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勝惠

1965 서강대학교史 學 科졸업 1979 京都대학에서 박사논문 연구 1981 하버드대학교 종교학 박사 1988 대만 중앙연구원 歷 史言語硏究所에서 연구 현재 서강대학교종교학과부교수 저 서 The Rig hteo us and the Sa ge , 『 宗敎 學 의 理解 』

原始儒敎

原始信敎

『論語』 • 『孟子』 • 『荀子』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 金勝惠 民音社

책 머리에 20 세기초에 이르기까지 근세 500 년 동안 우리는 朱子學을 사회의 정통이 념으로 받들어왔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 속에서 〈 1 儒敎〉라 하면 性理學인 宋學울 생각하게 되고, 어느 면에서는 이 둘을 동일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性理學은 北宋시기에 대두한 새로운 經典해석의 경향이 南宋 때에 와서 朱子에 의해 체계화된 약 800 년의 역사를 지닌 소위 新儒學 Neo-Confu c ia - nis m 이라 1 불리는 사상운동의 , 주류로서, 1 需敎의 2,500 년이라는 긴 역사의 안목에서 볼 때에는 한 단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朱子學울 儒敎의 발전사라는 전체적 흐름 안에서 이해해야 하고, 이러한 역사적 조명을 통해 서만 우리가 이어받고 있는 儒敎的 전통의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명확한 역사적 이해에 바탕을 두었을 때에만, 현대적 시각에서 유교 전통을 새롭게 수용하고 재해석하여 미래의 우리 문화에 의미있는 한 부분 으로 보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論語』에서 溫故而知新이라고 말했던 이러한 능력을 우리 안에 배양하기 위하여 儒敎의 始原울 이루는 先秦儒敎를, 20 세기의 발전된 역사비판적 연구 방법에 기초를두고고찰하려는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곧漢儒學의 이차적 인 해석과 체계화가 나오기 이전에 보이는 先秦사료들을 중심으로 하여 原始儒敎의 핵심적 사상과 해석학적 발전과정을 살핌으로써 儒敎의 본래적 성격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 책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孔子,孟子, 荀子 등의 이름들을 말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분들의 사상의 깊이와 의미를 오늘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새로운 시도이기도 하 다• 일반적 예상과는 달리 原始儒敎를 다룬 우리말 저서들이 희귀한 상태여

서 , 이러한 필요에 따라 대우재단에서 『原始儒敎』의 저술을 필자에게 부탁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학문적으로 미숙한 것을 인식하면서도 그 주제가 필자의 전공 부분이고, 또한 거절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감히 시도를 해본 것이다. 儒敎傳統의 眞義를 그르치지 않았을까 우려되지만, 宗敎學이 전공인 필자로서는 史學이나 哲學的 고찰에서 간과되기 쉬운 면이 宗敎學的 고찰로 선명하게 되어, 儒敎의 전모를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 다. 儒學울 하시는 모든 분들의 편달을 바라는 마음이고, 우리 文化의 전동 적 깊이를 배우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조금이냐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끝으로 이 저술을 하도록 자극을 주신 대우재단과 일년 동안 甲骨文 등 많은 자료를 개방해 준 대만의 中央硏究院 歷史語言硏究所, 원고의 일부 혹은 전체를 읽고 조언을 해주신 車柱環 교수님, 鄭仁在 교수님, 李楠永 교수님과 서울대 哲學科 대학원생들, 輔仁大 대학원의 尹任圭 신부님, 문장 을 고쳐주신 李海仁 수녀님과 교정을 보아주신 西江大 대학원의 吳智燮 씨께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한 가지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책에서는 中國傳統의 종교학적 해석이나 인류의 종교역사 안에서 儒敎가 지닌 위치에 대한 비교적 고찰은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본격적 인 종교학적 연구는 필자가 현재 계획하고 있는 〈中國宗敎史〉에서 다룰· 예정이다. 1990 년 II 월 1 일 西江大學校 연구실에서 紹軒金勝惠

原始儒敎

『論語』 • 『孟子』 • 『荀子 』 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

책 머리에 4

서론 原始儒敎의 定義, 史料의 비판 및 연구방법론 • 9

1 原始儒敎란 무엇인가? 9

2 史料에 대한 歷史批判 19

3 연구방법론 39

1장 儒敎 성립 이전 고대중국의 人間理解 • 43

1 甲骨文 속의 王:余一人 사상 43

2 『書經』 속의 王과 民 : 天命사상 51

3 『詩經』의 聖王사상과 福祿 57

4 『春秋左氏傳』의 禮 사상 70

2장 孔子의 人間論 : 修己安人하는 君子 • 79

1 孔子와 춘추시기 魯나라의 사회문화 83

2 『論語』에 제시된 人間像 91

3 修已安人의 인간론 104

3장 孔子의 道와 天命論 • 125

1 孔子의 道 127

2 運命으로서의 命 131

3 使命을 주는 주체로서의 天 134

4 鬼神과 孝와 敬 141

4장 孔子 人間論에 대한 孟子의 盡心的 해석 • 147

1 전국시대 전반기의 정치사회적 특성 152

2 墨家의 인간론 : 그 도전의 한계 155

3 孔子 인간론에 대한 孟子의 盡心的 해석 164

4 天 사상의 체계적 해석 182

5 孔子와 孟子의 인간론 비교 186

5장 孟子의 정치경제관과 聖人論 • 189

1 孟子의 정치론 193

2 孟子의 경제론 197

3 孟子의 聖人觀 203

4 孟子의 盡心的 해석이 지닌 특성 212

6장 孔子 人間論에 대한 荀子의 禮論的 해석 • 217

1 荀子의 시대적 특성 : 他學派와의 관계 안에서 222

2 荀子의 인간론 : 性僞之合 233

3 荀子의 修養論 246

4 荀子 禮論의 특성 261

7장 荀子의 正名論과 天人觀 • 273

1 사회적 正名論 : 荀子의 정치경제관 276

2 宇宙的 正名論 : 荀子의 종교관 288

결론 原始儒敎의 위치와 특성 • 307

1 「易傳」 : 『周易』의 儒家的 주석서 313

2 『禮記』 : 通論을 중심으로 320

3 결론 : 原始儒敎의 특성 328

참고문헌 335

찾아보기 341

부록 역사지도 1 春秋時代 (『論語』 관계 지도) 350

2 戰國時代 (『孟子』 • 『荀子』 관계 지도) 352

서론 原始信敎의 定義, 史料의 비판 및 연구방법론 l 原始信敎란 무엇인가? 〈原始儒敎 Pr imiti ve Co nf uc i an i sm 〉라는 용어는 서구적 현대학문의 영향을 받으면서 정착되고 있는 학술용어로서, 전통적으로는 先秦儒敎를 지칭하는 말이다. 우선 〈 1 儒敎〉라는 용어의 기원부터 살펴보자면, 〈 1 儒〉라는 글자는 甲骨文이나 周代金文에는 물론 詩와 書 에도 쓰이지 않고 있다. 金文이나 詩書에서는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둘을 師 혹은 保라고 불렀다(詩, 小祖 十月 之交 ; 書 顧命 등). 儒가 학문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가장 오래된 典籍은 『論語』인데, 여기서도 孔 F1 만을 지칭하는 명칭은 아니다. 〈선생님께 서 子夏에게 말씀하시기를, 더는 君子儒가 될 것이지 小人儒가 되지 말아 라’ 하시었다〉(「雍也」 13). 君子儒와 小人儒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가 가능한 데, 하나는 君子가 배워야 되는 고등학문으로서의 詩書禮樂을 배우고 巫史가 직업으로 배우는 喪儀禮 동에 만족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제자에게 경계하는 禮敎文化 전승자로서의 孔子의 사명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다 (淸代注 및 木村英一注). 또 한 가지는 군자가 儒가 되면 道를 밝히고 소인이 儒가 되면 그 이름을 내어 이익을 찾는다는 풀이로서, 이 말을 통해 孔子는 학문의 목표란 천부적으로 받은 도덕성을 키워서 인격의 완성자인 君子가

되어야 하는 것임을 가르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古 注 및 新注). 어떠한 해석을 택하든, 여기서 쓰인 低라는 글자가 朱子가 정의한 대로 학자를 총칭 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런데 儒가 孔門을 지칭하기 시작한 것은 儒家의 기록이 아닌 『墨子』에 서부터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홍미롭다. 1Lr’ 에 대립하여 일어난 墨家는 「非 儒篇」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儒家의 차등적인 禮의 실천, 수동적인 運命論 및 옛것을 따르는 보수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사실 儒란 〈柔弱하 다〉(說文)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易經』 의 需卦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강하게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기다린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방어술에 능했 던 武士 출신인 墨家의 입장에서 볼 때, 德治와 禮교육을 통한 敎 1 t를 말하 는 儒家둘의 가르침이 유약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墨子』 뿐만 아니라 『莊 子』 및 『韓非子』 등에도 儒라는 말이 孔門울 지칭하는 용어로 나오는 것을 보면, 儒란 본래 孔門을 비난하던 다른 학파들에 의하여 孔門에게 붙여전 명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I)

I) 輝直暮 「儒(/)意義」, 《藝文》 II~I • 7(1 9 21 ), I~12, I~14 참조.

儒라는 명칭이 儒家的 기록 안에서 孔 F1 을 지칭하는 용어로 처음 쓰여진 것은 『孟子』 「盡心篇」(下) 26 장에서인데, 여기서 역시 墨률과 楊朱의 설에 대비하여 儒라는 용어를 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荀子에 와서 비로소 儒라 는 글자가 쓰이는 예가 많아지는데, 荀子는 儒롤 俗儒와 雅儒, 小儒와 大儒 등으로 분류하여 先王과 선왕의 전승을 배우는 모든 이들을 그 안에 포함시 켰다. 특히 「儒效篇」에서 荀子는 孔子를 모범으로 제시하며 儒란 禮義를 융성하게 하여 정치 사회를 바르게 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함으로써, 사람의 스승이 되는 사람이라고 그 효능의 위대함을 강조하였다. 漢代 이후로 儒는 孔門의 명칭으로 확정되어 諸子들 중에서 孔子의 가르침을 전승하는 사람들 이러는 자각을 뚜렷이 드러내는 대명사가 되었다. 그 다음 〈敎〉라는 글자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겠다. 보통 儒敎,儒家, 儒學 이라는 세 가지 용어가 그 의미상의 구별이 없이 적당히 혼용되고 있지만 이 셋을 정확하게 정의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敎란 가르친다는· 의미로

『論語 』 의 〈有敎無갖R 〉(「衛飯公」 39) 에서 드러나듯이 先 王 과 孔 子 의 가르침 그 자체를 가리켰다. 『 孟 子』 에서는 敎를 더욱 분명히 정의하여 인륜을 가르 쳐서 四端울 확충하게 하는 것이라 말했고, 荀子는 예의로써 인간을 교화시 키는 것을 敎라고 하였다. 따라서 〈儒敎〉라는 용어를 정확히 풀이하자면, 孔子가 계승한 선왕들의 가르침, 다시 말해서 문화적 교육을 통해 德化를 실현하려는 도덕적 • 정치적 사상체계를 지칭한다고 하겠다. 敎를 宗敎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儒敎라는 용어를 기피하려는 경향은 19 세기말 이후로 일어 난 현상으로 敎의 본래 의미는 물론 宗敎의 개념을 좁게 파악한 데서 기인 한것이다. 이러한 儒敎 죽 孔子의 가르침을 전승시키는 학파를 가리킬 때에 〈儒 家〉라고 불렀고, 보통 墨家나 道家 등에 대립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儒學〉이란 儒敎를 받아들여 배운다는 뜻으로, 『論語』에서 〈學〉은 〈敎〉와 대비되어 사용된다. 베푸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敎이고, 배우는 사람의 입장 에서는 學인 것이다. 따라서 儒敎란 孔子를 통해 전수된 先王둘의 가르침인 데 비하여, 儒學이란 이 가르침을 받아 배우고 닦는 후학들의 노력을 뜻한 다. 아 책에서는 孔子로부터 이어지는 가르침의 체계 및 그 해석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儒敎〉라는 명칭을 택한 것이다. 그 다음, 〈原始〉라는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儒敎가 지니고 있었던 것과 유사하게 사상적으로 주도적 위치를 각기의 문화권에서 보유하고 있던 그리스도교 및 불교와 비교하여 고찰해 볼 필요 가 있다. 다시 말해서, 〈原始儒敎〉라는 용어와 대등한 말로 〈原始佛敎〉와 〈原始그리스도교〉라는 용어가 있는데, 그 原始의 의미가 原始的이어서 미개 발되었다는 부정적인 뜻을 가전 것이 아니라, 始原대 1 인 규범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곧 여기서 原始라는 말은 인류의 역사 안에서 손꼽을 만큼 거대한 사상적 조류의 시원으로서 새로운 사상의 태동기 및 그 태동이 체계화되어 확립되는 시기를 일컫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원시불교라고 하면 불교전통의 창시자인 釋迪牟尼(기원전 560 ~480 년경)의 成佛 이후 시작된 초기 僧伽 San g ha 가, 그의 入滅 후 대략 아쇼카왕에 이르기까지 수차의 결집회의를 통하여 經典의 핵을 이루는 經藏

Su tt a pit aka 과 律藏 V in a y a pit aka 을 형 성 하는 시 기 로, 기 원 전 6 세 기 에 서 3 세 기 까지를 지칭한다고 하겠다전 論 藏 abh i dhamma pit aka 은 그후 약 2 세기 동안 계속 저술되어, 기원전 1 세기경에야 三藏 Tr ipit aka 이 완성되었다 . 여러가지 異論이 있을 수는 있으나 釋迪牟尼와 초기 승가의 사상과 모습을 알기 위 해 서는 원시경전으로 가장 찰 보존된 팔리 Pal i語 경전을 사료로 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원시불교 전통은 이 역사적 사료가 확정되는 시기로 보아야 할것이다.

2) 제 1 차 結集은 석가모니가 입적한 해인 기원전 480 년경 王舍城 Ra j a grih a 에 모인 阿羅 漢 500 명이, 그들이 들어 기억한 말씀과 계율을 함께 낭송 Samgiti함으로써 이루어졌 다. 제 2 차 결집은 기원전 380 년 昆舍離 V aisali에서 모여서 이루어지는데, 이때 上座部 와 大衆部의 분열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된다. 제 3 차 결집은 기원전 225 년 Asoka 왕의 치하 때 파타리자城 Pa talip u tta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결집은 Pa li 경전에만 언급되어 있다. 처음 몇 세기간은 인도 고유의 전통에 따라 문자로 기록되는 것이 아니고 기억 에 의한 전승이었으며, 기원전 1 세기말부터 Ce y lon 에서 문자화되기 시작하였으므로 대승경전 문제를 논의로 하더라도 불교경전의 확립시기는 확정하기가 어려운 것이 다 .

原始그리스도교란 예수그리스도(기원전 6(?)~30 년경)의 설교와 행적, 죽음 과 부활에서 시작된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가르친 福音宣布 Ker yg ma 와 敎理 敎授 di dach 여! 핵으로 하여 , 사도 바울로의 편지들이 집 필 • 유통되고 共觀福 音書들이 저술되며 이어서 요한계 저서 및 공동서간들이 쓰여져서 신약성서 가 완성되는 시기, 곧 기원후 30 년경부터 100 년경까지를 지칭한다전 다시 말해서, 신약성서는 原始그리스도교를 연구하는 일차적 사료로서, 초기 그리 스도교의 원초적 체험은 전승이라는 매개체를 거쳐 기록된 증언을 통해서만 알려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經典 Canon4) 의 형성이란 한 공동체의 성격과

3) 고린도전서 15 장 3~5 철에는 바울로가 초대교회로부터 전해받은 신앙고백문이 들어있 으며, 山上說敎는 초대교회의 신자들을 위한 교리교수를 전하는 것이다 . 바울로 서간 은 51~63 년, 공관복 :은 65~80 년, 요한계 저서와 공동서간들은 90~100 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본다. 4) 漢字로 經이란, 피륙의 근간을 이루는 상하의 세로로 놓인 실로서 하늘과 땅을 묶는 일정불변의 도리, 곧 常法을 상칭하여 사물의 典撮가 되는 책을 일컫는다. 傳이나 紀는 經을 해석하는 것이어서 전승으로서 이차적인 중요성을 지니지만, 계속되는 세대

에 그 경전이 어떤 의미를 지녔고 어떻게 해석되었는가를 알려주기 때문에 경전이 지닌 역사를 알게 해준다. 희랍어의 Kanon 은 측량에 쓰던 대나무 reed 를 지칭하여 역시 규범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새롭게 태동한 사상의 확립을 시사하는 사건으로서, 經典化되고 기록된 사료 둘을 분석함으로써만이 그 始原 01 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儒敎전통에서 原始儒敎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잡을 것이며, 儒敎經 典 안에서 그 시기의 역사적 사료가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확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유교경전 안에 어떤 책이 포함되느냐 하는 것도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 귀에 가장 익숙한 〈四書五經〉이라는 개념 은 宋代 新儒學者들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유교전통에서 가장 늦게 확립 된 경전의 개념이다. 그보다 조금 앞서서 宋 초기에 편찬된 『十三經注疏』에 는 『周易』을 위시한 『詩經』과 『書經』의 三經, 『周禮』,『儀禮』, 『禮記』의 三視 『左傳』, 『公羊傳』, 『穀梁傳』의 三傳 및 『論語』, 『孟子』, 『孝經』, 『 爾 雅』를 포함하고 있다 •5) 〈四書五經〉을 朱子 (1130~1200) 의 『四書集注』가 쓰여 짐으로써 新注의 전동에서 확립한 四書를 중심으로 한 유교경전의 개념이라 고 한다면 ,6) 〈九經〉이나 〈十三經〉은 漢代 이후의 訓話學的인 古注전통에서 이어져 내려온 개념이다. 더구나 이 두 가지 개념이 모두 宋代에 와서 완성 된 것이므로, 천여 년이 앞선 儒敎 초기의 모습을 파악하기 위하여 四書五經 이나 十三經울 사료비판적 분석이 없이 일률적으로 모두 역사적인 사료로 간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유교경전의 형성사를 처음부터 고찰해야 하며, 儒敎의 始原的 성격을 알려주는 사료들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5) 唐石經 (9 세기초)에는 『孟子』를 제의한 I lk;꾼이 새겨져 있는데, 緯急로부터 중시된 『孟子』가 宋代에 들어와 經으로 취급되어 [~이 완성되었다. 古注를 총망라한 『十三 經注疏선다가 淸代의 阮元이 고증학적 校勘을 보충하여 4[~,gJ 『十三經校勘記』(南昌 1815) 를 출판하였는데, 유교경전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사료이다. 6) 程子와 朱子가 『論語』, 『孟子』와 더불어 『禮記』의 한 장들로서 漢유교의 이상적 발전 울 대표하는 『大學』과 『中庸』을 독립된 책으로 하여 四書라는 명칭을 만들고 五經보 다 중시하는 전통을 시작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儒家의 창시자인 孔子(기원전 551 I2~479 년 )7) 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전기를 저술한 司馬遷(기원전 145~86) 은 그의 『 史記』 「孔子世家」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孔子의 시기에 이르러 周나라 왕실의 힘이 쇠약하여지자, 禮와 음악이 쇠퇴해 지고 詩와 書가 이지러졌다. 그는 夏, 殷, 周 三代의 禮를 추구하여 고찰하였고 書의 차례를 정하였다……따라서 『書 傳 』 과 r 禮記』는 孔子에게서 나온 것아다 .8) 司馬遷은, 禮와 書는 물론 3 천여 편의 詩를 305 편으로 편집한 것도 孔子였 으며, 만년에 易울 좋아하여 易의 주석서를 썼고 그의 道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春秋』를 저술하였다고 하여젼 孔子를 五經의 저자 또는 편찬자로 소개하고 있다. 司馬遷이 『 史記』를 저술한 기원전 100 년경은 孔子의 사후 400 년이 지난 시기이며, 儒敎가 漢나라의 국가적 이념으로 그 위치를 굳힌 다음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감안해야 한다. 魯의 大夫직을 2, 3 년간 지냈을 뿐 ,10) 평생 士의 신분을 지니고 있던(「子후」 12) 孔子를, 司馬遷이 세력있는 諸侯가문을 다루는 世家 안에 넣었다는 사실부터가 前漢 후기라는 시대성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11) 7) 『春秋公羊傳』과 『穀梁傳』에 의하면, 孔子의 출생이 魯나라 襄公 21 년으로 되어 있고, 『史記』에 의하면 襄公 22 년으로 되어 있다. 사망 연도는 哀公 l 碑죠]라는 데 일치하고 있다. 8) 〈孔子之時, 周室微而禮樂 M, 詩書缺 追遊三代之禮, 序警傳…… 故활傳禮記自孔氏〉 (『史記』 3 권, 洪氏出版社, 1935~1936 면). 9) 같은 책, 1937, 1943 면 10) 孔子가 가졌던 제일 높은 職位는 魯나라 定公 10 년(기원전 500 년), 奭谷의 會盟에 수행하여 공적을 이룬 후에 獄談과 司法을 맡는 大夫인 司冠 벼슬에 오른 것이었는 데, 그것도 上大夫가 아닌 下大夫였을 것으로 본다(「先進」 8, 「憲 F버 」 21 참조). 11) 『史記』는 天子에 오른 왕실을 다루는 本記와 世家 三十권과 列傳 七十권으로 되어 있는데,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孔子는 마땅히 列傳에 포함되어야 했을 것이 다.

또한 보통 五經이라고 알려진 『 周易』, 『詩經 』 , 『 書 經』, 『春 秋 』 , 『 禮記 』 가 과연 司馬遷이 말한 대로 孔子에 의하여 이루어전 것인가 하는 문제는 儒敎 의 經學史에서 의혹을 일으켜 왔는데, 특히 淸代의 고증학적 연구에 의 ;,,-1여 비판을 받았다 .12) 20 세기에 들어와서 현대적 역사비판적 연구방법에 따라 이 문제를 새롭게 취급한 武內義雄과 크릴 H.G . Creel 등은 『 論語』에서 孔 子 가 직접 언급한 經典은 詩와 書 뿐이었음을 밝혔다 •13) 그러면 儒敎전통에서 최초로 형성된 經典개념인 〈五經〉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확립되었는가를­ 고찰하도록 하겠다.

12) 淸末今文學의 입장에서 쓰여전 皮錫瑞(1 850~1908) 의 『中國經學史』(李鴻鎭 역, 동화 출판공사, 1984) 는 淸 代까지의 經學的 연구를 서술하고 있으므로 참조 . 그러나 그는 孔子률 經의 창시자로 보기 때문에 司馬遷의 입장을 근본적으로 고수하고 있다고 하겠다. 13) 『武內義雄全集』 8 권(角川書店, 1978), 363 면과 Herrlee G. Creel, The Orig ins of the Sta t e c raft of Chin a , Un i. of Ch ica go Press, 1970, Ap pe nd ix A : The Sources , 444~486 면 참조 . 물론 여기서 말하는 書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古今文 전체의 尙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周初에 형성된 12 편의 교훈적인 칙서만을 지칭한다.

『論語 』 와 『 孟子』에는 아직 經이라는 확실한 개념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論語 』 와 『 孟子』에서도 詩와 書 , 또는 속담 등의 인용문들이 많이 언급되기 는 하지만 儒敎의 經典이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정의를 내려서 명시화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五經이 언급된 것은 유교전통의 일차적 체계 화가 이루어진 荀子에서이다. 荀子는 「勸學 篇 」에서, 배움에는 그 과정 (數) 과 목적(義)이 있다고 구별하면서 君子가 되기 위하여 배워야 될 과정으로 서 書 , 詩,樂, 春秋, 禮를 둘고 있다. 여기서 樂과 禮는 그 당시까지 아직 문서화되지 않은 문화적 실천과 규범을 지칭한 것이었을 것이며 ,14) 무엇보다 도 놀라운 사실은 易이 빠져있다는 점이다. 『十三經注疏』에서는 처음자리를 차지할 만큼 중시되는 『周易 』 이, 『論語』에는 단지 한 번(「述而」 17), 그것도

14) 『樂파이 과연 하나의 경전으로 기록되었었는가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서 r 樂經』 은 보존되고 있지 않고, 禮 역시 우리에게 전해지는 三禮의 편찬은 漢代에 이르러서 완성된 것이다 .

문헌학적으로 볼 때 전승상의 문제를 지니고 있어서 그 역사성이 의심되는 상태에서 언급될 뿐이고 ,15) 『孟子』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으며, 『荀 子』에서도 雜篇인 「大略篇」에 두 번 나오는 것을 제의하면 「非相篇」에 단 한 번 부패한 선비를 묘사하기 위하여 易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을 뿐이 다.

15) r 十三糸說퍼流』에는 〈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로 되어 있고, 朱子는 r 論語 集注』에서 〈假我數年, 卒以學易, 可以無大過矣〉로 수정하여 읽고 있다. 劉寶楠은 r 論 語正義』에서 〈釋文云 學易如字, 魯讀易爲亦, 今從古, 此出鄭注〉라고 고증하였다. 곧 『魯論語』에는 易이 亦으로 되어 있고, 亦可以로서 다음 句에 연결된다는 것이다. 『論』안에 亦可以의 문체가 5 번이나 더 나오고 있고 (6 편 27 장, 13 편 II 장 • 20 장 • 29 장, 14 편 12 장), 易이라는 글자가 『論語』에서 고유명사로 쓰이는 예가 전혀 없는 접 등으로 미루어보아 여기의 易을 『周易』으로 보는 것은 후대에 강요된 해석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실은 『周易』이 초기 유교전통에서는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았으 며, 분명히 經典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荀子』에서 언급된 五經과 더불어 『周易』이 儒敎의 경전으로 처음 소개되는 것은 『莊 子』 33 장, 「天下篇」에서이다. 鄒魯의 학자들, 곧 儒家는 〈詩로써 뜻을 말하 고, 書로써 일을 말하며, 禮로써 행동을 밀하고, 樂으로써 조화를 말하며, 易으로써 陰關을 말하고, 春秋로써 名分울 말한다〉 16) 고 하였다. 그런데 『荀 子』 「勸學篇」에서는 詩는 감정의 알맞은 표현을, 書는 政事의 기강을, 禮는 도덕적인 분수의 법을, 樂은 調禾 D 를 이루는 것을, 春秋는 시세의 미묘함을 m 가르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두 가지를 바교해 보면, 易울 제의한 다론 五經에 대한 설명에서는 별차이가 없으나, 『莊子』 「天下篇」에서 陰陽을 말하는 易이 儒敎經典으로 새로이 소개된 것을 알 수 있다. 『莊子』 「天下 篇丘본 周代 말기까지의 모든 학파들을 나열한 독특한 문장으로, 여기에 언급 된 儒家에 대한 이러한 논평은 戰國시대 말엽부터 陰陽論이 儒敎 안에 정착

16) 〈詩以道志, 書以道事, 禮以道行, 樂以道和, 易以道陰陽, 春秋以道名分〉(『莊子』 33, 「天下篇」). 17) 〈書者, 政事之紀也. 詩者, 中聲之所止也 禮者, 法之大分, 婁類之綱紀也…… 樂之中和 也…… 春秋之微也〉(『荀子』 「勸學篇」).

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陰陽論과 『周易』의 밀접한 관계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후 漢代에 들어와서 『禮記』 「經解篇」, 『淮南子』 「泰族訓」, 『春秋繁露』 , 『史記』, 『前漢書』 등에 『周易』이 계속 언급되고 있어서, 六糸뿐으로서 또는 『樂經』을 대신하여 五經으로서의 위치를 굳힌 것을 알 수 있다. 戰國末에 성립된 〈五經〉이라는 개념은 董仲舒와 公孫弘의 건의로 漢武帝 (기원전 141~87) 때 太學이 창설되고 五經博士借 l] 가 공식적으로 채택되면서 제도화되었고, 後漢의 許愼이 지금은 전하지 않는 『五經異義』 를 씀으로써 정착되었다• 그후 五經의 개념은 큰 변화없이 唐代에까지 계속되었다. 六朝 시대는 佛敎와 道敎의 전성시기로서, 儒敎는 중국문화를 전달하는 교육의 매개체 내지 정치사회의 제도적 틀로서의 역할을 하였을 뿐, 사상적으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唐代는 三敎의 공존을 원칙으로 하였 으나 儒學의 정리작업이 성하여, 太宗 때에는 孔輯達과 顔師古의 『五經 正 義』가 나왔다. 이것은 五經에 대한 여러 주석들 중에서 하나를 택하고 거기 에다 疏를 부천 것으로 『十三經注疏』에 그대로 수용되었다. 또한 唐代에 〈九經〉이라는 개념이 생겨서 『易經』 , 『書經』, 『詩經』의 三經과 더불어 『 周 禮』, 『儀禮』, 『小戴禮記』의 三禮와 『左氏傳』, 『公羊傳』, 『穀梁傳』의 三傳울 일컬었다. 여기에 『論語』,『孝經』,『孟子』, 『爾雅』가 첨가되어 十三經이 이루 어진 것이 宋 초였다는 것은 이미 언급하였다. 九經 또는 十三經이란 개념은 經과 傳의 구별을 없이 하였다는 데 특색이 있다. 앞에서도 지적하였듯이 〈四書〉라는 개념이 형성된 것은 송대의 주자학적 해석과 확립의 결과였다• 四書 중에서도 『大學』(『禮記』 42 편)은 학문의 목적 과 그 과정을 설명하므로 가장 먼저 배위야 할 成人의 교과과목이었고, 『中 庸』(『禮記』 31 편)은 性과 道를 밝히는 철학적 논술의 바탕으로 중시되었다. 漢代 이후로 경전을 해석하고 보충하는 記 또는 傳으로서의 성격을 지녔던 『論語』는 宋代에 와서 儒學의 정수로 인식되어 孔子는 최고 스승으로서의 위치를 확인받게 되었다. 또한 계속 諸子 류에 속했던 『孟子」가 그 위치가 격상되어 四書 속에 들어감으로써 性善說적인 孟子의 해석이 儒家사상의 정통으로 확립되었고, 荀子의 해석은 이단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이러한 孟子 학설에의 정통성 부여 및 荀子의 이단화는 송대에 일어난

儒學史 속의 한 가지 사건으로서 고찰될 문제이지만, 이 후대의 평가가 原始 儒敎 연구에 그대로 소급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性理學的 전통 에서 형성된 孟子의 性善 說과 荀子의 性惡說에 대한 평가는 宋學이라는 유교발전사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으로 연구되어야 하지만, 그 평가를 그 이전의 儒敎연구에까지 강요해서는 정확한 역사적 파악을 할 수 없게 된다 는말이다 . 南宋 이후로 四 書 를 五 經 보다 앞세우는 〈四 書 五 經 〉이라는 새로운 儒敎 經 典의 개념이 확립되자 〈十三 經 〉이란 말과 訓話學的 주석서둘이 거의 통용되 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 明 淸 시기에는 科 擧 의 試 題가 四 書 에서 나왔기 때문 에 四 書 가 근세 6, 7 백년간 서당의 교재로서 일반교양의 기초 및 정신적 기틀을 이루었다는 사실 등을 긴 역사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는 객관적 시각이 필요하다. 따라서 儒 敎의 經典울 연구할 때, 『 四 書集注 』나 『 周易 本 義 』 뿐만 아니라 『十三 經 注疏』와 淸 代의 考證學的주석들도 함께 고찰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四 書 를 하나의 통일체로 보려는 선입관을 떨쳐버리고, 각기의 텍스트를 역사적 발전 속에서 차지했던 본 위치로 회복시킬 수 있어 야 한다. 그렇게 한 후에만 原始儒敎는 물론, 宋代 이전의 유학의 본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原始儒敎라는 범위 안에는 秦漢 이전에 성립된 것이 확실한 儒 敎的 사료 만을 포함시켜야 하는데,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論 語 』 , 『孟子』' 『荀子』뿐이다. 이 세 가지 기초사료에 대한 문헌비판의 결과를- 자세히 소개 하겠지만, 우선 말해둘 것은 儒敎전통의 원천인 孔子의 사상을 전하는· 유일 한 역사적 사료는 『 論 語』뿐이며, 諸子百家의 난립 속에서 孔子의 사상을 옹호하고 체계화시킨 戰國時代의 대표적 儒學者인 孟子와 荀子의 사상을 전하는 유일한 사료는 이들의 이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孟子』와 『荀子』 뿐이라는 것이다 .18) 『 論語』 자체의 형성사를 살펴보더라도, 孔子의 言行錄이 孟子와 荀子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착되고 편집되어 체계적인 모습을 18) 이 두 학자의 중요성은 그들의 이름을 지닌 저서가 보존되었다는 사실에서부터 확인되는 것이며, 司馬遷의 『史記』 「孟子 • 荀卿列傳」에서 재확인된다 .

갖추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原始儒敎〉란 춘추시기말 孔 子 에서부터 전국시기말 荀 子 에 이르는, 기원전 떼기말에서 3 세기초까지를 포괄하는 200 여 년간의 始原的 확립기의 儒敎를 지칭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五經 중에서도 孔子 이전의 사료로 판명 된 『 詩經』과 『書經』의 한 부분을 孔子사상의 源流룰 살피 기 위하여 고찰하 겠고, 『春秋左氏傳』과 『 國語』는 孔子의 시대와 병행을 이루는 측면적 사료 로서 사용하겠으며 ,19) 『 周易』과 『禮記 』 ( 『 大學』과 따蒲 』 을 포함)는 原始儒敎 자체의 고찰에서는 제의하는 20) 대신 결론부분에서 1L • 孟 • 荀의 사상을 종합하여 儒敎의 제 1 시기를 완성한 작품으로 살피고자 한다.

19) 『史記』는 물론, 『孟子』 「胎文公篇」에도 『春秋』는 孔子가 저술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r 祠파 자체는 魯나라 史官의 단편적 인 역사 사실의 기록에 불과하고, 『左氏傳』 은 晋을 중십으로 한 춘추시대 복부 제후국들의 역사 기록이 후에 주석서로 배열된 것으로본다. 20) 필자의 이러한 입장은 역사비판적 연구를 중시하는 현대 학자들 대부분의 입장이라 고 보는데, 대표적 예를 들자면 牟宗三은 유학의 1 차적 발전시기를 분류하여 제 1 단계 의 孔 • 孟 • 荀, 제 2 단계의 「中庸」 • 「易緊辭」 • 「樂記」 • 「大學J, 제 3 단계의 董仲舒로 나누고 이 세 단계를 합하여 제 1 시기라고 부른다. 그는 제 E1 기의 발전은 宋代의 朱子學에서 시작되어 明의 王學으로 꽃핀 것으로 보며, 오늘의 시기를 유학의 제 3 시기가 시작될 때로 본다(『道德的 理想主義』, 學生害局, 1978, I~2 면) . 단, 그의 유학 사의 시대적 구분이 필자의 구분과 일치하지는 않는다(이 책 결론 부분 참조) .

2 史k 에 대한 歷史批判 『랴노력 iiffll na 』 孔子의 사상을 충실하게 전하는 역사적 자료를 『 論語』에 국한시킨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史記』의 「孔子世家」가 孔子에 대한 최초의

전기로 중요한 자료이기는 하지만 孔 子 사후 4, 5 세기나 지난 뒤에 기록된 것으로, 그 속에는 통속적으로 받아들여 관습화된 유교체제를 전하는 게 많으므로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易 傳 』 이나 『禮記』 에 나오는 〈孔 子 B 〉도 漢代에 와서 편찬된 것이기 때문에 그 역사성에 문제점이 있다. 『 孔 子家語 』 라고 알려진 서적은 魏의 王 肅 ( 195~256) 이 後 漢 때의 유학자 鄭玄 (127~200) 의 해석에 반대하기 위하여 孔安國의 이름을 빌어 옛 고전에서 뽑아 편찬한 僞作임이 판명되었다. 『 孟子 』 나 『 荀 子』 에 나오는 〈孔 子 曰〉까지 도 그대로 孔子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고, 오히려 그들 각자가 시도 한 해석과정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물론 『論語』 자체도 孔子가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論語』 에 보존된 그의 言行의 기록들이 얼마나 충실하게 그의 사상을 전하고 있는 것인가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孔子의 사상 울 논하기에 앞서, 『論 語 』 의 형성에 대하여 언급한 고대의 문헌들은 물론, 역사비판적 분석을 시도한 현대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고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2 1) 20 세기 학자들의 결론을 먼저 종합해 본다면, 『論語』 의 역사성에 부분적으로는 문제가 있으나 대체적으로 보아 『論語』 는 몇 대에 걸친 제자 둘의 공동협력으로 편찬되었고 孔子의 사상을 충실히 전하는· 유일한 사료라 는 점에 거의 일치하고 있다.

21) 텍스트를 연구하는 현대적 방법론을 총괄하여 〈역사비판적 his tor i ca l c riti cal 〉인 연구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안에는 source c riti c is m( 저자, 연대, 기원이 되는 요소 등의 분석 ), form c riticis m( 사회적 배경과 연결시켜 특성을 고찰), tra d ition cri ti- cism (텍스트를 이루기까지의 전승의 발전단계 연구), redacti on c riti c is m( 여러 요소 둘이 수집되고 편찬된 편집사적 의도 고찰) 등이 있으나, 서로 연결되어 있고 텍스트 의 성격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 漢書 』 「 藝 文志」는 孔子 사후에 그의 門人들이 그의 말씀을 모아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책의 이름을 『論 語』라고 했다는 것과, 漢 나라 초기에는 3 가지 종류의 『論語』 異本이 있었다고 전한다. 『魯 論語』 20 편, 『商 ' 鮮語 』 22 편, 『 古論語』 21 편이 그것이다 .22 ) 다른 두 本이 당시에 사용되던 문자형태인

22) r 魯顯』는 篇名이나 篇次가 현존의 『論語』와 갇았고, 『齊論語』는 대'민 3 과 「知道」

의 2 편이 『魯論語』보다 더 많았다(『漢書藝文志』, 洪氏出版社, 1716 면). 『古論語』가 21 편이었던 이유는 『魯論語』의 마지막 편이 둘로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今文으로 된 데 비해 『 古論語 』 는 斜針文字인 古文으로 된 것으로 孔家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篇次나 글자에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전승상 갱}論 語 』 와 내용이 같은 것이었을 것으로 본다. 곧 孔子의 사후 그의 제지들의 활동 중심지였던 魯나라와 西나라의 전승이, 『 魯論語 』 와 『 晋論語 로 라는 두 개의 『 論語』 異本울 전했다는 것은 王充(기원후 27~100 년경 )의 這羽恥 「正說 篇」의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 論語』에 대한 가장 오래된 주석서인 何姜의 「論語集解敍」에 의하면, 前漢 말엽에 安昌侯 張禹(기원전 1 세기)가 『魯論語 』 에 기초를 두며 너 齊論 語』의 좋은 점을 취하여 새로운 편찬을 하였는데 이것울 『 張侯論 』 이라고 불렀고 세상에 널리 통용되었다고 한다. 그후 『張侯論 』 을 기초로 하여 後漢 의 鄭玄 (127~200) 이 『 魯論語』의 篇章울 받아들이며, 『 費論語』와 던겁鮮語표를 다시 비교 고찰하여, 三論울 절충 교정하고 注롤 달았다. 이 텍스트를 기초 로 해서 漢과 魏의 주석들을 수집하여 『論語集解 』 (248 년)가 이루어진 것이 다오 물론 그후의 모든 주석들은 『 論語集解』의 텍스트를 사용해 왔다. 원래 의 異本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그 차이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漢代의 교정작업이 받아들여전 이후로 텍스트의 전승 속에는 커다란 변화가 없었던 것 같다. 기원후 175 년에 經典울 정착시키기 위하여 돌에다 새긴 嘉平石經(일명 漢石經) 『論語 』 의 남아있는 부분을 오늘날의 텍스트와 비교해보면, 의미에 변화를 줄 만큼의 차이가 없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24)

23) 「十三經注疏」 8 권(藝文tfJ書館印行), 『論語』, 4 면 24) 그 이후로 여러 번 돌에 경전을 새기는 작업이 중국에서 이루어졌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唐나라 文宗 때의 開成石經이다. 古寫本둘을 비교연구한 것으로는 隋唐간 陸德 明의 『經典釋文』이 가장 유명하다. 石經과 사본들을 비교연구한 것으로는 武內義雄, 『論語(l)硏究』(岩波警店, 1939) 참조.

『論語』 20 편은 전통적으로 上下로 10 편씩 구분되어 왔는데, 특히 淸代에는

뒤의 10 편이 시기적으로 늦게 편찬되었으며 역사적으로 의심스러운 부분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2S) 20 세기에 들어와서 『 論語』 에 대한 문학비판적 분석을 시도한 스칸디나비아의 언어학자 버나드 칼그렌 Bernard Karl g ren 은 『 論語』의 문체가 『孟子』와 같은 문법적 체계를 지니고 있는데, 부수적인 차이를 보아는 것은 『論語 』 가 『 孟子』보다 오래된 기록이기 때문이 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미국의 중국학 학자 크릴H. G. Creel 은 내용상으로 天地, 陰陽, 五行 등 戰國時代에 이르러서 유행하는 사상이 『 說語』에 r전 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論語』가 그 이전의 사상을 전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 論語 』 에 나타나는 孔子의 모습은 후대의 전설에서처럼 초인적인 聖人이 아니고, 확신과 덕성을 지녔울 뿐만 아니라 의혹과 실패를 맛본 소박한 인간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중시하였다. 크릴은 『 論語』가 孔子에 대한 기억을 상당히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로, 후대의 유학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대목들(孔子의 衛南子와의 만남이라든가 孔子의 제자들간에 있었던 질시) 등이 『論語』 안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26)

25) 淸代의 崔述(1 740~1816) 은 「洙沼考信錄」과 「論語餘說」에서 특히 『論語』 後篇 안에 문체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의심스러운 부분들을 고증하였다(『崔東壁遺書』 四 • 六冊 참조, 武內義雄, 갇은 책, 201~2 면 ; 金學主, 『中國古代文學史』, 민음사, 1983, 149~ 150 면 참조). 26) H. G. Creel, Confu ci u s and the Chin e se Way, Ha rpe r Torchbooks, 1960, Ap pe nd ix 291~292 면.

2 떼기 중엽 『論語』에 대한 역사비판적 연구를 가장 철저하게 한 학자들 은 藤塚隨 津田左右吉, 武內義雄이었다. 藤塚隣은 그의 『論語總說』(1 949) 에 서 『論語』의 上下 10 편씩의 구분을 더욱 세분하여, 下 10 편을 다시 전후 5 편씩 둘로 분류하였다. 그는 16 편에서부터 20 편까지의 마지막 5 편이 특별히 후학의 사상을 많이 포함하고 있음을 밝혀서 明代의 羅唯義, 淸代의 崔述의 설을 발전시켰다. 대표적 예를 들자면 16 편의 益者三友와 損者三友 (4 장), 君子의 三戒 (7 장), 君子의 九思( 10 장), 17 편의 六言六薇 (7 장), 20 편의 五美四 惡 (2 장) 등은 반복적인 문체로 암기를 위한 문답식의 구조를 갖고 있어서,

뒤에 발전되는 유교의 교훈적 성격 을 드러내고 있다 . zn 18 편과 19 편은 주로 孔 子 의 제자들의 언행 을 보고하고 있어서 시대적으로 늦은 것이 확실하다. 마지막 편인 20 편은 堯 , 舜, 禹, 湯王 , 武王 울 통해 孔 子 에 이어지는 道 統 사 상을 확립하려는 의도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道統사상이 유교전통 안에서 대두되는 것은 『 孟 子』 에 의해서이며, 『 孟 子』 의 마지막 편인 「盡心 篇 」 끝부분 역시 『論語』 「 堯 日 篇 」과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27) 藤 Fujit suka Ch ikas hi , 『 顯困組!tJ, 弘文堂, 1949 ; 吉田賢抗 Yosh ida Kenko, 『 論語 』 , 新釋漢文大系 l( 明治 書 院, 1960), 2 면에 세 학자의 이론이 소개되어 있다 . Creel 역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

이와 같이 『論 語 』 의 마지막 5 편이 지닌 문체적, 내용적 이질성은 이 5 편이 다른 편들보다 후기에 편찬된 것이며, 그 안에 孔子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 후학의 기록둘을 상당히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해준다. 따라서 비록 藤塚隣가 주장한 것같이 『 論語』의 앞부분에 편찬된 것일수록 그 내용이 순수한 것이라고까지 볼 필요는 없을지라도, 『 論語 』 연구에서 주의할 점은 마지막 5 편 중에서 앞부분과 모순되는 기록이 나울 경우에 〈孔 子 日〉로 보고된 말씀이라도 孔子 자신의 사상을 전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諦語 』 의 역사성에 대하여 가장 회의적 입장을 표명한 학자는 津田左右吉 였다. 그는 그의 『論 語之孔子刃思想 』 (1946) 에서 『 論語 』 가 孔子의 언행에 기초를 둔 것으로서, 직제자들의 전승에 의하여 전하여졌고, 孔子의 가르침 울 보존하려는 편집자들의 의도에 따라 지금과 같이 편찬되었다는 것을 부인하였다. 그는 『 論語』에 기록된 孔子의 말씀들은 거의 다시 쓰여졌거나 孟子나 荀子를 비롯한 漢初까지의 儒家들의 필요에 따라 각색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 28 ) 따라서 그는 『 論語』의 개별적인 章을 중요시하면서,

28) 津田左右吉 Tsuda Sok ich i , 『論語&孔子(J)思想』, 岩波書店, 1946. 예를 들어 그는 詩, 書 , 天, 君主 등에 대한 말은 王道사상과 革命사상을 보급하려는 孟子 이후의 부가문이고, 禮와 樂 등에 대한 중시는 荀子 시대에 이루어전 것이라고 보았다.

그 안에서 孔 子 의 사상보다는 儒家 사상의 변화 를 -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 다. 전승을 매개로 하여 기록된 저서에 대한 이와 같은 회의는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聖 人의 말씀에 대하여 제자들이 지녔던 경의감 (「 季 氏」 8) 등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儒 家 라는 중국 최 초 의 학파가 형성되어 지속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어디서 나울 수 있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 다. 또한 孔 子 의 사상을 분석할 때 나오겠지만, 『 論語』 의 전문용어와 사상은 통일성과 유기성을 지니고 있어서 여러 사람의 사상을 시대적 필요에 따라 모아놓은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孔 子 의 직제자들이 보존한 전승에 기초를 두고 그 후학들이 편찬한 孔 子 의 언행록이, 완전히 변질되어 그 본래 의 사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추측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津田左右吉이 지적한 대로 초기 儒家 의 사상적 발전이 『論語』 안에 엿보인디는 사실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39 년 하나의 가설로 제시된 이래, 앞에 언급한 학자들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의 비평을 받았고 수정될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 전체적 골격에 있어 서 신빙성이 있으며 『論 語 』 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것은 武內 義 雄의 편집사 적 비판 reda cti onal cr iti c i sm 이다. 그는 後漢의 王充이 쓴 『論 衡 』 「正說 篇 」 에 기재되어 있는 漢武帝 때에 『 古論語 』 와 더불어 〈齊魯二, 河間九 篇 〉을 얻었다는 기록에 기초를 두고, 『論 語』를 크게 魯나라와 齊나라의 語錄둘 및 그 결합 과정에서 편찬된 것으로 풀이하였다. 우선 그는 『 論語』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은 2 편에서 8 편으로 이 부분을 〈河間七 篇 〉이라고 명명하였 는데, 이것은 『 論衡』에서 九라고 한 것은 七의 誤字라고 보기 때문이다 . 2 9) 이 〈河間七篇〉은 魯나라에 남아 왔던 제자들 사이에 보존된 孔子語錄으로 曾子와 子思와 孟子로 이어지는 전승이다. 이 7 편 중에서도 「爲政 篇 」, 「八僧 篇」,「里仁篇」이 중심을 이루고 「泰伯篇표본 주로 曾子의 말을 기록한 것이 29) 武內義雄, 『論語 0 硏究 』 , 岩波 書 店, 1939, 제 2 장 「論語 D 原典批判J, 72~108 면 참조. 木村英_는 河間九篇을 다른 지방에서 형성된 『論語』의 帝流의 하나였으리라고 본다 (r :J L 子&論語』, 倉文社, 1971, 191 면) .

며, 이 魯나라 어록에 9 편인 「子年篇」이 후에 첨가되었으리라고 보았다. 武內羲雄에 의하면, 『 論語』에서 그 다음으로 오래된 부분은 II 편에서 15 편인데, 商나라에서 활동하던 제자들 사이에 보존된 孔子語錄으로 子貢, 子夏子遊 子張의 전승이다. 여기에 孔子의 여러 제자들의 말을 주로 수집 한 「子張篇」과 「堯曰篇」의 前半音t가 첨가되어 『齊論語』 의 最古 형태를 이루 었다고 본다. 『魯論語』 와 『齊論語』 가 각기의 전승을 가지고 발전했으리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내용상으로 유사한 말씀들이 형태상의 차이만을 지닌 채 『論語』 안에 반복해서 나오고 있는 예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里 仁篇」 15 장에 孔子의 道는 〈忠怒〉일 뿐이라는 말을 전하는 제자는 曾子인 데 비하여, 「衛훑公篇」 24 장에 〈꾸g〉라는 평생 동안 실천할 만한 가르침을 받는 것은 子貢으로 되어 있다. 忠怨와 怒는 자신에게 충실한 것을 남에게 확대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사실상 같은 것으로, 전승의 경로에만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지分篇」 22 장에서는 孔子가 管仲은 그 그릇이 작았다고 낮게 평가하는 데 비하여 「憲問篇」 17 장에는 管仲이 天下룰 안정 시킨 공로를 孔子가 칭찬하는 말이 보존되어 있다. 管仲은 齊의 功臣이었으 므로 齊의 儒家들은 魯와는 다르게 그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전승을 전했 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부분들은 극히 적고, 대부분의 경우는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어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닌다. 『論語』의 편찬과정에서 셋째 부분을 이루는 것은 1 편과 10 편으로서, 武內 義雄은 『論 衡』의 〈齊魯二〉는 이 두 편을 지칭한 것이라고 하였다. 魯와 齊에서 활동하던 제자들이 두 가지 전승을 모으기로 타협을 보았을 때(아마 도 孟子가 齊에 머물 동안), 전체를 총괄하는 서론 부분으로 「學而篇표斗 「鄕 黨篇」이 편찬되었으리라는 것이다. 「學而篇」은 有子, 曾子 등 魯에 살던 제자들과 子貢 子夏 등 齊에 살던 제자들의 전승이 종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君子의 理想과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孔門의 대정신을 소개하는 『論語』 전체의 머리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鄕黨篇표는 다양한 환경 속에서 기억된 孔子의 행동만을 수집한, 『論語』 안에서도 특이한 부분으로 君子는 이와 같이 행동해야 된다는 규범을 제시하려는 의도를 지녔던 것

같다 .30) 더욱이 皇保 (488~545) 의 淡疏에 따르면, 『 古論語 』 에는 「鄕黨篇」이 「學而篇」 바로 다음인 두번째 위치에 놓여 있었다. 「學而」와 「鄕黨」 두 편이 나란히 『論語』 의 첫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이 두 편이 서론으로서 종합적인 성격을 지녔울 가능성이 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論衡』의 〈齊魯二〉가 반드시 이 두 편을 지칭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木村英一이 지적 한 바와 같이 王充 때에는 이미 그 原形이 상실된 齊魯二論을 지칭했을 확률기 더 높다 .3 1)

30) Hen ri Mas p ero 와 Arth u r Wale y는 「鄕黨篇食

木村英一는 그의 『孔子之論語』 (1971 년)와 『論語』 (1975 년)에서 위의 세 학자 들의 설을 비판 종합하려 하였다. 그는 魯의 어록이 가장 오래된 것이고, 그 후에 齊의 전승이 편찬되었으며, 이 둘의 교류와 융합을 통해 『論語』 가 이루어졌다는 데에는 武內義雄과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齊論語』가 독립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魯,鮮語』가 齊에 전래되어 보충된 것이라고 보는 점에서 의견을 달리한다. 또한 그는 『論語』의 총 498 장 중에서 대부분 은 孔子룰 〈子〉로 부르고 있고, 下論에 보이는 〈孔子〉로 부론 부분은 『論 語』 전체의 IO% 가 못되는 42 장뿐으로, 이것은 아마도 孔門밖 世間에 전해지 던 孔子의 말씀을, 기원전 때]기초에서 3 세기 중엽에 걸쳐서 후학들이 『論 語』를 편집 또는 재편집할 때 채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32)

32) 木村英一 譯沮 『論語』, 講談社, 1975, 536~539 면.

결국 『說語』의 최종 편집 연대는 戰國시기 말경으로, 마지막 5 편이 가장 늦다는 데에는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武內義雄은 자신이 보는 각도에서 각 편 안에 있는 章의 차례까지도 다시 배열하였는데, 이것은 객관

적 고증이 결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 論語 』 이해에도 별도움이 되지 않는 다. 그러나 편집사적인 비판에 따른 그의 전체적인 『 論語 』 텍스트의 분류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곧, 『論語』 에 보존된 孔子의 言行의 기록은 대부분 그의 직제자들에 의하여 전해진 것이며, 그것이 몇 차례에 걸친 편찬작업을 통해 오늘과 같은 구조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설 hyp o t hes i s 이기 때문에 계속 수정될 수 있는 것이지 만, 『論語』를 학문적으로 연구할 때에 도의시할 수 없는 업적이며 실제로 『論語』 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구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상반되는 내용을 지닌 덱스트들을 비교분석하는 등 필요한 경우에 그의 가설을 인용할 것이다. 『 孟子』 『論語』의 형성사만큼 복잡하지는 않지만, 『孟子』 7 편 역시 전통적으로 믿어지던 대로 孟子가 직접 저술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최근 학계의 정설이 다. 『史記』의 「孟子 • 荀卿傳표t 쓴 司馬遷, 後漢 때 최초의 『孟子注』를 쓴 趙岐 ,33) 『孟子集注』를 쓴 朱子는 모두 『孟子』는 직접 孟子에 의하여 쓰여전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孟子』의 親著說은 吳의 姚信, 唐의 韓急 등에 의해 간혹 도전을 받기는 했으나 淸代에 이르기까지 대체적으로 받아 들여졌다. 청대에 들어와 고증학적 학풍이 일어나면서, 崔述은 孟子와 담화 를 나누는 諸侯들이 사후에 지어지는 盆號로 불리고 있디는· 사실과 孟子의 제자둘에게까지도 公都子, 樂正子와 같이 子를 붙여 존칭이 쓰여진다는 접 등을 들어서 『孟子』는 孟子의 親著일 수 없디는- 것을 밝힌 바 있다.

33) 『漢書藝文志』에는 內篇 7 편, 外篇 4 편(性善混 文說 孝經, 爲政)으로 『孟子』 II 편이 라고 되어 있다. 趙岐의 序를 보면 外篇은 그 사상이 천박하고 잡다하여 孟子의 저술 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제의시켰다고 밝히고 있다 . 그는 7 편을 上下로 나누어 지금과 같은 14 편으로 분류하였는데, 趙岐의 孟子注는 孟子 연구에 가장 중요한 주석 서 °l 다.

『孟子』에 대한 위의 고증학적 비판을 20 세기에 들어와서 역사비판적 연구

로 더욱 발전시킨 사람들은 武內義雄의 제자들이었다. 우선 小林勝人은 『 孟 子 』의 문체를 분석하여 그 안에 3 가지 종류의 문답형식이 있음을 지적하였 다언 A 형은 〈王問曰……孟子對曰〉의 형식으로 「公孫丑篇J, 「梁惡王篇」 10~II 장 ,r~ 文公篇」 등에서 쓰이는데, 그는 이 문체가 齊나라에서 孟子의 제자가 되어 서기의 역할을 맡고 있던 公孫丑의 문장이라고 본다. B 형은 〈 王 曰……孟子對 El 〉의 형식으로 「梁惠王篇」 l~6 장 등에 나오고 있기 때문 에 梁惠王型의 문장이라고 한다. C 형은 〈王曰……, El·· .. ··〉의 형식으로 「離婁篇」과 「萬章篇」에 주로 쓰이는데, 孟子의 高弟子였던 萬 章 의 문장이라 고 본다. 이렇게 여러 가지 문체가 孟子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 孟 子 』 가 孟子 자신에 의하여 저술된 것이 아니라, 公孫丑, 萬章 등 그의 제자 들에 의해 기록된 手記를 모아서, 후학들이 편집하였으리라는 가능성을 시사 하는것이다.

34) r 孟子』, 小林勝人譯注 Kobaya shi Katz u ndo, 岩波耆店, 1968, 471~484 면 참조.

金谷治 역시 『 孟子』의 문체가 대부분의 경우 『論語 』 에 비해 훨씬 긴 문답 체로 되어 있는데, 「離婁篇」과 뎀춥心篇」은 『 論語』와 비슷하게 〈孟子曰〉로 시작되는 단편적인 언행록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孟子 』 가 여러 사람의 記述이라는 것은 분명하다고 결론내렸다. 또한 그는 『孟子 』 안에서 孟子사상 의 발전적 단계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梁惠王篇」은 孟子 의 정치유세 15 년간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독립적인 단편으로서, 「公孫丑」나 「藤文公」 등 다른 편에 나오는 사료들을 발췌하여 정치이론가로서의 孟子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편집자의 의도로 편찬된 것이다후 孟子의 15 년간의 여정

35) 金谷治 Kanaya Osamu , 『孟子』내의 부록 「孟子七篇 1:?(: -r」 (岩波新書, 598, 19 96), 169~183 면 참조. 「梁惠王」 l~5 장 : 惠王과의 알현 문답 6 장 : 梁의 襄王에 실망하여 떠남. 7 장~下 10 장:齊로 가서 宣王과 만남 . 下 11 장:齊가 燕울 치자 떠남. 下 12 장:鄒에 머뭄 下 13 장 ~15 장:膜에 머뭄 . 下 16 장 : 魯에서 道의 成敗가 하늘에 달려 있음을 말합

중에서도 특히 당시대 학술의 중심지였던 齊의 稷下에서 보낸 7 년간은 孟子 의 사상이 심화된 시기로서, 그곳에서 그의 학설이 체계화되어 性善說에 도달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 곧, 金谷治는 孟子의 사상의 발전단계를 仁義 說➔ 王道說一性善說 ➔ 天命說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 孟子』 본문 전체에서 이 사상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발견되기 때문에, 발전적 단계로까지 보아야 할 것인가는 그리 분명하지 않다. 『孟子』의 처음 세 편인 「梁惠王篇」,「公孫丑篇」, 「勝文公篇」 등 전반부에 서 주로 聖王의 仁政에 중점을 둔 王道사상을 디루고 있다면, 후반부인 「離 婁篇」, 「萬章篇」, 「告子篇」, 「盡心篇」 등의 4 편은 人性論과 그 형이상학적 원리에 대하여 주로 논하고 있다. 『 孟子』의 결론 부분인 델如心篇」을 비롯한 후반부가 修養면에 치중하기 때문에, 孟子 은퇴 후의 말을 기록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같은 주제에 대한 반복되는 사료들이 여러 편에서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36) 『 孟子』가 몇 차례에 걸쳐 수집 • 편찬되었으리리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36) 대표적인 예를 들면 「盡여記 上 22 장에 나오는 孟子의 경제관은 「梁惠王」 上 3 장과 7 장 및 「離婁」 上 13 장 등에 거의 유사한 형태로 발견된다.

그러한 문체적 상이성과 내용적 반복에도 불구하고 그 전체적 사상에 있어서 통일된 안목을 보여주고 있어서, 孟子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하여는 『 孟子』 7 편을 서로 비교해가며 분석할 필요가 있다. 전문적 용어사용에 있어 서도 〈四端〉과 같은 용어는 『孟子』 전편에 걸쳐 나오기 때문에 그의 사상의 중심을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誠〉(「離婁」 上 12, 「盡心」 上 4) 이나 〈良知良能〉(델&心」 上 15) 등 후기 儒敎전통 안에서 매우 중요한 용어들이 『孟子』 안에서는 한두 번 언급되고 있을 뿐이어서, 孟子의 만년이나 아니면 그 제자들이 발전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 책에서는 屈萬里도 그의 『先秦文史資料考辨』에서 안정한 것과 같이, 『孟子』 7 편이 孟子 자신에 의하여 저술된 것이 아니라 그의 후학들에 의해 몇 차례의 편집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비슷한 내용의 사료들을 바교분석하여 나가는 입장을 취하고자 한다•

『 荀子 』 현재는 敍錄만이 전해지고 있지만 『 孫卿新 書』 라는 최 초 의 荀 子 注를 쓴 학자는 劉向(기원전 79~8) 이었다. 그는 그 당시 소장되어 있는 322 개의 『 孫 卿 書 』 사본을 정리 교정하고 중복된 것을 제거하여 32 편을 채택하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유일한 古注는 唐代 (9 세기초) 楊係이 쓴 『 荀 子注』 인데 그는 劉向本의 순서를 재조정하였다. 木村英一는 두 사본의 목록을 비교하고 문체 를 분석하여 荀子原本을 찾으려고 시도하였다. 그가 지적한 중요한 사실의 하나는 荀子의 대표적 사상으로 알려진 23 편 「性惡 篇 」이 현재로는 이론적 논문 (17~24 편)들 속에 들어가 있으나, 원래 劉向本의 목록에서는 26 편으로 『 荀子』와 칙접적 관련이 없는 雜 篇 속에 둘어 있었다는 것이다 .3 7 ) 이 책 7 장에서 荀子와 性惡說에 대한 자세한 논평이 있겠지만, 『 荀子』 전체에서 〈性惡〉이라는 특수용어가 쓰이고 있는 부분은 「性惡 篇 」뿐으로, 이 유명한 「性惡 篇 」이 荀子 자신의 저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일단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37) 木村英一 K im ura Ei ich i , 「荀子三十二篇(!)構成 E?L)T 」, 〈支那學》 8(1935), 15~ 45 면, `[荀子二 H lJ」, 『神田博士還曆記念書誌學論集』, 1957, 277~8 면 참조.

金谷治는 前漢 시기에 통용되던 『 荀子』는 4 종류의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각기의 편집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라고 하였다. 첫번째 것은 l 편에서 6 편으로, 군자의 개인적 수양을 주제로 하여 수집된 것으로, 후에 성격을 조금 달리하는 7 편이 여기에 첨가되었다고 본다한 둘째 부분은 8 편에서 16 편으로, 賢人울 등용하여 仁政울 베푸는 聖王의 정치론을 펴고 있다• 셋째 부분은 17 편에서 22 편으로 禮論, 天論, 正名論 등 荀子의 중심사 상이 이론적으로 전개되는 부분이다. 부록적 성격을 띠는 23 편과 24 편이 후에 여기에 첨가되었으리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편집된 부분은 27 편에서 32 편으로, 荀子의 가르침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古事的 전기나 짧은 문장들

38) 2 편에서는 覇道를 시대적 필요에 웅한 것으로 긍정하고 있으나, 7 편에서는 이것을 부정하는 내용에 차이가 있다. 金谷治는 劉向本에는 8 편인 成相도 여기에 첨가되었다 고본다.

