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口1 으0 조0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낭뜨대학과 땐]대학에서 수학하였으며, 문학박사 학위를취득하였음. 현재는충남대학교 사학과교수로재직중이며 논문 「루]시앙 페브르와 역사」, 「마르끄 블로끄의 역사세계」가 있고, 역서 『프랑스 혁명사』 (F. 뭐레, D. 리세)가 있음.

아날학파

아날학파

金應鍾 지음 民音社

책 머리에 필자가 아날 학파를 처음 대한 것은 대학교 4 학년 때이다. 군복무를 마친 후 새로운 각오로 학문의 세계에 뛰어들었을 때에도, 아날 학파에 대한 기억은 단지 아날이라는 단어뿐이었다. 그 후 몇 편의 논문을 읽어 보았지만 아날 학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프랑스 낭뜨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천 후, 의국인으로서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분야는 사학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즉시 머리에 떠오른 것이 아날 학파였다• 이 〈첨단 학문〉을 국내에 소개하는 것이 하나의 소명처 럼 여겨지기도 하였다. 박사 과정을 페브르의 〈전정한 고향〉인 프랑쉬― 꽁때 지방에서 밟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1985 년, 「페브르와 사회 사」라는 주제로 DEA( 박사 준비 과정) 논문을 제출할 때까지도 필자는 아날 학파에 대한 신비주의에 젖어 있었다. 필자의 지도 교수인 Rog er S t a uffe ne gg er 교수의 조심 스러운 충고는 필자로 하여금 아날 학파에 대하여 정반대의 시각을 갖도록 해주었으며, 그 후 2 년 뒤 박사 학위 논문 「페브르와 역사표t 제출할 수 있었다. 전문 역사가로서의 충분한 수련을 쌓지 못한 사람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하여 논한다는 것은 분명 무모하고 주제넘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구체적인 사실에 대한 판단 기준을 가지지 못한 채 어떻게 그 사학사적 위치를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하던 그 시점부터 필자는 아러한 심정을 저버릴 수 없었고, 이는 지금도 마찬 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날 학파에 대하여 균형잡힌 시각을 갖도록 하는 데 무엇인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주위에서 많은 분들이 격려해 주었다. 먼저 필자가 쓸모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 부모님,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우리 가족, 프랑스 학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신 Sta u ff en egg e r 교수, 항상 관심을 가지고 이끌어 주시는 은사님, 특히 양병우 선생님, 민석홍 선생님, 선배 • 친우들, 특별히 이 책을 읽고 조언 을 해준 친구 이영호, 박대호 교수에게 고마움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분들의 사랑과 우정이 없었더라면 이 책은 더욱 불완전한 형태로밖에 출판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분들의 관심과 질책을 기대하 면서, 이 책이 하나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아날 학파에 대한 새로운 연구에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1991 년 2 월 金應鍾

아날 학파

■차례

책 머리에 5

서론 9

제 1 장 페브르와 블로끄 : 〈다른 역사를 향하여〉 15

1 시대적 언어 • 16

2 페브르의 문제사 • 41

3 불로끄의 사회사 • 61

제 2 장 브로델의 새로운 역사 89

1 지리적 역사 • 90

2 물질주의 • 106

3 장기 지속의 세대 • 131

제 3 장 새로운 새로운 역사 149

l 브로델 현상 • 150

2 심성사 • 166

3 우상 파괴 • I93

맺음말 213

참고문헌 221

찾아보기/인명 247

서론 1970 년대 세계 역사학계의 관심은 프랑스의 아날 학파에 집중되었다. 이 학파를 해부하는 작업이 프랑스 안팎에서 계속되었으며, 70 년대말에 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도 이 대열에 참여하였다전 아날 학파는 전통적 인 독일 사학을 대체하는 〈 새로운 역사학 〉 으로 인식되었으며, 사회사, 전 체 사, 심성사 등 새로운 언어들이 이 학파의 성격을 규정지었다. 그리 고 프랑스의 문화적 고립주의는 그 신비스러움을 더해 주었다.

1) 민석홍, 「아날르 학파의 성립과 논리」, 《 역사학보 》 , 79, l'J7 8 .

아날 학파란 과연 무엇인가? 이 질문은 이 책의 전편을 관통하는 문제 의식이지만 편의상 예비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우선 아날이 란 1929 년 뤼시앙 페브르 Lu ci en Febvre 와 마르끄 불로고 .Marc Bloch 에 의해서 창간된 역사학 잡지 《 사회경제사연보 Annales d'Hi sto i r e economi qu e et soc i ale 》 에서 나온 말이다. 아날 학파란 바로 이 잡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역사가들이 하나의 학파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 된 다. 그러면 학파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군의 학자들이 개방적이고 자유 로운 분위기에서 지적인 교류를 행하는 만남의 장소를 의미하는가, 그렇 지 않으면 권위주의적인 스승의 가르침울 교조적으로 추종하는 폐쇄적인 집단을 의미하는가? 정의하기에 따라서 아날은 하나의 학파일 수도 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목적은 이 문제에 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최종적인 판단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데 있 다. 우리는 단지 편의상 아날 학파라는· 용어를 사용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단적인 질문은 아날 학파의 성격을 분석함에 있어서 매우 유용 하다. 우리는 즉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날 학파의 60 년 역사를 관통하는 가르침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하나인가 아니면 여러 개인가? 또 그것들은 결국 동질적인가 아니면 이질적 인 것인가? 그 가르침은 아날 학파의 테두리내에서 만들어 전 것인가 아니면 앞에서 또는 밖에서 유입된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날 학파에 속하는 역사가들을 분석하여 이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도출해 내야 한다. 그런 다 음, 이 척도를 가지고 비교를 해야 한다. 일차적으로는 아날 학파에 속하 지 않는 다른 역사가들과· 비교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하나의 역사 사조 는 그 시대의 산물이라는 가정 아래 다른 지적 흐름이나 이전 세대의 역사 사조와도 비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프랑스를 벗어나 전유럽, 전세계적인 차원으로까지 확대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비교가 과학성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질적 차원에서뿐만 아니 라, 계량적 차원에서도 비교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사이클을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아날 학파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균형잡 힌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문제를 확대시킬 때, 우리의 연구는 부분적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아날 학파 의 본고장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 다. 그 좌절을 극소화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이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객관성이라는 이상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그리고 이 문제 —는— 비 단우 리이가러 한취 할유 의수 연있구는뿐 만방 법아은니 라연 구모자든의 역주사관 연을구 분에명 공히통 적드일러텐내데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 전환은 아날 학파의 주장이기도 하 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는 명제는 지난 세대의 역사가들에게 패배 의식을 심어 주었고, 이는 결국 변화해 가는 학문의 세계에서 역사학의

위상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 후 여사는 객관적 진리를 찾아 헤매는 구도자의 모습을 포기하고 시대의 생생한 증언으로 남기를 바랐다. 다시 말해서 역사가들은 과거러는· 어두운 감옥에서 해방되어 현재라는 삶의 현장에 참여하였으며, 그 고민의 흔적이 역사라는 형식으 로 표현된 것이다. 〈 모든 역사는 동시대사 〉 라는 말은 우리 시대의 역사 가들을 지탱해 주는 신념이다. 따라서, 역사책은 그 책의 저자와 그 책이 쓰여전 시대의 분위기를 전해 주지 못하면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 다. 〈 이 책은 매우 훌륭한 책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10 년 후에는 전혀 쓸모 없는 책이 되기를 바란다 〉 라는 페브르의 한 서평은 그 자체가 최고의 찬사였던 것이다. 아울러 페브르의 말은 프랑스의 역사학을 충분 히 체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실체를 바라보려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된다. 이 책의 목적은 페브르, 불로끄、 브로델 등 아날 학파의 대표적인 역사 가들을 심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날 학파의 내적 흐름과 그 사학사적 위치를 가늠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또는 그들을 둘러싸고 진행된 대화를 분석하여 당시의 지배적인 언어를 이해 할 필요가 있다. 역사란 역사가와 과거의 대화라는 말은 이미 공리화되 었지만, 이런 유의 역사에서는 특히, 역사는 역사가와 역사가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우선 아날 학파가 주로 사용하는 언어들-문제사, 전체사 또는 〈 장기지속 〉 과 같은 개념 등-의 의미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들이 이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언어들에게 어떠한 다른,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실증사학자들 의 과학적인 역사가 궁국적으로는 객관성의 추구였던 반면에, 아날의 역사가들에게 있어서 과학적이라는 말은 법칙, 모델과 같은 것의 정립이 라는, 다른, 어쩌면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조각조각난 사실들에게 연결고리를 매어 주는 것은 결국 주관성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실증사학자들에 의해서 폐쇄당했던 이 주관성의 세계가 바로 19 세기 전반기의 낭만주의 사학이었으며 또 그것이 아날 학파에 의해서 부활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우선 아날 학파의 사학사적 위치

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역사학이란 단순한 복귀를 의마하지 않는다. 그 새로움 속에 아날 학파의 사학사적 의의가 담겨 있는 것이 다. 이렇듯 이 연구는 세대간의 갈등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서 아날 학파를 바라보았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당연히 아날 학파 내부의 세대 갈등에 주목하게 되었다. 제 1 장에서는 〈 낡은 역사 〉 가 지배적이던 시대에서 아날 학파의 창조 세대가 추구한 〈 다른 역사 〉 에 대해서 논의되 고 있다. 이어서 제 2 장은 새로운 역사라는 제목으로 브로델을 다루고 있다. 그의 지리적 역사 그리고 사론적 측면에서 〈 장기지속 〉 은 아날 학파의 역사를 새로운 역사로 등장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제 3 장에서는 브로델의 새로운 역사에 반발하여 이른바 〈새로운 새로운 역사 〉 를 제창한 제양 11 대가 다루어지고 있다. 이렇듯 이 책은 아날 학파의 내적 흐름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와는 그 접근 방법을 달리하였다전 아날 학파의 역사 가들이 남긴 저술을 분석하여 역사 인식의 한 패러다임을 추출해 내고, 그것을 다론 패러다임과 비교한다는 것은 이런 유의 연구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과정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는 아날 학파를 동일한 패러다임을 가지고 일사 분란하게 전전하는 하나의 패쇄적인 학파로 묘사한 느낌을 준다. 특히 그 현란한 내용은, 그것이 비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아날 학파를 더욱 신비스러운 존재로 만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존의 연구가 아날을 우상화하던 시대를 반영한다면, 이 책은 〈우상파괴〉가 진행된 1980 년대의 시각을 담고 있 2) 아날 학파에 관한 연구서로는 H. Couta u -Bega r ie, Le ph enomene r e, Se ntr amt ei ge ite te se .t D idees olAogn inea /dese s an olau v, P aris, 1987. 그리고, 프랑스 밖에서 행해진 전반적인 연구로는, Georg lgg e rs, New dir e cti on s in Europ ea n Hi stor io g r ap h y , Wesley an Un ive rsit y Press, 1975( 이민호 • 박은구 공 역, 『현대 사회사학의 흐름』, 전예원, 1982) : Trai an Sto i a n ovic h , French His t- oric a l Meth o d. The Annales Paradig m ; with a fore word by Femand Braudel, Cornell Un ive rsit y Press, 1976 등이 있다.

다. 이를 위해서 이 책은 아날 학파에 속하는 역사가들의 연구 업적뿐만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바라본 아날 학파에 대한 견해와 그 추이를 분석 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이렇게 할 때, 아날 학파의 전체적 움직임뿐만 아니라 세대간의 갈등, 상이한 조류 등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날 학파의 〈 새로운 역사 〉 는 더 이상 신비스러움을 내뿜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 역사란 학문의 역사는 새로운 ‘진실'의 역사 이며, 따라서 새로운 역사들의 역사인 것이다 〉 .3) 3) 양병우, 『역사의 방법 』 , 민음사, 1988. p, 196.

제 1 장 페브르와 블로끄:〈다른 역사를 향하여〉 아날 학파의 제 1 세대는 그들이 살던 시대를 어떻게 느꼈을까? 우선 그들의 인간 형성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생각되는 주요 사건들을 열거해 보자 : 1870 년 독 • 불 전쟁, 빠리 꼬윈, 드레퓌스 사건, 1905 년의 Fuste l 논전, 제 1 차 세계 대전, 러시아 혁명, 경제 공황, 반유태 주의, 제 2 차 세계 대전 등등전 이 전환기를 겪으며 이들이 남긴 직접적인 증언은 매우 드물다. 1935 년 당시 『프랑스 백과 사전 Encyc l op ed ie fra - n~a is e 』 의 편찬 책 임을 맡고 있던 페브르는 이렇게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18 96~1902,빠 리. 정치적, 심미적, 도덕적 투쟁과 위 기. 갑자기 그리고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이 격변의 시기에, 어린 시골 사람들이 도시를 발견, 전실을 위해서 그리고 생존 이유를· 위해서 싸운 1) 불로끄는 스스로를 〈드레퓌스 사건의 세대〉에 속한다고 말할 정도로 반유태주의 의 충격을 받았으나, 페브르의 경우 반유태주의 및 퓌스뗄 논전으로 대변되는 극우 민족주의 사학 또는 193W 대의 우익 운동에 대해서는 별 기록을 남기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이 당시의 분위기를 형성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 가 아닐 것이다. 참고로 퓌스텔 논전 (Ba g arre de Fus tel) 이란 1905 년 극우단체인 Acti on Fran~a ise 7~ 위대한 〈민족주의〉 역사가인 Fuste l de Coulan g es 의 단생 .15 주년 기념식을 거행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야기된 역사학 안팎의 논전홀 말한 다. (cf. F. Harto g , Le 짜 e siec le et l 'His toi re , Le Cas Fuste l de Coulange s, Paris, 1988.)

다. 새로운 눈과 새로운 귀를, 즉 세계를 느끼는 새로운 방식을 가지고 자.〉 2) 이러한 태도에서 우리는 페브르가 새로운 세계에 직면,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제 2 차 세계 대전 후 비관주의에 빠진 유럽 문명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이 역사가는 다시 〈변화〉의 개념에 의존, 위기 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역사 는 무엇보다도 〈변화의 과학〉이기 때문이었다•

2) 페브르 , r 프랑스 백과 사전』, 제 17 권의 결론/ Combats po ur l'his toi re , Pa ris, 1953 , p. 46. 이후 문맥에 따라 『전두』 또는 『역사 몰 위한 전두』로 표기할 것임.

역사가로서 변화라는 말을 중요시 여기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문명의 쇠퇴기에 사람들이 오히려 변화를- 거부하는 경향 이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당시 지적 세계는 어떻게 변화해 가고 있었으며, 역사가들은 이를 어떻게 수용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은 역사가들의 작업장에서 어떠한 쓰임새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시대적 언어 새로운 세계의 지식인들은 어떠한 〈심성적 도구〉를 통해 그 시대를 조명했을까? 먼저 우리는 페브르가 직접 작성한 아날 학파의 지적 계보 를 통해 그 매듭을 풀어보자 .3) 페브르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4 개의 지적 세대를 제시하고 있다. 우선 그는 제 1 세대의 역사적, 문학적, 사상적, 죽 문화적 유산을 미슐레 J, Mi ch elet 에 집약시킨 후, 아 역사가를 〈새로운 역사학〉의 정신적 지주

3) 이 표는 194 純 이후에 작성되었을 것이며, 몇 개의 오자가 눈에 된다. E. Ra .le, Ca mille Jullian d. Lev i -Bruhl 은 E. Male, Ca mille Jullian, Lev y -Bruhl 의 오기 이다.

로 모시고 있다. 그 후 이 전통은 〈 역사 의식으로 충만된 〉 수학자, 지리학자, 위대한 벨기에 역사가, 언어학자들의 후광을 입어 드디어 베르 H.Berr 가 주도하는 〈 역사적 종합 〉 운동과, 뒤르깽 E. Durkhe i m 의 제자들이 추전한 사회학주의에 이르러 하나의 시대 정신으로 승화된다. 제 3 세대는 페브르의 세대이다. 고등 사범학교의 동료 인문사회과학자들과교류하면서 그는 과거의 모든 유산울 계승하고 이룰 불로끄, 그리고아날 학파의 제 2 세대 역사가들에게 전달한다.

나의 저자들 나의 아버지와 동료들

Renan -Flaubert -S te n dhal -Proudhon Vid a l Meil le t RevueS edrer esty nlat h e se L'aMnnaeues ss,o Sc iim ol io agn idq u e Courajo d E. Rale Cami lle Ju llia n d Abbe BremondLevi- B ruhI A. Leri ch e Ch. Blondel H.Wallon A. Renaudet Ju les Bloch M. Bloch LesAnnales Braudel 자료 : Febvre 의 부인 소장 문서. 국립도서관 (BN) 주관 Febvre 전시회, 1978.

이 표를 보고 우선 지적할 수 있는 사항은 삐렌느H. P i renne 를 제의하 고는 모두가 프랑스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는 페브르가, 나아가 아날 학파가 프랑스적 내지는 불어 세계의 전통에 배타적으로 접목되어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을 가지게 해준다. 또한 페브르보다 앞선 세대의 인물 중에 역사가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어쩌면 그는 과거의 역사 학과 아날 학파의 역사학과의 단절을 과시하고 있는지도 모론다• 아울러 역사가가 과거 프랑스의 지적 유산을 물려받았으며 또 이룰 역사가에게 전승하였다는 의식 속에는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오랜 싸움에서 결국 역사학이 승리하였다는 강한 주장이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결국 아날 학파의 승리였다.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아날 학파 역사가들이 가장 잘 적응하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면 이 〈 새로움 〉 의 토대는 무엇이었나? 아날 학파의 제 1 세대에게 있어서 그것은 〈 과학 혁명 〉 이었다. 어째서 이 문명을 짊어지고 있는 문화인들이 명백한 사실을 거부하는가? 우리가 매일 보듯이 모든 낡은 우주――도덕적, 지적, 철학적, 과학적 그리고 종교적인―~가 붕괴되고 있다. 사람들이 수세기 이래 겪어 보지 못한 혁명 이 진행되고 있다. 그 기원은 아마 과학 혁명일 것이다. 데까르뜨적 뉴턴적 궤도를 따르던 과학으로부터 새로운 과학이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문제를 제기하며 등장, 낡은 세계를 전복시키고 있는 것이다 .4) 페브르가 이 과학 혁명의 결과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은 그가 새로운 역시를 위한 전투에 임하기 전에 행한 〈 신앙 고백 〉 에도 잘 나타나 있다 .5) 4 ) 페브르, , L e nouveau monde et l 'europ e, Geneve, 1954 , pp. 27-8. 5) 그의 『역사를 위한 전두』 중

20 세기초까지만 해도 뉴턴 물리학의 영향 아래 결정론이 자연과학 뿐만 아니라 인간과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왔다. 꽁뜨의 실증주의는 결정론적인 신념을 대변해 준다. 그런데 1920 년대에 들어서서 이러한 법칙 정립적인 경향은 하이젠베르그의 이론에 의해 심한 동요를 겪게 된다. 1934 년 〈 과학과 법칙 〉 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열린 제 5 회 국제 종합 주간 Semain e Inte r nati on ale de S y n t hese 에서 참석 자들은 물리 학상의 혁명에 의해 일종의 위기가 도래하였음을 공감하였다. 그러나 자연과학 자들은 이 이론이 결정주의의 그 토대까지 붕괴시키는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은 반면 ,6) 특기할 만한 사실은, 동일 이론이 인문사회과학자들에게는 상대주의의 과학적 증명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이 다. 상대성 이론은 결정론이나 실증주의에 호감을 가지지 못하던 역사가들 에게 환영을 받았다. 특히, 후일 새로운 역사학의 선구자로 추앙받게 될 페브르, 불로끄, 르페브르 G. Le fe bvre 가 모두 과학 혁명울 중요시하 고 있음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르페브르는, 〈 현대 물리학은 법칙을 단순 한 통계적 개연성으로 전환시켰으며, 그 결과 역사학은 과거 그를 억압 하던 실험적 과학으로부터 덜 격리되었다 〉 7)면서,과학혁명을 수용하였 다. 블로끄는 좀더 구체적으로 과학 혁명을 주시하고 있다. <…… 우리 의 정신 세계는 이제 달라졌다. 가스의 운동이론, 아인슈타인의 역학, 양자론 등은 지난날 과학에 대하여 우리가 가져온 안식을 철저히 바꾸어 놓았다. 과학이 축소된 것이 아니고 유연해전 것이다. 결과적으로 확실성 6) 이 세미나에서 천문학자인 M in eur 은 〈 하이젠베르그의 원리가 발표된 후 우리논 자연 법칙의 비결정주의를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왜냐하면 이 원리에 의하 면, 한 조직 체계의 미세한 원소들은 불확정 상태로만 고착되기 때문이다. [……] 나는 결정론이 하이젠베르그의 원리에 의해 되색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는 다 ; 이 원리의 결과로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기초적 형태의 결정주의는, 달리 말해서 기계론적인 결정주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접이다.〉 (Revue de Syn th e se, 1934, pp. 69-70) 물리학자인 Berhou~ 됴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위의 책, p, 114). 이후 이 잡지는 RS 로 표기할 것임. 7) G. Lefe b vre, La nais sa nce de l'hi s t or io grap h ie moderne. Pa ris, 1971, p. 34.

이 가능성으로, 그리고 엄격한 측 정이 영원한 상대적 개념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처럼 자연과학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나 자신 도 그중에 속한다. 〉 8 ) 페브르는 과학 혁명의 결과를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미생물학이 일으킨 혁명 : 수천 분의 일 밀리미터 크기의 무수히 많은 조직체들을 이제 관찰할 수 있다. 육안으로 볼 때에는 물리화학적인 체계인 것 같지만 미생물학에 의해 밝혀진 조직체에서는 기계론적인 법칙, 중력 등의 작용이 무시된다 . 그들은 적어도 초보적인 단계에서는 고전적 역학 법칙의 지배를 받던 것으로 여겨진 시대에 태어난 이론으로써는 더 이상 설명되지 않는다. 미생물학에 의해 파악된 세계는, 반대로, 고유한 저항이 없는 유기체로` 가득 메워졌다기보다는 오히려 비어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여러 가지 힘들이 작용하는 하나의 장인 것이다. 이처럼 세계가 돌변하였 댜 [……] 그리고 생물학의 영역에서 유기체 조직들이 공간으로 차 있다는 사실은, 양자론과 함께 물리학이 소개한 불연속의 개념과 맥을 같이한다. 상대성 이론에 의해 야기된 과학 인식상의 붕괴 현상을 배가시키면서 양자론 은 전통적인 인과 관계라는 낡은 관념을-그럼으로써 단번에 모든 실증과 학의 기존 토대인 결정론을-위협한다. [……]이 제 유물론적 또는 합리 론적 기계론에 입각해서 세계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 다. 옛 이론을 새 이론으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9) 8) 불로TI., Ap o[ ogi .e po ur l'his toi re , Paris, 1974, p. 29. 이후 여사를 위한 변명 』 으 로표기할 것임. 9) 페브르, , 1941 / 『 역사를 위한 전두 』 , pp. 28- 9. 그가 죽기 칙전에 발표한 , A nna/es, 1955 에도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결국 이 과학 혁명은 그의 역사 세계를 지배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 다. 이 잡지 (Annales) 는 1929 년 Annales d'his toi re economi qu e et soc i ale 이라는 제명으로 창간된 후 Annales d'his toi r e socia le ( I93 9-4l), Melang es d'his toi re , 그리 고 Anna/es d' his toi re socia le , Hommage s a Marc Bloch(l945) 등으로 제명을 바꿔오다가, 1946 \1 Annales, Economi es. Socie tes . C i v i l is a ti ons 으로 변경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후 Annales 로 표기할 것임 .

이 세 역사가들의 과학 지식은 물론 피상적이고 단편적이다. 실제 불로끄는 비록 상대주의의 개념에는 동조하지만 그가 받아온 교육 환경 내지 자연과학적 지식의 부족 때문에, 이 새로운 과학 현상의 충격파를 단지 반사적으로만, 그리고 멀리서 따라갈 뿐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IO ) 그러나 어쨌든 물리학과 생물학에서의 혁명은 역사가들의 뇌리에 〈 상대 성 >, 〈 삶 〉 과 감은 언어를 각인시켜 놓았고, 통시적 관점보다는 공시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과학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I1' 인간은 더 이상 결정론의 지배를 당하는 단순한 메커니즘으로 인식되 지 않았다. 역사의 주체는 이제 삶의 창조적 능력을 부여받게 된 것이 다. 페브르는 그의 『 토지와 인간 전보』에서 이를 가능주의 Possib i l ism e 라는 새로운 말로 표현하고 있다 .1 2) 그런데 하이젠베르그의 원리가 19 25 년에 발표된 반면, 이 책은 제 1 차 세계 대전 전에 구상되고 192 2¼민에 발표되었다는 사실 또한 지적할 만하다. 가능주의는 자연과학의 일방적 영향이라기보다 인간과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 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학자가 자연과학 이의에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 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먼저 삶의 창조적 힘을 강조하는 〈베르크송 10) 불로끄、 위의 책, p. 29. 페브르 역시 역사학자로서 충분한 과학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_예를 들면, 르 고프J. Le Goff 는 페브르의 심리학 지식이 막연하고 환상적이어서 심리학자와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 H ist o ir e des scie n ces et histoi re des menta lit es>, R S, n° 111-2, 1983, pp. 411-2). 그러나 실제 페브르는 Ch . Blondel 과 감은 심리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이 잡지는 과학사와 심성사 특집 으로 꾸며쳤는데, 페브르에 관한 논문이 많았다(J. Rog er , : P. Redond i, 등 이다). 11) 브로델은 〈 삶은 우리의 학교다〉라고 말하고 있다 (Ecr it s sur l'his toi re , Pa ris, 1969, p. 31 ). 이 논문집은 『역사학 논고 』 라는 제명으로 번역되었다(이정옥 역 , 민음사, 1990). 이후 r 역사학 논고 」 로 표기할 것임. 12) La terr e et l'euoluti on humain e , Pa ris, 1922/1970. 이후 『 토지 』 로 표기할 것 임 .

혁명 〉 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르 페브르는 페브르의 『 토지 』 가 이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1 3) 그러나 페브르는 철학이라고 하는· 구시 대의 추상주의와는 천교하지 않았으며, 아마 이러한 이유로 자신과 베르 크송과의 지적 계보를 굳이 따지려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14) 페브 르가 주목한 것은 엄격히 정의된 방법론으로 무장된 사회과학이 그 영역 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로 인해 겪게 될 역사학의 왜소 화 내지는 무용화 현상울 우려했던 것이다. 『 토지 』 에서 그는 지리학과 사회학으로 대변되는 당시 사회과학의 팽창을 근심어린 눈으로 관찰하 고 이들의 도전을 분석, 역사학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지리학은 19 세기말까지만 해도 그 학문 영역이 주로 정치적, 행정적 경계 설정에 치중된, 역사학의 〈 시녀 〉 로 여겨져 왔었다 .15) 그러나 비달 드 라블라쉬 Vid a l de La Blache 의 등장과 함께 지 리 학은 역사학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지리학의 팽창이 시작 되었다. 1891 년 창간된 《 지리학 연보 Annales de Geo g rap h i e 》 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 〈비달 학파 〉 의 특칭은 지방지리라는 점에 있었다. 물론 엄밀 한 의미에서 비달 자신이 이러한 유의 지리학을 창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1905 년 이후 우리는 지방지리학-특히 사회 경제적 분야에 초점을 맞춘-의 만개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16) 페브르는 이렇게 〈 새로 운 지리학〉을 평가하고 있다. 〈과거의 예가 없는, 전적으로 독창적인 스타일을 가진 걸작―一그러나 교조주의적이지 않으며,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책 생명력이 넘치는 《 지리학 연보 》 , 특히 고등 사범학교 (1877 13) 르페브르、 위의 책, pp. 315-6. 14) 페브로.는 r 토지』의 결론에서만 간략하게 베르크송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p. 396). 15) 이는 지리학자인 N. Broe 의 말이다( 〈 Les seduc tion s de la nouvelle ge- og ra- phie> , A u berceau des Anna/es, 197 興 10 월 11-3,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세미 나 보고서, p. 255). 16) A. Deman g eon 의 La pic ard ie(1 905) 를 필두로 해서, Blanchard 의 La Flandre (19 06), Vallaux 의 La basse Breta g n e (1 9 07), de Fel i ce 의 La basse Nonnandie (19 07), S i on의 La Nonnandie orie n ta le (1 9 09) 등을 둘 수 있다.

~1898) 와 쏘르본에서의 교육을 통해 전파된 하나의 정산. 탄력 있고 생기 있는 자유 탐구 정신. 또한 교리문답식 주입이 아닌, 소명 의식을 일깨워 주는 정신. 〉 17) 비달에 바친 이 예찬문 속에서 우리는 교리문답적 교조주의에 대한 一 구체적으로는 뒤르깽에 대한 - 강한 거부감을 엿볼 수 있다. 그런 데 페브르에게 있어서 그것의 지리학적 표현은 라첼 Ra t zel 의 지리학이 었다. 『 토지 』 에서 페브르는 〈 성소 관리인같이 사납게 〉 18) 이 독일 지리학 의 결정주의를 비판한 후, 비달의 사상을 토대로, 〈 어쩌면 비달의 사상보 다 더 엄격한 〉 19) 하나의 체계를 수립하였으니 가능주의가 곧 그것이다. 즉 자연 환경은 일련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인간이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 토지 .!] 의 부제인 〈 지리학적 역사 서설 〉 이 암시하듯이 페브르의 궁극적인 의도는 지리학의 팽창을 억제, 그 영역을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페브르는 〈 새로운 지리학의 아버지〉를 인용하면서 지리학과 역사학의 관계를 (명 확히 한다. 〈지리학은 비달이 강조했듯이 공간의 과학이지 인간의 과학이 아니다. 〉 20) 이러한 비달의 선언은 페브르 에게 , 따라서 역사가들에게는 〈 구세주〉와 같았을 것이다 .21) 인간 과학 그것은 곧 역사학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사회학으로 눈을 돌려 역사 학의 생존에 필요한 방법론적 원조를 구한다. 사회학 또한 젊고 활동적인 과학으로서 현재 힘찬 전전을 하고 있다. 소용 돌이 속에서 이 학문은 많은 야심을 표출한다. 특히 그 추종자들은 단어와 개념의 정의, 영역 설정, 영향 추적, 논리 전개 등 정말 독특한 취향을 가지 고 있다. 뒤르깽이 조직한 소수의 집단은 이 접에서 특출하고 정열적이다. 그러나 제 1 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이돌은 거의 분해되고 말았다 .22) 17 ) 페 브르、 『토지 』 , p. 29. 18) 이는 인문지리학자인 Deman g eon 의 평가이다 (Broe, p. 259). 19 ) Broe 의 논문, p. 259. 20) 페브르기 r 토지 』 , p. 75. 21) 위의 책, p. 75. 22) 위의 책. pp. 32-3.

이렇게 본다면, 1896 년 뒤르깽이 창간하여 항상 새롭고 풍부한 관점을 제시해 온 《 사회학 해 Annee Soc i olo giq ue 》 가 그의 세대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전쟁 후 나타난 일종의 학문적 공백을 메울 아날의 한 모델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비달을 향한 거의 무조건적인 존경과 는 대조적으로 페브르는 이 사회학주의의 창시자를 애써 의면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브로델이 〈 패러다임의 혁명적 변화 〉 라고 강조한 바가 있는 23) 뒤르깽의 사회학에 대해서 간단히나마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뒤르깽은 사회학을 독자적인 대상과 고유한 방법론을 갖춘 하나의 독립 과학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실증주의를 계승하여 그는 우선 사회 과학은 어떠한 방법을 통해 법칙을 정립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후, 유명한 〈 사회적 사실 Fait soc i al 〉――그의 정의에 의하면, 〈 개별자의 의부에서, 강제력을 가지고 영향을 미치는 행동, 사고, 지각의 방식 〉 24) —이라는 개념을 창출해 내었다. 그리고 나서 뒤르깽은 사회학적 방법 론의 규칙을 제정하는데, 그에 의하면 〈사회적 사실은 사물처럼 취급되 어야 한다〉는 것이다후 자연과학의 속성이 〈 관찰 〉 인 것처럼, 사회적 사실도 직접 관찰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니, 결국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사이에는 방법론적 차이가 없다는 것이 기본 법칙인 셈이다 .26) 따라서 비록 뒤르깽의 사회학이 심성적 세계, 집단 심리 등에 각별한 중요성을 부여하지만, 가능주의에 몰두한 젊은 페브르의 눈에는 결정주의의 새로 운 표현으로 비쳤을 것이며 바로 이런 이유로 그로부터 배척받았으리라 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27) 23 ) 브로델 , Civ il i s a tio n mate r iel l e. Economi e et C ap ital ism e. t. II , Pa ris, 1979, pp. 407-8. 이 책은 문맥에 따라 『물질 문명 』 또는 『자본주의 』 등으로 표기할 것 임. 24 ) 뒤 르쌩 Les regle s de la meth o de socio lo g iqu e, Pa ris, 1895 / 1983, p. 5. 이 정 의 에 따르면 사회적 사실이란 결국 〈집합 표상〉, 브로델의 구조_포락선_ 등과동일한 개념이다. 25) 위의 책, p. XII. 26) 위의 책, pp. 27, XN. 27) 페브르、 『토지』, p. 47.

그런데 한 세대 동안 위세를 떨친 이 신생 학문을 보면서 역사가가 내심 관심을 가진 것은 역시 역사학의 존립 문제였으며, 이는 곧 역사학 의 영역 설정으로 표현되었다. 페브르는 사회학이 우선 관심을 가진 것은 〈공간이 아니고 사회 〉 28) 라면서 사회학의 팽창에 제동을 걸었던 것이다. 그러면 역사학의 영역은 무엇일까? 지리학과 관련, 이미 설정하 였듯이 인간 그것이 역사학의 고유 영역으로 재확인되었다. 이처럼 도식 적으로 세 학문간의 경계가 그려졌고 이를 토대로 이들 학문간의 협조가 이루어질 것이며, 또한 학문간의 팽창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화가, 특히 역사학과 사회학 사이에서 전개될 것이다• 페브르가 뒤르깽에게서 두려 워했던 것은 무엇보다 이 팽창주의였다. 뒤르깽은 비록 역사 연구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문제는 그가 역사를 사회학의 보조 학문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역사는 개별적인 사실 규명 이상으 로 상승하지 않으면 과학이 될 수 없다 ; 그런데 그렇게 되면 역사학은 존재를 멈추고 사회학의 한 가지가 될 것이다.〉 29) 이 점에서 불로끄 역시 심한 굴욕감을 느꼈다고 말하고 있다 .30) 페브르는 결국 이 사회학적 결정 주의의 교주와는 대화를 포기하고 대신 뒤르깽 학파의 제 2 세대, 특히 씨미 앙 F. Sim ian d, 모스 M. Mauss 등과 교류하였다 .3 1) 씨미앙은 뒤르깽의 방법론을 엄격하게 적용, 임금과 가격의 역사에서 하나의 법칙, 그에 의하면 〈규칙성〉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과학적〉 연구 를 통해 이 사회학자 겸 경제학자는 전통적 역사가들이 숭배하고 있던 세 개의 우상-정치적, 개별적, 연대기적-을 타파하는 데 선두에 섰으며, 나아가 페브르와 아날 학파의 역사가들에게 인식론적 무기를 제공해주었다 .32) 경제사에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한 씨미앙은 후일, 28) 위의 책, p. 50. 29) 뒤르쌩 L'Annee socio lo g iqu e, 1903, p. 124. 30) 불로끄 『역사를 위한 변명』, p. 31. 31) 페브르, Annales, 1954, p. 524. 32) 씨미앙의 논문 , Reuue de

특히 쏘르본에서 경제사 강좌를 담당한 라부르스 E. Labrousse 를 통해 계량사의 선구자로 등장하게 된다. 페브르도 씨미앙의 「정치 경제학 강의」가 마치 역사가들의 소망에 답하기 위해 쓰여진 듯하다고 말히코. 있다 .33) 정치사로 대변되는 전통적 역사의 우상을 단죄하는 데 있어 서 페브르 역시 씨미앙 못지않았다. 1850 년 이후, 이 세상에서 혁명들을 이끌고, 인도하고 지배하던 프랑스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또는알면서,스스로를영광되게 하면서)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죽 물질 혁명이 탄생했지만, 프랑스인들은 절제, 지혜, 침착이라는 낡은 철학 뒤로 몸을 사리면서 정치를, 정치만을, 언제나 정치만을 했던 것이 다. [……]무 엇을 할 것인가? 돛단배에 뛰어울라, 강인한 손으로 노를 움켜 잡고, 선두를 잡는다. 최소한 정신적 선두를. 사람들은 노력 끝에 프랑스를 찾았다. 지난날의 낡은 옷을 입고, 매력적인 고풍의 가족 소유의 집 정원에 앉아, 아무 것도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은 채 낡은 고전을 읽고 또 읽고 있는, 너무 현명하고, 너무 합리적이고, 너무 온건한 이 선량하고 작은 프랑 스를. 프랑스적 중용의 대가들을. 중용인가 아니면 하찮음인가? 그렇다, 이는 눈물겨운 일이다. 그리고 치명적이다. 프랑스는 파멸을 선택하였다 .34) 정치에 대한 비판은 곧 정치사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심정이 페브르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음은 아날 학파의 영토 에서 정치사가 철저히 배제되어 왔다는- 사실로써 확인할 수 있다. 따라 서, 새로운 역사의 구체적 출발이 반(反)정치사였다는· 사실 역시 프랑스 Sy n t底 e h ist or 떠 ue, 1903( 이하 RSH로 표기 )은 새로운 역사학의 이론적 지침으 로서 Annales 에 의해 자주 추천된 논문이다. 1960 년, 〈특히 젊은 역사가들로 하여금 지난 반세기 동안 역사학이 걸어온 발자취를 바라보고 또 역사학과 사회 과학의 대화를 더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Annales- €:, 이 논문을 다시 게재 하였으며, 198'N . 다시 Anna/es- €:, 이 논문을 추천하고 있다. 33) 페브르 , A nnales, 1930 / Pour une his toi re a par t enti ere , Pa ris, 1962, p. 190. 이후 『완전한 역사를 위하여』로 표기할 것임. 34) 페브르、 , r 역사를 위한 전두』, pp. 67-8.

적 현상이었다. 모스는 뒤르깽과 달리 교조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았다. 1924~1925 년 발표된 「시 여론 Essais sur le don 」에서 그는 자기 스승의 방법론에 대해 이렇게 회의를 표하였다. 〈 역사학자들은 사회학자들이 너무 추상화 하고 사회의 여러 요소들을 너무 분리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는데 이는 옳다고 본다. 역사학자들처럼 주어진 것을 관찰해야 한다. 그런데 주어진 것이란 예를 들면, 로마, 아테네, 보통의 프랑스 사람, 멜라네시아 의 이러저러한 섬들과 같은 것이지, 기도 그 자체, 또는 법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다소 지나치게 유형 분류를 해왔는데 이제 이를 지양하고 전체를 재조합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한다. 〉 35) 이러한 자성 은 그의 문화인류학적 관심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지만, 어쨌든 뒤르깽 대에서는 다소 기계론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사회적 사실들이 이제 모스에 이르러서는 유기체적으로 파악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 전체 〉 라는 말이 강하게 등장하고 있으며, 레비 AE 쿠人식으로 본다면 구조주 의의 맹아가 싹튼 것이다 .36) 이처럼 뒤르깽 학파의 제 2 세대인 씨미앙과 모스는 비록 서로 대조적인 방법론을 지향했지만 모두 당시 역사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 새로운 역사 〉 는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두 개의 조류-그 영역에 있어서는 경제와 사회, 그 방법에 있어서는 구조적 인식-를 다 수용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서 페브르에게 방향을 제시해 준 사람 은 역사철학자인 베르였다. 20 세기의 문턱에서 베르는 《 역사 종합 잡지 Revue de Syn t h e se his - tor iq u e> 라 는 의미 심장한 제명의 잡지를 창간하였다. 〈객관성〉이라는 불가능 앞에서 위축되어 있던 당시의 실증사학자들에게 종합이라는 〈 주관주의로 오염된〉 37) 말은 그 자체가 하나의 도전이었다• 〈종합〉이란 35) M. Mauss, Socio lo g ie e t a nth ro p ol og ie, Pa ris, 1985, p. 276. 36) 위 책에 대한 레비 人뜨무스의 서문. 37) Ch.-0. Carbonell, , R omanti sm e, n° 21-22, 1978, p. 178.

말은 당시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를 향해 품고 있던 여망을 담고 있었 다. 이와 관련, 당시 전통적 역사학의 대부로 군립하고 있던 모노 G. Monod 보다 더 적절한 증인은 없을 것이다. 1900 년 〈 역사의 사명 〉 이라 는 주제의 인터뷰에 응하면서 그는 이렇게 〈 역사의 현재와 미래 〉 를 그리 고있다. 나는 역사학자들이 점점 엄밀한 의미의 역사철학과, 시간적 추이에 토대를 둔 법칙 정립적 경향에서 탈피하여 과학적 성격을 띠는 일반화에 몰두할 것으로 본다. 이 를 위해 역사학자들은 정치, 군사, 의교 같은 사건에는 중요 성을 덜 부여하는 대신, 사회적 사실의 변화, 제도, 이념 등과 같은, 항상성과 논리적 지속성을 가진 대상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가 질 것이라고믿는다 . 38) 이 전망 속에는 〈 일반화 〉 로 표현되는 〈 새로운 역사 〉 의 싹이 움트고 있음울 알 수 있다. 이제 궁금한 것은 사회과학의 도전에 직면, 역사학이 맡아야 할 역할에 대한 모노의 견해이다. 사실, 그에 대한 일반적 평가와 는 달리 ,39) 이 《 역사 잡지 Revue h ist or iq ue 》 의 편집인은 《 사회학 해 》 와 《 역사 종합 잡지 》 로 표현되는 당시의 지적 전환을 깊이 인식, 〈 종합 〉 에의 복귀를 거부하지 않았다. 단지 자기 세대의 역사학자들이 극복했던 〈낭만적〉 종합의 재림을 경계하고, 이러한 대세의 흐름 속에서, 역사학의 존재는 비판적 종합에 있으며, 종합은 바로 이러한 토대 위에서만 이루 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40) 아날 학파의 속죄양인 세뇨보 Ch. Se ign obos 에게 있어서도 역사학이 38) 모노의 인터뷰, Le Temp s, 1900/RSH, 1900, p. 232 에 다시 실림. 39) 모노를 〈역사 팽창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것은 (A. Gerard, , Revue h ist or 떠 ue , 1976, p. 362. 이후 이 잡지는 RH로 표기할 것임 ) 지나치다고 본다. K. Lamp re cht7 l-불 러일으킨 문화사 논쟁을 프랑스 학계에 소개하면서 H. P ir enn ei근 이와 비슷한 노력을 모노에게서 발견하였다(〈 Une pol em iqu e histor iq u e en Allemagn e >, RH, n° 14, 1897). 40 ) Monad, , R H, 1909, p. 12.

과학인가 예술인가 하는 질문은 이제 〈 유치한 〉 질문이었다. 411 왜냐하면 역사는 더 이상 낭만적 단계에 있지 않고 실증적이며 또 실증적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또 그렇다고 해서 역사가 사료비판적 단계에 머물러 있지도 않으며 또 거기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421 비록 간단하나마 이러한 그의 소론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간 그에게 가해진 비판 역시 다소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학은 무엇보다도 실증적 사료 비판을 토대로 일반화를 지향한다는 주장에 역사가라면 아무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것이가 때문이다. 단지 세뇨보는 엄격성의 노예 가 되어, 당시 팽창해 가던 사회과학의 도전에 적철히 대처하지 못했다 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의 소국주의는 다음과 같은 진술 속에 잘 드러난다. 과학은 분석, 종합, 실제적 비교에 토대를 두는 객관적 지식이다. 대상의 직접 관찰이 그들을 인도하고 또 문제를 제기해 준다. 그러나 역사학의 경우 아무 것도 이와 유사한 것이 없다. [……] 역사에서는 아무도 종이 그리고 가끔가다가 기념물 또는 제조품과 같은 것 의에는 실제적인 것을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러한 자료의 성격상 역사는 불가피하게 주관적 과학이다. 이처럼 주관적 감각을 지적으로분석하는 역사학에, 실제의 대상을 분석함으로써 도출되는 법칙 등을 확대 적용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할 것이 다. 역사는 그러므로 생물학적 방법론을 모방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 역사적 사실은 다른 과학적 사실과는 너무도 달라서 각각 다론 방법론 이 필요하다 .43) 세뇨보에 있어서 역사는 구체적 사실의 과학인 데 반해 사회학자들이 만든 〈사회적 사실浮폰 추상적인 철학적 건축물에 불과하였다.”) 또한 41 ) Ch. Seig n obos, V. Lang lo is , Intr o ducti on aux eludes his tor iq u es, Pa ris, 1898, P. 206. 42) 위의 책, pp. 227-8. 43) 위의 책, pp. 185-7. 44) 위의 책, p. 188.

역사학은 시간의 과학이고 사회적 변화의 과학인 데 반해 사회과학은 이 시간이라는 개념을 무시한다고 역사가는 생각하였다 .45 ) 과학의 의미 가 무엇인가, 또는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의 차이점 또는 유사점에 대해 인식론적인 논리 전개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지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전통적 역사가는 자꾸만 인간과학과 자연과학을, 그리고 역사학과 사회과학을 구분지으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그마한 입장의 차이, 시각 의 차이지만 여기에서 낡은 역사와 새로운 역사의 차이점이 시작된다. 이처럼 학문의 방향이 〈 종합 〉 으로 나아가는데 이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세뇨보가 역사학자, 사회학자, 철학지들의 토론회에서 고립되었다는 사실 울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46 ) 경험주의자, 회의주의자로 규정되면서 그는 전통적 역사학, 죽 극복되야만 할 역사학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 토론회에서 역사학자인 라꽁브 P. Lacombe 가 〈 도대체 당신 은 왜 역사학을 하고 있나? 〉 라고 질책한 것, 또는 씨미앙이 자기 스승의 교조주의를 되풀이하며, 〈 결국 역사학에 있어서 모든 과학적 노력은 사회학으로 귀결될 것이다 〉 라고 강조한 것, 뒤르깽 자신이 〈 ……당신은 당신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있다 〉 라고 실망스러운 어조로 말한 사실 등은 모두 시대적 전환 기류를 웅변해 준다. 비록 수세에 몰렸지만 역사학자 가 역사학의 특수성을 강조하게 됨은 전환기에 있어서 있을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모노가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분업적 협동을 기꺼이 받아들인 데 반해, 세뇨보는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결국 패배주의로 빠지고 말았다• 〈 역사적 방법은 간접적인 것으로서, 직접 관찰에 의거 수립된 과학적 방법론에 미치지 못한다. 만일 역사학적 결과와 과학적 결과가 상충한다면 역사학이 양보해야 한다. [……]역 사 는 직접적 과학의 전보에 기여할 수 없다.〉 m 베르는 세뇨보의 역사를 〈역사를 위한 역사 His t o i r e hi s t or i san t e 〉 라는 45 ) Seig no bos, La Meth o de his tor iq u e app li qu ee aux scie n ces socia le s, Pa ris, 1901, p. 142. 46) Les Bulleti ns de la socie te fran cais e de ph ilo sop h ie , 1907 과 1908. 47) Seig no bos, Intr od uctio n … …, pp. 178-9.

말로, 라꽁브와 씨미앙은 〈 사건사 His t o ir e evenemen ti elle 〉 라는 말로 비판하고 있다 .48 ) 불로끄가 보기에 세뇨보적인 역사는 이미 뒤르깽이 언급한 바 있듯이, 〈 가능성 자체의 부정 〉 이었으며 .49) , 페브르는 〈 사실학파 Ecole des Fa it s 〉 의 〈 불임적 분위기 〉 , 〈 회화적 역사 〉 , 〈 교과서적 역사 〉 라는 말로써 세뇨보의 역사에는 문제 의식과 깊이가 결여되어 있음을 비판하고, 또 사학사적인 관점에서 〈 늙은 랑케의 순진한 가르침 〉 을 〈 어린애처럼 웃으며 〉 순종하는 〈 1870 년 패배자들의 가련한 사론〉이라고 조소하고 있다전 세뇨보의 부정, 그것이 바로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었 다. 페브르와 불로끄는 자기 세대의 〈 세뇨보와 랑글콰 〉 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51) 세뇨보의 부정, 그것은 동시에 독일 사학의 부정이기도 하였 다. 베르는 페브르를 만남으로써 새로운 역사의 대부가 되는데, 1900 년 그가 창간한 《 역사 종합 잡지 X 근 〈 종합 〉 을 위한 첫번째 시도였다. 페브 르는 이 잡지를 통해 그의 〈 진정한 스승 〉 인 미슐레가 추구하였던 정신 —과거의 완전한 소생-이 부활되었다고 보았다 .52) 그런데 이 역사 철학자에개 있어서 종합의 목적과 방법은 그 창간사에서 볼 수 있듯이, 다분히 〈 심리적 〉 이었는데, 53) 페브르가 추구했던 〈새로운 역사〉의 성격이 48) Berr, L'his toi r e tra dit ion nelle et la syn th e se h ist or 떠 ue, Pa ris, 1935, p. 29. (Hi st o i re his t o r is a nt ~ 역사학의 경험적 양식이다 : 이야기하고 묘사하고 표현 한다 ; 가끔 설명을 하기도 하나 매우 제한적이며 정밀한 방법론이나 분명한 문제 의식 등에 바탕을 두지 않은 채 행해지는 어립적 설명에 불과하다). 49) 불로끄, 여사를 위한 변명 』 , p. 28. 50) 페브르、 Avant- P r op o s de Trois essais sur His toi re et C ultu r e deCh. Moraze, Paris, 1948, p. VI ; 페브르 , , A nna/es, 1946/ 『역사를 위한 전두』, p. 41. 51) 페브르、 , 『 역사를 위한 변명』의 부록, p. 161 . 52) M. Sie g e l, , A u Berceau des Anna/es, p. 208. 53) Berr, , R SH, n°l, 1900, p. 6.

심리적이라는 점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역사가로서 막 입문한 페브르가 주로 이 잡지를 통해 활동해 온 사실은 역사학의 미래 를 예고한다고 보여진다. 페브르는· 이 잡지에서 〈 프랑스의 지방들 〉 을 담당하는 공식 멤버가 되었으며, 프랑쉬_꽁때에 대한 그의 논문과 일 드 프랑스 Ile-de-France 에 대한 블로끄의 논문 등 지방사적 논문들이 여기를 통해서 발표되었다. 또한 베르가 주관한 일반사의 일환으로 페브 르는 『 토지 』 , 『 16 세기의 비신앙 문제』를, 그리고 불로끄는 『봉건 사회 』 룰 각각 발표하는 등 아날 학파의 제 1 세대는 그와 지적 유대를 계속하였 다. 페브르는 1954 년 추모사에서 이렇게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그 잡지는 하나의 집회소였습니다. 마치 당신이 창조했고(이것 자체가 대단 한 일이었죠), 그리고 유지해 왔던 (이것은 더 한충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모든 일처럼. 그것들을 통하여 활동했고 당신이 일하는 것을 보아 왔고 미력한 힘이나마 젊음을 가지고 당신을 도왔던 모든 사람들이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은 당신의 덕입니다. 이제 우리 역시, 과학과 그 진보를 위해 당신을 계승 하여 과업을 계속함으로써 우리의 존경십을 표시합니다 : 그 사업은 《 사회 경제사 연보 》 [……] 또는 『 프랑스 백과 사전』으로도 불릴 수 있을 것입니 다.외)

54) 페브르、 , 1952/ 『역사를 위한 전두』, pp. 340-1.

이처럼 베르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혁명과 팽창이 진행되는 가운데 과거 전통적 역사학의 구습에 빠져 열등의식에 젖어 있던 역사가들을­ 자국, 바로 역사학이 학문의 중심이 되어 〈 종합 〉 을 이룩하라고 가르쳤으 니, 이는 〈새로운 역사〉의 전개와 성격 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영향 을 끼쳤던 것이다. 역사는 변화의 과학이라는 평범한 전리를 새롭게 인식하면서 페브르는 과학 혁명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사회과학의 도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 면서 자신의 사론을 정립하였다. 〈인간〉이 시대적 언어였으며 , 또 이로부

터 몇 가지 공통 언어 즉 패러다임이 파생되었다 .55) 첫째, 역사는 인간과학이었다. 비록 평범하지만 이 말은 페브르의 사론 을 잘 나타내 준다. 페브르에 있어서 전통적 역사학은 한 마디로 〈 사실 과학 〉 이었으며, 바로 이 사실과 인간의 대비 속에 새로운 역사의 핵심이 담겨 있다. 〈 사실 학파 〉 의 〈 나쁜 역사 〉 에 대한 페브르의 냉소적 평가를­ 들어 보자. 분명히 어리석은 역사가 있다. 인간을 왜소화시키는 역사. 잘 훈련된 앵무 새만을 위한 역사. 이러한 역사는 아무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또한 스스로의 모습을 잘 알지도 못하는 역사이다. 〈 과거의 과학 〉 , 이 얼마나 기묘 한 상상력인가? 왜 현재의 과학 또는 미래의 과학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 다. 그러한 역사는 지하 갱도에 갇혀서 끈기 있게 일하는 두더지가 만드는 역사이다. 또한 지나간 시간과 문명을 통틀어서 모든 빛나는· 것, 대중을 즐겁 게 할 만한 사건들_왕실의 결 혼 , 왕족의 연애 사건, 음모, 암살, 폭동, 스캔들 등 一一 울 수집하는 연대기 작가가 만드는 역사이다. 쁘띠 부르주아지 를 위한 역사일 뿐이다. 달리 말하면 보바리의 자손들을 위한 역사인 것이 다. 이러한 역사가 있는 반면 다른 역사가 있다. 불로끄의 역사. 아날의 역 사. 모두 인간을 사랑하는 역사이다. 왜냐하면 그의 진정한 이름은 인간사이 기 때문이다 .5 6) 인간사는 곧 인간의 인간을 위한 역사라는 전부한 공식으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 새시대의 역사가〉는 자신의 주관주의적 입장을 당당히 천명하고 있다 . 역사란 <… … 주어진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역사가 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이다. 가설과 추정을 사용하여 발명하고 제조하는 55) 우리는 패러다임이라는 말과 공통 언어라는 말을 동일하게 사용할 것이다. 패러 다임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Th. Ku hn, La stru ctur e des revolut ion s sci- enti fiqu es, tra d. de l'an gl , Pa ris, 1983 을 참조할 것(〈 ..... 페러다임이란 말하자 면,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과학적 발견으로서 특정 기간 동안 일군의 연구자들에 게 공동의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기능을 한다.〉 p. 11). 56) 페브르、 , Annales, 1945, p, 5.

것이다. 〉 57) 더 과감히 말하자면, 〈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존재한다 〉 는 뜻이다 .58) 이처럼 역사학에서 인간이 주체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 까? 앞에서 언급한 역사학 의적 충격 못지않게 역사학 내적 변화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바로 실증주의적 경향의 퇴조와 그와 대립적 관계 에 있던 역사주의적 경향의 부상이 이 내적 변화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룰 독일의 영향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우선 프랑스 의 역사가들은 철학을 배격했다는 사실, 또한 독일의 〈비판적 역사철학 〉 은 1930 년대에 가서야 비로소 체계적으로 프랑스에 소개되었다는 사실 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59) 물론 페브르는· 딜타이를 알고 있었으며 ,60) 그 자신 삶, 상대성, 전체성 등을 강조하였고, 또 딜타이처럼 개인의 전기에 많은 관심을 표명하였다는 데에서 이 두 학자의 지적 교류 가능 성을 짐작해 볼 수는 있다 .61) 그러나 페브르의 문화적 배타성은 독일에 대하여 침묵을 강요하였으며, 〈과거 전체를 재현한다 〉 는 딜타이의 명제 를 미슐레에게서 찾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연의 불가피성에 대한 인간 자유의 지속적 승리〉 또한 미슐레의 교훈이었다 .62) 57) 페브르, 1 933 / 『역사를 위한 전두』, p. 7. 58) 페브르、 Avant- P ropo s de Trois essais ……, p. vm. 59) 대표적 철학자인 아롱 R. Aron 의 La ph ilo s op h ie criti que de l ' h ist o i r~ 근 193 4-5 에 출판되었다. 60) 페브르는 Annales (l 944) 에서 딜타이를 언급하고 있으며, 브로델은 페브르가 이 독일 철학자를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Luc i en Febvre et I'hi stoi r e> , Annales, 1957, p. 181 ). 61) 아롱은 딜타이가 직계 제자를 키우지는 못했지만, 〈과거의 완전한 재현〉이라는 그의 명제는 많은 역사가들에게 교훈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위의 책, p. 101 ). 62) 페브르、 Mi ch elet( l7 98-l874), Ju les Mi ch elet ou la libe rte morale. Intr od ucti on et Choix , Paris -G eneve, 1946, pp. 57-8. 페브르의 문화적 배타성은 Croce 에 대한 침묵에서도 드러난다. H. La p e yr~근 이 두 역사가의 사론을 비교하는· 가운 데 그 내용 및 표현이 너무나 유사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Re t our ii Croce,

RH, jan vie r -mars 1971, pp. 83-8). 고의인지 우연의 일치인지는 알 수 없지만 〈 모든 역사는 동시대사 〉 라는 사상이 이 두 역사가에게 공통적이라는 점은 분명 하다.

인간사는 페브르에 있어서는 고정 관념으로 박혀 있었다• 63) 안간이 역사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역사는 곧 인간을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고 그는 주 장하였다. 역사는 객관적인 〈 죽은 과학 〉 이 아니고 인간에게 유용 해야 한다는 뜻이다. 〈 역사는, 바라든 바라지 않든 현재적 관심에 의거 , 과거 사실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하며 계열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삶을 위하여 죽음을 심문하는 것이다. 〉 어 ) 이로써 현재사라는 새로운 역사의 한 측면이 부각된다. 아리애스 Ph. Ari es 는 이를 당시 실존주의와 연관시켜 〈 실존적 역사 〉 라고 부르고 있다 .65) 또한 인간은 이제 그 추상성을 벗어 버렸다. 〈 인간 그 본질에 있어서 는 시간 공간을 통해 항상 같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가에게는 아무 런 진실성이 없는 하나의 가정에 불과한 것이다. 역사가에게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들이 존재할 뿐이다. 〉 66) 철학적인 인간이 추상적인 반면 역사학적 인간의 모습, 과학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은 언제나 구체적 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는 변화를 연구히는· 학문이요, 또 〈다론 점 〉 을 찾는 과학이리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과학 〉 인가? 이전 세대의 실증사학 h i s t o ir e p os iti ve 에 있어서도 역사는 과학이었 다. 이 때의 과학이란 객관성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이제 과학의 의미가

63) 사소한 〈 실수 〉 에도 페브르는 비판을 가한다. A. Deman g eon 의 Geog rap h ie economi qu e et humain e 에 대해 말하기를, 〈 나라면 『인문 경제 지리학 』 이라고 했을 것이다. 인간이 항상 우선이기 때문이다 〉 (Annales, 1949, p. 5). 64) 페브르, , Revue de Me t ap hy s 떠 ue et de Morale, L Vlll, 1949/ 『 역사를 위한 전두 』 , pp. 437-8. 이 장의 제목은 여기에서 따온 것이 다 . 65) Le tem p s de l'his toi re , Monaco, 1954 / Pa ris, 1986, pp. 225-239. 66) 페브르, , R evue bi-m ensuelle des Cours et Confe re nces, n°ll-15, 1925 / 『완전한 역사를 위하여 』 · pp. 530-1.

