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元植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중국 어문학과 졸업 , 동 대학원 수료 京都大學 문학박 사. 성균관대학교 교수 , 대만국립정치대학 교수, 중국문화대학 교수 , 중화학술원 한국연구소 소장, 경도산업대학 객원교수 역임 현 재 는近畿大學 문 예학부 교수, 경도대학 강사 저서로는 댄韋國漢籍民俗設書』 (공편) 『朝鮮通信使®訪日 之筆談 唱和 刃硏究 』
『 江 戶 時代 ® 朝鮮通信使 』 ( 공저) 『 通信使®倭射 譯 官 J 『 通信使 ® 遺 忠』 등이 있다.朝鮮通信使
朝鮮通信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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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通信使
차례 책 머리에 • 12 제 1 부 한일관계와 조선통신사 제 1 장 일본과의 교린관계 21 1 교린외교의 由來 • 21 2 교린관계의 復舊 • 27 제 2 장 조선통신사의 差送 35 1 통신사의 訪日 • 35 2 통신사의 迎接 • 41 제 2 부 통신사행과 문화교류 제 1 장 개관 51 1 일본 문사와의 交歡 • 51 2 詩文贈答과 筆談 • 58 1) 唱和 • 58 2) 筆談 • 64 제 2 장 초기의 교류 99 1 林羅山과 통신사 • 991) 信使와의 交歡 • 99
2) 통신사와 林家 • 108 2 石川丈山과 權伐 • 109 제 3 장 임술년(1682) 使行 112 1 통신사의 訪日 • 112 2 일본 문사와의 筆談唱和 • 124 1) 損軒詩稿 • 126 2) 牛窓詩 • 128 3) 木下順庵의 『對韓稿 』 • 135 4) 別宗 • 大方和尙과의 唱酬 • 139 5) 德川光圀의 別章 • 140 6) 新井家 所藏 「與洪滄浪筆語」 • 143 7) 人見友元과 洪滄浪 • 150 3 洪世泰의 생애 • 153 제 4 장 신묘년(1711) 使行 158 1 新井白石과 통신사 • 158 1) 信使와의 교류 • 158 2) 白石詩集 • 164 3) 江關筆談 • 168 4) 白石의 詩人像 • 171 2 深見玄岱와 信使 • 174 1) 深見玄岱의 생애 • 174 2) 信使와의 交歡 • 174 3) 日光山八景詩和韻 • 181 3 別宗祖緣和尙과 信使 • 186 1) 韓客詞章 • 186 2) 海東詩文帖 • 189 3) 樣客通簡集 • 190제 5 장 무진년(1748) 使行 191
1 畵員 李聖麟과 大岡春卜 • 196 2 崔北의 渡日 • 201 제 6 장 갑신년(1764) 使行 207 1 信使의 訪日 • 207 2 筆談唱和 • 217 1) 일본 문사의 上星詩稿 • 218 2) 일본 문인의 篆刻印章 • 245 3) 韓客人相筆話 • 248 3 韓天壽 醉晋齋 書帖題跋 • 253 제 7 장 신미년(1811) 使行 260 1 對馬島 易地行禮 • 260 2 信使의 활동 • 262 3 문화교류 • 274 제 3 부 통신사의 활약 제 1 장 통신사의 倭學譯官 279 1 訪日한 譯官들 • 279 2 被擄人의 別還交涉 • 289 3 일본어의 習熟 • 293 4 諺文伊路波 • 296 5 捷解新語의 성립 시기 • 299 제 2 장 淀川과 통신사 315 1 樓船 • 3152 網引과 浚渫 • 318
3 韓使淀城來着圖 • 320 제 3 장 상호인식 325 제 4 장 통신사의 往還經路 334 1 往路 • 334 2 回路 • 335 제 4 부 통신사의 자료 제 1 장 통신사의 遺墨 339 1 著者 所藏 墨蹟 • 341 2 韓國國史編纂委員會 所藏 • 376 3 韓國國立中央博物館 所藏 • 377 4 洞松美術館 所藏 • 378 5 서울大學校中央圖書館 所藏 • 379 6 靜嘉堂文庫 所藏 權低自筆原翰 • 379 7 東洋文庫 所藏 南岡居士筆蹟 • 379 8 東京國立博物館 所藏 歷聖大儒像金世濂讚 • 380 9 筑波大學圖書館 所藏 歷聖大儒像金世濂讚 • 380 10 日光山輪王寺 所藏 朝鮮國王孝宗御筆 • 380 11 靜岡縣淸水市興津 淸見寺 所藏 • 381 12 名古屋新井家 所藏 • 384 13 蓬左文庫 所藏 • 386 14 大阪府立中之島圖書館 所藏 • 386 15 天理大學圖書館 所藏 • 387 16 大和文華館 所藏 • 38817 京都相國寺慈照院 所藏 • 388
18 雨森芳洲文庫 所藏 • 389 19 彦根磨針嶺望湖堂 所藏 • 390 20 鞆浦福禪寺對潮樓 所藏 • 390 21 岡山牛窓本蓮寺 所藏 • 392 22 近江八幡西本願寺別院 所藏 • 394 23 山口女子大學樓團寺內文庫 所藏 • 394 24 東京藝術大學 所藏 • 394 25 東京韓國硏究院 所藏 • 394 26 기타 • 395 제 2 장 통신사 印譜 398 제 3 장 통신사 行列圖 400 제 4 장 통신사 訪日 기행록 403 제 5 장 筆談唱和集 410 結語 • 423 참고문헌 • 429 찾아보기 /事項 • 445 /人名 • 448 /地名 • 456 /書名 • 460책 머리에 조선왕조는 事大交院을 외교상의 전동적 국시로 삼고 중국에 대해서는 燕行使롤 정기적으로 파견하였고, 일본에는 通信使를 차송하였다 . 그 빈 도수로 본다면 17 세 기 부터 19 세 기 까지 250 여 년 사이 에 연 행 사는 502 회 , 통신사는 12 회 에 달한다. 대 일본관계에서 볼 때 그 교린의 발단은 倭志에 있었다. 즉 이 왜구 방 지를 위한 평화적 회유수단으로서 使者가 일본 九州探題處롤 찾아갔는데 고려 말기 1377 년에 禁賊求請의 임 무를 띠 고 도일 한 鄭夢周는 그 좋은 예 의 하나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일본 足利幕府와 서로 사신왕래가 부활되어 임진왜 란 전까지 200 년간에 62 회나 조선사신이 파견되었던 것이다 . 申叔舟가 통 신사 서장관으로 방일한 것은 1443 년의 일이다 . 그 후 일본에서는 足利가 멸망하고 織田 • 豊臣시대에 둘어가 秀吉온 국 내를 평정하자 영토 확장의 야십을 중국대륙에다 품고 조선정부에 대하여 假途入明, 죽 대명제국을 쳐들어가는 데 길을 빌리고 그 선도를 맡으라 는 것이었다. 1590 년 통신사 黃允吉 일행이 도일하여 京都 緊樂第에서 秀 吉과 회견한 지 2 년 후, 秀吉은 드디어 동원령을 내려 무모한 조선침략전 을 단행했다.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으로 1592 년부터 7 년 동안이나 조선의 전국토는 전쟁 속에 빠져 살육, 방화, 약탈, 기근, 연행 등 그 참상은 형 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전 란중 메 마침 1598 년 8 월 18 일 秀吉이 京都 伏見城에 서 병 사하자 德 川家康등五大老는秀吉의 사망을숨기고일본군의 철수, 귀국을명하였다. 1600 년에는 일본의 關原戰에서 家康이 승리하여 그의 세력이 확립되고 1603 년에는 征夷大將軍으로 임명되자 家康은 조선과의 수호를 열망하여 조선에 사자를 보내왔다. 조선조정에서는 1604 년 8 월에 探賊使로 松雲大 師를 대마도에 보내어 일본국정을 살피며 화의를 촉진시킬 것과被樓人의 송환교섭을 명하였다. 그때 마침 家康이 京都에 上洛하게 되어 송운대사 는 講和使僧으로 입 경 하여 伏見城에서 家康과 회 견하고, 被擦人 1, 390 명 을
데리고 귀국했다. 이 회견이 있은 후 조선정부와 德川幕府와의 관계는 급 속한 진전을 보게 되 어 1607 년 2 월에 呂祐吉 일행 이 수호의 사명 을 띠 고 일본 땅을 밟았다. 그 후 1617 년에는 大坂平定 • 日域統合을 축하하기 위하여, 1624 년에는 家光 장군의 襲職賀使로 파견되었다. 조선측으로서는 임진왜란 메 일본에 연행구류된 被勝人둘의 屈賤 8 이 熊眉 의 급선무였다 . 따라서 초기 사절의 임무는 副還使를 겸했던 것이다. 그 다 음 1636 년에 는 泰平의 賀使로, 1643 년에 는 家綱의 탄생 · 축하로, 1655 년에 는 家網장군의 襲職 축하로 방일했는데, 이때에 이르기까지 피로인 송환교섭이 계속되었다는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1682 년 이후에는德 )II 장군이 바 뀔 때 마다 襲職울 축하하는 사절로 정 례 화되 어 1711 년 (家宣), 1719 년 (吉 宗), 1748 년(家重), 1764 년(家治), 1811 년(家齊)에 이르기까지 전후 12 회 에 걸쳐 통신사가파송되었다 . 이 중 1617 년에는京都 伏見城에서, 1811 년 에는 對馬島 府中(嚴原)에서 行禮한 것을 빼면 나머지 10 회는 모두 江戶 에 登城하였다 . 이와 갇이 일본과의 선린의교에 있어서 그 근간을 이룬 조선통신사에 관하여 일본에서는 제 2 차대전 후 과거의 역사를 재검토하는 기운이 고조 되는 가운데 비로소 각광을 받게 되었다. 江戶時代,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豊臣秀吉의 침 략 후 벌어진 和平克服, 즉 교린관계의 복구부터 시작된다. 이 교린관계 란 德 )11 장군과 조선국왕과의 抗禮關係에 따르는 대등한 국교를 맺고 조선 통신사의 방일을 실현시킨 일이다. 德川政權은 爲政상의 기본정책으로서 幕藩體制를 구축하는 한편 鎖國이 라는 엄중한 海禁政策을 취하는 가운데 조선과의 수교에 의하여 동아시아 의 국제사회와 결부되고 對馬島 領主 宗氏에 대해서는 조선과의 무역을 공인하고 조선에 대한 섭의사무를 담당시켰다. 이와 같이 조선동신사의 일본 방문은 대의적으로는 德川정권의 위용을 과시하며 대내적으로는 領主(大名)를 비롯하여 武士 • 町人 • 庶民에 이르 기까지 막부의 威光을 주지시키는 데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따라서 조선사절의 일본 방문에 대한 관십과 기대는 상상외로 지대하였 다 . 그중에서도 일본의 유학자와 문인들은 조선사절과의 접촉~ 교류를 종신토록 영예로 생각하고 通信使가 입국할 때마다 沿道의 객관을 찾아 들어 서로 다두어 면접을 청하고 筆談과 詩文唱和 그리고 서화의 휘호를
청탁하면서 양국의 문화교류를 촉진시킨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 한편 조선국으로서는 이와 같은 문화적 접촉에 대비하여 특히 詩文과 서예에 뛰어난 文才들을 뽑아서 임명했다. 말하자면 일대 문화사절단을 구성한 셈이다. 일본 문인들과의 詩文 應翻에 대해서는 조선국왕 자신이 깊 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일본 문사와의 交歡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문화상의 우월감을 지니 고 방일하는 조선사절은 시문 응수에 더한층 힘을 기울여 선진국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졌던 것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조선통신사의 최대 임무는 조선국왕의 國 書 와 別幅(선물 기록)을 德川 장군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덕천장군의 國 書 (答 書 )와 別幅을 받아가지고 돌 아와 국왕께 복명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의교적 의례에 불과하다. 이 밖에 일본인사와의 문화적 접촉을 통해서 선진국으로서의 조선문화를 과시하고 필담과 시문창화로 선린우호를 얼마나 더 촉진시켰 는가를 중시하여야 할 것이다 . 저자는 문화교류의 시점에서 이러한 문화적 교환의 실태를 파악하는 동 시에 양국인사의 상호인식과 문화적 영향을 규명해 보고자 했다. 따라서 종래의 연구방법과 특이한 점은 ® 새로운 사료의 발굴과 그 수 집에 힘썼고, ® 사료조사는 현지를 탐방하여 실물을 目見했고, ® 현재 유포되는 筆談唱和集을 총망라했고, ® 현행 『海行担載』에 누락된 사료를 찾아내고 또 새로운 使行錄을 추가했고, ® 일본에 남아 있는 信使遺墨의 발견과수집에 전력을 경주했고 © 필담내용을 16 항목으로분류정리한 것 울 둘 수 있다. 이 책의 구성은 책 머리에 • 參考文獻 目錄울 제의하고 4 부로 나누었다 . 제 1 부 「한일관계와 조선통신사」에서 교린의교의 유래 • 교린관계의 복구· 몽신사의 방일과 영집을 개관하였다. 제 2 부 「通信使行과 文化交流」에서 는초기의 조선사절로부터 최종회인 對馬島易地行 禮 에 이르기까지 방일 연 대별로 통신사와 일본인사들과의 문화적 접촉을 중심으로 그 교환의 실태 파악에 힘썼댜 일본의 대표적 문화인으로서 林羅山 • 木下順庵 • 新井白石 • 深見玄俗 들을 다루었다. 제 3 부 「통신사의 활약」에 서 는 倭學譯官들의 被擔人 別還交涉 • 康遇聖 著 『捷解新語』 • 泥川과 通信使 • 상호인식 을 포함 시켰다 . 제 4 부 「동신사의 자료」에서는 통신사의 遺墨 • 통신사의 印譜 • 통 신사행렬도 • 방일기행록 및 筆談唱和集을 망라하였다 . 다음은 지금까지의 동신사에 관한 여러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고
자 한다. 우선 中村榮孝 교수의 『 日 鮮關係史 0 硏究』에 수록된 「江戶時代 0 日鮮關係 • 朝鮮 0 日本通信使七大坂· 外交史上 0 德川政權」을 들지 않을 수 없다. 中村 교수는 동아시아 국제사회에 주목하고 조선통신사의 방일 성과에 대하여 상론하였다. 한일관계사 연구에 지극히 높은 평가를 받는 노작으로서 그의 學恩을 힘입은 바 적지 않다. 1910 년(明治 43 년) 11 월, 한국병합을 축하하는 목적으로 《歷史地理〉〉 臨 時增刊 〈朝鮮號〉를 특집했는데 그 속에 辻善之助의 「江戶初期 K 共낡石朝 鮮上 0 修交」 • 藤田明의 「江戶時代t乙治남石朝鮮使節 0 來朝t;::就f」가 게재 되었다 . 또 三浦周行의 「日韓 0 同{t&分化」에서 막부는 조선신사의 來聽이 라고 하여 마치 장군의 위세에 눌려 오는 것처럼 일본 국민들에게 인상을 주었지만 사실인즉 속과 겉이 다르게 信使란 자들은 제멋대로 행동했다고 말했다 . 위 세 학자의 견해는 소위 〈한일병합〉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염두 에 두고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또 松田甲의 『日鮮史話』, 『續日鮮史話』가 있다. 松田氏는 1911 년(명치 44 년) 朝鮮總督府 土地調査局 監査官으로 도래 하여 그후總督官房文書課에 전속되자일본과조선과의 옛날부터의 깊은관 계 를 조사하여 그 기 록을 남기 도록 위 촉받고 동신사에 관한 논고를 《朝鮮〉〉 에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후에 이것을 『日鮮史話』 正續編에 수록한 것이다. 三上參次는 『江戶時代史』에서 통신사 내빙에 대하여 막부에서는 이것을 몹 시 중대시하여 일본의 부강함을 과시하고 또 한편으로는 제후(영주)를 비 롯하여 일반 서민에게까지 막부의 위세를 알리기 위하여 힘을 다해서 이 룰 정중히 환대하니 결국 내의경중의 기준까지 문란하게 되었다고 평했다. 田保橋潔은 『近代日鮮關係 0 硏究』(朝鮮國通信使易地行賜考)에서 〈원래 조 일관계는 멀리 유사 이전부터 존재했는데 그 사이 江戶時代처럼 일본국이 조선국에 협조적이었던 것은 그 유례가 없는 일이다 . 이 조일관계의 조정 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즉 통신사이다. 江戶幕府가 그 軟待에 힘쓰며 그래도 미흡함을 두려워한 성의는 깊이 조선군신의 만족을 샀고 그들의 선천적 猪疑心을 消散시키는 데 비상한 효과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통신 사의 巨幣만을 들고 통신사의 來朝가 300 년간의 조일관계를 조정하고 本 邦文化發達에 간집적이지만 적지 않은 공헌을 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정당한 견해가 아니다〉라고 갈파한 것은 우리의 주목을 끄는 바이다. 藤塚鄭의 『日鮮淸 0 文化交流』(五 對馬島 K* 남石 日 • 鮮學人 0 文化工作 타淸朝學)에서는 辛未年 (1811) 사행 때 대마도에 간 일본측 사신과 그에 동행 한 大學頭林述齋 • 松崎憶堂 • 古賀精里 • 草場偶川 들과 韓使와의 筆談
唱和를 기술하였다. 栗田元次의 『新井白石(l)文治政治』에서 家康의 조선통교의 목적은 주로 당시 수입품의 수위를 접했던 生絲의 산지인 중국과의 公貿易을 열기 위해 서 조선울 중개로 하고자했다. 이에 일본이 빌붙어 동교를 맺었기 때문에 통신사의 의례에는 일본의 국위를 손상시킨 점이 적지 않았다고 했다. 新井白石 연구가로서 알려져 있는 宮崎道生 박사는 『新井白石序論』에서 조선의 대일태도로서 공포심에서 나오는 시의심과 오만, 여기에 따르는 모멸감을 지적하고 있다. 內藤燒輔 박사는 『朝鮮史硏究』(朝鮮史料t乙i 石 日鮮航路 K 就f)에서 신 사기행록의 해설 • 항로일람 • 지명의 고증을 붙였다. 또한 『文祿慶長役t: 和납石被擔人 0 硏究』에서는 被捕人副還實態를 조선사료에 의해서 상술하 고 있다. 今村柄 著 『人夢史』(信華)에서는 사행시 필요로 하는 인삼 및 〈信夢〉 卜 定에 관하여 『李朝實錄』에 의거해서 상론하였다. 三木榮 著 『朝鮮醫學史及疾病史』(朝鮮信使 日 本來賜t乙於납 石 醫學(l)交涉 • 日鮮醫事問題)에서는 통신사를 수행한 良醫 • 醫員과 일본측 儒醫와의 醫 事本草學 관계의 문답 내용을 열거했다. 阿部吉雄 著 『 日 本朱子學 &朝 鮮』 (朝鮮通信使 &0 交涉顧末)에 서 林羅山의 儒學에 조선 유교문화가 어민 영향을 끼쳤으며 또 그가 조선신사와 접촉하 면서 어떤 관계를 가졌던가를 『羅山文集』과 詩集을 동하여 소견을 가하였 다. 근자에 와서 田中健夫著 『對外關係七文化交流』(朝鮮(l)修好回復 • 朝 鮮通信使(l)渡來&朝鮮貿易)에서 볼 때 통신사 방일의 역할과 대마도와의 관계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田代和生著 『近世 日 朝通交貿易史 O 硏究』는 아시 아 통상권에 서 차지 하는 韓日貿易의 의의와 본질을 구명한 그의 『書총替之 8h t.:國書』도 호평을 받고 있다. 미국 학자 Ronald P. Tob y의 Sta t e and Di pl- omacy in Early Modern Jap a n : Asia in the Develop m ent of the Tokug aw a Bakuf u 는 근세 朝日關係를 의교사적 시점에서 고찰하고 있다. 三宅英利 著 『近世 日 朝關係史(l)硏究』는 『朝鮮王朝實錄』에 의 거 하여 대 외 교섭 사의 입장에서 통신사 파견의 역사적 배경을 해명한 다년간의 노작이다. 荒野 泰典 著 『近世 日 本 &東 7 :,; 7 』(第二部 近世朝 日 關係史硏究序說), 李進熙 著 『李朝©通信使_~江戶時代 0 日本上朝鮮』, 姜在彦 譯注 『海游錄―朝鮮 通信使 0 日本紀行』, 芳賀登 著 『日韓文化交流史 O 硏究』, 金義煥 著 『朝鮮
通 信 使의 발자취 』 , 片野次 雄著 『 德 川 吉 宗 七 朝 鮮 通 信 使 』 , 仲尾宏 著 『 前 近代(f) 日 本 七 朝 鮮 __朝 鮮通信 使(l) 軌跡 __ 』 등이 있다. 이 밖 에 通 信 使 盡 員에 관해서는 李東 洲 著 『 日本 속의 韓盡』 (일본을 왕 래한 盡員 들)에 畵 員둘이 남긴 작품 들 을 소개하였다 . 근자 일본 국내에서는 조선통신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통신사 자료전시와 강연회가 빈번히 열리고 있다 . 한일관계의 상호 올바른 안식 과 깊은 이해가 절실히 요망되는 이때에 조선통신사가 지니는 역사적 의 의는 자못 크다고 보아야 하겠다. 저자는 본 래 중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한국내 대학 교단생활을 거쳐 중국(대만) 대학에서 다년 간 교수생활을 보냈고, 다시 일본에 객원교수 로 오게 되어 주로 동아시아 지역연구와문화교류사강좌 를 담당해 오는중 이다 원래 중국문화권에 속하는 중국 • 한국 • 일본 3 국의 문화교류에 깊은 관심과홍미를가지고있던 차에 일본에 온후부터는임진왜란으로말미암아 유실된 우리나라의 귀중 문헌자료를 발굴하고자 각지의 민속자료관과 고서 점을 찾 아다니던 중통신사관계사료를 속속 입수하게 되어 한일 관계사 연 구면에서는 아직 강호시대가 미개척 분야임을 깨닫고 우선 이 방면의 사료 발굴 과 그 수집에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여 어언 18 년의 세월이 흘렀다 . 그 사이 매년 새로 발굴한 통신사 관계사료를 가지고 학회에서 연구보고를 해 오고 있 는데 더욱더 한일 선린관계의 역사적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러는 동안에 대우재단이사장李用熙 박사로부터 통신사연구의 성과를 공표하도록 종용받고 그 호의 에 보답코자 미 력 함을 무릅쓰고 舊稿를 정 리 하 면서 원고를 엮어 오던 중과로로 인해서 일시 쉬지 않을수없게 되어 결국 논문 제출이 이렇게 지연되었음을 송구하게 여기는 바이다 . 아직도 미비한 점이 적 지 않을 줄 알지만 우선 통신사 연구의 작은 길잡이라도 되었으면 하 는 微表에서 上粹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 오랜 연구생활에서 특히 자료 수집과 귀중한 자료열람 등 제반편의를 도모해 주신 각 연구기관, 그리고 고 마운 교시와 격려를 아끼시지 않고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은사 李丙 熹 박사 님과 선배제위 및 京都大學교수 朝尾直弘 박사와, 더욱이 물질적인 지원으 로 졸저를 간행해 주시는대우재단에 대하여 심심한 사의를표하는바이다. 이 저서를 어린 나이로 일본 땅에서 애처롭게도 목숨을 거둔 二女 援兒 의 영전에 바치기로 한다. 1991 년 9 월 일본에서 저자
제 1 부
제 1 장 일본과의 교린관계 1 교린의교의 유래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은 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밀집불가분의 관계에 놓 여 있고 또한 오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정치, 경제, 의교 및 문화의 다방 면에 걷쳐 하나의 세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으로부터 100 년 전까지만 해도 동아시아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가 존재했던 것 이다. 더욱이 14, 15 세기경에는 明帝國의 중국동일로 인하여 체제가 갱신 되었고, 17 세기 이후의 淸帝國에 의한 중국지배시에도 기본적으로는 그 질서가 계승되었다 . 따라서 일본이나 조선도 15 세기부터 19 세기까지 이 체제의 일환으로서 관계가 맺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ll
1) 中村榮孝 『朝鮮__風土 • 民族 • 傳統』 149 쪽(吉川弘文館 昭和 · 46 年).
이와 같은 정세하에 조선왕국은 사대교린”을 외교상의 전동적 국시로 삼고 여기에 적응할 대외정책의 정립에 고심해 왔다. 즉 여진정책에 관한 중국과의 교섭, 일본에 대한 왜구진압과 무역의 처리, 豊臣秀吉침략 후 의 화평극복, 또 大淸帝國의 침략에 대한 화평조건의 완화 등 그 대책에 비할 데 없는 특징적 술책을 발휘했다 .3)
2) 宗 屬 關係를 前提로 하여 相互 敵國抗 禮 의 對等한 外交關係를 交 隣 이 라고 하 며 이 와 並稱하여 對中關係는 〈以小事大〉에 따라 事大라고 하였다.
일본에서는 足利 • 豊 臣 • 德 )|I 의 三大 武家政權이 교체됨에 따라 시대적 으로 체제에의 대응이 상이했으며 더욱이 각 정권이 국가체제상 차지한 지위와 중요한 관련이 있었다 . 足利政權은 대의적으로 大明帝國으로부터 의 冊封에 의거하여 〈日本國王〉이라고 칭하고 의교권을 행사하며 관습적 의례를 구현시켰다 . 豊臣政權은 〈關白〉이라고 자칭하고 〈일본국왕〉으로 인정은 되었으나 중국의 책봉은 받지 않았다• 그리고 德川政權은 秀吉의 外征으로 인하여 중국과의 국교가 단절된 뒤를 이어받아 회복교섭은 성공 하지 못하고 다만 17 세기 초에 對馬島主의 매개로 조선왕국과의 국교를 회복했다 . 이와 같이 하여 德川政權은 중국의 책봉을 전제로 하지 않고
3) 中村榮孝 「日鮮關係史0)硏究0)要旨」{『天理大學和수 8 &硏究報告 1 』 昭和 46 年) 참조.
독자적으로 조선 외교체제를 성립시켰다고 할 수 있다 . 4)
4) 中村榮孝, 『日鮮關係史0)硏究』(下) 8. 「外交史上0)德川政權」 참조.
그런데 朝日交隣의 발단은 倭 危 에 있다 . 조선에서는 고려 말기부터 조 선왕조 성립기에 걸쳐 왜구의 禁制를 청하는 사자가 파송되었다 . 이 왜구 의 시 초는 고려 충정 왕 2 년 (1350) 부터 라고 한다. 6>
5) 石原道博, 『倭窓』 (吉川 弘文館 昭和 39 年) . 田中健夫, 「倭窓」(『世界大百科辭典』 31 卷 54쪽 , 平凡社, 1958 年). 有井智德 『高麗李朝史0)硏究』 8, 「十四 • 五世紀0)倭造둔砂 〈`. 石中韓關係」(國 書 刊 行會昭和 60 年) 참조. 6) 中村榮孝, 『 日 鮮關係史0)硏究』 (上) 5, 「室町時代0) 日 鮮關係-倭窓力) 5 日 鮮 ^0)修交^」 駐 2) 참조. 『高麗史』 卷 37, 「忠定王庚寅二年二月 : 倭窓固城竹林巨濟 • 合浦千戶崔禪 • 都領梁瑢等戰破之, 斬獲三百餘級, 倭志之侵始此」.
1367 년에는 萬戶 金龍 • 檢校中郞將 金逸이 파견되어 고려의 연해안을 勅涼하는 일본 해적의 금압을 요청했다. 1375 년에는 判典客寺 事 羅興個가 九州博多에 來到했고, 1377 년 6 월에는 禁賊求請使로서 判典客寺 事 安祥이 來日했으나 일본에서 병사하여, 이어서 같은 해 7 월에는 鄭夢周(호 : 團 隱)”가 報聽使로 금적구청의 書契를 가지고 博多에 내도했다.
7) 『海行捷 載 』(一)에 鄭團隱奉使時作漢詩 · 12 수와 附年譜에 〈洪武十年丁巳九月 以前大司成使日本時朝廷患倭窓侵撲〉라고 明記되 었다 .
이와 같이 일본과의 교린은 조선측에서 본다면 왜구방지를 위한 평화적 회유가 가장 큰 목적이었고, 일본측에서 본다면 조선에 대장경을 요청하 는 동시에 대마도를 비롯하여 서부일본의 大名(領主) 및 幕府의 교역상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 8)
8) 『韓國史 • 近世前期篇』, 「倭窓와 對 日 關係」 ( 震 檀學會編, 乙酉文化社, 1963 年) 참조 .
그 다음 조선왕조에 들어오면 태조 3 년 (1394) 조선에서 回禮使로 金巨 源 • 僧 梵明이 방일했고, 또 1395 년(應永 2) 에는 大內義弘의 朝鮮通使에 보답키 위하여 回禮使 朴淳之를 파견했다. 일본에서는 1399 년 足利幕府가 일본국 대장군의 명의로 국서를 보내왔으나 일본국왕의 사절로 조선에 파 송된 것은 그 다음 代의 太宗 4 년 7 월, 즉 1404 년(응영 11) 으로 이 足利 義滿의 遣使가 최초이다. 그 후 동 10 년 8 월 보빙사로 梁需”를 파견하여
9) 京都 南禪寺에는 梁需룹 맞이한 冥席에서 그린 것으로 생각되는『色薰夜雨圖』 傳周文 作, 重文指定 96.OX3 1. 4cm) 가 現存한다. 여기에는 〈朝鮮國奉禮使通政大夫 禮曺左參議集랐學士梁需題〉라고 軟署되어 있다. (『南禪寺0)名寶』 20 쪽, 『別冊 太陽 水墨證』 179 쪽). 熊谷宣夫, 「色魚夜雨固考」(《美術硏究〉〉 8 號 1932)I 安輝浦, 「朝鮮 王朝初期의 繪盡와 日本室町時代의 水墨蓋」(《韓國學報〉) 3 輯)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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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持의 襲職을 축하하는 동시에 足利義滿을 弟問시켰던 것이다. 그 이후 1419 년(세종 원년, 옹영 26) 에는 이른바 己亥東征(應永外,rg )10) 이 일어나 이 사건 후 국교조정을 위하여 다시금 室町幕府와 조선국과의 사자의 왕래가 부활했다. 이메 막부의 사자로 僧 亮保가 조선에 파견되었 댜 조선측에서는 다음해 1420 년(응영 27) 에 仁寧府少尹 宋希璟(호 : 老 松堂 )11l 이 희례사로서 일본에 파견되었다. 그로부터 8 년 후 1428 년(세종 10, 正長 元年)에는 足利義敎의 계승이 통보되자 慶弟의 禮룰 다하기 위 하여 正使에 大司成 朴瑞生이, 副使에 大護軍 李藝가, 書狀官에 前副校理 金克柔가 임 명 되 어 일본을 방문하였다 . 12) 그 뒤 에 도 계 속하여 1439 년 (세 종 21, 永享 11), 1443 년(세종 25, 嘉吉 3), 1459 년(세조 5, 長祿 2) 및 1479 년(성종 10, 文明 11), 전후 5 회에 걸쳐 일본에 파견되었으나 조선통신사 의 방일은 사실상 15 세기 전반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15 세기의 세종시대 부터 임진왜란까지의 통신사 방일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10) 高木眞太郞, 『應永外冠(J)前後』(八木 書 店, 昭和 17 年) . 秋山謙藏, 『 日 支交涉 史話』 15. 「朝鮮史料;댜접石應永(J)外志」(內外 書 籍株式會社 昭和 10 年). 中村榮孝, 『日鮮關係史(J)硏究』(上) 7, 「朝鮮世宗己亥(J)對馬征伐」 참조 . 11) 谷村一太郞 編, 『校注老松堂日本行錄』(太洋社, 昭和 8 年), 宋希璟 著 村井 章介 校注, 『老松堂日本行錄一一朝鮮使節(J)見f:.中世日本』(岩波文庫本 1987) 참조. 12) 中村榮孝 『朝鮮一風土 • 民族 • 傳統』 2, 「通信使(J) 日 本訪問」, 154 쪽 참조 .
통신사 일람표(中村榮孝 氏의 표를 일부 보충)
14431 ::2: 矣亥 I- k 孝文 尹仁甫 申叔舟 I: ~·: : I: ::』 (?4 7:::)
前記한 바와 같이 1420 년 보빙사로서 日本 京都에 내도했던 宋希璟의 『老松堂日本行錄』과 제 1 회 통신사 朴瑞生의 「復命 書 」(Ii'이조실록』 소재) 에서 보는바대로生彩있는일본기행과시찰보고가남아있고, 또제 3 회 통신사의 書狀 官 申叔舟는 親日 宰相으로 알려졌으며, 특히 〈청컨대 일본 과의 화친을 잃지 마옵소서〉라고 한 臨終의 말은 오늘날까지 噴傳되고 있 다. 그는 일본관계의 연혁과 현행규례를 계통적으로 정리한 『海東諸國紀』 (1471 년 刊)를 編修하여 일본관계의 便覽을 완성하였다 . 조선이 일본에 통신사 파견을 중지한 것은 교린정책의 소국화에도 기 인하지만, 한편으로는 일본의 내란으로 말미암아 足利幕府의 통제력이 약 화되어 京都룰 왕복하는 교통로의 위험이 증대된 데 있었다고도 생각된 댜 13> 그러던 사이에 足利가 멸망하고 織田 • 豊臣時代가 되어 1 언止1 기 말 에는 豊臣政權의 성립기를 맞이했다.
13) 앞의 책 , 155 쪽 참조.
그런데 豊臣秀吉은 1587 년(선조 20, 天正 15) 5 월, 九州의 豪族 島津義 弘융 제압하고 歸路 6 월에 北九州 箱崎에 이르자 거기에는 對馬島主 家臣 柳 }II 調信이 출영했는데, 수길은 조선국왕 入朝의 권고를 대마도주 宗義調 • 義智 부자에 게 명 하였다. 6 월 朔 日 附命令에 〈我朝之覺候間, 高麗國王 可
參內之旨被仰遣候, 若於淵者彼國^相越, 人數被相究成敗候 事 〉 1 _ 4) 라고 한 것 울 보면 5 년 후에 일어날 임진왜란의 단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1589 년(선조 22) 봄에는 대마도주 宗義智가 가신 柳川調信과 때마침 대 마도에 체류중인 九州博多 聖福寺僧 仙菓 • 玄蘇 등을 동반하고내한했다. 조선조정에서는 일본과의 통신의 가부를 논란한 결각 遣使하기로 결정하 고 이듬해 3 월, 正使 黃允吉, 副使 金誠一, 書狀官 許策 15) 일행은 서울을 출발, 4 월 29 일 부산에서 出船, 대마도에 1 개월 체재한 후 7 월 22 일에 京 都에 도착, 三使는 大德寺에서 수길의 歸洛을 3 개월이나 기다렸다 . 秀吉 은 小田原의 北條氏征討를 끝내고 같은 해 11 월 7 일 京都 衆樂第에서 조 선사절을 맞이했는데, 조선이 복속한 것으로 착각하고 入明先 導 를 조선국 왕에게 요청했다 . 그리고 조선국왕에게 보내는 국서에는 入朝라는 문구를 쓰고, 〈殿下〉를 〈闇下〉로, 禮幣를 方物로 썼기 때문에 黃允吉 등이 이의 롤 주장했던 것이댜 16)
14) 『本 願寺 文 書 』 「天正十五年 六 月 朔 日付 • 本願 寺志 T 秀吉朱 印 狀」. 中村榮孝 , 『 日 鮮關係史0)硏究』 (中) , 247 쪽 참조 . 15) 許筑(1 548~1612) • 藤 原爲 經編 , {j' 뱀窓 先 生 文集 』에 〈爲經 接, 天 正 庚寅 , 朝鮮 國使黃允吉, 金 誠 一, 許敍 之來 貢〉 이 라고 되 어 있다 . 또 林 羅 山의 「 ' t星 窓先 生 行狀 」 에도 許 策之로 되어 있다 . 이것으로 볼 때 林羅山 以來 300 여 년간, 許敍 之로 誤傳 된 것을 알 수 있다. 許 筑의 筆 蹟은 漢詩隸書 , 「山前 奉 贈孫月 城 行 案 別 章 」 (『槿 墨 』 成 均館大學校博物館編墓 1981 年)과 『海東歷代名家 筆譜 』 三 所收 : 令公拜狀 都令 公仙 案 합 札 「茂」이 現存한다(白斗鑄 編翰南 密 林 大正 15 年) . 太田 靑 丘 著 『藤 原 惟 窓 』 ( 吉 川弘文館 昭和 60 年)에도 許寂之로 記錄되어 있으나 〈 液 〉 은 〈 筑 〉 의 誤記 이다. 16) 『朝鮮王朝貫錄』, 宜祖大王 『修正貫錄』 卷 35, 24 年 2 月條 참조 . 17) 柳成龍 著, {j'惡瑟錄』 卷 1 : 「筑復命, 上引見而問之, 允吉對如前, 誠 一曰, 臣不 見其有是, 因 言 允吉描動人心 非宜, 於是 議者或主允吉, 或主誠一, 余問 誠 一曰, 君 與黃使不同, 萬一有兵將奈何, 吾亦登能必倭終不動, 但黃 言太重 , 中外驚 惑 , 故解之 耳」(大東文化硏究院編 『西匡文菓附忽瑟錄』 檀紀 4291 年).
柳成龍의 『惡瑟錄』 1 에 의하면 〈그가 우리 사절을 맞이하고자 가마를 타고 입궁할 것을 허락했는데 節角울 가지고 先導하여 堂에 올라 行禮했 다. 수길의 용모는 몸집도 작고 못생긴 데다가 얼굴빛은 검은색이어서 보 참것없지만 그러나 빛나는 두 눈은 사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 답서가 비로소 왔다. 그러나 그 文面은 도리에 어긋나고 오만하여 우리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誠一은 이것을 받지 않고 여러 차례 개정시킨 뒤 에 떠났다. 대개 조선사신이 경유하는 곳마다 왜인들이 선물을 바치고자 했으나 誠一온 이를 모두 물리쳤다. 黃允吉은 부산에 돌아오자 급히 狀啓
를 울리되 반드시 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사신들이 상경하여 복명 하매 국왕이 引見하시고 下問하자 允吉의 대답은 전과 같았다. 誠一은 가 로되 신은 그런 징조를 보지 못했나이다 . 이어서 말하기를 黃允吉은 인심 을 동요시키니 마땅치 못하의다. 여기서 논의하는 자 혹은 允吉(西人)의 주장을 따르고 혹은 誠一(東人)의 주장을 따르다. 내가 誠一에게 묻기를 자네의 말은 黃允吉 正使와 다르나 만일 병란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할 것 인가 저 (誠一) 역시 어찌 倭가 동란을 반드시 일으키지 않으리라고 단언 할 수 있으리요마는 다만 黃允吉의 말이 너무 무거워 中外를 驚惑시키기 때문에 이것을 풀고자 했을 따름이의다.〉 이렇게 賜見의 모양을 상술하고 있다. 그러나 金誠一이 조야에 충격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고는 하나 권력을 다무어 당을 나누고 국사를 도의시 했다는 관점에서 김성일에 대한 비난은 면할 길이 없이 오늘날도 되풀이 되고 있다 .18)
18) 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 刊 『鶴峯全集』 李佑成 교수 解題에 〈先生(鶴 峯)이 黨派的 心理로 黃의 日本侵入說을 無條件 否認하여 결과적으로 國家防衛態 勢를 池緩시 켰고, 따라서 壬辰亂에 그와 같은 民族的 被害를 입 혔다고 말한다. 이 와 갇이 壬辰亂에 있어서의 무방비 상태와 그 피해를 모두 선생에게 책임지게 하 려는 견해는 천부당만부당한 것이다〉고 鶴峯울 옹호하고 있다.
드디어 秀吉은 1592 년(선조 25) 조선에 출병을 단행했다. 전란 중 강화 교섭 이 벌 어 져 결국 1593 년 명 나라의 冊封使로서 楊方亨 • 沈惟敬이 , 通信 使로서 敦寧都正 黃愼, 大丘府使 朴弘長이 방일했다. 黃愼의 『日本往還日 記』에는 그때 塀로부터 상륙하여 大坂으로 가서 강화교섭이 결렬된 경위 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해 수길은 그의 割讓 요구 지역의 보장 점령을 목표로 재출병을 결행하게 되었다 .19) 이상에서 고려 말기부터 조선조 초기를 거쳐 임진왜란에 이르기까지의 朝日 交隣體制에 의한 동신사의 방일을 개관하였다 . 2 교린관계의 복구 豊臣秀吉이 조선출병을 단행한 후 小西行長과 명나라의 沈惟敬이 중심
19) 中村榮孝 『日鮮關係史0)硏究』(中) 2. . 「豊臣秀吉0)外征-文祿 • 慶長0)役」 참조.
이 되어 日 • 明간의 강화교섭을 추진하여 停戰協定이 성립되었다 . 그러나 이것은 당사자의 모략에 의한 일시적 조치에 불과하며 전란은 재차 丁酉 亂(慶長役)으로 옮아갔다. 위 전란이 한창일 때 1598 년 8 월 18 일, 풍신수길이 京都 伏見城에서 병 사하자 德川家康 • 前田利家 등 五大老는 수길의 죽음을 숨기고 당장 일본 군의 철수를 명령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和 議 에 대해서도 지시한 바 있다 20) 그 결과 島津義弘은 명나라 제독 董一 元으로부터 遊擊茅國器의 弟 國科를, 小西行長은 제 독 劉紙으로부터 劉萬 壽 • 王建功을 參將이 라 하여 , 또 제독 陳芸으로부터 陳文棟을 각각 인질(質官)로 받아들이고, 일본측에 서도 要時羅(小西與四郞) 등을 인질로 보내어 停戰울 약속했다 .21) 그때의 조건은 후에 조선에서 사자를 보내어 화의를 조정하기로 했던 것 같으나 조선축의 사자는 오지 않았다. 원래 조선측은 항전의 의욕이 강했으며 정 전협정은 明將의 주도권 아래 성립된 것이다. 그의 成否는 대마도의 사활 문제였으므로 도주 宗義智는 가신 柳川調信 등과 모의하여 연고가 깊은 小西行長과 寺澤正成의 지시를 받고 철병 종료 직후에 조선으로 사자를 보내어 교섭을 시작했다 .
20) 島津家의 『征韓錄』 所收 8 月 25 日付 五奉行으로부터 德永 • 宮木 兩使에게 보 낸 「內儀之覺」이란 書 契에 의하면 이미 內命이 내려졌던 것을 알 수 있다 . 中村榮 孝 『日鮮關係史0)硏究』(下) 269 쪽 駐 3) 참조. -21) 要時羅는 『亂中雜錄』과 『宣廟中興誌』에 의하면 前年 4 月에 小西行長의 講和 使로 明將 劉紙의 陣中에 들어가 副總兵 李芳春에게 갔다가 서울로 보내져 다시 經理邪까에게 맡겨 遼東으로 보내진 후 소식 불명 이다. 앞의 中村榮孝 書 270 쪽 참조 .
일본군이 철병하게 되자 명군도 순차적으로 귀환했다 . 그러나 일본의 재침에 대비하여 24,000 여 명의 명군이 남아서 경비했는데 萬世德은 總司 令官으로 서울에 駐留하고 있었다. 1599 년 6 월에는 船主 源智實이 명나라 質官 王建功 동의 사자 河應朝 • 汗洋과 阿波德島의 蜂須賀家政이 석방한 鄭希得(號 月峯) 등을 송환해 왔다. 그때 柳川調信으로부터 釜山倉使 李宗誠에게 보내온 書契에는 豊臣 秀類의 嗣位를 보고하면서 조선의 사자는 오지 않고 또 전에 파송한 사 자를 억류한 것을 문책하며 양국의 화의가 성립된다면 조선포로를 송환하 겠다고 했다. 이와 같이 자진해서 포로를 송환하겠다고 제안한 것은 강화 교섭의 국면을 타개하는 데 중요한 관련이 있다. 일본에서는 계속해서 대대적인 강화촉진 공작이 계획되어 다음해 4 월에
는 王建功 • 陳文棟 두 질 관 을 태우 고 船 主調 次가 건너왔다 . 조선에서는 이와 같은 사정 아래 명군지휘관들의 응대 를 맡 고 있던 관 원이 송환되어 온 질관 왕전공으로부터 일본사정을 들 어 보았더니 家 康의 중신들 사이에는 재차 출병할 의사는 없고 사자 를 보내면 화평이 기대된 다는 것이었다 . 게다가 이와 전후하여 포로가 수십 명씩 집단적으로 일본 을 탈출해 와서는 잇따라 일본의 정세를 전하는 것이었다 . 그들 말에 의 하면 이번 사자에 대하여 회답이 없으면 7, 8 월경에는 대거 내습하게 되 리라는 소리가 강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정세를 검토한 결과, 禮 曹에서 공문을 보내기로 했다. 동래에서 파견한 軍官 金直, 校生 朴希根, 通 事 李希萬 등 3 인이 예조의 서계를 가지고 동행했다. 이것이 조선에서 보내 온 최 초의 회 답이 었다 . 2 2 )
22) 『宣祖 實 錄』 卷 126, 33 年 6 月 丙戌(1 5 日)條, 「備邊司啓」, 같은 책 卷 207, 40 年 正月 戊寅(1 4 日)條, 앞의 中村榮孝 書 257 쪽.
마침 그 무렵 被樓 人 姜流(號 睦 隱 )이 해방되어 귀국하여, 일본에서는 再畢 출병할 염려가 없다는 것을 전했다 .23 )
23) 『宣祖 實 錄』 卷 126, 33 年 6 月 庚辰 (9 日)條, 「姜洗秘密 書 啓」, 『 看 羊錄』 脂承政 院啓辭 이 書 啓에 의하면 日本情報는 倭僧 舜首座(藤原怪窓) • 醫 師 理安 • 角倉與 一(素庵)로부터 들은 바라고 한다. 앞의 中村榮孝 書 273 쪽 注 20) 참조 .
일본에서는 9 월에 關原 戰 이 벌어져 德川家康의 세력이 확립되었다 . 동 시에 수길이 출병을 시작했을 때부터 의교면의 절충을 맡았던 대마도주 宗氏와 긴밀한 관계에 ' 놓여 있던 小西行長이 敗死한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조선에서는 8 월에 명나라 駐留軍이 귀환 명령을 받고 다음날 經略 萬世 德이 떠났고, 부산에는 대일경비를 감시하는 주재관이 있기는 했으나 화 의에 관해서는 明將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24) 일본과 조선의 국정이 일변하여 수호교섭도 일대 전환기를 맞이했다 .
24) 앞의 中村榮孝 書 257 쪽 참조.
조선에서는 일본군이 철퇴하고 나서도 명군의 주류가 계속되어 전후 처 리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 명나라 주류군의 폐해는 왜적보다도 더 크다고 한탄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적국에 억류되어 있는 포로의 참상도 그대로는 사라지기 어려운 전쟁의 흔적이었다 . 이에 조선 정부는 교섭진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601 년 2 월, 尹斗 壽 • 李德 馨 등의 중신들은 일본과의 교섭에 경험이 풍
부한 사람을 파견하여 적중 소식을 탐정시키자고 제안했다. 이어서 6 월에 는 대마도로부터 橘智正이 和好에 관한 寺澤正成과 宗義智 및 柳川調信의 서계를 가지고 前縣監 南忠元을 비롯하여 250 명의 被勝人을 싣고 부산으 로 건너왔다. 다음해 정월에는 조선에서 동래의 招墓陣千抱 全繼信, 孫文 或 司譯院正 金孝舜을 대마도에 파견하여 일본의 진의를 타진시켰다. 이 러는 동안에 德川家康온 1603 년 2 월 征夷大將軍이 되자 和好의 중거로서 통신사를 파견토록 요청해 왔다. 1604 년 8 월에는 探賊使로 僧 惟政(號 松雲) • 孫文或울 대마도에 파견하 여 일본국정을 정탐시키는 동시에 화의를 맡기고 또 피로인의 屈賤흥교섭도 추진시켰다. 때마침 그 무렵 家康은 秀忠울 대동하고 上洛할 예정이었으 므로 宗義智에게 松雲大師를 모시고 上京토록 명령했다. 이에 송운대사 일행은 도주에게 수반되어 1604 년 12 월 27 일 京都에 도착하여 本法寺에서 家康 父子의 上洛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듬해 3 월 5 일 京都 伏見城에서 家康 부자와 회견하고 被樓人 1,390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 이 복견성에서 의 절충 이후, 조선정부와 德 )II 幕府와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을 보게 되 었다 .25)
25) 『宣祖實錄』 卷 183, 38 年 5 月 乙酉 (12 日)條, 禮曹 앞으로 보내온 平(宗) 義智 書 契 戊子 (1513) 條대t臣會議), . T 酉 ((24 日)條 「備邊司啓」. 앞의 中村榮孝 書 278 쪽.
『朝鮮通交大紀』권 4 에 慶長 9 年 甲辰, 명나라 萬曆 32 년, 朝鮮 孫文或 • 僧 惟政으로 하여금 같이 오게 하여 화호의 일을 의론케 하다. 登年 乙巳, 明萬曆 33 년 12 월 神君 • 台德君 上洛, 命하여 公(對馬島主)으로 하여금 惟政 • 文或 등 울 데 리 고 山城伏見城에 서 拜賜하다. 이 일 이 「政事撮要」에 〈만력 32 년 7 월 橘智正 等 留駐海上, 投降倭子連積出來, 情形臣(不可의 뜻)測, 遣 僧人松雲于日本, 瓜探賊情, 則還本國被擦人口一千三百餘名, 致家康意曰 我於壬辰在關東, 不曾干預兵事, 朝鮮與我實務無 讐 怨, 請與通和, 具由咨 報于遼東撫鎭各街 F’ 〉 이라 기록되어 있다. 伏見城에서의 회견에는 本多正信과 僧 承免가 接伴役으로 家康의 뜻을 송운대사께 전했다고 하는데, 上記의 「我於壬辰, 在關東不曾干預兵事」와
부합되지 않는 기록이 보인다 . 즉, 新井白石 撰 『藩翰譜』 卷 7 (上), 沒 野彈正少弼長政項目에 文祿初, 朝鮮兵事가 일어나자, 같은 해 2 年 6 月 長政은 그 나라에 건 너가 石田 • 增田 등과 상의하여 諸軍勢를 이끌고 晋州城을 공략했다. 今 冬太闇(秀吉)은 조선에 나가 있는 일본군의 싸움이 순조롭지 못함을 노 하여 德川을 비롯하여 宗徒의 大名(領主)을 名護屋陣에 불러모아 놓고 조선의 전쟁이 지금과 같아서는 언제 끝날지 모르겠으니 이제 秀吉 자신 이 건너 가려 고 한다 . 30 만의 군세를 셋으로 나누어 利家(前田) . 氏鄕 (蒲生)을 대장으로 삼고 세 길로 향하여 〈조선을 격파하고 곧장 명나라 로 쳐들어갈 것이다.〉 本朝의 일은 家康이 있으니 마음에 21 정될 것 없다. 모두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德J II 은 안색을 달리하고 利 家 • 氏鄕에 대하여 日本의 많은 대명 중에 · 당신네 두 사람만 뽑혀 대장 을 임명받는 일, 弓矢잡는 면목으로 이 이상 지나치는 일이 어디 있으 랴 . 대저 家康은 적어도 弓馬의 집에 태어나 싸움터에서 늙었거늘 이재 이런 중대사에 이르러 어찌 남들 뒤에 머물러 부질없이 본조를 지켜야 할 것인가 . 비록 小勢일지라도 가강도 군세를 이끌고 반드시 한쪽 先 陣을 달려야 할 것인죽 여러분의 천거를 바라는 바이오(『新井白石全集』 제 1 권). 라고 명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죽, 家康도 先陣을 염원했던 것이 역력히 엿보인다. 그리고 가강이 조선과의 수교를 열망한 배경으로는 또 한 가지 묵과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雨森芳洲의 「寶曆 3 矣酉年 5 月 8 日 大順院時代 말씀하신 뜻에 따라 雨 森東五郞 跋書해 둠」에 ……豊臣太闇 無名의 師를 일으켜 수많은 大名(領主)을 보내어 조선 을 · 정벌한 바 전후 수년간, 그 나라 선왕의 분묘를 파헤치고, 인민의 사망은 20 년을 경과하고도 원상복구를 할 수 없을 정도이므로 일본국을 不共戴天의 원수로 삼고 있다. 豊臣太闇이 타계하자 諸大名(領主)이 凱 陣한 후 이내 大權現台(家康)가 일본국의 정무를 맡으셨는데 만일 조선 이 그 원한을 가지고 중국과 약속하여 복수하는 군대를 원나라 때와 갇
이 보낸다면 천하초창기에 어떻게 될 것인가 를 생각 하 시와 아 무 쪼록 조 선국을 납득시켜 이전과 같이 隣好를 맺도록 하니 전 후 7 년 걷려 信使 를 파견하게 되어 양국이 무사하게 된 것입니다. 라고 명기되어 있다(『芳洲外交資料 書 翰 雨森芳洲全 書 3』 제 37 호). 이것으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조선이 원한울 가지고 복수하는 군대를 보낼까봐 두려워 7 년이나 걸려 겨우 隣好룰 맺을 수 있어 무사하다는 내 용이다. 다음에 講和使僧으로 上洛하여 京都 伏見城에서 家 康과 회견한 松 雲 大 師 2 6 ) (1544~1610) 에 대하여 부언코자 한다 . 대사는 1592 년 임진왜란이 벌 어지자 西山大師의 뒤를 이어 僧軍都抱攝으로서 법의 를 군포로 갈아입고 전장을 달렸으며, 또 加藤淸正의 陣營에 네 번이나 왕래하며 스스로 구 국활동에 몸을 바친 고승이며 또한 불세출의 한국 위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송운대사는 일찍이 13 세 때 少年白日場(詩文競作大 會 )에서 장원으 로 뽑혔고, 1 汀 때 科擧 禪 科에 급제했으니 漢詩 文에 능했음은 말할 것 도 없고 또한 草 書 로도 유명하다. 『舊忠舒難錄』 五台山僧就惠所藏文 藥 中記松 雲事蹟 에 의하면 강화사승으 로 경도에 입경했을 때의 환영 모양과 가강과의 회견 및 포로쇄환에 관한 기록이 들어 있다. 경도 체류시, 円光 • 松源 • 西笑(承tl) • 宿菌등 각 長 老를 비롯하여 五山의 禪僧들과 唱細한 贈答詩가 『四浜堂集』에 수록되어 있다. 송운대사가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대마도주의 家 老 柳川調信이 죽었 다. 그의 아들 景直(후에 智永으로 개명)은 遺 策울 이어받아 임진왜란 후 의 교린체제의 복구를 위해 활약하였다. 그러나 성공을 서두른 나머지 그 가 택한 방법은 모략과 위장의 외교였고 , 이는 다시 調興에게 계승되었 다. 부자 2 대, 30 년에 걸쳐 조선정부와 덕천정권을 기만하여 의교관계를 부활시키고, 國書改作을 되풀이하여 모략이 폭로되는 것을 막아왔다. 그 의 破徒을 초래하게 되자 비로소 교린의 신체제가 확립되었다 . 柳川景直은 그의 아버지가 죽은 뒤 곧 宗義智와 상의하여 조선에 통보 하고 피로인을 돌려 보내며 화의를 촉진시키도록 요구했다. 다음해 1606 26) 抽稿 「壬辰倭亂僧將松 零 大師墨跡(J)發見江寄난 T 」 ( 《 韓 )) 53 號, 昭 和 49 年) .
켜〔 .
년 정월에는 橘智正을 파견했는데, 조선으로서는 강화에 대하여 2 개조의 중대한 요구를 제시하였다. 첫째로는 德川家康이 국서를 보내울 것, 둘째 로는 전쟁중에 先王의 陵墓_成宗 眞顯王妃의 宣陵 및 中宗의 靖陵을 범 한 적을 總送해 오는 일이다 . 11 월이 되어 橘智正아 도래하여 대마도에서 僞作한 가강의 국서를 지참하고 또 犯陵한 적으로 麻古沙九(孫作) • 麻多 化之(又八) 두 사람__실은 대마도내의 죄인을 이처럼 명목을 붙여―一을 결박해 보내왔다 .27) 지극히 어려운 조건이 예상한 것보다도 신속히 낙착 27) 『宣祖實錄』 卷 205, 39 年 11 月 丁丑 (12 日 ) 條, 日 本國源家康 書 契 • 己卯 (14 日 ) 條, 禮曹啓 • 接慰官禮曹正郞金止男勘啓 • 辛已 (16 日)條, 右承旨李善啓 • 壬午 (17 日) 條, 備邊司啓 • 禮曹啓 • 對馬島倭人麻古沙九(年 37) . 麻多化之(年 27) 供. 앞의 中村 榮孝 書 266 쪽 참조.
되었으므로 조선측으로서는 적지 않은 의혹을 남긴 채 犯陵賊의 진위오 가강의 국서에 대한 의문 동 여러 가지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명의상으 로는 유리한 결과를 얻은 셈이므로 평온하게 강화를 성립시키기로 결정古 였다 .28 ) 使者의 명칭도 對日使節의 전례에 따라 〈通信使〉이어야 하겠지탄 피로인을 조사하여 귀환시키는 別還使로 하여야 한다는 등의 엄밀한 검토 룰 거쳐 결국 〈回答兼別還使〉로 낙착지었다. 29) 1607 년 정월에 正使 呂祐吉 • 副使 慶進 • 從事官 丁好寬의 三使 일행은 대마도로 건너가 宗義智와 僧 玄蘇의 先導로 대마도 府中울 출발하여 江 戶로 향하였다. 6 월 6 일에는 登城하여 征夷大將軍 秀忠을 배알하고 國書
28) 中) 『日鮮關係史0)硏究』(下) 266 쪽 참조. 29) 『海行錄』 (上), 萬曆丙午條 참조 .
I.,1 .\t1'」lt\.b-i1t터 -尸 1 5 。 7 년소오 회화胡呂 祐 吉· _•.-;'.8. '[r ·'.,L’'r .1',『 급~tL._.ft. _ f 正 :. 使;f드f폴찬n 訪 ....旦士. .. 日 令時보紅겁효선不않和九장ft모소和값~2EI훈井m터 8lt쇼융`l芳싼這;t훗文l q의섯ti干;坪水&부?tAP &沖 i추?조七fi우혼먼꿉 ;\li.?.i,I1f`i}'i.‘.'A•4:.`. •?t.. ` r1朝. i · t r....전千見 안i':조사준조수”En.,沿 '心 . i鮮 |; f ., 티훈잡?f戒.쓰승##國l*.息효稿훈 史 l . 書f .표?b섭춘..~机'춘&t ( Ri효l사f有h洛浪元和美 수付本七&g급x4 都 ..” a下大굿‘더4ii〉. “''‘· ,n.1,..、A..\‘i.,..,..’ ..•'.tI., ..I’ .. ..If홉困學'L .. ., “ i I L . \ ! i 博 . 物, 館 ‘터 도q소후+ 伽 i 소 장,....,. 、’/ . 1 . 4•..T. .••• . •, 3 ‘.• ... f ` ... '. I 11.../., `I ',,•..'.'L, 'A Ii'\니'iiJf서”'‘,I' i. ,.4·` 2 ' . · . . 1 . .
와 別幅을 상정하였다 . 그리고 귀국 도중 駿府(靜岡)에서 家康을 배알하 고 6 월 대마도를 거쳐 귀국하여 복명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조선과 일본 과의 교린관계는 복구된 것이다 . 제 2 장 朝鮮通信使의 差送 1 通信使의 訪日 1607 년(선조 40, 慶長 12) 의 呂祐吉 일행의 訪日에 이어 1617 년(광해군 9, 元和 3) 에 는 大坂平定 • 日 域統合의 賀使로, 1624 년 (인조 2, 寬永 원 년)에는 장군 家光의 襲職의 賀使가 각각 파견되었다. 그런데 조선측으 로서는 임진왜란시, 일본에 연행 억류된 피로인의 쇄환이 熊眉의 과제였 음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이들 초기의 사절이 모두 別還使를 경했다 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다 . 그 후 1636 년 (인조 14, 寬永 13) 에 는 泰平의 賀使로, 1643 년 (인조 21, 관영 20) 에는 家網의 탄생賀使로, 1655 년(효종 6, 明曆 원년)에는 家綱襲 職의 賀使로 도일했는데 이때에 이르기까지 계속 피로인의 쇄환교섭이 진 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조선사절의 방일은 일본측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어느 때나 손쉽게 수락했던 것은 아니다. 1614 년에는 宗義智가 橘智正을 조선 에 파견하여 德川家康의 의향을 전하며 통신사의 방일을 요청했으나 목적 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 해는 大坂 冬의 陣, 다음해는 夏의 陣으로 豊臣 이 멸망하고 덕천정권의 기초가 확고해지는 때였다. 이에 橘智正은 재차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으나 용납되지 않았고, 1616 년 3 월에는 세번째 도항 으로, 가강의 大坂平定은 조선을 위하여 보복한 것과 다름없으니l) 축~ 1) 『朝鮮通交大紀』 卷 6, 朝鮮國禮曹參議李援奉復 日本國 對馬島州太守平公足下 橘使再來, 書間鼎至, 惡審珍衛,慰洗良深,滿紙辭意, 聲吐備曲, 要乞信使, 足見貴 島誠數 日本之動滅大坂, 固出於爭戰, 實非爲我國報怨, 而或者天誘其表, 假手致 此, 則我國嘉其蕩掃之輿 遣使報홉 亦是一道, 況貴島居中行事, 情勢之運切, 朝廷
槪已領會, 但我國於天朝大小機務無不票報, 故上年冬間, 曾以貸島請使之意, 委咨鎭 江遊擊鎭府矣, 祚蒙總督軍門送票鎖江轉咨來到, 乃以勿遣信壅其校計爲言, 此則天朝 戒筋我國者也, 第念貴島之惡祈至此, 今日之事理宜熟講往年日本右府委送 書 來, 固要 通使我國, 因此具察天朝乃有回答之禮矣, 炫者日本若避前例通掛致軟則朝廷當卽依例 操實票天朝而信使之遣, 隣好之修庶速就完幸望貴島詳諒體行, 余冀勉旅, 不宜.
사절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즉, 일본에서 먼저 국서를 보내 온다면 回禮次 방일하기로 되어 있었다 . 같은 해 4 월에 가강이 죽었고, 12 월에는 네번째 로 橘智正이 도항하여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617 년 4 월 智正은 장군의 사자로서 조선을 예방하고 일본국 왕 源秀忠의 국서를 전달했다. 여기에 대하여 조선에서는 正使 吳允謙 일 행을 回答兼則還使명목으로파견하였다. 京都 伏見城에서 장군 秀忠을 알 현하고 대판 평정과 日域 통합을 축하하고 나서 수충의 답서를 받아 가지 고 피로인 321 인을 대동하고 11 월에 귀국했다. 실은 이때의 秀忠의 국서 도 위작한 것이었다. 얼마 후 德川家光이 장군직에 취임하자 대마도에서 僧 規伯玄方”이 조선 에 건너와 축하사절을 파견하도록 요청했다. 이때도 먼저 장군의 국서를 보내오게 되어 1624 년 10 월에 회답 겸 쇄환사로 鄭뾰 일행을 파견했다. 그 런데 이메의 일본국서도 개찬된 것이었다. 즉, 국서에는 장군의 칭호를 僧 以心崇傳의 의견에 따라 〈日本國主〉라고 했는데, 柳川調興은 조선의 의향 을 받들어 가신 松尾知保와 공모하여 〈國主〉를 〈國王〉으로 고쳤다.” 이와 같이 하여 柳川 등은 네 번에 걸쳐 국서의 위작과 개찬을 자행하여 일단 당면을 호도했던 것이다. 덕천정권 초기의 조선의교는 前代로부터 관례에 따라 오로지 대마도에 맡겼다. 柳JII調興은 父祖 이래 조선의교를 전담해 온 공로가 자랑이 되고 또 島主 宗義成의 妹婚로서 권세는 義成울 능가할 정도였다. 조홍은 領地 문제로 불만을 품고 막부에 제소하여 의성을 빠뜨리려고 꾀하였다. 그래
2) 村上觀光, 『禪林文藝史譯』, 「德川初期0)朝鮮通 • 規伯玄方」(大證閣 • 大正 8 年) 참조. 田代和坐 「對馬使節0)朝鮮國 『御上京之時每日記.!le. 'C0)背景.」(《朝鮮學報〉〉 95 ~101 輯) 참조. 3) 『異國日記』에 天啓燁年!JJIJ月 日付 日本國王에게 보낸 朝鮮國王 李佳國書가 수 록되어 있다. 여기에 대한 復書는 以信崇傳의 草案이며, 龍集甲子冬 12 月 日付, 朝 鮮國王에게 보낸 日本國源家光의 國書이다. 그런데 『姜弘重東接錄』(『海行抱載』二 所收) 「關白書契」에 〈日本國下初不書王字, 余字改冥人, 納字改以贈字〉라고 柱를 가 하고있다.
서 1635 년 3 월, 장군 家光 親裁하에 의성과 조홍과를 대결시킨 결과 慶長 이래로 柳川 3 대 및 島 )II • 松尾 둥의 의교상의 간책이 폭로되어 의성은 容敎되었으나 僧 規伯玄方을 포함하여 국서의 위작과 개찬의 관계자들을 처벌하게 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셉 P J II 一件 4) 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삼아 덕천정권의 조선의교는 면목을 일신하게 되었다 .
4) 中村榮孝 『日鮮關係史0)硏究』(下), 8. 外交史上0) 德 川政 權 , 2. 日本國大君0) 設定, B 宗, 柳川 0 爭松&朝鮮 참조.
이때 단행된 개혁의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첫째로以訂菴輪番制의 실시이다.” 1635 년 11 월 京都東福寺寶勝院의 玉峰光璃을 對馬島府中(嚴 原)의 以訂菴에 주재시키고 그 후 京都五山의 僧울 윤번으로 대마도에 보 내어 조선과의 의교사무를 감찰하고 왕복서한을 관장하며 조선사절 응대 에 참여시키기로 했다. 둘째로는 국서의 體例를 확정시킨 일이다 .6) 종래 조선국서에는 장군의 칭호를 〈日本國王〉이라고 해오던 것을 〈日本大君〉으 로 고치고, 장군의 국서에는 다만 〈日本國源茶〉로 하고 또 종래는 연호를 피하고 〈龍集干支〉만 쓰던 것을 일본 연호로 바꾸었다. 셋째로는 대마도와 조선과의 왕복서한에 대해서도 명분상 옳지 않은 것은 일절 고쳤다. 우선 종래는 명나라 연호를 쓰던 것을 폐지하고 서로 干支만을 쓰며 칭호를 고 치고 贈物울 〈 進上〉이라고 하던 것을 〈封進〉으로 개칭하고 서한의 체재를 갖추고 公 貿 易에 대해서는 別幅을 첨가하게 하는 것 등이 그 한두 가지의 예이다 .7)
5) 『通航一 覽 』 卷 30, 朝鮮國部六 , 對馬國以訂菴 輪 番. 上村 觀 光 , 『 禪 林文 藝 史 譯 』 「對州以訂菴0)沿革」 (大證閣, 大正 8 年) 참조. 6) 위 의 柱 4) 中村榮孝 書 , 2. 日 本國大君號0)設定 참조. 7) 『通文館志』 卷 5, 交隣上, 年例送使, 一特送使條 참조.
덕천정권은 그 개정에 있어서 곧 조선에 통보하는 동시에 新制에 의한 정식 통신사 명칭으로 초청키로했다. 조선에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대마 도가 중간에 끼여 詐謀를 꾀하고 또 몽사역관들이 대마도와 결탁하여 부당 한 공작을 해오는 데도 의혹을 품고 왕왕 논쟁의 불씨가되어 왔으므로 이 런 불안이 제거되는 것에 희망을 걸었다 .8) 그래서 일본의 요청을 받아둘 여 1636 년 10 월에는 正使 任統 • 副使 金世流 • 從事官黃民를 파견하여 일 본의 태평을 축하키로 했다 이로써 신정권 밀에 처음으로 정규의 통신사 가 실현된 셈이다.
8) 위의 莊 4) 中村榮孝 書 3, 江戶時代0)日鮮關係, 288 쪽.
조선은 德川政權이 정식으로 국교를 맺은 나라로서 여기에 형성된 외교 체제는 江戶時代 말기에 유럽과 미국의 여러 나라와 접촉이 생겼을 때도 기본적으로 받아들여 여기에 근거하여 국제관계가 성립되었다. 예를 들면 근대외교의 조약상 〈 日本國大君 〉 이 征夷大將 軍 의 公稱“이 된 것도 이때부 터의 체례에 따른 것이다 .
9) 1854 年( 嘉永 7) 3 月 3 日 調印된 「日米和親條 約 」 第 12 條 譯文 에 〈 今 般 0) 約定 相定候上,;J:, 兩國0) 者, 堅〈相守可申, 尤合衆國主i乙治 L 、 T 長公會大臣&評議一定之 後, 書 춘日本大君 K 致l.,, 此 事 , 今J: b 後 18 節月춘過물 君主許容之約定取替l.,候事〉 라고 했는데, 이 〈日本大君〉은 正文(英文)의
조선은 對馬島主 宗氏를 통하여 德川을 足利에 준하여 일본국왕으로 인 정하여 일본과의 국교를 회복하고 교린관계를 갱신했다. 조선통신사가 정규 수속에 의하여 덕천정권의 희망에 따른 형식으로 도 일한 것은 장군 家光시대 1636 년의 사절부터이다. 일본에서는 조선통신사 내방을 그때 연호를 붙여 부르며 조선에서는 干 支를 붙여서 구별하지만 慶長丁未 • 元和丁巳 • 寬永 元年甲,:f의 3 차 방일을 포함하여 전후 합계 12 회 로 계 산한다. 慶長度 (1607) 가 수호를 위 하여 , 元 和度 (1617) 가 대판평정 • 일역통합의 축하로, 寬永 13 년도 (1636) 가 태평 의 賀禮로, 관영 20 년도 (1643) 가 家網 탄생의 축하로 온 것을 제의하면 나머 지 는 모두 德川 征夷大將軍의 襲 職賀使로서 1624 년 (家光)에 시 작하여 1655 년 (家綱) • 1682 년 (網吉) • 1711 년 (家宣) • 1719 년 (吉宗) • 1748 년 (家 重 ) • 1764 년(家治) • 1811 년(家齊)에 이르기까지 방일하였다. 이 중 1617 년 대판평정의 賀使는 경도에서, 1811 년 家齊 장군의 하사는 대마도 府中(嚴 原)에서 행례한 것을 제의하면 나머지 10 회는 모두 江戶登城으로 장군에 알현했던 것이다. 여기 제 1 회부터 제 12 회에 이르기까지의 통신사의 내빙 연대 ·삼사·제술관·서기 • 역관·사자관•화원 • 양의 ·의원의 씨명 ·사 명 • 총 인원수 • 사행록 • 집반승을 표시하면 다음 일람표와 같다.
西조:선내통 ~신사I 일람 正표使( 이원晶 |식j使 작從성事)官 製述官 書 記 I譯 官 'f.t字官
||\李金畵李柳荷醉蓮 成拳弘明彦潭潭 員_\|虹國業弘 - 良- 醫-I냐問韓白霜-尸 彦士協立기 ||5 贊 規玄東5니伯陰흙 福玄 蘇玄겹方使 寺 111 법쩍::泰::1 平'蟲:之命 디데賀| 미4리34성076750 尸11| 東丙덩=海!接子昌鬪U 錄 힘(日( 입 慶本쁠姜 불七行日대弘 멸松 記重『}) )(澤 任 統錄)) I|1| 蠶' 日備國흙릅本 交릅멸國回伏解考盟大復見
2 通信使의 迎接 德川幕府로서는 장군측의 동정에 관하여 대마도주를 시켜 조선 정부에 보고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따라서 새로 장군이 襲職하게 되면 大 慶參判使(關白承襲告慶差倭)를 파견하여 서면으로 예조참판에게 알린다. 그 다음에 修開參判使(通信使請來差倭)가 건너와서 통신사 파견을 요청한 댜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통신사를 선임하고, 도일을 결정하면 다시 대 마도로부터 迎賜參判使(通信使護行差倭)가 부산포로 와서 통신사를 모시 고 출선한다. 귀국시에도 미}찬가지로 送開參判使(通信使護送差倭)가 護行 하여 돌아온다. 통신사 일행의 구성 1 0) 은 다음과 같다. 三使-正使는 文官 堂上官(正三 品上階)으로 吏曹參議를 除授하고, 副使는 文官 堂下官(正三品下階)으로 弘文館典翰을 제수하고, 從 事 官( 書 狀官을 改稱)은 文官 五, 六品으로 弘 文館校理를 제수한다. 수행원으로서는 堂上譯官(上上官) 3 명을 倭學에서 임명하고 통역을 담당한다. 製述官(學士) 1 명은 특히 文才가 뛰어난 學士 로서 문서의 起草 및 일본인과의 筆談唱和를 담당하며 3 사의 書記 각 1 명은 문재가 있는 進士 출신에서 선임하여 詩文唱和룰 전담한다. 譯官은 堂上 譯官 의 에 上通事(上判事) 3 명 (倭學 2, 漢學 1), 次上通事 3 명 , 押物通事 3 명, 寫字官 2 명은 使行中의 문서의 書寫 및 揮華를 담당하고, 良醫 1 명 은 의술에 정통한 사람으로서 일본측의 요청에 따라 1682 년(肅宗 8) 부터 추가되었다 醫員 2 명, 畵員 1 명 (1643 년도에는 2 명), 子弟軍官 5 명은 三 使의 연고자 중에서 선임하고, 軍官 12 명은 궁술에 뛰어난 사람을 포함하 고, 別破陣 2 명은 軍器寺의 관원인데, 이상을 上官이라고 한다 . 그리고 馬上才 2 명은 曲馬의 騎手, 典樂 2 명은 奏樂師, 理馬 1 명, 熟手(日光參脂 時의 料理人) 1 명, 伴個 3 명, 騎船將(乘船의 船長) 3 명, 이상을 次官이라 고 한다 . 그리고 卜船將(貨物船長) 3 명, 暗小童 16 명, 奴子 49 명, 小通事 10 명 , 都訓導 3 명 , 禮單直 1 명 , 廳直과 盤禮直 각 3 명 , 使令 1 6t경 , 吹手 (角笛) 18 명 , 節 {印奉持者 4 명 , 砲手 6 명 , 刀尺 (蔚夫) 7 명 , 沙工 24 명 , 形 名旗手와 霞 手각 2 명, 月刀手(個月刀) 4 명, 巡視旗手, 令旗手, 淸道旗 手, 三枝鏡手, 長繪手, 馬上鼓手, 銅鼓手 각 6 명, 大鼓手, 三穴銃手, 細 10) 『通文館志』 卷 6, 交隣下 • 通信使行條 참조.
樂手, 鈴 手 各 3 명, 三 使 이하에 分屬하여 中官이라고 한다 . 상기 명칭으 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사절의 상징인 節 §戊을 奉 持하는 者부터 樂 器 • 武器 • 旗 등 각종 儀伏隊가 들어 있다. 이 밖에 風樂手 12 명, 屠牛匠 1 명, 格軍 27 0 명, 이들을 下官이라고 한다. 상기한 上上官 • 上判 事 • 學 士 ·上官 · 次官·中官·下官의 구분은일본에서 집대할때 이와 같은類別 울 한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 사절단 일행의 인선이 결정되면 미리 三 使 이하 차관까지의 명단을 대마도에 통고하여 그 준비에 착수하도록 하게 되어 있다. 조선측은 방일준비로서 우선 禮物 II)_ 人 華 (野 夢 ) • 虎皮 • 約皮 • 鷹 . 大緩子·大 繼 子 . 白莘布 · 黑麻布·黃麻布·彩花席·色紙·壯紙 · 色 筆 .毛 筆 • 眞墨 둥을 갖춘다 . 한편 渡海를 위 하여 水軍統制使 營 에 서 大 船 2 척 . 中 · 小船각 1 척, 慶尙左水營에서 中·小船각 1 척을 建造하여 騎 船 . 卜船 각 3 척의 선단을 편성한다 .12 ) 騎船의 제 1 척은 國 書 를 奉安한 正使 船, 제 2 척은 副使船, 제 3 척은 從事官船, 그리고 卜船 3 척에는 卜物을 分載하고 各 乘員을 배 당한다. 通信使 일행은 제반준비가 끝나면 辭陸하고 國 書 를 받들고 서울을 출발 하여 육로로 부산포에 내려와 일본(대마도)에서 온 迎 賜 船의 마중을 받고
11) 앞의 책 , 國 書 式 • 別 幅 條 참조 . 12) 앞의 책, 渡海船條 참조. 騎 卜船의 造船에 關해서는 Ii'~未隨接 錄 』(韓國國立 中央圖 書 館 藏 )에 詳記되 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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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嘉 臺 13 )에 서 승선하여 대마도로 향한다 . 대마도에서는 島主 宗氏의 출 영을 받고 府中(嚴原)에 도착한 후 여기서 부 터 江 戶까지 往遠하는 道中은 始終 島主가 護行하며 , 또 以配菴僧이 동행 한댜 對馬島主宗氏는 통신사 정 반 임무를 다했을 때는 參朔交代를 면제하는 특전이 있었다. 통신사 일행은 對馬島府中에 도착하여 國分寺또는 西山寺에 숙박하여 도주의 접대를 받 으며 출발 일정이 결정되는 대로 大坂으로 출항한다 .
13) 『東萊府誌.!I에 〈永嘉 臺 는 府南 21 里 釜山鎭 前方에 있으며, 萬曆甲寅에 巡察 使 權粉이 못을 파고 호수를 만들어 전함을 숨겨 두고 작은 언덕을 쌓아 培를 만 들었다. 永嘉라고 한 것은 權公이 永嘉 사람이므로 이것을 따서 이름을 불인 것이 다〉라고 했다. 통신사 일행은 모두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松田甲, 『日鮮史話』 3. 「釜山鎭0)永嘉台」 참조.
일행은 途中,萱岐, 藍島, 赤間關(下關)을 거쳐 源戶內海로 들어가 室 隅, 上 W 센, 津和, 加老島, 鎌새, 忠海島, 竹原, 縮浦 , 日比 , 牛窓,室津, 兵庫를 경과하여 大坂에 도착한다. 여기까지의 해로는 西國大名(領主)들 의 關船이 조선선단을 호송하게 되어 있다 . 大坂에서는 河口가 얕아서 店 浦(傳 法 ) 前洋에서 영접 나온 日本樓船(御座船)에 갈아타고 입항한다 . 難 波橋로부터 상륙하여 西本顔寺(津村別院)를 館所로 했다. 朝鮮使船은 乘 組員만을 남기고 大坂에 旋泊하며 일행의 江戶往還울 기다린다. 大坂에서
.... ·. ... · , ...
부터는 河船울 타고 泥川울 거슬러 올라가 泥浦 14) 에서 상륙하여 京都로 들 어가 客館으로 지정된 本國寺(初期에는 大德寺, 1719 年度에는 本能寺)에 留宿했다. 京都에서부터는 東海道를 따라 草津까지 내려와 中山道로 옮겨 守山宿(野洲)에서 混한湖의 景觀인 浜街道로 들어 近江八幡, 安土, 彦根 를 거 쳐 磨針嶺 15 띄 望湖堂을 지 나 島居本에 서 本道로 나온다. t兵街道란 일명 朝鮮人街道 16) 라고도 불린다. 여기서부터 垂井宿에서 美濃路로 들어 大垣 名古屋롤 거쳐 宮之宿(熱田) 東海道로 나온다. 途中, 江戶로부터 岡崎에 장군의 사자가 출영나오는데 이것을 中路問安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소위 參向道中을 거쳐 江戶에 다다른다. 도중에 통과하는 長良 • 木 曾 天龍, 富士, 酒亂 馬入 둥의 큰 하천에는 舟橋가 특설되고 또 大井 川을 건널 때에는 수위를 낮추기 위하여 물 막는 인부 1,400 여 명이 겹겹 이 늘어선다. 이때의 수송에는 말 260 필, 인부 2,600 명이나 동원되었다고 한다. 드디어 使行이 江戶에 들어오게 되면 市中 길거리에 있는 武家邸宅 에서는 대문을 열어놓고 金居風울 펴서 세우고 비단 帳幕을 걸어 놓으며, 활과 철포로 장식하고 지키는 무사들도 단정하게 차리고 있었으며 통신사 행렬을 구경하는 남녀가 거리륭 메웠던 것아다 . 17)
14) 「朝鮮蔣禮使洗城來着圖」 (京都大學圖 書 館所藏 『朝鮮人來聽記』 附圖 3, 右京都 府乙訓郡渡邊守國氏所藏 • 大正 8 年 10 月 影寫). 抽稿 「洗J I1& 朝鮮通信使―朝鮮聽 禮使泥城來着圖춘中心 K- 」(《圭 A t.:.》 第 31 號, 1987 年) . 15) 抽稿 「朝鮮通信使&望湖堂」(〈(統一日報〉〉 1979 年 8 月 2 • 3 日號) 참조 .. 16) . 岡 田精파 「朝鮮人街道0) 乙 &」 (『 日 本文化 &朝 鮮』 新人物往來社, 昭和 48 年) . 江 南良三 著 『朝鮮人街道』(近江八幡鄕土史會, 昭和 61 年) 참조. 駒) . 中村榮孝 5 『. 日鮮關係史0)硏究』(下), 3. 江戶時代 0 日鮮關係, 4. 德川政權&朝 鮮 使참조 .
日 光大歐院靈廟에 奇贈한 朝鮮國王孝宗御筆 ( 日 光山輪王寺 소장)
江戶에서는 1624 년도부터 1682 년도까지는 馬哈町 本딴寺가 信使의 客館이 었지만 1711 년도 이후는 本 誓寺 가 소실되어 沒草의 東本願寺로 바뀌었다. 통신사가 江戶에 도착한 날 저녁에는 객관에서 향연이 벌어졌으며, 다음날 에는 장군의 사자가 조선사절을 예방한다 . 수일 후에 통신사 일행은 국서 를 받들고 장엄한 위의를 갖춘 행렬로 江戶城에 들어가 장군에게 배알하고 조선국왕의 국서와 예물을 進里하고 나면 그 자리에서 향연이 벌어지는데 이 연석에는 德川 三宗室, 즉 水戶 • 尾張 • 紀伊藩主가 삼사를 接伴한다. 이 국서 전달이 끝나면 특별행사로서 日光廟를 參脂했던 것이다. 이것은 1636 년도에 시작되었다. 실은 이메 正使 任統과 副使 金世源온 국왕의 명령 을 받지 않았다고 하여 거절했으나 對馬太守 宗義成의 惡請으로 결국 日光 山을 유람하게 되 었다 . 그 후 1643 년도에는 일본측의 특청으로 國王 仁祖 의 御筆 「日光淨界彰孝道場」 18) 額字와 梵鐘 19) . 香遠 • 花服등을 日光廟에 奉納하면서 致祭의 禮룰 거행하였다 . 1655 년도에는 國王 孝宗의 御筆 「靈 山 法 界崇孝淨院」 20 ) 額字와 銅燈籠 한쌍, 樂器 • 銀香盆 • 金 mll • 赤紋紗 • 大 花 席 등을 증정하고 大獸院(家光) 靈 廟에 致祭했다.
18) 原本은 文化 9 年(1 812) 12 月 東照宮寶庫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仁祖御筆額字 의 雙釣壤墨 의 撲寫本은 關係者가 기념으로 작성하여 秘 藏 해 두었던 것이다. 中村 榮孝 「日光山 德 川 家康廟社堂篇 額(J)模本ir.?t '\T 」(《朝鮮學報〉〉 49 輯) 참조 . 19) 松田甲, 「李朝仁祖J: b 寄贈난石 日光東照宮(J)庸額&鐘」 (2) 鐘&其(J)序銘(『日 鮮史話』 第 2 編 所收) 참조. 20) 大 浦晴 子, 「日光山輪王寺 K (J)乙 5 韓國文化」(《韓國文化》 1983 年 10 月號) 참조 .
이 日光廟參脂가 德川家光이 장군직의 권위를 확립했을 때에 츠음하여 단행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본다 . 21 ) 그런데 이 日光廟參 脂는 3 회만으로 폐지되고 말았다.
21) 앞의 注 8) 中村榮孝 書 305 쪽 참조.
통신사가 江戶 瀋留時에 거행하는행사로서 曲馬上覽이 있다. 이것은 본 래 장군 家光의 요청으로 22 ) 朝鮮의 馬上才가 曲馬演技룰 坡露한 것이 그 시초인데, 1682 년도에 장군 綱吉이 八重洲河岸에서 朝鮮의 騎藝를 구경한 후부터 항례행사로 되었다. 조선동신사 일행은 江戶에서의 모든 행사를 끝낸 다음 장군으로부터 조
22) 中村榮孝 「朝鮮曲馬上 覽 (J)起源」(((朝鮮〉〉 昭和 5 年) . 松田甲, 「江戶城 K 於 H5 朝鮮人(J) 曲馬」 (『 續 日 鮮史話』 第 1 編 所收). 『通航一 覽 』 卷 91, 朝鮮國部 67 • 68 「曲馬上 覽井騎 射」 참조.
선국왕께 上星하는 國書(答書)와 예물을 받아 가지고 귀로에 올라 往路時 의 경로를 반대로 내려와 大坂港에서는 다시 朝鮮使船을 갈아타고 對馬島 를 거쳐 부산포에 귀착한 후 곧 상경하여 국왕에게 복명한다. 이것으로서 통신사의 임무는 끝난다 . 23) 통신사 일행의 日本 往還에는 대개 6 개월 내지 8 개월이 걸렸는데 1764 년도에는 거의 1 년의 시간이 걸렸다.
23) 앞의 社 12) 中村榮孝 書 305 쪽 참조 .
信使의 江戶 往還道中에는 沿路의 諸領主가 船船과 人馬의 差出, 道路修 坪와 客館建造 • 菩護擔當 그리고 접대비용까지 부담했던 것이다. 幕府로 서도 信使의 送迎 • 樂應과 禮物 등 그 歡待에 巨額이 들었는데 그 비용은 최고 100 만 냥을 넘었다고 한다. 24)
24) 近衛關白基熙公 記 正 德 元年 12 月 29 日條 「今年朝鮮來 勅 以下彼 是 雜用 六 十 萬 兩也 存外不多者也 先代之時年年及百萬兩云云」(三上 參 次 『 江戶時代史 』 (上) 338 쏙) , 『通航一萱』 卷 118, 朝鮮國部 94 來聽御用 , 明 曆 元乙未 • 唐 人 參 候而歸石造, 御 上樣御金四十兩程入 · 此外大名衆 下下 O 入沈力 ) l f t百萬兩 8 可入候 ••• … 榎本氏覺 볍. 小林茂 「 德 )II 時代 K t-5답 石 朝鮮通信使 0 助鄕問題-~泥藩 0 場合둔 中心 K 一 ―-」 ( 《 朝 鮮學報 〉〉 43 輯) 참조 .
1655 년 9 월 10 일경 條令에 의 하면 조선사절 來開時에 는 2 년 전 부터 그 준비에 착수했으며 연도의 諸州에 명령하여 도로와 교량을 수선하고 혹은 연도가옥이 파손된것을고치게하고메로는극히 사세한令까지 내린 일 도 있다. 또 사절이 江戶에 체재시에는 불조심과 口論言爭을 훈계하고 2 충의 문을 닫고 더러운 빨래를 걷게 하고 길가의 집들의 기와 깨진 것까 지 수선시켰다고 할 정도이다. 통신사의 처우에 관해서 新井白石은 60 여 州의 힘을 탕진하여 송영했으 니 이는 天使(勅使)를 집대하는 것보다도 100 배나 더 했다고 말하고 있 다포) 이 와 같은 대 우에 대 하여 三上參次 박사는 하나는 막부의 정 략상, 또 하나는 일본사람이 학문에 어두워서 의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무관심한 탓으로 부질없이 정중히 대하는 것만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도리어 칙사 를 집대했을 때보다도 더 융승했다고 논평하였다 .26) 그러나 江戶幕府가 韓使軟待에 힘쓰며 더욱 그 미흡함을 두려워한 성의
25) 近衛家文합 • 白石 書 狀(栗田元次, 『江戶時代史』 國史講座 • 受驗講座刊行會, 昭和 6 年 116 쪽) 참조 . 26 ) 三 上參次, 『江戶時代史』(上) 第 10 節 外交(1) 「朝鮮 &0 關係」( 富 山 房 , 昭和 19 年) 참조 .
는 깊이 조선국 군신의 만족을 사고 그들의 선천적 시의심을 소산시키는 데 큰 효과가 있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통신사를 접대하는 데 막대한 비용만을 거론하는 자도 있으나 통산사의 來聽이 300 년간의 일조관계를 조정하고 일본 문화 발달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한 사실 을 간과해서는 안 될 줄로 안다. 27) 27) 田保橋潔 『近代日鮮關係0)硏究』(下) (宗高書房 昭和 47 年 復麥j} 892 쪽 참조`
제 2 부
通信使行과 文化交流
제 1 장 槪 觀 1 日本文士와의 交歡 17 세기부터 19 세기에 걸쳐 동아시아의 세계는 국제교류가 결여되었다. 따라서 조선통신사의 방일은 文化傳流의 중요한 기회이기도 하였다. 당시 의 조선은 明 , 淸과의 종속관계가 확립되어 있어 매년 수회에 걸쳐 파견 되는 燕行使1)에 의하여 중국 선진의 학술문화에 접하고 이를 도입하게 되 었다 .
1) 『通文館志』 卷 3 • 事大上 • 社京使行(朝鮮史編修會編 朝鮮史料最刊第 21 昭和 19 年), 『燕行錄選集』 下(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 刊行 1960 年). 全海宗著, 『韓中關係史 硏究 II 』: 朝貢關係 • 使行의 傾度(一潮閣 1970 年) 참조. 点行使란 冬 至 • 正朝 • 聖節 • 謝恩 • 奏請 • 進賀 • 陳奏 • 陳慰 • 進香 • 告計 • rJ J安等의 使行이 歲幣 • 方物을 가지 고 北京을 禮訪하는 것을 말한다. :::z.. 빈도수로 보면 1637 년에 서 한18다8.1 년 에 이르기까지 使行 502 회, 費咨 !距奏行 195 회를 합하면 총계 697 회에 달
한편 對日 交隣關係는 친선우호를 촉진하여 조선에서 파견된 전후 12 회 의 통신사는 德川幕府와의 수호를 계속하며 일본 往還途上에서는 官民 각 충과 접촉할 수 있었다. 조선통신사의 來聽온 琉球의 慶賀使 • 謝恩使의 江戶參向 2) 과 阿蘭陀甲比 丹(和閔 CAPITAN) 의 江戶參府와 같이 쇄국체제하의 異彩로서 일본인들 의 이목을 자극하는 중요 행사였는데 통신사의 규모의 성대함은 타자가 따를 바가 아니었다.
2) 宮城榮昌, · 『琉球使者0)江戶上 b 』(南島文化穀 書 4. 第 1 書房 昭和 57 年). 橫山 學 『琉球國使節渡來0)硏究』(吉川弘文館 昭和 62 年) 참조.
이와 같은 조선통신사에 대한 관심 속에서 일본의 문화인들이 지닌 기 대 또한 지대하였다. 그것은 7 년간에 걸친 秀吉의 조선출병으로 일본의 將兵과 從軍僧둘이 조선의 중앙 • 지방관인과 有識者와 접촉하며 왕궁과 사원에서 훌륭한 문화재를 견문한 것은 물론이요 온갖 典籍울 입수하여 몰아왔고 학식이 풍부하고 기술에 뛰어난 被擔人둘을 연행하는 등 문화
3) 內藤虎次郞, 『東洋文化史硏究.!I(弘文堂 書 店 • 昭和 17 年) 宋元板0)話에서 〈文錄 之役때 일본군은 조선의 서적을 모조리 일본에 갖고 왔기 때문에 오늘날 조선에는 宋板本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하였다. 그리고 입진왜란때 軍師로종군한 僧 惠
덟:\. 〉 : '궁、, .3.% 누 훈 .. ~\·'::. · _정` {` :;尸1기 컹t 、.: 국\••:T`, \군 .`'::i T 、 ..-요군 : ;블; : -:' ; `~ .
瓊이 朝鮮陣中에서 安國寺와 그밖의 다른 곳에 보낸 편지사본이 현재 전하고 있다 (嚴鳥文 書 ). 이 펀지 속에 조선과 중국을 손에 넣으면 內典 • 外典의 서적과 ::::r.. 밖 의 보물을 배에 실어 보내겠다고 하였다(辻善之助 『日本文化史別錄』 3, 軍師&f& -?t.:僧-安國寺 惠瓊).
적 감명을 받은 데 유래했을 것이다 . 더욱이 인쇄기술을 배워 고전출판이 일어나 朝鮮典籍이 複刻되어 德川政權의 文運興隆策에 기여한 바 적지 않 았다 .4)
4) 中村榮孝, 『日鮮關係史0)硏究』 下 4. 朝鮮0)日本通 信 使&大阪 3. 通信使 &文 化交流 柱 12) 참조.
따라서 조선사절단이 일본에 들어오게 되면 일본의 儒學者 • 寺僧 및 文 人둘은 연도의 객관에 달려가 향옹석상은 물론이요 체류하는 동안 서로 다투어 면접을 청하고, 漢詩의 唱和, 書畵의 揮豪 및 筆談으로 중국과 조 선의 政情을 살피며 역사와 풍속 또는 조선 문인의 저서와 의약등에 관하 여 질문하는 등 많은 佳話를 남기며 交歡했다 .5)
5) 『通航一覽』 卷 108~111 . 朝鮮國部 84~87 筆談唱和 참조.
조선측으로서는 〈交隣之道 貴在誠信〉임을 강조하면서 특히 시문과 서예 에 뛰어난 문재들을 선임했다. 초기의 信使(通信使라는 명칭 외에 信使 또는 韓使라고도 했다)와 접촉 한 일본의 지식인으로서는 林羅山이 대표적일 것이다. 제 4 장에서 그와의 교환 모양을 詳述키 로 하겠다. 시대가 내려움에 따라 信使와의 시문의 교환도 한충 더 성황을 띠게 된 다. 1682 년(숙종 8) 에는 信使 碑將洪世泰와 일본인 학자 人見友元과의 감동적인 佳話가 전한다. 다음에 일본인사들이 어느 정도로 신사일행의 書畵揮臺룰 惡請하였으며 또 이것을 진귀하게 여겼던가를 一啓하기로 하겠다. 1636 년, 從事官 黃辰의 『東接錄』 11 월 13 일 條에 의하면 〈自到大坂以後, 諸倭官求詩文, 書畵者盆集, 學官 • 寫者 • 畵員等翻應日不假給〉이라고 하였 다. 즉 大阪도착 이후로는 일본의 諸官이 信使의 시문과 서화를 구하러 객관에 몰려들어 製述官 • 寫字官 • 畵員은 그 應삐에 쉴 사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 1655 년, 信使從事官 南龍翼의 『扶桑錄』 11 月 21 日 條에 留倭京, 義成以倭皇之請, 送彩賤數幅于使臣, 請得手書, 各書古詩以
給之 일본 경도에 머물어 있을 때 대마도태수 의성이 일본 천황의 간청이라고 하 며 채색종이 수폭을 보내어 필적을 청하므로 삼사신은 각각 고시를 써서 주었 다. 라고 한 것이 있다. 1682 년, 譯官 金指南의 『東桂 日 錄』 8 월 21 일 條에 도 我國文獻之名, 素胞日東人之耳目, 求詩求墨之請, 在路次已不可塔, 及 到舍館, 自館伴與其國執政者以至斯養之倭及儒釋好事輩張紙現筆, 日來求 惡 우리나라 문헌의 이름은 일찍부터 일본 사람의 이목에 익히 들려왔다. 시문 과 묵적을 구하는 청 때문에 연도에서 이미 견딜 수 없었다. 사관에 도착하자관 반과 그 나라 집정자로부터 심부름하는 왜인 및 선비와 중등 호사가에 이르기 까지 종이와 벼루, 먹을 가지고 와서 날마다 간청했다 . 라고 명기되어 있다. 이처럼 일본인들의 詩墨求請에 비명을 올렸음이 짐 작된다. 1711 년(숙종 37) 에는 信使와 日本文士들과의 詩文唱訓가 더욱더 성황하 여 많은 唱和詩集이 筆寫本 또는 刊本으로 유포되고 있다. 1719 년(숙종 45), 製述官 申維翰은 그의 『海游錄』에 歸路 10 月 25 日 名 古屋에서의 唱和에 대하여 自遠方來者魚貫而集,坐堂皇閣道庭場間究而降者升者環立而院者無不人人 乞詩求語·· ·· 童子疾於墨藥使倭人適勞則紙壘如雲華撰如林, 須庚而園復進之, 余亦有時氣潟願原破村以佐腸 ·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이 물고기를 첸 것처럼 마루, 복도, 뜰과 마당에 모여 앉 았는데, 좁아서 내려가는 사람, 끌고서 울라가는 사람, 둘러서서 옆눈질하는 사 람들로서 시문을 청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 소동이 먹을 갈기에 피로하 여 왜인으로 대신 갈게 하였다. 겹경으로 쌓인 종이가 구름과 같았고, 꽂힌 붓 이 수풀과 같았으나 참깐 동안에 바닥이 나면 다시 들여 온다. 나도 또한 기 갇 이 나서 자주 밀감을 깨물어 술안주로 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도 시문의 증담과 서화의 휘호의 모습이 떠오른다 . 大坂의 懷德堂學主 中井積善(1 731~1804) 은 그의 『草茅 危 言 』 6 ) (朝鮮 之 事)에
6) 稱垣國三郞 『中井竹山&草茅危 言 』(大正洋行 昭和 18 年) 참조. 中井積善 著, 『莫陰集』 卷 4 附錄雜件에 「 寶曆 甲申正月朝鮮通信使至大阪甘五日 書堂 小飮戱作, 韓 館唱和, 諸子以予擬朝鮮學士, 得詩十餘篇, 倉卒燁筆, 固不足觀矣, 聯錄以存一時雅 興耳」라 하고, 贈諸子 : 使樣停阪城, 才子 喜逢 迎, 休恨方言異, 有詩通兩情. 이 밖에 和淡水韻, 書 堂小集戱分網設韓館贈管得齊韻贈學士, 同前次韻答學士, 和兩峯依龍溪 韻見示등 數篇이 들어 있다 . 前文에 서 보는 바와 같이 中井積善온 門人을 書堂 에 모아 韓使와의 唱訓에 앞서 雅興을 틈타서 미리 연습을 시켰다는것을 알 수 있다 . 多治比郁夫의 「 寶曆 0)大阪詩壇」 八 • 朝鮮 修 好使&大阪(『近世大阪 藝 文 幾談 』 大阪 藝 文會刊 昭和 48 年)에서 〈中井竹山의 唱和詩는 「食陰集」에 실려 있고, 또한 객관을 방문한 일은 「草茅危 言 」 卷 8 에 보인다〉 하였으나 이 唱和詩란 것은 객관에서의 韓 使와의 唱和詩가 아니고 門人들과의 연습작임을 말한다.
韓使는 文 事를 주장하는 고로 대단히 문재에 뛰어난 사람들을 선발해 서 보내오는 것 같다. 그러므로 연도 객관에서는 皇國 의 儒臣과 시문의 증담과 필담을 하는 일이 많았다. 일본측 稱臣둘 중에는 문재가 뛰어나 지 못한 사람도 있어 출중하지 못함이 보여 민망스러웠다. 그것은 차 치하고 또한 三都(江戶 • 京都 • 大坂)에서는 평민들까지도 연줄만 있으 면 객관에 들어가 사신과 시문을 증답하는데 관에서 금하지 않아 浮華 한 무리들이 앞을 다두어 나서곤 한다 . 객관 안은 봄비어 마치 장터 와도 같다. 惡詩抽文을 가지고 나와 韓客과함부로 접촉하기도 하여 심 지어는 전혀 미숙한 자가 백 일이나 걸려서 겨우 시 한 수를 지어 품에 넣고 와서 睦行頓首하며 그것을 바치고 한 편의 和韻을 얻으면 평생의 영 광으로 생각하고 남에게 자랑하니 가소로운 일이다.… ••• 나는 1764 년(寶 曆 14, 明和元年)에 조선사절이 방일했을 때 객관에 나아가 시문창화가 시작되던 자리를 통과하며 그 광경을 목격했는데 적어도 志氣있는 자라 면 누가 이런 무리와 같이 섞여 시문중답하는 자리에 나가겠는가. 그래 서 진정 학문과 재능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이를 부끄러워하여 당초부터 韓 人과는 소식을 끊었다. 한인은 이런 것을 알지도 못하고 그 접촉하는 곳은 왕왕히 저러고 보니 한인으로 하여금 일본에는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인즉 실로 한탄스러운 일이다 . 라고 지극히 심한 비평을 내리고 있다 . 아마 이런 일본인의 惡詩가 韓使
를 뽐내게 하였는지도 모르겠다 . 1764 年副使 書 記 元重擧(號 玄川)는 那波 魯 堂”의 「東游篇」에 「 書 那波孝 卿東游卷後」라고 題하고 〈筑之東, 武之西, 三 , 四月之間, 損 讓 一千餘人, 翻唱二千篇〉이라고 명기했다. 魯堂에 대하여서는 『通航一覽』(卷 110) 에도 〈相國寺 輯 長老의 연고로 浪花(大坂)에서 江戶까지 왕래하면서 韓客과 접 촉하였는데 대개 甲申年 (1764) 韓使와 친교를 맺은 사람은 魯堂에 따를 이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7) 那波魯堂 이름온 師曾, 字는 孝卿, 通稱은 主膳 • 魯堂 • 鐵現道人이 라고 부른 다. 岡白駒에게 배웠으며, 德島藩 儒臣으로 1789 年꿨 享年 63( 『儒海』). 那波利貞, 「明 和元年0)朝鮮國修好通信使團0)渡來&我國0)學者文人&0)翰墨上 K 於납石應翻唱和0) ’ 一例 IC 就굴 T 」(《朝鮮學報)〉 第 42 輯) 참조.
이와 같이 韓使가 방일하는 3,4 개월 중에 1,000 여 명의 일본문인들과접 촉하고 2,000 여 편의 唱和詩를 써주었다고 하니 韓 使의 노고는 물론이려니 와 일본문인의 詩文應訓에 대한 정열이야말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일본인이 지니고 있던 통신사에 대한 관심을 하나 둘 부언코자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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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海國兵談」과 「 三國通覽圖說」로 유명한 林子平(1 738~1794) 은 1764 년 2 월, 仙台長町橋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조선사정이 江戶에 들어온다는 소 문을 듣자 낚싯대를 던지고 江戶까지 960 里(약 384km) 길을 3 日 3 夜로 답 려가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구경했다는 것이다 . 8 )
8) 永田衡吉, 『林子平』(講談社 昭和 18 年)참조.
그리 고 또 江戶末期 狂歌狂詩의 大宗匠이 고 平民文學界의 盟主로서 蜀 山人이라는 이름으로 일세를 풍미한 太田南敵 (1749~1823) 의 『發德先生文 集』에도 통신사의 문장을 풍자한 漢詩가 들어 있다 .9)
9) 塚本哲三 編, 『太田南敵集』, 探憶先生文集初編 卷 1, 詩 143 쪽(有朋堂 昭和 9 年) 濱作田의義 詩一다郞., 『太田南敵』 22 쪽(人物 幾書 吉川弘文館) . 「送下官唐人 還 朝鮮」은 平秩東
送下官唐人還朝鮮 家朋鷄鳴門跡邊 今朝哈散社科川 能紅核敷 花三月 色黑往來路二年 皆道唐人好書物 誰知惡筆不成錢 富山被美還迷惑 少許錢難御目惡 하관당인이 조선에 돌아감율 전송함 돼지가 꿀꿀하며 닭이 울던 사원 근방에서 아침밥을 먹고 나서 시나가와로 향하였네 꽃피 는 삼월 붉은 양탄자가 깔린 관람석 얼굴 빛이 검도록 왕복 길에는 2 년이나 걸렸다네 모두 말하기 를 조선사람은 글씨 를 찰쓴다고 하지만 누가 알까 악필은 돈이 안 된다는 것을 부사산을 칭찬받아 도리어 언짢다 소액의 전별이라도 보여드리기 어렵네 라고 한 것은 과연 들어보기 힘든 辛鍊한 狂句라고 해야겠다. 또한 1682 년에 통신사 소문을 듣고 色燕 (1644~1694) 가 「野폰 5 L 紀行」 罰和句에 〈小僧丘t..: b 간力냐i저다) 남石/朝鮮 0 兎力홍 ·K t£ 80 酒宅 <入 〉 (어린 중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朝鮮畵員에게 奈良 술을 따라주다)라고
읊온 것이 있다. 그리고 또 「.:.ti ;G L 卷」에 t; ,LG {l)露宅丘石丘尤力屯 r 主 重五 (머리의 이슬을 터는 붉은 말) 朝鮮 0 ii춘 b 寸寸총(J) K, 幻강t£총 杜國 (조선의 가느다란 참억새에는 향기도 없네) 라는 付句와, 鳴海의 如意寺 文英和尙(號 : 如風)이 지은 道廣〈 朝鮮人心來&也(「七百五十韻」) (길 넓게 조선사람도 오는가 보다) 등은 모두 통신사 왕래의 實景을 읊은 것이라고 하겠다 . 10)
10) 若木太一, 「朝鮮通信使&石 )II 丈山―日東(J)李杜考一」(《語文硏究》 第 52 • 53 號 九州大學 國語國文學會 1982) 참조.
그리고 또 大坂의 문인 上田秋成 (1734~1809) 도 통신사와 두 번이나 만 났다고 그의 「膳大小心錄」에 기록하고 있다. 죽 寬延元年(1 748) 과 明和元 年 (1764) 인데, 그의 나이 31 세 되던 1764 년에는 製述官 南玉과 書 記 成大 中괴 詩文唱和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岩波古典大系本 • 中村幸彦氏 誌) . 2 詩文贈答과 筆談 1) 唱和 조선국으로서는 이와 같은 문화적 접촉에 대비하여 득히 詩文과 글씨에 뛰어난 문사를 선임한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사철 일행은 총수 400 명을 넘는 대사절단으로 正使 • 副使 • 從事官의 三使 이의에 通譯官 • 製述 官 • 書記 • 寫字官 • 畵員 및 醫員 둥이 수행하면서 일본인과의 交歡울 맡 았던 것이다. 이 詩文應訓에 있어서 조선국왕 자신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11)
11) 正使 趙職撰 『海接日記』 鑑話 : 〈上曰南玉得多云矣 • 何者多作平 • 對曰四人所 作之數略同矣·上曰壯矣·汝得彼人詩來平•對曰彼人先作然後和之·故彼作果爲持來 矣〉.
이와 같이 일본문사와의 교환에서 보듯이 문화상의 우월감을 지니고 방 일한 조선사절은 시문응수에 한층 더 힘을 기울여 선진국으로서 자부심을 강하게 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 그런데 詩文贈答과 揮蓬要請은 통신사가 來日할 때의 상례로서 시대가 내려움에 따라 성황을 이루었으나 결국 使行의 苦役이 되기도 하였다. 『通航一覽』卷 108~111, 朝鮮國部 84~87 「筆談唱和」에는 各 訪日年度別 로 諸般書籍에서 인용, 수록하였는데 그 서두에서 다음과 갇이 밝히고 있다. 朝鮮使臣이 來聽할 때마다 筆談唱和를하였다. 1682 년(天和 2) 과 1711 년(正德元)경부터 이런 文事가 성행하게 되어 書冊을 이룬 것이 백수십 권에 달하여 이를 모두 枚擧할 수는 없다. 輯錄에 있어서 內命에 依한 것은 말할 것 없이 收取했으며 그 밖에 國體와 朝典에 關係되는 부류를 주로 하여 雅地, 舊跡에서 哈諒한 것들까지 채록하였다. 그러나 筆談唱 和에서 無用한 잡담과 청풍명월 따위는 인용하지 않았다. 조선통신사의 來賜을 둘러싸고 일본의 유학자와 문인들 사이에서는 액 자와 卷軸 및 居風의 書畵를 간청하는 일이 많았는데, 각 영주(大名)로부 터 對馬島藩主 宗氏에게 알선을 의뢰하는 자가 범람하였다. 그리하여 1682 년부터는 조선사절에게 휘호를 청할 때 규제를 가하게 되었다. 對馬島 眞 文役 (儒官) 雨森芳洲 l 의 『交隣提階』에 는 다음과 같이 명 기 되 어 있다. 1. 信使來開時, 行中과 함부로 필담하는 것을 금한 것은 1682 년부터 이다. 그러나 휘호는 요청하는 사람이 많아 이를 막을 길이 없어서 결 국 액자일 경우에는 2,3 枚 정도로 제한하였다. 2. 시문의 요청은 반드시 眞文役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였다. 그리고 1711 년에도 韓使를 수행하는 일본인들에게 1. 조선인의 서화를 희망하는 사람은 대마도 역원을 통하여야 한다. 2. 역원 이외에는 韓使와의 접촉을 할 수 없다. 라고 명기하여 휘호를 규제하였다고하나대마도사람에게 권한울주었으므
로 대마도 사람이 중간에 들어서서 뇌물을 받는 폐단까지 일어났던 것이다 . 1764 년의 正使 趙職의 『海接 日 記』 1 월 11 일 條에 도 〈그들은 우리 나라 시 람의 글씨만 얻을 수 있다면 權 書 와 草 書 의 우열을 가리지도 않고 모두 기 뻐 날뛰었다. 寫字官뿐만 아니라 일행 중 글씨를 조금이라도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일본인들의 요청에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 심지어는 승선 한 후에도 따라와서 애원하는 바람에 揮漏하는 데 겨를이 없었다 . 그리고 대마도 譯官둘은 중간에 서서 소개하면서 뇌물까지 받는다고 하니 그들의 뜻을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통신사의 일본기행문 중 申維翰의 『海游錄』이야말로 白眉 로 서 오늘닐 까지 훤전되 어 온다 . 그중에서 10 월 4 일 條 江戶文士와의 唱和에서 〈연일 館에 있으매 심상한 시인들이 만나보러 오는 자가 잇따라 시를 부르고 화 답하며 필담으로 수작하기에 한가한 톰이 없어 괴로웠다. 또 밖으로부터 청하는 자들은 雨森東과 두 長老를 끌어대며 詩文集의 序文이니, 그림의 畵 題니, 畵 像의 贊이니 諒物詩의 類를 모두 내가 손수 쓰고 도장을 누른 것을 받아 가지고 가기를 원하여 나로 하여금 골몰하여 겨를이 없게 하였 다〉라고 하였다. 또 歸路 10 월 27 일 磨針嶺울 넘어 彦根에 다다랐을 때의 일은 〈 문학을 좋아하는 지 방의 풍속이 다른 고을보다 배 나 더 하여 우리 나라의 시 문을 많이 얻은 자는 글의 우열을 묻지 않고 그것을 빙자하여 이름을 내려고 하 였다. 그들이 다투어 듬을 엿보고 기회를 만들어 얻으려고 애쓰는 것이 탐욕 많은 장사꾼이 재 물에 목숨을 바치 는 것과 같으므로 그들이 보낸 글 들이 柄하여 족히 응답할 거리도 못되었으나 나는이머 글에 관한 일을 맡 았으므로 문을 막고 몰아낼 수가 없어 밤새도록 써내고 보니 문자의 屈運 이라고 스스로 웃었다〉라고 쓰고 있다. 대마도의 眞文役(書記)으로서 통신사를 수행한 雨森芳洲는 申維翰에게 〈일본사람이 글을 배우는 데는 귀국과 아주 달라서 힘을 쓰는 것을 심히 부지런히 해야 하나 성취하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귀하가 여기서부터 江戶 까지 가는 도중에서 집하는 많은 시문은 천신만고로 애를 쩌서 겨우 지은 글들이니 모름지기 더럽다고 · 버리지 말고 용납하여 칭찬해 주면 다행이겠 다〉고 말한 일이 있다. 申維翰이 앞에서 말한 대로 일본사람의 글들이 너 무 兩하여 화답하기에 족하지는 못하나 일일이 수응해 주었다고 한것은 아마 芳洲의 말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우리 통신사 일행은 서화의 휘호를 해준 답
례로 바치는 潤 筆 料는 일체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 - 1764 년 從 事 官 書 記로 수행한 金仁謙(號 退石)은 순 한굳로 가사체의 기행문 「 日東壯遊歌」띠를 펴
12) 『 日東壯遊歌』는 한글로 기 술된 유일한 가사체 기행문으로 한국문학사상 중요
輝退T5才A盜十〈生쵸 검仁첼士企均 進孛成士b . b..궁書 .潟篠홉乙 ..”麟麟 ..' 息_篠g上的 4Y갚井 晶깽3 -A52’ 士'효 u擇t?J:D: 書剛言陣溪成碩!,寸 . 1764 년 從事官書記 金仁謙肖像
시되는 자료이다. 현존하는 筆寫本으로는 李秉岐氏 愛藏本 『日東壯遊歌』(四卷四冊) 이 서울大學校 中央圖書館 가람文庫에 전하며 李家源 博士所藏 轉寫本이 있다. 校 莊本으로는 李民樹 校底 『 日東壯遊歌』 (探究堂, 1981 年), 沈載完 校柱, 『 日 東壯遊 歌』 (韓國古典文學大系 10 所收. 敎文祗 1984 年) 이 있다. 張德順 著, 『金仁謙의 「 日 東壯遊歌」 旅行과 體驗의 文學 日本篇』 (민족문화문고 간행희 1985 년) 참조. 13) 『問樣餘響』 (上), (伊藤維典 編, 明和元年, 文泉堂) 〈通刺. 僕姓田名立松字 士茂 • 號勝山 • 特來于館下執觸於左右 • 幸賜容接感戴何言〉.