이 荀子의 이름 아래 수집된 雜篇둘이다. 25 편과 26 편은 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역시 4 차 편집과정 에서 수집된 것으로 본다. 金谷治는 후학들에 의하여 이루어전 雜篇울 제의하고, 『 荀子 』 안에 3 가지 종류의 텍스트들이 구별되게 된 이유를 다음의 두 가지 가능성에서 찾아보 고자 한다. 첫째는 그의 제자들이 修身派 治國派, 理論派로 나누어져 있어서 그들이 각기 위에 언급한 3 가지 종류의 편집을 했을 것이라는 것이고, 둘째 는 荀子가 趙,齊, 楚나라로 여행을 계속하면서 그의 사상의 초점이 이와 같이 발전된 것을 각 곳에서 만난 제자들이 전승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39) 그러나 『荀子』의 세 부분은 주제에 따른 구분으로 荀子의 사상 전모를 이해 하기 위해서는 세 부분을 종합적으로 고찰해야 되고, 道나 禮 등 그의 기본 적 개념들에 부분에 따른 차이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荀子 후학들의 세 가지 派나 荀子 자신의 사상적 발전설을 확립할 만한 충분한 근거는 부족하 다고 하겠다. 『荀子』의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문장구성과 종합적인 사고유형 이 1 편에서 22 편까지 전체를 흐르고 있어서, 雜篇적 성격을 지닌 끝부분을 제의한 『荀子』 전체는 稷下학원의 노련한 스승으로서 학문에 대부분의 시간 울 보냈던 荀子 자신의 기록이 핵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屈萬里도 『荀子』는 대부분이 荀子 자신의 저술이고, 일부분 만이 그의 제자와 타인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내렸던 것이다 •40) 『詩經』, 『書經』, 『春秋左氏傳』 儒家의 창시자인 孔子의 사상에 원천이 되었던 것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데서 原始儒敎에 대한 고찰이 시작되어야 하므로, 孔子 이전 西周시기 (기원 전 1122/ 1027~770 년 )41) 를 알려주는 역사적 사료가 무엇이며, 그 사료들이 39) 金谷治, 「荀子(l)文獻學的硏究」, 〈日本學士院紀要 9/1> (19 51 ),2 0~21 면 참조. 40) 屈萬里, 「先秦文史資料考辨」, r 屈萬里全集』 4, 聯經出版, 1983, 411 면. 41) 周代는 북방민족인 犬戒의 침입을 받아 鎬京에서 洛邑으로 東遷하는 기원전 770 년을 분기점으로 하여 西周와 東周로 나뉜다. 周의 시작연대에 대하여는 전통적인 1122 년 설과 고고학적 연구에 기초를·두는 1027 년 설, 두 가지를 대표로 둘 수 있다

( Kwang -C h ih Chang, Shang Civ il iz a tio n , New Haven & London, Yale Un ive rsit y Press, 1980, 15~19 면 참조).

孔子와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20 세기초에 알려진 중국 最古의 사료인 殷의 갑골문이 孔子에게는 아마도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論 語』에 보면, 孔子 자신이 夏代와 殷代의 문화는 문헌이 미약하여 고증하기가 힘들다고 평하면서(「八{分」 9), 자신은 周代의 문화를 따르겠다고( 「지分」 14) 그의 입 장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甲骨文에 나타나는 殷代의 사상을 역사적 배경으로서 어느 정도 고찰할 필요는 있겠지만, 1L 子사상에 직접적 인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 댜 『 論語』에 인용되는 古語둘을 살펴볼 때, 孔子사상에 직접적 원천이 된 것은 詩와 書뿐이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기원전 5, 6 세기 에 孔子가 읽고 음미하며 해석했던 詩와 書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승된 『詩經』, 『書經』과 같은 것인가 하는 문제는 문헌학적 비판을 요구하는 것이 다. 『詩經』은 90% 이상이 四言詩로 된 중국 최초의 詩歌集으로서, 그 안에 305 개의 詩둘이 수집되어 있다• 상당수가 음악에 맞추어 노래로 불렸던 것이 기 때문에, 후렴의 반복이 많고 節 S t anza 사이에 對稱的인 S y mme tr i cal 語句 둘이 자주 보이며, 韻 rh y me 이 맞추어져 있다 .42) 가장 두드러진 기법은 興이 라고 해서 자연현상을 묘사하여 먼저 일정한 분위기를 형성시킨 후 그 안에 서 일어나는, 상응하거나 대조적인 인간사를 노래함으로써 묘사의 효과~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다. 주제는 다양해서 제 1 부를 이루는 風(처음 160 편) 은 황하 유역 15 개국의 민요를 모은 것이기 때문에 사랑, 결혼, 우정, 농사, 추수, 수렵, 전쟁, 민중의 탄식 등 인간사에서 우러나온 감정 전체가 표현되 고 있다 .43) 小雅 (74 편)와 大雅 (31 편)라고 불리는 제 2 부는 雅, 곧 당시의 표준

42) Bernard Kalgr en , The Book of Odes, MFEA , 197 따 Glosses on the Book of Odes, Sto c kholm : Museum of Far Easte r n Auti quities , 1964 ; Arthu r Waley, The Book of Song s, New York : Grove Press, 1937 ; 目加田誠, Mekada Makoto , 『詩經 楚 辭』(平凡社, 1969) 참조 . 43) Marcel Grane t는 詩의 國風 안게서 봄과 가을축제를 보내며 젊은 남녀들의 결합이

이루어지던 儀禮를 재구성하고 그 안에서 중국 최초의 농경적 원시종교를 구상하기도 하였다 (The Relig ion of the Chin e se Peop le , Ha rpe r & Row, 1975, 41~45 면 ; Fest- iua ls and Songs of Ancie n t Chin a , George Routl ed g e, 1932 참조).

어를 가지고 제작된 詩들로 귀 족들 과 왕실의 고상한 노래라는 의마를 지니 고 있는데, 향연과 조회 때의 노래, 관리들의 생활과 한탄, 서사시 등 지배계 충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마지막 부분인 碩 (40 편)은 宗廟祭祀 의식 때 쓰이는 碩祝의 시들로서 음악과 춤이 있었으리라고 보는데, 周 왕실의 祭歌 인 周碩 31 편, 魯碩 4 편, ’못을 계승한 宋의 祭歌 인 商碩 5 편이 모아져 있다. 『 史記 』 「孔子世 家 」에는 孔 子 가 당시에 전하던 3 천여 편의 詩 롤 정리하여 禮義 에 맞는 것만을 선택해서 지금과 같이 305 편으로 편찬했다고 되어 있으 나, 吳 나라의 公子 季 札이 魯 나리를 방문하여(左氏傳 襄公 29 년) 周樂이 그곳 에 훌 륭하게 보존된 것을 찬탄한 것이 孔子 8 세 때의 사건이다. 여기서 언급 된 詩 의 순서는 지금과 비슷하게 周南, 召南에서 시작하여 國風과 小雅, 大雅를 거쳐 碩에 이르도록 체계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論語』 「爲政 篇 」 2 장 및 「子路 篇 」 5 장 등에 보면, 孔子가 아무-런 해명이 없이 〈 詩三百 〉이라고 지칭하고 있어서, 孔子시대에는 이미 詩 가 300 여 편으로 정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r 詩經』 의 내용을 보더라도 대부분의 詩가 義理 的인 노래들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감정을 다양한 환경 속에서 그대로 표현한 것들이어서, 정치적 義理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려던 漢 代 주석가들 ( 齊, 魯 韓 , 毛의 四 家詩 )의 해설이 오히려 인위적이었던 것을 볼 수 있다. 『論語』에서 孔子가 무엇보다도 詩룰 많이 인용하고 있고, 아들 伯魚에게 우선적으로 공부하라고 말한 것도 詩였다는 것을(「 季 氏」 13) 보면, 그가 詩롤 중시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의 詩의 해석은 詩 본래의 뜻에 충실하기 위하여 본문에 집착하기보디는., 그 의미를 확대시켜서 인격도 야의 상징으로 쓰기도 하고,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가운데 키워지는 정치 및 의교적 능력의 효용성을 말하기 위해 인용하기도 하였다 .44) 孔子가 詩를

44) 車 柱現 「孔子의 詩說」, 〈心象〉 창간호(1 973), 78 면. 인격도야로 해석되는 대표적 예로는 白圭章(「先進」 5), 干祿章(「爲政」 18), 碩人二章(「八僧」 8), 棋澳一章(「學而」 15) 등을 둘 수 있고, 정치의교적 활용 가치를 강조한 예는 「子路엷」 5 장에 나온다 .

귀중하게 본 가장 근본적 이유는 詩 가 〈思 無 邪〉(「 爲 政」 2), 곧 인간의 감정 울 순수한 그대로 표현하게 하여 그 안에 사악함이 끼어있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孔 子 는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을 존중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고, 그것을 禮에 따라 알맞게 표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인간교육의 중요한 일면이라고 보았다. 남녀간의 그리움을 그린 『詩經』 제 1 편인 「關雄」 를 평하여 孔子는 〈즐거우나 지나치지 않고, 애절하나 몸을 상하게 함이 없다〉(「지分」 20) 고 하였던 것이다. 이는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절도에 맞는 감정을 긍정하는 그의 자세를 보여준다. 孔子가 詩를 직접 정리해서 지금과 같이 편찬했다는· 司 馬遷 의 말을 오늘 날의 학계에서는 신빙할 만한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孔 子 가 태어나 기 이전인 기원전 600 년경에 詩는 지금과 비슷한 형태로 이미 편찬되었으며 鎬 京이 불탄 이후 周文化 전승에 관심이 크던 魯에 가장 찰 보존되어 있었 으리라고 보는 것이 학계의 定說이다 .45 ) 『 論語』에 인용되고 있지만 지금은 逸文인 부분들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詩 經 』 전체는 孔 子 이전의 사료로서 대체로 안전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45) Herrlee G. Creel 은 r 詩經 』 의 詩둘은 기원전 1122 년에서 기원전 600 년 사이에 쓰여 진 것이라고 연대를 잡고 있어서, 편집시기를 西周에서 東周 초기까지라고 보았다 (The Orig ins of Sta t e c raft in Chin a , 463 면) . 그는 주석 72 에서 Maspe r o, Waley, Dobson 등의 연구를 들고 있는데, 이 연대 측정은 대부분의 일본학자들도 받아들이 고 있다 . 屈萬里는 國風은 西周 중엽에서 춘추 후영까지, 小雅는 西周 宣王시대에서 춘추 초기까지, 大雅는 西周 초영에서 東周 초기까지, 碩은 대부분이 西周 초기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보았다(『先秦文史資料考辨 J, 327~335 면) . 金學主의 『中國古代 文學史』 47 면에는,「子年篇」 15 장에 孔子가 魯에 돌아온 후에야 음악이 을바르게 되고 雅와 碩이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는 말을 들어 孔子가 시경을 정리했다는 『史記』의 설을 지지하고 있으나, 「子卒篇」 자체가 『論語』 중에서 가장 늦게 편집된 부분이며 , 詩가 각기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各得其所)는 말은 r 詩經』이 제대로 쓰이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고 시경을 지금과 갇이 편찬했다는 것을 고중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겠다 國風에는 魯의 노래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대신에 碩에 왕실인 周와 商의 후손인 宋의 노래와 더불어 魯의 詩歌가 들어있다는 사실이 詩의 마지막 편찬이 周公의 제사를 모시던 魯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

『書 經 』 의 사료적 성 격은 『詩 經 』 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많은 문제를 포함 하고 있다. 孔子가 『論語』 에서 지칭하던 書 (「爲政」 21) 가 과연 지금 년 庄f .J 의 얼마만큼이었을까 하는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西周시기에 이루어진 『書 經』의 부분이 어떤 것인가를 고찰한 연구는 이루어져 있다. 秦 始皇帝의 梵 書 이후, 漢文帝 때에 書 博士였던 伏生울 시켜 書 룰 의우게 하여 당시의 통용글자인 隸 書 로 필기한 것이 『今 文尙 書 』 29 권이었다. 그런데 孔子의 12 대 孫인 孔安國이 『 古文尙 書』 5 (R!을 발견하였다고 하여 유명한 今 古文 논쟁이 漢代에 벌어졌다. 前漢시기에는 今文派가, 後漢 때에는 古文 派가 우세하였는데 唐의 孔類達이 『尙 書 正殺』를 지울 때 古文울 채택함으로 써 『 古文尙 書』 가 十三經의 정식 텍스트로- 확립되었다. 그러나 宋代로부터 『 古文尙 書 』의 역사성이 의심을 받기 시작하더니, 淸代에 와서 고종학적인 연구를 통해 僞 書 임이 판명되었다 .4 6 ) 20 세기에 들어와 역사비판적 분석을 시도한 서구 및 중국의 학자들은 陰陽說 儒家사상 등 후기의 사상이 들어가 있다는 이유 등을 들어, r 今文尙 書』 중에서도 周初에 쓰여전 成王이나 成王울 대신한 周公의 교훈적 勅書들 울 중심으로 한 12 편만이 西周시대를 연구하는 역사적 자료가 될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47 ) 이 말은「洪範」,「金勝」등 『 今文尙 書 』에서 중시되던 『 書經 』 의 篇둘이 儒敎 및 陰陽五行說이 유행되던 전국시대 이후에 저술된 것으로, 孔子 이전이나 原始儒敎에 영향을 준 사료로는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을 가리 46) 宋代의 吳械 朱子 등이 의심하기 시작하여 元代의 吳澄, 明代의 都敬과 梅鷲을 거쳐, 淸代의 間若波와 惠棟에 의하여 僞 書 임이 확정되었다(屈萬里, 『先秦文史資料考 辨J, 319~20 면 참조) ; 陳夢家, 『尙書通論』(초판은 1957) (增訂本), 中華書局, 1985, 102~107 면. 47) Herrlee G. Creel, The Orig ins of Sta te c raft in Chin a , 447~463 면 ; Bu rton Wats o n, Early Chin e se Lit er atu r e, Columbia Un i. Press, 1962, 21~27 • 202~30 면. 陳夢家 「西周銅器斯代」, 『金文論文集』 王夢旦亂 1968, 182~198 면 . 12 편 중 「文侯之命 F} 「費꽝丘 平王과 魯公의 말씀으로 시대적으로 늦다. 顧頓剛은 『論今文尙촘훔作時代 書』에서 今文尙書를 三組로 나누었는데, 그가 역사적으로 믿을 만하다고 추정한 一組 의 13 편은 거의 일치한다(『古史辨』 一冊, 藍燈文化, 1987, 200~206 면).

킨다. 결국 孔子 이전의 사료로 『書 經 』 에서 안전하게 쓸 수 있는 부분은 「大語」 (27), 「康話」 (29), 「酒語」 (30), 댜辛材」 (31 ), 「召話」(3 2), 「洛話」(3 3), 「多士」 (34), 「君奭」 (36), 「多方」(3 8), 마傾命」 (42) , 「文侯之命」 (48), 「費 替 」 (49) 등 12 편이다. 따라서 書의 사료적 가치는 詩보다 국한되어 있고 단편적 01 다. 『春秋』란 春夏秋冬의 약자로서 魯의 연대기를 지칭하는 이름이었는데, 周代의 모든 제후국들은 각기의 史官들을 시켜 연대기를 기록하여 보관하였 다 .48) 그런데 다른 나라의 연대기는 모두 없어지고 魯나라의 연대기만이 보존된 것은, 周公의 문화적 전통을 자랑하는 魯나라의 활발한 학술 활동과 魯가 儒家의 본산지로서 중국 고대문화를 전승하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 다. 『春秋』의 經 부분은 魯나라 隱公元年(기원전 722 년)부터 哀公 16 년(기원 전 481 년)까지의 12 代 242 년간의 역사를 춘하추동별로 사건 중심으로 간단히 보고해 놓은 編年史이다. 三傳이라고 불리는 『春秋』의 3 가지 주석서 중에서 도 가장 오래되었고 春秋시대의 역사적 배경 및 사상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左氏傳』이다 .49)

48) 「孟子離婁篇」 下 21 장에 보면 晋나라의 기록은 乘, 楚의 기록은 |ih, 魯의 기록은 春秋라고 부르는데, 모두 史官의 기록이라는 데서 같다는 孟子의 언급이 나온다. 49) 『左氏傳』은 唐의 孔¥尉홍이 五經正義에 춘추 주석서로 수용한 이후 『春秋』의 정통 주석서로서 후세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다른 두 개의 주석서는 『公羊傳』과 『穀梁 傳』인데 『春秋』 원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해답하는 식의 문답적인 성격을 띠며 『春秋』 안에서 孔子가 의도했던 바를 찾아내어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료 로서의 가치는 많지 않다. 『左氏傳』이 『史記』에서는 〈左氏春秋〉라고 불렸으므로 『呂 氏春秋』와 같이 독립된 책이었는데, 劉飮에 의하여 『春秋』의 해석서가 되었으리라고 淸代의 皮錫瑞는 풀이하였다(『中國經學史』, 60~61 면) .

『左氏傳』은 魯의 左丘明이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이름이 『論語』에 孔子의 말씀으로 한 번 언급되는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교묘한 말과 꾸미는 얼굴, 지나친 공손함, 그런 것을 左丘明은 부끄러워 했는데, 나 역시 그것을 부끄러워 한다. 원한울 숨기고 그 사람과 친분을 맺는 것, 그것을 左丘明은 수치로 여겼는데 나 역시 그것을 수치로 여긴다〉(「公治長」 25).

여기에 左丘明은 孔 子 의 선배로 소개되는데, 그의 곧은 성격에 자신을 비교 해 볼 정도로 孔子의 존경을 받던 인물임을 알 수 있을 뿐, 그 이상에 대하 여는 주석가들도 더 보태어주는 바가 없다. 漢 代 이후로 『 左氏傳』은 『 春秋』의 주석으로 전승되어 왔지만, 본래는 春秋시기에 북부지방울 주도하던 제후국 晋의 연대기가 그 핵을 이루었으리 라는 학설이 최근에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 左氏傳』이 『 春秋』에서 독립된 기록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이유로 다음 4 가지를 둘 수 있다. 첫째, 『 左 氏傳 』 에서 다루는 사건의 연대가 『春秋 』 보다 후대로 내려가서, 『 春秋 』 가 哀公 14 년(기원전 481 년)에서 끝나고 있는 반면에 , 『 左氏傳』은 哀公 27 년 (기원전 468 년)까지를 보고하고 있다. 둘째, 『 左氏傳 』 은 『 春秋』보다 두 달이 빠른 달력을 쓰고 있어서 周曆이 아닌 殷曆울 따르고 있던 제후국의 연대기 이었음을 알게 한다 .50 ) 셋째, 『 左氏傳』에는 『 春秋』에 없는 晋에 대한 기사들 이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晋에 호의적인 평가를- 한결같이 내리고 있다 는 사실이다. 넷째, 『 春秋』가 메마른 사건만을 보고하고 있고 『 左氏傳 』 과 거의 같은 시대에 편찬되어 춘추전국시대의 사료가 되는 『 國語』는 주로 연설문들을 모아놓은 데 비하여, 『 左氏傳 』 은 역사적 사건과 연설문을 연결시 키고 있다. 君主가 도덕적 禮룰 따르면 그 나라가 번성하고,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는 교훈적 역사관을 가지고 사건을 전개시키면서 연설문을 통해 이념 을 피력하는 것이다. 그 의에도 버나드 칼그렌이나 폴리브랑크E. G.Pulle y­ blank 등은 언어적 분석을 통해 『左氏傳』의 문법이 『詩經』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고증했다 .51 ) 로날드 이간 Ronald E g an 은 위에 언급된 이유들과 아울 러 그 당시 사회관습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 사건의 세밀성, 기사의 가까움 50) 6 번 예의가 있으나 이것은 『左氏傳』을 주석서로 붙일 때에 고친 것으로 본다. Ronald C. Eg an, Selecti on s from Tso Chuan : Translati on s and Analys is, ph. D. Disse rta t i on , Harvard, 1976, 346~355 면 참조. Jiil萬里 역시 『左傳 』 은 본래 독립 된 저술로서 r 春秋』의 주석서가 아니며, 晋國의 사료가 戰國시대 중엽에 편찬된 것이 라고 하였다( 『先秦文史箕料考辨』, 365~370 면 ). 51) 예를 들어 晋是pX 는 〈晋은 멸망당한다〉로 是 앞의 글자가 목적어로 되고、 晋實敗之 는 〈晋은 멸망시킬 것이다〉로 되어 實 앞에 글자가 주어가 되는 등이다.

등을 논거로 들어서, 『 左氏傳 』 의 핵심이 되는 사료는 晋나라를 중심으로 한 북부 제후국들의 연대기였으며, 그것을 지금과 같이 편찬한 것은 기원전 떼기경이었으리라고 결론내렸다 .5 2 )

52) 그러나 약 100 번 나오는 君子 B, 君子謂 등 사건과 관계없는 삽입 부분은 훨씬 후기 (기원전 1 세기경 )에 첨가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春秋左氏傳』 전체를 孔子 이전의 사료로 간주할 수는 없고, 이전 의 것과 당시의 것, 후기의 사료가 섞여 있어서 儒敎의 형성기와 병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결국 『左氏傳』은 原始儒敎의 역사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측면 적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홍미로운 것은 孔子에 대한 언급이 『春秋』에는 단지 두 번, 『 左氏傳 』 에는 7 번 나오는데, 모두 객관적이고 지나가는 사건으로 간략하게 보고되고 있다 는 사실이다. 우선 『春秋』을 보면 襄公 21 年에 孔子의 출생이 보고되고 있는 데, 그에 대한 주석적 해설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후에 삽입되었을 가능 성이 높고, 哀公 16 년에는 孔子의 죽음이 간단히 보고된다. 『左氏傳 』 에 나오 는 孔子에 대한 7 번의 언급 중에서 중요한 것은 두 번뿐으로, 한 번은 昭公 6 년 魯의 大夫 孟僖子가 병상에서 그의 아들들을 孔子에게 보내 禮를 배우 게 하라는 당부이다. 또 한 번은 定公 IO 년 孔子가 임금을 모시고 齊와 조약 울 맺으러 갔을 때, 齊의 사람들이 그를 평해서, 〈孔子는 禮는 알지만 용기 가 없다〉(孔丘知禮而無勇)고 하는 부분이다• 다시 말해서, 『左氏傳』에 나오는 孔子의 모습은 『左氏傳』 안에서 人間과 社會의 근간이 된다고 보던 禮를 아는 君子로서이다• 이는 곧 孔子 당시 그에 대한 사회적 평판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춘추시대의 사람들은 孔子를, 전승되는 문화를 대표하는 禮에 정통한 학자로서 이해했을 것이다. 『 論語』 안에서도 孔子는 학문적 조예에 있어서는 자신이 어느 누구- 못지않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학문(文)에 있어서만은 내가 남과 갇지 못하겠는가마는, 君子디운 실천을 실행하는 점에서는 나는 아직 도달하 지 못하였다〉(「述而」 33). 禮와 仁의 조화를 이상으로 하면서도 孔子는 禮 (文)보다는 仁(質)을 바탕으로서 더 중요시하였으며(「지介」 3), 이러한 孔子

의 내면적 깊이는 그의 사상을 가장 정확히 전하는 『論語』 를 고찰함으로써 만이 파악할 수 있게 된다포 또한 『 左氏傳』에 보이는 禮의 절대화는 『 荀 子』의 해석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禮 중심적 중국전통의 문화적 특성을 드러내 준다•

53) Herbert F ingare tt e 이 Confu c iu s -th e Secular as Sacred(Ha rpe r, 1972) 에서 孔子가 사실은 子貢울 최고의 인간상으로 제시했으며 禮야말로 仁의 목적으로서 孔子 사상의 핵심이라고 결론 내린 것은 이렇게 世間에 퍼져있던 孔子에 대한 의부적 평가에 더 큰 비중을 둔 결과라고 하겠다 . F ingare tt e 에 대한 평가로는 Alan Cha n, Ph i- losop hica l Henneneuti cs and the Analects : The Paradi gm of Trad ition , Phil o- sop hy East and West 34(0ct . 1984), 421~36 면 참조.

3 연구방법론 原始儒敎의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이 책에서 택하는 점근방법 은 歷史批判的 his t o r ic a l crit ica l 연구에 기초를 둔 解釋學的 hermeneuti ca l 理解이다. 역사비판적 연구란 우선 각 사료를 문헌학적으로 고찰함으로써 그 사료가 지닌 역사적 가치를 확실히 한 후에, 각기의 텍스트를 그 역사적 배경 안에 놓을 뿐만 아니라 그 텍스트에서 나오는 전문용어를 사용하면서 그 안의 내용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가를 드러내어 사상의 전모를 파악 하려는 것이다. 이 말은 孟子의 사상에 입각해서 孔子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 라, 孔子는 『 論語』라는 사료 안에서 그 자체의 용어와 거기에 나오는 사상 둘을 체계화시킴으로써 孔子사상의 전체적 구조를 파악하고, 孟子는 孟子대 로 100 여 년 후에 나오는 儒敎사상의 발전으로서 개별적으로 고찰하는 접근 방법을 택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유교전동의 긴 역사 안에서 중요시된 대표적 주석서둘, 특히 漢代 로부터 형성된 훈고학적 인 古注들 ,54) 宋代에 확립된 성 리학적 인 新注들 ,55)

54) 魏 何롯의 『論語集解』 (24 純), 梁, 皇 1 .lit의 『義銃』 (545), 宋, 邪붕의 『正義』 (999) 는

『十三經注疏』 안에 합쳐져 있다 . 後漢 趙岐(1 09~201) 의 『孟子注』와 宋, 孫奭의 疏가 역시 댜三經注疏』 안에 있다 . 荀子의 현존하는 古注는 시대적으로 늦어서 唐代, 楊京의 『荀子注』가 최초의 주석서이다. 55) 朱子의 r 論語集注』 『孟子菓注』는 新注를 대표하는 것이고, 荀子는 宋學에서 이단시 되었기 때문에, 新注를 가지고 있지 않다 .

消代에 쓰여진 고증학적 인 주해서들을 5 6) 『 論語 』 , 『 孟 子』 , 『 荀子 』 등의 연구 에 필수적인 참고도서로 참조해야 하지만 역사비판적 원칙에 따라 이들 주해서둘이 지닌 사상적 특성과 역사적 배경을 본 텍스트에 강요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책에서는 이러한 텍스트를 이해하 기 위하여 주석서들의 도움을 받기는 하겠지만, 原始儒敎의 모습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데 유익한 정도에 한정하도록 하겠다.

56) 劉寶楠(1 791~1855) 의 r 論語正義』(1 866 년 아들에 의하여 출판)는 古注와 新注를 비교하여 오류를 수정하면서 淸代 고중학적 연구를 수집한 것으로 가장 중요하다. 魚循의 『孟子正義』(1 876) 와 王先謙의 『荀子集解』 (1891) 는 갈은 성격을 가전 종합적인 주석서둘이다. 丁若鏞(1 762~1836) 의 『論語古今注』, r 孟子要義』는 조선 후기 실학적 경학연구를 대표하는 것으로 일본의 伊藤仁齋(1 627~1705) 와 萩生f.ll.俠 (l666~1728) 등의 주석까지를 열거하면서 고중을 들면서 해설하고 있다.

또한 孔子의 사상이 전개되는 춘추 말기와 『孟子 』 와 『 荀 子』 의 해석과 체계화가 이루어지는 전국시기의 시대적 배경과 사상적 역동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당시에 공존하였던 다른 학파들의 사상도 함께 고찰하도록 하겠 다. 儒敎에 대한 墨家의 도전 없이 孟子의 孝와 天의 강조를 이해할 수 없으며, 道家와의 논박 없이 荀子의 道사상의 확립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諸子百家 자체의 사상을 논하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原始儒敎의 사상체계 확립에 이해를 돕는 데 필요한 정도만을 언급할 것이다. 둘째로, 이 책이 채택한 접근방법은 해석학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 책이 原始儒敎라는 제목으로 儒敎史 중에서 처음 200 여 년간의 짧은 시기를 다루면서 이미 그 사상의 발전과정 속에 해석학적 작업이 계속 일어 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려고 한디는 말이다. 孔子는 그가 받은 周文化의 핵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의미와 체계를 부여하였고, 孟子는 孔子의 사상을

당대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면서 자신이 이해한 바에 따라 재구성하였으 며, 荀子 역시 孔子의 유산을 새롭게 해석하여 제자백가의 사상적 일면들을 孔子를 중심으로 하여 종합하였다. 『 論語』에서 孔子는 〈述而不作〉(「述而」 l) 이라 하여 자신은 聖王둘의 옛 가르침을 믿고 좋아하여 그것을 찾고(「述 而」 20) 전할 뿐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고 하였고, 孟子와 荀子 역시 孔子가 전한 그 聖王之道룰 밝히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5 7) 이러한 주장은 실제로 사실과도 부합하는 것으로서, 이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原始儒敎의 골격을 형성한 위의 세 학자는· 각기 자신 들이 이해한 대로 가장 충실하게 聖王之道롤 당시대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이었다.

57) 孟子가 孔子에 대하여 지닌 지국한 존경심과 그를 모범으로 한다는 의식을 보여주 는 부분으로는 「萬章」 下 I • 上 7, 「公孫丑」 上 2, 델 E 心」 下 15 등을 둘 수 있다 . 荀子가 자신은 孔子의 가르침을 계승한다는 말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은 「修身篇J, 「非十二子篇」 등에서 찾울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전통을 계승시키는 이러한 각세대의 이해야말로 해석과정을 거친 것이라는 점을 밝힌 것이 현대 칠학적 해석학의 공헌이다 . 즉 인간이 어떤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석의 단계를 거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해석학적 이론을 제시한 한스-게오르크 가다머 Hans-Georg Gad- amer 는 해석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세상을 경험하는 인간 체험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해석적 현상이란 방법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앎과 전리에의 추구라고 보았다. 거리를 가지고 객관적으로 과거를 보는 과학성, 곧 과거를 그 과거의 관점에서 보려는 노력은 필요하기는 하지만 인간에게 소의를 경험케 하였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디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특히 인문학에서는 핵심을 찌르고 결실 있는 질문을 할 수 있는 상상력이 과학성 에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다머는 인간이 처해져 있는 역사 적 환경과 조건이야말로 결실 있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 에, 이해하려는 해석자가 지니는 역사적 한계성과 특수성은 전리를 향해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시발점을 제공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선입견과 시대성이라는 인간 존재의 구체적 한계성을 통해서 진리를 향한 무한한

대화가 열린다. 시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먼 것을 가까이 가져와서 옛날과 지금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재해석의 과정을 통하여 전통은 계승되며, 과거의 지평선 Hor i zon t과 오늘의 지평선이 결합되는 속에서 더 보편적인 새로운 이해에 도달한디는 것이다프 이 책은 이러한 해석학적 이해를 통한 사상의 발전을 孔子와 孟子와 荀子의 사상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고자 했다.

- 58THans-Georg Gadamer, Wahrheit und •M eth od e, J.C .B. Mohr, 1960( Truth and Meth od , 영역판은 1975 년)과 Phil os op h ic a l Henneneut ics, Un ive rsity of Ca lifor ni a Press, 1976 년 참조. 두 지평선의 만남은 그의 해석학적 사고의 네 과정 중에서 셋째 단계로 가장 중십되는 과정이다. 네 과정이란 이해자가 지닌 현재의 지평 혹은 편견 ➔ 덱스트를 경청함으로써 새로운 지평의 도전을 받아들임一두 지평선의 융합으로 더 보편적인 이해에 도달함 ➔ 다시 새로운 질문을 던집으로써 해석학적 사고를 계속 하는것을가리킨다.

해석학적 과정은 살아있는 모든 전통 속에서 계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原始儒敎를 재구성한 漢個學도, 宋明儒學도, 淸代의 고증학적 實 學도 이러한 해석학적 발전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20 세기초에 역사적 단절을 경험한 유교전통이 미래를 향하여 어떻게 다시 한 번 재해석될 것인가의 비전을 얻는 것도 이런 해석학적 이해에서 가능할 것이다 . 결국 原始儒敎를 이해하 려는 이 책은 과거를 위해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오늘과 내일을 사는 이들을 위하여 하나의 해석학적 시도로서 저술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孔子의 경험적이고 핵심적인 통찰에서 이론적 체계를 탈바꿈하 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儒敎의 저력을 볼 수 있을 것이고,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다해 인격을 이룰 때 하늘을 알게 된다는, 孟子가 체계화한 儒敎의 근원적 신앙에서 현대인에게도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天人관계의 기본적 원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荀子의 배움에 대한 강조와 文化에 대한 존중에서 東아시아 문화권을 규정짓고 있는 특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 0] 다.

1 장 信敎 성립 이전 고대중국의 人間理解 原始儒敎의 人間論울 고찰하기에 앞서서, 孔子 이전의 고대 중국인들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孔 F1 의 교과서로서 사용된 것이 확실한 詩와 書 가 儒敎와 그 이전 사상과의 연결성을 밝히는 데 가장 중요하겠지만, 考古學的으로 발굴되어 중국最古의 사료로서 중시되 는 甲骨文울 일단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또한 춘추시기를 대표하는 『春 秋左氏傳』과 『國語』에 나오는 인간론을 고찰하여, 공자가 제시한 안간론의 독특성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고자 한다. 1 甲骨文 속의 王 :余一人 사상 商王朝 후기, 곧 殷의 수도였던 河南省 安陽縣 小屯村의 발굴을 비롯하여 周가 형성된 周原(古公宣父), 豊京(文王 말년), 鎬京(武王의 수도) 지구 등에서 발굴된 갑골문은 15 만片 이상으로 약 4 천 5 백 字를 헤아리는데, 그중에서 1/3 만이 그 의미가 분명히 확인되고 있다신 갑골문이 쓰여진 연대를 보면, I) 『甲骨文字集林』(于省吾撰 大通書局, 1981) 에 따른 숫자로, 189 9'd부터 1979 'd 사이에

발굴된 것이다. 北京에서 출판된 『甲骨文合集』에는 41, 956 편이 수록되어 있고, 대만에 서 출판된 『商周甲骨文總集』에는 그 의에 4 천여 편이 더 첨가되어 있다. 商代의 연대 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견해가 있어서, 陳夢家는 기원전 1600~1028 년으로, 董作賓은 기원전 1751~1111 년으로 잡았고, 고고인류학자인 張光直은 殷甲骨文이 나온 武丁에서 멸망까지를 기원전 1200~104 0¾1으로 보고 있다. 商은 공식적인 國名이고, 首都名으로 殷猿 역시 大商邑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論語』 등의 사료에서는 夏殷周三代로 늘 후기의 명칭인 殷울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商과 ’못을 그 내용의 적합성 에 따라쓰기로하겠다.

殷나라 武丁시기(기원전 1200 년경) 이후로 殷의 멸망과 周의 성립시기를 거쳐 周 초기까지라고 하겠다. 갑골문이란 거북이의 腹甲이나 背里 또는 소, 水 牛, 돼지, 양, 사슴 등의 眉押骨을 사용하여 占을 치면서 그 占의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獸骨로 占울 치는 습관은 신석기시대인 기원전 3500 년경부터 있었지만, 그 위에 文字가 새겨진 것이 발견되는 것은 殷시기에 이르러서부터이다. 이제까지 발굴된 甲骨文은 모두 殷王室이나 周王室, 혹은 周가 아직 殷의 제후국으로 있을 때의 宮殿 지역에서 나온 것으로, 사료로서 한계성을 지니 고 있다. 이러한 한계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시기의 甲骨文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은 王(또는 諸侯)뿐이라고 하겠다. 王은 邑들의 연합체를 지배하는 주권자로서 정벌 때에는 군사지휘자로서의 권한울 행사 하였다. 갑골문에는 王의 정복사업과 관련된 기사가 상당히 많이 나온다. 『小屯』 「丙編」 圖版 25 를 예로 들자면, 좌우에 긍정문과 부정문을 병립시켜 서 정벌의 성공여부를 占치는 것을 볼 수 있다. 貞 : 王사 夏伐巴, 帝受又? 貞 :王勿사 夏伐巴? 사는 從의 古字이고, 受는 授의 의미이며, 又는 祐를 가리키므로, 이 占文 의 내용을 풀이하여 보면 〈문의하기를, 왕이 夏을 수행케 하여 巴롤 정복하 려는 일에, 上帝께서 도움을 주실까요? 아니면 그 정복을 하지 말까요?〉

01 다 .2)

•? ) 貞이라는 글자는 甲骨文울 읽는 데 일종의 기호와 갇은 것으로, 항상 나오지는 않지 만 나타날 때에는 그 이후가 占의 내용이라는 것을 쉽게 판별하게 한다. 여기서 인용 하는 甲骨文은 다른 언급이 없는 한 모두 『小屯殷虛文字丙編』(張秉權, 中央硏究院 歷史語言硏究所出版, 1957) 에서 나온 것임을 밝힌다 .

商王朝는 邑의 연합, 곧 많은 씨족집단들의 盟主로서 山東 지방과 河南 지역의 沃土를 구하며 통치지역을 넓히기 위해 다섯 번 이동하다가 끝으로 殷城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갑골문에서는 이곳을 大邑商, 또는 天邑商이라고 불렀다. 邑이란 이 시대 사회의 기본적 단위가 되는 취락으로서, 대체로 강가에 가까운 남향의 언덕 위에 흙을 굳힌 성벽을 쌓아 이루어졌다. 서민의 주거지는 굴을 파서 半地下의 형태로 세운 것이었고, 氏族的 혈연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地名이 곧 그곳에 사는 氏族名이기도 했다. 읍마다 祖上神울 제사 지내는 사당을 가지고 있어서 공동체적 결합의 상징으로 삼았다. 또한 邑 사이에는 계급적 지배관계가 형성되어 연합적 성격을 이루고 있었는데, 갑골문에 의 하면 邑의 건립 역시 王의 권한에 속하였다. 圖版 93 에는 王이 邑을 세우면서 上帝의 인준을 구하는 占이 보인다. 庚午 卜 , 內 貞 : 王勿午邑在鉉, 帝若? 庚午卜, 內貞 : 王年邑, 帝若? 八月 이 占의 내용은, 〈 8 월, 7 일째 되는 날 占을 쳐서 內이라는 貞 A 이 다음과 같이 문의하였다. 王이 이곳에다 邑울 만들려고 하는데, 上帝께서 윤허하여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여기에 邑을 세우지 말아야 할까요?〉이다. 6 (rf-支룰 단위로 하는 날자와 貞人의 이름 및 占울 친 장소나 月 등은 序辭적 성격을 띤 것으로 때로는 생략되기도 한다. 貞人의 이름은 120 개 정도가 언급되는데 갑골문의 시대 구분에는 중요하지만,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소속한 씨족의 이름이기 때문에, 貞人둘의 인간모습을 보여주지는 않고 王의 占치는 일을 보좌하는 직무적 성격을 지닐 뿐이다 .

사실 占術 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占의 해석으로서, 神 意. 를 파악하는 이 권한은 王 에게만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갑골문에는 〈임금께서 占 을 해석 하여 吉하다고 하셨다〉( 王固臼 吉)라는 구절이 자주 보인다. 商代의 王 은 자신을 〈余一人〉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인간을 대표하는 존재라는 뜻이 다. 따라서 정벌사업과 사냥행위 등 인간의 모든 활동은 왕의 이름으로 수행 되었다• 또한 王은 最高神인 上帝와 인간사회를 중재하는 연결점으로서 모든 축복의 매개자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3 ) 그래서 王 은 祈雨를 위해 춤을 추었고 (圖版 100), 풍성한 추수를 내려주시도록 吉한 神託울 上帝에게 청했으며 (圓版 9 등), 가뭄의 재앙이 자신에게서 물러가기를 간구했던 것이다. 圖版 67 은 上帝가 王에게 재앙을 내릴 것인가의 여부를 문의하고 있다.

3) 胡厚亢 「釋余一人」,《歷史硏究》, 1957 년 一期와 「重論 ‘余 _K 問題」, 《古文字硏究》, 六輯 1981 년 11 월. 말, 소, 양둘의 목축과 더불어 사냥은 중요한 생산수단이었기 때문 에 王의 활동의 일부로서 중시되었다(西嶋定生, 『中國古代社會經濟史』 참조). 張光直 은 王은 최고의 巫였고, 貞人둘 역시 불을 피우면서 일종의 음악과 충으로 靈媒관계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보았다(K. C.Chan g, Art , My th, And Rit ua ~ Harvard Un ive rsity Press, 1983, 54~55 면).

戊申 卜 , [爭]貞 : 帝其降我莫? 一 月 戊申 卜 , 爭貞 : 帝不我降莫? 이 占의 내용은 〈 1 월 45 일째 되는 날 占울 쳐서 爭이라는 貞人이 물었다. 上帝께서 내게 가뭄울 내리시겠습니까? 내리지 않으시겠습니까?〉이다. 여기 에서 〈我〉는 占치는 행위의 주체가 되는 王으로서, 가뭄의 위기를 느끼고 있는 모든 백성을 대표하는 존재로서의 王의 모습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 다. 이와 감이 商代의 王은 정치군사상의 지휘관이요, 祭祀 때의 제사장 및 神意의 해석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인간공동체를 상칭하는 존재 corp o rate p ersona lity였다. 이러한 王의 위치는 小屯의 考古學的 발굴의 결과 를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殷王의 60mXlOm 의 장엄한 宮殿과 宗廟가

小屯의 북쪽 高 地에서 발굴되었으며 王 墓로 생각되는 거대한 분묘가 西北方 에서 10 여 개 발견되었다. 청동기 부장품과 더불어 발굴된 拘葬者의 유골은 數人에서 수십 인, 가장 많은 것은 이삼백 인에까지 이른다. 순장된 사람들 은 제물로 희생되어 머리가 잘린 전쟁포로들과 생매장된 侍臣들이었으리라 고 추정된다. 殷人들의 내세관과 그 당시 王이 지녔던 위치를 엿보게 해주는 국단적 인 예라고 하겠다. 上帝와祖上神 사상 殷人둘은 王이 죽으면 上帝의 天上궁정에 울라가 祗上神이 되며, 그의 자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었다 .4) 여기서 王과 최고신인 상제 와 祖上神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圖版 39 에는 다음 5 쌍의 卜 辭가 새겨져 있다.

4) 武丁시기 이후로 視上神인 王帝를 下帝라고 부르게 되면서, 最高神인 帝는 上帝라고 총서 구별하였다(胡厚宣, 「'針 卜 辭中的上帝和王帝J, a 든史硏究》, 1959 \1, 104면 ). n 豊 記』 曲禮下에는 天子가 죽은 후 장례를 치론 후에 帝라고 부른다고 설명하였다.

(I) 貞 : 咸(成湯) 賓于帝? 貞 :咸不賓于帝? (2) 貞 : 大甲 (太甲 )賓于咸? 貞 : 大甲不賓于(威)? (3) 甲辰 卜 , 殺貞 : 下乙(祖乙)賓[咸]? 貞 :下乙不賓于咸? (4) 貞 : 大〔甲]賓于帝? 貞 :大甲不賓于帝? (5) 貞 : 下乙〔賓]于帝? 貞 :下乙不賓于帝?

여기에 언급되는 세 명의 조상들은 商의 始ft!l.인 成湯과 그의 손자인 太甲 과 다시 그의 四代孫인 視乙이다. 그리고 이 조상신들은 종국적으로는 상제 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賓〉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이다. 이에 대한 지금까지의 학계의 견해는 두 가지로 구분되고 있 다. 하나는 〈賓〉을 〈손님으로 대접을 받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 조상신 들이 상제의 좌우에 손님이 되어 자신들의 후손을 위해 상제에게 전구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는가를 占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또 하나의 해석은 〈賓 X 끌 〈제사 때에 配享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 상제에게 드리는 제사 에 특정한 조상신을 함께 제사해도 되는가를- 묻는 占이라고 보려는 것이 다. 두 가지의 해석은 다 가능한 것으로서, 殷人들이 상제를 최고의 권력자 로 보고 祖上들이 天上궁전에 함께 거주한다고 믿은 것도 사실이고, 祖上神 들에최게고 신실인질 帝적는으 로갑 골가문장에 많서 은* 祭 祀또룰는 울 #려? 福로울 표 시기되원는하데면 서비 ,상 바제람를, 구함름께, 기억했을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번개 등 모든 자연현상의 主宰者이기 때문에, 풍년과 가뭄이나 홍수 등 자연 적 재앙의 최종원인이라고 간주되었다. 또한 상제는 上天에 궁정을 가지고 天上에는 帝五臣 또는 五工臣울, 地上에는 四方神울 거느리고 명령을 하달하 는 천상 임금으로 생각되었다• 四方神이란 동서남북을 지칭하는 것으로, 상제의 명령을 전하는 使者의 임무를 띠고 있었는데, 바람이나 새로 표현되 기도 하였다선 帝는 人間事도 主宰하고 있어서, 殷人둘은 전쟁의 승리는 물론, 도읍의 건설과 멸망(圖版 71, 73 등)이 그의 손 안에 있다고 믿었다. 상제가 그들의 나라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믿음은 殷人들이 상제를 그들 과 혈연관계를 지닌 祖上神으로 본 것이 아니라 ,6) 묘사할 수 없는 초월성을 5) 姚孝遂 肖丁, 「小屯南地甲骨考釋」, 中華書局, 1985, 75~76 면 참조. 갑골문에서 바람과 새는 동일한 글자로 표시되고 있다. 또한 胡厚효 「論五方視念及中國稱謂之起源」, 《甲 骨學商史論왔》, 1942, 383~8 면을 보면 그는 中商을 中方으로 보아 五方과 帝五臣울 대웅시켰는데, 그의 해석이 옳다면, 五行說의 기원을 殷의 五方관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6) 郭洙若은 「先秦天道觀之進展」, 『靑鋼時代』(1 946), 16 면에서 상제를 王의 최초의 조상

이라고 하였으나, 최근의 연구에서는 상제는 왕실과 혈연적 관계가 없는 절대신의 성격을 띠며 그렇기 때문에 殷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고 본 것이라고 해석된다. Chang Kwang Ch ih 張光直 The Archaeology of Ancie n t Chin a , 251~2 면 ; David Keig htly, Shang Theolog y, His tor y of Relig ion 17( 19 78), 211 ~25 면.

지님과 함께 제사로도 그 마음을· 바꿀 수 없는 원리적인 성격을 띤 절대적 인 존재로 보았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7) 그리고 上帝의 이러한 원리성 때문 에 周初에 이르러 도덕적 天命사상이 나울 수 있었다고 하겠다 .8)

7) 陳夢家 『殷虛卜辭綜述』(1 956), 577 면. 그리고 島邦男 Shim a Ku nio, 『殷樓卜辭硏究』 (19 58), 212 면 . 8) 于省곰 『甲骨文字釋林』, 189 면 참조. 周의 天命사상에는 王의 德이 필수조건으로 대두되는데, 甲骨文에 과연 德의 개념이 존재하는가의 여부가 학계의 쟁점으로 대두되 고 있다 . Divi d S. N i v isi on 은 德이란 원래 종교의식을 동해서 王이 얻는 초인간적인 힘으로서 정치 및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말했다고 본다 (Can These Bones Liv e , Workshop on Classic a l Chin e se Thou gh t, Harvard Un iv., 1976, 46~47 면) . Donald Munro 는 德의 본 의미가 占을 쳐서 문의한다는(t o consult) 종교적인 것이 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The Concept of Man in Early Chin a , 부록 190 면).

갑골문 속의 조상신은 先公과 先王으로 구별되는데, 祈年의 대상이 되는 것은 社稷, 河, 土 등과 더불어 신화적인 先公만이었고, 成湯으로부터 시작되 는 역사적인 先王들은 여기에 속하지 못하였다. 사실 요 로 표시되는 土라 는 글자 하나가 先公名으로 高祖亥를 가리키는 데 쓰이기도 하고, 地名으로 社土룰 말하기도 한다. 先公은 원래 土地神 및 河神과도 일치되는 토뎀신앙 에서 나온 것으로 글자의 모양 자체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새로도 표시 되었다 .9) 『 詩經』의 商碩 玄鳥에 나오는 〈天命玄鳥, 降而生商〉(하늘이 신비로 운 새에게 명하여 지상에 내려가 成湯울 낳게 하였다)이러는- 표.현은, 殷의 제사 를 계승하는 周의 제후국이었던 宋나라에서 본래의 토템신앙을 周初의 天命 사상과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9) 王亥의 亥는겔<나 김의 모습으로 표시되어 鳥에서 나온 글자임을 알 수 있다. 商의 t o t em 신앙에 대하여는 胡厚효 「甲骨文所見商族鳥圖曆的 新證撮」, 《文物〉, 19 77 년 2 월 : 84~87 참조 . 土의 두 가지 용법과 先公과 河, 土 등의 관계에 대하여는 『小 屯南地甲骨』,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編, 1980, 80~82 면 참조.

先 王 들과 王과의 관계는 밀접한 것이거서 정규적인 제사는 대부분 이들에 게 드리는 것이었고, 王 의 치통까지도 어느 조상의 노여움에서 생긴 것이라 고(圖版 114) 생각되었다. 日, 月, 星 , 雷 , 雲 등 자연신돌에게도 제사가 바쳤 졌으나, 그 중요성이 큰 것은 아니었다. 殷代의 갑골문뿐 아니라 같은 문화 를 계승한 西周의 갑골문에도 上 天 的인 개념이 나오기는 하지만, 최고신을 지칭하기 위하여 통용되는 것은 〈帝〉라는 글자이고, 〈 天 〉은 갑골문 안에서 는 크다(大)는 의미로만 쓰이고 있다 .10) 따라서 天 이라는 最高 神의 명칭은 『 詩 書』 에 와서야 상제와 일치하고 보편화된 것이라고 하겠다.

10) 甲骨文에 大는 사람이 서있는 모습인 *형 태로 나오고, 天은 제 5 시기에만 나오는 데, 委 이나 주 혹은 吳 형태를 지닌다 . 곧 天은 인간의 머리 위에 있다는 뜻으 로 蒼蒼者라는 의미였을 것으로 풀이된다(李孝定, 『甲骨文字集釋 』 , 中央硏究院歷史語 言硏究所, 1965, 13~21 면) . 天이 언급된 殷代의 갑골문을 전부 분석한 Creel 은 天이 周人둘의 고유한 神名이었다고 보았다 . 그는 또한 天이 조상신의 집단적 호칭이었다 고 결론 내렸는데 (The Orig ins of Sta t e c raft in Chin a , 502 면), 이 결론은 『詩書』 등의 사료에서는 입증될 수 없는 추측의 요소가 너무 많은 것이다.

祭器를 비롯한 殷人들의 靑銅器 제조와 정교한 조각을 연구한 학자들은 이들의 예술적 특성은 질서와 位階性이라고 한다. 추상적이면서도 균형이 잡힌 기하학적 무늬둘로 평면 전체를 메꾸고 있는 모습은 개개인의 인간모 습이 드러나지 않는 비인격적 유형의 문화형태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러한 殷人둘의 문화적 유산에서나 갑골문 안에서 한 인간의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도덕적 人格추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孔子 가 夏禮나 殷禮가 아니라 周代의 文化롤 따르겠다고 하던 말은 사료를 고증 할 수 없었다는 면에서뿐만 아니라(「지分」 9) 周初로부터 분명해지는 문화의 도덕적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지分」 14).

2 『普經 』 속의 王과 民 : 天命사상 『 今文尙 書』 안에서도 西周시기의 사료로서 그 역사적 가치가 고증된 周 初, 곧 成 王 과 成王울 보좌하던 周公의 칙서들을 중심으로 하여쁜 周 文化의 기초를 이루던 天命사상과 , 天 命을 통해 형성되는 民과 王 의 역동적인 관계 룰 살펴보고자 한다 . 周의 武 王이 군시를- 일으켜 혼란 속에 있던 殷을 멸망 시킨 군사활동을, 成 王 이나 周公은 군사력의 우세에 기인한 것이라고 해석하 지를 않았다 . 예를 들어 周의 제후들에게 술과 향락에 빠지지 말도록 경고하 는 칙서인 「酒話」에는 〈天이 命을 내려 우리나라(我民)를 시작하면서 始祖 께 드리는 제사가 있게 하였다〉 12) 고 하였다. 天命과 民과 宗 廟, 곧 王權과의 연속적인 관계를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殷의 멸망에 대해서도, 같은 칙서는 殷末期에 이르러 王 과 신하들이 과도한 향락을 즐기게 되자, 거기서 나오는 술냄새와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에까지 미치게 되었고, 이에 天이 殷 울 멸망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天이 인간을 학대한 것이 아니라, 殷의 君臣들 스스로가 멸망울 자초한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民의 원망과 天의 결정 및 왕조의 멸망은 원인론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11 ) 「大語」, 「康語」, 「福告」, 마報」, 「召語」, 댐準」, 「多士」,「君奭」, 「多方」, 「顧命표기 IO 편을 중십으로 고찰하려고 한다 . 文侯之命과 費誓 역시 역사적 사료로서의 신빙성 울 인정받으나 시기적으로 늦거나 내용상으로 빈약해서 제의시켰다 . 이 칙서둘의 저자에 대한 문제는 B.K a rlgr e n, Glosses on the Book of Docwnent, M FEA II, 1970, 63~64 면 참조. 12) 惟天降命, 肇我民, 惟元祀(尙害本文 酒語 Harvard Yenchi ng Index, 40~52 줄). Karl gr en 은 冠 E 를

德을 잃으면 백성을 다스리라는 天의 命울 잃게 된다는 것을 역사의 철칙 으로 제시한 周公은, 殷의 유민들을 대상으로한 칙서 「多方」에서 다음과

學生書局, 1975, 40 면.

걷기 밀하였다. 〈天이 夏나라를 버린 것이 아니고, 天이 殷나라를 버린 것이 아니다. 여러분의 임금이 신하들과 더불어 방자하게 행동함으로써 天의 命을 실천하는 데 소홀히 하여 죄를 얻었기 때문이다.〉 13) 王이 德을 잃고 정치를 잘못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되면, 그 罪가 하늘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논리는 周의 제후들에게 하는 훈계에서나 殷의 유민들에게 하는 훈계에서 한결같이 나오는 周公의 정치관이다.

13) 非天庸釋有夏 非天庸釋有,i. 惟爾辭以爾多方大浩, 圓天之命, 層有辭(尙書本文 「多 方」, Harvard Yench ing Index, 296~324 줄).

文王의 아홉째 아들인 康叔을 殷의 유민들을 다스리기 위해 東土의 諸侯 로 봉하면서, 成王이 내리는 훈계인 「康話」에서도 民과 天의 직접적인 관계 를 확인할 수 있다. 〈封이여 ! 내가 살피지 않으면 안될 것이 있으니, 그대에 게 德의 실천에 대한 말과 형벌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 알려주겠노라. 만약 지금 백성이 평안하지 못하고 그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계속 가르쳐도 화합하지 않는다면, 天이 우리를 벌하고 죄 주어도 원망할 수 없는 것이다. 罪란 그 큰 데 있는 것도 아니고, 많은 것에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하늘 에까지 밝히 알려지게 되는 데 있는 것이다.〉 14) 王의 罪란 民의 원망이 天에 까지 이르게 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이 사상온 「酒話」, 「召語」 등에서 도 보인다. 그래서 옛 격언을 인용하면서 임금이 자기의 모습을 보고 싶으 면, 거울에 비추어 볼 것이 아니라 백성에게 비추어 보라고 권고하기까지 한다 .15)

14) 王曰 封, 予惟不可不뚝 告汝德之說, 于罰之行. 今惟民不靜, 未庚販心, 迪屠未同, 奭淮 天其罰殘我 我其不怨. 惟販罪無在大, 亦無在多, ~IB 其尙顯聞于天(같은 책, 「康語」, HYI, 766~82 峰). 15) 古人有言 B, 人無於水監, 當於民監(「酒浩」, HYI, 509~523 줄) ; 王不政後用, 顧長于民 씁(「召詩J, HYI, 379~389 줄) .

『書經』의 칙서둘 안에 보이는 天과 民의 관계는 상당히 홍미로운 것이다. 孟子가 7 백 년 후에 체계화시키는 民本的 사상체계의 기초가 이미 뚜렷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天은 民울 위해 힘쓰고 위로하며(勤瑟我民, 「大話」), 四方의 백성을 불쌍히 여겨 (哀于四方民, 「召語」), 그들을 편안하게 인도하고자

한다(引逸 「多土」). 백성이 지니고 있는 孝와 友 등 가장 기본적인 인간으로 서의 떳떳함은 天이 부여한 것이기 때문에, 不孝와 不友는 관청에 죄를 짓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혼란시키는 것이므로 가장 큰 죄악이라고 하였다 .16) 결국 天의 직접적인 관심의 대상은 王에 있는 것이 아니라 民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民울 편안하게 이끌지 못하는 王은 天命 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天命不常과 『普 經』의 哲王사상 『書經』에서 반복되어 나오는 〈하늘의 命은 (보존하기에) 쉬운 것이 아니 다〉, 〈하늘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17J 등 天命이란 일정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天命不常(하늘의 명은 일정한 것이 아니다)의 사상은 天 자체가 믿을 수 없이 변덕스럽다는 것이 아니라, 天이 王에게 주는 王權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民에 대한 王의 책임을 다할 때까지만 유효하다는, 王의 입장에서 볼 때의 天命의 조건 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周公과 成王은 周王室이 天命울 계속 보존하 기 위해서는 文王의 德울 이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훈계를 宗族들에게 반복하고 있다. 「多士」나 「多方」 등 殷민족에게 말할 때에도 기본적인 이 사상에는 변화가 없으며, 제대로 정치를 하고 있던 초기 殷나라 임금들을 〈殷先哲王〉이라고 부르며 높이고 있다.

16) 元惡大怒, 好雅不孝不友 ...... 不于我政人得罪 天惟與我民휴, *i筑 L( 「康浩.J, HYI, 526~602 줄) . 17) 〈天命不易, 天不可信〉(「君奭」, HYI, 104~107 • 149~9 줄). 郭洙若은 天命不常을 하늘 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라고 보았는데, 이러한 해석은 民과 王과의 상호적 관계 아래 서 天命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이와 같이 天命사상이 天과 王의 관계에서는 조건적이고 간접적인 데 비하여, 天과 民과의 관계에서는 무조건적이고 직접적이라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周公이 天命사상을 제시함으로써 정권의 교체를 정당 화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하는 사회학적 정당화의 이론만으로 天命사

상의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사실 天命사상 속에는 왕권교체의 가능성이 계속 전제되고 있기 때문에, 왕위를 물려받은 사람에게 天命이란 매우 힘겨 운 것이었다. 成王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아! 그대들 많은 제후들과 관리들에게 알리 는 바이다……이 내 나이 어린 사람이 무한히 중대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나는 현명(哲)하지 못하여 국민(民)을 평안하게 이끌지 못하니, 어찌 하늘의 뜻을 아는 데(知天命) 이를 수 있겠는가 !18 ) 위에 언급된 〈哲〉이란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天命울 아는 지혜, 곧 王과 王울 보조하는 정치가들이 지녀야 하는 지혜를 지칭했다 .19) 나라를 빛내는 일은 哲人둘이 많을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大語」), 王은 德이 있는 관리 를 임용하여 정치를 보조하도록 해야한다고 보았다(「君奭」).

18) 王若타 飮大話爾多邦…… 惟我幼沖人, 嗣無福大歷服, 弗造哲, 迪民康. ~IB 其有能格 知天命(「大諾J. HYI, 3~II • 28~53 줄). 19) 위의 해석은 哲울 智와 같은 것으로 본 孔安國의 주석에 의한 것이고, 孔系尉홍은 天道를 이해하여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r 十三經注疏』, 201~2 면 참조). 주목해야 될 정은 『書經』의 칙서들에 나오는 哲이 모두 王에게만 쓰이고 있다 는 사실이다. 「召諾」에서 哲은 王의 지혜를 말할 때에만 쓰이고, 智는 일반사람들을­ 지칭할 때 쓰이는 것으로 보아, 哲이라는 용어가 본래는 王의 지혜만을 지칭했던 것 갇다. 역시 「召浩」에는 哲命으로 나와서 王이 받는 天命과의 관계를 보여준다 (필자의 박사논문, The Rig h te o us and the Sa ge , Sog an g Un ive rsity , 1985, 21 면 참조 ).

德 있는 王과 신하가 일체가 되어 하늘의 마음에 드는 정치를 함으로써 天命울 받게 된 전형적인 예를, 『書經』의 칙서둘은 文王에서 찾았다. 周公이 召公奭에게 힘을 합쳐 成王을 보좌하자고 호소한 칙서 안에 哲王의 모습이 뚜렷이 제시되고 있다. 周公께서 말씀하였다. 君奭이여, 옛날 상제께서는 文王의 德을 거듭 관찰하시 고 위대한 命울 그의 몸에 내리신 것이오. 文王은 자기 몸을 닦고 맡겨진 나라

룰 화합하도록 다스렸으며, 또 號叔, 閉天, 散宜 生, 泰顧, 南宮括과 같은 분이 계셨소… ••• 이들이(文王울) 도와 德울 굳게 하고 天威를 아는 데 나아갔으니, 그때에 文王의 밝음이 상제에까지 보이고 들리게 되어, 殷의 天命울 물려받게 된 것이오 .20)

20) 公日 君럿 在昔上帝割 申勸寧王之德 其集大命于歌島 惟文王尙克修和我有夏 亦有 若陳叔 有若閉天, 有若散宜生, 有若泰亂 有若南宮括 •••••• 亦惟純佑, 秉德迪知天威, 乃惟時昭文王, 迪見昌聞于上帝, 惟時受有殷命哉(「君奭」, HYI, 340~443 줄).

王과 관리들에게 요구된 德, 혹은 哲이라는 도덕적인 지혜로움이 인간의 노력에 따라 커질 수도 있고 없어질 수도 있다는 바로 여기에, 周公이 확립 한 周文化의 인문주의적 성격의 핵심이 있었다. 한 王朝 안에 德의 성쇠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도 이런 변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聖人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狂人이 되고, 狂人이라도 생각을 하게 되면 聖人 이 된다 .21) 여기에 언급된 〈聖〉이란 〈哲〉과 같은 의미로 『書經』과 『 詩經』에서 哲王과 聖王은 王의 理想像울 지칭하는 용어로 함께 쓰인다 .22) 聖의 반대어인 狂이 란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무절제에 빠져 德을 잃은 상태를 말했다. 聖과 狂의 차이를 가져오는 〈생각함〉, 혹은 노력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여기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대체로 王이 노력해야 될 일은 아래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위로는 제사를 정성껏 지내는 일이었다. 殷末의 王은 狂의 대표로서, 향락에 빠져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않았으며 백성을 편안하

21 ) 惟聖周念作狂, 惟狂克念作聖(「多方」, HYI, 364~315 줄). 22) 哲이라는 글자는 甲骨文에는 보이지 않으며, 聖은 릭f 의 형태로서 큰 귀를 가지고 옆에 입을 지닌 사람의 모습이라고 해석되는데, 둘을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李孝定 『甲骨文字集釋』, 3519 면). 哲은 詩에 12 번, 書의 칙서에서 IO 번 쓰여지 며, 聖은 詩에는 9 번, 書의 칙서 부분에서는 2 번 나온다.

게 하지 못했다는 두 가지 죄목이 늘 지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周初의 王들은 이 두 가지 일에 전력하여, 우선 지극한 정성을 들여서 邪祭와 社祭 및 宗廟祭를 드렸고 ,23)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정신을 썼다.

23) 「召話」 l 에 의하면, 洛邑의 땅을 접친 후에 터를 잡고 郞祭로 소 두 마리, 社祭로 소 한 마리, 양 한 마리, 돼지 한 마리를 울렀다 . 「洛諾」 5, 6 에는 洛邑이 완성된 이후 成王이 살피러 왔을 때 文武王에게 소 한 마리씩을 올렸다.

사실 王과 民의 관계는 『 書 經』의 칙서들 안에서 중심을 이루는 주제로서, 殷先哲王, 文王, 武王들에게서 올바른 정치의 모범을 배우게 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康語에서 王은 제후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내린다. 封 이여! 백성들을 吉하고 편안한 길로 인도하여라. ’的先哲王둘의 德 울 생각하 고 그에 따라 백성들을 편안히 다스리려 함은 곧 그분들과 훌륭함을 겨루어 보려는 것이다. 지금 백성들을 잘 이끌지 않으면 그들은 따를 바를 모르게 되 고 그들을 잘 이끌지 않으면 그대의 나라에 훌륭한 정치가 없어지게 될 것이 다 .24)

24) 王曰 封, 奭惟民迪吉康 我時其惟殷先哲王德, 用康父民作求. 短|今民同迪 不適, 不迪 H lj 同政在販邦(「康諾J, HYI, 728~766 줄).

