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효 서울대철학과졸업 벨지움 루벵대학교 철학최고연구원 박사학위 취득 서강대 철학과 부교수 및 루벵대학교 연구교수 역임 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저서 『평화를 위한 철학』 , 瓚國精神史의 現在的 認識』, 『 가브리엘 마르셀의 具體哲學과 旅程의 形而上學 』 , 『 孟子와 荀子의 哲學思想 』 외 다수
베르그송의 철학
베르그송의 철학
〈커진 육체는 영혼의 보충을 기다리고 있다〉
책 머리에 언젠가 베르그송 철학에 대한 종합해설적 저술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 은 지가 오래 되었지만, 그동안 착수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그 작업의 끝 구두점을 찍고 이 머리말을 쓰게 되니 가슴이 후련하고 한편 뿌듯한 느낌을 금할 수가 없다. 이런 작업의 계기를 현실화시킨 것은 대우재단의 후원과 격려에 힘입은 것이다. 감사한 마음 표현할 길이 없다.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데 필요한 전문서적용으로 저술할 것을 부탁받았기에 거기에 합당하도록 기급적 베르그송의 철학과 사상을 이모 저모 충실하게 해설하는 데 최선을 기울였다. 따라서 이 저술은 충실한 解說 書 가 되도록 노력한 것의 결정이지, 저자 자신의 주관이 많이 첨가된 解 釋書 의 특성을 고집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내용도 가급적 평이하게 서 술하려고 애썼다. 정신문화가 점점 황폐해져가는 오늘의 우리 현실에서 정신적 가치의 復元울 생각하는 많은 교양 계층들도 이 책을 수월하게 소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저자가 이 저술의 책명을 〈베르그송의 철학〉이라고 붙인 것도 베르그송 철학사상의 일관된 흐름과, 그 흐름이 움직이면서 내용상 어떻게 다양하게 나누어지는가를 보여주려는 의도를 이 책이 지니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말할 나위도 없이 앙리 베르그 송의 철학은 흐르는 철학이다. 흐름은 그의 철학사상의 핵심적 개념이다. 무엇이 흐르는가? 意識이 흐르고, 生命이 흐르고, 時間이 흐르고, 精神이 흐르고 道德과 宗敎도 흐르기를 바란다 . 그의 철학은 흐르는 세계 속에 동참하겨 같이 흐르면서 진리를 말한다. 그의 철학은 진리에 관한 생각이 나 말이 아니고, 진리의 선율과 리듬과 화음을 그냥 연주하는 행위와 같 다. 음악을 듣는 이는 아무리 그 변화가 다양하여도 그것이 하나의 흐름
임을안다. 베르그송은 결코 일상생활 언어 이상의 괴팍한 철 학용어 를 사용하지 않는다 . 많은 사람들은 그의 문체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문 장 구성 이 섬세하리만큼 세련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프랑 스 散文 의 白 眉라고 들 칭찬한다. 그러나 저자의 불어 수준으로는 그의 문체의 절묘함을 저자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문체나 문장 구조가 매우 섬세하다고 여겨지기에 , 무딘 감정으로 그냥 읽어 내려 가면,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쉽게 파악이 되지 않는 것은 사실 이다. 그의 철학은 결코 난해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 는 특수한 철학용어가 거의 없기 때문에, 주의집중을 하지 않고 읽으면 내용이 빠져나가고 만다. 그는 큰소리로 웅변을 하거나 악을 쓰지 않고, 조용히 친구와의 사랑방 대화처럼 그의 생각을 개전하고 있다. 아마존강 의 나비 한 마리의 비상이 지구 전체의 대기에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바로 그 나비의 가냥픈 날개짓이 어떻게 광대한 지구의 대기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 하고 의혹을 가전 마음은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깨달음의 喜稅을 맛볼 수 있으리라. 돌이켜보면, 저자가 베르그송을 안 것은 고등학교 2 학년 때 잡지 《 思 想界 H 룹 통해서다. 그때 저지는 막연하나마 베르그송의 〈생명의 비약〉이 란 개념에 감동되어 생명세계의 신비스러움을 사춘기적 감상으로 느꼈었 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학생들과 가끔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持 續 과 時間 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토론하기도 하였으나 잘 알면서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막연하게 哲學史에 관한 책을 읽고 남은 어렵풋한 생각으로 서두르게 데생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베르그송의 저서 한 권 제대로 읽은 것도 아니었다. 처음으로 그의 저서를 대하게 된 계기는 루뱅에의 유학시절 心理哲學演習 강의였는데, 그 교재가 바로 유명한 베르그송의 『 물질과 기 억 Mati er e et memo i re 』 이 었다 . 비로소 저 자는 베르그송의 세계에 구체적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이 抽著룰 펴면서 그때 그 강좌를 이끌어주시던 아루 H.Haroux 교수의 은혜를 잊울 수 없
다. 이 졸저의 제 1 장은 그때 그 강좌의 강의 내용에 크게 힘입은 것이었 댜 그때 읽은 책과 강의에 감동되어 저지는 틈틈이 베르그송의 다른 저 술들을 탐독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제 1 장을, 『물질과 기억 』 을 중심으로 하 는 心理哲學을 데마로 삼은 까닭도 주관적으로 유학생 시절에 받은 강의 의 감동과 연관되기도 한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 객관적으로 베르그송 철학의 핵심과 비밀이 물질과 기억의 관계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저자는 일반 다른 해설서의 순서와 달리 一一 일반적으로는 그의 저술의 연대순으로 해석하고 있다 - 물질과 기억의 心身관계 주제를 제 1 장으로 내세웠다. 그 사상의 전반적 소개를 이미 서론에서 언급하였기 에 그렇게 하여도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각 장을 독립 적으로 선택하여 읽어도 이해에는 큰 지장이 없도록 하였다. 만약에 제 1 장이 내용상 조금 무겁게 여겨진다면, 제 2 장부터 먼저 읽고 제 1 장을 맨 나중에 읽어도 무방하리라. 후쎄엘 Husserl 을 모르고는 2M] 기의 독일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듯이, 베르그송을 통과하지 않고 2 伊1 ] 기의 프랑스 철학을 깊이 소화한 다는 것은 쉽지 않으리라. 베르그송이 2 伐1 | 기 프랑스 철학의 新紀元울 연 철학자임에는 아마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데올로기적인 성향이 강 한 사회과학만이 사상계에 전부인양 여겨지는 요즈음의 풍토에서, 그런 성향이 전혀 없는 인문과학적인 베르그송의 철학이 어떤 평가를 받을는 지 두렵고 궁금하다. 그러나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사회과학은 정신성을 망각한 기계문명처럼 인간을 파멸로 몰고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면, 바로 거기에 베르그송이 우리 모두에게 주는 한가닥의 진한 메시지가 있을것이다. 1991 년 3 월 著者
베르그송의 철학
차례 책 머리에 • 5 序論 베르그송 철학의 개요 • 11 1 直觀的 방법과 그 특성 14 2 생명의 우주 17 3 신체와 영혼의 관계 19 4 도덕과 종교의 두 가지 원천 23 제 1 장 물질과 기억 • 29 ―베르그송의 심리철학 1 心身平行論의 비판과 두 가지 기억 29 2 두 가지 기억의 상호관계 39 3 持續으로서의 기억과 망각의 문제 49 4 꿈과 행동, 그리고 두 가지 認知 57 5 기억의 운동과 두뇌의 역할 68 제2장 내면적 자아의 지속 • 83 1 質의 심리학과 의식의 흐름 83 2 동질적 시간과 지속 98 3 自由의 심리학 110제 3 장 생명의 비약과 유기체적 전체 • 123
1 물질과 생명 123 2 비약과 하강, 그리고 진화 139 3 본능과 지능의 인식이론 154 4 기계론과 목적론을 넘어서 170 제4장 직관과 정신의 형이상학 • 179 1 직관이란 무엇인가? 179 2 정신의 풍요와 無의 否定 192 3 낙관적 형이상학과 신비주의 205 제 5 장 도덕과 종교의 두 가지 원천 • 215 1 〈닫힌 도덕〉과 〈열린 도덕〉 215 2 〈靜態宗敎〉의 본질 230 3 〈動態宗敎〉의 본질 254 4 인간 사고의 두 가지 유형 268 부록 I 참고문헌 • 279 부록 II 주요용어 해설 • 283 찾아보기 • 291序論 베르그송 철학의 개요 앙리 베르그송 Henri Ber g so 퍼즌 185 9¼빈 1~ 18 일 프랑스의 빠리 에 서 출생하여 1941 년 1 월 역시 빠리에서 서거하였다. 혈통상으로는 유대 인이었다. 꽁도르세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의 재능은 탁월하였다. 고교시 절에 이미 과학과 수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고, 수학상과 수사학상을 타 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교시절 배운 철학에는 크게 실망하였던 것으로 보 인다. 그가 배운 그 당시의 철학은 그에게 대단히 공허하고 너무 큰소리 만 치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는 지식으로서 보다 더 확실한 수학과 실증적 과학에 매료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런 고교시절 그가· 배운 철 학이 너무 공허하였기에, 그는 뒤에 그 공허를 메우기 위하여 자신의 철 학을 새롭게 창조하는 직업에 매전하였다고 볼 수 있으리라. 그는 고등사 범학교에서 특히 부트루 Bou t roux 의 자연철학에서 배운 바가 많았다고 한다. 흔히 2~세 기 전반부 프랑스 철학사에 〈 3B 〉로 손꼽히는 사람이 부 트루 Boutr o ux, 베르그송 Bergs o n, 그리고 브롱델 Blonde! 아다. 이 세 철 학자들이 서로 사상적, 이론적인 인접성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1881 년 철학교수 자격을 취득한 다음 그는 188 8';:初}지 앙제 An g ers 와 끌레르몽 Clermon t 고등학교에서 철학교사(프랑스에서는 교수라 함)로 철학강의를 하였다. 그동안 그는 자신의 새로운 철학을 준비중에 있었고, 그것을 위하여 영국의 전화론적 철학자 스펜서 H. S p ence 며t 특히 연구 하였는데, 뒤에 그는 스펜서 철학을 극복하고 비판하게 된다.
이어 그의 모교 고등사범학교의 전임강사로 있으면서 참신한 새로운 학설과 유려한 문장과 명강의로 점차 철학계에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다. 1901 년부터 〈꼴레쥬 드 프랑스 Colle g e de France 〉의 교수가 되면서 많 은 청중으로부터 감동과 경의의 박수를 받기 시직하였다. 특히 그의 철학 은 그 당시 프랑스를 풍미하던 칸트철학과 실증주의적 과학이론 • 사상에 대한 비판과 그 비판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사상과 이론을 제창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1 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아인슈타인과 더불어 국제연맹에서 국제평화를 항구히 유지하는 학문의교도 펼쳤다. 그리고 19281d 에는 노벨문학싱을 받는 최고의 영광을 입기도 하였다. 1921 년 베르그송은 사색과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기 위하여 꼴레쥬 드 프랑스의 자리를 그의 제자인 에두이르 르로와 Ed. Le Ro 현]게 물려주 고, 저술과 강연으로 남은 생애를 살다가 나치점령 치하의 1941 년 1 월 4 일에 쓸쓸히 永眼하였다. 그가 남긴 저서 중에서 대표작들을 꼽으면, 그 의 박사학위 논문으로서 直觀의 철학적 방법을 의식의 해명에 두영한 『 의식의 直接與件에 관한 논고 Essa i sur les donnees im media t e s de la consc i ence 』 (1889) 와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다룬 심리철학계열인 『 물질과 기억 Mati er e et memo i re 』 (1896), 생명을 우주론적 차원으로 적용시킨 『 창조적 전화 L'evolu ti on crea t r i ce 』 (1907),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덕과 종 교의 문제를 취급한 『도덕과 종교의 두 가지 원천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 igi on 』 (19 32) 등이 있다. 이제부터 베르구송 철학의 전반적 특성과 개요를 보기로 하자• 앙리 베르그송 철학의 특성에 관하여 哲學史家 에밀 브레이예 Brehie r 는 〈精神主義〉라고 특칭화하였고, 현대 프랑스의 심리학자 프라딘느 M. Prad i nes 는 〈신비적 정신주의〉라고 규정하였다. 그의 철학에 크게 영향 을 받은 사상가들은 마리땡 J. Marit ain , 빼기 Ch. Pegu y , 르로와 Le Roy , 쏘렐 G. Sorel, 바르트K. Barth , 제임스 W. Ja mes 형제, 그리고 가브리엘 마르셀 G. Marcel 등이다. 이들 다양한 후계자들을 보아도 베 르그송의 철학이 정신주의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베르그송의 새로운 철학은 종래까지 내려오던 사변적 철학이나 과학적 실증주의 철학에 종지부를 찍고 정신적 체험의 질서 위에서 철학적 심리 학과 자연철학, 그리고 형이상학을 수립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둘라크로 와 M. Delacro i x는 심리철학적으로 멘느 드 비랑 Ma i ne de B i ran 이 꽁 디약 Con di llac 이나 까바니 Caban i s 의 심리학에 대립되듯이, 베르그송이 리보 R i bo t나 기타 실증적 심리학에 대립된다고 지적하였다. 꽁디약의 기 계론적 심리학에 반대하여 멘느 드 답 1 랑이 인간 자아의 정신적 원리롤 내세웠듯이, 베르그송도 기계론적 심리학, 연상주의적 심리학, 행태주의적 심리학에 저항하여 그들 과학주의의 허구를 파헤쳤다. 한마디로 베르그송 철학의 원리는 철학의 탐구 대상인 實 在가 지적 개념에 의하여 인식되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직관만이 그 실재의 생생한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런 실재의 본질은 언제나 간단없이 변하고 흐르는 〈순수 생성〉 자체리는 데에 있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이 우주의 모든 것, 인간의 모든 것이 끊임없이 흐르고 변하는 生成 자체임을 밝히기 위한 과정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베르그송은 근대 • 현대과학의 지적 승리와 그 승리를 뒷받침하는 칸트 철학과 현대 실증주의 철학의 철학적 허구를 지적하기 시작한다. 그런 철 학과 과학은 단지 실재의 외양만을 응결시켜 추상적 지식만을 공급해주 고, 상대적인 세계에 인간의 사고를 머물게 하며 철대적 세계에 대한 생 생하고 살아 있는 접근을 차단시키고 말았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물리학 과 수학이 무의미하다고 버려둔 생생한 운동과 실재적이고 현실적인 시 간을 다시 복구시켰고, 생물학이 파기시켜 놓은 생명의 본질을 다시 해명 하였으며, 또 심리학이 문제삼지 않았던 삶의 주체로서의 주체적 의식을 복원시켰다. 그의 철학세계에서 〈생성〉, 〈생명의 비약〉, 〈의식〉, 〈시간〉 등은 사실상 동일한 전리를 다르게 설명하는 개념적 차이에 지나지 않는 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개념들은 지적 승리를 구가하던 수학이나 물리학 등 에 의하여 파악되지 않기에, 베르그송은 수학이나 물리학이 의존하고 있
는 추상적 사고나 추리능력과 같은 지능과는 다른 방법 을 생각하게 되었 다. 그 다른 방법이 베르그송의 直觀 이다• 이 직관에 의하여 이루어전 새 로운 철학은 종래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이나 과학적 지식이 모르던 새로 운 영역을 열어놓았다. 아 새로운 영역이 〈 純粹 持緖 la duree p ure 〉의 영역, 생성의 영역이다. 〈순수 지속 X 본 시간이다• 그러나 수학이나 역학 이 다루는 것과 같은 〈동질성의 시간〉이 아니다. 이 점은 우리가 뒤에서 충분히 다루게 될 것이다 . 그러면 지금부터 보다 본격적으로 그의 철학적 특성과 내용을 개괄적 으로 정리하여 보기로 하자. 1 直觀的방법과 그 특성 베르그송이 말한 직관!'i n t u iti on 은 지능이라고 부르는 능력에 대립된 다. 이 〈지능〉으로 번역되는 불어는 〈i n t el lig ence 〉인데, 보통 흔히 한국 에서 〈지성〉이라고 번역되고 있다 . 그러나 엄격히 말하여 지성이라고 하 는 단어는 〈i n t ellec t〉라는 불어를 가리키는 것이고 , 〈i n t e llig ence 〉는 오히려 인간의 지적 심리적 활동능력을 말하는 지능에 가깝다고 여겨진 다. 지능과 뉘앙스를 조금 달리하는 지성은 논리화된 지능의 개념에 가깝 고, 추상적인 사고능력의 본성을 뜻한다 . 그러면 베르그송이 쓰 고 있는 〈i n t e llig ence 〉란 개념은 지능에 해당하는가? 아니면 지성인가? 물론 베 르그송이 말한 〈i n t ell ig ence 〉란 개념은 한국어로 좁은 의미의 〈지능〉과 넓은 의미의 〈지성〉에 다 함께 적용될 수 있고, 또 지능과 지성이 서로 이웃사촌간이기에 혼용해서 써도 별로 큰 문제는 안된다고 보여진다. 그 러나 베르그송이 자기를 〈反知性的 an ti-i n t ellec t uel 〉 철학자라고 사람들 이 부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음을 김안하고 , 또 엄밀하고 좁은 의 미에서 개념을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므로 우리는 흔히 쓰여전 〈지성〉 대신에 〈지능戶]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지성〉으로 번역되어야 하는 기
회가 오면 그때는 그 이유를 밝히겠다. 베르그송의 개념에 따르면, 지능은 의부의 대상을 분석적으로, 추상적 으로 파악하는 인간의 능력을 뜻한다. 이 지능이 가장 원숙하게 지식화한 것이 수학이나 제반 자연과학이다. 그런데 지능이 의부의 대상을 분석적 으로 추상화하여 그 성질을 법칙화하는 능력이기에, 지능은 인간 의식의 내면적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세계는 추상적으로 고정화시켜서 분석하고 쪼개고 공간 속의 대상처럼 양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 세계는 어제와 오늘이 분리되지 않는 연속이며 흐르는 운동으로서의 생 성이고 지속이다. 〈베르그송이 자신의 철학적 비전으로 접근함에 따라서 개념의 비판과 지속의 직관은 두 개의 연대적 주제로서 서로 섞이게 된 다. 왜냐하면 개념의 비판은 ‘의식의 직접적 與件’에 구원을 요청하고, 반 대로 지속의 직관은 反사변적인 해석에의 의존을 필연적으로 요청하기 때문이다.〉 I)
1 ) Rene Verdenal, La ph il o sop h ie de Bergs o n, p. 262, in La ph il o sop h ie III, sous la dire cti on de F. Chate l et, Marabout, 1985.
그래서 베르그송은 지능이 의식과 같은 내면세계를 인석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지능이 의부세계를 과학적으로 더 잘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세 계의 대상을 가급적이면 자세히 쪼개고, 흐르지 않도록 응결시켜야 한다. 그런데 의부세계의 대상은 인위적으로 분석하고 웅결시킬 수 있지만, 인 간 내면의 의식세계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뒤에서 우리가 자세히 검토 할 단계가 오겠지만, 베르그송은 지능이 사변을 위해서 작용하지 않고 행 동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보기에, 지능은 정신세계인 의식과 달리 물질세 계를 탐구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도 물질세계의 본질 울 인식하기보다, 오히려 생명 활동에 장애가 되는 물질세계를 지배하고 부수고 뒤틀기 위하여 지능이 그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면 더욱 그러하다. 현대과학의 승리는 지능의 승리요, 물질세계를 정복한 개선용사의 의기양 양함과 같다. 재래의 전통적인 형이상학도 물질세계의 유효한 지능에 의
존해서 정신세계를 조명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베르그송에 의하여 비판받 게 된다. 그 대표적인 형이상학이 아리스토텔레스 Ar i s t o t~ 것이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베르그송은 칸 트나 꽁뜨 A. Comt e2} 궤도를 같이 한다. 그러나 칸트와 꽁뜨와는 달리 그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구상하였다. 그 새로운 형이상학은 직관의 방법 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면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직관이란 무엇일까? 〈직관은 먼저 의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의식은 보여진 대상과 거의 구 분되지 않는 직접적인 의식과 비전, 접촉과 일치가 바로 인식이 되는 그 런 의식이다. 추론하고 논증하는 思惟가 만질 수 있는 방법이기는커녕, 지속의 칙관은 의식이 현실의 現前울 느끼는 행위 속에서 현실이 의식에 스스로 주어지는 형이상학적 경험을 표현하고 있다.〉 2) 이 직관을 베르그 송은 스스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사람들이, 대상아 지니고 있는 유일하고, 따라서 표현하기 어려운 것과 일치하기 위하여 대상의 내면으 로 스스로를 옮기려 할 때 생기는 共感 la s y m p a t h i여全 직관이라한다.〉3 ) 그래서 직관은 개념에 의한 인식의 매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 실상 베르그송의 저서들을 읽으면, 그가 우선 난해한 개념을 별로 쓰지 않고, 또 화끈하고 확실하게 정의하는 것을 꺼려함을 십분 감지할 수 있 다. 그래서 성질이 조급한 독자들은 베르그송의 의도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없다고 불평한다. 칼로 두부 자르듯이 그는 一刀兩端울 내리지 않는 다. 그가 탐구하는 전리의 세계가 그렇게 칼로 종이 자르듯 오려지는 성 질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마르셀 G. Marcel 의 문장이 시 원시원하지 않음도 이런 베르그송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저자의 불어 실력이 미숙하여 스스로 자신을 갖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베르그송 연구가들은 그의 불어문장이 탁월하리만큼 세련 되고 우아하다고 입을 모아 칭찬하고 있다. 아마도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 상한 것도 그런 그의 우아한 문체와도 관계가 있으리라. 2) 같은 책, p. 263. 3) H. Bergs o n, La Pensee et le mouuant, p. 18, P.U. F.
직관은 현실과 실재를 그 내부에서 직접 파악하는 인간의 능력을 말한 다. 따라서 직관은 〈절대적인 것났t 파악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칙관이 파악하는 절대적인 것이 〈무한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또 그것 이 전체적인 것도 아니다. 전통철학에서 절대와 무한과 전체는 상호 교환 이 가능한 개념이었지만, 베르그송의 철학에서는 그렇지 않다. 〈절대적이 라는 것X 즌 유일하고 고유하다는 뜻이지, 불변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베 르그송은 이러한 자기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하여 〈사고의 전환)o l 요청 된다고 가끔 주장하였다.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오랜 세월 동안 개념에 의하여 수행되어 온 사고의 인습에서 벗어날 것을 거듭 제 기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직관은 절대적이지만 또한 단편적일 수밖에 없 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직관적 체험과 정보를 귀하게 여기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그는 말하였다. 그리고 직관의 체험을 남에게 전달하기 위 하여 어쩔 수 없이 언어적 개념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의사전달을 구 체화하기 위하여 영상을 도입하여 추상적 개념을 가급적 연성화시키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2 생명의 우주 베르그송의 자연관은, 자연은 물질의 무기력한 덩어리들의 단순한 집합 이 아니며 자연의 물질계 내부에도 생명의 흐름이 관통하고 있다고 보는 관점으로 아롱져 있다. 그 생명의 흐름이 물질을 유기체로 형성케 한다. 자연을 설명하는 과학은 많다. 물리학, 화학, 천문학, 생물학 등. 그런데 이둘 과학이 설명하는 것과 같이 우주와 자연을 이해해도 좋을까? 이런 의문이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제기된다. 베르그송은 자연의 세계를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차원을 넘어, 자연 세계의 유일한 실재로서 간주되는 생명의 흐름을 〈생명의 비약〉으로 해 석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모든 생명은 〈種〉으로 결정되어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창조로서의 〈생명의 비약〉에 의하여 점진적으로 전진하고 있다. 뒤에 우리가 보겠지만 생명이 없는 순수한 물질세계도 생 명의 흐름과의 연관 아레서만 이해되고 설명될 뿐이다. 〈생명의 존재는 죽음 세계의 와중에 있는 非決定의 섬이다. 생명의 존재는 자발적인 운동 의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물질적 대상세계의 무기력과 대조를 이루고 있 다. 운동을 말하는 자는 가능한 방향잡기의 다양성, 즉 非決定을 일으켜 세우는 선택의 필연성과 선택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선택과 자유 는 선택을 바추어주고 적응의 방향을 집아주는 의식을 가정하고 있다. 이 래서 의식은 생명과 같이 나아가고 있다.〉4) 베르그송이 생명의 흐름과 전화를 말한다고 하여 다윈 Ch. Darw i n 의 진화론이나 스펜서의 진화철학에 동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베르그송은 생명이 물리화학적 과정으로 완전히 설명된다고 보지도 않고, 또 다윈의 적자생존 원칙처럼 생존을 위한 투쟁과 환경과의 영향에서 오 는 함수관계에서 전화가 설명되어야 한다고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베르 그송이 생각하는 진화는 인위적인 방식으로 미리 분해된 요소들의 결합 이 아니다. 진화는 새롭고 예견하기 어려운, 생산적이며 창조적인 전화다. 그래서 생명의 바약의 과정은 씨앗에서 씨앗으로., 種울 넘어서 흐르는 힘 과 같은 것으로, 인과율이나 目的因에 의하여 설명될 수 없다.〉 5) 그가 다윈의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류의 목적 론도 수용하지 않는다. 목적론이나 목적인의 개념은 어떤 생명이 앞단계 에서 미리 디음에 전개될 전화의 내용을 온전히 가능성의 상태에서 갖추 고 있다는 생각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다.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을 구체적으로- 그려보면, 자연은 생명이 분출하고 용솟는 〈불꽃〉의 형상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불꽃〉의 개념은 베르그 송 스스로가 묘사한 것이기도 하지만, 불꽃은 그 중심부에서 폭발하여 공 중으로 散開하고 있다• 불꽃이 어디로 어느 방향으로 치솟게 될지 아무도 4) Fran~ois Mey er , Pour conna'it re Bergs o n, p. 48. 5) Jea n Wahl, Tubleau de la ph il o sop h ie fra n~is e , p. 127, N.R. F.
미리 예측하지 못한다. 그 불꽃이 용출될 때, 지구의 중력과 공기저항 등 에 따라 튀어오르는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바로 이 중력과 공기저항이 곧 자연계에 있어서 생명에 대한 물질의 저항과 같다. 생명은 비약을 원 하나 물질이 그 비약을 밑으로 끌어당긴다. 그렇게 보면 자연계는 생명과 물질의 숨바꼭질과 같은 놀이가 생기는 지대다. 그러나 식물, 동물, 인간 이 자연계에서 탄생하였다는 것은 생명이 물질의 방해와 저항을 뚫고 무 기력의 상자 속에 갇히기를 거부한 것의 결과다. 물론 생명의 각 영역마 다 특성상의 처이는 있다. 그 차이는 뒤에서 우리가 자세히 검토하게 될 것이다. 자연이나 인류나 모두 영속적인 생성 속에 있다. 그런 생성의 끝 없는 흐름 안에서 의식과 자연의 생명이 서로서로 손을 잡고 있다. 생명 울 통하여 의식은 자연세계에까지 연장되고 있고, 생명은 인간의 정신세 계에까지 들어와 있다. 의식과 생명 사이에는 이질적인 장벽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여튼 생명의 유기체는 물질적 저항과 무기력에 대한 승리를 보여주 고 있댜 그런데 비록 물질이 생명과는 대립개념에 속한다 할지라도, 생 명은 물질 없이는 그의 활동을 수행해나가기가 불가능하다. 물질은 그런 점에서, 생명의 방해물이면서 동시에 생명의 활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수 단이기도 하다. 베르그송의 표현처럼, 〈산이 저기에 있기 때문에 굴이 생 겼다〉. 생명의 흐름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물질적 방해와 저항이 없이는 생명은 계산상으로 볼 때 불가능한 바약을 결행할 수가 없었으리라. 3 신체와 영혼의 관계 자연철학에서 생명과 물질의 관계처럼, 베르그송의 심리철학에서 영혼. 과 물질도 유사한 관련구조를 맺고 있다. 베르그송의 심리학은 의식을 심 리적 현싱이나 사실의 확인으로 생각하는 현상주의 le p henomen i sme 나 또는 의식의 각 요소들 사이의 연상관계만을 취급하는 聯想主~l' asso-
cia t i on is m e, 의식을 신체활동, 죽 두뇌활동의 부수현상으로 여기는 心 身 平行論 le pa rallelis m e p s y cho - p h y s iq ue 이나 副隋 現 象 主 義 l'ep i-ph en- omen i sm 흘 모두 거부하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하여 베르그송의 심리학은 우리가 自我라고 부르는 실재, 우리의 내면적 삶의 실재는 단지 검증가능한 현상들의 집합이 아니고, 持 續 이며 흐름이라고 밝히는 데 있 다. 그런 의식의 지속하는 내면세계를 베르그송은 대개 세 가지 특칭으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로 우리의 의식세계는 지능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분 해되는 현싱들의 짜깁기가 아니다. 우리의 의식은 쉬지 않고 흐르는 냇물 처럼 지속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베르그송은 연상심리학이나 심신평행 론의 입장을 의식의 자연스런 흐름을 의면한 인위적 조작이라고 본다. 둘째로 의식의 내면세계가 지속이고 흐름이라고 해서 그 흐름의 시간 이 이곳이나 저곳, 창조하는 데 열중하는 사림이나 권태에 찌든 사람이나 다 동일한 同質의 시간이라고 생긱해서는 안된다. 동질적인 시간의 흐름 은 말하자면 획일적인 시간 계산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생명의 세계에서 비약이 예기치 않게 문득 나타니듯이, 의식의 세계에서도 감각에서 지각, 지각에서 영상, 영상에서 관념으로 전화하면서 동질적인 추상개념을 당황 스럽게 만드는 異質性이 갑자기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심리현상을 생리 현상에서부터 추론하여 설명하려는 모든 기계론적 심리주의를 베르그송 은거부한다. 그러므로 베르그송 철학에서 가장 먼저 알아두어야 할 원칙은 우리들 의 자아가. 느끼고 체험하는 실재적이고 현실적인 시간과, 수학이나 역학 에서 운동의 단위를 측정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만든 추상적 시간을 구 분하는 일이다. 전자의 시간을 베르그송은 통상 〈지속 la duree 〉이라고 명 명하고있다. 셋째로 의식의 내면세계는 절대적이고 자유스럽다는 점이다. 〈생명의 비약〉처럼 의식의 내면세계는 예기할 수 없고, 목적론적 사고방식이나 기 계론적 사고방식이 적용될 수 없는 자유의 세계다. 그에 의하면, 모든 결 정론적인 사고방식은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속으로 보지 않고 단편적으로
쪼개어 그것에 인위적으로 인과율을 적용시킨 결과다. 생명의 본질도 자 유이듯이, 의식의 본질도 자유다. 물론 생명과 의식의 자유를- 방해하고 제약하는 물질의 저항 역시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그 물질의 저항도 사실 상 자유를 현실화시키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 점은 뒤에 우리가 본론 을 다룰 때 충분히 검토될 것이다. 이런 기본적 이해를 토대로 하여 心 身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 의식의 지속은 베르그송의 심리철학에서 〈기억〉으로 탈바꿈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기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습관적 기억 la memo i re-hab it ude 〉이라고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냐는 〈정신적 기 억 la memo i re -e s p r it〉이라고 하는 것이다. 〈습관적 기억沃는 종종 〈신체 적 기 억 la memo i re -c or p s 〉이나 〈운동 기 억 la memoir e mo t r i ce 〉으로 불리기도 하고, 반면에 〈정신적 기억活든 〈순수 기억 la memoir e pu re> 이나 〈추억적 기억 la memo i re -s ouven i r 〉이라고 지칭되기도 한다. 습관적 기억은 암기에 의하여 책의 내용이나 행동의 순서를 재생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따라서 습관적 기억은 신체에 걸린 습관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 기억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복에 의하여 조금씩 취득되어지고, 반복연습에 의하여 무의식으로 향하게 된 댜 그 기억은 의국어 회화를 배울 때처럼 일정한 질서와 반복에 의하여 맺어진 자동적 메카니즘의 운동을 전제로 하면서 가능하다. 그 기억은 신 체와 연관성을 맺고 있고, 특히 신체의 두뇌가 습관적 기억의 행위를 전 개시키는 운동신경의 중심부가 된다. 그 기억은 현재 속에서 동일한 행동 울 재생한다. 이와는 반대로 정신적 기억은 단번에 과거 속으로 자기자신을 가져간 다. 그 기억은 기계적인 운동에 의하여 습관화되는 것이 아니라, 단 일 회의 사건으로 잊혀지지 않고 과거의 추억으로 존재하게 되어 우리의 현 재적 삶에 추억으로 계속 살아남게 된다 . 뒤에 우리가 자세히 보는 기회 를 갖게 되겠지만, 그러한 추억은 반복연습에 의하여 두뇌의 감각운동신 경의 지휘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두뇌의 작용과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베르그송의 이론이다. 왜냐하면 뇌세포 기능의 정지에도 불구 하고 뇌를 다찬 사람이 지난 시절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음이 밝혀지기 때문이댜 이 문제도 뒤에서 자세히 다루어질 것이다. 추억의 존재가 뇌 세포의 손상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증거는 베르그송으로 하여금 추억적 기억은 뇌세포와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 으로 존재한디는 주장을 펴게 하였다. 그러나 이 순수 추억의 정신도 현실화되기 위하여, 즉 현재화되기 위 하여 참재상태에서 현실상태로 이행되어야 하고 의면화되어야 한다. 현실 화의 도구가 필요하다. 그 도구가 바로 뇌세포다. 정신으로서의 순수 추 억이 뇌세포의 신체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됨은 노동자가 일하기 위하 여 도구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함과 다를 바가 없다 하겠다. 그러므로 순수 기억이나 순수 추억은 뇌세포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뇌세포와 무 관하지만, 현실세계에 현재화하기 위하여 필요한 도구로서 뇌세포를 이용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점을 달리 표현하면, 뇌세포의 운동기능 은 순수기억의 정신성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그 활동을~ 제약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이미 앞에서 암시된 바이지만, 영혼(순수 기억 )과 신체 (뇌세포)와의 관계는 마치 생명과 물질과의 관계와 같다. 생명은 물질이 아니고, 물질은 생명의 비약을 방해하나, 또 다른 한편으 로 생명이 그 물질의 저항을 이용하고 있다. 정신(영혼)과 뇌세포와의 관계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베르그송은 心身平行論의 이론이나 영혼이 신체의 부수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副隋現象主義l' ep i-p henomen i sme 에 동의하지 않게 된다. 베르그송의 이러한 기억이론은 그 당시 심리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 었다. 브로까 Broe 텨t 위시한 그 당시의 심리학자둘은 추억이란 신경 충 동이 남겨놓은 흔적처럼 뇌세포 속에 박히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증거로서 뇌세포의 파손은 곧 전망증이나 병적 망각을 야기한다는 사 실이다. 더구나 브로까는, 失語症온 생리학적으로 왼쪽 이마의 浪 1 째 대 뇌의 하부 파손 때문에 생간다고 전단하였다. 뒤에 뇌세포 피손과- 망각과
의 관계를 보게 되겠지만, 마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망각은 추억의 소멸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망각과 추억의 不在 오柱근 다론 차원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베르그송의 지론이다. 이 〈순수 기억〉, 〈추억적 기억〉, 〈정신적 기억〉의 이론에 따르면, 추억 으로서의 기억이 뇌세포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唯物 論者 들의 주장은 허구다. 베르그송의 생각을 충실히 옮기면, 뇌세포는 기억의 근원 이 아니고, 단지 기억이 현실화하는 데 거쳐가야 할 통로일 뿐이다. 그러면 기억이 현실화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을 갖게 될 것이고, 그 의문은 나중에 자연스럽게 풀리게 될 것이리라. 좌우간 이 추억적 기 억이 정신이고, 의식이고 지속이며 생명이다 . 과거는 우리 속에서 쉬지 않고 구성되어진다. 과거는 비록 망각의 지대에 속해 있을지라도 결코 無 化되거나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4 도덕과 종교의 두 가지 원천 자아와 자연적 생명세계를 탐구하던 베르그송은 후기에 이르러 사회생 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도덕과 종교의 원리에 대한 탐구의 결실을 맺었 다. 동물, 특히 벌이나 개미의 群捷生活은 본능에 의한 것이지만, 베르그 송은 인간사회가 세 가지의 특칭으로 요약된다고 생각하였다. 그 세 가지 특징은 첫째 인간사회는 강제적인 법에 근거한 도덕적 특칭이요, 둘째가 조직적인 儀禮를 지니는 종교적 특칭이요, 셋째로 자기 제도를 개선할 수 있는 진보적 특징이다 .6) 인간의 사회생활과 개미나 벌들의 군서생활의 비 교를 우리가 뒤에서 검토하는 기회를 갖게 되겠지만, 그런 안간사회 생활 의 특징을 염두에 두고서 베르그송은 〈닫힌 도덕 la morale close> ,〈 열 린 도덕 la morale ouver t e 〉의 두 가지 원천을 제시하였다. 〈닫힌 도덕浮 7 인간의 사회생활을 가능케 하고 유용하게 만들기 위해 6) F. J. Thonnard, Precis de l'h i s t o i r e de la ph ilo sop h ie , p. 976, Desclee.
사회가 개인들에게 부과하는 금지조항과 규정들의 체계를 가리킨다. 베르 그송에 의하면 닫힌 도덕은 세 가지 특징을 역시 지니고 있는데, 그 특 성은 각각 의무적이라는 것, 본능적이라는 것, 그리고 폐쇄적이라는 것이 댜7) 의무적이라는 개념은 강제적이라는 개념과 동의어다. 모든 의무에는 언 제나 필연성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그러면 닫힌 도덕의 필연성은 어디에 서부터 오는가? 베르그송은 그것이 사회관습에서부터 파생한다고 보았다. 그 사회관습은 사회의 집단적 강제성과 의무성을 지니고 있어서 거기에 사는 개인들의 -擧手一投足까지 지배하게 된다. 사회관습을 벗어난 개인 은 그 사회에서 제재를 받는다. 그러나 부분적 관습은 시대나 상황에 따 라 달라지는 가변성을 지닌다. 그런데 이런 강제적이고 의무적인 도덕은 합리적인 근거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니다. 닫힌 도덕과 관습을 합리적 과 학적으로 설명하려 한다면, 그런 시도는 언제나 벽에 부딪힌다. 그러므로 그런 강제적인 닫힌 도덕은 그 사회를 지키고 보호하고자 하는 사회적 본능의 소산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기에 쓰여전 사회적 본능이라는 개념 은 개미나 벌들 사회의 본능처럼 일자 일획도 틀림과 바뀜이 없는 예의 없는 정확성이 아니고, 대체적으로 동물사회의 본능처럼 그런 역할을 수 행한다고 넓은 의미에서 쓰여전 것이기에 베르그송은 이를 〈잠재적 본능 !'ins ti nc t v i rt ue! 〉이라 불렀다. 즉, 잠재적 본능이란 동물적 본능과 달 라, 지능의 요구에 적응하는 성향을 지니면서 본능적인 감각도 갖고 있어 그런 도덕이 자기 사회를 보존케 한다. 일종의 〈원하여전 본능〉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그래서 그런 본능적 성향은 사회생활의 비효 율적인 것을 제거하고, 또 사회조직을 해체시키는 이기주의적 작태를 경 계하고 배척하게 한다. 그런데 그 도덕은 어디까지나 자기 사회의 생존 • 보존 • 번영이라는 테두리를 념을 수 없다. 애초에 그 도덕이 나온 까 닭 자체가 집단보존의 소속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도덕성은 어쩔 수 없이 사회적 폐쇄성을 지닌다. 7) 같은 책, p. 976.
거기에 반하여 열린 도덕은 세 가지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자발적 이고, 직관적이고, 전보적이다 . 8 ) 물론 열린 도덕도 도덕으로서 갖추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의무는 강제적 형식으로 개개인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자유로운 자발성에 근거하게 된다. 죽, 열린 도덕은 개개인에게 자발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부름과 직결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도덕은 닫힌 도덕이 주 로 익명의 체계로써 강제화하는 데 비하여 어떤 숭고한 정산과 영웅적인 인물의 호소와 만나게 된다. 그래서 그 도덕이 개개인의 양심을 일깨우는 부름이기에, 그 부름은 개개인에게 어떤 깊은 영혼의 감동을 자아내고 그 감동은 도덕으로 변한다. 따라서 이 열린 도덕은 대단히 정감적인 데가 많지만, 그 정감성은 합리성이 창출하지 못하는 높은 정신적 共感과 神秘 롤 창조하게 된다• 그런 공감과 신비성은 悟性的 추리에 의하여 유도되는 결론이 아니라, 높은 정신적 차원에 있는 영웅이나 성자와 각 개인 사이 에 직접 맺어지는 직관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와 같은 직관적인 共鳴과 정신적인 신비를 체험한 이는 그 영혼에서 전과는· 바교가 안될 정도로 빛나는 변형과 비약, 그리고 전보를 이룩하게 된다. 그런 접에서 열린 도 덕은 개인에서 가정, 가정생활에서 사회생활, 사회생활에서 국가생활, 국 가생활에서 인류적 박애의 차원으로 점진적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생활에서 바로 인류의 차원으로 비약하고 전보한다. 예수와 석가모니 의 가르침과 그 도덕이 그러하다. 열린 도덕은 모든 이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가르치고 실천한다. 이와 같은 도덕의 두 가지 원천 이의에 그는 또 종교의 성질을 두 가 지로 분류하고 있다. 그것은 곧 〈정태적 종교 la reli gion st a tiq ue 〉와 〈동태적 종교 la relig ion d yn am iq ue 〉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정태적 종교는 닫힌 도덕처럼 자기 종족과 그 사회 의 보존 및 보호롤 기본 목적으로 갖고 있다. 모든 닫힌 종교와 도덕은 그 기원에 있어서 자기 사회의 위험성이 초래하는 사회적 붕괴를 막는 8) 같은 책, p. 978.
임무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 사회의 붕괴를 초래하는 그 공통적 요인이 무엇인가? 베르그송은 그것을 〈이기주의〉와 〈공 포 〉라고 생각하였다. 동 물사회에는 이기심이 없고 오직 본능의 사회적 소리에 따라 한 치의 오 차도 없이 군서생활을 꾸려나간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가 못하여서 본 능 이외에 지능이 있고, 이 지능에 의해서 이기심이 교묘히 발동된다. 닫 힌 도덕의 강제성만으로 이 이기심이 고개를 숙이지 않으므로 사회는 종 교를 만들어서 인간의 지능적 이기심을 억누른다. 그래서 사회적 압력이 해결하지 못허는 것을 神의 이름으로 종교가 해결하려 한다. 두번째의 위 험은 인간의 허약성에서 발단된다. 동물의 본능은 대단히 정확하고 정밀 해서 거의 실수가 없다. 사냥하는 동물의 神技는 화살을 들고 불확실한 사냥을 해야 하는 인간들에게 정확성과 정밀성에서 열등감을 심어주기 충분하다. 인간은 그 동물의 신기에 가끼운 본능 대신에 지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 지능도 동물의 본능처럼 당장에 신기에 가끼운- 능력을 부여해주지는 않는다• 그런 열등김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미래적 공 포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는 길을 찾게 하였다. 그런 불안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죽음의 문제다. 다른 동물은 죽는다는 지각은 갖고 있지만 죽음 울 예감하지 못하나, 인간은 그것을 미리 의식한다• 그래서 인간은 사냥 이나 천재지변이나 혹은 병으로 우연히 오는 죽음의 공포를 이기기 위하 여 不死의 신앙, 조상숭배, 초자연적인 정신들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되었 다. 이 모든 신앙은 결국 사회생활을 유용하게 하기 위한 동기에서 파생 되었고, 허구적 說話들도 그런 사회생활의 질서유지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정태종교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주술이나 마법, 미신 등도 인간 의 사회생활을 가능케 하는 신경안정제의 역할을 하고, 동시에 금지의 법 과 같은 역할도 한다. 이런 정태종교가 더 고급화하면― ― 인간 지능의 발전에 따라-神들과 같은 초월적 개념이 등장한다. 이런 정태적 종교 는 미개인들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인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다. 왜냐하면 사회생활의 성공을 비는 마음은 예나 이제나 다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정태적 종교와 달리 동태적 종교는 열린 도덕처럼 사회생활의 성 공을 비는 祈福的 요소를 뛰어넘는다. 동태적 종교는 사회적 차원을 넘어 전 인류의 지고한 행복과 평화와 사랑을 가르친다. 이 종교는 사회와 그 속에 사는 개인의 성공과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그런 질서의 차원을 넘어 , 죽 지능의 차원을 넘어 숭고한 정신의 이념에로 인간을 부르게 된다. 동 태적 종교는 지능의 종교가 아니고 직관의 종교다. 물론 베르그송의 철학은 〈지능〉에서 〈직관〉으로, 〈닫힌 도덕 〉에서 〈열 린 도덕〉으로, 〈정태적 종교〉에서 〈동태적 종교〉로 인간 정신이 回心할 것을 암암리에 부르고 있다. 열린 도덕은 억압이 아니고, 열망에 의하여 그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열린 도덕은 미래로 방향을 돌리고 있다. 그 도덕은 창조적인 水液으로 부풀어전 감동 속에 자신의 근원을 갖고 있다. …… 열망은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갖는 사랑의 비약이다. 억압이 지성 이하적인 것이라면, 열망은 지성 이상적인 것이다. …… 열망은 언제나 영웅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다.〉 이 루이 라벨은 〈동태적 종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지적하고 있다. 〈정태적 종교는 아직도 도시국가의 종교이지만, 동태적 종교는 그 한계를 벗어나 있다. 허구적 기능은 반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삶 속 에서 신뢰의 결핍울 채워주는 신화만을 창조하지만, 신바주의는 그런 신 화에 의하여 정지당하지 않는다. 신비주의는 비약이 오는 방향으로 향하 여 비약을 다시 잡기 위하여 거슬러 올라간다. 영혼은 자기자신보다 무한 히 강력한 존재에 의하여 침두되어지려고 한다. 그 영혼은 미래에 관하여 불안하기를 그친다. 왜냐하면 그 영혼은 자기 관점에서 동의하는 영혼이 고 원하는 영혼이기 때문이다.〉 10) 지금까지 우리는 베르그송 철학의 개요를 살펴보았다. 서론에서 이 개 요를 먼저 언급하는 까닭은 제 1 장부터 시작될 그의 철학의 본론적 해석 9) Louis Lavelle, La ph il o sop h ie fran i;a i s e entr e Les deux gue rres, p. 105, Aubie r . 10) 같은 책, p. 109.
에 대한 접근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간의 개요를 다시 한 번 간 추려 정리하면, 베르그송의 철학은 분석적 추상적 지성에서 체험적 구체 적 직관으로 철학적 방법의 무게를 전환시킬 것을 권유하는 방법론적 초 대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 방법론적인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면, 인간의 의식은 현상이나 요소가 아니라, 구체적 시간으로서의 지속이며, 인간의 의식세계 그 자체가 지속인 한에서 〈추억적 기억〉의 흐름이고 비약임을 우리가 알게 된다고 그는 역설한다• 이와 동시에 도덕과 종교의 두 가지 원천에서도 〈열린 도덕〉과 〈동태적 종교났근 〈닫힌 도덕〉과 〈정태적 종 교〉와 차원을 달리하는 〈열망〉이요 〈바약〉이다. 그러나 그 열망과 비약 이 현실화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 닫힌 도덕과 정태적 종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음은 순수기억이 뇌세포에, 생명이 물질에 어느 정도 의존하지 않 울 수 없음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 이 점에서 라벨이 베르그송의 철학을 해설하면서 내린 결론 자체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하겠다. 〈두 세계 사 이에 놓여 있는 지능, 죽 지성 이하적인 것으로서 닫혀 있는 것에서부터 방향을 바꾸어 지성 이상적인 것으로서 열려 있는 것으로 향하여 바라보 고 있는 지능을 험담해서는 안된다.〉II) 11) 같은 책 , p. 111 .
제 1 장 물질과 기억 ― 베르그송의 심리철학 1 心身平行論의 비판과 두 가지 기억 서양철학사에서 心身平行 論 의 주장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데까르 뜨 Descar t es 철학에서 그 기원울 찾는다. 즉, 데까르뜨는 정신이란 실체 의 본질은 思惟이고 물질이란 실체의 본질은 延長이라고 주장했다. 그리 하여 영혼은 정신세계의 대표자로서 그 본질도 역시 사유이고, 신체는 물 질계의 미약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 본질 역시 연장이라고 여기게 되었 던 것이다. 이 연장이란 개념에 대한 약간의 부연적 설명이 이해에 도움을 주리 라. 데까르뜨가 말한 연장은 모든 물질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고, 그 공간 은 길이나 너비나 깊이의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아무튼 연 장의 개념은 물질이 길거나 짧거나간에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장 소의 개념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어서, 흔히 擦張이나 공간의 부분개 념과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그래서 공간의 점유 속에서 모든 물질은 물리학의 법칙에 종속되며, 특히 신체도 그런 물리적 세계에 속하는 기계 성과 다룰 바가 없다고 데까르뜨는 추리하였다. 이것이 데까르뜨의 心身 二元論 0] 다. 그런데 사실상 심정적으로 데까르뜨는 자기의 심신이원론이 타당한가 에 대한 깊은 의문을 지녔지만, 합리적 사유와 기계론적 세계관과 기하학
에의 신뢰 때문에 심정적 생각을 무시하려 하였다 . 데까르뜨를 이은 말브 랑슈 Malebranche나 라이프니츠 Le i bn i z 나 스피노자 S pi noz a'S三 데까르뜨 의 이원론이 제기한 어려운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유와 연장 은 서로 전혀 다론 독립적 실체인데 그 실체들 사이에 결합이 생긴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하여, 위의 세 철학자들은 다 함께 인간의 현실에서 느껴지는 심신의 상호교응을 설명한기 위하여 어려운 이론적 모색을 각 각시도하였다. 예컨대 스피노자는 그런 심신의 교류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神 의 개념 속에서 찾으려 하였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사유와 연장은 유일한 실체인 神의 두 가지 속성이었다. 神의 두 가지 속성은 물론 평행선만 달릴 뿐이다. 그 평행선을 달리는 神의 두 속성이 인간의 경우에 영혼과 양신체상의은 가樣변相적 사성이질에을서 뜻나한타다난.다 .그 리속하성여은 영실혼체의의 지불각변과적 산성체질의을 성 말향하과고의, 사이에 어떤 상호교차도 없지만 그래도 평행적인 대응관계는 유일한 실 체인 神을 매개로 하여 성립한다고 주장하였다. 스피노자의 생각은 평행 론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상관관계를 인정하려 한 애매한 절충방식을 나타내고있다. 사실상 데까르뜨의 이와 같은 심신이원론은 그 후 데까르뜨가 비판해 마지 않았던 스콜라 철학의 잔재라는 생각이 일어나게 되었다. 즉, 정신 이나 영혼은 그리스도교적인 인간관과 신학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결 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生理學과 心理學의 발달과 함께 서서히 제기되 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서양 근대화과정에서 생긴 생리학과 심리학은 확실한 과학적 결과를 가져오는 생리학적 사고를 존중하게 되면서 심신 관계를 생리학의 차원에서 디루어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을 펴기 시직굵} 였다. 심신의 문제가 의부에서 관찰이 가능한, 그리고 인과관계의 연결이 기계론적으로 잘 맞아떨어지는 생리문제로 자리를 옮기면서, 의식은 전등 불 옆에 있는 희미한 반딧불의 신세처럼 밀려나게 되었다. 그래서 의식상 태, 정신상태란 원칙적으로 생리현상의 두뇌회전에 대한 〈정신적 번역 la
tra ducti on men t ale 〉과 다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굳어져가기 시작하 였다. 이것이 이른바 생리작용에 대한 정신작용의 〈 副隋 現 象主義 l'€p i p henomen i sme 〉다. 의식이란 신체 생리현상의 부수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는 생각은 데까르뜨의 기계론적 자연관에 의하여 더욱 큰 용기를 얻게 된다. 자연은 거대한 기계장치고, 그 장치는 수학적 계산에 따라 정밀하 게 작용하고 있기에 수학적 사고는 생명과 의식세계에도 적용되어야 한 다는 주장이 서양 근대화과정에서 지배적이었다 . 그래서 심리학은 〈심리 물리학〉이나 〈심리생리학〉과 같은 동의어로 이해하게 되었다. 신체에 가 해지는 생리적 자극과 그 과정을 먼저 측정하고 이어서 거기에 대응되는 內省的 방법으로 심리현성을 고찰해야 된다는 것이 심리물리학 내지 심 리생리학의 요청이다. 베르그송이 철학자로서 활동을 시작한 1 양1 l 기말과 2M] 기초에도 심리 학은 이와 같이 생리학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 영향 아래서 心的 사실 둘은 두뇌상태와 평행하게 전개된다는 주장이 압도적이었다• 즉, 심신평 행론의 요지는 결정된 모든 심적 현상에 대하여 거기에 대응되는 두뇌상 태가 각각 게재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심신평행론은 엄밀히 말하여 두 가지의 이론을 포함하고 있다. 그 하니는 두뇌상태와 심적 현상은 정 확히 1 : 1 의 대응적 평행관계를 유지한다는 입칭이고, 또 다른 하나는 두뇌상태가 어떤 경우에 자기자신의 의도를 비쳐주는 심적 상태로 〈복 사났仁다는 입장이다• 이 경우에 신체의 생리현상이 主가 되고, 그것이 심 리현상을 창조하기에 자연히 심리현상은 생리현상의 부수적 의미로 전락 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이런 심신평행론은 곧 물리적인 것이 심리적인 것을 결정한디는 決定論의 사상을 잉태하게 된다. 이런 결정주의의 사상 에 대하여 베르그송은 디움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우리 시대에 제기되고 있는 바와 같은 물리적 결정주의의 사상은 기 하학적 엄격성과 명석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두뇌 속에서 이루어지는 분자운동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의식이 어떻게 그러 한지 알지 못하면서 그 분자운동에서 파생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마치
의식은 반딧불의 방식으로 그 분자의 운동 흔적을 비춘다고 생각한다. 또 한 사람들은 울리지 않는 피아노의 건반을 배우가 두드리는 동안 무대 뒤에서 연주하는 보이지 않는 음악가를 생각한다. 그래서 멜로디가 배우 의 박자에 따른 운동에 접붙여지듯이, 의식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부터 분 자운동에 포개지기 위해서 오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떤 상상을 하든지간에, 심리적 사실이 두뇌의 분자운동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l) 베르그송의 눈으로 볼 때, 심신평행론과 결정주의는 〈사실〉과 〈사실의 과학적 설명 X t 혼동하는 과오를 범하는 셈이다. 사실은 심신이 서로 삼 투작용을 하고 있는데, 평행론과 결정주의는 그런 삼두작용을·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어서 또 베르그송은 평행론과 결정론의 허구를 다음과 같 이 풍자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일단 평행론자나 결정론자의 주장을 수용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가정해놓고 보면, 생리학자들은 뇌세포의 세 포막을 구성하고 있는 분자와 원자, 그리고 전자들의 전 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아주 강력한 어떤 도구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 도구는 뇌세포 전동과 운동의 모든 모습을 인간의 사고나 감정으로 번역할 수 있는 심신대응의 일람표나 사전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추정 할 수밖에 없다. 그런 도구로서의 일람표나 사전을 생리학자가 소유하고 있다면, 그는 영혼보다 더 잘 인간의 생각과 느낌과 바람을 알 수 있다 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인간의식이란 것은 뇌세포의 모든 과정 중에 서 특전을 부여받은 부분만 비춘다고 생리학자가 주장하는데, 그 생리학 자는 뇌세포의 모든 운동과정을 다 알 수 있는 전권을 지니게 된다는 가 설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뇌세포 운동의 원인과 결과를 동시 에 다 볼 수 있다는 우스운 결과에 이른다.〉 2) 이처럼 베르그송의 심리철학은 평행론과 결정론의 이론과 사상에 대한 1) H. Bergs o n, Essai sur les dennees im media tes de la conscie n ce, p. 111, P. U.F. 2) H. Bergs o n, L'energi e spi rit u e lle, pp. 33~34, P.U . F.
비판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소극적 비판에만 머물지 않고 심신관계 에 대한 자신의 적극적 이론과 사상을 개전하였다. 그의 개진은 그의 저 서 전편에 펼쳐 있지만, 그래도 그의 불후의 명저인 『 물질과 기억 Mati - ere et memo i re 』에서 가장 전하게 그 문제가 다루어져 있다. 결론부터 먼 저 언급하자면, 심신관계에 대한 그의 주장의 논리는 마치 생명과 물질의 관계논리와 같이 심신은 상호의존적 관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본질상 분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심신관계에 대한 문제를 연구하기 위하여 베르그송은 문제의 정밀한 해결울 바라는 마음에서 보다 연구범위롤 축소할 필요를 느꼈다. 즉, 그 는 기억의 문제를 연구히는 것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기억문제는 그 당시 심리학계나 생리학계의 주된 관심 중의 하나였고, 그 기억의 문제와 함께 말의 기억과 말소리의 기억, 그리 고 망각과 실어증까지 아울러 연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죽, 베르그송 이 기억문제를 연구과제로 선택한 적극적 동기는, 기억이야말로 의식과 신체가 서로 만날 수 있는 특성을 지닐 수 있다는 데 있다. 신체(물질) 로서의 두뇌는 가장 정교한 기계이고, 또 동시에 정신과 의식도 이 가장 정교한 두뇌와 분리될 수 없디는 관점에서 기억문제가 다루어지기 시작 하였다. 그러면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평행론이나 부수현상론, 결정론과 같은 전 통적인 심리학이 기억문제에 관하여 범한 오류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고 찰해보자. 전통 심리학은 인간의 과거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 였고、 그 심리학에 영향을 받은 철학도 그런 생각을 강화시켜나갔다. 〈오 직 현재만이 자기 홀로 존재한다. 만약에 어떤 것이 과거에서 솟아난다 면, 그것은 현재가 과거에 빌려준 도움에 의하여, 현재가 과거에 대하여 만들어준 자비에 의하여, 다른 말로 바꿔 덜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과거 의 어떤 무 분 둘 을 상자 속에 저장함으로써 예의적으로 보존하는 역할을 지닌 기억이리는 특수한 기능의 중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3) 이상의 인 3) H. Bergs o n, La pe nsee et le mouuant, p. 168, P.U.F.
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만약에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과거가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인가? 기억이 존재하지 않고 하나의 기능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존 재 근거가 없 는 기능이 활동할 수 있겠는가? 과거의 어떤 부분들이 상자 속에 저장된 것이라면, 그 장소는 어딘가? 이런 물음을 제기하면서 베 르 그송은 과거가 존재하기를 그쳤는지, 아니면 그것이 有用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잊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 그러면 유물론적인 평행론자들은 추억으로서의 우리의 기억이 어디에 보존되어 있다고 보는가? 그들은 정신작용의 기능으로서만 생각하는 기 억이 다음과 같이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왼쪽 정면 세번째 대뇌의 하단에 말의 분절운동에 대한 추억이 저장되어 있고, 왼쪽 관자놀이 첫번 째 • 두번째 대뇌 속에 말소리의 기억이 보존되어 있고, 왼쪽 노정부 두 번째 대뇌의 뒷쪽에 말과 문자의 시각적 영상이 비축되어 있다 전 추억과 기억을 보존하는 그릇은 그렇다고 하자. 그러면 그 기억의 내용은 어떤 상태로 있는가 하는 의문이 역시 생기지 않을 수 없다 . 말하자면 과거가 어떤 형식으로 두뇌 속에 보존되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전통 심리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죽, 만약에 우리가 과거를 회상한다면, 그것은 우리 신체가 아직도 그 과거에 대한 현재적 흔적을 보존하고 있 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을 비유해서 표현하자면, 기억이 우리의 뇌세포 속에 마치 소리가 디스크판 속에 담겨 있듯이, 사 전필름의 음화 속에 실물의 영상이 새겨져 있듯이 그렇게 저장되어 있다 는뜻이 된다. 이런 주장을 수용해놓고 보아도 여전히 의문이 일어난다. 이 주장은 결국 밀가루 반죽에 손가락의 지문이 박히듯이, 과거의 사건이 두뇌세포 속에 〈엔그람 l' en g ramme 〉의 형식으로 찍힌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 래서 우리 머리의 각 뇌세포는 먼저 지각에 의하여 인상의 주형을 받고, 4) H. Bergs o n, Mati er e et memoir e , p. 166, P.U. F. 5) H. Bergs on, L'energi e spi rit u e lle, p. 32, P.U. F.
이어서 그 인상을 재생하여 감각이나 영상으로 복원시킬 수 있는 이상야 릇한 마술적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심리학자 리보 R i bo t는 우리 뇌세포가 모든 기억이나 추억을 다 녹음 • 녹화할 수 있다 고 가정한다면, 약 6 억 개의 뇌세포가 소요된다고 계산하였다. 물론 그 6 억 개의 숫자는 동일한 기억요소들이 기계론적 연상법칙에 의하여 다양 한 결합을 시도한다는 것을 감안하고서 나온 개념이다. 그렇게 볼 때, 뇌 세포는 시각· 청각 ·후각·촉각·미각 등 다양한 영상들이 한없이 다양 하게 가지를 치고 나가면서도 중앙에 있는 감각중추기관에 집중적으로 연결되는 산호군의 이미지와 유사하게 된다. 결국 인상이 저장되어 있는 곳에 어떤 의부의 진동이 자극으로 가해지 면, 뇌세포는 추억을 회성하게 된다. 시각 • 청각 운동에 대한 추억둘이 모두 뇌세포 속에 저장되어 있다가, 우리가 어떤 것을 지각하게 되었을 때, 그 지각이 두뇌의 세포를 자국하여 추억이 그 지각과 연상되어 발생 한다는 생각이다. 지각이 뇌세포를 자극하여 추억이 발생한다면, 〈지각〉 은 〈강렬한 추억〉과 같고, 〈추억活든 〈희미한 지각〉과 같다는 · 이론이 성 립하게 된다. 그런데 베르그송에 의하면 지각과 추억은 전혀 다른 본질에 속한다. 뒤에 자세히 보게 되겠지만, 지각과 추억울 정도의 강익단계로 생긱하게 된다면, 그런 생각은 지각의 현재성과 추억의 과거성을 동일화 시키는 과오를 범하게 되고, 〈 認 知 la reconna i ssance 〉의 현상이나 무의 식의 메카니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6) 죄우간 추억과 기억울 뇌세포 속에 저장된 인상이라고 할 때, 그 뇌세 포가 해부학적으로 변질되거나 파괴되었을 때 추억과 기억은 사라지게 된다는 귀결이 나오게 된다. 예컨대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병은 그 기억 울 저장하는 대뇌가 상해를 입었기 때문이러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은 베 르그송 심리철학의 핵심으로 접근하는 데 주요한 쟁점이 된다. 만약에 우리가 유물론적 평행론자들의 주장처럼 기억을 그렇게 생각한 다면, 기억은 단지 두뇌의 뇌세포 기능에 불과하다 . 그래서 신체 (두뇌 )로 6) H. Bergs o n, Mati er e et memoir e , p. 70.
부터 독립된 기억의 존재는 불가능해전다. 이 점은 추억과 지각 사이가 단지 단계의 정도에서 생기는 깅약의 차이인가, 아니면 본질적 차이인가 하는 점과 더불어 베르그송의 심리철학의 이론적 중심이 된다. 그러면 이제부터 베르그송 자신의 적극적인 이론을 살펴보기로 하자. 기억에 관한 그의 이론은 먼저 그가 기억을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미 우리는 서론에서 베르그송의 두 가지 기억울 정리한 바 있다. 그 두 가지 종류는 주지하다시피 〈습관적 기억〉과 〈정 신적 기억〉이다 .7) 그러면 서론에서 간략히 설명된 것을 이해의 토대로 삼고, 베르그송이 스스로 예시한 예를 다시 취하여 〈습관적 기억〉과 〈정신적 기여〉이라고 하는 것의 성격을 규명하여 보기로 하자. 내가 학과를 공부한다. 나는 그 학과의 내용을 암기하기 위하여 그 내용을 내용상의 마디와 각운으로 나 누어서 읽는다. 나는 그것을 암송하기 시작한다. 나는 반복적인 암송에 의하여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 말들이 서로서로 전체적인 유기체를 형성 할 때까지 수십 번 반복한다. 드디어 어느 순간에 이르러 나는 그 과목· 을 암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학과목의 암기 과정에 다른 종류의 기억이 생길 수가 있다. 시험치기 위해 과목을 암기하는 과정에서 찬한 천구가 찾아와 공부에 관한 중요한 책을 주고 갔다고 가정해보자. 또 암기와 달리 친구가 주고 간 그 책의 독서를 생각해보자. 친구의 방문이나 독서는 암기와 다른 성질을 지니는 기억으로 나타난다. 내가 의도적으로 암기하는 동안에 나도 모르는 사이 에 친구의 방문이나 독서에서 느껴지는 어떤 지적 분위기가 또 다른 종 류의 기억으로 생기게 된다. 왜냐하면 암기와 달리 독서에서 오는 분위기 와 친구의 방문은 내가 반복적으로 의워서 기억되는 것이 아니고, 의도성 과 관계없이 그냥 일회적으로 자연스럽게 기억되가 때문이다. 첫번째의 경우 나는 학과목을 기억하고, 둘째의 경우 나는 독서의 체험 그 자체를 7) H. Bergs o n, 갇은 책, pp. 83~85, 167~168, La pe nsee et le mouuant, pp. 79~80.
기여한다. 이 두 가지 기억은 그 성격에서 다르다. 학과목의 암기는 습관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을 알기 쉽게 요 약하면 다음과 같다. ® 과목 암기는 반복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 과목 암기는 그 자체 하나의 반복된 행동이다. ® 그 암기는 과거 속에 자리잡을 수 없는 현재적 행동이다. 즉, 암기 는 내가 글 쓰고 걷는 습관처럼 나의 현재적 행동에 관계하고 있 다. ® 그 암기는 단승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암기가 이룩될 때까지 일정한 시간이 걸린다. 이와 같은 성격의 기억울 베르그송은 〈습관적 기억 la memoir e -habi- tud e>, 〈신체적 기 억 la memo i re -c or p s 〉이라고 명명하였다. 그 기 억은 반半 1l 의하여 서서히 연쇄적으로 형성되는 기계적 운동체계를 구성하게 된다. 우리가 의국어를 공부하고 회화를 하게 되는 것은 이런 습관적 기 억의 소산이다. 그래서 이런 기여울 〈기계적 기억 la memoir e meca- niq ue 〉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와는 반대로 독서에서 오는 개인적 체험의 추억울 상기하여 보기로 하자. ® 이 기억은 반복에 의하여 취득되지 않고 단번에 어떤 분위기의 영 상이 나의 추억으로 남게 된다. 따라서 이 기억은 개인의 고유한 체험이나 사건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 이 기억은 암기처럼 행동이 아니고, 하나의 표상으로서 나의 생애 의 특이한 실존적 사건을 회상하게 해주는 정신의 직관을 뜻한다. ® 이 기억은 현재 속에서 쓰여지는 행동이 아니라, 언제나 과거의 어 느 때와 연관을 갖는 추억을 심어준다. 그래서 이 기억은 과거를 과거로서 회상케 한다. ® 이 기억은 암기와 같이 어떤 객관적으로 규정가능한 시간을 요구하 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직관에 의하여 단번에 이루어지고, 또 그
추억의 시간을 내가 임의로 길게 하거나 줄일 수가 있다. 이런 종류의 기억을 베르그송은 〈정신적 기억 la memoir e -e s pr it> , 〈직관적 기억 la memoir e int u itive >, 〈순수 기억 la memoir e pu re>, 또는 〈영상적 기억 memoir e -im age > , 〈추억적 기억 la memoir e -sou- ven ir> , 〈자발적 기 억 la memoir e spo nt an ee> 등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말할 나위도 없이 이와 같은 기여온 개인의 실존적 체험과 그 체 험의 독특한 사건의 역사와 관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적 직관의 기억이 언제나 순수한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 순수 기억은 우리 의 일상적 생활이 요구하는 행동과 사회적 생활의 습관 때문에 오염될 수가있다. 일상생활과 행동의 필요성에 의해 정신적 기억이 오염되는 경우, 그 기 억은 우리의 과거를 대수롭지 않은 평범하고 무인격적인 것으로서 회상 하게 된다. 정신적 기억은 우리 과거의 특이한 모든 사건들을, 그리고 모 든 체험들을 흐르는 삶의 전개과정에서 특이하게 표상하고 있지만, 현실 생활의 실천적 필요성 때문에 우리는 그 개인적 영상들을- 주인이 없는 무인격적인 영상들로 탈바꿈시켜버린다. 그리하여 과거의 근원적 영상이 생명과 색깔이 없는 껍데기 영상에 의하여 대체되어버린다. 대부분의 사 람들은 이런 껍데기 영상으로 과거를 생각한다. 특히 현실생활에 매달려 있는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왜냐하면 현실에 적응하여 살기 위해서는 실 존적인 것을 일반적인 것에, 특수한 체험을 公共의 경험 속에 용해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정신적 기억의 차원에서 보면, 정신적 기억은 일반적 시간과 달력과 디론 주관적, 실존적, 개인적 시간의 흐름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미 주지하다시피, 이런 정신적 기억과는 이론적으로 전혀 성 질을 달리하는 것이 습관적 기억(또는 신체적 기억)이다. 이 습관적 기 억에 대하여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모든 지각은 나타 나기 시작하는 행동으로 연장된다. 영상들이 한번 지각되면, 그 영성들은 이러한 기억 속에 고정되고 배열됨에 따라 그 영상들을 계승하는 운동들
이 유기체를 변화시키고 신체 속에 행동의 새로운 영상을 만든다. 이렇게 하여 전혀 디론 질서의 경험, 신체 속에 저장되는 경험, 조립된 메카니즘 속에 침전되는 경험이 의부의 자극에 따라 점점 다양화되고 많아지는 반 응과 함께, 죽 점차 증가하는 가능한 질문에 답변할 수 있는 준비와 함 께 형성된다.〉 8) 이 기억은 과거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전 것이지만, 그 것은 언제나 현재 속에 저장되어 있다. 그것이 현재의 자극에 대한 답변 으로서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기에 기억은 기억이지만(과거의 반복노력 의 결과로 남아 있는), 그 기억은 언제나 행동을 향하여 달리고 있고 현 재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오직 미래만을 바라보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과거의 축적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지능적으로 잘 결합된 운동만을 과거로부터 취한다. 그래서 그 기억은 과거를 회상하 는 추억의 영상 속에서가 아니라, 현실적 운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엄격한 기계론적 체계 속에서 과거의 노력을 다시 모은다산 그래서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습관적 기억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다. 〈그 기억은 이미 우 리의 과거를 표상하지 않고, 그 과거를 움직이고 있다. 만약에 그 기억이 기억이란 이름을 받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그것이 옛날의 영상을 보존해서가 아니라, 옛날 영상의 유용한 결과를 지금까지 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10) 2 두 가지 기억의 상호관계 추억아 형성되는 것은 우리가 보고 듣는 지각행위와 동시적으로 일어 난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현재가 매순간마다 二重化하여 서로 대칭적인 방향으로 갈라지게 된다고 전단하였다. 하나의 방향은 과거를 향해 나아 8) H. Bergs o n, Mati er e et memoir e, p. 86, P.U.F. 9) H. Bergs o n, 갇은 책, pp. 86~87. iO) H. Bergs o n, 같은 책, p. 87.
가고, 또 다른 하나는 미래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 그런데 보통 우리가 지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로 후자의 경우를 지칭한 것이다. 〈우리는 사 물을 붙들고 있는 동안 사물에 대한 추억 같은 것에는 관심없이 지내고 있다. 실천적 의식은 그 추억을 불필요한 것으로 멀리하기에 이론적 반성 은 그 추억을 없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추억은 지각에 뒤따르는 것이라는 환성이 생기게 된다.〉!” 현재적인 지각의 순간에 하나 는 미래로, 또 다른 하나는 과거로 갇라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그것은 하나는 지각이요, 또 다른 하나는 추억임을 말하지만, 서로 성질을 달리하는 두 가지 요소가 동시에 생긴다는 것을 인식론적으로 어 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베르그송은 그런 현상을 우리 의식의 〈현실성〉과 〈참재성〉으로 해석하고 있다. 매순간마다 우리의 의식생활이 〈지각〉과 〈추억〉으로 〈이중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우리 주위에서 생활하면 서 보고 듣고 체험하고 하는 것의 총체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존재는 〈지각〉이고 동시에 〈추억〉이다. 이 점을 베르그송은 디음괴-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추억의 형성이 결코 지각의 형성보다 뒤지지 않 는다고 주장한다. 지각이 이루어지는 척도에 따라서, 우리의 추억은 마치 몸에 그림자가 따라다니듯이, 지각의 추억은 지각 곁에서 함께 이루어지 고 있다. 그러나 의식이 보통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눈이 그림자를 향할 때마다, 그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12) 지각문제는 두 가지 종류의 기억이 서로 어떤 연관성을 맺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지각은 추 억과 동시에 성립한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지각의 현재적 측면을 〈순수 지각 la pe rcep tion p ure 〉이라 하였고, 그 과거적 측면을 〈기억〉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면 〈순수 지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실천 적 목적만을 갖고 있다. 보통 인식이론에서 지각은 순수한 객관적 인식을 위한 이론적인 최초의 계기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베르그송에 의하면 11 ) H. Bergs o n, L'energi e spi rit u e lle, p. 132, P.U.F. 12 ) H. Bergs o n, 같은 책 , p. 130.
객관적 이론적 인식이란 하나의 위장된 구실이고, 모든 지적 인식의 밑바 닥에는 언제나 〈실천적 유용성〉과 〈이익〉의 동기가 숨어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베르그송이 생긱하는 지각도 순수 인식의 이론적 계기이기 는커녕, 매순간마다 행동의 가능성을 설계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의 순 수 지각을 구성하는 것은 순수 지각이 제공하는 영상의 와중에서 그려지 는 행동의 나타남이다. 우리 지각의 현실성은 그의 행위성 속에서, 즉 그 행위성을 연장하는 운동 속에서 성립하지 , 지각의 가장 큰 강도에서 성립 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는 관념에 지나지 않고, 현재는 관념적 운동i d eo-mo t eur 이다.〉 l” 그러므로 지각은 물질과 칙접 결합되어 있다. 지각은 물질의 전부나 적어도 그 본질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l4) 그런 점에서 베르그송은 칸트처럼 물질의 〈현상계〉와 〈본체계〉, 죽 〈物 自體只룹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현상계 배후에 우 리가 알 수 없는 비밀스런 〈물자체〉가 있다고 베르그송은 생각하지 않는 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물질은 〈순수 지각〉과 서로 만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물질이 행동의 전달수단이지, 인식의 基底는 아니다〉 15) 고 생각한 다. 그런데 미래를 겨냥하는 현재적 지각은 자연히 행동을- 기본이념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을 가능케 하는 신경조직의 반사신경과 밀 접한 연관성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신경조직의 중추기관으로서의 두뇌는 지각에 의하여 그려진 표상을 두뇌운동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해서 베르그송은 지긱이 두뇌상태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각 은 감각운동기관에 불과한 두뇌에서부터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단지 두뇌 는 지각에 의하여 그려진 표상을 행동을 위해 준비하거나 시작하는 기능 만을 갖는댜 즉, 두뇌는 지각에 의하여 그려진 가능한 모든 표상을 운동 신경의 반응형식으로 나타낸다. 지각은 언제나 현재적이다. 그 순간적(현 13) H. Bergs o n, Mati ere et memoir e , p. 71. 14) H. Bergs o n, 같은 책, p. 76. 15) H. Bergs o n, 같은 책, p. 77.
재적 ) 지각은 이미 과거로 흘러가게 되고, 그것은 동시에 미래로 나가는 행동에 기댄다. 그래서 지각이 과거로 흘러가면 그것은 감각이 되고 동시 에 미래를 준비하면 그것은 운동이 된다. 따라서 나의 현재는 감각과 운 동으로 구성된 체계다 .16) 그래서 두뇌는 지각의 감각과 운동을 행동으로 준비하고 시작하고 암시하는 〈감각적 운동적 도식 le schema sensori- mo t eur 〉이다. 죽, 두뇌는 지각이 표상한 것을 행동의 측면에서 연장하고 계승한다. 두뇌는 지각적 표상의 운동적 동반자다. 따라서 지각 자체는 정신적 표상이지 결코 신체(두뇌)의 산물이 아니다. 이 점을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우리의 신체는 행동, 오직 행동의 도구이 다. 어떤 정도에서도, 어떤 의미에서도, 어떤 측면에서도 신체는 표상을 설명하거나 준비하지 못한다.〉 17) 지각과 추억(또는 기억)과의 관계를 한 번 더 정리할 필요가 있다. 지 각과 추억과의 관계는 동시적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지각은 이미 기여 이다〉 .18) 나의 실이 꼬집힌 순간에 이미 아픔의 감각은 지나간 과거로서 하나의 〈기분적 느낌 l'affe c ti on 〉으로 남아 지속하고 있다• 〈기분적 느 낌 X 즌 이미 기억이고, 추억이다. 그러나 지각과 기억(또는 추억)은 전혀 다른 성질을 지녀 구별되기도 한다. 지각이 미래적 행동을 두뇌의 〈감각 적 운동적 도식〉에 의하여 겨냥하는 경우에, 그 지각은 행동으로 탈바꿈 되기 때문에 정신적 기억으로 과거화되는 것과는 다르다. 지각의 기억적 측면은 전적으로 이미 전개된 것에 대한 관심이지만, 지각의 운동적 측면 은 전개되고 있는 것만을 바라보는 성질을 지니고 있기에 기억된 모든 과거에 대한 재생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제 〈정신적 기억〉과 〈습관적 기억〉이 어떻게 연계를 맺고 있는지 살 펴볼 기회가 왔다. 이미 우리가 앞에서 분명히 밝혔지만, 베르그송의 심 리철학에서 〈정신적 기억〉과 〈습관적 기억 X 는 이론적으로 분명히 성질을 16) H. Bergs o n, 같은 책, p. 153. 17_) H. Bergs o n, 같은 책, p. 253. 18 ) H. Bergs o n . 같은 책 , p. 167.
달리한다. 이론적으로 이원적인 입장은 실제적인 면에서 상호간에 교차하 는 입장을 배제하지 않는다. 우선 이론적인 이원론의 분명한 입장을 다시 한 번 더 보기로 하자. 〈근본적으로 구분된 두 가지의 기억이 있다. 그 하니는 유기체 속에 고정되어 있어서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하여 적절한 응답을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지능적으로 조립된 메카니즘의 전체 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 기억은 현실 상황에 우리 스스로를 적응할 수 있게끔 해주고, 또 그 기억은 우리에 의하여 받아들여진 행동이 때로 • 는 이미 이루어전, 때로는 지금 생기기 시작하는, 그러나 언제나 다소간 자기 체질에 맞추어진 반응으로- 스스로 연장되도록 한다. 기억이라기보다 오히려 습관인 그것은 지나간 우리의 경험을 움직이게 하지 그 경험의 영성을 환기시키지 않는다 . 또 다른 하나가 참 기억이다. 그 기억은 의식 과 같은 外 延 울 갖고 있고, 서로서로 줄을 지어서 우리의 모든 상태를 그 장소와 그 날짜에 따라 제자리에 두면서 보유하고 있다. 그 기억은 실제로 스스로 확정된 과거에서 움직이지 첫번째 기억처럼 간단없이 다 시 시작하는 현재 속에서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1 9) 말할 나위도 없이, 첫째 기억이 〈습관적 기억〉이고 둘째 기억이 〈정신적 기억〉이다. 이제 이처럼 이론적으로 명확하게 구분된 두 가지 기억이 어떻게 서로 현실적으로- 관계를 짓게 되는지 검토해 보아야 할 단계에 왔다. 지각된 영상은 과거의 기억으로 변하면서 정신적 기억 속으로 모이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지각된 영성을 동반하는 운동은 우리의 유기체를 점 차 바꿔놓는다. 그런데 우리가 제한된 수의 대상세계 와중에서 지각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경우 제한된 수의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지각은 반복되고, 거기에 따라서 마찬가지로 우리의 지각을 동반하는 운동도 반 복하게 된다. 여기서 지각이 과거적 기억과 미래적 행동으로 동시에 나아 가는 경향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운동이 반복됨에 따라서, 그 운 동은 나중에 더 이상 변경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강제성을 갖고 운동조직, 운동 메카니즘, 운동적인 습관을 점차로 형성하게 됨은 말할 나위가 없 19) H. Bergs o n, 갇은 책, pp. 167~168.
다. 다른 말로 쉽게 설명하면, 지각의 정신작용을 계승한 운동은 반복됨 에 따라서 점진적으로 신체 속에 행동의 새로운 경향 을 창 조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습관적 기억이 형성된다 . 이 기억은 언제나 행동으 로 향하고 있는 현재에 자리잡고 있고 미래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여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발견하게 된다. 신체 를 통하여 이루 어지는 지각은 두 가지 면을 지닌다. 주지하듯이 기억으로서의 과거와 행 동으로서의 현재다• 그런 점에서 정신적 기억과 습관적 기억은 신체를 통 하여 표상되는 지각에서 공통적으로 만난다. 단지 순간에서 가는 길이 다 를 뿐이지 신체에서 표상되는 지각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는 연결된다. 그런 점에서 〈신체는 내게 영향을 끼치는 사물들과 내가 행동하게 되는 사물들 사이의 연결점이고, 운동을 주고 받는 통과의 장소며, 단적으로 밀하여 감각적 운동적 현상들이 이루어지는 자리다〉 . 20) 그런데 베르그송 에 의하면 〈순수 기억〉, 죽 〈정신적 기억 X 폰 신체의 두뇌세포 속에 저장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각이 갖고 있는 행동적 경향이 가장 뚜렷이 부각되는 것은 습관에서다. 그 습관은 어떻게 하여 이루어지는가? 순간적 으로 과거화된 지각의 기억이 반복하여 거듭됨으로써 그 습관화된 기억 은 현재적(미래적) 행동의 경향성을 지닌 지각의 다른 측면(사실은 동일 한 지긱이지만)과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기억에서 그것이 현실적 생활에 유용하고 행동에 필요한 기억이면, 또 그 기억울 지각의 반복을 통하여 습관화시키게 되면, 정신적 기억은 현재적 유용성과 행동성을 위 하여 현실화되거나 습관으로 각질화한다. 또 이런 차원의 연계성을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다음 도표는 베르그송에 의하여 제시된 것이다. SAB 는 나의 기억에 의하여 축적된 추억의 총체를 표시한다. 원추형의 밑바닥 AB 는 과거에 자리잡고 있는 움직이지 않는 추억울 표싱하고, 원추형의 정상 없근 매순 간의 현재를 나타내고, 그 았큰 끊임없이 대상에 대한 현실적인 나의 표 상(지각)의 가변적인 평면 P 로 향하고 접촉하고 있다. 이 없룬 통하여 과 20) H. Bergs o n, 같은 책, p. 169.