변하였다. 객관성, 즉 불편부당이라는 불가능한 이상 앞에서 신음하던 전통적 역사가들과는 달리, 젊은 세대의 역사가들은 법칙이러는- 가능한 그러나 주관적인 개념을 과학성의 요체라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상대주 의 혁명을 거친 후 자연과학에 있어서조차 법칙이라는 것이 하나의 개연 성에 불과하게 된 마당에, 역사학자들이 법칙을 세우는 일에 나서는 것이 금기시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전 세대의 실증사학에 대비시켜 볼 때 새로운 역사는 실증주의 사학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67) 〈 법칙들? 만일 개별 사실들을 정리하여 계열을 만든다는 의미로 이 용어 를 사용한다면 안 될 것도 없다. 그러면 역사학은 다시 한번 과학의 살아 있는 일체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 68) 객관성과 법칙이라는 상호 대립적인 두 개념 가운데 역사가의 관심은 법칙으로 옮겨가고 있었지 만, 그렇다고 해서 객관성을 추구한다는 그 기초적인 의무가 버려진 것은 아니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실증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제 과학성이 그 엄격성을 상실하였다는 점을 아울러 강조 해야 할 것이다. 페브르에 있어서 역사는 과학이라기보다는 〈과학적으로 수행된〉 연구였다 .69) 과학이라는 말이 밀려가고 대신 들어온 말이 〈인 간〉이었다. 역사는 인간과학이라는 명제 가운데 인간이 항상 우선이었 다. 새로운 역사가 낭만주의 역사가인 미슐레에게서 그 정신적 원천을 발견한 것도 실증사학의 극복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공통 언어로 들 수 있는 것은 문제사 His t o r ir e p robleme 이 다. 새로운 〈종합〉의 시대를 맞아 역사학은 사회과학과 일체감을 느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적 변화를 추적하는 것이 역사학의 본령이 67) Carbonell 은 앞의 논문에서 아날 학파가 극복한 1 양 11 기말의 역사학이 실증주의 사학이라는 일반된 견해에 대해 그 용어 사용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 실증주의는 역사가들에게 침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그는 실증주의 사학의 이론가인 Lou is Bourdeau 와 페브르와의 유사성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아날 학파를 실증주의 역사로 평가해야 할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68) 페브르, ,p . 16. 69) 페브르、 , p . 22.

며, 법칙 정립적인 사회과학과는 달리 역사학은 오히려 차이점을 밝히는 학문이었다. 이러한 역사학의 본질에 과학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역사학을 과거라는 감옥에서 해방시킬 필요가 있었다. 현재, 삶이라는 언어로부터 역사학의 과학적 기능, 죽 현실적인 문제를 밝힌다는 기능이 부여되었다. 또한 현재에서 출발함으로써 역사학은 연대기적 서술이라는 우상을 타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회귀적 방법 Me tho de reg re- ssiv e 은 자료의 한계를 극복한디는 효과도 가져다 주었다 .70) 이러한 배경에서 문제사가 등장하였으며 페브르는 이것이 혁명적이었 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 그것은 모든 역사학의 시작이요 끝이다. 문제가 없으면 역사도 없다. 단지 이야기, 편집물들이 있을 뿐이다. […… ] 문제를 제기하고 가정을 세우는 것, 이 두 과정은 우리 세대의 역사가들에게는 무엇 보다도 위험시되었었다. 왜냐하면 문제를 제기하고 또 가정을 세우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 배신 〉 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마치 객관주의라는 요새에 주관 주의라는 트로이의 말을 침투시키는 것처럼… … .71) 역사학은 상아탑에 갇혀서는 안 되고 현실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 이 역사적 유용성의 구체적 실상은 무엇일까? 역사가가 현실에서 문제를 제기, 과거를 연구하여 나온 결과는 현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는가? 이렇게 문제를 급하게 설정할 경우 페브르의 대답은 완곡하다. 70) 페브르、 , p . 10. 71) 페브르, , p . 22.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페브르.의 비판은 지나친 감이 있다. 왜냐하면 세뇨보에게 있어서도 역사는 불가피하게 주관적인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또 이런 유의 역사가 정말 새로운 역사였나 하는 질문도 제기될 수 있다. 아날 창간 당시 편집위원 중의 한 명이었던 A. Piganiol 은 주관주의적 시각에서 세뇨보를 비판하는 H.-I. Marrou 와 페브르에 반박하 면서, 〈 문제사는 헤 쿠꾸 뚜人 때부터 존재해 왔다〉라고 말하고 있다(〈Qu 'est -ce que I'hi sto i re ? >, R evue de meta p h y s iq u e et de Morale, n°3, 1955, p. 237).

역사학은 오늘날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대답이다. 복잡한 상황에 대한 설명, 이를 통해, 사람들이 역사를 안다면 죽 그 기원을 안다면 덜 맹목적으로 드잡이하게 될 것이다. 과거의 해결책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현재 문제의 해결책은 아닌 것이다. 역사의 교훈은 과거가 어떻게 현재와 다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유연한 학파인가? [……]이 학파는 자동적인 역사가 아니라 문제 중심의 역사를 가르친다 .72) 죽, 역사는 현재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고 단지 무엇이 문제인가를 밝혀줄 뿐이다. 본질적으로 역사는 〈변화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역사의 한계일 것이고 이를 통해 역사와 사회과학의 협동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없으면 역사가 없듯이, 역사가 없으면 사회과학도 가능하지 못하다는 강한 주장이 이 한계 의식 속에 깔려 있지 않을까? 세번째 공통 언어는 상관성 Zusamrnenhan g이다. 페브르와 씨미앙의 논쟁을 통해서 이 개념을 검토해 보자. 〈이미 1903 년부터 [……] 씨미앙 은, 역사가에게는 매우 소중한 개념 인―—프랑스어로는 다소 설익은—— 사회적 Zusarnmenhan g을 격렬하게 비 판하고 있다. 씨미 앙에 의 하면 이 전통적 역사학의 테두리를 최근 역사 방법론자들이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73) 이 역사 방법론자란 세뇨보를 지칭한다. 죽 전통적 역사가들­ 은 상관성 개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다시 말하면 사회의 전체성을 파악 하려고 하기 때문에 과학적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비교〉를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우선 페브르는 이 상관성 개념이 역사학에는 매우 소중 한 개념이라고 옹호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새로운 역사나 비달의 지리 학은 사회학적 방법론인 비교의 가능성을 배제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면서 지리학적 관점을 옹호하고 있다. 지리학과 사회학 사이에서 그는 지리학 에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74) 후일 이 논쟁을 회고하면서 페브 72) 페브르、 ,p . 42. 73) 페브르, 『토지 』, pp. 89-90. 74) 페브르、 Annales, 1953, p. 374.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비달의 지리학이 Ann-ales 의 역사, 죽 우리의 역사를 낳았다.〉

르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 우리 역사학자들은 Zusam- menhan g의 이론가이다. 〉 75) 페브르가 소위 전체사를 지향, 과거의 사회 를 유기적으로 재현하고자 하였음은 이러한 이론적 배경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세뇨보마저도 이 개념을 〈가장 위대한 역사적 전보〉 중의 하나로 평가하고 있으며, 르페브르도 마찬가지였다 .76) 〈아버지보다 는 시대를 더 닮는다〉라는 블로끄가 애용하는 격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단 블로끄가 이 개념에 대해서 직접적인 증언을 남기고 있지 않은 것은 아마도 사회학주의 및 비교사에 대한 남다론 관심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쨌든 이 개념-우리는 이를 〈종합〉 이라는 말로, 또는 구조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인데 m ――은 당시 역사가들의 공통 언어였다. 그런데 이 개념과 관련, 눈에 띄는 것은 그 기원에 관한 견해들이다. 우선 페브르는 빠스깔을 거론한다. 〈단순한 해석학적 교조주의 대신 현대 과학이 제공하는 상관성이라는 젊은 개념을 주목해야 한다. 젊은 개념? 그러나 그것의 가장 명료한 형태를 빠스깥에게서가 아니면 누구에 게서 찾을 것인가? ‘이 세상의 각 부분들은 상관성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부분을 모르고서는 이 부분을 모르며, 또 전체를 모르면 한 부분도 모르게 된다.'〉 78) 페브르는 또한 미술레에게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한다. 세뇨보는 몽때스뀌의를, 그리고 현재 프랑스 사학사를 대표하고 있는 까르보넬 Ch. Carbonell 은 뗀느 H. T ain여} 들고 있는데 ,79) 이러한 75) 페브르, , 1 929 / Au coeur relig ieu.r du XVI\iec le, Paris, 1957, p. 24. 76) Seig n obos, La me tho de his tor iq u e•… ·· p. 137 : Lefe b vre, 위의 책, p. 26. 77) Ch. Carbonell. His toi re et his tor ie n s. Une mu tation ideo log iqu e des his tor ien s fran ~ais , 1865-85, Toulouse, 1976, pp. 301-2. A. G 垣 ar d.£. 세뇨보의 역사에서 구조주의적 어조를 발견하였다(〈 A l'ori g ine des combats des Annales>, Au berceau des Annaels, p. 85). 78) 페브르, , p . 25.

조상찾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프랑스 학자들의 배타성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이 문화적 배타성, 나아가 민족 의식을 우리는 아날 학파로 표현되는 프랑스 역사학의 부흥운동, 그 배경에 깔려 있는 무의식적인 힘으로 파악하고 싶다. 우리는 아날 학파의 역사가들을 통해서 이러한 것들을 재발견할 수 있다. 역사는 인간과학이라는 대전제하에 표현된 언어들, 예를 들면 전체사 와 문제사는 서로 상충되는 면이 없지 않다. 하나의 문제에서 시작하면 그것은 결국 전체사가 될 수 없지 않은가? 이들 언어 중 어떠한 것이 더 지배적인가가 아날 학파의 내적 굴곡을 설명해 줄 것이다.

2 페브르의 문제사 이제 페브르와 불로끄의 소박한 〈 역사를 위한 변명 〉 이, 전문 역사가로 서 실제 〈 경기장 〉 에 들어설 때 어떻게 표현 또는 굴절되는가를 검토할 차례이다 . 왜냐하면 《 아날 》 의 창간사에도 나와 있듯이 역사가는 사변적 개념이 아니라 실제적 〈 예와 사실에 의해서 〉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페브르는 베르와 구분되며 또 이 점에서 그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페브르는 주요 저서들 -Ph il ipp e Il et la Franche- C omt e( 1 9 11), La ter re et l'ev oluti on humain e (1922), Un desti n Mart in Lu the r(1928), Le pro bleme de l'incr oy an ce au .\11 sie c le. La relig ion de Rabelais ( 1942 ) ―의에도 1700 여 편에 달하는 길고 짧은 글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왕성하게 지적 활동을 전개하면서 그는 〈 새로운 역사 〉 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이다• 페브르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은 연구가 행해졌다. 195 61.;빈 그의 사후에 추도사 형식으로 발표된 단편적인 글 의에도 3 편의 체계적인 연구가 발표되 었다. 1971 년 독일 역사학자인 H. -D. Mann 은 페브르와 동시대 사상가들과의 지적인 관계를 주로 규명하였으며, 1981 년 캐나다 역사가 인 G. Massic o t t~ 페브르의 저술을 중점 분석하였다. 또 최근에는 스위스 역사가들에 의해서 페브르가 Revue de Sy n th e se h ist or iq ue 에 발표한 글들을 계량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1) 이제 역사 가 페브르의 생을 간단히 추적하면서 그의 〈역사를 위한 전두〉가 어떻게 진행되었나를 살펴보기로 하자. 1911 년 당시 3#1] 의 페브르는 쏘르본에 박사 학위 논문인 「 P hilippe 1) H. -D. Mann. Lucie n Febvre: la pen see viva nte 伊 hist or ie n , Par is, 1971 : G. Massic o tt e, L'his toi re pro bleme, la meth o de de Lucie n Febvre, Par is-Qu ebec, 1981 ; J.- P. Ag ue t, B. Muller, , R evue suis se d'his toi re , n•4, 1985. 반면 불로끄에 대해서는 아직 체계적인 연구가 발표되지 않은 접이 인상적이다.

II 와 Franche-Comt e. 156 전의 위기. 기원과 결과. 정치, 종교、 사회적 연구 P} 부록으로 「 Dole 의회 문서 보관소 소장 Franche - Com te내의 종교 개혁과 종교 재판에 관한 자료」를 제출하였다. 그는 왜 프랑쉬 꽁떼 지방을 선택하였나? 우선 1911 년 이전 그의 생을 잠시 검토해 보 자. 페브르는 1878 년 로렌 지방의 중심지인 낭시 Nanc y에서 태어났다 . 아버 지를 따라 프랑쉬 꽁떼 지방의 중심지 인 브장송 Besan c on 으로 이 주, 어린 시절을 보낸 후, 1899 년 빠리의 고등 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명문 고등 교육 기관에서 3 년을 지낸 후 역사와 지리 교사 자격증을 획득하였다. 그 후 Bar-l e Due 고등학교에서 1 년간 교편을 잡은 다음 Thier s 재단의 후원을 받아 학위 논문을 준비하게 된다. 190 灰打부터는 브장송 고등학교에서 근무하였으며, 그 곳 문과 대학에서 강의하였다. 이처럼 역사가로서의 교육 과정을 밟아 왔지만 역사에 대한 관심은 그 이전부터 어린 페브르의 꿈을 키워 주었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이 가지고 있던 역사에 대한 애정을 물려받았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아버 지의 서재에서 그가 탐독한 책 중 특히 영향을 준 책은, 그에 의하면, 미슐레의 『프랑스사 』 였다. 〈그를 읽으며 그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꿈을 키워 갔으니, 어떻게 내가 역사가가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 2) 그 내용 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미슐레가 1869 년 완성한 『 프랑스사 』 의 서문에 담겨 있는 인간(〈인간은 그 자신의 프로메데우스이 다〉), 삶(〈총체적 삶의 소생〉)이라는 말이 어린 페브르의 뇌리에 새겨졌 던 것이 아닐까? 또한 그가 19461d 편찬한 『 미슐레 』를 통해서 유추해 보면 그것은 〈자유〉, 〈애국〉 등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삼색기 가 노트르담 드 빠리의 탑 위에서 펄럭이는 것을 보고 기쁨과 감격에 겨워 미슐레는 자유의 찬가를 영창하였다. 무슨 자유일까? [……] 그것 은 프랑스적인 자유였다.〉 나아가 〈민중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라는 미슐레의 가르침이 장차 페브르를 사회사의 길로 인도했을지도 모른다 .3) 2) 페브르、 『역사를 위한 전두』, 서문, p. V. 3) 페브르、 『미술레』, p. 58 ; Mi ch elet, Le peuple, Intr o ducti on et note s par P. Via l laneix , Pa ris, lf57 4 , p. 13.

이 어린 역사가는 자신이 태어난 로렌 지방과 프랑쉬 꽁떼 지방에서 자신의 〈 저항적 기 질 〉 을 키워 나갔다. 특히 프랑쉬 꽁떼 지방울 그는 항상 자신의 〈 진정한 고향 〉 으로 여겨 왔으며, 여기에서 19561 년 임종을 맞이하였다. 〈 꽁떼와 로렌 지방의 ‘비판적, 논쟁적, 전투적' 기질을 쌓아 가면서 나는 1870 년 패배자들의 역사 ―― 너무 지나친 소심함, ‘종합' 의 거부, 지적으로 태만한 사실 숭배, 배타적인 의교사 취향-를 그냥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리고 거의 혼자, 동료 역사가들 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이에 저항하였다. 〉 4 ) 여기서 페브르는 의로운 영웅 의 등장 장면을 완벽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가 지리적 결정론에 의거 자신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필요는 없다 . 그는 단지 과거의 비프랑 스적인 역사학에 저항하여 승리하였음을 미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모든 역사학자들이 세뇨보의 깃발 아래 운집해 있을 때, 페브르는 언어학자, 심리학자, 지리학자 , 철학자들과 접촉하면서 역사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1900 년 베르가 《 역사 종합 잡지 》 를 만들었을 때, 페브르는 〈 즉시 그 창간자의 가장 충실한 〉 동료가 되었다선 1905 년부터 그는 이 잡지에 프랑쉬 꽁때에 관한 논문 및 지리학 저술에 대한 서평을 게재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벌써 역사가의 임무는 계기적 사슬의 고리를 묶는 것이 아니라 삶의 유기적 기능에 의해 유지되는 관계들을 포착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선 이 관계를 가장 용이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 지방 〉 이었다. 지리학의 영향을 엿볼 수 있고 또 페브르 의 저서가 지방사의 한 모델이 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 다. 7) 4) 페브르, 여사를 위한 전두 』 , 서문 , p. VI. 5) 위의 책, p. 넨. 6) 페브르、 , R SH, X, 1905, pp. 185-7 : 아울러 페브르는 이 잡지에 지방 지리학 관련 서평을 많이 발표하였다. 7) 브로델은 이 책의 1970 년판 서문에서 이 책을 지방사 연구_― -P . Gaube rt의 Beauvais et l e Beauuais is, R. Baehrel 의 La basse Prouence ; E. Le Roy Ladu rie 의 Pays a ns de Lan g uedoc- 의 선구적 작품이라고 평하고 있다(p. 5). 〈모델〉 이라는 말은 학위 논문 심사위원이었던 피스데르의 말이다.

『 필립 2 세와 프랑쉬 꽁때 』 는 4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1 장은 필립 2 세가 즉위하기 전 꽁때의 모습이다. 제 2 장에서 그는 필립 2 세의 치세 중 귀족과 부르주아지간의 갈등과 두쟁 그리고 그것의 정치적 의미 에 대해 언급하고, 부르주아지가 상승할 수 있었던 사회 경제적 요인 예컨대, 상업, 고리대, 농민의 토지 탈취, 관리, 법관들에 의한 귀족 의 토지 매입 등 ―― 을 분석한 다음, 마지막으로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삶의 모습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묘사를 덧붙이고 있다. 그리고 제 3 장에 서 페브르는 저지대 Pay s Bas 지방에 혁명이 발발했을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사건들을 서술하고 마지막 장에선 종합 평가를 내린다. 즉 이제 프랑쉬 꽁떼는 스페인의 대 저지대 정책에 희생당한 나머지 새로운 프랑 쉬 꽁때를 갈구하게 되었으며, 이는 1 세기 후 이 지방이 프랑스에 귀속 됨으로써 실현되었디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페브르J} 이 결과를 〈 바람직했던 〉 일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전 역사학자가 이 말로 자기 논문의 대미를 장식했디는· 데에는 그냥 간과할 수 없는 사 실, 죽 국가애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또 그가 서론에서 프랑쉬 꽁떼와 갇은 국경 지방 -Arles, Daup h in e, Savoie , Bresse 등-의 연구가 시급하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사학사적 위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대인의 평가 내용을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논문 심사 위원으로서 많은 관심을 보여 주었던 피스떼르 Ch. P fi st er 는 Revue h ist or iq ue 에 장문의 서평을 게재하였다. 그는 먼저 페브르기 -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등장, 그들의 재산 소유, 삶의 양태 등에 대해서 〈존경할 만큼 훌륭하게 〉 묘사하였다고 칭찬하였다산 논문 발표 당시 페브르는 자신이 사회사를 시도했다고 8) 페브르, 『 필립 2 세와 프랑쉬 꽁떼 』 , 1970 년판, p. 471 . 9 ) RH. 1912, p. 406.

밝힌 바 있는데 1 0) , 그도 이에 공감한 것이다. 그러나 이 〈 전통적 역사가 〉 는 몇 가지 문제점을 제시한다. 이제 바야흐로 새로운 역사가가 등장하 는 시점에서 그의 비판은 사학사적으로 커다란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된 다. 페브르는 꽁때를 무대로 전개된 1556 년에서 1598 년까지의 사건들에 관해 서는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 우선 보기에 그는 필립 2 세 치하의 꽁떼 지방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서두에서 도 말했듯이 〈 특정 시대와 지방에 있어서의 정치 , 종교, 경제 사이의 관계를 파악 〉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 11)

10) 페브르의 논문 심사 기록은 Reuue d'his toi re moderne et c onte m p or ain e, t. nl, 1912, p, 99 에 실려 있다 . 11) 피스데르, 위의 논문, p, 405-6.

시간적 선후 관계에서 역사적 변천의 주된 원인을 찾는 데 익숙해져 있던 구시대의 역사가로서 피스떼르가 이 논문에 연대가 많이 빠져 있다 는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피스 떼르 자신 이 비판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덧붙이고 있다. 정말 그에게 새롭게 느껴진 것은, 다시 말하면 그가 우려한 것은, 이 젊은 역사가가 경제적 요인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마도 우리는 페브르의 주장에 대하여 핵심적인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역사에 있어서 경제적 요인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 종교 개혁의 제 1 원인은 일상 생활에서가 아니라 종교 생활에서 재생의 영양소를 섭취하는· 개인의 신앙 및 희구 속에 있는 것이 다. 16 세기의 꽁때 지방은 귀족과 부르주아지, 국가와 법원 사이의 대립에 의해서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이 두 계급의 이해 관계는 자주 교차되었지만 언제나 상충된 것은 아니다 .12)

12) 피스페르, 위의 논문, p, 407 ; H. Prento u t.5 :. 당시 젊은 역사가돌이 일반적으로 학위 논문의 주제로 혁명, 제국, 19 세기 등을 선택한 데 반하여 페브르J} l~I 기

의 부르주아지를 택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페브르가 역사 에 있어서 종교의 역할을 과소 평가했다는 비판을 덧붙이고 있다 (< P hil ip p e II et la Franche-C o mt e, d'apr e s un livr e recent> , R SH, 1912, p. 65).

이러한 일반적 반론에는 종교를 일차적으로 종교에 의해서 설명하고자 하는 전통적 역사의 시각이 담겨 있다. 그리고 종교를 비종교적 요인 즉 경제, 사회에 의해서 설명하고자 하는 페브르의 전체적 또는 구조적 시각이 새롭게 느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건 좌익적 성향을 띠고 있던 페브르는 경제 결정론적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3) 어쨌든 이러 한 비판은 당시 페브르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나를 보여 주는 것으 로서, 막시스트건 아니건 젊은 역사가들이 《 아날 》 에 환호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14) 이처럼 당시대의 역사가들은 페브르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고 보았으며, 페브르도 서론에서 명백히 자신의 의도를 밝히고 있다. 죽 〈 외교적, 군사적 행위에 주목한 나머지 사료비판적 역사가들은 종종 한 지방의 가장 평범한 실제와 사회적 삶의 가장 은근한 전환을- 보지 못했다 〉 는 것이니, 이러한 언급 속에 이미 사회사 나아가 문화인류학적 역사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15) 그렇다고 정치가 배제된 것은 아니었

13) 페브르는 1934-5 년에 발표된 논문에서 마르크시즘에 대한 자신 의 입장을 분명 히 밝히고 있다. 우선 그는 이 교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고 고백한 후, 〈 진정한 마르크시즘 〉 과 〈 러시아에서 수입된 마르크시즘 〉 가운데, 후자는 경제적 결정론이라고 바판하고, 〈 진정한 마르크시즘 X 본 마르크스를 따르지 않더 〈 역사가의 오랜 체험 〉 을 통해서 터득할 수 있는 기본 사상에 불과하다고 보죠 L 라도 있다. (, p p. 364-336 : , r 완전한 역사를 위하여』, pp. 671-5). 14) J. R. Sura tt eau 는 현존하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마르크시스트 역사가둘­ Labrousse, Vil ar, Bruha t-의 증언을 통해, 아날 창간 당시 마르크시즘의 파급 정도를 밝히고 있는데, 1930 년 이전 마르크시스트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 고 아날의 두 편집인은 물론 마르크시스트가 아니었지만, 이 잡지의 성향이 자신들을 사로잡고 있던 문제에 가장 근접했었다고 말하고 있다( 〈 Les histo r ie n s, le ma rxism e et la nais sa nce des Anna/es : L'h istor io g r ap h ie marxi ste vers 1929 : un my the ?> ,A u berceau des Anna/es). 15) 페브르、 『필립 양 1l 와 프랑쉬 꽁떼J, p. 11.

다. 정치적 사건들 - 필립 2 세의 즉위, 저지대의 혁명, Albe 공작의 행군 등 ―_ 은 꽁떼 지방의 운명에 〈 혁명적 〉 영향을 끼쳤다고 페브르는 보고 있는 것이다 .1 6) 다만 비정치적인 요인들이 그 중요성을 되찾은 것이 다. 이러한 의미에서 페브르는 그 논문의 부제가 말해 주듯이, 정치, 경제, 종교 등 사회의 제반 요소를 다 망라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우리는 피스데르의 마지막 비판, 〈 다른 사회 계급들도 고려해 야 한다 〉 는 언급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사실 페브르는 l 硏 1 기 후반기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귀족과 부르주아지만을 중시한 반면, 피지배층­ 농민 ― ―은 거의 무시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페브르가 전체사를 지향했다는 점, 그리고 전체사가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는 점을 받아들이 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꽁떼 지방의 〈전체적 삶只t 묘사했다는 예찬은 결국 하나의 우상 숭배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페브르의 역사는 하층 계급이 빠진 불완전한 역사라는 비판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 0] 다•17)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그러면 페브르는 어떠한 배경에서 피지배층 울 소홀히 취급하였나 하는 것을 이해하는 문제일 것이다. 우선 그는 1924 년 〈민중 Peu p le 이라는 말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부르주아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18) 구체성을 신봉하는 역사가에게 있어서 부르주아지는 역사 의 주체가 아니라 1 伊1 l 기라는 특정 시대의 주체라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그의 1&1l 기에 피지배 계층이 빠져 있다는 정당한 비판이 페브 16) 위의 책, pp. 75, 81. 17) 브로델, 197W 국립 도서관이 주관한 페브르 전시회 팜플렛 서문 p. 8 : 베르는 이 책이 자신이 제창한 〈종합〉의 훌륭한 모범이라고 극찬을 하고 있다(〈 Nou­ velle serie> , R SH, 1913 , p. 2) : 페브르의 가장 충실한 사도로 꼽히고 있는 망드 루R. Mandrou 는 이 책이 〈전체사의 아름다운 예〉라고 극찬한다(페브르의 『완 전한 역사를 위하여』의 서평 , pp. 211-2). 하층 계급이 빠졌다는 이거스 l gg ers 의 비 판은 New dire c tio n s· •· , p. 54. 18 ) 페 브르, , 1 924 / 『완전한 역 사를 위 하여 』, p. 597.

르는 지배충의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고 있다는 의미로 환 원된다면 이는 오히려 정당하지 않을 것이다. 『 필립 2 세와 프랑쉬 꽁때 』 로써 시작된 개인적 전두는 1920 년 이후 삐렌느와 불로끄를 발견하고, 1929 년 Annales¾ 만들면서부터 집단적으 로 변하게 된다. 애향심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 전정한 고향 〉 을 연구하 게끔 하였고 이를 통해 그의 애국십은 일충 강화되었을지 모론다. 그리 고 그것은 제 1 차 세계 대전 참전 경험을 통해서 새롭게 확인되었을 것이 다. 1919 년 〈 스트라스부르의 프랑스적 대학 〉 에 부임하면서 페브르는 독일 패망의 역사학적 원인을 분석하였다. 독일이 패배한 것은 자신의 배타적 효용성을 위해 전실을 주조했기 때문이 아닌가? 가상적인 세계를 관조함으로써 스스로를 마비시키고 또 사실상 국가 적 이기주의의 가장 저주스러운 환상에 불과한 것을 필경에는 자의적으로 실체인 것처럼 믿었기 때문이 아닌가? 만일 내가 믿듯이 역 사 라는 것이 집단 적인 것에서 개별적인 것의 몫을 찾아내고 그들의 관계를 밝히는 비판적인 학문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많은 순진한 역사가들이 주장하듯이 개별적인 것, 특수한 것, 일회적안 것 등의 인식에 불과하다면…… .19 ) 〈황폐한 세계에 있어서의 역사 〉 라는 제목으로 행해진 이 첫 강의에서 페브르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바로 독일의 관념주의와 역사주의이며, 야結 1 이를 받아들였다고 본 1870 년 패배자들의 역사였던 것이다. 독일 과 프랑스 국경에 위치한 대학의 교수로서 페브르는 양국 관계에 많은 관심을 나타내 었다. 그는 1928 년 『 하나의 운명, 루터 』 를 발표하고, 3 년 뒤 에는 드망종 A. Deman g eon 과 함께 『 라인강. 역사와 경제 』 를 펴내었 다. 루터를 선택한 것은 그가 독일인의 집단 심리를 파악하는 데 가장 전형적인 인물로 여겨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0 ) 19) 페브르, RSH, 1920, pp. 4-6. 1960 년대의 피셔 Fis c her 논쟁에서 그의 예리함이 재차 증명되었다 (c f. J. Droz, Les causes de la pre mi ere Guerre mondia le . Essai d'his tor io gra p h ie , Paris, 1973). 20) A. Renaudet, 『 루터 』 에 대한 서평, RH, 1928, p. 374. 당시 루터는 〈근대 독일

울 형성하는 데 가장 기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고, 페브르도 1944 년 『루터』 의 제 2 판 서문에서 이를 말하고 있다 .

『 루터 』 에서 페브르는 주인공의 전생애를 서술하지는 않았다. 그가 관심을 가전 루터는 역사의 전면에서 격동의 파도를 타고 있던 1517 년에 서 1525 년까지의 루터였다. 역사가는 불분명한, 따라서 소설적이거나 정신분석적일 수밖에 없는 1517 년 이전의 젊은 루터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전 1525 년 이후의 루터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페브르J~ 관심을 가진 것은 루터라는 역사적 인물을 통해 그 시대를 파악하는 데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루터는 그에게 문제를 제공해 주는 도구였던 것이다. 서문에서 페브르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루터의 전기? 아니다. 루터에 대한 심판은 더더욱이 아니다. 간단하지만 그러나 비국적인 한 인간의 운명 곡선을 그리고 중요한 시점들을 정확히 식별하여 어떠한 환경에서 그가 품었던 애초의 숨결이 약화되고 굴절되었나 롤 보여 주는 것, 특이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던 한 인물에 대해 개인과 집단 그리고 개인의 진취성과 사회적 필요성 등―一이것이 아마도 역사학의 궁극 적 문제일텐데――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 이것이 나의 의도이다 . 2 1) 확실히 개안과 집단의 문제는 이즈음 페브르를 사로잡고 있던 문제였 다. 1933 년 〈 개체성 〉 이라는 주제로 열린 제 3 회 〈 국제 종합 주간〉에서 그는 이렇게 그 관계를 일반화하고 있다 : 〈 역사적 인물이란 밀가루 반죽 같은 것을 부풀리는 효소이다.〉 22) 따라서, 루터는 효소이고 밀가루 반죽 은 독일 민중 즉 부르주아지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사적 관점에서 페브르는 기존의 루터 연구가 너무 정치적, 종교적 측면만 강조하였다고 비판한다. 23) 이제 관점을 사회에 돌릴 때가 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예언

21) 페브르, r 루터』, 서문, p. VI. 22) 페브르, , L'ind iv id u alite , Pa ris, 1933 , p. 136. 23) 페브르, ,p p, 8-9.

가적인 어조로 말한다. 〈 심리적인 것의 배후에는 사회적인 것이 있다 . 그리고 이 강의 중 수차 반복했던 것을 다시 한번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인 것 속에서 찾아라, 그러면 발견할 것이다. 그 시대의 사회를 보라, 그러면 구할 것이다. 〉 24) 그는 당시 루터 연구가인 Den ifle 이 순수 심리학적으로 프로이트적 〈 소설 〉 을 썼다고 비판하고 있다 .25 ) 아마도 그는 Er i ckson 의 정신 분석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무엇보다도 〈 사실 〉 에 토대를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과 사회에서 페브르의 시야는 사회를 향하고 있었다. 루터에게 중요했던 것은 교회의 개혁이 아니라 〈 루터 자신, 그의 영혼 구제 〉 였다 . 2 6 ) 그러나 페브르는 미슐레처럼, 종교 개혁이 종교적, 심리적 이라기보다 근본적으로 사회적 사건임을 주장한다. 종교 개혁은 〈 사회의 산물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부르주아 시대의 부르주아적 현상-종교의 부르주아적 인식 〉 이며 27) , 나아가 부르주아지가 스스로 〈 꺼려하거나 반대 해도 〉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는다. 28) 즉 부르주아지라는 계층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동일한 의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하면 역사의 주역은 루터 개인이 아니라 당시의 부르주아지이며, 더 정확하게는 이 부르주아지가 루터를 어떻게 인식하였나 하는 뒤르깽적 집합 표상 ―― 루터주의-이 역사의 흐름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루터의 〈 고유 한 〉 사상과 루터주의가 동일시되던 1517 년에서 1525 년까지만 루터는 역사적 인물로 간주된 것이며, 루터의 〈 배신 〉 은 루터가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와 루터주의 사이의 상이점이 극적으로 표현된 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1525 년 이후의 루터를 페브르는 〈 자신에로의 복귀 〉 로 표현하고 24) 페브르、 , p . 587. 1941 년 고등 사범학교 에서 강연하면서 페브르는 역사는 본질적으로 사회사라고 말하고 있다( 〈 V i vre l'hi stoi r e> , p . 222 ). 25) 페브르、 『 루터 』 , p. 23. 26) 위의 책, p. 41. 27) 페브르、 , p . 587. 28) 페브르、 , p . 758.

있다. 어찌 보면 루터는 배신한 것 이 아니라 배신당했다는 논리이기도 하다. 페브르의 『 루터 』 에서 우리는 이 〈 독일인의 영웅 〉 이 왜소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 서문에서 페브르는 역사가의 임무는 심판하는 데에 있지 않다고 다짐하고 있지만 민족 감정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는 종교 개혁 자체가 실패로 끝났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그 이유를 〈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승려의 ‘시대 착오적인’ 머리 〉 탓으로 돌리고 있다 . 2 9 ) 제 2 차 대전을 겪은 후 그는 더욱 심하게 루터를 단죄한다. 〈 루터, 이 골수 독일인은 결국 독일 사람들만을 위해 말하였고 행동했을 뿐이다. 민중의 지도자 루터는 그들의 온갖 편견――무엇보다 도 잔인하고 격렬한 조직적인 반유태주의――울 어깨에 얹고, [……] 루터는 마음속 깊이 천진한 무정부주의를 간직하고……. 〉 30) 비록 민족적 편견 내지는 사회적 결정론의 위험을 드러내기는 하였지 만, 『 루터 』 는 예의적 인 인물이 아니라 〈 그 시대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인물 〉 을 동해서 사회를 파악하였다는 점에서 〈 전기 〉 의 새로운 장을 열어 준 것 이며, 문제를 뚜렷이 밝히고 또 그것을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규명함으로써 해결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사의 한 모델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 새로운 역사 〉 는 라블레 Rabelais 연구에서 극명 하게 드러난다. 『 루터 』 를 발표한 다음해 페브르는 불로끄와 함께 Annales 울 창간한 다. 그 후 스트라스부르에서의 오랜 〈 유배 생활 〉 을 마치고 1933 \1 드디 어 빠리로 진군, College de France 의 교수가 된다. 〈이 높은 연단 덕분 에 내 목소리는 매우 멀리 전해졌다.〉 3 1) 이 무렵 페브르는 『 프랑스 백과 사전 』 의 편집 책임을 맡아 〈 종합〉을 실천에 옮긴다. 1933 년 당시 문교부 장관이 었던 몬지 A. de Monz iei근 새로운 백과 29) 페브르, 『 루터 』 , p. 193. 30) 페브르 , Au coeur relig ieu x du XVIie c le, p. 80. 31) 페브르、 『역사를 위한 전두』, 서문.

사전을 편찬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 그에게 있어서 백과 사전은 지식의 종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 사전 이나 라루스 또는 영국이나 이태리의 백과 사전처럼 알파벳 순으로 편집 된 백과 사전은 이러한 요구에 부합되지 않았다. 몬지는 자신과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던 페브르에게 이 작업을 의뢰하였다. 이후 1940 년까지 역사가가 이 작업을 주도하게 된다. 이 사전은 모두 2 01'.l으로 이루어졌 는데 각권의 제목과 간행 연도는 다음과 같다. I. 심성적 도구 (193 7) II . 물리 (1955) m. 하늘과 땅(1 93 7) N. 생 (토대. 유자 번식 ) (제 1 권, 1937 : 제 2 권, 1960) V. 생물 (1937) w. 인간(1 936) \t 인간의 공간 (1936) ,'Ill. 심성적 삶 (1938) lX. 경제적 사회적 세계 (19 60) x. 국가(1 935) XI. 국제적 삶(1 95 7) XII. 화학(과학과 산업 )(1957) XIII. 공업 · . 농업 (1962) XIV. 일상적 문명 (19 54) lV. 교육과 지도 (1939) 짜 1. X\!. 예술과 문학 (1962) 洞'Ill. 기록 문명 (19 57) XIX. 철학 • 종교 (1957) xx. 변전하는 세계(역사. 변화. 미래 )(1959) 우리는 먼저 이 백과 사전이 알파벳순이 아니라 주제별로 구성되어 있으며, 또 그 주제도 철학, 역사, 지리, 사회학, 생물학 등과 같이 전통 적인, 페브르에 의하면 칸막이된 대학의 교과목별로 나뉘지 않고, 대신

삶, 인간, 심성, 문명 등 가히 〈 종합적인 〉 카테고리에 의해서 나누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도 또 부분적으로도 종합을 이루려는 시대 정신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백과 사전의 원래 구상에는 〈 역사 〉 라는 항목이 들어 있지 않은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역사 그 자체가 종합이어야 되었기 때문이다 . 3 2 ) 이 백과 사전은 〈 우리 시대에서부터 출발하여 인간 문명의 총서를 구성할 것을 대담하게 꾀한 〉 33), 즉 현재사적 역사 인식의 표현이며, 그 종합의 출발은 심성적 도구였다. 페브르는· 〈 인간이 만든 해방과 획득의 도구 〉 로서 〈 논리적 사고, 언어, 수학 〉 이라는 세 가지 도구를 제시하고 있다.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 인간 문명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 이러한 그의 관념주의는 제 2 차 대전중에 발표된 저술들 ――『 오리젠과 데스 뻬리에 』 Orig en e et Des Perie rs ou l'eig me du Cym balum Mundi( 1 94 2), 『 l81] 기의 비신앙 문제 』 Le pro bleme de l'in c roy an ce au xvresie c le. la •R elig ion de Rabelais (19 42),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 사랑 』 Au tou r de l'Hept am eron. Amour sac~. amour p ro f ane (1 944) ――에서 재차 확인 된다.

32) 페브르, 위의 책, pp. 104-6. 33) 페브루 , Ene yc lop ed ie [ran 안is e, p. 18-24- 10. 그러나 이러한 성격의 백과 사전은 구체적 사실에 대하여 정보를 얻고자 하는 독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으며, 또 항상 새롭 게 개정되어야 그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데, 이 백과 사전은 그 후 개정되지 못한 채 도서관의 한 구석 에 의롭게 놓여 있다 (c f. G. Mato r e, His toi re des dict i o n nair es fran uais , Paris, 1968, p. 159).

페브르는 1922 년 르프랑 A. Le fr anc 이 발표한 『 Pan t a gr uel 연구 』 를 읽은 후, 라블레와 l@1l 기의 비신앙 문제를 연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의 출발점은 분명 했다. 즉 르프랑의 주장을 반박, 1532 'd Pan t a gr uel 을 발표 할 당시의 라블레는 무신론자가 아니며 나아가 무신론자가 될 수 없었다 는 가정을 세운 것이다. 서론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문제는 이제 명확해진다. 역사가라면 다 이해하겠지만, 한 인간, 동시대인

으로부터 고립된 한 16 세기 작가를 체포하고 그의 작품 속의 어떠어떠한 구절이 현재 우리의 감각 틀 에 부합된다고 해서, 마치 현대인이 종교 문제에 관해 서류 분류하듯이 그를 분류하는 것은 역사가의 일이 아니다. 1 位1 ] 기의 인간과 관념에 대해서, 또 원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에 관해서 […… 연구할 때 ] 문제는 주의하여야 할 사항들을 명시하여, 죄악 중의 죄악, 용서 받지 못할 죄악인 시대 착오를 피할 수 있게 하는 일이다 .34 ) 우리는 뒤르깽이 내린 사회적 사실의 정의를 상기 인용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회적 사실을 역사학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역사학의 역할은 과거와 현재는 다르다는 인식, 즉 〈 시대 착오 〉 의 위험성을 환기시키는 일이었다. 〈 변화 〉 , 〈 차이점 〉 등이 역사가들의 고유한 언어가 아니었나? 페브르는 우선 라블레와 동시대인들의 증언을 검토, 그들이 비록 무신 론자라는 말을 사용하여 라블레를 비판하였지만, 이 말의 l@1] 기적 의미 는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그저 〈 신자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던 욕설 〉 에 불과했다고 밝히고 있다 .35) 따라서, 1R1) 기의 사람둘이 그를 무신론자라고 불렀다고 해서 그를 무신론자라고 평가한 르프랑은 시대 착오라는 죄악을 범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시대 인들은 왜 라블레를 비난했을까? 흔히 이야기하듯이 라블레가 종교를 바웃고 또 사회를 풍자해서가 아니라-왜냐하면 이는 당시 유행이었으 며, 라블레는 오히려 점잖은 편이었다고 페브르는 주장한다―― Pan t a ­ grue l 과 Garga n tu a 7} 위대한 작가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일종의 질투심 때문이었다고 가볍게 본다 .36) 이처럼 먼저 당시대인이 남긴 증언을 시대적 배경에서 이해한 다음 페브르는 라블레의 저술에 담긴 신학적 문제에 파고든다. 다시 한번 언어사적 관점에서 그는 〈 완전히 죽는다 〉 , 〈 기적은 없다 〉 라는 말들이 당시에는 무신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깔뱅 Calv i n 과 비교할 34) 페브르、 p. 15. 이후 이 책은 문맥에 따라 『 라블레 』 또는 『 1 6-11]기의 바신앙 문제 』 로 표기할 것임. 35) 페브르, 위의 책, p. 128. 36) 위의 책, pp. 154-6, 160.

적에 그는 한결 온전했다는 것이다 .3 7) 그리고 나서 페브르는 라블레와 종교 개혁 및 인문주의와의 관련성을 추적한다. 우선 1530 년에서 1535 년 사이의 종교 개혁 형태를 두 가지 일반론 __ 성서 지상주의와 신앙 에 의해서만 일반화된다는 믿음 ―― 에서 설정한 후 , 라블레는 바울의 사상을 인용하고 있지 않으며, 또 성서 이의에도 고전을 중시하고 있다 는 점에서 그는 종교 개혁과 호흡을 같이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히 려 에라스무스와 가까웠다는 것이다. 라블레는 〈 우리에게 그것 [에라스무 스에 대해서 느낀 것]에 관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어느 날 감동 어린 목소리로 에라스무스를 향해 자신이 그의 정신적 아들이라고 감사 히 의칠 뿐이었다. 〉 38) 그러나 역사가는 그 본연의 임무에 충실, 라블레와 에라스무스의 차이점을 지적한다. 라 블 레는 세계시민주의자가 아니었다. 프랑스인이고 애국자였으며, 그리고 자신의 왕에게 충성을 바치며 파비아 전두의 패주자들에게 그가 온갖 저주를 다했음을 우리는 안다. 역사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면 그는 〈 민족주의자 〉 였 다 . 39)

37) 위의 책, p, 206. 38) 위의 책, p. 298. 39) 위의 책, p, 302.

바로 이러한 이유로 페브르가 국가 존망의 위기에서 라블레를 연구했 거나 또 그 연구 방향이 정해졌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로서 태어난 이래 그의 영혼 속에 흐르는 국가애가 다시 한번 표출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만일 페브르의 연구가 여기에서 그쳤다면 그의 r 라블레 』 는 그저 평범 한 연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라블레가 무신론자인가 아닌가 하는 내면의 문제를 어떻게 역사적으로 입증할 수 있을까? 그는 이렇게 변명 울 덧붙이고 있다. 〈아마도 153~ 라블레는 그렇게 [무신론적으로] 생각 했을지도 모른다. 그 의에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

나 정말 라블레가 그렇게 생각했는가? 우리들은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라도 그렇게 쓰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 40' 페브르 는 다시 한번 순수 심리학적 해석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역사십리학은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페브르는 1 位 1] 기의 사회로 문제를 전환시키며 그 해답을 찾고 있다. 페브르는 다음-과 갇은 문제를 제기한다 : 〈 라블레는 무신론자가 될 수 있었을까? 〉 마치 독일 부르주아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종교 개혁 사상에 물들지 않을 수 없었듯이, 라블레도 〈 사회적 사실 〉 그 강제력에 의해 무신론자가 되고 싶었어도 될 수 없었으리라는 대답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증명 하기 위해 페브르는 16 세기의 〈 심성적 도구 Ou till a g e men t al — — 언어, 과학, 수학_~를 분석한다. 그 결과 1~- 1]기는 이들의 빈곤, 정확성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41), 라블레와 같은 창조적 인물이라도 그 시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42) 그리고 이러한 세계에서 간혹 발견되는 비종교적인 기록 등은 다 개인적인, 충동적인, 단편적 의침에 불과하기 때문에 〈 사회적 중요성 〉 을 가지지 못한다고 그는 덧붙이고 있다. 43) 한 마디로 1~- 1]기는 〈 믿기를 원하던 시대 〉 였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이것이 바로 페브르의 1~사 기이다. 기본적으로 관념적이며 45) 어떠한 40) 위의 책, p, 210. 〈 아무도 결코 - 이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 라블레의 의식 깊숙 히 내려가 볼 수는 없다. 〉( p. 203) 41) 시각이 아니라 청각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정확한 측 정보다는 소문에 의해 지배되던 비과학적인 시대라고 페브르는 주장하고 있으며( 〈 De !'a peu pre s a la pre cis ion en pa ssant pa r ow-dir e> , A nnales, 1950), 과학철학자인 꽈레 A. Koy r8 :. 페브르의 이러한 직관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E t udes d'his toi r e de la pe nsee scie n ti fiqu e, Paris, 1966 / 1973, p. 106). 42) 페브르、 『 라블레 』 , p, 323. 43) 위의 책, P, 323. 44) 결론 제목이다. 45) 페브르는 관념주의자였다 . 그에게는 경제도 기본적으로 관념적이었다(페브르、 『황폐한 세계에 있어서의 역사 』 , p. 15). 베르도 이를 지적하고 있으며, 모라제도 페브르를 독일식 결정주의에 반대한 정신주의자라고 보고 있다(모라제,

Febvre et I' his t o i r e viv a nte > , R H. 1957).

창조적 반항도 허용하지 않던 폐쇄된 세계였다. 당연히 비판을 받았다. 우리는 먼저 그의 사론이 얼마나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부터 검토해 보자. 우선 페브르가 가능주의를 신봉해 왔고, 또 추상성을 배격 해 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193 안건 그는 〈 모든 우상 가운데 치명적인 해악을 가져오는 적, 그것은 분명 의인화된 추상 일 것이다 〉 라고 쓰고 있다 . 46 ) 그러나 『 l81] 기의 비신앙 문제 』 를 발표하 기 1 년 전 그의 관점은 정반대로 선회한다• 〈 각 시대는 각각 고유한 스타일, 다시 말하면 고유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 47) 그리고 이와 동일 한 생각을 그는 이 책의 서론에 쓰고 있다. 〈 각 시대는 심성적으로 그의 세계를 제조한다. 〉 이러한 상대주의적 관점 48) 을 우리는 전쟁 체험으로 돌릴 수 있지 않을까? 전쟁,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 의지 밖에 있으며 또 그럴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을까? 이 책의 서문을 쓴 베르는 페브르가 시대의 깊은 종교심은 잘 증명했 지만 〈 지적 엘리뜨의 창조적 역할을 부정했다 〉 고 질책하고 있다. 49) 불로 끄도 베르의 비판에 페브르가 놀랐을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도 베르의 견해와 동일하다는 것을 암시한 후, 페브르의 문제사는 결국 르프랑이라 는 한 라블레 연구가에 대한 논쟁적 반론을 제기했을 뿐, 〈 역사적 실체〉 _ 一 자신의 『 봉건 사회 』 와 같은_를 취급하지 않았다고 평하고 있

46) 페브르, , R H, 血 1932/ r 완전한 역사를 위하여 』 , p, 470. 예를 들면, le genie gau lois , le gen ie pro vin c ia l, la pen see bourgu igno ne 등. 47) 페브르、 , A nna/es, 1941 / Au coeur relig ieu x du XVIi ec le, p. 274. 48) 이는 이거스의 평가로서 이처럼 역사주의적인 일면을 지적하는 것은 타당하다 고 생각한다. 페브르는 <… ... 이 사실인가〉라는 사실학파적 관접에서 벗어나 〈 … … 이 가능한가 〉 라는 이해주의적 관접으로 역사를 바라보았다는 접도 아울러 지적해야 할 것이다. 49) 베르,

, 『 라볼레 』 의 서문, p. XXI .

다. 50 ) 그러나 페브르가 관심을 가전 것은 라블레가 아니라 16 세기의 심성적 사회가 아니었나? 비록 단편적이지만 불로끄의 비판과, 그 전에 있었던 『 봉건 사회 』 에 대한 페브르의 혹평을 비교해 보면 둘 사이의 묘한 대립을 엿볼 수 있다• 중세사가인 바따이용 M. Bata i l lon . 5:.. 베르에 동감하면서, 구체적으로 중세에 이미 비기독교적인 전통이 존재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5 1) 이처럼 당시대인들의 비판은 페브르가 인간의 창조적 능력을 과소 평가했다는 점에 초점이 맞추어진 반면, 후대의 역사가들은 계급적 시각 에서 페브르를 비판하고 있다. 왜냐하면 페브르에 있어서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질적으로 동일한 〈 심성적 도구 〉 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 세계관이 같을 수밖에 없으며, 지식충이 그 세계관을 표현하기 때문이 다. 다시 말하면 한 사회내의 계층간에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긴장, 모순 이 발생할 수 없다는 유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세계를 〈 심성 〉 이라는 관념적 도구를 가지고만 제시했다는 그의 선택은 자연히 물질적 도구를 경시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 이는 결국 페브르가 그토록 경계해 왔던 결정론적 사고와 다를 것이 없었다 .52 ) 보벨 M. Vovelle 의 종합적 평가를 들어 보자. 바흐찐 Bakh tin e 의 저술을 통해서 생명력 있는 민중 문화의 대변인으로서 의 러블레를 발견한 사람들, 또는 갠즈부르그 G i nzbur g, 데이비스 Dav i s 등을 통하여, 모순, 간장, 두쟁 그리고 민중 문화와 엘리뜨 문화의 일방 통행적인 흐름이 아니라, 생생한 변증법적 교류로 가득 찬 l@1] 기를 발견한 사람들은 50) 불로끄가 1943 \1 2 월 13 일 페브르에게 보낸 편지, Annales, 1944, pp. 28-9. 51) 바따이용, , A nnales, 1944, p. 29. 52) 갠츠부르그는 페브르가 2 01]기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 중의 한 명임에는 틀림없 지만, 그리고 라불레가 무신론자가 아님을 매력적으로 증명했다고 평하면서도, 1 찌기의 사람들이 종교의 지배적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Le from a ge et les vers, L'u n iv e rs d'un meunie r du XVIe sie c le, tra d, de I' italien , Pa ris, 1980, p. 19).

사물의 일면밖에 보지 못한 페브르 같은 사람이 제시한 빈약한 구조를 그냥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53) 또 현재사적 관점에서, 페브르는 1930 년대 고조된 우익적 사고를 대변 하면서 물질보다는 심성의 우위를 강조하고 또 마르크시즘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하나의 해독제로서 l~ i l 기의 조화로운 세계를 제시했다는 분석, 또는 비종교적, 반교회적 좌익이 라블레를 자기편에 끌어들이려는 데에 반대하여 페브르는· 라블레가 기본적으로 종교적임을 밝히려 했다는 분석 54) 등도, 건조한 면은 있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듯 페브르의 구조가 간과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또 정당 하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사관은 결국 계급 사관으로서 다 일면적 전실 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데올로기적 시각에서 역사가의 저술 울 분석하는 것은 그것을 일방통행적으로, 빈약하게 만들 위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많은 예찬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시대 착오를 경계하라는 역사가의 주장을 강하게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잃지 않을 것이 다. 55) 아울러 페브르가 심성적 세계의 가능성과 한계와 갇은 사변적인 문제를 그래도 〈 과학적 〉 이고 〈 실증적 〉 인 수단-심성적 도구――을 53 ) Vovelle, , L a nouvelle his toi re , Pa ris, 1978, p, 325. 이러한 〈 지배적 이데올로기 테제 〉 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을 사로잡았 던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예를 들면, 힐튼(R. H ilt on) 은 〈 널리 유포되어 있는 가정과는 반대로, 중세 농민의 문화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계급의 문화가 중간 및 상충 계급의 문화로부터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듯이, 중세 유럽의 지배 계급의 문화로부터 분리된 것은 아니었다 〉 고 주장하고 있다(하비 J. 케이 지음, 양효식 옮김, 『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 』 , 역사비평사, 1988, p. 109). 54) M. de Certe a u, , Faire de l'his toi re , I, Pa ris, 197 4, p. 14 ; M. Ag ulho n,

, 198 與 4 월 11 일 College de France 취 임 강연, Annales, 1987, p. 605. 그는 Fuste l de Coulan g es 의 la Cite an tiq ue 도 공화주의에 반대하기 위해서 쓰여졌다 고분석하고있다. 55) 바흐찐은 이 책이 기념비적인 저서임에는 틀림없으나, 민중의 옷음에 담긴 해학

적 인 면을 무시하고 전지한 면만을 근대적 인 의미로 해석함으로써 페브르 자신 이 시대 착오를 범했다고 말하고 있기는 하다 (L ' oe U!i re de Franc o is Rabelais . la cultu r e pop u lair e au moy en age et sous la Renais sa nce. tra d. de russe, Paris, 1970, p. 137).

동원하여 증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지성사 연구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 5 6 ) 이제 바야흐로 심성사라는 영역이 개 척 되었고 젊은 역사가들은 계량적 방법까지 동원하여 그 새로움을 더할 것이다.

56) S. Hugh e s, The obstr u cte d pa th , N. Y., 1968, P. 47.

3 불로끄의 사회사 페브르가 〈 역사가로 태어난 〉 반면, 불로끄의 경우 출생 환경 및 부찬 의 지적 영향은 더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가 있다. 불로끄는 1886 년(페브르보다 8 년 늦게) 리용 L yon 에서 태어났다. 한 지식인의 운명 울 그의 인종적 측면만 가지고 추적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1 양1 ] 기말부터 20 세기 중반에 걸쳐 전개되었던 반유태주의 운동이 이 유태계 역사가에 스게 스커로다를란 〈 드충레격퓌을스 주 사었건으의리 라세는대 〉 것라은고 말쉽게하 고침 있작으할며 수 ” 또있다 5. 양 脂불 l 의로 끄노병도 으로 제 2 차 세계 대전에 자원한 것도 이와 전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아버 지 인 귀스따브 불로끄 Gusta v e Bloch 는 당대 로마사의 권위자 로서, 그와 그의 주위에 형성된 지적 서클은 어린 불로끄에게 많은 영향 울 끼쳤다 . 〈 아버지에게, 그의 제자가 〉 라는 학위 논문의 헌사가 이룰 말해 준다. 고등 사범학교에서 본격적인 역사가 수업을 받은 후, 1908 년 졸업 후에는 당시 유행대로 독일 유학이라는 지적 순례를 떠났다. 베를린과 라이프찌 히 대 학에서 뷔 허 K. B ii cher 와 하르나크 A. von Harnack 의 강의를 듣는데, 특히 뷔허는 시장의 출현에 의해 야기된 〈경제 혁명〉 이 결국농노해방의 물질적 가능성을만들어 내었다는주장으로유명한 역사가로서, 벨기에 역사가인 삐렌느 역시 이 역사가의 영향을 받은 바 있었다. 이 점에서 삐렌느와 불로끄 사이에 하나의 지적 고리가 형성 되었을지도 모른다. 독일에서 1 년간 체류한 후에는 Thiers 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농노제 시대 Ile-de-France 지방의 농촌 인구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처럼 농업사와 인구에 대한 관심은 역사가로서의 출발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3 년간 이 재단에서 연구를 마친 후 1913l 건 불로끄는 《 역사 종합 잡지 》 중 페브르가 담당하던 「프랑스의 지방」에 「 Ile-de­ France 」를 발표하였다. 이로써 당시 새로운 역사의 기치를 세운 베르, 1) 불로끄, 『역사를 위한 변명 』 , p. 151 .