백성들을 이끄는 구체적인 비유로서는 그들이 마치 병(疾)든 것과 같이 불쌍히 여겨주면 스스로 모든 허물(答)을 버릴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린 아이를 보호하듯이(保赤子) 하면 국민이 편안함을 누리게 되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백성을 이끌어주라는 비유는 부자관계를 척도로 하여 王과 民의 관계를 규정한 것이다. 周初로부터 확립 된 이러한 政治理想은 原始儒敎에서는 물론 전통적 중국정치사상의 지속적 인 특성을 이룬다고 하겠다. 『書經』의 인간론을 요약하여 보면 天命울 좌우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 을 하는 것이 民이면서도, 民은 활동적 主體性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고, 天의 관심과 王의 善政울 받는 대상으로서 수동성만을 지닌다. 따라서 民에 게는 타고난 바의 떳떳함인 孝友를 지키라는 것 의에 더 이상의 요구가

제시되지 않는다 『書 經 』 에서 두드러지는 인간 모습은 王 과 그롤 보좌하는 관리들을 위하여 묘사된 哲人 혹은 聖 A 이다. 그러나 聖哲의 성격을 더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 畵 經』의 칙서들과 비슷한 시기로부터 시작하여 그 후 몇백 년간을 내려오면서 쓰여전 『 詩經』의 詩둘 안에 보존된 사상을 고찰하 여야 한다. 金文의 도움을 받으며, 詩와 書를 함께 다물- 때 西周 시기의 인간론을 더 포괄적으로 살필 수 있을 것이다. 3 『詩經』의 聖王사상과 福祿 『 詩 經』 에 보존된 305 편의 詩 중에 半 이상을 차지하는 160 편은 國風으로 서 대부분 서정시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西周시기에서 東周初의 文學연구 에는 값진 자료이지만, 人間像과 天人관계에 대한 복합적인 사고를 그 안에 서 발견할 수는 없다흐 물론 『 論語 』 에서는 風에 속한 詩들에 나오는 육체적 아름다움의 묘사(衛風 「i其奧」과 「學而」 15) 나 여자의 화장술(衛風 「碩人」과 「저記 8) 에서까지 인격을 닦는 修已的 추구에 관한 영감을 발견하고 도덕적 으로 해석한 경우가 적지않다. 이런 면에서 風, 특히 正風으로 중시되던 周南과 召南은 孔 F1 의 교육에서 필수적인 것이었다(『論語』 「陽貨」 s). 그러나 孔子 이전의 사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詩經』을 하나의 역사적 사료로 간주 할 때에, 風은 한계성을 지닌다.

25) 國風 160 편 중에 분명히 역사적 사실로 보이는 내용을 노래한 것은 2 편뿐이다. 곧 廊風의 定之方中과 秦風의 賀鳥논 각기 春秋 僖公 E 빈(기원전 65 8\1)과 文公 6 년 (기원전 621 년)의 사건을 노래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白 )ll 靜, 『詩經硏究』 通論篇 朋友書店, 1981, 278 면) .

『詩 經』 안에서 감정적 묘사뿐만 아니라 사상적 내용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雅와 碩 부분이다. 碩은 왕실의 조상신들을 찬미하는 宗廟祭祀 때의 노래이므로 天命사상과 밀접히 연결될 수밖에 없고, 雅 역시 귀족계급의 노래이기 때문에, 王울 중심으로 한 정치생활의 주인공이 되는 다양한 인간

의 모습들이 묘사되고 있다. 태평성시를 축복한 노래에서는 聖 王 과 그를 통해 국민 전체가 받게 되는 福祿이 주제가 되고, 난세를 한탄한 탄식시들에 서는 愚王 밑에서 고통 당하는 관리의 슬픔과 괴로움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西周 후기부터 쓰여지는 탄식시들은 꼭 있어야만 할 사회적 질서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에 비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雅와 碩의 주제가 되는 德이 있고 지혜로운 王과 그를 통해 오는 福祿에 대하여 살펴보도록하겠다. 『詩經』의 聖王 • 哲王사상 這 「下武篇」(詩 243) 은 天命에 합하여 天下의 모범이 되는 哲王울 디음­ 과같이 노래한다. 後人들이 이어나갈 周나라이기에 대대로 哲王을 모시게 되나이다. 세 분의 임금(三后)은 하늘(天)에 계시고 王께서는 수도에서 짝 지으셨네. 王께서 수도에서 짝 지으시니 대대로의 德울 구하시도다. 길이 天命에 짝하시어 王의 진실됨을 이루옵소서. 王의 전실됨을 이루시어 下土의 모범 (式)이 되시나이다. 길이 효성으로써 조상의 덕을 생각하시어 孝思를 통해 (백성의) 규범(月1j) 되소서 26) 26) 下武維周, 世有哲王, 三后在天, 王配于京, 王配于京. 世德作求, 永言配命, 成王之후. 成王之字, 下土之式, 永言孝思 孝思維 Rll( 시 243, I~3 장). 三后는 大王,王季, 文王울 지칭하고 王은 武王을 지칭한다고 毛傳과 朱子의 集傳은 말하였다. 이 해석을 받아들

이면, 下武는 周초 武王 때에 지어지고 그후 궁중의 향연 때에 계속 노래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각 장의 末句가 그 다음 장 처음에 반복되고 있는 大雅 특유의 문체로 쓰여져 있다( 目加田誠 Mega d a Makoto , 『詩經 • 楚辭』, 中國古典文學大系 15, 平凡社, 1969, 222 면 참조).

下武歌의 처음 3 장을 인용하였는데, 제 1 장은 王 울 찬미하는 부분이다. 거기에 나오는 〈哲王〉이란 용어는 『書 經』에서 익히 본 전문용어인데, 바람 직한 왕을 지칭하는 칭호로서 西周시기에 보편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조상신인 三后가 있는 1 장의 天은 장소를 지칭한 것이지만, 여기에 인용 하지 않은 4 장과 5 장에 반복되는 〈受天之祐〉의 天은 最高神을 지칭하여, 天의 복록을 받기를 王에게 축원하는 말이다. 『 詩經 』 에서 〈天〉이라는 용어 는 이렇게 蒼空울 지칭하기도 하면서, 대부분의 경우에 最高神으로 쓰이고 있는데 ,27) 사실 이렇게 다층적인 天의 용법은 후대에까지 계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문장의 내용에 따라 의미가 결정된다.

27) 『詩經』에서 天은 22 편의 詩에 139 번 나오는데, 그중 23 번은 창공의 의미로 쓰이고 나머지 116 번은 최고신의 의미를 지닌다. 帝나 上帝는 40 번 나와서 天과 帝가 일치하 면서도 帝가 훨씬 적게 쓰아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東周시기에 가면 더욱 현저해서, 실제로 춘추시기 이후로 최고신의 명칭은 天이었다.

2 장과 3 장에는 哲王이 하는 일이 묘사되어 있는데, 크게 3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 첫째,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德울 구하여 天命에 配合함으로써 왕답게 되는 일이다. 임금이 된다는 것은 配命 혹은 配天하는 것으로, 甲骨 文에서의 賓帝가 사후에만 이루어지던 것과 비교하여 보면, 임금의 위치가 그만큼 격상되었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配天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王은 왕위에 오름으로써 즉석에서 임금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임금다워지기 위해서 일생 동안 힘써야 된다는 점이 哲王의 理想이 지닌 의미요 묘미이다. 〈成王之半〉, 곧 임금이 지녀야 할 진실함, 또는 미쁨(信) 울 이루어야 된다는 말이다 . 아렇게 임금이 전실하게 될 때 자연히 흘러나오는 결과는 哲王의 두번째 특성, 곧 天下의 모범 (下土之式)이 되는 것이다. 임금이 임금다워질 때 백성 들은 그를 본받게 되고, 그때 비로소 임금은 백성의 신임을 받을 만한 德.,

곧 도덕적 인 힘 char i sma 을 가지게 된다. 德化가 이루어지면 그에 따라 사계 절의 변화 역시 순조롭게 돌아가리라고 생각하였다. 후에 언급할 탄식시들에 서 일식 등의 자연적인 변괴를 정치의 무질서에서 오는 것이라고 보는 것 은, 王이 人間事뿐만 아니라 下土 전체를 바르게 다스려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는 이러한 전제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와 감이 무거운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王은 옛날의 哲王둘을 거울로 삼아야 한다. 곧, 이 詩에서 제시되는 셋째 요소는 〈孝思〉라는 구체적 실천 방법이었다 . 孝思란 孝로써 선조둘에게 제사를 지내고, 思로써 그들의 업적 울 되새겨 그들을 본받음을 말한다 .28) 孝란 자손을 조상과 연결시키는 끈과 도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孝는 德과 더불어 임금이 갖추어야 될 대표적 덕목이었고(〈有孝有德〉, 大雅 「卷阿」 5), 孝子를 둔디는 - 것은 君子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복이라고 생각되었다(大雅 「槪目f」 5 등). 孝는 살아서의 부자관계를 묶어줄 뿐만 아니라 사후에까지 지속되는 것으로, 사실 『 詩經』에서 孝 는 대부분 제사와 연결되어 언급되고 있다 .29) 자손이 孝로써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드릴 때 조상신들의 축복을- 받으리라는 믿음은 확고한 것이었다 (周碩 「載見」, 小雅 「天保」, 魯碩 「洋水」 등). 결국 孝란 儒敎 성립 훨씬 이전에 가부장제 속에서 이미 확립되어 있던 중국 고대의 기초사상으로, 孔子사상의 특칭을 孝에서 찾으려는 것은 잘못아라고 하겠다. 孔子는 이미 존재하던 孝사상을 仁을 중심으로 한 그의 해석체계 안에 수용하여, 仁울 이루는 첫단 계로서 孝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을 뿐이다.

28) 孝思에 대한 해석으로 朱子는 잊지 않는 것(不忘)이라고 보아 王은 孝를 통해 四方 의 法이 될 수 있다고 하였고, 古注는 孝心으로써 三后의 행한 바를 생각하여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B. Karl gr en 은 로 번역하였다 . 『詩經』에서의 孝가 특히 제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思의 의미가 지닌 조상의 행적을 마음에 품는다는 뜻을 살려 줄 필요기· 있다. 29) 『詩經』에 孝는 血선 나오는데 모두 조상과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다. 그중 살아서의 부자관계를 말하는 것은 大雅, 「卷阿 F} 「匠醉」 두 번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제사 속에 쓰인다.

哲王 혹은 聖王이라는 王의 理想은 『書經』에서와 마찬가지로 『 詩經』에서

도 王을 보좌하는 정치인들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다. 大雅 「魚民 篇 」(詩 260) 에는 仲山甫라는 재상이 홀아비와 과부를· 업신여기지 않고, 강포한 무리를 두려워하지 않아서 시바를 밝히며, 지혜(哲)로써 자기 몸을 보존하고 임금을 섬긴다고 그를 칭송하고 있다. 그런데 이 詩의 1 장에 仲山甫의 탄생을 알리 는 序文이 소개된다. 이 서문은 1 儒家 가 성립되기 전에 어느 지식인이 기록한 가장 철학적인 발언이리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30)

30) 大雅 「魚民」 맨 끝에 〈吉甫作踊〉이라고 저자를 밝히고 있는데, 이런 예는 「綴高」 편 의에는 없어서 특이한 것이다. 후에 첨가되어울 가망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나, 두 詩가 다 8 句씩으로 된 형태에 맞아서, 西周 말이나 東周初에 개인적 지성 인들의 사고가 상당히 표현되는 시기의 작품인 듯하다. 孟子가 「告子」 上에서 이 詩를 인용하였기 때문에 널리 알려진 시이다.

天 이 모든 사람 낳으셨으니(生) 사물마다 원리(fl l j)가 있네. 백성 (民)들은 떳떳함( 柱 )을 품고 있고 올바른 德을 좋아한다네. 天 은 周나라를 두루 살피사 세상에 밝음이 널리 퍼지게 하시네. 이 天子를 보우하도록 仲山甫믈 낳으셨네(生 ).3 1)

31) 天生魚民, 有物有則 民之秉葬, 好是강잤惡 天監有周, 昭假于下. 保炫天子, 生仲山甫 (시 260, HYI, 71 면). 1 中山甫는 廣王의 폭정 이후 西周를 중흥시킨 宣王 때의 재상인 듯하다(『國語 』 , 『周語』 및 『竹書紀年』 참조). 丁若鏞은 〈天生蒸民〉의 生올 造化之理 료 〈生仲山甫〉의 生을 卷祐之意로 구별하여 天의 안배성을 분명히 드러내었다(『詩經 諸義』 III, 34 가) .

民이 천성적으로 떳떳함을 품고 있기 때문에 올바른 것을 좋아하게 마련 이라는 말은 『書經』 「康語」에서도 나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天生魚民, 有物 有ff l J〉이라고 이론화하여 보편성을 더하게 된 점에서 사상적으로 한 단계 더욱 발전했다고 하겠다.

『書 經』에서와 마찬가지로 『詩經』 에서도 天에 대한 이해는 간접적이어서 天 그 자체를 칭송하기 위한 詩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天은 왕권의 기초 요 규범으로, 또 民이 천성적으로 지니는 인륜의 근원으로 중시되고 있다. 위의 詩에서 天이 蒸民을 生했고 또 仲山甫를 生했다고 표현했는데, 〈生〉 이란 존재의 원인, 곧 기원을 나타내는 글자로 商碩 「玄鳥」(詩 303) 에서 天이 玄烏를 명하여 商울 낳아 天命을 줄 때에도 같은 글자가 쓰였다. 따라 서 天이 仲山甫를 낳아 세상을 더 밝게 다스리도록 했디는- 것은 王뿐만이 아니라 그를 보좌하는 명철한 정치적 인물들 역시 天의 命을 받은 것이라는­ 뜻이 간접적으로 내포되어 있어서, 天命사상이 은연중에 그만큼 확대되었다 고하겠다. 이렇게 王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인간에 대한 사고가 점점 확대되면서 哲王이나 聖王 대신에 哲人과 聖人이라는 용어가 쓰여지고, 관리들을 聖人과 愚人으로 분류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 예를 大雅 「桑柔」(詩 257) 에서 볼 수있다. 聖人이란 百里 앞을 바라보아 헤아리는데, 저 어리석은 사람(愚人)들은 오히려 희락 속에 미쳐(狂)가누나.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텐데, 어찌하여 두려워 피하고만 있는가 ?32) 장래를 내다볼 수 있는 명철한 사람둘을 聖人이라고 불렀는데, 〈聖〉이라 는 글자는 갑골문에서부터 귀가 커서 많은 것을 듣고 헤아릴 수 있는 · 능력 을 가리켰다 .33) 『書經』 「多方」에서 인간은 사고 여하에 따라 聖도 될 수 32) 維此聖人. 晴言百里. 維彼愚人. 覆狂以喜. 匠言不能. 胡斯長思(시 257, IO 장, HYI, 69 면). 33) f;jf 이莘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큰 귀를 가진 사람이 서있고 앞에 작은 입이

그려져 있다. 귀가 크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잘 들어 통찰한다는 뜻이었을 것으로 본다 (李효, 3519 면) . 「說文式 7 哲을 知루 聖올 通으로 풀이하였다 . 穆公鼎, 克鼎 曾伯筑 등에 새겨진 金文 속에서도 王이나 재상을 聖哲로 묘사하고 있어서 『詩經』의 용법과 갇다.

있고 狂도 될 수 있다고 하여 聖과 狂이 대조되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聖과 愚가 대립되어 두 가지 종류의 인간을 지칭하였다. 그러나 愚의 내용은 역시 환락 속에서 도리를 잃어버려 狂하게 된 상태라고 표현하고 있다. 곧, 愚와 狂은 같은 사실을 지칭한 것으로 聖의 반대 개념임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聖人은 바람직한 인간을, 狂人이나 愚人은 부정적인 인간의 모습을 가리켰다 고하겠다. 儒敎에서는 물론, 중국역사상 가장 중요한 人間理想像인 〈聖人〉이라는 칭호는 결국 詩書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춘추전국시 대에 와서 哲王이나 哲 A 이라는 용어는 거의 쓰이지 않고, 聖王과 聖人이 최고의 인격자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정착한다. 그러나 詩書에서의 聖이나 哲은 어디까지나 王과 주위에서 그를 보좌하는 재상들에게 국한된 지배자들 의 정치적 능력을 우선적으로 지칭한 것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언 그것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확대되고 인격의 완성으로 심화되 는 일은 儒敎의 성립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중국의 중십적 인간상이 神이나 예언자도 아니요, 해탈을 체험한 覺者도 아닌, 임금의 理想에서부터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중국의 인간론이 지닌 강한 정치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34) 周碩 「皇(詩 282) 에서는 周의 선조들을 宣哲한 인물이었다고 묘사하였고` 商碩 「長發」(詩 304) 에서는 商의 임금들을 濬哲하고 聖敬하였다고 칭송한다. 大雅 「仰」 • (詩 256) 에서 庶人之愚와 哲人之愚가 비교되는 것을 보면, 哲 A 이 庶人과 대조되는 王 및 지배자를 가리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詩經』의 福祿사상 孔子의 사상체계에서는 거의 배제되지만, 『詩經』의 聖王사상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 福祿의 개념이다 .35) 王 이 백성을 편안케 히는- 德을 실천 함으로써 天으로부터 기대하던 것은 福이었고, 孝 를 다해 제사를 지냄으로써 조상신들에게 기원하던 것도 福이었다. 『 詩 經』 에서 노래하는 福이란 王과 왕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王 이 〈余一人〉으로서 대표하고 있는 국민 전체 의 안녕울 위한 것이었다.

j5) 李明識 「詩經에 나타난 福사상 연구」(西江大, 석사논문, 1984) 67 면 참조. 『論語』에 서 福이란 글자는 전혀 쓰이지 않으며 祿만이 4 장 속에서 5 번 나오는데, 의미가 뚜렷 한 「爲政」 18 과 「衛靈公」 32 를 종합하여 보면, 인격적 • 학문적 공부가 있을 때 복록 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孔子 고유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天이 임금을 보우하여 안정케 하시고 익은 곡식을 풍성케 하시니 바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어 天으로부터 百祿을 받으시도다 . 임금께 큰 福울 내리시오니 많은 나날들이 오히 려 모자라시 리 . ..... . 吉한 날 받아 목욕재계하고 제물을 차려 孝룰 다해 제사 울리니 봉, 여름, 가을, 겨울 제사 先公先王께 드리울 제 홈향하신 神둘은 이르시기를 〈그대 에게 萬 壽 無 5릎 을 주노라〉 神둘이 이르시어 多福울 임금께 주시는도다. 국민들의 소박한 원이란(民之質) 나날이 먹을 음식이 (충족되는 것), 수없이 많은 모든 百姓들이 널리 임금의 德울 위하는도다 .36)

36) 天保定爾, 伴爾歡穀 馨無不宜, 受天百祿, 降爾退福, 維日不足……吉錫 爲緯 是用孝

亨, 禮祠然音,于公先王, 君曰卜爾, 萬壽無福.神之弓矣, 胎爾多福, 民之質矣, B 用飮食, 登黎百姓, f닮爲爾德(시 166, 2 • 4 • 5 장 HYI, 35 면). 『十三經注銃』에서는 마지막 부분을 많은 백성이 널리 임금의 德울 칭송하고 그것을 본받는다고 풀이하였는데, 여기에서는 가장 기초적인 의미를 택하였다.

위에 인용된 노래는 小雅 「 天保 」( 詩 166) 의 2 장과 4, 5 장이다. 이 詩는 모두 6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의 3 장은 天과 임금과의 관계를 노래한 것으로 天이 임금에게 안정과 풍성함 등 百祿울 내려 주시기를 축원하는 내용이다. 뒤의 3 장은 임금이 조상신들에게 사계절의 제사를 드리고, 그 제사를 흠향한 神둘이 자손인 임금에게 多福울 내리는 장면과 백성들은 王 의 福에 의지하여 충족한 음식을 얻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왕권과 밀접히 연결된 지배층에서 이루어진 雅와 碩에서는 자주 언급되는 福祿이, 國風에서는 단지 한 번, 그것도 周南 다홍木篇」( 詩 4) 에 백성들이 임금의 복을 축원하는 노래 안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西周 시기의 백성들은 복을 직접 받아야 되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나라의 모든 福은 임금을 통해서 국민전체에게 확산되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준 다. 王 이 天命을 보존하는 길이 德으로써 백성을 편안하게 이끄는 것이었다 면, 조상신을 중심으로 한 百神과의 관계에서는 百禮가 갖추어진 제사를­ 울리는 일이 중요시되었다. 詩에서 百禮라고 할 때에는 제사에 요구되는 온갖 式禮라는 의미이다(小雅 「賓之初延」 2 장과 「楚茨.J 4 장 등). 神들에게 바치는 제물을 祭器에 울려놓은 모양을 그린 글자의 형태에서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37), 禮의 본래적 의미는 神둘과 인간을 이어주는 제사의식에서 유래된 것아었다는 것을 『詩經』에서 분명히 할 수 있다. 시대적으로 늦게 쓰여전 탄식시 안에서 사회적인 上下의 禮法(小雅 「十月之交」 5 장과 「빠風」과 「相鼠」)

37) 王國維는 禮의 본래 글자 모양은 祭器안에 玉울 두 개 울려 놓은 형태라고 풀이하 였다(觀堂集林 卷六, 15). 天과 百神의 관계 및 百神의 개념에 대하여는 필자의 논문 「中國宗敎傳統의 基本構造와 特性」, 〈宗敎硏究〉 2(1 9 86), 48~53 면 참조. 禮라는 단어 는 『詩經』에 10 번 쓰일 뿐으로 주로 儀式的인 의미를 지니었고 아직 그 개념이 인간 생활 전체에 적용될 만큼 보편화되지 않고 있다.

이라는 새로운 용법으로 禮가 쓰이는 예를 두 번 발견할 수 있기는 하지 만, 대부분의 경우에 r 詩經』에서 禮란 제사의식상에 차려야 할 예법이라는 원초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禮라는 개념이 인간관계에까지 확대되어 그 중요성을 과시하게 되는 것은 춘추시대에 이르러서이며, 탄식시에 나오는 두 번의 예의도 춘추 초기에 쓰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 詩經 』 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禮라는 개념이 원래 제사의식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原始個敎의 禮사상 이해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 詩經 』 의 탄식시들 『詩經』에 보존된 305 편의 詩중에서 약 20% 를 차지하는 72 편의 詩 안에 天이 언급되는데, 그중 약 반수가 사회 혼란을 한탄하는 탄식시들이다촨 대부분 雅에 소속되는 탄식의 詩들은 그 자체로 독특한 장르를 이루고 있는 데, 기원전 9 세기에서 8 세기에 이르는 西周 멸망 전후에 있었던 사회의 부조 리와 부패를 고발하는 내용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小雅 「雨無正」 (詩 194) l 장과 3 장을 인용하겠다.

38) 天이 언급되는 72 편의 詩를 다시 분석해 보면 碩에서 15 편 (40%), 雅에서 51 편 (50 %), 風에서 6 편 (4% )이다. 특히 風에 나오는 6 편의 詩는 모두 탄식시들로서 체념, 원망, 술품 등의 감정을 天을 향하여 토로하고 있는 것들이다. 天과 王權이 얼마나 밀접히 연결되었는가를 위의 확률을 동해서도 알 수 있다.

넓고 넓은 하늘(昊天)조차 그 德을 베풀지 않으심인가. 죽음과 기근을 내리시어 천하를 휩쓸어 버리시네 가혹한 하늘(롯天) 재앙을 내리시니 불쌍한 이 백성 돌보려고 생각도 않으십인가. 죄 있는(有罪) 저 무리를 내버려두고 도리어 그 허물( ~ ) 숨기어 주며

이같이 아무 죄도 없는(無罪) 사람들은 모두 죽음의 구렁에 빠뜨리심 인가 . 아 어인 일인가 넓은 하늘(昊天)이여. 옳은 말은 믿어지지 않고, 저렇게 치달아 가기만 하여 멈추어 설 줄을 모르는도다. 아 세상의 모든 군자들(百君子), 각기 그대의 몸을 공경 (敬)스럽게 하라. 어찌하여 서로를 두려워 (長)하지 않더니 天마저 두려워 (長)하지 않는 것인가 .39) 이 詩는 無罪한 사람이 마땅히 福울 받아야 되고 有罪한 사람은 고난에 빠져야 된다는 도덕적인 전제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을 한탄 하며, 自重하는 가운데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小雅 「小弁」(詩 197) 에도 〈어째서 天으로부터 벌(寧)을 받는지, 내 罪는 무엇인지 알 길이 없네〉4-0) 하며 天울 향해 호소하는 탄식이 나온다.

39) 浩浩昊天,不駿其i底 降喪機鎖 斬伐四國 톳天疾威, 弗慮弗圖 舍彼有罪, 匠伏其寧, 若此無罪, 治肖以錦……如何昊天, 群言不信, 如彼行遇, 則磨所 •. 凡百君子, 各敬爾身, 胡不相異 不長于天(시 194, I • 3 장, HYI, 45 면). 治晋以鏞의 번역은 朱子의 「詩集 傳」의 해석을 따랐다. 天 앞에는 여러 가지 형용사가 붙고 있는데, 天의 묘사인 동시 에 때에 따라 시인이 체험하는 天의 다양한 품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 昊天 (Vast Heaven), 蒼天 (Blue Heaven), 上天(High Heaven), 皇天 (Grea t Heaven), 톳天 (Severe Heaven) 등이다. 영어 번역은 B. Karl gr en 의 것이다 (The Book of Odes, Sto c kholm ; Museum of Far Easte r n Anti quities, 1974). 40) 何于天, 我罪伊何(I장).

복록이 종국적으로는 天으로부터 오는 것처럼 재앙과 벌도 끝으로는 天으 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믿어졌기 때문에, 탄식과 호소의 마지막 대상 역시 天일 수밖에 없다. it B 風 「北門」(詩 40) 은 어느 관리의 한탄을 노래한 것이 다.

北 r, 을 걸어 나오니 근심스런 마음 끝이 없네. 곤궁에 처해져 가난하게 되었으니 내 고통을 알아줄 이 없네. 이미 끝난것 天이 실로 이렇게 한 것이니 말을 해서 무엇하리 .4 1)

41) 出自北門, 憂心殷殷 終冥旦貧, 莫知我難. 巳焉哉, 天實爲之, 謂之何哉(I장). 丁若鏞은 그의 「詩經講義」에서 〈天實爲之〉란 탓울 임금에게 돌리지 않고 天命에 맡기는 忠厚 한 뜻을 드러낸다고 설명하였다.

모두 3 장으로 된 이 노래의 첫째 장을 인용했는데, 마지막 결론인 〈天實 爲之, 謂之何哉〉는 매장마다 3 번 반복되고 있어서 후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그것을 하늘이 정한 것으로 여겨 체념하고 있는 모습을그린 것이다. 『詩經』 안에 나오는 탄식시들은 그 결론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하나는 國風이나 雅의 상당수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늘도 무심하다는 한탄이나 원망, 혹은 체념으로 끝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인간사, 특히 정치 에서 일어나는 모든 재앙은 부패된 인간들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그 책임을 인간에게 돌리면서, 사람은 하늘의 뜻을 다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 에, 보상이 없을 때에도 계속 선을 하도록 자신을 삼가야 된다는 결론이다. 둘째 결론을 내리고 있는 詩들의 숫자가 소수이긴 하지만, 사상적으로 심화 된 것이고·儒敎사상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앞에 인용한 雨無正과 더불어 이와 같은 사상을 노래한 것으로 小雅 「十 月之交」(詩 193) 를 들 수 있다. 十月之交의 1 장에서 3 장까지는 日 食과 月 食, 지진 등의 자연재앙을 묘사하여 혼란된 정치상에 대응하는 자연의 무질 서를 그림으로써 탄식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4 장에서 6 장까지는 부패한 관리 들의 이름과 직책을 하나씩 나열한 후에, 그들이 겉으로는 聖人인 체하며 致富해 놓은 재물과 권력의 남용을 묘사한다.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7 장에서

詩人은 다음과 감이 재앙의 원인을 규명한다. 〈아래 백성이(下民) 받는 재앙 은 天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모여서는 서로 좋게 말하지만 돌아서서는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에게서 오로지 나온 것일세.〉 42) 大雅 「肥 r0 」(詩 264) 도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어지러움은 天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婦人으로부터 생기는 것일세.〉 43) 여기서는 권력 주위에서 정치를 농락하던 여성들의 부패를 단죄한다. 그런데 이 詩에서 이런 부인들을 〈哲婦〉라고 풍자하고 있는 것을 보아, 哲의 의미 또한 애매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역시 小雅 正月(詩 192) 에도 〈모두들 나는 聖人이라고 말하니, 까마귀의 암수를 누가 알겠는가〉 44) 하고 의 문을 제기한다. 周初에 성 립된 哲이나 聖이라는 王과 그를 보좌하는 관리들을 위한 人間像이, 사회적 혼란 속에서 악용되고 그 이미지가 혼들리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42) 下民之덮 匠降自天. 增깥背僧, 職競由人 (7 장 하반부). 43) 亂匠自天, 生自婦人 (3 장 중간부). 44) 具曰予聖 誰知烏之雄雄 (5 장 하반부).

『詩經』 의 탄식시들은 周初로부터의 天命사상과 그에 기초를 둔 王 중심적 인 인간관이 정치적 혼란 속에서 점점 생기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어떻게 보면, 天命사상의 기반을 이루던 天신앙 자체가 흔들리는 사상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고도 하겠다. 넓은 하늘은 공평하지 못해 이런 곤궁과 어지러움을 내리시고, 넓은 하늘은 은혜롭지 못해 이런 큰 변괴를 내리시었네 .45)

45) 昊天不傳, 降此羅話 , 昊天不惠, 降此大庚(小雅 「節南山」;詩 191 ;5 장 상반부). 갇은 시의 3 장, 6 장, 8 장에도 하늘의 무정함을 한탄하고 있다. 朱子는 偏울 均, 繩올 窮, 認울 亂, 炅를 乘라고 풀었다 .

여기서 詩人은 天이 공평하지도 은혜롭지도 못하다고 평함으로써 사회적 무질서에 대한 책임을 天에게 돌리고 있다. 天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

울 편안하게 이끌고저 한다는 周 초기의 신앙은, 그렇다면 지속되는 정치사 회적 부패를 天이 왜 내버려 두는가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 다. 그래서 『詩經』의 탄식시들 속에서 백성이 곤궁에 처해 하늘을 쳐다보고 호소하건만, 어찌하여 天은 善惡을 분별하지 않으려는 듯 대답이 없는가 하는 한탄이 나오기도 하고, 天命이란 인간의 머리로는 꿰뚫어(徹) 볼 수 없는 것이라고 결론 내림으로써 天의 초월성을 인정하기에 이르기도 하였 다 . 46)

46) 小雅 「正月」(詩 192), 4 장과 小雅 「十月之交」(詩 193), 8 장 참조. 視天夢夢에 대한 해설은 朱子의 것을 따랐고, 天命才瑞t의 徹은 朱子의 均보다 毛傳의 道 내지 Kar- l gr en 의 〈imp ene tr able 〉을 택했다.

이러한 사상적 위기는 天 신앙의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 하였고 인간 의미 의 심화를 요구하였다. 춘추시기에 들어가면서 정치의 중심이 周 왕실이 아닌 강력한 제후국들로 이양되었다. 제후와 제후국들을 실제로 움직이던 大夫둘을 대상으로 한 인간론이 禮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펼쳐지는데, 『 春秋 左氏傳』과 『國語』를 통하여 그러한 변화를 살펴볼 수가 있다. 4 『春秋左氏傳』의 禮 사상 『春秋左氏傳』은 현재는 魯의 年代記인 『春秋』(기원전 722~481 )의 주석서로 보존되어 있지만, 원래는 춘추시기에 북중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晋의 연대기를 기본 사료로 하여 기원전 때]기경에 편찬된 교훈적 역사서 d i dac ti c hi st or y라는 것을 1 장에서 고찰하였다. 『左氏傳』 혹은 『 左傳』은 역사적 사건 과 등장인물의 연설문을 찰 연결시켜서, 그 사건의 교훈적 의미를 연설문을 통하여 전달하고 있다. 周와 제후국들에 보존된 연설문을 주로 수집한 『國 語』는 『左傳』에서 볼 수 있는 역동성은 없으나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것으 로 『左傳』을 보조할 수 있는 東周시기의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 『春秋左

氏傳』과 『 國語 』 모두가 역사적 기록과 연설문의 수집이기 때문에 思想울 주제로 하여 체계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儒敎가 성립되는 춘추시기를 알려주는 유일한 사료라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닌다. 『 左傳』과 『國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理想像은 聖人과 賢人으로서, 聖人 의 개념은 詩書의 王 중심적 聖人觀울 계승하면서 발전시킨 데 비하여, 賢人 은 東周시기에 성립된 관료귀족들을 위한 새로운 인간관의 출현이라고 하겠 다 .4 7) 『 左傳』을 보면 춘추시대의 제후들과 귀족관리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고, 실제로 그들의 정치적 역량과 도덕성에 의하여 나라의 운명이 좌우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된 현실에 부응한 것이 賢人이라는 이미지로서, 賢人울 높이는 것은 君主의 으뜸가는 德으로 강조되고 있어 聖人과 賢 A의 개념이 서로 보완적인 것을 알 수 있다.

47) 『左傳』에 聖人은 26 번 쓰이는데, 哲人은 단지 2 번, 그것도 시경을 인용할 때에만 언급된다. 賢人은 『左傳』에 16 번 언급되고 있는데, 『左傳』보다 후에 쓰여진 「公羊 傳」과 「穀梁傳」에는 68 번으로 그 사용 도수가 증가되고 있어서 전국시대 이후로 尙賢 사상이 확대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聖王의 정치란 어떠한 것인가를 『 左傳』의 교훈사적적인 관점에서 보여주고 있는 좋은 예를 桓公 6 년(기원전 706 년)의 기록에서 살펴보겠다. 楚나라와 隨나라 사이의 전쟁을 배경으로 하여 전개되는 이 이야기는 디옴­ 과 같다. 南方의 大國이었던 楚가 楚보다는· 국세가 약하지만 漢東지방을 주도하던 隨롤 침범한 후에 화평을 제의했다. 隨나라의 使臣이 왔을 때 楚는 일부러 軍力을 작게 보여 隨룰 유인하고자 했다. 隨의 사신이 돌아와 楚의 군대를 추격할 것을 제의하여 君主도 그것을 허락하려 하였을 때, 季梁이라 는 隨의 賢臣이 聖 A 의 정치론을 제시하여 그 계획을 포기하게 한다. 〈天은 지금 楚나라를 돕고 있습니다. 楚가 약하게 보이는 것은 이쪽을 꼬이 려는 계책이니 군주께서 어찌 성급하게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臣이 듣기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작은 쪽에 道가 있고 큰 쪽이 그릇 된 경우에 한하는 것입니다. 道라고 하는 것은 백성에게 충의를 다하고(忠於

民) 神에게 신의를 지키는( 信於神 ) 것입니다. 윗사람이 백성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을 충의라고 하고, 祝史가 祭文을 읽는 바가 사실에 맞는 것울 신의라고 합니 다. 지금 백성은 굶주린 배를 안고 있는데, 임금은 그 원하시는 바를 다하고 계시고, 祝史는 祭文을 거짓으로 꾸며서 神을 제사지내고 있습니다. 臣에게는 楚를 친다는 것은 당치않은 것 같습니다.〉 隨侯가 말하기를, 〈내가바치는 희생 은 험없이 완전하고 살찐 것이며 제사용 곡식도 풍부한데, 어째서 神을 속인다 고 말하는가?〉 〈무릇 백성은 神의 祭主입니다(夫民, 神之 主 也). 그러므로 聖王은 먼저 백성(의 생활)을 충분하게 해주고(先成民), 그 후에 神에게 힘을 기울이는 일을 다했던 것입니다……〉 48 )

48) 天方授楚 楚之風 其誘我也. 君何急焉. 臣聞小之能敵大也, 小道大浩 . 所謂道忠於民而 信於神也. 上思利民, 忠也. 祝史正辭, 信也 . 今民般而君退欲, 祝史短擧以祭. 臣不知其可 也 公 B. 吾佳往肥ft, 菜盛豊備 何JIlJ不信 對曰 夫民, 神之主也. 是以聖王先成民而後 致力於神(『春秋經傳』, 桓公 六年 春 正月, 左附, HYI, 31 면). 『春秋左氏傳』, 權五悟 譯, 弘新文化社, 1976, 53~54 면 ; 『春秋左氏傳』上, 文葉奎 역, 明文堂, 1985, 113~115 면 ; 楊伯峻의 『春秋左傳注』(中華書局, 1981), 111 면 ; 竹內照夫의 『春秋左氏傳』 上 (全譯漢文大係 4, 集英社, 1983), 81~84 면 참조.

이 유명한 연설에서 핵심을 이루는 부분은 聖王의 정치를 〈忠於民〉과 〈先成民〉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보통 忠은 아랫사람이 웃사람에게 바치는 충성이라고만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서의 忠은 분명히 임금이 국민에게 해야 할 충의, 곧 백성의 이익을 생각하면서 정치를 하는 성실함을 일컫는다. 또한 제사의 祭主가 되는 국민을 잘살게 해주는 것이 제사의식보다도 앞서 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 左傳』은 民에 대한 강조에 있어서 詩書를 능가하 고있다. 같은 맥락에서 禮의 핵심은 儀式울 아는 데 있지 않고 백성을 아껴서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는 것에 있다는 사상이 『左傳』 여러 군데서 보인 다. 昭公 5 년(기원전 537) 의 기록에서 대표적인 예를 찾을 수 있다. 魯의 中軍이 폐지되면서, 一軍은 季氏가 私有하고, 다른 一軍은 孟孫氏와 叔孫氏 가 반씩 나누어 私兵化함으로써 제후의 힘이 더욱 약화되고 三桓의 횡포가

심화되었다. 그해에 昭公이 晋울 방문하여 邪迎에서부터 예물 바치는 데 이르기까지 모든 예의절차에 어긋남이 없었다. 이를 보고 晋侯가 昭公은 禮에 밝다고 칭찬을 하자, 女叔齊라는 貸臣은 禮의 본뜻은 다론 데 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儀式이며, 禮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禮 라는 것은 나라를· 지키고、 그 政令울 행하여 그 백성(民)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禮 의 本末은 이런 데에 있는 것인데, 한낱 의식을 익히기에 급급합니다. 禮에 밝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이 아니겠습니까 ?49)

49) 是儀也, 不可謂禮 禮所以守其國, 行其政令, 無失其民者也……禮之本 末將於此平在, 而層層焉習儀以函 言善於禮, 不亦遠子(昭公 五年, 春, 公如晋, 左, HYI, 35~).

r 詩經』 에서 禮란 宗禮 百禮 등 제사의식에 관계된 의식적 예법을 지칭하 였고, 晋侯가 魯侯룰 칭찬한 것도 이러한 의마에서였다. 그러나 女叔齊는 〈儀〉와 〈禮〉를 구분하여, 禮의 의미를 한 사람의 행위 전체를 포괄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러한 禮사상의 심화는 춘추시기를 특칭짓는 가장 중요한 사상적 발전이었다고 하겠다. 『左氏傳』 에서 禮란 인간생활 전체의 틀이며 모든 사회관계의 규범이라는 확대된 개념을 갖는다. 禮의 중요성을 알기 위해 禮와 다른 덕목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孝는 禮의 시작이고(文公 2 년) 敬은 禮룰 싣는 수레이며 (僖公 II 년), 忠信은 禮룰 담는 그릇이고 卑讓은 禮룰 실천하는 으뜸되는 방법이 된다(昭公 2 년). 義의 규범이 되는 것 역시 禮이기 때문에(僖公 28 년), 亂릎는 모든 德의 지침이며 윤곽으로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僖公 27 년). 따라서 禮는 한 인간의 근간(幹)이어서(成公 13 년), 禮를 따르면 그 사람의 일생은 반드시 성공하고、 禮를 잃어버리면 망하게 된다고 보았다(昭公 25 년 ;「周語」中 5 참조). 禮는 또한 上下의 관계 등 모든 인간관계를 묶어주어 조화를 가능 케 히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의 근간(幹)이기도 했다(僖公 II 년). 따라서 禮를 알아야 백성을 잃지 않고 나라를 올바로 이끌 수 있다고 하였다(昭公 26 년).

더 나아가서 天人관계를 바르게 해주는 것도 禮라고 보았다. 天의 규범과 명령이 禮에 요약되어 있다고 보았으므로(昭公 13, 25 년), 禮를 실천함으로써 인간은 天에 순종하게 되고(文公 15 년) 天의 축복을 받게 된다(襄公 28 년) 고 결론내렸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 左傳』에 언급되고 있는 禮는 개인과 사회 및 天人관계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며, 春秋시기에 이르러 禮가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중십사상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하겠다. 『左傳』은 임금, 재상, 신하 등 춘추시기에 등장하는 정치가들에게 禮라는 규범을 적용하여 인간으로서의 전체적 판정을 내린다• 곧, 어떤 사람의 행동 이 〈有禮〉하다든가 〈非禮〉 혹은 〈無禮〉하다는 말은, 그 사람 전체에 대한 종합적 평가일 뿐 아니라 장차 그가 홍하거나 망하리라는 전조가 되기도 한다 .50) 楚나라의 교만한 장수 子玉은 無禮한 사람으로 소개되는데(晋語 4, 18), 결국 패전하여 자살하고 말아(僖公 27, 28 년) 『 左傳』의 교훈적인 역사 관을 실증하는 대표적인 예가 된다.

50) 『左傳』에는 〈禮也〉가 83 번, 〈非禮也〉가 39 번 나온다. 成公 13 년에 보면 그 당시 晋侯 가 보낸 部綺의 행동이 無禮한 것을 보고 〈郁氏는 망할 것이다. 禮는 몸의 줄기요 敬은 몸의 근본이다. 郁子는 근본이 없다〉라고 평한 것을 읽을 수 있다.

城深의 전투에서 子玉과 겨루어 승리를 거둔 重耳 晋文公은 19 년의 긴 망명생활을 거친 후 晋에 돌아와 백성들을 가르칠 때, 賢臣의 충언에 따라 義와 信과 禮로써 점차적인 교화에 힘썼다. 文公은 나라에 돌아온 그 시초부터 백성들을 가르쳤다. 2 년이 지나자 이를 움직여서 전쟁에 쓰려 했다. 子 1E 이 말하기를 〈民이 아직 殺몰 알지 못하고 그 생활이 편안하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리하여 晋侯는 밖으로는 天子의 지위를 굳게 하고 안으로는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데 힘썼으므로 民이 삶을 귀히 여기게 되었다. 이에 백성을 쓰려 하자 子 }E 이 또 말히·기를 〈民이 아직 信을 알지 못하여 그들의 씀을 옳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文公은 原을 정벌하여 약속을 지키는 것을 보여 주었더니, 백성들이 물건을 교역할 때 높은 이윤을 탐내지 않고 약속을 어김이 없이 신용을 지켰다. 文公이 말하기를 〈아제 는 될 수 있겠는가?〉 子잠 E 이 대답했다• 〈民이 아직 禮를 알지 못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미처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수렵장에 군대를 모아 대대 적인 훈련을 실시하고 禮룰 시범했으며 질서를 다스리는 관직을 세워서 官紀를 바로 잡았다. 백성이 주저함이 없이 명령에 따르게 된 뒤에야 비로소 백성을 움직였다. 穀 땅에 나아가서 楚의 군대를 몰아내고 국경을 수비하였고, 宋나라의 포위를 풀어주었다. 한 번 싸움으로 翁者가 된 것은 문화적 교화(文之敎)의 덕분이었다 . 5 1)

51 ) 晋侯始入而敎其民, 二年, 欲用之. 子犯曰 民未知義, 未安其居. 於是平出定襄王, 入務 利民, 民懷生矣 將用之, 子犯曰 . 民未知信, 未宣其用. 於是平伐原以示之信. 民易資者不 求豊焉 明徵其辭 公曰, 可矣f . 子犯曰 民未知禮, 未生其共. 於是平大東以示之禮, 作以正其官 民聽不惑而後用之. 出穀戊, 釋宋園, 一戰而覇, 文之敎也(僖公 2~ 빈, 冬, 左, HY!, 130 면). 멘 끝의 논평은 『左傳』 편찬자의 것으로 교훈적인 결론이다. 筑는 수렵이기도 하고 군대 훈련을 지칭하기도 하므로 두 가지를 결합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十三經注疏』에서 萊는 少長의 순서를 따르고 貴賤울 밝히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莫는 被蘆에서 있었다고 본다(楊伯峻, 『春秋左傳注』, 447 면).

춘추시기에 南北의 세력을 대표하던 楚와 晋의 싸움에서 晋울 승리로 이끌고 覇者가 된 晋文公은, 분명 『左傳』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소개되는 사람이다 . 그는 賢臣둘을 등용하여 그들의 충언에 따라 정치를 했는데, 백성 들을 가르침에 있어서 우선 그들을 義에 따라 부유하게 한 후에 서로 믿을 수 있게 하였고, 끝으로 禮에 따라 공경하게 하는 것을 정치적인 실천을 통해서 가르쳤던 것이다. 禮는 정치적 교화에서도 義와 信울 완성시키는 최종적인 덕으로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 左傳 』 의 편찬자는 覇道정치의 길을 긍정할 뿐 아니라 文之敎로서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에 바하여 孔子는 齊나라의 패도정치가 발전하여 魯의 文敎로 바뀌고, 文敎는 다시 德治인 왕도정치로 되어야 한다고 주창하여 (「雍也」 24) 『左傳 』 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정치사상을제시한다. 孔子를 계승한 孟子는 王道만을 인정하여 패도를 배격하는 입장을 취한 반면에, 荀子는 王道보다는 못하지만 사회적 필요에 부응하는 것으로서 패도를 수용하는 자세를 보인다. 原始儒敎룰 확립한 이 세 학자 중에서 『左氏傳』의 결론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荀 子 였다고 하겠다. 끝으로 『 左傳 』 속에서 새로이 드러난 賢 A 의 모습을 고찰하겠다. 〈賢〉 이란 원래 〈보다 뛰어난다〉는 비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 詩 經』 에서 賢은 사람의 능력이나 일을 비교할 때의 서술어로 쓰인다 . 5 2) 『 左傳 』 도 이런 기초적인 의미로 賢 울 사용하고 있어서, 현인이란 한마디로 남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가리켰다. 정치론에 있어서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양보하 는 것을 『 左傳』은 大羲를 위한 것이라고 보아 禮 룰 실 천 하는 행위로서 높이 평가하였다. 晋文公의 정치를 찬양한 襄 公 9 년의 기록을 보면, 〈 晋 나라 임금 은 능력에 따라 사람을 쓰고 人選에 잘못됨이 없으며, 관리들은 각기의 직책 울 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卿은 자기보다 나은 이에게 자리를 사양하고, 그 大夫는 本分을 잃지 않으며(不失守), 그 士는 가르침에 잘 따르고, 그 庶人은 농사에 힘쓰고 商工人들도 각자의 업에 힘쓰고 있습니다〉 . 53 ) 사양을 통해 賢人이 추천되고 등용되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禮에 따른 身分의 규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곧 신분사회가 가지는 본분의 차별 적 체계와, 능력을 중시하는 賢 人정치의 두 가지 이념이 결합된 형태를 춘추 시대의 賢人觀에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정치적 능력이 뛰어난 이들에게 적용되는 개념이므로 현인의 내용은 복합적이어서 훌륭한 전략을 내놓는 사람을 현인이라고 부르는가 하면(哀公 7 년),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使臣울 현인으로 칭송하기도 한다(昭公 1 년).

52) 『詩經』 전체에 賢이라는 용어는 단지 두 번 사용될 뿐으로 그 개념이 별로 동용되 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小雅 「北山」(詩 205) 과 大雅 「行蒼」(詩 246) 에만 나오는데 비교적 의미를 갖는다 . 『書經』의 칙서 12 편 속에는 賢이 전혀 쓰이지 않고있다 . 53) 晋君類能而使之, 擧不失選 官不易方. 其卿讓於善, 其大夫不失守, 其士競於敎, 其庶人 力於農稙 商工卑隸不知遷業(襄公 9 년 夏, 左傳本文, HYI, 267 면).

결국 『左傳』은 자신의 身分에 따른 本分울 알고 그것을 禮에 따라 행할 수 있는 社會的 人間울 〈賢人〉 혹은 〈賢者〉라고 불렀다. 成公 15 년의 기록에 서 禮에 따라 德울 실천한 구체적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제후들이 曹成公울 웅칭하고 曹의 公子 威에게 제후직을 계승시키려고 하였을 때, 威은 이를

사양하면서 天子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聖人은 절도에 통달하고, 그 다음의 사람은 절도를 지키 며, 가장 못한 사람은 절도를 잃는다〉고 했습니다. 제후가 되는 것은 저의 절도 가 아닙니다. 비록 聖人이 되지는 못할망정 어찌 절도를 잃을 수야 있겠습니 까! 하고 宋나라로 망명했다 .54) 여기서의 聖은 君主의 정치권과 필연적으로 연결 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버림으로써 얻어지는 것으로 節道, 곧 禮룰 실천하 고 그것에 통달함을 지칭했다. 四夫라도 善울 행하면 백성이 그것을 본받는 다(昭公 6 년)고 말할 수 있던 춘추시기의 분위기는, 王이나 관리들뿐만이 아니라 더욱 많은 이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인간론이 등장할 수 있는 태동 의 시기였다고 하겠다 .

54) 前志有之, 曰. 聖達師 次守節, 下失節 爲君非吾節也. 難能聖, 政失守平. 遂逃拜宋 (成公 15 년, 春, HYI, 238 면).

결론적으로, 禮라는 개념은 孔子가 태어난 춘추시기에 견고히 확립된 것으로서, 孔子의 사상이 주창되기 이전에 이미 춘추시대의 사회전체가 禮룰 규범으로 하여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左傳』과 『國語』를 통해서 알 수 있댜 단 춘추시기의 禮라는 것은 君子, 곧 지배계급에게만 적용되던 것으로 백성에게까지 확산되지는 않았다. 成公 13 년(기원전 578 년)에 보면, 〈君子勤 禮, 小人盡力〉(君子는 禮에 힘쓰고, 小人은 부역에 힘을 다한다)이라 하여 君子 와 小人의 힘쓸 바를 구별하였다. 襄公 9 년(기원전 564 년)에도 〈君子勞心, 小人勞力〉(君子는 마음으로 일을 하고, 小人은 힘으로 일을 한다)이라고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小人의 본분은 農工商의 업에 종사하여 노동력으로 君子룰 섬기는 것이었고, 君子는 禮에 마음을 써서 사회를 바로잡고 국가에 질서를 가져와 小人들, 곧 庶民울 편안하게 하는 일을 맡는 것이다. 이와 같이 禮는君子계급에게만한정된 것이었기 때문에, 禮룰중심으로 한 聖 A이 나 賢人의 인간론 역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보편적인 것일 수는 없었 다.

『 左傳 』 에 보이는 禮개념과 孔 子 의 禮개념을 비교해 보면, 이 둘 사이에는 연속성과 비연속성이 공존함을 볼 수 있다. 孔子 역시 身分 제도를 수용하면 서 정치 능력에 있어서 뛰어난 현인을 나라의 재목으로 쓸 것을 주장하였 다. 그러나 孔子의 사상체계에서 가장 중시되는 것은 禮보다는 仁이었고 능력보다는 人格이었다. 또한 孔子의 禮는 君子에게만 적용된다는 신분적 규제를 벗어나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것이었다. 사실 君子라는 개념 자체가 달라져서, 孔子는 지배 계급을 지칭하던 이 용어를 人格者라는 의미로 전환시킴으로써 배움을 닦는 모든 이는 君子가 될 수 있다는 혁신처인 인간론을 주장한 것이다 . 55 ) 전통을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의 근원적인 의미를 추구하여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그에 따른 통일된 해석체계를 소유하였다는 것이, 孔子가 儒敎라는 하나의 사상체계를 정립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겠다.

55) 君子와 小人이라는 용어는 孔子 전까지는 완전히 사회적 신분을 가리키는 것이었 다 . 『詩書』에서와 『左傳』에서도 지배계급, 피지배계급을 지칭하는 것에는 변화가 없다. 이것은 孔子의 독창성을 뚜렷이 해주는 하나의 예가 된다 . 단 자신을 낮추는 겸양어로 『左傳』에서 小人이 쓰이고 남자에 대한 존칭어로 君子가 쓰이는 예가 있 다 . 陳夢家 「西周文中的g文人身分」, 信은史硏究》(1 954) 85~1 떤 ;零石鑛吉 Siz ukuishi Koki chi, 「君子小人論」, 《東京支那 學報》 9(1 9 63), 116~118 면 참조 .

이제까지 고찰한 갑골문, 詩 와 書 , 『 春秋左氏傳 』 과 『 國語 』 등에 나왔던 王 중심적 人間說, 祖上神과 天에 대한 신앙, 孝와 禮사상 등을 영두에 두면 서, 春秋 말기를 산 孔子가 이 사상들을 어떻게 집대성하여 새롭게 해석하였 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孔子는 君子의 개념을 변화시키면서 인간이 인간답게 되는 仁之道를 주창함으로써 〈 {I 多 已安人〉(자기를 닦아서 남을 편안하게 한다) 의 인간론을 제시하였다. 그의 이러한 인간론은 전통적 天命사상을 심화시켰 으며, 계속되는 儒家傳統, 특히 孟子와 荀子의 이론적 체계화를- 위한 기본적 틀을제공했던 것이다.

2 장 孔子의 人間論 : 修己安人하는 君子 孔子의 사상을 충실하게 전하는 유일한 사료인 『論語』는, 공자가 그의 제자들이나 당대의 사람들과 나누었던 대화나 행동을- 간략하게 보고해 놓은 言行錄으로 200 여 년간의 편집과정을 통해 지금과 감이 형성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서론에서 이미 고찰하였다. 『論語』에 보존된 단편적인 기억들을 통해 孔子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춘추시 기의 역사적 배경과 그 당시의 관습을 알 필요가 있다. 또한 전통적인 注釋 書 둘을 참조할 뿐만 아니라 索引 Concordance 을 사용하여 반복해서 나오는 중요한 전문용어들울 분석하고 종합해 보는 일 등 여러 가지 현대적 연구방 법을 통한 기초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 論語』 20 편 중에서도 특이하게 孔子의 일상적인 행동만을 수집해 놓은 「鄕黨篇」에는 참으로 孔子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엿보게 해주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마굿간에 불이 났었는데, 朝廷에서 퇴근하시 자 선생님께서는 ‘사람이 다쳤느냐?' 하고 물으시고 馬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셨다.〉I) 孔家의 馬舍가 불탄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본문에 〈退朝〉라고 I) 〈底梵 布驛, 曰, 傷人平. 不問馬〉(「鄕黨」 II). 이 책에서 쓰이는 『論語』의 본문과 章의 번호는 Harvard-Yenchi ng Insti tute Sin o log ica l Index Ser i郞의 번호를 따른 다. 『論語』의 우리말 번역에는 車柱環 역, 『論語』巳酉文庫 22) 와 南晩星의 『論語』 (瑞文文庫 145) 를 참고로 하였음을 밝힌다 . 鄭玄과 朱子의 注는 孔子가 人間을 중히

여기고 가축을 천히 여기는 것이 이와 같았음을 지적하며 이것이 이치에 맞는 것이라 고 평하였다. 향당편은 공직자로서의 孔子의 모습을 핵으로 하여 君子의 일상생활을 이상화한 것이다 .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孔子가 魯나라 國政에 참여하고 있을 시기, 곧 기원 전 501 년부터 498 년 사이 (52 세에서 55 세)였을 것이다. 그 시기는 내의로 多難 한 때로서 개혁을 기대했던 定公은 孔子를 國都直轄地의 替察과 獄松을 담당하는 大司冠(법무부 장관)로 임용하였다. 孔子는 魯가 齊와 奭谷의 會盟 (기원전 500 년)을 맺을 때 定公을 수행하여 士兵울 전열시켜 위협하는 것을 禮로써 물리치고 齊가 魯에서 빼앗었던 땅을 반환케 하여 의교적 공적을 세우고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左傳』 定公 十年條 참조). 그러나 季孫氏룰 비롯한 三桓의 세력을 억압하는 데 실패하자 그는 55 세경 魯나라를 떠나 14 년간의 망명생활로 들어갔다 .2)

2) 金谷治, r 論語』, 岩波書店, 1963, 「孔子略年表J, 277~280 면 참조 . 木村英一는 「孔子世 家」에서 孔子가 中都宰, 司空의 벼슬을 거쳐 大司窓에 임명되었다는 것에 기초를 두고 孔子는 50 세경부터 55~@l 에 이르는 5, 6 년간을 魯의 官職에 있었으리라고 추정하였 다(『孔子&論語』 48~65 면) .

馬舍의 화재사건에서 주목해야 될 것은 孔子가 大夫로서 馬車를 타고 다녀야 했다는 실용적인 문제와 더불어 周代에 말이 지녔던 상칭적 중요성 울 살펴보는 일이다. 말 4 필이 끄는 戰車를 타는 것은 天子와 제후를 비롯하 여 周代의 지배계급인 卿, 大夫, 士의 정치적, 신분적 특권을 표시하는· 것이 었다. 서민이나 노예에게는 戰車몰 타고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유하고 있는 전차의 수효에 따라서 한 나라 의 경제적, 군사적 능력이 판가름되기도 하였다전 따라서 周代에 있어서 말이란 재산인 동시에 사회적 특권을 상징하는 귀한 동물이었다• 그런데

3) 貝塚茂亂 『中國의 歷史』(上) (中央新書, 1980), 115 • 130 면에는 周代의 戰車의 복원도 와 크기, 바퀴의 살, 말의 뼈 등이 소개되어 있다. 『論語』 안에서도 제후를 千乘之國으 로(「學而」 5, 「公治長」 8), 卿大夫의 집안을 百乘울 거느리논(「公治長」 8) 것으로,. 또 齊景公을 말 四千四울 가지고 있던 강력한 군주로(「季氏」 12) 묘사하고 있다.

孔子는 자기집의 馬舍가 불탔다는 것을 알고 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사람이 다치지 않았는가에만 관심을 표명하였던 것이다. 인간에 대한 관심, 인간의 生命과 平安(「述而」 13), 더 나아가 인간이란 과연 어떻게 자신 의 인격을 키워야 하고 남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여 올바론 사회를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이 孔子의 가르침의 전부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0] 다. 그러나 孔 子 의 인간론은 후기 儒學전통에서 발전되는 바와 같이 철학적이 고 우주적인 체계를 지닌 人性諦에 중점을 둔 것은 아니었다. 사실 『 論語』 전체에서 〈性〉이라는 말이 나오는 경우는 오직 두 번뿐이다. 그중 한 번은 「公治長篇」 13 장에 孔子에게서 人性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이 없디는 - 子貢 의 회고이다. 〈선생님의 文 章 에 관한 말씀은 들어볼 수가 있었지만, 선생님 께서 性과 天道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들어볼 수가 없었다.〉 4) 文章이란 詩, 畵 禮, 樂 등 교육을 통해 전승될 수 있는 文化의 총체를 가리키는데 孔子가 그의 교육과정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이러한 문화적 유산을 가르 치는 데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人性과 天道에 관해서는 별로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子貢의 말을 古注와 新注 등의 주석적 전통들은 모두 이 두 가지 주제가 깊고 높은 것이어서 그만한 수준에 도달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둘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4) 〈子貢曰, 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 이 文章울 新注 는 威儀文辭라고 했으나 劉寶楠의 해석인 詩警禮樂으로 보는 것이 『論語』의 내용과 맞는다 .

『論語』에 (11 〉이라는 용어가 또한 번 쓰이는 것은 「陽貨篇」 2 장에서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性으로는 서로 가까우나 習으로 서로 멀어진다.〉5 ) 17 편인 「陽貨篇」은 『論語 』 마지막 5 편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서 가장 후기 에 편찬되었고 後學들에 의한 윤색이 제일 많이 발견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5) 〈子 B, 性相近也 習相遠也.〉 新注는 性理的 체계로 여기서의 性을 해석하여 氣質之性 을 지칭한 것으로 보고 氣質의 착한 것을 익히면 착하게 되고 악한 것을 익히면 악해 질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태어난 대로의 인간이 지닌 소질이라 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

性이라는 용어를 과연 孔 子 가 직접 쓴 것일까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 다. 앞에 언급된 「公治長 篇 」에 나오는 〈 1 生 〉이라는 용어도 孔 子 자신의 말씀 속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孔 子 의 가르침에 대한 子貢 의 평 속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孔 子 가 性이라는 용어를 썼다고 하더라도 「陽貨 篇 」 본문은 인간이 지닌 소질 정도의 의미밖에 없어서 태어난 대로의 소질로만 보면 인간은 모두 비슷한데 계속되는 배움의 노력에 의해 사람들 사이에 큰 차이가 생기는 것이라는 경험적인 논평에 불과하다. 〈性〉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雍也 篇 」 19 장에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정직하기 마련인데 (人之生也直) 그렇지 않고 속이면서 살아가 는 것은 요행으로 모면하고 있는 것이다(閉之生也 幸 而免)〉라는 孔 子 의 말은 인간의 본성을 논했다고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발언이라 볼 수 있다. 물론 性理에 최대의 관심을 두던 新注 전통에서는 孔子의 이 발언을 인간의 본래부터의 性, 곧 理는 바른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풀이하지만, 古注전동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의 生을 마칠 때까지 일생 동안 正直하게 노력해 야 할 것을 경계한 것이라고 소박하게 이해하였다 . 사실 본문에 나오는 〈直〉과 〈同〉은 곧게 살아가는 모습과 그물에 걸릴 듯 속이면서 살아가는 대조적인 모습을 묘사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에 대한 언급이라기 보다는 두 가지 상반되는 길을 걸어가는 인간의 자세를 경험적으로 논평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顔淵 篇 」 20 장에 나오는 〈質直而好義〉에서도 모든 사람의 質이 直하다는 의미는 전혀 없고, 한 사람의 품성이 곧고 의로 움 좋아하면 통달할 수 있으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論語』 에 사용되는 直의 의마를 모두 살펴보아도 경험적 관찰 이상의 다른 뜻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孔子는 人性 자체에 대하여 어떠한 철학적인 논리를 전개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다. 오히려 그의 인간론은 경험에서 나온- 통찰로 서 孔子 자신이 성숙되어 가면서 수정되고 심화되어 갔다전 또한 孔子는 6) 「公治長篇」 IO 장에 보면 孔子는 宰予를 알기 전까지는 한 사람의 말을 듣고 그의 행동을 믿었는데, 宰予의 言과 行이 다름을 경험한 후에는 말을 둘은 후 그의 행동을

관찰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爲政篇」 4 장에 나오는 15 세로부터 70 에 이르는 孔子 의 인격 및 사상의 십화는 잘 알려져 있다.

인간에 대한 그의 통찰을 논리적 체계를 세워서 해설하려는 노력을 기울아 지도 않았다. 이렇게 경험적 관찰에 기초를 두었기 때문에 孔子의 인간론은 나름대로의 장단점을 소유하고 있다. 孔子는 철학적인 전제나 당연성의 기초 를 제시함이 없이 인간은 어떠해야 한다고 단편적으로 말하·고 있어서, 조심 스럽게 파악하지 않으면 피상적인 관찰로만 그칠 수 있는 단점아 있다. 그러 나 孔子의 이러한 경험적인 인간론이 지닌 강점도 적은 것은 아니다• 우선 孔子의 대화체로 된 말씀은 누구나가 부담없이 접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공감을 느낄 수 있고 위대한 인간의 체온을 경험하게 한다. 곧,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만이 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어서 읽는 이를 감동 시킬 수 있는 것이다. 孔子의 말씀둘은 철학적 논리로 체계화되기 이전의 원초적 체험의 증언과도 같은 성격을 지녀서, 변하는 세대 속에서 새롭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는 개방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論語』에 보존된 孔子의 語錄은 구체적 사건을 배경으로 해서 그때그때 제자들에 의하여 기억된 孔子의 인간에 대한 통찰이 수집된 것이기 때문에 孔子의 생애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孔子의 인간론을 논하기에 앞서서 먼저 孔子의 시대적 배경과 그의 생애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을 간단히 고찰하도록 하겠다. l 孔子와 춘추시기 魯나라의 사회문화 孔子는 周 왕실과 同族으로 같은 姬姓울 가졌으며 200 여 개의 제후국 중에서도 春秋十二列國이라 불리는 유력한 제후국의 하나였던 魯나라의 昌平鄕 諏邑, 지금의 山東省 曲阜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연대는 襄公 21 년이나 22 년(기원전 551 I2) 으로 아버지 孔糸t(字는 叔梁)은 三桓 중에서도

季孫氏보다 세력이 약했던 孟孫氏에 봉사하면서 공훈을 세워 홍기하는 무사 계급 곧 下級士族에 속한 勇士였다? 孔丘( 字 는 仲尼)는 차남으로서 아버지 晩年의 아들이었는데, 異腹兄도 딸 하나를 남기고 일찍 죽었으므로 그는 집안을 계승하여 빈궁한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8) 그의 어머니 顔氏 (이름은 徵在)와 孔叔梁과의 결혼을 『史記』 「孔子世家」에서는 〈野合〉이라고 했는데, 이는 정식혼례의 예식을 거치지 않은 남녀관계를 지칭히는· 것이었 다. 후기 個敎傳統의 입장에서 보면 놀라운 일이겠지만, 그 당시의 사회에서 는 별문제가 없었던 모양으로 그 일아 孔子의 정치적 활동이나 스승으로서 의 역할에 장애요소로 - 등장하지는 않는다.

