' on est a ujo u rd'hui !'on ne !'est p as demain , Rien n'est s ta b le qu 'au ciel, le tem p s et l a fortune R~g ne nt absolument au-dessous de la Lune.>

작품의 마지막 장에서 불운한 목동의 입에서 홀러나온 이 대사는 전원극의 목가적이고 행복에 넘친 분위기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감을 준다. 행복에 대한 뜨거운 갈망과 이것이 낳은 아름디운 환각으로 채워졌던 전원극은 이제 그 그 늘에서 서서히 번식하고 있는 불안의 감정에 잠식되기 시작한 것일까 . 그렇다 면 그것은 더 이상 전원극은 아니다. 라캉과 더불어 전원국은 급격히 퇴조한다. 비극_코르네유이전 우리는 앞서 바희극에 대한 서술을 끝내면서 이 시대의 문학의 또 다른 목소 리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우리가 참시 고찰한 전원극은 주 제의 공상적 성격이나 국의 비현실적이고 환각적인 구성으로 보아 비희극과 기 본적으로 동질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1630 년을 전후하여 이것들은 표면 상 당대의 문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전원국까지 포함하겨) 비희극이 이 시대의 문학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 나아가서는 이 시대의 가 장 홍미로운 문학적 사건은 여러 대립적인 장르들이 혼거하였고 그 사이에서 매우 치열한 긱축전이 벌어졌었다는 사실에 있다. 아마도 17 세기 전반기의 문 학이 우리의 호기심을 국도로 자극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 가 싶다. 이 시기에 문학은 시, 산문, 소설, 희곡 등 모든 장르들이 화려하게 피어날 뿐만 아니라 각 장르마다 그 안에서 여러 양식들이 각기 대립하며 우열 울 다두고 있다. 특히 희곡에 있어서의 내란은 단연 입권이다. 희곡, 나아가서 는 문학에 있어서의 춘추전국 시대 -17 세기 전반기의 문학의 양상은 바로 이런 것이었고, 뒤이은 고전주의의 승리는 말하자면 문학의 세계 속에서 이루 어진 천하통일과 감은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희곡이러는 왕국의 한 영지를 답사했다. 이제 또 다른 영지에 발걸음을 옮겨놓을 차례가 되었다. 비희극에 뒤이어 여기 비극이 있다. 근대 프랑스 비극은 위마니슴 전통의 부 활과 더불어 시작된다. 고대의 모델, 특히 세네카 Sene q u 惑} 그의 것으로 잘못 전해진 『오크타비 Oc ta v i~』에서 영감을 받은 위마니슴 비극은 죠델에서 로베르 가르니에로 이어지는 사이에 확고한 장르로 자리잡았다. 그 후 비극은 상당한

기간 동안 불황의 늪에 빠지게 되고 그 컷 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16 2 0 년대 후반의 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6 세기 말에서 1 7 세기 초에 걸쳐 비극이 부 진했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 명맥이 완전히 끊어전 것은 아니다. 4)

4) Cf P. Sage , Le Precla ssicis m e , del Duca, 1962, 10 澤 :〈 En tr e 1594 et 1610, une bonne cin q u a nta i n e de trag e d ie s en fran i; ai s s ont pub lie e s>( 〈 1594 년에서 1610 년에 걸쳐 5~ 가량의 프랑스어 비국이 출판되었다 〉 ).

왜냐하면, 이 기간 동안에 다가올 비극의 부활을 은밀히 준비하는 듯이 보이 는 일련의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들을 통해 비극이 단순 히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어떤 내적 변신까지도 도모하고 있는 점에 예의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연극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이 시기의 비극에 직접적으로- 미친, 고대 이의의 다른 두 영향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제수이트들 의 신라틴극 le the atr e neo-la ti~서, 1610 년경까지도 프랑스 연극계에 군 립했던 이 국은 성서극의 발전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부수적으로 국민적 주 제들을 개발하게 하였다(가령, 비야르 C l. B ill ard 의 『 메로베 Merovee 』 (1610) 나 『 앙 리 대왕 Hen ry le Grand 』 (1610) 과 같은 작품). 또 하나는 이탈리아 연극의 유입 으로서, 이것을 통해 프랑스인들은 그리스 비극의 전통을· 전수받은 것으로 알 려져 있다. 이 이중의 영향이 위마니슴 비극을 지탱했던 세네카적 전통에 상당 한 수정을 가하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침작할 만하다. 첫째로, 성서극의 정신적 원리를 이루는 섭리주의는 운명에 대한 해석과 태도에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비 극성의 분위기를 바꾸어놓았다. 5) 다음으로, 국민적 주제의 도입은 극중에서 정 치적 성찰을 가능케 하였고, 통치자들의 역할과 관련하여 정치적 책략주의

5) 다시 말해, 운명을 신의 섭리와 결부시킨다는 것은 운명을 맹목적이고 잔인한 폭력으로 보는 대신 궁극적으로 선으로 인도하는 신의 의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절망과 가서는 Pulcin e lla5 :.. 〈 잔니〉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이 comed i a 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가면을 쓴 희극 인물들과 그렇지 않은 인물들(가령, 한쌍의 젊은 연인들)과의 대조이다. 비탄 속에 한 줄기 구원과 희망의 빛이 잉태되어 있으며, 이로써 비극의 처절함과 암울 함은 상당히 희석될 것이다.

machia v elism e, 통치자들의 영웅적 영도력 , 이에 수반되어야 할 절제와 관용 의 미덕 등이 새로운 논의의 주제로 부각되었다. 한편, 1575 년 이후 비극 작가들이 이론가들에 의해 설정된 금기에도 불구하 고 소설에서 주제를 빌려왔다는 사실도 특기할 만하다. 멀리 고대소설을 번안 한 작품들이 있었는가 하면(가령 르 딘뉴 LeD ign~ 『 아르사세 Arsac e J 와 3 편의 『 샤리트 Cha rit e 』 ) , 이탈리아의 르 타소, 반델로 등의 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작 품들도 있다(가령, 익명의 『 잔인한 무어인 More cruel 』 ). 또한 쟈크 이베르 Jac qu e s Yver 의 소설들은 키드 K y d 의 『 스페인 비극 la Trag e die espagn oleJ, 멩프레 Ma inf ra y의 『 로도스 여인 La Rhod i enne 』 을 낳게 했다. 이 소설의 감염이 비극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키게 한 것은 분명하다. 대체 로, 규칙의 개념이 약화됨으로써 이른바 〈 비규칙적 비극t ra g e di e irr eg ulier e> 이 성행하기에 이르렀다. 5 막으로 구성되는 비극의 기본 골격은 여전히 유지되 었지만, 막간에 삽입되는 합창은 점차 줄어들었고, 단일 un it e~ 규칙들도 강 제성을 잃었다. 가장 괄목할 만한 변화는 극 속의 사건이 매우 복잡하고 동적 인 것으로 변했다는 사실이다. 이 비국들은 〈 장면들의 다양성과 변화로써 사람 둘의 눈을 즐겁게 하려고 〉 6 ) 했던 것처럼 보인다. 1630 년 이전의 비극 속에서 마치 소설에서와 같이 과도한 언동과 난폭성, 살인, 강간, 근친상간, 피의 복 수 따위를 보는 것은 혼한 일이다. 이 시대의 프랑스 연극은 많은 점에서 당대 의 영국 및 스페인의 국을 닮았다.

6) 1632 년, 극작가 Ra y ss igui er의 말 : <… que l'on conte n te l eurs yeu x par fa div e r- site e t l e change m ent de fa scene du thea tr e e t q ue le gran d nombre des acci de nts et aventu re s extr ao rdi na ire s leur 6te n t la connais sa nce du suje t > ( c ite i n P . Sage , L e Precla ssicisme , de! Duca, 10 璃) .

한마디로, 지난날 서정적 비탄으로 일관했던 비극은 이제 행동의 장으로 변 했다. 바극의 주인공들은 여전히 자신의 불운 속에서 탄식을 발할 것이다. 그 러나 그들은 더 이상 운명의 수동적 제물이 되는 대신 자신의 의지와 정열로써 이 운명에 저항한다. 말하자면, 그들의 운명을 만드는 것은 그들 자신이며 그

들의 불행도 자업자득이다. 이렇듯, 극의 주체가 초월적 운명에서 인간으로 옮 겨진 이 비극 속에서 신화적 또는 우의적 인물들이 처츰 모습을 감추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이 초월적 인물들의 개입에 대신하는 것은 주인공들의 꿈이나 환상이다. 당대의 극작가들은 이것이 〈 사실다움 〉 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판단했던것 같다. 어쨌든, 프랑스의 비극은 가르니에의 후계자들, 클로드 비야르 Claude Bil lard , 장 드 슈랑드르J ean de Schelandr~ 더불어 운명의 초월적 세계에 서 인간의 세계로, 그의 정념과 의지의 세계로 한 발짝 내려섰다. 이 시대의 비극 속에서 지난날의 관습들, 긴 대사, 과장된 표현, 대조법, 현학적 지식 의 과시 등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떤 새로운 요청을 수용하려 하였고 이로써 다가을 비극의 길을 열었던 것은 확실하다. 과 거와 미래 사이에 걸려 있는, 이 모호한 시기의 모호한 상황을 가칭· 홍미롭게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앙뚜안느 드 몽크레티엥 An t o i ne de Montc h reti en (l575- 1621)0] 다. 노르만디 출신의 귀족이자 극작가였던 몽크레티엥은 20 살의 젊은 나이에 이 미 자신의 명작 『소포니스브 Sop hon is be 』 를 쓰기 시작하여 최초로 발표하였고, 그 후 5 편의 비극과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1 편의 전원극을 남겼다. 그의 최고 의 작품은 고대 신화를 주제로 한 것(가령 r 에크토르 Hec t or 』)보다는 로마풍의 비국, 특히 『소포니스브 』 와 『스 코틀랜드 여인 L'Ecossa is e 』 으로 알려져 있다. 첫번째 비극은 발표된 지 5 년 후인 1601 년에 개작되었는데, 아마도 말레르브 의 충고를 따른 것으로 보이는 이 작업을 통해 비극의 새로운 가능성이 시도된 것이 분명하다. 몽크레티엥은 이 작품 속에서 왕들의 의무 및 이로 인한 의지 의 긴장과, 사랑의 부드러운 그러나 강렬한 요청을 극단적으로 대립시키고 있 다. 마지막 제 5 막에서 주인공 마시니사 Mass ini ssa 는 인간 심정의 자연스러운 갇전] 그토록 대립되는 정치적 요청에 헛되이 반항하며 자신의 운명을 비탄 한다.

또 하나의 비극 『 스코틀랜드 여인 』 도 동일한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기이하 게도 두 개의 비극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은 첫 2 막 속에서는 정치적 압력 에 저항하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그리고 뒤이은 3 막 속에서는 사형에 처해지는 마리 스튜어트 Mar i e S t uar t를 주제로 삼고 있다. 이 두 여인 사이의 대립은 단순히 상반된 두 정치적 개념 또는 두 종교적 신앙(가톨릭과 신교) 사이의 대 립만은 아니다. 그들의 비극의 본질은 양립할 수 없는 두 객관적 상황의 대립 이 서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도 있었던 두 존재를 죽음에 이르도록 갈라놓은 데 있다. 그들의 개인적인 예지나 덕성은 끝내 운명의 중압을 견디지 못하고 다가 오는 불행과 죽음을 가로막지 못한다. 몽크레티엥은 이 암울한 비극을 통해 인 간에게 닥쳐오는 모든 불행과 비참마저도 신의 비밀스러운 섭리로 돌리며 조용 히 받아들이는 예지를 가르치려 했던 것일까. 7)

7) Cf ].M orel, 앞의 책 , 92 쪽 :

지금 프랑스 비극의 역사를 더듬고 있는 우리에게 더욱 홍미로운 것은 몽크 레티엥의 작품들이 비국의 변화 과정 속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다. 앞서 확인한 바와 같이 그는 로베르 가르니에로부터 물려받은 위마니슴 비극의 전통을 대부 분 답습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비국 속에서 변화의 어떤 조짐둘을-~비록 미미한 것이라 할지라도-찾아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아마도 가장 주목 할 만한 것은 극이 갈등과 대립을 부각시키는 데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비국은 이제 운명의 일방적인 승리와 인간의 일방적인 패배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물론, 몽크레티앵의 작품 속에서도 인간은 운명의 무게를 견디 지 못하고 좌절하며, 그의 비탄과 절규는 합창 소리와 함께 무겁게 메아리친 다. 그러나 극의 중심이 인간의 패배와 비참의 확인에서, 운명의 압력에 저항 하는 의지의 발동과 의식의 명칠성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 이 양자 사이의 대립 그리고 이것이 불러일으키는 갈등이야말로 그의 비

극의 중심축이 될 것이다. 이 대립의 긴장상태가 극에 움직임과 굴곡을 부여하 고 이른바 극적 효과를 증대시키리라는 것은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다. 전원국 울 쓰기도 했던 몽크레티앵은 그의 비극 속에서, 효과의 극대화를 노리는 전원 극적 (즉 , 바로크적) 수법을 조금은 원용했을 법도 하다. 다시 한 번 환기하자. 이 모든 새로운 요소들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위험하다. 다만, 우리는 바 극 속에 대립의 긴장과 극적 효과를 도입함으로써 몽크레티엥이 비국의 어떤 변신을 희미하게나마 예고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싶을 따름이다. 1630 년대에 이르러 우리는 마침내 장 메레J ean Ma i re t (1604 - 1686) 를 통해 비극의 부활을 맞이하게 된다. 이 새로운 비극이 전세기 후반에 나타났던 위마 니슴 비극의 재판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아당은 그의 문 학사에서 이 비극의 부활을 한 일화와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다. 이 시대로 말 하면 비희극과 아울러 전원국의 전성기였는데, 당시 문단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던 두 사람, 라 발레트 La Valett e 추기경과 크라마이유 공작 le comt e de Crama i l 은 젊은 작가 메레에게 규칙에 부합된 전원극을 쓸 것을 권유하였고, 그래서 완성된 것이 1630 년의 『실바니르 Sy lvan i re 』 였다. 8) 이 작품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는데, 메레는 다음해에 가히 문학선언이라 할 만한 서문을 이에 붙였다. 물론, 『 실바니르 』 는 전원국이다. 문제는 전원국임에도 불구하고 그것 이 르 타소의 『아민타』나 구아리니의 『충직한 목동. !l 과 마찬가지로 규칙을 준수 한 데 있으며, 이로써 극작에 있어서 〈 단일났t 위시한 규칙의 문제가 진지하게 제기되었다는데 있다. 그러나 메레의 비국을 다루기 전에 참시 아르디와 테오필 드 비오의 작품에 눈을 돌려볼까 한다. 배우이자 극작가였던 알렉상드로 아르디 (1570-1632) 는 그 의 비국보다는 회비국으로써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아마도 100 편에 달하~근 많 은 작품을 쓴 것으로 추측되는 그는 약 40 편만을 남겼는데, 그중 비극은 12 편 s) Cf A.A d am, 앞의 책, 166-167 쪽.

에 불과하다. 그는 비극의 주제를 주로 고대에서 빌려왔고, 극작에 있어서는 대체로 죠델, 가르니에로 이어지는 위마니슴 비극의 전통을 따랐다. 그는 극을 5 막으로 구성하고 처음에는 합창을 삽입하였는데, 그 후 공연에서는 이를 생략 하였고 끝내는 국에서 제의시켰다. 그는 〈 알렉상드렝 〉 {12 음절시)을 채택하였 고, 가르니에의 예를 따라 전령과 유모를 인물 중에 설정하였는가 하면 꿈과 예언과 망령의 출현 등을 이용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가 위마니슴 비극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 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가장 특칭적인 것은 그의 비극 속에서 〈 행동 〉 이 차 지하는 비중이다. 물론, 그의 비극의 어떤 장면들은 기나긴 비탄의 독백 혹은 행동이 배제된 이야기체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대체로 그의 국은 움직임과 변 화를 선택한 것이 분명하며 특히 격렬하고 극단적인 행동을 선호한 듯 보인다. 그가 복수의 주제에 이끌렸던 것은 주목할 만하다. 『티모클레 Ti moclee 』 속에 서 한 무사에게 능욕을 당한 테베의 여인은 그를 유인하여 우물 속에 묻어버리 고, 데크레스 Lucrece 』 속에서 아내에게 속은 남편은 그녀의 정부를 살해하지 만 그 자신은 이 정부의 친구에게 다시 복수당한다. 결국, 아르디는 인간의 들끓는 감정에 민감하였고, 그것들이 휘몰고 오는 가 공할 광란의 드라마를 국 속에 재현하기를 즐겼다. 그의 주인공둘은 야망과 사 랑과 잔인성과 복수의 극을 달리며 지신의 파괴를 스스로 완성시킨다. 『 알렉상 드르의 죽음 La Mor t d'Alexandre 』 {1626 년에 발표) 속에서 자신에게 닥쳐울 죽음의 위험을 분명히 의식하면서도, 자신의 지난날의 행적으로 쌓아울린 찬란 한 명예에 합당하기 위해 감히 이 위험과 맞선다. 여기, 우리에게 홍미로운 것 은 비극의 주인공이 행동적인 인물로 변모했다는 사실이다. 이 비극 속에서 신, 신탁, 숙명 따위는 차츰 자리를 잃어가는 대신, 행동적이고 도전적인 인간 들 그리고 분출하는 정념과 의지의 결단이 전면에 등장한다. 몽크레티엥 속에 서 우리가 조심스럽게 전단했던 변화의 가능성들은 이제 아르디 속에서 확실하 게 구현된다. 데오필 드 비오 Theo p h i le de V i au(1590-1626) 의 비극 『 피람과 티스베

Pyra me et Th is be 』 도 뛰어난 독창성으로써 각별한 주목을 끈다. 1621 년에 공 연된 이 작품은 코르네유 이전의 비극의 가장 전형적이고 가창 완성된 예로 인 정받았으며, 당대의 사람들에게, 특히 메레와 스퀴데리에게 강한 인성을 남겼 다. 이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의 원천은 오바디우스으] 『 변신보 』 제心 1 이다. 그러나 테오필이 마리노의 Pir am e e T is be 에서도 영감을 얻었을 것으로 추측 된다. 이 비극은 표면상 매우 단순하고 원시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계속되는 장들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장은 마치 독립 된 한편의 시처럼 펼쳐져 있다. 가령, 제 5 장은 두 개의 긴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체적으로 행동보다는 이야기체와 서정적 고백들이 우세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성의 느슨함과 허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고 전주의 〉 룰 향해 한 걸음 전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연결이 결여된 듯이 보이는 장등은 하나의 내재적인 리듬에 의해 이어지고, 극의 전전에 따라 윤곽은 뚜렷 해지고 긴장은 고조된다. 주제는 단 하나, 불가능한 비극적 사랑으로 집중되 고, 사건은 2 41-]간내에 종결되며, 장소도 제한되어 있다(작가는 두 연인이 연달 아 자살하게 되는 숲속의 무덤이 아주 가까운 곳임을 밝히고 있다) . 이 비극 속에서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통찰은 찾아보기 힘들고 또 작품 전체를 적시고 있는 것이 차라리 전한 서정성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사랑의 영굉에 바쳐진 한 편의 시-테오필은 실은 이 영원한 전원국의 주제를 비극으로 옮겨놓은 것뿐이 다. 전원극 속에서 아름답게 장식된 이 영굉을 비극으로 채색함으로써 그는 삶 에 대한 회의를 나타내려 했던 것일까. 인간은 이 세상에서 이루기에는 너무나 도 아름답고 순수한 꿈을 안고 살아가며, 이 꿈을 끝내 포기하지 않을 때 죽음 의 비극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테오필의 세계는 분명히 다론 빛깔이지만 아르 디의 열광적인 갈망과 분노와 복수의 세계와 겹쳐진다. 그것들은 고전주의 비 극의 세계와는 아직 거리가 멀다. 그리고 이 시대의 갇구와 흥분에 보다 충실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로써 다음 세대의 비극이 내밀히 준비되었다는 것도부인할수없다.

이제야 우리는 메레로 되돌아온다. 그의 극작 활동은 표면상 기묘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비회국으로써 출발 했 던 그는 몇 편의 비극을 쓴 후 다시 비희극 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대체로 실패작으로 간주되는 후기 작품을 제의한다면 그는 극작에 있어 어떤 일관된 태도, 죽 고전주의적 규칙의 개념과 취향에 충 실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으며, 바로 이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다고 말 할수있다. 우리는 그의 『 실바니르 』 에 대해서 잠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이에 앞선 작품들, 특히 1626 년의 『 실비 S i lv i e 』 에서부터 이미 그의 특칭적 경향둘은 나타 나기 시작했다. 사건을 단순화하여 관심을 하나의 초점으로 집중시키고, 극적 움직임을 강화시키며 내적 감정의 굴곡을 부각시키는 경향 말이다. 비희극의 형식 속에서 그가 고전주의적 규범과 수법을 고수하려고 했던 것은 정녕 놀라 운일이다. 마침내 1634 년 그는 비극 『 소포니스브』를 내놓았다. 프랑스의 연극사상 최초 의 규칙 비극 la tra ge d ie regu li e r~ 간주되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그는 특 별히 전과 디른 극작의 방식을 고안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초기의 비회국을 제작했을 때의 방식을 보다 엄밀하게 적용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는 〈삼단일 tro is u n it es 〉 의 규칙을 충실히 지키고 〈예법 b i enseances 〉의 법칙을 준수함으 로써, 그리고 단순 두명하면서도 위엄 있는 스틸울 시종 견지함으로써 비국의 한 전형을 보여준 셈이다. 그가 지킨 것은 형식적 엄정성만은 아니다. 사건의 전개에 있어서의 단순성, 비극의 극점을 향한 긴장의 상승, 내적 갈등에 부여 된 철대적 중요성은 그것의 부분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 소포니스브 』 를 최초의 고전 비극이 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메 레는 다음해 이 비국에 붙인 서문 속에서 극작에 있어서의 규칙의 준수를 강력 히 주장하였다. 요컨대 그는 극작의 실제와 이론을 통해 정동적 비극의 미래를 열어놓았던것이다. 『소 포니스브』는 그 자체의 성공으로 그치지 않고 비극을 부활시켜 크게 유행 하게 했다. 1635 년과 1636 년, 1 싹!의 비극이 동수의 비희극과 함께 공연되었

다. 9) 뿐만 아니라 메레는 역사적 주제 (주로 로마사에 근거한)에 대한 관심을 불 러일으켰으며, 이로써 국가의 중대사와 이에 걸맞는 고귀한 정념들이 비극 속 에서 다루어지기에 이르렀다. 이 드높은 주제들이 장엄한 스틸과 짝을 이루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규칙은 모든 작품에서 준수되지는 않았다. 비희극의 지 속적안 영향은 비극을 본궤도에서 탈선하게 하는 일이 종종 있었으며, 고상한 문체에 평속한, 때로는 희극적인 어두가 뒤섞이는가 하면 〈 예법 〉 의 법칙을 어 겨 무대 위에 살인의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메레에 뒤이어 이제 위대한 비극 작가로서의 코르네유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 가 되었다. 그의 『 르 시드 Le C i d 』 에 앞서 언급해야 할 비극이 있다면 그것은 트리스탄 Tr i s t an l' Herm it e(1601-16ss) 의 『 마리안느 Ma ri anne .!) , 단 한 편뿐 이다. 오늘날까지도 읽혀지고 또 공연되기에 합당한 이 비극은 감정의 고귀함 과 구성의 엄밀함과 언어의 풍요로움으로써 이미 코르네유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코르네유 및 그 이후의 비극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다시 한 1 번 1630 년대의 비극 전반에 대해, 특히 그것이 놓인 특이한 상황에 대해 잠시 되돌이볼필요가있다.

9) 1634 년, 부르고뉴 극장의 공연 레퍼토리에 의하면 69 편의 비회국에 대해 단 2 편만의 비극이 기록되어 있다. 그 후의 비극의 부활은 분명히 『소포니스브 』 이후의 현상이다.

비극과 비희극의 공존 이 특이한 상황이란 상반되는 연극의 두 장르, 비극과 비희극의 공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비희극(및 전원극)의 역사를 통해 그것이 세기초부터 나타 나기 시작하여 1620 년대에서 1630 년대에 걸쳐 전성기를 맞게 되는 것을 확인 하였다. 이것은 소설의 출현 및 유행과 때를 같이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뒤이어 우리는 이 시대의 문학이 단순히 바로크적인 양식들에 의해 독점된 것 이 아니라는 것을, 죽 명맥이 끊어진 듯이 보였던 비극이 이 거센 반비극의 회 오리 속에서 계속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임중모색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1634 년, 로트루 Ro t rou(1 609- 1 650) 의 『 죽어가는 헤라클레스 Hercule mouran t .!I 에 뒤이어 메레의 『 소포니스브 』 가 발표된 이후 사정은 급격 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해 부르고뉴 극장 Ho t el de Bourg o g n 터]서 공연된 연극의 목록에는 69 편의 비희극에 대해 단 2 편의 비극만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뒤이은 2 년 사이에는 비극과 비희극의 공연이 같은 수에 이르렀다. 비극은 성 공적으로 재기한 것이다. 그러나 비극의 결정적 승리에 이르기까지는 아직도 멀다. 프랑스 연극의 양분상태는 한동안 지속될 것이며, 이 상태의 지속이야말 로 이 시대 문학의 가장 의미 있는 특칭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양분상태를 여러 가지 시각에서 가늠해 볼 수 있다. 가장 단순한 시각은 그것을 대립의 관계로 보게 한다. 실제로, 양자 사이의 경쟁과 각축은 치열했다. 극작가와 이론가들은 각기 작품과 논설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표 명하고 옹호하였다. 특히 작품에 붙인 서문은 극작의 원리와 방식에 대한 자신 들의 견해를 밝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ii' 티르와 시동 』 (1628) 에 붙인 프랑수아 오지에의 〈 서문 〉 과, 『 실바니르 .!l 에 붙인 메레 자 신의 〈 서문 〉 (1631) 이다. 각기 극작에 있어서의 자유와 규칙의 존중을 옹호함으 로써 비희극과 비극의 미학을 대변했던 이 서문들은 문학선언이라 하기에 손색 이 없다(우리는 장을 달리하여 연극을 에워싼 이론적 대립의 역사를 보다 상세히 다루 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양자의 관계를 단순히 대립의 관계로 보는 것은 옳지 않 다. 왜냐하면, 그것들 사이에는 표면적인 또는 이론적인 대립에도 불구하고 상 당한 교감의 폭이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지적할 것은 경직 된 이론가들과는 달리 극작가들은 놀라운 유연성을 발휘했었다는 사실이다. 논 리의 차가운 메커니즘에 따라 일도양단하며 대립과 배타성을 조장한 것은 이론 가들기었다. 이에 반하여, 극작가들이 보여준 정신의 유연성과 적응의 기교는 경탄할 만하다. 요컨대, 그들은 양자 사이를 너무나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그들은 동시에 비극 작가이자 비회국 작가였던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적어도 1630 년대에 그들은 후자로써 더 많은 영광을 차지했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양자의 미묘한 바중의 차이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문제는 상 호 모순되는 연극의 두 미학 사이룰 지극히 자연스럽게 내왕할 수 있었디는 데 있으며, 우리는 바로 이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비희극으로써 시작한 메레는 몇 편의 비극을 쓴 다음 다시 비희극으로 되돌이왔고, 『 죽어가는 헤리클레스 .!J 를 내놓은 로트루는 이것으로 비희극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스퀴데리는 1635 년 비극 띠동 D i don 』 을 쓴 칙후 바희극 『 관대한 연인 l'Amant l i beral 』 을 내놓았 다. 우리는 이제 몇 편의 희극으로부터 시작하여 비희극 『클 리탕드르 Cl i­ tan dreJ, 비극 『 메데 M¢d¢e 』 를 거쳐 다시 비희극 『르 시드 』 로 되돌아온 변화무 쌍한 코르네유의 행적에 대해 크게 놀라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양자 사이의 이 자연스러운 왕래가 연극에 미친 영향은 어떤 것이 었을까. 먼저 당연한 결과로서 그것은 양자 사이의 거리를 단축시키고 차이를 희석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가령, 여기 극작에 있어서의 규칙의 문제가 있다. 각기 규칙의 준수와 규칙의 거부를 주장함으로써 첨예하게 대립했던 양자는 적 어도 이론상으로는 화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비희극에 하나의 기이한 변화가 일어났다. 즉 극직에 있어서 의형적 속박을 거부하고 전적인 자 유를 표방했던 비희극이 비극에만 적용되었던 단일의 규칙을 상당부분 수용하 기에 이르론 것이다. 1630 년, 메레가 『 실바니르』 로써 규칙에 부합된 최초의 전 원극을 시도했었다는 것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다. 바희극에서 처음으로 이 시 도에 가담한 것은 다름아닌 코르네유였다. 1630 년(또는 1631 년)에 공연된 그의 『클 리탕드르 』 는 복잡다단한 사건들을 2 41-]간내에 담는 데 성공함으로써 단일의 규칙에 충실했다. 뒤이어 뒤 리에 Du R y er도 단일의 규칙들이 지켜전 『 알시메 동 Alc i medon 』 (1632) 을 내놓았고, 다음해에 메레는 다시 『 비르지니 Vir- gi n i e 』 로써 동일한 성격의 비희극을 선보였다. 우리는 여기서, 비희극의 자유분방한 로마내스크한 주제와 형식적 규제의 원 리가 과연 조화될 수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물음과 관련하여, 비희 극이 단일의 적용에 있어 상당한 융통성을 발휘했었디는 점에 유의하고 싶다. 가령, 사건의 단일 un it e d'ac ti on에 있어 비회국 작가들은 하나의 중심적인 사

건의 근간을 유지하되, 이에 밀접하게 관련지어져 있는 부수적인 사건들을 수 용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한편, 시간의 단일 un it e de tem p s£ 일출에서 일 몰까지로 한정하는 대신, 그 어느 시점에서 시작하든간에 2 4.A]간의 시한을 인 정했다. 장소의 단일 un it e de li eu 에 있어서도 하나의 방이나 집에 한정하는 대신 한 도시, 숲, 섬으로까지 확대시켰다. 요컨대, 이들은 단일의 규칙을 존 중하되 단일에 대해 상당히 유연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개념이 정통적인 비극보다 이탈리아 전원극의 유형과 더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레가 『 실바니르 』 를 쓸 때 모델로 삼은 것은 르 타소의 『 아 민타 』 와 구아리니의 『 충직한 목동. !I 이었는데, 이것들은 바로 규칙에 부합된 전 원극 o] 었다. 당대의 비희극 작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이와 같은 단일에 대한 느슨한 개 념은 코르네유의 몇몇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가령, 커다란 논 란의 대상이 되었던 그의 『 르 시드 』 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은 코르네유가 단일 의 규칙들을 지키는 데 몹시 어려워했고 또 상당한 실수를 범한 것으로 믿었었 다. 실제로 『 르 시드 』 는 주된 사건, 즉 로드리그와 쉬멘느와의 사랑 의에 로드 리그에 대한 왕녀의 사랑이라는 부수적인 사건을 담고 있고, 무대는 각기 다른 세 장소로 옮겨지며, 이야기는 한낮에 시작하여 다음날 낮까지 지속된다. 이 모든 것은 엄격한 의미의 삼단일의 규칙에 비추어볼 때 분명히 과오라 하지 않 울 수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코르네유는 단 일의 규칙을 다루는 데 있어 어색하지도 않았고 서둘지도 않았다. 그가 쓴 것 은 비극이 아니라 비희극이었고, 그는 이 장르에 적용된 당대의 관행을 충실히 따랐을뿐이다. 그렇다면, 이 양자의 만남에서 또 하나의 상대인 비국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우선, 비희극이 받은 영향이 규칙이러는 의형적 형식과 관련된 데 반해 비극 속에 일어난 변화는 다분히 내면적 성격의 것으로서 가늠하기가 대단히 미묘하 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비회국은 당시 전성기를 맞이함으로써 불원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데 반해 비극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위

대한 완성을 앞에 두고 있는 장르러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보다 신중하고 주의 깊게 접근할 필요성을 느낀다. 먼저, 16 세기 후반의 위마니슴 바극과 1630 년을 전후하여 부활한 새 비극 사 이의 현저한 차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신화와 역사 속의 널리 알려진 비 극적 인물 또는 사건을 주제로 한 위마니슴 비극이 일방적으로 사건의 비장함 과 윤리적 의미에 치우치며 서정적 탄식과 교훈적인 격언들로 채워져 있디는· 것은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다. 때로는 한 막 전체를 차지하기도 하는 긴 독백 이나 막간에 삽입되는 합창은 이 극의 성격으로. 보아 조금도 기이할 것이 없 다. 그러나 1630 년대의 비극 속에서 이런 것들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사 건은 이제 종국을 향한 혼들림 없는 직선적인 전진의 형태를 취하는 대신 수많 은 굴곡, 전진과 후퇴, 지속되는 긴장으로 채워져 있다. 주인공들은 피할 수 없는 재난과 불행 앞에서 헛되이 바탄에 빠져드는 대신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이에 저항하며 최후의 패배를 의식하면서도 이 저힝울 궁극에까지 견지한다. 말하자면, 새 비극의 주인공들은 의지적이고 행동적이 되었으며, 이 비극 속에 되살아난 것은 다름아닌 행동 ac ti on 의 개념이다. 이 변화의 배경에 우리는 조심스럽게 바희극과의 만남을 보기를 원한다. 다 시 말해, 당대의 비국 작가들이 동시에 비희극 작가였디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 다. 로마네스크한 주제의 비희극은 필연적으로 사건의 극적인 전개를 극 구성 의 원리로 십았다. 비희극의 이와 같은 방식에 익숙했던 작가들이 비극의 제작 에 있어서 이를 원용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그들은 극히 자연 스럽게 비극 속에 행동을 도입하고 대립과 갈등의 구조를 만들며 이로써 긴장 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갔을 것이다. 요컨대, 여기 새롭게 조성된 것은 극적 효과이다. 죠델과 가르니에의 비극 속에서 장면들은 주로 서정적 효과를 위해 고안되었었다. 그러나 이제 새 바국은 그것들을 오직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의 극적 효과에 따라 구싱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위마니슴 비극과 새 비극을 잇는 과도기의 몇몇 작가들에게서 이 변화의 첫 조짐들을 찾아내기에 힘쓴 바 있다. 몽크레티앵의 미미한 변화의

시도가 아르디에 이르러 좀더 분명하게 구체화되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다. 바 극은 이미 그 자체로써, 그리고 어떤 내적인 요청에 따라 스스로 변화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비희극과의 만남은 결국 이 변화의 움직임을 크게 촉진시켰 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 비희극은 가장 총애받는 극 양식으로서 가히 연극의 왕자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아직도 허약한 비국이 위세당당한 비희극에 압도당 하고 또한 비국 작가들이 비희극의 유혹에 굴복했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 은없다. 여기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비극이 비희극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다. 프랑스의 바극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로마 비극의 전통과 접목됨으로써 성 취된 것, 다시 말해 고대 비극의 재현, 프랑스적 재현으로. 인식되어 왔다. 코 르네유와 라신은 소포클레스와 유리피데스의 계승자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틀 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고대 비극과 프랑스 고전 비극과의 엄청난 차이를 감추지는 못한다. 한마디로, 전자가 비극성에 초월적 • 신적 의미를 부 여하였다면, 후자는 그것을 인간적 차원으로- 끌어내렸다고 할 수 있다. 고전 비극의 주인공들은 자유롭고 의지적이며, 〈 운명 〉 과 싸우는 대신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장애물과 싸운다. 그리하여 신과 운명 앞에서 모든 행동의 여백이 말살 된 고대 바극과는 달리 고전 비극은 본질적으로 행동의 비극이며, 이 행동의 극적인 궤적을 논리적 엄정성과 밀도 가운데 재현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삼을 것 0] 다. 우리는 이 새로운 비극의 개념을 〈 근대적 〉 이란 말로 정의할 수밖에 없다. 그 것은 〈고 대적 a nitq ue ou an ci en 〉 이란 말과의 대조를 강조하기 위해 쓴 말이 다. 최초, 위마니슴 비극은 내용과 구성의 형식에 있어 전적으로 고대극을 모 방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고대 모방의 전통은 계속 이어져 왔고, 심지 어 고전 시대에도 이 전통의 위력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고대 작품들은 여전 히 모방되어야 할 완벽의 모델이었고, 작가들은 고대인의 충실한 제자로 자처 했다. 그러나 이들은 의식했거나 안 했거나간에 자신들의 비극 속에서 비극의 새로운 세계와 인물들의 행동의 새로운 양태를 국 구성의 새로운 방식 가운데

그려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비극은 바로 그들이 실아가고 있는 시대가 공감하 는 바극이고, 그들의 인물들은 17 세기 프랑스인들이다. 그들은 지극히 정당하 게 〈근 대적 〉 이라불리어지기에 합당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진정한 〈 근대인들 modernes ).g. 비회국 작가들(그리고 소설 가들)이다. 이들은 애당초 고대에 눈길을 돌리지도 않았고, 하물며 극작의 영 감을 그것에서 찾으려 하지 않았다. 이따금 고대 소설 또는 역사에서 소재를 빌려오는 일은 있었지만 그것은 드문 일이었고, 그럴 경우에도 이 소재는 이내 시대의 색깔로 물들여졌다. 그들은 보다 많이 근레의 의국 작품들,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소설과 전원극, 가깝게는 프랑스의 소설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조금도 거리낌없이 그들 자신의 격앙된 시대와 이 시대의 사람들의 환상적 이야기를 펼쳐나갔다. 그들은 오랫동안 프랑스 문학을 고대에 예속시켜 왔던 끈끈한 인 연, 단단한 탯줄을 끊고 그것이 마땅히 뿌리 내려야 할 본향으로 되돌려놓은 것과 같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의 문학은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한 채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17 세기 프랑스의 한 특정한 시기에 프랑스인들의 열망과 꿈, 도약과 좌절을 대변하게 될, 그리고 프랑스적 정신과 취향에 가장 합당한 심미 적 형식 가운데 이루어지게 될 진정한 근대문학의 완성은 다른 문학 양식에 위 임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다름아닌 고전극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이 비극의 성장과 변모의 기나긴 과정에서 비희극과의 교차가 갖는 의미의 중대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프랑스의 고전 비극이 전정 프랑 스적인 국민문학으로 자립하기 위해서는 한동안 비희극과 동행해야만 했던 것 일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만남이었고, 비극은 그것을 추월하 여 앞서나갔다. 비희극에는 비극이 취해야 했던 것만큼 버려야 할 것도 많았기 때문이다. 아니, 비극이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확보하고 스스로를 확립하는 것 은 본질적으로 反비희극의 입칭에서이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고전극의 이론적 형성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비희극에 대해 무엇을 청산해야 했는가를, 다시 말 해 비극과 비회국과의 처절한 결두를 보게 될 것이다. 그에 앞서 1640 년 이후 의 비국에 참시 눈길을 돌려보기로 하자.