페브르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이후 이 빠리지앵은 몽쁠리에 Montp - ellie r 와 아미 앵 Am i ens 의 고등학교에 근무하면서 프랑스의 남부와 북부를 접촉하게 되며, 특히 제 1 차 대전에 종군하면서 농촌을 관찰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불로끄에게 있어서 전쟁은 역사가로서의 진로를 결정지어 준 중대한 사건이었다. 물론 이는 불로끄에게만 국한된 체험은 아닐 것이다. 삐렌 느, 페브르 모두 제 1 차 대전을 통해서 〈 국가의 신성화 〉 를 위해 존재하는 독일적 역사학의 해악을 실감하였으며, 이로부터 새로운 역사학을 정립 할 사명감을 느꼈던 것이다. 종전 후 다시 프랑스에 귀속된 스트라스부 르 대학에 근무하게 된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대학은 Annales 의 모태였을 뿐만 아니라, 독일 대학의 도서관 구조는 독일과 독일 사학 의 배타성을 확인시켜 주었던 것이다. 이를 극복할 보편사의 방법으로서 〈비교〉를 실천에 옮길 필요성도 여기에서 싹렀을지 모른다 .2) 제 1 차 대전 때문에 부득이 연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학위 논문 준비자들에게 마완성의 상태라도 논문 제출이 허용됨으로써 블로끄는 1920 년 「왕과 농노」라는 비교적 짧은 논문을 제출하였다. 이 논문에서 그는 1315 년 루이 lMl 에 의해서 내려진 농노 해방령의 인도주의적 의피 속에 감추어져 있던 사회 경제적 동기를 분석하였다. 농노가 해방을 원하지 않던 경우에는 동액의 벌금을 물게 할 정도였으니 결국 자유를 부여해 준 것이 아니라 판매하였다는 것이다 .3) 따라서, 이 칙령의 진정 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왕, 영주, 도시들간에 벌어전 갈등을 분석 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불로끄의 후기 저작들에서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스트라스부르 대학 동료인 메이에 A. M ill e t로부터 불로끄는 언어를 동한 비교사 의 한 가능성을 발견하였으며, 스스로 많은 언어―-~기본적인 언어 외에도 고독 일어, 색슨어, 스칸디나비아어, 러시아어 등-를 배웠다. 그는 페브르- 덕분에 역사와 언어학이 서로 교류를 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역사를 위한 변명』· 3) p.페 1브52르).의 서평, , R SH, 1920, pp. 105- 7.

그러나 그의 출발점은 왕이었으며, 정치 권력의 속성을 밝히기 위한 그의 노력은 1924 년의 『 기적을 행하는 왕 』 에서 표현된다 . 집단적 오류라 는 〈 전쟁 〉 의 체험 역시 여기에 오버랩되었을지 모른다 .4 ) 프랑스와 영국 의 왕은 초자연적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로서, 그의 손길이 닿거나 영국 왕의 반지를 끼면 연주창이라는 병이 낫는다는 믿음이 중세 이래 널리 퍼져 있었다. 불로끄는 기존의 연구에 새로운 사실은 덧붙이려 하지 않고 단지 새로운 해석을 가했으니, 왕의 신성성 저변에 깔려 있는 권력 이데올로기와, 이에 대한 귀족과 교회의 저항, 그리고 이러한 〈 미신적 〉 현상에 용해되어 있던 집단 심리를 규명하는 것이 그의 의도요 문제 제기였다.

4) J. Le Goff , 불로끄의 『기적을 행하는 왕 』 의 198 3\1도판, 서문, p. VI.

사회경제사가로 알려진 이 역사가가 그의 초기 대작에서는 심리적 현상을 밝히는 데 몰두했다는 점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도 먼저 그의 지적 교류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1870 년 전쟁 전에 스트라스부르 대학 교수로서 독일 사학에 부단히 저항했던 퓌스펠 드 꿀랑쥬 Fuste l de Coulang eS 7} 『 고대 도시 La cit e an tiq ue 』 에서 제시한 종교적 하부 구조론에 홍미를 느꼈으며, 뒤르깽의 집합표상설에도 귀를 기울였다. 또한 고등 사범학교 동기생으로서 헬레니즘 시대 전문가인 루이 제르네 Louis Gernet9 } 중국 학자인 마르셀 그라네 Marcel Granet 등과의 교류는 신화, 의식 등에 관한 관심을 재고시켰다. 나아가 그가 유태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종교 문제가 미묘하게 얽혀 있던 스트라스부 르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 등도 그의 연구를 자국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직접적인 계기를 준 사람은, 스스로 서론에서 밝히고 있듯이 의사였던 그의 형, 심리학자인 샤를르 불롱델 Charles Blonde! 그리고 페브르였다. 역사가는 왕의 초자연적 의술 시행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하는 문제 에 우선 관심을 가진다. 그의 후기 저작에서도 나타나지만 불로끄는 생성 -성장―소멸이라는 모델을 애호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 그러나

낭만주의 역사가들처럼 〈 심판하기 위해 〉 기원을 찾 은 것은 아니었다 . 그는 오히려 이러한 〈 기원 숭배 〉 를 거부하고 있다. 5) 즉, 그의 관심은 왕의 초자연적 능력 과시가 왜 프랑스에서는 까뻬 왕조의 성립기에, 그리고 영국의 경우는 노르만 정복기에 시작되는가 하는 비교사적 문제 에 있었던 것이다. 양국 공히 정치적 권력의 정당성이 의심받던 무렵에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다시 말하면, 왕과 봉건 제후와 의 권력 다툼, 그리고 영국의 경우는 이에 덧붙여 영국 왕이면서도 프랑 스 왕의 가신이라는 경쟁적 열등 의식이 이 현상 배후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권력 무쟁은 왕과 가신이라는 이원적 구조만을 가진 것은 아니 었다. 교회로서는 왕의 이교적 주장을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블로끄는 로마 시대의 황제-신과 게르만족이 전통적으로 믿어 왔던 왕의 신성이 기독교에 의해서 사라져 가다가, 뻬뺑 Pe pin이 그의 왕위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도유식을 실시함으로 써, 다시 말해서 왕이 지상의 지배자이면서 동시에 성직자가 됨으로써, 신성을 회복해 가는, 죽 교권과 교회의 대립상을 보여 준다. 또한 왕이면 서 동시에 사제라는 점에 있어서 왕은 봉건 귀족과는 별개의 신분적 위치를 차지한 것이다. 종교와 정치라는 두 개의 계열이 상호 설명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다분히 구조적이다. 까뻬 왕조 성립 후 왕위 계승이 선거제로 돌아갈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던 상황에서, 왕의 초월적 능력이 장자 상속된다는 주장은 왕권을 강화시키는 기능을 했다는· 것이 불로끄의 분석이다. 6) 이러한 관점에서 교황 그레고리 7 세의 개혁은 왕권 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직과 속직을 지배하려는 왕에 대한 저항의 성격이 강했다는 것이다. 교황의 저항이 강했던 독일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도 갑은 맥락에 5) 불로끄, 『 역사를 위한 변명 』 , pp. 37-9. 6 ) 불로끄, Les Rois tha umatu rg e s . Elude sur le caract er e surnatu r el attr i b u e cl la pu is sa nce roy al e pa rtic u lie re ment en France et en Ang le te rr e, Str a sbourg, 1924 , pp. 80-1. 『 기적을 행하는 왕 』 으로 표기할 것임.

서 이해될 수 있다 .7 ) 왕의 초자연적 능력은 결국 중세인의 신비적 심성을 바탕으로 배양 되었으며, 또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르네상스, 종교 개혁,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사라져 간다. 영국에서는 1688 년 오렌지 공의 즉위와 함께 이 관행이 사라지며, 프랑스의 경우는 더 오래 지속되 어 1825 년 샤를르 10 세의 의례적 시행 이후 종식을 고한다 . 그러면 정말 왕은 병을 고쳤을까? 왜 이러한 미신적 현상이 존재했을 까? 결국 이는 집단 심리의 문제인 것이다. 초월적 존재인 왕에 의해서 도 병이 낫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환자 자신의 신앙심이 부족한 탓으로 여겨졌을 것이니 환자는 결국 병이 나았다는 소문을 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8) !표 소문이 지배하던 시대에 사람들은 병이 낫지 않은 경우는 쉽게 잊었을 것이라는 분석 9) 등은 위대한 역사가의 초상을 보여 주는 듯하다. 결국 중세인들이 이러한 기적을 믿게 된 것은 〈 기적 이 있어야 한다 〉 는 기대 심리 때문이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10) 542 페이지에 달하는 이 대작을 읽으면 우선 홍미 전전함을 느끼게 된다. 하나의 작은 문제에서 출발, 블로끄는 점점 문제를 사방으로 확산 시키면서 종교와 권력이라는 고리로 중세 사회를 재구성하고 있는데, 어쩌면 페브르가 『 1 6,{1 ] 기의 비신앙 문제 』 의 모델로 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둘 정도로 많은 유사점이 발견된다. 단지 불로끄는 한 현상을 7) 위의 책, pp, 121- 6. 8) 위의 책, p, 423. 9) 위의 책, p. 429. 10) 위의 책, p, 429. 페브르도 『 l 硏 1 기 바신앙 문제 』 에서 lRl 기를 〈 믿기를 원하던 시대 〉 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서로가 유사한 스타일을 보여 주고 있어 홍미 롭다. 폴란드 역사가인 Germeck 은 이 책이 프랑스적 새로운 역사의 전형이라고 찬양하면서도 결론 부분에 대해서는 〈실망적〉이라고 유감을 표하고 있다. 이 저술에 물질적 배경이 미흡하고, 사회과학적 연구 성과를 충분히 _-Fraser 나 Lev y -Bruh! 만으로는 부족 ___고 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초자연적 현상을 단순히 〈 집단 오류 〉 로 파악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Marc Bloch, Histor ie n et resis t a n t> , A nna/es, 1986, pp. 98-9.)

〈 시간 지속 〉 과 〈 변화 〉 속에서 관찰하면서 〈 전체적 설명 〉 을 시도했다 Ill 는 점이 페브르의 공시적 구조와는 다른- 점으로 생각된다. 정치사가 비판받던 분위기에서 불로끄기· 이 책을 〈 정치사 ―― 넓은 의미의, 진정한 의미에서 〉 로 분류하고 있는 점도 홍미롭다 .12) 이러한 자각 속에는 새로운 역사학을 이루겠다는 역사가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왕권의 속성을 규명하기 위해서 행정적, 법제적, 재정적 조직만 을 분석하는 것으로서는 충분하지 않으며, 〈 인류학적 접근 〉 과 〈 비교사 〉 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13) 경제사의 유행에 밀려 한동안 주변적 저술로 도의시되다가, 오늘날 문화인류학적 역사가 각광을 받게 되면서 이 책의 가치는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 새로운 정치사, 문화인류학적 역사의 선구 로서 .14) 이후 1944 년 나찌에 저항, 순교할 때까지 불로끄는 사회경제사 연구에 몰두한다. 학창 시절부터 그가 경제, 인구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또 스스로 『 기적을 행하는 왕 』 을 전체적 설명을 위한 한 부분으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그가 이제 사회, 경제 등으로 영역을 확대시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20 년대 후반 불로끄의 주된 관심은 농업사였다• 1929 년 페브르와 함께 Annales 을 만든 후 이 두 역사가는 이 잡지에 실린 글 중 약 30 퍼센트를 커버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보여 주는데 ,15) 그중 특이할 만한 사실은 불로끄 의 주도하에 〈공동 연구〉-토지 구획 대장, 가술, 귀족 등의 주제하에 —가 진행된 점이다. 이러한 연구를 토대로 발표된 것이 1931 년의 r 프랑스 농촌사의 기본 성격』이고, 1939~1940 년의 『 봉건 사회 』 이다. 11) 어적을 행하는 왕 』 , p. 21. 12) 위의 책, p. 21. 13) 위의 책, pp. 20-1. 14 ) A. Burgu ier e, , L a nouuuelle his toi re , p. 43 ; 르 고프도 앞에 인용한 서문에서 불로끄를 〈역사인류학의 아버지〉라고 묘사하고 있다(p. XXXIV ). 15) p. 87 의 통계를 보면, 어쩌면 이렇게 분담하기로 서로 합의를 본 듯한 느낌을 받는다.

『 농촌사 』 는 1929 년 오슬로에 있는 문명 비교 연구소의 의뢰로 간행되 었다. 20 세기에 들어 비교라는 말이 서서히 역사가둘의 의식 속에 자리 잡기 시작하였는데 ,1 6) 가장 열렬한 제창자로서는 삐렌느를 들어야 할 것이다. 제 1 차 대전으로 그 한계가 드러난 편협한 독일 사학에 환멸을 느낀 이 벨기에 역사가는 1923 년 제 5 회 국제 역사학 대회 개막 연설을 통해 〈 역사에 있어서의 비교의 방법 〉 울 강조하였으며, 5 년 뒤 오슬로 대회에서 불로끄는 「유럽 사회 비교사」라는 논문을 통하여 자신이 존경 하던 삐렌느의 일반론을 구체화시켰다. 이즈음 분로끄가 방법론에 관심 울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바로 이 『 농업사 』 의 서론에서 방법론적인 고찰 울 분명히 하고 있다는 사실로도 확인할 수 있다 .l7l 프랑스는 문화적, 지리적으로 다양성을 가진 나라라는 간단한 사실을 고려해 보아도, 프랑 스 농업사의 기본 성격이라는 〈 성급한 종합 〉 을 제시한다는 것은 실증적 역사가로서는 하나의 모험이었다. 바로 이러한 한계성을 인정하면서, 〈 더 넓고 더 인간적인 역사 〉 라는 필요성에 접근하기 위해서 불로끄가 우선 제시한 방법 이 〈 비교사 〉 였다. 프랑스에 우선 시선을 던지지 않고 어떻게 상이한 지방에서 전개된 발전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프랑스적 양상은 유럽적 차원에서 관찰될 때에만 그 진정한 의미가 찾아지는 것이다. 문제는 억지로 동질성을 찾는 데 있지 않고 구분하는 데 있으며, 사전을 겹쳐 놓은 듯한 거짓 일반상 울 구성하는 것아 아니라 대조함으로써 공통 성격뿐만 아니라 독창성을 찾아 내는 데 있다 .18) 불로끄가 관심을 가진 것은 〈 어떻게 비교하는가〉라는 방법론적 인 문제 보다는 〈 왜 비교하는가 〉 라는 것이었다. 뒤르깽의 사회학주의에서 가르치 16) RSH 는 1913 년 〈 비교〉에 대한 특집을 마련하였다. 17) 이 서론의 부제가 〈 약간의 방법론적 고찰 〉 이다. 18) 불로끄, Les caracte re s orig ina ux de l'his toi r e rurale fran ~ais e , avec le sup ple ment eta b li d' apr e s Jes tra vaux de l'aute U I(l931-44), Pa ris, 1976, p. . 이후 r 농촌사 』 로 표기함.

는 대로 〈 규칙성 〉 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페브르도 말했지만, 공통점과 아울러 상이점, 죽 삶의 다양성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 역사가로서의 비교 〉 라는 명제에 블로끄 역시 충실했던 것이다 .19 ) 그리고 나서 불로끄는 농업사 연구의 고질적인 문제인 자료의 부족을 보완하는 방편으로서 〈 회귀적 방법 meth o de re g ress i ve 〉 을 제시한다. 즉, 1885 년 영국의 농업사가인 F. Seebohm 이 퓌스펠 드 꿀랑쥬에게, 영국에 있는 울타리 없는 장방형의 밭이 프랑스에도 있는지를 문의했을 때, 그가 부정적으로 회답한 것은 〈 문서만, 그리고 아주 오래된 기록만 〉 검토하는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0) 역사가는 기원이 불분명 하다고 해서 〈 사실 〉 자체에 눈을 감아서도 안 되며, 또 이러한 작업이 문서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먼저 기원을 찾은 다음 시간의 흐름을 따라 변화를 살펴보는 것은 〈 농업 제도 사 〉 에만 적용되지, 〈 인간사 〉 의 경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사회학자 들이 현재에 도달하기 위해 과거로 우회하듯이, 역사가들도 과거를 이해 하기 위해 현재, 즉 덜 불분명한 사실로부터 거꾸로 시간을 거슬러 울라 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비교사가 역사가의 필수적인 시각인 데 반해 서 회귀적 방법은 필요한 경우에 사용되는 임시 방편이었다 .2 1) 19) 페브르, , 1 936 / r 역사를 위한 전두 』 , p. 140. 페브르는 자신이 〈 비교 〉 를 등한시 한다는 비판에 대해 〈 역사가로서의 비교 〉 를 해야 한다고 대답하고 있다. 그러나 불로끄에 비해 그가 이 사회학적인 개념에 중요성을 덜 부여한 것은 분명하다 . 국내에서도 불로끄를 중심으로 비교사를 연구한 논문이 최근 발표되었다(양병 우, 「불로끄의 비교사학」, 『 역사논초 』 , 지식산업사, 1987 ; 『 역사의 방법 』 , 민음 사, 1989, pp. 133-51 ; 차하순, 「비교사의 방법」, r 서양사론 』 , 31, 1988). 사실 비교사는 요즈음의 관점에서 보면 평범한 시각에 불과하다. Germeck 이 냉정하게 지적했듯이 그것은 역사의 한 분야가 아니라 〈 과거를 연구하고 제시하는 방식 〉 이었다(앞의 논문 pp. 1102-3). 비교사의 의의는 그것이 편협 한 독일 사학의 대용물이었다는 시대적 상황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20) 불로끄` r 농촌사 』 , p. XII . 21) 위의 책, pp. xx' VI-\『. 이 방법은 자료 부족과 같은 부득이한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을 뿐,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오히려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면 10 세기에 걸 치 는 긴 시간대 위에서, 그리고 160 여 페이지라는 상대적으로 짧은 연구에서 블로끄는 무엇을 비교하였으며, 이룰 통해 드러난 프랑스 농 촌 사의 기본 성격은 무엇인가? 불로끄는 받, 목초지, 포도밭 등으로 세분된 토지가 11 세기말에서 1 양1 l 기말에 걸쳐 진행된 대개간 사업을 통해서 어떻게 재조정되었으며, 그 후 프랑스 혁명기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토지 이용이 어떻게 변천되어 왔나를 서술하고 있 다. 이러한 시간 지속 속에서 그는 우선 윤작 _ 2 포제와 3 포제 __ 과 경작지 형태_개방 장방형, 개방 불규칙형, 폐쇄형 _ 의 지형적 지리적 분포를 비교한다. 프랑스의 중부 이남에는 2 포제가 실시된 반면 그 이북과 영국에서는 3 포제가 성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프랑스의 남부 에서는 경작지의 형태가 개방 불규칙형인 반면, 중부 이북에서는 개방 장방형인 이유는 무엇일까? 윤작과 경작지 형태는 상관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프랑스의 서부 지방에서는 폐쇄형이 지배적인 이유는근 지형 때문일까? 개방 불규칙형의 등장은 곧 농촌 공동체의 강제력이 약화됨을 증명해 주며, 폐쇄형울 1 양1 l 기 영국 농경제학자들이 주장하듯 이 농업상의 전보라고 본다면 가장 낙후된 서부 지방에 이 경작 형태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들이 비교라는- 과정을 통해서 새롭게 제기될 수 있는 문제들이다. 불로끄는 일원론적 설명을 가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인종적, 지리적, 역사적 측면에서 다양하게 검토하고 있으며, 특히 농업 기술 ― 一 바퀴 없는 쟁기, 바퀴 달린 쟁기, 화학비료의 사용 과의 상관성을 상술하고 있다. 어쨌든 이러한 비교를 통해 프랑 스 중부 이북에서 발견되는 개방 장방형 경작지는 영국, 독일, 폴란드、 러시아에서도 발견되는 유럽적 현상이며, 개방 불규칙형이 공존하는 것이 프랑스 농촌사의 한 특칭이라고 보고 있다. 22) 토지와 인간의 관계를 영속화시키는 것이 제도인데, 이제 윤작과 경작 지 형태에 덧붙여 불로끄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장원제이다. 그 변화를 추적하면서 불로끄는 프랑스 장원제의 특징으로서 영주 직영지의 세분 22 ) 『 농촌사 』 , p. 49.

화, 세금의 불가분성, 부역의 감소 등을 들고 있다. 23) 장원제가 영주와 농민간에 이루어진 불평등한 제도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농민 둘기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지는 않았다. 불로끄가 시종일관 관십을 가지고 서술한 것은 농촌 공동체였다. 그의 농촌사는 곧 화폐와 자본주 의적 경작의 확대에 따라 이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어 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가 중농주의를 반자본주의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24 ) 이렇게 불로끄는 긴 시간대 속에서, 그리고 전유럽적 차원에서 인간과 토지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를 서술하였다• 그 웅대한 구성 자체가 하나의 종합, 결론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불로끄의 저술에 공통적 으로 결론아 없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그 人人-쿠두 인정하 고 있듯이 〈 커다란 문제의 제기 〉 였다 .2 5) 이 연구는 비교사의 표본으로 높이 평가받을 수 있지만 그러나 바로 비교러는 방법론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치러야 할 대가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비교를 하려면 우선 유형 분류를 해야 하는데 이 책에 도식적이며 이분법적 구분이 간혹 눈에 띄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페브르식으로 말하면 인간이 사회 학주의에 의해서 밀려났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 26) 이제 이 책을 통해서 드러나는 불로끄의 사론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선 lMI 기에 걸쳐서 전행된 프랑스 농촌사의 〈 주체 〉 는 누구였나 하는 통속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불로끄는 농민은 관습의 지배 23) 위의 책, p. 95. 세금의 불가분성이란 그것이 공동체 단위로 부과된 것을 의미한 다. 24) 위의 책, pp. 40, 48, 172, 193, 210 등. 이는 마르크스의 견해와 대조적이다. <… … 중농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파악이다. 산업 자본 의 대표자인 차지 농업가 계급이 전체 운용을· 지도한다 . 농업은 자본주의적으 로 죽 자본주의적 차지 농업가의 대규모 기업으로서 운용되며, 토지의 직접적 경작자는 임금 노동자이다.〉 (김수행 역, 『 자본론 』 ' II, 1989, p. 422). 25) r 농촌사 』 , p. VII. 26) 이는 불로고의 저작에 대한 페브르의 일관된 비판으로서, r 봉건 사회 』 의 경우 특히 심하다.

를 받는 보수주의자로서 , 27l 대개간 사업, 엔클로우저 동 농업사에 대변혁 울 가져다 준 사건들은 모두 영주나 부르주아지에 의해서 추전되었다고 보고 있다 .28) 그러나 계층 사이에는 조화와 일체감 대신 갈등과 두쟁 ―〈 창조적 〉 _—이 상존하였다 .29) 그리고 이러한 대립은 영주와 농민, 부르주아지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 관계가 있는 모든 집단 一— 예를 들면 경작자와 목축자 _ 간에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조화와 일체감만을 가지고는 장기 지속적인 역사를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불로끄와 마르크시즘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의 저작에는 다소 유물론적인 색채를 띠는 구절들이 있지만 ,30) 일원론적인 해석으로 시종 일관하지는 않았다. 경제 이의에 그는 인구, 심성 등의 요인을 강조 하고 있다. 대개간 사업, 도시, 국가, 농촌에서 도시로의 탈출 등을 분석 할 때 불로끄는 반드시 인구적 요인을 고려하고 있으며, 나아가 인구를 가장 중요한 변수로 파악하기도 한다. 토지 접유를 향한 거대한 도약의 기저에, 인구의 자연 증가 이의의 다른 원인을 놓을 수 없다. [……] 유럽 문명사에 있어서, 특히 프랑스의 경우, 이 것 보다 더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 것은 없다. [… … ] 이러한 번영(물질적, 지적 교류, 르네상스, 도시 성장, 군주 국가의 등장 등)을 가능 - 하게 한 것은 바로 안구의 증가이다. 31) 또한, 눈에 띄는 것은 그의 장기 지속적인 관점이다• 특히 마지막 문 장, 〈 인간 사회의 진보, 그 연속 위에서, 입자로부터 입자로의 파동은 매우 멀리까지 퍼지기 때문에, 어느 한 시점에의 인식을 바로 앞선 시접 의 분석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는 없다〉 32) 는 브로델의 시각과 너무나 27 ) 『 농촌사 』 , p. 227. 28) 위의 책, pp, 20, 208- 9. 29) 위의 책, p. 175. 30 ) 위 의 책 , pp. 74, 85, 107, 172 , 231 . 31) 위 의 책 , p. 17. 이 밖에도 pp. 109, 117, 237, 249. 32) 위의 책, P. 251 . 이 밖에 pp, 174, 201, 223-4 에도 장기 지속적인 관점이 엿보 인다.

유사하지 않은가? 이렇게 장기 지속적으로 도 출 된 불 로끄의 혁명관 역시 홍미롭다. 프랑스 혁명은 사회 경제적인 내용아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변화해 가는 가운데 최후까지 저항하던 제도적 법적 의피를 벗겨 버린 〈 정치적 혁명 〉 이라는 것이 간헐적으로 눈에 띄는 그러나 일관된 그의 견해이다 .33) 『 농촌사 』 를 통하여 불로끄는 일약 세계적인 역사가로 등장하였다. 런던에서 그는 〈 프랑스와 영국의 장원제 〉 에 대한 비교 연구를 의뢰받았 고 ,34 ) 마드리드, 오슬로, 강 등지에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국제적인 무대에서 불로끄의 명성은 페브르-를 능가하였다. 1933 년 페브 르가 빠리로 진출한 후, 블로끄는 1934 년과 1936 년 Colleg e de France 의 유럽 사회 비교사 강좌에 지원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35 ) 19 3 詞 오제 H. Hauser 의 후임으로 쏘르본에서 경제사를 담당하게 되 었 다. 프랑스에서 유일했던 이 경제사 강좌는 후일 라부르스에게로 계승되 었다. Colleg e de France 에 제출한 그의 연구 계획서에는 심성을 통해 사회의 구조를 분석하려는 계획이 나타나 있는데 ,3 6 ) 이러한 시각은 그의 『 봉건 사회 』 에서 구체화된다. 『 봉건 사회 』 는 베르가 기획한 〈 인류의 전보 〉 시리즈에 속한 책으로 193~ 부터 집필이 시작되어 1939 년 제 1 권( 『 의존 관계의 형성 』 )이, 그리 고 이듬해에 제 2 권( 『 계급과 인간의 통치 』 )이 발표되었다. 책의 서두에서 불로끄는 〈 사회의 구조와 그것의 제반 관계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것 〉 이 자신의 의도라고 밝히고 있다• 3n 이 말의 단어 하나하나는 다 문제점 을 제시하고 있다. 죽 〈 구조 〉 라는 당시 언어학에서 유행하던 말의 역사 학적 의미, 마찬가지로 공시적 이해와 통시적 이해라는 측면에서의 33) 위의 책 , p. 227. 34) 이 연구는 1960 년 Cahie r s des Annales 시리즈로 간행되었다 . 35) 불로끄가 이렇게 저항을 받은 이유는 아마 그가 유태인이기 때문이었을 것이 다. 고등 사범학교 교장으로의 전출이 봉쇄된 것도 그의 인종 때문이었다고 페브 르는 불로끄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고 있다 (Annales, 1945, p. 30). 36) 『 역사를 위한 변명 』 에 대한 G. Dub y의 서문. 37) 불로끄 、 La socie te feo dale, Paris, 1939- 40 , p. 16. 『 봉건 사회 』 로 표기할 것임.

〈 관계 〉 의 의미 등이 그것이다. 이 책은 불로고의 다른 저술에서도 나타났듯이 탄생 -성장-쇠되라는 모델을 따르고 있다. 즉 그는 9 세기 이후 아랍, 헝가리, 노르만의 침입에 의해 유럽이 포위된 극심한 〈혼 란 〉 으로부터 봉건적 사회 질서가 〈 탄생 〉 되었다고 보고 있다 .38 ) 물론 참재적 혼란으로서 게르만족의 침입을 이야 기하고 있기는 하나, 어쨌든 불로끄에 있어서 봉건 사회라는 특이한 사회 구조는 9-13,\ ~] 기 에 만 두드러진 〈 단절 〉 적 현상으로 파악되고 있는 점을 우선 지적해야 할 것이다 .39)

38) 페브르는 이 책을 비판적으로 평하고 있는데, A 로부터 B 가 나왔다는 식의 논리 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페브르, , A nna/es, 1940-4 1 l . 39) 불로끄, 『 봉건 사회 』 , pp, 16, 393.

이러한 혼란―불안이라는 심리적 요인의 토양으로서 불로~ 물질 적, 도덕적, 지적 요인과 그 결과에 대해서도 상술하고 있다. 제 1 절에서 는 봉건 1 기와 2 기의 구분, 〈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 〉 , 집단 기억, 봉건 2 기에서의 지적 르네상스, 봉건법제 등을-, 그리고 제 2 절에서는 혈연적 가계 유대, 가신 관계와 봉, 복수적 신종 선서, 장원제, 농노제의 소멸 등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제 2 권의 제 1 절 〈 계급 〉 에서는 귀족, 귀족둘의 생활, 기사, 귀족의 신분화, 귀족내의 분화 등 귀족 계급 울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제 2 절에서는 사법제, 전통적 지배 권력, 제국, 왕국, 공국, 교회령 등 인간의 통치 형태를 논하고 있다. 마지막 절에서는 유럽식 봉건제의 이념화를 시도한 후 비교사의 필요성을 강조 하고 있다. 이렇게 봉건적 사회 구조를 분석한 다음 불로끄는 『농촌사』 의 구성에서와 마찬가지로, 〈 후기 〉 라는 페이지를 마련, 봉건 사회의 그 후믈 그리고 있다. 이렇게 이 책의 구성을 살펴본 이유는 이 책이 하나의 문제에서 출발 하여 이를 다각적으로 검증해 나가는 페브르식의 〈 문제사〉가 아니라, 봉건 사회 구조의 제반 측면을 총체적으로 재생시키려는 〈전체사〉적 구도를 보여 주기 때문아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는 우선 불로끄가 취급 한 자료의 방대함에 놀라게 된다. 이 점에서 우선 이 책은 백과 사전으

로서의 가치를 지닐 것이다. 동시에 강쇼프나 스티븐슨류의 명료하고 도해적인 설명에 익숙한 사람에게 불로끄의 『 봉건 사회 』 는 불명확하고 복잡하기만 한 혼란스러운 책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40) 또 다른 혼란의 원인은 불로끄가 봉건 사회의 이념형만을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 제도〉가 실제 어떠했나 하는 점을 밝히는 데 역점을 두었다는­ 데에 있다 . 자연히 무수히 많은 예의 내지 시간적, 공간적 변화, 차이점 등을 대하면서 우리는 도대체 봉건제가 무엇이며 과연 그것이 하나의 제도로서 존재했었나 하는 의문울 가지게 된다 .41) 아마도 이러한 혼란을 염두에 두고 책의 말미에 하나의 이념형으로서 〈 사회적 유형 〉 을 덧붙였 으며, 또 같은 이유에서 비교사의 필요성을 재강조하고 있는지도 모론 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이 블로끄의 스타일이고 또 여기에 불로끄적 봉건 사회의 한 특징이 있는 것이다. 이 『 봉건 사회』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불로끄가 정치, 경제적 사항보다 도-어쩌면 『 농촌사 』 에서 이미 봉건 사회의 경제적 측면, 죽 장원제를 충분히 살펴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심성적 측면을 소생시켰다는 접에 있다고 생각한다. 〈느끼고 생각히는· 방식 〉 과 〈 집단 기억 〉 은 심성사 연구의 선구적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42) 제 1 권의 타이틀이 보여 주듯이 9 세기 이후 가중되는 혼란 때문에 중세인들은 더욱더 〈 불안감 〉 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제는 종래부터 유지되어 오던 혈연 관계만을 가지고서는 더 이상 이 불안을 이겨낼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사람들은 지배층이건 피지배층이건 새로운 관계를 필요로 했으니 그것이 바로 계약적 성격을 40) 페브르의 서평 41) 한 예를 들면, 중세에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무기를 들 수 있어도 영주에 대해서 는 무기를 둘 수 없는 것이 하나의 계율이었으나, 가신은 호시담담 영주를 무너 뜨릴 생각만 했다고 불로끄는 쓰고 있다 (r 봉건 사회』, pp. 328·30). 42) 〈십리적 불안〉(p. 116), 〈심성적 정확성의 결여〉(p. 124), 〈 모순에의 둔감〉 (p. 174) 등은 시대적 심성이었다고 불로끄는 쓰고 있다. 페브르.의 분석을 보는 듯하다. 뒤비의 삼신분론과 봉건제 연구, 그리고 르 고프의 가신제의 모델화 시도들은 모두 불로끄로부터 시사받은 점이 많았다 . G. Duby , Les tro is ordres ou l'im agina ir e du feo dalism e, Paris, 1978 : J. Le Goff , ,P our 血 aulre Moy en Ag e, Pa ris, 1977.

가전 가신제이며, 이로써 9-1 31]기 중의 유럽에는 혈연 관계와 가신제 라는 특수한 인간 관계가 구 조 적으로 맺어전 —— 대체된 것이 아니라 一― 봉건제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 4 3 ) 봉건제를 법제적 제도로만, 또는 귀족들만의 가신제로, 혹은 경제적인 의마에서의 장원제라는 좁은 의미 로 파악하지 않고, 중세인 모두를 지배하는 〈 사회적 유형 〉 으로 보는 데에서 불로끄적 봉건제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10 년 전의 『 농촌사 』 에 비해 블로끄는 장기 지속적인 변화보다는 봉건 사회라는 구조의 역동적 관계를 규명하는 데 관심을 가졌으며, 이러한 공시적 역사는 그가 즐겨 인용하는 아랍의 격언 〈 사람은 그의 아버지보 다 그의 시대를 더 닮는다 〉 에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 이러한 경향 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책이 바로 페브르의 『1 硏]기의 비신앙 문제 』 일 것이다. 다만 〈 문제가 없는 책 〉 , 〈 결론이 없는 책 〉 이라는 페브르의 비판 은 같은 무렵에 나온 두 책의 차이점을 드러내 준다 .45) 이제 『 농촌사 』 에서 살펴본 그의 소론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검토 해 보자. 먼저 불로끄에 있어서의 경제와 인간의 관계이다. 경제는 과연 하부구조적 기능을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불로끄의 대답은 일관성이 없다. 죽, 봉건적 관계는 경제 제도 위에 세워졌다고 보기도 하지만 46) 이렇게 단순한 도식으로는 봉건적 인간 관계라는 복잡한 성격 중 〈창백한 이미지〉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라고 그는 덧붙인다 .47) 〈사회라 는 것은 기하학적 형상을 하고 있지 않다 〉 48) 는격언을 통해 그는 한 사회는 법적, 경제적 요소뿐만 아니라 정신적 요소들의 복잡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 사회 구조를 연구하는 역사가는 43) 『 봉건 사회 』 , pp. 183-6, 316, 326. 44) 위의 책, p. 214. 불로끄는 『 역사를 위한 변명 』 에서도 다시 이 격언을 인용하고 있다(p. 41). 45) 페브르는 서평에서 〈 도대체 이 책의 주제가 무엇인가〉라고 불만을 표하고 있 다. 46) 『 봉건 사회 』, pp. 110, 234. 47) 위의 책, p. 316. 48) 위의 책, p. 371 .

경제와 심성의 분석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 49 ) 따라서, 한 사회의 구조를 밝히기 위해서는 정신적 현상까지도 과학적으로 관찰할 필요성이 제기되 는 것이니,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뒤르깽의 사회학주의를 발견한다. 50) 이 책의 제목인 봉건 사회, 또 〈 사회적 유형 〉 등의 용어 선택은 불로 끄가 얼마나 〈 사회 〉 라는 말에 사로잡혀 있었나 하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생각된다. 〈 인구 〉 는 여전히 강조되고 있다. 봉건 2 기에 이르 러 새로운 인간 관계는 당시의 〈 경제 혁명 〉 에 의해 야기되었으며, 또 그 기저에는 인구 중가러는 〈 유일한 〉 요인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51 ) 그러나 불로끄는 하나의 요인만을 가지고 사회 구조를 분석하지 않았 으며, 또 깊은 생각을 가지고 어떤 요소-예를 들면 인구― ― 가 제 1 원인이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단지 『 농촌사 』 와 비교해 볼 때, 『봉건 사회』에서는 경제적 요인이 인구적 요인보다 상대 적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는 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1936 년부 터 쏘르본에서 경제사를 담당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52) 비교의 중요성 역시 꾸준히 강조되고 있다. 서론에서, 특히 결론 부분 에서 불로끄는 유럽적 봉건제를 다른 문명권에서 나타나는- 봉건제, 특히 일본의 봉건제와 비교하고 있다. 봉건제는 유럽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이라는 유럽 중심주의는 이제 이 새로운 역사가에게는 더 이상의 의미가 없음을 알려 준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유럽과 일본의 봉건제에 대한 불로끄의 짧은 비교를 통해서 비교사의 위험성을 다시 느끼게 된 다. 죽 단순화가 그것인데, 불로끄에 의하면 유럽의 봉건제는 기본 속성 이 상호 계약적이고 따라서 이러한 성격이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를 가능케 한 반면, 일본의 봉건주의는 일방적, 굴종적이어서 이러한 과거의 유산 때문에 일본에는 민주주의가 꽃피기 어렵다는 것이다. 53) 49) 위의 책, p. 98. 50) 페브르의 서평 뒤르깽의 사회학주의는 집단 십리로서, 개인 십리 즉 인간을 배제하고 있다는 것이 페브르의 견해이다. 51) 『 봉건 사회 』 , p. 112. 52) 뒤비는 앞에 인용한 서문에서 불로끄가 이즈음 마르크시즘적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공감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53) 『봉건 사회 』 , pp. 610-2.

이 책이 독 일과 프 랑 스 의 적대감이 첨예화된 시기에 마무리되었다는 점, 그리고 블로끄가 유태인이라는 점 등은 자연 그의 민족 감정이 이 저서에 어떻게 두영되었나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불로끄가 이 책의 마지막을 양국가의 민족 의식에 대한 역사적 고찰로써 장식하고 있다는 것은 역사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 〈 우리가 지금까지 심층적으로 재구성한 시대는 국가들이 형성된 것뿐만 아니었다. 그 시대에는 또한 형성, 확인된 것이 있는데 조국이 바로 그것 이다. 〉집) 제 2 차 대전이 발발하자 불로끄는 〈 프랑스에서 가장 나이 많은 대위 〉 로 전쟁에 자원하였다. 전쟁, 그리고 패배는 지식인에게 뼈저린 자아 성찰의 기회를 주었을 것이며, 역사가로서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나를 자문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r 이상한 패배 』 는 이렇듯 역사가가 자신이 직접 체험한 현실을 분석한 투키디데스류의 현재사이다.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라는 명제를 철학으로 삼고 있던 역사가로서 전쟁을 단순히 인간 의 통제력을 벗어난 불가항력적인 힘의 표현으로만 볼 수는 없었다. 불로끄는 이상한 패배의 원인을 인간, 우선 정치인과 군인들의 무능과 태만에서 찾고 있다 . 55 ) 그러나 이러한 심리 상태는 비단 이들 계층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사회 전체에 퍼져 있던 이러한 심성에 지식인 과 역사가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불로~ 의하면 프랑스는 제 1 차 대전 의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전술 전략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는데, 이는 바로 〈 역사는 변화의 과학 〉 이라는 역사의 교훈 을 인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하고 있다 .56) 또한 역사 교육 에서 현대사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지만 비교라는 관점이 배제되었기 때문에 결국 과거는 현재와 다르다는 인식을 충분히 십어 주지 못했다는 것아다. 57) 제 1 차 대전을 동해 노출된 독일 역사학의 편협성을 국복하기 54) 위의 책, p. 602. 55) 불로n., L'e tra n g e defa it e . Temoig n age ecrit en 1940, Paris, 1946, p. 45. 이후 r 이상한 패배 』 로 표기. 56) 위의 책, p. 137. 57) 위의 책, p. 172.

위해 인식된 비교사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 것이다 . 아직 새로워지지 못한 역사는 전 혀 과학적이지 못하고 단지 사실을 합리화시 키기에만급급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비판 _―― 예를 들면, 발레리 P. Val- €r y의 ― 一 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58) 역사 무용론에 맞서 불로끄는 『 역사를 위한 변명 』 에 나서게 된다. 불로끄는 이 책을 완성하지 못한 채 1944 년 나찌에게 처형당하고 만 다 . 페브르가 그의 유고를 정리하여 책으로 펴내는데 , 5 원래 불로끄의 구상은다음과같았다. 1. 역사 인식 : 과거와 현재 2. 역사학적 관찰 3. 역사적 분석 4. 시간과 역사 5. 역사적 경험 6. 역사에 있어서의 설명 7. 예견 601 58) P. Valery, Rega r ds sur le monde actu .el Paris, 1933, p. 64. 〈 역사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역사는 엄밀한 의미에서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다. 왜냐하면 역사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며, 모든 것의 예를 보여 주기 때문이 다. 〉 그 밖에 당시 역사학은 고증학적 업격성의 노예가 됨으로써 현실 이해라는 유용성을 지니지 못한 채 과거라는 〈 지하 감옥 〉 에 격리되거나, 심지어는 〈 지성이 라는 화학 반웅이 만든 가장 위험한 생산품 〉 이라는 바난을 받고 있었다(블로 JJ., 『역사를 위한 변명 』, pp. 25, 31) . 59) J. Ste n ge r , A nnales, 1953. 이 벨기에 사회학자는 페브르가 불로끄의 이 미완성 작품을 가다듬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은 점을 비난하였는데 (p. 331. 주), 페브르는 이에 대한 답변에서 자신은 그럴 필요 를 느끼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Pro Paroa Nostr a Domo. Scolies sur deux arti cle s beig e s>, A nna/es, 1953). 60) 페브르가 밝힌 6 장과 7 장의 세부 구상은 다음과 같다. 6 장의 서론으로서 회의주 의자(그리고 과학주의자의 시대 ) ; 1. 원인과 동기 (무의식적 )의 소멸. 낭만주의와 자생주의 ; 2. 우연 : 3. 개인과 그 차등 가치의 문제. 문서상 개인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 -역사는 단지 사회에 사는 인간의 과학인가? 집단 역사와 엘리뜨의

역사 ; 4. 〈 결정주의적 〉 행위와 사실의 문제 ; 제 7 장은 1. 예견, 심성적 필요성 ; 2. 예견의 일반적 오류 : 경제적 상황과 군대사 ; 3. 인간적 문제에 있어서 예견의 해부 : 예견에 의해 파괴되는 예견 : 인식의 기능 ; 4. 단기적 예견 : 5. 규칙성 ; 6. 희망과 불확실성.

물론 블로끄가 이 구상대로 실행하지도 않았고 또 출판된 책의 실제 구성도 이와 다르다 . 6 1) 무엇보다도 이 책이 미완성 작품이라는 점은 불로끄의 사론을 면밀히 파악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이 책의 구성을 보면 역사가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윤곽을 알 수 있다. 『 이상한 패배 .Ii 에서도 그랬듯이 불로끄는 역사란 변화의 과학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는 먼저 과거와 현재러는- 시간의 문제에 몰두하였으며, 과학의 기능, 즉 예견 62 ) 이라는 문제로서 그의 『 변명 』 을 끝맺을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역사란 과거를 연구하는 죽은 학문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데 도움을 주는 유용한 〈 실증주의적인〉 학문 임을 천명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 아버지, 역사가 어디에 쓰임이 있는지 말해 주세요 〉 라는 아들의 질문, 그리고 그에 대한 불로끄의 대답 이 바로 『 역사를 위한 변명 』 이었다. 불로끄가 전편을 통해 증명하려 했던 문제는 역사도 과학이라는 점이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불로끄가 취한 방법은 철학적이거나 논증적이 아니었다. 그는 실제 역사가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소박하게, 즉 실제 역사가의 작업장을 보여 줌으 로써 그가 사랑하는 새로운 역사를 변호하려 하였다. 이 책의 제목을 『 역사룰 위한 변명 』 으로 할지 『 역사가의 직업』으로 할지 망설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 바로 이 점에서 이 책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 다. 역사는 우선 〈 과학적 〉 이 되어야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로끄가 역사 가 과학인가 아니면 예술인가 하는 이분법적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 것은

61 ) 페브르가 펴낸 이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서론 : l, 역사, 인간, 시간 : 2. 역사적 관찰 ; 3. 비판 ; 4. 역사적 분석. 그 세부목차와 그 원구상과 비교해 볼 때, 3 분의 1 정도밖에 작성되지 못한 상태이다 . 62) 페브르는 불로끄의 구상에 나타난 대부분의 문제에 관해서는 둘이 토론을 한 바 있지만, 이 〈 예견〉에 대해서는 전혀 논의한 바 없다고 밝히고 있다(페브르의 〈후 기〉, p, 163).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역사는 과학이면서 동시에 예술이었다 . 63 ) 왜냐 하면 역사가는 기하학적 정신을 가지고 과거를 조립하는 것을 본업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학의 대상은 바로 인간이었다. 따라서, 유기체 내부의 복잡한 관계를 〈 전체성 〉 속에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 섬세한 정신 〉 이 또한 필요하였던 것이다. 641 그 밖에도 불로끄는 설명과 이해, 이해와 비판, 시간의 연속성과 단절 성 등 역사 인식론상의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나, A_ 人쿠두 이러 한 문제는 철학자들이 체계적으로 규명할 과제라고 말하고 있듯이 ,65)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을 통해서 이 책을 평가할 수 없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페브르는 이 책을 짜임새 있게 가필하여 아날의 이론서로도 만들 수 있었을텐데 그 과제를 담당하지 않았다 .66) 어쩌면그가 너무 〈 경험적인 〉 역사가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 페브르는 자신이 평생 발표한 대표적인 논문을 모아 『 역사를 위한 전투 』 롤 펴내는 것으로 이를 대신하였을 뿐이 다. 논리적으로 왜소화시키는 것보다는 여전히 〈 사실과 예 〉 로써 보여 주기를 선호했던 것이다. 우리는 〈더 넓고 더 인간적 인 역사 〉 라는 말로 표현되는 불로끄의 사론 이 페브르의 그것과 아무런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 역사가는 비록 양 1] 라는 적지 않은 나이차가 있었지만-페브르 에 의하면 당시로서는 한 세대의 차이에 해당하는一一사실 동일한 시대 적 분위기를 호흡했다. 물론 차이점도 있다• 페브르에 비해 블로끄는 63) 『 역사를 위한 변명 』 , p. 35. 불로끄는 역사가 과학인가 아닌가라는 고전적인 문제에 관십이 없었다 (S t en g er, p. 332) 라고 보는 것은 오류이다. 불로끄는 역사 가 과학임을 부인하는 역사를 His t o i r e h i s t or i san t e 라고 비판하고 있다( 『 변명 』 , pp. 27-9). 불로고가 주장한 것은 역사는 과학이면서 동시에 예술이라는 것이었 다. 64) 여사를 위한 변명 』 , p. 129. 불로끄는 페브르를 인용하면서 (p. 25) 인간을 복수 로 사용하고 있다. 다양한 인간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65) 위의 책, p. 30. 66) 페브르와 불로끄는 세뇨보와 랑글과의 『역사과학 입문』을 대체할 이론서를 만들 생각이었으나 실현시키지는 못하였다(페브르의 〈후기〉).

전통적 역사학과 뒤르깽의 사회학주의에 대해서 덜 적대적이었다 .67 1 또 『 변명 』 과 『 전투 』 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성격의 차이, 취향의 차이 또한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두 새로운 역사를 풍부하게 하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브로델에 의하면 바로 이러한 〈 적대적인 두 형제 〉 의 존재가 성공의 전제 조건이었다 .68) 이러한 생각에서 우리는 그가 페브르에게 바찬 헌사룰 읽어야 할 것이 다. ……오랫동안 우리는 더 넓고 더 인간적인 역사를 위해 한 뜻이 되어 싸웠습니다. […… ]과 거와 같이 공개적이고 자유롭게 우리의 협력이 재현될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당신의 존재로 충만된 이 책을 씀으로써 내측에서의 협력은 지속됩니다. 우리들의 협동은, 전에도 그러했듯이, 근본적으로 동일할 뿐만 아니라 우정어린 토론이라는 유익한 과정을 거치면서 의면적인 생명력 이 더해진, 우리들의 관점의 근본적인 동일성을 유지해 나갈 것입니다. 내가 제시하는 생각들 가운데 많은 것이 분명히 당신으로부터 왔습니다. 또 많은 것 가운데는 그것이 원래 당신 생각인지 내 생각인지 아니면 우리 둘 생각인 지 이제는 잘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부분은 당신도 동의할 것이라 고 믿으며 또 어떤 부분은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시 한번 우리 사이에 맺어진 끈을 강화할 것입니다 .69) 67) 〈 나는 역사를 위한 변명을 계속 쓰고 있습니다. 어렵지만 유익한 작업입니다. 내가 과연 무엇을 쓰려고 하는지, 그리고 이 책을 끝마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 다 . 그러나 분명히 정리해 보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뒤르깽은 분명 어리 석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불쌍한 대부 세뇨보도 마찬가지입니다(당신은 얼굴을 가리겠지요). 또한 랑글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들과 뜻을 갇이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제시하는 해결접어 1 서는 아직 그렇지 못하지만, 우리가 제기하는 문제 자체에서는 그러합니다.〉(불로끄의 편지, 1942 년 8 월 17 일, Anna/es, 1945, p. 31) . 68) 브로델, , R euie w , 3I4, 1978, p. 247. 브로델을 위해 마련된 이 학회에서 그는 페브르와 불로끄와 갇은 〈적대적 형제〉를 찾으라고 I. Wallers t e i n 에게 충고하고 있다. 아울러 불로끄가 자기의 r 봉건 사회』를 스승 인 F. Lo t에게 헌정한 반면, 페브르는 제자격인 브로델에게 헌정한 것을 보아도 두 〈적대적인 형제〉의 성격 차이를 엿볼 수 있다. 69) 『역사를 위한 변명 』 , p. 17.

불로끄가 1944 년 58 세의 나이로 아깝게 세상을 떠난 후 페브르는· 혼자 Annale~~ 이끌어 나갔다. 페브르와 불로끄 사이 에 존재 했던 산화 적인 협력을 토대로 지속된 이 잡지야말로 이들이 사학계에 남긴 가장 값진 유산일 것이다. 이제 이 잡지에 대해서 검토할 차례이다. 먼저 1929 년 창간호의 〈 독자들에게 〉 에 나와 있는 〈아날의 정신〉에 대해서 살펴 보자. 첫째, 이 잡지는 국제적인 성격을 지향하고 있다. 독일 사학의 국수주의적 편협성이 던져 준 교훈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며, 또한 마찬가지 맥락에서 역사는 전세계사적인 차원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는 비교사적인 열망 때문일 것이다. 이어서 두 편집자둘은 벌써 〈 아날의 고유한 정신 〉 을 말하고 있다. 역사가와 역사가, 역사와 사회과학 나아가 과거와 현재 등 모든 벽을 허물어뜨리자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은 이것을 역사가답게, 죽 〈 실제적 예와 사실에 의해서 〉 그리고 〈 전솔하고 양심적이며 견실하게 무장된 연구가 지니는 모범적인 덕성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 역사를 만들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아날의 정신은 기존의 잡지와 비교하면 그 의미가 두드러진 다. 187 6\'!에 창간된 Revue h ist or iq ue 의 창간사를 보면 역사는 〈 엄격한 방법과 과학이 요구하는 선입견의 배제 〉 를 통해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다. 방법론적 역사, 객관적 역사라는 정신이 표현된 것이다 . 또한 아날의 목표가 벽을 허무는 데 있었던 반면, 《 역사 잡지 》 는 〈기본적으로 떼오도즈의 죽음 (395) 부터 나쁠레옹 1 세의 몰락까지의 유럽사〉를, 더 구체적으로는 〈프랑스의 과거를 연구하는 것 〉 으로 벽을 쌓고 있다. 객관성을 추구했던 이 잡지가 프랑스에 〈 동일성과 도덕적인 힘〉을 배양시킬 것을 목적으로 한 프랑스적인 잡지였다는 것은 아날이 〈국제적인〉 잡지를 지향했다는 점과도 커다란 대조를 이룬다 .70) 한편, Revue de Syn t h e se h ist or iq ue 는 정치사, 경제사, 종교사, 철학사, 과학사, 문학사, 예술사 등등 역사학의 모든 부분에서 공동 인자를 추출 하여 역사적 종합을 달성, 즉 벽을 허물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70) Monad , Fan iez , RH. n°!, 1876, pp. 1-4.

철학자가 만든 잡지는 자연히 이론에 우선적인 중요성을 부여하였으며, 또 그 성격도 디분히 심리적이었다. 역사적 종합에 의해서 통합되는 다양한 연구는 결국 심리학으로 귀결되어 야 할 것이다. 사회에 대한 비교 연구는 사회심리학으로, 죽 토양적 욕망­ 제반 제도는 이에 부응하는 것인데-과 이들의 변화하는 현상에 대한 인식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역사적인 것에 대한 연구는 행동과 사상이 위대 한 사람들, 개개의 민족, 역사상 결정적인 순간 등에 대한 심리학으로 귀결되 어야 한다 .71)

71 ) Berr, , R SH, n° I, 1900, p. 6.

사회학을 지향하였던 불로끄는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을 것이고 페브르는 불로끄보다는 거부감이 덜했을 것이나, 그 역시 베르의 주장에 는 익명의 인간들에 대한 집단 심리가 빠져 있음을 간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사회와 경제를 연구하려는 이들 전문 역사가들에게 이 잡지는, 아날의 창간사에서도 암시되어 있듯이, 너무 이론적이었던 것이 다. 아날이 창간되자 《 역 사 종합 잡지 》 가 Revue de Sy n t hese 로 그 제명을 개칭한 것도 이 두 잡지의 차이점을 드러내 준다고 여겨진다. 아날의 정신은 〈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종합 정신〉을 통해서 구체화 되었다. 독일로부터 되찾은 이 대학을 명문으로 육성하려는 민족적 자존 심울 걸고 프랑스 정부는 이 대학을 적극 지원하였다. 이 대학에 뽑혀 온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학자들은 1920 년 1 월부터 소위 〈토요일 모임〉 을 가지곤 하였는데 바로 이룰 통해 아날의 창간자들은 철학자, 사회과 학자, 법학자, 수학자, 심리학자, 독일 연구가 등과 폭 넓은 학문적 교류 룰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체험으로부터 지리학자인 A. Deman- geo n, 사회 학자인 M. Halbawchs, 경제 학자인 C. Ris t, 정 치학자인 A. Sie g f ried 그리고 4 명의 역사가_고대사학자인 A. Pig aniol, 중세사가 인 G. Espi na s, 근대 사가인 H. Hauser 그리고 벨기 에 역사가인 H. P ir enne( 감사의 예우로서)_一로아날의 범학문적인 편집위원회가구성되

었다. 이렇게 아날은 뒤르깽 학파와 비달 학파의 싱속·자들을 역사 잡지 에 포용함으로써 학문의 종합화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프랑스 학계를 상속할 준비를 갖추었다. 아날은 브로델이 적철히 지적하듯이 연속이며 동시에 시작이었고, 상속자이면서 동시에 개척자였던 것이다 .72) 아날은 1989 년 그 창간 6 0-?년을 〈 조용히 〉 맞이하였다 .73) 그간 60 년 동안 아날은 수차례 그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또 편집전도 바뀌었다 .74) 이러한 변화를 겪울 때마다 아날은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 편집자의 글 〉 을 발표해 왔는데, 이제 이를 통해서 아날의 정신이 어떻게 지속, 변화되어 왔는지 살펴보자. 두 창간자는 창간 이듬해부터 벌써 종합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들은 창간과 동시에 제안된 공동 연구가 성공적 이었다고 자축한 후 아날에 동조하는 역사가들이 〈 더욱더 과감하게 동시 대적 사실을 다룰 것〉 75) 을 요구하고 있다. 두번째 주요한 편집자의 글은 1939 년 아날이 그 명칭을 변경할 무렵에 나왔다. 페브르는 이에 대해 1941 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불로끄와 내가 이 두 전통적인 단어를 아날지의 표지에 인쇄시킬 때 우리 들은 그중에서도 〈 사회적 〉 이라는 단어가 필경에는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이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말하게 해주는 형용사 가운데 하나러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이 말을 받아들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너무나 잘 받아들여진 나머지 순전히 우연적인 이유로 해서 이 말은 오늘날 [……] 홀로 표지를 72) 브로델, 국립 도서관 주관 Febvre 전시회 팜플렛, p. 8. 73) R. Char ti er 는 Le monde (l 989 년 10 월 20 일)에 기고한 글에서 아날 창간 60 주년 기념 행사가 소련 등지에서는 성대히 거행된 반면 프랑스내에서는 조용했 다고 전하고 있다. 아날 현상이 프랑스내에서는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 다. 74) 페브르. 사후 1968 년까지는 브로델이 책임을 맡았고, 그 후 르 고프, 르 콰 라뒤 리, 페로가 집단 편집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1981 년에는 A. Bur gui ere 가 그리고 그 후 J. Revel 과 L. Valens 카 참여하였다. 75) 페브르、 , A nnales, 1930. p. 3. 역사가와 실업인과의 실제 적 협동은 창간사에서도 이미 요청된 바 있다.

장식하게 되었다 . [… … ]경 제 사회사라는 것은 없다. 그냥 역사가 있을 뿐이다. 통일적인 의미에서 역사는 정의를 내리자면 한마디로 사회적이다.l 61

76) 페브르, , p p. 19-20. 마지막 구철은 사회사에 대한 페브르의 유명한 정의이다.

더욱더 넓은 역사를 이룩하려는 10 년간의 노력은 성공적이라고 평가되 었다. 바야흐로 이 무렵에 이르러 아날의 창간자들-은 아날 정신이 〈 자연 발생적으로 〉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현재에 부여된 중요성은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았다. 1946 년 아날은 새로운 제명 (Annales. Economi es. Socie te s . Civ il is a t- ion s) 으로 다시 출발하였다. 역사라는 말이 빠진 것은 역사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 종합이라는 정신의 표현일 것이며, 경제, 사회, 문명 등이 모두 복수로 사용된 것은 구체성을 추구한다는 일관된 정신의 반영일 것이다. 아울러 문명이라는 말이 새롭게 아날의 표지에 등장한 것은 문명의 위기 의식을 반영하거나 또는 정신 문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페브르는 〈 새로운 아날의 마니페스 토 〉 를 발표하였다. 파당과 당파적 의견에 봉사하는 역사, 결코 아니다. 인류의 현재적 요구에 입각하여 과거에 문제를 제기하는 역사, 바로 그렇다 .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독트린이다. 이것이 우리의 역사이다. m 어쩌면 페브르는 제 2 차 대전 이후 만연된 마르크시즘을 경계하는지도 모론다. 아울러 그는 역사의 실용적 기능을 문제사라는 이름으로 강조하 고 있다. 1947 년에는 드디어 고등 연구원 제 6 국이 설치됨으로써 아날은 과거의 전투적 단계에서 탈피하여 하나의 제도로서 자리잡는다. 페브르 는 아날의 20T 년을 자축하면서 제도적 측면에서의 성과와 과제에 대해

77) 페브르、 , A nnales, 1946, p. 8.