거의 추억 AB 가 현실세계인 평면 P 와 만나게 된다 . 지각(현재의 ) P 와 현 실 홈回 관계는 유용성과 행동성만 고려되는 관계이기에, A~ 라 P 와의 관 계에서 없三 행동에 유리한 것만 AB 에 서 뽑아내고 P 에서는 행동에 유리한 것만 영상화하면서 서로 연결시킨다 . 21) 이어서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은 결 론을 내리고 있다. 〈습관이 조직한 감 각적 운동적 체계에 의하여 구성된 신 체의 기억은 거의 순간적 기억이고, 그 순간적 기억에 과거의 참다운 기 억이 기초로서 고용되고 있다. 그 두 가지 기억은 분리된 두 가지의 것 이 아니기에, 신체의 기억은 경험의 움직이는 평면 속으로 과거의 기억이 삽입시킨 유동적인 뾰족한 끝에 지나지 않기에, 이 두 가지 기능이 상호 의존을 주고 받는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한편으로 과거의 기억은 감각적 운동적 메카니즘에 대하여 그 메카니즘을 지도할 수 있고 경험의 학습이 암시하고 있는 방향으로 운동반응을 인도할 수 있는 모든 추억을 제시한 다. 유사성과 인접성에 의한 聯想이 그런 데서 정확히 성립한다. 그런데 디론 한편으로 감각적 운동적 장치는 무력하고 무의식적인 추억에 대하 여 신체를 취할 수 있고 물질화될 수 있는, 죽 현재화되는 수단을 공급 해주고 있다.〉 22) 이상의 긴 인용을 통하여 베르그송이 어떤 각도에서 정신적 기억과 습 관적 기억(신체의 기억)을 연계시키고 있고, 그 두 기억의 상호작용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 좀 쉽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신체의 기 억은 순간적 현재의 행동에 필요한 기억이다. 그 기억에는 언제나 과거의 참 기억아 기초로서 작용하고 있다 . 비록 신체적 기억이 현재의 행동과 21) H. Bergs o n, 갇은 책, p. 169. 22) H. Bergs o n, 같은 책, pp. 169~170.
관계하고 있고 정신의 기억이 과거의 추억과 연관되어 있지만 과거의 추 억이 현재의 행동 메카니즘을 지도하고 운동반응을 인도할 수 있는 추억 을 제시하는 점에서 신체적 기억은 과거의 기억이 현재 속으로 삽입시킨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또 반면에 신체의 감각적 운동적 도식은 무력한 과거의 기억이 현재화하는 것을 도와준다. 그래서 신체적 기억과 정신적 기억은 사실상 현재 행동에서 서로 만난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우리는 베르그송이 〈정신의 기억〉(순수 기억, 추 억적 기억 )과 〈신체의 기억〉(습관적 기억, 기계적 기억 )이 전혀 그 본질 에서 다르다고 지적한 것을 보았다. 말하자면 신체의 기억이 반복에서 가 능하고 행동을 겨냥하고 있고 시간적 현재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기계적 습성이 신체에 붙기 위하여 일정한 시간을 요하는 것임에 반하여, 정신의 기억은 단번에 추억으로 자리잡고, 행동을- 겨냥하기보다 개인의 특이한 체험에 근거한 표상이요 직관이고 시간적으로 순수 과거에 속하고 객관 적 시간과 무관하게 작용하는 의식의 흐름이다. 이처럼 판이한 성질을 지 닌 그 두 개의 기억이 이번에는 상호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베르그송 은 주장한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주장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베르그송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이론 적으로 추억과 습관은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는 꿈과 행동이 다 름과 같다. 추억울 생각하면서 꿈꾸는 자는 현실에서 거의 충동에 가끼우 리만큼 행동에만 몰두하여 있는 자와는 다르다. 또 여러 번 반복하여 암 기하는 기억과, 한 번 독서하고 그 내용을 기억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그런 구별은 어디까지나 이론적 차원에서의 본질적 구분이다. 그 러나 실제에서 보면 이와 다른 관계가 있다. 모든 기억과 그 기억의 추 억은 지각과 동시에 성립한다. 그런데 지각의 표상작용에는 이미 우리가 지적하였듯이 두 가지 면이 있다. 그 하나는 기억의 측면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현재와 미래의 행동을 겨냥하는 측면이다. 그러나 이 두 측면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성과 같다. 예컨대 꼬집혀서 아픔의 통 각을 느낀 지각은 이미 순간적으로 과거가 된 기억이다. 죽, 近接 과거
다. 그 지각적 기억에 대하여 우리는 그 아픔을 추억으로, 또 그 아픔에 대한 행동적 반응으로 각각 동시에 분화된다고 볼 수 있다 . 그런데 그 아픔에 대한 어떤 종류의 행동적 반응은 우리 신체의 감각적 운동적 sen- sori- m ote u r 메카니즘의 도움을 받아 가능하다. 더구나 그 아픔의 반웅 에 대한 행동이 반복되는 경우에 이 메카니즘은 하나의 습관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이 기계적인 습관도 지각에 의하여 정신적으로 작용~ 기억 의 가초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습관도 하나의 기억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기억은 추억과 달라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의부의 자국에 즉각 대응하기 위하여 거의 현재에 아주 가끼이 머물러서 준비태세를 갖 추고 있는 기억이다. 그런 점에서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신체적 기억났는 〈정신적 기억〉의 〈角質化〉라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순수 추억 적 기억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데, 간혹 인간은 현실생활의 적용상 필요 한 경우에 그 추억들 중에서 현실생활에 유용한 것만을 두뇌의 메카니즘 에서 통과시키고 있다. 그 추억이 행동을 겨냥하기 위하여 현실화되는 셈 이다. 그래서 〈정신적 기억〉으로서의 〈추억〉과 〈신체적 기억〉으로서의 〈행동화〉가 서로 만나게 된다. 이상의 설명이 두 가지 기억에 대한 베르그송의 입장인 것으로 보인 다. 밀하자면 二元的 一 元의 태도다. 이런 이원적 일원의 태도는 베르그 송 철학의 모든 분야에서 같은 구조를 지니고 나타난다. 생명과 물질과의 관계도 이원적 일원의 구조요, 본능과 직관의 , 관계, 직관과 지능과의 관 계도 이원적 일원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보여진다. 정신적 기억과 신체 적 기억과의 이원적 일원의 구조에 대하여 베르그송의 사유가 어디로 향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홍미있는 일이다. 베르그송이 향하고 있는 목 적지는 잘 균형잡힌 정신의 세계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 〈행동의 인간을 특징짓는 것은 그에게 주어진 상황의 구조 요청에 그 상황과 관 계되는 모든 추억울 재빠르게 회상하는 일이다. 그러나 또한 행동의 인간 에게 있어 의식의 문턱에서 이용가치가 없거나 별로 관계가 없는 추억은 건널 수 없는 장벽을 만나게 된다. 아주 순수한 현재 속에서 산다는 것
과 자극을 연장시키는 직접반응에 의하여 자극에 응답한다는 것은 다 하 등동물이 하는 짓이다. 그렇게 처신하는 인간은 충동적 동물이다. 그러나 과거에 사는 쾌감을 위하여 과거 속에만 안주하는 사람은 행동에 더 이 상 적응하지 못한다. 그런 인간에게 추억은 현실 상황에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으면서 의식의 빛에 떠오른다. 그것은 이미 충동적 동물이 아니 고, 단지 한 꿈꾸는 자일 뿐이다. 이 두 가지 극단 사이에서 현재 상황의 테두리를 정확히 따를 만큼 유순히·고, 또 전혀 다른 부름에 저항할 만큼 강인한 기억의 행복한 배열이 자리잡고 있다. 실천적 의미나 良識은 아마 도 다른 것이 아니리라.〉 23) 이 인용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양식 있 는 인간은 행동과 꿈 사이에서 어느 한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추억과 실용의 두 측면을 조화시켜 나가는 사림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베르그송은 어린아이의 경우에 자발적인 정신적 기억이 왜 엄 청나게 발전하고 지능과 지성이 발달된 사람들에게 기억력이 약화되는지 룰 밝히고 있다. 어린아이의 경우에는 그들의 순수 기억이 아직도 그들의 행동과 결부시키는 연계성을 전하게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어린아이들은 습관적으로 순간의 인상을 따르고, 행동이 아직 추억의 지시에 접목되지 않기에, 역설적으로 그들의 추억은 현실적 행동에 필요한 제한울 받지 않 는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적으로 분별없이 회상하고 그래서 쉽게 기억울 지니게 된다. 그와는 반대로 지능이 발전함에 따라서 기억의 현저한 약화 가 생기는데, 그 까닭은 추억은 증가함에 따라 그 증가하는 추억울 행동 과 함께 결부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에게 설교를 한 한 선교사는, 원주민둘의 반수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선교사가 한 몸짓을 똑같이 흉내내면서 설교의 내용을 반복하는 것울 보았다고 한다언 원주 민은 실용적 행동에 대한 집착이 그만큼 약한 것이다. 23) H. Bergs o n, 같은 책, p. 170. 24) H. Bergs o n, 같은 책, p. 171.
3 持續으로서의 기억과 망각의 문제 앞의 두 절에서 검토된 기억의 두 가지 구분과 그 상관성을 보면서, 만약에 우리가 우리 내면적 삶의 實在 를 팀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가급 적 신체의 습관적 기억과 그 기억이 겨냥하는 행동과 사회생활의 여러 가지 상징과 언어활동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의 정신적 내면세계의 실재를 인식하기 위하여 우리는 실용적으로 흔히 객 관적이라고 하는 과학적 인식의 틀을 벗어나서 다른 차원으로 회전해야 한다.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측면에서 아무 소용도 없다고 하는 그 세계로 주의를 기울여야 내면의 정신세계가 나타난다. 그러면 베르그송이 말한 그 내면세계란 무엇인가? 그 세계는 〈 純粹 持 續 la duree p ure 〉의 세계다. 그에 의하면 지속만이 정신세계의 특칭을 알려주고 있다. 바로 이 〈지속 la duree 〉이 그에게는 곧 〈기억 la memo- i re 〉이다. 이 지속에 관해서는 제 2 장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즉, 순수한 내면적 정신세계의 본질이 지속이요 기억이다. 그래서 내면세계의 추억이나 기억이 어디에 저장되어 있다는 공간적 장소개념은 전혀 내면세계의 정신성에 맞지 않는 것이다. 구태여 말해야 한다면, 기억은 자기 스스로 보존될 뿐이다. 이 점은 베르 그송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예시화된다 . 한 단어롤 발음할 때는 그 단어 를 음절에 따라 발음해야 한다. 두 음절을 가진 단어가 있다고 가정해보 자 . 첫째 음절을 내가 이미 발음하였을 경우, 그 발음은 이미 과거로 홀 러가고, 나는 이어서 다음 음절을 발음한다. 첫째 음절은 이미 기억이다. 그렇다면 이미 발음된 첫 음절은 뇌세포라는 서랍 속에 저장되어 있고 나는 이어서 그 다음 음절을 찾기 위하여 또다시 뇌세포의 서랍 속으로 7 탸 하는가? 간단한 단어발음뿐만이 아니라, 문장을 말할 때도 똑같은 이치가 성립하는 것인가? 물론 베르그송에 의하면 그런 입장은 성립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 그때마다 머리의 세포 속에 저장 간직된 기억울 찾 으러 간다는 것은 말과 문장의 자발적 발음현상에 비추어 이치에 닿지
않는다. 〈우리 의식의 첫 각성부터 우리의 삶은 그 전체에 있어서 한없 이 연장되는 전술과 같은 어떤 것이다. 삶의 지속은 실체적이요 순수 지 속인 한에서 분해될 수 없다.〉 25) 〈우리의 지속은 순간순간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오직 현재만이 있을 뿐이고 과거의 현재적 연장도, 진화도, 구체적 지속도 존재하지 않 는다• 지속은 전전하면서 팽창하고 미래를 파먹는 과거의 연속적 진보다. 과거가 끊임없이 증가하는 순간부터 한없이 그 과거는 스스로 보존되고 있다. …… 기억은 서랍 속에 있는 기억을 분류하는 능력도, 그 기억울 등록장부에 등재하는 능력도 아니다.〉 26 ) 단적으로 말하여 과거는 그냥 스 스로 보존되고 지속될 뿐이다. 의식이 있은 이후로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 고 원했던 그 모든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기억으로서 그냥 스스로 보존 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지금 기억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없어졌거 나 다론 데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다. 모든 과거는 하나의 지속으로서 우리의 정신에 흐르고 있다. 우리의 기억은 분해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속 속에서 〈우리의 가장 먼 과거도 우리의 현재에 접목되어 있고 우리 의 현재와 함께 유일하고 동일한 변화의 계속성을 이루고 있다〉. 엄) 그런 점에서 과거는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의 현재와 한몸을 이루고 있고, 우리의 현재에 끊임없는 울림을 보내고 있다. 이런 모습을 베르그송은 〈눈공 la boule de ne ig e 〉과 같다고 묘사하였다 . 28 ) 조 그만 눈덩이룰 굴리면 계속해서 부피가 팽창한다. 베르그송이 생각한 영 혼의 상태도 저 눈덩이처럼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부피가 커진다. 이처럼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계속 팽창을 지속하면서 변화한다. 정신과 영혼은 계속이요, 변화다. 눈공처럼 불어나면서 변화하는 그런 영상을 쟝께레비 츠J ankelev it c 낡근 그의 『베르그송 연구』에서 〈유기체적 전체성 la to t a - 25) H. Bergs o n, La pe nsee et le mouuant, p. 80. 26) H. Bergs o n, L'euoluti on crea trice , p. 4. 27 ) H. Bergs o n, La pe nsee et le mouuant, p. 170. 28) H. Bergs on, L'euoluti on creatr ice , p. 2.
lite or g an iq ue 〉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런 〈유기체적 전체성〉의 개념에서 보면 어떤 과거도 우리 정신의 자 기 보존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연속적으로 현재까지 흐르기 때문에 과 거는 현재에 임암리에 활약하고 있고, 우리의 성격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 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각자가 현재 지니고 있는 개성은 지나온 자기 體 史의 은밀하고 내밀한 영향 이의에 다른 것이 아니다. 나의 역사는 내가 지금 다 기억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전적으로 나의 현재적 상황에서 연속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모든 과거가 다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은 타당하고 프루스트 Prous~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I 가는 영혼은 가능하다. 기억과 과거가 지속한다는 것은 계속 존재하고 있 다는것과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기억의 지속은 서로서로 의면적인 요소들을 연속적으로- 짜깁 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나눌 수 없는 生成울 뜻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환언하면, 인간의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은 서로 상이하게 俳 置 될 수 있는 물건놓기와 같지 않다. 그냥 양적으로 다양하게 전열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싸고 돌면서 연속적으로 쉬지 않고 흐르는 강물과 같다. 흐르는 강물과 같은 연속과 지속 속에서 과거는 현 재와 한몸을 이루게 되고, 그 현재는 새로이 예견할 수 없는 미래를 창 조하기 위하여 또 어디로 흘러간다. 이 점을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기 술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출생 이후로 체험하였던 역사, 그리고 출생 이전의 경향을 갖고 이세상에 오기 때문에 심지어 우리의 탄생 이전의 역사까지도 다 집약시킨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의 성격이 무엇이겠는가? 물론 우리는 우리 과거의 한 조그만 부분과 함께 생각한 다. 그러나 우리가 욕망하고 원하고 행동하는 것은 근원적인 우리 영혼의 휘어전 것을 포함한 우리 과거의 모든 것과 함께 이루어전다. 그러므로 비록 과거의 어떤 조그만 부분만 표상된다 하더라도, 우리의 과거는 성향 의 형식 아래서 자신의 추전력에 의해 우리에게 온전하게 나타난다.〉 29) 29) H. Bergs o n, 같은 책, p. 5.
이미 우리가 앞에서 여러 번 강조하고 암시하였지만, 비록 우리의 모 든 과거가 보존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는 극히 그 과거 의 조그만 부분에 불과하다. 왜 그럴까? 모든 과거가 우리의 정신 속에 있고 그것이 현재까지 계속 변화하면서 흐르고 있다면, 우리는 그 과거로 돌아가기만 하면 될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 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실생활에 적응하며 살아가기 위하여 과거를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주어진 여건 속에서 행동하고 살아야 하 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뒤보다 앞을 바라보고 살 수밖에 없다• 우리 가 현실생활의 요구에 적응하기 위하여 두뇌의 메카니즘은 우리의 과거 를 감추는 역할과 기능을 하고, 또 매순간마다 우리의 활동을· 촉진시켜주 고 현실 상황을 해명할 수 있는 것만울 통과시키는 기능을 한다• 〈두뇌 의 메카니즘은 거의 대부분의 과거를 무의식 속으로 억압시키고, 그리고 의식 속에는 본질상 현실 상황을 해명하고, 준비되고 있는 행동을 돕고, 일을 유용하게 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만을 도입하기 위하여 만들어져 있 다. 기껏해야 사치스런 추억은 반쯤 열린 문을 통하여 밀수입품으로 통과 될 뿐이다.〉 30) 다른 말로 환언하면, 우리 과거의 대부분은 무의식으로 남아 있다. 왜 냐하면 우리 생활의 근본 법칙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동을- 가능하 게 해주는 것이 의식이고, 따라서 의식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하고 있다. 그래서 베르그송의 표현대로, 의식은 미리 미래를 앞당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의식의 태도는 〈주의 집중〉이고, 〈주의 집중 X 든 곧 〈기다림〉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거기에 있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미래 는 우리를 자기에게로 집아당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미 래는 관념의 대상이 아니고 우리가 기획하는 행동의 설계가 그리는 세계 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미래가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은 행동의 세계보다 꿈의 세계에 침잠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과거에 대한 의식은 우 리의 과거 속에서 행동의 설계에 유리한 것, 미래에 도움을 줄 수 있는 30) H. Bergs o n, 같은 책, p. 5.
것만을 습관적으로 파악한다 . 1 l) 우리의 모든 추억은 거기에 있지만, 그 모든 추억은 원칙적으로 무의 식적이다. 간혹 열병이나 충격이나 마취 등을- 통해 그 과거의 추억이 회 상되어, 베르그송이 말하듯이 반쯤 열린 문을 통하여 〈밀수입품〉처럼 나 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환자가 자기 의식을 회복한 디음에는 다시 기억하 지 못하고 과거를 망각한다. 그러면 〈망각I' oub li)-l끝 어떻게 설명해야 하 는가? 또 앞에서 여러 번 현재와 과거의 시간차 개념을 사용하였는데 도 대체 과거와 현재를 구분짓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런 의문들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이런 문제는 우리가 기억울 하나의 연속적 흐름이 라고 불렀기 때문에 제기된다. 모든 과거의 추억이 그 연속적 변화의 흐 름을 통하여 현재와 맞닿고 있다고 한다면, 추억은 쪼개질 수 없는 성질 울 지니게 되고, 과거와 현재를 구별짓기란 추억의 기억에서 불가능한 것 이 여아기닌에가 대하한는 점베이르 그부송각의된 다.생 각은 〈삶에 대한 주의 I'at t en ti on a la v i e 〉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풀어나가고 있다. 즉, 현재와 과거의 경계선 울 결정짓는 요인은 〈삶에 대한 주의〉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베르그 송의 생각을 인용하여 보자. 〈우리가 우리의 현재에 대하여 말할 때, 우 리가 생각하는 것은 지속의 어떤 간격임을 우리 의식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어떤 지속? 정확히 그것은 고정시키기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것은 아주 유동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현재는 이 순간에 있어서 내 가 발음하는 데 열중하고 있는 문장이다. 나의 문장에 내 주의의 영역을 제한시키고 있음이 내 마음에 둘기 때문에 나는 문장을 발음하는 데만 열중해 있다. 이런 주의는 컴퍼스의 두 끝의 간격처럼 늘일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는 그런 것이다. 당분간 그 두 끝은 내 문장의 처음부터 끝 까지 갈 만큼 제법 간격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 두 끝을 더 멀리 하려 고 한다면, 나의 현재는 나의 마지막 문장을 지나서 그 문장보다 앞선 것도 포괄하게 되리라.〉 32) 31 ) H. Bergs o n, Ma tier e et memoir e , p. 167.
위의 인용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현재러는 것이 객관적인 시각에 의하여 표시되는 순간이 아니라, 심리적 주체의 관심과 주의에 따 라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 수도 있는 대단히 가변 적 인 탄력성을 유지하 고 있디는 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과거라는 것은 우리가 우 리의 〈삶에 기울이는 현실적 주의의 영역 le champ de not re att en ti on act u elle a la vie > 바깥에 있는 것이 된다• 〈우리의 현재와 우리의 과거 사이에서 우리가 만들고 있는 구분이 자의적이 아니라면, 적어도 삶에의 주의가 포옹할 수 있는 영역의 면적에 따라 그 구분은 상대적이다.〉 33 ) 그 런 접에서 우리가 기울이는 〈삶에의 주의〉가 디~ 데로 그 관심을 돌리 자마자, 그 주의의 대상은 이미 과거로 등록되고 만다. 만약 관심과 주의 가 다론 데로 돌려지면 현재가 죽시 과거로 탈바꿈되어 기억과 추억 속 으로 보존되지만, 그 기억과 추억은 우리 의식의 전역사에 포함되어 함께 흐르고 있다. 과거는 無化되지 않고 意識 史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망 각과 無와는 다르다.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과거는 없어전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무의식 상태에서 지속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의 단적인 증거를 베 르그송은 갑작스런 죽음의 체험을 겪은 사람들의 증언에서 찾고 있다. 〈예기치 않은 갑작스런 죽음의 위협을 느낀 사람들에게, 골짜기의 심연 속으로 미끄러지는 등산가의 경우에, 익사나 紋首의 체험을 할 뻔한 이들 에게 주의의 급격한 전환이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 체험 을 하기 전까지는 미래를 향하여 방향을 잡고 있었고 행동의 필요성에 흡수된 의식의 방향이 갑자기 그런 것에서 벗어나는 변화와 같은 것이 일어났다. 그래서 잊혀진 수만 가지의 상세한 추억이 재생되었다고 한다. 이 점은 개인의 전역사가 죽음 앞에서 하나의 움직이는 파노라마로서 전 개되었디는 것이다.〉려) 그러면 〈삶에의 주의〉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는 현실적으로 살아가 32) H. Bergs o n, La pe nsee et le mouuant, pp. 168~169. 33) H. Bergs o n . 갇은 책, p. 169. 34) H. Bergs o n, 같은 책, p. 170.
야 하는 존재고, 또 그렇게 살기 위하여 환경과 물 질 과의 교섭을 유지해 야 한다. 물질과 환경과의 교섭 속에서 우리는 행동하고 적응하고 선택하 여 미래를 설계한다. 그런 현실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과거 가운데 현재와 미래의 실용적 설계에 도움을 주는 과거만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베르그송이 말하는 〈삶에의 주의〉란 의부세계에 대한 긴장 과 설계를 뜻한다. 어떤 점에서 이 〈삶에의 주의났근,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생존을 위한 하나의 자연적 본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주의를 가능케 해주는 기관조직이 우리 신체 중의 두뇌다. 즉, 두뇌는 현실적인 과업수행에 요구되는 것을 자신의 메카니즘의 발동 에 의하여 매순간마다 꾸려나간다. 그런 점에서 〈삶에의 주의〉의 波長울 결정하는 것은 현실적 이해관계, 실천적 관심, 현실적 행동의 목표 등이 댜 이런 요인들이 사라지면, 例의 대상들은 금방 과거로 미끄러져 내려 간다. 그러므로 외부세계에 대한 우리의 실천적, 실용적 관심과 주의가 과거 에 대한 망각을 요구하게 된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으리라• 그래서 나의 현재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요, 나의 과거는 나의 현재적 행동에 직결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과거는 나의 명상의 대상이 된다. 그 러나 우리의 행동(현재적 )은 언제나 우리의 존재 (과거적 )에 의존하고 있 다. 이 점을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하는 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함이 옳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으로 존재한다고 덧붙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 울 끊임없이 창조하고 있다.〉 35) 과거 , 망각된 과거를 베르그송은 무의식 l'i ncons ci en t이라고 표현하였 다. 그 점에서 베르그송의 무의식 개념은 프로이트 S. Freud 의 무의식 개 념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하여튼 망각된 과거가 무의식이라면, 베 르그송이 말하는 의식은 실제적 행동과 즉각적 실용성과 동의어가 된다. 왜냐하면 의식은 행동을 지도하고 행동적 선택을 결행하게 하는 역할을 35) H. Bergs o n, L'euoluti on creatr ic e , p. 7.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베르그송의 무의식을 문학작품에 서 두드러지게 재등장시킨 이가 이미 앞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프랑스의 작가인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 Prous t다. 프루스트의 소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A la recherche du tem p s p erdu 』 는 일인칭 소설이다. 이때 프루스트가 〈나〉라고 하는 것은 〈알베레스 Alberes 가 정확히 지적하였듯 이 우리가 행동과 사회생활을 통하여 나타내는 ‘나'와는 다른 ‘나', 즉 볘 르그송이 表面自我 밀에 숨겨져 있다고 주장한 內的 自我〉이다. 프루쓰_트 는 자기의 소설이 발자크 H. Balzac 와 플로베르 G. Flaubert, 졸라 E. Zola 등이 그린 의적이고 객관적인 경험으로서의 사회적 生울 디루고 있 지 않다는 점을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서 자기 소설을 〈무의식의 소설〉, 〈베르그송 철학적 소설 Roman berg- so ni en 〉이라고 부르고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의 소설은 특유한 의 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바유하자면 시간 위에 장치된 망원경과 같은 것 이다. 망원경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별들을 보이게끔 하는데, 나는 시 간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어서 완전히 망각된 무의식적 현상을 나타내 보이도록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 ... 이런 특수한 의미에서 나는 흔히 세상사람이 얘기하듯이 베르그송과 만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베르그송 이의에 나에게 직접적인 암시를 제공한 사람이 이전에는 없었 기 때문이다.〉 36) 베르그송의 표현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자. 〈현재적 행동의 필요성에 의하여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과거가 거의 전적으로 감추어져 있 다면, 우리의 과거는 우리가 꿈의 삶 속으로 우리 자신을 다시 옮기기 위하여 유효한 행동에서 벗어나는 모든 경우에 의식의 문지방울 통과하 는 힘을 다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 잠은 바로 그 런 장르의 벗어남을 불러일으킨다.〉j/) 〈삶에의 주의注근 결국 습관적 행동 과 꿈 사이에서 왕복 f 동 을 하고 있는 셈이다. 숙련된 행동에서 자아는 36) 金振聲, 『베르그송 硏究』, pp. 126~127, 문학과 지성사. 37 ) H. Bergs o n, Mati ere et memoir e , p. 171 .
프루스트가 이미 지적하였듯이, 표피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그 자아는· 어 쩔 수 없이 자아라고 부르지 사실상 익명적인 무인격성에 가낌·다. 인습 la rout ine -g.. 신체적 습관적 기억으로 인한 운동의 반복에 의하여 구성될 뿐이다. 그런 인습 속에서 인간의 존재는 거의 자동적이고 수동적인 방식 으로 외부의 자극에 대하여 반응한다. 그러나 인습적으로 행동하는- 이와 달라 꿈꾸는 영혼은 유효하고 실용적인 행동을 포기한 자다. 꿈 속에서 우리는 행동의 세계를 벗어나고, 현실적 상황에 대한 실천적 적응성을 잃 게 된다. 우리의 인식이 꿈의 세계에 가까이 접근할수록, 습관을 가능케 해주는 두뇌의 메카니즘은 그 기능을 이완시킨다. 이 점을 베르그송은 다 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과거를 영상의 형식 아래 회상하기 위하여 현재 의 행동에서부터 초연해야 하고, 쓸모 없는 것을 중히 여기는 법을 알아 야 한다• 오직 인간만이 그런 장르의 노력을 해야 한다.〉 38) 행동과 꿈의 양 극한 가운데서 삶에 대한 우리의 주의가 움직인다고 이미 위에서 지적되었다• 즉, 주의가 의부세계에 대하여 보다 높은 긴장 을 지니고 있으면 그 주의는 행동의 방향으로 접근하고, 그 주의가 긴장 완화를 잉태하게 되면, 그것은 꿈의 세계에 가급적 가까이 간다. 이제 우 리는 스타일을 달리하여 행동과 꿈의 문제에 대한 베르그송의 심리철학 적 입장을보기로하자. 4 꿈과 행동, 그리고 두 가지 認知 앞에서 거론된 내용에서 보면, 베르그송에 있어서 모든 기억은 정신이 다. 비록 신체적 기억(습관적 기억)이 행동의 필요상 두뇌의 메카니즘의 영향으로 각질화되지만, 그 습관적(신체적) 기억이 그렇다고 물질은 아니 다. 두뇌는 단지 정신이 각질화하는 것을 도와주는 도구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정신의 생명은 앞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두 가지 극단 속 38) H. Bergs o n, 같은 책, p. 87.
에 자리잡고 있다. 정신적 생명이 수축하면 그것은 행동의 지대에까지 가 고, 그 생명이 이완하면 그것은 꿈의 세계로 빠져들어간다. 그리하여 우 리는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명상〉과 〈행동〉, 〈꿈〉과 〈현실〉의 두 가지 지렛대를 만나게 된다. 정신은 과거로 향할 수도 있고, 미래로 향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정신의 생명은 이 이중적 운동과 연계되어서 설명되어야 한 다. 우리의 정신이 과거로 침접하면 할수록, 우리의 정신은 현실과 행동 울 상실하여 초연한 명상 속에 잠기게 되고, 그 반대로 우리의 정신이 현재나 미래로 관심을 쏟으면 쏟울수록, 그것은 행동적이고 나중에는 충 동적으로까지 된다. 정신의 이러한 이중적 운동 속에서 우리가 앞에서 구 별한 〈습관적 기억〉과 〈정신적 기억〉이 각각 행동과 꿈으로 표현되어 나 타난다. 〈실존을 생존시키는 대신에 자기 실존을 꿈꾸려고 하는 자는 자 기의 눈짓 아래서 자기의 지나간 역사의 무수한 면들을 소상하게 취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그 기억이 생산하는 모든 것과 함께 그 기여 을 싫어하는 자는 그 기억울 진실로 표상하는 대신에 자기 실존을 끊임 없이 행동화할 것이다. 자동적으로 의식화되어서 그는 자극을 자기의 반 응으로 만들어 연장시키는 유용한 습관의 언덕을 따르게 될 것이다• 그러 나 꿈꾸는 자는 결코 특이하고 개인적인 그의 영역에서 나오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는 그가 가전 각 영상에 시간적인 날짜나 공간적인 장소를 남겨둠으로써 그 기억이 어디에서 디론 것과 다르고 어디에서 다른 것과 유사한가를 보게 될 것이다. 습관에 언제나 매달려 있는 자는 하나의 상 황 속에서 그 상황이 실천적 입장에서 예전 상황과 유사한 측면만을 가 려내게 될 것이다.〉 39) 그러나 이런 베르그송의 인용은 아주 극단적인 경우를 추상화한 것이 고, 대체로 보통사람의 경우에는 이 두 가지 극단의 경우가 상호간에 뒤 섞여 있는 것이다. 꿈은 개인적 실존적인 특이한 세계로 들어가게 하고, 행동은 일반적이고 기계적 세계로 우리의 관심을 무인격화시킨다. 그래서 일상적 정상생활에서 우리의 정신은 언제나 꿈과 행동을 조화시켜 나가 39) H. Bergs o n, 같은 책, pp. 172~173.
기 때문에 그 두 가지 종류의 지랫대가 마주치는 곳에서 보통사람들은 얌전히 살아간다. 그런 보통 생각을 베르그송은 〈일반적 생각 l'ide e ge - nerale 〉이라고 하였다. 〈일반적 생각의 본질은 결국 행동의 영역과 순수 기억의 영역 사이에 서 쉬지 않고 움직인다. 우리가 이미 보았던 그림을 상기하여 보자. S 에 는 내가 나의 신체로부터 갖는, 즉 감각적 운동적 균형으로부터 갖게 되 는 현실적 지각이 있다. AB 기저의 면적에는 나의 모든 추억이 보존되 어 있다. 그렇게 규정된 원추형 안에서 일반적 생각은 계속적으로 정상 S 와 기저 AB 사이에서 왔다갔다 한다. S 에서 일반적 생각은 신체적 태 도나 발음된 말의 분명한 형태를 취하게 되고, AB 에서 그 일반적 생각 은 깨어지기 쉬운 동일을 구성하고 있는 무수한 개체적 영상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 40 ) 위의 인용에서 설명되었듯이, 원추형 (거꾸로 전도된)은 우리 정신의 일반적 A 생각을 표상하고 있고, AB 는 보존된 추 억의 전체를 나타내고 있고, 앉즌 신체가 현실과 접촉하고 있는 점, 즉 감각적 운 동적 메카니즘을 뜻하고 있다. 그래서 우 리의 정신이 S 에서 AB 로 가면 (A' B '’와 A ' B 를 거쳐서), 그 정신은 꿈꾸는 삶을 살아가려는 것을 반영하고, 그와 반대로 뿌 집중되면 될수록 정신은 행동으로 나 아간다. 그래서 정상적인 自我는 어느 한 쪽에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 고, 그 양극단 사이에서 움직이게 된다. 행동에서부터 초연해지면 꿈의 생활이 시작되고, 그 꿈의 생활은 우리 의 신경조직이 극도로 이완된 상태에 해당한다 . 마치 잠자는 것과 같다. 최면에 걸리거나 몽유병에 빠진 사람들이 평소에 완전히 잊고 있던 그 40) H. Bergs o n, 같은 책, p. 180.
과거의 추억들을 거의 완벽하게 재생시키는 것은 놀랄 일이 못된다. 죽음 에 임박한 사람들이 가끔 그들이 어렸을 때 익힌 언어를(그동안 구사하 지 않아서 망각상태에 있었던) 재생시키는 경우가 있다. 아인슈타인 A. E i ns t e i冠 어렸을 때 익힌 히브리 언어를 생전에는 거의 쓰지 않았는 데, 임종 직전에 그동안 망각한 히브리 언어로 유언을 해서 주위의 사람 들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故事를 읽은 기억이 있다. 이미 앞에서 언급된 바이지만,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자의 죽음의 순간에 그의 지나 간 역사의 상세한 파노라마가 재현되었디~ 기록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 4 1) 그러면 이처럼 의공으로 꿈과 추억의 방향으로 가면, 우리는 어디에 도달하게 되는가? 베르그송은 우리의 정신이 극도의 긴장완화를- 일으키 면, 그것은 〈순수 기억 la memoir e p ure 〉의 상태로 전입하게 된다고 주 장한다. 〈순수 기억〉의 상태란 우리 과거의 모든 상태가 하나도 분해되 ' 지 않고 온전히 하나의 전체적 유기체를 형성하여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다양한 기억은 참재성을 이루고 있다. 그 〈순수 기 억 X 는 현실적 영상의 다양성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그 순수 기억울 다른 한편으로 〈순수 추억 le souvenir p ur 〉이라고 하였다. 그 〈순수 기 억〉이나 〈순수 추억〉에서부터 우리는 필요한 행동의 경우에 또는 꿈의 변덕에 따라 과거의 추억적 영성을 끄집어낸다. 〈순수 기억〉이나 〈순수 추억浮는 지식이지 행동이 아니다. 그 순수 추억은 행동의 실용성이 없기 때문에 지식이고 영상이며 예술적 미학의 범주에 머무르게 된다. 모든 예 술적 미학은 영상이기에 우리를 과거로 이끈다. 그러면 그 순수 기억, 순수 추억에서부터 어떻게 기억이 현실화해나가 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순수 기억이 현실화하여 나가는 과정에서 그 순 수 추억은 이른바 〈영상적 추억 l'i ma g e-souven i r 〉으로 탈바꿈된다. 즉, 〈순수 추억〉 가운데서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억이 의식에 나타나기 위하여 영상화(구체화)한다• 그 〈영상적 추억〉 은 행동의 〈정찰병〉 노릇을 한다. 그러면 〈순수 추억只t 〈영상적 추억〉 41 ) H. Bergs o n, 갇은 책 , p. 172.
으로 보다 선명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베르그송에 의하면 지각이 그 런 견인의 역할을 수행한다. 〈만약에 지각이 추억을 불러일으킨다면, 그 것은 과거 지나간 상황보다 앞섰거나 동반하였거나 뒤따랐던 정황들이 현재의 상황에 어떤 빛을 던지거나 어디로 탈출할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 해서다. 수천 가지의 추억의 회상이 유사성에서 가능하고, 다시 나타나려 는 추억은 특수한 각도에서 지각에 비슷한 것이고 준비과정에 있는 행동 을 비출 수 있거나 지도할 수 있는 것이다.〉 42 ) 지각이 유사성과 연상의 법 칙에 의하여 과거의 기억울 유사성과 연상에 따라 현실적인 것으로 유인 한다는 것이다. 그런 유사성의 법칙에 따라서 현실적 실용성과 직접 관련 이 없는 추억이 단지 어떤 기억과 인접하였거나 유사하거나 하는 사실 때문에 현실화되어 기억의 재생을 가져오는 경우도 물론 있다. 그렇기 때 문에 인간은 한편으로- 꿈을 꾸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회상의 법칙 X 끌 결정하는 것은 행동의 필요성 때문이다. 아무튼 기 억의 현실화란 다른 한편으로 〈認知 la reconna i ssance 〉의 심리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이 〈인지〉의 심리현상도 두 가지 종류의 상 이한 기억, 즉 〈영상적 기억〉(정신적 기억 )과 〈습관적 기억〉과 분리되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말할 나위도 없이 현재 눈 앞에 놓여 있는 대상을 알아본디는 것은 기억의 실천적 작용과 깊은 관계롤 갖고 있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을 인지함은 현재 대상의 인식에 있어서 지나간 경험 의 이용을 전제로 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나간 경험에서 현재의 대상 을 알아본다는 것은 기억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인지의 심리현상을 습관적 기억과 정신적 기억에 따라 각각 두 가지로 분류히코 있다. 즉, 〈자동적 인지 la reconnais s ance au t oma tiq ue 〉와 〈세심한 인 지 la reconnais s ance a tt en ti ve 〉가 그 두 가지 분류다 .43) 이 두 가지 종류롤 이해하기 위하여 베르그송이 스스로 예시한 보기를 여기서 다시 취급하기로 한다. 먼저 자동적인 인지 la reconnais s ance 42) H. Bergs o n, L'energi e spi rit u e lle, pp. 144~145. 43) H. Bergs o n, Mati ere et mem?ir e , p. 100.
aut o mati qu e- c- 기계적 인지 la reconnais s ance mach i nal 라 같은 성격 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찰 모르는 어떤 도시에 도착하였다. 나는 처음으 로 낯설은 이 ' 도시에서 산보를 한다. 거리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줄도 모른다. 나는 나의 미래에 대해 불확실하다• 그 러나 내가 그 도시에 살게 되고 그 도시가 나의 지각에 낯익기 시작하 면, 나는 거의 자동적으로 길을 찾아간다. 낯설다와 낯익다의 처이가 무 엇일까? 도시에 대하여 낯설은 경우에 나의 지각을 동반하고 있는 두뇌 의 메카니즘 운동이 아직도 조직화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러나 마침내 지각과 함께 가는 두뇌의 기계적 운동이 반복에 의하여 완전히 조직화가 된 경우 나는 이미 구체적 지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경우에 나는 그 도시에 완전히 낯익게 된 것이다 .44) 〈그러므로 대상을 이용하~근 습관 온 전체적으로 운동과 지각을 조직함으로써 끝난다. 그리고 조건반사의 방식으로 지각을 추종하였던 운동의 의식은 여기에서 인지의 기본에 속 한다.〉 45) 이와 같은 성질을 지닌 인지가 〈자동적 인지〉, 〈기계적 인지〉의 본질 이고, 그런 인지는 신체의 조직화에 의하여 가능해진다. 이와 같은 기계 적 인지는 지각을 습관적으로 계승하는 두뇌조직의 반응운동, 죽 습관적 • 기억에 의하여 가능해진다. 〈이런 운동은 반복됨으로써 메카니즘을 창조 하고 습관의 상태로 나아가고 사물의 지각을 자동적으로 추종하는 태도 룰 결정하고 있다.〉 46) 〈일용적인 대상을 인지함은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 는 것에서 성립한다.〉 47) 이와 같은 〈자동적 인지는 마치 소련의 심리학자 빠블로프 Pavlov 가 제시한 조건반사의 이론과 다르지 않다. 종을 칠 때마다 개가 침을 홀리 는 것은 반복된 신체적 메카니즘이 낳은 결과다. 그러므로 이런 인지는 44) 같은 책, pp. 100~101. 45) 같은 책, p. 101. 46) 같은 책, p. 89. 47) 같은 책, p. 101.
그냥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행동되는 것이지, 생각되는 것이 아니다. 그 래서 그 인지는 〈감각적 운동적 도식 le scheme sensor i -mo t eur 〉의 체 계에 속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인지는 결코 정신적인 표상의 세계에 속하지 않고, 행동의 세계에만 종속될 뿐이다• 〈일반적으로 그 인지를 생 각하기 전에 먼저 행동화한다. 우리의 일상적 생활은 많은 대상들 사이에 서 전개되는데, 그 대상들의 유일한 現前은 하나의 역할을 행하도록 우리 를 초대하고 있다.〉 48) 이런 인지를 자각하기 위하여 추억울 야기시킬 필요는 없다. 그 인지 는 단지 친밀감으로써 능히 자기 기능을 수행한다• 역설적으로 말하여 정 신병 가운데 〈심리적 맹인 la cecit e p s y ch iq ue 〉이 있다. 이 심리적 맹 인은 지각된 대성을 인지할 수 없는 심리적 무능력을 뜻한다. 그런 이에 게는 지각과 두뇌의 기계적 운동과의 사이에 있는 연결이 완전히 차단되 어 있다. 그런 환자의 경우에 지각은 언제나 새롭고 낯설은 것처럼 어령 . 풋이 느껴질 뿐이다 . 49) 기계적 자동적 인지 이의에 또 다른 종류의 인지가 있음을- 우리는 예 고하였다. 그 인지롤 베르그송은 〈세심한 인지 la reconnais s ance at- ten ti ve > 또는 〈주의 깊은 인지〉라고 칭하였다. 이 인지는 〈정신의 기 억〉, 〈영상적 기억〉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인지는 역시 알아보는 심리 현상이기에 과거의 가여과 불가분적이다. 왜냐하면 대상의 인지는 과거 기억의 재생문제에 속하기 때문이다. 즉, 이 인지의 경우수근 습관이 아니라, 추억이 현재적안 지각을 해명하기 위하여 현재적 지각에 접목되 어야 한다. 또 이런 인지의 경우에 지각한다는 것은 느끼는 것이고 또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知 梵 은 감각적 직관과 기 억 내용과의 만남과 다른 것이 아니다. 기억의 내용이 해체되었다는 것은 생리학적으로 지각 불능 l' ag nos i e 이나 감각적 전망증 l'am nesie senso- r i ell 태 말한다. 이런 병에 걸리게 되면, 지각은 감각이 단순히 느끼는 48) 같은 책, p. 103. 49) 갇은 책, p. 105.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죽, 환자는 느끼기는 하나 그가 느끼는 것을 알 아보지 못한다. 그러면 기억의 내용은 어디에 저장되어 있었던가? 뇌세포의 外皮中心 部 les centr e s cor ti caux 에 전달된 지각의 진동이 세포 속에 녹음된 것 과 같은 방식으로 보존된 추억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는가? 이미 그동안 이 글을 처음부터 세심하게 읽어온 독자들은 이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미리 짐작할 것이다. 만약에 인간의 추억이 녹음데이프에 담긴 녹음이나 녹화 또는 디스크판에 새겨진 녹음과 같은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추억 은 세포의 기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셈이 되고 따라서 심신평행론의 부 수현상주의적 유물론의 견해가 옳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그런 견 해를 철저히 부정한다. 그는 뇌세포 속에서 가억울 찾으려 하는 모든 시 도를 거짓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뇌세포는 단지 운동적 기능 만을 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추억울 다른 곳에서 찾어야 한다. 그 다른 곳이 베르그송에 의하면 정신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이 〈세심한 인지〉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살펴보기로 하자. 이 인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베르그송은 말의 청각적 인지의 경우를 검토하고 있다. 이 청각적 인지는 〈세심한 인지〉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 준다. 말을 듣는다는 것은 먼저 그 소리를 알아보고 이어서 그 의미를 재발견하고 마지막으로 해석울 펴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더구나 이 말의 청각적 인지(알아보기)는 심신평행론적, 또 부수현상론적 유물론자들이 크게 관심을 가졌던 분야 중의 하나고, 그들은 음성의 기억이 뇌세포 속 에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더욱 베르그송의 관심을 유발시켰다• 베르그송의 지론에 의하면 〈세심한 인지 la reconnais s ance att en t- i ve 〉의 검토는 두 가지 종류의 기억이 선명하게 부각되는 영역이다. 먼저 그 인지에는 감각적이며 운동적이고 자동적 과정이 있다 .50) 예를 들어 보 자.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의국어로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을 듣고 있다. 내가 듣는 소리의 전동은 그들이 듣는 진동과 물리적으로는 마찬가지다. 50) 같은 책, pp. 120~146.
그렇지만 나는 그 진동에서 모호한 잡음만 지각하는 데 비하여, 그들은 분명히 말의 뜻을 파악하고 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물론 그 둘이 알고 있는 언어의 인식은 기억이 지닌 추억의 소산이다. 그런데 어 떻게 이 인식이 현재적 지각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게 하는 가? 어떻게 언어의 학습이 소리의 연속으로 귀에 전달된 말과 음절을 분 별하게 하는가? 지각된 소리가 기억에 말울 하기 위해서는 그 소리가 말로써 분리되 고, 구분되고 지각되어야 한다• 그런 것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다음과 같 은 과정이 필요하다고 베르그송은 분석하고 있다 . 청각은 반복에 의하여 점차로 조직화되면서 들은 문장을 박자에 따라 쪼개고 그 문장의 주요한 의미분절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 운동을- 촉발시킨다. 그 운동은 청각에 의한 지각을 동반하고 있는 자동적 운동이다. 그 운동은 반복됨으로써 더 욱 더 잘 조직된다. 그 자동적 운동은 受話者가 대충 送話者의 운동을 자기 속에서 재발견하는 단순화된 형상을 그림으로써 끝난다. 베르그송은 우리에게 단순화된 형상을 제공해주는 〈내적 동반의 조직화된 운동只t 〈운동적 도식 le schema mo t eur 〉이라고 말하였다. 〈내적 동반의 조직화 된 운동〉이라 함은 지각의 순간과 동시에 두뇌의 도식화된 메카니즘의 조직적 운동이 일어남을 뜻한다 . 5 1) 디론 말로 말하면, 우리가 타인의 말을 듣게 될 때 우리 신체는 그냥 수동적인 자세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동적으로 우리 속에서 둘은 말을 반복하고 그 말의 도식을 소묘하는 경향을 나타내게 된다. 우리 두뇌가 지니고 있는 능력인 〈운동적 도식冷는 물론 반복에 의하여 구성된다. 그 러면 반복은 무슨 일을 하는가? 우선 반복은 말의 연속성을 재구성하기 위하여 그 연속성을 분해한다. 즉, 반복은 본질적인 것을 강조한다. 이 점을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반복은 먼저 분해하고, 다음에 재 조립하여서 산체의 지능에 말하는 것을 참다운 결과로서 갖는다. 반복은 매번 새로운 시도에 포장된 운동을 펼친다. 반복은 눈에 띄지 않고 간과 51) 같은 책, p. 121 .
된 새로운 세부사항에 대하여 신체의 주의를 매번 부른다. 반복은 신체가 나누고 분류하게끔 만들어준다. 반복은 신체에게 본질적인 것을 강조하여 준다. 반복은 전체적 운동 속에서 전체 운동의 내부적 구조 를 표시하는 선을 하나씩 하나씩 재발견한다. 그런 점에서 운동은 신체가 그 운동을 먼저 이해하고 나서 배워진다.〉 52 ) 이런 베르그송의 생각을 정리하여 보면, 〈세심한 인지注근 먼저 신체의 기억에서 발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체의 기억은 지각의 운동을 모방하는 반복게 의하여 점차로 구성되는 〈운동적 도식〉의 형태 아래서 〈세심한 인지〉의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 베르그송이 취한 예시를 살펴보 면, 의국어의 습득이나 학습은 둘은 의국어를 소리와 의미에 따라 분절할 수 있는 운동적 도식을 내가 구성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이 학습은 내가 외국어를 듣는 지각의 순간과 함께 장치가 가동되는 모방운동을- 내가 소 유하고 있음과 같다. 이것이 이른바 베르그송이 말한 습관적 기억이다. 좀더 쉽게 설명하자면, 내가 외국어 회화를 지각하게 되는 순간에, 나의 청각은 두뇌(신체)의 운동적 도식을 발동케 한다. 이 운동적 도식은 그 동안의 반복에 의하여 점차로 구성된 자동적인 메카니즘이요, 예전에 들 었던 나의 지각을 계승한 모방운동이다. 그런데 베르그송에 의하면 〈세심한 인지〉 문제에 있어서 〈기계적〉, 〈습관적〉, 〈신체적〉 기억은 그 인지과정의 첫단계에 해당될 뿐이다. 두번 째 단계는 〈영상적 기억〉의 불가결한 도움에 의하여 구성되고 있다. 물 론 의국어 학습에 따른 나의 지각작용은 행동을 겨냥하기 위함이다. 의사 소통도 행동이다. 그러나 그런 의사소통의 행동을 무엇보다 먼저 가능케 해주는 것은 추억이다. 우리의 과거는 현재적 상황과 비슷한 상황의 추억 울 간칙하고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지각은 결코 현재 여건을 수동적으로 녹음하는 것 울 의미하지 않는다. 지각작용은 매순간마다 필요한 추억의 능동적 投射 에 의하여 그 내용에서 풍부해진다. 내가 아는 의국어를 듣게 될 때, 나 52) 같은 책, p. 122.
의 구체적 청각은 실제로 현재에 관계하기보다 과거에 관계한다. 나의 구 체적 청각이 내포하고 있는 이른바 순수지각의 희미한 부분은 곧 기억의 내용에 의하여 채워지거나 덮이게 된다 . 기억이 그 지각(청각)의 내용을 채우기 전의 이른바 〈순수 지각 X 든 과거의 기억을 회상시키게 하는 순간 적 유도장치일 뿐이다. 나의 지각은 곧 즉각적으로 기억에서 울라오는 추 억과 같다. 〈우리 눈 앞에 놓여 있는 대상으로부터 우리가 보는 것, 우리 귀에 발음된 문장으로부터 우리가 듣는 것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기억이 그것에 덧붙이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이 신문을 훑을 때, 책장을 넘길 때, 당신은 각 단어의 각 문자를 실제로 통찰하거나 각 문 장의 각 단어들을 다 지각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하루에 몇 페이지밖에 보지 못할 것이다. 사실상 당신은 단어나 문장에서부터 몇 개의 글자나 나머지롤 짐작하기 위하여 필요한 몇 개의 특징만을 지각하 게 될 뿐이다.〉 !i1 ) 일일이 글자나 단어를 하나하나 검토하지 않고 대충 보 고 파악하는 까닭은 이미 우리의 정신이 지니고 있는 기억과 그 기억의 추억 때문이다 . 이런 설명은 결국 우리의 모든 지각이 매순간마다 정신, 즉 기억울 부 른다고 볼 수 있다 . 지각이 추억울 부르지만, 또 동시에 추억도 현재적 지각 속에 나타나기를 원한다고 볼 수 있다. 추억과 순수지각이 만남으로 써 구체적 지각이 탄생된다. 지금까지 설명된 〈세심한 인지〉의 과정을 한 번 더 요약해보자. 지각 운동이 신체에 대하여 시동을 거는 태도를 전달한 다음에 운동적 도식을 가동시키면, 기억 속에 보존된 지나간 영상(그 영상은 지각된 대상의 영 상임 )이 지각 속으로 울라오게 된다. 그렇게 하여 추여과 지각이 서로 만나게 된댜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신체에 의하여 채용된 〈운동적 도식〉 은 지각을 재구성하면서, 그 지각을 알아보게(인지하게) 하기 위하여 추 억울 부른다. 추억은 곧 기억의 내용이다. 그래서 지각과 추억울 만나게 해주는 매개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감각적 운동적 모방능력으로서 점진 53) H. Bergs o n, L'energi e spi rit u e lle, p. 97.
적 인 반복에 의하여 이미 구성된 〈감각적 운동적 도식 le schema sen- sor i -mo t eur 〉이다. 이렇게 볼 때 지각을 알아보기 위하여, 지각의 행동 적 측면을 유효하게 지원해주기 위하여 정신의 기억은 자발적으로 지각 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즉, 〈정신의 기여 X 존 자신의 〈영상적 추억 le sou- ve nir- i ma g e )i끌 지각으로 던진다 . 5 4) 그런데 〈기억으로 재생된 영상이 지각된 영상의 세부사항의 모든 것을 다 덮어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미 알게 된 다른 세부사항들이 모르는 세부사항 위로 나아가게 될 때까지, 기억의 더 깊고 더 먼 지역 까지 부름이 발신된다.〉 55) 5 기억의 운동과 두뇌의 역할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에 따라서 보면, 〈세심한 인지 X 즌 지각과 동시에 기억의 자발적 도움을 요청하고, 기억은 그것을 도우러 현재로 부상하게 된다. 그리고 추억의 내용이 간단히 발견되지 않으면, 우리는 더 깊고 먼 추억까지 깊고 세심하게 더듬어간다고 하였다. 그러면 기억이 지각으로 현재화하는 과정은 어떠한가? 베르그송에 의하면 추억(기억의 내용)이 지각적 현재로 부상하는 과정은 현재적 지각에서 추억으로, 다시 추억에 서 지각으로 오고 가는 〈순환운동 X 춘 유지하고 있다. 베르그송이 제기한 이 〈순환운동 X t 잘 이해하기 위하여 그는 기억의 지각에 대한 개입을 두 가지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다. 죽, 그 하나는 기억의 〈遠心的 投射 운 동)o l 고 또 다른 하나는 기억의 〈확장 또는 수축운동〉이다. 먼저 〈원심적 두사운동 le mouvement de pro je c ti on cen t r ifug e 〉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현재의 지각을 해명하고 그 지각을 인지하기 위하여 추억은 현재로 향 54) H. Bergs o n, Mati ere et 神m o i re, pp. 110~111 . 55) 같은 책, p. 111.
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기억은 자신의 추억을 현재적 지각 위로 두사하 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우리가 말한 기억의 순환운동은 말할 나위도 없이 지각에 주어진 여건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그 지각의 여건은 기 억의 원심적 투사운동에 의해서만 어떤 의미와 가치를 얻을 수 있다. 베 르그송에 의하면 〈세심한 인지 〉의 과정은 〈求心的 운동)o l 아니고 〈원심 적 운동〉이러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앞에서 예시된 의국어의 이해에서 암시되었지만, 청각적 인지에서 소리의 진동에 대하여 기억이 그 소리로 원심적인 투사를 결행하여야만 그 소리가 의미의 옷을 입게 된다. 사실상 반드시 좁은 의미의 인지에서뿐만 아니고, 회성이나 이해나 발 명 등과 같은 모든 정신활동에는 먼저 지각의 여건이 주어지고, 그 다 음에 기억의 원심적 운동에 의하여 그 지각에서 주어진 여건이 의미화된 다. 이 점은 그의 저서인 『 정신적 에너지 L'energi e sp i r it uelle 』 가운데 있는 「지적 노력 I'ef f or t i n t ellec t uel 」이라는 논문에서 잘 분석되고 있다. 아무튼 지나간 추억울 무기력하고 무관심한 것으로 생각함은 잘못이다. 〈기억의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추억이 거기에 무기력하고 무관심하게 남아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추억둘은 기다립 속에 있고, 거의 세 심한 주의력을 보내고 있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골몰하고 있으면 신문을 펼치더라도 우리가 몰두하고 있는 말에 곧 시선이 떨어지는 것이 일어나 지 않는가?〉 56 ) 그래서 기억 속에는 현재로 향하는 비약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기억의 현재로의 비약은 과거에 의한 현재의 인지와 다른 것이 아니다. 추억이 현재화되기 위히여 〈순수 기억 X 는 상이한 영상들로 현실화되어 야 한다. 〈잠재태 상태〉에 있던 〈순수 추억 X 는 〈현실적 상태〉로 변해야 한다. 〈순수 추억 le souvenir p ur 〉이 보다 구체적인 〈영상적 추억 le souve nir- i ma g e 〉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 고 있다. 〈점차로 우리의 추억은 농도 질은 안개처럼 나타난다. 참재태에 서 그 추억은 현실태로 통과한다. 그 추억의 윤곽이 그려지고 표면이 채 56 ) H. Bergs o n, L'energi e spir itue lle, p. 99.
색됨에 따라, 그 추억은 지긱을 모방하려 한다.〉 5 7) A 순수추억 B 영상적o:M,P’’I’ 추 억 C 지각 D 지금까지 논의된 것을 바탕으로 생각을 정리하면, 베르그송이 말한 〈순수 추억〉, 〈영상적 추억〉, 그리고 〈지각〉이 각각 분리되어서 생성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 왜냐하면 지각도 독립적으로 우리 감각작용의 의식화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각이 대상을 의식하는 순간에, 그 지각에는 우리가 전에 그 대상이나 그 대상과 유사하거나 연싱을- 가 진 대상에 대하여 가졌던 기억이 달무리처럼 함께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 각과 함께 떠오르는 추억이 〈영상적 추억〉인데, 이 〈영상적 추억〉도 〈순 수 추억〉의 可視化이고 구체화다. 그런 점에서 이론상 〈순수 추억〉이 독 립적으로 명명되지만, 그 추억은 현실적으로 언제나 지각과 함께 채색되 거나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 58 ) 이런 점에서 위의 도표는 〈순수추억〉이 〈영 상적 추억〉으로, 다시 이것이 〈지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각 A, B, C, D 의 선분적 단계로 구상화한 것이다. 그러나 그 각각의 단계는 아주 안 위적인 구분에 지나지 않고, 사실상 그것은 A 에서 D로 계속해서 직접 이어진다. D 까지 이어지는 기억(정신)의 연속적 지속의 변화에서 명백히 공간적으로 어디에서 영상적 추억이 시작되고 그것이 끝남으로써 지각이 그 다음을 잇는 繼走 경기가 시작된다고 선을 긋기가 불가능하다• 베르그 송이 聯想主羲l' assoc i a ti on i sm 려 심리학에 반대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 다. 〈연상주의의 변함없는 과오는 살아있는 실재인 생성의 이런 연속성에 무기력하고 俳列된 요소들의 비연속적인 다양성을 대체시키는 데 있다. 그런데 그렇게 연상주의식으로 구성된 각각 요소들도 그것들의 기원을 고려하면 그 요소들보다 앞서거나 또는 뒤서거나 하는 것들을 내포하고 57) H. Bergs o n, Mati ere et memoi re , p. 148. 58) 같은 책, p. 147.
있기 때문에, 연상주의 심리학이 과오를 범한 것이다. 각 요소들은 우리 가 생각할 때 혼합상태나 어떤 점에 있어서 불순한 상태의 모습을 취하 고 있음에 틀림없다. 또 다른 한편으로 연상주의의 원리는 모든 심리상태 가 일종의 原 子 나 단순 요소이기를 원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구분시 켰던 각 과정에서 불안정한 것을 안정한 것으로, 즉 시작을 끝으로 희생 시켜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된다.〉 59) 그래서 聯想心理學은 위의 도표에서 표시된 AD 의 일직선을 MOP 로 양분시켜서, OD 의 선분에서 지각을 구성하는 감각 la sensa ti on 만을 보 고, AO 의 선분에서 순수 추억은 소멸되고 이미 구상화된 영상l'i ma g e 만 울 본다. 그래서 연상심리학은 인간의 심리세계가 감각과 영상만으로 구 성된 것으로 간주하고 그 두 요소 사이에 강도나 정도의 차이만을 볼 뿐 이다 . 그래서 감각은 지각의 강한 상태며, 영상은 지각의 약한 상태라 여 겨, 감각은 현재의 지각이요, 영상은 과거의 표상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러 나 베르그송에 의하면, 그런 연상심리학은 두 가지의 오해를 지아내고 있 다. 첫째로 연상심리학은 지각이 현재적 감각과 과거적 표상의 원자적 결 합으로 이루어전 분자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기억의 흐름이 무 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상싱히는 것 i ma gi ner~ 는 〈기억 하는 것 se souve ni r 〉과 다르다고 베르그송은 가르친다. 추억이 현실화됨 에 따라서 그 추억이 영상 속에 살려고 하는 경향을 갖는다고 그는 말한 댜 추억이 현재화를 원하고 현실화를 갈망한다고 하여서, 그 반대로 영 상이 추억화로 다시 과거화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어떤 영상이 과거와 관계를 짓게 될 때는 오직 기억의 지속에 따라 내가 그 영싱을 찾으러 과거로 침잠할 때라고 한다. 그러므로 추억과 영상이 그 본질에서 일치하고 단지 강도의 차이가 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은틀렸다. 둘째로 연상심리학은 과거와 현재의 본성상 차이를 무시하고 있다. 연 59) 갇은 책, pp. 148~149.
상심리학은 지각에서 순수 정신에 전달되는 이론적 사변적 정보가 있다 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나의 현재는 나의 이해관계와 나의 행동을 촉발 시키는 관심만이 문제가 되고, 과거는 그런 이해관계와 관심에는 아주 무 력하다. 과거는 명상 자체다. 과거의 추억과 현재의 지각에는 기본적 본 성의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순수 추억 X 본 〈영상〉이 아니고 〈영상의 근원〉이다. 그 〈순 수 추억 X 픈 우리의 두뇌가 지니고 있는 〈운동적 도식〉의 기능을 중개로 히여서 〈영상〉으로 구체화되고 현실화된다. 만약에 우리가 기억울 하지 못한다면, 과거라는 것은 인간에게 촌재할 수가 없게 된다. 우리가 기억 을 회상할 때, 우리는 단번에 과거로 참긴다. 〈우리가 단번에 과거에 자 리를 두지 않으면 결코 과거에 도달하지 못한다. 과거는 본질적으로- 참재 적이어서 과거가 현재적 영상으로 꽃 피고 어둠에서 대낮으로 솟아나는 운동을 우리가 채용하고 띠른다면, 과거는 과거로서 파악되어질 수 있 다.〉 6(J ) 이처럼 과거가 두뇌의 운동적 도식의 도움을 받아 현재화되는 것 이 곧 기억의 〈원심적 투사운동〉이다. 이같은 〈원심운동 X 본 동시에 기억의 〈확장운동 le mouvement d'ex- p ans i on 〉이나 또는 경우에 따라 〈수축훈 등 le mouvement de cont ra c- ti on 冷 실현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앞에서 거론한 〈기억의 순환운동汶 7 우리의 노력이 증대하거나 감소함에 따라서 〈확장〉되거나 〈수축〉되거나 한다. 이런 확장과 수축의 범위 안에 기억이 들어온다. 우 리의 知性的 확장의 노력이 중가함에 따라 그 순환운동이 팽창하기 때문 에, 우리의 기억도 대상에 대하여 수적으로 증대된 영상적 추억을 그만큼 많이 조명하게 된다. 그런 경우에 영상적 추억은 대상 자체에 대한 상세 한 기억이나, 그 대싱을 해명하기에 기여할 수 있는 부대적 세부사항을 가져오게 된다. 대상에 대하여 가해지는 긴장의 노력이 증대함으로써 그 만큼 기억도 상관적으로 확장되기에, 지각된 대상은 점점 더 깊이 자기 실재의 밀바닥을 열어 밝히게 된다. 60) 같은 책, p. 149.
〈동일한 심리적 삶이 무한하게 기억의 연 속적 총계에서 반복되어진다. 그리고 정신 의 동일한 행위가 많은 다양한 높이에서 관계될 수 있다. 주의를 집중하는 세심한 노력 속에서 정신은 언제나 온전히 자신 //?' \ 울 里示하지만, 정신이 자기 진화를 성취 ’`I\ / \ {`\ \ `\ \ \ ` -` --BDC-'-'' ,· 2 , /,,/ /,/ iI ./I \I I \ / II 하되방기거향 나을위 결하복정여잡 하해선는지택 기것한도은 수 한현준다재에.적 인우따리 라지 각단정이순신다의화. ~--一 그러나 우리 정신이 채용하는 긴장의 정 도에 따라, 그 정신이 자리잡고 있는 높이에 따라, 지각은 우리 안에서 영상적 추억의 수를 많거나 적게 전개시켜나간다.〉 6 1) 이 인용의 취지에 따라 위에 그려진 도표를 설명할 차례가 왔다. 기억의 확장운동에서 A는 직접적인 지각에 가장 가까운 기억의 범위를 뜻한다. 즉, A는 대상 G 라 직접 연관되는 영상적 추억울 뜻한다. B, C, D 로 범위가 확장됨에 따라 확장된 기억은 거기에 대응되는 지적 노력의 증대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기억은 고정된 物性과 같은 것이 아니고 지적 노력에 따라 한없이 팽창 하거나 수축하는 可盟性울 지니고 있다. B', C ', D'는 우리의 정신집중 과 노력의 증폭에 따라 대상의 배후에 음영처럼 것들어 있는 실재의 깊 은 밑바딕이나 부대적인 세부사항을 뜻한다• 그래서 기억의 범위가 확대 됨에 따라, 그 기억은 대상의 배후에 깃든 깊이롤 그만큼 많이 반영한다. 그리하여 정신집중과 긴장에 의하여 확장된 기억의 범위는 그만큼 그 기 억이 개인의 지나간 삶의 실존적 체험의 전체에 가까워진다. 그 반면에 기억의 동심원이 축소되면 될수록 그 기억은 개인의 전역사의 체험에서 멀어지고 현재적 지각에 쓰이는 평범성과 일반적 익명성에 가까워진다. 이 점을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주의의 전보는 지각된 대상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을 결과로 갖게 될 뿐만 아니라, 지각된 대상 61) 같은 책, pp. 115~116.
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넓은 체계를 더 광범위하게 갖게 된다. ……다 른 말로 바꾸면, 개인적인 추억은 지나간 우리 실존의 흐름을- 그리고 있 는데 ……그것은 동시에 우리 기억의 마지막이자 가장 넓은 포장을 구 성하고 있다. 그 개인적인 추억은 본질적으로 잘 잡히지 않고 도망다니는 성질울 지니고 있어서, 우리의 신체적인 태도가 우연하게 정확한 결정을 내려 그 추억울 끌어당기든지, 신체적 태도의 非決定이 추억의 변덕스런 출현을 돕든지간에 그 개인적 추억은 우연히 물질화(구상화)될 뿐이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 포장이 동심원 안에서 반복되거나 좁혀지게 되면, 그 동심원은 점차 감소된 추억울 지니게 되고 점차 그 추억의 근원적이고 개인적인 형식에서 멀어지게 되고 평범하게 되어 현재적 지각에 더 잘 적응되어진다.〉 62) 단적으로 말하여 기억이 확장되면 그 기억은 개인적 실존적 체험에 접 근하게 되고, 기억이 수축되면 그 기억은 평범한 실용적 행동단계에 접근 하는 익명성에 가까워진다. 이것이 또한 주의집중을 요하는 〈세심한 인 지〉의 한 특성이다. 지금까지 거론된 기억의 본질을 바탕으로 하여 기억에 있어서 두뇌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규명하는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 이 문제는 앞에서 간혹 단편적으로 암시되었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성찰해야 할 단 계에 이르렀다. 우선 결론부터 정리하여 언급하면, 두뇌 le cerveau 는 발동을 거는 기 관이요, 운동적 도식을 치밀하게 구성하는 행동의 도구다. 그래서 두뇌는 한편으로 추억울 선택하게 하고 또 다론 한편으로 추억의 현실화와 물질 화를 가능케 한다. 그러므로 두뇌는 정신적인 표상의 기관이 아니다. 유 물론적 평행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두뇌는 물질적 흔적의 형태 아래 서 추억울 녹음하거나 보존할 수가 없다고 보는 것이 베르그송의 결론이 다. 베르그송은 두뇌의 기능과 骨隨 la moell~ 기능 시이에 아무런 본 질적 차이가 없음을 밝히고 있다. 죽, 자극에 의하여 전달되는 求心的 운 62) 같은 책, pp. 115~116.
동은 골수의 신경세포의 매개에 의하여 근육수축을 지시하는 원심적 운 동으로 반응된다. 이것은 자국과 반응에 대한 생리학의 상식이다. 그러면 두뇌조직의 기능은 여기서 무슨 일을 하는가? 우리의 감각기관이 의부의 자극을 받게 되면 골수의 운동신경에 직접 그 자극을 전달하거나 근육에 필요한 수축:동 을 지시하지 않고, 그 의부자극은 먼저 腦짧~I' encep hale 에 울라가고 이어서 반사적인 운동으로 참가하는 골수의 동일한 신경계 통으로 내려온다. 의부의 자극이 이런 우회의 길을 택하여 무엇을 얻었는 가? 그 자극은 뇌수의 섬세한 세포 속으로 무엇을 찾으러 울라갔는가? 의부의 자극이 뇌수의 세포 속에서 물질의 표상으로 변형되는 기적적인 능력을 꺼내기 위하여 거기에 갔다는 생각을 베르그송은 완강히 부정한 다. 완강히 반대하는 그의 이론은 다음과 같다. 구심적인 신경섬유의 말단에 형성된 〈나뭇가지 모양I' arbor i sa ti on 〉과 〈롤란도 지역 la zone roland iq ue 〉 :i 의 운동세포 사이에 놓여 있는 다양 한 지역의 세포들은 수용된 자극으로 하여금 마음대로育籠 lamoellee pi ni ere 의 어떤 운동 메카니즘을 얻게 해준다. 알기 쉽게 이런 두뇌의 생리 학 역할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두뇌는 중앙 전신전화국의 역할과 다론 것이 아니다. 두뇌의 역할은 통신을 주고, 또 통신을 기다리는 것이다. 두뇌는 그가 받은 것에서 어떤 것도 추가하지 않는다• ……그래서 두뇌의 역할은 받아들인 운동을 선택된 반응기관으 로 인도하든지, 그 운동이 내포하게 되는 가능한 모든 반응을 그 기관에 서 그리기 위하여 운동신경통로의 전체를 열어놓든지 하는 일이다. 다론 말로 설명하면 두뇌는 우리에게 있어서 수용된 운동과의 관계에서 분석 의 도구이기도 하고 집행된 운동과의 관계에서 선택의 도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그의 역할은 운동을 나누고 전달하는 것에 제한된 다.〉 63) 어떤 경우에도 신경조직은 정신적 표상을 준비하거나 만드는 그런 ※ 롤란도 지역 la zone roland iq ue 이란 이탈리아의 해부학자이고 생리학자인 Luig i Rolando(1773~1831) 에 의하여 발견된 두뇌조직으로서 두 개의 대뇌 (정면부, 노정부)에 의하여 형성된 두뇌 부분을 가리킴.
기관은 아니다. 뇌세포와 신경조직은 의부 자극을 받아들이고, 메카니즘 의 운동을 발동시키고, 주어전 자극을 전신전화국이 통신의 교통정리를 하듯이 반응을 분석 • 정리 • 전달하는 도구일 뿐이다. 두뇌가 담당하는 추억의 선택 역할을 먼저 검토해보기로 하자. 이미 앞에서도 지적되었듯이, 두뇌는 〈운동적 도식〉이나 운동의 조직을 치밀하 게 구싱하고 있다. 그러면 두뇌가 지니고 있는 〈운동적 도식〉의 역할은 무엇인가? 말할 나위도 없이 추억은 지각을 알아보기 위하여 지각으로 내려와야 한다. 그러나 모든 추억이 다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지 각에 도움을 주는 것만 필요로 해서 내려온다. 바로 필요한 추억울 통과시 키는 역할이 곧 중재자의 역할이고, 또 두뇌의 운동적 도식의 일이다. 〈두뇌의 역할은 두뇌가 추억을 필요로 할 때, 찾아진 추억에서 적당한 틀 울 제시하는 운동이나 태도의 胎動을 정신이 신체로부터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 툴이 거기에 있으면, 추억은 자기 스스로 거기에 끼이기 위하여 내려온다. 두뇌기관은 그 틀을 준비하지 추여울 제공하지 않는다.〉 64 J 두뇌가 현실화를 위하여 현실에 유용한 추여만을 허락한다는 것은 동 시에 다른 추억의 현실화를 방해한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두뇌가 대부분 우리 추억의 기억재생을 가로막고 있다. 그렇게 하여야만 우리가 현실생 활에 적응할 수 있다. 물론 유사성에 의한 聯想法則이 현실생활에 별로 필요가 없는 〈사치스런 추억 les souven irs de luxe )1끌 내보이는 수가 있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행동하면서 디소간 꿈꿀 수 있음이 설명된다. 그러나 회상의 법칙을 결정하였던 것은 행동의 필요성이다. 그 필요성만 이 의식의 열쇠를 쥐고 있고, 꿈의 추억은 ·'… .. 유사성의 관계에서 느슨 하고 잘못 정의된 것을 이용함으로써만 도입된다.〉 65) 우리에게 망각이 있게 하는 것은 두뇌다. 두뇌라는 물질성이 망각을 63) H. Bergs on , Mati er e et memoir e , pp. 26~27. 64) H. Bergs on, L'energi e spi rit u e lle, p. 74. 65) 같은 책 , p. 145.
가능케 한다. 두뇌가 망각을 가능케 한다 함은 미래에 대한 관심과 주의 롤 제한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 66) 두뇌는 추억울 선택하는 기능 이의에 또 추억의 현실호H t 이룩하는 기능을 한다• 그 추억의 현실화는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순수 추억〉에서 〈영상적 추억〉, 그리고 〈지각〉의 단 계를 밟는다. 이 점은 이미 우리가 앞에서 충분히 거론하였기 때문에 더 아상의 언급은 생략하기로 하겠다. 이 두뇌의 기능을 보다 선명히 이해하기 위하여 〈두뇌의 傷害 les lesi- ons cerebrales >경 우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두뇌 상해의 경우에 대 한 검토는 유물론자 견해의 허구성을 알려주는 좋은 재료가 된다. 만약에 유물론자들의 견해가 옳다고 한다면, 두뇌의 상해는 뇌세포 속에 저장된 추억 자체의 상실을 초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반대로 만약에 베르그 송의 견해가 옳다면, 뇌세포의 상해가 추억의 상실을 초대할 수 없다. 왜 냐하면 뇌세포 속에 추억이 저장되어 있지 않다고 그는 생각하기 때문이 다. 베르그송의 견해에 따르면, 뇌세포의 상해와 동시에 손성을 입게 되 는 것은 뇌세포의 〈운동적 도식〉 기능이다. 〈운동적 도식〉의 기능이 추 억의 현실화와 선택의 역할을 하는 것일전대, 결국 두뇌의 상해는 그 기 능과 역할의 중지를 뜻하는 것이 된다• 죽, 추억의 선택적 현실화가 불가 능하여도, 그 추억은 잠재적 무의석 상태에서 그대로 존속되고 있다고 베 르그송은 생각한다 .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뇌세포의 손상이나 상해 에 대응되는 것은 기억의 혼란이고, 알아보는 능력인 인지의 혼란이다. 그런 인지의 혼란은 청각이나 시각적인 착란인 〈심리적 맹인〉이나 〈심리 적 襲 人〉의 경우와 같은 것이 있고, 〈언어적 맹인〉이나 〈언어적 농인〉과 같이 말의 인지가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그런데 만약에 베르그송의 가설 이 옳다면, 인지의 착란은 두 가지 원인에서 기인해야 한다. 첫째로 신체는 의부에서 오는 자극에 대하여 이미 자동적인 반웅능력 울 상실하였디는 점이다. 즉, 신체의 자동적 적응능력의 상실로 추억의 66) H. Bergs o n, La pe nsee et le mouuant, p. 171.
취사선택이 이루어지는 신체적 매개의 능력이 중단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로 우리의 추억은 이미 신체 속에 현실화의 적응수단이나 행동화 의 수단을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그래서 추억은 존속하고 있지만, 그것의 현실화가 불가능해진다. 심리적 맹인이나 심리적 농인의 경우에 시각적 청각적 추억이 아직도 회상되고 있지만, 현실화의 어려움 때문에 해당되는 지각으로 그 추억울 적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적 맹인이나 언어적 농인의 경우에 회 상의 기능, 즉 취사선택의 기능장애 때문에 추억의 회상마저도 방해를 받 고있다. 추억의 현실화가 방해를 받고 있는 착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경 우는 심리적 맹인이나 심리적 귀머거리(뾰人)의 사례에 해당된다. 환자가 실제로 보고 듣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정상이다. 그렇지만 환자는 말을 인지하지 못한다. 말소리의 추억이 이미 현실화될 수가 없기 때문이 다. 그 까닭은 그 소리의 현실화에 쓰이는 뇌세포의 영역이 손상이나 상 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추억 자체는 온전히 남아 있다. 상해는 추억을 파괴하지 않았다. 손상을 입은 것은 현실화시켜나가는 두뇌의 메 카니즘이다. 예컨대 조직적인 기억상실의 전개과정에서 어떤 추억들은 충 격을 받게 되면 불현듯 소생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뇌 속에 저장된 영 상들이 파괴되었다면 설명할 길이 없다. 기억상실을 야기시키는 뇌세포의 상해가 단지 영상들의 생동적인 현실화를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문 제가 풀린다. 다시 말하자면 영싱들은 파괴되지 않고, 단지 어떻게, 그리 고 어디를 통하여 현실화하여야 할 것인가를 알지 못할 뿐이다. 두뇌의 역할 때문에 추억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참재적 존재에서 현 실적 존재로 통과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정신의 기억은 그 자체에 있어 서 두뇌의 기능에서부터 독립적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두뇌는 기억 과 추억울 창조하지 못하고, 그것을 보존하지도 못한다. 두뇌의 상해에 관한 연구는, 상실된 것은 추억이 아니고 두뇌의 운동적 도식이 고장났음 을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추억의 나타남과 추억의 존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추억은 나타나지 않더라도 존재할 수 있다. 나타나지 않고 잠재상 태에서 존재해 있는 추억을 베르그송은 〈무의식沖]라고 불렀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자면, 우리의 신체와 두뇌는 행동의 도구일 뿐이다. 그래서 베 르그송의 철학에서 정신적 존재로서의 기억은 두뇌의 메카니즘을 초월하 여 그 자체대로 존재해 있다는 사성을· 겨냥하게 된다. 과거는 그 자체 자동적으로- 보존될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내면적 삶이 계속이요, 지속이요, 나누어질 수 없는 변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정신적 추억이 결코 뇌세포의 산물이 아님을 다시 논증한다. 〈지나간 우리 실존의 시기가 졸지에, 그리고 근본적으로 기억에서 사라지 는 기억상실증의 경우에 사람들은 정확한 뇌세포의 싱해를 발견하지 못 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뇌세포의 위치가 정확하고 분명한 기억착란의 경우에, 죽 시각적 청각적 인지에 불가능을 가져오는 다양한 언어상실의 경우에 뇌세포의 공간적 장소에서 사라진 것은 그에 해당되는 추억이 아 니라, 마치 주체가 현재적 상황과의 접촉에서 자기 추억울 가져오는 것에 다소간 고통스러워 하는 것처럼, 그 생기에서 감퇴되는 회상의 능력 자체 다.〉 li7) 베르그송은 더구나 언어상실의 경우에 언어의 망각이 언제나 일정 한 순서를 밟고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마치 언어상실증 환자가 일 정한 상실의 문법을 가전 것처럼 보인다. 즉, 대명사가 제일 먼저 사라지 고, 이어서 보통명사, 다음에 형용사, 부사, 그리고 동사가 제일 마지막까 지 남는다. 이렇게 보면 유물론자의 주장처럼 기억이 뇌세포 속에 충을 이루어 차곡차곡 쌓였다가, 윗충에서부터 아래층으로 뇌세포의 상해가 전 전됨에 따라 그렇게 언어망각의 상태가 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한 베르그송의 생각은 두 가지 각도에서 정리해볼 수 있다 . 68 ) 첫째로 언어상실을 초래하는 병은 가장 다양한 원인에서 생기게 되고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그 병은 문제되고 있는 뇌세포의 어 떤 한 지점에서 시작되어서 임의의 방향으로 확산될 수 있다. 반드시 위 67) H. Bergs on, Mati ere et memoir e , pp. 266~267. 68) H. Bergs on, . L'energi e spi rit u e lle, pp. 53~55.