비극一_-코르네유 이후 1640 년경 마침내 바극은 기나긴 우여곡절과 방황 끝에 요지부동-하게 확립되 었고 자신의 위대한 시대를 맞이할 듯이 보였다. 비희극이라 불리어지는 작품 둘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규칙의 원리와 이에 충실한 비극의 승리는 결정적 인 것이 되었다. 희극과 비희극을 전전했던 코르네유도 1640 년 이후 비극에 전 념했는데 , 훗날 『 르 시드 』 를 재판할 때는 이것을 〈 비극 〉 이라 고쳐 부르기까지 했다. 이 기류의 변화를 주도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여기서 〈 do ct es 〉 라 불 리어전 이론가들의 역할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당대의 극작가들에게 규칙 의 개념과 정동적 비극의 형식을 받아들이도록 유도(강요?)한 것은 다름아닌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의 관객들로 말하면 비희극의 무대가 보여주 는 그 화려한 변화와 다양한게 매료되어 있었고, 극작가들도 이 관객들의 기호 에 부응하여 비희극의 제직에 열을 울리고 있었다. 따라서 변화의 근원이 관객 이나 극작가 자신에게 있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프랑스 고전극이 극작가 들의 작품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론가들의 이론을 통해 먼저 확립되었다는 것은 홍미로운 일이다(우리는 다음 장에서 이 문제를 더 심도 있게 디루게 될 것이다). 어쨌든, 1640 년 규칙에 충실한 바극은 프랑스 연극의 새 주인이 되었고, 그 것의 원리들은 이론적으로 홈잡을 데 없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론적 완성이 곧 작품의 완성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우리는 아직도 한동안 기다려야 하며, 지금은 이 기다림 속에서 행해진 시도들에 대해 잠시 되돌아봐야 할 때이다. 1640 년대를 지배한 가장 위대한 비극시인은 두말 할 것 없이 코르네유이다. 『 르 시드 』 를 에워싼 격렬한 논쟁 속에서 크게 상처입은 그는 한동안 절필하던 끝에 1640 년에는 『오라스 Horace』 를, 2 년 후에는 『 신나 Ci nna 』 와 『 폴리의크트 Poly euc t e 』 를 속속 발표하여, 마치 그를 비난한 이론가들에게 앙갚음이라도 하 듯 규칙에 충실한 비극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이 작품들은 당대의 다른 극작가 에게 본이 되었고, 그래서 공보 Gornbauld, 로트루, 뒤 리에, 트리스탕 등은 앞다투어 비극을 쓰며 코르네유와 경쟁울 했다. 비극의 주제는 주로 로마사에

서 빌려왔고, 그리스사에 의거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프롱드란이 일어나기 전 까지 코르네유적 유형의 비극은 이렇듯 꾸준히 이어졌다. 그 후, 비국의 유행은 갑자기 사그라졌다. 1649 년에서 1652 년 사이에 파리 의 두 극장은 단 여섯 편의 새 비극을 공연히는 데 그쳤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비국 의의 다른 관심사에 눈길을 돌렸고, 코르네유 자신도 1651 년 이후 극작을 중단했다. 이 갑작스러운 비극의 침몰은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 아당은 이것을 프롱 드란으로 야기된 혼란과 결부시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차라리 관객 둘의 취향의 변화를 환기시키면서, 이미 프롱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관객들은 이 비극의 너무나도 명백한 결함을 감지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등을 돌린 것 이라고 설명한다. 양식 있는 사람들은 신을 향한 빈번한 부르짖음, 독백, 칼날 같은 준임함, 장황한 수사에 싫증을 느꼈으며, 때로는 말뿐인 영웅들의 과장된 자기 전시를 비웃었다. 10)

10) Cf A. Adam, 앞의 책 , 17 쪽 :

그런데, 기이하게도 비극은 이 돌연한 쇠퇴 후에 다시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것은 갇은 유형의 비극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1630 년대의 비희극에 가 까운 것으로서, 지극히 로마네스크한 취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전통적인 로마 네스크와 새로운 사랑의 유형이 뒤섞인 이 비극을 가리켜 아당은 〈 사랑의 비극 tra ge d i e g alan t e 〉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특이한 비극의 첫 모델은 토마 코르네유 Thomas Corne ill e( 위대한 코르네 유의 l 었갈 손아래 동생, 1625-1709) 의 『티모크라트 Ti mocra t e 』 (1656) 였다. 주제 를 라 칼프르네드의 『클 레오파트라』에서 빌린 이 작품은 허점두성이의 터무니 없는 것이었으나 크게 성공했다. 그는 계속해서 『베레니스 Beren i ce 』, 『다리우

스 Dar i us 』 등을 내놓았는데 , 소설적 주제를 선호했던 그는 비극 속에 소설적 비현실을 도입함으로써 부조리의 국한에까지 다다른 듯이 보였다. 같은 시기에 유사한 비극을 쓴 사람들 중에는 필립 키노 Ph i l ipp e Qu in a ult 도 있다. 스페인 희극에 사로잡혔던 그는 이때 비극으로 돌아섰는데, 16 년 『 아말라종트 Amalason t e 』 에 뒤이어 『 변장한 알시비아드 le Fein t Alc i b ia de 』 를 내놓았다. 사실적 경향의 소설가 스카롱도 훗날 연극, 특히 스페인 연극에 매 료되어 몇 편의 비희극을 번안함으로써 이 대열에 가담하였고, 브와로베르 Bois r obert£ 스카롱을 뒤따랐다. 1650 년대 , 다시 말해 위대한 고전주의 시대의 막이 오르기 직전의 프랑스 연 극의 상황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는 이 시기가 〈프 레시오지테 〉 의 전성기에 해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라 칼프르네드, 스퀴데리 등의 소설에서 즐겨 주제 를 빌려오곤 했던 이 시대의 비극은 말하자면 프레시오지테의 비극이었던 셈이 다. 바로 이때, 즉 이 로마네스크풍의 비극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을 때 고전비 극의 위대한 작품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당이 적절히 지적한 바와 같이 , 『 앙드로마크 Andro maq ue 』나 「 브리타니퀴스 B rita nn i cus 』 는 이 시대가 낳은 자연스러운 산물은 아니다. 자연스러운 것은 오히려 『 티모크라트 』 나 『 변 장한 알시비아드 』 였다. 11) 요컨대, 라신의 작품은 프레시오지테로 대변되는 이 시류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갖는다. 그는 많은 작가들이 이 자연스런 흐름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을 때 다가오는 새 시대의 도전을 홀로 받아들였던 것일 까. 분명히 그의 비극은 이 도전에 대한 그의 응답이었고, 그는 자신의 새로운 비극의 개념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할 것이다. 그의 비극의 새로움은 의형적 형식의 완성과는 별 상관이 없다. 토마 코르네 유나 키노도 규칙의 준수에 있어서는 거의 탓할 데가 없었다. 라신에 있어 문 11 ) CJ 위의 책 , 17 ~ : <… Jes triom p he s de la trag e d i e g al ante nous per mett en t de mesurer !'illus io n des hist o r ie n s qui veulent voir dans Andromaqu e ou dans Bri tan ic u s le pro duit natu r e! d'un moment de la c 函 l i sa ti on. Car, ce pro duit natu re! , c'eta i t bie n plu tO t Tim ocrate o u le Fein t Alcib ia d e.>

제되는 것은 극작의 기교 따위는 아니다. 그 엄정성과 진실성 가운데 추구되는 인간의 내적 현실, 마침내 재정립되기에 이르른 비극성의 개념一一라신과 더 불어 프랑스 비국은 최후의 완성, 최고의 위엄에 다다를 것이다. 희극 프랑스의 근대 연국사상 아마도 최초의 희극 작가로 기억될 피에르 드 라리 베 P i erre de Lar i ve y (l5 4 0?-1619) 는 〈고 대 그리스-라틴 작가와 근대 이탈리 아인을 모방하여 〉 12) 희극을 쓰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그는 이 말로써 자신 의 작품이 규칙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근대적 취향에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싶었던 것 갇다. 그러나 그가 거의 일방적으로 이탈리아 희극에 경도 되었던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것은 라리베에게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1570 년 부터 17 세기 중반, 몰리에르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희극, 이른바 〈코 미디아 델아르데 comed i a dell'ar t e 〉 13) 의 위력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이탈리 아의 여러 극단들은 줄이어 파리뿐만 아니라 지방 도시에까지 전출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프랑스 배우들은 이 위세에 눌려 그들과 경쟁하느니 차라

12) J.M orel, 앞의 책, 8 쭉 :

13) Come di adell'ar t하 프랑스 연극에 미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것은 몰리에르에게 회국적 유형의 무궁무진한 저장고였다. 이 전통적 이탈리아 희극의 인물들은 항상 같은 옷차림으로 같은 역을 맡음으로써 관객들은 무대 위에 그들이 나타 나자마자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항상 갑은 성격과 특징을 지니고 있었고 판에 박은 수많은 대사들을 의고 있었지만 동시에 매우 독창적인 죽홍 연기 le jeu all'- i m p ro vi s~ 써 활기를 불어넣을 줄 알았다. 전형적 인물로는 빨간 옷과 검은 망토 차림 의 늙은 부자 상인 판타롱 Pan t alon, 그의 견을 떠나지 않는 의사와 카피탄 le Cap itan , 처음에는 잔니 le Za ruili료 불리어졌다가 이내 아를르켕 Arle q u i n 이 된, 농촌 출신의 상스 럽고 게으르고 교활한 하인 등이 있다. Brig h ella, Scap in, Mascarill e, Fronti n, 나아 가서는 Pu lci 112 [뇨도 〈잔니〉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이 comed i a 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가 면을 쓴 희극인물들과 그렇지 않은 인물들(가령, 한 쌍의 젊은 연인들)과의 대조이다;

리 함께 손잡고 일하기를 택했다. 극작가들도 아리오스테 Ar i os t e, 파라보스코 Parabosc 예 위시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극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거나 번안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라리베는 이러한 경향의 최초의 성공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는 157 9\1에서 1611 년에 걸쳐 두 권의 희곡집을 냈는데, 모든 작품은 예의없이 이탈리아 원작 울 번안한 것들이었다. 라리베가 이 번안에 있어 프랑스의 지리와 사회적 • 정 치적 현실을 대입시킴으로써 프랑스 희극으로서의 신분을 갖추게 하기 위해 고 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희극에 대한 그의 의존은 거의 전적인 것이었다. 희극적 상황, 무대의 특성, 특히 희극적 인물 유형 등은 원형의 충 실한 재판과도 갇았다. 그의 희곡은 추하고 탐욕스러운 늙은이, 멍청하고 부도 덕한 젊은이, 교활한 뚜쟁이 할머니, 허풍 떠는 학자와 의사, 허세 부리는 카 피탄 le cap itan 등, 동일한 희극적 안물둘로 채워져 있고, 이들이 뒤섞여 어울 리는 소란스러운 사건은 사랑에 빠진 젊은이가 그의 연인과 결혼에 골인하는 것으로끝난다. 라리베를 전후한 당대의 극작가들도 같은 경향의 작품 속에서 같은 이야기를 펼쳐 보여주었다. 레미 벨로 Rem y Belleau 의 r 되찾은 여인 La Reconnue 』 (1577), 오데 드 튀르네브 Ode t de Turneb~ 『만족한 사람들 Les Con t en ts 』 (1577-1578), 프랑수아 당브와즈 Fran~o i s d'Ambo i s 혀 『나폴리 여인들 Les Nap ol it a i nes 』 (1584) , 트로트렐 Tro t erel 의 『코 리보 Les Co rri vea ux.』 (1612) 등 은 기록될 만한 작품들이다. 이 초기 작품들이 비록 이탈리아 희극의 절대적인 영향하에서 태어나기는 했 지만 그 가운데 어떤 프랑스적인 특칭들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당대 프랑스의 현실을 반영하는 데 부분적으로나 마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미 라리베에 관해 언급했듯이 이 작품들이 프랑스 현 실의 환각을 조성하기에 고심한 흔적은 역력하다. 『정절 La Cons ta nce 』 은 트 루와, 브장송, 리옹을 배경으로 삼았고, 『기만 Les Tromp e ri es 』은 독자를 오 롤레앙에서 부르고뉴로, 파리에서 트루와로 여행하게 한다. 또 익명의 『연동

소제부 Les Ramon neu rs 』 (1 62 2 - 16 23 ) 에서는 뤽상부르궁과 파리 법원의 개축이 언급되어 있다. 이 현실의 재현에 있어 이 시대의 사회와 풍조에 대한 풍자가 개입하는 것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특징이다. 이 풍자는 직설적인 표현을 피하고 매우 은근하게 이루어져 있는데, 이 은근함 속에 함축된 풍자의 묘미야말로 극작가들의 재능의 몫이었다. 끝으로, 이 풍자의 한 변형으로서 고 상하고 숭고한 것에 대한 패러디를 조심스럽게 지적할 수 있다. 일상적 삶의 묘사 속에서 인간의 약점과 결함에 더 민감했던 희극 작가들은· 온갖 고귀한 품 성과 미덕의 아름다운 포장으로 감춰진 현실의 내막을 둘추어내며 이를 희화화 하려고했을것이다. 그러나 이 몇 가지 경향들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 초기의 희국들이 상당한 활기를 지니고 있었다 해도 그 주제와 구도에 있어서는 매우 한정되어 있었기 대문이다. 상기한 특칭들은 말하자면 앞으로 완성되기를 기다 려야 할 극히 미미한 가능성들이었다. 어쨌든, 여기 프랑스 근대 희극의 씨는 뿌려졌고 최초의 모습이 드러났다. 17 세기 초 근 30 년에 걸쳐 우리는 희극과 관련하여 기이한 현상과 마주치게 된다. 죽 한 장르로서의 희극은 이 기간 동안 거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으며 새로이 제작된 희극의 수는 극소수였다. 그러나 이것은 희극의 명맥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왜냐하면, 희극과는 달리 익살극fa re~ 든 여전히 총애받는 공연물의 자리를 지켜왔기 때문이다. 당시 모든 연극 공연은 어김없이 한 편의 익살극으로서 막을 내렸는데, 이렇듯 이 시기에 살아남은 유일한 희극 장르는 바로익살극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기에 또 하나의 홍미로운 현싱을 발견한다. 그것은 희극 이 아닌 다른 장르들 속에, 즉 전원극과 비희극 속에 희극적 요소들이 뒤섞여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일상적인 그리고 순수히 희극적인 장면들을 보여주 는 작품들은 수없이 많다. 이 장면들은 놀랍게도 그 어떤 회국적 전통, 가령 고대 희극 또는 이탈리아 근대 희극의 전통에도 결부되어 있지 않았다. 거기에 는 지식을 뽐내는 학자도 위세 부리는 병정도 없고, 유모나 뚜쟁이 할멈도 없

다. 그것들은 극히 일상적이고 친근한 삶의 한 단면을, 즉 당대 프랑스인들의 한 풍속도를 그려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풍속도를 그리는 데 있어 작가들 은 지극히 섬세한 감수성과 예리한 관찰력을 발휘함으로써 그것이 웃음을- 자아 내되 상스럽지 않고, 정직한 것이되 권태롭거나 과장되지 않도록 배려했다. 라 캉의 『 목동 이야기 』 나 메레의 『 실비 』 는 이 희극적 장면들의 신선함과 홍취가 어 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희극이 아닌 이런 작품들을 통해 근대 희극의 한 형태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드디어 1630 년을 전후하여 우리는 여기서도 코르네유와 만나게 된다. 1629 년 『 멜리트 Me lit e 』 를 발표한 그는 이어 5 년 사이에 5 편의 희극을 썼다. 일반적으 로 코르네유는 새로운 희극적 유형의 창시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 목동 ­ 이야기』나 『 실비』를 읽어본 사람들은 이 평가에 반드시 동조하지는 않을 것이 다. 코르네유의 희극울 특칭짓는 일상적 레아리슴은 이미 라캉이나 메레에 의 해 성공적으로 시도된 바 있다. 다만 코르네유는 이 레아리슴을, 함께 뒤섞여 있었던 전원극 및 비회국의 요소들로부터 도려내어 그것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만둘거낸것뿐이다• 코르네유의 희극 속에 이 레아리슴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사회의 여러 인간 유형들을 즐겨 보여주는데, 특히 그의 젊은 루앙 시절에 특별한 향 수를 느끼고 있기라도 한 듯 학업중의 젊은이룰 지주 등장시킨다. 파리의 여러 풍물들도 생동감 있게 그려진다. 그러나 그는 1634년 이후 희극을 포기하고 다 른방향으로선회했다. 당시 코르네유를 따라 풍속 희극을 쓴 극작가는 많지 않았다, 언급할 만한 작품도 몇 편에 불과하다. 뒤 리에의 『쉬렌느의 포도 수확 Les Vendang es de Suresnes 』 (1633), 앙드레 마레샬 Andre Mareschal 의 『익살꾼 Le Rail ll eur.1, 작자 미상의 『 알리종 Al iz on 』 등이 고작이다. 요컨대 코르네유예 의해 확립된 듯이 보였던 풍속 희극은 너무나도 단명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새로운 회국운 당대의 관객들의 구미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익숙해져 있던, 그리고 되돌아오기를 끝없이 기다렸던 것은 다

름아닌 영원한 고대 희극과 1 Q 1] 기의 이탈리아 근대 희극이었다. 그들의 갈채 를 받기 위해서는 호언장담하는 병정들, 유식한 체하는 학자, 사링에 빠진 늙 은이를 등장시켜야 하고, 풍속의 관찰 대신 파란만장의 모험의 이야기, 처녀들 의 납치, 변장, 해적 이야기를 펼쳐야 한다. 이것들은 모험 소설, 비희극을 연 상케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주제들을 단순히 극적 효과를 위해 사용하는 대 신 어떤 과장의 수법을 통해, 그리고 복잡한 사건들의 뒤얽힘이 야기시키는 착 각과 오해를 통해 얻어지는 희극적 요소를 극대화시키는 데 있다. 이런 유형의 희극, 죽 로마네스크한 희극 속에 진실의 추구나 윤리적 의미 따위를 찾는 것은 헛된 일이다. 또한 걸직이라고 손꼽을 만한 작품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여러 작품들은 생동하는 리듬과 참신한 희극적 창의와 탁월한 언어로써 우리의 주목을 끈다. 메레의 『 오손느 백작의 사랑 이야기 Les Gal-ante r ie s du due d'Ossone 』 (1636) 와 데 마레 Des Marests. 9-j 『 환각자들 Les Vi- si onna i res 』 (1637) 은 오늘날에도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몰리에르 이전의 희극과 관련하여 끝으로 스페인풍의 희극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640 년경, 스페인 희극의 대대적인 유입과 그 모방은 참신한 바 람을 불러일으켰으며 프랑스 희극의 주제와 인물 유형과 언어를 새롭게 했다. 이 새 바람을 일으키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두벌 d'Ou vi lle(An t o i ne le Mete l , sieu r d ' )이었다. 스페인어와 스페인 문학의 전문가였던 그는 1639 년에서 1646 년에 걸쳐 칼데론 Calderon, 로페 드 베가 Lo p e de Veg a, 몬탈반 Mon­ t alv 떠올〈 모방한 5 편의 희극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곧 대유행의 시발점이었 댜 1640 년에서 1648 년 사이에 공연된 20 편의 희극 중에서 스페인 원작의 번 역이나 번안은 10 편에 달했다. 스카롱도 1645 년 이후 스페인 극작가를 모방한 7 편의 희극을 썼고, 브와로베르 Bo i srobe 社도 1650 년부터 5 년간에 9 편의 유사 한 작품을 내놓았다. 코르네유도 1643 년, 로페 드 베가의 것으로 믿었던 작품 울 모방하여 『 거짓말쟁이 le Men t eur 』 를, 다음해에는 r 거짓말쟁이 속편 la Suit e d u Men t eur 』을 발표하였는가 하면, 그의 동생 토마도 같은 시기에 7 편

의 스페인풍 희극을 썼다. 이 작품들은 실은 희극이라 불리어지기에는 합당하지 않다. 오히려 19 세기풍 의 낭만적인 희곡에 가까운 것이며, 사실상 일종의 무협 희곡 comed i a de ca.p a y espa d a(pi ec es de cape et d 'e p ee) 이라 할 수 있다. 여기 등장하는 것은 절망에 빠진 젊은 청년, 유혹에 걸렸거나 협박받는 처녀, 반번한 결투와 야밤의 기습 등, 로마네스크한 세계 그 자체이며, 진지하고 스릴에 넘친 사랑 의 드라마이다. 웃음이 배제된, 이 숨가쁜 격정의 그림 위에 또 하나의 그림이 겹쳐진다. 마치 사건의 긴박함을 누그러뜨리고 관객들의 긴장을 풀기라도 할 듯 희극적 요소가 도입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인이라는 인물에 의해 연출된다. 그 유형은 이미 정해져 있으며, 원형은 다름아닌 산쵸 판사 Sancho Pansa 이 다. 그는 우스꽝스럽게 굽실거리며 항상 게걸스럽게 먹을 것을 찾아다닌다. 때 로는 격언을 써가며 일장 훈시로 상전을 니무라기도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교 묘한 이기주의가 깔려 있다. 훗날 몰리에르의 『 돈 주안 Don Ju an 』 속에 등장하 는 스가나렐 Sg anarell~ 이 하인의 유형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이 스페인풍의 희국들은 굳이 자신들의 기원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무대 위 에는 스페인의 한 도시가 배경으로 그려졌고, 발코니에서는 이국적인 옷차림과 모습의 처녀들이 연인을 기다리곤 했다. 물론, 이 풍조에 따르기를 거부한 사 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코르네유는 『 거짓말쟁이 』 속에서 파리를 무대로 삼 았고, 스페인의 풍습에 과감히 프랑스의 풍속을 대치시켰다. 한때 크게 유행했던 스페인풍 희극은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1656 년 이후 이 희곡은 눈에 띄게 의면당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아마도 사회적 기류 의 변화도 한몫 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롱드란 이후 프랑스의 정국은 안정을 되찾았고, 절대군주를 정점으로 한 체제의 정립이 가속화되었다. 질서와 규율 의 개념이 정착되고 계층의 분화가 정립되어 나갔다. 모든 것이 계급화되고 각 각의 위상이 확정된 이 사회 속에서 토마 코르네유가 전한 바와 같이 〈귀족, 왕족들과 하인, 익살 광대들과의 대화只t 듣거나 그들이 스스럼없이 뒤섞이는 장면을 보는 것은 더 이상 유쾌한 일이 못 된다. 14) 요컨대, 스페인풍의 희곡이

14 ) A. Adam, 앞의 책 , 179 쪽 :

보여주는 비극과 익살의 혼합물은 당대의 취향에 거슬렸던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로마네스크풍의 희곡은 계속 제자리를 유지했다. 그것은 흔히 〈 대희극gr ande comed i e 〉 이라 불리어졌다. 그것들은 사랑의 마력에 사로잡힌 정념, 고상한 감정, 균형 있게 곁들여진 교훈을 담고 있는 점에서 프레시오지 데의 공상적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여기에 정신의 비상한 재치와 번 득임으로써 희극적 요소가 가마되어 있을 뿐이다. 스카롱, 키노, 토마 코르네 유, 브와로베르 등이 부르고뉴와 마레의 두 국칭에서 보여준 희극은 이런 취향 의 것들이었다. 몰리에르가 오랜 방랑 끝에 파리로 되돌아왔을 때의 희극의 모 습은이런것이었다. 2 고전주의 이론의 탄생과 형성 희곡의 형식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고전주의에 진입하기 위해 우리는 그 길잡 이로서 프랑스 근대 희곡의 역사룰 추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이제 우리 는 또 하나의 발판으로서 고전주의 이론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려고 한다. 앞 장 에서 고찰한 희곡의 다양한 변모의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문학 창조의 갖가지 시도가 이에 따른 이론적 • 심미적 성찰을 수반하고 있었다는 것, 다시 말해 문학 창조의 역시에 이론적 모색과 정립의 역사가 병행했었다는 것이다• 여기 주역으로 등장하는 것은 물론 이론가들, 이른바 〈 do ct es 〉 이다. 그러나 작품을 직접 생산한 시인, 국작가들이 이 작업에서 소의되었던 것은 아니다. 요컨대 이 시대에 문학에 관심을 가전 모든 사람들은 단순히 문학을 창조하거 나 감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 문학적 창조를 가능케 하는 이론적 근거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지향하는 완성의 개념에 대해 깊이 생각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성찰 속에서 상이한 입장들은 서로 대립하고 때로는 격렬한 논쟁 속 에 휘말려 들어갔으며 우리는 그 일단을 이미 확인한 바 있다. 이제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디음 두 가지 사실을 먼저 환기하는 것이 필요 하다. 첫째로, 문학 창조에 관한 이론적 관심은 이 시대의 여러 범주에 걸친 전반적 경향과 무관하지 않디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이 경향이란 다름아닌 질 서와 법제화에 대한 관심이다. 우리는 정치적 처원에서 17 세기 전반기의 프랑 스가 엄청난 혼란과 변화의 불안정 속에서 그 어떤 통합과 통제를 지향하였는 가를 알고 있다. 이른바 절대왕정은 이 일련의 움직임의 귀착점이었으며 이로 써 프랑스의 정치적 통합은 완성되고 왕을 정점으로 한 국가적 체제는 확고히 자리잡게 된 것이다. 우리는 지적 처원에서도 유사한 천하통일의 기운이 감도 는 것을 느낀다. 전세기의 위마니슴의 열풍과 종교적 갈등이 낳은 참담한 혼돈 속에서 정신적 • 지적 가치에 대한 근원적 회의가 싹렀고 뒤이어 사고와 인식의 새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시도가 행해졌다. 몽데뉴를 거쳐 데카르트로 이어지 는 지적 움직임은 이성에 대한 전면적 검증을 통해 이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권 위와 통제력을 회복하게 하고 이로써 질서잡힌 지적 왕국을· 재건하게 하는 것 으로 귀착된다. 국가의 정상에서 온갖 위엄과 권위로써 군림하는 왕처럼 이제 이성은 지적 세계에서 질서와 통제의 보장자로 군림할 것이다. 여기 문학과 관 련하여, 통합과 질서를 지향하는 이 시대의 전반적인 움직임을 환기하고 이에 결부시킨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사실, 이 시대의 문학은 형용할 수 없는 혼돈의 양상을 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학의 풍요로운 무정부 상 태 속에서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하나의 견고한 이론, 다시 말해 문학 창조 의 모든 양식과 모든 방법에 한결같이 적용될 수 있는 어떤 보편적 규범의 필 요성이 느껴졌다는 것은 확실하다. 일단의 이론가들이 문학 속에서 기도한 것 은 거의 동일한 시기에 데카르트가 정신의 세계 속에서 기도한 것, 죽 사고의 보편적 규범을 제정함으로써 올바른 인식의 기반을 구축하려 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마치 데카르트가 오직 하나의 진리가 있고 이 진리에 도달하는 오직 하 나의 길이 있다고 믿은 것과 같이, 이 문학 이론가들도 오직 하나뿐인 문학적

완성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방식이 있다고 믿었고, 이것을 법제화하기에 주력했 다. 우리는 여기서 이 작업의 배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창설하였고 『 르 시 드 』 논쟁에 개입하기까지 했던 리슐리의 R ic hel i eu 의 존재를 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 왕국에 정치적 통합을 실현시키려 했던 그의 원초적 기도와, 지 적 • 문학적 세계를 다스릴 유사한 통합적 원리의 수립은 별개의 것일 수는 없 다. 우리가 주목할 또 하나의 사실은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에 있어 이론적 완성 이 작품의 생산에 선행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론은 창작과 병행하거나 뒤따른다. 풀레이아드 시인들의 경우 양자는 동시적이었고, 다분히 자연발생적 인 바로크 예술은 〈 자신을 알지 못하는 〉 예술이었다. 그러나 고전주의는 문학 이론으로서 먼저 완성되었다. 만약 코르네유를 고전 비극 작가의 한 사람으로 간주한다면 그의 작가로서의 활동과 이론적 성찰은 병행했었다고 말할 수 있 다. 그가 가장 활발하게 창작 활동을 벌인 것은 1630 년대에서 16 4 0 년대에 걸 쳐서였고, 문학이론의 정립을 위한 가장 치열한 탐구가 진행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기 때문이다. 극작법을 에워싼 일대논쟁에 불을 당긴 것도 바로 그 자신 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고전주의 작가와 작품이 출현하기까지는 좀 더 기다려야만 했고, 그 이전에 고전주의 이론은 완벽하게 수립되어 있었던 것 이다. 이론에 충실히 부합됨으로써 위대한 완성에 도달한 작품들은 마치 이론 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씌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다시 최초의 지적으로 되돌아간다. 이 시대는 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이룰 합리적으로 통제함으로써 질서와 완성을 실현할 수 있게 하는 규범에 대 한 각별한 관심으로 특칭지어진다. 아딩에 의하면, 1630 년에서 1640 년에 이르 는 근 10 년 사이에 고전주의 문학이론의 골격은 완성되었고, 이 이론은 거의 모든 작가들에 의해 받아등겨지기에 이르렀다. 15) 이제 우리는 이 완성의 도정 15) A. Adam, 앞의 책, 10~:

울 좀더 충실히 따라가 보려 한다. 플레이아드 이후 먼저 그 기원으로 거슬러 울라가자. 브왈로에 의하면 이 기원은 당연히 말레 르브, 즉 플레이아드 이후 만연된, 시 창조에 있어서의 무절제에 저항한 말레 르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설적으로 폴레이아드의 대표자인 롱사르에 게까지 거슬러 울라가려 한다. 물론 이것은 초기 작품의 롱사르, 넘실거리는 시적 영감과 찬란한 언어의 축제에 탐닉했던 젊은 날의 몽사르를 가리키는 것 은 아니다. 반대로 여기 문제되는 것은 원숙기의 롱사르, 다년간의 詩作울 통 해 획득한 어떤 〈 지고한 스틸 souvera i n s ty le 〉 로써 시적 언어의 새 이상을 제 시한 몽사르이다. 그는 고대를 모방하되 특별히 호메로스(호머)와 베르길리우 스를 모델로 삼았고, 갓 태어나기 시작한 바로크풍의 부풀림과 과장의 경향을 규탄했다. 사실 뒤 바르타스 DuBar t as 를 위시한 일부 젊은 시안들은 로마 퇴 폐기의 시인들, 스타시우스 S t ac e-2} 루카누스 Luc i en 등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 았었다. 롱사르는 이들이 로마 퇴폐 시인들의 예를 따라 무절제하게 과장과 기 발함을 추구함으로써 대혼란을 야기시키는 것을 경고하면서 베르길리우스의 순 수와 정제된 우아로 되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17 세기 초의 상황은 따라서 한편에 바로크적 열기와 흥분의 새 물결과, 다른 한편에 순수와 위엄을 견지하는 고대의 전통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상반된 두 흐름이 다같이 롱사르를 그 원류로 삼고 있는 것은 홍미로운 일이 다. 롱사르의 위대함은 여기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앞날의 프랑스 시가 다양하게 펼쳐나갈 모험들의 각각의 잠재적 요소들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 아 닌가 싶다. 세기초의 바로크 물결은 초기 롱사르의 자유분방함과 대담성의 연 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고, 한편 이 홍겨운 혼돈에 대한 반성적 성찰도 동일 한, 그러나 이번에는 원숙기의 롱사르와 관련지어진다. 세기초에 말레르브가 반롱사르의 기치를 들고 나온 것은 물론 전자에 대항하 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이미 그의 입칭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 언어의 혼란

울 잠재우고 사고와 시직에 절도와 질서를 도입함으로써 지적 활동의 새 규범 울 수립하고자 했던 그의 과업은 사실상 고전주의의 진정한 기점으로 간주되기 에 손색이 없다. 우리는 이 과업이 거세게 일기 시작한 바로크의 물결 속에서 지극히 험난한 항해를 계속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점증하 는 새 시대의 움직임 (우리는 이것을 modernis m ~ 이름으로 불러왔다)에 저항하 며 순수와 통제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말레르브의 기도는 계속 견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충실한 추종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먼저 그의 동시대인으로는 메나르 Main a rd, 라캉 등 일단의 시인들이 있어 그의 이론과 충고를 시 창작에 반영 하기에 힘썼고, 1620 년 후로는 오늘의 문학 비평가에 해당되는 젊은 이론가들 이 말레르브의 주장을 바탕으로 문학이론의 체계화에 주력하였다. 샤프렝, 발 작, 도비냑 라 메나르디에르-이들은 향후 십여 년에 걸쳐, 이미 말레르브 에 의해 다져진 언어와 시직에 관한 기본적 개념 위에서 다가울 문학, 즉 고전 주의 문학의 원리들을 정립하는 데 몰두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 앞서, 이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면서 새로운 문학이론의 형성에 적지않게 공헌한 주변의 상황에 잠시 눈길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이 상황이란 다름아닌,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의 활기 찬 문학 논의가 미친 영향 을 가리킨다. 문학의 이론적 추구에 있어 양국은 단연 선진국이었다. 아 두 나 라 중에서도 프랑스 문학과 보다 깊이 관련지어지는 것은 이탈리아이다. 알려 진 바와 같이, 1590 년대에서 1640 년에 걸쳐 스페인에서 장르들의 규칙과 시작 의 일반적 법칙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론가들은 하나의 통합된 이론 체계를 정립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며, 따 라서 프랑스 문학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스페인 이론가들에 있어 아 리스토텔레스로부터 추출한 규칙들과, 그들의 국민 문학-거의 자연발생적 인 그러나 이미 수많은 걸작들을 자랑하는 풍요로운 국민 문학-을 일치시 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반대로, 이털리아인들의 영향은 실질적이고도 강력했다. 그들의 이론적

원천은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 시학 』 이다. 『 시학 』 의 최초의 라틴어 번역판이 베니스에서 출간된 것은 1498 년의 일이었고, 몇 년 후에는 (1503 년 또는 1508 \J) 그리스 원어판이 나왔다. 16 세기에 걸쳐 이 책은 여러 차례 재판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해설서를 낳게 했다. 그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비다 V i da, 스칼리제 Scal ig er 와 카스텔베트로 Cas t elve t ro 에 의해 씌어진 해설이다. 아리 스토텔레스의 미학적 개념에 근거한 이들의 이론은· 프랑스인들에 의해 거의 맹 목적으로 추종될 만큼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특히 1575 년에 발표된 카스텔 베트로의 해설은 철학적 추론으로. 일관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로부터 예술과 관련된 원리와 규칙들을 추출하여 체계화하는 데 놀랍도록 성공한 것으로서, 프랑스에서 크게 호응을 받으며 널리 읽혀졌다. 이렇듯, 프랑스인들은 그들의 문학적 성찰에 있어 이탈리아인들이 인도하는 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로 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권위가 프랑스에 서 18 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존중되어 왔다는 사실은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 위대한 철학자에게서 어떤 예술적 원리들이 추출되었을 때 그것이 곧 바로 절대적 법칙과 같은 무게를 지니게 되었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우리 는 프랑스 고전주의와 관련하여 흔히 로마의 시인 • 철학자 호라티우스의 시론 을 상기한다. 그러나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에 비하면 그의 영향은 별 것이 아 니었다. 그는 새로운 개념을 창출했다기보다 이미 밝혀진 것들을 다소 독창적 인 표현으로 덧입혔울 따름이다. 어쨌든, 여기 1630 년대를 전후하여 일단의 문학이론가들 사이에서 문학 창 조, 특히 시 창조(이 시대의 희곡도 시의 범주에 포함된다)의 원리와 규칙을 에워 싼 논의가 활기 차게 전개되었다. 그들은 이탈리아인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이들을 통해 고대의 이론과 접목되었다. 만약 프랑스인들이 이탈리아의 중개를 통하는 대신 직접 고대를 발견하고 그 이론들을 수령했다면 그들의 이론 정립 의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무의미하다. 17 세기 초엽의 프랑스 여론가들은 이미 그둘에 앞서 이루어놓은 이탈리아인들의 엄청난 학문적 업적을 접하고 해독하기에 주력하였으며, 이것

을 바탕으로 그들 자신의 이론, 다시 말해 문학 창조의 모든 문제에 답할 수 있는 하나의 총체적 이론 체계를 쌓어올려 갔다. 이 작업에는 10 여 년 또는 더 많은 기간이 소요되었다. 반 티겜은 1 6 30 년부터 대략 1660 년경까지로 측정하 고 있고, 16) 아당과 같은 사람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갈이) 1640 년경에는 대체로 고전주의 이론의 틀이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두 사람 사이의 견해 차이 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고전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문학 의 완성에 앞서 그것의 미학적 원리와 방법의 개념이 먼저 완성되었디~ 사실 이다. 이 점에 있어 두 사람은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은) 견해를 같이하고 있 다. 이제 우리는 이 이론가들의 작업 현장을 찾아가 보려 한다.

16} Ph. Van Tie g h e m, 앞의 책, 3 澤: <… ils p ar v ien nent, en une tren ta i n e d'annees, de 1630 app ro x im ati ve mentj usq u e vers 1660, a form er un corp s de doctr ine assez homog ~n e •• '. >

게 드 발자크 • 보쥬라 • 아카데미 프랑세즈 우선 주변의 이야기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여기 문제되는 것은 발자크와 보 쥬라의 경우이다. 전자는 산문p ros 혀 1 있어서, 후자는 프랑스어의 문제에 있 어서 조금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고전주의의 완성에 기여하고 있다. 고전주의가 본질적으로 시와 관련된 문학적 규범이라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말레르브의 제자이자 평생의 벗이었던 게 드 발자크J ean Louis Guez de Balzac(1594 - 1654) 는 명실공히 산문에 있어서의 말레르브였다. 1624 년에 발표 된 그의 최초의 『 서간접 』 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일약 문단의 총아로 그를 만 들었다. 그는 이내 〈 정신의 황제 〉 , 〈 당대의 웅변의 왕 〉 등의 명예로운 칭호로 불어지기까지 했다. 그 후 정치적 야망에 있어 뜻을 이루지 못한 그는 자신 의 고향 샤랑트에 은거하면서 『군 왕 le Pr i nce 』 (1631) , 『 기독교도 소크라데스 Socrate c hret ie n 』 (1652) 와 같은 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이 유감없 이 발휘된 것은 그곳에서 당대의 명사, 친지, 작가 들에게 써보낸 서간을 통해

서였다. 이 서간들 17)은 사교계 살롱에서 읽히고 또 복사되어 유포되면서 놀라 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7) 총 21 권의 묶음으로 1665 년 『 전집 Oeures comp le te$ 』 속에 수록 • 발간되었음.

발자크는 이 서간 속에서 자연과 전원생활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심오한 철학 적, 윤리적 성찰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각별한 관심을 쏟은 것은 문 학 작품, 니아가서는 예술 전반에 대해서였다. 그는 말레르브와 마찬가지로 이 단편적인 글 속에서 체계적인 문학이론을 펼치고 있지는 않다. 다만 그가 접한 과거의 혹은 당대의 작품들에 대한 주의 깊은 검토를 통해 글쓰기에 대한 자신 의 생각들을 피력하거나 충고를 기술하고 있다 . 그가 문학, 좁게는 스틸과 표현의 문제에 있어 대체로 말레르브의 궤적을 따 르고 있디는 것은 명백하다. 그가 가장 존중한 것은 표현의 명석성 cla rt e 이었 다. 그는 〈 여인들과 아이들에게도 이해될 수 있는 〉 그런 글을 쓰기를 원했다. 말하자면, 그 어떤 문제를 논한다 해도 이 문제와 전혀 무관한 사람들까지도 양가들을 수 있도록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의 명석성이란 어떤 특정한 사람들, 전문가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장 비전문적인 사람들, 즉 모든 사 람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명석성은 필연적으로 보편성과 결부된다. 우리는 이 명석성과 보편성의 개념이 고전주의자들에 의해 어떻게 받아들여 지는가를 앞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발자크의 경우 이 개념들의 이론 화는 아직 문제되지 않는다. 그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 울였기 때문이다. 그는 명석성을 확보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관용 usa g eo] 존중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관용이 거부하는 고어, 신어, 지방어는 물론, 현학적인 어법을 추방하였다. 그러나 명석성이 강조된 나머지 문체가 윤기없고 맥빠진 것이 되는 것도 문제이다. 발자크는 글에 생동감과 색깔을 부여하기 위 해 어떤 장식적 기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으며, 실제로 자신의 스틸울 갈고 닦기에 전념했다. 그는 문장에 음악적 율동을 부여했고, 은유와 과장으로. 장식 적 효과를 더했다. 그러나 그가 이 모든 기법의 사용에 있어 그지없이 신중하 고 세심했었다는 것은 크게 강조될 필요기- 있다. 그는 부자연스러움과 억지를

회피하였고, 절도와 질서의 테두리 안에 머물기를 고집했다(훗날, 고전주의 이론 가들은 이것들을 이성의 원리와 결부시킴으로써 그들의 이론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 요컨대, 프랑스의 키케로가 되기를 원했던 그는 그를 모방하여 이른바 〈 절도 있는 스틸 s ty le t em p ere 冷「 창안하였고, 이로써 말레르브와 더불어 고전주의 의 한 초석을 놓은 셈이다. 보쥬라 Claude de Vau g elas(1585-165o) 는 보다 직접적으로 언어의 문제에 도전했다. 1620 년경부터 프랑스어와 관련된 갖가지 현상들을 수집하기 시작한 그는 1647 \1 『 프랑스어에 대한 고찰 Reamrq ues sur la lan g ue fr anca is e 』 이라 는 제목의 괄목할 만한 작품울 내놓았다. 이 책 안에서 어떤 문학이론을 찾으 려 한다면 그것은 헛된 일이다. 그의 유일한 관심은 아직도 유동적이고 불확실 했던 당대의 프랑스어를 표현의 완벽한 도구로 완성시키는 데 있었으며, 이를 위해 그는 사변적 논의보다 실제적인 개혁의 방식을 선호했다. 사실 그는 말레 르브나 발자크가 언어의 사용에 관해 제시했던 충고에 의지하고 있었음이 분명 하다. 그의 일관된 주장을 지탱하는 원리도 역시 관용의 존중이었다. 그에 의하면, 관용이야말로 〈오늘의 언어들의 주인이자 왕 〉 이다. 어떤 관용 말인가. 그는 거 침없이 〈궁정 la Cour 〉의 관용이라 말하고, 거기에 〈 당대의 작가들 ecr i va i ns du t em p s 冷 덧붙인다. 물론 그는 궁정을 〈(궁정의) 가장 건전한 부분 la plu s sain e p ar ti e 〉으로 한정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여기 문제되는 것은 당대 프랑 스 사회의 엘리트 사이에서 통용되는 관용이다. 그러나 이 관용은 하나의 기준 에 불과할 뿐 완성된 그 무엇은 아니다. 이 기준에 따라 어휘와 표현을 정비하 고(가령 신어, 전문용거, 지방어 등에 대한 선별 작업), 모호한 발음 또는 문법적 규칙을 확정짓고, 각각의 표현과 의미와의 상관관계를 명확히 설정함으로써 한 언어를 정돈하여 완성시키는 작업은 무한히 열려 있는 작업이다. 보쥬라는 프 랑스어가 스스로 정립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이 명예로운 작업에 전념했으며, 그가 제시한 방향과 규칙들은 프랑스어의 초석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 안존중될것이다.

이 두 사람의 경우와 아울러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그 것은 다름아닌 〈 아카데미 프랑세즈 Academ i e fr an<;a i se 〉 의 창설과 역할이다.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것은 1634 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수년 전부터 뜻을 같이한 일단의 문인, 학자들은 왕의 측근이었던 콩라르 Conrar t의 집에 정기적으로 모여 문학과 학문을 논하였다. 샤프렝울 위시한 이 지식인들의 집단이 벌인 활동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가에 대해 길게 아야 기할 필요는 없다. 한마디로 그들은 말레르브의 충실한 제자들이었고, 따라서 적어도 언어의 문제에 있어 그들의 주된 관심은 프랑스어에 명확성과 규칙성을 회복시킴으로써 순수를 확보하는 데 있었다. 당대에 16 세기풍의 언어의 혼돈과 표현들의 무절제한 범람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는 것을, 뿐만 아니라 영감 과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반말레르브파의 반격이 거셨다는 것을 감안할 때, 언어의 순회를 위한 이들의 작업은 일종의 긴장된 두쟁으로 간주될 만하다. 그 들은 pur is t e s , 매우 전투적인 퓌리스트였던 셈이다. 1634 년, 이들의 활동을 알게 된 재상 리슐리의는 지체없이 그들의 후원자가 되었고 한 국가기구로 공인해 주었다. 국가적 처원에서 보편적 질서를 확립하 고자 했던 그는 단순히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지적 • 문화적 활동에 있어서도, 특히 이 활동의 중추인 언어에 있어서도 규칙성과 규범이 회복되기를 바랐으 며, 바로 이 임무를 새로이 태어난 아카데미에 위임했던 것이다. 〈 우리의 말에 확실한 규칙을 부여하며, 그것을 순수하고 설득력 있고 학문과 예술을 다룰 능 력을 갖춘 것으로 만들기에 온갖 정성으로 노력할 것〉 18) -설립 법령은 이 기구의 사명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1s ) Le Decret de fon dati on : <… de trav ail ler avec tou t le soin po ssib le a donner des reg le s cert ai n e s a notr e langu e , la rendre pu re, eloq u ente et c apa b le de trai te r Jes sci en ces et l es arts > ( cite in His toi re de la l i混r a ture fran ta i se , T. I., Bordas, 201 쪽).