서 주로 말하고 있다. 78) 페브르는 더 이상 아날의 정신을 강조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제 그 필요성이 사라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무렵 〈 아날 학파 〉 라는 말이 프랑스의 안팎에서 서서히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79)

78) 《 마르끄 불로끄 학회지》 간행, 제 6 국의 출범, 브로델이 맡고 있는 역사과학 연구소, 모라제의 경제 조사 연구소, 프리드만이 주관하는 르노 공장에 대한 조사 등이 성공적인 측면이며, 개선되어야 할 것으로서 페브르는 교원 자격 고사 의 구태 의연한 프로그램을 들고 있다(〈 V ingts ans apr e s>, A nnales, 1949, pp, 1-3). 다시 말하면 아날 학파의 정착을 위한 마지막 과제라는 의미일 것이다. 79) 브로델은

아날의 정신은 잡지의 구성을 보아도 잘 드러난다• 초창기 약간의 수정을 거듭한 후 아날은 1933 년에 가서야 그 구성 체계를 갖추었으며 이는 전쟁 전까지 유지되었다. 1933 년 아날의 구성 노'- .T0 조사 (En que t e)- 토지 대장 -현재적인 사항에 대한 조사 종합적 문제 과학적인 삶-경제학자, 역사가, 행동가 -회의, 연구소 -통계 -문서 보관소, 도서관 -연 구의 도구, 정기 간행물, 출판물 사실과 방법의 문제 과거에서 현재로 : 비판적 견해 자료목록

이 구성 자체는 역사적 종합에 대한 창간자들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 다. 이 구성은 1946 년의 〈 새로운 아날 〉 에서도 거의 변하지 않았으며 1948 년에 〈 토론과 전두 〉 라는 난이 새로 추가된 것은 더욱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날의 정신 - 역사와 사회 과학의 협동 ― ―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 대표적 상징성은 범학문적인 편집위원회의 구성 이었다. 그러나 실제 그들은 과연 어느 정도 아날에 협조하였나? 실제 얼마나 글을 기고하였나? 뼈가니울은 페브르와 불로끄.로부터 사회와 경제에 대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현실과 연계해서 문제 의식을 가질 것을 누누이 둘어왔다고 전하고 있지만 ,80) 그러나 실제 이들은 아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아날에 별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81)

80) A. Pig aniol, , Reuue de Meta ph ys iqu e et d e Morale, n°3, 1955, p. 246. 81) 이 표는 1929 년에서 1938 년 사이에 이들 편집위원들이 아날에 기고한 글을 그 길고 짧음에 관계없이 하나의 단위로 취급해 통계를 내본 것이다

1929 1930 1931 1932 1933 1934 1935 1936 1937 1938 겨 l (%) Febvre 24 34 22 26 16 34 29 31 25 21 262 16 Bloch 25 36 24 23 27 33 24 32 22 28 274 17 Demange o n 3 3 4 7 6 6 5 4 5 2 45 Halbawchs 4 3 6 10 10 6 6 4 7 5 61 Ris t 。 Hauser 1 3 3 1 2 。 2 2 2 3 19 Espi na s 4 4 2 1 6 5 2 5 1 4 34 Pig a nio l 4 3 1 3 5 2 1 1 。 1 21 Sie g f rie d 。

정치학자와 경제학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으며, 사회과학과의 협동이 라는 구호는 단지 지리학자와 사회학자로부터 미미하나마 회신을 받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들의 대부분은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동료들이었다. 그 밖에 역사가들의 참여도 의의로 빈약하였다. 반면 페브르와 블로끄는 아날에 실린 글 가운데 3 분의 l 을 커버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물론 그중의 대부분은 서평이었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전두는 그만큼 비판적이며 논쟁적이었다. 마치 학생을 대하듯 이들은 〈 새로운 역사 〉 를 위해 신랄한 필봉을 휘둘렀던 것이다 .82 ) 이렇듯 제 1 세대의 아날은 아직 스트라스부르라는 지방적 색채를 벗지 못하였으며, 주로 두 창간자의 개인적인 능력과 노력에 의해서 운영되었 다. 그들은 아직 사방에 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는 적을 만들어 가면서 〈 토론과 전투 〉 를 계속하였다. 다시 말하면 〈 다른 역사를 향한 〉 노력이 아직 결실을 보지 못한 것이다 . 이것이 새로운 역사로서 관심을 집중시 키는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82) 196 31;!에 출판된 불로끄의 논문 모음집 Melang es his tor iq u e, 2 권에 실려 있는 불로끄의 저술 목록을 연대별로 분류해 보면 불로끄는 아날의 창간 연대인 1929 년부터 저술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총 1116 편의 글 가 운데 1911 - 28 에는 102 편, 1929-40 에는 890 편, 1941 년 이후에는 124 편의 글을 발 표하였는데, 1931 년 한해 동안에는 놀랍게도 124 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제 2 장 브로델의 새로운 역사 1956 년 페브르가 죽은 이후 아날 학파를 이끌어 간 사람은 브로델이 다. 물론 이 시점에 와서야 브로델이 아날의 역사 속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페브르와 브로델의 만남은 1933 년 브라질에서 귀환하던 대서 양의 선상에서 이루어졌다. 20 대를 알제리에서 지중해를 바라보며 역사 가의 웅지를 가꾸어 오던 브로델과 페브르의 이 국적인 상봉은 아날의 역사학이 지중해를 넘어 팽창해 나가는 데 중요한 한 시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페브르의 의견을 좇아 브로델은 학위 논문의 중심 인물을 필립 2 세가 아니라 〈 지중해 〉 로 무한히 확대시키며, 제 2 차 대전중에는 벌써 불로끄를 대신한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아날에 깊숙히 관여하였다. 전쟁 후 브로델은 아날의 편집에 참여하며, 고등 연구원 제 6 국의 창설에도 적극 나섰다. 바로 그가 페브르 사후 아날의 두 기관-잡지와 에꼴 I I —울 책임지게 된다 . 페브르를 〈 거의 아버지 같은 〉 2) 존재로서 받들던 브로델이 아날 학파의 1) 에꼴 Ecole 이란 학교 학파라는 뜻으로, 직접적으로는 고등 연구원 제 6 국을 지칭 한다 . 2) 브로델, ,J o urnal of modern his tor y , 44, 1972, p. 453.

제 1 세대가 강조하던 패러다임 - 인간 중심의 역사, 문 제사, 종합 등 ­ 울 지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세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공통 언어 롤 창조해 낼 것인가?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우리는 먼저 전문 역사가로서 브로델이 남긴 대표적인 저작을 분석할 것이며, 이 〈 실증적 〉 토대 위에서, 그가 확산시키고자 하였던 새로운 역사에 대해서 검토할 것이다 . 3)

3) 브로델에 대해서는 이미 국내에서도 연구가 행해졌다. 나종일, 「브로델의 전체 사」, 『현대 역사 이론의 조명 』 , 정신문화연구원, 1984.

1 지리적 역사 브로델은 로렌 지방에서 태어났다. 아날의 세 역사가가 그 출생부터 알자스 로렌이라는 독일 접경 지방과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날의 역사학이 반독일 사학적 기치를 쳐들고 태어났다는 사실과 관 련, 매우 홍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쏘르본에서 역사학과 지리학을 공부한 브로델은 빠리 지역에 자리잡지 못하고 그 역시 먼 알제리로 〈배척〉당하였다. 이렇게 해서 브로델과 지중해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10 년 가까이 알제리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그는 〈 필립 2 세의 지중해 정책〉이라는 전통적인 주제로 학위 논문을一―그의 지도 교수는 라부르 스였다―—준비하였다. 이미 1911 년 페브르도 이 〈수수께끼 같은 인물 〉 에 대하여 논문을 쓴 바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브로델은 1927 년경 자신의 연구 방향에 대해서 페브르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필립 2 세와 지중해, 멋진 주제입니다. 그러나 지중해와 필립 2 세는 어떻습니까? 〉 페브르의 이러한 〈경솔한〉 충고에 따라 브로델은 필립 2 세의 지중해 정책이라는 좁은 정치사의 틀을 벗어나, 지중해라는 역사적 인물의 장구

한 삶 속에 두 영된 필립 2 세 를 발견하기 위해 전지중해에 널려 있는 문서 보관소를 뒤지는 엄청난 작업에 나서게 된다. 지리적 역사라는 거대한 톨이 페브르와의 지적 교류를 통해 잉태된 것이다 . 4) 제 2 차 대전 때 브로델은 장교로 종군, 포로가 된 후 수용소에서 자신 의 기억과 페브르가 보내 주는 약간의 자료를 가지고 1000 페이지가 넘는 논문의 초안을 작성하였고, 1947 년 학위 논문으로 제출하였다 .5) 마치 벨기에의 위대한 역사가 삐렌느가 제 1 차 대전중 포로 수용소에서 유럽사 룰 저술한 것처럼. 패전의 충격, 그리고 전쟁 포로라는 현실적 신분,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바람 등이 그물 게르만 민족의 역사와는 리듬을 달리하는 지중해로기 그리고 바다 깊숙히 먼 시간대로 전정한 프랑스를 찾도록 인도했으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홍미 이상의 진실을 담고 있다. 브로델 자신도 인정하듯이 그는 스페 인의 189 8-t-l]대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6 ) 폐허화된 유럽, 다시 야만 상태에 4) 페브르는 서평 (Revue his tor iq u e, 1950/ r 완전한 역사를 위하여 』 )에서 자신의 조언이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브로델은 1984 년 Maga z in e litt er air e (Il 월 호 ) 와의 인터뷰에서 매우 완곡하게 말하고 있다. 〈 나는 페브르의 옛날 생각 (페브르의 『토지 』를 말함)이 나의 관심이 스페인에서 지중해로 이동하는 데 결 정 적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중요했던 것은 1926-2T 년경 그의 〈 스페인이 아니 라 지중해 〉 라는 몇 마디였다 . 그러나 나는 그 죽시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다(p. 18). 불로끄의 영향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단지 우리는 불로끄의 〈 바교 〉 가 그의 시야를 지리적으로 확대한 것과 일치한다는 접을 말할 수 있을 뿐 0] 다. 5) 심사위원으로서 는 Marcel Bata illon , Em ile Coornaet, Rog er Di on , Gasto n Zeller 였으며 라부르스가 지도 교수로서 경과보고를 하였다 . 6) 브로델, L'i de nti tie de la France, I, Paris, 1986. 서론에서 브로델은 제 2 차 대전 의 충격을 받은 자신이, 1898 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스페인의 본질을 찾아 나선 스페인의 189 8k\ l 대와 비슷한 처지에 놓였었다고 스스로를 분석하고 있다(p. 18). 이 『 프랑스의 아이덴티티 』 는 브로델의 유고로서, 그의 구상은 다음과 같았다(실제는 제 2 권까지만 완성되었다). I . Esp a ce et Hi st o i r e : II. Les hommes et Jes choses : 冊 Et at , cultu r e, socie t e , N. La France hors de France. 지리적 역사라는 시각으로 된 매우 특이한 프랑스사라고 생각된다.

빠진 유럽, 문명의 우월성을 상실해 가는 유럽, 그리고 분열된 유럽에 직면하면서 지중해라는 장엄하고 영광된 통일 세계로 유럽인들을 안내할 것이니, 이러한 노스텔지어가 이 『 지중해 』 의 성공을 자아낸 배경일지도 모르며, 또 이러한 퇴행적 색조 때문에 보수주의적이라는 평을 받았는지 도모른다• 이런 유의 저작을 평가하는 일은 쉽지 않다 . 1160 페이지 면면에 담겨 있는 저자의 백화점적 지식, 무엇보다도 문서 보관소에서 발굴해 낸 당시인들의 생생한 삶의 기록 등은 우선 이 책을 접하는 사람을 왜소하 게 만든다. 세세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검증은 해당 전문가에게 맡기고 우리는 단지 저자는 이 사실들을 어떻게 구성하고 해석하는지를 검토하 는 정도로 그치고자 한다. 이 책을 새로운 역사학의 모델이라고 평가하 고 이에 대한 서평을 의미심장하게도 Revue h ist or iq ue 에 발표, 과시한 페브르 역시 역사적 사실 속에 파묻히지 않고 이러한 면에 초점을 맞추 지 않았던가? 〈 역사 인식상의 혁명 〉 , 이로써 아날의 제 1 세대가 추구했던 〈 다른 역사 〉 가 낡은 습관을 전복시키며 브로델에 와서 새로운 역사로 승화된 것이다. 이 〈 혁명 〉 을 우리는 이 책의 구성에서부터 접할 수 있 다. 먼저 이 역사학자가 연출한 무대의 주인공은 지중해였다. 지리학과 역사학의 분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프랑스 사학계에서 역사학자 가 지리적 존재를 그 대상으로 택한 것은, 또 지리적 접근 방법을 택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지리학자인 R. Di on 이 학위 논문 십사위원장을 맡았다는 사실이 이를 웅변해 준다. 또한 역사학자가 자신 의 문제를 해결할 적에 그 서두에 지리적 배경을 기술하는 것은 혼한 관행이었다. 그러나 브로델에 있어서 지리는 이러한 단역 내지 식전 행사용이 아니었다. 전 3 장으로 되어 있는 이 책에서 제 1 장- 〈 환경의 몫〉―― 300 페이지가 지리에 할당된 것이다. 서론에서 브로델은 이렇게 제 1 장을 설명하고 있다. 제 1 장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 역사를, 죽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 환경

속에서 인간이 이루는 역사 를 문제 삼고 있다. 서서히 흘 러가고 서서히 자신 을 변화시키며 자주 완강히 되 돌 아가기를 고집하는가 하면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는 주기들로 이루어진 역사이다. 나는 거의 시간 밖에 위치하며 생명 이 없는 사물과 접하고 있는 이러한 역사룰 도의시하고 싶지 않았으며, 또한 이와 관련 많은 책들의 서두에 불필요하게 위치한 역사학에 대한 지리학적 서론이라는 전통적인 관행에도 만족하지 않았다 .n 왜냐하면 이러한 지리적 환경은 날이 바뀌고 철이 바뀌고 해가 바뀔 때마다 반복적으로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구조, 다시 말하 떤 〈 지리적 시간 〉 이기 때문이다 .8 ) 따라서, 브로델이 제 1 장에서 다루·고 있는 지리-산, 고원, 평야, 사막, 초원, 바다, 연안, 섬, 기후 등­ 는 그 속에 거주하고 있는 인간둘에게 과거의 삶을 계속 전달해 주는 역사적 인물의 대열 속으로―—페브르에 의하면, 사상 처음으로―~들어 왔다. 이러한 다양성을 가전 지중해를 역사학자는 하나의, 다시 말하면 구체성이 결여된 지중해로 인식하지 않는다. 이동 목축과 유목에 따라 지중해는 벌써 두 개의 지중해가 될 뿐만 아니라 역사적 차원에서의 지중해는 지리적 지중해의 테두리를 뛰어넘어 흑해, 카스피해, 북해, 대서양, 사하라 사막 둥으로 확대되며, 도로, 항만, 도시를 총망라하는 하나의 세계가된다. 그런데 이러한 지리적 시간이 흐르는 세계는 지리적 결정론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일까? 페브르의 역사학이 (지리적 ) 결정론을 부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 또 제 1 세대의 공통어가 〈인간사〉였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이 계승자가 결정론에 대하여, 적어도 사론상으로라 도, 어떠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나를 살펴보는 것은 아날 학파의 지속성 여부를 판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할 것이다. 결과는 절충적이다. 7) 브로델, La medit er ranee et le monde medit err aneen a l'epo q u e de Phlilp p e II , Paris, 1949. 여기에서는 1985 년판(제 6 판)을 참조하였다. p, 13. 이후 이 책을 『 지중해 』 로 표기할 것임. 8) 역사가는 이렇게 시간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사회과학과의 〈 전두〉에서 역사가의 무기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제 1 장 및 그 밖의 디른 논저를 읽으면서 결정론적 표현 못지않게 반(反)결정론적 표현을 많이 발견한다 .9) 위에 인용한 서문에서 브로델이 〈 거의 움직이지 않는 〉 이라고 표현한 것도 지리적 시간에 의해서 〈 얼어붙 은 〉 역사가 아니라는 점울 말하기 위함이었다 .10) 그러나 결정론에 대한 그의 입장은 페브르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1984 년, 페브르의 『 토지 』 가 자신의 『 지중해 』 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질문을 받고 브로델은 자신의 입장을 꾸밈없이 밝히고 있다. 그는 얼마나 지리학적 설명을 복잡하게 만들었던가? 그는 거의 모든 결정 론을 깨부수고 말았다. 나는 이러한 일괄적인 폐기를 믿지 않는다. 어느 정도 의 결정론은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공간은 자신의 생생한 실체를 박탈당 한 꼴이 되고 말 것이다.II) 그 다음해 10 월, 그러니까 죽기 한달 전 Cha t eauvallon 에서 3 일간 열린 〈브로델의 날〉에서 지리학자인 Et ien ne Jui l la rd7} 다시 이 문제에 대해서 질문했을 때에도 그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 만일 지리적 결정 론이라는 것이 없다면 지리과학이라는 것이 설 땅이 있겠는가? 〉 1 2 ) 즉 결정론이 과학성의 토대라는 의미일 것이다. 나아가 그는 페브르의 가능­ 주의도 하나의 결정주의였다는 묘한 말을 덧붙이고 있다 .13) 이렇듯 페브 르와 브로델의 시각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 지중 해』에 나타난 지리와 인간의 관계는 일방적이지는 않았다. 페브르는 9) 『 지중해 』 , I , pp. 244-52. 10) 후일 르 콰 라뒤리가 선언한 〈움직이지 않는 역사〉와 자신의 역사를 구분하기 위해서 브로델은 이 〈거의〉라는 부사의 사용을 강조하고 있다. 철학적 논증 능력 의 부족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가 아닌가 한다. p. 92 에서는 〈 거의 〉 라는 말 없이 사용하고 있다(밑줄은 필자가 표시한 것임 ). 11) 브로델의 인터뷰, Maga z in e litte r air e, 11 월, 1984, p. 18. 12) 〈브로델의 날〉의 기록은 Une lec; o n d'his toi re de Fernand Bra ud.e l 이라는 단행본 으로 출판되었다(1 98 6¾1). p. 175. 13) 위의 책, p. 208.

〈 인간 집단은 자연 환경에 의해서도 만들어지지만 동시에 인간이 그 자연환경을 만들기도 한다 〉 라는 우려, 또는 다짐의 말로써 제 1 장에 대한 서평을 끝내고 있다. 〈집단적 운명과 집합적 움직임 〉 , 이것이 바로 지리적 구조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인간,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 집단을 취급한 제 2 장의 제목이다. 다시 서론으로 돌아가 브로델의 구도를 알아보자 . 이러한 움직이지 않는 역사 위에 천천히 리듬지어진 역사가 식별된다 : 만일 그의 완전한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하나의 사회사, 집단과 집단화의 역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 해저의 물흐름 이 지중해의 전체적인 삶을 자극하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제 2 장에서 제기한 문제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 브로델이 취급한 문제는 먼저 그 시대의 넓이와 무게를 측정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l@1] 기의 지중해가 단일 한 리듬에 의해서 움직이는 〈 세계一경제 〉 14) 를 구성하고 있음을- 밝힌 후, 브로델은 신대륙으로부터 유입된 귀금속이 이 세계에서 일으킨 파장 一― 가격 혁명-과 후추, 밀 등의 교역량을 재고 있다. 이러한 경제의 주역을 담당한 이태리 도시들의 경쟁 그리고 그 중심 이동을 관찰한 다음, 브로델은 〈 제국 〉 이라는 제목하에, 당시 시간적으로 국민국가 내지 제국이 출현하는 데 성숙하였나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국가가 자본주의의 발달에 어떠한 기능을 하였나 하는 문제일 것이다. I 5) 이러한 커다란 흐름 속에서 당시의 계층이 어떻게 대응하였 나-영주의 반동, 부르주아지의 배신-하는 〈사회〉, 그리고 총체적 인 〈 문명 〉 을 다루며, 마지막으로 〈 전쟁〉을 논함으로써 브로델은 가장 급격하게 변하는 정치사는 정치만으로써가 아니라 경제, 사회, 문명을 총체적으로 관찰해야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14) 위의 책, p, 6 : 『 물질 문명 』 , p. 12. 15) 브로델과 왈러슈타인의 논의는 제 2 절에서 소개하였다.

제 2 장에서 브로델이 다룬 문제는 아날의 제명대로 경제, 사회, 문명이었 다. 제 1 장이 구조를, 즉 〈 거의 움직이지 않는 시간 〉 을 역사 속으로 끌어 들였다면 나나 제 2 장에서 브로델이 디룬· 시간은 〈 사회적 시간 〉 이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시간, 반복되는 시간, 사이클, 국면, 달리 표현하면 꽁종 뛰르일 것이다 .1 6 ) 꽁종뛰르는 브로델의 역사 안식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 를 차지하는 용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된다 . 비록 그가 지리학을 역사 학에 접목시켜 인간 생활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리듬, 거의 무의식적인 리듬을 발견하려고 하였으나, 『 지중해 』 의 제 1 장은 역사학자의 저술로는 오히려 불필요한 부분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가지 지 않을 수 없다. 역사학자가 지리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명제는 너무도 프랑스적인 전통에 뿌리 내리고 있다. 땅을 사랑하는- 것은 곧 조국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미슐레의 의침 1 7 ) 에서도 둘을 수 있듯이 프랑 스인에게 있어서 땅의 의미는 곧 민족주의의 의미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 이 든다. 이 지리적 역사는 단지 역사가는· 지리적 대상을 가능한 한 더 넓게 잡아야 한다는 교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역사가에게 더 중요한 것은 시간적으로도 무한히 확대해야 한다는 교훈일 것이다. 브로델이 제시한 가장 중요한 개념인 〈 장기 지속 (La long ue duree) 〉 이 바로 그것이다 •18) 그 속에서 역사가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거의 16) Con j onc t ure 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갇다. (P eti tR obert) 여기에서는 문맥에 따라, 국면, 추세, 또는 꽁종뛰르로 사용할 것이다. 브로델은 제 2 장의 결론 제목을 〈 꽁종뛰 르 꽁종뛰르들 〉 이라고 붙이고 있다 . 17) 미술레, Le peu p le , 1974 년판, P. V i allane i x 의 서문, p. 13 ; 아울러 브로델은 비달에 대해서 이렇게 예찬하고 있다. 〈 역사를 위해서 가장 풍요한 저서들 중의 하나, 어쩌면 가장 풍요로운 저서일지도 모르는 것이 비달의 저서둘이다(『역사학 논고 』 , pp. 31-2). 18) 브로델, 『 역사학 논고 』 , pp. 48-9. 라부르스의 1933 년 저술은 한 세기 (19 세기 ) 에 걸친 가격 변동을 논하고 있으나 1943 년의 저술은 1774-91 년이라는 짧은

시간대를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깊은 철학적 의미보다는 더 넓은 시간대를 잡으라는 단순한` 그러나 그 결과는 심대할,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 다.

움직이지 않는 구 조 요 서서 히 움직이는 국면 ―一 꽁종뛰르 _ _ 이었던 것이다. 구조와 국면이라는 미묘한 ___ 왜냐하면 구조 역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 선택이 문제가 될 때 브로델의 대답은 분명하였다. 〈 나는 기질적으로 '구조주의자’이다. 사전들에는 거의 끌리지 않으며, 동일한 정표를 가전 일단의 사건들 즉 꽁종뛰르에는 단지 반 정도만 끌린다. 〉 1 9) 그가 쇼뉘 P. Chaunu 의 대작을 비판한 것은 쇼뉘가 국면에 만 관심을 가질 뿐 구조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20 ) 긴 시간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는 대가의 욕십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이 애매 모호한 두 개념 사이에 무슨 질적인 차이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단지 시간의 길고 짧음이 라는 차이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브로델에게 있어서 〈 국면 〉 에는 그 간격에 따라 100 년 이상의 주기를 갖는 tre nd. 5:. 포함된다 는 것을 고려할 때, 그의 〈 구조 〉 는 결국 이 〈 긴 꽁종뛰르 〉 죽 tre nd7} 아닐까 하는 생각이 둘기 때문이다. 수백년에 걸치는 긴 역사의 파고를 나누는 것 , 최고점과 최하점을 찍고 여기에 따라 상승선과 하강선을 긋는 것이 역사의 추세, 죽 꽁종뛰 르를 파악하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이었다. 역사가는 무슨 기준으로 이러 한 시대 구분을 하게 되는가? 이 중요한 문제에 관해 브로델은 명쾌한 해답울 주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꽁종뛰르가 하나만 존재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 세기적 t rend 〉 은 인구 변동, 지리적 꽁종뛰 르(국가와 제국의 크기), 사회와 그 사회의 이동성, 산업의 팽창력 등을 고려할 때 도출되며, 〈 장기적 꽁종뛰르〉는 산업화, 국가의 재정, 전쟁 등을 고려함으로써 도출된다고 그는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이클은

19) 『 지중해 』 ' II, 종합 결론, p, 520. 20) 11 권으로 된 쇼뉘의 학위 논문에 대한 평 (

), 『 역사학 논고 』 , p, 138.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반 요소를 총체적으로 측정한 후에야 도출 될 수 있는 지표라고 보는 편이 무난할 것이다. 그런데 추상적인 것의 무게를 어떻게 잴 수 있다는 말인가? 현실적 불가능에 직면, 역사가는 우선 〈 모든 꽁종뛰르 가운데 가장 빛나고 가장 잘 알려진 경제적 꽁종뛰 르가 매우 빠르게 다른 꽁종뛰르들을 압도하고 그 자신의 언어, 자신의 정밀함 밑으로 이겨 넣는다 〉 라고 순서를 정하고 있다. 21 ) 그리고 경제 가운데에서도 브로델은 마찬가지 이유로 생산보다는 교환을 선호할 수밖 에 없다고 합리화시키고 있다. 22) 즉, 여기에는 아무런 이데올로기적 편견 이 담겨 있지 않다는· 뜻이다. 사실, 생산이 경제의 근본이며, 자본가와 노동자를 만들어 낸다는 견지에서 좌익 역사가들은· 교환주의가 이러한 계급 투쟁을 은폐하려는 보수주의지들의 술책이라는 비판을 가했는데, 이러한 비판은 지나친 경직성의 소산인 듯하다. 우선, 시장에서의 가격 곡선을 그리는 것은 씨미앙과 라부르스로 계승되는 프랑스 경제사의 뿌리 깊은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또 이것만이 실증적으로 가능·하기 때문 이라는 이유도 변명 이상의 전실을 담고 있다. 이 논쟁은 기본적으로 어느 것이 더 〈역사적 진실〉에 가까운가 하는 논쟁이 아니라 어느 것이 더 마르크스의 교리에 근접한가라는 성격이 진하다고 보여진다. 어쨌든 경제적 꽁종뛰르를 가장 우선적인 꽁종뛰르로 보고 있는 브로델의 시각 은 다분히 물질주의적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브로델에 있어서 역사적 설명이란 곧 이 꽁종뛰르들간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었다. 구조 사, 쇼뉘의 계열사 (H i s t o i re serie l le) 또는 종합이 그에게 있어서는 이렇게 표현된 것이다• 21) 브로델, r 지중해』, Il, 제 2 장의 결론, p, 213. 22) 브로델, 『물질 문명』, II, p. 12. 〈생산이라는 어려운 문제는 맨 나중에 다룰 것이다. 마르크스나 푸르동에게 그것들이 본질적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희귀적 관찰자인 역사가에게 있어서 혼돈스럽고 쉽게 식별되지 않으며, 아직 충분히 분류, 정리되지 않은 생산이라는 것부터 작업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다.〉 앞서의 저서에서 쇼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제 1 권. 1955, p, 8).

그러면 구체적으로 브로델은 어떻게 시대를 나누고 있는가? 우선 이 책이 취급하고 있는 〈 역사가의 1 伊1 ] 기 〉 (1 450~1650)23 ) 를 분석하기 전에 〈세기적 t rend 〉에 대해서 살펴보자. 브로델은 〈 로마제국의 멸망 〉 이후 950 년까지 유럽은 하강기에 있었으며 그 후 1350 년까지는 서서히 상승하 다가 1350 년에서 1450 년까지의 급격한 후되기를 거쳐 그 후 현재까지는 상승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시대 구분은 많은 논쟁에 대한 대답 을 담고 있다. 게르만족의 침입은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였다는 삐렌느의 견해에 동조하면서도 사라센의 침입으로 서구의 역사가 반전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하고 있으며, 950 년에서 1350 년까지의 기간 을 〈 후기 봉건기 〉 라고 부르기보다는 〈 최초의 근대 〉 라고 부르는 점, 또 페스트는 인구 감소의 시작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꽁종뛰르를 급격하게 만들었을 뿐이라는 견해― ― 이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고 있는데 __ 에도 드러나 있지만, 의부적 요인보디는 - 내부적 요인―― 〈 가공할 만한 후퇴는 어느 정도는 그 성공의 대가이다 〉 -을 더 본질적으로 여기고 있는 점 등이 그것이다 .24) 이 꽁종뛰르론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결정주 의적 색조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지중해로 돌아가자• 그의 l@1l 기는 구체적으로 곡물 가격을 기준 으로 볼 때, 1450 년이나 1470 년경부터 상승하기 시작하여 1590 년에서 1600 년까지 일시적 중단 내지 완만한 상태를 거친 후 1650 년까지 계속 오르막길에 있었다. 이러한 장기적 t rend 는 다시 다음과 같은 장기적 파동으로나누어진다. 23) 『 지중해 』 , II, pp. 213-20. 브로델은 〈 긴 l&l 기〉, Wallers t e in은 역사학적 세기 라고 부르고 있다( The modern world-s ys t em , I, N, Y., 1974, p. 67). 24) 『프랑스의 아이덴티티 』 , pp. 107-8. 〈지휘를 하는 것은 꽁종뛰르이다. 그리고 매번 필요할 때마다 꽁종뛰르는 자신의 화폐를 창조하고 발견하고 사용한다.〉

1450 ////(1?4 83). fff15f09 1509 (15 29) 1539 1539 ( ? ) 1575 1575 (1595) 1621 1621 (16 50) 이렇게 관찰된 181] 기의 파동은- 많은 것을 설명해 준다. 우선 이 파동· 의 정점은 스페인에서 파산이 일어난 시점(1차는 1557 년과 1560 년, 2 차는 1596 년)과 일치하며, 경제의 하강기에 이교도와의 전쟁이 일어난 반면, 경제의 상승기에는 내란이 일어났음을 보여 주고 있다. 또 1530 년 죽 유럽에 금이 풍부할 때는 상업자본주의가 성했으나 그 후 산업자본주의 와 금융자본주의가 중기, 후기로 가면서 번성하였다고 브로델은 보고 있다. 이렇듯 꽁종뛰르는 구조적 설명을 가능케 해준다. 이처럼 바다에 비유하여, 가장 밑바닥에 지리적 시간이 흐르고 중심부 에 사회적 시간이 흐르며, 표면에는 파도치듯 급변하는· 정치적 시간이 흐르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제 3 장의 대상이었다. 다시 서론으로 돌아가 브로델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마지막으로 제 3 장은 전통적 역사, 달리 말하면 인간적 차원이 아니라 개인 적 차원의 역사, 뿔 라꽁브와 프랑수아 씨미앙아 말하는 사건사 죽 표면적인 출렁거립, 조수의 강력한 움직임에 의해 일어나는 파도와 같은 것을 다룬 다. 짧고 급격하고 신경질적인 진동을 가진 역사이다. 정의를 내리자면 국도 로 민감한 역사로서 발을 조금 내디디기만 해도 전체의 측정 계기에 비상이 걸린다. 그러나 그 자체로서는 무엇보다도 정열적이고 가장 인간성이 풍부하 며 동시에 가장 위험하다. 1 떼기의 지중해 세계를 총체적으로 되살린다는 의미에서 브로델은 이 〈사건사〉를 제외시킬 수 없었다. 단지 전통적 역사가들에게는 무엇보 다도 중요한 이 부분이 브로델의 역사에서는 마지막 장으로 밀려난 것이다. 전통적 역사가들이 다루는 사건들은 부유하는 〈먼지〉에 불과하

였다. 25) 그러나 사진 그 자체가 먼지와 같다는 것은 아니었다. 장기 지속 적인 관점에서 지리적, 사회적 시간을 모두 고려했을 때, 〈 개인적 시간 〉 속을 날아다니는 〈 먼지 〉 들은 비로소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었다. 죽, 이제 더 이상 먼지, 즉 〈 사건 〉 이라는 경멸을 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 사건 〉 의 대명사인 정치에게만 국한된 운명 이 아니었다. 정치사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부문-정치, 경제, 사 회, 문화, 지리까지도-은 이러한 사건사적인 칭표들로, 명멸하는 빛으로 차 있다. [……]단 지 그뿐이다. 나는 사건의 적이 아니다 . 261

25) 여중해 』 , II, p. 223. 26) 위의 책, 같은 페이지.

즉, 역사가의 영토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바라보는 시각이 결정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페브르 7 卜 말하는 칸막이된 역사란 그것이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관계없이 모두 사건사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다른 용어 선택 속에서 우리는 동일한 정신이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브로델이 이 『 지중해 』 개정판을 낼 때 많은 망설임 속에서도 이 제 3 장을 삭제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에서일 것이다. 〈 사건, 정치, 인간 〉 이라는 제목의 제 3 장에서 브로델은 1550 년에서 1559 년 사이의 세계 전쟁, 그 재현과 종식 그리고 1559 년에 서 1665 년까지 진행된 터키의 마지막 헤게모니, 156& 건에서 1570 년 사이 의 신성 동맹, 1571 년 10 월 7 일의 레판트 해전, 157 8'선에서 1584 년에 걸친 스페인과 터키의 휴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위대한 역사〉의 뒤안 길로 물러난 지중해를 그리고 있다. 〈위대한 인물들〉-칼 양 1l, 필립 2 세, 피우스 5 세, 돈주앙, 파르내즈, 그랑벨 등-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가 사라져 간다. 전통적 역사에서는 역사의 주인공이었지만 브로델의 역사에서 이돌은 꽁종뛰르의 힘에 의해, 영문도 모르는 채

사라져 간 것이다. 〈 사건 〉 역시 그 주역의 위치를 상실하였다. 대신, 〈 위대한 사전-전쟁 〉 을 가지지 못해 침묵과 어둠 속에 깔려 있던 1580 년 이후의 지중해가 자신의 위치를 되찾았다 . 2 7) 또한, 예를 둘자면, 1572 년 8 월 24 일 밤의 쌩 바르땔르미 사건은, 그간 역사가들이 주장하듯 이 프랑스의 정치사에 있어서 위대한 전환점이 아니었으며 ,28) 신성 동맹 은 광신적 카톨릭주의자들의 연합체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왕에 의해서 파괴된 과거로 복귀하려는, 왕국을 소규모 카톨릭 공화국으로 분해하려 는 운동이었고 ,29 ) 레판트 해전의 승리는 단지 해전의 승리에 불과해 대륙에 뿌리를 박고 있던 터키의 세력을 제거하기에는 부족했다는 분 석, 죽 이 해전의 승리가 지중해에 평화를 가져다 준 것은 아니라는 분석 등을 찾아볼 수 있다 .30) 한마디로 말해, 사건이 꽁종뛰르를 좌우하 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지중해에 평화가 자리잡았다면, 그것은 전쟁이 인접 공간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서쪽으로는 대서양으로 그리고 동쪽으로는 페르시아 접경과 인도 양으로. 터키가 동쪽으로 거대한 움직임을 한 데 대하여 스페인은 서쪽으로 움직임으로써 대답한 것이다. 사건사는 그 자체의 속성상 이 거대한 움직임 울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31) 이렇게 해서 지중해는 대서양에게 위대한 역사의 자리를 넘겨 주고 말았다. 이것이 당시의 꽁종뛰르-죽 거역할 수 없는――였다. 다분히 지리적 설명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다시 한번 그의 관점이 결정 주의적임을 느끼게 된다. 이제 이 책의 대결론을 검토하면서 브로델 자신이 반드시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이 문제- 27) 위의 책, p. 469. 28) 위의 책, p, 405. 29) 위의 책, p, 495. 30) 위의 책, p. 397. 31) 위의 책, p. 468.

인간의 자유 _ 에 대해서 살펴보자 . …… 철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사건의 중요성이나 인간의 자유에 관하여 나에게 제기되었고 또 제기될 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길게 논의하고 싶지 않다. 복합적인 의미 를 지니고 있었고 또 수세기를 지나는 동안 결코 그 의미가 동일하지도 않았던 자유라는 말에 대하여 합의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집단의 자유와 개인들의 자유를 구분해야 할 것이다. 1966 년에 프랑스라는 집단의 자유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1571 년 스페인이 라는 한 덩어리의 자유가 진실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할 수 있는 행동 영역, 필립 2 세의 자유, 또는 선단과 연합군과 병사들과 함께 바다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오스트리아의 돈주앙의 자유? 이들 자유들의 각각은 내가 보기에는 협소한 섬, 거의 감옥과 같은 것이다. [……] 이러한 한계를 확인하는 것이 역사에 있어서 개인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일까? 나는 전혀 그렇게 생 각하지 않는다. 32)

32) 위의 책, p. 519.

우리는 이러한 〈 신앙 고백 〉 을 굳이 분석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는다. 역사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인자는 제각기 자기의 몫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제 1 장의 제목인 〈 환경의 몫 〉 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 밖에 위 인용문 속에는 아날 학파나 프랑스의 역사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몇 가지 언명들이 담겨 있다. 첫째는, 역사학에 있어서의 철학의 배제이다. 이는 자연히 논리적 증명 대신 문학적 수식 이나 비유로 토론을 마무리하는 경향을 자아냈는데, 브로델의 경우_ 그리고 그가 특히 심하다고 여겨지는데――바다에의 비유를 대표적인 예로서 들 수 있다. 두번째 주요한 경향은 역사학이 기본적으로 관찰에 입각한 과학이라는 점이다• 역사 속의 인간에게 주어전 자유의 몫에 대하여 역사가는 사변적 선입견을 버리고 단순히 〈확인〉할 뿐이라는 것이 그의 답변이다. 후일 그가 수립한 〈유일한〉 모델이라고 볼 수 있는 〈 세계―경제 〉 역시 기본적으로 지리적이고 관찰적이어서 사회과학적

시각에서 본다면 매우 체계적이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희생의 대가로 지리적 역사는 대신 인간의 삶을 생생하게 전할 수는 있었지만. 이렇듯 역사학의 영역을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무한히 확대한 『 지중 해 』 는 미슐레의 〈 소생 〉 이 가장 웅장하게 구현된 저서이다. 『 지중해 』 는 새로운 역사의 모델이 되었다. 페브르는 그 서평을 다음과 같이 감격적 으로 마무리짓고 있다. 20 년 전부터 아날을 통해 싸움을 해온 우리들에게 있어서 _ 나는 이것을 친구인 Revue h ist or iq ue 에서 말할 수 있다. [… … ] 한 마음이 되어 더 생생 하고 더 심사 숙고되었으며, 과거의 것보다 더 효율적이고 우리 시대의 요구 에 더 잘 부응하는 역사를 세우기 위해 일해 온 우리에게 있어서, 이렇듯 우리들의 생각이 구체화되고 그토록 권위를 가지고 또한 그토록 유연성을 가지고, 우리가 기쁜 마음을 가지고 불러대는 역사의 이미지가 실현된 것을 보는 것은 기쁜 줄거움이다. 역사 그 자체를 위해서 이것은 커다란 진보요 유용한 혁신이다. 새로운 시대의 새벽임을 나는 확신한다. 그리고 나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 이 멋진 책을 읽고 또 읽고 깊이 생각해 보라 고. 오랫동안 그것을 자신들의 동반자로 삼으라고 .33) 페브르의 환회와 예언은 어긋나지 않았다. 『 지중해 』 와 더불어 아날 학파는 드디어 하나의 〈교과서〉를 가지게 되었고, 이 〈 학교 〉 에 입문하려 는 젊은 역사가들은 이 책을 동반자로 삼았던 것이다. 페브르의 서평 이의에 프랑스 학자의 비판적인 논문이 없다는 사실이 그 교과서적인 위치를 말해 준다. 브로델을 뒤따라 많은 역사가둘이 지중해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 .34) 이 책은 그 후 수차례 개정판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1985 년 현재 9 개국어로 번역되 었거나 또는 준비중에 있다는 사실이 이 33) 페브르의 서평, p. 178. 34) 특히 이태리와 스페인에서 그 검증이 이루어졌다· 교역(밀, 견사, 대리석), 상선 (베니스와 제노아), 정기 시장 (Lanc i ano, Fog gia) , 가격 (Ud i ne, Chig gia) , 화폐 와 신용(피렌체, 밀라노), 항구 (L i vourne, Ancone), 도시(제노아, 베니스、 피렌 체,로마).

책의 파장을 말해 준다. 그러나 영미 학자들에게 있어서 이 『 지중해 』 는 다소 생소하게 보였 다 . 35) 역사학과 지리학 사이의 학문적 연관성을 공감하지 못하던 이둘에 게 브로델의 지리적 역사는, 구체적으로 제 1 장은 오히려 불필요한 기술 로 여겨졌으며, 나아가 제 3 장 정치사 부분은 브로델이 페브르에게 자문 을 구하기 전에 완성해 놓은 것을 그냥 덧붙이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밝거일으켰다 •3 6) 이들의 비판은 웅장한 브로델의 3 총 구조란 결국 단절 된 구조여서 전혀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이었으니, 브로델은 지중해라는 인물을 〈 소생 〉 시키는 데 결국 실패하였다는 뜻이다. 헥스터 J. Hexte r 에 의하면 브로델의 『 지중해 』 는 제 1 장 때문에 빛나는 것이 아니라, 제 1 장에도 불구하고 훌륭하다는 것이다. 또한 젊은 마르크시스트 역사가들에게 있어서 지리적 역사는 과학적이 지 못한 역사로 인식되었다. 37) 이렇듯 『 지중해 』 를 둘러싸고 예찬과 비판 이 교차되었다. 이 모든 것은 지리적 역사의 〈 새로움 〉 이 일으킨 충격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여기에 대한 예찬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브로델 개인에게 있어서 그의 관심은 그 후 경제로 쏠리다가 후년에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남긴 유작인 『 프랑스의 야기덴티티 』 는 브로델적 프랑스사로서 우리는 다시 한번 지리적 역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출발점은 『지중해 』 에서와 마찬가지로기 프랑 스의 지리를 기술하는 것이었다. 35) 예를 들면, B. Bail y n , , Jo urnal of economi c his tor y , 여름, 1951 : S. Kin se r, , A . H .R. 2 월, 1981 : D. Gress, , The new crite r io n , 4 월, 1983. 36) J. H. Hexte r , , J o urnal of modem his tor y , 44, 1972, p. 534. 핵스터의 평은 특히 풍자적이고 비판적이다. 37) P. Vi lar , La Cata l og ne dans l'Espa gn e modeme, recherches sur /es fon dements economi qu es des str u ctu r es natio n ales, Paris, 1962, pp. 13, 17.

2 물질주의 『 지중해 』 가 출판된 지 3 년 후인 195 2'건, 페브르는 자신이 편집을 맡고 있던 〈 세계의 운명 〉 시리즈의 일환으로 〈 산업화 이전의 유럽 경제사 〉 롤 집필해 줄 것을 브로델에게 위촉하였다. 이 작업은 그 후 27 년이 지난 1979 년, 『 l 앙1 ] 기에서 1 양1 ] 기까지의 물질 문명, 경제, 그리고 자본주 의 』 라는 제명으로 세 권의 책이 완결됨으로써 빛을 보게 되었다.] ) 전부 1800 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방대한 책은 그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 대상 지역을 유럽으로만 한정하고 있지도 않으며, 또 시기적으로도 l 데기와 1 양1 ] 기의 밖으로 확대되고 있다. 당시의 유럽은 하나의 〈 세계 -경제 〉 를 형성하면서 서서히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확대되어 가고 있었 기 때문에, 또 유럽을 다른 지역과 〈 비교 〉 하지 않고서는 올바르게 파악 할 수 없기 때문에도 이렇게 세계 경제사를 시도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 다. 따라서 이처럼 웅대한 구상과 야심 그리고 브로델의 무전장한 지식 의 양, 더욱이 거의 매페이지마다 등장하는 그림, 사전, 지도, 도표 등은 이 방대한 저서가 실증적 연구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의경심을 품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우리는 이 책의 구조를 우선 파악하고, 전편에 흐르고 있는 논점을 분석하여 브로델이 간직하고 있는 역사 인식의 면모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는 경제학자나 경제사학자들의 논평을 통해서 이 저서가 가지는 비중을 가늠해 볼 것이다. 역사학자의 경제사는 경제학자의 경제사와 달라야 할 것이다• 우선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역사학자의 작품이라는 인상을 준다. 구체적인 사실울 관찰한다는 정신으로 과거의 사료를 섭렵하면서 브로델은 좀바르 트 W. Sombar t나 쿨리셔 J. Ku lisc her 등의 고전적인 모델에서 오류를 발견하며, 또한 경제를 〈 동질적인 실상〉으로 파악하고 그 〈 두명한 〉 부분 1) 제 1 권 『 일상의 구조. 가능과 불가능 』 , 544 면; 제 2 권 『 교환 』 , 600 면 ; 제 3 권 《 세계 의 시간 》 , 607 면.

— 시장 ―― 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제학자가 바라보는 과거에는 아직도 〈 불두명한 지역 〉 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였다 . 복잡성과 이질성 등이 지배 하는 지역이 아 책의, 더 직접적으로는 제 1 권 『 일상의 구조들 : 가능과 불가능 』 의 대상이다. 바로 이러한 〈 삶 그 자체의 흔적 〉 에서부터 출발하 여 브로델은 3 층의 구조를 건축하는데, 그의 설계를 들어 보자. 불투명한 지역은 역사적 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관찰하기 어려운 데, 시장의 아래에 펼쳐진다 ; 이것은 우리가 도처에서 봉 수 있는 기저의 초보적인 활동으로서 간단히 말해서 환상적인 부피를 지닌다. 표면에 있는 이러한 두꺼운 충을 나는 더 좋은 명칭이 없어서 물질 생활, 물질 문명이라 고 부론다. [… … ]또 한 시장들의 광활한 표면 위로 활발한 사회적 위계가 세워진다. 이것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교환을 변조하며 기존 질서를 뒤흔든다. 이것을 원하고 또 가시적으로는 그것을 원하지 않기조차 하기 때문에, 이것들은 비정상과 〈 혼란 〉 을 만들어 내며, 매우 특별한 길을 통해서 자신들의 사업을 이끌어 간다. [……] 시장 경제의 두명함 위에 존재하는 이러한두번째 불두명한지역은그것의 상부한계에 해당하는것으로서 나에 게 있어서는, 다시 언급하겠지만, 자본주의의 고유 영역이다. 2)

2) r 물질 문명』, I, p. 8.

위 인용문을 통해서 우리는 브로델의 모델을 다음과 같이 그려 볼 수있다. 광의의 경제-E시자장본 주의 물질 문명 시장이라고 하는 〈투명한〉 충-이것만이 기존 경제사의 대상이었다 는 것인데-의 위아래로 또 다른 충――브로델에 의하면, 〈불투명한〉 ―이 펼쳐져 있으며, 각 충은 다음과 같이 서로 상이한 논리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 자본주의-독점 시장-교환 물질 문명―자급 자족 이러한 도식은 인간의 경제 활동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역사 인식 을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간이란 경제 전문가나 경제 정책 수립가만이 아닌 모든 구체적인 사람을 다 포함한다. 그런데 이 모델이 특별한 관심을 모은 이유는 자본주의의 본질이 일반적으로 시장 경제 즉 교환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상황에서, 경제 ―― 교환――와 자본 주의를 별개의 충으로 구분하고 있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에 상세히 논할 것이다 .3) 1 떼기에서 1 양1 ] 기까지의 세계(주로 유럽을 중심으로 하고는 있지만) 경제사를 서술하면서 브로델은 그 〈 일상의 구조 〉 를 파악함으로써 긴 항해를 시작하였다. 일상의 사람들이 먹고, 입고、 거주하는 그 반복적 양식은 1830 년대 〈 기 차 혁명 〉 에 의 해 변동이 오기 전까지 동일하였다는· 것이니, 이 〈거의 변하지 않는 〉 구조를 발견하는· 것이 그가 제기한 우선 적 과제였다 .4) 그의 표현에 의하면 〈 가능과 불가능 〉 이라는 시대의 물질 적 한계를 긋는 작업이 한 시대의 경제 활동 및 독점 행위를 이해하는 데 우선 필요하다는 것이다. 페브르가 lR1] 기의 심성적 한계를 설정하 3) 『 물질 문명 』 , II, p. 199. 브로델은 중세 이후 경제와 자본주의의 구분은 유럽사 의 상수라고 말하고 있다 . 자본주의의 본질을 〈 독접 〉 으로 파악하는 데 있어서는 왈러슈타인도 대체로 동조하고 있다( 『 근대 세계-체제 』 , I, p. 74 : Une lec;o n d'h is toi re , p. 126 이하 왈러슈타인의 발언). 4) 『물질 문명 』 , I, p. 12. 브로델은 이 기차 혁명을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보고 있다. r 프랑스의 아이덴티티 』 , I, p. 12 에서 그는 프랑스의 동질성이 진정으로 확인되는 것은 잔다르크나 프랑스 혁명에서가 아니라 철도 혁명과 국민학교의 보급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Une lec; o n d'h ist o i re 에서 이를 재차 강조하고 있다 (p. 163).

고 이러한 한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정신적 동일성을 주장한 것과 매우 유사한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단지 브로델은 하부의 경제적 구조를 먼저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물질주의가 두드러진다. 비록 『 지 중해』에서처럼 지리적 세계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 자양 분을 공급하는 토양 〉 위에 사람들을 위치시키는 것이 역사학의 비인간 화를 방지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 그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이러한 지리학과 경제사의 결합은 〈 세계-경제 〉 라는 개념에서 구체화된다. 전(前) 산업적 경제 활동 영역의 두께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하여 브로델이 사용한 〈 물질적 도구 〉 6)는 인구와 물질――식량, 의복, 주거, 기술, 화폐, 도시-이었다. 물질 생활, 그것은 사람들과 물질들, 물질들과 사람들이다. 물질들――-식 량, 거주지, 의복, 사치품, 도구, 화폐 수단, 마울과 도시의 테두리-한마디 로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것을 연구하는 것이 인간의 일상적 존재를 측정하 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다. 토지의 부를 나누어 갖는 사람들의 수 역시 그 의미를 지닌다 .n 인구가 역사의 변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서 논쟁이 벌어졌었다. 소위 맬서스적 역사 인식, 죽 하나의 생태계 Eco-sy s t em 여t 설정하고 인구는 이 생태계가 제공하는 가능성의 한계내에서 스스로의 인구를 증감시켜 나간다는 견해가 바로 그것이다. 농업 생산물이 충분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생산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구수 를 감소시켜 나가는 경향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러한 현상이 전(前) 산업 적 단계의 프랑스에서 관찰된다는 것이다. 역사를 창조하는 인간, 계급 5) r 물질 문명 』 , I, p. 496. 6) 페브르가 십성적 도구 (ou till ag e men t al) 를 분석한 반면 브로델은 경제적 도구 (outi llag e econo miq ue) 를 분석하였다는 접에서 (『지중해』, I, p. 326), 『물질 문명 』 은 『지중해』의 제 2 장을 확대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7) 『물질 문명 』 , I, p. 15.

무쟁적안 인간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신음하는, 자기 살을 깎는 인간상이 이처럼 제시된 것이다. 그리고 이 피동적인 인간의 수적 증감이 역사의 기본적인 동인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 인구 결정론 〉 이 역사 가들의 인식론에 하나의 모티프롤 제시하였던 것이고, 따라서 브로델이 〈 인구의 문제 〉 를 재는 것으로써 자신의 경제사를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 은 그냥 간과될 수 없다. 인구 지도가 또한 〈 가장 덜 변하는 것 〉 8) 이기 때문에 브로델의 역사에서는 그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기 때문 이다• 그러나 브로델은 이러한 생각을 체계화시키고 있지 않다. 하나의 결정론으로 자신을 묶어 두거나 그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 기 때문일 것이다. 인구의 증가는 〈 분명 물질적 발달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 발달 속에서 인간의 수는 결과인만큼원인이기도하다. 〉 9) 그의 사론은 항상 그러하듯이 매우 유연하고 절충주의적이다. 브로델의 다음 관심은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어떠한 주거지에서 어떠 한 옷을 입고 살아왔나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의식주 문제이다 .10 ) 한마 디로 우리는 이를 사회사적 관점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브로델 의 경제사 3 권 가운데서도 특히 이 제 1 권의 가치가 돋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한 예를 들어 보자. 페스트로 인하여 전체 인구의 절반 가까이를 상실한 1E] 기의 유럽, 그 위기나 불행은 과연 누구에게 해당하는 것일까? 죽은 사람, 또는 귀족들을 역사가는 이러한 표현으로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 특히 하층민들의 경우 실질 임금은 이 시기보다 높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있어서 이 시기가 〈생존 조건이 분명히 행복한 〉 시기였다는 것이다. 브로델은 단선적 역사 해석의 패러독스를 이렇게 지적한다. 〈 단순주의적 생각은 중세의 시간을 거꾸로 내려갈수록 더 불행 속으로 빠져 든다는 점을 8) 위의 책, 같은 페이지. 9) 위의 책, 갇은 페이지. 10) 밀, 쌀, 옥수수, 감자(〈 1 防 l 기의 식량 혁명〉), 음료수 등의 식량과 거주지의 내부 의부 구조, 나아가 부자와 빈자가 입고 있던 옷도 보여 준다.

내세운다. 그러나 밀중의 생활수준이 문제될 때는 그 반대가 옳다. 〉 1 1)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입장을 한쪽으로만 고정시키지는 않는다. 사회사 죽 다수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수의 역사를 도의시해서 는 안 된다고 역사가는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늘날의 역사학은 어제의 역사가 잊고 있었던 다수의 운명을 찾는다. 더 이상 영주들이 아니라 농민들, 그리고 루이 1Ull 가 아니라 2 천만 프랑스 인이 그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가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는 있으 나, 불활동적인 다수의 사람, 재화, 상품보다 흔히 더 직접적일 수 있는 소수 의 역사를 평가 절하하지는 않는다 .12) 통계 숫자를 과신하는 경향을 질책한 말이며, 아울러 교역량 못지 않게, 비록 양은 적어도 경제 상층에 활력을 일으켰던 사치품-―_그 한 예가 후추인데-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이어 브로델은 인력, 축력, 수력, 풍력과 목재, 석탄 등이 인간들의 생활에 어떻게 이용되었으며 어떻게 기술 축적이 전행되어 왔나를- 서술 하고 있다. 서서히 변화하는 것, 죽 당시의 교통 수단 역시 고려의 대상 이 되었다. 증기 기관의 사용으로 촉발된 〈산업 혁명〉 이전에 이러한 〈 점진적 상승 〉 이 뒷받침되었다는 장기 지속적 관점이 다시 한번 드러난 다 .13) 이처럼 경제적 토양을 다진 다음 브로델은 한 단계 위에서 전개될 경제활동의 기본적인 도구와 틀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제 1 권의 마지막 두 장에 해당하는 화폐와 도시가 바로 그것이다. 본인 人人쿠 F 이 두 요소를 〈일상의 구조〉 속에 넣기를 망설였던지 그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11) 『 물질 문명 』 , I, p. 163. 밑줄은 브로델의 것이다. 왈러슈타인이 인용한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근대 세계 -체제』, I, p. 80). 12 ) 『물질 문명 』 , II , p. 356. 13) 『물질 문명』, I, p. 326.

화폐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 그것은 한 단계 위로 울라가는 것이요 의견상 으로는 이 책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 위에서 그 전체를 바라보면, 화폐의 유통은 하나의 도구, 하나의 구조, 전체 교환 생활 ―—다소 가속된-의 근본적 규칙성으로 드러난다 .14) 다소 애매한 표현이지만, 화폐―一원시적 화폐, 물물 교환, 금속 화 폐, 지폐, 신용 거래 — — 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언어처럼 항상 인간과 함께 있어 왔다는 것이다. 도시에 대해서도 브로델은 같은 말을 덧붙일 수 있었다. 〈 도시는 변압기와 같다. 도시는 긴장을 증폭시키며, 교환을 가속시키고 끊임없이 인간의 삶을 혼든다. 도시는 한쪽은 밭, 다른 한쪽 은 일면 도시 생활이라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혁명적인 노동 분업의 소산이 아닌가?〉 15) 긴장,대립-도시와농촌의――아 역사의 상수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상의 구조 속으로 들어울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도시 에서 교환――브로델에 의하면, 경제-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제 1 권에 서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도시의 인구 수, 특칭, 유형, 그리고 도시와 농촌의 관계였다. 이렇게 물질 문명의 〈총량〉을 잰 후 브로델은 그 위에서 전개되는 가장 초보적인 물물 교환에서 가장 정교한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교환에 대해서 고찰한다. 제 1 권의 주제가 〈비경제〉였다면 제 2 권의 주제는 바로 〈경제〉인 것이다. 경제 현상을 관찰하고 비교하여 그 규칙성――이를 브로델은 〈문법〉이라는 말로도 표현하고 있다 .16) 一— 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역사가는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교환 경제와, 정교 한 상위의 경제 죽 자본주의를 구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구분을 이론적으로 입증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구분이 손으로 만지는 것처럼 명백하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각 상이한 단계에서 그 주체자나 사람들, 행위, 정신상태 등이 서로 갇지 않다는 것도 확실하 14) 위의 책, p. 383. 15) 위의 책, p. 421 . 16) 브로델, Grammair e des civi l i s a tio n s 『제문명의 문법』, Paris, 1963.

다. 〉 171 이러한 구분은 거의 실험의 위치에까지 높여진 관찰의 결과라는 것이다. 브로델은 다음과 같은 다섯 단계의 관찰을 실시하였다. 1. 교환의 도구 2. 시장을 마주 대하고 있는 경제 3. 생산, 제집에 안주하지 않은 자본주의 4. 제집에 있는 자본주의 5. 사회, 〈 전체들 중의 전체 〉 물론 브로델은 단순한 것부터 관찰을 시작한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의 유통주의 (C i rcula ti on i sme) 는 위와 같은 관찰의 단계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18) 교환을 중시하고 있으며, 자본주의가 제집이라고 느낀 것도 생산이 아니라 교환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교환의 도구는 도시와 시장이었다. 브로델은 행상, 가게, 장에서부터 자본 정기 시장, 노동 시장 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시장에 대하여 고찰하고 있다. 특히 서양이 중세의 정체적인 경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12 세기부터 일정한 지역에 퍼져 있는 여러 시장들 사이에 가격에 있어서의 파동 및 동조가 눈에 띄는데, 바로 이것이 〈 근대적 〉 시장의 존재를 증명해 준다는 것이다 .19) 그리고 이러한 시장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노동 시장이 나, 이것이 산업 사회의 피조물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덧붙이기를 잊지 17) 『 물질 문명 』 . II , p. 8. 18) 브로델은 자신의 유통주의적 시각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r 물질 문명 』 · II , pp. 12, 112, 174, 193, 200, 209, 229, 329, 519 등. 특히 p. 519 에서는 〈 기초 적 결정주의 〉 라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다. 왈러슈타인 역시 유통주의에 동조하고 있다 . 그는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의 유통이 중요하며, 그리고 경제를 생산에만 국한시킨다면 현재의 미국은 전혀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말한다(왈러슈타 인, , E spa c e Temp s, 34/35, 1986). 이번 호의 주제는 〈 브로델의 총체적 해부 〉 였다 . 19 ) 『 물질 문명 』 , II , pp. 14. 195.