7) 孔子의 집안이 원래 殷의 후손인 宋나라에서 이민해 온 名族이라는 전설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木村英一, II說語』, 526 면 등). r 論語』 안에서 그러한 언급은 전혀 찾아 봉 수가 없는 반면 孔子가 周文化룰 계승하였다는 자각은 너무나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8) r 驛』 「子환 6 과 7 을 보면 孔子가 〈니는 젊었을 때 비천했으므로 여러 가지 일에 능하게 되었다〉라는 말이 있다. 그는 20 대에서 30 대에 이르는 나이에 귀족의 회계원, 家詞養係, 가정교사 등을 지냈다.

孔子는 士族의 자제로서 춘추시대의 기초적 교양과정이며 취업에 요구되 었던 제사 등의 종교의식과 행동규범으로서의 禮儀式, 妻會 때에 부르는 樂, 儀式의 하나였던 射, 身分 있는 사람들이 타는 馬車를 다루는· 御, 글쓰는 것을 배우는 書, 회계계산울 할 수 있는 數등 六藝룰 배웠다. 그러나 그의 학구열은 대단한 것으로서 아마도 15 세경부터 그는 고급 학문인 詩와 書, 높은 수준의 禮樂울 연구하였고 정치, 도덕, 문화의 본질을 철저히 규명하기 시작하였다. 30 세에 이르러 그는 독자적 입장을 확립한 학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고, 30 대 후반에서 40 대초에는 齊나라에 유학하여 (「述而」 14)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9)

9) 「爲政」 4 등에 기초를 둔 위의 해석은 木村英一의 『論語』 527~528 면 참조. 「孔子世 家」에 따르면 孔子의 키는 九尺六寸으로 190cm 의 대장부였다고 하는데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가 心身이 모두 건장했던 인물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갇다.

그가 50 세경부터 魯나라 定公 에게 임용되어 中都의 宰, 司空 (建設局長), 大司冠(法務部長官) 등의 벼슬을 하면서 卿이라 불리는 上大夫 밑에 있는 下大夫( 長官級 )의 위치에까지 울라갔다(「先進」 8, 「憲問」 21).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下勉上의 풍조와 그에 따른 사회적 부패와 모순을 바로 잡으려고 하던 그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孔子는 55 세경부터 14 년간(기원전 497~484) 일종의 亡命 혹은 遊歷의 생활을 떠났다. 子貢에게 자기는 값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라고(「子후」 13) 말한 바와 같이 孔子는 자기를 임용해서 道를 실천하게 해줄 제후를 찾았다. 그러 나 衛의 靈公은 孔子에게 전치는 법을 물었고, 楚의 昭 王 은 대신들의 이간으 로 孔 子를 채용하지 않았다. 이 14 년이라는 기간 동안 孔子는 子路,顔淵, 子貢 등 소수의 제자를 데리고 여행하는 중 陳과 蔡의 변경에서 양식이 떨어져 굶주리고 수행하던 사람들이 병들어 일어나지도 못하였으며(「衛靈 公」 2, 「先進」 2), 匡에서는 陽虎 라는 魯의 장수로 오인되어 며칠간 포위당하 는 등(「子후」 5) 죽음의 고비를 몇번 넘기기도 했다 .10) 이러한 시련의 때마다 孔 子 의 天命 관이 드러나곤 하는데, 이것은 3 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JO) 孔子 일행이 여행한 순서를 魯구衛 ➔ 曺 ➔ 宋 ➔ 鄭구陳수衛구陳 ➔ 蔡구楚구衛一魯로 보는데 이중에서도 衛와 陳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金谷治, 『論語』, 「孔子略年表J, 277~280 면 참조).

14 년간에 걸친 孔子의 망명생활이 겉으로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 시기에 孔子의 경험과 견식은 확대되고, 인격의 성숙과 사상의 심화를· 가져와서 그의 晩年의 교육사업에 그만큼 더 깊이를 더해준 결과가 되었다. 68 혹은 69 세에 모국인 魯에 돌아가 제자양성에만 전념하려는 孔子의 심정이 「公治 長篇」 22 장에 보인다. 〈돌아가자 돌아가. 우리 고향의 젊은이들은 포부는 크지만 치밀하지 못하고 찬연하게 文章은 이루었으나 그것을 헤아릴 줄을 모른다.〉 그는 전승되는 문화교육에 방향을 잡아주기를 원했고, 禮의 바탕이 되는 인격의 중요성을 보여중으로써 당대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일하려던 그의 안목을 장래를 위한 사명으로 전환하였다고 하겠다. 그가 哀公 16 년 (기원전 479 년), 73 세 혹은 7 4't1 ] 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5 년 동안 마지막

교육사업을 평으로써 많은 영재들을 魯 나라에 운집하게 하였다. 이때 魯는 학술의 중심지가 되어 중국 고대문화의 집대성을 이루었으며, 그의 제자들을 통해 그 문화를 전승하는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11)

II) r 麟』에 이름이 언급되논 제자는 28 인이고, 『史記 』 에는 3,000 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는 하나 「弟子傳」에 기록이 있는 이는 29 인이다 . 결국 사료가 어느 정도나마 보존된 孔子의 제자는 30 명 정도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孔子의 모국인 魯나라의 사회와 문화적 전통을 살펴서 孔子 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고자 한다. 魯는 周初에 일어났던 殷民族의 반란을 전압한 周公이 그 반란에 가담했던 山東반도의 이민족을 周文化에 융화시키 며 통치하기 위하여 그의 長男 伯寫에게 봉해준 제후국이었다. 魯公 伯截은 封地룰 향해 출발할 때에 周 왕실로부터 策命이라고 부르는 공식적 문서와 함께 세 가지 보물을 받았다고 한다. 첫째는 大型인 儀式用 馬車였고, 둘째 는 옛부터’전해 내려오는 寶玉이었으며, 셋째는 封父라고 불리는 大弓이었 다. 이 세 가지는 魯公이 周의 宗廟祭祀에 참여하기 위하여 宗周에 갈 때 사용되었으며 朝廷에서도 魯公의 位階를 상칭하는 표시가 되었다 .1 2 )

12) 貝塚茂樹, 『孔子』, 岩波新書 65, 1979, 27 면 참조. 기원전 501 년 陽虎가 실각하여 齊나 라에 도피하면서 寶玉과 大弓울 가지고 가서 魯나라에 큰 소동이 일어난 사건은 이 세 가지 상징물의 중요성을 확인해 준다. r 書經』 「文侯之命」에는 平王이 晋나라의 文侯에게 주는 선물로서 검은 기장 술 한통과 활과 화살 및 말 네 필이 언급되어 있다.

魯가 周 왕실에 대하여 本家에 대한 分家의 혈연관계로 묶어져 있었고 같은 조상에 대한 제사로 결합되어 있었던 것과 같이, 周는 근본적으로 군신 관계라기 보다는 宗族관계를 원칙으로 하여 제후국들을 지배하였다. 宗廟祭 祀에 참여하고 四時의 제사에 쓸 제물을 보낸다는 것은 戰時에 군사적 협조 룰 해야 하는 것과 더불어 제후들의 가장 큰 특권이요 의무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종족관계에서 우러나오는 孝 1 弟의 감정적 일체감은 異氏族들과의 관계에까지 확대되었다. 예를 둘어 魯公이 처음 山東반도에 올 때 殷民族 출신의 六氏族울 받았다고 하는데, 魯나라는 周公울 모시는 宗廟와 더불어

土地神을 모시는 社稷城을 세움으로써 地緣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성공하였 다 .13) 宗廟와 社稷을 중심으로 제후의 궁전이 세워지고, 그 주위에 성벽이 축조됨으로써 이루어진 도시국가들은 血緣단체에서 地緣단체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띠게 되나 혈연관계에서 유래한 宗法사상이 지속되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13) 같은 책, 29~30 면 제후들이 社稷의 主라고 불렸던 것은 제후의 도시국가들이 지녔 던 지리적 제사 공동체로서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周初로부터 이어지는 이러한 宗法사상이야말로 孔子가 孝를 정치 와 직결시킬 수 있었던 사상적 배경이라고 하겠다. 또한 魯가 정치적으로는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周文化 확립의 공헌자인 周公울 조상으로 모셨다는 긍지 때문에 문화보존에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며, 八僧舞가 魯公의 宗廟祭祀 때 특이하게 허락되던 것도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魯의 사회구조를 보면 諸侯―卿―大夫―士의 지배계급과 國人이라고 불리 는 庶民 및 노예가 있었다. 魯公 바로 밀에 卿이라고 불리는 최고 관직이 있었는데, 卿은 國都의 近鄕 東西에 설치된 二鄕에 주둔하는 二軍의 지휘관 이 되며 나라의 제사와 婁會를 主宰하였다. 卿 밀에 있는 大夫는 士 혹은 夫라고 불리는 武士둘을 지휘하는 長이었고、 士는 귀족계급의 최하에 위치하 여 戰車를 타고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였다. 魯의 卿직은 桓公 으로부터 나온 孟孫氏, 叔孫氏, 季孫氏의 三桓氏가 세습적으로 독점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季孫氏가 춘추 중기 이후로 가장 강력하였다• 이둘은 각기의 采邑에서 私兵을 기르고 私臣에게 충성을 서약받아 宗族制]의 원리에 따라 세워진 君主權울 무력하게 만들었다 .14)

14) 春秋시대의 경제는 농업이 중심이었으므로 토지소유관계를 동하여 계급이 분화되었 다. 王으로부터 받은 토지를 諸侯는 다시 그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로부터 나오 는 수익을 받을 권리를 가지게 하였다. 이렇게 氏族들에게 세습되도록 주어진 토지와 그 안에서 경작하는 농민들을 采邑이라고 하는데 그 크기는 十室(가족)에서부터 千室에 이르렀다고 한다. 季氏의 采邑은 費(曲阜 東南方 75km), 叔孫氏의 采邑은 郵

(西北 60km), 孟孫氏의 采邑은 邸(西北 22km) 이었다(같은 책 40, 43 면 참조) .

孔 子 가 태어나기 IO 년 전인 기원전 562 년에, 二 軍 이었던 군사조직을 三 軍 으로 증가하여 三桓氏가 一 軍 씩을 지휘하도록 하였는데, 특히 季 氏는 鄕黨의 士들에게 모두 개인적 충성을 하게 하였다. 孔 子 가 16 세 되던 기원전 537 년에는 一 軍 울 다시 폐지하여 二軍 으로 재편성한 후, 一 軍 은 季 氏가 私有하 고 나머지 一軍은 孟孫氏와 叔孫氏가 半分하였다. 결국 孔 子 당시 魯國의 政治는 季 氏가 군대의 半을 지배하여 군주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독재정치를 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論 語』 「지分 篇 」에 보이는 季 氏의 무례한 행동에 대한 孔 子 의 탄식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孔子께서 季氏가 (天子의 宗 廟에만 허락되던) 八僧 舞 를 자기집 마당에서 추게 한 것을 두고 말씀하시기를, 〈이런 짓을 감히 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인들 못 저지르겠는가〉 하셨다 (I 장 ).1 5)

15) 위의 번역은 『四書集注』를 따른 것이고, 『十三經注統』에서는 〈이런 행동을 참아 준다면 어떤 일을 참아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로 보았는데, D.C.Lau 의 영어 번역은 古注 전동을 따른다. 八 1 分舞란 8 列로 64 인이 方形울 이루어 추는 충으로서 天子의 宗廟제사 때에 국한된 것이었고, 諸侯는 36 인을, 卿大夫는 16 인, 士는 4 인으로 규정되 어 있어서 사회적 신분을 표시하였다. 新注에 一僧이 8 인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치 않다고고증하고있다 .

季 氏가 泰山에서 (國君만이 할 수 있는) 旅祭롤 지내려 하였다. 선생님께서 再有에게 〈너는 그것을 막을 수 없겠느냐〉 하시니 〈할 수 없 습 니다〉 하고 대답 하였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슬프다. 그래 泰 山의 신령이 ( 禮 의 본뜻을 묻던) 林放만 못하겠는가〉 (6 장) .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孔子는 禮의 본질을 회복시킴으로 써 정치를 바르게 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춘추시대의 覇 道정치를 대표하는

齊나라의 管仲이나 鄭나라의 子 産에 대하여 孔 子 가 가진 태도는 미묘할 수밖에 없었댜 齊桓公이 제후들을 규합하는 데 병력을 쓰지 않도록 도와준 管仲의 힘을 孔子는 인자함(仁)의 일종으로 규정하였으며 (「憲問」 16), 天下룰 통일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 그의 공적을 치하하였다(멀t FR1 」 17). 그럼에도 불구하고 孔子는 管仲의 사람됨으로서의 그릇은 작아서 禮를 알기 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결론내렸다(「지分」 22). 孔子에게 있어서 패도란 천하의 혼란을 수습함으로써 백성을 급한 데서 구해준다는 공로는 있을지 모르지만 이상적 정치를 펴기에는 부족한 것이었다. 따라서 패도를 행하는 齊나라가 한번 변하면 禮治을 실시하는 魯와 같아 되고, 魯나라가 한번 변하 면 道, 곧 德治에 이를 수 있으리라고 역설하였던 것이다(「雍也」 24). 같은 맥락에서 孔子는 그가 30 세 되던 해에 사망한 鄭나라의 大夫 子産을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라고 호평하였으며(「憲問」 9), 행위에 공경스 러움을 지녔고 義로써 정치를 하여 君子之道룰 실천하였다고까지 긍정적으 로 평가하였다(「公治長」 16). 그러나 孔子는 사상사적으로 볼 때 子産아 행한 가장 중요한 업적인 刑 書 를 鑄造하여 최초로 成文法典을 公布(기원전 536 년)한 것에 대해서나, 이에 반대했던 晋나라의 大夫叔向이 刑法의 반포가 정치적 권위를 약화시키리라는 비판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가 없다. 사실 하나의 학파로서의 法家의 확립은 전국시대에 이르러 愼至 l, 商陝, 韓非子 등에 의해서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法의 제정으로써 혼란된 정치를 바로잡고자 하는 法家 09 인 사고의 싹은 이미 春秋 晩期에 시작되고 있었 다. 이에 대한 孔子의 반응은 소극적인 것이었다. 孔子는 형벌을 통해 인간 울 참으로 교화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松事를 잘 처리하기보다는 소송이 없는 사회를 이상으로 여겼던 (「顔淵」 12) 孔子는 法政과 刑罰로써 백성을 다스리면, 백성들은 벌을 면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 에 스스로 부끄러워 할 줄을 모른다고 하였다. 오히려 孔子에게 있어서 바른 정치란 백성들을 德으로 이끌고 禮로써 바르게 하도록 가르쳐서 백성들 스스로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를 알고 자신의 삶을 바르게 할 능력을 키워 주는 것이었다(「爲政」 3). 孔子의 이러한 이상론은 孟子와 荀子에게 계승되 어, 孟子는 齊桓公과 晋文公의 覇道에 관해 묻는 齊宣王에게 孔門은 그들의

일을 말하지 않는다고 일축하였으며 (「 梁 惠 王 」 上 7), 荀 子 는 패도를 부분적으 로 인정하면서도 王 道밀에 두었을 뿐 아니라 法의 위치를 法을 실천할 수 있는 君子 밑에 둠으로써 漢 代로부터 이루어지는 法의 儒敎化 과정을 시작 하였다• 끝으로 孔子 자신이 士계급 출신이었고, 孔門의 대부분이 士였으므로 춘추 말기의 사회에서 士가 지니고 있던 위치와 역할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겠다. 士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분명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한 가지 설은, 〈國人〉이라고 불리는 국가경제와 군사력의 기초를 이루 던 자유농민들 중에서 건장한 자들을 甲士라고 불렀는데, 戰時에는 그들을 동원하여 戰士로서 활약하게 하다가 선발되어 하급관리가 된 것이 士의 기원이 되었으며, 여기에 몰락귀족들이 유입되어 士계급이 확대되고 지식인 계층을 이루게 되었다는 설이다 .16) 또 한 가지는 귀족계급둘이 分家룰 계속 하면서 그중에서 몰락한 지배층의 사람들이 하급관리인 士가 된 것이라고 보는 설이다.17)

16) 徐復觀 『周秦漢政治社會結構之硏究』, 學生 書 局, 1975, 40 면, 85~108 면 참조. 國人 안에는 士와 자유농민과 더불어 상공업에 종사하여 도읍 안에 거주한 이들도 포함된 다. 西嶋定生은 國人은 지배층을 지칭하고 民이 피지배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 는데(『中國古代社會經濟史』, 변인석 편역, 學文社, 1984 년, 35 면), 徐復觀은 國人과 民은 실제로는 일치하지만 民의 범위는 國人보다 넓어서 民울 칭할 때는 國人도 포함하지만, 〈鷹王盧 國人誘王〉(『國語』 「周語」 一)과 같이 國人은 정치군사적 성격을 더 강하게 띤다고 보았다(갇은 책, 34 면). 17) Cho- Y un Hsu, Ancie n t Chin a in Transit ion , An Analys i s of Socia l Mobil ity, 722~222 B.C ., Sta nfor d Un ive rsit y Press, 1965, 7~8 면 .

그 기원이야 어떠했던 士둘은 춘추시기에 들어와 상공업이 발전되고 인구 의 도시집중현상이 확대되면서 각국의 상비병력이 증가되자 농경에서 완전 히 유리되어 戰士로서 또는 오로지 다른- 전문직에 종사하게 되는 경향이 현저해졌다.춘추말기인孔子시대에 이르러서 士둘은政治상에 필요한지식 울 추구하는 전문지식인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孔門은 이러한 士의 새로운 경향을 대표하는 단체였음과 동시에 그들이 학파를 확립하는 데 성공함으로

써 士의 의미 자체를 전환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하겠다. 衛 읊 公이 孔 子 에게 전 치는 법을 물었을 때 孔 子 는 자신은 그러한 武術울 배운 바가 없다고 대답하고 그곳을 떠났으며 (「衛 읊 公」 l ), 제자인 煥週가 농사짓는 법을 물었을 때 자신은 늙은 농부만 못하다고 대답한 후 禮와 義와 信울 가르치는데, 언제 농사할 시간이 있을 것인가 하고 반문하는 것(「子路」 4) 을 읽을 수 있다. 孔 子 는 농부나 武士가 아닌 文士로서의 孔門의 정체를 분명히 밝힌 것이라 하겠다 . 이제 孔子가 제시한 道를 추구하는 士, 혹은 주로 〈君子〉 라는 칭호로 불리는 문화적 교양을 겸비한 인격자의 새로운 모습을 『 論語 』 안에서 고찰해 보기로 한다. 2 『 論語』에 제시된 人間像 宗周의 쇠되로 구질서가 전면적으로 붕괴되고 제후국들의 실력경쟁 속에 서 士 계급이 대두되며 상공업의 발전으로 경제활동이 활성화되던 춘추 말기는 새로운 사상이 태동할 수 있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孔子는 개인 자격으로 학교를 세워 하나의 학파를 확립한 최초의 학자였다• 그는 문화적 교양을 쌓게 하는 교육을 시켰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격수양을 강조 하여 모든 면에서 갖추어전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교육에 대한 그의 신뢰는 대단한 것이어서 신분사회적 체계 자체를 부인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인도의 카스트제도나 신라의 骨品제도와 감이 그 체계 가 出身에 의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하여 변화가 가능 - 하고 곧은 사람이 임용됨으로써(「爲政」 19, 「顔淵」 22) 항상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선생님께서 仲弓울 일러서 말씀하시기를, ‘얼룩소의 자식이라도 그 털빛이 붉고 뿔이 단정하다면, (사람들은) 제사에 쓰지 않으려고 할지 몰라도 山 )1I 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기야 하겠느냐'〉(「雍也」 6). 仲弓은 德行이 출중한 제자로 南面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까지 칭찬 받았으나(「雍也」 I ), 그 부친은 사회적으로 비천한 ·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됨을

중시했던 이러한 孔 子 의 확신은 후에 儒敎사상이 국가이념으로 받아들여지 면서, 제한된 규모에서나마 개인의 지식을 측정하여 관료를 채용하는 科學 制 度가 정착함으로써 제도화되었다고 하겠다. 교육에 근거를 두고 당시 일반화되어 있던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는 孔子 의 태도는 이의에도 『論語』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 「衛 蓋 公 篇 」 39 장에는 그의 유명한 〈有敎無 類 〉(가르침을 받는 데는 사람의 구별이 없다)라는 - 교육의 대원칙이 전해지고 있으며, 「述而 篇 」 7 장에는 그 당시에 가장 적은 예물이었 던 肉捕의 묶음(束 修 ) 이상을 가져와서 배울 마음을 표시만 한다면 아무라 도 가르치기를 거절한 적이 없다는 孔子의 말이 보존되고 있다. 「 子 年 篇 」 14 장에는 오랑캐 땅(九夷)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는 孔子의 말을 들은 제자 가 그 누추함을 걱정하자, 〈君子가 사는 데 무슨 누추한 게 있겠는가〉 하고 답하여 지역과 민족을 초월할 수 있는 배움의 힘과 道 의 보편성을 시사하였 다. 「述而篇」 29 장에는 다음과 같은 홍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 互鄕 사람들과는 함께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이 마울의 한 아이가 孔子를 뵈러 오자 제자들이 당황(惑)하였다. 이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오는 사람은 맞아들일 것이요, 가는 사람은 막지 말 것이니, 어찌 심하게 하겠느냐? 어떤 사람이든지 몸을 깨끗이 하고 오면 그 깨끗함을 받아들일 것이요, 과거의 일은 묻지 말 것이다.〉 18)

18) 〈타떠難與言 童子見, 門人惑 子 B, 與其進也, 不與其退也 . 唯何若. 人 黎 已以進, 與其 黎也 不保其往也.〉 惑은 古注에서는 怪로 보아 제자들이 괴이하게 여긴 것으로 풀이 하였고 新注는 疑로 보아 孔子께서 그를 만나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고 의심한 것으 로 풀이하였다. 양쪽 다 제자들의 입장, 곧 일반적 사고로는 함께 말할 만한 상대가 되지 않는 사람임을 말한다고 하겠다. 劉寶楠은 r 論語正義』에서 互鄕의 지리적 위치 에 대하여 여러 가지 고증을 하고는 있으나 그 설이 같이 않음을 지적해서, 실제적으 로도움이 되는자료를제공하지는 않는다.

互鄕은 〈難與言〉이라고 했는데, 그 地名이 확인되지 않았고 주석가들도

관습이 의롭지 않은 동네였다고 전할 뿐 그 이상의 자세한 배경을 알려주지 는 않고 있다. 孔 子 의 제자들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던 것을 보면 그 찾아온 젊은이의 배경이 孔門에 받아둘이기엔 일반적 상식으로 볼 때 문제 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互鄕이 사회신분적으로 소의된 그룹이었 는지 혹은 도덕적으로 악평이 높았던 마울이었는지 단정할 길은 없으나, 士族의 무리 속에 받아들일 수 없는 터부를 지닌 그룹의 사람이 孔子룰 찾아왔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19) 그가 孔 F1 에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孔子가 그의 제자들과는 달리 그를 받아들여 상종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는 것은 有敎無類의 원칙에 孔子가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보여주는 것 0] 다.

19) 『禮記』, 「王制篇」에 보면, 刑人둘의 활동을 가족이라는 법의 한정된 테두리 안에 제한하면서 公家도 그들을 길러서는 안되고 大夫도 그들을 부양해서는 안되며, 士는 그들을 길에서 만나면 함께 말하지 말라고(弗與言) 규정하고 있다. 互鄕이 이런 刑人 둘이 많아 살던 마을이 아니었는가 하는 추축을 가능케 하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실제로 1LF1 에서 공부를 하던 제자들의 사회적 신분은 士계급이 대부분을 구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러한 孔門의 사회적 배경이 곧 孔子가 士계급의 이익과 도덕을 대변했다고 속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 또한 「陽貨」 3 에서 下愚는 교육이 불가 능하다는 등의 언급이 나오지만 『論語』 앞부분에 나오는 孔子의 교육관과 상충되므 로 이 말은 孔子 자신의 것이 아니라 後學 등의 논평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孔子는 자신의 가르침을 일컬어 文王과 周公으로부터 확립된 聖王의 道를 전할 뿐 새로운 가르침을 창시한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述而」 I), 실질적으 로 그는 여러 면에서 전통에 새로운 해석을 가하여 의미있는 체계를 제시했 기 때문에 당대의 젊은이들에게 열렬한 호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孔子 의 통일적 안목은- 〈君子〉라는 人間像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孔子가 제시한 君子가 어떤 사람인가를 고찰하는 것이 그의 인간론을 알게 되는 첩경인 것이다. 따라서 군자에 대한 단편적인 『論語 』 의 말씀둘을 모아서 일종의 모자이크 Mosa i c 를 만들어 보도록 하겠다. 이러한 모자이크를 통해 먼저 孔子가 보여주고자 했던 군자의 전체적 윤곽을 분명히 한 이후에, 君子

像의 심층에 전제되어 있는 〈 {I 多已安人〉(자신을 닦아서 남을 편안하게 한다) 이라는 그의 인간론을 논하고자 한다. r 論語』 속에서 孔子는 인격자를 지칭하기 위하여 주로 세 가지 용어를 썼다. 가장 빈번하게 나오고 대표적인 것이 〈君子〉이고, 쓰이는 횟수는 적지 만 최고의 경지에 이론 사람을 〈聖人〉이라고 불렀으며, 출중한 德을 지녔다 는 뜻으로 〈賢人〉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20) 이 세 가지 용어 상호간의 관계 및 그 의미의 변화는 孔子가 전통을 어떻게 해석하였는가를 보여 준다.

20) 君子는 『論語』 안에서 107 번 나오는데 거의 한결같이 孔子의 이상인 人格者를 가리 킨다. 9 번의 예의가 있으나 대개 인용문 등에서 쓰이고 있다. 聖人은 r 論語』 전체에 서 6 장에 걸쳐 8 번 나오고 있고, 賢人은 24 번 나온다(『論語引得』, Harvard-Yenchi ng Instit ut.e Sin o log ica l Index Seri es 16). 그 의에도 善者 大人, 仁者, 智者, 勇者 등의 부속적인 용어들이 사용되기는 하지만 이들은 전문용어화 되지는 않고 인간적 자질의 한 가지 면을 강조할 때 쓰이기 때문에 대부분 앞의 세 용어를 수식하는 역할을 지닌다. 『論語』에서 士는 대체로 사회신분을 표시하는 경우에 쓰인다(필자의 박사논 문, The Rig h te o us and the Sag e , Sog an g Un ive rsit y Press, 1985, 51~60 면 참조).

孔子의 聖 A1 象 詩와 書에서 이미 확립된 王의 理想像이었던 聖 A 이라는 개념을 수용하면 서, 孔子는 聖王의 이미지를 보편화시켜서 자신과 모든 인간이 추구해야 될 최고의 理想으로 이를 확대시켰다. 이 변화는 미묘하지만 파격적인 것이 었다. 남을 평안하게 하는 정치적 지도력은 인격을 이룬 사람이 결과적으로 가지게 되는 역량이지만, 詩나 書에서와 같이 王位나 宰相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만이 聖人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論語』 전체 중 6 장 속에 언급되는 聖 A 의 모습을 분석하여 보겠다. 聖人은 우선 孔子 자신의 理想이 었음이 「述而篇」 33 장과 「子年篇」 6 장에 시사되고 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聖 A 과 仁者 같으면야 내가 어찌 감당하겠느냐.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는 데 물리지 않고 남을 가르치는 데 지치지 않은 점은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公西華가 말했다. 〈바로 그 접이 저희들이 본받지 못하는 것 입니다.〉 21) 여기서 〈聖〉과 〈仁〉은 유사어로서 孔子가 그침없이 되고자 노력하면서도 감히 그에 이르렀다고는 말하지 못하는 그의 이상이었다고 하겠다. 「子뚜 篇 」 6 장에 나오는 大宰와 子貢과의 대화는 子貢의 입장에서는 孔子를 聖人 이라고 불렀지만 22) 孔子 자신은 그러한 칭호를 사양하면서 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재능(藝)이 곧 인격자를 만드는 것은 아님을 명백히 하고자 했음을· 알려준다.

21 ) 子曰, 若聖與仁, ff l j吾登政. 仰爲之不JR, 語人不侍, 則可謂云爾巳矣. 公西華日, 正唯弟 子不能學也(덧~ffii」 34). 22) 〈天縱之將聖〉의 將에 대한 古注의 해석은 大로서 하늘이 孔子를 큰 성인으로 만들 려 한다고 이해했고 新注의 해석은 治로서 거의 가까워졌다고 보았는데, 劉寶楠은 未就로 보아 아직 도달하지 않은 것으로 풀이했다.

제자들이 孔子를 〈聖人〉이라고 부론 예는 「子張篇」 12 장에 또 한 번 나오 는데 이질적 문체와 내용이 많이 포함된 『論 語 』 마지막 5 편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문맥상으로 보아도 孔子 사후에 일어난 일이었던 것 같다. 子游가 子夏의 門人둘은 물 뿌리고 소제하고, 부르는 데 응하고, 묻는 데 대답하 고, 나오고 물러가는 등 末端 B9 인 일은 잘하지만 君子가 되는 근본적인 길에 는 어둡다고 평하자, 비판을 받은 子夏가 처음과 끝을 다 포섭하고 있는 사람은 聖人뿐이기 때문에 교육방법은 점진적이어야 됨을 변호하고 있다• 주석서둘은 처음과 끝을 한결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은 〈一以貫之〉(하나로써 모든 것을 관통한다)를 말히는- 것으로 여기서 언급된 聖 A 이란 孔子였다고 풀기한다. 「季氏篇」 8 장에 언급되는 君子가 두려워해야 할 〈聖人之言〉 역시 전승상으로 후기의 것일 가능성이 크고 ,23) 여기서 말하는· 聖人이란 孔子와

23) 君子가 두려워해야 할 다른 27} 지는 天命과 大人으로 보고 되는데, 보통 『論語』의 다른 부분에서는 〈長天命〉이 아니라 〈知天命〉으로 나오고 있는 데서 차이가 있다 .

大人에 대해서 주석가들은 聖人과 갇다고 하지만 『諦語』 전체에서 여기 의에는 大人 을 언급한 적이 전혀 없고, 大人이란 孟子에서 중시되는 용어이므로 이 부분은 孟子 學派의 후기 편찬에서 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孔子의 가르침의 원천이 된 聖王들을 막연하게 지칭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 다. 孔子의 사고 안에서 聖人이 人格완성의 최고경지를 상징하는- 용어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는 「雍也篇」 30 장과 「述而篇」 26 장이다. 「雍也篇」 30 장은 子貢과 孔子와의 대담을 보고한 것으로 仁을 이루는 방법과 仁이 철정에 이르러 모든 사람에게까지 널리 확산되는 상태, 그것이 바로 聖의 경지임을 밀하고 있다. 子貢이 묻기를 〈만일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고 대중을 구제할 수 있다면 어떻 겠습니까? 仁이라고 부를 만하겠지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仁에 불과하겠는가? 반드시 聖일 것이다. 堯舜도 그것을 할 수 없어서 근심했던 것이 아니겠는냐. 대개 仁이라는 것은 내가 서고(立) 싶으면 남을 서게 하고, 내가 발전하고(達) 싶으면 남을 발전하게 하는 것이다. 가까운 자기를 비유삼아 남에 게까지 할 수 있는 것이 仁을 이루는 방법 (仁之方)일 뿐이다.〉%) 끝부분에 나오는 仁과 仁之方에 대해서는 후에 논의하기로 하고, 지금은 聖人의 특성에만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聖이 분명히 仁보다 높은 경지이지 만 聖의 핵심은 仁울 최대한으로 확대시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모든 이에게 베푸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聖人이 된다는 것은 초인적인 지식이나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25)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못하고 있는 그것 울 이룬다는 데 특징이 있다. 君子나 仁者는 아직도 추구하고 있는 데 비하

24) 新注는 〈仁者, 以天地萬物, 爲一體, 莫非已也〉라고 해서 天地萬物로까지 확대시키고 있지만, 『論語』의 本 텍스트가 관십을 두는 것은 인간일 뿐이다. 곧 자기를 비유로 삼아 남에게까지, 또 모든 백성에게까지 그 인자함을 확대할 것을 말하고 있다 . 25) -市定 M iyazaki I chisa da 는 聖人을 超人的인 존재로 보고 君子를 교양인으로

보아 대조했는데(『論語(J)新硏究』), 이런 대조는 논어에는 나오지 않는다. 聖人울 영어로 번역한 이들이 선택한 용어도 다양해서, Le gg라근 혹은 로 Wale y는 로하였다.

여 聖人은 도달했디는 면에서 군자와 聖 人 사이에는 정도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한 서민 출신으로 德이 높아서 임금이 된 堯와 舜만이 聖人으로 『 論語』에서 일컬어지는데, 그들 역시 孔子의 聖人像울 완전히 점유하지는 못한다. 그들도 그렇게 하기믈 힘들어 했다고 孔子는 묘미 있는 논평을 첨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 王이 되었다는 것 그 자체가 곧 聖人이라는 것은 물론 아니며, 가장 덕이 있던 王들도 聖의 최고경지에 도달하기를 어려워했 다는 것이다. 丁若鏞은 「雍也篇」 30 장의 〈聖〉은 〈達天之德也〉라고 주석을 달았는데 , 26 ) 이것은 天 으로부터 받은 바의 德울 통달한 경지가 곧 聖이라고 풀이한 것이다. 이 말은 〈聖〉이란 보편적으로 인간이면 누구나가 도달할 수 있는 도덕의 완성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하겠다. 「述而 篇 」26 장에 언급된 孔子의 말씀도 같은 내용이다. 〈聖人은 내가 만나 볼 수 없다 하더라도 군자디운- 사람을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하겠다.〉27) 聖人과 군자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고 같은 仁의 길을 걸어가는 데 도달한 정도의 차이만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十三 經 注疏』에서 聖人과 군자를 〈上聖之人〉(최고의 성덕을 지닌 사람)과 〈行善無意之君〉(선을 행하여 게으름이 없는 군주)으로 풀이하였고, 『四書集 注』에서 〈神明不i ff lj 之號〉(신명하여 헤아릴 수 없는 칭호)와 〈才德出衆之名〉 (재능과 덕이 출중한 자의 이름)으로” 대조적으로 본 것은 오히려 오해를 낳을 우려가 큰 것이다. 劉寶楠이 『論語正義』에서 군자는 〈未及聖人也〉(성 인에

26) 「論語古今注」, 『與猶堂全書』, 11-3, 22b ; 景仁文化社, 2 권 213 면 . 27) 이 章 후편에는 善 A 과 有恒者가 聖人과 君子와 병행을 이루며 언급되는데, 두 개의 다론 말씀이 결합된 것으로 본다 . 牟宗三은 〈=I L 子가 처음 열어놓은 사상은 오칙 仁과 聖의 길 一路뿐이다〉(『中國哲學의 特質』, 송항룡 역, 동화출판공사, 1983, 49 면)라고 하였는데, 仁과 聖이 곧 君子之道를 이루는 것임을 잘 표현한 것이다 .

아직 이르지 못한 자)라고 한 것이 본문에 가장 충실한 해석이라고 하겠다. 결국 『論語』에서 제시된 聖人의 모습은 디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聖人은 孔子가 자신과 남을 위하여 최고의 人格理想으로 삼고 있었다 는 점이다. 둘째, 堯舜만이 聖 A의 구체적인 예로 나오지만 그들 역시 聖人 像과 완전히 일치되지는 않고 있다. 그들이 王이면서도 본래는 서민 출신으 로 王으로 천거될 수 있는 인격자였다는 면에서 孔子의 넓은 인간상을 포용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셋째, 多能이나 藝는 聖人의 일부분을- 이룰 수는 있으 나 근본적인 요소는 아니라는 점이다. 넷째, 聖의 핵심은 仁之道 혹은 君子 之道의 완성에 있는데, 그 영향이 많은 이들에게 확대된다는 점을 孔子는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聖人이 孔子의 최고이상이었던 것은 확실 하지만, 철정에 이론 사람이란 찾아 보기 힘들기 때문에 孔子는 비록 도달하 지는 못했어도 聖人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을 君子라고 불렀고, 군자의 모습을 제시하는 데 그의 전력을 경주하였던 것이다. 孔子의 君子像 君子란 『詩經』과 『左傳』에서는 지배층의 사회신분을 지칭하는 용어인데, 『論語』에서는 격언의 인용이나 후기 편집 등에 나오는 약간의 예의를 제외 하고는 거의 한결같이 도덕적 인격자라는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뿌 君子나 仁과 같은 독창적이고도 중심적인 용어가 『論語』 전체에서 지닌 의미가 한결같다는 사실은 孔子의 사상체계가 지금은 단편적으로 보존되어 있지만 28) 君子라는 용어는 『論語』에 전부 107 번 나오는데 그중 사회신분을 지칭하는 예는 9 번이다. 「顔淵」 19 에 〈君子의 德은 바람이요 . 小 A 의 德은 풀〉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그 당시의 격언을 인용한 것이라고 본다. 「鄕黨」 5 는 사회계층에 따른 의복을 말할 때 쓴 것이며, 「季氏」 6, 「陽貨」 4(3 번), 「微子」 10-€ :- 후기 수집 중에 나오며, 「憲問」 7 역시 후기의 수정이 들어간 것 갇다. 君子를 영어로 번역한 이들은 다양한 용어를 택하였다. 예를 들어 Le gg~근 을택하고있다.

그 자체로서는 통일된 것아었다는 것을 확실시해 주며, 『 論語 』 라는 기록의 역사성에도 상당한 산방성을 더해 주는 증거가 된다. 또한 孔 子 는 〈君子〉 라는 용어의 의미만을 바꾼 것이 아니라 그와 상반되는 〈小 A 〉의 의미 역시 변화시켜서, 본래의 庶民이라는 뜻에서 인간적으로 작은 사람, 곧 인격을 이루지 못한 졸렬한 사람을 지칭하게 하였다. 따라서 군자와 소인은 『論語 』 전체를 통해서 인격적으로 된사람과 되지 못한 사람으로 계속 대조되어 나온다 . 2 9)

29) 小人은 『論語』에 24 번 나오는데 그중에서 19 번은 갇은 章 속에서 君子와 함께 언급 되어, 상반되는 인간상을 보여준다 .

孔子가 말하는 군자와 소인이 사회적 신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명백하게 보여주는 예는 「雍也篇」 13 장이다. 〈孔子께서 子夏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君 子儒가 되어야지 小人儒가 되지는 말아라’ 하고 말씀하 셨다.〉 古注는 〈君子는 儒가 되면 道를 밝히는데, 小人은 儒가 되면 그 이름 (名)을 내는 데 힘쓰기〉 때문이라고 내용을 풀이하였다. 新注에서는 儒의 글자를 해설하여 〈學者의 칭호〉라고 하였는데,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狩野直喜는 儒의 역사를 자세히 고찰한 바 있다. 곧, 孔子 당시의 儒란 사회 적으로는 지배층에 속하는 지식을 소유한 文化人 전체를 지칭하였으며, 孔子 사후에 다른 학파, 특히 墨家둘이 禮樂과 내면적 敎化를 중시하는 孔 F1 의 유약함을 풍자하여 儒라고 부르던 것이 孔門의 명칭이 되어 荀子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칭호가 되었다는 것이다 .30) 위에 인용한 孔子와 子夏와의 대화를 보면 문화적 교양을 가르치는 일이 孔子 교육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한낱 시작일 뿐 전체를 이루 는 것은 아니었다. 孔子는 교육이 지식인이나 교양인을 만드는 데 그쳐서는 소용이 없고, 문화적 교양의 바탕이 되는 인간됨에까지 침투해야 된다고 본 것이다. 곧 배움의 목표는 소인을 벗어나 군자가 되는 데 있었다.

30) 狩野直喜 Kano Naok i, 「儒®意義」,《藝文》 II(1 9 21 ), I : I~12 와 7 : 531~44.

그런데 소인과 군자를 가르는 초석은 德울 키우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었 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君子는 德을 마음에 품고 小人은 土룰 마음에 품는다. 君子는 도리에 맞는 바(刑)를 생각하고 小人은 특혜(惡) 받기를 생각한 다〉 .311

31) 〈子日, 君子懷德,小人懷士. 君子懷刑 小人懷惠〉(「里仁」 II) . 新注에는 土를 자신이 거처하는 곳의 편안함에 빠지는 것이라고 의역하였는데, 劉寶楠은 土를 田으로 풀이 하여 생계가 유지되는 근거로 직역하였다 . 여기서는 후자의 해석을 따랐다 . 惠를 古注에서는 安으로 풀이했고, 新注는 이익을 람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결국 자신의 편안함을 위하여 특별한 은혜를 받으려는 것을 말한다.

완전한 對句法p arallel i sm 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德〉은 〈土〉와, 〈刑〉은 〈惡〉와 대립되고 있다. 小人이 관심을 두는 土와 惠란 농경사회에서 경제적 이득의 원천이 되는 토지와 정치적 권력에서 나오는 특혜를 말하는 것이 다. 孔子는 小人울 구별짓는 특성을, 羲를 희생하면서 利를 추구하는 사람이 라는 데(「里仁」 16) 두고 있다 . 따라서 이익을 보면서도 義롤 생각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것이기에(「憲問」 12), 孔子는 君子란 德과 刑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라고 단정한다. 여기서 刑이란 형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규범이 될 수 있는 法이나 道理를 지칭 하는 것으로 劉寶楠은 이를, 매일 禮法에 마음을 - 써서 옳지 않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그리고 德이란 禮法을 실천할 수 있는 기 초 곧 인간다워질 수 있는 참재된 가능성 또는 도덕성을 지칭한다. 여기서 孔子의 사상에서 德이 지닌 의미를 그 전과 비교하며 분명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詩書에서 德이란 民울 잘 다스림으로써 天命울 받고 보존하는 王權의 필요충분조건을 의미했는데, 『論語』에서는 그 의미가 확대되어 천부적인 인간의 道德性으로 이해되었다. 우선 「述而篇」 23 장을 보면, 孔子는 〈하늘이 내 안에 德을 부여하였다〉(天生德於予)고 하여 德이 天에서 기원한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述而 篇 」 3 장에서는 〈德이 닦아지지 못하는 것……이 것이 내가 우려하는 바이다〉(德之不條……是吾憂也)라고 말하여 德이란 완성 된 상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키워나갈 책임이 인간에게 있음을

강조하였다. 孔 子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德 을 닦아야 할 의무는 모든 사람에 게 있는 것으로, 「 衛靈 公 篇 」 13 장에서 孔 子 는 사람들이 이를 게을리하는 사실을 한탄하고 있다. 〈나는 여지껏 德 좋아하기를 女色 좋아하듯 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論語 』의 〈德〉이란 개념은 후에 孟 子 의 〈性〉과도 연결되는 것으로, 「 憲 問 篇 」 33 장에는 馬 에게까지 德 이 적용되는 것을 보아 德 이 각 사물에 주어전 천부적인 성격을 지칭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孔 子 는 德이 완전하게 된 상태를 仁이라고 불렀는데 仁의 상세한 내용은 인간론 부분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君 子와 德의 관계만을 여기서 조명해 보면, 君子는 德울 마음에 품고 매일 이를 실천하여 고귀한 인품을 갖게 되고, 小人은 이익을 따름으로써 결국은 바천한 품성을 소유하게 된다(「 흉 F버 」 23). 자신의 노력에 따라 도달 하게 되는 소인과 군자라는 이 상반되는 인간 모습을 내적인 자질, 의면적인 태도, 남과의 관계, 그들이 지닌 규범의 차이 등 4 가지 각도에서 고찰하여 보겠다. 첫째, 군자와 소인은 그들의 내적 자질에 상당한 차이룰 보인다. 군자는­ 마음이 넓어서(周)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남과 경쟁하는 마음이 없으며 (「爲政」 14), 한 가지 기예에 능하기보다는 모든 일에 두루 쓰일 수 있다 (「爲政」 12). 그와 반대로 소인은 편파적이고 경쟁적이어서 남과 늘 견주어 보려고 하며, 한 가지 기능에는 뛰어날 수 있지만 그에게 큰일을 맡길 수는 없다(「衛 靈 公」 34). 또한 군자는 원칙은 버리지 않으면서도 융통성이 있는데 (「學而」 8) 비해, 소인은 겉치레에 치우치고 고집스럽다(「子張」 8). 둘째, 군자와 소인은 내적 자질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의면적 태도 에 있어서도 구별된다고 孔子는 말하였다. 군자는 근심이나 두려움이 없이 평온한 모습을 지니는데(「顔淵」 4), 소인은 항상 불안하고 초초하며 근심에 차 있는 듯하다(「述而」 37). 군자는 태연하지만 교만하지 않은데, 소인은 교만하면서도 태연하지 못하다(「子路」 26). 「鄕黨篇」 전체에는 孔子의 근엄 하면서도 화락하고 부드러운 의모를 묘사함으로써 환경에 따라 적절하게 적응하는 군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셋째, 군자와 소인의 차이는 내적 자질과 드러난 외모라는 양면성에 있어

서 그 자신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도 뚜렷이 드러난다. 군자는 남들과 늘 동의하지는 않으면서도 화합하는데, 소인은 동의하는 듯하지만 화합하지를 못한다(「子路」 23).32) 孔子는, 군자는 남의 장점을 키워주고 단점은 드러나지 않게 하는 데 반하여 소인은 남의 안 좋은 점을 키우기 때문에 (「顔淵」 16), 소인과 가까이 하는 사람은 德에 자랄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君子는 道에 알맞을 때에만 기뻐하므로 그를 기쁘게 하기는 어렵지만 섬기기는 쉽고, 소인은 기쁘게 하기는 쉬워도 섬기 기는 어렵다(「子路」 25) 고 하였다. 따라서 참된 우정이란 君子둘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論 語 』 의 많은 부분은 찬구들과 나누는 우정의 기쁨을 말하 고 있다 .33)

32) 馮友蘭은 同과 和의 차이점을 다음과 갇이 설명하였다 . 〈同은 획일성 또는 同一性을 뜻하는데, 이것은 異質的인 것과 서로 兩立할 수 없다. 和는 조화를 뜻하는데 異質的 인 것과 兩立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和는 이 異質的인 것들이 結合되었을 때 생긴 결과이다(『中國哲學史 』 , 鄭仁在 역, 형설출판사, 1982, 233~234 면). 33) 「學記 I, 「顔淵」 24 등. 仁者만이 남을 좋아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다는 것은 (「里仁」 3) 올바른 대인관계를 가질 수 있는 안간적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넷째, 군자와 소안이 지니고 있는 규범의 차이룰 孔子는 한마디로 표현하 여, 〈군자는 자신 안에서 구하는데 소인은 남한데서 구한다〉고 하였다(「衛읊 公」 21) . 이 말은 곧 德이란 인간 안에 주어전 것이기 때문에 잘못이 있을 때 군자는 자기 안에서 그 원인을 살피는 데 반하여, 소인은 남을 탓하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군자는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 지 않고(「學而」 I, 16 등), 오히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과 더불어 자기가 남을 제대로 알지 못할까 근심한다(「憲間」 30, 「衛靈公」 19), 물론 德이란 원래 天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天은 인간도덕의 원천으로서 중요 하다. 또한 孝佛는 仁울 이루는 시작이 되기 때문에 가정이 德의 실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도덕적 행위자 moral ag en t는 가정도 天도 아니고 바로 인간이라는 하나의 인격체인 것이다언 天을 원망

34) 謝幼偉, 「孔子倫理中的 個人地位」, 《民主評論》 16(1 9 65), 14 면 . 吳康 「孔子形上思想

一性, 命, 天道」, 〈淸 華釋 》 4(1 9 64). 그는 天울 문또한쑥 것은 불 7 뜸하기 때문 에 孔子가 언급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 않고 남을 허물하지 않으며, 밑에서부터 배워서 위에 도달하는(「 :꾼 「버」 35) 孔 子 의 모습은, 곧 자신 안에서 모든 탓을 찾는 군자의 구체적인 예를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論語』 에 제시된 군자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고찰하였는데, 군자의 유사어로 쓰이는 貸人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35 ) 〈였〉이란 『 詩經』 이 나 『 左傳 』 에서는 두 사람 이상을 비교할 때 쓰이는 비교어로서 정치적 능력 이 뛰어난 재상들을 가리켰는데, 『 論語 』 에서는 비교급의 의미는 지속되지만 재능보다 德에 중점을 둔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러나 孔 子 가 자신의 가르침 울 가리켜서 〈古之道〉, 〈君子之道〉 혹은 〈吾道〉라고는 하지만 〈賢人之道〉 라고 부르는 적은 없는 것을 보면, 賢人 혹은 賢者란 孔子가 중시한 이미지 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賢과 不賢으로 사람들을 개괄적으로 분류하거 나(「 里 仁」 17),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아래로는 賢才 를 등용하고(「 子路 」 2) 위로는 賢者를 섬기는 것이라는(「衛읊公」 10) 등 일반적인 의미로 賢 울 사용하였다. 孔子가 顔淵과 伯夷叔齊롤 賢人이라고 부르며(「 雍 也」 II, 「述而」 15) 仁울 얻은 사람들이라고 논평한 것을 보면, 결국 孔子의 사상체계 안에서 현인이란 仁者 내지 君子와 같은 것인데 〈뛰어난 사람〉이란 본래의 뉘앙스를 德에 적용했다는 것이 새로운 것이라고 하겠다.

35) 貸이란 용어는 『論語』에 24 번 나오는데, 그중 13 번은 孔子의 말 속에, II 번은 제자나 의부인의 말 속에 쓰인다. 그리고 24 번 중 18 번이 下권에 나와서 편집시기적으로 보아 후기 사료에 더 빈번히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孔子의 제자들 중에서 특히 子貢이 孔門 안에서 누가 더 뛰어나는지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으로 〈賢〉이라는 용어는 주로 子貢과 연결되어 쓰여전 다. 「先進 篇 」 16 장에 보면, 子張과 子夏 중에 누가 더 뛰어난가를 子貢이 孔子에게 물었을 때, 孔子는 한 사람은 지나치고 한 사람은 미치지 못함으로 양쪽 다 中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답하고 있다. 「憲問篇」 29 장에는 남을 평하 기를 좋아하는 子貢울 년지시 질책하는 孔子의 말씀이 실려 있다. 〈賜(子貢

의 名)는 (나보다) 나은-가(쩐) 보구나. 나는 그런 것을 할 여유가 없는데.〉 물론 子貢 자신은 다론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孔子에게는 미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 子張篇 」 25 장에 드러나고 있는데, 거기서도 〈賢〉이러는 용어를 써서 비교의 뜻을 나타낸다. 그러나 賢者는 士와 마찬가지로 儒家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다른 道를 추구하는 뛰어난 사람들에게도 적용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36) 儒家 고유의 인간상을 대표하지는 않는다고 보아야 하겠다.

36) 「憲問」 37 에는 세상을 도피하는 이들을 賢者라고 부르고 있으며, 「微子」 6 에는 은자들을 醉人之士라고 평하고 있다.

결국 孔子가 제시한 인간의 모습은 군자상이 중심이 되는 것으로서 君子 는 천부적인 德울 일상생활 속에서 닦아서 仁을 이룬 인격자를 말한다. 중국 고대로부터 계속되는 인간 이해의 전승 속에서 孔子가 이룬 가장 큰 공헌은 왕권을 중심으로 한 聖人과 君子와 賢者 등 전통적인 人間像울 仁이라는 人格완성에 초점을 맞추어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보편적인 의미를 지닌 인간론을 확립하였다는 데 있다. 이제까지 r 論語』의 단편적 말씀들을 모아 모자이크를 만들면서 평면적으로 군자의 모습을 살펴보았는데, 앞으로는 좀더 심층적인 분석을 시도하여 修已安人의 이론체계를 고찰하도록 하겠 다. 3 修己安 A 의 인간론 후기 유가전통에서 보편화되어 우리 학계에 익숙한 〈治人〉이란 용어 대신 에 〈安人〉이라는 용어를 택한 이유는 〈治人〉이라는 말이 『論語』에는 한 번도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과 〈治〉라는 글자에는 남을 다스린다는 지배의 뜻이 훨씬 강해서 정치가에게만 한정된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論語』 자체에서 治라는 동사는 사람을 목적어로 갖는 경우는 없고 軍務를 말아보

는 일(「公治長」 8), 렸客과 宗 廟와 軍I I~ 를 관장하는 일(「 1짱 晶1 」 19) 등 사우분 장을 담당할 때에나, 〈無爲而治〉(작위함이 없이 다스린다)(「衛蓋公」 5) 와 〈天下治〉(천하가 다스려진다)(「泰伯」 20) 와 갇이 다스림을 추상적으로 말할 때에만 쓰이고 있다. 孔子의 사상을 충실히 대변하자면, 사람이란 다스려야 할(治) 대상이 아니라 편안케 하여야 할(安) 주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남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은 자신을 닦는 君子 공부의 자연스러운 결과여 서, 修已와 安人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지닌다. 『論語』에서 이 둘의 관계를 가장 명백하게 보여준 것은 「憲問篇」 42 장이다. 子路가 君子에 관하여 여쭈어 보았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敬으로써 자신을 닦는(修己) 것이다〉. 子路가 말하기를 〈그렇게 할 따름입니까?〉 선생님 께서 말씀하시기를 〈修己함으로써 남을 편안하게 (安人) 하는 것이다〉. 子路가 또 말하기를 〈그렇게 할 따름입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修己함으로써 백성들을 편안하게 (安百姓) 한다. {I 參已로써 安百姓하는 일은 堯舜도 힘들어했던 것이다〉. 이미 「雍也篇」 30 장의 孔子와 子貢의 대화 속에서 모든 백성에게 널리 베풀고 대중을 구하여 仁의 극치를 이룬 聖人의 모습을 살펴 보았다. 여기서 는 聖人에 이르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설명하여 만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일이 사실은 지극히 작고 눈에 띄지 않는 修己, 곧 자기를 닦는 데서 시작 한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 朱子는 바로 〈修已以敬〉(공경스런 자세로 자기를 닦는다)이리는 처음의 말씀 안에 孔子의 가르침은 그 지국함에 이른 것인데 子路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보잘것없는 일로 여기므로 계속해서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의미를 확충해준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劉寶楠 역시 〈安人〉과 〈安百姓〉이 모두 〈修已以敬〉 안에 그 기초를 두고 있으므로 위에 있는 사람이 공경스러우면 天下가 평안해진다고 풀이하였다.37J 결국 위에 37) 安人과 安百姓의 관계를 확대되는 개념으로 보아 古注에서는 人은 〈朋友九族〉을 가리킨다고 했고, 劉寶楠은 安人울 齊家로, 安百性을 治國平天下라 했다(『論語正義』,

329 면) . 본문 자체의 의미에서는 확대되는 면도 있으나 앞의 것이 뒤의 것을 함축하 고 있는 면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인용한 孔子의 말씀에서 핵이 되는 것은 〈 修 已以敬〉으로서 우선 孔子의 인간론에서 修已의 문제를 고찰하겠다. (I) 修己 : 崇德 修已(자신을 닦는 공부)의 시작은 崇德(덕을 숭상함)에 있는데, 과연 인간이 모두 德울 숭상하여 닦을 수 있으며, 또 닦아야만 된다는 전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孔子는 논하고 있지 않다. 그는 이러한 기초적 전제를 西周시기의 전통으로부터 수용한 후 그 의미를 심화하였을 뿐이다. 곧 孔 子 는 100 여 년 후에 그의 사상을 체계화시키는 孟子에서와 같이 모든 사람 안에 仁殺禮 智의 四端울 지닌 선한 本性이 주어졌다고 명백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단지 앞에서 보았듯이 자신의 예를 들어서 〈하늘이 내 안에 德을 부여하였다〉 (天生德於子)고 확신에 찬 발언을 하였을 뿐이다(「述而」 23). 그런데 이 말이 나오는 배경은 그의 14 년 동안의 여행중에서 宋나라의 司馬인 桓廻가 그를 죽이려고 할 때이다. 따라서 古注와 新注 전통은 여기서 언급된 德 이란 孔子 가 이룬 그의 고유한 聖德을 지칭한다고 보았다. 劉 寶 楠은 『書經』 「召話」 울 인용하면서, 인간의 지혜나 우매함이 모두 하늘이 낳은 것이니, 孔子가 5 0;t-에 天命울 알게 되어 자신이 가진 바의 德은 天이 명한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 사실을 말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天生〉이라는 주어와 동사아다. 특히 『 詩經』 大雅 「禁民篇」에 보이는 〈天生蒸民, 有物有 ~IJ 〉이리는 - 유명한 시구와 연결해 서 해석하여 볼 때 위의 孔子의 말씀은 하늘이 만물을 낳았기 때문에 사물 마다 원칙이 있다는 『 詩經』의 사상과 비교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단, 孔子는 사물마다에 內在되어 있는 원칙을 德이리는· 말로 표현하였고 특별히 인간 안에 주어진 德에 관심을 쏟았다. 따라서 비록 德이 모든 인간에게

다같이 주 어전 것이라는 보편적 명제를 『 論語 』 에서 명백히 찾 아 볼 수는 없다 하더라도 德이 곧 인간에게 주어전 도덕적 가능성이며, 여기서부터 孔 子 의 실천적인 崇德사상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崇 德하는 것에 관하여 가르쳐 주기를 청한 子 張에게 孔 子 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忠 信 을 주로 하고 義 에 따라 옮기는 것이 德울 높이는 것이 다〉( 通 濁 10). 〈主忠 信 〉이란 말은 「學而 篇 」 8 장과 「 子 뚜 篇 」 25 장에 반복되고 있고, 그의에도 忠信이 『 論語 』에 언급되는 부분이 4 번 더 있는데, 모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져야 할 인간의 성실함을 지칭한다 .38 ) 그중에서도 「衛 蓋 公 篇 」 6 장은 인간이 실천해야 할 바로서 〈言忠 信 , 行 篤 敬〉(말이 충실하고 신용이 있으며, 행동이 진지하고 공경스럽다)을 들어서 忠信울 특별히 말(言) 과 연결시키고 있다. 여기에 준해서 앞의 「顔淵篇」 10 장의 崇德의 내용을 해석해 보면, 〈말에는 忠 信 울 지키고, 행동에 있어서는 義로움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말과 행동에 있어서 忠信과 義를 따르는 것은 德의 실천이기 때문에 인간의 바탕으로서 가장 중요하기는 하지만, 인간 사이의 다양한관계에 따라,또시대에 따라그것을적당하게 표현하는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이렇게 전승되는 표현을 文(文 章 )이라고 불렀고, 孔子는 質 과 文 이 결합되어 조화를- 이룰 때에야 崇德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보았 다.

38) 「學而」 4 에는 남과의 관계에서는 忠을, 천구와의 관계에서는 信 울 말하고,「公治長」 28 은 성실한 사람을 전체적으로 지칭하며 , 「述而」 2 5i근 후기 제자들의 보고로 孔子 의 四敎 중에서 두 가지로서 忠과 信을 들고 있다 .

文質彬彬論 「雍也 篇 」 18 장에 孔子의 유명한 文質彬彬論이 나온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 質 이 文을 압도하게 되면 거칠게(野) 되고, 文이 質 울 압도하게 되면 문약해(史)진다. 文과 質이 서로 조화를· 이룬 후에야 君子

라고 할 수 있다 .39) 여기서 〈質〉이란 인간의 자질 혹은 성품을 가리켜서 殺로써 대표되는 德을 말하고 ,40) 〈文〉이란 詩, 畵 , 禮, 樂 등의 文 章 울 지칭해서 文化의 총체 를 말한다. 文은 남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孔門의 교육 과정에서 대부분을 차지히는- 것이었다. 그에 비하여 質이란 남이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人間 각자가 꾸준히 닦음으로써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子路 篇 」 21 장에 보면 孔子는 南方사람들의 격언을 인용하면서 〈누구나 자신의 德울 항구하게 닦지 않으면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선타고 하였다. 孔子는 이 점이야말로 占울 쳐볼 필요도 없이 명확한 것이라고 다시 단언하고 있다. 따라서 孔子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방법은 양면성을 띠어서, 文化的인 유산은 직접적으로 교육하였고, 德울 닦는 일은 君子像울 제시함으로써 스스로 분발하기를 계속 촉구하였다.

39) 新注에 따르면, 野는 野人으로서 鄒略함을 가리키고 史는 文書를 담당하는 관리로서 관습적인 일을 너무나 많이 돋기 때문에 성실함이 부족하게 된다는 것이다. 40) 子日, 君子義以爲質, 禮以行之, 孫以出之, 信以成之, 君子哉(「違靈公」 18). 41) 〈 T恒 其德、 或承之墓〉는 오늘날의一 『周易』 恒卦九三의 父辭이나 『周易』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하나의 격언으로 독립해 있었을 수도 있으므로 이 말을 반드시 『周易』에 서 孔子가 인용했다고 불 필요는 없다. 劉寶楠은 或울 常으로 보았는데 이것을 따랐 다.

好學 質과 文, 내용과 표현이 조화롭게 발전해야 함으로 자연히 孔子가 말하는 배움(學)이란 뜻 안에는 인격적 수양과 학문적 연마의 두 가지 뜻이 결합되 어 있다.요) 따라서 생子學〉(배우기를 좋아함)이란 孔子가 가장 중시하던 자세

42) r~ 』 안개 學이란 글자는 64 번 쓰이고 있는데, 전승된 문화를 배운다는 뜻과(「雍 也」 26, 「顔淵」 15 등) 德을 닦는 뜻(「學而」 1 등)으로 분리해서 쓰일 때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 양면성을 포괄하고 있다.

로서, 노력하는 君子의 특성을 지칭했기 때문에(「學而」 14), 그가 가장 높이 평가하던 제자 顔淵과 자신에게만 好學者라는 칭호를 허용하였다. 哀公께서 제자들 중에 누가 배우기를 좋아하는(好學)가를 물으셨다. 孔子께서 대답하시기를, 〈顔回라는 사람이 있어서 배우기를 좋아하여 분노를 남에게 옮기 지 않고, 과실을 거듭하지 않았는데 불행히도 단명하여 죽었습니다. 지금은 없습 니다. 아직까지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사람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43)

43) 「雍也」 3, 「先進」 7 에는 季康子가 갇은 질문을 하고 있고 孔子가 유사한 답을 하는 것이 보고되고 있다. 갇은 사건에 대한 두 가지 전승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배우 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곧 小人이 될 수밖에 없는데 『論語』 전체에서 오직 한 번 언급되는 女子에 대한 17 편 23 장의 평가가 여자와 소인을 함께 묶고 있는 것은 여자가 배울 수 없었던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소개되는 호학의 내용이 학문적이라기보다는 실천적이라는 것이 홍미롭다. 노여움을 간직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 고 과실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이 올바론지를 안 후에는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호학이란 실천하려는 의지를 말한 것으로, 이러한 의지가 부족 하기 때문에 孔子로부터 질책을 받은 대표적 제자로서 円求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재능(藝)이 많은 사람으로 정치에 종사할 수 있다고 孔子의 추천을 받기까지 하였지만(「雍也」 8), 孔子가 제시히는- 인격적 배움에까지 나아가려고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円求가 여쭙기를, 〈선생님의 道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힘이 부족 합니다〉 하니,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힘이 부족한 사람은 중간에서 그만두는 것이지만 지금 너는 금을 긋고 있는 것이다.〉(「雍也」 12)

자신을 君子라고 부르기를 주저한 孔子였지만(「述而J 33), 好學이라는 뉘앙스의 자유스러움 때문이었는지 그는 자신의 정체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데서 찾았다(「公治長」 28). 따라서 그는 남들이 자기를 호학자로 알아주기를바랐다. 葉公이 子路에게 孔子가 어떤 분인가를 물었는데 子路는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왜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느냐? 그의 사람됨은 배우는데 發慣하면 밥먹기를 잊어버리고 그러한 즐거움(樂)에 근심을 잊으며 늙음이 닥쳐오는 것도 알지 못한다〉.”)