이 목적을 위해 회원들은 양면으로 작업했다. 한편으로는 프랑스어 속에 스 며든 불순물 접을 제거하는 일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문법을 제정하고 사전을

간행하는 등 올바른 언어의 관용을 수립하는 일이었다. 물론 이것들은 서로 분 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자와 관련하여 그들이 생각했던 불순의 근원들을 살펴보는 것은 홍미롭다. 첫째로 그것은 서민, 하층민의 천한 말두이다. 그러 나 궁중의 무리, 죽 무식하고 교양 없는 무리들의 거친 말두도 여기 포함된다. 뿐만 아니라 〈글 을 쓰면서 말을 더럽히는 자들 〉 , 다시 말해 언어의 순화에 역 행하는 일부 작가들의 어법도 그들의 청소 작업의 대상이 된다. 구체적으로 그 둘은 고어 archa i smes, 현학적 말과 표현, 야비한 말투 등의 사용을 엄격히 규 제했다. 때때로 이 작업은 국단으로 치우치기도 했다. 『 르 시드』 를 에워싼 논 쟁의 와중에서 일부 퓌리스트들은 ce p endan t의 사용을- 규탄하기까지 했는데, 이 말의 발음은 ce p endard 라는 천한 말울 상기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아카데미의 온건한 회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 말은 관용에서 제의되 지도않았다 . 어쨌든, 여기 아카대미를 중심으로 프랑스어의 순화와 올바른 규범의 제정을 위한 운동은 지속적으로 그리고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말레르브 , 보쥬라, 아카 데미로 이어져나간 이 일련의 움직임이 프랑스어에 명확성과 정확성과 절도를 회복게 하고 질서와 아울러 우아함을 획득게 함으로써 그것을 표현의 힘있고 아름디운 도구로 연마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한 이 움직임이 당시 형성되어 가던 프랑스의 새로운 상류사회의 출현과 보조를 같이했다는 것도 확실하다. 요컨대, 이 모든 것은 어떤 새로운 문화 유형의 탄 생의 서곡이다. 일부의 문인들과 이론기들이 언어의 순화에 주력하고 표현의 새 규범을 모색한 것은 가장 기본적인 작업, 말하자면 정지 작업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언어의 정화는 사고의 정화와 통하고 사고는 이미 그 자체 한 문 화의 동력이다. 이 일단의 개혁자들은 단순히 말을 순화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 고 그 안에 단순하고 명확한 관념, 조리 있는 이미지, 분명한 含意를 담기를 원했다. 고전주의 문학은 이들의 작업 속에 이미 잉태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움직임에 대해 조금은 회의적인 시각을 가질 수도 있다. 언어의

관용과 표현의 기법에 관한 과도한 간섭과 규제는 과연 문학 창조에 이롭기만 할 것인가. 작가가 주어진 말을 받아 쓰고 그것들을 정해전 엄격한 규칙에 따 라 조합할 때 그 작품은 어떤 것이 되겠는가. 그러나 이런 회의에도 불구하고 여기 새로운 언어의 개념이 문제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며, 앞으로 이 개념은 그것에 합당한 문학적 표현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이 개념에 승복한 작가들은 이제 언어를 디루는 데 경솔할 수 없음은 물론 온갖 신중함과 정성을 다할 것 이다. 그들은 자의적으로 표현방식을 만들어낼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며, 따라 서 자신의 재능과 영감 따위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믿는 것은 오직 규칙 과 방법뿐이며, 그들은 그 안에서 언어와 씨름하면서 자신의 어법을 구축해 나 갇 것이다. 창조를 작업의 개념으로 바꾸어놓은 그들을 통해 말레르브의 교훈 은 이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01 론 7 頃 이제야 우리는 일단의 이론가들 doc t e~ 만나게 된다. 그들 중 한두 사람은 이미 거명되었고 그들의 관심과 활동의 방향도 조금은 암시되었다. 그들이 말 레르브 이래 프랑스 문단의 일각에서 기도된 어떤 개혁의 움직임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 이론가들은 한결 의식적이었으며, 구체적이 고 실제적인 문제에 도전했다. 이들은 언어, 시, 산문과 관련된 기본적 문제들 에 대한 성찰을 이어받아 이번에는 문학의 각 장르(주로 희곡과 서사시)의 실제 적인 규칙들을 수립하는 데 주력했던 것이다. 이들의 영감의 원천은 고대,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 시학』이었다. 우리는 이것이 주로 이탈리아의 이론가들의 손을 거쳐 그들에게 전해지게 된 경위에 대해 소상히 밝힌 바 있다. 비다, 스칼리제, 카스텔베트로, 헤인시우스 He i n­ siu s , 보시우스 등은 프랑스 고전주의의 유일한 전거가 될 정통 미학의 창시자 들이었다, 1630 년에서 1640 년, 더 광범하게는 1660 년에 걸쳐 프랑스의 이론가 들은 이들을 통해 계시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원리에 근거하여 하나의 체계 를 완성하기에 전념할 것이다.

그들이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문학을 지배하는 법칙, 즉 문학이 지향하는 영 원한 美의 법칙, 〈변 함 없는 원리p rece pt es inv aria b les>, 〈 영원히 진실된 교 의 do gm es d'ete m elle ver it e 〉 (샤프렝)에 대해서였다. 그들은 문학이 실현해야 할 하나의 완성이 있고, 또 이 완성을 가능케 하는 원리들이 있다고 믿었다. 바천 말하면 , 이 원리들이 정확히 적용되었을 때 비로소 걸작이 탄생한다. 고대인들이 위대한 작품을 생산한 것은 결코 우연의 소치는 아니며 그들이 부 지불식간에 이 영원한 법칙에 스스로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 중요한 것은 이 법칙을 알고 또 그것들을 충실히 적용하는 일이 다. 프랑스의 이론가들이 미 그 자체에 대한 관념적, 추상적 논의보다 그것을 실현하게 하는 법칙들에 대한 실제적 성찰에 더 전념했었다는 것은 크게 강조 할 만하다. 우리는 이따금 우연을 통해 성공을 거둘 수도 있고, 찰나의 영감으 로 위대한 발견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회적이고 또 무상의 것이기 에 가치가 없다. 반면 확실한 방법은 항상 확실한 결과를 낳는다. 데카르트가 이성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기 전에 어떻게 스스로를 운용할 것인가를 물은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동시대의 문학이론가들이 데카르트와 거의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그들은- 문 학을 완성으로 인도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먼저 물었고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 에게서 배웠으며 자신들의 이론으로 재정립했다. 그들의 이론 체계 속에서 개 인의 천부적 재능이나 영감 따위가 별볼일 없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반대로 문학의 규칙들에 대한 확실한 지식은 그런 것들의 결여를 보완하고도 남을 것 이다 . 문학은 변덕과 환상의 소산이 아니라 의식적이고 방법적인 작업의 소산, 각고의 정전과 인내의 소산이다. 여기 먼저 장 샤프렝J ean Cha p ela i n(l595-1674) 이 있다 .19) 그는 이 이론가 19) 샤프렝도 〈서한〉과 〈소품집났t 남기고 있을 뿐이다. 특히 주목할 작품으로는 Lett re sur les vin g t -qua tr e heures(1630) ;Prefac e a /'Ad onis de Marin o (l623) ; les Sen ti - ments de l'A c ademi ef r an fa i s e sur le Cid ( 1638).

들 중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낸 사람으로서, 명실공히 고전주의 이론의 기수라 할 만하다. 그는 불행히도 시인으로서는 실패했다. 『 (오를레앙의) 처녀 La Pu- celle 』 (쟌 다르크를 가리킴)라는 졸렬한 서사시로 인해 그는 오랫동안 세인의 웃 음거리가 되었었다. 그러나 비평가로서의 그에 대한 평가는 전혀 다르다. 그는 이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예리하고 정확한 판단으로 주위를 압도했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교계에서 크게 환영받음으로써 사교인으로서도 성공한 그는 문학과 상류사회를 연결하는 교량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는 지배계층에 대 해 문학을 대표하는 공식적인 대변자와도 같았으며, 실제로 당대의 문단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아카데미 회원 선출에 깊이 관여했고, 왕의 은급의 분배자가 되었으며, 작가들의 공과에 대한 심판을 도맡았다. 그는 자신 의 위치로 말미임아 본의 아니게 『 르 시드』 논쟁에 개입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이런 데 있지 않다. 문학이론가로서의 그의 기여는 다 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로 그는 고대의 이론에 입각하여 규칙의 존 중을 기본원리로 제시했다. 개인적 재능이나 영감만을 의지할 때 불확실하고 변덕스러운 결과를 낳는 데 반해 규칙의 충실한 적용은 항상 확실한 결과를 낳 는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 규칙을 알고 이 규칙에 따라 방법적으로 작업하 는 일이다. 이 점, 그가 말레르브의 주장을 승계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 그러나 그는 말레르브가 이론적 경직성으로 말미암아 어떤 편협함에 빠져드는 것을 비판할 줄도 알았다. 말레르브의 시를 가리켜, 시가 아니라 운을 붙인 웅 변 elo q uence r i mee 일 뿐이라고 혹평하기도 한 그는 말레르브와 일단의 퓌리스 트들에 의한 프랑스어의 빈곤화를 우려했던 것이다. 이래서 그는 역설적으로, 말레르브가 규탄했던 롱사르에 대해 애착을 느꼈 다. 그것은 기본적으로는 롱사르의 언어에 대한 애착이었는데, 이 언어는 초기 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명확하고 장엄한 안정〉 20) 이라고 그가 정의한 것, 다시 말해 롱사르 가운데 발견되는 가장 고전주의적인 것이라 20) (cite par A. Adam, 앞의 책 , 11 쪽) .

할 수 있다. 샤프렝에 앞서 롱사르의 작품에 대해 이와 갑은 평가를 내린 사람 은 베르토 Ber t aud 와 뒤 페롱 Du Perron 추기경이었다. 샤프렝은 어떤 의미에 서 말레르브의 시각울 다소 수정하여 고전주의 원류를 롱사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았을 뿐만 아니라, 경직되고 편협해지는 어떤 경향에 대한 치유책을 그 안에서 발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롱사르에 대해 전혀 바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샤프렝은 그가 고대 인들을 〈 비굴하고 추하게 모방한 〉 데 대해, 〈 그가 글을 쓰던 (자신의) 시대를 생각하지 않았던 〉 데 대해, 그리고 일반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도 않은 수많은 것들을 만들어낸 것에 대해 비난했다. 〈 시는 바로 이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지 는 것 〉 이라고 그는 덧붙인다. 21) 이와 같은 입장은 전세기의 위마니슴 문학이 거의 전적으로 고대로 이끌려갔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 는다. 그는 단순한 고대의 모방 대신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 le p eu p l 혁끝 위해 쓰는 것, 요컨대 그 시대를 생각하는 것을 작가의 최초의 의무로 단정했다. 고 대의 전통을 존중했던 그는 동시에 〈근 대주의자 〉 이기도 했다.

21) Cf. A.A dam, 위의 책, 11 쭉:

이와 같은 그의 태도는 고대인들에 대한 그의 입장을 분명히 말해 준다. 그 가 고대의 맹목적인 모방울 규탄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를 존중했고 또 고대의 작품들게 매료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문제삼은 것은 모방 그 자체가 아니 라 〈 맹목적인 〉 모방이었다. 고대의 위대한 작품들은 가히 완성의 한 전형을 보 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이것을 창작의 모델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고 대의 작품들 속에 모든 것이 완전한 것은 아닌 만큼 우리는 정확히 판별하는 눈을 가질 필요가 있다. 호메로스나 베르길리우스의 어떤 글 중에는 찬양받을 것과 비난받을 것들이 뒤섞여 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더 중요한 것은 고대

의 작품 속에 성취된 것으로- 믿어지는 완성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가를 인식 하는 일이다. 고대인들 자신은 이 문제에 대해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들은 단순히 시인으로서의 영감에 따라 작업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 나 한 작품이 어떤 완성에 도달했다면, 그것이 의식적 작업의 소산이건 아니건 조례, 모든 예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미, 영원한 미의 원리와 법칙에 일치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에서 고대의 작품들을 맹목적으로 모방하는 대신 판별적안 안목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지만, 판별의 기준은 바로 이 원리와 법칙이다. 요컨대, 샤프렝이 주목한 것은 고대 또는 고대의 작품 그 자체보다 그 안에서 숨쉬고 있는 예술의 법칙이었다. 그의 발견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 다. 그는 이 법칙이 고대의 작품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작품에 한결같이 적용될 수 있는 영원한 법칙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 영원한 자연 la na t ure( 인간의 본성까지도 포함한)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의 작품 속에서 발견한 미의 법칙을 고대에 한정시키는 대신 영 원 보편한 법칙으로 확대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영원한 자연과 결부시켰다는 것은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샤프렝의 이와 같은 해석이 옳다면 고대의 원리는 이제 고대의 것이 아니라 새 시대의 원리가 되기에 전혀 손색이 없을 뿐만 아 니라 이 법칙은 확실한 논리적 근거를 제공받게 될 것이다. 샤프렝에 의해 고 대의 이론은 근대적 이론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끝으로 한 가지 더 덧붙일 것이 있다. 그것은 당대의 시가 위협받고 있는 경 박성에 대한 그의 반격이다. 그는 차츰 고개를 들기 시작한 부르주아들의 살롱 에서 번지고 있던 감정적 • 지적 유희로서의 문학놀이를 강력히 비난했다. 사실 샤프렝은 이론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작품들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는 매 우 관대하고 포용적이었다. 그는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셍 타망, 트리스탕, 스 퀴데리 등의 시에 대해서도 굳이 결함을 찾아내려 하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개입한 『르 시드』 논쟁에 있어서도 그는 극작의 기본원리를 환기시키되 작품 속에서 발견되는 아름디움에 대해 찬양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살 롱 문학에 대해서는 가차없었다. 말과 감정의 유희로 일관한 경박하고 무의미

한 연애시, 또는 연가 madr ig al 는 그의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시를 장난과 여흥으로 격하시키는 일이며, 말하자면 진정한 문학에 대한 모독 이다. 그에 있어 문학은 진지한 것이어야 한다. 이 진지성을 상실할 때 문학은 모든 것을, 즉 위엄과 위대를 상실할 것이다. 샤프렝은 진지성이 위협받고 있 던 당대의 사회적 풍조 속에서 그것을 강력히 옹호하며 문학의 기본적 윤리로 회복시킴으로써 고전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 샤프렝 의에 기억해야 할 이론가들은 적지않다. 1640 년 『 시학 Poe tiq ue 』 제 1 권 울 발표한 라 메나르디에르 La Mesnard i er elj떠 주목하기로 하자. 그는 전 4 권 울 예고했었지만 이 한 권을 내놓는 것으로 그쳤다. 그가 그 안에서 디룬 문 제는 희곡에 국한된 것이었는데, 규칙의 전통적 개념들을 평이하게 풀이하고 전파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그가 특별히 역점을 둔 것은 〈 적합성 b i enseances 〉에 대해서였다. 도바냑 abbe d'Aub igna 떠 관심도 희곡에 집중되었다. 그의 유명한 『 희곡의 실제 Pra tiq ue du t hea t re ,IJ 가 출판된 것은 16 년의 일이지만, 그가 구상하고 쓰기 시작한 것은 1640 년경부터였다. 그는 추상적인 이론에 관심을 갖는 대신 극작에 따르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거론하며 해답을 주는 데 주력했다. 말하자 면 그는 그 자신 연극인이 아니면서도-하긴 한 편의 실패직을 남기기는 했 다一一극작 기술의 전문가, 프랑스의 최초의 전문가가 된 셈이다. 그는 그가 정통하고 있었던 이론과 원리로부터 구체적인 적용의 방식을 이끌어냈으며 세 부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들에 대한 지침을 수립했다. 이 관점에 따라 그는 한편 으로는 코르네유의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의 가장 아름디운 비 극 속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규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 점을 명백히 지적하 며 비판했다. 도비냑이 그의 모든 작업과 생각들을 이성의 원리에 결부시키고 있는 점은 크게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에 의하면 미는 이성이 낳은 딸이다. 〈이성의 빛 에 의지해야만 한다. 그것은 단순하고 확실하며, 우리가 참된 자연적 아름다움

울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 방법에 의해서이다 〉 _ _이렇게 단정하는 그는 사 실상 샤프렝이 환기시켰던 〈 자연 〉 의 원리에 합류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스퀴데리 Geor g e de Scuder y도 이 대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박학 했을 뿐만 아니라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누린 사교인이기도 했던 그는 〈 단일 〉 의 법칙의 열렬한 옹호자였으며 코르네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르네 브레에 의하면 그는 〈 시와 역사, 사실다움과 초자연적인 것 사이의 관계, 전체적으로 는 영웅 시의 구성 〉 22) 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의에도 『 영웅 시론 D is se rt a ti on du poe me hero iq ue 』 을 쓴 르므완느 le P. Le- moyn e , 『 담론 D is cours .!l , 『 문학론 Tra it es .!l 의 저자 콜르테 Gu ill aume Collete t , 『비극론 D is cours de la Tra ge d i e 』을 남긴, 재능 있는 시인이자 사교인이었던 시리쟁J ean-Fran~o i s Sarasin , 매우 박학했던 메나쥬 l'abbe Menag e, 그리 고 발자크가 그랬던 것처럼 파리의 문인들에게 보낸 서한울 통해 문학론을 펼 친 코스타르 P i erre Costa r 등의 이름을 우리는 기억한다.

22) R. Bray, La Formatio n de la Doctr ine clas siqu e, Paris, Niz e t, 1963, 36~:

이들은 각기 자신들의 고유한 관심의 분야가 있었고 그 나름의 문학적 취향 과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상당한 대립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때로는 감정적 반목으로 발전하기도 했는데, 아당과 같은 문학사가는 〈 이 비평가들은 서로 중상하고 헐뜯는 데 寧日 이 없었다〉 23 봐코 핀잔을 주기도 한다. 코스타르는 샤프렝과 고도 Godea 머문 헐뜯음으로써 문인생활을 시작했 고, 도비냑은 메니쥬와 소란스런 언쟁을 벌였다. 샤프렝은 라 메나르디에르를 〈 허풍 떨고 잘난 체하는 〉 사람으로 경멸했고, 메나쥬를 엉터리 협집꾼으로 취 급했다. 그는 자기를 중상한 코스타르를 끝내 용서하지 않았고, 코스타르는 이

23) A.A dam, 앞의 책, 11 쭉:

에 대한 반감으로 브와뒤르의 찬양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라 메나르디에르, 메니쥬 등과 함께 반샤프렝 전선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 모든 반목과 대립에도 불구하고 1630 년에서 16 4 0 년에 걸쳐 하나의 공인 될 만한 이론 체계가 점차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 거론된 이론가들은 이 체계 의 완성을 위한 대역서에 각기 자기 몫의 공헌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참으로 길고 긴 역사였고, 이에 가담한 것은 이론가들만도 아니었다. 수많은 시인, 극작가들이 서문 또는 담론의 형석을 빌려 자신들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 했을 때 그것은 조금도 손색없는 하나의 시론, 국작론이었다. 메레가 『 실바니 르려 재판에 붙인 〈 서문沼 7 극작에 있어서의 규칙의 준수를 주장한 한 편의 문학 선언문이었고, 이보다 앞서 『 티르와 시동』 에 붙인 프랑수아 오지에의 서 문은 반대로 형석으로부터의 자유와 영감을 옹호한 선언문이었다. 도비냑의 비 판에 대해 코르네유도 침묵만을 지키지는 않았으며, 3 편의 『 담론 』 (1660 년의 전 집 각 권 앞에 서문의 형식으로 붙임)으로. 이에 응수했다. 사실 프랑스의 문학사 는 작가가 단순히 작가로 머무는 대신 바평가를 겸하고 있는 많은 경우를 보여 주고 있다. 프랑스 근대 문학의 창시자들, 즉 플레이아드의 시인들은 먼저 문 학 선언문을 쓰는 것으로부터 그들의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프랑스 문학은 그 시작부터 문학에 대한 이론적 성찰을 수반했는데, 문학에 대한 문학의 자아 성 창] 하나의 전통으로 면면히 이어져나온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17 세 기 전반기의 많은 작가들은 동시에 비평가들이었고, 비평가들 또한 많은 경우 시인이기도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론가들〉이라고 따로 분류하여 지칭하는 사람들이 보다 의 식적으로 문학이론에 도전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여기 1640 년경 이른바 고전주의라 불리어지는 문학이론의 전모가 거의 완성된 형태로 드러났다. 그것 은 기이하게도 고전주의 문학 그 자체에 선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한 고전 주의 이론의 종합으로 평가되는 브왈로의 『시 학 A rt p oe tiq ue 』에도 선행했다. 1674 년 이 책이 나왔을 때 고전주의 이론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고 더 이상 이론의 여지없이 확정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브왈로가 이 이론의 형성에 기여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그는 분산된 이론들을 하나의 전체적 툴 속에 통 합했을 뿐이고 또 당대의 지식인들이 선호하는 스틸로 포장하는 데 성공한 것 뿐이다. 브왈로와 같은 시기에 거의 동일한 작업을 한 또 한 사람이 있다. 그 는 다름아닌 예수회 신부 라펭 le P. Ra pi n 인데, 브왈로의 7 시학셔 보다 7 개월 앞 서 출간된 그의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 대한 성찰 Ref l ex i ons sur la Po- etiqu e d'A ris t o t e 』 도 고전주의 이론의 한 집대성이라 할 만하다. 결국 여기에까지 왔다. 우리는 이 지점에 와닿기 위해 저 멀리 전세기의 위 마니슴에서부터 시작했다. 16 세기 중엽 새로운 문학적 이상을 위해 문학의 재 건을 꿈꾸었던 플레이아드 이래 근 1 세기에 걸쳐 프랑스 문학은 들끓는 사회 적 • 정신적 상황 속에서 마치 문학의 모든 가능성을 실험하기라도 할 듯 다양 하고 화려한 모험들을 펼쳐나갔다. 17 세기 중엽 우리가 추적해 온 바와 같이 하나의 이론체계가 완성되었다면, 그것은 이 일련의 모험둘의 한 귀결과도 같 은 것이다. 이 귀결 속에 복합적인 모험들의 모든 것이 수령되고 , 종합화되었다 고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 이론체계가 상반된 경향들의 각축 과 대립 속에서 자신을 확립해 나간 것은 확실하며 그런 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쟁취된 승리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승리인가를, 그리고 무엇 의 승리인가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좀더 분명히 이것 울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3 고전주의 이론 앞 장에서 근대희곡의 역사와 고전주의 이론의 형성을 개관하면서 우리는 이 론 그 자체에 대해 간간이 언급할 기회를 가졌으며 이를 통해 어렵풋이나마 이 론의 대체적 윤곽을 환기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이상 의곽지대에서 맴 돌고만 있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포위망을 좁힐 대로 좁혔고 이제는 심장부를 향해 돌진해 들어갈 때가 된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앞서 거론했던 문제들을

다시 다루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단편적으로 논의되었던 것들은 이론의 총체, 즉 통합된 전체 속에 편입되어야 하고 그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고대의모방 먼저 고대에 대한 고전주의자들의 태도를 점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우리의 성찰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당연하고도 유효하 다. 위마니슴에서 고전주의에 이르는 일관된 정신적 • 심미적 모험을 촉발시킨 것은 바로 고대의 발견이었기 때문이다. 고대는 위마니스트들의 영감의 보고였 고 고전주의자들의 영원한 숭배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다같이 고대의 모방울 제일원리로 삼았으며, 이 점 고전주의자들은 플레이아드 이론가들의 계승자로 간주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이 양자의 일치는 여기서 끝난다. 고대에 대한 공통된 찬양에도 불구 하고 이들은 이 찬양의 동기와 방식에 있어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위마니스트들은 극히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고대에 이끌렀 다. 그들의 고대와의 만남은 하나의 현혹이었고, 그래서 이 위대한 완성을 경 탄의 눈으로 바라보고 이것을 모방하는 것은 말하자면 자연발생적인 것이었다. 이에 반해, 고전주의자들은 이 찬양의 이유를 찾기를, 즉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기를 원했다. 전자의 경우 찬양과 모방이 맹목적이고 미신적이었 다면 후자는 그것들이 이유 있는 것이기를 바랐다. 그들이 찾아낸 이유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샤프렝은 고대의 작품 속에서 기적적으로 실현된 미를 설명할 수 있는 원리로서 〈 자연 〉 과의 합치를 제시했 다. 한 작품이 완벽한 아름다움을 이루고 우리의 영혼을 뒤흔들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그 자체 영원한 〈자연〉에 합치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고대 를 모방할 때 실은 그 안에 재현된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된다. 샤프렝에 뒤이 어 도비냑은 〈자연冷t 〈이성〉으로 고쳐 부름으로써 개념을 좀더 명확히 했다. 고대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완성의 표본이라면, 설사 그것이 무의식적 이고 자연발생적인 산물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성에 부합된 것임에 틀림없

다. 그들은 부지불식간에 이성의 이끌립을 받아 작업하였고, 이렇게 함으로써 영원불변한 그리고 보편적인 미 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이 야말로 그 자체 영원하고 보편적인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 이성의 빛에 의지해야 한다. 이성은 단순하고 확실하며, 우리가 진정한 자연적 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의 방법을 통해서이다 〉 2 4) 라고. 그는 분명히 고대의 위대를 찬양했다. 그러나 그 위대는 고대인의 권위에서가 아니라 이성의 원리 에서 니온 것이다. 그에 있어 고대와 이성은 동의어였다고 말할 수 있다. 더 정확하게는, 동의어가 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고대를 존중했다고 하는 것이 옳다. 훗날 고전주의의 규칙들에 관해, 〈그 것들은 권위로써가 아니라 이성으로 써 세워졌다 〉 25) 라고 말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라팽도 〈 규칙들은 권위와 실례보다 양식 (판단력)과 이성 위에 세워져 있다 〉 2 6) 라고 단언함으로써 이에 가 세한다.

24) d'Aubig na c, Pratiq u e du the atr e : (c ite p ar A. Adam, His toire de la litt irat u re fr an ,ais e, T. I., Bordas, 20~) .

2 5 ) 위 의 책 : ( c it e par P. C larac, L i混 ra­ tu re fra n,aise , L 'Ag e ctas sz·qu e II , 1660-1680, 75 쪽) .

26) Rapi n, Refle xion s sur la Poetiq u e d'A ristote : (cite par P. Clarac, 앞의 책, 75 쪽).

고대에 대한 이와 같은 기본적 태도가 고대의 작품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낳은 것은 당연하다• 아니, 해석한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일에 속한다. 전세기 의 위마니스트들의 경우 고대는 전적으로 모방되어야 할 신성한 그 무엇이었 다. 이에 반해, 고전주의자들은 고대를 숭상하되 그것이 분별 있는 것이 되기 를 선택했다. 자연 또는 이성과의 합치를 준거로 제시한 성숙한 고전주의자들 은 이 준거에 따라 고대를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사랑한 고대, 이른바 〈 아름다운 고대 belle An tiq u it e ) 는 단연 그리 스 보다는 라틴이었다. 그들은 핀다로스, 아이스쿨로스 Ech y le, 소포클레스보다 베르길리우스, 테렌티우스 Terence, 호라티우스를 선호했다. 그리스의 시인들 이 때때로 대담성과 무절제로써 그들을 당혹케 한 데 반해, 라틴 시인들은 - 스 틸의 〈 우아한 단순성 〉 과 〈 순진함 〉 으로- 그들을 매료했다. 이들은 예술적 완성의 개념을 그들에게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사실 이 예술적 완성의 개념, 혹은 보 다 넓게 예술의 개념은 16 세기 위마니슴 문학의 위대한 정복이었으며 뒤이어 고전주의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플레이아드로부터 시작되는 프랑스 근대 문 학이 중세와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이며 우리는 여기서도 17 세기 가 16 세기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고전주의자들이 〈 아름다운 고대 〉 에서 발견한 것은 예술적 완성만이 아니다. 고대가 이 형식적 완성 속에 구현하는 데 성공한, 〈 자연 또는 이성에 합치된 것 〉 으로써 그들을 사로잡았다는 것은 새삼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고전 주의자들이 고대를 발견했을 때 동시에 발견한 것은 자연 그 자체였으며, 따라 서 그들의 경우 고대를 모방하는 것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갈수록 더 고대보다 〈 자연 〉 그 자체에 관심을 집중 시 키게 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들은 한 편으로는 고대에 매여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탈고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 다. 그들이 고대 속에서 발견한 자연은 고대의 것만이 아니라 영원한 것, 즉 그들 자신의 것이기도 했으며 , 따라서 그들은 이 자연을 모방함으로써 그들 자 신의 문학을 창조하고 고대와 대비되는 근대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자연의 모방 다시 한 번 확인하자. 고전주의자들에 있어 고대의 모방과 자연의 모방은 논 리적으로 하나를 이룬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모든 문제는 〈 자연의 모방 〉 으로 귀착된다. 고대와의 만남으로 촉발된, 전정한 예술적 창조에 대한 일련의 성찰 둘은 실은 이 명제롤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 명제는 문제의 핵이자

진원지이다. 이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는 〈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 라는 근원적 물음에 대한 그의 답이다. 이 물음에 대해 모든 예술가와 예술 이론가들은 그 둘 나름대로 답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많은 경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를 성 찰의 기점으로 삼고 있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자연의 모방은 그 자체 자명하 고도 보편적인 명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술과 문학이 자연의 모방, 즉 현 실의 재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거부하는 유파는 사실상 단 하나도 없다. 심 지어 프레시오지테 문학도 〈 자연스러운 〉 , 즉 자연을 묘사하는 문학으로 자처했 다. 『 클레리 Clel i e 』 (1660) 의 동시대인들은, 오늘날 보기에는 그처럼 기교적이 고 부자연스러운 이 소설을 〈 가장 일반적인…… 것들冷t 묘사한, 자연스러움의 극치로서 찬양했다. 사실 〈 자연의 모방 〉 이란 명제는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자연은 무엇이며 모 방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에 대해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자연을 어 떻게 모방하는가라는 문제는 그 자체 근원적인 것으로서 한 문학, 한 예술의 존재양식을 결정짓고도 남음이 있다. 방금 언급한 프레시오지테와 『 클레리 』 의 경우도 실은 자연에 대한 한 개념, 모방의 한 방식이 그 안에서 문제되고 있는 것이다. 고대에 경도되었던 그리고 성찰의 준거를 그 안에서 찾았던 17 세기 이론가들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를 그들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들은 자연의 모방울 문학의 제일원리로 믿었고, 그들의 관념 속에서 자연은 사실 또는 진실과 일치했다. 브왈로는 시인들에게 자연을 연구하라고 권유하면 서, 〈 전실만이 사랑할 만한 것이다〉 27) 라고 단언했다. 진실을 존중하고 진실만 을 모방할 것을 가르치는 이와 같은 입장은 때때로 오해를 낳기도 했다. 19 세 기의 일부 비평가들은 고전주의자들의 진실에 대한 집착을, 낭만주의의 현실 27) Boil ea u, Ep itre IX : (c it ee par P. C larac, 앞의 책 , 77 쪽) .

일탈과 비교하면서 그들의 사실주의적, 나아가서는 자연주의적 경향을 운운하 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비평가들은 〈 자연 〉 에 대한 고전주의적 관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 던 것이 명백하다. 고전주의자들은득 이미 17 세기 초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 에 대해 지극히 명확하고도 한정적인 해석을 가했기 때문이다. 이들에 의하면 시가 모방해야 할 자연은 드러나 있는 그대로의 모든 자연이 아니며, 모방은 그것들을 사전처럼 정확히 그려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시는 자연의 혼돈된 의양둘로부터 그것의 본질을 이루는 것을 추출해 내야 한다. 이 의양둘은 그 속에 숨어서 그것들을 지배하는 어떤 본질적인 것의 우연한 표출 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일종의 밀그림과 같은 것이며 문제는 이 밀그 림을 통해 진짜 그립을 그리는 데 있다. 그런데, 여기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고전주의자들이 〈 자연只끌 인간적 자연, 나아가서는 인간의 내면적 • 정신적 자연으로 국한시켰다는 점이다. 그들 에게 인간을 제의한 자연은 애당초 관십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숲과 강, 들판 과 전원 따위는 애당초 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인간, 특히 그의 의 지, 정념, 성격, 한마디로 그의 내면 세계의 모든 것-그들이 집착하는 자 연은바로이런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자연의 모방울 좀더 명확히 정의할 수 있다. 그 것은 인간의 내적 • 정신적 현실의 모방이고, 이 현실의 의양의 복사가 아니라 그것의 본질의 재현이 되기를 바라는 모방이다. 여기에는 매우 의미 깊은 지적 선택이 개입한다. 그것은 밖으로. 드러난 현실의 모든 의양들은 그 자체 혼돈의 것이고 따라서 이 혼돈을 충실히 복사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이해되 지도 않는다는 기본 인식에 바탕을 둔 선택이다. 문제는 이 의양의 혼돈을 제 어하고, 투명한 시선으로 현실의 본질을 투시하는 데 있다. 시는 표출된 현실 울 감각적으로 감수된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그것을 지적으로 변형시키고 여과 시킴으로써 하나의 통일되고 질서잡힌 것으로. 창조해 내는 데 그 본질이 있다. 고전주의자들에 있어 자연은 지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할 그 무엇이며, 말하자면

관념화된 자연이다. 이때 비로소 이 자연은 인간의 정신에 인지될 수 있을 것 이다. 본질로 환원된 현실은 필경 보편성을 부여받는다. 의형적 현실은 조건과 상 황개 따라 특이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그것들의 변화에 따라 무한히 가변적이 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은 영원불멸하고 보편적이다. 샤프렝은 『 아도니스 Ado n is 』 에 관한 유명한 서한 속에서 역사와 시를 대비시키면서 〈 역사는 사물 울 있는 그대로 다루고, 시는 마땅히 되어야 할 상태로 다룬다……. 역사는 특 정한 일을 특정한 일로 다루고 그것을 전달하는 것 의에 다른 목적이 없는 데 반해 …… 시는 먼저 보편적인 것을 고려하고 특히 그것에서 유형을 끌어내게 하려는 의도로서만 그것을 디룬다…… 〉 라고 말한다. 그의 부연 설명은 더 명확 하다. <… … 역사를 읽을 때 나는 시저와 폼페이우스에게 일어났던 일만을 알게 되고 어떤 확실한 이익도 도덕적 교훈도 얻는 것이 없는 반면, 시를 읽으면 율 리시즈와 폴루페모스의 사건들 속에서 같은 행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땅 히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을 본다……. >28 )

28) Chape l ain , L ett re sur Adonis : ; (l'hi s to i re ) , (tan dis q ue ) < si b ie n qu' au lieu que , lisa nt l'his to i r e, je ne connais q ue ce qui est arriv e a Cesar et a Pomp ee , sans pro fi t assure et sans inst ru c tio n morale, lisa nt la poe sie , sous les accid e nts d'Ulys s e et d e Polyp h eme je crois c e qui e st r ais o nnable qu' il arr ive en gen eral a tou s cewc qui fon t ! es memes acti on s.>

역사와의 대비를 통한 샤프렝의 설명은 문학에 있어서의 자연의 모방이 어떤 의미의 것인가를 확연히 드러내 보여준다. 역사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하나 의 특수한 사건으로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데 그친다면 (이것도 자연의 모방의 한 방식이다), 시는 이 특수한 사건 속에서 그것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내면의 법

칙, 영원하고 보편적인 법칙, 죽 본질적인 것을 재현 (또는 재구성)한다. 이때 비로소 자연은 그것의 내밀한 비밀과 함께 우리의 정신에 인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을 충일하고 내밀하게 재구성하되 그것을 인지될 수 있는 그 무엇 으로 제공하는 것- 〈 자연의 모방 〉 의 고전주의적 해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진실 E 梧중 여기 문학과 관련된 문제의 또 하나의 핵이 있다. 그것은 방금 언급된 〈 인지 i n t e lligi b il it e 〉 의 문제이다. 우리는 우리의 논의를 〈 자연의 모방 〉 이라는 명제 에서부터 시작했고, 이 명제가 고전주의자들에 의해 어떻게 해석되었는가를 추 궁 보았다. 요컨대 이 특정한 해석의 방식이 고전주의를 탄생시킨 것이다. 사실 모든 문학은 각기 그 나름대로 자연의 모방, 즉 현실의 재현을 추구한다. 그리고 〈 어떤 〉 현실을 〈 어떻게 〉 재현하는가에 따라 문학의 색깔이 결정지어진 다. 우리가 지금까지 고전주의 문학에 다가간 것은 이 관점에서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문학의 모든 것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문학은 단순히 현 실을 재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 재현된 현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즉 문학은 그것을 지각되고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서 제공할 의무가 있다. 한 작가가 그 아무리 아름답고 심오한 세계를 그려 보여준다 할지라도 그것이 이해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작가만의 부질없는 환각으로 그칠 것 이다. 예술적, 문학적 창조는 그것이 관객과 독자에게 지각될 수 있는 한도에 서만 창조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고전주의자들은 예술의 본질에 관한 그들의 성찰 속에서 전지하게 이 문제에 도전했다. 사고에 있어서 논리성이 존중되고 문학에 있어서 명석성이 강조되기 시작한 이 시대의 전반적 경향을 감안할 때, 그리고 문학 창조가 사회적 활동 과 유기적으로 연관지어져 있던 문화적 상황을 고려할 때 그들이 이 〈 인지〉의 문제에 특별히 민감했던 것은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다. 그들이 자연의 의적 표 출보다 그것의 내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쏟은 것은 실은 이 문제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들은 그 자체 혼미하고 모호한 의양을 나타나 보인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식을 더욱 혼미하게 만들뿐이라고 믿었고, 따라 서 자연의 완벽한 이미지를 찾아 자연의 내면으로 파고 들었던 것이다. 여기 자연의 완벽한 이미지란 그 자체 명료하고 질서잡힌 이미지, 그리하여 완벽하 게 인지 (이해)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자. 그들이 문학 속에 제시 한 자연의 진실이 과연 전실다운 것으로서 인정될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 진실다움 le vra i semblable 〉 2 9) 의 주제는 이래서 태어났다. 하나의 진실은 그것이 진실로 인정되었을 때에 한해서 전실의 권위를 획득한다. 가령 법정에 서 한 증인이 어떤 사건에 대해 증언한다고 하자. 그는 자신의 진술이 설득력 있는 것이 되도록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그의 증언이 유효한 것 이 되기 위해서는 재판관 또는 배심원들에 의해 그것이 진실한 것으로서 받아 들여져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가 해야 할 일은 〈 진실처 7 이야기 하 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진실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 진실답게 〉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문학이 해야 할 일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작가가 진실을 추구하 고 전실을 말하는 것은 그에게 맡겨진 가상할 만한 사명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그의 전실은 그만의 것으로는 족하지 않다. 그의 진실이 정 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진실한 것으로서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 그 의 도전의 대상은 〈 진실 le vra i 〉 이 아니라 〈전 실다운 것 le vra i semblable 〉 이다.

29) 〈 전실다움 X 는 levra i semblabl 공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levra i( 〈 진실 또는 사실 〉 ) 와 semblable( 〈 유사한, 그렇게 보이는 〉 )이 합쳐진 말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진 실갇이 보이는 것났t 의미한다. 우리는 이 말을 〈전실다움〉, 〈 진실성〉, 〈사실성〉 등으 로 번역하여 사용하게 될 것이다.

이 〈 전실다움 〉 의 원리도 아리스토텔레스 가운데 그 뿌리가 있다. 그는 『 시 학』 제 9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시인의 작품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 라 일어날 수 있었던 일, 필연과 전실성 la vra i semblance( 혹은 진실의 개연성) 에 의해 가능했던 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30) 라고. 그는 뒤이어 한충

30) Aris to te , Poetiq u e, chap itre IX (tra ducti on Egg e r) :

du poe te n 'est p as de dire ce qui e st a rriv e , mais c e qui a urait pu arriv e r, ce qui e ta i t pos sib l e selon la necessite ou la vrais e mblance.>

분명하게 , 〈 전실다운 것 X 본 현실의 것 le reel.£ , 또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아 니라 〈 일어날 수 있다고 믿어전 것 〉 이라고 단언한다. 여기 중요한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또는 개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믿 어진 것, 죽 그것에 대해 우리가 품고 있는 어떤 관념에 일치되는 것이다. 전 자가 일회적인 특수한 것 le p ar ti cu li er 이라면 후자는 동일한 상황과 조건하에 서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것 le g eneral 이다. 우리는 이마 역사와 시와의 대비를 통해 이 양자의 차이를 확인한 바 있지만, 이 대비도 실은 아리 스토텔레스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결국 시는 특히 보편적인 것을 표현하고, 역사는 특수한 것을 표현한다. 보편적인 것이란 그 누군가가 그의 성격에 따라 필연 또는 진실성 (개연성)에 의해 말하고 행동 했던 것이다. 바로 이 바탕 위에서 시는 뒤이어 (그 사람에게) 이름을 붙인다. 31)

31 ) 위의 책 :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도는 분명하다. 보편적인 것은 일정한 조건하에서 (여기 서는 한 인간의 성격으로 표현되어 있다) 필연적으로- 또는 개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울 가리킨다. 그런데, 이 필연성과 개연성을 인정하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의 관념이다. 우리는 각기 자연(즉 현실)에 대해 하나의 관념을 가지고 있 으며, 결국 이 관념에 일치된 것만울 진실로 인정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최초로 천명된 〈전실다움〉의 원리는 먼저 이탈리아 이론가들에 의해 연구되고 해설된 후 프랑스에 전해졌다. 데미에 De i m i er 에 뒤 이어 샤프렝은 이 원리에 입각하여 〈전실〉과 〈전실다운 것冷t 명백히 구분한다.