않았다 .20) 이처럼 다양한 교환의 규칙성 - 교환의 담당자인 상인의 활동, 그의 일반적 전술, 그리고 개인적인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시장 그 자체의 메커니즘 등 - 을 찾아내는 것이 브로델의 다음 과제였다• 시장 에서는 수요와 공급이 작용한다. 여기에서 역사학자는 경제학자들 ―― 쎄 H. Say , 마르크스, 제임스 스듀어트、 뛰르고, 존 스튜어트 밀, 케인즈 등-과 대화를 시도한다• 경제학자들이 세운 전(前) 산업사회의 법칙 은 이 시대는 공급이 바탄력적이어서 수요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 그러나 역사가는 과거를 단순화시키지 않는다. 브로델은 다음 과 같이 문제를 제기한다. 〔중농주의자들이〕 농업 생산과 농업적 부를 가장 중시한 것이 식량의 공급 이 수요에 부응하고 인구 증가를 따라가기에 항상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잘못된 것이었을까? 반대로 공업의 빈번한 고장은 농촌의 인구전 도시의 기술자전 노동자건 이들로부터의 수요가 너무 약했다는 점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21) 매우 조심스러운 문제 제기지만 브로델의 관점은 뚜렷하다. 앙시앙 레짐기의 경제를 공급 부족에 의해서 지배된 경제라고 단순화시킬 수 없다는 접, 그리고 농업과 공업은 서로 상반되었디는` 점 등을 그는 강조 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 혁명을 결국 〈 수요의 혁명 〉 으로 파악하는 등 사회적 수용성에 대한 강조는 사회사적 역사 인식이라는 점에서 일관성 울 지니고 있다 .22 ) 20) 위의 책, p. 36. 1 5'1-l]기 이래 중부 유럽의 광산 노동자, l 양 1l 기 이래 빠리 그래 브 광장에서 일자리를 기다리던 실업자들, 1253 년과 1379 년 포르두갈 회사의 노동자 기용, 1393 년 부르고뉴 지방 포도밭 노동자들의 파업, 그리고 용병들도 산업 사회와는 관계없는 노동 시장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21) 위의 책, 갇은 페이지. 22) r 물질 문명 』 , II, p. 293. 귀금속의 유입이 l &ll]기 가격 혁명을 일으켰다는 Ham ilto n 의 주장을 논하면서, 왈러슈타인은, 브레너와 갇이, 유럽 자본주의의

발달이 귀금속을 불러들였다는 역의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 근대 세계 -체제 』 , I , pp. 70- 2) . 이러한 시각 역시 수용성을 강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시장 경제가 경제의 전부를 다 포괄하지는 않는다. 전체 생산 총량 가운대 일부는 자족적 단계로, 또 일부는 국가나 자본에 의해서 시장 밖으로 유출되기 때문이다 . 3 층으로 되어 있는 경제의 상충부는 시장의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지 않는다. 이 영역이 바로 자본주의의 영역이다 . 2 3) 자본주의라는 논란이 많은 주제를 취급하면서 브로델은 〈 앙리 베르와 뤼시앙 페브르의 충고를 좇아서 〉 먼저 〈 자본, 자본가, 자본 주의 〉 라는 말의 역사적 의미, 그 변천을 살핀다. 자본주의라는 말이 사용 되기 시작한 것은 19 세기 사회주의자-루이 블랑, 푸르동 __ _ 에게서이 며, 2 안1 l 기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회주의의 반의어로서 그 근대적인 의미를 지닌다 .24l 그렇다고 해서 이 시기에 와서야 자본주의가 등장한 것은 아니다. 브로델은 16 세기에 자본주의가 시작된다는 마르크스나 왈러슈타인 등의 견해의는 달리, 1 양1 ] 기의 이태리 도시에서 자본주의의 초벌구이가 나타난다고 보고 있는데, 이는 벨기에의 도시에 주목하여 12 세기를 주장한 삐렌느의 견해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시장, 교환, 도시와 함께 자본주의가 시작된다는 유통주의적 시각의 표현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브로델은 다음과 같은 것을 자본주의의 선행 요건으로 들고 있다. -영주제의 쇠퇴 내지는 폐지 -농민의 자유가 폐지되거나 최소한 제한될 것 -기업이 광역적인 교환의 망 속에 놓일 것 -합리적인 경영이 정착될 것

23) r 물질 문명 』 , II, p. 197. 브로델은 이렇게 독점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라고 파악 함으로써 사회주의가 가격을 통제함으로써 국복한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시장 경제일 뿐이며, 나아가 독점은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에서 등장하는 칭후가 아니라고 봄으로써 자본주의의 소멸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 같다. 24) 위의 책, p. 207.

-자본의 두 자 기 술 이 향상될 것 ―임금 프롤레타리아의 존재 25l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브로델의 관점 은 항상 그러하듯이 매우 유연하다. 내부적, 변증법적 요인과 외부적 충격을 공히 중요시하고 있는 것이다 .2 6 ) 재판 농노제의 경우도 그는 기본적으로 일차상품 생산자의 운명이라는 〈 세계 -경제 〉 적 해석을 하면 서도, 국가, 도시, 영주 사이의 경쟁에서 영주가 승리하였기 때문이라는 계급 두쟁적 요인도 빠뜨리지 않는다 .27) 또한 농민 반란에 대해서도 그는 그것이 반봉건적이었는지, 반국가적이었는지롤 굳이 구분하지 않는 다. 농민 반란은 기본적으로 〈 빈곤 〉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 28) 이러한 유연한 해석은 도식을 벗어났다는 긍정적인 면은 있지만, 절충주의적이 라는 평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29) 농민의 자유는 곧 농촌 공동체의 자유를 의미하였다• 자본주의와 농촌 공동체의 투쟁은 이미 블로끄가 『 농촌사』의 중심 주제로 삼은 바 있다. 브로델 역시 동일한 관점에서 프랑스 농민의 반(反)자본주의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 〈 새롭고 놀라운 상황에 직면하여 반자본주의라는 언어를 아칙 발견하지 못한 프랑스 농민들이 반봉건주의라는 이미 낡은 옛말에 25) 위의 책, p. 218. 26) 위의 책, pp. 229- 31 . 27) 위의 책, pp. 231-6 : 『 물질 문명 』, m, P. 29. 왈러슈타인도 이러한 지리적 설명 에 동조하고 있지만, 주변부의 경제를 브로델이 봉건적이라고 보고 있는 데 반 해, 그는 그것이 상품 생산을 지향하였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적이라고 보고 있 다. 28) 『 물질 문명 』 , II, p. 258 에서는 반영주적(1 7 세가)과 반조세적, 죽 반국가적 (1째기 )을 구분하고 있지만, 『 프랑스의 아이덴티티 』 에서는 굳이 구분하고 있지 않다(ill, pp. 161-72). 29) 브로델에 대한 평가 중 가장 빈번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 절충주의 (eclecti - sme) 〉이다.

의존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 을 까? 〉 30) 브로델에 있어서 자본주의 〈 제집 〉 은 도시의 상인이었다. 12 세기 이후 동업 조합이 조직되면서 상인과 직인들은 두쟁을 벌이는데 결국 상인이 승리를 차지한다. 이로써 선대 제도라는 상인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생산 자를 통제함으로써 시장 가격을 벗어날 수 있었고, 고정 자본을 줄일 수 있었으며, 수요의 변덕을 넘어설 수 있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前) 산업적 자본주의에 있어서 대상인들은 생산에 참여하지 않았으 며, 교환이 이윤을 가져다 주는 진정한 부분이었다. 브로델에게 있어서 상업 자본의 보수성이니, 〈 전정으로 혁명적인 길 〉 등과 같은 도식적인 언어들은 바실제적인 언어에 불과하였다. 생산이 자본주의의 체제내로 들어오는 산업 혁명 이후의 시기에도 자본주의가 단지 공업적 생산하고 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브로델은 말하고 있다 •3 1) 전체를 조망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자본주의는 이처럼 자신보다 항상 더 넓은 짚겐의 내부에 위치하며, 이것 이 자본주의를 자신의 움직임 위로 떠받든다. 상업 사회의 정상이라는 이러 한 높은 위치가 그 자체로 법적 내지는 사실적인 독점과 조작을 가능케 한다 는 의미에서 아마도 자본주의의 주요한 실체일 것이다 .32) 독점은 상인에게 안정을 제공해 주지만, 자본가들에게 있어서 독점의 의미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독점은 지배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필요성 때문에 상인은 항상 생산자를 통제하려고 하며, 또 사치품 등에 손을 대는 것이다. 따라서 유통의 양이나 그 사용 가치-예를 들면 밀과 같이 인간의 생존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가 경제의 흐름을 좌우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독점은 결코 상인 혼자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30 ) 『 물질 문명 』 , II , p. 258. 31) 위의 책, p. 327. 전산업적 자본주의를 결산하면서 내린 평가이다. 32) 위의 책, p. 329. 밑줄은 브로델의 것이다. 독접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라는 주장 은 수차례 반복된다(예를 들면, 같은 책, pp. 364, 368, 371, 372).

않다. 봉건 사회에서 벗어나 정치적 권력의 확대를 노리고 있던 왕, 즉 국가와 자본가의 결탁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이루어지며, 그 자체가 자본 주의 성립의 한 조건이었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본질을 독점으로 보고, 상인들이 그 중심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때, 자본주의가 상업 ―산업 _금융 등의 단계로 발전하였 다는 단계설이 비판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물론 브로델이 상업자본주의니, 공업자본주의니, 금융자본주의니 하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33) 그러나 그는 단계설이라는 〈 단순주의 〉 를 배격하 고 있으며, 왈러슈타인은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의 인식에 있어서 브로델 의 한 공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34) 기본적으로 역사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진행한다는 전(前) 시대의 목적론적 시각에 대한 반발이 이러한 시각을 그에게 심어 주었을지도 모른다. 하나의 〈세계_경제 〉 속에는 여러 개의 자본주의가 또는 여러 개의 생산 양식이 공존한다는 의미도 또한 담겨 있댜 직접 브로델의 말을 들어 보자. 총체적 경제라는 면에서 봉 때, 자본주의가 단계를 밟아 상업적 단계에서 금융적 단계와 산업적 단계 -성숙 단계, 유일하게 진정한 자본주의에 부합하 는 단계로 성장하였다는 단순주의적 이미지롤 경계해야 한다. 소위 상업적 단계에서나 소위 산업적 단계에서나 ___ 이러한 용어는 다 의형적으로는 커다란 진리를 담고 있는데 - ~자본주의는 그의 본질적 성격으로서, 심각한 위기가 닥쳤거나 또는 이윤률이 현저하게 감소할 때,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이 분야에서 다론 분야로 거의 죽각적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능력 을 가지고 있다 .35) 1 께기 이태리의 도시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33) 위의 책, p. 382. 34) 『 물질 문명 』 , m, p. 524. 왈러슈타인의 평가는, : Une le~o n d'his toi re , p. 128. 35) 『 물질 문명 』 . II, p. 382( 밑줄은 브로텔이 강조한 것임 ).

모든 시련에 대한 탄력성, 변형과 적응 능력과 갇은 질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 속에는 자본주의는 자체의 위기를 언제나 극복해 왔고 미래에도 항상 그러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세계관이 담겨 있다. 자본주의의 본질이 독접이고 이것을 보장해 주는 것이 국가이기 때문 에 자본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국가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 그러나 그 힘의 정도에 있어서 브로델의 관점은 신중하다. 왈러슈타인과는· 달리 브로델은 국가가 너무 강력해도 자본주의의 발달을 억제한다고 지적하면 서, 그 예로 루이 1iv1 il 시대의 프랑스를 들고 있다 . 36) 기본적으로 자본주 의의 정신은 〈 선택의 자유 〉 라는 것이다 .37) 절대주의가 과연 자본주의의 발달에 기여했는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발달을 위해서 반드시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될 장애물이었나? 시민 혁명의 역사적 필연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후자의 편을 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위와 같은 이분법은 다분히 논쟁적이고 교조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절대주의의 중상주의적 정책이 자본주의 의 발달에 기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업 36) 〈 브로델의 날 〉 에서 이 두 학자는 국가와 자본주의에 대하여 토론했는데, 브로델 은 다음과 같이 고답적으로 대화 를 유도하고 있다. 〈 임마뉴엘, 왜 국가가 자본주 의에 필수 불가결한가 를 설명해 보라, 그러면 나는 그 반대를 이야기하마 .〉 (p. 150 ) . 이 자리가 이 노역사가를 위해 마련된 자리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분위 기 를 침작할 수 있 을 것이다 . 그러나 브로델의 입장은 여전히 절충주의적이다 . 즉 국가는 너무 강력해서도 또 너무 약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브로델 은 봉건제, 죽 왕권이 분해된 시기의 존재 여부가 자본제의 성립에서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 r 물질 문명 』 ill, p, 365 ; Une /e;;o n d'his toi re , p. 151 ). 브로델은 역사 발전 단계를 차용하고 있는 셈안데, 이 둘을 종합하면 그의 견해는 국가가 강력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과 비교해서 현재 강력해 지는 과정에 있어야 그것이 자본주의의 성립에 기여한다는 것으로 봉 수 있을 것 0] 다 . 37) 『 물질 문명 』 , II, p. 353 ; 또 冊권의 종합 결론에서, 〈 자본주의의 주요한 특권은 어제나 오늘이나 여전히 선택의 자유이다〉라고 자본가적 정신을 정의내리고 있다.

자본이 아무리 〈 보수적 〉 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브로델 의 관점은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오염을 경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 다라고 추측하는 것은 그를 너무 미화시키는 것일까? 어쨌든 브로델은 한쪽으로 치우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 사회 〉 라는 〈 전체들 중의 전체 〉 38) 속에서 총체적으로 그리고 장기 지속적으로 조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38) 자본주의를 어떠한 정신의 구현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의적인 〈 관념주의적 〉 설명은 좀바르트나 막스 베버가 막스의 생각을 회피하기 위하여 할 수 없이 차용한 출구에 불과하다. 우리들은 공정하게 생각해 볼 때 그들을 따라간 의무가 없다. 나는 또한 자본주의에 있어서 모든 것이 물질적이라거나 사회 적이라거나 사회 관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 하나 내가 보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은 자본주의라는 것이 단 하나의 편협한 기원을 가지고 있지 는 않다는 점이다. 경제도 할 말이 있고, 정치도 할 말이 있고, 사회도 할 말이 있고, 문명과 문화도 할 말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힘의 관계를 최종적 으로 결정해 주곤 하던 역사도 할 말이 있다 .39 )

38) 〈전체들 중의 전체〉는 사회에 대한 브로델의 유명한 정의로서 제 2 권 제 5 장의 제목이다. 이것을 파악하는 것이 역사라는 뜻이다. 39 ) 『물질 문명 』 , II , p. 355.

지금까지 살펴본 제 1 권과 제 2 권으로써 브로델의 역사적 관찰은 그 역할을 다했는지 모른다. 제 3 권은 이러한 사실들을 이론적으로 정립 (세계 -경제)하고 다시 이 〈세계-경제〉를 그 중심 도시 ___ 베니스, 앙베 르, 제노아, 암스테르담, 런던(영국), 뉴욕(미국)-를 중심으로 살펴보 고 있다. 이론에 의한 설명은 브로델과 같은 역사가의 〈제집〉을 벗어난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왜 이러한 시도를 하였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왈러슈타인의 존재를 거론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역사)사회학자는 1974 년 『근대 세계 -체제』를 발표하였다. 책의 제목에도 나와 있듯이 왈러슈타인은 〈세계-체제〉의 하나인 〈세계-경제〉(또 하나는 〈세계-제

국 〉 이다 ) 라 는 개념으 로 써 자 본주 의 를 파악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의 서두 에서 자신에게 직접 영향을 준 사람은 M. Malowis t. 9 -)- 브로델이었으 며, 특히 브로델은 초고를 읽고 많은 용기 를 불어넣어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 세계-경제 〉 라는 개념을 과연 누가 창안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왈러슈타인은 〈 브로델에게서 영감을 얻어 내가 이론화하였다 〉 라고 대답하고 있다 . 4 0 ) 브로델은 역사학자이고 사회학자인 자신의 본업은 개념화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왈러슈타인이 브로델의 『 지중 해 』 에서, 폐쇄되고 자급자족적인 하나의 경제 권역, 즉 〈 세계 -경제 〉 라는 개념울 도출하였으며 차후 그와의 대화를 통해 체계화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왈러슈타인에게 있어서 브로델의 존재는 가히 철대적이 라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뉴욕 주립대학에 설치한 〈 경제, 역사 체제 , 문명 연구소 〉 를 〈 페르낭 브로델 센터 〉 라고 명명하였으 며, 1977 년 5 월 이 연구소는 〈 아날 학파가 사회과학에 가한 충격 〉 이라는 주제로 창립 세미나를 개최할 정도였다. 왈러슈타인이 어쩌면 브로델의 유일한 계승자일지 모른다. 브로델의 제 3 권은 사회학자가 만든 개념에 대한 역사학자로서의 교정 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브로델은 〈 세계 -경제 〉 를 〈 l~i l 기의 지중해 처럼 〉 경제적으로 자율적이고, 본질적으로는 자족적이며, 내적 연결과 교환을 통해 유기적 일체성을 부여받는, 지구상의 일부분이라고 정의하 면서 41) 그 〈 규칙 〉 을 다음과 같이 정하고 있다. 첫째, 〈 세계 -경제 〉 는 천천히 변하는· 공간이다. 둘째, 중심부에는 지배적인 자본주의적 도시가 있다• 셋째, 상이한 권역들이 위계되어 있다. 이러한 규칙들은 다시 하부 규칙들로 세분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것들 이 과연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이 속에서 브로델의 역사 인식을 접할 수 있다. 우선 브로델의 40) , p p. 42-6. 41) 『 물질 문명 』 , lll, p. 12.

시각은 〈 공간과 경제 〉 라는 부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지리적이다. 〈 세계_경제 〉 와 〈 세계-경제 〉 사이에는 바다나 사막과 갇은 완충지가 존재하는데, l~ i]기의 지리상의 발견은 유럽의 〈 세계 ―경제 〉 가 팽창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 기적 〉 이었다는 평가가 그러하다 .42) 또한, 하나의 〈 세계-경제 〉 는 중심부, 준주변부 그리고 주변부라는 · 세 개의 불평등한 권역으로 나뉘며, 중심부의 중심은 베니스―앙베르_제노아-암스테르담 _런던-뉴욕으로 이동한다는 점 역시 지리적이다. 그리고 이 지리적 중심 이동을 사회학자는 경시했다는 것이 바로 지리적 역사학자의 평가 이다 . 베니스는 만개한 상업 도시이지만 공업과 금융을 제한적이나마 구비한 도시인 반면, 앙베르는 전적으로 상업에만, 그리고 제노아는 전적 으로 금융에만 의존한 도시였다. 그 후 암스데르담, 특히 런던에 이르러 이 〈 세계 ―도시 〉 는 상업, 공업, 금융 나아가 국민 경제와 같은 경제력의 후배지를 갖추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중심 이동을 가능케 한 것은 무엇 인가? 브로델의 대답은 역시 지리적이다• 경제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제노아의 지배권은 중심 이동이 유동적일 때 나타나는 〈 막간 〉 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또한 브로델은 필립 2 세가 마드리드가 아니라 리스본에 자리잡았더라면 암스 데르담의 지배권은 불가농했을 것이라면서 하나의 〈 세계一경제 〉 에는 하나의 중심부만 존재할 뿐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 하나의 설명이지 만 갈증은 여전히 남는다• 역사가의 설명은 기본적으로 관찰적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43) 〈 세계 _경제〉에는 자본주의에서 노예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개의 생산 양식이 공존하고 있다. 또한 중심부와 (준)주변부 사이에는, 리카르도의 희망과는 달리, 불평등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브로델은, 왈러슈타인이 자본주의적 〈 세계 _경제 〉 의 불평등울 교정할 새로운 사회주의적 〈 세계 一 42) 위의 책, p. 17. 43) 반면 왈러슈타인은 노동자들의 저항이라는 한 요인을 제시하고 있다( 《 근대 세계 -체제 》 , p. 81).

경제 〉 를 회구하는 것과는 달리, 불평등이라는 것은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보수주의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런데 중심부, 준주변부, 주변부가 하나의 〈 세계一경제 〉 에 속한다는 것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교환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 불평 등이 발생한다고 해서 하나의 세계 -경제 속에 위치한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 브로델은 지리적으로 닫힌 세계 속에 흐르는 시간이라는 인자를 주목한다. 제 3 권의 제목을 〈 세계의시간 〉 이라고 붙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의 〈 세계-경제 〉 는 중심부 건 (준)주변부건 동일한 시간의 리듬을」간다는 것이다. 45) 그는 다시 우리 를 꽁종뛰르 속으로 인도하고 있다. 한 예로., 1639~1660 년, 유럽에 있어 서 밀의 위기가 불러일으킨 가격의 파급을 보면 전유럽이 동일한 꽁종뛰 르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r 물질 문명』, III, p. 59). 꽁종뛰르는 〈 장기 지속 〉 이라는 말과 더불어 브로델이 역사를 바라보는 핵심적 도구였다. 이 경제사 3 부작의 제 2 권, 제 3 권에서 무슈二히 반복될 뿐만 아니라, 〈 꽁종뛰르에 어떠한 역할을 부여할 것인가? 〉 라는 작은 절로써 아 대저를 마무리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 중요성을 알 수 있 다. 그는 다음과 같이 강한 표현을 하기도 한다. 〈 50 년 전에 인간과학은 인간의 모든 삶은 무한히 반복되는 주기적 운동에 따라 변동하고 전동한 다는 전리를 발견하였다. 〉 46) 죽 주기적으로 변하는 꽁종뛰르의 존재, 그것은 곧 하나의 진리라는 것이다. 길고 짧은 리듬을· 가진 무수히 많은 경기 사이클-예를 들면, 계절적 변동, Ki tch in 사이클, Ju g la r 사이 클, Labrousse 사이클, Kuznets 사이클, Kondrati eff 사이클이나 세기적 tre nd 등-가운데 브로델이 관심을 가전 것은 세기적 t rend 나 Kon-drati eff 사이클처럼 적어도 50 년 이상 수세기에 걸친 〈 장기적〉 꽁종뛰르 (Conjo n ctr u re lon gu e) 였다. 브로델에 의하면 유럽의 〈세계 -경제〉는 다음 44) 세계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는 것이다. 『물 질 문명 』, I, pp. 156, 189, 42 3, 496 : II , pp. 8. 331, 411, 415, 440, 458 : Ill, pp. 36. 49. 45) 왈러슈타인의 책에도 바슷한 내용이 엿보인다(위의 책, p. 70). 46) 『물 질 문명 』 , Ill, p.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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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Roy Ladm i e 는 이러한 시각으로 산업 혁명 이전까지의 프랑스사룰 설명하고 있는 데 반해 브로델은 그 이후의 위기도 갇은 시각에서 바라 보고 있다 .49)

49) 위의 책, 갇은 페이지.

우리는 이제까지 『 물질 문명. 경제. 자본주의 』 라는 3 부작의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우선 전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방대한 연구에서 브로델은 무수히 많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페브르가 하나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그 시대적 분위기에서 최종적인 해답을 찾은 데에 비해, 브로델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 하나의 종합을 이루고는 있지만 산만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세부적인 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를 평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브로델에 의해서 총체적으로, 재구성된 역사의 성격은 어떠한가? 몇 가지의 인자-구조, 변동, 현재사-를 중심으 로. 그 구체적 예증을 가지고, 브로델의 역사 인식을 이해해 보자. 첫째, 눈에 띄는 것은 지리적 해석이다. 『지중해 』 에 있어서의 지리적 시간, 그리고 이 책에 있어서의 〈세계-경제〉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역사학에 지리학을 도입한 프랑스 역사학의 특칭은 구체적 삶의 토양에 인간을 위치시키고 그 위에서 전개되는 삶의 모습을 다양성 속에서 파악 한다는 낭만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지리적 해석은 그 자체의 생생함을 부정하는 결정주의의 위협을 받는다. 우리는 이러한 경향을브로델의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세계-경제〉의 주변 지역은 그 지리적 위치 때문에 불평등 및 착취를 벗어날 수 없다는 논리가 그 한 예이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 보자 : 〈한 국가가 가난한 것은 이미 가난하기 때문이다〉라는 비관적 악순환 50) ; 엘베 강 이동 지역에서 15 세기 이후 농노제가 다시 나타난 것은 스페인이나 남부 이태리, 스코틀 랜드, 아일랜드처럼 이 지역 역시 〈세계 -경제〉의 주변부에 위치했기 때문이라는 설명 ; 종교 개혁을 라인 강-다뉴브 강이라는 구조적 경계선 울 설정, 부유한 남부로부터 가난한 북부의 해방으로 설명하는 것; 베니 스가 경제적으로 더 발달한 제노아를 누르고 1#1l 기에 경제적 우위를

50) 위의 책, p. 38.

차지한 것은 지리적 위치 때문이라는 해석 등. 이러한 지리적 설명은 그래도 일면의 타당성을 지닌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지리적 크기를 가지 고 설명할 때, 예를 들면 프랑스가 영국에 뒤진 이유는 국토가 너무 넓기 때문이었다라든지, 아일랜드는 너무 크기 때문에 영국에 복속되지 않았다는 유의 해석은 환상적이라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다 .5 1) 두번째 특징은 꽁종뛰르에 의한 설명이다. 역사의 흐름을 상승-하강 하는 장기적 사이클로 인식하는 이러한 시각은 복잡 다변한 사건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1 양 1l 기 이후의 역사를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4 개의 파동으로 설명한다든지 또는 더 장기 지속적인 관점 에서 1450 년이라는 단절 이후 현재까지를 하나의 상승기로 파악한다든지 하는 것은, 비록 이러한 사이클에 의한 설명이 경제학자들에게는 이미 낡은 이론이 되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52 ) 브로델적 역사의 유용 한 특징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꽁종뛰르는 그 어의대로 역사를 하나의 인자가 아니라 복수 인자의 결합에 의해서 설명하려는 탈단순주의라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꽁종뛰르라는 말은 역사 가가 논리적으로 한계에 봉착했을 때마다 하나의 출구로서 사용하는 방편이 아닌가 할 정도로 브로델의 저서에서는 너무 남발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53 ) 또한 사건과 인간은 이 거대한 사이클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단적인 예를 둘어 보자. 아랍의 침입에 의해 고대 세계의 사회 경제적 토대가 붕괴되고 바야흐로 중세가 시작되었다는 삐렌느의 주장에 대해, 브로델은 로마사의 연속성에 대해서는 동감하면서도 이미 지중해는 죽어가고 있었다는· 꽁종뛰르적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51) 지리적 사고의 일단을 보여 주는 구철은 무수히 많다 . 예를 들면, 『 물질 문명 』 II , pp. 46, 255, 394, 507 : 『 물질 문명 』 m, pp. 12, 16, 2s, 79, 269, 276, 30 3, 321 등. 프랑스가 지리적으로 너무 커서 자본주의를 꽃피우지 못했다는 견해 는 『프 랑스의 아이덴티티 』 에서도 반복된다(제 1 권 pp, 167, 279, 제 2 권 pp. 66 -7, 370, 408 등) . 52) 〈 브로델의 날 〉 에서 경제학자인 P. Fabra 는 이 접을 지적하였다(p. 89). 53) 따질 문명 』 , II, pp. 154, 182, 193, 232, 348, 353, 398, 425, 426, 429, 441, 472 : r 물질 문명 』 , 血 pp, 56. 65. 512, 528.

deus ex mach i na 였던 것은 지중해의 봉쇄가 아니라 경제의 전반적 인 악화 였다. 그리고 9 세기나 10 세기에 가서야 장기적 꽁종뛰르가 역전되어 라틴, 그리스, 아랍 할 것 없이 지중해에 접하고 있는 모든 국가를- 동해, 그리고 모든 국가를 위해 지중해에 다시 활기가 태어난다. 970 년에서 985 년경 아랍 의 금이 바르셀로나로 흘러 들어온다. 물론 이러한 금의 유입이 경제적 분위 기를 바꾸어 놓은 것은 아니다. 이것은 지중해와 세기적 tre nd7t 반전된 것을 보여 주는 징표에 불과하다. 54) 인간이 철저히 배제되었고, 디분히 체념론적 색조를 띤다• 1350 년에서 부터 1450 년까지의 〈가증스러운 퇴조는 어떤 면에서는 그 성공의 결과이 다.〉 55) 꽁종뛰르라는 종합적인 그러나 매우 신비적이며 비과학적인 움직 임이 역사의 동인으로 등장한 것이다.

54) 『프랑스의 아이덴티티 』 . II. p. 92. 55) 위의 책, p. 117 : 씨또 수도회는 수도원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황무지를 개간 하고 양을 사육하였으나, 〈경제의 보복〉에 의해 경제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어 최초의 정신을 상실하였다(또는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는 뒤비의 해석도 유사한 논리라고 생각된다(뒤비의 College de France 취임 강연, Ann- ales, 1972). 56 ) r 물질 문명 』, I . pp. 7. 156, 376, 451-2, 465 : II , pp. 54. 75, 134-5, 141, 2 06, 222, 353, 489, 506, 510, 515, III, pp. 8, 9, 44 등.

마지막으로 현재사라는 시각에서 이 책을 바라보자. 브로델이 이 자본 주의에 대한 연구에 착수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사학사적 측면에서 브로델은 관념론적 자본주의 연구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물질과 정신이라는 두 가지 명제 가운데 브로델은 물질주 의를 내세우고 있다. 물론 그는 마르크스의 교훈을 따르기도 하나 그를 비판하기도 한다. 브로델이 특히 바판한 사람은 좀바르트였다. 그의 자본 주의는 좀바르트롤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둘 정도로, 브로델은 이 3 부작을 통해서 좀바르트를, 특히 그의 관념주의를 비판하 고 있다 .56) 19 세기를 지배한 독일의 랑케 사학이 기본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의 보편주의에 반대한 것이라든지 , 57) 또는 페브르가 독일 사학에 반대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제 정치사의 부정, 사회경제사의 개척 을 뛰어넘어, 독일식 경제사를 극복하는 것이 새로운 역사학을 완성시키 기 위해 브로델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과제였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의도는 1974 년의 경제 〈 위기 〉 에 대한 역사가로서의 진단을 내리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브로델의 현재사적 문제 의식, 즉 그의 출발 점은 이 책의 서론과 결론, 그리고 제 3 권 등에 분명히 나타난다. 1974 년의 〈 위기 〉 는 세기적 t rend 와 Kondrati ef f 사이클의 이중 하강아라는 것이 브로델의 진단이다 .58) 따라서, 역사가가 보기에 1974 년의 위기는 일반 경제학자가 보는 것 이상으로 바관적이었다. 브로델의 이 책은 결국 경제학자들과의 대화였다. 따라서, 경제학자들 은 브로델의 위기 진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으로 써 이 대저에 대한 분석을 마치고자 한다. 브로델에게 노벨 경제학상을 부여하자는 J. A tt al i나 A. Mi ne 같은 브로델주의자들을 제의한 경제학 자들의 평가는 대체로 비판적이었다. 생산울 도의시하고 교환을 지나치 게 강조했다는 역사가들 사이의 논쟁에 경제학자들은 끼어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개념이 모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눈에 비친 브로델의 경제사는 한마디로 문학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브로델의 저작이 〈 영롱 〉 하며 감각주의적이라는· 점을 우선 지적한다 . 읽는 데 재미있고 또 그렇기 때문에, 부럽게도, 대중적 인기를 누리지 만, 그의 저작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이라는 것이다. 브로델은 〈 경제적 사이클이라는 종교 〉 를 숭배한다고 이들은 말한다. 특히 1974 년을 Kondrati ef f 사이클에 의해 설명하는 데는 단호히 반대한다 .59) 역사학자와 경제학자의 대화는 결국 단절된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자 들에게 브로델에 대한 평가를- 맡길 수는 없다. 그의 지리적 해석이나 57) lgg e rs, The Gennan concept ion of hist or y , 1983, p. 72. 58) 브로델의 출발접이 1974 년의 위기였음을 시사해 주는 구철은 많다. r 물질 문 명 』 , I , pp. 8, 9 : m, pp. 61, 63, 65, 70, 468 , 469, 535, 537. 59) Espa c es Tem p s 에 기고한 경제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꽁종뛰르적 해석은 비록 비과학적인 면을 지니고는 있으나, 결국 총체적 해석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역사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는 데 기여했 다는 긍정적인 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경제사를 사회사적 시각에 서 접근한 것은 매우 높게 평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페브르의 정신주의와 브로델의 물질주의는 거대한 종합을 기다리고 있었다.

3 장기 지속의 세대 〈 장기 지속의 세대 〉 ” 라는 제명으로 우리는 소위 아날 학파라는 집단 의 내부를 관찰하고자 한다. 이 말을 택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말의 모태인 브로델의 개념 一 —〈 장기 지속 〉 -이 아날을 하나의 학파로 결집시키는 데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날 학파 에 속한 역사가들은 주로 아날지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학에 참여하였으 며, 또 그들은 하나의 독자적인 연구 기관을 갖추었는데 그것이 바로 〈 아날의 자매 기관 〉 2 ) 이었던 고등 연구원 제 6 국이었다.

1) Le Go f까 사용한 표현이다 (Pour un autr e Moy en Ag e, Temp s. Travail et Cultu re en Occid e nt : 18 essais . Paris, 1977, p, 9). 2) 페브르、 , A nnales, 1949, pp, 1-3.

1868년 V. Duru y에 의해서 창설된 고등 연구원 Ecole Prati qu e des Haute s E t udes 의 목적은 과학적 연구를 활성화시키는 데 있었다. 창립 당시에는 4 개의 국-수학, 물리학, 자연과학, 그리고 역사와 문헌과학 울 각각 전담하는 ―― 으로 조직되어 있었으며, 188 6\:!에는 제 5 국(종교과 학)이, 그리고 1947 년에는 제 6 국(경제사회과학)이 설치되었다. 고등 연구 원의 창립 당시에 이미 제 6 국은 예정되어 있었지만 그 계획은 당시로서 는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뒤르깽 학파의 노력과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 로 제 1 차 대전 직후에 6 국을 설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 계획은 결국 2 차 대전 이후에 가서야 실현되고 만다 . 패전의 충격이 가속력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제 6 국의 창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아날의 역사가들이 아니 라, 당시 대학 교육국장이 었던 P. Au g er 와 제 4 국의 연구부장이었던 Ch. Moraze 였다. 역사학 이의의 학문-인구학, 경제학, 사회학, 지리학 등-은 이미 자체의 연구 기관을 가지고 있던 상황에서 하나의 공백 이 생겼던 것이고 역사가들은 뒤늦게 여기에 열의를 보였다. 194 7건 가울에야 페브르는 이 기관에 관심을 가지고 록펠러 재단에 연구비를

신청하게 된다. 그리고 1947 년 11 월, 제 6 국이 공식 출범하였다. 페브르가 국장으로 브로델이 사무처장으로, 그리고 4 개의 연구부장직에는 브로 델, 라부르스 모라제, 페브르 7} 각각 임명되었다. 현재 프랑스 학파를 대표하는 역사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러나 출범 당시의 6 국은 건물도, 공공 기금도 제대로 구비하지 못하 였을 뿐만 아니라 학위 수여권도 가지지 못한 빈곤한 기관이었다. 3) 미국 으로부터 지원받은 기금액도 Ris ~ 경제 연구소에 비해서 4 분의 1 밖에 되지 않는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6 국의 설립은, 브로델에 의하면, 하나의 〈기적〉에 해당하였다 .4) 왜냐하면 이단적인 아날인들을 전통적인 대학의 테두리 밖으로 몰아내려는 쏘르본주의자들의 전략― ― 결과적으로는 그릇된-이 그들로 하여금 그 설립을 방관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이 연구소가 프랑스내에서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브로델 다음으로 이 연구 기관의 책임을 맡은 르 고프J. Le Go ff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역사는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교육, 연구 토론을 통해서 자매 학문에게로 새로운 역사학을 전파시키며 하나의 제도로 귀착되는 주요한 사건이다. 5) 참고로 1986 년 교과 과정을 살펴보면 우리는 이룰 확인할 수 있다 (괄호 안의 숫자는 개설된 세미나의 수를 말함). -인간과학의 방법과 기술 (11) -지리 (5) 3 ) 이 기 관은 1975 년 사회 과학 고등 연구원 Ecole des Haute s Etu d es en scie n ces soc i al 郞으로 개편되면서 학위 수여권을 획득하였다 . 4) T. S t o i anov i ch 의 French his tor ic a l meth o d, 1976 에 대한 브로델의 서문, p. 15. 5) Le Goff , , L a nouvelle his toi re , .P. 220.

- 역사 (60) -역사인류학 (7) -사회인류학과 인류학 (25) -경제 (22) -학문간의 공동 연구 (20) -심리 (8) -의마론, 기호학, 언어학 (9) -사회학 (26) 10 여 개의 부에서 실시되는 세미나의 총수는 203 강좌에 달하며 그중 역사는 전체의 38% 를 점하고 있다. 이 거대한 기관에서 역사가 지배적 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 또한 학문간의 벽을 허물자는 아날 학파 제 1 세대의 가르침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 등을· 알 수 있다. 아날의 역사 가들이 1929 년부터 제 2 차 대전까지를 〈창립〉 시기로, 그리고 제 6 국의 설치 이후를 〈 제도 〉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는 것 6).5 :_ 이 기관의 비중을 말해 준다. 제 6 국은, 아날지와 더불어, 아날 학파를 지탱시키는 양대 지주였다는 점은 19761d 에서 1985 년 사이에 아날지에 기고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 기관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로도 확인된다 •n 아날의 성공은 자연히 그 중심 기관에 대한 관십을 불러일으켰다. 비판 내용 가운데에서 우리의 홍미를 끄는 것은 이 6 국과 그리고 후일 (1975 년) 브로델이 포드 재단의 후원을 얻어 설립한 인간과학원 M aiso n des Scie n ces de l' Hornrne 이 모두 미국의 자본과 이데올로기에 봉사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전 페브르의 관념주의가 물질주의 더 구체적으로는 마르크시즘에 대한 해독제라는 비판, 또 브로델의 역사 6) A. Burgu ier e, , D ic ti o n nair e des scie n ces his tor iq u es, 1 986, p. 47. 7) F. Dosse, ,L ir e Braudel, Pa ris, 1988, p. 169. 이 책은 브로델 사후에 브로델을 해부하기 위해서 역사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지리학자 등이 공동으로 집필한 책이다. 8 ) 0. Dumoulin , , Espa c es Temp s,

de『1usAeuuo 1sbcnrno 1 iinsF e d r a;a i oees, dhl'tiirv eelo l N u a lHes. oriti ®®X X xx® X X Xx ® X X X X snadecPs『tcne anu d misPe r(usve,eR, ceaRo,d T le)i xxx x xx X X X X xx X xx X X odEn1 iigeSSEEH vsR1s releeu a·oAenlnUCedlen ot.ldifl si ecFacen『cuctireD『 or su chstiiq xx xx ® xxxxx x Xxx xxxX ® X)8 X XX X XX xxxx ®o xx ® X® o X X XX x xX 。 xx ® X X XXXX X X。 x x Xrucu(Aoa sore ds nul ed s9es 6ea1/n nA l5cs nad7 9selc81sc r.)cnp Ipi :tiri。t .ttt t oe )G2 L f Jf.1( y1G (D) .0bu nu uCahP( ) .9uguBree riA( .9 ) Naor 8)(. PerM o. Fr 8()levR eJ .7 ()y rLL adouRe ei E)7(. Rr-).a rhe C(6it FeruF .t )5 ( .L nsleVa i5 () rau d. JlilJ5( ) .M c(o4nW k) i le(4) voMV .le.Dh(4oc)R e m)u 4elu aDJe(. : ®--. snno 2 : X pIoipit- t.

34-5, pp. 31-5. 1951 년에 이미 J. Chambaz 에 의해서 이러한 비판이 제기되었으 나, 뒤물랭은 이에 동조하고 있지 않다.

를 신보수주의로 평가하는 것 등은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우선 아날의 전사를 밝히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또 페브르J} 사명감을 가지고 이 기관 설립에 앞장 섰다는 기존의 〈 신화 〉 를 깨뜨리는 데 기여할 것이다. 그러 나 이들 기관이 미국의 돈에 의해서 운영되었다고 해서 냉전의 무기였다 고 해석하는 것은 너무 편협하다는 느낌이 든다. 브로델의 『 지중해 』 나 『 물질 문명 』 을 이러한 시각으로만 단순화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몇 가지 구체적인 사실들이 우리의 느낌을 뒷받침해 준다. 우선 자타가 인정하는 마르크스주의자인 라부르스가 설립 당시 연구부장으로 참여했 다는 사실, 그리고 록펠러 재단의 후원금이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많지 않았다는 점 등이다 .9) 또한 록펠러 재단은 연구소의 인선 과정에 별로 간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비록 몇몇 인사 __- 예를 들면, J . Chesnaux- 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표하기도 했으나 브로델 은 이를 극복하였다는 것이다. 브로델은 아롱R. Aron 이 추천한 A. Rossi 를 중심으로 한 국제 공산주의사에 대한 연구 지원을 거부한 바 있으며, 1957 년에는 L. Goldmann, A. Krie g el , M. Rubel, C. Fr iou x, G. Haup t 등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참여하에 소련 공산당사에 대한 세미 나를 개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10) 이러한 사실들― ―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 로 미루어 볼 때, 미국의 자본이 아날의 이데올로기를 경직시 켰거나 매수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제 6 국은 브로델의 역사를 확대, 심화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51 년 페브르와 브로델은 근대 세계의 경제적 구조에 대한 공동 연구를 수행하

9) 고등 연구원 제 6 국의 설립에 대한 미국의 역할을 논한 B. Mazon 의 저술 Aux orig ine s de /'E c ole des Haute s Etu d es en scie n ces socia le s. Le role du M 磁 na t amecain ( l92 0-60), Paris, 1988 을 평하면서, J. Revel 은 미국 재단의 역할을 부인 하고 있다 (Anna/es, 1989, pp. 1380-2). 10) Dumoulin, 위의 논문, pp. 34-5.

기 위해 필요한 기금을 미국에 요청하였는데, 이 연구 계획의 중심 데마 는 페브르가 〈 최초의 역사 실험실 〉 이라고 명명한 바 있던 브로델의 『 지 중해 』 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제 학파로서의 의적 조건을 구비한 아날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패러다임, 죽 공통 언어였다. 『지중해』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학의 모습을 보여 주었고, 그 후 19 56 년 페브르의 사망 이후는 혼자서 아날이라는 거대한 집단을 이끌게 된 브로델이 새로운 역사학의 상이나 방법론을 정립할 필요성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다. 11) 물론 아날의 공통 언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 다. 그러나 제 1 세대의 〈 인간사〉, 〈 문제사〉, 〈 종합 〉 과 갑은 말들은 구체성 울 결하고 있다. 이러한 기본 정신을 계승하면서 브로델이 창안한 언어 가 바로 〈 장기 지속〉이 었다.

ll ) 브로델도 왈러슈타인에게 강한 지도 노선을 갖는 것이 성공의 필수 요소라고 조언하고 있다. Revie w , 3/4, p. 251. 이 밖에도 브로델은 〈적대적인 형제〉­ 페브르에게 있어서 몇 년 연하인 불로끄와 갇은 __- 를 찾을 것, 세계를 향해 개방적일 것 등울 성공의 조건으로 둘고 있다. 이는 바로 아날이 성공할 수 있었 던 조건을 의미할 것이다.

좋건 나쁘건 이 말[구조〕은 장기 지속의 제반 문제를 지배한다. 사회 문제 를 관찰하는 사람들은 구조라는 말로써 실체와 사회적 집체 사이에 형성된 꽤 고착적인 관계, 일체성, 조직 등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 역사가에게 있어 서 구조란 어쩌면 모아짜기나 건축 아니면 그 이상으로` 시간이 잘 마모시키 지 못하고 매우 장기간 전달해 주는 하나의 실체를 의미한다. 어떤 구조들은 오랫동안 생존하면서 무수한 세대들의 견고한 요소들이 되었다. 이들은 역사 를 방해하고 그 흐름을 곤란하게 한다. 죽 지휘하는 것이다. 다른· 것들 은 그보다는 신속히 풍화된다. 그러나 구조는 모두가 역사의 지주이면서 동시에 방해뭉이다. 방해물, 죽 구조는 인간과 인간의 체험이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한계(수학적인 의미로는포락선)와 갇은 것이다. 어떠한 지리적인 틀, 생물학적 인 사실, 생산성의 한계, 또 나아가 이러저러한 정신적 구속-심성적 툴 역시 장기 지속의 감옥이다-등을 깨뜨리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해 보라.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예가 여전히 지리적 구속일 것이

다. 인간은 수세기 동안 기후, 동식 물군, 경작, 그리고 하나만 벗어나도 전체 가 흔들리는, 서서히 건축된 균형 등의 포로이다. 12) 위 인용문은 브로델이 1958 년 발표한 논문 「역사학과 사회과학, 장기 지속」의 일부이댜 당시 학문적 헤게모니를 구가하고 있던 새로운 역사 학은 학문 세계의 재편성을 꾀하는 사회과학의 도전을 받고 있었다. 죽 〈경 험적 사회학〉은 사회 연구를 지나치게 현실화, 죽 〈 사건화 〉 함으로 써 여전히 표면적인 숨가쁜 시간에 머물러 있던 반면, 거의 무시간적인 구조를 수학 공식화시키려고 하던 〈 교환의 과학 〉 이 강력히 대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브로델의 논문은 이에 대한 역사학의 응전이며, 그 직접 적안 대상은 바로 레비 스트구_스의 구조주의였다. 우리는 브로델이 E] 중해 』 에서 새로운 역사학의 과제는 구조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강조한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의 역사학을 구조주의적이라고 평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인용문에서도 논의되고 있듯이, 역사학에 있어서 의 구조는 그것이 비록 〈 거의 변하지 않는다 〉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시간 즉 변화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화인류학적 구조는 변하지 않는 무시간적인 실체라고 브로델은 이해하고 있다 .13) 아마도 자신이 설정한 지리적 시간 ―~ 역사가로서는 하한선인_보다 더 긴 시간이라 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역사학과 인류학 사이에 벌어전 대화의 요체 는 의의로 간단하다. 죽 문화인류학적 구조는 초시간적이어서 비인간적 인 데 반해 역사학적 구조는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역사학과 사회과학과의 대결이라는 말은 다소 의아하게 들릴지 모른 댜 그러나 우리는 아날 학파는 역사학이라는 전통적인 학문이 사회 과학이러는 신생 학문으로부터 그 기존의 위치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12) 브로델, , Annales, 1958/ Ecrits sur l'his toi r e, 1969. pp. 50-1. 이후 이 논문은 「장기 지속£포로 표기함. 13) 그러나 문화인류학적 〈구조注근 변화의 개념이 빠진 얼어붙은 구조라는 통상적 인 비판을 레비 스트로스 자신은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An t hro p olo gi e socia l e devant I' his toi r e> , College de France 취 임 강연, Annales, 1960, p. 633 ).

태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특히 〈 사회적 사실 〉 이라는 새로 운 실체가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됨으로써 역사학과 사회학은 서로 그 〈 소유권 〉 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 이러한 대결은 대화를 가능케 했고 결국 학문간의 벽을 허무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역사학이 사회과학과 대화해야 한다는 명제는 아날 학파의 전통으로 굳어져 있다. 앞에서 살펴본 페브르의 - 불로끄의 경우순근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역사학의 이론적 지침서로서 여겨져 왔던 씨미앙의 「역사적 방법 과 사회과학」이 아날의 역사에서 되풀이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아날 창간 6 02r-년을 맞아 기획한 공동 연구의 주제가 〈 역사학과 사회 과학, 결정적 전환기 〉 라는 사실 등은 아날 학파가 얼마나 사회과학에 접목되어 있나 하는 점을 잘 보여 준다. 제 1 세대에 있어서 대화의 요체 는 역사는 정치사- 이것이 당시로서는 역사라고 여겨졌었는데 ­ 라는, 그리고 과거라는 좁은 감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페브르 에 의하면 역사는 현재의 과학이면서 동시에 과거의 과학이었다. 이로써 역사학과 사회과학은 현재라는 공동의 무대에서 만날 수 있었지만, 동시 에 역사학의 아이덴티티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일이었 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사학의 고유 무기로서 강조된 것이 바로 시간이 라는 개념이었다. 브로델의 경우 시간은 과거와 현재라는 평면적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의 시간 개념은 다층적이었다. 이러한 〈 시간의 다양성과 긴 시간의 특별한 가치 〉 는 사회학자인 귀르비취 G. Gurvit ch 와 인류학자인 레비 人E 쿠人와의 대화를 통해 심화된다. 50 년대초 브로델은 귀르비취의 사회학이 뒤르깽의 가르침을 이탈하여 〈 의부적인 표피 〉 를 선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14 ) 또 그의 시간 개념은 다양하기는 하나 너무 통일성을 결여하고 있어서, 〈조합하여 하나의 빛을 내기가 불가능 〉 할 뿐만 아니라, 그의 사회체에서 시간은 〈전체에 덧붙여져 있는〉 상태에 불과해, 결국 역사가 배제된 14 ) 브로델, , Anna/es, 1953, p. 355.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었다. 15 ) 이처럼 5 0 년대초 브로델이 수편의 논문을 통해서 이 사회학자에게 주장한 것은 다름 아니라 장기 지속의 특별한 가치였다. 그러나 귀르비취의 도전은 엄밀히 말해서 역사학에 특별한 위협을 가하지는 못했다. 사회학의 도전이 뒤르깽의 죽음과 더불 어 사실상 소멸된 상태에서 브로델의 이러한 대화는 오히려 팽창주의의 한 표현이었다. 반면 레비 AE 쿠 A 의 인류학은 〈 진정한 대화 〉 를 표방하 면서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새로운 위상 정립을 요구하고 나섰고, 이에 브로델로서는 이론적으로 대응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2 차 대전 전에 이미 이 두 학자는 브라질의 상파울루 대학에서 같이 근무한 적이 있었으며, 이 때부터 브로델은 수학적 공식으로 치장된 인류학의 과학성에 대해서 냉소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친족의 기본 구조丘근 1949 년에 발표되었지만, 구조주의 물결을 몰고 온 것은 1958 년에 출판된 『 구조인류학 』 이었다. 그런데 이 책의 서론에 해당하는 논문이 이미 1949 년에 발표되었던 「역사학과 인류학」이라는 사실 16’ 은 곧 레비 A- 트쿠스가 이를 통해 학문적 재편성을 꾀하고 있었다는 점을 말해 준다• 〈 오제 H. Hauser 와 씨미앙이 서로 역사학과 사회학을 가르는 원칙과 방법론에 대하여 대립적인 견해를 피력한 지 반 세기 이상이 지났다.〉17) 죽 레비 人- E 쿠스가 보기에 역사학은 새로워져야 한다는 주변 과학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아직 구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간 아날이 이룩한 역사학의 혁신을 부정한 말이었댜 같은 해에 브로델의 선언적 논문인 「역사학과 사회과학, 장기 지속」이 발표되었다는 것과, 1960 년 아날은 씨미앙의 논문을 게재하였다 는 사실 등은 모두 인류학의 공격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나 하는 점을 증언해 준다. 15) 브로델, 「장기 지속」, pp. 68- 9. 16) 이 논문은 Revue de Me t a p h y s 떠 ue et de Morale 에 게재되었는데, 이 잡지에 실린 수편의 논문 중 서론격에 해당하는 것이 페브르의 였 다. 17) 레 비 ,,,._ E 쿠 人 , , A nth ro p ol og ie stru c tu r ale, p. 3.

<… … 역사학은 의식적인 표현과 관련해서 자료를 구성하지만, 인류학 은 무의식적인 여건과 관련해서 자료를 구성한다. 〉 18) 역사학은 일회적이 고 경험적인 조그만 사건에만 머물지 말고 이제 인류학처럼 인간 정신의 내적이고 항구적인 법칙이나 기저에 있는 보편적인 무의식적 세계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이러한 말을 뒤르깽도 한 적이 있었 다. 사회학 대신 인류학으로 말이 바뀌었을 뿐이다. 동시에 레비 스트로 스가 범례적으로 제시한 것은 물질적 우발성에 가장 덜 종속적인 혈연 관계의 기본 구조나 신화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브로델에게 있어서 구조란 여전히 경험적이고 구체적이며 관찰 내지 측정 가능한· 실체였 다 .19) 그가 보기에 레비 스트쿠스의 구조는 무엇보다도 이론적이고 무시 간적이었다. 비역사적이고 따라서 역사가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나아가 경계를 요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브로델이 레비 A_E 쿠 A의 구조주의에 서 문제 삼은 것은 한마디로 시간 개념이었다. 〈 나는 레비 AE 쿠 A 의 새로운 연구가 장기 지속의 물 위를 항해할 때에야 비로소 성공의 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논증했다고는 못해도 보여 주려고 애썼다. 〉 20) 다시 한번 장기 지속, 그리고 삼분법적 시간대를 강조하게 되고, 이를 통해서 만, 죽 인류학이 아니라 역사학을 통해서만 사회, 다시 말하면 〈 전체들 중의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이렇듯 레비 人드쿠스의 의도와는 달리, 무시간적이고 비역사적인, 죽 인간이 철저히 배제된 반인간적인 사상이리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마르크시스트들은 변화-―_변증법적인 __ 의 개념을 결여 한 구조주의는 바로 마르크시즘을 해독하기 위한 부르주아적 사상이라는 비판을 가하였다 .21) 인류학적 구조에 대한 브로델의 저항에도 불구하 고 브로델의 〈장기 지속 X 븐 그 자체에 정체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18) 위의 책, p. 31. 19) 브로델, 「장기 지속」, p. 65. 20) 브로델, , E crits sur l'hi s to i re , p. 114. 21 ) H. Lefe b vre, 〈 R 띠 ex i ons sur le str u ctu r al ism e et I' His t o i r e> , L ' ide olog ie stru ctu r alist e, Paris, 1971, 특히 1975 년판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

동일한 비판을 면치 못하였다 .22 ) 가장 충실한 아날리스트인 르 콰 라뒤 리가 1974 년 Colleg e de France 취임 강연에서 선언한 〈 움직이지 않는 역사 〉 는 구조주의 사학의 극단적인 표현이었다. 아날의 역사가들은 적어도 사론상으로는 구조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피력하였다 .23 ) 그러나 구조주의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브로델 의 저항은 거부의 몸짓이 아니라 역사학의 아이덴티티를 끝까지 간직하 려는 노력이었다. 역사가로서 구조주의를 수용하자는 의미였다. 이렇게 볼 때, 죽 구조주의에 인간주의를 가미할 때 ,a) 구조주의라는 것이 역사 가들에게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사실, 표면적이고 단선적인 전통적 역사학에 대항하여 아날 학파가 내세운 것은 결국 구조주의가 아니었는 가? 아날 학파는 사실 구조주의 이전부터 이미 구조주의적이었던 것이 다 .25) 레비 스트로스 자신도 인정하고 있듯이, 아날의 제 1 세대 특히 페브 르의 역사학은 구조주의적이었던 것이다 .26) 더욱이 새로운 역사와 구조 주의는 동일한 대상과 시각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실이 바로 22) A. Soboul, , A ujo u rd' hui /' hist o i re , p. 267. 〈 역사는 짧은 시간이건 긴 시간이건 모두 움직임이다. 구조주 의적 분석이 가져다 주는 이점이 어떠하든지간에, 역사적인 방법은 이에 만족할 수 없다. 구조주의는 고정된 카테고리를 가지고 작용하는 반면 역사는 웅직임이 다. 역사에게 있어서 구조는 불변이 아니라, 진보 과정의 임시적인 자리잡음에 불과하다. 역사적 시간이라는 것은 없다. 분야와 수준에 따라 다수의 완만하거나 급한 리듬이 있으며, 경제적 시간보다 심성―一-유명한 공식을 따르자면 ‘장기 지속의 감옥'-적 시간이 뒤처진다는 등의 말은 일단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로부터 움직임을 제거하는 것 죽 말하자면 이의 척도인 연대를 제거하는 것은 곧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23) F. Furet, , Preuves, n°2, 1967. 24) Ecrits sur l'h ist o i re 에 실린 마지막 글 〈근대적 인간주의를 향하여〉가 이러한 맥락에서 의미 십장하다. 25) A. Burgu iere , , A nna/es, 1971, p. 11. 26) 레비 人뜨 쿠人, , Anth r op ol og ie s tru c tu r ale, p. 38. 그는 페브르가 l 硏 1 기의 심성적 한계를 밝힐 때 사용한 방법이 구조주의적이었다고 평가하고있다.

심성사였다. 브로델의 충고를 좇아 아날의 역사가들은 인류학의 무시간성을 배격했 지만 〈 장기 지속 只 본 이제 더 이상 브로델의 경우처럼, 물질로 채워지지 않았다. 브로델 연구가인 도스 F. Dosse 의 말을 들어 보자. 브로델은 역사가의 시각과 연구 영역을 매우 넓게 열어 준 변화 도상에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연결 고리이다. 그는 아날의 승리를 확고부동 하게 하였고、 지적이나 제도적 측면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그리고 매우 기름진 유산을 넘겨 주었다. 그러나 사론을 그 내부에서 완전히 포위한 것은 인류학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 27)

27 ) F. Dosse, , Espa c es Temp s, 34 / 35, p. 93.