44) 「述而」 19. 葉公은 楚나라의 大夫. 新注에서는 이러한 好學의 모습은 聖人이 아니면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실제로 孔子는 모든 이가 이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쓴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밥먹기를 잊을 정도로 몰두했던 그의 배움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세세한 것까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그가 文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에 못지않다고 (명海」 33) 자신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 孔子 당시의 문화적 유산이었던 詩, 畵 禮, 樂에 대한 학문적 조예가 어느 누구보다도 깊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君子는 〈먹는 데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고 거처하는 데 평안하기를 구하지 않는다〉(「學而」 14) 고 한 그 호학의 모습을 자신에게 적용시킨 것으로 보아 修已의 배움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 기에 그는 이러한 배움이 근심이나 늙음조차를 잊게 하는 즐거움을 준다고 하였다. 즐거움(樂)이란 그 앎이 완전히 소화되어 자기 삶의 한 부분이 되었을 때에 비로소 체험될 수 있는 것으로 배움의 최고 경지롤 일컫는다고 하겠 다. 따라서 孔子는 〈아는 것(知)은 좋아하는 것(好)만 같지 않고, 좋아하는 것은 줄기는 것(樂)만 같지 않다〉(「雍也」 20) 고 하였다. 곧, 樂이란 全人的 반웅으로서 체득했을 때의 기쁨을 표현한다. 그런데 孔子의 삶 속에서 이 樂이란 글자가 보통 기대하는 이상으로 자주 보인다. 『論語』의 첫머리부터가

배움의 기쁨(說)과 멀리서 찾아 온 친구와 함께 나누는 즐거움(樂)으로 시작 되고 있다. 가난하면서도 즐거울 수 있는 것(「學而」 15), 곤경 속에서나 즐거 움 속에서나 오래 머물 수 있는 것(「 里仁 」 2), 거찬 밥에 물을 마시고 팔베 개를 하고 살아도 그 속에서 즐거움을- 가지는 것 (「述而」 16), 이 모든 7i 은 君子와 仁者, 곧 孔子가 삶 속에서 누리는 즐거움둘이었다. 孔子의 仁 배움의 결실로 군자가 체득하는 것은 仁이었다. 仁이 孔子의 가르침 안에 서 가장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仁이란 용어 자체는 詩書에 서는 육체적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데 쓰였고, 『左傳』과 『 國語』에서는 부모 자식간의 애정을 묘사하여서 孝, 義, 禮, 忠, 信과 더불어 여러 가지 덕목 중의 하나로 나온다 .45) 그런데 孔子는 이 仁이라는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德의 절정, 죽 人間性의 완성을 표시하는 전문용어로 만들었다. 孔子의 仁이란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가리키는 상칭어와도 같아서 孔子는 仁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각자의 삶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 제자들 안에 仁을 획득하고자 하는 열의를 심어 주었 다. 따라서 孔子는 仁에 관하여 묻는 제자들에게 각기의 정도에 따라 그때그 때 仁의 다론 면을 말해 주었고 우리는 그러한 단편적인 기록들만을 『 論 語』 안에서 접할 수 있다.

45) 竹內照夫 Takeuchi Teruo, 『仁(l)古義(1)硏究』, 明治書院, 1964 ; Lin Yii -She ng, The Evoluti on of the Pre-C on fuci a n Mean ing of Jen 仁 and the Con fuci a n Concep t of Moral Auto n omy , Monumenta Serica 31( 19 74/75), 172~204 면

司馬牛가 仁에 관하여 묻자 孔子는 〈仁者는 그 말하는 것을 더디게 한 다〉 46) 고 대답하였다• 仁은 실천으로만 체득되는 것이기 때문에 말보다 행동

46) 〈仁者其言也誘〉(「顔淵」 3). 誘울 古注에서는 難 혹은 不전흠이라고 했고 新注에서는 忍 및 難으로 보아 仁者는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쉽게 발설하지 않는 것인데, 司馬

牛가 말이 많으므로 이것을 절제시키기 위하여 孔子가 경계한 것으로 풀이했다. 劉寶 楠은 純이 訪의 칙역이며 難은 의역을 한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264 면).

이 앞서야 함을 지적한 것이다• 君子는 말에 신중해서 행동이 먼저 있고 그 후에 말이 따르도록 하게 하라는 것은 孔子가 누누히 제자들에게 충고한 것이었다(「學而」 14, 「爲政」 13, 「 里 仁」 24, 「顔淵」 3 등). 또한 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에 煥週가 仁에 관해 물었을 때 孔子는 〈仁이란 먼저 고난을 겪고 난 뒤에 얻게 되는 것으로 그래야 仁이라 고 할 수 있다〉 m 고 말해 주었다. 仁울 이루기 위해 필요한 한결같은 노력과 희생은 다음의 孔子의 말 속에도 잘 드러난다. 〈仁을 버리면 어찌 이름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군자는 밥먹는 순간이거나 아무리 급한 때이라도 仁 안에 머물러야 한다〉(「里仁」 5) 고 하였고, 〈仁울 달성하기 위해 자신을 죽일망정 목숨을 살리려고 仁을 해할 수는 없는 것〉(「衛盜公」 9) 이라고까지 역설했던 것이다. 여기서 孔子는 仁이 인간 삶에 지닌 궁극적 가치를 분명히 표명한 것이라고 하겠다. 德에 가장 높이 나아갔던 제자 顔淵의 仁에 대한 질문에 孔子가 대답한 〈克已復禮爲仁 X 본 가장 함축적이고 정확한 仁에 대한 孔子의 설명이었다고 평가된다.

47) 〈仁者, 先難而後獲, 可謂仁矣〉(「雍也」 22). 위의 번역은 古注의 전통을 따른 것이 다 . 新注는 仁者는 어려운 일에는 앞서고, 이익에는 뒤에 선다고 하였는데, 先難울 克己라고 본 정에서는 공통성을 지닌다 .

顔淵이 仁에 관하여 묻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극복하고 禮로 돌아가는 것이 仁을 이루는 것이다. 어느 날이건 자기를 극복하고 禮로 돌아간 다면, 天下가 仁에 따르게 될 것이다. 仁을 이루는 것이 자기로부터 나오는 것이 지 남에게서 나올 수야 있겠느냐〉. 顔淵이 그 세목을 청하자, 선생님께서 말씀하 시기를, 〈禮가 아니면 보지 말고, 禮가 아니면 듣지 말고, 禮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禮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48)

48) 「顔淵」 I. 竹內照夫는 克己復禮란 일종의 격언으로 孔子가 이 격언을 새롭게 해석하

여 仁울 이루는 길로 본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안연을 비롯한 제자들이 孔子에게 禮가 무엇인가를 전혀 묻지 않는 것을 보면 仁과는 달리 禮의 개념은 이미 확립되어 있었던 것을알수있다.

여기서 仁을 구성하는 두 요소, 克已와 復禮는 앞에서 언급한 修已와 安 A에 대응될 수 있는 것이다. 곧, 克已와 修己란 자기의 人格을 닦는 일이 고, 復禮와 安人이란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禮에 맞는 바를 실천하여 남을 편안하게 해줌을 일컫는다 .49) 다시 말해서 克已復禮란 자기에게서 시작되어 남에게로 확대되는 仁의 사회적 성격을 드러낸다. 與週가 仁에 대하여 물었 을 때 孔子는 仁이란 〈남을 아끼는 것이다(愛人)〉(「顔淵」 22) 라고 대답함으 로써 仁의 사회성을 강조하였다. 孔子는 제자들에게 인자한 사람과 사뀜으로 써 仁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라고 여러 번 충고하였는데(「顔淵」 24, 「衛靈公」 10 등), 이것은 仁을 체득하기 위해서도 사회적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 것이다.

49) 新注에 仁이란 〈本心의 온전한 德〉이라고 풀이하고 己를 私欲으로 보아 사사로운 욕심을 없앰으로써 본래 마음의 德을 다하는 것이 克已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性理學 的인 해석은 『論語』 자체에는 없다. 禮는 天理의 節文이라고 주석을 달았는데 역시 마찬가지이다. 「陽貨」 17 에 子張이 仁을 물었을 때 孔子가 5 가지를 대답하는데 그중 마지막 것인 惠가 역시 사회적 성격이 강하나 문체로 보아 후기 것으로 보아야 할 것 0l 다.

仲弓이 仁에 관하여 물었을 때 孔子는 특히 敬의 자세를 설명해 주었다• 〈문을 나설 때는 큰 손님(大賓)을 뵙는 것 같이 하고, 국민을 부릴(使民) 때에는 큰 제사(大祭)를 받드는 것처럼 하여라.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하지 않으면, 나라 안에 있어도 원망이 없을 것이고 집안에 있어도 원망이 없을 것이다〉(「顔淵」 2). 앞 부분에서 大賓과 大祭를 받드는 것과 같은 공경스러운 자세로 남을 대하고 국민을 부리라는 말은 〈修已以敬〉 (공경스러움으로써 자신을 닦으라)의 敬이 본래는 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었음 울 알려준다. 이와 같이 공경스러운 자세가 강조됨과 더불어 뒷부분에는 〈자기가 원하기 않는 바를 남에게 하지 말라〉는 仁울 이루는 구체적 방법이 제시되고 있다.

「雍也篇」 30 장에서는 이 방법론을 〈 1二 之方〉(仁을 이루는 처방)이라고 명시 함과 동시에 〈己欲立而立人, 已欲達而述人〉(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을 서게 하고, 자기가 도달하고 싶으면 남도 도달하게 하라)이라고 적극적으로 仁을 이루는 방법을 묘사하고 있다. 이미 언급한 「顔淵篇」 2 장과 「衛靈公篇」 24 장에서는 〈已所不欲, 勿施於人〉(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 으로 부정법을 써서 소극적으로 표현했는데, 둘 사이의 내용에는 차이가 없고, 仁之方이란 곧 孔子의 怨 혹은 忠怒임을 분명히 해준다. 曾子롤 통해 전해전 魯의 전승에서는 〈忠怒〉(자신에게 충실한 것을 남에게도 그대로 확대 함)야말로 孔子의 道를 하나로 관통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50) 子貢에게서 이어지는 齊의 전승에서는 〈怨〉(자신에게 대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남을 대 함)라는 한마디 말이야말로 종신토록 실천할 만한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衛靈公」 24). 仁울 성취하기 위한 수양방법인 仁之方 혹은 忠怒를 孔子의 가르침 전체를 묶고 대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한 原始儒敎 전통은 역시 지극히 실천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51)

50) 「里仁」 15. 朱子는 忠이란 자신을 다하는 것으로 體요 天道이며, 怨논 자기를 비유 로 해서 남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것으로 用이요 人道라고 설명하였다. 51) 孝와 怖야말로 仁울 아루는 本이라고 전하는 「學而」 2 장의 말씀은 孔子의 말씀이 아니라 魯나라의 제자 有子의 것이다. 물론 『論語』의 많은 부분에 孝佛가 중시되므로 이러한 孔子의 가르침에 기초를 둔 결론이었겠지만, 홍미롭게도 孔子의 말씀으로 孝를 직접적으로 仁에 이르는 길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은 『論語』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仁이란 상징어가 이와 같이 孔子사상 전체를 묶고 있고, 〈克已復禮爲仁〉 에서와 같이 仁 안에는 克己라고 하는 도덕적이고 내면적인 요소와 復禮라 고 하는 사회문화적인 요소가 모두 포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넓은 의미로서의 仁과 다르게 仁을 협의로 사용할 때에 仁은 質, 곧 德의 완성을 지칭하는 데 비하여 禮는 文, 곧 전승된 문화의 완성을 대표하게 된다. 한마디로 禮가 의부적 윤곽 혹은 형태를 말한다면, 仁은 인간 마음 안에 있는 禮의 근본 혹은 원천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겠다우 여기서 仁과

52) 錢稿 『孔子與論語』, 聯經出版, 1974, 251~56 면. 仁과 禮의 관계와 같은 예를 仁과

知에서도 볼 수 있다. 牟宗三이 〈知는 모름지기 仁 안에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덕이 포함되어 있다. 仁과 知를 병립하여 말할 때에는 그 양면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中國哲學의 特質』, 송항룡 역, 46~47 면)라고 한 것은 그 좋은 예이 다.

禮룰 구별하여 비교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그런데 仁과 前흥의 관계는 孔子 의 사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아주 중요한 것이다. 특히 후기 儒敎가 너무 禮에 치중하여 형식적으로 홀렀기 때문에 일상적인 儒敎에 대한 편견 을 바로 잡기 위해서 孔子가 仁울 禮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仁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되어가지고 仁이 없다면 禮는 해서 무엇하겠 느냐? 사람이 되어가지고 仁이 없다면 樂은 해서 무엇하겠느냐?〉(「八{介」 3) 禮樂은 文化의 총칭으로서 교육을 통해 전승되는 모든 사회적 표현을 대표했다. 그런데 禮樂의 스승으로서 춘추시대의 제일인자였던 孔子는 이 모든 표현 밀에 인간성의 완성인 仁이 우선적으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지分篇」 26 장에는 허울만 있고내용이 없는세 가지 부정 적 경우를 구체적으로 들고 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윗자리에 있으면서 관용함이 없고, 禮를 차리면서 공경함이 없으며, 喪울 당하여 슬퍼함이 없다면, 무엇을 가지고 그의 사람됨을 살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윗자리나 예의나 喪事 그 자체보다도 그것을 뒷받침해 주어야 될 관대함과 공경스러움과 슬픔이 더 중요한 것이며 그 바탕이 되어야 함을 가리킨 것이다. 「八僧篇」 8 장 역시 먼저 바탕이 이루어전 후에 문식인 禮가 따라야 함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仁과 禮의 비교는 무엇이 우선적 인가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을 뿐, 孔子가 이상으로 하던 바는 분명히 質과 文의 조화와 결합에 있었다. 따라서 이제 孔子의 禮사상을

좀더 깊이 고찰하여 보기로 한다. 孔子의 禮 『論語』 20 편 중에서 禮를 주제로 하여 수집되어 禮에 관한 언급을 가장 많이 하고 있는 부분은 「지分篇」이다. 그런데 「八僧篇」 전체를 분석하여 보면, 제사의식 때의 禮를 밀하고 있는 부분과 人間事에서의 禮룰 말하는­ 부분기 거의 半半을 차지하고 있고,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괄하고 있는 경우도 여러 번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53) 이 사실은, 孔子는 禮의 원초적 의미였던 祭祀 등 종교의식에서 가졌던 敬의 태도가 그대로 인간관계에 적용될 수 있으며, 이 두 세계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통하는 것이 라고 이해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그는 〈禮之本〉(예의 근본이 되는 마음가짐)(「지分篇」 4) 을 강조하여 마음의 슬퍼함과 검소함을 의부적인 절차 나 사치한 꾸밈보다 중시하였다.

53) 제사의식 때의 禮 : I, 2, 6, 10, II, 12, 1s; 17 장. 인간사에서의 禮 : 3, 4, 7, 8, 18, 19, 22 장. 이 둘이 상동하는 의미 : 9, 11, 13, 26 장.

사실 의적 표현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孔子 는 夏禮와 殷禮를 고증하려고 애썼고(「저介」 9), 이 두 왕조를 계승한 周禮 는 수정보완을 통해서 더 완전한 문화를 이루었다고 하였다(「爲政」 23). 「子후篇」 3 장은 비싼 검은 삼베 실로 짠 冠 대신에 검소한 굵은 명주실로 짠 冠울 쓰는 당시의 습관은 그대로 따르겠지만, 임금을 뵈울 때 밀에서 절하는 것이 禮인데 위에 울라가 절히는· 당시의 습관은 따르지 않겠다고 하는 孔子의 말을 전한다. 다시 말해서 孔子는 근본정신에 위배되지 않는 의부적 변화는 받아들일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禮의 표현에 있어서는 융통 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孔子에 의하면, 禮란 시대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것으로 그 본래의 정신을 표현할 수가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禮의 가장 큰 가능은 한 인간을 자립하게 하여 남 앞에 나설 수 있게 하는 데 있다(「泰伯」 8, 「 李 氏」 13). 다시 말해서 禮란 인간과 인간 사이 의 관계를 올바르게 묶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禮는 孔 子 의 인간론인 修已安 A 에서 安 A 의 구체적 상황을 인도하는 역할을 지닌다. 孔子의 安 A 이란 현대적인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넓은 의미의 정치경제관을 말한다고 하겠 다. (2) 安人 : 孔子의 정치경제관 孔子의 정치관은 그 개념이 상당히 포괄적이어서 인간관계 전체를 올바르 게 하는 것 자체를 政治라고 보았다. 「爲政篇」 21 장에서 孔子는 정치란 가정 에서부터 시작되어 점차로 확대되는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뚜렷하게 보여 준다. 어떤 사람이 孔子에게 〈선생님께서는 왜 정치(政)를 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 선생님께서 〈『 書 經』에 孝하라 오직 孝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으라 하였으니, 이것을 행함에 정치(政)가 있는 것이니 이것 역시 정치(政)입니다. 어찌 國政을 하는 것만이 정치를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하고 말씀하셨 다.터)

54) 여기에 인용된 『書經』의 말씀은 「君陳篇」에 유사한 말이 있기는 하지만 「君陳篇」 이 僞文에 속하므로 逸文이라 하겠다. 新注 전통은 施於有政까지를 인용문으로 보지 만, 위의 번역은 古注를 따랐다.

이 말은 孔子가 정치에 참여할 뜻이 없다거나 국가의 정치를 소홀히 해도 괜찮다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堯舜을 최고의 聖人으로 보았듯이 德울 쌓아 만백성을 평안하게 한다는 것이 孔子의 이상이었고 그 자신 14 년 동안 유세 를 하면서 정치에 참여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子후」 13 등).

단지 그에게 있어서 정치란 國 政을 말할 뿐만 아니라 선행되는 모든 인간관 계를 바르게 하는 것 또한 포함시키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齊나라의 景 公 이 孔 子 에게 정치에 관하여 물었을 때 그는 〈君 君 , 臣臣 父父, 子子 〉 5 5 ) 라는 유명한 대답을 했던 것이다. 임금은 임금답게 행동하고, 신하는 신하다우 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것은 각 사람이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제대로 한다는 것으로, 〈政〉(정치)이란 〈正〉(바른것)이라고 56 ) 본 孔子의 정치관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55) 「顔淵」 11. 이 질문은 孔子의 나이 35/6 세부터 42/3 세 때 (517~510 B.C.) 까지 7 년 동안 齊나라에 체류할 때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孔子世家」와 新注의 설인데, 木村 英-는 당시의 孔子는 아칙 사회적 신분이나 명성이 없었다는 접에서 奭谷의 會 때에 만났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r 論語』 309 면). 56) 「顔淵」 17. 魯의 실권자 季康子가 孔子에게 정치에 관하여 물었을 때 孔子가 대답한 말이다.

그래서 子路가 孔子에게 정치를 할 때에 가장 먼저 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孔子는 서슴없이 〈正名〉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子路」 3). 이름 울 바르게 한다는 것은 각자의 할 바가 그 직위와 맞는 것으로서 내용과 이름의 일치란 質과 文의 조화와도 직결되는 사상이다. 孔子는 직위가 바르 게 되었을 때 명령이 제대로 실시되어 일이 이루어지고, 그런 후에야 禮樂이 일어나고 刑罰이 알맞게 가해져서 백성들이 안정된다고 正名의 내용을 설명 하였다(「子路」 3). 따라서 정치를 하는 사람은 우선 자신을 바르게 해야 아랫사람이 그 말을 따르게 되어(「子路」 6), 남을 바로 잡을 수 있게 된다(「子 路」 13).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곧 德治로서, 德울 가지고 정치를 하면 북극성에 모든 별들이 모여들듯이 사람들이 그에게로 모일 것이다(「爲政」 I). 孔子는 임금이 德으로 백성을 이끌고 禮로 가지런히 하는 법을 가르치 면, 백성들은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스스로 바르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爲 政」 3). 따라서 정치를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들의 신뢰를 잃지 않는 것이다. 경험에 기초를 두었던 孔子는 식량과 군사력이 나라에 필요하 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인정하였지만, 德에 기초를 둔 신뢰야말로 그 두

가지보다도 더 중요하고 근원적인 것이라는 확고한 정치관을 표명하였다 . 子 貢 이 정치에 대하여 여쭈었더니, 孔 子 께서 말씀하섭`다. 〈식량(食)이 충분해 야 되고, 병력(兵)이 갖추어져야 되며, 국민들이 그를 믿어야(民 信 之) 한다.〉 子貢이 말하기를, 〈할 수 없이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하겠습니까?〉 선생님께서는 〈병력을 버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나머지 두 가지 중에서는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선생님께서는 〈식량을 버려라. 옛날로부터 모두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있었다. 국민들이 위정자를 믿지 ( 信 ) 않으면 (국가가) 설 수 없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顔淵」 7). 신뢰라는 것은 정치가가 일을 공경스럽게 처리하여 국민에게 신의를 지킬 때 자연히 생기는 것으로(「學而」 5), 남에게서 신뢰를 받는다는 것은 자기자 신 안에 믿음이 있을 때에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孔子는 사람 으로서 신용( 信 )이 없으면 아무데도 쓸데가 없다고 했던 것이다 (「爲政」 22). 따라서 위정자가 해야 될 우선적인 일은 신뢰를 받을 만한 곧은 인재를 등용하여 아랫사람들을 바르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顔淵」 22). 만일 위정자 가 굽은 사람을 등용하여 곧은 사람들 위에 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孔子는 경고하였다(「爲政」 19, 20). 곧은 것으로 굽은 것을 바르 게 한다는 원칙에 따라서 孔子는 원한을 德으로 갚으라는 사상에는 반대를 표명하였다 . 어떤 사람이 〈은덕으로써 원한을 갚으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자, 선생님께서 〈그러면 은덕은 무엇으로 갚겠습니까? 곧은 것(直)을 가지고 원한을 갚고 은덕을 가지고 은덕을 갚아야 합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571 57) 「憲問」 34. 여기서 德은 은혜 혹은 은덕이라는 의미를 지니는데(古注), 논어의 다른 부분에서는 이런 뜻을 지니고 있지 않아서 예의적인 것이다. 〈報怨以德〉은 『老子』 (63 장)에 나오는 말임을 朱子가 지적한 바 있는데, 아마도 그 당시에 통용되던 격언

이어서 여기 『論語』에도 보이고 『老子』 속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격언에 대한 해석에서 老子와 孔子는 의견을 달리한다. 孔子는 怨을 直으로 갚으라고 하였는 데, 直이란 朱子가 말한 대로 공평함이 지국하여 사사로움이 없는 것을 말했다.

원망이란 利 1용 을 따라서 행할 때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里仁」 12), 仁之 方을 행하면 집안에서나 나라 안에서나 원망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顔 淵」 2). 따라서 孔子는 원망은 올바른 것을 실천함으로써 풀어야지 그냥 은덕을 베품으로써 해결된다고 보지는 않았다. 더욱이 마음속에 있는 원망을 숨기고 그 사람과 친한 것같이 꾸미는 것을 君子는 부끄러워 한다고 한 孔子의 말은 이미 고찰하였다. 이와 같이 모든 면에서 〈正〉, 곧 올바르게 하는 것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孔子는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사회와 國政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관계를 바르게 함으로써 만백성을 편안 하게 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孔子의 정치관이 〈正〉을 토대로 하였다면, 그의 경제관은 〈均〉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均이란 衡平의 원칙에 따라 고르게 하는 것이므로 결국 均은 正과 직결되는 것이다. 孔子 당시 魯나라의 실력자로 군대의 반을 차지하고 있던 季氏가 자신의 私邑이었던 費 가까이에 있던 顧央라는 魯의 영내에 보호되고 있는 小國울 정벌하려 했다. 그런데 전유는 周初로부터 社稷제사를 드릴 수 있는 제후로 봉해전 성읍으로서 季氏의 속셈은 앞으로의 경쟁자를­ 소탕하여 우환을 없애려는 의도에서였다. 季氏의 家臣이었던 再有와 子路가 이 계획을 孔子에게 알렸을 때 제자들의 무능을 힐책하면서 孔子는 그의 경제관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듣기에 나라와 가정을 가전 사람은 수가 부족한(~) 것을 걱정하지 않 고 고르지(均) 않은 것을 걱정하며, 가난한(貧) 것을 근심하지 않고, 안정되지 (安) 못한 것을 근심한다고 한다. 대개 고르면 가난함이 없을 것이고, 화합하면 숫자가 부족하지 않으며, 안정되면 기울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58)

58) 「季氏」 I. 이 장은 『論語』 속에서도 이례적으로 긴 문장이며 『左傳』이나 다론 책에 는 전하지 않는 사건으로 世間에서 전승되다가 후에 수집된 것일 것이다. 崔述은

子路가 季氏의 宰가 된 것은 魯나라 定公(기원전 498 \1) 때이고, 再有가 宰가 된 것은 哀公(기원전 484) 때였으므로 두 사람이 함께 일한 적은 없다는 이유로 이 사실 의 역사성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貝塚茂樹는 이 章의 내용으로 보면 再有만이 孔子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므로 円有가 宰일 때의 일일 것으로 본다 . 곧 사건의 핵이 되는 부분은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이지만 魯의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에 의해서 편찬된 데서 나온 결과라는 것이다(貝塚茂樹, 『論語』, 466~467 면 참조). 또한 「先進」 23 등과 비교하여 보면, 孔子의 사상을 상당히 충실히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木村英 一, 『論語』, 433 면 참조) .

보통 君主나 家長된 사람은 그 성원의 수효가 적고 재물이 빈곤한 것을 걱정하지만, 참으로 근심할 것은 재물의 분배가 고르지 못하고 사회가 불안 한 것이라고 孔子는 깨우쳐 준 것이다. 여기서의 均이란 義에 따라 경제적 분배가 골고루 잘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양의 재물을 소유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孔子가 國政에 참여하고 있을 때 그 밀의 사람들에게 직위에 따른 봉급울 주었으며, 많다고 사양하는 제자에게는 남은 바를 鄕里의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고 권고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59)

59) 「雍也」 5 에 보면 原思라는 제자가 孔子의 家宰가 되자 그에게 栗 知 H 를· 주었는데 그가 사양한 적이 있다. 그때 孔子는 그에게 사양하지 말고 너의 가꺼운 이옷과 함께 나누라고 권고하는 기록이 있다. 이 사건이 있었던 시기에 대해서는 古注나 新注에서 는 孔子가 魯의 司冠 벼슬을 할 때로 보나 原思의 나이가 家語에는 孔子보다 3g , 아래였기 때문에 孔子 晩年에 孔子가 國老 때일지도 모른다는 견해도 있다.

비록 孔子 자신의 말씀은 아니지만 그의 제자 有若과 哀公과의 다음의 대화는 孔子가 말하려던 均의 경제관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哀公께서 有若에게 물으시기를 〈올해는 흉년이 들어 재용이 부족한데 어찌하 면 좋겠는가?〉 有若이 대답하였다. 〈왜 1/10( 徹)로 세금을 줄이지 않으십니까?〉 哀公께서 말씀하시길, 〈 2/10 를 받아도 부족한데 1/10 만 받으면 어떻게 지낼 수 있겠는가?〉 有若이 대답하였다. 〈백성들이 충족하면 어떻게 임금님께서 부족하 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백성들이 부족하면 어떻게 임금님께서 족하실 수 있겠습니까?〉(「顔淵」 9)

均이란 부족할 때 그 부족을 함께 나누고, 충족할 때는 그 여유를 골고루 나누는 것을 말했다. 그리고 재물이 공평하게 분배될 때에 집안이나 나라 안에 화합과 안정이 있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論語 』 는 円有와 연결되어 孔 子 가 어떠한 경제관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구체적 사건들을 몇 가지 보존하고 있다 . 円有는 재능이 많아서 세상일에 능한 사람이었으나 그 가치관이 세속적이어서 실제적 판단에서 孔子와 알력을 일으키던 제자였던 것 갇다. 우선 「雍也 篇 」 4 장에는 子華 라는 제자가 齊나라에 使臣으로 간 동안 그의 모친을 위해 곡식을 주기를 円有가 청하는 사건이 나온다. 子華의 집안은 워낙 부유했기 때문에 孔 子 는 예의 정도로 6 말 4 되(釜)를 주라고 했는데 再有는 더 줄 것을 청했다. 이에 16 말(庚)로 늘여 주었다. 그러나 再有는 독단으로 80 말을 보냈는데, 그것을 알게 된 孔子는 다음과 같이 円有를 질책하였다. 〈君子는 급한 사람에게 널리 베푸는 것이지 부유한 데에 더 보태지는 않는다.〉 다시 均에 입각한 孔子의 경제관이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한 사건은 円有가 季氏의 家臣이 되어 백성들을 착취하게 한 데서 일어났다. 季氏는 周公보다도 더 부유했는데 円有는 그를 위해 세금을 거둬들여서 그 재산을 더 크게 해 주었다. 선생님께서는 〈그는 내 제자가 아니다. 너희들이 북을 울리며 그를 공격해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601

60) 「驛」 17. -fir有의 이름은 求, 字는 子有였으며 孔子보다 29 세 아래였다. 위의 발언 은 孔子 晩年에 학교를 경영하고 있을 시기였다고 본다. 『荀子』 「議兵篇」에 의하면 〈聞鼓聲而進 聞金聲而退〉라고 하였으므로 공격을 비유하여 사건의 중대함을 표시하 고자한것이다.

이것은 孔子가 자기 제자에게 했던 가장 심한 말로서 명분상으로 사제지 간을 단절하는 이 말을 하게 된 것은, 円有가 孔子가 가르치던 均의 원칙을 어기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대신 가혹한 세금으로 독재자의 재산을 늘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백성을 빈곤하게 하면서 위정자의 재산울 늘이는 것을 신랄하 게 비판하는 孔子였지만, 子 貢이 貨殖(상업활동)을 통해서 부유하게 되는 것은 별문제 없이 받아들아고 있었다. 여러 제자들의 생활자세를 평하면서 孔子는 말하였다. 〈回(顔淵)는 거의 道에 가까이 왔지만 자주 끼니를 굶고, 賜( 子貢 )는 운명을 감수하지 않고 재물을 늘였는데 그 두자하는 바가 자주 적중하곤 한다.〉 61) 『 論語』 전체에 나오는 이 두 유명한 제자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 미루어보면, 孔子가 가난하지만 덕행에 뛰어나서 仁을 이룬 顔淵을 제자 중에서 가장 높이 평가했던 것은 확실하다. 利보다 義를 앞세운 孔子의 가치관 때문이었다. 그러나 孔子는 그의 부유했던 제자 子貢이 그 당시에 활발하던 상업행위를 하는 그 자체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지는 않았다. 경제 활동에 대하여 孔子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君子가 목적 하는 바는 부유하게 되려는 것이 아니라 道를 이루어 모든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는 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均에 기초를 둔 그의 경제관 과 正울 원리로 하는 그의 정치관은 모두 安人과 安百姓을 위한 것이었고, 이러한 역량을 가진 지도자를 키우기 위하여 자신을 닦는 君子둘을 교육시 키려 했던 것이다.

61) 「驛」 18. 徐復觀은 子貢의 貨殖이 그 당시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알려주는 것이 며 이러한 부유의 유동성은 곧 자유로운 사회적 분위기 조성에 기여했을 것으로 본다( 맥秦漢政治社會結構之硏究』, 85~86 면).

孔子가 발전시킨 修已安人의 인간론이 통일된 체계를 그 안에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논리적인 전개를 통해서보다는· 군자라는 구체적 인격 자를 통해서 제시되고 있다• 호학하는 군자의 대표적 예로 들었던 그의 제자 顔回와 孔子 자신은 國政에 등용되어 道를 펼칠 수 있을 때에는 나아가 많은 이를 편안하게 하고(「述而」 11), 버려지면 둘어와 가난 속에서도 그 즐거움이 변하지 않을 수 있는(「雍也」 11) 仁者들이었다. 孔子는 〈가난 속에 서도 줄거울 수 있고 부유 속에서는 禮를 좋아하며〉(「學而」 15), 변하는 여러 가지 환경 속에서도 仁을 최고의 목표로 삼기 때문에 언제나 자유로울 수 있는 君子를 참된 인간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따라서 시련의 시간은 한 사람이 군자인가 소인인가를 판가름할 수 있는 때라고 보았다(「衛飯公」 2). 재물 그 자체는 좋은 것이나 의롭게 획득되어야 하며 (「里仁」 5),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는 데에서 그쳐서는 아직 부족한 정 치 이고 그들에게 道를 가르쳐야 한다고 孔子는 역설하였다(「子路」 9). 결국 君子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부유나 권력이 아니라 道이 기 때문이댜 따라서 孔子의 인간론에 방향을 제시하는 그의 道 개념과 그 道가 근거를 두고 있는 天命論를 살펴보아야만 그의 사상의 전모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3 장 孔子의 道와天命論 孔子는 인간에만 관심을 두었던 철저한 人文主義者로서 종교적 신앙을 완전히 배제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고대도시국가의 귀족적 종교로부터 理性의 해방울 완전히 수행하지는 못한 불완전한 인문주의자로 서의 그의 한계성이 지적되기도 한다 .2) 그러나 孔子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哲學者는 아니었기 때문에 人間理性 혹은 논리성을 찻대로 하여 그의 사상 울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그가 인간과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의 전체로서 보았고, 체험적인 통찰에 의하여 삶의 어떤 부분은 인간 의 노력에 달려 있는 데 반하여 다른 한 부분은 인간의 통제 밖에 있음을 인정하고 그러한 운명적인 요소를 바르게 수용하는 법을 제시하였다는 사실 은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 {I 多已安人〉의 인간론은 능동적인 배움 과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적극적인 부분으로 孔子는 일생 동안 그것을 실천하고 가르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전력이 다한 곳에 이르러서 그가 역시 의연할 수 있었다는 것은 孔子의 사상 안에 미완 성된 부분이 있었다고 보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사상체계가 인간사 전체를 I ) H.G.Cree~ Confu c iu s and the Confu c ia n Way, Ha rpe r and Row, 1960, 120 면. 2) 貝塚茂亂 『孔子』, 123~4 면 그는, 종교와 학문을 완전히 분리하는 데 성공한 것은 孔子의 後學들에 와서라고 본다.

포괄할 수 있는 폭을 지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憲 問 篇 」 36 장에는 孔子가 그 당시 魯나라의 실력자 季 孫氏에게 추천한 제자 子路가 참소를 받아서 孔 子 의 가르침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상실될 지도 모르는 위기적 상황 속에서 孔子와 그를 방문한 정치인 사이에 나누어 지는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公伯療가 季孫에게 子路를 참소하였는데 子服 景1 B 이 그 사실을 孔子에게 고하 며 말하였다. 〈季孫氏는 公伯療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제 힘으로 그를(꺽어 그 시체를) 저자에 내걸 수 있으니 (근심하지 마십시오) . 〉 선생님께서는 〈道가 행하여지는 것도 命이고 道가 없어져 버리는 것도 命입니 다 . 公伯療가 그러한 命울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씀하셨다 . 3 )

3) 이 사건은 孔子가 魯의 大夫로서 三桓의 무장을 해제시키려는 정책에 전력을 다하던 55 세경(定公 13 년, 서기전 497 년)의 일로, 子路는 季武子의 본거지인 費城의 宰로서 -그 성벽을 철거하게 하여 孔子의 정책수행에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본다 (木村英一, 『論語』 389 면 . 貝塚茂鬪 『論語』 418 면). H.G . Creel 은 여기서 孔子가 命을 말한 것은 붕당정치를 거철하면서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한 예의에 불과했다고 설명했는데 (Con f uc i us and the Confu c ia n Way, 121 면), 이것은 孔子의 사상 안에 命 내지 종교적 신앙이 지닌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한 까닭이라고 하겠다.

孔子를 찾아 온 子服 景 伯은 魯나라의 大夫로서 季 孫氏와 경쟁적 위치에 있던 叔孫氏의 一族이었다 . 그는 통상적인 정치적 제거의 방법울 써서 孔子 의 혁신정치를 실행하자고 제의한 것인데, 孔子는 그의 德治의 원칙을 고수 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德治主羲의 근거로 孔子가 들고 있는 것이 命이리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곧 그는 道의 마지막 成敗가 命에 달렸다고 말함으 로써 德에 의거한 그의 修已安人論울 버티어 갔던 것이다. 『 論語』에 나오는 道와 命의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우선 이 두 가지 개념을 각각 고찰하도록하겠다.

1 孔子의 道 孔子의 가르침을 관통하는 忠惡 곧 仁之方을 말하는· 孔子와 曾子와의 대화 속에서 (「里仁」 15) 孔子는 忠怒를 〈나의 道〉(吾道)라고 했고 曾子는 〈선생님의 道〉(夫子之道)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곧 孔子가 〈나의 道〉라고 한 것은 다름 아닌 仁울 이루는 忠怒의 道였다. 「雍也篇」 12 장에 再有가 〈선생님의 道〉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힘이 부족하다고 한 것도 역시 仁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孔子는 아무도 문을 통하지 않고는 나갈 수 없는 것과 같이 〈이 道〉(斯道)를 따르 지 않고서는(「雍也」 17) 아무도 군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 었다. 따라서 孔子의 道는 〈君子之道〉라고도 불렸는데 그 안에 知와 勇울 모두 포함하고 있어서 이 道를 통달한 君子는 근심하지 않고, 의혹에 빠지지 않으 며 두려워함이 없다고 하였다(「憲晶1 」 28).4> 다시 말해서 孔子가 가르쳤던 道는 君子가 되기 위한 修行의 길이었는데, 孔子는 자신보다 30 여 년 앞섰던 鄭나라의 名宰相 子産울 예를 들면서 君子之道의 네 가지 요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4) 仁과 知 및 勇올 서로 비교할 때의 仁은 역시 협의로의 仁을 말하고, 광의로의 仁은 다른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는 모든 덕의 완성을 말했다. 「衛靈公」 33 에는 知를 방향 을 잡는 기능으로, 仁을 미치는 힘으로 보고 있다. 「里仁」 2 에는 知者利仁이라 하여 역시 보완적으로 보았다. 勇이란 義를 보고 행동할 수 있는 힘을 말했다 ( 「爲 政」 24).

그의 행동은 공손하였고(恭), 윗사람을 섬기는 데는 존경스러웠으며(敬), 백성 울 키우는 데는 은해로웠고(惠), 백성에게 일을 시킬 때에는 의로웠다(義)(「公治 長」 16).

여기서의 君子라는 칭호 속에는 전통적인 지배층의 인물이라는 의미와 孔子가 새로 부여한 인격자라는 의미가 결합되어 있는 것이 홍미롭다. 사실 孔子는 〈述而不作〉(聖王의 가르침을 전할 뿐 새로 만들어내지 않는다)이라고 했듯이 〈吾道〉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이 새로 만들어낸 가르침이라는 뜻은 아니고 〈古之道〉(「지分」 16) 를 계승하여 당대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전한다는 그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따라서 그의 제자 有子는 禮롤 실천할 때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孔子의 가르침을 〈先王之道〉로서 소개하였 다(「學而」 12). 또한 子貢은 衛의 大夫公孫朝에게서 孔子는 누구한테서 배웠느냐는 질문을 받자 〈文武之道〉(「子張」 22), 곧 周나라의 문화를 두루 계승하고 있음을 밝혔다. 옛것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孔子는 『論語』에서는 유일하게 구체성을 띠는 아버지의 길(父之道)을 말했고, 그것을 3 년 동안 고치지 않으면 참으로 孝하는 것이라는(「學而」 II, 「里仁」 20) 사상을 孔門 안에 굳혔을 것이다 .5)

5) 3 년이란 喪울 입는 기간이라는 배경에서 父之道를 생각할 수 있으나, 주석적 전통둘 에서는 아무리 父之道라 하더라도 道에 맞아야 된다는 견해가 강하게 대두하였다 .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道 앞에 소유격이 여러 가지로 붙여지고는 있지 만, 결국 孔子가 가르친 道란 추상적인 것이어서 군자가 되려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구체화될 수 있는 것이다. 「里仁篇」 8 장에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침에 道를 들으면(聞)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는 孔子의 말씀이 보존되어 있다. 古注에서는 〈듣는다〉는 것을 道가 세상에 실현되는 것을 죽기 전에 보았으면 하는 孔子의 탄원으로 풀이하였는데, 新注에서는 道를 사물의 당연한 理로 이해하여 그 理를 들어 알게 되면 살아서는 그것 울 따르고 죽더라도 편안하여 한이 없을 것으로 풀이하였다. 어느 쪽의 해석 울 선택하든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道란 孔子의 삶에서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만큼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道에 뜻을 두고도 좋지 않은 의복이나 음식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 과는 함께 이야기할 것도 없다(「里仁」 9) 고 하였다 . 君子가 도모하는 바는

먹고 입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道에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君子는 道를 위해서 일을 계획하지 먹는 것을 위해 서 일을 계획하지는 않는다. 밭을 갈아도 주림이 그 안에 있을 수 있으나 배움 에는 祿이 그 가운데 있기 마련이다. 君子는 道를 걱정하지 가난을 걱정하지 않는다〉 .6)

6) 「衛靈公」 32. 여기서의 祿이란 녹봉이 있어서 생활에 어려움이 없으리라는 뜻으로 보통 해석된다 . 「子路」 4 에 孔子가 자신은 농사일에는 늙은 농부보다 못하다고 하는 말과 연결시켜 볼 때 君子의 일을 安人에 있다고 보는 孔子의 사상을 전한다고 보겠 다. 그러나 「爲政」 18 의 祿과 연결시켜 보면 祿의 기초적 의미인 福祿의 의미도 포함 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君子에게 있어서 우선적인 관심은 道에 있는 것이며, 일상생활에 필요한 재물은 부차적으로 따라오기 마련이라는 孔子의 확신을 다시 한 번 확인하 게 된다. 따라서 친구를 사귈 때에도 자기만 못한 사람을 택하지 말러는­ (「學記 8, 「子후」 25), 어떻게 보면 배타적 인 충고를 하는데, 이것은 小人을 친구로 가지면 道를 추구하는 데 방해를 받기 때문일 것이다. 「衛靈公篇」 29 장에서 孔子는 道와 인간의 관계를 묘미 있게 설명하였다. 사람이 道를 넓힐 수 있는 것이지 道가 사람을 넓혀주는 것이 아니다. 道를 넓히는 일은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가만히 있는 데 道가 스스로 넓혀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孔子가 말하는 道는 어디까 지나 인간다운 인간이 되려는 君子之道를 지칭하는 것이고 인간을 초월해서 스스로 존재하고 활동하는 형이상학적아고 우주적인 道가 아니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면에서 孔子의 道개념은 道家의 道개념과는 물 론, 『周易』이나 新儒學의 道개념과도 다른 것이다. 道家에서 道는 우주 만물 의 근원이며 모든 현상세계의 원리를 지칭하는 데 반하여, 『論語』에 나오는

孔子의 道는 어디까지나 仁을 이루는 忠怨, 곧 인간성을 키우는 실천적 길이 었다. 비록 道가 君子와의 관계에서 추상화되고 삶의 궁극적 규범의 역할을 하게 되어도 역시 孔 子 의 道는 人道, 죽 人間이 되는 길을 말했다. 『論語 』 에서 道의 의미가 이와 다르게 쓰인 예의적인 예는 오직 한번 「公 治長 篇 」 13 장에 언급되는 〈 天 道〉라고 쓰인 경우이다. 그러나 이 말은 孔子 자신의 말씀이 아니었고 子貢 이 옛날을 회상하여 〈선생님께서 性 과 天 道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들어 보기가 어려웠다〉는 후기 편찬과정에서 들어 간 용어로, 孔子 자신의 道사상과는 다른 개념이 혼합된 것이다? 인간이 노력해야 될 길 이상의 것을 말할 때 孔子는 道란 용어를 쓰지 않고 命이나 天이란 말을 사용했다.

7) 漢代로부터의 후기 유가에서 道를 天道의 의미와 혼합하여 확대된 개념으로 쓰게 된 것은 秦漢代의 종합적 eclecti c 경향에서 시작된 것으로 『周易』과 『中庸』 및 董仲舒 가 그 대표적 예라 하겠다 . 이러한 경향은 新儒學에 와서 그 철정을 이루었다 하겠 다 . 孔子의 道가 人之道로 최고선인 仁을 의미한다는 것은 木村英一도 여러 차례 지적 한 바 있다( 『論語』, 84 • 419 • 568 면 ) .

〈人能弘道〉(사람이 道롤 넓히는 것이다)를 강조해서 道에 뜻을 두고 그에 노력하는 君子둘을 키우기에 전력을 다한 孔子였지만, 때( 時 )와의 관계 안에 서 道를 넓힐 수 있는 한계성과 그 한계를 분별하는 지혜를 또한 중요시하 였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신의를 돈독히 하고 배움을 좋 아하여 죽음으로써 선한 道를 지켜라. 위태한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혼란스러운 나라 안에서 살지 말라. 天下에 도가 행해지면(有道) 자신을 드러내고,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無道) 숨어라. 나라에 도가 행해질 때(有道) 가난하고 빈천한 것은 부끄러워 하지만,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을 때에는(無道) 부유하고 귀하게 된 것을 부끄러워하라〉(「泰伯」 13). 有道한 때와 無道한 때에 따라서 君子는 자신의 처세를 결정해야 된다는

말은 『 論語』에 여러 번 강조되는데 ,8 ) 子 L ::f -는 때를 분별하여 각기의 환경에 적중하는 행위를 태하는 것을 權이라고 하였다. 〈才祖〉이란 본래 저울질을 한다는 뜻으로 孔子는 때를 저울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장 높고 어려운 것이라고 보았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함께 한 자리에서 공부할(學) 수 있다 하여도 그것만으로 더불어 설(立) 수는 없는 사람이 있다. 함께 설 수는 있다 하여도 그것만으로 더불어 때를 저울질할(權) 수는 없는 것이 다.'〉 9 ) 그런데 자신이 처한 때를 저울질하여 그에 따라 道롤 실천하는 일은 인간이 해야 될 것이지만, 그 때가 有道하고 無道한 그 사실 자체는 인간이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孔子의 命사상이 대두되는 것이다.

8) 「學配 14, 「지分」 24, 「公治長」 5 • 21, 「憲f口1 」 I, 「衛靈公」 7, 「季氏」 2 등 . 9) 「子후」 30. 『周易』과 『中庸』에서는 이와 같은 능력을 時中이라는 전문용어로 지칭하 였는데 1 距家전통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덕이다. 「微子」 8 참조 .

2 運命으로서의 命 「子뚜 篇 」 1 장에는 孔子께서 利와 命과 仁에 대해서는 드물게 말씀하셨다 고 전하고 있다 .10) 분명히 이득을 추구하는 것은 소인의 일로기 군자가 구할 바가 아니라고 했으므로 항상 의로움(義)을 앞세운 孔子가 이익(利)에 관하

10) 〈子후言利與命與仁〉. 古注에서 利는 義之和요 命은 天之命이고 仁은 行之盛이라고 했는데 모두 능력이 거기에 미치기에 부족하므로 드물게 말했다고 풀이하였다. 新注 는 利만은 부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적게 이야기하였다고 하였고, 命과 仁은 미묘하고 큰 것이므로 드물게 말씀하셨다고 풀이하였다. 祖棟는 孔子가 利를 드물게 말씀하셨 지만 말할 때에는 命과 仁과 더불어 하셨다는 특이한 해석을 내놓기도 하였다. 丁若 鏞은 利를 자주 말하면 義를 해치게 되고, 命을 자주 말하면 天을 모독하게 되며, 仁을 자주 말하면 실천이 그것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가장 합리적인 풀이를 제시하였다(『論語古今注』).

여 적게 말하였다는 것은 당연하다.II) 그런데 命과 仁울 적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가 문제인데, 특히 仁은 孔子의 새롭고 매력 적인 사상이었던 때문인지 여러 제자들이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물음을 제기하던 중심되는 주제였다. 그러나 性과 天道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 보기가 어려웠다고 하던 「公治長篇」 13 장에 보존된 子貢의 회고에 비추어서 「子年篇」 1 장을 해석해보면, 孔子가 詩 書 등의 文 章 을 가르치던 것에 비하면 人性이나 仁에 대한 설명은 훨씬 적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교육 을 통해 전수될 수 없기에 드물게 말씀하시던 仁에 대한 孔子의 대답을 각자 제자들이 귀중히 여겨 기억하였고 보존한 것이 모아져서 지금과 같이 수집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II ) 『韓』에 利는 모두 9 장에 언급되고 있는데 그중 4 장에서는 동사로 쓰였고` 5 장에서 만이 小 A 이 찾는 이익이란 명사로 부정적으로 쓰이고 있다.

命이나 天道를 적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댜島貨篇」 17 장에 하늘이 말없이 四時를 돌리지만 만물이 자라나는 것처럼 孔子 자신도 말하지 않겠다고 한 말씀과도 연결시켜서 이해할 수 있다. 무엇인가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 부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한계성을 공경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孔子는 그에 대해 많은 논평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論語』의 이 구절들에 주석을 붙였던 古沮 新注 및 淸代의 주해서들 역시 天命의 미묘함 때문이라고 풀이 하였다. 그러면 『論語』에 나오는 命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命은 글자 그대로 君主 나 윗사람의 명령을 지칭하기도 하고 天이 인간에게 준 목숨-, 몫, 혹은 運命 을 지칭하기도 한다 .12) 道와 연결되기 때문에 고찰의 대상이 되는 命은 물론 天命이라는 의미의 命인데, 한 가지 홍미로운 사실은 『論 語』에서 〈命〉이라

12) 『論語』에서 命이 언급되는 부분은 모두 19 장인데, 그중 7 장은(I O : 2 • 14, 13 : 20, 14 : 8 • 44, 17 : 18, 20 : I) 군주나 윗사람의 명령 혹은 명령을 전하는 것을 의미했고, 9 장은 (6:3, II :7, 6: IO, II :8, 12: 5, 14 : 12, 19: I, 8 :6, 16: 2} 개인이나 나라의 운명 이라는 뜻으로 쓰였으며, 3 장에서는 (9 : I, 14 : 36, 20 : 3) 天命이라는 추상명사로 쓰인 다. 劉寶楠은 天命울 德命과 祿命으로 분류하여 德命은 자신을 아는 것으로 天에서 유래한 것이며 德을 닦아 仁義之道를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祿命은 길흉화복으로

修身을 한 후에 그것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다(『論語正義』, 「季氏」 8 주석).

고 할 때에는 인간의 입장에 서서 받은 바의 몫, 혹은 운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 天 〉이리는 용어를 쓸 때에는 天 이 주체가 되어 인간을 향해 명령 하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命은 인간의 정해진 運命이라는 뜻을 나타내고, 天 은 인간에게 주는 使命이라는 적극적인 뉘앙스를 지닌다. 運命으로서 인간에게 주어진 몫은 生死와 불치병 등 목숨과 연결된 모든 것을 말했다. 伯牛가 병에 걸려서 선생님께서 그에게 문병을 가셨다. 창문으로 해서 그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끝이로구나. 命이로다! 이 사람이 이런 병이 걸리다 니 ! 이 사람이 이런 병이 걷리다니 !〉(「雍也」 IO) 주석전통에서는 덕행에 뛰어났던 이 제자가 나병에 걸려 죽게 된 것을 보고 孔子께서 탄식한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여기서 命이란 하늘의 命한 바이므로 어쩔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성을 받아들이는 孔子의 자세를 드러 낸다. 그리고 마지막에 두 번 거듭되는 깊은 애통의 표현은 天命은 뚫어 볼 수 없다는 『 詩經 』 이래의 한계점에 부딪친 인간의 탄식을 자연스럽게 토로한 것이다. 아끼던 제자 顔淵의 〈短命〉(「雍也」 3, 「先進」 7), 나라가 위태 할 때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 있어야 된다는 〈授命〉(「憲 F버 」 12), 士는 위기 에 당하여 자기 목숨을 다한디는· 〈致命〉(「子張」 I),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목숨을 命으로 표현한 것이다. 결국 〈死生有命〉(죽음과 삶에는 천명이 있다) (「顔淵」 5) 이라 하여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 및 평생 동안 누리는 목숨이 모두 命에 의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도 命이라 고 불렸다. 〈百里之命〉(「泰伯」 8) 이나 〈國命〉(「季氏」 2) 과 같이 집단의 운명 도 天命으로 이해되었는데, 이것은 西周時代로부터 전승된 왕조적 天命사상 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하겠다. 孔子의 命개념이 運命으로 어쩔 수 없다는 수동적 요소를 근저에 깔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후에 墨家에서 비판하는 것같이 인간은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運命論에 빠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삶이 지닌 한계를 인정하고 평온하게 받아들임으로써 修已安 A의 노력에 항구할 수 있고 기대치 않던 죽음이나 잃음 속에서도 굳건하게 설 수 있는 의연함 과 힘을 주었다. 따라서 孔子의 命사상은 인간적 약점이라든지 그가 인본주 의에 철저하지 못했던 것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사상에 인간 의 삶 전체를 포용할 수 있는 넓이와 깊이룰 지니게 하였다고 평가되어야 할것이다. 3 使命을 주는 주체로서의 天 詩書를 동해서 나타나는 바와 갇이 西周시기로부터 天은 중국인의 의식 속에서 최고신의 위치를 점유하여 나라와 개인의 운명을 주재하는 궁극적인 결정권을 쥔 철대자로 신봉되었다. 天에 대한 이러한 근본적 믿음은 孔子에 게도 지속되는데, 다른 모든 면에서와 마찬가지로 孔子는 전승받은 天신앙을 새롭게 해석하여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단 그가 天에 대하여 체계적으 로 이론전개를 한 것은 없고 그의 삶, 특히 자신의 시대적 使命의식과 밀접 히 연결되면서 그의 天사상이 드러난다 .13)

13) 孔子의 天에 대한 의식을 〈신앙〉 또는 〈사상〉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신앙〉이라고 할 때에는 고증을 통해 확인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전제, 특히 궁극적 전제라 는 면에서 그렇게 부를 수 있다. 〈사상〉이라고 말할 때에는 그의 天觀이 사고적 명확 성을 띠고 다른 모든 사상과 연결된다는 면에서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이다. 木村英 ―는 運命으로서의 命은 인간에게 제약성을 느끼게 하는데, 使命으로서의 命은 그런 제한 밀에서도 人間이 해야 될 自覺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구별하였다(『論語』 ,571 면) .

「지分篇」 24 장에는 벼슬을 잃고 망명생활을 하던 孔子의 일행이 衛나라의 西南 국경인 儀 땅에 도착했을 때 국경을 관리하던 관원인 封人이 孔子를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儀의 封 A 이 孔子룰 뵈옵기를 청하면서 〈君子가 이 땅에 울 때마다 내가 만나 뵙지 못한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시종하는 사람들이 孔子를 뵈옵게 했다. 그가 나와서 말하기를 〈여러분들은 선생님께서 벼슬을 잃었다고 왜 걱정 하십니까. 天下에 道가 없어진 지가 오래 되었으니 天이 선생님을 木鑄을 삼으 시려는 것입니다〉. 木鑄은 금속으로 만든 鐘의 혀가 나무로 된 것인데, 武事에는 金錫을 썼고 文事에는 木鎌을 썼다. 따라서 孔子가 목탁이 된다는- 말은 文化롤 세상 에 전하는 사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孔子에게 이 사명을 준 주체는 先王이나 임금도 아니요 자기 자신도 아닌 바로 天이라고 儀封人은 말하고 있다. 儀封人이 어떠한 인물이었는지는 다른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으나 분명히 사람을 꿰뚫어볼 줄 아는 눈을 가졌던 사람이었을 것이고, 그의 말을 孔門에서 귀히 여겨 보존했다는 것도 그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子뚜篇」 6 장에 보면 子貢 역시 孔子를 聖人으로 부추기는 주체를 天이라고 말하고 있다 .14)

14) 〈天縱之將聖〉. 『論語』 안에 天이라는 용어가 쓰이는 곳은 모두 17 장인데 그중 IO 번은 孔子의 말씀 안에서, 나머지 7 번은 다른 이들의 말 속에서 나타난다. 그 의에 天道로는 1 번 (5 : 13), 天命으로 3 번 (2 : 4, 16 : 8 에 2 번), 天祿으로 1 번 (20 : I) 나온다.

天이 孔子에게 德울 기초로 한 문화를 전하게 하였다는 자각은 孔子 자신 의 말 속에서도 발견된다. 天이 나에게 德울 낳아 주었는데, 桓旭가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 (덴罰i」 23) 선생님께서 匡 땅에서 위험 속에 빠졌을 때 말씀하시기를, 〈文王이 돌아가신 후 문화(文)가 내게 이론 것이 아닌가. 天이 이 문화(斯文)를 없애버리려고 했다면 내가 어떻게 이 문화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天이 이 문화(斯文)를 없애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면 匡人들이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子年」 5)15)

15) 匡은 衛나라와 宋나라 경계에 위치한 邑으로 주석가들에 의하면 孔子가 魯의 장수 로 匡人의 원한을 샀던 陽虎로 오인되어 습격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사건 은 孔子가 衛에서 宋으로 들어가던 도중 宋의 司馬인 桓廻로부터 받는 재난 바로 직전에 일어난 일이므로 환되가 孔子 일행이 宋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炫와 後死者의 해석은 古注와 新注를 따라 孔子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는데 글자 그대로 보면 孔子 일행 전체와 당대의 사람들을 포괄했을 가능성 이 크다.

孔子에게 德울 부여한 것도 天이며, 周의 문화를 계승하게 하고 또 후세 에 전하게 한 주체도 天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이 天과 孔子와의 관계는 使命울 주고 그것을 받은 관계로서 孔子의 일생을 좌우하는 使命意識 안에 天신앙이 굳게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孔子가 전할 사명을 받은 斯文은 인간을 위한 天의 意志룰 구체화하는 것으 로 孔子는 인간문화와 天命이 직결되어 있다고 이해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전승되는 문화의 본 정신을 되살려서 인간사회에 道가 행해지게 하는 일은 인간을 인간답게 할 뿐만 아니라 天命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孔子의 사명의식은 단지 天으로부터 받았다는 수동적인 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평생 끊임없는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받았다기보다는 오히려 지속적인 배움의 노력을 통하여 자신의 사명을 자각하기에 이론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 다. 「憲問篇」 35 장에는 孔子와 子貢의 홍미로운 대화가 기재되어 있다. 선생님께서 〈나를 아는(知) 사람이 없구나〉 하고 말씀하셨다. 子貢이 〈어째서 선생님을 아는(知) 사람이 없다고 하십니까?〉 하고 말씀드렸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天울 원망하지 않고 남을 허물하지 않으며 밀에서부터 배워서 위의 것을 통달하였거니와 나를 아는 것은(知我者) 天일 것이다〉• 孔子가 이 말을 할 때에 그는 이미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을 것이고, 따라

서 古注에서 지적한 대로 자기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는 孔子의 말을 子貢은 괴이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孔子가 여기서 말하는 〈知我者〉 란 자신의 진가를 알아 참으로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말한 것이다. 그가 만난 君主들 중에 아무도 그를 등용하여 道룰 실천하게 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 에 한탄을 금하지 못하면서도, 동시에 정치적 실패가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그롤 확고하게 잡아 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격의 근저에 天신앙이 굳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 것, 또 〈下學而上達〉(밀에 서부터 배워서 높은 경지에 이른다)하수근 것은 모두 君子된 사람의 특칭으로귀 결국 孔子는 자신을 비유로 해서 仁울 이룬 사람을 참으로 이해하는 것은 다름 아닌 天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라고 보겠다. 君子와 天과의 관계는 드물 게 언급되기는 해도 중요한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孔子가 50 세에 이르러 〈知天命〉(하늘의 명을 알게 되다)(「爲政」 4) 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의 생애 에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곧 그 전까지는 배우고 닦기 위한 노력을 가해 야 했는데, 知天命한 이후로는 자연스럽게 규범에 맞는 올바른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論語』의 마지막 편찬지는· 〈天命울 모르면 君子가 될 수 없다〉(「堯日」 3) 는 말로써 孔子의 言行錄울 종결지었던 것이 다 .16)

16) 〈不知命, 無以爲君子也〉. 陸德明의 『經典釋文』에 의하면 『魯論』에는 이 마지막 부분 이 없었고 『古諭』에 의하여 보충된 것으로 보는데, 武內義雄온 『漢石經』에도 없기 때문에 r 韓詩外傳』 등에서 보충된 것이 아닌가 보기도 한다 (88 면). 편찬은 늦었을망 정, 그 사상은 『論語』 전체를 요약하는 것으로 命과 禮와 言울 연결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 孔子를 완전히 이해하는 주체가 天이기 때문에 孔子는 어떤 경우에라도 天울 속일 수는 없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天에게 죄를 지으면 기도할 곳이 없게 된다고 하였으며, 그가 맹세할 때의 유일한 근거를 天으로 삼았다. 이러한 孔子의 신앙적인 면들은 모두 그의 생애의 여러 가지 사건들 속에서 드러나고 있다. 우선 「子卒篇」 12 장에는 孔子께서 위독하셨을 때 충직한 제자였던 子路가 당시에는 士신분에 불과한 孔子의 장례식을 옛날

司冠 벼슬을 했던 것을 생각하여 그 당시 예법에 어긋나게 大夫의 장례로 준비했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선생님께서 몹시 편찮으시자, 子路가 門人들을 시켜 家臣으로 삼았다. 병환에 차도가 있자(이 말을 들으시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오래되었구나, 由가 속임수를 쓴 지가. 家臣이 없는데 家臣을 있게 한다면 나는 누구를 속이는 것인 가? 天을 속일 것인가? 또 나는 家臣들의 손에서 죽기보다 차라리 너희들의 손에서 죽는 것이 낫다. 내가 비록 큰 장례식은 못 받게 될지라도 길가에서 죽기야 하겠느냐?〉 「述而篇」 35 장 역시 갇은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나온 기록으로 보이는 데, 여기서는 子路가 위독한 孔子에게 기도하기를 청하고 있고 孔子는 〈丘之 蘆久矣〉(내가 기도한 지는 오래되었다)란 유명한 말로 대답하고 있다• 古注에 서 풀이한 바와 감이, 孔子는 평상시의 素行이 神明에 맞는 그 자체가 곧 기도라고 본 것이고, 삶 전체를 天이 준 사명을 다하며 사는 것이 天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유지해 나가는 것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論語』에서 기도에 대하여 언급한 또 다른 예는 「八僧篇」 13 장에 보이는 데, 衛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던 大夫 王孫賈와 孔子와의 대화이다• 王孫賈가 묻기를 〈신주를 모시는 방 서남쪽 귀신(奧)에게 아첨하기보다는 부엌귀신(籠)에게 아침하는 것이 더 낫다라는· 말은 무엇을 이르는 것일까요?〉 선생님께서 대답하시기를 〈틀린 말입니다. 天에 죄를 얻으면 기도할 곳이 없습 니다〉. 여기서 奧는 衛의 君主를 비유한 것이고 籠는 王孫賈 자신을 지칭한 것인 데, 衛에 등용되기를 원하던 孔子에게 자기에게 아첨하는 것이 출세에 빠른· 길이라는 것을 넌지시 빗대서 말한 것이다. 孔子 역시 비유를 쓰면서 대답 하지만, 奧나 籠의 품격을 훨씬 뛰어 넘는 최고신인 天에게 죄를 얻으면 다른 신령들이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따르는 것은 道라는

인간됨의 원리임을 암시한다. 古注전통에서는 孔 子 가 여기서 天울 君主의 비유로 든 것으로 보는데, 혹시 天子라면 몰라도 사실 衛라는 한 제후국의 君主가 天에 비유될 수는 없었다. 그보다는 天으로부터 받은 孔子의 使命感 내지는 新注에서 보듯이 이치에 맞는 올바론 방법에 의해서만 國政에 참여 하려 했던 孔子의 곧은 자세를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을 또 하나의 사건은 미모의 여성이었으나 정치에 개입하였고 음란하기로 악명이 높았던 衛靈公의 부인 南子가 孔子룰 뵙기를 청하여 만난 후의 일이다. 선생님께서 南子룰 만나시자 子路가 기뻐하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맹세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禮에 맞지 않는 일을 한 것이 있다면, 天이 그것을 미워하 실 것이다. 天이 그것을 미워하실 것이다〉 .m

17) 「雍也」 28. 木村英一는 〈天獸之〉를 〈하늘이여 단죄를 내려주소서〉로 하늘에게 칙접 적으로 하는 맹세문으로 이해하였다 . 또한 그는 〈夫子矢之〉의 夫子라는 칭호가 孔門 의 사람들과 의부 사람들과의 회화에 보통 쓰인다는 이유로 世 r바 에 전하던 이야기를 편찬할 때 수집한 것으로 본다(『論語』, 150 면) . 劉寶楠은 孔子가 하늘을 향해 손가락 울 을리고 맹세한 것으로 풀이하였다.