냈는데 그 속의 2 월 1 일 條에 다음과 갇이 쓰고 있다. 괘선비 대엿놈 서로가 글을 드려 차운(次韻)하라 보채거늘 종이 펴 고 먹을 갈아 담배 한대 먹을 동안 여덟 수를 내리쓰니 그중에 전승산 (田勝山 )13) 이 글 쓰는 양 바라보고 필담으로 써서 뵈되 전문(傳聞)의 퇴석 (退石)先生 시 (詩) 짓기로 유명터니 선생의 빠른 재주 일생 처음 보 았으니 엎디어 묻잡나니 필연코 귀한 별호(別號) 퇴석 (退石)인가 하나 이다 . 내 웃고 써서 뵈되 늙고 병든 둔한 글을 포장(喪暎)을 과히 하니 수괴 (蓋恨)키 가이 없다. 승산(勝山)이 고쳐 하되 소국의 천한 선비 세 상에 낫삽다가 장한 구경하였으니 저녁에 죽사와도 여한이 없다 하고 어디로 나가더니 또 고쳐 들어와서 아롱보에 무엇 싸고 杉木 궤에 무엇 넣어 이마에 손을 얹고 엎디어 드리거늘 받아놓고 피봉보니 봉한 위에 쓰였으되 각색 大緩 三段이오, 사십삼냥(四十三兩) 은자(銀子)로다. 놀 랍고 어이없어 종이에 써서 뵈되 그대 비록 의국이나 선비몸으로서 온 화를 갖다가서 글 값을주랴하니 그뜻은감격하나의(義)에 크게 가(可) 치 않아 못받고 도로 주니 허물치 말지어다 . 승산(勝山)이 부끄러워 백 번이나 칭사(稱辭)하고 고쳐 써서 하온 말이 옛부터 성현(聖賢)네도 제 자(弟子)의 수수례 (授受禮)는 다 받아 겨오시니 소생이 이것으로 폐백 (幣用)을 하옵고서 제자되기 원하나니 물리치지 마옵소서. 수수(授受) 라 하는 것은 포육에甫肉)으로 하는지라 어디서 은단(銀緩)으로 폐백을 하단 말고, 성현(聖賢)네께오서도 받을리 만무하고내 무슨 재덕(才德) 으로 그대의 스승될꼬. 주고받기 다 그로니 잡말 말고 가져가라. 승산 이 도로 나가 감자 설탕(雪糖) 가지고 지성으로 권하기에 조금씩 맛을 보고 행중의 시전지(詩獲紙)를 열 장으로 답례하다. 그리고, 이때 통신사 일행이 귀국하여 영조대왕께 복명할 때 국왕으로
부터 下問이 있었다. 問 : 여국(彼國)에 들어가니 피인(彼人)의 문재(文才)들이 무섭더냐 언 잖더냐?〉 答 : 〈문재가 유여 (有餘)한 놈 왕왕이 있사오나 시율(詩律)은 참혹하여 제술(製述)할 줄 모르더이다. > 問 : 〈이번 지은 것이 다소(多少)가 어떠하뇨?〉 答 : 〈네 문사 짓사온것 대략은 갇사오나 다주어 헤게 되면 수천 수(數 千 首) 가 되 나이 다〉 . 國王은 擊節敵賞하시 오되 〈壯하고 심 히 많다. 들으 니 너희 詩才 전도곤 많이 낫고 潤筆을 도로줌이 淸白히 다녀오니 屠國울 아닌지라 아름답고 기특하다〉고 격찬했던 것이다(『日東壯遊歌』). 앞에서 말한 네 문사란 製述官 南玉과 書記 成大中, 元重擧 및 金仁謙 을 말한다. 영조대왕이 〈壯하도다. 너희도 그들의 시를 가지고 왔느냐〉 하 시매 〈네. 그들이 먼저 시를 지은 뒤에 臣돌이 화답하였으므로 그들의 시 를 가지고 왔나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저자가 소장하고 있는 「唱和詩稿」 는 일본문사들이 成大中에게 和韻을 청한 親筆詩稿로서, 接伴僧인 承瞬維 天和尙을 비롯하여 당시의 이름난 日本 儒學者 片山北海 등 28 명의 漢詩가 들어 있다 . 그리고 이 詩稿의 일부분으로 韓國 國立中央圖書館所藏 『東接 唱翻集』과 日本 山口縣立女子大學 寺內樓圓文庫에 上星詩文이 현존한다. 통신사의 來聽에 있어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1711 년 때의 접촉이다. 新井白石과 信使와의 交歡에서는 『白石詩草』에 들어 있는 信使의 序跋과 「江關筆談」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木下順庵의 門人둘을 중심으로 深見玄俗 • 三宅觀蘭 • 木下菊潭 • 土肥霞洲 • 室鳩菓 • 服部寬齋 • 祗園南海 둥이 客館을 방문하여 贈答한 것이 『七家唱和集』 14~ 로 간행되었다. 또 京都의 儒學者 源尾維賢(號 用抽齋)은 信使와의 唱和詩文을 널리 채 록하여 『雜林唱和集』 15) 을 1712 년 5 월에 上粹했는데 萩生 1H 探一門은 소의되 었다. 그리하여 談園一派는 이에 대항하여 신사와의 창화시고를 따로 『問 樣崎賞』과 『廣陵問樣錄』이 라고 이 름붙여 간행 하였다 .16) 14) 七家唱和班荊集 2 卷 (木下平三郞) • 正德和韓集 2 卷 (深見新右衛門) • 支機開談 韓1 卷唱 (和三集宅 九1十 卷郞 ()士 肥. 朝源四鮮郞客)館 .詩 賓文館稿稿 好1 卷集 ( 2室 卷新 助()祗 園• 餘桑一韓)唱 . 訓集 1 卷 (服部藤九郞) • 桑 15) Ii'雜林唱和集』 • 源尾維賢 編 • 正德辛卯新鎖 • 書坊玉芝堂 壽 粹 • 木板 全 16 冊 . 16) 『問椎崎賞』 韓使와 山縣周南 • 安藤東野와의 唱和集, 『題答問接二種附廣陵問樣 錄』 味木虎 • 寺田立革과 李東郭과의 唱和集,
그리 고 1711 년 正使書記 洪舜衍 (號 鏡湖) 의 愛妄 安援의 作 「春思」와 「闇 怨」 2 편이 前記한 『雜林唱和集』예 수록되어 있다 . 「閩怨」이라는 詩는 다 음과같다. 十五隊遊子 二十猶未歸 縱欲道心事 與須相見稀 또 그 注記에 〈右洪鏡湖妄安氏之詩, 事難不關唱細而淸思硏語可與李易安 朱淑眞相伯仲矣, 一友人得之鏡湖席上愛玩示予, 鳴呼三韓婦人能言詩亦可見 其文華之盛, 故錄 • 用抽齋誌〉라고 하였다. 鏡湖의 愛妄 安 援 의 시를 宋代 의 여류시인 李淸照와 朱淑眞에 비견하였던 것이다. 信使와 일본문인과의 시문창화에 있어서 홍미있는 기록이 남아 있다. 「樂鄕紀聞」 17) 에 의하면 〈조선사람은 일본사람과의 창화에서 빨리짓는 것을 위주로 하여 졸작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1811 년 때 어떤 조선학사의 소 행을 보니 툼 있을 때에 聯句 또는 起結句를 몇 구씩 생각나는 대로 적어 서 종이 봉두에 넣어 두었다가 화답할 때에 그 봉두에서 꺼내어 日人의 上星詩稿에 맞추어서 한두 자 고치곤 하였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조선측 문사들은 화운이 빠른 것을 몹시 자랑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1711 년에 이 어 1719 년, 1748 년, 1764 년 및 1811 년의 信使와의 唱和集에 대해서는 後章에서 詳述하기로 하겠다.
17) 『樂鄕紀聞』 2. 對馬夜話 中川廷良 著 鈴木梁三 校莊(東洋文庫 308. 平凡社 刊, 昭和 52 年).
2) 筆談 앞에서 말한 바와 갇이 일본문사들은 조선통신사 일행과 만나 광범위 한 화제로 필담을 나누었는데, 그 내용은 크게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 다. ® 科擧制度 ® 諺文 ® 冠婚喪祭 ® 醫事問答 ® 花鳥 @ 筆墨의 製 法 ® 富士山과 金剛山 ® 衣冠 ® 觀相 ® 釋莫 @ 退溪朱子學 @ 中國 事情 @ 女人染齒 ® 生活習俗 ® 徐市東渡說 ® 煙草와 煙管. 다음에서 는 그 필담 내용을 소개하기로 한다. ® 科擧制度 : 일본에서는 모두 세습제로 인하여 인재등용의 길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 일본문인들은 중국과 조선의 과거제도에 남달리 깊은 관심 을 갖고 있었던 것 갇다. 조선왕조의 과거시험은 文科 • 武科 • 雜科로 구 별하여 정기적으로 子 • 卯 • 午 • 酉에 3 년마다 거행하는 式年試와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임시로 행하는 增廣試가 있다. 이 과거제도는 18 ) 고려 광종 9 년 (958) 에 설치되어 1894 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申維翰의 『海游 錄』 에서도 일본에서는 과거제도에 의하여 인재를 등용하는 법이 없고 관 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세습이므로 奇材俊物이라고 해도 세상에 이름을 나타낼 수 없어서 한을 품고 이 세상을 떠나는 수밖에 없음을 한탄했다고 하였다.
18) 『高麗史』 卷 73, 志第 27, 選擧 1, 科 目 1 「光宗九年五月 雙冀獻議始設科擧, 試以試試領及時務策, 取進士兼取明經醫 卜等業」(國 書 刊行會, 明治 42 年).
1711 년에 漢學譯官 鄭昌周와 필담한 岡島明敬突 〈唐山朝鮮共有科擧所 以諸生發狼讀 書 用意于筆現 往往有大才人出來, 我日本若也有及第之事必然 還有奇才人團團出來, 但可借我國沒有科擧, 故縱有幾個良才人也自埋沒姓名 終不能出身可暎可暎〉 20) 이라고 토로하고 있다.
19) 僕 • 長崎人 • 氏姓岡島 • 名環. 字玉成乃國子祭酒林老人門弟也(『雜林唱和集』 卷 3). 20) 『難林唱和集』 卷 3, 東武 참조.
또한 信使와 新井白石과의 交歡席上에서 製述官 李璟은 雨森芳洲를 옆 에 두고 白石에게 〈이 사람이 만약 조선에 태어났더라면 이렇게 냉대받지 않을 터이니 귀국에서는 인재를 존중하지 않는 것 같으니 이야말로 정치 상의 일대 결점이오〉라고 지적한 바 있다(「江關筆談」) . 과거에 의해서 인 재를 등용하는 조선으로 본다면 일본의 세습제라는 것은 기이하게 생각되 었을 것이다 . 그런데 과거시험의 내용에 대하여 1764 년, 日本 文人 仙樓(奧田元繼)와 正使伴人 花山齋(趙東親)와의 문답은 다음과 같다. 仙樓:貴國科文取士之法與華同敗 花山:幣邦科擧有製述講經二法, 製述者作文以明聖賢之言者也. 講經者 熟讀四書五經而踊講者也. 古法如此, 近世則世道已降士習亦卑, 製述只尙 詞章, 講經不究深意, 只有其名而已 . 登科者萬不及古之人, 差向異邦人答 說也.
즉, 과거도 근세에 와서는 其名이 있을 뿐, 옛사람에 따를 수 없음을 이 방인에게 설명하려니 부끄럽다고 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 ®諺文:조선의 訓民正音 21 몬세종대왕이 당시 뛰어난학자들을집현전 에 모아 학문을 장려하여 그들과의 공동연구로 만들어진 문자이다. 이것 은 발음기관을 象形한 독창적인 表音文字이다. 이 문자야말로 한국민족의 문화적 유산으로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이다.
21) 『訓民正音解例本』(全釜弼氏所藏). 훈민정음 원본으로서 1940 년 韓國 慶尙北道 安東郡 臥龍面周下洞李漢杰氏宅에서 발견되었다. 한글학회에서 影印本으로 刊行.
申維翰의 『海游錄』에 〈여러 왜인이 우리나라 언문의 字形올 보여달라고 하므로 대략 써서 보였다. 또 어느시대에 창제하였는가를 묻기에 나는 답 하기를 ‘우리 세종께서 聖神의 자질로서 온갖 技藝에 博通하시고 열다섯 줄의 새 굴자를 만들어 만물의 음을 다 模寫시켰는데 지금으로부터 300 년 전의 일이다’ 하니 여러 왜인들이 모여서 보고는 말하기를 ‘글자의 형상이 星辰·草木과 같으니 반드시 河圖洛書에서 취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라고 씌어 있다. 또 1711 년 京都本國寺에서의 筆談席上 松崎祐之(號 甘白)는 製述官 李東 郭에게 〈貴國所用諺文不知起自何時〉라고 묻자 東郭은 〈我國諺文世宗大王 與申叔舟, 鄭麟址等諸名臣別淸濁高低之音, 翔爲一家言, 眞聖人因世制宜之 一端也, 今見馬州之人亦有能通者奇哉奇哉〉 22) 라고 감탄하고 있다 .
22) 『難林唱和集』 卷 4, 京師前編 • 通刺. 僕氏松崎名祐之. 號甘白.
甘白은 또다시 〈貴邦諺文, 彼字體如策字樣者離合華之古文而所造敗其大 略可得聞平〉고 물었다. 東郭은 答曰 〈諺文字體特出於我聖祖一時制作, 非 模微菜諦之舊也〉 23) 라고 하였다.
23) 앞의 책 卷 5, 京師後編 참조.
이와 같이 일본문사들 눈에는 조선언문이 큰 관심거리였다. 따라서 몽 신사 일행은 일본측 질문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해 온 것 같다. 『和韓唱和』 (享保己亥之歲 島山 先生門人 書燁貫道軒藏版)에도 池田南漠의 요청으로 正使書記 張應斗(號 菊溪)가 書寫한 언문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문의 통용에 대하여 1764 년 製述官 南玉(號秋月)과 일본문인 仙樓와의 문답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兩好餘話』). 仙樓:不識一丁者, 但用諺文, 通千里戀戀耶 秋月:女子與小人以諺通情, 其他皆用古字古語耳
록. -자. ., 이R?-o _I^A비수소뷰슈부소뷰겨+寸브넌서〈、 보벼a뱌 벼뱌뵤모묘미며모티뮤무、llRF 리든로터랴마己로유랴로르루터u _ -디견)도T댜머뎌됴두다누u뇨니느'yk · · 전쁩罪 탓(뿡國:蓋챔之緖而옮盆조 R,쥬뿔字食,浜향성접器慕 . 문세니升 均놉홍병강립1여1로나습니K’. 셰허더약뀌손섯仇은1사사11눙평오각나이을
한편 日本假名文字에 대하여 우리나라 통신사절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 었던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1636 년 副使 金東演의 『海樣錄』(聞見雜錄)에 以倭人不解文字依方言以四十八字分作倭諺, 酷似我國諺文, 又有一種~ 文以十七姑中草 書 字爲之 , 雜用文字此則酷似我國吏 讀 왜인이 문자를 알지 못하므로 그 나라 말에 따라 48 자로 나누어 일본문자를 만들었는데 우리 나라의 언문과 매우 닮았다. 또 한 가지의 문자는 십칠첩 (왕회 지의 초서첩) 중의 초서 글자로 만들어 문자에 섞어 쓰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이 두와 매우 닮았다. 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諺文草書字라고 함은 소위 平假名文字를 말한 것이다. 1655 년 從事官 南龍翼의 『扶桑錄』(聞見別錄)에는
無男女貴賤, 皆習其國字, 所謂國字只五十字而離合轉環無言不記, 猶我 國之諺文也, 稽解文者雜以漢字以通書辭 남녀 귀천 없이 모두 나라의 글자를 익히는데 소위 국자라는 것은 단지 50 자뿐이나, 때고 합치기를 이리저리하면 말을 적지 못할 것이 없으니 우리 나라 의 언문과 같은 것으로 문자를 약간 아는 사람은 한자(漢字)를 섞어서 편지에 통용하고 있다. 라고 명기했다. 그리고 1719 년 製述官 申維翰의 『海游錄』(附聞見雜錄)에는 國中所用諺文有四十八字, 字形皆截眞書首尾點獸j, 有音而無釋, 互着而 成聲 略如我國諺文 나라 안에서 쓰는 언문은 48 자가 있는데 자형은 모두 진서 수미의 점과 획을 찰라 만들었고, 음만 있고 해석은 없어 서로 붙여 소리를 이루어 거의 우리나 라의 언문과 같다. 즉 日本 片假名文字는 한자의 偏芳을 따서 만들었음을 말하고 있다 . ® 冠婚喪祭 : 앞에 서 쓴 1711 년 필 담에 서 甘白 問 〈貴邦俗恥再線, 若再隊 失行, 婦女所生之子不許入士流, 其禮今荀達于上下平〉, 〈聞貴邦俗喪必三年 難奴僕例許百日喪, 若願行三年者亦許之, 蓋惟奴僕拜百日或三年之喪則其主 如數 口 之家使令如何〉, 〈如喪祭者或儒或佛各以其所信而行之平 . 〉, 〈當今貴邦 尙儒平信佛平儒佛相半平〉, 즉 貴邦에서는 再隊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만 약 재가하여 아들을 낳았어도 士流에 입적시키지 않는다는데 지금도 이런 것이 적용되고 있는가, 노복에게도 백일 또는 삼년상을 허락하는 경우 家 主는 使令을 어떻게 부리는가, 喪祭에서 儒佛 各各 믿는 바대로 거행하는 가, 當今 유교를 숭상하는 사람이 많은지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이 많은지 또는 儒佛相半인지를 물었으나 이것들은 국사에 관한 일이므로 대답을 피 한 것으로 보여진다 .24) 火葬 • 土葬 • 水葬 • 鳥葬에 대한 문답은 다음과 같다. 24) 앞의 책
仙樓:人死則僧俗共燒化, 所謂火葬也, 間有土葬者而已, 夫鳥葬則棄之 中野, 水葬則沒之江流者絶亡矣, 雜貴邦亦然, 或有水鳥葬耶 秋月 : 此法登中華所有, 幣邦小中華復沒此事耳, 所謂土葬火葬也. 또 삼년상에 대한 대화는 이러하다. 茅山:貴邦三年喪, 居怖區者著喪服爲力役備作也, 否則官賜栗平, 又其 禮皆襲周制平 여기에 대하여 副使書記 元重擧(號 玄 )II) 의 답은 다음과 같다. 玄川:難喪中農者爲農, 商者爲商, 但其持禮如禮耳, 大凡喪禮是自天子 達於庶人者故其節目亦多, 從上而言, 其庶人苦魂草覆自爲{奇間, 食素斷色 自爲持禮耳, 餘可類推冠香祭亦同, 幣邦自君上至庶人皆違家禮而已. ® 醫事問答 25): 통신사가 방일할 때마다 良醫 l 명과 醫員 2 명이 수행하 여 일본 의원 및 本草學者들과의 사이에 질의문답이 있었는데 거기에 관 한 기록이 수없이 간행되었다. 信使 初期의 의원의 활약에 대해서는 기록 이 남아 있지 않다 . 여기에서는 1636 년의 信使 때부터 방일 연대순으로 약 술하고자 한다. 1636 년에는 幕府醫官 岡本玄治가 將軍 家光의 명으로 信使와 집하고 從 事官 黃果(號 靑丘)의 병을 고치는 데 공이 있었다. 韓使는 이를 반겨 〈昔 越人今見玄治〉이라고 하며 칭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의 醫員 白士立 과 野間三竹(號 靜軒)과의 醫事問答 『朝鮮人筆談』 26) 이 京都大學 富士川文 25). 三木榮 著, 『朝鮮醫學史及疾病史』 1963 年, 自家出版 500 部, 第 10 장 「江戶時代 K 於납 5 日鮮醫學0)交涉, 第一節 第二項 日鮮醫事問答」 참조. 金斗鍾 著, 『韓國醫 學史』 第 3 편 「最近世醫學史 2 절 後期醫人傳」 (探究堂, 1979 年)* 26) 앞의 駐 8) , 三木榮 書 九享保時 C. 『朝鮮人筆談』寫本一冊. (京都大學富士川 本): 醫員 白興鈴에게 日本醫가 問答한것을 모은 小冊子라고 설명을 가했다. 그러 나 이 筆寫本을 조사해 보니 靜軒(野間四竹의 號)과 醫員 白士立 및 學士 槪試과 의 筆談唱和가 실려 있다. 따라서 시대적으로 1636 년에 방일한 白士立과 槿試에 관 한 것이 판명되었다. 三木 氏는 白氏, 權氏라고 한 것을 보고 1719 년에 내일한 橫道 와 白興鈴으로 오해한 것 같다.
庫에 남아 있다. 1655 년에는 貝原益軒이 조선의원에게 日本産 〈竹節人夢〉에 대하여 질문 하니 이는 〈백제인삼〉일 것이라고 대답했다(服部範忠 『人參譜』). 1682 년 信使 訪日時에는 水戶光圈의 家臣 今井小四郞,中村新八郞, 森指 月을 객관에 보내어 製述官 成苑과 醫員鄭斗俊에게 일본에는 없는 歲獸 와 草木 및 國字에 관하여 질문시켰다 27)( 『桃源遺事』).
27) 『桃源遺事』(德川公爵家藏版 弘文社 昭和 10 年) 14 쪽.
1711 년에 는 本草學者 稱生若 Ii' m 』 序룰 製述官 李讀(號 東部) 이 써주었다. 28) 良醫 奇斗文(號 常百軒)과 博多의 儒醫 竹田定直(號 春庵) 과의 사이에 藥劑의 사용법에 관한 문답을 하였다 .29) 그리고 浪華의 鐵醫 村上溪南은 對馬島의 醫師 椎靖菴을 따라 객 관을 방문하고 鐵術에 관한 문 답을 하였다. (『兩東唱和後錄』). 醫事問答에 있어서 특히 인삼에 관한 것 이 많다. 大垣의 儒醫 北尾春圓는 인삼에 대하여 沙夢과 菱夢의 眞僞鑑定 法을 묻기 도 했다(『桑韓醫談』).
28) Ii'雜林唱和集』 卷 5, 京師後編 〈譜保票李東郭 • 洪鏡湖 • 嚴龍湖 , 南距燮四先生 案下〉 •••••• 正德 辛卯 十二月 梧義頓首. 若水는 다시 製述官 東郭에게 〈千萬爲政乞 惠來幸茶〉이라고 간청하여 東郭이 『庶物類纂』에 序文올 쓰게 되었다. 29) Ii'難林唱和集』 卷 14, 諸州後 編 「示良醫當百軒 • 春菴」 참조.
1719 년 11 월 1 일에 는 信使客館인 京都本能寺로 儒醫 加藤謙齋가 醫員 白 興鈴과 書記 張應斗를 찾아가 문답했다. 여기에 대하여 後에 謙齋의 아~ 篤齋가 補正하고 다시 기 타의 人夢考룰 부가하여 『和漢人澄考』를 간행 하 였다. 이 속에서 稱生若水의 人夢論 30) 을 소개하고 이어서 謙齋가 조선의 관과 만나 諸夢에 관하여 질문한 필어도록을 실었다. 일본 각지의 문사 와 신사와의 筆錄을 모은 『桑韓坦篤集』 권 3 에 北尾春倫(春圓의 第二子) 와 良醫 權道 및 醫員 金光酒와의 문답, 동 권 4 에 春倫과 金光酒와의 문 답, 동권 8 에 飯田玄機(防州岩邑의 醫士)와 權道와의 문답, 동권 9 에 飯 田隆慶(京都 醫士) 및 林義方(長州萩藩 醫士)와 조선 의관과의 문답이 각 각 실려 있다. 3ll 이 밖에 筑前州 藍島에서 신사와 일본문사들과 창화한 것을 小野士厚가
30) 『和漢人澄考』(廷享五年戊辰三月粹行 , · 安永三年甲午九月補正. 文化九年壬申初 冬求版 浪華 書 隸 • 加賀屋善藏粹). 朝鮮國醫官西桃白君平 • 從事 書 記張應斗菊溪贈答 記 참조 . 31) 앞의 往 8), 三木榮 書 315 쪽 참조.
편집한 『藍島鼓吹』에도 植物岡 및 朝鮮圖를 삽입한 것이 있다. 1748 년 良醫 趙崇 蔣 와 前田道伯과의 문답 3 2 ) 에서 인삼은 長白山産이 최상 품이라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고 물은즉 良醫는 장백산뿐만 아니라 北路의 ` 産이면 제일이라고 하였다. 道伯은 趙崇 壽 에게 다음과 갇은 人夢詩를 보 냈다.
32) 『對麗筆語』, 江都前田道伯先生 著 延享五戊辰年 六月, 書 房江戶日本橋通一町 目出雲寺和泉祿發行.
與趙崇 壽 鴨綠難林指掌間, 如何此處駐朱顔 人薔五葉春應通 萬古風光長白山 이 시에 대하여 趙崇 壽 는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趙和 沈沈數翔海山間, 未到博桑己減顔 大藥駐年君莫說, 不如歸臥故鄕山 이때에 趙崇 壽 는 40 세요 前田道伯은 37 세였다. 또 直海龍과의 문답에서도 本草에 관한 필어가 주요부분을 이루는데 陶 弘景의 「名醫別錄」에서 말하는 인삼에 대하여 질문했고 기타 각종 본초의 異同울 물었다. 그리고 『桑韓器鑑錄醫談』에서는 浪華의 醫員 百田安宅 33) 과 良醫 趙崇壽 와의 醫事問答울 기록하고 부록으로 安宅과 信使의 三書記 및 良醫와의 唱和詩룰 싣고 있다.
33) 直海先生 著, 韓人唱和産物筆語班荊開譯 含英堂 寬廷元~ 十月 刊 .
浪華의 醫員 種口淳里(字 道與 • 號 生寧)이 官命을 받고 韓客올 無尻川 船中에서 治療한 전후모양을 기록한 「韓客治驗」에는 韓客을 全治시켜 正使 로부터 감사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韓客이 일본 의약을 의 심하자 淳皇는 貴邦의 『東醫寶鑑』을 規短로 삼았은죽 무슨 의심이 있으랴 고 했다 한다. 그 다음 橘元勳과 良醫 趙崇 壽 와의 對談筆錄 S4) 「橘先生仙椎筆談」에도
34) 앞의 柱 8) , 三木榮 書 316 쪽 참조 .
약초, 특히 인삼에 관하여 질문했고 조선에서 常用하는 醫 書 에 관해서 물 었다. 1764 년에 는 良醫 李佐國과 尾張藩의 醫員 山 口 忠居가 名古屋의 性高院에 서 회합하고 인삼의 眞廣鑑定法 및 夢葉의 主治에 대하여 질문한 「和韓醫 話」가 있다. 그리고 江戶 客館에서의 坂上善之와의 필담에서도 인삼에 관 하여 상론하였다(「倭韓醫談」). 또한 幕府의 醫官 山田正珍이 人華製法에 대하여 묻자 良醫는 參製一法의 別記를 주면서 그의 의학에 대한 열심과 재능이 고명함을 칭찬했다고 한다. 이어 正珍은 正使伴人 李民 壽 (號 三桂, 醫理에 通함)에게 萬年靑葉을 내보이면서 조선 명칭을 물은즉, 民 壽 는 〈此 乃採藥 軍事何以知平〉즉 軍官인 내가 어떻게 採藥을 알겠는가 하고 반 문했다는 것이다. 35)
35) 『桑韓筆語』, 山田正珍撰 寶曆十四年 四月 東都 刊 前掃 三木榮 書 316 쪽참조.
浪華의 信使 客館이던 本願寺에서 儒醫北山彰(字元章. 號橘庵)이 醫官 南斗昊과 필담창화한 가운데 解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難壇團鳴」). 良醫 李佐國(號 慕菴)과 奧田元繼(號 仙樓)와의 필담에서는 湯泉療法이 중심이었다. 慕菴 : 貴邦有湯泉治死疾者平. 仙樓 : 湯泉數十處, 匠短猪所錄畢, 其尤傑然著者攝之有馬, 但之城崎, 紀之熊野此等接壤中州, 超浴者追逐躍鍾. 慕菴:何症能急. 仙樓:僕非醫何政奉答貴邦湯泉有幾處平 慕菴:東西兩道名山産石琉黃者必有溫泉浦出, 景山藤嶺金川其他數十處 亦不假錄示, 皆治風寒濕揮等之症. 『寶曆物語』 36) 에 의하면 1764 년 信使小童 金漢重이 大坂에서 병사한 것에
36) 『朝鮮信使來朝歸机官錄』(兵庫津岡方忽會所所藏 兵庫岡方古文 書 刊行委員會 • 昭和 심年) 所收 , 國立國會圖 書 館本 「 寶 曆物語」 卷 8 • 大坂旅館信使留守事 • 井小童 病死之事 • 여기에는 小童名울 〈金眠江〉이라고 했다. 〈今春和國客 • 去歲韓人中 • 浮 世何定處, 可歸古地春金良江行年二十二齡書〉라고 했다. 그런데 金漢重 墓碑에 陰刻 된 辭世詩 〈今春倭國客 • 去年朝中人 • 浮世何會定·可歸古地春〉와 비교하면 倭-+和, 年-+歲, 朝-+韓, 會-+定 • 定-+處처 럼 異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李進熙, 『江戶時 代(})朝鮮通信使』 (講談社 昭和 62 年) 에 는 〈今春倭國客, 去年韓人中, 浮世何定處 • 可 歸古地春〉이 라고 했다.
관하여 朝鮮醫員 尙庵(成額의 號)과 對馬島醫生 平山文徵이 의술을 다했으 나 效가 없이 陰去火動症으로 고국에 두 아들을 남긴 채 사망했다는 기사 와 함께 臨終에 써서 남긴 辭世詩가 있다 . 그리고 「攝津名所圖會大成」(卷 9 下)에도 「韓人境」이라고 題하고 竹林寺 本堂後庭楠樹下에 병사한 金漢重이 묻혔다고 하며 當寺의 주지승의 追悼和歌를 실었다. 大阪竹林寺後庭에는 無緣佛 속에 이 묘비가 서 있다. 墓碑前面에 〈朝鮮金漢重〉이라고 陰刻하 고 右側面에 〈明和元甲申二月十一日卒〉, 左側面에 〈今春倭國客 去年朝中 人, 浮世何會定, 可歸古地春〉이라고 辭世詩가 재겨져 있다. 실은 1982 년 1 월 24 일 재일조선인 청년들의 발의로 220 년 만에 성대한 위령제를 거행하 여 큰 화제가 되었다(通信使 慰靈祭 記念講演 李元植 「明和度 0 朝鮮通信 使':::.--?\,,--c:」 上 • 下 《東洋經濟日報〉〉 1982 • l • 29, 2 • 5). ® 花鳥 : 『雜林唱和集』(卷 5) 에 甘白이 〈我國有鳥黃綠色大如雀, 名曰鷲 •••••• 貴邦所謂鷲亦同吾國所謂鷲平〉라고 묻자 東郭은 〈僕舊聞日本無鷲而今 承阮敎其形顔以鷲而所謂鷲只有黃色無綠色〉이 라고 대 답했는데 韓國에 서 는
1764년 小童 金漢重墓(大阪 竹林寺)
黃鳥라고 불려왔다. 諸橋轍次 著 『大漢和辭典』 卷 12, 855 면에 〈燃〉 조선 꾀꼬리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唐詩選』 伊州歌에 〈打起黃 燦 兒, 莫敎枝上 'Wt' lffi時驚妄夢 不得到遼西〉라고 한 오언절구가 들어 있다. 『本草綱目』 林齒類에 의하면 黃鳥는 黃 鷲 • 黃關 • 黎黃 • 楚雀 • 倉庚이라고도 했고 입 춘 후에 울기 시작하여 보리가 누르스름해질 무렵에 찰 울며 그 소리는 원활하여 마치 베짜는 소리와도 같다고 하였다. 岡元鳳의 「毛詩品物圖改」 에도 黃鳥를 〈力 力弓 4 ? ? · 七久〉라고 했다. 또 「兩好餘話」에 仙樓 : 所圖示郞醉呼敬鷺, 其羽黃灰色, 三四月候有好音, 淸滑可愛, 無他齒可比, 難不視眞生能察之如何. 雲我(李彦頂) : 幣邦 鷲 亦如 是, 聞古則無之,近世多見之, 唯與詩之所諒分明是別種也라고 기재되어 있 다. 다음 樓에 대하여, 菊般이 일본에서는 꽃이라고 하면 말하지 않아도 樓 花룰 연상하는데 귀국에서도 일본에서처럼 애완하느냐고 묻자, 東郭은 조 선에는 樓桃란 것이 심히 많아꽃은 귀하지 않고 오직 그 열매를좋아할뿐 이다. 貴國의 樓桃花는 色이 몹시 예쁘다고 하니 아마 우리나라 것과는 다 른 것 같다고 했다. 또 1617 년 李景稷의 「扶桑錄」에 〈花草則別無奇花異草 而以木樓爲第一, 其木如我國之山樓而枝祠 長長 而長〉, 1655 년 南龍翼의 「扶 桑錄」에 〈我國之所無者有木樣 •••••• 國俗稱爲第一品卽奇花也〉라고 하였다 . 1764 년의 筆談集 『兩好餘話』(附錄)에 茅山 : 所圖示敵邦樓也, 人以爲中華 海葉。 秋月 (南玉) : 非樓亦非海業, !僕未魄何花。 茅山 : 別有稱樣者平. 秋 月 : 樓桃 . 茅山 : 有單稱樓平 . 秋月 : 無라고 기록되어 있다. 앵도는 조선에서 古來로 珍重해 온 과실이다. 世宗大王이 이것을 좋아 했으므로 효성이 깊은,문종이 태자 때 손수 宮苑에 심고 그 열매가 익는 것을 기다려 대왕께 바쳤다는 미담이 있다. 그런데 松田甲 「朝鮮 0 樓上樓桃」, 「大和樓左移植산石洪耳溪」(『日鮮史話』 第 1 卷 第 2 卷)에, 서울 근교 우이동에 洪良浩 (1724~1802) 가 1764 년 때 의 通信使行에게 부탁해서 日本撲花 苗木을 가져오게 하여 재배했다고 전 해 온다는 대목이 들어 있다. 그러나 저자는 아직 신사기행록에서 이런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앵도를 日本語로는 〈+夕 7 `/玉〉라고 하는데 日本 平安朝의 「和名類疑 抄」에는 앵도의 和名을 〈還波佐久良〉(庭撲)라고 불렀다. 岡元鳳의 『毛詩 品物圖攻』 卷 3 에 〈常棟之華 • 傳常棟樓也 • 集傳子如樣桃可食〉이 라고 했 다. 앵도에 관하여 靑木正兒 氏의 『中華名物考』(名物零捨)와 原田禹雄 氏
의 「혼 <8 폰 <8 」(《玲龍 〉〉 14 號 1989 년)에 상론한 것이 있다 . @ 鐘墨 의 製法 : 奈良 正 倉院 예는 〈 新羅楊家上 墨 〉 3“ 이라고 陽刻銘이 둘 어 있는 墨 이 현존한다 . 이것은 奈良時代에 신라로부터 수입된 것으로 알 려지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고대 신라에서는 製 墨 技 術 이 매우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37) 『正倉院展 目 錄』 (奈良國立博物館 1976 年) 9. 墨二捷.
1711 년의 筆 談 38) 에 서 與軒 F비 : 貴壤眞墨用油炯或松煙製之耶 . 從 事 官 書 記 南聖 重 ( 號 1 芝里)答 : 眞墨本用油炯而人心巧詐, 或雜以松炯此則非造墨之法 乃工匠之用巧耳. 與軒又 棄 : 取炯用桐油或 麻 油耶 . 1z 里復 : 用桐油 . 又 票 : 添 墨 色之 藥 物何. 復 : 添 墨 色則用全漆耳. 여기서 조선의 製 墨 은 桐油炳을 쓰고 또 漆色울 했음을 알 수 있다 .
38) Ii'雜林唱和集』 卷 15, 補 遺 . 참조 ..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지만 岡島明敬은 〈京師有墨工, 其造法原傳自貴國 僧人, 今朝廷賜號生活大行〉이 라고 하며 , 墨詩一首를 惡請하자 i Z 與는 〈不 知其源, 不見其墨難以題之, 其墨可得見平〉하니 明敬은 「彼居京師送 書 來相 托, 其 墨 又不在我手, 其源又不載 書 中, 吾本不知其詳」 3 9 ) 이 라고 하였다. 여 기서 말하는 묵공이란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京師의 製墨家로서는 古梅園이 알려졌다.
39) 앞의 책 卷 3, 東武 참조.
『古梅園墨 譜 』(南京和泉操古梅園松井元泰 著)에는 다음과 같은 墨讚이 실 려 있다. (1) 豊 山香 豊山妙製最稱奇 • 遺 法當時自大師抱取濃光題數句 • 筆 頭禪 覺 暗香 隨 辛卯仲冬上洗題贈松井和泉 朝鮮製述官李東郭. (2) 龍 裏難 三韓東 郭 墨讚 (3) 漆光磨 此製有大小數種 「豊山香」 題梅 豊 山下郁郁平墨 哉 松井和泉 祿 製造 張果 姑金 埋離朝鮮海峰書豊山香三字 . 前記한 李東郭 은 辛卯使行 製述官 李讀이 고 海峰은 同使行의 押物通 事 金時漢이 다. 甲申年 (1764) 使行의 『兩好餘話』(下)에도 古梅園墨價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筆談하고 있다. 仙樓 : 君所惡求古梅園制墨貿得致之, 此其中品也, 然非磨難辨其精範, 要之必當頓製墨家之言校有信而果非街 賣 之徒也. 龍淵 : 墨之佳惡誠如好示而是名家之製何容疑平, 價銀幾許 . 仙樓 : 三勿合不盆一兩, 不必給價亦無妹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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製筆에 관하여 일본문인 甘白이 묻기를 「明一統志」에 귀국에서 狼尾 筆 이 난다고 했지만 董 圭峰의 「朝鮮賊」 40 ) 에는 그 許에 狼尾가 아니고 黃鼠 蓬라고 하였는데 李時珍本草에 나오는黃鼠와 다른 것이냐고 하니, 製述官 李東郭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의 筆墨은 천하에 이름나 명나라 사신이 오 게 되면 반드시 이것을 구했다고 한다 . 소위 黃 毛 筆 이 상품인데 黃 狂皮의 교리를 찰라 묶어 봇을 만든다고 하였다 . 黃 狂이란 소위 狼울 말하는데 우리나라 방언으로 〈足紙飛〉라고 한다고 했다. 이에 관해서는 「對麗 筆 語」에도 〈道伯曰 貴 國有山鼠大如牛, 則方言足紙飛此說恐是妄也 〉 라고 한 것이 있다. 오늘날 족제비라고 하는 것을 한자로 〈足紙飛 〉 라고 표음한 것 은 그 어원을 밝히는 데도 한 가지 자료가 될 것이다 . 그리고 造紙에 관하여 「兩好餘話」에, 仙樓 : 高麗紙以綿菌造成, 色白如 綾, 堅朝如島 我邦所見貴邦之紙薄脇易破斷作綱冊簡葉猶可也, 若施桐障雨 40) 『朝 鮮 賊』 卷 1, 明 董 越 撰 明史朝鮮傳에서 말한 것과 하나하나 부합된다(諸 橋轍次 『大 漢 和辭典』 卷 5) .
拳之用, 數數爲風雨, 被破裂, 未見所謂堅勒如用者東來, 柳仰別有佳紙平, 秋月:敵邦之紙今專用猪造, 厚者稱壯紙, 薄者稱白紙乃總稱也, 壯宜居障之 用, 白宜書版之用, 旦有名品, 或有換之不裂者或有易吸者, 賢見其脇品耳. 秋月은 壯紙와 白紙의 用途룰 설명하고 있다. ® 富士山과 金剛山 : 우리나라 사절이 방일할 때마다 富士山을 목격하 면서 일본문사와 서 로 자랑하는 것이 富士山과 金剛山이 다. 1711 년에 岡 島明敬은 〈일찍이 둘은 바 귀국에도 유명한 산이 있다고 했는데 가르쳐주 기를 바라오〉 하니 書記 洪鏡湖는 〈귀국의 富士山도 神特하고 奇秀淸淑하 나 우리나라 금강산에는 비할 바가 못된다. 금강산에 대해서는 일찍이 중 국사람도 동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까지 하 였으니 우주의 명산치고 이 산의 그림을 두고 또 어디 바할 곳이 있겠는 가〉 41) 하였다. 사실 금강산이야말로 산수화의 제재로서 그 일만이천봉은 千變萬化의 홍취를 돋우기도 한다. 아마도 鄭飮(號 謙齋)이 그린 金剛山萬 爆洞과 正陽寺는 명작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41) 『雜林唱和集』 卷 3, 東武 참조.
일본인 문사 正數가 製述官 東郭에게 富士山을 읊은시가 있느냐고 물은 즉, 〈富士山도 과연 명산이기는 하나 우리 나라 금강산에는 따르지 못할 것이다 당나라 황제도 그 奇勝함을 듣고 한번 賞玩하고 싶었으나 종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臣僚로 하여금 作詩케 하여 그것을 보고 ‘願生高麗國 親見金剛以親製之詩也'라고 한 바 있다. 이번 使行에 富士山을 읊은 시도 있기는 하지만 길이 바빠 재로 써서 보일 수는 없다〉고 하였다. 42l
42) 앞의 책 卷 12 참조.
대 마도의 眞文役 (書記)으로 동행 한 雨森芳洲 H 는 〈我人說富士之勝者 每有 微色而韓客必擧其金剛 以爲折說之資, 好勝之心 彼此一揆, 然韓客觀富士者 莫不致疑於山崩之有雪 或以爲白石 或以爲是必白雲, 最可笑者 以爲是必惡土 塗崩爲炫曜之計也. 因其致疑而觀之 彼國所謂金剛山者 夏月 無雪而其高不及 我富山從可知矣〉 43) 라고 하였다. 製述官 李東郭의 奉次願神長老望富士山詩韻은 다음과 같다. 海上雄播第一峯 亭亭淸水播英菩
43) 『稿約風雅集』 雨森芳洲全書一(關西大學東西學術硏究所資料集 刊 11-1 昭和 탸 年) 215 쪽.
何如萬二金剛勝 節節 瓊 密 拔地崇 44 ) 또 1655 년 從 事 官으로 방일했던 南龍翼(號 登 谷)의 시 를 소개 한다. 倍視群山若蝶封, 去天盆尺斷人縱 爭如方丈三韓外玉立金剛萬二 峯 4 5 ) 그런데 1748 년 통신사의 畵 員 李聖麟(號 蘇 齋)이 그린 「 桂 路勝區圖」 畵 帖예 〈 六月十七日望見富士山 雪〉 이라고 畵 題룰 부친 그림이 韓國 國立中央 博物館에 현존한다. ◄ 6 ) ® 衣冠 : 통신사의 冠幅에 대하여 일본측 인사들은 홍미를 느꼈던 모양 이 다. 1764 년 信使와의 「兩好餘話」에 〈吾 輩 可特義者則冠服雅 . ® II 〉 이 라고 하 여 조선의 冠服을 부러워하였다.
) 同上, 京都相國寺慈照院 所 藏 『韓客詞 章 』 참조 . . • 45) 南登谷 『扶桑 錄 』 342 쪽(『海行捷 載 』 3). 46) 韓國國立中央博物館所 藏 Ii'樣路勝區 圖 』 紙本 習 色 . 二卷各十五圖) 所收 . 曺 命 采 『奉 使日本時 聞 見 錄 』六月十七日條「午初到吉原館, 富 士山正當前而 雲醫 皆抱 , 全 體畢露 考之日記, 曾 前使臣之所不能快親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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仙樓 : 衣冠皆古雅, 多是周制平. 龍淵 : 周制則已古矣 不知其必如此而中朝盛唐時華制則分明也. 仙樓 : 公等壯齡常不免市幅, 能勝熱氣妙妙. 秋月 : 뾰不聞君子死冠不免之言平. 岡鳥明敬은 〈南京사람들이 당신네와 琉球사람의 의관을 보게 되면 울 면서 중국의관이 도리어 외국에 남아 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하니 漢學譯官 鄭昌周는 〈내가 30 년 전에 북경에 갔을 때 琉 球人울 본 적이 있는데 바로 우리들과 의관이 꼭 마찬가지더라〉고 하였 다 . 47)
47) 『雜林唱和集』 卷 3, 東武 .
1711 년에 書 記 嚴漢重(號 龍湖)은 雲葉八字冠을 쓰고 있었는데 이 관의 앞면에는 〈正衣冠 〉 , 뒷면에는 〈尊贈視〉라고 策書體로 씌어 있었다. 즉 의 관을 바로 하고 膳視함을 존중히 하라는 뜻으로 생 각하고 日 本文士 靑地浚 • 新은 과연 儒服이라고 할 수 있다고 감탄한 바 있었다 . 48) 조선에서는 前 記한 儒冠 의에 국왕이 쓰는 翼善冠, 金冠(梁冠), 祭冠, 臥龍冠(堂上官 用), 東坡冠 (堂下官用), 八卦總冠, 諸葛冠, 程子冠 등의 類別이 있다. 49)
48) 앞의 책 卷 5, 冠市 圖樣 및 前後面의 筆文온 卷 4 에 들어 있음. 49) 『朝鮮時代宮中服飾』 (韓國文公部文化財管理局發行, 1981 年) 참조.
1764 년의 「朝鮮人來賜記」에는 三使를 비롯하여 堂上譯官, 製述官, 書記 都訓 導 軍官, 馬上才, 小童,使令, 吸唱,樂人, 刀尺의 衣冠圖樣이 실려 있다. 그리고 또, 韓天 壽 와 함께 信使를 예방하고 필담창화한 澤田東江은 그의 『傾蓋集』에 製述官 南玉, 書 記 成大中,元重擧, 金仁謙의 초상과 冠 • 服圓룰 그려 넣었다. 조선에서는 前記한 冠物 의에 평상시 深衣道服울 입을 때 쓰는 幅市(模 市)이 있다. 1711 年 통신사를접대한 新井白石온 正使趙泰億에게 그 幅市 을 좀 빌려다가 모방해서 만들고 싶다고 하자 正使는 그 자리에서 쓰고 있던 幅市울 벗어 주니 白石은 稿約의 선물로 深謝한다고 하였다. SO)
50) 任守幹 撰 『東樣錄』 附江關筆談(서울大學校圖 書 館奎章閣 藏 本)에 의하면 〈白石 曰有幅市制 不侯不信故云不知, 行中有區IJ, 賜之以爲王公之塞挑壁以拜〉라고 했다. 晋 書 王衍傳 〈……唯談老莊爲 事 . 每提玉柄麗尾與手同色〉. 白石이 말하는〈王公之麗〉 이란 王衍의 〈玉柄麗尾〉로 생각하고 벽에 결어 두겠다는 뜻인데 이것온 俗 廳 에 물 들지 아니한 귀중한 선물을 가리키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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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觀相 : 1764 년에 통신사 일행 중, 三 使를 제의하고 譯官, 書 記, 寫字 官, 軍官, 畵員 醫員 둥 모두 日 本 觀相家 新山退甫에 게 觀相올 보였 다 . 51 ) 成大中과 金仁謙의 觀相記는 다음장에서 상론키로 하고 여기에서는 군관 에 대해서 소개하기로 한다.
51) 新山退甫先生 著 『韓客人相筆話』(浪速天橋窟藏板 明和元年) 참조.
軍官 徐有大(1 732~1802) 는 往路 登岐 앞바다에서 正使船의 鷄木(蛇)이 부러져 하마터면 배가 침몰할 뻔했는데 그때 기지를 살려 難을 면할 수 있었다 . 그래서 信使가 귀국하여 국왕께 복명할 때 그 공적으로 말미암아 일약 防禦使에 승진했고 52) 뒤에 都總官(正二品)에까지 오른 사람이다. 觀相家 退甫는 徐有大의 相울 보고 〈骨格難入通達富貴之相而血色靑暗, 肉皮浮濁 眼神多殺, 恐致殺害凶惡之安, 又主病尼妻웬之憂, 能修身普行陰 龍則後換回而應保其福壽也〉하고 하였다 . 이 말을 듣고 있던 軍官 李海文은
52) 趙暎 『海接日記』, 縮話 : 上曰惡折時柳達源徐有大執先效功. 對曰徐有大執椎而 椎下惡木. 柳達源拔劍而督筋軍人矣. 上曰柳達源則似號令而已 . 徐有大最有功矣. 命 書徐有 大防禦使傳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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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를 〈이 사람은 과연 힘이 장사로 한주먹이면 사람을 즉사시킨다〉고 하자 좌중이 모두 妙中妙中하면서 박수를 쳤다는 것이 다 . 李海文에 대해서는 〈六府充實, 邊地豊圓, 地閣有燕領之勢, 主殷富 顯達, 眉目鍊秀主才智技藝過人, 其器宇 凍原有意氣, 以爲 豪 俊英傑之士, 惟德壽數 不過五十八九際〉라고 한즉 海文온 무엇을 가지고 好相이라고 하며 또 壽 數는 왜 58,59 밖에 못 가느냐고 반문하였다. 그리고 海文은 나도 相學울 좀 배웠으니 退甫의 相을 보아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相 法은 잘 모르나 凡眼 으로 이를 보면, 師의 準頭는 平滿하니 心 事 는 심히 순할 것이고 눈은 방 울을 단 것처럼 伏虎의 勢가 있으며 山林茂盛하여 兄弟에 顯者가 있을 것 같고 귀는 대나무를 깎은 듯하여 壽 는 80 세를 保全할 것이요, 다만 願骨 이 平低하니 恨은 無位일 것이나 입술은 두텁고 붉으니 일생 맛있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하였다. ® 釋莫 : 석전이란 2 월과 8 월 上丁日에 孔子롤 모신 大成殿에서 지내는 祭禮를 말한다. 1711 년 書記 南聖重과 日本學者 興軒木房祥과의 필담 53 ) 에서 조선의 釋食 禮는 〈중국의 제도에 따른 것인가요〉 하니 대답하기를 〈중국의 제도를 따 론 것인데 조선의 국왕전하가 3 년에 한차례씩 공자묘에 배례하고 친히 그 祭典울 관람한다〉고 하였다.
53) 『雜林唱和集』 卷 15.
일본에서는 일찍이 文武天皇 大寶元年 (701) 2 월 丁巳날 大學察에서 공자 에게 釋菜莫幣의 예를 행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54) 德川이 幕府를 세 우는 데 따라 文敎가 다시 일어나자 1630 년에 林羅山의 忍岡私邸에 글방 (塾舍)과 書庫를 만든 것이 昌平校의 起源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1632 년에 孔子廟가 세워졌는데, 明治維新後 昌平校가 廢絶됨에 따라 釋食도 중지되고 말았다. 明治 39 년 (1906) 에는 孔子祭典會를 창립하여 공자 제전 울 大成殿에서 거행했다. 1918 년에 斯文會가 조직되자 공자제전도 여기에 병합되었다. 지금은 東 京에 湯島聖堂으로서 孔子廟가 남아있을뿐이다. 이 東京湯島聖堂은 1923 년(大正 12) 關東大震災에 소실되었던 것을, 昭和 7 년부터 재건하기 시작 하여 同 10 年 4 월 4 일에 준공, 同월 30 일에 新聖堂에서 제 1 회 孔子祭典울
54) 近藤正浩, 「聖堂&昌平坂學問所」(『近世日本0)盤學』 岩波 書 店 昭和 14 年) 참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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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행하기에 이르렀다. @ 退溪朱子學 : 德川幕府는 朱子學을 학술계의 重鎭으로 삼고 사상계의 근저로 했으므로 다론 학파에 비해 주자학은 큰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幕府가 주자학 부흥에 착안한 것은 임진왜란 후 조선 전역으로부터 귀환 한 壯士의 견문담과 서적 그리고 朱子의 再生으로 숭앙을 받는 李退溪의 존재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래 통신사가 을 때마다 퇴계의 이름은 일본 학자들 사이에 훤전되었다. 실제로 퇴계가 저술한 서적은 德川幕府의 治 世에 있어서 그 文敎의 基本으로 삼은 주자학 진홍에 기여한 바 적지 않 다. 55)
55) 松田甲 「日本朱子學者0)李退溪觀」(『日鮮史話』 第六編 所收) 참조-
1636 년에 林羅山은 조선사절과 면접하고 李退溪의 四端七情理氣說울 질 문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副使 金東漠의 『海樣錄』에도 林道春(號 羅山)이 찾아와서 經史中의 난해한 60 조항을 들어 질문했는데 字畵文辭 가 찬연하여 볼 만했고 理氣四端七情에 대한 변론이 그치지 않았다고 하 였다. 1682 년에는 貝原益軒이 藍島에서 信使를 맞이하여 李退溪, 李海齋, 廊 夢周의 사적과 저술에 관하여 물었다. 그리고 岡山牛窓의 유학자 小原善 助가 製述官 成琉에게 〈퇴계 선생의 자손이 지금 남아 있느냐. 그들은 학 七을 찰하느냐 또 퇴계의 학문을 전하는 학자가 있느냐〉고 묻고, 〈自省錄
을 읽어보고 그 학덕이 높음을 알게 되었다 〉 고 하였다 . 成腕은 말하기를 〈퇴계의 자손은 번영하고 있으며 또한 그의 道를 전하는 학자도 그치지 않 고 있다〉고 대답했다. 1711 년에는 新井白石의 천거로 막부의 儒官이 된 三宅觀潤 (1675~1712) 이 객관을 찾아가서 製述官 李東郭과 필담했다. 觀蘭은 李庫齋 • 李退溪의 주자학에 관하여 平正醉粹함을 높이 평 하고 欽服한다는 말부터 시 작하여 퇴계의 사적과 李栗谷의 著書를 묻고 이어서 山崎闇齋의 『小學本社』는 朝 鮮版 『小學集成』에서 本駐를 추출하여 上粹했다고 하며 조선에 朱子의 原 本이 남아 있는지를 물었다 . 또 京都의 儒學者 靑地禮幹(號 浚新 )56) 은 李東郭에게 李退溪의 學問을 景仰한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 그의 字를 모른다고 하니 東郭은 〈 退溪李先 生, 名 混 字 景浩, 官至判中樞府事, 道學爲東方最 , 至今私淑而繼其道統 者其多其下世之後 卽配享聖廟矣〉 5” 라고 대답하였다.
56) 『雜林唱和集』 京師 5. 〈姓靑 • 名 禮幹 • 字 貞淑 • 號浚新 • 賀州人 • 乙卯生 今 年 三十七. 本邦北藩加能越三州鎭主金澤侯小臣耳〉. 57) [j'雜林唱和集』 京師 4 참조 .
1719 년 申維翰의 「海游錄」 (11 월 4 일 條)에서는 大坂에 서적이 많음은 실 로 천하의 장관인데 우리나라 여러 名賢의 문집 중에서 倭人이 높이고 숭 상하는 것은 退溪集만한 것이 없어서 곧 집집마다 의고 모든 선비가 필담 으로 물음에 반드시 退溪集을 첫째로 삼았다고 하였다. 江戶時代에 일본에서 간행된 退溪著和刻本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1) 『天命圖說』, 慶安 4 年(1 651) 刊, 원본은 朝鮮明宗 9 年, 退溪 54 歲時 刊行, 記林羅山跋이 붙어 있음. (2) 『自省錄』, 寬文 5 年 (1665) 刊, 원본에는 萬曆 13 年 乙酉冬羅州牧 刊의 刊記가 있음. (3) 『朱子書節要』, 明曆 2 年 (1656) 刊, 又寬文 11 年 刊 寶永 6 年 黑岩 慈庵訓點校 刊, 明治 4 年 龜岡牧命順子正校 刊. (4) 『朱子行狀輯注』, 寬文 5 年 村上平樂寺開板本, 正德壬辰 壽 文堂刊本 (5) 『易學啓蒙傳疑』, 明曆 3 年 (1657) 刊, 寬文 9 年 武村三郞兵衛刊. (6) 『聖學十圖附戊辰封事』, 承應 4 年 (1655) • 3 月 西村五郞兵衛開板本. (7) 『西銘考證講義』, 寬文 7 年 (1667) 谷一齋附識語 刊, 元祿 6 年 (1693)
京東洞 院夷 川上町林九兵衛 壽 粹刊 明治 2 年 補 刻本 (8) 『 七先 生 迫像 費』 , 寬文 9 年 刊 , 退 溪策 跡 울 模刻 . (9) 『 李退 溪書 抄 』 , 村 士玉 水 }屈 文化 8 年 (1811) 刊 , 岡田 寒泉 跋 . 古賀 精里序.
諭稿나훈: 誌: 끓令幸갤 ’,,•. ,' -
(10) 『心 經 附許四卷付心經後論』, 明程敏政附注 李洗後論 正保 4 年 (16 47) 刊 (l1) 『 延平答問』 2 卷 李 混 附跋 正保 4 年 刊 李混跋은 朝鮮原뀌1 대 로 退 溪의 眞蹟울 撲刻 以上 著 書 8, 校刻 書 2, 模刻 書 1, 計 11 種(阿部吉雄 「李退溪 著 書 (J) 江戶刻本」 東京大學 敎養 學 部 《人文科學紀要〉〉 第 26 輯 참조). @ 中國 事 情 : 조선왕조시대에는, 사대교린의 의교정책에 따라 일본에는 通信使 를 , 중국에는 燕行使를 파견했다 . 연행사는 약 300 명에 가까운 인 원으로 陸路北京까지 왕복하는 데 대개 5 개월 정도 걸렸다. 그 燕行使節 파견 반도로 본다면 1637 년부터 1881 년에 이르기까지 697 회 58) 에 달한다. 58) 제 2 부 「通 信 使行과 文化交流」, 제 1 장 槪觀 駐 1) 참조.
연행사 일행은 의식을 끝낸 후 名所 캘蹟 울 견학하면서 중국문물에 접했 고 또 일행 중에는 중국문인들과 천교 를 맺고 59) 시문울증답하며 淸 朝의考 證 學 과 西洋科 學 울 도입하여 실학발전에 기여한 사람도 있다. 중국의 見 聞 記를 실은 燕行錄 중 洪大容의 『世軒燕記』와 朴址源의 『熱河日記』는 白眉로서 오늘날까지 噴傳되어 온다. 이렇게 하여 조선에 傳入된 淸朝의 선전문화는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할 메마다 일본학자의 관심사였다 .
59) 抽 稿 〈洪大容0)入燕&淸國 學 人&0)交歡 K? l,、 T ―一新發見O)W]南尺 版 춘中心 K 一〉 (朝鮮 學會 第 34 回 大 會 要項, 1983 年) 참조.
일본울 방문한 통신사 중에는 연행사로중국을다녀온사람도 15 명에 달 한다 . 60) 예를 들면 1607 년 正使 呂祐吉을 위시하여 1636 년의 從 事 官 黃果, 1643 년의 副使 尹順之, 1655 년의 正使 趙lfr, 副使 兪 場 , 從 事 官 南龍 翼 , 1682 년의 副使 李彦網, 1719 년의 從 事 官 李明彦 , 1748 년의 正使 洪啓 禧 , 副使 南 泰耆 , 從 事 官 曺命采, 그리 고 譯官 중에 도 洪 喜 男, 金指南, 鄭昌 周, 吳大齡, 李彦頂 등이 들어 있다.
60) 『燕行 錄 選 集 』(下) 所收同文 案考 補 編 卷之七 使行 錄 @戈均館大 學 校 大東文化硏 究所 1960 年) 참조 .
1711 년, 日本學者 岡島明敬과 鄭昌周와의 대화 61 ) 를 소개하겠다 .
61) Ii' 雜 林唱和 集 』 卷 3 東武 참조.
明敬 : 듣자오니 북경어에 통하는 사람이 두 분 계시다고 하니 한번 뵙 고자 합니다. 東郭:귀하가중국어에 정통하다니 그재간을 알수 있군요. 昌周가 곧 나을 겁니다. 昌周 : 나도 북경어를 조금 아는데 귀하가 남경어를 할 줄 안다니 정말 귀하군요. 明敬 : 나는 長崎사람인데 長崎에는 원래 남경사람이 많이 오게 되어 자연히 남경어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昌周 : 長崎에는 일년에 중국선이 몇 척이나 둘어오며 또 얼마나 묵게 되나요? 明敬 : 일년에 70, 80 척, 3,4 월에 들어와 12 월에 돌아가곤 합니다. 昌周 : 나는 금년 나이 60 세로 북경에도 네 차례나 다녀왔는데 이번에 또 귀국에 오게 되어 그 고생에 견딜 수 없군요. 明敬:북경은큰곳이라고하는데 다른곳과비해서 어떻습니까?
昌周 : 북경은 과연 큰 곳으로 다른 데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 조선에 서 북경으로 가는 데는 백사장 위를 수십 일이나 가야 합니다. 明敬은 다음과 같은 한시 한 편을 書 贈했다. 南北音通言語淸 風流奇會好將情 異鄕自有異鄕友 莫道新交不弟兄 남북음이 통해 언어가 맑고, 풍류한 기회에 정을 말한다. 이향에는 자연히 이 향빗이 있는 법이니 새로 사귀어 제형이 못된다고 말하지 마라. 昌周는 〈我不政奉和請免〉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譯官들은 시문에는 능 숙하지 못했던 것 같다. 1764 년 「兩好餘話」에 의 하면 仙樓:貴邦只通路北京而與南京相距逸絶, 其間果幾日程歷都邑關山幾許 玄川:鴨綠江敏邦西界也, 自此渡遼東野入海關, 經燕京,渡河水, 濟水 淮水, 渡江水而爲金陵, 僕紙未經歷, 若以禹貢驗之則當知經冀靑完徐而爲 楊州, 自餘非短紙可怨. 仙樓 : 貴邦與北京相距幾許, 糖也吾見玄川聞其略未識里程之詳 . 雲我(李彦Jj) : 四千餘里而山河拜然怨無人之境. 仙樓 : 聞自鴨綠江西數里遼未聞涉無人廣野, 君言可誘. 雲我 : 余常有詩四千里뿐뿐, 無緊落林鹿亂叫野離飛, 蓋實錄也. 라고했다. 대개 서울에서 북경까지 얼마나 먼 거리인가를 묻고 있는데 漢學譯官으 로 연행사에 수행했던 李彦頂의 시 「余常有詩四千里뿐뿐」은 실감이 난다. 그리 고, 1711 년의 製述官 李東郭과 濱松城 武臣 正數와의 문답을 소게 한다(『雜林昌和菓』 卷 12). 問 : 聞洪武末中華與貴國絶, 至永樂元年相和今也 貴國受大淸歲曆年號 耶 貴國今年號如何. 答 : 卽今我國紙服事大淸, 用其年號固也, 是以公私文書皆用康熙耳. 問 : 貴國大王朝於中華耶.
答 : 述職之禮周以後廢龍不行 , 故曾在 皇 明之世 亦 無 朝聽之 畢 , 況今日 平, 每年冬至惟遣使陳賀而已矣.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청나라의 연호를 쓰고 있느냐는 물음에 대하여 조선은 大淸에 服 事 하고 있으므로 그 연호몰 쓰고 있는 것은 물 론 이라고 했고 또 中華에 參朝하느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매년 冬至에 遣 使하여 陳 賀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燕行貢使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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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좀 내려와서 1811 년 對馬島易地交聽에서 大學頭 林述齋가 正使 金履喬에게 〈信使行中 여러분이 북경을 다녀왔을 터이니 그 실정을 듣고 싶 다〉고 했다. 正使는〈나는 아직 청나라에 사신으로가 본 일이 없어 그 실 정을 이야기할 수 없는데 이번 使行中에는 북경을 다녀온 문사 몇 사람이 있으나 그것도 유희완상에 불과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大學頭는 다시 〈조선의 입장으로서 명나라와 청나라 어느 쪽이 더 德이 크냐〉고 묻자 正 使는 〈우리나라가 청나라와 和交하고 있음은 以小事大에 따르는 것인데 나의 家系로 말하면 청나라와 꺼리는바가있어 연행사에는 充役을 못하고 있으니 詳言하기를 원하지 않으나 우리 나라 精神家로서 · 통신사로 울 수
,
없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 라고 하였다. 62 ) 正使 金履喬는 安東金 氏로 일찍이 丙子胡亂 당시 床和를 主張했던 金尙憲 6 3 ) 의 族孫인 까닭으로 연행 사에는 충임될 수 없다고 했을 것이다. 또한 통신사에 있어서도 임진왜란 에 기인하여 이 使行에 끼이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말했을 것이다.
62) 松崎嫌堂 編 『接鮮潛語』 卷 2 附接鮮紀事(寫本) 참조 ` 63) 金尙~ (15 70~1652) 字는 叔度, 號는 淸陰, 本貫온 安東人. 병 자호란 때 척 화를 주장하고 또 淸의 討明에 반대 , 瀋陽에 連行拘留되 었다가 귀환 후, 左議政을 역 임 (『韓國人名大事典』 靑丘文化社, 1967 年).
@ 女人染齒(齒黑) : 일본에서는 유부녀가 이에 까맣게 물을 들였는데 통 신사들의 눈에 는 기 이 하게 보인 모양이 다. 1748 년에 書記 李鳳煥(號 濟菴) 은 日本文人 山宮雪樓에게 여인이 染齒하는것은 무슨 제도를 딴 것이냐고 묻자 雪樓는 〈烈女不更二夫〉라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검게 물들이면 다시 다른 색으로 바꾸려고 해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德川 光圈은 槪婚婦人의 染齒와 去眉의 풍습에 관하여 이는 蕃風이라고 지적하 였다 . 즉 染齒하는 풍습은 귀천을 가르기 위해서인가, 부녀를 분별키 위 해서인가, 대저 불결함을 은폐하려는 것일까. …… 이것은 본래 夷 5X 의 風 으로서 君子의 禪風은 아니 라고 통박하였다(野村兼太郞 『江戶時代 0 經世 家』 29 쪽).
64) 山宮先生 著, 『和韓筆談薰風編』 上 참조. 姓 山宮, 名 維深, 字 仲淵 , 號雪 樓·江戶府人.
染齒(齒黑)는 藤原時代 이래 조금도 변함없이 江戶時代까지 내려왔는데, 그 동기는 민간에서 발생한 미혼과 기혼을 표현하는 독수풍속이었다 . 染 齒의 기법에 관해서는 「女用訓蒙圖棄J에 詳記되어 있는데 鐵限을 바르는 일은 婦人 日 課의 하나였다고 한다(江馬務 『江戶時代風俗史』) . ® 생활풍습 : 1748 년에 良醫 趙崇壽는 日本學者 道伯과의 필담에서 65) 귀 국에는 온돌이 없으니 三冬에 춥지 않으냐고 물었다. 道伯은 우리나라에 는 火達(고다쯔)라는 것이 있어서 한기를 이겨낼 수 있다고 했다. 이 고 다쯔란 화로에 나무로 짠 倍籠을 얹고 그 위에 이불, 포대기 따위를 씌워 손, 무릎, 발을 넣고 몸을 녹이는 화로를 말한다. 從事官 曺命采의 「奉使 日本時聞見錄」에도 일본에는 온돌이 없고 마루 위에 茶풍(다다미 音譯)을 깐다고 했고 이것은 우리나라의 藤毒席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 1764 년에, 朝鮮信使와 那波魯堂의 實弟 仙樓와의 筆談集 「兩好餘話」에,
65) 江都前田道伯先生 著, 『對麗筆語』 延享五戊辰年 六月, 書 房日本橋通一町目出
食品, 禁酒 茶, 器名, 米價 등 생 활풍습에 관한 기 록이 나온다. 仙樓 : 敵邦無戶個鷄藤猪鹿等 而自備食料旦四方源海, 故多用魚琉爲英, 難有嘉賓上客而供盛飯亦無他品, 牛羊最不Uitt, 貴邦隨鄕太夫士庶有食禁耶 . 製述官 南玉 (號 秋月 ) : 服邦陸食六畜, 水路海鉛而 牛羊最Jrj, 貴邦不喜 食牛羊, 鄭等牌敗基思牛炎, 敗邦六畜無禁, 惟牛以耕有屠禁. 즉, 일본에는 牛羊을 먹지 않으나 조선에서는 牛羊을 매우 즐기므로 일 본에 와서 음석이 비위에 안 맞을 때에는 쇠고기 구운 것이 생각난다고 했다. 통신사가 일본에 울 때마다 刀尺(料理人)이 수행하여 닭을 잡아서 料理
下
雲 寺和泉祿發行참조-
하였다. 仙樓가 〈 下處隣座鷄呼 銃 鳴不忍聞也〉라고 하자, 押物通 事 李彦頂은 〈 日殺充制君非儒士平, 何出此言以佛家好生之說, 觀之何傷〉이라고, 즉 〈닭 참는 소리물 차마 들을 수 없다〉고 하니, 〈매일 장아서 밥상에 올리는데 당신은 儒學者가 아니냐 왜 佛家의 好生之說을 꺼내느냐〉고 하며 핀찬을 주는 대목이 있다. 조선에서는 영조 때 1756 년 7 월에 禁酒令이 내려, 이를 범하는 자에게 는 사형에 처할 정도였다. 仙樓曰 : 飮酒之禮自古有之, 貴邦一何禁諸. 成 大中曰:以醉亂失禮義旦多岡彌相害者故禁之犯之者死. 向來無禁時讓酒家極 多, 多至數萬斗, 士大夫皆泊飮之, 酒名極多不可數淸濁皆可飮之, 今則國禁 極嚴 酒之一字禮不放出諸言이 라고 하였다. 茶에 대하여 仙樓曰 : 意日夕未見尊等契茶散邦多暗茶乃至其待賓則別立 禮 法, 其器用皆喜有古賞守法莊嚴. 成大中曰 : 散邦産茶基少, 旦人不多暗也 . 곧 日本에서는 이처럼 茶道가 발달했으며 茶器로서도 조선에서 만들어진 木左衛門井戶茶腕(日本大德寺孤蓬庵所藏)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동신사가 일본에 와서는 객관에서 夢茶로 일인을 집대 했을 따름이다. 조선사람은 일본사람에 바해 多食인 것 같았다. 南玉曰 : 散邦人多食諸賢 得無笑否 仙樓曰:多食猶可, 止邦食必用筋, 尊等以手何耶. 南玉曰:飯委 毋以著禮不云平 조선에서는 고래로 시저 (延署)를 상용해 오고 있지만 찰 떡 같은 것은 흔히 손으로 집어먹는 법이었으니 아마 이런 것을 보고 조 선사람은 손으로 먹는다고 했을 것이다. 倍祿과 米價에 대해서 仙樓曰 : 貴邦貢倍供用脫栗米耶. 玄 )II 曰 : 隨年之 豊凶有米栗之別, 個仕臣有慶賞則必賜栗耳. 仙樓曰:貴邦米價大抵幾許 . ~ 川 曰 : 是何仕士所識耶. 즉 朝鮮의 兩班階級은 〈不問米價〉라고 한 것을 자 랑으로 삼았던 것 같다. 그러자 仙樓는 小童에게 〈爾能識米價邪一料幾錢〉 이냐고 묻자 〈大抵二兩三兩〉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仙樓는 다시 「貴邦兩 幾錢」이냐고 물은즉, 小童은 一兩은 十錢이라고하였다 . 이것으로아마그 당시의 米價를 추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徐福의 東渡說 : 徐市(福) 에 관해서 는 「史記 66) 秦始皇本紀」에 〈二十八 66) 司馬遷의 『史記』 卷 6 에는 徐市(福)에 관하여 秦始皇本紀 (1) 始皇帝 2 완료 (2) 始皇帝 35 年, (3) 始皇帝 37 年 및 同卷 118 「淮南衡山列傳」에 기 록되 어 있다` 그리 고 시 대 가 내 려 음에 따라 東方朔 『海內十洲記 • 祖洲』 • n 困 書 나婦祀志 • 五被 傳』
• 『後漢 書 東夷列傳(倭傳).!] • 『三國志吳志 • 孫權傳』 唐魏王泰『括地志』 • 『李太白全集 • 古風其三』 • 『白居易集 • 海漫漫.!] • 『全唐詩 • 胡曾味史詩』 • 『漢楚六帖夷二十一(城 郭 • 日本).!] • 『太平御覽 • 外國紀 • 約順人』 • Ii'歐陽文忠公全集(日本刀歌).!] • 無學禪師 (1 228~1286) 『致祭詩』 • 吳菜(1 297~1340) 『所客話熊野徐福廟』 • 明太祖和日本入明僧 絶海中津詩附絶海獻詩. 都印 Ii'所雨項記』 • 宋源 『日東曲』 • 黃違盛 『日本國志』 • 『日 本雜事詩』 . ' 黎庶昌 Ii'免用新宮徐福墓』 등이 있다. (「從徐福到黃避盛」 時事出版社, 1985 年) . 竹內實 著, 『紀行日本0)t~力)0)中國 始皇帝0)昔J: tJ-徐福傳說0)念 &.!] (朝日選 書 , 1976 年) • 『歷史讀本』(特集夕 .7 I::方 7_ ―日本0)徐福渡來說춘追 5 , 新人 物往來社, 昭和 61 年) .
年始皇郡縣……旺已齊人徐市等上 書言 , 海中有三神山名曰蓬萊·方丈·漏洲 仙人居之, 請得齋戒與童男女求之, 於是遣徐市發童男女數千人入海求仙人〉 이라고 하였다. 秦始皇 (B. C. 259~210) 은 이처럼 仙人의 존재를 믿고 不 老長 壽 의 仙藥을 구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그러나 徐福은 秦始 皇을 속여서 출항한 후 〈平原廣澤 〉 한 곳에 도달하여 여기서 정착하고 왕 이 되어 귀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중국의 梁嘉彬 氏는 三神山에 대하여 〈蓬萊〉는 오늘의 日本列島, 〈方丈〉 은 오늘의 한국의 제 주도, 〈滅洲〉는 오늘의 琉球群島예 해 당한다고 하였 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학자 衛庭生은 그의 「徐福入日本建國政一日本神武 開國新政-」에서, 神武天皇의 入海王國建立史實과 일치된다고 하여 徐福 이 곧 神武天皇이 라고 주장한 바 있다 . 67) 『史記』에 는 세 군데 모두 〈徐 市〉로 나온다. 그런데 『淮南衡山列傳』에는 〈徐福〉으로 바뀌었다. 〈市〉 (불)와 〈福〉(복)은 고대에서는 同音字로서 표기된 것이므로 동일한 인물 인 것이다.
67) 衛誕生, 『徐福與 日 本 • 神武天皇=徐福傳說0)誌』 (新人物往來社 昭和 52 年) 참 조.
그런데 통신사가 일본에 을 때마다 徐福의 東渡說이 화제가 되었던 것 은 홍미있는 이야기다. 徐福의 東渡說은 秦始皇의 소위 禁書抗儒 이전의 일이므로 儒學에서 중 시하는 중국의 六經(易 • 書 • 詩 • 周禮 • 禮記 • 春秋)이 일본에 재래된 것 이 아닐까 하는 관심에서였다 . 송나라 歐陽修의 「日本刀歌」(歐陽文忠公全築)에 〈徐福行時 書 未禁, 逸書 百篇今尙存, 令嚴不許傳中國, 擧世無人識古文〉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중 국에서 없어진 「古文尙書」殘卷이 일본 奈良時代에 당나라로부터 재래되었 다고 하는 「古文尙書」가 국보로지정되어 東洋文庫와東京國立博物館에 現
9
存한다. 68)
68) 『國 寶 大 事 典』 3, 219 古文尙 書 卷第 3, 第 5, 第 11( 東洋文 庫 ) • 220 古文尙 書 卷 第 6( 東京國立 博 物館).
1607 년에 방일한 조선사절은 接伴僧玄蘇에게 徐福廟의 소재를 물었더니 玄蘇는 紀伊州熊野山에 斜斜文字( 筆 墨이 발명되기 전에는 竹簡에 漆로 썼 기 때문에 點劃의 머리가 굵고 꼬리가 가늘어 마치 올챙이 모양과 같다는 것)로 된 經書 가 있었다고 하지만 병화에 소실되고 말았다고 하였다(「慶 進 海 樣 錄」 6 월초 10 일 留江戶條). 그리 고 1624 년, 信使와 接伴僧 規伯玄方과의 필 담에 서 , 玄方은 〈 在南海 道伊州 熊野山下, 居人至今崇奉, 不絶香火, 其子孫亦其地, 皆稱 秦 氏云〉, 또 問 〈 徐福之來在 秦 火之前故六 經 全 書 在於日本云, 然耶〉 하자 玄方答曰 〈 日本 素 文 獻 , 未之 聞 也, 其時設或有 , 日本好戰 翻覆莊數, 兵火之씁基於秦 火, 登能保有至今耶〉(姜弘重 『東樣錄』 10 월 28 일 條). 즉 紀伊州熊野山에 는 秦 氏라고 칭하는 徐福의 자손이 살고 있으며 燒香이 그치지 않는다. 六 經 은 혹시 당초에 있었을지도 모르나 일본은 싸움을 즐기어 그 병화의 참상은 진시황의 분서갱유보다도 심하니 어찌 경서를 오늘까지 보유할 수 있었겠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1711 년, 통신사와 新井白石과의 필담에서 從 事 官 南岡은 일찍이 歐陽條 日本刀歌에서 본 바 先 秦 時代의 서적이 일본에 홀로전한다고 했는데 지금 남아 있느냐고 묻자, 白石온 出雲大社에 竹簡漆 書 한 古文尙 書 가 수백 장 남아 있으며 또 熱田神宮에 도 斜朗文字인 죽간칠서 23 책 이 남아 있다고 하 였댜 그러자 南岡은 귀로에 이것을 볼 수 있느냐고 물으니 白石온 秘藏 되어 있은즉 어떻게 볼 수 있겠느냐고 하자 正使 趙泰億은 비록 珍書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볼 수 없다면 본디 없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느냐고 하며 실 망하는 대 목이 나온다. 徐福傳說의 緣故地로서는 일본내에 和歌山縣 新宮市에 있는 徐福廟를 위 시하여 佐賀縣 寺井津의 金立神社 • 丹後半島의 新井崎神社 등 20 여 곳이 나된다 . 그런데 副島淸高의 「徐福傳說&邪馬台國」에서는 조선반도 지역에는 徐 福傳說이 없다고 했지만 徐福이 東渡할 때 조선반도를 경유했다는 것은 를 림없을 것이다. 실은 한국내에도 徐福과 관련되는 유적이 두 곳에 현존하 기 메 문이 다. 韓國 南海郡 錦山 摩康石麥J’에 는 〈徐市起禮 日 出〉 69) 六字의
69) 著者收 藏 , 『吳世昌 遺 墨』, 摘文 體 「徐市起 禮 日出」 • 此刻在南海郡錦山 • 是摩崔
職乃石釋爲刻 字「體徐奇市認起禮 日人 能出」解 但六傳字徐油市秦題時名遺而蹟已在,李 斯我作先小君策曾前撲雍拓文本也至.燕 台栗,浦 . 過徵於博古之士
吳世昌筆 徐市東渡記錄 韓國南海郡 錦山 摩廣石亥 U( 저자 소장)
籍文刻字가 남아 있다. 이 刻字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徐市題名刻字〉라고 전해 왔는데 아무도 이 글자를 해독할 수 없었다. 마침 조선왕조 말기 연행 사에 수행한 譯官 吳慶錫 (1831~1879) 이 이 각자를 모사하여 가지고 가서 중국학자에 물은죽 秦나라 李斯가 문자(小茶)를 통일하기 이전의 摘文體 로서 〈徐市起禮日出〉임이 판명되어 오랫동안의 의문이 풀렸다고 한다. 그 리고 지금 濟州島 西歸浦에 있는 정방폭포 암벽에도 〈徐市過處〉라고 한 刻字가 남아 있다. 1764 년 正使 趙職 撰 「海椎 日 記」 2 월 9 일 條에 〈徐市이 꼭 일본에 왔다는 것은 이미 · 믿을 수 없는데 仙藥을 이 섭나라 세 산에서 겠다는 것은 또 가
죽없는 터러격이다. 瑞草奇花는 진실로 인간에 있는 것이 아니며 金丹鍊 精이 본래 方士의 망언이고 보면 壽 를 연장하는 영약을 구하는 데는 반드 시 인삼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인삼이 생산되는 고장이므로 제주의 한라산 • 고성의 금강산 • 남원의 지리산을 세상에서 三 神山이라고 칭하는데 이 말 역시 꼭 믿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만일 徐市 울 시켜서 영약을 구하고자 했다면 어찌 인삼이 많이 생산되는 조선을 제 쳐두고 꼭 인삼이 생산되지 않는 일본으로 가게 했겠는가 . 그리하여 나는 일찍이 이로써 三神山이 일본에 있지 않고 영약이 일본에서 생산되지 않 고, 徐市은 日本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고 있다. 중국대륙에서는 그 사이 수수께끼로 전해 오던 徐市의 고향이 數年前 江 蘇省 連雲港市 부근에서 〈徐福村〉 70) 으로 현존함을 확인한 바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吉野'T里遺跡의 발굴을 둘러싸고 邪馬 臺國論爭이 再 燃되는 가운데, 徐福東渡傳說이 부상되고 있다. 國際 日本文化硏究센터― 所長 梅原猛 氏는 출토한 壅稽을 검정 하고 도교의 不死長生을 이 상으로 하 는 사생관에 따라 徐福이 거느리고 왔다는 3,000 명은 영생을 누린다는 不 死의 사상, 유토피아의 具現化로서 옹관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하고 제기하였다(《歷史街道》 1989 년 11 월호, 副島淸高 「徐福傳說&邪馬台國 • 佐平野宅 目 청 L t의渡來人」 『最新邪馬台國論 • 歷史群像特別編集』 1989 년 9 월).
70) 徐福村 • 羅其湘, 「徐福村的發現和徐福東渡」 0\ 徐福到黃違完所收 中 日關係史 論文集 第一輯 時事出版社 1985 年).
또한 日本 佐賀市에서는작년 여름 日中共同심포지움 「徐福올 더듬다」라 는 학술토론회가 열렸다. 하여간 徐福의 東渡傳說올 다시 보게 된 것만은 사실이 다(才曲稿 「徐福渡來傳說宅追 5 」 《讀賣新聞〉〉 1989 년 12 월 28 일 茂在 寅男「古代源流」 38 • 40, 《朝 日新聞》 1990 년 4 월 13 일, 27 일). ® 煙草와 煙管 : 煙草는 본래 일본에서 들어왔다고 한다. 李粹光 (1563 ~1628) 의 『芝峰類說』에 〈談婆姑는 草名으로 南靈草라고도 부른다. 近歲 倭國에서 나왔다〉고 명기되 어 왔다. 또 柳得恭 (1749~ ? )의 「京都雜志」에 도 參朝하는 官員이 말울 타고 煙草盆울 가진 從者가 그 뒤에 따르고 있 는 광경과 군수가 동청 ·퇴청할 때도 역시 煙管과 煙草효을 든 자가 뒤를 따랐다는 것을 묘사했다.
그리고 恒屋盛服의 『朝鮮開化史』 7 ” 에 청나라사람은 東 征했을때 처음으 로 그 맛을 알게 되어 그 후 일반에 유행하였는데 瀋陽에 조선사신이 울 때 몰래 휴대하여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고 말하고 있다. 통신사가 방일할 때마다 일본측에서는 이 담배(南草) 를 선사하곤 했 다. 72)
71) 恒屋盛 Hll, 『朝鮮開化史』 (博文館 明治 37 年) 304 쪽. 72) 趙職, 『海接 日 記』, 各處 書 契 • 回禮品條 : 宿坊本國寺依戊辰例星南草曾納.
『林羅山文集』 • 「隋筆部」 73) 에 〈근년 朝鮮賜使가 왔는데 進士 朴眞卿(號 螺山)과 필담하였다 . 그때 多婆胡는 莫 岩 인가 , 또 學士도 이것을 먹는가 하고 물은즉, 螺山은 근래 南方에서 들어와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먹는 다. 炯酒라고 부르는데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 없어서 큰 폐가 되고 있 다〉고 했다 . 1682 년에 방일한 製述官 成玩에게 日本人 學士 柳川 震 澤은 煙草몰 보내 는 시를 읊었는데 74) 다음과 같다 .
73) 『羅山林先生文集』 卷 72 隨筆 8. 74) 松田 틴 『 日 鮮史話』 第 3 편 「朝鮮煙草(J)起源 K 就 T 」 참조.
奉送琴虛成公西歸贈煙草 煙草一何奇 原始問阿誰 神農不曾 常 東壁遂無知 千載空寂寂 只言傳南夷 滿菱滿中外 玩賞共翁兒 以何代巧藥幸有煙草胎 不知君暗否姑炫慰此離 之子有佳名 微意請事斯異域天一角 雲樹更相思 申維翰의 『海游錄』에도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남초는 본래 동래왜관에서 얻어왔는데 속언에 〈淡麻古〉라고 하는 것은 日本音 〈多葉粉 〉 의 사두리라 고 했다. 한국에서는 한때 담배노래가 流行했다고 한다 . 75)
75) 앞의 책 117 쪽 참조.
1711 년 正使 趙泰億(號 平泉)과 新井白石이 서로 응수 76) 한 것이 있는데
76) 任守幹, 『東樣日記』(坤)江關筆談 참조. 일본에 유포되는 『江關 筆 談』에는 홉연 인에 관한 기사는 없다. 『新井白石全集』(國 書 刊行會編 復刊本 昭和 52 年) 卷 4 所 收 「坐問 筆 語」에 諸賢不契相思炯耶(美). 恩賜自是錦誘恐炯氣點汚(億). 錦誘不染炯 氣 文彩自鮮明也古色則無如之何(美) • 戱而已, 不侯性不吸炯茶, 兩僚則能哈之(億). 墨出靑松炯, 墨客噴炯登得無非氣類耶(美).
다음에 소개 하는 바와 같다. 白石 : 어째서 담배를 피우지 않으십니 까 . 平泉:평소에 이 담배를좋아하지 않으니까요. 白石 : 옛사람이 말하기를 酒腸이 없다 하더니 公께서는 炯腸이 없으 신 모양이군요. 平泉 : 마음의 창자인 心腸이 곧 비단이거늘 어찌 담뱃불 연기로써 더 럽힐 수 있겠습니까. 白石 : 正使께서 비단 심장이라 연깃불에 더럽힐 수 없다 하셨는데 저 는 鐵石 같은 심장이어서 화롯불로 한번 시험해 보려는데 어떻습니까 平泉 : 심장은 비단보다 아름답고 철석보다도 군거늘 두 가지를 다 겸 한 나인데 어떻게 할 겁니까. 또 信使 製述官 李東郭과 幕府儒臣 深見玄俗(號 天務)와의 吸煙詩를 소 개하면 다음과 같다. 玄俗는 東郭이 끊임없이 흡연하면서 휘호하는 것을 보고 다음 시를 읊 어 풍자 77) 했 다고 한다 .
77) 『鎬舒風雅集』 (雨森芳洲全 書 一) 73 쪽 참조.
斗酒百篇李白後一炯添得幾千篇 靑蓮未必能如此 君是三韓大諦仙 走次天游大詞伯韻 東郭 異味南邦千葉粉 淸炯吸處有新篇 能令漢思如川游 當日顧狂笑酒仙 1764 年 書 記 成大中과 일본문인 北山橘庵과의 필담 78) 에서 橘庵이 〈우리 네의 담뱃대는 길어서 한 자 반인데 公등이 들고 있는 담뱃대는 몹시도 기 니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니 成大中이 대답하기를 〈귀한사람은 담뱃대가 길고 천한 사람은 담뱃대가 짧은 법이다〉라고 야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사람의 긴 담뱃대는 오늘날도 촌로들이 물고 있는 것을 혼히 보게
78) 『雜壇喝!島』 寶 曆甲 申著北山元章 • 朝鮮來朝於津村御坊 筆 語. 草 書 之方朝鮮人直 筆(大坂府立中之島圖 書 館藏).
된다. 조선조 후기의 민속화가로 유명한 申潤福(號 蕙園)과 金得臣(號 統 齋)이 그린 風俗畵帖 79) 에는 남녀가 서로 긴 담뱃대를 물고 즐기고 있는 野遊圖가 있는데 어던지 모르게 홍취가 떠오른다 .
79) 『風俗畵帖』 申潤福 : 野冥圖 金得臣 : 破寂(故金쫓弼氏寬集).
동신사가 방일했을 때에 그린 행렬도에도 신사 한 사람에 일본인 종자 가 두 사람씩 따르며 담배와 담뱃대를 권하는 모습이 보인다. 英國 런던 大英博物館이 所藏하고 있는 日本浮世繪版盡중에 「朝鮮人煙 藝圖」 80) 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石川豊信(1 711~1785) 이 그린 版畵이다.
80) 「大英博物館所藏 浮世繪名作展圖錄」 (《朝 日新聞社》 1985) 34, 石川豊信 朝鮮人
石川豊信 朝鮮人煙藝圖 幅廣柱繪判(大英博物館 소장)
煙藝0)圖 幅廣柱繪判 • 同解說 34. 山內長三 「浮世 繪 版 畵」 , 「朝鮮人煙 藝圖 1, 岡本 綺堂 作, 「朝鮮昇風」(《韓國文化》 1985 年 12 月號 自由社) 참조`
이 그림에는 통신사에 수행한 碑將의 옷차림으로 긴 담뱃대 를 손에 들고 그 담배 연기로 썼다는 漢詩 〈 日 暮漢宮傳蝶炯〉 구 절 이 뚜렷하게 드러나 는데 과연 담배연기로 이런 재주를 피울 수 있었을까 하고 의심할 정도 이다 통신사의 紀行錄에는 이와 같은 煙藝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일본에 는 杉田玄白이 지 은 『 蒸錄 』에 「吹煙戱曲 說 」이 나오고 또 八島岳이 쓴 『百家琦行傳』에 炳曲彌平이라는 자가 담배연기로 여러 가지 재주를 부 렸다는 이야기가 나을 뿐이다. 하여간 홍미있는 담배연기 곡예였음은 돌 림없다. 제 2 장 초기의 교류 l 林羅山과 通信使 조선통신사와 일본문사와의 交歡은 시대가 내려움에 따라 성황을 띠게 되었는데 초기에 있어서는 林羅山(道春)이 대표적일 것이다 . 林羅山 (1583 ~1657) 은 조선통신사의 방일시 대표적 문화인으로서 활약하여 幕府의 의 교문서까지 관장하게 되었다. 그는 명분론에 입각하여 의교문서의 서식을 고치고 또는 합리주의적 사관을 가지고 조선 고대전설을 비판하며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儒學上의 질문을 하였던 것이다. 생각건대 羅山은 江戶時 代의 유교문화의 기초를 닦은 가장 유력한 인물이라고 해야겠다. 따라서 羅山의 학문형성에 조선의 유교문화가 어떻게 영향을 끼쳤으며 또그가 조 선통신사와 어떤 접촉을 했는가는 주목할 만하다 . 1) 信使와의 交歡 羅山이 처음으로 만난 朝鮮使節은 1605 년 (선조 38) 講和使僧으로 방일 한 松雲大師이다. 그때 羅山온 민간의 한 청년학도로서 客館을 찾아가 필
어로 문답하였다. 그때 羅山은 23 세였다. 『 韓客 筆 語 』 1) 에 의하면 松雲問曰:古人以不遠復三字以威君子一生功業不可以古之精柏而己. 君 之朝夕用心處如何. 羅山答曰:不遠復者顔子所以不戴過也·成湯旦日改過不客以是爲工夫亦 好 • 余工夫唯在主一無適. 여 기 서 大師는 羅山에 게 〈主一至佳 • 君年未及而立 看書 之眼爲君多之〉, 즉 한 가지에 주력한다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다 . 자네는 나이 아직 30 세 미만인데도 책을 보는 눈이 있으니 뛰어났음을 인정한다고 하였던 것이 다. 〈主一無適〉이 란 程朱學派의 術語로 한 가지 에 주력 하여 다른 데 는 마 음이 가지 않는다는 뜻이 다.
1) 『羅山林先生文集』 卷 60 • 雜著 • 韓客 筆 語 • 慶長十月乙已二月京師蕃館與朝鮮使 僧松雲筆語松 雲 號四明山大師諱惟政(平安考古學會發行, 大正 10 年) 참조 .
羅山은 그 후에도 1655 년에 이르기까지 6 차에 컬쳐 조선사절과 筆談唱 和하였다. 제 1 회 1607 년 (선조 40) 正使 呂祐吉 일행 은 江戶城에 서 將軍 秀忠과 회 견한 후 歸路 駿府에서 家康을 만나고 本多正純집에서 향응을 받았다. 2) 이때 羅山은 마침 家康 측근에 시종하면서 駿府(靜岡)에 머물고 있었다 . 羅山은 信使 從事官 丁好寬에게 〈朱子 • 象山何惡〉라고 묻자 信使는 〈朱文 公集諸賢之大成 • fp I 比之於象山〉이 냐고 일축하였다고 한다. 3)
2) 『通航一覽』 卷 108 • 朝鮮國部 84 • 筆 談唱和等 三使食於正純宅, 時林忠連造, 筆 語未半而相引, 續本朝通鑑. 3) 『羅山林先生文集』 卷 70 • 隨筆 6 참조 .
제 2 회 1617 년(광해군 9) 에는 大坂平定을 축하하기 위하여 正使 吳允謙 일행이 渡日하여 京都 伏見城에서 行禮하였다. 羅山은 그 전해에 家康의 卒去로 인해 駿府 • 江戶 • 日光 사이룰 왕래하느라고 통신사와는 접촉이 없었으나 『朝鮮信使來貢記』 4) 를 撰述하여 접대와 의식의 정황을 詳記하였 다. 이에 따르면 幕府將軍으로부터 3 使에게는 白銀 15, 000 냥과 금병풍 15 척을, 通事 朴大根 • 崔義吉 2 인에게는 백은 4, 000 냥을, 上官 2 人에게는 백 은 1, 000 냥을, 그리고 백은 500 냥을 諸官人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했다 .
4) 앞의 책 卷 22, 所收 『朝鮮信使來貢記』 時大樹偶在京居伏見城.
그리고 末尾에 〈原夫朝鮮者自古爲我西蕃 , 今及其來而厚惠之, 是亦柔遠人 懷諸侯之意平〉라고 한 것으로 보아도 幕府가 信使에게 일본의 부강함을 과시한 것을 알 수 있다. 제 3 회 1624 년(인조 2) 에는 副使姜弘重이 春秋館 編修官울 겸임하고 있음을 알고 「春秋」 속에서 ® 春王正月의 胡傳集解注 ® 壬午猶擇萬入去 篠의 「萬」 ® 西狩獲麟의 杜氏와 胡氏說에 관하여 질문했으나 대답을 얻 지 못하였다 .5)
5) 앞의 책 卷 14, 外國書下. 寄朝鮮國副使姜弘重 참조`
한편 寫字官 李誠國(號 梅菴)으로부터 〈夕顔老〉 三大字를 써받아 羅山堂 號로 삼았다고 한다 . 6)
6) 『通航一覽』 卷 108, 朝鮮國部 84. 264 쪽. 自注誠國號梅菴. 有能 書 之名故先生使 彼筆夕顔卷三大字以爲堂顔. 〈夕顔卷〉은 林羅山의 別號로서 藤原怪窓로부터 지 어받 온 것이다(太田靑丘 著, 『藤原煙腐』 年譜).
제 4 회 信使는 1636 년 柳川一件의 결말을 환영하며 일본의 泰平을 축하 하기 위하여 正使 任銃(號 白龍) . 副使 金世派(號 東演) . 從事官 黃民(號 靑丘) 일행이 방일하였다. 羅山은 이들의 來賜을 계기로 조선 의교문서를 기초하고 또 문서의 體例 改正에 관여하게 되었다. 죽 종래의 조선국서에는 장군의 칭호를 〈日本國 王〉이 라고 해 오던 것 을 <日 本國大君〉으로 고치 고 또 〈龍集干支〉를 써 오던 것을 일본 연호로 고쳤다.” 이 〈日本國大君〉 號의 제정은 林羅山이 입안 한 것이다. 이 <日 本國大君〉칭 호는 1811 년 對馬島易地賜禮 때 까지 사용되 었으나 다만 1711 년도 1 회만 新井白石의 건의에 의해 〈日本國王殿下〉로 고쳤을뿐이다. 다음에는 副使 金世嫌과 羅山과의 교환을 약술하겠다. 羅山은 狩野山雪 筆 「聖賢圖像」에 費올 써 받았다. 『羅山林先生文集』 (卷 64, 雜著 9. 聖賢 像軸)에는 寬永丙子季冬朝鮮信使通政大夫白覽任統, 通訓大夫東漠金世派, 通訓大 夫靑丘黃辰來賜印之則倉云東演者儒者也, 故以吾家所藏聖賢圖像二十一幅 請書于圖上, 於是表出古語井舊費副其軸以遣之, 金世源, 遂書而返之, 足 以爲家珍, 卿記焉爲他後之證矣.
7) 『羅山林先生文集』 卷 13, 引鷲峯語, 141 쪽. 「今般先生預此*又舊例遣朝鮮 書 唯 干支 今般初記年號」.
라고 하였다. 또 金東漠 『海接錄』 12 월 26 일 留江戶條에 서 는 道春以關白之命來言. 柄邦至寶只此而已, 不得寫費以爲矢缺, 願得副使 公筆以增光彩, 義成兩僧繁進, 裝以三重燒 1伏 , 盛以金樞乃伏羲 • 神農 • 黃 帝·堯舜·禹湯文武周·孔顔曾思孟派洛關間郡堯夫像也·凡二十一族, 象 軸錦粧, 毛髮欲動, 眞天下絶寶也·其長意壁皆立像·關白以千金講諸天朝 得之十餘年, 極以爲寶, 諸將不政見云·余辭不能·道春書示曰大君能尊尙 聖賢其意足尙, 以大人斯文宗匠臨夜契邦, 誠難得之會, 欲得燮字以爲至 寶, 若不蒙許器獨大君失望, 將無以復命, 願大人留意焉.登日寫畢, 道春 持証至每輯要書號着圖書而去. 라고 하였다. 죽 羅山은 장군의 명으로 와서 말하기를 〈저희 나라의 至寶 인 이 圖像에 費을 쓰지 못한 것이 홈이니 副使의 글씨를 얻어 광채를 더 하기를 바랍니다〉고 하였다. 伏義를 위시하여 神農 • 黃帝 • 堯舜 • 禹 • 湯 • 文王 • 武王 • 周公 • 孔子 • 顔子 • 曾子 • 子思 • 孟子 • 源(周敦頭) • 洛(程 願 • 程頭) . 關(張載) . 閣(朱熹) . 郡雍 등의 立像 21 폭이다. 그런데 이 畵像온 장군이 천금을 주고 중국에서 사온 지 10 여 년이 된다 고 했는데 실온 狩野山雪이 그린 것이다. 혹시 譯官이 과장했거나 誤譯
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21 폭 중 15 폭은 東京國立博物館에, 나머지 6 폭 온 筑波大學附屬圖書館에 현존한다. 그리 고 1876 년 4 월 修信使로 일본을 방문한 金綺秀는 5 월 3 일 太學(今 日의 文部省 • 著者誌)을 시찰했을 때의 기록 속에 〈左右壁掛周子 • 二程子 • 張子 , 部子 , 朱子影禎軟識皆金東漠世漁筆, 以其信行來時所書也〉(『日東 記游』 卷 2)8) 라고 하였다. 여기에 말한 6 폭이 前記 筑波大學에 소장된 圖 像인 것이다. 저자도 「羅山子家藏之五聖賢圖像朝鮮金世源書舊讚于其上今 侍其圖讚」이라고 軟署한 聖賢圖像軸을 收藏하고 있다.8) 金綺秀 撰, 『 日 東記游』 卷 2 玩賞 .
羅山은 三使에게 ® 단군에 대하여 中國史籍에 記載되어 있지 않으니 齊 東野人의 說이 아닌가. ® 箕子에 대하여서도 中華群書에 未見이니 그 근 거를 알고 싶다. ® 唐太宗이 고려를 칠 때에 飛矢를 눈에 맞 ·고 귀환했다 고 하나 舊新唐書通鑑에는 없으니 일방적 私言이 아닌가. ® 일본에 사신
*
으로 왔던 鄭夢周는 성리학자로 忠 義 의 士인데 왜 살해했는가 . ® 「腦 競 方」에 나오는 약초명에 대한 질문 ® 備 齋 成文의 溫泉 說 은 합리적이 아니 라는 것 ® 李退溪의 四端理發 • 七情 氣 發 說 에 대 하여 질문하였다. 9)
9) 『羅山林先生文集』 卷 14 『寄朝鮮國三官使』 참조.
金世源 『海樣錄』 12 월 13 일 條에 羅山이 질문한 李退溪學說 • 鄭夢周 이 야기 · 養 課方에 언급한후, 羅山에게 〈오늘그대가특이한 것을물으리라 했는데 겨우 매와 개치기를 묻느냐 〉 고 하니 羅山이 사과하며 말하기를 〈섬 나라에 자라서 군자의 말을 듣지 못했는데 오늘은 안개를 헤치고 푸른 하 늘을 보는 듯합니다〉(余曰吾以子爲異之問, 曾 腦 與犬之問耶 道春謝曰 生長 海國不得聞君子之言, 今 日 若彼 霧 親靑天) 그리 고 孔子의 학문에 대 하여 〈 사 신의 말씀이 저에게 약입니다. 우리나라의 학문은 모두 禪 에서 나온 까닭 에 이런 병이 있습니다. 공자의 학문으로 아주 돌아가려면 어떻게 공부하 여야 옳습니까〉(道春得 書 頓首曰 使臣之言藥石我也, 我國 學 問皆出於禪, 所 以有此患, 如欲一歸於孔氏之學 則當何修而可)라고 한 대목이 있다. 그런 데 이런 대화의 내용은 日本에 流布된 羅山文集에는 들어 있지 않고 金世 源의 『海接錄』에서만 볼 수 있다. 羅山의 명성에 대해서는 副使 金世派이 귀국하여 복명할 때 국왕으로부 터 〈저나라 사람으로 글에 능한 자가 있던가〉 하니 答하기를 〈 召長老 • 璃 西堂의 글이 다 좋고 그 나라 안에서 오직 道春의 글이 제일이었으며 沿 路 및 江戶에서는 와서 묻는 자가 많았는데 다 理氣性情 등의 말을 물으 니 야만이 라고 얕볼 수 없습니 다〉고 하였다. 10) 問彼國之人有能文者平, 上使對曰不成文理·詩則尤不好, 臣世澈對曰召 長老璃西堂行文盡好,國中惟道春之文爲最, 沿路及江戶多有來問者皆以理 氣性情等語爲問不可以鹽人而忽之.
10) 金世源, 『海椎錄』 3 月 9 日 條.
이것으로도 당시 조선학자의 일본 유학에 대한 평가를 엿볼 수 있을 것 이다. 羅山온 學士 權低에게 朝鮮의 官制를 물었다. ll> 득히 正使가 正三品인데
11) 『羅山林先生文集』 卷 60. Ii'寬永十三年丙子臘月 江府蕃館與朝鮮學士權依筆語』 참조.
도리 어 隨行員인 堂上譯官 (上上官) 인 洪喜男과 姜消賓이 嘉善大夫로 二品 이었기 때문에 의문을 품었던 것이다. 正使 書 記 文弘續과의 필담 12) 에서는 조선의 縣雜 • 衣冠 • 習俗 • 朝廷에 대 하여 질문했는데 국정에 관한 것은 대답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羅山은 또 일본의 『 吾妻鏡』(卷 26. 元仁 元年 (1224) 2 월 29 일 條)에 실 려 있는 異國文字 13) 「 논座采接」에 대해서 〈右四字古貴邦人來斯士純面記之, 不會其義, 若存其義平請聞之〉라고 문의했다 . 文弘緩은 〈此四字以憶說解之 則字 盡 非策非眞亦非草也, 以是籍文而恐是前朝之楓物也. 논 恐是王字, 藍是 國字,셨似是貴字,埃族字也〉 즉 〈王國貴族〉이라고 해독하자 羅山은 감격 한 나머지 〈今足下以意解說之, 蓋是也敷, 千歲陽泳於足下亦可以見之, 多 可多可〉라고 하며 기뻐해 마지 않았다. 이 이국문자에 대해서 최초로 의 문을 가진 것은 林羅山이 었다. 明治 이 후에 와서 白鳥庫吉 • 內藤湖南 • 稱 葉君山 • 秋山謙藏 諸氏의 연구에 의하여 〈女眞國萬戶溫〉으로 해독되어 왔 다. 근년 西田龍雄 著 〈女眞文學 0 成立 & 發展〉 (『 7 --.; 7 Q)未解讀文字』 大修 館書店, 1982 年)에 의해 첫째 자는 皇帝의 花押(手決)이고 둘째, 셋째, 넷 째 자는 〈國之誠(信)〉으로 판독되 었다.
12) 『羅山林先生文集』 卷 60. 雜著五. 韓客筆語. 『丙子臘月與朝鮮進士文弘續筆語』 참조. 13) 앞의 책 269 쪽. 白鳥庫吉 「契丹女眞西夏文字考」(《史學雜誌》 9~11), 內藤湖南 「日本滿洲交通略說」(大阪朝日新聞社發行飯山講演集 • 明治 40 年 11 月 1 日), 稱葉君 山 「吾妻鏡女眞字0)硏究」(《靑丘學幾)) 9. 昭和 7 年 8 月), 秋山謙藏 「女眞船0)來航&華 夷譯語」 (『 日 支交涉史話』 • 內外書籍株式會社發行, 昭和 10 年) • 「女眞船標者」 (『東亞交 涉史論』 第一書房 • 昭和 19 年), 西田龍雄 「女眞文字0)成立&發展」(li' 7~7 0)未解讀 文字』 大修館書店 1982 年) • 같은 책 莊 6) 韻華 「女眞文國信牌的發現」 (〈(社會科學戰 錢》 1979. 第二期 209 쪽 • 劉風鏞 「女眞字 〈國誠〉 錄牌考 釋」 (《文物〉〉 1980 第 1 期 33 쪽 • 柱 7) 鄭紹宗 「承德發現的契丹符牌」 (『文物』 1974.- . 第 10 期 82 쪽) 참조‘
그런데 文弘續은 鹿說이 라고는 했지 만 〈王國貴族〉이 라고 〈王〉字와 〈國〉 字로 해독했다는 것은 놀랄 만한 탁견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제 5 회 信使는 1643 년 家網의 탄생 을 축하하기 위 하여 正使 尹順之(號 :薛漠), 副使 趙網(號 龍洲) . 從事官 申潘(號 竹堂)일행 총원 462 명이 방 일하였다 . 江戶登城울 마친 후, 日光廟를 參脂하고 인조의 御筆額字 「日光 淨界彰孝道場」”)을 증여한 바 있다. 이때 羅山父子는 讀祝官으로 동행한 進士 朴安期(號 螺山)와 친교를 맺고 필담창화하였다. 그때의 필담 일부
14) 松田甲 『日鮮史話』 第二編 「李朝仁祖J: b 寄贈산石 日光東照宮0)鳥額&鐘」, 中
材榮孛 『日*&朝鮮』 228 쪽 • 東照宮 「日光淨界彰孝道場」.
1
가 〈矣未朝鮮人筆蹟〉이 라고 題한 원본으로 현재 東京大學 史料編纂所에 남 아있다. 朴安期(號 螺山)는 당시의 유명한 화가 狩野探幽 (1602~1674) 로부터 자 기의 초상화를 그려 받았는데 羅山이 그 위에 다음과 같은 療을 썼다 . 15) 繪是日東繪 人是朝鮮人 仙螺累卷石 臥龍裁冠市 奇哉朴進士 認假以爲眞 眞假同一理 隱顯其分身 彼此奈消息 請看手澤新 朴安期는 동행한 畵員 李起龍(字君瑞 號凡隱)의 그립과자기필적을 羅
1힉 『羅山林先生文集』 卷 60 • 寬永二十年 七月 與朝鮮進士朴安期筆語 참조.
山에게 贈送했다. 朴安期가 能書家로서 방일했을 때 남긴 필적으로 淸見 寺에 「瓊培世界」扇額과 「再尋淸見寺走筆留題」라고 한 詩稿가 있고, 牛窓 本蓮寺에는 〈螺 山 翁題本蓮寺〉 라고 한 칠언절구의 書軸 이 현존한다. 제 6 회는 1655 년에 家綱 의 襲職賀使로 正使 趙衍(號 琴 In), 副使 兪場(號 秋潭), 從 事官 南龍翼(號 壅谷) 일행 488 명이 방일하였다. 江戶城에서 國書 와 別幅의 전달의식을 마천 후 日光廟를 參脂하고 효종대왕의 御筆額字 「靈山法界崇孝淨院」을 贈與했다. 이 御筆은 오늘날 日光山輪王寺에 遺存 한다 .16)
16) 大 湘晴子 , 「日光山輪王寺'O)C.J.,韓國文化」(《韓國文化)) 1983 年 3 月號), 南壅 谷 『扶桑錄』 賓去物件御筆靈山法界崇孝淨院 乙未孟夏下洗朝鮮國王姓諱 書愼 以爲政以 德 之圖 書 참조.
이때의 信使는 大坂에서 羅山의 『五花堂記』를 얻어서 읽어보고 그의 문 장을 칭찬했는데 羅山은 三 使 및 進士 李明彬에게 자기의 시를 증정하였 다. 羅山父子와의 교환에 대하여는 從事官 南龍翼의 『扶桑錄』에 詳記되어 있다. 副使兪場은 歸途에 오르기 전날 밤, 「扶桑壯遊百五十韻」이라고 題 한 장편시를 羅山에게 보냈는데 羅山은 밤을 새워가며 和韻하여 다음날 아침 小田原에까지 가고 있는 信使行中에 전하여 그의 신속한 作詩에 놀 랐다고 한다. 『羅山詩集』(卷 46. 外國贈答下)에 〈和秋潭扶桑壯遊 150 韻井 序〉라고 하고 자기의 시를 부기했다. 「朝鮮信使東樣紀行」 171 末尾에 〈乙未 孟冬秋 潭居士, 須以此作轉奉羅山得其和韻投示幸基〉이라고 있는 것으로 보 아 接伴僧을 통하여 전달받자 羅山은 전기한 바와 같이 副使 앞으로 증여 했음을 알 수 있다.
17) 燁森芳洲文庫目錄稿〉〉 111 號 「朝鮮信使東樣紀行」一冊 (28 . OX20.5) 寫 本 • (《關 西學術硏究所紀要》 第十輯 • 昭和 52 年) . 大塚燈 「芳洲文庫本朝鮮信使東椎紀行 l l:? t、 T 」(《朝鮮學報)) 第十輯 • 昭和 31 年) 참조、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특기할것은 讀祝官 李明彬(號 石湖)는 방일할 때 徐居正 著 『東人詩話』를 지참하였다. 石湖는 京都 本國寺에서 신사를 집 반한 菊池東句에게 그의 詩文才學을칭찬하면서 이별의 정으로 『東人詩話』 를 기증하였다 . 後年 그의 아들 鵬漠에 의하여 覆刻되었는데 이것이 처음 으로 일본에 전입된 藍本이다. 그 覆刻의 경위를 밝힌 跋語에 의해 찰 알 수 있다 18)
18) 松田甲, 「東人詩話0)魏刻」(『日鮮史話』 4) • 『東人詩話』 魏刻本 (全 2 卷)에는 姜希孟景醉序·金守溫文良序·東人詩話卷上·下·東人詩話後序崔淑精國華梁誠之純 夫證跋 및 鵬漠原博九萬甫識語라고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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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通信使와 林家 19) 林家는 幕府의 大學頭로서 통신사가 방일할때마다 그 接伴役울 맡았다 . 家康이 학문을 즐겼다는 것은 유학자의 기용, 학문의 장려, 서적의 印 行, 고서의 수집 및 書寫 등을 둘 수 있다. 본래 당시 문장을 다루던 사람 둘은 대개 五山의 禪師였고 羅山옹 기용한 후부터는 維 林의 손을 떠나 유 학자도 독자적인 면목을 세우게 되었다. 따라서 그 후부터는 諸 藩 에서도 유학자를 擦用하게 되었고 점차 碩學鴻儒가 배출되게 되었다는 것을 간과 해서는 안 된다. 羅山의 제 3 대손 鳳岡(信篤)에 이르러 더욱 文運이 융성해졌다. 1691 년 정월, 鳳岡은 幕府의 명으로 束髮改服하고 大學頭에 임명되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유학자의 刺髮은 중지된 셈이다. 鳳岡은 幕府將軍 제 5 대부터 제 8 대까지를 십기고 1722 년에 89 세로 殘하였다 . 그 후 林家 제 4 대 楠岡 (信充), 제 5 대 鳳谷(信言), 제 6 대 鳳潭(信徵), 제 7 대 錦峯(信敬), 제 8 대 述齋(衡)에 이르기까지 통신사를 접반해 왔다. 그 후 제 9 대 檀宇 -( 銃), 제 10 대 壯軒(健), 제 11 대 復齋(達)를 거 쳐 제 12 대 學齋(昇)에 이 르 러 明治維新울 맞이하게 되었다. 이와 갇이 林家는 學祖 羅山 이후 그 후예들 또한 名儒로서 林家中心의
19) 中山久四郞 「林家&文敎」(『近世日本0)儒學』 德 )II 公繼宗七十年 祝 賀 記念會編· 岩 波 書 店 • 昭和 141 ¥-).
文敎振興과 幕府橋官의 補益을 얻어 敎學에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林 家의 전통적 촌재의 권위를 유지해 왔다고 하여야겠다. 다음에 林大學頭一覽表 20) 를 부기한다.
20) 斯文會 編 『日本漢學年表』(大修館 書 店, 昭和 52 年) 참조.
林*墨面 - 覽 表
2 石川丈山과 權{式 石川丈山 Zl)(1583~1672) 은 이름을 四, 字를 丈山, 號롤 六六山人이라고 하였다. 본래 家康에 따라 전공을세웠으나, 關放당한 후比敦山覽一乘寺 村에 詩仙堂을 짓고 은거하면서 翰墨을 일삼았다. 丙子年 信使가 귀 로 京都本國寺에 머 물 때 1637 년 1 월 18 일 객 관을 찾아 가 學士 權試과 면접하였는데 그때의 필담 원본 『與朝鮮國權學士菊軒筆談 書』 가 東京靜嘉堂 文 庫에 현존한다. 權低은 丈山의 詩卷二百餘篇을 읽 어 보고 〈意圓而語新, 法古而格淸〉이
21) 『先哲幾談』 卷 2 • 石川四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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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며 〈尊公可謂 日 東之李杜也 〉, 즉, 日 本 의 李 白 • 杜甫 라 해 야 겠 다고 격찬한 바 있다 .22)
22) 若木太 一 「 朝鮮通 信 使 &石 川丈山 ― 一日東0)李白考 」 ( 〈〈語 文硏究 〉〉 52, 53 號 198 2 年 6 月 九州 大 穆國語國文學會) 참조 .
權低이 丈山에게 〈東武有道春者 , 亦 賞 再見而 有唱 和之詩 , 未知 貴 邦以此 人爲文苑之領柚耶, 願聞之 〉 라고 물으니 丈山은 대답하기를 〈자 기와는 函 丈之間으로 그는 보지 않은 책이 없고 모르는 일이 없어 우리나라 儒 宗의 으뜸가는 인물〉이라고 하였다 . 『先哲 幾 話』 卷 2 에 〈丈山與羅山友 義 殊深, 羅 山 集 中 載 其往 復書 38 편 , 契 分可見焉〉이라고 하듯이 『 羅 山文 集 』에는 丈山의 서한에 중답한 것이 모두 들어 있다. 그리고 『羅山詩集』에는 〈 矣未之冬在京作 石丈山蹴予兒 裁 所唱和 于朝鮮專對使及 學 士等之冊子 而周 覽 之後 盛之於 紙 時 有唐律佳作 可以 爲 跋 平因次其韻〉이라 하여 다음 1 편이 수록되어 있다 . 朝鮮山水久周 選 貢有 阜 比獲有 菴 理紙封星遼北誰 使船長權海東 緊 槪韻異客土風換 復見玲仙窟宅高 柴凡向總類老杜 未推禹錫敬詩 豪
이것은 바로 1643 년에 방일한 朴安期와의 唱訓를 말한다. 權低問曰 〈 又請政問尊公 原任 何官, 而今居何地, 尊諱誰也, 軒號何也〉에 대하여 丈山答 〈上 姓源 • 氏石川 • 諱勘字 丈山 • 假官名曰左近衛 • 謂別號曰 大抽腐 • 難爲東照大神君累葉之舊臣, 昔不顧軍令獨捷於營中, 入死地先登, 自後不歸幕下, 至今若是而已 , 大丈夫何街首級之功哉, 況又於文才平〉라고 하였다. 丈山은 또 말하기를 〈이번 朝鮮信使몰 따라귀국에 가서 풍속을 보고 싶 으나 국내제도가 自窓獨行울 불허하므로 중지하였소. 他日 國制가 허락한 다면 商船을 타고라도 三韓울 遊歷하고 싶은데 그때까지 저를 기다려주겠 는가, 公은 명나라에 들어가 魯鄒의 楠風과 聖跡웅 본 적이 있는가〉하니, 權{式은 〈일찍이 卦明使臣을 따라 壯遊의 뜻을 품고 渤海를 건너靑齊를 거 쳐 燕市(北京)에 放歌하고 鄒魯의 땅을 筋翔한 바 있다. 이번에는 사절을 따라 來日하여 귀국의 산천을 돌아보며 평생의 소원을 풀었고 또 귀공을 만나게 되어 더욱 기쁘다〉고 했다. 23)
23) 若木太―「翻刻自筆原翰」, 『與朝鮮國權學士菊軒筆談 書 』((〈江戶時代文學誌》 第 3 號 1983 年 6 月)· 『朝鮮人筆談.!I(京都大學富士川游文庫本)은 1963 年 通信使 醫員 白 士立과 野間三竹(號 精軒)과의 醫事問答 및 權試과 靜軒과의 筆談唱和한 記錄입. 그 속에 權試曰 〈往年從朝天使涉渤海過登萊遊遊平齊魯之境放歌平萊市之中歸而猶以 爲未足 今從信使之行. 歷諸島而到此則觀 覽 之富, 執與太史公多平哉〉라고 했음.