에서 아래로 뇌세포의 손상이 일정하게 진전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방향 으로 상해가 생겨서 나아가더라도 망각의 순서가 일정하디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망각의 순서는 뇌세포의 표피총부터 상해가 가해져서 심층부로 내려간다는 가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둘째로 베르그송은 보다 간단한 원리를 생각한다 . 만약에 고유명사가 보통명사보다 먼저 사라지고, 보통명사는 형용사보다, 형용사는 동사보다 먼저 사라전다면, 그것은 보통명사보다 고유명사를 회상하기가 더 힘들 고, 형용사보다 보통명사, 동사보다 형용사의 회상이 더 힘들다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죽 두뇌가 기여하고 있는 회상 기능은 두뇌 손상의 정 도가 심각해짐에 따라 점차 쉬운 회상 쪽으로만 제한되어져 간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두뇌가 회상하기 쉬운 것과 어렵디는 것의 기준이 무엇일 까? 베르그송은 동사가 가장 회상하기 쉬운 까닭은 그것이 행동을 표현 하고, 또 행동은 흉내내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형용사는 동 사의 매개를 통하여, 명사는 또 동사와 속사인 형용부가어의 매개를 통하 여, 그리고 대명사는 또 보통명사 • 형용사 • 동사를 통하여 모방하거나 흉내낼 수 있기 때문에 신체에 의하여 행동하거나 모방할 수 있는 행동 에서 그만큼 거리가 멀어진다. 행동에서 거리가 먼 언어일수록 복잡한 인 공적 조작과 상정운동이 더 요청되는데, 두뇌의 기능은 상해를 받아 점점 쇠약해져간다. 그래서 두뇌의 기능이 감퇴 내지 쇠약해짐에 따라 망각의 순서는 복잡한 조작운동에서 가장 행동과 가까운 단순한 것으로 이행된 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실에서 베르그송은 두뇌의 활 동에서 정신적 활동을 흉내내는 팬터마임을 우리가 볼 수 있지, 정신적 활동 그 자체를 볼 수는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즉, 우리는 기억의 운동 이 〈순수 추억〉에서 〈영상적 추억〉, 그리고 〈지각〉의 행동적 측면까지 이어지는 것을 알고 있다. 〈순수 추억〉에 가까워질수록 그 추억은 그 개 인의 실존적 인격적 체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이어서 보다 구상화된 〈영상적 체험〉이 오고 마지막으로 현재적 지각의 표상에 접근 하는, 죽 행동에 유리한 기억이 현실화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명사에
서 동사까지 가는 언어상실의 순서도 저런 단계의 흉내나 팬터마임에 속 한다고볼수 있으리라. 〈두뇌의 성해가 심각한 경우에, 말의 기억이 심대한 타격을 받은 경우 에, 다소간 강한 자극이나 예컨대 홍Hto l 영원히 잃어버린 것으로 여겨지 던 추억울 소생시키는 것이 일어난다. 만약에 추억이 변질되었거나 파괴 된 뇌의 물질 속에 저장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러 므로 두되는 추억울 회상하는 데 쓰이지, 보존하는 데 쓰이지는 않는 것 으로 보인다.〉 69 ) 기억으로서의 정신과 물질로서의 산체는 분명히 다르다. 그것은 구분된다. 그렇게 보면 二元論 이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은 구분된 것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 그 관계는 기존의 어떤 철학 개념으로도 덮여지지 않는 관계다. 그 관계는 一方이 他方울 완전히 결정 하는 관계도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무관한 평행관계도 아니다• 그저 무엇이라고 표현할 길이 없어서 二元的 一元論의 관계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이런 이원적 일원론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하는 베르그송의 말을 인용하면 디음과 같다. 〈순수 추억이 이미 정신이라면, 그리고 순수 지직이 아직도 물질의 어떤 것이라면, 순수 지각과 순수 추억 사이에 있 는 관절 마디에 우리 자신을 위치시키면서 우리는 정신과 물질의 상호작 용에 관한 어떤 빛을 던지지 않으면 안된다. 사실상 순수 지각은, 즉 순 간적 지각은 하나의 이상이고 한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현실적인) 모든 지각은 지속의 어떤 두께를 차지하고 있고 과거를 현재 속에 연장 시키고 있고, 그래서 기억과 같은 성질을 띠고 있다. 순수 추억과 순수 지각의 종합으로서, 죽 정신과 물질의 종합으로서 구체적인 형태의 지각 울 생각하면, 우리는 영혼과 육체의 결합문제를 가장 좁은 한계 속에서 좁혀 보게 될 것이다.〉 70) 심리적 상태는 두뇌의 생리상태를 넘어가고 있다. 행동의 제스처나 표 현운동이나 팬터마임의 세계보다 더 많은 것이 정신적 삶 속에 있다. 우 69) 같은 책, p. 52. 70) H. Bergs o n, Mati ere et memoir e , pp. 274~275.
리의 내면적 정신의 극히 일부분만이 겨우 행동으로 현상회될 뿐이다• 이 점을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뇌와 사유와의 관계는 복집하·고 미묘하다. 만약에 당신들이 간단히 거친 공식으로 그 관계를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두뇌가 단지 팬터마임의 기관이라고 말하고 싶다. 두뇌의 역할은 정신의 생명을 모방하는 것이다. 죽, 정신이 적응해서 살아야 하 는 의부 상황을 모방하는 것이다. 두뇌의 활동이 정신활동예 상관적인 것 은 교향악단 지휘봉의 운동이 교향곡과 관계되는 것과 같다. 교향곡은 그 곡을 운율로 나누는 운동을 모든 측면에서 초월하여 있다. 마찬가지로 정 신의 생명은 두뇌의 생명을 초월해 있다.〉71) 〈따라서 두뇌가 사유를 결정 하지 못한다. 그리고 사유는 적어도 큰 부분에서 두뇌에 대하여 독립적이 다.〉 72) 바로 이런 관점에서 두뇌에 대한 정신의 상대적인 독립을 우리가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영혼의 불멸 l'rn morta l it e de l'a. me 〉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독립의 측면에서다 .13) 이 〈영혼의 불멸 X 본 경험적 으로 증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경험은 제한된 지속만을 관계하기 때문이다꼬 아무튼 베르그송은, 경험적으로 〈영혼의 불멸〉과 〈死後의 생 명의 존속X t 증명할 길은 없지만 정신적인 생명이 두뇌의 기능을 초월 하고 있음이 확정적인 이상, 〈영혼 불멸 X 든 아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래서 증명을 해야 하는 쪽은 그 가능성을 긍정하는 편 에서가 아니고, 오히려 그 가능성을 부정하는 편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71 ) H. Bergs o n , L'energi e spi rit ue lle, p. 47. 72) 같은 책, p. 43. 73) H. Bergs o n, 갇은 책, p. 58,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 lig ion , pp. 280~281 . 74) H. Bergs o n, -L'e nergi e spi rit u e lle, p. 58.
제宏J 내면적 자아의 지속 1 質의 심리학과 의식의 흐름 제 1 장에서 우리는 정신과 물질에 관한 베르그송의 철학을 보면서 그가 종래의 철학이론이나 과학이론에 가한 비판적 시각을 살펴보았다. 베르그 송은 자기의 철학사싱을- 이해하기 위하여 일종의 사고방식의 전환을 요 청하였음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순수 추억〉과 같은 정신세계를 파 악하기 위하여 과거의 기억으로 단번에, 그러나 주의 깊고 세심하게 침잠 할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이제 우리는 이 정신세계를 意識의 각도에서 다르게 접근하는 길을 택하여야 할 때에 이르게 되었다. 보통 사람들은 물질세계와 사회생활에 둘러싸여 습관적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이런 습관적인 생활방식으로는 베르그송이 말하는 의식세계를 파 악하지 못한다. 베르그송은 의식의 내면세계의 본질을 읽기 위하여 모든 관념의 습관에서부터 벗어날 것을 제의하고 있다. 이 점에서 베르그송의 의식에 대한 철학은 자기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길을 선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재래의 심리학이나 철학(특히 칸트철학)은 인간의 자아를 객관 화시켜서 파악하려고 하였다. 자아를 객관화시킬 때, 그 자아는 物性으로 변질되든지, 아니면 물성과 동일한 법칙이 적용될 수 있는 대상이 되고 만다. 이미 우리가 제 1 장의 「물질과 기억」에서 검토한 바이지만, 베르그 송의 철학은 자아의 주관을 인위적으로 파악하려는 모든 現存의 시도에
대한 비판과 그 대안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근본적으로 자아는 持緖 la duree 의 흐름이다. 지 속은 〈창조적 생성〉이고 〈이미 만들어전 to ut fait> 질 서에 속하는 것 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가는 se faisa nt> 질서에 속한다. 즉 , 의식으로서의 자아는 〈발명적인 자발성〉이요 〈창조적 전화〉다. 이미 우리가 기억의 본 질을 보았을 때 지적된 사항이지만, 기억에서 과거와 현재를 두부 자르듯 이 그렇게 분석할 수 없음은 잘 알고 있다. 기억에서 과거는 현재로 언 제나 계속해서 흐르고 있기에, 그런 기억의 흐름을 베르그송은 〈순수 지 속〉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기억으로서의 〈순수 지속〉이 마 치 짜깁기를 하듯기 그렇게 조각조각 단편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어니는- 〈눈 공〉처럼 모든 것이 계속적으로 유기체화하는- 것임을 우리는 또한 안다. 우리의 의식이 〈눈공〉처럼 그렇게 지속하는 경우, 셀링 Schell i n g의 말처 럼 끝이 처음을 증언하게 된다고 보아도 틀린 것은 아니리라. 왜냐하면 끝이 시작과 단철되어 있지 않고 , 어떤 7 불 7설 한 굴곡울 중간에 가 졌 었 다 하더라도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짜깁기를 하는 사고방식은 기계론 le rnecan i sme 의 입장에 서 있고, 눈공처럼 살찌면서 굴러가는 것을 생각하 는 사고방식은 쟝께레비츠가 잘 묘사하였듯이 〈유기체적 전체성 la to ta -lit e or ganiq ue 〉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 점을 쟝께레비츠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생명의 질서와 정신의 질서에 있어서 참다운 근본 적 사실은 지속한다는 것이다• 즉, 다른 말로 설명하면……기억의 본성을 그 생생한 규모에서 파악하면, 그것은 우리 경험의 영속성을 생명의 매순 간마다 확인시켜주고 있다.……기억의 본성은 자아의 내면적인 지속의 정신적 얼굴과 다르지 않다.……우리의 개성은 아무것도 상실되지 않는 세계이고, 아무리 작은 진동이라도 오래가고 깊이 스며드는 반향을 일깨 워줄 수 있는 그런 환경이다.〉 I) 베르그송이 말하고 있는 자아와 의식의 지속을 좀더 이론적으로 · 규명 해보아야 한다. 그는 지속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해명하기 위하여 〈질 la 1 ) V. Jan kelevit ch , Henri Bergs o n, p. 7.
q ual it e 〉과 〈 量 la q uan tit e 〉의 개념적 구분이 중요함을 가르치고 있다. 밀할 나위도 없이 양의 세계는 수적으로 그 크기를 측정할 수 있음을 본 질로 삼고 있다. 그가 제시한 예를 중심으로 설명해보기로 하자 1 예컨대 어떤 수가 디른 수보다 크다고 할 때, 그 어떤 수는 자연수의 계열에서 다른 수보다 뒤에 올 때를 뜻한다. 그리고 그 어떤 수와 다론 수와의 관 계에서 그 어떤 수가 다른 수를 어떤 관계에서든지 내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어떤 수가 다른 수보다 크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양적으로 A 가 B 보다 크다고 할 때, 우리는 그 양적인 크기의 객관적 기준을 정확히 제시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무거운 물건을 들어울릴 때나 또는 밀 때 우리가 체내 감각으로 느끼는 힘의 강도는 수량으로 量 化될 수 있는 것일까? 재래의 전통적 심리학에서는 이 체내 감각적 강도의 문제가 위 에서 거론된 크기의 양적 측정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즉, 크 기의 양적 측정은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하고 따라서 팽창 가능한 것이지 만, 느끼는 체내의 강도는 측정할 수는 없더라도 두 강도간의 크기와 작기를 비교할 수는 있다고 주장하였다. 베르그송의 의식 탐구는 바로 이 체내 감각이나 감정을 量 化하려고 하는 심리학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 작하고 있다. 힘을 쓸 때 근육 훈동과 동시에 발생하는 감각은 신경이 소 모하는 힘의 원심적 흐름과 일치한다고 生理學的 심리학은 주장해 왔었 다.
2) H. Bergs o n, Essai sur Les donnees im media t e s de la conscie n ce, p. 2( 이후 로는 이 책명을 줄여서 Essa i라고 표기함).
이런 생리학적 심리학의 주장, 죽 量 化心理學의 주장에 대하여 베르그 송은 다음과 같은 심리학적 현상들을 제시함으로써 의식의 量 化를 부정 하려 한다센 예컨대 지체마바자가 마바된 지체를 들어울리려 하지만, 그 운동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지체를 들어올리고 만다. 마찬가지로 반신불수의 환자에게 그의 마비된 손바닥을 움켜 주먹 을 쥐도록 하면 그는 무의식 중에 마비되지 않은 손의 주먹을 쥐는 행동
3) 같은 책, pp. 16~20.
울 한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시한 곳에서 운동이 일어나지 않고 다른 곳에서 그것이 발생함은 곧 우리 체내에 노력의 감각이 있음 울 반영한다. 또 이런 예시를 베르그송은 제시한다. 권 총의 방아쇠 를 잡 아당기려는 듯한 자세로 팔을 허공에 수직으로~ 울려 집게 손가락 을 가볍 게 구부리게 되면(그때 팔도 움직이지 않고 근육 오 동도 없다), 물 리적인 힘의 변화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에너지의 소모를 느끼게 된 다. 이런 노력의 느낌은 가슴 근육의 고정화와 일치하고, 聲 門이 닫혀지 는 느낌을 갖게 하고, 호흡 근육이 적극적으로 수축되는 것을 깨닫게 한 다.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노력을 의식하는 일도 사라진다. 이런 사 실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베르그송에 의하면, 그 사실은 우리가 노 력의 放出울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결과인 근육오동을 의식하게 되는것이라고본다. 베르그송은 윌리엄 제임스 W. Jam es7} 한 생각을 긍정하고 있다. 제 임스는 노력의 감정이라는 것이 遠 心的이라기보다 오히려 求 心的이라고 말하였다 . 우리의 체내 감각으로서의 노력이나 주의집중의 느낌은 물론 생리적 운동(예를 들면 근육 오 동 )을 동반하고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이 그런 느낌의 원인도, 결과도 아니다. 이런 근육오동은 그런 노력에 동참 하고 있고, 그 노력이나 주의집중의 느낌을 공간적 면적으로 표현한 것으 로 보아야 한다. 예컨대 주의집중을 의도적으로 하려는 사람이 가끔 입술 울 오므리고 있는 것도 입술을 오므리는 것이 주의집중의 원인도 결과도 아니고, 주의집중의 노력이 그런 모습을 짓게 하는 것이다 . 4 ) 바로 이런 신체적 可視化의 현상 때문에 사람들은 노력이나 긴장 또는 주의집중의 심리현상을 量 化하고 측정하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의지의 노력은 언제 나 신체적 긴장의 증대를 유발하기에, 그것은 신체의 압박, 긴장, 피로를 동반하게 된다• 그렇다고 정신의 노력이나 주의집중을 신체근육의 긴장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정신적인 노력이나 긴장은 사실상 사랑과 증오의 격 렬한 감정과 다르지 않다. 사랑과 증오의 격렬한 감정도 신체의 수축현상 4) 갇은 책, p. 21.
울 동반한다. 그렇다고 사랑과 증오가 양화될 수 있는 신체운동이 아니 다 . 〈 質 의 챠기가 자발적으로 量 의 차이로서 번역된다는 것을 덧붙여야 한다. 그 까닭은 우리의 신체가 주어전 무게를 들어울릴 때 다소간 제공 하게 되는 확장된 노력 때문에 그러하다• 이것은 사실상 속이 비어 있는 바구니인데 사람들이 당신에게 쇠부스러기로 가득한 바구니라고 하면, 당 신은 그 바구니를 들어올리는 순간 느끼게 되는 이치와 같다. 그때 당신 은 당신의 모든 근육이 미리 작동준비를 마쳤는데 실망을 느낀 것처럼 균형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 당신이 크기의 개념을 느낌에 도입하지 않는다면, 그런 느낌은 단지 하나의 質 이다.〉 5 ) 우리의 체내 감긱이 느끼고 있는 강도는 사람들이 상식으로 생각하듯 이 양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양으로 측정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도 근육읍동이 공간적으로 수축되거나 팽창되는 것으로 가시화되기 때문 에 그러하다. 고통의 강도가 작은 데서부터 큰 데로 양이 증대하는 것으 로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베르그송이 제기하는 심리학적 분석은 우리 의 감각이 양적으로 탈바꿈하지 않고 질적으로 탈바꿈한다는 점이다. 즉, 우리의 느낌은 양적인 크기와는 상관없이 그 느낌의 질을 달리할 수 있 다. 감각(또는 느낌 )을 양적으로만 생각하는 경우에 자연수의 증가나 감 소처럼 동일한 측정의 단위로 계산할 수 있고, 조각을 낼 수 있다. 양이 나 수가 증가하고 감소해도 동일한 기준의 측정 단위가 있으면, 그 다양 한 느낌의 조각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런 느낌이나 감각은 同質的 homo g ene 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감각이나 느낌을 질적으로- 각각 다르다고 여길 때, 우리는 그 질을 하나의 측정단위로 더하거나 뺄 수 없는 異 質 的 het ero g ene 인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과학적 인 생각의 습관에 젖은 사림이나 과학적 사고만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검은 색을 말 할 때, 그 색은 색이 없다든가 또는 최소한 빛만이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되고, 스펙트럼의 여러 가지 색깔은 그 최소한 빛인 검은 색에서부터 빛 이 단계적으로 증대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러나 의식에 직접 5) 같은 책, p. 36.
주어지는 것을 그냥 그대로 느끼는 사람들은 검은 색을 다른 색깔과 같 이 적극적인 다론 색으로 간주한다 . h I 여기에 이르러 색채감각에 관한 베르그송의 지론을 잠시 음미하여 보 기로 하자. 한 자루의 촛불이 종이 한 장과 어떤 거리를 두고서 종이룰 비추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그 거리를 두 배로 하였을 때 꼭 같은 느낌을 갖게 하기 위하여 네 자루의 촛불이 필요하였다고 상정해보자. 이 실험을 통하여 만약에 光源의 강도를 증가시키지 않고 거리를 두 배로 하였다면 조명의 효과는 4 배나 감소하였다고 결론내릴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실험은 물리적 효과에 관한 것이지 심리적 효과와는 무관하다. 왜냐하 면 그 경우 두 가지 느낌을 그들 사이에서 비교하였다고 여기지 않기 때 문이다. 죽, 광원의 차이에서 오는 것을 서로 비교하가 위하여 하나의 감 각만을 이용하였다고 여기게 된다 . ; 1 이 실험보다 더 구체적인 예를 베르 그송과 함께 제시해보지-. 촛불 네 자루에 의해 비춰진 종이를 보고. 점차로 하나씩 그 촛불을 꺼 서 드디어 하나만 남게 되었다고 하자. 처음에 종이의 표면이 흰색이었다 가 조명의 빛이 약해짐에 따라 그 색깔이 어두워진다고 아마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긱하게 되는 것은 촛불이 하나씩 꺼지는 것 을 기억하고 있고 언어의 습관성에서 오는 것이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전 짜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흰 종이의 표면 위에서 광원의 감소가 아 니라, 촛불이 하나씩 꺼지는 순간 그 표면 위에 질은 그림자의 충이 지 나간다는 것이다. 이 그림자는 빛과 같이 우리의 의식에 하나의 실재로서 느껴진다고 베르그송은 주장한다. 애초의 네 자루 촛불에서 비천 종이를 흰색이라 한다면, 세 자루의 촛불이 꺼전 경우에는 우리는 아마도 다른 색의 이름이나 흰색의 다른 뉘앙스라고 말해야 할 것이라고 베르그송은 주장한다 .8) 6) 같은 책, p. 40. 7) 같은 책, p. 40. 8) 감은 책, pp. 39~40.
감각이나 느낌의 질이 무엇인가물 ' 알려주 는 또 다른 예시를 생각해보 자. 여기 오렌지 색이 있다고 가정하여 보자. 우리가 이미 붉은색과 노란 색을 알고 있기에 오렌지 색은 붉은색과 노란색이 결합된 것이라고 생각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그 오렌지 색을 보았을 때, 붉은색과 노란색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양색의 결합이라고 생각하지, 만약 이 세상 에 그 양색이 없었거나 아직 모른다고 가정하였을 때 오렌지 색을 두 색 의 결합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 경우 오렌지 색은 하나의 독립적인 單色으로 여겨지게 됨은 자명하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세심하게 하나의 가상적인 논리적 반박을 상상하고 있다. 즉, 노란색과 붉은색은 오렌지 색의 형성 때 이미 들어온 것이고, 비록 이 두 색이 실제로 아직 존재하 지 않았다고 가정하여도 잠재적으로 오렌지 색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가? 이런 가상적 반박에 대하여 베르그송은 우리의 습관적 논리가 언제 나 〈회고의 논리 la log iqu e de ret ros p ec ti on 〉에 지나지 않음울 지적하 고 있다. 〈회고의 논리注근 현실적인 실재를 잡재성이나 가능성의 상태로 상상하여 과거 속으로 던지는 환상을 말한다. 그런 환상으로 사물을 보면 지금 구성된 것이 거의 언제나 옛날에도 그랬던 것같이 보인다. 이것이 일종의 〈회고적 환상〉이다 . 9) 베르그송은 우리가 인간이나 사건들을 평가할 때, 그 판단의 가치를 회고적인 것으로 만들려 하는 믿음으로 우리의 생각이 젖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즉, 어떤 것에 대한 진실이 한번 정립되면, 그 진실을 시 간의 과거 속으로 후퇴시키는 근성을 우리는 갖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적 사건의 전실을 찾았다고 하면, 그 전실이 마치 아득한 옛날부터 있었던 것으로 채색한다. 그래서 옛날의 그것이 참재상태로 있다가 지금 그것이 현실화된 것으로 여기려는 환상을 말한다. 그래서 그런 씨앗이 과거에 미 리 있었기에 현실의 진실이 더욱 튼튼해전다고 여기고 그리하여 미래도 미리 예견하고자 한다. 이런 〈회고적 환상 X 는 역사적 사건을 의미화하려 는 史家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하여튼 우리가 그런 〈회고의 논리〉에 9) H. Bergs o n, La pe nsee et le mouvant, pp. 18~ 19.
빠지지 않았다면, 오렌지 색은 그 나름대로 독특한 느낌을 우리에게 주 지, 그것이 마치 붉은색과 노란색의 연장선상에 있는 결합의 同質性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오렌지 색을 붉은색과 노란색의 결합과 같은 동질성으로 생각하는 경 우, 그런 사고방식은 하나의 原因이 외연적으로 다소간 연장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심리적 물리학의 소산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우리의 의식에 칙집 주어지는 색채의 느낌은 하나의 독특한 뉘앙스에서 다른 뉘앙스로 불연속적으로 변한다• 이와 같이 느낌을 質의 異質性과 不連續性으로 보 려고 하는 베르그송의 심리학은 心理物理學 la p s y cho p h y s iq ue 의 경향 에 대한 비판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심리물리학의 대표자가 독일의 페히 너 T.G.Fechner 다. 심리물리학은 다음과 같은 법칙 위에 서 있다. 느낌 (감각)의 새로운 변화를 잉태하는 자극의 증가는 그 증가를 가져오는 자 국의 양과 일정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 페히너는 심리물리학을 통하 여 영혼과 육체에 대한 정확한 이론을 물리세계와 심리세계의 일반관계 론으로서 정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심리학은 물리학처럼 철 저히 양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우리가 제 1 장에서 본 바와 같이 심신평행론을 페히너는 제창하게 되었다. 즉, 신체와 같은 물 질의 덱스트를 심리가 번역하는 것으로 이 독일의 심리물리학자는 생각 하게 되었다. 그는 의식의 사실을 연구하기 위한 척도를 도입하기 위하여 양의 개념과 단위를 의식에 적용하는 가능한 수단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 런데 마음이 체내감각으로 느끼는 강도와 같은 것은 질적 개념이므로 양 화하기가 거의 어렵기 때문에, 그는 강도를 신경운동의 내적 모습으로 생 각하여 신경운동과 그 힘을 양화하면, 심리세계를 물리세계처럼 환원시키 는 방식이 간접적이라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신경계통 의 운동은 물리적 자극과 직결되어서 그 크기를 수량화할 수 있기 때문 이다. 그래서 페히너는 마치 수은주의 수은 상승으로 온도를 재듯이 신경 운동의 힘을 측정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감각(느낌)의 강도를 측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온도 측정은 결과에 의하여 원인을 재지만, 심리 측정은
원인(자극)에 의하여 결과(감각)을 잰다는 차이점만 있을 뿐이라고 페히 너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내적 감각이 의적 미터로 측 정된다고 그의 심리 물리학은 단언하고 있다. 이와 같은 페허너의 심리물리학의 이론에 반대하는., 즉 심리의 동질적 수량화를 반대하는 質 의 심리학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베르그송이 제 시한 심리적 예시를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의 의식이 내적인 기쁨을 느끼는 감정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물론 기쁨을 느끼는 감정은 공간적으 로 자기 자리를 체내에서 규정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은 아니다. 기쁨에는 심리적으로 여러 가지 상태가 있을 수 있다. 베르그송의 분석에 따르면, 〈가장 낮은 단계에 있어서의 기쁨은 미래의 방향으로 우리의 의식상태가 定向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 마지막으로 국단적인 기쁨의 경우에 우리의 지각과 우리의 추억은 열기나 빛에 비유됨직한 형용할 수 없는 質 울 체득하게 된다. 그리고 質 은 아주 새로운 것이어서 어떤 순간에 우 리 자신에게로 되돌아와서 우리는 존재의 경이룰 맛보게 된다.〉 I OI 이러한 베르그송의 생각을 통하여 우리는 순수히 내면적인 기쁨의 감정 안에서 도 정도의 차이에 따라 엄청난 질적 차이가 게재해 있음을 보게 된다. 기쁨뿐만 아니라 슬픔도 그 정도의 차이에 따라 느낌의 질적 변화가 있 댜 예컨대 슬픔이 아직 시작 단계에 있을 때, 그 슬픔은 마치 미래가 우 리에게 차단된 것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과거로만 定向하 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슬픔이 극도에 다다르면 우리가 마치 허무를 바라는 것 같은 압도당하는 인상을 느끼게 되고, 매번마다 당하는 새로운 불운은 싸우고자 하는 용기마저 잃게 하여서 우리에게 일종의 쓰디쓴 쾌 감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11) 겉에서 보면 낮은 기쁨에서 극단적 기쁨 까지 그리고 술품의 시작에서 끝까지 모든 감정이 하나의 量 的 연속의 증대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죽, 자극의 동질적인 증가가 기쁨이나 슬 폼의 크기를 연속적으로 가져온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안에서 그 기쁨과 10) H. Bergs o n, Essai, p. 8. 11) 같은 책, p. 8.
그 슬픔을 여러 가지 정도에서 겪는 사람에게 다양한 기쁨과 슬픔은 하 나의 동질적인 자국의 연속이 아니라, 각 계기마다 겪는 기쁨과 술품은 서로간에 異質的인 質的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베르그송이 생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의 내면적 자아와 그 의식이 느끼고 있는 감각은 양화의 대상이 아니고, . 질의 변화로서 이해되어야 한 다. 감각이 질적인 변화의 주체이기 때문에 예술적 감동이 가능하다. 아 름다운 음악을 듣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 사이에는 내면적 자아의 의식 세계에 엄청난 질적 변화가 가져오는 차이가 생기게 된다. 〈예술의 대상 은 우리 인격이 지니고 있는 능동적 힘, 죽 저항적 힘을 잠재우는 일을 한다. 그리고 예술의 대상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생각을 우 리가 실현하는 완전한 유순성의 상태, 즉 우리가 표현된 감정과 공감하게 되는 완전한 유순성의 상태로 우리를 이끄는 일을 한다. 예술의 과정 속 에서 사람들은 경감되고 세련되고 어떤 점에서 정신적으로 변화된 형태 에서 사람들이 보통 최면상태에서 얻게 되는 과정을 재발견한다. ……음 악의 소리가 자연의 소리보다 우리에게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 다면, 그것은 자연이 감정을 표현하는 데 제한되고 있는 반면, 음악은 우 리에게 그 감정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1 2 ) 예술적 정감이 우리의 의 식에 질적인 변화몰 잉태하기 때문에 음악을 모르는 사람보다, 자연의 소 리만 듣는 이보다, 음악을 듣는 이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내면적 자아 의 유순함과 아름다움을 창조해나간다. 만약에 심리물리학의 주장처럼 감 각이나 느낌이 자극에 의한 신경의 운동량이라고 한다면, 도시의 소음공 해의 자극이나 대자연의 바람소리나 또는 전축에서 울려퍼지는 음악의 높은 음향이나 다 같은 소리의 동질적 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여 자연의 소리나 음악의 소리는 정신병이나 신 경증을 유발하지 않는데, 도시의 소음은 사람의 정신을 황폐화시키고 파 멸시키는가? 그러면 질적 변화로서 느껴져야 할 감각을 어떻게 해서 양적 크기로 12) 같은 책, p. 11.
생각하려는 경향이 생기게 되는가? 베르그송에 의하면, 이 경향도 일종의 〈회고의 논리〉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여긴다. 감각의 느낌이 시간이 지나 감에 따라 자기의 정감적 성격을 잃고 관념적인 표상상태로 전환하게 됨 에 따라서, 우리가 체내에서 느꼈던 반응운동도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런 소멸과 동시에 우리는 의부의 대상과 그 대상이 준 자국만 의식하게 된 다. 죽, 그 대상과 자극을 원인으로 알게 된다. 그런데 그런 원인은 물리 적인 것이어서 延長的 성격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측정가능한 것이다. 이 리하여 우리들은 감각이나 감정의 질적 결과의 원인으로 물리적 양적 원 인을 결합시키게 된다. 그래서 감각이나 감정이 느꼈던 강도가 드디어 양 적인 크기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식세계, 내면적 자아를 바로 인식하기 위하여 〈질 적 구분〉과 〈양적 구분 X t 분명히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양적인 구 분尺든 〈공간적 구분〉, 〈물리적 구분〉과 같다. 모든 공간은 동질의 처원으 로 설명된다. 공간에서 이곳 나의 연구실과 바깥의 더 넓은 빈 곳의 구 별이 있다. 그러나 이 좁은 연구실 공간과 바깥의 넓은 공간은 동일한 물리법칙과 부피의 수치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다. 공간적 구분은 그래서 연장적이고 수적인 표상으로 특칭지워진다. 〈공간적이고 수적인 구분은 대상들의 질적인 특수성을 없애버린다. 왜냐하면 그러한 구분은 供列 la j ux t a p os iti on 에 의하여 진행되기 때문이다. 병렬시키기 위하여 외면화 해야 한다. 의면화하기 위하여 동질화를 시켜야 한다.〉 1 3 ) 그와는 반대로 〈질적인 구분 X 는 〈시간적 구분〉, 〈심리적 구분〉과 같다. 이 시간의 개념 은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두 가지 뜻으로 나누어진다. 즉, 심리적 지속과 물리적 시간이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곧 오게 될 것이다. 하여튼 위에서 쓰여전 시간은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뜻한다. 이 시간적 지속적 구분이 가 장 구체적으로 체험되는 지대가 음악이다. 예컨대 모짜르트 Mozar t의 혼 horn 협주곡 중의 하나를 듣는 이는 그 협주곡이 전개됨에 따라 때로는 13) Gabrie l Madin i e r , Conscie n ce et mouuement, p. 370, Nauwelaerts Lou-vam.
우아하고 부드러우나 슬픔의 소리를, 때로는 가볍고 명랑하고 하늘거리는 나비의 율동과 같은 소리의 느낌 등을 다양하게 체험하게 될 것이리라. 그 각각의 느낌과 감각은 다른 음조의 느낌과는 분명히 질 적으로 다론 것이다. 마치 오렌지 색이 붉은색과 노란색의 결합과 다르게 느껴지는 것 처럼. 하나의 협주곡을 둘을 때에도, 그 속에서 듣는 이는 여러 가지 질 적으로 이질적인 변화들은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 많은 이질적인 느낌 의 체험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혼 협주곡을 듣는 이는 이것이 하나의 멜 로디로 이어져간다는 것을 또한 느낀다. 많은 이 질 적인 변화에도 불구하 고 그 이질적인 변화들을 꿰뚫는 한 줄기의 연속적인 흐름이 선율로서 나타나 있음을 또한 안다. 〈질적인 구분은 力動的 d y na miq ue 이다. 그 구 분은 다양성을 하나의 유기체로서, 죽 각각의 계기에 언제나 현존해 있는 전체성으로서 생각한다. 각 계기는 총체적으로, 다시 말하자면 자기 안에 서 자기의 뉘앙스를 지니고서 그러나 또한 전체성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 된다.〉 14) 양적인 구분과 질적인 구분이 다르듯이,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양적인 〈同 質 的 連 續 〉과 질적인 〈異 質 的 連續 〉이 또한 다르다. 전자는 공간 속 에서 직선이 계속 이어지듯이, 그 직선은 선분으로 쪼개지듯이 그런 성질 을 지니고 있지만, 후자는 음악의 선율처럼 우리의 의식이 흐르되 그 흐 름은 선분에서 선분으로 선이 이어지돗아 그렇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이질적 경험둘이 변화를 일으키면서도 음악의 선율처럼 그렇게 시간의 지속 속에서 흘러간다. 모짜르트의 혼 협주곡을 듣다가 갑자기 째 즈 음악이 나오거나 유행가 가락이 튀어나오는 경우에,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도 그것이 어딘가 흐르는 선율이 아니고 이상한 이물질이 끼었다고 즉각느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지속의 질적 경험은 개념으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 다. 그러나 그것이 양적인 구분들을 짜깁기하거나 병렬시킨 동질의 연결 울 오히려 근거짓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이 베르그송의 입장이다. 14) 같은 책, p. 370.
즉, 베르그송에 의하면 우리의 의식이 지속하기 때문에 공간적이고 수학 적인 연결을 인식할 수 있디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양적인 구분沃든 〈질적인 구분〉 때문에 가능해전다. 예컨대 공간적이고 수적인 병렬이나 佛 置 가 가능하기 위하여, 병렬되어져야 할 요소들이 서로 우리의 의식에 서 상호침투하여야 하고, 그 요소들의 합계가 질적으로 하나의 진보나 전 진으로 먼저 파악되어야 한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의식의 흐름 le flux de la conscie n ce, le courant de la consc i ence 〉이 〈양적 인 累計〉보다 인식론적으로 선행한다고 보고 있다. 베르그송은 그의 학위논문이자 氏 최초의 저서인 『 의식의 직접여건에 관 한 논고 Essa i sur Les donnees im media t e s de la consc i ence 』 에서 간접적 이며 개념적이고 悟性的인 지식을 거부하고, 우리의 의식에 직접 와닿는 직관적이고 질적이며 심리적인 지식을 귀중히 여겨야 함을 강조하고 있 다. 그리하여 베르그송은 추리적인 개념의 산물보다 직관의 가르침을 중 시한다. 인식의 이론에서도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지식보다 생동감이 흐르 는 살아 있는 지식의 세계를 그는 가까이한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우리의 의식이 직접 현실이나 실재와 접촉하면서 自得하는 지식과 간접적 추리 와 상징에 의하여 내려진 지식을 구분한다. 이 후자의 견해대로 하면, 〈인식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는 관점과 자신을 표현하는 상징 에 의존하게 된다. 그런 인식은 번역, 추상적 思考의 기획, 인위적인 구 성과 같은 분석적 과정을 필연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 …… 『 창조적 전 화 L'evolu ti on crea t r i ce 』 는 悟性의 자연적 기능을 정확히 밝히고 있다. 그 기능은 변화와 행위보다 오히려 사물과 상태를 표상하기 위하여 만들 어진 순수히 실천적 기능이다. 인간 지능의 구조는 바깥의 물질에 영향을 주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그 구조는 실재의 흐름 속에 순간적인 자르기를 실천함으로써만 일어난다.〉 1 5 ) ※ 자료에 의하면 그의 문학박사 학위 논문은 그가 학생시절(고등사범학교)에 쓴 라틴어 논문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소 개념Q u i d Arsto te l es de loco sense- r it」과 함께 제출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
뒤에 우리가 자세히 음마하고 검토하는 기회를 갖게 되겠지만, 인간의 지능이 실재를 분석하고 재단하는 까닭은 사회적 현실의 실천적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서다. 사회적 실천은 물질이나 생활을 지배하여 이익을 가 져오게 함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러기 위해 알아야 하고 알기 위해 도구가 필요하다. 그 지배에의 도구가 인간에게 논리를 가져오고, 그 논 리가 여러 가지 인위적 상징을 만둘어낸다. 그런 상칭들 중에 가장 대표 적인 것이 사회생활에서의 언어 활동이요, 과학에서의 數理的 추리다. 수 리적 추리는 또 공간적 운동개념과 직결되어 있다. 베르그송이 개념의 철 학에 반대함은 개념이 의식의 직접적 여건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 이다. 〈의식의 직접 여건〉에 바탕한 직관적 인식은 추리적인 성질을 지 니지 않고 직관적이다. 직관적 인식이야말로 베르그송이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철학적 지렛대다. 〈인식한다는 것은 실재와 혼용되는 의식의 일치를 방해하는 표상을 배제하면서, 現存울 체험적 실존으로 느끼는 의식의 행 위다. 칙접적 직관은 인식의 행위가 실재를 낳게 하는 행위와 일치하는· 곳에 일어난다. 직접성은 모든 표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성취한 의식의 행 위에 의해서 얻어진다. 이런 인식은 추리, 추상, 그리고 일반화에 의하여 통과됨이 없이 완전히 절대적인 것을 파악한다.〉 1 6 ) 베르그송이 생각하고 있는 質의 심리학은 인식의 직접적 경험과 의식 의 흐름으로서의 지속에 근거를 두고 있다. 量 의 심리학, 즉 심리물리학 이 동질적인 공간의 延長性과 운동량과 같은 수량화와 직결되고 있다면, 質의 심리학은 이질적인 칙접 체험과 그 체험의 지속적 흐름에 바탕하고 있다. 〈근원적인 순수성에서 비추어전 의식상태의 다양성은 수량적으로 구분되고 있는 다양성과 아무런 유사성도 없다. 거기에는 질적인 다%모j 이 있을 뿐이다. 요컨대 두 가지 종류의 다양성, 구분하다리는 말의 가능 한 두 가지 뜻, 두 가지 개념, 즉 질적인 다양성과 양적인 다양성이 있음 15) Rene Verdenal, La philo sop hie de Bergs o n, in La ph il o sop h ie de Kant ci Husserl, sous la dire cti on de F. Chate l et, p. 264. 16) 같은 논문, p. 265.
을 인정해야 한다. … ... 양이 없는 다양성이 있다.〉 17) 질의 심리학이 귀중하게 여기고 있는 경험의 다양성은 수량으로 동질 적으로 구분하는 공간의 다양성과 다르다. 그런 질의 다양성을 베르그송 은 〈異質性 l' he t ero g ene it e )o]라고 하면서 공간의 〈同質性 l'ho mog en e- it e 〉과 구분하고 있다. 이질적 체험의 세계에서 확실히 〈不連緖的인 것〉 이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앞의 체험과 다른 변화가 반드시 생기기 때 문이다. 이 점은 이미 우리가 앞에서 본 색채감각과 체내 감정의 심리에 서 예시를 들어 훑어보았다• 그러나 이 〈이질성의 불연속성芹 7 단편적으 로 조각조각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 짜깁기를 할 때, 동질적인 천을 병 렬시켜 덧붙이듯이, 그렇게 이질성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의식의 세계 에서 그 〈이질성 X 끈 동시에 〈계속성〉이다. 의석은 순간순간 디~ 체험의 질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또한 동시에 하나의 선율처럼 계속해서 흐르 고 있다. 의식은 〈변화 le chan g emen t〉요 동시에 〈선율 la melodie ) o l 다. 이 점은 공간이 〈동질적 연장l' ex t ens i on homo g ene 〉이면서 동시에 〈可分的 要 素 !'elemen t d i v i s i ble 〉인 것과 정반대다. 이 점을 로비네는 다음과 같이 멋지게 표현하였다. 〈이질적인 것이라 함은 결합적 soli da ire 인 것은 아니되, 그러나 연속적 success if인 것을 뜻한다.〉 18) 이와 같이 〈변화〉와 동시에 〈선율〉로서 의식의 흐름을 이해하면, 그 흐름이 바로 우리가 앞 장에서 다루었던 기억이다• 기억은 그 흐름의 다 른 이름이다. 의식이 변화요 흐름이라고 하여서 순간적으로 소멸되고 다 시는 되돌아오지 못하는 무한 직선이라고 여겨서는 안된다. 순간적 의식 은 사라지지만, 의식의 지속적이고 생생한 활동에 의하여 언제나 그것은 현재의 두께 속에 항구적으로 것들어 있다. 그러므로 변화한다는 것은 사 라진다는 뜻이 아니고, 살찌고 풍요로워진다는 뜻에 오히려 가깝다고 할 것이다. 이래서 의식의 자아와 물질의 세계를 베르그송은 〈유기체의 생명 la vie de l' or g an i sme 〉과 〈기계론의 존재 l'ex is t e nce du mecanis m e> 17) H. Bergs o n, Essai, p. 90. 18) A. Robin e t, Berg s on, p. 28.
로 구분지어 부르기도 하였다. 이 두 세계의 차이를 쟝께레비츠만큼 아름 답게 부각시킨 이는 드문 것 같다. 〈물질적 체계는 전적으로 사람들이 바 라보는 순간에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물질은 그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그 주제에 관하여 라이프니츠 Le i bn i쩌 표현인 '순간적 정신 mens momen t anea’ 을 되새긴다. 플라톤 Pla t on 의 『 필레브 Ph i l ei터가 굴이나 해파리에게 귀속시킨 것이 순간적 의식이 아닌가? 조약돌이 변화 를 일으킬 수 있고, 겉에서 보면 늙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계속적인 그의 상태는 서로서로 의면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비록 감지할 수 없을지라도 어떤 변화의 轉移가 옛것을 새 것 속으로 환기시 키지 못한다. …… 반대로 감촉할 수 없고 미묘한 전통을 옮기는 정신적 실재는 영속적으로 함축된 암시성을 띠고 있다. 정신적 실재의 내용은- 축 적된 경험이나 함축적 암시를 내포하고 있음으로써 老羽선 하고 깊다. 가장 평범한 인간의 정서라도 그것은 쉽게 나열할 수 없는 풍요한 보물이다. 왜냐하면 그 정서는 개인의 무수한 경험이 소리없이 퇴적충처럼 조용히 쌓인 계속적인 과거를 증언하기 때문이다.〉 1 9 ) 2 동질적 시간과 지속 앞 절에서 보았듯이, 결국 의식의 흐름은 지속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지속은 공간과 구분되는 시간의 질서에 속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면 〈지속 la duree 〉이 〈시간 le t em p s 〉의 차원과 동일한 것인가? 물론 그렇 지 않다. 베르그송이 좁은 의미에서 시간이란 낱말을 사용할 때, 그 뜻은 물리학적 수학적 개념으로 좁혀서 이해되어야 한다. 가장 소박하게 밀하 자면 〈지속 X 즌 심리적 시간이고, 〈시간 X 즌 물리적 운동개념을 수량화한 것 0] 다. 數와 시간이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 19) V. Jan kelevit ch , 갇은 책, p. 8.
데 베르그송은 수가 시간과는 물 론이고 공간과도 본 질 적으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물론 ……공간과 독립하여 시간의 계속적인 계기 들을 인식함이 가능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현재적 순간에 그보다 앞선 순 간들을 첨가시키려 할 때, 단위들을 더하려고 할 때, 순간 위에서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순간들은 영원히 사라지기 때문 이다. 그래서 공간을 관통하면서 공간 속에 남겨 놓은 것으로 여기는 지 속적 흔적 위에서 사람들도 첨가하거나 더하게 된다. ……수에 대한 모 든 명석한 관념은 공간 속에서의 비전을 내포하고 있다.〉 20) 이상의 인용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 사 실상 떨어질 수 없는 상보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과학은 실 질적으로 공간 속에 임의의 직선을 그어놓고 그 직선을 통과하는 데 소 요되는 운동 속도를 시간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있다. 이런 물리학적 시간 은 量 으로서의 단위에 불과하다. 이런 경우에 측정되어지는 직선이나 선 분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 움직이지 않는 직선 위에서 움직이는 물체의 이동성이 시간일 뿐이다. 우리가 시간을 생각하면, 지속을 양적으로 측정 할 것만 생각하지, 결코 지속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일정한 거리를 일 정한 속도로 통과할 때, 또는 그 속도가 점차 빨라지거나 느릴 때 걸리 는 시간이라는 것은 지속이 아니다. 시간은 수치로 환원되어야 한다. 그 래야만 계산할 수 있고, 또 앞으로 걸리는 시간을 예견할 수 있다. 시간 은 출발점과 종점 사이의 중간에서 발생하는 사건 속에서 인간 심리가 느끼는 흐름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베르그송이 스스로 예시하였듯이 설팅이 물에 다 녹기를 기다림은 지속의 의미를 뚜렷이 보여준다. 녹는 시간이 일정하더라도 인간의 의식에 느껴지는 지속은 한결같지가 않다. 참다운 지속으로서의 〈계속 la success i on 〉과 공간적 시간 속에서 〈병 렬 la j ux t a p os iti on 〉과는 다르고, 〈진화I' evolu ti on 〉와 〈전개 le deve- lop pe ment) -E-다 르고 〈근본적 새로움〉과 〈전에 있었던 것의 재배치 X 근 각각 다르다 . 2 1) 과학과 오성은 지속을 고려하지 않는다. 과학과 오성은 20) H. Bergs o n, Essai, p. 59.
21 ) H. Bergs o n, La pe nsee et le mouuant, p. 13.
의식의 흐름 속에서 변화와 더불어 나타나는 질적인 비약과 새로움을 보 지 않는다. 과학과 오성은 물질세계에서 반복되는 것과 계산할 수 있는 것만을 취하려 한다. 설탕이 물에 녹기를 기다리는 인간의 의식을 생각해 볼 때, 인간은 그의 의식이 직접 느끼는 구체적 시간으로서의 지속을 객 관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추상적 시간을 쳐다보고 계산한다. 그 러나 인간은 구체적 시간을 바라보거나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것과 더불 어 살 뿐이다. 그런 점에서 구체적 시간은 자연스럽고, 추상적 시간은 인 위적이다. 〈살아있는 존재의 인식이나 또는 자연적 체계는 지속의 사이에 관계하는 인식이지만, 인위적이고 수학적인 체계의 인식은 양 끝만을 관 계할 뿐이다.〉 22 ) 이처럼 구체적 시간으로서의 지속의 측면에서 베르그송의 철학을 생각 하면, 그의 철학사상은 〈存在〉와 〈無〉의 측면에서 인간과 우주의 진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생성〉의 입장에서 안간과 우주의 哲理롤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생성의 철학은 존재가 무로 변하고, 무가 또다시 디른 변화를 일으켜 존재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바라보는 철학이기에, 생성의 철학에서는 엄밀하게 말하여 〈존재〉와 〈무〉의 개념 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뒤에서 자세히 보게 되겠지만, 그의 형이상학은 존재론도 아니요, 또 철저히 무의 세계를 부정하고 있다. 그 렇다고 그의 생성철학이 지리멸렬하게 변하기만 하는 무질서를 중심에 두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베르그송이 그리고 있는 생성 변화는 어떤 질서의 생명을 지니고 있다. 그 질서의 생명을 쟝께레비츠가 〈유기체적 전체성〉이라고 멋지게 표현하였다는 것을 우리가 앞에서 거론한 적이 있 지만, 이 생성의 철학에서 볼 때, 베르그송은 확실히 전통적 철학이 분리 시켜놓았던 개념들을 통합시켜놓았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의 『파르메니 데스 Parmen i de 』 이래로 진리가 하나냐, 아니면 여럿이냐, 또 전리가 변 하지 않는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느냐, 아니면 변화해 마지 않는 他者 자
22) H. Bergs o n, L'euoluti on creatr i c e , p. 22.
체냐 하는 논쟁이 계속되어 서양철학사에서 철학의 학파를 구별케 하였 다. 그런데 베르그송의 철학을 자세히 보면, 그런 논쟁 자체가 무의미해 진다. 그동안 우리가 개전했던 그의 철학 이론만 가지고 말해도 충분하다 고 여겨진다. 우선 물질과 정신은 각각의 실제로 독립성을 갖기보다는 현 실적으로 둘이면서 하나로 상호교점하고 있다. 둘이다 하나다 하고 心身 관계를 單複數로 고집함은 무의미하다. 또 기억으로서의 정신만 보아도 마찬가지다. 기억으로서의 정신이 하나인가? 여럿인가? 기억은 하나이면 서 여럿이다. 기억은 지속하기 때문에 하나요, 변화를 질적으로 거듭하기 에 여럿이다• 이 점에서 의식의 흐름도 마찬가지다. 의식이 흐르면서도 변화 속에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기에 의식은 같은 것이면서 동시에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베르그송의 역설적 진리를 추상적이고 오성적인 개 념철학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지도 못한다고 베르그송은 보는 것 같 다. 그러면 왜 추상적이고 오성적인 학문의 대표적인 물리학이나 수학이 그런 역설적 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 결과가 원인에 필연적으 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여지면, 사람들은 마치 수학적 결과를 원리 속에 놓으려 하듯이 그 결과를 원인 속에 놓으려고 더욱 애쓴다. 그리하여 지 속의 행위를 지우려 한다• 동일한 의적 조건의 영향 아래서도 내가 어제 행동한 것처럼 오늘 행동하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변하고, 니는 지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각 밖에서 생각되어전 사물들은 우리에게 지속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이와 같은 생 각을 깊이 하면 할수록, 동일한 원인이 어제와 같이 동일한 결과를 생산 하지 않음을 가정한디는 것은 더욱 기이하게 여겨질 것이다.〉 23) 지속하는 자아와 의식을 배제하고 수적인 측정에만 의존하여 어디서든 지 동일한 동질적 시간만을 고려하는 과학이나 그 과학에 종속된 추상적 철학은 모두 공간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증좌라고 베르그송은 지적 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공간은 물체나 물질처럼 그 넓이나 부피에서 23) H. Bergs o n, Essai, p. 157.
늘어날 수 있는 연장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연장된 공간도 여전히 동질 적 homo g ene 인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공간은 그 성 질에서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베르그송은 이 동 질 적인 공간과 우리의 의식이 최초로 대상과 접촉하는 - 감각의 질이 지닌 이 질 성을 엄격히 구분 하고 있다. 지속은 감각을 통하여 느껴전 것의 지속이기에, 〈감각의 질〉 과 〈의식의 지속 X 든 사실상 별개의 것이 아니다.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싱이한 두 가지 질서의 실재를 인식하고 있디는- 점이다. 하 나는 이질적인 것으로서 감각적 질의 실재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동질적인 것으로서의 공간이다. 이 동질적 공간은 인간의 지능에 의하여 명쾌하게 인식되기에, 그 공간은 우리의 지능에 대하여 분명한 구분을 만들고 계산 하고 추상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2 4 ) 그런 점에서 시간은 이 동질적인 공 간을 구분하고 계산하고 추상하기 위하여 만들어전 인위적 수의 척도요 단위에 해당된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공간화된 시간〉과 〈공간화될 수 없는 시간〉을 구별하였다. 2.“ 그의 표현에 의하자면 〈공간화된 시간 le tem p s s p a ti al i se)- 은 〈흘러간 시간 le tem p s ecoule 〉이고 그렇게 될 수 없는 지속은 〈흐르는 시간 le tem p s qu i s'ecoule 〉이다. 공간이나 〈공간화된 시간〉이나 다 어디서나 같은 법칙, 같은 연장성의 지배를 받는 〈동질성 l' homo g ene it e 〉으로 상칭된다. 이곳과 저곳이 다른 시간으로 설명되지 않기에 그런 시간을 〈동질적 시간 la sim ulta n eit e> 이라고 부른다. 이 〈동질적 시간〉 속에서는 특이한 것이 존재할 수가 없 다. 어떤 시간기 다른 시간보다 더 농축되었다든가 느슨해졌다는 것은 거 기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이 〈동질적 시간〉 속에서는 모든 것이 균등하 고 齊一하다. 한 시간을 긴장 · 속에서 재미있게 보내는 이와 권태 속에서 보낸 이의 차이가 거기에서는 무의미하다. 그 시간은 인간에 대하여 무관 심하다. 그러나 지속으로서의 시간은 이와는 아주 다르다. 지속으로서의 시간은 24) 같은 책, p. 73. 25) 같은 책, p. 166.
사람에 따라 그것을 느끼는 것이 다르고, 같은 시간(공간화된) 안에서도 한 사람의 마음의 질에 따라서도 그 시간의 지속이 달리 나타난다. 그래 서 〈동질적 시간 la s i mul t ane it e 〉과 달리 〈지속 la duree){ 폰 〈이질적 he t ero g줍 ne 〉이다. 그런 지속의 시간은 밖에서 균등하고 齊一的으로 쪼개 질 수 없다. 그런 지속을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우리 안 에 있는 지속은 무엇인가? 그것은 수와 아무런 유사성이 없는 질적인 다 양성이다. 그것은 증가하는 양이 아닌 유기체적인 발전이다. 그것은 순수 한 이질성으로서 그 안에 의연적 구분이 판명한 질은 없다. 요컨대 내면 적 지속의 계기들은 서로서로 의면적인 것이 아니다.〉 2 ij) 이리하여 〈의식 의 세계〉와 〈공간의 세계〉가 내면적 자아의 세계와 의면적 사물의 세계 처럼 선명히 구별된다. 〈의식 안에서 우리는 서로 구분됨이 없이 서로 이어지는 상태를 우리가 발견하게 되고, 공간 안에서 서로 이어짐이 없이 하나가 나타나면 다른 것은 이미 존재치 않듯이 그렇게 서로 구별되는 동질적 시간을 우리가 발견한다. 우리 바깥에는 계속이 없는 상호적 의면 성이 있고, 우리 안에서는 상호적 의면성이 없는 계속이 있다.〉 27 ) 지속인 우리의 자아나 의식 내부에서 지니고 있는 〈계속성 la sue- cess i on 冷 이미 암시된 바와 같이 , 시간이 하루에 냐켜 l 서 86,40 떠료 L 흘러가고, 1cm 가 llm 료- 연장되듯아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속 의 계속성은 하나의 형식이 경직되게 자기 동일성을 고집하는 그런 장르 가 아니다. 그것은 음악의 선율처럼 어떤 영속성과 변화의 힘을 동반하는 흐름이다. 그러면 이토록 우리와 가까이 있는 우리 자신의 세계인 지속이 나 의식의 흐름이 왜 오성적 과학의 객관성보다 학문적인 근거가 희박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는가? 여기에 대한 해답을 베르그송은 제시하고 있 다. 〈증명의 필요성이 지능에서 지능에로 전파되게 된 것은 수학에 의해 서다. 더구나 수학아 인간 정신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자 그만큼 더 수학 은 기계론의 매개를 통하여 대부분의 물질현상을 거의 포용하였다. 구체 26) 같은 책, p. 170. 27 ) 같은 책, p. 171.
적인 실재의 연구에 수학적 사고의 특징인 정확성 • 엄밀성과 꼭 같은 것 울 요구하게 된 습관은 우리가 물질학에서 빌린, 물질학이 없었으면 생기 지도 않았을 경향이다. 이리하여 정신적인 것에 적용되었던 학문이 전보 되기는커녕 불확실하고 애매한 것으로 여기지게 된 것이다.〉 2 H) 수학과 물리학의 가시적인 경이의 발전에 힘입어 사람들이 그 발전된 과학의 기준에 따르는 것이 가장 전보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하게 된 습관 에서 그 이유가 있기도 하지만, 그런 수학과 물리학 등과 같은 物質學이 楠神學보다 훨씬 우리에게 찰 먹혀들게 된 숨은 요인이 또 있다. 그 요 인은 이미 우리가 분석한 「물질과 기억」의 제 1 장에서 해답으로서 지적된 바이지만, 우리의 사회생활의 실용적 필요성이 예의 물리학의 성과를 쉽 게 흡수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질학이란 결국 객관적 대상세계를 우리 가 지성적으로 정복하여 우리의 현재적 행동의 실용성에 기여하고자 하 는 데 있다. 그런 현재적 행동의 필요성이 결국 정신학의 성과보다 물질 학의 성과를 더 크게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 의식의 내면 적 지속과 그 지속의 계속적 계기들도 계산으로 표현하고 싶어지게 되고, 계산상으로 수치화하자니까 수와 결합하지 않을 수 없고, 드디어 지속의 시간은 측정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니, 마침내 공간과 유사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속의 시간은 동질적 시간으로 추상화되 고만다. 베르그송의 예시대로 교회의 종소리가 음율을 타고 울린다. 그 음율이 나에게 하나의 아리아로 들릴 때, 나는 그 종소리를 계산하지 않고 하나 의 질적 유기체로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그 종소리의 시간이나 박 자를 계산하려고 하면 나는 그 소리를 분절시키게 되고 그 분절은 그 소 리와 나와의 사이에 오고 가는 내면적 질을 없애고 순전히 동질적 시간 대에 따라 분석하게 한다?) 이 예시가 가르쳐주는 바와 같이 철학사에 있어서 베르그송의 위치는 꺼져가던 인간 정신의 고유성과 정당한 권리 28) H. Bergs on, L'energi e spi rit u e lle, p. 83. 29) H. Bergs o n, Essai, pp. 64~65.
를 회복케 한 데 있다. 이 점을 프랑소와 메이에르 Franr;o is Me y er 는 비교적 초보자를 위한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기술하였다. 〈그것을 위하여 먼저 우리는 내면세계로 향하는 注완. 의 回心을 결행해야 한다. 사회생활과 대화의 필요성울 만족시키기 위하여 창조된 언어와 대 상세계로 향하였던 길고 긴 접 촉 에 의하여 우리 속에 쌓여전 영상들을 의식의 받으로부터 멀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주의력에 의하여 그 순 수성에 의해서만 나타니는· 내면적 체험과 함께 친밀한 일체감을 얻어야 한다. 사고의 전환, 검약함, 명상, 순수 경험, 이런 것들이 건너야 할 단 계들이다. 안이한 인상주의와 유사한 것이라곤 거기에 없다.〉 30 ) 이미 우리가 앞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두 가지 종류의 기억이 있었다 . 〈습관적 기억〉과 〈정신적 기억〉이 그것이다. 또 이제 두 가지의 시간이 있었다. 〈순수 지속〉과 〈동질적 시간〉이 그것이 다 . 마찬가지로 지어에도 두 가지 종류의 것이 있다. 이른바 〈내면적 자 아〉와 〈의면적 자아〉댜 〈내면적 자아注근 자신의 내적 상태를 성성한 존 재로서 파악하면서, 그 자아 속에 나타니는· 모든 계기들이 상호 침두되어 있다는 것을 본다. 그런 자아의 지속은 동질적 공간 속에서 인위적으로 절단된 요소들을 짜깁기 식으로- 조립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 그런데 〈우리 모두는 거의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의면적 자아로서 살 아간다. 즉, 우리는 동질적 공간 속으로 순수 지속이 던지고 있는 자아의 색깔없는 허깨비나 그림자를 우리의 자아인 양 알고 살아간다. 우리의 실 존은 시간 속에서라기보다 공간 속에서 오히려 전개된다 . 우리는 우리 자 신을 위해서라기보다 오히려 외부세계를 위해 살아간다. 우리는 생각하기 보다 오히려 말을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행동하기보다 오히려 행동함 울 당하고 있다.〉 31) 이와 같은 자아의 두 가지 모습에 대하여 쟝께레비츠는 〈내면적 자아〉 를 〈定 言 的 性格 la natu re ca t egor iq ue 〉에, 〈의면적 자아 X 룹 〈假言的 30) Frani;o i s Mey er , Pour connait re Bergs o n, p. 24. 31 ) H. Bergs o n, Essai, p. 174.
성격 la natu re h yp o t he tiq ue 〉에 비유하였다. 〈내면적 지아〉가 칸트철 학적인 용어로 〈정언적 성격〉에 속한다 함은 아마도 내면적 자아가 보여 주는 참디운 시간으로서의 지속이 우리의 실재 의식세계의 참모습이기에 그렇게 생각한 것으로 보이고, 반면에 〈외면적 자아〉가 추구하는 공간적 시간의 인식은 바깥 세계의 실용적 인식과 행동을 전제로 한 요구이기에 〈가언적 성질〉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말할 나위없 이 정언적 본질이 가언적 본질보다 인식에서 훨씬 비중이 높은 것이 사 실이다. 베르그송이 내면적 지아의 지속을 그의 철학의 중심으로 삼았다 는 것은 그가 철학적 전리를 담구함에 있어서 인간의식의 내면세계를 특 권적 지대로 삼았다는 것과 같다• 그의 철학세계에 있어서 이 내면세계의 전리보다 더 확실하고 더 가치가 있는 다른 진리는 없다. 바로 특권적 지대라고 생각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베르그송에 의하여 사링을- 받 은 그 전리의 성격을 우리는 〈순수 지속 la duree p ure 〉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 〈순수 지속只끌 베르그송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그의 생각을 직접 들어보자.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 자신의 삶에서 가장 내면적으로 우리 스스로가 느끼고 있는 점을 찾아보자. 그때에 우리가 깊숙히 다시 몰두하게 되는 곳은 순수 지속 속에서다. 그 지속에서 과거는 언제나 행 진하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절대적으로 새로운 현재에서 살찌고 있다•〉 32 ) 이런 〈순수 지속〉의 철학에서 볼 때, 어떤 운동도 부정한 고대 희랍의 엘레아 학파와 특히 그 학파의 대표자격인 제논 Zenon 의 이론은 베르그 송의 눈에 넌센스로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제논의 궤변은 운동을- 부정하 기 위함을 목적으로 한다. 그의 궤변을 간략히 소개하면 〈나는· 화살은 움직이지 않는다〉라든가 〈발 빠른 아킬레스가 거북이의 걸음을 따라잡지 못한다注근 등이다. 이 궤변이 지니는 이론적 생각은 화살이 A 점에서 B 점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 중간지점 C 를 통과해야 하고, 그 C 긱 중간지 점까지 화살이 날아가기 위하여 또 그 중간지점 D 까지 가야 하고 … … 32) H. Bergs o n, L'evoluti on creatr i c e , p. 201 .
이렇게 자꾸 분석하여 보면 결국 화살은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생간다는 것이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 잡지 못한다는 것도 이와 같은 궤변에서 도래하였다. 이 궤변이 궤변 이 상의 것이 아님은 말할 나위 없이 A 에서 E 가지 가는 화살의 운동이 하 나의 계속이며 분해될 수 없는 자연스런 움직임을 인간의 지능이나 오성 아 인위적이고 추상적으로 분해하였기에 생긴 것이다. 베르그송이 생각할 때, 추상적이고 인위적인 사고가 극단적으로 미신화하면, 앞에서 본 제논 의 궤변처럼 그것이 어느덧 탈바꿈된다. 金 奎 榮은 베르그송의 시간론을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순 수 지속〉의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다. 〈우리들은 시간 그 자체를 파악하 기 위하여 공간적인 像울 그리는 데서 우선 이탈하지 않으면 안되고, 그 다음게 순수 변화를 지각하기 위해서는 基體나 實體와 같은 불변체의 범 주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 들 내적 생활의 멜로디뿐인 것이다. ……>33 ) 확실히 그러하다. 〈순수 지 속只t 파악하기 위하여 김규영이 말한 바와 같이, 고정된 실체 개념이나 동질적 연장의 속성을 지닌 공간성에서 우리의 사고가 벗어나아: 한다. 그 런 초탈의 回心이 이루어전 경우에, 우리의 인생은 생성 그 자체와 결코 다른 것이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인생은 아이의 시절에서부터 노 인의 시기까지 무수한 여정을 겪는다. 우리는 일상적 생활용어에서 흔히 〈어린이가 어른이 되었다 L'en fa n t devie n t l' homme 〉라고 말한다. 그런 데 이런 일상적 용법을 떠나 좀더 순수하게 말한다면, 베르그송은 〈어린 이로부터 어론까지 가는 생성이 있다 Il y a devenir de l'en fan t a l' homme 〉라고 말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뽀 왜 베르그송이 그렇게 생각 하게 되었는가? 앞의 명제의 경우에는 〈되다 deve ni r 〉라는 동사의 역할 과 기능이 대단히 애매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죽, 이 경우에 〈되다〉라는 緊辭는 마치 활동사진(영화)의 경우 각 장면을 찍은 사진이 실상 정지된 33) 金奎榮 『時間論 』 (增補版), p. 56, 西江大出版部 34) H. Bergs o n, L'evoluti on creatr ice , p. 312.
것인데, 영사기를 돌립으로써 정지된 각각의 화면들이 움직아는 실재처럼 보이게 하는 위장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정지된 이 화면과 정지된 저 화 면을 빠른 속도로 나란히 계속해서 병렬시켜놓으면, 그것이 운동을 모방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어린이가 어른이 된다〉라는 명제는 어린이라는 고정된 화면과 어른이라는 고정된 화면을 〈되다〉라는 영사기가 우리의 눈을 속여 마치 하나의 계속적인 운동이 있었던 것같이 느끼게 한다고 베르그송은 분석한다• 그래서 그런 표현보다는 차라리 두번째의 명제인 〈어린이에서 어른까지 가는 생성이 있다〉라고 함이 더 타당하다는 것이 다. 왜냐하면 이 두번째의 명제에서야말로 생성 그 자체가 하나의 탁월한 주어로 중장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베르그송의 생성철학은 자연히 칸트의 시간공간론과 정면으 로 충돌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 관하여서는 김규영이 그의 『 시간론 』 에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는 의미에서 더 이상 이 론적 논급은 피하기로 하겠다. 베르그송이 칸트의 시간공간론을 비판하는 요접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다. 〈칸트의 오류 는 시간을 하나의 동질적 환경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는 실재 적 지속이 서로서로 내면적 계기들로서 구성되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 였고, 또 그는 실재적 지속이 동질적인 하나의 전체라는 형식으로 옷을 입고 있다고 보았을 때 그런 지속이 공간 속에서 표현되고 있음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그가 공간과 시간 사이에서 정립한 구분 자체도 그 근본에 있어서 시간을 공간과 혼동시킨 것이 되고, 자아 자체와 자아의 상징적 표성을 혼동한 것이 된다.〉 꼬 ) 베르그송이 이처럼 칸트의 시간론을 〈공간화된 시간〉이라고 비판한 이 면에는, 자신의 시간은 자아가 안에서 확실하게 느끼는 〈절대적 시간론〉 임을 임암리에 전제한 것이다. 기하학자나 물리학자가 파악하는 - 시간은 공간 속에서 동질적인 시간을 보는 것이기에 어디서나 같은 법칙이 지배 하여서 여기에 있는 시간이 저기에 있는 시간과 질적으로 디른- 절대적 35) H. Bergs o n . Essai, p. 174.
시간일 수는 없다. 그러나 내 인생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통과 쾌감, 노 력과 즐거움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절대적인 것이고 또다시 같 은 것이 되돌아울 수 없는 〈不可逆的 i rrevers i ble 〉인 것이다. 나의 내면 적 자아가 안에서 느끼는 지속은 〈취소할 수 있는 약속〉도 아니고、 〈임 의적으로 선택된 관접〉도 아니다. 객관적인 수량의 시간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나의 내면적 자아가 흐르는 운동이기에, 편의상 사람들이 〈동질적 시간 X t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었다. 시간은 자아의 지속이 없었다 면 존재할 수가 없었으리라. 이 말은 이 우주에 인간이 없다면, 시간도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볼 때 인간은 지속이고, 그 순수 지속이 시간을 잉태시켰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식이고 의식은 기억이며, 기억은 정신이다. 그런데 그 정신은 고정된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하나로 흐르는 〈진보 le pro g re s> 다. 전보가 정신 속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정신과 의식이 이미 전보 자체 라고 보아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물질생활과 공간생활에서 초탈할 수 있 다면, 그때에 우리는 내면세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정신의 화음과 선율과 박자를 듣게 되리라. 〈우리가 순수 지속 속에서 우리의 전보를 의식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우리 존재의 여러 가지 부분 들이 서로서로 삼두작용을 하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고, 우리의 인격이 그 전체에서 끊임없이 미래를 착수하면서 미래 속으로. 자리를 잡아나가 는 한 점으로 집중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바로 그런 것에 인생과 자 유의 행동이 성립하고 있다.〉 : ~i) 3 自由의 심리학 이미 앞에서 검토된 바와 같이 베르그송 철학에 있어서 최후의 審級은 내면적 의식의 체험이다. 기하학자나 수학자가 사랑하는 운동의 측정단위 36) H. Bergs o n, L'euo luti on creatr i c e , p. 202.
로서의 시간을 인위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배격하고, 순수 지속의 절대 적 시간 속으로 베르그송의 사유가 깊이 침잠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의 철학에서, 객관성과 공정성의 허울 좋은 명분에서 방관자적인 인간으 로 남기를 거부하고 내면적 정신의 흐름에 참여하는 인간의 전실됨을 겨 냥하는 내음을 맡게 된다. 그가 운동과 시간의 객관화(공간화)를 거부하 고 참 시간의 흐름 속에 참여하기를 바란 것은 다른 한편으로 거리의 허 상에 대한 비판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엘레아 학파의 제논처럼 거리가 주는 무감각 속에서 인간의 의식이 석고처럼 굳어지기를 그는 거 부하였다. 그는 이 우주와 인간 속에 흐르는 선율을 타려고 하였다. 그런 선율의 흐름을 탄 인간에게 의식의 자유는-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확실 하고 단순한 진리로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베르그송의 입장에서 볼 때 창 조하는 예술가보다 더 확실하고 그토록 간단한 자유의 진리를 체득하는· 이가 없으리라. 어떤 것이 인공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구체적이 고 생생한 실재인가를 판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의식에 직접 주어전 것의 경험 이의에 다른 것일 수가 없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직접적 경험으로서의 〈현실적인 것 le reel 〉과 간접적 추리의 도구로서의 〈상칭적인 것 le sym boliq u e)¾ 구별하고 있다. 〈현실적인 것〉이 〈지각 된 per~ u 것〉이라면 〈상칭적 인 것 X 는 〈생각된 것 con c; u 〉의 질서에 속한 다. 지금부터 우리가 해석하고자 하는 자유의 영역도 개념적인 상징의 생 각하는 질서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이 느끼는 지각의 질서, 현실적인 것의 영역에 속한다. 단적으로 말하여 의식의 지속과 의식의 자 유는 같은의미다. 〈의식과 물질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존재의 형식으로서 어쨌든 그들 사이에 타협안을 채용하여 타결할 수밖에 없다• 물질은 필연성이고, 의식 은 자유다. 그러나 그것들이 서로서로 대립해보아야 헛일이다. 생명은 그 것들을 화해시키는 수단은 발견한다• 생명은 필연성 속으로 끼어드는 자 유다. 물질이 복종하고 있는 결정론이 자기의 경직성을 누그러뜨리지 않 으면, 생명은 불가능하다.〉'Il l 이 안용은 앞으로 전개될 베르그송의 자유
론의 대강을 미리 알려주는 구절이다. 그러면 베르그송은 자유의 심리학 울 어떻게 전개시켜나가는가? 베르그송이 자유의 심리학을 철학적으로 전개시켜나가기 때문에, 말할 필요도 없이 그가 決定論의 심리학을 반대 하고 있음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그는 전통적인 자유옹호론자들이 주장하 듯이 인간 의지의 자유, 즉 자유의지론 le lib r e arbit re ¾ 지지하고 있는 가? 그렇지 않다. 생명의 철학에서 베르그송이 생명의 목적론은 사실상 기계론과 다른 논리가 아님을 주장하는 것과 같이, 그는 이른바 심리적 자유재량권을 옹호하는 자유의지론은 그 이면에서 자유를 부정하는 결정 론과 사고방식에서 다르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점은 논의가 자연스 럽게 전개되어 가는 과정에서 기술되어 나오겠지만, 우선 〈자유의지론〉과 〈결정론〉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사고방식은 그것들이 한결같이 〈說明 의 논리〉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설명의 특성을 쟝께레비츠는 다 음과 같이 적실하게 지적하고 있다. 〈설명은 정확히 말하여 설명해야 할 것과 동시적이 아니다. 설명은 사건의 경험적 역사에 대하여 현상의 지성 적 역사를 대체시키고 있다. 지성의 역사는 지성의 역사가 구성되기 전에 경험의 역사가 이야기되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설명과 이야기를 대립시 키는 것은, 이야기에서는 전기작가나 이야기꾼이 전개되고 있는 소설의 시간과 언제나 동시적임에 대하여 설명에서는 모랄리스트나 역사가가 전 개될 시간보다 허구적으로 뒤에 처져 있다는 데 있다. 설명은 시간의 폐 지뿐만 아니라……, 설명의 행위는 폐지된 시간, 전개된 시간을 전제하고 있다.〉 38) 이 인용은 베르그송이 왜 〈자유의지론〉과 〈결정론 X 끌 다 거부하 는가 함을 미리 암시하여 주는 방법론적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 면 그가 자유의지론과 결정론을 다 거부하는 구체적 예시를 그의 스타일 에 따라 한번 정리해보기로 하자 .39) 자유의지론은 밀J .S.M i ll 과 같은 철학자들에 의하여 선명하게 부각되 37) H. Bergs o n, L'energi e spi rit u e lle, p. 13. 38) V. Ja nkelevit ch , 같은 책, p. 59. 39) H. Bergs o n, Essai, pp. 130~144.
는데,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자유의지란 어떤 것을 선택하기 전에 이것과 는 다르게 선택할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인정함에 성립하고 있다. 즉, 이 런 행동을 선택하기 전에, 사람은 저런 행동을 똑같은 가능성으로서 선택 할 수 있었으리리는 믿음을 자유의지론지들은 펼친다. 베르그송의 자유론 은 과연 그러할까 하는 의문에서부터 시작한다. 물론 이런 자유의지론자 와는 반대로 결정론자는 어떤 행동의 전단계가 정립되면, 다른 선택의 여 지는 없고 오직 하나의 길밖에 다른 방법이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이것이 베르그송의 이의 제기 방식이다. 이런 물음의 제기 와 함께 베르그송이 기술하는 그의 생각은 대단히 섬세하고 그의 서술 방식이 더구나 또박또박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주의를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그의 생각을 요령있게 포착하기가 힘들다. M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나는 M 에서 O 가지 달려왔는데 0 지점에서 X로 가 는 길과 Y로 가는 길이 각각 나누어 졌다. 자유의지론자의 이론에 따르면, 。 니는 0 에 멈추어 서서 X 방향이나 Y x Y 방향이나 똑같은 가능성을 두고 주저 하게 된디는 이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 나 베르그송에 의하면 내가 꼭 같은 가능성을 두고 저울질하기는커녕, 나 는 심중에 X 로 기울어지든지 Y로 기울어지든지 히는 경향을 갖게 된다 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달리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죽, 내 앞에 객관적 으로 놓여 있는 상반된 두 가지의 길과 거기에 대응되는 내 의식의 두 가지 상태 사이에 내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면서도 계속적인 많은 의식상태의 와중에서 나는 상성력의 노력에 의하여 대립된 두 방향 울 분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점을 좀더 풀어서 생각해보기로 하자. 자 유의지론자는 보통 사람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내가 MO 를 달려온 후에 0 지점에 도달하여 똑같이 가능한 ox 와 OY 의 두 길을 보 게 되었다는 식으로 단계적으로 말한다. 그래서 그 ox 나 OY는 객관적
사물처럼 꾸며지고, 결국 나는 중성적인 상태에서 무관심하게 어느 한 길 울 선택하게 된다고 보고 있다. 그 두 방향은 그 경우 우리의 무심한 선 랙을 기다리는 무기력한 것으로 변하고 만다. 즉, 다론 말로 달리 표현하 면, 자유의지론자는 내가 0 지점에 도착히여서 두 가지 선택의 길목에 서 서 먼저 주저하고 그 다음 숙고하고 이어서 마침내 둘 중에 하나를 선택 하게 된다고 본다. 이런 발상은 두 가지 방향과 내 의식의 지속적 흐름 이 맺고 있는 관계를 차단시켰고, 또 내 의식의 지속적 흐름도 몇 가지 단계로 고착화, 結晶化시켰기 때문에 생간다. 이런 미묘한 심리세계를 그 렇게 객관적으로 결정화시키지 않고, 나의 의식에 그 순간 와.닿는 직접 적 경험을 존중한다면, 0 지접에서 갖게 된다고 여기는 허구적 무관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표피적인 주저야 있었겠지만 사실상 내가 미리 ox 의 방향으로 향해진 생각에 의하여 나는 X 로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는 것이 베르그송의 입장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죽, 내가 0 지점 에 도달하여 어느 방향을 잡기로 결정하였다면, 나에게 다른 방향은 꼭 같은 가능성으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눈에는, 자유의지 옹호론자나 부정론자나 다 같이 XY 두 지점 사이에서 행동하기 전에 어떤 기계적인 심리적 동요가 있었다는 데 공통적이다. 단지 그 처이점은 전자(자유의지 옹호론자)가 나의 선택 전 에 주저와 숙고가 있었고 그러기에 X 대신 Y 의 선택도 똑같이 가능하 였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후자(결정론자)는 내가 X를 택했다면 그럴 만 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므로 Y도 동시에 가능할 수 있으리라고 말함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태도는 모두 사고방식의 공통적 인 헛점을 안고 있다. 그 헛점은 내가 X를 선택한 행동을 성취한 다음에 과거를 다시 회고적으로 표상한다는 점이다. 회고적으로 나의 선택 행위 를 관념적으로 표상한 점에서는 같지만, 결정론자는· 내가 MOX 를 미래 적으로 선택하게 되리라는 것을 〈前未來 le futur an t er i eur 〉적으로 미 리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 자유의지론자는 행동의 결정 이후 다시 과거를 현실과 다르게 회고적으로 환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각각 차이가 난
다. 〈전미래적 사고〉와 〈회고적 환상〉에 대해서는 곧 보게 될 것이다. 베 르그송이 생각할 때, 자유의지론자나 결정론자나 모두 〈성취되고 있는 행 동I' ac ti on s'accom p l i ssan t〉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취된 행동 acti on accom p li e 〉만을 볼 뿐이다. 베르그송의 이론에 의하면, 내가 선 택하는 의식에서 MO, 0, OX, OY 등과 같은 중간의 쉬는 역이 존재할 수 없다. 그렇게 중간 역을 설정하는 사고방식은 시간을 공간으로 표상하 거나 계속을 동질적 시간으로 표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그것은 〈지도 위에서 군대의 이동을 연습하는 假想〉과 같다. 나의 모든 행동은 전보의 흐름에서 파악되어야지, 사물처럼 조각으로 분석되어서는 안된다. 이상이 베르그송에 의하여 제시된 예시를 요약한 것이다. 이 예시를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선 베르그송은 논리 주의적이고 기계론적인 인간 의지론을 공박하고 있다. 그런 의지론은 우 리가 위에서 성찰한 바와 같이 인간의지를 몇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죽, 〈주저하는 단계〉, 〈숙고하는 단계〉, 〈결심하는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행에 옮기는 단계〉다. 그래서 의지의 결행은 이 네 가지 계단을 밟아 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착상은 기계론적 논리주의의 과정에서 나 온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숙고하기 전에 주저해야 하고, 결행하기 전 에 결심해야 한다고 믿는 사고의 이면에는 어떤 행위가 현실적이기 전에 가능상태로 먼저 있어야 하고,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단편적인 생각둘의 조립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기계론적 원자론적 제조의 논리가 숨어 있다. 그런데 베르그송은 이런 기계론적 제조의 사고방식울 정면 부 정하고 나선다. 그의 생각을 충실히 반영하자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야 하리라. 〈행위와 전실로 동시적인 경험은 결심하기 전보다 오히려 먼저 결심을 한 다음에 사람들이 숙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40) 이런 표현은 확실히 기계적 〈기술적 조립의 논리〉와는 정반대다. 〈사실상 의식의 엄 격한 검토는 의지가 예 pou r q uo i'에 대하여 때문에 par ce que ’라고 대 답함이 없이 근원적으로 결정을 내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데올로기적인 40) V. Ja nkel .e vit ch , 같은 책, p. 60.
동기가 원인의 필요성을 위하여 발명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현실적 행동을 사건이 지나고 난 다음에 제정하는 관념적인 시나리오와 혼동하 게 된다.〉 4 11 그러면 베르그송이 공박하는 기계론적 제조의 사고방식이 빠지고 있는 함정으로서 〈전미래적 사고 la pen see de futur an t er i eur 〉와 〈회고적 환상l'ill us i on re t ros p ec ti ve 〉이란 무엇인가? 前未來란 문법적으로 불어 특유의 용례다. 문자 그대로 미래가 오기 전에 어떤 일이 완료될 것이라 는 時制]를 담고 있기에 영어의 미래완료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전미래 의 본질은 심리적으로 과거가 된 미래로 존재함이다• 전미래는 허구적으 로 상상력에 의하여 앞서 가고 예견되어서, 결과적으로 미래로 부정된 미 래로서 존재함이다. 설명이 설명해야 할 행동보다 앞서고 어떤 점에서 그 행동에 대하여 자세히 지시한다. 참인 것이 문제가 아니고, 생명의 문법 앞에서 규칙에 맞음이 문제가 될 뿐이다. ……>42 ) 〈회고적 환상은 현실적 인 연대순을 전도할 것을 명령한다. 존재해야 하고 존재한다고 추정하~근 원인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원인을 대체하고 있다.〉 ~3 1 이상의 인용을 토대로 하여 〈전미래적 사고〉나 〈회고적 환상只t 좀더 서술하여 보자. 〈회고적 환상〉이나 〈전미래의 신기루〉나 다 함께 기계적 인 존재를 위하여 만들어전 방법을 내면적 의식의 세계에 적용시킬 때 생기는 과오를 말한다. 기계론적 사고방식은 인간 지능의 산물이다. 인간 지능은 복잡한 기계를 가급적 단순 요소로 분해하여 손에 다루기 쉽게 함을 사명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지능의 세계, 기계론의 세계에서 자 연스럽고 사랑받게 되는 것은 因數分解와 같이 먼저 단순요소롤 발견하 고 나중에 동질적인 단순 요소를 결합시켜 종합하는 일이다. 또 지능 세 계의 지식이나 기계의 세계를 인식하기 위하여 그런 분해법의 교육과정 울 거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능은 요소들의 사유〉라고 정의 41) 같은 책, p. 61. 42) 같은 책, p. 61. 43) 같은 책, p. 61.