孔子가 맹세를 하는 기록은 『論語』 전체에서 여기뿐인데, 孔子는 자신의 결백함을 子路와 제자들 앞에서 증언하기 위하여 天을 불렀던 것이다. 天은 인간 운명의 최종적 결정자이기 때문에 孔子는 자신에게 非義한 일이 있었 다면 그에 따른 벌을 받을 것이라는 天의 無言의 심판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수있다• 天은 孔子에게 德과 使命울 부여했고, 그를 이해하며 그의 무죄의 증인이 었으나, 동시에 문화를 전해야 할 그의 사명을 실패로 끝나게 하는 듯한 불행을 내려주는 주체이기도 하였다. 『論語』 전체에서 孔子가 가장 애통해 하던 일은 그가 제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君子〉라고 불렀던 顔淵이 그보다 먼저 죽었을 때였다. 이러한 슬픔은 사랑하는 제자를 잃었다는 순수한 감정 의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顔淵이야말로 孔子가 가르치던 仁의 道를

체득한 사람이었고、 따라서 孔子는 그를 통하여 德에 기초를 둔 文化的 敎化 사업이 이어지고 후세에 계승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顔淵이 죽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아! 天이 나에게 후계를 없게 하는구 나! 天이 나에게 후계를 없게 하는구나!'〉(「先進」 9). 〈天喪予〉의 喪은 초상 을 당한다는 뜻으로 하늘이 孔子에게서 후계자를 빼앗아 갔다는 지극한 슬픔을 표시한 것이다뽀 의아들인 伯魚(이름은 經)가 죽었을 때에 孔子의 반응에 대해서는 『論語』 에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은(「先進」 8), 孔子와 초기 孔門의 관심이 한 가문의 문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文化의 계승에 있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19) 『 論語』의 마지막 5 편에 언급되는 天이나 天命은 子貢이 孔子를 하늘에 비유한 예나(「子張」 25), 말없이 四時를 돌리는 天울 모범으로 삼고 싶다고 한 孔子의 말씀(「陽貨」 17) 등을 전하고 있다 .20) 그 의 에도 군자는 天命을 두려워한다는 등(「季氏」 8) 일반적이고 격언적인 언급들이 나오고 있다 .21) 孔子의 天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마지막 5 편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 부분의 체계적인 이해와는 어느 정도 이질적인 내용을 전하고 있다. 孔子의 사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論語』의 처음 15 편에 집중할 필요가 있음을 확인해 주는 또 하나의 예가 된다 하겠다.

18) 朱子는 〈悼道無傳, 若天喪已也〉(道가 전하여 지지 못함을 애통해한 것이니, 天이 후계자를 빼앗음과 감은 것이다)라고 했고 劉寶楠은 〈此亦天亡天子之微〉(이는 또한 天이 天子의 상칭을 없애버린 것아다)이라 하여 그 근본의미를 갇게 보고 있다. 19) 伯魚에 대한 기록은 위의 「先進」 8 이의에는 후기 편집부분에 속하는 「季氏」 13 과 「陽貨」 8 에 있을 뿐으로 孔子가 아들에게 詩와 禮를 배우라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이 보존될 뿐안데, 여기서도 역시 아들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남기지 않은 것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 20) 「泰伯」 19 에 堯 임금만이 위대한 天울 본받았다 (H lj之)고 하는 孔子의 말씀과 대웅 되는 전승이라고 하겠다. 21) 「顔淵」 5 에 子夏가 둘은 말로 전승된 〈富貴在天〉이라고 한 것도 이런 당대의 일반 적 격언이 인용되었을 확률이 높다.

결국 天은(帝라는 용어는 「堯曰篇」의 祭文에 인용될 뿐 r 論語』 에서 전혀 쓰이

지 않는다) 孔子의 생애에서 중요한 사건 때마다 언급되었다. 즉, 그에게 德을 부여하고 文化를 전할 사명을 주었으며, 그의 삶에서 떳떳함과 신뢰의 근거가 되었다. 비록 孔子가 吾,我, 予 등의 일인칭 대명사로 표현된 자기와 天과의 관계를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忠怒의 원칙에 의하면 적어도 君子를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使命을 자각해서 능동적으로 天과의 관계를 지니는 사람은 군자로 제한될지 모르지만, 運命으로서의 命, 곧 인간에 주어전 몫이라는 면에서는 모든 인간 에게 적용되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天과 같이 君子의 삶 근저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지만 西周시기로부터 신앙되던 祖上神을 비롯한 百神에 22) 대한 孔子의 태도와 그들에게 드리는 제사의식에서 비롯한 敬의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4 鬼神과 孝와 敬 『論語』에서 鬼는 죽은 사람의 혼령을 지칭하고, 神은 自然神울 포괄해서 神明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23) 그런데 孔子는 鬼를 공경함에 있어서 자기 조상인 鬼에게 드리는 제사만을 인정하였고 그렇지 않은 鬼에게 드리는 제사는 아침이라고 비판하였다(「爲政」 24).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는· 孝의 지속적 표현이므로 인간의 인격형성에도 도움이 된다고 보았으나, 조상이 아닌 鬼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道에 맞지 않게 福祿울 구하는 것이므로 군자로서 해서는 안될 일이라고 본 것이다. 자연신들에 대해서도 孔子는 나라와 鄕黨의 儀式의 일부로서 禮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인정하여 22) 필자의 논문 「中國宗敎傳統의 基本構造와 特性J, 〈宗敎硏究》 2( 1986), 48~53 면 참 조. 23) 사실 귀신이란 말은 『論語』에 모두 8 번 나올 뿐으로 鬼만으로 「爲政」 2, 神만으로 「지分」 12, 「述而」 21 • 35, 鬼神으로 「雍也」 22, 「泰伯」 21, 「先進」 12 에 나온다.

社(「 A1 分」 21), 告朔(「八 1分 」 17), 灘(玉黨」 8) 등의 종교의식을 존중하였으 나, 〈怪力亂神〉(「述而」 21) 에 대하여는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사실 올바론 鬼와 神에게 드리는 제사에 대한 孔子의 정성은 지극한 것이 었다. 「지分篇」 12 장을 보면, 제사에 몸소 참석하여 그 의미를 새기던 孔子 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祗上에게 제사를 드릴 때에는 그 혼령이 거기 계신 것과 같이 하고, 神에게 제사를 드릴 때에는 그 神이 거기 계신 것과 같이 할 것이다. 선생님께서 말씀 하셨다. 〈나는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제사를 드린 것 같지가 않다.〉 24)

24) 위의 번역은 新注에 따라서 〈祭, 祭先祖也. 祭神, 祭外神也〉로 보고 한 것이다. 租棟 는, 〈祭如在〉는 古禮經의 문구로서 孔子가 이것을 인용한 후에 그에 대한 설명으로 〈祭神如神在〉라고 부친 것으로 보았으나, 여기서는 채택하지 않았다.

제사에 대한 정성을 民에게 대한 정성과 더불어 임금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의무라고 보는 면에서 孔子는 西周시기의 사상을 그대로 계승했다고하겠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禹에 관하여 나는 비난할 것을 찾지 못하였다. 자신 의 음식에는 검소하지만 鬼神에게는 孝를 지극히 하였다. 자산의 의복은 거친 것으로 하면서 祭服과 禮冠은 아름다움을 국하게 하였다. 자신의 궁실은 비천하 면서 전답 사이의 수로를 내는 데는 전력을 다했다. 禹에 관하여 나는 허물할 것을 찾지 못하였다.〉(「泰伯」 21 ) 禹가 자신의 의식주는 검소하게 하면서 제사와 백성의 일에 힘쓴 것을 칭찬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제사에 정성을 다할 것을 말하면서도 孔子는 동시에 鬼神 과 인간과의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어야 하고, 넘을 수 없는 그 간격을 좁히려고 하는 것은 울바론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孔子가 위독할 때 기도하 기를 청했던 제자 子路가 「先進篇」 12 장에서는 귀신을 섭기는 일과 죽음에

대하여 묻고 있다. 孔 子 의 유명한 대답은 〈사람을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기겠으며, 삶을 모르면서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였다. 그러나 여기 서 孔子가 鬼神의 존재나 죽음 후의 문제를 부인하거나 필요없는 것으로 배척한 것은 아니었고 인간에게 가까운 일, 자기 힘으로 가능한 〈 {I 多已字'\.〉 의 일에 전력을 기울이라는 個家 고유의 자세를 표명한 것이었다. f L .: 巳 의 이러한 태도는 잘 알려진 〈敬鬼神而遠之〉(「雍也」 22) 에도 그대로 드러나노 있다.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는 것은 禮에 따른 알맞은 거리를 유지하라 는 뜻이다후 遠은 소극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敬은 적극적인 뜻을 가져서 祭祀 때에 가져야 할 마음가짐으로 생각되었다(「子張」 I). 「述而 篇 」 13 장은 제사를 준비하는 齋 룰 지키는 일과 인간생명에 대한 존중에서 孔子가 각별했던 것을 알려준다. 선생님께서 신중하게 하시던 일은 齋戒와 전쟁과 질병이었다. 「 憲問篇 」 21 장에 보면 齊나라의 大夫 陳成子가 자기 임금을 살해하자 孔子는 泳浴齋戒하고 魯哀公에게 찾아가 義를 위하여 齊를 토벌할 것을 건의하였다쩐 魯의 三桓둘 역시 실권을 자기들의 손 안에 쥐고 있었으므로 이 토벌제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생명을 존중하던 孔子가 생명보다도 앞세운 것은 義였고, 그것을 준비하기 위하여 제사 때와 같이 목욕재계했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 것은 제사의식에서 시작된 齋戒가 생사를 좌우 하는 인간사에까지 적용되었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제사 때에 지녀야 할 敬이라는 태도는 인간사 전역에 확대되어 孝의 핵심도 敬에 있었고(「爲 政」 7), 남과 사귀는 일을 잘하여 인간관계를 지속시키는 것도 敬이라고 보았으며(「公治長」 7), 모든 행동에서 두텁게 해야 될 것도 敬이었다(「衛훔 25) 「季氏」 13 에 孔子가 그 아들을 멀리한 데서 군자다운 모습을 보았다고(君子之遠其子 也) 기뻐하는 陳亢의 반웅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26) 陳成子가 簡公울 시해한 사건은 哀公 14 년(기원전 481 년)으로 孔子의 나이 71/ 2,11)였 다 . 후에 그는 齊나라를 탈취하여 齊侯가 되었다 .

公」 6). 비록 남을 대하는 면에서는 대범한 것이 좋으나 자신의 삶에 있어서 는 누구나가 〈居敬〉(공경스러운 마음가짐 속에 생활한다)(「雍也」 2) 해야 한다고 孔子는 가르쳤다• 곧 이것은 〈f l 多己以荷k 〉(공경스러움으로 자신을 닦는다)과 같은 말로서 君子는 敬함으로써 실수함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顔淵」 5 ). 백성을 부리는 일은 大祭룰 받드는 것과 같이 하라고 仲弓에게 한 孔子의 말씀을(「顔淵」 2) 이미 살펴보았는데, 魯나라에서 가장 중시되는 제사는 太廟에서 드리는 宗廟제사였다. 魯는 周公旦을 始祖로 모심으로 太廟의 제사 는 가장 성대하였다• 그런데 孔子가 大夫로서 祭祀儀式을 도울 때 매사를 물었다는 기록이 「八僧篇」 15 장과 「鄕黨篇」 15 장에 보고되고 있다. 매사를 묻는다는 것은 禮에 맞는 일이었고 孔子는 그만큼 제사의 모든 것을 조심스 럽고 공경스럽게 행했다는 뜻이었다. 특히 魯나라에서 5 년마다 드리는 가장 큰 제사는 諦祭이었는데, 「八僧篇」 II 장에 孔子는 諦祭와 修己安人을 직결시키는 묘한 말씀을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諦祭의 의미에 관하여 물었더니 선생님께서 말씀하였다. 〈모릅니 다.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이 天下의 일을 다루는 것은 마치 이것을 보는 것과 갇울 것입니다〉 하시고 자기 손바닥을 가리키셨다. 諦祭는 始祖를 天에 配享하여 드리는 제사로 원래는 天子에게만 허락되던 것인데 魯公은 周公울 모시기 때문에 八僧舞와 더불어 諦祭도 드릴 수 있는 허락을 받은 것이다.27) 諦祭란 자기가 나온 근본인 始 wt !1.와 그 始祖가 나온 27) 漢代에서는 이런 제사를 邪祭라고 했는데 (劉寶楠의 『論語正義』 53 면 참조) 이 용어 가 r 論語』에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吉川幸次郞은 君主가 모든 조상의 位牌를 始祖의 廟에 모아서 함께 드리논 제사라고 설명하였다(『論語』, 朝日新聞社, 1966, 66 면). 丁若

鏞은 『中庸』을 인용하면서 鄕社의 禮와 諦菅의 義를 밝힌다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같은 것임을 孔子가 말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論語古今注』, 50 면) . 『論語』에 서 孔子가 모론다고 대답한 것은 諦祭의 의미와 鬼神울 섭기는 법과 죽음 등이었는 데,참으로이해하지 못했다는의미보다는말로대답해서 알아들을수없는초월적인

주제이기 때문에 명확한 답을 하기는 어려운 것이며 無言으로 놓아두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한결같은 입장의 표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궁국적 근본안 天에게까지 소급되는 제사이므로 그 제사의 의미를 이해한다 는 것은 모든 생명의 기원과 질서의 근저를 파악한디는- 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諦祭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자기 손바닥을 들여다 보듯이 天下의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諦祭는 모든 제사 중에도 가장 至嚴한 것으로서 儀禮 B1 인 敬의 국치를 드러내고, 天下룰 편안하게 할 수 있는 聖人은 人間事에서 이루어지는 敬울 완성시킨 것이므로 이 두 가지는 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곧 敬이란 天을 비롯한 百神에게 바치는 제사의식 과 人間事 전체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자세로 聖과 俗을 관통하는 개념이었 다. 이와 같이 孔子의 人間論, 政治經濟觀, 宗敎觀 등그의 사상 전체는 『論語』 에 보존된 말씀들이 단편적인 것과는 정반대로 인간의 삶 전체를 포괄하고 하나로 묶어주는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4 장 孔子人間論에 대한 孟子의 盡心的 해석 孔子는 顔淵이 죽었을때 天이 그의 후계자를 없이 하는 것이라고 애통해 하였는데 (「先進」 9), 사실 孔子 사후에 그의 直弟子들 중에서 孔子의 사상을 발전시켜 체계화시킨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I) 『 論語』나 『 史記』의 『 孔子世 家 』 등에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제자들은 선생님에 대한 지극한 공경심을 가지고 있었고, 바로 몇대의 제자들에게까지 전수되던 이런 공경심이 『論語 』 라는 孔子의 언행록을 편집하게 된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앞에서 고찰하였 듯이 魯나라와 商나라를 중심으로 하여 孔子의 가르침이 제자들에 의해 퍼져 나가는 儒家 성립시기에 강력한 도전 세력으로 대두한 것이 墨家와 道家였다. 孔子의 사후 100 년 후에 태어나 최초로 孔子의 가르침을 체계적으 로 해석한 孟子는 楊朱와 墨醫의 가르침이 天下를 가득 채우고 있다고 한탄 하면서 그들과 지속적인 논란을 벌이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 I) 宋代의 新儒學者들은 顔淵의 短命 때문에 孔子 학문의 진수가 전수되지 못하다가 1 , 500 년이 지난 후 性理學의 홍기로서 비로소 재발견된 것이라고 보았다(『近思錄』· 卷二 「爲學類」). 이것은 마치 석가모니佛의 참된 께달음이 禪佛敎의 전통으로 되찾아 졌다는 中國佛敎의 주장에 비유될 수 있다고 하겠다. 2) r 孟子』 「膜文公」 下 9 장 : 〈楊朱墨첼之言효天下〉. 그 의에도 「膜文公」 上 5 장, 「盡心」 上 26 장, 떻心」 下 26 장 등에서 孟子가 그들과 논쟁을 하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결국 은 그들도 유교로 돌아오리라는 孟子의 확신을 표명한다. 孔子의 사망연대는 서기전

479 년인데, 孟子의 연대는 서기전 372~289 이므로 정확하게 107 년 후에 孟子가 태어났 다 .

楊朱의 사상은 따로 책이 보존되어 있지 않고 단지 『 列子 』 7 편, 『 淮南 子』 「 i E 論訓」, 『 呂氏春秋 』 등에 단편적으로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에 그 내용을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養生과 保身울 주장했던 것 같다전 곧 , 楊朱는 사회 를 바르게 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기보다는 천수를 누리며 십신을 평안 하게 보존하는 것을 더 가치 있게 보았던 것이다 .4) 孟 子 가 그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던 莊子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없고 老 子 에 대해서도 논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아칙 道家의 중심을 이루는 老莊사상은 당시 황하 유역 북방의 사상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겠다. 사실 老莊사상에서 확립되는 道, 無爲 至人 등의 개념은 荀 子 에 와서야 심각하게 받아 들여질 뿐만 아니라 儒敎에 적응할 수 있도록 변화되어 儒敎전통 안에 부분적으로 수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道家의 사상적 도전을 인식하고 그에 儒家的 응답을 한 인물은 荀子이므로 道家와 儒 家 와의 관계는 荀子의 사성을 디루는 이 책 6 장과 7 장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3) 멜南子』에는 全性保眞으로 그의 입장을 대변하고 『列子 』 에는 자연스러움에 거스리 지 않음으로써 養生하는 법을 말하고 있다. 4) 孟子는 楊朱를 완전한 이기주의자로 비평하고 있으나 保身論의 본래 사상은 모든 이가 이런 자세를 지니고 살 때 사회는 자연스럽게 평안해지리라는, 후에 체계화되는 道家的 사회관과 연결되었으리라고 본다. r 論語』 「微子篇」 5, 6, 7 장 등에는 楚狂, 接與 長沮와 菜沼 등 정치생활에서 완전히 물러난 은자들과 孔子와의 홍미로운 대면 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역시 保身論을 지닌 초기 도가에 속한 인물들이 아닌가 한다.

백여 년이 지난 후 孔子의 가르침을 당시의 사상적 조류에 입각하여 해석 하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서술함으로써 『論 語 』 다음으로 중요한 儒 家 의 기록 울 남긴 孟子에게 실질적으로 가장 큰 도전이었으며 따라서 그의 해석 체계 에 제일 큰 영향을 미친 학파는 墨家였다. 孟子는 墨 家 의 利人說을 그의 性善說과 孝의 강조를 통해 인간의 선천적 도덕성을 확립시킴으로써 극복하 려 하였고, 墨家의 天志와 聖王觀은 도덕성의 완성을 통한 知天과 仁政을 중심으로 한 그의 王道論울 통하여 응답하고자 하였다. 아러한 孟子의 儒家

的 반격울 다루기에 앞서서, 먼저 個家와 역동적 관계에 있었던 提家의 주요 사상과 그 발전을 살펴보기로 한다. 盛家의 창시자인 恐 醫 (기원전 470 년경 ~391 년)은 아마도 魯나라에서 孔子의 後學들로부터 그의 초기 교육을 받은 듯하다. 그들로부터 그가 배운 詩와 書 의 경전 교육은 墨子의 사상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지만 그는 個家가 강조하는 前홍의 번거로움을 싫어하였다고 한다 . 5 ) 『 墨 子』 의「節用」, 「節男 「非樂럴 등을 보면 실용성을 근거로 해서 儒家의 禮를 신랄히 비판 하는 母子의 모습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러나 晃家가 儒家에게 도전한 가장 큰 위협은 禮의 실천에 관한 세부적 견해 차이라기보다 兼愛야말로 聖王들 의 가르침이며 天志라고 하는 강력한 주장이었다. 墨子는 그의 兼愛說울 가지고 禮예 따른 차등적인 사랑의 확대로써 仁울 이루려는 孔子의 가르침 울 別愛라고 비판하였고, 모든 이를 차별 없이 사랑하는 兼愛가 곧 하늘의 뜻이며 聖王之道를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인간의 길이라고 하였던 것이 다. 이러한 墨家사상의 내용을 면밀히 고찰하기에 앞서 A; 먼저 『 墨子 』 의 구조와 편집과정을 간단히 설명하고, 墨家와 儒家의 사상적 대결이 벌어지던 전국시기의 사회적 배경을 파악하여 보도록 하겠다.

5) 『淮南子』 卷 21, 要꽝 墨醫의 출신계급은 工人이었으리라고 보기도 하고 賤民계급이 었으리라는 說(楚惠王이 冕醫울 만나지 않은 이유, 47 편)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 『墨 子』 47 편인 「資義篇」(언행록의 일부)에는 冕子가 유세할 때 수레 속에 매우 많은 책을 싣고 있었다고 하고 방어전술을 가르쳐서 제자들에게 전승시킨 것을 보면 武士 로서 낮은 士계급에 속했을 가능성이 높다. 단 그가 제자들에게 너절한 옷을 입게 하고 나막신이나 짚신을 신게 하며 밤낮 쉴새 없이 일을 하게 하였다는 『莊子』 「天下 篇」의 기록을 참고로 하면, 墨家의 대부분아 서민층으로 이루어졌으리라는 것을 짐작 할수있다.

『 漢 書 藝文志』에 의하면 『墨子』는 7[ 편이었으나, 현재는 53 편만 보존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8 편에서 37 편까지의 30 편은 十大主張이라고 불리는 墨家의 10 가지 대표사상이 上中下 편으로 편찬되어 있어서 눈길을 끈다 .6) 이렇게 같은 제목을 주제로 하여 3 가지의 개별적안 편집이 이루어진 것은

6) 十大主張울 기재한 30 편 중 7 편은 없어져서 현재는 23 편만 남아 있다. r 墨子」를 연구

한 서양학자들은 이 편들을 신약성서의 예에 비추어서 「共觀篇 Syn o ptic Cha pte rs 」 라고 불렀다. 38, 39 편은 「非儒篇上포료 「共觀篇」의 부록적 성격을 띤다 . 『墨子』 1~7 편은 앞의 十大主張을 요약한 데다가 儒家 및 道家사상을 도입하고 있어서 前漢 초기 의 종합적 경향 아래서 이루어전 것으로 보며, 40~45 편은 墨辯 또는 墨운꾼이라고 불리 는데 논리학, 과학 등에 관한 것이고 46~50 편은 墨子의 언행록이 있는데 그 정확한 연대는 아칙도 논쟁중에 있는 상태이며, 51~71 편은 防禦戰術에 대한 기록으로 후에 편집된 것으로본다.

壘子의 사후 세 분파로 갈라전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墨 子 의 사상이 보존되 고 발전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墨子 』 는 기원전 5 세기로부터 3 세기에 이르는 200 여 년간의 편찬과정을 통해서 이루 어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댕망子』는 墨留의 사상을 핵으로 하여 발전한 墨家리는 한 학파의 사상이 집약된 책이라고 보는 것아 정확할 것이다 .8)

7) 『韓非子』 「顯學타(卷 19, 9) 에는 相里氏, 相夫氏, 鄧陵氏之墨으로 墨家가 나누어져 있다고 하였고, 『莊子』 「天下篇」에도 〈別墨〉이라 하여 서로를 헐뜯는다는 기록이 있 다. 단 十大主張의 골자는 적어도 구두전승의 형태로서 墨子시기에 형성되었으리라고 본다 . 8) 渡卓 Wa tana be Tak ashi는 8~37 편 자체를 기원전 400~220 년 사이에 편집되었다고 보고 각 편의 사상을 분석하여 연대적 발전을 보이려고 하였다(「墨子諸篇(1)著作年代 (上)」, 《東洋學報》 45, 1962~63, l~38 면). 그 의에도 高田淳 Takata Ats ushi, r 墨子』, 明德出版, 1967 ; Jos eph Needha m, Sci.e n ce & Civ il i z a tion in Chin a , 1956, 2 권 참조.

潭子』 39 편인 「非儒篇」에는 당시에 실천되고 있던 儒敎에 대한 墨家의 비판이 실려 있는데, 반대편의 눈에 비친 전국시대 儒者둘의 모습을 보여주 는 홍미로운 기록이다. 그들(儒者)은 禮와 樂울 번거롭게 꾸밈으로써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오랫동안 喪울 입고 슬픔을 위장함으로써 부모를 속인다. 立命울 주장하여 해이하고 가난 하면서도 고상한 체 호탕하게 지내고 있으니, 그들은 근본(本)을 어기고 할 일(事)을 포기한 채 편안히 태만하게 지낸다. 먹고 마시는 데는 급급하지만 일을 힘쓰는 데는 게으르기 짝이 없다 . 9)

9) 旦夫繁飾禮樂以埋人, 久喪僞哀以設親 立命緩貧而高浩居,倍本棄事而安意微. 食於飮食,

情禪務 『墨子間話』. 孫~fjM( (1848~1905), 臺淸商務 ~n 書館, 1974, 185 면 ; r 墨子』t 金學主 역 명문당, 1978, 274 면 ; Mo Tzu ; Basic Writ ing s , tr. by Bu rtan Wato n , Columbia Un i. Press, 1963 ; The Eth i c a l and Politi ca l Works of Mots e, tr. by Yi -P ao Me~ Hy pe rio n Press, 1973(fi rst pu blis h ed by Arth u r Probsth a i n, 1929) 등참조.

여기서 바판을 받고 있 는 것은 偉家 의 형석적인 禮樂 중시와 運命論 으로, 儒 家 자체에서 말하는 安 貧 樂道 및 내면적 바탕에 근거를 둔 禮 의 이상과는 거리가 있다. 어떤 면에서는 당시 존 재하던 儒 家 의 이상과 실천 사이의 괴리 때문에 비난을 사게 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淸 末의 주석가 孫話 讓 은 이에 대한 주석을 쓰면서 『 荀 子 』 「非十二 子篇 」에서 荀 子 가 子游 氏의 賤儒둘이 지닌 생활태도를 비판한 것을 인용하였다. 〈선비임을 핑계로 하여 일을 싫어하고, 염치없이 음식만 탐하면서 한다는 말이, ‘군자란 원래 用力울 하지 않는 것이다.'〉 荀 子 는 본래 이러한 안일한 태도가 군자의 자세가 아님 울 지적하면서, 〈근본을 지키면서 만사에 응할 수 있어서 모든 일에 맞는 것을 할 수 있는 연후에야 聖 A 이라고 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10)

JO) 倫儒恨爭 無廉恥而耆飮食, 必曰君子固不用力, 是子游氏之賤儒也…… 宗原應變, 曲得 其宜,如是然後聖他 .

荀 子 가 儒家 안에서의 실천적 남용을 인정하고 비난한 것과는 달리, 孟子 는 원리적인 면에서 墨家 의 오류를 지적하고 이를 논박하였다. 그런데 홍미 로운 것은 후에 韓非子도 「顯學 篇 」에서 지적하였듯이, 儒家와 墨家는 모두 堯舜의 聖王 之道를 말하고 자신이야말로 그 전수를 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 다는 것이다. 사실 墨 子는 그의 시대에 아르러 聖王의 법이 잊혀진 것을 한탄하였고 儒家를 비판함으로써 참된 규범을 회복하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 를 지니고 있었다. 여기서는 墨子와, 그보다 후에 나와서 그와 사상적 대결 울 벌이는 孟子가 살던 전국시대 전반기의 사회상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겠 다•

l 전국시대 전반기의 정치사회적 특성 北部의 제후국들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던 춘추시대의 術者인 晋나라가 家臣들에 의하여 韓, 魏, 趙로 三分된 것은 기원전 403 년(실질적 권력의 분할 은 453 년부터)이었다• 아때를 시점으로 하여 秦始皇의 통일이 이루어지는 기원전 221 년까지를 전국시기라고 하는데, 제후국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중국 역사상 가장 급격한 변혁의 시기였다. 사실 정치권력을 둘러 싼 경쟁은 제후국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한 제후국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어 서, 기원전 386 년에는 齊나라 역시 家老인 田氏에게 군주권을 박탈당했다. 이러한 정치적 변동은 전국시기의 사회 경제적인 변화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것이었다. 우선 괄목할 만한 사실은 製鐵, 製鹽 등 商工業의 발전으로 인구의 도시 집중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城이 커도 三百丈에 인구가 三千家 를 넘지 못하던 것이,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千丈의 城과 萬家의 邑이 보통 이 되었다 .11) 대표적인 예를 둘자면, 齊의 수도 臨溫는 풍족하고 융성한 도시 로서 七萬戶를 헤아려서, 실제로 21 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것으로 계산 된다.

II) 戰國策, 趙策三;徐復觀 「周秦漢政治社會結構之硏究」, 108 면.

또한 임치는 대단히 유복하고 충실해 있습니다. 백성은 너나 없이 피리를 불거나 大琴이 아니면 筑, 小琴 등을 타고 鬪鷄나 競犬, 雙六이나 공차기를 줄기 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한 임치의 거리에는 수레 바퀴통이 서로 부딪치고 사람의 어깨와 어깨가 서로 스치며, 또한 옷것과 옷것이 나란히 합쳐져 휘장이 되고, 옷자락을 올리면 幕이 되고, 땀을 홀리면 비가 될 만큼 나다니는 사람이 많고, 모든 집이 풍족해서 시민의 사기는 매우 왕성합니다.12)

12) 臨溫若富而貢 其民無不吹宇鼓瑟 , 擊筑彈琴, 鬪難走*, 六博路躍者. 臨湘之途, 車穀 擊 人眉摩 連征成椎, 擧快成幕揮汗成兩 家敦而爲 志高而揚(戰國策, 齊策一). 李相 玉 역, 河西출판, 146 면 참조.

齊의 宣王울 설득하여 合從策울 제안하는 蘇秦의 말이므로 어느 정도 과장이 들어갔다는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전국시대의 도시 생활을 보여 주는 단면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와 갇이 소란한 도시의 문화 생활을 부정적 으로 묘사한 『 老子』 12 장, 3 장, 20 장 등을 보더라도 서로 경쟁적이고 사냥과 놀이에 정신을 쓰던 당시의 모습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商나라뿐만 아니라 韓의 宣陽에는 材士 十萬이 있었다고 하며, 魏나라 역시 萬家의 邑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각국의 상비병력이 증가됨과 동시에, 일정한 직업에 매이지 않고 유동성을 띤 지식인들인 士계층이 확대되어 사상과 문화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각국의 제후들은 富國强兵의 꿈을 실현시켜 줄 역량 있는 인재들을 구했 고, 다양한 出身성분으로 이루어진 士계층의 지식인들은 자신을 등용해 줄 主人을 찾아서 여러 나라로 유세를 벌였는데, 이런 유세의 집단은 때로 수백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13) 이런 현상은 제후와 士상호간의 필요에 응한 것이 었지만 이들간의 관계는 유동성을 특칭으로 하기 때문에 사회 신분관계에 변동을 가져왔다. 곧 그전과 같이 宗法制]에 의거하여 혈연이나 지연관계에 따라 지속적인 충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시한적인 고용 관계를 형성 하였다.

13) 墨子의 제자가 180 인에 이르렀다고 하고, 孟子는 그 從者가 수백 인이었고 하는 것은 그 대표적 예라 하겠다(徐復觀, 같은 책, 110 면).

이러한 사회적 유동성은 농민을 비롯한 서민층의 삶에서도 일어나고 있었 다. 장기간의 전쟁에 지천 농민들은 離農하여 遊民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 고, 이것은 세금과 부역을 이들에게 부과시켜 온 지배자들에게 심각한 문제 룰 제기하였던 것이다. 『孟子』 첫머리에 등장하는 梁의 惠王이 인구의 증가 룰 원해서 여러 가지 정책을 시도한 것 등은 君主가 농민들을 정착시키려고 노력한 한 가지 예라고 하겠다. 또한 전국시기에 이르러 이루어진 농지의 개척과 농업 기술의 발전 및 화폐사용의 확대와 상공업의 비약적인 발전은 그만큼 農民과 市民의 역할을 중요하게 하였고, 따라서 그들은 정치적으로도

큰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14) 墨子나 孟子가 民울 위한 정치를 주창하 여 그들의 생활을 편안하고 윤택하게 해주어야 할 것을 강력히 요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離農의 문제, 서민들이 차지하던 정치적 중요성, 제국간의 힘의 각축 등 전국시기의 사회적 배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14) 金谷混 『孟子』, 岩波書店, 1966, 16~19 면 참조.

전국시기에 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던 곳은 초기에는 魏의 도성 安邑이었다. 魏나라의 文侯(기원전 445~396 년)는 그 당시 학자로서의 명성을 지닌 老境의 子夏룰 비롯한 많은 학자를- 초빙하였으며, 그의 재상인 李克은 子夏의 제자가 되어 成文法을 제정하고, 米價의 안정책을 실시하였으며, 토지와 재산의 사유권을 보장하였다. 그러나 魏文侯의 사후 전국시대 중기에 이르러 문화의 중심지는 齊나라로 옮겨졌다. 商의 威王(기원전 357~320 년) 과 宣王(기원전 319~301 년)은 그들의 재위기간 57 년 동안 대대적인 문화정책 울 써서, 臨溫의 西 F1 인 稷門 아래에 훌륭한 저택들을 짓고 大夫의 대우를 약속하며 여러 나라의 사상가들을 초빙하였다. 여기에 모여 자유로운 학술 활동을 벌이던 학자들을 稷下의 士, 그들의 학설을 稷下의 學이라고 하였는 데, 전국시대를 특징짓던 자유사상의 절정을 이루었다. 당대를 풍미하던 다양한 사상가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던 까닭에 일면 절충적인 성격을 띠면 서도 상호 자국을 통해 개성 있는 사상체계들을 내놓았다 •15) 稷下의 士로서 대표적인 학자들을 들자면, 儒家로서는 孟子(鄒人), 墨家로서는 宋經(宋人), 道家로서는 環淵(楚人), 陰陽家로서는 鄒衍(齊人) 등이 있어서 盛時에는 70 여 명에 달하였다고 하는데, 이런 현상은 荀子가 유학할 襄王(기원전 3 세기 전반)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들은 자유롭게 이론적 학문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 고대의 사성들이 여기서 체계화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15) 貝塚茂麻 『諸子百家』, 岩波書店, 1961, 77 면과 갇은 저자의 『中國의 歷史』 上, 이용 범 역, 중앙신서, 140~148 면 r 武內義雄全集』, 8 권, 「思想史篇」 1, 角川書店, 1978, 50~68 면. 稷下의 士로서 이름이 알려진 학자의 수효는 76 명이나 여기에 머물렀던 학자의 총수는 수백 인 혹은 수천 인에 달하였을 것으로 본다 .

2 墨家의 인간론:그 도전의 한계 孔子의 인간론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墨子도 역시 인간의 본성에 근거를 두고 이론적으로 정립되어 있는 체계적인 인간론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墨子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가 儒家보다 월등한 것이라는 논증을 번번이 들고 있지만, 그것은 논리적인 결론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墨家의 가르침이 儒家보다 聖王之道를 더 충실히 계승한다는 점과 경험적으로 볼 때 墨家가 儒 家 보다 더 큰 효능을 지닌다는 두 가지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16) 곧 墨子 역시 孔子와 마찬가지로 古之道를 규범으로 하면서 경험적 통찰을 통하여 우러나온 인간의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는 같은데, 한 사람은 〈利〉에 중점 을 두었고 또 한 사람은 〈正〉을 중시했다는 것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인 다.

16) 보통 墨子의 〈三表〉라 불리는 세 가지 기준에는 백성들의 이목을 살펴서 사건의 진상을 캔다는 〈原〉과 本始로서 聖王之事를 살핀다는 〈本〉과 국가와 백성에게 더 큰 이득을 돌린다는 〈用〉이 있다 . 여기서 原은 따로 취급하지 않았다 . 〈上本之於古者 聖王之事……下原察百姓耳目之實……廢以爲刑政, 視其中國家 百姓人民之利〉(「非 命」 上, 『墨子間話』, 商務印書館, 170 면 )

우선 墨子가 자신과 기존 학파인 儒家와의 차이를 어디에서 보았는가를 살피기 위하여 그의 사상의 핵을 이루는 兼愛에 대한 논설 속에 나오는 두 종류의 선비에 대한 비유를 인용하겠다. 잠시 시험삼아 두 가지 이론을 비교하기 위하여 두 선비(二士)를 설정하여 봅시다 . 그중의 한 선바는 별애(別)를 주장하고、 다른 한 선비는 경애(兼)를 주장합니다. 그리하여 차별하는 선비 (別土)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어찌 친구의 몸 위하기를 내 몸을 위하는 것같이 하고, 천구의 어버이 위하기를 내 어버이를 위하는 것같이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물러나 그의 친구를 만났을 때 굶주리고 있어도 먹여주지 아니하고 헐벗고 있어도 옷을 입혀주지 아니하며 병이 들어도 시중 들고 간호하지 아니하고 죽어도 장사 지내주지 않았

습니다. 8|H: 의 말도 이와 갇고 행동도 이와 같습니다. 兼愛를 주장하는 선비 (兼士)의 말은 그렇지 않고 행동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듣건대 天 下에서 지조가 높은 선비( 高- I:)는 반드시 친구의 몸 위하기를 자신의 몸을 위하는 것과 같이 하고 천구의 어버이 위하기를 자신의 어버이를 위하는 것갇이 하는데, 그런 뒤에야 天下의 지조 높은 선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러나 그의 친구를 만났을 때 굶주리고 있으면 먹여주고 헐벗고 있으면 옷을 입혀주고 병을 앓고 있으면 시중하고 간호해주며 죽으면 장사를 지내줍니다 .171

17) 姑菅兩而進之, 誰以爲二士 . 使其一士者執別, 使其一士者執兼. 是故月Jj士之言 B, 吾登能 福友之身, 若爲吾身, 爲吾友之親, 若爲吾親. 是故退諸其友, 凱뵤回뀜t, 寒郞不衣, 疾病 不侍養 死喪不葬埋. 別士之言若此, 行若此 . 兼士之言不然 行亦不然. 日, 吾聞爲高士於 天下者, 以爲其友之身, 若爲其身, 爲其友之親, 若爲其親, 然後可以爲高士於天下. 是故退 諸其友, m lJ食之, 寒ff lj 衣之, 疾病侍養之, 死喪葬埋之(「兼愛」 下, 『墨子間話』, 76 면 ). 金學主 역, 명문당, 1978, 172~173 면 참조. 墨子가 장례 그 자체를 바난한 것이 아님 은 여기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非樂」, 「節用J, 「節葬」 편에서 墨子가 모든 사치와 소비를 반대하여 장례도 3 개월이면 족하고 모든 장식과 예술, 음악과 춤은 백성을 위해 써야 할 자산과 시간을 군주에게서 빼앗아 감으로 반대한다고 했을 뿐이다.

여기서 墨子는 別士와 兼士로 두 종류의 사람을 열거하고 있는데, 물론 別士란 禮를 따라 인간 관계에 처등을· 두는 儒士를 가리킨 것이며, 兼士는 관계의 가까움과 덟울 상관하지 않고 모든 이를 아울러 사랑하는 墨家를 지칭한다. 곧 墨子는 儒敎와 자신의 가르침을 구별하는 가장 큰 차이를 別과 兼에서 보고 〈兼으로써 別울 대치해야 된다〉(兼以易月 l j)고 주장하였다. 墨子가 여기서 말하는 〈月IJ〉은 孔子사상의 일면만을, 그것도 禮에 따른 과정상의 형식만을 보죠 L 仁의 확대라는 목적은 도의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孔子가 목표하는 바는 차등적인 禮의 완성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 라, 天이 정한 바의 인륜에 따라 禮를 실천함으로써 부모와 같이 가장 가까 운 사람에게 대한 사랑이 점점 확대되어 널리 愛人 혹은 安人할 수 있는 仁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別이란 仁을 이루기 위한 과정상에서 禮의 실천이 지닌 의곽만을 지칭할 수 있을 뿐이다. 실천의 내용을 보면 忠怨로서

자산에게 하는 그대로를 남에게도 해야 되기 때문이다. 결국 墨子와 孔子의 가르침을 구별짓는 것은 그들이 목표하는 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상의 차이에 있었다고 하겠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 사실은 墨子는 〈兼〉이라는 한 단어 안에 儒家가 말하 는 모든 德目을 포괄시킬 뿐만 아니라 다시 그들을 상대화시켜서 그의 중심 사상인 利로서 해석하고 있디는· 것이다. 〈兼〉이 하나의 상징어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면에서는 孔子의 〈仁〉과 대비될 수 있으나, 孔子의 仁이 전체를 묶어주고 완성시켜 주는 개념인 데 비해, 墨子의 兼은 다론 개념들을 연결시 키고 체계화시키지를 못하고 뭉뚱그려 놓을 뿐이리는· 데 그 약점이 있다. 墨子는 〈兼이란 곧 仁이요 義다〉라고 정의를 내리지만 ,18) 仁과 義를 다시 〈利人〉(남을 이롭게 한다)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에 ,19) 결국 널리 서로 사랑하 고 서로 이롭게 한다(兼相愛交相利)는 兼의 개념으로 다시 귀착된다. 다시 말해서, 仁과 義의 개념은 독자적인 도덕규범으로 간주되기보다는 兼에 의하 여 상대화되고 이롭게 한다는 의미로 새롭게 해석되었다. 墨經에서 孝는 〈利親〉(부모를 이롭게 한다)이라고 정의 내려지는 것을 보면, 孝 역시 墨家의 중심이 되는 이롭게 한디는· 개념 안에서 그 가치를 발견하고 있다.

18) 兼郞仁矣義矣(「兼愛」 下, r 墨子 OO 話』, 78 면). 19) 仁之事者, 必務求興天下之利 「非樂篇」 上 l( 『墨子問話』, 160 면)과 仁, 體愛也 ...... 義, 利也……忠以爲利而强低也……孝, 利親也, 經上(『墨子間誌』, 196 면). 墨經의 정의는 후학에 의해 정착된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그런데 墨子는 〈兼〉이 서로에게 이롭다는 효능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곧 聖王의 길이요 하늘의 뜻이라는 데서 그 당위성을 찾았다 .20) 우선 兼은 先聖四王인 禹,湯, 文王, 武王이 행하였던 것이라고 단정한다. 예를 들어 〈文王께서는 해와 달과도 같이 사방에 빛을 비추셨다〉는 『書經』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것이 곧 聖王의 兼愛를 가리킨 것이라고 墨子는 풀이한다.

20) 故兼者, 聖王之道也(「兼愛」 下, 『墨子間話』, 82 면) ;何以知天之愛天下之百姓, 以其兼 而明之( · 「天志」 上, 『墨子問話』, 126 면).

옛날 文王이 서쪽 땅을 다스릴 적에는 해와도 같고 달과도 같이 사방에 빛을

발하시었다. 서쪽 땅에 있어서는 큰 나라라고 해서 작은 나라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식구가 많다고 해서 의로운 홀아비나 과부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포악한 권세로써 농사짓는 사람들의 곡식이나 가축을 뻣는 일이 없었다. 하늘은 맑게 내려다 보시었고 文王께서는 자애로우셨다… ... 이것은 文王의 일이 곧 내가 지금 행하는 兼이었다는 것을 말한다.21)

21) 昔者文王之治西土, 若 8 若月, 午光于四方. 于西土, 不爲大國{每小國, 不爲衆庶偉課事, 不爲暴勢奪稙人黎稷狗훅 天層臨文王慈……此言文王之事則吾今 行兼矣(「兼愛」 中, 『墨子間話』, 72~73 면) . 『書經』 泰誓에는 惟我文考若日 月之照臨光于四方으로 나온다.

墨子가 文王울 위시한 聖王의 정치를 겸애로서 설명한 것은 당시의 혼란 이 신하와 임금, 자식과 아버지, 나라와 나라가 서로 사랑하지 않은 데서 기인한다고 판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墨子는 자신의 경애설이야말로 전국 시대의 혼란을 치료할 수 있으며 聖王之道롤 올바르게 전하는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고, 반사적으로 차등을 - 두는 儒敎의 가르침을 別이라고 비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詩 書 를 인용하면서도 墨家와 儒家는 그 해석을 달리하였다. 구체적 인 예를 들면 墨子는 〈聖人이란 天下를 다스리는 일에 종사하는- 자〉(「兼 愛」 上)라고 詩書에서와 같이 聖人울 王者로 해석하는 데 비해, 儒家에서의 뿔人은 왕다운 임금을 지칭할 뿐만 아니라 德의 완성자라는 새로운 의미가 첨가되어 사실상 그 뜻의 핵심을 이룬다. 그 의에도 天이나 鬼神에 대한 해석 등 전체적으로 墨家의 경전 해석이 儒家에 비해 훨씬 더 보수적이고 字句的이었다 하겠다. 〈兼〉이란 聖王之道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聖王둘이 바로 하늘로부터 배워 서 알게 된(尙賢 中) 것이어서, 墨子는 兼울 행하는 사람은 天의 뜻을 따르 기 때문에 상을 받을 것이고, 이를 거스요는 사람은 天의 뜻을 거스리므로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22) 사실 三代의 聖王인 禹,湯, 文王, 武王은

22) 順天意者, 兼相愛,交相利, 必得賞 反天意者, 別相惡 交相賊 必得罰(「天志」 上, 『墨子間話』, 125 면) .

모두 天意를 따랐는데, 그들이 天意룰 따른 방법을 墨子는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지적한다. 그들의 일은 위로는 하늘을 높이고 가운데로는 귀신을 섬기며 아래로는 백성 둘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23) 墨子의 우주관은 이와 갇이 上中下로 三分되어 있어서, 맨 위에는 도덕의 원천인 天이 좌정하여 있고, 중간에는 도덕의 관리자로서 상벌을 주관하는 鬼神둘이 있으며, 맨 아래에 도덕의 실천자로서 인간이 위치하고 있다. 墨子 의 사상에서 특이한 것은 귀신이 天과 인간 사이의 매개자로서 인간 세계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24)

23) 上尊天 中事鬼補 下愛人(「天志』 上, 같은 책) . 24) 墨子는 鬼神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첫째는 天鬼로서 句돈과 갇이 人面烏身 등 인간과 동물이 혼합된 모습으로 표현되며, 天의 使者로서 그 명령을 전하는 역할 울 담당하는 하늘에 있는 귀신들이다. 둘째는 사람이 죽어서 된 人鬼로서 구체적 형상을 지니고 원수를 갚는 역할로 자주 나타난다. 셋째는 山水에 있는 자연신들로서 可視的 형상을 갖추지 않고 자연현상을 통해 경고를 보내는 山水鬼들이 있다(「明 鬼」 下, 『墨子間話』 159 만 차인애, 「墨子와 論語의 鬼神觀J, 서강대학교 석사논문, 1983 년 참조).

墨子의 도덕체계 안에서 귀신이 인간 행위의 감시자 및 상벌의 집행자로 서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는 것은 儒家와 특별히 구별되는 것이다. 孔子는 孝로써 조상들에게 제사룰 지내는 것 이상으로 귀신에 대해 언급하기를 거부하였고, 인간이란 修已安人함으로써 人間事를 통하여 천명을 다하게 된다는 사실을 중시하였다. 그와 달리 墨子는 聖王둘이 天下를 다스릴 때에 는 귀신을 섬기는 일을 먼저 한 후에 人間事룰 다루었음과 같이, 임금은 먼저 祭器의 준비 등 제사에 관계된 일을 앞세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25) 馮友 蘭은 〈墨子가 귀신의 存在룰 인정한 것은 그가 정말 超自然的인 사실에

25) 故古聖王治天下也, 故必先鬼神而後人者 (「明鬼」 下, 『墨子間話』, 152 면) . 『淮南子』 21 장에 墨子는 夏文을 계승했다고 했는데 夏왕조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gi의 甲骨文의 종교관과 통하는 접을 볼 수 있다.

관심이 있어서 그랬다기보다는 兼愛의 교리를 보강하기 위해 종교적인 制裁 를 도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하였는데 ,26) 이렇게 墨子가 기능적인 이유에만 관심이 있었다면 인간보다도 귀신을 앞세워야 한다고까 지 말할 필요가 있었을지는 의심스럽다.

26) 『中國哲學史』, 鄭仁在 역, 형설출판사, 1982, 91 면 . 墨子는 天울 善惡등 모든 것의 절대규범으로 보았으므로 그를 u tilltari an 으로 볼 수 없음을 밝혔다. Denn is Ahern , Is Mo Tzu a Utilitarian ? Jo urnal of Chin e se Phil os op hy 3(1 9 76), 185~193 면 참조 .

특히 『春秋左傳』 桓公 6 년(기원전 706 년){菜에 나오는 季梁의 유명한 연설 속에 나오는 〈백성은 神둘의 祭主이므로, 聖人은 백성을 키우는 일에 먼저 힘을 쓰고, 그 후에 神들에 정성을 들인다〉는 말과 반대되는 사상을 墨子가 역설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儒家가 束周시기 에 와서 새로운 사상으로 대두하던 인간을 우선으로 하는 사조를 대표했다 고 한다면, 墨家는 조상신울 비롯한 귀신이 禍福을 초래할 수 있디는- 신앙을 고수하는 西周 초기, 아니 그 이전부터의 전통적 사조를 계승하고 있다고 하겠다. 양대 사조가 모두 사회의 질서를 유지 회복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지녔다는 데서는 갑았으나, 한쪽이 인간의 내면적 德의 완성을 추구했다면, 다른 쪽은 우주 전체의 질서 속에 인간의 도덕성을 위치시키고자 했다. 귀신 관뿐 아니라 그의 단순한 웅보사상 등 종교적인 견해 전반에 있어서 墨家는 아마도 그 당시의 대중 신앙에 가까웠을 것이며, 이런 면에서 儒家보다도 서민의 사상을 더 충실히 대변했다고 하겠다. 墨子의 귀신관이 지닌 민중적이고도 보수적인 성격이 墨子의 사상에 특이 성을 더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尙同篇」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位階的인 그의 사상체계에서 最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곧 天이었다. 갑골문 이나 詩書에서와 비슷하게 墨子는 天울 인격적으로 개념화하여, 분명한 의지 를 지닌 最高神으로 보았다. 그는 天의 뜻을 天意 혹은 天志라고 명명하였는 데, 天命이라는 전통적인 용어를 쓰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墨子 자신이 「非 命篇」에서 밝힌 바와 같이 命이란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운명론을 지칭

한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墨子는 天志야말로 마치 수레바퀴 工人에게 원형을 그리는 그립쇠(規) 가 있고 匠 A 에게 方形울 그리는 四角자(短)가 있는 것과 같이 세상 萬 事 에 있어서 규범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天은 仁과 儀의 원천으로서 人間事 전체를 살피고 있는 것이다. 아무곳에라도 天울 피할 수는 없으니 숲이나 골짜기 속에 한적하게 아무도 없는 곳이라 하더라도 天은 반드시 밝히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天下의 士君 子들이 天에 대하여는 오히려 경계할 줄을 모르니, 이것이 내가 天下의 士君子 둘이 작은 것은 알면서도 큰 것은 알지 못함을 아는 까닭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은 또한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싫어하는가? 하늘은 義롤 바라고 不義롤 싫어한다. 그러므로 天下의 백성을 거느리고 義에 종사하는 것은 곧 하늘이 바라는 바를 행하는 것이다 .2n 墨子는 백성이 錢로써 다스려지기를 天이 바라는 그 이유를 天이 백성을 널리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天志 그 자체가 곧 兼愛인 것이기 때문에 墨子는 경애가 다른 모든 덕목을 상대화시키는 절대성을 지닌다고 주장할 수 있었으며, 兼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혼란을 국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 했던 것이다 .28)

27) 日, 無腕卽모, 夫天不可爲林谷幽門無人, 明必見之. 然而天下之士君子之於天也, 忽然 不知以相敬戒 . 此我所以知天下士君子知小而不知大也. 然ilj天亦何欲何惡. 天欲義惡不 義 然i|j率天下之百姓, 以從事於穀, 月1j我乃爲天之所欲也(「天志」 上 1 ; 『墨子間話』, 124 면) ;義自天出(「天志」 中). 『墨子』에서의 士君子는 사회적 범주로서 王公大人보다 는 낮은 지식인 및 지배계급을 지칭하며 『論語』에서와 같은 인격지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28) 天志와 尙同의 개념이 墨子 안에서 가장 늦게 발전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記卓 「墨子諸篇 D 著作年代J, 《東洋學報》 45, 28~29 면 ), 「兼愛篇」에 이미 두 사상 이 나오고 있으므로 결국에는 서로 연결된 것으로 보고, 여기서는 墨家가 제시한 이론들을 하나로 체계화하고자 노력하였다.

墨子와 孔子의 사상을 비교했던 서양학자 라우리H.H. Rowle y는, 墨子는

天志를 중시하고 그 경애를 구체화하여 그 안에서 人間事의 규범을 찾으려 한 데 비하여 孔子는 天을 의식적이고 목적을 지닌 권능으로 파악하기는 했으나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원천으로 여기지는 않았다고 결론내린 적이 있다 .29) 이 말은 墨子와 孔子의 사상에서 드러나는 일면을 잘 지적한 것이기 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올바른 평가라고 볼 수는 없다. 天志가 경애로서 직접 적으로 인간사의 규범이 된다는 면에서는 墨子가 밀히~는 天人 관계가 더 밀접한 것같이 보이지만, 墨子는 그의 尙同 개념에 입각하여 天志를 실천할 사람은 王으로 보았으며, 사람들이 경애가 좋은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실행 하지 않는 이유 역시 경애를 기뻐하는 임금들이 없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兼愛」 下). 반면에 孔子는 인간 각자 안에 주어전 천부적 인 德울 닦음으로 써 天命을 구현할 위대한 사명은 王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전 것이 라고 하였다. 따라서 孔子가 자신을 참으로 이해하는 〈知我者〉로서 天울 보았다는 점에서 볼 때, 孔子 사상 안의 天人 관계가 실제로는 더 보편적이 고 친밀하며 삶을 지탱하는 힘을 가전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겉으 로 드러나는 孔子의 〈敬鬼神而遠之〉(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나 無言의 자세가 孔子의 사상 밑바닥에 깊이 흐르는 天人 관계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게 만든다는 것은 4 장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29) The Ch ine se Ph ilos op h er Mo Ti, Bulleti n of the Joh n Ry la nds Lib r ary 31( 19 48), 272 면.

결국 墨子는 聖王의 큰 지식으로써 士君子의 작은 지식을, 의욕적인 天志 로써 儒家의 운명적인 命을, 실용적인 경애로써 예의에 얽매이는 別愛롤 퇴치해야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孔子의 君子像과 天命觀 및 文質彬彬論(문화적 표현과 도덕적 내용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이 론)에 도전을 가한 것이었다. 墨子의 강력한 도전은 사회적 불안을 경험하던 기원전 때]기경에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孟子는 天下가 그들의 사상으로 가득 찼다고 한탄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墨家는 孟子 등 儒家의 응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 문화권 안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기에 는 부족한 몇 가지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로, 墨家는 중국인의 공동체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문화에 대한 존중을 결여하고 있었다 .30) 음악과 예술을 낭비와 사치로 배격 하고 禮를 번거로운 것으로 버리고 나면, 문화의 골격이 무너질 위험에 처하 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가 붕괴될 때 공동체로서의 의식이 빈약해짐과 동시 에 중국의 문화를 창시한 聖王들과의 관계 역시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후에 언급할 道家가 그러했던 것과 같이, 墨家는 儒敎的인 문화를 배척하면서 문화의 새로운 개념을 제시할 만한 대안을 지니고 있지도 못했 던 것 같다.

30) 中華사상의 핵십은 문화적인 것으로서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문화의 공유란, 마치 히브리 인들에게 있어서 계약에 의한 선민사상이 지녔던 것과 비슷한 중요성을 띠는 것이다(필자의 박사논문, The Rig h te o us and the Sag e , 259~264 면 참조) .

둘째로, 墨家의 인간관은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것에 모든 촛점이 맞추어 져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절약해서 사회를 풍요하게 할 수 있는 열성 적인 정치가를 배양하는 데 관심을 둘 뿐 인간적 수양이라는 내면적 깊이를 제시하는 면을 결여하고 있다 . 따라서 墨子의 聖王은 西周시기에서와 같이 王의 理想像으로만 한정되어 있다안 능력이 있는 賢者들을 존중하여 기용하 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라고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墨子의 尙同개념 32) 때문에 天志는 天子를 통해서 매개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윗사람과 의견을 달리할 때 충언을 해야 한다든지, 道가 실천될 수 없을 때 직위를 떠나야 한다는 사상 등은 墨子 안에서 찾아볼 수 없다.

31) 聖人以治天下爲事者也(「兼愛」 上, 155 면) . 일반인들을 구분하여 賢者와 不肖者, 혹은 善人과 暴人이나 惡人 등으로 구분하지만 그러한 이미지들에 대한 구체적 발전은 볼수없다 . 32) 『漢書藝文志』 (47 면)에는 尙同이 上同으로 되어 있으므로 孫胎讓은 尙울 上으로 풀이 하였다. 庶人 ..... 士 ..... 大夫一諸侯 ..... 三公 ..... 天子 ..... 天으로 이루어진 질서체계 안에서 윗사 람의 뜻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墨子 안에서 孔子와 그의 제자들은 반란을 책동 한 사람들이었다고 비평하고 있는 것을 읽을 수 있는데, 이것은 墨家와 儒家의 이런 정치관의 차이에서 기인할 것이다.

한마디로 墨家의 인간론은 王에게 집중되어 있다. 賢人은 비록 聖王이 국가의 각종 일을 맡길 수 있는 행정가로 묘사되고 있고 능력에 따라 기용

된다는 면에서 지극히 민주적이지만, 종국에 가서는 天子 에 의존되어 있고 그와 뜻을 같이해야 된다는 피동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모습이 뚜렷이 드러나지를 않는다• 다시 말해서, 보편적 인간상을 제시하고 내면적으로 깊이 있는 인간론을 발전시키는 면에서 墨子 의 사상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 다고하겠다. 중국고대 사상사에서 체계적인 人性 論 의 확립은 儒家의 한 학파인 孟 子 에 의해서 처음으로 이루어진다. 전국시기 稷下의 學 이 지니는 변론적이고 논쟁 적인 분위기 (「胎文公」 下 9) 속에서 墨家 등과의 알력을 통하여 孟 子 의 인간 론은 孔 子 에서보다 더욱 이론적으로 정립되는 것을 볼 수 있다• 3 孔子 인간론에 대한 孟子의 盡心的 해석 孟子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실들은 놀라울 정도로 미미하다. 그는 魯의 남쪽에 인접한 鄒라는 小國의 사람으로 그의 이름은 阿였고 字는 子輿 또는 子車라고 하는데 분명치 않으며, 그의 연대도 대략 기원전 372 ~289 년 정도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三桓으로 알려진 魯의 公族 孟孫氏의 후예라고도 하지만, 그의 부모의 이름이 전하지 않는 것을 보면 名門의 出身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렸을 때의 유명한 이야기로 孟母 三遷 斷機 등의 설화가 漢의 劉向이 편찬한 『列女傳 』 에 기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후에 만들어전 것으로 역사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孟子가 儒敎의 본거지이며 고향에서 가까운 魯에 유학을 간 것은 확실한 데, 『 史記』에서 말한 대로 孔子의 손자인 子思에게서 직접 배웠다고 하기에 는 연대적으로 차이가 너무 크다. 『孟子』 「離婁 篇 」 下 22 장에 의하면, 孟子 는 〈나는 孔子의 門徒가 되지는 못하고 사람들을 동해 그를 私淑했다〉고 말했다. 私淑이란 혼자 사모하며 닦는 공부를 지칭하므로, 孟子는 孔門의 여러 학자에게서 두루 배우기는 했으나 결국에는 孔子의 가르침을 스스로 깨달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가 忠信과 孝를 중요시하고 내면적인 修己에

중점을 둔 曾子로부터 子思 로 이어지는 魯의 학풍을 주로 계승한 것은 분명 하다. 기원전 320 년, 50 세를 넘은 孟子는 그 당시의 많은 학자들이 그러했던 것과 감이 자신의 사상을 받아 줄 제후를 만나기 위해 17 년간의 유세를 떠났는데, 그 일행의 모습이 「勝文公 篇 」 下권 4 장에 묘사되어 있다. 〈뒤따르 는 수레가 수십 개이고 隨從하는 인원 수백 명을 거느리고 제후에게서 제후 에게로 옮겨다니며 祿울 먹는 것은 사치스러운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어느 제자의 비평섞인 질문이었다. 孟子는 仁義를 가르쳐 王道를 가능케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설명함으로써 자신의 여행을 정당한 것이라고 변호하였다. 사실 孟子 당대에는 農家라고 불리는 일종의 사상집단이 형성되어 있어서 한 국가의 관리는 물론 임금에 이르기까지 庶人과 똑같이 농사를 지어서 먹어야 한다는 평등론을 제창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孟子의 가르침에 따라 왕도정치를 실천하고자 노력하던 勝文公에게 許行과 그의 일행 수십 명이 楚나라로부터 모여들었고, 宋나라로부터는 陳相과 그의 동생아 農具를 짊어 지고찾아왔다.그런데 그들은勝文公의 儒家的 정치에 한가지 부족한점이 있음을 孟子를 찾아와 다음과 같아 지적하였다. 胎나라의 國君은 정말로 현명한 임금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직 올바론 도리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백성들과 나날이 서서 농사지어 먹고 살며, 아침저녁울 손수 지어 먹고 나라를 디스립니다. 그런데 지금 胎나라 에는 곡식창고와 재물창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을 괴롭혀서 자기를 살리는 것이니 어찌 현명한 임금이 될 수 있겠습니까?(대菜文公」 上 4) 물론 孟子는 농부라도 자신이 입을 옷이나 농사짓는 데 필요한 쟁기 등을 혼자 다 만들 수는 없고, 곡식을 가지고 교환해야 하는 것처럼 임금의 일도 백성을 위해 마음 쓸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분업의 원칙에 따라 직접 농사를 지울 수는 없는 것임을 역설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홍미로운 것은 孟子의 합리적인 대답보다도 임금에 이르기

까지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농사에 종사해야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 존재했디는 사실이다. 神農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는 許行은 이런 집단 울 대표하는 인물로서 중앙집권화되고 전문화되어가는 당시의 정치사회 경향과는 정반대로 지극히 협소한 小國인 膜울 선택하여 원시적 농경사회의 이상을 실현해 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錢穆이 지적했듯이 이들이 節用사 상을 주창했던 墨家의 일파였든지, 武內義雄이 결론내렸듯이 道家의 齊物論 에 기초를 두고 墨家의 영향을 받고 있었든간에, 孟子 당시에 墨家와 楊朱뿐 만 아니라 農家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이론이 병존하면서 儒家的 정치이 상에 도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33)

33) A.C. Graha m, The Nung- C h ia 家 ‘School of the Tiller s' and the Ori gins of Peasant Ut op i anism in Ch ina, Bulleti n of the School of Orie n ta l and Afr ican Stu dies 42(1 9 79), 66~ J OO; 武內義雄 『諸子槪說』갑弘文堂書房, 1938, 183~188 면.