이 날 필 담석 상에 서 丈山은 〈 옻 明進應賜朝鮮國菊軒學士權文丈 • 筆語移욤 伴躍之餘, 卑興一首拓哈梧前〉이 라 題하고 다음과 같은 七絶 한 편을 上星 했다. 日本朝鮮隔海滅 不圖相遇結文盟 使星明日留炫地 唱和皇華歌鹿鳴 權伐도〈拜龍之幸識韓之願·不候實有之, 又繁珪韻不覺頭風頓産, 木瓜之 報, 烏可已平 • 惟冀郵正一完〉하고 다음과 같은 詩 한 편을 贈答하였다. 片机千里涉蓬滅 此日詞壇見主盟 莫道東來無好事 誓時消却不平鳴 끝으로 丈山筆語의 跋文을 소개하겠다.
寬永十三年丙子十一月, 朝鮮國貢獻三官使通政大夫修撰官任統, 通訓大 夫編修官金世源, 通訓大夫記注官黃辰之屬來朝而造於東武, 致登歲丁丑正 月中句還京師, 館于本國寺, 余爲試其才識, 行而賜候焉, 其徒有中直大夫 詩學敎授權學士者, 出而與余照對矣, 展禮座定互依産素以通情思, 學士治 然操筆, 詞錄如飛辨論如流, 丁眞永草歐潤蘇潮不多讓矣, 可謂希世之達才 也, 臨之信使到東都時, 羅浮氏以書話問三韓之風俗六經之難處, 彼以國法 不政答焉, 故余此行也, 不設難問, 管記取會次之風槪以爲文戰之徵矣耳, 木投瓊報亡慮四+篇, 爲好事者, 裝接卷軸藏諸詩仙堂之藝菓, 後之覽者可 爲疾談之一助 戊寅仲夏望日 參陽隱夫石川丈山跋 제 3 장 壬戌年(1 682) 使行 l 通信使의 訪日 德川幕府 제 4 대장군 家網이 병사하고 그의 동생 網吉이 장군직을 계승 하자 1681 년 7 월에 對馬太守로부터 통신사 파견을 요청 해 왔다. 그러 나 경 상도 관찰사 李翊은 이례적으로 동생이 襲職했다는 점에 대하여 처음에는 纂奪한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까지 했던 것이다 .1 》
1) 『肅宗實錄』 卷 12, 肅宗七年甲子 • 日本國新關白嗣位來告 • 慶尙道觀察使李翊啓 日本稱兄亡弟及而事情多可疑, 蓋纂奪而得之云.
東萊府使로부터 일본국 關白新立, 備局啓請差出通信使가 상신되 어 조정 에서는 전례대로 이를 허가하였다. 이어 인선에 착수하고 처음에는 正使 에 尹址完, 從事官에 李彦網을 내정했으나 李彦網온 壬戌一月 4 품직 (掌 令)에 陸進되었으므로 이를 副使로, 從事官에는 朴致道를 임명하였다. 朴 致道는 신병으로 인하여 林泳이 대체되었으나 부친이 70 세 고령 임을 이유 로 사퇴하자 申畢을 임명하였다. 申畢 또한 신병을 이유로 경질되어 최후 에는 松禾縣監朴慶後가 임명되었다 .2)
2) 위의 책 , 肅宗 8 年 6 月乙未, 大臣啓返其代朴致道又以病通, 通信使從事官林泳親 年七十述其代申畢又以有朗血病, 大臣亦啓還及以松禾縣監朴慶後送故疏及之. 朴慶 〈後〉의 이 름자에 대 하여 『通航一. 覽』 • 『桑韓筆語唱和集』 •· 『 和韓唱訓集』 • 『朝鮮文化 史大全』(靑柳南冥 著) • 『韓國 書 藝史』(金基昇 著)에는 모두 朴慶〈俊〉으로 하였다. 그
러나 전기한 『 肅 宗 實錄 』을 비롯하여 『國朝傍目』 • 金指南의 『東樣日錄』 • Ii'增正交 隣 志』 • Ii' 槿域書靈徵 』에는 朴慶 〈後 〉 로 하였다. 따라서 〈後〉 字가 옳다. 3) 名代堀田筑前守正俊에 대한 拜 禮 問題에 있어서 『通航一 覽 』(卷 87) 에 〈天和 2 年(1 682) 8 月 28 日 朝鮮 信 使 西丸에 등성하다. 偉君이 年幼한 탓으로 筑前守正俊이 대신하여 三使의 배례를 받고자 했으나 彼國의 예법에는 이런 일이 없다고 하여 虛 位에 拜 禮 하고 되석했다〉고 하였다. 또 『南山聞 書 』에도 〈天和壬戌 憲廟 以偉副尙幼不 克親臨 命時執政臣茶代備君受拜, 三使方就位不肯拜曰吾受命之日聞. 拜世子, 未聞 拜執政, 禮 官茶進使 譯 官言曰君幼以 重 臣代受拜, 我國之 禮 也, 不見君不肯拜 貴 國之 禮 也客行其 禮 我行我 禮 , 三使起拜空位而退〉라고 하였다.
正使 尹 址 完 일행 473 명은 壬 戌 年 (1682) 5 월 8 일 국왕에게 辭陸한 후 국서 를 받 들 고 서 울로부터 납하하여 5 월 26 일 부산에 도 착 , 6 월 16 일 부 산포 를 출 선하여 같은 달 24 일 對馬島 府中에 도 착 하였다. 7 월 8 일 對馬太 守 宗 義眞 이 護行하여 대 마도를 출발하여 7 월 26 일 大坂 도착, 8 월 2 일 徒 川을 朔行하여 旋浦에서 육로로 바꾸어 京都에 들어가 本國寺에 유숙, 8 월 7 일 京都롤 떠 나 8 월 21 일에 江戶에 도착하였다. 8 월 27 일에 登城하여 국서와 별폭을 봉정하고, 다음날 偉君이 幼少하여 名代와 行 禮 하였다 .3) 9 월 5 일 馬 上才의 곡예를 彼 露 하고 다음날 장군의 답서와 별폭을 받아가지 고 9 월 12 일 江戶룰 출발하여 귀 로에 올랐다 . 9 월 26 일 倭京에 , 10 월 1 일 大坂에 도 착 , 10 월 6 일 大坂港을 출선하여 10 월 17 일 대 마도에 도착, 여 기 서 〈對馬貿易 七 節 條 館 牌 〉 4) 에 관한 교섭 을 끝내 고 27 일 對州름 출발, 10 월 30 일 부산에 귀착, 11 월 16 일 상경 복명하였다. 왕복 총소요 일수는 185 일이었다. 보통은 8 개월이 결렀는데 여기에 비하면 빠른 편이었다. 堂 上 譯 官 洪禹 載 의 『東樣錄』 9 월 25 일條에 의하면 洪譯官은 모친의 생일 때 문에 10 월 15 일까지 , 또 堂上譯官 朴再興은 부친의 命日 때문에 11 월 20 일까지는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했던 것으로 보아 강행군했음이 틀림없다 . 洪 譯 官은 다행히도 11 월 14 일 귀가할 수 있었으니 효성이 지국 하여 이루어진 셈이다.
4) 洪禹 載 의 『東樣錄』 壬戌 10 月 23 日條에 〈說及不違 舊 約, 續 送差倭, 物力 難 支之 事 及緖中禁製 惡 板館壁 令加申筋之 意 出示三堂聯名一 幅書 則諸倭見以爲然〉 .
이때의 信使行列圖로서는 狩野永敬이 그린 「朝鮮人行列圖」가 뉴욕 퍼블 릭 라이브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 조선국왕으로부터 德川綱吉 장군에게 보 낸 국서와 별폭(補注 l) 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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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2 년 德 )II 綱吉 國 書 副本 (京都藤井有隣館 소장)
소
朝鮮國王李淳奉 書 日 本國大君殿下 修開之禮, 間者腦焉, 商承殿下克積洪緖, 撫寧邦域, 休 聞遠及, 井喜良深, 炫遣使臣, 往申賀儀, 蓋爲敦結썰好與同新慶也, 土宜 不膜 庸效區區, 惟冀勉’灰令固, 益聞祥社. 不宣. 조선국왕 이돈은 굴을 일본국 대군전하에게 올립니다. 수호빙례가 근래에 끊 어지고 있었는데 전하께서 큰 업을 이어받아 국내 백성들을 편안히 다스리고 있 다는 아름다운 소문이 멀리까지 퍼짐을 몹시 기뻐하오며 여기 사신을 보내어 축 하드리는 바, 이는 옛 우호를 돈독히 맺고 새로운 경사를 함께 하고자 하는 것 입니다. 변변치 못한 선물이나마 적은 뜻을 표하는 것이오니 바라옵건대 넓은 마 음으로 받아 주십시오. 더욱 길상다복하시기를 바라오며 다 쓰지 못합니다. 〔別幅〕 人薔 50 斤, 大維子 10 定, 大緩子 10 定, 色大紗 20 定, 白照布 20 定, 黃照布 20]1 :, 坤布 30 定, 虎皮 15 張, 約皮 20 張, 靑皮 30 張, 魚皮 100 張 色紙 30 卷 色筆 50 柄, 眞墨 50~, 黃靈 100 斤, 淸黨 10 壅, 鷹子 10 連, 駿馬軟具 2 四 여기에 대하여 장군 綱吉의 答書와 別幅(補駐 2) 은 다음과 같다. 〔日本國源綱吉敬復〕 朝鮮國王殿下 賜使遠至, 禮意鄭重, 彼書具審慶我繼前 業, 所贈物産如別 幅領納 惡軟喝誠, 感謝無已, 心交久敬隣德不孤, 彌修世睦茂近天休, 秋 凉氣奭爲國自愛, 炫寄土品用勅遠沈, 使還書不盡言. 不宣. 일본국 원 강길은 답서를 조선국왕 전하께 올립니다 . 빙사가 멀리까지 와주시 니 예의가 정중하오며 전업계승을 축하해 주시는 글을 찰 받아 보았습니다. 보 내주신 선물은 별폭대로 받았사오며 간곡히 성의를 다하신 데 감사해 마지 않습 니다. 마음으로 사뀜이 오래되었음을 공경하는 바 이웃의 덕으로 의롭지 않사 오며 대대로 돈목함을 닦아 하늘의 칭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상쾌한 가을에 나 라를 위하여 자애하십시오. 여기 선물을 보내어 멀리서 정성을 다하고자 합니 다. 사신이 돌아가는 편에 글웅 울리 는바 말씀을 다하지 못합니 다. 갭 U 幅〕 鑄 100 柄, 澈金薛繪軟具 20 裝, 金地畵居風 20 雙, 澈金薛繪廣蓋 10 枚, 採紋服 50 領
위 에 기 록된 居風에 대 해 서 는 『通航一登』 卷 95 에 〈天和 2 年 朝鮮^被 遣候居風(1)模樣 〉 이라고 하고 막부의 狩野家畵工 狩野永眞, 義朴, 洞雲, 探 信, 探 雪 秀信, 淸信, 文信, 友信 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국왕으로부터 備君에게 보낸 예물과 備君으로부터 조선국왕 에게 보낸 예물 朝鮮國禮曹參判 洪萬容으로부터 幕府大老및 近侍에게 보 낸 서계와 예물, 禮曹參議 尹喜積으로부터 對馬太守에게 보낸 서계와 예 물, 德川 三宗室에 보낸 예 물에 대 하여 『通航一覽』에 명 기 되 어 있다. 한편 장군으로부터 신사 일행에 대한 回禮로서는, 三使에게 각각 銀 500 매와 綿 200 파물, 堂上譯官(上上官) 3 인에게 각각 銀 200 매를, 上通事에 게 銀각 50 매를, 製述官(學士)에게 30 매를, 上官 • 次官 50 인에게 합계 은 500 매를, 中官 • 下官 330 여 명에게 합계 銀 1, 000 매를, 馬上才에게 銀 각 100 매 를, 그리 고 偉君으로부터 三使에 게 각각 銀 200 매 를, 上上官에 게 각 100 매를, 上判 事 와 學士에게 각 20 매를, 上官 • 次官 50 인에게 합계 200 매 를, 中官 • 下官 330 여 명에게 합계 300 매가 증여되었다. 이 은자는 모두 大坂에서 현물로 받았던 것이다.
5) 上上官이 란 堂上譯官(倭學首 譯)을 말한다. 上判事란 上通事의 뜻이 다 . 上官이 란 次上通 事 • 押物通事· 寫 字官· 醫員 ·盡員 • 子弟軍官 ·軍官· 書 記·別破陣울 말 한다 . 次官이 란 伴個 • 騎船將 • 馬上才 • 典樂 • 理馬를 말한다 . 中官이 란 卜船將 • 階小童·小通 事 ·都訓導·禮單直·廳直·盤緩直·使令·吹手·節, 銀奉持者·形名 手·綴手·個月刀手·巡視旗手·令旗手·淸道旗手·抱手•長銘手·馬上鼓手·銅鼓 手 •· 大 鼓手 • 三穴銃手 • 細樂手 • 鈴手 • 奴子 • 刀尺 • 沙工을 말한다. 下官이란 風樂 手·屠牛匠·格軍을말한다. 三使·上上官·上判事•學士·上官·次官·中官·下官 의 구별온 임본측이 집대할 때 類別한 데서 시작한다.
이 밖에 德川三宗室로부터 三使에 게 각각 銀 200 매 , 上上官에게 銀각 50 매, 그리고 幕府執政으로부터 三使에게 각각 銀 100 매를 보내왔다. 洪 禹載의 『東樣錄』 10 월 18 일 條에 〈臣等處所送銀子都合 16, 720 兩 6) 並授
6) 洪禹 載 『東桂錄』 9 月 初 9 日 條에 〈日本用銀之規, 以四兩三錢爲一枚, 以四錢三 分爲一兩, 以一貫目爲一百兩, 以百枚爲一千兩, 執政等別幅以 書 一千兩, 其數則百枚 故此意告于三位, 還給別幅改 書 百枚〉. 1655 년 때의 從事官南龍翼 『扶桑錄』 10 月 25 日條에 〈關白所送使臣處丁銀五百枚 •••••• 都合三千五百枚〉. 同 26 日條에 〈以我國四錢 三分爲一兩. 以我國四兩三錢爲一枚〉. 1764 년 때 正使趙職 「海樣日記」에 〈關白所lift 員役以下銀子二二八 O 枚每枚四兩三錢式合九 AO 四兩〉 • 〈使行前各處回 禮 銀子~萬三 千一百十二兩천 八千兩公木二百同防給條下〉라고 명기되어 있다. 죽 銀 8,000 냥을 公木 200 동 대 금으로 防給하고 공목담당의 倭人手標를 받아서 首譯에게 주어 東萊 府에 考準케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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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眞使之依例區處爲白平抗한 他餘雜物段, 分給於一行員役及下卒爲白餘라고 했다. 回禮銀子는 對馬太守에게 除給하여 東萊府의 公木울 대납케 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7) 〈爲白平旅〉란 한국어의 이두식 표기로 〈춘삶오며〉의 뜻이다. 小倉進平 『鄕歌 及T 吏讀0)硏究』 • 『吏讀集成』 (朝鮮總督府中樞院編) • 『吏讀便覽 I r.-?~ 、 T 』 (『前闇恭作 著作集』 下所收) 참조.
公貿易이란, 조선에서 생산되지 않는 銅,錫, 丹木類롤 조선정부가 公 木(公課로서 칭집한 목면)으로 매입하는 방식인데 공무역 물품의 折價(교 환율)는 동철은 100 斤에 公木 60 定, 胡被는 100 斤에 100 走로 되어 있었다. 〈同〉이 란 한국어 〈 Ton g〉의 音字로 束이 라고도 쓴다. 목면 인 경 우 1 동은 50 定에 해 당한다. 8)
8) 『通文館志』 卷 5, 交隣 • 年例送使 • 一特送使, 中村榮孝 『 日 鮮關係史0)硏究』 下 • 3. 江戶時代0)日鮮關係(六)朝鮮貿易&對馬藩 325 쪽, 田代和生 「十七世紀初頭 '다하j 石日 朝貿易0)形態」 (《東方學〉〉 54輯 ) 참조.
조선과 일본과의 무역에 있어서 〈進上〉, 즉 대마도의 使船이 조선국왕 에게 헌상하는 물품으로서 胡淑, 明碧, 丹木, 大和眞朱, 紋紙, 彩畵現IT!, 銅盤 銅鏡, 金居風 등이고 여기에 대하여 조선에서는 〈回賜〉라고 하여 人 蓬 虎皮 約皮 白宇布, 黑麻布, 白綿維 白綿布, 花席, 油范, 黃毛筆, 眞墨 鷹 등이 하사되었다. 田代和生 氏에 의하면 진상물품보다 과분한 예 물을 조선에서 하사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던 것 갇다고 한다 .9)
9) 田代和生, 「前揚論文」 9 쪽 참조.
1764 년 正使 趙職의 『海樣 日 記』에 는 주목할 만한 기 록이 있 다. 즉, 조선 에서 대마도 入送使에게 주는 人夢, 細, 宇, 麻布, 虎約皮 동 잡물 의에 매년 別送使를 접대하는 비용을 합치면 30 만 냥이 넘었다. 이것은 嶺南半 道 出産의 재산을 그들에게 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대하여 그들 로부터 받는 물품으로서는 黑角 • 銅鐵 • 胡淑 • 明碧 • 丹木 • 銀鐵 등인데 이것을 환산하면 3 만냥에 불과하다. 이것은우리가 주는 것의 10 분의 1 도 못 되는 셈이다 .10)
10) 趙職 『海樣 日 記』 10 月 28 日 條에 〈入送使處例給禮單薔三十斤餘 • 細莘麻布及虎 約皮雜物各色基多, 此乃入送使逐年應下之物, 至於別送使歲不下五.六次, 其所接待 亦各有例 通一年所給雜物並爲折價以計則治過三十萬兩, 恒言嶺南半道之財産盡入於 彼倭 此則未必然而原數誠愍然矣, 以彼人所納者言之, 則黑角四百椎, 銅鐵二萬七千 九百斤, 胡被四千餘斤, 明善一千四百餘斤, 丹木五千六百餘斤, 鎌鐵價銀一千五百餘 兩及雜種物件矣. 並爲折價不過爲三萬餘金, 以其所納我所給可謂竹之-〉.
앞에서 말한 통신사의 예물 중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조선 인삼이 다. 통신사가 査來하는 인삼을 〈 信器〉이라고 부른다. 이 인삼이 野夢임은 말할 것도 없다 . 이 信夢採集에 관해서는 주로 江界府에 할당했는데 강계 주민은 일단 信慕 卜定의 소식이 전해 오면 과중한 부담 때문에 도망하는 사람이 속출하여 그 조달에 큰 곤란을 초래하였다고 한다 .II) 이 강제적 할 당은 통신사 파견이 결정되어 출발하기 반년 전에 산삼이 나는 현지주민 에게 복정하는데 통신사 한 번 행차에 體夢이 약 245 근이나 소요되었다 信華은 卜定된 지방으로부터 할당수량을 戶曹에 납입하게 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가장 좋은 인삼을 골라 통신사에게 교부한다. 인삼은 백두산 것이 최 상품이 라고 한다. 121
11) 『朝鮮王朝實錄』 正宗 11 年 7 月 江界府使 李願祥 上疏에 〈數年以來荒薔滋基 으로 二千戶又復流亡하여 四千五百十八戶에 불과한데 信좋 卜定의 消息울 듣자 營 魄炭心하여 一時에 짐을 지고 他處로 떠났다〉고 하였다. 今村柄 著 『人夢史』(第二 第三章) 참조 . 12) 「滿洲源流考」에 豆滿 • 鴨綠 二大江流에 따라 河口로부터 거슬러 울라가 ::::z.. 치는 곳이 白頭山 定界碑에 따른 조선과 중국과의 국경선인데 ::::z.. 양축에 위치된 산악은 고래로 각종 물산이 풍부하며 그중 高價의 인삼과 紹皮를 대종으로 한다고 했다> 또 저자가 소장하는 『松原昌軒朝鮮談』(朝鮮物語)에 백두산에서 나는 인삼을 제일로 친다고 하였다 .
전래된 조선 인삼예 관해서는 『三國史記』 卷제 10. 『新羅本紀』 제 10. 昭 聖王元年 (799) 秋 7 월條에 〈得人夢九尺, 其異之, 遣使如唐進奉, 德宗謂非 人夢不受 〉 라고 한 기록이 있다. 또 正倉院 「 延曆 12 年爆凉使解」에도 新羅琴과 人夢 205 근 8 냥의 기록이 남아 있다 .13)
13) 1974 년 『正倉院展 目 錄』 延曆十二年 爆凉使解 2 卷에 〈申藤凉香藥等事. 合萱百 燁捨任種……人夢二百五斤八兩井袋·新羅羊脂十二兩三分·第九槪收納人薔二袋重八 十一斤井袋虫契下品第十槪收納人夢二袋重一百甘四斤八兩依廷曆十三年四月甘七日官 肺進內裏百斤鈴虫契下品〉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조선 인삼의 가격은 일본의 享保年間 (1716~1735) 에는 1 근(중량 40 냥)에 금 10 냥(금 l 냥은 은 60 돈쫑)이었다. 인삼이 起死回生의 영약이라고 해도 10 냥을 훔치면 목이 찰리며 遊里에 빠진 여자의 몸값이 5 냥이던 때이니만 큼 중대한 사회 문제였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三浦二郞 著 『人夢史t드?\,、 f』). 虎皮 約皮도 많은 수가 소요되었는데 1811 년의 통신사 방일 때만 해도
합계 147 매를 가지고 왔던 것이다 . 14)
14) 抽稿 「朝鮮純祖辛未通 信 使0)訪 日 'r.?t TC 」 (《朝鮮學報〉〉 第 72 輯, 昭和 49 년) 참 조
그런데 조선측으로부터의 이런 정중한 예물에 대하여 일본에서는 貢 物 이라고 본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 . 즉 『寶永 • 華洛細見圖』 卷 10 에 〈天和 2 년(1 682) 7 월. 我朝에 사신을 보내어 각종 보물을 공물로 바치다 〉 또 〈여 러가지 향연과 각종의 하사물〔賜〕이 있어 이국 사람들 도 기뻐해 마지 않 았다〉고 한 대목이 있다. 이상은 통신사 방일에 있어서 서로간의 예물을 비교하는 의미에서 상론 하였다. 2 일본 문사와의 筆談唱和 1682 년의 신사기행록으로서는전술한바와같이 堂上 譯 官 洪禹 載 !”의 『東 椎錄』과 押物通 事 金指南 16) 의 『東 模 日錄』이 전할 뿐이다. 그리고 洪 世泰 의 『柳下集』에는 「金季明東椎錄序」가 수록되어 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海行抱 載 』 所收 「金指南東樣日錄」에는 들어 있지 않다. 다만 東桂 錄序라 고 하여 〈……傳記顔詳. 押又文詞之不群辨. 凡 版 時 覽 之資, 莫不興 絶 爲家 庭世襲之寶, 可以流芳.歲上章敦洋月建亥下游. 西原人 韓 舜錫汝聖 諦 序 〉 의 에 威老 李芝之父長榮의 七律 一首가 싣려 있을 뿐이다. 金指南의 『東椎日錄』을 보충하는 의미에서 洪世泰 撰 「金季明東 樣 錄序」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歲辛酉, 日本關白新立, 諸我修好, 朝廷許之, 越明年五月, 遣 使報賜 . 余以租解文詞, 與佐幕之選, 自釜山乘舟渡海抵對馬島, 自對馬而歷諸島抵 大坂城, 其間皆大洋數千餘里, 自大坂而抵江戶, 其間原陸亦旦數千餘里. 大抵其地多幽退說異之觀, 余於舟中始有日記, 及下陸多事卒卒, 遂不得 續 爲之, 聲竣事遂歸, 念所經道途物色, 十記其五, 六而十年之後値二, 三焉 .
15) 『譯科傍目』 康熙丙午 (1666) 式年條 • 洪禹 載 字 廷瑞 • 甲申(1 644) 生 • 本 南陽, 倭學敎誰 嘉 善同樞 • 文司果汝舟. 16) 金指南(1 654~ ? ), 字秀明 • 號 廣 )|I, 信使尹址完에 隨行訪 日, 1672 年 譯科 에 급제. 1682 年 日本人作和韓集有曰鑛川爲人寬柔而能容人, 顔有君子之風. 1698 年 隨閔尙 書 就道卦燕, 歸朝後 「新傳擬砲方」을 撰述, 『通文館志』를 編纂, 官至中樞府 事 (『通文館志』 卷 7 . 人物. 『韓國人名大 事 典』 참조) .
至於二十餘年則所謂二, 三者 亦不能記, 꾼然若夢中事, 近與金季明語及於 此, 季明郞其時同舟者也. 出示其所記東樣錄一編, 讀之則祝然省悟, 向所 謂뿐然若夢中事者今皆歷歷平. 羅列于前矣. 余及撫卷而軟曰善平, 子之記 也, 夫日本海外之絶國也. 我使之往, 數十年槿一有焉, 而其往者亦平有記 志, 故其所傳說未詳, 或有杜撰新奇以資其類舌而考於人者, 其亦妄矣. 今 季明所記, 隨其見聞, 一皆抵其實而書. 日本之立國, 沿革, 山川道里之遠 近, 城廊樓觀之宏麗, 人物財用之富~,風俗制度之殊~, 與夫兩國交聽之 禮, 接待案享之儀, 條牟資予之數, 文 書 往復之式, 無所不載, 織惑備具, 居然爲 一輿 地志, 扶桑數千里之外, 可坐而接親也, 噴當時同行者非止一季 明而乃獨能爲此 書, 季明其眞有心人哉, 余常以不得續紀爲恨而果爲之, 亦 無居於季明之外者, 季明此錄不但爲一家小乘而己, 世有如顔古者出而爲王 會圖則必有採焉, 季明以余目擊其地而言之爲可信, 要余一言以證于後, 於 是 書 其卷首, 誌諸 他 日 之爲是役者. 이 서문이 『海行抱載』 수록본에 들어있지 않다는 것은 매우 의아스러운 일이다. 신사의 방일이 일본의 유학자와 문인들에게 이상할 정도의 기대 와 열광적 환영 속에 筆談唱和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앞에 쓴 「寶永 • 華洛細見圓」 (10) 에는 信使行列圖와 馬上才의 그림을 싣 고 그 설명에 〈참시 洛陽(京都의 뜻) 서쪽 本國寺를 鴻腦館으로 하여 異朝
人을 유숙시키고 위로한 후 江戶로 내려가 台命을 받고 휴식하는 동안 武 藝弓矢의 연기를 보이며 弘文院의 유학자와 洛陽五山의 禪僧 시인들이 모 여 시가를 창수증답하였다. 이때에 기록한 것을 筆語라고 하여 세상에 전 하고 있다〉고 하였다 . 시대가 내려움에 따라 시문 교환이 성황을 이루었는데 여기서는 福岡의 貝原益軒, 牛窓의 富田元眞, 大坂 客館, 京都 本圈寺, 江戶 本誓寺에서의 필담창화를 각 항목별로 상술하고자 한다. 金指南의 『東接 日 錄』 8 월 21 일 條에 我國文獻之名素胞日東人之耳目 求詩求墨之請, 在路次己不可塔, 及到 舍箱自館伴與其國執政者, 以至朗養之倭及儒釋好事輩, 張紙現墨日來求惡 而余於詩尤昧昧焉, 棟心之發, 無以爲辭必委於洪道長 • 成伯圭. 若夫~札, 則余難無臨池之學好紙精鎌推積眼前, 而來者雜還揮之不去始試忘합禪酒終 遂成一苦役, 矢在鉉上不得不發云者登謂此耶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일본측의 詩墨惡請에는 洪世泰(字 道 長 )가 활약했음 을 짐작할 수 있다 . 1) 損軒詩稿 1682 년 7 월 9 일 貝原益軒 m(1630~1714) 은 藩主 命에 의하여 朔睦 好古 (號 恥軒)과 門人 鶴原時敏을 동반하고 藍島로 가서 조선통신사를 영접하 였다. 福岡藩에서는 그 전 해 8 월경부터 藍島에서의 집대를 준비해 왔다. 金指南의 「東樣 日 錄」 7 월 초 9 일條 18) 에 〈到泊藍島, 新腹大舍於浦邊爲使行所寫之館而所供器血皆土播塗金, 希 核之上 洞 以銀金間彩花, 又以金爲鶴龜之形置撰其背, 奇巧可玩, 供給之人 亦着長接, 轄射超去, 極其恭洛而唯恐其不預, 接待供張之盛, 比諸對馬一 岐兩島過之遠矣〉 남도에 도착하니, 포구가에 새로 큰 집을 지어 사신 일행이 머무 를 관사로 삼 았다. 음식을 대접하는 그릇둘은 모두 흙으로 구워서 금을 칠 했다. 안 주위에는 금빛, 은빛 꽃을 뿌리기도 했고, 또 금으로 학이나 거북의 모양 을 만들고 음식 을 그 등에 놓았는데 기이하고 교묘해서 볼 만하다. 음식을 나르는 사람은 역시 긴 바지를 입고 몸을 굽히고 충총 걸음으로 걸어다녀 몹시 공손하면서도 오히려 . 손님이 기뻐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집대하는 것과 선바한 물건이 융숭 하기가 대마도나 일기도 두 성에 비하면 훨씬 지나쳤다. 라고했다.
17) 貝原益軒, 名은 篤信, 字는 子 엷k • 通稱은 久兵衛, 처 음에 號 룰 柔軒이 라고 했으나 後에 益軒으로 고침. 또 別號를 損軒이 라고도 했다 . 筑前人으로 松永尺五와 木下順庵에게 배웠다. 程朱學派, 福岡藩儒臣, 1714 년에 殘. 享年 85 歲(『儒海』, 井 上忠著 『貝原益軒』(略年譜) 참조. 18) 井上忠 『貝原益軒』 94 쪽에 「譯官洪禹載0)東接錄 K 上打났」라고 한 것은 金指 南 「東接日錄」의 誤記임.
益軒은 먼저 〈일찍이 둘은 바에 의하면 귀국은 예의지방으로서 經書에 밝은 군자가 많음을 알고 있는바 만리를 격하여 평소에 앙모해 왔는데 이 번 光範에 접할 수 있어 뜻밖의 다행이며 실로 생애의 일대 쾌거입니다〉라 고 했다. 서기 李鵬演은 〈일찍이 대마도에 왔을때 고명을 들은 바 있는데 이제 藍島로 와서 정중한 예방을 받게 되니 고맙소. 우리는 비록 예의 지방 에 있을지라도 학문은 魯芬하고 才는 鷲劣하여 비록 訓酷을 청하더라도
거기에 부응할 수 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益軒은 다시 말하기를 〈腐儒는 筑前의 서생으로 유학을 敎授하고 있는데 어려서부터 독 서 를 좋아하여 涉臘한 바 700 韻 孔孟周程張朱의 책 을 가장 즐기 며 마음 을 橋術에 둔지 오래이다. 다음 몇 개조의 질문을 하니 교시를 바란다〉고 하였다 즉 李退溪·權近.李庫齋·鄭夢周 ·盧守愼 ·王仁 등의 事蹟 및 저술, 학교와 과거에 대하여 물었다. 처음에 益軒은 조선지리에 대해서도 질문하려고 했으나 國禁 사항임을 알고 중지했다고 한다 . 19)
19) 藤井基太郞, 「禮屋郡相島 I t:.:to납 石 黑田家0)朝鮮信使接待」 (『筑紫史談』 第 2~ 所收). 井上忠 『貝原益軒』 3, 「朝鮮信使(J)應待」 참조.
洪禹載의 『東樣錄』 7 월 14 일 條에 〈筑前書僧貝久兵爲口者, 大作詩篇星納 三位, 一行文人無不讚善矣〉라고 한 것으로 보아 益軒의 시문이 높이 평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韓客에 증여한 益軒의 한시 20) 몇 수를 소개하겠다 . 對朝鮮學士 (鄭生 素抽 文詞, 不常賊詩, 然情抽柄無以待貴客, 故政護星恒詞一絶而行 鄧表以代譯語) 舊慕殊方皆術 正 何圖今日見嘉賓 曾聞四海皆兄弟 傾蓋相逢如故人 又送韓客 萬里乘樣志氣剛 欲尋賜谷略扶桑 忽思異域經過苦 爲微張憲路轉長 (寄朝鮮學士成琴虛 • 李鵬漠兼洪槍浪之過藍島三首壬戌十月此三首詩不及 示而韓客去) 聞謝武城來藍島 無由相送採緊蹟 不塔情恨思君意 自此空望北海濱 海水杏뿐韓與倭 只將別恨寄炳波 自炫登裏神交外 再會難期欲奈何
20) 竹田文庫 所藏 「損軒詩稿」, 大阪府立中之島圖 書館藏 , 「損軒詩集西歸哈稿」 (油 印本大正 14 年 11 月中洗筑前內田良平識)에 의합.
曾歷夏秋渡大洋 今回 畫 阿謝扶桑 東辛西苦知多少 腦思不塔寒夜長 그리고 益軒은 일찍이 1655 년에 朝鮮醫官에게 일본산 竹節人夢에 대하여 질문한 바 의관은 이를 백제 인삼이라고 했다고 한다 .2 1)
21) 三木榮 著 『朝鮮醫學史及疾病史』 (朝鮮 信 使 日 本來聽時 K 於 (1 조 醫學 0 交涉) 참조.
貝原益軒은 豊臣秀吉의 조선출병시, 都體察使의 중임을 띠고 左相의 顯 職에 있던 柳成龍 (1542~1607) 이 후세 사람을 경계하는의미로詩經의 「予 其慈而瑟後患」에 서 제 명 을 딴 『悠瑟錄』의 가치 를 인식 하고 元祿 8 년 (16 95) 京都書陣서 翻刻할 메 그 권두에 서문을 썼음을 부기해 둔다 . 2) 牛窓詩 牛窓은 岡山藩의 항구의 하나로서 인접한 福山藩의 柄 ( 紹 )浦와 함께 姬 路藩의 室津과 맺는 요충지였다. 江戶時代, 조선통신사 일행은 江戶往還途 上, 반드시 牛窓에 기항했었다. 처음에는 本蓮寺의 客殿( 書院 )이 숙박향 웅의 장소였다. 일본국 지정 중요문화재인 本蓮寺의 緣起 및 寺歷에 의하 면 〈江戶時代에는 조선사절단의 접대를 맞고 日朝友好에 공헌한 사원이다〉 라고 명기되어 있다 . 지금도신사를 영접했던 객관들 앞에는 樹齡 300 년이 넘는 蘇鐵이 남아 있다. 신사 일행이 牛窓에 止宿한 것은 l . 636 년, 1643 년, 1655 년, 1682 년, 1711 년, 1719 년, 1748 년과 1764 년 합계 8 회 에 달한다. 『改訂邑久郡史』에 의하면 牛窓에 머무르며 숙박하는 동안, 藩儒 富 田元 眞과 小原善助는 上上官 安愼齋, 學士 成琴虛, 判 事 洪槍浪과 필담, 시문 증답을 했고 이것을 纂錄하여 『和韓唱副集』(小原善助) • 『牛窓詩』(富田元 眞)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洪譯士의 『東樣錄』에 七月二十一日, 自六口島朝向牛窓……借接館宇乃爲新創也, 不言宏麗, 近 平千間, 紋帳居族喪衣浴襲 有或可記, 浴室諸具側間所設難可狀言 육구도로부터 아침에 우창을 향해 출발했다. …… 다 함께 객관에 들어갔다. 객관은 재로 지은 것으로 크고 화려하다고 할 것은 없으나 천 칸쯤 되는 건물로 모기장과 병풍, 족자며 참옷과 목욕 때 입는 옷 둥 혹 기록할 만한 것도 있고 목욕실의 여러 기구와 측간의 시선은 그 형상을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또 支待倭等來接三堂, 愍勳勸供, 語若哲識, 星紙請寫諸寫官 • 成琉 • 李朋 齡·安愼徽·李華立·李三錫, 方張潤筆, 花錦策競投如積 집대하는 왜인들이 와서 세 당상에게 은근히 공물을 권하는데 말두가 옛부터 알고 있는 것 같았고 종이를 바치면서 글씨를 청하므로 여러 사자관 • 성완 • 이담 령 • 안신휘 • 이화립 • 이삼석 둥이 바야흐로 윤필을 발휘하니 꽃비단을 수놓은 부 채가 다무어 싸이다 . 이라고 했다 . 위에 기술한 바와 같이 신사의 영빈관으로 茶屋이 새로지어졌는데, 『池 田家文庫』의 「檜地圖」에 의 하면 270 여 怪이 나 되 는 웅장하고도 화려 한 건 물이었다고 한다. 그리 고 金指南의 『東樣 日 錄』에 도 7 월 22 일 早朝備前主太守의 아우 松平 丹波守로부터 휘호를 요청받아 졸필이나마 서중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本蓮寺에 남아 있는 신사의 필적 22) 으로는 1643 년 從事官 申i亂 同學士 朴 安期 1655 년 正使 趙 I行 • 副使 兪場, 1711 년 副使 任守幹 • 從事官 李邦彦· 製述官 李讚 • 書記 南聖重 합계 9 점 이 남아 있을 뿐 1682 년의 것은 남아 있지 않다.
22) 抽稿 「朝鮮通信使0)遺墨」(『江戶時代0)朝鮮通信使』 214 쪽 每日新聞社 昭和 5~) 참조.
吉備文庫 藏 「牛窓詩」를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天和二年 (1682) 壬戌孟秋甘一日 會朝鮮國聽使太學士成伯圭於牛窓公館 筆語週唱和參半及五更, 備前書生富田氏元眞證白, 其詩曰譜星太學士琴虛先 生硏右 諒浪漫漫海路長 使星東共我邦光 幸登貴館接高客 只恨炫行草草伯 壬戌孟秋虛軒拜稿
學士答, 其詩曰奉次處軒示韻 璋海机程萬里長 碧天星月應波光 燈前幸遇能文士 傾蓋那知客意伯 壬戌下幹琴虛走稿走次處軒韻 一笑相逢意氣長 滿賤珠玉燦生光 異邦 罪 水眞奇會 沼恨明朝競路伯 壬戌秋孟 槍浪子 그리고 成苑에게 〈退溪自省錄 • 宋呂端小 事 湖塗大 事 不湖 • 金犯孫有言儒 不知兵非眞儒也〉 등 의견을 묻고 「處軒」 2 자 휘호를 청했다. 前記한 小原善助 『和韓唱訓集』 별책은 未見이나, 家藏 하는 『和韓唱細』 本에 備前正 義 小原善助에 관해서 수록된 것이 있다. 天和壬戌七月甘-日夜筆談於牛窓館, 向依通詞氏布情所 許 相見幸幸, 初 只聞學士來未詳其姓名, 願 書 以示之, 不肖在武士之列, 然以侍 講 兼國學直 講 小原氏名正義, 字伯實,稱善助, 號大丈軒. 그리고 小原正義는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問貴邦退溪先生今有子孫平, 亦能好學平, 亦有傳其學者平, 不肖曾見自 省錄略知其學之正, 其德之高, 今及于炫. 이에 대해서 製述官 成琴虛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其退溪子孫尙余極盛, 傳道之人綿連後先無棟於自省錄基多矣 洪世泰는 다음과 갇은 詩로 옹수하였다. 走筆奉星大丈軒詩案 目擊心能契, 知君不俗姿 愍勳留一句 異日個相思. 今入貴國獲逢高士, 望其儀容知其非廢浚人也, 炫將抽句敗陳鄭懷斤散旦 知幸基 壬戌秋孟, 槍浪子稿. 牛窓에는 오늘날 향토예능으로서 당자층(唐子踊)이 전해 오고 있다. 여
기에 관해서는 申維翰의 『海游錄』에 악사들에게 鼓笛을 연주케 하고 두 小童울 對舞시켰다고 한 것과 결부시켜 牛窓에 기항한 통신사 小童의 對 舞에서 배운 것이라고 보고 있다 .23)
23) 西川宏 「牛窓港 K 傳七石朝鮮0)踊 b __唐子踊 b &通信使O)C. . &」(《歷史地理 鮮敎育通)信〉 使15』5 號每 • 日 『新日聞本社)文.化 &朝鮮』 所收) • 李進熙 「唐子踊 b &朝鮮 O 」(『江戶時代 O 朝
그런데 『海游錄』에 나오는 童子 對舞몰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 6 월 23 일 對馬島 豊崎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 〈돌 위에다 자리를 깔고 앉아서 악 공을 시켜 나무 그늘 사이에서 풍류를 하게 하고 冠者, 童子 4~5 명에게 비단옷을 입고 빙빙 돌며 춤을 추게 하였다〉. @ 7 월 17 일 대마도 府中에 서 〈악공을 시켜 북 • 저 • 필률을 연주하게 하니 노래를 불러 서로 맞추었 고 동자는 채색 적삼을 입고 마주서서 춤추는데 춤추는 것이 궁녀의 자태 와 같았다〉. 申維翰 때 1719 년의 信使는 왕로에는 9 월 1 일에, 귀로에는 11 월 17 일에 각각 牛窓에 들렀으나 牛窓에서 동자가 대무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리 고 1748 년의 통신사도 왕로에는 4 월 17 일에, 귀로에는 7 월 9 일에 牛窓에 기항했으나 역시 동자대무에 관한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동자대무의 근거를 申維翰의 『海游錄』에 두기는어려울 것 같다. 西川宏氏는 〈히_야―〉라는 장단이 조선어라는 것, 당자(唐子)들의 옷 이 이조의 옷과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海游錄』의 기록과 결부시켜 통신사의 소동 대무에서 · 배운 것이라고 결론지었다(《역사지리교육》 155 호). 또 李進熙 씨는 牛窓町 당자충 기록보존위원회에서 편찬한 「唐子踊 b 」 를 인용하고 동자의 모자와 의상을 신윤복이 그린 「劍舞圖」와 비교하여 당 자충의 의상과 비슷한 쾌자와 전립 차림이라고 하였다 .24)
24) 앞의 책 李進熙.
저자는 이 동자 대무의 옷차림이 통신사 소동의 옷차림과 다르다는 점, 즉 申維翰이 말한 〈童子華杉對舞, 舞似官桂態〉와판이한 것은 물론이고 歌 詞에 〈사―챠―아―아一완에〉라고 한 것으로 琉球使節의 樂童子를 연상하 게 되었다. 즉 琉球王國은 중국과 일본 본토에 대하여 양속 관계가 성립되 어 薩摩藩의 屬島이기는 하나 당시의 정책으로서는 琉球人을 異國人視하여 琉球使節 2” 을 江戶에 등성시켰던 것이다. 1610 년 琉球國 中山王이 來朝한
25) 塚田淸策 『文字力나J E f.::沖繩文化0)史的硏究』 • 宮減;榮昌 『琉球使者0) 江戶上
b 』(第一간房 昭和 57 年) . 橫山學 『 琉球國使節渡來 0 硏 究.!](吉 川 弘文館 昭 和 62 年) 참조.
이래 1850 년에 이르기까지 德 川 幕 府의 장군이 바뀔 메마다 〈慶賀 使 〉 가 9 회, 中山王이 襲封할 때마다 〈 謝恩使 〉 가 10 회 , 강호성에 파견되었다 . 이들 琉球使節의 영점에 관해서는 〈 도중의 향옹은 조선인 來朝 때와 같이 하라 〉 26) 는 지시가 내려져 있었다. 琉球國은 중국 청조에 대해서는 이른바 上 書 의 형식으로 臣이라고 칭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琉球 王 으로부터 막부 집정(老中)에게 書 契불 보낼 뿐 장군과 직접 봉하는 것은 아니었다 . 그런 데 德川幕府에 파견하는 琉球使節은 지위가 높은 王子接司 를 보냈고 중국 에는 그 다음 가는 親方을 보냈던 것이다 . 이점은 조선에서 중국에 보내는 燕行使에는 판서 내지 참판을 임명한데 비해 일본에 보내는 통신사는 한 계급 낮은 參議를 임명한 것과는 상반되는 현상이다 . 또 통신사에는 馬上 才(曲馬)를 대동시켜 곡예를 장군에게 관람시켰는데, 琉球使節은 樂童子를 동반시켜 장군 앞에서 중국과 琉球의 음악을 연주시켰다는 점이 다르다 . 『通航一覽』 卷 16 • 琉球國部 16 • 明和元年(1 764) 11 월 25 일 音樂上覽 • 金 城奉奏樂曲之名帖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 第一奏樂萬年春 第二奏樂 賀聖明 第三奏樂 樂淸朝 第四唱曲 天讓 麟 紗窓外 닳접 第五唱曲 太平歌 8 섭 依台命奏樂曲之名帖 第一奏樂 鳳凰哈 第二奏樂 慶皇都 第三唱曲 王碩歌 덟섭 第四唱曲 論 治 닳갑
26) 『 通 航一梵.!] 卷 3, 琉球國部 3, 8 月 6 日條 「 路次道 中之御 駒走朝鮮人 來 朝 &同 냐 )5 六 람 旨, 宿宿造兼兼被仰付之由 K 而殊外結構 t 乙御座 候 」 .
第五唱曲 琉 歌 「沙窓外」 曲詞는 다음과 같다. 사 창 하이 옛 잉 스에 잉 쟈오 량 숭 나 더 수이 죠 짓 쉔 독 쥐 샹 스 沙窓 外 月 影斜 映 照梁上那得睦 著寂然 獨 坐 想思 샹 스 다오 고 라이 스 짓 작 홍 힝 想思道我來時日暑風薰 이와 같이 한자 위에 중국음 토를 달았다(원문일본片假名注音). 이와 관 련아 있는 기록으로 太田南敵의 『一話一言』 卷九 • 琉歌井唐躍曲에도 明和 元年의 일이 라 하고 天初魄 • 紗窓외 • 太平歌 • 五碩歌 • 論治 • 和蕃 동 6 곡 가사예 중국음 토를 달고 역주를 가했다. 또 Ii'支那俗語文學史』 2” 에 〈중국 (支那)음악은 근세에 있어서 장군이 바뀔 때마다 파송된 琉球使節의 琉球 , 樂을 통하여 德川幕臣들께 감상되었을 것이며 長崎에서는 뭉론 각종 俗降 와 충의 曲詞도 수입되었었다. 元祿 10 년 (1697) 『松 0 葉』에 唐人歌가 들어 있고 寶永 7 年(1 710) 『增補松葉』에 「唐人충」이 둘어 있다〉고 하였다.
27) 石崎又造 著 『近世日本 k 於납 5 支那俗語文學史』 382 쪽.
그리 고 凌井忠夫 著 『唐人唄 &看 看踊胎 T]28k 正德 • 享保의 唐士 연구에 이 어 다시 寶曆 • 明和경부터 文化 • 文政 양 시대에 걸쳐 唐土 연구의 열은 점점 높아가 중국 俗文學은 세상에 유행하여 허다한 문헌이 나오게 되었는 데 민간에서는 각종 唐物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 풍류한 사람들에게는 唐人唄가 유행 하게 되 었다〉고 말하고 〈唐人춤〉의 가사는 「一更埋天」에서 전래된 것이라고 하며 다음 가사를 들고 있다. 44 수 `./94 子`/ 4 4 수`/ 9 4 子 •. / -lj-7 `y7 ·/Z 子+,,-lj- ` y 7·/ 一 更 埋 天 一 更 埋天 沙 窓 月 照 沙 窓 寸了=f- 3/ 요 /I 、 4도、y 전술한 바와 같이 琉球使節이 奏曲한 「沙窓外」의 〈沙 窓 外 月 〉은 唐子踊의 가사에 나오는 〈寸一千十一 7 一 7_7 7 、./.:r.〉와 또 「一更埋天」
28) 淡井忠夫, 『唐人唄&看看踊』, 附田邊尙雄述九連環0)曲&看看踊여 E 亞硏究譜唐 第 54 輯) 13 쪽. 中山久四郞 「唐人踊0)歌0)唐音 l r.?l,、 T 」(『支那史籍上0) 日本史』 雄山 閣 昭和 5 年) 참조.
서 7` y 7·// 의 〈沙 窓 月 〉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리 고 또 岡島冠山 著 『唐話墓要』 卷 5 小曲에 다음과 같이 注音한 「一 更埋天」이 들어 있다. 4 分 `/')4 子`/ 4 뉴 •. / ')4 子 `./ 조子十力久了于누`/ 一更埋天 一更埋天 月照紗窓 、 ) >?E? 4 섯 `/ 난 4 / \'7J v '7 /\ 、/ 卜 `/ 子 夕 텃 `/ > `/ 노 누 `/ 于 크 `J/ 人也未眠 被澳兒 寒凍得禪身上種 그我 • .的,肝子力肝 、/ 力`/ 그我 ·的9 子心久肝 4 `./ 力>' *何?處于食그花 4 夕 `1/ I\ 그런데 太木扇德 編 『增補松(J)落葉』(寶 永 元年 • 新群 書 類從歌曲六所收)卷 4 에 〈唐人踊〉이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L 덩t i ' 드--c L 、풍 t :t 寸 L 、七손凡及/...,t::,손寸 L 、七손··…· 여기에 관하여 中山久四郞 씨는 그의 「唐人踊 0 歌 0 唐音 t乙?총--c 」( 『支 那 史籍上 0 日 本史』 其實例五則) 에 서 4 夕 `. /,)4 子`./ 4 夕 `/94 子`/ 久 7 子누 4 工. 于누夕久了千누`// 一更埋天 一更埋天 紗窓月 照沙窓 L 덩tt乙-c L 、총'乙t 寸\,t?쓴多凡 ~~-ti,、七쓴 이 상하 두 가지 음을 대비해 보건데 일찍이 유행하던 「一更埋天」의 唐音이 변화하여 당시의 일본 唐人踊의 노래 문구로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一更埋天」이라는 속요가 일본내에 유행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中山賜使略』에 수록된 악기 중 橫笛圖가들어 있는데 이 피리에 는 구멍이 여섯 개 보인다. 우연히도 唐子충에 쓰여진 피리가 여섯 구멍 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혹시 일치할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琉球使節에 수행한 樂童子들은 路次樂人이라고 했으니 使行途中 奏曲한 일도 있었을 것이고 또 「唐人唄」가 유행했다는 점에서 그 曲詞의 音과 의미에서 미루어 볼 때 牛窓의 「唐子踊 1J」를 조선통신사의 小童對舞 에만 결부시키는 것은 재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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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통신사 배행 소 동은 곱게 단장은 했으나 결코 어린 아이가 아니 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琉球使節도 牛窓에 기항한 일이 있 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柳 澤 新治 씨의 말 29) 과 같이 통신사의 대무를 보 고 감탄한 그곳 사람들이 長崎 系의 唐人충을 합치고 또 뱃노래의 唐人唄 를 가미시키고 거기에 神樂에서 사용하는 피리와북을 덧붙인 것이라고한 말은 과연 탁견이 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러 나 한 가지 더 琉球使節의 樂童子롤 간과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된다 .
29) 柳澤新治, 「唐人踊 b 0)誌훈解 <」 (〈(歷史 &人 物》 1978 年 12 月 號) 참조.
3) 木下順庵의 『對韓稿』 木下順庵J O)(1621~1698) 이 처음으로 조선통신사 일행과 만난 것은 1682 년 8 월의 일이다. 당시의 筆談唱 和 詩稿는 『和韓唱細集』에 수록되어 있는 데 일괄하여 「對韓稿」라고 하여 『錦里文集』 31)( 卷 12·13) 에 들어 있다. 즉 筆談二 則 • 詩 34 首 • 文 3 首이다.
30) 木下一雄, 『木下順庵評傳』 (國 書 刊行會, 昭和 57 年) 참조. 31) 『錦里文集』 木下順庵著 木下一雄校譯(國 書 刊行會, 昭和 57 年) 卷 12, 對韓稿 筆談 二則 • 詩 25 首 • 卷 13, 對韓稿 • 詩八首, 文三首, 原文 520~534 쪽.
順庵의 생애에 관해서는 『先哲 殿談 』 32) 에 詳記되어 있다. 이름은 眞幹 • 字는 直夫, 小字는 平之允 • 號는 錦里 또는 順庵이라고 하였다. 平安(京 都) 사람이다 .
32) 『先哲穀談』 卷 3 • 順庵條, 14~16 쪽 참조.
松永尺五 33) 의 門下에 들어 가 수업 하면서 京都에 서 學舍維塾윤 열 고 20 년 동안 諸生을 敎授하였다. 그의 이름이 사방에 알려지게 되자 加賀藩主 前 田綱紀의 초빙을 받고 19 년간 성기다가 장군 網吉의 襲職으로 文敎振興에 따라 1682 년 7 월 12 일 드디 어 막부의 儒官이 되 었다 . 順庵은 장군의 신임이 두터웠고 또한 천하의 사표로 존승을 받았다. 그 의 문중에는木門五선생, 죽新井白石·室鳩菓·雨森芳洲·祗園南海.擔 . 原篇洲 P 와 여기에 南部南山 • 松浦 霞 沼 • 三宅觀獨 • 服部寬齋 • 向井槍洲를 합 하여 木門 十哲이라고 일컬어 온다 . 順庵이 막부의 儒官이 된 지 얼마되지 않아서 조선통신사가 8 월 20 일에 江戶에 도착하였다 . 順庵은 信使의 객관인 本 誓 寺로 찾아가 8 월 26 일과 9
33) 松永尺五 碩儒이 다 . 이 름은 追年 • 字는 昌三 • 通稱온 昌三郞 • 號는 尺五 • 講習堂 主人이라고 하며 京都 사람이다 . 藤原埋腐에게 배웠다 . 나이 18- IJ] 때 豊臣秀 頓에게 大學을 講하다. 加賀藩情臣, 1658 年 殘, 享年 66( 『 儒海 』 • 『近世儒林編年志』 7 쪽 참조.
월 4 일 2 회에 걸쳐 통신사와 필담창화하였다. 順庵은 먼저 다음과 같은 인사를 올렸다. 天南地北, 水陸萬里, 經夏度秋, 冒暑衝澤, 賢勞辛勤, 更僕何馨, 幸是 今年, 風雨時若, 海波不揚 舟 損 之利涉, 車馬之載帥, 乘危過險, 事不失 素, 썰弟君子, 神之所扶, 登只使華之榮, 實惟 兩國之慶, 至祝 여기예 대하여 製述官 成苑은 다음과 같이 應待하였다. 郞對雅範 知其大人君子也, 第邦音不通, 只自目擊而己, 今承先耿之鄭 重 旦慰不侯之跋涉, 書意樓樓 有同十年前故舊, 感戰無已, 此固由於兩 國敦修之力, 獲親長德之陶儀, 堯可幸也. 일본 문사와의 교환에 관해서는 洪禹載의 『東椎錄』 9 월 11 일 條에 〈留住 江戶時, 所謂學士聲相與我學士成李兩儒洪碑將唱和詩句, 詩在諸賢之所集, 余不記焉, 只抄文人之名, 貞簡號順庵 丹後州人, 曾經弘文學士者, 林春常 號整宇, 祖子孫爲學士者, 陸奧州人 藤倫字子明號士峯, 作富士山七絶六首, 生前刊行傳布 , 相模州人野節號鶴山, 稽存文名者武藏州人, 柳順剛號雲 빨 , 山城州人 則倭京也〉라고 했다. 일본 문인으로서는 順庵 외에 林整宇 • 藤士峯 • 野鶴山 • 柳順剛 등을 들 고있다 . 다음에 順庵과 洪浦浪과의 唱和詩를 소개하겠다. 始接紫眉槪蒙靑阿, 狀躍之深諦作理詞以星 消浪洪詞宗 殊方何意作同盟 一見禪消鄭杏情 未信至淸無友語 惡君此日瀋廢撰 順庵木貞幹稿 敬次順庵公屠示韻 願壇牛耳檀宗盟 潮酒千秋白雪情 祭若鳳凰熹彩翻 逸如謀酸脫長樣 消浪譜稿
送洪演浪還朝鮮 長路關心酒滿賜 雲山煙水九秋霜 君家自有容齋筆 萬首唐詩照錦蔡
順庵木貞幹稿
앞에 기 술한 順庵의 「送洪槍浪還朝鮮」 자필 시 고는 昭和 2 년 (1927) 10 월 市村器堂 박사가 京城大學에 강의차 내한했을 메 서울에서 입수하여 彼露
했다는 것이다 .34) 그리고 「對韓稿」에 수록되어 있는 順庵의 〈馬嶋太守席上賜朝鮮三使星尹 正使〉라고 題한 七律 一首.
信幣禮成轄跋還 霜楓如錦哀軟額 太師敎化遼東舊 吏部文章海外傳 大雅時聞吉甫碩 醉。 稱久仰彦明賢 姜君一爲蒼生起 更鷺扶桑萬里船
' 군4 ,'i I. 賢『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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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 .i .,34) 植野武雄 「木下順庵父子&朝鮮使節」(『朝鮮』 所收). 제 3 장 壬戌年(1 682) 使行 137
이것은 順庵의 자필 초고로서 『 書 道全榮』 卷第 21 105 쪽에 실려 있다. 거기에 의하면 이 시는 즉 9 월 1 일 正使 尹址完에게 상정한 시의 초안이라 고 했다 『錦里文集』의 「對韓稿」 원문과 비교해 보면 〈映〉은 〈照〉로, 〈更〉 은 〈復〉으로 고쳐졌다. 尹址完 正使는 이 시에 대하여 다음과 갇이 증답하였다 . 再詐杜對馬守家案, 初遇順庵木學士, 實有傾蓋若舊之歡, 初贈余以一律, 午看便覺牙類生奭氣, 不勝敬而只緣夜深歸意忽卒, 未克奉和, 今始追步以星 序 白戰願場幾凱還 早從牛背讀蒲糖 蓬端掃墨 千人弄 甄裏新篇萬口傳 少日聲名推內翰 暮年詞賊壓群賢 殷勤別有臨岐贈 IJ 得瓊培載客船 京都客館 本閔寺에는 順庵의 아들 菊潭(名 寅亮)이 찾아와 洪世泰와 唱 和하였다. 奉星槍浪洪公詞壇 豫章詞客豫章材 騰茂雜林獨占駐 撲微偶依淸藤下 耕 11 戱偏覺荷裁培 菊潭木寅亮 走次菊潭瓊韻 年少猶能抱大材 定知他日士林船 君家父子是蘭秀 造化由來別樣培 洪演浪 菊潭이 후에 幕府儒官으로 信使와 접응하고 필담창화한 것을 撰進한『班 荊集』이 傳存한다. 澈J II 昌樂 3” 은 9 월 29 일 本圈寺에서 予門之高弟木下順庵生, 在東武與公 35) 溝JII怒水 • 名온 昌樂 • 字는 隨有 • 怒水라고 號하다. 松永尺五에게 배움 . 程 朱學派 廷 寶 (1673~80) 前後에 활약함. (『儒海』) . 『桑韓筆語唱和集.!I에 筆談贈答詩 가 재목되어 있음(韓國國立中央圖 書館藏 本).
及, 成均館學士, 有文談爲筆語, 有詩篇細答·通兩國之情, 狀躍有餘, 月先 自東武, 寄 書 告予有之, 諸其贈答之佳仕手敷口復圭欲及一唱三暎是余願也〉라 고 하며, 〈其姜洗之苗商, 今猶存平, 仰願聞之, 曲告之〉 • 〈貴邦聖人封國而 文獻足而多珍 書 古籍而有勝於中夏大明者矣,故深問之也〉라고 질문하였다. 洪槍浪도.다음과 같이 順庵과의 필담을 이야기하고 있다. 〈如所로示, 公 之同門學士與木下順庵鴻儒於東武通筆語, 博籠廣識之良材, 華夷亦希有之眞 儒也, 但亦有詩章細和蒙靑牌受顧回狀然幸tt • 尤欲爲歸國逸朝之助矣〉.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順庵의 名聲 36) 은 이때 방일한 신사에 의하여 알 려지게 되었는데 더욱 그의 聲뿜가 높아진 것은 1711 년 때이다. 그것은 신 사와의 필담창화는 모두 順庵의 門人들이었기 때문이다.
36) 松田甲, 「朝鮮t C 名춘博산 3 木下順庵」(『日鮮史話』 第 5 編) 참조슬
4) 別宗 • 大方和尙과의 唱訓 京都 相國寺 慈照院에는 1682 년 別宗과 南禪寺의 大方和尙이 조선통신사 의 객관인 本國寺를 찾아가 製述官 成腕 • 碑將 洪世泰 및 서기 李稱齡과 필담창화한 自筆詩稿 13 편이 현존한다. 그리고 또 1711 년 正使 趙泰億 일 행이 別宗長老에게 증답한 自筆詩堂 「韓客詞章」이 소장되어 있다. 실온 이 「韓客詞 章 」은 水田紀久에 의해 확인되었지만 저자가 이 詞章울 拜觀하고 자 慈照院을 찾아갔을 때 예측하지도 못했던 전기 1682 년 때의 시고를 발 견하였다(《京都新聞》 1982.10.1, 《神戶新聞》 1982. 10. 5). 1682 년에 信使와 일본측 東福寺 祖辰長老 • 林整宇 • 木下順庵 • 大方長老 와의 필담중답시가 『和韓唱訓集』 3” 에 들어 있다. 그 서두는 다음과 같다.
37) 『和韓唱洲集』 目 首題答(天和 2 年) 2 卷 首 1 卷釋祖辰朝鮮成苑等. 刊本一冊(架 藏).
天和二年壬戌朝鮮國三使來朝, 正使尹址完, 副使李彦網, 從事朴慶俊 八月三日到京師本國精舍, 五日余與別宗爲問異域風俗佛法興廢, 依頓西山 梅翁行而賜焉……鳴呼三士之富文才也操鎭無舍一瞬一息而成·自上午至下 午琴虛得七章, 鵬漠四章, 消浪者三章, 余與別宗各得六章通計二十六首, 不移時而成矣·以余苦哈對佑快筆, 緊急可知因記其顯末·因疑結案云余. 天和壬戌仲秋初八玄機書. 이 중의 13 首가 原詩接대로 相國寺慈照院에 현존한다. 唱和詩釜에는 英
中和尙이 〈風雲際會 靈足山人 書 〉라고 軟署·한 紙幅을 卷首에 부치고, 각각 行書와 草 書 體로 증답시를 揮酒하고 있다. 다음 시고를 소개하기로 한다 . 星余公詞案 我國君新立 異邦特賀來 千程煙水遠 一幅錦風開 京寺哲留篤 驛亭幾掃埃 風雲時際會 仰看翰林材 別宗草 次謝別宗詞案 幸際敦修日 仙査海外來 白頭綜浪遠 靑昞鳳聲開 瓊居罪淸話 瑠篇絶點埃 蓋原多隔人 先數二公才 壬戌仲秋 朝鮮製述官 成琴虛走稿 奉次別宗瓊韻 遠逐星樣使 行容日域來 相逢高士在一笑好懷開 華館風生討閑庭雨洗埃 當篠競揮筆何讓古人才 壬戌仲秋演浪草 上記한 창화시를 음미해 보면 우선 別宗和尙이 〈風雲時際會, 仰看翰林 才〉라고 읊은 데 대해서 製述官 成腕은 〈蓋原多隔人, 先數二公才〉라고 일 본을 칭찬하였고 洪世泰는 〈當雜競揮筆, 何讓古人才〉라고 하며 작시에 자 신을 보이는 등 대조적이다. 5) 德 )II 光岡의 別章 信使가 . 江戶에 등성하여 聽禮儀式, 죽 조선국왕의 국서와별폭을 상정하 고 또 三使의 私禮單울 진정하고 나면 장군으로부터 三使에게 향연이 베풀 어진다, 이때 德川三宗室 38) 이 자리하게 되어 있다. 1682 년에는 水戶宰相 光 38) 德川三宗室이란 紀伊)사, 尾張州, 水戶州 三 太 守몰 말한다.
k人 a 未
OO 도 暗席하였다. 七五三膳 3” 이라는 가장 隆崇한 대접이었는데 이 자리에는 給 事 役으로 高家吉良上野介 40) 가 나와 금박을 한 토기 술찬에 술을 따랐다 . 正使 尹址完은 光 OO 에게 磨子 1 連, 人夢 l 斤, 虎皮 2 張, 白照布 5 定, 英 菩香 20 本, 黃毛筆 20 本, 眞墨 20~ 을 선물했다 . 그런데 아 선물목록에는 正使尹g.JI:完의 字叔麟이란 도장만이 찍혀 있었으므로 光 OO 은 이를 非禮라 고 생각하고 家臣을 시켜 製述官 成琉에게 다음과 같은 話問狀을 보냈다 〈問 : 詐日送贈我相公之土宜, 惟錄品數, 不具姓名, 성f尾押一印, 稱三使所 贈 見印文二字, 疑是尹公之字平, 古人於交際, 自稱名不稱字, 以爲通式, 右三件物有所疑,蓋貴國之法平,願聞之〉 日本側記錄인「水戶公與韓使訓和」 39) 朝鮮人來聽七五三獻立難形寫本一冊(架藏). 要應에서 七獻 五獻三獻 御動走를 말함(『婚遊笑 覽 』 飮食 • 七五三). 膳部七五三, 本膳(제 1 상)七菜, 二膳(제 2 상) 五 菜 三膳(제 3 상) 三菜(『寬永+三年朝鮮人來朝記』 注(1 9)) 참조 . 40) 吉良上野介(1 641~1702) 江戶幕府의 高家, 勅使接待準備를 口 實 로 吉良이 溪 野長短를 모욕하자 江戶城內에서 浚野가 吉良에게 切傷을 입히는 사건이 벌어져 達 野는 賜死 浚野遺臣 47 人이 吉良을 급습하여 刺殺함 . 忠臣 藏 時代劇으로 훤전되 어 온 다 .
에는 「右疑問至日, 三使屈伏而無答語」라고 附記했다. 질문이란 즉, 光 OO 相公에게 보내온 선물에는 품수를 썼을뿐성명은 안쓰고도장두글자가찍 혀 있는데 옛사람의 교제란 이름을 쓰며 字는 쓰지 않은 것이 통례였으나 이런 것은 귀국의 법인지 묻고 싶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上通事 를 光 OO 에게 보내어 설명하고자 했으나 對馬太守의 만류로 대마도 家臣을 통하여 서한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信使의 답례로 光 OO 은 三使에게 각각 銀 300 냥을 보내왔는데 三使는 이를 받을 수 없다고 하 여 다음과 갇은 서한을 보내어 사퇴하였다 . 白金三百兩, 名誰錬睦, 實係貨寶, 古之人未有以金爲幣者, 蓋由受之者 不免貨取之嫌而與之者亦非使人安心之道故也, 炫遣舌官, 譜將送惠白金, 全封還星, 惟闇下諒此區區之意收納. 그러나 光 OO 은 다시 三使에게 다음과 같은 답서를 보냈다. 三使臺闇下 淸廉高節過于胡質諭于陸緩不膜微物, 登容高明傷廉之疑平 哉 況我贈非南越之裝, 使臺亦非游說之徒平, 古人有以黃金爲中幣者有其 辭則皆受之, 不以爲傷義然則於無與無取之道彼此何傷平 . 望請三使臺闇下 克察此區區赤心. 이와 같이 신사가 방일할 때마다 장군 외에도 德川宗室三家로부터 백금 銀을 錢別로 보내오므로 이를 사퇴할 수 없어 받기는 받았으나 결국은 장 군의 回禮銀과 함께 대마도주에게 위로금 및 교역물품대로 충당했던 것 이다. 끝으로 光園과 三使와의 贈答詩를 통하여 양국인사의 우의를 엿보기로 하겠다 .41) 奉送朝鮮國東山尹公使日本國歸 萬里勞來萌 三韓尋舊盟 衣冠皆該腸 草木立知名 連爾己臨別 羅然不盡情 鄕人若相問 文物屬昇平 41 ) 『水戶侯與韓使訓和』 筆寫 本二冊(架藏) 참조.
奉送朝鮮國鷺湖李公歸本國 星轄持使節敦好結交隣避返言雜異 愍勳情尙親 寄詩推李杜 分快隔胡秦 今日君歸去 長爲遠別人 奉送朝鮮國竹菴朴公歸本國 鷄林交際久街命使扶桑 盛禮復難得 良緣不可常 綠陰辭舊里 黃菊感他鄕 殘夢屋梁月 相思幾斷腸 常山源光菌頓首 敬次送別韻奉星水戶侯常山源公詞案下 薄儀來賀慶 大信登申盟 未入扶桑異 先聞水戶名 周旋仰懿範 委曲荷深情 臨別初相勉但宜要太平 朝鮮國通信正使東山尹址完拜稿 敬次日本國水戶侯源公贈別詩韻 海外逢知己 天珪郞比隣 一言勝手地 傾蓋許心親 使節初辭磨 歸程遠向秦 新詩有餘意 百里問行人 朝鮮國通信副使鷺湖李彦綱拜稿 敬次送別韻奉로日本國水戶源公詞案下 使節隱樣影 來觀日出桑河間承好禮 交際荷非常 別意投新句歸程指故鄕 音容從此隔 安得不回腸 朝鮮國通信從事官竹菴朴慶後拜稿 正使의 次韻에 〈未入扶桑界 先聞水戶公〉이라고 한 것은 1655 년 정사 趙 衍 일행이 방일하였을 때에도 장군이 베푼 향연에 光岡公이 배석했던 것으 로 보아 허언은 아닐 것이다. 6) 新井家所藏 『與洪消浪筆語』
新井白石 (1657~1725) 에 관한 연구 논저로서는 栗田元次 著 『新井白石(J) 文治政治』, 宮崎道生 著 『新井白石 0 硏究』 등 20 여 종에 달한 다. 그리고 白石 관계 문헌자료 도서목록으로서 1926 년 동경시립 日比谷도 서관에서 간행한 『新井白石關係文獻總覽』에 「與洪消浪筆語」(新井太吉 藏) 가 수록되어 있다. 그 후 전기한 栗田 • 宮崎 두 사람의 책에서도 이 서목 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로서는 이 문헌을 소장하고 있는 新井家의 소재를 알 길이 없어 여기저기 탐문해 오던 중 入江隆則氏의 『新井白石岡\,、(J)肖像』라는 책 속에서 白石의 후손인 新井修氏를 名古屋本宅으로 찾아가 많은 귀중한 자 료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한 것을 읽고 즉시 入江에게 편지를 띄워 그의 소 개로 현지를 답사하고 오랫동안 그리던 流浪自筆의 유목을 拜觀할 수 있 었다. 여기서는 우선 「與洪槍浪筆語」와 「陶情詩集」에 書贈한 成玩의 ' 서문과 . 洪世泰의 발문을 중심 으로 소개 하기 로 한다. 新井白石自 著 『折t-:〈 柴 0 記』 42) 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명기되 어 있다 .
42) 新井家藏 「折f::. <柴 0)記」 自筆 寫 本 上 • 中 • 下 3 卷, 〈君美正德 6 年 丙申 5 月 下游絶 筆 〉이라고 명기했음. 昭和 8 年 10 月 31 日. 文部省 重要美術品認 定 . 羽仁五郞 校訂 『折t <柴 0)記』(岩波文庫 昭和 14-1 1=-) .
이 무렵부터 대마도의 유생 阿比留(西山順泰)라는 사람과 알게 되었 다. 내가 26 세 때 봄부터 다시 사관하는 몸이 되었는데 이 해 가을 朝 鮮聽使가 오게 되었다. 阿比留에게 부탁하여 평소에 지온 시 100 수를 기록하여 三學士의 평을 받고자 했더니 본인을 만나 본 후에야 서문을 써주겠다고 하기에 9 월 1 일 객관으로 찾아가서 製述官 成琉 • 書 記官 李 稱齡 • 碑將 洪世泰와 만나 시를 지은 일이 있는데 그날 밤에 成琉이 내 시집에 서문을 지어서 보내왔다. 이해 木下順庵 선생도 막부에 출사하게 되어 阿比留도 그의 門人이 되었다. 그후 내가 山形이라는 곳에갔다가 기행문을 지은 것이 있는데 阿比留가 그 책을 順庵 선생께 보이며 조선 사절로부터 서문을 써받은 일을 말씀드렸더니 그 白石이라는 사람을 만 나 보아야겠다고 하신다기에 阿比留의 소개로 /1 頂庵 선생을 뵙게 되었다 .
또 『先哲股談』 卷五 • 源君美條 43) 에 白石與對馬西山健甫名順泰 爲舊 友, 年二十六, 錄所作 詩一百 首, 因健甫 求韓客爲之評則容請而泰見遂作序襄揚之, 後入木下順庵門, 健甫又爲之介 라고 기록되어 있다 죽 新井白石이 처음으로 韓使와 만난 것은 1682 년의 일인데 對馬島의 西山健甫를 통하여 객관인 本 誓 寺로 製述官 成苑, 書 記 李稱齡, 碑將 洪 世泰룰 찾아가 自著 「陶情詩集」에 서문과 발문을 간청하 며 필담창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3) 『先哲穀談』 卷 5 • 源君美 • 字在中 • 新井氏 • 小字勘解由 • 初名與 • 號白石又號 錦昇山人 • 江戶人 • 仕大府 • 叔從五位下任筑後守.
西山健甫에 대 해 서 는 新井白石의 『停 雲集 』 44) 에 留健甫 • 西山順泰 • 字健甫 • 對 1 i 1 人 • 本姓阿比留氏, 後改西山, 年二十 餘, 州群爲 書 記, 因燁業於木先生之門, 自恨學晩, 勸苦讀 書畫 夜不息, 才 思敏 照, 作爲文章諏數百千言, 及其疾病, 乃命其僕, 取平生之稿而禁之曰 若我文 章 何用遺後爲, 元祿戊辰秋九月殘于學舍, 年二十九, 先生深借其才, 自撰碑銘葬之東武郭北養玉院中 라고 명기되어 있다.
44) 「停 雲集 」 卷上(『新井白石全集』 第 6 卷 所收) 638 쪽.
白石이 阿比留와 알게 된 것은 1677 년 2 월 22 일, 父 正濟와 연좌되 어 禁 銅放逐당했을 메라고 한다. 宮崎道生 氏 「新井白石年譜」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 CD 1682 년 大老堀田正俊에 출사함 . 9 월 1 일 조선신사와 만나 시를 창화 하고 시집에 서를 써 받음. ® 1686 년 木下順庵의 門人이 됨 . @ 1693 년 12 월 16 일 順庵의 鷹擧로 甲府網豊公의 侍講이 됨 . 이와 같이 白石이 順庵의 문인이 된 것도 阿比留의 소개로 『陶情詩集』에 써준 조선신사의 서문과 발문이 奇緣이 되었던 것이다 .45)
45) 『折f.: Q柴 0)記.!I에 〈此年恭靖木先生 t 公t mbL 出 훈 h 給'(}, iJ>O)阿比留彼 r,1c 入?(ti O)*t,;.l{춘0)0);我出羽國山形&t넙소所 |09 〈事念 b L 時, 紀行一卷念 b,
足立栗園 著 『新井白石』(明治 30 년 3 월 발행)에서는
貞享三年丙寅0)秋我三十歲0)時0)事也阿比留其卷춘 8 T, 木先生江見난圭 L 、 6 난朝鮮 0)人0)序0)事ti E 申난 L 力가i充i선t其人춘志 O 見 l f수&0)f.:圭 0心 &T 阿比留力냉菜 U T ii u 砂 T木先生t E 見九圭 L、 5 난 U 事命 b>.
白石은 9 월 1 일 信使客館으로 가서 韓使와 면담하고 창화했다. 여기 서 製述官 成腕온 그날밤 白石의 시집에 서문을 써주었다. 당시로서는 문학자의 최상의 명예였던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다음에 필담내용을 찾아보기로 하겠다 . 『與洪消浪筆語』의 표제에는 〈諸名家 書 井筆談寫 • 業居外數氏〉라고 하고 卷軸으로 되어 있다. 맨 처음에 〈琴中越〉 3 자를 橫 書 하고 業居醉菴印 朱印 이 찍혀 있다. 그 다음에 〈黃門藤 OO 光 • 梁景 鷲 • 建元號 • 讀禁淑錄 • 安積覺 識·垂裕堂八景.觀蘭獲·天保八年秋九日從五位下大 學 頭林衡譜奉.潛畜鷄 의 「今炫壬戌秋八月朝鮮國通信三官駐節于東都館於本 菩 梵利, 一行員役中有 成學士뾰李鵬漠.洪演浪之'1il.皆以文筆鳴鳴, 是弄翰墨遊駿壇之徒相爭求智 今蝶集於館門.炫余友新井白石丈人亦有求知之志, 然官 事 無監, 撰其平生所 作一百首爲一冊目曰陶情集, 達于學士及 李 • 洪要以各一言加于卷首末, 三 客詩見之敷賞焉 ••• …> • 〈與洪消浪筆語〉라고 題書하고 〈白石 • 消浪 • 琴虛 • 鵬漠 멘끝에 越中晩生南景春國華稿〉로 맺었다. 白石:不侯蓋起敬香名, 瞬望無以己, 不幸而權微慈不能超賜館下, 幸勿 以運緩爲罪怒亮惟希. 消浪:向於館中得見陶情集, 淸新奇妙眞是作者手也, 返欲一面以討論千 古而今幸柱問狀喜局 l兪 . 白石:敎意過盛, 僕不政當不政當, 今也聞西山之言, 向所請之跋語將成 于此堂中, 不知所謝, 小詩有足以取者則幸運郵斤以開裝飾. 消浪:足下之詩可謂善鳴者也, 集中間有絶可觀者, 僕欲借加批評而恨歸 期已迫勿卒不能也,跋語或可勉率而爲之耳. 白石:貴邦自古稱文章之國信平, 名下無虛士今則見所與空山小心應翻之 瓊章俊逸敏捷恐筆端俠風而龍蛇爲之飛動, 變化出沒賊人坐於驚關怒浪之中, 奇哉題哉可謂數百千言梅馬可待也, 僕亦不政忍技洋卒賊一絶以乞電梁. 化爲兩鳥哲相訓 一止一鳴復幾秋 蒸海西邊分手去 各天消息水悠悠
槍浪:次贈白石秀士 初交言語不須翻 落筆淸詩敵素秋 恨恨逢便相別去 明朝空海拜悠悠 三百篇之後, 漢魏晋五代之間, 遠哉尙矣, 及於唐之方盛, 自陳杜沈宋始 唱近體於上, 至於李杜一出而孟王韋賈高혹之屬以和之, ’ 可謂前無古人也, 其餘如韓柳之富贈簡古, 歐梅之自在平淡, 蘇黃之甄逸魂奇, 后山大虛苑丘 之深, 統然流麗, 淸新之類, 皆可以爲後生之標準也矣, 僕難素有好詩之雍 而才亦不敏, 不知其誰可以爲師者, 兼問學詩之經路, 笑自而則可, 勿速之 中恐不可作長語, 白石:與槍浪子, 臨別不塔難然之情, 冀怒亮幸莊敗請陶情集之跋語, 大 手筆於今夕 . 槍浪:依示集中作不過數十篇, 幸騰寫此惠則歸傳於故國以誘耀於藝苑矣 白石 : 立談之中不可樓說也,明日因西山氏以答雅意若盛卷則不政當不政當 .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白石은 陶情詩集의 跋語를 그날 저녁내로 써 주도록 간청하자 製述官 成玩이 서문을, 洪世泰는 跋語를 써주게 되었다. 이 서문과 발어는 卷軸으로 篠裝되어 오동나무함에 들어 있는데 石琴松 之書, 琴虛居士成伯圭之書, 洪來叔甫之書라고 했다 . 卷軸 멘 처음에 〈鷄 林聲價〉라고 橫 書 하고 石琴松書學魯字鼎貫卿菴 46) 이라고 落軟하였다. 琴虛居士成伯圭筆 序文 夫詩者天機也, 鳴詩而無天材, 烏能齒議而其間者哉, 是以詩三百篇, 難 大抵聖賢之發慣作也 . 曰比曰興皆出於性情之正而自王公大人后妃以至鄕里 士庶之流 , 喜怒哀樂憂驚之所發, 必諒於歌詩以伸其不平之氣, 由是後世操 鎭弄墨之士, 微而作擬而哈, 大之爲天地, 明之爲日月, 廣之爲河海, 幽之 爲鬼神, 織之爲草木花案及昆虫隣介之類, 一無逃形於風諒之中, 精一語, 鍊一語, 如塚其王,如換其約, 至比師職之鼓琴惠子之柏梧, 座丁之屠牛, 由基之容揚. 深得其不言之妙, 又透其無聲之理,然後詩可與言也, 自漢魏 以後壅壅不聞 其上承風雅之比興之者, 作詩之難誠不誤也, 今者白石公日 本之奇士也, 自兒戱貫察子史, 駒賜翰墨, 摘詩之正 OO, 內積紙富, 外發方 46) 石原鼎菴, 名온 學魯, 字는 貫卿. 號는 鼎菴 • 粹山. 長崎人, 木下順에게 배 웅, 盤醫 1698 年沒 享年 40 餘歲 (『儒海』) .
多, 上而天地風雲日月雷雨星辰, 下而山川草木溪魚蟲動之 國 , 及亭 臺 樓閣 池沼林園田朗荒野古塘靈廟曲岸回猪之以遊以遊可喜可懷, 慈爵 ’ 恒住傑之狀, 一寫於詩, 是以其爲詩也, 變態百出, 大有風雅之造音, 旺亦異哉, 白石公 之新有詩 聲似古之侯喜, 難曰域內老於詩者, 局影柚手莫有與白石公爭其 文柄 白石其可謂能學詩者也, 是年秋不侯幸以下官, 隨信使來東都得與白 石公稽有一日之雅, 獲親其所著陶情集, 版擇其意, 課諒其製, 頓令牙類生 凉路銀有金玉之聲, 使人甄謨有羽化登仙之氣, 何其睦哉, 白石公其可謂一 世願壇風流宗也, 鳴呼陽春白雪奏於下里, 執知其正聲, 然則不遇知詩者, 難與論詩, 白石問其作多歷年所, 今遇不族, 欲得鍾崎之詩, 行其硬築, 憶 不侯本非知詩者, 實是好語詩者, 重違白石公之惡要, 爲公快哈老杜之陶治 性靈存底物新詩改龍自長哈之句, 遂援筆而書焉 壬戌九月初句 朝鮮製述官琴虛居士成伯圭 海 月 琴 虛 軒 成 腕 主 人 伯圭章 製述官 成琉은 白石의 시에 대하여 〈白石公과 더불어 그 文柄을 다툴 자 없을 것이니 시를 찰 배운 사람이요, 白石은 또한 一世의 願壇風流의 宗이 라고 해야겠다〉고 평했으니 과연 木下順庵이 白石 公울 진중하게 여긴 것 도 수긍되는 바이다. 洪來叔甫筆跋語 余在館中見有陶情集, 淸新雅麗, 往往有被沙棟金處, 令人制目眞作者手 也, 及見其人勝於I 其演詩,浪 所 謂表埋如:一金[玉I君子 也,I 來琴父虛叔成 伯I 圭氏作序發揮 之樓樓數百言, 余炫不政養只書其硬藥云爾.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 인물을 대해 보니 그의 시보다도 낫다. 이 른바 표리가 한결같은 金玉君子〉라고 평한 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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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石은 자기 초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 蒼顔如鐵裝如銀 紫石稷稷電射人 五尺小身禪是膳 明時何用 畫麟麟 그리고 深見玄俗는 白石의 초상에 다음과 같은 題賢을 붙였다. 誰道是白石, 磁隣下可磨, 誰道是非白石, 森蓋不可轉, 眉間火字耳上 墓 兩 目 流光i蔚합, -機應變縱橫, 不然韓客殿上爭得使渠從容欽手不碑頭 • 柱平 白石이 韓使와의 응접에서 엄연한 태도로 지략을 발휘했음을 찬양하는 대목이 보인다 .47) 47) 石村喜英 著, 『深見玄俗(7)硏究』(第 5 章 玄俗(7)交遊) 참조 .
1711 년 부사 任守幹아 「 奉束 白石公 源 案下」 4 8 ) 라고 지은 詩 〈君 不見日出 之邦源大官, 骨淸氣 豪 身桓桓, 肖 中壯略龍虎秘, 筆 下文 章 星斗 幡〉 에서도 白 石의 인물상을 엿볼 수 있다.
48) 新井 家藏 , 「朝 鮮 國 通信 副使任守幹自 筆詩稿 」 . 宮崎道 生, 『新井 白 石0)人物&政 것治』은( 二副 使新井 任白守石幹0의)性 詩格 &의 感장情못 )임에 . 〈 그 賢 에 引用된 朝鮮 正使 趙泰億 의 詩 〉라고 한
앞에서 말한 名古屋 新井 家 所 藏 『陶情詩 集 』 朝 鮮 信使序跋에 대하여 故
吉 ]II 幸次郞박사는 생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 그의 「新井白石逸 事 其三」 49) 에 〈成苑으로부터 써받은 서문이 현존하는지 그 여부 믈 나는 알지 못한다〉, 또 宮崎道生에게 보낸 서한 50) 에서도 〈韓客 成 苑 의 서문이 『陶情 詩集』에 붙어 있는지 그 여부를 알려달라 〉 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宮崎 는 이 질문에 대하여 그 서문은 현존하지 않는다고 회답했다는 것이다.49) 吉川幸次郞, 『 鳳 鳥不至』 新井白石逸 事 춘0)三(新潮 社 昭和 46 年, 初 載 《 新潮)) 1969 年 7 月 號 ) 참조. 50) 宮 崎道 生, 『新井白石 斷 想』 5, 白石0) 詩 &吉川幸次郞博士(近 藤 出版社 昭和 62 年 《日本 歷 史》 398 號 所收) . 『新井白石0)洋 學 &海外知識』 299 쪽 「新井家 i 댜 遺 存寸石 陶 情詩集 (但l,序i;t殘 ?T t、t,;.t、 M 참조.
新井白石은 木下順庵의 천거로 網 豊 公의 侍 講 이 되었고 후에 이 網 豊 公 이 바로 제 6 대 家宣 장군으로 습적하게 되자 白石은 막부정치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1711 년 正使 趙泰億일행이 방일했을 때에는 신사 점 대 를 일 절 전 담했던 것이다. 白石이 이렇게까지 출세하게 된 애당초의 계기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1682 년 網吉 장군의 襲職賀使로 방일한 正使 尹址完의 수행 원 成琉과 洪世泰로부터 『陶情詩集』에 서문과 발문을 써 받은 것이 機緣 이 되어 당시의 碩儒 木下順庵의 門人이 되면서부터이다 . 따라서 조선통 신사야말로 白石에게는 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관심이 집중되었던 『陶情詩集』의 序跋文親 筆 原本이 저자의 손에 의해 발견되어 「折t.::〈柴(l)記」의 기목을 입증할 수 있었음은 망의의 기쁨 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7) 人見友元과 洪槍浪 洪世泰(號 槍浪)와 人見友元(號 鶴山 )51) 과의 교환에 대해서는 『 鶴 山 筆 談』과 『天和來聽韓客手口錄』에 詳記되어 있다. 그때 鶴山온 46 세, 槍 浪은
51) 人見友元 (1637~1696) 本姓온 小野氏. 名온 節, 字는 時平, 後에 宜卿, 通稱 은 友元, 鶴 山 • 竹 洞 • 葛 民 • 括峯 동의 諸號가 있다 . 江戶人, 林 鷲峰 께 배웠다. 程 朱 學 派 , 日 出 藩儒 臣, 元 祿 9 年(1 696) 1 月 24 日夜, 享 年 60. (『 儒 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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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세였다. 消浪온 「則席走星」이라고 題하고 〈已識人同氣 休陸語異音 靑燈 一點影 照我百年心〉 한 수를 읊으니 鶴山도 〈良育歡避返 返 事 問淸音 月露 秋風奭 玉登一片心〉으로 화답하였다. 그리고 9 월 2 일 필담창화 석상에서 鶴山은 狩野常信이 그린 「寒江釣雪岡」를 消浪에게 증정하면서 다음의 七 律一首롤 덧붙였다. 請看萬里演浪子 我是淸江釣雪翁 歸國瀋懷蒼海外 登科智筆玉堂中 相思墓到一窓月 遠別心通千古風 他日若傳來誰信 五雲深處翰林公 消浪은 이 「寒江釣雪圖」를 가지고 돌아와 珍藏했다. 『柳下集』에도 「寒 江釣雪圖」라고 題하고 〈憶昔日本野鶴山贈我寒江釣雪圖云此常信之老筆, 新 詩妙絶二美供, 燈前一見三軟息〉이라고 기록했다. 槍浪이 이 그림을 진중 히 여긴 것은 金昌翁 s” 의 『三淵集』에도 〈題洪世泰日本所得獨釣寒江雪圖〉 라고 한 것으로 보아 충분히 알 수 있다.
52) 金昌翁 (1653~1722), 字는 子益 號는三淵, 安東人 歷事三朝德業名節爲士林 領柚 中兄 昌協(號 農岩)供以道學文章有大名(『國朝人物志』).
鶴山은 10 여 년 후에 황천의 객이 되었지만 槍浪은 그것을 모르고 1711 년에 방일하는 통신사 製述官 李璟(號 東郭)편에 30 년 전 知己인 人見鶴山 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탁했다. 李碩이 槍浪의 서한울 鶴山의 아들 桃源에 • 게 전달하자 桃源도 신사가 귀국하는 편에 演浪에게 회신을 보내 왔는데` 그 글 중에 〈편지를 펴보니 바로 亡父에게 보내온 것으로 情狀이 顯然하 여 一歡一悲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양국 문인들 사이 의 미 담으로서 강호에 噴傳되 어 왔던 바이 다 . 『柳下集』 (卷 9) 에 수록 된 「與日本野鶴山書」는 다음과 같다. 僕與足下別于今三十年矣. 未知足下無志平否. 僕亦在世間而齒髮裵謝殊 非昔年相見人可隣也. 每念在本誓寺中日與足下唱訓其言笑之樂·情志之半 實無棟於向産約鎬之義矣, 今其詩仕藏在盤底, 有時坡覽槪然興懷低回者久 之, 想足下亦當然矣, 鳴呼僕與足下生世異國相去萬里, 山海間之, 唯是風 馬牛之不相及而所往來者此心耳, 記矣亥秋得足下三十韻詩自馬島傳來觀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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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辭贈博 誠意惡篤 至有同志多修契, 歸仁爭寫眞之句, 而下訪別後諸人 屈憲公像使傑作費語云, 何足下愛僕之深而諸子俗卷不忘之意亦可見矣 , 宜 則還答用謝高義而春秋之 義 , 大夫無外交故不紋識以越禮冒義, 得罪聖人之 是恨而非政忘足下也, 然而中心感魂不自釋焉, 今者兩國無 事式修菩 好, 使 者東出疆域有通乃政附 書 以往爲足下謝, 而繼以三絶句, 在後一覽而和之幸 也 製述官東郭李重叔吾友也·其人仁厚長者極有文章加善遇之, 足下於僕 見愛之如此而不得見焉則見吾重叔當如見僕也, 足下 書 中所謂僕之寫眞, 至 今有藏去者 , 重叔還可付之, 僕今已老矣, 物欲致之使家人兒女輩以識夫少 壯 顔 面也, 各天一珪參商相望此 書 之後更難書矣, 臨 書 恨情不能爲懷, 千萬 唯冀保薔以慰經想不宣. 寄日本野鶴山 蓬海仙樣一夢還 日東消息杏꾼間 不知萬里今何似 三十年來野鶴山 東使今年又騎隣 誠看漁海未生廢 白 炤 丹 類洪鹿 子 畫裏 曾爲少壯人 一別音 書 不復通 此生無那馬牛風 相思却似扶桑日 線落西來復出東 上記 人見鶴山에 게 보낸 서 한에 서 보는 바와 같이 30 년 전 江戶 本誓寺에 서 만나 창화한 시고를 때때로 상자 속에서 꺼내어 보니 감회가 재로우며 서로 만리에서 山海를 격하고 있으니 거래하는 것은 마음뿐이라는 것, 방 일하는 製述官 李東郭에 대해서는 나를 보듯이 대해 달라고하며 일찍이 그 려주었던 자신의 초상이 남아 있으면 신사편에 보내달라고 하였다. 槍浪의 초상에 대해서는 후절에서 언급하기로 하겠다. 鶴山과槍浪과의 천교에 관 해서는 松田甲 氏의 「人見鶴山&洪槍浪」(『日鮮史話』)을 참조하기 바란다. 3 洪世泰의 생애 洪世泰 53>(1653~1725) 는 副使 李彦綱과 同學의 친분이 있어 副使의 棒將 53) 洪世泰(1 653~1725), 字는 道長 • 來叔 • 號는浦浪 • 柳下 • 本貫온 南陽 • 翊夏
의 子. 經史에 精通하고 시에 능하여 金昌協. 金昌翁동과 訓唱하여 그들의 칭송을 받았다. 1682 년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詩墨울 얻어 보 베로 간직했다. 청나라 사신이 와서 조선의 시를 보고자 할때 左議政崔錫鼎의 추천 으로 詩를 지 어 보였고 그 후 吏文學官. 承文院 製述官을 거 쳐 蔚山監牧官울 지 냈 다. 글씨도 찰 꼈다. 著 書 에 「海東遺珠」 • 「柳下集」이 있다(『韓國人名大事典』 • 朝 鮮總督府中樞院編 『朝鮮人名辭 書 』 • 金基昇著 『新稿韓國 書 藝史』).
名目으로 수행하였다. 그의 字는 道長 또는 來叔, 號룰 浪浪 • 柳下라고 불 렀다. 본관은 南陽이며 經史諸子에 정통하고 시에 능하였다. 官온 吏文學 官, 棟院製述官,通禮院引儀, 西部主簿兼纂修郞을 거쳐 蔚山監牧官을 역 임하였다. 만년에는 白蓮峰에 서실을 짓고 柳下亭이라고 이름붙여 風流徵 逐울 일삼았다. 저서에는 『海東造珠』와 『柳下集』이 있다. 鄭來橋 54) 撰 『墓誌銘』에 〈余初見公於柳下亭時, 公年旦五十矣. 嚴髮蒼然, 顔如紅玉, 余固疑其神圈中人〉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또 人見鶴山의 造稿 『竹洞詩文集』(淨庵記)에도 〈博學善文, 氣象雄偉, 聽明超群, 志操非凡〉이 라고 하였다.
54) 鄭來儒 (1681~1757) , 字는 潤卿 號는 洗巖 . 본래 · 한미한 집안의 출신이었으 나 문명이 높았으며 특히 시에 능했다. 그런데 『韓國人名大事典』 (820 쪽)에 〈 1705 년 숙종 31) 동신사의 譯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것이 계기가 되어 청신하고 낭만적인 시로 그곳에서도 유명했다〉고 한 것은 찰못이다. 그는 통신사에 수행한 일도 없으 며 또 1705 년에 는 동신사를 差遣한 일도 없다. 아마 1719 년 通信使 副使 黃暗의 子 弟軍官으로 수행한 副司勇 鄭後橋(1 675~1755) 와 혼동한 것 갇다 . 後橋는 시명이 높고 또 방일시의 기록인 『扶桑紀行』을 撰述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洪世泰 초상이 보존되 어 神姿가 半秀하고 眉 目 이 疏朗한 풍채를 엿볼 수 있다. 鶴山의 「朝鮮國演浪子圖讚」에 〈冊個槍浪子, 朝鮮萬 里人, 秉心無鄭杏, 下筆有精神, 高潔玉登月, 漫良蒼海春, 百年知己友, 一 別兩情親〉, 또 〈及其歸不塔別情, 畵工養朴寫其眞, 因護 書 其上云〉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화공이란 狩野常信임을 알 수 있다. 전기한 대로 1711 년 槍浪은 製述官 李碩편에 人見鶴山에게 편지를 보내 면서 장년 때의 모습을 친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으니 옛날 그려두었던 초 상이 남아 있으면 李讀 편에 보내달라고 하여 이것을 묘사해서 보내주었다 고 한다. 이때의 肖像寫本 55) 의 하나가 芳洲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洪世泰는 寒微했던 탓으로 사대부 문단에 대항하여 불우한 박명시인을
-S 5) 洪世泰肖像上下一軸, 模寫由來는 다음과 같다. 〈天和二壬戌之年, 朝鮮國使洪 批泰號槍浪時, 人見 鶴 山以詩文友善, 使命 畫 工茶造其肖像. 後三十年. 正德年間復使 李困字重叔號東郭來賜焉. 當此時, 世泰託重叔等寄한鶴山, 索前所造肖像, 意謂我今
老而姿容哀矣 . 欲使親族見壯年之姿. 請 許之. 於此 鶴 山 寫 前所造之像以與焉. . 今炫天 保四年得其圖 井 所贈 詩 文以刻示同好. 良齋七十六翁源弘賢 書 〉 또 Ill 像에 는 〈天保矣已 晩 夏 應村上守雄 需 模 寫 之正民印 • 印〉라고 했다. 京都大學圖 書 館 藏 「朝鮮人來蔣 關 係 書 類 3 」(右東京市外落合村公爵近衛文磨氏所 藏 . 大正 7 年 7 月 膳寫編纂 ) 참조.
途浪 洪世泰肖像(雨森芳洲文庫 소장)
엄 호하며 委菩文壇의 수립 을 기 도하여 이 른바 委老詩人 48 명 의 한시 220 여 수를 수록한 『海東造珠』를 편집하여 1712 년에 간행하였다 . 이것은 조선의 근대 평민문학사상 획기적인 공적을 남겼다고 한다 .56)
56) 具滋均 著 『朝鮮平民文 學 史』 (第 2 節 洪世泰, 高 時彦) 참조솔
그의 『柳下集』 自序에는 崇禎紀元後再甲辰仲冬 (1724) 이라는 刊記가 있 으며 그 속에 〈余生五歲則知 讀書 從塾師受數卷 書 , 己能通大義, 紙長 讀 經史 諸子百家無不過覽 顧於詩哈莊〉또〈息庵公見余少作稱曰高혹者流, 中歲農 巖公曰知成章有一唱三軟之音〉, 그리고 〈今年病莊, 意忽忽發陸中所藏草藥 劃繁就約得賊三首, 詩一千六百二十七首, 文四十二首 蘆 爲十卷, 遂自爲叔停
後之覽者知余於詩用力之本來如此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洪世泰의 詩名에 관해서는 鄭來儒撰 『墓誌銘』에 . 〈移西部主簿兼纂修郞以 掌東文選之後時, 上命工畵西湖十景, 賜札國男慶恩公曰洪世泰以詩名世, 可 使製進十說 公援筆立成以進之〉라고명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도 그의 시 작이 유명했음을 알 수 있다 . 57)
57) 『古畵備考』(卷 13) 38. 狩野譜 1661 쪽.
여기에서 『柳下集』에 수록된 日本使行時의 詩賊 33 편의 題名을 소개하 면 다음과 같다. 釜山壬戌, 永嘉臺權公粉爲萊伯時筑此臺權出永嘉故名之云, 釜山歌 其 二, 沙工浦舟上浦郞馬島西偏也, 對馬島, 早發對馬島, 萱岐放舟, 其二, 赤 間關 安德天皇神廟店在赤間關彌陀寺中古有安德天皇與源頓朝戰敗漏水死國 人哀之爲立祠朔像歲祀之壁上畵當時戰伐之狀苑然在目, 次成伯圭韻, 發赤間 關 上關 室津 舟中示安伯倫, 次李耳老韻, 少想路傍松樹下望海, 自泥浦 乘船夜行暎泊大坂浦, 出河口入海, 雨中登永嘉臺壬戌, 渡海示伯倫, 一岐放 舟, 向浦 牛窓, 舟中早起, 河口, 倭京, 鹿튬湖, 富士山, 金谷, 舟中記景 • 其二. 이 밖에 또 1711 년 正使 趙泰億에 게 보낸 「奉送趙參議令公使 日 本」 11 首와 同製述官 李璟에게 보낸 「送李重叔充製述官往日本」 및 「送李重叔往日本序」 가 재록되어 있다. 다음에 「倭京」 一首를 소개하겠다. 倭京都會最繁華 城郭人炯十萬家 日出樓臺迎使節 路窮浦海駐仙樣 少年寶劍霜爲鎔 遊女輕杉繩作花 自笑風流非衛硏 市門投果溫行車 이것으로 번화한 京都의 풍취와 유녀들의 화려한 모습을 엿 볼수 있다. 洪世泰의 詩名에 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것 의에도 1764 년 正使 趙職의 「海接日記」 緖話에 7 월 8 일 입시복명할 메 국왕으로부터 사행중의 시문창
58) 吉田宏志 「我國 K 傳來 L t.:李朝水墨畵둔砂 〈 ??T 」(『李朝0)水墨畵』 所收) 참조· 鮮學59報) 》抽 稿98 輯「天昭和度和( 156 6)8 2참) 조朝.鮮 信使補將洪世泰& 日本文士&0)筆談唱訓 K?LTC 」(《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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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 관하여 하문한 기록이 있다. 즉, 製述官 南玉은 洪世泰 • 申維翰과 비 해서 어떠했느냐 한 것으로도 洪世泰의 시명이 알려져 있었음을 침작할 수 있다 . 鄭來橋의 『浦浪洪公墓誌銘』에 〈肅宗朝壬戌從通信使 往日本, 發人持賤鎌 乞求詩墨, 所過培立公怖馬揮掃蝶若風雨, 詩思騰逸筆亦遂妙得者皆藏휴以爲 寶傾慕噴操 至戶繪其像焉〉이 라고 하였다. 人見鶴山으로부터 槍浪에게 보 내온 30 韻 시에도 〈別後諸人屈畵公像使槿作讚語〉라고 한 것으로 보아도 「戶 繪其像」은 틀림없을 것이다. 앞에 서 말한 畵工狩野常信筆 「寒江獨釣圖」에 대 하여 『古畵備考』에 〈余 酷常畵圖, 閔古今畵多矣, 稱意者絶少, 今見常信公眞跡絶代奇筆也〉라고 기 록되어 있다. 이것은 洪世泰가 常信의 그림을 칭찬한 말로서 특히 〈余酷 暗畵圖〉라고 한 것을 보니 槍浪도 회화에 대하여 상당한 자신이 있었음을 알수 있댜 또 墓誌銘에 〈筆亦遂妙〉라고 하였는데 流浪은 과연 능필이었다. 이미 앞에서 상론한 대로 新井白石의 『陶情詩集』跋語는 槍浪이 방일했을 때 남 긴 휘호이다. 『柳下集』에 수록된 板刻 自序는 趙子昴體를 딴 필치로서 명 필이라고 해야겠다. 저자는 일본에 유전되어 오던 槍浪筆 「雙維圖」(宇本 淡彩 94. 5X39. 5cm) 와 「山水圖」(宇本淡彩 103X35cm) 를 입수하였다. 槍 浪遺墨으로는 이 밖에 도 개 인 소장의 「水墨山水圖」 58) 와 愛知縣稱澤市禪源 寺에 「禪源寺」 肅額이 남아 있다. 저자가 珍藏하는 槍浪筆 「山水圖」에 대하여 한국회화에 造脂가깊은 山 內長三 氏는 〈산의 毅法描寫에 있어서 芹碧敍에 가까운 것은 김홍도 등이 사용했는데 만일 이 산수도가 洪世泰가 그린 것이 틀림없다면 沈師正 • 김 홍도보다도 훨씬 앞서서 洪世泰가 썼다는 것이 되니 이것이야말로 한국회 화 사상 재로운 발견이 되겠다〉고 시사한 바 있다 .59)
보주 1) 1) 李元植, 「朝鮮通信使0)國書, 重文指定 K 寄산 T 」(《삽 Y 夕 4新聞〉〉 昭和 62 年 5 月 18 日 ) . 「重文指定0)朝鮮通信使資料 K-::>L 、 L 」 (朝鮮學會 第 38 回大會硏究發表要旨 昭和 62 年 10 月 4 日). 大塚英明, 「藤井齊成會所藏朝鮮通信使關係資料 I t: -::>L 、 L 」(《文 化財報〉〉 1987 年 8 月 58 號) 참조. 2) 京都市藤井有鄭館所藏答書 : 綱吉將軍으로부터 朝鮮國王에게 보낸 답서. 別幅 副本.
제 4 장 辛卯年 (1711) 使行 1 新井白石과 通信使 1) 信使와의 交流 辛卯年度의 信使는 家宣 장군의 襲職賀使로서 趙泰億 일행 500 명이 訪日 하였다. 信使는 5 월 15 일 辭陸하여 국서를 받들고 서울을 출발해서 육로 로 부산에 내려와 7 월 15 일 승선하여 對馬島로 향발, 8 월 19 일에 對馬島 藩主 宗義方에 게 호행 되 어 9 월 16 일 大坂港에 도착한 후 京都룰 거 쳐 10 월 18 일 江戶에 도착하였다. 11 월 1 일 장군께 알현하여 국서와 별폭을진정하 고 11 월 3 일 下案 후 11 월 11 일 장군의 답서 를 받아 11 월 19 일 江戶를 충 발하여 다음해 2 월 25 일에 부산에 귀착하였고, 3 월 9 일 상경하여 국왕께 복명하였다. 副使 任守幹 撰 『東樣錄』에 의 하여 辛卯 通信使座 目 을 열 거 하면 다음과 같다 . 正 使 通政大夫戶曹參議知製敎 趙泰億 副 使 通訓大夫司僕寺正知製敎 任守幹 從事官 通訓大夫行兵曹正郞知製敎 李邦彦 第一船
正使子弟軍官 折 衝李絡 前參奉 韓潤基 折 衝 金鑑英 都採經歷 趙健 訓鍊命正 韓範錫 訓鍊主簿 柳 瀋 前噴官 金世珍 製 述 官 前佐郞 李 碩 書 記 奉常判官 洪舜衍 堂上譯官 嘉 善 崔尙嫌 李碩麟漢學上通事 判官鄭昌周 押加物定通醫 員事 前上前前 直直致護 長正軍長 奇朴金泰顯斗信門文 寫字 官 李壽長 別破陣兼軍官 金斗明 典 樂 金碩謙 理 馬 安英敏 伴 {(버 嚴廷輝 禮 單 直 金益明 馬 上 才 池起澤 廳直 李明俊
盤 經 次 崔天若 騎 船 將安時迪 都 訓 導 金漢伯 奴子 費善 萬責 一行奴子 20 명 小 童 姜必周 裵金儉 徐九智 金鳳章 金光白 首譯暗 金有聲 副譯暗 洪俊訖 製述暗 小通 事 鄭得秋 朴盤金金瑟金 崔進昌 使令40 명 2 명首譯暗 砲 手 2 명 刀 尺 2 명 都沙工 金命吉 統手旋手 각 1 명格軍 56 명 卜船將 李寅成 沙 工 高萬世 舞上線手旋手 각 1 명 格軍 36 명 第二船 書堂副上 使上子通弟譯 軍軍官官官事記 副閑都武前前折副護前前前前前司鬪主參司別縣判 監直良猛事衝官察奉兼長軍將簿監果 任張鄭洪 趙劉嚴閔李申 道文濟綴舜震廷漢松升述明翰烽章佐重年債 押物通 事 金時璟 趙得賢
醫 員玄萬奎 畵 員陣朴東普 別典廳伴破 個樂禮直 · 嚴金崔 漢世壽 璟佑海 盤 鄭寅起 李能白 奴子 五男 繼鳳一行奴子 16 명 小 童 李世勳 姜命祚 李愛돛 李德載騎船將 辛之寬 都訓導 鄭載 重 使 令 12 명 小通事 崔命男 朴貴費 李承 倭 砲 手 2 명 刀 尺 2 명 都 沙 工 金戒立 舞上線手旋手 각 1 명 格 軍 59 명 卜 船將 金自鳴 沙工 白莫生 舞上線手旋手 각 1 명 格 軍 31 명 第三船 從事官子弟軍官 副司勇卞景和 軍官 前宣傳郡官守李行儉 書堂上次 上上通 通譯 記事官事 前副副副折前上司護司倉 主司正簿勇軍勇衝果 鄭金南 玄金 始聖德壽是 南潤松重探 崔漢鎭 醫員李 消 馬寫伴字上 個官才李李爾斗芳興 騎廳將直金世榮 都盤 船 導知 元金萬汝柱澄 盤 次 趙熙錫 訓 金鑑億
奴子 老積 順傑 一行奴子 12 명 小 童 朴致賢 尹昌傑 李尙三 崔應虎 張世徵 使 令 12 명 小 通 專 白哲同
李完日 宋毛同 刀 尺 2 명 砲 手 2 명 都沙工 徐有廷 舞上僚手旋手 각 1 명 格 軍 57 명 卜船 將 秋時江 沙工 張今福 舞上僚手旋手 각 1 명 格 軍 31 명 屠 牛 匠 1 명 以上 六船員役以下 총 481 명 辛卯年信使行에서는新井白石에 의한개혁안, 죽國 書 復號, 國諱및신 사집대 간소화문제로 물의를 빚어냈던 것이다. 白石은 신사집대의 공적으 로 恩賞加資되었지만 한편 正使 趙泰億 일행은 屠國의 죄로 처벌받았다.1) 그러면 信使가 江戶에 등성했을 때 白石과 어떤 접촉이 있었는지를 살 1) 『肅宗實錄』 卷 51. 38 年 . 3 月 庚戌條 〈上敎以徐判事議正合予意並命削奪官爵, 門外翻送, 禁府又勘罪諸譯首譯定配, 堂上譯官徒配 • 堂下則決杖〉 趙泰億 등은 귀국 후 廷臣의 彈抽으로 曆國의 최를 문책받았으나 국왕의 재결로 관작의 박탈로 꾼 났다.펴보기로 하겠다. 『新井白石年譜』”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CD 1711 년 8 월 25 일 . 조선신사의 영 정 윤 명 령 받다. ® 동년 10 월 17 일 조선신사를 川崎驛에 출영나가다. ® 동년 10 월 28 일 白石의 주선으로 深見玄俗 등 7 명의 유학자가 江戶 客館에서 필담창수하다 ® 동년 11 월 3 일 韓使賜裝과 舞樂開權(「坐間筆語」) . ® 동년 11 월 5 일 白石이 객관을 방문하고 신사와 필담하다(「江關筆 談」). 또 副使 任守幹 撰 『東椎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CD 10 월 20 일 陰 源與來見 ® 10 월 26 일. 雨 源與來星野風香一小合請以八分寫 「天爵堂藏修遊息 居」八字, 欲爲惡板云, 許之, 出外廳求見軍官所個劍及弓矢以天字弓六兩節 示之, 不能開弦見軍官輩引 證 大加驚軟云 . ® 10 월 28 일. 陰夜雨 源與來候 高玄俗等八人亦來 ® 11 월 1 일 源與來見. ® l1 월 5 일 雨雪終日. 源與偶酒來訪. 終夕筆談而去
2) 宮崎道生, 『新井白石0)硏究』, 「附錄新井白石年譜」. 三田深光, 『白石先生年譜』 (明治 14 年) 참조. 3) 任守幹 撰, 『東樣錄』, 乾 • 坤 2 卷(서울大學校中央圖 書 館奎章閣本 • 寫 本). 이 중 「日記補」와 「聞見錄」은 從 事 官 李邦彦의 기록으로 되어 있다.
다시 상기내용을 補足하는 의미에서 『白石日記』 4) 중에서 추출해 보기로 하겠다. ® l0 월 17 일. 寅亥 U 에 發篤 巳亥 U 에 川崎驛에 도착하여 즉시 平田直右 衛門, 雨森東五郞被參, 用務를 상담한 후, 저녁에 三使旅館에 直行하여, 三使와 面會하고 戊亥넘 어 自 己 旅館에 가다. ® 20 일. 已亥 l 에 登城했다가 歸宅後, 申亥 U 에 信使客館에 가다. 三使不及 對面 . . ® 21 일. 午刻 客館에 나아가다 三使不及對面 이날 향연을 구경하다. ® 26 일. 객관방문. 이날 學士 • 書記들과도 대면, 三使酒案床이 나오다. 무기관람. 陳香持參
4) 東京大學史料編纂所編纂, 『大日本古記錄』, 『新井白石日記』 上 • 下 (岩波 書 店 刊行 昭和 28 年).
® 28 일. 객관방문 . 이날 儒 學者 筆談 (木下寅 亮 深見玄貸 三 宅觀潤 室鳩菓 • 服部保 庸 • 土肥元成 • 祗園南海). 此日 三 使不及對面. ® , 每 日. 三 使 및 學 士에게 堂 * tt進星 ® l1 월 朔日 . 辰亥 l 에 登城, 今 日 韓 使 行禮 (國 書 傳 達 )우사히 끝납. 未刻 에 歸宅. ® 2 일 對馬太守宅에서 曲 馬 下乘 두 아들을 다 帶同하고 구경. 그 후 객관으로 가서 詐日行 禮 룰 축하하고 歸宅. 不及對面. ® 3 일 辰亥 l 에 登城 今日 韓 使賜 樂 • 舞樂觀 覽 • 금일 모양은 別紙에 기 록한 것 있음 . ® 4 일 辰亥 0 에 登城, 馬場에서 曲馬 무사히 끝납 @ 5 일. 巳亥 U 에 客館을 訪問. 三使와 交歡. 음식 나옴 . 밤에 귀가. 此 日儒學者들 필담. 鄭綴述 만남(『江關筆談』 : 이메의 문답을 기록한 것). @ 11 일 . 辰刻出仕 韓使告別式畢 @ 12 일. 巳亥 l 에 韓使告別式울 무사히 끝냈으므로 全 員 出仕. ® 13 일. 三使 書 簡을 雨森東五郞이 持參함. ® 15 일 堂上譯官(首譯) 崔尙峨으로부터 선물 보내옴 ® l6 일. 使者를 보내어 三使께 錢別함 訓 蒙 圖 棄 玉林 墨 十$], 扇子十 柄 小人形 유리잔 5 개씩 三人께 進星, 단 正使에게 排子 一 柄울 추가함. 崔首譯에게는 鼻 紙二千葉 扇子十柄 . 白羽 重 (白網布) 二走. @ 19 일. 韓客 子亥 U 에 歸國 寅亥 U 에 登城 ® 22 일. 辰刻에 登城 朝鮮信使接待로 因하여 五百石加增拜領 執政 • 近侍께 인사 次 禮 訪. 상기한 바와 같이 白石은 신사객관에 7 차 방문했는데 그중 네 번은 신사 와 만나지 못했다고 일부러 자필로 〈三使不及對面〉이 라고 補 書 까지 한 것 은 무슨 까닭일까. 白石온 장군의 막부신하 자격으로 신사와 접촉했을 뿐 인데 혹시 신사가 만나주지 않은 것을 섭섭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 2) 白石詩集 이 『白石詩草』”는新井白石의 한시를 深見玄俗 6) 가편집한 것이다 . 5) 『白石 詩 草』에는 新井白石의 自作 詩 92 篇 이 수록되어 있다 . 現在 流布되고 있는 刊本으로서는 ® 正 德 壬辰仲 春 江戶 碧 町十丁目唐本屋淸兵衛粹行 • 京 都同店八郞兵衛 ® 正 德 2 年刊 本後掃刊 記 는 없음 ® 寬 政 8 年丙辰 5 月 浪華 書 林河內屋 喜 兵衛粹.