한 쟝께레비츠의 말은 탁월한 뜻을 지녔다고 할 것이다. 그런 기계론적 지능이 정신세계에 적용될 때, 스펜서 H. S p encer 의 철학이나 영국의 聯 想主義 심리학이 그렇게 해왔던 것같이 전체를 인위적인 요소들로 재구 성하게 된다. 그리하여 구체적인 것은 뒤로 물러나고 거기에 현실을 설명 하는 〈知性的 等價性)o l 자리잡게 된다. 쟝께레비츠에 의하면, 기계론적 사고에 바탕한 지성은 요소가 전체보다 단순하여 오류를 덜 범하게 되고, 단순한 것이 복잡한 것보다 먼저 항상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기계론적 지성은 〈논리적 단순성 la sim p li c i t e lo giq ue 〉과 〈연대순적 단순성 la sim p li - cit e chronolo giq ue 澤 혼동하고 있다고 쟝께레비츠가 지적하였다 .44) 〈논리적 단순성 X 본 요소가 전체보다 더 단순하고, 조건을 주는 것이 조건 받는 것보다 더 단순하고, 원인이 결과보다 더 단순하다고 여기는 원리 다. 그러나 〈연대순적 단순성 X 든 체험의 역사에서 가장 먼저 오는 것을 뜻한다. 의식에 직접 와 닿는 것은 간접적으로 전해듣는 것보다 훨씬 단 순하다. 상대방의 얼굴 표정을 보고 우리는 그가 가전 감정을 가장 단순 한 확실성에서 파악한다. 쟝께레비츠는 이 후자의 단순성을 다른 말로 〈순박한 단순성 la sim p li c i t e ing e nue>, 〈구체적 단순성 〉이라고 불렀고 전자의 경우를 〈숙련된 단순성 la sim p li ci t e savante > , 〈추상적 단순 성>o l 라고 명명하였다 .45) 여고적 환상»]나 〈전미래적 신기루〉나 모두 〈숙련된 단순성 X t 〈순 박한 단순성〉에 대체시키고, 〈추상적 단순성 X 끌 〈구체적 단순성〉과 혼동 한 데서 빛어전 사고의 착각에서 연유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회고적 환상〉에서 오는 지유의지론이나 〈전미래적 신기루〉에서 오는 결정론은 모두 〈始源的인 것 le p r imitif〉과 〈要素的인 것 l'el emmenta i r e }¾ 뒤 섞어놓은 인식론적 착각에서 비롯하고 있다고 쟝께레비츠 Jan kelevit ch 가 지적하였다. 이 점을 좀더 규명하여 보자. 베르그송이 예시한 앞의 경 44) 갇은 책, p. 16. 45) 같은 책, p. 17.
우를 다시 한 번 상기해보자. 내가 MO 를 달려와 X 와 Y 의 두 갈림길에 서 X를 택하여 MO X;가 성립되었다면, 이 MOX는 설명하기 위한 하나 의 방편이지 M 이 있었고 0 가 있었고 드디어 X 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MOX 는 베르그송개 의하면 하나의 의식의 전체적 흐름으로 볼 때, 〈단 순화된 구체성〉일 뿐이다. 설혹 G 세서 겉으로 순간적인 머뭇거림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주저하고 숙고해서 결심하고 결행한 것이 아니라, 이미 결심하고 나서 단지 한 번 더 스스로의 결심의 박자를 늦추었을 뿐이라 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의지론지들이 주장하는 〈회고적 환상 X 든 시간적인 순서에서 전체적 흐름이 먼저고 의식의 그동안 일관된 지속이 먼저임에 도 불구하고, 그 〈구체적 단순성〉, 〈연대순적 단순성 X 끝 부정하고 이제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인위적으로 그 살아있던 전체성을 분해하고 분석 하여 여러 가지 요소들을 둘추어내려는 작위성과 다르지 않다. 이 점은 마치 〈발명〉이 〈시간적으로 먼저〉고 〈제조〉가 〈그 다음에 오는 것〉임에 도 불구하고 마치 제조가 발명보다 먼저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와 마찬 가지다. 발명은 부분들의 조립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적 직관에 의하여 문득 시야에 나타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미래적 신기 루 le mira ge du futur an t er i eur 〉도 같은 방식으로 사고의 함정 에 빠 졌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적 선택이 어떻게 될 것인지 모른다. 미래는 예 측의 지능을 넘어선 가능성의 지대다• 어떤 그 현재적 시접어] 닿아야만 미래적 행동이 나타날 뿐이다. 그런데도 그 미래를 미리 〈이렇게 될 것 임에 틀림없다汗곤 식으로 예측을 한다. 〈전미래적 신기루 X 근 모든 의식 이 언제나 〈현재진행형〉임에도 불구하고 그 〈현재진행형났t 관념적으로 중단시켜 과거의 한 시점에 임의적으로 서서 지금 위치해 있는 현재가 과거의 이런 요소 때문에 현재의 위치가 이럴 수밖에 없었다고 추정한다. 쟝께레비츠의 표현대로 〈심리적으로 과거가 된 미래〉가 〈전미래적 신기 루〉다. 이런 신기루에 현혹되어서 심리적 결정론은 인간의 심리현상을 자 연의 물리현상처럼 여긴다. 물리현상에서의 인과법칙처럼 심리현상도 그 렇게 설명하려 한다. 기계론적 사고의 적용이 거기에도 있다. 〈사람들이
도달하게 되는 물리적 결정론은 자연과학에 호소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하 고 자기의 윤곽을 고정시키고자 애쓰는 심리적 결정론과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4 6 ) 이와 같은 심리적 결정론의 가장 대 표적 인 이론이 연상주의 I'as so- ci a ti on i sme 다 . 연상주의는 현재의 의식상태가 과거의 의식상태에 의하 여 강요받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강제적 법칙이 합법적으 로 증명되기 위하여 과거와 현재의 의식 결합을 성사시키는 어떤 常數가 어떤 경우에도 발견될 수 있어야 한다 . 그리고 그 의식의 결합을 객관적 으로 수식화나 量 化시켜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경험에서 보면 불 가능하다. 〈영혼이 자기 감정 중의 어떤 하나의 영향에 의하여 결정된다 고 말하는 것은 영혼이 결정되어진다고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연상 주의자는 자아를 의식의 사실들인 감각, 감정, 관념의 합계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가 이 다양한 의식상태에서 이 감각의 이름이 표현하고 있는 것 이상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들의 무인격적 국면만을 취한다면, 연상주 의자는 허깨비 자아만을, 공간 속에 던져전 자아의 그림자만울 취하면서 의식의 여러 가지 상태들을 무한히 병렬시킬 수 있을 뿐이리라.〉 47) 베르그송이 어떤 필연성도 의식의 세계에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면, 성격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왜냐하면 성격 le caracte r e 은 심리세계에서 언제나 동기 le mo tif의 문제와 같이 떠오르고 따라서 성격이나 동기가 의식의 지유로운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생각하 기 때문이다. 그러면 베르그송은 성격이나 동기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 가? 〈요컨대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전체 개성에서 흘러나오고, 그 행위 가 개성을 표현하고, 그 행위가 개성과 함께 작품과 예술가에게 보여지는 것같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유사성을 갖게 되는 경우에, 우리는 자유롭 다. 그때 우리가 우리 성격의 전능한 영향력에 굴종하고 있다고 주장함은 허황된 일이다. 우리의 성격도 우리 자신이다. 추상의 노력에 의하여 생 46) H. Bergs o n, Essai, p. 112. 47) H. Bergs o n, 갇은 책, p. 124.
塗回 느끼는 자아와 행동하는 자아로 분리하여 각각 생각하기 위하여 개인을 두 가지 부분으로 나누는 것을 사람들이 좋아하였기 때문에, 두 쟈가 중의 하나가 다른 하나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고 결론을 내리는 유치한 짓이 생기게 된다. 이런 비판은 우리가 우리의 성격을 자유스럽게 수정할 수 있는가를 묻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확실히 우리의 성격은 매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수정된다. 그리고 우리의 자유는 이 새로운 취득이 우리의 자아 속에 용해되지 않고 접목만 되었다면 그것으로 괴로 워하게 되리라. 그러나 이런 용해가 일어나게 된다면, 우리의 성격 속에 갑자기 일어난 변화가 우리 자신이고,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우리 것으로 하였다고 말해야 하리라. 간단히 요약하면, 자아로부터 오직 자아로부터 흘 러나오는 모든 행위를 자유스럽다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 개인의 특칭 을 부각시키는 행위도 참으로 자유스럽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의 자아만이 오직 그 특칭을 부각시키는 행위의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 기 때문이다.〉 48) 우리가 이토록 긴 인용을 여기서 그대로 옮기는 까닭은 베르그송이 성 격과 동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또 그가 생각하는 자유의 본질이 무엇인가 룰 이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기로 서의 성격과 자아의 행동을 둘로 니누어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유 는 추상적인 의미에서 하늘의 구름 잡듯이 느껴지는 자유 일반이 아니다. 모든 자유는 바로 나의 자유요, 너의 자유다, 나의 자유는 너의 자유와 달라 나의 개성에 알맞는 행동양식을 뜻한다. 나의 개성에 알맞는 행위는 내가 이미 어떤 것을 선택해나감에 있어서 무엇을 더 좋아하는 나의 스 타일과 통한다. 이 점은 내가 표현하는 문장이 다른 사람에 의한 문장과 그 스타일에서 다름과 같다고 하겠다. 나는 나의 독특한 스타일이 있지 만, 그렇다고 그 나의 스타일이 지금 베르그송의 철학을 집필하면서 구상 하는 나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다. 자유의지론자처럼 동기가 꼭 같은 두 가지의 대상 앞에서 내가 주저하고 머뭇거리다가 결국 無 償 의 선택, 무관 48) H. Bergs o n, 같은 책, pp. 129~130.
심의 선택을 하고 만다고 보는 것은 〈회고적 환상〉 이상의 것이 결코 아 니다. 쥴 르끼예J. Le qui er 가 잘 묘사하였듯이, 〈내게 좋 은 것을 만드는 것이 나의 선택이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이 내 마음을 즐 겁게 한다.〉 4' 이 점을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다. 어떤 것이 선택되었기에 그것이 좋았고, 그것이 좋았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빠스깔B. Pascal 의 말처럼 〈理性은 나에게 있어서 뒤에 온다. 그러나 까닭도 모르지만 먼저 사물이 나를 즐 겁게 하고 나에게 충격을 준다. 그렇지만 내가 뒤늦게서야 발견하는- 그 이유로 그것이 내게 또 충격을 준다.〉 50) 이 빠스깔의 역설적 진리는 어떤 사실이 나에게 충격을 줄 때, 내가 뒤늦게 발견하는 이유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이 먼저 나에게 충격을 주었기에 내가 그 이유를 찾게 된다 는 것이다. 그런 접에서 현재적인 의식의 전행형보다 더 앞선 것은 존재 하지 않는다. 그러면 베르그송이 생각히는 자유의 개념은 무엇인가? 〈구체적 자아가 이룩하고 있는 행위와 구체적 자아와의 관계를 자유라고 한다• 그 관계는 정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롭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사물 une chos 텨t 분석하지만, 진보 un p rog res 를 분석하지 못하고 延長 une e t endu 혀 해체하지만 지속 la duree 의 해체는 불가능하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분석하기를 고집하면, 무의식적으로 전보를 사물로, 지속을 연장으로 변형시키게 된다.〉 51) 자유는 바로 개인의 개성적인 의식행위의 현재진행형 자체와 다르지 않다. 자유는· 그런 행위의 현재진행에서 자기 스스로의 영감과 정신력에 의하여 고무된 행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 런 경우에 〈점치기 la d i v i na ti on 〉와 같은 〈영감!'i ns pi ra ti on 〉과 미래를 〈예상l' an ti c ip a ti on 〉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 〈미래를 예상한다났근 것은 베르그송의 철학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것은 미래에 어떤 〈새로움〉도 솟을 수 없고, 나의 미래가 아무런 49) V. Ja nkelevit ch, 같은 책, p. 65 에서 재인용. 50) V. J ank 革 v it c h, 같은 책, p. 63 에서 재인용. 51 ) H. Bergs o n, 갇은 책 , p. 165.
생기도 없는 〈무기력한 사물의 골짜기〉에 불과하다고 여길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에서부터 시작해서 미래완료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미래를 예상하는 태도다. 그러나 베르그송에 의하면 아무리 절망에 빠진 인간이라도 그의 의식이 전적으로 무기력한 사물과 꼭 닮은 모습을 나타 내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의식의 현재에서 미래를 예전하고 예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점치기〉와 같은 〈영감 X 는 〈예견»]나 〈예상〉 과 다르다. 예컨대 모짜르트나 쇼팽의 즉흥곡을 생각해보자. 이들 작곡가 의 죽홍곡은 미리 머리 속에 예견된 것이 아니다. 그들이 피아노 건반에 따라 의견상 손가락 가는 데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다. 그러나 그들이 임의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같이 보이지만, 그들이 피아노 건반을 치는 그 순간에 이미 어떤 영감이 그들의 손을 이끌고 있다. 그 영감이 그들을 필연적으로 지배하였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음악가는 아마 존재 하지 않으리라. 그러면 음악의 작곡을 해본 경험이 없는 나는 왜 그런 죽홍환성곡을 창조할 수가 없는가? 그 까닭은 나의 지속이 음악적인 분 위기와 이해로 가득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음악적으로 멋진 즉흥환상곡을 창작하는 이는 그 곡이 주옥처럼 아름다우면 아름디울수록, 그의 영혼이 그의 내면 속에 흘러온 아름다운 지속에 그만큼 깊숙히 참 여하고 있음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점치기와 같은 영감 X 는 객관적 데이타를 놓고 예상하거나 예견하는 분석과 전혀 다르다. 그것이 순간적 환각이 아니고, 그의 앞선 영감이 언제나 그의 현재적 행위와 이 어전 기억이기에, 그는 그의 즉흥환상곡을 건반 위에 연주한 다음 악보로 다시 정확하게 재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그의 과거에서 전한 정신적 기억에 참여하면 할수록, 그는 그의 미래에서 어떤 정신적 영감에 의하여 빛을받게 된다. 자유는 〈자아에 의한 자아의 창조행위〉와 같다. 그러므로 위의 경우가 암시하듯기, 자유와 의식의 지속은 동의어다. 〈지속과 자유는 유일하고 동일한 것이다. 습관과 사회생활과 언어활동에서 구성된 표피적 자아의 굳은 껍질을 부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깊은 밑바닥에서 지속의 역동성
울 다시 잡게 되고, 과학적 결정론의 모든 주장과 비교가 안되는 자유, 자기 스스로를 긍정하는 자유 자체가 된다.〉 52) 예의 즉흥환상곡의 연주를 다시 생각해보자. 그는 피아노 건반을 치면서, 그 환상곡이 하나의 영감 으로 그의 머리에 떠오르지, 피아노 건반을 치지 않고 미리 그 곡을 예 견한 것이 아니다. 연주하면서 그는 영감에 사로잡혔다. 마찬가지로 행동 하기 전에 모르다가 행동하면서 그는 알게 된다. 그가 무엇을 할 것인가 를 알게 됨은 그의 행동의 순간에서다. 그순간은 과거의 진한 정신의 기 억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말을 하면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배운다. 걸 음마를 하면서 아기는 걸음울 배운다. 우리가 발의하는 자발성은 변증법 이 배회하고 있는 모든 문제를 비춰준다. 왜냐하면 그자발성은 우리에게 흩어전 요소들을 모으는 대신에 하나의 전체성을 제의하기 때문이다.〉 53) 52 ) F. Mey er , 같은 책 , p. 35. 53) V. J ank 革 v it ch, 갇은 책, p. 75.
제%l- 생명의 비약과 유기체적 전체 1 물질과 생명 베르그송은 1911 년 5-%l 29 일 영국의 버밍검 Bir m ing ha m 대학에 초빙 울 받아 헉슬리 Huxley 강좌를 하였다. 그때 그가 발표한 「의식과 생명 La conscie n ce et la v i e 」 의 논문을 열자 마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 울 만나게 된다. 〈우리는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 로 가는가? 이런 질문들은 우리가 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철학을 하게 되 면 즉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생생한 물음들이다.〉I) 우리는 베르그송이 이와 같은 인생의 제문제에 대하여 단도직입적으로 철학적 대변을 하였 다고 보지 않는다. 그런 질문들은 너무나 우리 자신에게 생생한 것이지 만, 거기에 대한 만족스런 해답을 단순하게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임 울 잘 안다. 왜냐하면 그러한 질문들은 수학이 공리에서 연역하여 모든 것을 설명하고 증명할 수 있는 바와 같은 그런 과정을 찾지 못하기 때문 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하나의 인식체계롤 우 리에게 보여주기보다, 오히려 그 문제를 바라보는 생각의 방향을 제시하 려고 노력하였던 것갈이 보인다. 베르그송은 그런 방향을 제시하는 하나 의 시도로서 자연의 생명과 인간의 삶의 문제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제 1 장과 제%낼 7 통하여 베르그송이 생각하는 정신의 질서는 1) H. Bergs o n, L'energi e spi rit u e lle, p. 2.
바로 持領임을 보았다. 이 지속이 생명의 세계에서도 가장 주요한 기본적 사실이 된다. 생명도 지속한다. 우리는 기억에서 정신과 신체가 대립적이 면서도 상보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또 내면적 자아의 세 · 계에서도 시간과 공간이 대립적이되 상호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세계에서도 생명과 물질이 상호 대립적이다. 그 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역설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물질은 타성이 고 幾何며 필연성이다. 그러나 생명과 함께 예견할 수 없고 자유스러운 운동이 나타난다. 생명이 있는 존재는 선택하고 선택하려 한다. 그의 역 할은 창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 세계에서 非決定의 지대 가 그 세계를 둘러싸고 있다 .•• …· 생명은 정확히 말하자면 필연성 속에 참가하여, 그 필연성을 자기 이익으로 돌리는 자유다.〉 2) 또 우리는 앞에서 〈정신적 기억〉과 〈 量 〉, 〈이질성〉과 〈동질성〉, 〈변 화〉와 〈동일성〉, 〈계속성〉과 〈동질적 시간성〉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마 찬가지로 생명의 세계에서 주요한 차이점은, 생명의 〈유기체론l' or g an i s me 〉과 물질의 〈기계론 le mecan i sme 冷 구별하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존재는 우리의 지각이나 우리의 과학이 인위적으로 분리시키고 닫는 모 든 것으로부터 구별된다. 생명의 존재를 하나의 대상과 비교함은 틀린 일 이다. 만약에 우리가 비교의 용어를 무기물에서 찾고자 원한다면, 그것은 결정된 물질적 한 대상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유기체와 비교하려 는 물질적 우주의 전체에서 찾아져야 한다.〉 3 ) 〈유기체론〉과 〈기계론〉의 차이를 보다 더 선명하게 구별하기 위하여 베르그송의 말을 더 들어보자. 〈製造 la fa br i ca ti on 는 주변에서부터 중심으로 간다. 또는 철학지들이 말하여 왔듯이 여럿에서부터 하나로 간다. 반대로 有機化의 일은 중심에 서부터 주변으로 간다. 유기화의 일은 거의 수학적 점과 같은 한 점에서 시작하여, 그 점 주위에서부터 언제나 확장되면서 나가는 同心의 파문을 그리면서 전파되어간다. 製造의 일은 그것이 많은 量 의 물질을 처리하면 2) H. Bergs o n, L'energi e spi rit u e lle, pp. 12~13. 3) H. Bergs o n, L'evoluti on creatr i ce , p. 15.
할수록 그만큼 더 유효해전다. 그 일은 집중과 압축에 의하여 진행된다. 반대로 유기화의 행위는 폭발적인 어떤 것을 갖고 있다. 그 행위는 출발 에서 가급적 작은 공간, 최소한의 물질만 필요로 한다. 마치 유기적 조직 을 가져오는 힘이 마지 못해서 공간 속에 들어온 것처럼. 유충적인 생명 의 진화과정을 가능케 하는 精子 는 유기체의 가장 작은 세포 중의 하나 다. 더구나 현실적으로 진화작업에 참여하는 것은 단지 정자의 아주 미세 한 부분일 뿐이다.〉 4) 물질세계는 기계론의 세계요, 언제나 우리가 지각하는 순간 그대로 존 재하는 타성일 뿐이다• 그 세계에는 지속이 없다. 그러나 유기체의 세계, 생명의 세계에는 전화가 있다. 그 진화는 지속이다• 생명의 세계는 탄력 성이 있다. 생명의 세계에서 어떤 생명이 사고를 만나 자기의 한 부분을 상실하게 되면, 다른 부분이 그 기능을 대신하든지, 새로운 기능이 탄생 하든지 한다. 그러나 물질의 세계에는 그런 전체성을 유지하려는 탄력성 이 없다. 물질이 쪼개지면, 그대로 언제나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베르그 송은 물질의 기계론적인 〈作爲的 統合l' un it e fa c ti ce 〉에 대하여 생명의 탄력적인 통합을 〈내면적 통합l' un it e int e r ie u re>, 〈참 통합l'unit e vrai e> , 〈 살아있는 통합l' un it e v i van t e 〉이라고 불렀다 .5) 그런 점에서 물질세계에서는 부분과 전체가 엄연히 구분된다. 그래서 부분과 부분들이 상호 병렬되어서 전체를 구성하기는 하지만, 그 전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상호 침투되는 ' 결합을 이룩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기술적으로 분해되어서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外的 關係에 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생명의 세계에서 아무리 작은 단세포라도 그것은 그 니름대로 완전한 유기체적 존재이기에, 생명은 요소적인 부분들의 합계가 아니다. 유기체는 전체로서 존재하든지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다. 이 점에서 생명은 〈정신적 기억〉이나 〈순수 기억〉과 매우 유사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순수 추억 X 븐 결코 부분적 요소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 4) H. Bergs o n, 감은 책, p. 93. 5) 같은 책, p. 200.
라, 하나의 원초적 생명의 에너지처럼 정신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순수 추억은 언제나 전체로서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순수 추억은 생명이다. 문장의 단편적 조각은 현실적으로 발생할 수 있지만, 생각이나 관념의 단 편적 조각이나 병렬은 성립할 수 없다. 만약 누가 그렇게 말을 하면, 아 무도 제대로 뜻을 파악하지 못한다. 우리가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할 때, 먼저 문장을 분석하고 그 다음에 낱말과 연결시켜 전체의 의미를 파악하 지 않는다. 우리는 단번에 그가 하는 말의 전체를 깨닫고 이해한다• 생각 은 전체에서 전체로 가지, 부분에서 부분으로 또는 전체로 가지 않는다. 생명도 이와 갇다. 이미 우리가 앞 장에서 언급하였듯이, 베르그송은 〈순박한 단순성〉과 〈숙련된 단순성只t 구분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베르그송은 〈역동적 단 순성 la sim p li c i t e d yn am iq ue 〉와 〈기계적 단순성 la sim p li c ite meca- niq ue 冷 역시 구분한다. 〈첫째로 그 결과가 예견되고 심지어 계산되어 지는 모든 원리는 단순하다. 죽, 타성의 개념은 그 정의에서 보아도 자유 의 개념보다 더 단순하고, 동질적인 것은 이질적인 것보다 더 단순하고, 추상적인 것은 구체적인 것보다 더 단순하다. 역동적 생명은 개념들 사이 에서 가장 편리한 질서를 찾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 질서의 실재적 주종 관계를 재발견하지도 않는다. 가끔 기계론자들이 원시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른바 단순개념은 거기서 파생된 것처럼 보이는 더 풍성한 여러 개념의 혼융에 의하며, 그런 혼융 속에서 서로서로 중성화되는 더 풍부해전 여러 개념들의 합일에 의하여 얻어졌다. 이것은 마치 그립자가 두 빛의 간섭에 서 생기는 것과 같다. 이런 새로운 관점에서 보면, 자발성의 관념은 의심 할 여지없이 타성의 개념보다 더 단순하다. 왜냐하면 타성의 관념은 자발 성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고 정의될 수 있지만, 자발성은 스스로 충분 하기 때문이다.〉 6) 이처럼 물질과 생명은 서로의 본성을 달리하고 있다. 물질은 이미 앞 에서 논의되었듯이, 기하학적 연구에 적합하도록 다른 것과 분리되고 절 6) H. Bergs o n, Essai, p. 106.
연될 수 있는 체계를 구성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자연과학이 그 학문 적 본질에서 병렬적이고 분석적이고 추상적인 까닭은 물질 자체의 속성 이 분해가능성을 본질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물질과학이 정신과 학보다 쉽게 우리에게 명석하고 판명하게 보이는 까닭은 물질 자체가 〈이미 이룩된 사실 le fait dej a fait)¾ 다루고, 또 그런 사실에 대하여 정의 내리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은 이미 완결되게 〈이록된 사실〉 이 아니고, 언제나 유동적으로 흐르는 〈이루어지고 있는 le -s e- fai sant> 사실을 뜻한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여 생명은 의식과 마찬가지 로 하나의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찾아가려는 〈경향)o l 다 .7) 생명이 하나의 〈경향〉이기 때문에 그 생명은 안주하지 않고, 늘 끊임없 이 새로운 세계로 비약하려 한다. 〈旺原質이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면, 적 어도 생식에너지의 연속성이 있다. 이 에너지는 참깐 동안, 죽 旺茅의 생 명에 활기를 주는 시간에 자기자신을 소모시켜 가능한 한에서 빨리 그 에너지가 자기 시간을 기다리는 새로운 性의 요소 안에서 다시 자리를 잡는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생명은 이미 발달된 유기체를 매개로 하여 한 싹에서 한 싹으로 가는 흐름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것은 마치 유기 체가 새 싹으로 계속되어지기를 바라고, 옛 싹이 다시 솟아나게 하는 눈 (n 조)이나 흑인 것과 같다. 본질적인 것은 한없이 추구되는 진보의 연속이 고, 눈에 보이는 각각의 유기체가 자기에게 살아가는 것이 주어전 짧은 시간 동안에 눈에 안 보이는 전보를 걸터앉아 있다는 점이다.〉 8) 이와 같 은 인용에서 다시 우리의 생각을 정돈하면, 베르그송이 말한 생명의 〈경 향〉은 다름 아닌 〈전보〉의 경향, 〈전화〉의 경향이다. 생명체는 진보나 전 화의 경향을 갖고 지속한다. 그러므로 생명은 언제 어디서나 탐색하고 더 듬고 찾고 모색한다. 그 탐색과 모색에의 경향이 어떤 방식으로 돌출할지 전혀 예상하거나 예견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만약에 그런 예측불허의 생명이나 의식을 이 세계에서 배제한다는 것이 가능해지면, 인간의 지능 7) H. Bergs o n, L'evoluti on creatr i c e , p. 13. 8) 같은 책, p. 27.
은 이 세계의 움직임을 계산할 수 있고 전개의 과정과 속도를 마치 영화 필름처럼 찍을 수 있으리라. 그런데 생명과 물질이 이처럼 서로 상반된 성질과 본성을 지니고 있지 만, 서로 상관적인 것이 또한 사실이다. 이 점은 기억과 물질이 상반적이 지만, 기억의 현실화를 위하여 물질에 ' 의존해야 하는 이치와 같다. 죽, 물질과 기억에서 물질에 속하는 인간 두뇌는 정신적인 기억을 현실화시 키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정신적 기억의 현실화를 방해하기도 한다. 이런 원리가 생명과 자연적 물질과의 사이에도 적용된다. 물질은 생명의 꽃핌 을 방해하고 동시에 가능케 해주는 도구다. 이런 원리는 분명히 역설적 이다. 생명은 거기에 저항하는 물질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더욱 생명의 약 동을 느끼게 된다. 생명의 약동을- 더 느낀다는 것은 동시에 물질의 저항 에 생명이 항복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이 두 가지 逆理를 동시에 표현 하면, 생명은 물질 때문에 그 물질의 방해롤 넘어 전보의 경향으로 가면 서, 동시에 그 생명은 현실화의 대가로 자신의 일부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 성립된다. 이와 같은 역설적 진리를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은 비유로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어린아이의 성품은 지금 갓 태어난 상태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한꺼번에 용해된 다양한 개성들을 자기 속에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자라야 하고 자라면서 사회의 저항도 받아야 한다. 어린아이 는 무엇이든지 될 요인을 자기 안에 다 지니고 있기에 매력적이다. 그러 나 이 다양한 가능성은 크면서 불가능해진다. 사회생활의 도움을 받고 또 그 저항을 받으면서 아기는 점차로 자라는 과정에서 하니를 선택하지 않 으면 안된다.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선택을 하면 할수록, 그는 또한 다른 것을 놓치지 않을 수 없다전 물질의 저항이 주는 이중성에 대하여, 죽 물 질과 생명의 상관성에 대하여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생명의 가장 기본 적 현상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 현상들이 이직도 물리적이고 화학적인지, 아니면 이미 생명적인지 잘 말할 수 없다. 생명은 다른 길 위에서 최면 9) 갇은 책, pp. 100~101.
에 걸린 물질을 조금씩 끌어들이기 위하여 자연적 물질의 습관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먼저 나타났던 생명 있는 형태들은 극도로 단 순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오늘날 우리가 관찰하는 아메바와 겉으로 유사 한, 그래서 거의 차이가 없는 조그만 원형질의 덩이였다. 그러나 그것들 은 생명의 내면적 형식에까지 상승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기막힌 내적 추 진력을 갖고 있다.〉 10) 생명이 물질을 이용한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생명은 물질을 통하여 자신의 역동성을 가시화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생 명과 물질과의 관계를 쟝께레비츠는 멋지게 기술하였다. 〈산이 터널을 야 기하는 것 이상으로 물질이 생명을 조장하는 것은 아니다. 명백히 산이 없다면, 터널도 없으리라. 그러나 만약에 터널 자체가 불필요하다면, 그렇 다고 누가 불평하겠는가? 터널은 산이 많아 통과하기가 어려운 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다. 그러나 터널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정복당한 산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체기관은 물질의 패 배를 각각 표상한다. 그러므로 물체는 정복되기 위해서 거기에 존재한다. 반대로 생명은 물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생명은 산을 관통할 필요.7} 없이 그냥 바로 자기 목적으로 가려고 하든지 혼자 있기를 원한다. 그러 나 물체가 거기에 있다. 그래서 그 물체를 우회하든지 피하든지 또는 모 든 종류의 꾀를 동원하여 승화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ll) 그런 점에서 물질은 정신이나 생명에게 있어서 〈필요악 »l 아니면 어 쩔 수 없이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 운명이란 용어 는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적절치 않지만, 그래도 그럴 수밖에 다른 길이 생명에게 보이지 않기에 그 용어를 쓰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물질의 〈필 요악적 존재〉와 생명이 잠자리를 같이 함으로 인해 생명세계에 여러 가 지 드라마가 나타난다. 생명이 〈필요악〉으로서의 물질적 유혹에 정신을 잃는 경우가 생간다. 물질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라고 할까? 식 물은 동물보다 더 물질의 유혹에 걸려든 경우고, 또 동물 가운데서도 舌 10) 같은 책, p. 100. 11 ) V. Ja nke!evit ch . 같은 책 , p. 168.
狀동물 les L i n g ules 이나 有孔蟲類 les Fora mi n ife res 나 다른 동물에 기 식해서 사는 박테리아류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사실을 말하 자면, 자발적인 운동을 전혀 할 수가 없는 생명체는 없다• 심지어 유기체 가 일반적으로 땅에 고착된 식물세계인 경우에도 자신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없다기보다 오히려 참자고 있다고 보이야 한다. 그 능력은 스스로 룰 유익하게 만들 수 있을 때 깨어난다. 나는 모든 생명체 (식물과 동물) 가 그런 능력을 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많은 생명체들 이 사실상 그것을 포기하고 있다. 예컨대 먼저 동물들 중에서 다른 유기 체에 기생하면서 살거나 먹이를 찾기 위하여 장소 이동을 할 필요가 없 는 동물들과 다음 대부분의 식물들이 그러하다. 식물들은 ……땅에 기식 하며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12) 베르그송은 비록 생명체가 동물과 식물로 나누어져 있지만, 그 생명의 에너지가 각각 별도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 면 생명은 정신적인 에너지고, 진화와 진보의 〈역동적 힘의 경향只끌 지 니고 있는 〈비약〉 자체다. 그래서 동물이라고 식물보다 반드시 깨어있는 의식이나 정신이라는 보장이 있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식물이라고 하여 서 동물보다 더 잠자고 있는 멍청한 상태의 의식이라고 반드시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동물 가운데서도 운동과 의식을 포기한 것들도 있고, 식물 세계도 기회가 오면 운동성과 의식이 깨어날 수 있다고 베르그송은 생각 한다. 그에게 있어서 생명은 정신적 에너지고, 이 에너지는 또한 동시에 의식과 다르지 않다. - 그러므로 『의식의 직접 여건에 관한 논고 Essai sur Les donnees im media t e s de la consc i ence 』에서 인간의 의식에만 국 한시켰던 의식의 개념을, 그는 『정신적 에너지 L'energi e sp i r it uelle 』 와 『 창조적 진화 L'evolu ti on crea t r i ce 』에서는 우주적 생명의 차원으로 확장 시켰다. 이 생명의 문제와 더불어 의식의 개념은 전우주와 자연의 영역만 큼 넓어지게 되었다. 그의 말처럼 〈사실에서는 아니지만 법적인 차원에서 의식은 생명과 함께 같이 늘어난다〉 .13)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생명은 물 12) H. Bergs o n, L'energi e spi rit u e lle, p. 10.
질에 의하여 최면상태에 빠지거나, 물질의 자동적 기계성에 종속되거나 또는 물질의 무의식세계 속에 잠둘 수 있다. 전화의 흐름을 역으로 거슬러 내려가면 하등동물의 경우에 骨짧[ la moelle 의 기능과 뇌 le cerveau 기능의 분화가 점점 뚜렷해지지 않는 것 울 볼 수가 있다. 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선택의 능력이 그보다 조금 뒤 떨어전 메커니즘을 갖고 있는 골수로 점차 확장되어 메커니즘의 정확성 을 점점 상실해가는 경우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되는 경우, 신경 조직이 너무 유치한 것이 되어서 산경활동의 명백한 구분도 없어지고 선 랙과 자율운동이 함께 용해되어버린다고 한다. 선택이 곧 자율운동과 구 분이 되지 않는 생명은 〈생명의 역동성인 비약〉이 〈마비상태〉에 빠진 것 이고, 동시에 진화가 갑자기 중단된 경우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전화 가 마비상태에 빠지고 비약적인 생명의 역동성이 갑자기 중단된 상태를 베르그송은 『 창조적 전화 』 에서 〈무의식 l'i nconsc i ence 〉이라고 불렀다. 물 론 베르그송이 의식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지속〉이요, 〈전화〉요, 〈진 보〉요, 〈비약〉이요, 〈변화〉요, 〈흐름 X t 뜻한다. 그런데 이 의식과 무의식 이 기계적으로 확연하게 구분되는 어떤 고정된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서 무의식은 식물세계에, 의식은 동물세계에 각각 해 당된다고 보아서는 안됨을 우리가 조금 전에 암시하였다. 운동을 포기한 하등동물의 세포는 의식이 마비되고 침들어 있는 상태고, 그와 반면에 식 물세계라도 운동의 자유를 쟁취하였다면, 의식이 깨어 있다고 볼 수 있 댜 그러나 일반적으로 봐서 동물은 깨어 있는 의식이고 식물은 참자는 의식이라고 불러도 상식에서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식물이건 동물이건 다 같은 〈원초적인 생명의 에너지〉에 바탕하고 있고구 이 공통 조상으로서의 에너지는 탄생의 순간에 서로서로의 구분을 짓기 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로서로 공통적인 이 에너지가 전화의 과정 에서 식물과 동물로 나누어지기 시작하였다. 식물은 고착성과 무감각성 13) 같은 책, p. 13.
을, 동물은 운동성과 의식을 특징으로 갖고 생명의 에너지가 분화되었다. 그런데 베르그송에 의하면 이런 〈이중성의 원인汗t 설명하기 위하여 〈실 용적인 便宜의 원칙只t 도입하고 있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생존하기 위하 여, 죽 필요한 탄소와 질소를 획득하기 위하여 각각 자기에게 가장 편리 한 방식을 채택하게 된 것이 에너지의 동식물적 분화의 원인이라고 베르 그송은 설명하고 있다 .1 4) 다른 말로 설명하면, 식물은 광물로부터 유기체 에 필요한 양분을 직접 만든다. 이런 식물의 방식이 식물로 하여금 운동 과 감각의 불필요성을 일반적으로 잉태시켰다. 그러나 동물은 자신의 먹 이를 찾기 위하여 여기저기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는 피곤함을 선택한 대 가로 운동신경의 진화와, 광범위하면서도 뚜렷한 의식을 점차로 확보하게 되었던 셈이다. 이 점을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동물의 감각에 해당 되는 것은 식물에게 있어서 빛에 대한 영록소의 아주 특수한 민감성이다. 그런데 신경조직은 무엇보다 먼저 느낌과 바람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하 는 메커니즘이므로, 식물의 참다운 신경조직은 빛에 대한 영록소의 민감 성과 녹말의 생산 사이에서 매개자 역할을 하는 메커니즘이거나 고유한 화학작용인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은 곧 식물에게는 신경세포가 필요없다 는 것을 뜻한다. 동물에게 중추신경과 신경조직을 주게 되었던 동일한 비 약이 식물의 경우에는 영록소적인 기능으로 맞닿게 되었다.〉 15 ) 이상의 인 용이 암시하듯기, 생명의 세계에서 수학이나 물리학의 경우에서 나타나는 것 같은 명석하고 판명한 정의를 동식물의 구분에 적용시키기가 힘들다. 특히 하등생물로 내려가면 갈수록 그런 구분적 정의가 더 까다로워진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동식물의 구분은 본질적 차이롤 갖는 것이 아니고, 어 떤 성향이나 경향성의 강조접 차이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동물 과 식물은 생명의 상이한 두 가지 전개방향이나 성향의 차이에 불과해전 다 . 그 싱이한 전개방향은 또 다론 의미에서 태양 에너지를 〈동물은 소 14) H. Bergs o n , L'euoluti on creatr ice , p. 114 참조. 15) 같은 책, p. 115.
모시키는 방향〉으로, 그리고 〈식물은 비 축 하는 방향〉으로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아기 시절에 의양으로 性의 구별을 뚜렷이 보이지 않듯이, 또 아기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한 몸에 지니고 있듯이, 생물도 그 원초적 뿌리로 내려가면 동식물의 구분을 뚜렷이 표시하지 않는다. 아 기가 자라면서 性의 구별을 의양상 행동상 나타내기 시작하고, 어른이 되 어가면서 인간의 많은 가능성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듯이, 생 명도 전화하면서 그러한 구분을 필연적으로 하게 된다. 그리하여 동물은 전화하면서 자유로운 운동을 위하여 에너지를 점점 더 많이 소모하게 되 고, 식물은 오히려 점차 더 완벽한 현장 에너지의 비축으로 나아가게 되 었다. 그렇게 보면 모든 생명이 그 〈원초적 상태〉에 가까울수록 〈집중화 하는 경향 X t 보이고, 〈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에너지는 마치 밤하늘의 불꽃이 폭발하여 사방으로 散開되듯이 그렇게 흩어전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그러면 생명의 바약하려는 경향은 어떤 방향성을 처음에 잡게 되는가? 여기에 대하여 베르그송은 생명의 폭발은 처음에 우연히 이루어지기에 스스로 그 방향을 선택하여 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애초에 폭발은 무턱대고 생긴다. 그래서 그 방향을 선택할 수가 없다. 이것은 마치 아메 바가 동시에 모든 방향으로 자신의 僞足울 뻗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 나 동물의 계열을 따라 울라가면, 우리는 몸체의 모양 자체가 일정한 수 의 잘 규정된 방향을 그리고 있음을 보게 되고, 그 방향에 따라서 에너 지가 나아감을 알게 된다.〉 1 6 ) 그리고 고등동물이 규정된 운동방향을 잘 그리면 그릴수록 운동과 의식은 상호 밀접한 관계를 짓게 된다고 베르그 송은 생각한다. 고등동물의 유기체의 의식이 뇌의 장치와 밀접히 연결되 어 있는 것은 해부학상 입증된 사실이다. 그래서 신경조직이 발달되면 될 수록, 그 신경조직이 선택해야 할 운동은 그만큼 많아지고 정확해진다. 그리고 그 조직과 함께 나타나는 의식도 그만큼 더 명료해진다. 그 반대 로 하등동물로 내려오면 울수록 중추신경은 단순해지고, 마침내 신경세포 16) 같은 책, p. 121.
는 분화가 덜 발달된 유기체의 전체 속에 사라지고 매몰되고 만다 .1 7 ) 그 런 점에서 운동과 의식은 서로 비례하고, 정체와 무의식이 역시 비례적이 다. 그렇다고 베르그송이 생명세계에서 지적한 무의식은 의식이 전혀 없 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하등동물이나 식물에게 의식이 없다는 것은 베 르그송의 철학에서 수용되지 않는다. 단지 그들에게 있어서 〈의식이 점들· 고 있는 상태〉, 또는 〈물질에 의하여 최면에 걸렸거나 유혹의 마비에 빠 져 있는 상태〉라고 말함이 더 타당하다• 생명이 있는 곳에 넓은 의마의 의식이 있다.
17) 갇은 책, p. 111 .
그러면 의식은 운동의 원인인가? 아니면 운동의 결과인가? 이런 물음 에 대한 베르그송의 생각은 兩價的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죽, 의식이 운 동의 원인이기도 하고 동시에 운동의 결과이기도 하디는 것이다. 의식이 장소이동으로서의 운동을 이끌고 있디는 점에서 의식은 운동의 원인이고, 반대로 운동성이 의식을 지탱시켜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식은 운동의 결 과가 된다는 것이다 .18) 동물 중에서 운동하기를 즐겨 하지 않고 포기한 〈리조세팔〉 ※ 과 같은 甲穀類들은 옛날에 좀더 다양한 구조를 里示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경조직의 퇴화를- 당하게 되고 따라서 의식도 거 의 참자는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다.
18) 같은 책, p. 112. ※ 리조세팔 R hi zoce p hales 은 게 Crabe 위에 기식해서 살고 있는 굴과 같은 종류 의 甲 OO 를말함.
그렇다면 개와 같은 고등동물도 의식이 있다는 뜻이 아닌가? 이미 우 리가 제 1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식과 기억은 동일한 개념이다. 그러 면 개도 의식과 추억이 있는가? 물론 베르그송에 의하면 개도 인간처럼 의식과 추억울 갖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 또한 차이점이 있다• 베르그송 의 말을 직접 듣자. 〈개와 사람이 함께 참석하게 된 동일한 구경거리에 대한 추억은 아마도 개의 뇌와 사람의 뇌를 같은 방식으로 수식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때 지각은 같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다. 그러나 추억
은 개의 의식에서와 사람의 의식에서 아주 다른 것임에 틀림없다. 개에게 추억은 지각의 포로로 남아 있게 되고, 그래서 동일한 구경거리를 다시 보면서 홉사한 지각이 그 추억울 회상케 할 때만 오직 개의 추억은 깨어 나게 될 것이다. 개의 추억은 추억 자체의 참다운 재생에 의해서라기보다 더 현실적인 지각의 인지, 즉 생각된pe nse 인지라기보다 오히려 움직여 전j oue 인지에 의하여 나타나게 되리라. 반대로 사람은 자기 뜻대로, 어 떤 순간에도 현실적 지각과 독립하여 추억울 회상할 수 있다. 사람은 자 기의 과거를 움직이게 하는 것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고, 스스로 과거를 표상하거나 과거를 꿈꾼다•〉 1 9 ) 그렇다면 고등동물의 의식과 인간의 의식이 같은가? 디론가? 이 물음 은 베르그송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섬세한 문제 중의 하나에 속 한다. 이미 우리가 기억문제를 다룰 때, 기억은 하나의 흐름이고 연속이 지만, 그러나 그 흐름은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고 끝없는 질적 변화를 동 반하는 흐름임을 지적하였다. 생명의 흐름, 생명의 지속도 이와 같다. 생 명의 에너지는 이 우주에 하나로 흐르고 있지만, 그러나 그 흐름은 여러 가지의 질적 변화를 수반하고 있다. 그래서 동물(고등)의 의식과 인간의 의식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질적으로- 다르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 점을 좀더 가까이서 살펴보기로 하자.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다시 한 번 더 정리해보자• 어떤 경우 에도 의식은 뇌에서 생기는 부산물이 아니다. 물론 뇌가 그 구조에서 복 집하면 할수록, 의식활동의 강도도 그 질에서 강해지고 의식활동이 처분 하는 선택의 양도 많아전다. 이 뇌와 의식과의 관계를 베르그송은 〈칼과 칼의 뾰죽한 끝〉의 관계와 같다고 비유하였다. 죽, 생명체의 의식은 예리 한 킬이 뾰죽한 칼 끝과 연결되어 있듯이 그렇게 생명체의 뇌에 연계되 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 끝이 전부 다 칼일 수가 없다. 두뇌는 생명 체의 의식이 현실세계(지각세계)의 조직 속으로 침투하게 하는 예리한 칼 끝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칼 끝이 칼과 그 外延에서 같을 수가 없 19) 갇은 책, p. 181.
듯이, 뇌는 의식과 꼭 같은 차원에서 함께 언제나 동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 접에서 베르그송은 뇌의 구조에서 인간과 원숭이의 구조가 어느 정도에서 유사하지만, 두뇌와 상관하여 의식에서는 비교가 안되리만 큼 질적 변화, 죽 비약이 있다고 주장한다 . 20 ) 물론 그렇다고 베르그송은 원숭이의 두뇌 구조와 인간의 것이 같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단지 어느 정도의 유사성이 있다고 인정할 뿐이다. 그러나 그 유사성도 동질적인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 이다. 원숭이의 두뇌는 극히 제한된 수의 운동기능만을 반복하지만, 인간 의 두뇌는 한없는 기능을 계발해나갈 수 있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동물 중에서 가장 인간 두뇌에 가까운 원숭이와 인간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의 차이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 2 1) 그 차이는 베르 그송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대로 〈닫힘〉과 〈열림〉의 거리만큼 멀다. 여기 서 우리는 베르그송의 진화론과 다윈 Ch. Dar wi n의 전화론의 차이가 무 엇인지 궁금해진다. 이 점은 나중에 검토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 하기로하자. 더구나 원숭이와 인간의 의식 사이에는 뇌의 구조보다 더 근본적인 질 적 차이와 비약이 나타나고 있다. 생물철학의 관점에 비친 의식의 개념은 〈생명체가 처분하는 선택의 능력沖]나 〈현실적 행동을 둘러싸고 있는 가 능한 행동의 가장자리〉 22 ) 와 의연상 함께 가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선택 능력의 內包와 外延의 질적 깊이와 양적 넓이가 의식의 수준을 결정하는 셈이다. 그래서 그런 깊이와 넓이가 인간에게 〈발명〉과 〈자유녔t 가능케 한다고 베르그송은 생각하고 있다. 〈동물에 있어서 발명은 언제나 인습의 주제상에 나타난 하나의 변주곡에 지나지 않다. 種의 습관 속에 갇혀 있 지만, 동물에겐 개체적인 발의에 의하여 자신의 습관을 넓혀나가는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오직 순간에서만, 죽 새로운 자율운동을 창조하는 바로 20) 갇은 책, p. 263. 21) 갇은 책, p. 264. 22) 갇은 책 , p. 264.
그 시간에서만 동물은 자율운동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그의 감옥의 문은 열리자마자 또다시 닫힌다. 자기 인습의 사슬 쪽으로 새 습관을 잡아당 겨서 그것을 길게 하는 것을 동물은 성공시킨다. 인간과 함께 의식은 그 사슬을 끊어버린다. 그 순간까지 생명의 모든 역사는 물질을 들어울리기 위한 의식의 노력과 의식 위에 다시 떨어지는 물질에 의하여 디소간 이 루어전 의식의 짓밟힘과의 사이에 나타난 역사다.〉 23 ) 그런 점에서 생명의 전화는 인간에 이르러서 종점에 도달하였다고 베 르그송은 생각한다. 생명의 진화는 물질을 넘어 물질과 싸우면서, 또 때 로는 물질에 등을 기대고 쉬면서 산이 거기에 있기에 터널을 뚫듯이 그 렇게 하여 흘러왔다. 산이 거기에 있기에 터널을 뚫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듯이, 물질 때문에 생명의 지속이 방해를 받지만, 그러나 동시에 물질은 생명의 의식화와 자각을 북돋운다. 쟝께레비츠의 표현처럼, 〈月 0 自 상태〉에서 있던 의식이 물질의 저항을 받으면서 〈對自상태〉의 의식으로 탈바꿈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리하여 쟝께레비츠는 베르그송의 철 학을 해설하면서 물질이 생명에 준 기여를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 2 4) 그 하나는 물질이 생명을 분화시키고 다양화시킨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물질이 생명으로- 하여금 노력을 하도록 자국을 제공하였디~ 점이다. 이 점은 기억문제에 있어서 우리 두뇌의 운동적 도식이 우리의 현실적 적응 울 위하여 수많은 추억들 가운데 필요한 것만을 통과시키듯이, 생명의 문 제에 있어서도 물질조직이 정신적인 생명의 에너지를 정확히 하고 집중 시키는 구실을 한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물질조직이 에너지를 정확히 집 중시키려 하는가? 그 까닭은 생명이 소비해야 하는 에너지를 물질이 비 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동시에 물질의 저항은 생명의 자각과 동시에 비약을 가져 온다. 공기의 저항이 있어야 비행기가 뜨고, 물의 저항은 동 시에 생명체의 유영을 가능케 하여 준다. 그래서 베르그송에 있어서 물질 은 생명을 짓밟는 유혹이요 저항이지만, 동시에 그것 때문에 생명이 승화 23) 갇은 책, p. 264. 24) Jan ke1evit ch , 갇은 책, p. 171, H. Bergs o n , L'energi e spi rit ue lle, p. 22.
하고 도약하는 비약의 받침대이기도 하다• 이 점을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 이 표현하였다. 〈생각에 지나지 않는 사유, 생각에만 그친 예 술 작품, 꿈만 꾼 詩 는 아 직도 골칫거리가 되지 않는다. 시를 말로 옮기는 물질적 실현, 예술적 개 념을 조각이나 그립으로 바꾸는 물질적 실현 등이 노력을 요구한다. 노력 은 고통스럽지만, 또한 귀중하다. 노력은 그가 이끈 작품보다 더 귀중하 댜 왜냐하면 노력 때문에 존재했던 것 이상을 자기자신에게서 끌어낼 수 있었고, 자기자신 너머로 비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물질이 없으면 노력 도 불가능하였으리라. 물질이 뻗는 저항과 우리가 그 물질에서 끌어들이 는 유순성에 의하여 물질은 장해물이고, 도구고, 자극제가 된다. 물질은 우리의 힘을 증명하고 그 힘의 흔적을 간직하고, 그 힘의 집중화를- 부론 다.〉 25 ) 이상의 인용은 바로 베르그송 철학의 기본적 구조를 깊숙히 반영하고 있다. 물질의 저항이 없었다면 생명의 창조나 창조가 가져오는 기쁨이 있 을 수도 없으리라는 그의 사상은 두뇌의 운동적 도식이 없었다면 정신생 활의 현실적 적용이 어려웠으리라는 실용주의적 진리관과 맞물리고 있다. 베르그송은 확실히 철학적으로 정신주의자다. 그러나 그의 정신주의의 철 학은 관념론도 아니고, 정신적 唯名論의 타락한 名分主 羲 도 아니다. 그는 정신의 기쁨과 위대성을 알지만, 그 정신의 기쁨과 위대성이 언제나 실용 적 지식과 지성의 배후에 숨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는 철두철미 실 용주의적 입장을 결코 견지하지 않는다. 실용적인 것만을 진리로 생각하 는 사상은 현실적 행동의 실용성 여부만 보기 때문에 정신상태의 깊이를 망각하고 사는 가난한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베르그송의 철학에는 언 제나 상반된 두 가지의 極이 다른 면에서 상보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의 철학사상을 이원적 일원론이라 해도 좋을는지 ? 25) H. Bergs o n, L'energi e spi rit u e lle, pp. 22~23.
2 비약과 하강, 그리고 진화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에서 물질과 생명은 서로 대립된다. 서로 대립되지 만 어떤 고정된 실체로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지가 갖고 있 는 상반된 방향성에 의하여 대립되고 있다. 생명의 에너지는 상승하기를 바라고, 물질은 하강하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과 생명과의 관계는 베르그송의 표현처럼 〈못〉과 〈옷〉의 관계와 같다. 벽에 박힌 못 이 거기에 있기에 그 못이 옷걸이로 사용된다. 그러나 옷은 어떤 경우에 도 못과 같을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다론가? 베르그송에 의하면, 정신과 생명은 상승적인 비약운동의 방향으로 진행 하고 있고, 물질은 하강적인 방향으로 내리막길을 가려는 운동성을 지니 고 있다. 그래서 물질은 무게와 같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그 의 말을 직접 듣자. 〈모든 우리의 분석은 결과적으로- 물질이 내려오는 언덕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기 위한 노력을 생명이 里示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거기에서 우리의 모든 분석은 물질과 반대로 가는 과정의 가 능성과 필연성, 물질의 길을 차단시킴으로써 물질을 창조하는 과정의 가 능성과 필연성을 보여준다. 확실히 우리 지구의 표면에서 전화하고 있는 생명은 물질에 연계되어 있다. 만약에 생명이 순수 의식이라면, 그 생명 은 순수한 창조적 활동성이 되리라. 사실상 생명은 무생명적인 물질의 일 반법칙에 생명을 복종시키는 유기체에 못박혀 있다. 그러나 생명은 마치 이 법칙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그의 온갖 가능성을 다하는 것같이 보여진 댜〉 26 ) 물질은 〈타성〉과 〈무기력〉과 〈무생명〉의 무게를 상칭하고대 생명은 한 없이 바상하고폰 의지와 같은 것으로 표상된다. 그렇다. 생명아 자신의 자유로운 나래를 펼칠 때, 의식은 기쁨을 느끼고 생명이 물질의 무게에 짓눌려 자발적인 운동을 포기하게 될 때, 생명은 참들어 생기를 상실하게 된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은 생명의 순수 지속이 아니다. 26) H. Bergs o n, L'eu oluti on ere~at r ic e , p. 146.
인간도 물질의 부담을 안고 흐르는 생명이다. 그러나 물질의 힘을 배제하 고 〈순수 의식〉이나 또는 베르그송의 다른 표현처럼 〈超 意識 〉의 각도에 서 생명을 생각하면, 마치 우주의 〈대폭발 B ig Ban g〉처럼 생명은 불 꽃 처 럼 散華하는 이미지를 준다. 이 점을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무한히 넓은 꽃다발의 로켓처럼 우주가 분출하는 중심에 대하여 내가 말할 때, 나는 간단히 그럴 듯한 유사성을 표현하고 있다. 물론 나 는 그 중심이 하나의 사물이 아니고 분출의 연속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렇 게 본다면 神은 槪成의 어떤 것이 아니다. 神은 끝없는 생명이고 활동이 고 자유다.〉 m ) 우주의 대폭발이나 밤하늘에 폭발하는 〈불꽃〉처럼 생명의 이미지를 그리는 베르그송은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바와 같이 유명한 〈생명의 비약l' elan v it al 〉이란 사상을 집대성시키게 된다. 〈생명의 비 약 X 는 생명의 에너지가 지니고 있는 창조의 바람을 뜻한다. 그러나 그 비약이 〈순수 의식〉이나 〈초의식〉 같으면 무한히 자유로운 시간 속에서 절대적인 창조를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 우주의 생명은 그런 절대 자유의 에너지가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물질의 무게를 안고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생명체는 물질의 필연성과 동력과 생명의 지유와 창조와의 사이에서 투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정체된 물이 오래가면 썩게 마련인 것처럼 정체된 생명도 오래 계속되면, 생명의 생기 있는 기상과 자유스런 창조역량을 상실하고 만다. 물의 생리는 흐르게 마련이다. 물이 흐를 때, 기폭이 중간에 있고 물의 흐름이 일시적으로 둔하고 빨라지기는 하여도, 흐르는 물의 운동을 막을 수는 없다. 물이 계곡의 모습과 같이 흐를지언정, 물이 곧 계곡의 형상은 아니다. 물이 아래로 흐르지만, 생명 은 위로 솟아오르는 것이 다르다. 솟아오르는, 아니 터지는 〈생명의 비 약X 는 어떤 모습을 지니게 되는가? 물론 그 모습은 밤하늘에 솟아올리 터지는 〈불꽃〉과 감은 영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 비약하는 생명은 하 나인가? 아니면 여럿인가? 베르그송에 의하면, 물질세계에 적용되기 위하여 나타난 悟性的인 단수 27) 같은 책 , p. 249.
와 복수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고방식은 물질을 이해하기 위 한 추상적 사고의 인습에서 생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왕 불꽃 이야기 가 나왔으니 그 영상에서 다시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보자. 밤하늘에 비상하여 분출하는 불꽃은 하나인가? 아니면 여럿인가? 한 개의 불꽃이 공중으로 비약하여 터지면 여러 개로 주위에 산화된다. 그래서 추상적으 로 생각하면 하나가 여러 개로 갈라졌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구 체적 관점에서 불꽃을 구경하는 사람에게 그것이 하나안지 아니면 여럿 인지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하나와 산화된 여러 가지 불꽃 사이에 하나 의 흐름, 하나의 持 組 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하나도 동일성을 형식 적으로 유지하는 하나가 아니고 벌써 다양하게 변화된 하나이다. 〈생명의 비약〉도 이와 같다• 단수와 복수를 초월하는 〈생명의 비약只t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의 일 생을 상상해보면 좋으리라. 우리의 일생은 나이와 더불어, 그리고 각자가 살아온 개인적인 인생 과정과 함께 수많은 경험적인 마디로 갈라지고 나 누어진다. 1()1 ,1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동일한 개성이나 인격을 갖 고 있지 않다. 그러면 나는 1()1 ,1 전과 다른 사람인가? 아무도 그렇다고 시인하지는 않으리라 . 1()1 ,1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많은 갈래의 변화를 체험하였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하나의 인격이나 개성으로 지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의식의 세계나 생명의 - 세계에서 수량적인 계산이라는 것 은 무의미하다. 생명적인 창조의 바람에서 계산이나 量 化의 법칙은 그 바 람의 상승적 에너지를 파괴시키는 결과를 빚는다. 〈자유로운 행위는 관념 과 約分될 수 없다. 그 행위의 順理性은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의 지성을 거기서 발견하게 해주는 不可糸%汗t에 의하여 정의됨에 틀림없다. 그러한 것이 우리의 내면적 전화의 성격이고 또한 생명의 전화의 성격이다.〉 211 ) 그러면 이제부터 베르그송이 말한 〈생명의 비약)o l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화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기 위하여 베르그송이 스스로 규정한 〈생명의 비약l' elan v it al 〉의 의미를 마지막으로 훑어보 28) 같은 책, p. 48.
자. 〈따라서 동물적이든 식물적이든 모든 생명 전체는 그가 지닌 본질 속 에서 에너지를 모으기 위한 노력으로서 그리고 그 에너지를 융통성 있고 변형시킬 수 있는 운하를 통하여 방출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나타난다. 그 리하여 그 운하의 끝에 가서 생명은 무한히 다양한 일을 이룩한다. 바로 이것은 물질을 넘어서 생명의 비약이 단번에 얻기를 원하는 것이다. 물론 그의 힘이 무한하거나 어떤 의부의 도움이 있으면, 생명의 비약은 거기에 서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비약은 유한하고, 그것은 아주 결정적으로 한 번 주어졌다. 그 비약은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는 없다. 그가 새기는 운동은 때로는 빗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누어지기도 하고, 언제나 저항을 만난다. 유기체의 전화는 이런 투쟁의 전개에 불과하다.〉 2'J ) 쉽게 말하자 면 〈생명의 비약活든 〈생명의 바람〉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단지 단순한 바람이 생명의 약진을 가져오는 모든 것이다. 진화의 모든 형태나 과정도 그 생명의 바람이 물질과 협의해서 싸워 얻은 가장 단순한 결과 일 뿐이다. 이 점을 쟝께레비츠는 아주 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새는 날 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날려고 하고, 황소는 뿔울 갖고 있기 때문에 받고자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리라.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황소는 받 기를 원하기 때문에 뿔울 갖게 되었고, 새는 먼저 날기를 원하였기에 날 개를 갖게 되었고 그래서 날았다.〉 30) 생명의 바람은 그런 바람을 그냥 가졌기 때문에 그런 구조를 갖게 되 었다는 것이 쟝께레비츠의 소론이다• 그의 실례를 잠깐 살펴보자 . 3 1) 누에 나방은 자기의 침으로 민들이벌레 Panor p톄t 죽이는데, 누에나방 Born by: xOl 민들이벌레를 먹기 위해서도 아니고, 또 민들이벌레가 누에나방울 공격해서도 아니다. 그러나 민들이벌레는 자기 알을 누에나방의 보금자리 안에 까기 때문에 누에나방의 후손들에게 위협이 될 뿐이다. 누에나방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본능적 직감으로 알 것이다. 하여튼 29) 같은 책, pp. 254~255. 30) V. Jan ke1e~v itch , 갇은 책, p. 137. 31) 같은 책, p. 137:
누에나방이 민들이벌레를 죽이는 것은 살려고 하는 바람, 존속하고자 하 는 가장 단순한 바람 그것일 뿐이다. 가장 단순한 바람, 그것은 〈생명의 자발성 la sp o nt an eit e de la v i e 〉이다. 진회는 생명의 단순한 자발성의 폭발이지만, 그러나 그 전화의 구체적 모습이 단순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화의 지속이 성공적이면 그럴수록, 생명의 유기체는 보다 복잡한 구조를 띠고 나타난다. 그러므로 .. 〈생명의 진화났근 〈바람의 기능적 단순성〉과 〈유기체 구조의 복잡성)o l 라 는 두 가지 관점을 동시에 갖게 된다. 베르그송이 분석한 예시를 살펴보 기로 하자 판 그는 사람의 눈을 하나의 예로 제시하고 있다. 눈은 〈구조 의 복잡성〉과 〈기능의 단순성〉이 가장 잘 묘합된 경우에 해당된다. 눈은 여러 가지 구분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컨대 망각, 각막, 눈의 수 정체 등등을 열거할 수 있다. 이 각 부분에 대하여서도 해부학적으로 무 한히 세밀하게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망각의 경우만 봐도 신경 세포가 沙}지 충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多 極세포 • 양국세포 • 시각세포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 각각의 세포도 자기 개체를 지니고 있고 아주 복잡 한 유기체를 구성하고 있다. 눈이라는 기계가 이처럼 복잡다기한 구조로 형성되어 있지만, 그 기능은 대단히 단순하다. 눈을 뜨기만 하면, 사물이 있는 그대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생명의 진화는 기계론적으로도 목적론적 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이 점은 곧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이와 같은 생명의 전화는 어떤 〈계획 le p lan 〉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모든 〈계획 X 픈 그것이 계획인 한에서 기계론 적으로 과거를 설명하든, 목적론적으로 미래를 설명하든, 어떤 구상을 사 전에 갖고 일을 꾸미는 본질을 지닌다. 그래서 그 본질이 다 이루어지면, 자연히 그 계획은 소멸된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전화는 그런 계획과 다르 댜 〈생명의 전화에 있어서 미래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다. 진화는 최초의 운동에 힘입어 끝없이 추구되는 창조다. 그 운동은 어떤 지능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은 무한한 富의 통일, 풍요한 유기적 통일 32) H. Bergs o n, L'eu oluti on creatr i c e , p. 89.
울 형성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능은 그 통일의 한 국면이거나 그 통일이 낳은 산물 중의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3) 그래서 전화는 〈포탄의 폭발〉과 같다고 베르그송이 비유하고 있다• 〈대포의 포탄)o l 날아가서 터지면, 그 파편이 다시 또 터지고 해서 무한 히 파열된다. 파편이 어디로 날아갈 것인가를 미리 결정한다는 것은 불가 능하다. 척추동물과 연체동물 (ex. Peig n e) ※ 의 눈을 비교하여 보기로 하 자. 해부학적으로 척추동물의 눈과 가라비와 같은 연체동물의 눈은 각각 유사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가라비의 눈도 망각이나 각막, 눈의 수정체 등을 지니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연체동물이나 척추동 물이 어떤 공통적인 줄기에서 散開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 원본에서 연체동물이나 척추동물의 눈이 같은 생명의 에너지에서 유 래하였다고 하여도, 진화의 과정에서 비약의 방향이 달랐다. 〈척추동물과 연체동물의 눈을 비교하자면, 척추동물의 망막은 생명의 초기에 뇌의 희 미한 윤곽이 방출하는 확장에 의히여 생겼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주변 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참다운 중추신경이다. 반대로 연체동물의 경우에 있어서 망막은 직접 외배영 l' ec t oderme 에서 파생되어 나오지, 胎속에 있는 생명의 뇌수l' ence p hal 혜t 매개로 하여 간접적으로 파생되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런 것이 인간과 조개류(연체동물)에 있어서 동일한 망막 의 전개에 와닿는 상이한 전화의 과정이다.〉 34) 인간의 눈은 동물의 눈 가운데서 가장 구조적으로 복잡하지만, 또 가 장 기능면에서 단순하게 잘 발달되어 있다. 이미 앞에서 지적되었듯이, 〈구조의 복잡함〉과 〈기능의 단순함)o l 전혀 괴리를 일으키지 않고 생명 의 자기 표현을 나타내고 있다. 쟝께레비츠는 괴테 Goe t he 의 표현에 영 향을 받아서 너무도 아름답게 서술하고 있다• 〈로봇의 만화적인 육중함은 물질과 기능 사이에서 암암리에 보이는 不和의 느낌에서, 죽 그 두 가지 33) 갇은 책, p. 106. ※ Peig ne E 貝類 가리비와 같은 辨魚思잦[에 속하는 연체동물을 말함. 34) 갇은 책, p. 76.
의 만남이 일부러 이루어전 사실이라는 것이 감정에 바로 온다. 여기서 꾸밈은 꾸며진 것과 괴리되어 있고, 또 그 꾸밈은 심히 그리고 몹시 인 위적인 작품의 기계적 경직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생명의 작 품에는 의도적인 어떤 것도 없다. 거기에는 꾸밈도 꾸며진 것도 없다. 생 명이 실현하는 역설적인 결합은 언제나 유일한 가능성이다. 왜냐하면 그 결합의 바탕은 직접 살아있는 개체의 본질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l 5 ) 역사의 전개 와중에서 우리는 점차 과학과 추리의 교육에 의하여 자연으 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었고 간접적인 지식만을 배운 나머지, 우리는 거의 자연의 언어를 잊고 말았다. 지능의 언어는 물질의 언어지 생명의 언어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지능은 생명의 단순성을 파악하기에는 너무 유식하다〉. 지금까지 살핀 베르그송의 전화론은 바로 생명의 자발성이요 단순성인 생명과 비약과 지속 이의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런 베르그송의 진화론은 분명히 다윈 Dar wi n 의 전화론과 일치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베르그송과 다윈의 진화론의 차이는 전자가 〈다발상태의 진화 !'evoluti on en ger - be~ 주장함에 반하여 후자는 〈직선적 전화 !'evolu ti on recti lign e~ 주장함에 있다. 이 점을 좀 자세히 살펴보자. 단적으로 다윈의 전화론은 외부 환경과의 관계에서 적자생존의 원리에 의하여 설명되고 있다. 적자 생존의 원리이란 의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생명의 기능은 탈락되거 나 배제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다윈의 전화론은 의부의 생존조건에 유기 체의 정확한 적응을 전제로 한 것이다. 물론 의부환경과 유기체의 적응관 계에 두 가지의 가설이 있다. 그 하나는 지속적인 의부환경의 조건이 유 기체의 구성에 변형을 가져와서 그 환경에 적응케 하는 적극적 영향설로 서 이것은 주로 아이머 E i mer 에 의하여 제창된 가설이며, 또 다른 하나 는 다윈의 이론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의부환경의 영향이 간접적 방식으 로 유기체에 작용한다는 가설이다. 이 가설에 의하면 생존경쟁에서 우연 히 주어전 환경에 잘 적응될 수 있는 기능과 구조를 타고난 種만 살고 35) V. Jan kelevit ch, 같은 책, p. 144.
그렇지 못한 種은 도태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베르그송은 그 두 가지 가설을 구분하지 않고 다 거부한다. 거 부하는 이유는 그 두 가설이 다 기계론적인 진화의 설명방식을 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반박 이유를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 다. 첫째로 의부환경이 자신에게 적합지 못한 종은 도태시키고, 적합한 종만 생존시킨다고 한다면, 어떻게 그토록 복잡한 기관들의 구조가 수많 은 고등동물들에게서 생겨날 수 있었겠는가? 환경이 그런 유기체의 복잡 한 기관의 진화를 가져오게 한 주원인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윈의 생각에 따르면 환경은 적자생존의 생명만을 도태시키지 않는 소국적 작용만 하 기 때문이다. 환경이 그런 전화를 촉진시켰다고 인정하자.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 생긴다. 어떻게 공간과 시간을 달리하는데도 불구하고 , 즉 공간적 환경과 시간적 환경이 엄청나게 디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目 l' ordre 에 서 동일한 기관의 복잡성이 생기게 되는가? 다윈주의자들은- 동일한 결과 가 다양한 원인에서 나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생각은 불가능하다고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은 비유로써 반박하고 있다. 두 사람이 서로 싱이한 장소에서 출발하여 우연히 같은 장소에서 만나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 그런 일이 아주 드물지만 우연히 생겼다 하여도 그들이 지나온 지리나 환경이 꼭 같을 수는 도저히 없다. 과정이 전적으로 무시되고 우연히 아 주 드문 확률로 결과가 같다고 하여서 생명의 세계에서 동일한 전화의 설명을 거기에 의존할 수 있는가? 또 다른 한편으로 아이머의 가설처럼 결과의 유사성이 설명되는 것은 환경이라는 원인의 유사성 때문인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생명을 물 질적 기계론으로 설명하는 태도와 같다. 하여튼 베르그송은 전화론을 적 웅론으로 설명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만약 내가 동일한 유리컵에 차례로 물과 술을 봇는다면, 그 두 액체는 그 컵 에서 동일한 모양을 취할 것이고, 모양의 유사성은 내용물이 그릇에 적응 한 동일성에 기인하리라. 아 경우에 적응은 기계적인 삽입을 의미한다. 내용물이 적응된 그릇의 모양은 이미 거기에 만들어진 채로 있었고, 내용
물에 대하여 자기자신의 형태롤 요구하였다. 그러나 유기체가 살아야 하 는 조건에 대한 유가체의 적응을- 말할 때, 그 내용물을- 기다리는 모양이 미리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 조건들이란 생명이 가입되어서 거기서 그 모양을 받게 되는 주형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은유를 잘 못 사용한 것이다. 거기에는 아직도 모양이 없고, 생명은 그에게 주어진 조건에 알맞은 모양을 스스로 창조해나갈 뿐이다.〉 36) 그래서 다윈주의자들은 환경적응설이 유기체의 진화과정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깨닫고 〈우연적 변이 la varia t ion acc i den t elle 〉의 개념을 도 입하고 있다• 환경에 요행히 적응하는· 생물은 도태되지 않고 살아 남아서 생존하다가 의부의 어떤 요소에 충격을 받아 기관의 진화를 하게 되었다 는 것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눈에서 보면, 그런 우연적 변이는 납득되 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연적 변이가 발생할 수 있었다면, 지구상예 광범 위하게 퍼져 있는 동일한 종 사이에서 어떻게 동일한 결과가 발생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 우연적 사고가 계속 반복된 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다윈의 적응설이 지니고 있는 인식론적 애매성을 더 추구하여 보자. 다원론자들의 적응설은 의부환경이 제시하는 조건에 점차 더 잘 어울리 는 모양이 점진적으로 복잡화되어 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런 적응설 은 그런 조건에서부터 점점 유리하게 이용하는 도구를 점차 복잡하게 하 는 구조의 문제와는 다르다. 첫번째 경우에 물질이 수동적으로 의부의 환 경으로부터 하나의 흔적을 받는 것에 제한되지만, 두번째의 경우에 물질 은 능동적으로 반응하여 문제를 해결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연체동물과 척추동물의 눈이 그 구조상에서 유사하지만 기능적으로 척추동물의 눈이 훨씬 전화되었다는 점은 척추동물의 눈이 연체동물의 눈보다 빛의 영향 에 대하여 더 능동적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 m) 그러나 우리가 그 동안 분석한 내용에 따라보면, 물질은 무기력한 타성이기에 스스로 능동 36) H. Bergs o n, L'evoluti on creatr i c e , p. 58. 37) 같은 책, pp. 70~71.
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척추동물은 연체동 물보 다 더 생명의 자 발성, 생명의 비약이 강렬하였기 때문에 눈의 기능이 더 발달되었다고 보 지않을수없다. 그러면 라마르크 Lamarck 의 〈用不用說〉에 대한 베르그송의 견해는 어 떠한가? 아시다시피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은 생명체가 자기 기관을 사용 하고 사용하지 않고 하는 정도에 따라 그 생명체의 후손에게 변화나 변 이를 전수한디는 가설이다. 이 라마르크의 가설도 기계론적 설명을 전제 로 해서 가능하다. 왜냐하면 생명체가 자신의 어떤 특수한 기관을 주로 사용하고 안하는 문제는 의부환경의 압박이 원인이 되어서 결과적으로 그 압력에 잘 적응하기 위하여 用과 不用의 기계론적 반응이 오기 때문 이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이 가설은 다윈의 가설보다 전일보한 접이 있 다. 그 이유는 첫째로 어떤 기관의 用 • 不用울 선택하는 것은 심리적인 요인울 제거하고 성립할 수 없기에 생물의 진화를 심리적 요인과 결부시 켰다는 것이고, 둘째로 동일한 환경에서 동일한 기관의 전화를 설명하는 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베르그송이 라마르크의 가설을 반박 하는 요지는 다음과 같다 . 38 ) 양적인 크기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과 모양이 질적 변화를 수반하는 것은 다르다. 근육오동을 반복하는 사람이 튼튼한 가슴의 근육조직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런 양적인 크기가 연체동물과 척추동물 사이에 있어서 구조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척추동 물이 연체동물보다 보는 기능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보장이 없다. 그 다음 라마르크는 用不用이 유전적으로 후손인 생명체에 변화를 수반 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후천적으로 습득된 성격이 다음 세대에 전 이된다는 것이 생물학적으로 부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죽, 바이스만 We i s m 血운 虹宣 프라스마 le pla sma g er mi na tif의 계속성 가설에 의하여 난자든 정자든 생식세포를 體物質的 세포 les cellules somati qu es9 } 거 의 별도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후천적으로 습득된 성격의 유전은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흔히 성격의 유전 38) 갇은 책, pp. 77~79.
이라는 것은 습관이거나 습관의 결과인 수가 많다. 그렇다면 다음 세대에 이전된 것이 후천적으로 습득된 습관인지, 아니면 습관 이전에 이미 존재 하는 하나의 〈자연적 소질 une ap titud e na t urelle 〉인지 알아봐야 한다. 베르그송은 이 소질이 개체가 지니고 있는 생식세포에 내재해 있는 것으 로 여긴다. 그렇게 볼 때, 두더지는 땅 속에 사는 습관을 지녔기 때문에 장님이 된 것이 아니라, 아마도 두더지의 눈이 위축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두더지가 땅 속에서 스스로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여길 수 있 다. 그런 경우에 두더지가 시력을 상실하는 성향은 두더지으 體物質 le soma 에 의하겨 습득되어지거나 상실되어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생식 세포 le g ermen 에서 생식세포로 이전되어졌다고 보아야 한다고 베르그송 은 말한다전 이렇게 본다면, 베르그송이 든 예시와 같이 무기 敎官의 아 둘이 아버지보다 더 빨리 탁월한 사격술을 익혔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아버지의 名射手의 습관이 아들에게 유전되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 다. 그 경우에 아버지의 생식세포에서 아들의 생식세포로 증가일로에 있 는 〈자연적 성향써 통과될 수 있었고, 원초적인 비약의 결과에 의하여 출발에서 커질 수밖에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베르그송의 입장이 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브라운세까르 Brown -S e q uard 의 실험결과를 원용하고 있다 .40) 브라운세까르의 실험은 꾸 근 구 E 들에게서 有競나 좌골신경을 잘라냄으로써, 꾸 근 F E 둘 les cob- a y es 들이 후손들게게 전달하게 될 간질성 상태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 런데 동일한 좌골친경이나 索狀 신경조직의 손상이 F 근꾸 E 에게 다양한 장애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즉, 구 근 꾸 E 의 후손들이 다양한 형식으로 대물림받았는데, 예컨대 眼球 돌출증이나 발톱의 상실 등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유전의 다양한 경우에도 F근 FE의 생식세포 의에 동물의 體物質 le soma 의 진짜 영향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간혹 알 39) 같은 책, p. 80. 40) 같은 책, p. 81.
콜중독자를 아버지로 둔 아들은 태아 시절에 이미 영향을 받고 형성되기 는 하지만, 그것과 꼭 같은 방식으로는 나타나지 않고 전혀 다른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여튼 베르그송이 이 문 제 를 담구한 끝에 내린 결론은 이른바 습득된 습관이 다음 세대에 선천적 습관으로 굳어지는 것 이 아니며, 유전적 전이는 예의지 하나의 규칙이 아니라는 것이다 . 4 1) 그 렇다면 라마르크의 유전적 전이설도 베르그송의 눈에는 별로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는 셈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베르그송의 전화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미 우리 가 앞에서 암시한 바이지만, 베르그송의 전화론과 다론 생물학자들의 전 화론의 특칭적 차이는 베르그송이 〈다발로 묶은 진화 !'evoluti on en g erbe 〉를 주장함에 반해 생물학적 진화론은 〈일직선상의 진화l' evol _ut i on rec tillig ne 〉를 말함에 있다. 〈다발상태의 진화녔} 베르그송은 다음 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그런데 분화의 진짜 깊은 원인은 생명이 자기 얀너 지니고 있는 원인이다. 왜냐하면 생명은 성향이고, 성향의 본질은 다발로 묶은 모양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발로 묶은 상태는 커지 면서 자신의 비약이 나누게 될 여러 가지 방향을 창조하게 된다.〉 4 2 ) 이상 의 인용만 가지고서, 베르그송이 의도하는 생각이 무엇인지 잘 구체화가 안될 것이다. 보다 잘 알기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베르그송이 예시한 보 기를 원용한다. 작가가 소설을 쓸 때, 그는 그 주인공의 많은 종류의 성 격상 가능성을 미리 생각하지만,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에 작가는 그 주인 훙사게 몇 가지밖에 안되는 성격만 부각시키게 된다.-다른 성격을.그 작 가는 포기할 수밖에 없고, 그 남혼 성격은 다른 작풍을二쓸때 다시 원용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는 베르그송이 시작한 〈다발 상태의 진화〉가 무엇인지 시각화할 수 있다. 그것은 각종의 생명체가 공 통적으로 자신의 뿌리에서 생명의 자발성과 비약을 갖고 있고, 그 비약은 다발처럼 한데 묶여 있다가 자라면서 꽃다발처럼 제각기 다양하게 가지 41) 갇은 책, p. 85. 42) 같은 책, p. 100.
롤 편다는 것이다. 즉, 한 생명을 택한 유기체의 경우를 보면 그도 그 뿌 리에서 다른 유기체와 공통의 생명과 그 비약을 갖고 있었지만, 그 길을 선택하는 바람에 다른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뜻한다. 이와 같은 〈다발상태의 전화只t 두고 쟝께레비츠는 베르그송이 풀로티 누스 Plo ti n 의 〈우주적 니무l' arbre cos miq ue 〉의 영성을 취하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 43) 말할 나위도 없이 나무는 그 뿌리에서 공통적이고 자라면 서 가지가 나누어진다. 나무는 진화의 방향, 생명의 비약의 遠心的 확장 울 상칭하고 있다. 베르그송이 즐겨 쓰는 개념인 〈폭발〉, 〈포탄〉, 〈꽃다 발〉, 〈불꽃〉, 〈다발〉 등의 뉘앙스가 이를 웅변으로 입증한다. 이 모든 개 념들은 생명의 운동괴- 지속의 특칭을 알리는 상칭들이다. 거기에 비하여 〈일직선상의 진화潟} 왜 베르그송은 배격하는가? 〈다발 상태의 진화注근 마치 나뭇가지가 줄기에서 둘로 갈라지다가 또 그 두 가 지가 3, 4, 5 개로 또는 그 이상으로 분화되는 연쇄폭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일직선상의 진화 X 근 한가닥 노선에 의하여 앞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진화 발전한다는 기계론적 설명방식만울 취할 뿐이다. 그런 데 대나무의 마디가 계속 하나로 올라가듯이 전화를 그렇게 생각하면, 연 체동물과 척추동물의 눈 전화과정에서, 어떻게 해서 조그만 변화가 같은 目 l' ordr 려서 생기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비록 기능상에 있어서 시력은 질적인 엄청난 차이를 지니고 있지만, 눈의 해부학적 구조가 거의 유사하 다는 것은 일직선상의 진화로써 설명되지 않는다. 결국 일직선상의 전화 론은 간단한 것이 복잡한 것보다 앞서고 유치한 것이 발달된 것보다 앞 선다는 기계론적 단순성의 사고에 기인한다고 여겨지게 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생명의 전화는 〈역동적 단순성 la sir n p licite d ynamiq ue 〉에 의 햐겨 이해되어야지, 〈기계적 단순성 la sir n p li c i t e mec aniq ue 〉으로 파악 되어서는안된다. 생명 전화의 직접적 발동은 생명 자체가 지니고 있는 내면적 추진력에 서 생긴다. 의적 환경이 전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43) V. Jan kelevit ch , 같은 책, p. 147.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해냐 촉진이냐 하는 보조적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 자체가 전화의 비약을 강렬히 가지지 않으면, 의부 환경이 아무리 바뀌더라도 그 생명은 제자리에서 잠잘 뿐이다. 예컨대 有 孔蟲 類는 실루 리아 紀 이래로 변하지 않았다 한다. 그 사이에 우리 지구를 뒤엎을 만 한 천지개벽과 같은 일이 수차례 벌어졌는데도 그 유공충은 환경의 변화 에 무십한 채로 남아 있었다. 舌狀科 식물은 오늘날에도 古生代 시기 그 대로 지금남아 있다. 이미 앞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동물이나 식물은 그 근원에 있어서 동 일한 생명의 바팅을 갖고 있다. 그 근원에서 분리되어 나오면서, 식물은 不動性 속에서 잠들었고, 동물은 점차로 깨어 있으면서 신경세포를 찾으 러 헤매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최초의 동물은 별로 복집하지 않고 단순한 구조에다 운동의 기능만 갖고 형체도 뚜렷하지 못하였으리라 짐 작된다. 형체가 뚜렷하지 못했기에 미래적 가능성이 그만큼 많아진다. 그 래서 그 동물은 일종의 벌레와 유사하였다고 베르그송은 추측한다 .44) 그 벌레에서부터 극피동물, 연체동물, 절지동물, 척추동물· 등이 파생되었다고 베르그송은주장한다. 하여튼 최초의 동물은 활동하기가 거북스럽고 종종 운동을 마비시킬 수 있는 다소간 뻣뻣한 덮개 속에 갇혀 살았으리라. 연체동물도 오늘날의 것보다 더 심한 조개껍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절지동물은 일반적으 로 딱딱한 갑옷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것이 甲穀類 동물이다. 물고기 도 化石에 의하면 뼈와 같은 덮개로 씌어져 있었다. 이 모든 현상은 유 기체가 아주 물렁물링하여서 서로서로 먹히지 않으려는 생명의 자발적 경향에서 설명되어야 하리라. 자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딱딱한 겉옷이 오히려 안주하는 피난처가 되어서 운동을 방해하고 은근히 정체를 권장 하는 경향을 낳을 수 있다. 식물이 섬유질의 막으로 자신을 둘러싸게 함 으로써 의식을 포기하였던 것같이, 동물도 갑옷의 세계 속에 안주하여 반 수면상태에 영원히 고착된 것이 있다. 극피동물이나 연체동물이 거기에 44) H. Bergs o n, L'evoluti on cria t r i c e , p. 131.