고대인들은 모두 일치해서 그들의 파르나스로부터 진실을 추방했다. ...... 그 누구 도 이 전실이 그들에게, 죽 정의와 이치에 합당한 것이 될 때를 제의하고는, 그리고 그것이 진실다움을 갖출 때를 제의하고는 그것을 환기시키려 하지 않았다……. 이 경우, 진실이 아니라 진실다움이 인간을 덕으로 인도하는 도구로 시인에게 사용된다 ……. 전실은 시의 본질이 아니므로 ..... 진실다움만이 거기서 추구되었다. 32)

32 ) Chape l ain , Lett re sur Adonis :

여기 〈 정의와 이치에 합당한 것 〉 이란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 은 진실다운 것, 즉 우리가 전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관념과 일치하는 것은 그 자체 이치에 합당한 것, 즉 합리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어떤 일 이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면 그렇게 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샤프렝과 다른 고전주의 이론가들에 있어 〈진실다운 것〉과 〈합리적 인 것 le ra i sonnable )-f든 동의 어 이 다. 도비냑도 거의 같은 해설을 되풀이한다. 〈 전실다움 X 본 국시 (연극)의 본질이며, 이것 없이는 무대 위에서 이치에 합당한 그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도 말해지지도 않는다. 〈 전실〉이 연극의 주제가 아니라는 것은 보편적인 규칙이다. 왜냐하면 연극에서 보여져서는 안 될 많은 진실의 것들, 재현되 어서는 안 될 많은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뼈, •••' . 〈일어날 수 있는 것 le p oss i ble 〉도 역시 연극의 주제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일어날 수도 있는…… 그래서 무대 위에 재현된다면 우스광스럽고 또 믿기 어려운 많은 일들이 있기 때문아다. 따라서 한 극 시 (연극)를 이치에 합당하게 세우고 지탱하고 종결지을 수 있는 것은 〈진실다운 것〉 뿐이다 .33)

33) d'Aubig na c, La Pratiq u e du the atr e, Liv re II , ch. ii :

sence du po eme dramati iue et s ans laq ue lle ii ne se peu t rien faire ni r ie n dir e de rais o nnable sur Ia scene. C'est une maxim e gen erale que le Vrai n'est p as le suje t bdue atuhceo autrp e ,q puai r n c'ye p qeuu ' ivl e yn at b piaes n e dteres cr ehpo rsee sse vnetre iet sa b( …les ) qLuei Pn eo sdsoibi vl e e nn'te pna s se ertar ep avs u easu,s esti le suje t, car ii y a bie n des choses qui s e peu vent faire (… ) qui p ou rt an t seraie n t rid ic u les et peu croy ab les si e lles eta i e n t repr e sente e s (… ) II n'y a donc que le Vrais em blable qu i p u is s e rais o nnablement fon der, soute n ir e t t er mi ne r un po eme dramatiq u e.>

라펭의 표현은 한결 명확하고 힘이 있다. 그리고 철학적이다. 진실은 사물을 오직 있는 그대로 만들뿐이고, 진실다움은 그것들을 되어져야 할 것으로 만든다. 진실은 그것을 구성하는 특정한 조건들의 혼합으로 항상 불완전하 다. 이 세상에는 태어날 때 그 관념의 완성으로부터 멀어져 있지 않은 그 어떤 것도 태어나지 않는다. 추구해야 할 것은 진실다움과 사물들의 보편적 원리 속에서 , 그것 들을 타락시키는 그 어떤 물질적인 것도 특수한 것도 끼여들지 않은 원초적인 것과 모형들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역사의 그림들은 시의 그림들보다 덜 완전하다. 34)

34) vrRaaisp ei n m, b앞la의nc e책 J e:s < Lfa ait v ceormitem en ee llfeasi t dJeevs r acihe no ts e est req .u e L ac ovmermitee eplrlee ss qus oe ntto, u ejot u• lras defe c tu e use pa r le melang e des condit ion s sin g u liere s qu i l a comp o sent. II ne na1t rien au monde qui n e s'eloig ne de la per fe c ti on de son ide e en nais s ant. II ne fau t chercher des orig ina ux et d es modeles dans la vrais e mblance et d ans Jes pri n c i pe s univ e rsels des choses, oil ii n'entr e rien de mate r i el et d e sin g u lier qu i l es corromp e. C'est p a r la que les po rtr a it s d e l'his t o i re sont moin s pa rfa its q ue les po rt ra it s d e la poe sie > ( cite p a r P. Clarac, 앞의 책, 78-7~).

이 일련의 인용문을 통해 우리는 고전주의지들이 문학 속에서 추구하려 했던 이상이 무엇이었는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사물들의 자연적 표출 따위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우발적인 산물이고 그것을 태어나게 한 조건들의 특수성으로서 한정지어져 있다. 그들은 이것을 〈 특수한 것 〉 , 〈 실제의

것 〉 , 〈 진실의 것 〉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 자연임에는 툴 림없다. 그러나 고전주의자들은 이 우발적이고 한정적이고 따라서 불완전한 자 연을 모방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발적이 아닌 필연적인 것, 한정적이 아닌 보편적인 것, 결국 자연의 완벽한 이미지를 구성하기를 바랐다. 〈 진실다움 〉 의 원리는 이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다. 이 원리에 의 해 시는 역사와 신분을 달리하고, 전실 또는 사실의 차원을 뛰어넘어 전실을 낳게 하는 내밀한 본질-라펭에 의하면 〈 원초적인 것과 모형들 〉 에 도전하는 것아다. 다시 한 번 확인하자. 시는 자연적 자연을 〈모 방하는 〉 대신 보편적, 본질적 자연을 〈 구성한다 〉 . 그것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관념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므로 관념적 자연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것은 플로베르가 예술을 가리켜 〈 제 2 의 자연 〉 이라 정의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35) 더 이상 추상적 논의에 빠져드는 것은 삼가하기로 하자. 그보다는 〈 진실다 35) 여기서 Corne ill려 경우를 환기하는 것은 필요하고 또 유익하다. 그는 모든 이론가 그 리고 대디수의 작가들과 달리 〈전실다움 〉 의 원리를 거부하고 〈 진실只춘 국의 주제로 삼을 것을 고집했다. 인간에 있어서의 위대와 숭고함을 추구했던 그는 그것이 예의적이고 비 범한 인물들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극은 예의적 행동을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 제 1 담론 Prem i er D is cours 』 속에서 고대 비국의 행동들은 사실 상 〈 전실다운 것 〉 이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메데 Medee 나 크리템네스트르 Cl yt hemnes­ t r 려 살인은 사실답지도 않고 쉽게 믿어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승이나 역사 에 의해 사실로서 전해져 내려온 것이고 사람들은 사실답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 실로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것들은 강렬한 호소력으로써 사람들의 십금을 울린다. 코 르네유에 의하면 국이 힘을 갖는 것은 오직 사실 또는 진실로 뒷받침되고 있을 때뿐이 다. 〈‘행동이’ 진실한 것일 때 진실다음 따위에는 개념할 필요가 없다. 그것들은 진실다 움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는 Heracl i us 의 서문 속에서 한결 단호하게 〈나는 훌륭한 비극의 주제는 진실답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다. 그것 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쉽게 증명될 수 있다〉 (Je ne crain d rai p o in t d 'avan- cer que le suje t d'une belle tra g ed ie doit n'etr e pas vrais e mblable. La pre uve en est aise e par le meme Ar isto t e (…) )라고 천명하고 있다.

움 〉 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더 중요하고 유효하다. 우리는 이 뭉 1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진실다움을 우리의 진실의 관념과 일 치된 것이라고 정의했을 때 그것이 일반 관객이나 독자의 인습적 관념으로 귀 착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라팽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실다움은 결국 〈 일반 대 중의 의견과 일치하는 것 〉 이 된다. 다시 말해, 비극의 주인공이나 희극의 인물 들에 대해 관객은 이미 하나의 공통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전실답게 재현한 다는 것은 이 통념에 부합되게 만드는 것과 같다. 그 본질에 있어 지극히 관념 적인 문학이 모든 새로움이 배제된 순옹주의 con fo rm i sm~ 위협을 받고 있다 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진실다움을 추구할 때 예의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을 배제하고 보편적 이고 정상적인 것을 선택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원리는 개인 적 성격의 무한한 다양성 대신 지극히 평범하고 상투적인 유형을 따르도록 강 요한다. 브왈로에 의하면 시인은 〈 방탕자, 구두쇠, 교양인, 찰난 체하는 자, 질투하는 자, 괴벽가가 어떤 사람인가 〉 36) 를 알고 있어야 한다. 물론, 세상에는 예의적으로 안색한 젊은이나 낭비하는 노인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예 의적 인물을 모델로 삼는 것은 전실다움의 법칙이 허용하지 않는다. 요컨대 나 이마다 그에 부합된 특칭이 있고 나라마다 그리고 시대마다 그 나름의 풍속이 있다. 브왈로는 시인들에게 나라와 시대에 따라 각기 디른· 모습으로 나타니는· 삶과 행동의 양식에 주목하라고 권고한다 .37) 그러나 이것은 성격이나 행동양식 에 미천 환경과 풍토의 영향을 연구하라는 것과는· 다르다. 그는 시인이 알고 있어야 할, 시대와 나라에 따른 통념화된 차이를 강조한 것뿐이다. 예컨대, 항 상 근엄한 로마의 원로, 항상 여자에게 아양 떠는 프랑스인 따위 말이다. 만약 36) Boil ea u, Art poe tiq u e : 37) 위의 책 :

아와 같은 통념에 어긋나는 인물들, 가령 씩씩하고 정숙한 여인, 너그러운 노 인을 무대 위에 올린다면 사람들은 진실다운 것으로 받아들이 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연의 예의적이고 우연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것의 보편적이고 본 질적인 이미지를 구현해 내는 일이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전실다움의 원 리이다. 샤프렝의 말을 인용하자면, <•• … •• 대 체로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합리적으로) 일어나는 것 〉 이야말로 예술 창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것만이 이치에 합당하고 〈 적법한 것 〉 이 되기 때문이다. 적합성 여기 〈 전실다움 〉 에 뒤이어 〈 적합성 les b i enseances 〉 38) 의 원리를 이야기할 차례가 되었다. 이 두 원리는 서로 연관지어져 있으며 후자는 전자의 한 연장 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방금 전에 연령마다 신분마다 그리고 성격마다 각기 고유한 특징과 행동 양식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진실다움의 법칙은 시인으로 하여금 그의 인물들을 이 보편적 특성에 부합되도록 창조할 것을 요 구한다. 왜냐하면 이때 비로소 그의 창조는 전실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적합성 〉 이란 창조의 구체적 방식을 말하는 것으로서 〈 전실다움 〉 에 의해 요청된다. 라펭이 데렌티우스를 찬%늄}면서 〈 그의 인물들은 결코 그들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 39) 라고 말한 것은 바로 적합성이 존중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테렌티우스는 한 성격아 요구하는 모든 언행의 방식에 완전히 부합

38) 여기 〈 적합성~ bie n seance~ 번역한 말인데, 일반적으로는 〈 예절 또는 예법〉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 예법 冷든 그 시대의 풍속 , 윤리적 규범과의 일치를 의미하는 bie n seance ex t ern 여는 해당될지 모르지만 , 인물의 성격 또는 상황과의 일치를 의미하 는 bie n seance int e rn~ 거리가 멀다. 우리는 다소의 어색함을 무릅쓰고 〈 적합성〉이 란 말을 사용하기로 한다.

39) Rapi n, 앞의 책 : (c it ee pa r P. Clarac, 앞의 책 , 82 쪽) .

된 인물, 즉 완벽하게 〈 적합한 〉 인물만을 창조했던 것이다. 우리는 라신에 대 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가령 그는 남편을 배신한 페드르 Phedre7} 그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 이 불륜의 책임을 이폴리트 H ipp ol yt혀]게 전가하려 할 때 이 비열한 행동을 그녀 자신이 아니라 시녀로 하여금 하게 하도록 배려했 다. 이것은 페드르의 신분이 요구하는 적합성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 르 시드 』 속에서 쉬멘느 Ch i mene7} 자기 아버지를 살해하고 찾아온 애인 로드 리그 Rodr igu여t 집안에 들어서게 하고 대화를 나누기까지 한 것은 많은 사람 둘의 빈축을 샀다. 혈통과 명예를 존중하는 명문의 딸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행 동을 하게 한 것은 극작가의 잘못이다. 〈 Lesb i enseances 〉 라는 말은 매우 광범하고도 모호한 개념으로서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쉽지 않다. 우리는 〈 적합성 〉 이란 말을 사용했는데, 방금 논의된 의 미에서의 bie n seances, 즉 내면적 일치를 의미하는 bie n seance i n t erne 의 경 우 〈적합성 X 즌 적절한 표현으로 여겨진다. 고전주의자들이 〈 적합성 〉 을 예술작 품의 본질적 조건의 하나로 간주했던 것은 확실하다. 반 티겜은 당대의 문학 논의 속에서 빈번히 사용되었던 이 말을 〈 조화 harmon i e 〉 의 개념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즉 예술작품의 내면적 조화, 그리고 (뒤이어 논의되겠지만) 작품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중과의 조화. 이 원리도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그리고 뒤이어 호라티우스는) 이 합치의 개념을 다시 4 범주로 세분하였다. 첫째로 도덕적 합치, 즉 풍속과 행동은· 공인된 도덕적 규 범에 합치되어야 하고, 둘째로 인물의 성격 또는 행동과 전승t rad iti on 과의 유 사성, 셋째로 행동과 성격 또는 상황과의 일치, 끝으로 전작품을 통한 인물들 의 성격의 일관성. 이 적합성의 개념이 프랑스에서 전지하게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1630 년 경부터였으며, 이것 역시 샤프렝에 의해 주도되었다. 구체적인 계기는 『르 시 드』 논쟁이었는데, 이때부터 비평가들은 비교적 새로운 이 개념을 명확히 정의 하기에 주력했다.

〈 적합성 〉 에는 내적인 것과 아울러 의적인 것도 있다. 이 경우 그것은 흔히 〈 예법 〉 이란 말로 불리어진다. 즉 당대의 사람들에게 공통된 취향, 윤리적 감각 에 부합되는 것이 문제이다. 만약 작중의 인물들에게 당대의 건실한 교양인들 의 취향과 예법에 어긋나는, 난폭하고 무례한 언동을 하게 한다면 그 작가는 의적 적합성을 어긴 것이 되며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도 〈 자 연의 모방 〉 의 한정적 적용을· 확인하게 된다. 고전주의자들에 의해 모방되는 자 연은 모든 자연이 아니라 모방되기에 합당한, 즉 엄밀히 선별된 자연이다. 이 선별의 기준의 하나가 곧 당대의 사람들의 미적 감각, 윤리적 의석이다. 그리 하여 이에 어긋나는 모든 것은 엄격히 무대에서 추방될 것이다. 야비하고 상스 런 말투, 난폭한 행동, 결투, 살인과 같은 행위는 재현되어서는 안 된다. 〈시 인이 커다란 주제 속에서 성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부분은 자 연 속에서 아름다운 것과 즐거운 것을 잘 분간할 줄 아는 일이다……. 왜냐하 면 시는 모든 것이 마음에 줄거움을 주어야 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자연에 집착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一—자연은 어떤 점에서는 거칠고 불쾌하기 도 하다. 자연이 가지고 있는 아름디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선별해야만 한 다. >40 ) 이것은 라펭의 말이다. 〈 모든 것이 마음에 즐거움을 주어야 하는 예술〉 속게서 그렇지 않은 것들은 마땅히 배제되어야 한다. 만약 이것들을 굳이 포함 시켜야만 한다면, 가령 브왈로가 가정한 것처럼 〈흉칙한 뱀과 괴물只t 이야기 해야 한다면 그것들은 〈 섬세한 화필〉과 〈줄거운 기교〉로써 아름답고 향기롭게 변형되어야 한다. 41) 여기 라신의 위대가 있다. 그의 주인공들은 때때로 〈괴물〉

4o) Rap in, 앞의 책 : (citee par P. Cia r ac, 앞의 책, 갇은곳).

41) Boil ea u, 앞의 책, Chant III :

par l'ar t imit~, ne pui ss e pla ir e aux yeu x.>

의 의형을 지니고 등장한다. 끝내 광기에 빠져드는 오레스트도, 〈 근친상간과 기만 〉 의 이중적 범죄를 범하는 페드르도 괴물이라면 괴물이다. 그러나 인간의 약점으로 말미암아 마치 예정된 운명처럼 최후의 파멸을 향해 돌진하는 이들은 정녕 사랑할 만한 괴물이다. 라신은 작품 속에서 모든 것을 말하고 환기시킨 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거슬리지도 불쾌하게 하지 도 않는다. 그는 자신의 놀라운 예술로써 삶의 모든 신비-그 아름답고도 소름끼치는 진실들을 〈 적합성 〉 의 범주 안에서 드러내 보여줄 줄 알았던 것이 다. 이에 반해, 몰리에르는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샤프렝, 리펭 그리고 평생의 친구였던 브왈로에 의해서까지도 다른 평가를 받았다. 이들은· 그를 찬양하면서 도 그의 〈 천한 익살〉에 대해서는 몹시 상을 찌푸렸다. 끝으로 〈 적합성〉과 관련하여 한 가지 주목할 일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내적 인 것과 의적인 것으로 분류하였는데, 이 양자 사이에 상당한 모순이 있는 것 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적 적합성은 작중 인물이 그의 신분, 그의 시대, 그에 관한 전설적 또는 역사적 전승에 부합되기를 요구한다. 이에 반해, 의적 적합성은 이 인물이 당대의 사람들의 취향과 행동양식에 비추어 묘사되기를 원 한다. 전자가 역사적 현실성을 존중한다면 후자는 이 현실에 대해 갖는 당대의 사람들의 인식, 죽 관념을 중시한다. 이 양자 사이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 가. 대부분의 고전주의자들은 당연히 후자로 기울어질 것이다. 그들은 당대의 사람들을 위해, 이들의 〈마음에 둘기p la i re 〉 위해 작품을 썼기 때문이다. 사람 둘의 마음을 사로잡고 또 감동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아 믿는 그대로의 삶의 방식에 부합된 모델을 그려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다시 〈진실 〉과 〈 전 실다움〉의 이분법으로 되돌아온다. 이 양자 사이에서 십각하게 고민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다름아닌 코르네유 였다. 그는 비극의 주제는 전실다움이 아니라 전실 그 자체여야 한다고 역설함 으로써 단연 역사적 진실성의 편에 섰다.

(비극의) 큰 주제들은 항상 진실다움을 넘어서야 하며, 만약 그것들이 ......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 역사의 권위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관중들에게서 믿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42)

42) Corneil le, D euxie m e Dis c ours :

그는 『 헤라클리우스H秘 racl i us 』의 서문 속에서 한결 단호한 입장을 천명한다. 레오틴느가 헤라클리우스를 대신하여 한 아들을 죽게 한다는 가정은 진실 (사실)답 지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따라서 진실다움 따위는 필요가 없다. 그것은 전실의 뒷받침이 있기 때문이다 .43)

43) Corneil le, Heraclius , Avis a u lecte u r :

이와 같은 코르네유의 주장 가운데, 아당이 지적한 바와 같이, 〈강한 진실에 대한 욕구서} 보는 것은 온당한 일로 보인다. 44) 그가 진실다움을 거부한 것은 그것이 당대의 취향대로 채색하고 변형시킴으로써 진실 그 자체의 약화, 변질 울 초래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한 진실-오직 그 자체로써 가장 강렬한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진실에 도전했다.

44) Cf P. Clarac, 앞의 책 , 81 쪽 :

그러나 코르네유의 주장이 메아리 없는 의침으로 끝난 것을 우리는 알고 있 다. 샤프랭 도비냑을 위시한 이론가들의 주장은 고전주의의 정론으로 자리잡

았고, 마침내 라신에 의해 이 이론은 작품으로 구현되었다. 진실다움은 비극의 유일한 원리로 받아들여졌고, 당대의 취향과의 일치를 요구하는 의적 적합성의 규칙은 별 저항 없이 존중되었다. 그러나 창작의 구체적 과정 속에서 역사적 진실이 일방적으로 희생되지는 않았다. 신화 속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택하거나 로마사에서 주제를 빌려울 때 극작가들은 신화나 역사에 충실한 상황을 재현하 기에 소홀함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 모든 것에 신선함과 생동감을 불어넣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안에서 전개되는 사건을 하나의 예의적 인 것으로 다루는 대신 이내 보편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렸으며 그 안에서 인간 과 삶의 영원한 진실이 부각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 전실은 일차적으로 당대 의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아득히 먼 신화적 인물 이기도 하고 로마의 역사적 인물이기도 한 주인공들은 의형상 그들의 시대와 상황에 알맞는 인물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그들의 언동에서 거칠고 야비한 말이나 과격한 행동은 제거되고 무대에서 충격적인 장면들은 자 제될 것이다. 요컨대 이 시대의 예법, 이른바 의적 〈 적합성活든 조심스럽게 준 수된다. 이로써 그 주제로 보아 로마의 비극이라 할 이 비극은 루이 14 세 시대 의 비국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환은 언어와 행동양식과 같은, 단 순히 의형적인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내면적 진 실의 차원에 있어 이 시대의 관념과의 일치를 의미한다. 비국의 주인공들 사이 에서 벌어지는 내적 정념의 드라마는 실은 17 세기 프랑스인들 자신의 것이었 다. 결국 고전주의 작가들은 개별적인 역사적 전실과 보편적 진실, 즉 진실과 진실다움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찾기에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그들은 후자를 존중하며, 그들의 창작의 방향은 전자에서 후자로의 전환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적합성〉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이 이 양자 사이에 균형을 모색한것은확실하다. 규칙-삼단일 마침내 우리는 규칙의 문제와 만나게 된다. 혼히 고전주의를 논할 때 의형적

규칙, 죽 〈 삼단일t ro i s un it es 〉 의 법칙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이것은 고전 주의에 대한 올바른 접근방식이라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고전주의의 본질을 결정짓는 기본적 원리들이며, 이 원리들이 표현되어 나오는 방식, 즉 의형적 형식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우리는 이 순서를 따라 먼저 몇 가지 원리들을 밝 히기에 주력하였고, 이제 그것들이 담길 틀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그러나 직접 이 문제에 들어서기 전에 고전주의자들이 이른바 〈 예술 ar t 〉 에 대해 어떤 개념을 가졌었는가를 가늠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규칙의 문제는 이 개념 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개념은 그 역사가 길며 적어도 전세기의 플레이아드 시인들에게까지 거슬러 울라간다. 이들이 시 창조에 있어 천부적 재능과 영감, 즉 〈 자연 〉 의 힘에 의지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 에 시가 하나의 완성이 되어야 한다는 자각이 그들에게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비록 미미하게나마 시가 기술적 연마의 소산이어야 한다고 믿었고 이로 써 예술의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들로 간주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보다 많이 시신 Mus eQ1 영감에 자신을 위탁했고, 이로써 말레르브의 반격을 불러일으켰다. 영감을 자연의 자의적이고 우발적인 변덕으로 간주했던 말레르브는 시를 이와 같은 변덕에 위탁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타락이라고 믿었다. 시인은, 마치 조각가가 대리석을 깎고 다듬어 하 나의 형상을 완성시키는 것과 같이, 말이라는 제재에 도전하여 그것을 갈고 닦 음으로써 완성된 형식을 창조해야 한다. 그는 드높은 하늘의 전령, 영감의 창 조자이기에 앞서 먼저 겸허한 언어의 장인 ar ti san 이어야 한다. 시 창조를 의식 적이고 방법적인 작업의 차원으로 되돌려놓음으로써 〈예술〉의 개념을 도입하고 문학에 있어서의 형식적 완성의 개념을 최초로 확립한 것은 말레르브였다. 고전주의자들이 말레르브의 입장을 이어받은 것은 확실하다. 다만 그들은 자 연의 역할에 대해 조금은 더 관대했던 것처럼 보인다. 천부적 재능없이, 또한 영감없이 아름다운 시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령 라펭은 〈비록 자연이 예술의 도움 없이는 큰 일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예술은 시인의 지고한 완 성에 자연만큼 이바지하지 않는다고 믿은 퀸틸리아누스의 견해로 되돌아올 필

요가 있다 〉 4 5) 라고 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둘이는 것은 위험하다. 그는 〈서 문 〉 속에서, 〈 완성으로 가는 것은 오직 규칙을 통해서 이며 , 규칙을 따르지 않을 때는 이내 길을 잃는다 〉 46)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 다.

45) Rap in, 앞의 책 : (citee par P.C l arac, 앞의 책, 7~). 46) Rapi n, 앞의 책 , Avert iss ement : ( citee par P. Clarac, 앞의 책 , 같은 곳) .

결국, 그들이 말하는 artrd - 작업의 방식을 가리키며 구체적으로는 〈 규칙에 따라 〉 작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둘이 규칙을 따르는 것은 그것이 완성으로 인도하는 확실한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완성이며, 규칙은 이 완성의 보장인 셈이다. 완성을 실현하기 위해 고안된, 엄 밀한 작업의 한 방정식――고전주의의 규칙들은 바로 이런 것이며, 한 체계로 서의 고전주의의 완성은 이 규칙의 완성으로써 매듭지어진다. 이와 아울러 우리는 이 규칙들이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 다. 이 규칙들은 17 세기 이론가들에 의해 창안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고대로부 터 물려받은 것인 만큼 고대의 권위야말로 그것들의 근거가 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고전주의 이론가들이 고대의 권위를 존중하면서도 이 규 칙들을 다른 원리, 즉 이성의 원리에 결부시켰다는 것을 확인한 바 있다. 도비 냑의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하자면, 〈그것들(규칙)은 권위가 아니라 자연적 판 단 위에 세워져 있다. >m 라펭도 이에 가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 시학』은 정확히 말해서 방법화된 자연 그리고 원리들로 환원된 이성일 뿐이다. >48 ) 그런

47) d'Aubig na c, 앞의 책 : ( citee par Clarac, 앞의 책, 같은 곳) . 48) Rapi n, 앞의 책 :

natu r e mis e en meth o de et l e hon sens reduit en pri nc i pe s>( c itee pa r P. Clarac, 앞의 책, 갇은곳).

데, 자연도 영원하고 이성도 영원하다 . 따라서 고대인들에게 유효했던 규칙들 은 17 세기 시인들에게도 유효하다. 이들은 고대인들에게서 빌린 규칙들을 이성 의 원리로 재해석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규칙으로 만들었으며, 동시에 이 규칙 에 보편타당성을 부여했다. 이제 구체적으로 규칙에 대해 논하기로 하자. 이 규칙들이 희곡과 관련된 것 임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의 대표적 장르는 희곡이었으 며, 이론가들의 논의도 당연히 희곡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규칙과 관련하여 그것은 〈 삼단일 〉 의 문제로 모아졌다. 그러나 먼저 희곡이라는 문학 장르의 특성에 ·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희곡 은 다른 장르와는 달리 극장이라는 한 특정한 장소에서 관객들을 상대로 보여 주는 공연 예술이다. 다시 말해 희곡은 공연되기 위해 극장(때로는 노천 극장일 수도 있다)과 무대와 관객을 필요로 한다. 이와 같은 조건은 희곡에 갖가지 제 약을 가한다. 무엇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행동의 공간이 무대로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전개되는 행동만을 보게 되므로 극작 가는 보여주고자 하는 모든 것을 무대 위에 펼쳐놓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무 대란 매우 좁울 뿐만 아니라 고정되어 있는 공간이므로 그 안에서 전개되는 행 동은 극도로 제한된 것일 수밖에 없다. 극작가는 이 제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때때로 무대장치를 바꿈으로써 공간의 변화와 확대를 꾀할 수는 있다 . 그러나 무대의 물리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기도에도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 다. 뿐만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관객 앞에서 무대 위의 행동 공간이 수시로 변 화한다면 그것은 인위적 조작에 의한 것이 되며 따라서 연극이 관객에게 주어 야 할 진실의 환각은 크게 손상될 것이다(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좀더 깊이 있게 언급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지적할 제한은 시간의 제한이다. 연극의 공연은 한정된 공간에서뿐 만 아니라 한정된 시간 안에 진행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공연은 두 시간 또는 세 시간 동안 진행되는 것이 관례인 만큼 연극은 이 주어진 시간 안에 보 여줄 모든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 시간을 인위적으로 늘리기 위한 시도가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다. 막과 막 사이에 몇 달 또는 몇 년이 홀러갔다고 가정 할 수도 있다. 또한 며칠 동안의 사건을 몇 시간 안으로 압축하여 보여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작이 공간을 확대하기 위한 조작과 동일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것도 무대 위에서 전개되는 행동의 진실성을 의 심하게 할우려가있다. 이 공간과 시간의 이중의 제약이 그 안에 담길 행동에 제약을 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두세 시간의 한정된 지속 동안에 보여줄 수 있는 행동은 우선 이 물리적 제약만큼의 제약을 받게 될 것 이다. 극작가가 한 사건의 전말을 그 시작에서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전되고 장소의 이동에 따라 변화되어 가는 모든 과정을 남김없 이 보여주고 싶다면 그는 연극을 포기하고 디른 장르, 가령 소설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굳이 연극을 고집한다면 그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 대신 그 중 일부분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행동의 제약은 그러나 공간과 시간의 물리적 제약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 다. 연극은 시나 소설과 같이 읽혀지는 글이 아니라 보여지는 공연물 s p ec t acle 이다. 글이 독자에게 있어 간접적이고 개인적인 만남의 장이라면 연극 공연은 직접적이고 집단적인 만남의 장이다. 공연물과 관객 사이에는 직접적인, 죽 인 간적인 접촉과 교류가 성립될 뿐만 아니라 어떤 사회성까지도 개입하게 된다. 다시 말해, 관객은 공연물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바, 이 반응은 강한 사 회적 성격을 내포하기도 한다. 관객 앞에서 펼쳐지는 공연이 이와 같은 관객과 의 특수한 관계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다. 공연은 그것이 성공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관객들에게 받아들 여져야 하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관객들

이 형오하는 것은 피해야 하는 대신 그들의 취향, 그들의 관념, 그들의 윤리의 식, 그들의 행동양식은 존중되어야 한다. 관객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연극은 이 점에서도 상당한 내면적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연극은 이상과 같은 연극의 숙명적 조건들에 대응하는 그 나름의 방식 울 가지고 있으며, 바로 이 방식이 한 연극의 성격을 결정짓는다고도 말할 수 있다. 프랑스 고전극도 예의는 아니다. 아니, 연극이라는 장르에 내재하는 제 약적 조건들을 하나의 도전으로서 가장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오히려 완성의 계기로 삼은 것은 다름아닌 프랑스 고전극이었다. 여기 문제되어 있는 규칙은 바로 이 대응의 방식들이며 우리는 그 안에서 부정적 요소들이 긍정적 인 것으로 전환되는 놀라운 변증법을 보게 될 것이다. 이른바 〈 삼단일 〉 이라 불리어지는 규칙은 사건의 단일, 시간의 단일, 장소의 단일을 말한다. 이 규칙도 아리스토텔레스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런데, 그 는 사건과 시간의 두 단일만을 설명했을 뿐 장소의 단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 이 없었다. 도비냑은, 〈 그가 이 규칙을 소홀히 한 것은 그 시대에 그것이 너무 나도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고 말한다. 장소의 단일을 처음으 로 발설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이론가 마기 Ma ggi였다. 그는 시간의 단일에서 장소의 단일울 도출해 냈는데, 전개되는 사건의 시간이 짧다면 그것이 서로 멀 리 떨어진 장소에 걸쳐 일어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후 1570 년경, 카스텔 베트로에 의해 이 장소의 단일이 확인되었고, 이로써 삼단일의 규칙은 완전한 형태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프랑스에서 이 규칙은 이탈리아의 이론가들을 통해 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인 정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이 일반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된 것은 1630 년 메 레의 『실바니르』 서문에 의해서였다. 그 후 약 10 년에 걸쳐 프랑스 문단은 이 규칙을 에워싼 매우 활발한 논의에 휘말려 들어갔다. 먼저 시간의 단일 unit e de tem p ~ 경우롤 살펴보자. 이 문제에 대해 최초로 명확한 입장을 표명한 사람은 샤프렝이었다. 그는 1630 년, 〈 24 시간의 필요성〉

에 관한 유명한 서한 속에서, 〈 시인 (즉 국작가)이 두세 시간 사이에 10 년에 걸 친 일을 재현함으로써 만들어내는 것보다 진실답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 49) 라고 단언함으로써 사건의 지속이 24 시간 이내로 한정되어야 함을 분명히 밝혔다. 도비냑은 이보다 한결 엄밀했다. 그는 이 규칙의 해석에 있어 모든 관용을 배제하면서 가장 엄밀하게 적용되기를 요구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는 시간의 단일에 대해 〈태양의 1 공전 〉 이란 표현을 사용했었다. 50) 이것은 수학 적으로는 24 시간에 해당되지만, 도바냑은 이 해석에 반대하여 일출에서 일몰까 지로 다시 한정할 것을 주장했다. 왜냐하면 사람이 밤중에 활동하는 것은 예의 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가장 엄밀한 방식은 무대에서 지속되는 시간과 사건이 진행되는 시간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연극이 관객에게 주는 진실 의 환각은 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모든 사건 은 머나먼 시작이 있고 기나긴 과정이 있다. 시간의 단일은 이 모든 것의 재현 울 애당초 포기하게 한다. 이 규칙에 부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도바냑이 제안한 바와 같이 〈파국(즉 종말)에서 가능한 한 가장 가까운 데서 극을 시작하 게 하는〉 것뿐이다 .51) 그는 10 년 후에야 모습을 나타낼 라신의 비극을 미리 정 의한셈이다.

49) Chape l ain , Lett re i i. Anto i n e Godeau sur la regl e des vin g t -qu atr e heures : (cit ee par A. Adam, 앞의 책 , 225 쪽) .

50) Ari sto t e , Poetiq u e : <(la tra ge d ie ) s'effo rc e de s'enfe r mer, auta n t que po ssib l e, dans le tem p s d'une seule revoluti on de soleil o u de ne le dep as ser que de peu .>

51) d'Aubig na c, 앞의 책 : (citee par P. C larac, 앞의 책 , B@ r) . Cf Corneil le, Trois iem e disc ours :

장소의 단일 un it e de l i eu 에 대해서도 우리는 거의 동일한 지적을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언급되지 않았던 이 규칙은 이탈리아의 이론가들을 통 해 기존의 두 단일에 첨가되었고 1631 년 이후 프랑스에서도 삼단일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처음에는 개념이 다소 모호하게 적용되어, 하나의 장소가 한 섭, 한 도시, 한 지방으로 인정되었는가 하면, 코르네유와 같은 극작가는 <24 J .] 간 안에 갈 수 있는 곳 〉 으로 확대해석했다. 이에 대해 샤프렝은 공연중에 어떠 한 무대장치의 변화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이 규칙에 본래의 엄밀성을 부여했 다. 이 엄밀성을 극단에까지 밀고 간 사람은 역시 도비냑이었다. 국중의 장소 는 막연하게 궁정의 한 대합실로 설정될 것이 아니라 보다 명확하게 한정될 필 요가 있다. 〈나 는 코르네유씨가 어떻게 해서 같은 장소에서 신나로 하여금 오 귀스트 황제에 대한 대음모에 관한 모든 명령과 정황을 에밀리에게 이야기하게 하고 또 오귀스트 황제로 하여금 그곳에서 그의 두 충신과 은밀한 협의를 갖도 록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52 )

52) d'Aubig na c : ( c itl!e pa r P. Clarac, 앞의 책 , 갇은 곳) .

사건의 단일 unit e d ' ac ti o~ 은 시간과 장소의 이중의 단일이 전제될 때 거의 필연적인 귀결로 보인다. 한 사건이 불과 수시간 동안에 한 장소에서 벌어진다 면 그것은 극도로 단순한 것일 수밖에 없다. 사건의 단일은 결국 단순화된 사 건의 가장 확실한 형태이다. 그렇다면 이 단일은 어떻게 해서 확보되는 것일 까. 그것은 한 사람의 주인공을 주제로 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 하면 한 인간의 삶 속에 복잡한 사건들이 수없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한 주인공의 하나의 행동으로 국한시키는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렇듯 이야기(여기서는 국을 가리킵) 속에서_왜냐하면 그것은 한 행동의

모방이기 때문인데―~ 행동은 하나이고 완전한 것이어야 하며 또한 그 부분들은., 만약 그중 하나라도 옮기거나 도려내면 전체가 뒤흔들리고 혼란에 빠지게 되는 그런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분명한 영향을 미치지 않은 채 첨부되거 나 첨부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전체의 부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53)

53) Arist o t e , Poetiq u e :

아리스토텔레스가 극의 행동(혹은 사건)을 〈 하나이고 완전한 것 〉 으로 정의하 고 있는 것은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에 의하면 un it e 는 단순한 숫적 개 념이 아니라 질적 개념이다. 그가 말하는 하나의 행동은 전체――각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통합된 전체-를 의미한다. 이때 이 전체의 구성에 꼭 필요치 않은 모든 것들은 단호히 배제될 것이다. 요컨대 최소한도의 시간과 최소한도 의 공간 속에서 사건 또한 최소한도의 단일화된 행동으로 압축된다. 프랑스에서 사건의 단일의 규칙은 17 세기 초 상당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었 다. 그것이 확립된 것은 1635 년경의 일이었고 이에 주동적인 역할을 담당한 사 람은 역시 샤프렝이었다. 스퀴데리도 그에게 가세했고 코르네유도 한몫 거들었 다. 시간과 장소의 단일에 대해 조금은 거북스러웠던 코르네유는 처음부터 명 확하고 단호했다. 사건의 단일은 그가 추구했던 극적 효과의 극대화와 전혀 모 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효하다. 그는 1660 년, 그의 『 담론』 속에서 사건의 단일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제시하기도 했다. 죽 그것은 희극에서는 〈주요 인물들의 계획에 대한 장애의 단일 un it e d'obs t acle 〉 로서, 그리고 비극 에서는 〈 위기의 단일 unit e d e p er il 〉 로서 성립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코르네유의 극은 상당한 복잡성을 내포하고 있다. 정치

가 주된 주 제 를 이루고 있 는 , 다시 말해 주 인 공 의 개인 적 운명과 국 가 의 공 적 운명이 피할 길 없이 뒤 섞 여 있는 그의 비극 속 에서 사건 은 정치의 복잡성만큼 이나 복잡한 모습을 띤다. 『 르 시드 』 에서 『 폴리의크트 』 를 거쳐 『 쉬레나 Su re rui ;_ 에 이르기까지 정치 그 자체의 양상도 , 그리고 주인공과 정치와의 관계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인공들의 행동 방식은 거의 동일하다. 그들은 다른 모든 욕망에 앞서, 그리고 그것들의 희생을 무릅쓰고 오직 〈 영광 〉 울 향해 매진하며 이의 실현을 위해 결단하고 행동한다. 그들에게 저항과 갈등 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방황은 오래가지 않으며, 그들이 처한 딜 레마는 비록 고통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해결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들은 자 신의 이성을 되찾으며 분연히 일어나서 행동한다. 그들의 뛰어난 특징은 바로 행동한다는 데 있다. 행동은 자신을 실현하고 현시하며 세계를 변화시킨다. 코 르네유에 있어 비극이 추구하는 자연의 모방, 즉 인간의 모방은 행동하는 인간 의 모방이다. 그의 극이 역동성과 변화와 복잡성에 넘쳐 있는 것은 조금도 눌 라운 일이 아니다. 이에 반해, 정념의 비극으로 특징지어지는 라신의 비극 속에서 사건은 극도 로 단순화된다. 그 안에서 정치는 사랑에 종속되고 모든 것은 심정 coeur 의 차 원으로 귀착된다. 여기서 행동이 문제된다면 그것은 코르네유의 경우처럼 의형 적 행위가 아니라 감정들의 내면적 교환으로 나타난다. 그러기에 의형적으로 전개되는 사건디운 사건은 거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라신 자신도 이 사건의 단순성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 베레니스 Beren i ce 』 에 붙인 〈 서문 〉 속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창작은 無로부터 그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성립된다. .. …. 그리고 그 수많은 사건들은 5 막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들을 정념들의 격렬함과 감정들의 아름다 움과 표현의 우아함으로 지탱된 단순한 행동(사건)에 의해 붙잡아둘 만큼 풍요로움 과 힘을 자신의 재능 속에 느끼지 못하는 시인들의 영원한 피난처였다. 54) 54) Raci ne , Beneri ce, Prefa c e :

rien et t ou t ce gran d nombre d'in c i de nts a tou jo u rs ete le refu ge des poe te s qui ne senta i e n t dans leur gen ie a ssez d'abondance ni a ssez de for ce po ur att ac her durant cinq acte s leurs spe c ta t e u rs par une acti on sim ple , soute n ue de la vio l ence des pas sio n s, de la beaute des senti me nts e t d e l'elega n ce de !'expr e ssio n .>

훗날 풀로베르에게 영감을 주게 될 이 유명한 선언은 라신의 예술을 놀랍도 록 국명하게 조명해 준다. 그는 자신의 비극에서 의적 사건들이 철저히 배제되 는 대신 오직 정념과 감정들의 내면적 드라마로 일관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 다. 그가 정념에 대해 〈 격렬함 〉 이란 말을 사용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라신의 주인공들에 있어 정념은 불가항력의 그 무엇, 페드르가 말한 〈 광적인 열기fu­ reur> 그 자체이다. 일단 이 정념에 사로잡힐 때 인간은 파멸이 운명지어지며 오직 죽음에 의해서만 그것에서 풀려날 것이다. 고대 비극에서는 숙명은 신에 의해 주관되고 인간은 자신 밖에서 결정되는 이 운명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못 한다. 라신의 주인공도 자신의 운명에 대해 전적으로 무력하다. 그러나 이 운 명은 자신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다. 말하자면 숙명이 내면화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정념의 드라마는 등장인물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의 드라마라 할 수 있다. 가령 『앙드로마크 Androma q ue 』 에서 네 등장인물은 마 치 톱니바퀴가 서로 물려 있듯이 하나의 사건 속에서 맞물려 있다. 이 맞물림 으로 안해 그들은 동일한 운명의 파장 속에 놓여 있으며 한 사람의 선택은 즉 각 다른 세 사람의 운명으로 파급된다. 이 네 사람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은 마침내 최후의 선택이 앙드로마크에 의해 선언됨으로써 폭발하고 만다. 균형은 깨지고 연결고리는 끊어지고 모든 것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런데, 라신의 비극에 있어 말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정념 그리고 그것 이 야기시키는 내적 갈등이 표현되고 전달되는 것은 말에 의해서이다. 그것들 은 단순히 전달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가공할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어떤 종 류의 말 또는 선언은 사람을 광기로 몰아넣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페드르의 (사랑의) 고백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시발점이 된다. 라신에 있어 말하는 것

은 바로 행동하는 것과 같다. 코르네유의 인물이 행동으로써 행동하는 데 비해 라신의 인물은 말로써 행동한다. 라신에 이르러 비로소 비극은 사건의 번잡함 에서 해방되어 내면적 드라마로서의 관념적 순수성을 획득하기에 이른다. 〈 삼단일 〉 의 규칙에 관한 서술을 끝맺으면서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간 다. 이 규칙들은 논의의 시작이 아니라 끝이며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문학 에 대한 고전주의지들의 기본적 관념이 먼저 있고, 그것의 필연적인 연장으로 서 규칙이 존재한다. 그들의 문학적 개념에 대해 이 자리에서 다시 길게 환기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기본적으로는 〈 자연의 모방 〉 을 원리로 삼고 있고 방법 적으로는 〈 진실다움 〉 의 추구로 성립되어 있다. 이에 덧붙여 우리는 이 모든 것 이 가장 〈 합리적 〉 이라는 확신도 잊어서는 안 된다. 요컨대 이 몇 개의 원리들 이 삼단일의 규칙을 낳은 것이다. 고전주의자들은 무대예술에 내재된 조건들에 비추어 가장 합리적인 방식, 가장 진실에 가까운 방식을 고안했을 뿐이다. 시 간의 단일을 수락한 것은 그것이 가장 진실다운 것이기 때문이고 사건의 단일 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 단 하루 사이에 수주일에 걸쳐 일어날까 말까 하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난다면 거기에 어떤 진실성이 있겠는가〉 55) 라고 라신은 반문 한다.