3 種이 있을 뿐이다. 6) 『先哲幾談』 卷 5, 高玄俗條(念齋原先生 著. 文化 13 年 新鏞).
였고玄 俗특는히 白그石의의 시은문고에를 대입해었서는는데 敬한愛편의 白念石울도 품연고장 자있었로다서. “玄 俗그래를서 推 戴白하石 은 자기 시집을 玄俗에게 부탁하여 선집토록 한 것이 『白石詩草』이다. 白石은 이 시집을 미리 對馬島의 盤官 雨森芳洲!에게 보내어 조선신사가 대마도에 도착하면 이 시집에 신사로부터 서문과 발문을 써 받도록 의뢰했 다 . 신사가 대마도에 도착하자마자 이 『白石詩草』를 내보이고序跋울 청하 니 신사는 대마도에서 大阪으로 오는 船中에서 기초하여 大阪客館에서 청 서하였다. 芳洲는 이 시초의 序跋을 信使가 江戶에 도착하기도 전에 白石 에게 보내왔다 . 白石은 한시를 가지고 신사를 압도시켜 볼 생각으로 용의 주도하게 꾸몄 던 것 이 다. 任守幹 『東接錄』에 〈辛卯 十月 十七 日 . 陰. 晩發 過神奈川. 夕抵河崎. 地屬武藏州. 蜂須賀飛罪守隆長支待星檜重, 新井筑後 守源與自江戶來見, 以前日詩集序製送事略致謝意〉라고 하였다. 다음에 『白石詩草』의 序文과 跋文의 일부분을 소개한다.
7) 抽稿 「朝鮮通信使&深見玄俗-日光山八景和韻 • 詩 書 卷춘中心 k- 」(《日本 歷史》 384 號 昭和 55 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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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使趙泰億의 序文 自余入馬州來聞順庵木公門下彬彬多文學士而白石源公尤有名焉. 固己傾 網之矣 日始得其詩藥一卷 反覆岭擇其學也博其才也富······~ 常 論之, 其 詩華細而實茂, 格高而越雅, 豪健而不流於範硬, 腕麗而不泥於織巧.駿駿 有盛唐人 口 氣, 乃知天機之發於人者, 不以地之編, 生之晩而有所局之也, 觀其詩郞其人可想, 而亦以見其國崇文之化於斯爲盛也… ••• 早晩入武城當與 公一接傾蓋之歡 以講稿約之契, 安得無一言以道我慕用之誠哉, 姑 書 此以
爲 貸 焉 辛卯季秋朝鮮國通信正使楊州趙泰億大年甫 書 于大坂館中 『白石詩草』 중에 〈春日追悼恭靖先生詩八首〉라고 題하고 〈第五六句形容先 生恭讓之德云, 頃聞我友橘伯陽(雨森芳洲 筆者柱) 曰朝鮮人每到對州必求先 生文章傳踊而歸〉라고 부기하였다. 전기한 趙泰億 序文에도 木下順庵을 칭 송한 바 있다. 製述官李讀의 白石詩集 序 芳洲君以東武聞人白石公詩稿投于余, 初索卷弁之文曰是則與余同樞衣於 木先生者, 源甫所著也… ••• 蓋其詩格淸而響亮, 語新而越遠, 往往有與唐人 酷肖者, 余不知白石公果何如人, 能紹絶響於累萬里之外, 數千載之後直欲 拉唐之高手而翻翔於翰墨之外哉…… 李讀도 白石에 대하여 〈詩格淸而響亮, 語新而越遠, 往往唐人과 酷肖한 바 있다〉고 격찬하고 있다. 副使任守幹의 跋文 不侯奉使萌日域, 製述李君得白石源公詩集以示之, . 各體詩凡若干篇, 觀 其學富而氣亢, 格秀而詞溪采色相宣, 音律諸叫, 不侯受之而未及卒業, 跋 然意下哈腐尋擇不能去手, 己而軟曰不圖九州之表, 西海之外獲見中夏之正 聲…···. 從事官李邦彦의 跋文 今余之賜于是邦也, 因雨森院長得見白石源公詩集一卷, 其格力淸健, 詞 彩華織 不但音律之諸吐, 聲調之雅麗而已, 讀未意 數篇不自覺販然而起 崔然而驚曰異哉其地辭遠矣, 其俗武勇也而乃能獨運天機之妙深得風雅之體 難使公生於中華之盛際得與鴻工距匠屬鍵而周旋余恐其不在下風也 •••••• 白石公方在東武, 此去或可得見難不見其人觀其發於性情則其人可知, 余遂以托 名於卷末爲幸而雨森君之勤托亦不可孤也. 이상과 갇이 三 使와 製述官은 한가지로 雨森芳洲i를 내세우고 木下順庵 에 대해서는 崇敬의 念을, 그리고 白石에 대하여 이구동성으로 그 詩才에 경탄하면서 한없이 찬사를 보내고 있다 . 白石도 신사로부터 써 받은 서문과 발문에 대하여 기쁨과 자랑을 금할 길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白石日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 ® 9 월 27 일 『白石詩草』 一卷울 바치 다. ® 10 월 5 일 巳亥 U 에 出仕 今朝詩草四通을 바치 다. 趙泰億以下朝鮮信 使四名의 作 이보다 앞서 신사가 대마도에 도착했을 때 詩草를 · 증정하고 序跋을 받게 하여 그것이 到來한 것임. @ 9 일 寅亥 U 에 出仕 詩草 序 돌려 보내 오다. ® l0 일 . 『白石詩草』 一卷 바치다. 앞에서 보는 바와 같이 白石은 자기의 시집 『白石詩草퍼문장군家宣에게 바치고 있다. 그리고 雨森芳洲i를 통하여 신사로부터 써받은 序跋이 수중 에 도착하자 또 이것을 장군에게 바쳤는데 수일 후에 이 序跋原本을 돌려 보내왔다고 명기했다. 內藤湖南 박사는 「白石0 一遺聞 K 就--c」 8) 에서 〈白石은 近衛家에 대하여 조선사절의 동정을 보고하고 있다 . 白石은 조선사절과 필담하는 것까지도 상대방을 감복시키도록 주도하게 준비했다. 白石은 장군가를 방편으로 이 용하여 자기가 듣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묻고 있다. 꽤 뻔뻔스럽다〉 고까지 지탄했던 것이다 .
8) 內藤湖南, 「白石0)一遺聞 K 就-CJ(『先哲0)學問』 弘文堂, 昭和 21 年).
하여간 『白石詩草』에 대하여 雨森芳洲는 그의 「橘窓茶話」에서 〈新井白 石大有詩名, 朝鮮人索其詩草陸續不己〉라고했다. 그리고 또慈雲庵에게 보 낸 書翰에서도 그 사이 일본의 시문을 가지고 韓客과 증답한 사람이 천 명을 훨씬 넘는데 그중에서 시집을 구한 것은 당대에 白石公 한 사람뿐이 라고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白石이 近衛家에게 보낸 서한 중에 韓使가 自己詩草를 조선국왕 에게 첫째가는 선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하더라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 아 닐 수 없다.
그런데 저 자는 『白石全集』 제 5 권에 수록된 『白石詩草』 활자본에 다음과 같은 誤植이 있음을 밝혀냈다. ® 李東郭序中 〈未知有幾洲沿〉의 〈沿〉은 〈沼〉로 〈寧晩唐而母宋 • 寧宋而母明〉의 〈母〉는 〈毋〉로, 〈 況西唐平〉의 〈西〉 는 〈兩〉으로, ® 趙泰億序中 〈乃和天機之發於人者〉의 〈和〉는 〈知〉로, 〈登 惟云一國之華〉의 〈云〉은 〈公〉으로, 〈昔庚子山奉使異國〉의 〈庚〉은 〈庚〉로, 〈願〉은 〈顧〉로, ® 副使 任守幹跋中 〈哈度尋律不能去平〉의 〈律〉은 〈擇〉으 로, 〈散而發之於幽退侯絶之區〉의 〈侯〉은 〈象〉으로, 〈今白石公能追稱前人, 顧不得如西公之賞書〉의 〈稱〉은 〈涉〉으로 〈西〉는 〈兩〉으로, ® 從事官 李 邦彦跋中 〈此夫或可得見〉의 〈夫〉는 〈去〉로, ® 高玄俗敍中 〈陽技散暎起 便〉의 〈散〉은 〈發〉로, 〈哉己丑之夏〉의 〈哉〉는 〈歲〉로, 〈未獲親其制作也〉 의 〈制〉는 〈製〉로 각각 訂正하여 둔다. 그리고 또 『白石全集』에 수록된 序跋은 모두 白文 그대로이므로 일본한 문식 訓点을 붙여두었으나 여기에는 생략한다 . 백석전집을 간행할 메 유 독 『白石詩草』의 序跋만을 白文으로 남겨둔 것은 아마 조선 한문체이므로 그 해독이 분명치 않았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 3) 江關筆談 信使는 11 월 1 일 등성하여 국서와 별폭을 진정하고 11 월 3 일에는 향연 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舞樂울 관상했다. 그때 白石과의 필담은 「坐間 筆語」”로 남아 있다. 그중에서 서로의 응수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재 미있는 대목이 나온다. 白石:諸賢不契相思炳耶 泰億:恩賜自是錦誘. 恐炳氣點汚 白石:錦誘不染炯氣文彩鮮明也. 古色則無如之何 泰億:戱而已. 不侯性不吸炯茶. 兩僚則能暗之 白石:墨出靑松炳, 墨客曜炳登得無非其氣類耶 그리고 任守幹의 - 『東樣錄』에 수록된 「江關筆談」에도 다음과 같은 대화 가나온다. 9) 「坐間筆語」(『新井白石全集』 第 4 卷 所收 721 쪽) .〈 天明己酉正月甲子平安鈴木公 混識 「坐問筆語」 附江關筆談(刊本)이 있음.
白石問平泉曰 何不吸炯茶 平泉曰 平生不常此物 白石曰 古人云無酒腸, 登公無炯腸耶 平泉曰 心腸自是錦誘, 登容炳氣点汚, 遂相與一,原 白石曰 正使自稱錦燒心腸不爲炯火点汚, 不侯鐵石心腸試以遠火如何. 靑坪曰 心腸美於錦線堅於鐵石兼之者當如何. 여기서 말하는 平泉은 정사의 호이며, 靑坪은 부사의 · 호이다. 『近世幾 語』(卷 2. 言語)에 는 〈韓使見新井白石, 推前所出煙盆謂曰那用此煙管薰我 錦綠腸 白石應聲答曰試用此煙管融我銅鐵腸乃引煙盆吹炯一二管〉이라고 되 어 있다 . 이 날 殿上에 서 觀樂한 후, 副使 任守幹은 接伴僧 別宗祖緣에 게 〈奉星別宗 長老道案 日 祚幸蒙國王殿下張樂以興之, 伏切盛戰不任區區, 初構短篇求正 慧眼〉이 라고 題하고 五言長篇詩를 書贈하였다. 白石은 또 이 신사 자필의 詩獲울 將軍께 상람시켰다. 京都 相國寺 慈照院에 소장된 「韓客詞章」 중에 別宗和尙 祖緣諦補 〈右殿上觀樂和章惠韻二首新井筑州刺史上于至尊殿 T, 因 膳寫以補其缺〉, 즉 副使가 화운한 시를 新井白石이 장군께 바쳤으므로 그 것을 騰寫하여 缺落된 것을 보완한다는 시고가 들어 있다. 그런데 장군으 로부터 白石에게 반환된 原本이 新井家예 현존한다. 전기한 『白石日記』에도 있는 바와 같이 11 월 5 일에는 白石이 객관을 방 문하여 신사와 더불어 한국 음식을 만끽하면서 마음껏 환담하였던 것이 다. 이때의 환담기록을 「江關筆談」이라고 이름붙여 流傳한다. 그런데 일본내에 유포된 「江關筆談」 10) 이 刊本에는 그 序文과 末文이 재 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것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전문을 소개한다. 序. 楓余之往也對州人雨森東中途進詩卷, 請吾輩而序之, 問之則筑後守 源與之作也 . 詩類淸高可觀, 三使各爲文而贈之. 及抵東武一舍地源與迎見 致敗曲, 留館中也數來就之相與筆談, 道兩國交隱之意, 間以諸笑. 一日凡 數十百紙難矢筆書之, 往往有可傳者歸到下關限風海淸, 懷思無聯出裝中故 紙編而次之名曰江關筆談, 蓋源興者號白石以國王潛邸之舊, 方爲寄闇大官 出入非時其被卷遇云耳. 歲壬辰仲春靑坪居士題于風本館中 10) 「江關筆談」(『新井白石全集』 第 4 卷 所收. 725 쪽).
末文온 다음과 같다. 十九日自江戶離發. 二十三日次三島源興書送習作詩數十首, 又抵 書 雨森東 曰三使門前經過之時. 只寄別意而已, 醉然之恨老淡泉進. 難然天錫良緣登 無再會之期, 此等話頭第可爲我域中人說之耳, 若彼三使臺下貝 l j供生於萬里 之外避返於一堂之上, 顔在眼, 語在耳而情未盡依썰生別於萬里之外. 騰北 飛日東出, 何因我所思, 應南來水東流, 何因得其音能. 我鐵石心腸爲此却 火灰飛廢散·正使所說點頭石佛萬片粉 w, 郞現百億小身之大士, 設令慈眼 視衆生亦何利益之有悲昞悲昞, 或言興以數訪使臣有自 中諦言不得來別云. 이 서문에 의하면 대마도에 도착하여 『白石詩草』를 보고 序跋을 서증했 다는 것, 江戶客館에서 白石과 필담환담했다는 것, 귀로에 下關에서 풍우 로 저지당해 체류하는 중 무료한 끝에 故紙를 꺼내어 이것을 편집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江關이라고 한 것은 중국의 荊門 • 處牙 두 산 사이, 즉 荊門은 江南, 處牙는 江北을 가리키는 말로서 한 • 일 양국의 지리적 遠隔 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말문에서는 江戶를 출발하여 귀로에 올랐을 때 白石으로부터 시 수십 수를 보내오면서 雨森芳洲에게 서신을 보내어 白石이 자기의 심정을 토로했던 것이다. 특히 그 궁 중에 白石이 신사객관을 종종 방문한다는 것 을 部內에 있는 자가 비방하므로 신사가 江戶를 출발할 때 직접 객관에 나아가 전송하지 못한 것이 한이라고 한 점은 주목된다. 즉 學敵 林大學 頭와의 抗爭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후일, 吉宗 장군이 등장하자 조선사절의 賜禮를 1682 년메의 舊例로 돌리 고 白石은 막부 중신의 자리에서 축출당했는데 그 배경에는 德川紀州藩主 로서 명군의 칭을 받던 吉宗 장군에게는 李眞榮, 李梅溪父子가 선대를 위 해서 바친 恩義에 대한 심적 요소가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다. 「江關筆談」의 내용에 대해서 宮崎道生은 ® 海外知識 ® 中華文明의 問 題 ® 日韓外交의 根本方針 ® 國諱問題 ® 儀禮文物遺存問題를 들고 있 다. 11) 조금 더 구체 적 으로 살펴 보면 白石온 1443 년에 通信使 書狀官으로 11) 宮崎道生, 『新井白石序論』, 新井白石&趙泰億 1. 白石&泰億&0)交驛 55 쪽 (吉 )I[ 弘文館 昭和 51 年).
방일했던 申叔舟가 임종시, 성종대왕에게 〈 請勿與日本失和 〉 라고 한 말을 인용하며 〈況今諸公憂國如文忠用心則實是兩國蒼生之福〉이 라고 하였다. 趙 泰億은 〈 申文忠公郞僕外先也, 臨終 一 言誠出於睦 〉 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白石은 또 壬戌年(1 682) 신사 방일시, 白石의 『陶情詩集』에 序跋을 書 贈한 成苑과 洪世泰에 대해서 문안하자, 〈成苑今夏已作千古人矣〉이라고하니 白 石은 〈昔得海外之交今作地下之人哀哉〉라고 暎하고 있다. 白石은 또 圓隱 鄭夢周先生의 十一代孫 鄭綴述이 宣傳官으로 수행한 것을 보고 〈洪武十年 鄭公以高麗氏之使來見我九州節度使源貞世以講二國之和, 信使始到都下之日 斯人 常 得奉使而來于館中, 公等進見之日受 書 官源少將者貞世九代之族孫〉즉 趙泰億 일행이 江戶에 도착한 날 장군의 사자로 객관을 예방했으며 또 고별 하던 날도 江戶城腦下에서 待令한 사람이 내 宗親인 豊前守近衛少將이라 고 말하고 있다 . 이날 교환석상에서 正使 趙泰隱은 白石에게 소주를 권하면서 〈公何借一 酷訂〉이 냐고 하니 白石온 〈鐵石心腸亦不塔燒酒矣〉라고 대 답했는데 白石도 과연 강한 조선 소주는 감당하지 못했던 것 같다. 白石은 신사에게 휘호를 청했다. 從 事 官 李邦彦이가 白石에게 써준 「天 爵堂」 肅額字와 사행중에 지은 한시 14 편이 東洋文庫에 현존한다. 辛卯年 信使訪日時에는 白石의 주선으로 많은 배려를 했는데 그중 家宣 將軍이 조선국왕에게 보낸 선물로 막부의 화공들이 그린 金彩畵居風 20 쌍 은 귀국 도중 파선으로 인하여 五六島前洋에서 해수에 침몰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12)
12) 『邊例集要』 下 • 卷 18 • 5 쪽(『韓國史料幾 書 』 第 16 韓國國史編纂委員會發行 1971 年) , 1712 年 3 月 條 〈今此信行關白所로別幅雜物及島主及萬松院等所몸禮曹別幅雜 物, 倭船三堡分載矣 二堡無事到泊. 一堡段致敗於五六島前洋 • 關白所星別幅金昇 風 • 長劍 • 甲衣 • 個月刀 • 島主所星禮曹別幅黃蓮等物沈沒海水〉.
또 한 가지는 장군의 명령에 의하여 막부의 화공 狩野常信 (1636~1713) 이 그린 正使 趙泰億肖像 (103.5X49cm, 紙本着色, 軸)은 관복 모습의 위 풍이 당당한 초상화로 현재 韓國國立中央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이 肖 像軸의 설명서에는 大正 5 년(1 916) 4 월 15 일 伯爵 寺內正毅寄贈이라고 명 기되어 있다 . 4) 白石의 詩人像 13)
13) 宮崎道生, 『新井白石』 4, 「詩人 白石」(日本歷史新 書 至文堂 昭和 32 年). 吉 川幸次郞, 『鳳鳥不至』, 「新井白石逸事」 (新潮社 昭和 46 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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足立栗園 著 『新井白石』에 〈(일본의) 文運이 나쁘다는 것은 이미 멀리 일 본해를 격하여 東亞大陸에까지 전해져 저 小弱附庸의 조선인마저 중화의 문명을모방하여 의기양양하게 우리를보는것이한개의 木强漢이라고梅 漫했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朝鮮萌使의 손에 一 書 生白石의 단련된 唐 詩가 전교되어 일본의 문화는 德川期에 들어가 이 정도까지 되었는가 하 고 놀라게 하였다 .•••••• 白石온 죽 정치계에 웅비하기 전에 일개 시인으 로서 성공했던 것이다〉라고 갇파했다. 白石의 시인으로서의 성가는 이미 壬戌年(1 682) 신사가 서 `증 한 그의 『陶 情詩集』 序跋에서 볼 수 있지만 辛卯年 (1711) 메의 『白石詩草』 序跋에서 더욱더 입증된 셈이다. 다음은 일본내의 문헌자료에 의해 한두 가지 열거하기로 하겠다. 白石의 장남 明卿은 「白石先生餘稿緖言」에서 〈先大夫以經術遇知昭代而以詩名世,
世之知先大夫者特以詩〉라고 하였다 . 또 室鳩菓도 〈君詩光華國家益美四方 其餘波 單 及海外者北至朝鮮南至琉球又至堂堂淸朝文化之國莫不同?太一辭所至 稱善鹽 ……今乃知君詩不負爲天下之寶也 〉 라고 격찬한 바 있다 . 또 江村北海의 『日本詩史』에 〈白石天援敏妙獨步藝苑, 所謂錦心線腸暖垂 成珠, 暖語講韻者索諸異邦古人中未可多得〉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白石은 말하자면 天縱 의 詩人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끝으로 필자가 京都古書辭에서 발견한 白石親筆의 시고를 彼露하겠다· 北海苗前未得暗 春風何日盡餘杯 玉登徒爲長歌碑 金鏡偏將短髮開 驛使相逢梅落盡 用 書 欲寄誰飛回 百年疏備吾今老 幸謝山公不托才 一字 新井勘解由 在 中 이 시구는 加賀藩의 儒醫 山脇元視(字 敬美)의 「壽白石翁五十」에 화운한 것인데 『白石先生餘稿』(卷 2) 에 수록되어 있다. 겸하여 『天爵堂壽詩』에 둘 어 있는 山脇敬美의 原韻울 소개하면 다음과 갇다. 金軟白馬此追暗 桃李陰陰映壽杯 珠履聲殘花影轉 玉蕭吹斷月華開 採衣偏向尊前舞 靑鳥蓬從海上回 大雅千年傳盛事 風流誰繼諦仙才 그런데 白石의 贈答詩 原文에는 〈幸口山公不任才〉라고 하여 謝字가 빠졌 는데 이 白石 自筆詩禁에 의하여 謝字를 보완할 수 있었고 또 한편 家藏의 白石 自筆詩釜에는 〈百年口類吾今老〉라고 하여 疏字가 빠졌는데 이것은 아마 주연의 순배가 한창일 때 醉翁의 탓으로 빠뜨린 것이 아닐까. 桑原武夫 氏는 〈白石온 17 세기부터 18 세기에 걸쳐 일본이 가질 수 있던 가장 위대한 백과전서적인 문화인이다〉 U) 라고 평하였다. 14) 桑原武夫, 「日本0)百科全 書 家新井白石」(日本0)名著 『新井白石』, 中央公論 社 昭和 44 年) 참조.
2 深見玄俗와 信使 1) 玄俗의 生珪 15) 『先哲幾談』에 다음과 갇이 기 록되 었 다. 高玄ta • 字子新 • 一字斗膳 • 小字新右衛門 • 號天游 • 又號婆山 • 肥前 人·仕大府.天演祖高 壽 覺, 西土人也, 父大踊, 號一覽爲長崎譯者, 一覽 改稱姓高爲深見. 蓋高氏出自渤海, 渤海倭讀深見, 故以稱焉. 天游與朝鮮 聽使李東郭詩序, 陳其歸化顧末.
15) 石村 喜 英 著, 『深見玄ffiO)硏究.!I (雄山 閣 發行 昭和 48 年) 참조.
또, 「深見玄俗年譜」에 의하면 신사와의 교환 및 白石과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즉, 玄俗는 11 세 때부터 獨立禪師에게서 儒學 • 醫學 및 詩곳옹 · 배 웠고 25 세 때에는 長崎에서 醫業에 종사했다. 延寶年間 (1673~1680) 에 京 師에 遊學하여 木下順庵의 門에 들어가 시문을 배우기도 하였다. 1710 년 3 월, 白石의 천거로 江戶幕府 儒官이 되어 六代將軍 家宣에 알현, 11 월 白石의 요청에 의해 『白石詩草』 序文을 썼다. 1711 년 3 월에 조선국왕에게 보내는 그림 병풍의 題辭를 撰述했고, 같은해 10 월 26 일 江戶城中에서 조 선신사 행례를 참관한 후, 동 28 일 白石 및 유학자들과 함께 객관에서 韓 使와 필담창화떳 11 월 5 일 韓使와 再會하였다. 「日光山八景詩」를 짓고 自 筆한 詩書卷을 남겼다. 1712 년 12 월 『七家唱和集』의 하나로 『正德和韓集』 을 刊行하였다. 2) 信使와의 交歡 『正德和韓集』에 다음과 갇이 기 록되 어 있다. 正德元年辛卯十月朝鮮來JP}}, 命下儒曹會集其學士書記等筆語唱iii, 臣俗 亦同班列次, 凡二會謨炫編次其所述奉備上覽 二會라는 것은 10 월 28 일과 11 월 5 일 .2 차에 걸쳐 객관을 방문하고필담창
16) 抽稿 「朝鮮通信使&深見玄貸―日光山八 景 和韻詩 書 卷춘中心t乙一」(《日本歷史》 384號 昭和 55 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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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辛卯年 (1711) 使行 175
화한 것을 말한다.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7 명에 의한 唱和詩文은 『七家 唱和集』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갇다. 正德和韓集 二卷 深見玄俗 班荊集 二卷 木下菊深 支機開談 一卷 三宅競腦 朝鮮客館詩文稿 一卷 室鳩菓 桑韓唱訓集 一卷 服部寬齋 桑韓唱和集 一卷 土肥 霞 洲 賓館稿許集 二卷 祗園南海 10 월 28 일 初會에 玄俗와 창수한 조선측 인사로서는 三使를 위시하여 製 述官 • 書 記 嚴漢重(號 鐘湖) • 南聖重(號 i칸§!!) • 良醫 奇斗文 • 醫員 玄萬 奎 • 通事 趙君瑞 • 鄭昌周 등이었고, 11 월 5 일 再會 때에는 從 喜 官 • 製述 官 • 嚴漢重 • 洪舜衍 • 南聖重 등이 었다. 玄俗와 信使와의 필담창화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再里東部李學 士」라고 題한 前文中, 陽村權近에 관한 기록이다. 適適憶往者在京曾見陽村權先生親手所畵皇明一統輿地圖整歷代沿革, 幅 員可六尺, 圖下有小記係建文四年秋八月四日, 顧其記中寫意者深矣. 今不 識其圖無差否也. 여기에서 말한 陽村 權先生이란 고려말부터 이조 초기의 학자로 本名은 權近 11>(1352~1409), 號를 陽村이 라고 하였다. 1367 년 . 成均試 文科에 及第 하고 禮曹判書를 ·역 임, 鄭夢周와 더불어 親明政策울 주장하였다. 1389 년 에 는 遣明副使를 1392 年 朝鮮王朝로 바뀐 후 大司成울 거 쳐 藝文館大提學, 議政府費成事, 世子左賓客울 역임, 왕명에 의하여 『東國史略』을 撰하였 다. 문장에 뛰어나고 경학에 정통하였다. 그의 「入學圖說」은 후일 李退溪 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저서에 『陽村集』이 있다. 17) 檀近 『朝鮮人名辭 書 』((朝鮮總督府中樞院編纂), 1854 쪽. 『韓國人名大事典』 47 쪽. 『陽村先生文集』 所收 「陽村先生年譜」 참조. 石村 喜 英, 『深見玄俗(J)硏究』 283 쪽 에 〈權陽村, 京都 K 住寸碩學〉이 라고 한 것은 찰못입
玄俗가 일찍이 京都에서 목견했다는 權近小記의 「混一疆理歷代國都之 圖」가 京都龍谷大學圖 書 館에 현존한다. 建文 4 년이란 명나라 惠帝의 연호 로 일본의 應永 9 년, 서기 1402 년에 해당한다. 이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는 網地 市曲尺 5 尺 3 寸 4 分, 長 4 尺 3 寸 4 分의 大幅인데 풍신수길에 의하 여 本願寺에 하사된 것 이 라고도 한다 . 18)
18) 高橋正, 「東潮난 5 中世 4 久 7-k 世界固 • 主& LT 混_疆理歷代國都之圖 K? L、 T 」(『龍谷大學論集』 374 號) 참조. 中村榮孝氏에 의하면 大谷光瑞가 朝鮮서 입수 한 것이라고 했음『日鮮關係史0.)硏究』 (上) 378 쪽.
玄俗는 延寶年間 (1673~1680), 京都에 遊學했을 때 본 적이 있는 이 지 도를 회상하면서, 신사와의 필담창화 석상에서 〈今不識其圖無慈否也〉라고 토로했다. 陽村權近이 小記한 跋文에는이 지도의 성립 유래가명기되어 있다. 즉, 吳門의 李澤民의 「聲敎廣被圖」와 天台僧 淸消의 「混一疆理圖」를 建文 4 년 (14 02) 여 름, 左政丞 上洛 金士衡 19 놔 右政丞丹陽 李 茂 20) 가參究하여 檢詳 李첩로하여금 합치게 하여 一圖를 만들고 거기에 權近자신이 일본과 조 선을 그려넣었다는 것이다. 內藤湖南 박사에 의하면 李澤民, 淸浦의 兩圖 는 金士衡이 建文 元年 (1399) 에 建文帝則位의 賀使로 入明한 적이 있으니 그메 가져 온 것이 라고 한다 .22)
19) 金士衡(1 333~1407) . 字 平甫 • 安東人 • 上洛侯永照孫. 高麗恭愍朝文科. 福朝與 趙浚同在練官時稱得人, 恭讓朝爲三司左使贊 • 太祖開國入本朝策一等勳封上洛伯, 上 幸平州溫泉駐鷲野次召士衡及南闇論潛邸相得之情, 開國勤勞之 事益酒相屬親如舊時. 丙子爲都統處置使, 征日本對馬一岐島, 登年正月凱旋官至左議政, 論翼元(『國朝人物 志』 明文堂 1983 年). 20) 李茂 (13 55~1409) . 字는 敦夫, 丹陽人, 高麗恭愍王때 文科에 及第. 朝鮮開國 後 1393 年開城尹을 거쳐 中樞院使. 謝恩使로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倭志에 대비. 1396 年都體察使가 되어 一岐島와 對馬島의 倭志를 토벌. 1401 年(太宗 l) 判三 軍府事가 되고 佐命功臣 一등으로 右政丞에 승진, 이어 領承攝府事, 右政丞兼判兵 曹事를 역 임. 1408 年병으로 사직. 이듬해 閔無썬의 옥사에 연루되어 昌原에 유배 되었다가 竹州에서 사형당하다. 뒤에 伸窟되어 論號는 翼平(Ii'韓國人名大事典』). 21) 李菩, 號는 松谷, 泰安人, 少尹卿의 아들, 우왕 때 문과에 급제 . 1392 年朝鮮 開國後 太祖에 게 발탁되 어 兵曹正郞. 1402 年 檢詳으로 중 淸浦이 그린 「歷代帝王 混一疆理圖」를 增修. 官은 司陳에 이르렀다. 시문에 능했다. (『韓國人名大事典』). 辻稷三 「李朝춘 中心 K 發達 L t.::.朝鮮地圖」 (京都府立朱雀高校鳥羽分校 『地圖』 Vol. 19 No.2, 1981 年)에 李菩는 朴敦之가 1401 年 일본에서 가져온 일본지도를 原地圖에 중보하여 완성시켰다고 하였다. 22) 앞의 駐 4) 小川塚治 「支那歷史地理硏究」 61 쪽 참조.
이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龍谷大學所藏本)에 씌 어 진 權近의 跋文 23) 은 다음과 같다. 天下至廣也, 內自中國外薄四海, 不知其幾千萬里也.約而圖之於數尺之 幅 其致詳難矣. 故爲圖者率皆疏略, 惟吳門李澤民聲敎廣被固顔爲詳備而 歷代帝王國都沿革則天台僧淸浦混一疆理圖備焉載. 建文四年夏左政丞上洛 金公, 右政丞丹陽李公礎理之假參究是圖命檢詳李畜更加詳校合爲一圖, 其 遼水以東及本國疆域澤民之圖亦多閑略, 今特增廣本國地圖而附以日本勒成
新圖井然可 . 楓 誠可以不出戶而知天下也, 夫觀圖籍而知地域之適追爲治之 一助也, 二公所以拳拳於此圖者其規模局量之大可知矣, 近以不才承之參費 以從二公之後樂視此圖之成而深幸之, 紙償吾平 日 講求方冊而欲觀之志又喜, 吾他日退處環培之中而得遂其臥遊之志也, 故書此于圖之下云是年秋八月陽 村權近誌 23) (a) 跋文解讀 : 「龍谷大學圖 書 館 善 本 目 錄」 (訂正基本 書 ) 249 「混一疆理歷代國都 之圖」 一軸 (陽村文集卷 22 所載 .I 文二 크 9 訂正) : 明代, 組本 着 色. 密 證 5 尺 4 寸 5 分. 內則橫 5 尺 3 寸 7 分 縱 4 尺 9 寸 6 分, 東這日本J: b 北 , 벼滿洲 蒙 古 . 西없安南交B.11:. 印度了? 난了主 T 含tr . 日本0)地形ti大陸J: b 姚~t..::石形t~ I). 三段江分 5 上段 K ii 府名及州名충列擧l.,, 下段江左0)如 <記 T. 天下至廣也…… 惟吳門…… 吳門의 〈門〉는 〈門〉의 誤記임을 지적해 둔다. (b) 弘中芳男 「古代中國 K 和납 5 日 本0)地理像」 第 5 章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圓」 IC? t、 T( 《邪馬台國》 15 號 1983 春號). (c) _ 題跋譯出에서 . 다음과 같은 찰못을 발견했다. ® 四海江I薄,、石t ..... 산(圭正) 5 ® 皆略t~ 1., ~醉砂 石 ..... 皆(鍊正略) t& b ® 李菩 K 命 UT 檢詳산 l.,砂 ..... 檢(詳正李)畜 ii::命 UT (正) @ 近〈不才 ..... 近 &I i權近0)C.七 近(權近)不才 ®®® 會平製日觀作方0人冊)物춘志〈講춘求靑償l山 5. 氏.,... .l . (l...:. 原講J求(文:正l ;).「f ,'欲 l觀,之났權者近」i)i安 東乙(0正)札)生 춘九(h &o觀)L 九 、 5&, 欲t寸 l石.者, 鴨綠江右岸0)安東 0) 乙 & T 念九if朝鮮i;I: & t 力) <, 日 本0)國情 1 i:: t 地理像 I r. t ...... 〉라고 했는 데 이 〈安東〉이 란 韓國 慶尙北道의 〈安東〉을 말한다.上記 跋文울 『 陽村先生文祭』 24) 卷 22 所錄 「歷代 帝 王混-疆理固誌 」 와 비 교 대조해 보면, ® 備載焉一備焉載 ® 金公士衡一金公, ® 李公茂一李公, ® 方特增一今特增 ® 退避一避返 ® 亦爲治一 爲治 , ® 規謨一規模, ® 是年秋八月 日 誌一是年八月 陽村權近誌로 되 어 있다.
24) 『 陽村先生 文 集 』 卷 40 10 冊 . 1674 年 十世孫權 獨 가 嶺南監司在任中, 晋州牧使 南夢費와 協力하여 刊行한 것이 다. 許穆의 . 序文이 -붙어 있다 . 李丙 熹 「 權陽 村 0 入學 圖說tr.就t TC 」(《東洋學報)) 1929 年). 朴天圭 「陽村權近硏究」(《史 幾 》 . 9 輯). 尹炳奭 「權近」 (『 韓國 의 人間像』 第 4 卷) .
그런데 京都 妙心寺 麟祥院에도 「混―歷代國都 疆 理地圖」가 있다. 여기에 관해 서 는 宮崎市定의 연구결과, 麟祥院藏의 이 지 도는 嘉靖 5 년 (1526) 명 나라 사람 楊子器가 그린 중국도에 조선인이 조선지도를 부가한 것이라고 한다. 25) 이 것은 1636 년경 家光이 기 증한 것이 라고 하며 상자에 는 大明國 地圖라고 하고 원도상면에는 「混一歷代國都疆理地圖」라고 茶書體 로 썼다. 크기 는 세 로 1. 76m, 가로 1. 79m 이 다.
25) 宮崎市定, 「妙心寺麟祥院 藏 混一歷代國都 疆 理地圓 K? t TC 」 (『神田悟士還曆 書 誌學論集 』 所收) .
그리고 같은 종류의 지도라고 생각되는 것이 일본 각지에 현존한다. 靑 山定雄氏에 의하면 現 書陵 部 所藏 「混一歷代國都疆理圖」는 楊子器의 중국 도에다가 조선을 중보한 것인데 명종 4 년 (1549) -同 22 년 (1567) 사이에 작 성된 것일 것이라고 하였다. 26) 靑山은 또 龍谷大學 所藏의 지도는 建文 4 年 權 近이 작성한 당시의 것이 아니고 그 이후 적어도 2 회에 걸쳐 조선지명 을 개정한 것으로 성종 2~3 년 (1471~1472) 경에 그려진 것이라고 추정하 고 있다. 27) 또 天理圖 書館 所藏 「大明國圖」는 權近의 增補混一疆理歷代國 都之圖를 개정중보한 것이라고 하며 이것과 같은 종류의 지도가 熊本市本 妙寺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28) 그리고 근년, 長崎縣島原市本光寺常盤 歷史資料館소장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가 확인되 었다(《西 日 本新聞〉〉 1988 年 4 월 25 일 석간, 弘中芳男 : 島原市t 28? t:t 5-?(!) 「混一疆理歷代國 都之圖」 《韓國文化〉〉 1989 年 2 월 호) . 그런데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深見玄俗가 보았다고하는 지도는 과연 어 느 것인가 하는 접이다 . 建文 4 년 權近의 跋文小記가 들어 있는 지도라는
26). 靑 山定雄, 「李朝江於i ?5 二三©朝鮮全 圖 K? t、 T 」(〈( 東 方 學報 》 第 9 冊所收 참조. 27) 靑 山定雄, 「元代 0 地圖 K? t、 T 」 (《東方 學報〉〉 東京 第 8 冊所收 昭和 13 年) . 28) 海野一盜 「天理圖 書館 所 藏 大明國圖 K'.)LT t」(『大阪學 藝 大紀要』 第 6 號 所收).
점에서 龍 谷大 學 圖 書 館 藏 의 지도가 가장 가까운 것으 로 생 각 된다 . 다만 玄 俗는 〈 皇明一統輿地圖뾰歷代沿 革〉 이 라는 名稱을 썼고 , 또 〈 建文四年 秋八 月 四日〉이라 명기했는데 龍 谷大 學 藏圖에는 〈 混 一疆 理歷代 國 都之圖, 是年 秋八月陽村權近誌〉라고하였다. 즉 〈 四日〉이라는 날짜가 빠졌다. 이것을 다 시 陽村先生文集所收 「歷代帝王混一 疆 理圖誌」에서 보면 〈 是年秋八月 日誌〉 라고하여 역시 〈四〉字가 빠졌다 . 따라서 玄俗의 기록인 〈 八月 四日〉의 〈 四 〉 字가문제된다. 일반적으로跋文刊記에 날짜까지 들어 있는것은 지극히 드 문일이므로玄俗의 착각으로 날짜까지 넣은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처자는 龍谷大 學 圖 書 館의 호의로 이 原圖롤 배관할 수 있었다 . 이 지 도를 담은 상자표면에 「混一 疆 理歷代國都之圓」라고 쓰고 寫字 台文 庫 . 龍 谷 大 學 受入整理月 日 「大正十二年十二月十五日」 • 圖 書 番號 0211-103 - 1 라고 쓴 題策이 붙어 있었다. 원도를 상세히 살펴보니 跋文 「陽村 權 近誌」라고 쓴 左 下에 〈朱印〉이 찍힌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印文은 선명치 않아서 해독할 수는 없었다. 필자는 이 跋文小記가 權近의 자필인가 아닌가를 알 아보기 위해 우선 權近의 서체를 조사하기로 하였다 . 權 近의 서품에 관하 여 「東國文獻筆苑編」에는善 書 하였다고기록되어 있다. 현재 참고할수있 는 필적 의 模刊으로는 『古今歷代法帖』 (朴文會 編 1859 年 刊) 과 『海東歷代名 家筆譜』(白心齋輯)에 수록된 것 (安東 暎湖樓에서 哈 諒 한 七 言律 詩 : 客 裏 登 臨感暎多卷遊裏得 要 陽村權近)이 있다. 그런데 權 近의 이 서체와 전기 발문 의 필치를 비교해 본즉, 동일인의 필적이라고는 도저히 보기 어렵다. 따라 서 龍谷大學 所藏 地圖의 跋文이 權近의 자필이라고 하는 입증을 하나도 얻을 수 없다. 단지 深見玄俗가 延 寶 年間 (1673~1680) 京都에 遊 學 하였을 때 보았다는 權近의 跋文이 들어 있는 지도와 龍谷大 學 에 현존하는 「混一 張 理歷代國都之圖」가 완전히 합치되지는 않지만 玄俗가 그 지도를 실견했 던 것만은 확증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玄俗는『正德和韓集』에서 말하기를 『東國輿地勝 覽 』을 얻어 볼 수 있었는 데 所開本殘缺不全으로 江原忠淸 二道는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라고 하 였다 . 그는 조선의 명산대천, 인물의미를 다음 詩句로 표현하고 있다 . 〈錦 繩 山輝暖 • 社丹峰彰香〉 • 〈乙密台高敵 • 四處望更長〉 • 〈南原多美景 • 第一廣 寒樓〉라고 한 것으로 보아 물론 『東國輿地勝覽』의 원문을 참조했을 것이 나 조선의 지리풍물에도 홍미를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新井白石 編 『停雲集』에 는 玄俗의 시 8 편을 재 록하고 〈天深詩草最富觀 正德和韓集可以想見其槪〉라고 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東
洋文庫所藏 『海東詩文帖』에는 신묘년신사에게 상정한 일본 유학자들의 자 필시고가 들어 있는데 이 중에 玄俗 자필의 시 3 편이 남아 있다. 3) 日光山八景詩和韻 저자는 玄俗의 자필시고 「日光山八景詩和韻」 卷軸 (3 1. 5cmX417cm) 紙本 墨書網裝을 입수하였다. 이 卷軸은 본래 川村雨谷舊藏이었다. 日光山八景
卜 -.,.' JI `,:.i-.fi)Jf『. . ·t i ,`gI\ g倫1 i予강쵸& t 忠홍上盆.店_l ' R -곤L/”2t‘I+I1 玄:^¢4放5L》俗 筆 t tti'訂凡ttC&&F日 光山i條습/V.h·:T.s 八 景t 詩菱'象倭、} . 和 . .韻i .( 林야1 ':gl 저 자&11.tt 언广k 4 ·? 소 장\訴1r,t:g人.)i i虎뉴꾸西伊EF?' ?24t?少丘, 小受 倉총a춘^4 홋;g
詩와 조선신사와의 관련에 대해서는 『日光山八景詩集』' 新麥1 日光八景引에 <日 光山八景詩者吾一品大王之所新設而與暗臣之輩同賊者也, 旦頓遇朝鮮國 賜使在于江城, 命需夫詩合爲一冊, 集就而傳寫之者多, 臣恐其魚魯之諺, 因 請錢諸粹云. 正德壬辰春三月 中大夫長州刺史源好古譜識〉이라고 한 것으로 도 알 수 있다. 죽 이 시집에는 玄堂 • 元龍 • 一英 • 好古 • 慧海 • 高敏 • 承 方 • 景晴 등의 칠언철구 각 한 수가 실려있는데 이 팔경운을 次韻한 「朝鮮國 李讀和日光八景」 외에 趙泰億, 任守幹, 李邦彦등 三使의 시가 들어 있다. 押物通事 金顯門 撰 『東椎錄』에 〈十一月 初八日, 矣已晴, 留江戶兩館伴 問候 緣長老送日光山八景圖於正使相求詩〉라고 명기되어 있다. 저자가 京 都古書燁에서 입수한 趙泰億 자필시고는 上記한 祖緣別宗長老求詩에 증답 한 것임에 틀림없다. 30) 『日光山八景詩集』 正德 2 年 春 3 月刊 和裝本一冊, 中大夫長州刺史源好古. 朝 · 倉景曜 芬河元泰의 序文, 東敬大王玄堂올 비롯하여 倍從僧 16 人의 시와 韓使의 시 가 수록되었다.
譜次東板 法 王日光韻奉몹別宗 長老詞案 未視名山勝 徒聞寶界 淸 入 熊雲霧氣 德戶澤流聲 畵 登形容得 詩因夢想成 東游有遺恨 仙 賞 負平生 長 老以日光八 景 圖見贈故第五及之 辛卯復月 平泉居士 여 기 에서 말하는 緣長老란 相國寺 第 104 대 住持로 辛卯年信使를 접 반하 여 江戶를 왕복하였다 . 玄俗 撰 『正德和韓集』(下)에 〈 送相國寺 緣長 老回 京 〉 〈三 十年前相國遊, 竹 林深處地偏幽, 顔參玉版老 禪 味, 一 掃 瓊 階皓雪 瞬 , 勅外彼 樣驚 昔夢, 節 中競 面喜新 德 , 紫衣辭殿回京去, 韓客明朝共一舟 〉 라고 했다. 이것으로 江戶에 서 玄俗는 緣長老와 해후하여 賊詩했음을 알 수 있다 . 앞에서 언급한대로 東洋文庫에 현존하는 『 海 東 詩文帖』에 守玄堂 자필시 고 「日光山偶成」이 들어 있다. 老杉護 蕭 寺 到處水炳淸 不雨香山色 無風 響 潤聲 心依廢外靜 詩自沈邊成 終日忘言坐 白雲孤楊生 前記 趙泰億詩에 〈證次東假法王日光山韻〉이라고 한 것처럼 이 「日光山 偶成」에 화운했던 것이다. 과연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겠다 . 그리고 東洋 文庫에는 從事官 南岡 李邦彦의 『天爵堂』이라고 留題한, 사행중에 읊은
?솜 ,
14 편의 친필 자작시고가 현존함을 부기한다 . 다음에 玄俗와 李碩의 日 光八景詩물 소개 한다. 日光山八景和韻 高玄俗 小倉春暎 山光別是一神州 草綠松靑映碧流 花發可隣春色暎 起來獨試霧中牌 鉢石快照 山下水來環作川 一方衆落撲相連 雜帝屋上永淸證 垂晩新傾初起 '炯 含滿蝶雨 傍流石經亂容跋 兩岸森森枝色迷 下有碧源潛巨怪 課風驛雨動前溪 寂光漏布 倒i街淸泉落紫 雷 惡崔國處玉條條 誰知隔斷千山外 唯有寂光送寂窟 大谷秋月 大谷水流月不流 水流無盡轉淸幽 也將照去人間也 歸肝泳登夜夜秋 鳴虫紅楓 日光染出滿天紅 山色虫聲入望中 楓葉幾時題得句 凡將一片寄秋風 山菅夕照 證道上人示異縱 夕陽影裏菅花濃 當年火臨成浮柱 旦問橋頭老臥龍 黑髮晴雪 寶習洞光雪外緣 端然王閑棋星睦 有僧來道山中雪 六月猶盤最上崩 庚子蒲月要山老人 朝鮮國李噴和日光八景 小倉春魄 名山傍簿鎭雄州 紫琴玲蒲暖色流
海底陽鳥猶未 器 滿空星彩溫哈睦 鉢石欽炳 如雲如霧覆前川 琴色空源萬樓連 才到飯時甄散盡 細看方覺是快炯 含滿蝶雨 漏雲殘日藤山腐 頃刻千峰雨氣迷 野水忽高强一尺 牧童慈殺限前溪 寂光澤布 誰倒銀河注九 雷洞 空飛洙散千條 雷拜電製聲嫌話 自是幽人喜寂章 大谷秋月 婆娑桂影滿空流 照破乾坤夜色幽 一歲周回盆又缺 最隣淸景也宜採 鳴虫紅楓 萬林靑葉得霜紅 錦總玲荊維眼中 可借採光容易謝 不慈寒重只慈風 山菅夕照 山椎野牧忽無縱 落日初低暎 熊 濃 倒海餘陣垂四練 況疑天末掛長龍 黑髮晴雪 路絶惡崔不可緣 雪花寒遜斗牛隱 炫山亦作瓊培窟積稿休誘富士崩 題日光山八景錄後 李璟 山有兄孫滿眼多四時光景自森羅 區區八諒還塔笑 爭奈風煙漏萬何 그리고 『日光山八景詩集』 所錄 正使 趙泰億의 시는 다음과 갇다. 小倉春暎 春星未落宿雲低 花氣冥冥樹色迷 地近扶桑天早曜 金難權日五更帝 鉢石欽炯
山下孤煙起竹節 兩三村屋晩伏時 籠花織柳依微色 添却詩家一格奇 含滿蝶雨 洞埋深潭臥老龍 有時行雨晴千峰 須庚日出雨聲止 潭影雲光濃復濃 寂光藩布 炎天樓閣欲生寒 千尺飛流落琴密 時有遊人來入洞 鑄疑雷雨岡林端 大谷秋月 山前秋水沒山平 活得泳輪徹底明 聞說高僧掌管領 心將此境校誰淸 鳴虫紅楓 仙家花木四時宜 留得長星色色奇 唯有一山楓樹在 每年採意獨先知 山菅夕照 長橋百尺個垂虹 欲訪靈源路可通 最是夕陽山色裏 一筑僧影畵桐東 黑髮晴雪 層密練郡壓群峰 高頂長時素雪封 塔與富山相伯仲 東西雙釜玉英容 현존하는 玄俗 자필의 목적으로서 알려진 것은 저자가 收藏하는 日光山 八景詩和韻卷軸 • 布袋圖 • 蕭湘八景詩折帖 • 扇面詩 • 二行草書軸 동을 포합 하여 43 점 에 달한다. 名古屋 新井家에 傳存하는 玄俗筆 「前赤壁圖卷」 (宇本 淡彩 • 橫坡卷子 153X29cm) 에는 〈正德 2 年 (1712) 壬辰基春日要山〉이라는 낙관이 들어 있 다. 이 圖卷에 관해 서 는 『古畵備考』 (卷 12, 427 쪽) 에 〈似六 如徵仲, 更無倭魏又非慕落文人之態落軟云〉이 라 하고 〈跋書其試行草極佳〉 라고 부기했다. 玄俗는 당시 長崎通事 林道榮과 더불어 〈崎陽의 二妙〉라고 불려 필법이 추장되었다. 「先哲幾談」에 〈春台曰林道榮者長崎舌人也與高玄俗供以善草 書 知名, 然林不及高筆法無變化故也〉라고 하였다. 玄俗의 초서는 변용무궁하 고 그 運筆의 묘기는 후인이 따를 수 없을 정도이다.
3 別宗祖緣和尙과 信使 1) 韓客詞章 對馬島에서는 1598 년(慶長 2) 이래, 博多 聖福寺 景轍玄照가 以訂菴에 거주하면서 朝鮮修文職의 전임자로 있었다. 玄蘇가 입적한 후 제자인 規伯 玄方이 계승해 오다가 所謂 柳川一件에 연좌되어 流諦되자 京都四山(天龍· 相國 • 建仁 • 東福寺)의 碩學僧 중에서 선임하여 이에 충당하게 되었다. 이 것을 以訂菴輪番이라고 한다. 輪番僧온 조선과의 왕복문서의 사찰과 통신 사의 집반을 담당했다. 1635 년 11 월 東福寺 寶勝院 玉峰或을 처음으로 하여 1866 년 (慶應 2) 廢庵하기 까지 126 番 88 명 의 外交僧이 輪住했 던 것 이 다. 31)
31) . 『通航一覽』 卷 30 朝鮮國部六 • 對馬國以訂菴輪番, 泉澄一 「對馬以訂菴輪番僧 江岳元策 K? 1,、 T 」(橫田健一先生還曆記念 『日本史論穀』 所收), 田中健夫 「對馬以 訂菴0)硏究――近世對朝鮮外交機關0)一考察_一」 (『東洋大學大學院紀要』 第 24 集 • 文 學硏究科 1988 年), 田中健夫 「朝鮮修文職&通信使館伴」(《韓〉〉 第 110 號 1988 年).
『萬山聯芳錄』(卷 3) 에 의하면 別宗祖緣에 대하여 〈 諱祖緣 • 初名玄緣 . 字別宗·號江沙又願神.加州金澤人·俗姓佐佐木氏·父名定之·母富田氏. 師其第三子也 • 受業覺雲 • 參南禪英中 • 受其印狀 • 貞享 4 年 (1687) 丁卯至 gji秉挑 • 元祿 5 年(1 692) 壬申 2 月 20 日位眞如西堂 • 同年 (1697) 丁丑 3 月 19 日選碩學任朝鮮修文職 • 已卯(1 699) 正月 18 日 • 受公帖 • 5 月 23 日視菜本寺 • 明年 (1700) 庚辰 3 月輪住以訂菴 • 寶永 7 年 (1710) 庚寅 10 月 29 日陸南禪 • 辛卯 (1711) 韓使來朝 • 編其唱和詩付策曰 『樣客通節集』 行于世, 正德 4 年 (1714) 甲午 5 月 朔日示寂 • 世壽 57, 塔于當院〉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別宗和尙 (1658~1714) 은 41 번째의 輪番僧으로 元祿 13 년 (1700) 5 월부터 동 15 년 (1702) 6 월까지 對馬島 以配菴에 거주하고 1711 년 10 월, 조선동신 사래빙시에는 建仁寺의 雲堅永集和尙과 함께 加番接伴僧으로 수행하여 江 戶에 등성했다 . 오늘날 京都 相國寺 慈照院에 傳存하는 天和度 (1682) 의 창화시고, 죽 天 和 2 年 (1682) 8 月 5 日 別宗祖緣이 南禪寺 大方長老를 따라 객관인 本國寺 를 찾아 신사와 창수한 詩獲原稿에 대해서는 이미 洪世泰와의 교환에서 상 술한 바이다. 한편, 1711 년 통신사 趙泰億 일행이 別宗祖緣長老에게 증답한 自筆詩獲 『韓客詞章』이 慈照院에 현존하고 있다 .32)
32) 《京都新聞》 1982 年 10 月 1 日付, 《神戶新聞〉〉 1982 年 10 月 5 日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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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客詞章』은 卷軸으로 分裝되어 箱子裏書에 〈正德辛卯別宗大和尙承命 接伴韓人於江府有唱翻許多篇粹行于世矣而今輯韓人所記似詩室裝構以爲四軸 永置于慈照文庫〉라고 명기되어 있다. 이 『韓客詞章』에 대해서 水田紀久 氏 의 Ii'稿約風雅集』 解說同補遺에 상론했다 .33) 雨森芳洲 編 『緖約風雅集』에는 33) 水田紀久 『稿約風雅集』 解說同補遺(關西大學東西學術硏究所資料集刊 11-1) 참조.
1711 년의 신사일행 죽 正使 • 副使 • 從 事 官 三 使률 비 롯하여 製述官 • 書 記 등이 사행중 일본 유학자 문인들과 창화중답한 것인데 주로 奉謝 • 次韻 • 留 別의 시 및 기타往還誕諒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稿約風雅集』 卷 11 에는 別宗祖緣長老에게 차운한 것이 실려 있는데 rJ '韓客詞章』은 이 原 詩稿에 해 당한다 . 그리 고 『鎬許風雅附集』에 들어 있는 別宗和尙의 贈詩는 이와 對句를 이룬다. 그런데 『韓客詞章』에는 현존하는 『稿舒風雅集』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시 16 수와 서한 3 몽이 보인다. 예를 들면 전기한 『同補造』에 抽記되어 있 지 않은 것으로서 「和寄別宗長老道案」 〈刀頭明月正浮燁 洲海星 樣 萬里歸 便 與高僧三笑別 天珪雲雨各分飛 辛卯稀月 靖庵稿 〉 가 있다. 또한 〈願神道案 乙乙回示病草不備 泰億拜 別日潮迫恨 證 難勝, 腹 蒙 臨存 病未面討,尤用恨數, 長篇之睦感荷實深, 病中神思荒塞行 事 挑腦勢未假仰和 深軟 旦妹三郞渡海在於何朝, 所討者何賊, 藤戶在何方並乞詳敎旦未知三郞 於師爲幾代遠祖〉라고 한 서한도 들어 있다. 그런데 同補遺에 미 수록이 라고 한 〈龍湖奉稿又次惠韻 • 天珪歲月 己峨峻 ……〉은 「稿約風雅集」 228 쪽에 , 平泉奉 藥 〈奉謝別宗長老詞案 炳炳男兒報國 誠……〉, 靖庵 〈奉謝別宗大師道案異邦誰與討心誠……〉 및 南岡散人拜稿 〈翻謝願神長老道案縣動原限盤微誠……〉 등 3 수는 『稿許風雅集』 219 쪽에 수록되 어 있음을 밝혀 둔다 .34)
34) 앞의 詐訪 2.!] 14-15 쪽.
조선통신사의 집반승 중 別宗長老는 시문창수에서 가장 이채를 띠고 있 다. 別宗長老는 귀로, 正使가 자기 나라를 위하여 바치는 ' 충정에 감동하여 七絶 一首를 봉정하였고 正使가 이에 증답한 시가 『韓客詞章』에 보인다. (東武歸路小詩一絶奉星三使大人旅楊下柳慰覇情) 爲國忘身奏 薔 誠 明君何不感忠情 東華萬里榮旋日 定識盛名齊關生 別宗 奉謝別宗長老詞案 炳炳男兒報國誠 異方誰與訴表情 終年遠役君休問 王事關心白髮生 趙泰億
실은 新井白石의 건의로 신사점대의 간소화 • 國王號의 復行 죽, 〈日本 國大君 〉 을 <日 本國王 〉 으로 고치 고 또 國諱論爭의 결 과, 趙泰億은 귀 국복 명 후 辱國의 죄까지 면할 길이 없었다 . 그러나 同道 詩文唱뼈에 열정을 기울인 別宗長老의 정의를 잊지 않고 王事가 마음에 걸려 백발이 생긴다 고까지 호소한 심경은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韓客詞章』에 들어 있는 副使 任守幹의 「奉里別宗長老道案」 〈日 祚幸蒙國王殿下張以樂興之伏切感敗不任區區, 初構短篇求正慧眼〉이 라고 한 이 原詩 凌 은 新井白石이 家宣 將軍에게 상정했으므로 여기에 등사하여 그 결락을 보완한다고 한 別宗祖緣諦記의 詩稿 原 쫓 은 다행히도 名古屋 新井 家에 현존한다. 전기한 正使書翰에 〈三郞渡海云云〉한 것은 죽 德川將軍으 로부터 조선국왕에게 보낸 金彩畵居風 20 쌍 중의 하나로 「源盛網渡藤戶海 圖」 (狩野探 雪畵) 를 말한다 .35) 別宗和尙은 正使의 물음에 대 해 서 〈追感一首 星 三使大 人並引〉이 라고 題하고 〈我殿下所贈居風有佐佐木三郞源諱盛網渡海 圖 三郞 郞我遠祖兵部諱秀義之第三子也, 往昔戰爭之日, 直渡藤戶海而爲先 登武名偉功赫赫今古我難出家未忘其本, 在東都之日幸得見此固不勝追感, 因 賊一絶述卑懷聯供三使大人之一菜伏乞完政〉이 라고 詳記하였다. 그런데 이 병풍은 귀국 도중 파선으로 인하여 공교롭게도 해중에 침몰되고 말았다고 한다.
35) 『新井白石全集』 第 4 卷, 白維帖 • 源盛綱渡藤戶渡海.
2) 海東詩文帖 1711 년 일본 유학자 문인들이 신사에게 상정한 시고『海東詩文帖』 36) 에 는 別宗長老의 「味富士山三首錄星三使大人哈案下求敎」 등 6 편이 들어 있 다 . 殿上辱暗朝鮮三官使觀樂舞譜賊一絶奉謝恩遇兼星倉公旅楊 鳳翔鷲舞武昌城 金石經銀奏九成 兩國太平歡笑語 一齊和入管鉉聲 辛卯仲冬 別宗拜稿
36) 『海東詩文帖』 1711 年 信使와 接應하여 詩文울上星한 識蘆主人 • 松浦 霞 沼 • 三 宅田立演革漠 ·• 木高下玄 菊m 潭•· 三雨宅森觀芳源洲祗·園守南玄海堂 • ·源林綱信條篤 • ·武林江信萬充年丕·山信 智및· 別霞宗洲組·緣平의元 成自·筆臨詩川肇 이 들어 있다(東洋文庫所藏).
味富士山詩에는 〈東遊歷過富山陸 朝徹夕陣景狀奇 定識神靈多喜色 三韓 嘉客競題詩〉라고 읊었는데 富士山과 金剛山에 대한 자랑은 이미 앞에서 詳 述하였다. 3) 樣客通節集 別宗祖緣和尙은 1711 년 신사일행 과의 창화시 를 편수하여 「接客通尙集」 3 7) 이라고 題하고 別離의 筆語롤 붙여 다음해 5 월에 출판하였다.
37) Ii'接客通簡集』 卷 3 • 正德初元辛卯鎖印 • 三韓使星族雄才於扶桑六十州之中 • 萬嶽 老宿揚美擧於折木數千里之外·洛下書隸臨泉堂誌·卷首에北郁可昌叔·椎客通節集姓 名·卷末에〈正德二年壬辰五月穀旦文台屋次郞兵衛·同儀兵衛開版0)刊記, 弟子祖沖· 祖會編集〉이 라고 명 기되 어 있다.
日光八景圖贈목에 관해서는 『接客通尙集』(卷 2) 에 「向星二荒山 一 作日光 八 景 圖 一軸於三使大人護案佳篇各賊新詩見惠因裁一絶奉翻倉公詞案」이 라고 題하고 다음 七絶 一首를 실었다. 二荒峨峨壯洪基 一幅丹靑描得奇 神德永騰添瑞氣 雜林官使爲題詩 別宗和尙온 자기에게 受衣한 英中老師의 頂相에다 三使의 讚을 청했던 바 各各 狀然이 讚을 書寫해 주어 그의 心聲墨妙에 홈복해 마지 않으며 吾師 의 遺德을 발휘해 준 것도 三大人이다. 따라서 奉謝의 시를 다음과 같이 상정한다고 하였다. 山河大地我師眞 無相相中面目新 定理正知開笑眼 微言讚盡樂浪人 끝으로 「攝州河口船上臨別筆語」를 2,3 구절 소개하며 이 장을 끝마치고 자 한다. 正使는 〈願以一杯相別幸勿辭却〉이 라고 하니 別宗도 〈難空門元戒 酒向有公命追暗盛案方今何取辭哉〉라고 하였다. 마침내 離別에 앞서 製述官 李東郭온 〈振師手不忍辭去 • 以手揮耳作語言 不通之勢左右顔勸行不得已而分柚乃當廻棒微然發帝師亦洋泣覆面〉이 라고 하 였다. 석별의 정이 넘쳐 흐른다.
제 5 장 戊辰年(1 748) 使行 1748 년 (英祖 24) 家重 將軍의 襲職응 축하하기 위 해 서 正使 洪啓f성 일행 475 명은 그 전해인 丁卯年 11 월 28 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12 월 16 일 東萊에 도착했다. 순풍을 기다려 약 2 개월후 戊辰年 2 월 16 일에 宗氏의 호행을 받고 釜山浦를 출범하여 對馬島를 거쳐 江戶로 향했다. 5 월 21 일에 江戶 에 도착하여 6 월 1 일 국서와 별폭을 진정하고, 장군의 향연, 馬上才관람 등 제행사를 마치고 6 월 9 일 將軍 家重의 답서와 별폭을 받아가지고 6 월 13 일 回程에 올라 京都룰 거 쳐 동 28 일에 大坂에 도착했다. 그 후 7 월 7 일에 信使渡海船을 타고 대판을 출항하여, 동 18 일에 對馬島로 들어와 참 시 체류한 후 間 7 월 13 일에 釜山浦에 착륙한 뒤, 동 30 일에 귀경하여 복 명했다 . 일본 왕환에는 270 일을 요했다. 戊辰年使行의 인명록!)은 다음과 같다. 正 使 通政大夫 吏曹參議 知製敎 洪啓禧 젊갑겔 年 46 副 使 通訓大夫 行弘文館典翰知製敎兼經 楚侍讀官 春秋館編修官 南泰耆 翻을 年 50 從事官 通訓大夫行弘文館校理 知製敎兼經 雜侍讀官 春秋館記注 曹命采 ‘법통 年 49 正使船 166 명 子弟軍官 通 德 郞 洪景海 前 同 知 白尙輝 名武軍官 前府使 趙東晋 訓鍊正 金桂岳 都抱都事 李梧齡 訓鍊主簿 李吉儒 禁旅軍官 前同知 金壽鼎 1) 洪景海撰 『隨接日錄』(乾)人名錄. 松田甲 「李朝英祖時代戊辰信使0)一行」 『日 鮮史話』 第 4 編所收 참조.
製述官 前 典籍 朴敬行걸듦問 年 39 書 言B 氷庫別檢 李鳳煥 걸룹: 年 39 堂上譯官 朴尙淳 福: 年 49 上通事 李昌基 겁쥴률 年 53 押物通事 崔鶴齡 길홍롭 年 39 崔 壽 仁 益홍 年 40 良 醫 通 德郞 趙崇 壽 걸儒훑 年 34 畵 員 前 主 簿 李聖麟 ;훑: 年 31 別暗行 幼 學李得 壽 셜:人 前萬 戶 金夏鼎 셨::昌g훑歸 別破陣 金尙龜 馬上才 印文調
典 樂 延益成 騎船將 徐克濟 卜船將 宋世基 廳 直 姜必福 都訓導 尹道長 暗小童 文聖訓 I 李枝興 河應運 碑將廳小童 孫德緯 製述官小童 金淸風 首譯小童 鄭起仁 使奴子 就 男 同 令 . 都沙工 姜弘晋各員奴子 18 명 吹 手 6 명 羅 將 6 명 砲 手 2 명 旗 手 4 명 刀 尺 2 명 小通事 3 명 沙 工 7 명 格 軍 86 명 倭通事 4 명 倭禁徒 3 명 倭沙工 6 명 倭下知 7 명 副使船 160 명 子弟軍官 前 司 果南衍明 副司正 尹世佐 名武軍官 宣 傳 官 田光國 同 上 李 摘 同 上 李邦一 內 乘 · 李逸濟 禁旅軍官 折 衝 林世載 書 記 前奉事 柳返 걸孟겔 年 59 堂上譯官 玄德淵 ::릅 年 55 上通 事 鄭道行 ‘偉교 年 55 次上通事 黃大中 뀝핥 年 34 押物通事 (漢學)崔菌齊 益: 年 59 醫 員 前 主 簿 趙德祚‘롭옵 年 40
寫字官 嘉 善 金天秀 걸墨훑 年 40 別暗行 通 德 郞 金佐升 以名從伴 人 別破陣 金舜澤 典 樂 沈 漢 騎船將 房應文 卜船將 徐後禪 盤睦直 李世益 都訓導 鄭興邦 暗小童 兪宇天 孫聖源 崔龜甲 碑將小童 李應望 首譯小童 朴致祥 使奴子 繼 得 千 金 都沙工 金尙萬 各員奴子 16 명 吹 手 6 명
羅 將 6 명 砲 手 2 명 旗 手 4 명 刀 尺 2 명 小通事 3 명 沙 工 7 명 格 軍 85 명 倭通 事 4 명 倭禁徒 3 명 倭沙工 6 명 倭下知 7 명 從事官船 146 명 子弟軍官 副司果 李喜春名武軍官 前 府 使 李柱國 武 兼 曺命傑 書 記 進 士 李命啓 ‘‘훑 年 35 堂上譯官 洪聖龜‘ 걸걸 : 年 51 上通 事 (漢學)金弘喆 保聖皇眞 齋年 34 次上通 事 玄泰衡 孟問젊 年 31 押物通 事 黃歷成 걸졸걸 年 54 醫 員 前主 簿 金德福겁孟嬰 年 46 寫字官 上 護 軍 玄文龜 걸畵‘ 年 38 伴 人 李枝成 馬上才 李世蕃 騎船將 白璃一 卜船將 金潤興 盤盤直 曺世彬 都訓導 鄭泰興 鄕 書 記 辛重來 暗小童 權孟集 徐慶元 2) 裵應大 碑將小童 白璃楚 首譯小童 韓世英 使奴子 老 味 應 聖 都沙工 崔聖次 2) 徐慶元은 1748 年度 使行때 從 事 官屬 小童이 다. 宇野宗佑 著 『中山道守山宿』 七 五이三 (家J )寶膳 로( 靑遺 珪存房되 고刊 있19다84 年한)다에. 朝鮮國 達城人 徐慶元의 필적을 • 병풍으로 만든 것
各員奴子 12 명 吹 手 6 명 羅將 4 명 砲 手 2 명 刀 尺 2 명 得~ 젊還到歸馬 島 小通 事 3 명 沙 工 7 명 格 軍 84 명 屠牛匠 1 명 倭通事 4 명 倭禁徒 3 명 倭沙工 6 명 倭下知 7 명 1 畵員 李聖麟과 大岡春 卜 戊辰年 (1748) 通信使 畵員으로 來日한 李聖麟 (1718~1777) 의 작품으로는 『畵史會要』明淸之部에 ® 墨梅 蘇齋草, 朝鮮畵員李聖麟蘇齋 卜號7-. . ® 墨 竹朝鮮蘇齋筆이 있고 또 『古畵備考』 50 朝鮮書畵傳에 李聖麟字德厚 • 號蘇 齋, 寬延元年戊辰來 畵員 朝鮮國蘇齋李聖麟寫 右御物在御小座敷, 松竹網 本橫坡 (補]蘇齋草 (補〕朝鮮蘇齋筆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이밖에 현존하는 것으로는 ® 한국국립박물관 소장 「椎路勝區圖」 2 卷 30 圖, ® 家藏 「壽老 人圖」 金啓升費 ® 酒川子所藏 山水圖 紙本墨畵淡彩 114. OX49. 6cm © 평 양국립미술관 소장 「山水圖」 雙幅과 「遣蓬圖」가 알려져 있다. 李聖麟이 귀로에 大坂 客館에서 畵師 大岡春卜과 해후하고 畵會룰 열고 交歡한 것은 다음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畵師 春 卜”의 이름은 愛董 • 號 는 雀Ill'.:, 또는 一翁이라 한다. 狩野家의 화법을 배웠으며 명성이 높아 法 眼에 叔하고 실로 근세의 명수라고 전해온다. 1763 년에 향년 8 때1 로 殘했 3) 抽稿 「通信使 畫 員李聖麟之大岡春 卜 &0) 畫 會i C? t Tc 」(朝鮮學會 第 36 回 大會要 項 1985 年). 『古 畫 備考』 26 名 畫 大岡春 卜, 『大阪人物誌』 215 쪽, 藤岡作太郞, 『近 世繪 畫 史』 170 쪽 大岡春 卜, 『浪華人物誌』 卷 2 68 쪽 大岡春 卜 참조.
는데 1751 년에 명 저 『畵史會要』 6 冊을 펴 냈다. 『家彭集』 에 는 慶賀漢詩와 和歌 및 俳諸가 수록되어 있다. 『家彩集』 序에 今年延享夏 韓國賜使 俺留于浪華, 常 好 事 之士 多到旅館而對諸客 有送 詩述文以筆話者 或有荷紙擔扇 以令 書 字者 日 日狼狼于坐右矣, 又有韓人 畵員李聖麟者 號蘇齋 私乞彼畵圖者亦不鮮也……浪華之 畵 師 法眼大岡春 卜翁來官舍, 謂予曰今欲賜蘇齋, 冀以官吏之因許容而爲我計之平……翁笑 答曰我老矣, 蓋其遊于藝也治久, 荀枚枚而不已者進之謂裁, 今炫韓客之來 聽 避返而在側幸窟視於其筆意而彼若有漢土名畵之遺風則取以易夫不得我 助耶……翁亦駿然而來, 蘇齋執其手 撫其族有嘉色而謝翁之來凱, 坐定而 後互揮筆模墨畵 蘇齋寫於梅月, 福祿壽之圖, 翁寫於野馬山水, 梅花, 蓮 鷺, 苗誰 長果郞之圖 ...... 各相共以其畵圖交易而盟於長爲家藏, 固和漢之 奇觀也. 이 서문을 쓴 軌同源直救는 大坂의 韓使客館에서 賓傑의 官務를 맡아보 았는데 畵使 大岡春卜울 周旋한 사람이다. 객관에는 호사가들이 몰려들어 필묵을 구하려는 사람이 좌우에 봄비었으며 또 畵員 李聖麟의 그림을 청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春卜은 藝에서 논 지 오래되었는데 韓客과 해후하여 그 필의를 엿보고 漢土의 遺風이 있다면 그것을 취하면 도움되 리라 생각하여 賓館을 찾아가니 聖麟온 春卜의 손을 붙잡고 무릎을 만지 며 반겼다. 좌정한 후 봇을 들고 蓋齋는 梅月, 福祿壽老人圖를 그렸고 春 卜은 野馬 山水, 梅花, 蓮鷺, 苗雅, 長果郞圖를그텨 서로 이 畵圖를 교 환하며 오랫동안 家藏할 것을 다짐했다는 것이다. 후일 春卜翁울 위해서 案을 베풀고 碩詞를 모아 蘇齋가 휘호한 그림도 넣어서 『家能集』 4) 이라고 이름 붙이고 畵會의 취지를 적는다고 하였다. 창화 시구의 일부를 소개하기로 한다. 法眼春 卜與韓畵員 李蘇齋揮臺 對畵精妙不可言, 韓人以爲所不及大稱歡焉 風流五採自縱橫 濃淡丹靑妙手輕 筆下精神誰好敵 天工造化便人驚 訥齋石 文潛 4) 桑韓畵會家能集 刊本 _._冊(岩源文庫所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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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代佳會對秋陰 視上起雲關漆深 蘇子白梅津外發 一翁墨馬走雅林 帶雲軒 恭賀大岡君與韓國畵士 縣齋於西本顔寺之堂上 互爲畵結奇緣 山山筑重重 閔尺畵層樓 客鳴筆坐兒 童垂釣遊陰 陰陰林岳雨狼眼石中流 勝景方寸埋 筆端得自由 金峰百安宅 朝鮮之畵史李蘇齋者 延享夏 適暗韓侯之來賜於本朝, 先着于攝江之下焉 于炫소業徒大岡法眼春 卜 號一翁 行年七十又餘而自尻齡游畵工之藝, 硏精 於漠石俺思於山水, 于炫有年矣, 欲試李蘇齋畵左任駒行 賜于蘇齋旦請畵 蘇齋紙筆而畵, 卜復執筆而畵於花鳥人物等, 蘇齋拍手驚軟曰絶妙精巧, 所 謂畵家百世之師也, 於是爲與以靈藥三圭而愍勳謝之, 是宜不假聲聞而存良, 生人之要道不朽之鴻圖哉, 是以高人逸客同不慕其雅風, 故諒歌題詩潮又裁 詩二絶 戱模畵一張以碩其德也 仙客飛昇雲霧臺 碧波萬里乘雲來 人間爲與長生藥 不知何處去不回 그리고 이 畵會席上에서 春卜의 門人 法橋江阿彌卜信도 葬琴(물총새), 韻領, 山崔, 英容, 猿 1 侯룰 그렸다. • 『家能集』에 수록된 和歌俳句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참고 삼아 日 語 원문대로 싣는다. 寫 L 箱 0 筆宅入??훈唐人心 秋津寸力갑:宅猶 L t―丘 5k 永田計年 力士)人t 尤力겁于心宅寫 L 及(J)筆(I)十혼入 l i世世t댜 b 균t으 L 小澤金船
神代J: b 豊尤 L 原 0 秋津洲宅唐土人(l) l.,t..:V'-c꾼 <石 嘉佳 難波 0 法眼春 卜翁.::. 主人t乙主入之給 0 繪 0 事 t乙뿜 h 有心御代 0 光 b 在祝 L 、 --c 高麗人t & 心t:初心--c入 ?O 濱.::.~難波t£石途 K L 成 8 凡 皇都淸庫 力홍力댜寸筆 O 촌力汶-t治 h 石御代 0 t..:沈 나드 0 〈 力、프 主人 內藤氏武女 浪花江 0 筆 0 寸폰入宅乙主人'i L 겉尸 A --C國 0 土産t :A 寸 8 L 橘熙完 ^t: c t£총繪 0 友ts:. G~ 力따졌켜나:知 8 心 :0 葉 0 心& <主 균 春川門人直救自畵(直救는 『家能祭』 서문을 . 쓴 사람이다) 慶賀俳諸之部 韓 0 繪力:何浪花江 0 言 K 誰 雪阜 朝鮮 0 扇K 力、力、九翁草 巴田 高麗人ti챠아남石 t m 玄小드 드하乙日本一&誰力 \O L 꾼 泉州尾廢 法眼 0 畵宅蘇齊t오主ii b f歸机寸 松井求馬 大岡法橋江阿彌朝鮮人浪花 0 旅館'디會合 L f名藩宅祝寸 河南 東我
大岡兩師 O 畵宅蘇齋乞請f拜稅感賞基 L 눈 t다唐韻 0 治力、 l.., ~ t - U i 田中義元小華人浪花 0 宿寺御堂 K f#@繪合 0 尤 b 나다樂 0 紹宅& b 替 L 稅 0 餘 唐人佛藥三丸宅送石 爲机 韓畵 0 旅館 K 會 L f主寸主寸大岡氏 0 高畵宅尤 8 itf實 K 國 0 寶t L 、!i 人, 立穀軒 五J II 又 L 、?&何力넋:。主人: 主 AK 逢心 J:ii L 、 t 主 h@ 七 풍 b 宅 法眼春卜一翁 『家能集』 卷末에 于時寬延二己巳歲三月 日 大阪南本町一丁 目 書林 村井 喜太郞開板이라고 되어 있다. 죽 『家能集』은 戊辰年 信使畵員 李聖麟이 귀국한 다음해 3 월에 大坂書店에서 발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2 崔北의 渡日 戊辰年 (1748) 信使의 畵員으로서는 李聖麟만이 使行 인명록과 일본측 「通 航一覽」에 나오며 崔北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 그런데 Ii'畵史會要』(明 淸部)와 『古畵備考』(朝鮮書畵傳)에는 崔北의 방일시의 작품이라고 하여 수록된 것이 있다. (1) 『畵史會要』에 ® 朝鮮畵員居其齋筆寬延戊辰年來朝 山水圖 ® 居其齋 墨菊 (2) 『古畵備考』에 ® 崔北 字七七 號居其齋 菊花小萬御物 〔補〕 居其齋 墨菊紙 ® 朝鮮國居其齋崔北七七寫 山居圖 費金啓升 〔補〕寬延戊辰季夏 朝鮮國居其齋崔北寫 山居圖網本淡彩大橫 平坂氏藏 費 金啓升 漠漠水田飛白鷺 陰陰夏木晴黃鵬 眞狂金啓升書 〔補〕 朝鮮畵員居其齋筆 月夜山水紙墨 崔~t畵貸 朝鮮國龍門山玩競齋主人眞狂金啓升君日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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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記 『畵史會要』와 『古畵備考』의 ®, ®는 동일 한 내 용의 것 으로 생 각 된다. 이 밖에 현존하는 것으로서는 「崔北筆山水圓」에 戊辰季夏 朝鮮國居其齋 七七寫라는 낙관이 들어 있다. 5)
5) 崔北筆 山水 Ill 紙本 墨 畫 128. 4X55. 4cm( 酒川子그 V 夕 > 크 `Y), 『小倉그 V 夕 > 크/目錄』(油印本) 繪 畫 及 書 47 「居其齋山水」가 수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遺存하는 작품과 문헌기록을 통해서 볼 때 崔北의 방일은 거 의 틀림없으나 다만 정식기록인 使行錄에 崔北의 이름이 없다는 점, 그리 고 崔北의 작품에는 崔北과 莫逆之友인 金啓升의 養이 들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메 崔北 자신은 방일하지 않았을지라도 金啓升이 來日할 때 崔北 의 작품을 持來한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1748 년 通信使製述官 朴敬行(號 短軒) · 등과 日本 篠山藩 家老 松 崎觀海 (1725~1775) 와의 筆談唱和 『來庭集』 6) 에 다음과 같은 중요한 기사 가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6) 來庭集 松崎觀海와 信使와의 筆 談唱和集 刊本 內閣文庫 所藏, 抽稿 「朝鮮朝 家 崔北0)訪日 K? t、 T 」, 朝鮮學會 第 40 回 大會要項 19, 8 9 年 .
也―慕火
初見筆語 觀海:聞足下多寫字作態, 僕不政望揮蓬, 唯示尊姓名 金啓升 : 龍門山下玩毅主, 姓金 名啓升, 字君日,號眞狂, 新羅王孫八 代相之孫也, 不見科目,不出仕路, 入於龍門山下, 意外副使率來, 故不得 己來此故耳 觀海:足下姓名何如, 見居何官 居其齋 : 居此處, 號居其齋, 伯基未答問. 여기에서 居其齋라 한 것은 崔北의 號이다. 觀海가 足下의 성명은 무엇 이며 지금 무슨 官으로 있느냐고 하는 물음에 崔北은 여기 있는데 號는 居其齋(거기재)이니 거기 있으며 몹시 바빠서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겠다 고 한 것은 퍽 풍자적이라고 보아야겠다. 이 날 筆談唱和席上에 는 上記한 製述官 朴短軒, 金啓升, 崔北 이 외 에 書
記 李鳳煥(號 濟菴), 李命啓(號 海阜), 良醫趙崇 壽 , 寫字官 玄文龜(號 東 巖), 小童 金淸風, 白文光 등이 배석했다. 이상의 문헌기록으로서 우선 崔北의 방일은 확증을 얻은 셈이다. 다음은 崔北의 방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李漢 (1681~1763) 의 『星湖 先生全集』 卷 5 에 「送崔七七之日本」 三首”가 있다. 確頭山色遊連空 諒死之宗路始通 聲敎東酒問何世 天心會借一机風 九郡山川歷覽多胸中包括果如何 當年徐福求仙地 又逐星轄接쁩過 抽懷平生矢壯觀 奇遊天外隔波漁 扶桑枝上眞形日 描畵將來與我看7) 河宇鳳, 『朝鮮後期實學者의 日本觀硏究』 57 쪽(一志社 1989 年), 『星湖先生全集』 卷上 5 景仁文化社 19741 f..
崔北이 일본에 가는 것을 송별하는 이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扶桑(일 본을 가리킴)에 가서 그림을 그려다가 나에게 보여 달라고 했으니 이것으 로도 崔北의 일본행은 틀림없다고 보여진다.
이 밖에 「尾張名所圖會」 부록에 는 延享 5 년 (17 48) 朝鮮信使의 귀 로에 阿 野坂에 있는 三田家에 둘렀을 때 暑氣가 심하여 물을 청했더니 주인이 葛 湯(설탕을 탄 갈분 암죽)을 내주어 모두 炎暑를 잊어버렸다고 하며 주인의 후의에 보답하는 의미로 시와 서화물 선사했다. 三田家에는 居其齋, 西岩 의 墨 書 등이 지 금도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8) 活字本에 는 〈居甘齋〉로 되 어 있으나 崔北의 낙관은 얼핏 보면 〈其〉자가 〈甘〉자처럼도 보이므로 아 것은 돌림없이 〈居其齋〉일 것이다. 또 한 가지 文獻記載로서 는 「延平 뿜 齡依母圖」” 朴齊家修其寫誌에 다음 과 같은 기록이 있다.
8) 『尾張名所圖會』 卷 6, ·1 0 쪽, 圖會附錄 小治田之眞淸水卷之四, 阿野坂 朝鮮人 通行圖 333 쪽, 三田家는 鳴海矢作川中間 阿野坂에 있었다. 9) 藤塚鄭 『日鮮淸0)文化交流』 3, 鄭成功母子O)fll~純石 日, 鮮 • 明 • 淸 0)文化 交流 中文館 書 店 昭和 22 年 참조.
朴齊家 延平빵齒依母 lll
明나라 末期 鄭芝龍은 일본의 贊콰(塔)로서 成功을 낳다. 成功은 어 머니를 따라 일본에 留居했다. 우리나라 崔氏가 예술을 가지고 扶桑에 놀았는데 일찍이 이룰 위해서 眞을 寫하여 稿롤 남겨가지고 돌아왔다. 지금 崔氏 집에는 후손이 없다. 稿는 吾師한테 남아 있는데 齊家가 이를 臨模했다. (原漢文) 鄭成功 (1624~1662) 의 아버지 芝龍은 일본부인 田川 氏를 처로 맞이하여 成功을 낳고 일시 長崎平戶에 있었으므로 처가에 기식했다는 뜻에서 賢恐 라는 말을 썼을 것이다. 鄭成功온 台灣을 거점으로 청나라에 항전하며 일 본에 원병을 청한 적도 있다. 近松門左衛門의 「國姓爺合戰」이 유명하다. 여기서 말하는 崔氏란 과연 누구일까. 예술을 가지고 일본에 놀러갔다고 한다면 돌림없이 통신사를 따라간 畵員일 것이다 . 통신사가 전후 12 회 방 일했는데 이 중 畵員으로서 崔氏는 한 사람도 들어 있지 않다 . 한편 중국 화가 중 崔鍾 : 〈工人物仕女, 學無秉貞法, 三韓人〉. 三韓人이 라고 했으니 朴齊家가 혹시 崔緖를 조선사람이라고 본 것은 아닐까도 생 각해 불 수 있다. 그러나 이 三韓이란 결코 10) 한국이라는 뜻이 아니고 中 國 遼東人을 三韓人이 라고 했다고 한다.
10) 崔譜(淸)字象九(一作象州),三韓(今內蒙古瑢喇f心旗)人, 與黃鼎(1 660~1730) 友 善 (『中國美術家人名辭典』 800 쪽 , 兪劍草編 1981 年) .. 三韓 : 遼東울 말함(日知錄 • 外國 • 三韓). 今人謂遼車爲三韓者云云 •••••• 遂有謂遼人爲三韓者, 外之也, 今遼人 乃以之自稱 (『漢和大辭典』 1~118 쪽) 山內長三 氏는「淸國 T 活躍L,t::朝鮮畫 家」(《韓 國文化》 1983 年 1 月號) 에서 崔譜 • 三韓人을 조선인으로 보았다. 그후 《韓國文化》 19W F-5 月에 이것을 찰못이라고 정정했다. ’
이렇게 볼 때 역시 崔北이 일본에 가서 이 延平뿜齡依母圖(鄭成功이 6,7 세 때 어머니와 같이 있는 그림)를 얻어서 이것을 모사하여 가지고 돌아간 稿本울 朴齊家의 스승(朴g.J1:源)집에서 얻어보고 이것을 臨模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상 詳論한 바와 같이 정식 사행명록에는 들어 있지 않으나 崔北은 툴 림없이 방일한 것이 확증되었다. 그러나 崔北의 이름이 사행록에서 빠졌다 는 것은 여전히 그 의문이 남는다. 혹시 이미 신사일행의 인선이 끝나 使 行節目講定이 결정된 후, 金啓升의 知遇를 얻어 급거 추가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제 6 장 甲 申年(1 764) 使行 l 信使의 訪日 甲申年(1 764) 에는 제 10 대 장군 家治의 습적하사로 趙職 일행이 방일하 였다. 통신사 일행은 1763 년 8 월 3 일 崇賢門에 입시하여 영조대왕으로부터 〈好 往好來〉 4 자의 御 筆 을 하사받고 辭陸한 후 서 울을 출발, 육로로 남하하여 8 월 22 일에 부산에 도착했으나 순풍을 기다리느라고 시간이 걸렸다. 10- %l 6 일에야 對馬島 迎聽使의 호행으로 부산포를 출선, 對馬島 府中(嚴原)으 로 건너가 島主 宗義暢의 영접을 받고 함께 출발하여 一岐, 藍島, 下關, 稱浦 兵庫를 거쳐 1764 년 1 월 20 일에 大坂에 도착하였다. 다시 河船으로 泥川을 朔行하여 泥浦 에서 육로로 바꾸어 京都를 경유하여 2 월 16 일에 江 戶에 도착하였다. 2 월 27 일 장군에 알현하고 국서와 별폭을 진정한 후, 3 월 6 일 마상재의 곡마궁술을 관람시키고, 3 월 7 일 장군의 답서와 별폭을 받아 가지 고 3 월 11 일 江戶를 떠 나 귀 로에 올랐다. 그런데 4 월 5 일 大坂 에 도 착하 여 귀국준비를 하던 중 4 월 7 일 밤 大坂客館(西本願寺 北御堂 • 津 村別院)에서 都訓導 崔天宗이 對馬島의 傳語官 鈴木 傅藏 에게 刺殺 1) 당하 는 일대참사가 돌발하였다. 그리하여 正使 趙職은 이 사건의 처리를 위하 1) 崔天宗被殺原因에 대하여 正使 趙藏 『海樣日記』 狀啓에 〈罪人傳 藏供曰 所以刺 殺崔天宗者四月初六日在坂城, 天宗失鏡使傳藏授索之而終不得, 天宗云日本人能盜傳 藏惡道卽是朝鮮 人 最能爲盜 , 相與怒 照 , 終至於天宗以陳痛打傳藏, 傳藏莊念, 欲亂退 其心而不得其便, 於是方其夜潛 藏館 中何際乃得乘疑而行兒〉이 라고 하였다 . 그런데 『寶曆物語』(日本國立國會圖書館藏本)에 의하면, 신사의 船將이 인삼을 가지고 와 서 傳藏에게 轄賣를 부탁했으나 취체가 엄하여 성사 못하니 都訓導인 崔天宗을 원 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귀로에 濱松宿所에서 天宗이 傳藏에게 숙소가 너무 초라하 니 다론 곳으로 바꾸라고 명 한즉, 傳 藏 이 기 껏해 야 하롯밤이 니 참고 있으라고 하 자 天宗이 대노하여 傳 藏 을 채찍으로 때렸다는 것이다. 人薔 轉賣 에 대해서는 金仁 謙의 「日東壯遊歌」에 〈傳 藏 이 納招키를 夢 商일로 죽였다네〉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리고 崔天宗 피살사건은 일본 歌舞使 무대에 등장하여 1767 년에는 〈世話料理 鍾 鹿丁〉이라는 이름으로, 1789 년에는 〈漢人韓文手管始〉로 바뀌어 상연되었다. 해방 후에도 1973 년에 大阪 國立劇場에서 상연되었는데 異國情緖가 풍긴다고 하여 오늘 날까지 일본의 歌舞使 사회에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볼 때 220 여 년 전의 참상이 연
상된다. 『漢人韓文手管始」(『日本古典文學大系』 53 「歌舞使脚本 集」 岩波書店刊), 中 村榮孝 『朝鮮―風土 • 民族 • 傳統-』 162 쪽(吉 )I1 弘文館 昭和 46 年), 角田豊正 「朝 鮮通信使 & 歌舞使」 (『江戶時代0)朝鮮通信使』 講談社 昭和 54 年) 참조.
여 1 개월이나 체류하면서 범인을 잡아 처형하는 것까지 확인하고 5 월 8 일 大坂港을 떠나 對馬島를 거쳐 6 월 22 일에 부산에 귀착, 7 월 8 일 상경 복 명했는데 왕환 소요기간은 11 개월이나 걸렸던 것이다. 이때 使行은 본래 三使로서는 徐命朋 • 嚴璃 • 李得培가 선임되었지만 正 使에 임명된 徐命開은 獄事에 걸려 북변에 流諦되고 鄭尙淳이 임명되었으 나 노모 때문에 원행을 기할 수 없어 결국 趙職이 充任되었으니 말하자면 臨戰易將한 셈이다. 인원은 다음과 같다. 朝鮮通信使 一行座 目 2) 正使 通政大夫吏曹參議“知製敎 趙職 字明瑞 號濟谷 豊壤人 乙亥生, 四十五齡 副 使 通訓大夫行弘文館典翰知制敎 兼經緖侍讀官春秋館編修官 李仁培 字季修 號吉菴 • 全義人 丙申生 48 세 從 事 官 通訓大夫行弘文館校理知製敎 兼經雜侍讀官春秋館記注官 金相翊 字仲佑, 號弦菴 • 光山人 辛丑生, 43 세 製述官 前結城縣監 南玉 字時햏, 號秋月 • 宜寧人 壬寅生, 42 세 書記 正使屬 前銀溪察訪 成大中 字士執, 號龍淵 • 昌寧人 庚子生, 33 세 書記 副使屬 前長興庫奉事 元重擧 字子才, 號玄川 • 原城人 己亥生, 45 서] 書記 從事屬 成均進士 金仁謙 字士安, 號退石 • 安東人 丁亥生, 57 세 良 醫 副司勇 李佐國 字聖再, 號慕菴 • 完山人 甲寅生, 30 세 醫 員 前典醫監正 南斗昊 字天章, 號丹虛 • 英陽人 乙巳生, 39 세 醫 . 員 副司猛 成 源 字大深, 號尙菴 • 昌寧人 辛丑生, 43 세
2) 寶曆 十四年 甲申年 正月 吉日, 東海波臣題序 「朝鮮通信使一行座目」, 『海接 日 記』 「三使一行錄」 참조. 3) 朝鮮職官表東班(內職)에 의하면, 判書는 正二品, 參判온 從二品, 參議는 正 三品이다. 品階에서 通政大夫는 正三品堂上官, 通訓大夫는正三品堂下官에 屬한다. 姜在彦 譯柱 『海游錄』 (東洋文庫 252, 昭和 49 年) 332 쪽에 〈參議力仁次官級, 參判力; 局長級〉이 라고 하였다. 또 李進熙 『李朝0)通信使』 - (講談社, 昭和 51 年) 27, 29 頁에 「 禮曺參判 (外務省局長夕 7?.) 禮曹參議 (外務次官夕컷久)」라고 하였다. 이것은 찰 못된 것이다 . 〈參判〉이 〈次官級〉이고, 〈參議〉가 〈局長級〉이 될 것이다 .
寫字官 前臨溫仮使 洪聖源 字最魯, 號敷齋 • 南陽人 乙巳生, 39 세 寫字官 上 護軍 李彦佑 字公弼, 號梅窓 • 全州人 甲辰生, 40 세 盡 員 前文城儉使 金有聲 字仲玉 號西巖 •金 海人 乙巳生, 39 세 堂上譯官 資憲大夫同中樞 崔鶴齡 字君聲, 號居今齋 • 茂朱人 庚寅生, 54 세 嘉義大夫副護軍 李命尹 字聖任, 號華菴 • 金山人 辛卯生, 53 세 嘉義大夫同中樞 玄泰翼 字仲擧, 號長洲 I • 川寧人 辛巳生, 63 세 上 通 事 前司譯院判官崔鳳齡 字來儀, 號蒼翁 • 茂朱人 壬寅生, 42 세 前司譯院致正 崔弘景 字原通 , 號竹里 • 稷山人 辛丑生, 43 세 漢學前司譯院倉正 吳大齡 字大年, 號長游 • 海州人 辛已生, 63 세 次上通事 前司譯院倉正 崔壽仁 字大來, 號美谷 • 淸州人 乙丑生, 55 세 前司譯院副奉事 李命 知 字聖欽 號松潭 • 金山 人 · 戊申生, 36 세 押物通事 前司譯院倉正 玄泰心 字子定, 號明谷 • 川寧人 矣已生, 51 세 前司譯院命正 玄啓根 字'每伯, 號東巖 • 川寧人 丙午生, 38 세 前司譯院儉正 劉道弘 字士行, 號水軒 • 淸州 人 戊戌生, 4 6 세 漢學前譯院主簿 李彦頂 字處袋 號 墨哀 • 鷄林 人 庚申生, 24 세 正使屬 7 인 子弟軍官 通德郞 趙 職字士通 豊壤人 甲辰生 前浦 ) 11 縣監 李 梅字伯春 完山 人 꽂未生 軍 官 內禁將 金相玉 字溫叔 , 號石齋 海豊 人 丁未生, 庚午試
前尙州營將 柳達源 字孝伯, 晋山人 辛亥生, 丙子庭試 訓鍊院正 徐有大字子謙 達城人 壬子生, 己卯別試 前康翔縣監 李海文字孟器, 號兼泉 德水人 壬辰生, 丁丑庭試 前安骨浦萬戶 曺 信 字立中 呂寧人 辛亥生, 丙子庭試 副使屬 7 인 子弟軍官 通德郞 李德辰 字緩之 全義人 戊申生 前桃源察訪 權 琦 字奇玉 安東人 甲辰生 軍 官 前長興府使 柳鎭恒 字靜商 晋山人 庚子生, 笑酉試 前明川府使 閔惠洙 字明叔 廢興 人 矣卯生, 丁丑庭試 都抱都事 曺學臣 字心夫 昌寧人 壬子生, 辛已庭試 武兼 梁 培 字東野 南原人 笑丑生, 己卯庭試 嘉義大夫 林春興 字士賓 羅州人 甲寅生, 壬申庭試 從事屬 3 인 子弟軍官 通德郞 李徵輔 字聖甫 全義人 壬辰生 軍 官 都抱都事 任訖 字巨卿 豊川人 壬子生, 丙子庭試 副司勇 吳載熙 字敬緯 海州人 丁未生, 壬午賜聖 . 別破軍兼軍官 劉斗億 馬上才 別武士 朴聖迪 鄭道行 典 樂 金泰成 鄭德龜 理 馬 張世文字君質 正使伴人 通德郞 趙東觀字聖賓 號花山齋 副使伴人 前月松萬戶 金應錫字奎伯 號復齋 從事伴人 通德郞 洪善輔字聖老 號默齋 騎船將 3 인 金龍和居東萊 一船 金潤河 居東萊 移差代卞環 二船
2
卞 漢 居東萊 字 成之 號荊齋 卜船將 2 인 朴重三 居東萊一 卜 兪進元 居釜山 身死代金潤河 二船 鄭世泰 居釜山 三卜 都訓導 2 인 崔天宗 居大丘 身死代金光虎 文斗興居左水營 二房 鄭潤復 居東萊 三房 鄕書記 2 인 金光虎居東萊 移差代朴泰範 一房 邊啓河 居安東 三房 禮單直 李守義 京居醫人李民秀 一房 「日東壯遊歌」에 伴人 니민슈, 「桑韓筆語」 에 李民 壽 號三桂 • 正使伴人通德郞 通醫 理라고 하였다. 盤經直 3 인 金錫忠 一房 李守萬 二房 金萬裕三房 廳 直 3 인 劉聖弼 安東醫人劉漢祥 一房 鄭守榮二房 韓斗成三房 小童 16 인 白泰隆 居大丘 一房
朴泰範 居東萊 一房 鄭致仁 居釜山 一톡 金龍澤 居左水營 一房 製述官 崔致 居釜山草梁 一房首譯 玉振海 居釜山 一房 碑將廳 孫金道 居慶州 二房 金大振居東萊 一房 首譯 趙命三 居密陽 一房 林就彬 居永川 二房 金永大 居釜山 二房 碑將廳鄭重橋居東萊 二房 金漢重 · 居草梁 三房 首譯身死坂城 吳孟直 居晋州 三房 碑將廳 裵尙台 居金海 三房 朴聖信 居釜山 三房 小通事 10 인 朴再會 居草梁 一房 朴泰萬 居草梁 一房 金分雄 居草梁 一房 卜船 朴斗應居草梁 一房 朴尙點 居草梁 二房 朴元興 居草梁 二房 卜船 金聖得 居草梁 三房 朴致祥居草梁 三房 田致白 居草梁 三房 卜船 金德重居草梁 三房 使奴子 6 인 張志默 一房 廳直隨行 震道 二房 金載福 一房光郁 三房 貴 金二房 光奉三房 及唱 6 명 三房 각 2 명 刀尺 6 명 三房 각 2 명 房子 3 명 三房각 1 명 各員奴子 46 명 一房 18, 二房 16, 三房 12 樂工 18 명 三房 각 6 명 吹手 18 명 三房각 6 명 羅將 18 명 三房 각 6 명 節手 2 명 銀手 2 명 形名手 2 명 視手 2 명 砲手 6 명 屠牛匠 1 명 三房 騎 卜船都沙工 6 명 練手 6 명 株手 6 명 舞上 6 명 六船格軍 253 명 都合 480 명 (「海樣 日記」에 는 477 명 )
信使總司對馬州太守捨造 平義暢 信使接伴 京師萬年山相國承天禪寺 賜沙門承總 字維天 號葛陝 大 和人 信使接伴 京都惠 日 山東福禪寺 龍芳 字桂巖 號臥雲 京師人 郞舟院 이번 사행중 前記한 崔天宗 피살사건 의예도 萱岐島前洋에서 邸木이 부 러져 하마터면 正使船이 침몰당할 뻔했으나 다행히도 武官 徐有大와 柳達 源의 민첩한 대응으로 난을 면했는데, 후일 徐有大는 이때 공적으로 말미 암아 防禦使에 승진하였다. 正使 趙職의 공헌이라고 하면 甘蔣의 移植裁培일 것이다 .4) 이에 관해서 는 『 海樣日記』에 상세한 기록이 있다. 왕로에 對馬島佐須奈浦에서 甘菌數 斗를 얻어서 種子룰 먼저 부산진에 보냈고, 또 귀로에는 그 裁培肝藏法까 지 습득하고 甘 蔣룹 가지고 돌아와 東萊와 濟州島에 移植했는데 이것이 朝鮮에서의 甘 器 裁培의 시초이다. 趙職은사행중 徒浦의 水車”를보고別破陣 許圭에게 제작도를그리게 하 고 대마도 지도와 일본 지도를 얻어보고는畵員과 都訓導에게 모사시켰다. 「海接 日 記」 1 월 24 일條에 〈得 日 本地圖改正之本, 使畵師金有聲模之, 所謂 大地圖繁雜故置之 , 三騎將卞環以能畵與都訓導相換隨行於江戶〉라고 하였다. 江戶에 등성하여 傳命禮(國書別幅進星)를 마치고 장군의 招案에서는 전 4) 趙職 『海樣日記』(『海行提載』 四 327 쪽)에 〈島中有草根可食者名曰甘薛或謂孝 子麻 倭音古貴爲麻, 其形或如山藥, 或如符根,如瓜如宇, 不一其狀, 其葉如山藥之 葉而稽大而厚, 微有赤色, 其호亦大於山 藥 之J!, 其味比山藥而稽堅, 實有眞氣, 或似 半煥之栗味, 生可食也, 炎可食也, 完 亦可食也, 和穀而作察弼可也, 持淸而爲正果可 也, 或作硏或和飯而無不可, 可謂救荒之材料也, 此物聞自南京流入日本, 日本陸地諸 島間有之而馬島尤盛云, 其種法春和後種之於向陽之處, 待其草菱之出土租長, 取其冕 間一二節姑地俺土則隨其所俺處靴皆抱卵, 卵之大小必隨土品之當否矣……祚年初佐須 奈浦見甘菌求得數斗, 出送釜山鎭使之取種, 今於回路又此求得, 將授於萊州校吏輩, 行中諸人亦有得去者, 此物果能皆生, 廣布於我國與文綿之爲則뾰不大助於東民耶, 萊 州所種호廷, 移裁於濟州及他島似爲宜矣, 聞濟州土俗或似馬島者多, 甘薩如果燮盛則 濟民之逐歲仰 n 亂 羅倉之廷舟運穀, 庶可除矣, 但地宜未詳, 土産皆異, 蕃殖之如意亦 何可必也〉 . 上記文中 〈文綿之爲〉란 文益潮이 木綿 퍼뜨리듯 한다는 뜻입. 孫晋泰 「甘薛傳播考」 (『韓國民族文化의 硏究』) 참조. 5) 泥浦의 水車에 관해 서 는 다음과 같은 기 록이 남아 있다. 1655 年 從 事 官 南龍 翼 『扶桑錄』 (上) 乙未年 9 月 11 日條에 〈洲邊有二水車, 激水諭城制作若妙, 中國之 制少異矣〉. 申維翰 『海游錄』에 〈九月初十一日, 庚辰晴, 明起舟已泊浦岸, 岸上橋已 具, 卽下陸就館, 是山城州, 臨江築城曰泥城, 城外設水車二具, 能激水而溫城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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례를 깨뜨리고 〈空益〉로 대응하였다. 이는 조선에서 금주령 6) 이 내렀기 때문이다. 이 금주에 대해서는 成大中이 魯堂과의 필담에서 〈 酒乃狂藥, 以是而起禍莊多, 大則亡國破家,小則喪性失身, 前世君群皆欲禁之而未果, 我聖上斷然禁之, 始自丙子年”이 라고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正使 趙職 (1719~1777) 은 判書 尙fJiiJ의 아들로 태어나 長身隆顧, 骨格遂 遇하였다. 1738 년에 戊午生員試에 합격하였고, 1752 년에 庭試文科에 乙科 로 及第한 후, 1757 년에는 東萊府使로서 對馬島와의 절충에서 풍부한 경 험을 얻었다. 6) 趙職 『海樣 日 記』 甲 申 2 月 17 日 條에 〈我國酒禁至嚴, 爲朝鮮臣子者非惟不政近 口 , 亦不政以手執酒杯而擧之, 此則義理所關, 關白若以酒勸之, 決當不爲領受〉. 7) 那波利貞 「明和元年0)朝鮮國修好通信使團0)渡來&我國0)學者文人&0)翰墨上 ’댜於납 5 應訓唱和0)一例 K 就 공 T 」 (《朝鮮學報〉〉 42 輯) 참조 .
다음에 甲申年 使行의 國 書 와 別幅을 소개하겠다. 〔朝鮮國王 李岭奉星〕 日 本國大君殿下 賤信之輯, 一紀有餘 窟聞殿下, 顔承令緖, 撫寧海宇, 其在交好, 易勝狀鈴, 炫循故常, 返勅使竹致慶 修睦, 隣誰 則然, 土宜難 薄聯表遠沈, 惟冀勉快前烈, 茂鹿新社, 不備 矣未年八月 日 朝鮮國王 李 岭 晶: 조선 국왕 이금은 일본국 대군전하께 굴을 올립니다. 일기 남짓토록 통신빙례가 없었사온데 그욱이 듣자오니 전하께서 대업을 이어 받아 나라안을 다스려 편안케 하신다 하매 교호하는 처지에서 어찌 몹시 반갑지 않으오리까. 이에 규례에 따라 바삐 사신을 보내어 경축하며 친목을 도모함이 아 웃의 의리로는 당연할 것이의다. 토산물이 변변치는 못하오나 멀리서의 정성을 표합니다 . 선대 홍업을 힘써 넓히어 새 복을 듬북 받으소서. 불비하나이다. 〔別幅J 人夢 五十斤, 大 繼 子 十定, 大緩子 十定, 白莘布 三十>E, 白綿細 五 十索, 黑麻布 三十定, 虎皮 十五張, 約皮 二十張, 靑委皮 三十張, 魚皮 一百張, 色紙 三十卷 彩花席 二十張, 各色筆 五十柄, 眞墨 五十勿, 黃 寒 一百斤, 淸黨 十(I[(每虹 十斗) 腦子 二十連, 駿馬 二四毅具 〔日本國源家治奉復〕 朝鮮國王殿下 8) 信使追親 聽儀寒盛, 就審起居安寧 嘉慶殊深, 方今以承 紹前緖 撫育群委初由舊典, 斯叔新權, 幣物匠厚, 禮意旦隆, 乃知敦兩國 講信之意, 而昭突世修睦之諒也, 言將非品附諸歸使, 惟冀永諦隣好, 共奉 天體, 不備 甲申三月 日 日本國源家治 8) 京都市藤井有郞館所藏 家治 將軍으로부터 조선국왕에게 보낸 答書副本. 李元 植 「重文指定0)朝鮮通信使資料 IC-?~ 、 T 」(朝鮮學會 第 38 回大會 發表要旨), 「朝鮮通 信使0)國書重文指定 IC 寄산 T 」(〈(-ij-:./夕 4 新聞》 昭和 62 年 5 月 18 日) 참조-
일본국 원가치는 조선국왕 전하께 답서 를 옹립니 다 . 신사 가 멀 리 이 르 매 빙 의가 참 으 로 넘 치시옵 니다. 기거가 안녕 하심을 듣 자오 니 몹 시 경사 스 럽 습 니다. 바야 흐 로 선 대 의 홍 업 을 이어 받 아 백 성을 다 스 리니 옛 법도에 말 미암아 새 기쁨을 펴는 바 이 온대, 폐물 이 이미 후하고 예 의 또한 융숭 하시니 두 나라의 신의 를 돈독히 하는 뜻을 알겠 으며 대대로 친목을 닦는 의리 를 깨닫겠나이다. 이에 변변치 않은 물 품 을 돌 아가는 사 신 편에 전 하오니 이웃의 화호 를 길이 맺어 하 늘 의 훌륭 한 도리 를 함 께 받 들 어 가기 를 바라 옵 니다. 불비 하나이다 . 〔別幅〕 姑金六曲居風 二十 雙 9)' 描金案 二張, 描金毅具 二十副, 染 華綾 一百 端, 採細二百端
9) 李元 植 「朝鮮國王 K 繪 居風— 善隣 友好0)新資料」 (《 讀賣 新聞 〉〉 昭和 61 年 10 月 7 日) • 韓國文化公報部文化財管理局 「昌德宮所 藏 日 本 繪畵 調査報告 書 」 (1 987 年 4 月 ) • 《京都新 聞 》(昭和 61 年 9 月 4 日 • 同 昭和 62 年 1 月 31 日) 참조 .
일본막부 장군은 신사일행에게는 다음과갇은전별금을보냈다 .1 0) 三使:銀各五百枚, 堂上譯官:銀各二百枚, 上通 事 :銀各五十枚, 製述 官:銀三十枚, 上官·次官:銀五百枚, 小童:銀各二十枚, 中官·下官: 銀千枚, 馬上才:銀百枚
10) 『通航一 覽 』 卷 101 , 明和 元年 甲 申年 「朝鮮國王^被 遣 御返簡」 • 『海樣 日 記』 412 쫑 「關白所贈員役以下銀子二千二百八十枚 • 每枚四兩三錢式合九千八百四兩」 .
전기한 막부장군의 답서에는 처음에 〈興居佳勝〉이라고 한 것을 〈 起居安 寧〉으로, 〈狀慰〉를 〈嘉慶〉으로, 〈彌慶〉을 〈敍 權 〉으로, 〈 之誠 〉 을 〈 之諒〉로 改書시켰다 .11 》
11) 趙 廣 『海椎 日 記 』 3 月 3 日 條 262 쪽 참조.
그런데 正使는 이 日本國 書 改寫에 대하여 〈일행은 모두 눈에 거슬리는 대목을 고치게 된 것을 가지고 큰 다행이라고 하였으나 매우 슬픈 일이 다. 우리 聖君의 정중한 국서를 받들고 왔다는 자체가 이미 비분한 일이 다 . 비록 극히 존경하는 답서를 얻는다고 해도 오히려 기뿔 것이 없거늘 더구나 이처럼 고친 글 또한 평범한 어구에 불과하니 어찌 애통하고 切悲 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하였던 것이다.
2 筆談唱和 朝 鮮通信使의 방 일은 江戶幕府 當局者 의 관 심은 물론 이거니와 특 히 儒 學 者文人 들 이 韓 使에 대 한 기대는 상상 외로 컸 던 것 이다 . 大阪 의 懷德堂 學主 中 井積善 은 그 의 「草茅 危 言 」(朝鮮之 事 )에서 〈韓 使는 文 事를 주장하 는 고로, 문재에 뛰어난 사람을 뽑아 오는 것이다 . 그래서 연 도 객관에서 日本 儒 臣들 과 시문중담과 필담이 성행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 「日 韓 提 要 」 )2 ) 에서는 〈 일본인은 武 를 利로 삼고, 조선인은 文을 利로 삼는댜 眼前의 利는 武 에 있지만, 他日의 利는 文에 있다. 史官의 기술 은 만세의 귀감이니 文이 아니고는 전해질 수 없다 . 따라서 그 智의 沒深 과 遠 近을 알아야 할 것이다 〉 라고 하였다 .
12) 『 通 航一 覽 』 卷 30, 朝 鮮 國部六 (370 쪽), 對馬國以配庵 輪 番 참조.
甲申年 信 使의 詩文唱訓에 대해서는 조선국왕 자신이 깊은 관심을 가지 고 있었다 . 13 며두 1764 년 7 월 8 일, 통신사 일행이 귀국하여 영조대왕에게 復 命할 때에 대왕은 〈 南玉의 이름이 알려졌다고 하였는데 누가 시를 많이 지었는가 〉 하고 하문 하 자, 〈 네 사람이 모두 같은 정도로 지었습니다〉라고 답하였댜 이 네 사람이 란 製 述官 南玉 • 書 記 成大中 • 元重擧 • 金仁 謙 울 말한다 . 대 왕은 또 〈 南 玉 은 몇 편이 나 지 었는가〉 하자 〈약 1, 000 수 지 었 습니다 〉 하고 대답하였다 . 대왕은 〈장하도다 . 너희들도 그들(일본인)의 시 를 持 來하 였느냐 〉 하고 묻자, 〈 그들이 먼저 作詩한 후 신 동이 화답하였으 므로 그들 의 · 시를 가지고 왔습니다〉고 답하였다. 대왕이 〈成大中은 어떠 하였느냐 〉 고 하니 정사는 〈 대단히 훌륭했습니다 . 元重擧와 金仁謙도 각 각 약 1, 000 수씩 지 었습니 다〉고 하였다 . 正使 趙 微 온 〈그들(일본인)의 시 는 대체로원숙한 것이 적어 볼 만한 것이 없습니다〉하고 덧붙였다 . 대왕 은 〈南玉은 洪 世泰와 申維翰과 비해서 어떠했느냐〉고 하자 〈시와 문은 각 각 장점이 있어 창졸한 가운데도 모두 찰 지었습니다〉고 하였다. 國王이 〈그들이 조선인의 문무의 재능에는 당할 수 없다고 하였다더니〉 · 라고 묻 자 〈과연 그랬사옵니다〉라고 대답한 대목도 있다 . 여기서 말하는 洪世泰 란 1682 년 壬戌信使 때에 碑將으로 동행하여 新井白石 • 人見友元 • 木下順 庵들과 필담창화하며 문명을 떨친 사람이며, 申維翰은 1719 년 製述官으로 서 그의 「海游錄」은 사행일기 중의 백미로 훤전되고 있다.
13) 「海 樣 日 記 」(縮話) 463 쪽(『海行捷 載 』 四).