해당된다. 절지동물이나 척추동물도 그런 위협을 받았지만, 안주 속의 정 체를 과감히 뚫고 생명의 가장 높은 형태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고 베르 그송은 전단한다 . 45 ) 물고기는 활동과 자유를- 찾기 위하여 갑옷 뼈의 굴레를 털고 비늘로 대체하였으며, 곤충도 그들의 조상이 입고 있던 갑옷을 벗고 위협에 대처 하기 위하여 날렵한 운동을 얻게 되었다. 〈생명의 전체적 전화에서나, 인 간 사회의 전화에서나 개인적인 목적의 진화에서 가장 큰 성공은 가장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였던 자들에게만 존재하였다.〉 4 6 ) 조금 위에서 극피동물(해삼, 성게, 불가사리, 갯고사리, 갯나리 등), 연 체동물(문어, 낙지, 조개, 달팽이 등), 절지동물(甲穀類, 多足類, 곤충, 거 미류), 그리고 척추동물(물고기, 파충류, 조류, 포유류, 양서류) 중에서 생명의 진화가 비교적 발달된 것이 절지동물과 척추동풍기라고 지적되었 다. 그런데 절지동물의 전화의 정점은 무엇보다도 곤충이고, 곤충 가운데 서도 막시류(膜建類, Hy m enop ter es : 개미과, 풀벌과, 송곳벌과, 말벌과, 잎벌과 등)이고, 척추동물 가운데서 전화의 최고 정접은 말할 나위도 없 이 인간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디움과 같이 생각을 정리한다. 곤충보다 도 본능이 더 발달된 동물이 없고, 특히 곤충 가운데서 막시류가 본능의 정상이다. 그리고 인간보다 지능이 더 발달된 동물이 없다. 그렇다면 동 물세계의 진화는 두 가지 상이한 길, 죽 본능의 길과 지능의 길로 나아 갔다고 볼 수 있다. 본능과 지능은 동물세계 전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칭 이다 .47) 그렇다면 식물과 동물을 공통적으로 가로 누비던 생명의 비약과 충동 속에는 세 가지의 상이한 모습이 구체화되어 나타나 있다. 그것은 〈식물 적 무감각상태 la to rpe ur ve g e t a ti ve 〉와 〈본능 l' i ns ti nc t〉, 그리고 〈지 능l'i n t ell ig ence 〉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일직선싱에서 단계적으로 올 45) 같은 책, pp. 131~133. 46) 같은 책, p. 133. 47) 같은 책, p. 135.
라가는 사다리와 갇은 위계적 등급이 아니라, 베르그송에 의하면 전혀 질 이 다른 것이다. 즉, 폭발된 중심부에서 산화된 불 꽃 처럼 그것들은 다른 방향으로 다발로 폭발된 생명의 세계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대부분 의 자연철학자들이 범하게 된 가장 큰 오류는 식물적 생명, 본능적 생명, 그리고 추리적 생명을 각각 발전하는 동일한 경향의 계속적인 세 단계로 서 간주하여 왔다는 데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들은 자라면서 나누어졌 던 활동성의 상이한 세 가지 방향이다. 그들 사이의 차이는 강도의 차이 도' -c.i 일반적으로 정도의 처이도 아니다. 그 차이는 본성의 차이다.〉 4 H) . 3 본능과 지능의 인식이론 앞 절에서 우리는 본능과 지능은 생명의 진화에 있어서 두 가지 본질 적 차이에 해당함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 절에서 이 문제에 대한 본격적 인 분석에 우리가 접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에 앞에서 암시되어 나왔지 만, 단적으로 말하여서 본능과 지능은 그 각각의 성격상 베르그송이 분류 한 〈역동적 단순성〉과 〈기계적 단순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49) 〈기 계적 단순성〉이란 원인만 알면 결과는 예측하고 계산할 수 있는 지능의 오성적 원칙을 말한다. 그래서 그런 원칙 앞에서는 언제나 동질적인 것이 이질적인 것보다, 추상적인 것이 구체적인 것보다, 정지된 것이 운동적인 것보다 知的 무게를 더 갖게 된다. 반대로 움직이는 것이 정지된 것보다, 의식에 체험되는 것이 추상적으로 ' 추리되는 것보다 더 단순하게 여겨지 는 지대가 있다. 그것이 이른바 〈역동적 단순성〉이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의 운동 메카니즘은 지극히 단순하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도로의 방향에 따라, 또 도로의 교통량에 따라 즉각 핸들을 조작한다. 그가 핸들 울 조작할 때, 〈기계적 단순성〉에 의해서 조각조각 동작을 결정하는 것 48) 같은 책, p. 136. 49) H. Bergs o n. Essai, p. 106.
이 아니다. 〈역동적 단순성〉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마치 자신의 손놀림과 발놀림이 하나인 것같이 행동한다. 그런 행동이 바로 본능이다. 운전자는 운동의 본능에 의해서 운전하지, 지능의 판단에 의하여 운전하지 않는다. 그러면 본능과 지능 곡 폰 전혀 그 출발점에서부터 다른 종류, 다른 차원 의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이미 우리가 그동안 추구하여 온 내 용 자체 속에 이미 포함되어져 있다. 말할 나위 없이 베르그송의 진화론 은 〈일직선상〉의 전화가 아니다. 척추동물에 속하는 포유동물 중에서 그 전화의 구조가 단순한 것에서부터 점차 진화하여서 원숭이가 되고, 원숭 이가 침팬지가 되고, 침팬지가 類人猿이 되고, 유인원이 인간으로 드디어 되는 그런 일직선상의 진화를 베르그송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주장하 는 것은 〈다발 모습의 전화〉로 한꺼번에 생명이 비약적으로 폭발하고 그 생명이 다양하게 폭발된 것에서 또 다양하게 폭발하는 〈포탄〉의 영상이 다. 〈나뭇가지〉의 영상이 거기에 알맞다. 그러나 그 뿌리에서 공통적이 다. 생명의 에너지가 그 뿌리에서 공통적이기에 식물과 동물도 하나의 에 너지 가족임에 틀림업다. 그렇다면 본능과 지능도 저런 생명의 에너지처 럼 한 뿌리에서 자란 상이한 두 가지의 능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척추 동물과 절지동물의 계열에 따라 생명의 비약이 발견하였던 두 가지 커다 란 길 위에서 본능과 지능이 상이한 방향으로 발전하였지만, 먼저 서로서 로 애매하게 덮혀 감추어져 있었다. 첫번째(본능) 전화의 정상에 막시류 의 곤충이 있고, 두번째(지능) 전화의 끝에 인간이 있다.〉 50 ) 그런 점에서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은 이 우주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의 교향곡이라고 ※ 베르그송이 말한 〈i n t e llig ence 〉란 개념은 보통 그동안 〈知性戶]라고 번역되어 왔었는데, 이 책에서는 원칙적으로 〈知有粉이라고 번역하였다. 그 까닭은. 〈지 능泥 7 〈본능i ns ti nc t〉과 대비되는 생명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능沼 7 또한 고도의 오성적 능력으로 나아가기에 〈지성〉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지 능浮} 〈직관 X t 대비할 때는 抽著에서 〈지성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지 능活든 생명의 원초적 한 능력이고、 〈지성 X 는 그 〈지능)o l 논리화한 경우로 이 해하면 좋을것 같다. 50) H. Bergs o n, L'energi e spi rit u e lle, p. 26.
여기는 사상을 담고 있다. 교향곡은 한 악기의 소리만 단조롭게 진행시키 지 않는다. 다양한 여러 가지 악기가 자기 소리를 전개시켜 나가지만 거 기에는 하나의 화음이 있다. 화음은 구분과 통일이 상보성을 이룰 때 생 긴다. 본능과 지능은 서로 구분되지만, 그러나 한 가족의 뿌리에 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 뿌리의 공통성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되돌아갈 수 없는 상실된 낙원과 같다. 왜냐하면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과거로 역행 하는 전화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쟝께레비츠의 표현처럼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통일은 약속이 아니고 오히려 回想〉에 해당한다. 이미 출발점에서 감이 있었던 본능과 지능이 각각 서로 다른 궤도를 밟고 출발하였다. 물론 본능과 지능이 서로 달려온 궤도가 다를지언정, 순수 본능만 지니는 막시류, 순수 지능만 지니는 인간이란 구체적으로 존 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지능적 존재임은 사실이지만, 그 지능이 고장을 일으키는 경우, 본능이 대체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 베르그송이 예시한 바에 따라 생각해보면, 장님으로 태어난 인간에게 눈으로 본다는 것은 의 미가 없다. 시각이 장애를 받은 경우에 촉각이 시각의 망막 역할을 대행 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이때의 촉각은 본능이지만, 그 본능은 지능과 같이 거리감각을 인식하게 된다. 동물의 본능도 거리감각을 전혀 의식하 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물론 지능과 본능이 근본적으로 서로 상이한 인식 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본능도 어느 정도 의식 을 갖고 있는 경우와 무의식에 빠진 경우로 구분된다. 예컨대 식물은 본 능을 갖고 있지만, 본능을 통한 자기 감정을 갖고 있는가는 의심스럽다• 그러나 동물이 전화의 고등단계에 접어들면 들수록 의식이 없는 본능을 생각함은 불가능하다. 이리하여 베르그송은 무의식을 두 가지로 대별한 다. 그 하나는 〈존재치 않는 의식 la conscie n ce nulle 〉이고 또 다른 하 나는 〈폐기된 의식 la conscie n ce annulee 〉이다 .51) 예컨대 낙하하는 돌은 자기 감정이 없기에 〈존재치 않는 의식〉이고, 그러나 직물의 무의식은 〈폐기된 의식〉이다. 그러나 동물의 경우에 그 의식의 강도에 차이가 있지 51 ) H. Bergs o n , L' euoluti on creatr i c e , p. 144.
만, 의식은 있다. 그러나 인간 의식과의 차이점은 인간의식은 表 象的임에 반하여, 동물의 의식은 행동적이라는 데 있다. 동물은 현실적 행동에만 집념되어 있기 때문에 표상의 능력이 막혀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베르그 송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지능은 오히려 의식을 향하여 방 향을 잡고 있고, 본능은 무의식을 향하여 차라리 방향을 취하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52 ) 본능이 무의식적으로 취하는 행동을 예시로서 살펴보자. 베르그송은 곤 충의 기가 막힌 본능적 행동을 많이 예시하고 있지만, 그중의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소개한다. 말의 쇠파리가 말의 어깨나 다리에 자기 알을 깔 때, 그 쇠파리는 자기의 애벌레가 말의 위장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을 알기나 하는 듯이 행동한다. 왜냐하면 말이 자기 몸을- 혀로 핥으면 갓 태어난 애벌레를 소화기관 속으로 옮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의 배설 물과 함께 자란다. 다른 곤충을 마비시키는 막시류는 자기의 희생물을 죽 이지 않고 움직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중추신경이 어디에 있는가를 정확 히 알고서 바로 거기를 쏜다. 이런 행동은 마치 유능·한 곤충학자가 의과 의사의 능력을 겸비한 것처럼 이루어진다. 초시류 곤충(相肖~退類, Coleop - t줍 res : ex 투구벌레 類)은 일종의 안토포라 An t ho p ores 벌이 파놓은 지 하통로 입구에 알을 깐다. 초시류에 속하는 시타리스 S it ar i~ 애벌레는 오랜 기다림 후에 지하동로에서 나오는 숫컷 안토포라 벌을 노린다. 그 벌에 고착된 시스타리스 애벌레는 그 벌이 공중결혼을 할 때까지 거기에 달라붙어 있는다. 벌이 공중결혼을 할 때, 시타리스 애벌레는 숫컷에서 암컷에게로 건너가게 된다. 건너간 다음 조용히 암벌이 알을 깔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다가 알 위로 뛰어내려, 꿀을 먹고 자라는 그 알을 며칠 동안 삼킨다. 남은 알 껍질 위에 자리를 잡고서 그 애벌레는 첫번째 탈 바꿈을 시도한다. 탈바꿈이 된 시타리스 애벌레는 꿀 위에서 자라면서 먹 이의 공급을 받고 번데기로 변하고 드디어 완전한 곤충이 된다. 이 모든 과정은 시타리스의 애벌레가 부화하자마자 안토포라 숫벌이 지하통로에 52) 같은 책, p. 145.
서 나오고 공중결혼을 하고, 그 순간에 암벌 몸으로 옮겼다가 그 암벌이 알을 까자 거기에 내려 꿀을 먹고 자라게 되는 것 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포 베르그송의 표현처럼, 본능으로 알고 있는 곤충들의 인식은 분 명히 〈임임리 i m p l i c it e 〉에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함축적인 인식 la connais s ance i m p li c it e 冷 의식으로 내면화되지 않고 정확한 行 程 으로 의면화되고 있다• 여) 그러면 여기서 주의 깊은 독자들은 어떤 인식상의 혼란을 갖게 될 것 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본능이 무의식으로 향하고, 지능이 의식으로- 향하 려는 운동이라고 앞에서 베르그송에 따라 규정하였는데, 위에서 또 무의 식은 〈존재치 않는 의식〉과 〈폐기된 의식〉으로 이분화되어 돌과 같은 물 질은 〈존재치 않는 의식〉이고 식물은 〈폐기된 의식〉으로 비유되었기 때 문이다• 그리고 동물의 의식이 인간의 표상적 의식이 아니고 비록 행동적 의식이라 하여도, 하동동물과 고등동물 사이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 리가 동물적 의식이라고 일반화할 수 있다면, 본능이 동물적 의식이 아닌 가 하는 문제가 도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동물적 본능은 무의식인가 의 식인가?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베르그송의 이원론적 일원론의 철학적 사고의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생명의 세계에 있어서 본능과 지능은 확실히 질적 으로 서로 구분되지만, 구체적 생명의 표출에서 상호 얽혀 있다. 〈모든 구체적 본능이 지능으로 침두되고 있듯이, 모든 현실적 지능은 본능과 뒤 섞여 있다. 더구나 지능과 본능이 굳어진 정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능 과 본능은 두 가지의 경향이지 이미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55) 그러므로 본능과 지능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상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러므로 앞에서 거론된 예시에서 곤충들이 자신의 할 일을 정확히 알아서 어김없이 실행하는 것은 행동이요, 암암리의 〈함축적 인식〉이다. 〈함축적 53) 갇은 책, pp. 146~147. 54) 갇은 책, p. 147. 55) 같은 책, p. 137.
인식〉이라 함은 명백한 自意識 을 가전 인식은 아니지만, 그것이 하나의 인식인 한에서 〈함축적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함축적 의식으로 행하여지기에, 베르그송의 표현대로 무의식으로 가려는 경향을 보다 진하게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본능과 지능은 결정된 것이 아니고 하나의 각각 다론 〈경향 la t endance 〉이듯이, 의식과 무의식 도 하나의 각각 다른 경향으로 여겨져야 한다. 이제 서로 각각 달리하는 경향을 음미하여 보도록 하자.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가장 주요한 핵심 개념인 지속의 관점에서 보면(그 지속이 의 식의 지속이든 생명의 지속이든), 우리의 지능적 사고와 그것의 일반화의 성격인 知 性 은 생명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약점을 지니게 된 다. 〈우리의 사유는 그 가장 논리적 형식에서 보면 생명의 참다운 본성 울 표상할 수가 없고, 전화 운동의 깊은 의미를 표상할 수 없다. 특정한 상황 속에서 특정한 것에 대하여 행동하기 위하여 생명에 의하여 창조된 논리적 사유는 생명에서 유출된 한 국면인데 어떻게 생명을 포괄할 수 있겠는가?〉 56) 그래서 베르그송이 생각할 때, 지능은 생명을 이해하기보다 다른 것을 설명하기에 더 적합하다• 그러면 그 다른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행동의 요구에 적합하도록 이루어전 〈성향 X t 뜻한다. 생명의 요구가 아니고 행동의 요구에 알맞도 록 만들어진 것이 지능이다. 이마 앞에서 우리는 곤충, 특히 막시류의 경 우에, 그 막시류가 갖고 있는 본능이 모두 행동의 정확성과 기가 막힌 정밀성에 연결되어 있음을 보았다. 그런데 인간은 본능상 다른 동물이나 곤충처럼 그런 절묘한 본능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본능과 다른 지능이 행동의 지침을 계산과 기하학의 기계론에 따라 채워나간다. 그런 점에서 인간 지능은 동물에 바하여 열등한 인간 본능의 힘을 보완하는 다른방식에 해당한다. 그러면 열등한 인간의 본능을 보완하기 위한 지능은 어떤 방식을 택하 고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베르그송의 말을 잠깐 들어보기로 하자. 〈지 56) 같은 책, VI.
능l'i n t el lig enc~ 는 자연상태에서 실천적으로- 유용한 목표만을 겨냥한다. 지능이 운동에 대하여 병렬된 不動의 것을 대체할 때, 지능은 있는 그대 로의 운동을 재구성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지능은 운동을 하나의 실천 적인 等價의 것으로. 단순히 대체한다. 행동을 위하여 만들어진 사유의 방 법을 思辨의 영역으로 옮겨놓을 때, 속는 것은 철학자들이다. ·/… .. 우리 의 지능은 명백히 움직이지 않는 것만을 상상한다.〉 57) 우리가 앞에서 의 식의 지속인 이질적 시간과 동질적인 공간을 비교하였을 때 나타났던 문 제이기는 하지만, 지능은 언제나 동질적인 것으로 모든 생명을 환원시키 려 하는 인간의 능력을 뜻한다. 공간을 기하학이 무수한 동질적 시간과 공간으로 쪼개듯이, 마찬가지로 지능은 생명의 세계를 정지시켜 기하학과 기계론의 원칙에 맞게끔 동질화시켜 마침내 데까르뜨R. Descar t es 가 표 방한 전리의 인식기준인 〈명석함 cla i r 〉과 〈판명함di sti nc t〉으로 생명을 가두어둔다 .58) 인간의 지능은 논리적 지성을 창출한다. 그리하여 〈논리적 지성 X 본 구체적이고 생생한 우리의 지각과 경험에 대체되는 (-AJ-~>둘을 발명한다. 그리하여 상칭들 사이의 연관성이 모든 전리의 대명사처럼 여 겨지게끔 한다. 〈우리들의 논리학은 상칭조작 속에서 우리가 추종해야 할 규칙의 전체다. 이러한 상징이 고착적인 것을 생각하는 데서 파생되듯이, 그리고 고착적인 것 사이에 있는 상칭을 구성하는 규칙이 그것들 사이의 가장 일반적인 관계만을 번역하게 하듯이, 우리들의 논리학은 물체의 고 착성을 대상으로 다루는 과학 속에서, 즉 기하학 속에서 의기양양해전 다.〉 59) 인간의 지능이 논리학적 지성을 창출하였지만, 그런 지성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언제나 유동적인 것을 고착적인 것으로, 생명이 넘치 는 것을 무기력한 것으로 임의화시킬 뿐이다. 그런 지능과 기하학적 과학 적 지성이 생명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면 왜, 그리고 무엇 때문에 지능에 근거한 지성 !'i n t ellec t이 의도적으로 모든 57) 같은 책, p. 156. 58) 같은 책, p. 161 . 59) 같은 책, p. 162.
것을 정태화시키려고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베르그송의 분석을 한번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본디 우리의 지성은 우리의 행동예 유용-한 것만을 취하는 실천적 동기를 지니 고 있는 지능과 다른 것이 아니기에, 지성은 행동에 알맞는 것을 취사선 택하기 위하여 스스로 운동의 바깥에 위치해서 어떤 계획을 짜야 한다. 그런데 그 계획은 움직이는 본질을 지닐 수가 없다 . 왜냐하면 지능이 움 직이는 흐름의 와중에 있으면 스스로 현기증을 느껴 전체 행동의 설계도 를 구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능적 인식으로서의 지성은 자연 히 〈변화 le chan g emen t〉보다는 〈상태 l'et a t ~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베르그송은, 모든 종류의 변화는 세 가지 장르가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즉, 〈질적 변화〉와 〈진화론적 변화〉, 그리고 〈확장적 변화〉 등이다. ti()) 그 가 스스로 제시한 예시를 언급함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질적 변 화 le chang em ent q ual it a tif冷 예컨대 노란색이 녹색으로 변할 때와 녹색이 청색으로 변할 때, 질적인 운동이 달라짐을 뜻한다. 〈전화론적 변 화 le change m ent evolut if~ 꽃이 열매를 맺는 생성과 유충이 번데기 가 되고 이어서 완전한 곤충이 되는 생성과 전화의 운동성격이 각각 다 름을 뜻한다. 〈확장적 변화 le chang em ent ex t ens if)i근 먹고 마시고 하 는 행위와 서로 치고 받고 싸우는 행위가 확장의 운동적 성격에서 각각 다름을 말한다. 그런데 이 각각 세 가지 장르에 속하는 변화와 운동과 생성을 인간의 지능과 언어활동은 일일이 구체적으로 대응할 수가 없고, 복잡다기하여 명석하고 판명하게 인식할 수가 없어서 드디어 〈생성 일 반〉이니 〈운동 일반〉이니 하는 추상적 표상으로 상칭화하고 만다고 보는 것이 베르그송의 입장이다. 베르그송의 비유를 그대로 옮기면, 이런 〈지능의 지성화l'i n t ellec ti on de !'int e l lig e nce~ 〈영화촬영기의 인위적 조작l' ar tifi ce du cin e ma- t o g ra p he 〉과 같다 . 6 1) 촬영기는 사물의 내적 흐름에 참여하지 않고 밖에 60) 같은 책, pp. 303~304. 61) 같은 책 , p. 305.
서 인위적으로 생성을 다시 조작할 뿐이다. 그래서 그는 〈일상적인 우리 인식의 메커니즘은 그 본성에서 영화촬영과 같다〉 62) 고 주장한다. 물론 인간의 지능은 본능과 마찬가지로 선천적이고 유전적 성질을 지 닌다. 본능을 타고 나듯이, 지능도 후천적인 습득의 결과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 난다. 그러나 지능이 인식의 타고난 능력이 기는 하여도, 단번에 특수한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가슴을 찾는 것은,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가슴을 찾는 것은 분명히 본능이지 지능의 결과는 아니다• 그러므로 선천적인 지능의 기능은 어떤 대싱을 선천적으로 인식하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인간 지능이 선천적이라면, 어떤 지적 능력을 구비해야만 한다. 그러면 지능의 선천적 기능은 무엇인가? 베르그송에 의하면 〈지능의 선 천적 기능 X 든 〈관계를 인식하는 선천적 능력〉이다. 여기서 베르그송이 생각하는 지능의 관계 파악의 능력은 미국의 언어 학자 촘스키 N. Chomsk y가 말한 〈언어 생성〉의 이론과 유사하다. 어린 이가 채 말을 다 배우거나 의미를 깨닫기 전이라도 명사에다가 형용사를 붙이는 어른의 말을 관계에서 파악하고 스스로 습득해나간다. 그리고 〈형 용사+명사十동사〉의 관계도 이해한다. 물론 어린이는 개념 파악은 제대 로 못할지언정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형식논리적으로 이해한다. 이런 형 식적 관계 파악의 능력은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젖가슴을 손을 더듬어 찾는 본능과는 다르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본능과 지능이 선천적 인식에 관하여 그것들이 안고 있는 것을 사람들 이 찾는다면, 그 선천적 인식은 본능의 경우에는 사물들에 관계하고, 지 능의 경우에는 관계에 관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3 ) 그래서 지능은 〈인식의 형식적 측면 X t 선천적으로 인지하는 방향성을 갖게 된다. 그런 데 베르그송은 〈내용 la ma ti ere 〉이 없는 〈형식〉만의 인식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분수의 개념을 아는 학생은 분자와 분모의 62) 같은 책, p. 305. 63) 같은 책, p. 149.
숫자를 알기 전에 이미 중간 분할의 선을 머리에 그릴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지능은 그가 지닌 선천적인 것 속에서 하나의 형식을 인식하는 것 이고, 본능은 하나의 내용을 인식하는 것〉 M)이 라고 규정하였다. 이런 규 정은 이어서 〈定 言 的 命題의 인식〉과 〈假 言 的 命題의 인식〉으로 나아-간 다 . 65 ) 전자의 인식은 본능의 것이고, 후자의 인식은 지능의 것이다. 왜냐 하면 본능이 지각을 통하여 어떤 대상에 접하게 되면, 본능은 즉각 그 대상이 어떤 것인가 하는 〈 質料性 X t 알게 된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서 즉각 본능은 상대방의 기분을 직관하고 깨닫는다. 그래서 본능을 〈정 언적 명제의 인식〉과 유사하다고 베르그송은 생각한다. 그러나 지능은 어 떤 특수한 대상의 〈질료성 la ma t er i al it e) 울 알려주기보다, 오히려 〈이 것〉과 〈저것〉과의 관계와 비교롤 추리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것이 그러하면 저것은 이러하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지능 의 기능이다. 그런데 본능이 알려주는 내용의 인식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왜냐하 면 본능은 추상적 사고력보다, 우리의 행동에 유리하냐 아니면 해로우냐 하는 측면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지능은 비록 내용이 없고 공허하여도, 그 관계의 인식을 형식적으로 무한하게 보편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본능은 주로 〈內包〉의 면에, 지능은 주로 〈外延〉의 면에서 그 기능을 각각 발휘한다고 베르그송은 지적한다• 그 두 기능은 각각 제 각기의 제한된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능이 본능보다 인식의 면에서 큰 이점을 지니고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능은 본능과 달 라 현재 행동의 실용성 여부를 초월하여 비록 공허하지만 무한한 대상세 계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능 위에 근거하고 있는 지성은 무한히 〈형식적 사고 X 룹 넓혀 나갈 수 있고, 따라서 추상적 思辨울 계속 해나갈 수 있다 . 66) 지능과 본능의 장단점에 대하여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 64) 같은 책, pp. 149~150. 65) 같은 책, p. 150. 66) 같은 책, p. 152.
은 유명한 말로 그 특성을 밝히고 있다. 〈오직 지능만이 찾을 수 있는 (chercher) 것들이 있지만, 지능만으로 결코 발견하지 (tro uver) 못하는 것들이 있다. 이것들을 본능만이 발견하게 되지만, 그러나 결코 찾지는 못하리라.〉 6 7) 지능은 죽각 〈발견〉하지 못하기에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능의 모색이 가능하기 위하여, 지능은 어떤 도구를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찾 기 위하여, 추리하기 위하여 지능과 그 능력 위에 선 인간의 오성적 지 성은 도구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을 그 특유한, 죽 인간만이 지니 고 있는 특수한 기능에서 정의한다면, 베르그송은 인간을 〈工作人 homo f aber 〉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지능의 근원적 인 행정에서 보면, 지능은 인위적인 대상을 만드는 능력, 특히 도구를 만 드는, 도구를 제작하는 능력, 그리고 무한하게 그 도구의 제작을 다양하 게 변형시키는 능력이다.〉 68 ) 지능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도구를 제 작〉하는 능력과 같다. 그 점에서 『창조적 전화L' evolu ti on crea t r i ce 』 에서 베르그송은 인간을 〈공작인 homo f aber 〉으로 보면서 이른바 종래의 〈智 慧 人 homo sap i ens 〉의 개념을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 창조적 전화』보다 뒤에 출간된 『사유와 운동자 La pe nsee et le mouuan t .JJ 에서 베르그송은 〈공작인〉과 〈지혜인〉의 두 개념을 대립적으로- 보는 것을 지양한다 . 6 9) 그 에 의하면, 〈지혜인 homo sap i ens 〉의 개념은 〈공작인 homo f aber 〉이 도구 제작을 하는 능력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기에 다 함께 짝을 지어 같 이 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그는
지능의 능력 위에선 지성이 〈추상적 형식적 사고〉에 의하여 무한한 대 상들에게까지 연장되는 〈보편성 X t 지니고 있지만, 그 지능의 지성은 어 디까지나 인간의 현실적 행동에 필요한 실용적 지침을 우회적으로 찾기 위한 간접적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동물의 본능은 바록 제한적이지만 정 확하게 행동의 목표물을 찾는데, 인간의 지능은 그런 동물적 본능의 발견 역량에 비하여 미전하기에 본능과 다른 길인 지능에 의하여 본능의 대리 역할을 한다• 〈철학과 과학이 있기 전에도, 지능의 역할은 이미 도구를 제작하는 것이었고, 둘러싸고 있는 물체 위에 우리 신체의 행동을 지도하 는 것이었다. 과학은 이 지능의 노동을 훨씬 멀리 밀고 나갔다 . 그러나 과학이 그 지능의 방향을 바꾸지는 않았다. 과학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로 하여금 물질의 주인이 되게끔 조준하고 있다.〉 70) 그러므로 도구를 제작하 는 지능 위에 서 있는 과학적 지성은 결국 물질을 상대로 우리의 행동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실용성과 다르지 않다. 아무리 추상적 과학이라도 베 르그송의 눈에서 보면 실용과학의 이념에서 멀지 않다 . 그리하여 지성은 〈일반성只t 좋아한다. 왜냐하면 지성은 구체적 행동 에 필요한 법칙과 도식을 찾아야 하기에, 그 사고가 〈일반성〉으로 니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일반성只t 귀히 여기게 되면, 질적 세계의 변화와 변화가 주는 다양성을 무시하고 일반적으로 다 통용되는 동질성 울 자연적으로 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성은 〈동질성只t 구한다. 동질성 을 구하기 위하여 지성은 가급적 대상세계에서 유사한 것만을 본다. 베르 그송에 의하면, 지성에 비쳐진 〈유사성 X 즌 세 가지 종류로 분류된다 . 71 ) 그 세 가지는 각각 〈생물학적 유사성〉, 〈기하학적 유사성〉, 그리고 〈공작 적 유사성〉이다. 〈생물학적 유사성 X 든 〈類 le genre 〉와 〈種l' es p ece 〉에 의하여 생물을 분류하는 방식이고, 〈기하학적 유사성 X 본 가급적 모든 대 상을 수학화하기에 편리하게 정리하는 방식이다. 심리학은 물리학처럼, 화학도 물리학처럼, 그리고 최종적으로 모든 학문을 수학화시켜 나가는 70) H. Bergs o n, La pe nsee et l e mouuant, p. 35. 71) 같은 책, pp. 58~63.
사고방식이다. 마지막으로 〈공작적 유사성 X 존 어떤 모형에 맞게 도구를 만드는 방식이다. 어떤 모형의 표준에 따라 그것을 모방하는 것이 〈공작 적 유사성〉의 원리다. 베르그송이 비판하는 폴리톤의 〈이데아〉 사상도 이 〈공작적 유사성〉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이 플라돈에 대한 베르그 송의 비판의 핵심이다. 지능의 지성이 〈유사성只끝 통하여 〈일반성只춘 추출해내는 것은 곧 다 양하게 변화하여 마지 않는 것에서 불변하고 안정되고 고착적인 것을 인 위적으로 뽑아내서 공통성을 만드는 것과 같다. 그래서 관계를 정립하여 사실둘 사이에 법칙을 만든다. 그 관계가 정확하고 수학화가 되면 될수록 〈지성의 법칙 X 곤 그만큼 완벽해진다. 이것이 지능과 지성의 위대성이고 동시에 최대의 약접이다. 그 약점은 곧 지능과 그 위에 선 과학의 지성 은 생명을 제대로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지능과 지성은 하나 와 여럿이 함께 살아 있는 통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단수와 복수는 전혀 지성의 논리에서는 공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생명의 세계 안에서는 〈하 나〉이면서 동시에 〈여럿〉이 모순됨이 없이 공존한다. 왜냐하면 지능과 지성은 기계론적 사고를 지니고 있지만, 생명은 〈유기체적 전체성只t 지 니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유기체적 전체성 안에서 지성이 좋아하는 단 절은 없다. 이 우주의 생명적 실재는 나누어지지 않는 전체적 성장이다. 이 우주의 생명적 실재는 끝없이 지속하면서 동시에 다양하게 폭발한다. 이런 생명의 지속과 흐름을 지능과 지능의 과학적 사고인 지성은 이해하 지 못한다. 그러나 본능은 그런 생명의 흐름을 이해한다. 이것이 베르그송의 입장 이다. 〈지능이 모든 것을 기계론적으로 취급함에 반하여, 본능은 말하자 면 유기체적으로 나아간다. 만약에 본능 속에 점들어 있는 의식이 깨어나 고 본능이 행동으로 외면화하는 대신 내면화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 본 능에 대하여 질문을 던질 수 있고 그 본능이 대답할 수 있다면, 그 본능 은 우리에게 생명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교부하여주리라.〉 72 ) 아무튼 본능 72) H. Bergs o n, L'euoluti on creat ri c e , p. 166.
은 생명 그 자체에 가까이 있다. 본능은 〈생명의 비약〉과 다르지 않다. 생명이 〈유기체적 전체 la to ta l it e or g a niq ue 〉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면 생명에 가장 가까이 가 있는 본능이 왜 유기체적 전체를 구성하 고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예시가 추상적 설명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고 느낀다 回 하나의 생명체 속에 수천 개의 세포들이 더불어 하나의 공동 목표를 향하여 일하고 있음을 볼 때, 그리고 그 수천 개의 세포가 일을 서로 나누어서 각자가 자기자신과 동시에 남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 고 서로 보존하고 서로 키우고 서로 위협에 대처하여 공동방어를 구성하 고 있는 것을 보면, 본능이 지니는 생생한 생명의 화음과 율동을 누구든 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벌이 벌집에서 하나의 유기체적 전체 의 구성 세포가 되어서 조직적으로 생활해나가는 것을 보면, 생명체 속의 세포나 벌집 속의 벌이나 모두 디론 것들과 함께 분해되지 않는 유기체 를 형성하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그런 유기화의 일을 본능이 지시하고 있다. 위의 예시가 암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곤충들의 본능도 그들의 생존을 위한 행동으로 집약되고 있다. 그렇다면 지능도 인간으로 하여금 행동에 필요한 실용성을 팀구하는 기능으로- 이해되는데, 본능과 지능은 결국 행 동상의 요구에서 만나는 셈이 된다. 그런 점에서 〈본능沖]나 〈지능 X 든 인간의 정신적 본성의 표현인 〈직관〉과 달리 오로지 행동상의 실용성 제 조에 공통적으로 모여전다. 그러나 본능과 지능은 같은 목표를 두고 있지 만, 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의 성질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 다름은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한 가지는 이미 우리가 앞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본 능이 비교적 무의식적인 경향을 갖고 목표를 〈발견〉하는 반면, 지능은 비교적 의식적인 경향을 갖고 목표를 〈모색〉하는 데 있다. 죽, 무의식적 발견과 의식적 모색과의 차이다. 그 둘째의 차이점은 본능이 이미 이루어 전 유기체적 도구를 이용하거나 구성함에 반하여, 지능은 유기화가 안된 것들을 모아서 도구로서 제조하거나 이용하는 능력이라는 점이다 . 7 4) 구체 73) 같은 책, pp. 167.
적 예를 들어 설명하면, 말의 쇠파리가 말의 어깨나 다리에 알을 까서 말의 혀를 통하여 말 소화기관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나, 또는 초시류과에 속하는 시타리스가 애벌레를 안토포라 지하벌집 통로에 까서 숫벌과 암 벌을 각각 이용하는 행동은 이미 이루어전 유기체를 도구로 이용하는 보 기다. 그러나 지능이 기계를 만들고 이용하는 것은 막시류나 초시류의 곤 충이 다론 유기체를 이용하는 것과 다르다. 이처럼 막시류나 초시류의 곤충이 지니고 있는 본능을 생각하면, 그 곤충들은 자기의 생명보존을 위하여 그 희생자와 어떤 생명적 共鳴이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죽, 베르그송의 표현처럼 두 개 의 유기체가 따로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마치 두 가지 활동성이 서로 호흡일치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본능은 곧 共感 la s ymp a thi e 〉이라고 규정하였다 . 75 ) 이 본능이 지니고 있는 〈공감현상〉에 대하여 그것이 〈직관l'i n t u iti on 〉의 그것과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 장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 는생략하기로한다. 앙드레 로비네 A. Rob i ne t는 그의 『베르그송 』 에서 베르그송이 생각하 고 있는 본능은 무엇보다 하나의 〈공감〉이라는 점에서, 미래를 내다 보 는, 죽 〈점치는 공감 la sy m p a th ie d i v i na t r i ce )o]라는 점에 매우 가깝 다고 해설하고 있다 .76) 마찬가지로 쟝께레비츠도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생각을 정리하여 보자. 본능이 어김없이 정확하게 자기 행동 울 결행하여 나갈 때, 인간의 지능처럼 오성적인 도식이 있어서 거기에 맞추어 미리 계획을 짠 것도 아니고, 알기 위하여 더듬어 파악한 것도 아니다. 쟝께레비츠의 말처럼, 본능은 〈정신감응 la t ele p a t h i e 〉에 의하여 알거나 또는 〈예언자적 영감 le delir e p ro p he tiq ue 〉에 의하여 안다 .77) 74) 같은 책, pp. 141 . 75) 같은 책, pp. 177. 76) A. Robin e t, Berg s on, p 123. 77) V. Ja nkelevit cb , 같은 책, p. 156.
새가 아직도 없는 새끼를 위하여 미리 둥지 를 짓고, 거미가 먹이를 사로 잡기 위하여 거미줄을 친다• 이 모든 것은 〈영감〉의 소산이지, 숙고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놓는 것이 아니다. 이런 현상을 쟝께레비츠는 〈본능적 예언 le pro p h eti sm e i ns ti nc tif〉이라고 불렀고, 〈과학적 예견 la pre vi- sio n sc i en tifiq ue 〉과 구분하였다. 천문학자가 일식과 월식을 예견하고, 기상학자가 내일의 날씨를 예보함은 어떤 객관적 데이타에 근거해서 시 간의 밖에 서서 전단하는 것이다• 즉, 그 과학지들은 지속으로서의 시간 과 무관하다 . 그러나 철새가 때가 오면 딴 곳으로 이동하는 준비를 하고, 애벌레가 성충이 되는 것은 생명의 지속 밖에서 데이타에 의하여 미래를 조립하는 것이 아니다• 이 동물들은· 지속적인 생명의 흐름에서 자신의 미 래를 아는 것이다. 마치 즉흥연주가가 연주의 흐름을 타면서 그의 미래가 그에게 현재화되어 오는 것과 같은 뜻에서 동물의 본능도- 〈점치기〉의 일 종이다. 미래는 현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현재의 흐름 , 자신의 현 재 안에 있다. 이런 현상이 〈본능적 예언〉이다. 그러나 로비네가 잘 지적 하였듯이, 〈본능적 예언 X 는 〈열려 있지 않고〉 〈딛혀 있다〉. 〈본능적 공 감沃든 그 본능에게 제시된 정확한 대상과 무의식적 자율운동의 틀을 넘 지 못한다 向 그렇기 때문에 동물적 본능은 유기화가 안된, 조직화가 안 된, 자연 그대로의 자료를 결코 도구로 가공할 줄 모른다. 그래서 본능은 베르그송의 바유대로 〈몽유병 상태〉처럼 움직일 뿐이다. 본능은 직관과 달리 〈몽유병 상태〉에서 정확히 예언하는 특성을 지니 고 있기 때문에 상황의 급격한 변동이 오면, 그만 무력해지고 만다. 문제 해결을 응용해서 찾는 능력을 상실한다. 쟝께레비츠의 표현대로 본능은 〈꿰뚫어 보는 비전 une vis i o n per <;ant e> ½ 가졌지만, 그 범위가 매우 좁다. 본능은 역설적으로 표현하여 〈맹목적이지만 명쾌한 aveu g lemen t luc ide > 데를 갖고 있다. 쟝께레비츠의 정곡을 찌른 표현처럼 본능의 한 계는 〈貝 0 自的l' en -s o i〉이며, 결코 〈對自的 le p our -s o i〉인 요소를 모른다 는 데 있다 . 79 ) 78) A. Robin e t, 같은 책, pp. 123~134.
79) V. Ja nke1evit ch, 같은 책, p. 160.
본능은 지능과 달라 생명의 흐름 안에서 바록 제한적이지만 생명과 호 흡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본능은 직관과 같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고 지능과 성질을 달리한다. 오히려 지능은 생명보다 물질을 가끼이한 다. 모든 지성은 물질의 관리를 다루기 때문에 베르그송에 있어서 〈지성 의 형이상학 X 끈 곧 〈물질의 형이상학〉만큼 이해되지 않는 년센스에 속한 다. 4 기계론과 목적론을 넘어서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베르그송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였다면, 그의 철학의 핵심은 〈지속 la duree 〉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속의 흐름은 의 식의 내면세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우주적 세계에까지 확 장되고 있다. 따라서 베르그송 철학을 독창적으로 지탱시켜주는 것은 곧 〈지속)o]다. 이 지속의 흐름을 타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의식의 내면세 계는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비결정론의 이율배반을 넘어서 있다. 이 점을 이미 우리가 제 2 장에서 살펴보았다. 마찬가지로 베르그송의 흐름을 타고 있는 입장에서, 생명의 우주적 세계는 〈기계론 le mecan i sme 〉과 〈목적론 le fi na li sme 冷 넘어서 있다. 그러면 왜 베르그송이 〈기계론〉과 〈목적론 X t 넘어선 생명의 흐름을 생각하고 있는가? 베르그송 곁에서 베르그송의 생각을 음미해보자. 베르 그송에 의하면, 기계론과 목적론의 오류가 생기는 원인은 우리가 생명의 자연적 흐름을 설명하기 위하여 인간의 지능에 전폭적으로 그 설명을 맡 기기 때문에 온다. 우리의 지능이 발동되는 것은 본능의 힘이 미약한 인 간에게 〈행동의 지침서녔卜 구하기 위해서다. 그런 〈행동의 지침서〉라는 것은 인간이 생존하고 생활하기 위한 필요 그 자체다. 그런 행동지침서에 서 보면, 명상하고 사변하는 것은 하나의 잉여적 사치에 불과해 보인다.
좌우간 지능은 행동의 지침서를 만드는 것이 목적인데, 그러기 위하여 지 침서는 행동을 법칙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어떤 목적도 겨냥해두어야 한다. 행동의 법칙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 하여 인과법칙이 필요한데, 행동예 가장 필요한 인과율은 말할 나위 없이 〈動力因 la cause e ffi c i en t e 〉이다. 왜냐하면 동력인은 기계적인 인과율을 가장 충실히 지키기 때문이다. 이런 동력인이 더욱 수량화하면 할수록, 그 동력인은 하나의 모형으로 굳어진다. 또 다론 한편으로 미래를 예견하 기 위하여 행동이 목적 설정을 해야 하는데, 여기서 필요한 것이 〈目的 因 la cause fi nale 〉이다. 이런 지능의 과학화로서의 지성이 기계론과 목 적론을 토대로 하여 자연의 생명세계를 설명할 때, 때로는 수학법칙에 의 하여 지배되는 거대한 기계로 자연의 생명세계를 생각하는가 하면, 또 때 로는 자연의 생명세계를 어떤 목적으로 향하여 움직이는 것으로 구도화 한다. 그러므로 기계론이나 목적론이나 다 같이, 그 취지는 다르지만 발 생의 동기에서 생명의 흐름을 지성화하려고 하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고 베르그송은 추정한다. 베르그송의 눈에서 보면, 〈기계론 X 본 〈회고적 환상〉에 빠진 오류고, 〈목적론活든 〈전미래저 신기루〉에 빠진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 두 개념은 이미 제 2 장에서 설명되었기 때문에 반복은 하지 않기로 한 다. 말하자면 〈회고적 환상!'i llus i on retr o spe cti ve ). g. 현재분사적 흐름 울 과거분사적 원인에 의하여 나타난 결과로 보려 하는 입장이고, 〈전미 래적 신기루 le mi ra ge du futur an t er i eur )i:근 〈예견할 수 없는i m p re vis i b le> 미래를 현재에서 미래완료적으로 종결시키는 사고를 뜻한다. 여 기서 한 번 더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베르그송이 말한 미래의 不可豫見 은 〈豫言不可 non - p ro p he ti san t〉라는 것과 다르다는 점이다. 이 점은 이 미 앞절에서 설명되었기에 더 이상 재론하지 않겠다. 한마디로 표현하자 면, 〈기계론〉이나 〈목적론沼 7 생명의 현재진행형인 〈되어지고 있음 le-se fai san t冷무시하고 모두 생명을 〈이미 이루어전 것 le -d ej a- fait〉으로 여기는 착각을 범하였다는 것이 베르그송의 관점이다. 기계론은 현재의
생명이 과거의 원인에서 기계적으로 이미 유출된 것으로 착각하고, 목적 론은 생명의 미래도 현재의 시점에서 이미 형성되어서 존재하게 될 것으 로 보고 있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요컨대 기계론 적 인과율의 엄격한 적용과 마찬가지로 목적론적 인과율의 엄격한 적용 은 ‘모든 것이 주어져 있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이 두 원리는 그들의 두 가지 언어 속에서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두 가지는 동 일한 필요에 응답하기 때문이다•〉 80) 기계론이든 목적론이든 그 사고의 방향이 과거지향이냐 미래지향이냐 하는 차이점만 가지고 있을 뿐, 그 기본 논리는 지능이 좋아하는 기계론 적 설명에서 다 같이 벗어나지 않는다. 〈기계론적 설명의 본질은 미래와 과거를, 현재를 함수로 하여 계산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따라 서 모든 것이 주어져 있다고 주장함에 있다. 이런 가정 안에서 과거, 현 재와 미래는 계산을 수행할 수 있는 초인적인 지능에 대해서는 단번에 보일 수 있으리라. 또한 기계론적 설명의 완전한 객관성과 보편성을 믿었 던 학자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런 類의 가정을 해왔다.〉 8 1) 그런 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목적론은 기계론과 전혀 다른 영역, 과학적 사 고가 아니고 형이상학적 사고에 해당된다고 여기고 있다. 베르그송은 이 런 사고의 허상을 지적한다. 예컨대 목적론의 대표자가 라이프니츠 Le i b ni z 인데, 그는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이미 그려진 프로그램에 따라서 자기의 일을 해나간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주장이 옳다면 우주에서 새로 운 창조나 발명도 없고 〈不可豫見的〉인 어떤 것도 없다는 뜻이 된다. 이 미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다면 시간도 무의미해전다 .8 2 ) 〈이렇게 이해한다 면, 목적론은 뒤집혀진 기계론에 불과하다. 목적론은 … … 우리를 인도한 다고 하는 빛을, 우리 뒤에 두는 대신에 우리 앞에 두고 있다. 목적론은 미래의 奉引울 과거의 추전력에 대신시키고 있다.〉 83) 80) H. Bergs o n, L'euoluti on creatr i c e , p. 46. 81) 갇은 책, p. 38. 82) 같은 책, p. 39.
베르그송이 지적한 이런 설명을 숙고해보면, 〈기계론〉이나 〈목적론 X 는 다 함께 〈생명의 비약났t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생명이 스스로 자신의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비약하려는 의지와 원 인의 개념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비약l' elan>-€:- 생명의 운동과 흐름 내 부에 있는 자유에너지 자체다. 거기에 비하여 원인의 개념은 운동의 바깥 에 서서 그 운동을 이분화시켜 추전력의 원인과 결과로 나눈다. 그러므로 비약은 생명 자체의 것이지만, 원인은 인간의 지능이 바리본 생명의 허상 적 분석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기계론과 목적론은 생명의 자유를 인정 하지 않는 셈이다. 기계론이 생명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것에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계론은 우리가 기계를 제작할 때의 과정을 생각하면, 기계가 스스로 자기의 기능을 완성시켜나가는 것이 아니라, 안 간의 지능과 손이 기계의 무속풍늘을 조립해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 적론은 기계분해나 조립과 다르기 때문에 자유가 인정된다고 상상하기 쉽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철학적 사유에서 보면, 목적론도 자유를- 철저히 배제한다. 베르그송에 따라 예시를 들면, 변호사와 목사는 미리 죄인의 벌을 감하고, 신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목적을 가전 직업이 다. 그런 직업을 가진 변호사와 목사가 사고의 직업적 자유를 갖고 있다 고주장할수없다. 그런 점에서 생명의 비약은 전혀 기계론과 목적론의 두 양식을 넘어서 있다. 생명을 다른 차원에서 생긱해야 한다. 생명을 조각 조각으로 분해 하면 생명의 세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생명은 엄청나게 복잡한 구조 를 지니면서도 그 기능은 한없이 단순하다. 이런 생명의 신비롤 분석적으 로 이해함은 시체와 생명체가 같다고 하는 것과 같다• 운전대를 잡고 길 울 따라 운전하는 사람에게 그 손발의 동작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분해되 어 있지 않다. 그가 갑자기 자기의 운전동작이 분해되어 있다고 느낄 때, 그는 운전을 하지 못하거나 사고를 일으킨다. 생명은 〈유기적 전체〉로서 흐르지만, 지능적 사고로서의 지성은 〈제 83) 같은 책, pp. 39~40.
조〉와 〈조립 X t 할 뿐이다. 〈제조는 주변에서 중심으로, 또는 철학자들이 말하였듯이, 多祿에서 하나로 간다. 반대로 유기화의 일은 중심에서부터 주변으로 간다. 유기화의 일은 수학의 점과 같은 한 점에서 시작한다. 그 래서 그 점 주위로부터 점차 확장되면서 가는 동심원의 파문으로서 전파 된다. 제조의 일은 더 많은 양의 물질을 처분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유 효하다. 그 일은 집중과 압축으로 니아가지만, 유기화의 행위는 폭발적인 어떤 것을 갖고 있다.〉 84) 생명은 내면적 선율이요 흐름이다. 음악회에 가서 연주되는 음악의 선 율을 타면서 같이 흐르는 의식과 밖에서 음악회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사 람의 의식이 같을 수가 없다. 베르그송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음악의 선 율을 탄 사람의 의식은 〈進化〉요, 밖에서 기다린 사람의 의식은 〈展開 le deroulemen t〉다 .85) 밖에서 기다린 사람은 시간을 토막 토막을 내어서 계 산한 사람이다. 그러나 전화의 시간을 함께 한 사람은 그의 의식이 수많 은 악기의 소리를 들었지만 그 소리들이 갈래갈래 찢어진 것이 아니고, 가장 단순하게 둘려지는 것을 체험하였을 것이다. 이 음악처럼 자연도 수 많은 생명을 다양하게 변화시키지만, 그러나 그 자연은 해부학적 지식도 없이 하나의 유기체로 자신을 지속시키고 있다. 괴테 Goe t he 의 말처럼 〈유기체는 우리에게 참으로 필연적이면서 자연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왜 냐하면 오칙 그 유기체만이 기능의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단순성과 물 질의 무한한 복잡성 사이에 존재하는 화해의 완전한 성공을 표싱하기 때 문 0] 다〉 .86) 그런데 베르그송은 그의 철학저술들 가운데서 특이한 저술을 하나 남 겼다. 그 저술이 『웃음 Le r ir e 』이라는 별로 두껍지 않는 책이다. 그러나 이 『웃음』의 小冊은 생명철학과 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생명은 지극히 단순하고 그러면서도 어색하지 않게 자연스런 84) 같은 책, p. 93. 85) H. Bergs on, La pe nsee et le mouvant, p. 11. 86) V. Jan ke1evit ch , 갇은 책, pp. 143~144 에서 재인용.
것인데, 인위적인 기계성이 생명을 가장하게 될 때 웃음이 터지고 코메디 가 시작한다고 베르그송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희극적인 것은 정신적인 의식의 질서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희극은 행동처럼 무의식적 인 것이어야 한다. 〈……웃기는 인물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그렇다는 것 울 모르는 한에서 희극적이다. 코믹한 것은 무의식적이다.〉 R i) 우리가 이 미 앞에서 살펴본 것같이, 기억이 순수 추억의 방향으로 가면 갈수록, 그 추억은 개성이 강하다고 지적하였다• 반면에 기억이 지각적 행동의 방향 에 접근할수록, 그것이 〈일반성〉과 〈익명성 X 卜 노출한다고 지적되었다. 이와 같은 베르그송의 생각이 〈웃음 》 〉의 분석에서도 나타나 있다. 그가 지적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희곡작품이 고유명사(예 : Hamlet, Ot he llo 등)의 이름을 갖지 않고 보통명사(예 : L'Avare, le J oueur) 의 이름을 갖고 있음도 예사롭게 넘길 일은 아닌 것 같다 .~ 8) 비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하는 비극의 주인공의 얼굴은 그의 영혼 속에 복잡하게 움직이고 있는 갈등과 슬픔, 분노 등이 뒤범벅이 되어 정확하게 그 모습을 단색으로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나 희극적인 얼굴의 표정은 비 극적 얼굴에 비하여 훨씬 단색적이다. 찌푸린 얼굴로 굳어전 모습은 사람 들을 웃게 한다. 〈바로 그런 까닭으로 한 얼굴이 단순하고 기계적인 행 동의 관념을 더 잘 암시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웃기게 된다. …… 자율운 동, 굳어짐, 찌그러져 있고 펴지지 않는 주름 등 바로 거기에서 어떤 인 상이 우리를 웃게 한다.〉 89 ) 그런 점에서 굳어전 얼굴이 찌그러져 형체의 변화를 수반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폭소롤 연발하게 된다. 군대 에서 제식훈련을 받는데, 다들 절도 있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두 발과 두 팔의 동작을 반대로 하면서 진행한다. 그런데 그중에 유독 어느 한 훈련 병이 너무 긴장한 나머지 몸의 동작이 굳어져 두 발과 두 팔의 운동을 평행으로 하면서 걷는 경우가 생간다면,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87) H. Bergs o n, Le rire , p. 13. 88) 갇은 책, p. 12. 89) 갇은 책, p. 19.
자아내게 한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몸의 율동이 기계적 단순성에 젖을 때 웃음이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정상적인 걸음은 자연스럽고 단순하다. 그 러나 이때의 단순성은 〈기계적 단순성〉이 아니라, 〈역동적 단순성〉이다. 그러므로 웃음은 〈추함〉에서 온다기보다 오히려 〈굳음〉에서 온다고 보아 야 하리라 . 90 ) 더구나 무대에서 한두 사람이 굳어전 기계적 동작을 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굳어진 기계적 동작을 할 때가 더 우습다• 다수가 한꺼번에 어색한 동작을 같이 반복함은 기계성의 일반원칙에 어 울리는 일도 되려니와 그만큼 익명성을 더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회국배우의 복장도 어색하다. 유명한 희극배우 채플린의 복장은 작은 상의에다가 체구에 걸맞지 않는 헐렁한 바지와 낡아서 입을 벌린 보트 같은 구두로서 상칭되고 있다. 이미 그 복장 자체가 전지함과 드라마틱한 요소를 배재하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희극배우의 화장은 붉고 검은 색을 칠해서 살과 구분케 하고 있다. 그런 화장법도 어색한 인위성을 나 타내고 있다. 모든 기계성은 반복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기계는 동작을 반복한다. 희극배우도 어리석은 반복을 고집스럽게 되풀이한다. 실패해도 희극배우 는 무대 위에서 계속 반복하기를 고집한다. 그 반복하는 고집이 우리를 웃게 한다. 사림이면서도 사람 같지 않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기 때문이 다. 여기서 베르그송이 제시한 예시를 든다. 내가 우연히 길가에서 오래 간만에 옛 친구를 만났다고 가정해보자. 이 사실은 전혀 웃을 일이 아니 다. 그러나 같은 날 우연하 그 친구를 여러 번 상봉하게 되었다면, 이 사 실은 분명히 웃을 일이다. 이처럼 반복은 우리를 웃게 만든다. 그래서 〈반복은 고전 희곡에서 즐겨 이용한 방법이다.〉 91) 이처럼 〈반복 X 는 인간의 행동을 〈자율운동l' au t oma ti sme 〉으로 보이 게끔 하고, 그 자율운동은 인간을 기계인간으로 여기게끔 해준다. 기계인 간은 그가 하는 일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무의지적으로 행동을 반복한다. 90) 같은 책, p. 22. 91) 갇은 책, p. 93.
행동의 희극성이 나타나는 것으로- 우리가 언급한 〈굳어짐 la raid e ur>, 〈반복적 자율운동I' au t oma ti sme repe ti tif> 이의에 〈실수 la dis t r a c- tion > , 〈비사회성 I'ins ocia b il it e> 등 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베르그송의 희극론을 전부 다 구석구석 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단지 생명의 기계 화와 관계되는 측면에서만 희극성을 논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희극 배우의 몸짓은 〈행동I' ac ti on 〉이 아니고 〈제스추어 le g es t e 〉에 해당한 다. 〈행동은 원해전 것이고 어떤 경우에도 의식적인 것이지만, 제스추어 는 의식으로부터 새어나간 것이고, 자동적이다. 행동 속에서 나타나는 것 은 개인의 모든 것이다. 제스추어 속에서 개인으로부터 분리된 한 부분이 모르는 사이에 또는 적어도 전체적 개성에서 떨어져 표현된다.〉 92)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평소에 인격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품위를 풍기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벼락 출세를 하였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람이 전에 안하던 버릇인 목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갑자기 무겁게 억지로 깔면서 남을 대 하고 있다고 가상해보자. 그의 그런 느닷없는 짓은 분명히 자연스런 행동 이 아니고 어떤 어색한 제스추어다. 이 제스추어가 사람들로 하여금 실소 를금치 못하게 한다. 희극적인 것은 생명의 리듬을 타지 않고 밖에서 관찰하는 자에게 비추 어진다. 희극은 그냥 〈구경하는 것〉이지 〈침여하는 것〉이 아니다. 비극은 거기에 있는 관객을 그 비국의 무대 위의 흐름에 끌어들인다. 그러나 희 극의 관객은 무대 밖에 서서 무대를 관찰하며 응시한다. 비극은 인간의 〈가슴〉에 와 닿지만, 희극은 인간의 〈지능〉에 말을 건넨다 . 〈회국적인 것 은 순수 지능에 말을 건넨다. 웃음은 감동과 결코 짝하지 않는다.〉 9 3 ) 지 금까지 우리는 베르그송의 희극론의 일부분만을 管見하였다. 우리의 목적 은 이미 언급되었듯이 그의 희국론을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행동이 기계적 동작으로 변하였을 때, 죽 생명이 〈역동적 단순성只t 잃고 〈기계 적 단순성〉에 빠졌을 때, 희극과 웃음이 발생하게 되는 측면만 고려하였 92) 갇은 책, pp. 110~111 . 93) 갇은 책, p. 106.
다. 웃음은 생명의 자연스런 흐름이 중단된 상태가 주는 파격성에서 온 다. 자연스런 것에는 웃음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이 베르그송의 관점이다. 즉, 생명에서 非생명적인 기계성을 볼 때, 희극이 발생한다. 이제 우리는 제筑。낼广 끝낼 차례가 왔다.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은 모든 생명체가 생명의 전진과 물질의 落下 사이에서 어떤 균형과 타협을 찾은 결과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생명체는 물질의 타성과 무기력에 대한 비약 의 승리와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인간은 그런 생명의 비약과 전화의 정점이다. 인간은 생명의 흐름이 성공한 하나 의 예시다. 인간은 다른 동물이 가지지 못한 자유를- 구가하고 있다• 메이 에르의 지적처럼 인간과 함께 〈새로운 왕국.〉이 도래하고 있다 . 9 4) 인간은 단지 완성된 동물만이 아니다. 인간은 생명 자체고 생명의 의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개인의 차원에서나 인류 전체의 치원에서 인간은 생명의 품위를 잊어서는 안되고 그가 스스로 계발시킨 정신적 가 치를 무시해서는 안됨을 뜻한다. 94) F. Meye r , 갇은 책, p. 55.
제花강 직관과 정신의 형이상학 1 직관이란 무엇인가? 베르그송은 『물질과 기억』을 저술하던 시절에 이미 〈물질의 延長性〉과 〈정신의 非延長性〉, 〈물질의 量 〉과 〈정신의 質〉, 〈물질의 필연성〉과 〈정 신의 자유녔} 대비하여 놓았다. 물론 그 대비는 절대적 이원론이 아니고, 상호 상관성도 지니고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베르그송에 있어 서 정신의 개념은 오직 인간만의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정신과 의 식과 기억과, 그리고 생명은 상호교환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동물과 식물 은 생명의 유기체라는 점에서 다 생명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원론적으로 의식과 정신도 향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동식물은 그 내부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차이가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에 비하여 물질의 법칙에 보다 많이 종속되어 있어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정신»]나 또는 〈참 자는 정신〉, 〈마바상태에 있는 정신〉, 〈몽유병에서 헤매는 정신〉 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칙 인간만이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정신 과 의식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앞 장에서 그 우주 적 생명의 정신이 인간에게는 〈지능〉의 방향으로, 그리고 동물, 특히 막 시류 H ym eno pt eres 의 곤충에게는 〈본능〉의 방향으로 나타나게 되었음 울 설명하였다. 인간의 지능이나 개미의 본능이나 다 갇이 환경에 대한 그들의 적응을 보장받기 위한 생명의 표현임에는 틀림없다 . 그러나 벌이
나 개미의 본능은 환경에 적응하되, 환경의 흐름 밖에서 구경하고 그것을 과학적으로 안식하여 행동에 옮기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자기 생명을 한 몸으로 하여, 즉 〈공감적 일체감只t 형성하여 생존함이 지능과 다르다. 본능은 자연환경과 하나가 되지만, 지능은 자연환경의 지배자요 주인으로 군림한다. 그러므로 지능은 인간이 행동하여 살아가기 위한 도구적 지성 과 실용적, 효용적 지성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베르그송의 눈에 비천 지 능과 그것의 과학적 기술적 발현인 지성은 현실생활의 효용성만 생각하 기에 〈이해관계를 떠난 인식 la connais s ance des i n t eresse) 울 주장할 수가 없다. 형이상학이 이해관계를 떠난 초탈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 면, 그 형이상학은 지성에 의하여 결코 추구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그러나 정확하든 애매하든간에 지능은 정신이 물질에 기울이는 주의다. 그렇다면 정신이 자기자신에게로 되돌아울 때 어떻게 정신은 지능이 되 는가? ……우리는 그런 정신울 직관이라고 부른다. 직관은 대상으로서의 물질에 고정되어 있는 정신에 비하여 자기자신에게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정신의 주의력이다.〉 1) 단적으로 말하여 〈직관!'i n t u iti on>{ 픈 〈정신 에 의한 정신의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직관으로 번역되고 있는 불어 〈i n t u iti on>{ 는 라틴어로 동사인
기억과 정신의 본질을 결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능은 그 속성상 언제나 현재진행형으로 흐르고 있는 정신을 밖에서 파악할 수밖 에 없기에, 그 흐름의 운동을 不動의 위치와 점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운동은 점의 무한한 연속으로 계산된다. 미적분이 그것이다. 그래서 지능은 운동의 연속을 불연속으로기 변화의 질적 탈바꿈을 양적인 크기의 변화로만 생각하려고 하기에 운동의 생성 자체를 그 자체대로 이 해하지 못한다. 그런 접에서 인간정신에 있어서 지능과 직관은 근본적으 로 질을 달리하는 셈이 된다. 베르그송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철학자들은 겉으로 비천 그들 생각의 다양회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을 인식함에 있어 근본적으로 상이 한 두 가지 양식을 구별하는 데 동의하리라 믿는다. 하나의 양식은 사람 들이 그 어떤 것 주위로 맴돌고 있음을- 뜻하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어떤 것 속으로 들어감을 뜻한다• 첫째의 양식은 사람이 서 있는 관점과 자신 울 표현하는 상징들에 의존하고 있다. 두번째의 양식은 스스로 어떤 관점 을 취하지 않고, 어떤 상칭에도 근거하지 않는다. 첫번째의 인식에 대하 여 그 인식은 상대적인 것에 얽매여 있다고 말할 수 있고, 두번째의 인 식에 대하여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인식은 절대적인 것에 도달하게 된다 는 것이다.〉 2) 여기서 베르그송이 말하는 〈절대적인 것 I' absolu )o]란 무 엇을 말함인가? 지금 내가 캄캄한 시골의 밤하늘 아래서 혼자 뛰고 있다 고 상정해보자 내가 지금 뛰고 있으면서 주위의 캄캄한 적막 속에서 내 가 느끼는 나의 심리 상태는 도시의 대낮에 만인이 주시하는 가운데서 마라톤 경기를 하는 나의 운동심리와 같을 수 없다. 좌우간 뛰고 있는 나의 의식은 뛰는 나의 몸과 일체를 형성하면서 心身이 하나의 공감현상 울 나타내고 있다. 이런 공감현상의 처원에서 보면, 나의 의식은 의부에 서 관찰가능한 이가 어떤 관점에 따라 달리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관찰자가 자기 입장에서 나의 운동하는 의식을 설명하 기 위한 상칭을 知的 도구로 내세우는 것에 의존할 수 있는 것도 아니 2) H. Bergs o n, 갑은 책, p. 185.
다. 〈요컨대 운동은 바깥에서 이미 파악되지 않고, 어떤 점에서 내 속에 서부터, 안으로 그 자체에서 파악된다. 나는 하나의 절대적인 것을 지니 는 셈이 된다.〉 3 ) 우리는 베르그송이 말한 직관의 기능이 지능의 기능과 전혀 질적으로 다른 성질임을 안다. 그런데 그 직관의 본질을 바로 파악하기 위하여 베 르그송이 생각하고 있는 직관과 전통적으로 다른 철학자들이 생각해온 직관의 뜻이 서로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베르그송의 생각을 충실히 옮기면, 그동안 哲學史룰 통하여 많은 철학자들이 정신의 근본에 이르기 위해서는 개념적 지성의 차원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지 적하였다. 그래서 션g知性的인 능력〉의 필요성을 많은 철학자들이 주장하 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베르그송은 그들 철학자들이 인간의 지능은 시간 속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지능을 초월하는 일은 곧 시간을 벗어나는 것과 같다고 여겼던 전통적인 칙관론의 과오기- 있었 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전통적 주장이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보면 어디에서 과오를 범한 것인지 우리는 쉽게 추정할 수 있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지성화된 시간 X 본 이미 시간의 허깨비에 불과하고 사실상 공간 화된 기하학적 측정 단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지능과 지성은 결코 순수 시간으로서의 지속 속에 있어 본 적이 없다. 더구나 베르그송에 의하면 시간을 제거시킨다거나 벗어난다는 것은 지능의 산물인 인간 오성이 이 미 실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 오성은 시간을 측정하지만, 결코 시 간의 흐름을 타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인 지속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 성적인 인식은 서 있는 위치와 사용하는 상칭에 따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정신의 인식은 정신의 본질과 同居해야만 가능하다는 결 론이 니온다. 정신의 본질은 〈흐름〉이요, 〈지속〉이다. 따라서 정신의 본 질을 스스로 인식하는 직관은 시간으로서의 지속을 결코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베르그송이 샨g知性的 능력 la fac ulte su p ra-i n t ellec t uelle 써 脫時間 09 이어야 한다는 재래의 직관론을 반대하 3) 갇은 책, p. 178.
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결국 〈지성〉이나 〈직관 X 즌 인간 의식이 가장 최고도로 깨어 있는 두 가지 모습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직관 X 는 생명의 의식이 자기자신의 운동과 생성과 흐름에 주의를 기울인 것이고, 〈지성 X 즌 생명의 의식이 행동을 위하여 물질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주의를 기울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참자는 상태의 무의식의 행동인 〈본능〉과 대비하여 깨어있는 의 식의 행동을 가리킬 때 〈지능〉으로 우리가 번역하였던 개념을 이제 〈직 관〉과 비교할 때는 〈지성〉이러는 개념으로 탈바꿈시킴이 옳다고 여긴다. 직관이 하나의 고유한 정신적 인식이라면, 지능에서 파생된 논리적 인식 성으로서 〈지성 X 는 직관과 디른 바깥에서의 오성적 인식을 가리킨다 . 따 라서 〈본능〉과 〈지능沃든 의식의 심리적 경향을 가리키고, 〈직관〉과 〈지 성 X 는 의식의 인식론적 경향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생각함이 좋을 듯하다. 직관이 지성과 이처럼 다른 차원에 속하는 것이라면, 그 직관은 심리 적 능력 면에서 본능과 유사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뜻인가? 이런 물음 에 대한 베르그송의 답변은 직관이 본능과 유사한 데가 있고 또 동시에 본능과 다른 데가 있다는 것이다. 직관이 본능과 유사한 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이 무엇인가? 〈직관이 우리를 인도하는 곳은 생명의 내부다. 나 는 직관이 이해득실을 떠난 공평무사한 본능l'i ns ti nc t desin t e r esse, 죽 자기자신을 의식하게 되고 자기 대상을 반성하고 그 대상을 한없이 넓힐 수 있는 본능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4) 우리는 본능이 하나의 〈생명 적 공감 la s y rn p a thi e 〉임을 잘 알고 있다. 직관도 본능처럼 하나의 〈공 감沖]지만, 그러나 그 공감은 지극히 그 대상과 영역이 제한된 공감도 아니고, 행동의 실용적인 면만을 취사선택하는 이해관계에 민감한 공감도 아니고, 무의식에 가까운 몽유병적 성격에서 비롯한 공감도 아니다. 그래 서 베르그송은 직관이 지니고 있는 공감을 〈공평무사한〉 것이라고 규정 하였다. 이와 같은 〈공평무사한 공감 la sym pa th ie desin t er essee)o l 가장 잘 4) H. Bergs o n, L'e vo luti on creatr ice , p. 178.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곳이 예술적 직관의 형태다. 예술가의 눈은 보통 사 람들이 보지 못하는 대상의 생명적 흐름을 그 내부에서 유기적으로 접촉 하는 탁월한 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직관은 예술가적인 섬세의 정신을 가전 사유와 갇다. 〈섬세의 정신이 없이는 思惟도 없다. 그리고 섬세의 정신은 직관이 지성 속으로 반영된 것이다.〉 5 ) 〈공평무사한 공감〉으로서 의 직관이 〈예술적인 섬세의 정신〉과 같다는 베르그-송의 주장에서 우리 는 다시 한 번 그의 이원적 일원론의 사유구조를 접하게 된다. 직관과 본능은 같으면서 다르다. 이것을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보았다. 그런데 앞에서 또 우리는 칙관과 지성은 다르다고 이야기하였다. 그것은 틀림없 다. 그러나 다르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번에 〈직관〉과 〈지성 X 는 다르면서 같기 때문이다. 〈본능〉과 〈직관 X 는 갇으면서 다르고, 〈직관〉과 〈지성 X 본 다르면서 같다. 뉘앙스에서 차이가 있다. 이것은 무엇 울뜻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베르그송이 말하고 있는 본능과 지능, 지성 (지능)과 직 관과의 미묘한 뉘앙스를 결코 놓쳐서는 안된다• 그의 철학은 헤겔의 철학 이나 베토벤의 음악처럼 굵고 육중하지 않다. 그의 철학은 마치 드뷔씨 Debuss y나 라벨 Ravel 의 음악적 선율처럼 미묘하고 대단히 섬세하다. 그의 철학은 앙리 마띠스 Ma ti ss 려 그림이 물체의 무게를 느끼게 하지 않는 화법인 것과 같이 아지링이 같은 가벼운 전동을 우주에 가득 채운 다. 마띠스의 그립이 중력을 거부하는 새 물질을 창조하듯, 라벨의 선율 이 리듬과 화음과의 구별을 느끼지 못할 만큼 함께 혼융되어 있는 것처 럼, 베르그송의 철학은 의식의 내면세계와 생명의 우주적 세계가 혼융된 화음이요, 리듬이요, 멜로디다. 그러나 그 음악적 흐름 가운데서 보일까 말까 하는 소절로서의 마디와 대위법적 체계가 있다. 본능, 지능과 지성, 그리고 직관은 그런 일체감의 흐름 속에 숨어 있는 마디와 같다 하겠다. 인간의 지능에 의한 과학적 인식과는 다른 본능적 인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동물이 정확히 행동하고 환경에 잘 적응한다는 사실에 5) H. Bergs o n, La pe nsee et le mouuant, p. 87.
서 온다. 다 본능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본능적 인식은 오성적 분석이 개입할 예지가 없는 인식이요, 제한된 대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여 일체 감을 이루는 공감적 인식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제한된 본능적 인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깨어 있는 의식의 인식이기를 요구한다. 인간은 동물적 정확성과 무의식성을 거부하고 의식적 정확성을 희구하였다. 그런 희구가 대상에 밀착된 제한성을 탈피하는 지적 자유를· 구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지성의 자유는 본능이 갖고 있는 공감의 생명력을 상실한 대가에서 왔다. 그 자유는 귀중한 것을 잃었다. 이에 인간은 또다시 지성의 자유를 갖되, 핏기 없는 인식이 아닌 생명력을 갈구하게 된다. 〈자유〉와 〈생명력 의 직접적 공감只t 아울러 요구하게 된다• 그 요구가 곧 직관이다. 그러 므로 직관에는 지성과 같은 反省力과 자유와 의식이 있되, 또 거기에는 본능과 같은 생동감과 생명력과 공감현상도 있다• 그래서 직관은 지성과 다르지만 같다고 하는 것이다. 〈지능이 없었다면, 직관은 본능의 형식 아 래서 실제적으로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주는 특수한 대상에 못박혀 남아 있게 되었을 것이고, 이동운동으로서 그 대상에 의하여 의면화되어 남아 있게 되었으리라.〉 6) 그런 점에서 인간의 직관은 지성의 도움을 받아 다 시 본능의 힘을 확장시키고 승화시킨 것이다. 직관은 본능에서부터 공감 과 단순성을, 지능과 지성에서부터 자유와 보편성과 명석한 의식을 취하 면서, 동시에 그 본능과 지능을 아울러 초월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제부터 직관을 전통적 개념으로서의 직관이나 본능 및 지능 과 의적으로 대비하는 일을 그만두고, 직관을 그 자체에서 베르그송이 어 떻게 생각하였는가를 성찰해보기로 하자. ® 베르그송에 의하면 직관, 즉 직관적 사유는 지속 속의 사유와 같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우선 그의 말을 들어보자. 〈공간 속에 흩어지는 물리적 존재와 형이상학적 교조주의가 말해온 것과 같은 개념적이고 논 리적인 존재인 무시간적인 존재 사이에 의식과 생명을 위한 여지가 없는 가? 틀림없이 있다. 순간들을 지속 속에 결합시키기 위하여 순간들로부터 6) H. Bergs o n, L'i v o luti on cria t r i c e , p. 179
출발하는 대신예 지속에서부터 순간으로 가기 위하여 지속 속에 사람들 이 자리를 잡자마자 그 문제가 깨달아지게 된다.〉 7) 이와 같은 베르그송 의 논리를 이해하게 되면, 직관은 의식과 생명의 지속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지속이 없으면, 즉 지속의 흐름을 타고 생각하지 않으면 직관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는 다음과 감이 『 사유와 운동자 』 속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칙관적으로 사유함은 지속 속에서 사유함이 다.〉 8)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인간의 지성과 오성은 운동을 운동 그 자체 대로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운동을 이해하기 위하여 수학과 물리 학은 운동의 과정을 수많은 정지의 위치로 쪼개서 나란히 병렬시키게 된 다. 그래서 지성은 운동의 정지 속에서 추상적 계기만을 파악한다 . 지성 은 변화 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반대로 직관은 변화와 함께 하는 사유다. 그러므로 〈직관은 성정히는 지속에 가입되어서 예견할 수 없는 새로움의 중단없는 연속을 지속에서 지각한다〉전 이처럼 직관적 사유는 지속 속의 사유이기에 지성적인 추리적, 논증적 사유보다 훨씬 일반에게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베르그송은 보고 있다 .10) 논증적 사유는 이미 우리 가 쓰고 있는 언어와 사고습관과 과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유유자적하 게 자신의 객관적 견해를 열어 밝힐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지속의 세계 속에 관여하여 살지 않고, 객관적이거나 擬似 객관적인 상식 의 차원에서 사고하고 생활한다. 그래서 지속 속의 〈직관적 사유났근 설 명에서 〈논증적 사유〉보다 열등하게 된다. 예컨대 하나의 예시롤 생각해 보자. 사랑을 느낀 사람은 그가 왜 이 사람을 사링하는지 설명하기가 어 렵다. 사랑하는 의식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지신의 의식 내부에,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생명 내부에 깊숙히 관여하여 있다. 그러나 사랑이 식어지 면서 그는 단번에 남들에게 그가 왜 이 사람을 싫어하게 되는지 그 이유 7) 갇은 책, p. 361 . 8) H. Bergs o n, La pe nsie et le mouuant, p. 30. 9) 갇은 책 , pp. 30~31 10) 같은 책, p. 33.
를 자세히 나열한다. 그는 벌써 이 사람과 하나의 일체적 공감을 형성하 지 않고, 바깥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증오는 공감이 아니다. 그래서 그 는 그가 증오하는 까닭을 논증할 수 있다. ® 직관이 지속 속의 사유이기에 직관은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르는 시 간의 변화 속에 〈동거〉해온 정신에게서만 가능하다. 그러한 정신은 〈정 신에 의한 정신의 직접적 비전 le vis i o n dir e cte de !'esp r it pa r l'es p - r it〉 II) 을 낳게 된다. 그것이 직관이다. 이어서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직 관을 풀이한다. 〈직관은 먼저 의석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의식은 직접적 의식, 보여전 대상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비전, 접촉과 심지어 일치이기 도 한 인식을 말한다.〉 1 2 ) 그러므로 직관은 지속적 사유이면서 동시에 〈직 접적 의식〉으로서 대상과 구분이 거의 되지 않는 〈접촉〉이나 〈일치녔t 뜻하게 된다. 사랑을 느끼는 한 쌍의 남녀는 눈빛으로 사랑을 서로 확인 한다. 사랑은 두 의식의 접촉이나 일치와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랑은 의식 의 교감이다. 사랑은 일종의 〈정신감응 la t ele p a t h i e 〉이고, 정신의 교환 이고, 일종의 〈內向i~透l' endosmose 〉다. 이 사랑의 확인은 직관으로 인 식되지 지성으로 추리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심리에 있는 상호간 〈내 향삼투〉의 현성이 곧 〈접촉〉이요, 〈일치 〉며 그것이 〈직관〉이다 .1 3 ) ® 사랑하는 한 쌍의 남녀는 상호간에 흐르고 있는 미묘한 의식의 변 화를 민감하게 알고 있다. 여기서 단순히 느낀다는 말로 그 의미가 다 포함되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직관도 지성과 비록 성질이 다르지만 인식의 권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미묘한 변화가 지속이고, 그 지속 은 베르그송에 의하면 바로 정신적인 것, 정신성 자체이기도 하다. 그러 므로 직관은 정신과 변화, 순수 지속을 인식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칙관 은 정신, 지속, 순수 변화를 깨닫는 길이다. 직관의 고유한 영역은 정신 11) 같은 책, p. 27. 12) 같은 책, p. 27. 13) H. Bergs o n,. L 'energi e spi rit u e lle, p. 78, H. Bergs o n, La pen see et le mouuant, p. 28.
이므로, 직관은 심지어 물질적인 것 속에서 물질적인 정신성이나 神性에 대한 關與를 파악하고자 한다.〉 14 ) 물론 베르그송은 지성의 언어가 정신을 가술하고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성의 언어가 추상적으 로 정신을 묘사하더라도, 그 언어는 언제나 〈공간화된 물질의 표상» 빌려서 정신을 설명하게 된다. 왜냐하면 지성이 사용하고 있는 추상적 관 념은 언제나 물질과 공간을 모델로 하여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령 전통철 학이나 형이상학에서 정신을 〈사유 la p ensee 〉나 〈절대적 실체 la sub- sta n ce absolue 〉로 규정하였는데, 이때의 〈사유注: 수학적 기계론적 사 고의 원천으로, 〈절대적 실체〉라는 것은 〈自己原因的〉인 독립적인 것으 로 物性化하게 된다. 그런 정신적 표상에 지속과 흐름과 시간이 없다. 그 래서 베르그송은 우리가 언어를 쓸 수밖에 없지만, 그 언어가 우리의 사 고를 방해한다고 여기고 있다. 직관은 언제나 언어를 넘어가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 그러나 직관이 순전히 감정적인 본질에만 가까운 것으로 생각하는 오해를 불식시킬 필요기- 있다. 위에서 든 예시에서 사랑의 문제가 등장하 기 때문에 혹시 직관이 단지 인간 감정의 영역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가 하고 좁혀서 생각할 여지가 생길 우려가 있다• 베르그송의 생각에 의 하면, 〈우리의 직관은 반성이다〉 .1 5 ) 직관이 정신의 지속을 파악할 수 있 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직관은 지속의 흐름을 타면서 유 유자적하게 의식이 이완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정반대로 직관은 〈의식의 긴장〉과 〈집중났t 요구하고 있다. 〈긴 장, 정신집중과 같은 낱말은 매번 새로운 문제, 전적으로 새로운 노력을 위하여 우리가 정신에게 청하는 방법들이다.〉 16)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우리가 소설을 재미있게 숙독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 소설의 주인공과 자 신 사이에 하나의 성격적, 운명적 일체감이 형성되어짐을 느낀다. 그 주 14) H. Bergs o n, La pe nsee et le mouuant, p. 29. 15) 갇은 책, p. 95. 16) 같은 책, p. 97.