孟子는 魏나라의 惠王으로부터 시작하여 齊나라의 宣王 및 鄒, 勝, 魯

등의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客卿 또는 師로서 諸侯돌 앞에서 당당하고 의연 한 자세로 임하였다. 그의 이상적 王道'움이 수용되지 않자 70 세경 그는 고향 에 은퇴하여 門人의 교육에 전념하였는데, 孔子와는- 달리 孟子와 제자들 사이의 인간적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은 『孟子』 안에 그리 많이 보존되 어 있지 않다. 그의 공헌은 그의 인간성 자체나 독자적 사상의 창시라기보다 는 孔子의 사상을 변호하고 체계적으로 해석한 데 있었다. 孔子가 제시한 儒家的 인간론인 〈修已安人〉(자신을 닦아서 남을 편안하게 한다)의 君子論울 孟子가 어떻게 수용하고 해석하였는가를 고찰할 때 우선 눈에 띄는 사실은, 孔子사상의 중심이 되던 〈君子〉 대신에 孟子는 〈聖人〉 울 보편적 인간상으로 앞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聖王의 모습 울 강력하게 제시한 墨家와의 대결에서 필요한 것이었을 것이고, 孔子 안에 서도 이미 聖人의 모습이 드물기는 하지만 최고의 경지로 나오고 있기 때문 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칭호의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孟子 는 내용상의 해석에 있어서도 다른 학파와의 논쟁 속에서 孔子의 사상체계

를 나름대로 이론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음을 봉 수 있다. 여러 가지 구체적인 해석상의 변화를 고찰하기에 앞서서 언급해야 될 점은, 孟 子 가 儒 家 의 인간론에 제공한 가장 큰 공헌은 孔 子 의 〈 修 已安人〉 이라는 경험적이고 수양론적인 인간론에 기초가 될 수 있는 人 1 生 ' 숨을 확립 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인성론은 보통 性 善說로서 알려져 있는데, 〈 1 生善〉 이란 용어로써 인간의 본성 안에는 오직 도덕적인 善 만이 존재하고 있다고 孟 子 가 소박한 주장을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 다. 사실 〈性善〉이란 용어 자체는 『 孟 子』 에서 단지 2 번(「勝文公」 上 l, 「告 子」 上 6), 그것도 주로 다른 학파와의 논쟁 속에서 언급될 뿐이다. 실제로 孟子의 인성론은 후에 보편화된 〈 1 生善〉이라는 이론을 통해서보다는 섬춥心〉 이라는 修養論과 직결되는 시각에서 고찰할 때 더 정확히 파악될 수 있다. 따라서 孟 子 가 말하는 性과 心의 의미와 그 관계를 우선 명확히 밝힐 필요 가있다. 중국 고대에서 인성론에 대한 논의가 처음 대두한 것은 전국시대 중기로 서 그 전에 활동을 한 孔子나 墨子, 老子 안에서는 인간이란 어떻게 살고 어떠한 정치를 해야 되느냐에 관심을 집중했을 뿐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냐 에 대한 직접적인 논설은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人性울 지칭하는 단편적 인 예들은 그 전에도 찾아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人性에 대한 최초의 체계 적 인 논의는 『 孟子 』 안에서 비로소 발견된다고 하겠다 .34) 그런데 『孟子』 34) A.C . Graham 은 生에서 냐온 性이라는 字가 처음에는 節性(召浩), 彌性(詩 252), 民樂其性(左傳)에서와 같이 인간이 살아야 할 길을 따라 제대로 산다는 뜻으로 일반 적으로 쓰이다가, 楊朱 등의 養生사상에서 철학화하기 시작하여, 孟子 시대에 이르러 4 가지의 人性論이 생겼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The Backg rou nd of The Menc ian Theory of Human Natu r e, The Tsin g Hua Jo urnal of Chin e se Stu d ie s 淸 華學報 new seri es 6(1967), 215~271 면. 孟子 전체에서 性이 언급되는 경우는 37 번인데, 그중 35 번이 6 편 (23 번)과 7 편(1 2 번)에서 이고, 나머지 한 번은 「膜文公」 上 1 장에서, 또 한번은 「離婁」 下 26 장에서이다. 후반부에 집중되고 있다는 이유로 학자들 중에서는 人性論이 孟子 후기의 사상으로서 은되 후 제자들에 의하여 체계화된 것이라고 보기 도 하고 또는 齊의 稷下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金谷治, 『孟子』, 岩波新書 598, 1966, 182~183 면 등 참조).

안에서도 인성에 대한 논쟁이나 언급이 기재된 부분은 6 편 「告子i집 」과 7 편 넘운다집 」이므로 이 두 편을 중심으로 하여 孟子의 인성론을 고찰하도록 하겠다. 孟子의 人性論 孟子는 인간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개, 소, 버들, 물, 산에 대해서도 性울 말하고 있기 때문에 35) 孟子가 생각하는 性이란 생겨날 때부터 천부적으로 받은 각기의 종류에 따른 특정한 성품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런데 人間의 性 안에는 동물과 같은 욕망과 더불어 동물에게는 없고 인간에게만 고유한 도덕성이 있어서 결국 인간은 양면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孟子는 인정한다. 단, 그는 욕망 곧 食色이 人性의 전부로서 인간을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존재로 볼려는 告子의 입장을 배척한다(「 告 子」 上 I, 2, 3, 4). 오히 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도덕성이야말로 인간을 특정짓는디는· 의미 에서 孟子는 도덕성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정의한다.

35) 然fl lj 犬之性猶牛之性, 牛之性猶人之性與(다능子」 上 3) ; 此登山之性也哉(「告子」 上 8) ;f開 P 之性 (「告子」 上 l) ;水之性 (「告子」 上 2) 등. 후에 朱子는 性을 理로, 生울 氣 해석하였는데 宋學의 理氣적 를에 맞춘 것이다. 조선후기 朱子學者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人物性同異論 동의 문제는 宋學的인 理氣의 사고체계에서만 가능한 것이 며, 孟子에게서 침승과 인간의 性이 다르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여 논의의 대상 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

입이 맛을 아는 것, 눈이 빛을 분별하는 것, 귀가 음성을 듣는 것, 코가 냄새 룰 맡는 것, 四股가 편안한 것을 좋아하는 것 등은 인간의 본성(性)의 (일부 를) 이루는 것은 사실이나, 어쩔 수 없는 요소(命)을 가지고 있으므로기 君子는 그런 것을 性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仁이 父子간에 베풀어지고, 義가 君臣간에 유지되며, 禮가 손님과 주인간에 지켜지고, 知가 賢者에게서 밝혀지며,, 聖人이 天道에 따라 행하는것 등은 (주어전) 命적인 요소가 게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인간이 노력해야 될) 性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君子는 그런 것을 命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36) 여기서 性과 命은 『 論語』에서의 德과 命과 같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3n 命이란 인간이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되는 부분을 지칭하고, 性이나 德은 인간이 닦고 키워야 될 부분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孔子가 德이라고 불렀던 도덕성, 곧 닦아 서 완성되어야 할 인간성을 孟子는 性이라고 했던 것이다한 德은 보통 시작 보다는 완성을 지칭하기 때문에 孔子의 德개념에는 함축적으로만 제시되어 있던 도덕성의 보편성을 孟子는 性으로 표현함으로써 명확하게 드러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孟子가 정의한 性의 개념은 축소된 협의의 것으로서, 그는 인간 안에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은 하면서도 그것을 배제한 인간 고유 의 도덕성만을 性이라고 부른다고 명시한 것이다 .39)

36) 口之於味也, 目之於色也, 耳之於聲也, 鼻之於吳也, 四枝之於安快也, 性也. 有命焉, 君子不謂性也 仁之於父子也, 義之於君臣也,禮之於賓主也, 知之於賢者也, 聖人之於天 道也, 命也 有性焉 君子不謂命也(『孟子』, 「盡心」 下 24). 古注와 新注에서는 다섯 가지 욕망을 性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를 天命에 의해 분수가 지워져 있으므로 구해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r 孟子』 본문의 번역에는 車柱環, 『孟子』 (乙酉文庵 138, 139 면)와 D.C. Lau, Menciu s , Peng uin Books, 197 峰 주로 참조하였 음을 밝힌다. 37) 『孟子』 전체에서도 「盡心篇표본 특별히 『論語』의 문체와 사상에 대비될 수 있는 형태로 孟子의 언행을 종합하고 있는 부분으로 아마도 『論語』가 편찬되는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예를 들어 命이라는 글자는 『孟子』에 54 번 나오는데 그중 32 번은 왕이나 부모 등 인간의 명령으로 쓰이고 12 번은 인용문에 나오며 10 번만 天命의 뜻을 지니는데 그것이 모두 여기 7 편에 기재되어 있다. 38) 武內義雄, 『論語(!)硏究』, 137 면 참조. 그는 孟子의 性은 『論語』의 德과 일치하나 훨씬 구체화되고 명확해졌다고 보았다. 39) 徐復晟 『中國人性論史』, 「先秦篇」, 臺淸 商務印書館, 1969, 165 면 ; A.C. Graha m, 앞의 논문, 241 면 .

결과적으로 孟子가 〈性善〉이라고 말할 때의 性은 이 축소된 의미로의 性, 곧 心 안에 뿌리박힌 도덕성인 四端(「盡心」 上 21) 을 지칭한 것으로,

心울 가지고 人性의 독특성을 설명한 것이라고 하겠다. 사실 혼돈을 피하기 위해서는 〈性善〉보다도 〈四端善〉 혹은 〈心善〉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았을지 도 모른다. 후에 나오는 荀子의 性개념이 孟子의 性개념과 분별 없이 대조될 때에, 이해의 혼란이 극대화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本心 혹은 心 안에 뿌리박혀 있는 四端이라는 도덕성이 인간의 본성을 특징지우 며 이것이 인간에게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방향성을 내재적으로 지니게 한다는 것이 孟子의 깨달음이었고 1 儒家전통에 그가 기여한 통찰이었던 것이 다. 따라서 孟子는 당대에 떠돌고 있던 여러 가지 人性論들, 곧 인간의 본성 은 본래부터 善한 것도 不善한 것도 아니라는 告子의 說을 배척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 따라 어떤 이는 그 본성이 善하고 어떤 이는 不善하다는­ 차별적인 인성론도 수긍하지 않았고, 君主의 정치 여하에 따라서 善하게 될 수도 있고 不善하게 될 수도 있다는 환경결정론도 받아둘이지 않았다 (「告子」 上 6). 孟子 역시 어떤 사람은 大人이 되고 어떤 사람은 小人으로 주어진 四端울 키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모든 인간 안에 四端이 주어졌다는 그 기본적 사실을 중시한 것이다. 四端論 四端이란 聖人이 될 수 있는 4 가지의 도덕적 실마리 혹은 근거가 되는 발단을 지칭한다 .40) 「公孫丑」 上 6 장과 「告子」 上 6 장에서 孟子는 사람이면 누구나 測隱之心, 蓋惡之心, 恭敬之心(辭讓之心), 是非之心울 가지고 있어서 仁義禮智의 端緖는 본래 인간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런데 孟子가 제시한 4 단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살펴보면,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볼 때 자연히 우러나오는 측은히 여기게 되는 마음, 부당한

40) 『墨子』, 「經說」 下에는 〈端體之無序而最前者也〉(『墨子間誌』, 244 면)라고 되어 있 다 . 『孟子』의 주석전통에서 역시 端울 首 또는 頭로 해석하여 모든 삶의 시작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魚循 『孟子正義』, 中華書局, 1957, 139 면).

일을 보았을 때 부끄러워하고 미워하게 되는 마음, 자신보다 나이든 분을 보면 공경하여 사양하게 되는 마음,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되는 마음으로, 배우거나 생각하지 않고도 누구나가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천연적인 마음 의 상태를 지칭한다. 때로 孟 子 는 이런 천연적인 마음을 赤子之心, 本心, 혹은 良能, 良心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이 본연의 상태를 중시하고 보편적 도덕성의 확립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孔子에서 볼 수 있었던 〈克已復禮〉 (자신을 극복하여 禮에 돌아간다)라는- 어려운 배움의 과정을 통해 仁울 이루어 야 된다는 修養論적인 철저성은 어느 정도 상실하고 있다• 그러면 4 단을 대표하며 어느 의미에서 4 단 전체를 포괄하는· 仁에 대한 孟子의 설명을 고찰함으로써 孟子가 孔子의 전승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를 살펴보고자한다. 사람마다 모두 차마 남에게 잔인하게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先王들은 차마 남에게 잔인하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잔인하지 않은 정치 를 했던 것이다. 차마 남에게 잔인하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또 차마 남에게 잔인하게 하지 못하는 정치를 실천한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손바닥 위에서 그것을 움직이는 것같이 수월할 것이다 .4 1)

41) 人皆有不忍人之心 先王有不忍人之心,斯其不忍人之政矣. 以不忍人之心行不忍人之 政, 治天下可運之掌上(「公孫丑」 上 6).

天下를 다스리는 일이 손바닥 위에 놓고 움직이는 것과 같으리라는 孟子 의 비유는 『論語』 「지分篇」 11 장에 나오는 孔子의 말을 상기시킨다. 『論語 』 에서 孔子는 諦祭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天下의 모든 일은 손바닥을 보는 것과도 같다고 말함으로써 禮의 절정, 곧 天과 조상들을 거쳐 내려온 生命에 대한 종교적 깨달음과 人間事 전체를 꿰뚫는 忠?g의 道롤 이해하여 仁울 완성한 聖人의 경지를 지칭하였다. 그러나 맹자에게 있어서 仁이란 이렇게 도달하기 어려운 修已安人의 마지막 단계에 이론 최고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같이 가지고 있는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 곧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고 側隱 해 하는 천연적 마음가침 울 仁이라고 했고 그것을 그대로 확충하기만 하면 仁政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곧 孔子의 仁이 완성된 개념이라면, 孟 子 의 仁은 모든 인간 안에 선천적으로 내재해 있는 마음 곧 人心의 본연적 상태를 지칭한다고 보겠다 (「 告 子」 上 11). 따라서 孟子는 모든 인간 관계의 기초가 되는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우러 나는 자연적 애정을 가장 중요시하였고, 그래서 仁의 핵심은 〈 事親 〉(「 離 婁」 上 27) 이며, 〈親親〉이 곧 仁(「 盡 心」 上 15) 이라고 정의내린다. 따라서 孝 는 仁의 내용이며 결실로서, 孟子는 堯 舜의 道는 孝 弟일 뿐이라고 (「 告 子」 下 2) 까지 단정한다• 孔子에서는 孝 가 仁울 이루는 첫 단계의 시작으로 중시되 기는 했지만 君子가 되기 위한 공부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했었 는데, 孟子에 와서 그 개념이 확대되고 최고의 德으로까지 고양된 것이다 .42) 이러한 孝의 강조는 경애를 주장하던 墨家의 사상을 〈無父〉라고 혹평하 던 孟子가, 他派의 도전에 웅전하기 위하여 儒敎윤리의 시작인 孝 의 중요성 울 확인하려 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孔子의 사상과 비교하여 볼 때 , 孟子는 仁울 부모와 자식간의 육천적 애정 혹은 배움이 들어가지 않은 본연의 人心 그 자체로 봄으로써 당시에 쓰이던 仁의 일반적 인 의미로 되돌아가서, 『 論語』에서 仁이 지녔던 그 상징적 의미를 어느 정도 상실한 감이 있다 .43 ) 孔子에서는 仁이 완성 개념이었으므로 모든 德울 포괄하고 통일시키는 것이었지만, 孟子의 仁은 기초 개념이므로 4 단을 대표 하기는 해도 다시 仁羲禮智로 구분하여 설명될 수밖에 없다. 仁羲禮智 혹은 그것을 요약하여 仁義로 儒敎의 덕목을 지칭하는 관습은 孟子로부터 시작된 것 0] 다. 42) 徐復凰 「中國孝道思想的形成, 演變 及其在歷史中的諸問題」, 『中國思想史論集』, 19 79, 161~73 면 참조. 그는 孝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가족 윤리에 악영향을 준 사실을 지적하면서, 특히 아들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불효라는 사상이 『孟子』 「離婁」 上 26 에 나옵올 상기시킨 바 있다 . 43) 竹內照夫 Takeuch i Teru 야근 『仁(I)古義(I)硏究』에서 『左傳』과 『國語』 등에서 仁을 인간적 애정이란 뜻으로 쓰고 있음을 지적하였다(1 45~59) .

孟子는 4 단이란 마치 몸의 四體와 같아서 인간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보살펴 주어야 자란디는- 사실을 다음과 감이 지적한 다. 仁과 義와 禮와 智는 밖에서부터 나를 녹여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지 (思) 않는 것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구하면 그것 을 얻고, 버려두면 그것을 잃어 버린다〉(「告子」 上 6). 위의 구절을 계속 읽어 내려가면, 『詩經』 「魚民篇」을 인용하면서 孟子가 〈天生魚民, 有物有ffiJ〉이라고 한 그 〈ffij〉이 곧 자신이 말하는 仁義禮智의 4 단이라고 풀이하는 것을 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본연 의 상태를 중시한 孟子가 동시에 〈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 다 . 思란 詩 書 에서부터 중시되던 것으로서, 죽 생각하면 聖人이 될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狂人이 된다는 사상임을 이미 이 책 1 장에서 고찰한 바 있다. 그런데 생각하고 구하여 얻는다는 것은 修養論을 지칭하는 것으로, IL 을 다해야 된다는 孟子의 섬 E 心〉 사상이 가전 중요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 다. 心과氣 사실 중국사상사에서 心의 중요성을 지적하여 도덕적 주관성의 기초를 제공한 사람은 孟子였다.”) 心의 기능은 생각하는 것이므로◄ 5) 心이야말로 4 단이 뿌리박혀 있는 근거인 동시에 4 단을 배양하고 키우는 역할을 담당한 다. 孟子는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다할 때 성공하는 것과 감이 4 단을 확충하는 일에 있어서도 흐트러진 마음(放心)을 다시 찾는 44) 牟宗三, 『中國哲學의 特質』, 64~67 면 참조. 45) 心之官則思(「告子」 上 15).

일이 급선무라고 보았다 .46) 유명한 牛山의 나무를- 비유로 들면서 孟子는 키움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므로 길러주는 힘(其養)을 얻기만 하면 자라지 않는 물건이 없고, 길러주 는 힘을 잃어버리기만 하면 소멸되지 않는 물건이 없는 것이다. 孔子께서 말씀 하시기를, 〈잡으면 남아 있고, 버리면 없어지고, 때 없이 드나들고, 제 고향을 모른다〉고 하신 것은 마음을 두고 이르신 말씀일 것이다 .4 7) 牛山은 山東省 齊의 수도안 臨湘에서 남쪽으로 10 리 정도 떨어전 곳에 위치한 산이므로 이 비유는 아마도 孟子가 齊의 稷下에 7 년간 체류할 때에 발설했을 가능성이 높다. 도끼로 찍어가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면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것이 山의 性, 곧 본연의 상태인 것과 감이 인간의 性情도 의부로부터의 침해가 없는 한 仁義之心울 갖고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48) 朱子가 풀이한 바와 같이, 山木과 人心은 그 이치가 같은 것이므로 인간 도 良心을 버리는 일을 하지 않고, 平旦之氣혹은 夜氣를 충분히 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心과 氣의 문제가 대두하는대 孟子는 心뿐만이 아니라 氣롤 중국고대 사상의 중요한 주제로 등장시킨 최초의 학자이다. 孟子에서 氣에 대하여 언급되는 부분으로서는 「告子篇」 上 8 장의 平旦之 氣와 夜氣 「公孫丑篇」 上 2 장의 浩然之氣가 있다. 平旦之氣나 夜氣라는 것은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氣를 말하는데, 후에 댜包朴子』(3 17 년)에서 하루 46) 今夫葬之爲數, 小數也 不專心致志, 則不得也(「告子」 上 9) ; 學問之道無繼 求放心而 已矣(「告子」 上 II). 47) 故荀得其養 無物不長 荀失其養無物不消 孔子 B, 操flij存,舍fliJ亡. 出入無時. 莫知其 鄕, 惟心之謂與(「告子」 上 8). 孔子의 말씀으로 인용하고 있는 네 구철은 淸代의 학자 兪抱이 지적하였듯이 古語일 가능성이 크다(小林勝人, 『孟子』 下, 岩波文庫, 1972, 244 면 참조) . 48} 宋學에서 발전되는氣質之性으로서의 情과本然之性으로서의 理의 구별은孟子 안에 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 그는 위의 텍스트에서 인간의 性과 情과 才를 같은 의미로 쓰고있기 때문이다.

를 二分하여 자정에서 정오까지를 生氣의 시간으로 보는 것과도 통하는 것이다. 사실 氣에 대한 사상은 생명 및 호흡과 연결되어 養生律i에서 발전한 것으로, 孟子의 본고장인 鄒魯보다는 齊나라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49) 그런 데 孟子는 氣의 사상을 수용하면서도 儒家的인 倫理사상에 역점을 두어 氣를 心의 지배하에 두도록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이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孟子와 齊人인 그의 제자 公孫丑와의 문답 안에 나오는 浩然之氣에 대한 토론에서이다.

49) 『氣(1)思想』, 小野澤精一 • 福永光司 • 山井通 編, 東京大學出版會, 1978, 34~71 면 참 조 .

浩然이란 물이 광대하게 흐르는 모습을 형용하는 것으로 마음이 활짝 열려서 모든 것이 명확해진 상태를 묘사한다(「公孫丑」 下 12). 齊나라의 王子 가 보통 젊은이들과 다르게 고귀한 모습을 지닌 것을 보고 王의 아들로서의 거함이 그와 같은 氣를 지니게 했다고 감탄한(「盡心」 上 36) 孟子가, 그렇다 면 〈天下의 廣居〉, 곧 仁에 거하는 사람은 얼마나 더 고귀하게 빛날 것인가 를 반문한 적이 있다. 孟子 자신도 설명하기 힘들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浩然之氣란 결국 仁義禮智 속에 거함으로써 생기는 生氣로서 그 사람 전체 를 채우고 결국 밖으로 드러나는(「盡心」 上 21 ; 「離婁」 上 15) 품위 또는 고귀함인 것이다. 孟子에 의하면, 이 氣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세며 義와 道와 짝함으로 써만 키워진다• 다시 말해서 氣는 온 몸을 채우는 것이지만, 그 통솔자는 心志인 것이다 .50) 여기서 孟子는 인간과 天地를 하나로 묶어주는 氣사상을 儒家체계 안에 정착시키면서, 동시에 도덕성의 우위를 명백히 하여 氣보다 心을 앞세운 것이다. 결국 氣를 키우기 위해서는 心울 키워야 하기 때문에, 孟子에서 養氣는 養心 안에 종속되어 있다고 하겠다.

50) 夫志 氣之帥也 氣 體之充也 夫志至焉, 氣次焉(「公孫丑」 上 2). 心과 志의 관계는 정신적 기능자체와 기능이 발하여 방향을 정한다는 차이는 있으나 결국 갇은 것이 다 . 이 사실은 「告子」 上 9 의 〈專心致志〉, 「告子」 下 15 의 〈心志〉 등으로 확인될 수 있다. 勞思光은 〈志가 곧 心이다. 두 낱말이 가리킨 것은 단지 動靜의 구별만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中國哲學史』, 「古代篇.J, 鄭仁在 역, 採求堂, 1986, 13~).

孟子의 修淡論 자신은 浩然之氣를 키우는 데 능하다고 한 孟子가 제시한 修養의 방법은 효欲이었다. 마음을 수양하는 데는 욕망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사람됨 이 욕망이 적으면서 本心을 잃어버리는 자의 수는 적다. 사람됨이 욕망이 많으면 서 본심을 보존하는 수는 거의 없다 .5 1)

51) 孟子 B, 養心莫善於纂欲 其爲人也冥欲, 雜有不存焉者案矣. 其爲人也多欲, 雜有存焉哀 矣(「盡心」 下 35).

孟子는 인간의 본성 안에 4 단과 더불어 食色의 욕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비록 그가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4 단만을 인성이라고 부르자 고 하기는 했지만, 4 단의 원만한 성숙을 위협하는 요소로서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4 단과 食色은 하나가 커지면 다른 하나가 적어지는 상반관계에 놓여 있으므로 孟子가 哀欲울 강조히는· 이유는, 食色의 욕망을 적게 함으로써 4 단이 클 수 있게 하자는 데 있었다• 그러나 孟子는 心울 키우는 修養論울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키지는 않았 고, 大人과 小人이라는 구체적인 인간상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이 생각하는 수양의 과정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우선 孔子와 孟子의 인간상이 지닌 차이점을 보면, 『論語』에서는 군자와 소인이 대표적인 인간으로 제시되 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孟子에서는 大人과 小人이 자신 안에 있는 *混 곧 도덕성울 이룬 사람과 이루지 못한 사람으로 대비된다 .52) 이것은

52) 大人은 『孟子』에서 12 번 쓰이는데 한 번만 (r 膜文公」 上 4) 을 제의하고는 모두 도덕 자의 의미로 후반부에 나오고 있다. 『論語』에서는 「季氏」 8 에 유일하게 大人이 언급 되는데 孟子派의 사상이 삽입된 것일 것이다. 小人은 14 번 나오는데 경비어(「離婁」 下 24) 로 쓰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大人의 반대어로 자기 안에 있는 작은 것을 키운 사람으로 나온다. 君子와 小人의 대비는 『孟子』 안에 6 번 나오나 모두 사회계층 을 지칭하고 있어서 『孔子』 아전의 개념과 같다.

孟子가 지닌 人性의 개념과 잘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孟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자기 몸에 관한 것은 어느 것이나 다갇이 아낀 다. 아울러서 다같이 아끼기 때문에 아울러 모든 것을 기른다. 한 자나 한 치 되는 살도 아끼지 않음이 없은즉, 한 자나 한 치 되는 살도 기르지 않음이 없다. 기르기를 잘하고 못하는 것을 생각하는 방법에 어찌 다른 것이 있겠는가? 자기 안에서 그것을 취할 따름이다 . 몸안에는 귀한 부분과 천한 부분이 있고, 큰 부분 과 작은 부분이 있는데, 작은 부분 때문에 큰 부분을 해치는 일은 없고, 천한 부분 때문에 귀한 부분을- 해치는 일은 없다. 작은 부분을 기르는 사람은 小人이 되고 큰 부분을 기르는 사람은 大人이 되는 것이다.〉 53)

53} 〈孟子 B, 人之於身也, 兼所愛 兼所愛, 則兼所養也. 無尺寸之曆不愛焉, 1l lJ無尺寸之讚不 養也 所以考其善不善者, 登有他哉 於已取之而已矣 體有貴賤, 有小大, 無以小害大, 無以賤害賞 養其小者爲小人, 養其大者爲大人.〉(「告子」 上 14 장) ; 15 장에는 〈從其大體 爲大人, 從其小體爲小人〉으로 나온다. 주석전동들은 I j댜 H 를 口腹이나 情慈으로, 大者 롤 心志나 心思禮義로 보고 있다 .

小者 혹은 小體가 食色울 지칭하고, 大者 혹은 大體가 4 단을 지칭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한 가지 홍미로운 사실은 小體와 大體가 상반관계에 있기는 하지만, 서양사상에서의 善과 惡과 같이 두쟁적인 관계만 울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小를 위해서 大를 해쳐서는 안된 다는 것이 명백히 서술되어 있지만, 인간은 자기 몸의 어느 부분이든 다 아끼고 키우게 되어 있기 때문에 小體 역시 완전히 없애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大體룰 상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서 小體 역시 그 위치를 가지는 것이니 仁義에 맞는 食色은 용납되는 것이다언 또한 大人과 小人의 관계 역시 두쟁적이라기보다는 先覺者와 後登者의 관계로 맺어지기 때문에(「萬 章」 上 7, 下 I) 보완적이라고 하겠다.

54) 휘寧 「孟子性善說에 대한 硏究」, 『高大 50 周記論』 (1955), 47~49 면 참조 .

大體를 키우는 養J L 에 있어서 주의해야 될 점을 孟子는 宋나라의 성미 급한 사람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다.

宋나라 사람 중에 자기가 심은 곡식의 싹이 자라나지 않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싹을 뽑아올린 사람이 있었네. 그 사람은 피곤해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 집안 사람들에게 〈오늘은 지 쳤다. 나는 싹이 자라나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말했 는데 그의 아들아 뛰어가 싹울 보았더니 싹은 말라버렸다네. 天下에는 싹이 자라나는 것을 도와주지 않는 사람은 적네. 무익하다고 여겨 버려두는 사람은 김 매어 주지 않는 것이고` 우리하게 잘되게 하려는 사람은 싹을 뽑아 울리는 것이니,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치는 것일세 . 551 浩然之氣를 말할 때에도 지적한 바와 같아 孟子는 인간의 修養法은 道룰 따라야 하기 때문에 지나쳐도 안되고 게울러서도 안되는 것으로, 농사를 지을 때처럼 때를 기다리며 4 단이 자연스럽게 확충되기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고 보았다. 때(時)의 문제는 그의 天사싱을- 디를- 때 취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養心과정에서 점유하는 배움과 지식의 역할을 살펴보겠다. 孟子는 배움이란 인륜을 밝히기 위하여 필요한 것으로(「脫文公」上 3, 4)56> 지식 자체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57) 물론그는 古之道를 배워서(「離婁」 上 25) 禮를 알아야 백성중에 도둑질하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고 국가가 보존될 수 있다고 말한다(「離要」 上 I, 「胎文公」 下 2). 이와 같이 개인이나 국가를 위해 배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孟子는 지식이나 기술만을 가르치고 인륜의 실천을 등한시할 때 지식이 오히려 유해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離婁」 下 24). 지적 인 배움과 인격적 인 배움의 양면성을 지적하면서 인격적인 면에 더 큰 중점을 두는 것은 孔子로 부터 시작된 儒家의 교육론이었다. 孔子는 지적이고 문화적인 배움을 통해 55) 宋人有閔其苗之不長而樞之者· 논뜬然歸, 謂其人 8, 今日病矣, 予助苗長矣. 其子超而往 視之 苗 R lj稿矣 天下之不助苗長者裏矣. 以爲無益而舍之者, 不阮苗者也. 助之長者, 抵苗 者也, 非徒無益而又害之(「公孫丑」 上 2). 56) 「勝文公」 上 4 장에 五 1 읍이 열거되고 있는데, 사료상으로 五倫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 로 孟子가 人倫올 父子, 君臣,夫婦, 長幼, 朋友의 5 가지로 체계화시켰다고 하겠다. 그들의 관계는 상호 책임적 인 특칭을 지닌다. 57) 博學而詳說之, 將以反說約也(「離婁」 下 15).

인격적 배움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함으로써 이 양면의 조화를 이상으로 하고 그 결합을 중시하였다. 이에 비하여 학자층의 부패와 형식성의 폐단을 절감한 孟子는 학문과 인격 사이의 알력과 비연속성에 관심을 두어 지식의 오용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天 下에서 본성을 논하는 것은 마땅히 그래야 될 것을 따를 뿐이어야 한다. 마땅한 바를 이롭게 여기고 근본을 삼아야 한다. 지식을 미워하는 것은 지식으 로 천착하기 때문이다 . 58)

58) 天下之言性也, ffiJ故而已矣 故者, 以利爲本. 所惡於智者, 爲其堅也(「離婁」 下 26). 朱子는 故者를 其已然之跡이라 하여 지난날의 자취로 풀었고 利를 順으로 이해하였는 데, 필자는 古注를 따라 자구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 전체 텍스트를 파악하는 데 좋다 고보았다. •

孟子는 지식의 역할은 마치 물이 흘러 나가야 할 방향으로 물길을 터주는 것과 같은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런 작업을 하는 지혜는 위대한 것이지만, 억지로 仁羲에 어긋나려 할 때 그 지식은 오히려 인간에게 해가 된다고 본 것이다. 결국 참된 학문의 길은 〈잃어버린 자기 마음을 찾는 것일 따름〉(「告子」 上 II) 이라고 결론 내림으로써 孟子는 孔子 이상으 로 내면적 배움에 큰 비중을 두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 論語 』 에서 중시된 質과 文의 조화라든가 禮와 文에 대한 관심이 孟子에서는 훨씬 감소된 것을 감지할 수 있다 .59) 배우지 않고도 아는 良知와 닦지 않고도 할 수 있는 良能울 최고의 · 지식 이요 능력이라고 60) 봄으로써 孟子는 무엇보다도 人間이 선천적으로 지니고

59) 文은 『孟子』 안에 4 번 쓰이는데, 3 번은 문장의 구성이나 옷의 디자인이라는 의미를 지닐 뿐이다 . 60) 孟子曰, 人之所不學而能者, 其良能也 . 所不慮而知者, 其良知也(「盡心」 上 15). 良知와 良能은 후에 王陽明學派에서는 가장 중요한 전문용어로 등장되는데, 『孟子』 자체에서 는 여기에만 유일하게 언급되고 있어서 대표적 용어로 보기는 어렵다. 단 四端이 인간 안에 내재해 있다는 孟子의 기본 사상에 기초를 두고 발전된 것임에는 틀립이 없다.

있는 도덕성에 성실할 것을 요구한다. 孟子께서 말씀하셨다. 〈만물이 모두 내 안에 갖추어져 있으니 자신을 반성하 여 성실(誠)하게 되면 줄거움이 더 클 수 없을 것이다. 怨룰 힘써 행하면 仁울 구하는 데에 그보다 더 가까운 길은 없을 것이다.〉 6 1) 여기서 孟子가 말하는 誠은 자신에게 충실하고 그 충실함을 남에게까지 확대하여 그대로 실천하라는 孔子의 忠怒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뿐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孟子에서 誠의 개념은 『 中庸』에서처럼 중심사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어서 誠이라는 전문용어는 단지 두 번만이 언급될 뿐 이다 .62)

61 ) 孟子 B, 萬物皆備於我矣 反身而誠, 樂莫大焉 强怒而行, 求仁莫近焉(델如心」 上 4). 朱子는 萬物이 모두 내 안에 구비되어 있다는 것을 理로 보아 人倫과 사물 전체를 총괄한다는 의미로 풀이하였다. 그러나 孟子의 사물에 대한 관심은 미미한 것이었기 때문에 여기서의 萬物이란 萬民 또는 古注와 같이 萬事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 다. 62) r 孟子』에 誠이라는 글자 자체는 전부 22 번 나오는데, 그중 20 번은 부사로 쓰이므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고기 두 번만이 『中庸』과 유사한 철학적 의미를 지닌 다 . 이런 사실은 誠이라는 개념이 孟子 후기나 그 後學 등에 의하여 발전되었을 가능 성을 질게 하며, 『中庸』의 誠개념이 孟子보다 후기의 것이리라는 현대의 역사비판적 결론을 확중해 주는 또 하나의 예가 된다 (Tu Wei- M i ng, Centr al ity and Commonalty, An Essay on Chu ng-yung : The Un ive rsity Press of Haw 빠 1976 참조).

앞에 인용한 구절 이의에 『 孟子』에서 철학적 의미로 誠이 언급되고 있는 곳은 「離婁篇」 上 13 장이다. 孟子께서 말씀하셨다.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의 신임을 얻지 못한다 면, 백성을 다스려내지 못한다. 윗사람의 신임을 얻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벗들 에게 신용을 얻지 못하면 윗사람에게 신임을 받지 못한다. 벗들에게 신용을 얻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어버이를 섬겨 (어버이가) 기뻐하지 않으면 벗들에게

신용을 얻지 못한다. 어버이를 기쁘게 하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자신을 반성하 여서 성실(誠)하지 않은 점이 있으면 어버이에게 기뻐함을 받지 못한다. 자신을 성실하게 하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善울 밝히 알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성실하 게 하지 못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성실 그 자체는 天의 道이고며 성실해지려고 생각하는 것(思誠者)은 A 의 道이다.〉 63)

63) 孟子타 居下位而不獲於上, 民不可得而治也 . 獲於上有道, 不信於友, 弗獲於上矣. 信於 友有道, 事親弗說 弗信於友矣 稅親有道, 反身不誠, 不稅於親矣. 誠身有道, 不明平善, 不誠其身矣 是故誠者天之道也, 思誠者人之道也(「離婁」 上 13).

여기서 孟子는 전국시대 사람들이 희구한 정치적 역량은 친구간의 信義에 기초를 두고 있고, 그것은 다시 가정에서의 孝에, 孝는 다시 자신을 성실하 게 하는 데 기초를 두며, 성실해지기 위해서는 善을 알아야 되는데, 그 善과 誠의 궁극적 기초는 天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孔子가 修已安人의 점차적 확대를 위하여 〈忠怒〉의 방법을 말했다면, 孟子는 여기서 〈思誠〉을 말한 다. 思는 心의 작용으로서 성실해지기 위해서는 善울 밝혀야 하므로 결국 다시 心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뿌리박힌 4 단을 다 이루려는 盡心의 노력을 지칭한다고 하겠다. 孔子에서보다도 孟子의 사상체계 안에서 더 뚜렷해진 것이 있다면, 성실 의 근원이 天에 있다고 명확히 서술했다는 점이다• 사실 孟子가 인간의 본성 이 善하다고 하였던 것도 4 단이 天으로부터 부여된 것이라는 데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孟子의 인성론과 수양론에 있어서 天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큰 것이다. 孟子는 天과 연결시켜서 聖人의 길을 지향하는 사람이 경험하는 고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天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기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히고 그의 몸을 수고롭게 하며, 그의 신체를 굶주리게 하고대 그 자신 에게 아무것도 없게 한다. 그가 하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일과는 어긋나게 만드 는데, 그것은 마음을 움직이고 자기의 성질을 참아서, 그가 해내지 못하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이다 .64)

64) 故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飯其體,., 空芝其身 行掃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會益其所不能(「告子」 下 15).

孔子 역시 仁이란 먼저 고난을 겪은 후에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으 나(「雍也」 22), 이 고난이 天으로부터 그를 강하게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한 적은 없다. 孔子 안에서 함축적이고 개인적이던 天사상이 孟子 안에서는 이와 같이 드러나서 性善과 養心의 형이상학적 근거가 된다. 단, 완성된 인격을 통해서만 天이 알려진다는 儒家 고유의 내재적 종교사상은 孟子에서도 지속되었고 사실 그에 의하여 처음으로 이론 화된 것이라 하겠다. 4 天사상의 체계적 해석 盡心이 知性 및 知天과 직결된다는 孟子의 사상체계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 주는 부분은 『孟子』의 마지막 편인 「盡心篇」이다 .65) 「盡心篇표든 문체상 으로나 내용상으로 『孟子』 속에서 『論語』와 가장 유사한 부분으로서 아마도 孔子의 사싱을 정착시키려는 노력으로 『論語』의 편찬이 이때에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에 대응하는 의미에서 孟子의 말씀을 『論語』체와 비슷하게 재정리 하여 그 사상의 체계화를 시도한 것이 아닌가 한다.

65) 天은 딸子』 안에서 모두 80 번 언급되는데 그중 8 번은 蒼空울 지칭하고, 나머지 72 번은 궁극자를 지칭해서 『論語』에서의 天의 의미 사용과 근본적으로 갇다 .

心과 性과 天의 관계를 규정해 놓은 「盡心篇」 上 1 장은 儒家의 形而上學 的 체계를 대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자기의 心을 다하면 자기의 性울 알게 되고기 자기의 性을 알면 天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자기의 心을 보존하고 자기의 性을 기르는 것이 天 을 섭기는 방법 이다. 短 命하거나 長홉 하거나 의심을 두지 않고, 자산의 몸을 닦으며 기다리면 命울 세우는 길이 된다 .66)

66) 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則知天矣.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秩壽不l\, 修身以 侯之,所以立命也 .

자기의 마음을 다한다(盡其心)는 것은 心 안에 뿌리박혀 있는 仁義禮智의 4 단을 온전히 하여 그 본래의 도덕적 선함을 보존하고 확충한다는 孟子의 수양론을 요약한 것이다 . 그런데 이렇게 수양을 통해 자기 마음 안에 주어진 도덕성을 온전히 하였을 때 비로소 인간은 자기가 지닌 인간 고유의 본성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知其性). 牛山의 바유에서 孟子가 이야기했듯이, 도끼에 잘리고 소나 양에게 늘 먹힌 산의 황폐한 모습을 보고 山의 본성을 제대로 파악히·지 못하는 것과 같이 환경과 食色의 유혹으로 추해진 인간의 모습을 보면 인간의 본성이 善하다는 것을 모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牛山울 자연대로 놓아두면 풀과 나무가 다시 자라서 아름다운 山의 모습을 되찾듯이 인간도 의부의 유혹에 이끌리지 아니하고 자기 안에 있는 本心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면 인간의 본성이 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보통 인문주의자라고 評해지는 孟子는 여기서 그치지를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인간이 자기의 本性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 本性을 부여한 天울 알게 되고(知天) 天울 섬기는 것이( 事 天)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운명에 속하는 생사의 문제에 정신을 쓰지 않고 자신을 닦는 일에 전력을 기울일 때 그것이 바로 天命을 완수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6n

67) 牟宗三은 盡其心울 道德心의 완성으로 보고, 〈道德心울 충분히 실현시키면 天의 創造性을 간파할 수 있어 天이 創造的 眞幾가 됨을 실증하게 된다〉고 하였다(『中國 哲學의 特質』, 105 면).

「盡心篇」 上 1 장에서 인간 심성의 형이상학적 근거로 언급되는 天과 天命 아 孟子의 사상 전체에서 차지한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우선 孟子는 西周시기로부터 孔子룰 동해 전해 내려온 전통적 天신앙을 수용하고

있다. 天은 萬物과 民울 낳았기 때문에 모든 것 안에는 본래의 원리가 있고 모든 인간은 선함을 좋아하기 마련인 것이다. 따라서 天은 天民 중의 선각자 가 후각자를 가르치게 하여 올바론 정치가 행해지도록 하였다 .68) 天은 임금 에게 왕권을 수여할 뿐 아니라 民울 통하여 말없이 그 뜻을 전한다(「萬章」 上 5, 「告子」 下 15). 따라서 天의 뜻에 따르는 사람은 살고 거스리는 사람은 멸망하는 것이 원칙이나(「離襲J 上 7), 일시적인 고난은 때로 天이 聖人으 로 만들려는 사람을 강하게 하기 위해 시련 삼아 보낼 수도 있다(「告子」 下 15), 그리고 끝에 가서 인간의 노력을 초월하는 성공과 실패는 결국 天으 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孟子는 말한다 .69)

68) 天之生物也, 使之一本(대땄文公」 上 5) ; 天之生此民也,使先知覺後知, 使先梵覺後梵 也 予天民之先梵者也(「萬章」 上 7). 69) 若成功則天也 (「梁惠王」下 14) ; 吾之不遇魯侯, 天也(「梁惠王」 下 16).

이러한 전통적인 天사상에 기초를 두고 孟子가 더욱 발전시킨 天에 대한 해석은 첫째, 天은 성실 그 자체라는 것이다(「離模」 上 12). 天이 도덕적이기 때문에 天으로부터 본성을 부여받은 모든 인간이 도덕적이라는 이론적 근거 를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天의 성실성이 형이상학적으로 해석되면서 중국 고대의 天이 지닌 인격적 요소와 孔子에게서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관계 적 성격을 거의 제거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와 같이 孟子는 天에 대한 직접적 종교적 감정을 약화시킨 반면에 인간과 인간의 역사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주었고 도덕적 세계관을 제공하였다. 다시 말해서 孟子는 天울 敬長 의 대상이라기 보다 형이상적 실체로 제시한 것이다 .70) 인간의 성실함은 天의 성실함에 근거를 두고 지속적으로 확충해 나가야 될 것으로 天人관계 의 초점이 도덕성에 모아전 것이다. 결국 인간이 天과의 올바른 관계를 지니 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 부여된 도덕성을 키우는 일 의에 디론· 길이 없다는 것이 孟子의 주장이었다. 따라서 孟子는 자기의 本性울 알게 된 인격자만이 天을 알고 섬길 수 있다는 수양론을 매개로 한 儒家 고유의 天人觀울 확립 하였다.

70) 牟宗三, r 中國哲學의 特質』 39, 66~67 면.

孟子는 모든 사람이 희구하는 벼슬을 天爵과 人爵 두 가지로 분류하였 다. 〈하늘이 준 벼슬〉이란 〈夫仁, 天之尊爵也〉(「公孫丑」 上 7) 라고 말했듯이 仁義禮智의 4 단을 지칭하는데, 사람에게 가장 존귀한 것으로 참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준 벼슬〉이란 모든 사회적 작위로서 孟子는 人爵 은 天爵에 기초를 두었을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公孫丑」 上 7, 「告子」 上 16). 따라서 孟子는 마을에서 남에게는 신중하고 德이 있는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속이 비어 있는 사람들을 〈德의 도적〉이라고 혹평하여 儒家的 修身이 벼슬은 물론 사회적 인정이나 평판에 의존해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71) 그러면 孟子의 사상 안에서 〈命〉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묘하 게도 「盡心篇」을 제의한 다른 여섯 편에서 命은 한결같이 王이나 제후, 부모 등 인간의 명령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오직 「盡心篇」에서만 天命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72) 시대적으로 보아 후기에 이루어졌고 『論語』의 편찬과 병행했을 뎀紅篇」을 제의하고 나머지 『 孟子』 6 편에서는 한결같이 〈命〉이 〈天〉으로 대치되는데, 그 이유는 墨子가 儒家의 命울 무기력한 운명론으로 신랄하게 비평하면서 〈天志〉라는 의욕적인 절대규범을 제시하였다는 시대적 배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孟子는 오해받기 쉬운 〈命〉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오히려 天과 ' 1 生과의 관계를 체계화함으로써 孔子가 제시한 天人관계의 구조를 드러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盡心篇」에서만 孔子의 본 용어에 가깝게 性과 命을 대조하고 『論語』의 끝과 마찬가지로 道統울 제시함으로써 孔子사상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더욱 분명히 한 것이다. 71) 「盡心」 下 37 에서 鄕原人을 〈{惡之賊〉이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論語』 「陽貨」 II 에도 갇은 표현이 나오고 있어서 「盡心篇f} 『論語』와의 가까운 관계를 다시 보여준다. 사실 이러한 孟子의 사상에는 예언자적인 요소까지 엿보인다. 72) 命은 『孟子 』 에서 모두 54 번 나오는데 32 번은 인간의 명령으로, 12 번은 인용문에서 쓰이며, 7 편에 10 번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天命으로 쓰인다 .

5 孔子와 孟子의 인간론 비교 100 여 년이 지난 후 여러 학파들 사이의 치열한 논쟁 속에서 孔 子 의 가르 침을 변호하는 일을 자신의 필생의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던 孟 子 의 인간론 이 孔子 본래의 사상과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이해의 과정에는 해석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에 孟 子 의 孔 子 이해 역시 그의 시대성과 그 자신의 파악능력에 따른 하나의 해석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이 해석의 과정을 통해 原始儒敎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한 단계의 변화 및 발전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孔子와 孟子의 인간론이 지닌 차이를 다음 네 가지 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孔子는 그의 인간론을 군자상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시켰으며, 군자 의 특성을 好學함으로써 仁울 이룬 인격자라는 데서 보았다. 그런데 孔子의 仁이란 質과 文, 德과 禮가 조화되어 이루어전 최고의 경지로서 오랜 노력을 통해 도달해야만 되는 하나의 理想이었다. 그래서 그가 仁者라는 칭호를 허용한 제자는 자신의 가르침을 계승할 수 있다고 인정한 顔淵뿐이었다. 이에 반하여 孟子의 仁義禮智는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 보편적으로 뿌리박 혀 있는 도덕성 그 자체이기 때문에 孟子는 그것을 보존하고 키우는 盡 IL 에 중점을 두었다. 인간의 도덕성이 천부적으로 주어졌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수양론에 있어서 文章 내지 문화적인 면이 孔子보다 孟子에서 훨씬 소홀히 되고 있어서 質과 文의 조화가 그 균형이 깨진 느낌이 있다. 중국인의 공동 체적 의식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문화라는 면은 후에 나오는 荀子의 禮論的 해석으로 비로소 체계화되는데, 이런 각도에서 볼 때 孟子의 盡心的 해석은 孔子가 제시한 儒家的 인간론의 일면, 곧 보편적 도덕성의 긍정과 心의 자율성을 이론적으로 확립하려는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73) 73) 牟宗三은 孟子가 적국적이고 정면적으로 내재된 도덕성과 절대주체성을 제시하여 그 면을 무명하게 표현한 공로가 크지만 孔子의 사상 전체를 보지는 못하였다고 평하였다(『歷史哲學』, 學生書局, 1976, 114~9 면 참조).

둘째로, 孔子의 군자론에서 도덕성의 원천으로서 함축적으로 아해되어 밑바탕에 깔려 있는 天사상은 주로 孔 子 자신의 개인적 위기나 使命感의 표출에서 드러나고 있다. 곧 天과 我, 吾, 予 등의 친밀한 관계적 표현을 통해 언급되어서 孔子를 이해해 주는 〈知我者〉로서의 天의 모습이 부각된 다. 이에 비하여 孟子에서는 이러한 개인적 친밀성을 드러내는 말씀둘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고, 대신 天은 형이상학적으로 해석된다. 곧 天은 誠 그 자체로서 모든 인간에게 도덕성을 부여하는 보편적 도덕원리이며 수양론 적 체계 안에서는 궁극적 實在로서의 자리를 차지한다. 따라서 天을 아는 길은 성실해지는 盡心울 통해 자신의 본성을 깨달음으로써만이 가능한· 것이 다. 물론 修身을 통해 天을 알고 섬긴다는 데 있어서는 孔子와 孟子 사이에 기본적 공통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論語 』 의 기록 속에서는 修養의 과정 속에 天울 불러 맹세를 하는 등 종교적 감정이 드러나는 데 반하여 , 孟子에 서는 도덕의 원리라는 시각에서 天의 궁극성을 인정하면서도 관계적인 언급 을 회피하는 儒家전통의 일반적인 분위기가 형성된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곧 孟子는 墨子의 天志에 대응할 만한 절대규범으로서의 天의 궁극성을 주장함과 동시에 墨子의 귀신관이 지니는 神의 인격적 이해나 초자연적 상벌을 통한 의적 규제의 필요성을 배제하였다고 하겠다• 셋째로, 孔子는 부유, 孝, 禮 등에 관한 대중적 사고를 조심스럽게 수용하 여 仁울 중심으로 철저하게 재해석함으로써 儒家的 특성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데 비하여 ,74) 孟子는 인간의 本心 그 자체를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그대로 수용하는 경향을 띤다. 仁의 의미가 孟子 안에서 육천적 애정 이라는 일반적 뜻으로 돌아온 예라든가 孝|弟가 道의 핵심이며 가장 큰 不孝 는 아들이 없는 것(「離婁」 上 26) 이라고 孟子가 서슴없이 말하는· 것 같은 것이 그 좋은 예라고 하겠다. 孔子에서 지녔던 學의 절대적 필요성이 어느 74) 孔子는 부유는 〈貧而果 富而好禮〉(「學而」 l5) 와 〈君子固窮〉(「衛靈公」 2) 으로, 孝는 〈事父母幾謀〉(「里仁」 18) 과 〈不敬, 何以別平〉(「爲政」 7) 로 禮논 〈禮之本〉 (r i\.ffl'」 4) 을 중시하여 〈人而不仁, 如禮何〉(「八僧」 3) 으로, 모두 仁의 완성을 위한 실천적 단계로 해석하였다 .

정도 감소되고 孝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전통적 사고를 대부분 그대로 수용 했다는 사실은 儒敎가 곧 중국의 전통을 대표하고 전수하는 주체가 되었다 는 의미에서 강점을 지니는 것도 사실이지만, 孔子의 고유한 해석을 어느정 도 약화시킨 결과를 가져왔다고도 볼 수 있다. 넷째로, 孔子의 인간론 역시 修已安人을 지향했기 때문에 君子는 마땅히 널리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정치에 참여할 것을 이상으로 하였으 나, 孟子에 와서 정치참여에의 필연성은 더욱 강조된다. 사실 孟子에서 仁이 란 많은 경우 聖王의 仁政을 지칭하고 있으며 75) 民이 곧 天心을 대표하기 때문에 天의 뜻을 아는 것도 정치를 통해서이다. 墨家의 聖王사상에 응전하 기 위해서 孟子는 修已에 치중했던 孔子의 君子像보다도 聖人을 중심적 이미지로 택하여 전국시대에 만연했던 王者에 대한 열망에 부응함과 동시에 孔子의 보편적 인간 이상도 포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다음 장에 서는 孟子의 정치경제관과 聖人論울 고찰하여 孟子사상의 전모를 파악하고 자한다. 75) 仁이라는 용어는 『孟子』에 모두 151 번 언급되는데 그중 32 번은 仁政이나 仁術이란 정치적 의미로 쓰이고 나머지의 대부분은 부모자식간의 애정 안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연적 도덕감을 지칭한다 .

5 장 孟子의 정치경제관과 聖人論 孟子의 盡心的 修養論이 어떠한 결실을 맺을 것인가를 가장 구제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의 仁政論과 仁政의 주체가 되는 聖人論이다. 『孟子』 7 편 중에서 「告子篇」과 「盡心篇묘끌 비롯한 후반부가 주로 人性論울 다루고 있다면, 「梁惡王篇」 「公孫丑篇」 「勝文公篇」 등의 전반부는 孟子의 정치경제 관을 보여주는 仁政論울 취급하고 있다. 특히 「梁惠王篇표본 孟子의 유세관계 자료를 연대순으로 편찬해 놓은 것으로서, 齊룰 무대로 하는 「公孫丑篇」과 太子로 있을 때부터 孟子의 제자가 되었던 勝나라 文公에 관한 기사룰 모은 「勝文公篇」을 요약하여 그 안에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우선 「梁惠王篇」 안에 나오는 구체적인 예를 몇 가지 열거함으로써 孟子가 주창하던 仁政의 내용을서술하겠다. 孟子가 그의 정치유세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머물면서 상당한 기대를 걸었던 군주는 齊의 宣王(기원전 319~301 년)이었다. 孟子와 齊宣王과의 계속 되는 대담은 孟子의 17 년간(기원전 320~303 년)의 유세가 지닌 목표와 그의 정치경제관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孟子는 당시 문화의 중심지요 東方 최강 제후국인 齊나라의 宣王을 儒家的 王者로 만듦으로써 자기의 이상을 구현시켜 보고자 온 심혈을 기울였다. 우선 이 두 사람이 지닌 정치적 시각의 차이는 孟子가 제시하는 覇道와 王道의 구별에서부터 시작된다.

齊宣王이 〈齊桓公과 晋文公의 일에 관해서 말씀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하고 묻자, 孟子께서는 〈 1 牛尼의 제자들 중에는 桓公과 文公의 일을 이야기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후세에 그 일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직 그 일에 관해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만남을 무언가 가치있게 하시려면 王다운 임금이 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심이 어떨까요?〉 하고 대답하셨다. 〈i뚱이 어떠해야 王답게 될 수 있겠습니까?〉 〈民울 보호하여 주면 王답게 될 것이니 아무도 그것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森人 같은 사람이 民울 보호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하실 수 있습니다.〉I)

I) 齊宣王 FR1B, 齊桓晋文之事, 何得聞平. 孟子對타 仲尼之從無道桓文之事者, 是以後世無 傳焉 臣未之聞也. 無以, 則王平 曰, 德何如則可以王矣 曰, 保民而王, 莫之能禦也, B, 若嘉人者可以保民平哉. 8, 可(「梁惠王」 上 7).

처음 齊宣王이 관심을 표명한 정치사상은 춘추시대의 覇者로 유명한 桓公 과 文公의 패도정치였다. 마치 梁惠王이 孟子롤 처음 만났을 때 자기 나라를­ 이롭게 하는(利吾國) 전략을 가르쳐 달라고 했던 것과 같이 齊宣王 역시 富國强兵의 방법을 말해 달라고 청한 것이다. 그런데 梁惠王에게 자신은 〈利〉가 아니라 〈仁義〉를 가르치러 왔노라고 말했던 孟子는 齊宣王에게도 王者로서의 길을 가르치려고 온 個家로서의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孔子가 齊의 覇道가 한 번 변하면 魯의 禮治가 되고 魯가 다시 한 번 변하면 道, 곧 德治에 이를 것(「雍也」 24) 이라고 말하였고 진 치는 법을 묻던 衛靈公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던 것과 같은 자세라고 하겠다. 齊宣 王 역시 孟子가 〈王〉다운 정치를 말하자 그것이 곧 德治를 지칭한다는- 사실 울 알아 듣고 자신이 그에 미치지 못함을 자인한다. 그런데 홍미로운 것은 宣王 자신보다도 孟子 쪽에서 宣王이 德 있는 王者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확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孟子는 宣王의 한 신하로부터 宣王이 어느 날 鐘에 바를 피를 받기 위하 여 희생되려 끌려가는 소의 모습을 보고 차마 그것을 견디지 못해 羊으로 바꾸게 한 사건이 있었디는· 것을 들었다고 宣王에게 말한다. 남의 곤경을 측은히 여기고 차마 보지 못해 하는 不忍人之心이야말로 孟子가 인성론에서

말한 4 단의 시작이요 仁政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孟子는 宣王에게 王者가 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이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고 분명히 대답한다. 仁政이란 그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反其本)으로 서 내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남의 부모에게까지 미치게 하고 내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남의 자녀들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 기 때문이다. 곧 忠怒의 道가 사회 및 정치 전반에까지 확대되어 적용되도록 하는 것이다. 孟子는 仁政이란 인간 본성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워서 모든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과 걱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다. 食色의 욕망에 속하는 재물, 아름다운 여자, 넓은 사냥터, 세속적인 음 악, 명예와 용맹 등을 갈구한다는 宣王의 고백을 孟子는 모두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단지 그것을 똑같은 갈구를 지니고 있는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즐길 수 있다면 仁政을 베풀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참으로 〈同 樂〉이란 仁政의 잣대와도 같아서 줄거움을 함께 할 때 그러한 인간의 욕망 은 善하다는 것이다. 孟子에서 欲과 性의 관계는 각기 있어야 할 위치 안에 서 조화되었을 때에 둘이 반드시 상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앞장에서 설명한 바 있다. 여기서 同樂은 仁義의 실천을 가리키기 때문에 同樂할 때의 인간의 모든 욕망은 긍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孟子가 齊宣王에게 同樂에 대하여 말하는 대표적 예를 몇 가지 들어보겠 댜 王께서 음악을 좋아하시는 것이 대단하시면 齊나리는· 道에 가까이 나갈 것입 니다.오늘날의 음악은옛날의 음악과(그기본정신은) 같은것입니다……혼자서 음악을 들으며 즐기는 것과 사람들과 함께 음악을 들으며 즐기는 것 中 어느 쪽이 더 즐겁겠습니까 ?2) 2) 王之好樂꿀 則齊其庶幾平. 今之樂由古之樂也 ……猫樂樂 與人樂樂, O( 「梁惠王」 下 I).

王이 〈크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森人은 한 가지 병이 있습 니다. 森人은 용맹한 것을 좋아합니다〉 하고 말하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王께 서는 조그마한 용맹을 좋아하시는 일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文王은 한 번 성을 내서 온 天下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주었습니다.〉 3) 王이 〈哀人은 한 가지 병이 있습니다. 효人은 재물을 좋아합니다〉 하고 말하 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 ••• 왕께서 재물을 좋아하시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 면, 왕답게 되는 데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4) 왕이 〈霧人은 한 가지 병이 있습니다. 森人은 色을 좋아합니다〉 하고 말하쟈 이렇게 대답하셨다. 〈옛날에 太王은 色울 좋아하여서 그의 王妃를 사랑하였습 니다……그때에는 안에는 남편 없는 여인이 없었고 밖에는 아내 없는 사나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왕께서 色을 좋아하시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면 왕답게 되는 데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S)

3) 王曰, 大哉言矣 冥人有疾, 案人好勇 對曰, 王請無好小勇……文王一怒而安天下之民 (「梁惠王」 下 3). 4) 王曰 霧人有疾, 霧人好貨 對曰 …… 王如好貨· 與百姓同之, 於王何有(「梁惠王」 下 5). 5) 王曰, 墓人有疾, 冥人好色. 對 8, 昔者太王好色, 愛販妃……當是時也, 內無怨女, 外無 讓夫. 王如好色 與百姓同之, 於王何有(「梁惠王」 下 5).

백성과 더불어 함께 즐긴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孟子는 文王이 가졌던 70 里의 王林과 宣王이 가전 40 里의 산림을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周의 文王은 宣王보다 더 넓은 산림을 가지고 있었지만 백성들이 그곳에 들어가서 나무를 할 수 있었고 꿩과 토끼를 잡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백성 들은 오히려 70 리가 작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 宣王은 자신의 산림 속에 들어가서 사냥을 하는 사람을 모두 잡아 죽일 정도로 산림을 혼자서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은 40 리도 너무 크다고 불평을 한다는- 것이 다. 이와 같이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남에게도 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함께 즐기는 것이 仁政이라는 것이다. 孟子가 주장하는 仁政의 구체적인

내용을 政治論과 經濟論으로 크게 분류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l 孟子의 정치론 孟子는 仁政울 베풀 수 있는 仁慈한 사람만이 君主의 지위에 있어야 하며 (「離要」 上 I), 군주가 신하를 채용한 후에는 그들이 배운 바대로 정치를 하도록 허용해야 된다고 주장한다(「梁惠王」 下 9, 「勝文公」 下 2). 따라서 채용할 때나 채용한 후에도 계속 신하의 적격 여부를 점검하는 것이 仁政을 계속하기 위해 중요한 것인데,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孟子가 권고하는 최고 의 지침은 民心의 소재를 파악하는 일이다.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貸良합니다〉 하고 말해도 안됩니다. 여러 大夫둘 이 모두 〈賢良합니다〉 하고 말해도 안됩니다. 國人들이 다 〈賢良합니다〉 하고 말한 후에 그 사람을 살펴보아서, 그가 현량함을 알게 된 후에 등용하십시오` 좌우의 사람들이 다 〈안됩니다〉라고 말해도 그 말을 듣지 마십시오` 여러 大夫 들이 다 〈안됩니다〉 하고 말해도 그 말을 듣지 마십시오. 國人들이 다 〈안된 다〉 하고 말한 후에 그 사람을 살펴보아서, 그가 안되겠음을 알게 된 후에 그를 제거하십시오 .6)

6) 左右皆曰賢 未可也 諸大夫皆日賢, 未可也. 國人皆曰賢, 然後察之, 見賢焉, 然後用之. 左右皆日不可, 勿懿 諸大夫皆曰不可, 勿聽 國人皆曰不可, 然後察之, 見不可焉, 然後去 之(「梁惠王」 下 7).

國人이란 民과 같이 한 나라의 백성 전체를 지칭하지만 어떤 정치사전에 대하여 즐거움이나 불평을 표시함으로써 民이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될 때 특히 사용되는 용어이다. 현대와 같이 공식적인 투표제도나 시위 등을 통한 民意 표출 방법이 없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國人의 民心을 파악하는 것이 정치능력을 가늠하는 가장 정확한 판단규범이 된다는 것을 명확히

지적한 점에서 孟子의 정치관은 時空울 뛰어넘는 통찰력을 지닌 것이라고 하겠다. 국내 문제에서뿐만 아니라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孟子는 민심을 가장 중요 시하였다. 예를 들어 어느 군주가 다른 나라와 전쟁을 일으킬 것인가를­ 결정할 때에 가장 결정적인 판단규범이 되는 것은 피정복민의 마음자세라고 孟子는 말한다• 齊의 宣王이 孟子에게 燕나라를· 정복해도 좋은지에 대해 충언을 청했을 때 孟子는 〈빼앗아서 燕나라의 백성들이 기뻐한다면 빼앗아 버리십시오〉(「梁惠王」 下 10) 라고 대답했다. 곧 周나라 武王의 경우에서와 같이 정복당하는 나라의 王이 王道를 잃어 버려서 백성들이 원한에 차 있을 경우에는 정벌이 용납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민심에 따른 정권이양의 원칙은 국내정치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孟子의 정치론은 革命 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齊宣王이 湯과 武王의 예를 돌면 서 신하가 자기 임금을 살해해도 괜찮느냐고 질문하자 孟子는 仁義를 해쳐 서 민심을 잃은 임금은 실제로 一夫에 불과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仁을 해치는 자를 흉폭하다고 하고 義롤 해치는 자를 잔인하다고 합니다• 흉폭하고 잔인한 인간은 一夫라고 이릅니다. 一夫인 討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살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7)

7) 賊仁者謂之賊 賊義者謂之殘 殘賊之人謂之一夫. 聞諒―夫討矣, 未聞殺君也(「梁惠王」 下 8).