1764 년 방일시, 京都의 盤學者 那波魯堂은 接伴僧 承 瞬 維天長老를 따라 大坂에서 江戶까지 신사와 동행하면서 시문을 증답했는데 그의 『東游篇』 에 元 重擧는 「 書 那波孝卿東遊卷後」라고 題하고 〈筑之東 , 武之西, 三, 四 月之間, 損讓一千餘人, 翻唱二千餘篇 〉 이라고 書 贈하였다. 이것으로 미루 어볼 때 앞에서 국왕에게 복명할 때 보고한 바대로 그 細唱에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인 문사들과의 交歡을 소개하기에 앞서 먼저 正使 趙職의 「海樣日 記」에 대하여 약술하고자 한다. 그 내용은 ® 成大中의 서문, ® 矣未 年 (1763) . 8 월 3 일부터 登甲申年 7 월 8 일까지의 일기, ® 翻唱錄 : 製述 官 • 書 記 • 軍官들과 창화한 시 300 편, ® 各處 書契 : 조선국왕의 국서와 별폭, 막부장군의 답서와 별폭, 禮曹參判 • 參議 • 佐郞으로부터 幕府 執政 • 對馬 州太守, 接伴長老에게 보낸 서한과 예단, 同 回 禮書翰과 예단 , ® 與彼人 往復文字와 狀啓, ® 雜話 • 祭文 • 魄諭員役文 • 禁制條 • 約束條 • 日 供, ® 三使一行名錄, ® 路程記, ® 日本信使行次諸般 軍 令으로 나뉘어 있다. 趙 職도〈余於此行, 亦不免信 筆記 日而前人己錄之 言, 如欲 盡 拔則未爲記實, 故 只取其目擊耳聞及愚見所到處載之〉라고 하였다. 三宅英利가 지적 4) 한 대로 일본 관찰에 精細함을 기하고 있다. 일본 長 r, 의 유학자와 문인들이 간행한 唱和集 『長門矣甲問極』 山根華 陽서문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余及隅韓使四修賜也, 閔其所唱訓者, 辛卯幕中李東郭超乘矣, 爾後此行 南秋月, 成龍淵亦爲巨 擊焉 , 然而皆操其土風, 蘇黃末派之雄耳, 如夫筆語 者應翻敏捷, 顔似得縱橫自由者也 특히 製述官 南玉과 書記 成大中울 칭 찬하고 있다. 華陽온 萩藩 의 儒臣 으로 山縣周南에게 배웠으며, 1711 년부터 1764 년에 이르기까지 4 차에 걷 쳐 韓使와 집응하였다. 1) 일본 문사의 上星詩稿 『海樣日記』 6 월 18 일 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4) 那波利貞 「明和元年0)朝鮮國修好通信使0)渡來 七 我國0)學者文人 & 0)翰墨上 K 於납 石 應翻唱和0)一例 K 就 궁 T 」 (《朝鮮學報〉〉 42 輯 1967 年) 참조 . 15) 三宅英利, 「近世李朝通 信 使0)九州視察」{『北九州大 學文學紀要』 B 系列 第 1 卷 第 1 號) 참조-
以今 行所聞見 於文士 者言 之 則別 無學術 的可稱, 略 有 文 字 之 稙 勝 者 江戶 則太 宰 純號 春 台 者 郞物 雙 柄之 高 弟, 有 所 著詩論 文 論, 光踊則不及其師而 論 議則顔勝之, 岡井孝先 1 6) 亦 雙 柄之派, 木貞 貫' .17: 갑苗 井平 1 8) 及林氏之徒而無基 可觀 柴邦 彦 1 9 ) 者 年少而文 氣 顔健, 但其 爲 人類辭, 岡明倫亦年少 尻 成 , 尾 張州則有源 雲 2 0 ) 號君山, 其弟 子源 正 卿 2 1) • 號泊 洲, 岡 田宜生 22 ) 號新川者皆能 詩文而宜尤勝 , 西 京 則有同白駒 23 ) , 淸拘 24) , 芬煥 25 ) 稱西 京三 傑而皆名過其 實 那波師 曾 2 6) 號 魯堂 者述作難不裁奇 最 多聞識, 大阪則有合 離 Z7) 號斗南, 16) 岡井孝范 字 는 仲 錫 , 通稱은 郡大夫 , 號는 峨 ·} { I, 江戶 人, 萩生 {H 徐 에 게 배 웠 다 . 高松藩儒臣 ( 『儒海』 ). 17) 木貞賞 ( 木村蓋萊 ), 名 온 貞貫 , 號 는 蓬萊 山 人 , 嶺南 . 尾張 人, 勝 山 藩儒 臣, 1765 年 10 月 25 日殘 . 享 年 51. 著 書 : 「 玉 礎 詩選 」 • 「 迷萊詩私j 」( Ii'衛海 』 ) . 『 日 東壯遊 歌』 한 글 原本 에는 「 목경 한」으로 되어 있다 . 18) 造井平 , 名은 孝德 , 字 는 子 章 , 通稱 은 平佐衛 門, 號 는 太室 , 佐倉 人, 井 上 OO 台 에게 배 웠 다. 古柱學派 , 佐倉藩家老 , 1788 年殘 , 享 年 69. 著 書 : 『 佐 國通義』 , 『扶桑名勝』 , Ii'勢迷手輪具佐』 , 『典禮考, 建官考』 (『 儒海』 ) . 19)· 柴邦彦 ( 柴野栗 山), 碩儒 , 名 은 邦彦 , 字 는 彦輔 , 號 는 栗 山 • 古愚軒 , 石 願 , 讚岐 人 , 程朱學派 , 德島藩衍臣 , 후 에 幕 府 儒官 이 되 어 寬 政 三博 士의 一人. 1807 年 殊 享年 74, 著 舌 : Ii'圖鑑』 • 『聖賢固像考 』 • Ii' 資治 槪 言 』 • Ii'冠服 考證』 • 『栗 山文 集 』 ( 『儒海』 ) . 20) 源 雲 ( 松平君 山) • 本tt 은 千 村 氏, 名온 秀 雲 , 字 는 子 龍 , 號 는 君 山 • 龍 哈子, 尾張 人 , 名古屋藩儒臣 , 1 7 83 年殘, 享年 87. 著書 에 韓 使와의 『三世 唱 和 集 』이 있다. 『松平君 山 考 』(市 橋錫 編 文 化 財菜 書 73 號 , 名古屋市敎育委 員會 昭和 52 年) 참조. 21) 源正卿 ( 磯谷演 洲) , 字 는 子相, 號 는 消 洲, 1802 年殘, 享年 66, 松 田甲 「名 古屋 0) 儒者 & 朝 鮮 文士」 ( 『 日 鮮 史 話 』 積第 3 編 ) 참조 . 22) 岡田 宜生 , 名온 宜生 , 字 는捷之, 號는新 )II, 尾張人, 松平君山에게 배웠다. 名古 屋藩儒 臣, 1799 年 吸 , 享年 63, 著書 : 『 常語藏 』 • 『日下新 gt 』 • 『新川 集 』, Ii' 秉德 錄』 (『 儒海 』). 23) 岡 白駒 , 名 假 , 本 姓 온 阿 野 氏, 名온 白駒, 字 는 千里 , 通 稱온 太沖, 號 는 胞심 1 i, 播 磨 人 , 京 都에 居 住, 古 誌學 派, 晩年에 蓬 池 藩儒 臣, 1767 年殘, 享 年 76, (『 儒海 』) . 24) 淸 田 像빛 , 名은 細, 字 는 君 錦 , 江村北海의 弟 . 號 는 像 燮, 孔雀 樓 主人, 越 前 藩盤 臣, 1785 年殘 享 年 67, 朝 鮮 崔 博 의 Ii' 源 海 錄 』을 日 譯 한 『 唐 土行 程記 』 · 4 卷 4 冊(明和 6 年刊)이 있다 . 石 崎 又造 『支那俗文 學 史』 167 쪽. 25) 芬煥, 名온 煥, 字는 彦 章 • 丹邱, 號는 養 軒, 京 都人, 宇野明 霞 에게 배웠다. 古駐 學 派, 著함 : 『丹邱 詩 話』(『 儒 海』). 26). 魯 堂, 名온 師 曾 , 字는 孝卿 , 號는 魯 堂 • 鐵 現 道 人, 姬路人, 岡白駒에게 배 웠다 . 德島 藩 照 臣, 1764 年 信 使를 따라 江戶를 往復하며 唱訓한 『東遊 篇 』이 있다. 27) 合 離 (細合斗南), 名온 離 , 字 는 麗 王, 號 는 斗南 • 學 半 齊 • 太乙 眞 人, 京 都 人, 大坂에 居住 , 1803 年吸, 享 年 77 세, 書 에 能했다(『 儒 海』).
永 富 28) 號獨 鳴 菴者獨俊, 木弘 恭 29 ) 號 飛酸 堂者 詩 文 難 無足稱多 菩奇 書 , 備前 州則有井潛 3 0 ) 號四明, 近 藤篤 3 1 ) 號 西 珪 者而潛尤 殿 敏 , 長 門州則有 確長情 32 ) 號鶴 臺 安草世號大龍, 並有文名而 浦 類老成, 筑前州則 有 龜井 魯 3 3), 年少 才妙可期有成云矣, 蓋聞 長 崎島通船之後, 中國文 籍 多有流入 者, 其中有志 者潮 趙 文翰 比戊辰訓唱顔勝云 .
28) 獨 鳴 庵 姓온 永 富 , 名온 鳳 , 字는 朝陽, 號는 獨 BR 庵, 長 門人 , 山縣周南 • 山脇東洋에게 배웠다. 1766 年殘 . 享 年 35 세 (『儒海』). 29) 木村弘恭, 字는 世 肅 , 號는 興齋 • 飛 西堂, 大阪에 居 住, 酒造業 을 경 영 , 本 草 學 에 밝으며, 資産이 豊 院하여 書畵 典 籍 , 金石 骨董 을 많이 苑 集 했다. 釜亥 U , 繪 畵 에 能합 1802 年 13l . 享 年 67 세, 著書 : 『箕 齋 印 譜 』. 『 飛西堂합 目』. 『 海 外 快書 目』. 『興 齋詩 草』. 『 飛 鼓堂日記』. 『攝 津 名所圖 緖 』(藤圖作太郞 『近世 繪盡 史』). 30) 井潛(井上潛), 字는 仲 龍 , 號 는 四明 , 越後人, 井上 蘭 台에게 배 웠 다 . 1819 年꼈 享年 90 세 (『 儒 海』) . 31) 近藤 篤 字는 子 業 , 號는 西珪 , 岡山人 • 岡山藩 儒 臣 , 河口 靜齋 에게 배웠다. 程朱 學 派, 著 書 : 『西珪 館遺稿 』 (『 樞 海』) . 32) 溝長뱀, 名은 長恒, 通稱은 彌人 , 號는 鶴豪 , 長門人 , 山縣 周 南, 服部南 郭 에게 배움, 復古學派, 山 口 藩儒 臣, 1773 年 13l, 亭 年 65 세, 著書 : 『長門笑甲問接』. 『 鶴臺遺 稿』 (『 備 海』) . 33) 龜 井魯, 名온 魯, 字는 道載, 南漠이라고 號함. 僧大潮, 山縣周南에게 배웠 다. 復古 學 派, 福 岡 藩儒 臣 , 181~ 殘, 享 年 72 세, 信 使와 藍 島에서 筆談 唱和한 fi'決 決 餘響 』이 전한다(『 情 海』).
여기에 나오는 鶴 臺 와 南秋月과의 필담이 「 長 門矣甲問 樣 」에 들어 있는 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鶴 臺 : 諸君東行,浪華江都, 及其宅處處溪客 恥 土, 抱 藝 求見者定多矣, 才學風流可與語者有幾人平 秋月 : 江戶諸彦中, 井太室, 木蓬萊 僕輩尤所惟卷者 知足下未久東社, 爲僕致意 浪華木弘恭之風流, 合離之才華, 平安那波師曾之博 學 , 釋 笠 常 之雅義, 尾張州源正卿之偉才, 岡田宜生之詞律, 二子之師源 雲 之 豊 望, 皆 僕 輩 所與傾倒而那波與之同往江都情好尤密, 足下若與從容當知 僕輩 此言非 阿好之比, 幸爲致意. 그리 고 笠常薰中 34) 禪師의 『 芹 遇錄』에 의 하면 成大中으로부터 「 復 薰 中 禪 師」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
34) 薰 中 禪 師, 諱 는 顯常 , 字는 大典,薰中. 梅莊이 라고 號함 . 8 세 때 黃興 宗 華
藏院에 들어가 相國寺獨峯에 따라 測度 宇野士新, 大潮에게 詩文을 배웠다. 28 세 때 獨峯의 뒤를 따라 慈雲庵 住持. 그후 相國寺 • 南禪寺住持를 역임. 安永 7年 (17 78) 朝鮮修文職에 就任. 天明 7 年 (1787) 朝鮮蔣使를 國內凶歡으로 인하여 연기 할 때 그 信書案울 위 촉받자 能文으로 老中 松平定信의 상을 받았다 : 1801 年 3 月 8 禪日師成』 참享조年. 83 세, 著書 : 『小 雲樓稿 』, Ii'浮遇錄』, 『北禪詩草』, 『小晶文鼎著』(『大典
僕入貴境以來接韻士文情多矣, 而筑j , 11 得龜井魯, 於長門州得 誰 彌八, 於 備前州得井溝 於攝津州得木弘恭, 福尙條, 合離, 於平安城得那波師曾, 於尾張州得源雲, 岡田宜生, 源正卿, 於江戶得造井平, 木貞貫而最後得 燕中 앞에서 국왕으로부터 〈그들의 시를 持來하였는가〉하고 하문받았을 때, 답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먼저 작시하여 화운을 청하자 신등이 화답하였 으므로 그들의 시를 가지고 왔습니다〉고 한 바와 같이, 저자가 소장하는 詩稿卷軸에는 成大中에게 화운을 청한 일본측 문사들의 이름이 들어 있 다. 이 시고야말로 국왕께서 御覽한 것임에 들립이 없을 것이다. 成大中 (1732~1812) 은 昌寧사람으로 字를 士執, 號를 靑城 ' . 龍淵이라 고 하였다. 察訪 孝基의 아들로 金俊의 門人이 다 . 1753 년 生員試에 合格, 1756 년 庭試文科에 丙科로 及第, 1764 년 33 세 의 나이 로 正使 趙職의 書記 로 방일했으며, 일행 중 가장 문명을 떨친 문사이다. 1784 년 興海郡守로 재임중, 救憶을 찰하여 조정으로부터 포상받고 府使가 되었다 . 실학파 학 문을 배격하고 성리학을 토대로 한 醉正文學울 주장하였다. 그리고 崔天 宗 피살사건 처리에서 〈賊不得或請還到釜山 以書契往復〉이라는 의견에 대 하여 成大中은 〈大坂乃水陸之都會 而賊發於此 捨此一步而經下海, 淸息限 於江戶 操縱繁於馬島進退失操, 何賊之獲〉이라고 하여, 正使 趙微도 大中 의 말에 따라 결국 범인을 체포 처형하는 것을 보고야 귀국했다. 다음에 成大中에게 상정한 시고를 소개하기로 한다. ® 再依前韻星記室龍淵詞伯 傾蓋相逢攝水濱 心交却笑白頭新 千秋隣好同文會 筆海詩壇驚幾人 維天
뺀 1쟈 검多성간人8E궁 ”『주g요緯多此덧?ggf깁T?혼 꼈 T?떄i넒 設r銅t?千 m?4rm鈴之林§
이 維天은 京都相國寺 住持로 加番僧으로신사를접반한 和尙이다. 「海 樣 日 記」 甲 申정 월 21 일 條에 〈馬島守及以配僧與加番長老僧入i易, 加番僧名 承綴 號維天, 以接伴之任自江戶定送而槪有訂菴僧之暗行, 故此則謂之加 番 在於訂菴僧之上座矣, 自禮曹有別幅贈於加番僧而倍於訂菴僧, 古則來待 馬島與配菴僧借來矣, 至辛卯信使時謂以中路改差, 追到大阪遂以爲例, 禮曹 書中尙用護涉海路句可謂失實也, 加番年今七十, 行禮之際老香無可稱矣〉라 고 하였다. 加番僧은 本來대마도에까지 나와서 以訂菴僧과 함께 통신사 를 호행 했 던 것 인데 1711 년 使行부터 中路, 즉 大坂에 나와서 接伴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奉星龍淵成公 羽鹿文施望堂堂使者風流觀國光 舊識何能似東里 美人元自在西方 千秋白壁誰論價一代黃園群作行 縱値部裁君見許 差吾狂簡未成章 日 本 越後處士 片飮 頓首再拜 伏乞高和旦賜一敎海終身踊之, 勿杏齒牙余論望蜀多罪, 賤姓片孝秩並具
欽」다?g; 상r,4 '心1r〉} -32J 쓰상i쓰?Ar;;ijo)`? 또速四 . 쩡최a-弁못 짱알 4 '검섭꿈가궁접멋名전J羽片z'/ 서作` u1山 1샤4久 竹 ~ 정頃요철챙 겟52:( 芳섭수'요仁乙혼 片»^k`S 齡10143여多另사전珉£店 . 宅威 休及中드炎孟/훈 女羽羽¢J짜混序폐 l >' 초/#N.?嶋氏
이 片獸는 바로 片山北海이'댜 이름은 飮 字는 孝秩, 通稱은 忠藏, 號 는 北海이 다. 程朱學派로서 岸 和田藩儒臣이 었으며 1790 년 9 월 23 일投, (향 년 80 세 로 混頓詩社 盟主를 지 냈다. 35)
35) 富士川英郞 『江戶後期0)詩人f. :5 』 「混頓社0)詩人f .:B 」 筑摩 書 房 1973 年참 조.
薰 中禪師의 [j'芹遇錄』에 〈四月 六日 片孝秩常贈龍淵詩而淵和詩曰片秀才 孝秩託余使改之, 余以其詩還示 龍淵曰吾友片孝秩號北海, 向星一詩賜高和 珍襲不趙 斯人學行君子, 吾輩所欽也, 來詩題以片秀才, 片生非秀才也, 請 改書賜之, 龍淵改寫和詩 書 以片北海〉라고 한 것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成 大中은 片山孝秩의 星詩에 화답하면서 片秀才라고 했더니 자기는 수재가 아니 라고 사양하여 다시 片北海로 改書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多治比郁夫 氏는 〈片山北海와 韓使와의 接應에 대하여 이것을 뒷 받침할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36) 고 했지만, 이 시고야말로 확증이 되는 것이다. ® 旋河官船中始拜賜龍淵成公 漫星小詩 奉送東遊伏乞政正 箕域群賓楚調多 相逢爲聽甄中歌 鷄舟共送東遊去 無由巴人停玉河 浪華富維章 頓首再拜
36) 多治比郁夫, 「 寶 曆0)大阪詩壇」 (『近世大阪藝文幾談』, 大阪藝文會, 昭和 48 年), 多治比郁夫 「片山北海年譜改」 (〈〈大阪府立圖 書 館紀要》 第 6 號) • 「片山北海年譜補訂」 (同紀要 第 7 號) • 「片山北海0)家庭生活」 (同紀要 第 15 號) 참조`
恭用龍淵成公賜余 高 和之韻 再奉 星 靑 玉案投初賜年 復 看落筆 若 雲炯 造 知令尹關門紫 偏執使臣上 國權 舟推交歡何草草 客中盛會自荊翻 波 潟 萬里從忠信 定是明王依好賢 浪華富維章 頓首再拜
食'상성屯서4선 糸뮤 ¢> 邊待 조人乙18 之&,싸_쇼尊휴慕i心8fff禁 孤多截 자설生1 丘弁 소:止逐東k3 갱·J孫오 ki傾z茶 札 . 사처~ 훈frg格g'
富維章에 대해서는 詩僧 雪巖이 京攝의 人士로부터 歲旦歲暮의 詩를 모 아 寶 曆 11 년 (1761) 에 간행한 『白雪余歌』 名寄 (24) 에 〈 富 維 章 , 字 子煥, 號 有明〉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富 田維章온 富維 章 과 동일인으로 후에 混 頓社에 참가한 사람이지만 그 經歷은 자세하지 않다 .
® 典 日 妄獻無辭脣賜高和爲幸 己多感個之至 別賊一律以奉里龍淵先 生左右伏乞멩芹 喜看賓館奉怨初 紫氣高惡牛斗盤 上國君臣傳信義 寒鄕士女仰管泥 詩篇雲起八又襄 名姓鳳鳴千里餘 己識山川相待久 壯遊何處好藏 書
蘭齋藤導 頓首再拜 證貢播扇二撰金絲煙一策冀笑留
閑齋伊藤導 伊藤仲導의 字는 環夫, 號는 開齋, 上野人으로 姬路藩儒臣이 다. 『蘭齋 先生遺稿初編附錄』에 韓人贈答이 재록되어 있다. 〈奉星朝鮮國製述官南君 書記成元金四君座下, 僕姓藤, 名導, 字環夫, 別號開齋, 散藩姬路侯之小臣 也〉라고 하고 上記 시를 실었다.
® 奉送龍淵成公 春風欲暮柳條斜 別後相思天一珪 二島晩潮描北斗千机暎霧入東華 龍淵己抱明珠色 驛路猶餘彩筆花 篇就縱塔供坐鳴 飛騰忽隔海雲除
大垣淸臣守屋元泰九拜 제 6 장 甲 申年 (1764) 使行 2 海
縱令®異 奉&f 猿盧心반邦星知成己훈멀 뺨隱듦公少龍 仕효냐 i,嬪.隅炎返淵1炭g 風 書 流 記』莫貸리角합건연旺J九守 借屋 梧元床葬虹油닷뜬걸 5泰梁 臺軌逢霧入츈 限凡.또l _뺄7미.天沮a2-.편紅陶 . . ,油홍亂油斜멋暮凶洙 導'$淵} & 冕풍” .
3?) 李丙熹 , 「近世朝鮮의 對 日通 信 使一行과 文化交流」 (『斗室餘流』) .
舒角g1 ' ., 위染홍훈'. . ..GI針慕尙 :\1冀:庄단『吳 델 }, v^策永秒*多t뱌 才훈 沿꿇允펴舊뮤. 札成:처 궁也. . 3쓰素 -
® 奉星朝鮮 書 記成公
® 奉送龍淵成公還朝鮮 征途春暖日光鮮 行盡馬諦槍海邊 分手悟然千萬里 不知再會又何年 駿州 島津實
令 ; 協 &l i& 挑
® 星三書記左右 星節逢來見舊章 雜林嘉客擔詞場 詩篇多駐明珠色 長帶扶桑朝日光 渡邊悳 38) 拜字中馨號華陽
38) 金仁謙, 『日東壯遊歌』 沈載完校注 「日東壯遊歌」(韓國古典文學大系 10 所收) 에 渡邊悳이라고 姓名이 들어 있다 . 한글 原文에는 〈도〉가 〈조〉로 되어 있다.
LT}A,冷서& 北. 41.f宁냥一검流 9 있孫사 求輯符'훈훌品 f4죄:성?羽層 2片`'# 왕져간법 . 저心尸凡1.g꿈/마硏f了 ti왕렵fl k ’ 硏•i.
®奉送書記成公西歸
39) r . 日東壯遊歌」 ·한 글 原文에는 〈황언명〉의 〈언〉이 〈억〉으로 되어 있다.
@ 再次前韻奉星龍淵成公案下
40) 仙樓 那波魯堂의 實 弟, 妻의 姓을 따서 奧田元繼라고 하였다. 字는 志季, 號는 抽古 또는 仙樓, 大阪에 居住, 韓使와 筆談唱和한 「兩好餘話」가 있다.
急*때덧 多 食t 土士짜·第?·, .1 生컴t싹믿t:危多副 禾逸떠不r차딴&格중눗t
@ 證用前韻奉星龍淵先生梧下 標細滅礎杖節年 覽族蓬至自朝鮮 臺揮繩虎兼翔鷲 遊姜名山與勝川 鳴楓禮容存舊典踊珠使客照芳楚 共隣學術追伊洛 辭命屬君國士賢 芬元澄 41) 再拜
41) 芬 )|l 元沮 字는 子泉, 思堂이 라고 號함. 丹邱의 子, 請江藩盤臣, 1807 年?Ji .
. I'., . 鬱- 도 'c. • :' .•. -• …- . ~ `글.7
® 敬星朝鮮國 書 記龍淵成先生玉案下 口指朝陣日本天 長風遠度渤演口 洋域殿高留臘雪 征途路半値新年 韓國文章翔煙鳳 扶桑賓口仰神仙 千載嘉遇鴻膳案 辨口應同季札賢 日 本 平 安 儒 生 芬煥頓首九拜
+실>ti국 사&갑七達;[굽1 타합!.L ~ 궁A『-蠶Jf비藤·i ,나 r幹i 우서 i떠;4-土索:요: 도 ' j;及i:처:!부::!나 :i 업 4쏴 . j둥:;.’ 曲 삼 n#成之효솝午뽀也淵 조 次
® 奉星朝鮮國書記龍淵成公玉案下伏希뽑正 四海九州通五畿 三韓使節自光輝 錦机至處總相議 此際朝陽有鳳飛 浪華府參操 內山之明 42) 頓首九拜
附墨蘭 -1
42) 內山栗齋 名은 之明, 字는 藤三, 또는 藤藏 號는 栗齋, 播州人, 大阪西町
奉行組與力으로 天滿에 居住 . 著書 : 「探勝仲」 (『浪華人物誌』 卷 1, 73 쪽) . 韓使와 의 唱和集 『栗齋探勝草』 附韓客唱和가 있다(東京都立中央圖 書館藏 ).
@ 奉送龍淵成公 鷲鳳仙郞彩 詞章果出群 敏疑楊主簿 才似抱參軍 旅夢靑山雨鄕慈落日雲 征線難哲住 別淡幾 霞第 龍門 劉維翰 431
43) 劉維翰 本姓宮源氏, 名온 維翰, 字는 文翼, 號는 龍門山人, 紀伊人, 江戶 에 居造 1771 年꿨 享年 53 세, 韓客과 唱和한 『東椎餘談』 • 『鴻臘傾蓋集』이 있다.
富峰® 高再掃用捕前星g鈴%韻`辰%訓 i 龍.?R,/'.託盧 습工s白 淵r雪 成 &h7i.:앰&-E%Q-몬千公秋 見山幻g #t양l.?뵤&/1望劉和 維更 i전先수군杯`i’` 沿Ei翰新 읽肉i:·아Ji꿉쑹숫:`gt`l溫凶 1t&虎邸) t-주i.g
® 次原韻奉翻成公見和 古驛山連奭氣低 留觸況値百花齊 行行回首思今會 萬嶽層層望欲迷 秋山章 44)
) . 秋山章, 名 온 章, 字는 子成, 通稱 文藏, 富南이라고 號합. 伊豆安久村人, lB08 年, 享年 86 세 4 . . (Ji'11海』) .
® 1j4 +.i; 'I'秋김t뿡g令 V51山4、 `5.章· 혼?札용강核정 죠脣t단§ 숑후條 心 3?床간約J f’i겼萩.?l
□□□□□□□ □□□□ □ □□ □ 口偏殷金節外 . 嘉賓不醉玉壅前 儀章故有風容美 聲蕃應因文字傳 記室尤稱似沈謝 彩奎幾見暎佳賤 皆J II 應再拜 彩· 급乙 生 1& ¥
gag-/ . 祈“간타' ” 暖賤-凡森佳 갇皆謝1稱,沈宜yJtJ...I (拳字應息1후텨( 휴洪 園擧冬)급美有丞 丈 月 »A不도辭살唄 帥外誓金底皆JII 洪園(1 734~1807) 의 이름은 應, 字는 伯恭, 通稱은 文藏, 洪園 • 筋齋, 毛海子 • 有裝齋의 諸號가 있다. 京都人으로 弘道館을 열고 門弟가 三千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繪畵룹 圓山應擧에게 배웠다 . 洪園에게는 아 우 富士谷成章이 있었는데, 成章은 本居宣長이 長敬할 정도의 국학자였다. 『近年儒林編年志』 (138 쪽)에 의하면 1748 년 洪園이 15 세 때 아우 成章과 함께 韓使몰 接見하고 문명을 떨쳤다고 했다. ® 星上龍淵先生案下 李郭仙副指海東 千秋橋雅漢文風 登龍名下無處士 投刺先迎第一雄
齊 震
@ 奉次成龍淵題 □□□ 法燈傳惠遠 梵偶却須君 隨 O 口餘興 不訪論楚文
@ 奉星朝鮮國龍淵成公案下 錦机高掛客心雄 忽見仙 樣 入日東 莫問天珪言語異 交情賊得滿花宮 山正方再拜 奉送龍淵成公 成君今日登江城 春色送慈萬里行 何幸相逢分手處 異鄕無那別離情 曲川 山 正 方再拜
少정우沼占냉k多 %C성 iJt룡:곧史0多굿셔愛、、 · 11苑仙쓰身. 썹拉潟祝g今心 :1 수`2/苑勘상 #'6 겨서t답영 · 1.g*:..’ '
危歸馮 冬瓜吹東堤 多春則釜特 聽痛헝華商惑烽久作新坐 、驛路楊번¢스( 났劃託훗 ?舒훅나조
® 千條楊柳雨粉粉 雨裏逢君又送君 不見花岡門外色 海天幾處笛中聞 拜送四君子 異山 拜(補駐 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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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奉送書記成先生-仇_同세잡 公l . 각墨 E -化후含망` 塗 〔홍t상杯洙華多 似못섰A8¢ 仇..危乃偉上 i万션竹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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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敬票頃到館舍得講淸儀旦厚荷卷顧何幸加之狀嘉狀慰歸國有保伏惟 尊體佳勝旅途保重 春風吹動長河淵 綠柳如雲映日垂 此地 關 哥分手後 天珪只待誰來時 奉送龍淵先生 日本小生 邊英再拜
#조뿐섣 素 왕홋.k月 ;i沃. i4A#꾼떤궁업一·마巧3 얹 燦%浙t鈴七.갖阜가2- 요f샤•;4. .料뉴 자心선究흡터*'11;&.· 弁具仁寸.A/?VT· 다무샤란수·전싼·· . . 서謀알&.
信使盡員 金有聲(號 西岩)이 邊英에게 贈送한 山水畵小品(著者珍藏)이 0 0 있다. 〈甲申暮春朝鮮西岩爲日本邊英寫〉라고 한 落軟이 들어 있다. 渡邊英 (1749~1822) 은 號가 玄對이며 甲申年 信使와 집옹했을 때 15 세의 소년이 었다. ® 奉星龍淵成公 星使高篠春欲菌 登龍詞客接淸歡 殊方遊返難通語 正好論文借筆端 平英拜
1젓장? 짜세광 뮬達迎선迎....L-?s、 l· ?껏협i凡강떠沒生. . ti '貞?罰 令무 l
® 僕姓保名高堅字仲固號玉川, 武藏人保高堅再拜 漢使威儀實壯哉 望來仙暑是香臺 含恩東海兩朝賜 作賊西方萬里回 玉樹飛腹漫相並 瓊蓬翰墨目親暗 知君處處多唱和 自是當年八斗才 右奉星 南公 聞公先朝來開故句中及之 錦机造掛釜山限 萬里扶桑指日來 大海蒼뿐連弱水 英菩突完壓蓬萊 名區뾰是求作使 異域還高濟勝才 便見翻翻書記名 新詩更向幾人哉 右奉星 三公書記 尊姓大名未審焉冀得聞之 字劃不正 餘不如式唯以執掌之故也 伏賜海油 若蒙不弄得賜高和 則此獻別紙非所敗望也 政布腹心也 調野書可情可情 保高堅再拜上
® 出東武作依前韻星龍淵 葛陝 (補注 2) 共發江關春雨中 蓬峰何處接逢空 生還路指坂城下 須篤雲机萬里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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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海深 雲 埋 呼晴林鉛 R뜹 驛程春欲慈 花落舊山 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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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記한 바와 같아 成大中에게 화운을 청한 詩稿의 일부분이 한국국립 중앙도서관에 『東極 唱訓集』 45) 으로 현존한다. 이 시고의 작자들은 다음과 갇다 .
45) 『善本解題』 (韓國圖 書館學 硏究會 編兼 仁文化社 1975 年) 所收 『東提唱訓 集 』 日 本 釋隆賢等稿本 二軸.
日東僧醉月隆賢, 丹波國北文 能 , 完父舞擇, 京師餘璟伯玉, 高田次正, 平安井命登, 阿波國源 之 熙 , 君 山, 谷顯仲 ◄ 6), 尾州山三秀, 小鹿 鷲 岡, 召 南, 竹溪春坡, OO 州; 新川, 白石榮子春, 登陽散人吉野德義, 登岐函崎選 怨齋古野連尋, 泊維 章 叔慶, 白石榮, 嶋 村皓, 井魯炯, 秋江, 龜 井魯, 筑 州 寫字官橫 田義民, 魯炯, 秋江, 筑前城逸, 合計 28 篇. 이 중에서 成大中이 칭찬했던 龜井魯, 松平君山, 谷顯仲, 岡田新川의 上星 詩는 다음과 갇다. 一 路長風萬里波 乘秋樣客入程過 無窮伴樹如花雷 判作팸人鉉下歌 以右 壘 韻謝龍淵詞伯見和散賊 龜井 魯拜
46) 谷類中, 字半先, 號雄江, 伊勢州朝明縣人, 桑名大歌南宮喬卿門人以 講 授爲業 ( Ii'問樣餘響』 下) .
再和前韻謝龍淵成公 丈夫出處在蒼天汶上何求關子慈 知己應無千里隔 相思常欲到那邊 君山 奉星正使書記案下 四方供 淡 使平賢 況復文 章漢馬選 也識名山佳麗地 行哈更作遠遊篇 谷 顯仲拜題 奉贈龍淵成公 ―百餘年屬升平 使者遠來尋썰盟 官屬何人當妙選 龍淵成公氣縱橫 成公曾藏一寶劍 時時經爾膜間鳴 黃金爲環珠爲飾 紫氣常向斗邊明 鷲海風机亦無慈 水波不起魚不驚 我今逢君南門市 永夜高樓{奇短藥 相視而笑心莫逆 暢然一展客中情 矢口千言何落落: : 觀者如培盡自傾 成公由來明漢鑑 爲我品題月旦評 平輿之淵龍猶在 成公風流符其名 誰鐘報暎登車去 東都此去數十程 東都壯麗冠天下 朱門線戶雅嚴城 張樂開雜勞使者 懿懿擊鼓又吹堂 盛事偉觀誰不淡知君日胞五疾館 新 )II 拜稿 그리고 山口女子大學 樣圓寺內文庫 4” 에도 成大中에게 상정한 54 인의 詩 稿原接 도합 130 매가 현존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奉星詩文 ® 中村弘道, 林信有(鳳池), 谷半先, 松村琴(山城), 林信愛 10 枚 ® 林信愛,林信有, 僧了然, 林東庵, 小室當則 10 枚 47) 『機團寺內文庫0)硏究』(山口女子大學歷史學硏究室 國守進 昭和 51 年) 참조슬
® 林信愛, 橫田玄節 南川維遷 48) 10 枚 ® 草場安世, 萬年山維天, 石川貞 49), 林東庵 10 枚 ® 林東庵 小室東則, 糖尾惠迪 靑葉養浩(紫峰) 12 枚 @ 矢木懷 近藤篤, 源敏, 岩信成 9 枚 @ 矢田英源, 樓井廣, 文淵藏 10 枚 ® 山口純實 野口芳峻 橫田玄節, 岡廷龍 11 枚 ® 河野通遠, 林成, 芬澄子泉 8 枚 ® 大江資衡 50) , 釋圓巖(京都), 田中秩(伊勢), 岡田國香(大垣), 勝山立 成, 南禪寺誌~ 13 枚 @ 石 )|I 貞(金谷), 谷爭先, 中川鳴鶴, 田中正語, 藤玄芝 10 枚 @ 河口俊彦 片岡有庸(泳)|I), 河口大岳, 松本爲美 5 枚 @ 靑葉養浩, 林信有, 德力良弼 松田久徵, 木部敦 5 枚 ® 德力良弼, 木部敦, 片岡有庸 河口太岳, 松田久徵(鴻溝) 6 枚 ® 鈴世憲 久保泰亨, 松本爲美 5 枚 ® 芬川際 魯齋 橫田準 4 枚 @ 西村直,源君綾, 獨明 6 枚 ® 土田貞初, 林觀亭, 維天 5 枚
48) 南 )I1 維遷 : 字士長, 通稱은 文漢, 號金溪 伊勢人, 龍草蘆에게 배 웠다. 古注 學派, 晩年에 那野藩儒醫, 시문에 능했다(『儒海』). 176 41¥度 信使와 接~ 『金 溪雜話』를 撰함. 49) 石川貞, 字는 太乙, 通稱온 頓母, 金谷山人이 라고 號합. 河內人, 南宮大歌 에게 배웠다. 古注學派. 大炫御門公의 臣(『儒海』). 50) 大江玄lilil, 名은 資衡, 字는 禪圭, 玄團라고 號함. 京都人, 龍草麻에게 배웠다. 1794 年꼈 享年 67 세, 1764 年度 韓使와의 唱和集 『問偶集』(內閣文庫藏)이 傳存함.
그리고 成大中撰 『日本錄』(椎上記)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0 0 0 0 三月十一日, 發回程宿品川, 江戶儒生木貞貫, 造井平, 今井兼規, 山岸 000 000 00 藏 源成範, 千葉立之, 山田方, 黃彦明, 關修齡 51) , 平瞬, 平英, 韓天壽 來別 兼規離墨一, 修齡賤扇一,0 0 瞬0 睦印0章 二0 ,0 天0 壽0賤 0筆 三, 各以紙筆謝之. 三月十八日, 留三島, 儒生秋山章, 西原彰, 島津實來別, 秋山睦一空冊,
51) 關修齡, 字는 君長, 號를 松窓 • 樓雲樓라고 함. 川越人, 江戶에 住했다. 昌 平費出身, 井上蘭台에게 배웠다. 1801 年吸. 享年 76 세, 「韓館贈答集」을 撰했다. (Ii'層海』).
西原賤花築四十餘丈, 島津臨一筆, 辛未十二月初0八 日0 ,0 庚寅東風日暖春夜雨, 筑州 書 記井上周道, i슘i, 獅田或, 醫官龜井魯來見, 0000 00 初九日, 辛卯筑州寫字官橫田義民, 龜井之徒城逸來見. 上記 傍点(著者)한 인명들은 上星詩稿에 이름이 들어 있는 사람들이다 . 大阪府立圖書館藏 貴重本으로서 『朝鮮使節南秋月 等北山橘 52) 庵筆話』(雜 壇喝鳴)이 遺存한다. 그 속에 「朝鮮人來朝於津村御坊筆語草 書 之方朝鮮人 直筆」이 라고 題策하고 秋月 書答 31 條, 龍淵手 書 28 條, 玄川 10 條, 退石 5 條 花山 10 條 長游 l 條가 姑付되어 있다 . 이밖에 沙門義端 53) 의 『朝鮮 萌使館浪華記』도 현존한다.
52) 北山橘庵, 名은 彩, 字는 元 章 , 橘庵이라고 號함. 南河內郡一屋村人 • 醫業 으로 詩文에 能했다. 混池社人과 往來가 많았다. 1791 年殘 (『大阪人物誌』 臨川 書 店 . 昭和 49 年) . 53) 義端 . ' 俗姓 脇坂 名온 義端, 字는 勇進, 別號는 雲松道 人, 攝 1 사住吉 靈松 山 龍麟庵의 住僧 . 詩文에 能합 . 1803 年殘. 享年 72) 『大阪人物誌』臨川書店. 昭和 49 年).
1764 년 통신사 일행 의 修撰으로서 는 趙職 自 筆詩帖 2 冊, 製述官 南玉의 『日觀記』 4 冊, 『日觀唱酷』 2 冊, 成大中의 『日本錄』(椎上記), 元重擧의 『乘 接錄』 • 「和國志」, 李彦頂의 『松穆館 燒 餘稿』, 吳大齡의 『榮未使行 日 記』, 金 仁謙의 『日東壯遊歌』등이 造存한다. 끝으로 大典和尙과 成大中과의 筆語를 가지 고 이 항을 끝맺기 로 하겠다. 大典禪師의 『芹遇錄』에 〈成大中曰僕東來以後見許多山水, 許多禪子而惟於 柄浦福禪樓稱第一海山, 於望湖亭稱第一湖山 , 於淸見寺稱第一名藍, 於富士 山稱第一名山, 今於師稱第一禪音而已 〉 라고 하였다. 日本景勝에 대해서는 信使둘의 공통적인 인식이었던 것 같다 . 그리고 明和度 (1764) 신사들과 연고가 깊은 靜岡縣 淸水市 興津의 淸見寺와 彦根磨針嶺 望湖亭에는 신사 의 遺墨터)이 현존한다.
54) 抽稿 「江戶時代i C t낡 5 朝鮮國信使0)遺墨 K? t '\T 」(《朝鮮學報 〉〉 第 88 輯 昭和 53 年) 참조. 보주 2 1) 襄山. 姓 今井, 名 兼規. 字 子範. 號는 峴山, 佐倉人, 井上蘭台에게 배움. 程朱學派, 佐倉藩盤臣 . 1777 年꿨. 享年 60. (『盤海』). 2) 葛坡(阪). 姓 高, 名 峻 • 字 伯起, 惟岳 • 葛坡, 伊齋라고 號함. 下總人, 石島 筑波에게 배우다. 復古學派. 그의 先祖는 明나라사람이라고 함. 享年 53. (『儒海』).
2) 일본 문인의 策刻印章 동신사 일행 중, 15 명의 성명 • 字號몰 大阪浪華의 문인 福原承明( 尙條)과 木村荊 設堂 (木孔恭)이 각각 8 顯 15 面. 20 顯 29 面을 菜刻하 여 선물로 증정 하면서 『東華名公印譜』 55) 를 첨부하였는데, 이 印 譜는 大阪府立 中之島圖 書 館에 현존한다.
55) 森上修, 「混池社0)福原承明」 (〈〈大阪府立圖 書館紀 要》 第 1 號 昭和 39 年). 水田 紀久 「鈴印本之原鈴本」 (〈( 書誌學 月報〉〉 第 8 號 昭和 56 年). 同氏 「原鈴&模鈴」 (((混 池》 7 號 昭和 56 年) 참조.
이 印譜冊子에는 細合半齋의 서문과 兩刻者의 발문이 들어 있다. 著者는 福原尙條 56) 와 木村荊殿堂이 새긴 成大中印章 各一類 中村三實刻 三顯, 澤田東江 57) 亥 l 一類를 합하여 成大中이 造愛하던 石印六類를 恩師 李 丙 需 博士로부터 양도받아 珍藏하고 있다 . 생각하면 거금 220 여 년 전, 일본 문인이 韓使에게 증정한 인장이 시간 의 흐름에 따라 유출되어 전전하던 중 드디어 저자의 손에 들어 왔으니 이 것이야말로 기연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우선 細合半齋의 서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供之文房者 古私印之制也, 間有官印者亦係私刻 非佳手之需則好事遺之 云 博彼韓 土菴受西北, 聽我 日 域于東南隅, 隣盟不漁造其今矣. 適浪華之要 大賓也 吾友福·木二子莫先焉, 賓之待二子亦莫厚焉, 蓋二子自佳耳, 予 名亦紙在筑紫旦二子先之也, 難未至賓館諺以季孟之間待之, 仰幸矣, 低而 國賓竣使 事 于江都, 而還, 息浪華如初遂將行也, 夫送賓以言不獨二子而二 子則俳印爲睦, 有譜副焉. 予業己莫逆如此, 相得如彼, 應共換成好事, 然 而二子各 自道也 爲之奈何 唯是銀印二子緖餘難與平 文章之競亦區區論技之 小大若工抽非其志也, 巖然大賓遺偶以視槪歸之後, 每有文事煥平其章蓋思 二子而及予焉, 予則因印以送言者距非兩朝右文之時, 登得相爲謀平. 日本寶曆 14 年 (1764) 春三月 友人河曲合離撰
56) 福原尙備 字는 承明, 浪華醫師福原百鍊의 子, 시문에 능하고 書畫釜刻 및 聲樂 등 諸技에 통했다. 成大中이 尙條를 相見하고 水雲居士의 號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1768 年殘, 享年 34 세 (『大阪人物誌』). 57) 澤田東江, 名은 麟 字는 文龍, 東江이라고 號하였다. (『先哲 幾談後編 』 卷 8). 1796 年沒 享年 65 세. 韓使와의 『傾蓋集』이 遺存한다. 抽稿 「韓天 壽 &朝鮮通 信使―醉晋齋書帖0)題跋춘中心 K ―」 (《近畿文化》 430 號. 1985 年 9 月) 참조.
福原尙條가 전각한 인장은 다음 8 명의 것이다. 上通 事 崔鳳齡, 製述官 南玉, 書 記 成大中 • 元仲擧, 寫字官 洪聖源 • 李彦佑, 盡員 金有聲, 軍官 柳達源 尙修의 跋文 士之處世可以事 事 , 玩物斯喪心, 喪志, 斯害業, 予有刻印之1iW, 壓爲人 所廊不뿔 揚子所謂影蟲茶刻, 壯夫不爲, 信然哉, 唱何以菜爾小技供人之 玩賞爲絶刀匠久之, 甲申之春朝鮮信使來賜修有隣之交, 予與木世肅從暗諸 公於箕館, 以筆代象吾, 供通心交, 然公私亢援未假從容幣歡而歸裝在速, 想亦風馬牛不相及哉況再會無期平, , 顧寸心之可無贈乃奏純刀刻諸公姓字, 聯表別諒詩曰我朱孔陽爲公子袋仰文之在中, 是在諸公哉, 斯爲東華印譜云 甲申三月 浪華福原尙條跋 木弘恭은 다음 14 명의 인장을 전각했다. 製述官 南玉, 書記 成大中 • 元重擧 • 金仁謙, 良醫 李佐國, 醫員 南斗 톳 • 成源, 寫字官 洪聖源 • 李彦佑, 畵員 金有聲, 押物通 事 李彦璟, 軍 官 柳達源 • 徐有大, 正使伴人 趙東觀 木弘恭識語 朝鮮諸公之還國, 余蒙錬圖章以充解刀之義, 古人有云, . 印用表文顧諸公 之文煥炤日域然其於余傾蓋恭諒抵掌不担七寸之管, 語言相接無一不涉于文 者, 陸文之不可以己耶, 唯策綾技之末耳, 離蟲相將, 吳取之, 君子難然文 房之供, 聽役左右, 諸公一日之雅, 酒不相忘者亦唯焉由也, 余因與承明借 斯擧裝池一冊俳以贈云 寶曆甲申三月 木弘恭識 인장 증여에 관해서는 成大中의 『日本錄』(椎上記)에 〈五月十五日, 中村 三實刻送印章六類.時福九類·退石.玄川各二類旦各致私印譜一卷, 日本人 雅善圖章·所謂一刀萬象者名於天下, 而今行所見則三實爲最, 江戶平綱, 西 京長公勳次之, 浪華木弘恭, 福尙俺輩又其次也〉라고 기 록되 어 있다. 또 金仁謙의 『日東壯遊歌』에도 四月初四日 〈목흥공셰숙(木弘恭世肅)이
가 도셔삭여 보내였네 〉, 또 15 일 牛窓에서 〈 동촌삼실(中村 三質 )이란 사람 도셔이부 삭여왔네. 장지 열 장으로 답례하여 보내니라 〉 고 한 대목이 나 온다. 저자가 珍藏하는 『日本人所刻成大中圖書』에는 ® 木村萩殿堂刻兩面印 • 朱文 「允執其中」 • 白文 「昌山成大中士執印」 • 側軟 「浪華木弘恭刻」 @) 福 原承明刻兩面印 ·• 朱文 「成大中印」 • 白文 「成士執印」 • 側軟 「 日 本浪華處士 福尙條爲東華龍淵成君亥 l 」 ® 中村三實刻 • 朱文 「矣酉司馬丙子登龍」 • 側
印中白成► 面莊 圈
軟 「日本中村 三 實 策」 ® 同朱文 「士執」 • 側軟 「日本巴陵中 三 實 刻」 ® 同, 白文 「成大中印」 • 側軟 「日本備前州巴陵中 三 實 茶亥 U J @ 平隣(澤田東江)刻 兩面 • 朱文 「士執」 • 白文 「成大中印」 모두 6 類이 다 . 그리고 木村非鼓堂은 자작산수도에 동인들이 題費을 붙인 雅集圖믈 成 大中에게 증정하였다 . 이 繪圖는 본래 總督府博物館에 소장5 8 ) 되어 있었다 고 하나 지금은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3) 韓客人相筆話 통신사가 江戶에 왕환하던 도중, 大阪客館에서 相士新山退甫에게 人相
58) 藤塚費 「李朝0)學人 & 乾隆文化」 (『朝鮮支那文化0)硏究』 刀 江 書 院 昭和 4 年) . 316 쪽.
\l人l !~i1l0l 二〔
울 보였다. 그때의 필어집으로 新山退甫 著 『韓客人相筆話』가 전한다. 『大 阪人物誌』(石田誠太郞 著)에 의하면 〈新山 氏, 名은 退, 字는 退甫, 六起 翁 또는 天橋窟主人이라고 號하였다. 仙台人으로 어려서부터 風鑑術에 정 통하여 골상을 찰 보고 길흉을 판단했으며 이것으로서 도하에 이름이 났 다. 1775 년殊 향년 53 세. 退甫는 江戶詩文家로 활약한 葛西因是5 9) 의 아 버지이기도 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59) 葛西因是 名온 質, 字는 休文, 因是라고 號하였다. 大阪人, 江戶에 居住, 古柱學派, 1823 年沒 享年 61. 著書 : 『通俗唐詩解』. 『國姓爺合戰評』. {『儒海』).
退甫는 北山橘庵의 천거로 大阪客館을 방문하였다, 『人相筆話』에 〈寶曆 十四年甲申春正月下句朝鮮國信使駐節於浪華賓館, 余偶往相鑑諸客筆話〉라 고 하였다. 이 『人相筆話』에는 岡白駒 • 芬煥, 陶山冕 60) 의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芬 煥의 上星詩는 이미 전항에서 소개한 바와 같다. 芬煥의 韓客神相編序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今炫甲申之春, 韓人來賜方其經過洛城, 余偶出通衛縱觀一行列粧, 無論 其衣冠服章, · 典雅端嚴, 苑肖中華, 望其容統骨格峻秀, 皮肉醉堅, 顔異吾 方人物焉 余謂芳人曰荀得善相之士, 審辨彼此異同則一盛擧也……, 夫韓 使來賜三都人士筆翰爲牙, 紙墨爲循競雄平詞園, 而獲鹿執兎者往往屬於吾 邦則優劣之差亦足槪見矣, 而未聞東方之人相彼方人焉, 今道人此擧爲其權 輿則可以傳於千載也必矣, 若夫斷權爲周削瓜爲泉五嶽四演, 吉凶妖祥則道 人所精通而非余所政論是爲序, 明和元年甲申秋八月, 平安芬煥彦章撰.
60) 陶山冕 字는 尙善, 名온 冕 南溝라고 號함. 土佐人, . 伊藤東珪에게 배우다, 古義學派, 宮津蕩盤臣, 華音에 精通했다. {『盤海』).
즉, 신사의 행렬을 보니 의관복장이 단엄하여 마치 중화를 닮은 것 같 고, 그 용모는 골격이 준수하고, 피륙이 견고함은 일본인과도 달라 좋은 觀相家가 있어 상호의 異同을 審辨할 수 있으면 일대성사일 것이라고 생 각했다. 韓使가 입국하면 三都의 인사는 筆翰을 다투지만, 아직 그들의 人相울 보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아마 退甫道人의 쾌거가 처음일 것이니, 千載에 전할 만하다고 한 것은 이채를 띤다. 다음에 三書記와 畵員의 觀相을 소개하겠다.
成大中 字 士執, 號 龍淵, 三 十 三 齡 退相之曰, 疏眉秀目學堂不凡, 神光淸澄, 主早早歲發達, 富貴雙全文苑 俊才, 名播朝野之相也, 兒孫亦榮昌矣, 可賀可賀. 龍淵曰, 偶早歲學文租有聲名, 二十餘登科, 今有 一 子, 古人所謂三不幸 者皆具, 居常棟權而所不知者獨 壽 耳. 退旦 骨格槪有 壽 , 神氣亦有 壽 , 必可享八句壽考. 成大中예 대하여 말한다면 富는 듣지 못했으나 壽 는 80 을 보전했으니 이 관상이 적중했는지도 모르겠다. 金仁謙은 從事官 書 記로 동행하여, 순국문체로 기행일기 『日東壯遊歌』를 썼댜 仁謙은 안동김씨 가문에 태어나 진사에 급제한 후에도 관도에는 오 르지 않고 公j {1 에서 悠悠自適의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金仁謙 字士安, 號退石, 五十七齡 退相之曰 難百相惑不如而獨左掌生一大症, 犬如黑豆,狀似遠山, 珍哉 奇哉 所謂稱擬珠者是也, 主文林高策有天賜之才, 但恨血色廢 l 楓 神氣濁 造 若不有病尼則或有憂患之事, 壽 相亦不過六十八, 九之際耳. 退石默而不喜須텃暎息曰大不如大不如. 仁謙예 대해서는 主文林高策 有天賜之才라고 하였는데, 귀국복명시 영 조대왕께서 擊節暎賞하며 〈장하고 심히 많다. 들으니 너희 詩才, 전보다 많이 낫고, 潤筆움 도로 주어 청백히 다녀오니 辱國을 아닌지라 아름답고 기득하다〉 61) 고 칭찬을 하였으니, 退甫의 말대로 天賜之才라고 볼 수 있을 지 모르겠다.
61) 金仁謙 『日東壯遊歌』(沈載完校注本 『韓國古典文學大系』 10 敎文社 1984 年) 참 조.
元重擧 字子才,號玄川, 四十五齡 龍淵指玄川 曰 此人如何. 退忽爾看曰 此人長壽之相而必缺兒孫, 玄川曰 老夫平生自知不欲談命論相. 重擧는 내 운명은 내가 찰 알고 있으니 談命論相은 원치 않는다고 한 것이 색다르다.
李彦頂 字處吸 號 藝襄 二十五齡 盛襄 曰 吾相如何. 東菴曰 骨格俊雅 學堂不缺, 主通達發跡 彦頂은 漢 學譯 官으로 특히 시문과 필법에 뛰어난 문인이었으나, 아깝게 도 26 세 로 요절하였다 사행 중에 지 은 시 구를 수록한 「松穆館 煙 餘稿」가 남아 있을 뿐이 다. 相士 東菴이 란 退甫의 門人 林東菴울 말한다. 金有聲 字仲玉, 號西巖 四十齡 爲光相之曰 骨格豊滿, 眉目淸秀, 耳色明i亂 主富貴名쁨, 但年 壽 上生 暗氣必發病患. 西巖曰 果今有病患, 又曰何年得富貴 何年出子平. 爲光曰 四十四, 五之際 得一開色則吉也, 若不得富貴則或可生好男也.
춘畵버
畵員 金有聲에 대해서는 殺年도 모르는데, 황차 富責까지 어찌 알 수 있으랴 金有聲의 相을 본 爲光이란 사람도 退甫의 門 A 이다 . 卞塚(漢) 字成之, 號荊齋, 二十三齡 退相之曰 俊雅之骨格, 淸秀之眉目, 主初運通達, 又爲才藝機巧之相, 但印堂李猿 神氣鬱鬱 血色靑浦 恐早年勉父母, 晩歲缺子息, 身樞抱宿 疾 荊齋曰 一時歷路若是之厚諒 多謝多謝, 僕難不善寫 後當畵星于五日所 新五郞公前, 爲此笑領如何, 退曰 誠爲厚諒 多謝多謝, 永爲家珍 . 卞環은 관상에도 〈才藝機巧之相〉이라고 한 것처럼 從 事 官 騎船將으로 동행했으나 그림을 찰 그린다고 하여, 都訓導役으로 바꾸어 江戶往還에 수행했다. 지금까지 卞漢에 대해서는 사적불명의 화가로 전해왔지만, 저 자가 발견한 荊齋筆墨竹圖 6” 에 의해서 확증을 얻을 수 있었다. 卞漢이 그 린 「倭館圖」는 국립중앙박물관에 현존한다.
62) 抽稿 「江戶時代 K 和납 石 朝鮮國信使0)遺墨 K?L 、 T 」 (〈(朝鮮學報〉〉 88 輯, 昭和 53 年) 각주 22, 27 참조.
3 韓天壽醉晋齋 書帖題跋 63) 1764 년도 통신사의 방일에 있어서 일본 문사와의 筆談唱和에 관해서는 前章에서 약술하였다. 여기에서는 伊勢松阪文人 韓天壽 (1727~1795) 의 醉晋齋書帖에 써준 製 述官 南玉과 書記 成大中의 自筆題跋卷軸(紙本緩裝 28. 5X458. Ocm) 을 被 露하고자한다. 韓天壽의 生珪에 대해서는 『萬寶書畵全集』에 이렇게 씌어 있다.
63) 抽稿 「韓天 需 & 朝鮮通信使―醉晋齋 書 帖0)題跋춘中心 K- 」 (〈(近畿文化〉〉 430, 1985 年 9 月 號) 참조.
韓天 壽 名 天 蓋 字 大年, 通稱 中川長四郞, 醉 晋齋 라고 號한다. 韓 國餘璋王의 後商라고 하여 韓 氏 룹 칭하댜 伊勢人. 처음에 烏石에게 書 法울 배 우고, 東江의 指 導를 받아 二王울 模微하여 一家 의 風致를 이 루 다. 또 菜亥 l 을 찰하다. 그의 名聲은 池大雅와 더 불어 雙稱되 다 . 寬政七 年三月二十三日殘, 年六十九 , 또한 『 古 畵備 考』(卷 28, 名畵)에도, 韓天壽 小景의 山水몰 그리다. 가끔 四君子도 보인다. 모두伊半九 믈 模擬한 것으로 , 더욱 風致가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天 壽가 殘한 후, 從弟인 靑木尻夜에 의해 〈韓大年先生故紙家〉이 건립되
·5.‘ · t . '2I 초心 쇼쵸덟 問 〔 설죠삽― ‘. J` \ l1b ¢碑il 閃幻—〔검를 14lI •魏갑父서&霞 iIl 1多꿇 틀L', ’言?i `..l?.J ,.r긴 '`丁널 . L’ 1〔L’〔三 `t ... `., f察 1• .-. ,서1 기;’-A1iT섭 永n: 云 . j .§ t ,..l 11· '^ 4§g•t• .. I1. '.Ag R J131~ t1x· &t - +t《· 1AJ15·A서h상4 ^d 2t$ iA1J . J 1w·4» J 3 pJJL.hs z 사,/1 C 1i 1-人 Lt#土. ”.rItr $, 1& o,갑 선J· 3 . 1U^ . 41‘L'aIi,Ltff4^E소 , fli ·A선t .u I 홍t A . .1'- i E. ' s· . 겁 ^홍읽l정t . .? 1.K .^,.`J' , ,c .J4 ’. f집rk1 ' A 大1?L3시선底 소偉 EA― . 4( 성`접 ..一s. i춥 ' ’1, .',' {서t i궁I.:춘f .1궁1tj:Rd ”' ';;r.1 주k0i At 1공11 i 沒”―Z',”죠설i7t\j·/ tA젓A r.8•¢ ,s성‘H'g'上g: 2 · • t4t*~`1L+처T1& nx4 'n`' JI8컬g . - ui . U안:t서g :,.k.3유`N;T 1 . t졌 4昧. i本 f 'z.s尸ffAAi't41사 니 . 1 4 `?1! . iihiT&스': l` pi.`q,t1기츠; * .it'P»Ai 3I'l:t .f·i코, ‘?i • . 국 仙t 砂 갭 ,4,1F어.t4,'.t· |A?k ?`'항론 •잡가 f1 <1A'ig?· 1& g'?1홍 . . 1 t¢1t1구효·1.&:3·A_8,익 iii. 2Ai,. #` 5 .'kf.{?;`K·..i.‘.` 1 ZR7 ; ” f -'.qt' ?141 Ad..入t1선’» i_ ii ' -遠생佳성 .i:1‘4?1 'fA4 '나요4k1홍£44 'i틀t - 、 . . ·T .궁ne:·스 ';집. 1.f t - u % .s .'g성人· 다¢국국/1^1Cfl i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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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는데 이 碑銘은 細合半齋가 지은 것이다. 故紙家온 현재 京都市 東山區 通妙寺墓石群 속에 있다 . 碑銘게 〈甲申會有韓賜賞 書 喪帖名 OO 〉이라고 했는 데, 이로써 韓使의 題跋이 입증된 셈이다. 成大中의 『日本錄』(椎上記)에 〈三月十一日, 平瞬 • 平英 • 韓天 壽 來別, 瞬賤印章二, 天 壽 賤筆三, 各以紙筆謝之〉, 또 〈三月十二日,宿藤澤, 韓天 壽 • 平英冒雨追來酒洋而別〉이 라고 하였다. 한편 澤田東江 (1732~1796) 의 『傾蓋集』예는 다음과 같이 명기되어 있다 64) 『傾蓋集』 東江源麟自 筆 圖像入. 1764 年 澤田東江이 韓使와의 筆 談唱和를 編集 한 것으로, 이 自 筆 稿本卷首에는 造井太室 • 木村貞 貫 • 關修齡의 自 筆 序文이 붙어 있다(中野三敏氏所藏).
寶曆十四年甲申二月 韓 使來勝, 隣 時奉命 菜 御 書 寶 事 畢矣, 三月三日, 依相 國 寺 籠長 老侍 者 宏 禪 師 , 賜四客於客 館, 遂結域外之神交 . 『先哲 鼓 談後編 』 에 〈 源東江, 名瞬, 字文龍, 號東江, 東江壯年時, 有故姓 平, 名筑 字景瑞號東婦 故當時皆呼平瞬, 又兼善 畵 及 策 刻, 聲價高于時〉 라고 한 바 있댜 韓 使는 東 江이 策 刻하여 幕 府將軍答 書 에 찍힌 印 亥 l 이 몹시 마음에 들었 던지 東江 이 객관을 방문하자 印刻을 간청하여 3 월 11 일 品川客館에서 재 회했을 때 製述官 南玉은 「其人如玉」 • 「編 區 而藏」 2 類를 成大中은 「成大 中印」 • 「 士執」 兩面刻 l 類를 증정 받았다. 이 때 東江이 韓天 壽書 帖에 題跋 을 써주도록 청하자, 귀로 도중 大阪에서 書 寫하여 周宏 禪 師便에 보내줄 것을 약속하였다. 한편 필담교환 석상에서 東江의 후의에 보답하는 의미 에서 南 玉 은 「日東米顯」 • 「東鄕舍」를 書 贈했고 韓天 壽 에게는 「醉晋齋」 三 字 를 휘호해 주었는데 東江이 南玉의 필치를 보고 〈龍蛇之勢〉라고 칭찬하 자 南 玉 은 〈!l!li!l! 5 1 之形 〉 이 라고 겸 손하는 대 목이 재 미 있다 . 그리 고 成大中도 「醉 晋」 二字 와 李白의 시 二 首룰 韓 天 壽 에게 서중했다. 韓使가 大阪에 도 착 하자 귀 로 도 중 吉原 館 에서 淸書 한 「醉晋齋帖跋」을 周宏 禪 師便에 東江 과 天 壽 에게 전 달 하였다. 다음에 跋語原 文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醉晋齋 書 帖錄跋 右 韓 大年醉晋齋 書 帖也, 上自神禹下至表唐各體供備而獨稱晋者宗晋體也, 夫 筆法 莫盛於兩晋, 莫備於二王而右軍其惟集大成者平, 嗣是而作者唐諸人 至矣, 而世代遼遠板刻社缺, 難中華臨池家鮮有厚畜之者秦漢以前之 書 固無 論也 . 今大年生平絶海異域之外而乃能廣講至百三十餘種之多, 而 慕 刻者又 七八種, 非篤好之者能如是平. 昔米元章名其齋曰 寶 晋, 世猶稱其雜也. 大 年之醉非直寶之而已, 其瞬始過於元章 M. 大年之友平景瑞 麟 又好金石圖章 菩古 書畵 基多, 皆日東奇士也. 余因宏上人得與二人者交及余歸二人者冒雨 乘夜相送至品川, 大年猶以爲未足追到藤澤暎燈作別, 坊德不能去旦遺余以 手刻李北海筆, 初求是帖跋, 余紙奇大年之., 旦感其誠遂 書 此以歸之. 봅 甲申三月下洗小華靑城山人 成士執題于吉原館. ® 醉晋齋 小華秋月子爲韓大年 書
® 書 韓大年醉晋齋 書 帖錄後 日東多好奇士, 以余所見飛酸木世肅菩異 書 , 東鄕平景瑞菩金石, 景瑞之 友韓大年多菩古碑法 書 名其所藏之室曰醉晋, 余紙爲之 書 其,Im, 造發其錄而 接之自禹碑以下策隸槿行之磯二十有五, 鍾王以來小借帖三十有五, 六朝行 草帖十有八, 梁武以後帝王名臣帖十有七, 有唐六臣法 書 三十有一帖, 名臣 書 二十有一帖 斯可謂富矣 日 東個在海外凡古今鐘鼎塔廟之亥 U, 斷簡尺木 之藏 皆無得以關之, 其或講之者踊越風 潟 不測之險, 率歲年而後一至, 非至 篤好不可得其一二, 今大年之所有者如是, 又其年未哀而其描益深. 終大年 之世 又不知其幾倍礎於今所有也. 大年以余租涉古 書 樂就而問之, 送余至百 有餘里跋履雨泥浩萩萩下, 吾以是益知大年之專於所向也, 吾聞大年無子求 之如彼其勤將誰與傳之平, 夫隸者描之宗而茶又隸之祖也. 畵者 書 之根而心 又畵之基也. 大年其因權而求隸而求策, 因書而求畵,因畵而求心. 毋役志 於其所未有, 但玩心於其所已有, 淨掃其室時出而觀之則必知所以止之矣. 荀不求其心難至老死求 書 將無可止之時, 荀求其心, 大年之所有者已多矣. 大年又復何求焉. 大年臨別乞余一言, 余以是證之, 屬大年之空門友周宏以 致大年. 其不以余言爲不晴 書 者平否, 時甲申莫春小華秋月 書 于富士山下 . @) 李白乘舟將遠行 忽聞岸上踏歌聲 桃花潭水深千尺 不及注倫送我情 故人西辭黃鶴樓 炯花三月下揚州 孤机遠映碧空盡 惟見長江天際流 ® 醉晋 靑城山人 成犬中의 『日本錄』(椎上記 )65) 에 〈瞬賤印章二〉라고 한 것처 럼, 이 「醉晋 齋書帖跋語」에 찍힌 印章 : 成大中印 • 士執 2 類는 成大中의 遺愛로서 成氏 宅에 傳存하던 것인데 지금은 저자 소장이 되어 昔日의 交歡의 중거로 삼 고있다. 다시 . 『日本錄』에서 交歡 모양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藏6 5書) 印『이日 本적錄혀』 (있樣다上記()高 麗成大大學中校의圖 書自 館筆所訪藏日)紀.行 錄이다. 筆 寫本 • 李丙 熹 博士의 斗溪
樣上記 一月二十二日, 文士十四人來見, 木世肅, 福尙 (I t 合離, 那波 0 0 師曾 富野義,l{I L 其選也, 加番 長老 始護使行其徒周奎, 周避, 周宏來見, 宏 則飛郭守之子也,0 0 奎有俊氣善畵 四月九日, 周宏送馬節鏡 一 , 筆十二, 西翼送墨十o/J, 韓天壽因木世盡致 書送譯山, 華山二碑揚 0 0 五月六日, 周宏禪來別, 過午出館別石居老人 陶國興其廷三宅斌及安井屬 玉 別於門外, 木弘恭, 合離,片飮, 笠常, 淨王侍於路側下馬撰手而別, 那 波師曾及弟奧田元繼待之船步少話 坂城官人忽來數語, 師曾色嬰遂與之別. 澤田東江이 韓使와 만나게 된 것은 接伴僧 維天承艦長老의 侍者인 周宏 和尙의 소개에 의한 것인데 이것이 계기가되어 韓天壽도通信使와 만났던 것이다 . 전기한 成大中의 『日本錄』에도 周宏禪師의 이름이 자주 나온다. 이제 澤田東江의 『傾蓋集』에서 인장서각에 관한 부분을 抽記하겠다. 秋月云 僕聞君印寶, 因宏師欲得數枚, 前日和詩亦致此意能領會否, 有 略于私印而皆劣不用, 願得奇奇古者數章盛意如何. 東鄕云 奉抽技於大方君子, 僕素所願耳. 秋月云 僕所願得者莊多而不可得多, 得二節亦可, 一則曰其人如玉, 一 則曰盤區而藏, 此乃僕名與字之義也 . 東鄕云 證承命. 龍淵云 大君回答 書 中印刻若好, 登景瑞所菜耶. 東鄕云 然矣, 執政藤公, 京尹藤公, 報書中印亦僕所菜刻也. 龍淵云 砲聞足下金石之聲因宏師人奉求和章亦致意足下其或留念否. 東鄕云 諦奉薄技, 龍淵寫名字云成大中印, 士執 東鄕云 刻貴號如何. 龍淵云 號則姑舍, 如得姓名字印則幸矣. 이렇게 하여 澤田東江(東鄕平隣)이 새긴 印章이 韓使에게 증여되어 『醉 晋齋 書 帖錄跋』에 찍힌 것을 알 수 있다. 『傾蓋集』에 는 製述官南玉을 비 롯하여 成大中 , 元重擧 • 金仁謙 三書記의 像을 그리고 그 위에 題費까지 하였다. 화상의 費은 다음과 같다. 製述官 前結城縣監 南玉 字時福,號秋月, 宜寧人, 壬寅生 四十三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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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識文 章 重 榮名詩賊高 詞場誰第 一 秋月自才豪 東姉平瞬題 書 記 正使屬 前銀溪察訪 成大中 字士執, 號龍淵, 昌寧人, 壬子生 三十三齡 客是靑雲器 龍淵殊妙年 中心 臺 素滿 詩卷此長傳
東鄕平瞬題 書 記 副使屬 前長興庫奉 事 元重擧 字子才, 號玄川,原城人, 己亥生 四十六齡 良珠辭鳳殿 踏海入仙區 翻彼元 書 記 論文眞尻情 東鄕平瞬題 書 記從 事 屬 成均進士 金仁謙 字士安,號退石, 丁亥生, 五十八齡 尻條經國業 老從使平行名下無虛士 金公獨損場 東鄕平瞬題 澤田東江(東鄕平隣)은 韓大年의 模揚울 증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댜 前日所星 譯 山碑, 葉有道碑揚微於寶晋齋帖. 原本共石揚故字有飾缺…… 顧足下長者以愛顧於大年之意深, 則不可不政陳之,伏冀足下隣察之, 齋 歸 而列貴藝團之林 則永傳墨寶於兩東也 何事如之. 이 譯山碑揚本온 成大中으로부터 다시 조선의 燕行使에 수행한 金正喜 (號阮堂)의 손을 거쳐 청나라의 鴻儒 翁草溪에게 기중되었고 單溪는 「秦 譯山碑舊本」이라고 題하여 長詩를 賊하였다 .66) 이것은 유독 燕行使의 墨 緣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日 • 中 • 韓 3 국에 결천 문화교류의 비화로서 훤전되어야 할 것이다. 66) 藤塚鄕 『淸朝文化東傳0)硏究』 159 쪽(國 書 刊行會 昭和 50 年) 참조`제 7 장 辛未年(1 811) 使行 1 對馬島 易地行禮 1786 년(정조 10) 9 월 8 일, 일본의 德川 제 10 대 장군 家治가 죽고 다음 해 4 월 15 일에 家齊가 습적했다. 동신사의 파견은 장군 承襲告慶大差使가 來到한 후 3 년 이내에 차견하 는 것이 舊例이다. 그런데 1788 년 5 월 2 일에 德川幕府老中 松平定信은 通 信使 來勝울 일시 연기하도록 조선국에 제의할 것을 對馬島主에게 명령하 였다 .1) 그 主要口實은 흉작기근에 기인한 것이었다. 같은 해 10 월, 延聽 參判使가 書契를 가지고 東萊倭第에 도착하여 조선측의 동의를 얻기는 했 다. 이 信使來賜 延期의 成功온 易地通萌의 第一步가 될 것이다 . 이 書契 와 아울러 信使來賜 延期에 관하여 大典禪師룰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
1) 『通航一覽』 卷 33 『朝鮮國部』 9 • 『淨元院實錄』 上 참조 . 2) 大典禪師(1 719~1801) 諱는 顯常 字는 梅莊 大典이라고 號하다. 別號로 蒸 中 • 東湖 • 不生主人 등이 있다 . 그 居를 小 雲 模라 부르고, 그의 書 院울 北禪이 라고 불렀다 . 1777 년에 京都 相國寺 住持에 오르고 다음해 碩學에 뽑히 어 朝鮮修文職에 입명되고 1781 年부터 1783 年까지 對馬島以訂庵輪番僧으로 주류했다. 1764 年 朝鮮 信使와 만나 筆談唱和하고 「落遇錄」을 撰한 바 있다. 1787 年에 江戶藩府는 조선신 사의 내빙을 연기하고자 幕閣老中松平定信온 그 書 契의 起草를 大典禪師에게 위탁 했고. 이 연기안이 조선측의 동의를 얻자 1789 년에는 聽使延緩에 참여한 공로로 白 銀 30 枚를 받았다. 그후에도 朝鮮通信使易地賜禮일로 막부의 요청을 받아 4 차에 결 쳐 江戶에 울라갔다. (小晶文鼎 『大典禪師』). 3) 앞의 책, I) 참조.
그 다음에 1791 년 5 월에는 다시 통신사의 江戶등성을 그만두고 對馬島 에서 行禮할 것을 조선국에 교섭하도록 島主에게 명령했다 .3) 이에 대하여 조선측으로서는 무조건 거부했으나 對馬島의 끈질긴 교섭 끝에 1791 년부터 1810 년에 이르기까지 전후 20 년을 소비하여 처음이자 마 지막인 對馬島勝禮를 거행했던 것이다. 對馬島로 신사의 聽禮 장소를 변경한다는 생각은 新井白石이 구상한 것 이다. 白石의 「國書復號紀事」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 彼此往來, 止于境上 以禮館待而受其書幣己, 是勤一使之勞 代除萬世之
鮮也, 上拉稱善曰 事未晩 也, 子其熟計, 我亦可思耳, 居未幾上不予, 是歲 十月升返矣, 正德二年冬十一月廊日 書 죽, 對馬島境上에 머 무르게 하여 국서 와 별 폭을 서 로 교환한다면 한번의 使者의 노력으로 萬世의 幣를 덜게 할 수 있다고 진언하니 장군(家宣)도 대단히 좋은 생각이라고 칭찬해 주었지만 그 후 얼마 안 되어 장군은 병 으로 같은 해 10 월에 죽고 말았다 . 이 해란 1711 년도의 신사를 맞이한 다 음해이다. 그리고 白石은 이로부터 3 년 후에 그의 「朝鮮聽使後議」에서 다 시 對馬島에서 賜禮할 것을 주장하며 장군 家宣이 타계했기 때문에 실현되 지 못했다고 한탄했던 것이다. 白石의 易地通將建議는 물론 通信使의 집대경비를 줄인다는 경제적 이유 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 근저에는 조선을 고래로 朝貢國으로 보는 전통적 인 감정이 흐르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對馬島의 眞文役(書記)으로 힘을 바쳐온 雨森芳洲는 통신사의 내빙은 무 익한 것이니 정지할 것을 1753 년에 對馬島主 宗義蕃에게 진언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4)
4) 芳洲外交關係資料書翰集 信使停 止之覺 書 (關西大學 『東西學術硏究所資料集刊』 11-3 昭和 57 年) 참조 .
또 大坂懷德堂學主 中井積善 (1732~1804) 은 〈草茅危言〉이 라는 건의에서 〈朝鮮之事〉라 하고 對州易地聽禮에 관하여 先儒(新井白石울 가르침)도 논한 바와 같이 對馬島에서 서로 국서와 예물을 교환하면 경비도 생략되므로 가 장 좋은 방편이라고 주장했다. 5) 그리고 한편으로는 水戶彰考館總裁를 지낸 立原琴軒 (1744~1823) 의 통신사 영빙에 대한 건의도 작용했던 것이다 .6) 幕府로서 이 개혁안을결정하는 데 있어서 이들 의견울중시했음은틀림 없다. 對馬島로 장소를 바꾸는 경위와 그후 1876 년 金綺秀修信使의 방일에 이 르기까지 그 실정에 관해서는 田保橋潔 氏의 「朝鮮國通信使易地行賜考」 7) 에 詳論하였다.
5) 稱垣國三郞, 『中井竹山 & 草茅危言』 (大正洋行 昭和 18 年) 참조. 6) 宮 崎道生, 『新井白石&思想家文人』 10 新井白石&立原琴軒(吉川弘文館 昭和 60 年)三上參次 『江戶時代史』 下卷 508 쪽, 松平定信 『宇下人 言 • 修行錄』 136 쪽(岩波 文庫本 昭和 17 年) 참조. 7) 田保橋潔 『近代日鮮關係0)硏究』 下 「別編第一 朝鮮國通信使易地行聽考」 675 頁 (宗高 書房 昭和 15 年 原刊, 昭和 47 年 復刻) 참조.
2 信使의 活動 전술한 바와 같이 對州易地通開約條가 성립되어 통신사 파견이 결정되자 곧 신사 선임에 들어가 조정에서는 1810 년 10 월 10 일 正使에 金履 喬 를, 副 使에 李勉求를 임명하기로 하였다 .8)
8) 正 • 副使選任에 있어시 각각 후보자 3 인을 내어 그중에서 뽑는다. 正使에는 金履喬 • 趙 鍾 永 • 洪義浚 중에서 金履喬가, 副使에는 李勉求 • 洪儀泳 • 李泰淳 중에 서 李勉求가 선발되었다. 동신사 및 연행사 선임에 있어서 국왕이 천히 후보자 가
그리고 聽禮年期도 다음해 辛未年 5 월로 결정되자 도선준비에 착수했다 . 그런데 正使金履 喬 는 使行 卜定物의 裁減으로 사행활동에 지장을 준다고 상소하여 물의를 자아내어 새로 金相休가 正使에 입명되었다가 陳疏乞免 으로 다시 처음대로 金履 喬 가 正使로 임무를 완수하게 되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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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데에서 적임자를 골라 그 이름 위에 圈點을 그리는데 이것을 落點이라고 부른다. 金履喬撰 『辛末通信日錄』 卷之一 使臣內賜附 147 쪽 (通文館 1980 年 刊行), 三宅英刊 「室町時代0)朝鮮通 信 使-通信使0)初期形態-」 (『北九州大學文學部記要 B 系列』) 第 16 卷 昭和 59 年)에 1475 年(成宗 6) 通信使 選任에 있어서 正使에 斐孟厚가, 副使에 李命崇이, 書 狀官에 蔡 惠 가 각각 선발되었으나 결국 낙접으로 물러나 출발에 이르 지 못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落點〉이란 것은 국왕의 선임을 받은 것을 말한다. 이때 사행은 신사까지 선임했으나, 日本 京都를 왕복하는 교통로의 위험으로 도 항을 중지했던 것이다. 9) 『純祖 實 錄』 卷 13, 10 年 11 月 • 12 月條.
辛未 朝鮮通 信 使座目은 다음과 같다 . 10) 正使, 通政大夫 吏曹參議 • 知製敎 金履喬 孟含問 當年 48 歲 副徒 通訓大夫 弘文館典翰 • 知製敎 • 經緖侍讀官 • 春秋館編修官 李勉求 겁; 출 當年 55 歲 堂上譯官 知中樞府 事 玄義狗 :겔겁軒 當年 47 歲 大護軍 玄斌 젊麟 55 歲 同知中樞府 事 崔昔 걸닮섭 44 歲 製述官 奉常寺儉正 李顯相 :嬰출 42 歲 正使 書 記幼 學 金善臣 ::접 37 歲 副使 書 記 通德郞 李明五 臨: 戊辰萌使 濟庵子 62 歲 上判 事 前判官 卞文圭 福偉 40 歲 前主簿 崔仁民 福겁 43 歲 前正漢學 李儀龍 蠶 : 65 歲 次上判 事 前主簿 金祖慶 갑;겔 30 歲 前判官 秦東益 ‘鬪 30 歲 押物判 事 副司猛 趙行倫 麟걸 37 歲
10) 金履喬 『辛未通信 日 錄』, 柳相弼 『東椎錄』 • 三宅橘園 『難林情盟』.
前判官 洪得俊 깁麟 37 歲 醫員 副司勇 . 金鎭周 젊幕쩔齋 45 歲 副司猛 朴景郁 젊툴:所 44 歲 寫字官上護軍 皮宗鼎 값훑 49 歲 畵員 副司果 李義迷 젊접昌 44 歲 正使伴個 太學上舍生 李文哲 ::: 別階行 幼學 金萬亨 副使伴個 閑良 孫聖甲 正使軍官 前營將 具毅和 前府使 李一愚 前郡守 柳相弼 通德郞 趙晩錫 副司果 文永喆 副使軍官 尙衣院主簿 李勉玄 前內乘 李運植 前五衛將 鄭宅升 前營將 許乘長九尺 前縣監 金蛇行 理馬 白福起 章夫 梁日成 金千孫 磯鷹 鄭錫祐 騎船將二員 房斗宗 張彦明 卜船將二員 金履一 金漢壁 禮單直 張世隆
盤護直 金繼賢 邊得麟 都訓導 朴秀亮李英俊 鄕書記金龍漢 邊靑臣 小童 15 人 小通事 10 人上上官 3 上官 24 次官 16 中官 172 下官 119 凡 336 명 11)
11) 三宅英 利 『近世日朝關係史(J)硏究』(第五章 森藩體制動描期(J)通信使 4. 信 行節 目 (J) 講 定) 에 328 名說을 主張했으나 金履喬 『辛未通 信 日 錄』과 柳相弼 『東樣錄』에 336 名이 라고 했으니 이 숫자가 타당할 것으로 생 각된다.
통신사 일행 은 1811 년 (순조 11) 2 월 12 일 辭陸하고 서 울을 출발하여 3 月 1 日 東萊府에 도착한 후, 通信使 護行大差使 正官氏江左織 • 都船主 岩崎右 平, 渡海譯官 護還裁判重松此面등의 호행으로 3 월 12 일 부산포를출선하 여 登 13 일 對馬國佐須浦에 입항, 순풍을 기다려 29 일에 府中(嚴原)에 도 착하였고 對 馬藩 主 宗 義 功의 영 집 을 받고 죽일 상륙하여 國分寺 客館에 들어 갔댜 이 에 관해 서 는 純祖實錄 卷 14 11 년 2 월 條에 다음과 갇이 기 록되 었다. 辛卯召見通信正使金履喬, 副使李勉求, 辭陸也, 上曰難是不遠之地, 旦 與入江戶有異而係是客地, 彼人接待諸節 着意檢察好矣 • 履喬曰與彼接見 時 臣 等當 以今番信行之 只入馬島 渠悲惡請朝廷 權宜姑從爲辭矣 • 上曰何 時可 還 平 • 履 喬 曰似當至抱秋間矣 • 上曰無 事 往還也, 賜物當自外領下矣 . 국왕으로부터, 비록 멀지 않은 곳이고 江戶와다르다고는 하나 7~ 지이니 그들의 접대와 모든 절차에 유의해서 검찰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며 무 사히 다녀오라는 전별의 말씀을 들었다. 신사 일행은 5 월 22 일에 국서와 별폭을 전달하고 6 월 6 일에 향연에 참석 한 후 12), 6 월 15 일에 德 )II 將軍의 답서 와 별폭을 받아 27 일에 對馬島를 출 발하여 7 월 2 일에 부산에 귀착하였다. 같은 달 11 일에 동래부를 떠나 25 일 서울에 도착하여 26 일에 복명하였다.
12) 이때 향연의 요리를 위해서 請負人, 料理人頭取 石井次兵衛이하 料理人 56 人, 木具屋 .8人, 糸花屋 5 人, 合計 70 人이 참가했었다. (『通航一뺐』 卷 71. 『朝鮮國部』 47 •3 93 쪽) , 家 藏의 『朝鮮 人來聽七五三獻立盤形』에 는 七 • 五 • 三膳의 內容과 器血 硏까究지』 固付示編했 다第 .I ll •村 開上 明四 書男 院 昭「和廷 享53五 年戊) 辰참五조月 . 朝鮮人慶應獻立 K'? t、 T 」(『朝鮮古代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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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측은 막부명령에 의하여 上使에 小倉藩主 小笠原大膳大夫忠固가 副 使에 寺社奉行 龍野藩主脇坂中務大輔 董 이 임명되고 林大學頭衡(號述齋)이 동행했다. 그리고 松崎復(號僚堂), 古賀撲(號精里), 草場陣(號偶川), 橘 口太(號溫川), 畵師巨野萬年 등이 수행하였다 . 그리고 幕府官吏 岡本正成 (號花亭), 鈴木文(號幽谷 • 又號椿亭)과 三宅邦(號橘園)도 學人으로서 入 島했다. 朝鮮國書와 別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補注 ll 〔國書〕 日本國大君殿下 聽使之禮膳踊四紀, 迷承殿下克鎖洪緖, 誕撫區域休聞所及狀蓋易已, 炫 循故常, 庸伸賀儀, 至於易地行聽之擧, 寒出兩國淳好之義也, 不膜土宜聯 寫遠沈惟冀益戀令飮 茂隅休社, 不備 辛未年 二月 日 朝鮮國王 李松 깝걸픕 조선국왕은 일본국 대군 전하에게 글을 올립니다. 사신을 보내는 예가 벌써 4 紀 (1 紀는 12 년)가 넘었습니다. 멀리서 듣자오니 전하께서 대통을 계승하시와 문덕을 펴 나라를 위무하신다 하니 아름다운 소문이 미치는 바에서 치솟는 기 쁨이 어찌 그치리까. 이에 예전부터 내려오는 관례에 따라 하례를 올립니다. 서 로 빙문의 예를 행하는 일로 말하면 진실로 양국이 수호를 두텁게 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변변치 못한 토산물로써 멀리서 정성을 보냅니다. 오칙 좋은 계 책에 더욱 힘쓰시어 많은 행복을 받으시기 바라오며 이만 줄입니다. 〔別幅〕 人夢 三十三帥 大繼子 五定 大緩子五定 白莘布十五定 生莘布 十五定 白綿細 二十五走 黑麻布 十五定 虎皮 七張 約皮 十張 靑委皮十五張 魚 皮 五十張 色紙 十五卷彩花席十張各色筆 三十柄 眞墨 三十勿 黃童
五十斤 淸靈五器 鷹子 十連 駿馬 一四敎具 上記 국왕의 公禮單 의에 신사의 私禮單과 贈給禮單의 數種이 있다 . 여 기 동신사가 齋來한 公禮單(幕府將軍에게 進星)의 人參, 虎皮, 約皮, 鷹 子의 수를 방일 연대별로 비교하기로 한다.
별폭의 품목과 수람
신사가 드리는 예단으로서는 장군 외에도 宗室御三家 • 幕府의 執政 • 執 事 • 奉行 • 館伴大名 • 大學頭 • 對馬島主 • 接伴僧 • 京都所司代 • 大坂城主 등 광범위하다. 매번 소요되는 총수량으로 보면 인삼이 245 근, 虎皮 70 장, 約皮 80 장 정도이다 . 인삼은 모두 야생의 산삼이며, 신사가 가지고 오는 인삼을 〈信夢 〉이라고 불렀다. 백두산 것을 최상품으로 하고, 강계부 주민 에게 그 채취를 할당했던 것이다 .13) 虎皮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홍미있 는 기록이 있다. 申維翰의 『海游錄』(聞見雜錄 )14) 에 따르면 신유한이 江戶에 머물렀을 때 한 왜인이 묻기를 〈일본에 범과 표범이 없으므로 그 형상을 알지 못하나,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하는데 귀국에서는 무슨 방법으로 범과 표범을 잡~ 니까〉 하기에, 〈우리나라에서 범과 표범을 잡는 데는 함정으로 혹은 조총 과 화살로써 하고 西北道 방면의 용사들은 모두 철갑을 팔에 끼우고 능히 손으로 쳐서 잡는 것이 많다고 하니 여러 왜인들이 서로 돌아보고 놀랐 13) 今村柄, 『人夢史』 上編 國際關係'더於납石人薔 第 3 章 國&國&0)贈以外國交 1 디使用 훈 h f.:石人夢 第 4 節 日本信使0)行 IC 於i?石人薔0) 禮 物使用 참조. 14) 申維翰 『海游錄』 附聞見雜錄(『海行捷 載 』(一)) : 余在江戶時 • 有人倭人作筆語 問之曰 日本無虎約難未知其狀…食人爲根…貴國之多用虎約皮, 未知何術而 屠 之, 余曰 我者比國比之.制 虎約, 或以葬或以鳥銃弓節, 西北邊郡之材官勇士, 皆以 鐵 團 蒙讐 能使手格殺
다〉고 하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이에 관해서는 1764 년 방 일시 일본 문인 仙樓와 正使伴人 趙東競 (號 花山齋)과의 필담!”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15) 『兩好餘話』 虎約 參照.
仙樓曰 幣邦往往見虎 창섭 之皮 •••••• 皆海船所傳也, 多裁制造部泥描後又坐 蔣等 柔軟可{親 聞其負 lh 맵(奇險則 l1l 非人之可得而捕矣如何 花山曰 虎約之制 君之言惑矣, 吾國西北兩道有飛砲手累萬名 提虎如捕 鼠故我國虎창섭之皮 基賤以此故也, 負 隅者徒博 Rlj 難而飛砲火丸最易制, 貴 國亦登無鳥銃妙手平 듣건대 범은 산기슭울 등지고 험준한 곳을 기대고 있다니 사람이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잡느냐하는 물음에, 우리나라 西北道(平安 • 咸鏡)에는 나는 포수(飛砲手)가 있어서 호랑이를 잡는 것은 쥐잡는 것과 같아 虎창섬의 가죽값이 몹시 싸다고 했다. 신사가 선물로 가져오는 매 (病子)는 海東靑 16) 이 라고 부른다. 家光 장군 때에는 매를 50 連이나 선물로 가져왔는데 장군의 매사냥에는 이 조신매를 애용했을 것이다. 『德 )Il 썼쟁 B 』에 의하면 매사냥 횟수도 523 회에 달하며 역 대 장군 중에서 으뜸을 차지했다고 한다.
16) 海東靑 應의 別名, 「宋史太祖紀」 乾德元年九月 戊辰, 女眞國造使獻海東靑名 際 • 〔異名記) 登州海岸有鳥如器, 自 高麗飛渡海岸, 名海束 靑 , 擊物最健 善 抵天飛, 飛 時旋風直上雪際. (大漢和辭典 6 • 1176 쪽)
앞에 열거한 조선국왕의 국서 및 별폭과 대비하기 위하여 德 川 家齊 장 군의 답서와 별폭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日本國源家齊 敬復〕 朝鮮國王殿下 距介庚至, 華敍隨達, 因惑啓居寧 諸 狀幸廊極 今者以吾承統 業蒙條 聽儀, 珍胎糖性, 殊感隆識 如其成 禮津島 則 事 難從新, 意在循菌, 所以度時制宜 而敦兩國之好也, 炫具猶品寄諸還便, 惟冀彌揚景烈允受純服, 不備 文化八年 辛未月 日
德 川 家齊 答書副本(日本外務省外交史料館藏)
일본국 원가제는 조선국왕에게 회답을 올립니다 . 사신이 돌아오고 화함이 따 라 도달하였습니다. 따라서 살피옵건대 기거가 평안하시니 혼행하옵기 더할 수 없습니다. 금번에 저의 승몽 때문에 순빙의 의식과 진귀한 예물을 받자오니 자못 융의에 감사하옵니다. 진도(대마도)에서 성례를 하였음은, 일은 비 록 새것을 따 랐으나 뜻은 옛것을 따른 것이오니 이것은 시의에 맞추어서 양국의 호의를 돈 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변변치 못한 물건을 갖추어 돌아가는 편에 부 칩니다. 오직 밝은 빛을 더욱 드날려 진실로 대복을 받으시기를 바라오며 이만 줄임니다. 때 u g配 畵居風 萱捨雙 軟具 萱捨口 視紙便 三副 染檜(色羽二重) 五十走 綜細 採繪百端 德川 장군으로부터 조선국왕에게 선물로 보내오는 畵居風 1 에 관해서는 『古畵備考』 45 宮殿筆者예 「朝鮮居風筆者」가 들어 있다 . 「海行抱載」 18) 와 『通航一覽』 19) 에는 제 1 회 신사 1607 년도만을 제외하고 1617 년에는 10 쌍, 1624 년에 10 쌍, 1636 년에 20 쌍 1643 년에 20 쌍, 1655 년에 20 쌍씩 조선국왕 에게 선물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畵居風은 1811 년까지 계속되었다.
17) 畫居風 : 韓國昌德宮에 現存하는 日本繪師 狩野友甫作 「英容誰圖居風」 一!l, 梅笑師信 作 「杜丹圖」居風一豊에 대해서는 著者와 武田武夫敎授가 訪韓하여 安輝瀋 敎授 및 金貞敎 • 洪善杓 兩硏究員과 共同調査한『日本給 置 報告 書 』(昌德宮所 藏 )(文化 財管理局 1987 年 4 月 發行)에 詳記되어 있다, 그리고 同報告 書 22 「四季花鳥圖居風」 (遺物番號 書 畫 138) 은 韓皇室 皇帝陸下께 進로한것, 同報告 書 13 「松鶴圖」 居風(遺 物番號 書畫 7) 은 太皇帝陸下께 進星한 것, 同報告書 24a 「菊花圖」 刺總群風온 嚴妃 께 進星한 것입을 1907 年(明治 40 年) 朝鮮夕 4 A 久社編輯部編纂 「 皇 太子殿下韓國御 渡航紀念寫眞帖」에 依해서 確認했다.
조선사절을 환영하는 광경은 마치 오늘날 일본 京都의 祗園祭를 방불케 한다. 辛未年度 (1811) 의 來聽도 對馬島府中(嚴原)이라고는 하나 「辛未年 朝鮮人來聽行列圖」 (家藏)와 「朝鮮人物旗伏幅輿之圖」 (蓬左文庫所藏)에 의 해서 豪華狗爆함을 엿볼 수 있다 . 그리고 辛未年度信使來勅과 관계가 깊 은 對馬島의 參判使(通信使護行大差使)가 부산왜관에 · 건너와 동래부사와 회견했는데, 당시 東萊府使招宜 • 參判使差禮行列 • 龍頭山의 虎狩(범사냥)
18) 李石門 『扶桑錄』 161 쪽, 姜弘重 「東椎錄」 261 쪽(『海行捷載』 2) 참조. 19) 「通航一覽」 卷 94 朝鮮國部 70, 105 쪽 • 108 쪽 • llO 쪽 참조.
(守서
동을 그린 「朝鮮圖繪」가 京都大學圖 書 館에 현존한다. 3 문화교류 20) 辛未年度 (1811) 신사 일행은 3 월 29 일 對馬島 府中에 도착하여 6 월 27 일 귀환할 때까지 국서와 별폭진정 그리고 향응, 답서와 별폭을 받는 중요행 사를 끝내는 2 1) 한편 필담창화에도 열기를 띠었다. 문인으로서 입도한 三 宅橘園은 3 회에 걸쳐 製述官 李顯相, 書記 金善臣동과 필담창화한 것을 편집하여 『雜林情盟』이라고 이름붙여 출간했다. 對馬島 以訂庵長老와 筆談唱和詩文으로서 『朝鮮人詩賊』(文化八 歲次辛 未五月 寫於對州金石客舍 龍泉猪個正毅)가 전한다 .
20) 藤塚鄭 『 日 鮮淸0)文化交流』 5 對馬 K 治납 石 日 • 鮮學人0)文化工作 & 淸朝學. 中文館 書 店 昭和 22 年 참조.
大學頭 林述齋롤 따라 도항한 松崎선紅설은 그의 「接鮮 雍語」 에 〈文 化辛未 歲 朝鮮國王李松遣通信 正使金履喬, 副使李勉求 來修聽事, 官命小倉侯 • 龍 野侯爲受萌正副使會於津島, 六月十五日禮始 訖 , 甘一日我林先生就館所與金 李二使筆語半日, 余以侍書在側以先生所言一一筆星, 二使亦口授正使書記金 善臣筆錄答問, 其問製述官李顯相·副使 書記李明五 亦有 筆記者 至事 之小者 大護軍郞上上官玄斌等文割記之, 席間忽援紙片之亂落 徵集者又隨東西散 , 余 取手所收捨者, 綱錄列在〉라고 하였다. 林述齋는 동행한 畵師 巨野泉祐(萬年)이 그린 山水圖롤 正使에게 증정하 였다 . 正使는 〈 畵法畵境供妙, 凉適淸境, 是可忘暑, 荷此擔贈良感良感〉이 라고 하며 기뻐했다. 조선측으로서는 製述官 李顯相이 金魯敬의 書 四片, 金履度의 書 2 片, 申在植의 書 3 片, 兪漢芝의 書 각 2 편을, 正使書記 金 善臣은 魯敬의 大 書幅 「金超勢海香象渡河」(嚴槍浪의 句)를, 正使伴個 李文 哲온 金履度의 書 大小 14 편, 金祖淳의 草書 1 卷울 林述齋에게 중정했다. 필담석상에서 堂上譯官 玄試은 입도한 일본 인원 수와 선척을 물으니 述 齋는 船 百餘姜 • 暗行 3, 000 여 명 이 라고 대 답하였다. 林述 齋 와 韓使間 에 는 淸朝學의 영향이 큰 화제였다. 古賀精里와 韓使와의 필담창수는 草場傾川
21) 三宅橘園 名온 邦, 字는 元興, 橘園 또는 威如齋라고 號하다. 加賀人, 皆川洪 園에게 배움, 古駐學派, 1819 年殘, 享年 53. 韓使와의 筆談唱和菓 으로 「雜林情盟」 및 그때의 紀行文 「薄遊談戴」가 있다(Ii'僧海』).
의 『 對禮餘羅 』 와 種口 i 副 II 의 『對遊日記』 및 『韓客唱訓集』에 수록되어 있다. 精里는 「李退溪 書 抄」를 正使에게 증정했다. 이것은 村士玉水가편집하고 門人岡田寒泉이 刊刻한 것이다. 正使는 귀로 상경 도중, 李退溪의 遠孫 泰 淳이 郡守로 재임중인 梁山으로 찾아가서 보여주니 泰淳은 감격한 나머지 이 것 을 正使로부터 빌 려 陶山書院에 寶藏했다고 한다. 22)
22) 松田甲, 「陶山 書院 江藏寸 5 村士玉水0)李退溪 書 抄」(『日鮮史話』 第 6 編 ) 참조.
草場個川 23> (1787~1867) 은 유학을 가지 고 佐賀藩에 탁용되 었는데 漢詩 文에 능하며 특히 墨竹에 뛰어났다. 『古賀精里文集』에는 對馬島에 들어가 한객에 접하매 동반한 草場生온 文才가 있고 한편 그림을 찰 그려 韓客으 로부터 휘호몰 청탁받아 다른 일을 전폐하고 이에 응수했다고 했다. 草場 家 는 偶川울 포함하여 4 대 즉 居敬온 1711 년도에, 中山은 1748 년도에 大 競온 1764 년도에 각각 韓使와 접하고 시문창화를 하였다. 본래 頓山陽이 精里예 수행하고자 했으나 頓山陽의 行狀에 혐오를 느껴 이를 거절하고 그 대신 草場個川을 선임했다는 것이다. 24)
23) 富士川英郞, 『江戶後期0)詩人t.: ;.!I(筑摩幾 書 1973 年) 참조 .. 24) 中村眞_郞 『頓山陽 &춘 0)時代』 三 西遊中0)知人t.: ; 255 쪽. (中央公論社 1971 年) .
偵川은 古賀精里를 따라 對馬島에 건너가서 조선사절과 접촉하고 전후 2 개월간의 기사를 모아 『津島日記』 2” 를 간행했다. 이 책에는 對馬全島圖 ^ /오力 9 壬 및 朝鮮國訓吏道縣譯 : 隱(은), 萬(만), 刀(도) 등 . 55 개 (한글注音筆者), ^ 十 卜 才 Jv 、 J 一 4 -lj-중 : 夕 4 > 크 `/ 韓語 : 一,二, 三, 人,耳, 手 등 158 개語, 天寶鏡圖及銘文模 寫 信使行隊圖, 韓人官職姓名, 朝鮮國王來書井圖, 賜物品目, 書翰受取之 次第 御碧應次第, 回答國 書井圖書, 以訂菴圖, 韓船仰面圖(長凡甘三四間, 衡六間), 韓船開机圖 등을 수록했다. 또 입도한 일본인으로서 勘定方計吏 岡本花亭 26)(1768~1850) 이 있다. 그는 韓使와의 唱和詩를 실온 『詩姑享餘一糖』에 副使書記 李明五(號泊翁) 가 花亭의 시 에 驚喜하여 지 어 준 詩 : 名位一時, 薰拘文章, 千古不朽, 不 諭窮達울 載錄했다. 花亭은 시명이 높고 청렴한지사로 발탁되어 勘定奉行
25) 『草楊個川 日記』 上卷 10, 11, 12 · 津島日記 上, 中, 下 『影印本 津島日記』(西日 本文化協會 昭和 53 年) 참조. 26) 迫田靜雄 「岡本花亭O)t:&」(『近世0)學藝一史傅&考證』 三古會編八 木 書 店刊 昭和 51 年), 앞의 각주 23) 참조.
에까지 올랐다. 金善臣과 친교가 깊었던 金正喜는 그의 『昭惡齋詩 函』 2” 에 古賀精里 • 三 宅橘園 동에 관하여 賊한 〈 微懷人詩體歷敍깝聞轉寄和船大坂浪華間諸名勝 當有知之者〉라는 詩題 아래 五言古詩를 실었다. 金正喜는 對馬易地來勅한 신사를 통하여 간접적이나마 일본 유학자의 자국을 받았을 것이다. 古賀精 里로부터 正使 金履喬에게 증정한 「李退溪 書抄 」를 借讀하고 精里의 洛間 之 學 에 깊고 이 筆法淳古함을 찬탄하여 精里古賀撲盛老學 遠潮洛間餘 因之 及我邦 節要退溪書 筆法亦淳古 想必其人如余齋有精里對聯라고 賊하고 自注 에 있는 바와 같이 그의 서제에는 精里의 對聯을 결어 놓고 감상했다는데 藤塚鄒 박사에 의하면 金善臣으로부터의 선물이 아닐까 하였다 .2 8)
27) 金正喜 (17 86~1856) , 字는 元春, 號는 阮堂, 秋史, 躍卑齋 등 200 여 개 있 다. [j'區章齋詩藥』 7 卷 二冊 • 丁卯(1 867) 冬 平山申錫禧序 • 宜山南秉吉題辭. 28) 『藤塚鄭 書 』 96 쪽. 보주) 1) 1811 年(文化 8 純祖 11) 對馬島易地萌禮時의 朝鮮國 書 와 別幅은 日 本外務 省外 交史料館에 現存한다. 그리고 이 史料館에는 明治維新以後 朝鮮國으로부터 보 내온 書契 가 있通 現存하는데 그중 朝鮮國王의 國 書 는 다음과 같다. (D 1881 年 8 月 7 日(高宗 18 明治 14) 信使 趙秉鎬. 從事官 李祖淵. ® 1882 年 8 月 : 8 日 (高宗 19 明治 15) 修信使 朴泳孝 副使 金晩植,
正喜는 木村飛酸堂의 精雅한 策亥 l 을 좋아했으며, 『古梅園墨譜』를 읽고 그 製墨法의 절묘함에 감탄했다고 한다. 飛酸堂 의 策亥 l 에 대해서는 成大 中에게 새겨준 印章에 연유했을지도 모르겠다. 成大中은 對州通賜 다음해 1812 년에 殘했고 또 생전에 正喜와 친교가 깊었기 때문이다 . 對馬島에서의 詩文唱和席上에서 古賀精里는 谷文晟의 山水圖를 내어놓 고 製述官 李顯相에게 費울 求했다는데 金善臣도 文晟의 그림을 선사받아 歸國의 賤珍으로 삼았다고 했다.
제 3 부
통신사의 활약
제 1 장 통신사의 倭學譯官 1· 訪日한 譯官들 통신사가 파견륄 메마다 倭學譯官들이 수행했다 . 그 編制를 보면 堂上 譯官을 비 못하여 上通 事 , 次上通 事 , 押物通 事 및 小通 事 에 이 르기 까지 20 여 명이다.!)
1) 『通文館 志 』 卷 6 交 隣 下, 通 信 使行 堂上二員 • 上 通事 三員 • 次上通 事 二員 • 押物通 事 三員 • 小通 詞 10 명 . 또 「增正交 隣志 」에 는 堂上官 三員 • 押物官 四員이 라 고 明 記 되 어 있다. 따라서 堂上 譯 官은 倭 學 三員 • 上通 事 三員 倭 學 二 • 漢學 一, 押物通 事 四員 중 倭學三, 漢 學一, 定員온 합계 12 명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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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에서는 江戶時代에 방일한 도합 12 회의 역관 전원에 대한 일람표 를 만들고 동시에 각 인물에 대해서 조선측의 통신사 기행 록 과 譯科傍目 2) 에 의하여 그 실태를 파악하고자 한다.
2) 「 譯 科傍目」 燕山君 4 年(1 498)~ 高宗 28 年 (1891) 까지의 譯 官科試合格者名 錄 , 2 卷 2 冊 高 宗時刊行 活字本(東洋文 庫 所 藏 ).
그리고 역관의 업적의 하나인 被樓人.!ii賤홍의 절충, 일본어의 習熟程度, 譯官 康遇聖의 저 작인 『捷解新語』의 성 립 시 기 에 관해 서 는 金東漠의 『 海植 錄』에 나오는 「金絶河投金」 기사와 『 捷解新語』의 「 信使不受金」이라는 거 록을 대조하여 그 확증을 얻었다 . 또 現行 『海行抱載』에 미수록인 동신사의 諸紀行錄에 散見하는 일본 어 휘의 諺文譯字와 漢字音轉寫를 일일이 추출하여 附記했다 . 우선 아래 각 항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대조하는 데 편리하도록 역관일람 표를 싣는다. 일람표에 실린 역관의 총 인원 수는 小通 事 를 제의하고 118 명에 달한다. 그러나 그중에는 동일인이 수회에 걸쳐 방일한 경우도 있 다. 예를 들면 朴大根 3 회, 康遇聖 3 회, 洪喜男 4 회, 金槿行 2 회, 韓德男 2 회, 崔義吉 2 회, 鄭忠獻 2 회, 李亨男 2 회, 李長生 2 회, 李碩麟 2 회, 金 時聖 2 회, 鄭昌周 2 회, 金圖南 2 회, 崔鶴齡 2 회, 崔 壽 仁 2 회, 도합 15 인 에 달한다. 총 인원 수에서 2 회 이상 방일한 횟수를 빼면 실재로는 99 인이 방일한 것이 된다. 이들 역관 중에는 임진왜란 때 被打力人의 몸으로 연행 되어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일본어를 습득해서 귀국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일본어 역관으로 다시 통신사에 수행하여 방일한 사람이 있음은 주목할 만 하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서는康遇聖을 들수 있고 그 밖에도 朴彦環,“ 尹 大銃 4) 등도 들어 있다 .
3) 『宣祖實錄』 卷 140, 34 年 8 月 壬子條 • 金東漠 『海椎錄』 9 月 25 日條 「問于彦環 云渠曾於甲辰年隨惟政入日本, 又於甲子年隨鄭뾰以往」. 4) ·· 金東漠 『海極錄』 丙子 12 月 28 日條 「一行諸譯己往者及前日被揚康遇聖 • 尹大銃 · 輩無不知之」.
조선통신사 역관 일람표
1617 光海君 丁已 吳允謙 朴大根 崔義 吉 鄭 純 邦 金君萬 大坂平
—1 -1 T - 「 - - 7 朴李白完貴哲白同賢 朴船韓世破天亮演錫 死
朝鮮王朝時代에는 譯科選拔융 위한 科擧로서는 漢 • 倭 • 蒙 • 淸 즉 中國 語. 日本語.蒙古語.滿洲語의 譯科試驗이 실시되었다. 이 과시 합격자는 성 적 순위 로 1 등 2 등 3 등으로 나누어 각각 從九品에 서 從七品까지 의 品階 를주었다 . 과거는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시험, 즉 式年試” 의에 임시로 시행하는 增廣試 6) 가 있다 . 譯科의 과시 합격자의 인명록인 「譯科傍目」에는 성명 • 자 • 본관 • 연령 • 최종관직 및 품계, 그리고 父名이 注記되어 있다. 앞 일 람표의 역관들을 「譯科傍目」에서 抽記하면 다음과 같다. 편의상 간지에는 서기를 명기했다. 역관인명록 I 朴大根 萬曆辛卯式年(1 591) 字玄久 丙寅生(1 566) 本務安 倭學敎海同樞 父 進士 軍資正 連壽 2 李彦瑞 萬曆矣卯式年(1 603) 字子祥 己巳~f . (1 569) 本全州 倭學敎海嘉善 父 通政 孫福 壬辰倭亂時被挑人 3 朴彦璟 萬曆矣卯式年(1 603) 字士精 丁丑生(1 577) 本寧海 倭學敎海正 父 通德 永順 4 康遇聖 萬曆己酉增廣(1 609) 字亡그 辛已生(1 581) 本晋 1 서 倭學敎海嘉義 父 節敎授 有慶 5 皮得沈 萬曆壬子式年(1 612) 字子順 丙申生(1 596) 本洪川 漢學敎梅正 父 嘉善 鎭 6 洪喜男 萬曆矣丑增廣(1 613) 字子稅 甲戌生(1 574) 本密陽 倭學敎海崇祿 永付知樞 父 司果 德麟 7 姜滑賓 萬曆己未增廣(1 619) 字 E 그 丁酉生(1 597) 本晋 ) · I1 倭學敎海通政 父 好仁 8 李長生 天啓甲子增廣(1 624) 字子固 甲辰生(1 604) 本全 111 倭學敎海崇祿 知樞 父 敎諦知樞 鷹 5)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과거시험, 子 , 卯 • 午 • 酉年 3 년 만에 한번씩 실시한다 . 6) 국왕의 즉위 또는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임시적으로 실시하는 과거시험을말 한다. 주로 慶科 • ,駐聖科 • 庭試 • 春塘臺試 • 節目製 • 黃村製 등으로 이것은 一般文 科試의 경우이다. 朴大根온 萬曆辛卯(1 591 ) 式年試에, 康遇聖은 萬曆 己酉 (1609) 增 廣試에 급제했다. 이 己酉增廣科試의 합격자는 漢學 13 人, 倭學 2 人, 蒙學 2 人, 淸 學 2 人, 그리 고 一等 1 人, 二等 5 人 • 三等 13 人으로 합계 19 인이 었다.