인공이 비극적 상황에 처해지면, 나는 괴로워하게 되고 말할 수 없는 안 타까움을 느낀다. 그 주인공이 행복해지면 나도 행복해진다. 그 주인공의 흐름이 내 의식의 흐름과 호흡이 일치되면서, 나는 더욱 더 그 주인공에 게 긴장과 정신집중을 보내게 된다. 음악연주회에 가서 내가 평소에 좋아 하던 곡이 연주되어 나오면 니는 더욱 정신집중을 한다. 왜 정신집중을 하게 되는가? 내가 그 곡의 선율과 회음과 리듬과 일체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이댜 아니 더 강도 높은 일체감을 느끼기 위하여 나는 그 곡에 그 만큼 강력한 주의와 반성력을 보내게 된다. 그러므로 직관은 지성의 노력 과 달리 풀어지는 〈긴장 해이〉라고 여기는 생각은 오해다. 왜 〈반성〉과 〈긴장〉이 직관에서 작용하게 될까? 예의 소설의 주인공이 새로운 환경에 처해졌다고 내가 느끼면, 나는 그 새로움이 과거의 지속과 이어지지 않으 면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내가 잘 아는 곡을 더 잘 듣기 위하여 나는 그 곡을 나의 과거의 깊이와 연계시켜 생각하면서 듣지 않으면 안된다. 〈주 의력〉, 〈긴장〉, 〈정선집중〉 같은 개념들은 깊이를 찾는 정신의 자기 활동 이라고보아야한다. ® 정신의 깊이를 찾기 위한 직관의 반성작용은 드디어 하나의 지점, 모든 흐름이 하나의 지극히 단순한 지점으로 모여지는 것을 체험하게 된 다. 음악을 듣고 독서를 하면서 느끼는 나의 긴장과 정신집중은 나의 마 음이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지는 혼란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간장과 정신집중이 하나의 지극히,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는 아주 단순한 한 점으로 수령된다. 그때 우리는 정신적인 기쁨과 평회를· 맛본다. 기쁨 과 마음의 평화는 지극한 정신의 〈단순성〉에서 온다. 〈그 점에서 철학자 가 결코 말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단순한, 무한히 단순한 것이 있다. 그 것이 무한히 단순하기에 철학자는 평생을 두고 말하였다.〉 17) 말하자면, 직관은 단순성 속에서의 풍요로움과 같다. 직관은 지극히 풍요한 것을 지 극히 단순한 것에서 인식하는 능력이기에, 직관은 분석을 싫어한다. 이런 점에서 직관은 〈형이상학적〉이고, 분석은 〈과학적»]다. 〈직관은 단순성 17) 같은 책, p. 119.
이면서도 풍요성이다. 그 까닭은 직관은 공감이고 공평무사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지능과 분석은 대상 앞에서 자기자신을 놓고, 그 대상을 연구 하고 쪼개고 이용할 목적으로 재구성한다.〉 18) 이런 점에서 베르그송 철학 에 영향을 받은 가브리엘 마르셀 G. Marcel 이 〈신비〉와 〈문제녔卜 대비 시킨 사상도 베르그송의 개념으로 치환시켜 보아도 좋을 성싶다. 마르셀 에게 있어서 〈신비났근 베르그송에 있어서 〈직관〉이고, 마르셀에게 있어 서 〈문제났근 베르그송에 있어서 〈분석〉이다. 〈분석은 움직이지 않는 것 에서 작용하고 있고, 직관은 움직이는 것에서, 죽 지속 속에서 자리잡고 있다. 바로 거기에 직관과 분석의 뚜렷한 경계가 있다 . 사람들은 현실적 인 것, 체험적인 것, 구체적인 것을 가변성에서 인지하고 있고, 요소를 불변적인 것으로 인지한다.〉 1 9 ) 그런데 직관이 분석보다 인식론상에서 선 행한다. 왜냐하면 칙관에서 분석으로 사고가 이행할 수 있지만, 분석에서 직관으로 사고가 거슬러 울라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상의 다섯 가지로 직관의 의미를 나누어 성찰해보았다. 편의상 다섯 개로 나눈 것이지, 사실상 그것들은 모두 한 개의 의미고 하나의 줄로 이어져 있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철학과 과학의 분기점은 바로 이 〈직 관〉과 〈분석〉의 분기점과 같다. 〈운동 위에서 不動의 관점을 잡으려고 애쓰거나, 반복되지 않는 것에 따라서 반복을 채집하려고 하거나, 현실을 인간행동에 복종시키기 위하여 현실이 전개되고 있는 繼 時的 면 위에서 현실을 편리하게 나누는 데 주의력을 집중하는 과학자는 자연과 함께 술 책을 쓰든지 자연 앞에서 불신과 두쟁의 태도를 채택해야 하지만, 철학자 는 자연을 친구로서 대한다. 베이컨에 의하여 제시된 과학의 규칙은 명령 하기 위하여 복종하라는 것이었다. 철학자는 복종하기를 모색한다.〉 20 ) 〈철학의 본질은 단순성의 정신이다. 우리가 철학적 정신을 그 자체에서, 그리고 그 작품 속에서 비추어보면, 그리고 철학과 과학을 비교하거나 한 18) F. Mey er , 갈은 책, p. 68. 19) H. Bergs o n, La pe nsee et le mouvant, p. 202. 20) 갇은 책, p. 139.
철학을 다른 철학과 비교하여 보면, 언제나 우리는 복잡다단함은 表皮的 인 것이고 구성은 부차적이며 종합은 하나의 假想임을 발견하게 된다. 철 학한다는 것은 하나의 - 단순한 행위다 . 〉 2 1)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은 복잡하다. 그러나 정직한 사람은 지극히 단순하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 거짓말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변 명의 변명을 계속 늘어놓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전실과 정직을 말하는 사람은 그냥 단순하게 간단히 말하기만 하면 된다. 정직한 사람은 거짓말 울 능사로 여기는 사람보다 훨씬 진리의 철학적 단순성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모든 철학적 진리는 그 근원에서 지극히 단순하다. 그것이 너무 단순하기에 사람들이 보지 못하거나 말을 꾸미지 못할 뿐이다. 어떻게 보 면 철학의 원초적 진리는 둘에 핀 한떨기의 백합화나 如來가 말을 하지 않고 들고 있었던 꽃의 미소와 같은 것인지 모른다. 이처럼 인류에게 지 혜를 가르쳐준 스승들은 한없이 단순한 지혜를 보여주었다. 〈마음이 가난 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베르그송의 철학은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쟝 께레비츠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가술로부터 탄생된 사치를 속죄해야 하고, 포기의 정신 속에서 검약과 가난의 정화된 길을 자신에게 부과해야 한다. 개념의 자동성과 문명의 우글거리는 장식들은 불필요하게 중언반복된 낭비의 두 가지 모습이다.〉 22) 〈진리의 단순성났든 〈단순주의적 인 유치한 지성〉과 다르다. 우리가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성자〉와 〈영 웅X 는 저런 〈단순성의 화신〉이다. 이처럼 직관이 우리에게 가져디주는 선물이자 은총인 지극한 단순성을 셀링 Sehell ing 철학의 탁월한 해석가 요, 음악적 철학자인 쟝께레비츠는 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붙이고 있다. 〈이 지국한 단순성은 우리를 먼저 진지함으로, 그 다음 기쁨으로 초대하 고 있다. 진지함 le ser i eu 쩌 1 초대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화가 무엇 보다 먼저 본질화이거나 본질적인 것으로의 還元임에서 온다. 인생은 짧 21) 같은 책, p. 139. 22) V. Jan ke1evit ch, 같은 책, p. 238.
다. 그리고 지혜는 자질구레한 것과 우회적 표현법을 위한 시간을 갖고 있지 않다. 오직 본질적인 것만이다! …… 베르그송은 수다쟁이 homo loq ua x, 죽 중언부언 이야기하는 정신에 대하여 아름다운 메마름 la belle ar i d i韓 대표한다. 베르그송은 증류법에 의하여 지속의 농축된 알콜을 얻기 위해 인생을 어지럽게 혼란시키는 문법적 범주와 형식적 말의 논쟁 에서부터 인생을 정화시키려고 하였다. ……단순성의 평화로운 대양 속 에 베르그송적인 기쁨이 그렇게 만난다. 페느롱 Fenelon 의 순수한 사랑, 시간의 근원인 하늘처럼 ‘레키엠 Re q u i em' 이나 ‘137~ 의 소야곡 Tre i ze noc t urnes’ 이나 ‘이브의 노래 la chanson d'Eve’ 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가 브리엘 포레 Gabrie l Faur 斜 무한한 밤의 평화가 단순성의 대양 속에서 만난다. 節食과 지식의 순결함은 두 가지 단순성이 아니고 하나의 것이 다. 이런 이중적 단순성은 기쁨을 위한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 기쁨 속에서 느낌과 행함은 서로서로 상반된 것임을 그쳤기 때 문]다. 우리가 원하는 철학은 그 두 가지롤 하나로 만들어 우리에게 주 게 되리라. 행함과 인식함, 실제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을 하나로 만들어 철학이 우리에게 줄 것이다. 플로티토스 Plo ti n 의 말처럼, 習俗의 단순성 이 사유의 순수성과 하나가 될지어다.〉 23) 2 정신의 풍요와 無의 否定 앞 장에서 우리는 베르그송이 두 가지 종류의 다양성을 구분하고 있음 을 살폈다. 죽, 수량화될 수 있는 다양성과 質의 다양성이다. 수량화될 수 있는 다양성은 내가 603 돼卜 마음으로 세는 것과 같은 것이고, 質의 다양성은 의식이 지속에서 느끼는 감정의 다양성이다. 예컨대 내가 부드 러움의 촉감적 쾌락을 느끼면, 그것이 다른 감각에도 영향을 미쳐 부드러 움이 시각의 표정과 직결되어 내 시각도 부드러워진다. 달콤한 미각은 후 23) 갇은 책, pp. 243~244.
각에도 영향을 미쳐 몸 전체의 쾌감을 증대시킨다. 이런 디앙정은 그 쾌 감의 지속 속에 나의 의식이 참여하면서 다른 감각과의 혼융일체나 하나 의 쪼갤 수 없는 유기체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간은 잴 수 있으 나, 쾌감은 量 化되지 않는다. 이와 갇은 내적 느낌을 언어로 표현하기가 가장 힘들다. 우리의 사회생활은 이런 개인적 체험을 무시하는· 경향을 지 닌다. 왜냐하면 사회생활은 사회생활에 필요한 행동과 그 행동을 일반적 준칙으로 만들기 위한 사고의 일반성만 문제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 분의 사람들은 사회생활에 적응하기 위하여 자신의 내면세계의 풍요한 체험을 망각하거나 또는 도의시하려 한다. 그래서 그런 풍요한 내면세계 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로 표현할 때 언제나 생각이 말보다 훨씬 넘쳐흐르게 됨을 우리는 느낀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종류의 다양성을 베르그송은 디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거기에서부터 두 가지의 다양성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직접적 으로 수를 형성하는 물질적 대상의 다양성과 필연적으로 공간이 개입되 는 상징적 표상의 중개가 없이는 수의 모습을 취할 수 없는 의식의 사실 의 다양성이 각각 있다.〉 24 ) 베르그송에 의하면, 〈물리적 대상의 다양성〉 은 과학의 대상이고, 〈의식의 사실의 다양성 X 폰 철학의 대상에 속한다. 그런데 또 베르그송에 의하면, 철학과 형이상학의 구분이 없다. 그에게 있어서 철학이 곧 형이상학이고 생명학이고 동시에 심리학이다. 이 모든 것은 다 지속의 학문이다. 〈철학의 의무는 …… 엄밀한 의미에서 지성적 인 습관이나 형식에서 벗어나 실천적 효용성의 숨은 생각을 가침이 없이 생명체를 검토하는 데 있다. 철학에 속하는 그의 대상은 사변하고 보는 것이다. 생명체 앞에 선 철학의 태도는 행동만 겨냥하는 과학의 태도규 타 성적인 물질의 매개를 통해서만 행동할 수 있고, 실재를 이런 국면 아래 서만 관찰하는 과학의 태도일 수는 없다.〉 25) 이와 같은 철학의 태도, 형이상학의 길이 가능하기 위하여 베르그송은 24 ) H. Bergs o n, Essai, p. 65. 25) H. Bergs o n, L'e v oluti on creatr i c e , p. 197.
재래의 전통적인 인식이론을 벗어날 것을 종용하고 있다 . ll i ) 그에 의하면 전통적인 인식이론에는 실재론적인 입장과 관념론적 입장, 그리고 구성주 의적 입칭이 있다. 실재론적 입장은 정신이 사물들- 위에서 통제되어야 한 다는 것이고, 관념론적 입장은 사물들이 정신 위에서 통어되어야 한다는 입장이고, 구성주의적 입장은 사물과 정신 사이에 어떤 합일이 이루어져 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경우의 인식이론은 모두 한결같 이 정신을 지능의 소산인 지성으로 해석하는 데 있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이런 입장에서 참다운 철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이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 다. 칸트가 형이상학을 〈불가능의 학문〉, 〈불가지의 학문〉으로 배척하였 음은 정신을 지성과 동일한 것으로 보았던 사고의 정직한 결론이다. 그런 데 베르그송에 의하면, 정신은 지성과 지능을 한없이 넘어서 있다. 죽, 정신은 지성과 지능을 초월해 있다. 그런 점에서 지능과 지성은 정신의 한 특수한 기능, 즉 물질과 만나서 해결하기를 바라는 정신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 그렇게 볼 때 전통적 철학과 형이상학의 과오는 〈정신〉과 〈지 성〉(지능)을 동일시한 데 있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지성의 본래적인 두 가지 기능은 연역과 귀납이다. 연역법이나 귀납법이 개념적으로 무엇인지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귀납이나 연역도 이미 존재하는 질서를 전제로 해서 가능하다. 그렇다 면 지능이 생산하는 과학도, 그리고 직관에 의존하는 철학이나 형이상학 도 다 함께 이 우주에 존재하는 질서를 전제로 해서 가능해전다. 베르그 송은 과학이 전제로 삼고 있는 귀납적 또는 연역적 질서를 〈타성과 자율 운동의 질서 l'or dre de l'en erti e e t de l'au t oma ti sme 〉라고 생각하고, 철학이나 형이상학이 전제하고 있는 질서를 〈생명적인 것과 원하여진 것 의 질서 l'or dre du vit al et du voulu 〉라고 명명하였다 . m 이런 차원에서 문제를 보는 시각을 계속해나가면, 결국 과학은 〈제조 적 사고〉의 대표이고, 철학이나 형이상학은 〈창조적 사고〉나 〈유기체적 26) 같은 책, p. 207. 27) 같은 책, p. 225.
사고〉의 대표인 것으로 집약된다. 〈제 조 적 사고 la pe nsee fa br i can t e )i=근 이미 우리가 앞에서 검토한 〈분석적 사고〉, 또는 〈기계론적 사고〉나 〈목 적론적 사고〉의 다른 명칭에 불과하다. 제조적 사고는 단순한 것에서 복 잡한 것으로 사고를 이행시키기 위하여 〈덜한 것〉에서 〈더한 것〉으로 논 리적 전개를 추진시켜나간다. 죽, 부분에서 전체로 니이간다• 이런 논리적 전개를 좀더 지성화하기 위하여, 지능은 實在 롤 설명하는 데 〈無 le nea- n t〉의 개념이나 〈없음 le r i en 〉의 개념을 도입한다. 〈약한 데〉서 〈강한 데〉로, 〈작은 데〉서 〈큰 데〉로 나아가는 것이 지극히 지연스럽게 보이기 에, 지능의 논리적 지성은 시작을 〈無〉로 생각하는 사고를 〈합리성〉의 이름으로 정당화시켜 나간다 . 이 점을 해석하는 베르그송의 생각을 살펴 보기로 하자. <…… 나는 모든 실재를 융단 위에 물건이 깔려있듯이 無 위에 확장되어 있는 것으로 상상한다. 죽, 無가 먼저 있었고, 존재는 덤 으로 있다고 생각한다. 또는 어떤 것이 먼저 있었다면, 無는 그 어떤 것 의 基 底나 그릇으로서 사용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無는 영원 히 시간적으로 앞선 것이라고 믿게 된다. 잔은 언제나 채워진 채로 있을 수 없다. 그 잔을 채운 액체가 빈 데를 가득 차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존 재는 언제나 거기에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존재에 의하여 가득- 채워 진 無는 사실에서가 아니라면, 적어도 법적으로- 그 존재보다 앞서 있었다 고 생각하게 된다.〉 28 ) 이상에 인용된 베르그송의 생각은, 위에서 지적된 〈제조적 사고〉가 〈無〉를 어떤 동기에서 생각하게 되었는가를 실감나게 표현해주고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제조적 사고났근 언제나 양적 부피의 확대나 가산을 생각하면서, 그 양적 확장이나 가산이 애초에 無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可知的이 아니라고 여간다. 이런 〈제조적 사고났근 사실상 〈기술적 사고〉 와 다른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제조적 기술적 사고는 그의 모든 창조 신화에 결부되어 있다고 베르그송은 생각한다. 창조가 있기 전에 혼돈이 있었고국 빛이 있기 전에 어둠이 있었다. 이런 발생론적 사고방식은 사실 28) 같은 책, p. 276.
상 인류가 예나 지금이나 갖고 있는 제조적 사고와 다른 것이 아니다. 라슈리예 Lachel i er 나 메이에르송 Me y erson 이 이미 잘 지적하였듯이, 〈제조적 사고〉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原因의 개념 X 든 실제로 보지는 않았지만, 먼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제조론적 창조론과 유사하다 .29) 『舊約 창세기』에 나오는 신의 우주창조론도 베르그송에 의하면 제조론적 사고(기계론이나 목적론)의 표상임에 지나지 않는다. 神에 의한 우주의 창조론을 주장하는 자나 그것을 부정하고 물질이 태초에도 지금처럼 온 전히 존재하여 왔다고 주장하는 자나 다 함께, 베르그송의 입장에서 보면 시간 속의 창조적 지속을 도의시하는 제조론적 사고, 기술적 사고에서 벗 어나지 못한 증좌다. 신이 일시에 이 우주를 無에서 만들었다고 봄이나, 물질이 일시에 그냥 형성되어 현상대로 있다고 봄이나 다 같이 우주를 전체냐 無냐 하는 양갈래로 보는 논리의 함정에 빠져 있다. 〈無〉나 〈비어 있음 le v i de 〉이나 〈없음 le r i en 〉의 개념은 모두 오성적 사고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그러면 無의 개념이 비록 오성의 연산 작용에서 나왔지만, 그런 연산작용을 가능케 한 근거가 무엇인가? 이런 물음에 대한 베르그송의 해답은 두 가지 각도에서 발견되어진다• 그 첫째 해답은 〈심리적 각도〉이고, 그 둘째 해답은 〈논리적 각도〉다. 그러면 먼저 심리적 각도에서 베르그송의 생각을 정리해보자. 우선 결 론부터 먼저 이야기하면, 심리적으로 無의 개념은 네모난 원의 개념과 갇 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죽, 無의 개념은 심리적인 관념이 아니라, 하나 의 비현실적인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베르그송의 입장이 다. 그의 생각을 이해하여 보기로 하자 .30) 우선 내가 먼저 의적 대성을 말소시킨다고 가정해보자. 죽, 내가 나의 생각 속에서 의적 대상을 지워 버린다. 그래서 거기에 이제 아무것도 없게 된다. 그러나 내가 A라 는 의 적 대상을 지우자마자, 그 장소에 다른 대상 E 가 자리를 잡게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내 서재 앞에서 내려다보이는 자동차를 없앤다고 가정하 29) V. Jan kelevit ch , 같은 책, p. 202. 30) H. Bergs o n, L'evoluti on creatr ice , pp. 280~282.
자. 그러면 그 자동차가 보이던 장소에는 다른 배경인 언덕의 풀이나 시 멘트 바닥이 그 장소를 채우고 만다. 자연 속에 절 대적 공허란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 공간 속에서 관념적으로 사라전 자동차 자리에 다른 것, 주위의 다른 것이 그 빈 데를 메우고 있다. 그렇다면 그 빈 데는 언제나 있는 것들로 둘러싸인 구멍에 불과하기에 제한적 공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다른 것으로 채워졌거나 또는 둘러싸였지만, 그 자동차는 나에게 는 사라진 無가 아닌가? 그렇지 않다. 그 자동차가 비록 공간적으로 사 라졌다고 가정하여도, 그것이 내 기억 속에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죽, 내 의식의 지속 속에는 존재하고 있다. 먼 세월이 흘러 망각되면, 無가 존재하는 것인가? 그러나 이미 우리가 제 1 장에서 보았듯이 망각은 無化 가 결코 아니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디음과 감이 말한다. 〈추억과 예견을 할 수 없는 존재는 비어 있음이나 無라는 낱말을 결코 생각할 수 없다 . •• 묘 · 추억과 기다림이 가능한 존재에게만 不 在 가 있다. 그는 한 대상을 추억하고 있었고 아마도 그것을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그의 추억에서 나온 그의 기다립에 대 한 실망울 표현한다 . 그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말하면서 그는 無에 직면하게 된다.〉 3 1 ) 이처럼 無를 생각하는 심리는 베르그송의 지적처 럼 주관적으로는 〈더 좋아하는 것 le pre fe r abl~ 부재〉에 대한 실망감 이요, 객관적으로는 〈다론 것에 의한 대체 la substi tut i on ~ 의미한다. 즉, 심리적으로 자기가 기다렸던 것을 만나지 못했음에서 생간 無의 심리 는 주관적으로 〈더 좋아하는 것의 부재〉에 대한 실망이나 객관적으로 〈다른 것에 의한 대체〉의 현상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이 베르그송이 말한 無의 심리적 발생요인이다 . 의적 대상에 대한 無의 심리가 그렇다고 하면, 내적 체험의 대상에 대 한 지움은 어떤가? 베르그송이 암시한 바와 같이 내가 꿈도 꾸지 않고 참을 잤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잠자던 동안 나는 존재하기를 그쳤다고 말 할 수 있다 . 그러나 내가 참자는 동안에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고, 그런 31) 갇은 책 , p. 281 .
생각은 내가 깨어나서야 할 수 있다. 내가 잠자는 동안에 는 아무런 지각 이 체험되지 않았지만, 내가 깨어나서 나 자신을 밖에서 지긱굴}고 있기에 그런 잠의 내적 세계의 無化가정은 무의미해진다. 이 잠의 시간이 無 라고 가정하는 것도 잠찼다는 기억과 지금은 잠과 반대로 깨어있디는 · 것을 전 제로 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보면, 의적 대상이든 내적 체험의 대상 이든 無의 개념을 거기에 적용시킬 수가 없다. 공간의 세계든 시간의 세 계든 언제나 〈가득찬 것 le p le i n 〉이 〈가득찬 것〉으로 흘 러갈 뿐이다. 이 렇게 생각해놓고 볼 때, 우리는 베르그송의 디움 구절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말하여 물질의 비어 있음이든, 의식의 비어 있음이 든간에 비어 있음의 표상은 언제나 적극적인 두 가지 요소로 분석될 수 있는 하나의 가득 찬 표상이다• 그 두 가지 요소란 판명하돈 모호하든 대체의 관념이요, 또 다른 하나는 체험했거나 상상했던 욕망이나 회한의 감정이다.〉 32) 단적으로 심리적인 無 의 개념은 사실상 객관적 대체나 주관 적 감정의 실망스런 표현에 지나지 않기에, 심리적으로 〈 無 汗근 〈거짓 개 념〉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논리적 각도에서 無의 비판을 살펴보기로 하자. 無 의 개념이 논 리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베르그송의 비판은 그의 철학 과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칸트철학과 기이하게 만나고 있다. 칸트에 의하 면, 어떤 대상 A 가 경험적으로 실존하고 있다고 여기는 관념은 그 대상 자체에 대한 직접 표상과 같다. 그러므로 〈 A 가 실존한다〉라는 명제는 〈대상 A〉와 〈실존한다났근 동사가 동시에 성립함을 뜻한다. 베르그송도 칸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그래서 베르그송의 생각에 의하 면, 〈대상 A〉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상상함은 그 대상의 관념에 어떤 다 론 것을 추가함으로써만 가능해진다. 그런 점에서 어떤 특정한 〈대상 A> 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주장함은 〈실재적인 것 일반〉의 실존을 먼저 정립 하고서야 논리적으로 가능해진다. 이 말은 쉽게 풀이하면, 〈대상 A 〉가 32) 같은 책, p. 283.
실존하지 않는다고 내가 주장할 때, 나는 그런 부정판단을 하기 전에 우 선 실재의 실존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 실재 일반에 대 한 실존적 믿음이 없는 경우에는 특수한 어떤 것에 대한 부정판단을 내 릴 수가 없다. 부정판단은 존재나 실존에 대하여 어떤 부정사를 부가함으 로써 발생한다. 그 부정사의 추가가 부정을 알리는 부사가 된다. 부정문 은 논리적으로 어떤 대상 A 의 非 實 存울 뜻한다. 이 부정문은 순전히 지 능의 〈연산 !'o p era ti on 〉에 불과하다. 그런데 긍정문과 부정문 사이에는 〈논리적 等價〉가 성립하지 않는다 . 33) 베르그송이 말한 예시를 보자. 예컨대 내가 〈이 책상은 검다浮悼 l 하 면, 그것은 긍정문이다. 이 긍정문은 내가 본 책상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나의 긍정판단은 있는 사실과 관계하고 있다• 그런데 내 가 만약 〈이 책상은 희지 않다〉고 부정문으로- 판단하면, 이 판단은 책상 의 색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본 것은 검 은 색이지, 희지 않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정판단 X 는 〈판단 에 대한 판단〉이지 〈사실에 대한 존재판단〉이 아니다. 즉, 나의 부정판단 은 만약에 내가 검은 책상을 희다고 착각하였다면 그것이 희지 않음을 교정해주는 역할을 한다• 〈긍정이 사물에 직접 관계하는 반면에, 부정은 개입된 궁정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만 사물을 겨냥하고 있다. 긍정명제는 한 대상에 관한 판단을 옮기지만, 부정명제는 판단에 관한 판단을 옮긴 다 . 부정은 그것이 이차 단계의 긍정이라는 점에서 엄밀한 의미의 긍정과 다르다. 부정은 한 대상의 어떤 것을 긍정하는 한, 긍정의 어떤 것을 긍 정한다.〉 34 ) 그래서 〈부정판단 X 든 〈사실판단〉이 아니고, 어떤 판단을 하는 사람의 正 誤 에 관계한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부정판단 X 븐 실재의 부정 울 가져오는 〈비실재〉에 대한 주장이 아니고, 상대방의 허위나 오류를 교정해주는 〈교육적〉, 〈사회적〉 기능을 가질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 로 부정부사와 함께 등장하는 논리적 부정문이나 부정판단이 〈無〉나 〈비 33) 같은 책, pp. 286~288. 34) 같은 책, pp. 287~288.
어 있음只t 결코 알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오랜 사고의 관습에 의하여 긍정문은 실존에, 부정문은 비실 존에 관계하는 것으로 보아 〈논리적 等 價〉로 놓았지만, 사실상 따지고 보면, 긍정과 부정이 결코 동렬의 가치에 같이 서 있을 수 없다. 긍정을 주장하는 사람, 더 정확히 긍정문을 쓰는 적극적인 사람은 가부간 진위를 밝힐 수 있는 내용을 말하지만, 부정만 하는 사람의 생각은 언제나 애매 모호하다. 왜냐하면 책상이 희지 않다고만 주장하면, 그 나머지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확히 알지 못하 는 그것은 가능성의 세계고 가능성은 현실성보다 논리적으로 먼저 존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고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베르그 송에 의하면 가능성은 결코 현실성보다 더 선행하지 않는다. 이 접에 관하여 베르그송이 든 예시를 생각해보자. 3.'i) 음악가가 교향곡 울 작곡하는 경우다. 음악가에게 그 교향곡이 현실화되기 전에 그 작품이 가능상태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5km 를 걷고 나서 다른 심 신 장애가 없다고 판정되면 10km 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은 가능하다. 그 러나 정신세계에서 그런 가능성은 존재할 수 없다. 만약 가능하다면 그가 어떤 초능력을 가져 자기 작품의 모든 흐름을 다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관념을 갖고 있어야만 하는데 그런 예견적 관념이란 정신세계에서 불가 능하다. 단지 그는 작곡의 흐름을 타고 있는 마당에서 점치는 예언적 죽 홍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 죽홍도 현재 진행하면서 미래를 금방 현재화하 는 것이지 일목요연하게 그 흐름을 벗어나서 그 작품 전체를 예견하는 것은 아니다. 예견은 바깥에서 계산되지만, 예언적 즉흥에는 밖에서 여유 있게 바라본 가능과 불가능이 성립할 수 없다. 베르그송의 주장처럼 작곡 가가 그가 만들 교향곡에 대한 완전하고 정확한 관념을 이미 갖게 되었 다면, 사실상 그 교향곡은 이미 이루어진 셈이다. 그래서 교향곡이 현실 화되기 전에 추상적으로 가능상태에 있다는 것은 語不成說이다. 이런 착 각은 과거가 오늘의 현실에 대하여 가능이었고, 오늘은 내일에 대한 가능 35) H. Bergs o n, La pe nsee et le mouuant, p. 13.
이라고 여기는 신기루 현상과 같다. 예술창작에서와 같이, 세상의 모든 일은 현재의 현실적 일이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현실적 일의 창조적 역량 의 강도만큼 가능성이 동시에 생기는 것이지, 가능성이 먼저 존재했고 그 다約] 순차적으로 그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모국어 롤 배웠을 때나 커서 의국어를 배웠을 때, 시도하면서 배우게 되는 것이 다. 시도하는 현실과 배우는 가능성이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스 스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현실이지, 가능한 것이 현실적인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36 ) 이제 우리는 無의 부정을 주장하는 베르그송의 사상에 다시 돌아가자. 〈아무것도 없음ri en\'. 곤 사람들이 행동과 제조의 지대에 머무는 한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일상 용어다. 없음은 우리가 찾고, 우리가 욕망하· 고, 우리가 기다리는 것의 부재를 가리킨다. 결과적으로 경험이 우리에게 절대적 공허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없음은 언제나 제한되어 있고, 주변을 갖고 있기에 아직도 어떤 것으로 있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공허는 없다. 우리는 언제나 가득 찬 것만을 지각하고 생각한다. 어떤 것은 다론 것이 그것을 대신하였기 때문에만 사라전다• 〈제거는 대체를 의미한다.〉 37) 그 러면 〈죽음 X 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베르그송의 사상에 따라 보면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으로 보존되어 존재한다. 기억으로 현실화되 어 있는 한,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나 기억이 망각의 세계 속으 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망각은 無化가 아니다. 그러면 망각이란 무엇인가? 다른 필요에 의하여 그 기억이 다른 것에 의하여 대체되었음울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정신의 세계에서 〈無〉나 〈없음〉이나 〈비어 있음 X 든 없다. 단지 정신은 한 사실 이 다른 사실에 의하여 〈대체되는 것〉만 볼 뿐이다• 그렇다면, 철학에서 가끔 〈절대적 無 le neant absolu 〉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가 더 근본적으로 〈전체의 관념 X 끝 적극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에 파생적으로 36) 같은 책, p. 115. 37) 같은 책, p. 106.
생긴 〈거짓 관념〉에 불과하다. 베르그송의 우주에서 〈無 X 근 없다. 이미 우리가 앞에서 거론하였듯이, 결국 無나 否定 의 개념은 〈제조적 사고〉가 낳은 인위적 부산물에 지나지 않다. 우리 인간은 어떻게 생활하 고 있는가? 우리는 생각하기도 하지만, 보통 인간은 생각하기 위해서 살 기보다는 오히려 행동하기 위하여 삶을 꾸려간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행동하기 위하여서라고 말함이 보통 사람의 생활에 어울리는 일이다. 그 래서 생활은 곧 행동아다. 〈모든 인간의 행동은 불만과 부재의 감정 속 에서 자신의 출발접을 갖고 있다. 사람들이 어떤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지 않으면, 행동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결핍울 느끼기 때문에 오칙 어떤 것을 찾으려 한다. 이리하여 우리의 행동은 없는 것에서 어떤 것으로 나아가고, 無의 바탕 천 위에 어떤 것을 수 놓는 것을 본질 자체 로 갖고 있다. 사실 말하자면,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無는 어떤 것의 부 재라기보다 효용성의 부재다.〉 38 ) 이상의 인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無 개념은 지금 당장 소요되는 것이 없다는 뜻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 이의에 다른 것이 아니다. 베르그송은 어떤 예시를 들고 있다. 빈 방 에 아무것도 아직 없다라고 우리가 통상 말할 때, 있어야 할 가구가 아 직 갖추어져 있지 않음을 뜻한다. 인간의 행동이 일을 해서 그 가구를 들여놓아야 하는데, 아직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지, 그 방이 無라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실용성의 불만이 그렇게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적 제조적 사고나 기술적 실용적 관점에서 無나 비어 있음이란 개념을 쓸 수 있을지언정, 철학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그 말은 결코 의미하는 바가 없다. 이것이 베르그송의 사상이다. 베르그송 철학에 있어서 정신의 세계는 지성의 어떤 논리적 사유나 개 념보다 풍요하다. 이미 우리가 제 1 장을 보았을 때 그 점이 지적되기도 하였지만, 그의 철학사상에 있어서 물질적 기호보다 정신적 의미가, 행위 적 지각보다 순수 추억이 얼마나 풍요한 정신성을 지니고 있는가 함이 나타났다. 단적으로 기억은 말할 나위 없이 두뇌의 세포를 질적으로 넘어 38) H. Bergs o n, L'eu olut ion creatr i c e , p. 297.
서 있다. 無와 可能 性 이 논리적, 심리적으로 상상되고 요청되지만, 그 요 청은 언제나 행동의 필요성과 정당성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이 나타나는· 현실은 그러한 無와 가능성을 훨씬 초월하여 있다. 지성은 계산이고 추리 지만, 정신의 직관은 영감이고 동시에 생생한 생명의 촉진 자체다. 직관 에서 우러나오는 영감과 정신적 풍요의 촉진제를 공급받지 않는 지성은 아무것도 제조하거나 만들 수 없다. 모든 과학적 사고의 밑바탕에는 직관 의 정신과 형이상학이 숨어 있다. 이미 우리는 제 2 장에서 베르그송이 얼 마나 자유의지 le lib r e arbit r~ 추상성을 비판하였는지를 잘 알고 있 다. 인간이 두 가지 행동의 길 가운데 서서 무관심한 중립적 위치로 하 나를 선택한다는 이른바 자유의지론의 전통적 주장은 위에서 비판된 無 의 개념처럼 지극히 가공적 이론에 불과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창조적 일 에 몰두한 영혼만이 미래에 더 많은 가능성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 거의 정신세계의 창의성과 자발성의 흐름을 타고 있는 자는 이미 자유 그 자체고, 그의 선택은 계산된 다음의 대차대조표에서 내려진 결론이 아 니고, 그의 창조성의 흐름 자체가 이미 선택이다. 무관심의 자유, 자유의 지의 자유는 인간의 선택이 있기 전에 無의 中性에서 하나를 선택한다는 제조적 사고의 잔재다. 인간의 정신에는 중성적인 중립지대가 존재하거 나, 無의 영역이 없다. 인간의 정신에는 빈 곳이나 공허가 없고, 풍요와 연속으로 가득 차 있다. 〈베르그송적인 창조는 無로부터의 창조도, 옛 요 소들의 기계적인 재배치도 아니다. 그 창조는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새로 워지는 연속이거나, 창조적인 진화이거나, 또는 계속적으로 발명적인 內 在性이거나, 또는 앞서 있었던 것의 수많은 풍요 속에서 언제나 시작하는 죽홍이다.〉 39 ) 정신의 세계에서 인간이 창조에 현재적으로 열중할수록, 더 큰 풍요의 가능성이 미래에 열린다는 베르그송의 사상은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모 든 것이 변화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재래의 형이상학과 어떻게 다~ 가? 아리스토텔레스 Ar i st o t~ 철학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과학 39) V. •J an ke1evit ch , 같은 책, p. 215.
자나 수학자도 그렇게 생각하여 왔다. 예컨대 운동이 있기 전에 그 운동 울 연결시키는 정지된 접들이 선결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석 적 이성도 그런 〈제조적 사고〉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베르그송이 생각한 가능성은 그런 기계론적 제조의 사고와 전혀 다르다. 현재에 쏟아 넣는 창조적 생명의 강도가 미래에 더 많은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을 갖 게 되리라는 생각은 그의 자유론괴- 같이 현재의 창조적 생명이 그의 미 래에 대하여 갖는 희망이다• 〈희망이 강도 높은 쾌감을 주는 것은 우리 뜻대로 우리가 처분하는 미래가 동시에 우리에게 똑같이 미소짓고 똑같 이 가능이 가능한 무수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아다. … … 무한한 가능 성으로써 살찌고 있는 미래의 관념은 미래 자체보다 더 풍요하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소유보다는 희망에, 현실보다는 꿈에 사람들이 더 큰 매력을 느낀다.〉 40) 그러므로 베르그송이 생각하는 가능성은 현실태가 되 기 전의 참재태로서의 가능성이 아니다. 그의 가능성은 현재의 창조가 약 속할 것 같은 자신감이 넘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지성의 제조적 사고와 직관의 창조적 사고는 다르다. 직관의 정신적인 창조에는 분석적이고 제조적인 지성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신 비적인 요소의 섬광이 있다. 왜냐하면 오직 정신만아 정신적인 것이 무엇 인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어떤 것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에너지의 흐름이요 의식의 지속이다. 끊임없이 흐르고 흐르는 정신은 어디로 흘러가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주 의 시간만큼 영원하다. 그러므로 정신의 풍요는 우주의 시간만큼 영원한 그 세계에 동참하는 형이상학과 같다• 우주의 영원한 시간이라고 하여서 그 시간을 객관적으로 한없이 이어지는 줄처럼 공간화하거나 그렇게 표 상하여서는 안된다. 공간적으로 표상화된 영원은 베르그송에 의하면 〈죽 은 영원 l'et er nit e mo rt e 쩌다. 〈죽은 영원 X 든 지성적 개념으로 파악되 는 시간의 시작과 끝을 모르는 한 줄의 실과 같다. 그러나 〈살아있는 영 원 l'et er ni te v i van t e){ 든 우리 의식의 지속이 우주에 동참하여 우주의 40) H. Bergs o n, Essai, p. 7.
생명과 나의 의식이 함께 선율과 화음과 리듬을- 타고 느끼는, 무한하지만 또한 지극히 〈단순한 기쁨〉 그 자체다. 그 기쁨은 베르그송의 예찬자였 던 미국의 제임스 W. Jam es7} 말한 바와 같은 〈아침의 미풍戶]고 〈새들 의 웃음소리〉와 다르지 않으리라 . 4 1) 이와 같은 베르그송의 철학과 형이상 학은 그가 스스로 지적하였듯이, 칸트의 철학과 아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철학한다는 것은 정확히 말하여 직관의 노력으로서 비판철학이 밖에 서서 定立과 反定立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길을 구체적 현실에서 취하려고 한, 그런 구체적 현실의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내가 회색을 보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흰색과 검은색이 서로 상호침투하는지를 결코 상상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한 번이라도 내가 회색을 보았다면, 흰색 과 검은색의 이중적 관점에서부터 어떻게 회색을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 울 것인가를 별어려움이 없이 이해하게 된다. 직관의 바탕을 갖고 있는 학설은 그것이 직관적이기에 칸트의 비판철학에서 잡히지 않는다. 만약에 사람들이 논문 속에서 얼어붙고 죽은 형이상학을 취하지 않고, 철학자들 에게서 살아있는 형이상학을 취한다면, 직관적 모든 학설은 형이상학의 전부가 된다 . 〉 42) 3 낙관적 형이상학과 신비주의 앞 절에서 우리는 베르그송에 있어서 철학과 형이상학이 결국 같은 의 미를 지니고 있는 것임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의 본령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는 미전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베르그송은 『 사유와 운동자』에서 라베쏭 Feli x Rava i sson의 철학을 긍정 적으로 평가하면서 라베쏭의 철학에 있어서 〈예술은 형체로 나타난 형이 상학 une meta p h y si q u e fig ure 러고, 형이상학은 예술에 관한 反省이며, 41 ) 金振祖 앞의 책, p. 191. 42) H. Bergs o n, La pe nsee et le mouvant, p. 224.
심오한 철학자와 위대한 예술가를 만드는 것은 다양하게 이용~ 동일한 직관〉 4” 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고 밀하였다. 이와 같은 규정은 라벳 쏭의 철학에 대한 베르그송의 주석이지만, 사실상 라베쏭의 해석을 통하 여 베르그송이 스스로의 형이상학에 대한 견해를 전술한 것이라고 보아 도좋으리라. 베르그송에 있어서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물론 그에게 있어서 철학 하는 것 자체가 바로 형이상학이다. 그의 철학방법이 칸트의 비판철학과 다르다고 함이 앞에서 지적되었다. 그런데 그의 철학적 방법은 보편과학 이나 종합과학의 방법이 아니다. 〈하나의 철학은 조립보다 오히려 유기체 에 더 유사하고, 구성보다 오히려 진화를 말함이 더 타당하다〉 44) 고 베르 그송이 밀하였을 때, 우리는 이미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적 성격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단적으로 그의 형이상학은 유기체 l' or g an i sme 의 철학이 요, 전화의 철학이다. 그런 각도에서 그의 철학은 특수과학들의 다양한 결과를 종합하는 〈보편과학 la sci en ce un i verselle 〉이 될 수 없고 지식 의 통합원리가 될 수 없다 .45) 다양하게 분화된 과학들을 하나의 원리로 종합한다는 것도 불가능하고, 또 철학은 과학적 지능의 방향으로 달리는 그런 지식을 따라갈 수가 없다. 지성의 척도에서 철학이 과학보다 더 낫 게 지식을 무장한다는 것은 지능과 지성의 본질상 불가능하다. 오히려 철 학이나 형이상학은 다양한 과학들을 한 곳에 모으기보다, 과학과는 다른 각도에서 시작해야 한다. 죽, 철학은 애초의 출발에서 과학과 달리 어떤 통일에서 시작한다고 봐야 한다. 통일로 가는 것이 아니고, 통일에서 출 발하는 것이 철학이요, 형이상학이다.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은 직관의 철학이기 때문에 지성의 과학과는 아예 그 궤도를 달리한다. 그러면 직관의 철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이 아예 처음 부터 통일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그 출발점이 지속 43) 갈은 책, p. 226. 4454)) 갇같은은 책책,, pp.. 113242..
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속은 통일이다. 우리의 정신세계에는 시작부 터 끝까지 단편적으로 끊이지 않는 내면적 〈선율〉이 있다. 이 〈내면적 선율 X 는 움직이는 실재요, 그래서 변화다. 변화와 통일은 모순적 개념이 아닌가? 형식논리에서 보면, 변화와 통일은 분명히 모순적이다. 그러나 지속의 형이상학에서 보면 그것은 전혀 모순적인 것이 아니다. 그 까닭울 우리는 이미 제 2 장에서 밝힌 바가 있다. 베르그송이 생각한 변화는 변화 하는 것들이 다양하게 있다는 뜻이 아니라, 변화하는 흐름의 연속이 있음 을 뜻할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지속이 변화하면서 흐른다. 그 흐름에 직접 공감하면서 정신의 의미를 늘 현재진행형으로 찾기에,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은 그의 표현처럼 〈상징없이 지낼 수 있는 학문〉 4 6) 임에 틀림없 다. 여기서 〈상칭〉이라는 개념은 지성이 자기의 객관적이고 기계론적 사 유를 정립시켜나가기 위한 사유의 도구를 뜻한다. 그 사유의 도구가 곧 표상이다. 예컨대 수학적인 모든 기호가 다 상칭이다. 형이상학이 정신의 흐름을 타고 있으므로, 그 형이상학이 겨냥하는 전리는 밖에서 위치에 따 라 달라지는 상대성을 벗어난 절대적인 것이요, 비록 변화하지만 하나의 흐름이 흐르기에 거기에는 추상적 개념들의 〈병렬 la j ux t a p os iti on 〉이 없고, 생생한 현실의 살아있는 경험의 연속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런 형이상학은 유한한 관점들의 정리가 아니고, 무한에서 무한으로 흐르 는 정신의 전리를 찾는다. 그리고 그 형이상학은 직관의 방법을 가까이하 지, 결코 분석의 방법을 포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의 절대성은 오 직 직관에서만 주어질 수 있고, 그 나머지는 분석에서 제기된다. 여기서 말한 직관은 대상의 유일하고 표현할 수 없는 것과 일체가 되기 위하여 대상의 내부로 옮겨지는 공감 la s y m p a t h i e 이다. 반대로 분석은 대상을 이미 인식된 요소나, 이 대상과 다른 대상과 공통적인 요소에로 이끌고 가는 操作이다. 분석한다는 것은 한 사실을 그 사실이 아닌 것을 함수로 하여 표현하는 데 성립한다.〉 47) 46) 같은 책, p. 182. 47) 같은 책, p. 181.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대상과의 〈정신적 접촉〉 울 형이상학이라고 한다면, 그런 형이상학은 예술에 관한 반성과 같이 대 상과 사이좋게 가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술은 구체화 된 형상으로서의 형이상학과 같은 것〉이기에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은 예 술철학과 대단히 가까이 이웃하게 된다. 베르그송의 사상에 따르면, 참다 운 예술가는 質의 심리철학요, 自由의 심리학자며 동시에 생명의 지속과 벗하고 있는 직관주의자다. 예술이나 형이상학이나 다 함께 일상생활의 실용적인 세계에만 우리의 생각과 언어활동과 행동이 매달려 있는 것의 빈곤함을 일깨워준다. 형이상학과 예술은 일상생활의 실용성만 찾는 이들 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고, 또 그것들은 그들에게서 멀리 도망간다. 형이 상학과 예술은 실용을 넘어 실용성이 보지 못한 정신의 풍요함과 기쁨울 찾고자 할 때 나타난다. 〈회화든 조긱이든, 詩든 음악이든, 예술은 실천 적으로 유용한 상칭둘을 멀리하려는 것, 사회생활상 수용된 일반성을 멀 리하려는 것, 우리에게 실존룰 못 보게 하는 모든 것을 멀리하려는 것 이의에 다른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 …·:· 예술은 확실히 실재를 더 직접 보는 비전이다. 그러나 이런 지각의 순수성은 유용한 · 관습과의 결별, 의 미나 의식의 타고난 공평무사함과 생명의 어떤 비물질성……울 내포하고 있다.〉 48)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이 그런 취지를 안고 있다면, 그 형이상학은 결국 종국적으로 무엇을 겨냥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베르그송 형이상학의 정 신은 무엇일까? 단적으로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은 곧 〈지속의 형이상학〉이다. 지속이 있는 곳에 형이상학이 있고 또 지속이 있는 곳에 정신의 기쁨이 있다. 그런 점에서 베르그송은 이 지상 위에 지속을 떠나 시간을 초월한 세계 로 도피하지 않는다• 지속 속에서 모든 것이 가득 차 있고 허무와 無와 공허는 없다. 지속적인 생성의 형이상학에서 헤겔이 말한 역사의 〈불행한 의식 X 는 개입되지 않는다.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에서는 비극적 인생체험과 48) H. Bergs o n, Le rire , p. 120.
역사체험이 제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베르그송에 영향을 크게 입은 가 브리엘 마르셀 Gabrie l Marcel 의 형이상학에서는 이 세상에 대한 슬픔 이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베르그송에게 찢어진 갈등의 실재는 그의 형이 상학에서 배제되어 있다. 우리는 이미 베르그송 철학사상의 구조가 이원 적 일원론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에게는 〈기억〉과 〈물질〉 의 이원성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의식의 계속성으로서의 지속〉과 〈의 식의 공간화로서의 동질적 시간〉 사이의 대립이 있다• 또 그런가 하면 〈생명과 물질〉, 〈본능과 지능〉, 〈지성과 직관〉의 대립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대립도 결코 영원히 화해될 수 없는 갈등과 분열의 〈임 벌립 X t 하 고 있지 않다. 그의 말처럼 두뇌가 기억의 방해물이면서 동시에 도구이기 도 하고 본능과 지능, 직관과 지성은 서로 대립되면서도 상보적인 요소를 갖는다. 언어도 우리의 정신적 생각을 방해하고 뒤틀리게 하면서도 언제 나 언어는 우리의 유일한 표현수단이다. 두 가지 이원론이 결코 찢어진 분열의 영원상을 제시하지 않기에 또한 조용한 일원론으로 수령된다. 그 가 추정하는 사후의 영혼불멸도 우리가 제 1 장에서 보았듯이, 물질과 투쟁 한 땀방울 맺힌 영혼의 승리가 아니다. 영혼불멸은 단지 기억이 두뇌의 기능을 한없아 넘어감으로써 가장 그럴 듯하게 생각되는 사고의 귀결일 뿐이다. 죽음도 비극적인 마지막 갈림길로 나타나지 않고, 단지 기억의 존속이나 필요에 의한 대체로 설명되고 만다. 죽음 앞에 선 실재의 고통 도 없다. 그러므로 죽음도 無化가 아니고 전적으로 다른 질의 변화로 담 담하게 이어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생명의 비약)o l 죽음에 대한 명상 보다 더 그에게 강렬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생명의 낙관주의가 죽음의 비관주의보다 훨씬 전하다. 말하자면 죽음의 필연성이 생명의 자유를- 끝 까지 해체시키지 못한다. 베르그송에 있어서 자유의 의미는 언제나 생명 이 자기의 현 위치를 超克하는 데 있다. 거기에서 정신의 기쁨이 폭발한 다. 생명이 자기의 현상태를 초극한다 하여도, 결코 생명의 세계를 벗어 나는 것이 아니므로 그의 형이상학은 생명의 내재성에서 결코 이탈하지 않는다.
형이상학은 결코 경험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 이상학을 초경험적이라고 규정한 것은 잘못이다. 인간이 경험을 벗어나면 과학도 철학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과학이 관계하는 경험은 물질과 관계 되는 〈위적 경험〉이고, 형이상학이 관계하는 경험은 정신에 관계하는 〈내적 경험〉이다 .4 9 ) 정신에 관계하는 〈내적 경험〉이 바로 직관이다. 〈형 이상학은 경험의 일반화와는 공통적인 것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형이상학은 총체적인 경험 l'ex p er ie n ce i n t e g rale 이라고 정의될 수 있으리라.〉 50 ) 베르그송이 스펜서의 진화론을 비판하는 까닭도 바로 스 펜서가 진화를 〈총체적 경험〉으로- 생긱하지 않고 진화의 전체 흐름을 단 편적 모자이크로 조각서어서 그것을 마침내 다시 일반화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펜서 H. S p encer 가 전화론의 이름을- 다윈의 영향으 로 쓰고 있지만, 그의 철학은 전화의 총체적 경험과는 무관하고, 단지 전 화된 것들을 조립하여 일반화하려고 하였다고 베르그송은 본다. 〈간단히 밀하자면, 스펜서의 방법이 안고 있는 예사스런 人工性은 전화를 전화된 것의 단편들을 갖고서 재구성함에 성립한다.〉 51) 이미 앞에서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적 낙관주의를 이야기하였지만, 그 낙 관주의는 러이프니츠의 낙관론처럼 지능의 계산에 의하여 이루어전 오성 의 결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인간의 직관이 정신세계를 다시 발견할 수 있고, 그 정신으로 재귀함이 가능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살아있는 생명의 원리와 다시 일치할 수 있다는 철학적 희망 과 통한다. 이와 같은 베르그송의 낙관론적 형이상학이 가능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삶의 체질을 변화시켜야 한다. 베르그송의 말처럼 직관은 지성의 작업보다 훨씬 고된 인간의 수련을 요구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 가? 산업혁명 이후로 2 伊1 ] 기에 들어와서 더욱 더 인류는 과학과 기술의 진 49) H. Bergs o n, La pe nsie et le mouvant, p. 45. 50) 같은 책, p. 227. 51 ) H. Bergs o n , L' evolut ion cria tri c e , p. 363.
보에 대한 신뢰를 강하게 두고 살아 왔다. 산업화와 기계주의가 인류의 행복을 약속하고 있다는 허망된 신화에서 인류는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산업화와 기계화가 고도로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은 옛날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탐욕〉과 〈쾌락〉과 〈사치〉와 〈 富 〉에 탐닉하고 있다. 베르그 송의 생각처럼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보이는 힘이 인간을 점점 더 거칠은 욕망의 만족으로 휘몰아가고 있다. 이 광란적인 욕망의 만족에 제동이 걸 리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우리의 문명은 備浩劑的인 성격을 지니고 있 다. …… 변화가 생겨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보다 더 단순해지고 동시에 더 진지해질 것이다• 여자가 남자 기분에 둘도록 하기 위하여, 그 리고 간접적으로 자기지신에게 기분 좋도록 하기 위하여 사치를 요구하 는 것은 대부분 불필요하게 되리라. 낭비가 작아지고 선망도 덜 생기게 되리라. ― ― 사치, 쾌락, 안락은 ……서로 가까이 있다. 사다리처럼 단계 적으로 사람들이 그것들을 처분한다. 죽, 안락에서 사치로 점진적인 상승 을 한다. 우리가 안락을 확신하게 될 때, 거기에 쾌락을 덧붙이고 싶어한 다. 그 다음게 사치의 사랑이 온다•〉 52)
52) H. Bergs on,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 ion , p. 322 (이후 로는 Les deux sources 라고 약칭함).
우리의 정신이 사치와 쾌락과 안락에 젖으면 젖을수록, 인간은 베르그 송이 말한 〈기쁨〉과 〈즐거움의 형이상학 X t 망각하게 된다. 그런 사치와 쾌락과 안락은 기계문명의 발달과 함께 가는 것은 사실이다. 기계문명이 인간 지능의 필요에 의하여 나온 산물임을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본능 의 취약을 깨달은 인간이 지능으로 그것을 대신하였다. 〈아무도 기계문명 이 현실적 필요성을 만족시키는 수단을 광범위하게 개발함으로써 인간에 게 보내준 서비스를 의심하지는 않지만, 기계문명이 너무 인위적인 것을 장려했고, 사치로 몰고 갔으며 농촌을 희생하고 도시를 살찌게 하였고, 드디어 공간적 거리를 확장시켰고,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와 자본과 노동 사이의 관계를 너무 변형시켰음울 우리는 비판한다.〉 53 ) 베르그송이 생각
53) H. Bergs o n, 같은 책, p. 327.
하는 〈기쁨과 줄거움의 형이상학 X 든 지나치게 그 정도를 념은 기계문명 과 그 기계문명이 낳은 사치, 쾌락, 안락과 결코 같이 공존할 수 없다. 이런 기계문명의 지나침과 과도함에 노예가 된 사람은 형이상학을 싫어 하는 정도가 아니라, 경멸하게 된다. 이미 우리는 실용적 행동에만 급급 한 인간이 사색과 정신의 꿈을 망각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극단적인 행동인이 정신적으로 천박해지는 것과 마 찬가지로, 극단적인 공상인이 현실적으로 비효율적이 된다. 양극단을 베 르그송은 다 거부한다. 그러나 현대 기계문명은 인간을 극단적인 행동인 의 천박성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 천박성이 곧 사치와 쾌락과 안락이다. 이 현대인의 천박성 앞에서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은 어떤 의미를 던지 고 있다. 정신적인 삶의 풍요를 위하여 물질과 접촉하는 인생의 질박함과 단순함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물질을 지나치게 낭 비하고 사치하고 물질적 쾌락을 추구하는 천박한 행동적 삶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인류사회에서 인간 정신의 심오한 깊이가 다시 살아나기 힘들 다는 것이다. 물질주의와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천박한 실용주의 일변도 에 인간의 문명이 전락하지 않기 위하여, 인간은 〈형이상학적 신비주의〉 를 다시 익혀야 한다고 베르그송은 생각한다. 〈신비주의가 금욕주의를 부 른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신비주의와 금욕주의는 조그만 소유만 울 언제나 주장한다. 그러나 진실하고 완전하고 행동하는 신비주의는 그 것의 본질인 자비에 의하여 널리 확산되기를 열망하고 있음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힘도 강하지 않고 희석된 신비주의가 어떻게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에 빠져 있는 인류 속에 확산될 수 있을까? 인간은 하나의 강력한 도구가 그에게 지탱점을 제공한다면, 대지 위에 스스로 일어서게 될 것이 다. 인간은 그가 물질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란다면, 물질을 손아귀에 쥐어 야 하리라. 다른 말로 말하자면, 신비적인 것은 기계적인 것을 부른다.〉 54) 우리 인류의 문명은 〈신비〉와 〈기계〉가 서로 공존하는 형태를 잘 알지 54) 같은 책, p. 329.
못하고 있고 또 어색하게 생각한다. 사실상 〈신바〉와 〈기계〉가 인간의 정신세계의 두 질서인 〈직관〉과 〈지성〉에서 나온 한 뿌리의 다양화된 가 지임에도 봉구하고, 사람들은 그 두 가지가 전혀 공존이 불가능한 물과 불의 관계처럼 생각한다. 물론 〈신비 〉와 〈기계 났근 직관과 지성 (지성 )처 럼 서로 이질적인 방향으로 달려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관계를 이 미 우리가 제 1 장에서 본 바와 같이 〈순수 추억〉과 〈지각적 행동〉과의 관 계처럼 생각하게 된다면, 신비와 기계가 서로 다를지언정, 사색과 행동이 相補하듯이 또한 서로 相助할 수 있게 된다고 베르그송은 생각한다. 그렇 게 생각하지 못한 근본 이유는 기계문명이 산업혁명 이후 급속히 팽창할 때, 신비주의와 정신주의를 배척한 대가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 여 기계문명은 정신문화의 신비성과 금욕성을 불편한 과거의 잔재로 여 겨 안락의 실용성에 너무 비중을 둔 나머지, 결국 오늘날에 우리가 보는 것처럼 〈만인을 위한 해방이 되지 못하고〉 〈불특정 인간들을 위한 사치 나 과도한 안락〉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마침내 기계문명은 정신문화를 배척하거나 경멸하는 욕망의 천박성만 노출시키고 말았다. 〈지나치게 살이 찐 육체 안에서 영혼은 옛날 그대로 있게 되어 지금은 그 육체를 채우기에는 너무 적고, 그 육체를 인도하기에는 너무 약해졌 다. 거기서 영혼과 육체 사이에 공허가 생긴다. 거기서 사회적, 정치적, 국제적인 무서운 문제들이 일어나고 그 문제는 저 공허와 무관하지 않으 며, 공허를 채우기 위하여 문제는 문란하고 비효율적인 많은 노력을 선동 하고 있다. 이제 새로운 잠재적 에너지의 비축이 필요하다. 이번에는 도 덕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55) 베르그송의 낙관적 형이상학은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와 달라서 그대 로 존재하는 이 세계가 가능한 우주 가운데 최선의 것이라는 그런 주장 과 다르다. 그의 낙관주의는 인간의 정신이 자기자신에게 재귀하고, 창조 적인 생명의 원리와 일치하는 한에서 죽음도 넘어설 수 있다는 아주 단 순한 기쁨과 줄거움을 보여주는 형이상학이다. 이때에 쓰여진 단순성은 55) 같은 책, p. 330.
유치한 지성의 단순주의와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다. 거짓말과 악과 욕십은 인간을 복잡하게 하지만, 기쁨과 즐거움은 인간 영 혼을 한없이 단순하게 한다. 어쩌면 그 단순성은 떠오르는 아침의 영롱한 햇살에 누구나 즐거워하고, 그 빛을 받아 새가 나무에서 지저귀고 꽃이 망울을 터뜨리는 것만큼 단순한 것인지도 모른다.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은 그렇다고 대지에 사는 인간조건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신비가 기계를 부른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물질적 기계가 신비를 부를 수 없 다. 인간의 정신이 신비와 기계를 동시에 불러야 한다. 그리고 기계의 도 구가 신비의 영혼에 봉사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 러기 위하여 인간의 지능과 지성은 직관의 힘 앞에 다시 겸손을 배워야 한다. 지능과 지성이 그동안 땅을 보기 위해 인간을 너무 밑으로 구부리 게 하였지만, 이제 직관은 인간으로 하여금 다시 자세를 바로집아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 56) 이래서 그의 형이상학이 도 덕과 종교의 세계로 접목된다. 56) 같은 책, p. 331 .
제兒J 도덕과 종교의 두 가지 원천 1 〈닫힌 도덕〉과 〈열린 도덕〉 우리는 그동안 베르그송의 철학이 이원론이면서도 일원론의 숨은 의도 를 잠재적으로 갖고 있다고 수차례나 지적하였다. 제 1 장에서 베르그송이 물질적인 두뇌와 정신적 기억울 대비시키면서도 상호 연결점을 찾고 있 음을 보았고 생명과 물질, 본능과 지능, 직관과 지성이 상호 대바되면서 도 그러나 서로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을 우리가 살펴보았다. 여기 沼강에서도 같은 대립이 성립한다. 이른바 베르그송이 말한 유명한 〈닫힌 도덕 la morale close 〉과 〈열린 도덕 la morale ouver t e 〉이 그런 대바 를 선명하게 해준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도덕은 각각 그 특성상의 존재 이유를 갖고 있지만, 베르그송이 희망하는 관점은 인류가 〈닫힌 도덕〉에 서 〈열린 도덕〉으로 질적인 비약을 결행할 것을 바라는 데 있다. 말할 나위도 없이 사회생활이 없다면, 인간에게 도덕도 필요없고대 도덕 이 존재할 수도 없다. 도덕은 근본적으로 사회생활의 필요성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래서 사회생활 속에서 도덕은 먼저 〈금지〉의 형식을 빌어 나 타나 있다. 모세 Mo i se 의 십계명 가운데 인간의 도덕에 관한 계율이 거 의 금지하는 부정문의 명령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금지〉가 발생되는 까닭은 그 금지조항을 어기게 되었을 때, 사회생 활의 유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도덕적 금지〉의 기본
은 사회생활의 유지에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회는 하나의 유기체다. 사회생활은 베르그송에 의하면 두 가지의 특성을 지닌다. 사회생활을 구 성하고 있는 개인들은 자유스런 의지의 인격체이지만, 그러나 사회생활 그 자체는 인간의 의지와 무관한 하나의 필연적 법칙을 갖는다. 사회생활 자체가 그 필연적 법칙을 독립적으로 갖지 않으면, 사회는 개인들의 성향 에 따라 붕괴되고 만다. 따라서 〈금지〉는 인간의 자유스런 의지가 붕괴 를 자초하는 위험울 초래하지 않도록 하는 방파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회생활은 공동체의 필요에 대응되는 아주 뿌리깊은 습관의 체계 로서 나타나 있다.〉
1) H. Bergs o n, Les deux sources, p. 2.
이와 같은 사회생활은 전혀 인위적인 것이 아니고 자연발생적인 것이 기에, 기계론적으로- 사회체를 설명할 수 없고, 유기체적으로 이해해야 한 다. 〈사회생활은 본능에 대해서나 지능에 대하여 하나의 막연한 이상같이 내재하고 있다. 이 이상은 한편으로 벌집이나 개미집에서, 또 다른 한편 으로 인간사회에서 가장 완전한 실현을 발견한다. 인간적이든, 동물적이 든, 하나의 사회는 하나의 유기체다. 사회는 하나의 연결성과 또한 상호 간 주종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는 단순히 체험된 것이든, 또는 표상된 것이든 규칙과 법의 체계를 星示하고 있다. 그러나 벌집과 개미집에서 개체는 구조에 의하여 자기가 해야 할 일에 못이 박혀 있고, 유기체는 상대적으로 변화하지 않지만, 인간사회는 가변적 형식으로 이루 어쳐 있고 모든 전보에 열려 있다•〉 2) 이상의 인용을 통하여 우리가 유추 할 수 있는 것은 베르그송에 있어서 사회생활은 막시류의 곤충이나 인간 에게 있어서 공통적인 것이고, 막시류의 사회는 〈본능의 소산〉이고, 인간 의 사회는 〈지능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회에 다 공통적인 것은 그것들이 자연과 같은 하나의 유기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회질서를 구축하는 도덕과 법은 자연의 법칙과
2) H. Bergs o n, 같은 책, p. 22, Fran,;;ois Mey er , 같은 책, pp. 95~96 에서 재 인용.
유사한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사회질서와 자연질서 사이에 하나의 뉘앙스 차이가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사회질서는 의무를 부과하지만, 자연질서에는 의무가 없다. 자연질서는 법칙으로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 3) 그러나 비록 뉘앙스에서 차이가 나지만, 자연법칙을 어기면 해를 입게 되 듯이, 인간이 사회법칙을 어기면 벌을 받게 된다. 그래서 자연법칙에 〈필 연성〉이 있듯이 사회법칙에 〈의무〉가 있고, 자연세계에 〈물질성〉이 있듯 이 사회 생활에 〈관습〉이 있다. 사회가 자연의 생명체와 같이 하나의 유기체이기에, 사회생활에서 개체 와 전체가 분리되어서는 존재할 수 없다. 사회가 유기체가 아니고 기계적 인 조직이라면, 기계적인 조직의 본질상 전체와 부분은 서로 분리될 수 있고, 이 요소와 저 요소도 각각 독립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유기체로서의 사회생활에서 개인과 사회가 각각 따로따로 노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개인은 그의 인격의 깊은 밑바탕에서 사회성과 다른 고유한 실존성을 지니고 있지만, 실존성만으로 그가 일생을 살아가지 못한다. 이 점은 마치 개인이 、 꿈과 행동의 두 측면을 그의 의식세계에서 지니고 있 지만, 꿈만 먹고 살아갈 수가 없는 이치와 다를 것이 없다. 사회생활은 꿈의 세계가 아니고 행동의 세계다. 경험적이고 일상적인 사회생활을 포 기한 이가 점차 행동을 포기하고 순수 추억의 꿈 세계로 깊이 침잠히는· 현상을 생각해보면, 그 점은 쉽게 풀린다. 다시 베르그송의 생각으로 접 근하자. 베르그송은 인간이 사회생활에서 사회와 격리되어 존재할 수 없 기 때문에 범죄를 짓고 괴로워하다가 자기 범죄를 고백하거나 그에 상응 하는 벌을 받고 다시 사회에 통합되기를 바란다고 지적하였다. 그가 벌이 무서워서 도망다니더라도 가까운 자기 친구나 애인에게 자기의 범죄를 고백하고픈 충동을 느끼는 까닭은 적어도 좁은 범위에서나마 그 7} 사회 와 가까이 있고 싶어하는 욕구의 자연적 발로 이의에 다른 것이 아니라 고 베르그송은 추정하고 있다. 쉽게 말하여 인간은 자연적으로 〈사회적 동물〉로 태어났다. 비록 인간이 그의 인격의 깊은 내면세계에서 사회생활 3) H. Bergs o n, Les deux sources, p. 4.
을 싫어하고 거기에서 가급적 탈피하고폰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정작 그 가 反社會的 人間으로 고립을 당하게 되고 철저한 고독을 느끼게 되면, 그는 그 고립과 봉쇄를 한없이 괴로워하게 된다. 아우리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의 독백은 언제나 자기자신과의 대화의 양식으로 나 타나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아무리 개성이 강한 인간이라도 반사회적 행위를 감히 취하지 못 하고 결국 그 사회가 요구하는 규칙이나 관습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그 개인이 스스로 자기자신을 보호하는 길이다. 마찬가지로 사회 도 자기 존속과 보존을 위하여 사회규칙에 대한 복종을 절대적인 필요로 요구하고 있다. 더구나 미개사회에 접근할수록 사회규칙도 다양하게 많 고구 그 사회규칙에 대한 복총도 거의 절대적인 〈의무〉로 여겨진다. 미개 사회는 베르그송이 말한 개념에 따라 보면 가장 전형적인 〈닫힌 사회 la socie t e close 〉다. 닫힌 사회일수록 사회적인 것이 인격적이고 정신적이 며 실존적인 것을 압도한다. 지금까지 인류가 체험한 어느 사회도 완전히 열린 사회가 없었다. 그러므로 미개사회든 현대사회든 정도의 처이는 있 지만, 다 닫힌 사회의 성격을 질게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 〈닫힌 사회〉의 〈닫힌 도덕〉이 사회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절대시함 은 자연적인 귀결이다. 그런 사회에서 의무와 함께 나타나는 명령에 어떤 이유를 따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베르그송이 칸트의 〈定言的 無上命 令 X 끝 모든 명령과 의무의 원초적 형태라고 동의하였을 때, 그는 의무의 본질이 이유의 요구와 다른 성격인 〈본능적〉, 〈몽유병적〉 성격을 근본적 으로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4) 그런 관점에서 보면 칸트적인 도덕 의 〈정언적 무상생명〉인 〈너는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해야 하기 때문이 다〉라는 절대적 당위는 닫힌 사회 속에서 인간에게 거의 본능적으로 반 복해서 의무의 복종을 요구하여 왔던 사고습관의 도덕적 자각이요, 지성 화와다른것이 아니다. 〈닫힌 사회 X 즌 이미 언급되었듯이 사회 전체의 유기체를 존속시키고 4) H. Bergs o n, 같은 책, p. 20.
보존시키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는다. 미개사회일수록 사회붕괴의 위 가가 더 많았다. 자연의 재앙으로 사회가 붕괴되든지, 아니면 강한 의적 의 침략으로 사회가 해체되든지 하는 위험이 현대사회보다 더 많았던 것 이 사실이다. 이 점을 무시하고서 닫힌 도덕을 이해할 수 없다. 열린 사 회라도 어떤 전쟁의 위기를 느낄 때, 열린 사회는 닫힌 사회로 되돌아가 려는 충동을 갖는다. 하여튼 닫힌 사회는 사회적인 것의 절대성으로 말미 임아 거기에 대한 도덕은 철두철미 〈의무적〉이다. 그런데 개미나 벌둘 사회에는 이마 본능적으로 곤충들 개체가 오로지 자기가 해야 할 일만 한다. 그것은 그들의 群樓생활을 영구히 지속시키기 위한 무의식적 행동 이다. 베르그송의 비유처럼 그들 막시류 곤충들(벌과 개미)은 마치 〈몽 유병 환자〉처럼 일하고 움직이고 행동한다. 본능은 무의식이나 또한 비유 컨대 〈몽유병 상태의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군서생활에서 명령과 복종의 위계질서는 빈틈이 없다. 부하는 상사에 대하여 최면에 걸린 것처 럼 행동하고 일한다. 그러나 인간은 막시류와 달라 그렇게 본능적인 〈몽 유병〉이나 〈최면상태〉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사회가 유지되기 위하여 이와 유사한 법칙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그런 법칙이 곧 〈관습〉 이다. 관습은 곤충의 본능처럼 인간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게 한다. 반복에 의하여 자율운동적 습관에 걸린 사람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 을 한다. 그런 습관을 형성시키는 것은 인간의 지능이다. 인간이 사회생 활에서 사회적 행동의 관습에 걸리는 것은 인간에게 그러한 요인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깊은 영혼은 사회적인 것과 무관한 자유의 세계를 갈망 하지만, 그가 반사회적 범죄를 지었을 때 적어도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 그 죄를 고백하고 싶어 하듯이, 인간은 사회적 행동의 연대세계에서 이탈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런 사회성 때문에 행동의 유효성을 찾는 지능은 도덕을습관화시킨다. 그런 점에서 닫힌 사회의 닫힌 도덕의 두번째 특징은 본능적인 것에 가까우리만큼 〈습관적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첫번째 특칭인 〈의무적인 것〉이 이미 두번째 특칭인 〈습관적인 것璋「 스스로 잉태하고 있다. 〈지
능과 본능은 원초적인 상태에서는 상호 침투되었다가 자라면서 서로 분 리되지 않으면 안되었던 의식의 모습들이라고 간단히 밀하자. 그런 전개 가 동물적 생명의 두 가지 방향의 큰 진화, 죽 절지동물과 척추동물 위 에서 이루어졌다. 절지동물의 끝에 곤충들의 본능, 특히 막시류의 본능이 있고 척추동물의 끝에 인간의 지능이 있다. 본능과 지능은 도구를 이용하 는 것을 본질적 대상으로 갖고 있다. 지능에서는 발명되는 도구, 죽 가변 적이고 예견불능의 도구가 관계되고 본능에서는 자연에 의하여 갖추어진, 따라서 불변적인 기관I' or g an ff:' l 관계된다.〉 5 ) 한번 습관에 걸리면, 인간 은 다른 것을 받이들이기 어렵다• 습관은 자기가 형성한 기질 이외의 다 른 것을 배척하는 닫힌 성격을 지니고 있다 . 습관과 유사한 성질을 지닌 본능도 폐쇄적인 성격을 지닌다. 막시류의 곤충돌이 〈몽유병 환자〉마냥 일을 줄곧 하는데, 그들은 자기가 왜 그런 일을 미친 듯이 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본능의 행태 속에 갇혀 거기서 떠나지 않고 일을 무의식적으로 계속할 뿐아다. 그런 점에서 닫힌 도덕의 세번째 특칭은 그것이 문자 그대로 〈폐쇄적〉 이고 〈배척적〉이라는 것이다. 닫힌 도덕은 닫힌 사회를 만들고, 동시에 닫힌 사회도 닫힌 도덕을 만들어간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닫힌 도덕의 최 고 기준은 국가사회라고 생각한다. 즉, 국가사회는 닫힌 도덕이 확장할 수 있는 가장 넓은 外延인 셈이다. 닫힌 도덕은 인류를 겨냥하지 않는다. 〈닫힌 도덕은 인류를 바라보지 않는다. 아무리 크다 하여도 나라와 인 류 사이에는 유한에서 무한까지 벌어진, 닫힘에서 열림까지 벌어전 거 리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민적 덕성의 습득은 가정에서 이루어져서 자기 조국을 사랑하고 드디어 사람들이 전 인류를 사랑하게 된다고 즐겨 말하고자 한다. 우리의 공감이 계속적인 전보로 확장되고 동일한 것으로 성장하면서 마침내 전 인류를 포괄하는 것으로 끝난다고 믿는다. 그러나 거기에는 영혼을 순전히 主知主我的 개념으로 생각하는 선천적 추리가 있다.〉 6) 5) 같은 책, pp. 21~22.
儒敎的 발상에 따르면 〈 {I 多身 〉, 〈齊 家 〉, 〈治國〉, 그리고 〈 平天下 〉다. 그 런데 베르그송이 생각하는 관점은 〈제가〉와 〈치국 X 븐 닫힌 개념, 닫힌 도덕이고 〈평천하났근 열린 도덕이라는 것이다. 가족윤리가 사회윤리로 이 어질 수 있다. 그러나 국가사회 윤리와 인류를· 포괄하는 윤리 사이에는 엄청나게 다른 질적 비약이나 질적 변형이 있다고 베르그송은 생각한다. 그 질적 비약은 〈닫힘〉과 〈열림〉의 차이와 같다. 가족이나 국가사회나 침략하는 의적이나 교란자를 언제나 상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가상의 적을 격퇴하고 가족과 사회를 수호한 인물을 애국자의 표본으로 여긴다. 그런 애국심은 그 자체 숭고한 감동을- 동반하고 있지만, 베르그송의 눈에 비찬 그 애국심은 〈의무적〉이고, 〈본능적〉이며, 〈폐쇄적〉인 도덕성의 고 상한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린 애국자의 감동은 쉽게 국경 밖울 초월하지 못한다• 애국심이 닫힌 도덕이라고 하여 서 그것이 나쁜 것이라는 유치한 흑백논리로 보아서는 안된다. 훌륭한 애 국심은 역시 감동적인 데가 있다. 그러나 애국자가 국경을 초월한 감동을 줄 때는 오직 자기 나라의 이익만을 위해서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경우 보다는 그가 애국적이되 동시에 정신적인 보편성을 가졌을 때, 더욱 감동 적이 된다. 아마도 이순신 장군이 그런 경우에 해당하리라 믿는다. 그는 애국자다. 그러나 그는 자기 나라의 이익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한 軍伐이 아니다. 그는 보편적 인간성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聖雄〉이라고 부른다. 이순신은 군인의 몸으로서는 닫힌 도덕의 至上인 애국자였지만, 인간으로서는 열린 도덕의 성품을 가졌다고 보여전다• 즉, 그는 〈닫힌 도덕〉과 〈열린 도덕〉의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가졌다고 보 여진다. 그런데 베르그송이 생각한 열린 도덕의 化身온 주로 위대한 종교인을 말한다. 그의 말처럼 고대 그리스의 성자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불교의 아라한들, 기독교의 성자들이 이에 속한다. 현인이나 성자들에 의하여 제 시된 도덕은 단순히 국가사회까지만 확장되는 의무적이며 습관적이고 닫 6) 갇은 책, p. 27.
힌 도덕이 아니다. 열린 도덕은 〈자발적〉이며, 〈직관적〉이고, 〈진보적〉이 면서 〈통일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베르그송은 생각한다. 왜 〈열린 도덕 la morale ouver t e 〉이 자발적인가? 이 물음에 대한 베르그송의 간접적 인 답변을 듣기로 하자. 〈왜 성자들은 그렇게 자신들을 닮으려는 이들을 갖고 있는가? 그리고 왜 善 의 위대한 인간들 뒤에 많은 군중들이 따르고 있는가? 그들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얻 는다. 그들은 권장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이 실존하기만 하면 된 다. 그들의 실존이 하나의 부름이다. ……자연적인 의무가 압력이거나 강제임에 반하여, 완전하고 온전한 도덕에는 부름이 있다.〉 7 ) 〈열린 도덕〉 은 〈강요하는 도덕〉이 아니고, 〈부름의 도덕〉이다. 사회가 강요하지 않 고, 하나의 실존이 그 자리에 있기만 하는데, 왜 사람들이 그 실존을 모 방하려고 하는가? 그 까닭은 그 실존의 있음이 만인에게 커다란 〈감동 e mo ti on 〉을 안겨다 주기 때문이다. 〈가장 조용한 감동 속에서는 어떤 행 동의 요구가 들어올 수 있다. 그 행동의 요구는 저항을 만나지 않는디는 점에서, 또 동의된 것에 속한다는 점에서, 그러나 어떤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의무와 닮은 데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조금 전에 말한 의무와 차 이가 난다.〉 8) 이와 같은 감동은 베르그송이 말한 바와 같이, 음악적 감동 에 비유된다. 음악적 감동이란 우리가 음악을 듣는 동안, 또는 그 감동이 식지 않고 아직도 남아 있는 동안, 우리는 그 음악소리의 부름에 따라 자발적으로 음악이 마치 행동의 준칙이 되듯이 행동하게 된다. 음악이 즐 거우면 나도 즐거워지고, 음악이 슬프면 나도 따라서 슬퍼진다. 음악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음악의 세계 속으로 빨려들어가 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이처럼 음악은 우리를 감동시키면서 자발적인 창조의 힘을 일깨워준다. 〈창조는 무엇보다 먼저 감동이다〉 9) 라고 베르그 송은 간결히 표현하였다. 위대한 천재들은 먼저 감동을 받고, 그 감동에 7) 같은 책, p. 30. 8) 같은 책, p. 36. 9) 갇은 책, p. 42.
의하여 그들의 지성이 움직여졌다. 과학적인 천재의 경우가 아니라도 좋 댜 철학적인 창조의 경우에 감동은 도덕과 지성보다 선행한다. 〈새로운 도덕 이전에, 새로운 형이상학 이전에, 의지의 측면에서는 비약으로, 지성 의 측면에서는 설명적인 표상으로 연장되는 감동이 있다. 예컨대 그리스 도교가 사랑의 이름 아래 주었던 감동을 생각해보자. 그 감동이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집았다면, 어떤 행위가 거기에서 나오고, 어떤 敎說이 퍼진다. 이런 형이상학이 이런 도덕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이런 도덕이 이런 형이 상학을 바라지도 않았다. 형이상학과 도덕은 같은 것을 표현하고 있다.〉 1 0 1 음악처럼 열린 도덕은 인간의 영혼을 부르고 있다. 그 〈부름l' a pp el 〉이 인간에게 자발적 창조의 힘을 일깨워준다. 이와 함께 도덕은 사람들의 마음을 강제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즐겁게 하나로 융합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고 베르그송은 생각한다. 이미 우리가 성찰해온 바와 같이, 닫힌 도덕은 철저히 자기 사회의 보존과 自 衛, 그리고 번영을 위한 도덕이다. 따라서 그 도덕의 주체는 익명적인 사 회규범과 사회체제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회적인 익명의 성격을 지니 면 지닐수록, 그만큼 의무의 강제력은 강해진다. 그러나 열린 도덕은 한 위대한 영혼의 실존적 개체성에 집중된다. 그 영혼을 중심으로 하여 많은 사람이 마치 그 영혼 자체이듯 하나로 통합된다. 이런 통일의 힘이 어디 에서 오는가? 베르그송은 그 힘을 인간적인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른바 닫힌 도덕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인 힘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과 전혀 질 을 달리하는 〈인간적인 힘〉이다. 〈결국 우리는 도시를 확장시킴으로써 인류에 도달하는 것이 아님을 보았다. 사회적 도덕과 인간적 도덕 사이의 차이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다. 사회적 도덕은 우리가 자 연적으로 의무를 짊어지고 있다고 느낄 때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선명한 의무를 넘어서, 우리는 거기에 겹쳐지는 유동적인 다른 것을 상싱하고자 한다. 헌신, 自已贈與, 회생의 정신, 자비 등은 우 리가 그 다른 것을 생각할 때 말하게 되는 개념들이다.〉 Ill 이처럼 열린 10) 같은 책, p. 46.
도덕이 자발적으로 인간들을 모으는 것은 그것이 인간성에 말을 건네는 도덕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런 열린 도덕은 비약적이고 진보적인 성격을 또한 지니게 된다. 이 비약의 전보는 열린 도덕이 생물적인 만족이나 쾌락보다 정신적인 가쁨 을 추구하는 데서 생긴다. 열린 도덕과 닫힌 도덕이 구체적인 경우에 서 로 회통되는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두 가지는 질을 달리하는· 것이 사실이러는 입장을 베르그송은 견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 두 가지 도덕을 극단적으로 추상화하면, 열린 도덕은 〈열망l' as pi ra ti on)%, 닫힌 도덕은 〈압력 la pr essio n )% 그 본질적 특성으로 갖는다. <… … 우리는 하나의 도덕의 양 국단에서 압력과 열망을 발견한다. 압력은 그것이 무인 격적이면 그럴수록 그만큼 더 완전해지고, 또 습관이나 본능에 더욱 더 가까워지고, 열망은 그것이 개인들에 의하여 우리 속에서 더 가시적으로 제고되면 될수록, 그리고 자연을 더 잘 이겨내면 낼수록, 그만큼 더 강력 해진다.〉 12) 압력으로서의 도덕은 사회의 보존을 겨냥하기 위한 수단이다. 사회의 보존을 통하여 사회적인 것의 〈안락〉 속에서 개인들의 〈쾌락 le p la i s i r 璋 증대시키려는 목적을 닫힌 도덕이 생긱하고 있다. 그의는 반 대로 열린 도덕은 물질적 쾌락보다 〈정신적 기쁨 la j o i e )1끌 겨냥하고 있 다 .13) 쾌락은 그 자체 닫힘의 성질을 지닌다. 배고픈 이에게는 음식을 먹 는 것보다 더 큰 쾌락은 없다. 그런데 배고품에서 배부름의 상태로 이행 함에는 전혀 열린 정신의 자세롤 볼 수 없다. 배가 부른 다음에 오는 포 만감은 超越에의 여지롤 남겨두지 않는다. 그러나 쾌락과 안락과 포만과 는 달리 기쁨은 암암리에 열린 정신의 본성과 만난다. 〈열망의 도덕 속 에는 반대로 전보의 감정이 암암리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말했던 감동 은 前進의 열기다. ……전보와 전진은 그 열기 자체와 서로 혼융되어 있 다.〉 U) 11) 같은 책, p. 31. 12) 갇은 책, p. 48. 13) 같은 책, p. 49.