적절한 평가이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아날의 역사가들은 〈 장기 지속〉이라는 브로델의 사론을 가지고 인류학적 역사라는 새로운 영토로들어선 것이다. 이렇듯 인류학과 역사학과의 관계는 아날이 하나의 〈 학파 〉 를 형성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좋은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과연 아날 은, 학파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폐쇄적인가? 그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아날의 역사가들은 아날 학파 의부에서 너무나 많은 자양분을 공급받고 있다. 그 태동기 때부터 페브르와 불로끄는 지리학, 사회학, 역사철학으로부터 인식론적 무기를 공급받았으며, 이러한 전통은 그 후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하면 아날은 폐쇄성을 고집할 아무런 교리를 자체적으로 생산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날의 창간호에서 부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아날의 정신〉이라는 말들을 그 폐쇄성을 감추기 위한 표현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잠시 아날의 창간호부터 이 문제를 다시 검토해 보자. 창간호에서부터 페브르와 불로끄는 〈아날의 정신〉을 말하고 있다. 새로운 잡지롤 창간할 때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즌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10 년 뒤, 이 들 은 아날의 정신이 〈 정확성에 대한 세심한 주의, 아이디어에 대한 개방된 호기심, 특히 연구 동료들 사이에 상존하는 상호 부조적 배려 등으로부터 형성되어 ...... >〈 자연 발생적으로 〉 존재하 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28) 아날의 정신은 폐쇄적이거나 교조적이 아니 라는 말이다. 2 차 대전 후, 페브르의 전두적이고 직선적인 성격은 그로 하여금 〈 아날의 마니페스토 〉 , 〈 독트린 〉 과 같은 강한 표현을 사용하게끔 하였다. 페브르는 〈 학파 〉 라는 표현도 사용하나, 즉시 〈 유연한 〉 이라는 뉘앙스를 덧붙이고 있다 .29) 이러한 페브르의 세심함 속에서 우리는 그 스스로가 교조주의적이라고 비판을 가한 뒤르깽 학파에 대한 거부감을,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뒤르깽 학파는 즉시 와해되었다는 교훈을 확인할 수 있다. 아날의 성공 때문에 50 년대 이래 아날 학파라는 말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 벨기에의 사회학자인 J. Ste n g er s7} 제기한 문제에 대하여 페브르는- 디움과 같이 답변하였다. 결코 아날의 창간자들은 자신들의 척도에 맞게 자신들과 유사하게 연구자 둘의 정신에 각인하거나 그것을 제한하거나 부식시키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재치와 자발성을 맛보고 싶었다. 그러므로 〈 학파 〉 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꺼이 〈 아날의 정신 〉 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죽 많은 사람들이 혼쾌 히 아날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잡지에서 우리와 협동한 적이 없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날이 창간되 기 훨씬 전에 사색하고 글을 발표한 사람들도·… ... 30) 페브르는 (주)에서 〈 결코 〉 라는 표현으로 재차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페브르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러나 당시 그가 아날 및 고등 연구원 제 6 국 등 역사학계에서 지도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28) , A nna/es, 1939, p. 5. 29) 페브르、 , Annales, 1946, p, 7. 30) 페브르, ,A nna/es, 1946, p, 513.

그의 말을 의당 의례적인 말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따라서 다론 사람 들의 증언을 들어 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2 차 대전 후 브로델, 모라제와 함께 아날의 편집에 참여한 사회학자인 프리드만 G Fr i edmann 은 아날 의 정신이 뒤르깽 학파의 교조주의와는 달리 자유로운 정신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 3 1) 브로델은 페브르가 몇몇 사람이 보기를 원했던 〈 독재 적인 리더나 학파의 수장 또는 파당의 당수 〉 와 같은 면모를 지니지 않았 다고 강조하고 있다 .32 ) 그러나 이들 역시 초기의 아날을 증언하기에는 페브르와 너무 가까이 있었다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우리는 퓌레 F. Fure t라는 매우 적절한 증인을 가지고 있다. 아날지의 편집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1977 년부터 1985 년까지 르 고프의 뒤를 이어 사회과학 고등 연구원의 원장을 역임하였다는 그의 경력은 아날 학파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던 위치를 상징적으로 말해 준 다. 퓌레에 의하면, A. Besan<; o n, E. Le Roy Ladurie , J. Ozou f, D. Ric h et 등 자기 세대의 역사가들은 50 년대와 60 년대에 아날을 중심으로 새로워진 역사학을 통해서 일체감을 느꼈다고 말하고 있다 .33) 그러나 퓌레는 단일화된 사론을 공유했다는 것은 〈 거짓된 관념 〉 이라고 반박한 다. 오히려 그의 세대는 아날에서 〈 호기심과 방법론상의 거의 무한한 공간〉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34) 고등 연구원에 대해서도 그는 〈 섭리적으 로 우호적이며 개방적인 제도의 은총 〉 이라고 압축하고 있다. 이들 전후 세대의 평가는 페브르, 브로델 등의 평가와 전적으로 동일함을 알 수 있으며, 결국 50~60 년대의 아날은 결코 폐쇄적이지 않았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퓌레가 자신의 논문을 「아날의 테두리 밖에서」라고 제목 붙인 것이 의미심장하다. 자신은 아날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31) G. Fried ma nn, , A nnales, 1957, p. 3 32) 브로델, , A nnales, 1957, p. 182. 33 ) F. Furet, , L e debat, 12 월, 1981, p, 112. 34) 위의 책, p. 112.

달리 말하면 70 년대 이후 프랑스 안팎에서 아날을 하나의 〈 학파 〉 로 규정 지어 왔는데, 그렇다면 자산은 이런 의미의 학파에는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70 년대에 아날은 국제적인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 무엇이 아날 의 성공을 가능케 하였나? 의국학자들은 페브르, 불로끄, 브로델 등의 개인적인 재능보디는 프랑스 학계의, 더 구체적으로는 아날의 중앙 집권 적인 구조에서 그 열쇠를 찾았다 .35) 죽 폐쇄성이 바로 집단적인 힘을 창출해 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 학파 〉 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왜곡 된 견해에 반발해서 퓌레 등의 프랑스 학자들은 이 교조적인 단어보다는 단순히 만남의 장소를 의미하는 〈 집단 Grou p e 〉 이라는 말을 선호하였 다. 더욱이 70 년 이후 한 명의 스승 대신 다수의 작은 스승이 할거하는 상황에서 학파라는 말은 더더욱이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따라서, 〈 아날 학파 〉 라는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 정확한 말이 아니다. 단지 편리 한 말일 뿐이다. 이렇게 모인 역사가들을 묶어 놓는 패러다임도 매우 유연해서 이들에 게 일정한 문제점을 제공하거나 그 문제점에 대해서 일정한 해답을 미리 정해 주지도 않았다. 단지 인간 중심의 역사니, 〈 장기 지속〉이니 하는 언어들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주고 이들 역사가들에게 일련의 연대 의식을 심어 준 것이다.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이들은 항상 새로운 자료 를 발굴하고, 그것들을 새롭게 배열하여, 새로운 해석을 내리고자 노력하 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적 장벽은, 다음 페이지의 도표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36 ) 그다지 높지 않았다. 쇼뉘와 같은 국우 역사가나 35) Hexte r , , p . 497 : W. den . Boer, , L 'h is toi re et ses meth o des, Collog ue d' A mste r da m, Paris- La Haye , 1980 : Obelkevic h .5 :. 영국의 Past and Presen t에 비 해 Annales 은 하나의 〈 왕국 〉 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

, L e debat, n°17 1981, p. 36 ) 1F0.4 )D. osse, , Lir e Braudel, p. 168. 여 기 에 나와 있는 역사가들이 바로 아날리스트들이다. 필자는 최근(1 990 년 10 월)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 릴 대학의 Jea n de Vig ue rie 교수에게 과연 프랑스의 역사학자들 가운데

아날의 핵과 그 성운

E. Pa~ag ea n N. Wachte l M. Wino ck (4) J. Delumeau (4) A. Cha rtier (6) F. Fure! (5) E.l.. e Roy Laduri e (7) J. Le Gof f (12) J.M . P. Chaunu (9) M. Ferro (8) Pesez NOYAU ’ P. Nora (8) G. ’D uby (10) A. Burgu i l) r e (8) J. Rawl (7) L Valensi (5) J. Ju lli ar d (5) M. Vovelle (4) D. Roche (4) S.C .KOlhm

몇 퍼센트 정도가 아날리스트로 분류될 수 있는지를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빠리의 사회과학 고등 연구원은 아날리스트들의 〈본부〉이지만 과연 빠리나 기타 지방의 대학에 그 〈지부〉에 해당하는 것이 있을까 의문시된다면서 약 20% 정도 의 숫자를 제시하였다. 이 숫자가 과연 대단한 숫자인지 아닌지는 판단하기에 달려 있겠지만, 아날 학파가 현재 쇠되하고 있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 다 .

보벨과 감은 마르크시스트 역사가가 한자리에 모일 수 있을 정도로 아날 은 무이데올로기적이었다. 여기에 참여하고 안하고는 단지 역사가 개인 의 취향이 결정적일 것이며, 또 이는 페브르, 블로끄, 브로델 등으로 이어지는 아날의 〈 정신 〉 , 개인적인 관계, 제도적 헤게모니 등에 의해서 좌우될 것이다. 〈 아날 학파 〉 의 실체는 이 정도를 넘지 않는 것으로 생각 된다. 〈 장기 지속의 세대 〉 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 다.

제 3 장 새로운 새로운 역사 《 역사 종합 잡지 》 와 더불어 2 伊 1l 기를 맞이한 역사가들은 〈 종합〉이라는 시대적 명제를 역사학적으로 실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92 9t건에 창간된 Annales, 페브르의 『 l~ il 기의 비신앙 문제』, 불로끄의 『봉건 사회 .!1 , 그리 고 아날 학파의 제 2 세대인 브로델의 『 지중해 』 , 『 물질 문명 』 등은 모두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역사가의 대답이었다. 제 1 세대의 역사가들이 사회적, 심성적 측면에서 〈 질적 〉 종합을 시도했다면, 브로델은 물질적 〈 계량적 〉 종합을 시도했다는 차이점을 지적할 수 있는데, 이 역시 자기 세대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체사 자체는 세부 사항에 대한 분석적, 실증적 연구에 의해서 붕괴되었던 전(前) 시대의 낭만주의 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 세대에 의해서 거부될 소지를 그 자체의 한계로서 지니고 있었다. 1968 년 사태는 반권위주의적 혁명이었다. 아날의 내부에서 그간 형성 된 창조 세대에 대한 신화, 전설들을 새로운 세대는 그냥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우상 파괴〉는 직전 세대인 브로델이 전세계적으 로 일으킨 선풍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더 자신들에게는 하나의 강제력 으로 작용하였기 에 급격할 수밖에 없었다. 196 9t권 아날의 편집을 제 3 세대에게 이양하면서 브로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새로운 젊은 편집전들이 새로운 아날의 명성을 굳건히 할 것이며, 그리고 후

일, 필요하다면 , 새로운 새로운 아날을 만드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 〉 1) 〈 새로운 새로운 역사 〉 는, 브로델에 의하면, 심성사 Histo i r e des men t al ites였다. 2) 1 브로델 현상 1968 년은 아날 학파의 역사에서도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1945 년에서 1968년 의 기간은 일반적으로 아날 학파의 완성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제도적인 측면에서 고등 연구원 제 6 국의 설치, 그리고 패러다임이라는 측면에서 브로델의 〈 장기 지속 〉 등 아날 학파는 바로 브로델의 후광에 힘입어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69 년 브로델의 은퇴 이후 아날은 〈 불확실성의 시대 〉 를 통과하고 있었다고까지 르 고프는 말하고 있다 .3 ) 그러나 1969 년 이전의 아날은 아직 국제적인 선풍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 장기 지속 〉 이라는 아날의 대표적인 언어에 대한 의국에서의 반응도 미미하였다. 〈 토론과 전두 〉 에 응한 W. Kula 와 W. Ros t ow 은 역사학과 사회과학이 협력해야 한다는 명제에는 공감하지만-사실 누가 이룰 거부할 수 있겠는가?-정작 토론의 주제인 〈 장기 지속 〉 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4) 오히려 Kula 는 이 애매 한 개념이 제국주의의 한 표현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표할 정도였다. 또한모스크바에서 바라본 아날의 역사학은 사회경제사에 대한 긍정적인 지향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지 역사학의 낡은 이데올로기적 가방 〉 을 1 ) 브로델 , , Anna/es, 1969, p. 571 . 2) 브로델, Une lec;o n, d' his toi re , p. 163. 3) ecLoele fGroanf f i ,; a , A nna/es, 1960 : W. Rosto w , , A nna/es, 1959.

여전히 메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 5 ) 이러한 교조적인 평가와는 다른 측면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미국의 지성사가인 휴즈 S. Hug he s 의 분석이다• 휴즈는 20 세기 유럽 지성사를 전공하는 역사가이다. 그는 195 2td에 『 스펭글러 』 를, 그리고 1958 년에는 『 의식과 사회 : 1890~1930. 유럽 사회 의 재지향 』 을 발표하였으며, 그 후 10 년 후에는 이 저술의 속편으로서 『 차단된 길 : 1930~1960. 좌절기의 프랑스 사회 사상 』 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의 프랑스는 의교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문화적 측면에서도 고립을 자초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958 년의 저서에서 그는 프랑스에서의 역사학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 며, 1 년 뒤 미국 역사학회에서 행한 연설 〈 역사가와 사회과학 〉 에서도 독일과 이태리의 역사학만을 주로 이야기하였다. 따라서 그는 비교적 늦게서야 프랑스의 역사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결실이 바로 『 차단된 길 .!l 이었다. 이 미국 역사가에게 있어서 프랑스가 그 문화적 고립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 과학적 방법 〉 뿐이 었다. 그런데 아날의 창간자들은 이 길로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베버, 프로이트 대신 미술 레, 베르크송, 뒤르깽 등 프랑스의 전통에만 매달렸다는 것이다. 페브르. 의 『 1 떼기의 비신앙 문제 』 에 대해서는 지성사의 전환점이었다~ 찬사를 아끼고 있지 않지만, 그러나 이 저서 역시 과학적이라기보다는 〈회고적 문화인류학 〉 이라는 평을 덧붙이고 있다. 6) 나아가 휴즈는 브로델의 『 지중 해 』 는 〈 비과학적 〉 이라는 측면에서 프랑스의 고립을 십화시켰다는 혹평을 가하고 있다. 페브르를 계승한 브로델은 사상과 논리 전개의 명증성 저편으로 한걸음 5 ) G. G. Dil igen skij , , Annales, 1963, pp. 10 4-11 . 6 ) S. Hugh e s, The obstr u cte d pa th . French socia l tho u gh t in the yea rs of despe r- atio n , 1930-60, p. 63.

더 멀리 나아갔다 . 새 지도자가 썼고, 옛 지도자가 뒤따라가야 될 모델이 라고 부추긴 그 책[ 『 지중해 고 은 산만하고 논지가 없다 . 비록 세부적으로는 매력적 이고 역사학과 지리학과의 관련에 대한 신선한 관 찰 이 생동감을 주지만, 그 책은 분명한 초점을 결하고 있다 . […· 기 그 결과 이미 프랑스 역사학자 둘의 재난이랄 수 있는 거인[과 갇은 과중한 부피의 학위 논문] 을 향한 고행이 한충 강화되었다. 7)

7) 위의 책, p. 58.

〈 과학성 〉 이라는 측면에서 이러한 휴즈의 비판은 정당하다고 생각된 다. 아날은 바로 객관성을 추구하는 〈 방법론적 역사 〉 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하였으며 페브르, 불로끄, 브로델 등이 추구한 것은 무엇보다도 〈종합 〉 ― ― 수사학적――이었기 때문이다. 휴즈는 따라서 이러한 유의 역사학이 고립을 뛰어넘어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키리라고는 생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지중해 』 의 성공 을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아날은 프랑스내에서 제도적 기반을 확립했지만 국제적인 수준 에서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70 년대에 들어 상황 은 일변하였다. 세계 역사학계는 경쟁적으로 브로델과 아날이라는 새로 운 현상을 찬미하게 된 것이다. 같은 시기에 브로델은 아날에서 은퇴하 였으며 젊은 세대는 브로델의 역사와는 다른 〈 새로운 새로운 역사 〉 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이 현상의 묘한 점이 부각된다. 이 브로델 현상은 Hex t er 가 재미있게 그린 페브르와 브로델의 국제적 인 명성 지도를 보아도 가시적으로 느껴진다 .8) 1953 년 페브르 기념 논총에 기고한 85 명 가운데 의국인은 15 명이었으 며 그중 이태리인이 9 명, 벨기에인이 3 명, 포르투갈인과 루마니아인, 미국인이 각각 1 명씩이었다. 3 년 뒤 이태리 역사가인 A. Sap o ri 기념 논총의 경우, 총 34 명의 기고자 가운데는 프랑스인이 12 명, 벨기에인이

8) J. Hexte r , , J o urnal of modern his tor y , 1972, pp. 4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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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t• MMet llaann ggee ss BFreabuvdreel에 에 기기고고한한 사사람람들들의의 국국적적 -·

5 명, 영국인이 5 명, 미국인이 4 명, 러시아인이 3 명, 폴란드인이 2 명, 그리 고 스위스, 스페인, 포르투갈인이 각각 1 명이었다. 이러한 참여도는 역사 가의 개인적인 친분, 학회에서의 만남― — 구체적으로 1950 년 빠리 역사 학 대회와 1955 년 로마 대회-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겠지만, 어쨌든 페브르의 국제적 명성은 대단치 않았으며 그나마 라틴 세계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를 20 년 뒤, 즉 1973 년 브로델에 증정된 기념 논총과 비교해 보면 브로델의 국제적 명성이 확인된다. 93 명 가운데 의국인은 16 개국의 53 명에 달하였으며 그 분포도 지중해 세계를 벗어나 그야말로 전세계적이었다• 이 두 기념 논총에 참여한 학자들의 전공을 비교해 보면 또 다른 홍미 있는 지표를 발견한다•

페브르 브로델 역사가 51( 61 %) 87(94%) 지리학자 12 2 사회학자 9 2 심리학자 2 。 경제학자 2 1 철학자 2 。 인류학자 2 1 언어학자 3 。 겨] 83 93

페브르 기념 논총에 참여한 사람의 대부분은 프랑스인이었으며 역사학 자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반면, 브로델 기념 논총의 경우에는 의국인이 많았고 대신 역사학자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페브르의 세대에

있어서는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종합이라는 그의 바람이 어느 정도 공감 대를 형성한 반면, 브로델대에 이르러 점차 국제화된 아날은 하나의 역사학파로 여겨졌다는 점, 그리고 60 년대 이후 가열된 인류학의 도전은 인간과학으로서의, 종합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의 위상을 약화시켰다는· 점 등을 보여 준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70 년대에 들어 아날은 국제화되 었다는 점이다• 70 년대의 아날 현상은 곧 브로델 현상이었다. 우리는 이를 『 지중해 』 의 판매 부수표를 통해서도 가늠할 수 있다. 9)

9) Le Monde, 198 純 1 월 10 일. 출판사인 Armand Co lin에서 이 자료를 제시한 이유는 페브르 현상이 미국에서 번역판이 나온 이후에 비롯되었다는 영국 역사학 자 Th Zel din의 견해를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브로델 현상이 미국에서 의 성공에 의해 중폭되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판매 부수

3000 2500 제 l 판 수정 재판 영어 번역판 제 3 판 갈79: 제 5 판 1949 1966 1972 1976 I 1982 2000 1500 1086 1000 1950 196S `'60 1985 1970 1975 1980 ' ·나K3gi1안 i' 5·”9~안 .&`·- 、 ...-.... 8 5

60 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r 지중해 』 는 그것이 불러일으킨 충격에 비해 판매 부수는 〈 마치 사막을 걷는 듯 〉 빈약하였다. 그 파장은 좁은 학문적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 196&, 빈 왜 재판을 발행하였으며, 그 후 출판 부수가 급증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 우리는 단지 60 년대 중반 이후에 가서야 이 책이 하나의 〈 교과서 〉 로 자리를 잡았으며, 또 이 무렵에야 아날 학파의 헤게모니가 완성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뿐이다. 196& 년 이후 프랑스내에서 시작된 아날의 선풍은 1972 년 미국에서 번역판이 나온 이후 증폭되었다. 좁은 학문의 세계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대중적인 현상 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프랑스에 재상륙한 브로델 현상은 매스컴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파급되었다. 미국에서의 바람은 1976 년 뉴욕 주립대학에 페르낭 브로델 센터가 설치됨으로써 정점에 달하였고, 세계의 중심에서의 성공은 아날의 국제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연구소 설립자인 왈러슈타인은 이렇게 그 특유의 분석을 하고 있다. 〈이제까지 브로델은 과학적 세계의 준주변부에 고립되어 있었다• 프랑 스, 스페인, 이태리에서는 매우 널리 알려져 있었고 좋은 평가를· 받아왔 지만 미국과 독일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고 영국에서도 미미하였 다. 바로 『 지중해 』 의 영어 번역이 이를 뛰어넘도록 해주었다• 〉 10) 이제 그 현상을 〈 질적 〉 으로 검토해 보자. 출발점은 1971 년 베니스에서 열린 국제 학술회의였다. 〈 인류학자와 미래학자 사이에 있는 역사학자 〉 라는 주제로 열린 이 학회에 참여한 학자들은 역사학과 사회학의 대화와 협력에 기여하는 사회사의 세계적인 유행에 주목하였고, 그 전원지가 바로 프랑스의 아날 학파임을 확인하였 다. 아날울 대표해서 참여한 세 명의 역사가――퓌레, 르 고프, 뒤비­ 는 인류학적 역사를 사회사의 새로운 형태로 제시하였다. 이 베니스 학회는 아날 학파에 대한 최초의 축성이었다. 트레버 로퍼는 다음과 갇이 찬양하였다. 10) I. Wallerste in , , E spa c es Temp s, 34- 5. 1986. p. 42.

인간이야말로 역사 연구의 통 합적인 힘이다. 마르끄 블 로끄가 그의 r 역사 가의 직업 』 에서 썼듯이, 역사가는 동화 속에 나오는 식인귀처럼 인육의 냄새 가 나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간다. 현대의 어떤 역사학파도 마르끄 불로 Il, 뒤시앙 페브르, 페르낭 브로델로 대표되는 아날 학파보다 나에게 더 많은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11) 인간을 중심으로 역사학과 사회과학이 인간과학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는 아날의 정신, 따라서 가장 인간적이라 할 수 있는 역사학이 학문의 중심이라는 소위 〈 역사학의 제국주의 〉 까지도 이 영국 역사가는 적극적으 로 받아들이고 있다 .1 2) 그런데 아날의 역사학이 직접적으로 독일 사학, 그 정치사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은 독일 역사가인 몸젠의 평가이다. 그 역시 현재 사회사가 대유행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 전통적 역사학에 대한 가장 철저한 안티데제는 아날 학파에 의해서 대표되고 있다 〉 고 말하였다 .13) 그렇다고 해서 정치사라는 것이 아날 학파에서처럼 배제되어서도 안 되었다. 몸젠은 정치사와 사회 과학의 협동 속에서 새로운 합을 모색하는데 아마도 이것이 독일 사회사 의 한 특징이 될 것이다. 그 밖에도 이 학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다양한 시각으로 아날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분석하였다. 아날의 역사가 경제적 사실이나 통계적 수치 속에 인간을 예속시키는 경향을 우려하기도 하였 고 14), 또는 이러한 계열사(계량사)를 아날의 본질로 해석하여 아날을 전시대의 실증주의적 역사와 동일시하기도 하였다 .15) 인간과 과학이라는 대립적인 분석 도구가 분리되어 사용된 것이다. 11) Trevor-Ro p er 의 발언, L'his tor ien entr e l' eth n ologu e et le futur olog ue , Col- loq ue de Ven ice , 1971, p. 225. 12) 이는 R. Aron 이 이 세미나를 결론지으면서 한 말이다 . 13) 위의 책, p. 172. 14 ) Trevor -R op er , 위 의 책 , p. 225. 15 ) Graubard, 위 의 책 , p. 67.

그런데 이 베니스 학회에서 아날 학파의 실증주의적 경향을 지적한 바 있던 미국 역사가 Graubard 는 같은 해 자신이 편집한 『 오늘날의 역사 연구 』 의 서문에서 실증주의에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 고 있다 . 그에 의하면 역사학은 과학적 위상을 확보하면 할수록 대중으 로부터 격리될 뿐이기 때문에 역사가는 과거 속에 파묻히지 말고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또한 아날의 정신이 아닌가? 사실 아날의 역사는 더 이상 구시대의 기계적인 법칙을 적용해 서 인간을 왜소화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인간적인 반면, 이러한 인간을 낭만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추상화시키지 않고 실증적으로 관찰 한다는 의미에서 〈 과학적 〉 이러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아날의 계량사가 여전히 비과학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도 이러한 의지주의 Volon t ar i sme 적 전통 때문이었다. Graubarcl7}-현 대 역사학이 겪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아날에 손을 내미는 것도 이러 한 의미에서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분명히, 양차 대전 사이에 처음 나타났던 몇몇 역사 연구 경향은 1945 년 이후 그 중요도를 더하였다 . 이렇듯, 예를 들면, 사회사에 대한 관심이 증대 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 이러한 발전의 공적이 아날 학파에만 돌아간 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겠지만, 아날 학파보다 더욱더 국제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끼친 것을 찾기 어렵다. 미국은 1930 년대에 위대한 사회사가들을­ 배출했지만 그들은 여러 나라의 역사가들- 한 세대에 걸쳐 스승이 되지는 못하였다. 마르끄 불로끄의 명성, 그리고 그가 만든 잡지의 명성은 이러한 의미에서 여타의 지역에서 생산된 그 어떤 것과도 그 유를 달리한다 .1 6) 그가 깊은 생각에서 불로끄만을 언급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상기 증언은 당시 아날이 국제적으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찰 말해 주고 있다. 이 논총에 기고한 홉스봄의 평가는 그가 마르크시스 트 역사가라는 점에서도 특별한 관심을 끈다. 16) Graubard(ed), Hi stor ic a l stu d ie s tod ay, 1971, p. 胤

과거의 사회사를 개관해 보면 그것의 가장 뛰어난 연구자는 그 용어 자체 에 대해서 언제나 만족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그들은 우리에게 그토록 도움을 많이 준 프랑스 역사가들처럼 스스로를 단순히 역사가로, 그리고 그 목표를 전체사나 종합사로 또는 역사 속으로 역사와 관련되는 모든 사회 과학의 연구 성과 ― ~이중 하나만을 예증하는 것이 아니라 - 를 통합하고 자 하는 사람으로 묘사하기를 더 좋아하였다. 마르끄 불로끄, 페르낭 브로델, 조르쥬 르페브르는 〈 역사는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유의 사건을 축적하지 않는다. 역사는 인간 사회들의 과학이다 〉 라는 퓌스뗄 드 꿀랑쥬의 말을 그들 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만 사회사가로 분류될 수 있는 이름들이 다.17)

17) E. Hobsbawm. ,위 의 책, p, 5.

사회사는 빈민이나 하층 계급의 역사도, 또는 트레벨리언의 유명한 정의처럼 정치사라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도의시된 잡동사니의 역사도 아니라, 바로 전체 사회사라는 것이다. 그리고 홉스봄은 이러한 개념을 실천한 역사가들이 프랑스의 역사가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기- 언급한 역사가들 가운데에는 페브르가 빠져 있지만, 사회사는 곧 역사라는 페브 르의 말을 그가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 지중해 』 의 영어 번역판이 나온 직후 Jo urnal of modern h ist o ry는 〈 프랑스 역사학의 강세 〉 라는 제목으로 〈 2 伊 1l 기 역사학의장엄한 기념비〉 를 기리기 위해 세 명의 대역사가를 동원하였다. 브로델 자신의 「개인 적 증언」, 트레버 로퍼의 「페르낭 브로델, 아날 그리고 『지중해』」, 그리 고 헥스터의 「페르낭 브로델과 지중해 세계…f} 바로 그것이다. 영국 사가의 예찬, 미국 사가의 비판 등은 모두 브로델과 아날의 위대한 위상 울 재확인시켜 줄 뿐이다. 이렇듯 아날은 70 년대에 많은 역사가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그중에 서도 아날 학파의 저작을 면밀히 검토하여 최초로 종합적인 아날 연구서 를 발표한 사람은 T. S t o i anov i ch 였다. 그는 아날 학파의 패러다임-

그에 의하면 구조주의 을 추출해 낸 후 이를 브로델의 공으로 돌리 고 있다. 즉 아날의 제 1 세대보다 브로델에 이르러 아날은 하나의 학파로 자리잡았으며, 독일 사학을 대체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18) 같은 해 인 197 6t;빈 Jo urnal of socia l h ist o ry는 그 창간 1 0-9-년을 기 념 하면서 사회사의 미래를 전단했는데 여기에서도 아날 학파는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19 ) 또한 갑은 해 반더빌트 대학에서 개최된 〈 역사학의 미래 〉 라는· 세미나에서 C. Delzell 은, 아날 학파는 마르크시즘과 마찬가지로 역사학 의 차원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는 내용을 담은 개막 연설을 하였다 . 발표 에 나선 L. S t on e{든 역사학의 미래를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협동에서 찾고 이 분야에서 아날 학파의 역할이 지대하였음울 인정하였다. 20) 이즈음 아날은 다론 기존의 학파와도 비교의 대상이 되었다. 1978 년 Jo urnal of economi c h ist o ry는 〈 경제사의 성과 〉 를 결산하면서 세 학파 —신경제사학파, 마르크시스트 학파, 아날 학파——를 비교하였다 . 또한 이미 1975 년에 『 유럽 역사학의 새로운 방향 』 에서 아날 학파를 분석 한 바 있던 이거스는 1979 년 역사학의 본질적 흐름으로서 사건 서술사, 프랑스의 아날 학파, 사회과학 집단,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들고 있다 .2l 이러한 사실들은 아날이 70 년대 하나의 뚜렷한 집단적인 경향을 가진 학파로서 국제적인 관심을 집중시켰다는 점울 보여 준다• 그 관심이 호의적이었던 것만은 물론 아니었다• 예찬 속에는, 당연히, 〈 새로운 역사 학 〉 에 대한 비판적인, 비관적인 전망이 담겨 있기도 하였다. 아날의 역사 가들은 과도하게 계량화를 추구한다는 비판, 또는 이와 정반대로 아날의 18) T. Sto i a n ovic h , Frendh his tor ic a l meth o d, Lnodon, 1976. 19) 이 특집호에 실린 논문들, 특히 Perkin , ; Kaelble, ; Perrot, . 20) L. Sto n e, , T he futur e of his tor y , p. 11. 한편 그는 역사학의 미래는 프랑스 학파의 〈새로운 역사 〉 는 아닐 것이라는 진단 올내리고있다. 21) G. lgg e rs, Inte r natio n al handbook of his tor ic al stu d ie s (ed. G. Igg e rs, H. Parkers), 1979 의 서문 .

역사가들은 통계 자료 처리의 미숙함을 아름다운 문체 __ 말하자면 비과 학적이고 비논리적인 - 로 감추고 있디는 비판, 또는 아날 학파는 하나 의 인식론적 전환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방법론의 전환을 가져다 주었을 뿐이라는 평가, 또는 나아가 아날은 방법론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도 없이 단순한 절충주의에 빠져 있다는 비판 등은 모두 일면의 전실 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2) 가장 〈 과학적 〉 인 역사가인 R.W . Foge l 은 블로끄, 페브르, 브로델 등을 〈 전통적인 역사가 〉 로 분류하고 있지 않은가 ? 23) 가장 충실한 아날리스트인 S t o i anov i ch 의 전망도 기본적으로 개인적일 수밖에 없다. 역사가의 전망은 그 자체의 가치보다도 그것에 담겨 있는 현실 분석이 더욱 가치가 있을 것이다 . 만일 프랑스 역사학자들이 종합을 이루지 못하고, 또 혼합주의, 철충주의, 새로운 것에 대한 광적인 탐험을 할 뿐이라는 아날에 가해전 바판이 정당한 것이라면 , 프랑스 역사학의 미래는 의당 황량할 것이다 .24) 이미 197 6\:回 논문에서 비관적인 전망을 한 바 있던 스톤은 1979 년 〈 과학적 역사 〉 의 종언이라는 이름으로 아날의 지배가 끝났음을 단언 하고 있다. 〈 서술로의 복귀 〉 를 주장하는 스돈은 바로 르 콰 라뒤리의 〈 인간이 없는 역사 〉 나 〈 움직이지 않는 역사〉에서 과학적 역사의 한계를 발견한 것이다 .25 ) 그리고 그가 제시한 대안은 페브르류의 역사-그에 의하면 서술적인 역사-였다. 아날의 제 2 세대에 의해서 집단적으로 수행된 인류학적 역사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전망은 22 ) R. Forste r , , T he jou rnal of economi c his tory , 1978 : G. Barracloug h, Tendances actu e l/ es de l'his toi re , Pa ris, 1980. Fors t er 의 평 가는 Barraclou g h 의 평 가보다 더 가혹하다. 23 ) R. W. Fog el , G. R. Elto n , Whic h road to the Past?, Two vie w s of his tor y , New Haven, London, 1983, pp. 18-9. 24 ) Sto i a n ovic h , p. 235. 25) 이런 유의 역사는 페브르가 제창한 역사와 정반대에 위치하며, 따라서 이제 페브르가 부활되고 있다는 그의 분석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그 자체가 아날 학파의 내부 역사를 확인한 것이었다. 어쨌든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 목적인 우리들은 이러한 비관적 인 전망 속에서 아날이 서서히 그 초기의 관심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날에 대한 예찬과 비판 속에 역사가의 민족 의식이 담겨 있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아날 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트레버 로퍼나 홉스봄 등 《 과거와 현재 Past and Presen t 》 - 1952 년 창간된 - 의 편집자들의 고백과는 달리, Obelkev i ch 는 양국의 대표적 인 두 잡지를 비교한 글에서, 공통점보디는· 차이점을 지적하는 데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26 ) 계량사, 계열사, 심성사를 지향하는- 아날과는 달리, 영국의 잡지는 현대사, 시민 혁명기의 정치적 사회적 위기, 산업 혁명, 전산업 시대의 민중 봉기 등에 주로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사실 이 두 잡지는 사회경제사라는 공통 인자 의에는 닮은 점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아날은 《 과거와 현재 》 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 였다는 것이다. 충실한 아날리스트인 A y mard 의 입장은 더욱 분명하다. 이 이태리 사가는 1972 년의 논문에서, 아날은 브로델과 〈 장기 지속 〉 에 힘입어 성공하였으나 제 3 세대에 이르러서는 표류하고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런데 8 년 후의 논문에서는 〈 아날의 실패 〉 를 말하고 있 다. 뿐만 아니라 브로델의 『 지중해』와 〈 장기 지속 〉 도 그의 비판을 피하 지 못하였다• 스페인의 189SA➔ I 대와는 또 달리 브로델은 과거의 영광을 상실한 프랑스와 유럽에 고집스럽게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27 ) 아날이 추구하는 〈 세계사 〉 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 이태리에 있어서 아날은 매우 간접적으로만 그리고 부분적으로만 민족 역사의 주제를 취급하는 하나의 의국 잡지일 뿐이다. [……] ‘완전한 역사', 26 ) J. Obelkevic h . , L e debat, 1981 . '2J ) M. Ay m ard, , T he Jo urnal of Europ ea n economi c his to r y , 가을, 1972, pp. 501-11 : , M elang es de l'eco le fran c; a is e de Rome, Moy en Ag e- Temp s modernes, t. 93, 1981. pp. 413-7.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완전한 이태리 역사가 요구된다. 〉 28) 민족 의식은 프랑스 역사학의 전파를 차단하였으며 그 벽이 가장 높았던 곳은 역사주의와 정치사라는 강력한 전통의 발원지인 독일일 것이다. 또한 아날 학파가 독일 역사학파에 대한 극복이었다는 점에서도 아날이 라인 강을 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사회사에 대해 고찰하면서 H. U. Wehler. W. Conze, P. Lut z, J. Kocka, W. Fis c her 등 독일 역사학 자들은 프랑스 학파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29) 비록 1950 년대 이후 브로델의 역사학이 전체사 또는 〈 완전한 역사 〉 라는 이름으로 독일에 소개되기는 하였지만, 그리고 Barracloug h7 } 관찰하듯이, 많은 독일 역사학자들이 이즈음 사회 구조의 분석에 관심을 보여 왔지만, 독일에서는 정치사가 여전히 역사의 축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30) 이제까지의 분석은 결국 70 년대에 아날 현상이 존재하였음을 밝혀 준다. 아날이 국제적인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는 동안, 아날 학파내에서 도 자체의 사론을 정립하려는 움칙임이 활발하였다. 1974 년 르 고프 Le Go ff와 노라 P. Nora 는 『 역사를 만든다 』 라는 도전적인 제목으로 세 권의 책을 편찬하였다. 각 권의 제목_제 1 권은 〈 새로운 문제〉, 제 2 권은 〈 새로운 접근 〉 , 제 3 권은 〈새로운 대상〉 ―― 은 새로운 역사학의 면모를 잘 드러내 준다 .3 1) 4 년 후 르 고프는 젊은 세대인 샤르띠에 R. Charti er, 르벨 J. Revel 과 손잡고 『 새로운 역사 』 라는 제목으로 일종의 사전을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상호 인용으로 아날의 업적을 자축하며, 제 1 세대에 대한 예찬으로 아날의 창세기를 신비롭게 채색한 이 책은 아날 현상이 얼마나 프랑스 역사가들을 둘뜨게 하였나를 보여 주는 책이 28 ) Ay m ard, , p . 417. 29) 신용하(편), r 사회사와 사회사 』 , 창작과 비평사, 198 2'건에 번역 수록된 논문들. 30) Barracloug h, 앞의 책, pp. 70-1, Kocka, ,신 용하(편), 앞의 책. 31) J. Le Goff , P. Nora(ed.), Fair e de l'his toi re 특히 『역사를 만든다』라고 직역 할 수 있는 이 책의 제목이 아날의 주관주의적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 된다.

다. 그 현상이 사라전 후인 1986 년 뷔르기 애르 A. Bur gui ere 가 편찬한 『 역사과학 사전 』 과 바교해 볼 때, 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프랑스 역사가들의 홍윤! 역시 70 년대를 끝으로 사라진 듯하다. 아날 창간 502r 년을 맞이하여 아날의 요람인 스트라스부르에서 개최된 세미나 는 지방적인 성격을 탈피하지 못하였다 . 3 2) 대신 아날의 젊은 편집인들 一뷔르기애르, 르벨, 샤르띠에 ― 은 대축제를 벌이기보다 자성의 시간을 마련하였다 .33 ) 이들 젊은 세대는 그간 무조건적인 숭배의 대상이 었던 창조 세대를 둘러싸고 형성된 신화와 우상을 타파하면서 아날 학파 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문제 의식을 제기하였고 또 실천에 옮겼 다. 브로델과의 갈등, 전체사와의 갈등이 아날 현상과 브로델 현상에 가려져 있다가, 드디어 〈심성사〉라는 모습으로 자취를 드러낸 것이다. 스톤이 아날의 〈새로운 역사〉에 대하여 회의적인 견해를 피력한 그 무 렵, 아날 내부에서도 〈새로운 역사는 존재하는가〉라는 의미 심장한 주제 가 다시 역사가들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 내었다. 1980 년 열린 이 국제 학술 세미나에 참석한 역사가들은 〈문제〉, 〈부분〉, 〈지향〉이라는 세부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벌였다. 이러한 유의 토론에서 모든 참석자들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은 물론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르 콰 라뒤리를 위시한 아날의 역사가들은 더 이상 아날을 신비화시키지는 않았지만, 아날의 역사학은 반세기라는 기간이 홀렀어도 여전히 개척자 정신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역사〉라는 점을 주장한 반면, 의국 의 역사가들은 아날을 이미 〈낡은 역사〉라고 보고 있었다. 〈새로운 역사 는 존재하는가? 내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다〉라는 라슬렛 P. Laslet~ 32) 197 9';1 10 월 11 일에서 13 일까지 스트라스부르에서는 Ch. -0 . Carbonell 과 G. Liv e t 주관하에 Au berceau des Anna/es. le mi lie u str as bourge o is , l'his toi r e en France au debut du XX s iec l ea}는 제목으로 세미나가 열렸다. 그러나 이 세미나 결과는 의아스럽게도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 33 ) J. Revel. , A . Burgu iere ,

단언, 〈 어쨌든 새로운 패러다임이 1929 년에 태어났다는 것은 사실이다 〉 라는 르 봐 라뒤리의 토론 등이 이제는 빛바랜 세미나의 분위기를 대변 해 주는 듯하다 . 34)

34) 1980 년 E. Le Lad uri e 와 G. Gado ffr 국관 아래 Y a-t- il un e no1U1elle his - Loi re? 라는 제목으로 세미나가 열렸다 . 그 보고서 . p, 49.

70 년대의 아날 현상을 관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의미 심장한 사건은 197 전 페르낭 브로델 센터 창립 기념으로 〈 사회과학에 대한 아날 학파 의 충격 〉 이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일 것이다. 이를 주관한 왈러슈타인 은 아날을 〈 저항 〉 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시각 속에는 아날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해 내지 못했다는 뜻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이 세미 나 내용을 그 다음해 간행된 기관지 《 잡지 Rev i ew 》 에 소개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 발표자들은 공히 동질적인 아날 학파가 존재했거나 또는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리 고 자신과 아날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이 세미나에서 결론적인 발표를 담당한 브로델은 아날의 성공을 가능케 했던 요인들을 전해 주면서 왈러 슈타인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기를 기원하였다 . 물론 의례적인 발표라고 간단히 취급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아날 현상을 논하는 데 많은 상칭 성을 지닌다고 생각된다 . 아무런 형용사 없이 그저 Rev i e~ 斗고 잡지명을 정한 데에서도 침작할 수 있듯이 왈러슈타인은 역사학과 사회과학, 그리 고 역사학 내부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아날의 정신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날은, 적어도 브로델은 미국에서 자기의 후계자 ― ―유일한? __- 를 만난 것이다. 70 년대 프랑스내에서 〈새로운 새로운 아날 〉 은 브로델의 길을 거부했던 것이다. 전체사에 대해서 〈역사 학의 분해 〉 라는 말이, 그리고 물질주의에 반해서 심성이라는 말이 〈새로 운 언어 〉 로서 역사가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

2 심성사 1985 년 개최된 〈 브로델의 날 〉 에서 브로델은 다음과 같이 자신과 제 3 세대와의 차이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나의 역사 개념은 [… …] 전체사의 개념, 죽 모든 인간과학에 의해서 부풀 려진 역사이다. 단지 그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그와 결연하는 것이 아니 합라,리 적모이든다 .인 간그과들학은과 무 같엇이보 다사도는 심것성이사다(.心 性[…史…)]를 내발 전후시계켰자다들. 은” 나보다 더

1) 브로델, Une le1;o n d'his toi re , pp, 162-3.

1969 년 이후 아날을 계승한 소장 학자들은 인간과학 중에서도 특히 문화인류학과 손을 잡았으며 그들이 만들어 낸 역사는 인류학적 역사 다시 말해서 심성사라는 것이다. 전체사가 비록 엄격한 의미에서는 불가 능한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로델의 『 지중해 』 와 『 물질 문명 』 은 인간의 종합적 이해라는- 시대 정신을 구현하려는 거대한 노력이었 다. 또 그의 세대에는 역사학이 인간과학의 중심이었고 또 이들을 종합 할 수 있는 학문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 나 60 년대 이후 유행한 구조주의는 역사학을 그저 하나의 학문, 그것도 개별적 자료를 수집하기만 하는 전통적인 학문으로 격하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사학자가 계속 전체서를· 고수하는 것은 브로델의 눈에도 〈합리적〉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브로델의 전체사적 노력 을 무모하거나 불합리한 것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역사와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그 시대를 반영하는 〈 변화의 전문가 〉 이기 때문이 다. 그러나 제양 1l 대가 바라보는 브로델의 전체사는 분명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였다. 경제사, 인구사 등 〈과학적〉 역사에서 출발한 이들이 보기 에, 지리학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는 〈종합 〉 이라는 것은 더욱더 그렇 게 보였을 것이다. 이제 그 환상이 깨어진 것이다. 그들의 언어를 빌린다

면 역사학이 〈 분해 〉 된 것이다 . 2) 그 대표적 인물인 르벨은 이 현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 이러한 분해는 인식론적으로도 과거의 확신보다 더 만족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옛 의미의 전체사를 상실한 것을 슬퍼해야 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3 ) 심성사가 1969 년에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은 물론 아니다. 이제 우리는 아마도 현대 사학을 대표하고, 또 가장 프랑스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심성사가 어떠한 내적 논리와 의적 영향을 통하여 형성되었으며, 이의 발전을 가능케 한 아날 학파내의 지적 원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4) 심성 (Men t al it e) 이라는 말은 그 기원에 있어서 전문 역사가의 용어가 아니었다. 이 말이 과학적 의미에서 사용된 것은 인류학에서였다• 레비 브륄 L. Lev y -Bruhl 은 1910 년, 하층 사회에서의 〈 심성적 〉 기능을 분석하 였고, 1922l 건에는 〈 원시적 심성 〉 에 관해 논하였다. 그가 사용한 의미는 감성적, 전(前) 논리적 행위에 따라 지배되는 문화적 기능을 파악하자는 것이 었다. 그 후 불롱델 Ch. Blonde!. 왈롱 H. Wallon 등도 이 용어를 각각 심리학과 사회학에 도입하였다• 이들과 함께 스트라스부르 대학에 근무하였고 〈 토요일의 회합 〉 이나 Annales¾ 통해 지적 교류를 나눈 페브 르와 불로끄가 이 용어를 역사학에 도입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불롱델의 『 집단 심리학 서설 』 은 역사학에 집단 심리를 도입하기 위한 방법론적 시도로서 이의 집필울 권유한 사람은 페브르였다전 페브르는 2) F. Dosse, L' his toi re en mie tt e s . Des Anna/e s a la , Pa ris, 1987. 3 ) J. Revel, , E spa ces Temp s, 34 / 35, 1986, p. 14. 4) 심성사는 국내에도 상세히 소개되었다. 김정자, 「망딸리데사의 가능성과 한계 점」, 〈 서양사론 》 , 31, 1988 : 최갑수, 「미셀 보벨과 역사 세계」, 『 역사가와 역사인 식 』 , 민음사, 1989. 5) Y. Conry, , R S, 111-2, 1983, p. 367.

왈롱이 편집한 『 프랑스 백과 사전 』 의 제 8 권 『심성적 생활 』 에 삽입된 「심리학과 역사학」에서 다음과 갈이 불롱델의 저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심성사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불롱델의 말을 빌린다면, 어쩌면 존재하지 않고 어쨌든 현실적으로는 파악 할 수 없는 보편적인 지각, 사고, 행동의 방식을 결정하고자 하는 것은 문제 가 될 수 없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퍼져 있는 인간 집단을 고립적으로 고려함으로써, 그의 역할은 반대로 각각에게 고유한 심성적 체계를 묘사하 고, 그 형성의 메커니즘, 발달 과정, 그 원소들의 결합 성격 등을 파악하고자 노력하면서, 그 체계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잘 말할 수도 또 그 위험 을 고발할 수도 없다. 우리에게 속하는 느낌과 생각들을, 그와 유사한 말과 그와 동일한 말이 그의 가설적이고 기만적인 동일성 때문에 때때로 수세기의 시간차가 있음에도 언제나(동일하게 ) 의미하게끔 해주는 느낌과 생각 위로, 직접적으로, 그리고 그 어려움에 대해서 의심조차 해보지 않고 지나가게 하기를 바란다는 그 위험성을 말이다 . 6)

6) 페브르、 En cycl ope d ie fran c; a is e, t. VI, p, 8-12-5.

매우 페브르적인 문체로 쓰여진 이 문장아 결국 의미하는 것은, 인간 집단의 느낌과 생각-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 一 울 다루는 십리사는 과거와 현재는 다르다는 점을 그 기본 전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페브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죄악 중의 죄악인 시대 착오를 피해 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 그의 대표작인 『 1~1] 기의 비신앙 문제 』 였다• 그는 그 밖의 여러 논문에서 심성사의 영역을 제시하 고 있다. 「민속과 민속학자」, 「역사에서의 감성 (Sens i b ilite)」 (1941), 「마 술, 어리석음인가 심성적 혁명인가?」 (1948), 「개략에서 정확까지」 (1950), 「느낌의 역사, 대공포」 (1951), 「역사에서의 죽음」 (1952) 등이다. 이런 유의 역사는 지적 엘리뜨의 사상만을 대상으로 하는 지성사와는 다르 다. 또한 십리사란 그것이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생각하~근 방식 (합리적

으로) 〉 으로 그 대상을 한정시킨다고 볼 때, 〈 사랑 〉 , 〈 죽음 〉 , 〈 신앙심 〉 , 〈 공포 〉 등 집단적인 사고와 느낌, 합리와 비합리를 다 망라하는 역사는 심리사와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성사라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 했던 것이다. 이렇듯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데 가장 많이 기여한 사람은 페브르-였 다. 그러나 페브르만이 심성사의 조상은 아니다. 프랑스내로만 국한시켜 보아도, 불로끄는 또 다른 심성사의 선구자였다. 그의 짧은 생애는 그로 하여금 페브르처럼 심성사 연구를 독려하지는 못하게 하였지만, 그의 전저작은 심성사적 색채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병을 고치는 초능력을 지닌 왕에 대한 연구는 그 人人쿠干 평하기를 인류학적 연구였다. 또 『 봉건 사회 』 의 〈 심성적 분위기의 삶의 조건들 〉 , 〈 느끼는 방식과 생각하 는 방식 〉 , 〈 혈연 관계 〉 같은 부분에서는 페브르가 3 년 뒤에 강조할 심성 적 도구와 시대 착오에 대한 경고를 미리 둘을 수 있다. 그 밖에도 불로 끄는 〈 삶에 대한 집착 〉 , 〈 신경계의 균형 〉 , 〈 시간 감각 〉 , 〈 안전에 대한 느낌 〉 , 〈 식생활 태도 〉 , 〈 언어 현상 〉 등 인류학적 주제에 대해서 광범위한 관심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이 두 역사가가 같은 시기에 같은 주제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역사가의 접근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다. 페브르가 기본적으로 심리적이 었던 반면 불로끄는 사회학적-인류학적――접근 방법을 선호하였던 것이다. 그간 심성사는 페브르의 독창적인 창조물로만 여겨져 왔지만 최근 들어 불로끄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정당하다고 생각된다. 페브르적 노선에서 심성사 연구를 지속한 사람은, 브로델이 아날을 계승하기 전 아날의 편집에 깊숙히 참여하였으나 브로델과의 불화 이후 아날에서 멀어전 망드루 R. Mandrou 였다. 페브르의 사도라는 평가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저서들은 페브르에 대한 온갖 예찬으로 가득 차 있다 .1961 년, 〈 페브르에게 전적으로 충실하게〉 『 근대 프랑스사 서설 1500~1640 』 을 발표한 후, 1968 년 망드루는 자신의 학위 논문인 『 17 세기 프랑스에 있어서의 법관과 마녀 _역사심리학적 분석 』 을 발표하였다.

1948 년 페브르가 「마술, 어리석음인가 심성적 혁명인가?」에서 제기한 문제, 즉 〈 그 심원한 구조에 있어서 l 伊 1] 기말 17 세기초의 가장 개명된 사람(법관)이라도 오늘날의 가장 개명된 사람의 심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 에서 출발한 망드루는 그의 스승과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 17 세기에 마녀 사냥이 포기된 것은 수세기 동안 이러한 세계관을 완성 하고 있던 심성적 구조의 탈골을 의미한다 .〉 7) 신과 사탄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던 시대는 데까르뜨에 의해 새로운 심성적 도구를 부여받은 합리 적 세계가 도래할 때까지 지속된 것이다. 심성사가는·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한 다론 이유-예를 들면 사회 경제적―一에 대해서는 언급하 고 있지 않다. 기본적으로 심성의 변화 자체가 다른 것들을 설명해 준다 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망드루는 지적 엘리뜨의 심성이 그 시대 의 심성을 한계짓는다는 페브르의 대담한 가설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 이 연구에서 밝히고자 했던 것은 한 특정 집단 의 집단 심리를 밝히는 것이다. 〉 8) 그가 자기 연구의 대상을 법관이라고 하는 한 계층으로 한정시킨 것도, 그리고 심성적 구조라는 말 대신 집단 심리라는 말을 선호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지 모른다. 이러한 심리사적 연구는 그 후 사회경제사가 유행하던 시기에 점점 쇠되의 길을 걸었다• 역사가가 사회의 물적 배경을 도의시한 채 심리 (심성)만으로 역사를 만든디는 것은 금기로 여겨졌다. 그러나 만일 비역 사가가 심성적 변화에 주목하고 심성적 구조의 불연속에 따라 역사를 설명한다면? 우리는 푸꼬 M. Foucaul t에게서 페브르와 유사한 주장을 발견할 수 있다. 푸꼬는 한 시대에 있어서 인식의 지평과 문화적 구조를 가능케 하는 하부 구조――그의 표현에 의하면 에피스데메 e pi s 函 m 錢} 발굴하였다. 르네상스라 불리는 16 세기는 유사성의 개념이 지배하는 말과 사물의 공존 시기이며, 고전주의 시대 (1660~1800) 는 동실성과 차이 에 의한 분석이 다양한 언설을 지탱하는 감추어진 질서였다는 것이다. 7 ) R. Mandrou , Ma gistra ts et sorcie rs en France au X 넵 e sie c le, Paris, 1968, p. 14. 8) 위의 책, p. 499.

우리는 이를 심성적 구조라는 친숙한 말로 대치할 수 있을 것이며, 또 그 구조 역시 단절적임을 알 수 있다 . 9) 이러한 의미에서 푸꼬가 〈 페브르 의 유일한 계승자이다 〉 라는 브로델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10) 한편 이러한 브로델의 말은, 전문 역사가들 더 구체적으로 아날의 제양1 l 대들은 페브르를 뒤따르지 않았다는 뷔르기애르의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11) 르벨이 심성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접근 (A . Besan c; on 과 M. de Cer t eau 의 연구)이나 푸꼬의 도전을 〈 급진적 〉 이라고 평가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12 ) 한마디로 역사는 〈 사회적 〉 인 길을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9 년 아날의 창간과 더불어 프랑스의 역사학은 경제와 사회라는 미개척 분야로 몰입해 들어갔다. 〈 사회 〉 라는 애매한 말은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을 역사 속으로 넣어 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념, 심리, 심성 등도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사에 포함될 수 있겠지만 그 주변적 위치를 맴돌 뿐이었다. 대공황이 발생했을 때 아날이 창간되었다는 그 연대적 일치가 상칭해 주듯이 아날의 초기 관심은 경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씨미앙과 불로끄를 계승한 라부르스가 곡물 가격의 장기적 변동을 추적 하여 경제사 연구의 신기원을 연 것도 이 무렵이었다 .13) 그 후 프랑스 학자들은 라부르스의 영향 아래 자신이 아날의 테두리내에 속해 있건 그렇지 않건 경제와 사회 계층 구조를 밝히는 데 몰두했던 것이다. 제 2 차 세계 대전 후 마르크시즘이 지식인들의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등장하 였고、 또 전후 경제 부흥에 힘입어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가속되었다. 앙시 9) 이광래, 『 미셸 푸코-광기의 역사에서 성의 역사까지 』 , 민음사, 1989. pp. 14 5-8 : M. Foucaut. Archeolog ie du sauoir , 1969, p. 13. 10) 브로델, Revie w , p. 256. 페브르와 푸꼬의 지적 유사성에 대해서는, H-D. Mann 이 이미 밝힌 바 있다 (Luc i en Febure. la pen see uiu a nte d'un his tor ie n , pp. 14 1-4.). 11) 제 3 장 제 3 철 〈 우상 파괴〉를 봉 것. 12) J. Revel, , Dic ti o n nair e des scie n ces his tor iqu .es, p. 456. 13 ) Esqu i ss e du mouuement des pr ix et des reuenus en France au )\\I e sie c le (1 932) 과 La crise de l'Ancie n Reg ime et au 幽 de la Revolut ion (1943).

앙레짐의 전원적 리듬이 파괴되고, 식민지 세계의 낭만적 환상에서 벗어 난 젊은 지식인들은 눈부신 변화의 추전력이라고 생각되는 사회 경제적 힘에 매료당하였다. 14 ) 따라서 심성사의 역사로 볼 때 이 시기는 아직 준비기 정도로밖에는 볼 수 없을 것이다.

14 ) J. Revel, ,p . 454 ; Ph. Aries, ,L a nouuelle hi stoi re, p. 409.

심성사의 성장을 가능케 해준 토양은 역사학의 내적 발전 논리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이 역시 프랑스 역사와 역사학의 특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초기의 경제사는 지방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곡물 생산 및 가격 변동에 관한 경제사적 관심이 이와 밀접한 상관 관계에 놓여 있는 인구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역사가들은 죽시 대상 지방의 인구 변동, 인구와 생계 문제, 나아가 기 근, 질병 등과 감은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94& 건 《 인구 》 지에 발표되었고, 그 후 1971 년 아날에 게재된 뫼브레 J. Meuvre 떠 「생계 위기와 앙시앙 레짐기의 프랑스의 인구丘근 인구사적 연구의 효시였다• 같은 무렵 (1952 년) 구베르 P. Gouber t는 『 1600 년과 1730 년 사이의 Beauvais 와 Beauva i s i s 』 를 발표하였댜 라부르스에게 현정된 이 <17 세기 프랑스의 사회사 연구 〉 는 〈총체적인 〉 17 세기를 재구성하기 위해 제도, 군사, 종교, 사법, 도덕, 지성 , 사회적 망딸리떼 등을 다루고 있다. 한마디로 〈모든 인간 〉 -우선적으로는 당시 프랑스가 농업 국가이니까 농민이 되겠지만 __- 울 이해한다는 구상이었던 것이다. 후일 문고판으로 재출판된 이 책의 제 1 권을 〈 10 만 지방민 〉 이라고 제목 붙인 것만 보아도 그 인구사적 의도를 실감할 수 있다. 이처럼 세례, 결혼, 장례 등에 관한 교구의 호적 문서둘을 통해 구베르는 보베 지방의 〈가족〉을 재구성해 낼 수 있었다. 그 결과는 매우 참신하였다. 〈 라블레의 후손들 〉 에게는 오히려 사생아나 독신자가 적었으며, 보베 지방의 농민들은 결혼을 늦게 하고 또 자녀를 가지는 시간 간격을 길게 가짐으로써 스스로 인구를 조절해 나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연구는 앙시앙 레짐기에는

출생률과 사망률이 매우 높았으리라는 기존의 단순한 견해에 강력한 제동을 걸었다. 구베르는 지방사만이 이러한 유의 연구를 가~켜 l 한다고 강조한다. 말하자면 어떠한 사회사적 연구도, 적어도 17 세기의 경우에는 〈 지방 〉 보다 더 넓은 테두리에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러한 연구 차원을 넘어선 다면, 소위 〈 전형적 〉 이라는 〈 조그만 사실 〉 의 인상주의로 또는 심지어 수사학 내지는 아마추어의 그립으로 전락할지 모른다 .15) 구베르의 비판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지방사라는 견지에서, 또 그가 아날에 합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는 브로델의 〈대륙적〉 연구를 겨냥하고 있는지도 모른 다. 또한 우리는 구베르가 비판한 인상주의, 수사학에 가장 가까운 것으 로 아리애스 Ph. Arie s 의 연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아리애스는 그 人-人쿠두 밝히고 있듯아, 경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근대 프랑스사에 나타나는 인구적 특수성에 대한 관심에 의해서 인구학, 나아 가 삶과 죽음과 같은 망딸리떼 세계에 뛰어들었다. 출생률, 생존 기간, 밀도의 분포, 인구의 이동 등의 시간적 변화는 인간의 망딸리데, 또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품는 생각 등에 있어서 더 근본적이고 더 비밀스러운 변화를 숫자로 표시해 준다. 인구 통계는 삶의 양식, 육체에 대한 생각, 가족 생활, 죽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삶에 대한 태도를 밝혀 준다 .16) 사회경제사에서 출발, 인구사를 경유, 심성사로 들어간 역사가들과는 달리, 아리애스는 페브르의 지적 호소에 응답한 소수의 역사가에 속하였 15) P. Goubert, 100000 pro uin c ia u x au \11 iecle , 1968, p. 16. 16) J. Revel, , L a noU1 Je lle hsit oi re , p. 137.