9 韓相國 天啓甲子式年(1 62 4-) 字汝弼 己亥生(1 599) 本淸州 倭學敎諦正 父 司果德弘 10 金證行 天啓丁卯式年(1 627) 字解梅 庚戌生(1 610) 本金海 倭學敎梅資盛 知樞 父 譯余樞 得棋 11 鄭時講 崇禎矣酉增廣 (1 633) 字亡二] 庚戌生(1 610) 本溫陽 倭學敎梅正 愼男子 12 金時聖 崇禎壬午式年(1 642) 字丕顯 丙辰生(1 616) 本安 山 倭學敎誰正 父 折衡 德輝 13 李承緊 崇禎壬 午式年(1 642) 字子允 甲寅生 (1626) 本江陰 漢學敎誰 正 父 折衝禮元 14 卞承業 順治乙酉式年(1 645) 字善行矣亥生 (1 623) 本密陽 倭學敎梅嘉義 應星子 15 朴亨元 順治 乙酉式年(1 645) 字善長 戊申生(1 608) 本密陽 漢學移去倭學 聽敏 父 折衝 壽進 16 洪汝雨 順治庚寅增廣(1 650) 字浦然 丙寅生(1 626) 本南陽 倭學聽敏通政 喜男子 17 卞爾標 順治庚寅增廣(1 650) 字卓然 矣亥生(1 6 23) 本密陽 倭學敎誰資憲 知樞 18 劉以寬 順治辛卯式年(1 651) 字子燒 丙子生(1 636) 本平山 漢學敎誰正 父 通政錫民 19 李尙漢 順治辛卯式年(1 651) 字 士 秀 戊午生(1 618) 本施善 倭學敎諦正 父 司果 義方 20 鄭文秀康熙壬寅增廣 (1 662) 字子和 丙寅生(1 626) 本溫陽 倭學敎海正 父 同樞得 21 安愼徽 康熙壬寅增廣 (1 662) 字伯痛 庚辰生(1 640) 本順興 倭學敎諦嘉義 父 司果仁達 22 朴再興 康熙矣 卯式年(1 663) 字仲起 乙酉生 (1645) 本務安 倭學敎海嘉義 同樞 元郞子 23 洪禹載 康熙丙午式年 (1 666) . 字延瑞 甲申生(1 644) 本南陽 倭學敎海嘉善 同樞 父 司果 汝舟 썩 吳允文 康熙壬子式年 (1 672) 字子華 丙戌生 (1646) 本海州 倭學敎海正 父邦立 25 金指南 : 康熙壬子式年(1 672 ), 字季明 甲午生 (165 4.) 本牛峯 漢學敎海資憲 知樞 父 · 壽別 提汝義
26 朴再昌 康熙乙卯式年(1 675) 字道卿 己丑生(1 649) 本務安 倭學敎海嘉義 元郞子 27 鄭昌周 康熙乙卯式年(1 675) 字 盛之 壬辰生(1 652) 本溫協 范 學上通 事 正 文秀子 28 洪世泰 康熙乙卯式年(1 675) 字道長 笑巳生(1 653) 本南陽 商學聽敏吏文 學官(天和度(1 682) ?卑將으로 來日〕 29 金圖南 康熙戊午增YD'((1 678) 字仲羽 己亥生(1 659) 本牛峯 倭學敎海嘉義
汝溫子 30 金 瑢 康熙戊午增廣 (16 78) 字純玉 甲 申 生 (16 44) 本 雪 城 倭學敎海嘉義 璟弟 31 韓後暖 康熙戊午增廣(1 678) 字伯玉 己亥生(1 659) 本淸州 倭學敎諒 嘉 義 父 武科 時逸 32 李碩 競 康熙戊午式年(1 678) 字聖瑞 庚子生(1 66 0) 本海,J 1i 倭學聽敏 嘉 善 性然子 33 朴 重 烈 康熙辛酉式年(1 681) 字 亡二] 本成陽 倭學聽敏奉事 父班 34 韓重億 康熙壬戌增廣 (16 82) 字時仲 庚子生 (16 60) 本新平 倭學敎海通政 重琦弟 35 李松年 康熙笑亥增廣(1 683) 字久叔庚子生 (1 660) 本廣州 倭學敎海通政 36 趙得賢 康熙甲子式年 (1 684) 字景叔矣卯生 (1 663) 本錦山 漢學舊押物直 長 時說子 37 權興式 康熙丁卯式年(1 687) 字君敬 丙午生(1 666) 本安東 漢學舊押物致 正 父 折衝 以謙 38 金是探 康熙丁卯式年(1 687) 字大材 甲辰生(1 664) 本慶州 倭學敎海正 父 司猛應嫌 39 崔尙蝶 ]康熙 丁卯式年(1 687) 字廷普 甲辰生 (1664) 本茂朱 倭學敎海正 盛 父 景稅 40 吳萬昌 康熙己已增廣(1 689) 字天老 戊申生(1 668) 本海州 倭學聽敏奉 事 碩典子 41 金始南 康熙庚午增廣(1 690) 字重叔 丙申生(1 656) 本牛峯 倭學敎海通政 星南弟 42 金世鑑 康熙笑酉式年 (1 693) 字百朋 甲寅生(1 674) 本宣城 倭學敎海欽正 父 嘉善 昌翼 43 朴泰信 康熙己卯式年(1 699) 字信哉 己未生 (1679) 本密陽 倭學敎誕 嘉養 同樞 光後子44 金顯門 康熙壬午式年(1 702) 字陽甫 乙卯生(1 675) 本牛峯 倭學敎諦嘉善 指南子 45 金時環 康熙乙酉式年(1 705) 字明仲 甲子生(1 684) 本 春 川 倭學敎海主簿 聲和子 46 洪舜明 康熙乙酉式年(1 705) 字永鏡 丁已生(1 677) 本南陽 倭學敎海通政 萬載子 47 玄德潤 康熙乙酉增廣(1 705) 字道以 丙辰生(1 676) 本川寧 倭學敎諦嘉善 父 資盛 漢一 48 崔漢鎭 康熙戊子式年(1 708) 字安國 戊午生(1 678) 本慶州 倭漢敎海通政 大圭子 49 韓綴興 康熙戊子式年(1 708) 字起仲 庚午生(1 690) 本淸州 倭學敎海主簿 振興弟 50 崔尙齊 康熙庚寅增廣(1 710) 字亡그 丁卯生(1 687) 本淸州 漢學舊押物主 簿 希亮子 51 李 棒 康熙矣已增廣(1 713) 字濟卿 乙丑生(1 685) 本金山 倭學敎諦資窓 後勉子 52 金震藩 康熙笑已增廣(1 713) 字仲明 矣丑生(1 673) 本三涉 倭學聽敏正 父 折衝 聲遠 53 朴春瑞 康熙甲午增廣(1 714) 字和仲 丁卯生(1 687) 本務安 倭學敎海通政 父 司果 再起 54 鄭道行 康熙甲午增廣(1 714) 字汝一 甲戌生(1 694) 本河東 倭學敎海正 翰益子 55 玄德淵 康熙甲午式年(1 714) 字季深 甲戌生(1 694) 本川寧 倭學敎海崇祿 德潤弟 56 吳大齡 康熙丁酉式年(1 717) 字大年 辛已生(1 70 1) 本海州 漢學通事正初 名億齡 益興子 57 ’夏成 康熙庚子式年(1 720) 字大而 乙丑生 (1695) 本昌原 倭學敎海判官 歷) 父 惠參奉 致章 58 洪聖龜 康熙辛丑增廣 (17 21) 字大年戊寅生 (16 98) 本南陽 倭學敎海資憲 父 內銀醫別提 萬遇 59 朴尙淳 康熙辛丑增廣 (17 21) 字子淳 庚辰生 (17 00) 本密陽 倭學敎海崇祿 泰信子 60 玄泰翼 康熙壬寅增廣(1 722) 字仲擧 辛已生 (1701) 本川寧 倭學敎海資憲 德潤子
61 李昌基 康熙壬寅增廣(1 722) 字大卿 丙子生 (1696) 本廣州 倭學敎海通政 松年子 62 崔鶴齡 雍正壬子式年(1 732) 字君興 庚寅生(1 7 10) 本茂州 倭學敎海崇祿 永付知樞 父 譯正盛毒漠 63 玄泰心 雍正乙卯增廣(1 735) 字子定 矣巳生(1 713) 本川寧 倭學敎海正 父 德萬 生父 譯科同樞 德潤 64 黃大中 雍正乙卯增廣(1 735) 字定叔 乙未生(1 715) 本昌原 倭學敎海奉事 父 再河 65 崔壽仁 雍正乙卯式年(1 73 5) 字大束 己丑生(1 709) 本淸州 倭學敎海嘉善 同樞 台齊子 66 李命尹 乾隆戊午式年(1 7 38) 字聖任 辛卯生(1 711) 本金山 倭學敎梅資盛 障子 67 金弘喆 乾隆庚申增廣(1 740) 字聖몇 乙未生(1 715) 本牛峯 漢學敎海資盛 慶門子 68 崔弘景 乾隆庚申增廣(1 74 0) 字敬通 辛丑生(1 72 1) 本稷山 倭學敎海致正 震 岡子 69 玄泰衡 乾隆辛酉式年 (1 7 4 1) 字群久 戊戌生 (17 18) 本川寧 倭學敎海命正 父 折衝 德昌 70 玄啓根 乾隆丁卯式年 (1 747) 字暎伯 丙午生 (1726) 本 )I( 寧 倭學敎海資憲 知樞 初名敬罰 父 譯判官 深 71 劉道弘 乾隆庚午式年 (1 750) 字士行 戊戌生(1 718) 本淸州 倭學聽敏正 道明弟 72 崔鳳齡乾隆甲戌增廣 (1 754) 字來儀 壬寅生(1 722) 本茂,'i 1 倭學敎海崇祿 知樞 鶴齡弟 73 李命和 乾隆甲戌增廣 (1 75 4) 字聖欽 戊申生(1 728) 本金山 倭學敎海嘉善 棒子 74 李彦頂 乾隆己卯式年 (1759) 字處掌 庚申生 (1740) 本江陽 漢學舊押物 主 簿 父 通德郞 德芳 75 李儀龍 乾隆辛卯式年(1 771) 字雲敬 戊辰生(1 748) 本金州 漢學 上通 事正 76 玄 試 乾隆丙午式年 (1 786) 字陽元 壬午生(1 762) 本川寧 倭學敎海崇政 知樞 啓禎子 77 卞文圭 嘉慶辛酉增廣(1 801) 字玉汝 乙酉生(1 765) 本密陽 倭學敎海嘉善 光玉子生父譯科主簿 光晋 78 金祖慶 嘉慶辛酉增廣(1 801) 字子祐 壬寅生(1 782) 本漢陽 倭學敎海通政 宗吉子
79 玄義湘 嘉慶辛酉式年(1 801) 字敬天 乙酉生(1 765) 本川寧 倭學敎胞崇祿 知樞 父 惠參奉 商說 80 崔昔 嘉慶甲子式年(1 804) 字明元 戊子生(1 768) 本慶州 倭學敎海崇政 知樞縣監 父 護軍 道慶 81 洪得俊 嘉慶乙丑增廣(1 805) 字仲偉 T 酉生(1 777) 本南腸 倭學敬海崇政 宅福子 82 趙行倫 痛慶丁卯式年(1 807) 字明五 乙未生(1 775) 本韓山 倭學敎諦嘉 善 父 譯判官 孟 喜 83 秦東益 嘉慶己已增廣(1 809) 字直哉 丁酉生(1 777) 本豊基 倭學敎海崇祿 知樞 父 醫同樞 洞 전기한 譯官一覽表에 둘어 있는 사람들 중, 金孝舜, 韓德男,梁大福, 崔義吉, 朴應夢, 鄭彦邦, 鄭純邦, 李賢男, 李亨男, 張善敏, 宋禮修, 尹大 銃, 尹廷羽, 鄭忠獻,金汝澤, 吳仁亮(扶桑日錄에는 亮이 寬으로 되어 있 음) 등 16 명은 譯科傍目에 그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이 사람들은 거의 모 두 통신사 초기의 역관들인데 기재되어 있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없다. 혹 시 당시 일본어 역관이 부족해서 소위 현지 특별 임용에 의한 것이 아닐 까 하는 생각도 든다. 金孝舜에 관해서는 『通文館志』 卷 7 인물항에 기 록이 보인다 . 그는 임진왜란 때 적진에 있으면서 府使 李廷統을 도운일 과 松雲大師가 講和使로 방일할 때 수행했다는 것이 적혀 있다. 그리고 倭學譯官 朴大根을 위시하여 洪喜男 • 康遇聖 • 金槿行 • 玄德潤 • 洪舜明 및 漢學譯官 金指南에 관해서 도 『通文館志』 (人物)에 기 재 되 어 있다. 朴大根에 대해서는 특히 德川政權과의 강화교섭에 있어서 중대 문제였던 犯陵賊의 總送을 실현시킨 공로로 倉知中樞府事에 올랐고 또 당시의 左相 고李 德被馨魔온人 別일還본에에서도 공差이倭 가있 었오다기고만 하하였면다 .반 “드 시朴 大朴根大이根 에日게本 畵하師문 할海 北정友도松였 ' (1543~1625) 으로부터 그려 받은 수목화를 모두 천하일품이 라고 하니 한 폭 더 그려달라고 한 서한이 남아 있다. 혹시 1607 年 信使롤 따라 방일했을 때 京都에서 友松과 해후했는지도 모르겠다 .8) 7) 『通文館志』 卷 7, 人物 朴大根 條, 『韓國人名大事典』 268 쪽 • 中村榮孝 『 日 鮮 關係史0)硏究』 下 266 쪽 참조. 8) 山內長三 「海北友松&朴大根」 及 「通信使&狩野常信」(《韓國文化〉〉 1984 年 5 月 號) 참조.
洪喜男에 관해서도 전 술 한 바와 같이 통신사에 네 차례나 수행했고 1636 년에 對馬太守 宗 義 成을 위문하기 위하여 渡海한 것이 問慰行의 시초가 되 었다. 또 1659 년의 問慰行 메에는 疏黃의 酸化 法 울 배워가지고 와서 국내 에 보급시켰다. 그는 연행사를 따라 2 차나 중국을 다녀왔다 .9)
9) 『通文館志』 卷 7 人物 洪 喜 男條 • 갈은 책 卷 6, 交隣問慰行 • 田代和生 『近世 日朝通交貿易史0)硏究』 131 쪽 • 『韓國人名大事典』 1058 쪽 참조.
이와 같이 朴大根 • 洪 喜 男 兩譯官은 초기의 통신사행에 공헌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앞에 열거한 역관 99 명 중 漢學通 事 16 명을 빼면 나머지 83 명 온 모두 倭學譯官이다 . 小倉進平 박사의 『增訂朝鮮語學史』(일본어학자 ) 1 0 ) 에는 그중 31 명을 열거한 데에 불과하다 .
10) 小倉進平 『增訂朝鮮語學史』 第 5 節 「 日 本語學者」 440~455 쪽 . 1) 抽稿 「壬亂僧將松 雲 大師墨跡0)發見江寄난 T 」 (〈馮t》 53 號 昭和 51 年) 참조 내
통신사를 따라 방일한 倭 學 譯官 중 辛卯年 (1711) 信使의 上通 事 玄德潤 (號錦谷)은 能 書 家로 특히 草 書 와 隸 書 에 뛰어났다. 淸見寺山門에 걷린 「東海名區」와 「潮音閣」 두 稱額은 모두 錦谷의 필적이다. 그리고 일본에 남아 있는 것으로는 押物通 事 金時漢(號海峯) 筆 「廣忠寺」 額字가 岡崎市 廣忠寺에 현존한다. 2 被擦人의 別還交涉 초기 통신사에 동행한 역관들은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被擦人들에게 諭告文을 배부하고 귀국을 권유하는 등 則還에 활약하였다 . 본래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한 그 주요 목적의 하나는 伴廢別還에 있었 던 것이다. 이들 被擔人에 관해서는 內藤集輔 박사의 『文祿慶長役 K 治낡石 被擦人(l)硏究』에 詳述되 어 있다 . 우선 통신사 파견이 실현될 때까지의 경위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 1592 년 부터 7 년간에 걸친 豊臣秀吉의 조선침략, 죽 임진왜란은 1598 년 8 월 18 일 秀吉의 병사로서 종막을 고하고 德川家康의 세상이 되자 家康온 使者를 조 선에 보내어 和好를 구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측으로서는 探賊使로 松雲大師 ”(1544~1610) 를 對馬島에 파견 하여 일본국정을 정탐하는 동시에 被揚人의 別還交涉을 추진시켰다. 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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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 家康온 上洛(京都에 내려옴)을 예정하고 있던 차이므로, 對馬島主 宗 義智에게 松雲大師를 동반하여 上洛하라고 명하여 대사 일행은 1604 년 12 월 27 일에 京都에 도착하여 登年 3 월 5 일 京都伏見城에서 家康父子와 회 견하고 귀로에 被擔人 1,390 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 伏見城에서의 절 충 이후, 조선국과 德川政權과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되어 드디어 1607 년 2 월 呂祐吉일행이 德 )II 幕府에 대한 回禮.와 修好를 겸하여 回答兼別還 使라는 명목으로 일본땅을 밟았던 것이다. 조선측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임진 • 정유왜란으로 인하여 일본에 연행된 포로의 쇄환이 無眉의 과제였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1607 년, 1617 년, 1624 년을 포함한 초기 3 회의 사절은 別還使를 겸했고 또 1636 년, 1643 년 및 1655 년때의 통신사 방일에 이르기까지 피로 인쇄환 교섭이 계속 되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조선에 귀환한 포로의 인원 수로 본다면 1607 년 呂祐吉 때에 1, 240 명 , 1617 년 吳允謙 때 에 321 명 , 1624 년 鄭뾰 때 에 146 명 , 그리 고 1643
년 尹順之 때에는 14 명에 불과했다 일본에 연행된 포로의 인원 수에 대해서 內藤 患 輔 박사 2) 는 槪數 5, 6 만 명으로 추정했으나 후에 2 , 3 만 명정도라고 정정하기도 했다 . 하여간 『 朝 鮮王朝實錄』에 의 하면 조선에 귀 환한 것은 5, 720 명 에 불과하다. 3)
2) 內藤 魏 輔 『文祿慶長役 K 和 85 被 樓 人0)硏究』(日本 K 治납石.lil l 還 接 衝 0) 實情 東 京大學出版會 1976 年) 참조. 3) 앞의 책 59 쪽.
다음 信使紀行錄에 의하여 그 실정을 한두 가지 소개하겠다 . 1. 607 년 副 使慶進의 『海樣錄』에는大阪浦在時, 被挑人남·여가문밖에 와모였으므로 譯官 朴大根울 시 켜 信使가 귀 국할 때 帶同할 것을 전했다 . 4) 또 1617 년 때 濱에 으는로 屈 賤가}서에 1관0 한여 명諭 을告 文모과아 왔江다戶고幕 한府다 .執 政” 둘16의17 년書 狀正융使 가吳지允 고謙 이康 遇가聖지이 고 온埋 被挑人에 대한 諭告文은 唐津市 高德寺에 造存한다 .6 ) 쇄환이 곤란한 것은 아 무리 정성을 다하여 끌어들이고 반복해서 타일러도 종시 마음을 돌려 돌아 오려고 하지 않으며 혹은 돌아가려고 했다가도 중간에 변심하여 혹은 배 를 탈 무렵에 달아나버리는 자가 있었다고 한다 .7) 또 從事官 李石門의 「 扶 桑錄」 9 월 20 일 條에 는 〈大槪思歸者稙知有識之士族及在此契苦之人也 , 其餘 有妻子, 有財産 己定其居, 頓無歸意, 可惡可惡〉, 즉 귀 환을 원하는 자는 조금 식견이 있는 士族이든가 또는 여기서 고생하는 사람들이었고 그 나 머지 처자가 생기고 재산이 있어서 그 생활이 안정된 사람들은 돌아갈 생 각이 없으니 가증스럽기 한이 없다고 했다 .
4) 慶七松 『海樣錄』 4 月 9 日條. 5) 吳允謙 『東樣上日錄』 9 月 13 日條. 6) 앞의 內藤提輔 書 圖版 5. 7) 吳允謙 『東樣上日錄』 9 月 15 日條 「蓋汚染己療, 喪失本心, 俳俳反側未有定志, 故難血誠諭引, 反覆開誘, 終不肯回心出來, 或許還 T 寧而中間改路, 或臨乘船走 還 者 有之, 別還之 難如此如此」 .
또 1624 년 副使 姜弘重의 『東椎錄』 8) 에는 康遇聖이 말하기를 〈간밤에 大 津 사람과 담화하였는데 한 사람의 말이 조선인 李文長이라는 자가 지금 倭京에서 占 卜으로 생계를 세우고 있는데 被挑人에게 공갈하여 말하기를 조선의 법이 일본만 못하고 생계가 어려워 살 수 없으니 본국으로 돌아가 도 조금도 이로울 것이 없다고 하며 만가지 좋지 않은 말로 두루 다니며
8) 姜弘重 『東椎錄』 11 月 27 日 條 .
遊說하여 그 본국을 홈모하는마음을 끓어버리게 하므로 사로잡혀 온 사람 들도 모두 李文長의 말에 유혹되 어 나가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소위 李文 長이라는 자가 어느 지방에서 왔는지 알 수 없으나 그와 같이 好詐한 무 리가 이국에서 날뛰니 심히 불행하고 또한 통분하기 짝이 없다〉고 하였다. 앞서 말한 李文長온 특이한 존재로서 관심이 쏠리므로 그 인물에 대해 서는 문헌을 찾아 보충하는 바이다. ® 광해 군 9 년 정 월 9 일 乙亥條”에 〈李文長은 林川의 士子이 다 . 처 음 薩摩에 있었을 때 兒黨을 모아 兵을 薩摩에 請하여 제 주도를 冠 涼하고자 했 으나 薩摩는 이를 꾸짖어 허락하지 않고 大阪城으로 옮겼다 . 사전이 귀국 할 때 유인해서 對馬島까지 데리고 왔으나, 귀국 후의 자기 죄가 두려워서 島中執權者에게 청탁하여 뒤떨어져 귀국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 樂姉紀聞 (I)10) 에 〈李文長은 조선 사람으로 李田 氏의 선조이다. 그 의 무덤은 國分寺 동남쪽에 있었다. 묘의 표지로 큰 소나무를 심었었는데 文化信聽 (1811) 때 모르고 벌목해 버 렸다〉고 하였다 .
9) 舊朝鮮總督府編 『朝鮮史』 所引 備邊司膳錄 • 光海君丁巳年正月 乙亥條 • 앞의 內藤槪輔 書 87 쪽. 10) 『樂鄕紀聞』 I 對馬夜話 中川延良編 鈴木業三校莊(東洋文庫本 307) 참조.
® 『陳元賀 0 硏究』 11) (朝鮮系 李文長)에 〈內地釋放者로 알려져 있는사람 으로서는 毛利藩의 李家聖賢과 孟二寬 그리고 大阪, 撰와 京都에 轉住한 李文長…〉라고 하였다.
11) 小松原 溝 著 『陳元貸C7)硏究』 183~184 쪽(雄山閣刊 昭和 47 年).
® 正保野史和解의 和文에서 인용하면, 源素心(字 藤丸 • 號 意林庵)은 조선 사람 李文長이 조선에 오게 되어 만났다. 李文長의 儒名을 기뻐하여 그를 스승으로 모시자 이로부터 학업이 진척하여 이름이 나게 되었다는기 록이 있다 .12)
12) 앞의 책 駐 13 83 쪽.
® 秦鼎 「一育話」(卷 2 朝鮮易者)에, 〈慶長年 (1597~1598) 조선이 항복 을 청하매 포로들을 돌려보냈는데, 李文長은 어떻게 하여 이 땅에 머물게 되었을까. 片桐主膳正에게 명하여 李文長에게 점을 치게 하다…無民의 易 林에 따라 점패를 폈다. 文長은 필법에도 능했는데 槿書로 쓴 孝經을 보 니 뛰어났었다〉고 하였다 .13)
13) 앞의 책 84 쪽.
@ 史氏備考에 岡原仲撰墓碑銘文 중, 〈朝鮮儒李文長到于之日, 相見受聖 學之道統〉이 라는 구전 이 있 다 . 14)
14) 앞의 책 84 쪽.
® 陳元혔氏는 曰 〈僕二十四, 五時 遇李文 長 於 京 師, 文 長歲垂 八十, 僕 作詩 十, 文長 二, 乃擧手開口敬疾勞氣端之狀, 曰文長慈地的, 子何號虎魄 道人, 曰文長造吾虎魄株, 吾莊愛故以爲號〉!”라고 한 대목이 나온다 . @ 1624 년 姜弘重 『東樣錄』에 〈有漢人元費者福建人也, 上年因公來此以病 尙留, 送啓帖於三使臣處, 文理筆跡稽有才氣, 大槪中朝外郞之類也,答 書 非 便令譯官借辭以報〉 16) 라고 하였다.
15) 앞의 책 85 쪽. 16) 姜弘重 「東樣錄」 留江戶, 12 月 18 日條.
이상으로서 李文長이란 인물은 임진왜란 때의 被擔人이며 易者로서 大 阪城에도 있었고 또 京都에 있을 때에는 전기한 바와 같이 포로들에게 환 국을 반대했고 만년에는 對馬島에 정주했음을 알 수 있다 . 1636 년 副使 金東漠 『海接錄』에 도 譯官 康遇聖이 諭告文을 가지 고 對馬 島의 差倭將監과 함께 唐津까지 갔었는데 괴로인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 했다고 하였다 .1 7)
17) 金東漠 『海樣錄』 2 月 13 日 • 同 16 日 條 .
1643 년 正使 尹順之일행이 귀로 도중 對馬島에 체류할 때, 본국에 보낸 狀啓에 〈壬辰丁酉被勝人民皆有子孫, 安居其地不樂還鄕, 只別十四名而還〉 이라고 하였다 .18)
18) 『仁祖實錄』 21 年 10 月 己丑條 前掃 內藤隔輔흉 196 쪽 .
3 일본어의 習熟 譯官의 일 본어 학습에 관해 서 는 『通航一覽』 %1] 『金溪雜話』”를 인용한 것 이 있다 . 〈通辭〉를 조선음으로 卜 夕 y ? (통사)라고 한다. 〈어떻게 倭語를 배우는가 하면 부산왜관에는 늘 對馬島 사람이 체류하고 있어서 어려서부
I) 『通航一覽』 卷 lll, 318 쪽. 2) 金溪雜話 金溪(南川)의 作. 名은 維遷 • 字는 士長 • 金溪라고 號하다. 伊勢人, 龍草盧에 게 배우다. 古柱學派, 晩年에 那野藩盤生, 成大中과 同庚으로 詩文에 능
했다(『 儒海 』) . 山口女子大 學 樓團寺內 文 庫 에 成大中에게 상정한 南川 維遷筆詩稿 가 현존한다 .
터 조석으로 왜관에 출입하면서 임금을 받지 않고 도와준다 . 이렇게 하여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倭語에 통하게 되어 信使來賜時에는 이들 중에서 通辭를 뽑는다고 했다. 또, 1764 년에 방일한 次上通 事 李命和 譯官에 대해 서 今 日好天平安否(中 크 中 크 4 子 `./ 수手::i ' -tf/1, 才 力 7 9 壬 = ' -tf弓 文 力) 정 도는 동하지만 말이 조금 어렵든가 말이 길 메에는 전후상하가 轉倒하여 알아듣기 어려울 때가 많지만, 일본의 平假名, 和歌, 俳句도 조금씩 배워 남이 청하면 古歌 같은 것을 찰 써주고 하는데 나한테도 ‘if.)(J)山 0 月力 내 鳴 t책선 :H g ’ 라는 發句를 써준 일이 있다〉고 하였다. 또 1748 년에 방일한 堂上譯官 玄德淵에 관하여 借別이 라는 두자를 大 書 하고 또 한 종이에는 平假名도 日本和歌 〈明日ii主t괴誰t£力따자시) 知 8 心 身t드 友尤 b 今日(J) 曰드군借남 h 〉라고 쓴 것이 姬路 藩 茶 氏 집 병풍에 붙 어 있었다고 했다(有斐齋雜記, 文 會 雜記). 『樂姉紀聞』에는 小通 事 의 일본어 실력을 엿볼수 있는 기록이 들어 있다 4 》 저자가 소장하고 있는 이들 譯官 自筆의 和歌 , 俳句룰 일본어 원문대로 소 개하면 다음과 같다 .
3) 『 通 航一 覽 』 卷 111, 320 쪽. 4) 『樂鄕絶 聞 』 137 쪽•
尤 礎晶 5 r, 作 사 소 犯
® 秋iit£(和越) 中丘主〈.n .:. 7c (堂f.:堂 f.:t) - :.Gb 萩 0 (考t}f) 萩 OL ti 露 ® 范屋손 今朝ii 阿七 8 乃 岸'::疾 ® 父'다以f 子(l()ti 這 0 #) #石 (案力 )山b 나子/力可따f南) 이런 작품을 통해서 볼 때 일본 시가에 상당히 정통했음을 알 수 있다 . 그런데 新井白石이 佐久間洞巖에게 보낸 書 翰에 조선의 倭 學 及第者둘 도 日本和歌에 대해서는 어림없다고 했지만 앞에 기술한 趙景安 및 朴德 源과 같은 특례도 있었던 것이다 .
5) 佐久間洞巖 앞 密簡(『新井白石全集』 第 5 卷 430 쪽) 참조 .
1764 년 正使 趙職은 〈兩國之言語之相通, 全韻譯舌而隨行十人, 達通彼語 者基鮮, 誠可該然, 此無他倭學生珪比益蕭條, 朝家勸忽近亦森處故耳 〉 6) 라고 하였다 즉 양국의 말이 서로 통하는 것은 오로지 역관들에게 의지하게 되 어 10 명이 수행했는데 저들의 말에 달통한 자가 매우 드무니 정말 놀랐 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倭學으로 생계를 세우는 일이 더욱 소조해지고 조정의 勸愍도 근래에 허술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 그리고 또 귀로 도 중 大阪客館에서 都訓導 崔天宗이 對馬島의 傳語官 鈴木傳藏에게 피살되어 조선과 일본의 응수가 긴박해졌을 때 首譯 崔鶴齡과 李命尹의 일본어 실 력이 옛 명역관처럼 識慮가 많고 倭語를 찰하는 데는 따를 수 없었다고 했 댜“ 여기서 말하는 古昔의 명역관이란 과연 누구를 두고 말하는 것일까. 혹시 朴大根 • 洪喜男 • 康遇聖을 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선측 역관의 일본어 실력 저하에 관해서는 『賢言試集』에도 근년에 저하되어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하는 대목이 보인다. 또 한가지 堂上譯官의 步行에 대해서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즉, 평소에 釜山 倭館에 출입할 때에는 아무 일도 없더니 일단 渡海堂上譯官에 임명되면 갑자기 양쪽에서 두 小童이 부축해 야만 걷어가며 위의를 갖추었다는 것이다 .8) 通事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일찍이 雨森芳洲도 隣交에 있어서 通詞보다 더 요건한 관리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9)
6) 趙職 『海樣日記』 12 月 16 日條. 7) 前掃 畵 甲申 5 月 6 日條. 8) 長正統 「倭學譯官J: b 石f니易地行賜交涉」(九州大學文學史部史淵 115 輯)同 『津 島日記』 解題(『影印本津島日記』 草場職川 著 西日本文化協會 昭和 53 年) 참조. 9) 安田 章 『朝鮮資料&中世國語』(朝鮮資料0)史的系譜) 6 頁 笠間 密院 昭和 55 年 참조.
일본어가 배우는 데 제일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는 雨森芳洲i와 申維翰과 의 다음과 같은 응수에서 엿볼 수 있다. 『海游錄』(附聞見錄)에 의하면, 申 維翰이 芳洲i에게 〈내가 일본어롤 배우려면 몇 달이나 걷리면 될까요〉 했 더니 芳洲i는 〈중국어라면 두어 달이면 되겠고 조선어는 1 년이면 가능하겠 지만 일본어는 비록 총명이 過人아라고 할지라도 3 년이 아니면 능하지 못 할 것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조선통신사가 방일할 때마다 對馬藩에서도 傳語官(朝鮮語通詞)이 50 명 이나 隨行 10) 했고 또, 島主 이하 1,500 여 명의 隨員이 동행했다는 것을 염 두에 둘 필요가 있다.
10) 洪景海 著 『隨極 日 錄』 33 쪽 倭通事之隨來於今行者始至 50 人而皆善作我國語 無少抽造 島主行中所率人 1, 500 여 명 , 其中傳語 50 명 .
4 諺文伊路波 일본문인들은 통신사를 맞이하여 ‘ 필담창화석상에서 朝鮮諺文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諺文을 써달라고 간청한 것이 도처에서 보인다. 『客館瑞菜 集』I)에 들어 있는 언문도 그 한 예 이 다. 1719 년 通信使 書 記 姜柏 (號耕牧子) 와 名古屋 儒學者 木下實聞(號蘭阜)와의 필담에서 蘭阜가 〈諺文未審字體如 何〉라고 물으니 耕牧子는 〈字似梵字而以方言譯字義〉라고 하며 따로 언문을 서사해 주었다고 한다. 이 일에 관해서는 「弘治五年朝鮮板伊路波」 부록 해 설에 福島邦道 氏의 상제한 설명이 붙어 있다? 福島 氏가 〈蘭阜는 姜柏 으로부터 언문의 자모표 및 以呂波譯字를 써받았다. 〉라고 한 점은 재고를 요한다. 죽, 耕牧子가 이 「以呂波譯字」를 諺文 자모표와 동시에 서사했다 고한다면 ;!:(h)=( 〈메)와 같은 書法은 하지 않았을것이다. 이 서체는 神 國神字弁論에 소재된 朝鮮諺字와 똑같다. 따라서 以呂波譯字와 언문 자모 母와는 별도로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以呂波譯字는 일본 사람 손에 의해서 씌어졌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남은 문제는 이 「以呂波譯 字」의 출처를 밝히는 데 있다. 실은 이와 때를 같이 하여 1719 년 9 월 6 일
1) 「客館瑞梁集」 1 冊 刊本, 1719 年 申維翰등과 日 本名古屋의 文人 木下實聞 • 朝 比奈文淵과의 筆談唱和集이다(家藏). 2) 弘治五年朝鮮板伊路波』 附錄解說 • 國 書 0)誘文 L 따바i • 福島邦道稿(京都大學文 學部國語學國文學硏究室編 昭和 40 年).
大坂의 신사객관에서 入江若水, 池田南漠 등이 申維翰, 耕牧子,成鳴軒, 張菊溪와 필담창화를 했다는 것이다. 그 『和韓唱和集』(下)에 의하면 南漠 問 : 〈余常開貴邦 書 中, 有如此字或曰是貸邦通俗之文字也, 今 書 所記得數十 字矣, 請以借字示之幸幸〉라고 했나. (67 쪽 朝鮮諺文 그립 참조) 이 조선언문의 書 順온 가행에서부터 시작하여 나행 • 다행 • 라행 • 마행 • 바행 • 사행 • 아행 • 카행 • 타행 • 파행 ·자행 • 차행 • 하행으로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되는 것은 각행의 末字 <7 > 아래에 〈 7 〉字가 또 하나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 이〈 ‘II' 〉諺重母音字에 대해서는 종래 申景藩 (1712~1781) 에 의해서 창제되었다고 알려져 왔는데 그의 「韻解」 (1750) 보 다 31 년 전인 1719 년 통신사와 일본 문인들과의 필담창화집에 들어 있으니 결국 이 신자료의 발견으로 申景浦創製說의 허실을 밝히게 되었다 .3)
3) 金敏洙 「重母音 ‘ `’ 에 대 하여 」 (高麗大學校文科大學人文論集 第 30 輯 1985. 12) 참조.
이 필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기 張菊溪가 조선언문을 池田南漠에게 書 寫해 주었는데, 이것으로 보아 아마 미리 일본 문인들의 질문과 요청에 옹 할 생각으로 준비해 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앞의 李祿年의 효행에 관해서 는 『東國新續三網行實』(續三網孝子圖)에도 수록되어 있다. 또 1748 년, 조선신사와 필담한 藤原明遠 4) 온 그의 『學山錄』(卷 6) 에 朝 鮮諺文이 라고 題하고 언문을 列記하며 〈右芳音九字, 正音一百四十三字, 其 字體則依梵字爲之也〉라고 명기했다. 이 언문은 『昆陽漫錄』 5) 에 들어 있는 것과 동일하게 〈 E 〉行이 탈락되 어 있다.
4) 藤原明遠 字深藏, 中村氏, 號閑林, 又號盆進齋, 寶曆 11 年 (1761) 9 月 3 日꿨 享 年 65, 1747 年 1 月, 奧醫에서 奧儒가 되다(『日本漢學年表』 大修館 書 店 昭和 52 年.)
耕牧子가 서사한 언문에 〈字似梵字〉라고 했는데 『學山錄』에도 〈其字體 則依梵字爲之也〉라고 한 것으로 보아 언문의 기원을 논하는 데에 있어서 일본에 梵字起源說이 전해졌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언문 기원에 관 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成偶과 李1l$光온 梵字起源說울 주장했던 것이 다. 그런대 1940 년, 訓民正音解例本이 慶尙北道 安東郡 臥龍面周下洞 李 漢杰氏宅에서 발견되자 그 制字解에 根振하여 〈正音二十八字各象其形而制 之〉 즉 初聲凡 17 자는 發音器官象形說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1748 년도 信使良醫 趙崇壽(號 敬老)와 京都의 儒醫 直海龍(字 元周, 號
5) 靑木敦書 • 字 厚甫 小字文藏, 號 昆陽, '. 武藏人, 仕大府 書 物奉行, 著 有昆陽 漫錄 6 卷 (『先哲幾談』 卷 8) .
衡齋)의 필담집 「班荊開譯」 6) 이 간행되었는데, 이 「班荊開譯」에 이로하(1,' 하 1) 諺文譯字가 들어 있다. 이는 宇野明霞가 지온 「和漢用字式」을 信 使製述官과 서기에게 보이고 조선언문을 濟庵 8) 이 써주어 卷末에 새겨서 넣은 것이다.
6) 直海先生 著 含英堂韓人唱和産物筆語班荊 OO 譯 宇士 新先生倭漢用字式附(四方 朝鮮文庫所藏). 7) 宇野明 霞 , 名冊이다. 名온 鼎, 字는 士新, 明 霞 는 그의 號, 京都人, 程朱學派, 後無所師承父安治角倉與市에 屬하여 運潛業울 함. 1745 年殘 享年 48, 著書 : 『論語 考 左傳考』 • 『姓氏解』 • 『名字解』 • 『唐詩集解』 • Ii'穀園名公四序評.!l 등(『儒海』 • 『先 哲最談』 卷 7). 8) 正使 書記 李鳳煥 • 字 聖章, 號 濟菴, 年 39.
이상온 조선언문을 並記하든가 또는 「이로하」(1,,.7:,11.)에 諺文譯字를 첨 기하였기에 참고 자료로서 부기해 둔다. 다음은 조선통신사 일행의 성명 및 관직명의 한자 옆에 일본 假名(가나) 으로 注記한 것을 소개한다. 卜 夕t ?T. J ? 1 Jv 7 :Z 夕. 7 `.J. 于 3 夕. 、J 卜夕·卜 二 十 夕. /\夕•、y 7 壬夕 、.J ? ? ? 夕 /V/ `)十夕. ? 4 1764 年度의 朝鮮通信使一行座 目 , 正使,副使, 從事官, 通德郞, 良醫' 9) 츠卜 夕夕 t夕서/요 •7/· ~夕•1:y' 夕?· 卜 7子누 、y夕 . ^`/夕 >.夕 : 누 〉夕/누\夕 `./ 堂上譯官, 上通, 事, 廳直, 形名手, 上官 卜 夕\) `J 또 1811 년 通信使行列圖(辛未年 春朝鮮人來賜行列次第 )10) 에 小通事 • 使 V 주 夕 4 子푸 令 • 大廳目付라고 注音했다. 여기에 따라서 [IJ ](0) 에 해당하는 음은〔夕 * 〕 를 썼다. 通事[t O I] Sa] 통사, 使令 [sar y.>IJ]사령 , 大廳 [da ity.iIJ]대 령 이 와 갇 은 轉寫에서 불 대 세종 23 년 (1441) 對馬島漁民의 釣魚에 관해서 조선측 과 맺은 孤草島釣魚禁約에 의해서 발급한 對馬島主의 文引(渡航證明)을 〈治소산凡〉이라고 불렀는데 長節子氏는 〈和丘산 A 〉을 조선어의 漁夫船 [.>busy. in] 일 것 이 라고 推定했 다. 11)
9) 「朝鮮通信使一行座目」 刊本 • 寶曆矣未之冬 12 月 東海波臣題(家藏). 10) 菅野裕臣 「朝鮮語力 )5 0)借用語」 38 쪽(《言語〉〉 1978 年 2 月號). 11) 前揚 書 莊 9. 37 쪽 .
5 捷解新語의 성립 시기 『捷解新語』의 저 자로 알려 진 康遇聖의 전 기 에 관해 서 는 『通文館志 』 (卷 7 人物)에 다음과 갇이 기 록되 어 있다. 康遇聖 晋州人也, 壬辰被挑十年乃還, 熟語倭俗, 旦善其語, 常以國典 所載倭語冊子語多疏略, 乃設爲館倭接待信使細祚之說棄作十卷, 名曰捷解 新語, 各樣節目無不詳備, 康熙庚戌陽坡鄭相國啓請鑄字印布, 自戊午後, 專以此書 行用於科試 겔:辭 凡再社信使, 五任釜山訓導 官至嘉善. 또 「譯科傍目」에는 〈萬曆己酉增廣, 辛已生, 本貫晋州, 倭學敎諦嘉善, 父 篤敎授 有慶〉이라고 했다 . 이들 기록에 의하여, 그는 辛巳年(1 581) 에 출생 하여 임진왜란을 당하매 1 :v-11 에 포로로 일본에 연행되어 10 년간 체재한 후 귀환하여 己酉年(1 609) 의 增廣別試에 급제했다 . 그는 일본 습속에 정통했 고 또 일본어를 찰했다. 倭語冊子에는 疏略된 것이 많아 그는 捷解新語 10 권을 저술했는데 이것을 庚戌年 (1676) 에 鑄字로 印布하게 되어 戊午年 (] 678) 이 후는 아 책 만이 科試에 사용되 었다. 그는 또 통신사의 역 관으로 3 회 수행했고, 釜山訓導로서 5 회 부임했으며 최후에는 嘉善大夫(從二品)의 품계까지 올랐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가 귀국하여 科試에 급제하기 까 지 式年試가 두 번 (1603, 1606), 增廣別試가 두 번 (1605, 1606) 있었는데 도 1609 년 增廣試에 급제한것을 보면 10 년간의 일본 체재 생활로 인해 조 선어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귀국해서부터는 오히려 조선어 학습에 주력하 여 시간을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殘年에 대해서는 명기된 것이 없다. 다만 『邊例集要』(卷 16 譯官)에 〈壬辰八月府使尹文擧時, 訓導康遇聖病重, 方在死域, 不能察任, 當此多事之時極爲閑慮〉라고한 것으로미루어 安田章 氏는 임진은 1652 년이니 이 시간과 별로 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朝 鮮資料(J)位置』 注 27). 『捷解新語』가 일본어의 역사적 연구자료로 등장한 이래, 일본어 학자들 에 의해서 일본어의 음운과 문법, 어휘 등의 측면에서 비교 검토되어 그 연구 성과가 널리 알려지고 있다. 더구나 그 자료적 가치로 볼 때 일본어 사상, 구어 문헌으로서의 조선자 료는 『捷解新語』를 喝矢로 하여 그 일본 가명에 토를 단 언문-죽 글줄의 가운데에 平假名으로 회화체 일본어를 적고 그 바른쪽 옆에 한글로 그 음
울 달고 어구마다 우리말로 그 뜻을 옮겨 놓았다一은 일본어 음운 사상 귀 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I)
1) 安田章, 『朝朝資料&中世國語』(捷解新語0)改訂覺 書 ) 158~159 쪽 참조.
한편 한국에서는 李朝 中葉의 중요한 언어자료로서 일찍이 한국어학계 의 태두인 이숭녕 박사의 명저 『스音放』 2) 속에서 康遇聖의 日本語렵f의 有 聲子音表記에 관한 면밀한 연구 결과가 알려졌고 그 칙후 金完鎭의 「捷解 新語에서의 日本語 轉寫에 대하여」가 발표된 이래 현재까지 저자”가 管見 한 바로서는 상기 논문 이의에 거의 주목할 만한 것이 없는 것으로 보여 진다. 물론 이 자료를 이용하는 데 있어서 우선 일본어학에 대하여 상당 한 예비지식이 요구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또한 한국어학 연구면에 있어서 도, 더 많이 활용되기를 염원해 마지 않는다 .
2) 李崇寧, [j' A 音政』(서울대학교 논문집 第 3 輯·人文社會科學編 1956 年 4 月) 참 조. 3) 金完鎭, 「捷解新語에 서 의 日 本語轉寫에 대 하여 」 (서 울大學校 文理大學報 V-2 1957 年) 참조.
그러면 우선 康遇聖에 관하여 조선측의 신사기행록에 散見되는 기사를 들어보기로 하겠다. (D 1617 年從事官 李石門의 「扶桑錄」 9 월 10 일條에 〈未時到旋浦止宿… 0 0 0 朝日康遇聖持一封書及視來示曰此乃晋州人河憶傳致其兄者也〉 ® 1624 年 副使 姜弘重의 「東接錄」 11 월 15 일條에 〈初四 日 以後, 海水 潮生, 國人傳之爲怪事, 康 • 朴兩譯官曾所目見云〉 이 康 • 朴 兩譯官에 대하여 森田武 氏는 康遇聖 • 朴彦環 두 역관에 틀림 없다고 단정했으나 4) 朴譯官이라고 하면 먼저 朴大根을 연상케 된다. 그는 초회, 제 2 회, 그리고 이 제 3 회에도 동행하고 있으니 반드시 朴彦環이라 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朴彦環도 康遇聖과 같이 피로인이었다는 점에서 朴彦璟이 신사를 수행한 것은 1624 년이 처음이기는 하지만 혹시 포 로시절에 이런 일을 목격했을지도 모른다 . ® l624 년 11 월 23 일 條에 〈有被擔人李成立 • 金春福者曾與康 • 朴兩譯 相知, 持酒來訪…〉
4) 森田武 「捷解新語解題」(『三本對照捷解新語』 所收) 219 쪽.
이 朴譯官에 대해서 中村 榮 孝 氏는 〈 朴 大 根 〉 이라고 추정했다 .5 )
5) 中村榮孝 『 日 鮮關係史0)硏究』 (中) 496 쪽 참조.
@ 1624 년 11 월 29 일 條에 〈 未時發行過關原, 郞 家 康與 輝 元勝戰之地也. 0 0 0 康遇聖曾於被挑時,在 家 康 軍 中 目 見相戰之時云 〉. @ 1625 년 1 월 7 일 條0 에0 0 〈 昔日 家 康與秀頓戰時, 聞其先錄與 輝 元兵相遇 於關原…堯得戰捷, 時康遇聖在 家 康軍中, 目見之云 〉. @ 1636 년 副使 金東漠 「海 樣 錄」 9 월 25 일條에 〈 問于譯官朴彦 珉 云, 渠 曾於甲辰年, 隨惟政入日本, 又於甲子年, 隨鄭뾰以往〉 . ® 같은 책 11 월 23 일 條에 〈 過關原, 一名勝山, 郞家康 輝 元戰處, 譯官 記造®貞 ,같 은曾 在책 家1康2 월陣 中2,8 일 目條 見에其 時〈 一事 行〉 . 諸譯曾己往者及前 日 被朔康0 遇0 聖0 • 尹 大銃 號 無不知之 〉 . 이상 諸記 事 에 따르면 康遇聖은 1617 년 • 1624 년 • 1636 년 3 회에 걸쳐 신 사를 수행하였고, 또한 포로로 일본에 체류중 關原戰에서는 家康陣中에 있 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포로로서 留日中에는 다른 피로인들과도 만 났는데 특히 朴彦環 • 尹大銃과는 같은 被擔人이었다는 것이다 . 다음은 『捷解新語』의 성 립 시 기 에 관하여 지 금까지 의 諸說을 一啓하기 로 한다. ® 小倉進平 박사는 『重刊捷解新語』 범 례 에 의 하여 萬曆戊午年 (1618) 경 , 이 원고가 되어 있었다고 보았다 .6)
6) 小倉進平, 『增訂朝鮮語學史』 414 쪽 참조 .
® 中村榮 孝氏는, 森田 • 大友두 사람의 설을 비교 검토하면서 『捷解 新語』의 조선통신사에 관한 부분을 3 회의 使節團江戶往復의 기행문과 대 조해 보면 그 내용은 주로 2,3 회의 체험을 근거로 삼아 구성된 것으로서 제 3 회에 관련된 사실로 보아 그 성립 시기는 1636 년 이후일 것이 틀림없 다고 단정하였다 . ” 그리고 또 〈소재가 된 사항을 검토해 보면 어떤 시기 의 1 회의 편집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고 추가 또는 보정을 거쳐서 성립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책의 성립과정에 대하여 더 한충 내용의 사항별로 검토를 다방면으로 행한 뒤에 최후의 결정을 내릴 것이 아닌가
7) 中村 榮 孝, 「捷解新語0)成立 • 改 修 t->J::rf倭語類解成立0)時期 I E?L 、 T 」 ((( 朝鮮 學報》 第 19 輯).
한다〉고 신중한 태 도를 보였다 . 8)
8) 中村榮孝 위의 책 14 쪽.
® 森田 氏에 의하면 〈저자는 使節隨員으로 2 회나 江戶를 왕복하고 있으 므로 本書의 訪日記事가 그의 체험에 근거한 것임은 용이하게 상상되는 것 이다〉 9). 또 〈요컨대 卷 5~8 의 4 卷은 제 2 회 방일여행에서 돌아간 天啓 5 년 (1625) 부터 제 3 회 여행에 오른 崇禎 9 년(1 636) 사이에 성립된 것이라 고 생각된다〉. JO ) 그리고 大原 氏의 〈召長老說〉에 언급하여 〈제 3 회에 견줄 수 있는 것은 이 한 가지뿐이며, 따로 명백히 그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여하간 이 책 전편의 성립은 天啓 5 년 (1625) 이후가 아니면 안 될 것이고 그 萬曆戊午成立說과는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II) 다시 〔補 駐 3] 에 서 〈中村說을 인용하여 卷 5~8 의 一群도, 그 이 의 의 一群도 모두 1636 년 이후의 성립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趙承福도 中村이 열거한 것과 같은 논거에 서서 1636 년 이후에 성립된 것이라〉고 하였다 12) 同 [補注 4] 에서 〈趙承福 氏는 『改修捷解新語』의 범례에 따라 역시 萬曆 戊午年(1 618) 에 최초의 稿本이 성립되고 그후 1636 년까지의 기간중 신교재를 첨가하면 서 개정중보한 것일 것이라고 추정했다〉고 하였다 13)
9) 森田武 「捷解新語解題」 五 • 成立0)時期 221 쪽 . 10) 위의 책, 223 쪽. II) 위의 책, 224 쪽. 12) 위의 책, 266 쪽. 13) 위의 책, 267 쪽.
® 大友信一은 〈언어와 소재 양면에서 검토하여 Ii'捷解新語』 전반의 성 립 시기를 추정할 때 우선 寬永 13 년 (1636) 이 기준이 될 것이다〉라고 하 였다 .l4)
14) 大友信一, 「『捷解新語』O)成立時期私見」 ((〈文藝硏究〉〉 第 26 集).
® 安田章 氏는 『捷解新語』가 현존 10 卷本으로 편성된 것이 초판간행 때 (1676) 라 해도 그 윈고는 1636 년까지는 성립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 다 .15)
15) 安田章, 『改修捷解新語解題』 53 쪽.
이상과 갇이 『捷解新語』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벌써 10 여 년 전에 이 미 先學들에 의해 귀중한 견해가 발표되었다. 저자는 丙子年 (1636) 使行時 金東潔 『海椎錄』 기사 속에 〈金絶河投金〉이라고 한 대목을 발견하고 이것 이 『捷解新語』 卷 8 〈信使不受金〉과 결부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그
근거를 명시하고자 하는 바이다. 우선 大友 氏가 昭 長 老를 召 長 老에 比 定 하여 1636 년의 기 사에 주목한 것 은 탁견이라고 해야겠다 . 中村도 〈 제 3 회에 관련된 기사로 추측하여 그 성립 시기가 1636 년 이후인 것은 틀림없다 〉 고 추정하였고, 또 제 3 회의 통 신사에 관련하여 〈信使가 江戶 출 발에 츠음하여 金子를 보내온 것을 사퇴 하고 島主下人에게 주라고 한 것 〉 16) 까지 지적했지만 金絶河投金記 事 에는 언급하지 못하였다. 이 사퇴했다는 金子는 실은 매번 신사가 울 때마다 장 군으로부터 회 례 로 三使에 게 각각 은 500 매 를, 이 밖에 도 德川三宗室로부 터 三使에게 각각 은 200 매 씩 을 또 幕府執政으로부터 三使에게 각각 온 100 매씩을 선사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 은 1 매는 4 냥 3 전에 해당 했다. 장군이 선사하는 온자는 大阪에서 받기로 되어 있었다 .l” 이 回 禮 銀子의 처분에 관해서는 그 일부분을 對馬島太守에게 주어 동반한 노고를 치하하며 위로했고, 그 나머지는 東萊府의 公木代納, 즉 공목대금 대신 防給하여 공목을 담당하는 왜인의 수표를 받아 이것을 首譯에게 주어 東 萊府에 考準시켰던 것이다 . 18)
16) 中村榮孝 위의, 「捷解新語(J)成立」 9 쪽. 17) 金東漠, 『海椎 錄 』 12 月 28 日條(『海行捷 載 』 2, 449 쪽). 18) 抽 稿 「天和度 (1682) 朝鮮通 信 使碑將洪世泰& 日本文士&(J) 筆談唱 罰 t C?L 、 T 」 『朝鮮學報』 98 輯所收 駐 6) 참조.
『 捷 解 新語』의 성립 시기에 관하여 森田은 제 3 회에 견줄 수 있는것은 大 友의 [j'召 長 老 說 』 하나뿐이고 따로 인정할 만한 것은 없다고 했다 .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金世派의 『海 樣 錄』에 의해서 확증을 얻을 수 있었다. 저자는 Ii 捷解新語 』 의 음운 및 문법 적 연구면에서는 先學諸說에 따르는 바 이지만 문헌 적 자료면에서 보아 中村說에 동의하면서 또 趙承福氏도 말한 바와 같이 康遇聖의 제 1 회 (16 17) 사행 직 후부터 초고가 되 기 시 작하여 제 2 회(1 624), 제 3 회(1 636) 의 使行을거쳐 새로운 체험사항을 첨가하면서 추가, 보정하여 성립된 것이라고 본다. 다음에 〈投金〉과 관련되는 기사를 순차적으로 열거하겠다. ® 金東漠 『海椎錄』 12 월 30 일 條 〈余等以一. 行 , 上下員役支供用餘米五 百三十餘依, 酒 器 , 油, 撰 等物 積置于庭中傳給於右京 • 淡路等處, 使 之分給館下同候諸倭, 其所謂裝者容入其五十手斗云〉 19).
19) 一手斗는 三升에 해당함( 曺 命采 『奉使日本時間見 錄 』2 月 19 日條) .
여기에 따라서 통신사 일행이 江戶룰 떠날 메 接待米로서 지급받았던 것 중 남은 五百三十餘依 및 식료품 등을 안뜰에 쌓아 놓고 館伴 右京 • 淡路 守에게 관사에서 個候하던 왜인들에게 나누어주도록 전했음을 알 수 있다. ® 同丁丑정월초 10 일條에 〈聞淡路守等以留米鋼難是使臣棄置之物, 在 我之禮則不可還受, 票于關白貿送黃金一百七十銃, 一銃之直白金七兩, 通 計一千數百兩, 自江戶追送於中路, 員役或以爲此乃料食之餘分給爲當, 或 以爲令島主還送江戶爲當 • 余等以爲 日 本接待至此誠, 可尙而贈行者禮也, 此 則太過 分給則受之也, 是爲貨取, 還送則不恭也, 古人有埋金幕下, 不必爲 今日法, 但念馬島人爲越棄太重, 不如受去投諸錢凌流, 使馬島人知不貴此 物而又使有用之物不爲虛棄矣, 到金絶河投之中流〉 듣건대 담노수 등이 남겨둔 쌀과 찬물이 비록 사선이 놓아둔 물건이기는 하나 우리의 예의로는 도로 받을 수 없다 하여 관백에게 여쭈어 황금 1 백 70 정으로 바꾸어 보냈는데 1 정의 값은 7 냥이니 합계 1 천수백 냥이다 . 江戶로부터 중로까 지 뒤쫓아 보내왔는데, 원역 중 어떤 사람은 이것은 식료의 나머지이니 나눠줌 이 마땅하다 O 고, 어떤 사람은 도주로 하여금 江戶로 돌려 보냄이 마땅하다 하 였으나, 우리가 말하기를 일본의 집대가 이토록 지극하니 진실로 가상하며 선행 하는 것은 예의이나 이는 너무 과하다. 나누어주면 받는 것이 되니 이는 재물을 취하는 것이 되고, 돌려보내면 공손하지 못하다. 옛사람 중에는 장막밀에 금을 묻은 이가 있으나 반드시 오늘날 본받을 것은 아니다. 다만 생각건대, 대마도 사람들의 침이 너무 무거우니 받아가지고 가다가 얕은 물에 던져 대마도 사람으 로 하여금 이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준 알게 하고 또 쓸모있는 물건이 헛 되게 버려지지 않게 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하여 金絶河에 이르러 중류에 던졌 다 20)
20) 『國 譯 海行捷 載 』 w. 金世源 『海樣錄』 126 쪽.
이것은 동신사 일행이 江戶를 떠나 濱松에 도착했을 때의 이야기다. 이 기사가 바로 『捷解新語』의 「信使不受金」의 수수께끼를 푸는 관건이 되는 셈이다 . ® 同 2 월 15 일 己酉條에 〈留馬島, 平成春等來言曰, 大君執政禮單, 使 道誰棄置 小人若不極力請納早晩傳播于江戶則必受重罪, 祈惡莊至, 余等
1748 년 盡 員 李聖麟 筆 金絶河(韓國國立中央博物館藏樣路勝匡圖)
開 諭 曰行路所費如治船等物固己不 賀 , 旦聞汝等亦有自辯禮單之 事 云 , 不可 不償 旦許多島中下人拜走遠路, 登無罰勞之擧平, 平成春等卯頭謝曰下敎 登不至當,供行次時島中所費計可四,五百枚銀子,使道分付至此,若四 , 五 百枚銀子則可以依受, 至於綿子亦當依下敎, 分給于暗行倭人 , {卑知使恩德, 0 0 0 0 0 0 0 至於沒數決不政受矣, 余等曰如此固執必欲生闇矣, 曾以金絶河投金之事, 0 0 0 恐得罪於關白 , 汝等每每告訴, 汝等終始不受則吾 輩 處置, 畢意如金絶河 也, 汝等無復追梅, 平成春等 鹿 然而去〉 이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막부장군이 주는 회례은자의 수수를 둘러싼 응 수이다 . 즉, 對馬島主는 〈大君과 執政의 예단을 사또께서 비록 버려두시 더라도 소인이 만약 힘을 다하여 청하여 바치지 못하고 조만간 江戶에 전 파되면 반드시 무거운 죄를 받게 될 것이라〉 하며 신사의 말에 옹하지 않 으므로 〈끝끝내 이렇게 고집울 한다면 일찍이 金絶河에서 돈을 버린 일 때 문에 막부장군에게 죄받을 것 같다〉고 호소하였는데 〈그대들이 종시받지 않으면, 우리의 처지는 마침내 金絶河에서와 같을 것이니 그대들은 · 다시 후회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이 회례은자의 처리에 관해서는 同年 3 월 초 9 일 復命條에 〈島主書契又 至 以前日留置銀子, 非不運送而使臣紙不欲受, 今若强送亦非誠信, 願獻嶺 南公貿木三百同, 銀子則留用, 朝廷以爲其意出於誠信, 啓票從之〉, 죽 對馬
島主에게 유치했던 희례은자 一萬餘兩온 公貿木三百同 (1 同은 50 定)의 대 금에 충당했음을 알 수 있다. @ 從事官 黃辰의 『東樣錄』 1 월 초 10 일 條에 〈聞右京 • 淡路等以爲所留 許多米館, 難是使臣棄置, 在我之禮則不可還受, 票于關白貿送黃金一百七 十鍊 一鍊之直銀子七, 八兩, 通計一千數百兩·自江戶追送于中路, 員役 輩或以爲此乃一行料食之餘, 分給爲當, 或以爲令島主還送江戶爲當, 臣等 以爲分給一行是乃受之也, 決不可爲, 令島主還送必不政傳敎, 若求善處之 方便, 若如投河而去, 行到 今絶河令軍官譯官等投之中流〉. 이것은 동행한 從事官 黃辰의 기록인데, 앞의 副使 金東漠의 『海樣錄』 의 기사내용과 거의 동일하나 다만 島主를 시켜서 돌려보낸다고 해도 감히 전해 보내지 못할 것이니 선처하는 방편을 택한다면 강물에 던지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今絶河(일본 기록에는 今切河)에 이르러서 군관과 역 관들을 시켜 중류에 던졌다고 한 점이 더 상세하다. ® 다음은 江戶客館에서의 米撰支給에 관한 기록으로 正使 任統 「丙子 日本日記」 12 월 초 8 일 條에 〈夕備星下程之物, 上使所屬上下通共 一百五 十人, 每一日料米至於 十九敍, 一儀所盛郞十斗也 , 以我國斗 量 計之則平 物之具而十二石十斗之多而能物各種亦爲備星, 蓋前行累次則只星米石, 以 爲根料耕今則只納口槿而能物則一一備里, 故謂之比前行極尊敬云矣〉 이 기 록에 의 하면 正使所屬隨員 150 명 의 1 일 料米 (식 량) 로 19* 가 지 급 되었다. l f&는 10 斗를 담은 것으로 우리나라의 斗〔말〕로 계산하면 平斗로 12 石 J.O斗 정도이다 . 각종 찬물(原文에 能物이라 했으나 鑛物의 오기인 듯 함)도 갖추어 올렸다. 전회 (1624 년)에 비하면 극히 존경한 것으로, 料米 도 많아 신사일행의 殘餘米가 530 依나 되 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잔 여미에 대해서 생각되는 것은 丙子年 (1636) 사행은 특별행사로서 日光山 德 川家康廟에 參脂한 것이다 . 죽 이 日光廟에 갔기 때문에 江戶客館의 식량 이 예상 밖으로 남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日光廟 參脂에 관해서는 애당초 국명을 받고온 것이 아님을 이유로 사퇴했던 것인데 결국 島主의 간 청으로승낙하고 國書傳命을 마천 후 日光廟를 參脂했던 것이다 .21) 이 日 21) 任統 「丙子日本日記」 12 月 11 日條〈請日光之行… ‘ .. 大炫, 道春等 言 於大君曰大
君之 請 所以尊敬使臣也, 義 成若肯周旋, 使臣堡不 許諾 或欲 激 怒, 或欲 構 担, 乘時造語 阿有其極以此爲閑……朝廷紙爲義成有此通 信 之 擧 .荀有一 臺 可 願 之 事 , 恐不生桓, 大 槪自通賜使以來, 接待 尊 敬, 未有盛於今日……吾 等 相 議 曰島主形 勢 若或如此 終 始不 許 恐非出 揮 處 變 之道, 昔鄭lilll 隱 奉使至此, 紙爲遊 覽 前 輩 之行亦有周 覽 寺 淨 j 擧 而今者 關 白 願 觀 日本, 其請起惡, , 其 言 基遜, 一番遊 覽 恐無所 傷 〉.
光行은 丙 子年 (1636) 사행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 1643 년도 , 그리고 1655 년 도 3 회 로 써 중지되고 말았다. 다음에 『捷解新語』 卷 8. 「信使不受金」의 원문과 한글역주를 소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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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일행이 귀국에 앞서 江戶客 館 에 남긴 糖 米處分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즉 丙子年 使行 다음인 1643 년의 正使 尹順 之일행에 관 한 『榮 未 東樣 日 記』 22) 에는 8 월 6 일 條에 〈 以 館 中放料餘米八 百 八 十限 , 傳與 館伴曰館 穀莊厚 , 所 ~J 如此, 館伴 等言 曰此不可仰 達 於大 君 , 當言 于執政前云 云〉이라는 구절이 있다. 즉, 동신사가 관곡을 너무 후하게 주어서 이와 같 이 남았다고 하니 館伴이 말하기를 〈 이 일은 大君(將 軍 )께 여쭙것이 아니 고(國譯海行抱 載 V p. 297 계미동사일기 8 월 6 일 條에 〈 이 일은 대군께 여 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라고 반대로 번역되었다) 마땅히 執政에게 말 해야겠다〉고 하였다. 〈此不可仰達於大君〉이라는 말은 전회 1636 년의 金絶 河投金 事 件을 암시하는 말로 생각된다. 1643 년의 사행에서도 . 日光廟致祭 를 했으니 이 日光山行으로 말미암아 1636 년 때처럼 찬여미가 많았는지도 모론다.
22) 「矣未東樣日記」는 作者未詳으로 1643 年 信使에 따라간 사람이 쓴 것이다 .
그후의 사행에서도 殘餘根米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1748 년의 洪景海 撰 『隨樣日錄』에 〈留館時各房用~J餘米八十八依, 炭四百三十二依, 柴七百 八十三抵 其他雜物亦多, 以前例略給馬島通詞 菌 , 余作件記使 掌 務官面傳於 館伴〉이라 했고 또 1764 년 上通事 吳大齡의 「矣未使行日記」 2 월 10 일條에 <日 供餘米分給兩館伴, 蓋前例又分給島主及各官下及傳語官合米 一 百三十石 矣〉라고 했다 .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이른바 丙子年 (1636) 의 「信使不受金」 (金絶河投金)사건 이후, 찬여 양미에 대해서는 객관에서 個候한 館伴과 對 馬島通 事 들에게 분급하는 것이 통례로 된 것 같다. 金世流의 『樣上錄』에는 〈投金〉을 읊은 漢詩가 들어 있는데 다음과 갇다. 命鷲出江戶 使 事 亦已畢 賤行無不至 練享信非一 送我 棄 中裝 黃金一百鑑 欲取恐廉 傷 欲還知望失 中流獨白水 從者皆 震 栗 此物登不 貴 視與泥沙四 寶 氣必騰上 千秋終一出 魚龍恒群易 寒 潭 映白日
나에게 보내온 주머니 속 엔, 백냥의 황금이 들 어 있다오 . 가지려도 청령을 상할까 싶고 돌려주연 실망 할 것 뻔한 일이라 중 류 에 다다라 뭉 에 던지니 종자 둘이 모두 보고 놀라 떨었네 (국역 해행총재 4 300 쪽). 金世嫌.의 『海椎錄』에 는 황금 170 銃이 라고 했는데 여 기 나오는 黃金一百 鑑은 『捷解新語』 信使不受金에 들어있는 金子 100 枚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金東漠 『海樣錄』의 許穆序 23) 〈及還其君長錦遺千金皆不受, 又其館留供帳 百需旦黃金百七十銃, 辭曰銃臨受之至金絶河投之茂流曰不欲令有用無用無貨 取而已〉에서 보는 바, 〈쓸모있는 것을 쓸모없게 하고 싶지 않고, 貨路로 취한 것이 없음울 보일 따름이라〉고 한 것을 인용하면서 金世嫌의 결단을 칭찬하였는데 조선조의 관인들의 몸가짐에서 청렴함을 얼마나 중시했던가 를 엿볼 수 있다.
23) 「東漠海椎錄序」 上之八年(1 667) 孟冬上洗陽 )II 許穆序(「海行掛載」 2 490 쪽). 許 穆(1 595~1682), 字和甫 一云文父, 號眉斐, 官至右議政 善策爲東方第一(「槿域書 畵徵」) .
이에 관해서는 1643 년 副使 趙綱이 읊은 詩題 〈八月十三日還渡金絶河郞 金道源丙子奉使時投金處〉라 하고 〈金絶長河深復深 中流初想故人心 千金若 漁齊高士 24) 玉腕何由傳至今〉(금절의 장하는 깊고 깊어 라, 중류에서 친구 마음 상상해보네, 천금이 노중련(齊나라 高士)을 더럽혔던둘 옥모가 오늘 까지 전해졌겠나)에서도 엿볼 수 있다.
24) 齊高士란 中國 戰國時代齊나라 사람으로 高士魯仲連의 故事가 있다(『大漢和 辭典』 卷 12 • 729 쪽) .
丙子年 (1636) 사행 이후에도 金絶河投金에 대해서는 여러 기행록 즉, 1719 년 申 維翰 『海游錄』과 1748 년 曺命采 『奉使 日 本時聞 見錄』, 1764 년 正使書 記 成大中 『日本錄』에 噴傳되고 있다. 다음은 『捷解新語』 李滿序에 관해서 私見울 한두 가지 피력하고자 한다. 『重刊改修捷解新語』에 대해서는 安田章 氏가 初本과 改修本을 음운 • 어법 및 어휘의 각 측면에서 면밀한 비교검토를 가하여 발표한 노작이 있다 . 25 ; 小倉進平 박사의 명저 『增訂朝鮮語學史』에 의하면 重刊捷解新語序 <... 速 至丁卯通信之行使臣承朝命往質之, 崔知樞鶴齡崔同知壽仁, 在行中寒主其事
25) 安田章 「重刊改修捷解新語解題」(『重刊改修捷解新語』 京都大學國文學會 昭和 35 年) 참조.
與倭人之護行者互相質難逐段藍改, 歸告于朝令藝閣印布……中略 ...... 歲辛丑 仲冬下溶崇祿大0 夫0 行知中樞府事李滿序〉에 따라 〈乾隆丁卯(1 747) 之歲, 通信 行使의 使臣 李渡이 朝命을 받아 일본에 건너갔을 메 崔鶴齡 • 崔 壽 仁의 힘을 빌어서 證改하고 다음 戊辰年에 印布한 것〉 또 〈乾隆戊辰 (1748) 은 前 文에 있는 숨읊이 일본에 사행한 丁卯年 다음해에 해당되므로 本 書 는 그들 행사의 귀국 후 곧 인쇄에 붙인 것으로 생각된다 〉 26) 고 한 점이다. 즉, 小 倉 박사는 李溝이 朝命을 받아 일본에 건너 갔다고 했는데 이 것은 小倉 박사 가 〈丁卯通信之行使臣承命往質之〉라는 字句몰 찰못 생각하여 여기서 말한 사신을 곧 李溝으로 착각한 데서 오는 오해일 것이다 . 이 통신사행에 관 해서는 실온 丁卯年 (1747) 2 월, 對馬島太守 平義如로부터 平和恒울 보내어 舊例에 따라서 家重將軍襲職의 賀使로서 통신사 파견옹 요청해 왔고, 이에 국왕이 이를 허가하여 3 월에 이미 三使의 선임이 끝났던 것이다 . 27) 그러 나 도해 준비를 모두 끝내고 이해 11 월 28 일에 辭陸하고 서울을 떠나 12 월 18 일 부산착, 다음해 戊辰年 (1748) 2 월 12 일에 야 겨 우 부산포를 출항하여 대마도로 향했다. 무진년 행사에는 正使에 洪啓禧, 副使에 南泰 耆 , 從事 官에 曺命采를 임명하고 堂上譯官에 朴尙淳,玄德淵, 洪聖龜를, 押物通事 에 崔鶴齡 崔壽仁, 黃屋成, 崔尙齊(漢學)가 선임되었다 . 28)
26) 小倉進平, 『增訂朝鮮語學史』 (第 4 章 日 本語學) 423~424 쪽. 27) 洪景海, 『隨樣日錄』 〈……上之卽(立二十三年丁卯二月 日本國對馬州太守平義如 送大差倭正官平如恒以其關白源家重之受禪於其父吉宗諸以舊例修円契送通信使, 上許 之, 三月家君以正使首擬受點……十一月二十八日 啓程 •• …·十二月十八日達釜山 …… 登年二月 十二 日 登船. > 28) 위 의 책 참조. 서 울대 학교 개 교 20 주년 기 념 『貸重固書展示 目 錄』 130 『捷解 新語』에 〈譯官康遇聖이 편찬한 것을 仁祖 5 年(1 627) 에 역관 崔鶴齡이 교정하였고 肅 宗 2 年(1 676) 에 重刊한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崔鶴齡은 1710 年生, 1732 年 增 廣別試에 合格, 1748 年 信使押物通事, 1764 年에 堂上譯官이 었으니 上記 〈 1627 年에 역관 崔鶴齡〉이라 한 것은 찰못이다.
그 다음 사행 1764 년에는 崔鶴齡이 堂上譯官으로, 崔 壽 仁은 次上通事로 수행했다. 그런데 李造에 관해서 말한다면 역관의 신분이므로 사신, 즉 三使에 임 명될리가 없다. 설령 渡海譯官으로 對馬島에 건너갈 수는 있었겠지만 한 학 역관이었으므로 이것 역시 무리일 것이다. 따라서 李溝 자신이 사신으 로 도해한 것이 아니고 李渡의 서문은 그때의 경위를 서술한 데에 불과하 다고생각된다.
겹
조선왕조 전반을 통해 볼 때 역관 중에는 嘉善(從二品), 資憲(正二品) 또는 崇祿(從一品)의 품계까지 울라간 사람이 있다. 이것은 물론 사대교 린과 어전 통역의 필요성에서 된 것이겠지만 역대 국왕이 역학을 중시하 고 역관을 우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29 》 司譯院이 설치된 것은 태조 2 년 (1393) 이며, 서학속에 왜학이 들어가 일 본어 학습이 실시된 것은 태종 14 년 (1414) 부터라고 본다 .30) 그리고 숙종 8 년 (1682) 에 倭學偶語廳이 설 치 되 어 譯官 朴再興과 安愼徽에 의 해서 본격 적 語이設」32라倭90라學))고 고令 姜司 하外譯했信는方院으流 鄕에므사 校 람로「倭生이李 學이徒 朝이있것良時 다으代家설 의.로子 치그 弟된譯미러入 루學것나屬어政은 合 「策 于1「太 에년司宗世 宗實譯빠관實錄院른한錄」〉 」太考에1 察4宗1 年」2의 年 I(해1 i~大8서月 月 東으 丙乙文로丁申化未 酉볼條硏年禮에究수죽曹 院 啓太〈있 〈다第命宗.二去司 輯1乙譯5r) 年未i院 i 年(習i참l4受日國조1史5.敎本年)
表』 (震檀學會編) 太宗 14 年條에 〈司譯院에 日 本語를 學習시 킵 〉 이 라고 明記하고 있 다. 위의 姜信洗 氏 論文 23 쪽 참조.
으로 일본어 교육이 시작되었다 . 司譯院의 설치 목 적 은 通文館 志 서문에 있는 바와 같 이 〈 本朝有司譯院專 掌事大交隣之 事 , 上下數千年間朝開應對有能以舒患 〉 , 즉 중국에의 사대정 책과 일본과의 교린관계의 추진에 있어서 사절의 응대에 역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 태종 14 년 (1414) 10 월 丙申條에 〈命司譯院習日本語 • 倭客通事尹 仁甫 31) 上言, 日本人來朝不絶, 譯語者少, 願令子弟傳習從之〉라고 한 것으 로 미루어보아 일본어 학습이 얼마나 필요했던가를 알 수 있다.
31) 尹仁甫는 倭學通事로 1410 年에 는 梁 需 룰 따라서 , 1420 年에 는 宋希璟을 따라 서 방일했고, 1439 年과 1443 年에 는 副使로 방일했다. 京都南禪寺에 는 梁 需 가 방일 했을 때 그 歡迎冥席上 그렸다고 생각되는 덴꿨軒夜雨 Ill 」(重文指定 • 傳周文(午) 詩 軸에 〈永樂八年八月 日 朝鮮國奉禮使通政大夫禮曹左參議集賢學士梁 需 題〉라고 軟署한 · 것이 現存한다.
이조초기에 왜학역관으로서는尹仁甫를비롯하여 徐仁達, 金石柱, 辛自 强 徐 壽 長 등이 있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景應舜, 金善慶, 金孝舜 등이 활 약했다 . 32) 그후 德 )II 政權과의 교류에 있어서는 朴大根 • 洪喜男 • 康遇聖 등이 크게 공헌한 것은 이미 전술한 바와 같다.
32) 姜信洗 「李朝中期以後의 譯學者에 對한 考察」 (《成均館大學校論文菓〉〉 第 11 輯 所收) 참조.
여기에서 한가지 주목할 만한것은, 역대 국왕은 역학 장려에 전력을 기 울이면서 漢.倭·蒙.淸四學에 정통한자를탁용하도록명하였으나, 일부 문산현관에 의해서 〈舌人不齒士大夫之列〉이라든가, 〈醫譯之流, 皆出賤微 非士族也〉라고 하여 역관을 천대시한 것은 간과할 수 없다 . 그래서 역관 온 일반 科擧와는 달리 雜科의 하나로 譯科試驗에 급제하는 길밖에는 없 었다. 倭學科試에는 본래 伊路波, 消息, 書格, 老乞大, 童子敎, 雜語, 本 草, 議論, 通信, 鳩養物語, 庭訓往來, 應永記, 雜筆, 富士 등 14 종을 課 해왔으나 이들 교재가 疏略하여 時用에는 맞지 않는다고 해서, 결국 康熙 17 년 (1678) 부터 전폐하고 『捷解新語』 하나만으로 바꾸었다. 33) 이와 같은 배경에서 볼 때 Ii'捷解新語』란 얼마나 유용한 교재이며 또한 그 저자인 康 遇聖은 얼마나 귀중한 존재였던가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33) 『通文館志』 卷 2 勸奧 • 科擧 O 倭學八冊捷解新語, 魏經國大典 〈初用伊路波, 消息 書 格, 老乞大, 童子敎, 雜語, 本草, 議論, 通信, 鳩 養 物語, 庭訓往來, 應永 記 , 雜筆 富士井十四島 語多鍊略不適時用, 故康熙戊午專以此冊行用, 惑去前 書 啓 醉膳錄〉 .
제 2 장 泥川과 통신사 조선통신사가 방일하여 京都와 江戶몰 왕복할 때마다 반드시 徒 )II 을 河 船으로 오르내리곤 했다. 따라서 旋川은 통신사와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 에 놓여 있다. 德 )II 時代 이전 조선사절의 京都往還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 다. CD 1420 년(세종 2) 回禮使로 내일한 宋希璟 1) 은 兵庫에서부터는 육로로 京都에 울라왔다가 귀로에는 泥浦에처 하선을 타고 泥川을 내려가 尼崎를 거쳐 兵庫에 도착, 여기서부터 출선하여 귀국했다.
1) 『老松堂日本行錄』에 (四月)十六日到泊攝 津 州兵庫, 二十日發兵庫向王所路中雜 諒二首 〈過利時老美夜店〉 〈宿盛加臥店用前韻〉, 二十一日入王部落, 利時老美夜는 지 금의 西宮市, 盛加臥는 지금의 源川울 말함. 六月 二十七日發深 修 菴, 宿山城)i 1 要 溫 梁夜三更王之護送文及來夜半上紅順流向兵庫. 宿阿麻沙只村妹日本. 要溫梁온 泥 浦, 阿麻沙只는 尼崎 . 七月初 三日發兵庫風逆日沒宿津口. (宋希璟 著 村井章介校注 『老松堂日本行錄_朝鮮使節0)見t.:中世日本_.!I(岩波文庫 1987 年) 참조.
® 1443 년 (세 종 25) 書 狀官 申叔舟 때 에 도 兵庫에 서 육로로 京都에 둘 어왔지만 2) 귀로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다.
2) 『海東諸國紀』 道路里數에 自兵庫至王城十八里陸路(『海行捷載』 (一)朝鮮古 書 刊 行會輯).
Q) 1590 년(선조 23) 통신사 黃允吉 일행은 撰濱(지금의 塀市)에서 症川 을 湖上하여 京都에 울라왔음을 알 수 있다. 3)
3) 金鶴峯 『海樣錄』에 〈次週河向京〉이 라고 한 七言絶句 한 首 行盡重浜不 盡 行症 河風浪夢猶驚 夜深星斗昭回處 臥聽隣船一笛聲 및 “過泥御城이 라고 하여 七 言 二首 江上華誰帶晩晴 海西歸路眼偏明宮桂亦解星樣興 爭推珠廉泥御城; 江水悠悠江雨晴 鳥飛不盡靑山明孤舟今夕宿何處 歸意先過大阪城(『海行捷載』(一)所收 「金鶴峯海梧 錄」 • 『鶴峯全集』 鶴峯先生逸稿卷二 詩(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1972 年) 참조.
德川時代에 들어와 조선과의 交隣아 복구됨에 따라 조선사절단이 방일 하게 되 는데 제 1 회 1607 년 呂祐吉 正使부터 시 작하여 1764 년 趙曜正使에 이르기까지 전후 11 차에 걸쳐 泥川울 하선으로 往還하였다 . 1 樓船 大阪河 口에 출영 나온 日 本 樓船에 대 해서 는 1636 년 從事官黃辰의 『東接
- r므§鬪鬪,깁}仁 8i\ i` ?· 『 2I t r~ - \_ -~ -.-. ....:.心. _ 王` ``<` 니
錄.!l에 〈그 이른바 畵船이라는 것은 모두 層閣울 만들어 황금으로 꾸미고 수놓은 장막으로 둘러서 사치하기 짝이 없었다. 臣 등은 일시에 화선울 타 고 잇따라 차례로 나아가고 員役과 점들은 小船에 나누어 실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또 1764 년 正使 趙職의 『海椎日記』 甲申年 1 월 20 일 條 〈國書를 金樓船 에 모셨다. 세 사신도 각각 누선을 랐으며 세 首譯과 上通事도 또한 누선 을 랐다. 누선의 제도는 크기가 우리 나라의 水上船과 갇았다. 안팎으로 칠을 하고 좌우에는 난간이 있으며 황금으로 龍鳳의 형상을 장식하고 충각 에 금수의 모양을 조각하였다. 그 빛이 사람의 눈을 현란케 하고 물의 파 란을 움직이니 그 제작의 기교로움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전에 듣기 로는 이 배 한 척을 만드는 비용이 수만금이 넘는다고 하니 가위 무익한 비용이라고 하겠다. 이에는 各州의 太守가 타는 彩船이라고 하는데 어린 아이의 노리개와도 같으니 그 무식함을 볼 수 있다〉고 했다. 徒)j l · 올 거슬러 울라가는 동신사船團 그림이 현존하는 바 그 繪圖는 다 홈坪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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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通信使船團圖居風 6 曲四雙網本色 各 59. OX263. 6cm( 故徐彩源氏 藏). 24 曲에 달하는 장대한 화면에 正使가 탄 樓船과 良引船 및 隨行船團 을 그린것으로 선두에는 〈正〉字 깃발을 달았고 선미에는 德川家將軍의 奏 紋章旗와 流蘇가 나부끼고 있다. 이와 짝을 이루는 국서선단, 부사선단, 종사관선단의 그림이 한국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 國 書樓 船圖 紙本彩色 59. 1 X 1515. Ocm( 한국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국 서를 받들고 泥J I! 을 가는 국서선단, 부사선단, 종사관선단을 그린 卷軸이 다. 박물관 기록에 의하면 1909 년에 李王家에서 구입한 것이라고 한다 . ®의 그림 병풍을 그린 동일 화가의 작품이다. ® 通信使國書船團居風 紙本彩色 55. 1 X482. 4cm( 個人所藏) 八曲一雙 泥川울 울라가는 통신사 선단도로 선두를 가는 배에는 國書先導船이라는 깃발이 나부끼며 그 뒤에 3 척의 누선(御座船)과 그의 伴船융 그린 것이다 . 申維翰의 『海游錄 9 월』 10 일 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국서를 받들고 金船에 울라서 풍악을 치며 갔다. 三使臣, 三堂上(譯官), 上通事 등이 탄 배 가 연달아 강을 거 슬러 울라갔다. 강은 浪華江 상류였 는데 다른 이름으로는 泥江이라 한다. 푸른 옷을 입고 뱃줄을 당기는 사 람이 배마다 70 명씩인데 양쪽 언덕에 서서 배가 북쪽 언덕에 가까우면 북 쪽에 있는 사람이 당기 고 남쪽 언덕 에 가까우면 남쪽에 있는 사람이 당긴 다. …… 저물녘에 平方館 아래에 이르러서 배를 멈추고 밥을 먹었다. 또 9 월 11 일 條에는 〈새벽에 일어나니 배가 이미 언덕에 닿았고 언덕 위 에는 가마가 준비되어 있었다. 곧 육지에 내려서 館으로 갔다. 여기는 山 城서 1 인데 강을 따라 성을 쌓아서 泥城이라 하고 水車 두대를 설치하여 몰
을 끌어울려 성중에 물을 댄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泥川 沿岸 근처에는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연행되어 이곳에 정 착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 즉 『海游錄』에 〈왜인이 말하기를 泥江 언덕에 晋州島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임진년 전쟁 메 왜인들이 진주사람을 포로로 잡아 와서 살게 했던 곳으로 지금도 그 한 마을에는 다른 종족이 없다고 하였는데 당시를 생각하매 털끝이 쭈댔해졌다 〉 고 기록되어 있다. 또 1682 년 통신사 역 관 金指南의 「東樣 日 錄」 8 월 1 일 條에 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大阪을 떠나 50 리를 가서 平方에 도착했다. 使館에 내려 振舞를 받았다 . 접대하는 것이 공손하고 음식이 맛이 있다. 또 시저(延署) 가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 만든 것과 흡사했다. 괴이히 여겨 물었더니 우 리 나라에서 포로로 잡혀온 자가 이곳에 많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 본에 연행된 포로의 수는 약 4 만 명이라고 하는데 『朝鮮王朝 實 錄』에 의하 면 조선에 귀환한 피로인은 5,720 명에 불과하다고 했으니 그 의의 사람들 은 일본 각처에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 2 網引과 浚深 조선사결의 泥川通行에 있어서는 沿岸諸村으로부터 인부(부역군)를 칭 발하여, 申維翰이 말한 바와 같이 뱃줄 당기는 사람(綱引役)과 浚深人夫 로 동원되었다. 죽 泥川은 土砂가 몰려 얕아져 이 모래를 파내야만 河船 이 갇 수 있기 메문에 이 賊役이 또한 과중했던 것이다. 이런 助鄕 • 網引 및 信使의 道中接待에 관해서는 各市史에 기록된 것이 있다 . 枚方市史에 들어 있는 1764 년 12 월 申立 書 에는 〈朝鮮人來朝 0 節, 人馬 御入用相掛 b 重役 K 龍成難儀 至極奉存候〉라고 명기되어 있다. 또, 日野照正의 〈外國人使節 0 泥川往還七 綱引役 • 水尾浚役一朝鮮通信 使來朝 0 場合〉(〈(地方史硏究〉〉 162 號)에 의하면 칭발된 網引人夫는 다음과 같다. 1682 년 上行 963 명 1719 년 上行 1, 318 명 下行 400 명 1748 년 上行 1, 472 명 下行 308 명
1764 년 上行 1, 472 명 下行 308 명 水尾浚役 인부에 대해서는 1711 년 泥川 상행 때 20, 644 명, 귀로하행때 1, 570 명 이 , 동시 에 諸入用銀에 관해 서 는 來路에 63 貫 858!J J., 歸路에 69 貫 517!J J. 들었 다고 한다. 신사선단의 항로에 해당하는 부분은 幅 10 間 (18.lm) 깊이 3 尺(약 90 cm) 의 규격을 浚深하게 되어 있다 . 小林茂의 〈德川時代t乙和남 石 朝鮮通信使(J)助鄕問題 __ 泥藩(J)場合在中心 K- 」(《朝鮮學報〉〉 43 輯)에 의하면 泥藩에서는 1748 년의 접대에는 延 35, 221 인, 총 入用銀온 38 貫 247!J ]. 8 分이 들었다고 한다. 小林은 · 藩과 領民 에 있어서는 경제적으로 무익하다고 할 통신사의 來朝로 貢租와 노역을 부과시킵으로써 곤궁도를 더 배가시키는 형편이었고 豪著한 隣交를 존속 시킨 것은 오로지 국제간의 허영적인 과시를 견지하는데 있었다고 지적하 였다. 하여간호화찬란한 조선국사절단의 泥川往還에는 뱃줄을 당기는 부 역과 준설 인부들의 노고가 컸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徒川은 고래로 湘戶內海와混튬湖를 연결하는 중요한 수로로서 정치, 경 제, 문화의 대동맥이었는데 특히 江戶時代에 있어서는 교통운송의 요로로 서 그 역할이 대단히 컸다. 『泥川兩岸』 4)( 暎晴翁 著 松川半山 畵)[上行船部 • 下]에 泥大橋의 繪圖가 들어 있는데 泥川說明에 〈성곽 결을 호른다. 五畿內에서 제일가는 大河로 서, 6 국의 물이 여기 돌아와 만난다. 山城·近江 ' ·河內·伊賀·丹波.攝 津의 河水는 늘 溶溶히 조용하게 흐르며 難波津에 오가는 배 는 주야로 쉴 새없고 성곽의 모태섭에는 水車(무자위)가 있어 물결을 따라 연달아 돈 다. 領主의 茶亭 다리 위의 오가는 아름다운 정경, 깊숙하여 부족함이 없 다. 또 이곳은 잉어의 명산으로각별히 맛이 있다. 고귀한 獻上에는 성(城) 가의 고기를 쓰는데 흔히 車下라고 부른다. 그래서 늘 遊臘을 금한다〉고 했다. 江戶時代, 京都伏見과 大坂八軒家 사이의 약 130 리 되는 강줄기를 이른 바 30 石船(過書船 )5) 이 운행했는데 明治 5 년 (1872) 9 월에 이 30 石船 대신 4) 『泥川兩岸一覽 • 宇治川兩岸一覽』(柳原 書 店 昭和 53 年). 5) 井上俊夫 『泥J II 』(三一 書 房 1957 年) • 『:b b 玲은 )II .!I(草思社 1979 年) 참조. 三十石 船의 구조는 長 5 丈 6 尺 (약 17m) • !計幅 8 尺 3 寸 (약 2. 5m) 정 원은 乘客 28 名 • 船頭 4
名 • 過 書 는 過所라고도 썼으며, 關所의 통행을 허가하는 것으로 중세에는 이 手形 올 가지고 있는 배를 過 書 船이라고 불렀다 . 京都伏見과 大阪 사이를 울라갈 때는 한낮 또는 하풋밤, 내려갈 때는 반나절 또는 半夜로 운행했다고 하며 그 船 貨 온 1 인당 을라갈 때는 180 文, 내려갈 때는 84 文이었다고 한다(『增補登船獨案內』 1837 年 刊行) .
17 돈짜리 蒸氣船이 처 음 등장했 고, 明治 43 년(1 910) 부터 京阪電車 가 달 리 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韓使症城來着圖 6) 1748 년 泥 藩 主 稱葉家의 藩 士 渡 邊 善右衛門이 조선신사 를 泥 城에 서 집 대 할 때 個候하면서 그 견문을 상세히 기술한 것아 남아 있다 . 『朝 鮮 人來聽 記』 3 冊 • 『延 享 朝鮮人御 要 應御獻立』 1 冊 외에 渡 邊藩 士가 그린 『朝 鮮 人來 朝行列圖』 2 卷 • 『馬上才繪卷』 1 卷 • 『朝鮮萌 禮 使泥城來 着繪 圖』가 渡 邊 家에
4
月 6)2 5 京日 都) . 府中史村蹟 富勝 三地郞調 査著會 I報i'告泥第納所一0冊)歷 史第』 2(1 沙納文所社村發唐行人 誰19木72( 年京) 都抽府稿發 •行 「 泥大J I正1 & 朝8 年鮮 通6 信使」 北河內 & 준0)周邊0)地域文化誌 <<£A,tt)) 第 31 號 昭和 62 年) 참조.
傳存했다. 이것을 大正 8 년(1 919) 京都大學講師 西田直二郞이 渡邊守國으 로부터 대출하여 조사한 결과가 京都府史蹟勝地調査會報告 第一冊에 수록 되어 있으며 이들 模寫本이 京都大學圖書館에 남아 있다. 渡邊善右衛門은 이름을 守 業 또는 守田이라고 한다 . 元 祿 14 년(1 701) 3 월 10 일 江戶靑山稱葉家에 서 출생 하여 享保 8 년 (1723) 稱葉家를 따라 症 에 이주하였다. 1748 년 2 월 御使者役, 同년 5 월朝鮮人興應役울 담당했고 1762 년에 62 세로 旋城下에서 병사했다. 그의 隨筆手記인 『觀樂榮粧』 卷 12 에 〈菜子軒齋堂室翁號之事〉라 題하고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7 ) 繪之號繼榮子 藤原守業 卜號, 文林軒, 竹林齋, 皇風堂, 洪貢室, 鶴勢 翁, 排號峨洲, 表德號古調如也.
7) 平山敏治郞 「入來琉球記」 (資料) (《成城大學民俗學硏究所紀要》 第 3 集 昭和 53 年 12 月) 참조.
上記한 繪圖는 六尺四方紙面에 채색으로 泥城부근의 시설과 唐人誰木을 詳記하고 人物, 樓船, 番所 , 菩護隊 ffi, 輿車馬四 등을 선명하게 그리고 繪 圈右上에 는 (朝鮮)官人數 365 인, 舟引人足 1, 500 인, 挑燈數 1, 500 張 등 해 설을 가하고 끝에 〈延享五戊辰五月二日 晴天 夕少雨天 洪貢翁蝶洲作此圖〉 라고 軟署하였다. 그리고 前記한 「朝鮮人來賜記」에는 조선 사절단이 泥浦에 도착하기 전에 000 0000 泥大下津에 서 納所村에 있는 唐人誰木까지 舟引人足 1, 500 명 을 시 켜 河中 土砂大浚深울했는데 그공사를 위해서 高提燈 3,000 張을걸었다고하였다. 이 밖에도 渡邊藩士가 그린 「泥城古圖」 8) 가 현존한다 . 洪貢翁은 多超味
多才한 逸材로서 특히 文才 畵業 에 뛰 어 났다 . 泥浦에 관한 기 록으로서 는 제 1 회 사절 1607 년 (선조 40) 副使 慶遷의 『海 樣錄』에 다음과 갇은 것이 있다. 申時到泊於泥浦 俗名五沙浦 有板橋橫截江流, 兩邊蘭干 , 柱頭皆以靑銅8) 北屋鍊之助 Ii'泥川』 16 쪽( 京阪電氣鐵道株 式會社 昭和 18 年). 9) 「慶七松海樣錄」上. 4 月 11 日 條(『海行掃載』 2. 26 쪽) .
冒之, 下陸過橋, 寫一館舍, 是秀吉妄家也, 今已適他, 爲家康磨下將倭所 操 四面整水爲塚, 塚西有十0 字0閣 樓船, 塗飾黃金, 郞秀吉生時所騎船也, 廢棄已久, 舍後江橋下, 設水車 ~I J木作水道, 高可五六丈, 激水引之, 直注 脂舍 〈俗音五沙浦〉라고 한 것은 〈納所〉의 誰音인 것으로 생각된다. 唐人雅木 (納所授橋)란 외국(조선) 사철의 착안 상륙지점을 의미한다 . 納所의 板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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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강물을 가로지르고 양쪽가에는 난간이 있으며 기둥머리에는 모두 청동 구리를 입혔다. 육지로 내려가 다리를 건너 관사에 기숙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唐人誰木이 바로 하륙지점인 것이 틀림없다. 여기에 나오는 水車 는 渡邊氏 「泥城古圖」에도 2 基가 그려져 있다. 이 수차는 泥J II 의 수류를
따라 飛 洙 (물보라)을 날리며 회전하는데, 이 수차야말로 泥 城의 상칭이었 다고 한다. 이 수차 를 유지하기 위해서 泥藩 主에게 2 천 석을 더 가증했다 는 것이다 .10 )
10) 앞의 駐 6. 中村 富 三郞 書 18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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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수차에 관해서는, 세종 12 년 (1430) 에 내일한 朴瑞生의 보고서에 도 일본의 농민은 수차를 설치해서 물을 길어 田쌀에 대는자가 있어 金愼 을 시켜서 그 造車法울 자세히 조사시켰다고 했다 . 11) 朴瑞生의 건의에 따 라 各道에 그 모형을 보내어 시험시켰다고 하는데 경상도 쪽에 남아 있는 수차는 세종시대의 자취라고 한다 . 12) 趙職의 『海樣日記』에도 수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一月二十七日, 夕次泥浦……城外有水車二座 , 狀如錬車逐波自轉酷水注
11) 今村 柄 『歷史民俗朝鮮漫談』 日本0)水車 421 쪽(南山哈社 昭和 5 年) . 12) 갇온 책 朝鮮 & 水車 297 쪽.
楠澈入城中, 見莊奇f祖 使別破陣許圭 都訓導卞 漢 詳望其制樣, 如能移其 制作於我國而用之, 則其於湘田之道, 可謂有利矣 , 未知兩人可能必成否 也 13)
13) 趙職 『海樣日記』 1 月 27 日 條(『海行捷載』 4. 224 쪽).
1 월 27 일 저녁에 정포에 닿았다 . … .•. 성 밖에 수차 두 대가 있었다. 모양이 뭉 레와 같은데 물결을 따라 스스로 돌면서 문을 떠서 동에 부어 성중으로 보낸다 . 보기에 매우 괴이하므로 별과진 허규와 도훈도 변박을 시켜서 자세히 그 제도와 모양을 보게 했다. 만일 그 제작 방법을 옮겨다가 우리나라에 사용한다연 , 논에 물을 대기에 유리하겠는데 두 사람이 이 룰 반드시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인지의 여 부를 알수가 없다. 또 귀로 도중 4 월초 2 일 八幡山中火, 宿森山條에도 平明發行, 行三十里, 小想茶屋, 中火八幡山 路邊聞有 播 祐, 使許圭落 後看審, 歸傳製樣,蓋於水車, 交以牙輪瞬次轉環, 前柱惡三維確兩杓臼, 後柱惡磨石而觀其水勢可以加減, 不費人功籍一水之力而春磨六, 七處可謂 好器械也, 許圭以爲詳見其製度亦已模畵, 如得數百金, 可以造得云矣 . 14)
14) 위의 책 없 6 쪽.
평명에 출발하여 30 리 를 가서 참깐 다옥에서 쉬고, 팔번산에서 접심 을 먹었다 . 길 옆에서 방아쩡는 소리가 나므로 허규에게 뒤에 떨어져서 잘 살펴보았다가 돌 야와서 그 만듦새를 전하도 록 하였다. 물레방아는 몹니바퀴가 서로 물려져 돌 며, 전강에 3 개의 방아와 2 개의 공이와 확이 달려 있고 후강에 맷돌이 달려 있 는데 뭉의 형세를 보아 가감할 수 있으며 인력을 허비하지 않고 오직 한 수력을 빌어서, 6,7 군데에서 곡식을 쩡으니 좋은 기계라 할 만하다. 허규는 그 제도 를 자세히 보고 이미 그대로 모형을 :::L.렀으니 수백 냥의 돈만 얻는다면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였다.
제 3 장 상호인식 江戶時代, 일본인의 대조선 인식에 있어서는 우선 조선 고대의 여러 나라 가 중국선전문화의 중계지였으며 또한 많은 渡來人이 학문과 기술의 전달 자였다는 古代傳承을 통하여 조선의 문화적 공헌에 대하여 敬慕의 생각을 지니고 있었고, 또 막부의 우호정책 하에서 일본의 유학자와 문인들 사이 에서는 조선의 학자와 문인에 대해서 존경심이 강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일면에서는 이와 반대로 조선을 『古 事 記』와 『 日本 書 紀』의 고대전승 이래 朝貢國으로 보는 전통적 의식이 정착되어 있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 즉 국학자 사이에는 조선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일본 의 건국기원에까지 소급하여 조선을일본의 속국으로보는것이었다 .1) 그 예를 한두 가지 들어 보기로 하겠다 .
1) 旗田嵐 「日本人0)朝鮮觀」(『日本&朝鮮』 勤草 書 房 1965 年), 矢澤康祐 「江戶 時代 K 和납石 日本人0)朝鮮觀 K? t TC 」(『朝鮮史硏究會論文集』 6 號 1969 年), 三宅英
熊澤蕃山 (1619~1691) 의 『集義和 書 卷 8 』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九夷 안에서 朝鮮, 琉球, 日本을 우수하다고 한다. 이 삼국 안에서는 일본이 뛰어나다고 한다 . 그렇다면 中夏 밖 사해 안에서는 일본을 따를 나라는 없을 것이다 . 이것은 天照皇 • 神武帝의 은덕에 의한 것이다. 山鹿索行 (1622~1685) 의 『中朝事實』(中國章)에도 이와 유사한 구절이 등 장한다 . 高麗는 본래 우리의 속국이다 . 文이건 武이건 外朝에 비할 바 못된 다…… 中朝(일본을 가리킴)의 文武에 恐權한다 . 이와 같은 속국론이 대두한다. 따라서 新井白石에 의하여 제기된 대동 의식은 上記한 熊澤蕃山과 山鹿素行 등에 의한 멸시관에서 다시 대항의식 으로 변하고 드디어 林子平 (1738~1793) 과 吉田松陰 (1830~1859) 등에 의 하여 한국을 침략의 대상으로밖에는 보지 않는 도식이 형성된다. 林子平의 『海國兵談』(제 16 권)에
利 「 信 使0)風塞三十年」 (『韓國文化』 1986 年 8 月 號) , 高柄翊 「群倭 & 棋花瑠 草 」 -朝 鮮通 信 使0) 日本 觀 - (『韓國文化』 1989 年 7 • 8 • 9 月號), 참조 .
神武帝가 처음 一統의 業을 성취하고 人統을 세운 후 神功皇后가 三 韓을 臣服시키고, 太闇(豊臣秀吉)이 조선을 토벌하여 금세까지도 本邦 에 복종시키게 되는 일들은 모두 武德의 빛나는 바이다. 吉田松陰의 『幽囚錄』에 그리하여 조선과 같은 것은 古時 우리에게 臣屬되었으나 지금은 점차 오만하여지고 있다. 더욱이 그 風敎를 昭詳하게 하여 이것을 회복시키 지 않으면 안 되겠다. 고 역설했던 것이다. 江戶時代에 일본은 의국과의 교류에 있어서 조선통신사의 경우 〈來賜〉, 琉球使의 경우〈來賀〉, 和蘭 甲比丹의 경우〈江戶參府〉라는 용어를 사용했 다. 〈來萌〉이라는 것은 초청을 받고 來訪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 다. 그런데 통신사의 방일을 일부러 〈來貢〉이 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죽 儒學에 조예가 깊은 林羅山은 信使의 〈客館〉 또는 〈賓館〉을 〈蕃館〉 2) 이 라고 불렀으며 「朝鮮信使來貢記」를 撰述하였다 .
2) 『 羅 山先生文 集 』, 卷 60, 雜著 5 韓 客 筆 語 • 慶長 十年 乙已 二月 京師 蕃 館與朝 鮮僧松 雲筆 語
중국문화를 숭상하던 일본 유학자들은 중국을 별격으로 〈 華人 〉 , 〈華館〉 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和蘭등은 外蕃이라고 하여 〈蕃〉자를 썼는데 . , 앞서 서술한 羅山의 蕃館도 이로부터 연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아다. 「寶永 • 華洛細見圖」(卷 10) 에는 壬戌年 (1682) 信使의 행렬도와 마상재 그림을 싣고 그 설명에 〈天和 2 년 (1682) 7 월에 我朝에 사신을 보내어 각 종 보물을 공물로 바치다〉라고 하였다. 天和 2 년 (1682) 은 新井白石이 처음으로 동신사와 만났던 해이다 . 新井 白石은 자신이 지온 『陶情詩集』을 韓使에게 보이고, 서문과 跋 語를 청하 여 써받았는데 이것이 機緣이 되어 侍 講 으로 천거받고 후일 막부정치에까 지 참여하게 되었다. 1711 년 조선통신사의 방일시 白石온 韓使와의 대응에 있어서 이른바 개 혁안 즉 國 書 復號, 집대의 간소화를 단행하고 國 諱 문제로 논쟁을 벌이기
까지 했는데, 그 근저에는 白石도 조선을 조공국으로 보는 전통적 의식이 흐르고 있었음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白石은 그의 「國 書 復號紀 事 」 (1712 年 11 月 眠日 書 )에 夫, 朝鮮校腐多詐 利之所在不顧信義, 蓋滅柄之俗天性固然 이라고 갈파하고 있다. 또 「朝鮮開使後議」 (1715 년 2 월 26 일 脫稿)에 〈조선 의 역대 기록을 보니 대개 일본을 그 나라에 臣屬시킨 것처럼 써놓고 심지 어는 倭齒 • 倭奴 • 倭賊이라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 그런데 옛날 그 나 라 삼국시대, 我國에 臣屬했던 일들도 이조역대 국사에 명기되어 있다.〉 白石온 적어도 우리나라에 관하여 『海東諸國紀』 • 『忽怨錄』 • 『致事撮要』 • 『經國大典』 등은 涉覽했 으리 라고 생 각된다. 3)
3) 宮崎道生, 「正德0) 朝鮮來賜」 (『新井白石序論』 吉川弘文館 昭和 51 年) 참조.
한편 新井白石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西 )11 如見 (1648~1724) 은 그의 『華 夷通商考』 (1695) 에서 조선에 대하여 〈이 나라는 監道를 존승하는 일이 中 華보다 낫고, 儒의 古法이 中華에서 끊겨 없어진 것도 이 나라에 남아 있 다. 인물은 質素하고 長命하는 나라다 . 의복과 말은 唐人과 다르다〉고 하 였다. 즉 유교의 나라로서 조선의 특성을 칭송하였다. 大坂懷德堂學主였던 中井積善은 그의 「草茅危言」(朝鮮之 事 )에 〈神功의 遠征以來, 韓國이 服從朝貢하여 일본의 속국이었음은 역대로 그치지 않았 다〉. 그리고 또 〈우리나라 학문에 어두움을 찔러 통신사 행렬에는 巡視旗, 淸道旗, 令旗를 휘 날리 니 無禮하기 막심 하다 . 巡視는 우리 나라를 속국으 로 생각하고 使者를 보내어 巡視한다는 뜻이 되고, 淸道는 使者의 행로를 청소하라는 것이고 令旗는 일본에 호령한다는 것이다. 청국에서 조선으로 勅使가 올때에는 반드시 이렇게 했을 것이지만 이것을 우리나라에다 공공 연하게 시행하여 모욕을 주니 밉기 짝이 없다〉고 명기하고 있다. 積善은 조공국으로서의 인식은 버리지 않았으나 다만 武家(막부)와의 동교는 부 당하며 조정에대한 賜禮가 정상적인 관계라고 역설한 점은, 이미 국제적 신세력과의 접촉이 생겨 전통적 대의 의식 내지 對朝鮮觀이 새로 관심을 끌게 된 결과일 것이다 .4) 조선측에서 倭賊, 倭奴라고 부른 데 대하여, 1719 년 信使製述官 申維翰
4) 中村榮孝, 『日本&朝鮮』 第 5 交隣關係0
제 3 장 상호인식 327
과 對馬島 儒臣 雨森芳洲i와의 응수가 주목을 끈다. 5)
5) 國譯 『海行抱載』 II 海游錄 下. 聞見雜錄 참조 .
芳洲 : 귀국 사람이 저술한 문집을 보면 그중에 우리나라의 것은 반 드시 倭賊이니 倭齒니 하여 추하게 여기고 멸시하기를 함부로 한 것이 차마 말도 할 수 없을 정도이므로 우리 文昭王(家宣將軍)께서 말년에 우 연히 조선의 문집을 보고 매양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어찌 조선이 우리를 모욕함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을 알았으리오 하면서 평생토록 한 을 품었는데 오늘날 여러분이 과연 이 뜻을 아시오? 維翰 : 군이 본 우리나라 문집이 어느 사람이 쓴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 지만, 이것은 모두 임진왜란뒤에 간행된 글들일 것입니다. 平秀吉이 우 리나라에 철저한 원수가 되어 종묘사직의 수치와 욕됨과 생령이 피를 홀 린 것은 실로 만고에 잊지 못할 변이니, 우리나라 신민으로서 . 누가 그 의 고기를 찢어서 먹고자 하지 않겠소. 그러므로 위로는 사대부로부터 아래로 천인에 이르기까지 奴와 賊이라 말을 함부로 하게 되니 글에 나 타난 것이 진실로 마땅히 그와 같은 것이의다. 또 〈倭〉와 〈일본〉, 〈唐〉과 〈조선〉에 대한 화제가 뒤어나왔다. 芳洲 : 지금까지도 信使의 從者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부를 때 반드시 왜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維翰 : 귀국이 왜라는 칭호를 가진 지 이미 오래인데 군은 무슨 유감 이 있습니까? 芳洲 : 唐史에 왜가 국호몰 고쳐서 일본이라 하였다 하였으니 이후부 터는 하인들에게 신칙하여 우리를 일본인이라고 불러주십시오 . 維翰:귀국사람이 우리를唐人이라부르고, 우리나라사람의 筆帖에 쓰기를 唐人筆蹟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오? 芳洲 : 國令으로 客人이라고 칭하고 혹은 조선인이라 칭하도록 하였으 나 민속이 옛날부터 귀국문물이 中華와 같다고 하기 때문에 唐人이라고 칭하니, 이것은 사모하는 의미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왜적, 왜노라 고 불러왔는데, 일본은 이것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통신사의 기 행 문에 서 도 諸倭, 群倭라고 하며 〈倭 〉 字 를 고집 해 왔는데 , 이 배경을 생각해 보면 그 원인의 하나는 역시 임진왜란 이래의 원한과 증 오의 표현이고, 또 다른 원인은 조선의 유교적 관접에서 볼 때 일본인의 생 활습관의 부도덕성에 대한 멸시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倭〉에 대 해 서 는 『舊唐書』 東夷倭國傳에 <日 本國者倭國之別種也, 以其 國在日邊 故以日本爲名,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爲日本, 或云日本舊小國 俳倭國之也〉라고 명기되어 있다. 또 우리나라의 『 三 國史記』에도 〈文武王 10 년 (670) 倭國更號 日本, 自言國近日所出以爲名〉이라고 하였다. 芳洲가 말하듯이 일본인이라고 부르는 데에 대해서는 1764 년 使行에 있 0 0 0 0 0 어 서 『暎諭員役文』에 〈彼人切勿輕個潮笑待以忠信誠心呼以 日 本人亦勿爾汝 斤呼事〉라고 신최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1764 년에 방일한 正使 趙職은 일찍 이 1757 년에 東萊府使로 재 임 중, 對馬 島와의 절충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사람아다. 그의 『海樣日記』에 對馬 島와의 무역에 관하여 〈조선에서 對馬島入送使에게 주는 물품인 인삼, 細 宇, 麻布, 虎約皮 그 밖에 別送使를 접 대 하는 비 용까지 합하면 1 년에 30 만량이 넘는다. 일본측에서 바치는 銅鐵, 黑角,胡淑, 明碧 등을 환산하 면 3 만량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들이 바치는 것을 우리가 주는 것에 바교 하면 10 분의 1 밖에 안 된다. 이처럼 우리의 적지 않은 재물을 소모하여 잊어버리기 어려운 원수를 먹이는 것이 사리로 헤아려 보면 안 될 일이나, 列聖朝의 깊은 근심과 원대한 생각이 보통보다 만만 배나 뛰어나, 오랑캐 와 화친한 최하의 방책을 쓴 것이지, 어찌 즐겨 하였겠는가. 또 먼나라 사 람을 회 유하며 , 후하게 주고 박하게 받는다는 말이 中庸과 周易에 나타나 있으니, 큰 나라에서의 일처리는 마땅히 大體를 보아서 해야지 어찌 작은 이해를 따질 수 있겠는가〉 하는 대목이 나온다선 이것으로도 대일정책의 일면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6) 國譯 『海行抱載』 vn 海樣日記 矣未年 10 月 28 日條 참조.
통신사의 왕래와 부산왜관의 對馬島人과의 집촉으로 조선에서는 일본에 대한 이해자가 비교적 많았다. 그중 李漢 (1682~1763) 의 「日本忠義」(『星湖塞說類選』)는 우리들에게 啓 發되는 바 적지 않다. 李漢은 柳馨遠의 學을 紹述하여 經濟實用의 學을 주로 하면서 박학다재한 학풍을 일으킨 사람이다. 그는 經史諸子의 書로 부터 천문 • 지리 • 律算 • 의약에 이르기까지 내외의 전적을 섭람하고 록히
서양학술의 정밀함을 매양 칭탄하였다 .7)
7) 李丙 熹 『韓國史大觀』 (第 8 새 施設과 새 文化의 發茅) 426 쪽 참조.
李漢은 「日本忠義」에서 일본의 美點을 식별하고 전적의 보존과 문화의 진보를 칭찬하며 조선의 결점을 들었다. 그리고 江戶와 京都(西京)와의 관계 및 關白의 성격과 천황의 지위를 검토하여 忠義의 士, 尊王論이 유포 되고 있음을 聞知하고 他日, 천황에 의하여 일본이 통일되었을 때, 의교 상으로 關白(幕府將軍)과 對等抗禮의 국교를 맺고 있는 조선국왕은 천황 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지적하였다. 그리고 통신사에 대해서는 그 파견 횟수를 늘여 빈번히 왕래하면서 선린 우호를 깊이하며, 사절은 서로 國都에서 영집할 것을 역설한 바 있다. 얼 마 후에 일본정부로부터 통신사의 江戶登城울 중지하고 大阪 또는 對馬島 에서 영집하는 개혁안이 제기되어 현실적 과제로 변하는데, 이에 앞서 이 와 갇은 기본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더욱이 李漢이 깊은 관심을 가진 천황이 일본을대표하여 조선과의교섭에있어서일어날명분문제는그후 얼마 가지 않아서 양국간의 교섭의 중심과제로 되어 한일의교의 난국이 벌어지는 것을 생각할 때, 그 선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 명치유신 후 德 )|I 政權으로부터 의교권의 접수 및 왕정복고의 통고, 더 나아가서는 일본의교문서의 用字를 통하여, 체제의 전환에 대해 조선과의 의사소통의 결핍으로 분규를 거듭하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8)
8) 『星湖壁說』 卷 17 人事門 <日 本忠義〉, 中村榮孝, 『 日 鮮關係史0)硏究』 (下) 三 . 江戶時代0)日鮮關係 참조.
그리고 금석학자로서, 서예가로서 經學의 대가로서 異彩룰 띤 검정희 (1 786~1856) 는 1811 년 對馬島易地萌禮信使가 귀국할 때 가지고 온 일본 문물에 접하고 일본문화의 精華를 재안식하는 의미에서 起草한 김정희의 自筆原本 〈日本文化論〉이 남아 있다(藤塚鄭 『日鮮淸 0 文化交流』) . 한편 동신사 일행 중에는 1764 년의 書記 元重擧처럼 일본의 文雅함을 칭 찬한 사람도 있다. 『靑莊館全 書 』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陸呼, 朝鮮之俗, 陝悟而多思諱, 文明之化, 可謂久矣, 而風流文雅反遜 於日本, 無扶自騎, 凌梅異國余基悲之, 善平元玄J I1 之言, 日本之人故多聽 明英秀傾倒心肝, 炯照樣懷, 詩文筆語皆可貴而不可棄也, 我國之人, 夷而
9) 「靑莊館全 書 」, · 卷 32. 淸牌錄一 燕腹堂
忽之, 每衆首而好批談, 余常有感於斯言而得異國之文字, 未雀不拳拳愛之, 不哲如朋友之會心者 焉. 아, 조선의 풍속은 협루하여 꺼리어 싫어하고 괴하는 것이 많다. 문명의 교화 는 오래되었으나 풍류문아한 점에서는 도리어 일본에 떨어진다 . 조선은 호협하 지 못하고 스스로 교만하여 다른 나라를 업신여기니 나는 이 를 매우 슬퍼한다 . 원 현천이 〈 일본 사람은 총명하고 영수하여 진정을 토로하고 심금을 명백히 하 므로 문필도 모두 귀히 여길만하여 버릴 수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 랑캐라고 여겨 무시하고 언뜻 보고 나무라고 헐뜯기름 좋아한다 〉 고 한 말이 참 으로 옳은 말이다. 나는 이 말에 느낀 바 있어 다른 나라의 문자를 보게 되면정 성스런 마음으로 사랑하기 를 마치 마음이 맞는 친구의 글을 보는 것처럼 하지 않 온 적이 없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玄川이란 副使書記로 成大中과 동행한 元重擧이다. 이 이국 문자란 바로 일본 문인 廉殿 堂이 成大中에게 그려준 雅集圖룰 말한다. 이조 후기의 실학자로서 일본에 대한 관심이 깊고 또한 成大中 , 元重擧 와도 친밀했던 李德戀 (1741~1793)10) 는 그의 『靑莊館全 書 』 속에 「靖鈴國 志」 2 卷울 수록하였다. 題名이 말하듯이 일본의 世系 • 姓氏 • 職官 • 人物 • 藝文. 神佛 • 日本地圖 • 與地 • 風俗 • 器服 • 物産 • 兵戰 • 異國등을 기술한 日本國志이다. 이것은 모두 통신사의 『日本訪問紀行錄(聞見錄)』에서 채록 했을 것이다. 일본에 관한 기사를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11)
10) 李 德戀 (1741~1793) 實學者 , 字는 戀 官, 號는 炳菴, 雅 亭 , 靑莊館, 要處, 東 方一士 • 1778 년 (正祖 2) 沈念祖를 따라 北京을 다녀 오다. 1779 년 奎章閣檢書官, 積 城縣監 1791 년 司妻院主 簿 (『韓國人名大 事 典』), 河宇 鳳 「李 德戀 의 日本觀」 (『朝 鮮 後期實學者의 日 本觀硏究』 一志社 1989 年) 참조. 11) 靑 莊館全 書 64~65 卷 • 靖鈴國志 1 • 2( 민족문화추진회국역본 져) 참조.
® 木村兼段堂은 서적 3 만 권을 소장하며 중국 명사와의 교우도 많고 文 雅의 盛함은 조선에 비할 바가 아니다 . ® 인물로서는 林道春 • 木下順庵 • 伊藤仁齋 • 萩生祖探 • 新井白石 • 雨森 芳洲 등을 둘고 있다. ® 藝文에 대해서는 일본의 倭漢字 辻 • 岭 • 迪 • 動 • 迅 등 73 字, 以呂波 47 字 및 片假名文字를 기록했다. ® 風俗篇聲音항에는 〈契飯〉을 일본어로 飯曰眠時(J. -;,) • 契曰央湯伊 (7 力개 ) • 其語助曰麻時('77-,) 모두 七音節이 된다고 하였다(假名 著者注 音) .
일본에 관한 인식으로서는 동신사가 방일할 때마다 남긴 使行日記, 특히 聞見錄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전술한 李漢의 「日本忠義論」과 金正喜의 「日本文化論」이 대표적일 것이다. 朴g.tl:源의 李德戀行狀 12) 에 〈君常自言, 我荀當有 事 時 使絶國視機謀 庶幾 不下於人〉이라고 한 것처럼 李德戀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게 된다면 그 나 라의 機謀룰 살피는 것이 남보다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자부한 것을 엿볼 수 있다.
12) 「雅亭遺稿」, 卷 8. 附錄 . 炤菴行狀.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成大中에게 증정한 木村j莊殿堂의 『雅 集圖』 13) 이다. 荊鼓堂이 손수 비단에다 그림을 그려 두루마리를 만들고 두 루마리 끝에는 여러 사람이 각각 시 한 수씩을 썼는데 그림과 글씨가 모 두 일품이었다.
13) 「靑莊館全 書 」, 卷 52. 耳 目 口 心 룡 J 5.
『雅集圖』에 대하여 〈甲申歲, 成大中士執之入日本也, 請世肅(木村럿莊腹堂) 作雅集圖,世肅手寫, 諸人皆以詩書軸……今記詩文難未脫孤柄, 可愛遠人之 風流, 墨蹟皆浦酒, 盡亦超脫〉이라고 하였다. 이 畵圖에는 細合半齋, 福尙 {府 • 葛張 • 岡元鳳 • 釋淨王 • 木弘恭 • 片山北海의 題詩 및 笠 常의 서문이 들어 있다. 笠常序는〈乃今會朝鮮諸公之東至也, 如世肅者皆執賜館中, 諸公則稅世肅 如舊相識 及其將返, 龍淵成公請使世肅作飛腹雅集圓, 同社者各題其末曰齋 歸以爲萬里顔面云爾, 鳴呼成公之心與夫置身飛腹之堂者, 登有異哉〉 즉, 〈가 지고 랑아가서 만리 밖에 있는 우리들을 보듯하여 주시오 하였다. 아, 成 公의 마음도 이 경가당에 있는 우리들의 마음과 어찌 다르겠는가〉라고 하 였다. 이 『雅集圖』는 본래 舊朝鮮總督府博物館에 있었다)고 하는데, 저 자가 2 회에 걸쳐 현 국립중앙박물관에 조사를 의뢰했으나 현물아 남아 있 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끝으로 片山北海의 諒題를 부기 한다. 飛鼓堂上浪華春 一片春心畵裏新 誰識朔回何限興愍勳寫寄異邦人
14) 藤塚홉 「李朝(J)學人 & 乾隆文化」 (『朝鮮支那文化(J)硏究』 316 쪽 京城帝國大學 法文學會編 刀江 書 院 昭和 4 年).