55 ) Raci ne : (citee par P. Clarac, 앞의 책, 같은곳).

이렇게 해서 그들은 연극사상 유례없는 가장 완벽하고도 정교한 일련의 규칙 들을 만들어냈다. 그것둘이 대부분 고대의 유산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규칙들은, 비록 고대에서 물려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고대의 권위와는 무관 한 다른 원리로써 뒷받침되고 아론화되었다. 한 작품을 완성으로 이끌어갈 가 장 확실한, 가장 합리적인 방식――이것이 곧 이 규칙들이다. 이 규칙들에 대해 극작가들은 각기 상이한 방식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그들

은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간에 이제는 요지부동하게 자리잡은 규칙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규칙과의 갈등을 가장 심각하게 경험한 극작가는 역시 코르네 유였다. 그가 이론가에 못지않은 이론적 담론을 쓴 유일한 작가였다는 사실은 그가 느낀 갈등의 깊이를 반증한다. 그는 이론가들의 주장에 대체로 동조하면 서도 이따금 독창적인 견해를 피력하곤 했다. 그러나 이론가들로부터 가장 많 은 비판과 공격을 받은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 검토 Exam e ns 』 를 통해 그가 대체로 규칙을 준수했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안간힘을 썼다. 규칙은 작가들을 압박하는 폭군과도 같았다. 몰리에르는 운문의 5 막 희극을 제의하고는 규칙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다니엘 모르네 Dan i el Morne t는 루이 14 세 시대의 가장 찬양받은 이 시인이 고전주의 이론에 대해 가장 자유롭게 처신했었다고 지적한 바 있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라신의 작품은 표면상 고전주의 규칙에 가장 완벽하게 부합된 것으로 보인 다. 또한 규칙에 대한 그의 관념이 이론가들, 특히 도비녜가 내렸던 가장 엄밀 한 정의와 일치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이 시학에 정통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들에 의해 도마 위에 울려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에 대 해 라신은 그지없이 신랄하게 대응했다. 그는 알렉상드르의 첫번째 〈 서문 〉 속 에서 〈 머리를 혼들고 억지 표정을 지음으로써 모든 관객들에게 자신들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 시학』 을 깊이 있게 연구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한다고 믿 는〉 56) 비평가들을 비웃었다. 그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작품이 관객들에게 즐거 움을 주는 것, 죽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며, 그렇게 되었으면 그 작품 은 훌륭하고 성공적인 것이다. 관객들이 규칙에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 그것 울 알려고 하는 것은 불필요하다(라신의 생각 속에는, 훌륭한 작품과 규칙에 일치 56) spRe acc tain t ee ,u rAs lpexaar nudnr eb,r alneler mpreen fta d ce e t:e

된 작품 은 별 개의 것 이 아니 라는 믿음 이 있는 것 으 로 보인 다 . 물론 규 칙 에 일 치 된 작 품이 자동적으로 훌륭한 작품 이 되 는 것 은 아니 지 만) . 앙리에트 당 글르 테르 Hen­ rie t t e d ' An g le t err 혀 Hl 『 앙드로마크』 를 바치면서 쓴 헌사 속에서 그는, 〈 관 객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작업하는 우리들은 이제 학자들에게 과연 우리가 규칙에 따라 작업하고 있는가 를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최고의 규칙은 전하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 57) 라고 단언한다.

57) Raci ne : (c it ee par Clarac, 앞의 책 , 85 쪽) .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볼 때 라신에 이르러 비로소 고전국의 정수가 완성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고전주의의 규칙들은 그에 앞서 이미 10 여 년 전에 거의 완전한 형태로 다듬어졌다. 작품의 완성을 기약할 수 있는 제조기술, 이른바 〈 노하우 〉 가 수많은 이론적 논의와 검증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많은 작가들이 이 기술을 원용하여 작품들을 생산했다. 그중에 괄목할 만한 작품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동안 기다려야만 했고 드디어 라신이 출현했다. 30 여 년 전, 이론가들이 고전주의 이론을 조탁 하면서 대망했던 이 이론의 완벽한 실현자-라신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 고 전주의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고전주의 문학과 라신의 문학은 거의 동의어이다. 고전주의의 정수 끝으로 우리는 고전주의 규칙들이 갖는 의미, 그것들이 가져온 놀라운 결과 들을 다시 되돌아보면서 고전주의에 대한 마지막 조명을 시도해 볼까 한다. 아 마도 우리는 많은 것을 되풀이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논의 되었던 것들을 하나의 전체로서의 이론 속에 재편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 우리는 고전주의 규칙의 본질이 〈 제한 〉 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시간도 제 한되고 장소도 제한되며, 이 물리적 제약의 필연적 결과로서 그 안에 담길 연

극적 행동도 제한된다. 이 삼중의 제약은 작가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 〈 자연의 모방 〉 에 있어 자연의 모든 것의 모방은 애당초 문제될 수가 없다. 이미 지적한 대로 그러한 야망을 포기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보다 넓은 공간과 자유로움이 허용되어 있는 다른 장르로 옮겨가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희곡을 고집한다면 그는 그가 모방하려고 하는 자연에 대해 어떤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미 확실한 것은 제한된 문학적 공간 속에 자연을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즉 현실 또는 진실의 의형적 총체로서 재현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 문학적 공간으로 전이되기 위해서는 이 현실과 전실은 그 어떤 형 태로든 변형되어야 한다. 프랑스 고전주의자들이 이 변형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 방식을 제시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 전실다움 〉 의 원리는 바로 이 방식에 해당한다. 그들의 주장은 소박하기 그지없다. 문학이 그 아무리 진실을, 즉 실 제로 일어난 사실을 기술한다고 자부한들 그것이 사람들에게 진실한 것으로 인 정되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진실 또는 사실 그 자 체가 아니라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죽 〈 진실다움 〉 이다. 그런데, 인 간은 각기 전실의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판 단하는 것은 그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실의 관념과 일치했을 때이다. 가 령, 극중의 페드르가 자신이 처한 특정한 상황 속에서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관 객들은 자신들의 관념에 따라 그 행동의 진실성 (또는 정당성)을 판단한다. 그들 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라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해 어떤 생각 울 가지고 있으며, 라신에 의해 묘사된 페드르의 행동이 이에 부합되었을 때에 만 그것을 〈전실다운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요컨대 〈전실다움〉의 원리는 현실을 현실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현실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 이른바 지적 비전에 따라 재구성할 것을 요구한다 . 프랑스 고전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선택은 자연을 사실적으로 모방하는 대신 주 관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문학에 있어서의 사실주의, 레아리슴은 고전주의 와는 전적으로 무관하다. 현실을 관념적으로 여과시킴으로써 그것을 두명한 지 적 구조물로 재편성하는 것-이로써 고전주의 문학은 관념적 또는 주관적

문학으로확립된다. 다시 한 번 요약하자. 문학이 재현하고자 하는 자연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 라 관념화된 자연이다. 이 관념화의 작업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 자연은 본래의 풍성함과 잡다함에서 벗어나 관념의 투명과 순수를 획득한다. 이렇듯 관념과 본질의 형태로 압축된 자연이 〈 삼단일 〉 에 의해 축소된 공간 속에 마찰 없이 수용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삼단일의 규칙은 이 관념화된 자연을 모방하는 데 있어 최적의 공간을 제공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의견상 제약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제약이 아닐 뿐만 아니라 관념화의 작 업을 보장하는 안전장치가 될 것이다. 왜나하면 규칙들은 애당초 잡다한 현상 둘의 침입과 간섭을 막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훗날 발레리 Paul Valery 7} 규칙 의 효용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동일한 인식에서이다. 그에 있어 시의 규칙은 무엇보다 먼저 제지 또는 여과의 역할을 담당한다. 죽 자연적이고 우연적인 산 물들의 혼란과 모순을 일시적으로나마 제지시켜 주며, 이로써 〈완전하고 조직 적인 인간 〉 으로 하여금 〈 정신적 산물의 생산에 있어 스스로를 확립할 수 있 게 〉 58) 한다. 고전주의 규칙의 효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삼단일은 있는 그대로 의 자연적 자연의 범람을 원초적으로 막아주며 그것의 변용, 즉 관념으로의 변 용을촉진시킨다.

ss) Cf P. Valery , Vari ete V, Memoir e s d'un poe me : < L euro bje t pro fo n d est d'app e ler l'homme comp le t et orga n is e, t'etr e f a it po ur agi r e t q ue p arf ait en reto u r, son actio n mi me , iis' im p os er dans la pro ducti on des ouvrage s de !'esprit.>

고전주의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진실에서 진실다움으로〉의 이 변용을 가장 완벽하게 실현한 사람은 이론의 여지없이 라신이었다. 그는 〈진실다움〉의 원리 를 자신의 원리로 삼았고, 이 원리를 인간의 내면세계, 죽 정념의 차원에서 적 용했다. 그에 있어 인간 현실 (고전주의자들은 이것을 〈인간적 자연 na tur e hu-

ma i ne 〉 이라 불렀다)은 엄밀히 내적 • 심리적 현실로 귀착된다. 그는 의적 행동 은 가능한 한 배제하는 대신 감정과 정념의 심리적 드라마 를 - 연극적 행동의 주 축으로 삼았다. 가령 , 『 페드르 』 에서 의적 상황의 변화, 이른바 p er ip e ti략근 단 두 번 일어난다. 첫번째는 데제 왕의 죽음의 소식이고 두번째는 그의 생환이 다. 이 상황의 변화는 정념의 비극을 발동시키는 (물론 각기 다른 두 차원에서) 도화선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그친다. 그 다음에는 이 발동된 정념이 그 자체 의 내적 논리에 따라 광기와 파멸의 극한을 향해 질주를 계속한다. 라신이 이 작품을 쓸 때 그의 관심은 오직 이 내적 드라마에 집중되었으며, 나아가서는 그것을 인간 정신에게 인식 가능한 두명하고 합리적인 도식으로 그려내기를 바 랐다. 이른바 〈 정념의 기하학 〉 과 감은 것 말이다. 59 )

59) 코르네유의 비극은 여러 면에서 라신의 비극과 대조적이다. 그 안에 정념의 드라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코르네유가 추적하는 〈 영광에 목마른 인간只끝 움직이는 것도 실은 영 광에 대한 열렬한 정념아지 이성은 아니다. 다만, 이 정념의 대상이 이성의 대상과 일치 하고 있는 것뿐이다. 코르네유의 비국의 가장 뛰어난 특칭은 이 대상의 추구가 〈 행동 〉 으 로 표현되는 데 있다. 행동은 자기 실현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자기 현시의 방법이기도 하다. 코르네유에 있어 드러나지 않는 것은 무의미하다. 명예의 회복은 결투로써 이루어 지고, 용기는 싸움으로써 입증된다. 모든 가치는 숨겨진 내면성으로서가 아니라 표출되 고 전시된 의면성으로서만 인정된다. 그가 진실다움보다 진실을 더 소중히 여긴 것은 당 연하며, 이로써 그의 비극은 정념의 기하학이 되는 대신 행동의 찬란한 spe c ta c leol 된 다. 이 국적이고 변화무쌍하고 복잡한 행동의 세계와 삼단일의 규칙 사이의 불협화음은 숙명적이다.

우리는 지금 고전주의 문학의 또 하나의 놀라운 성격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 리가 위에서 확인한 것은 이 문학의 두 원리, 죽 자연의 모방과 전실디움의 원 리가 그것을 관념적이고 지적인 문학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문 학이 재현하는 이 관념적 세계가 자연적 세계와는 다른 모습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크게 주목해야 할 일이다. 관념화된 자연은 더 이상 현실의 자연 의 그 온갖 혼돈과 지리멸렬에 휘말려들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의 규칙과

법에 따라 움직이는, 질서잡힌 세계이다. 어떤 규칙과 법 말인가. 결론부터 말 하자. 그것은 이성에 합당한 것, 즉 합리적인 것이다. 〈 전실다운 것 〉 과 〈 합리적인 것X 즌 사실상 같은 것의 두 가지 표현에 불과하 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실의 관념(죽 진실다운 것)은 우리의 정신의 소산이 고, 우리의 정신은 자신의 원리, 즉 이성에 의해 수긍된 것만을 진실의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페드르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그녀는 남편 데제 왕의 아들 이폴리트에 대한 불의한 사랑에 빠져들었고 이 정념의 맹목적 힘에 이끌려 죄에서 더 큰 죄로 빠져 들며 이 상황으로 말미암아 겪을 수 있는 온갖 갈등과 고뇌와 광기를 경험한다. 그런데, 다른 여인을 사랑하는 이폴리트 에 대해 질투와 복수심에 불타오르고, 남편에 대해서는 배신뿐만 아니라 기만 의 범죄까지도 범하는 페드르의 일련의 행동은 그러한 상황 속에 놓인 여인이 라면 응당 취해야 할 행동양식으로서 묘사되어 있다. 다시 말해, 그녀의 태도 와 반응들은 우리의 정신이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진실된 것, 즉 가장 합리 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라신 자신 『 페드르 』 의 서문 (1677) 속에서 그의 여주 인공의 성격을 가리켜 아마도 그가 〈 무대 위에 울려 놓은 가장 합리적인 것 〉 60) 이라고 말한 것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페드르의 사랑의 감정 그 자체 를 두고 한 말은 물론 아니다. 사실 이 감정은 합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 의하고 부조리하다 . 그것은 반이성적이고 반도덕적이다. 페드르 자신도 그것을 신의 저주라고 말한다. 라신이 합리적이라고 한 것은 이 감정으로 인해 페드르 가 빠져들어 간 광기와 파멸의 행적, 바로 이것이다. 한편에 폭~ 사랑의 감 정이 있고 또 한편에 그것이 발동되는 상황이 있다. 이 두 요소의 싱승작용에 의해 그녀의 비극의 성격과 방향은 결정지어지고 그녀는 이 비극의 극한을 살 아갈 것이다. 여기 문제되는 것은 정념과 상황의 내적 논리이며, 라산은 이 논 리에 따라 인간의 내면세계를 재구성하였고 이것을 합리적인 것이라 정의했던 것이다(이 내적 논리 또는 논리적 필연성에 대해 고전주의자들이 〈적합성〉이라는, 조 60) Racin e , P hedre, Prefa c e : <(c e qu' il a) mis d e plu s rais o nnable sur le the atr e .>

금은 전근대적인 명칭을 붙였다는 것 은 이미 확인한 바와 같다). 따라서 고전주의와 관련하여 합리주의를 환기할 때 우리는 신중을 기할 필요 가 있다. 이제 고전주의가 세계 그 자체를 합리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 은 명백하다. 아니 세계는 오히려 맹목적이고 불합리하다. 고전주의자들의 문 학세계도 실은 불합리로 넘쳐 있다. 라신의 인물들은 이성의 피나는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굴복시켜 복종케 하는 정념의 노예들이며, 자신의 파멸을 바 라보면서 파멸 속으로 뛰어드는 부조리한 인간들이다. 라 로슈후코 la Ro- che fo ucau lt의 안간도 그 어떤 화사한 진실과 미덕의 가면으로 자신을 은폐한 다 해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추악한 동물임을 숨기지 못한다. 인간의 위 대와 승리를 찬양하는 코르네유에 있어서조차도 이 위대의 지향은 그 자체 비 합리적인 정념이라 함이 옳다. 그렇다면 고전주의 문학에 있어 무엇이 합리적 이란 말인가. 우리는 이미 이 물음에 답했다. 다시 한 번, 합리적인 것은 세계 와 인간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이 세계 속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 하는 모습들을 재현하는 방식이다 . 인간은 그 자신 아무리 부조리한 존재라 할 지라도 자신의 성격, 정념,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일정한 양식이 있으며, 문제 는 이 방정식에 따라 삶과 ·세계를 재편성하는 데 있다. 합리적인 것은 이렇게 해서 재편성된 세계, 즉 풀로베르가 말한 바 〈 제 2 의 자연 〉 이다. 그 자체 부조 리한 자연에 대한 조리 있는 비전이 문제인 것이다. 합리성에 뒤이어 우리는 자연적으로 보편성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둘은 한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이성적인 것은 필경 보편성으로 이어지고 보편 성은 이성적인 것을 전제로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 이성은 그 자체 영원 불변하고 만인에게 균등하게 공유되어 있다. 따라서 한 사람의 이성이 발견한 진실은 모든 사람의 진실이 된다. 세계에 대한 지적 비전, 즉 합리적 인식이 문제되는 고전주의가 본질적으로 보편성을 지향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한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재현할 때 그것은 그에게만 적용되는 심리학은 아니 다. 그러한 성격과 상황이 합쳐졌을 때 그 비극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이 비극은 한 주인공의 비극이 아니라 인간 모두의 비극이다. 그 주인공은 영

원한 비극을 조명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물론 고전극의 인물들은 의형상 한 시대와 한 지역의 정치, 사회, 문화의 겉옷을 입고 출현한다. 그러나 고전 주의자들의 관심은 이와 같은 가변적 의양이나 우연적 현상들에 있지 않고, 영 원히 변하지 않는 그리고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에 집중된다. 요컨대 그들은 가 변적인 찰나의 현상 대신 영원하고 보편 타당한 본질에 도전하는 것이다. 합리성과 보편성을 지향하는 이 문학에 대해 객관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크게 놀랄 것은 없다. 세계에 대한 관념적 인식이 문제되는 고전주의 문학과 객관성 은 일견 상호 모순된 듯이 보인다. 만약 객관주의를 세계에 대한 객관적 접근 그리고 그 재현의 객관적 방식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고전주의와는 아무런 관련 도 없다. 그런 점에서는 고전주의는 엄밀히 주관적이다. 우리가 여기 문제삼고 있는 것은 고전주의가 달성한, 인간 존재에 대한 관념적 인식의 내용물에 대해 서이다. 우리는 그것을 〈정 념의 기하학 〉 이라 부른 바 있다. 일반 기하학이 사 물의 형상에 관한 가장 합리적인 도식들의 총체라면 정념의 기하학은 감정의 움직임의 가장 합리적인 도식둘의 총체이다. 일반 기하학이 합리성과 보편성으 로써 객관적 가치로 인정되는 것과 같이 정념의 기하학도 동일한 이유에서 당 연히 객관성을 인정받는다. 객관적인 것은 인식 그 자체만이 아니다. 이 인식에 도달케 하는 방법 또한 객관적이다. 고전주의자들이 고대로부터 물려받은 규칙도 그들에 의해 합리성 이리는 새로운 원리에 의해 재정립됨으로써 보편성과 객관성을 획득한다. 이 규칙은 그것이 정확히 적용되는 모든 경우에 동일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보편적이고 이 결과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객관적이다. 현실에 대한 가장 관념적인 인식으로 특징지어지는 고전주의 문학이 그것의 합리적 • 보편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객관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 문학이 그리려 한 것은 한 인간의 초상화가 아니라 바로 인간 그 자체의 초상화이다. 인간이 본질적 존재로 환원된 이 문학 속에서 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특정한 개체로서의 특징 따위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페드르 는 그녀가 처한 상황 속에서 사랑의 정념이 필연적으로 펼쳐니갈 비극의 도식

을 그려내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페드르라는 이름의 한 여인은 그 아무리 생동감 있게 그려졌다 할지라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있는 것은 오직 감정들의 교차하는 곡선들뿐이며 페드르는 이 곡선을 따라 춤 추는꼭두각시이다. 이렇게 해서, 역설적으로 하나의 완벽한 객관적 문학이 탄생했다. 고전주의 자들이 금과옥조로 믿은 형석적 규제도 객관적이고, 그들이 수립한 보편타당한 인간학도 객관적이다. 그리고 객관적이 됨으로써 완전성을 획득했다. 왜냐하면 객관적 진리는 오칙 하나뿐이며 안간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완성이기 때문 이다. 고전주의자들은 완성으로 인도하는 〈 하나뿐인 〉 길을 알았고, 이 길을 따 라 〈 하나뿐인 〉 진실, 인간적 전실을 추구했고 붙잡았고 창조했다. 아니, 그렇 게 믿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절대주의에 빠져들었다. 루이 14 세가 정치적 절대주의를 이룩한 것갇이 고전주의자들도 문학 속에서 관념적 절대주 의를 이룩한 것이다. 그들은 영원과 절대에 봉사하기를 선택했고, 그래서 그들 자신 영생의 야망을 품었다 .6 최소한 이 문학적 앙시앵 레짐 anc i en re gi m 送든 정치적 앙시엥 레짐만큼은 지속될 것이다. 아니, 그들의 영생의 희망은 완전히 무산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정신은 오늘날 20 세기에 다시 놀라운 영 감의 원천으로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17 세기의 고전주의는 갔지만 영원한 고전주의는 프랑스 문학 속에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61) Cf Racin e , 앞의 책 :

끝으로 우리는 고전주의의 언어 또는 수사학에 대해 참시 언급하려고 한다. 고전주의 문학을 정의하면서 우리는 그것이 집중과 밀도의 예술이라는 것을 밝 히는 데 주력했었다. 이 문학이 감수한 갖가지 의형적 • 내면적 규제들은 제한 된 공간 속에서 압축된 주제, 즉 관념과 본질로 환원된 자연의 밀도 있는 재현

울 지향하게 만들었다. 지금 우리는 이 밀도 있는 재현이 무엇에 의해 실현될 수있는가를묻고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미 얻어전 것이나 다름없다. 밀도 있는 재현은 밀도 있는 언어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밀도는 언어의 경제 , 다시 말해 언어의 경제적인 사용을 의미한다. 발레리는 이것을 〈 두 개의 말 중 에서 작은 것을 선택하는 것 〉 62) 이라고 표현했고, 앙드레 지드는 리토트lit o t~ 기술이라 이름붙였다. 즉 〈 최소한울 말함으로써 최대한을 표현하는 〉 63) 기술이 다. 모든 예술은 각기 효과를 노리며 그것의 극대화를 꾀한다. 그러나 이에 동 원하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 고전주의도 그 나름의 효과를 노리는 점에서는 다 른 예술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고전주의는 지신의 문학적 지표와 방식에 따 라 표현 방법의 극도의 절제를 원리로 삼는다. 기본적으로 언어의 절제를 원리 로 삼은 이 수사학은 〈 자연스러움 le na t ure! 〉에 부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고 전주의 미학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억지와 과장이다. 라 브뤼예르 La Bruy er e 가 〈 수많은 떼지은 형용사들, 이것은 서투른 칭찬이다〉 64) 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가리칸다. \ 그에 앞서 파스칼 Pascal 은 〈자연적 모델只全 어기는 시적 언 어에 대해 경고했다. 〈 우리는 모방해야 할 자연적 모델이 무엇인지롤 알지 못 한다. 그리하여 이것을 모르는 탓으로 〈황금의 세기, 오늘날의 경이, 숙명적〉 따위와 같은 기괴한 말들을 만들어냈으며 이런 온전찮은 말을 시적 아름다움이 라 부른다. >65 ) 그의 글은 계속되어 〈온통 거울과 쇠사슬로 몸을 감은 젊은 여

62) P. Valery, Tel Qu el, Lit ter atu re {1929) :

63) A. Gid e. Inci de nces, Bil let s a Ang el e:

64) La Bruy er e, Les Caracte re s, Chap .I. :

65) Pascal, Pensees, ed. Brunschiv ic g, 33 :

cert ain s ter mes biz a rres : 'sie c le d'or, merveil le de nos jou rs, fatal ', e tc . ; et on app ell e ce jar go n beaute poe tiq u e.>

인冷 비유로 등장시킨다. 그에 의하면 〈 거창한 말로써 하찮은 것을 말하는 것 으로 성립된 〉 66) 이 경계해야 할 미학이 만들어내는 것은 이런 우스꽝스런 여인 과 같다는 것이다. 하나만 더 인용하자. 〈 ‘반란의 횃불을 진화하다', 지나치게 현란하다. ‘그의 천재의 불안', 지나친 두 개의 과도한 말. >67)

66) 위의 책 , 같은 곳 :

67) 위의 책 , 쪽 : <‘E t ei n d rele flam beau de la sedit ion ', tro p luxuri an t. 'L'inq u i e - tud e de son gen ie ', trop de deux m·o ts h ardis .>

이제 우리는 고전주의 미학을 좀더 정확히 정의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그것 은 언어의 절제이고 표현의 검소함이다. 〈 자제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코 글을 쓸 줄 몰랐다〉 68) 라고 브왈로가 말한 것은 이 미학의 요약과도 같다. 그러나 표 현의 절제는 반드시 효과의 절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은 효과의 국대화를 노린다. 위에서 인용한 앙드레 지드의 말을 통해 우리는 표면 상 다소곳하고 움츠러든 이 언어의 당찬 야심을 확인한 바 있다.

68) Boil ea u, Ar t poe tiq u e : ( citee par A. Chassang, la Dis ser ta tion l i混 ra i re gen era/,e , Hachett e, 34~) .

여기 강조되어야 할 것은 고전주의가 최대한을 말하기 위해 결코 최대한의 수단을 동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바로크적인 수법이다. 삶의 풍요로움과 역동성에 현혹된 바로크 시인들은 그 모든 것을 작품 속에 끌 어안기 위해 최대한의 언어를 가동했다. 그들의 시는 현란한 이미지들의 축제 의 장이 되었다. 이에 반해 고전주의자들은 언어의 사용에 있어 국도로 금욕적 이기를 선택했다. 이 표현의 금욕주의는 단순히 물량적 절제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숫적으로 최소한도일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최소한도이어야 한다.

감각적 언어의 현란함은 극도로 자제됨으로써 표현은 거의 기본적 골격으로 환 원된다. 트로이 왕국의 최후의 날을 환기시키기 위해 라신은 짤막하게 한 줄로 표현한다. 〈 승리자의 함성을 상상해 보오. 죽어가는 지들의 절규롤 상상해 보 오. >69 ) 그는 최후의 날의 비극을 묘사하기 위해 화려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단 하나의 형용사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이 한 줄의 말이 환기시키는 것은 엄 청나며 그 여운은 폐부를 찌른다. 이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반복되 는 동일한 말이 갖는 상이한 여운과 대조에서가 아닌가 싶다. er i s( 의침)라는 말은 두 번 반복되는데 그것은 〈 승리자 〉 에 연결됨으로써 〈 함성 〉 이 되고 〈 죽어 가는 자들 〉 에 걸립으로써 〈 철규 또는 비명 〉 이 된다. 그것뿐이다. 그리고 작가 는 우리에게 〈 상상해 보라 〉 고 두 번 권유한다. 시인은 소리를 들려주고 우리에 게는 그림을 그리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69) Raci ne , Androma q郞, acte I II , sc.s :

고전주의 미학의 깊은 뜻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미학은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 대신 이 모든 것을 우리가 구성하기를 기대한다. 그것은 우리의 작업, 즉 그림을 완성시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친다. 물론 이 최소한의 것 속에는 이 그림의 완성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이 압축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를 자극하고 설레이게 할 힘이 참재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 가 밀도 있는 언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고전주의 수사학은 요컨대 언어에 밀도를 부여하는 기술로 성립된다. 그것은 고도의 지적인 작업 이다. 세계의 지적 재구성을 지향하는 고전주의가 지적 언어를 수단으로 삼은 것은당연하다.

제 5 장 고전주의 작가 l 코르네유 코르네유 P i erre Corne ill e(1606-1684) 는 과연 고전주의 작가인가. 엄밀한 의 미에서 고전주의를 1660 년대에서 1680 년대에 이르는 시기로 한정짓는다면 우 리의 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는 분명히 라신, 몰리에르, 라 퐁텐느보다 한 세대 앞서 있었고 이들 정통파 고전주의지들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할 무 렵 그는 거의 일선에서 은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 전주의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러기에 흔히 전기 고전주의자로 불리 어지기도 한다. 사실 그가 고전주의와의 관련하에서 논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한 일로 보인다. 시기적으로 비록 한 세대 앞서 있었다 할지라도 적어도 그는 고전주의 이론가들의 세대에는 속해 있었다. 샤프렝, 도비냑, 라 메나르 디에르와 같은 이론가들이 극작의 규범을 정립하기에 주력하고 있을 때 그는 작품을 썼고 이 작품으로 인해 격렬한 논쟁을 유발하기도 했다. 그의 극작가로 서의 활동은 고전주의의 이론적 형성의 역사와 운명을 같이했으며 사실상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이 역사의 메아리를 담고 있다. 그는 때로는 만족과 긍지 속

에서,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실망과 원망 속에서 작품을 썼고, 문단을 떠났다 가 되돌아왔고, 끝내 죄절 속에서 봇을 던 졌 다. 그는 고전주의로 이어주는 징 검다리, 그것의 완성을 위한 희생양이었을까. 그의 작품 속에 넘 실 거리는 영웅 들의 전율만큼이나 숨가쁜 긴장을 우리는 그의 생애 속에서 느낀다. 그의 극작 가로서의 삶 또한 영웅적이었다. 변호사 생활을 하는 동안 틈틈이 짧은 시들을 짓곤 했던 코르네유가 콜레쥬 시절에 겪었던 사랑을 소재로 첫 희극 『 멜리트 Meli t e 』 를 쓴 것은 1629 년의 일 이었다 . 1630-1631 년 시즌에는 마리약 Mar ill ac 원수의 사건을 소재로 한 첫 비희극 『 클리탕드르 Cl ita ndre 』 를 발표하였고, 그 후 1636 년까지 『 미망인 La Veuve 』 에서 『 연극적 환상 L'Illus i on com iq ue 』 에 이르는 수편의 희극들을 잇달 아 내놓았다. 그 사이에 메레의 『 소포니스브 』 에 자극을 받아 첫 비국인 『 메데 』 롤 상연하기도 했다. 『 르 시드』 이전의 이 작품들은 코르네유의 초기극이라 일 컬어진다. 1636 년 말에 공연된 『 르 시드 』 는 코르네유 개인에게 있어서나 프랑 스 연극사에 있어서나 명실공히 신기원을 이루는 작품이다. 그 작품을 기점으 로 코르네유는 비극에 몰두하게 되고, 프랑스 연극은 고전주의 시대로 가는 확 실한 길에 집어들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대단한 성공을 거둔 이 작품은 그 성공만큼이나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는 참기 어려운 비난의 세례를 받았다. 이에 크게 실망한 코르네유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끝에 이번에는 규칙에 충실한 비극 작품들을 쏟아내기 시작했 다. 『 오라스 Horace 』 , 『 신나 Ci nna 』, 『 폴리의크트 Poly eu ct e 』 , 『 폼페이우스의 죽음 La Mor t deePomp e e 』 , 『 로도권느 Rodog une 』 , 『 니코메드 Ni comede 』 와 같은 작품들은 모두 논쟁을 거친 코르네유가 한결 성숙한 솜씨로 다듬어 내놓 은걸작들이다. 1652 년 『 페르타리트 Pe rt ha rit e』 가 실패로 돌아간 후 코르네유는 대중들의 판 단계 승복하고 연극계를 떠났다. 그러나 다시는 연극계로 되돌아오지 않으리라 고 공언했던 것과는 달리 1656 년 드 수르데악 de Sourdeac 후작의 요청에 따라

기계바극t ra g ed i e a machin e 『 황금 양털 La Tois o n d'or 』 을 집필하고 있음이 한 친구에 의해 목격되었고 , 1 6 60 년에는 이제까지 발표했던 작품들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3 권의 작품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는 각 권의 서두에 〈 담론>%, 각 작품에는 비평적 〈 검토녔t 첨부했는데, 이는 잠시 연극계를 떠난 후 다시 시작 하는 마당에 자신의 입장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후 『 세르토리우스 Se rt o ri us .!I , 『 아틸라 A tti la 』 , 『 티트와 베레니스 Ti t e et Berenic e .!I, 땀셰리 Pulche ri e 』 등의 작품들을 내놓은 코르네유는 1674 년 떠 레나』 를 마지막으로 극작 활동을 마감한다. 그가 작품활동을· 중단한 것은 무엇 보다도 관객들의 취향의 변화와 강력한 라이벌 라신의 등장 및 그가 거둔 성공 때문이다. 과거의 명성으로 버텨오던 코르네유는 1660 년대 중반 이후 라신에게 완전히 자신의 명성을 넘겨주게 된 것이다.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동일한 시기 에 겨렀던, 라신의 『 베레니스 .!I 와 코트네유의 『 티트와 베레니스 』 에서 관객들은 라신을 더 선호했고, 마지막 작품인 머레나』 의 경우에도 코르네유의 가장 훌 륭한 작품 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로부터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극작 활동은 크게 3 단계로 구분된다. 첫째 는 작품을 쓰기 시작한 때부터 『 르 시드 』 이전까지 주로 희극을 발표한 초기이 고, 둘째는 『 르 시드 』 발표와 그로 인해 야기된 논쟁을 거친 후 그의 가장 훌륭 한 작품들이 발표된 전성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세번째는 『오 이디푸스 Oe­ d ip e 』 를 내놓음으로써 연극계에 복귀한 코르네유가 새로 등장한 라신과 힘겨운 경쟁을 벌이는 시기이다. 먼저 여기 초기의 희극 작품들이 있다 . 그가 발표한 희극은 총 暎 R 인데, 이 중 『 거짓말쟁이 』 와 『 속 거짓말쟁이 』 는 그가 비극 작품들을 내놓는 전성기의 작 품이고 그 의는 모두 『 르 시드 』 이전에 발표된 것들이다. 첫 작품인 『멜리트 』 는 몽도리 극단에 의해 파리에서 공연되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관객들의 취향에 부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연극에 서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그들을 사로집았던 것으로 보인다.

〈 1629-1630 년에 희극을 쓴다는 생각은 일종의 독창성이었다 〉 1 ) 라고 아당은 설 명하고있다. 『 멜리투의 성공을 확인하기 위해 파리에 간 코르네유는 거기서 자신이 전혀 생각지 않았던 중요한 문제에 부딪쳤다. 그것은 바야흐로 이론가들 사이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극의 〈규 칙 〉 의 문제였다.

1) A.A dam, His toi re de la litte ra tu r efr an fa ise au XVII• siec le, Tome I , 47 澤 .

이 작품 ( r 멜리트 』 )은 내 試作品이었고 , 규칙에 맞추는 데 유의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니는 그 당시 규칙들이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아르디 Hard y의 경 우를 모범으로 하여 약간의 상식만을 안내자로 삼았었다……. 2)

2) Examen de Melite , Oeuvres Comp let es(이하 oc 로 약함) I , 흑.

이것은 1660 년 이 작품에 붙인 〈 검토 〉 속에서 그가 실토한 말이다. 바로 그 상식 sens commun에 의거해서 코르네유는 나름대로의 사건의 단일과 장소의 단일을 지키려고 노력했음을 또한 밝히고 있다. 그것은 『 멜리트 』 의 사건이 한 도시에서 일어나고, 5 명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점 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 가장 잘 알려진 시간의 단일성은 지켜지 지 않았고 코르네유는 특히 막과 막 사이의 시간 배분이 잘못되었음을 자인했 다. 『 멜리트 』 에서 코르네유가 스스로 독창적임을 내세운 것은 그 문체이다. 전 원극이 갖고 있는 현실과 동떨어전 대화, 비희극이 갖는 로마네스크한 내용, 또 笑劇에 사용되는 허풍 등과는 달리 〈소 박한 문체 s ty le na if )i 룹 사용하여 파 리의 교양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두로써 대화를 구성했다는 것이 그것 인데, 이 작품이 크게 성공한 이유로 코르네유 자신은 이것을 내세우고 있다. 3)

3) 위의 책, @f.

주제의 면에서 새로운 점은 찾아볼 수 없다. 두 남자 사이에서 망설이는 여 인, 사랑을 두고 벌이는 지나친 변덕, 결혼의 성립으로 맺어지는 행복한 결말

등은 모두 전원극의 상두적인 주제들이다. 『 멜리트』 의 주제는 이후의 희극들 속에서도 되풀이된다. 두번째 희극인 『 미 망인 』 은 특히 『 멜리트 』 와 유사한 점이 많다. 『 미망인 』 은 코르네유가 의도적으 로 규칙에 충실하고자 노력한 작품은 아니지만 대체로 『 멜리트 J 보다 규칙에 접 근해 있는 작품이고, 스스로 결점으로 지적했던 막간의 시간 배분에도 균등성 울 부여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희극 가운데 최초로 규칙에 충실한 작품은 1633 년에 발표된 『 시녀 La Sui- van t e 』 이다. 여기서는 삼단일의 규칙이 거의 완벽하게 지켜졌다고 할 수 있고, 특히 시간의 단일은 상연시간 자체에 한정될 만큼 완벽하다. 심지어 코르네유 는 각각의 막이 340 행의 시구로 이루어지도록 치밀하게 배려하기까지 했다. 『 멜리트』에서 『시녀 』 까지의 희극은 서로 유사한 점이 많다. 사랑을 두고 등 장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해와 갈등, 착각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 러나 몇몇 작품은 주제와 구성의 참신성으로써 각별한 관심을 끈다. 코르네유 의 〈 최초의 걸작 〉 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 라 풀라스 르와얄 La Place roy ale 』 은 이전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기본적인 주제로 다루고 있지만 알리도르 라는 특이한 인물로 인해 전혀 다른 작품으로 변모한다. 그는 앙겔리크를 사랑 하면서도 그 사랑이 가져다 주는 구속에서 지유로워지고 싶은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사랑과 지유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그가 택한 것은 자유이다. 사랑에 대한 수동적 예속보다는 의지로써 자유를 택하는 알리도르에게서 아당은 코르 네유의 〈 영웅주의의 탄생〉 4) 을 보았고, 쉐레르 Scherer는 그 속에 비극성이 내 포됨으로써 〈 전통적인 희극의 한계를 넘어서는 작품〉 5)~ 로. 평가했다. 결국 이 작품은 초기 희극들을 마감하면서 동시에 비극으로의 길을 열어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후로 코르네유의 작품들은 〈사랑과 명예〉, 〈사랑과 조국〉, 〈사 랑과 종교〉 등의 대립되는 요청들 사이의 갈등으로 특징지어질 것이다. 4) A.A dam, 앞의 책, 497 쪽• 5) J. Scherer, Le Thetre d e Corneill e , 쪽.

희극 중에서 『 연극적 환상 』 은 주제와 구성에 있어 독특한 작품이며 고전주의 와는 가장 거리가 먼 작품 중의 하나이다. 다시 말해 17 세기 초의 바로크적 경 향게 따라 풍요로움과 다양성과 기발함으로 뒤덮인 작품이다. 그러나 이것은 코르네유만의 독창적인 구성은 아니다. 이와 유사한 구조의 연극이 구즈노 Gou g eno 따 스퀴데리에 의해 「배우들의 연극 La Comedie des comed i ens 」이 라는 제목으로 이미 상연된 바 있다. 그러나 구즈노와 스퀴데리가 사용한 방법 보다 훨씬 더 복잡한 방식이 사용됨으로써 6 ) 관객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고 커 다란성공을거두었다.

6) 구즈노의 국은 1 막과 2 막은 운문으로써 프롤로그를 구성하고 극중 극인 3 막부터는 산문 으로 되어 있다. 스퀴데리의 극은 역시 2 막까지는 프롤로그로서 반대로 산문으로 되어 있고 3 막부터는 운문으로 되어 있다. 코르네유의 극은 운문과 산문의 구별이 없으며 프 몰로그도 없다. 현실과 환상 사이의 구별을 일부러 모호하게 함으로써 극중 인물인 프리 다망 P ri daman t뿐만 아니라 관객까지도 착각을 일으키게 만든다는 점에서 앞선 두 작품 보다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다 .

『 연극적 환상 』 이후로 바극에 몰두하던 코르네유는 1643 년과 16 44 년에 잇달 아 r 거짓말쟁이 』 와 『속 거짓말쟁이 』 라는 스페인풍의 희극 두 편을 내놓았다. 두빌 d'Ou vi ll 터 브와로베르 Bo i srobe rt에 의해 스페인풍의 희국들이 유행하게 되자 코르네유도 이에 편승하여 알라르콘 Alarcon 의 『의 심받는 진실 Verd a t so sj) echosa 』 을 번안하여 『 거짓말쟁이 』 를 발표했고, 이것이 성공을 거두자 로페 데 베가 Lo p e de Ve g a 의 『누 군지도 모르고 하는 사랑 Amar sin saber a q u i노 en 』 을 『 속 거짓말쟁이 』 로 번안했다. 전자는 바교적 고전주의의 제 규칙들을 준 수하고 있는 데 반해, 후자의 경우는 규칙에서 멀어져 있었고 전자만큼 성공을 거두지도못했다. 코르네유의 희극은 이상과 같다 . 그것들은 대체로 규칙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점에서, 그리고 주제와 구성에 있어서 다양성과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점에서 고전주의와 동떨어져 있다. 코르네유가 희극에서 멀어전 것은 그의 희극이 갖

는 한계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희극성이 결여된 그의 레아리승, 희극적 인물이 결여된 그의 희극은 관객들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풍속희극 및 상황의 반전을 주축으로 한 희극은 점차 성격 희극의 방향으로 나 아가며 이로써 고전주의 희극의 정수를 표현하게 될 몰리에르의 길을 열었다고 할수있다. 희극에 뒤이어 우리는 두번째 시기, 죽 비회국과 영웅비극의 시기로 접어든 다. 코르네유의 전체 작품 중에서 비희극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은 2 편밖 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프랑스 연극에 던진 파문은 그 어느 작품보다도 컸다. 『 클리탕드르 』 는 코르네유의 두번째 작품이다. 뒤 리에, 오브레 Auvra y 등이 비희극으로 파리에서 성공을 거둔 것을 본 코르네유는 그들과의 경쟁의식 에서 이 작품을 썼는데 , 그들처럼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다시 희극의 길로 돌 아섰다. 『 클리당드르』는 『 멜리트』 이후 2 41-]간의 규칙을 알게 된 코르네유가 메레의 전원비희극 『 실바니르』 에 자극을 받아 규칙들을 적용시켜 보려는 의도 로써 만들어졌다. 그러나 코르네유의 의도와는 달리 이 작품은 2 41-]간의 규칙 에는 비교적 충실했지만 다른 규칙들에서는 크게 벗어나 있었다. 지나치게 많 은 사건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숲과 성, 동굴, 감옥 등 전원극에서 보 여지는 장소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예법 (적합성)과 사실다움에서도 크게 벗어 나있었다. 『클리탕드르 』 가 실패를 거둔 데 반해 두번째 비희극 『 르 시드.!I는 16 년 몽 도리 극단에 의해 마레극칭에서 상연되면서 공전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또 그 에 못지않은 소란스런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알려진 대로 『르 시드』 는 스페인의 길렘 데 키스트로가 1621 년에 발표한 『시 드의 어린 시절 』 에서 줄거리 를 빌려온 것이다. 『 르 시드』는 비희극으로서는 비교적 규칙에 충실한 편으로 갓 태어나기 시작한 규칙주의자들의 취향에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24 시간의 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낮에 시작되어 다음 날 아침까지로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장소도 세빌리아 Se vi ll~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24 시간내에 지나치게 많은 사건들이 일어남으로써 고전주의가 원하는 단순성과 집중성이 부족하며 따라서 사실답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쉬멘느의 행동은 관 객들이 요구하는 예법에 거슬리고, 작품 전체에서 필요 없는 부분―――가령 왕 녀의 사랑――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 르 시드 』 는 마레국장에서 초연된 후 바로 책으로 인쇄되었다. 『 르 시드 』 의 출판과 거의 동시에 코르네유는· 이미 1633 년에 라틴어로 썼던 『 변명 Exe 述 a ti o 』 울 연상시키는 『 아리스트에게의 변명 Excus e ii A rist e 』 이러는 제목의 글을 발표 했는데, 『 르 시드』 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이 글은 다른 작가들의 오해를 불 러일으켰고 결국 르 시드 논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 글 속에서 코르네유는 〈내 모든 명성은 오로지 나에게만 기인한다 〉 7 봐는 말을 씀으로써, 그 글이 풍 기는 오만으로 인해 즉각적인 반격을 받게 되었다. 메레는 「스페인의 진짜 시 드의 저자가 불어번역자에게」를, 스퀴데리는 「르 시드에 관한 의견」이라는 공 격문을 내놓았고 코르네유는 이들에 대해 「변론서한」으로 답을 대신했다.