다 .17) 그의 심성적 연구가 인상주의에 머물러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그의 『 죽음 앞의 인간 』 (1977) 은 성상학, 수사학, 장례 의식 등에 암시된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 태도를 단계별로 추적하고 있다. 삶의 주위에 늘어붙어 있는 죽음이 망령이나 복수 등의 형태로 되돌아을 것에 대한 공포, 삶의 유한성, 허무 등으로 표현되는 죽음에 대한 감상적인 관조, 죽음을 이별, 상실, 추억과 애정 속의 재생 등으로 인식하는 태도,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의 죽음에 자신의 고통을 전이, 고착시키는 태도 등 인간이 죽음에 부여한 의미를 그 내적 논리 - 또 는 비논리?-에 따라 재구성하여 〈 비밀스러운 변화 〉 를 밝히는 작업은 우선 매우 매력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는 판에 박은 듯한 가격과 계층 분석에 식상한 사람들에게는 소설적 홍미까지도 아울러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는 망딸리떼를 구조적으로 규명하지 못했다는 한계와 함께 죽음에 대한 인식이 왜 변화했는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결정적 비판을 면치 못하였다. 18) 심성사의 발달에 기여한 사람으로서 반드시 기억해야 될 사람은 뒤비 G. Dub y이다. Le Go ff는 뒤비를 페브르, 망드루와 함께 세 명의 심성 사 〈이론가〉에 포함시키고 있다 .19) 여기에서 이론가라는- 말은 1961 년 출판된 『역사와 그 방법들 』 이라는 사전적인 책에 그가 「심성사」라는 논문을 기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페브르에 대한 인용으로 가득- 찬 이 글의 논지는 문학 작품에 주로 의존했던 페브르의 심성사를솔 불로끄의 사회적 연구와 접합시키자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20) 이 중세사가의 지적 노정을 살펴보아도 우리는 그에게 불로끄와 페브르가 종합되어 17) 자신의 사론집인 Le tem p s de l'h ist o i re 에서 아리애스는 페브르와 불로끄 가운데 페브르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La nouvelle h ist o i re 에 「심성사표t 집필하면 서도 페브르가 둘려준 일화로써 말미를 풀고 있다. 18) A. Burgu ier e, , A nnales, 1990, p. 131. 19) Le Goff , , Fair e de l'his toi r e, ill, 1 974, p. 84. 20) G. Duby,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0 년, 한 인터뷰에서 〈 나는 사실상 불로끄가 일궈 놓은 받고랑에서, 즉 경제적 구조 연구에 기초한 사회 관계의 연구 로부터 출발하였다 〉 라고 말한 후, 다음과 같이 부연하였다. 그러나 나는 사회는 경제적 토대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그 사회가 자신에 대해 가지는 표상에 의해서도 역시 설명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211 이러한 지적 경로는 이미 살펴본 바와 일치한다• 달리 말하면, 불로끄. 에서 출발하여 페브르에게 도착하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 물론 단순한 비교지만, 어쨌든 심성사의 기원은 페브르라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 아마도 그것 [심성사의 개념]은 페브르로부터 왔다. 매우 빨리 우리는 심성의 개념에 대해서 심사 숙고하기 시직하였다. 망드루와 나는 페브르 의 글을 가지고 의견울 교환하였다. 〉 22) 심성사가로서의 뒤비의 면모는 〈 봉건제란 무엇보다도 서서히 귀족으로 되어간 소수의 전사 집단 속에서 형성된 정신 상태, 심리적 콤플렉스가 아닐까? 〉 23 ) 라는 가설 속에서도 두드러진다. 즉 그는 봉건제를 법제적 해석, 경제적 해석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의 〈사회 유형〉으로 보는 불로 끄보다도 더 심성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봉건제가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그의 견해는 1978 년에 발표된 『세 개의 신분― 봉건제의 상상적 세계』 24) 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뒤비에 의하면, 세 신분 은 인도 유럽어족에 공통적으로존재하거나또는중세 봉건 사회에 실재 했던 계충 구조가 아니라, 서기 1000 년을 넘어서면서 팽배해전 종말론적 불안 속에서, 종교적 순수성을 부르짖으며 당시 교회의 타락상 및 〈불평 21) ,L 'aujo u rd'hui l'his toi re , pp. 202-6. 22) Melange s Robert Mandrou, His toi re socia le , sensib il i t e s collecti ve s et men t al it益 1985 가운데 「뒤비와의 대화」, p. 33. 23 ) G. Duby , , Anna/es, 1958, pp. 765-71 . 24) Les tro is ordres ou l'im a g ina ir e du feod alism e, 1978.

등〉을 비판하고 나섰던 이단과 수도원의 도전에 저항하기 위해 1025 년 랑 Laon 의 주교인 아달베롱과 깡브레의 주교인 제라르가 만들어 낸 하나의 이데올로기였다는 것이다. 이 〈 불평등〉 이론은 동시에 세속 영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던 왕권을 강화시키는 데도 이바지하였다는 분석이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두쟁이라는 공식에서 벗어나 그는 지배 충 내부-수도원과 재속 교회――에 존재하던, 궁극적으로 정치적 성격의 투쟁을 부각시키고 있다. 아날이 정치를 도의시한 채 표류하고 있을 때, 그는 〈새로운 정치사〉를 시도했디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 다. 뒤비는 또한 〈결혼〉의 역사가로도 알려져 있다. 25) 그가 관심을 가지는 11~12 세기는 유럽 결혼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시기 였다. 당시의 교회 개혁은 성직자의 독신을 강조하였는데, 바로 결혼이라는 것은 이와 대비 롤 이루어 사제들의 특권을 부각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죽 과거에는 성직자들이 결혼식장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12 세기에 이르러 교회는 결혼을 7 성사에 포함시키면서 세속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아울러 마리아의 동정과 어머니러는· 이중적 이미지가 교회의 이중적 목적에 잘 부합하였기 때문에 마리아가 숭배되기 시작하 였다는 분석이다 .26) 기본적으로 제반 사회 현상, 사건 등을 이데올로기 ―죽 주체자의 의도~~리는 측면에서 해석한다는 점에서 그의 분석 은 일관성과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십성사 연구는 당시 역사학계에서 주변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역사가들의 관심은 사회의 하부 구조를 해명하는 데 있었으며, 또한 앞에서 소개한 역사가들은 공히 아날과도 다소 거리를 유지하던 사람들이었다. 1956 \1 이후 아날을 이끌어간 브로델은 〈물질주의자〉였으 며, 또 전체사를 지향한 나머지 테마별 연구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25) Ch. Brooke, Europ e in the centr a l Mi dd le age s , 962-1154. London-New York. 1987. pp. 444-66. 26) , 뒤 비와의 인터뷰, Hi. stoi re ma ga zin e , n°22, 1981.

우리는 1969 년 이후 새로워진 아날에서 데마 연구의 붐을 발견하게 된 다. 그러나 브로델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60 년대의 지적 세계는 문화인류 학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사회경제사와 속류 마르크시즘에 싫증을 느낀 젊은 세대는 그 〈 과학적 〉 참신성에 매료되었다. 르 고프는 다음과 같이 60 년대의 상황을 전해 준다. 경제(학)가 사회에 내민 거울 속에는 표정을 가지거나 소생된 생명체가 아니라 추상적 도식의 창백한 반사광만이 바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으며, 역사는 그나마 빵조차 가지지 못한 채 자동 인형의 음산한 충에 의해서 움직이는 해골에서만 자양분을 공급받았던 것이다. 이들 앙상한 메커 니즘에 다른 균형추를 주어야 했다. 역사에서 다론 무엇을 발견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망딸리때였다 .2n 60 년대 마르크시즘의 위기에 대해서 증언하는 사람은 많다 .28) 이에 대한 반동이 구조주의일 것이며, 문화인류학적 역사, 달리 말하면 심성사 일 것이다. 이제 이 영향을 받은 심성사가 종래처럼 심리적 성격을 지니 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 할 수 있다. 그간 편협해전 역사학의 영토가 다시 확대되었다. 아날의 제 1 세대가 바라던 대로 모든 인간적인 것에 다시 역사가의 손길이 닿은 것이다. 다시 인간이-페브르식으로 생각하는 인간이든 또는 불로끄식 으로 사회 속에 사는 인간이든, 살아 있는 인간이――역사의 주체가 되었다. 심성사라는 그 경제 설정의 모호성 자체가, 과거에 사회사의 경우에서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축복해 주었다 .29) 기계주의에 밀려나 있던 삶과 삶의 유기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 역사가들을 과거의 향수에 젖게 하였다. 가족, 공동 생활 양식, (전통적) 사교 단체, 축제, 민중 신 27) ,p p, 79-80. 28) 아리애스, 르벨, 뷔르기애르 등은 심성사 관련 논문에서 공히 이를 지적하고 있다. 29) 앞에 소개한 르 고프의 논문 제목 (une histoi r e ambig ue ).

앙, 종교적 의식, 출생, 세대, 결혼, 성, 범죄, 비행, 광기, 죽음, 삶 등 그야말로 <잃 어버린 세계 〉 가 다시 발굴되었다. 1969 년 이후 아날의 젊은 세대가 추진한 〈 데마 연구 〉 를 일람해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1969 : 생물학적 역사와 사회 1970 : 역사와 도시화 1971 : 역사와 구조 1972 : 가족과 사회 1973 : 글로 쓰여지지 않은 역사 1974 : 앙시앙 레짐과 혁명-재해석 - : 역사와환경 -: 역사와 성(性) _ : 인류학적 역사를 위하여 _상호성의 개념 _ : 이단과종교영역 1975 : 소비의 역사 1976 : 죽음에 대하여 — :프랑스의 인류학 1977 : 18, 19 세기 프랑스의 의사, 의학 그리고 사회 1978 : 혈족의 의식 (Ri tue l) — : 안데스 산맥 사회의 역사적 인류학 1979 : 경제와 사회 1980 : 구전 (Oral) 문서 보관소 : 다른 역사? — : 이슬람에 대한 연구_역사와 인류학 1982 : 고대사와 역사 1983 : 일상의 사건들, 역사의 사건들 1984 : 산업화와 탈산업화 1985 : 아프리카_또 하나의 역사적 공간 1986 : 다원 사회

_ :학교와 사회 — : 공간과 역사_브로델을 추념하며 1987 : 노동 조직 1988 : 역사와 모델 정립 _ : 앙시앙 레짐기의 집단과 공동체 一 :파시즘과 나찌즘 — : 말로 전해지는 것 /글로 전해지는 것, 1 1989 : 프랑스 혁명 _ : 말로 전해지는 것 /글로 전해지는 것, 2 _ : 역사와 사회과학-중대한 전환점 一 :프랑스 혁명 1990 : 정치의 접근 이상 열거한 주제 의에도 많은 주제들이 아날 편집인의 제안 설명 없이 공동 연구되었다. 바로 이러한 〈역사학의 분해〉가 1969 년 이후의 아날을 특징지어 준다 .30) 그리고 그 주제의 대부분은 인류학적 색채를 띠고 있다. 그간 브로델의 물질주의에 은폐되어 있던 인간 심성에 대한 연구가 구조주의의 물결을 타고 그의 은퇴 이후에 범람한 것이다• 우리 는 이를 아날의 제양 1] 대가 아날의 제 1 세대로 복귀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이 단순한 복귀, 반복을 의미하지는 않는 다. 르 고프가 자평하듯이, 〈장기 지속의 세대〉는 〈근대화된〉 마르크시 즘, 브로델, 인류학이라는 유산을 공유했던 것이다 .31) 죽 그들은 장기 30) 브로델은 1961 년 아날은 〈많은 망설임 끝에〉 〈역사와 현재의 사회과학〉, 〈물질 생활의 역사와 생물학적 행동의 역사〉라는 두 개의 주제를 가지고 〈공동 연구로 복귀〉한다고 선언하였다(〈 Re t our aux enq ue te s >, A nnales, 1961, p. 421). 그런 데 이 공동 연구가 그 후 중단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브로델 자신이 망설였던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31 ) Le Goff , Pour un autr e Moy en Ag e, 1977, p. 9.

지속 속에서 경제 결정론보다는 인간의 프락시스에 눈을 돌렸고, 그 인간은 엘리뜨가 아니라 농민, 나아가 야만인, 일상적 인간이었던 것이 다 .32) 아날의 내부에서 이러한 방향으로 역사를 만든 사람 가운대 대표 적인 사람은 르 콰 라뒤리와 르 고프이다. 브로델과 더불어 세계적으로, 특히 미국에서 널리 알려진 아날의 역사 가인 르 콰 라뒤리의 대표작은 196& 권 발표된 『랑그독의 농민들 』 이다. 그는 프랑스 남부 지방의 오래된 토지 대장을 분석하여 자본주의 발생의 한 측면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연구 결과, 그는 랑그독 지방의 경우에 1 앙1 l 기말까지는 토지의 집중이 진행되다가 1500 년 이후부터는 토지가 분할되기 시작하여 이 움직임이 1680 년에 국에 달하였으며, 그 후 다시 토지 집중이 재현된 후 1750~1770 년부터는 다시 토지 분할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관찰하였다. 이러한 토지 집중과 분할의 역사는 법제 적, 기술적, 경제적인 요소와도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겠지만, 르 콰 라뒤리가 특별히 부각시키는 요소는 인구 증감이었다. 페스트와 백년 전쟁으로 인하여 급격해진 인구 감소는 1 앙1 ] 기말까지 토지의 상대적 집중을 초래하였으며, 16 세기의 빈곤화는 귀금속의 유입으로 파생된 인플레이션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그 세기의 급격한 인구 증가, 그로 인한 사회 구조의 근본적 혼란에 의해서도 야기되었다는 것이다 .33) 1680 년이라는 결정적 전환기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갑이 말하고 있다. 특히, 사회적 조철의 커다란 희생자는 인구였다. 총 생산의 감소, 장기적인 Sta t u q uo 로의 복귀에 대해서 사회는 가장 두박한 해결책으로 대항하였다 : 사회는 먹여 살릴 입과 고용할 팔의 수를 감소시켰다 ; 사회는 마취도 시키 지 않은 채 인구의 일부분을 도려내었다 ; 사회는 1 파운드의 살을 넘겨 준 것이다. 1680 년 이후 사실상 완만하나마 모든 인구 증가가 정지되었다 ; 그리 32) 다음과 같은 논문들의 제목에 잘 나타나 있다. Le Goff , , L'h is tor ien entr e l'eth o log ue et le futur olog ue ; ( F. Furet, ) , 같은 책 . 33) Les pay s a ns de Lang ue doc, 축약본, 1969, pp. 128-9.

고 이제 주요한 사실, 전정으로 새로운 사건이 생긴다-인구는 지난 2 세기 이래 처음 장기 지속적 하락을 시작하였다.마 ) 즉, 1680 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꽁종뛰르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 는 무엇이 이러한 농업 주기를 일으켰나 하는 점이다• 르 콰 라뒤리는 엄밀한 의미의 경제적인 힘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힘까지도 고려하고 있지만, 후자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듯하다. 〈 문화가 미리 예견하고, 또 결정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35) 랑그독의 농민들은 인구 증가 에 따른 토지의 세분화물 의식적이건 또는 무의식적이건 염려하면서 인간으로서의 대처 방안을 모색했던 것이니 그것이 바로 인구 조철이라 는 소극적인 방법이었다. 다시 말해서 농업 생산량의 증대와 인구 감소 라는 두 가지 길 가운데에서 프랑스의 농민들은 맬서스의 길을 택한 것이다오 그리고 신앙심이 예상의로 깊었던 이들에게 있어서 그 구체적 인 방법은 결혼을 늦게 하는 것이었다.

34) 위의 책, p. 352. 35) 위의 책, p, 365. 36) 위의 책, p, 370.

르 콰 라뒤리의 연구는 〈 맬서스적 역사 해석〉이라는 타이틀을 부여 받았지만, 그는 결국 아리애스나 구베르와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 셈이었 다. 그의 지적 경로 역시 경제 -인구一심성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나 그를 아날의 대표적인 역사가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가장 브로델 적으로 장기 지속적인 관점에서 경기 변동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이 다. 서론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사론을 밝히고 있다. …… 물질사나 계량사는 그 자체가 아무리 철저하고 엄격하다고 해도 나를 완전히 만족시키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필수 불가결하지만 여전히 투박 하기만한 골조를 제공할 뿐이었다. 나는 팽창이 부딪치는 맬서스적 경계선이 단지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평범한 지식을 가지고서도 알고 있었 다. 나는 심성의 거대한 장애물을 감지하고 있었다. 나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구속적이라 할 수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경계선을 예견하고 있었으며 조금씩 조금씩 나는 절망적인 반란의 연대기를 통하여, 그리고 농촌에 있는 종교의 피어린 역사를 통하여 이것들을 식별하게 되었다. 현재 로서 가용한 수단을 동원하고 하나의 인간 집단이라는 제한된 테두리 속에 서, 나는 전체사라는 모험에 뛰어들었다 .3 7) 연구 방향과 목적 등, 우리는 1966 년 당시 젊은 역사가들을 지배했던 대표적인 언어들을 다시 들을 수 있다. 1973 년 브로델을 계승하여 Coll- ege de France 에 들어간 르 콰 라뒤리는 〈 움직이지 않는 역사 〉 라는 도전적인 취임 강연을 하였다 . 전통적인 사건사, 가장 최신의 신경제사와 아울러 마르크시스트 역사학을 비판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아 말하고 있다• 계급 두쟁 에서보다, 경제, 사회 관계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생물학적 사실에 대한 우선적인 분석에서, 적어도 내가 연구 대상으로 삼은 기간에 있어서만큼은 집단사의 원동력을 찾아야 한다. 38) l#1] 기에서 l 앙1 l 기에 이르는 기간(더 정확히는 1320 년에서 1720 년까지 ) 에는 경제가 주인이라기보다는 〈 하인 〉 이었으며 , 3 9) 랑그독의 농민에게서 보듯이 사람들은 마르크스를 따르지 않고 맬서스를 따랐다는 것이다. 이 떼기 중 인구와 농업 생산면에 있어서 경기의 변동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역사는 〈 불변의 엄격한 천장으로 언제나 되돌아가려는 추세 〉 룰 보여 주었기 때문에 〈 움직이지 않는 역사〉라는 것이다. 인류학의 영향이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역사는 이미 역사가 아니라는 소불의 비판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논쟁이었다. 인간 울 대상으로 하는 심성사도 그 인간이 어떠한 인간이냐에 따라, 죽 피동 37) 위의 책, p. 10. 38) , A nna/es, 1973, p. 675. 39) 위의 논문, p. 689.

적이고 소극적인 인간일 경우 물적 역사로 변할 소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으로 생각된다. 르 고프는 새로운 역사학을 전파하는 데 앞장 선 아날리스트이다. 1974 년 그는 P. Nora 와 함께 새로운 역사학의 방법과 영역을 정립하는 작업을 하였으며, 1978 년에는 R. Char ti er 와 J. Revel 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역사』라는 사전을 편찬하였다. 그 밖에 그는 심성사에 관한 교범적인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40) 중세사가로서 197N . 『또 하나 의 중세를 위하여 : 서양의 시간, 노동 그리고 문화』를 발표하였다. 그에 게 있어서 새로운 중세사는 문화인류학적 역사였다. 책의 표지에 그 내용이 잘 소개되어 있다. 또 하나의 중세, 그것은 무엇보다도, 시대 착오에 빠지지 않은 채, 우리에 게 우리 자신들의 기원에 관한 몇 가지 열쇠를 회복시켜 준다. 그것은 우리 의 신화를 살찌우는 제반 현실-굶주립, 숲, 방랑, 반곤, 거지생활, 문등 병, 페스트, 죄악, 약자와 빈자에 대한 강자의 지배-에다가, 언제나 우리 의 삶의 터전인 도시, 국가, 정부, 대학, 물레방아, 기계, 시간과 시계, 책, 포크, 속옷, 인간, 의식 그리고 궁극적으로 혁명과 갇은 창조물을 연결시킨다. 또 하나의 중세, 그것은 나아가 특히 새로운 역사의 특권적 영역이다. 일상 의 역사, 장기간의 역사, 심층의 역사, 상상의 역사. 이 중세에 사람들은교회 의 시간, 상인의 시간, 노동의 시간과 같이 다양한 리듬을 가전 시간 속에서 살았다. 이 중세에 사람들은 육체 노동과 지적 노동 사이의 틈을 더욱 심화 시키면서, 서서히 자연을 지배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경제적, 기술적 조건 속에 서 일하였다. 이 중세에 문화는 새로운 엘리뜨들의 온상이었던 대학의 스콜 라적 정교함 사이에서, 그리고 교회 카스트의 현학적 문화와 성직자들의 다각적 투쟁에 부딪힌 민중 문화 사이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발전해 나갔 다 .41) 40 ) • 41 ) Pour un autr e May en Ag e Temp s, trau ail e t cultu r e : 18 essais , 1977. 책 표지 에 있는소개 글.

그의 연구에서 특히 주목을 끈 것은 시간의 상칭성이었다• 1#1] 기에 가서야 비로소 하루가 2 4-'-]간으로 나뉘는 노동의 시간이 등장한 것은 결국 근대 경제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부와 향락에 대한 태도, 즉 심성의 변화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42 ) 그리고 이 새로운 시간을 지배 하는 부르주아지가 사회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시켜 나갈 수 있었다 .4 3 ) 이러한 연구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심성사는 얼어붙은 과거를 연구하기 때문에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발현이라는 일반의 비판과는 달리, 역사가의 문제 의식은 언제나 현재와 과거의 변증법적 관계를 규명하는 데 있었다. 44)

42) 아리애스는 이를 십성사 연구의 한 사례로 들고 있다. 43) Le Goff , La civ il i s a tio n de ['occid e nt medie u ale, 1977 / 1984, p. 204. 44) 과거와 현재의 변증법이라는 멋진 말은 브로델의 것이다( 〈 H ist o ir e et soc io- log ie> , E crits sur l' his toi re , pp. 103-4). M. A gulh on 은 심성사와 이념사를 구분하여 심성사를 보수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고 있다( 〈 Co nflits et con- tra di ct io n s dans la France d'aujo u rd' hui >,A nnales, 1987, p. 600 : 아리 애스는 십성사가 근대로의 이행이라는 문제에 관십을 가진다고 말하고 있다(〈 L' hist o ir e des menta lites>,p . 420).

그리고 심성사 연구는 독자들에게 홍미를 제공해 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뒤바의 〈 결혼의 탄생 〉 처럼, 르 고프의 〈 연옥의 탄생 〉 일 것이다. 초기 기독교 이래 신학자들은 지상에서의 죄악을 사후에 사면해 주는 가능성을 모색해 왔으나, 그 장소 죽 연옥의 구체적인 위치, 연옥에 가는 시기, 방법 등의 문제는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르 고프에 의하면 12 세기에 가서야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역사가에 의하면 비로소 연옥이 〈 탄생 〉 한 것이다. 그러면 왜 12 세기에 사람들은 천당과 지옥이라는 이원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는가?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시간에 대한 논의에서와 비슷하다. 죽 기존의 이원론 적 사회 구조에 새로운 중간 계층 즉 도시민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러는­ 것이다. 아울러 이렇게 탄생한 연옥 덕분에 이제 사자와 생자간의 유대 가 깊어지고、 사자를 위한 기도, 시주, 미사 덕분에 교회는 신자들에

대한 영향력울 증대시킬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45) 매우 낭만적인 이야기 이지만 시각은 분명하다.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연옥의 존재 여부 一 — ­ 신학적 차원에서의 - 가 아니라 연옥이 〈 일상의 사람들 〉 속에 들어온 것이라는 사회사적 문제였던 것이다 . 신종 계약의 상칭성 연구에서 르 고프는 사회과학과의 접목을 시도한 다. 이 의식에서 가신은 말로써 주군의 부하가 될 것을 선언하고, 자신의 손을 주군의 손 사이에 내밀면(즉 가신은 주군보다 더 많은 노동울 한다!) 주군은 그의 손을 잡는다. 그 후 주군과 가신은 서로 생명의 입맞춤을 나누며, 마지막에 가서 주군은 가신에게 봉(그 상징물)을 부여하는 것으 로 되어 있다. 이러한 언어, 행동, 물건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통해서 르 고프는 주군과 가신의 관계를 규명하는데, 충성의 선서라는 일 단계 의 불평등한 관계에서 입맞춤이라는 평등한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이 의식에 담겨 있는 상칭성이라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이러한 분석은 서구 봉건제에 담겨 있는 계약성, 호해성 등의 요소를 이해하는 데 도움 울 준다. 그러나 그가 봉의 수여를 시여 /반시여라는 모델로 파악한다든 지, 신종 계약을 천구, 양자 모델이 아니라 가족 모델로겨 그리고 그 계약 의 파기를 이혼 모델로 파악하는 등은, 비록 인류학과 역사학을 결합시 키려는 노력의 일환이겠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46) 이러한 몇 가지 예는 심성사에 내포된 역사상을 극명하게 노출시킨다. 르 고프의 말을들어 보자. 나는 역사가 더욱 과학적으로 되어가면서 동시에 하나의 예술이 되기를 기원 한다. 역사는 문서, 생각 , 자료, 상상력으로써 만들어진다 .4n 45) 르 고프의 저서의 La nais sa nce du p u rg a t o i re 에 대한 인터뷰, His toi re ma ga z ine, 0°24, 1982. 46) Le Goff , , P our u.n aut re Maye n Ag e, 뒤비는 그의 Guerrie rs et p a y sans (l 973) 에서 중세의 세금을 don( 시여 )라는 측면에서 분석하 고 있다. 그에 의하면 〈경제적 실체는 부차적인 것이었고 진정한 구조는 정신적 이며 초자연적인 것이었다 . 〉(아리애스 ,p , 412), 47 ) Pour un aut re Moy en Age , p, 7.

이러한 고백은 비단 르 고프뿐만 아니라 심성사의, 나아가 프랑스 역사학의 한 특징을 잘 드러내 준다고 생각된다. 이제까지 살펴본 심성사는 그것이 페브르적이건 불로끄적이건 모두 〈 질적 〉 역사리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이미 구베르의 경우에서 드러 났듯이 라부르스의 사회경제사 아래에서 훈련받은 역사가들은 역사를, 나아가 심성사까지도 계량화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또한 〈 장기 지속 〉 이 하나의 〈 감옥 〉 으로 변하여 역사 자체를 응고시키고 있음을 우려한 역사가_ _ 주로 막시스트-들은 구조와 변화를 변증법적으로 결합시 킬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한 이중적 요구에서 나온 것이 바로 보벨 M. Vovelle 의 유언장 연구였다. 브로델보디는 라부르스의 영향을 더 받았 고, 마르크시스트이면서 아날에 참여하고 있다는 그의 지적 회로가 우선 그의 연구에 내포된 성격을 암시해 준다. 1971 년 제출한 학위논문 「 18 세기 프로방스 지방의 바로크적 신앙심과 비기독교화요근 이 지방 대학 교수를 일약 선구적인 〈 죽음 〉 의 역사가로 만들었고, 급기야는 소불 A. Soboul 의 뒤를 이어 쏘르본의 혁명사 강좌를 계승하게 해준 대작이었 다. 그의 출발점은 혁명력 2 년의 격정적인 비기독교화 움직임, 죽 〈 짧은 시간〉을 〈 긴 시간 〉 과의 연관 속에서 규명하자는 것이었다 . 4 8)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벨은 1680 년에서 1789 년까지 프로방스 지방에서 작성된 유언장 중 18000 여 개를 검토하고 그중 2000 개를 표본을 추출하 여 이를 시간적, 공간적, 사회 계층적으로 분석하였다. 유언장은 전반적 으로 죽음에 대한 집단적인 태도를 증언해 주는 동시에, 기재된 ― ―망자 자신이 했건 또는 공증인이 대신 했건 一 —-세부 내용의 변화 추세는 곧 신앙심의 변화를 드러내 준다. 구체적으로 보벨은 다음과 같은 지표 를 사용하였다 : 신앙 고백, 마리아와 성자 숭배, 장례 의식, 죽음에 대한 감정 표현, 미사 요구량, 매장 장소, 수도원, 교회, 신도회, 병원, 학교 등지에의 유층노, 유언자의 이름에 담겨 있는 종교적 흔적, 성직자 충원 48) Vovelle, , L a nouvelle his toi re , p. 338 : Pie te baroq ue et dichr is tian is a ti on en Provence au X11 e siec le, 1973 / 1978, 축약본, p. 16.

상황 등. 특히 학계를 놀라게 한 것은 장례 행렬에 사용된 초의 총 무게 가 1770 년까지는 증가하다가 그 후 감소 추세를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 까지 종교적 심성의 변화를 규명하는 한 증거로 사용되었다는 점이었 다. 이렇듯 그는 〈 모든 〉 지표의 시간적, 공간적, 계층적 분석을 통하여 1 찌기에, 즉 혁명 전부터 이미 종교적 무관심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 다는 사실을 계량적으로 확인하였다. 그러나 그 변화는 직선적이지 않았 댜 보벨은 다음과 갇은 시대 구분을 제시한다. -1680~1710 : 바투적 화려한 종교 관행의 만개 -1710~1740 : 첫번째 굴절 —17 40~1760 : 안정화, 때로는 복귀 현상 -1760~1790 : 기존 종교적 태도의 와해 49)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더욱 폭이 넓은, 따라서 비기독교화는 그중 하나의 측면에 불과한, 변화가 일어났다. 18 세기의 프로방스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의 이미지가 변하였 다. 이러한 이행을 확인시켜 주는, 비전과 같이, 일련의 행위, 제식 등이 근본 적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1710 년보다 1780 년에 더 홀로, 그리고 저세상에 대하여 덜 확신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세상에 대하여 더 이상 신뢰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이러한 생명 행위의 본질적 변화가 아마도 이 연구의 가장 중요한 성과일 것이다 .50) 그런데 이것이 새로운 발견일까? 비기독교화가 혁명력 안건에 갑자기 시작되었다고 믿는 사람도, 그리고 1 양1 ] 기에 비기독교화가 서서히 진행 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보벨의 〈발견只본 사실상 질적 인식을 계량적으로 확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49) 위의 책, pp. 266-8. 50) 위의 책, 326.

그의 연구가 가치를 잃는 것은 아니다. 보벨은 기존 심성사의 질적 단계 룰 뛰어넘어 쇼뉘 P. Chaunu7} 말하는 소위 〈 세번째 수준 〉 , 즉 계열사 나 계량사를 개척한 선구자였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 은, 쇼뉘도 말하듯이 새로운 자료를 발굴, 이용한 데 있었다. 51) 마치 퓌레 F. Fure~ 도마르 M. Daumard7} 결혼 계약서에 기재된 혼인 지참금, 가족 재산, 거주지, 직업, 사인, 증인 등을 계량적으로 분석하여 l 양1 ] 기 빠리 지방의 사회 직업표, 이동률, 문자 해독율 등을 도출함으로 써 사회사의 계량화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유언장을 보벨 이 처음 활용한 것은 아니었다. 과거 법제사가들이 소규모로 유언장을 참조한 바 있으며, 그들의 관심은, 예를 들면 양초는 주로 그 생산면에, 그리고 빈민의 옷은 그 천의 성격 등에 주로 치우쳐 있었다 . 따라서 보벨의 연구가 가지는 특징은 18000 여 개에 달하는 유언장을 계열적으로 통계 처리하여 궁극적으로 사람이 죽음 앞에서 가지는 태도가 어떻게 변천하였나 하는 심성적인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였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특칭은 아리애스의 경우와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중세 이래 현재까지 인간이 죽음에 대하여 가져온 태도를 비교 연구할 때, 아리애스가 사용한 자료는 문학 작품, 무훈시, 회고록, 종교 행적 기록, 비문, 기념물, 성상 등 매우 다양하였다. 그러나 이들 자료들은 계량화가 어려운 자료였다. 이러한 질적 자료로부터 아리애스는 4 가지 단계를 도출한다 : 11~12 세기까지 사람들은 스스로의 죽음을 준비했다 ; l 양 1] 기 부터 18 세기까지는 사회 상층부로부터 죽음의 개인화가 이루어진다. 죽음의 순간이 바로 개별적 심판의 시기로서 높은 가치를 부여받은 것이 다 ; 이러한 〈나의 죽음 X 본 l~➔ l 기 이후 〈너의 죽음 〉 으로 바뀌어 간다 . 묘지에 대한 숭배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 마지막 단계는 오늘날 미국 등지에서 볼 수 있는 금지된 죽음이다. 죽음 자체가 터부시됨으로써 사람들은 병원에서 비밀스럽게 죽어간다는 것이다. SZ) 1500 년이라는 초장 51 ) P. Chaunu, , M elang es Bra 叫 el, p. 116. 52 ) Vovelle,

마르세이유에서의 미사 요구량

태여남도자자의챠와 기1 ’700 (98 %년765010000 7 ) 이0 0전 171*00` 0O 、4`.’2 100 ‘i- / l32· 오i00 i _314·00i li J` 45.令`00 i `56100 i\. .67•·\ `00` .0 . f `.\.翼78 00 f 89 00 ..... 위 표의 범례 아래 표의 범례 •••- •..·皇 남총계자 ♦=-= “♦ 귀부르족주 아 ♦--♦ 여자 0···-O 관리 및 자유직업인 o-- -o 대상인 ....... 수공업자 및 소상인

사회학..적..~ 이분 석 ,17:0:l ~남자만의.... 경우\

60 5400 kr 1700 년 1이70전0 171000 2100 32o0 43-00 5400 56-00 76.0o 8fo0 - 8900 1이7전00 11700 0 2100 3200 3400 4500 5600 7600 7800 9800

et lectu r es differe nte s >, A nnales, 1976, pp. 126-7. 〈죽음 에 대하여 〉 라는 주제로 마련된 이 특집호에는 이 밖에도, J. -C. Sch mitt, ; P. Chaunu, : R. Chartie r , ; D. Roche, ; M. Crouz et, : C. Herzli ch , ; R. Gu idier, , < faire> , < pa rfa ire> : concep tua lisa ti on et effe c tu a ti on de pra tiq u es ritu ll es melanesie n nes(Fata l eka, Salomon ori e- nta l es) 등의 논문이 실려 있다.

기적 관조에 대해서 세부 사실을 들어 비판하는 것은, 보벨 자신도 말하 고 있듯이 불필요한 일이다. 장기 지속적인 조감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 서도 매력을 발산하지만, 우선 전체적으로 인상주의라는 평을 면치 못한 다. 보벨의 연구에는 앞의 페이지에 예시한 것과 같은 도표가 무수히 등장하는 반면, 아리애스의 『 죽음 앞의 인간』에는 단 한 개의 도표도. 나오지 않는다. 또한 사회사가에게 언제나 중요한 문제는 심성적인 문제 의 경우에도, 위의 표에서 보듯이, 사회의 물적 토대, 사회 집단 등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보벨도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하층민을 충분 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을 자인하고는 있지만 53) 그의 입장은 분명하였 으며, 바로 아러한 측면에서 그는 아리애스를 비판하고 있다• 즉, 아리애 스의 심성사는 경제, 구조, 생산 양식 등과 변증법적 교류가 막힌 〈 자율 주의적〉 의면을 띠면서도, 종교 제도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는· 것이다. 〈아리애스에게 있어서는 카톨릭적 죽음도, 기독교적 죽음도 없다. 〉 54 ) 문제는 그것이 질적이건 양적이건 도출된 자료를 해석하는· 일이다. 보벨의 유언장은 종교심의 되조를, 다시 말하면 비기독교화를 입증하고 있나? 아니면 둘뤼모J. Delumeau7}-말 하듯이, 그와는 반대로 미신적 죽음을 걸러낸 종교심의 내적 심화를 반영하는가 ?55) 아니면 아리애스가 시사하듯이, 종교심과는 관계없이, 17 세기말부터 시작된 자식과 가족에

53) Vovelle, P 碑 baroqu e •… , p. 300. 54 ) Vovelle, 위 의 논문, p. 129. 55) 위의 논문, p. 122.

대한 태도의 변화, 달리 말하면 〈 너의 죽음 〉 을 반영하는가 ? 56) 보벨 자신 의 문제 제기와 함께 고려할 만한 것은 르 콰 라뒤리의 회의주의였다. 그는 〈 보벨 덕분에 〉 종교적 심성에 대한 진정한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격찬하면서도, 비기독교화라는 대담한 해석보다는 종교적 무관심, 종교심 의 변화, 또는 구체적이고 바로크적인 예수에서 추상적인 하느님으로의 신학적 관점의 변화, 아니면 그저 단순히 공증인의 태도 변화라는 소박 한 해석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은 반증을 들고 있다. 〈 토리노 부근의 치에리에서 16 세기에 공증인들은 어떠한 종교적 인유도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에리의 주민 들은 기독교의 영향하에서도 전적으로 종교적이며 카톨릭으로 남아 있지 않았는가? 〉 57) 어쨌든 보벨의 연구는 죽음에 대한 계량적 연구의 효시였다. <7, 8 년 전 이래 죽음에 대한 연구에 한순간이라도 끌려 보지 않은 역사가가 있을까? 〉 58 ) 그중 대표적인 사람은 보벨의 방법론을 사용, 앙쥬와 빠리에 서도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프로방스에서와 동일한 추세를 보여 준다는 것을 확인한 르브랭 F. Lebrun 과 쇼뉘 P. Chaunu 였다. 197& 년 아날은 죽음에 대한 공동 연구를 마련하였다. 르 콰 라뒤리는 죽음에 대한 새로 운 역사가 프랑스적 현상이라고 내세웠지만 ,59) 그 후 프랑스적인 죽음은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198~ 빈 선구자 보벨은 이러한 죽음에 대한 연구 의 국제화를 확인하면서 희열을 맛보았을 것이다 .60) 지금까지 우리는 대표적 심성사가들을 통하여 심성사의 면모를 살펴보 았다. 〈 심성 〉 은 새로운 역사가가 병합한 새로운 영토일까? 기본적으로 〈 팽창주의자〉인 역사가들은 심성사를 역사학의 한 분야로 제한시키지 않는다. 심성사는 역사학적 실체에 적용시킬 수 있는 하나의 접근 방법 56) 아리애스, L'e nf a n t et la uie fam i lia l e s sous l'Ancie n Reg ime , 1973, p. 7 ; 보 벨, 위의 책, p, 145. 57 ) 르 콰 라뒤 리 , Y a 크-i l une nouvelle his toi re , p. 9. 58 ) P. Chaunu, , A nna/es, 1976, p. 29. 59) Le ter rito i re de l'hi s toi re n , 1973, p. 402. 60) Vovelle, , A nna/e s , 1982.

이라는 것이다 .6 1) 예를 들면, 이러한 심성사적 시각으로 경제를 바라보 면, 〈 경제적 생활은 결국 전반적인 사회적 진행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상부 구조를 형성하고 사회적(예를 들면, 혈연 관계), 윤리적, 종교적 목적에 종속된다 〉 는 것이다 . 또한 정치적 심성사는 아귈 롱 M. A gu lhon 의 전통적인 사회 단체 (Soc i ab ilit e) 연구에서 예시되었듯 이, 엘리뜨의 정치 이념이 토착적인 지방 문화에 의해서 굴절, 홉인되는 과정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심성사는 전체사의 한 파편이 아니었다. 심성사, 죽 심성적 시각은 심성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아날의 표어인 경제, 사회, 문명을 결합시키는 하나의 총체적 시각이었던 것이 다.

61) A. Burgu iere , , D ic tion nair e des scie n ces his tor iq u es, pp. 52-60.

또한 심성사는 물질주의에 의해서 인간이 배격되고, 사회사에 의해서 개인이 생명력을 상실해 가고 있을 때, 인간을 통해서__그들이 엘리뜨 이건, 무명씨이건 그들의 눈에 비친__一잃어버린 세계를 재발견하려는 인간주의의 한 표현이었다• 따라서 심성사를 보수주의적 이데올로기로 평가하는 것은 그 본질적 의미를 편협하게 해석한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관심은 기본적으로 현재, 나아가 과거에서 현재로의 이행이리는· 문제가 촉발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도 우리는 문제사, 현재사 등 아날의 전통이 심성사에서도 지속됨을 확인하게 된다.

3 우상 파괴 심성사는 물질보다는 정신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법칙 정립적 경향보 다는 사실 기술적 경향을 동반하였다는 점에서 기존의 〈 과학적 〉 인 역사 와는 다른 역사 인식론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심성사라는 영역을 〈 사실 과 예 〉 를 통해서 개척하면서, 새로운 세대는 자신들의 선택을 인식론적 으로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사실 아날의 초기 세대는 자신들의 역사학을 이론적으로 정교화하는 데 별 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둘의 사론 자체는 사료, 객관성, 법칙의 중압으로부터 역사가와 역사를 해방시킨다는 단순한 것이었고,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깊은 철학적 사색에 의거하지도 않았다. 철학자로 서는 아롱R. Aron 이, 그리고 역사가로서는 마루H. I. Marrou 등이 독일의 역사비판철학을 소개하면서 역사의 주관성을 강조하였으나 ,I) 대개의 역사가들은 철학적 논의에 무관심하였다. 기본적으로 아날의 역사학은 철학과의 결별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 다. 개념 정의, 논리화 등은 인간을 왜소화시킨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 었으니, 달리 말하면 아날의 역사학은 반(反)철학적이기도 하였다.

1) H. -I. Marrou , De la connais sa nce h ist or 떠 ue, Pa ris, 1954 : R. A:ton , Intr od - ucti on a la ph ilo s op h ie de l'his toi re . essai sur Les lim ites de l'obj e c ti uit e h ist or 떠成, Paris, 1948 : La ph ilo s op h ie criti qu e de l'his toi re , Pa ris, 1969. 페브르는 아롱의 『 역사철학 입문 』 이 자신의 생각을 철학적으로 표현했다는 평을 하였다. (

,A nnales, 1953, p. 516).

물론 〈 과학성 〉 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의 합치 여부는 프랑스에서는 너무나도 쉽게 결론이 나고 말았다. 〈과학 혁명〉 의 결과 자연과학의 법칙이라는 것도 하나의 개연성에 불과한 마당에 역사학이 스스로 〈 과학 〉 임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 로 아날의 초기 역사가들에게 있어서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역사학의 과학성이 더욱 엄격해전 것은

아니었다. 대신 자연과학의 엄격성이 유연해진 것이었다. 미미한 차이이 지만,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기존의 실증적 역사가들이 역사학의 열등 의식을 느끼며 더욱더 철저히 자연과학을 닮고자 애썼던 것괴는- 정반대 의 결과를 낳았다. 새로운 역사가들은 주관주의의 세계를 드나드는 데 매우 당당했던 것이다. 주관주의는 자료의 한계를 극복하고 또 역사학이 단순한 사실의 나 열, 고증에 머무르는 것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과거를 〈 소생 〉 시키 기 위해서는 역사가의 숨결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 삶을 총체적으로 소생시킨다 〉 라는 미슐레의 주관주의는 〈 사실을 있는 그대로 〉 라는 랑케의 교리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주관주의는 역사학을 〈 실증주의 〉 로 몰고 갇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공시적이거나 통시적이거나를 막론하고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모델, 법칙 등울 도출한다는 것은 사실 검증에 얽매여 있던 전통적 역사 가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말하면 전시대적인 낭만주의로 치달 을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1929 년 아날이 창간된 후 역사가들이 점점 사회경제사에 매료되면서, 그리고 이러한 경향이 마르크시즘과 연계되어 심화되면서, 그 가능성이 점차 농후해졌다. 〈 과학성 〉 이라는 말이 애매한 가운데에도 역사가들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사건 기술적인 심성사는 역사의 〈 과학성 〉, 사건사와 비사건사, 구조와 변동, 구조사와 서술사 등 그간 역사가들을 지배해 온 이원론적 언어 체계를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베인 P. Ve yn e 의 인식론 적 도전은 가장 파괴적이었고 가장 현학적이었다. 베인은 1971 년의 『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에서, 역사는 과학이라는 전래의 우상을 파괴하였다. 〈 설명〉과 〈이해 〉 에 대한 논쟁과 〈 사건사 〉 와 같은 아날의 언어둘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단언 하고있다. 역사는 과학이 아니며, 과학으로부터 많은 것을 기대할 필요도 없다; 역사 는 설명하지 않으며,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다 ; 게다가 2 세기 전부터 많이

이야가되어 온 역사라 는 것 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 그러면, 역사란 무엇인가? 두 키디데 스 에서 막 스 베버 또는 마 르 끄 불로끄에 이르기까지 역사가들이 자신 들 의 자료에서 나와 〈 종 합 〉 으로 나아가며 실제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 과거 인간들의 다양한 행동과 다양한 창조물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수행된 연구? 사회 속에 있는 인간에 대한 과학? 인간 사회들의 [과학 ] ? 이보다 훨씬 못하다 ; 문제에 대한 대답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후계자들이 찾아낸 이후 2 200 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 역사가들은 인간을 행위자로 하는 진실된 사건 을 이야기한다 ; 역사는 진실된 소설이다. 21 휘 인용문에서 우리는 역사에 대한 페브르의 - 불로끄의 정의가 내팽개 쳐졌음울 볼 수 있다. 그러면 베인은 과학성의 정반대편에 위치하면서 낭만주의의 수호신처럼 빛을 발하고 있는 미슐레를 찬양하고 있는 것일 까? 그렇지도 않다. 그는 역사란 필연적으로 역사가를 매개로 하기 때문 에 단지 부분적인 역사만이 존재할 뿐 3) 〈 삶의 총체적 소생 〉 이라는 것은 결국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4) 그렇다면 당시 지배적 인 사론이 었던 구조사는? 〈 1789 년이나 1917 년의 혁명과 같은 몇몇 사건들이 심층적 인 원인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매우 옳다. 그러나 역사가 결국에는 부르 주아지의 상승이나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사명과 같은 심층적 원인에 의해서만 배타적으로 인도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너무나 아름답다.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표면의 소용돌이 저변에 있는 대규모 흐름을 분별해 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심층을 가지고 있지 않다. 〉 5) 여기에서 베인은 브로델의 언어를 가지고 그를 비판하고 있디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베인은 어느 특정 역사 서술 경향을 비판 한 것이 아니라, 역사학 그 자체에 대해서 회의를 표명한 것이었고, 그 직접적인 동기는 〈 과학 〉 과 〈 전체성〉을 동시에 표방하는 아날의 역사학이 2) P. Vey ne , Comment on ecrit l'his toi re , 축약본, 1971, pp, 10, 171 . 이 책에는 , Fair e de l' hi st- oire , I, p, 7 1.에서 베인은 페브르의 인상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5) 위의 책, pp, 78, 151.

었다. 역사학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며, 역사적 설명과 과학적 설명 사이 에는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는 주장, 그리고 사건 과 비사건 -〈 비사건이란 아직 비사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건 〉 — 에 대한 해석, 역사적 설명이란 소설적인 플롯 ——〈 매우 인간적이고 아주 조금밖에 과학적이지 못한, 물질적 원인과 목적, 우연 등의 혼합물 〉 ―에 불과하다는 주장° 등은 반세기 동안 아날이 이루어 놓은 인식 론적 성과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학과 회의주의는 일관된 논리를 수반하고 있지 못하다. 그는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역사가 과학이라는 가싱적 주장에 대해서 그는 역사란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반박하면서도, 역사가 이야기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역사는 〈 과학적 〉 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미슐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소생, 초혼이 아니다. 역사 는 과학, 분석, 개념화이다. 〉 7) 이렇듯 역사학의 현실과 당위를 혼동하면 서 그가 결국 의도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아날이라는 서클의 신비를 벗기자는 것이었다전 이러한 폐허 위에서 구원의 손길은 사회학, 인류학, 비교사에서 왔다. 역사란 본질적으로 이야기이지만 역사가는 이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 사회학적 개념을 이용하여 이야기를 구조화해야 〉 한다는 것이었다산 그러면 이러 6) 위의 책, pp. 24, 37, 42, 67, 113, 117. 7) Vey ne , , A nnales, 1972, p. 669. 8) 베인의 책 표지에 실린 코멘트. C. Dubar, 〈 베인의 책은 먼저 그간 역사와 인간 과학에 대해서 받아들여진 많은 이념들을 부수기 위해서 만들어진 전쟁용 기계, 거대한 탈신비화의 작업으로 여겨진다 〉 ; M. de Certe a u, 〈 엑스에서 올라온 다비 드는 빠리식의 분파적 논쟁에 대항해 싸운다…… 〉 . 아날리스트란 사실 빠리의 사회과학 고등 연구원에 있는 〈소수〉의 역사가들인데,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 • 출판 매체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드 쎄로또의 분석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9) Vey ne, 위의 책 , p. 197 ; 이는 사회학적 역사의 정의로서 그의 책, Le pa in et le cirq u e , socio lo g ie his tor iq u e d ’ 血 plu ralism e p ol i t떠 ue, 1976, p. 10 에 나와 있다.

한 〈 개념사 〉 의 모델은 누구일까? 베인은 막스 베버를 들고 있으며, 아날 의 제 1 세대 가운데에서는 불로끄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10 ) 베인의 논술은 자연히 아날의 안팎에서 적지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 다. I“ 그중 가장 진지한 것으로 판단되는 아롱의 논평을 들어 보자. 〈 어쨌든간에 서술이라고 하는 것이 적법한 역사의 장르라고 하는 평범한 주장이 무슨 이유로 놀리움과 분노를 자국할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게다가 베인은 개인적으로는 서술을 좋아하지 않으며 인문과학을 비판하 면서도 아날 학파에 속하고 있는데……. 〉 12 ) 이 철학자는 오래간만에 역사가 사이에서 자신의 지지자를 발견한 셈이다. 도대체 철학자의 눈으 로 보기에 역사가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은 전혀 과학적이지 못하고 단지 자리 명성을 얻기 위한 파벌 싸움에 불과했던 것이다 .13) 더욱이 아롱에게 있어서 역사가 과학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역사학의 열등성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역사학은 과학성 이의의 분야에서, 다시 말하면 뼈와 살을 가진 인간을 이야기하는 데서 그 우월성을 찾아 야 한다는 것이었다 .14) 역사학이 이제 그 무분별한 팽창주의에서 벗어나 자신의 고유한 영역으로 복귀하자는 말은 곧 브로델적 전체사에 대한 비판이었으며, 동시에 〈 역사학의 분해〉에 대한 인식론적 설명이었다. 베인의 도전은 역사가들을- 〈 뒤혼들었다〉 .15) 그것은 인식론적인 자국 때문이 아니라, 단지 스스로의 신비가 벗겨지는 데 대한 본능적인 거부 감 내지 부끄러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10 ) Vey ne , , p . 67. 11) 아롱의 논문 의에도, M. de Certe a u, , A nnales, 1 972 : 또한 Ve yne 의 Le pa in et le c irq ue 에 대해서도 논쟁이 벌어졌었다(J. Andreau, P. Sch mitt, A. Schnapp ,

, A nna/es, 1978. n°2.). 12 ) Aron , , A nna/es, 1971, p. 1350. 13 ) Aron , 위 의 논문, p. 272. 14) Aron , L' his tor ien entr e l' e th n olog ue et le fui urolo g ue 의 후기, p. 292. 15 ) de Certe a u, 위 의 논문, p. 398.

〈 새로운 역사 〉 의 조류 가운데에서 베인이 제시한 길은 불로끄의 사회 학적 역사였다. 따라서 그의 논지에는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기는 하지 만, 그의 견해는 60 년대말부터 고개 들기 시작한 아날의 새로운 진로 모색과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 죽 〈 과학적 〉 인 경제사가 쇠퇴하고 인류학적 역사가 부상한 점, 그리고 인류학적 역사의 선구자로서 그간 추앙받던 페브르가 격하되고 대신 그간 잊혀져 가던 불로끄가· 다시 각광 울 받은 점 말이다. 그러나 아날이 국제적인 호기심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당시, 내부로부터 어떠한 영광을 파괴한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문 역사가는` 아니지만 출판계에서 상당한 영향 력을 행사하고 있던 P. Nora 는 1974 년 〈 사건의 복귀 〉 라는 말로써 베인 의 주장에 화답하였다• 노라의 특수한 위치, 마찬가지로 베인이 빠리의 서클에 몸담지 않았다는 사실 등이 이러한 우상 파괴를 시작하는 데 적절했던 것처럼, 마찬가지의 입장이 철학자인 리꾀르 P. R i coeur 로 하여금 역사학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것을 가~노케 해주었을 것이다. 리꾀르에게 있어서 이러한 〈 서술로의 복귀 〉 는 영미의 신실증주의를 둘러싼 논쟁에서, 특히 드레이 W. Dra y의 『 역사의 법칙과 설명 』 ( 1957) 에서 이미 논의된 바 있는 현상으로서 프랑스만의 고유 현상은 아니었 다 .16) 그러나 그는 아날 학파와 신실증주의와는 한 가지 차이점이 있음 을 지적한다. 즉, 신실증주의에서는 역사적 설명과 서술적 이해 사이의 인식론적 단절에서부터 이 논의가 파생된 데 반해, 프랑스에서는 역사학 의 대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인데 J7) 이는 매우 타당한 지적으로 생각된다. 결국 철학으로부터 해방된 역사가들이 탐험한 곳은 구체적인 영토였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역사 인식론적 논의가 드문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리꾀르는 아날 학파의 대표적인 저직들을· 해부하면서 그들의 소위 〈과학성〉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서술성〉을 보여 주고 있 다. 브로델의 『 지중해』에 대하여, 그는 〈장기 지속의 역사라는 개념 그 16 ) P. Ric o eur, Temp s et recit s, I, Pa ris, 1983, p. 160. 17) 위의 책, p. 138. 18) 위의 책, p. 304.

자체가 플롯으로 짜여전 사건으로부터 연유한다 〉 라고 말하면서 ,m) 〈 아날 에 동참하는 다른 프랑스 역사가들에게서도 장기 지속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사건으로 복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묘사들 - 대체로 은밀 한――울 발견하였다. 〉 19) 따라서 경제사를 한다고 해서 〈 과학적 〉 이라거 나 또는 인류학적 역사나 지리적 역사를 한다고 해서, 다시 말하면 역사 가의 대상을 옮겨간다고 해서 역사학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본질, 그것은 베인과 아롱이 말했듯이 〈 이야기 〉 였다. 이제 〈 이야기 〉 라는 것이 더 이상 역사가들이 〈 우상 〉 으로는 여겨지지 않는 상황에서, 그리고 역사가의 영토라는 것이 인식론적 차이룰 만들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간 터부시되어 온 영토, 즉 정치(사)에 대하여 새로 운 태도가 취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정치사의 부활 역시 우상 파괴 운동의 한 표현이었다. 전통적인 역사학이란 한마디로 정치사였다. 그리고 이 정치사의 특징 은 씨미앙이 비판한 세 가지 우상-정치, 개인, 서술-으로 잘 요약 된다. 그리고 새로운 역사는 반(反)정치사였다. 다음 페이지의 표는 이를 잘 보여 주고 있다. 20) 초기의 아날이 그 제명에 충실한 하나의 전문 역사잡지인 한 이 잡지에서 정치가 소홀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그다 지 비판의 대상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194& 선 이후 아날은 더 이상 사회경제사라는 제한된 영역이 아니라, 경제, 사회, 문명을 총괄하는 잡지를 표방한 이상, 정치사의 비중을 살펴보는 것은 논의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사론상으로만 검토해 볼 때, 페브르는 역사에서 정치사를 배제하지는 않았다. 이 Zusammenhan g의 역사가에게 있어서 〈정치사, 경제사, 사회사는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프) 그리고 이러한 19) 리꾀르가 분석한 책은 Le Goff , Un autr e Moy en Ag e ; Duby , Les trois ordres ou im ag in a ir e du feod alism e ; Dumezil, Les die u x souurain s des Indo-E u rop e ens ; Furet, Penser la Revoluti on fran <; a is e 등이다 . 20) F. Dosse, L' his toi re en mi ett e s , p. 47. 아날, 〈 역사 잡지 》 , 《 근 • 현대사 잡지 〉 에 게재된 페이지 수를 비교한 것이다. 21) 페브르` r 토지 』 , p. 94.

생각은 그 후 변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비판한 것은 학문의 제분과들· ―사회, 경제까지 포함하여-이 각각 별개의 서랍 속에 갇혀 있으 며, 나아가 정치가 제 1 번 서랍을 차지하던 당시의 상황이었다 • 22)

22) 페브르, ,『 역사를 위한 전 두 』 , p.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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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생각은 브로델에 이르러 경색되었다. 물론 적어도 사론상으로 는 그 역시 〈 사건의 적 〉 이 아니었다 .23 ) 그러나 장기 지속적 구조를 찾아 나선 역사가에게 있어서 정치적 사건은 일회적이고 표면적인 먼지에 불과하였다. 결과적으로 1960 년대초까지 정치사 관련 논문은 물론 정치 러는 용어마저도 아날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못하였다. 전체사를 지향하 는 잡지로서 아러한 편협성은 좀처럼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1963 년 아롱의 『국가간의 평화와 전쟁』은 이러한 현상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토론의 서두에서 브로델은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 과연 과학적인 정치학이 현재 있는가 없는가? 만일 있다면 아날은 이를 하나의 정복으로서 기뻐할 것이고 의교사에 대해서 그간 견지해 왔던 열광적이지는 못하였던 입장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 는 이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24) 이러한 지침에 따라 F. Cha- tele t, A. Krie g e l , V. Leduc, P. Renouvin , B. de Jou venei A. Tou-rain e 등이 그 비판의 톤을 높였다. 이에 대해 아롱은 브로델의 문제 제기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일축하고 있다 .25) 이렇듯 브로델 체제하에서 정치는 전혀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정치를 비판하거나, 기껏해야 페로 M. Ferro 처럼 「새로운 국제 관계사를 위하여」 (1965) 방법을 모색할 뿐이었다.