마지막으로 〈열린 도덕 X 든 지능의 소산이 아니고, 직관의 작품이다. 우 리가 앞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능과 지성은 물질의 관리와 이용에 접근할수록, 그 힘과 역량이 더욱 돋보인다. 그러나 정신세계에 우리가 눈의 방향을 돌리면, 그만큼 지능과 지성은 장애가 되고 오히려 직관이 정신의 본질을 더욱 잘 통찰하게 됨을 알고 있다. 열린 도덕은 물질과 사회를 안전하게 관리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을 그 생생 한 생명에서 공감하려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그러므로 열린 도덕은 정신 의 부름에 직접적으로 응답하려는 〈정신에 의한 정신의 공감〉인 직관과 다르지 않다. 이 점을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善 의 위대한 인간들을 사상으로써 다시 되새길 때,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그들이 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이 우리들에게 그들의 열정을 다해서 말을 건네고 있고, 우리를 그들의 운동 속으로 이끌어둘이고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어느 정도 경감된 강제성이 아니고,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이다.〉 15) 이처럼 열린 도덕은 직 관적으로 정신의 운동 속으로의 동침을 매력으로써 끌어둘이고 있다. 그 정신의 세계에 동참하게 되면, 우리는 신비스럽게도 하나의 새로운 질적 변형, 죽 〈해방의 감정 un senti me nt de libe rati on }½ 체험하게 된다. 〈안락 le bie n -e t r e , 쾌락, 富 와 같이 인간이 공통적 목표로 여기로 있는 것이 거기에서는 무관심해진다. 그것들에서 해방되면서 사람들은 어떤 위 안과 희열을 다시 느끼게 된다.〉 16) 베르그송은 닫힌 도덕에서 열린 도덕으로 질적 바약을 결행하는 정신 의 태도를 〈영웅적 행위 l' hero i sme 〉라고 말하고 있다. 물질적 만족이 주 는 온갖 사슬을 과감히 끊는 행위가 〈영웅적 행위〉다• 〈이 영웅적 행위 는 설교를 늘어 놓지 않는다• 그 행위는 자신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그 행위의 현존만으로 타인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그 행위 자체가 14) 같은 책, p. 49. 15) 같은 책, p. 98. 16) 갇은 책 , p. 50.
운동으로의 재귀며 창조적 행위와 결부된 감동에서 흘 러나온다.〉 17) 베르그 송이 생각한 〈영웅적 행위났근 마치 생명의 비약이 물질 의 저항 울 뚫 고 진화하는 폭발력과 같다. 그 행위는 베르그송이 스스 로 지적한 것같이, 〈사회적 연대의식 la solid a rit e soc i ale 〉에서부터 〈인간의 형제애 la fra - ter nit e huma i ne 〉로 비약하는 운동이며, 스피노자의 용어대로 표현하자 면 〈所産的 自然 la natu re na t uree 〉에서 〈能産的 自 然 la natu re natu - ran t e 〉에로의 상승운동이다 .18 ) 〈영웅적 행위〉로 나타나게 되는 〈도덕적 열망只끌 지금까지의 논거를 토대로 생각해볼 때, 그것은 〈창조적 에너 지녔t 받아 확장되는 〈감동〉과 다르지 않다. 그 열망은 압력이 가두어 놓았던 모든 닫힌 울타리의 틀을 과감히 깨고 근원적인 생명의 에너지로 다시 접목하는 힘과 같다. 열망은 각 사회의 특수성이 아니라, 인류의 보 편성을 추적하는 〈사랑〉과 〈형제애〉의 비약이다. 베르그송의 표현을 빌 리면, 〈압력汗는 〈의무〉와 같이 〈본능적〉이고 〈관습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지성이하적 inf ra - i n t ellec t uel 〉이지만, 열망은 부름과 같이 관념 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한에서 〈지성이상적 su p ra- i n t ellec t uel 〉인 성격 을 지니고 있다回 열린 도덕은 언제나 〈영웅 le heros 〉과 〈성자 le sai- n t〉의 〈부름l' a pp el 〉에 대한 〈응답 la re p onse 〉의 뜻을 지니고 있다. 루 이 라벨 Lou is Lavell et폰 〈닫힌 도덕〉과 〈열린 도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베르그송은 경탄할 만한 도덕 속에서 두 가지 도 덕을 대비하였다. 하나는 닫힌 도덕으로서, 그것은 자기자신의 지평 내부 에서 움직이지 않으며, 자기 획득에만 전념하며 자신을 상실하지 않을까 불안해 하지만, 또 디른 하나는 열린 도덕으로서, 그것은 인류의 발전에 관하여 무한한 전망을 열어놓는 운동과 발명으로 가득 차 있다 . 〉 20) 베르그송이 생각하는 두 가지 도덕에는 연결보다 오히려 질적인 비약 17) 같은 책, p. 51. 18) 같은 책, p. 56. 19) 같은 책, p. 85. 20 ) Louis Lavelle, La ph il o sop h ie fran i; aise entr e les deux gu erres, p. 106.
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쟝께레비츠는 그 비약을 〈갑작스러움 la sou- da i ne t e 〉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확실히 베르그송의 철학에는 그 〈갑작스 러움〉이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난다. 순수 기억과 물질적 지각 사이에도 하나의 갑작스런 질적 변환이 있고, 量 의 심리학과 質의 심리학, 생명과 물질, 직관과 지능 사이에도 前代未聞의 〈갑작스러움〉이 출현하고 있다. 그 점에서 닫힌 도덕과 열린 도덕도 마찬가지다. 닫힌 도덕의 안락과 쾌 락, 그리고 열린 도덕의 기쁨 사이에 하나의 균열이 있다 . 〈쾌락과 안락 은 어떤 것이지만, 기쁨은 그 이상의 것이다. 쾌락과 안락은 기쁨 속에 잠재적으로 재발견되지만, 기쁨은 쾌락과 안락 속에 포함되지 않았다. 쾌 락과 안락은 결과적으로 정지나 제자리 걸음이지만, 기쁨은 전전이다•〉 2 11 이와 같은 열린 도덕의 전형적안 예를 베르그송은 〈福音의 道德〉에서 찾 고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예수의 山上垂訓은 가 난의 예찬도, 부의 저주도 뜻하지 않는다. 베르그송의 눈에 그 수훈은 가 난을 가난으로 여기지 않는 영혼의 너그러움을 상칭한다. 그 산상수훈의 감동은 어떤 철학적 敎說보다 더 널리 인간의 영혼들 속으로 퍼져나간다• 거기에는 논증이나 증명도 필요없다. 단지 그 수훈 자체가 곧 지성의 대 싱이 아닌, 직관의 정신적 부름 자체다. 세계 시민의 보편적 정신은 스토 아 철학자들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철학이 그리스도교만큼 보편적 감동울 생생하게 불러일으키지 못한 까닭이 무엇일까? 그 까닭은 스토아 철학자들이 너무 理性的안 것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이성적 인 것을 지상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성적인 것을 넘어서는 어떤 逆 說的 감동이 그리스도교의 사랑 속에 것들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베르그송의 철학적 사유가 이원론적 일원론임을 찰 알 고 있다. 정신은 물질, 지속과 동질적 시간, 생명과 물질이 서로 상이한 두 가지 차원에 속하면서도 또한 현실적으로 하나의 차원에서 상호 보완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열린 도덕과 닫힌 도덕아 서로 이질적이면서도 문 지방울 통하여 상호교류가 이루어지듯, 그런 현상을 지니고 있다. 이 점 21 ) H. Bergs o n , Les deux sources, p. 57.
울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두 가지 힘은 영 혼 의 싱이 한 지대에서 활동하면서 지성과 같은 중간 지역 위에서 투영되고 있다. 그 두 가지 힘은 이제 지성의 두영에 의하여 대체된다. 이 투영은 서로 섞이고 서로 침투된다. 거기에서부터 질서와 부름이 순수 이성으로 자리 를 옮기는 이행이 생긴다.〉 22) 이 말은 철학자나 윤리학자에 의하여 닫힌 도덕과 열린 도덕이 공통적으로 설명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국 가사회를 지탱해나가는 애국심과 같은 닫힌 도덕과, 인류애와 형제애와 같은 열린 도덕이 하나의 도덕적 원리에 의하여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이 다. 예컨대 상업적 이해관계의 조정에서 파생된 正 義 의 덕목과 자비나 사 랑과 같은 덕목이 상호 비교되면서 하나의 이성적 판단으로 수령되어야 한다. 비록 닫힌 도덕이 동물적 본능에 가까운 강제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그래도 동물 이상의 것이어야 하고, 열린 도덕이 신적인 성스러움 울 지니고 있지만 그래도 신적인 것에서 인간적인 것으로 내려와야 한다• 그 두 가지 도덕을 하나의 삶에 적용시켜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그래서 도덕과 이성 사이에 일치를 이루려고 철학자나 윤리학자들이 시도하였다. 그런 시도 끝에 나온 것이 善 le B i en 의 개념이다 . 23) 이 〈 善 〉의 개념 속 에 의무l' obl ig a ti on 과 열망l' as pi ra ti on 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어떤 행위는 그것이 善이기에 우리의 윤리적 의무이기도 하고, 또한 동시에 우 리의 정신적 이상이요, 열망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善 의 단계를 향적으로 나누려 한다. 죽, 도덕적 삶은 이성적 삶이요, 그 이성적 삶 은 자기가 속하는 국가사회를 위하여 열심히 정직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일을 하게끔 가르치지만, 그 위에 또다시 전 인류를 위한 보편성에의 호 소도 잃지 않는다. 이것이 일반적인 윤리학의 명제다. 그러나 비록 인간 이성의 공통성 위에서 두 가지 도덕의 접목을 윤리 학이 시도한다 하여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설명의 차원이지, 두 가지 도 덕이 지니고 있는 힘은 여전히 이질적이다. 그 두 가지 힘이 각각 달리 22) 같은 책, p. 86. 23) 갇은 책, p. 89.
오는 원천을 베르그송은 〈 훈 련 le dressa g e 〉과 〈신비성 la my st i cit e)o l 라고 규정하였다 언 〈(훈련의) 방법에 대하여 사람들은 무인격적인 습관 으로 만들어진 도덕을 주입시키고, (신비성의 ) 방법에 대하여 사람들은 어떤 개인의 모방이나 심지어 정신적 결합 또는 어느 정도 그 결합과의 완전한 일치를 얻는다. 자연에 의하여 원해졌던 근원적 훈련은 집단의 관 습을 채용함에서 성립하였고, 그것은 자동적이었다 . 훈련은 개인이 집단 성과 거의 혼융되는 곳에서 이루어졌다. ……훈련은 자기 직분과 직업에 전념한 인간으로부터 하나의 정직한 인간을 만들려 한다. 이것이 훈련의 방법이다. 그 방법은 무인격적인 것에서 이루어진다. 다른 방법이 필요에 따라 그것을 보완하게 된다. 그것을 대체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 다른 방법을 종교적이라고, 심지어 신비적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다.〉 25) 반麟] 의하여 기계적으로 몸에 익힌 습관과 또 지성이 사회적인 것의 실용적 이익을 위하여 거기에 정당성을 부과하는· 것과 신비적 직관 으로 영혼의 갑작스런 비약을 결행하는 것과는 그 힘에 있어서 다르다. 아니 힘을 발생시키는 원천이 다르다. 이것이 베르그송의 생각이다. 본능 적인 자기보존의 원칙과 지성적인 실용성이 결부된 닫힌 도덕과 달리, 열 린 도덕은 정신의 신비성에서 온다. 그 신비성이 만인에게 공감을 불러일 으키는 까닭은 만인이 그의 영혼 깊은 곳에 잠자는 영혼의 신비성을 갖 고 있기에 가능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다른 말로 설명하면, 닫힌 도덕은 가족이나 사회나 국가 등과 같은 〈닫힌 사회 la socie te close~ 〈제조 la fa br i ca ti on 〉하기 위하여 요청 된 도덕이다. 그러나 열린 도덕은 닫힌 사회의 생존과 보존, 그리고 번영 울 위한 훈련이 아니라,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 〈제조〉와 다른 차원의 〈창조 la crea ti on 〉에 해당한다. 『 물질과 기억』에서 실용적인 행동과 명 상적인 꿈 사이에 하나의 깊은 균열아 있었다. 그런데 그때의 베르그송의 사상에서는 꿈과 행동의 한 극단에 치우쳐 산다는 것은 건강한 양식에 24) 같은 책, pp. 99~102. 25) 같은 책, p. 100.
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 도덕과 종교의 두 가지 원천 』 에서 베르 그송은 닫힌 도덕의 행동과 실용성, 열린 도덕의 신비성을 각각 규정하면 서도 은연중에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 인간의 정신이 回心할 것을 주장하고 권장하고 있다. 닫힌 도덕의 가장 기계적인 예가 막시류와 같은 곤충사회다. 그 세계는 빈틈없는 본능에 의하여 개개 분자가 한치의 오차 도 없이 전체 벌집사회나 개미집 사회를 위하여 일하고 있다. 그런데 인 간이 만든 닫힌 사회는 이와 같은 막시류의 생리적 유기체와 다르다. 전 혀 디론 것은 아니다. 같으면서도 다르다. 인간의 집단은 본능적 생리적 유기체가 아니고, 문자 그대로 사회적 유기체다. 이 사회는 인간 개개인 울 단지 집단의 도구로서만 간주하거나 이용할 수 없다. 본능 대신에 이 제 지능이 보다 유연성을 발휘하여 도구도 제작하고 하는 일을 객관화시 키는 자유와 여유도 향유한다. 그러나 지능이 물질세계를 지배하고 더 잘 관리하기 위하여 기계적 사고를 사랑하지만, 그러나 사회 전체의 유지 발 전을 위하여 본능적이 아니라 지능적으로 정직하고 열심히 일해야 하는 강제성과 의무성을 사회적 규범이나 관습으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열린 사회 la soc iete ouver t e )i룹 겨냥하는 열린 도덕은 전혀 새롭다. 그 새로 움은 어디까지나 물질의 폐쇄성과 중력을 이겨내려는 〈정신적 에너지〉와 다른것이 아니다. 2 〈靜態宗敎〉의 본질 철학과 과학은 존재하지 않더라도, 종교가 없는 문화나 민족은 없다. 그만큼 인류의 역사는 종교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흘러왔다. 그러면 예나 이제나 인류사에 보편적으로 존재하여 왔고 지금도 그러한 종교의 기원 은 무엇인가? 모든 생명체가 본능에만 얽혀 살게 되면, 종교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종교는 본능의 소산이 아니라, 지능의 소산이다. 다시 말하자면, 종교는 가공할 자연의 파괴력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 인간의 보상행위와 같다. 이 지능의 기능과 종교의 역할과는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우리가 이 점을 곧 보게 될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 하여 뒤르께임 E. Durkhe i m 이 말한 〈사회의 집단적 표상 la rep re sen- ta ti on collec tive de la soc i e t e) 을 먼저 선결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프랑스의 사회학자에 의하면 모든 사회는 각각 개인의 표상과는 다론 집 단적 사고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 집단적 사고방식은 각 사회마다 고유 하게 다를 수가 있다. 더구나 미개사회와 문명사회가 서로 현격히 디론· 사고방식을 갖는다고 여기는 까닭은 이 〈집단적 표상〉의 차이에 기인한 다. 그 〈집단적 표상〉이 언어생활, 관습, 풍속, 그리고 제도의 차이룰 가 져온다. 이 집단적 표싱이 개인적 사고보다 앞선다• 이 점은 이미 현대 구조주의에서 자세히 밝혀져 있다. 사회적인 것이 개안적인 것보다 선행 한다는 한 가지 예로서 범죄를 범한 사람아 그래도 자기가 믿는 사람에 게 고백하여 동정과 이해를 받고자 하는 태도를 우리가 이미 살펴본 적 이 있다. 자기 집단 사회롤 떠난 개미나 벌이 생존할 수 없듯이, 인간도 자기 사회에서 철저히 고립되어서는 견디기 어렵다. 인간에게 그것보다 더 감내하기 어려운 형벌이 없다. 레비쓰드루 ~Lev i-St rauss 의 인류학 에서도 이 점이 여실히 나타나 있다한 이렇게 보면, 인간의 사회적인 성 향은 후천적인 경험의 필요성에 의하여 하나 둘씩 조립되어, 죽 개체가 필요에 따라 전체 사회를 구성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선천적인 요소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사회화의 성향은 인간이 말을 하 는 능력같이 하나의 타고난 능력임에 틀림없다고 보고 있다• 업 ) 그러나 인간의 사회성이 선천적인 성향을 지녔다고 해서 곤충들의 群 樓性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 차이점은 두 가지로 대별되는데, 막시류 와 같은 곤충의 군서생활에는 개체가 전체를 위한 자율신경적 도구에 지 나지 않지만, 인간사회 생활에서는 개인과 집단의 行程이 기계적으로 톱 26) 抽者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 』 , p. 32, p. 127, p. 245, 도서출판 인간사 랑. 27) H. Bergs o n, 갇은 책, p. 110.
니바퀴처럼 결정되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또 베르그송이 지적하였듯이 〈곤충의 본성에서는 행동이 미리 형성되어 있지만, 인간에게는 오직 기능 만이 미리 형성되어 있다〉 . 28 ) 기능과 행동은 다르다. 행동은 처음부터 빈 톰없이 자기의 몫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지만 , 기능은 그렇지 못하다. 말 하는 기능은 선천적으로 미리 형성된 것이지만, 말을 배우지 못하면 그 기능은 사장되고 만다. 인간의 타고난 그 기능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지능 에 의하여 훈련을 받아야 제 역할을 수행한다. 이런 각도에서 인간을 조 명하면, 인간이 군서생활을 영위하는 막시류 H y meno pt eres( 개미, 벌)와 다론 점은 곧 〈지능〉과 〈사회성〉이라고 할 것이다. 막시류의 군서성과 인간의 사회성의 차이는 전자가 굳어 있고 본능적임에 바하여, 후자는 가 변적이고 지능적임에 있다. 이 막시류의 군서생활과 인간의 사회생활의 특칭을 규정함에 있어서 베르그송은 꽁뜨 A. Com t려 개념을 차용하고 있다. 본능적인 군서생활은 오직 〈질서〉만을 원하고 있지만, 인간의 지능 적인 사회생활은 질서 이의에 인간의 창의력에서 나오는 〈진보〉도 결행 하고 있다 .29) 이 군서생활의 〈질서〉와 사회생활의 〈진보났근 서로 싱이한 개념에 속하지만, 또한 동시에 상보적이기도 하다. 생명의 진화 과정에서 그 두 가지는 상이하면서도 상보적인 두 활동으로서 나타났다. 본능과 지 능은 서로 상이하다. 그러나 서로 행동의 유익함을 발견하거나 모색한다 는 점에서 서로 상보적이다. 본능과 지능의 상이점과 근사점에 대하여 이미 우리가 제炫}에서 살펴 보았다. 베르그송의 표현처럼 본능은 〈발견하고t rouver 〉, 지능은 〈모색 한다 chercher 〉. 그러나 발견과 모색의 차이는 사실상 종이 한 장의 정도 에 불과할 만큼 가까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베르그송은 지능의 주변에는 본능의 가장자리가 있고, 본능의 밑바닥에는 지능의 희 미한 빛이 있음을 보고 있다오) 곤충들이 자기들의 종족보존을 위하여 하 28) 같은 책 , p. 110. 29) 같은 책, p. 112. 30) 갇은 책, p. 122.
는 일을 보면, 그 절묘한 행위에서 우리의 지능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 우리의 원시 조상들이 아직 건축술을 발명하기 전에 토굴 속에 움터를 지어 살았음을 생각하면, 지능보다 본능이 움직여서 그렇게 된 것처럼 보 인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인류 문명의 기원으로 울라가면 갈수록, 〈인간 의 본능은 곤충의 본능보다 지능에 더 가까웠고, 지능은 척추동물의 지능 보다 본능에 더 가까웠다〉 3 1) 고 추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본능 과 지능은 본디 상당히 가깝게 지내다가 전화의 성장 속에서 점차 멀리 갈라지게 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본능과 지능은 그 밑바닥에서 서로서 로 은연중에 선을 닿고 있다고 여기지 아니할 수 없다. 본능과 지능도 인간에 있어서 이원적 일원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은 베르그송이 말한 〈 靜 態宗敎 la relig ion sta - tiq ue 〉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므로 좀 자세히 고찰할 필요 가있다. 곤충의 본능이든 인간의 본능이든, 본능은 사회생활(곤충에게는 군서생 활이지만)의 유기화를 기본적으로 생명으로 삼고 있다. 사회생활을 하는 까닭은 곧 생명의 유지와 보존이라는 목적과 통한다. 그래서 언제나 본능 은 마치 벌집이나 개미집의 조직처럼 부분이 전체를 위하여 일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 점은 곤충의 본능이나 인간의 본능에 차이가 없다. 왜 냐하면 그런 명령은 생명의 자연에서 유출되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의 말처럼 자연은 개체보다 전체를 더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데 인간 사회에는 곤충의 집단생활과 다른· 점이 있다. 그 다른· 점은 지 능에서 나온다. 지능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것이 아니고 개인적인 것이 다. 왜냐하면 본농기 생명의 애착과 자연의 집단화 명령에 어김없이 복종 하고 있음에 반하여, 인간의 지능은 일단 그런 본능의 행위에 거리를 두 는 것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능은 행동을- 통한 유익성과 실용성 울 추구한다는 점에서 본능과 닮았다. 그러나 지능은 맹목적인 추구가 아 닌 한에서, 일단 본능의 생명성과 집단성을 부정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 31) 같은 책, p. 122.
다. 그래서 지능은 사회생활에서 개인적인 이기심을 찾는다. 즉, 지능은 개인의 이기심에 바탕하여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찾고, 맹목적인 본능의 생명성에 대하여 거리를 취하면서, 자유와 독립과 개인적인 창의성을 구 하려 한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인간의 경우에 〈본능은 인멸된 것이 아니 고 가리워져 있으며, 지능이라는 온전히 밝고 빛나는 핵심 주위에 있는 희미한 빛으로서만 님아 있을 뿐이다〉 四 이와 같은 지능의 역량에 의하 여 인간은 발명도 하고, 사회를 진보시키게 된다. 본능이 요구하는 사회성은 자연성인데, 인간의 지능과 거기서 도출된 사유와 반성의 양식인 지성은 스스로 지니고 있는 본능에의 거리감과 사 회성을 해체시키려고 하는 이기심을 지니고 있다. 유기체 전체를 위하여 각 세포가 맹목적으로 일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본능의 사회적 요구를 지 능이나 지성이 회의하고 부정한다는 것은 사회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개미나 벌처럼 본능에만 못이 박혀 있으면, 인간은 도달 해야 할 의적 목적을 향하여 남아 있게 되었으리라. 그래서 인간은 자동 적으로, , 그리고 몽유병적 상태에서 種울 위하여 일하게 되었으리라. 그런 데 인간은 지능을 지니고 있어서, 반성에 눈떠 자기자신에게로 향하면서 유쾌하게 살 것만 생각한다. 물론 형식적인 추리상 인간은 타인의 행복을 촉진시키려 한다고 증명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스뮤어드 밀 Ste w ard M ill과 같은 공리주의자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많은 세기를 거친 문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밀도 모든 철학자들을 납득시키지도 않았고 , 보통 사람 들을 더구나 설득시키지도 못하였다. 사실상 지능이 먼저 이기심을 조장 한다고 봐야 한다. 아무도 그 지능의 이기심을 정지시키지 않으면, 지능 적 존재는 그 방향으로 가속화될 것이다.〉3:l) 동물과 달라서 인간의 지능은 〈이기적〉이다. 즉,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 다. 이 이기적 충동을 방임하면 사회 전체가 해체의 위기를 맞지 아니할 수 없다. 사회 전체가 붕괴되거나 해체되면, 생명은 결국 자멸하고 만다• 32) 갇은 책, pp. 125~126. 33) 같은 책, p. 126.
여기서 자연이 이 이기심에 대하여 제동을 거는 움직임을 시작한다. 이 움직임이 본능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 본능이 지능의 밝 은 태양 아래 감추어전 달과 같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달은 낮에도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이다. 지능의 활동 주변에는 언제나 본 능의 힘이 잠재해 있다. 이 점을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에 지능이 어떤 점에서 사회적 유대를 깨뜨리려 위협한다면, 그리고 만약에 사회가 생존을 계속해야 한다면, 지능에 대하여 하나의 대칭적 균 형이 가해져야 한다. 그런데 그 균형이 본능 자체일 수 없다면(그 까닭 은 지능이 본능의 자리를 대신하였기 때문에), 본능의 잠재성이나 또는 지능 주변에 아직 남아 있는 본능의 찌꺼기가 동일한 결과를 불러일으켜 야 한다. 그런 본능은 직접적으로 활동할 수 없다. 그러나 지능이 표상을 만들어 일을 하기 때문에 본능은 현실적인 표상에 대신하는 상상적인 표 상, 죽 지능의 매개를 통하여 지성의 작업을 방해하는 상상적인 것을 불 러일으키게 되리라.〉 34) 이 공상적인 표상을 베르그송은 〈허구 la fab ulati on > 또는 〈허구적 기능 la fon cti on fa bula t r i ce 〉이라고 불렀다. 이 〈허구적 기능 X 픈 본능 과 지능의 합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그런 성질을 지니고 있기에, 그것은 본능에서 나온 〈사회적인 것〉의 보호와 지능의 소산인 〈개인적인 것〉에 대한 배려를 동시에 지녀야 한다• 이 점을 우리는 곧 보게 될 것 이다. 우선 본능의 소산으로서의 허구가 사회의 보존에 관해 하는 기능을 살펴보기로 하자. 베르그송에 의하면, 〈정태종교 la relig ion st a tiq ue 〉의 본질은 이 〈허구적 기능〉과 불가분의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죽, 정태종교는 〈지능이 지니고 있는 해체적인 힘에 대한 자연의 방어적 인 반작용〉과 다르지 않다쩐 종교학자들의 조사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원시종교에서 종교적인 것은 언제나 사회적 관습과 유사한 것으로 나타 난다. 그리고 사회적 관습을 잘 지키는 것이 그 사회의 도덕이다. 오늘날 34) 같은 책, p. 124. 35) 같은 책, p. 127.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 관습 가운데 부도덕한 것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미개인의 도덕이 사회보존에 최우선의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종교와 관습과 도덕 사이에 어떤 괴리도 찾아볼 수가 없다 . 예컨대 어떤 종족 중의 한 사림이 反社 會 的인 행위를 하였다고 가정해보 자. 지금 우리의 관념에 따르면, 그 행위는 그 사람 개인의 책임으로- 돌 리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미개인이나 고대인의 경우에, 그 행위는 그 개인의 릿이 아니고, 그 씨족 전체나 부족 전체의 책임과 연관되어 있다 . 왜냐하면 그 씨족이나 부족아 그를 느슨하게 하여서 그를 반사회적인 행 위에 빠지도록 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사회로 접근하면 할 수록, 도덕적 악은 전염병처럼 번지는 신체적 악으로서의 병과 같이 생각 하였다. 그래서 사회적 규칙이나 관습을 지키지 않음은 가장 큰 죄다. 그 렇기 때문에 복수의 신이 종족 전체를 벌한다는 신화가 생기게 된다. 베 르그송에 의하면 이런 사고방식이 지금도 우리의 숨은 무의식에 남아 있 다고 본다. 예컨대 〈관습 mores 〉이라는 단어와 도덕 morale 이라는 단어 가 언제나 함께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다. 관습과 도덕은 다 함께 〈질 서 l' ordre 〉를 겨냥하고 있는데, 이 〈질서〉라는 낱말은 〈정돈l' arran g e ment〉과 〈명령 le commandemen t〉의 뜻을 동시에 담고 있다. 治) 그런 점에서 〈정태종교〉의 첫번째 기능은 〈사회적인 질서〉와 〈보존〉이라는 사 회성에 관련된다. 그 종교는 인간의 지능과 지성이 야기하게 되는 이기심 이 사회의 질서와 응집력을 해체하려는 것에 대한 위기에서 나온 처방이 다. 이를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원시종교는 … … 사람이 생각하게 된 이래로 자기만을 생각함에서 치닫게 되는 위험에 대한 경계 다. 원시종교는 지능에 대한 자연의 방어적인 반작용이다•〉 3 7 ) 그런데 정태종교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심리적으로 〈허구적 기 능〉에서 비롯되었다고 베르그송은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베르그송의 심리적 분석은 어느 심리학자도 상상하지 못한 탁월한 직관력이라고 여 36) 같은 책, p. 129. 37) 같은 책, p. 128.
기지 않을 수 없다 . 베르그송에 의하여 제시된 예를 설명해보자 . 31S) 책상 모서리에 갑자기 찍힌 사람은 순간적으로 참기 어려운 아픔 때문에 마치 그 책상에 의하여 한 대 얻어 맞은 것처럼 생각한다. 이런 심리현상은 어린이나 어른이나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성질이 급한 사람은 심지어 자 기 몸에 통증을 준 그 책상 모서리를 주먹으로나 발길로 다시 차게 된 다. 왜 그런 작태가 일어나게 될까? 베르그송에 의하면 순간적으로 그는 그 책상을 사람으로 생긱하였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책상을 정확히 사람으로 본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죽은 물전으로 본 것도 아니 고, 그 중간의 애매한 상태라고 함이 더 적절할 것이다. 베르그송에 의하 면, 모든 神話의 기원이 거기에 있고, 모든 신화의 기원은 곧 〈허구적 기 능〉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또다시 베르그송이 생각한 다른 예 시롤 검토해보자. 〈출입금지〉라는 폿말이 공공전물에 붙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의 심리는 그 폿말을 볼 때, 단지 추상적으로 쓰여진 글씨만을 보지 않는다. 그 금지는 하나의 명령이다. 그 금지는 하나의 사회적 질서 와 관계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금지 명령의 글씨 뒤에 은연중에 그 금지를 어기는 경우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허구적 그립자를 상상 하게 된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 비슷한 것이 있다고 느끼는 심리나 책상 에게 한 대 얻어맞았다고 느끼는 심리나 다를 것이 없다. 그런 심리가 擬似人格과 연관짓기 때문에 인간의 본능과 지능의 합작품인 〈허구적 기 능〉이 신화와 神聖의 인격화를 겨냥하게 된다는 것은 전혀 이상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신화적 諸神둘의 복수와 분노, 그리고 명령 등이 나 타나게 된다. 그런 제신들의 등장과 함께 정태종교가 탄생된다. 사회적인 것을 유지하고 정돈하기 위한 제산들의 것은 〈성스럽고〉 동 시에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정태종교에서 〈성스럽고〉, 〈위험한〉 두 가 지 개념은 하나로 혼융되어 있다. 그 경지가 곧 〈터부 le t abou 〉다. 제신 의 명령은 성스러운 것이기에 동시에 그것을 범하게 되면, 엄청난 위험의 무서운 대가를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종교학적으로 〈터부〉가 생겨나게 38) 같은 책, p. 130.
되었다. 〈각 터부는 사회가 금지에서 제한된 이익을 발전하였던 것에서 생긴 것이다• 터부는 개인의 관점에서 비합리적이다. 왜냐하면 지능에 말 을 건넴이 없이 지능적인 행위를 분명히 중단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것이 種과 사회에 이익을 주는 한에서는 합리적이었다. 예컨대 성관계가 터부에 의하여 유효하게 통제될 수 있었던 것이 그런 까닭에서다.〉 39 ) 〈터부〉가 생긴 원인에 대한 베르그송의 설명을 우리가 보았지만, 우리 는 아직도 왜 터부라는 금기가 物 性 化되었던가에 대한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죽, 터부가 〈종교적인 허구〉에 의하여 사회질서를 보존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발생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 허구가 왜 구체적 대상으로서의 물건(나무, 性, 돌, 지역 등)에 투영되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대한 베르그송의 생각을 인용하여 보자. 〈미개인의 지능 은 우리의 지능과 본질적인 차이를 나타내고 있지 않다. 미개인의 지능은 우리의 것과 같이 동태적인 것을 정태적인 것으로 변환시키고 행동을 사 물로 고착시키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지능의 경향이 지닌 영향으로 말미암아 금지는 그 금지가 관계하는 사물 속으로 정착되어진 다. ……정체된 사회에서 이런 고착화는 결정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런 고착화는 지능이 금지 뒤에 하나의 인격을 깨닫는 것으로 그치는 움 직이는 사회 속에서는 덜 완전해지거나 또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다.〉 4 0 ) 이상의 인용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터부 대상의 물성화는 인간 지능의 본질적 성향 때문에 생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지능 의 기능이 사물로 향하고 있음을 우리는 이미 제決0 l -에서 충분히 음미하 였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것이 정태종교의 첫번째 기능인 사회보존의 역 할이다. 그런데 이미 우리가 앞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정태종교는 지능 의 이기심이 인간 사회를 붕괴시킬 위험에 대비한 형평을 구하기 위하여, . 지능의 밝은 빛 아래 숨어 있던 본능의 빛이 지능의 빛과 함께 작동하여 〈허구적 기능 X 끝 연출함에서 니온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정태종교 39) 갇은 책, p. 133. 40) 같은 책, p. 134.
의 기능이 두 가지임을 천명한 바 있다. 그 하나는 본능의 사회성이 낳 은 것으로서 사회적 보존이요, 또 다른 하나는 지능의 작용과 연관된 개 인적인 문제라는 것이 앞에서 지적된 바가 있다. 이제 우리는 정태종교의 두번째 기능을 살펴볼 차례가 왔다. 동물과 인간간의 차이가 무엇일까? 말할 나위도 없이 그것은 죽음의 문제다. 인 간은 그가 죽는디는 것을 알고 있지만, 동물은 죽음에 대한 豫料的 表象 能力이 없다. 이 말은 동물이 자기 죽음에 대한 지각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모든 동물은 자기의 죽음이 임박해왔다는 것을 본능적으 로 지각한다. 그러나 동물에게 생명에 대한 일반화된 관념이 없듯이, 죽 음에 대한 일반화된 관념을 늘 표상하고 있지 않다. 즉, 동물은 정신작용 으로서 죽음을 생각하지 못하고, 단지 육체에 의하여 단순한 행동으로서 죽은 체할 뿐이다. 거미줄에 매달려 있는 거미를 사람아 손으로 건드리 면, 도망가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서 죽은 체한다는 것도 사람이 상상하 는 것이지, 그 동물로서는 죽은 시눙울 한다기보다 움직이면 더 큰 공격 을 유발한다는 본능적 직관에서 움직이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베르그송 은 일반적으로 상상되는 반대의 가설에 대하여 그의 생각을 준비해놓고 있다. 동물이 죽음을 표상하지 못한다면, 동물의 자살행위를 어떻게 설명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우리는 가끔 해의 뉴스를 통 하여 고래가 집단적으로 해안가에서 자살을 시도했디는 놀라운 사례를 듣게 된댜 이런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하여 베르그 송은 디움과 같이 보고 있다. 동물이 죽기 위하여 해야 할 것을 하는 것 과 사람이 언젠가는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 가 있디는 것이다 .41) 베르그송에 의하면, 지금까지 동물학에 관한 지식을 종합하여 보면, 동물은 그들에게 갑작스럽게 죽음이 오는 경우를 지각은 하지만, 그가 자연적인 죽음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일반적 관념으로 갖고 있지는 않디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죽음을 예상한다는 것은 다른 동물 들에 비하여 훨씬 본능적인 생명의 활기에 제동을 거는 결과를 빚는다. 41 ) 같은 책 , pp. 135~ 136.
물론 그 제동이 다른 보상, 정신적인 창조의 보상을 역설적으로 가져다주 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이 죽는다는 것을 미리 안다는 것은 확실 히 의기소침하게 하는 슬픈 일이다. 〈그가 죽는다는 것은 확실하나 언제 죽는가를 모르니 더욱 사기가 저상될 수밖에 없다.〉 4 2 1 이처럼 〈죽음의 확실성〉과 〈죽는 날에 대한 불확실성 X 는 인간으로 하 여금 종교적인 문제를 생각케 하였다. 좀더 기술적으로 언급하자면, 생명 의 위협은 동시에 자연성에 대한 위협이 되어서, 자연은 또다시 그 위협 울 경감시키기 위하여 死後 생명의 지속을 상상케 하였다고 베르그송은 생각한다. 이런 가공적 상상은 지능의 기능과 결부된다• 그래서 종교가 탄생된다. 그러므로 〈정태종교沖근 〈죽는다는 공포〉와 〈사후 생명의 연 장〉이라는 허구가 결부되어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 정태종교의 두번째 기 능이다. 〈……종교는 지능에 의한 죽음의 불가피성의 표상에 대한 자연 의 방어적인 반작용이다.〉 43 ) 베르그송이 정의한 정태종교의 두번째 기능 이 개인의 지능적 표상력에서 나온 것이긴 하여도, 사회적 혼란을 방지하 는 기능도 암암리에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회를 구성하 고 있는 모든 개인들이 죽음의 예상에 대한 단말마적인 공포에 빠지게 되면, 사회적 기능이 마비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총국적으로 사회 자체가 붕괴될 위기에 처한다. 그래서 사회도 개인의 죽음에 대한 공포에 처방울 해야 한다 . 그러므로 〈자연의 방어적인 반작용〉이 사회적 필요성 과 결부되어 사회적으로 인간의 사후에 생명이 연장된다는 신화를 조장 하게 된다 . 그런 생긱이 복합되어서 〈조상숭배〉나 인간이 사후에 제신과 같이 되어 불멸한다는 신앙이 생기게 된다고 베르그송은 보고 있다. 그리 고 善神과 惡 靈 의 구분도 나타난다. 그런데 영혼불멸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가시적인 증거가 필요할 수밖 에 없다. 여기서 말하는 영혼불멸의 주장은 베르그송이 『 물질과 기억 』 에 서 밝힌 바와 같은 그런 심리학적인 높은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42) 같은 책, p. 136. 43) 같은 책, p. 137.
미개인들이 신화를 통하여 가공적으로 상상한 생각들을 말하는 것이다 . 그러면 영혼불멸의 증거를 미개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게 되었는가? 이 물 음에 답변하기 위하여 베르그송의 생각을 여기에 정리해보기로 하자 . ” ) 고대인들은 자기 몸을 눈으로 보고, 촉각으로 느낀다. 그 몸을 그들은 또 다시 연못 위에 비추어진 자기의 그림지를 통하여 본다. 비추어전 영상은 분명히 자기 몸의 分身이다. 그러나 그 분신이 불멸하리라는 논리적인 보 장은 없다. 그러나 고대인들은 그가 사후에 제신처럼 불멸하리라는 신앙 울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몸은 썩어 없어지지만, 무게도 내용도 없는 자기 몸의 영상은 어디든지 살아남으리라고 추측하게 된다. 그래서 미개 인들의 精靈 思 想 , 즉 몸이 〈그림자〉나 〈유령〉의 모습으로 살아남게 된다 는 관념이 자연스럽게 움튼다. 그래서 신체의 정령은 유령이고 유령은 바 람 같다고 고대인들이나 미개인들이 믿게 되었고, 그 생각이 전화하면 마 침내 인간 영혼이 하나의 〈바람»]라는 생각으로 탈바꿈된다. 그런데 그런 정령은 그림자와 같기에 산 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가 없 다. 미쳐야 하겠지만, 그립자가 산 자들 사이에서 활동한다고 함이 쉽게 납득되지 않기에 미개인들은 새로운 점을 또 도입한다. 그 새로운 요소가 이른바 〈마나 le mana 〉라는 것이다. 이 〈마나〉라는 것은 각각 그 명칭이 다를지언정, 거의 모든 미개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온다. 이 〈마나〉의 역 할과 기능은 呪術 la mag i~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이 점은 곧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마나 X t 〈생명의 보편적 원리〉나 〈영혼의 실체〉 나, 또는 〈영혼이 붙잡은 힘〉 등으로 다양하게 종교학자들이 해석하고 있다. 그 해석의 다양성이 어떠하든간에 베르그송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 은 우리 지능의 자연적인 성향이다. 대상에 대하여 힘을 부여하려는 성향 은 우리가 무거운 물건을 밀 때 그 무게 때문에 물체가 요지부동이면, 우리는 스스로 물체를 대단히 고집이 센 인간처럼 은연중에 여긴다는 점 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신체의 陰 影 으로서의 정령아 불 사한다면, 그 음영이 힘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음영은 인간사에 44) 같은 책, pp. 139~140.
관여하고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동적이고 행동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 생각이 〈마나〉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은 그런 死者 의 힘있는 망령에 대하여 복을 빌고 화를 멀리하게 하여 줄 것을 기원한 댜 그래서 死者가 원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제물로 바찬다. 이것이 베르그송이 말한 〈허구적 기능 la fon cti on fa bula tr i ce 〉이다. 이와 같은 미개인들의 사고방식이 〈허구적〉이라고 하여서 그것을 단순 히 무의미한 것이라고 여기거나 또는 틀린 것이라고 간단히 취급해서는 결코 안된다. 오히려 그런 〈허구적 기능〉이 인간 사유의 원본적 모습이 라고 봄이 더 타당하다. 그 까닭을 종 검토하여 보기로 하자. 베르그송에 의하면, 미개인들도 지금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연현상에 대한 기계론적 인과율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미개인들이 발명한 소박한 생활 과학들(배, 화살, 도끼, 약초)은 그들이 자연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대 한 신뢰를 가졌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런 관념이 명백히 표현되었 던가, 아니면 암암리에 전제되었던가 하는 것은 전혀 중요성이 없다. 미 개인들도 문명인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기계론적 인과법칙을 이해하고 있 음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거기에 〈초자연적인 신비적 원인只t 첨가 하는가? 예컨대 캄캄한 밤길을 가다가 발을 잘못 헛디뎌 낭떠러지에 추 락하여 죽게 되는 경우에, 왜 그들은 악령이나 마법사의 의지롤 거기에 개입시키는가? 〈미개인들이 초자연적안 원인으로서 여기서 설명하는 것 은 물리적 결과가 아니고 그 결과의 인간적 의미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특히 어떤 특정한 인간에 대한 결과의 중요성이다• ……하나의 원인이 그 결과에 비례해야 한다는 신앙 속에는 …… 비논리적인 것도 先논리적 인 것도 없다. ……만약에 결과가 숙고할 만한 인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 원인도 적어도 동등한 의미를 가져야 한다. 그 원인도 모든 경우에 동일한 질서에 속해야 한다. 그것이 곧 의도다.〉 4” 위의 인용을 통 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미개인 甲이 밤거리에서 추락사의 참사를 당하게 된 경우에, 그 결과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쇼킹한 뉴스 45) 갇은 책, pp. 151~152.
가 아닐 수 없다. 그 결과가 쇼킹한 만큼, 그 원인도 평범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미개인들로 하여금 〈초자연적인 신비적 원인只t 상상케 하였 다. 그런데 그런 상상은 전혀 非논리적인 것이 아니라고 베르그송은 생각 한다. 그와 같은 사고방식의 허구적 기능이 문명인에게도 존재한 다. 문명 인도 죽음이나 병 또는 심각한 사고를 당하는 경우에 그런 생각을 갖게 된다. 그것의 예시를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알리고 있다 .4 6 ) 큰 전쟁에 참여한 제대군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부분의 군인들이 전사할 때, 소총 탄환보다 포탄의 파편에 의하여 죽는 경우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은 군인들이 소총탄환을 더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그들은 적이 소총을 가지고 자신을 겨냥하지 않을까 하는 악의를 느끼기 때문이다. 소총의 겨냥을 받음은 곧 악의의 의도를 느끼는 것과 같이 본 다. 포탄이 터져 죽거나 심한 부상을 입는 경우에도 그들은 〈재수가 없 어서 내가 당했다〉고 여간다. 너무도 명백하게 그 포탄의 작열은 물리법 칙에 지나지 않지만, 사람들은 불운과 연관해서 생각한다. 不運울 연상하 는 이런 자연발생적인 지능과 미개인의 사고방식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을수 없다. 이러한 미개인들의 사고방식에는 우연 le hasard 이 없다. 누가 어떤 사 고나 변고를 당하면, 그 재앙은 반드시 초자연적인 원인을 다 충분히 갖 고 있다고 미개인들은 생각하고 있다. 이 점은 이미 레비-브류울 Le vy Bruhl 의 이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미개인들이 전혀 우연을 인정하지 않갔던 사고방식을 문명인들은 무지의 소산이라고 자신 있게 비난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에 대한 베르그송의 세심한 심리적 분석은 우리를 놀 라게 한다. 그의 생각을 들어보기로 하자 .47) 베르그송은 미개인과 달라 문명인이 우연을 말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그 우연에 대하여 어떤 적극적인 내용을 부여하지 않고 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말을 뚜 있음은 겉으로는 하찮게 생각하지만, 속으로는 무시할 수가 없기 때 46) 같은 책, p. 153. 47) 같은 책, pp. 154~155.
문이다. 그래서 그 말이 자꾸 생각에 떠오르게 된다. 베르그송이 말한 예 시를 검토해보기로 하자. 큰 기왓장이 바람에 날려서 지나가던 행인이 즉 사하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우리는 우연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 기왓장이 땅바닥에 떨어졌을 경우 우리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 아마도 그 순간 거기에 사람이 있었더라면 하고 아찔한 생각을 금치 못했을 것 이다. 그런 생각도 우연과 결부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우연이라 고 부르는 것은, 인간의 이해관계가 문제되고 있고 사물둘이 인간을 고려 하고 있는 것처럼, 죽 사물들이 어떤 의도를 갖고 인간을 이롭게 하거나 해롭게 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에 생긴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기왓장이 떨어진 사실을 엄밀한 안과론적 각도에서 보면 우연이라고 말 할 여지가 없다. 문명인이 우연이라고 말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결과에 대하여 인과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 의미 부여의 결괴를· 원인에까지 소 급해나가는 생각과 사고방식의 소치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점에 서 베르그송의 정의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우연은 그러므로 기계론적 인과율이 하나의 의도를 갖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기계론적 인과율이 다.〉 48) 그렇게 보면, 우연은 겉으로는 대단히 과학적 사고인 것같이 보이 지만, 그런 과학적 사고의 밑바탕에 문제를 인과론적으로만 설명하지 않 고, 기왓장이 떨어전 순간과 그 순간에 사람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언제나 일치시키려는 〈자발적 사고〉와 〈半意識〉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베르 그송의 지적처럼 아예 처음부터 과학적 사고만 충만되어 있었다면, 우연 이란 숨은 생각이나 말을 할 필요기- 없었으리라. 물론 우연이 무엇인가를 내용상 설명하라고 하면, 적국적으로 말하기 힘들다. 〈우연은 이미 하나 의 그림자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고, 질료(내용)는 없지만, 거기에 형상 (형식 )이 있다.〉 49) 이렇게 보면 미개인은 우연을 인정하지 않고, 문명인은 인정하였다는 그런 의형상 차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미개인이나 문명인이나 사고방 48) 같은 책, p. 155. 49) 같은 책, p. 155.
식의 구조에 있어서는 다 동일하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미개인의 경우 에 사물을 생각하는 인간적 의미와 禍福 의 의도 부여가 명시적인 데 반 하여, 문명인의 경우에 그것이 명시적이지 않고 암시적인 데 있다. 그것 이 명시적일 때, 그런 태도를 우리는 迷信이라고 한다. 그런 미신과 종교 와는 그 근원에서 이웃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종교가 곧 미신이란 뜻인가? 그렇게 단순 논리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단지 우리의 주장은 종 교(정태 )가 나올 수 있었던 심리적 가능 근거를 해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곧 종교는 인간의 지능이 예측하기 어려운 생명의 위협과 그 공포로부터 우리를 안심시켜주기 위함을 기능적 목적 으로 삼고 있다. 〈믿음은 본질적으로 신뢰를 의미한다. 첫째 기원은 공포 가 아니고 공포에 대한 안심이다.〉 ',O ) 죽음이나 천재지변이나 커다란 재앙 은 분명히 예측하기 어렵고, 공포의 대상이 된다. 인간의 지능이 미리 예 측 하기 힘든 그 공포로부터 누가 우리롤 안심시켜주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베르그송의 답변은 인간이 스스로 안심하기 위하여 신화에서 등장 하는 諸 神에게로 바로 직접 달려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초에는 인간은 구체적 인격을 갖춘 대상보다 오히려 추상적 人格性 la p ersonn alite-을 닮은 신앙을 생각하였다는 것이 베르그송의 생각이다 . 5 1) 베르그송은 지신의 생각을 보완할 의도에서였는지, 미국의 심리철학자 인 윌리엄 제임스 W. J ames 의 『 비망록과 연구 Memor i es and S tu d i es 』 에 나오는 구절을 길게 인용하고 있다. 거기서 제임스는 190~ 반 4 월 18 일 샌프란시스코의 대지진 당시 겪은 체험을 기술하고 있다. 과학적으로 보 면 그것은 갑작스런 지각의 변동 이의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기 그 과학적인 설명을 충분히 알고 있되, 그런 설명만으로는 그의 정신의 다른 한 구석을 채워주지는 못하였다. 베르그송이 인용한 마지막 구절을 소개한다. 〈나는 지금 그런 종류의 참화에 대한 옛날 사람들의 신화적인 해석이 불가피하였다는 것을 잘 깨닫는다. 그리고 나는 과학이 교육으로- 50) 같은 책, p. 159. 51) 갇은 책, p. 160.
서 우리 속에 심어놓은 종국적인 관습이 자발적인 우리의 지각과 어떻게 반대로 가며, 얼마나 인위적인 것인가를 잘 알게 되었다. 초자연적인 制 裁와 경고로서 보다 다르게 지진의 인상을 받아들임이 무식한 사람들에 게 단적으로 불가능하였다.〉 52 l 이 인용은 마치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그 런 재앙을 초래케 하였다는 인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고 베르그송의 지적처럼 제임스가 구체적인 神이나 악마를 인격적으로 지칭한 것은 아 니다. 단지 제임스는 초자연적인 행위를 擬人化한 것이다. 베르그송의 표 현처럼 〈擬似人物 le q uas i-p ersonna g e )-l끌 우리는 큰 사건에서 언제나 상기한다는것이다. 그러면 우리 사고방식이 지니고 있는 이와 같은 〈허구적 기능 X 끝 어떻 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인생의 모든 문제가 지능이나 지성으로 다 완결 되게 해석되거나 해결되지는 않는다• 지능이나 지성으로 해결 가능한 인 생의 문제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이미 우리가 앞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능은 물질을 이용하고 사물을 지배하고 과학기술을 발명하는 것 이다. 그러나 지능의 작업이나 과학적 사고방식이 차지하는· 비율은 지극 히 소량이다. 지능의 역량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주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은 지신의 안전과 보호를 위하여 슬그머니 본능을 찾는다. 이때 본능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이와 동시에 이미 앞에서 거론된 바와 같이, 지능의 빛 속에서 빛을 잃고 있던 본능이 과학의 발전에도 불구하 고 후퇴하기는커녕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다• 이때 나타나는 것이 〈呪術 la ma gi e )o l 다. 정태종교와 주술이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이미 지적하 였다• 인간의 경우에 지능과 본능은 마치 강한 해와 약한 달의 관계와 같이 접목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미개인의 지능이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工具와 같은 도구를 제작하는 〈工作人 homo f aber 〉과 같은 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주술〉의 측면이다. 이 점을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지금 다론 한편에서 공작인이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경험의 부분이 있다. 52) 같은 책, p. 162.
그 경험은 물리적으로 취급되지 않고, 도덕적으로 취급된다. 우리가 그 경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기에 우리는 그 경험이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여기서 자연은 인간성으로서 젖게 된다. 그 러나 자연은 필요한 척도 안에서만 그것을 하게 된다. 힘이 없기에 우리 는 신뢰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마음 편함을 느끼기 위하여 현실적 전체 속에서 우리 눈에 뚜렷이 나타니는 사건은 하나의 의도를 띠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그런 의도가 우리의 자연적이며 근원적인 신념이 된다.〉 53 ) 인간의 지능이 자산의 안전을 충분히 도모해주지 못하기에, 결국 인간의 지능은 자연에 대하여 물리적 思考를 중단하고 자연에 대하여 하나의 〈의도!'i n t en ti on 澤 갖고 있는 힘으로 표상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지 능은 그 〈의도只춘 갖고 있는 자연을 신뢰하고 믿으려 한다. 그런 신념이 지능에서 생기자마자, 그 신념은 곧 본능의 충동을- 불러일으키고 그 본능 은 〈허구적 기능 la fon cti on fab ulatr i c e )¾ 환기시키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그 기능의 덕분으로 자연에 대해서 原初的 擬似人格性울 부여하 든가, 신화에서 보는 것 같은 諸神들의 여러 모습들을 부여하든가, 아니 면 유치한 정령이나 귀신과 같은 신성을 부여하든가, 우리의 의지나 욕망 에 〈자연의 의도녔문 접목시키고자 하는 것이 일어난다. 베르그송에 의하 면, 전자의 경우가 주로 〈정태종교〉의 기능이고, 후자의 경우가 〈주술〉의 기능이라고 한다 .54) 이와 같은 〈정태종교〉나 〈주술 X 본 철학자들이 흔히 착각하여 온 바와 같이 思辨의 줄거움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것들은 오직 인간 행동의 실용적 이익과 효용성을 추구하기 위한 지능과 본능의 합작품이 다. 베르그송의 표현처럼 〈인간이 사물을 그렇게 상성하게 된 것은 인간 이 주술을 믿었고, 주술을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죽, 인간의 주술은 성공 하였던 것으로 보였고, 그것은 설명할 수 있거나 오히려 성공을 표현할 수 있는 것에 제한되었다.〉 551 그런 믿음의 밑바닥에는 인간이 자연에 대 53) 같은 책, p. 172. 54) 같은 책, pp. 172~173.
한 물리적 법칙을 넘어 그의 행동과 그의 바람을 연장하고자 하는 경향 이 먼저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미 앞에서 거론된 바와 같이, 주술은 〈인 간 욕망의 의면화〉다. 베르그송은 이런 주술이 두 가지 기본적 요쇼를― 지니고 있다고 분석하 고 있다. 그 두 가지 요소는 주술과 과학과의 관계에 대한 것과 주술과 종교와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분류된다. 또한 이런 분류는 주술이 지니고 있는 두 가지 기원 가운데, 지능의 것은 주술과 과학과의 관계와 유관하 고, 본능의 것은 주술과 종교와의 관계와 연관되어 있다고 보아도 좋으리 라. 베르그송의 말을 직접 보기로 하자. 〈주술은 두 가지 요소들로 분해 되고 있다고 보여전다. 죽, 아무것에나 심지어 사람들이 도달할 수 없는 것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고폰 욕망과, 또 사물들이 우리가 인간적인 신통 력이라고 부르는 것을 지니고 있거나 지니게 된다고 믿는 생각이다 . 주술 과 과학을 비교하기 위하여 첫째 관접이 문제되어야 하고, 주술을 종교에 부착시키기 위하여 둘째 관점이 문제되어야 한다.〉 56 ) • 이미 레비간부쿠 스가 그의 불멸의 저서 『야생적 사유 La pe n.s ee sau- v ag e 』에서 〈주술 la mag ie) ¾ 〈구체과학 la scie n ce concre t e 〉이라고 규 정한 바가 있지만, 베르그송은 레비쓰투쿠 A- 닌다 앞서 주술의 과학성을 지적하였다 . 과학이란 결국 물질을 우리에게 실용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도구적 지성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실용적 이용을 잘 개척하기 위하여 과학은 보다 풍부한 기계론적인 인과법칙을 우주에 적용하기를 바랄 뿐 이다. 그래서 추상과학일수록, 도구적 지성은 수학적 계산에 의존한다. 그 런데 비록 주술이 수학적 계산에까지 의존하지는 않더라도, 모든 사물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죽 물질을 이용하기 위하여 주술이 과학적 사 고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 러므로 문명사회에서나 미개사회에서나 다 같이 같은 목적으로 출발한 탁월한 지능이 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가 과학자라고 부르는 55) 같은 책, p. 174. 56) 갇은 책, p. 178.
사람들과 미개인들이 주술가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다 탁월한 천재적 지 능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지능의 창조적 성과인 지성에 대해서 는 문명사회와 미개사회의 생리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 문명사회에서는 과학자의 창조적 발명과 그 발명을 채용하고 거기에 적응하는 능력이 유 연함에 반하여, 미개사회에서는 주술가의 발명 능력은 있었지만, 그 창조 적인 발명을 수용하고 채택하는 데 대단히 나태하고 게을렀다 .57) 그런 게 으름은 일반적으로 정태종교와 주술적 사고의 나쁜 영향에서 왔다고 보 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주술은 과학적 사고의 싸앗이기도 하고 동시 에 그 사고의 촉진을 방해한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면 왜 주술적 사고가 과학적 사고의 촉진을 방해하였던가? 주술적 사고도 이미 하나의 구체과학이다. 즉, 인간 행동과 그 결과의 이익 여부를 쉽게 확인시켜주 고, 가까운 미래에 대한 예견가능성을 주술이 확인시켜주는 점에서 주술 적 과학은 인간의 불안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 나 그런 좁은 울타리 밖을 벗어나 추상적인 세계로 나아가게 되면, 인간 은 그의 무지와 예견 불가능한 광대한 영역 때문에 대단히 불안하게 된 다. 그래서 주술은 좁은 테두리 속에 안주하기 위하여 넓은 자유의 불안 을 포기한 대가로 보아야 한다. 이런 해석은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에서 와 각 속에서 생명의 안전을 도모한 갑각류가 그것을 포기한 척추동물에 바 하여 전화의 자유를 그만큼 덜 향유하게 되었다는 이론과 같은 맥락에 있다. 그러면 주술이 과학적인 사고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사고를 방해하였 다는 이 逆說울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 이런 의문에 대한 베르그송의 생각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주술이 끝나고 과학이 시작되었다고 보아서는 안되고, 주술과 과학은 언제나 함께 공존하여 왔다고 보아야 한 다는 것이다. 이 점은 주술이 지능과 동시에 본능의 작품기고、 또 인간의 지능 속에는 본능의 희미한 빛이 언제나 잠재해 있다는 베르그송의 사상 과 통한다. 베르그송은 『창조적 전화』에서 지능과 본능을 상당히 명쾌하 57) 갇은 책, pp. 179~181.
게 갈라놓았지만, 『 도덕과 종교의 두 가지 원천 』 에서 그것들을 상당히 유사하게 근접시키고 있다. 그렇다고 베르그송이 지능과 본능을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시 주술과 과학, 본능과 지능의 관 계로 돌아가서 베르그송의 생각을 살펴보자. 〈주술에의 경향이 과학에 의 공回 억압되어 있지만, 그것은 그래도 존속하면서 자기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과학에의 주의가 한 순간 느슨해지면, 곧 주술이 문명사회에서 표 면에 갑자기 부상한다. 이 점은 깨어 있는 동안에 억압된 욕망이 꿈 속 에서 만족을 얻기 위하여 가장 가벼운 접이라도 이용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어 ) 이제 우리는 주술이 지니고 있는 둘째 요소인 주술과 종교와의 관계를 보기로 하자. 주술과 종교와의 관계도 주술과 과학과의 관계처럼 相似性 과 相違性울 동시적으로 지니고 있다. 우선 그 두 가지의 상사성을 보면, 주술도 종교와 마찬가지로 지능적 존재가 초래하게 되는 위험성 (反社會 的)과 불안(미래에 대한)에 대처하는 자연의 조심스런 예방이라는 측면 울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사이에 게재하는 상위성은 주술이 〈자연의 동의를 의도적으로 강요하는〉 측면이 강한 반면에, 종교는 〈神의 호의를 탄원하고 있는〉 측면이 강하다는 데 있다 . 59 ) 그리고 주술은 그래 도 과학적 냄새가 질어서 〈擬似人格 le q uas i-p erson ri a g e 〉에 의존하지 않음에 비하여, 종교는 〈擬似人格〉이나 〈人格性〉에 호소하고 의존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도 하나의 상위성이라고 보아야 하리라. 그러 나 그 뿌리에는 공통성이 있다. 그 공통성은 다 같이 인간의 반사회적 이기주의의 위험성과 생명의 미래적 불안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점은 마 치 주술과 과학이 다르지만, 그래도 행동의 실용적 유효성을 노린디는· 데 서 같은 뿌리를 두고 있음과 다를 바가 없다. 주술과 과학이 동시적으로 공존하듯이, 주술과 종교도 그러하다. 〈주술과 종교는 동시대적이다. 그 각각 두 가지는 다른 것에 출몰하기를 계속하고 있고, 따라서 종교 속에 58) 같은 책, pp. 181~182. 59) 갇은 책, p. 183.
주술이 상존하고 있고, 주술 속 에도 특 히 종교가 상 존 하고 있다. 주술가 둘은 때때로 완전한 인격성이나 諸神 의 탁월한 존 엄성 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개별화된 존재나 정령들의 매개를 통하여 활동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呪 文 은 계명이나 기도와 같은 성질을 동시에 떨 수도 있다.〉 60) 이렇게 보면, 〈닫힌 도덕〉이 〈열린 도덕〉보다 그 정신적 신비성에 있 어서 열등하더라도, 문명세계에서 〈닫힌 도덕〉이 상존하고 있듯이, 우리 가 흔히 미개인의 종교라고 부르는 〈정태종교〉도 문명사회에서 잠재적으 로 숨어 있음을 인식할 수가 있다. 〈정태종교〉라고 하여서 닫힌 도덕과 마찬가지로 지나간 유물이 결코 아니다. 정태종교가 지니고 있는 〈터부〉, 〈허구적 기능〉, 〈신화〉, 〈우연 否 定과 운수〉, 〈呪術〉, 〈마나〉 등의 요소 들이 은연중에 우리 인류의 사고방식에 여전히 잠자고 있다. 이와 같은 정태종교가 〈토테미즘 le t o t em i sme 〉과 밀접한 관계를 논리적으로 지니 고 있다고 베르그송은 직관하였다. 레바-人드루人는 그의 『 오늘날의 토데 미즘 Le tot e m i sm e auj ourd'hu i』 에서 베르그송이 문화인류학이나 민족학 l' e t hnolo gi e 에 대하여 남다른 현장조서를 하지도 않았으면서 토테미즘의 논리를 정확하게 규명한 것을 보고 아낌없는 찬탄과 천재적 직관력을 경 탄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면 베르그송이 규명한 토데미즘이란 무엇인가? 사람과 달라서 동물이나 식물에 대한 또는 자연적 물체에 대한 미개인 들의 생각은 개체 중심이 아니고, 種 的 인식체계를 중시한다. 이 점에서 미개인이나 문명인이나 예의가 없다. 다시 설명하자면, 사람은 개체지향 적 사고를 사람에 대하여 적용하여 甲男乙女의 구분을- 하지만, 동식물에 대하여서는 개, 말, 소나무 등과 같이 種 중심의 사고를 적용시킨다. 그 래서 베르그송은 토테미즘은 결코 동물숭배사성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61l 예컨대 어느 부족이 곰 토템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곰의 개체가 문제될 수 없고, 種으로서의 곰이 문제이기 때문에, 그 부족의 모든 구성원은 다 60) 갇은 책, p. 184. 61) 같은 책, p. 192.
곰 토템을 갖는 셈이 되고, 따라서 하나의 강한 연대의식을 갖게 된다• 그런데 토데미즘은 그렇게 간단히 〈부족 내부의 응집력 X t 갖게 하는 기 능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을 좀더 분석하여 보자. 예컨대 한 종족 내부에 두 개의 상이한 부족이 있다고 가정한다. 그 두 부족은 각각 싱이한 동물이나 식물을 토 템으로 갖고 있다. 이 경우 그 동물이나 식물의 생물학적 특성은 문제되 지 않는다. 예컨대 곰 토템을 가진 민족은 곰의 동물학적 특성, 죽 인내 심이 강하다거나 끈기가 있다는 따위로 곰울 숭상해서 그 토템을 채택한 것은 아니다. 토템에 대한 베르그송의 생각을 인용하여 보자. 〈두 부족이 상이한 두 가지 種울 구성하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 두 부족의 각각에게 다른 동물의 이름이 주어지게 된다. 그 이름들은 각각 따로 분 리되며, 하나의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그 명칭둘은 두 부족이 다~ 혈통에 속함을 말한다. 왜 그들은 그것을 말하는가? 만약에 토데미즘이 …… 지구의 여러 지점에서 상호간 통신을 할 수 없었던 사회에서 재발 견된다면, 그 토데미즘은 사회의 공통적 필요, 즉 생명의 요구에 응답하 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사실에 의하여 종족을 구성하고 있는 부족들은 가끔 族外婚의 제도를 갖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6 2) 베르그송이 해석한 토테미즘의 논리는 레비-스트로스가 갈파한 이론과 전적으로 합치하고 있다. 레바 AE 쿠 A 의 인류학에 있어서도 토데미즘은 부족간의 족의혼과 같은 교환과 거래를 하기 위한 기본적 가능 근거였다. 토데미즘은 부족간의 교환과 거래를 가능케 하는 하나의 일반적 법칙이 다. 결코 일부 한국의 학자들이 아칙도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동물숭 배사상이 아니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이런 교환이나 거래를 가능케 하는 것은 族內婚을 막으려 하는 자연의 의도다. 자연이 본능에게 족내혼은 결 국 부족의 생명과 그 활기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디는 사실을 일깨워준 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한 종족내에 다론 부족이 없는 경우에, 하나 의 부족이 둘로 길라지게 된다. 이런 〈이분법〉의 법칙이 베르그송에게는 62) 같은 책, p. 194.
자연의 법칙으로, 레비소 E 쿠스에게는 인간 사유의 선천적 법칙으로 표 현된다. 그 표현이야 다소 뉘앙스의 차이를 갖고 있지만, 그 본질에 있어 서는 다 같다고 보아야 한다. 〈그들이 두 가지 동물의 種울 구성한다고 선언할 때도,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이분법이지, 동물성이 아니다.〉 'k 토 데미즘의 근저에는 이분법이 것들어 있다. 정태종교가 지니고 있는 토데미즘도 결국 사회보존의 본능과 다를 바 가 없다. 그 사회보존의 본능은 동시에 개인 안전의 기능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베르그송이 생각한 정태종교는 〈허구적 기능〉의 소산이 고, 그 기능은 〈사회적〉이며 동시에 〈개인적〉이다. 왜냐하면 〈허구적 기 능汶 7 사회를 지능적 이기심의 지나친 발로로부터 지키기 위한 역할을 하고, 동시에 개인의 미래적 불안을 해소시켜주는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정태종교에서 사회와 개인은 서로 이해관계에 의하여 강 력히 연결된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 연결고리는 주로 개인의 지능에 의한 이기심이 사회 전체를 파괴하는 것에 대한 〈자연의 방어적 반응)o l 기도 하고, 동시에 인간 지능이 죽음의 불가피성을 표상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에 대한 〈자연의 방어적 반응〉이다. 그래서 정태종교가 자연적 방어 본능에 의존하여 성립하기에, 베르그송은 정태종교가 〈지성이하적 infra - i n t ellec t uel 〉이라고 규정하였다 .64) 정태종교는 많은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거기에는 신화, 정령과 제신에 대한 신앙과 의식, 제물의 헌정과 희생, 미신과 터부, 그리고 토데미즘 등등 다양한 것들이 복잡하게 포함 되어 있다. 그러나 그토록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는 정태종교도 그 전체 에서 보면 대단히 단순하다. 왜냐하면 정태종교는 결국 인간과 인간의 사 회생활에서 인간에게 실용적으로 유리한 것을 추구하는 욕망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정태종교에 대한 베르그송의 종합적인 정리를 보자. 〈그것은 지능의 활동에서 개인의 사기를 저상시킬 수 있는 것과 사회를 해체시킬 수 있는 것에 대한 자연의 방어적인 반응이다,〉 65) 6643)) 같같은은 책책,, pp.. 119965..
동물의 세계에서 본능은 그런 방어적 반응 을 완벽하리만 큼 수 행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능은 동물에 비하여 대단히 미약하다. 그래서 미약한 인 간 본능은 결국 사회생활 속에서 자신의 행동의 실용성을 추 구하기 위하 여 지능의 힘을 빌려 〈허구적 기능〉으로서 종교 를 만들어 자신의 사회적 안정성과 개인의 안정성을 도모한다. 그러므로 〈허구적 기능 X 본 그 자체 본능과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물의 본능에 버금가는 역할을 수행 한다. 그래서 정태종교는 사회구성원들을 내부에서 결집시키고, 다른- 집 단과 교환도 가능케 하고, 전쟁도 수행케 하며 사회적 관습과 전통도 보 지시키고, 국가사회도 보위케 한다. 밀하자면 정태종교는 도덕적, 국가적 기능을 다 갖고 있다. 쟝께레비츠가 적절히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 지능 의 이기심과 표상력 때문에 정태종교가 생겼지만, 그 파괴적 이기심과 불 안한 미래의 표상력을 치유하는 약도 그 지능에서 왔다. 그의 말처럼 정 태종교는 〈사회적 본능을 모방한 지능〉 6(j )이라고 보아야 하리라. 3 (JjJ態宗敎〉의 본질 앞에서 우리가 성찰해본 바와 같이, 정태종교는 철두철미 사회적 소산 이다. 사실상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없다.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없 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지능은 〈이기심〉의 경향을 지니고 있어서 자기 삶의 터전인 사회를 파괴하려 한다• 막시류와 같은 곤충은 자기의 군서생 활을 위하여 자동적으로, 그리고 자율신경상으로 아주 철저한 자기망각을 시행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회적 본능도 인간에게 보다 집 단적인 태도를 가질 것을 요구하기 위하여 정태종교를 창안하게 되었다. 〈정태종교는 사람들이 어린 아기를 혼들어 재울 때 하는 것과 비슷한 이 야기를 하면서 인간을 생명에, 개인울 사회에 밀착시키고 있다.〉 67 ) 그러 65) 갇은 책, p. 217. 66) V. Jan kelevit ch , 갇은 책, p. 189.
나 이런 정태종교의 곁 에 또 디론 하나의 종 교적 요구가 생긴다. 그 요 구는 생명에 대한 애 착과 사회생 활 에 대한 충성의 요구와는 판이한 인간 정신의 작품이다. 그 종교는 〈생명의 애착〉에서 〈생명으로부터의 초탈〉 울, 사회생활의 충성에서 사회생활을 초월하는 정신의 보다 자유로운 부 름을 겨냥하고 있다. 그런 종교가 곧 베르그송이 말한 〈동태종교 la re-lig ion dy nam iq ue 〉다. 이 동태종교는 지능의 옷을 빌린 본능의 자기 방 어와 무관한 정신의 직관세계에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이런 동태종교의 본질은 정신의 신비성과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컨대 데까르 뜨와 뉴턴의 천재성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대개 수학에 대하여 무관심하 게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멀리서부터 신비적인 말에 경도되었던 이 둘은 바로 그들의 영혼 밑바닥에서부터 그 말의 가느다란 반향을 들었기 때문에 그 말이 알리고 있는 것에 무관심할 수 없으리라 . 그들이 이미 신앙을 가졌다면, 그리고 그들이 그 신앙에서 떨어지기를 원치 않고 그럴 수도 없다면, 그 까닭은 그들이 스스로를 변형시키고 있고 따라서 실제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구성요소들은 그대로 남아 있겠지만 이미 磁 ft에 의하여 하나의 다른 방향으로 돌려졌고, 磁氣 를 띠 고 있다.〉 68 ) 이와 같은 동태종교는 이미 정태종교와 다르다. 〈의무〉와 〈은총〉이 전혀 다르듯이, 정태종교의 규칙과 생리가 도저히 모방할 수 없 는 하나의 깊은 영혼의 감동이 거기에 흐르고 있다. 동태종교는 종교라는 이름에서 정태종교와 같은 명목적인 공통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러나 그 것은 전혀 새로운 종교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철학사상이 이원적 일원론의 성격을 줄곧 지니고 있듯이, 이 동태종교와 정태종교의 관계도 그러하다. 그 둘은 전혀 별개 의 종교다. 그러나 동태종교는 정태종교를 필요로 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정태종교의 본질은 사회생활의 보존과 개인의 미래 적 불안(죽음)을 전정시켜주는 데 있다• 그러므로 정태종교는 인간 생명 67) H. Bergs o n. 같은 책, p. 223. 68) 갈은 책, p. 228.
의 현실적 유지에 필요하다. 그런데 동태종교는 그런 현실적 필요성에서 창안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현실에 적응하기 위하여 동태종교는 정태 종교의 표현과 발상을 빌릴 수밖에 없다. 이 점을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 이 말하고 있다. 〈그렇게 샘 솟는 동태종교는 열린 사회가 닫힌 사회에 대립되듯이 허구적 기능에서 나온 정태종교에 대립된다. 그러나 새로운 도덕적 열망이 닫힌 사회에서부터 의무라는 자연적 형식을 빌려서만 모 습을 갖추게 되듯이, 동태종교는 허구적 기능이 제공하고 있는 상징과 영 상에 의해서만 전파된다.〉 69) 동태종교는 제도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사회적 제도의 관습에서 그 생명을 키우지 않는다. 그래서 동태종교는 제도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정신적이요, 신비적인 성격을 지닌다. 정태종교가 사회적이고 행동적이며 실용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고 현상유지적이라면, 동태종교는 생명의 창조 적 비약과 직결되고 있다. 우리는 베르그송의 철학이 운동과 정지를 대비 시키고 있음을 안다. 정신은 운동이고 비약이며, 물질은 정체고 현상유지 다. 정신의 운동은 감동에 의하여 싹 트고, 생명의 운동은 자유로워지려 는 비약에 의하여 전화한다. 동태종교는 저런 정신의 운동이 생기는 곳에 서 빛난다. 〈우리의 눈에, 신비주의의 정신은 생명이 표현하는 창조적 노 력과의 접촉이며, 따라서 부분적인 일치다. 그런 노력은 神 자체는 아니 지만, 신에서 나온다. 위대한 신비주의지는 물질성에 의하여 種에 주어진 한계를 뛰어넘는, 신적인 행동을 또한 연장하는 하나의 개체성이다.〉 70) 위의 인용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정태종교가 種의 자연적 논리, 사회논리 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면, 동태종교는 순수히 개인적 차원의 정신 적 깊이에서 솟는다. 그러므로 동태종교는 집단적 성격을 전혀 지니지 않 는다. 그러면 그러한 동태종교에는 어떤 旺成의 종교들이 포함되는가? 베르 그송이 생각하는 가장 대표적인 동태종교가 기독교와 불교다. 그러나 그 69) 같은 책, p. 285. 70) 같은 책, p. 233.
는 불교보다 기독교가 더 동태종교의 본질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는 인도 종교의 높은 신비성을 인정한다. 그가 생각한 인도종교는 물론 브라만교, 자이나교, 그리고 불교다. 이들 인도사상과 종교 중에서 불교가 신비주의의 정상에 속한다고 베르그송은 인정한다. 그가 생각한 인도의 신비주의는 두 가지의 상이한 방법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즉, 생리학적 방법과 심리학적 방법이 곧 그것이다 . 7 1) 우선 생리학적 방법이라는 것은 고대 인도인들이 신비에 이르기 위해 약물을 사용하였음을 말한다. 마치 고대 희랍의 디오니소스파들이 술의 제전을 통하여 황홀한 신비에 이르기를 원하였던 것같이 고대 인도인들 은 약물 복용으로 그런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런 약물 복용의 한계를 깨닫고 요가의 길을 가게 되었다고 베르그송은 지적 한다. 그런데 베르그송은 요가를 일종의 최면술의 상태라고 보고 있다. 감각도 정지시키고, 사고 활동도 이완시키면서 깊은 최면의 세계에 빠져 든다. 베르그송은 최면술 자체가 신비주의는 아니지만, 지능을 넘어서는 길을 암시해주는 점에서 참다운 신바주의를 예비할 수 있다고 긍정하고 있다. 즉, 요가는 신비적 명상을 가능케 해주는 가장 대중적인 형식이라 고 베르그송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런 생리적 요가의 길은 다른 한편으로 부처에 의해서 전혀 다른· 심 리적 해탈의 길로 상승하는 계기를 만나게 된다. 고통으로부터 해탈하는 길을 가르쳐준 부처와 불교는 다른 어떤 인도 종교보다 더 신비적이라고 베르그송은 보고 있다. 부처가 인도하는 곳은 행복과 고통과 그것들을 느 끼는 의식이 초월된 세계, 〈살려고 하는 모든 의지〉가 꺼져버린 세계, 즉 니르바나ni rvana 의 세계다. 그런데 베르그송의 눈에 비친 불교는 기독교 보다도 완전한 신비주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니르바나의 세계에 이르는 절대 자유의 길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르그송은 불교가 〈사랑 의 따스한 열기녔卜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가 자비의 사상을 모르 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불교는 그 자비의 실례를 규범에 얽매어 71) 갇은 책, pp. 236~238.
놓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교의 자비에는 기독교의 사랑만큼 따스한 열기가 부족하다고 베르그송은 진단한다 .7 2) 왜 불교가 기독교보다 덜 따 스한가? 그 까닭은 불교가 기독교만큼 행동의 유효성에 대한 신뢰를 갖 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다. 기독교는 행동에 신뢰성을 두고 있기에, 그 신뢰가 〈산마저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다. 기독교는 인간 행동의 〈따스한 열정〉에 깊은 신뢰를 두고 있기 때문에 불교보다 현실의 어려움 을 헤쳐나가는 데 더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비주의 는 〈행동의 유효성〉과 만날 수 있는 특성을 지녔다고 베르그송은 진단한 다. 산업주의와 과학이 기독교 문명에서 나온 것은 결코 우연아 아니다. 이것이 베르그송의 입장이다. 모든 인간 행동의 허망함과 비관주의가 지 배하는 곳에서는 행동의 신비주의가 자라지 못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완전한 신비주의는 행동이다〉回 다시 말하자면 베르그송은 〈포기와 法 稅〉의 신비보다 〈보편적 사랑〉과 그 사랑의 실천을 가르치는 〈행동의 신 비只t 선택했다. 그 신비가 그의 〈생명의 비약〉에 알맞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기독교적 신비주의가 불교적인 신바주의보다 더 에너지가 넘쳐 흐르고, 대담성이 있고 생명이 약동한다고 보았기에 베르그송은 불교보다 오히려 기독교롤 동태종교의 정상으로 여겼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독교적인 동태종교를 통하여 이제 인간의 영혼은 엄천난 質의 탈바 꿈을 겪게 되고, 동시에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생명의 비약을 결행하게 된다. 그런 비약과 약동은 영혼이 〈닫힘〉에서 〈열림〉으로-, 〈정 태적인 것〉에서 〈동태적인 것〉으로, 〈습관적 삶〉에서 〈신비적 삶〉으로 이행함에서 생기는 전동과 같다. 마치 음속을 돌파하는 비행기가 엄청난 공기의 저항과 장벽을 이기면, 그 다음 모든 소음과 시끄러움을 뒤로 하 는 고요의 시간을 맛보는 것같이. 영혼이 체험하게 되는 신비적인 변형을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영혼을 끌어당기는 흐름에 의하 여 영혼의 깊은 곳에서 진동된 영혼은 자기자신 위에서 맴도는 것을 그 72) 같은 책, p. 239. 73) 같은 책, p. 240.
치고 種과 개체가 서로서로 순환적으로 조건짓기를 원하는 법칙에서 한 순간 벗어난다. 영혼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멈춘다. 이어 서 영혼은 바로 앞으로 나아간다. 영혼은 자기를 움직이는 힘을 직접 지 爭回 않고, 그 힘의 정의할 수 없는 현존을 느끼거나 상징적인 비전을 통하여 현존을 짐작한다. 바로 그때에 영혼을 담뿡 적셔주는 法脫이나 영 혼이 입는 황홀함이나 무한한 기쁨이 온다. 神은 거기에 있고국 영혼은 神 속에 있다.〉 74 ) 이미 앞에서 거론하였듯이, 영혼의 이 빛나는 변형은 이미 〈규칙〉이나 〈의무〉의 〈강제성〉에서 나오는 도덕과 관습을 넘어서 있다. 이와 같은 영혼의 탈바꿈을 루이 라벨 Louis Lavell~ 든 〈정신적인 황금l' or sp i- r it uel 〉에 비유하리라. 〈정신의 황금 X 는 베르그송에 있어서 〈생명의 충일 la surabondance de v i e 〉과 같다.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영혼은 곧 무한 한 약동을 표현한다. 정신의 형이상학과 생명의 비약이 결국 지극한 단순 성으로 집약되듯이, 열린 영혼이 나아가는 곳은 바로 〈정신의 단순성〉 그 자체다. 그 단순성은 〈하늘을 니는 새와 들에 핀 백합꽃〉과 같은 생 명의 단순성과 같다. 그러나 그 단순성은 어렵고 복잡하지 않을 뿐아지 결코 생명의 빈곤을 뜻하지 않는다. 루이 라벨은 말한다. 〈특히 우리 시 대에 있어서 인류의 가장 큰 과오는 영혼이 완성시켜야 할 일 속에만 존 재하는 지고의 선을 의부의 결과에 의해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다. 인간들은 향락만을 생각한다.〉 7 5 ) 베르그송이 생각한 정신의 단순성 은 다시 그 지고의 선을 영혼의 양식으로 돌리고자 하는 철학사상을 함 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영혼의 지고하고 깨끗한 양식은 정태종교 에서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태종교는 언제나 가족이나 국가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다른 가정과 다른 국가사회와 경쟁하는 투쟁의식을 암암 리에 조장하기 때문아다 . 그러므로 닫힌 사회, 정태종교는 국가의 울타리 밖울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열린 사회와 동태종교는 인간 영혼의 닫혀 74) 같은 책, pp. 223~224. 75) L. Lavelle, L'e rr eur de Narcis s e, p. 74.