7) Excuse iiA ri ste, vers 50. OC I , 78~ :

스퀴데리는 〈 r르 시드 .!I 라는 작품을 논하는 것이지 그 작가를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 8) 라는 말로써 성공을 거둔 작가에 대한 질두심에서가 아님을 내세우며 5 개 항에 걸쳐 Ii' 르 시드 .!I 의 결점을 지적했다. 이렇듯 논쟁은 규칙의 문제에서 비롯되었으나 점차 개인적 비난과 중상으로 변질되고 말았는데, 그러한 공격적 태도를 보인 것은 오히려 코르네유 쪽이었다. 결국 스퀴데리는 아카데미가 중 재에 나서줄 것을 요청하였고 리슐리의는 샤풀렝으로 하여금 초안을 작성케 하 여 1638 년 「르 시드에 관한 아카데미의 견해」가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아카데

8) Observati on s sur le Cid , OC I , 78 璃.

9) 위의 책, 78~: 1) 주제가 전혀 가치없는 것이다. 2) 연극의 주요 규칙들울 어기고 있 다. 3) 행동에 판단력이 결여되어 있다. 4) 많은 좋지 않은 시구들이 있다. 5) 그 속에 담긴 거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표철이다. 따라서 그 작품에 존경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부당하다.

미의 글은 스퀴데리가 제기했던 5 가지 문제점을 차례로 따라가며 관찰자인 스 퀴데리와 저자인 코르네유 양쪽의 옳고 그름을 판결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 다. 아카데미의 결론은 디음과 같다. 마침내 우리는 『 르 시드』 의 주제가 좋지 않고, 그것의 결말부분이 잘못을 범하고 있고, 쓸데없는 에피소드로 차 있고, 여러 곳에서 예법상의 결점과 극의 배치상의 결점이 있고, 부도덕하다고 할 정도로 저속한 시구들이 많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정열의 소박함과 격렬함, 사상의 힘과 섬세함, 결점 속에 섞여 있는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은 가장 큰 기쁨을 주어온 프랑스 연극둘 중에서 상당한 자리를 그 작품에 부여 했다. 이 작품의 저자가 얻은 모든 명성이 자신의 장점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명성이 단순히 행운의 탓만도 아니다. 비록 행운이 그에게 아낌없이 주어졌다 해 도 그 행운을 용서할 만큼 자연은 그에게 충분히 관대했다. 10) 이와 같은 아카데미의 개입으로 논쟁은 종결되었지만 코르네유에게는 그 내 용이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이 후 3 년간 그는 참시 극작 활동을 멈추고 극작법과 최근의 이론들을 연구하며 다론 작가들의 활동과 관객들의 반응을 관 찰硏근 데 시간을 보냈다. 여기에는 아버지의 죽음과 노르망디 지방에서 일어 난 농민 폭동의 탓도 있을 것이라 짐작된다. 『르 시무의 성공은 순수비국을 위축시키고 비희극을 다시 유행시키는 결과 를 낳았다. 1635-163 이즌에 발표된 비희극과 비극의 수는 각기 15 편과 14 편 이었는데, 1637-1639 년 사이에는 33 편과 23 편으로 비희극의 증가가 두드러졌 다. 이와 더불어 규칙에서 벗어나는 비극의 수도 중가했다. 따라서 『 르 시드』 가 고전주의 비극의 승리를 확정지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아당의 지적대로 오히려 그것은 비극의 발전에 한때나마 방해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 하다 .11) 참시의 휴면기를 거친 코르네유는 『오 라스』를 필두로 해서 주로 비극의 창작 10) Les Senti, m ents de l'A c ademi e sur ·le Cid , OC I , 82~. 11) A.A dam, 앞의 책, 51 澤.

에 몰두하게 된다. 그는 그 사이 사이에 2 편의 희극과 3 편의 영웅희극을 발표 하기도 한다. 『 동 상슈 다라공 Don Sanche d 'A ra g on 』 은 로마네스크한 내용의 극으로서 코르네유는 〈 영웅희극 〉 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붙였지만 사실은 비희극 이라 불러도 무방한 작품이다. 헌정서에서 그는 〈고 대인들에게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새로운 종류의 시 〉 12) 임을 내세웠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스페인의 왕족이거나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비극이 아닌 희극으로 구성되어 있 기 때문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장르 구분을 응용-하여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인물들게게도 비극이 가능하고, 반대로 위대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희극도 있을 수 있다는 추론을 세운다. 코르네유가 비극에 손을 댄 것은 메레의 r소 포니스브 』 와 로트루의 『죽어가는 헤라클레스』 의 성공이 극작가들과 관객들을 고무시켜 비극이 유행하게 된 시점 과 일치한다. 그의 최초의 비국 『 메데 』 (1635) 는 코르네유의 작품 속에서 다소 고립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그것은 그가 희극에 전념하던 시기에 씌어진 것 으로서 두번째 비극인 『오라스』와는 동일선성에 놓일 수 없는 작품이다. 실제 적인 비극의 시작은 『 오라스』 에서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 르 시드 』 이후 3 년 만에 다시 작품을내놓은코르네유는뒤이어 『신나J , 『폴 리의크트 』 등그의 주요 작품으로 손꼽히는 비국들을 발표하였고 비극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오 라스』의 소재는 티두스-리비우스 T it e-L i v~ 로마사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처럼 로마의 역사에서 소재를 구하는 것은 메레가 『소포니스브』를 발표한 이 후로 하나의 유행이 되다시피했는데, 민감한 코르네유도 예의는 아니었다. 로 마와 알바 Albe 사이의 전두를 배경으로 코르네유는 앞으로 그의 비극의 주제 가 될, 개인과 〈국가적 이해관계gr and int e r ~t d'Eta t > 사이의 대립을 부각시 키고 또한 그의 등칭인물들의 행동원리로서 영웅주의를 제시하였다. 이 작품 속에서 코르내유는 규칙에 충실하기 위해 상당히 고심한 혼적을 보 12) A Monsie u r de Zuy !ich em, OC II , 54~.

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규칙의 문제보다는 위대한 극작품이 되기 위한 필수요건이라 할 국의 밀도 있는 구성이다. 아직까지 등장 인물들의 내적 갈등의 묘사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영원한 비극의 원 천인 〈 형제살해fat r ici de 〉 13) 를 통해 〈 감정의 내면화 〉 14) 를 향한 첫발을 내딛었 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 신나』 는 기법적인 면에서 『 오라스』 보다 한결 뛰어난 작품, 쉐레르에 따르면 극작법에 있어서 〈 완전히 고전주의적인 〉 15) 작품이다. 도입부와 결말이 짧고 명 확할 뿐만 아니라 삼단일의 규칙은 엄격히 적용되어 있다. 일대 성공을 거둔 이 작품은 정치와 윤리와의 갈등이 주제로 다루어져 있다. 이것은 『 오러스유] 가족애와 애국심 사이의 갈등에서 애국심이 승리를 거두는 것에 반해 국가 이 익에 대한 인류애의 승리를 그림으로써 전일보한 면을 보여준다. 『 폴리의크트 』 는 자연스런 인간의 감정 즉 인간적 사랑과, 초자연적인 신에 대한 사랑 사이의 갈등을 주제로 하여 전자에 대한 후자의 승리를 확인한다. 여기서 폴리의크트는 단지 표면상의 주인공일 뿐이며 작품의 실질적인 주인공 은 신의 은총이다. 종교를 주제로 한 비극은 『 폴리의크트 ! 이전에도 몇몇 작가 들에 의해 시도된 바 있지만 코르네유가 이 문제에 관십이 있었음은 후일 1650 년 이후 그가 종교시를 쓰고 번역하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4 대 비극으로 일컬어지는 『 르 시드 』 , 『 오라스 J , 『 신나』 , 『 폴리의크트 』 는 코 르네유의 극 전체를 총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이들 ~---f품으로써 코르네유는 자 신의 천재성을 남김없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운 명을 가로막는 장애에 굴하지 않고, 중대한 문제들을 회피함이 없이 정면으로 대항하며 극복하는 코르네유적 영웅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f품은 13) 두l:l 쿠 고人키는 이 점을 『오 라스 J 의 독창적인 면으로 간주한다 . -S.Doubrovsky, Cor- neil le et l a dia le ctiq u e du /zero s, 14 璃 참조• 14) J.S cherer, 앞의 책, 5~. 15) 위의 책, 6~.

각기 앞의 작품을 뛰어넘음으로써 통합에 이르는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 『 르 시드 』 에서는 개인의 행복과 가문의 명예 사이의 갈등에서 후자가 승리를 거두 었다면, 『 오라스 』 에서는 가문의 문제는 국가의 이익 속에 통합되고, 『 신나 』 에 서는 어느 한 국가의 이해관계를 넘어 현명한 군주에 의한 공화주의라는 통치 철학의 이념이 부각된다. 마지막으로 『 폴리의크트』 는 이전의 작품들이 찬란하 게 밝혀놓은 영광들一一사랑, 가문, 조국, 충성-울 다시 취급하되 그보다 한층 높은 질서의 존재를 확인하며, 이전의 모든 영광을 신의 영광에 종속시킨 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볼 때 『 폴리의크트 』 는 어떤 상승기류의 절정에 다다른 작품이다. 이제 코르네유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 정치 〉 라는 문제이며 『 폼페이우스의 죽음 .!l 은 그 새로운 모색의 시발을 이룬다. 『 폼페이우스의 죽음』과 『 로도권느』 는 모두 역사에서 그 주제를 빌려온 것이 지만 그것을 다루는 데 있어서 역사에 충실하기보다 이른바 〈 시적 자유 〉 16 ) 에 따라 자유롭게 창작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것은 『 헤리클리우스 .!l , 『 니코메 드』 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코르네유 특유의 창작 방식이다. 『 로도귄느 』 의 머 리말에서 시적 자유를 밝힌 것과 마찬가지로 『 헤라클리우스 』 의 머리말에서는 진실다움의 아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주장을 편다. 그는 〈 진실다움이란 배열 에 필요한 조건일 따름이지 주제의 선택이나 역사에 의거한 사건들의 선택에 필요한 조건은 아니다 〉 17) 라며 최초로 주어지는 여건에 대한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의 권리를 요구한다. 이어서 〈 나는 멋진 비극의 주제는 진실임직하지 않 야갸 한다고 주장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 1 8) 라고 단언하기까지 한다. 『 니코 메드』 는 정치를 다룬 비극으로서 〈 정치적 사랑 〉 이라는 감정의 탄생을 알리는

16) Avert iss ement de Rodog un e, OC II , 19 쪽 :

17) Au Lecte u r de Heraclius , OC Ii , 357 쪽: (je n e crain d rai p as d'avancer que le suje t d 'une belle trag e d i e d oit n'~tr e pas vrais e mblable.>

18) 위의 책, 357 쪽.

작품이며, 프롱드란으로 감옥에 갇힌 그랑 콩데gr andConde 사건의 그립자가 질게 드리워져 있음으로 해서 관객들의 관심을 크게 끌었다. 1651-1652 년에 코르네유는 『 페르타리트 』 를 내놓았으나 관객들로부터 의면을 당하자 연극계를 떠났다. 이로써 그는 작품활동의 전성시대를 마감하게 된다. 극작 활동을 중단한 茂! 동안 코르네유는 종교시를 쓰면서 한편으로 새로운 연극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르데악 후작의 요청에 의해 1656 년부터 화려한 볼 거리를 제공하는 기계비극 『 황금 양털 』 을 쓰기 시작했으나 오랜 공백기의 침묵 을 깨뜨리고 먼저 발표된 것은 『 오이디푸스 .』 였다.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풍요 로운 신화 중의 하나에 코르네유는 자신의 창의성을 추가하여 더 복합적인 것 으로 만들었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는 끔찍한 장면을 삭제하는 한 편 라이우스 La i u 혀 딸 디르세Di rce 를 새로이 창조했다. 『 오이디푸스 』 와 r 황 금 양털 』 사이에 코르네유는 자신의 작품집을 발간하면서 3 권으로 된 책의 서 두에 각기 〈 담론冷t 한 편씩 첨부하여 규칙에 관한 견해와 자신의 극작 이론을 밝혔는가 하면 , 각 작품에 대해서는 〈 검토서t 통해 스스로의 작품에 비평을 가 했다. 이것은 그의 극작 이론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므로 뒤에 다시 설명하고자한다. 『 세르토리우스 』 는 1662 년에 상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쉐레르는 이것을 계기로 관객들이 코르네유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이루는 작품으로 파악했다. 19) 그는 코르네유가 대중적안 인기 대신 좀더 한정 된 관객 , 섬세한 정치적 • 도덕적 분석을 원하는 경험 있는 관객들을 추구한다 고 추정하면서 만년의 코르네유 극작법의 특징적인 면모로서 다음 두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로 그것은 구성이 복잡해지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사회적 • 정 치적 현실주의의 요청에 굴복한다는 것과, 두번째로는 육체적인 것의 경멸, 혹 은 기독교적 열정의 부활이다. 『세르토리우스』 뿐만 아니라 이후의 일련의 비극 19) ]. Scherer, 앞의 책, 117 쪽.

들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경향을 발견한다. 메레가 오래전에 발표하여 성공을 거두었던 작품과 동일한 제목의 『 소포니스브 』 (166 3 ) 와 그 디음해에 발표한 『 오 통 O t hon 』 은 『 세르토리우스 』 와 거의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 그 안에서 사 랑은 인물의 행동을 결정짓는 중요한 원동력으로서 작용하는 대신 단지 권력이 나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 전에는 대립되는 다른 이상과의 갈등 에서 희생되기는 했어도 사랑 그 자체는 고귀한 정념으로 남아 있었는데 반해 이제는 그 고귀성을 상실한 것이다. 『 아제질라 A g es i las 』 에서는 또 한번 그 관 계가 역전된다. 서로 대립되는 이해관계에도 불구하고 희극적 분위기가 도입됨 으로써 〈반 비극 an ti-t ra g ed i e 〉 20) 으로 간주된 이 작품에서 정치는 그 위력을 잃 고 사랑의 감정이 극을 이끌어간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승리는 코르네유 최 후의 작품으로서 코르네유의 〈 가장 아름다운 작품 중의 하나 〉 21) 로 간주되는 『쉬 레나』 에서 확고해진다. 끝으로 코르네유의 극이론에 대해 잠시 언급하려 한다. 그가 자신의 극이론 과 규칙에 관한 견해를 밝히리라는 것은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다. 언젠가는 이 문제들(규칙의 문제들)에 대해 내 생각을 설명하겠다. 하지만 좀더 큰 책을 쓸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22 ) 나는 언젠가는 이 문제들을 더 철저히 다루어보고, 지난 세기의 거장들이 따랐던 진실다움이라는 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보여주기를 희망한다. 23) 르 시드 논쟁을 거치면서 자기에게 가해진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자신의 시학을 설명하고자 하는 바람은 코르네유가 오랫동안 품어온 소망이었 20) 위의 책 , 122 쪽. 21 ) P. B runel, His toire de la litte ra tu re Franfa i s e, 212 쪽. 22) Au Lecte u r de La Veuve, OC I , 20~. 23) Ep itre de La Suiv a nte , OC I , 387쪽 .

다. 그리고 『 페르타리트 』 의 실패 후 극작 활동을 멈추고 무대에서 떠난 그는 바로 그 소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게다가 16 년에는 도비냑이 『 연극의 실제 La Pratiq u e du t he t re 』 를 펴내었는데, 그는 코르네유를· 줄곧 인용하면서도 그에게 전적인 동의를 표하지 않았다. 이것은 코르네유가 3 편 의 〈 담론冷t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이 3 개의 담론의 제목은, 1) 『 연극의 효용과 구성요소들에 대한 담론Dis­ cours de l'u ti l it e et des par t ies du poe me drama tiq ue 」 , 2) r 비극 및 진실 다움 혹은 필연에 따라 비극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담론 D is cours de la Tra- ged ie e t d es moye n s de la tra il er , selon le vrais em blable ou le necessa i re 」 , 3) 『 사건, 시간, 장소의 삼단일에 대한 담론Dis cours des Trois Unit es, d'ac- tion , de jou r, et de li eu 』 이다. 제 1 담론에서 디루어진 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번째는 연극의 목적이 교 훈을 주는 데 있는지 즐거움을 주는 데 있는지의 문제인데, 코르네유는 후자의 편에 섰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에 관한 논의는 효용성 u tilit e 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는 연극의 효용으로서 다음 네 가지를 둘 었다. 즉 도덕적 금언과 교훈이 연국의 군데군데에 심어져 있는 것이 첫번째 효용이고, 미덕과 악덕이 묘사되고 그것이 사랑을 받거나 미움을 받음으로써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두번째 효용이다. 행복한 결말은 우여곡절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선택하게끔 우리를 자극하고, 범죄와 불의의 비참한 결말은 유사한 불행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속에 공포감을 조장할 수 있 는 것이 세번째 효용이다. 네번째는 공포와 연민을 통한 감정의 정화인데, 이 는 비극에 관련된 특별한 효용이므로 코르네유는 두번째 담론으로. 그 설명을 넘긴다. 끝으로 그는 연극의 구성요소에 관한 문제를 논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의 비극과 회국의 성격 규정에 반론을 제기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인물의 신분과 지위에 따라 양자를 구분한 데 반해 코르네유는 인물들이 이끌어가는 사건의 성격에 따라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제 1 담론에서 다룬 연극의 효용성 가운데 네번째 것은 비극 특유의 것으로서 공포와 연민에 의한 감정의 정화였다. 제 2 담론에서는 이 점에 대해 더 상세한 설명을 가한다. 공포와 연민을 일으키는 사람과 사건들이란 무엇인가. 아리스 토텔레스에 의하면 고결한 인물은 비국에 부적합하다. 그러한 인물이 불행에 빠지면 공포와 연민을 일으키기는커녕 부당한 일로 간주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악한 인물이 불행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벌이므로 우리가 그보다 더 악한 인물이 아닌 한 아무런 공포와 연민도 일으키지 않는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 스는 완전히 선하지도 완전히 악하지도 않은 인물이 잘못에 의해 불행에 빠질 때 비극에 합당한 인물이 된다고 생각하고 그 예로 오이디푸스와 티에스트 Th y es t데 들었다. 그러나 코르네유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의 경우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긴 했지만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어떤 찰못도 저지른 것은 아니다. 또 비극에서 감정의 정화가 일어난다는 것도 꼭 아리스토 텔레스가 말한 공포와 연민이라는 조건을 통해서만 되는 것은 아니다. 『르 시 드』에서 로드리그와 쉬멘느는 서로의 사랑으로 인해 불행에 빠지게 되는데, 그 들의 불행에 대해 우리는 동정을 느낄 수는 있지만 우리가 그들과 유사한 상황 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지는 못한다. 다음으로 코르네유는 주제를 다루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해 검토한다. 그 방식 의 하나는 작가가 창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나 전설에서 변화시키지 않은 채 빌려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코르네유는 주요 사건은 작가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나 전설에서 선테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까운 사람들 사 이에서 일어나는 살해의 시도들은 범죄적인데다 인간의 본성에도 어긋나서 그 것이 역사나 전설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면 쉽게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제 2 담론 가운데 정점을 이루는 전실다움과 필연에 대한 추론은 여기서 비롯된다. 소재를 다루는 방식은 과거에 일어난 대로 나타내는 방식, 일어났다고 일컬 어지는 대로 나타내는 방식, 일어났음에 틀림없다고 생각되는 대로 나타내는 방식의 세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역사적 진실에 충실한 태도이고, 두번째는 역서에 약간의 변화를 주는 태도, 마지막은 역사를 꾸며내는 태도이다. 다시

말해 첫번째는 전실 그 자체 를 나타내는 것이고, 두번째는 때로는 진실다움을, 때로는 필연적인 것을 나타내며, 세번째는 필연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들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작가의 자유로운 결정에 달려 있지만 코르 네유는 진실디움과 필연적인 것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을 최선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비극을 구성하는 사건이 진실일 경우 진실다움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코르네유는주장한다. 진실다움의 문제를 다루면서 코르네유는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할 때 작가가 역사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얼마간의 자유를 인정한다. 단, 그 자유가 실제의 연대나 장소, 상황, 지명 등과 어긋나서는 안 된다. 또 한 가지, 〈평범한 진 실다움 le vrais e mblable ord i na i re 〉 과 〈 비범한 전실다움 le vrais e mblable ex t raord i na i re 처 구별하면서 ,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능하지만 믿을 수 없는 것 le pos sib l e i ncro y able 〉 보다 〈 불가능하지만 믿을 수 있는 것l'i m p os­ sib l e cro y able 冷 선택해야 한다고 했지만, 신화나 전설의 내용은 불가능하고 믿을 수 없는 것임에도 관객들이 불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만큼 그 것은 비범한 진실다움게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제 3 담론은 삼단일의 법칙을 디루고 있다. 코르네유의 전체적인 논지는 삼단 일 법칙의 확대 적용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사건의 단일冷t 볼 때, 그 것은 희극에서는 〈 줄거리 또는 장애의 단일unit e d'in t r igue ou d'obsta c le)o J] 있고 비극에서는 〈 위기의 단일 u nit e de p er il〉에 있다. 비극에서 사건의 단일 은 무대 위에 단 하나만의 사건을 울려놓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만 다른 부차적인 사건이 있을 경우 그것은 주요 사건에 종속되어야 한다. 또한 막과 막 사이, 장면과 장면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 〈 시간의 단일〉에 대해 코르네유는 2 41-]간 안에 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담기는 어려운 만큼 30A] 간까지의 연장이 가능하다고 본다. 극의 싱연시간과 극중 사건의 진행시간이 일치한다면 가창 이상적인 일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 우에는 사건의 진행시간을 막간에 배분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공연시간은 두

시간인데 국중 사건의 진행에 10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 차이나는- 8 시 간의 사건 은 막간, 죽 무대 밖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처리해야 한다. 무대 밖의 시간은 관객의 상상력에 맡겨진 시간이다. 마지막으로 〈 장소의 단일 〉 에 대해 코르네유는 이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서도 호라티우근데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임을 말하고 시간의 단일성, 즉 24 시간의 규칙의 결과로 확립된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림들이 있음을 소개한다. 어쨌든 장소의 단일이라는 규칙을 지키기는 불가능하진 않지만 어려운 일이므 로 시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약간 확대할 필요성이 있다. 코르네유는 〈 연극적 허구fi c ti ons de th e t re 〉 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하나의 〈 연극적 공간 un lieu t hea t ral 潘 확립할 것을 제안한다. 그 공간은 『 로도권느』 에서 로도권느의 방 도 아니고 클레오파트라의 방도 아닌 공간, 『헤라클리우스. .1 l 에서 포카스의 방도 레옹틴느의 방도 릴셰리의 방도 아닌 공간, 다시 말해 그곳에서 말하고 행동하 는 사람의 방으로 인정하기로 협약된 공간이다. 이상 우리는 코르네유의 작품들의 내용과 그의 국이론에 대해 개관하였다. 그가 고전주의 규칙에 대해 선구자라거나 완성자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분 명하다. 첫 작품 『멜리트』를 발표했을 당시 그는 규칙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었고, 처음으로 규칙의 적용을 시도했던 『클리탕드르』나 『 메데 』 도 메 레의 『 실바니르 』 와 『 소포니스브』의 예를 따라 시도해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1660년 의 〈담론冷준도 이전의 작품들에 대한 옹호의 성격이 질다. 그러 나 규칙들에 대해서 보여준 그의 관심은 프랑스의 독자적인 고전주의를 확립시 키는 데 크게 기여했음이 틀림없다. 가령 『 르 시드 』 에 의해 촉발된 논쟁은 규 칙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확산이라는 점에서 그 어느 작품보다도 중요한 역 할을했다. 32 편에 달하는 그의 많은 작품들은 초기 , 전성기 , 후기를 거치면서 바로크적 인 경향에서 고전주의적 작품으로 점차 발전하는 양상을 보여주었지만 라신이 나 몰리에르와 같은 순수비극이나 성격희국의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코르네유가 나타나기 위해 아르디와 같은 작가들이 필요했던 것 처럼 라신과 몰리에르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코르네유가 꼭 필요했던 것이 아 닌가 싶다. 그는 이론가들이 바야흐로 연극이론으로서 문단에 군림하며 작가를 지배하려 하던 시기에 작품을 쓰기 시작했고 어쩔수없이 그들의 눈치를 살피면 서도 자신의 왕국을 고수하기에 전념했다. 그는 고대를 존중하고 아리스토텔레 스를 존경하면서도 이를 뛰어넘으려고 한 점에서 근대인이었으며, 규칙의 효용 성을 믿으면서도 이에 구속되기를 거부함으로써 자유인임을 보여주었다. 그가 창조한 인물들 또한 근대인이자 지유인이었다. 자신의 의지와 자유로운 선택을 믿은 그의 인물들은 흘러간 지난날의 영웅이 아니라 루이 13 세 시대의 영웅이 다. 혼미와 갈등이 극심했던 이 시대 말이다. 우리는 그 가운데 한 시대의 고 뇌와 아픔과 꿈을 읽기를 원한다. 코르네유는 한 시인으로서 이 모든 것을 그 온갖 다양성과 깊이 속에 재현할 줄 알았고, 한 국작가로서 그것을 담을 틀을 屯나갔다. 그의 작업은 다음 세대에 이어짐으로써 완성되고 전세대와는 다 론 새로운 삶의 숨결이 그 안에 담겨질 것이다. 2 라신 라신J ean Rac i ne(I639-1699) 은 1660 년 루이 l 에의 결혼에 바치는 송시 『 센느강의 님프 La nym p he de la Se i ne 』 를 써서 10 여뇨 l 의 은전을 받는 것으 로 그의 문학적 생애를 시작한다. 그는 왕보다 한 살 아래로, 젊은 왕의 친정 이 시작된 그해에 극작을 시작했고( 『 아스마지 Asn 腐i~』 ), 16671 ;1 왕의 편사관이 되기까지 아홉 편의 비극과 한 편의 희극을 썼다(이 후 왕실의 요청으로 두 편의 비국을 보탠다) . 페르테 밀롱 Fer t e-M i lon 출신의 고아로서, 탄압받던 포르 루 와이얄(장세니슴의 본거지)이 베풀어준 무성교육의 시해자였던 라신은 그의 국 둘의 성공에 힘입어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고 왕의 측근이 되었다. 그가 성공 울 구가하던 시기는 프롱드란을 넘긴 절대왕정의 절정기로, 이의를 제기받지

않는 절대권력 위에 연극과 음악과 발레를 사랑하는 왕의 젊음까지 더한 호사 와축제의 기간아었다. 16 3 0 년대 초에 시작하여 근 10 년을 끈 문학적 논쟁들은 이미 규칙주의자들의 승리에 의해 고전주의의 규범들로 고착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라신은 정치적 으로나 문학적으로 논쟁과 갈등의 시기를 거친 완숙한 개화의 시기에 작품을 썼던 것이다. 코르네유와는 달리 그는 새로운 규칙들을 시험하여 보거나 새롭 게 정착되려는 규칙들의 심판에 자신의 작품을 내맡길 필요가 없었다. 당대 작 가들과의 끈질긴 비교와 경쟁이 있었지만 그의 작품들은 거의 언제나 왕을 비 못한 관중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런 사실들은 무에서 출발한 그에게 사회적 성공을 안겨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차후 그의 작품들의 의의를 한정시키 는 부정적 작용을 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앙시앵 레짐에 대한 비판적 의식 이 높아지고, 문학적으로는 낭만주의가 새 시대의 새로운 감수성으로 개화하려 할 때, 궁정작가로 폄하된 그는 〈 잘했다 하는 것 이의에는 같은 것을 말한 다 른 작가들보다 니올 것이 없는 작가 〉 24) 라거나, 〈 과거도 현재도 성격도 없는 단 하나의 선으로 그려진 〉 〈 차갑고 생명 없는 추상적 인물들 〉 2 5 만을 창조한 작가 로 비판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한동안 긍정적인 평가조차 고전주의의 원칙들을 준수한 순수하고도 완벽한 형태미의 성취자로서만 부각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 러나 절대왕정의 호사로움이 태양왕 치하의 프랑스를 치장하던 시대에 라신이 구현한 작품들이 가히 그리스의 절대비극과 비견될 만한 비극성을 성취하고 있 다는 서실, 그 비극성의 성취에 고전주의의 규범들이 속박 아닌 내적 필연성으 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롤 부정적인 준거점 으로 삼아 거부했던 낭만주의자들이 어찌하여 그의 작품에서 인간 영혼의 전실 성과 깊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가를, 또한 20 세기의 신비평이 고전 24) Volta ire , Disco urs sur la traged ie de Brutu s (cit e pa r Pie r re Moreau, Racin e , Hati er , 1 968, 5 쪽) . 25) Tain e , Nouveaux essais de critiqu e et r l'h is toir e (cit e pa r Pie r re Moreau, 앞의 책, 142 쪽).

주의의 모든 비평적 척도를 거부하면서도 왜 그 척도들의 발현이라 할 이 〈 2000 단거의 작가 〉 26) 를 위해 그처럼 두툼한 저서들을 써야만 했는가를 묻지 않 울 수 없다. 그리하여 비극성과 형식 사이의 완벽한 조화의 비밀을 캐어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고전주의의 정점에 선 예술가 라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라신 비극의 비극성을 이루는 그의 인간학에 주목하려 고 한다. 그가 고전주의의 규칙을 고안해 내지 않았듯이 그의 극의 소재 또한 새롭지 않다. 삶의 다양한 모습과 그 다채로운 변전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단순 하고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되는 고전주의의 사고체계에 따라, 그리고 가장 숭 고한 장르로 인정된 비극에서 권유되는 바에 따라, 많은 당대의 비극 작가들이 그랬듯이, 그 역시 이미 만들어전 이야기들을 소재로 삼았다. 볼테르의 말처럼 그는 많은 다른 작가들과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공적인 명분과 사적 인 감정 사이의 부조화가 주인공의 영웅적 행위에 의해 해소되는 코르네유의 비극이나, 숱한 우여곡절이 결국엔 주인공의 찬란한 승리로 귀결되는 비희극들 과는 달리 라신에게서는 정치와 사랑의 대립은 근본적이고 결정적이라는 점이 그의 비극적 세계관의 한 단서가 된다. 코르네유의 인물들은 동요에도 불~하 고 합당한 선택을 하는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고, 세계는 그가 스스로 희생시켰던 개인적 행복을 공적으로 되돌려중으로써 그의 선택을 보상한다. 이 처럼 세계의 정당성, 개인의 위대성에 대한 낙천적인 믿음은 세계와 인간 사이 의 궁극적 화해를 보장한다. 그러나 러신의 작품에서 정치나 권력은 근본적으 로 정의롭지 않다. 그것은 힘없는 약자의 희생을 요구하거나(『앙드로마크 J , 『 이 피제니 Ip h ige n i e 』), 거세의 공포로 개인을 억압한다( 『 바자제 Baj aze f』, 『 페드릭). 오직 힘의 불균형을 통해서만 작동하는 그것은 형제간의, 모자간의 피비린내 뚝 싸託 조장하고(『라 데바이드 La Theba fd e 』. 『브리타니퀴스 B rita n i~』), 음 모와 암살과 거짓과 술수를 만연시킨다. 이처럼 타락한 세계는 주인공들에게 26) Roland Bart hes , Crit iqu e et l a v e:遣 Se 페, 1966, 2~.

영광스러운 희생이 아니라 굴종과 타협을 강요한다. 그리고 그 타협의 요구가 주인공들로 하여금 불기능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한다는 점에서 세계와 인물 간의 대립은 해소될 수 없는 것이 된다. 아들을 살릴 것인가, 정절을 지킬 것 인가( 『 앙드로마크』 ) , 애인을 살릴 것인가 자신의 순수성을 지킬 것인가( 『 바자 제 』 ). 정치와 결부되어 거의 모든 인물들에게 주어진 이 결단의 과제들은 그들 에게 국기의 위대함이 아니라 행복이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절망과 저항의 의 식을 일깨워놓고, 나아가 위대성을 입증해야만 하는 자신의 상황조차도 존재의 비국적 조건으로 인식게 한다. 그 조건에 피뤼스( 『 앙드로마크』 )처럼 반항하거나 티튀스(예레니스』 )처럼 순응하거나간에 결말은 죽음 또는 죽음과 등가의 상태 일 뿐이다. 그리하여 〈나 의 유일한 희망은 나의 불행 속에 있다 〉 27) 는 아탈리드 의 대사는 인생에 대한 라신의 인물들의 마지막 통찰을 요약한다.

27) Baja z et, Acte I , sc. 4 :

그러나 정치적인 상황으로 야기된 세계와 인물 간의 대립은 근본적이되, 라 신의 비극성을 이루는 근본적인 요인은 아니다. 공적 가치나 정치적 신념에 대 한 확신이 이미 문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정치적 상황이 인물들의 내적 심리 를 지배하는 강도를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내가 에피르의 웃음거리가 되어 있는데 그리스가 내 행위를 찬양한다 해서 무슨 소용이랴. 28) _ 『 앙드로마크』 3 막 1 장

28) (Et que me serv ira que la Gr~ce m'admi re , Tandi s q ue je s erai l a fab le de l'Ep ire? >

나더러 다스리라고? 내 약해빠진 이성이 더 아상 나를 지배하지 못하는데 나더러 한 국가를 내 법칙 아래 거느리라고 ? 29) ― 『 페드르』 3 막 1 장

29)

Qu and ma faible rais o n ne regn e plu s sur moi!>

오레스트처럼 공적 가치에 우선하는 개인적 욕망의 절대성에 의해서건 페드 르의 경우처럼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 인물의 정신적 쇠락에 의해서건 정 치의 문제는 비극의 인물들을 얽어매는 부차적이고 의적인 상황에 지나지 않는 다. 그렇다면 인물들을 비극으로 이끌어가는 근본적인 동인은 무엇인가. 그것 은 느닷없이 찾아와 인물을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 몰아넣음으로써, 자아 의 주체성을 앗아가 버리는 사랑이다. 정치적 상황이 인물들을 불가능한 선택 의 기로에 놓이게 한다면, 사랑은 그 절대적인 힘으로 선택의 가능성을 차단해 버린다. 이렇게 하여 라신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통해 인간에 대한 분석과 탐구 의 시선을 의적 장애로부터 인간 자신의 내면으로 옮겨 집중시키고, 거기서 인 간성의 진실과 인간의 운명의 원천을 드러낸다. 사랑은 느닷없이 찾아온다. 한 번의 시선, 그것으로 고정되어 버린 사랑은 즉각성과 영원성으로 특칭지어전다. 그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라신은 사랑받 는 대싱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 어떤 특정한 수사를 동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받는 사람의 모습을 침작할 수 없다. 왜 피뤼스는 에르미온느 7} 아 닌 앙드로마크를 사랑하는지, 오레스트는 피뤼스가 버린 에르미온느룰 왜 사랑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만큼, 인물들 자산도 알지 못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유에 의해서도 사랑받는 대상들의 자질에 의해서도 설명되지 않는 이 사랑은 내용 없는 사랑이며,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절대적인 것이다. 보고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 자체의 욕구에 따라 다시 보아야 한다. 나는 보았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그를 떠날 수 없다 30) -바르트의 말처럼 라신에게 사랑한다는 동사는 타동사가 아니라 자동사이다. 느닷없이 찾아와 인 물의 전존재를 지배하는, 아니 바로 존재의 양식이 되어버리는.

30) Phedre, Ac te III, sc. 1 :

그러나 그 양식은 타자에의 집착이라는 양식이고 타자를 소유함으로써만 유

지될 수 있다. 그러기에 이유 없고 절대적인 이 사랑은 인물을 타자와의 관계 에 얽어맨다. 서로 사랑하는 경우에도 이 관계는 행복할 수 없다. 그것은 항상 제삼의 인물에 의해 금지되고, 파괴되고, 그 과정에서 인물들은 의심과 질두와 절망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디론 사람과 맺어지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애인의 죽음울 원하는 극단적인 집착 3 1)..g.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이리는 긍지 마저 불가능하게 한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경우, 관계는 더욱 화해로울 수 없 다. 사랑이 절대적이고 변화 불가능한 것처럼, 사랑할 수 없음 또한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를 지배하는 데는 절대적이지만, 대싱~을 설득하는 데는 전적으로 무력하다. 라신은 사랑하는 자에게 권력에서의 우위를 부여함으로써,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사이의 힘의 관계를 역전시켜 버린 다. 바르트의 유명한 도식 -A 는 B 에 대하여 전권을 가지며, A 는 B 를 사 랑하지만, B 는 A를 사랑하지 않는다 32) -~은 이 역전의 관계를 명시한다. 원 하는 사람의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그에 대하여 갖는 전권이 무슨 소용일 것인 가.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패배자요, 사랑받는 사람은 정복자이다. 거부당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수치를 안겨주고, 수치는 증오를, 증오는 폭력을 끌 어들인다. 사랑은 호소와 설득과 애원을 넘어서 비난과 위협과 상처주기를 통 한 결두의 양상을 띠게 되고, 자살에의 충동과 설해의 욕구를 불러들인다. 여기 내 가슴이 있다. 네 손이 후려쳐야 할 곳은 바로 여기야. 너의 증오가 그처럼 부드러운 형벌을 내게 과분한 것이라 생각한다면,

31 ) Baja z e~ Acte II , sc. 5 : (Et lorsq u e que lqu e fo is d e ma riva le heureuse Je m e repr e senta is ] 'im age douloureuse, Votr e m ort {pa rdonnez aux fure urs des amants ) Ne me par ai ss ait pas le plu s gran d des tou rments .>

32) Bart hes , 앞의 책, 쪽.

또는 네 손이 너무도 더러운 피에 적셔질 것이 걱정된다면, 네 손 대신 네 칼을 빌려다오. 33 ) _ r 페드르』 2 막 5 장

33)

아, 내 스스로 내가 받은 모욕에 복수하고, 피로 물든 팔을 그 배신자로부터 빼낼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랴. 34) —『앙드로마크 』 4 막 꾹}

34)

이처럼 사랑은 인간을 고양시키는 고상한 감정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지배 와 소유의 욕구이면서,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정념이다. 불가해하고 불가항력적인 이 사랑의 가장 비극적인 국면은 그러나 타인에 대 한 지배력의 상실, 그에 따르는 온갖 광폭한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광 폭한 추구를 제어할 수 없는 인간의 저 자신에 대한 무력에 있다. 라신의 인물 들은 그 사랑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낯설고도 집요한 정념에 사로잡힌 인간의 최초의 각성은 〈 행복한 날은 이제 없다 〉 35) 는 것이며 평안의 시절이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스스로의 의지로 사랑의 광폭한 도정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동의한 바 없는 정념의 절대성을, 그것을 억제하거나 숨기 려는 노력의 무모성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누구인지 더 이상 알가볼 수 없는 육체적 • 정신적 혼란이 있고, 한편으로는 그 혼란을 바라보는

35) Pheclre, Acte I , sc. 1 :

이성적 자아와, 사랑이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명철한 의식이 있다. 그리고 전 쟈}ol] 대한 후자의 무력함의 확인이 있다. 내가 처한 상태 속에서 나 스스로를 알아 보는 것이 두렵구나. 네가 보는 것들 어느 하나도 제발 믿지 말아 다오, 내가 이젠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긱하고, 내 승리를 칭찬해 다오. 그에 대한 노여움으로 내 가슴이 무감각해졌다고 믿어 다오, 0t ot ! 그리고, 그럴 수만 있다면, 나도 그렇게 믿을 수 있게 해주령• 36) ― r 앙드로마크』 2 막 2 장

36)

나는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하면서, 내 자신을 옳다고 보고, 내 스스로를 인정한다고는 생각지 마라. 네가 나를 미워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는 내 자신을 증오한다. 37 ) ― 『 페드르 』 2 막 5 장

37)

이성의 실권, 더 이상 자신이 스스로의 주인일 수 없는 인간의 비참―— 〈내 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가 무슨 짓을 했는가 〉 , 〈내 가 누구인가 〉 38) 를 묻는

38) Andromaqu e , Acte V , sc. 1, vers 1393 : Androm aqu e, Acte V , sc. 5, v ers 1568 : <… ets u i s - je orest e nf in?>P heare, Acte I , Sy. 31, vers 179 :

라신 인물들의 거듭되는 대사는 사랑이 야기한 자아의 이분, 주체성의 상실 앞 에 선 인간의 비통한 탄식이다. 이처럼 그들은 자기 정체성을 파괴해 버리는 과거와의 단절을 경험하고,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리며 자신의 내부 에 도사린 하나의 〈 괴물 〉 , 낯설고도 강력한 또 디른 자아를 체험하는 것이다. 인물들은 사랑이라는 정념을 통해 행복을- 가로막는 상황과 대립하고, 소유할 수 없는 타자와 직면하며, 제어할 수 없는 자신과 대면한다. 그러나 사랑은 이 런 체험을 이끌어내는 유일하고 특별한 정념은 아니다. 사랑은 인간 존재의 고 독과, 예속성을 발견케 하는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에테오클르와 폴리니스 ( 『 라 테바이드』 )의 증오, 아탈리 ( 『 아탈리 A th al i~』 )의 완고함에서 역시 우리는 자 신을 파괴하는 정념의 절대성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라신의 극은 〈사 랑의 극이 아니다 〉 .3 9) 그는 인간에 대하여, 인간조건의 비참에 대하여 말한다.