23) 브로델, 『지중해』, II, p, 223. 24) 브로델, , Annales, 1963, p. 119. 25) 상기 토론에 대한 아롱의 답변, Annales, 1963 , p. 491.

전환점은 역시 1969 년 브로델의 은퇴와 더불어 찾아왔다. 정 치사가 ­ 아날에 등장하는 빈도가 높아졌다. 정치사가 부활되었나 하는 문제를 검토하기 전에 먼저 아날에 게재되었던 정치사 관련 논문, 공동 주제들 울 일람해 보자. 1972 : 〈역사와 정치, 또는 역사, 결과의 과학〉(〈토론과 전투〉에 게재) 1974 : 〈앙시앙 레짐과 혁명 : 재해석〉(특집호의 제명 )

1977 : 〈 클라우스비츠와 국가 〉 _ : 〈 Henr y기념물 : 1898~1899 프랑스 반유태주의의 구조 〉 1978 : 국가와 공공 재정이라는 주제로 4 편의 논문 : 이데올로기와 문화라는 주제로 4 편의 논문 1979 : 이데올로기와 정치라는 주제로 3 편의 논문 1980 : 프랑스 혁명에 대한 2 편의 논문 1981 : 경제와 정치라는 주제로 2 편의 논문 1982 : 왕권과 정치적 이상이라는 주제로 3 편의 논문 1983 : 권력의 스펙터클이라는 주제로 3 편의 논문 1984 : 정치라는 공동 주제하에, 〈 패러다임의 탄생 : 똑끄빌과 미국 여행 〉 : 왕의 이데올로기라는 주제로 3 편의 논문 1985 : 프랑스 혁명아라는 주제로 3 편의 논문 : 권력과 혈통의 게임이라는 주제로 3 편의 논문 1986 : 왕의 이데올로기라는 주제로 3 편의 논문 : 앙시앙 레짐기의 국가와 사회라는 주제로 2 편의 논문 1988 : 파시즘, 나찌즘이라는 주제로 5 편의 논문 : 군주의 권력이라는 주제로 2 편의 논문 : 프랑스 혁명이라는 주제로 2 편의 논문 -: 화폐와 권력이라는 주제로 4 편의 논문 1989 : 프랑스 혁명이라는 주제로 4 편의 논문 : 정치에 대한 논평가라는 주제로 3 편의 논문 1990 : 중세의 권력이라는 주제로 3 편의 논문 : 정 치의 공간이리는 주제로 3 편의 논문 위에 소개한 논문, 공동 주제 등은 그 제목을 보고 정치사 논문으로 구분한 것이다. 물론 과연 정치사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문제는 일충 복잡해진다. 그러나 하나의 집단 현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용어의 선택 죽 정치라는 말이 더 이상 터부시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단 우리는 1969 년 이후 다량의 정치사 논문이 아날에 등장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정치사가 아니었다. 권력, 이데올로기, 정치 문화와 같은 주제는

인류학적 역사의 색채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서 『 기적을 행하는 왕 』 이 그 추종자를 만난 것이다. 70 년대초까지만 해도 〈 새로운 정치사 〉 는 〈 현실이라기보다는 꿈 〉 에 가까웠다 . 26) 르 고프는 「정치는 여전히 역사의 중추인가?」라는 논문에 서, 정치는 중추라기보다 핵심이다리는- 묘한 말로 핵심을 피하고 있다. 아마도 〈 정치 〉 라는 금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 새로운 정치사가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그간 우상으로 불렸던 〈 사건 〉 이 역사의 성전에 들어오는 것이 필요하였다. 1973 년, B. Barre t― Kr i e g el 은 〈 도처에서 사람들은 사건의 복귀를 환영하고 있다 〉 라고 단언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사건이 복귀했다고 해서 그간 군립하던 〈 구조 〉 가 포기된 것은 아니었다. 사건과 구조를 결합시키는 일이 역사가들의 한 과제가 된 것이다 . 27)

26 ) Le Goff , ,H is tor ic a l stu d ie s tod ay, 1971, p. 348. 27 ) Le Roy Ladu rie, , L e ter rito i re de l'his tor ie n , 1973 : 보벨은 아귈롱과 자신도 이러한 시도를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L 'hist o ir e et la long ue duree>, La nouuelle his toi r e . )

구조와 장기 지속에 밀려 그간 도의시되었던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사실 그간 아날의 영토는 현재에 대한 그 초창기 때부터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앙시앙 레침을 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건에 대한 재인식은 프랑스 혁명이라는 단절적 사건 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특집호(1 974) 에서 퓌레는 다음과 같이 연구 상황을 회고하고 있다. 〈 아날이나, 도처에서 더 좋은 용어가 없는 관계로 부르는 아날 학파는 그간 프랑스 혁명에 관해서 밀도 있는 관심을 보여 주지 못하였다. 〉 60 년대 중반 이후 퓌레 는 리세 D. Ric h et-2 } 함께, 프랑스 혁명을 하나의 성격-부르주아 혁명-으로, 또는 목적론적으로-사회주의 혁명의 선행 단계-

이해하는 소위 정통적 해석을 거부하고, 대신 〈 미슐레가 직관적으로 파악한 혁명, 즉 빈곤과 분노의 암울한 혁명 〉 으로 파악할 것을 주장하였 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이 가지는 세계사적 의미가 회석되고 대신 고래 로부터 번복적으로 의식의 충을 뚫고 표출되는 민중의 분노와 지도충의 권력 다툼이라는 무시간적인 틀 속에 프랑스 혁명을 묶어 놓았던 것이 다 .28) 이러한 소위 수정주의적 해석이 장기 지속이라는 아날의 정신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쉽게 엿볼 수 있다. 아날의 정치사는 자연히 정치문화라는 심층적 세계로 이끌려 들어갔다. 퓌레가 오주프 J. Ozou f와 더불어 〈현대 프랑스의 문자 해독율이나 프랑스 선거민의 행태〉 등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이러한 유의 정치사를 우리는 심성사에 포함시킬 수 있을텐데, 그 대표적인 학자로 들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아귈롱 M. A gu lhon 이다. 19 세기초까지만 해도 왕당파적 성향을 보여 주던 남부 프랑스에서 1851 년 공화국을 수호하려 는 봉기가 일어난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구조와 사건이라는 문제에 직면한 아귈롱은 중앙의 정치 이념을 굴절시키는 지방 문화에서 그 해결점을 찾았다. Z9) 198~ 빈 College de France 현대사 취임 강연에서 그는 이렇게 그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촌락의 공화국.1l의 일반화시 킬 수 있는 주된 결론은 이론화되고 조직화된 이념, 견해, 정치들로 이루 어전 고전적 인 역사는 행위 전체를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848 년이나 1851 년의 농민들은 혁명기에 있어서조차 롤랭 Ledru Roll in이나 위고 V. Hu g o- 그들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는 하지만-처럼 살지도 행동하지도 않았다. 바로 집단 심성에 있어서 차이점이 있었던 것이다.〉 30) 심성적 정치사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이념을 통하지 않고 대신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본 정치〉였던 것이다. 31) 이렇듯 사건의 복귀, 서술, 정치사의 부활 등은 상호 밀접한 관계를 28) F. Furet, D. Ric h et, La Revolut ion fran cais e, 1973, p. 253. 29) Burgu iere , , L a noU11elle hist oi re , p. 60. 30) Ag ulho n, ,A nnales, 1987, p. 605. 31) 위의 논문, p. 609.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단순한 평면적인 교체로 볼 수 없음은 당연하다. 32) 심성사가 그 공통 분모였고, 그 종합이었다. 19781 .! 편찬된 『 새로운 역사 』 에는 정치사라는 항목이 없는 반면, 8 권 뒤 출판된 『 역사 과학 사전 』 에는 정치사라는· 항목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의미 심장하다. 집필자인 레벡 P. Leveq ue 이 말하듯이, 이 역시 새로운 역사의 효율성과 깊이를 말해 준다. 새로운 역사가 낡은 역사로 후퇴한 것이 아니라 정치 라는 잔여 영역이 역사 속으로 흡수된 것이다. 이 무렵의 새로운 역사는 과거 브로델 시대의 새로운 역사와는- 달랐 다. 전체사라는 유토피아가 포기된 대신 심성사라는 구체적인 한 영역이 아날의 배타적이고 지배적인 영역으로 고정되었다. 뷔르기애르가 시사하 듯이, 아날은 이제 〈 역사 〉 가 아니라, 〈 하나의 역사〉를 추구하게 된 것이 다 . 33) 이렇듯 아날의 내부에서 과학, 서술 등의 말울 둘러싸고 논의가 진행 되고 있을 무렵, 국제적인 수준에 있어서 아날은 극복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음미와 찬양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우상 파괴 운동을 매우 조심스럽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날의 새로움은 70 년대 말을 고비로 점차 빛을 잃은 느낌이다. 1979 년 발표된 스톤의 「서술로의 복귀, 새로운 낡은 역사에 대한 고찰」, 그리고 이에 대한 응답 등은 조심 스럽지만 아날 학파로 상징되던 하나의 역사 사조가 사라져 가고 있음을 말해 준다고 보여진다.”) 〈 새로운 역사 〉 라는 용어 대신 새로운 새로운 역사, 새로운 낡은 역사, 낡은 새로운 역사라는 감각적인 말들이 역사가 들에게 하나의 지적 유희를 제공하였으니, 결국 아날 학파의 새로움이 소멸되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35) 아날 학파에 대한 환상이 32 ) J. Glen isso n , , L a recherche his tor iq u e en France de 1940 a 1965, Com ite fran c; ais des scie n ces hist o r iq u es, Paris, 1965, pp. XXXW. 33 ) Burgu ier e, , p . 1346. 34) 이 두 논문은 Past and pre sent, n°86, 1980 에 게재되어 있다. 35) G. Hir nme lfa rb , The new his tor y and the old, criti cal essays and reapp ra is a les, 1987 도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 느낌을 준다.

그 의부로부터 깨져 가던 무렵, 아날의 제 3 세대는 드디어 본격적인 우상 파괴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 시점이 바로 아날 창간 5(}: 주년이라 는 사실은 더욱 그 극적인 효과를 높여 주었다. 1979 년 아날의 젊은 편집 인들은 두 편의 논문――J. Revel 의 「역 사와 사회과학 : 아날의 패러다임」 ; A. Bur gui ere 의 「아날, 1929~1979. 하나 의 역사의 역사 : 아날의 탄생」-~ 발표하였다. 화려한 축제를 예상했 던 사람들에게 이러한 냉철한 자성은 놀라운 일이었다. 4 년 뒤 뷔르기애 르는 《 종합 잡지 》 에 「불로끄와 페브르에 있어서의 망딸리메 : 두 개의 개념, 두개의 계열묘끌 발표하였고、 샤르띠에 역시 동일 잡지에 「지성사와 심성사, 궤적과 문제점」을 발표함으로써 이 운동에 동참하였다. 36) 동일한 논리를 구사한 이 세 명의 역사가가 바로 우상 파괴 운동의 삼총사였다. 우상의 탄생은 기본적으로 〈페브르와 불로끄의 인용 〉 一―무비판적이 고교조적인- 에서 비롯되었는데 3n 그내용을요약하면 다음과같다 : 두 명의 위대한 역사가가 중앙에서 배척을 받아 지방으로 내려갔다 : 20 년대말, 인식론적 전환의 필요성을 철감한 이들은 아날을 창간하였다 : 그 이념의 독창성과 혁명적 방법론 덕분에 그들은 전통적 역사가들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결국 승리하였다. 그런데 그들 자신이 무수히 들어 왔던 이러한 이야기들이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페브르와 불로끄는 주변인이었나? 최고의 엘리뜨 양성소인 고등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스트라스부르 대학 -1 차 대전 후 프랑스 정부가 정책적으로 육성한一一에서 근무하다가 30 년대에 각각 College de France 와 쏘르본으로 개선한 페브르와 블로끄는 사실상 가장 영예스러 운 경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브로델에 이르러서도 이들 36 ) J. Revel, ; A. Burgu ier e, ; A. Burgu ier e, c hez Marc Bloch et Luci en Febvre : deux concep tion s, deux filiat i on s> ; R. Chartie r , . 37 ) Burgu ier e, , p , 1348.

은 꾸준히 배척을 받아 왔다고 이야기하는가 ? 38) 이는 바로 모든 신화의 서막이 그러하듯이, 영웅의 탄생에 극적인 효과를· 부여하기 위함이라는 것 이다. 그리고 적대감이 존 재했었다면 이는 〈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전술과 전략 〉 39) 상의 필요성 때문에 이들 스스로기 · 〈 입력 〉 사킨 결과라는 것이다. 40 ) 사실 페브르와 불로끄가 휘두른 그 막대한 양의 서평, 그 직접 적이고 논쟁적인 문체 등을· 감안할 때 수긍가는 면이 적지 않다. 그러나 삼총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아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을 이러한 전술과 전략 덕분으로 축소시킨다. 이렇게 페브르와 불로끄를 〈 전사장이나 탐험 대장 〉 으로 묘사한 후 삼총사는 이들이 위대하고 독창적인 역사가라는 점에도 의문을 제시한 다 .4 아날은 이미 비달의 지리학이나 뒤르깽의 사회학, 베르의 역사철학 등에서 논의된 것둘을 〈 계승 〉 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뷔르기 애르는 모노 Monod7} 187 6\1에 창간한 《 역사 잡지 》 의 창간사에까지 아날의 창세기를 소급하고 있다. 죽 〈 전통적 〉 역사와 〈 새로운〉 역사 사이에는 명백한 경계선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 삼총사는 페브르와 불로끄는 단지 1 차 대전 후에 생긴 학문적 헤게모니의 공백을 운좋게 포착한 후, 가상의 적을 만들어 이를 유지하였다는 분석을 내리고 있 다. 1979 년의 재판은 아날과 그 두 창간자를 한데 묶어 평가 절하하는 정도로 일단락되었다. 아마도 그 다음 단계는 이 두 창간자를- 비교하여 아날의 주류를 판별해 내는 순서가 될 것이 었다. 이 작업은 198 3'd에 마무리되었다. 당시 지배적인 새로운 역사인 심성사의 선구자는 과연 누구일까? 38) 브로델,

. 39) Burgu iere , 위의 논문, p. 1353 : 아날 연구가인 H. Cou t au-Be gari죠i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Le ph enomene . S tr at e gie et ide olog ie des nouveaux his tor ie n s, Paris, 1983). 40 ) Burgu iere , 위 의 논문, p. 1350. 41) Burgu iere , 위 의 논문, p. 1350.

흔히 망딸리떼 연구는 페브르의 군마처럼, 동시에 불명확한 대상으로 소개 되어 왔다 . 심성적 연구가 오늘날 아날에 의해서 고취된 역사적 생산물 가운 데 변변찮은 자리 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리고 인류학적 역사에 밀려 점차 소멸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불명확성 때문이다. 이제 나는 망딸리떼 연구가 불로끄와 페브르의 공통된 연구 대상이었다는 접을 밝히고 싶다 42) 그리고 나서 뷔르기애르는 불로끄와 페브르의 지적 궤적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즉 불로끄는 인류학적 역사와 집단 표상의 역사로 나아간 반면, 페브르는 역사적 심리학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43 ) 그런데 바로 페브르의 길은 역사가들에게는 〈 막다른 골목 〉 이었다는 평가이다. 44) 이렇게 볼 때 두번째 단계의 우상 파괴는 페브르를 겨냥한 것이었 다. 삼총사는 계속해서 페브르를 엘리아스 N. El i as 와 파노프스키 E. Panofs k y 감은 동시대의 의국 지성과 비교, 이 역사심리학자를· 프랑스적 고립주의의 상칭으로 묘사하고 있다 .45) 브로델에 의해서 〈 교황 〉 으로 추대되었던 페브르는 브로델 사후 〈 신문 기자 〉 정도로 전락하고 말았 다 .46) 이렇게 해서 우상 파괴 운동이 완료되었다. 그 직접적인 대상은 페브 르였고 간접적인 대상은 신화 창조의 주역이었던 브로델이었다 .4n 브로 델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젊은 세대가 페브르보다는 블로끄에 주목한 42 ) Burgu iere , ,p . 337. 43) 위의 논문, p. 345. 44) 위의 논문, p. 337. 45 ) Burgu iere , , p. 337 ; Chartie r, , p p. 284-6 ; 샤르띠에와의 대화, Le maga z in e litte ra ir e, 2 월, 1987, pp. 92-7. 46) P. Chaunu, Fig a ro, 1985 년 11 월 29 일자, 브로델 추모 기사. 47) 브로델은 수차례에 걸쳐 페브르가 미슐레 이후 가장 위대한 역사가라는 것을 강조해 왔다 . 예를 들면, 〈나는 뷔시앙 페브르에게서 흔히 이야기되고 있는 권위 주의적 선도자, 학파나 당파의 수장과 같은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지적으로 불 때 그는 우정어린 격정에도 불구하고 매우 의로웠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는 탁월하였다. 정신의 제후였다. 〉 ( 「뒤시앙 페브르와 역사」, Annales, 1956 p, 178). 페브르 탄생 10 09-년 기념 전시회 팜플렛 서문에서 브로델은 페브르 가 〈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 〉 라고 말하고 있다.

것은 이러한 측면에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통념과는 달리 군이 심성사와 인류학적 역사를 구분하고, 페브르의 심성사는 브로델의 전체 사와 마찬가지로 낭만적인 역사에 불과한 반면, 불로끄의 인류학적 역사 는 새로운 역사의 원형이라고 추대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 우상 파괴 운동이 매우 격렬한 어조로 전행되었다는 점은 그들과 브로델과의 반목의 골이 매우 뿌리 깊다는 것을 말해 준다. 1985 년 브로델이 사망했을 때, 아날이 이 대가의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러한 점에서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48) 우상이 파괴된 후 새롭게 전당에 모셔진 사람은 불로끄, 씨미앙, 라부 르스였다. 즉 베르-페브르--브로델로 이어전 아날의 중추 신경이 씨미 앙-블로끄-라부르스라는 중추로 대체된 것이다. 그것은, 계량적 역사이 건 또는 사회학적 역사이건, 적어도 페브르의 심리적 역사나 브로델의 전체사와 비교해 볼 때 〈 과학적 〉 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49) 1974 년에야 그 대표적인 역사가 라부르스에게 기념 논문집을 헌정한 것은 매우 뒤늦은 일이었다. 준비위원장을 맡았던 브로델이 〈 새로운 역사의 완전한 창조자 〉 에 대하여 축도한, 후 31 명의 역사가들 이 그 학덕을 찬양하였다. 그중 쇼뉘의 말은 상황을 잘 전해 주고 있다• 어떠한 책도 이( 『 소고 』 와 『 위기 』 는 하나의 책이다)와 비교할 만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였다. 이보다 시간적으로는 약간 뒤에 나왔지만 이 정도 수준의

48) 브로델이 사망했을 때 , 아날은 평범한 조사를 게재하였으며, 1 년 후 , Annales, 1971, p, 63 : R. Mandrou, , E ncy cl op ae dia Uniu e rsalis, 1984, p, 357.

책으로서 우리의 뇌리에 떠오르는 『 지중해 』 도,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예술적인 책이었기 때문에-따라서 모방할 수 없는_똑같은 무게를 지니지 못하 였으며, 또한 여중해 』 가 비록 국제적인 파급에 있어서 ―- ―의국어로의 번역 상황을 보라一一엄청났고 지속적이었지만, 적어도 프랑스내에 있어서 만큼은 라부르스의 저술만큼 깊고 지속적이고 대량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50) 라부르스 현상과 브로델 현상을 비교한 후 쇼뉘는 다음과 같이 단정을 내리고 있다. 〈 오늘날 모든 프랑스 역사 학파는 라부르스류이다. 〉 51) 쇼뉘 의 판단은 다소 선언적인 의미는 있지만, 브로델 현상이 해의로부터 매스컴을 통해서 증폭되었다는 접을 정확히 말해 주고 있다 . 52 ) 아날의 대표적인 저작들을 검토해 보면 우리는 라부르스에 대한 절대적인 예찬 울 들을 수 있다. 1978 년의 『 새로운 역사』에서, 르벨과 샤르띠에도 쇼뉘 의 판단에 동의하고 있다. …… 〈학파 〉 는 매우 일찍 잡지와 이를 뒷받침해 준 기관을 •. 넘 어섰다. 가장 뚜렷한 예는 라부르스의 경우일 것이다. 이 역사가는 지난 40 여 년부터 프랑 스 사회경제사를 새롭게 하는 데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사람일 것이다 .53) 198 61;5.의 『 역사과학 사전』에서도 동일한 평가가 계속된다. 〈 씨미앙의 제자인 러부르스는 계승권에 의해서 아날에 들어왔지만, 마르크시스트적 도식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50 년대에 아날 학파에 가담한 대부분의 젊은 역사가들은 그의 제자였다. 〉 54) 라부르스류 50 ) P. Chaunu, , C onjo n ctu r e economi qu e, stru ctu r es socia le s, 1974, p. 21. 51) 위의 논문, p. 21. 52 ) M. Ferro, , E spa c es Temp s, 34 / 35, p. 7. 53) , La nouvelle his toi re , p. 29. 라부르스는 아날지에 거의 기고하지 않았다. 54) Burgu iere , , 『 역사과학 사전 』 , p. 48. 계승권이란 라부르스 가 불로끄를 계승하여 쏘르본의 경제사 강좌를 담당한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의 〈 과학적 〉 시각으로 볼 때, 브로델의 전체사는 앙시앙 레짐적, 직관적 역사학의 계승이라고 본 보벨은 더욱 분명한 어조로 자신은 〈 브로델주의 자라기보다는 라부르스주의자다 〉 라고 밝히고 있으며 ,55) 르벨은 〈브로델 은 계승자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56) 이렇듯 아날의 젊은 지도부, 쇼뉘와 같은 극우 역사가, 보벨과 같은 마르크시스트 역사가가 공히 아날은 라부르스의 학문적 계승이라고 말하 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아날은 아날리스트들에게 무엇을 제공해 주었나? 퓌레의 말이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 줄 것이다. 페르낭 브로델과의 만남은 나에게 결정적이었다. 철학적이나 방법론적이라 기보다는 제도적으로 그러하였다. [……]지 적 인 면에 있어서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은 에르네스뜨 라부르스였다. sn 아날 학파의 중추적 기관인 아날과 사회과학 고등 연구원은 개방적 성격의 제도로서 60 년대 젊은 역사가들이 무한한 지적 호기심과 방법론 울 가지고 역사 연구를 할 수 있는 만남의 장소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학교의 〈학생〉들은 다른 선생님――라부르스-―-울 모시고 있었다는 데 있다. 1979 년의 우상 파괴 운동에서 르벨이 아날의 패러다 임, 그 존재 여부에 대하여 회의를 품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58) 55 ) Vovelle, , Espa c es Temp s, 34 / 35, p. 16. 56 ) Revel, , 위 의 책 . 57) Furet; Maga z in e l itt era i re 와의 대담, 198 興 3 월 pp, 92-3. 58 ) Revel, , A nnales, 1979, p, 1362.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아날 학파를 세 개의 세대로 나누어 각각의 세대가 추구했던 〈 다른 역사 〉 , 〈 새로운 역사 〉 , 〈 새로운 새로운 역사 〉 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 이제 이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여 하나의 흐름 내지는 공통 분모를 찾아보고, 이 아날 학파를 프랑스 안팎의 다른 학파와 비교함으 로써 그 사학사적 위 치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이란 자연과학의 세계에서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 혁명의 교훈으로 무장한 페브르와 불로끄는 비달 드 라블· 라쉬의 인문지리, 뒤르깽의 사회학주의, 베르의 〈 역사적 종합 〉 운동 등과 같은 새로운 시대적 언어들을 수용하면서, 〈 있는 사실을 그대로〉 재발견 한다는 랑케의 이상을 교조적으로 추종하던 전통적 역사학(사건사)을 공격하였다. 역사란 법 칙 을 세우기 위해(실증주의적 역사) 또는 역사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Hi s t o ir e h i s t or i san t e) 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제 1 세대의 근본 신념이었다. 그리고 그 인간은 추상적 인 인간이나 의인화된 그 무엇-예를 들면, 국가-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독일의 관념주의와도 그 성격을 달리하였다. 페브르와 불로끄에 게 있어서 인간은 구체적인 인간,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이었고,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따라서 역사학은 현재 살아 있는 인간을 위해 역사가에 의해서 창조된다는 주관주의적 신념 위에, 현재사, 문제사라는 언어가 탄생하였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과 인간 사회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기본 정신을 역사가로서 실천하기 위해 이 〈 적대적인 두 형제〉는 1929 \1 아날을 창간하였고, 그 전무적인 노력과 탐험이 계승되었으니 바로 〈아날 학파〉가 탄생한 것이다. 전문 역사가로서 페브르의 관심은 한 지방의 삶을 총체적으로 재구성 한다는 전체사적 야심에서 점차 한 역사적 인물을 동해 한 사회, 한 시대의 십성적 한계선을 긋는 방향으로 옮겨간 반면, 불로끄는 왕, 농 노, 기적, 농촌 등에 대하여 다양한 관심을 기울인 후 마지막으로 봉건

사회라는 역사적 종합에 접근하였다. 페브르의 사학이 심리적이었던 반면 불로끄의 사학은 사회적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이들 아날 학파의 제 1 세대는 관념적이라는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관념적, 주관주의적, 상대주의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날 학파의 제 1 세대에게서 독일 역사주의의 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 나 그 이상으로 강한 뿌리는 바로 프랑스의 전통-예를 들면, 미슐레 一에 내려져 있다는 사실과, 이들이 적어도 사론상으로는 추상주의를 철저히 배격했다는 점을 즉시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따라서 〈 다른 역사 〉 는 독일 역사학의 지배에서 벗어나 프랑스의 전통으로 복귀 하는 과정이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페브르에게서 특히 두드러졌다.

1) 페브로의 사론이 관념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Hu g hes 는 불로끄의 『역사를 위한 변명 』 에서도 관념주의를 발견하였다. (The obstr u cte d pa th , p. 53).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브로델의 지리학적 역사는 가장 프랑스적인 역사, 즉 〈 새로운 역사 〉 였다. 브로델에게 있어서 역사는 마치 바다의 저류처럼 오랜 세월 동안 거의 변함없이 흐르는 지리적 시간, 그리고 그 위에 완만히 전개되는 사회적 시간, 마지막으로 표면의 파도처럼 숨가쁘게 급변하는 정치적인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물론 그는 역사 가가 그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상이한 시간대를 모두 다 측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긴 하였으나, 그 자신이지속우대한 것은 〈 장기 〉 적인 지리적 시간이었다. 표면적인 시간을 전통적 역사학의 시간이라고 배격한 점에서 브로델은 아날 학파의 제 1 세대를 계승하였으며, 또 지리 적 시간을 프랑스 역사학의 독점물로 두지 않고 국제 무대에 내세워 〈새로운 역사〉를 보급하였다. 그러나 그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물질적이었다. 인간이 역사를 만든다 는 전(前) 세대의 (또는 마르크스의 ) 신념 이상으로 그가 강조한 것은 역사 가 인간을 만둘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페브르가 철저히, 적어도 사론상으 로는 배격했던 결정주의가 브로델에게서 다시 부활되었다. 그러면 우리 는 제 1 세대와 브로델과의 지적 고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사실

페브르의 〈 가능주의 〉 는 다분히 전투적이고 전략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 으며, 그 역시 후년에 가서는 심성적 결정주의에 빠지고 말았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어느 정도의 결정주의는 과학의 세계에서는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페브르의는· 달리, 학문적 헤게모 니를 구가한 브로델은 국단으로 치우치지 않았으며 또 그럴 필요도 없었 울 것이다. 그리고 그의 물질주의,결정주의는 기본적으로 〈 역사가로서의 〉 라는 한계를 넘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아날 학파에서의 그의 역할은 관념적이었던 제 1 세대의 역사학이 후일 제양 11 대에 의해서 변증법적으로 종합될 수 있는 다리의 역할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이다. 브로델의 지리적 역사와 〈 장기 지속 〉 이 세계적인 관심을 집중시키던 70 년대 아날 학파는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 새로운 역사 〉 에 대해서 새로 등장한 것이 〈 새로운 새로운 역사 〉 라는 이름의 심성사(인류 학적 역사)였다. 지리적 종합이란, 라부르스류의 사회사로 세례받은 제 3 세대에게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였으며, 그의 물질주의는 인구학과 인류학에 경도된 새로운 세대를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브로델에 의해서 소의된 또 하나의 〈 잃어버린 세계 〉 -사랑, 즐거움, 공포 갇은 인간의 심성뿐만 아니라, 민중 신앙, 축제, 성, 비행, 광기, 죽음과 같은 〈비합리 적인 〉 세계에 대한 집단 심리가 이제 역사가들의 주된 영토가 되었으 며, 심성적 시각이 역사가들의 주된 시각이 되었다. 또 기본적으로 추상 적이고 〈 질적 〉 일 수밖에 없는 이러한 문제들을 계량적으로 확인 내지 증명하려는 〈 과학적 〉 욕구가 분출되기도 하였다. 이 심성사는 프랑스 역사의 한 특징인 인구 문제, 경제적 침체성 등의 문제를 규명하려는 현실적인 필요성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에서, 또 유럽 문명의 우월감과 대표성이 사라져 가고 있던 시점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아날 학파의 현재사, 문제사의 정신이 반영된 결과였다. 또한 변화를 완강히 거부하는 사회 문화적 잔기몰 추출한다는 의미에서, 제양1 l 대는 표면적으로는 브로 델에 반기를 들었지만, 〈장기 지속의 세대〉였다 . 더 본질적으로는, 일상 의 인간, 익명의 인간에 대한 집단 심리를 밝히는 것이 심성사――이러 한 뜻에서 집단 심성이라는 말은 동어 반복이다――의 주요 과제라는

점에서, 제양1 ] 대는 아날의 정신울 충실히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될 수있다• 이렇듯 아날 학파는 그 60 년의 역사를 지내오면서 다소간의 굴곡을 보여 주기는 하였으나, 인간 중심의 역사라는 기본 정신에 충실하면서 창조적 계승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기본적으로 계승은 전임 세대가 누락 한 것을 강조한다는, 즉 균형을 잡으려 한다는, 또는 세대간의 갈등이라 는 평범한 측면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된다 .2) 이렇게 볼 때, 아날 학파 의 사회경제사를 1920 년대의 경제 위기에 의해서 해석하거나, 또는 대중 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경제사에서 탈피하여 인류학적 접근을 시도 하였디는 식으로, 아날 학파의 내적 역사를 그 시대적 환경과 결부시켜 해석하는 것은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그 역시 일면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고 생각된다. 더욱이 아날 학파가 성공한 것은 숭고한 사명 의식이나 혁명적 역사인식론 때문이 아니라 뒤르깽 학파의 붕괴 이후 드러난 학문 적 공백을 운좋게 차지하였을 뿐이라는 해석 역시 기계적이며 건조하다 는 느낌을 저버릴 수 없다. 우리가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아날 학파의 내적 변화이다. 페브르와 불로끄는 그 전세대가 배타적으로 우대하던 정치사에 대한 반발 때문에 사회 경제사 잡지를 창간하였고, 브로델의 물질주의는 그 전임자인 페브르J} 누락한 부분을 보완한 것이며, 제 3 세대는 물질주의적인 브로델에 반발하여 다시 인간에 초점을 맞춘 것으 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식론적인 측면에서도, 우리는 과학과 인간 이라는 두 가지 상충적인 인자를 가지고 아날의 세대 교체를 설명할 수 있다. 단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 과학적 〉 이라는 것이 시대적 대세였 으며, 이러한 거대한 조류 위에서 인간으로의 복귀라는 노력을 역사가들 이 벌여 온 것이다. 브로델의 물질주의 역시 이러한 〈 구조 〉 속에 놓여 있었으며, 심성사가 19 세기의 낭만주의로 복귀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갇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제째대의 우상 파괴는 아날을 둘러싸고 있는 신비주의를 타파하려는 2) Hug he s: £ 이러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Consc i ousness and socie ty ……, p.3 1 ).

움직임이었다는 데에 긍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그 내용이 직접적으로 는 페브르와 브로델에 대한 비판이지만, 그 비판 자체는 전통적인 테두 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최근에 발표된 뷔르기애르의 「역사적 이해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보아도, 여전히 이들은 페브르와 불로끄에 대한 재인용, 재해석 차원에서 맵돌고 있을 뿐, 인식론적인 창의성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이 역시 아날의 전통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비국적이다. 아날은 인식론이나 방법론의 혁신보다는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역사란 기본적으로 역사가에 의해서 창조되 는 것일 때, 이러한 새로운 영토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는 역사가에 의해 서 창조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심성사라는 영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심성적 시각이 있는 것이다. 사실, 아날의 속죄양이었던 세뇨보가 작성한 전통적 역사의 영토를 보면 이미 신천지는 다 개척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변한 것은 영토가 아니라 시각이고, 역사가는 그 시각을 통해 3 ) Ch. Seig no bos, V. Langl o is , Intr o ducti on , 1898, pp, 202- 3 ; Seig no bos, La m eth o de his tor iq u e , 1901, pp, 138- 40 , 166. I. Co:S D J T I0:.-1 S MAT,:lt J E I.LES, - 1。 I:.'t1 1 dr. des corps : A. Anth r op o log i~ (cth n olog ic) , nnalomi c ct ph y si o l og ic, anomalie s ct pa rlic u lar i t l;S pa lholug iqu cs. R. ncmog r~ p h ic (nomhrc, scxc, :\gc , uais s nncc, mort, maladie s ). -2° Rt 11 de clu mi li e u : A. ~lilicu nalurl'l gc og r ap h ic p 1 c (relie f , clim nls, ,•aux, sol, flo rc ct fou nc). /:. ]\lilicn nrti fici c l . amc11. 1gc - mcnl (cult ur es, edif ice s, rni1 ;.s, out illa i-t c , ctc . ). —lE/(o'rccso1•J xo·n5I pip. dt r1li cRi1l t IirsieAecos .l nen ii olgt— sT n mito,d; 1 Doe1 : . mi?r :0(pas cu l rAers oo1 ird(:qys tcu Ts uno cFcn u.: tI,c .i Lco.- J1sd n: C .a , ,: n T p!Aim.<; rm( rca 、.,t1tt ~hi ,q1 lo ,ispnt d tclcnc (ss )rsn , a to1ril nq.c u usr ncocslh.t la—i gt s n) t:.l o —’,i r S c 4cs0i) C .J I)Ihc- ei -s I.。 La11g 11 1• (vocnbulair c , !l~· n t a x c, ph oncliq u c, scmanti qu c). (condit ion s dc pr udurti on , concep tion s, pr ~ccdcs, w1n=r e s). IJ. Arts tic cep tion s, pl'cc cp tcs , pr ati qn c rccllc). III. CouTuM i;s MATi- :n u :1.u : s (non ohlig n to i r c s). - ·!• Yi1! 11wt h ·i r. ll e : A. Ali1 1 1cnt al io 11 (111all•1·i 11 11x, :1p p1 ·cls, l'X r it :m ls). J:. Yc tcm cnl ct pn rurc. C. 1Iahit :ili u 1 1 cl 11101 .iilicr . 一 2 。 Yie pr fr ee : A . Emp lo i

cl J,V;l c. rnCgo ct. : .T tJ: I).r EEs x1'.p:c l oo xiot .n\ltI i Qo Un Ed5e s- m·l io n pt ; r,' aO uIIxu.c t—i /In 2: 。 -· iT. rCandsl1fol 1r ·c- Ill(I ti()n . T,·(I1 1 sp o 1·ls cl in dustr i e s ~ : pr occdcs tc-c hniq u cs, dh·is i o n du trn ,·a i l , YOi cs

서 표면만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 즉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다. 모든 역사는 다 전체사이다. 정치사 역시 전체사일 수 있고 또 전체사 이어야 한다는 아날의 가르침은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국제 관계사 의 대부인 뒤로젤 J.- B. Duroselle 의 말을 들어 보자. 우리는 설명을 하고자 한다. 이 말은 정치사가인 우리들이 정치에 의해서 정치를 설명하거나 또는 우리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제한된 테두리를 벗어 나기를 거부한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역사는 하나이고 전체적이다. 어떠 한 정치적 과정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표면적이건 심층적이건 가능한 모든 설명을 다 찾아내야 한다. 우리는 즉시 정치사, 사회사, 경제사, 군대 사, 종교사 등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군대적 등등의 사건들이 있다. 그러나 이 사전들의 연결은 전체에 의해서 설명된다. 이 점에 있어서, 밀하자면 본질적인 점에 있어서, 우리는 뤼시앙 페브르가 행한 정열적인 〈 역사물 위한 전두 〉 에 아낌없는 박수 룰 보낸다 .4)

4) Duroselle, L'Europ e de 1815 a nos jou rs, Paris, 1975, pp. 369-70. 밑줄은 Duroselle 의 것 임 .

우리는 마찬가지의 경향 을 아날에 동참하지 않았던 무니에 R. Mou- snie r 에게서도 발견한다. 〈 17 세기 위기 〉 의 전정한 성격을 논하려면, 분석이 17 세기 중엽의 정치적 변란이나 초엽의 경제적 침체에만 한정될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지적, 종교적, 도덕적, 심지어는 비합리적인 감정 의 측면에까지 확대되어야 한다는 그의 말 5)은 곧 페브르의 말과 동일하 지 않은가? 따라서 아날 학파의 사론은 이미 그 학파의 테두리를 벗어나 프랑스적인 차원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금세기초부터 정치사라는 편협 한 무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날리스트들이 행해 온 개척적인 노력은 정치사, 제도사 등을 중시하는 역사가들의 공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아날 학파의 공헌이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아날 학파는 이제 더 이상 그 새로움을 독점하지 않는다. 과거 제반 학파들을 구분지었던 경계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항상 새로운 역사의 영토를 개척하기 위해 변경 지방으로 떠났던 아날의 전사들은 현재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아직 수도의 성으로 귀환하 지 못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또 아날 학파는 세계사적인 차원에서도 그 〈새로움〉을 심판받아야 된다. 19 세기의 실증적 역사에 반발하여 일어난 주관주의적, 상대주의적 사관은 이미 20 세기초 미국에서도 그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6) 또한 〈 모든 역사는 사상사 〉 이며, 〈 역사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지나 간 사상의 재연 (Re-enac t emen t)〉이라는 콜링우드의 사변도 같은 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 .7) 나아가 1890 년대 독일에서 람프레히트가 제창한 문화 사 운동까지도 아날 학파의 선구적인 형태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역사과학과 자연과학을 둘러싸고 전개된 논쟁 역시, 프랑스내에서 는 철학적인 고통이 적었다는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아날의 역사 5) 나종일, 「 17 세기 위기론과 한국사」, 《 역사 학보 》 , 94, 95 합집, 1982 에서 인용. 6) J. H. Robin son , New his tor y : essays illu str at in g the modern his tor ica l o 따 look, 1912. 7) R. G. Colling w ood, , T heories of his tor y , 1959. p, 253.

학과 같은 고민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프랑스 이의의 지역에서 전개된 새로운 역사 운동은 개인적이고 철학적인 노력에 그친 반면, 프랑스에서는 집단적이고 장기적인 운동으로 발전한 데에서 커다란 차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 바로 아날 학파의 특칭이 있는 것이다. 아날과 195 2¾반 영국에서 창간된 《 과거와 현재 》 , 그리고 왈러슈타인의 〈 잡지 》 들은 우선 아날의 사론이 더 이상 아날 학파의 독점물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준다. 그러나 우리는 제목에 담겨 있는 상칭성 속에서, 아날은 경제, 사회, 문명의 공시적 종합을 추구하였다면, 영국의 마르크시스트 잡지는 과거와 현재의 변증법적 종합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차이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왈러슈타인의 〈 잡지片근 아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왈러슈타인을 브로델의 유일한 계승자로 보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모든 역사는 문제사이다. 아날의 세 세대를 통하여 아날 학파의 실체 를 발견하려던 우리의 출발은 이제 종착점에 이르러 아날 학파의 앞과 옆에는 더욱 커다란 존재가 있음을 발견한다. 바로 미슐레와 라부르스이 다. 해답을 찾으려는 모든 노력은 결국 문제를 심화시키고, 새로운 문제 를 제기할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책에도 아날의 정신이 조금이라 도 반영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문헌 아날 학파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는 그야말로 〈 전부 〉 이다. 역사는 〈 전체들 중의 전체 〉 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 책을 쓰는 데 직접 참고한 자료만 소개하기로 한다. I. 공동 연구(연대순) Bulleti n de la Socie te fran ~ais e de ph ilo s ohie : ( 19 06 \1 5 월 31 일 ) ; ( 1 907 년 5 월 30 일 ) ; ( 1 908 년 5 월 28 일 ) Annales : Annales d'h is toi re economi qu e et s ocia le (1929-38) : Annales d'h is to i r e socia le (19 39-41 ), Melang es d'h is to i r e socia le (1 9 41-5) : An nales d'h is toi r e socia le , hommage s a Marc Bloch (1945), Annales. Economi es. Socie te s . Civ il i s a ti on s( 1946- ) Melange s Lucie n Febure. Euenta i l de l'his toi r e uiv a nte , 2vol., Par is, 1953. L' his toi re et l' his tor ien , Recherches et debats du Centr e cath o l- iqu e des intell ectu e ls fra n~s, n°4 7, 1964. (A. Dup ro nt, ; P. Vil a r, ; D. Ju li a, Ph. Levill ain, A. Vauchez, ; F. Bedarid a , 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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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찾아보기

기 가도프르 G . Gadoff rc 165 강쇼프 F. L. Ganshof 74 갠즈부르그 C. Gi nz burg 58 골드만L. Goldmann 135 구베르 P . Goubert 43, 172, 173, 따 186 귀르비취 G. Gurvit ch 138, 139 그라네 M . Granet 63 그랑벨 Granvellc 101 그레스 D . Gress 105 그로바드 Graubard I57, 158 글레니쏭J. Glenis so n 205 기디에 R. Guid i e r 190 김수행 70 김정자 167 까르보넬 Ch. -0. C a rb onell 27, 36, 39, 164 깔뱅 Calvi n 54 꼬르나에 E. Coornaet 91 꽁뜨 A . Comt e 19 꽁리 Y. Conry 168 꽈레 A. Ko 函 21, 56 꾸또 베가리 H. Couta u -Beg ar ie 12, 207 꾸라조 Couraj od 17 꾸르노 A . A. Coumot 17 L 나종일 90, 219 노라 P. Nora 134, 163, 183, 198 뉴턴 Newt on 18, 19 E: 달랑베르 D'Alember t 52

델젤 C. Delzell 160 데까르뜨 R . Descarte s 18, 170 데스 뻬리에 Des Pcri er s 53 데이비스 N. Davis 58 도마르 M . Daumard 188 도냐 . Doss e 12, 133, 142, 145, 167, 199 뒤로젤J. -B . Duroselle 218 뒤뒤 V. Du 자 131 뒤르깽 E. Durkheim 17, 23_27, JO , JI, 50, 54, 야, 67, 76, 81, 84, IJ I, 138_140, 143, 144, 151, 2 어, 213, 216 뒤메질 G. Dumezi l 199 뒤물랭 0. Dumoulin 133, 135 뒤바르C. Dubar 196 뒤비 G. Duby 74, 76, 129, 134, 156, 174 -17 6, 184, 185, 199 드니풀 Denif le 50 드레이 W. Dray 198 드로즈J. Droz 48 드망종 A . Demang eo n 22, 23, 35, 48, 84, 87 둘뤼모J. Delumeau 134, 190 디드로 D i dero t 52 디옹 R . Di on 91 딜리젠스키 G. G. Dil ig e nskij 151 딜타이 W. Di lth e y 34 멘느 H. Tain e 39 똑끄빌 A. Tocq ue vil le 202 뚜렌 A. Tourain e 201 뛰르고 Tur go t 114 근 라꽁브 P . Lacombe 25, JO , 31, 100

라부르스 E. Labrousse 펙 46, 72, 90, 96, 98, IJ 2, IJ 5 , 171, 172, 186, 209-2 I I , 2 I 5, 220 라블레 F. Rabelais 41, 51, 53_60, 172 라슬렛 P. Laslett I64 라첼 F. R atz e l 23 랄 E. Ra le 16, 17 람프레히트K. Lamp re cht 28, 219 랑글과 V . Lan g l o is 29, 31, 39, Bo, 81, 217 랑케 L. von Ranke 31, 128, 194, 213 레리쉬 R. Leric h e 17 레벡 P. L eveq ue 205 레비 브륄 L. Levy -B ruh! 16, 17, 65, 167 레비 人드 쿠~ Cl. Levi- S t r a uss 27, 137_141 로 F. Lot 81 로빈슨J. H. Robin s on 219 로슈 D. Roche. 134, 190 로스토우 W. Rosto w 150 로씨 A. Rossi 135 로제J. Rog er 21 록펠러 J. D. Rockfe ll er 131 롤랭 L. Roll in 204 루츠 P. Lutz 163 루터 Luth er 41 , 48_51 뒤벨 M. Rubel 135 르 고프 J. Le Goff 21, 66, 74, 84, 1J l- 1J 4 , 144, 150, 156, I 야, 174, 177, 179, 180, 183_186, 199, 203 르낭 E. Renan 17 르노데 A. Renaudet 17, 48 르노불 R. Renoble 21 르누뱅 P. Renouvin 201

르동디 P. R edondi 21 르윅 V. Leduc 201 르 콰 라뒤 리 E. Le Roy Ladurie 43, 84, 94, 126, 134, 141, 144, 血 164, 165, 180_182, 191, 203 르벨J. Revel 84, 134, _13 5, 163, 164, 167, 171, 173, 177, I 83, 20 6, 210, 21 I 르브랭 F. Lebrun 191 르페브르 G . Lefe b vre 19, 22, 39, 159 르페브르. H . Lefe b vre 140 르프랑 A. Lcfr an c 53, 57 리꾀르 P . Ri co eur 198 리 베 G. Liv e t 164 리세 D. Ri ch et 144, 203, 204 리스트C. Ri st 84, 87, 132 리카르도 D . Ri ca rdo 122 a 마또레 G. Mato re 53 마루 H- 1. Marrou 37, 193 마르크스 K . Marx 70, 했 114, 115, 128, 182, 214 마시꼬뜨 G. Massic o tt e 41 마종B. Mazon 135 만 H. -D. Mann 41, 171 말로위스트 M. Malowi st ·12 1 망드루 R. Mandrou 47, 169, 170, 174, 175, 209 맬서스 Th . R. Malth u s 109, 125, 181, 182 맹끄 A. Mi ne 129 메이에 A. Meil le t 17, 62 모노 G . Monad 28, 30, 83, 2 이 모라제 Ch. Moraze 17, 56, 86, !J I,

132, 144 모스 M . Mauss 17, 25, 27 몬지 A. Monzie 51, 52 몸젠 W . Mommsrn I 57 몽페스뀌외 Monte s q ui e u 39 뫼브레J. Meuvret 172 무니에 R. Mousnic r 219 월레르 B . Muller 41 미뇌르 H. Mi nc ur 19 미슐레J. Mi ch e let 16, 17, 31, 34, 36, .1 9, 42, 50, 96, 104, 151, 190, 194, 빽 책, 208 , 214, 220 민석홍 9 밀J. S . M i ll 114 n 바따이옹 M. Bata i ll o n 58, 91 바러클라우 G . Barracloug h 161, 函 바레 크리젤 B. Barret- K r ieg e l 203 바렐 R. Baehrd 43 바흐짠 M. Bakhti n 58, 59 박은구 6 발랑시 L. Valensi 84, 134 발레 리 P. Valery 78 발로 C . Vallaux 22 베르 H. Berr 17, 27, JD -32, 41, 43, _47 , 56~58, 72, 83, I 15, 207, 209, 213 베르뚜 A. Berth o ud 19 베르크송 H . Bergs o n 21, 22, 151 베버 M. Weber 120, 151, 195, 197 베인 P. Vey nc 194_199 베일린 B. Bail y n 105 벨러 H. -U. Wchler 1 야 보벨 M. Vovcllc 58, 59, 134, 147, 167, 186 마 )I, 20J, 211

보어 W. Boer 145 부르도 L. Bourdeau 36 부르크 Ch . Brooke 176 뷔르기애르 A . Burgu i e rc 61, 84, 133, 134, 141, I 야, 171, 174, 192, 204_210, 217 뷔허 K. B.ocher 61 브레너 R. Drenner 114 브레몽 Abbe Bremond 17 브로델 F. Braudel 11, 12, 17, 21, 24, 34, 4], 47, 71, 81, 84, 86, 89_166, 169, 171, 173, 176, 177, 179_182, 184, 195, 197, 198, 201, 205_211, 214 -21 7, 220 브록 N. Broe 22, 23 브뤼아J . Bruhat 46 브장송 A . Besan«;;on 144, 171 불랑L. Blanc I 15 블랑샤르 R. Blanchard 22 불로끄 G. Bloch 61 불로끄J. Bl9ch 17 불로끄 M . Bloch 9, u, 15, 17, 19.. 2I , 25, 31-33, 39, 41, 48, 51, 57, 58, 61 -88 , 91, u6, I 達 138, 142, 145, 147, 149, 152, 157_161, 169, 171, 173-177, 186, 195_1 셈, 2o6_210, 213_217 불롱델 Ch. Blonde! 17, 21 비그리J. de Vig u ric 145 비달 드 라 블라쉬 P. Vi da l de La Bia - che 17, 22, 건, 38, 84, 96, 2 이, 213 비 알라네 P. Via ll aneix 42, 96 빌라르 P. Vil ar 46, 105 빠스깔 B. Pascal 39 빼로 M. Perrot 160

뼈가니올 A . Pig a nio l 37, 84, 87, 88 삐렌느 H . Pir c nne 17, 18, 28, 48, 61, 62, 67, 84, 91, 99, I 15, 127 人 사포리 A. Sap or i 152 샤뜰레 F. C hate l et 201 샤르띠에 R. Char ti er 84, 134, 163, 164, 183, 190, 206, 208, 2IO 샹바즈]. Chambaz 135 세뇨보 Ch. Seig n obos 25, 28_31, 37-3 9 , 43, 80, 81, 217 셰노J. Chesnaux I35 소불 A . Soboul 141, 182, 186 쇼뉘 P. C haunu 97, 98, 134, 145, 188, 190, 191, 208, 210, 211 슈쉬라나또쁘] A . .R S.c Shnuaraptp t e a u1 974 6 슈미트 P . Schm itt 190, 197 스땅달 H . B. Ste n dhal 17 스텐져 J. S te n g er s 78, 143 스토이아노비취 T. Sto ia n ovic h 12, 132, 159_161 스돈L. Sto n e 160, 161, 164, 205 스뮤거트J. Stu a rt 114 스티븐슨 C. Ste p h e nson 74 스펭글러 0. Spe n g le r 151 시겔 M. Sie g e l 31 시그프리드 A. Sie g fried 84, 87 시봄 F . Seebohm 68 신용하 163 쎄 H. Say 114 쎄르또 M . de Certea u 59, _11 1, 1¢, 197 씨미앙 F , Sim i an d 17, 25, 27, JO , 31, 38, 98, 100, 138, 139, 171, 199, 209,

210 씨옹J. Sio n 17, 22 。 아게 J. -P. Ag ue t 41 아귈롱 M . Ag ul hon 59, 184, 192, 203, 204 아딸리J. Att ali 129 아롱 R. Aron 34, 135, 157, 193, 197, 199, 201 아르똑 F. H art og 15 아리애스 P. Aries 35, 172 , 173, 174, 177, I 紅 184, 185, 188, 190 아인슈타인 A. Ein s te i n 19, 20 알박 M. Halbawchs 84, 87 앙드로J . Andreau 197 앙리 H. J. Henry 202 양병우 13, 69 에라스무스 D . Erasmus 51, 55 에르즈릭 C. Herzlich 190 에릭슨 E . Eri ck son 50 에스삐나스 G. Esp ina s 84, 87 에이마르 M. Ay m ard 162, 163 엘리아스 N. Elia s 208 엘튼 G. R. Elt on 161 오 G. Haup t 135 오리젠 Orig e nes53 오불케비취]. Obelkevic h . 145, 162 오제 H. Hauser . 72, 84, 87, 139 오제 P. Aug er 131 오주프J. Ozouf 144, 204 왈러슈타인 I. Wallerste i n 紅 95, 99, 108, 111, 113_122, 136, 156, 165, 220 왈롱 H. Wallon 17, 167 위고 V . Hug o 204

위녹 M . W ino ck 134 이거스 G . Igg e rs 12, 47, 57, 160 이광래 171 이민호 12 이정옥 21 x 제라르 A . Gerard 28, 39 제르네 L. Gemet 63 제르멕 B. Germeck 65, 69 젤딘 Th. Zeldin 155 젤레르 G. Zeller 91 종바르트 W . Sombart J06 , 120 주브넬 B . d.J o u venel 201 쥐야르 E . J u i llard 94 쥐야르J.J u i llard 134 쥘리앙C.J u lli an 16, 17 •K 차하순 69 최갑수 167 구 케이 H. J. Kay e 59 케인즈J. M. Key ne s 114 켈불 H. Kaelble 160 코카J. Kocka 163 콘체 W . Conze I 야 콜링우드 R . G. Collin g w ood 219 쿤 Th. Kuhn 33 쿨라 W. Kula 150 쿨리셔J. Kulis c her Io6 크로체 B. Croce 34 크루제 M. Crouzet 190

크리첼 A. Krie g e l 135, 201 클라우스비츠 K. Clausewi tz 202 킨저 S. K in s er IO5 E 두키디데스 Thuc y d i des 77, 195 트레버 로퍼 H. R. Trevor-Rop er 156, 157, I 59, 162 트레벨리언 G. M. Trevelya n 159 IL 파노프스키 E. Panofs k y 208 파니에즈 G. Fag ni e z 83 파커스 H. Parkers 160 퍼킨 H.J. Perki n 160 페로 M . Ferro 134, 201, 210 페브르L. Febvre 9, II, I5-27, J1 _66, 70-94, 101, 104 -10 8, 115, 126, 130_138, 141-154, 157, I59, 파 165, 168_177, 186, 193, 195, 198.. 20 0, 206~209, 213..2 I 9 펠리스 de Felic e 22 포겔 R. W. Fog el 161 포드H. Ford 133 포스터 R. Forste r 161 푸꼬 M . Foucault 170, 171 푸르동 P . J. Proudhon 17, 98, 115 푸리우 C. Frio u x 135 퓌레 F. Furet 134, 141, 144, 145, 156, 180, 188, 199, 203, 204, 209, 211 퓌스펠 드 꿀랑쥬 N. D. Fuste l de Cou- lang es 15, 59, 63 , 68, 159 프랑뚜 H. Prento u t 45 프레이저J. G. Frazer 65

프로이트 S. Freud 151 프리드만 G . Frie d mann 17, 86, 144 풀로베르 G . Flaubert 17 피셔 F. Fis c her 48 피셔 W. Fis c her I 야 피스데르 Ch. Pfi ster 44 필립 객] Phil ip pe II 41, 42, 44-4 8 , 89, IOI, 103, 122

하르나크 A. van Harnack 6r 하이젠베르그 W . Heis e nberg 19, 21 해밀돈 E . J . Hami lton 114 헤 쿠 ~ Herodoto s 37 헥스터J. H. Hexte r 105, 145, 152 , 159 홉스봄E. Hobsbawm 158, 159, 函 휴즈 H . S. Hug he s 60, 151, 152, 214, 216 히멜파브 G. Him melfa r b 205 힐튼 R. Hi lto n 59

金應鍾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 졸업 프랑스 낭뜨대학·꽁대대학에서 수학, 문학박사 학위 취득 현재 충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뉵 「뒤시앙 페브르와 역사」, 「마르끄 불로끄의 역사 세계」 역서 『 프랑스 혁명사』 (F. 퓌레, D. 리세 ) 아날학파 대우학술총서 • 인문사회과학 55 찍은날 -1991 년 4 월 25 일 •펴낸 날 -1991 년 5 월 5 일 지은이―一-金應鍾 펴낸이――-朴孟浩 •펴낸 곳__卞民音社 충판등록 1966. 5. 19 제 1-I p호 우편대체번호 010041-31- 05 23282 은행 지로번호 3007783 135-120 서울 강남구 신사동 506 번지 강남출판문화센터 50~ 515-2003 급(편집부), 515-2()()() ~ 2( 영업부) •5©15 -金200應7, 鍾21_ 011(9 팩91시 밀리) 인문사회과학 • 역사이론 KDC /90 1 Pri nt e d in Seoul, Korea 값 5,500 원

대우학술총서 (인문사회과학) l 韓國語의 系統 김방한 2 文學社會學 감현 3 商周史 윤내현 4 人間의 知能 황정규 5 中國古代文學史 김 학주 6 日 本의 萬葉集 김사엽 7 現代意味論 이익환 8 베 트남史 유인선 9 印度哲學史 길회성 10 韓國의 風水思想 최창조 II 社會科學과 數學 이승훈 12 重商主義 김광수 13 方言學 이익섭 14 構造主義 소두영 15 外交制度史 김홍철 16 兒童心理學 최경숙 17 언어심리학 조명한 18 法 사회학 양건 19 海 洋 法 박춘호 • 유병화 20 한 국 의 정원 정동오 21 현 대 도시론 강대기 22 이슬람사상사 김정위 23 동북아시아의 岩刻畫 황용훈 24 자연 법 사상 박은정 25 洪大容評傳 김태준 26 歷史主義 아민호

사, 1988. Kin s er S., , A meric a n his tor ic a l revie w , vol 86, n° 1, 1981. Kuhn Th., La stru ctu r e des revoluti on s scie n ti fiqu es, tra d. de I' ang l., Paris, 1983. Kula W., , A nnales, 1960. Labrousse E., Esqu i s se du mouvement des pr ix et des revenus en France au 輝. siec le, Paris, 1932. , La crise de l'economi e frn qa i s e a la fin de l' Ancie n Reg ime et au debut de la Revolut ion , Paris, 1944. , , M elange s Braw l.el . Lacoste Y., La geo g ra ph ie , ~a sert, d' abord a fai r e la gu erre, Pa ris, 1976. Lap ey r e H., , R H. jan vie r -mars 1971 . 이광래, 『미셸 푸코 ― ―광기의 역사에서 성의 역사까지』, 민음사, 1989. 이민호, 『역사주의 - ~랑케에서 마이네케 』 , 민음사, 1988. Lefe b vre H., L ' ide olog ie stru c tu r ali ste, Pa ris, 1971. Le Goff J., La civ il i s a tio n de l' occid e nt medie u ale, 1977 / 1984. , Pour un aut re Moy en Ag e. tem p s, trav ail et cult ur e en occ- iden t. 18 essais Paris, 1977. , ,R S, 1983. , Prefa c e a Marc Bloch, Les rois tha umatu rg e s , Pa ris,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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