진 국경을 넘어 인류 전체의 차원에까지 확장된다. 〈인류의 신비적 사랑 은 전혀 다르다. 그 사랑은 본능을 연장시키지도 않고, 관념에서 나오지 도 않는다. 그 사랑은 감각적인 것도, 이성적인 것도 아니다. 물론 그 두 가지가 거기에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실제로 훨씬 더 이상의 것이 있다. ……그 사랑은 모든 것을 만든 사랑, 神의 작품에 대한 神의 사랑과 일치하면서 창조의 비밀을 묻고자 하는 이에게 창조의 바밀을 교 부하여 준다. 그 사랑은 도덕적이기라기보다 오히려 형이상학적인 본질에 더 가깝다.〉 ; 1 ; 1 물론 베르그송은 그 창조의 비밀을 〈창조적 비약〉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비약이 현실적으로 역사에서 이루어졌다고 베르그송은 생각한 다. 그 비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사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 랑의 힘 자체다. 그의 사랑은 정의를 부르고 모든 나라들이 자기둘의 국 경을 넘어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 사랑의 감동 속에서 기독교의 聖 者들은 두 가지 차원에서 신비주의를 증거하였다. 그 하나는 명상에 의한 법열이요, 또 다론 하나는 神의 직업과 합일하려는 의지다• 베르그송이 생각한 神은 영원에서부터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완전자가 아니다. 그의 神은 끊임없는 창조 그 자체다. 神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이 우주에 미만된 창조의 신비다• 그 창조의 신비가 사랑으로- 나타난 것이 곧 그리 스도다. 그러므로 그 神은 닫힌 사회의 법이나 규율이나 명령의 주체가 아니고, 우리의 영혼 속에 끊임없이 창조의 생동과 비약을 불러일으키는 힘 그 자체다. 그러므로 神은 우리롤 磁化시킨다. 자석이 모든 쇠붙이를 결합시키듯이, 神의 정신에 의하여 磁氣를 띠게 된 영혼은 모두를 모은 다. 왜냐하면 神은 곧 그 결합의 힘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 능이나 지성에 의하여 神울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神온, 죽 창조 자체는 오직 신비적 경험에 의해서만 이해되어질 뿐이다. 베르그송에 있 어서 神은 사랑과 무한한 힘, 생명의 힘이다. 그런데 神이 곧 〈사랑과 창조의 힘〉이라면, 피조물의 사랑과 창조의 76) H. Bergs o n, 갇은 책, p. 248.
힘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피조물도 그들의 영혼 속에 저런 神의 현존을 느끼고 있다면, 또 모든 것이 사랑이요 창조라면, 〈모든 것이 곧 神〉이라 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 이런 물음에 대하여 로비네가 그의 젝] 르그송 』 에서 적절한 해답을 내리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만약에 자유가 창조라면, 만약에 기억이 창조라면, 만약에 생명이 창조라면, 만약 에 영혼이 창조라면, 어떻게 神은 그의 창조적 성격에서 구분되는가? 더 구나 神은 ……우주 속에 경험적으로 인정된 그런 창조적 성격의 현존 이지 않은가? 神은 피조물보다 질적으로 더 창조적인 것은 아니다. 양적 으로 神은 더 창조적이다. 왜냐하면 神은 모든 창조가 확산되는 중심이 고, 실체가 갈래로 나누어지면서 폭발하는 지속의 운동이며, 神이 존재하 는 순간부터 폭발해오고 또 언제나 존재하면서 세계를 묘사해온 다양성 을 쉬지 않고 생산하는 유일한 비약이기 때문이다.〉77) 그와 같은 신적 신비를 체험한 영혼은 남에게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는 다. 그는 깊은 침묵 속에 침참한다. 〈가장 깊은 사랑은 말에 거의 의존하 지 않는다. 가장 열렬하고 가장 미묘한 사랑의 표현에 있어서 침묵을- 깨 뜨리는 것은 사랑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랑을 약화시키는 짓과 통한다. 사랑이 있는 곳에, 그 사랑은 하나고, 전체며 不可分解的이다.〉 7 8) 베르그송의 생각을 옮겨보자• <…… 신비주의 는 아무것도, 어떤 것도 체험하지 않는 이에게 절대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모든 세상사람은 신비주의가 근원적이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먼 곳에서부터 와서 지성의 용어로。 미리 표현된 하나의 종교 속으로 참 여하기 위하여 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79 ) 이처럼 침묵 속에서 신비주의를 체험한 영혼은 이미 그의 불안한 미래,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 방된다• 그의 영혼은 이미 평화며 同意며 비약 자체다. 죽음은 이미 불안 울 줄 만한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이리하여 동태적 종교의 본질을 구성 77) A. Robin e t, 같은 책, p. 163. 78) L. Lavelle, 같은 책, p. 81. 79) H. Bergs o n, 같은 책, pp. 251~252.
하고 있는 신비주의는 이미 인간의 영혼이 폐쇄적으로 하나의 소유에 집 착하게끔 내버려두지 않는다. 신비주의는 문자 그대로 하나의 대상적 소 유가 아니라, 생명의 무한한 약전에 우리의 영혼이 동참하게끔 한다. 그러면 이와 같은 신비주의를 철학적으로 어떻게 정립시켜야 할 것인 가? 이미 우리가 살펴본 내용을 다시 한 번 더 집약하면, 신비주의란 생 명의 정신화가 이루어지는 데서 나타난다. 라벨의 표현처럼 〈정신적 황 금〉이 이해되는 곳에 신비주의가 또한 이해된다. 그런데 생명이 구체화되 기 위해서는 물질을 통과해야 한다. 그 물질이 생명의 비약을 저해하고 방해하기도 하고, 또 생명의 다양한 표현을 창조하기도 한다. 이 점은 이 미 본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에서 언급되었다. 그런데 그 생명이 물질을 꿰 뚫고 나갈 때에 세 가지 방향으로 생명이 각기 표현됨을 우리는 보았다. 그 세 가지 방향이란 본능, 지능 그리고 직관이다. 본능의 대표자는 곤충 이고, 지능의 대표자는 인간이다. 본능은 그 자체 직관적이고, 지능은 추 리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지능을 인간 〈의식〉의 수준이라고 규정한다면, 본능은 〈의식이하적 infr a -c onsc i en t〉이라고 규정 할 수 있다 .80) 그래서 〈의식이하적〉인 본능아 직관적이되, 그 직관은 생 물학적 種의 생존을 위한 〈최면술에 걸린〉, 〈몽유병적〉인 직관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런 동물적 직관과 디론 칙관이 인간에게 있다. 이 인간의 직관은 물론 의식 수준의 지능이나 지성과 다르다. 여기서 잠시 베르그송의 생각을 직접 보기로 하자. 〈동물적인 본능의 주변에 지능의 영역이 존재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능은 직 관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인간의 직관은 온전히 공평무사하고 의식적인 것으로 남았지만, 그러나 멀리까지 비치지 못히는· 희미한 빛이었다. 생명 의 비약의 내부와 그 의미, 그 방향이 만약에 해명되어졌다면, 그 해명의 빛이 온 곳은 직관에서부터다. 왜냐하면 직관이 내부로 향하였기 때문이 다. 그리고 만약에 최초의 강도에 의하여 직관이 내면적 생명의 연속성을 파악하게 되었다면, 그리고 우리 대부분이 그토록 멀리까지 가지 못하였 80) 갇은 책, p. 264.
다면, 하나의 더 높은 강도가 직관을 우리 존재의 뿌리에까지, 따라서 생 명 일반의 원리에까지 운반하게 되리라. 신비한 영혼은 바로 그런 특권을 갖고 있지 않았던가?〉 8 1I 이상의 인용을 통하여 우리는 베르그송이 갈파 한 신비주의와 영혼의 신비적 변형은 철학적으로 직관에 근거해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직관은 〈본능적 직관〉, 〈몽유병〉과 같은 상태의 직관이 아 니라, 완전히 깨어있는 의식 상태의 직관, 그러면서도 지능처럼 계산적이 고 이기적인 것이 아닌 〈公平無私 des i n t eresse 〉한 정신적인 능력이기에 〈의식이상적 su p ra -c onsc i en t〉인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 다 . 82) 직관은 베르그송이 『 시유와 운동자』에서 정의하였듯이, 〈지성적 공감 la sy m p a th i e i n t ellec t uelle 〉이며 〈정신적 청진 l'au sculta t i on sp iri t u- elle 〉이다. 그러므로 직관은 어떤 종류의 대상이든 그 대상과의 접촉에 서 그 대상의 내면과 일치하는 정신적 감정을 뜻한다. 감정이 배제된 직 관은 성립할 수가 없다. 신비주의가 직관에 근거하고 있다는 베르그송의 주장은 영혼이 자기자신에게 감동을 주는 그 정신적 대상과 일치하는 법 열을 느끼고 있다는 감동과 같다. 그러므로 직관은 〈감동 !'emo ti on 〉에 의하여 신비적 체험을 보게 된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두 가지 종류의 감 동이 있다고 분류하였다. 즉, 〈지성이하적 감동 !'emo ti on inf r a- in t e - llec t uelle 〉과 〈지성이상적 감동l' emo ti on su p ra- i n t ellec t uelle 〉이 그것 이다 .83) 〈지성이하적 감동汗든 어떤 격렬한 표상에 이어서 생기는 정서적 감정을 말한다. 예컨대 밉살스러운 악질들을 때려부수는- 장쾌한 서부활극 은 감동을 자아낸다. 그래서 우리는 밉살스런 저질과 악질을 때려부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을 때 영화를 보면서 대리배설의 시원함을 느낀다. 그 러나 〈지성이상적 감동 X 는 이와는 다르다. 모짜르트나 브람스의 음악을 들으면서 느끼는 감동은 그 어떤 장면의 표상이나 관념의 형성과 다르다. 81) 갇은 책 , p. 265. 82) 같은 책, p. 264. 83) 갇은 책, p. 268.
그 감동은 관념이나 표상 이상의 것이다. 음악은 어떤 구체적 장면을 주 지 않는다. 그 음악소리와 함께 우리는 깊은 정신의 내면세계 속으로- 들 어간다. 단적으로 동태종교는 감동 , 즉 〈지성이상적인 감동 X 끌 주는 종교 다. 이런 동태종교는 신비적 감동으로 표현되고, 그 감동은 이미 우리가 앞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명상과 행동으로 나타난다. 『 물질과 기억 』 · 『창조적 진화 』 에서 소국적인 방향으로 기술되던 행동이 『 도덕과 종교의 두 가지 원천 』 에서 이제 적극적 가치를 입고 나타난다. 이와 함께 『 창조 적 진화 』 에서 강력히 대두되던 생명의 비약이 『 도덕과 종교의 두 가지 원천 』 에서 〈영웅〉과 〈聖者〉의 〈부름〉으로 대체된다. 〈영웅〉과 〈성자注근 〈행동과 명상의 신비只t 보여주는 화신이다. 영웅과 성자는 말을 많이 하 거나 생각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들은 침묵 속에 있든지, 아니면 가장 복잡한 것을 가장 단순하게 행동으로 보여준다. 베르그송은 『 물질과 기 억』을 통해서 보여주던 심리학적 전리, 『 창조적 전화』를 통해서 보여주 던 생물학적 전리를 넘어 『도덕과 종교의 두 가지 원천 』 에서 종교적, 정 신적 진리를보여준다. 그러면 이처럼 영혼의 빛나는 감동과 그 감동이 사랑의 힘으로 탈바꿈 된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惡에 대한 베르그송의 생각은 무엇인가? 우 리는 이미 앞 장에서 베르그송의 낙관주의 형이상학을 보았다. 그의 형이 상학은 확실히 실존철학에서 보는 바와 같은 형이상학적 고뇌와는- 거리 가 멀다. 그렇다고 그의 형이상학이 라이프니츠가 말한 계산된 낙관주의 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신의 승리에 대한 신 앙으로 가득 차 있다. 이처럼 정신의 종국적 승리를 믿는 그는 이 세상 의 악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는 악에 대하여 많은 면을 할애하고 있 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간략하나마 악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함 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 관한 그의 생각을 정리해보자 .84) 우리는 지금까지의 독서 과정을 통하여 베르그송의 철학은 밖에서 관 찰하는 철학이 아니고 안에서 함께 흐르면서 느끼는 철학적 성향을 갖고 84) 같은 책, pp. 275~279.
있음을 잘 알고 있다. 惡 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런 그의 철학적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예시한 것을 기준으로 살펴보자. 내가 팔을 밀에서 어깨 위로 들어올린다. 그 팔을 들어올리는 나는 하나의 가장 단순한 운 동이라고 생각하지만, 밖에서 그 운동을 기하학적으로 관찰하는 자는 그 팔의 운동이 무한한 점들을 통과하면서 이루어지는 부분들이라고 생각한 다. 나에게 있어서 그 팔운동은 하나의 〈니누어질 수 없는 운동〉인데, 밖 에 있는 제삼자에게는 한없는 점들로 〈나누어지는〉 미분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창조의 운동도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창조자에게 있어서 그 의 행위는 무한히 단순한 사랑의 제스처다. 그러나 제삼자는 그 창조의 행위에 대하여 엄청나게 많은 객관적 요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많 은 객관적 요구가 결코 창조를 직접하는 것은 아니다. 객관적 요구가 아 무리 많더라도, 그것들은 하나의 나열이지, 창조하는 이의 정신일 수는 없다• 인간과 인생을 안으로 체험하는 흐름에서 보면, 베르그송의 말처럼 정녕 인간과 인생은 낙관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낙관주의에 어려움을 주는 것이 신체적, 도덕적 고통이다• 이 신체적, 도덕적 고통도 대개 개인 자신의 부주의와 불찰에서 온다고 베르그송은 지적하고 있다. 더구나 도덕적 고통은 우리가 기억과 반성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 강 력하고 예리해진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기가 죽게 되는 것을 보는 어머니의 고통은 무엇으로~ 위로받거나 설 명할 길이 없다고 베르그송은 시인한다. 그런 어머니의 통곡 앞에서 철학 적 설명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시 베르그송은 실존철학의 방향 으로 그 고통을 추구하지 않고, 다시 낙관주의의 형이상학을 생각한다. 베르그송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두 가지의 〈경험적 낙관주의 l'op ti- mism e em pi r iq e 〉가 있다고 말한다 •85) 〈그 하나는 인류가 삶에 애착을 갖고 있기에 삶을 그 전체에서 좋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확증이고, 또 다 른 하나는 신비주의자들의 영혼처럼 쾌락과 고통을 넘어선 순수 기쁨이 있다는 사실이다.〉 86) 베르그송의 〈낙관주의 X 즌 이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해 85) 갇은 책, p. 277.
있다. 삶이 이토록 좋은 것이라면, 고통 없는 삶은 더 좋을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을 제기할 수 있다 . 또 혹시 고통은 神의 사랑에 의해서 원하 여진 것이 아닌가 히는 생각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이 神에 의 하여 원하여졌디는 어떤 확증도 지금까지 없다는 것이 베르그송의 입장 이다. 그렇다면 고통이 없는 삶은 더 좋을텐데 왜 고통이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베르그송의 생각을 보기로 하자• 이 물음에 대하여 베르그송 은 앞에서 언급된 팔운동의 두 가지 시각을 대입시키고 있다. 창조의 행 위를 무수한 요소들로 분해해서 생각하는 경우에, 그 한없는 요쇼二 가운데 고통이 포함되어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창조의 행위를 분해할 수 없 는 행위로서 고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때에 부분을 제거한다는 것 은 전체를 소멸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런 베르그송의 답변에 대하여 또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할 수 있다. 神은 전지전능한 분인데, 고통과 악을 개입시키지 않고 더 좋은 세계를 만들 수 있지 않았겠는가? 이런 가상의 질문에 대하여 베르그송은 〈전지전능 la t ou t e -p ui ssance 〉이란 개념 자체가 하나의 〈사이비 개념〉이라는 것이다 . 87) 이미 우리가 베르그 송의 형이상학을 보면서, 그가 無의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 사이비적 성격 임을 지적한 대목을 알고 있다. 〈전지전능〉 속에 내포된 〈모든 것〉의 개 념도 가공적이라는 것이다. 이 〈전지전능의 모든 것 X 폰 현실적인 전체뿐 만 아니라, 가능적인 전체도 다 내포하고 있는 개념인데, 그런 개념은 실 존뿐만 아니라 비실존도 상정하는 것이기에 말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 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신비주의자들이 가끔 神을 전지 전능으로 표현하지만, 그 개념은 神울 가공적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닫혀 전 개념)o l 아니고 모든 상상을 〈초월한 사랑과 창조의 무한한 에너지〉 룰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이 베르그송이 생각하고 있는 惡과 고통에 대한 요지다. 확실히 이 세상에 不條理한 고통과 악이 있지만, 그 스캔들은 베르그송이 86) 같은 책, p. 277. 87) 갇온 책, pp. 278~279:
겨냥하고 있는 생명의 무한한 창조과정, 정신의 한없는 열림 앞에서, 그 리고 사랑의 위대한 감동 앞에서 단지 바위에 부딪쳐 일시적으로 부서지 거나 역류하는 격랑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바위나 장애물에 부딪쳐 흐 르는 물이 요동을 치지만, 그러나 그 저항이 물의 흐름을 막지 못한다. 이것이 베르그송의 사상인 것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죽음도 생명의 지속을 막지 못한다. 이미 우리가 제 1 장을 보면서 베르그송이 사후 생명의 지속 la survie 가능성을 밝히고 있는 것 을 알고 있다. 인간의 의식이 두뇌의 장치에 의하여 보존되는 것이 아닐 진대, 육체가 파괴되더라도 의식으로서의 정신이 존속할 수 있는 가능성 울 베르그송은 보고 있다• 그러나 그 정신의 존속이 어느 시간까지 가는 지, 아니면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지 하는 것은 아직까지의 인식으로는 장 담할 수가 없다는 것이 베르그송의 입장이다. 그것을 해명하기 위한 학문 이 더 발달되어야 한다. 베르그송은 이른바 심리철학적인 사후 생명의 지 속가능성을 〈낮은 단계의 인식〉이라 보고, 더 높은 단계의 가능성을 〈신 비적 직관!'i n t u iti on m y s tiq ue 〉에서 구하고 있다 . 88 ) 왜냐하면 〈신비적 직관은 神的 본질의 관여 une pa rti cip a ti on de l'es sence d i v i ne 〉 u9 1 이 기 때문이다. 신비적 직관은 神의 체험이다. 베르그송이 생각한 神은 철 학자들의 개념적인 神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의 끝없는 창조다. 〈神은 우주에 나타나고 있는 창조적 비약l' elan crea t eur )o l 며 어디든지 현존 하고 어디서나 활동하고, 창조하는 근원이다.〉 90) 그런데 베르그송은 인간 의식이 심리철학적으로 두뇌를 초월하고 있다는 사후 생명의 존속가능성 주장과 〈신비적 칙관〉에 의한 종교적 사후 존속 가능성이 서로 만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하여는 결론을 내리지 않고, 내일의 연구를 위하여 문 제를 열어놓았다. 88) 같은 책, p. 281 . 89) 같은 책, p. 281 . 90) Francois Meye r , 감은 책, p. 108.
4 인간 사고의 두 가지 유형 이제 우리는 킨 설명에 이어서 베르그송 철 학의 성격과 특 성을 끝맺는 시점에 이르게 되었다. 베르그송의 철학이 자연철학과 정신 철 학의 두 가 지 갈래를 하나의 흐름으로. 보려고 하는 이원론적 일원론의 이론적 성격 을 지니고 있음을 그동안 우리는 줄곧 관찰하여 왔었다.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 자체의 영원한 물음에 대하여 베르그송은 인간이란 자연이며 동시에 정신이라고 대답할 것이리라• 이런 兩 價性 답변에 대하 여 베르그송은 다시 그 양가성을 통합하는 하나의 공통성을 겨냥하고 있 는 것으로 보인다. 그 공통성, 즉 자연과 정신을 가로지르는 공통성이 곧 생명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생명의 우주적 영역을 통하여 인간은 자 연이기도 하고 동시에 정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베르그송은 자연보다 정신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왜냐하면 자연의 물질은 인간 의 정신을 이 세상의 것으로 만들어주는 계기도 되지만, 정신의 무한한 진보롤 방해하는 무기력과 정체와 죽음의 대명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 세상에 살게끔 운명지워진 존재인 한에서 인간은 자연 과 그 자연의 물질성을 의면할 수 없다. 여기에 베르그송 철학의 묘미가 있다. 이처럼 인간이 이중적 존재이기에 베르그송은 인류사의 전개과정을 두 가지 상반된 요인으로 분석하는 근거를 찾게 되었다. 그 근거란 그가 말한 인류 역사의 〈이중적 광란 la double fr enes i e 〉의 현싱이다 . 9 1 ) 그 〈이중적 광란X 는 〈금욕주의의 광란 la fren esie d'asce ti sme 〉과 〈물질적 享 굉란 la fren esie de la jou iss ance ma t er i elle 〉이다. 이 점에 대 해서는 다시 보게 될 것이다. 하여튼 먼저 자연적 성향을 지닌 인간의 특성을 다시 반추해보기로 하 자.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과 가장 대비되는 존재가 곤충이다. 곤충 중에 서도 막시류(벌과 개미 )다. 막시류는 자연적 생명의 전화가 가장 정교한 본능의 방향으로 나아간 동물의 본보기다. 이런 막시류 곤충과는 정반대 91 ) H. Bergs o n, 같은 책 , p. 318.
로, 자연적 생명의 전화가 정밀한 지능의 방향으로 나아간 동물적 존재의 대표자가 인간이다. 이 점을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물 론 막시류의 공동체는 틀에 박힌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반면에 인간의 것 은 가변적이다. 전자는 본능에, 후자는 지능에 복종하고 있다. 그러나 자 연이 우리를 지능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자연이 어느 점까지 사회적 유기체의 형태를 선택하도록 우리를 자유스럽게 하였다면, 또한 그 자연 이 사회생활을 영위하도록 우리를 강요하였다.〉 92 ) 그래서 지능의 존재로 서 인간은 이기적이고 영리하기 때문에 그런 강요된 사회생활에서 이탈 하려 한다. 그 이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도덕적 의무〉의 〈강제성〉과 정 태종교의 〈허구적 기능〉이 작용하여 지능의 反社會性울 방지하게 된다. 그런 사회가 〈닫힌 사회 la socie t e close 〉의 생리다.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 la socie t e ouver t e 〉로의 이행은 물리적인 양적 확장이나 확 대와 다르다. 거기에는 질적 비약이 요청된다. 질적 비약은 〈닫힌 사회〉 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움이 있음을 뜻한다• 그 새로움이 곧 〈신 비적 직관〉이나 또는 〈신비적 삶〉이다. 이 〈신비적 삶 X 든 자기 가족이나 자기 국가사회의 실용적인 이익을 찾고자 하는 그런 영혼에게는 나타나 지 않는다. 〈신비적 직관X 는 닫힌 사회의 이해관계를 초탈한 영혼을 위 한 영혼의 보편적 감동이 울려퍼질 때 생긴다. 그런데 구체적 인간의 삶에서는 이 두 가지 도덕 (닫힌 도덕과 열린 도 덕 )과 두 가지 종교(정태종교와 동태종교)가 현실적으로 그렇게 칼로 두 부 자르듯이 나누어져서 따로 놀 수가 없다. 이미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 이, 〈열린 종교〉가 아무리 정신적이고 신비적이라 하더라도, 정신적이면 서 신비주의적 전리는 사회생활에서 제도와 규범과 질서를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전리가 이 세상에서 전파되지 않는다. 이 점은 영혼 이 육체를 필요로 함과 같다• 그래서 동태종교도 정태종교의 제도와 상칭 울 이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가지는 엄연히 다 르다. 이런 차이점을 베르그송은 〈이성이하적 infr a-ra tio nnel 〉인 개념과 92) 같은 책, p. 283.
〈이성이상적 su p ra-ra ti onnel 〉인 것으로 분류하였다. 즉, 사회이익과 강제 적 의무의 윤리는 〈이성이하적〉이고, 반면에 인류의 사랑과 감동을- 안겨 다주는 열망의 윤리는 〈이성이상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 9.” 그런데 인간의 자연적 성향이 낳는 〈닫힌 도덕〉과 〈닫힌 사회〉, 그리 고 거기서 파생되는 〈의무의 강제성〉과 〈사회적 실용성〉, 그리고 또한 〈정태종교〉가 창출하는 〈허구적 기능〉 등이 결코 〈열린 종교〉나 〈열린 도덕〉, 그리고 〈열린 사회〉에 의하여 완전히 극복될 수 없다. 많은 윤리 학자나 철학자들이 이 두 가지 원천을 통일시켜 보려고 하였지만, 그런 통일은 어디까지나 지성적 개념의 유희지,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예컨대 풀라돈 Pla t on 의 이데아 사상이나 至高善의 이데아도 그런 개념 적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영혼의 도덕과 사회적 유용성의 도덕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나? 플라톤은 至高善의 이데아로 접근하는 가치들을 사다리 모양으로 배열하려고 하였지만, 그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다. 어떤 행위가 至高善의 이데아에 얼마나 접근하였는가 하는 것을 안다 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상이라고 베르그송은 생각한다. 베르그송 의 눈에서 볼 때, 〈이성이하적〉인 본능의 요구와 〈이성이상적〉인 정신의 요구를 하나로 단일화한다는 것은 관념의 유희 이외에 다론 것이 아니다. 베르그송에 따라서 표현하면 본능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인데 그 자연은 파괴될 수 없다. 〈자연적인 것을 추방해보라. 그러면 그것이 질주해서 달 려온다고 말한 것은 잘못이었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것은 추방될 수 없 고, 그것은 언제나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94) 이 자연적 사회의 특성을 역사적으로 개관하면서 베르그송은 그의 낙 관적 형이상학과는 다른 어둡고 우울한 면을 나타내보이고 있다. 인간사 회와 막시류의 집단사회는 분명히 다르다. 왜냐하면 인간은 지능과 자유 롤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이성적 관점에서의 차이에도 불 구하고 인간사회와 곤충사회를 유사하게 보려는 본능적 사고가 없는 것 93) 같은 책, p. 286. 94) 같은 책, p. 289.
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본능적 사고가 우리의 무의식에서 은연중에 인정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곤충사회에서는 명령자와 명령을 받는 자가 엄 격히 기능상 분화되어 있다. 그리고 명령자와 복종자 사이에 게재해 있는 기능의 차이는 〈 多形 現像 le p ol ym or p h i sme 〉의 조직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同 質 二像 le d i mor phi sme 〉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베르그송은 전단하고 있다 . 95) 베르그송이 지적한 이 두 개념은 각 각 무엇을 뜻하는가? 곤충의 집단세계에서 명령하는 우두머리와 명령을 다양하게 접수하는 복종세력과의 사이에는 다양한 칸막이가 이미 정해져 있다. 즉, 여왕벌은 언제나 여왕벌이고, 숫벌은 언제나 숫벌의 생식기능만 할 뿐이며, 일벌은 언제나 몽유병 환자처럼 일만 한다. 일벌이 결코 여왕 벌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같은 유기체 아래 다양한 기능들이 그물처럼 조직되어 하나를 위하여 결합되어 있는 것이 이른바 〈다형현상p ol y mor p he 〉이다. 그러나 인간사회의 경우는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의 자연 적 모습이 이중적이다. 죽, 인간의 내부에 명령하는 본능을 지닌 우두머 리의 성향과 복종하는 신하의 성향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런 현상을 베르그송은 〈동질이상di mor p he 〉이라고 불렀다. 이런 〈동질이상〉 때문에 모든 인간은 누구나 〈이중적〉이지만, 이것은 특히 사회생활을 전하게 영위하는 사람들에게서 지주 · 나타난다. 정직하고 부드러운 인간이 어느 날 갑자기 천박하고 흉폭한 이미지를 준다. 베르그 송이 생각하는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이처럼 〈동질이상〉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인류 역사에서 많은 살육을 감행한 정복의 인물이 동시에 불멸의 영웅으로- 기념비에 새겨진다. 몽고의 징기스칸은 엄청난 살육을 역사에 자행하였다. 그러나 몽고인들에게는 절대적인 위인으로 숭앙받고 있다. 베르그송의 지적처럼 숫벌이 생식에 필요한 기능을 다하면 일벌들 이 숫벌을 무자비하게 죽이듯이, 역사현장에서 정치의 이름 아래 민중들 이 흥분하고 미쳐 결백한 한 인간을 제물로 만든 예가 한둘이 아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자연이 시키는 닫힌 사회의 자기 이익 (그것이 크게 봐 95) 같은 책, p. 296.
서는 이익이 되는지 의문이지만)을 위하여 정당화되어 왔다. 베르그.송의 말처럼 民主主 義 의 도래와 함께 사회의 율법이 자의적으로 표현되는 것 을 많이 방지할 수 있었지만, 민주주의도 닫힌 사회의 본질을 결코 제거 할수는없다. 인간은 자연적 존재다.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사회생활을 영위하지 않으면 안되고, 자기 소속의 이익과 번영을 우선 고려한다. 이것은 지울 수 없는 인간의 사회성이요, 본능이다. 이런 〈자연적 사회 la socie t e na t urelle 〉의 본질을 베르그송은 디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자가 위에 집합 응집력, 위계 질서, 지도자의 절대적 권위 . 이 모든 것은 규율, 죽 전쟁의 정신을 의미한다.〉 96 ) 자연적 사회가 이런 특성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에서 전쟁이 그치질 않았다. 〈전쟁의 기원은 개인적 또는 집 단적 재산의 소유다. 그리고 인간성이 그 구조에 의하여 재산에 바쳐져 있기에, 전쟁은 자연적이다• 전쟁의 본능이 그토록 강해서 사람들이 자연 울 재발견하기 위해 문명을 긁울 때 그 본능이 제일 먼저 나타난다• 사 람들은 어린 소년들이 얼마나 서로 싸우기를 좋아하는가를 알고 있다.〉 'YI ) 이처럼 전쟁의 원인은 대개 재산의 증식에 있고, 특히 한 국가사회가 〈인구과잉〉, 〈전출로의 상실〉 〈연료와 원료의 부족〉 등의 어려움을 겪을 때, 〈전쟁본능〉이 발동된다 . 98 ) 〈전쟁의 본능 X 본 한 사회가 기아와 궁핍의 위험을 예견하고, 더 큰 풍요의 향유를 바랄 때, 다론 나라와 전쟁을 일 으킨다. 그러므로 모든 전쟁의 근저에는 쾌락과 안락에의 꿈이 담겨 있 다. 그래서 전쟁에서 오는 고통이 엄청남에도 불구하고 전쟁 끝에 더 큰 안락과 쾌릭이 담보된다고 생각하면, 전쟁 초기에 사람들은 환호한다.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은 때로는 본능에 호소하지만,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지능을 가지고 있다. 이 지능이 본능을 대신하여 기아와 궁핍에서 의 탈피를 기도한다. 이 지능의 기도가 산업화와 기술화를 가져왔다. 서 96) 같은 책, p. 302. 97) 같은 책, p. 303. 98) 같은 책, p. 308.
양문화가 자랑하는 산업화와 기술화는 엄청난 닳 와 사치와 쾌락과 안락 울 인류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런 기술과 산업에 의하여 인류가 전보다 비 교가 안될 정도로 기아와 궁핍에서 해방된 것은 사실이다. 자연적 사회적 존재로서 생명이 인간 속에 진화와 더불어 분화시킨 본능과 지능은 인간 에게 실용성을 주는 행동을 겨냥하고 있다. 이 점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인간의 본능과 지능은 각각 〈정 치적 동물〉과 〈工作人 homo f aber 〉으로서 〈세계 속에서 한몫 단단히 볼려고 한다〉. 한 개인의 경우 에나, 같은 사회 안에서도 본능과 지능은 제각기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한다. 그런데 베르그송에 의하면, 본능과 지능은 마치 하이젠베르크 .He i senber g의 不確定性原理에서, 미시세계에서 속도를 알면 위치가 불확실 하고 위치가 속도를 감추게 하듯이 상호간에 찰 합치지 않는 관계를 유 지하고 있다. 그래서 본능적인 〈정치적 동물〉이나 〈전쟁의 본능〉이 크게 발동하면 〈工作人的〉인 지능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지능의 공작성 과 구도제작성이 크게 적극화하면, 본능이 소극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 능이나 본능이 다 닫힌 사회의 이익 추구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래 서 본능과 지능 사이에 언제나 왕복하는 저울질의 현상이 있다. 닫힌 사 회의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본능과 지능의 이런 행위를 베르그송은 〈이 분법의 법칙 la loi de di cho t o mi e 〉이라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이중적 광란 la loi de double fr ens i e 〉이라 부르기도 한다 . 99 ) 그래서 본능은 〈적 대감l' hos ti l it e 〉으로, 지능은 〈호기심 la cur i os it e 〉으로 해서 각각 자란 다 .100) 〈적대감〉이든 〈호기심〉이든 이것들이 의도하는 것은 결국 물질적 안락 이다. 〈인류의 주요한 표적이 된 것으로 보이는 것은 편안과 사치의 관 심사였다 . 그 관심사가 어떻게 발명의 정신을 발전시켜 왔고, 수많은 발 명이 어떻게 우리 과학의 적용인가, 그리고 어떻게 과학이 끝없이 발전해 가게끔 되어 있는가를 보게 되면 사람들은 동일한 방향으로의 한없는 진 99) 같은 책, p. 316. 100) 갇은 책 , p. 317.
보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게 되리라.〉 IO I ) 안락과 쾌락과 사치를 추구하 는 것은 그것들을 쟁취하는 수단방법이 본능과 지능에서 다를지언정 , 본 능과 지능이 다 같이 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능과 지능 사이에 서로 저울대의 추가 왕복 오 동 을 한다 하여도, 거기에는 분명히 하나의 〈이중적 광란〉의 법칙이 있다. 이런 〈이중법칙났t 일차적 법칙이라고 우리가 명 명하여 보자. 이 일차적 법칙 이의에 우리는 베르그송의 생각에서 또 다 른 하나의 〈이중법칙〉이 있음을 본다. 그 다른 〈이분법의 법칙 X 픈 이미 앞에서 암시된 바와 같은 〈물질적 향락의 광란〉과 〈금욕주의의 굉란 · 〉이 다. 이것을 이차적 법칙이라 하자. 〈물질적 향락의 광란 X 븐 본능과 지능 이 서로 교차하면서 만드는 광란의 축이라면, 금욕주의의 굉란은 안락과 쾌락을 추구하는 굉란과 전혀 디른 축에 서 있다. 이것은 정신주의의 광 란 0] 다. 이미 지적된 바와 같이 인간은 자연적 사회적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정 신적 존재다. 〈물질적 향락의 굉란 X 는 본능과 지능에 의하여 싹이 튼다. 그러나 〈금욕주의의 광란〉은 정신적 존재로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직관, 공평무사해서 이해관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신비주의적 직관과 밀접한 관 계를 지니고 있다. 이 〈금욕주의적 광란〉아란 개념은 이 세상에 오로지 금욕적 생활밖에 없고 다른 세속적 생활방식을 극도로 부정하는 정신적 태도의 극단성을 뜻한다. 베르그송은 이 〈금욕주의의 광란 X t 서양 중세 기와 인도인의 가난한 금욕적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보고 있다. 특히 인도 인의 금욕주의와 신바주의는 가난과 질병, 그리고 기아선상에서 헤매는 상황에서 그 상황을 개선시킬 만한 다른 희망이 보이지 않기에 역설적으 로 생긴 정신주의의 극단적 형태라고 베르그송은 보고 있다. 그런데 우리 가 편의상 부르는 일차적 광란이든 또는 이차적 광란이든, 그것들에 공통 적인 〈근원적 경향)o l 있다. 그 〈근원적 경향活돈 다 〈생명의 비약〉과 관 계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이 이차적 광란의 법칙은 知性史에서 뚜렷이 나타 101) 같은 책, p. 317.
난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소크라테스 생존시에 상보적이었던 두 가지 상반된 방향이 소크라데스적인 사상에서 생겨났으 니, 그것이 곧 키레네 학파와 犬儒學派다• 키레네 학파는 인생에 가능한 한에서 많은 만족을 주기를 원하였고, 견유학파는 그것없이 지내기를 배 웠다. 이들 두 학파가 두 가지 대립된 원리인 이완과 긴장 속에서 쾌락 주의와 스토아사상으로 연장되었다• 만약에 이 상반된 원리가 대응하고 있는 두 가지의 영혼상태 사이에서 본질의 공동체를 의심한다면, 쾌락주 의 학파 안에서도 쾌락을 미천 듯이 찾던 대중적 쾌락주의 곁에, 쾌락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쾌락이라고 여기는 에피쿠로스 E pi cure 의 쾌락주의가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기만 하면 된다. 쾌락주의든 금욕주의든 다 함께 사람들이 행복을 언제나 자기 마음에 불러일으켰다 는 생각을 겨냥하였음울 알려주고 있다.〉 1 02 ) 그런데 베르그송이 암시한 바와 같이, 쾌락주의는 〈사물들에 대한 압류 la mair unise sur les cho- ses 澤 의도하고, 금욕주의는 〈自我의 克已 la mait ris e de soi» -강 조 하여 왔었다 .1 03 ) 그러나 이 극단적인 〈이중법칙 X 븐 각기 다른 부작용을 필연적으로 잉태한다. 그 부작용은 쾌락주의 (본능과 지능에 따른·)가 인간 울 〈오만의 길〉로 이끌고, 금욕주의 (직관과 신비에 따른)가 인간을 〈허 망함의 길〉로 이끄는 데 있다고 지적되었다. 이 두 가지 길은 인간 思考의 두 가지 법칙과 같다고 하겠다. 한 가지 사고가 적극적이면, 다른 사고는 소극적이 되어서 마치 새끼줄처럼 교대 교대로 전진하면서 인류 역사를 엮어왔다고 보아야 하리라. 그런데 서양 사에서 중세기의 금욕주의 시대가 끝나고 문예부흥기 이후부터 서서히 쾌락주의의 사조가 우세하기 시작하여, 금세기의 문명은 그 쾌락주의가 절정에 이른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제!9J- 決J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未曾有의 사치, 쾌락, 그리고 안락이 인류의 유일한 행복 추구의 수 단인 양 물질적 향락의 광란이 도처에 넘쳐흐르고 있다. 금세기 서양문명 102) 같은 책, p. 319. 103) 같은 책 , p. 320.
이 누리는 안락과 사치와 쾌락이 기계주의의 소산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기계주의가 적극화되면서, 직관적 신비주의가 뒷전에 밀려난 것은 사실이 다. 그런데 베르그송의 사상은 양 국단의 광란을 다 극복하고자 하는 데 있다• 기계주의가 광란적으로 치닫게 되면, 그것은 쾌락과 향락의 오만에 의한 파멸을 초래하게 되고, 정반대로 신비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그것은 허무주의와 빈곤에 찌든 또 디론 광란으로 질주한다. 베르그송이 인도의 신비주의에 대하여 부정적인 눈을 가진 까닭이 거기에 있다. 의식 이 현실화하기 위하여 물질이 필요하고, 생명이 구체화하기 위하여 물질 이 필요하다고 베르그송은 생각하였다. 마찬가지로 베르그송은 행복이 지 상의 것이 되기 위하여 신비주의는 기계주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것 이 베르그송의 사상이다. 그리고 베르그송은, 기독교적 신비주의가 기계 주의롤 낳았기 때문에 불교적인 정신세계보다 기독교적인 정신세계에 더 경도하게 되었다. 이래서 그는 〈신비가 기계를 부른다〉고 언급하였다. 그 의 생각을 보자. 〈참답고 온전하고 행동적인 신바주의가 자신의 본질인 사랑을 힘으로 하여 전파되기를 갈망함은 확실하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지 않을까 하는 공포 속에 몰입된 인간성 속에서(비록 그 신비주의가 희석화되고 약화되어도 필연적으로 전파되겠지만) 그 신비주의가 어떻게 전파되겠는가? 인간은 강력한 도구가 그에게 지탱점울 주는 한에서만 대 지 위에 일어나게 된다. 인간은 그가 물질로부터 초탈하려고 원한다면 물 질을 짓누르지 않으면 안되리라. 디른 말로 밀하자면, 신비가 기계를 부 른다.〉떠) 베르그송의 철학이 이처럼 물질적 관리경영과 실용적 행동을 무시하지 않는 신비주의와 정신주의를 제창하여 인류의 정신적 구원을 생각하고 있다고 하여도, 그는 신비주의와 쾌락주의가 변증법적 통일을 사이좋게 이루어 낙원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리러는 소박한 낙관주의를 견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의 사상은 인간의 물질적 지배가 사치와 방종 에 흐르지 않고 가난을 국복하면서도 정신적 풍요와 단순성의 행복으로 104) 같은 책, p. 329.
인류가 나아가기를 바라는 데 있다. 이 점은 이미 제訖J 沼갈에서 취급되 었다 . 그가 〈이분법의 법칙〉이나 〈이중적 광란의 법칙»]라고 명명한 것 도 인간 속에 끝없는 국단에의 경향이 있음을 보았고, 그것이 결코 사라 지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도덕 속에 강제와 열망의 대립이 있 고, 종교 속에 사회적 이익 추구와 인류적인 영혼의 감동을 주는 대립이 있고, 닫힌 사회와 열린 사회의 대립이 있다. 이 대립은 어떤 경우에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 소멸의 불가능성은 자연의 법칙과 은총의 세계가 결코 동일화될 수 없음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그송은 역사세계 에서 물질적 만족은 최소화하고 정신적 기쁨을- 극대화시켜 나가는 방향 으로 인류가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 류가 파멸할 것임을 그는 내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의 낙관주의 는 결코 역사적 사실의 낙관주의도, 현실 긍정의 낙관주의도 아니다. 그 의 낙관주의는 정신이 진정 우리의 유일한 안식처임을 알려주는 정신주 의적 낙관주의다. 그러나 그의 정신주의가 허무적 신비주의가 아님은 물 론이다. 그런 점에서 종국적으로 그의 신비주의는 물질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물질에 축복을 보내고 있다고 보아야 하리라. 쟝께레비츠가 베르 그송의 철학을 일컬어 매순간 매순간마다 새로운 생명을 맛보게 히는· 〈봄의 철학 la ph i lo sop h i e vernale 〉이라고 평가한 것은 깊은 공명을 불 러일으킨다 •105) 매순간마다 정신과 영혼에서 생기와 봄을 느끼는 자는 기쁨에 충만해 있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한마디로 베르그송의 철학을 요약한다 면, 그의 철학은 곧 인류에게 멀어져간 기쁨을 찾아가는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기쁨이란 낱말은 예언자들에서나 베르그송에게서 마찬가지 로 중요한 낱말이다• 인간들을 춤추게 하는 기쁨, 밝디 밝은 내일의 기쁨 은 무엇보다 먼저 해방, 즉 자유의 실행에 기인하지 않는가?〉!U 6 ) 그의 철 학이 종국적으로 겨냥하는 관점은 인간이 물질에 궁핍을 느끼지 않되 결 105) V. Jan ke1evit ch , 갇은 책 , p. 271 . 106) V. Jan ke1evit ch , 갈은 책 , p. 296.
코 사치와 낭비 속에서 쾌락에 빠지지 않고, 행동의 실용성을 인정하되 결코 명상의 신비성을 무시하지 않고, 물질울 사랑하되 그것이 모든 것인 양 착각에 빠지지 않고 전정한 정신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인생 의 지혜와 같다. 그는 본능의 자연적 생리와 지능의 工作的 가치를 인정 하되, 그것들을 넘어 인간에게 정신을 정신으로 이해하는 직관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철학적 지혜가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는 인류가 神秘가 없는 기계문명만을 개발해나갈 때 만나게 될 가공할 위험이 무엇인가를 깨우쳐주는 것이다. 기계문명이 정신성과 신바성을 무시하게 되면, 우리 의 기계문명은 커다란 재앙을 필연적으로 당하게 됨을 그는 경고하고 있 다. 그가 남긴 말을 끝으로 깊이 깊이 음미해보자. 〈커진 육체는 영혼의 보충을 기다리고 있다.〉 107) 107) H. Bergs o n, 같은 책 , p. 330.
부록 I 참고문헌 (가) 앙리 베르그송의 저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장소의 개념 Qu id Aris t o t e le s de loco senseri t.n, Alcan, 1889. 『의식의 직접 여건에 관한 논고 Essa i sur les donnees im media t e s de la consc i ence 』, Akan, 1889. 『물질과 기억 Mati er e et memo ir e 』, Akan, 1896. 『웃음 Le r i re 』, Akan, 1900. 『창조적 진화 L'e u oluti on crea t r i ce 』, Akan, 1907. 『철학 La ph il o sop h ie ( i n La scie n ce /ran 언i se) 』, Larousse, 1915. 『전쟁의 의미 La sig n if ica ti on de la g uerre 』, Bloud et Gay , 1915. 『정신적 에너지 L'energi e sp i r it uelle 』, Akan, 1919. 『지속과 동질적 시간 Duree et s i mul t ane it e 』, Alcan, 1922. 『도덕과 종교의 두 가지 원천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 l igi on 』, Akan, 1932. 『사유와 운동자 La pe nsee et le mouuan t』, Akan, 1934. 『기록과 말 Ecrits et p aroles 』 ( I , II , ill ) , P.U.F., 1957, 1959. (나) 앙리 베르그송에 관한 연구 저서(불어) R. Gi llou in : Henri Bergs o n , Paris , M ich aud, 1910. ; La ph il o sop h ie de M. H. Bergs o n, Grasset, 1911 . E. Le Roy : Une ph il o sop h ie nouvelle, Akan, 1912. J. Benda ; Le Bergs o nis m e ou une ph il o sop h ie de la mobil it e , Akan, 1913. R. Berth e lot : Un romanti sm e uti lit a i r e , Akan,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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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II 주요용어해설 ※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은 일상생활에 쓰이는 평이한 개념으로써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특별히 해설해야 할 전문적인 용어가 없다. 그는 어렵고 난해한 전문 용어의 사용을 아주 싫어하였다. 그러나 독자들의 이해에 조금이라도 보뎀이 될까 하 는 세심한 배려에서 그래도 주요하다고 여겨지는 용어들을 아래와 걷이 풀어본다. 공간호둔 시간 le tem p s sp a ti ali se : 베르그송은 산器 렀 으로서의 시간〉과 〈공간冷 엄격히 구분함. 지속의 시간은 의식의 흐름이고 공간은 물리적 물 질의 세계임. 그런데 물리학이나 수학에서 취급하는 운동시간은 지속의 시 간이 아니고, 공간 속의 운동을 측정하기 위한 단위이므로 근원적인 시간이 아님 . 共感 la sym p a th ie : 베르그송의 철학은 지능과 지성에 의하여 대상을 객 관적으로 분석하고 측정하는 사유의 방식이란 실용적 유용성만을 우리에게 주는 과학에 국한된다고 주장함. 그래서 생명과 의식과 정신을 파악하는 철 학은 분석과 측정이 아니라 정신과 정신, 정신과 생명, 정신과 의식이 직접 접촉해서 일어나는 공명현성에서 가능하다고 주장함. 그 공명현상이 공감임. 公平無私한 본능1'i ns ti nc t desin t e r esse : 본능의 세계는 자연의 세계로 서 오직 자기집단의 보호의 - 보존만을 겨냥함. 그러나 직관의 세계는 본능처 럼 생명의 흐름을 이해하고 있지만, 닫힌 성격을 지니지 않고 열린 영혼과 정신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기에 베르그송은 칙관을 공평무사한 본능이라 고부르고있음. 과학적 예견 la pre vis i o n scie n ti fiqu e : 이 개념은 〈죽흥적 예언〉과 대 비됨. 죽흥적 예언은 의식의 흐름을 전하게 타고 있는 사람이 의식의 내부 에서 자기 의식의 미래를 현재적 행동으로 앞당기는 것을 말하지만, 과학적 예견은 제꼬}의 입장에서 데이터에 의해 일기예보하듯이 판단하는 행위임.
기계적 기억 la memoir e mecaniq u e : 기계 적 기억은 〈 습 관 적 기억〉과 같은 개념으로서 기계적 반복에 의하여 어떤 것을 암기하게 되 는 기억임. 이 기억은 주로 현실적, 미래적 행동에 유효한 성질을 지니고 있 으므로 기 억으로서는 과거에 속하지만 현재에 대기 상태에 있 음 . 기계적 단순성 la sim p li c i t e mecaniq u e : 이 개념은 기계 론 적 사고에서 나온 것으로서 要素 가 全體 보다, 부분이 합계보다, 원인이 결 과보다 분명하 고 오류가 적고 시간적으로 앞선디는 생각입 기계적 認矢 D la reconnais s ance machin a le : 이 개념은 〈자동적 인지 〉라 고도 하는데 나의 신체의 메카니즘이 어떤 것에 익숙해지고 습관화되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우리가 알아보는 심리적 행위임. 논리적 단순성 la sim p li c i t e log iqu e : 이 개념은 〈기계적 단순성 〉과 같 은 개념으로서 요소가 전체보다 더 단순하고, 조건 주는 것이 조 전 받는 것 보다, 원인이 결과보다 더 단순하다고 여기는 원리임. 기계론적 사고방식에 서 파생된 원리임. 다발상태의 진화I' evolu ti on en ger be : 이 개념은 다윈의 진화개념과 디름• 다윈의 전화개념은 모든 생물이 일직선상의 계단처럼 진화되어 인간 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보는데, 베르그송의 진화는 모든 생명이 그 뿌리에서 는 하나의 에너지지만 나뭇가지처럼, 밤하늘의 불꽃처럼, 꽃다발처럼 한 뿌 리에서 여러 개의 방향으로 폭발하면서 진화한다는 이론임. 多形現像 le po lym orph is m e : 가장 특이한 개념인데, 베르그송의 저작에 자주 나오지는 않고, 오칙 『종교와 도덕의 두 가지 원천 』 에서 두 번 나옴. 따라서 별로 중요한 개념은 아니지만, 일상생활용어가 아니기에 해설함. 이 개념은 곤충사회의 특징을 말하는 것으로 곤충사회에서 기능의 분화가 각 각 엄격히 나누어져 있음을 뜻함. 예컨대 일벌은 끝까지 일벌이고 여왕벌은 언제나 여왕벌이다. 이런 현상을 다형현성이라고 함. 닫힌 도덕 la morale close : 자기가 속한 사회집단을 지키고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한 도덕으로서, 이 도덕의 특징은 의무적이고 강제적아며, 습관 적이고 배타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음. 동질적 시간 la sim ulta n eit e : 이 개념은 持續 과 전혀 다른 시간으로서 위에서 거론된 〈공간화된 시간〉과 같은 뜻임. 불어 개념으로는 통싱- 〈同時
性〉이라고 번역되지만, 베르그송이 의도하고 있는 뜻은 여기와 저기의 시간 이 동시적이라는 의미보다, 오히려 여기의 6 어tc l 저기에서도 꼭 6 아몬으로 어김없이 통용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한가한 사람에게 6 0{i녓든 일에 쫓기돗 바쁜 사람의 6 앉손과는 다르다. 이것이 이질적 시간으로서의 지속인 데, 물리적 시간은 그런 이질성을 무시하므로- 동질적 시간이 됨. 同質二像 le dim orp h is m e : 이 개념도 위의 〈다형현상〉처럼 일상생활용 어가 아니며, 베르그송의 철학 이해에서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동물·과 달 라 인간은 사회생활에서 동시에 두 얼굴을 갖고 있다. 내가 주인으로 명령 하는 위치에 있지만, 또한 동시에 신하로서 복종하는 위치에 있기도 함. 動態宗敎 la relig ion dy n ami qu e : 〈神態宗敎〉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자기 소속 집단의 아익과 수호를 위한 종교가 아니고국 전 인류의 영혼에 깊 은 감동을 보편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종교다. 이 종교는 신비주의의 성격을 지니며, 기독교와 불교가 대표적인 동태종교입 두뇌 le cerveau : 두뇌는 물질에 속하고 정신에 속하는 기억을 운동의 메 카니즘에 적응하도록 조절하는 장치입 두뇌는 기억울 저장하지 않고, 〈순 수 지속〉인 기억을 현재화시켜 인간 행동에 도움이 되도록 기억의 현재화 와 망각을 가져오게 하는 자동개폐기의 역할을 함. 마나 le mana : 원시종교에서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개념으로 영혼이 유령 이나 陰影의 상태로 사후에 존재하는데 그것이 사후에도 우리의 생활에 영 향을 미치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신앙의 한 사고형태임. 無意識 I'inc onscie n t, I'inc onscie n ce : 베르그송의 무의식 개념은 프로이 트의 개념과 다름. 베르그송은 기억이 두뇌의 방해에 의하여 망각된 상태가 기억의 무의식이고, 또 생명의 에너지가 비약을 포기하고 잠들어 있는 상태 가 생명의 무의식입 본능I'i ns ti nc t : 생명의 비약은 본능, 지능, 직관으로 각각 나누어지는데, 본능은 주로 막시류(벌이나 개미)와 같은 곤충에게 그 생명의 비약상 최고 조의 달함. 본능은 인간의 지능과 달리 생명을 가장 그 내부에서 잘 이해케 해주는 개념으로 지능과 함께 생존에 필요하고 유리한 것을 추구하는 자연 적 능력임. 그 본농기 인간의 직관과 같이 생명적이지만. 폐쇄적이고 몽유 병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음. 지능의 활동은 간접적이지만, 본능의 활동은
직접적입 본능적 예언 le pro p h eti sm e ins ti nc ti f : 이 개념은 〈점치 는 共感 〉이나 〈 精 神 感應 써나 〈영감〉과 유사한 개념이고, 이미 앞에서 설명된 〈과 학 적 예 견〉과는 정반대의 뜻임. 미래가 의석 흐름의 현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식 흐름의 현재 안에 있음이 본능적 예언임. 副隨現象主義l' e pi-p henomen i sme : 이 개념은 心 身平 行 論 과 유사한 개념 으로서 인간의 심리현상은 물질적 두뇌의 생리현상의 복사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이론입 심신평행론이 더욱 유물론화된 심리학이론이다. 삶에 대한 주의 l'a t t en ti on a la vie : 베르그송에게서 의식과 시간은 같 은 개념이고 지속적으로 흐르고 있는 그런 차원에서 현재와 과거 를 경계짓 는 개념이 필요한데, 이 개념이 그 경계선이 됨. 죽, 현재 나의 의식의 주의 롤 삶에서 기울이고 있는 영역의 범위가 곧 베르그송에 있어서 의식의 현 재가됨. 생명의 비약 l'el an vit al : 이 개념은 베르그송 생명철학의 중심으로서, 모든 생명은 물질의 저항을 꿰 뚫 고 전화하고 비상하려는 역동적 힘을 가지 고 있음. 그 힘이 생명의 비약임. 생명의 비약은 정신적 에너지임 . 세십한 認知 la reconna iss ance att en ti ve : 이 개념은 위에서 거론된 〈기계적 인지〉와 다른 차원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는 현재화된 습관에 의해 서 가능한 것이 아니고 과거의 추억을 더듬어 현재의 대상을 알아보는 심 리행위를말함 . 숙련된 단순성 la sim p licite savante : 이 개념은 학자들이 좋아하는 것 으로 위에서 설명된 〈논리적 단순성〉과 동일한 것임. 순박한 단순성 la sim p lici t e i ng e n ue : 이 개념은 지능과 지성에 의한 추 리에서 생기는 단순성이 아니고, 인간의 직관이나 본능이 단번에 파악하는 단순성, 죽 정신의 단순성을 말함. 아름다운 교향곡은 多 音임에도 단순하게 느껴지나, 자동차 소음은 單音임에도 복잡하게 느껴집. 순수 기억 la memoir e pu re :순수 기억은 〈정신적 기억〉과 같은 개념으 로서, 우리 의식의 지속에 의하여 과거로서 그 자체 존재하는 기억임• 이 기억은 기계적 반복에 의하여 암기되는 것이 아니고, 단번에 한 번 보고 우 리의 정신에 기억되는 것을 말함.
순수 지각 la pe rcep tion pu re : 이 개념은 순수 기억의 過 去性 과는 정반 대로 지각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적 측면을 말함. 하나의 이론적 개념이 지, 사실적 개념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지각도 사실상 짧은 시간이 이미 지난 近接 과거이기 때문임. 순수 지속 la duree pu re : 이 개념은 의식의 흐름 그 자체를 말함. 순수 추억 le souvenir pu r : 이 개념은 〈순수 기억〉의 내용으로서 과거 얘 속함. 이 〈순수 추억活든 〈순수 지속〉의 정신세계에 속하는데, 추억이 현 재화하기 위해선 구체적 영상의 단계를 거쳐야 함. 습관적 기억 la memoir e -h a bit ud e : 〈기계적 기억〉과 같은 개념입 신체적 기억 la memo ir e 값 or p s : 〈습관적 기억〉과 같은 개념임. 心身平行論 le p arall 하i sme : 이 개념은 物心平行論이라고도 하는데 데까 르뜨가 그 사상의 元祖임. 죽, 심신은 전혀 본질을 달리하는 대등한 실체로 서 두 실체가 평행한데, 그 관계를 보는 입장에 따라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말브랑슈 등의 철학으로 구분됩 엔그람l' en g ramme : 심리학적 용어로 과거의 개인적 사건이 기억 속에 남은흔적을말함. 역동적 단순성 la sim p li c i t e dy n ami qu e : 〈기계적 단순성 〉과 정반대의 개념으로서 의석에 직접 접촉되는 생생하고 살아있는 전체로서의 단순성. 聯想主義I' asso ci a ti on i sme : 주로 영국에서 성행하는 심리학 이론으로서 인간의 정신을 관념이나 지각의 여러 요소로 분해하여, 그 결합을 곧 심리 적 정신세계로 보는 경험주의적, 주지주의적 심리학임. 베르그송은 연상주 의 심리학은 비판하지만, 인간 심리의 연상작용은 인정하고 있음 열린 도덕 la morale ouverte : 닫힌 도덕과 정반대의 개념으로서, 이 도 덕은 자기 소속집단의 보존보다 전 인류의 영혼에 감동을 주는 도덕으로서, 의무적이 아니고 영혼을 부르는 호소력을 지니고 있으며, 위대한 영혼이 모 범을 보여주는 도덕. 거기에는 정신의 비약이 있음. 영상적 기억 la memoir e -im age : 이 기 억은 〈순수 기 억 〉의 추억이 현재 화, 구체화하기 위하여 과거의 추억이 몽롱한 상태에서부터 추억의 내용과 함께 영상화되는 기억울 말함. 그 기억의 내용을 〈영상적 추억 le sou- ven i r - i ma g e 〉이라고 함.
운동적 도식 le schema mote ur : 두뇌가 우리의 현실적 행동을 가능케 해주는 기능을 가졌는데, 이 운동적 도식에 의하여 기억이 습 관화하고, 생 활의 실용적인 것을 이용하게 됨 . 운동적 도식은 두뇌의 활 동 메카니즘의 원리와 기능을말함. 유기체적 전체성 la to ta l ite orga niq u e : 베르그송은 의식과 생명을 기계 론적으로 보지 않고 유기체론적으로 생각함. 기계는 부분들의 조립으로 성 립하지만, 의식과 생명에는 전체의 흐름이 더 중요함. 의도!'i n t en ti on : 인간의 지능이 인간의 안전과 죽음의 공포를 다 해결 해주지 못하기에, 인간의 지능은 본능의 힘을 슬며시 빌려서 자연에 대하여 擬似人格性울 부여하거나 神話的 思惟롤 하거나, 어떤 인간 욕망을 投 射 하 여 의도를 갖고 있는 자연으로 생각함• 이중적 광란 la double fren esie : 일명 〈이중법 칙 la loi de dic h oto mi e> 라고도 하는데 이 개념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그 하나는 본능과 지능의 광 란이나 법칙으로서 본능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전쟁 본 능을 갖고 있고, 지능은 쾌락을 위하여 기계와 도구를 만드는 호기심을 갖 고 있다. 또 다른 이중법칙은 본능과 지능이 만드는 쾌락과 안락의 광란 이 의에 그것과 전혀 다른 정신적 〈금욕주의의 광란)o l 있다. 이 광란은 물질 적 빈곤을 극복할 자신이 없을 때, 정신의 세계로 도피하는 광란임. 前未來的 신기루 le mira ge de futur ant e rie u r : 이 개념은 미래가 오 기 전에 어떤 일이 완료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미래완료형의 환상을 말함. 인간의 미래는 예견되거나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전혀 예측불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이미 결정된 과거처럼 허구적으로 상상하는 사 고방식의 허상을말함. 정신적 기억 la memoir e -e s pr i t : 이 개념은 〈순수 기억»]나 〈직관적 기억〉처럼 반복에 의해서가 아니고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의식의 지속을 타 게 되는 기억울 말함. 이 기억을 〈자발적 기억沖]라고도 함. 靜態宗敎 la reli gion sta ti qu e : 이 개념은 〈動態宗敎〉와 달라 자기 소속 집단이나 사회의 보존과 이익을 위하여 지능의 이기심을 견제하는 종교이 고 지능이 해답하여 주지 못하는 인간의 불안(죽음의 공포)을 〈허구적 기 능冷 7 통해 참재우려는 종교임. 예컨대 일본의 神道가 대표적 정태종교라
할수있음. 呪術 la mag ie :주술은 정태종교와 밀접한 관계 를 맺고 있고, 주술의 본 능적인 면은 허구적 기능과 자연의 의도화를 통하여 종교적 색채를 띠게 되며, 주술의 지능적 측 면은 구체적으로 생활과학의 발명을 가져오는 계기 가 됨. 생활의학은 주술의 과학적 측 면의 대표임. 지능, 지성 l'int e l l ige nce, l'int e l lect : 생명의 비약은 인간에게 곤충의 본능 대신 지능을 심어주었음, 그래서 지능은 본능 대신 인간의 생활에 필 요한 도구를 제작하게끔 하였음. 그래서 베르그송은 인간을 지능의 측면에 서 〈工作人 homo fa ber 〉이라고 칭함. 이 지능의 생명적 능력이 논리화된 것이 〈지성 !'i n t ellec t〉임. 〈지능의 지성화〉가 과학임. 이 지능은 본능에 대 립되지만, 직관에도 대립됨. 직관!'i n t u iti on : 인간의 직관은 정신을 정신으로서 직접 체험하고 이해 하는 생명의 능력임. 직관은 동물의 본능처럼 생명의 신비를 직접 파악케 하는 힘이지만, 본능처럼 몽유병적인 무의식도 아니고, 지능이나 지성처럼 간접적인 지식이 아니라, 직접적인 정신이해의 능력임. 토테미즘 le to te m i sm e : 베르그송은 토데미즘이 물신숭배사상이 아니라, 자기 부족의 내적 응집력을 키우는 소속감을 나타내고, 다른 부족과 교환 및 족의혼을 가능케 하는 정태종교의 발상법이라고 주장하였음. 이 견해는 구조주의 창시자인 레비 - AE 쿠 A 에 의하여 탁월한주장으로높이 평가되었 음. 허구적 기능 la fon cti on fab ulatr ic e : 이 개념은 정태종교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 개념으로서, 사회보존의 기능을 지닌 정태종교가 안간지능의 이 기심과 죽음의 공포의식이 사회생활을 파괴할 위험이 있다고 보기에 지연 의 생명력인 인간 본능과 지능의 두 힘을 묘하게 빌려서 이기심을 억제하 고 죽음의 공포를 국복하게끔 허구적인 신화와 사회관습, 토데미즘, 마나, 애국심 등을 창작하였음. 그런 허구적 창작을 허구적 기능이라고 함 . 回顧的 환상l'ill us i on retr o sp ec ti ve : 이 개념은 미래로 향하는 〈前未來 的 신기루〉와 함께 인간 사고방식의 기계론적 오류로서, 현재는 의식의 지 속] 그 전체에서 자유스럽게 흘러온 것인데, 새삼스럽게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과거의 어떤 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원인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오늘을 있게 하였다고 보는 製造 的 사고방 식을 말함. 대개 역사학의 설명은 이런 회고적 환상에 빠졌음. 역사학적 설 명의 과오는 역사의 흐름을 타지 않고 밖에서 다시 역사를 인위적 설명의 논리로 제조하려고 하는 데 있음.
찾 0~ 보 71 기 me 269, 274, '215 가언적 명제의 인식 163 긍정판단 199 감각적 전망중 I' amnesie sensorie l le 64 기계론(적 ) 사고 20, 31, 33, 84, (감각적 ) 운동적 도식 le schema sen-114~116, 118, 122, 126, 143, 146, sori- m ote u r 42, 46, 47, 63, 65~ 166, 170~172, 212, 214, 276 68, 74, 76, 77 기계론적 심리주의 20 감동I' emo ti on 222, 224, 226, 256, 기계적 기억 37, 46 260, 264 기계적 단순성 151, 154, 176, 178 갑작스러움 la soudain e te 227 가계적 인지 la reconna iss ance mach- 강요하는 도덕 222 ina le 62 개념 96 기다립 52, 69 결정론(적 ) 20, 31~33, 111, 112, 114, 기쁨 91, 138, 139, 189, 192 , 208, 117, 123, 170 224, 227, 259, 278 곤충 153, 269 기억 33~35, 39, 40, 44~46, 49, 50, 공간(적 ) 94, 96, 97, 98, 102, 108, 69, 84, 109, 128, 135, 175 122, 160 金奎榮 107, 108 공간화된 시간 102, 109 까바니 Caban is 13 공감(명 ) la sy m p a th ie 16, 25, 168, 꽁디약 Condil la c 13 181, 183, 207 꽁뜨 A. Comt e 16, 232 공작인 homo fab er 164, 247 꿈 46, 47, 52, 57, 58, 217 공평무사한 본능!'i ns ti nc t desin t e r es-
se 183, 184 L 과거 30, 42, 45, 47, .50 ~ 55, 58, 60, 낙관주의 209, 210, 265, 266, 277 72, 135 내면(적) 세계 20, 49, 91, 92, 93, 과학적 예견 169 103, 106, 110, 122, 141 관념적 운동 41 내면적 통합 125 관습 217~219, 254 노력 86, 137, 138 괴 테 Goeth e 144, 174 뇌세포 22, 28, 34, 35, 44, 49, 64, 구체적 단순성 116, 117 77~80 그리스도교(기독교) 2'2: 1, 257, 258, 276 논리적(학) 160 국피동물 152, 153 눈공 50, 84 금욕주의 212 , '2:16 느낌 87, 88, 90 금욕주의의 광란 la fren esie d'asceti s-E. 르끼예 Leq u ie r 120 다발상태 (모습)의 전화 145, 150, 155 리보 Ri bo t 13, 35 다윈 Darwi n 18, 136, 145 多円暎像 le po lym orph is m e 271 口 닫힌 도덕 la morale close 23, 27, 28, 마나 la mana 241, 242, 251 215, 218, 219, 221, 228, 251 마르셀 G. Marcel 190, 209 닫힌 사회 218, 219, 269 막시류 153, 155, 156, 159, 168, 216, 닫힘 136, 259 255, 269 대폭발 Big Bang 140 말브랑슈 Malebranche 30 데까르뜨R. Descarte s 29, 30, 160 망각 2.'3, 53, 54, 55, 77, 201 도덕적 금지 215 메이에르 Me y er 105, 178 동물 129~133, 152, 251 메이에르송 Mey er son 196 同質二像 le dim orph ism e 271, 272 멘느 드 비랑 Main e de Bir a n 13 동질적 (성 ) 시간 14, 20, 87, 93, 94, 명상 58, 72, 171, 264, 278 96, 97, 102, 105, 109, 160, 165 목적론 18, 20, 111, 143, 170~172 동태종교 25, 27, 28, 255~257, 259, 無 54, 195~198, 201, 202, 209 260, 262 , 264 無에 대한 논리적 각도 196 두뇌 55, 57, 62, 74, 75, 77, 79, 81, 無에 대한 심리적 각도 196, 197 82 무의식 (적 ) 52~54, 79, 131, 134, 뒤르께임 E. Durkheim 231 156, 158 들라크로와 Delacroix 13 문제 190 물리적 대상의 다양성 193 2 물질 (세계 ) 17~20, 41, 47, 81, 96, 라마르크 Lamarck 148, 150 98, 110, 123, 126, 128, 129, 138, 라벨 L. Lavelle 27, 28, 226, 259, 262 139, 278 라베쏭 Rava iss on 206 물질적 향락의 광란 la fren esie de la 라슈리예 Lacheli er 196 jou is s ance mate r ie l le 269, 274, 275 라이프니츠 Le i b ni z 30, 98, 172, 210, 미래 40~42, 44, 52, 58 214, 265 미신 245, 254 레바브류울 Lev y -Bruhl 241 밀 M ill 112 레바人드 쿠c::.. Le vi-St rauss 248, 251, 253 닙 로비네 Robin e t 261 반복 65, 66, 100, 176
변화 50, 97, 131, 207 256 본능(적 ) 24, 47, 153, 154, 156, 158, 생명 (의 흐름) 17, 19, 47, 111, 1 업, 162~ 164, 166~ 168, 180, 183, 184, 133, 167, 174 220, 224, 233, 234, 246, 247, 250, 생명적인 것과 원하여진 것의 질서 195 262 생성 13, 15, 100, 108 본능적 예언 169 생식 148 봄의 철학 278 성격 118, 119 부름(의 도덕 ) 222, 223, 226 세심한 인지 la reconna iss ance ath e n- 부수현상주의 l'ep iph enomen ism e 20, tive 61, 63~69, 74 22, 31, 64 수다쟁이 homo loq ua x 164, 192 부정판단 199 수축f동 72, 74 불 꽃 18, 140, 141 숙련된 단순성 116, 126 불교 257, 258, 276 순박한 단순성 116, 126 불연속적(성) 97 순수 기억 28, 38, 44, 46, 60, 125 브레이예 Breh ier 12 순수 생성 13 비극 177 순수 의식 139, 140 비약 19, 28, 69, 127, 130, 131, 136, 순수 지각 40, 41, 67, 81 138, 139, 141, 144, 150, 261 순수 지속 14, 49, 84, 105, 106 빠블로프 Pavlov 62 순수 추억 60, 70, 72, 81, 175 빠스깔 Pascal 120 순환운동 68, 69, 72 스펜서 Sp e ncer 18, 116, 210 人 스피노자 Sp i noza 30 思 辯 15 습관(적 ) 44, 58, 219, 220, 224, 229 사유 29, 30 습관적 기 억 21, 36~38, 42~44, 46, 사회생활(질서 ) 216, 217 57, 58, 61, 66 사회적 연대의식 226 시간 13, 98, 102, 103, 107, 108, 122 사회의 집단적 표상 231 식물 129~133, 152 , 251 살아 있는 영원 205 神 140, 196, 256, 257, 259~261, 살아 있는통합 125 266, 268 삶에 대한 주의 53~56 신비 (주의 ) 25, 173, 190, 212~214, 상징 (적 ) 110, 160, 207 229, 230, 256, 260~262 , 업 6, 278 생명 (의 비약) 13, 17, 20, 124, 126, 신체 42, 44, 62, 78 129, 131, 139~142, 148, 173, 209, 신체적 기 억 37, 38, 46, 47, 57
실용적 (성 ) 48, 55, 61, 132, 138, 165, 延 長 29, 30, 121 , 179 167, 208, 212, 213, 230, 233, 248, 연체동물 152, 153 254, 278 열린 도덕 23, 25, 27, 28, 215, 221~ 심리물리학 31, 90 225, 228, 251 심리생리학 31 열림 136, 259 심리적 농인 78 열린 사회 219, 269 심리적 맹인 63, 77 열망 27, 28, 224, 226, 228 심신이원론 29, 30 영감!'i ns pi ra ti on 121 심신평행론 20, 22, 29, 31, 32, 64, 90 영상 72 영상적 기억 (추억 ) 38, 60, 61, 63, 66, 。 68, 70, 81 아름다운 메마름 192 영웅적 행위 225, 226 아리스토텔레스 Ar i st o t eles 16, 18, 204, 영혼 50, 256, 259, 260, 278 210 영혼의 불멸 82, 241 아이머 Ei m er 145 외면화(적 ) 93, 103 惡 265, 266, 267 요가 257 암기 47 용불용설 148 양 85, 87, 90, 93, 95, 96, 179 우연 243, 244 억압(압력 ) 27, 224, 226 우연적 변이 147 언어상실 (증) 79, 80 우주적 나무 151 언어적 농인 78 운동 42, 43, 57, 134, 173 언어적 맹인 78 웃음 175, 176, 178 에너지 130~132, 137, 140, 204, 230 원심적 (두사) 운동 68, 69, 72 엔그람I' en gr amme 34 원하여진 본능 24 엘레아학파 106, 110 유기체론(적 ) (사고) 122, 123, 130, 예술 184, 206 166, 195, 206, 216 예언자적 영감 169 유기체적 전체성 50, 51, 84, 100, 167, 역동적 (성 ) 94, 122, 126, 129, 130 175 역동적 단순성 151, 154, 176, 178 유사성 166 연대순적 단순성 116, 117 유용성 41, 45, 161, 233, 248, 254 연상(의 법칙 ) 61, 71, 72, 76 은총 255 연상주의 (심리학) 19, 71, 72, 116, 118 의도 247 연속 15 의무(적 ) 24, 217~219, 226, 228, 255
의식 (의 흐름) 13, 15, 43, 50, 52, 55, 108, 119, 122 91, 95, 96, 98, 109, llO, 122, · 131, 자연 17, 18 134 자유 21, llO, 111, 119, 120, 122, 173, 의식의 긴장(집중) 188 179, 208, 209 의식의 사실의 다잉정 193 자유의지론 le libr e arbit re 111~113, 의식이상적 sup ra -c o nscie n t 263 117, 170 의식이하적 inf r a -c o nscie n t 262 작위적 통합 123 의지의 단계 114 잠재적 본능 24 이기심 (주의 ) 25, 234~236, 251, 253, 쟝께레비츠J ankelev it ch 84, 98, 100, 255 106, 111, 116, 117, 129, 137, 142 , 李 舞臣 221 156, 169, 227, 278 二元 的 一元 47, 81, 158, 184, 209, 적응설 147 233, 256 전미래 (적 ) 사고(신기루) 114~117, 171 이분법의 법칙 274, 277 전쟁 272, 273 이성이상적 sup ra -rati on nel 270, 271 절대 (적 ) 17, 109, 181, 182 , 207 이성이하적 infra- rati on nel 270, 271 절지동물 152 , 153, 155, 220 이익 41, 96, 248 점치기 121, 168, 169, 200 이질적 (성 ) 87, 92, 94, 97, 103 정신(주의 ) 12, 58, 64, 81, 82, 182, 이중적 광란 269, 274, 277 194, 256 이해관계를 떠난 인식 la connais s ance 정신적 기억 la memo i re 군 s p r it 36, 38, desin t e r essee 180, 190 42, 43, 44, 46, 47, 58, 61, 63, 68, 인간의 형제애 222 125 인지 la reconna iss ance 161 정신적 번역 30, 31 일반성 165, 166, 175 정신적 황금l' or sp iri t ue l 259 일반적 생각 59 精 靈 사상 241,_2 51, 254 정태종교 25, 27, 233, 235~237, 239, x: 240, 246, 249, 251, 254 자동적 인지 la reconna iss ance auto - 제논 zenon 106, 110 mati qu e 61, 62 제스추어 177 (생명의 ) 자발성 25, 143, 145, 148, 제임스 W. Ja mes 86, 205, 245 150, 173, 203, 222 제조(적 사고) 122, 174, 195, 196, 204, 자발적 기억 38 229 자아 20, 56, 59, 83, 84, 98, 105, 106, 조건 반사 63
존재치 않는 의식 la conscie n ce nulle 전보(적 ) 25, 109, 114, 120, 127, 130, 156, 158 131, 222, 224 종교 230, 240, 241, 250, 251 진화(론) 18, 125, 127, 130, 141, 143, 주술 la magi e 241, 246~249, 251 144, 174, 206 주의 (집중) 52, 154, 57, 74, 86, 189 전화론적 변화 161 죽은 영원 205 質 85, 87, 90, 93~96, 179, 208 죽음 201, 209, 239, 240, 253, 267 질적 변화 161 즉흥 200 줄거움의 형이상학 211 天 지각 35, 40~42, 44, 46, 61~63, 76 참통합 125 지각된 영상 43 체내감각 85, 90 지각불능l' a g nose 64 창조 140, 222, 229, 260 지능!'i n t e llig ence 14, 15, 27, 47, 96, 창조적 사고 195, 204 102, 116, 145, 153, 154, 156, 158~ 창조적 전화 84 162, 164, 166, 167, 171, 180, 220, 척추동물 152, 153, 155, 220, 249 233, 234, 246, 247, 250 초시류 157, 168 지능의 선전척 기능 162 超 의식 la sup r a-c o nscie n ce 140 지능의 종교 27 총체적 경험 210 지성 !'int e l li ge nce 14, i59 , 160, 165, 추상적 단순성 116 166, 183, 184, 203 . 추억 23, 33, 34, 35, 37, 39, 40, 42, 지성이상적 sup ra -in t e l lectu e l 27, 28, 46~48, 61, 67, 76 226 추억적 기 억 28, 38, 46 지성이하적 infra- in t e l lectu el 27, 28, 226, 253 구 지속 la duree 15, 20, 28, 49, 50, 84, 칸트 kan t 16, 41, 106, 108, 194, 198, 85, 98, 100, 103, 122, 131, 170, 205, 206 182, 185, 207, 208 쾌감 195 지혜인 homo sapi en s 164 쾌락 211~213, 227, 273, 274, 276, 직관(적 ) l'intu ition 13, 14, 16, 17, 278 25, 29, 47, 96, 168, 180, 182, 183, 쾌락주의 275, 276 185, 187, 189, 203, 222, 262, 263 직관의 종교 27 E 직선적 진화 145, 150, 151 타성 139, 147
타성과 자율운동의 질서 l'or dre de l'in- 해방의 감정 225 erti e et de l' aut om ati sm e 194 행동 15, 41, 42, 45~47, 50, 52, 57, 터부 le tab ou 238, 251, 254 58, 80, 157, 159, 167, 171, 177, 토데미즘 le tot e m ism e 251, 252, 254 202, 219, 259, 264 통일 (적 ) 206, 207, 221, 223 허구적 기능 la fon cti on fab ulatr i c e 27, 235, 237, 239, 242, 243, 246, 포 247, 251, 253, 254, 256 페 히너 Fechner 90 헤겔 Hege l 209 폐기된 의식 la conscie n ce annulee 현상주의 le ph enomen ism e 19 156, 158 현실 (적 ) 58, 61, 110 폐쇄적 24, 220 현실적 운동 39 포기 191, 258 현재 39, 41, 44, 51~54, 69 포탄의 폭팔 144, 155 형이상학 194, 203, 204, 206~208, 표상 la rep re sent at i on 42, 135, 157, 210, 223 235, 240, 264 환경적응설 147 프라딘느 pra din e s 12 확장(운동) 68, 72, 74 프루스트p rous t 51, 56 회고의 논리 (환상) 89, 90, 93, 114~ 풀라톤p la t on 101, 270 116, 120, 171 풀로티노스p lo ti n 151, 192 확장적 변화 161 회상의 법칙 61, 77 굽 훈련 229 함축적 의식 la conscie n ce im p li ci t e 희극 175, 177 258 흐름 19, 20, 97, 131, 141, 161, 173, 함축적 지식 la connais s ance im p li c ite 181, 182 258
김형효 서울대 철학과 졸업 벨지움 루벵대학교 철학최고연구원 박사학위 취득 서강대 철학과 부교수 및 루벵대학교 연구교수 역임 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저서 『 평화를 위한 철학 』 , 『韓 國 精神 史의 現 在 的 認 識』 , 『 가브리엘 마르셀의 具 體哲學과 旅f로의 形而上學 』 , 『 孟子와 荀子의 哲學思想 』 의 다수 베르그송의 철학 대우학술총서 • 인문사회과학 54 찍은날 • 1991 년 4 월 25 일 펴낸날 • 1991 년 였l l0 일 지은이·김형효 펴낸이·朴孟浩 펴낸곳·民音社 출판등록 1966. 5. 19 제 l - 14 ti. 은행 지로번호 3007783 우편대체번호 010041-31-0 5 23282 135-120 서울 강남구 신사동 506, 강남출판문화센터 5¾- 515-2000~2( 영업부) 515-2003~5( 편집부) 515 - 2007( 팩시밀리 ) © 김형효 1991 인문사회과학, 철학 KDC/166.81 Prin t e d in Seoul, Korea 값 6,50~
대우학술총서 (인분사회과학) I 韓國語의 系統 김방한 2 文學社會學 김현 3 商周史 윤내현 4 人間의 知能 황정규 5 中國古代文學史 김학주 6 日本의 萬葉集 김사업 7 現代意味論 이익 환 8 베트남史 유인선 9 印度哲學史 길회성 10 韓國의 風水思想 최창조 II 社會科學과 數學 이승훈 12 重商主義 김광수 13 方言學 이익섭 14 構造主義 소두 영 15 外交制度史 김홍철 16 兒童心理學 최경숙 17 언어심리학 조명한 18 法 사회학 양전 19 海洋法 박춘호 • 유병화 20 한국 의 정원 정동오 21 현대도시론 강대기 22 이슬람사상사 김정위 23 동북아시아의 岩刻畫 황용훈 24 자연법사상 박 은정 25 洪大容評傳 감태준 26 歷史主義 이민 호 21 전구 어 - u5, 어학 -김 윤한 28 中國古代 學 문선규 29 韓 II 의 住居民俗誌 김 광언 30 한국의 고문서 허흥식 31 역사비교언어학 김방한 32 묵자 김학주 33 영국혁명의 수평파운동 임회완 34 性格 김경희 35 증국의 考古學 최무장 36 歷史의 方法 양병우 37 朝鮮時代地方行政史 이수건 38 한국女俗史 김용숙 39 한국農學史 이춘녕 40 한국의 家族과 宗族 김광규 41 제펴 1 계 십상필 42 코란의 이해 김용선 43 시베리아 개발사 이철 44 스페인 문학사 김현창 45 영어사 김석산 46 어원론 김방한 47 조선의 서학사 강재언 48 한국음악학 이강숙 49 증국언어학 문선규 50 스포츠 심리학 류정무 • 이강헌 51 원시유교 김승혜 52 전쟁른 김홍철 53 삼국시대의 한 X 낱옵 유창균 54 베르그송의 철학 김형 55 아날학파김웅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