39) Barth e s, 앞 의 책, 쪽.

그러나 인간은 비참하기만 한 존재인가. 젊은이들의 혼란에서 시작하여, 근 친상간의 욕구까지, 『 앙드로마크 』 에서 『 페드르 』 에 이르는 길은 분명 사랑이 지 닌 파괴성과 죄성이 강화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또한 사랑의 파괴성과 죄성을 모면하려는 헛된 노력의 과정이요, 그 노력 속에서 노예로서 의 자신, 죄인으로서의 자신을 분석하고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며, 역설적으 로 순수함에 대한 인간의 애타는 열망이 점점더 열렬히 드러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가장 불결한 욕망을 품은 페드르는 존엄한 심판 관 미노스의 딸이자 태양의 자손으로서, 이폴리트의 순결성을 사랑하는 순수 지향의 화신이 된다. 러신의 인물들은 텐느가 보았듯이 〈추 상적인 인간〉이 아 니라 분노와 슬픔을 느끼며 눈물을 홀리고 괴로워하는 생생한 인간이며, 〈단 하나의 선으로 그릴 수 있는 〉 인간이 아니라 모순된 욕망을 지닌 복잡한 존재 이다. 증오를 닮은 사랑, 순결한 죄안, 〈 완전한 죄인도 아니요 완전히 순수하 지도 않은 〉 40) 인간. 여기서 라신의 인간관은 구원의 가능성이 철저하게 배제된

4o) Phedre, Prefa c e :

구도 속에 나타난다는 점을 제의하면 인간성의 모순, 그 비참과 위대를 말한 파스칼의 장세니슴과 합류한다. 이제는 라신의 인간관 세계관이 그려지는 그 유명한 형식의 치원을 살펴보아 야 할 차례이다. 형식의 문제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문제되는 것은 삼단일 법 칙이라는 고전극작법의 의적 제한이다. 〈코르네유에게는 사방에서 몸을 죄는 불편한 옷 같았던〉 41) 이 규칙들이 어떻게 라신에 있어서는 극의 내적 필연성이 되는가. 우리는 위에서 라신의 인물들의 관계가 변화 불가능한 것임을 보았다. 그 관계는 이성이 설득할 수 없는 심정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심정은 극이 시작되기 이전,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한 영상에 고착되어 있다.

41) Luci en Goldmann, le Dieu cache , Gall im ard, 19s9, 3s1 쪽.

돌이켜보라, 세피즈여, 돌이켜보라, 그전인한밤, 한 민족 전체에게 영원한 밤이 되어버린 그 밤을. 떠올려보라, 번뜩이는 눈으로, 불타는 우리 궁전의 섬광에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 형제들의 주검들 위로 길울 트면서, 온통피범벅이 되어 살육을부추기면서, 들어 오던 피뤼스의 모습을. ...... 바로 그것이 피뤼스가 내 눈앞에 드러냈던 그 모습이다. 42) —『앙드로마크』 3 막 昭}

42)

Voil a comme Py rrhu s vint s 'off rir a ma vue ;>

내 병은 더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 … 내 입이 그 여신 비너스의 이름에 탄원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이폴리트를 사모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그를 보면서 내가 향 피우게 한 제단의 발치에서조차 감히 그 이름을 부를 수 없었던 이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있었다. 나는 어디서나 그롤 피하였다. 오 비참함의 국치여 ! 내 눈은 그의 아버지의 모습에서 또다시 그를 찾아내었다. 43) _ r 페드르』 1 막 3 장

43)

미움이건 사랑이건, 심정을 바꿀 수 없는 한 관계를 바꿀 수 없고, 과거를 바꿀 수 없는 한 심정을 바꿀 수 없다. 이처럼 그들의 관계가 변화 불가능하 고, 그 불가능성이 시간의 불가역성에 근원을 두고 있다면, 처음부터 결말은 예고되어 있다. 네가 내 죄를, 나를 짓누르는 숙명을 알게 된다 해도, 나는 덜 죽지 않을 것이고, 나는 더 죄 많은 몸으로 죽으리라. 44) ―『페드르 』 1 막 3 장

44)

그러나 결말의 인식이 곧 비극은 아니다. 인물들의 관계가 침묵 속에 은폐되 고 인물들이 주어전 선택을 미루고 있는 동안 그 결말은 유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이킬 수 없이 이미 굳어전 이 관계, 파국이 유예되어 있을 뿐인 이 시간,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바극적 상황 속에 새로운 조건이 주어 지면서 막이 오른다. 결말의 인식과 그것의 실현 사이에서 예고된 결말을 유보 시켜 온 침묵과 감춤의 휘장을 열어젖히듯, 마지막 결단을 요구하는 위기의 상 황으로부터 라신의 극은 시작되는 것이다. 오레스트의 등장, 쥐니의 납치, 티 뒤스의 등극, 태제의 죽음 등은 은폐되어 왔거나 지연되어 온 발설을 재촉하는 촉매제가 되고, 그와 더불어 극은 대번에 한껏 고양되고 긴박감이 고조되면서 막바지로 치달린다. 인물들은 이 긴박한 시간 속에서 마지막이라는 분명한 의 식을 가지고 45) 변화할 수 없는 관계의 틀을 다시 시험한다. 그러나 극의 끝에 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처음보다 악화된 상황일 뿐이다. 오레스트는 에르미 온느의 사랑을 얻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녀에 의해 배반자로 불리고, 페드르 는 〈더 죄 많은 몸으로 〉 죽을 수밖에 없다. 라신의 극은 그래서 말의 정확한 의미에서 〈 재현 re p resen t a ti on〉 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관계의 불변성에 대한 확인의 반복으로 짜여지는 라신 극의 시간은 진행의 시간이 아니라 순환적 시 간이다. 〈해의 한 회전 〉 이라는 시간의 단일 법칙의 물리적 구속은 이 순환적 45) Andromaqu e , Acte I , sc. 1 : Andromaqu e , Acte IV, sc. 1 : B 賊 n ice, Acte I , sc. 4 : Ph idre , Acte I , sc. 3 :

시간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 시간이 없다 〉 46)는 인물들의 심리적 긴박감으로 전 O] 된다.

46) Baja z et, Acte I II , sc. s, vers 1117 :

이 재현 속에서 라신의 인물들이 다시 확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 의 속성에서 드러났듯이 공존의 불가피성과 그 고통이다. 보았고 사랑하게 되 었고 그래서 다시 볼 수밖에 없는 관계, 죽음에 의해서만 풀려날 수 있는 집요 한 집착. 오직 정념 자체의 본질로부터 갈등과 파국의 논리적 전개를 끌어내는 라산의 극에서 무대는 더 이상 어떤 개별적 장소일 필요가 없다. 다시 보지 않 을 수 없는 타자가 함께 있는 곳,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인력으로 인물을 끌 어들이는 곳, 관계 속에 연루된 자들이 만나 그 관계를 확인하는 곳, 그곳이 무대이다. 〈 장님처럼 자기를 이끄는 운명에 순종하여 〉 47) 인물들은 정념이 유인 하는 곳으로 들어온다. 그러므로 무대의 폐쇄성, 장소의 단일 또한 인물들의 심리 자체의 폐쇄성에 부응한다.

47) Andromaqu e , Ac te I , sc. 1, vers 98 :

4 8) B 賊 n ic e, Prefa c e : <… ; mais c e qui m 'en plu davanta g e , c'est que je le trou vai extr ~m ement sim p le . II y avait long tem p s que je v oulai s e ssaye r si je p ou rrai s f aire une trag e d ie a vec cett e s im p licite d'acti on qui a ete si f ort du goa t d es anci en s.>

사건의 단일은 시간 장소의 단일 법칙과 함께 묶여 있으나 실상은 그 둘과 차원을 달리한다. 흔히 이 법칙은 단순한 사건 ac ti ons i m p l~ 요구로 이해되 어 왔고, 『 베레니스 .!) 의 서문 48). .g.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거론되곤 하였다. 그러나 『베레니스』를 제의하면 러신의 작품들에 이러한 요구에 합당한 것은 없다. 죽은 엑토르를 사랑하는 앙드로마크, 그녀를 사랑하는 피뤼스, 그 를 사랑하는 에르미온느, 그녀를 사랑하는 오레스트의 이야기로 요약될 수 있 는 『앙드로마크』 를 예로 들 때, 사건의 단일성은 복잡하게 얽힌 사건들, 관계 들 사이의 곽 짜여전 종속 관계로부터 획득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긴 고리 안게 들어 있는 인물들 각자는 모두 결단의 주체자들이면서 동시에 타인의 결

단에 종속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같은 긴박함 속에서 같은 높이의 고 뇌를 가지고 같은 절망을 토로하는 인물들의 대시를 듣는다. 주인공이 누구인 지 누가 가장 비극적 인물인지 말할 수 없는 이 균등성, 불필요한 인물도 불필 요한 사건도 전무한 긴밀한 인간 관계, 매순간 정황과 분위기의 균질성, 이것 으로 라신 비극의 사건의 일체성이 획득되는 것이다. 필연으로 화한 규약둘의 준수 속에서 라신의 극은 최고조의 진실다움을- 얻어 낸다. 이 말은 그의 극의 진실디움이 보편적 수준에서의 전실다움이 아니라는 뜻이다. 〈코 르네유는 우리가 되어야만 할 인간을 그렸고 라신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그렸다〉 49) 는 라 브루이예르 La Bruye r~ 구절은 라신은 인물이 보여 주는 인간 실존의 보편성을 이야기한 것이지 라신이 평범한 인간을 그렸다는 뜻은 아니다. 일상적 우연이나 사소한 곡철을 배제한 지극히 절제된 극의 줄거 리는 텐느의 말처럼 〈추상화 〉 의 협의를 받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극도로 고양 된 감정과 극단적인 혼란 속에서도 가차없이 행하여지는 인물들의 가혹한 자기 분석에 대해, 그리고 정념의 원칙과 인물 간의 관계의 양상에 따라 한치의 오 차도 없이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의 논리적 구조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라신은 바로 이런 것을 통해 인간 영혼의 어두운 맹목성을, 인간이라는 모순을, 인간 스스로 원하지 않았으나 피할 수 없는 숙명의 가~근할 지배를 이 해 가능한 것으로, 진실디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그 러므로 〈이성에 따라 그린다冷근 고전주의의 또 하나의 강령은 이성적 인간을 그려 보이거나 이성적 태도를 권유하는 교화적 의도에서가 아니라, 혼돈의 덩 어리와도 감은 정념에 대한, 그리고 모순 그 자체인 인간과 그의 삶의 조건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창조로 실현되는 것이다.

49) La Bruy~ r e, Caracter e s, Gallim a rd, 1975, 3~.

라신의 인간학에서 인간에 대한 그의 통찰의 깊이를, 내용과 형식 사이의 완 벽한 조화에서 예술가로서의 장인디움을 확인하였다면 이제 우리는 시인으로서

의 라신울 말해야 한다. 〈 2000 단어의 작가. 〉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장황한 수다를 허용하지 않는 고전적 정신이 지향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기 서 보아야 할 것은 언어의 빈곤이 아니라 그 제한된 언어 속에서 그가 모두 다 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숙명적 사랑에 사로잡힌 순간을 서술하는 페드르 의 대사를보라. 나는 그를 보았고, 그를 보자 붉어졌고, 창백해졌다. 나는 내 온몸이 얼어붙고 불타 오르는 것을 느꼈다. 50) ― r 페드르』 1 막 젓J

50)

꾸밈도, 설명도, 거창한 단어도, 나아가 특별히 시적인 단어도 없는 이 문장 에서 말하여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뿐만 아니라 어떤 표현이 숙명과 마 주친 인간의 공포를, 정념의 제어할 수 없는 끓어오름을, 그 앞에서의 혼란을, 인간이라는 모순적 존재를 예시하는 육체의 이중적 반응을 이보다 더 잘 나타 낼 수 있겠는가(불어의 단순 과거가 갖는 짧게 끊기는 i의 음색과, 쉼표로 나뉘어 끊 긴 문장의 헐떡이는 효과는 번역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 러신 언어의 아름다움 은 그러나 이러한 명정한 표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혼의 비밀을 토로하는 대화 속의 이러한 명징함과 더불어, 정념에 휩싸인 인물이 군왕의 위엄조차 벗 어던지고 쏟아내는 자제력을 상실한 광폭한 대사들, 짧게 되받아치는 두슈 t ouche( 펜싱에서의 찌르기) 같은 반어법들, 고독과 회한에 휩싸여 잃어버린 평 안을 그리워하거나 비참한 현실을 지우며 착란과 환상 속에서 불러내는 행복의 이미지들…… 요약하여 불타는 기하학이라고 불리었던 파스칼의 냉철한 열렬

함, 촌철살인하는 라로슈푸코의 예리함, 억제된 고통을 토로하는 라파예트 부 인의 숨죽인 신음기 모두 담긴 시, 그것이 라신의 언어이다. 고전주의의 완성자 라신의 예술은 그 인간학에만도, 그 형식미에만도, 그의 시적 언어에만도 있지 않다. 그것은 진실과 미가 만나는 극점에서 그것을 보편 성으로 전달하는 섬세하고 절제된 언어, 그 삼자의 완벽한 결합에 있는 것이다. 3 몰리에르 수많은 문학사 • 연극사가 보여주고 있듯이 프랑스의 모든 희극적 전통은 몰 리에르 Mo li ere{l622-1673) 에게로 흘러들어 가서 몰리에르로부터 새롭게 홀러 나온다. 그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희극적 유산울 흡수하여 그것을 근대적으로 재창조하기에 성공한, 그리하여 오늘닐에도 여전히 그 현재성을 잃지 않고 있 는 희극의 가장 높은 봉우리임에 틀림없다. 이미 그의 당대에 〈 웃음의 신 〉 51 ) 이 라 찬양받았고 브왈로의 『 시학 L'A rt p oe tiq ue 』 에 희극의 모범으로 새겨졌던 몰 리에르의 예술적 승리는 그러나 단순한 천재성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12 년간의 긴 유랑극단 생활을 통한 연극적 수련을 거쳐 파리로 입성했을 때, 그가 내세 운 희극은 당시의 규범주의자들의 요구에 배치되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고상한 웃음의 요구에 대해서는 폭발적인 笑劇의 웃음을, 로마네스크한 줄거리 의 요구에 대해서는 당대 풍속에 대한 가차없는 풍지를, 오락으로서의 희극 개 념에 대해서는 현실 참여로서의 희극 개념을 작품의 실제를 통해 보여주었고, 그래서 그는 더욱 어려운 역경의 연속 속에 빠져들었었다. 적대적 연극인들의 끝없는 질시, 현학적 문사들의 이론적 시비, 종교계의 도덕적 규탄은 끝없이 지속되어 , 그는 언제나 논쟁과 모함의 와중에 놓여 있었다. 52) 그러한 상황 속

51) Robin e t, Lett re en vers, 1666. 10. 31.

52) r쓴 광스런 재녀들 』 이후 몰리에르 작품을 둘러싼 시비는 끝이 없었다. 특히 『 야서들

의 학교』 를 둘러싼 논쟁은 〈 희극 전쟁 〉 이라 불릴 정도로 격렬한 것이었고, 이어지는 『타 르뒤프 J 시비는 결국 이 작품을 5 년간이나 공연치 못하도록 만들었다.

에서 그는 자신이 선택한 예술의 지향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고, 현실의 벽을 뚫고 나가는 예술적 방법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면서 그것을 통한 자기 반성과 갱신의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작품들은 바로 그런 삶의 형상물들이기에 일회적인 천재성을 뛰어넘는 풍요와 깊이를 역설적으로 획득하고 있는지도 모 른다. 본명이 장-바티스트 포클랭J ean-Ba pti s t e Po q ue li n 인 몰리에르의 생애는 이렇듯 한마디로 연극적 순교의 삶이었다. 한 부유한 부르주아 가정의 맏아들 로 태어나 궁정 실내 장식업자로서의 보장된 삶을 돌연히 포기하고 연극인의 길을 택하는 스물한 살 때의 회심 이후, 그의 삶은 오로지 연국만을 위해서 연 국만에 의해서 존재한다. 그는 동시대의 코르네유나 라신처럼 단순한 극작가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아카데미 회원이 되는 것도 가능한 부르주아 문사가 아니 었다. 그는 사회적 지위가 가져다 주는 혜택을 포기하면서까지, 기꺼이 12 년간 의 유랑국단 생활을 감수하며 천한 신분의 배우로 거듭나고자 했으며, 또한 연 출가였고 극단 경영인이었다. 삶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연극이었다 할 수 있는 그에게는 죽음마저도 연극적일 것이었다. 사실 그의 죽음만큼 몰리에르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없다. 오랜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그 자신이 쓰 고 연출한 마지막 작품 『 상상병 환자 Le Malade imagi na i re』 (1673) 에 직접 출 연해 연기하던 중 최후의 발작을 일으켰다. 그는 첫 몇 번의 발작을 즉흥적 연 기로 변용시키며 버틴다. 그러나 기어이 무대 위에 쓰러져 실려나가고, 그날 밤 많은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둔다. 불경한 배우라는 이유로 처음에 교회 당국 에 의해 교회 묘지에 매장되는 것이 거부되었으나, 왕의 도움으로 밤에 종교적 의식 없이 매장한다는 조건으로 그는 생-조세프 묘지에 묻힌다. 그가 연극에 두신한 지 30 년이 되는 해였다.

그 30 년간의 순교적 연극인의 삶을 가능케 한 스물한 살 때의 회심이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오늘날 전기적으로 해명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당시 부르주 아 계급의 윤리로 보아 패륜에 가까웠던 아 회심은 이후의 몰리에르의 창조적 여정 속에서 그가 취하는 기본적 태도를 설명해 준다. 53) 그것은 그가 그의 작 품들을 통해 드러낼 인간학이 부르주아 계급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부르주 아 계급을 벗어나는 방향으로 전개되리라는 것이다. 청년기에 형성되는 이 의 존과 일탈의 동시적 움직임, 정신적 구도는 비단 부르주아 계급과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루이 14 세에게 보호를 요청하고 그에게 의존할 때에도 그는 왕의 지도적 이념에 전적으로 동화되지 않으며, 극장 입석의 하층민들에 게 자기의 정당성을 호소할 때에도 그는 그들의 취향에만 아부하지는 않는다. 그는 모든 계급과 친화를 맺고 싶어했지만 어떤 계급과도 완전히 동화되지 않 는다• 그는 모든 계급의 경계선상에 자리집았던, 독자적인 예의적 개인으로서 의 예술가였고, 그래서 오히려 모든 계급을 함께 웃게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 다. 그 경계선상에서 그는 언제나 상대적인 눈으로 이쪽에서 저쪽을, 저쪽에서 이쪽을 견주어보며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제 3 의 지향점을 추구하였다. 이로써 그는 그의 시대와 인간을 오히려 총체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기에 이르를 뿐만 아니라 이 총체적 비전을 통해 한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독창성을 획득하는 것 0] 다.

53) 모롱 Charles Mauron- g.. 이 전기적 사실로부터 몰리에르의 〈 개인적 신화녔卜 그려낸다 (Cf. Charles Mauron, Des meta ph ores obsedente s au my the per sonel, Jos e Corti, 1962) .

그런 의미에서, 그의 독창성 • 위대성은 모든 것을 절대적 가치 체계로 환원 시키고 그것에 맞춰 재단하려 했던 절대왕정 시대에 전정한 의미에서의 상대주 의를, 상대주의의 총체성을 예술적으로 구현한 데 있었다 할 수 있다. 54) 사실,

54) 그렇게 불 때 몰리에르는 당대의 모랄리스트들과 같은 핏줄에 속한다. 그러나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그는 상대주의적 관접둘을 하나의 전체 속의 부분으로 구조화한다는 점에 서 고전주의적 정신에 다른 한 핏줄을 대고 있다.

모든 희극성은 상대주의 속에 있다. 베르그송 Ber g son 이나 구이에 Gouh i er 같은 논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웃음은 대상과 거리를 둔 상대적 시선 속에서 터쳐나온다. 가령 어떤 사람이 얼굴을 찡그릴 때, 그렇게 얼굴을 찡그리게 된 사정을 헤아리고 그 마음에 공감한다면 우리의 얼굴은 함께 찡그려질 것이다. 반대로 그 상대의 고통을 다른 관점에서 무심하게 바라보면 그 찡그린 표정은 우스꽝스러운 것아 된다. 이렇듯 웃음의 본질이 상대주의에 있다는 것을 깨우 치면 너무도 당연할 수 있는 몰리에르 희극의 참의미를 어쩌면 우리는 너우도 오래 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볼츠 Vol t z는 몰리에르 작품의 교훈_一예 술의 목적은 〈즐 겁게 하면서 가르치는p la i re et ins tr u ir e > 데 있다는 고전주의 적 관점에서의 교훈 55)- 이 작중의 〈 추론가 ra i sonneur )1출의 입을 통해 전해 전다는 오랜 선입관을 비판하면서, 〈 작품의 모랄은 두 인물(주인공과 추론가)의 대립으로부터 끌어내질 수 있는 것이지, 어느 한쪽의 진술 속에 담겨 있는 것 이 아니다 〉 56) 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옳다. 그의 작품의 참된 의마는 무엇보다도 〈 관계 〉 속에, 〈 관계화된 구조 〉 속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연극은, 특히 희극은 그 관계를 보여주는 가장 효과적인 예술 양식임에 틀림없 다.

55) Cf Rene Bray, L a Formatio n de la doctr ine clas siqu e, Niz e t, 1 945, 63-7 礎

56) Pie r re Voltz , La ComMi e, A . Coli n, 1964, 7~.

몰리에르는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자신이 추구하는 주제에 가장 적절한 형식을 부여하는 것으로 그의 위대성을 완성한다. 몰리에르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전기적 사실을 근거로 잡는 데는 각별히 세심한 주의를 요한다. 복 잡한 사회적 알력 관계 속에서 한 소공동체인 극단을 이끌었던 그는 사회적 태 도에 있어 그의 내심을 잘 드러내지 않는 조심스러움을 지켜왔고, 편지나 일기 같은 직접적 자료들도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 아내들의 학교 』 논쟁에서 보여지듯, 그는 논쟁에 대한 대답조차도 작품을 통해 하려 했던 의몫

의 예술가였다. 〈모 든 연구와 응용이 오로지 연국만을 위해서였다 〉 5 7)고 지적될 정도로 두철한 이 예술가에게는 작품 그 자체가 바로 세계를 향한 그의 발언이 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흔히 정치적 위장의 방편이기 십상이었던, 그나마 많지 도 않은 작품 서문이나 이론적인 글들을 참조할 때에도 그것을 곧 그의 전의로 파악하는 것은 위험하다. 58) 모든 작가들의 이해가 궁극적으로는 그의 작품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특히나 몰리에르의 경우는 곧바로 그의 작품들 속에 들어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런 전제를 염두에 둘 때, 〈 관 계 〉 의 문제에서 몰리에르 이해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우리에게 가장 먼저 주목 되는 것 역시 작품들 속의 인물 관계이다. 그중에서도 이미 인용한 볼츠가 암 시했듯이 주인공과 추론가의 관계는 그 이해의 핵심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절의 첫머리에서 그의 작품들을 그가 처한 사회적 조건들에 대한 끝없는 투쟁 과 자기 갱신의 산물로 보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작품들 속의 인물 관계 역시 끝없는 변모 과정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변모 혹은 운동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유용한 척도가 되는 존재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여러 작품들 에 되풀이 등장하는 독특한 몰리에르적 전형으로서의 스가나렐 유형의 인물과 그 옆에 병행하여 등장하는 추론가가 바로 그들이다.

57) La Grang e , Prefa c e des Oeuvres de Mon sieu r de Molier e , 16s2.

58) Cf Hen ri Peyr e, Qu'e st- c e que le clas sicisme , Niz e t, 1964, 121 쪽.

스가나렐 S g anarel 이란 이름은 몰리에르의 여러 작품에 두루 편재해 있는 이 름으로서, 몰리에르 연구가들은 다른 이름을- 가진 주요 등정인물들도 한 계열 의 유형으로 취급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59) 가령 『 아내들의 학교 L 'E cole des fe mmes』 의 아르눌프, 『 타르튀프 Le Ta rt uf fe 』 의 오르공, 『부르주아 귀족 Le Bourge o is g en ti lhomme 』 의 쥬르댕 등등도 그 성격상 하나의 공통분모를 지니 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통상 매우 다혈질적으로 화를 잘 내면서도 정이 많

59) Cf J.-M . Pelouse, Les Meta m orph o ses de Sga n arelle in Revue d'His toi re Litt era ir e de la France, sep. -d ec., 1 972.

고 저 나름으로는 사랑을 갈망하는 그런 인물들인데, 자신의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내적으로는 자학적이고 의적으로는 가학적인 이중적 성격을 소유하고 있 다. 그 이중적 성격을 형성하는 강박관념의 근거는 결벽증과 피해의식이다. 다 시 말해, 그 강박관념은 대타관계의 소산으로, 특히 그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 하는 것을 남들에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타인들의 눈에는 기괴하게만 보이는 비정상적 행위로 이들을 몰고 가는 것이다. 초기의 작품들에서는 소심 함과 우스꽝스러움만을 보여주던 이들이 몰리에르의 희극의 발전과정 속에서 점차 폭압적 인물로 화하며 그 비정상성을 갈수록 심하게 드러내 보인다. 이것 은 그들이 느끼는 대타관계의 균열이 더욱 심화되어 감을 뜻한다. 가령 『 타르 튀프 』 의 오르공이, 아 ! 나는 너희들 모두와 맞서겠다 , 그리고 너희들에게 알게 할 거다, 내게 복종해야만 하고 내가 곧 주인이라는 것을. 60) ―― 『 타르뒤프』 2 막 巧J-

60)

라고 의치는 것은 역으로 이 인물이 타인들――넓은 의미의 사회――과의 관계에 서 돌이키기 힘든 괴리 상태에 처해 있음울 알게 한다. 도대체 무엇이 이 인물들을 그렇게 몰고 가는 것일까. 그들의 반대편에서 사회적 정상성 , 이른바 〈 양식 冷? 대변하고 있는 인물들이 추 론가들기다. 이 말은 우선, 그들이 자신들의 언술 속에서 끝없이 〈이성 ra i son)% 의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데카르트적 의미에서의 합목적적 이성이 아니라 일반적 상식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뜻한다. 그들이 가르치는 것이 그것이었고, 『인간형오자 Le Mi san t hrop e,』의 필렝트가 알세스트에게 요구하는 것도 그것이다.

그러나 점차로 드러나는 그 요구의 문제점은 그 중용이란 것인 〈 의양상의 예절 〉 61) 이상의 알맹이가 될 가치기준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 인간형오 자』 의 필렝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분명해지는 것이지만 , 이들이 내세우는 예절 (또 는적합성)이란 , 구세대의 덕목들의 그 강한 완고함은 우리 시대의 일반적 관습에 너무 거슬리는 것이오. 고집 피우지 말고 시대에 순응하도록 해야 하오. 62) 一_ r 인간형오자』 1 막 1 장

61) Le Mis an th ro p e, A cte I , sc . 1, vers 66 :

62)

에서 읽히듯, 단순히 관례를 따르는 순응주의로 환원된다. 더구나 세상이 잘못 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대세라면 따라야 하며 그것을 고치려는 시도야말로 〈더 비길 데 없는 광기〉 63) 라고 오히려 반격하기까지 한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 가 순응주의를 넘어 허무주의에 가닿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 그들이 〈 교양인 〉 의 이상으로부터 너무 멀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과 맞부닥치게 된다. 몰리에 르 희극의 발전과정 속에서, 고전주의 사회의 양식을 대변한다고 알려졌던 이 인물들이 걷수록 인간과 사회에 대한 비관적 인식을 드러낸다는 사실은 의미심 장하다. 도대체 무엇이 이 인물들을 그렇게 몰아가는 것일까.

63) Le Mis an th r op e, Acte l , sc. 1, vers 157- e :

우리는 두 인물군에 대해서 동일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 의문을 어느 한쪽 의 눈으로 다른 쪽을 향해 일방적으로 적용시키지 않고 동시에 떠올려 그들의 관계 속에서 총체적으로 탐색게 하는 것 __- 그것이야말로 몰리에르 희극의 참 디운 새로움이자 역사적 승리인지도 모른다. 몰리에르 희극의 새로움은 형태상 으로는 스가나렐 유형의 인물들을 주인공급의 인물로 내세운다는 그 상황 설정 에서부터 바롯된다. 그런데 이 형식적인 새로움이 내용적 새로움과 긴밀히 연 결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전통적인 희극에서 이런 인물들은 정당한 사랑 의 방해자 역할을 떠맡는 극중의 보조적 기능에 머물러 있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몰리에르는 바로 이 방해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코페르니쿠스적 혁 명 〉 이라 일컬어지는 변화를 몰고 온다 .64) 이 혁신이 중요성을 지니는 까닭은, 그러한 극적 장치가 전통적으로 부수적인 악당 혹은 미치광이 역이었던 이 인 물 유형을 중심에 떠올려 그의 내면을 동시에 조명함으로써, 그가 악당이나 미 치광이라면 과연 그가 왜 그런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어떤 방식으~ 한 사회 속에 존재하고 취급받는가를 주제화시켜 준다는 데 있다. 모든 삶의 양태 가 사회적 존재구속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주제화는 필연적으로 사 회의 구조적 문제점들을 끌어들인다. 다시 말해, 그들이 그렇게 된 데 대한 책 임을 사회가 나누어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때 추론가들은 그 사회제도를 이념 적으로 대변하는 인물들로서, 그 사회적 일탈자들을 살피고 그들에 대해 어떻 게 대응해야 하는가를 탐색하는 동시에, 그 과정을 통해 사회에 대한 반성을 행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64) Cf Rog er G 떠 chemerre, La Comedie c las siqu e en France, P. U. F., 1978, 쪽.

이렇게 볼 때, 몰리에르의 작품들은 매우 현대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예의 적 개인과 사회의 대립적 상황 설정을 통해 〈도덕적 실험〉 65)을 행한 선구적 예 술가로 평가될 수 있다. 이러한 평가는 이때 말해지는 도덕적 실험이 단순한

65) 리오 로웬탈 Leo Lowenth a l, 『문학과 인간상 L ite ra ture and the image of man』 , 유 종호 옮김, 이화여대 출판부, 1984, 182 쪽.

시대적 윤리의 처원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보다 근원적인 욕망과 그것 울 제어하는 사회적 제도 사이의 갈등과 균형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보강된다. 몰리에르가 점차로 구체화하고 심화시켜 간 그 주제를 당시의 용어 룰 서용하여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그것은 〈 본성 〉 과 〈 자연 〉 의 이중적 의미를 지닌 〈 na t ure 〉 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일찍이 라 퐁텐 La Fon t a i n 썩본 몰리에르 의 작품을 보고 〈 이제 한 발자국도 자연을 떠나서는 안 된다 〉 66)고 했었고, 몰 리에르 자신도 『 아내들의 학교』 논쟁 중에 씌어진 『 아내들의 학교 비판 』 속에서 〈 자연에 따라 그려야만 한다 〉 67) 는 의견을 간접적으로 개진했었다. 그러나 몰리 에르의 이 진술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그 자연 혹은 본성이란 어휘가 당시에는 고전주의적 가치판 단이 개입된 함의를 담고 있었는 데 반해 ,68) 몰리에르는 거기서 과감하게 그 고전주의적 개념을 떼어내고 거의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그대로의 의미로 사 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말이다. 몰리에르에게 있어 이 어휘는 이상적 모델로 서의 자연이나 본성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연, 적나라한 동물적 본능으로 서의 본성이라는 함의를 띠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 부여는 가령 『 인간 형오자』 의 한구절,

66) La Fonta ine , La Premi ere des Ftic h e w:, 1661 :

67) La Cri tiqu e de l'E c ole des fem mes, sc. 6 :

그렇소, 나는 당신의 마음이 규탄하는 그 잘못들을 인간적 본성에 결합되어 있는 악으로. 보오. 그래서 내 정신은, 악랄하고 부당하고 이기적인 인간을본다고해서, 요컨대, 살육에 굶주린 독수리나 악랄한 짓을 하는 원숭이, 미쳐 날뛰는 이리들을 보는 것보다 더 불쾌해지지는 않는 것이오. 69) —『인간형오자』 1 막 1 장

68) Cf. Hen ri Benac, Le clas sicisme , Hachett e, 85-9~.

69)

같은 곳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이제 확실한 것은 몰리에르 작품의 주요 주인 공들인 현실 일탈지들이 대개는 그런 원초적 본성의 다양한 화신들이라는 것이 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대로 모든 것을 관계화된 구조 속에서 형상화하는 몰 리에르의 탁월한 균형감각은 그런 자연 혹은 본성을 단순히 제시하는 것에 멈 추지 않는다. 『 돈 주안』이 명증하게 보여주듯이, 인간은 그러한 본성만으로는 살 수가 없다. 인간은 동시에 사회적 동물이다. 공동체적 삶은 불가피하게 본 성적 욕망을 제한한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이 그려내는 것은 사회적 제도나 이 념에 의해 가려지고 왜곡된 본성, 사회 제도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다스려지지 않고 솟아니는 본성이다. 한 예로 초기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며 격렬한 논란 의 대상이 되었던 『 아내들의 학교 』 를 보자. 〈 오쟁이 진 남자 〉 의 강박관념을 심 하게 지니고 있는 아르놀프는 세 살짜리 갓난아이를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순수 한 영혼의 상태로 키워내 자신의 아내를 삼으려는 허황된 꿈을 실천에 옮긴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보다 더 잘 나의 아내를 만들어낼 수 없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나는 그녀의 영혼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녀는 내 손 안에 놓인 한중의 밀랍과 같으니, 나는 내 마음에 드는 형체를 그녀에게 부여할 수 있으리라. 70 ) ― 『 0 回들의 학교』 3 막 3 장

70)

이때의 아르눌프는 오직 자기의 욕밍에만 사로잡힌 나머지, 아녜스 역시 하 나의 독립된 존재이자 영혼이고 두 사람의 결혼은 사회 속에서 정당성을 인정 받아야 한다는 점을 전혀 고려에 넣지 않고 있다. 사회는 당연히 그를 미치광 이 취급하고, 따라서 점점 고립되어 가는 것은 아르놀프 자신이다. 게다가 순 수하게 성장한 아녜스는 그 순수한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한 청년을 사랑하게 된 다. 그리하여 아르놀프는 결과적으로 이중적인 보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 러나 다소 비극적이기까지 한 이 작품의 결말 부분에서 우리가 만나는 문제는 오히려 그 보복의 타당성과 관련된다. 순수성을 지향하는 아르놀프의 욕망 자 체를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는 그 욕망을 사회적 툴 안에 적 절히 적응시키지 못할 뿐이다. 아니, 그는 그 적응 자체를 거부한다. 아르놀프 는 끝없이 사회의 타락을 공격한다. 도대체 사회가 얼마나 타락해 있었길래 아 르놀프에게 그런 지독한 강박관념이 생겨난 것일까. 이 물음으로부터, 그렇다 면 사회의 해악을 제거하면서 인간의 본성이 가능한 한 자유롭게 발현될 수 있 는 공동체적 삶은 가능한가라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가 떠오른다. 30 편에 가까 운 몰리에르의 작품들은 이 물음을 밑바닥에 깔고 홀러가는 하나의 강줄기와도 같다. 유토피아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완전한 대답이 불가능한 그 물음을 이전 의 누구보다도 뚜렷이 형상화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그 강줄기는 역사적 지도 위에서 지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근원적 물음에 대한 탐구의 궤적으로서의 몰리에르 희극은 일반적으 로 그 형태상 크게 갈리는 3 단계로 나누어진다. 이것은 초기의 〈소극〉의 단계, 중기의 〈대희극〉의 단계, 후기의 〈발레-희극 comed i e-balle t〉의 단계를 지칭 하는 것으로서, 이따금 그 형태들이 겹쳐져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대세 의 흐름은 위와 갇은 구분을 정당화시켜 준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형식적 구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제기한 물음에 대한 모색과 상응한다는 점에서 내용적 구분이라 할 수 있다. 그 형태들은 실상 관중들에게 무엇을 어 떻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국적 효과의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고전주의가 이상으로 삼은 고상한 희극에 대해 몰리에르가 과감히 소극을 둘 고 나온 것은 당대의 적대자들이 비난했듯이 단순히 천박한 인기 전술 때문이 라고만은 보기 어렵다. 현실의 문제를 직접 치고 들어가는 이 폭발적 웃음의 양식은 비속성을 통해 오히려 허위에 찬 사회적 관습을 깨뜨리고 무거운 이성 의 굴레에서 정신을 해방시키는 작용을 한다. 71) 그럼으로써 그는 현실 속의 모 든 관중의 심부로부터 본성의 존재를 일깨우려 했던 것이다. 짧고 간결한 직선 적인 초기작품들 속에 뚜렷한 이 소극 양식은 그가 보다 본격적으로 그 본성과 사회의 관계를 탐구하기 위해 대희극의 양식을 취할 때에도 사라지는 것이 아 니라 새롭게 융합된다 .72) 초기에서 중기로의 전환점을 이루는 『 아내들의 학교 』 는 그래서 〈 희극 전쟁 〉 에 휩싸이게 되지만, 또한 그래서 기존의 대희극을 혁신 시키는 힘을 얻는다. 유명한 『 타르튀프 .!I , 『 인간형오자 』 등의 걸작은 바로 그 연장선상에서 창조된다. 여전히 그 본성이 관중의 내부로부터 일깨워지게 하 되, 그것을 보다 넓게 사회화된 지적 구도 속에서 성찰케 하려는 것이 그만의 독창적인 대희극 양식이다• 그 성찰의 결과는 나 자신 속에도 도사리고 있는 그 본성적 욕망의 화신인 예의적 개인을 과연 무턱대고 조롱할 수 있는가, 그 를 그렇게 만든 사회는 과연 정당한가라는 반성이다. 그 반성을 통해 사회의 억압적 성격을 완화시키고 본성의 해방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할 필요성이 부 각될 때, 후기의 발레-희극이 떠오른다. 더 넓게는 축제-희극이라 말할 수 있 는 이 양식은 축제와 같은 문화적 장치를 본성과 사회적 제도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 한 방식으로 제시해 주는 것임과 아울러, 그것이 바로 희극과 같은 예술이 맡아야 할 몫임을 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71) 소극의 효과에 대한 일반론은 다음 책을 불 것 : 제시카 데이비스, 『 소극J , 홍기창 옮 김, 서울대 출판부 , 1985.

72) Cf Gusta v e Lanson, His toir e de la litte ra tu re f ran ais e, Hachett e, 1951, 51 훅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논의를 정리하려는 우리 앞에 한 가지 근본적인 의문 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몰리에르는 반고전주의적 작가였는가. 이미 확인한 바

와 같이 몰리에르가 문제삼은 것은 당대의 주도적 이념이었던 이성도 신성도 아닌 본성 (자연)이었다. 분명 그롤 사로잡고 있는 주제는 〈 이겨낼 수 없는 영 원한 크라토스-자연 〉 73) 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가 그 본성을 어떻게 보고 다루었느냐에 주목해야 한다. 그가 본성에 주목한 것은 그것이 인간을 이 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조건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지, 본성에만 의존한 삶을 살 자고 주장하려 한 때문은 아니다. 물론 그는 인간이 이성의 정수만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소박한 고전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 이성이 모든 것을 지배 해야 한다고 믿 〉 74) 었지만, 이성만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오히려 본성에 더 깊 이 좌우되는 인간을 본다. 그러나 그 본성과 사회의 갈등을 관계화된 구조 속 에 균형잡힌 상대주의적 눈으로 다룬 그의 방법은 이성적이다. 그의 감성은 본 성으로 쏠려갔지만, 그의 지성은 이성을 무기로 삼았던 것이다. 문학사 • 연극 사가 그롤 〈성격 희극 〉 의 창조자로 규정했을 때, 75) 그 성격은 본성의 탐구로부 터 나온 것이다. 이 성격이 초역사적인 하나의 전형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영 원한 본질을 추구하는 고전주의 정신에 그가 핏줄을 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73) Jac qu e s Arnavon, Morale de Molier e , Ed. Un ive rselles, 1945, 112 쪽.

74} Lett re s ur la comedie d e l'Imp os te u r, 1667.

75) Cf, Gu ich emerre, 앞의 책, 52 쪽.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의 절대성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그 는 동시에 반고전주의적 또는 탈고전주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상대주 의적 정신은 이성도 인간 이해의 공간 속에서 하나의 상대적 지위만을 지니는 것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그는 영원한 전형을 창조했지만 또한 그 전형이 하나 의 추상화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문학사 • 연극사가 그를 〈 성격 희극 〉 의 창시 자인 동시에 〈풍속 희극冷t 예고한 작가로 평가했을 때 , 76)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몰리에르가 그 전형들을 구체적 상황 속에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구체화를 위해 그는 매우 사실주의적 기법을 동원했는데,

76) Cf. 위의 책 , %쪽.

이것은 이미 그의 예술이 다음 시대로 뻗쳐나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생생한 정황 속에 살아 움직이는 그의 전형적 인물상을 통해 3 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 우리의 이성을가지고. 스가나렐은 기괴하다. 그러나 그는 우리와 아주 가깝다. 그는 우리 자신이다. 그 는, 우리가 안간힘을 기울여 숨기려는 우리의 한 부분, 가련하고 수치스런 부분, 우 리의 우스꽝스러움과 바굴함과 결함의 부분인 것이다. 77) 막이 내리고 웃음이 잦아든 객석에서 관중이 되새기는 몰리에르 희극의 의미 를 앙트완 아당의 이 말처럼 담담히 지적하는 구절도 드물다. 77) Anto i n e Adam, His toir e de la litte ra tu re fran fa i se au XVII~ siec /e , Ed. Mond iale s, 1962, t. 3, 26~.