李德戀撰 『朗鈴國志』야말로 일본을 이해하는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내에 전해오는 『靖鈴國志』의 결락 부분(卷 64~65) 을 보완하게 된 경 위를 밝혀둔다. 본래 『靑莊館全 書 』 所收 『靖岭國志』 결 락 부분에 대 해 서 는 前間恭作 『古 鮮冊譜』에 金澤庄三郞 장서목록의 『靖鈴國志』를 인용한 것으로서, 金澤의 장서에 현존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한국의 민족문화추진회 기획 편집위원회장이던 李丙 熹 박사로부터 소재확인 요청을 받고 저자는 곧 동 양문고의 田川孝三 박사에게 문의했더니 田 )II 박사로부터 永平寺가 소장하 고 있는 『 靖 鈴國志』(寫本)를 발견하여 사진을 찍 어서 동양문고에 기증한 것이 남아 있다는 연락을 받고 수차에 걸친 교섭 끝에 이 자료를 민족문 화추진회에 제공하게 되었다. 본래 이 결락된 원본에 대해서는 『靑莊館全 書 』 刊本 雅亭遺稿 권 6 『與李洛瑞書九書』에 『祗將靖鈴國志』 二冊奉星이 라고 했고, 또 同 書 권 16 雅亭遺稿 8 에 成士執 앞으로 『靖鈴國志在李 蓋 山玉堂家」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靖岭國志』는 李書九의 집에 遺存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경로를 통해 金澤박사 소장에 귀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國譯靑莊館全 書 卷 68(XII) 에 〈「靖鈴國志」는 일본 동양문고 소장 필사본을 발견하게 되어 이것을 복사하여 대본으로 삼았다〉고한 것을 부언해 둔다. 한편 일본의 학자로서는 전기한 新井 白石울 비롯하여, 伊藤長絲 L(1670~ 1738) 의 『三韓紀略』, 貝原益軒(1 630~1714) 의 『慈忠錄』序, 雨森芳洲의 『交 隣提酸』, 그리고 조선사적의 출판으로서는 德川光 00(1628~1700) 이 『東國 通鑑』을 覆刻하여 일본 고대사 연구에 획기적 영향을 주었음은 주목할 만 하다. 동신사 기행록의 백미로 전승되어 오는 申維翰의 『海游錄』을 大正 4 년 (19 15) 에 조선연구회에서 和譯對照本으로 縣刻 출판하였다. 靑柳南冥온 그 서 문에 〈그 필력이 옹수하여 오만불손한 필치로 통열하게 뼈를 도려내는 감 이 없지 않으니 본서는 실로 享保時代 (1716~1734) 의 상하일반의 풍속습 관을 대담노골적으로 발표한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당시의 조선 사람이 얼마나 일본인을 경시하고 이를 鹽俗視했는가를 알 수 있는 동시에, 또 한편에서는 조선 사람이 얼마나 과대망상이었던가를 察知할 수 있다〉 15’ 고 갇파한 것은 주목을 끄는 바이다. 15) 靑柳南冥 「海游錄 |0 紋寸」 (『海游錄』 조선연구회 大正 4 年).
제 4 장 通信使 往還經路 (1764 년 趙職 『海樣 日 記』에 의 함) 1 往 路 1) 韓國內(陸路) 1 서울 1- 良才一―板橋-龍仁 __ 陽智一―竹山- 無極-崇善-忠州――安保-聞慶―—幽谷-―- 龍宮 __ 酸泉-豊山-安東-日 直-義城- 義 興-新 寧 __ 永 川―~毛 良_―慶 州-仇 於 __ 蔚 山-龍 堂__東 萊 __ 녀힙上」 2) 海路(往還) I 釜山 1_ 佐須浦-幌 浦-泉 浦-西泊浦――芳 浦- (佐須奈) 琴 浦-府 中-萱岐島_—藍 島-南 泊――赤間關- (嚴原) (相島)(地島) 室 隅――西口浦-上 關-津 和-加老島-~鎌 f_lJ - (向島) (笠戶) (蒲f_ l J) 忠海島一―竹 原-紹 浦- 日 比―_牛 窓-室 津 __ (柄) 明 石―一兵 庫 __ 河 口 -E 던瓦] 3) 泥川 (河船 • 往還) 던—平 方__泥 浦 (枚) 4) 日本國內(陸路往還) 泥 浦_―京 都-大 津-守 山-八幡山 __ 彦 根- (森山) (佐和) 磨針嶺-今 次――大 垣-洲 股__名護屋-鳴 海- (猪針嶺) (今須)
岡 崎_赤 坂 __ 吉 田――新 居 __ .•濱 松 __- 見 付_ (荒井) 惡 川_金 谷_藤 枝_靜 岡――江 尻_~ 淸 見寺 __ 吉 原_三 島一一箱根嶺――小田原_一大 磯一__藤 澤_ (富士) 神奈川_品 川_口口킨 5) 日光參脂(驛) 鷹젊 畵昌릅 打겁겁:!에 依함 며一越 節 谷— 糖 壁一新栗橋—小 山—石 橋一 (新) 宇都宮―一大 澤__德次良-今 市―~日光山 • 1636 年 • 1643 年 • 1655 年 三回에 限함 2 回 路 1) 日本國內 江 戶-京 都-大 坂-對馬島-釜 山 2) 韓國內(陸路) | 釜山 | __ 梁 山一―三浪倉_―密 陽 __ 淸 道――慶 山 大 邱-松林寺――仁 同――善 山-長川院_一尙 州 __ 咸 昌-聞 慶_―延 豊-棟 山 __. 陰 城-無 極 陰 竹-利 川 __- 慶 安-廣 州――巳뵤巳 통신사 일행은 국왕께 辭陸한 후 陸路로 남하하여 釜山에서는 渡海船으 로 對馬島를 거쳐 源戶內海를 통과하여 大坂에 도착, 大坂에서 河船으로 泥川울 朔上하여 泥浦에서 陸路로 바꾸어 京都를 거쳐 江戶를 왕복하고 귀 로에는 大坂港에서 渡海船울 갈아타고 對馬島를 경유하여 釜山에 귀착한 후 상경하여 국왕께 復命했다. 서울과 釜山間온 經由驛의 接待經費가 過 重하므로 往路와 回路를 달리 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本經路圖作成 에 있어서 현행 한국지도에 없는 地名 : 崇善,仇於,仁同,陰竹, 慶安 등 은 『大東輿地圖』에 의해서 밝혔다.
제 4 부
제 1 장 通信使의 遺墨1) 조선동신사가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남긴 遺墨의 발굴과 그 수집에 온 갖 정열을 경주해 온 저자는 오늘까지 약 50 여 점의 墨蹟을 收藏하게 되 었다. 물론 이것은 그 수효로 보아 九牛一毛에 불과하겠지만, 일본 문사 들과 교류한 것으로서 동신사 연구에는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우선 당시의 일본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통신사의 필목을 애중했는가를 使行日記 속에서 찾아보기로 하겠다.
1) 抽稿 「江戶時代 K 治납 5 朝鮮國信使(J)遺墨 I 乙?t、 T 」(《朝鮮學報》 第 88 輯 昭和 53 年) 참조.
1636 년에 來日한 副使 金世源의 『海接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 글씨와 그림을 청하는 왜인이 밤낮으로 모여들어 朴之英 • 趙廷炫 • 金明國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며 金明國은 울려고까지 했다. 왜인들은 全 榮의 글씨 를 가장 귀 중히 여 겼다(丙子年 11 월 14 일條). ® 일본의 풍속은 사신을 존경하여 감히 칙접 청하지 못하므로 執政 이 하가 나날이 교자를 타고 관사 문 밖에 와서 館伴울 통하여 청 한다. 1 만 ~2 만 석 정도의 祿을 받는 자는 감히 시를 청할 엄두도 내지 못하며 온나 라 안이 홈모하여 얻기를 다투고 오직 至寶로 하지 못할까 염려하니 역시 이 상한 일이 다. (12 월 27 일條) ® 兵庫의 站舍에 머물렀다. 뜰 아래로 걸어나가다가우연히 絶句두 수 를 지어 벽에 썼다. 이튿날 어제의 그 벽을 보니 써둔 시가 없으므로 그 까닭을 물으니 站舍의 주인이 말하기를 〈이 집은 關白의 藏入地로서 將官 의 茶屋인데 將官은 代官이 먼저 차지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그 시를 도 려내어 감추고 전과같이 도배했는데, 代官이 듣고나서 꼭 얻어보려 하매 將官이 죽기로 거절하고 굳게 숨기니 대관이 곧 2 백 냥을 주며 내가 꼭 얻 고 싶으니 네가 나를 속이지 말라 하므로 장관이 마지못해 내어 드렸습니 다〉 하며 2 백 냥을 내보이는데 몹시 아쉬운 빛이 있더라 한다(丁丑年 2 월 3 일 條). ® 兵庫에서 벽에 쓴 시 두 폭의 값이 각각 1 백 냥이고 富士山律詩 8 수
2) 金東漠 『海樣錄』 丙子年 11 月 14 日條, 12 月 27 日條, 丁丑年 2 月 3 日條, 2 月 12 日 條 (『海行抱載』 二) 참조.
는 온 나라 사람이 전해 베끼었는데 이는 반드시 그 사람들이 참으로 확실 히 아는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한번 지극한 보배라 하면 온 나라 사람이 몰려드니 또 한 번 웃을 만하다 (2 월 12 일 條). 또 1655 년 信使從事官, 南龍與의 『扶桑錄』(聞見別錄)”에 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혹시라도 우리나라 사람의 글자 한 자나 한 마디 말이라도 얻으면 보 물처럼 간칙하고 대대로 전하여 玩賞하며 더욱이 글씨의 법체를 좋아해 서 비록 신사를 수행한 아랫것들이 아무렇게나 쓴 것이라도 서로 다두 어 구해다가 병풍이나 족자를 만드는 자가 많다.
3) 南登谷· 『扶桑錄』(聞見別錄) (『海行抱 載 』 3 478 쪽)에 〈如得我國人堡字片言ff l J 寶藏而傳玩之 • 尤 喜書法難 下 輩亂草爭 相求得, 以爲居族者亦多矣 〉 .
또 1719 년 製述官 申維翰의 『海游錄』(聞見雜錄 )4) 에 는 다음과 같이 기 록되어 있다. 일본 사람이 우리 나라의 시문을 구하여 얻은 자는 貴賤賢愚를 막론하 고 우러러보기를 신선처럼 하고 보배로 여기기를 주옥처럼 하지 않음이 없어, 비록 가마를 메고 말을 모는 천한 사람이라도 조선 사람의 借書나 草書를 두어 글자만 얻으면 모두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감사의 성의를 표시하며 소위 文士라 하는 자는 천리길을 멀다 하지 않고 와서 역이나 館에서 기다려서 하롯밤을 자는 동안에 혹은 종이 수백 폭을 소비하고 시 를 구하다가 얻지 못하는 자는 비록 반줄의 筆談이라도 보배로 여겨 감 사해 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 이와 같은 시문의 증정과 서화의 휘호에는 三使 외에 製述官 • 書 記 • 寫 字官 • 畵員 및 醫員둘이 맡았다. 통신사 일행은 총수 4 백 명이 넘는 대사절단이었으므로 대개 巨利을 숙 사 또는 휴게소로 삼았다. 따라서 오늘날 靜岡縣 淸水市興津에 있는 淸見
4) 申靑泉 「海游錄」 (附聞見雜錄) 에 <日 本人求得我國詩文者, 勿論 貴 賤賢愚莫不仰 之如神仙, 貨之如珠玉, 卽昇人斯卒目不知 書 者, 得朝鮮階草數字皆以手援頂而謝, 所 謂文士或不遠千里而來待於站館, 一宿之問或費紙數百 幅, 求詩而不得則難半行筆談, 珍感無已〉.
寺”, 柄浦 의 福禪寺(對潮樓), 牛窓의 本蓮寺 등에는 신사일행아 남긴 墨 蹟이 많이 남아 있 다. 그 주요한 것웅 예로 들면 淸見寺山 門에 걸려 있는 『東海名區』와 fj'潮音閣』福額은 1711 년 통신사의 上通 事 玄怒il'』(號錦谷)의 필적이고, 이 밖에도 淸見寺 에는 朴安期(號螺山)筆 『 瓊瑞世界 』 , 趙 I行 (號瑟 居)筆 『興國』, 金啓升筆 『潛龍室』 屈 額둘이 현 존한 다 . 그리고 신사일행의 自筆 書 帖이 寺寶로 수장되어 있으며, 이 詩稿들은 板 刻하 여 方丈에 걸어 절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즐겁게 맞아 주고 있다.
5) 市毛弘子, 『巨 籠 山 淸見興國禪寺 0)歷史』 第三節 朝鮮0) 使節(人物往來社 昭和 49 年) 참조 .
柄浦 의 福禪寺(對潮樓)에는 1748 년 正使 洪啓禧의 次子 洪景海가 자제군 관으로 수행하여 휘호한 「對潮樓」 편액과 1711 년 從事官 李邦彦(號 南岡) 筆 「 日 東第 一形勝」 편액 이 오늘날에 도 자랑거 리 로 현 존한다. 牛窓 本蓮寺 에는 1643 년 從 事 官 申 儒를 비롯하여 朴安期, 趙 I行 , 兪場 등의 自 筆詩幅 9 점이 전해온다. 이 밖에도京都相國寺慈照院에는趙泰億일행이 接伴僧 別宗長老에게 증 답한 『韓客詞章』 四卷이 남아 있다 . 그리고 日光山輪王寺에는 조선 효종 대왕의 御 筆 『 靈 山法界崇孝 淨院』 額字가 전해진다. 또 彦根市 磨針嶺舊茶 屋에는 1748 년 副使伴個 金啓升(號 眞狂)筆 「望湖堂」 편액이 걸려 있다 . 名古屋 新井家에는 『陶情詩集』에 써준 成腕과 洪世泰의 親筆序跋 및 趙泰 億 등의 自筆 『白石詩草 』 序跋 등 13 점 이 현존한다 . 이 들 의 에 東洋文庫 • 蓬 左文 庫 • 雨森芳洲文庫 • 大和文華館 • 天理大學古 義堂 文庫에 신사유목이 다수 현존한다. l 처자 소장 墨蹟 (1) 趙 I行 筆三使의 筆蹟 卷軸(紙本墨書 44. 6X433. 4cm) 1655 년 正使 趙 I行 (號 琴Jt.) • 副使 兪場(號 秋潭) . 從事官 南龍翼(號 登 谷)이 南 禪 寺金地院 元良和尙에게 써준 친필 시와 서한 및 선물 품목이 들 어 있다. 南龍翼의 『扶桑錄』 10 월 13 일 條에 〈長老元良處援例給若干物種, 元良修答 書 送五卷紙, 受之分給下輩, 以其書辭基恭, 又非無名之債故也, 元 良則主管我國文書者也, 號金地院, 詩文顔精, 言語莊諦格〉이 라고 기 록되 어 있다 . 元良和尙온 南禪寺 274 대 주지로서 조선신사 내빙시에는 조선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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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보내는 일본답서를 기초한 사람이다. 三使의 중답시와 선물 품목은 다음과 같다. 次金地院寄示韻 . 窮河遠學博望椎 節序偏驚換物華 忽有佳篇翻入眼 吳藤揚彩狗生花 乙未孟冬 琴群 演洲散人 金地和尙 道案 萬里消漠臣客椎歲寒熹得擊毛華 知師結習磨應盡 幾度天妃來散花 乙未孟冬 秋潭奉 金地院 玄楊 銀漢初回萬里極 忽驚裝棄動光華 維摩一語元無價地上錦金更澈花 乙未孟冬 壅谷居士奉 金地院禪桐
人夢 一斤 白뚜布 五四 英菩香 捨柄 色紙 三卷 色筆 二十柄 眞墨 二十勿 石瞬 三 斤 (乙未 十月 日) 正使 琴居 副使 秋潭 從 事 官 통걸뿔홉 (2) 金明國筆 達磨圖(紙本水墨 158X 3 9. 0cm)
1636 년 畵員 金明國筆 達磨圖
金明國 (1600~? )은 이름을 明國 의에 . 命國 또는 鳴國이라고 불렀다. 字는 天汝, 號는 蓮潭 또는 醉翁이라고 하였다. 安山人이다. 이름난 畵 員 으로 圖畵署 교수를 지냈다. 金明國은 1636 년(인조、 14) 과 1643 년(인조 21)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의 畵員으로 수행하였다 . 『聽竹 畵 史』에 의하면 〈金 明國이 동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을 때 온 나라가 휩쓸려 그의 필목을 다소
라도 얻게 되 면 洪監같이 여 겼다〉고 했다. 이 達磨圖는 1636 년 방일했을 메 그린 작품인 것으로 생각된다 . 이 화폭과 함께 「醉翁亭記」롤 쓴 조선 趙玉坡의 낙관이 들어 있는 족자가 전해 오는데 金明國의 호인 醉翁에 관 련지어 중국 송나라 歐陽修의 「醉翁亭記」를 費으로 삼아 쓴 것으로 그메 동행했던 書寫員 趙廷球의 필적인 것 갇다. 『洗岩集』에도 〈金明國은 그 사 람됨이 疏放하여 해학을 찰하고 또 술을 즐겨 몇 말의 술을 마시는 까닭 에 반드시 실컷 취해야 필의가 더욱 몰려나와 神韻이 유동하였다. 대개 得意의 작품은 흔히 만취한 후에 나왔다〉고 한다. 이 達磨圖도 그 필치가 簡筆로서 禪味가 풍긴다. 현재까지 일본에 남아 있는 것은 주로 壽 老人 • 達磨 • 神仙 등 10 여 점에 불과하다. 6>
6) 吉田宏志 「李朝(J) 畫 員金明國 K?L 、 T 」(《日本(J)中(J)朝鮮文化》 35 號 朝鮮文化 社 1977 年) 참조‘
(3) 金世漁書五聖賢圖像讚(納本着色 182X60. 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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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 년(인조 14) 에 來日한 副使 金世嫌은 林羅山의 요청에 의해 狩野山 雪筆 歷聖大個像 21 폭에 費을 써 주었다. 『林羅山文集』 권 64 雜著 9 聖賢像 軸에 의하면 〈 寬永丙子季冬朝鮮信使通政大夫白能任統, 通訓大夫東漠金世 孤 通訓大夫靑丘黃辰來賜, 卯之則致云東演者儒者也 故以吾家所藏聖賢圖 像 二 十一幅請書于圖上, 於是表出古語並舊費副其軸以遣之, 金世嫌遂 書 而返 之, 足以爲家珍聯記焉爲他之證矣〉라고 하였다. 이 21 폭 중 15 폭은 東京國 立博物館에, 同 6 폭은 筑波大學附屬固書館에 현존한다. 저자가 소장하고 있는 圖像費에는 〈羅山子家藏之五聖賢圖像朝鮮金世派 書 舊讚于其上今俳其 圖讚〉이라고 軟署하고 〈菊應〉라는 朱文이 찍혀 있다. 孔子를 상단 중간 에, 그다음좌우에 曾子·孟子·顔子·자사의 도상을그리고그위에 각 각 讚을 썼는데, 그 찬문의 내용과 서체는 東京國立博物館所藏의 圖像費과 동일하다. 다만 〈藤原〉 • 〈右近〉 • 〈常信〉의 인장이 찍혀 있는 점으로 보아, 狩野常信이 전기 東京國立博物節에 있는 원본을 모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4) 演浪洪世泰筆 山水圖(手本淡彩 103X35cm)71
7) 抽稿 「天和度(1 682) 朝鮮通信使碑將洪世泰& 日本文士&0)策談唱訓 K? l,、 T 」 (『朝鮮學報』 98 輯 昭和 56 年) 참조.
槍浪 洪世泰筆 山水圖
洪世泰 (1652~1725) 의 字는 道長 • 來叔 , 號는 槍 浪 • 柳下이 다 . 1682 년 (숙종 8) 에 副使 碑 將의 명목으로 동행했다. 經 史 諸 子에 1危 貫 하고, 시에 있어서는 用工尤專하여 音調 氣 格은 唐의 正宗 諸家 에 及 遜 했고, 필법이 遂 妙하여 일본 사람이 다두어 그의 시목을 얻어 가보로 삼았다고 한다 . 이 산수도의 필법에 대해서 韓 國繪 畫 史에 조예가 깊은 山內 長 三氏는 〈 造 法 에 있어서 이와 같이 芹 뿜城에 가까운 것은 金弘道 등이 썼는데 만일 朝 鮮 槍 浪이 그린 이 그림 이 洪世泰作이 라고 한다면 沈師正 • 金弘道보다도 그 사용이 빨랐다는점에서 한국 회화사상 새로운 발견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5) 演浪洪世泰 筆雙 維圖 (宇本淡彩 94. 5X 39. 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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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畵備考』(卷 13. 38 狩野 譜 1661 쪽)에 〈 余酷昭盡固 OO 古今 畵 多矣, 稱意 者絶少, 今見常信公眞跡絶代奇 筆 也 〉 라고 하였다. 이것은 人見友元으로부 터 狩野常信이 그린 「 寒 江獨釣固」 를 증정 받고 칭 찬한 대 목인데 〈 余酷呼 肅 圖 〉 라고 한 것으로 보아 槍 浪 자신도 整 圖에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이 雙維圖는 梅花에다 雙維몰 그린 것으로, 모두 〈朝鮮槍浪〉이라는 낙관 이 들어 있다 (6) 朝鮮荷潭筆 高士彈琴圓(組本着色 104X4l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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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朝鮮荷潭〉이 라는 낙관에 〈士文〉이 라는 朱文이 찍 혀 있다. 저 자는 당초 金明國의 號가 〈蓮潭〉이 므로 〈蓮〉자와 같은 의 미 의 〈荷〉자를 써 서 〈荷潭〉이라고 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高麗大學校 附 屬博物館所藏 金明國筆 山水圖에 〈此行不爲鏞魚膳, 自愛名山入刻中〉(李太
白의 舟下뛰[門詩)이라고 費을 하고 〈荷部走 l) ll j l 〉라고 한 낙관을 발견하 고 荷 深이 바로 金明國의 別號임을 확인하 게 되었다. 한국회화사의 권위자인 安輝消 박사에게 이 그림을 보였더니 를림없이 17 세기 중간을 지나지 않는 전형적인 조선화원의 작품일 것이라 시사한 바 있다 . 그리고 한국 회화에 조예가 깊은 李東洲박사에게도 이 그림을보인바, 金明國의 필법과는조금 거리가 있는 것 갇다고 표명하였다. 그래서 다시 문헌을 조사해 보던 중 『通航一覽』 卷 103, 朝鮮國部 79 및 『古 事類 苑』 의 교부 朝鮮 2 에 다음과 갇은 기록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 朝鮮衆出仕之登日, 介方長老被送 書 案在左, 證星日本禪僧錄司, 金地長 老桐下, 膜岭禪風私動動想, 詐者緣致公輸숫力心力, 獲 達命宣旨戀昭睦鄒之 義 , 歡裕莊多矣, 其領國報以歸姉迎速亦復在師之善謀而己, 余t십(靑於馬島 之緩類汗略 別錄完留如何, 書 不盡意冀垂法照 不宣 主臣頓首 天啓四年 冬 十二月 日 荷泥 龍溪 孤山 天啓 4 년이란 죽 1624 년(인조 2) 으로 家光 장군 襲職의 賀使로 鄭뾰 • 姜 弘重 • 辛啓榮 三使가 방일하였다. 日本禪僧錄司 金地長老란 崇傳을 말하 며 方長老란 規伯玄方울 가리킨다. 상기의 荷潭은 金時議(1 581~1643) 의 號라는 점에서 때마침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중 正使 鄭笠이 방일하게 되어 이 사절편에 崇傳長老에게 선물로 「高士彈琴圖」를 보낸 것이 아닐까 . 그 러면 朝鮮荷潭이라는 낙관은 金時讓이 손수 그렸다는 것일까 . 일찍이 조 선학회에 강연차 來日했던 故申奭鎬 박사에게 문의했더니 金時讓도 그런 그림을 그렸을는지도 모르겠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상기 「古事類苑」에 명 기된 龍溪는 金止男(1 559~1631) 의 호이며 孤山은 柳根 (1549~1627) 의 호 임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荷潭〉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으나 金明國의 別號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7) 趙泰億筆 騎馬圖(組本淡彩 47. 5X28cm) 1711 년 (숙종 37) 방일한 正使 趙泰億의 字는 大年, 號는 謙齋 외 에 도 鶴 灘 • 胎祿堂 • 平泉 ' /\曲 등의 別號가 있다. 이 騎馬固 落軟에 는 〈朝鮮國 趙大年甫書〉라 하고 〈競齋〉라고 한 朱文이 찍혀 있다. 이 서체는 『白石詩 草』 序文에 쓴 낙관과 동일한 점으로 보아 이〈維齋〉라는 것도 趙泰億의
별호인 듯하다 . 현재까지 알려진 趙泰億의 유작으로는 「 翊毛圓」뿐이다 . 8)
8) 中村榮孝, 「趙泰億筆翔毛圖」(《靑丘學最〉〉 第 4 號 大阪屋號 書 店 昭和 6 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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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趙泰億筆 詩稿 (紙本 54 X 35cm)
성泉갑丁士 后갱多呼T ./I 及-숀 中)떠&J것的훙 •쓰 心心만4u衣. 1 71/1t1負恨:有·達隣 년 正使未응?간갓너티센叔gt 趙. P荷안食 泰후瓦域霧令설億 筆 . 入써麻t서:’賓j糸 佑i裁詩稿 詞索 宗先휘長 손亨本.,1 光ai象갔k
이 詩쫒은 방일했을 때 接伴僧 別宗祖緣長老(京都相國寺 107 代 住持)에 게 서중한 것으로 東洋文庫所藏 「海東詩文帖」에 들어 있는 東敦法王守玄 堂 「日光山偶成」 五言律詩에 和韻한 것이다. 譜次東板法王日光山韻奉星別宗長老詞案 未親名山勝 徒聞寶界淸 入熊雲霧氣 德戶澤流聲 畵登形容得 許因夢想成 東游有遺恨仙賞負平生 長老以日光八景圖見贈故第五及之 辛卯復月 平泉居士 (9) 李東郭筆 詩稿(紙本 44X3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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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 년 (숙종 37) 使行의 製述官 李賢의 자는 重叔, 호는 東郭이 다. 이 것은 사행중 仲秋 다음날 萱岐島에서 對馬島 以配菴僧 雲堅和尙에게 중답 한 시고이다 .
奉次雲 塾 大師辱視韻 十五 淸 光屬仲秋 玉輪寒洞碧波流 惟塔獨照高僧座 何 事 平分遠客舟 柱峯仙子舊聞名 天外能看月色淸 遠客奇觀還此夜 暗中丹桂落寒聲 辛卯仲秋嘉排之登日 東郭拜稿 (10 ) 李花 菴 筆 臨池戱墨 書 卷(紙本 31. OX54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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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爾芳의 字는 馨遠, 號는 花菴이다 . 1711 년 寫字官으로 來日하였다가 귀로 도중 赤間關에서 壬辰正月下洗, 懷索上人草 書 歌(李白), 登岳陽樓(杜 甫), 田園樂詩幽居(王維)믈 書 寫한 것이다 . 花菴의 아버지 李三錫(雪月堂) 은 1682 년에 寫字官으로 방일했다. 『古畵備考』 50 「朝鮮書畵傳」 2231 쪽에 〈李爾芳 • 東華花菴 • 忠이 라고 쓴 大字가 墨本에 있다〉고 하였다. 『雜林唱和 t 集』 序 目 「韓使官職姓名」에 〈上護軍李 壽 長 字馨遠號花菴, 完山人 雪月 堂子〉 라고 하였는데 , 〈李 壽 長〉은 〈李爾芳〉의 誤記이 다 . 또 〈李爾芳 字仁斐號貞 谷或號 養 靜主人 • 天安人〉이라고 했지만 〈李爾芳〉은 〈李 壽 長〉의 誤記이다 .
(11) 李貞谷 筆蹟 (紙本 28. 5X 7 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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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壽 長 (1661~1733) 의 字는 仁燮, 號는 貞谷 , 1711 년에 寫 字官으로 來日 했다 . 『槿域 書畵 徵』에 〈辛卯從通信使入日本, 日本人擔損賤弓君 墨 妙者, 日 累數千人, 君 或櫓或草信手揮酒, 案前推積片時 雲 空, 日本 號 能 書 者咸稱曰貞 谷 書 法得之, 鍾王顧素大而 危 奇小而彌妙, 旦其草法 園助 , 尤不可及, 可謂 體 兼衆美者矣〉라고 하였다. 醉臥松竹梅林天地籍爲表沈 龍虎 (草書體) 貞谷 (12) 李聖麟筆 壽 老人 Ill( 紙本水墨淡彩 219X59. 5cm) 李聖麟 (1718~1777) 은 1748 년(영조 24) 의 畵 員으로 방일했다 . 字는 德 厚, 號는 蘇齋, 全州人이다. 圖 畵 署 畵 員으로 산수, 인물에 능했으며 官 온 倉節制使에 이르고 60 세에 卒하였다. 이 壽 老人圖에는 金啓升의 「 壽 福」 二大字의 費이 씌어져 있는데 그낙
1748 년 畵員 李聖麟筆 器 老人圖
관에는 〈 朝鮮國龍門山玩羲齋主人金啓升君日眞狂〉이라고 했고, 頭印은 〈新 羅王孫八代平章〉이라는 한 朱文이 찍혀 있다. 이 그림은 일본사람의 취미 에 맞게 狩野探幽의 〈壽老人〉을 모방한 것처럼 보인다(思文閣 〈〈墨蹟資料 目錄〉〉 92 號 狩野派特集). 일본내에 전존하던 李聖麟의 「山水圖」(雙幅)와 「遺蓬圖」는 현재 平壤國立美術博物館에 소장 9) 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산~ 도의 사진에도 金啓升의 費이 들어 있다. 그런데 遣蓬圖의 사진을 자세히 보면, 그 낙관은 〈厚德蘇齋〉라고 했다. 실온 聖麟의 字가 德厚인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의 진가가 문제될 것이다.
9) 吉田宏志 「我國t L 傳來 b f.:朝鮮水墨 畫 춘砂 〈 . ?T 」(『李朝(l)水墨 畫 』 · 講談社) 참 조.
(13) 朝鮮趙玉坡筆 醉翁亭記(紙本 106X43. 5cm) 전기한 金明國筆 「達磨圖」에서 언급했지만 趙玉坡는 1636 년 신사를 수행 한 寫字官 趙廷炫으로 여겨진다. 낙관에 〈瑞峰玉石〉이라는 朱文印章이 찍 혀 있다. 〈醉翁亭記〉란 송나라 歐陽條가 蘇州의 知事로 있을 때 僧知遷이 條를 위해사정자를 세웠는데 俺 자신이 醉翁이라고 號한 것을 따서 이 亭 子의 이름으로 하고 여기서 놀던 일을 기록한 것이다. 玉坡의 필적은 과 연 능서 가의 초서 체 이 다. 「醉翁亭記」의 내 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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環源皆山也, 其西南諸峰林堅尤美, 望之蔚然而深秀者郡耶也, 山行六七 里潮聞水聲潟游而葛出於兩峰之間者韻泉也, 峰回路有亭, 翼然臨於泉上者 醉翁亭也 (14) 成大中筆 醉晋齋書帖錄跋 10) (紙本卷軸 28. 5X458cm)
10) 抽稿 「韓天 壽 &朝鮮通信使 ―醉晋齋 書 帖0)題跋춘中心 I r.―」(《近畿文化)) 430 翼 1985 年 9 月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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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앞의 抽 稿 참조 .
成大中 (1732~1812) 의 字는 士執, 號는 龍 淵 또는 靑城, 昌 寧 人이 다. 1764 년 正使 書 記로 방일하여 일본 문인 들 과의 필담 應 罰에서 문명을 떨쳤 댜 醉晋齋란 日本 伊 勢 松阪의 문 인 으로 본명을 中川 長 四郞이라고 한 사 람의 호이다. 그는 삼한시대, 馬韓 餘 璟 王의 후예라고 칭하여 성명을 한국 식으로 韓 天 壽 (1 727~1795) 라고 불 렀 다 . 成 大 中의 『 日本錄 』 ( 樣 上 記 )에는 3 월 12 일 江戶를 떠나 藤澤 에 오니 天 壽 가 澤 田 東江 과 함께 객관을 찾 아와 자필 서첩을 꺼내 보이며 序 跋 울 청하자 成大中은 跋語 와 함께 李太白의 시 「贈汗倫」 • 「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 2 수 및 〈 醉晋 〉 2 자를 서중했다고 명기되어 있다 . (15 ) 南玉 筆 書 韓大年醉晋 齋書 帖錄後 11) (紙本卷軸 28. 5X 4 5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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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玉의 號는 秋月, 1764 년 製述官으로 방일하였다 . 成大中과 함께 韓天 壽書 帖에 跋 文을 쓰고 또 예서체로 〈醉晋齋〉 額字를 써주었다 . 상세한 것 은 第 6 章 韓天 壽 醉晋齋 書 帖題跋에서 설명하였다.
(16) 朝鮮玉仙 筆 扇面詩(紙本 50. OX 1 7. 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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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일행이 京都로부터 江戶로 향할 때는 소위 朝 鮮 人 街道 湖岸을 따라 近江 • 安土를 통과하여 彦根의 磨 針嶺 茶 屋에서 쉬면서 鹿 튬 湖의 姚 望을 탄상하며 시를 읊고는 하였는데 이 扇面詩도 바로 晩秋의 湖 景 을 읊 온 것이다 . 食看 琴 蓋雅紅粧 不 覺 湖邊一夜 霜 卷却天機雲錦段 從敎定練寫秋光 模 湖景 朝鮮玉仙 (17) 金仁謙筆 詩稿(紙本 36X32. 5cm) 金仁謙 (1707~1772) 의 字는 士安, 號는 退石이다. 1764 年從 事 官 書 記로 방일했을 때 한글로 『日東壯遊歌』라는 紀行錄을 썼다 . 이 시고는 西尾藩 儒官源文虎 (1741~1793) 에게 중답한 것인데 唱和詩集 『鴻 腦 抵華』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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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源典翰見贈韻 彩艦春風繁木津 難波橋外物華新 今君個識同胞義 一席文盟二國人 退 石 (18) 卞環筆 墨竹 (紙本 23 X 30. 5cm) 卞環의 號는 荊齋또는 述齋이다. 1764 년 신사의 騎船將으로 수행했으 나 能畵였으므로 都訓導로 바뀌어 江戶를 往還하며 서화를 남기고있다 .12 》 유작으로서는 「倭館圖」 • 「觀濕圖」 • 「柳下馬圖」 등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卞漢에 대해서는 事蹟불명의 서화인으로 취급되어 오다가 저자에 의해서 비로소 그 사적이 밝혀졌다. 12) 趙職 『海樣 日 記』에 〈二十四 日 又得 日 本地圖改正之本, 使 畫 師金有聲模之, 所 謂大地圖繁雜故置之, 三騎將卞璟以能 畫 與都訓導相換隨行於江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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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金有聲筆 山水圖(版) (26. 5X34. 5cm) 金有聲 (1725~ ? )의 字는 仲玉, 號는 西岩이 다. 1764 年 畵員으로 방일 했다. 이 산수도에는 〈甲申暮春, 朝鮮西岩爲日本邊英寫〉라는 題軟이 씌어 있다. 저자가 소장하는, 成大中에게 상정한 일본 문인 시고 중에 〈奉送龍 淵先生春風吹動長河淵, 綠柳如雲映日垂, 此地麗哥分手後, 天珪只待誰來時 日本小生邊英再拜〉라고 한 것이 들어 있다. 邊英온 바로 渡邊玄對이다. (20) 朝鮮淸山 筆蹟(紙本 49. 0X18. 5cm) 金善臣의 字는 季良 • 號는 淸山이다. 1811 년(순조 11) 對州易地賜禮 때 正使書記로 수행 하여 大學頭林述齋 • 古賀精里 • 松崎僚堂 • 草場楓川 • 三宅 橘園 등과 筆陣을 벌이고 문명을 날려 일행중 가장 이채를 띠었다. 扇面詩 :OO 窟石鏡淸我心 謝公行處蒼范沒 靑山常對推廉時 朝鮮淸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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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朝鮮淸翁筆蹟(紙本 62. 0X 1 17. 5cm)
7.
秦東益의 字는 直哉, 號는 淸翁이다. 1811 년 次上通事로 수행했다. 慣看賓客兒童喜 得食階除鳥雀텁 l| (杜甫南隣詩) 朝鮮淸翁 (22) 朝鮮蒼艦筆 對聯 (紙本 12. 0 X 132. 5cm) 李勉玄의 字는 季淵, 號는 蒼艦이 다. 1811 년 副使 軍官으로 수행 , 官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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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衣院主簿를 지냈다. 李白桃紅滿樹開 君歌我鳴上雲臺 朝鮮蒼崔 柳培花影動疑是玉人來 如此風光如此樂 朝鮮蒼艦
(23) 李顯相筆蹟(紙本 12. 3X119. 0cm)
1
1811 년 信使 製述官으로 방일했다. 字는 相之, 號는 太華이 다. 奉常寺 食正을 지냈다. 對馬島 以訂菴에서 필담창화한 「難林情盟」에 그의 증답시 가 많이 둘어 있다. 負龍一華乃空門超度中人 朝鮮通信製述太常 小正太華山客 書 (24) 敬庵 書 扇面詩(紙本 50. OX17, 0cm) 1748 년(영조 24) 통신사의 押物通事 黃屋成의 필적이다. 字는 大而, 號 는 敬庵, 時年 54,q ] 였 다. 有村則不遠風便數峯月 敬 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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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趙 景 安 筆 扇面俳句(紙本 46. OX17. 5 cm)
‘ .' ·‘ 쇼 ¢'\· .\g .’\ \,、\'`./f `,`· \ 스,\ \、 •선 f\, . i,\?:忠船$ .,(,.\\ .I.` . . \\,. .?、 . .\\ ,., '·\ 上`. .\ l.I.\' L •\\?'\ ,f. ,i.i._I' tu , '. .I. . ,, . i 지', ”. \' .r' ` `. _. `c. :,.,\,\ \ \\' ..&유`i ~ i 1H ' \ ,'.t_. ,,' l \I` L.t,\. 1 ,·1· , , '', '\'J`?'l ,:\',.\.,.rJ. .` V'.,令‘' , 1. I. .. ?l . 烏 요처蘇千-유'纂구(수?
日本語譯官 小通事 중에도 일본어는 물론이고 和歌 • 俳句에도 정통한 자가 있었다. 趙景安도 그중의 한 사람으로 號를 擬笑人이라고 하였다. 芹5 궁 〈정屋수 今!?朝 슝i i志阿 七 8 (J)융岸 tU: 疾훈/\. 朝鮮 擬笑人 던 1 志靑治 수柳 궁· 心手t 宅 0伸)ii L- C~ &水寸 (l) ?月궁 朝鮮趙景安 志 총 七 f::.f::.. 治 궁· 판 ';!: 충. -::,@ 秋 iit£越中丘主〈 h 드군 堂 k t£ e 七 萩 05 ii#勢 萩 0L t..:露 朝鮮 趙景安 BB K 乙 |it、 石 力)力 )U力따£ 父 t.:.似--c 子(I)這力、力、類 案山子可南 朝鮮 趙景安 (26) 朴德源筆 扇面詩 (紙本 45. OX 21. 5cm)
써
朴德源은 小通 事 이다. 對馬島에 건너갔을 때 읊은 和歌에 대해서 『樂鄕 紀聞』에 실려 있다. 그는 小通 事 라고는 하나 漢 詩文에 대해서도상당한교 양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13)
• 13) 抽稿 「朝鮮通信使 K 隨行 L t.:倭學譯官 K? t、 T 」 三, 日本語(J)習熟程度 莊 7 (《朝鮮學報)) 111 輯 昭和 59 年) 參照 .
施旗日暖龍蛇動 宮殿風微燕雀高 (杜詩 : 杜甫奉和 賈 至舍人早朝大明宮) 朝鮮朴德源 洪園 朝鮮 朴德源 書 湖添水色消殘雪 江送潮頭源漫波 朝鮮鬪 |:터 (27) 朝鮮菊圓贊扇面 畵 (紙本着色 47. 5Xl9. 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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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華寫 天高鷹高飛 朝鮮菊圓 (28) 延享戊辰來賜朝鮮人書記濟菴筆蹟(紙本 45. 5X30. 5cm)
飮沿及t`1見79r48 년 書 記沿셔볘;^0各 옮李鳳 煥 筆 4g 蹟t 건全? ― 튼 今一 。 m.,.성E . '싼김# J'd, £홋牛 .1、1.
香燈伴殘夢 楚國天一珪 月落子規歡 滿庭山杏花 (29) 朝鮮竹下筆蹟(紙本 127. 5X57. 5cm) 萬物靜觀皆自得 四時佳興與人同 신사가 방일할 때에는 小童이 16 명 暗行하며 필담창화 석상에서는 먹을 갈며 사중을 들었는데 때로는 ' 소동도 휘호를 하곤 하였다. 아마 이 竹下 라는 인물도 소동인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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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朝鮮潔湖筆蹟(紙本 96. 5X18. 0cm) 橘林雨送香 朝鮮潔湖 潔湖란 1811 년 通信使의 別暗行 幼學金萬亨의 號이다. 「對禮餘漢筆語」 에도 〈敗乞公揮酒因復一掃潔湖〉라고 기록된 것이 있다. (31) 朝鮮人石山筆蹟(紙本 58. 0X109. 5cm) 山月俊如獨 霜風時動竹 夜半鳥驚柄 窓有人獨宿
1811 년 別暗行 金 萬 亨 筆 距
(32) 朝鮮笑回筆 詩稿(紙本 55. OX36. 5cm)
四胤1811 년 t 副 使l 軍.,fg虎白4官 李運 植 筆蹟4l上pif&
1811 년 副使軍官 前內乘 李運植, 戊午 (1798) 式年試科擧에 及第, 字는 士廣 號는 笑回 戊子 (1768) 十月 初八 日 生, 全義人이 다. 江水最深地 山雲欲暮時 朝鮮笑回 (33) 朝鮮七十三歲人錦左筆蹟 (紙本 36. OX 107. 0cm) 廉織一雨過江城 靑意暗隨驛柳生 泥塾尋常如學佛 寂韋深卷遠廢聲 朝鮮七十三歲人錦左 1 군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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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德戀의 『靑莊館全書』 卷 49 耳 目 口 心 書 2 에 金啓升에 관하여 戊辰年 (1748) 통신사의 別 書 寫로 따라갔다가 일본 正殿의 殿額울 썼었는데 일본 山東居士로부터王右軍이 썼는지 眞狂이 썼는지 모를 정도라는 평을 받았 다. 그리고 金啓升은 필법이 특이하고 뛰어났으며 사람됨이 활달하였다. 그의 圖 書 印章에는 〈新羅 憲 康王第三子派八代平章之孫龍門山玩 羲 齋主人金 啓升君日甫自號眞狂七十三歲翁字〉라고 했는데, 죽 君日이라는 명칭은 眞 狂이라고 自號한 73 세 늙은이의 字다라고 한 점으로 보아 金啓升이 방일 시에 73 세이었음을 알 수 있다 . 따라서 이 시고를 쓴 사람은 金啓升이 툴 림없다고 생각된다 . (34) 南岡筆蹟(紙本 30. OX17. 5cm) 1711 년 從事官 李邦彦의 號가 南岡인데 이 시고는 印文이 〈南岡〉이므로 李邦彦의 필적인지도 모르겠다. 天珪雲深樹 江口水洛秋 美人何處在 明月滿山頭
南岡筆蹟
(35) 朝鮮楓嶽山人筆蹟(紙本 35. OX62. Ocm) 恩器長壽酒 歸遺同心人 滿酷共君醉 一蓋千萬春 (36) 朝鮮棟園筆 花鳥圖(紙本淡彩 26. 5X30. 5cm) 1811 년 對馬島易地賜禮時, 上判事 卞文圭가 수행하였다. 卞文圭는 號풀 梅軒이라고 하며 일본에는 그의 작품 山水Ii가 전존한다. 入江毅夫氏 所 藏品中 朝鮮棟園筆山水 Ill 에 卞持漢이라는 印章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持漢이 卞文圭의 字이며, 棟園온 그의 別號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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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朝鮮國春圓扇面圖 (紙本 45. 5 X 17. O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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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淡彩朝鮮海 翁筆 山水圖(紙本 14. OX31 . 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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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淡彩朝鮮鶴 翁 ( 書 紙 48 . 5X 3 6. 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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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本朝鮮國鄭大峰咸鏡道八角山詩(紙本 30. 5X40. Qc m)
J少`命刃 t弓A# 검
• (41) 朝鮮月 航 書 對聯 (30. OX125. 0cm) 月勅이란 李哲!청의 號이다. 『譯科傍目』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道光庚子式年, 李哲戀 字 君章, 笑酉生, 本 全州, 倭學敎海嘉義同樞, 一 遇子生父雲科察訪一遂. 放開眼界看無事 立定脚根學古人 朝鮮月筋 '円 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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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韓國國史編纂委員會 所藏 (1) 金履喬筆蹟(紙本 141X4lcm) 1811 년(순조 11), 正使 金履喬 (1764~1832) 의 필적이다. 字는 公世, 號 는 竹里, 官은 右議政에까지 올랐다 . 江岸人歸白露飛漁翁日暮得魚歸 輕雲淡薄不成雨 海氣千天偶作罪 辛未季夏 正使竹里居士書于和陽館 (2) 兪場筆蹟 卷軸(紙本 253X35. 5cm) 1655 년 (효종 6), 副使 兪湯의 필적 이 다. 이 卷軸에 는 孝弟忠信이 라고 留 題하고大佛寺를 賊하였다 卷末에 〈乙未日南至朝鮮國通信副使昌原兪場書〉 라고 낙관하였다 . (3) 金世流筆蹟 卷軸(紙本 468. 7 X35cm) 1636 년(인조 14) 副使 金世源이 사행중에 지은 한시를 權書體와 草書體 로 휘호하여 歸路 도중 對馬島太守에게 서중한 것이다. 권말에 〈崇禎丁丑 奉史至海上與宗太守一見傾蓋臨還要得見沿路所作略書若干篇以爲他日面目云 笠二月 甘一日〉이라고 씌어 있다 . (4) 朴安期等 筆蹟 卷軸 (紙本 841 . 5 X 24. 8cm) 1643 年(인조 21), 信使讀祝官 朴安期(號 螺山) 및 寫字官 金義信(號 雪 峯)이 사행중 지은 漢詩로 泊豊琦 • 到馬島韻 • 太平寺 • 發風本浦 • 發藍島 • 視之海 • 文字城 • 河口 • 大阪城 • 箱根嶺 • 日光山詩 • 望富士山 등을 書寫한 것인데 螺山 • 雪峯 외에 南洞 • 白眉의 軟署도 보인다. (5) 尹順之 등 三使筆蹟 卷軸 (紙本 320X35cm) 1643 년 (인조 21) 正使 尹順之(號 薛潔), 副使 趙fJii](號 龍洲) ·從事官 申 滿(號 竹堂)가 사행중 지은 風物詩를 서사한 것이다. (6) 李明彦筆蹟 卷軸(紙本 672. 5X35. 2cm) 1719 년(숙종 45) 從事官 李明彦(號 雪山)이 귀로 도중 對馬太守의 간청 으로서사한詩稿이다.
3 韓國國立中央博物館 所藏 (1) 李聖麟 筆 樣 路勝區固 2 卷 각권 15 圖(紙本著色各 35. 2X 7 0. 3cm) 141
14) 앞의 抽稿 補柱 2, 山內長三 「極路勝區圖卷 K? t、 T 」(《韓國文化)) 80 號 1986 年 6 月 號) . 이 「極路勝區圖」의 作者에 관해 서 는 다음과 같이 未詳이 라고 전해 내 려 왔다. ® 『李王家 博物館所 藏 品 目 錄』 甲之部 • 書畫 • 筆者未詳 6792 椎路勝區之 圖 畫 帖 2 冊. ® 『朝鮮通信使繪圖集成』 84 椎路勝區圖卷 • 同 畫 의 筆者未詳.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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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8 년(영조 24) 通信使 洪啓禧에 수행한 畵員 李聖麟(號 蘇齋)의 작품이 다 . 그런데 설명카드에 의하면 竹里大臣 渡日時의 것으로 明治 43 年 (1910) 權重暎 氏로부터 구입한것으로되어 있다. 竹里大臣이란 바로 1811 年對馬 島에서 行禮했을때의 正使 金履喬를말한다. 이 繪圖는金履喬의 사행과는 관계 가 없으나 다만 金履喬가 通信正使로 갇 때 휴대 하고 가서 참고로 했을 지 모르겠다. 이 繪圖에는 釜山의 경관으로부터 시작하여 對馬島芳浦源戶 • 對馬州西山寺 • 一岐島風本浦 • 藍島 • 小倉 • 赤間關 • 上關 • 津和 • 蒲 '/.l j • 盤 臺寺 • 下津 • 柄浦 • 夜泊日比 • 牛窓(이상 上卷), 室津 • 夜入大城城 • 大阪城 館所南望 · 泥浦·西京本長寺北園.昆튬湖勢多橋·越川舟橋·金絶河.高~
澤十里姜荷 • 涉一定 )II • 淸見寺 • 吉原館六月十七日望見富士山 雪 • 入江戶 • 箱根嶺上館臨大澤 • 關白器享(이상 下卷) 등 30 圖가그려져 있다 . 이 戊辰年 신사 메 從事官 曺命采가 쓴 「奉使 日 本時聞見錄」 6 월 17 일 條에 〈午初到 吉原館, 富士山正當前面而雲醫皆捨全體畢露, 考之日記曾前使臣之所不能快 親也〉라고 한 것으로 보아 〈吉原館六月 十七 日 望見富士山雪〉이 라고 題한 이 繪圖와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나 과연 畵員李聖麟의 작품이냐 하는 점에서 우선 필체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李聖麟이 大坂客館에서 繪師 大岡春 卜과 盡 會를 열고 그 席上에서 蘇齋는 〈梅月〉과 〈福祿 壽 圖〉를 그리고, 〈朝鮮國 蘇齋草〉라고 落軟한 필체가 「樣路勝區圖」에 쓴 題字와 동일한 점에서 畵員 李聖麟의 작품이 틀림없음을 입증하였다 . (2) 卞環筆 倭館圖(紙本著色 133. OX58. 5cm) 이것은 부산에 있던 倭館을 그린 그림이다. 〈歲矣卯夏寫 • 荊齋 • 卞環〉의 白文과 朱文이 찍혀 있다. 矣卯란 1783 년인데 『韓國文化』 特集 朝鮮通信使 에 1843 년 (天保 14) 이 라고 한 것 은 찰못이 다. 15) 卞漢이 1764 년에 訪 日 했 을 때 23 세였으니 만일 1843 년에 그렸다고 하면 103 세 때의 작품이 되기 때 문이 다. (『韓客人相筆語』).
15) 따國文化》(1 985 年 7 月號) 特集 朝鮮通信使 (2) 및 〈(韓國文化〉〉 1989 年 7 月號 所收 <草梁倭館圖 1843( 天保 14) 의 作品〉이라고 한 것은 1783 年의 誤記이다.
(3) 金明國筆 達磨圖(紙本水墨 82. 4X58. 2cm) 이 達磨圖는 金明國이 通信使 畵員으로 일본에 갔을 때 그린 것인데 일 본내에 流傳하던 것울 한국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구입한 것이라고 한다. (4) 金明國筆 蘆葉達磨圖(紙本水墨 98.1X48. 3cm) 이 그림도 畵員으로 淸日중에 그린 것이다. 〈醉翁〉이라는 낙관이 있고, 簡筆이지만 蘆葉에 탄 達磨의 故事가 찰 표현되고 있다. 4 測松美術館 所藏 (1) 李義養筆 松虎圖(網本着色 126. OX48. 8cm) 李義養 (1768~?) 의 字는 爾信, 號는 信園 • 雲齋 또는 八松觀이라고 하 였다. 1811 년 通信使 畵 員으로 對馬島에 수행했을 메 그린 것으로 수법이 古抽하지만 원시적 화풍을 나타내고 있다. 〈辛未仲夏朝鮮國李義養爾信寫〉
라는 낙관이 들어 있다 16)
16) 《 T. {J松文華》 17 號.
(2) 李義養筆 對馬島府中圖帖 26 圖(紙本淡彩 各 26. 5X 3 2. 5cm)111 이것도 信使畵員으로 對馬島에 건너갔을 때 그린 경관이 툴림없을 터인 데, 〈壬申春中〉이라는 年記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다음해에 固帖으로 만들 었을 것이다. (3) 李義養筆 花林彩貧 對馬島에 갔을 때 그린 것으로 동행한 上通事 秦東益(號淸翁)의 姜이 들 어 있다.
17) 劉復烈 編著 『韓國繪 畫 大觀』 626 쪽 「對馬島對中圖」 畫 帖 111 版 430. 18) 若木太一, 「翻刻 自 筆原翰與朝鮮國權學士菊軒筆談書」 (《江戶時代文學》 第 31 t 1983 年) 참조.
5 韓國國立 서 울大學校 中央圖書館 所藏 (1)朝鮮信使交歡詩書卷軸 1748 년(영조 24), 信使製述官 朴敬行(號 短軒) . 書記 李鳳煥(號 濟庵) 李命啓(號 海阜)와 일본인과의 필담창화 시고이다. (2) 趙職詩帖 2 冊 1764 년 正使 趙職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지 은 詩의 自 筆書帖이 다. 6 靜嘉堂文庫 所藏 權低自筆原翰 1636 년(인조 14) 에 訪日한 信使吏文學官 權低(號 菊軒)과 石川丈山과의 필담창화집이다. 『與朝鮮國權學士菊軒筆談書』에 들어 있다 . 18) 7 東洋文庫 所藏 南岡居士筆蹟 1711 년(숙종 37), 從事官 李邦彦(號 南岡)이 〈天爵堂〉(新井白石의 堂號) 이라고 隸書體로 留題하고 사행중에 읊은 한시 14 편을 수록했다.
天爵堂 辛卯陽月 居士南岡 諦次壅谷先生韻 • 夕後登庵後小園作在以訂 庵時·西山寺次圓隱先生遊觀音寺·港口候風.紋·上關風雨客懷莊惡偶哈 團隱先生板屋雨聲多之句分以爲韻得七言古詩五首.午惡金臺寺·是越山途 中·夜泊河口·大坂城排律五十韻•鳴古屋·野店·金絶河·午發大議.辛 卯孟冬南岡居士書于東武館中 8 東京國立博物館 所藏 歷聖大儒像金世流讚(紙本着色 15 幅各 135. 7X47. 0cm) 1636 년에 訪日한 副使 金世漁(號東演)이 林羅山의 간청으로 聖賢稱像에 讚울 쓴 것이다. 伏鼓. 神農 • 黃帝 • 帝堯· 帝舜 • 大禹 • 成湯. 武王 • 文王 • 周公 • 孔子 • 顔子 • 子思 • 曾子 • 孟子의 15 폭이다. 이들 圖像온 狩野山 雪이 그린 것이다. 본문 第 2 部 第 2 章 초기의 交歡, 金東漠과 林羅山에 서 詳述하였다. 9 筑波大學圖書館 所藏 歷聖大儒像金世源讚 (紙本着色 6 幅各 135.7X47. cm) 본래 21 폭 중 15 폭은 東京國立博物館에 현존한다. 나머지 周子 • 張子 • 程伯子 • 程叔子 • 朱子 • 郡子의 6 폭이다. 1876 년에 修信使로 방일한 金綺 秀 『日東記游』에 太學을 관찰했을 때 좌우 벽에 이 초상들이 걸려 있었다 고 명기되어 있다. 10 日光山輪王寺 所藏 朝鮮國王孝宗御筆(紙本全長 349X47cm) 1655 년 (효종 6) 신사 파송시 가지 고 와서 大歐院에 기 증한 國王孝宗의 御筆 「靈山法界崇孝淨院」 額字이 다. 〈乙未孟夏下洗〉 아래 〈爲政以德〉의 玉 雲가 찍혀 있다 .19) 19) 大溝晴子, 「日光山輪王寺 K 0)乙조韓國文化」(《韓國文化〉〉 1983 年 10 月號) • 南 龍翼 「扶桑錄」 資去物件御筆(『海行總載』 3 ) 참조. `
11 靜岡縣淸水市興津 淸見寺 所藏 (1) 扇額 ®東海名區 錦谷居士筆(1 711 年 上判事 玄德潤)
1711 년 上判事玄德潤筆 東海名區 (靜岡淸水淸見寺)
® 潮音閣 錦谷筆(同上) ® 瓊培世界 螺山筆 (1643 年 讀祝官 朴安期) 諸佛宅(螺山筆)은 明治 34 년 (1901) 山中龍澤院의 화재시 연소되 어 羅漢堂과 함께 소실되었다고 함. ® 興國 琴居筆 (1655 年 正使 趙衍) (2) 書額 ®桃原 平泉筆 (1711 年 正使 趙泰億) ®追蓬 龍淵筆 (1764 年 書記 成大中) ®潛龍室 眞狂筆 (1748 年 伴個 金啓升) (3) 詩書帖 CD 1643 年 讀祝官 朴安期(號螺山)筆書軸 再尋淸見寺走筆留題 ® 1655 年 三使筆 詩稿 夜投淸見寺題主僧 正使 趙衍(號琴'fir.) 題淸見寺主僧 副使 兪場(號秋潭) 腕過淸見寺 從事官 南龍翼(號壅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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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1 年 通信使一行筆蹟 淸見寺題謝芝岸老師 正使 趙泰億(號平泉) 重過淸見寺題奉芝岸長老詞案 同上 奉謝芝上人道案 副使 任守幹(號靖菴) 淸見寺證次登谷先生韻贈芝上人 從事官 李邦彦(號南岡) 淸見寺走筆贈芝老師 書記 南聖重(號i z~) 淸見寺泣次遺韻 同上 © 1748 年 通信使一行筆蹟 淸見寺次性海禪師韻 正使 洪啓禧(號擔窟) 謝忍師來別 同上 淸見寺次性海禪師韻 副使 南泰耆(號竹裏) 受忍師來訪立次上使韻以贈之 從事官 曹命采(號閔谷) 前壘詩章伯未名次而只於丁未三使韻畢獲以贈之 同上 淸見寺次丁未使行韻 三使一同 奉和忍上人 製述官 朴敬行(號短軒) 謝次忍上人壘贈韻 同上 奉和忍上人 書記 柳返(號醉雪) 和忍上人 書記 李命啓(號海阜) 重到淸見寺次忍上人韻 書記李鳳煥(號 濟菴) 和上人 同上 次贈忍師 同上 @ 1764 年 通信使一行筆:蹟 次南登谷韻 正使 趙暖(號濟谷) 副使 李仁培(號吉菴) 從事官 金相翊(號弦菴) 重尋淸見寺壘波字韻關振住持 製述官 南玉(號 秋月) 淸見寺主忍上人 夜到江尻贈詩復和 同上 和祖鎌師 書記 成大中(號 龍淵) 和祖屋師 同上 淸見寺次南登谷韻 同上 江尻館炯下和關振上人贈別韻 同上 重到淸見寺壘用南登谷韻贈忍上人 同上 和關振上人 書記 金仁謙(號 退石)
再次南登谷韻贈關振上人 同上 淸見寺次南登谷韻 同上 重到淸見寺壘去時留題韻 書記 元重擧(號 玄川) 和關振禪師 同上 次忍上人星三使相韻 伴人 洪善輔(號默齋) 淸見寺次南登谷韻 同上 題淸見寺 軍官 李海文(號 兼泉) 題淸見寺用前韻 都訓導 卞漢 (號 述齋) 20)
20) 李英介 著, 『朝鮮古 書畫 總 覽 .!I 및 金榮胤 著 『韓國 書畫 人名辭典.!I에 卞漢울 事 蹟不明의 書畫 人속에 넣고 있다 . 卞漢은 1764 年度 信 使 騎 船將으로 수행 했으나 能 畫 이므로 都訓導로 바뀌어 江戶까지 동행했다 . 이 詩稿에는 〈 歲 甲申 暮春 東華述齋 卞環塚之走稿〉라는 落軟이 들어 있다. 따라서 吉田宏志 「我國 K 傳來 b t.:李朝水墨 畫 둔砂 〈님 T 」 柱 15 에 〈막부의 儒官 林述齋일까, 그의 著中에 「接韓錄」이 있어 몽 신사와의 접촉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찰못이다. 여기에 나오는 述齋는 卞環의 號이기 때문이다. 大學頭 林述齋는 1811 년, 對馬島易地通蔣때 입도했던 것 이므로, 1764 년도 통신사와는 관계가 없다.
(4) 畵圖 山水花鳥居風四曲一燮 1764 年 畵員 金有聲(號 西岩)筆 • 洛山寺 • 花鳥圖 • 金剛山 • 梅鳥圖를 병 풍으로 만든 것인데 이 작품의 독특한 화풍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 21 )
2·1 ) 이 작품은 걸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世界美術全 書 』 第 18 卷 朝鮮篇 • 李 東洲 『日本속의 韓 畫 .!I 일본을 왕래한 畫 員들(瑞文堂 19741P) 참조.
(5) 惡板(板刻) (D 1607 年 丁未正使 呂祐吉(號 擬溪) • 副使 慶進(號 七松) . 從事官 丁 好寬(號 一琴)의 시 각 일수를 惡板에 판각하여 方丈에 걷어 놓았다. ® 前記 3 詩書帖의 詩稿롤板刻한것 : 秋潭 • 登谷 • 平泉 • 靖菴 • t칸追 • 演窓 • 蘭谷 • 竹裏 • 濟谷 • 秋月 • 龍淵 • 玄 ]|I • 濟菴 ® 書記 金仁謙(字 士安)의 小華金士安이라고 軟署한 對聯 窓含南岳千秋雪 門泊東吳萬里船 22) 12 名古屋新井家 所藏 (1) 『白石詩草』 跋文 朝鮮國通信副使西河任守幹用署甫題 (2) 『白石詩草』 跋文 朝鮮國通信從事完山李邦彦美伯甫題
22) 松田 甲대菱河 0 淸見寺& 朝鮮信使」(『日鮮史話』 第 5 篤 27 쪽)에는 〈窓含西
嶺千秋雪〉이라고 했다 . 이것온 杜甫의 詩句 그대로인데 실온 金士安筆 對聯에는 〈西嶺〉이 〈南岳〉으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또 李進熙, 『江戶時代0)朝鮮通信使』 (212 頁) 에 는 〈窓舍〉로 되 어 있으나 〈舍〉는 〈含〉의 誤記이 다.
(3) 新井白石앞 謝束 및 선뭉 ® 奉星筑後守記室 辛卯復月甘日 趙泰億 任守幹 李邦彦等拜手 ® 奉謝白石源公詞案 壬辰元月下幹 正使 平泉趙泰億再拜 ® 同上 辛卯十一月 日 通信使趙泰億 任守幹 李邦彦 ® 奉星新井筑後守闇下 辛卯十一月 日 崔同知 昌젊 黑麻布 二四 線沈 一事 黃毛筆 捨柄 玉柄筆 二柄 ® 奉星白石源公記室 辛卯南至前一日 李邦彦筆頓首 任守幹 趙泰億 ® 奉束白石源公案下 朝鮮國通信副使西河任守幹 (4) 詩稿 渡大井川 農發藤枝 泥浦雨夜書示幕僚 今切河 洞盡 箱根嶺 途中冒雨 侵夜而行二首 辛卯孟冬 靖庵居士拜稿
(5) 白石著 『陶情詩集』 序 壬戌九月初句 朝鮮製述官琴虛居士 成伯圭 (6) 白石著 『陶情詩集』 跋 壬戌季秋 朝鮮槍浪居士洪來叔甫跋 (7) 別宗長老 앞 ® 別宗大師詞案 辛卯仲冬 南岡奉藥 ® 奉星別宗長老道案 辛卯仲冬 通信副使 上記 『白石詩草』 序跋에 〈대해서는 新井白石과 信使〉에서 詳述한 바 있 다. 4 동중, 2 통 만이 현존한다. 그리고 前記 (3) 謝束에 대해서는 『白石日 記』에 〈三使書束五郞殿持參〉이라고 명기했는데 東五郞이란 雨森芳洲{이다. 또 堂上譯官 崔尙蝶의 선물에 대해서도 『白石日記』에 〈十一月十五日崔同 知로부터 音物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3 蓬左文庫 所藏 (1) 1682 년 三使 尹但止完 • 李彦網 • 朴慶後가 尾張德 )II 光友에게 접대해 준 것을 감사하는 自筆聯句와 선물 목록 (2) 1748 년 6 월 日 付 洪啓禧 • 南泰耆 • 曺命采 三使로부터 尾張德川 宗勝 에게 보낸 선물목록 (3) 176 坪 2 月 日 付로 趙職 • 李仁培 • 金相翊 三使로부터 尾張德川 宗睦 에게 보낸 선물 목록 14 大阪府立中之島圖書館 所藏 1764 년 通信使와 필담한 北山橘庵編 [j'難壇喝!島』에 製述官秋月 手書 31 條, 書 記龍淵手書 28 條 • 玄川手書 10 條 • 退石手書 5 條 • 正使伴人趙東觀(號花 山) 手書 10 條 • 上通事吳大齡(號 長游)手書 l 條 동 필 담자필이 붙어 있다.
15 天理大學圖書館 所藏 23) (1)韓客筆語所收 CD 1719 年製述官申維翰 奉和伊藤梅宇 24) 見寄 ® 書記成夢良 奉星梅宇机下 奉和梅宇辱示韻 (2) 八居詩成夢良 自 筆評語 諸篇皆淵雅有古意少加猿括足爲詞林高手 (3) 韓客送簡 1748 년 柄浦에서 霞臺 와 필담창화한 것으로 製述官 朴短軒, 書記 李濟 庵 • 柳醉雪 • 李海阜의 중답 자필시고. (4) 1748 년 寫字官 金天 壽 (號 紫峯) 筆蹟 千里 書 心碧樹秋 一櫓酒盡靑山暮 (5) 1719 년 書記 成夢良 (號 長鳴軒) 筆蹟 水哉閣(伊藤東珪의 號) (6) 短冊帖 1811 년 上通 事 卞文圭(號 梅軒)書 l i ?c沈 乙九t V 근 l f |i& & 농경- 初聲,,.、 聲以曾計 杜 H g (注音著者) 이상 6 건은 古義堂文庫所藏임 (7) 1711 년 신사일행 이 귀 로 도중 풍우로 인해 赤間關에 체 류중, 山縣 周南上星詩에 증답한 것이다. 正使 趙泰億, 從事官 李邦彦, 製述官 李廣, 書記 洪舜衍 • 嚴漢重 • 南聖重 등의 자필시고. (8) 1719 년 信使가 赤間關에서 山縣良齋(周南의 父)의 상정시에 증답한 것이다. 製述官 申維翰, 書記 姜柄 • 成夢良 • 張應斗 등의 자필시고. 〈奉 訓縣良齋惠贈韻 己亥中秋下弦靑泉申秘書卿〉라고 하고, 〈縣良齋梧下製述官 所寄라고 쓴封棄도 卷軸에 붙어 있다. 23) 『古義堂文庫目錄』 22, 韓客筆語 一卷 (49-6), 2 韓客送簡一袋 (46-17), 7 八居 詩一卷 (46-7). 開館 58 周年記念展 「朝鮮通信使& 江戶時代(J) 人 k 」 111 錄 (天理大學 附 屬天理圖書館 1988 年) 참조. 24) 伊藤梅宇 名온 長英 • 仁 齋 의 次男 • 福山藩冊臣. 1745 年 10 月 28 日殘, . 享年 62( 1i'盤海』).
(9) 1748 년 신사일행이 4 월 5 일 赤間關에 도 착했을 메 明倫館器官 山縣 業園(周南의 長子)이 韓使에게 상정한 시에 증답한 것이다. 製述官 朴敬 行, 書記 李鳳煥 • 柳返 • 李命啓의 자필시고. (10 ) 韓館唱和 1748 년 6 월 10 일 日 本 橋官 拜崎恭忠 (琴台) 과 韓使가 江戶客館에 서 筆 談唱和한 自筆原本. 製述官 朴敬行, 書記 李鳳煥 • 李命啓 등의 自筆詩稿가 둘어 있다. (11) 贈居益村主人伊藤氏敍 1748 년 正使 書記 李鳳煥(號 濟庵)이 居益村(現 岐阜縣不破郡 今須村) 主 人 美濃國 伊藤五郞次에게 서중한 것(模刻) . 戊辰六月下洗 朝鮮國完山李鳳煥 書 16 大和文華館 所藏 壽老固 金明國筆 金義信費(紙本水墨 89. OX31 . 3cm) 1643 년 信使畫員 金明國이 그린 壽老圓 에 寫字官 金義信(號 雪峯)이 費 을 쓴 것이다. 17 京都相國寺慈照院 所藏 (1) 1682 년 信使와 南禪寺大方, 玄緣(祖緣)과의 창화시고 25) ® 製述官 成院(號 琴虛) 自筆 3 首 ® 碑將 洪世泰(號 槍浪) 自筆 2 首 ® 書記 李稱齡(號 鵬演) 自筆 2 首 (2) 1711 년 신사일행이 別宗祖緣長老에게 중답한 자필시고 『韓客詞章』 4 卷 26) (3) 野馬圖 朴安期養(綱本水墨 52. 3X34. 7cm) 朴安期(號 螺山)는 1643 년 신사의 讀祝官으로 수행 했다. 25) 本 書 第 3 章 (4) 別宗 • 大方和尙과의 唱訓 참조. 26) 本 書 第 4 章 三. 別宗祖緣과 信使 1. 韓客詞章 참조.
(4) 1811 년 信使寫字官 • 譯官 등의 필 적 ® 寫字官 皮宗鼎(號 東岡)筆 吹蕭塔引鳳 禁桂喜乘龍 朝鮮國東岡居士 辛未抄夏 ® 次上判事 秦東益(號 淸翁)筆 扇面詩 盡費 3, 短冊帖 5 桃花泡露江浮水 柳架甄風白滿船 朝鮮淸翁 貴爵祿者以菓由爲愚純 愛山林者以伊呂爲棟粧 朝鮮淸翁 流光再再看棋去 往事騰騰中酒眠 坡老好着棋歐公喜讀詩耶 淸翁 樂天四時好 樂地百物備 淸翁 18 雨森芳洲文庫 所藏 27) (1) 申維翰 筆蹟 l 冊 ® 書唐金氏詩卷 朝鮮國秘書著作充通信製述官靑泉申維翰書 ® 鼓琴歌一開奉垂裕堂主人 申學士周伯 (2) 1 711 년 製述官李廣東郭 自筆書翰과 詩稿 ® 芳洲詞伯案下 1 通 ® 酒席贈芳洲七律 1 軸 ® 蓬寄芳洲案下 七律 一軸 27) 「雨森芳洲文庫 目 錄稿」 (《關西大學東西學術硏究紀要〉〉 第 10 輯) 참조을
上段 矣巳(1 713) 首夏上幹 東郭 書 下段 元文丁已 (1737) 2 月 18 日 芳洲 書 ® 七絶一軸 辛卯菊秋東郭爲芳洲題 (3) 芳洲肖像盡(紙本着色) 雨森秀樹氏談에 의하면 朝鮮畵家가 그렸다고 하는 家傳이 있다고 한디 (松村一雄 『雨森芳洲雜話』). 19 彦根磨針嶺望湖堂 所藏 28) (1) 望湖堂 扇額 金啓升(號 眞狂)書 (2) 題望湖堂 1748 年 正使 洪啓禧, 副使 南泰耆, 從事官 曺命采 詩稿 (3) 製述官 南玉(號 秋月)筆 細雨山樓 詩軸 (4) 洪善輔 (號 默齋)筆 扇面詩
28) 抽稿 「朝鮮通信使 七 望湖堂」 (《統一 日 報〉〉 1979 年 8 月 2 日 ~3 日 ) 참조.
20 柄浦福禪寺對潮樓 所藏 29) (1) 對潮樓 肅額 1748 년 正使 洪啓禧의 次子 景海筆, 洪景海의 字는 叔 行, 號는 反求齋 子弟軍官으로 수행했다. (2) 日東第一形勝 扇額 1711 년 從事官 李邦彦(號 南岡)筆 (3) 信使筆蹟 (D 1655 년 從事官 南龍翼(號 登谷)筆 詩軸 ® 1711 년 三使의 詩軸 @ 1748 년 正使 洪啓禧를 비롯하여 南泰耆, 曺命采, 李命啓,李鳳煥, 洪景海, 柳返, 朴敬行, 李吉儒 등 9 명의 『次杜工部韻』 자필시고가 〈韓 客詞花〉라고 題書한 오동나무 상자에 들어 있다. 그리고 이 시고들은 전 기한 편액과 함께 판각되어 對潮樓에 걸려 찾아오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또 福禪寺에서 諒詩한 일본 문인들 중에는 「對潮樓用韓人韻」 이 라고 題한 菅茶山 • 玄子讓 및 變通諸氏의 自筆手稿도 남아 있다. 다음
29) Ii'柄O)JIIJ並』 朝鮮信使0) 來泊 (福山市敎育委員會編 1976 年) 참조.
1748 년 洪景海筆 對潮樓
洪景海의 五律首를 소개하겠다. 寺樓少坐 名下無虛士 果然第一樓 魚龍杯外靜 星月鏡中浮 雲醫千年樹 天低萬里舟 藤羅歸路黑 燈火映寒流 戊辰秋 反求齋洪景海叔行稿 21 岡山牛窓本蓮寺 所藏 30) 牛窓은 柄浦와 室津울 맺는 요충지이며 江戶時代에는 조선통신사 일행 이 江戶往還 途中 반드시 기항한 곳이다. 현촌하는 遺墨은 다음과 갇다. (1)蓮花本色法王心 玉柱鎖錢大字深
若道著維名實異 門前船有海潮音 螺山翁題本蓮寺 (2) 石模惡崔障 招提謙寶林 樓明腸谷魄 鍾濕海潮音 貝葉傳禪法 蓮花證佛心 經過接上客 一宿散須樣 模客爲住上人題 (3) 牛頭寺古殘僧少 琴竹蒼藤白日香 宿客不眠過夜半 紋雷隱隱振重門 過客爲妙上人題 (4) 星接泊秋猪 蘭若鎖雲林 影落紋龍窟風傳鐘磐音 蔚藍騰梵語 遊葉見禪心 客裏逢佳境 題詩溝遠樣 琴居 30) 抽稿 「朝鮮通 信使 (J) 遺墨 」(『江戶時代(J) 朝鮮通信使』 13 牛窓本蓮寺所 藏)참조.(5) 蕭寺停歸棒靈山訪道林 佛尊空裏相 鐘發空中音 古塔錦金地 澄湖印月心 蓮花眞世界登湖裕幽傑 潭翁 (6) 牛星尋漢猪 楠石訪穀林 山下停孤棒 雲間落梵音 偶然逢淨界 聯得洗廢心 明發回舟去 秋慈浦客樣 靑坪居士 (7) 閔若知何處 靈山秘寶林 夕陽孤塔影 明月古鐘音 得句和前唱 參禪違宿心 歸時擬一訪 哈挑源廢樣 辛卯暮秋 南岡居士稿 (8) 斷山臨極浦高處有鼓林 獅子驚魔睦 龍孫聽唄音 諸天投客快 初地見禪心 向夕蒲牟動 聯然話道傑 辛卯菊秋 三韓東郭 (9) 本蓮寺泣次遺韻 異邦訪先蹟 遺唯又祗林 每觸傷情物 如聞在耳音 悲哈未釋手 續和更何心 不盡蒸山淡 連連復滿傑 淸見寺亦見遺蹟故云 來路訪寺時, 見寺前古松, 有志感 一絶行伯未及書贈 故並錄于左 但道炫菴是本蓮悠悠往事問誰邊 盤桓手撫庭松泣 樹老應經乙未年 辛卯臘月下洗 朝鮮國信使記室南聖重 上記 (1) 의 螺山翁이 란 朴安期, (2) 의 椎客이 란 從事官 申淸, (3) 의 過
客도 필치로 보아 申潘, (4) 琴 居은 正使 趙 FIT , (5) 潭翁 은 副使 兪 場 , (6) 靑坪온 1711 년의 副使 任守幹, (7) 南岡은 從 事 官 李邦彦, (8) 東郭은 製述官 李碩, (9) 南聖重(號 返燮 )은 從 事 官 書 記로서 , 1655 년 從 事 官南 龍翼의 아들이다. 그래서 淸 見寺泣次遺韻이라고 덧붙였던 것이다. 22 近江八幡西本願寺別院 所藏 31) 1771 년 從事官 李邦彦(號 南岡)筆 詩軸 金台寺裏客重來 竹揚荷塘亂雲推 殘域 屬 看時物 變 此行何 事 尙運回 辛卯臘月上洗 東韓歸客題
31 ) 李進熙 『李朝0) 朝鮮通 信 使』 176 쪽( 講談 社 昭和 51 年) 참조.
23 山口女子大學樓團寺內文庫 所藏 32) 正使 趙泰億 自筆 書 帖 一浚浚演漠 繁華大坂城 壯麗東武州 一宿福禪寺 再上淸見樓 箱根澤浚嶺 24 東京藝術大學 所藏 金明國筆 達磨梅竹圖 三幅(網本墨 畵 96. 6X38. 8cm) 25 東京韓國硏究院 所藏 1811 년 次上判事 秦東益(號 淸翁)筆 詩稿
32) 『機園寺內文庫0)硏究』(山口女子大學歷史學硏究室 昭和 51 年) . 『 書道 全 集 』 第 甘一卷 所收 趙泰憶筆蹟 참조.
吳姬越女旦禪硏 淸歌妙舞每團會 朝鮮淸翁 26 기타 (1) 1682 년 碑將 洪世泰(號 槍浪)筆 扇額 禪源寺 愛知縣 稱澤市 禪源寺所藏 (2) 1711 년 寫字官 李爾芳(號 花菴)筆 篇額 ®古禪林 岐阜縣 可兒郡 御 協 町中 愚溪寺所藏 ®南林山 柄浦 圓福寺所藏 (3) 1711 년 押物通事 金時漢(號 海峯)筆 橋額 廣忠寺 岡崎市 廣忠寺所藏 (4) 1636 년 寫字官 金義信 (號 雪峯) 筆 扇額 江國寺 (5) 1748 년 押物通事 黃壓成(號 敬庵) 筆 扇額 守山寺 (6) 1811 년 次上判 事 秦東益(號 淸翁)筆 詩軸(紙本 103X42. 5cm) 灘尾 弘吉氏所藏 慧業明畵記事珠 雅音深院備詩珠 (7) 1682 년 槍浪洪世泰筆 山水固 李英介氏所藏 (8) 1811 년 上判 事 卞文圭(號 梅軒)筆 山水圓(網本淡彩) 吳辰成氏所藏 費 雲机遠影碧波來 (9) 1636 년 寫字官 全榮(號 梅隱)筆蹟 吳辰成氏所藏 (10) 1764 년 畵員 金有聲(號 西岩)筆 山水 Ill( 桐本着色 118. 5X49. 3cm) 飯本莊五郞氏所藏 (11) 寫字官 金義信(號 雪峯)筆蹟(紙本 110X52. 8cm) 柴田豊祗所藏 今春看又過 何日是歸年 (12) 金明國(號 醉翁)筆 達磨圖(李英介著 『朝鮮古 書畵 總覽』 圖版 26)
金明國 筆鷺 圖 林羅山 費 鄭認文氏所藏 金明國筆 舟遊圖 (13) 1682 년 畵 員 咸佛健 筆 竹圖(網本墨 畵 97. 5X30. 8cm) (14) 1655 년 畵 員 韓時覺 筆 33) 同上 ® 布袋和尙圖(紙本墨 畵 106. OX30. 3cm) ® 山水圖 團扇費 ® 川禪圖 大石良雄費 山科西野山樓岩屋寺所藏 (15 ) 金明國筆 達磨圖 坤月軒所藏 34) (16) 1643 년 畵 員 李起龍 (號 J L 隱 ) 筆 樓閣人物岡 同上 (17) 1719 년 畵 員 咸世輝筆 富士山圖扇面(紙本墨 畵 46. 9Xl7. 5cm) 同上 獨立統練白玉 密 中天積雪夏猶寒 五雲佳氣連金朔 雄鎭扶桑萬歲安 朝鮮國張應斗證題 (18) 金有聲筆 山水圖(紙本 96. OX53. 6cm) 同上 江南雨初歌 山暗雲猶酒 東華虎人 書 (19) 金有聲筆 壽 老圖(組本墨 畵 85. 5X27. 0) 同上 (20) 金有聲筆 蘭蝶圖 同上 (21) 金有聲筆 墨竹 同上 (22) 李義養筆 鷹 圖 同上 (23) 李義養筆 山水圖 同上 (24) 李聖麟筆 鷹 圖 同上 (25) 南玉筆 詩稿 和源 露 山 同上 (26) 秦東益筆 詩稿 同上 (27) 朝鮮潔湖居士奉贈 日 本四十宮 詩稿 同上 (28) 朝鮮棟園筆 山水圖 同上 (29) 朝鮮棟園筆 山水圖 법겁 同上 (30) 朝鮮棟園筆 約 Ill 同上 33) 『朝鮮0) 給 益 ―日本 K命石 高麗 • 李朝0) 作 品— 特 別 展 固 錄』 (大 和文華館 19 73 年) . 34) 『坤月軒그 V 夕 :,/ 3:./ 朝鮮0) 繪肅 』 固錄( 富 山 美術 館 昭和 60 年 ) .
(31 ) 朝鮮棟園筆 虎圖 同上 (32) 李義養筆 江南雨後圖 (桐本着色) 高橋濱吉氏所藏 (33) 李義養筆 山水圖(網本淡彩)源於董氏活法費 辛基秀氏所藏 (34) 金明國筆 壽老圖(紙本墨畵 89. OX 2 7. Ocm) 螺山居士費 酒川子컬렉션 35) (35) 螺山居士稿 「李朝 0 繪畵」(大和文華館發行 昭和 61 年) 四川子컬렉션 1643 年 讀祝官으로 수행 한 朴安期가 林羅山父子에 게 증답한 詩稿 6 首 (36) 李聖麟筆 山水圖(紙本墨畵 114. OX 49. 6cm) 崔北筆 山水圖(紙本墨畵 128. 4X55. 4cm) 酒川子컬렉션 (37) 卞環 (號述齋) 筆 柳下馬 圖 (紙本墨淡彩 117. 8 X 53. 1cm) 歲己亥初夏東華述齋寫 高松法然寺松平家菩持寺歲 己亥는 1779 년이므로, 甲申年 使行 後, 對馬藩을 통해서 서증한 것으로 생각된다. (38) 李壽長 (號 貞谷) 書帖 澄懷堂文庫所藏 36) 李貞谷臨稷帖 辛卯六月下洗留釜山時寫라는 年記가 있는 것으로 보아 1711 년 사행 도중 부산에서 썼음을 알 수 있다. 또, 周茂叔先生愛蓮說 아래에 辛卯中秋貞谷書라고 했다. 이 書帖에는 다음 일본인들의 跋語가 붙어 있 다. 雨森芳洲書·皇和明和己丑冬日豊城由儀子威父觀·明和庚寅秋九月京兆 丹邱芬煥拜題·明和庚寅秋九月京兆東里芬元澄題·伊勢高道昴題·辛卯季~ 鍊名誌·辛卯九月宜奇題 ·明和辛卯仲冬高孟能題·歲在辛丑六月暎北@外臣 識 • 歲甲寅之上元貫名范題 • 明和辛卯晩冬 石希聽. (39) 李義養筆 山水圖(紙本水墨淡彩 28. OXlOOcm) 古賀精里費 思文閣舊藏 37) (40) 朝鮮國 聽竹李山甫筆蹟 38) (紙本 124. 7X66. 4cm) 八幡宮 35) 酒川그 V 夕 > 타/ 『李朝(J)繪畫 特別展圖錄』(大和文華館 1986 年). 36) 山內長三 「李貞谷秩帖i C 가、 T 」(《韓)) 110 號 朝鮮通信使特集 東京韓國硏究院 1988 年) 참조. 37) 《思文閣墨蹟資料 目 錄》 163 號 圖版 54. 38) 筑紫 豊 『倭韓人』(1 89 쪽)에 〈李山甫는 黃允吉 일행과 博多를 거쳐 東上한 것 으로 생각되며 그 博多 체재중의 어느 날 李山甫는 宮崎八幡宮에 경의를 표하고 그때의 座主坊法印方淸의 요청에 의해 이 서폭을 證 書 했을 것이 를림없다〉고 하였 다. 筑紫가 말하는 李山甫(1 539~1594) 는 秀吉의 요청에 의한 통신사 파견을 大司 陳 立場에서 반대한 사람이다(『宣祖實錄』 卷 23 • 宣祖 22 年 9 月 乙丑條). 따라서
黃允吉 正使一行에 수행 했을 리 가 없다고 본다.
(41) 雪峯 金義信筆 扇額 東京港區高輪東禪寺所藏 39) ®海上禪林 ® 曺溪 矣未孟秋上洗雪峯書 (42) 金義信筆 肅額 箱根湯本早雲寺所藏 401 ®金湯山 ®方丈 (43) 金善臣(號 淸山)筆蹟 眞宗大谷派 名古屋別院所藏 暗水流花經 春星帶草堂(杜甫夜冥左氏莊詩) (44) 金有聲(號 西岩)筆 山水圖(組本着色 112X43. 5cm) 山田裕嗣氏所藏 (45) 金義信雪峯筆 麗風 額字 前田久氏所藏
39) 大溝晴子 「朝鮮通信使隨行員雪峯0)額」 上 • 下(《統一日報》 1986 年 10 月 14~15 日) 참조.
제 2 장 通信使 印譜 (1) 東華名公印譜(大阪府立中之島圖書館所藏) 1764 년 木村飛西堂所刻 14 人. 福原尙俺所刻 8 人의 印章 原鈴印譜 本論 文 6 章 日本人所刻石印에서 詳述하였다. (2) 日本人 所刻 成大中 圖書印章(著者所藏) 浪華木弘恭刻 1 類 • 福尙條 刻 1 類 • 中村三實刻 3 願 • 澤田東江刻 l 類. (3) 槿域印薇(華蒼吳世昌集編 韓國國會圖書館發行 1968 年) 所錄 동신사 일행의 印譜 尹址完 • 玄德潤 • 玄泰翼 • 崔鶴齡 • 申維翰 • 成大中 • 李景稷 • 李勉永·李聖麟·李起龍·金履喬·金明國.兪場·南泰耆 • 洪致中 • 秦東 益·洪聖源 (4) 「指印補遺」 所收 朝鮮印譜 朝鮮國王之印 • 李碩 • 金明國 • 趙泰億 • 任守幹 • 李邦彦 • 李壽長 • 洪舜 衍 • 李起龍 • 嚴漢重 • 蘇齋 • 南玉 • 成大中 • 元子才 • 金仁謙 • 金有聲의 印 影
40) 洪景海, 『隨接日錄.!I에서 箱根嶺金湯山門額 金義信筆이라고 했다. 〈(今日0) 韓 國》 (1 987 年 5 月 號)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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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通信使 行列圖 (1) 1624 年 寬永朝鮮人來朝記 紙本淡彩長卷 31. 8X984. 2cm( 韓國國立中 央圖書館藏) (2) 1636 年 丙子信使韓國使臣入皇城行陣圖 紙本設彩長卷 30. 7 X 595. 0cm (韓國國立中央博物館藏) 齋膜實 • 寺內正毅 • 山縣伊三郞 • 金允植 • 李完用· 三浦周行 등의 拜觀記가 붙어 있다. 金允植 「丙子信使之行距龍蛇之役甫四 紀耳·是歲兩棄前怨邦交益密·兵車息而爲衣裝之會·干戈殿而修玉用之禮威 儀秩秩 羽施肅肅合於古者鄕行旅從之例 蓋非題移觀也 • 於以敦兩國之好治賓 主之情 共享三百年和平之福 登不休哉 • 展覽造圖不禁懷古之感. 大正丙辰 (19 16) 七月下洗 雲養八十二燮觀」에 丙子 (1636) 信行이라고 하였다. 또 山縣 伊三郞온 副使 金世源의 『海樣錄』 所錄紀事四首 〈關白能盡禮 • 傳命正殿 上 • 肅肅設華菌〉句를 添書했다 . 그런데 이 行列繪圖의 제 작 년대 에 관하여 今村柄 『人夢史』 第 2 卷 人參政治篇에 〈필자는 信行의 一員인 圖畵署畵員 에 의한 손에 된 것으로 시대는 그 인원 수로 보아 寬延度(1 748) 또는 明和 度 (1764) 에 해당한다고추정한다〉고 명기되어 있다(京城本町 進辰馬氏藏). 그리고 三浦周行도 〈……게다가 畵中의 事物로 추측하면 明和 元年(1 764) 2 월 신사가 江戶에 도착한 최후의 것으로 생각된다〉고 했는데 今村柄의 說을 참고했을 것이다. 저 자가 『寬永十三年朝鮮人來朝記』 (玉露幾所收) 및 寬永 13 年 同 20 年 「朝 鮮人江戶入行列次第」 (『通航一覽』 卷 64 朝鮮國部 40) 에 의 하여 비 교 조 사한 결과 이 丙子使行과는 행렬차제와 명칭이 매우 다르다. 그리고 이 行列圖에 명기되어 있는 製述官과 良醫의 명칭은 天和度(1 682) 부터 쓰기 시작했으니 丙子年 (1636) 信使까지는 소급할 수 없을 것이다 . 三浦周行 氏도 지적한 바와 같이 首譯 ·羅將· 禁徒 ·兵房軍官 • 中房 • 奴子 • 房子와 같은 명칭을 쓴 것으로 보아 조선신사의 畵員에 의해 그려진 것이 룰림없 을 것이다. 따라서 寬永 13 年丙子 (1636) 사행의 근거는 전연 찾을 수 없 고 오히려 天和度 (1682) 이후 正德度 (1711) 의 행렬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韓國繪畵』 (國立中央博物館未公開繪畵特別展) 所收 216 「朝鮮通信 使江戶城」(卷軸)에 19 세기라고 했으니 그 근거를 알 수 없다. (3) 1711 년 「正德朝鮮信使登城行列圖」 着色卷軸 4 卷(韓國國史編纂委員 會所藏)
® 正德子辛卯年朝鮮國信使道中行列圖 卷 27. 0X 3 738. 0cm ® 正德元辛卯年朝鮮國信使登城行列圖卷 27. OX 4 172. 0cm ® 正德元辛卯年朝鮮國信使來聽歸路行列圓卷 27. 0X 3 965. 0cm ® 正德元辛卯年朝鮮國信使來聽歸國行列圖 27. 0X 4 300. 0cm (4) 1811 年 辛未朝鮮人來聽行列繪圖 紙本 着 色卷軸 24. OX 1 286. Ocm (著者 所藏) 이것은 對馬島 易地行禮 때의 신사행렬도이다. 대개 상징 적 인 신사행렬 도뿐인데 이 행렬도에는 正使 • 副使의 이름까지 명기된 것이 특색이다. 따라서 실증적인 사료로서 그 가치가 높다. 辛未年(1 811) 5 월 江戶時代 마지 막 통신사의 訪 日 로 正使金履 喬 (字公世 • 號竹里) . 副使 李勉求 (字子 餘 • 號南霞) 일행 336 명이 對馬島府中(嚴原)에 오고, 일본측에서는 막부 의 명 으로 上使 小倉藩主 小笠原大膳大夫忠固 • 副使 寺社奉行龍野藩主 脇 坂中務大輔安董一行이 入島하여. 5 월 22 일 對馬島主 宗氏邸에서 조선 국왕 의 國書와 별폭을 전달하고 6 월 15 일에는 德川家齊將軍의 답서와 별폭을 받고 귀국하여 7 월 27 일에 복명하였다 . 이 행렬도에는 辛未年春이라고 頭 書 하고 正使 • 副使의 姓名 • 字 • 號까지 명기되어 있다. 그리고 군관 중에 는 前 營 將 許乘이 수행했다. 松崎선t의 『接鮮磨語』에 〈軍官中有一員極祖 梧者是似蒙古種〉이라는 기록아 있고 이 繪圖에도 키가 8 尺 5 寸이라고 注 書까 지 했는데 이는 許乘을 그린 것이다. (5) 朝鮮人行列圖卷 紙本著色 23. OX521 . 2cm( 東京國立博物館 所藏) 正使 • 副使만을 그린 것으로 이것은 對馬島通萌時에는 從事官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볼 메 1811 년 辛未 使行의 행렬도인 것으로 생각된다. (6) 朝鮮通信使行列圖卷 2 卷 紙本着色 1 卷 38. 2X813. 8cm 2 卷 38. 2X 957. 6cm( 長崎縣立對馬歷史民俗資料館 所藏) (7) 朝鮮國書棒星行列圖卷 3 卷, 1 卷 27. 7X l476. 7cm, 2 卷 27. 7Xl462. 9 cm, 3 卷 27. 7Xl365.lcm( 辛基秀氏 藏) 特別展觀圖錄解說에 〈享保 4 年 (1719) 에 방일한 통신사 일행의 道中을 그 린 것이다. 正使 洪致中 • 副使 黃幡 • 從 事 官 李明彦 • 國 書 • 製述官 申維 翰 등이 따르다〉 l) 고 했다. 그런데 이 행렬도에는 上記三使 및 申維翰의 이름은 명기되어 있지 않다. 이 행렬도의 내용을 보면 분명히 1711 년도 使行의 행렬도를 그린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上上官(堂上譯官) 崔同 1) 『朝鮮通信使 特別展觀圖錄』 圖版 12( 東京國立博物館 昭和 60 年) .
知(尙峨)李同知(碩麟) • 李致知(松年) • 金兪知(始南)의 이름이 注記되어 있 고, 또 對馬藩의 수행원으로서 裁判種口久米右:z.門 • 出馬役吉田兵左工門 • 家老大浦忠左工門의 이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通航一覽』(卷 99 • Ill170 쪽)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이들 인물은 모두 辛卯 (1711) 使行 때 수 행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럴 듯하게 申維翰의 이름까지 언급하여 1719 년 사행이라고 斷定한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 말하자면 享保 4 年 度 (1719) 의 前回인 正德度 (1711 年)의 행 렬도를 모사했다는 것이 될 것이 다 . 그리 고 『朝鮮通信使繪圖集成』 (講談社刊 1985 年)에 도 「朝鮮國 書 棒星行 列圖卷」 설명에 製述官 申維翰 • 畵員 咸世輝라고 명기한 것은 지나친 생 각일 것이다. 그리고 眞父役의 〈父〉는 〈文〉, 上上官 崔周知 李周知의 〈周〉 는 〈同〉의 誤記이다. (8) 朝鮮人大行列圖卷 8 卷(紙本著色 各 28. 5Xl 卷 1321. 7cm, 2 卷 1124. 9 cm, 3 卷 1297. Ocm, 4 卷 1257. 1cm, 5 卷 1451. Ocm, 6 卷 1321. 7cm, 7 卷 1590. 6cm, 8 卷 1255. 8cm) 鄭認文 氏 所藏 이 행렬도는 辛卯年度 (1711) 의 것이 분명하다 .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圖卷은 尾張德川家의 딸이 近衛家에 출가할 때 婚禮具의 하나였을 것이 라 고 하며 오랫동안 京都 二條城에 秘藏되어 있었다고 한다. 白石先生手簡 與小潮復庵書 7 월 17 일 條에 〈나한테 前年의 朝鮮信使行列圖가 있으니 필 요하면 보여드리겠다고 하였다. 新井白石이 말하는 행렬도와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 (9) Sp e ncer collecti on 「朝鮮人行列圖」紙本淡彩 30.4 X 612. 9cm New York Publi c Libr ary 所藏 2)
2) 反田茂雄 編 『久섯、/삼- • -;:i v 夕〉크 `/ 藏日本繪入本及繪本目錄』 • 『日本 繪 畫 名作展』 56 朝鮮人行列圖卷 =그- 크 - 夕 • It f }y 夕 7 4 7? 9 所藏(神戶市立 博物館 1987) 에 〈正使尹址完의 宗對馬守앞 書 狀〉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 禮 曹參議 尹 嘉續 〉의 誤記이다.
1682 年 正使 尹址完 일행의 행렬을 京都狩野派 永納의 아들 永敬 (1654~ 1702) 이 그린 것이 다. 卷首에 는 平野道齋가 쓴 題字 「朝鮮人圖」 • 卷末에 「永敬圖」라고 한 것이 들어 있다. 그리고 禮曹參議 尹嘉續이 對馬太守에 게 보내는 書契寫本도 添付되어 있다. (10) 狩野探幽筆 「朝鮮通信使東照社參入圖」 (『東照社緣起』 第 4 卷) 日 光 東照宮 寶物館藏
丙子年度 (1636) 신사가 日光東照宮을 參脂했을 때의 모습을 狩野探幽(1 602~1674) 가 그린 것이 다. (11) 東照社緣起 第 4 卷 紙本著色 36. 2X 1 899. 1cm 住吉廣道 盡 靑 蓮院 尊純法親王 書 (和歌山 東照宮藏) 이 행렬도는 狩野探幽가 그린 「 信使東照社入圖」 를 臺 本으로 住吉廣道 (1 599~1670) 가 그린 것이 다 (12 ) 朝鮮人來朝圖 紙本着色 69. 7 X 9 1. 2cm( 神戶市立博物館 藏) 羽川藤永 畵 통신사 일행이 江戶駿河町越後屋 吳服店 근방을 위의 를 갖 추어 形名旗와 淸道旗를 앞세우고 가는 것을 단정한 복장으로 앉아 구경 하는 민중들을 浮繪 畵法 으로 羽川藤永이 그린 것이다 . 1748 년의 信使行列 로 보여진다. 1/ 7(1' 3 •) =朝 7鮮-?使 、節.來/女朝史菩行 列藏 圖)3)卷 (大判橫繪墨宿 12 枚 1 卷 26. OX 4 45. 0cm) (=
3) 檜崎宗重 「奧村政信 朝鮮使節來朝行列 Ill 卷 IL? t'-C」 (((古美術 》 第 50 號 1976 年). 『大英博物館所藏浮世繪名作展』 圖版 25( 朝日新聞社 1985 年) .
1711 년의 조선사절 행렬을 奧村政信 (1686~1764) 이 그린 것이다 . 이 그 림 卷頭에 〈東武大和 畵 師 奧村政信〉이라고 했고 卷末에 〈大傳馬三町目 鶴 屋 喜 右衛門板 〉 이라고 들어 있다. 大英博物館에는 12 매 중, 3 에서 12 까지 의 10 매가 현존한다. 그리고 호놀루루 美術館과 뉴욕 公立圖 書 館藏品은 12 매를 이어서 卷軸으로 만든 것이라 한다 . 제 4 장 通信使 訪 日 紀行錄 통신사의 기행록을 집대성한 『海行抱載』의 집록에 관하여 趙職撰 「海接 日 記」 10 월 초 6 일條에 다음과 같이 詳論하였다 . 前後信使毋論使臣員役多有日記者 • 洪尙書啓禧廣加寬集名以海行總載, 徐副學命廣翻騰之, 題以息波錄合爲六十一編, 以爲行中考開之資, 及其返 任也, 盡送於余, · 余固未及詳覽而槪目之則, 以前後使行備考一編爲始, 前
蠶讐一一三뇨! ' I: \틀.....,〕 i
朝鄭岡隱奉使時作一編次之申高靈叔舟 矣亥 以 書 狀奉使時作一編及撰 上 海東 諸國記一編又次之, 其下有庚寅副使金鶴峯誠一海 樣錄四編 , 丙申有黃浦愼 之書寫金哲佑東模錄一編, 秋浦所 錄逸而不傳誠可恨 也, 有姜睦隱流看羊錄 一編 此是壬辰亂時!) 以前佐郞被挑而去, 四年而 歸者 也 , 丙午有副使慶進 海樣錄一編 丁巳有正使吳秋灘允謙東 樣錄 一編, 李石門景稷扶桑錄一編, 甲子有姜副使弘重東樣錄一編, 丙子有正使任參判統日記一編, 標舟錄, 副 使金東漠世嫌海樣錄三編, 從 事官黃漫浪原東樣錄一編, 矣未有副使趙龍洲 網東樣錄一編 從 事 官申竹堂 潘海樣錄 二編, 又有矣未日記一編, 必是其時 從人而未知爲誰也, 乙未有從 事 官南登谷龍翼扶桑錄三編, 壬戌信行Jllj無使 臣日記, 只有譯士洪禹 載東樣錄 一編, 譯 士金指南東 接錄 一 編 , 辛卯有從 事 官李南岡邦彦東樣錄二編
&군 O 解說)에 따라 ® 金顯門 『東 樣 錄』 ® 洪致中 『海 樣 日錄』 ® 鄭后 橋 『扶桑紀行』의 세 가지는 京都大學河合文庫에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 다 . 이들 筆寫本에는 〈雙湖亭〉이라는 藏 書 印이 찍혀 있다. 실은 淸見寺所 藏 趙職自筆의 〈次南登谷韻〉 詩姜에 똑같은 〈雙湖亭〉印이 찍혀 있는 것으 로 보아 前記 京都大學河合文庫所藏筆寫本은 趙職이 收藏하고 있었을 것 이다 그리고 ® 「辛卯年 東樣錄」 二編온 서울大學校 奎章閣藏本에 『東樣 錄』(乾 • 坤 二卷)으로 현존한다. @ 洪啓禧所錄에 대해서는 子弟軍官으로 수행한 次子 洪景海 撰 『隨接日錄』(筆寫本 二卷)이 서울대학교 中央圖書館 에 현존하는 것을 확인했는데 이 『隨樣日錄』이 正使洪啓禧有所錄而姑不出 이라고 한 것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 나머지의 ®와 ®에 대해서는 그 소재를 알 수 없다. 『海行抱載』 卷首에 실린 「前後使行備考」에는 柳成龍(號西匡)의 「慈瑟 錄」을 인용했고 1443 年의 通信使書狀官 申叔舟 및 임진왜란 칙전의 1590 年 通信使 黃允吉에 대해 논급했고, 德 ]II 時代에 들어와서부터는 교린관계의 復舊에 따라 1607 년 第 1 回 使節 呂祐吉부터 1719 년, 즉 1748 년 사행 의 前回까지 i 언급하고 있다. 전기 한 「前後使行備考」에 이 어 서 高麗朝 末葉 1377 년 9 월 鄭夢周 (號圓 隱)가 報聽使로 禁賊求請書狀을 가지고 九州博多探題에 왔을 때의 奉使時 作詩와, 申叔舟의 『海東諸國紀』, 1590 년 副使 金誠一의 『海接錄』, 그리 고 壬辰丁酉倭亂(慶長役)에 藤堂高虎軍에 잡혀 京都伏見에 억류중 일본 국내 의 실정과 見聞記를 조선국왕에게 보고한 『看羊錄』이 들어 있다. 드디 어 江戶時代에 들어 오면 1607 년 제 1 회 副使 慶進撰 『海樣錄』을 비 롯하여 1764 년 제 11 회 正使 趙職의 『海椎日記』에 이르기까지 도합 15 편이 수록되어 있다. 趙職이 말하듯이 일본의 山川 • 風俗 • 官職 • 法制 • 衣服 • 飮食 • 器.IIIl. , 花ff • 儀節에 대하여 先任使行記錄에 詳述했으니 그야말로 동신사행의 참고자료로서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매회의 사행기록은 동신사 연구에 없어서 안 될 중요한 사료라고 하여야 겠다, 이돌 방일 기행록에 의해서 동신사가 국왕에게 辭陸하고 서울을 출발, 부 산항에서 출선, 江戶에 등성하여 임무를 마치고 귀환복명할 때까지의 사 행활동의 전모를 ·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일본에 대한 면밀 한 관찰은 말하자면 당시의 대일본 인식의 기본적 사료로서 방일하는통 신사의 예비지식이 되는 것은물론이고 또한 대일정책 결정에도 큰 도움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저자는 전술한 바와 같이 現 行 『 海行抱載 』 에 缺落된 부분을 보완하는 동시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행일기, 예 를 들면 1617 년 副使 朴 棒의 「東樣日記」, 1655 년 正使 趙衍의 「 扶桑日記 」 등 새로 발견한 자료, 도합 24 편을 추가할 수 있는 것은 동신사 연구에 여간 큰 기쁨이 아니다 . 다음에 現行 『海行抱載』(原本은 筆寫本 28 冊이 國立中央固 書 館에 현존)언 예 수록되어 현존하는 15 편 및 지금까지 판명된 새로운 紀行日記를 합친 24 편을 통신사의 방일 연도별로 열거하기로 한다 . l 현행 『海行抱載』에 수록된 것 (1) 1607 년 (선조 40) 副 使 慶 退 『海樣錄』 (2) 1617 년 (광해 군 9) 正 使 吳允謙 『東樣上日錄』 從事官李景稷 『扶桑錄』 (3) 1624 년 (인조 2) 副 使 姜弘重 『東接錄』 (4) 1636 년 (인 조 14) 正 使 任 統 『丙子日本日記』 副 使 金世派 『海樣錄』 從 事 官 黃 民 『東樣錄』 (5) 1643 년 (인조 21) 副使 趙 桐 『東樣錄』 從 事 官 申 淸 『海模錄』 作者 未 詳 『笑未東樣日記』 (6) 1655 년 (효종 6) 從事官 南龍翼 『扶桑錄』 2) 『海行抱載』 朝鮮古 書 刊行會 活字本四冊의 底本인 筆寫原 本(四周單邊 • 半郭 21. 5 Xl5.7 c m, 10 行 28 字 • 注雙行. 上二葉花紋魚尾 27.8Xl9 . 2cm) 이 韓國國立中 央圖 書館 에 현존한다. 印 記 로는 「學部圖 書 」 • 「編輯局保 管 」 • 「朝鮮總督府保轉本 」 의 印章이 적 혀 있다. 「古 書 目 錄 」 (2) 9 菜書 • 雜書 90 全 합 • ,tt합 「海行提 載 」 (國立 中央圖 書館 1971 年) . 中村 榮孝 『 日 鮮關係史0)硏究.!I (下) 248 쪽에 「海行抱 載 」 原 寫 本의 由來未詳, 成大中에 의하여 편집된 것으로서 朝鮮古 書 刊行會 活版本의 원본 은 행방불명 • 安田章 「三學譯語0)日本語」(《國語國文》 1983 年 第 52 卷 第 8 號)에 「海 行捷 載 0)原本 l ;J:所在未詳」(『國史大辭典』 第 3 卷 38 쪽) • 河宇鳳, 〈새로 발견된 日本 使行錄들」(《歷史學報》 112 輯)에 『海行抱 載 .!I는 모두 原本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 고 했으나, 그 원본이 남아 있음을 명 기 해 둔다. 朝鮮總督府 中樞院 書記長 官 國分 象 太郞은 朝鮮古 書 刊行會를 만들고 『海行抱 載 .!I 등 朝鮮古 書 發刊의 위 업을 남겼다고 한다(日野義彦 「對馬 K 於 1 七 5 隣國語學習 l r.?t、 T 」 ((對馬風土記》 20 號 昭和 59 年)
(7) 1682 년 (숙종 8) 譯官 金指南 『東樣日錄』 譯 官 洪禹載 『東接錄』 (8) 1719 년 (숙종 45) 製述官 申維翰 『海游錄』 (9) 1764 년 (영 조 40) 正 使 趙 職 『海樣日記』 2 추가분(신발견을 포함) (1) 1617 년(광해군 9) 副 使 朴 棒 「東樣日記」 (서울大學校 中央圖書館藏) (2) 1655 년 (효종 6) 正 使 趙 市 「扶桑 日 記」 (미국 하버드 대학 燕京學社藏) 軍 官 李東老 『 日 本紀行』 3) ( 日 本 天理大學圖書館藏) (3) 1711 년 (숙종 37) 副 使 任守幹 『東椎錄』 4) (서울大學校奎章閣藏本) 譯 官 金顯門 『東樣錄』 ( 日 本京都大學 河合文庫藏) (4) 1719 년 (숙종 45) 正 使 『洪致 中 海椎 日 錄』 ( 日 本京都大學 河合文庫藏) 軍 官 鄭后橋 『扶桑紀行』 ( 日 本京都大學 河合文庫藏) 軍官 金 演 『扶桑錄』 5) (韓國國立中央圖書館藏) 3) 天理大學固합館所藏 『日本紀行』은 1655 年 從事官 軍官 前縣監 李東老(字 公 望 完山人 • 乙丑(1 625) 生, 己丑(1 649) 庭試狀元)가 사행중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개 기록한 본인은 李 00 라고 했을 뿐 이름은 명기하지 않는다. 4) 趙歲 「海樣日記」에 辛卯有從事官 南岡李邦彦, 『東 樣錄』 2 ti갑으로 되어 있다. 現 奎章閣藏本온 乾 • 坤 2 卷으로, 그 내용을 보면 乾卷의 사행 일기 는 副使 任守 幹과 李邦彦이 나누어 썼고 坤卷의 聞見錄 둥은 李邦彦이 쓴 것으로 되 어 있다. 그 리고 韓國國立中央圓합館 所藏의 任守幹 著 『東樣日記』는 奎章閣本과 완전히 동일 한 내용의 필사본이다. 5) 1719 년 從事官軍官 備局郞廳 金 tj엄 의 『扶桑錄』은 전부 초서체로 되어 있어 해독하기 어렵다. 日本 京都 同志fd:女子大學敎授 信原修가 韓國國史編媒委員會에 勤務하는 鄭芝相氏에게 그 釋文을 의뢰하여 활자로 번각한 것이 있다(「總合文化硏
究所絶要」 第 6 卷 所收 • 信原修 「解說 金濱 『扶桑錄』 춘砂 〈 ,. ')-c」 • 史料紹介 『金 演扶桑錄』 • 同志社女子大學總合文化硏究所 1989 年) 참조.
(5) 1748 년 (영 조 24) 從 事 官 曺命采 『奉使日本時聞見錄』 (서 울대 학교 奎章閣藏本) 軍 官 洪景海 『隨樣日錄』 (서 울대 학교 中央圖書館藏) 작자미상 『日本日記』 (京都大學 圖書館藏) 作者未詳 『 日 觀要考』(韓國國立中央圖書館藏) (6) 1764 년 (영 조 40) 譯 官 吳大齡 『矣未使行 日 記』 (韓國國立中央圖書館藏) 作者未詳 『笑未隨樣錄』 (韓國國立中央圖書館藏) 製述官 南 玉 『日觀記』 (韓國國史編纂委員會藏) 正使書記 成大中 『 日 本錄』 (梧上記) (韓國 高麗大學校圖書館 藏) 軍 官 閔惠洙 『樣錄』 (韓國 高麗大學校六堂文庫 藏) 副使書記 元重擧 『和國志』 6) (德富蘇峰舊 藏 • 東京治茶(J)水圖書館 藏) 副使 書記 元重擧 『乘接錄』 (韓國 高麗大學校 六堂文庫藏) 從事官書記 金仁謙 『日東壯遊歌』 (韓國 서 울大學校中央圖書館藏) 譯 官 李彦項 『松穆館遣餘稿』 (日本 大阪府立中之島圖書館藏) (7) 1811 년 (순조 11) 正 使 金履喬 『辛未通信 日 錄』
6) 『和國志』(成賀堂文庫本 • 東京治茶 0 水圖 書館 所藏)는 天 • 地 • 人 3 卷으로 구 분된 筆寫本이다. 1764 년 副使 書記 元重擧가 방일했을 때의 使行錄으로 그의 자필 원본일 것으로 생각된다(河宇鳳 「재로 발견된 日本使行錄둘 ―『海行提 戴』 의 보충 과 관련하여 -」 《歷史學報)) 第 112 輯 所收) 참조.