결론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 우리는 꽤나 먼 길을 걸어왔 다. 우리는 이 문학의 발전의 과정이 그 완성에 매우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는 인식하에 그 기원으로까지 거슬러 울라갔으며 전세기의 위마니슴 문학에서부터 첫 발을 내딛었다. 플레이아드에서 고전주의에 이르는, 1 세기가 넘는 기나긴 그리고 무한히 복잡한 역사적 변전 속에서 펼쳐진 문학적 모험들을 그 온갖 다 양성과 복합성 가운데 추적하는 것은 그 자체 하나의 모험임에 틀림없다. 물론 이 추적이 이 기간의 각각의 문학에 대한 개별적 홍미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의 표적은 고전주의였으며 우리의 변함없는 관심은 이미 뿌려진 고전주의의 씨가 계속되는 세기 속에서 부침하는 각종의 문학들과의 만남을 통 해 어떻게 돋아나서 싹울티우고 마침내 꽃을 피우게 되는가를 조심스럽게 더 듬어보는 데 있었다. 모든 문학은 각기 자신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역사 는 자신의 운명 속에서 교차하는 다른 문학들과의 교환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 이다(이런 현상에 대한 관심은 오늘날 i n t e rt ex tu a lit e 란 이름으로 불리어지는데, 우 리는 이런 현학적 명칭에는 별 관심이 없다).

우리는 또한 이 과정에서 순수히 문학적 범주 안에 갇히기 를 거부했고, 그래 서 이 1 세기에 걷쳐 야기된 역사적 변화, 특히 문화적 상황의 변화에 주목했었 다. 문학은 문학이 누리는 자율성에도 불구하고 시대와 문화의 한 기호임을 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르네상스에서부터 시작하여 종교개혁, 뒤이은 종 교전쟁, 절대왕정의 확립과 이에 따른 정치 • 사회적 변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17 세기 전반기에 걸친 사회적 기류의 변화는 우리의 비상한 관심의 대상 이 되었다. 문학의 사회적 성격이 특별히 두드러지는 고전주의 문학의 경우 이 와 갇은 고찰은 필수적이다. 이에 덧붙여 우리는 이 모든 역사적 변화에 수반 된 정신적 풍토의 변화를 추적하기에 힘썼다. 라블레, 몽테뉴, 데카르트, 뒤이 어 자유사상가들, 파스칼과 장세니스트들에 대해 우리는 그들의 중요성만큼의 비중을할애했다. 고전주의 문학과 관련하여 우리는 먼저 각각의 범주에서 역사적 고칠을 시도 했다. 희곡이라는 장르로 대변되는 고전주의 문학에 접근하기 위해 먼저 희곡 의 역시를 추적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프랑스 고전주의는 정확히 이 희곡의 역 사의 한 순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고전주의 이론에 대해서도 이 관점은 여전 히 유효하다. 이 이론은 하루아침에 몇 사람의 머리 속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 니다. 그것도 형성과 성숙의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밀하자면 이 과정 이 그것을 완성시킨 것이다. 뒤이어 우리는 이 이론 자체에 대해 무척 많은 이 야기를 했다. 어쩌면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중요한 것은 문학 그 자체이지 문 학 이론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주의 이론에 대해 수다를 피웠던 것 은 프랑스 문학사상 그것이 최초의 완벽한 이론체계로 자처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이론은 매우 의식적인 일단의 이론가들에 의해 사전에 완성되었고 문학은 그 이후에야 생산되었으며 그때마다 이 이론적 기준에 따라 저울질되곤 했다. 이론이 이토록 막강한, 거의 전제적인 위력을 발휘했던 적은 문학사상 전무후무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론이 곧 문학은 아니다. 이론은 창조 에 방법을 제공할 뿐이며, 창조가 고유의 힘을 얻는 것은 디른 곳에서이다. 이 론에 대한 고전작가들의 태도는 이를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몇몇

위대한 작가들의 문학세계믈 탐방하는 것으로 우리의 기나긴 여행을 끝맺었다. 이 문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특히 프랑스 문학을 하나의 전체로서 바라 보며 그 안에서 무엇이 이 문학의 (공시적) 본질을 이루고 있는가를 항상 물어 야 할 한 외국학도로서 고전주의 문학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우리는 이 물 음에 답하기 위해 몇 개의 시각을 설정하려 한다. 첫째로, 고전주의 문학은 어느 정도로 근대적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 다. 이것은 프랑스의 근대문학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 문학이 차지하는 위치 를, 죽 이 문학이 갖는 의미를 가늠해 보는 데 있어 매우 유효한 관점이다. 당 대의 문학, 특히 17 세기 전반기의 문학 속에서 이른바 고대파와, 이에 반발한 근대파 사이에 상당한 각축이 있었던 것은 우리가 확인한 바와 같다. 전자가 고대에 전도되어 고대의 정신적 • 예술적 유산을 존중하고 그 원리와 규범에 순 응하는 것을 기본적 입장으로 삼은 데 반해, 후자는 고대와의 모든 인연을 차 단하고 영감과 창조의 자유로움 속에서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에 뿌리박은, 그 리고 이 시대를 위한 문학활동에 전념했다. 이들은 고대와 단절하는 대신 동일 한 취향과 예술적 지향을 가전 이웃의 근대문학들과 깊이 공감했다. 자유분방 한 이 시대의 소설, 격정적이고도 현란한 비희극은 이 근대적 문학의 대표적 장르였으며, 우리는 이를 바로크 미학의 범주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고대파와 근대파와의 대립의 관점에서 볼 때 고전주의 문학은 의견상 고대파 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문학이 고대에 대해 간직했던 숭상의 감정은 풀 레이아드에 못지않았으며 완벽의 모델로 간주된 고대를 모방하는 것은 이 문학 의 변함없는 기본원리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방이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분 별 있는 것임을 강조했고, 바로 이 점에서 이 문학이 고대에 대해 상당한 독립 성을 유지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분별 있는 모방이란 어떤 원리 에 따른 모방울 의미한다. 즉 이 원리가 허용하는 범위내에서의 모방, 선별적 인 모방이며, 이때 중요한 것은 모방이 아니라 원리이다. 우리는 고전주의자들이 고대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다른 모든 범주의 활

동에 있어서 원초적으로 선택했던 이 원리가 무엇인가를 이 자리에서 새삼 거 론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이성 혹은 합리러는 이름의 원칙이며 이것과 더불어 고전주의 문학은 자신의 독자적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근대성을 획득 한다라고 우리는 덧붙이고 싶다. 물론 이 근대성은 방금 언급했던 근대파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말하자면 이 문학은 그 나름의 방식대로 근대적이다. 그 자 신의 독자적인 원리 위에 서 있는 점에서 근대적이고, 또한 그것이 그들만의 것아 아니라 바야흐로 정신적 활동의 새 준거가 될 이 시대의 보편적 원리리는 점에서 근대적이다. 17세 기 말, 고전주의 문학이 이미 쇠퇴의 길로 접어들 무렵 프랑스 문단은 이른바 신구논쟁, 즉 근대파와 고대파와의 논쟁에 휘말려 들어갔다. 많은 고전 주의자들은 고대에 대한 변힘없는 충성심에서 고대파의 편에 섰다. 그들은 자 신들이 문학 속에서 실현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못 이해했던 것일까. 그러나 그 것은 그리 중요하지가 않다. 그들이 매우 깊이 고대에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의식했건 안 했전간에 그들 지신으로서, 그들 자신의 원리에 따라 생각하고 창조했다는 것도 확실하다. 그들은 스스로 고대 파를 자처했을 때 실은 자신도 몰래 근대파였던 것이다. 이 관접의 연장선상에서 다음으로 물어야 할 것은 이 문학이 지신의 시대와 맺은 보다 구체적인 관계에 대해서이다. 우리는 방금 이 문학이 합리성이라는 자신의 철학적 원리로써 독자성과 근대성을 획득하기에 이론 것을 지적했다. 이제 우리는 이 문학이 다른 또 하나의 원리로써 시대와의 밀착 관계를 어떻게 이루게 되었는가를 짚어보려 한다. 이 원리란 다름아닌 〈진실다움〉의 원리이 다. 여기 문제되는 것은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전실한 것으로 인정하 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현실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관련된다. 고전주의자들이 작품 속에서 전실 대신 전실다움을 추구한다고 할 때 그것은 그들이 상대하는 당대의 독자나 관객들의 관념, 죽 인간 현실에 대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 에 스스로를 부합시키는 것과 같다. 보다 구체적으로 당대의 사람들의 취향과

행동 양식과의 일치를 요구하는 이른바 〈 의적 적합성 〉 이 아에 가세함으로써 이 문학과 시대와의 일치는 더욱 확고해진다. 요컨대 진실다움과 적합성의 두 원 리는 고전주의 문학을 당대의 보편적 관념, 현대적 어휘를 빌리자면 이른바 지 배적 이데올로기의 행복한 대변자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고전주의 속에서 실현된 문학과 시대와의 일치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 해야 할 것인가. 사실 문학의 역사 속에서 시대와의 갈등과 불협화~ 한결 빈 번할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문학의 존재양식처럼 보인다. 낭만주의 이후 시인 은 저주받은 존재로 인식되고 반항은 그의 유일한 행동방식이 되어왔다. 그는 일반 대중으로부터 버림받고 자신만의 왕국 속에서 고독한 몽상에 잠기는가 하 면 반체제의 광기 속에 뛰어들기도 했다. 만약 고전주의자들처럼 독자나 관객 울 〈 기쁘게 하기p la i re )i문 꾀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가장 천박한 시인으로 낙 인 찍힐 것이다. 그렇다면, 고전주의 문학은 천박한 문학이란 말인가. 실제로 이 문학이 당대 의 보편적 정서와 관념에 순응함으로써 이른바 순응주의에 빠져들 위험은 상당 히 크다. 이 문학은 모든 새로움과 개인적 독창성을 국도로 경계한다. 그리고 오직 만인에 의해 공인된 것만을 받아들인다. 진정 이 문학이 이렇듯 기존의 관념과 가치들만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추구와 창조라는 문학 의 기본적 기능을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이 이 기본적 기능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아니, 반대로 이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말하고 싶다. 관중을 〈기쁘게 한다冷근 것은 그들에게 아부하는 것과는 다르다. 고전주의자들이 상대 했던 이 관중은 엄선된 관중이며 세련된 심미적 안목과 고도의 지적 판단력을 갖춘 관중이다. 그들을 기쁘게 한다(이 말은 그들을 〈감동시킨다-em ouvo i r 〉라는 말과 갇다)고 말할 때 그 안에는 이들에 대한 작가의 신뢰가 전제되어 있다. 그 둘은 말하자면 이 세련되고 지적인 엘리트와의 공감 속에서 작업한 것이다. 그 러기에 이 공감을 해치는 자들, 사이비 엘리트들에 대한 그들의 비판과 야유는 매서웠다. 이들의 가면을 벗기고 추하고 기만적인 정체를 드러냄으로써 웃음거

리로 삼은 것은 다름아닌 몰리에르였다. 어쨌든, 이 가짜 엘리트까지 기쁘게 할 생각은 그들에게 추호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 공동체 속에서 고전주의자들이 지향한 것 은 단순히 공감을 나누 는 것 이상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최후의 목표는 완성이었으며, 그들은 이미 실현한 완성 위에서 더 큰 완성을 향해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 관중을 기쁘게 한다 〉 라는 그들의 구호가 갖는 진정한 의미는 여기에 있다. 이들은 이 미 고도로 훈련되고 세련된 엘리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엘리트는 보다 큰 완성을 지향하며 작가에게도 그것을 요구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이 요구가 충족되었을 때뿐이다. 작가와 이 관중 사이 의 공감은 실은 완성을 향한 동일한 정열 의의 아무것도 아니다. 완성이란 우 엇인가. 그것은 바꿔 말하면 통합과도 같다. 질서 잡힌 유기적 전체를 구성하 는 것 말이다. 고전주의 문학의 야망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세계를 두명한 통합적 도식으로 재구성하는 것. 이 문학은 자연적 상태의 세계를 불완전하고 혼란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 이 세싱에는 태어나면서 그 관 념의 완성에서 멀어져 있지 않은 어떤 것도 태어나지 않는다 〉!) 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문학의 기본적 인식에 속한다. 그리하여 이 세계의 혼란에 질 서 를 부 여하고 혼미에 두명성을 회복시킴으로써 인지 가능한i n t ell igi ble 지적 구조물 로 전환시키는 의식적 작업이 시작된다. 말하자면 세계를 지적 언어로 번역하 는 작업이다. 여기에 고도의 창조성이 요구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1 ) Rapi n, 앞의 책 :

그리고 그것은 그 시대의 전반적 공감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 시대는 한마디 로 위대한 통합의 시대였다. 정치 • 사회적으로 절대왕정의 정립은 숱한 혼란과 갈등의 연속 끝에 프랑스에 국가적 통일과 안정과 질서를 가져다 주었다. 정신 의 차원에서도 통합의 기반이 오랜 시련 끝에 다져졌다• 위마니슴의 대두와 종 교개혁 운동 이래로 야기된 극심한 정신적 • 영적 갈등은 몽테뉴에 의해 여과되

었고 마침내 데카르트에 의해 사고의 통합이 시도되기에 이르렀다. 고전주의 문학도 이 시대의 통합적 움직임에 당연히 합류한다. 이 문학이 이를 거역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혼란이 극심했던, 격변의 시대 속에서 시대와의 일체감 울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비현실 속에서의 환상과 몽상에 잠겼던 바로크 문학과 는 달리 이 문학은 행복한 시대의 행복한 동반자로서 위대한 통합의 대역사 속 에서 자신의 몫을 담당할 것이다. 이 문학과 시대와의 합치는 비단 프랑스의 고전주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 다. 서기 5 세기 전의 그리스의 고전주의가 그러했고, 오귀스트 황제 시대의 로 마의 고전주의가 그러했다. 이 두 시대가 프랑스의 루이 l 心1 ] 치하에서와 동일 한 정치적 통합, 안정과 질서를 실현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셍트-뵈브 Sain t e - Beuve7} 고전주의를 정의하면서 〈그 시대와 사회적 틀과 사회의 지배 적 원리 및 계층과 완전히 합치되고 조화된 문학 〉 , 그래서 〈 건강하고 활짝 꽃 울 피운 상태의 문학 〉 2) 이라고 말한 것은 음미해 볼 만하다.

2) Sain t e - Beuve, Lundi, t. XII , De la tra dit ion en litte ra tu r e :

다시 한 번 환기하자. 시대와의 합치를 일방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그것을 순 옹주의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고전주의자들은 이 시대의 단 순한 〈 장식가 〉 로 머물지는 않았다. 전정한 창조자로서 그들은 진실에 도전하는 긴장된 탐구를 멈추지 않았으며 그 가운데서 때때로 시대와의 불협화를 나타내 기도 했다. 라 퐁텐은 반드시 〈 사회의 지배적 원리〉와 일치되지는 않았으며, 몰리에르는 한결 과격하게 이에 반발했다. 이들의 작품에 관류하는 지속적인 긴장감은 그들이 시대의 모순을 살았다는 강한 인상을 주고도 남음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트~뵈브의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은 분명히 이 시대의 문학이었고 이 시대와 합치된 문학이었다. 우리는 이 합치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다시 한 번 물으려 한다. 먼저 지적할 것은 그것이 이 시대에 실현된 프랑스의 국가적 영광과 무관하 지 않디는 사실이다. 모든 고전주의가 한 국가의 발전의 어떤 절정기, 위용과 광채로 빛나는 황금시대와 맞물려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프랑스 의 경우 그것은 한결 명백해 보인다. 고전주의자들은 새 왕, 그리고 그의 정권 이 달성한 경이적인 국가적 영광에 민감했으며 이를 찬양하기에 인색하지 않았 다. 루이 14 세는 〈새 오귀스트 황제 〉 , 〈 지상의 최초의 왕 〉 으로 숭상받았고, 그의 군사적 정복과 승리는 열렬한 찬양의 노래를 낳았다. 〈 위대한 왕이여, 당 신이 승리하기를 멈추시오, 아니면 내가 글쓰기를 멈추리다 〉 3) ――이렇게 의친 사람은 브왈로였다. 이것은 단순한 아부가 아니다. 그들은 매우 진지했으며 마 음속 깊이 위대한 국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긍지와 만족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3) Boil ea u, Ep ftre VIII :

셍트-뵈브는 이에 대해 〈자신의 국가의 일원인 것에 만족하는 〉 문학이라고 표현한다. 중요한 것은 고전주의 문학이 이 만족과 긍지로써 명백히 국민적 문 학의 성격을 띠게 된다는 점이다. 고대에 대한 이 문학의 애착은 이 사실에 별 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이 문학이 그 자신의 원리로 고대 를 재해석함으로써 고대에 대한 맹목적 추종에서 벗어났음을· 밝힌 바 있다. 한 편, 이탈리아 및 스페인 문학의 영향이 거론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위 대한 세기의 프랑스 정신을 변화시켰다고는 보기 어렵다. 이 정신은 자신의 독 자성을 온전히 지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배타적이고 오만했다. 특히 영국 문 화에 대한 무관심과 멸시는 놀랄 만하다. 셰익스피어와 밀턴은 고전주의자들에 게는 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았다. 그들은 여행하기를 줄기지도 않았으며, 대부 분 일-드-프랑스(파리를 중심으로 한 지역) 출신이었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이 지역의 풍속과 사고에 젖어 있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고양된 국민적 감정이 흔히 쇼비니슴 chauv i n i sm 혀 1 빠져

드는 것을 본다. 그리고 프랑스 고전주의의 경우 그렇게 될 위험성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우리는 이 문학이 시대와의 행복한 합치 를 이루어낸 국민적 문학이라는 것을 방금 확인했다. 위대한 시대와 완전히 조 화를 이룬 위대한 문학으로서의 긍지와 만족도 확인했다. 그 가운데 완성을 향 한 미학적 야망이 있고, 그것을 성취할 방법적 처방이 있다. 이 문학은 말하자 면 그 자체로서 완성되고 충족된 문학이다. 이 문학은 의부로부터의 그 어떤 관여도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묻는다-이 긍지와 충족감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라고. 생트-뵈브의 말을 믿는다면 그것은 위대한 국가의 일원으로서의 고양된 국민 감정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문제의 또 하나의 측면에 주목하 고자 한다. 왜냐하면 고전주의지들은 전세대의 바로크 시인들과는 달리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특성이나 국민적 감정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 다. 아니 , 반대로 그들은 자신들의 지적 활동울 시대나 역사 속에 한정된 국민 적 감정과는 무관한 원리, 이른바 〈보편성 〉 에 연관시키기를 선택했다. 그들이 문학적 • 예술적 활동을 통해 추구하고자 한 것은 존재와 세계에 대한 보편적 비전이며 그들은 오직 이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 믿음은 물론 합리성에 대한 그들의 원초적 신뢰에 뿌리 내리고 있다. 그들~ 그 자체 보편 타당한 합리성의 원리에 따라 작업함으로써 보편적 가치에 봉사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확신은 스스로를 고대 유산의 정통적 계승자로 자부함으로 써 더욱 견고해졌다. 코르네유와 라신을 소포클레스와 유리피데스의 계승자로 간주하는 그들은 이를테면 고대의 摘子로 자처했던 것이다. 이래서 고대와 근 대가 그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는 프랑스 정신은 〈하나의 그리고 영원한〉 전리 의 수탁자가 되며 이로써 만방에 비치는 등불이 될 것이다. 17 세기 프랑스에 〈보편성〉의 신화는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이미 그것은 전 세기 말 몽테뉴에 의해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는 개인적 성찰이 필연적으 로 보편적 성찰로 귀착되는 것을 확인했다. 각 사람은 자신 속에 인간 조건의

원형을 가지고 있다고 믿은 그가 자신에 대한 개인적 묘사를 통해 인간존재의 보편적 비전에 이르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를 뒤이어 데카르트는 합리 성을 바탕으로 보편성의 원리를 구축했다. 감각과 감성이 개인적 특성에 좌우 되는 믿을 수 없는 향도라면 이성은 그 자체 초개성적이고 중립적인 것으로서 판단의 공정성을 보장해 준다. 그것은 〈 가창 잘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 〉 이기에 그 누구나 이성에 의지할 수 있고 이때 판단을 그르치는 일은 없다. 다 만 이성을 〈 올바르게 운용하는 b i encondu i re 〉 것이 문제이다. 이래서 그는 〈 무 엇을 생각할 것인가 〉 에 앞서 〈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셔! 물었고 지식의 새 체계 롤 쌓아울리기 전에 사고의 방법론을 다듬기에 주력했다. 요컨대 그의 모든 철 학적 성찰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 그리고 그것들의 영원한 속성인 보편성에 대한 믿음이다. 고전주의자들도 데카르트와 유사한 궤도를 그려나갔다. 이들이 이성을 존중 한다고 할 때 그것은 데카르트가 이 말에 부여했던 철학적 의미와 완전히 일치 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사고와 판단의 공정성보다는 공감과 이해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가능케 하는 언어로써 합리성을 존중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쉽게 말해 양식 lebonsens( 이 말은 이성과 갇은 의미로 쓰였 다)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알아돌을 수 있는 양식의 언어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하여 이 공감과 인지i n t e lligi b il it e 의 폭이 확대될 때 그것은 보편성의 개 념과합치된다. 어쨌든 프랑스의 고전주의지들은 여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이론상 가장 비국민적이고 초역사적인 가치에 봉사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댜 그들이 믿은 진실 가운데 지역적 특색이나 역사적 특성은 거의 무의미하다. 그들이 대상으 로 삼은 인간은 영구 불변한 본질로서의 인간이며 그들의 관심은 끊임없이 유 동하고 변전하는 표면적 현실을 통해 이 영원한 본질에 육박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에 동원된 것이 다름아닌 합리의 언어였다. 17세 기 프랑스의 땅에 이렇게 해서 합리의 신이 내려왔고 그에 대한 열렬한 숭배의 전통이 뿌리 내렸다. 이 전통은 상당한 기간 동안 프랑스의 정통적 이

데올로기로서 그 위세를 뻗어나갈 것이다. 19 세기의 주목할 만한, 아마도 최초 의 문학사가 니자르 Des i re N i sard4)는 〈 프랑스정신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나는 거의 이성 그 자체의 초상화를 그렸다 〉 5 라고 실토한다. 〈 프랑스정신 속의 영속 적이고 본질적이고 불변한 것 〉 6) 을 정의하고자 했던 그가 만난 것은 결국 그 자 체 영구불변한 〈 이성 〉 이었으며, 그는 이로써 가장 반역사적인 문학사를 썼다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정신을 가리켜 〈 인간정신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완벽한 이미지 〉 7) 라고 말함으로써 그것의 완벽성과 보편성을 자랑스럽게 단정하고 있다. 아니, 차라리 오만하게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이 지적 오만 이 프랑스인뿐만 아니라 서구인의 머리 속에 병균처럼 번져간 것을 알고 있다. 향성을 정복한 그들은 마치 세계의 새 주인이 된 듯 우쭙했고 마침내는 실증 적 과학주의를 이에 결부시킴으로써 세계 지배의 야심을 실천에 옮겼다. 합리 성은 관념의 잠재태에서 행동의 효용성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들의 식민주의는 이미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속에 잉태되어 있었고 보편성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정복과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면죄부와도 같았다.

4) Desir e Nis a rd, His toir e de la litte ra tu re f ran fa i se , vol4, 1841-1861.

5) 위의 책 , vol. I er, l@- 두 :

6) 위의 책 , vol. I er, ~ :

7) 위 의 책 , vol. I •r, 15 쪽 :

지나친 비약은 피하기로 하자. 우리는 지금 프랑스 고전주의와 마주하고 있 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점차 모습을 드러낸 합리성과 보편성의 관념을 경이의 눈으로, 조금은 어이없는 느낌으로 바라보고 있다. 왜냐하면 그 자체 가장 반 역사적인 이 관념은 정확히 한 특정한 역사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관심은 프랑스 고전주의가 고대와의 만남으로 유발된 1 어]기 위마니슴 이래로 일련의 역사적 • 문화적 상황의 변화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모습으로. 다듬어져

나가는가를 추적하는 데 집중되었다. 우리의 탐구가 끝난 이 마당에 만약 프랑 스 고전주의와 그것을 에워싼 역사적 상황과의 힘수관계가 밝혀지지 않았다면 우리의 탐구는 전적인 실패가 될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두 개의 명제 앞에 놓 여 있다. 프랑스 고전주의자들은 분명히 17 세기 프랑스인으로서 살고 사색했다 는 것과, 동시에 인간과 세계에 대한 초역사적 비전 , 이론바 보편적 비전에 도 전했다는 것을 우리는 동시에 수용할 수밖에 없다. 일견 모순된 듯이 보이는 두 입장 사이에서 그들이 갈등을 느꼈다는 징조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이 상 반된 두 명제는 갈등을 야기시키기는커녕 지국히 자연스럽게 그들 속에 용해되 어 있다. 이를테면 그들은 가장 프랑스적일 때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보편적 일 때 가장 프랑스적이다. 그들이 스스로 프랑스인이라고 느끼는 감정과 보편 인이라고 느끼는 감정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 양자를 혼동한 나머지 이것들을 각기 별개의 것으로 느끼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그것들은 그들 가운 데 하나로 용해되어 있다. 그것들을 분리해서 보는 것은 우리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가운데 17 세기 프랑스인들이 스스로를 확인하는, 즉 자신의 정체성 i den tit e 을 확립하는 방식을 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우리는 최후의 결론에 다다랐다. 정체성의 확립_一우리가 위마니슴 에서 고전주의에 이르는 문학적 • 정신적 모험 속에서 최후로 확인하고 싶은 것 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정체성의 추구 〉 이다. 1 Q 1] 기 위마니슴과 종교개혁은 중세적 세계관의 해체가 초래한 정신적 • 영적 위기 속에서 모색된 새로운 인간 학의 최초의 시도였다. 뒤이어 인간존재의 기본적 조건과 삶의 방식에 대한 물 음이 이어졌고 처츰 근대적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나갔다. 문학에 있어서도 문 학적 • 예술적 창조에 대한 원초적 물음이 제기되었고 아울러 문학의 국민적 성 격에 대한 자각이 수반되었다. 프랑스어의 옹호와 현양을 부르짖은 폴레이아드 이후 프랑스어에 대한 자각은 비싱하게 고양되었고 고대의 모방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문학, 새로운 문화 창조에 대한 확신이 깊어갔다. 이 자각과 확신이 근 대적 문학으로 자부했던 바로크에서 보다 고전주의 문학 속에 더 강력하게 작

용했다는 것은 주목할 일이다. 바로크는 그것의 뛰어난 근대성에도 불~하고, 아니, 그 특유한 근대성으로 말미암아 감성과 정신의 범유럽적 유형으로 발전 되어 나갔다. 남단의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프랑스, 독일을 거쳐 북유럽, 나아 가서는 대륙 깊숙이 동유럽에 이르기까지 바로크는 반종교개혁 운동의 여파로 서 그리고 전환기의 정치적 • 사회적 변동의 극심한 혼돈 속에서 한 예술적 감 성의 공감대를 형성했던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초국가적이고 범유럽적이 었다. 이에 반해 우리가 프랑스적인 것의 정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고전주의에 서이다. 고전주의는 고대와의 밀착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대로 근대적아고 또 엄밀히 프랑스적이다. 프랑스 고전주의는 표면상 보편적 이성으로 무장되고 보 편적 언어로 장식됨으로써 초 역사적 순수성을 지니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 나 우리는 이 의관에 속아서는 안 된다. 보편성은 프랑스 고전주의자들이 자신 울 안식하고 표현하는 방식이다. 더 분명하게 말하자. 그것은 프랑스인들이 자 신이 처한 역사의 한 시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위마니슴 이래로 근대적 인간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 제기되었고 이에 대한 답이 적지않 게 시도되었다. 고전주의는 말하자면 이 수많은 시도들 끝에 얻어진 하나의 완 벽한 답이다. 적어도 고전주의자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지상에 완벽이 어디 있으며, 절대적 합리성, 보편성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것 은 상대적이고 잠정적이다. 절대왕정이 보장했던 질서와 균형도 잠정적이었고, 고전주의자들이 믿었던 합리성과 보편성도 그들만의 상대적 확신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중요한 것은 문학이란 결국 한 인간 이 자신의 정체성에 도전하는 치열한 지적 추구의 증언이라는 것, 그리고 프랑 스 고전주의는 역사적으로는 근대의 여명기에 프랑스인이 펼쳤던 이 지적 모험 의 증언이고, 초역사적으로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프랑스인의 인식의 한 영원 한 유형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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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가르니 에 Robert Garnie r 178, 180, I89, I92, I93, I95, 202 가상디 P i erre Gassendi 71, 72 고도 An t o i ne Godeau 231 골드만 Luc i en Goldmann 40 공베르빌 Gomberv ill e 149, 150 공보 Gombauld 205 구르네 Mlle de Gournay 101 구아리니 G i an Batt ista x86, 201 구이예 Henr i Gouhie r 3x3 구즈노 Gou g eno t 282 그랑 콩데 Grand Conde 15 5 그레코 Greco 109 기욤 뷔데 Gu ill aume Bude 34 L 노데 Gabr i el Naude 71, 72 니자르D es i re Nis a rd 335 C 데 로슈 Mlle des Roches 180 데 마레 Des Marets 149 데 페리에 Des Peri er s 50 데미에 Pie r re de Deim ier 242

데카르트 Rene Descart es 71, 74-88, 89, 中, o, 171, 215, 226, 326, 331, 334 데포르트 Ph ilipp e Despo r te s 89 도라 Dora t 57 도비냑 abbe d'Aubig na c 158, 218, 230, 231, 232, 243, 251, 258, 259, 277, 291 도비녜 Ag rippa d'A u big ne 89, 105, 108, 121, 122, 264 둘레 E ti enne Dolet 58 두벌 d'Ou vi lle 2i 2, 282 뒤 리에 P i erre Du Ry er 200, 205, 208, 2ll 뒤 바르타스 Du Bart as 89, u4, 217 뒤 벨 레 Joa chim Du Bellay 58-66, 88,99, 107 뒤 브와 위스 Du Bois H us 123 뒤 페롱 Du Perron 228 드 기즈 공작 le due de Gu ise 155 드 수르데악 De Sourdeac 278 2 라 로슈푸코 La Rochefo u cault 167, 169, 270, 310 라 메나르디에르 La Mesnardi ere 218, 230, 231, 232, 277 라 모트 르 베이예 La Moth e Le Vaye r 71, 72

라 발레트 La Valett e 194 라 브루이예르 La Bruye r e 91, 273,3 0 8 라 칼프르네드 La Calpr e nede 152, 163, 206, 207 라 파예트 부인 Mme de Lafa ye tte I54, I 야 -I70, 3IO 라 퐁텐 La Fonta i n e 149, 277, 318 라리베 P i erre de Lari ve y 208, 209 라블레 Fran~ois R abelais 34, 48, 49- 56, 57, 58, 60, 106, 326 라신J ean Rac ine 203, 207, 249, 250, 252, 261, 262, 2 야, 265, 269, 277, 279, 295-310, 3II, 333 라캉 Honora t de Bueil , seig ne ur de Racan 96, 100, 187, 188, 189, 2II, 2I8 라펭 P . Ra pi n 233, 235, 245, 246, 247, 250, 253, 254 랑 부 예 부 인 Mme de Rambouil let 143, 153 랭보Arth ur Rim baud 111 레뉘치 P . Renucc i 36 레니에 Ma rth ur i n Reg nier 97, 100 레미 벨로 Rem y Belleau 209 레이몽 Marcel Raym o nd 107, 127 레츠 원수부인 La marechale de Retz I33 렘브란트 Rembran t xo8 로레당 Loredan I47

로 앙 -몽 바종 부 인 Mme de Rohan - Montb a zon 137 로트루J eanRo t rou 150, 199, 200, 205, 286 로페 데 베가 Lo p e de Veg a 212, 282 몽사르 P i erre Ronsard 55- 66 , 88, 89, 92, 99, u2, n3, u4, II5, 217, 228 루벤스 Rubens 108 루카누스 Luc i en 217 르 타소 Le Tasso 106, 191, 201 르노데A. Renaudet 36 르므완느 P i erre Lemoy ne 231 르베그R. Lebegu e 91 르 자르 Lou i s Le Jar s 180 리슐리의 R ic he li eu 216, 284 □ 마그리트 드 나바르 Mar gu er it ede Navarre 50 마기 Carlo Maria Magg i 257 마로 Clemen t Marot 34, 135 마레샬 Andre Mareschal 159, 181, 2ll 마르그리트 여왕 La rein e Margu e rite 133, 134 마리노G i amba tti s t a Mari no 184, 196 말레르브 Fran~o i s Malherbe 88-98, 99, IOO, IOI, IO2, IO3, IO5, IO7, I I2,

II7, I34, I43, I70, I7I, I72, I88, I92, 217, 218, 221, 224, 225, 227, 228, 253 망지니 Manz i n i 147 메나르 Fran~o i s Main a rd 100, 218 메나쥬 abbe Menag e 23 I 메레J ean Mair e t 132, 194, 196, 198, 199, 200, 201, 211, 212, 278, 284, 286, 290 멩프레 Ma inf ra y 191 모르네 Dan i el Mornet 264 몬탈반 Mon t alvan 212 몰리 에르 Mol i ere I43, I54, 2I2, 2I3, 214, 250, 2 야, 277, 283, 294,295,310- 323 몽크레티엥 An t o i ne de Montc h reti en 192 몽테뉴 M ic hel Eyq u em de Monta ig ne 43-47, 53, 55, 6o, 67, 68, 69, 71, 73, 77, 86, 98, 101, 107, 112, 215, 326, 33°, 333 몽테메이요르 Mon t ema y or 147 몽트뢰 N i colas de Montr eu x 187 뮈레 Marc-An t o i ne Muret 57 미슈레J ules Mi ch elet 35 미켈란젤로 M ic hel-An g e ro6 n 바르트R oland Bart he s 299, 300

반 티겜 Ph.Van Tie g he m 90, 220 반델로 Bandello I47, I9I 발레 리 Paul Valery 98, 267 발자크J ean Louis Guez de Balzac I34, 2I8, 220, 22I, 2 베르그송 Henr i Bergs o n 313 베르길리우스 V i r gil e 57, 185, 217, 228, 236 베르니니 Bernin i ro8 베르토J ean Bert au d 228 보나렐리 Bonarell i 186 보시우스 Voss i us 225 보쥬라 Claude de Vaug el as 220, 222, 224 보카체 Boccace 147 본느J ac q ues de Beaune 58 볼츠 Vol t z 313 볼테르 Vol t a i re 297 뵐풀린 H. Wolff lin 106 부르크하르트J. Burckhardt 35, 40 뷔샤낭 Geor g e Buchanan 57 브레 Rene Bray 231 브런티에르 Fer di nand Bruneti er e 97, 98 브와로베르 Bo i srobe rt 207, 212, 214, 282 브와튀르 V in cen t Voit ure 135, 232 브왈로 Bo il eau 88, 97, 217, 232, 246, 249, 250

비다 V i da 219, 225 비야르 Claude Bil lar d 192 비온디 Bio n di 147 빌르루와 부인 Mme de Vil le roy 133 人 사라쟁 Jea n-Fran~ois Sarasin 137, 231 사블레 부인 Mme de Sable 136, 137, 153 사포 Sa p ho 137 샤롱 P i erre Charron 69, 70, 71, 73 샤를 소렐 Charles Sorel 159, 160 샤시 네 Jea n-Bap tist e Chassig n et 107, 108 샤토브리%}C ha t eaub ri and 36 샤프렝J ean Chape l ain 134, 137, 153, 218, 223, 226, 228, 229, 230, 231, 239, 242, 243, 247, 248, 251, 257, 259, 260, 277,284 세네카 Sen 碩 ue 55, 86, 189 세르반테스 Cervan t es 146 세비녜 부인 Mme de Sevig ne 154 세빌레 Thomas Sebil let 99 셍-타망 Sa int -Aman t 117, 229 셍트 - 뵈브 Sa int e-Beuve 331, 332, 333 셰익스피어 Shakes p eare 180 소크라데스 Socra t e 46, 52, 70

소포클레스 So p hocle 203, 236, 333 쉐레르J ac q ues Scherer 281, 289 슈미트 A . M. Schmi dt 111 스그레 Se gr a i s 154, 167 스카롱 Paul Scarron 162, 163, 207, 2I2, 2I4 스칼리제J ules Cesar Scalig e r 219, 225 스퀴데리 Mlle de Scudery 136, 137, 138, 150, 152, 153, 174, 196,200,207, 229, 231, 260, 282, 284, 285 스타시우스 S t ace 217 스퐁드J ean de Spo nde 107, 108 。 아당A. Adam 143, 281 아라르콘 Alarcon 282 아르노 Robe rt Arnauld d'Andil ly 146 아르디 Alexandre Hardy 187, 194, 195, 203, 280 아리스토텔레스 Ar i s t o t e 117, 218, 225, 226, 237, 238, 241, 242, 248, 257, 258, 259, 260, 286, 291, 292, 293, 294, 295 아리오스테Ari os t e 209 아베 드 퓌르 abbe de Pure 140 아사리노L uca Assarin o 147 아우어바흐 Er i ch Auerbach 54 야기스쿨로스政 h y le 236 알쿠인 Alc ui n 36

앙리에트 당글르테르 Henr i e tt e d'An- gle te r re 265 어거스틴 Au gu s ti n 46 에리스무스 Erasme 35 오노레 뒤 르페 Honore d'Ur fe 147, 156, 187 오데 드 튀르네르 Ode t de Turnebe 209 오비디우스 .Ov i de 185, 196 오브레 Auvra y 283 오지에 Fran~o i s Og ier 183, 199, 232 위에 Pie r re Dan iel Huet 167 유리피데스 Eur ipi de 203, 333 이베르J acq ues Yver 191 이브랑드 Yvrande 100 x: 장 드 슈랑드르J ean de Schelandre I83, I92 장 루세 Jea n Rousset 108, 128 장-바티스트 포클랭 Jea n-Bap tiste Po- que li n 3u 죠델 E ti enne Jod el 189, 195, 202 지드 Andre Gid e 273, 274 질송 E ti enne Gil so n 36

구 카뮈J ean-P i erre Camus 159 카스텔베트로 Cas t elve t ro 219, 225 칼데론 Calderon 212 칼뱅 J. Calvin 56, 57 코르네유 P i erre Corneil le 87, 105, 126, I4I, I 50, I62, I69, I88, p6 , I98, 200, 201, 203, 205, 211, 212, 213, 216, 232, 251, 259, 260, 261, 263, 2 야 ,270,277- 295, 296, 3 야 308, 311, 333 코르네유 Thomas Corneil le 206, 207, 213, 214 코스타르 P i erre Costa r 231 콜롱비 Colomb y 100 콜르데 G ui llaume Collete t 231 콩라르V alen ti ne Conrart 134, 137, 223 퀸틸리아누스Q u i n ti l i en 253 크라마이유 공작 com t e de Cramail 194 크레티엥 데 크르와 Chre ti en des Croix 187 키노 P hi l ippe Qu in a ult 207, 214 키드K yd 191 키케로 C i ceron 222

E 테렌티우스. Terence 236, 247 태오필 드 비오 Theo p h i le de Via u 134, 194, 195, 196 토리 To ry 58 트로트렐 Tro t erel 209 트리스탕 Franco i s Tri sta n !'Herm ite 205, 229 틴토레토 T i n t ore tt o 109 고: 파라보스코P arabosco 209 파스칼 Bla i se Pascal 44, 273, 309, 326 페레즈 대 히타 Perez de Hita 136, I46, I67

펠리송 Paul Pelli sso n r37 푸케 Foucqu e t 154 프링수아 당브와즈 Fran~o i s d'Ambois e 209 풀라톤 Pla t on 134 풀로베르 Gus t ave Flaubert 245, 262, 270 플루타르크 Plu t ar q ue 55 핀다로스 P i ndare 57, 134, 236 -_o 헤겔 He g el 35 헤인시우스 He i ns i us 225 헬리오드르 He li odore 149, 151 호라티우스 Horace 219, 236, 294 호메로스 Homere 57, 217, 228

李桓 1 9 29 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고 서울대 문리과대학 불문학과물 졸업했 다.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수학, 1974 년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서울대 인문대학 불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 저서로는 r 파스 칼의 生埋와 思想 』 , 『 파스칼 硏究 』, 『 파스칼-팡세』, 『 프랑스 文學 』 (공저) , 『 프랑스 문학사상의 理解 』 , 『 프랑스 文 學노 트 』 등이 있다.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 • 위먀 4 승에서 고전주의 문학까지 대우학술총서 • 인문사회과학 7I 1 판 1 쇄 찍음 1993 년 8 월 20 일 1 판 1 쇄 펴냄 1993 년 8 월 30 일 지은이-李桓 펴낸이――朴孟浩 펴낸곳―― (주)民音社 출판등록 1991 . 12. 20 제 16-490 호 은행 온라인번호―예금주 (주)민음사 국민은행 059-25-0013-457 조홍은행 975-01-001531 135-120 서울 강남구 신사동 506 7군 화센터 504 호 영업부 515-2000~2 편집부 515-2003, 210I 미술부 515-2004 팩시밀리 515~ 2 007 Pri nt e d in S eoul, Korea © 李桓 1993 문학, 프랑스 KDC/s6o 값 8,50~ ISBN 87-374-3071-1 94860 ISBN 89-374-3000-2 (세트)

대우학술총서 (인문사회과학 ) 1 한국어의 계통 김방한 46 어원론 김방한 2 문학사회학 검현 47 조선의 서학사 강재언 3 商周史 윤내현 48 한국음악학 이강숙 4 인간의 지 능 황정규 49 中國言語學 문선규 5 中國古代文學史 검학주 50 스포츠 심리학 6 日本의 萬葉集 김사엽 류정무 · 이강헌 7 現代意味論 이익환 51 原始儒敎 김승혜 8 베트남 史 유인선 52 전쟁론 검홍철 9 印度哲 學史 길희성 53 삼국시대의 漠字音 10 韓國의 風水思想 최창조 유창균 11 사회과학과 수학 이 승훈 外 54 베르그송의 철학 검형효 12 重商主義 김광수 55 아날학파 김응종 13 方言學 아익섭 56 자유주의 의 원리와 14 構造主義 소두영 역사 노명식 15 외교제도사 검홍철 57 국민투표 구 병삭 外 16 아동심리학 최경숙 58 한국서지학 천혜봉 17 언어 심리학 조명한 59 조선통신사 이원식 18 法社會學 양건 60 明末淸初思想 배영동 19 海洋法 박준호 유병화 61 한국의場市 이재하·홍순완 20 韓國의 庭園 정동오 62 고려시대의 后妃 정용숙 21 현대도시론 강대기 63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 22 이술람 사상사 검정위 김욱동 23 동북아시아의 岩刻畵 황용훈 64 韓國의 服籠 美 검영자 24 자연법사상 박은정 65 정신신경증 이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