(韓國 通文館發行 影 印本) 軍 官 柳相弼 『東 樣 錄』 (韓國 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藏 • 舊崔南 善藏) 正使 書 記 金善臣 『島遊錄』 (韓國國立中央圖 書 館藏) 제 5 장 筆談唱和集 통신사가 입국할 때마다 일본의 유생과 문인들은 객관으로 달려가 서로 다두어 면접을 청하고 한시의 창화를 마음껏 즐기며 또 필담으로 조선 역 사와 풍속관습, 醫學本草 및 중국 사정을 물으며 서화의 휘호를 청하면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일본 문인들과의 交職은 正使,副使, 從 事 官의 三使룰 비롯하여 製述官, 書記, 寫字官, 畵 員 및 醫員둘이 전담했다. 여기에 열거하는 자료는 초기의 신사 내빙으로부터 文化度 (1811 년)에 이르기까지 총망라한것이다 . 筆談唱和集의 총 수는 182 편에 달한다. 이것 둘은 모두 현존하는 것이며 또 저자가 管見한 것으로서 통신사 파견의 연 도 순으로 나누어 소장된 장소까지 명기하였다. (1) 1605 년 (선조 38) 韓客筆語 林羅山과 朝鮮使僧 松雲과의 筆語(林羅山文集 卷 60 雜著 5 所收). (2) 1624 년 (안조 2) ® 寄朝鮮國副使姜弘重(林羅山文集 卷 14 外國書 下) ® 寄朝鮮李誠國 2 首(林羅山文集 卷 47 外國贈答 上) (3) 1636 년 (인조 14) ® 朝鮮人筆語 日本 儒 醫 靜軒과 信使 醫 員 白士立과의 필담 寫本 1 冊(京都大學 醫 學部富士 )II 游文庫) ® 與朝鮮國權學士菊軒筆談書(石川丈山)寫本(靜嘉堂文庫藏) ® 朝鮮筆語 石川丈山과 權低과의 唱和集 正德元年 (1711) 刊 . 刊本 1 冊
(東京都立中央圖 書館藏 ) ® 丈山 筆語 朝鮮國中直大夫詩學敎授 菊軒權低 筆語 題篠朝鮮國菊軒筆 語石川四大抽朝鮮菊軒 刊本 l 冊 天和 2 年(1 682) 刊( 東京都立中央固書 館藏). ® 與朝鮮權低筆語(羅山文集 卷 60 雜著 5) @ 與朝鮮文弘續筆語(羅山文集 卷 60 雜著 5) ® 寄朝鮮權菊軒(羅山文集 卷 47 外國贈答 上) ® 載朝鮮文進士(羅山文集 卷 47 外國贈答 上) ® 和朝鮮三使日光山中詩 16 首(羅山文集 卷 47 外國贈答 上) ® 和白麗 2 首(羅山文集 卷 47 外國贈答 上) ® 和東漠 8 首(羅山文集 卷 47 外國贈答 上) @ 和靑丘 6 首(羅山文集 卷 47 外國贈答 上) (4) 1643 년 (인조 21) ® 細川三齋 遺愛石 信使從事官申竹堂이 細川侯의 遺愛石에 대하여 지 은 시 를 실음(舊中山久四郞藏) ® 寄朝鮮國朴進士 5 篇 (羅山文集 卷 14 外國書 下) ® 謝朝鮮國三官使(羅山文集 卷 14 外國書 下) ® 謝朝鮮國信使申竹堂(羅山文集 卷 14 外國書 下) ® 答朝鮮國副使趙龍洲(羅山文集 卷 14 外國書 下) @ 與朝鮮朴安期筆語(羅山文集 卷 60 雜著 5) @ 韓客筆語羅山等問朝鮮朴安期答自筆卷子一軸(東京大學史料編纂所 藏 • 同所報 18 號 昭和 58 年) ® 和朝鮮朴進士韻(羅山詩集 卷 48 外國贈答 中) ® 寄朴進士 1 首(羅山詩集 卷 48 外國贈答 中) ® 嗣朴進士所寄 1 首(羅山詩集 卷 48 外國贈答 中) @ 寄朴進士 4 首(羅山詩集 卷 48 外國贈答 中) @ 聲和朴進士 3 首(羅山詩集 卷 48 外國贈答 中) @ 又寄朴進士 1 首井序(羅山詩集 卷 48 外國贈答 中) ® 寄朝鮮洋漠君(羅山詩集 卷 48 外國贈答 中) ® 寄朝鮮龍洲君(羅山詩集 卷 48 外國贈答 中) ® 寄朝鮮竹堂君(羅山詩集 卷 48 外國贈答 中) @ 和朴進士琉球酒詩(羅山詩集 卷 48 外國贈答 中) ® 題朴進士 壽像 (羅山詩集 卷 48 外國贈答 中)
® 次薛漠韻(羅山詩集 卷 48 外國贈答 中) ® 和龍洲韻(羅山詩集 卷 48 外國贈答 中) ® 次竹堂韻(羅山詩集 卷 48 外國贈答 中) @ 又答薛漠 2 首(羅山詩集 卷 48 外國贈答 中) @ 謝竹堂松竹梅費 2 首(羅山詩集 卷 48 外國贈答 中) @ 寄龍洲井序(羅山詩集 卷 48 外國贈答 中) ® 和洋漠井序(羅山詩集 卷 48 外國贈答 中) ® 和竹堂井序(羅山詩菓 卷 48 外國贈答 中) @ 寄竹堂井序(羅山詩集 卷 48 外國贈答 中) @ 寄朴進士 (羅山詩集 卷 48 外國贈答 中) ® 和竹堂日光詩 4 首(羅山詩集 卷 48 外國贈答 中) ® 又寄竹堂井序(羅山詩集 卷 48 外國贈答 中) ® 韓使贈答日錄前集 寫本 l 冊(天理大學圖書館藏) (5) 1655 년 (효종 6) ® 朝鮮三官使翻和 外題朝鮮(九嚴〕等 寫本 l 冊(東京都立中央圖書館藏) ® 朝鮮信使東樣紀行 寫本 1 冊(雨森芳洲文庫藏) ® 答朝鮮國信使兪秋潭(羅山文集 卷 14 外國書 下) ® 星朝鮮星琴居井序(羅山詩集 卷 49 外國贈答 下) ® 星朝鮮秋潭井序(羅山詩集 卷 49 外國贈答 下) ® 星朝鮮壅谷井序(羅山詩集 卷 49 外國贈答 下) ® 寄朝鮮石湖井序(羅山詩集 卷 49 外國贈答 下) ® 和石湖韻(羅山詩集 卷 49 外國贈答 下) ® 五花堂詩 星三使 3 首(羅山詩集卷 49 外國贈答 下) ® 又星琴居井序(羅山詩集 卷 49 外國贈答 下) @ 又星秋潭井序(羅山詩集 卷 49 外國贈答 下) @ 又星壅谷(羅山詩集 卷 49 外國贈答 下) @ 用前韻寄石湖 2 首(羅山詩集 卷 49 外國贈答 下) ® 和登谷日光諾(羅山詩集 卷 49 外國贈答 下) ® 和秋潭扶桑壯遊 150 韻井序(羅山詩集卷 49 外國贈答 下) 答 下) ® 壘和登谷 4 首 和自道 二首和日光卽事二首(羅山詩集 卷 49 外國贈 ® 訓秋潭旅亭 2 首(羅山詩集 卷 49 外國贈答 下) ® 寄石湖旅宿(羅山詩集 卷 49 外國贈答 下)
® 韓使贈答日錄後集 寫本 l 冊(天理大學圖 書 館藏) (6) 1682 년 (숙종 8) ® 對韓稿 木下順庵著 木下一雄校莊錦里文渠 卷 12( 國 書 刊行會 昭和 57 年) ® 木下順庵稿 外題天和 2 年 木下貞幹(順庵)編 寫本 1 冊(東京都立中 央圖書館藏). ® 朝鮮人筆談井贈答詩題答 附唐人口通事井朝鮮言葉阿蘭陀言葉 刊本 1 冊(韓國國立中央圖書館藏). ® 桑韓筆語唱和集 卷末 天和 2 年 熊谷立閑 (了菴) 等 天和刊 1 冊(東京 都立中央圖書館藏) ® 和韓唱細集 目 首(天和 2 年) 2 卷首一卷 釋祖辰朝鮮成琉等 刊本 5 冊 (東京都立中央圖書館藏). ® 水戶公朝鮮人贈答集 32T 寫本(韓國國立中央圖書館藏) ® 桑韓筆語唱和集 天和 2 年 刊本 1 冊(韓國國立中央圖書館藏) ® 和韓唱翻集 尹址完一行과 東福寺僧祖辰등과의 唱和刊本 7 冊(韓國 國立中央圖書館藏). ® 和韓唱細集 目首題策(天和 2 年) 二卷首一卷 釋祖辰朝鮮成苑等 刊 本 대!(家藏) ® 韓館訓和集 柳川震澤 名順剛 字用中號震澤 刊本 l 冊(家藏) @ 韓人筆語 13 丁內題筆語 房州勝山侯兼和州太守散大夫酒井源忠國盡 報文(東京大學史料編纂所藏) @ 天和來聽韓客手口錄 人見友元과 洪世泰와의 筆談唱和 寫本 l 冊(內 閣文庫藏) @ 任處士筆語 寫本 l 冊(內閣文庫藏) ® 韓使贈答 成琉 • 李鵬漠 • 洪世泰와 林春宗 • 林整宇 • 坂潮軒 • 鶴山 晩節齋와의 唱iff 19 丁寫本 (家藏) ® 水戶侯與韓使翻和 正使 尹址完 • 副使李彦網 • 從事官 朴慶後와 德 川 光園과의 唱和 24 丁寫本(家藏) ® 唱罰詩稿 德川光岡과 韓使와의 唱罰 寫本(家藏) @ 韓客訓唱錄 山田復軒自筆卷子本(佐野正己藏) ® 西山遺事 附朝鮮使書簡(舊中山久四郞藏) ® 鶴山筆談 人見友元과 洪世泰와의 筆談唱和(松田甲 「人見鶴山&~ 槍浪」 『 日 鮮史話 第一編』 85 쪽)
® 洪世泰 『柳下集』 所收 日 本使行詩賊 33 篇 (東洋文庫藏) ® 韓使贈答略記(天理大學圖 書 館藏) (7) 1711 년 (숙종 37) ® 雜林唱和集 源尾維賢編 正德辛卯新錦 書 房玉芝堂奉粹 刊本 全 16 冊 (家藏) ® 辛卯和韓唱翻〔集]中麗 正德元年 寫本 l 冊(東京都立中央圖 書 館藏) ® 朝鮮客館詩文稿 室直淸(鳩菓)編 刊本 l 冊(天理大學圖 書 館藏) ® 支機開談 三宅 九十郞編 刊本 1 冊(天理大 學 圖 書 館藏) ® 桑韓唱翻集 服部藤九郞編 刊本 l 冊(天理大 學 圖 書 館藏) ® 桑韓唱和集 土肥原四郞編 刊本 1 冊(天理大 學 岡 書 館 藏 ) ® 賓館稿舒集 祗園餘一編 刊本 l 冊(天理大 學 圖 書 館藏) ® 正德和韓集(上下) 深見玄貸編 刊本 1 冊(家藏) ® 班荊集 菊潭木寅亮編 刊本 l 冊(家藏) ® 樣客通岡集 別宗祖緣과 韓使와의 筆語唱和 正德二年刊 三卷刊本 1 冊(天理大學圖書館藏) @ 問椎崎賞 韓使와 山縣周南 • 安藤東野와의 唱和集 秋本以正(須溪) 編 吉田有隣(孤山)校 刊本 l 冊. 同 題 策 問 接 二種附廣陵問 樣 錄二卷 味 木虎(立軒) 寺田立革(臨JII)과 李東郭과의 唱翻 山田敬 適 編 藤田覺校 五卷刊本 1 冊(家藏) @ 兩東唱和後錄 正德元年 一卷, 別錄一卷 韓使官職姓名一卷 村上溪 南朝鮮奇斗文等刊本 2 冊(韓國國立中央圖書館藏) ® 桑韓醫談 二卷附一卷 北尾春圓(當壯庵)問朝鮮奇斗文( 常 日軒)答附 北尾春團正德 3 年刊 l 冊(東京都立中央圖 書 館藏) ® 朝鮮國蔣使錄 題策正德朝鮮聽使錄 內殿燕樂 筆 語一卷合綴 l 冊 新井 君美編 1 冊(東京都立中央圖 書 館藏) ® 朝鮮使燕樂筆語 寫本 1 冊(韓國國立中央圖 書 館藏) ® 坐間筆語附江關筆談 寫本 1 冊(韓國國立中央圖 書 館藏) @ 觀樂筆語別名坐間筆語 附江關筆談 寫本 1 冊(韓國國立中央圖 書 館 藏) ® 觀樂筆語 日首坐間筆語 題答正德筆談 附江關筆談 寫本 l 冊(韓國國 立中央圖書館藏) ® 江關筆談任守幹撰 『東接錄』 所收(서울대학교 奎章閣本) ® 坐間筆語 附江關筆談 全 天明己酉正月 甲子 平安鈴木公溫識 刊本 l
./lJ} (家藏) ® 白石筆談二種 坐間節談 • 江關筆談 寬政 4 年 寫本 1 冊 (家藏) @ 白石詩草 正德壬辰仲春 江戶唐本屋淸兵衛粹行 刊本 1 冊 ( 家藏) @ 白石詩草 寬政 八年丙辰 五月 浪華 書 林 河內屋喜兵衛 刊本 1 冊( 家 藏) ® 白石詩草 正德二年刊本 後播年時不明 刊本 1 冊(家藏) ® 日光山八景詩集 正德壬辰春 三月 中大夫長州刺史 源好古證識 守玄 堂藏版 刊本 1 冊(家藏) ® 二東唱細集 山田由己外作 正德辛卯版 刊本 l 冊(彰考館圖 書 館現在分) @ 辛卯朝鮮記 一名和韓唱郵! 林信充 • 桂山義樹等 韓使와의 唱和 寫本 1 冊(舊中山久四郞藏) ® 古梅園墨譜 李東郭墨費 刊本 1 冊(天理大學圖書館藏) ® 辛卯唱嗣詩 岡重熙(竹林), 李東郭唱翻 寫本 1 冊(東京都立中央圖書 館藏) ® 牛總詩溪 小原大丈軒(吉備文庫 第四輯 所收) ® 安藤東野遺稿(下)山井鼎 • 根本遜志編輯 星李東郭學士啓寄朝鮮嚴龍 湖書記書 刊本 (佐野正己藏) @ 京都唱訓李東郭과 五山僧興山과의 唱訓 寫本 1 冊(雨森芳洲文庫藏) ® 稿許風雅集 同附集 正德元年 韓使와의 唱和筆談 寫本 8 冊(雨森芳洲 文庫藏) ® 槍漠韓使唱罰 韓使와 三宅槍漠등과의 唱和 寫本 1 冊 59 丁(雨森芳 洲文庫藏) ® 韓客唱和集 李東郭 • 莘野 • 北溪周浙과의 唱和 寫本 4 冊 合本 40 丁 (雨森芳洲文庫藏) ® 韓使五山唱和集 韓使와 以訂庵 加番和尙(石霜龍舊)과의 應訓詩稿 寫本 1 冊 37 丁 (雨森芳洲文庫藏) @ 趙泰億謙齋集 卷 6 • 7 • 8 東樣錄詩 寫本(서울대학교도서관奎章閣 藏本) ® 韓使唱和 山縣周南의 上星詩에 대한 正使趙泰億의 贈答詩稿(天理 大學圖書館藏) (8) 1719 년 (숙종 45) ® 桑韓星椎答響 平安書林柳枝軒刊行 l 冊 可竹和尙(月心)과 正使洪致 中 • 月 心과 芳洲 • 霞 沼와의 唱和詩(家藏)
® 客館瑞菜集 吳下閔阜 • 木實聞著 刊本 l 冊(家藏) ® 東竹堂先生書 酷室銘朝鮮進士張菊溪跋 勸學文朝鮮進士柄牧子跋文 煥堂線粹 石版 1 帖 (家藏) ® 享保 四年 韓客唱和 寫本 l 冊(東京都立中央圖書館藏) ® 和韓唱和集 島山輔門(香軒) • 朝鮮申維翰等唱和 享保 6 年刊(東京都 立中央圖書館藏) ® 航海獻罰錄 熊本藩儒生水足安直(群山)과 申維翰과의 唱和集 寫本 1 冊 (東京都立中央圖書館藏) ® 桑韓唱和損筋集及韓客筆語補逸 源尾維賢編 京華書坊奎文館發行 刊 本 11 冊(韓國國立中央圖書館藏) ® 桑韓唱訓集 河間正胤校 享保 5 年 刊本 3 冊(韓國國立中央圖書館藏) ® 星接餘響續編(星樣答響) 刊本 1 冊(韓國國立中央圖書館藏) ® 兩關唱和集 前編 後編刊本 1 冊(天理大學圖書館藏) ® 己亥雜林新珠 信使와 江戶人 鈴木文錦女의 詩書롤 칭 찬한 시 문의 眞跡을 모각한 것 刊本 l 冊(天理大學圖書館藏) @ 蓬島遺珠享保 4 年 9 月 16 日 尾張藩賓館에 서 , 또 10 月 25 日 性高院 에서 朝比奈玄洲 • 木下蘭阜와 信使와의 唱和集 刊本 1 冊(韓國國立中 央圖書館藏) ® 長澤二子和韓唱洲 長澤東海號不怨齊 • 長澤樂浪號不尤所 書翰 5 篇 • 尺讀 1 篇 • 詩 65 篇 • 筆語 23 條 松原基寫(鳥根縣立圖書館藏) ® 書唐金氏詩卷 申維翰筆 寫本 9 枚(雨森芳洲文庫藏) ® 山縣良齋(周南의 父)에게 증답한 申維翰親筆詩稿(天理大學圖書館 藏) ® 韓館唱和稿春台太宰純 著刊本 1 冊(無窮會神習文庫藏) ® 朝鮮對話集 內題韓客 • 不怨齋 • 不尤所對話初會 10 月 5 日, 再會 10 月 10 日 (內閣文庫藏) (9) 1748 년 (영 조 24) ® 稿約集 桃生盛(百川)과 朝鮮朴敬行과의 唱和 寫本 l 冊(東京都立中 央圖書館藏) ® 椎餘 題策延享樣餘 淵好凱編寫本 l 冊(東京都立中央圖書館藏) ® 韓館唱和編 守山問樣錄 一卷 琴台問樣錄 一卷 刊本(東京都立中央圖 書館藏) @ 韓館唱和 短軒贈答詩稿 刊本 1 冊(天理大學圖書館藏)
® 林家韓館贈答 寫字官金天 壽 라고 明記(天理大學圖 書 館藏) @ 和韓筆談 薰風編 延享 5 年 刊 三卷 二冊(家藏) ® 學山錄 卷四 「朝鮮 書 尼」 戊辰之夏朴敬行과의 筆語 藤原明遠 著 6 卷 4 冊 寬延 4 年 辛未 五月 江都 書 却 소 粹 (家藏) ® 長門戊辰問樣 長門下關에 서 萩藩橋生草場中山 (名允文) 外 10 여 명 과 朴敬行과의 唱和筆談集, 山縣周南序 延享 5 年 刊 三卷(家藏) ® 龍門先生鴻腦傾蓋集 宮漏維翰(號龍門)과 朴敬行과의 筆談唱和 森尙 賢編 寬延元年刊(東京都立中央圖書館藏) ® 桑韓錦經錄 三 卷 附醫談 一卷 度會南漠(伊勢山田의 祠官)과 朴敬 行과의 唱和尺 閑 築附百田安宅問朝鮮趙崇壽答醫談(東京都立中央圖書館 藏) @ 日觀要考延享年中朝鮮人來勅日記 寫本 대}(東京都立中央圖書館藏) @ 丁卯醉和集 外題別名日觀要致朱校本 寫本 l 冊(東京都立中央固書館 藏) @ 和韓文會 留守友信(希賢)著 岡田安敬編 朝鮮 朴敬行과의 筆談唱罰 寬延元年刊 2 冊(東京都立中央圖書館藏) ® 韓客對話贈答 外題寬延元年 寫本 l 冊(東京都立中央圖書館藏) ® 來庭集 篠山親海松崎惟時著 金啓升, 崔北(居其齋), 朴敬行 등과의 筆談(內閣文庫藏) ® 韓人唱和産物筆語 班荊開譯(上下)直海先生著 宇士新先生倭漢用字 式附 京都儒醫直海龍(元周號衡齋)이 戊辰年 4 月 27 日 大阪客館에서 良醫趙崇壽(號 敬老)와 筆談한 것 刊本 1 冊(四方朝鮮文庫藏) @ 善隣風雅 天龍寺以訂庵輪番僧承堅(別號 洪崔), 出石樓井良翰, 名 古屋千村鼎臣과 朴敬行 및 書記들과의 唱和詩 淸田像燮의 序文第一 集 二卷 後編存一卷 3 冊(韓國國立中央圖書館藏) ® 和韓唱和村上秀範 源擧薔共編 上月 鶴洲, 留守括蔡, 菅沼東郭 등 二十餘人과 朴短軒, 李濟庵과의 唱和詩 菅沼西陵序. 이 책 은 三邦連 壁錄이라고 칭하여 조선에 이름이 알려졌다고 함. 刊本 2 冊(韓國國立 中央圖書館藏) ® 對麗筆語 江都菅道伯夷長著 延享 5 戊辰年 6 月 出雲寺和泉祿發行 刊本 1 冊(家藏) ® 桑韓畵會家能集 小森信友編 畵師大岡春 卜과 畵員李聖麟과의 畵會 및 慶賀漢詩, 和歌, 俳階가 들어 있음. 寬政 3 年刊 1 冊(岩源文庫藏)
® 白鹿先生韓人應對話 松江藩術生桃白鹿 (1722~1801) 과 韓 使와의 筆 談 自 筆 稿本 1 冊 (桃裕行氏藏) @ 韓館唱和 延享 5 年 6 月 10 日 琴台 (拜崎恭忠) 가 江戶客館에 서 製述 官 朴敬行(短軒) , 書記 李鳳煥(濟菴) , 李命啓 (海 阜 )과의 筆談 唱和 自 筆原本 卷軸全長 950cm( 天理大學圖書館藏) @ 唱和詩稿 書記 李鳳煥(濟菴)筆蹟, 周南의 長子 業園께 증답한 것 (天 理大學圖 書館 藏) @ 贈居益村主人伊藤氏敍 書 記 李鳳煥(濟 菴 )이 美濃 國居益村(今須村) 主人 伊藤五郞次에게 書 贈한 것 模刻(天理大學圖書館藏) ® 韓人唱和詩 松山君山이 아들 雲 山을 데리고 客館 性高院에서 朴短 軒, 李濟庵과 唱和한 것 (10) 1764 년 (영 조 40) ® 傾蓋集 澤田東江源瞬自筆稿本 製述官 南玉, 書記 成大中,元重擧, 金仁謙 등과의 筆談唱和詩文 및 韓使 四人의 초상을 삽입 하고 造井太 室 木下蓬萊 關松窓의 서문을 실음 寫本 1 冊(中野三敏氏藏) ® 鴻腦館和韓詩文稿 遠州刺史加藤侯記室藤資哲(號情 齋 )과 韓使 와의 筆談唱和 寫本 1 冊(中野三敏氏藏) ® 樣客芹水集 市浦直春(南竹)등과 韓使와의 唱訓詩 寫本 l 冊(東京都 立中央圖書館藏) ® 殊服同調集 林文翼編 刊本 1 冊(東京都立圖書館藏) ® 東渡筆談 釋因靜 刊本 테月(東京都立中央圖 書 館藏) ® 桑韓筆語 附倭韓醫談 寫本 1 冊(東京都立中央圖 書館藏 ) ® 桑韓筆語 坂上上善之編 明和元年 山田宗俊(正珍)과 朝鮮李佐國과 의 筆語(東京都立中央圖書館藏) ® 問接餘響 伊藤維典編 1764 年 正月 25 日 大阪客館에서 石 )II 貞, 谷 類中, 田立松, 伊藤冠峯들과 製述官 南玉, 書記 成大中, 元重擧, 金 仁謙과의 筆談唱和 刊本 2 冊(韓國國立中央圖 書 館藏) ® 1'遇錄, 龜井魯, 浦彌八, 井潛, 福尙條, 合離, 木世肅과 韓使와의 筆談唱訓 寫本 1 冊(韓國國立中央圖書館藏) ® 東椎唱翻集二軸 日本源之熙, 君山, 谷顯中, 新 )II, 嶋村皓, 龜井魯 등이 成大中에게 상정한 自筆詩稿 28 篇(韓國國立中央圖書館藏) @ 日本文人上星詩稿 1764 年 書記 成大中에게 上星한 日本文人 片山 北海등 28 人의 自筆詩稿 3 卷 卷軸 (家藏)
@ 長門矣甲問樣 日本 文人 湘長 情(號鶴台), 草場大麗 , 山根南 演 , 秦 席山들과 韓使와의 獻訓詩語를 編輯한 것. 四卷 刊本(家藏) ® 問傾集 大江資衡(玄圓)編 寫本 1 冊(內閣文庫藏) ® 兩好餘話 奧田元繼와 韓使와의 筆談唱和 刊本 2 冊(天理大學圖 書 館 藏) ® 講餘獨覽南宮岳과 製述官 南玉과의 唱和 刊本 1 冊(家藏) ® 鷄壇喝鳴 朝鮮人來朝於津村御坊筆語 草 書 之方朝鮮人直筆, 韓使와 北山橘庵筆語 合卷 一冊手稿本(大阪府立中之島圖 書 館藏) @ 朝鮮聽使館浪華記 沙門義端記 附錄記浪華木世肅寄星朝鮮南時編學 士二律 刊本(大阪府立中之島圖書館藏) ® 問朝鮮國秋月南書記 湘彌八 寫本 宮內廳書陵部(片玉集 78) ® 小雲樓稿 大典撰 卷 12 所收 信使와의 唱翻詩文 刊本 l 冊(大阪府 立中之島圖書館藏) ® 名賢往來 正德年度, 明和年度 韓使와의 筆談唱訓 寫本(大阪府立中 之島圖書館藏) ® 奉星詩文 成大中에 게 上星한 日 本 文人 自 筆詩稿 草場安世 外 54 人 (山 口 女子大學樓圓寺內文庫藏) @ 甲申朝鮮諸人筆語 朝鮮使筆談集 韓使 元重擧 등의 自筆卷軸 3 卷 (39. 5X830cm) 安井澄彦氏藏 『朝鮮通信使 & 紀州』 1-18 和歌山市敎育委 員會 昭和 62 年 참조. @ 栗齋探勝草 附韓客唱和 大阪與力內山栗齋와 韓使와의 唱和集 刊本 2 冊 (東京都立中央圖書館藏) ® 韓客人相筆語 新山退甫道人 著 大阪 客館에서 信使人相鑑定記 卷 末에 三使를 비 롯하여 書記,畵員, 軍官 등의 초상이 들어 있음. 明 和甲申秋八月, 天橋窟藏版 刊本 l 冊(東京韓國硏究院藏) @ 東樣餘談 劉維翰 著 2 卷 1 冊(東北大學附屬圖書館狩野文庫藏) ® 決決餘響 龜井南漠과 韓使와의 筆談唱和集(龜井南冥昭陽全集 第一 卷所收) @ 韓館應翻錄 江戶 儒生石金子誰, 熊坂台洲와 南玉, 玄川, 退石, 龍 淵, 良醫 李佐國(慕菴)과의 筆談唱翻集(福島縣立圖書館藏) ® 三世唱和 1764 年 3 月 29 日 名古屋性高院에 서 松平君山이 아들 雲 山 • 孫子南山을 데리고 韓使와 接見, 筆談唱和 ® 歌芝照乘 韓使와 造井太室, 四明井潛과의 筆談唱和 寫本 一冊(內
閣文庫藏) ® 品 )|I 一燈 1764 年 3 月 11 日 太室 蓬萊, 麗山(今井兼規)과 韓使와 의 筆談 尺 就 中井積善의 跋이 들어 있음(本寫 內閣文庫藏) ® 松菴筆語 今井敏卿 (號松菴) 이 江戶客館에 서 2 月 29 日 , 3 月 3 日 , 3 月 6 日, 3 月 10 日 韓使製述官 南玉, 成大中, 元重擧, 金仁謙,李彦眞, 醫 員 南斗昊, 吳大齡과 필담한 것 寫本 1 冊(內閣文庫藏) @ 鴻臘推華 西尾藩典翰源文虎와 南玉, 成大中,元重擧, 寫字官, 洪 聖源, 盡員 金有聲, 良醫 李佐國과의 筆談唱 和 寫本(西尾市立圖 書 館 藏) ® 韓館唱和 卷一 國子祭酒(大學頭)林信言이 圖書頭林信愛와 江戶 信 使客館本願寺에서 三使 및 製述官 • 書記 들과 筆談唱和한 · 것 同卷二에 는 大學頭信言과 寫字官, 盡員과의 筆談, 同卷三에는 信言과 三使, 製述官, 三書記, 趙花山 柳達源들과의 筆談唱和 寫本 7 冊(內閣文庫藏) @ 韓館唱和續集 儒官林信有와 文人 28 人이 2 月 23, 24, 25 日 에 걸쳐 製述官과 三書記와 筆談唱和한 것 寫本 7 冊(內閣文庫藏) ® 韓館唱和別集 信使伴人洪聖輔와 日 本 文人 造井平, 今井荊規, 關 修齡등 24 人과의 筆談唱和한 것 寫本 7 冊(內閣文庫藏) ® 蓬高詩集 綾部藩儒醫西川國華(名湖 • 字子塘)가 客館울 찾아가 星 詩, 贈朝鮮成士執이 들어 있다. 三卷附錄 一卷, 文化 11 年刊 (11) 1811 년 (순조 11) ® 鷄林情盟 附朝鮮使人名氏 川越有邦左門等編 加賀의 文人三宅橘園 (號 威如齋)과 韓使와의 筆談唱和集 刊本 l 冊(家藏) ® 接鮮着語 二卷 附接鮮紀事松崎嫌堂編 對馬島易地聽禮때 大學頭 林述齋, 松崎嫌堂과의 筆談唱和集 寫本(家藏) ® 對馬客館唱細 附三劉先生詩文抄 古賀精里와 韓使와의 唱和集 寫本 (東京都立中央圖書館藏) ® 對州客館筆語 外題別名對禮餘漢 古賀精里 • 草場偶川이 客館에서 6 月 21 日,22 日 筆談한 것 寫本(東京都立中央圖書館藏) ® 對禮餘漢客館筆語 附謨星精里經案 寫本(東京都立中央圖書館藏) @ 金城筆語 文化年間 釋徹定 明治 9 年 寫本(東京都立中央圖書館藏) ® 接鮮紀事 松崎憶堂著 崇文幾書嫌堂全集卷 23 에 收錄 刊本(家藏) ® 嫌堂遺文上 • 下 士族松崎健五郞發行 • 嫌堂松崎先生行述 信使와 接 觸紀事(家藏)
® 愛日樓文詩 佐藤 一 齋著 奉送述齋林公社 津 島迎接韓使序 文政十二年 刊 四冊( 家藏 ) ® 朝鮮人詩賊 文化八 歲 次辛 未五月寫於對州金石客舍 龍泉猪桐正般 以 訂菴僧과 信使와의 鐘談唱 和 集 寫本 (蓬左文庫藏) ® 倭韓唱罰集 古賀精里와 正使金履 喬 一行과의 唱和詩文菜 寫本(韓國 國立中央圖書館藏) @ 淸 山島遊 錄 金善臣著 正使 書 記金善臣(淸 山)의 見聞記,唱罰詩, 博 對馬賊 寫本 (韓國國立中央圖 書 館藏) ® 對遊日記 高津泰著 對馬島通開時 , 古賀精里에 수행한 種口平三(字 平甫 • 號溫 )11) 이 韓使 와의 接觸紀 事 明治 11 年 新見旗山의 寫 本(慶應 義塾大學圖 書 館藏) ® 草場楓 )II 日 記 上 對禮余漢筆談唱訓詩 文을 수록(西 日 本文化協 會發 行 昭和 53 年) ® 薄遊漫載 三宅橘園이 韓使來賜을 맞이하기 위하여 對馬島에 가는 紀行文 五卷 刊本 文化 11 年刊
結 語 조선왕조시대에 德川幕府와 교린관계를 복구시키고 전후 12 회에 걸쳐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는 國命을 전하고 일본 지식인들과 접촉하면서 筆談 과 詩文唱和를 통하여 조선의 문화를 과시하는 동시에 당시의 일본 문화 인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통신사가 남긴 행적을 밝히는 데에 있어서 종래의 연구가 정 치 의교사적 측면에서는 성과가 없지 않았다고 보나 문화적 접촉, 즉 筆 談唱和에 관한 학술적 연구는 거의 공백에 가까운 실정에 비추어 저자는 연구방법의 기초를 통신사와 일본 문사와의 문화교류에 관한 사료의 전면 적이며 체계적인 수집에 기초하여 거기에 따르는 交歡의 실태 파악을 구명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제 본연구에서 얻은 성과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역사적으로 교린의교의 유래를 밝히는 동시에 임진왜란 후 交隣관 계의 복구, 죽 조선국왕과 德川將軍과 대등한 국교를 맺고 통신사의 差送 을 실현시킨 경위를 밝혔다. (2) 초기 조선사철의 파견 목적은 임진왜란시 일본에 연행구류된 被擦人 의崩還交涉에 있었고 사행을 통하여 직접 일본국정을 시찰하면서 수호의 내실을 거두었다. (3) 德川幕府로서는 幕藩體制下 정식으로 국교를 맺은 조선국으로부터 파견해 오는 통신사의 내빙을 통하여 대외적으로는 德川政權의 위용을 과 시하고 대내적으로는 각 영주로 하여금 신사집대의 과중한 비용을 부담시 키며 武士, 町人, 庶民에 이르기까지 막부의 위세를 보여주는 동시에 막 부의 安泰를 유지하는 데에 이용하였다. (4) 일본사람들이 얼마나 조선사절의 詩文贈答과 揮臺를 갇구하였으며 이것을 家寶로 진중히 여겼던가 하는 점 (5) 筆談唱和에 관해서는 통신사 기행록과 현존하는 필담창화집을 총망 라하여 16 개 항목으로 종합 분석하였다. 죽 ® 科擧制度 ® 諺文 ® 冠婚
喪祭 ® 醫事問答 ® 花鳥 @ 筆墨의 製法 ® 富士山과 金剛山 ® 衣冠 ® 觀相 ® 釋莫 @ 退溪朱子學 @ 中國事情 ® 女人染齒 ® 生活習俗 ® 徐市東渡說 ® 煙草와 煙管이를 통해서 조선과 일본 양국 문인들의 관심 의 소재를 알 수 있으며 양국 문화의 역사적 배경과 그 문화적 특성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徐市東渡說은 일본내에서 邪馬 臺國論爭 이 재연되는 가운데 이 문제가 부상되고 있다. 한국내에도 徐市과 관련되는 유적으로 南海郡 錦山 摩崔石刻 「徐市起禮日出」이 현존하는 것을 吳世昌 氏 自筆楠 文體模寫와 解讀經緯로 명시할 수 있었다 . (6) 통신사와 교류를 가진 일본의 지식인, 문인, 승려, 儒學者, 儒醫, 本草學者, 화가들과의 交歡을 동신사 내 빙 연도별로 상술하였다. 그중 초 기의 대표적 인물 林羅山온 松雲大師와도 해후했고 1636 년 副使 金世嫌으 로부터 中國聖賢圖像에 費을 써 받았다. 이 들 圖像은 東京國立博物館과 筑 波大學圖 書館 에 현존한다. (7) 江戶時代의 유학 발전의 배경을 살펴보면 봉건사회의 지주가 되는 朱子學을 官學의 기초로 삼은 德川家康의 유학자 기용, 學問換勘, 고서 간행이 주요원인이 될 것이다. 林羅山의 후예는 大學頭로서 通信使接伴의 중책을 담당해 왔다. (8) 壬戌年 (1682) 使行에서는 演浪 洪世泰를 중심으로 일본 문인들과의 교류를 다루었다. 京都 相國寺慈照院에서는 槍浪의 自筆筆談唱和詩稿를 발견하게 되어 재로운 사료를 보충할 수 있었다. 오늘날 牛窓에 전래되고 있는 唐子충에 대해서는 그 가사와 분석을 동해서 통설인 조선사절의 小 童對舞에 대하여 琉球使節의 樂童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가설을 제기 했다. 新井白石이 후일 막부의 중신으로 등용되는데 본래 그동기는 白石의 自 作 『陶情詩集』에 써 준 製述官 成苑의 서 문과 碑將으로 동행 한 洪世泰의 跋 文으로 인하여 白石의 명성이 木下順庵에게 둘려와 그의 門人이 되면서부 터이다. 그런데 이것을 입증할 수 있는 『陶情詩集』의 成腕과 洪世泰의 自 筆序跋文 원본을 名古屋新井家에서 발견하였다. (9) 辛卯年 (1711) 통신사 방일에서는 新井白石과 正使 趙泰億과의 접촉 에서 日本 國王 復號, 接待簡素化, 國諱論爭 등으로 물의를 빚어냈지만, 한편 그 交歡에 있어서 『白石詩草』에 書贈한 통신사의 서문과 발문 및 「江 關筆談」울중심으로 우의의 일면을 엿보았다. 『白石詩草』의 序跋은 초서체 가 섞인 필체인데 이를 일본 석학들이 활자화할 때 찰못 읽은 점을 수정 하였다. 幕府儒臣 深見玄俗와 製述官 李東郭과의 필담창화에서 玄俗가 京都에서 權近의 跋文이 붙은 〈皇明一統輿地圖聲歷代沿革圖〉를 目見했다고 했는데 현재 京都 龍谷大學圖書館에 權近의 跋文小記가 들어 있는 「混一强理歷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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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都之圖」가 迫存함을 확인했 다 . (10) 戊辰年 (1748) 使 行 에서는 畵員 李聖麟과 日本 盡師 大岡春 卜과의 盡 會를 기록한 『家能集』에 의해서 교환 내용을 밝혔다 . 그리고 오랫동안 수 수께끼였던 畵 工 崔北의 방일 여부에 관해서는 內閣文 庫 所藏 『來庭集』에 金啓升과 동석한 필담에서 居其 齋 (崔北의 號)와의 문답으로서 崔北의 내 일을 입증하였댜 한국 문헌인 『星湖先生全集』에도 崔北이 일본에 가는 것을 축하하는 한시 「送崔七七之日本 三 首」가 들어 있어 확증을 얻을 수 있었다. (11 ) 1764 년 통신사 방일시에는 都訓導 崔天宗이 對馬島 傳語官(通詞) 鈴 木傳藏에게 私怨으로 인해 피살당하는참국이 벌어져 이 사전 처리 때문에 正使 趙職아 고심했는데 그 피살 원인을 『海樣日記』와 『寶曆物語』 에 의해서 究明하였다. 본론에서는 특히 正使 書記 成大中에게 상정한 일본 문인들의 詩稿와 印章을 恩師斗溪 선생님으로부터 割愛받아 原史料로 쑬 수 있었음 은 고마운 일이 다. 또 九州大 學 中野三敏 교수의 호의 로 「韓天 壽 醉晋齋 書帖 題跋」을 입수하게 되어 成大中과 南玉의 自筆題跋의 내용을 밝힐 수 있었 다. 그리고 서예와 전각으로 이름난 澤 田東江이 통신사와의 필담창화를 엮은 자필 『傾蓋樂』 원본을 활용했는데 이것은 보기 드문 자료이다 . (12 ) 1811 년도(순조 11 년) 辛未使行은 이 른바 易地通聽으로 對馬島에서 國書 와 別幅을 교환하였다 . 본래 對馬島에서의 通勝건의는 新井白石으로 부터 시 작되 어 立原琴軒 • 中井 積善 등의 進言을 거 쳐 幕府老中 松平定信 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그 경위를상술하였다. 그런데 그 개혁의 주요원인 온 경비절약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13) 조선사절 이 도일 할 때 는 大阪에 서 京都에 울라가는 도중 반드시 紀 II 을 河船으로 왕복하였다 . 따라서 泥川과 통신사와는 관계가 깊다. 조 선 사절 이 탄 樓船(御座船) 을 그린 船圖居風과 1748 년 戊辰使行時 旋藩家 臣 渡邊善右衛門이 그린 聽使泥城來着圖를 상세히 소개하였다. 旋川온 토 사가 몰려 얕아지므로 그 준설에 힘썼는데 이 부역에 연도 주민들이 동원 되었다. 大阪港에서 河船으로울라오는 도중 平方(枚) 근처에 임진왜란 때 연행되어 온 조선사람이 정주한다는 晋州島 이야기와 조선인의 起著로 통 신사를 집대했다는 기사는 새삼 임진왜란을 연상하게 한다. (14) 통신사를 수행한 역관들의 노고를 잊을수는 없다. 특히 초기 사절 의 被樓人 崩還交涉에서의 공적울기려야 할 것이다. 본론에서는 譯科接目 에 의해서 12 회에 걸친 역관 전원 83 인의 인명록을 작성하였다. 조선어학
연구로 저명한 小倉進平 박사의 『朝鮮語學史』에 열거한 왜학 역관은 31 명에 불과하다. 그리 고 小倉 박사는 重刊捷解新語序 : 「速至丁卯通信之行使臣承 朝命往質…李滿譜序」라고 한 것을 가지고 李造이 통신사를 배명하여 방일 했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찰못된 해석이다. 康遇聖撰 『捷解新語』논 일본어 학습서로서 또 譯官科試에도 필수적인 교재였다 . 이 『捷解新語』의 성립 시 기를 둘러싸고 20 여 년 동안 일본 학자들이 考究해 오는바 아칙 그 정설 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저자는 金世派 撰 『海 椎錄』 에 명기된 〈金絶河 投金〉 事實과 『捷解新語』 卷 8 〈信使不受金〉 記 事가 완전 히 부합됨 을 발 견하고 이로써 그 성립 시기를 康遇聖이 세번째 사행 (1636 년)에서 돌아온 후일것이라고입증하였다. 그리고그〈金絶河〉기록을추구하던 끝에 「樣 路勝區圖」(韓國國立中央博物館 所藏) 속에 金絶河가 그려져 있는 것이 실 마리가 되어 從事官 曺命采撰 「奉使日本時聞見錄」 6 월 17 일 條에 〈午初 到 吉原館, 富士山正當前面而雲聲皆推全體畢露, 考之日記曾前使臣之所不能快 親也〉라고 한 것이 전기 F 椎路勝區圖」에 들어 있는 「富士山圖」 畵題 에 「吉 原館六月十七日望見富士山雪」이라고 한 것과 일치되므로 「 椎路勝區圖」는 畵員 李聖麟의 筆임을 입증하였다. (15) 통신사의 遺墨은 저자가 힘을 경주한 중요 분야이다. 통신사 일행 은 총 수 4 백 명이 넘는 대사절단이므로 巨利寺院을 숙사 또는 휴식처로 삼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淸見寺 • 福禪寺(對潮樓) . 本蓮寺 및 磨針嶺 등 지에는적지 않은 遺墨이 傳存하고 있다 . 저자는 이들 현존하는유목을 상 기 이외에도 收藏處와 古書店, 古美術店을 찾아 실물과 대면하면서 통신 사가 일본 땅에 남긴 약 50 점의 글씨와 그림을 收藏하기에 이르렀다. 물 론 이것은 12 회에 걸친 신사의 유묵의 수로 보자면 九牛一毛에 불과할 것 이다. 통신사와 연고가 깊은 옛 사원을 찾았을 때의 감동으로, 淸見寺에 남아 있는 신사유목에 관해서는 이미 본론에서 소개한 바 있지만 실은 그 철을 처음 찾아갔을 때; 맞이해 준 老住持 水野柏宗禪師는 山門에 걸린 「海東名 區」扇額올 가리키면서 저 필자가누구인지 몰라서 매우답답하다는것이었 다. 저자는 집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문헌들을 조사하는 중에 錦谷居士 라는 인물은 바로 辛卯年 (1711) 사행 때 上通事로 수행한 玄德潤임을 밝혀 냈다. 신사의 유목을명기한 抽稿別別本울 주지승에게 贈送했더니 수일 후 저자에게 「東海名區」의 필자를 판명할 수 있어서 고맙다는 서신을 보내왔 는데 이것은 14 년 전의 일이다. 뿐만 아니라 작자미상으로내려오던 작품
에 대해서도 문헌을 통하여 판명하였을때의 기쁨과 감격을 금할 수 없다. (16 ) 통신사의 기행록을 집대성한 『 海行抱載』는 통신사 연구에 불가결 한 중요 사료이다 . 현행 활 자본 『海行抱載 』 의 臺本인 筆寫本 28 冊이 國立 中央圖 書 館에 현존함을 확인하였댜 그리고 또 현행 『海行 抱 載』 에 수록되 어 있지 않았던 것과 새로 발견한 사료를 합하여 모두 24 편을 추가할 수 있었다. (17) 필담창화집은 초기의 사절부터 마지막 對馬島行禮에 이르기까지 총망라하여 182 편을 수록하였다 . 이 자료는 모두 저자가 管 見한 것으로서 그 내용과 소재처를 밝혀놓았다 . (18) 조선과 일본의 상호인식에 있어서 그 차아점을 밝혀보고자 했다. 일본의 對朝鮮觀을 살펴본다면 유학자와 문인들 사이에서는 조선문화와 학 자들에 대해서 敬慕의 念이 강했던 반면, 일부의 국학자들은 〈古事記〉와 〈 日本 書 紀〉의 고대전승에 의거하여 조선을 朝貢國으로 보는 의식어 저류 에 흐르고 있었다는 것도 엿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林羅山은 통신사의 〈客館〉 을 〈蕃館〉 으로 , 〈來聽〉 을 〈來貢〉 으로 표기했고, 中井積善온 神功皇 后遠征 이래, 조선은 일본의 속국으로 된 지 오래라고 했던 것이다. 한편 조선측에서는 선진 문화국으로서의 자부심이 컸고, 秀吉의 침략에 대한 宿怨으로 인해서 倭 音 , 倭賊 , 倭奴라는 표현으로 일관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雨森芳洲i는 倭라고 하지 말고 일본인으로 불러주기를 간청하게 되 었고 1764 년도 사행시에는 특히 이 점에 대해서 주의하도록 魄諭文까지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德川政權의 대조선관에 있어서 荒野泰典은 그의 『近世日本&東 7:,;7 』(第二部 近世日朝關係史硏究序說)에서 德川政權은 조선을 반드시 대 등한 〈 交隣 〉 • 〈通信〉의 상대 자로 본 것 이 아니 고 오히 려 조선통신사의 방일을 〈答禮〉 또는 〈入貢〉으로 간주했다고 생각된다는 점을 제기하고 있 다. 저자는 이 入貢視했다는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근거에 의해서 荒 野說을 반박하는 바이다. 즉 ® 交隣關係 復舊段階에 있어서 조선조정은 강화조건으로 먼저 家康이 國書를 보내와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고, 일본 측은 이것을 받아들여 家康名義의 국서를 보내음으로써 여기에 대한 조선 국왕의 국서(답서)를가지고 1607 년 제 1 회 사절 呂祐吉일행이 도일했다는 사실, ® 조선통신사 파견은 반드시 일본측의 초빙에 의거했다는 점, ® 조선과 일본의 국서 내용을 검토해 볼 메 어디까지나 抗禮에 입각하여 대 등한 수호를맺어왔다는 점, ® 통신사에 대한 거국적인 환영과정중한 환
대(日本勅使를 능가했다고 함), ® 일본 문사, 지식인들의 통신사에 대한 존경심과 통신사와의 교류를 종신토록 영예로 삼았다는 점. 자고로 朝貢 使라면 이처럼 대등한 항례로 접대한 예가 있었을리 만무하다. 다만 한 가지 조선측의 別幅(선물목록) 품목을 보면 人夢, 虎皮 約皮, 廣子, 維 殿, 莘布, 麻布 등의 수량이 많은 것으로 혹시 貢品이라고 오해했을는지도 모 르지만 이 선물품목과 수량에 관해서는 對馬島主가 중간에 서서 통신사의 방일을 이용하여 막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다량의 선물을 요청해 왔던 데에 기인한다. 또 조선과 일본(對馬島)과의 공무역 형태를 볼 때 對馬島 主는 조선 국왕에게 〈封進〉이라는 표현을 썼고 조선측으로서는 여기에 대 하여 〈下賜〉라는 말을 썼음을 볼 때 그 성격이 드러나고 있다. 즉 조선측 에서는 對馬藩을 조공국으로 견주는 의식이 저변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 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조선통신사의 도일을 조공시했다는 견해는 도저 히 용납할 수 없는 말이다. (19) 조선통신사 일 람표는 中村榮孝 교수가 작성 한 표를 토대 로 하여 製 述官 • 書記 • 譯官 • 寫字官 • 畵員 • 良醫 • 醫員 • 接伴僧 및 使行錄울 추가 보완했다. (20) 조선통신사 往還經路圖에 있어서 조선내 往還路는 往路와 回路가 구별되어 있다. 즉 왕환에 같은 곳을 경과하게 되면 그 연로 관민의 경비 부담이 과중해지므로 그것을 경감시키는 의미에서 왕환시에 각각 다른 길 울 경유하도록 조정의 지시가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 왕환 경로도를 작 성하는 데 있어서 현행지도에 없는 無極,崇善, 仇於,仁同, 長川院, 陰
竹 및 慶安온 金正浩 作 「大東輿地圖」에서 찾아내 보완하였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선린의교의 근간을 이룬 동신사에 관하여 그 성격, 목적, 사행의 역할, 교환의 실태, 필담창화의 내용, 상호인식의 정 도 • 일본에 끼친 문화적 영향에 이르기까지 문화교류 시점에서 규명해 보 았다. 금후 통신사 연구에 대한전망으로서는 『海行總載』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방일기행록을 집대성하는 것과 日本觀察의 精細를 期한 1636 년 副使 金世流 撰 『海樣錄』, 1655 년 從事官 南龍翼 撰 『扶桑錄』, 1764 년 正使 趙薇 撰 『海 椎日記』 등사행록을 일본어로 번역 간행하는 일을 중요 과제로 삼아야겠다.參考文獻 (1) 歷史關係 朝鮮王朝宜錄 : 宣祖 • 仁祖 • 孝宗 • 肅宗 • 英祖 • 純祖 • 正宗實錄. 通文館志 乾 • 坤 朝鮮史編修會編 昭和 19 年 增正交隣志 6 卷 奎章閣設書六 1940 年 致事撮要 1 卷 奎章閣殺書七 1941 年 備邊司膳錄 28 冊 國史編纂委員會 1960 年 邊例集要 上 • 下 國史編纂委員會 1970 年 譯科傍 目 2 卷 朝鮮司譯院編 朝鮮刊 大東輿地圖 金正浩著 韓國史學會 1965 年 影印 韓國史 : ® 近世前期篇 @ 近世後期篇 ® 最近世篇 乙酉文化社 1959 年 韓國史年表 震檀學會編 乙酉文化ifd: 1959 年 韓國史大觀 李丙 照 著 普文閣 1964 年 朝鮮文化史大全 靑柳南冥著 朝鮮硏究會 大正 13 年 日本神武開國新政(徐市東渡) 衛極生著 1950 年 한단고기 (徐市題名) 임 승국 역 주 정 신세 계 사 1986 年 增補文獻備考 上 • 中 • 下 明文堂 1959 年 朝鮮醫學史及疾病史 三木榮著 1963 年 人夢史 7 卷 今村柄著 朝鮮總督府專賣局刊 1934~1940 思文閣復刻 昭和 46 年 高麗史 3 卷 國書刊行會 明 治 42 年 混一强理歷代國都之圖 長崎縣島原市 本光寺常盤歷史資料館藏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龍谷大學圖書館所藏 (2) 海行捷載 • 使行錄 海行抱載 寫本 28 冊 韓國國立中央圖書館藏 海行捕載 活字本 4 冊 朝鮮古書刊行會 1914 年 국역 해 행 총재 12 冊 民族文化推進會 1974~9 年 黃愼 日本往還 日 記 奎章閣 東樣錄 • 靑丘學幾 11 號 所收 • 京都大學河合文庫 寫本 東樣 日 記 1617 年 副使朴棒著 寫 本 서 울大學校中央圖 書館藏 扶桑 日記 1655 年 正使趙市著 寫本 美國 Harvar dj;:學燕京學社 藏 日本紀行 1655 年 軍官李東老撰 寫本 天理大學圖 書館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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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物語 寬延 3 年 刊本 朝鮮通信使一行座目 寶曆 14 甲申年正月吉日 刊本 朝鮮人大行列記 延享 5 年刊本 朝鮮人來聽一件寫 廷享 5 年 寫本 朝鮮人關東養應聞書 寫本 朝鮮人來聽記 延享 5 年 寫本 朝鮮人登城次第 寫本 京都本國寺御養應 빴曆 14 年 寫本 朝鮮信使來朝歸机官錄 神戶岡方古文書刊行會 昭和 44 年 草茅危言 中井積善撰 5 卷 時習堂藏 中井竹山&草茅危言 梧垣國三郞 大正洋行 昭和 18 年 外蕃通書 近藤守重編 6 冊 寫本 平戶藩藏書 深見玄俗0)硏究 石村喜英著 雄山閣 昭和 48 年 柳營秘鑑脫漏 卷 1~12 寫本 洪世泰肖像 上下 1 軸 天保 4 年 安積良齋作 芳洲文庫藏 朝鮮人來聽七五三獻立難形 寫本 樂鄕紀聞 1 • 2 中川延良 鈴木榮三書 對馬夜話 東洋文庫 昭和 52 年 朝鮮聽禮使泥城來着固 渡邊善右衛門筆 京都大學圖書館藏 通信使關係資料展示會 目 錄 國史編纂委員會 1982 年 宗家文庫史料目錄(日記類) 宗家文庫調査委員會編 昭和 53 年 宗家文庫史料 目 錄 (記錄類 I ) 宗家文庫調査委員會編 昭和 57 年 宗家文庫史料目錄(記錄類 II) 宗家文庫調査委員會編 昭和 60 年 宗家史料 目 錄 東京大學史料編纂所 昭和 37 年 對馬古文書 目 錄 對馬鄕土硏究會 昭和 50 年 東華名公印譜 飛西堂 • 福原承明 自 刻 大阪府立圖書館藏 交隣提酸 1 冊 76 葉 寫本 享保 13 年 芳洲文庫藏 朝鮮人大行列記 寶曆 13 年 刊本 朝鮮人難波煙夢 1764 年 寫本 東人詩話上 • 下 翻刻 1687 年 安養寺仕寶 雜林捨遺 8 冊 刊本 芳洲文集 雨森芳洲全 書 二, 三, 關西大學東西學術硏究所紀要 昭和 5~ 芳洲口授 甘雨亭最 書 刊本 金銀兩座附朱座朝鮮人來蔣信使名 寫本 朝鮮人來朝 和韓捨遺 寫本 天和壬戌朝鮮人來朝御 目 見規式 寫本
巨暗山淸見典國禪 림g (J)歷史 市毛弘子 新人物往來社 昭和 49 年 馬上才異 l0( 長編小說) 篠田達明著 新人物往來社 昭和 63 年 歷史^0)招待 (2) NHK 朝鮮使節往캡 日本放送出版協會 昭和 54 年 歷史 F 수 .:,. x 、/ 卜 (8) NHK 朝鮮通信使始末 日 本放送出版協會 昭和 63 年 朝鮮人街道 江南良三著 近江八幡鄕土史會 昭和 61 年 對馬島藩朝鮮問答集 寫本 江戶時代0)朝鮮通信使 映像文化協會 每日新聞社 昭和 54 年 日 本0)fi力)0)朝鮮紀行 金聲翰著金容權譯 三省堂 1986 年 紀行朝鮮使0)道 朴春 日 著 新人物往來社 昭和 47 年 朝鮮通信使0)道춘f.: E5 旅 1984 年 朝鮮通信使의 발자취 金義煥著 正音文化社 1985 年 李朝0)通信使 江戶時代日本七朝鮮 李進熙著 講談社 昭和 51 年 江戶時代0)朝鮮通信使 李進熙著 講談社 昭和 62 年 前近代 & 日 本 &朝 鮮 朝鮮通信使0)軌跡 仲尾宏 明石書店 1989 年 德川吉宗 &朝 鮮通信使 片野次雄著 誠文堂新光社 1985 年 朝鮮通信使&紀州 和歌山市立博物館 昭和 62 年 朝鮮通信使 &江 戶時代0)人人 天理大學圖書館 昭和 62 年 朝鮮通信使-近世 2000 年0) 日韓文化交流 東京國立博物館 昭和 60 年 朝鮮時代通信使 國立中央博物館 三和出版社 1986 年 牛窓 &朝 鮮通信使 牛窓町敎育委員會 昭和 63 年 中山道守山宿(七五三0)膳) 宇野宗佑著 靑珪房 1984 年 旅行과 體驗의 文學 日本篇 민족문화문고간행회 1985 年 斗室餘商 (近世朝鮮의 對 日 通信使 -行과 文化交流) 李丙 熹 著 博英社 1975 年 近世朝 日 關係史 張承喆編著 江原大學校出版部 1987 年 (5) 韓日交流 日 鮮關係史0)硏究 上 . 中 , 下 中村榮孝著 吉川 弘文館 昭和 44 年 日 本 之 朝鮮 中村榮孝著 至文堂 昭和 41 年 朝鮮―風土 • 民族 • 傳統- 中村榮孝著 吉川弘文館 昭和 46 年 近代日鮮關係0)硏究 田保橋潔著 宗高書房 昭和 47 年 對外關係&文化交流 田中健夫著 思文閣昭和 57 年 近世日朝關係史0)硏究 三宅英利著 文獻出版社 昭和 61 年 近世日本&東 7沙 7 荒野泰典著 東京大學出版會 1988 年 日韓文化交流史0)硏究 芳賀登著 雄山閣 1986 年 朝鮮文化 & 日 本 李進熙著 朝鮮靑年社 1966 年 天理大學治수 훈 &硏 究所硏究報告 I 中村榮孛著 天理時報社 1 이 1年 ;
日鮮史話 4 冊 松田甲 原간房 復刻昭和 51 年 近世 日 朝通交貿易史0)硏究 田代和生著 創文社 昭和 56 年 文祿慶長役li::.:to l t;被勝人0)硏究 內藤隅輔著 東京大學出版會 1976 年 朝鮮史硏究 內藤魚輔著 京都大學文學部東洋史硏究會 1961 年 朝鮮學論考 藤田亮策著 藤田先生記念事業會 昭和 38 年 日本&朝鮮 旗田巖著 勤草書店 1965 年 日鮮淸0)文化交流 藤塚鄕著 中文館書店 昭和 22 年 淸朝文化東傳0)硏究 藤塚鄭著 國書刊行會 昭和 50 年 朝鮮支那文化0)硏究 京城大學法文學會編 刀江書院 昭和 4 年 星湖쁩說類選 李漢著 • 安鼎福編 古書刊行會 1915 年 星湖先生全集 李漢著 景仁文化社 1974 年 日 支交涉史話 秋山謙藏著 內外書籍 昭和 10 年 東亞交涉史論 秋山謙藏著 第一書房昭和 19 年 高麗李朝史0)硏究 有井智德著國書刊行會 昭和 60 年 東洋文化史硏究 內藤虎次郞著 弘文堂書店 昭和 17 年 朝鮮開化史 恒屋盛服著 博文館 明治 37 年 日鮮通交史附釜山史 岡媒三郞 釜山甲寅會 1916 年 機1i1i1寺內文庫0)硏究 山 口 女子大學歷史硏究室 昭和 51 年 歷史民族朝鮮漫談 今村柄著 南山哈社 昭和 5 年 日 本0)中0)朝鮮文化 全 50 號 朝鮮文化社 1981 年 看羊錄(日譯) 姜流著 朴鐘鳴譯注 平凡社 1984 年 戀瑟錄 ( 日 譯) 柳成龍著 朴鐘鳴譯莊 平凡fd: 1979 年 靑丘學幾 7 卷 國書刊行會復刻 昭和 46 年 鶴峯全集 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1972 年 西匡集 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檀紀 4291 年 靑莊館全書(국역청장관전서) 李德戀著 민족문화추진희 1978 年 靖鈴國志 李德戀著 寫本 東洋文庫所藏(金澤庄三郞舊藏) 靑城集 成大中撰 臘江出版影印 1985 年 柳下集 洪世泰撰 曆江出版影印 1986 年 韓中關係史硏究 全海宗著 一潮閣 1970 年 象吾紀聞 小田畿五郞著村田書店 昭和 54 年 韓日交流二千年 脫話堂 1984 年 아시 아의 歷史像 高柄翊著 서 울大學校出版部 1969 年 歷史地理增刊 朝鮮號 日本歷史地理學會 明治 43 年 宗家& 朝鮮 高橋章之助著 大正 .9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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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史硏究會論文菓 特渠 明 治百年之朝鮮 極束 2 t r占 1969 年 應永 外K&O)前後―中世.0)日鮮交 涉― 高木虹太郞 八木간店 昭和 17 年 新訂善隣國寶記 瑞溪和尙周鳳原著 • 中島鍊校訂 文求堂 昭和 7 年 玄界難i乙架 H t.:歷史―日朝關係0)光&影_ 差在彦 大阪멈籍 1988 年 李舜臣 & 秀吉 片野次雄著 誠文堂新光社 1983 年 韓 日 比紋文化硏究 第 1 輯 德成女子大學韓 日 比 紋文 化硏究所 1985 年 燕行錄選集 上. 下 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1960 年 陽村先生文集 權近著 朝鮮史料殺刊 13 1937 年 書物 同好會會報 書物 同好會 龍溪합舍 昭和 53 年 韓國古 文化論政(日本主要文庫所 藏朝鮮 本目 錄 ) 李弘稙著 植紀 4287 年 京都 0)渡來文化 仲尾宏著 淡交社 1990 年 日本朝鮮比紋史話 吉田東任著 國史講習會 大正 13 年 朝鮮前期對日交涉史硏究 李鉉涼著 韓國硏究院 1964 年 隨筆 朝鮮 上 • 下 寺田壽夫編 京城雜筆社 昭和 10 年 商忠舒難錄 二卷 二冊 釋南鵬編 申維翰增 lffill . 英祖 15 年己未座陽表忠祠刊 (6) 江戶時代關係 德 川 幕 府0)制度 小野淸著 • 高柳金芳校注 新人物往來jfd: 昭和 51 年 校訂江戶時代制度0)硏究 松平太郞著 柏 書房 1966 年 江戶時代史 上. 下 三上參次著 富 山房 昭和 19 年 江戶時代史 栗田元次 受驗講座刊行會 昭和 5 年 征夷大將軍 高橋富雄著 中公新 書 昭和 62 年 鎖國 日本0)歷史(1 7) 朝尾直弘著 小學館 1975 年 鎖國 加藤榮一 • 山 田忠雄編 有斐閣 昭和 56 年 元祿時代大石愼三郞著 岩波 書 店 1970 年 雨森芳洲 上垣外움一著 中公新書 1989 年 德川實紀 經濟雜誌社 明治 37 年 吉川弘文倍 昭和 39 年復刻 大阪人物誌 正 • 續 石田誠太郞著 臨川書店 昭和 49 年 近世大阪藝文幾談 大谷篤 藏編 大阪 藝 文會 昭和 48 年 江戶時代0)經世家 野村兼太郞著 夕 ' 4 + 壬 `/ Ffd : 昭和 17 年 琉球使者0)江戶上 b 宮城榮昌著 第 1 합房 昭和 57 年 岡本綺堂江戶 K 就'(O) 話 岸井良衛編 靑 珪房 昭和 31 年 德川時代史 岡本瓊二著 昭和 5 年 水戶學大系 七 三宅觀測 水戶學大系刊行會 昭和 17 年 近世日本 K 於납石支那俗語文學史 石崎又造著 弘文堂 昭和 15 年 陳元贊0)硏究 小松原 溝 著 雄山閣 昭和 47 年
튕趙籠中記 朝 日 文左衛門重章著 名古屋殺 합續編 9-12 卷 昭和 39-43 年 古事類苑(外交部) 神宮司廳編 吉 )II 弘文館 1969 年 江戶參府紀行 〉-示 )V 卜著 齋藤信譯 東洋文庫本 平凡社 昭和 42 年 白河樂翁公&德川時代 三上參次著 創元社 昭和 15 年 信長 • 秀吉 • 家康 辻善之助著 中央公論社 昭和 18 年 泥川 北尾鍊之助著 京阪電鐵會社 昭和 18 年 泥納所0)歷史 中村富三郞著沙文社 1972 年 泥川 井上俊夫著 三一 書 房 1957 年 續泥川 井上俊夫著 三一 書 房 1957 年 七力 %E 川 井上俊夫著 草思社 1979 年 泥川兩岸 宇治川 兩岸 暎 晴翁著 • 松川半山畵 柳原 書 店 昭和 53 年 京都府史蹟勝地調査會報告 西田直二郞 京都府發行 大正 8 年 攝津名所圖會大成 翻刻 柳原 書 店 尾張名所圖會 前編 7 冊 深田正紹著 天保 15 年 後編 5 冊 岡田啓 • 野口道直著 明治 13 年 野洲一國御用作 朝鮮種人夢0)歷史 熊田一著 0 0)葉 書房 昭和 54 年 德 )II 幕閣 藤野保著 中公新 書 昭和 40 年 豊臣秀吉 桑田忠親著 角川 書 店 昭和 40 年 江戶 & 北京 YEDO and PEKING by Robert Fortu n e 1863 三宅馨譯 廣川書店 昭和 40 年 先哲0)學問 內藤虎次郞著 弘文堂 昭和 21 年 萩生祖俠 山路愛山著 民友社 明治 26 年 近世史0)群像 北島正元著 吉川弘文館 昭和 52 年 德川政敎考 上. 下. 吉田東fJ.i著 富山房書店 明治 27 年 藤原恒腐集 . 國民精神文化硏究所 1938~39 年 足利時代史 田中義成著 明治 書 院 大正 12 年 東海道五十三次 槍崎宗重著 講談社 昭和 39 年 The Cap ital of the Ty c oon Rut h erfo r d Alcock London· 1863 年 日本 I Z:;fo l J o 三年問上 才-J V 그 、y 夕著 山澤種樹譯 講談社 昭和 24 年 Sta t e and Diplo macy in early Modern Jap a n : Asia in the Develop m ent of the Tokug a wa, Bakufu , Ronald P. Toby 1983 年 東海道五十三次 岸井良衛著 中公新 書 昭和 49 年 廢藩置縣 松尾正人著 中公新 書 昭和 61 年 江戶 O旅分野信 雄著岩波 書 店 1986 年 寧0 책 m述 AND JA PANESE LANDSCAPES 國際觀光協會 昭和 11 年
家康時代 上. 中.下. 德富猪一郞著 民友社 昭和 10 年 德川蓋府 上 . 中. 下, 德富猪一郞챔 民友社 昭和 10 年 元祿時代 上. 中, 下 . 德宮猪一郞著 民友社 大正 14 年 吉宗時代 德富猪一郞著 民友社 昭和 10 年 寶曆明和篇 德富猪一郞著 民友社 大正 15 年 文政天保時代 德富猪一郞著 民友社 昭和 10 年 常山紀談 湯浚常山著 有朋堂 大正元年 松平君山考 市橋鎔著 名古屋市敎育委員會 昭和 52 年 東西遊記 • 北窓項談 橘南 席衍著 永井-孝校訂 有朋 堂 大正 6 年 貝原益軒 井上忠著 吉川弘文館 昭和 38 年 伊藤仁齋 • 東lffi • 山崎闇齋 大 日 本思想全集 昭和 9 年 近世0) 日本 內田銀藏著 富山房 大正 8 年 近世新崎人傳 中野三敏著 每日新聞社 昭和 52 年 江戶時代漫筆 石井良助著 井上 書 房 昭和 34 年 江戶時代漫筆 續 石井良助著 井上書房 昭和 36 年 江戶 野村兼太郞著 至文堂 昭和 41 年 江戶時代0)武家0)生活 進士慶幹著 至文堂 昭和 36 年 德川十五代將軍總登 新人物往來社 昭和 52 年 神代0)文字 宮崎小八郡著 霞夕關書房 昭和 17 年 太田南敵 濱田義一郞著 人物殺書 吉川弘文館 昭和 38 年 一話一 言 上.下. 太田南敵 吉 )II 弘文館 昭和 3 年 學山錄 6 卷 藤原明遠撰 寬政 4 年(1 792) 僚堂遺文 上. 下. 松崎健五郞編 明治 34 年 先哲幾談 前後篇 全 8 冊 原念齋 文化 13 年(1 816) 先哲幾談 續篇 6 冊 琴臺東條先生著 明治 17 年 德川家康 山路愛山著 改造社 昭和 16 年 江戶三百年 西山松之助 • 芳賀登編 講談社 昭和 50 年 琉球國使節渡來0)硏究 橫山學著 吉川弘文館 昭和 62 年 長崎J: b 江戶1-r! Eng el bert Kaem pf er 著 • 衛藤利夫譯 國民 書 院 大正 4 年 硏 D군 }t,江戶參府紀行 Eng e lbert Kaenp fer 著 吳秀三譯 雄松堂 1966 年 藩政金井圓著 至文堂 昭和 3 年 江戶時代0)人人 森銃三著 大東出版社 昭和 17 年 江戶 & i머何力) 芳賀徹編 至文堂 昭和 60 年 林子平 永田衛吉著 講談社 昭和 18 年 戰國武功大名列傳 兒玉幸多編人物往來社 昭和 42 年 ·
國姓爺 石原道博著 吉川弘文館 昭和 34 年 唐人唄 & 看看踊 淡井忠夫著 東亞硏究譜 唐第五十四輯 江戶時代北島正元著 岩波書店 昭和 33 年 豊臣秀吉 鈴木良一著 岩波書店 昭和 29 年 先哲幾話 坂井松梁著 春敵堂 大正 2 年 歷史公論 江戶時代0) 交通&旅 雄山閣 昭和 52 年 浪華鄕友錄 毛必華先生輯 安永 4 年 (17 75) 改訂先哲穀談 原善 • 東條耕 松泉堂 明治 44 年 日本諸家人物誌 南山道人編 利涉堂粹 寬政 12 年(1 800) 江戶諸家人名錄 上. 下. 相見繁一 固盡刊行會 大正 7 年 浪華人物誌 四卷 岡本撫山著 藝苑彼書 平安人物誌 上.下. 弄翰子編 文政 5 年(1 822) • 天保 9 年(1 838) 宇下人言 • 修行錄 松平定信著岩波書店 昭和 17 年 安國寺惠瓊河合正治著 吉川弘文館 昭和 46 年 柄0)町並 福山市敎育委員會 1976 年 江戶時代史論 日本歷史地理學會 仁友社 大正 4 年 德川幕府時代史 池田晃淵著 早稱田大學出版部 明治 40 年 江戶時代史加藤淸司著 學術出版社 昭和 11 年 江戶幕府 日本歷史全集 11 講談社 昭和 45 年 澈戶內海0)歷史之文化 松岡久人編 昭和 53 年 增訂海外交通史略 辻善之助著 內外書籍 昭和 5 年 江戶時代風俗史 江馬務著 日 本文學ifd: 昭和 10 年 江戶時代史論 藤本嘉一郞著 平安書院 昭和 35 年 德川時代通史 井原儀著 大同館 大正元年 毛詩品物 Ill 致 3 冊 岡公翼纂輯 天明 5 年(1 785) 近世幾語 正續 8 冊 角田九華編 發行書燁 京三條通升屋町 出雲寺文次郞 弘化乙 巳(1 845) 江戶時代圖誌 全 25 卷 筑摩書房 1978 年 名家手簡 10 冊 香雪先生釣慕 天寧閣藏板 多波禮具佐 全 3 冊 雨森芳洲著 寬政元年(1 789) 筆0)寸훈 U 全 4 冊 菅茶山先生隨筆 安政 3 年(1 856) 秉糖錄 乾 ·坤 岡田新川著 寬政 7 年(1 795) 愛日樓文詩 佐藤一齋著 文政 12 年(1 829) 三國通覽圖說 林子平著 寫本 日 本人彦凍 日 夢連刊 昭和 43 年
展國日 記 以心 崇 傅 東 京 大學史料 編 篠所 1970 年 太田南軌菓 有朋堂 昭和 9 年 和漢人沒考 浪華 書 陣加賀屋 善 藏粹 文化 9 年 文字力) 5 見f.: 沖繩文化(l)史的硏究 塚田淸策 近世浪華文藝史談 水田紀久著 中尾松泉堂 昭和 61 年 7;;7 (l)未解讀文字 西田龍雄著 大修館 書 店 1982 年 大典禪師 小晶文鼎著 同朋舍 昭和 2 年 日 本經濟設書 4. 陶山純翁迫著 大證閣 大正 12 年 租探 • 春臺 • 竹山 • 芳洲 大日本思想全集 7 先進社版 昭和 6 年 鄭成功 石原道博著 三省堂 昭和 17 年 混池(第七號) 混池會 中尾松泉堂 昭和 56 年 近世先哲設談 3 冊 松村操編 明治 13 年 食陰集 5 冊 中井積善 松村文海堂 明治 44 年 親川詩紗 4 冊 草場個川著 嘉永폿丑(1 853) 町人社會(l)學藝 & 懷德堂 宮本又次著 文獻出版 昭和 57 年 紅葉山文庫&書物奉行 森潤三郞著 昭和書房 昭和 8 年 (7) 新井白石關係 新井白石全集 全 6 卷 國합刊行會 明治 40 年 原本 昭和 52 年 復刻 新井白石日記 上 • 下 岩波 書 店 昭和 28 年 讀史餘論 村岡典嗣校訂 岩波文庫本 昭和 11 年 國書復號紀事 寫本 坐間筆語 • 江關筆談 刊本 白石筆談二種 寫本 西洋紀聞 村岡典嗣校訂 岩波文庫本 昭和 11 年 市廢(新井白石 • 歷史長編小說) 藤澤周平著 講談社 1989 年 白石遺文捨遺 上 • 下. 甘雨亭幾書 弘化 3 年(1 846) 白石遺文 上·下 . 甘雨亭穀 합 弘化 3 年(1 846) 木門十四家詩集 上 • 中 • 下 甘雨亭縱 왑 弘化 3 年(1 846) 玉考寫本 白石手簡 膳本 4 冊 白石詩草 正德壬辰仲春 刊本 白石詩草 正德二年刊本後担 刊本 白石詩草 寬政 8 年 刊本 白石先生餘稿 3 冊 京都書林 寬政元年 (1789)
新井白石骨董雜談 活字本 白石先生年譜 三田 徐 光著 白石社 明治 14 年 新井白石 山路愛山著 民友社 明治 27 年 新井白石 足立栗園著 掌華房 明治 30 年 新井白石 武島羽衣著 博文館 明治 32 年 新井白石 言 行錄 渡邊修二郞著 內外出版協會 明治 41 年 興國0)偉人新井白石 上田萬年著 慶文堂 大正 6 年 新井白石言行錄 藤森花影著東亞堂書房 大正 5 年 新井白石0) 3 TJ `./ . > 口 _于 吉野作造 著 元 k 社 昭和 30 年 白石 • 諭吉 羽仁五郞著 岩波書店 昭和 12 年 新井白石 伊豆公夫著 白揚社 昭和 13 年 新井白石0)歷史學 勝田勝年著 厚生閣 昭和 14 年 新井白石 尾 崎盛 三著 靑梧堂 昭和 17 年 新井白石0)世界地理硏究 帖澤信太郞著 京城社 昭和 18 年 白石&祖探&春 臺 中村孝也著 萬里閣刊 昭和 17 年 晩年0)新井白石 多賀義憲著 北光 書 房 昭和 18 年 新井白石 古 )II 哲史著 弘文堂 昭和 28 年 新井白石序論 宮崎道生著 吉 )1| 弘文館 昭和 51 年 新井白石0)硏究 宮崎道生著吉川弘文館 增訂版 昭和 51 年 新井白石 宮崎道生著 至文堂 昭和 32 年 定本折f: <柴 0)記釋義 宮 崎道 生著 至文堂 昭和 39 年 新訂西洋紀聞 宮崎道生著 平凡社 昭和 43 年 新井白石0)洋學&海外知識 宮崎道生著吉川弘文館 1973 年 新井白石0)時代&世界 宮崎道生著 吉川弘文館 昭和 50 年 新井白石0)人物&政治 宮崎道生著 吉川弘文館 昭和 52 年 新井白石0)現代的考察 宮崎道生編 吉川弘文館 昭和 60 年 新井白石&思想家文人 宮崎道生著 吉川弘文館 昭和 60 年 新井白石斷想 宮崎道生著 近藤出版社 昭和 62 年 新井白石0)學問&思想 勝田勝年著 雄山閣 昭和 48 年 折f: <柴 0)記 羽仁五郞校訂 岩波文庫本 昭和 14 年 新井白石&切支丹屋敷0)夷人 岩井薰著 一粒社 昭和 9 年 新井白石鬪、0)肖像 入江隆則著 新潮社 昭和 54 年 新井白石0)文治政治 栗田元次著 石崎 書 店昭和 27 年 新井白石關係文獻總 覽 日比谷圖 書館 大正 15 年 新井白石 日本思想大系 35 岩波 書 店 1975 年
新井白石菓 猪谷善一著 誠文堂新光社 昭和 16 年 江戶時代0)經世家 新井白石 野村兼太郞著 夕 2 1 누끈`/ F 社 昭和 17 年 新井白石先生誕辰記念講話 史學界 6 卷 3 號 附錄 明治 37 年 鳳鳥不至 新井白石逸事 吉川幸次郞著 新潮社 昭和 46 年 新井白石 日本0)名著 15 中央公論社 昭和 44 年 新井白石集 日本0)思想 13 筑摩書房 1970 年 (8) 儒學漢詩 日 本漢學年表斯文會編 大修館書店 昭和 52 年 1需 海(儒者名鑑) 杉村顯道編大久保書院 昭和 50 年 紀州藩儒者李梅溪父子資料 平岡繁一著 昭和 60 年 日 本朱子學 & 朝鮮 阿部吉雄著 東京大學出版會 1965 年 李退溪 阿部吉雄著 文敎書院 昭和 19 年 人文科學紀要 26 輯 阿部吉雄著 東京大學出版會 1961 年 近世日本0)儒學 德川公繼宗七十年祝賀記念會編 岩波書店 昭和 1~ 紀사 ’ ,0)藩學 松下忠著 鳳出版 昭和 49 年 近世漢學.書誌&書評 水田紀久著 樓楓社 昭和 63 年 日 本儒學史 安井小太郞著 富山房 昭和 14 年 近世儒林編年志 齋藤悳太郞書 全國書房 昭和 18 年 禪林文藝史譯 上村觀光著 大鑑閣 大正 8 年 江戶後期0)詩人t.:: t, 富士川英郞著 筑摩書房 1973 年 菅茶山 富士川英郞著 筑摩書房 昭和 56 年 菅茶山 & 頓山陽 富士川英郞著 東洋文庫本 平凡社 昭和 46 年 仁齋 • 祖探 • 宣長 吉川幸次郞著 岩波書店 1975 年 儒學춘冷 〈•'1.,東洋思想史 〈〈韓)) 53 號 東京韓國硏究院 昭和 51 年 福山藩0)文人誌 濱本鶴賓著 兒島書店 1988 年 埋腐先生文集 藤原爲經編 享保年序刊 • 藤原怪腐集, 上 國民精神文化硏究所 昭和 16 年 大學章句纂釋 古賀精里編 文化 9 年(1 812) (9) 捷解新語 • 諺文 A 音政 李崇寧著 서울大學校論文集 1956 年 서 울大學校文理大學報 V-2 1957 年 增訂朝鮮語學史 小倉進平著 刀江書院 昭和 15 年 增訂補注 朝鮮語學史小倉進平著 刀江書院 昭和 39 年 捷解新語 國語索引付 京都大學國語國文學硏究室 昭和 32 年
倭語類解 國語索引付 京 都大學國語國文學硏究室 昭和 33 年 重 刊 改修 捷解新語 國語索引付 京都大學國語國文學硏究 室 昭和 35 年 隣語大方國語索引付 京都大學國語國文學硏究室 昭和 38 年 捷解新語文釋 國語索引付 京都大學國語國文學硏究室 昭和 38 年 全一道人0)硏究 國語索引付 京都大學國語國文學硏究室 昭和 39 年 弘治五年 朝鮮板伊路波 國語索引付 京都大學國語國文學硏究室 昭和 40 年 交隣須知 國語索引付 京都大學國語國文學硏究室 昭和 41 年 異本隣語大方 • 交 隣須知 國語索引付 京都大學國語國文學硏究室 昭和 42 年 異本隣語大方 • 交隣須知補 國語索引付 京都大學國語國文學硏究室 昭和 44 年 朝鮮物語木村理右衛門 國語索引付 京都大學國語國文學硏究室 昭和 45 年 兒學編 • 日語類解 • 韓語初步 國語索引付 京都大學國語國文學硏究室 昭和 46 年 捷解新語三本對照 本文篇 國語索引付 京都大學國語國文學硏究室 昭和 47 年 捷解新語三本對照 釋文 國語索引付 京都大學國語國文學硏究室 昭和 48 年 改 修捷 解新語 國語 索 引付 京都大學國語國文學硏究室 昭和 62 年 朝鮮資料&中世國語 安田章著 笠間 書院 昭和 55 年 訓民正音解例本 朝鮮語學會影印 檀紀 4279 年 朝鮮司譯院 日 滿蒙語學書斷簡 京都 大 學藏版 大正 7 年 東方言語史 幾考 (朝鮮司譯院日滿 蒙語學書斷簡解說) 新村出著 岩波書店 昭和 2 年 朝鮮資料 K J: 5 日 本語硏究 濱 田 敦著 岩波書店 昭和 45 年 續朝鮮資料 K J: 5 日本語硏究 濱田 敦著 臨川書店 昭和 58 年 (10) 書畫墨節 槿域 書畫徵 吳世昌著 國書刊行會 昭和 46 年 再版 古 畫備 考 朝岡興禎輯 太田證增訂 弘文館 明治 37 年 畫 史會要 法眼春 卜一翁集 寬政 4 年(1 751) 槿域印萩 吳世昌 編 韓國國會圖書館 1968 年 韓國書畫人名辭書 金榮胤縱 藝術春 秋社 1974 年 朝鮮古 書畫總覽 李英介著 思文 OO 昭和 46 年 韓國 書藝 史 金基昇著 正音社 1975 年 韓國繪畫大觀 劉復烈編 三正出版社 1973 年 槿墨 上 • 下 成均館大學校博物館編 靑 文社 1981 年 朝鮮0) 繪畫― 日本 K 希石高 麗 李朝0)作品― 大和文華館 1973 年 日 本속의 韓 畫 李東洲著 瑞文堂 1974 年 韓國繪畫史論 李東洲著僞話堂 1987 年 朝鮮0)繪 • 日本0) 繪 山內長三著 日本經濟新聞社 昭和 59 年
韓國柏盡史 安輝浦著 一志社 1980 年 韓國箱盡史 安輝游著藤本幸夫 吉田宏志譯 吉川弘文館 昭和 62 年 日本南 班史 山內 長三著 琉璃합房 昭和 56 年 李朝0) 箱證 坤月 軒그 k 夕 :./ 3 :./ 富 山 美術館 昭和 60 年 李朝0) 給盡 酒川子그 k 夕 ·노 크 •. / 大和文華館 1986 年 南 禪寺 0)名 寶 南禪寺 昭和 58 年 狩野山樂 & 山 雪 集英社 日 本美術繪盡全集 12 昭和 51 年 韓國繪盡 韓國名盡 近五百 年展圖錄 國立中央博物館 1972 年 韓國繪證未公開繪盡特別展 韓國國 立中央博物館所 藏 茶山閣 197 7 年 韓國歷代名人筆蹟 金錫培 編著 係仁文 化社 1975 年 對馬0)美術 福岡縣文化會館 昭和 53 年 日 本繪證調査報告書 昌德宮所藏 文化財管理局 1987 年 近世 繪盡史 藤 岡作太郞著 創元ird: 昭和 16 年 古美 術 50 三彩社 昭和 51 年 日 本 繪盡 名作展.=:. .:L._ 3 _ 夕 . ,'{7° 1) `) 夕 ? 4 7 弓 ) _所藏 神戶市立博物館 1987 年 浮世繪名作展 大英博物館所藏 朝 日 新聞社 1985 年 韓國美術全集 11 書藝 任 昌淳編 同和出版公社 1975 年 朝鮮時代宮中服飾 文化財管理局 1981 年 正 倉院展 目 錄 國立奈良博物館 1974 年 正 倉院展 目 錄 國立奈良博物館 1980 年 世界美術全 書 18 卷 朝鮮篇 韓國美術 3 李朝美術 講談社 古今居風特選圖錄 (9. 朝鮮使節來朝圖昇風) 思文閣 昭和 56 年 (11) 人名辭典 • 藏書 目 錄 增補 東洋文庫朝鮮本分類 目 錄 國立國會圖 書 館 昭和 54 年 大阪府立圖 書館藏 韓本 目 錄 大阪府立圖 書館 昭和 43 年 讀史備要 東京大學史料編纂所 講談社 昭和 41 年 國朝人物志 安鍾和編 明文堂 1983 年 朝鮮人名辭 書 朝鮮總督府編 第一 書 房 昭和 12 年初版 昭和 52 年 復刻 韓國人名大事典 新丘文化社 1967 年 善本解題 韓國圖 書 館學硏究會編 景仁文化社 1975 年 古義堂文庫 目 錄 天理大學圖 書 館 서울大學校開校二十周年記念 展示圖 書 目錄 서울大學校圖 書 館 1966 年 韓國古書綜合 目 錄 韓國國會圖書館 1968 年
고서목록 국립중앙도서관 1971 年 國舊總 目 錄 岩波書店 1963~76 年 樓lilil寺內文庫圖書 目 錄 寺內文庫 大正 11 年 小倉그 V 夕沙크`/目錄(油印本) 47 居其齋筆山水 84 日本使節接待圖 二千六百年歷史展覽會目 錄 (朝鮮國 書) 大阪每日新聞社 昭和 15 年 朝鮮關係資料目錄 1. 日本文 篇 國立國會圖書館參考書誌部 1966 年 雨森芳洲文庫 目 錄稿 關西大學東西學術硏究所紀要 第 10 輯 蓬左文庫朝鮮本展觀 目 錄 朝鮮學會 昭和 32 年
기 綱引 318 江戶登城 38, 330 江戶時代 38, 325 江戶參府 326 格軍 42 慶賀使 51, 132 科擧制度 64 關白 21, 112, 308 關白承襲告慶差倭 41 關原戰 12, 29, 301 國 書 14, 34, 42, 46, 113, 215 金絶河投金 289, 302, 304, 305, 306 騎船將 41 己 亥東征 24 L 落點 263 樓船 315 E: 堂上譯官 41 唐人雅木 321, 322 唐子踊 130 大慶參判使 41 對馬島易地行禮 14, 260 對馬島主 21 德川幕府 13, 51, 112 德川三宗室 45 刀尺 41, 90, 196 都訓導 41 東海名區 289
□ 馬上才 41, 45 幕蕃體制 13 問慰行 289 文引 298 닙 俳句 294 別破陣 41 別幅 14, 35, 113, 215 卜船將 41 副使 41 人 寺內樓團文庫 63 事大交隣 12, 21 司譯院 314 謝恩使 51, 132 寫字官 41, 53, 58 上通事 41 書記 41, 58 徐福村 95 釋 82 小童 41 小通事 196 送職參判使 41 鎖 13 別還使 13, 34, 290 修職參判使 41 水 213, 317 Spe n cer collect ion 402 襲職賀使 13
式年試 283 信使紀行錄 291 信使不受金 280, 304 信薔 130 室町幕府 24 。 阿蘭陀甲比丹 51 押物通事 41 良醫 41 燕行使 12, 51 迎賜參判使 41 倭冠 12, 22 倭譯官 279 論告文 291 柳 )II 一件 101, 186 醫事問答 69 醫員 41, 58 異國文字 105 理馬 41 以配菴 37, 43 人薔 42 仁祖御筆 45 日光廟 306 日 本國大君 38, 101, 189 日本刀歌 92 林大學頭一覽表 109 x: 子弟軍官 41 接伴僧 63 接 108
正使 41 征夷大將 軍 38 正倉院 75, 123 製述官 41, 53, 58 朝鮮通信使一覽表 39, 40 趙泰億肖像 171 助鄕 318 足利幕府 12, 21, 22, 25 從事官 41 浚深 318 重母音字 297 增廣試 283 次*上 通事 41 天爵堂 182 薰 中禪師 220 七五三膳 141 E 通信使 12 通信使行列圖 400 通信使紀行錄 404 通信使往還經路 334 通信使遺墨 339 通信使印譜 398 通信使請來差倭 41 通信使護送差倭 41 通信使護行差倭 41 立 約皮 42
被捕人 51, 289 筆談唱和集 411 _O_ 韓大年先生故紙蒙 253 海東靑 270
興 46 虎皮 42 和歌 294 畫風 272 畫員 41, 53, 58 孝宗御筆 45
7 加藤淸正 32 江南良三 44 岡島明敬 65, 75, 79, 86 江馬務 89 姜柏 296 岡本花亭 266, 275 姜信流 313 康 14, 280, 281, 283, 299, 301 , 314 姜消賓 .10 5 姜在彦 16 岡田新川 219, 241 岡田精司 44 江村北海 173 姜抗 29 姜弘重 93, 101, 291, 293, 300 芬元澄 230 皆川洪園 235 慶 34, 291 桂巖 213 高橋正 163 高木眞太郞 24 古賀精里 15, 266 谷村一太郞 24 坤月幹 396 管野裕臣 298 棟園 396 歐 82 具滋均 155 龜井魯 241, 420 宮崎道生 16, 144 , 150, 170, 174, 273, 261
宮崎市定 170, 179 宮源維翰 417 宮城榮昌 51 權近 176 權道 70 權ti\ 109, 411 規伯玄方 36, 93, 348 橘智正 30, 33, 35 今村柄 16, 269, 323, 400 金澤庄三郞 333 奇斗文 70 祗園南海 63, 135 旗田統 325 吉田宏志 157, 353, 384 吉田松陰 326 吉川幸次郞 150, 174 金巨源 22 金健瑞 282 金啓升 194, 196, 202, 341, 352, 370, 382, 390 金光酒 70 金克柔 24 金護行 280, 284 金綺秀 104 金東漠 303 金得臣 98 金龍 22 金萬亨 367 金明國 339, 343, 378, 388 , 394, 395, 397 金敏洙 297 金士衡 164 , 177
金相玉 209 金相翊 208 金善臣 263, 273, 276, 358, 398, 421 金誠一 26, 27, 315, 406 金世源(洞漠) 35, 45, 67, 101, 104, 339, 344, 376, 380 金時撲 281, 286, 289, 395 金榮胤 384 金完鎖 300 金有聲 209, 213, 239, 251, 358, 384, 395, 396, 398 金允植 400 金義信 388 金義煥 16 金履喬 88, 262, 263, 376 金仁謙 61, 63, 79, 81, 208, 217, 244, 246, 250, 259, 356, 383, • 384 金逸 22 金正喜 276, 330 金指南 54, 124, 125, 281, 284, 318 金直 29 金天秀 194, 387 金漢重 72 金頭門 159, 181, 281, 286, 406 金弘喆 282 金孝舜 30 L 那波魯堂 56, 218 那波利貞 214 羅興儒 22 南斗옷 72
南部南山 135 南聖重 82, 383, 394 南玉 58, 63, 66, 79, 91, 157, 208, 217, 257, 355, 383, 390, 396 南龍翼 53, 67, 107, 340, 341, 382, 390 南泰耆 191, 383, 390 內藤集輔 16, 289, 406 內藤虎次郞(湖南) 51, 167, 177 內山之明 231 E: 多治比郁夫 233 大江資衡 419 大岡春卜 196 大浦晴子 45, 107 大方和尙 139 大友信一 302 德川家康 35 德川家齊 270 德川家重 191 德川家治 207 德川光國 140, 333 渡邊悳 228 渡門 320, 321 渡埃 239 稱生若水 70 稱垣國三郞 55 島津義弘 25, 28 藤原明遠 297 藤田明 15 藤塚隣 15, 205, 248 , 274, 276, 졌 O
己 Ronald P.Toby 16 輯山陽 275 □ 梅原猛 95 木貞貫 219 木村兼西堂 223, 245, 331 木下菊潭 63 木下順庵 14, 63, 135, 150, 413 木下實聞 296 文弘續 105 t::I 朴敬行 100, 202, 379, 383, 390 朴慶後 112 朴大根 100, 280, 281, 283, 289, 314 朴德源 295, 365 朴淳之 22 朴東普 160 朴瑞生 24, 25, 323 朴安期 106, 341, 376, 382, 388 , 393, 341 朴棒 407 朴再興 113, 281, 284 朴齊家 205 朴址源 86, 332 朴弘長 27 朴希根 29 反田茂雄 402 芳賀lt 16 白士立 69, 411
梵明 22 卞文圭 282, 287, 387, 395 卞撲 211, 213, 252, 324, 357, 378, 384 卞承業 284 別宗 139 別宗祖緣 350 別宗祖緣和尙 186 福島邦道 296 服部寬齋 63, 135 福原尙條 245, 398 富士川英郞 223 富維章 224 北屋鏡之助 321 濱田義一郞 57 人 寺內正毅 400 思文閣 397 酒川子 397 山內長三 206, 288, 377 山鹿素行 325 山田裕嗣 398 山縣伊三郞 400 山縣周南上몸 387 三木榮 16, 69 森上 修 245 三上參次 15, 46 森田武 300 三宅觀 135 三宅觀測 63, 84 三宅橘園 266, 273, 422 三宅英利 16, 265
三浦周行 15, 400 桑原武夫 174 上田秋成 58 徐居正 107 徐慶元 195 徐命隅 405 徐市(福) 91 西山健甫 145 徐有大 81, 210 西田龍雄 105 西田直二郞 321 西 )11 宏 131 西 )II 如見 327 石崎文造 133 石原道博 22 石川大山 379 石 )II 丈山 109 石川豊信 98 石村喜英 149, 162 仙樓 65, 229 石 )II 丈山 411 涉井平 219, 220 成大中 58, 63, 79, 91, 97, 208, 217, 221, 246, 250, 254, 259, 311, 354, 382, 383, 331, 398 成夢良 387 成伯圭 386 成院 70, 83, 141, 144, 150, 171, 341, 388 細合斗南 219, 245 小笠原忠固 266 小西行長 27, 28, 29
小松原 薔 292 小林茂 319 小 倉 進平 289, 301, 311 孫文~ 30 松崎棟堂 15, 87, 266 松崎祐之 66 松雲大師(惟政) 12, 30, 32, 99, 289, 411 松田甲 15, 45, 74, 83, 15·3 松平君山 219 松平定信 260 松浦 霞沼 135 宋希璟 24, 25, 315 薇本莊五.a~ 395 狩野山雪 101, 345 狩野常信 171, 345 狩野探幽 402 水田紀久 187 水戶光國 70 崇傳 36, 348 承免 30, 32 市毛弘子 341 申景浦 297 辛基秀 397, 401 新山退甫 81, 248 申叔舟 12, 25, 315, 406 信原 修 · 408 猶原篇洲 135 申瀋 106, 341, 393 申維翰 54, 60, 65, 66, 67, 96, 131- , 157, 217, 269, 296, 297, 311, 327, 3fr7 , 38' ) 申潤福 98
新井白石 14, 31, 46, 63, 65, 79, 84, 93, 101, 135, 144, 145, 150, 162, 189, 260 室鳩菓 63, 135 深見玄貸 14, 63, 97, 164 沈惟敬 27 沈載完 62 。 阿部吉雄 16 安祥 · 22 安僕徽 284 安田章 295, 302, 311 安井澄彦 420 安輝浦 22 若木太一 58, 109 楊方亨 27 梁需 22 嚴漢重 79 呂祐吉 13, 34, 35, 100, 290, 315 蓮潭 347 鈴木傳藏 207, 295 永田衡吉 57 吳慶錫 94 吳大齡 209, 244, 282, 286, 310 吳世昌 398 吳允謙 36, 100, 290, 291 吳 395 奧村政信 403 玉 37 雨森芳洲 31, 59, 65, 77, 135, 163, 170, 261 宇野明霞 298
宇野宗佑 195 羽川藤永 403 雲堅和尙 351 熊澤蕃山 325 元良和尙 341 源文虎 356 元重擧 56, 63, 79, 208, 217, 244, 250, 259, 330, 331, 384 衛提生 92 梧崎宗重 403 柳達源 210 劉復烈 379 柳相弼 263, 264 柳成龍 26, 128, 406 劉維翰 232 有井智德 22 兪場 107, 341, 376, 382, 394 維天 213, 222 柳川調信 25, 28, 32 柳川趙興 32, 36 柳返 383, 390 尹順之 106, 291, 376 尹仁甫 314 尹g止完 112, 138, 141 栗田元次 16, 144 李起龍 106, 396 李吉儒 ,90 李i& 311, 312 李朋齡 139, 144, 388 李德戀 331, 370 李東郭 66, 76, 97 李東洲 17, 384
伊藤梅 387 伊藤長胤 ' 333 伊藤仲導 225 李梅溪 170 李勉求 263 李勉玄 360 李命啓 379, 390 李明彬 107 李明彦 376 李明五 275 李茂 164, 177 李文長 291 李邦彦 158, 166, 171, 181, 341, 379, 383, 385, 387, 390 李丙照 17, 226, 245, 330, 333 李鳳煥 89, 192, 379, 383, 390 李石門(景稷) 290, 300 李誠國 101 李 78, 192, 196, 352, 377, 396 李 l 卒光 95 李壽長 159 李崇寧 300 李彦網 112, 153 李彦項 87, 209, 244, 251, 282, 287 李英介 384 李藝 24 李完用 400 李佑成 27 李元植 216 李義養 264, 378, 397 李爾芳 161, 351, 395 李漠 204, 329
李仁 培 208 李宗誠 28 李佐國 72, 208 李眞榮 170 李進熙 16, 385 李哲戀 375 李退溪 83 李海文 81, 210, 384 李瓚 65, 70, 156, 166, 184, 351, 3ff l, 389, 394 李顯相 263, 273, 362 李蒼 165, 177 李希萬 29 人見友元 53, 150, 414 任統 37, 45, 101, 306 林羅山 14, 26, 53, 83, 99, 411 任守幹 79, 96, 150, 158, 174, 181, 189, 383, 385, 394 林述齋 15, 88, 266 林子平 57, 325 入江隆則 144 x: 柴野栗山 219 柴田豊祗 395 張應斗 66, 70, 396 長節子 298 長正統 295 齋實 400 前間恭作 333 全繼信 30 田代和生 16, 36
田保橋潔 15, 47, 261 全榮 395 前田久 398 田中健夫 16, 22 田)||孝三 333 全海宗 51 鄭斗俊 70 鄭來儒 154 鄭夢周 12, 22, 171, 406 井上俊夫 319 井上忠 126 鄭成功 206 鄭認文 396, 402 鄭뾰 36, 290 鄭昌周 65, 86, 159, 175, 280, 281, 282 丁好寬 34, 100 鄭后儒 406 鄭希得 28 趙綱 106, 311 趙景安 295, 363 曹命采 89, 191, 311, 378, 383, 390 朝尾直弘 17 趙崇 壽 71, 192, 297 趙承福 302 趙 60, 81, 94, 96, 122, 156, 207, 208 , 315, 324, 404 趙玉坡 353 趙泰億 79, 96, 150, 156, 158 , 171, 181, 186, 189, 417, 341, 348, 349, 382, 383, 385, 387, 394 趙~ 107, 341, 382, 394, 407 足利 義 滿 22, 24
足立栗liJ 145, 172 宗 義 功 265 宗義成 36 宗義調 25 宗義智 25, 28, 35 宗義暢 207 仲尾宏 17 中山久四 RF 108 中井積善 55, 217, 261, 327 中村三 實 245, 398 中村榮孝 15, 21, 24, 34, 37, 53, 301 中村眞一郞 275 池田南漠 66, 297 秦東益 263, 282, 288 , 360, 389, 394, 395 陳原質 293 圈 385 澄堂文庫 397 天 槍浪居士洪來 386 靑山定雄 171, 179 靑柳南冥 333 淸田 僧 斐 219 草場偶川 15, 266, 274, 275 村上競光 36 村上回男 265 村井章介 24 崔北 201 崔尙蝶 164, 281, 285, 385 崔薛仁 312 崔義吉 100
4
崔天宗 207, 211, 295 崔鶴齡 192, 209, 280, 282, 287, 312 秋山謙藏 24 笠常薰中 220 E 灘尾弘吉 395 太宰純 417 太田南敵 57, 133 太田靑丘 26 澤田東江 79, 245, 254, 398 土肥霞洲 I 63 立 色薰 57 貝原益軒 70, 83, 126, 333 片山北海 63, 223 片野次雄 17 豊臣秀吉 21, 25 皮宗鼎 389 E 荷潭 347 河宇鳳 204, 408 辻善之助 15 韓時覺 396 韓天錫 282 韓天 壽 252, 355 咸世輝 396
咸節健 396 向井槍洲 135 許放 26 玄德淵 193, 294 玄德潤 161, 281, 286, 289, 341 玄蘇 26, 27, 34, 93, 186 玄泰翼 209, 283, 286 脇坂董 266 洪景海 191, 341, 296, 310, 406 洪湖 77 洪啓禧 191, 341, 383, 390, 405, 406 洪大容 86 洪善輔 384, 390 洪世泰 53, 124, 126, 139, 144 , 150, 153, 154, 157, 171, 217, 285, 340, 341, 345, 388 , 395, 414 洪舜明 281 洪舜衍 64 洪禹載 113, 124, 127, 136, 281, 284 弘中芳男 168, 179 洪致中 406 洪喜男 105, 200, 281, 283, 289, 314 黃僕 27 荒野泰典 16 黃允吉 12, 26, 27, 37, 53, 69, 306, 315 黃栗 37, 53, 101, 315 黃后成 195, 286, 362, 395 橫山學 51
7 加老島 43, 334 潤松美術館 378 江尻 335 岡崎 44 岡崎市 廣忠寺 395 岡山牛窓本蓮寺 392 江戶 44, 57, 113, 158 , 191, 207, 335 見付 335 鎌새 43, 334 京都 25 京都大學 固書館 321 京都藤井有隣館 215 京都伏見 319 京都伏 見 城 290 京都本國寺 66, 109 京都思文閣 397 京都二條城 4-02 慶山 335 慶安 35 慶州 334 埋 292, 315 高德寺 291 古義堂 文 庫 387 筑波大學圖書館 380 廣州 335 廣忠寺 289 棟山 335 仇於 334 國立서울大學校 中 央圖書館 379 國史編纂委員會 所藏 376 近江J瓚西本願寺別院 • 394
今須 334 金絶河 377 岐阜愚 溪寺 395 紀伊州熊野山 93 吉原 335 吉田 335 L 南禪寺 186 納所村 321 尼崎 315 E: 大邱 335 大磯 335 對馬島 13, 191 大井川 44 大津 334 大 334 大坂 43 大阪府立 圖書館 244 大坂府立中之島 圖書館 386 大坂/\軒屋 319 對湖樓 341 大和文革館 341, 388 稽澤市禪源寺 395 圖 43, 128, 207 東京國立博物館 380 東京藝術大學 394 東京韓國硏究院 394 東來 334 東洋文庫 379
藤枝 335 藤澤 335 2 藍島 43, 70, 126, 207 □ 馬入 44 磨針嶺 44, 60 望湖堂 44 望湖亭 244 名古屋 蓬左文庫 272 名古屋別院 398 名古屋新井家 384 明石 334 鳴海 334 名護屋 334 毛良 334 木會 44 無極 334 聞慶 334, 335 密陽 335 仁 l 兵庫 43, 207, 315, 339 柄浦 128, 392 柄浦福禪寺(對潮樓) 390, 395 伏見城 12, 30, 32, 36 福禪寺(對湖樓) 341 本光寺 常盤歷史資料館 179 本國寺 44, 113, 186 本蓮寺 129, 341
本 普 寺 45 蓬左文庫 386 釜山 334 釜山浦 191 府中(嚴原) 13, 43, 207, 265 富土 44 濱松 335 人 山 口女子大學 嬰團寺內文庫 394 三島 335 三浪倉 335 森山 324 上關 43, 334 相國寺 慈照院 139, 169, 341, 388 箱根嶺 335 箱根嶺金湯山 398 箱根湯本早雲寺 398 • 尙fli 335 善山 335 性高院 417 性高院 72 小田原 335 松林寺 335 崇善 334 新居 335 神奈川 335 新寧 334 室隅 43, 334 室津 43
。 幌浦 334 安東 334 安保 334 樓團寺內文庫 242 梁山 335 良才 334 陽智 334 彦根 44, 334 彦根磨針嶺望湖堂 390 延豊 335 永嘉台 43 永川 334 龜덧 334 龍谷大學 圖 書 館 177 龍宮 334 龍堂 334 龍仁 334 雨森芳洲文庫 386, 389 牛窓 43, 125, 128, 392 蔚山 334 幽谷 334 陰城 335 陰竹 335 義城 334 義 334 利)f l 335 仁同 335 日光東照宮 403 日光廟 45 日光山 335 日 光山輪王寺 341, 3~
一岐 207 登 岐 43 日比 43, 334 日直 334 天 長崎縣立對馬歷史民俗 資料 館 401 長良 44 長川院 335 赤間關 43, 334 赤坂 335 靜堂文庫 379 靜岡 335 泥川 14, 207, 315 泥浦 44, 113, 207, 213 佐須奈 334 酒包 44 洲股 334 竹山 334 竹原 43 駿府 100 晋州島 318 津和 43, 334 澄堂文庫 397 天 天龍 44 天理大學 圖 書 館 179 天理大學 古義堂文庫 341 天理大學 圖 書 館 387 淸見寺 244, 289, 340, 378 , 381 淸道 335
草津 44 忠州 334 忠海島 43 緊樂第 12, 26 E 湯島聖堂 82 立 板橋 334
平方 317 品川 335 ’ 豊山 334 舌 下關 207 韓國國立中央博物館 377 咸昌 335 띤 II 335
-l 家 能集 197, 199 甲申朝鮮諸人筆語 420 江關筆談 63, 65, 96, 163, 168 江戶時代 風俗史 89 江戶時代史 15, 46 江戶後期® 詩人t.:t 223 客館瑞梁集 296, 416 傾蓋集 79, 245, 254 經國大典 327 京都府史 蹟勝地 調査報告 321 溪林情盟 273 溪林唱和集 63, 64, 73, 414 笑未東接日記 310 笑未使行 日 記 244, 282 高麗史 65 高麗李朝史(J)i 硏究 22 古梅園墨譜 75, 276, 416 古事記 325 古事類苑 348 政事撮要 30, 327 古鮮冊譜 333 稿符風雅集 416 古 畫 備考 156, 196, 201, 253, 272, 347, 351 昆陽漫錄 297 寬永朝鮮人來朝記 400 廣陵問樣錄 63 交隣提酸 59, ·33 3 校注老松堂日 本行錄 24 舊唐 書 329 國 書 復號紀事 26o, 327
國姓爺合 戰 206 國譯海行抱 載 304 , 310 國譯 靑 莊館全 書 333 括印補遺朝鮮印譜 398 橘先生仙 樣筆談 71 近代 日鮮關係(/) 硏究 15, 47, 261 近世大坂 藝 文 最談 55 近世日本 E 於 l t-3支那俗語文學史 133 近世日本七東 7 엇 7 16 近世 日 本(/) 儒學 108 近世 日 朝關係史(/) 硏究 265 近世 日 朝關係史(/) 硏究 16 近世日朝通交貿易史 硏究 16 近世穀語 169 槿域書畫徵 112 槿域印薇 398 金溪雜話 293 錦里文集 135, 413 L 樂支絲레, 64, 292 來庭集 202 老松堂日本行錄 24, 25, 315 E: 輩甄齋詩藥 276 滿軒燕記 86 對麗筆語 71, 76 對禮餘慕 275 大英博物館所藏浮進繪名作展圖錄 403 對外關係文化交流 16 對遊日記 421
大坂人物誌 249 德川吉宗 k 朝鮮通信使 17 桃源遺事 70 陶情詩集 144, 145, 147, 150, 172, 326, 341, 386 東國與地勝覽 180 東國通鑑 333 東萊府誌 43 東接錄 53, 79, 93, 113, 124, 127, 136, 281, 315, 406 東接日記 407 東樣 日 錄 54, 124, 125, 281, 288, 306, 318 東接唱細集 63, 241 東洋文化史硏究 51 東遊篇 56 東醫寶鑑 71 東人詩話 107 東照社 緣起 403 東華名公印譜 245, 398 藤原惟窟 26 己 羅山文集 16 頓山陽 之 군 (I) 時代 275 口 文祿慶長役 被塘人(J) 硏究 289 問桂崎賞 63, 415 問椎餘響 62 文祿慶長役 I: 治it 5 被揚人의 硏究 16
問楓集 419 닙 薄遊漫載 422 A 音 75l 300 班荊間譯 298 白石詩草 63, 164, 170, 172, 173, 174, 341, 387, 415 白石 日 記 167, 169, 386 白石全集 168 藩翰譜 31 邊例集要 299 丙子日本日記 306 賓館綺約集 63 寶曆物語 72 寶永華洛細見圖 326 蓬島遺珠 417 奉使 日 本時聞見錄 89, 378 鳳鳥不至 150, 173 扶桑紀行 406 扶桑錄 53, 67, 340 扶桑日記 407 英菩雅圖居風 272 奪忠舒難錄 32 人 樣客通簡集 186, 190 椎路勝區圖 78, 196, 377 四漠堂集 32 使行錄 14 三國史記 123, 329 • 三國通覽圖設 57
三韓紀略 333 桑韓星樣答響 416 桑韓開鍾錄醫談 70 桑韓唱訓集 63 桑韓唱和集 63 桑韓嫌茂集 70 書총贊it h t.: 國書 16 庶物類纂 70 禪林文藝史譯 36 宣祖實錄 29, 280 先哲最談 109, 135, 145, 173 星湖僖說類選 329 星湖先生全集 204 續日鮮史話 15 松穆館燒餘稿 244, 282 松菴筆語 420 隨接日錄 406 肅宗實錄 112, 174 純祖實錄 263 Sta te and Dip lo macy in ear,/ y modern Jap a n : Asia in the Develop me nt of the Tokuga w a Bakufu 16 乘 244 辛未年 朝鮮人來聽行列圖 272 辛鮮人來賜行列繪圖 401 辛未通信日錄 263 新井白石의 文治政治 16 新井白石 七 思想家 文人 261 新井白石斷想 150 新井白石序論 16 新井白石年譜 163 新井白石(1) 文治政治 144
新井白石의 硏究 144, 173 新井白石全集 31, 96 新井白石鬪 L) (J) 肖像 144 深見玄袋(J) 硏究 149 。 7 :,,7 (J)未解讀文字 105 雅集圖 332 決決餘響 ,42 0 兩東唱和後錄 70 陽村集 176 兩好餘話 66, 76 諺文伊路波 296 譯科傍 目 279, 283, 299 歷代帝王混一强理固誌 179 歷史民俗 朝鮮漫談 323 歷聖大儒像 345, 380 譯語類解補 282 延平흄令依母圖 205 燕行錄選集 86 熱河日記 86 吾妻鏡 105 屋張名所圖會 205 倭館圖 252 倭冠 22 倭 281 倭韓唱訓集 421 雨森芳洲文庫 389 雨森芳洲文庫 目 錄稿 107 雨森芳洲全書 32 牛窓詩 128, 129 韻解 297
琉球國使節渡來(J) 硏究 51 琉球使者(J) 江戶上 1 J 51 幽囚錄 326 柳下集 124, 154, 155, 414 異國日記 36 李朝(J) 水墨畵 353 李朝(J) 通信使-江戶時代(J) 日本& 朝 鮮 16 人薔史 16, 269, 400 日 光山八景詩集 174, 415 日 光山八景詩和韻 181 日東記遊 104 日 東壯遊歌 61, 62, 244, 246, 356 日本之 朝鮮 325 日本刀歌 92 日 本錄(t姜上記) 243, 246, 254 日本文化論 330 日本書紀 325 日本속의 韓畫 17 日本詩史 173 日本往還日記 27 日 本人所刻 成大中 圖書 247 日本朱子學 朝鮮 16 日鮮關係史(J) 硏究 15, 21, 27, 28, 33, 44, 53 日鮮史話 15 日 鮮淸(J) 文化交流 15, 205, 274, 330 日支交涉史話 24 日韓文化交流史(J) 硏究 16 日韓提要 217 一話一言 133 林羅山文集 345, 411
林子平 57 任處士筆語 414 ::x: 長門쫒甲問桂 218 丈山筆語 411 前近代CT) 日本之 朝鮮-朝鮮通信使CT) 軌 17 莫陰集 55 折t.: <柴 의 記 144, 150 接鮮똘語 87, 421 正德朝鮮信使登城行列圖 400 正德和韓集 63, 174, 182 停雲集 180 徒川 319, 321 徒川兩岸 319 征韓錄 28 朝鮮-風土 • 民族 • 傳統 21, 24 朝鮮開化史 96 朝鮮客館詩文稿 63 朝鮮國書棒몹行列圖 401 朝鮮賊 76 朝鮮聽禮使泥城來着圖 44 朝鮮賜禮使泥城來着繪圖 320 朝鮮賜使館浪華記 244 朝鮮賜使後議 261, 327 朝鮮使臣入皇城行陳圖 400 朝鮮史硏究 16, 406 朝鮮使節 南秋月 等 光山橋庵筆話 244 朝鮮使節來朝行列圖卷 如 3 朝鮮書畫傳 351
朝鮮信使來貢記 100 朝鮮信使東接紀行 413 朝鮮王朝實錄 16, 26, 291, 318 朝鮮뽑學史 及疾病史 16, 69 朝鮮人街道 44 朝鮮人來朝圖 403 朝鮮人物 旗伏橋輿之圖 272 朝鮮人詩賊 421 朝鮮人 煙藝圖 98 朝鮮人筆談 69 朝鮮人筆語 411 朝鮮人行列固卷 401 朝鮮資料之 中世國語 295 朝鮮支那文化® 硏究 248 朝鮮通交大紀 30, 35 朝鮮通信使一行座 目 298 朝鮮通信使東照社 參入圖 402 朝鮮通信使의 발자취 16 朝鮮通信使繪圈集成 402 朝鮮後期 實學者의 日本觀 硏究 204 趙詩帖 379 坐間筆語 96, 163 重刊改修捷解新語 311 重刊捷解新語 282, 301, 311 中山道宇山宿 195 中山聽使略 134 中井竹山 & 草茅危言 55 中朝事實 325 增正交隣志 112, 282 增訂朝鮮語學史 289, 311 支機問談 63 芝峰類設 95
陳元 賢 (1) 硏究 292 戀紫錄 26, 128, 327, 406 天: 昌德宮所藏 日 本繪 畫 報告 書 272 天和來賜韓客手 口 錄 150, 414 捷解新語 14, 280, 281, 299 捷解新語文釋 282 靑丘學最 405 靖鈴國志 331, 333 淸山島遊錄 421 靑莊館全書 331, 370 草茅危言 55, 217, 261, 327 草揚個川日記 275 賢言試集 295 醉翁停記 353 醉晋齋書帖 355 七家唱和班弗 I 63 七家唱 和集 174 襄憶先生文集 57 E 三 通文館志 37, 41, 120, 281, 289, 299 · 通信使 行列圖 298 通航一覽 37, 46, 53, 56, 59, 101, 119, 132, 190, 293, 348 立 色薰夜雨圖 22 貝原益軒 83, 126 罪遇錄 220, 244 品川一燈 420
筆談唱和集 14 鶴峯全集 27 學山錄 297 韓客詞章 169, 186, 341 韓客送簡 387 韓客人相筆話 I s1, 249 韓客筆談 100 韓客筆語 411 韓館唱和 388, 417 韓館唱和集 417 韓國史大觀 330 韓中關係史 51 海國兵談 57, 325 海東詩文帖 181, 189, 350 海東遺珠 154, 155 海東諸國紀 25, 327, 406 海楠錄 67, 339, 315, 406 海樣 日 記 58, 60, 81, 94, 96, 122, 156, 213, 218, 296, 316, 324, 404
海踊日錄 406 鬪錄一朝鮮通信使(1) 日 本紀行 16,1 54, 60, 65, 66, 67, 96, 131, 269, 340 海行錄 34 海行樓載 14, 22, 124, 125, 272, 280, 404, 407 歸風雅集 77, 187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177 鴻腦描華 356 和國志 244, 409 畫史會要 201 華夷通商考 327 和漢人 萊 考 70 和韓唱和 66, 297 和韓唱和集 416 孝宗御筆 380 訓民正音 66 訓民正音 解例本 66, 297
李元植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중국어문학과 졸업, 동 대 학원 수료 京都 大 學 문학박사 성 균관대 학교 교수, 대 만국립 정 치 대 학 교수 , 중국문화대 학 교수, 중화학술원 한국연구소 소장, 경 도산업 대 학 객 원교수 역 임 현재 近畿大學 문예 학부 교수, 경 도대 학 강사 저서 『韓國漢籍民俗幾 書 』(공편) 『朝鮮通 信 使0)訪 日 & 筆談唱 和0)硏究』 『江戶時代0)朝鮮通信使』(공저) 『 通信使 0)倭學 譯官』 느―――― ――- 『通信使0)遺墨』 동 鼻 朝鮮通信使 대우학술총서 • 인문사회과학 59 찍은날 -1991 년 9 월 30 일 펴 낸날 -1991 년 10 월 5 일 * 지온이-李元植 펴낸이-朴孟浩 펴낸곳-民音社 * 출판등록 1966. s. 19 계 1-142 호 우편대 체 번호 010041-31-0523282 은행 지 로번호 3007783 135- 1 20 서울 강남구 신사동 506, 강남출판문화센터 515-2003~5( 편집부) 515-2000~2( 영 업 부) 515-2007, 2101( 1!버시 밀리) * ©李元植, 1991 인문과학 • 조선후기 의교문화사 KDC/911.OS Prin t e d in Seoul, Korea 값 10,000 원 •
대우학술총서 (인붕사회 과학 ) l 韓國語의 系統 김방 안 2 文學社會學 김현 ·1 商 周史 윤 내 선 4 人間의 知能 황성규 5 中國古代 文 學 史 심 학수 6 日本의 萬 葉集 김사업 7 現代意味論 이익환 8 베트남史 유안선 9 印度 哲學 史 깅회성 10 韓國의 風水思想 쇠상 조 II 社會科學 과 數學 이 승훈 12 重商主義 김광수 B 方言學 이익섭 14 構 造主 義 소두 영 15 外交制度史 김홍잘 16 兒효心 理學 최성 숙 17 언어심리학 조 명한 18 法 사회학 양진 19 海洋法 박 춘 호 • 유병 화 20 한국의 정원 정동오 21 현대도시론 강대기 22 이 슬 람사상사 김성위 23 동북 아시 아의 岩刻畫 황용운 24 자 연 법사 상 박은정 25 洪大容評傳 김 대순 26 歷史主義 이민호 27 인구어 비교언어학 김윤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