결국 정치의 성패를 판정하는 것은 민심의 획득여부에 있었다. 마치 한 인간의 인간됨이 자신의 本心울 보존하고 배양하여 얼마나 盡心했는가에 따라 판정되듯이, 한 군주의 임금됨은 자기 백성의 마음을 얼마나 기쁘게 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孟子는 본 것이다. 그런데 盡心이 知性의 길일 뿐 아니라 知天의 길이었듯이 민심은 정치적 판가름일 뿐 아니라 곧 天意를 아는 길이기도 하였다. 天은 民이 보고 듣는 것을 통해서 보고 듣기 때문에 민심의 변화는 곧 天命의 변화를 뜻한다고 孟子는 풀이하였다. 萬章이 〈堯 임금이 천하를 舜에게 주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하고 여쭈어

보자, 孟子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天子가 天下를 남에게 주지는 못한다.〉 〈그러면 舜이 天下를 차지했는데 누가 준 것입니까?〉 〈天이 준 것이 다.〉 〈天이 주었다는 것은 소리를 내서 명령한 것입니까?〉 〈아니다. 天은 말을 하지 않는다. 행위와 하는 일을 가지고 그 뜻을 보여줄 따름이다… ••• 그를 시켜 서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百神이 그 제사를 홈향하였으니 그것은 天이 그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를 시켜 나라 일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나라일이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그것을 편안하게 여겼으니, 그것은 백성들이 그를 받아들인 것이다.〉 8)

8) 萬章曰, 堯以天下與舜 有諸 孟子日, 否, 天子不能以天下與人. 然ff lj 舜有天下也, 執與 之 曰, 天與之, 天與之者, 詳詳然命之平. 曰, 否, 天不言, 以行與事示之而已矣 …. .. 日, 堅主祭而百神享之, .是天受之 , 使之主事而事治, 百姓安之. 是民受之也 (「萬章」 上 5). 「告子」 上 14 장에도 民心과 정치가 직결되어 있다.

天의 뜻이 民心울 통해 드러난다는 사상은 詩書에 그 싹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孟子에서는 民의 역할이 훨씬 더 직접적이고 그 비중이 커진 것을 볼 수 있다. 墨家와 지속적인 논쟁을 벌였던 孟子의 입장을 墨家 와 비교하여 보면, 民心이 곧 天心이라는 정치이념 및 이에 기초를 둔 革命 論울 확립함으로써 孟子는 墨子의 尙同說과는 정반대되는 이론을 제시했다 고하겠다. 정치론에 있어서 孟子가 墨家와 정면으로 대치하는 장면을 『孟子』 여러 부분에서 읽을 수 있는데, 감은 稷下의 士로서 孟子보다 年長者였다고 하는 宋經과의 대담에서 그 대표적 예를 살펴볼 수 있다. 宋經은 楚나라로 가는 길이었다. 孟子께서 石丘에서 그를 만나시고 말씀하셨 다. 〈선생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나는 秦나라와 楚나라가 戰端울 일으 켰다는 소문을 들어서 楚나라의 왕을 만나서 그를 설복시켜 그만두게 하려는 거요……〉 〈……그 要旨를 듣고 싶습니다. 그들울 어떻게 설복시키시려는 겁니 까?〉 〈나는 그 전쟁의 不利함을 말하려 하오.〉 〈선생의 뜻은 위대하십니다마는 선생의 口號는 안되겠습니다. 선생께서 이익을 가지고 秦나라와 楚나라의 왕들을 설복시키셔서 그들이 이익을 기뻐하여 三軍의 군대를 해산시킨다면, 그것은 三軍

의 군사들이 해산을 즐거워하고 이익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君臣과 父子와 형제가 仁과 義를 버리고 이익만을 생각하여서 서로 접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도 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은 사람은 여태까지 있어본 일이 없습니다.〉 9)

9) 宋經將之楚 孟子遇於石丘. 日, 先生將何之. 曰, 吾聞秦楚構兵, 我將見楚王 . 說而龍之 …… B··· …願聞其指, 說之將何女Jl. 曰. 我將言其不利也. 曰, 先生之志ff l j大矣, 先生之號 ff l j不可. 先生以利說秦楚之王, 秦楚之王稅於利以龍三軍之!ifi, 是三軍之士樂龍而稅於利也 ……是君臣父子兄弟終去仁義懷利以相接, 然而不亡者, 未之有也(「告子」 下 4).

墨家가 非攻을 주장하여 방어전술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려는 왕들을 찾아가서 설득작업을 벌였던 것은 냉산子 』 안에서 도 읽어볼 수가 있다. 전쟁을 막고자 하는 뜻에는 孟子 역시 경의를 표시했 지만, 墨家의 중심사상인 交相利의 원리를 孟子는 인간의 仁毅를 해치는 것으로 단죄한다. 인간이 서로 이득을 얻으려는 뜻으로 접촉할 때 人心은 박해지고 결국 그 나라는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孟子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仁義의 心울 확충시키는 것뿐이며 王을 왕답게 하는 것 역시 仁毅뿐이라고 단정한다(「梁惠王」 上 I ). 墨家의 利사상을 仁殺로 반박했을 뿐만 아니라 孟子는 墨家의 兼愛를 親親으로 대치하였다. 가까운 육친을 친하게 대한다는 親親의 사상은 자연스 런 인간의 마음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곧 仁心이라고 그는 규정하였 다. 이러한 마음이 남에게까지 널리 확대될 때 仁政이 이루어지며, 같은 마음이 만물에게까지 퍼질 때 이룰 愛라고 불렀다. 곧 뎀흡心篇」에 의하면 愛와 仁과 親은 각기 物과 民과 親에게 해당되는 적합한 마음가짐으로 치등­ 적이나 그 본질은 같아서 가장 가까운 것을 기초로 하여 밖으로 확대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10) 따라서 孟子는 堯舜의 지혜나 인자함으로도 모든 것을 두루 포괄하려 하지 않고, 먼저 자신이 해야될 일과 현량한 人材를 가까이

10) 孟子日, 君子之於物也, 愛之而弗仁於民也, 仁之而親. 親親而仁民, 仁民而愛物(「盡心」 上 45). 이러한 명확한 구별은 孟子의 다른 부분에서는 지켜지지 않는 것으로 父母나 형제의 사랑을 愛라고 부르는 예 (「萬章」 上 I, 3 등)라든가 仁者는 납을 사랑한다는 용법 (「離婁」 下 28) 등을 볼 수 있다 .

하였음(「盡心」 上 46) 을 지적함으로써 儒家의 순서적인 실천론을 변호하였 다. 이와 같이 孟子는 墨家의 중심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兼愛와 利를 親親 과 仁義로 공박함으로써 孝와 五倫에 기초를 둔 儒家의 정치경제관을 확립 하고자 했던 것이다. 孟子의 가르침에 마음으로부터 설복되어 그에 따라 정치를 실시하려고 노력한 임금은 50 리의 영토를 지닌 小國勝나라의 文公이었다. 그는 태자 때부터 孟子롤 사모하였으므로 父喪울 당하자 장례를 치루는 법을 孟子에게 물었다. 죽 勝文公의 정치는 親喪울 치루는 데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孝롤 중심으로 한 德治룰 통해 백성들을 교화시키고자 한 의도가 엿보인다. 孟子 는 〈親喪이란 본래 스스로 마음을 다하는 것입니다〉 11 법·고 말함으로써 장례 의 핵심 역시 盡J L 에 있음을 밝힌다. 孟子는 구체적으로 三年喪울 제의하는· 데 이것이 그 당시의 관례가 아니었기 때문에 勝文公은 친척들과 관리들의 상당한 반대를 극복한 후에야 三年喪을 치룰 수 있던 것을 보면 전국시대의 장례예식이 다양했던 것을 알 수 있다. 『禮記』 등에 나오는 규범적 三年喪 은 儒家의 禮法이 정착된 후에 이루어진 것이다. 孟子는 임금이 자기 마음을 다해 슬퍼할 때 그의 孝誠은 자연히 신하들과 백성들에게까지 감화를 주게 되어 그 나라 안에 人倫이 바로 서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盡心의 사회적 영향력을 간파한 것이라고 하겠다.

11) 親뾰固所自盡也(「勝文公」 上 2).

2 孟子의 경제론 부친의 장례를 儒敎的 가르침에 따라 지낸 후에 정치를 위한 구체적 세목 울 물은 勝文公에게 孟子는 백성에게 〈恒産 X t 갖게 하라는 그의 유명한 경제관을제시한다.

백성들이 사는 방도란 일정한 생활 근거가 있는 사람은 일정한 마음을- 지니 고, 일정한 생활 근거가 없는 사람은 일정한 마음이 없습니다. 전실로 일정한 마음이 없게 되면 방탕하고 편벽되며, 사악하고 분수에 넘쳐 못하는 짓이 없게 됩니다. 죄에 빠지게 된 연후에 따라가서 처벌한다면 그것은 백성을 그물로 잡는 것입니다. 어찌 인자한 사람이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그물로 잡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12)

12) 民之爲道也, 有恒産者有恒心, 無恒産者無恒心. 荀無恒心, 放倻邪修, 無不爲已. 及路平 罪, 然後從而刑之, 是同民也. 焉有仁人在位問民而可爲也(대均文公」 上 3).

恒産이란 부모와 처자를 먹여살릴 만한 생활의 안정성을 주는 수입원의 확보를 가리킨다. 최소한의 경제적 안정이 이루어져야만 恒心, 곧 도덕적인 생활을 영유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일반서민의 생활양식이라는 것이다. 현대 적으로 표현하자면 기본권의 확보 또는 사회보장제도의 원칙과 맞먹는 것이 댜 孟子는 齊宣王과의 대담 중에서도 恒産의 원칙을 제시한 적이 있다. 단, 그때에는 선비와 서민을 구별하여 道에 뜻을 둔 선비(士)만은 恒産이 없을 때에도 恒心울 가질 수 있으나 이것은 예의적인 것이며 일반백성에게 는 가능한 것이 아님을 역설하였다 •13) 孔子는 志士와 君子가 취할 수 있는 재물에 대한 의연함과 곤궁 속에서도 즐거울 수 있는 德의 깊이를 理想으로 제시한 데 비하여, 孟子는 그 理想을 높이 평가하기는 하면서도 일반적인 서민의 삶과 仁政의 경제정책을 제시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고 하겠 다. 백성들에게 恒産울 갖게 하기 위하여 君主 편에서 지녀야 할 태도는 우선 致富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財富를 영위하면 인자하지 않게 되고, 인자하게 살면 부유해지지 않는다.〉 14) 孟子가 그의 수양론에서 襄欲울 주장 했던 것과 같은 원리로 仁政울 실시하기 위해서도 과욕이 요구된다고 본 것이다• 과욕을 주장하면서도 孟子는 지나친 금욕주의나 세속의 더러움을 버리고 현실의 도피를 주장하는 자연주의자들의 생활태도를 비판하였다

13) 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 若民 R lJ無恒産, 因無恒心(「梁惠王」 上 7). 14) 爲富才仁矣, 爲仁不富矣(「勝文公」 上 3).

(「勝文公」 下 10). 또한 군주도 직접 농사를 지어서 백성의 짐이 되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원시적 農家사상의 주장 역시 배격하였다(「勝文公」 上 4). 사회 적 공동체 생활을 긍정하고 다양한 직업과 신분의 상호보완을 통한 조화를 이상으로 하였다. 孟子가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릴 것을 仁政의 조건으로 내세운 이유는 그래야만 군주가 모든 백성에게 恒産울 갖게 하는 정책을 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군주가 과욕하는 자세를 가질 때에만 孟子가 주장하는 이상적 토지제도와 세금제도가 실시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당시 財原의 중심을 이루던 토지의 경영은 孟子가 심혈을 기울여 개혁 하려던 것으로 그는 周의 井田法울 이상으로 보고 이룰 회복시키려고 하였 다 .15) 鄕外의 농지 900 敵를 아홉으로 균등하게 나누어서 가운데에 위치한 公田은 여덟 가구가 함께 경작하여 국가의 수입원으로 바치고 IOO iit{.씩의 私有地는 각기 경작하여 恒産울 갖게 한다는 것이다. 근교의 농지로서 그 구획이 분명치 않을 경우, 그 수확의 1/10 % 세금으로 바치게 하는 周의 徹法울 孟子는 역시 이상적으로 보았다 .16)

15) Creel 은 토지를 재측량하여 경계선을 긋는 일에서부터 善政의 실시를 시작해야 된다 고 주장한 孟子룰 중국 고대 사상가 중에서 누구보다도 경제를 강조한 철학자였다고 평했다(『中國思想의 理解』, 91 면). 16) 「勝文公」 上 3 장에는 夏나라는 5~ 을 주고 貢法을 실시하였고, 殷은 7~ 를 주고 助法을 실시하였으며, 周는 l0 倻\를 주고 徹法을 실시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論 語』 「顔淵」 9 장에도 哀公과 有若과의 담화 속에 徹法을 이상으로 제시하는 예가 젝된다. 周禮를 따르겠다고 하던 孔子의 말대로 儒家 공통의 이상이었다고 하겠 다.

이렇게 농지의 분배가 공평하게 관리되고 세금이 1 / 10 정도의 선을 유지 하게 될 때 서민들 삶은 즐거운 것이 되고 비로소 교화가 가능하게 된다. 貸明한 임금이 백성들의 생활근거를 마련하면 반드시 위로는 넉넉히 부모를 섬길 수 있고, 아래로는 넉넉히 처자를 먹여 살릴 수 있으며, 풍년에는 내내 배불리 먹고 흉년에는 죽음을 면하게 합니다. 그렇게 한 후에 그들을 선한 길로 가게 합니다…… 다섯 이랑의 宅地에다가 뽕나무를 심으면 50 대의 사람들이

명주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닭, 돼지, 개 등의 번식시킬 시기를 놓치지 않으면 70 대의 사람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百 이랑의 밭에 농사지울 시기를 빼앗지 않는다면 여덟 식구를 가진 家 口가 굶주리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학교교육을 조심스럽게 실시하여 효성과 우애의 뜻을 되풀이하여 가르친다면 半白이 된 사람이 길에서 이고 지고 다니지 않게 될 것입니다 . 늙은이가 명주옷 을 입고 고기를 먹고,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춥지 않게 살게 되고서도 王者가 되지 못한 사람은 여태까지 있어 본 일이 없습니다. 17)

17) 是故明君制民之産 必使仰足以事父母, 情足以畜妻子. 樂歲終身約, 凶年免於死亡. 然後 縣而之善……五敵之宅밝之於桑, 五十者可以衣洛矣. 難麻狗군氏之畜無失其時, 七+者可 以食肉矣 百敵之田勿奪其時,八口之家以無凱矣. 護率序之敎, 申之以孝小弟之義, 領白 者不負戴於道路矣 老者衣홉食肉, 黎民木凱不寒, 然則平王者未之有也(「梁惠王」 上 7). 이의에도 恒産의 구체적 묘사는 「梁惠王」 上 3 장, 「離婁」 上 13 장, 「盡心」 上 22 장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 敵는 四才 6 尺의 치수를 가리켰다 .

위의 인용문은 齊의 宣 王에게 王 者의 德治를 恒産의 사상을 근거로 하여 묘사한 것인데, 지극히 소박한 인간의 기본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이 국가의 경제정책의 기초가 되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王政과 신분제도 등이 사라진 20 세기 말엽의 현대사회 안에서도 정치의 본질적 문제들이 지도자의 森欲, 恒産의 보장, 도덕적 교육 등으로 아직도 오히려 성취해야 될 과제로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라울 뿐이댜 여기서 주목해야 될 점은 王者의 정치란 특별히 무엇을 베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나 부역을 일으켜 서 자연스러운 농사와 목축의 시기(時) 등을 백성들에게서 빼앗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여기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儒家가 그렇게도 중시하는 인륜의 교육도 결국 恒産울 가지게 한 후에야 가능하다 는 孟子의 현실적 통찰이다. 孟子는 膜文公에게 역대의 교육제도를 설명할 때 夏에서는 학교를 가르친 다는 뜻으로 校라고 불렀고, 殷에서는 활을 쏜다는 의미로 序라고 했으며, 周에서는 기른다는 뜻에서 岸이라고 불렀다고 풀이하였다 .18 ) 이렇게 칭호에

18) 鹿者, 養也 校者, 敎也 . 序者, 射也 . 夏曰校, 殷 B 序, 周 B 岸. 學ff l j三代共之. 皆所以明

人倫也(대菜文公」 上 3).

는 변화가 있었지만 그들이 가르친 바는 결국 같아서 人倫을 밝히려는 것이 었다. 사실 孟子는 인간의 경제활동과 윤리생활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여 井田法의 장점을 설명한 바 있다 . 〈갇은 고장의 밭을 경작 하면 井田을 같이 하게 되므로 드나들면서 서로 친밀하여지고, 지켜보면서 서로 도와주고, 병이 나면 서로 부축해 주게 되어, 백성들은 친해지고 화목 해집니다.〉 19) 肺文公의 德治정치는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었던 모양으로 楚나라로부터 許 1 f의 무리 수천 명이 몰려들었고, 宋나라로부터는 陳相의 가족들이 農具룰 짊어지고 勝으로 이주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먼곳의 사람이 임금님 께서 仁政울 베푸신다고 들었습니다. 집을 한 채 받자와 백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20 ) 임금께서 聖 A 의 정치를 하신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하시는 임금님은 역시 聖 A 이시겠지요. 저는 聖人의 백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 21)

19) 鄕田同井, 出入相友, 守望相助 疾病扶持 則百姓親睦. 20) 遠方之人聞君行仁政, 願受-廈而爲珉(대業文公」 上 4). 21) 聞君行聖人之政, 是亦聖入也 願爲聖人!:&.

그러나 胎文公의 이러한 인기는 한계성을 지닌 것으로 그를 찾아 온 사람 둘 사이에서도 그의 정치에 대한 비난이 있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워낙 小國이었던 관계로 전국시대의 정치에 뚜렷한 영향을 주지는 못한 듯하다. 그러나 仁政울 베푸는 聖人의 理想을 소규모로나마 시도해 본 군주라는 의미에서 膜文公은 孟子의 생애와 사상에 중요한 인물이었음에 는틀림이 없다. 결국 孟子의 정치경제관은 孔子의 〈正〉이나 〈均〉의 사상을 백성을 중심으 로 하여 더욱 확대하고 발전시켜서 토지 세금제도 등의 시책으로까지 구체 화한 것이라고 하겠다. 마굿간에 불이 났을 때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이 다쳤

는지만을 물어 본 孔子의 인간중심적 관심은 孟子에서도 그대로 지속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푸줏간에 살찐 고기가 있고, 마굿간에 살찐 말이 있는 데, 국민은 굶주린 기색이 있고,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있다면, 이것은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것입니다.〉 22) 이것은 孟子가 梁惠王 에게 한 말로 극단적이고 과격한 어조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결국 임금된 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백성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다.

22) 應有肥肉 底有肥馬, 民有凱色, 野有峨!t=, 此率獸而食人也(「梁惠王」 上 4).

재물이나 병력의 증가보다도 民心울 얻는 것이 王者의 기준이 됨을 말한 孟子는 聖人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文王의 정치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 다. 옛날의 文王이 岐를 다스릴 적에 耕作者에게는 1 /9 의 과세를 하였고、 벼슬한 사람에게는 그 祿을 대대로 주었으며, 關門과 市場에서는 사정을 살피기는 하였 으나 稅를 징수하지는 않았고, 물고기 잡는 보를 쓰는 것을 금하지 않았고, 사람 울 처벌하는 데는 당사자의 자식에게까지 미치지 않았습니다……(홀아비, 과 부, 자식없는 의로운 늙은이, 고아들은) 天下의 궁박한 사람들로서 호소할 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文王이 정치에 착수하여 仁政울 베품에 있어서 이 네 가지 사람들을 먼저 돌보았던 것입니다 .23)

23) 昔者文王之治岐也, 耕者九-, {1 者具祿, 關市磯而不征, 澤菜無> 罪人不뚜……此四 者, 天下之窮民而無告者 文王發政施仁, 必先斯四者(「梁惠王」 下 5).

여기에는 이미 고찰한 바 있는 세금과 토지제도 이의에도 상업활동에의 과세문제, 형벌문제 및 貧者들에 대한 사회정책이 특히 드러나고 있다. 인간 본심의 善함을 확신하고 있던 孟子에게 있어서 정치가가 해야 될 임무는 백성들이 恒産울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중으로써 마음에 뿌리박힌 4 단이 자라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告子」上 7, 「盡心」上 23 등). 그리고 孟子 자신은 이런 정치의 왕도를 정치가들에게 가르칠 책임을 가졌다는 강한 사명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孔子와 마찬가지로 孟子 역시 그의 이상을 당시대의 정치현실 속에 구현시키는 데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仁政論은 孔子의 仁사상을 정치에 확대 적용함으로써 個家전통에 구체적인 정치경제 이론을 제공한 것이다. 이제 孟子가 제시한 仁政論의 주체가 되는 聖人에 대하여 고찰함으로써 孟 子 의 사상을 종합하여 보고자 한다. 3 孟子의 聖人觀 孔子에게 있어서 聖人이란 忠怨인 君子之道를 온전히 실천하여 仁울 완성 함으로써 修已安人의 理想울 天下에 실현시킨 최고의 인간이상이었고, 따라 서 堯舜도 이에 미치기를 힘들어 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孟子』에서 〈聖 人〉은 그 의미가 확대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또 실제로 모든 사람 둘이 추구해야 될 실현 가능한 목표로 등장한다. 따라서 『論 語』에서의 〈君子〉와 맞먹을 수 있는 보편성을 띠게 된다.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 똑같 이 4 단이 주어졌기 때문에 聖人과 나는 同類者로서 결국 〈聖人이란 내 마음 의 본연적인 모습을 먼저 획득한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24) 勝文公과의 담화에서 孟子는 인간 본성의 善함을 설명하면서 말끝마다 堯 舜을 예로 들었다고 보고되고 있다. 顔淵의 말로 인용되고 있는 堯舜과 일반사람과의 동일화는 실상 孟子 사상의 핵심을 꿰뚫는 것이다. 〈堯임금은 어떠한 사람이고, 나는 어떠한 사람이란 말인가? (善울) 하고자 하는 사람이 면 역시 이와 같아지는 것이다.〉 25) 孟子에 와서 堯舜은 보통 사람들이 미치 기 어려운 지극한 德의 소유라기보다는 마음 안에 천부적으로 받은 도덕성 을 키우기만 하면 누구나가 그와 갇아질 수 있는 친근한 인물로 제시되고 있다. 曹나라 군주의 동생이었던 曹交와 孟子와의 대담은 이런 孟子의 가르 침을잘보여준다. 24) 聖人與我同類者……聖人先得我心之所同然耳(「告子」 上 7). 25) 顔淵 B, 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膜文公」 上 I). 「離婁」 下 32 장에도 堯舜與人同耳라는 말이 다시 언급된다.

曹交가 〈사람이면 다 堯임금과 舜임금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하고 묻자, 孟子께서는 〈그렇소〉 하고 말씀하셨다. 〈제가 듣기로는 文 王 은 키가 10 尺이었고 湯王은 9 尺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9 尺 4 - t이나 되게 키가 크면서도 곡식을 먹어 없애고 있을 따름이니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어찌 그러한 것이 관계가 있겠소? 역시 해보는 것일 따름이오…… 천천히 걷어서 나이 많은 사람에 뒤져서 가는 것을 弟라 하고, 빨리 걸어서 나이 많은 사람에 앞서서 가는 것을 不弟라 하는데, 천천히 걷어가는· 것이야 어찌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이겠소? 하지 않는 것이지요. 堯임금 舜임금의 道는 孝와 弟일 따름이요. 당신 이 堯임금의 옷을 입고, 堯임금의 말을 의고, 堯임금이 행한 것을 행하면 그것이 堯임금일 따름이오… ... 道는 큰 길 같은 것인데 어찌 알기 어렵겠소? 사람들이 그것을 찾지 않는 것이 문재일 뿐이오. 당신이 돌아가서 그것을 찾으면 남아돌 아가는 스승이 생 길 것이오〉 26)

26) 舊交問曰, 人皆可以爲堯舜, 有諸. 孟子曰, 然. 交間, 文王十尺, 湯九尺, 今交九尺四寸以 長, 食栗而巳' ~ll 何Qij可. 日, 溪有於是, 亦爲之而已醫……徐行 後長者謂之弟, 疾行先長 者謂之不弟. 夫徐行者登人所不能哉, 所不爲也. 堯舜之道, 孝惟而已矣. 子服堯之服, 踊堯 之타 行堯之行, 是堯而已矣 ...... 夫道若大路然, 登難知哉. 人病不求耳. 子歸而求之, 有餘tiii(「告子」 下 2).

이 홍미로운 대화에서 孟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크게 세 가지로 지적할 수 있겠다. 첫째, 聖人의 길은 육체의 건장함이나 관상에서 말하듯이 운명적 으로 정해져 있거나 소수의 특출한 사람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러는· 것이 다. 둘째, 堯舜의 道는 큰 길과도 같아서 누구나 뜻이 있으면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 지극히 자연스런 孝弟가 곧 그 핵을 이루고 있으며 그것을 확대해 나가기만 하면 된디는· 것이다. 셋째, 이와 같이 쉽고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스승이 있어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을 성실하게 하고자 노력하면 자연스럽게 스승을 만나 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孟子는 스승을 당시대의 인물 중에서뿐만 아니 라 글을 통해서 옛세대의 聖賢둘 안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時空을 뛰어넘는 사상적 친교는 학문하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줄거움으

로 우정의 지극함이라고까지 말했다.7:7) 어떻게 보면 孔子와 孟子자신과의 관계 역시 시대를 뛰어넘는 이와 같은 우정으로 맺어전 것이었다고 하겠 다. 聖人은 인간이면 누구나 이룰 수 있는 상태이지만 이미 이 상태에 도달했 다고 알려진 역사적 聖人둘은 후학들을 위해서 규범의 위치를 차지한다. 〈規와 短는 四角과 圓의 지극한 표준이고, 聖人은 인륜의 지극함이다. 임금 노릇을 하려면 君道를 다할 것이고, 臣下 노릇을 하려면 臣道롤 다할 것인 데, 이 두 가지는 다 堯와 舜울 본 받는 것일 뿐이다•〉 28) 바로 이 점에서 堯舜은 孟子의 聖人이 지닌 두 가지의 개념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고 하겠 다. 孟子의 聖人觀은 개념상으로 구별될 수 있는 두 가지 요소를 함축하고 있다. 하나는 仁政울 베푼 역사 속의 聖王들로서 孟子는 500 년마다 시기적으 로 聖王이 일어난디는 독특한 역사관을 제시하였다. 또 하나는 훨씬 보편성 울 띤 개념으로서 모든 이들이 추구해야 될 孝弟의 완성자인 聖人의 모습인 데 孟子는 이런 聖 A 의 대표로 孔子를 들었다.

27) 又尙論古之人, 碩其訖 讀其홉 不知其人可-¥ .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萬章」 下 8). 28) 規廻 方貝之至也 聖人, 人倫之至也. 欲爲君,盡君道,欲爲臣, 盡臣道. 二者皆法堯舜而 已矣(「離婁」 上 2).

孟子의 聖王 사상과 5 백년 週期說 먼저 정치성이 훨씬 뚜렷한 〈聖王〉의 개념을 고찰하여 보기로 한다. 聖王 이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時와 연결되어 있다 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時란 天時룰 뜻하는데 자연의 계절적인 변화 뿐만 아니라 王者가 일어나는 시기를 가리켰다.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時勢 를 타느니만 못하고, 農具가 있다 하더라도 제때를 기다려서 경작하느니만 못하다.〉 29) 그런데 孟子는 四時의 순환과 마찬가지로 聖王이 일어나는 시기

29) 齊人有言 B, 難有智慧不如乘勢 難有磁基, 不如待時(「公孫丑」 上 I). 齊人들의 격언 으로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아 당시대의 일반적인 사고를 드러내는 말이라고 하

겠다 .

에도 일정한 순환적인 질서가 있다고 보아서 5 백년 週期說을 주창하였다. 그가 王 道를 실현하리라고 기대를 걸던 齊 宣王 이 燕울 정복한 후 孟子의 충고대로 仁政을 베푸는 대신 燕의 영토를 齊에 합병해 버리자, 孟 子 는 齊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기록된 孟 子 와 그의 제자와의 대담 안에 孟子의 5 백년 주기설이 소개된다. 孟 子 께서 齊나라를 떠나시자 充 燦 가 길에서 〈선생님은 어쩐지 언짢아 하시는 것 갇습니다 . 전일에 제가 선생님에게 듣자온 말씀입니다만, 君 子 는 하늘을- 원망 하지 않고 사람을 허물하지 않는다던데요?〉 하고 여쭙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때도 한 時期였으며, 지금도 한 時期다. 500 년이 되면 반드시 王者가 일어나 고, 그 동안에는 반드시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다. 周나라 가 홍한 이래로 700 여 년이 되었다. 그 數룰 가지고 따져본다면 王者 가 일어날 시기가 지난 것이다. 지금의 때를 가지고 궁구해 본다면 王者가 일어나기에 적당한 시기인 것이다. 저 天 이 아직 天下를 평화롭게 다스리게 하려들지 않는 것이지 만약에 天下률 평화스럽게 다스리게 하려 든다면야 오늘날의 세상에 나를 버리고 그 누가 그 일을 감당하겠는가? 내가 무엇 때문에 언짢아 하겠는 가?〉 30)

30) 孟子去閔 充虐路問曰, 夫子若不豫色然 前日虐問諸夫子曰, 君子不怨天, 不尤人. 曰, 彼-時 此一時也 五百年必有王者興, 其間必有名世者 由周而來, 七百餘歲矣 . 以其數 R lJ 過, 以其時考之月 l j可矣 . 夫天未欲平治天下也, 如欲平治天下, 當今之世舍我其言誰也 . 吾何爲不豫哉(「公孫丑」 下 13).

孟子의 정치적 포부가 좌절된 時點에서 孟子 자선이나 그의 제자가 같은 환경에서 발설되었던 孔子의 말씀을 상기했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는다는 주관적인 견해에서는 孔子와 같은 입장을 취하였지만 孟子는 孔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역사관 울 언급하고 있다. 곧 周가 생겨난 이래로 500 년이 넘어 700 년에 이르렀으므 로 王者가 나울 때가 지났다는 것이다.

『 孟 子 』 안에서 5 백년 주기설을 다시 설명하고 있는 곳은 「盡心 鎬 」 下 38 장이므로 이 구절을 함께 살펴 보겠다. 여기서 孟 子 는 堯舜으로부터 湯王 까지가 500 여 년이고, 湯 王 에서 文 王 까지가 500 여 년이며, 文 王 에서 孔 子 때까지가 500 여 년이라고 구분함으로써 위와 약간의 차이룰 보인다. 「公孫丑 篇 」의 5 백년 주기설에는 孔子가 王 者로서 등장하지 않는데 비해 교 千 의 결론을 이루는 「盡心 篇 」에서는 孔子를 한 주기의 끝으로 잡고 있다. 이 말은 물론 孔子가 『 春秋 』 를 지음으로써 聖王의 일을 실제로 한 것과 다름이 없다는 孟子의 해석에(「 勝 文公」 下 9) 기초를 둔 것이지만 ,3 1)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500 년이러는 숫자를 孟子가 어디서 얻은 것인가이다. 5 백년 주기설은 詩 書 나 『春秋左傳』은 물론 『 論語 』 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다. 후에 荀 子 는 子思와 孟子가 孔子룰 잘못 해석하였다고 그들의 오류를 지적하는 중에 五行說울 으뜸으로 들고 있다. 〈옛일을 의거하여 스스로 이론 울 만들어 五行이라고 일컬었는데 심히 치우치고 어긋나는 바가 있어서 본받을 바가 없다.〉 32) 사실 五行說은 稷下의 士였던 鄒 1 균에 의하여 체계화 되는 일종의 역사철학으로서 五行의 德울 각 왕조에 적용하여 역사의 순환 론을 주창한 것이다. 鄒衍 이전부터도 五行사상이 商에 만연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孟子의 5 백년 주기설 역시 孟子가 齊에 체류할 때에 수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郭洙若은 孟子의 사상에 끼친 五行說의 영향을 5 백년 주기설 에서뿐 아니라 仁義禮智誠에서도 볼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33> 1973 년 長沙에서 출토된 老子甲本卷后古 1 失 書 에서 仁義禮智룰 四行으로 부르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34) 위의 학설은 상당한 신빙성을 갖는다고 보겠다.

31 ) 孔子를 素 王이라고 본 孟子의 입장은 公羊學派에 영향을 주었고 漢代 및 淸末의 今古文學派의 논쟁의 쟁점이 되었다. 32) ~主舊造說, 謂之五行, 若辭違而無類(「非十二子」 11) . 33) 「十批判書」 科學出版社(초판 1945), 1962, 133~4 면. 34) 「馬王推漢墓흡 書 」, 文物出版社, 1974, 236. 서기전 3 세기나 VII 기의 것으로 보여지므로 孟子보다는 100 여 년 늦다고 보겠다 .

堯 舜 湯王, 文王으로 이어지는 聖王둘은 시공을 초월하는 규범성을 지니고 있다는 면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비록 그들의 시대와 환경

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王者로서의 仁政울 베풀었다는 사실에서 일치점을 지니고 있다. 孟子께서 말씀하셨다. 〈舜임금은 諸馮(山東省)에서 나서 負夏(衛나라 땅)에 옮겨 갔다가 鳴條(山東省)에서 죽었으니 東夷의 사람이다. 文王은 岐周(陝西 省)에서 나서 畢맵的뗀§省)에서 죽었으니 西夷의 사람이다. 이들은 피차간 땅의 거리가 천 여 리나 되는데 뜻을 이루어 중국에서 王者의 정치를 행한 것은 符節 울 맞춘 것 같으니 先聖과 後聖은 그 행한 법도가 하나이다.〉 35)

35) 孟子曰, 舜生於諸馮, 遷於負夏, 卒於鳴f急 東夷之人也. 文王生於岐周, 卒於畢里t, 西夷 之人也 地之相去也千有餘里, 也之相後也千有餘歲, 得志行子中國若合符節 . 先聖後聖, 其揆一也(「離婁」 下 I).

舜과 文王의 道가 하나라는 것은 그들의 치세 때에 백성들은 부유하게 되고 곡식이 넉넉해져서 모든 이가 마음의 인자함을 실천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盡心」 上 23). 그런데 孟子는 그들이 행한 道의 핵심은 같았지만, 이들 聖王들 사이에도 등급이 있다고 하였다. 堯와 舜은 仁울 자신들의 본성으로 행한 최고의 聖王 이었고, 湯王과 武王은 仁울 노력한 결과 자기 것으로 만든 그 다음 수준의 聖王이었으며, 五覇는 仁을 빌리려고 애쓴 인물이었다고 차등을 두었다 .36) 그런데 孟子의 聖人觀 안에 여러 등급과 다양한 종류가 있다는 사실은 孔子 를 위시하여 君主의 자리에 오르지 않는 인물들을 언급할 때에 더욱 명확해 진다. 또한 정치와 깊이 관련되기는 하지만 임금은 아니었던 이들 〈聖人〉 의 모습 안에서 孟子의 보편적 인간이상이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36) 堯舜性之也 湯武身之也, 五覇假之也 久假而不歸, 惡知其非有也(「盡心」 上 30). 性之 란 자연스러워진 것을 지칭하고, 身之란 체득하는 것이며 (古注), 假之란 仁義를 빌리 는 것이나 오래 돌려주지 않으면 자기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고 여운을 남긴다(「盡 心」 下 33).

孟子의 聖 A 사상과 聖之時者로서의 孔子 墨子의 聖人은 三代聖 王 울 지칭하기 때문에 堯舜禹湯文武가 항상 열거된 다. 다시 말해서 墨家의 聖人觀 안에는 聖王의 이미지만이 있기 때문에 聖人 의 족보는 文王과 武王에서 그친다. 그에 비하여 孟子는 훨씬 더 포괄적이고 계속되는 聖 A 의 개념을 지니고 있어서 伯夷, 伊尹, 柳下惠, 孔子가 聖人 안에 포함된다. 이들은 각기 다른 시대에 다른 환경 속에 살면서 독특한 결정을 통해 聖人의 길을 실현하였다고 보기 때문에 孟子가 지닌 聖人像의 다양성을보여준다. 처세하는 방법이 같지 않네. 정당한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고、 정당하게 맡게 된 백성들이 아니면 다스리지 않고, 다스려지면 나가고, 혼란해지면 물러나 는 것이 伯夷였네. 어느 누구를 섬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어느 누구를 부린둘 백성이 아니겠는가 하고, 다스려져도 나가고, 혼란해도 나가는 것이 伊尹이었 네. 벼슬을 살 만하면 벼슬살이룰 하고, 그만 두어야 할 계제가 되면 그만두고, 오래 머물러 있을 만하면 오래 머물러 있고, 빨리 떠나가야 할 계제가 되면 빨리 떠나가는 것이 孔子였네. 다 옛날의 聖人들일세. 나는 여태까지 그처럼 할 수는 없었지만, 소원인죽 孔子롤 배워 본받는 것일세.37)

37) 不同道 非其君不事,非其民不使, 治ff lj 進' lLRI J退, 18 夷也. 何事非君,何使非民,治亦進, 亂亦進,伊尹也. 可以仕則仕, 可以止則止, 可以久!lj久, 可以速月 1 j速, 孔子也. 皆古聖人 也 吾未能有行爲 乃所願 則學孔子也(「公孫丑」 上 2).

그의 제자 公孫丑와 孟子와의 대담 속에 나오는 말로 伯夷와 伊尹과 孔子 가 구체적인 결단 및 그런 결단을 하게 된 정치적 거취에 대한 원칙에 있어 서는 서로 달랐지만, 모두가 聖人의 한 길을 걸은 사람들이었다고 보는 孟子 의 견해는 孔子의 聖人觀과 차이를 드러낸다• 『論語』 에서 孔子는 伯夷와 伊尹울 君子라고는 불렀지만, 聖人이라고까지는 하지 않았다. 孔子가 聖人의 칭호를 허용한 사람들은 堯와 舜뿐으로 그는 士와 君子와 聖人 사이에 차등 울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孔子의 도덕적 위계성을 인식하지 않은

듯이 孟子는 君子대신 聖人을 중심저 인간상으로 확립시키면서 聖人의 개념을 확대시키고 그 안에 여러 종류 또는 차등울 두게 하였던 것이다. 「萬章篇」 下 1 장에 보면 公孫丑와의 대담과 거의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 伯夷 伊尹 다음에 춘추시대의 정치가인 柳下惠가 인용되어 더러운 임금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작은 벼슬을 사되하지 않은 화해의 인물로 소개된 다. 그러면서 이 네 聖人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伯夷는 聖人으로서 맑았던 사람이고、 伊尹은 聖人으로서 정 치적 사명을 다했 던 사람이며, 柳下惠는 聖人으로서 (모든 이와) 조화를 이물 수 있었던 사람이 고 孔子는 聖人으로서 때를 알아서 그에 따라 적중한 일을 해나간 사람이다. 孔子 같으신 분을 集大成했다고 하는 것이다. 집대성했다는 것은 (음악연주에 비유하면) 금속소리에다가 옥소리를 떨쳐낸 것이다. 금속소리라는 것은 조리있게 시작하는 것이고, 옥소리를 떨쳐낸다는 것은 조리있게 끝맺는 것이다. 조리있게 시작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智之事)이고, 옥소리를 떨쳐낸다는 것은 성인의 일(聖之事)이다. 智는 비유하자면 기교이고, 聖은 힘과 같은 것이다. 百步 밖에 서 활을 쏘는데, 목표물까지 도달하는 것은 힘에 의한 것아지만, 과념에 적중하 는 것은 그대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다 .38)

38) 伯夷 聖之淸者也. 伊尹, 聖之任者也. 柳下惠, 聖之和者也. 孔子, 聖之時者也. 孔子謂集 大成. 集大成也者 金聲而玉振之也. 金聲也者, 始條理也 玉振之也者, 終條理也. 始條理 者智之事也. 終條理者聖之事也. 智, 뿔則巧也. 聖, 뿔ffiJ力也. 由射於百步之外也, 其至, 爾力也, 其中, 非爾力也(「萬章」 下 I).

伯夷의 맑음과 伊尹의 사명감과 柳下惠의 화합함은 聖人의 한 면으로서 한 면만을 잘 실천한 사람들에게도 孟子는 聖人이라는 칭호를 거리낌없이 부여한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을 모두 갖추어서 때에 따라 적중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孔子야말로 최고의 聖人아라고 보았다. 孟子가 孔子에게 부여한 〈聖之時者〉라는 칭호는 『論語』에서 발견되는 〈權〉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權이란 중량을 다는 저울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기가 처한 환경 전체를 저울질하여 道에 적합한 구체적 행동을

할 수 있는, 각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깊고 은밀한 실천규범을 지칭하였다. 그래서 孔 子 는 함께 배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함께 道 를 지향하는 일이고, 함께 道를 지향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함께 서서 일을 하는 일이며, 그보다도 더 어려운 일은 함께 國 事 를 저울질(權)하는 일이라고 하였다(「子 年 」 30). 「中 庸 」과 『 周易 』 에서 〈時中〉이라는 전문용어로 정착하고 儒 家 에서 최고의 덕으로 여겨진 時에 적중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역동적인 능력은 원래 孔子에서 발단하여 孟 子 에 의하여 聖 A의 최고의 덕으로 부각 되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孟子는 이렇게 덕을 집대성한 孔子를 모든 聖人둘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보고 〈이 세상에 사람이 생겨난 이래로 孔 子 만한 인물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膜文公」 上 9) 는 대담한 발언을 했던 것이다. 聖之時 者 로서 최고의 聖人이 지닌 특성을 다르게 표현하면 智와 聖울 겸비한 것이다. 『 孟子』에서 智와 聖이 지닌 관계는 이중적이어서 덴 令語 』 에 서의 智 와 仁과의 관계와 유사하다. 광의의 聖은 智와 力을 모두 포괄하고 있지만, 협의로 말할 때 智와 聖은 대비된다. 곧, 목표를 똑바로 파악하는 지혜를 智 라고 부르고 거기에까지 도달하게 하는· 도덕적 힘을 聖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智 는 때를 제대로 저울질할 수 있는 판단능력이고, 聖은 옳다고 판단된 것을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도덕적 결단이라고 하겠 다. 선천적 도덕심의 강조 때문에 전체적으로 『論語 』 에 비해 智의 비중이 훨씬 작아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 孟子 』 에서도 是非之心(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을 올바로 키워서 人倫을 밝혀야 된다는 인식은 계속된다고 하겠다. 사실 孟子는 孔子를 자신의 학문의 지표로 한다는 뜻을 여러 번 고백하고 있는데, 〈學孔子〉란 곧 孔子의 〈聖之時者〉로서의 면모를 자신 안에 구현시 키려는 노력일 뿐만 아니라 그런 孔子의 가르침을 드러낼 수 있는 이론적 체계를 확립시키려는 노력이기도 하였다. 전국시기를 주름잡던 제자백가~준과 의 논쟁을 통하여 孟子는 墨家, 楊朱, 農家, 法家 등의 학설을 異端으로 배격 하고 孔子만이 聖王의 道를 이어받은 정통의 후계자임을 확증하려 했던 것이다. 儒家전통 안에서도 曾子와 子思의 學風을 이어받아 孝룰 비롯하여 인간의 마음 안에 주어전 도덕성에 초점을 맞춘 孟子는 盡心울 통한 인간성

의 완성을 목표로 하였다. 그런데 盡心은 개인적인 修己의 면과 더불어 공동 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孟子의 聖人觀 안에는 四端의 완성자로서의 〈聖人〉의 모습과 더불어 仁政을 베푸는 〈聖王〉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 단, 孔子 이래의 修已安 A 의 理想이 지닌 聖人의 양면성을 孟子는 仁 자체 보다도 仁政으로 종합함으로써 孔子에서보다 정치성이 훨씬 강하게 드러나 게 했다고하겠다. 4 孟子의 盡心的 해석이 지닌 특성 孔子를 사모하여 그의 가르침을 변호하면서 전국시대의 學風 속에서 孔子 學 새롭게 해석한 孟子의 사상체계 안에는 당시의 여러 가지 사상이 부분 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道家的 養生術에서 발전한 氣의 사상이 儒家的해석을 거쳐 浩然之氣를 키우는 수양론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五行說은 聖王의 500 년마다의 주기적 도래라는 역사관으로 孟子사상 의 일부분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孟子의 사상정립에 있어서 가장 직접적 자극이 된 것은 墨家였다. 1 儒家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墨家의 도전에 孟子는 儒家의 도덕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이해를 체계화시킴으로써 이론적 응전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墨家와의 사상적 투쟁에서 형성된 孟子의 사상을 열거해보자면, 다음 세 가지 점을 들 수 있다. 첫째, 孟子는 墨家의 兼愛와 利天下에 대항해서 仁羲禮智와 仁政을 부각 시켰다. 墨子는 인간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서로 사랑하고 이롭게 한다면 聖王의 정치가 행해질 수 있다고 보았으므로 儒家가 가르치는 禮에 따른 仁의 완성과정을 別愛라고 혹평하였다. 이에 대해 孟子는 仁義禮智란 문화적 전승에 의하여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인위적 규범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마음 안에 주어진 本性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마음 안에 뿌리 박힌 四端울 키워서 피어나게 한디는 그의 盡心論은 개인적 수양에서 그치 는 것이 아니라 仁政에까지 확대되는 것으로 남의 곤경을 차마 보지 못해

하는 마음을 그대로 정치에 적용할 때 곧 王者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 서 비록 親親과 仁과 愛로 가족으로부터 시작하며 만물에까지 퍼지는 사랑 의 점차적 확대를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 근본은 결국 하나인 것으로 孟子는 孝弟야말로 곧 仁政울 가능케 하는 마음이라고 결론내렸다. 孟子가 이와 같아 孔子의 사상 안에서도 특히 도덕적 내면성을 강조하여 盡心의 수양론 과 民 /L 을 규범으로 하는 정치론을 제시한 것은 墨家의 兼愛와 尙同사상에 응답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둘째로, 孟子는 天人관계의 정립에 있어서도 孔子사상에서는 중요한 일면 을 차지하는 〈知我者〉로서의 관계형성면을 거의 배제하고, 오로지 盡心울 통해서 자신의 本性을 알게 된 사람만이 天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다는 지극히 내면적이고 주체적인 해석을 내렸다. 그런데 이것 역시 天志를 최고 의 규범으로 내놓은 墨家에 대한 반작용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우선 인격적 요소가 함축되어 있는 命이라는 용어 자체가 델g,心篇」을 제의한 孟子 전체에서 天命의 의미로는 쓰이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墨子는 儒家의 운명론을 비판하면서 결국 天志를 알 수 있는 것은 天子뿐 이라는 보수적인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墨子는 聖王을 모범으로 하는 天子 를 통한 연쇄적인 위계질서 안에서만이 天志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는 尙同說울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墨家의 天志는 의부적 규범으로서 먼저 天子가 그것을 깨달아 諸侯,大夫, 士 등이 중개자들을 통해 백성에게까지 전달되는 것인 데 비하여 孟子의 天意는 정치적으로는 공동체적 民心을 통해서, 개인적으로는 인간 본성 안에 주어진 도덕성의 완성을 통해서 드러 난다는 내면성을 지닌다 . 天意가 모든 인간의 마음에 內在되어 있다는 사상 은 사회적 신분의 차등을 인정하면서도 근본적인 인간평등을 주창하는 것이 며 도덕적 天人관계에 기초를 둔 革命論의 발전을 가능케 한 것이다. 셋째로, 孟子의 聖人觀이 仁보다 仁政이라는 정치성 또는 공동체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 역시 墨家와의 대결에서 나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39) 39) 勞思光은 이것을 〈仁의 효용화〉라고 부르면서 순수도덕 인 仁에서부터 발전하여

실제적 성격을 떤 것으로 보았다(I권, 149 면). Creel 은 孟子의 四端 역시 공리적 학설 이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96 면), 지나친 단정이기는 하지만 묵가의 영향을 간접적으 로 시사한 것이라고 하겠다.

三代聖王을 兼愛의 규범으로 높이며 강력한 王者像을 제시한 墨子에 대항하 기 위하여 孟子는 修己에 치중하는 君子像보다 더 설득력이 있는 인간상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그는 고대 聖王들의 治世를 儒家的 仁政의 모범으로 해석함과 동시에 孔子와 같은 도덕의 완성자로서의 聖人의 모습을 聖王둘과 동일선상에 위치하게 하였다. 墨家의 〈聖王〉이 임금을 위한 군주의 理想像이 었다면, 孟子의 〈聖人〉은 仁政울 베푸는 聖王일 뿐 아니라 人格의 완성자라 는 면에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孔子에서의 仁이 모든 德의 완성이라는· 면에서 인간성숙 자체를 상칭하는 의미를 가졌던 것과는 달리 孟子에서의 仁은 인간 본연의 不忍人 之心울 확충한 王者의 仁政을 주로 지칭한다는 면에서 상당한 시각의 차이 를 드러낸다. 孔子와 孟子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차이는 墨家가 제창 한 聖王사상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될 역사적 상황에서 孟子가 仁政이라는 정치적 성격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하겠다. 결국 孟子는 사상의 내용 면에서는 孔子를 계승하였으나 강조점에 있어서는 墨家 등과 더불어 仁政울 갈구하는 전국시대 중기의 시대적 분위기를 공유 하고 있었댜 한마디로 孟子는 그 자신의 지평선상에 서서 孔子를 재해석하 였으며 당시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도록 孔子의 가르침을 재구 성했던 것이다. 孟子의 사상 안에 문화적인 면과 스승 및 교육의 중요성이 孔子에서보다 훨씬 빈약한 사실 역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非樂과 節用울 주장했던 墨家 의 영향 혹은 공유했던 시대적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孔子룰 지극 히 사모했고 그의 가르침을 聖王之道의 정동적 후계로서 받들기 위해 일생 을 받친 孟子의 儒敎 해석이 『論語』에 보존된 孔子의 사상과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은 홍미로운 사실이다. 결국 이 사실은 모든 이해란 하나 의 해석이며, 재구성의 과정을 동해서만이 하나의 전통이 계승되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墨 家 등과의 사상적 논쟁 속에서 孟 子 의 儒敎 해석이 주관적인 心과 이를 확충한 仁政울 강조하게 되자, 유교전통 자체 안에서 객관성을 띤 禮의 중요 성과 전승되는 文化의 공동체성을 재확인하려는 노력이 움트게 된다. 다음 두 장에서 살펴보려는 荀子는 孟 子 가 소홀히 한 孔子사상의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체계화했다는 면에서 原始儒敎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인물 이다. 이 책 서론의 문헌학적 고찰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의 학문적 연구에 있어서 宋學의 荀子비판을 무조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다. 荀子의 사상 전개를 儒敎의 역사적 발전 속에서 공평한 눈으로 고찰 할 때에만, 있는 그대로의 儒 敎 및 중국 고대의 사상전통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6 장 孔子 人間論에 대한 荀子의 禮論的 해석 전국시기말, 秦始皇帝의 중국통일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제자백가와의 논란 속에서 儒家의 사상을 집대성한 이론가는 荀子였다. 荀子를 접하면서 우선 놀랍게 느껴지는 사실은 그가 墨家나 道家, 法家, 名家는 물론, 같은 儒家에 속하는 孟子 역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荀子가 孟子 를 비판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하나는 五行과 禮에 관한 문제로서, 荀子가 여러 학파의 오류를 지적하는 「非十二子 篇」과 「解薇篇」에서 언급한 것이고, 또 하나는 「性惡篇」에만 집중적으로 나오는 것으로서, 孟子의 性善說에 대한 공격이다.1)

I ) 『荀子』 안에 맹자(孟祠)가 언급되는 횟수는 전부 9 번인데, 그중 「非十二子篇」에 2 번, 「解薇篇」에 한 번 언급되기 때문에, 첫째 분류에 들어가는 것은 전부 3 번이다. 「性惡篇」에서는 5 번 모두가 孟子 B 의 형태로 나오고 있으며, 荀子의 학설과는 칙집 관계가 없는 「雜篇」에 속하는 「大略엷 Rl 한 번 언급되고 있다(荀子引得, Harvard- -Yenc hing Instit ute Sin o log ica l Index Series 22). 『荀子』 본문과 각 편 안의 숫자는 引 1 운을 따랐다 . 「性惡엷 F} 「雜篇」에 대한 문헌학적 비판은 이 책 서론을 참조.

우선 「非十二子篇」을 보면, 荀子는 子思 및 孟子학파가 孔子의 학설을 잘못 해석하여 세상의 儒者들을 혼돈시키고 있다고 비난한다. (이들은) 대략 先王울 따르기는 하지만 그 전체적 계통(統)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재질이 격렬하고 뜻이 커서 듣고 본 바가 많고 넓다. 지나간 옛것에 의거하여 (자신들의 ) 이론을 만들어서 이것을 五行이라고 부른다. 심히 편벽되고 어긋나서 규범으로 삼을 것이 없으며, 애매하고 숨겨져서 이론이라고 할 만한 것을 진술함이 없고, 폐쇄적이고 간략해서 명확한 해설을 해주는 바도 없다. 그들의 말을 꾸미고 공경스럽게 하여서 이르기를 이것이 참으로 앞선 君子(곧 孔子)의 말씀이라고 한다 .2) 『 孟子』에 五行이라는 말 그대로는 쓰이지 않았으며, 楊係이 주를 단 것과 같이 仁羲禮智信을 가리키는 五常으로나 5 백년 週期說같이 인륜과 역사의 톨로 孟子가 오행사상울 간접적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전 그런데 『論語 』에는 언급되지 않는 陰陽說을 거리낌없이 수용하였고, 그의 後王사상에서 드러나듯이 시대에 따른 해석의 발전을 긍정하던 荀子가, 五行개념은 孔子의 사상을 분명 그르친 것이라고 확신했다는 사실이 홍미롭다. 이 바판의 전모를 밝히기는 힘들어도 荀子는 五行사상이 함축하고 있는 운명적인 요소를 부정하였을 것이다. 〈統〉을 모른 다는 것은 주석가들이 지적하듯이 紀綱울 세우지 못했다는· 뜻으로, 子思와 孟子학파가 지닌 禮的 윤곽의 결여, 곧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규범성 울 소홀히 하여 이를 붕괴시킬 위험이 있다고 본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荀子가 그 전승의 후계자로 자처하는 仲尼와 子弓은 바로 규율과 규범을 2) 略法先王而不知其統, (1 目)然而材劇志大, 聞見雜博, 案往舊造說, 謂之五行, 若個違而無 類, 幽隱而無說, 閉約而無解 案飾其緖 而祗敬之曰, 此眞先君子之言也(「非十二子篇」 102). 猶然은 那懿行의 설에 따라 宋本에 의거하여 然으로 해석함. 類는 王念孫의 설에 따라서 法또는律로봉 . 3) 徐復觀은 荀子가 이 篇을 저술할 때에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갇은 『孟子』가 그 제자들의 ' 손에 의해서 완성되고 있었으리라고 본다 . 따라서 그는 荀子가 孟子를 비판 할 때에 책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稷下의 학원에서 孟子의 학설에 대해서 둘은 바에 의거했으리라고 설명한 바 있다(『中國人性論史』, 「先秦篇」, 商務印홉館, 1969, 237 면). 龍宇純은 여기서의 五行울 결국 性善說에 대한 비판으로 보았는데 (『荀 子論集』, 學生書局, 19&7, 103 면), 위 인용문의 내용상 荀子가 지적하는 바는 윤곽, 곧 禮의 결여이지 人性論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일정하게 하여 聖王의 文章울 완전하게 한 사람들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荀子와 孟子의 사상을 구별짓는 가장 큰 획은 文章, 곧 문화의 뼈대가 되는 禮의 문제에 있었다 .4) 孟子롤 비난하는 또 하나의 문구는 「解薇 篇 」에서 볼 수 있는데, 여기서도 역시 荀子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禮의 실천에 관한 것이다 . 孟子는 (德울) 행하는 일에 실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아내를 내보내 려고 했으니, 어찌 능히 스스로 강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 ... 아직 전일한 상태 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5)

4) 갇은 「非十二子篇」에서 荀子는 賤儒와 聖人을 구별하고 있는데, 賤信란 겉으로는 예의를 차리지만 일은 하지 않고 눌기만 하는 학자들을 가리키고, 부지런하고 교만하 지 않으면서 만사에 응하여 바르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참된 君子라고 정의한다. 역시 禮의 구체적 실현을 규범으로 본 것이다 . 5) 孟子惡敗而出妻 可謂能自强矣……未及好也(「解萩篇」, 63~64). 『韓詩外傳』 卷九에 의하면 孟子의 아내는 혼자서 있을 때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는데, 孟子가 문을 열고 들어가 그것을 보고서 그의 어머니에게 아내가 禮를 다하지 못하므로 내보내겠 다고 청하였다. 그러나 孟子의 모친은 오히려 기척을 내어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은 孟子의 無禮를 책하여 아내를 버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로서 荀子의 내용과는 차이가 있다.

『韓詩 外傳』에도 전하고 있는 이 사건의 역사성을 확인할 길은 없으나, 4, 50 년 정도의 시대적 간격을 지녔던 荀子 당대에 孟子의 出妻사건은 일반 적으로 알려진 일화였을 것이다. 그리고 荀子는 이 일화를 孟子의 禮 실천이 얼마나 규범성이 없이 편협했는가물 보여주기 위해서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일화의 역사성이나 해석상의 공정성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荀子가 孟子룰 비난할 때에 그 핵심이 되고 있는 주제가 禮의 문제 였다는 사실에 있다. 사실 禮는 荀子의 사상 전체에서 중심이 되는 주제로 서, 여기서 孟子와 荀子의 孔子해석을 구별하는 가장 분명한 구분점을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荀子의 「性惡篇」에서는 이러한 禮의 문제

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앞부분에서는 언급되지 않던 人性論울 주제로 하여 孟子에 대한 비판이 일관성 있게 이루어진다는 것아 특이하다. 孟子가 말하기를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은 틀린 말이다〉라고 대답한다. 무릇 옛날이나 지금이나 天下가 善하다고 이르는 것은 이치에 맞고 평탄하게 다스려진 것이고, 惡이라고 이르는 것은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위태롭고 도리에 어긋나서 혼란된 것이다. 이것이 곧 善惡의 구분인 것이다 . 이제 참으로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이치에 맞게 평탄하게 다스림이 가능하겠는가? 그렇다면 聖王은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禮義는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6)

6) 孟子曰, 人之性善 B, 是不然 凡古今天下之所謂善者, 正理平治也. 所謂惡者, 偏險伴亂 也 是善惡之分也巳. 正理平治葬 Jl l j有惡用聖王, 惡用禮義矣哉(「性惡篇」, 36~38).

聖王과 예의 및 인간 본성과의 관계는 후에 자세히 디루기로 하고, 단지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荀子 전체 안에서 性善의 문제를 논제의 초점으로 하고 있는 것은 이 「性惡篇」에서뿐이라는 사실이다 . 현대 문헌학적 바판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23 편인 「性惡篇」은 원래 劉向本의 篇次에 의하면 26 편으로서 부록적 성격을 띈 제 4 수집 인 「雜篇」에 속하였다 는 점과 더불어 논제의 특이성 때문에 荀子의 사싱을· 취급할 때에 주변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고자 함을 밝힌다. 다시 말해서 「性惡篇」이 荀子사상 의 일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면적 발전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균형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性惡 篇五끌 한 면에 제쳐두고., l 편에서 22 편까지롤 중심으로 하여 그 골격을 찾고 자 한다는 말이다. 그 사상의 윤곽이 분명히 드러난 연후에 「性惡篇」이 그 안에서 지니는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실제에 있어서는 性惡이 아니라 禮사상을 중심으로 한 荀子의 儒家的 해석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러한 사도가 荀子 연구에 절실히 필요한 이유는, 性惡說을 그의 중심사 상으로 놓고 荀子사상을 체계화하려 한 학자들의 다음 결론에서 충분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 대표적 예를 들자면, 첫째 郭洙若은 그의 『十批

判 書』 ( 1956) 에서 荀 子는 ' |生惡울 말함으로써 天이 부여한 人ft이란 악한 것이 며, 인간 안에 있는 좋은 것은 모두 후천적 노력의 결과라고 간주하고 性과 僞룰 대립적인 것으로 보았다고 풀이하였다. 또한 荀 子 는 解薇를 주장하여 全一하고 평정하게 된 心의 자율성을 말하고 있는데, 이미 性惡說을 주장하 는 입장을 취한 荀子가 이러한 心說울 가진다는 것은 大규眉이라고 그는 결론내렸다 (214~220 면). 인간이 본성적으로 그 안에 객관적 사리를 알 수 있는 지적 역량을 가지고 있다면, 人f£이 완전히 방향성이 없이 혼란된 것이 라고만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반문을 郭洙若은 제기하였다. 徐復觀은 그의 『 中國人性 論 史』 (1969) 에서 荀子가 人性에는 방향성이 없다 고 주장하였는데, 방향성이 없다면 사실 惡한 것이라고도 칭할 수 없는 것으 로 그의 性惡的 주장은 엄밀한 논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禮와 師와 法 및 君主 의 政治를 중시하려는 시대적 요구에서 배출된 것이라고 보았다 (235~238 면). 더욱이 그는 荀子의 性惡說은 내부적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한면으로는 欲을 惡한 것으로 말하면서 또 한면으로는 欲을 禮로써 조절(節)하고 키워야(養)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256 면). 牟宗三은그의 『 名家與荀子』 (1979) 에서 荀子는禮殺가聖人의 僞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는데, 聖 人이 노력함으로써 영구불변한 人道를 완성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하여는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226 면). 荀子가 주장한 禮義의 체계 또는 기강(統)이 도덕적인 것이라면, 그 근원이 外在하는 것이 아니라 內在하는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荀子 가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의 聖人의 僞란 결국은 虛構에 불과한 것이라고 평한 바 있다. 牟宗三의 견해를 더 발전시키고 있는 蔡仁厚는 그의 『 孔孟荀 哲學』 (1984) 에서 禮가 의재적 표준이므로 心이 그것을 認知한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보편적 필연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417 면). 이런 결론은 荀子 자신의 주장과는 상반되는 것이므로 새로운 각도에서 그의 사상체계 전체를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l 荀子의 시대적 특성 :他學派와의 관계 안에서 초기 法家사상이 강했던 趙나라에서 태어난 荀子는 7) 50 세경에 襄王에 의하여 복고된 晋의 稷下학원에 가서 10 여 년 동안 머물면서 세 번이나 祭酒 곧 學長으로 추천될 정도의 지도적 위치에 서서 당시의 학문 전반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획득하였다. 기원전 264 년경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시작 한 秦나라에 들린 荀子가 昭王과 접견하는 장면이 『荀子 』 「儒效篇」에 기록 되어 있고, 재상 范唯와의 대담은 「張國篇」에 소개된다. 한마디로 荀子는 法家的 통치를 覇道로 보았으며, 秦의 강건한 정치체계를 일면 긍정하면서도 그 안에 儒家의 가르침이 수용되어야만 비로소 王道의 실천이 가능·할 수 있음을 역설하여 儒家로서의 그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7) 荀子의 名은 況이었고, 荀卿 또는 孫 9t P 이라고도 불리는데, 옛 郁國의 公室 출신이므 로 그 公室의 자손이라는 의미에서 孫이라고 칭하고 卿은 존칭이다(金谷治, 『荀子』 下, 岩波書店, 1962, 428 면). 荀과 孫이 음이 가까와서 동했다거나 漢宣帝의 諱가 拘이 므로 荀울 피해서 孫으로 썼다는 설도 있다. 그의 연대 역시 분명치는 않으나 서기전 321~230 년경으로 잡는데, 齊襄王이 등위한 햇수가 280 년이고, 春申君이 암살된 햇수가 23 언이며 그 후 관칙을 은되하고 蘭陵에 거주했다는 『史記』의 간단한 기록에 의거한 것이다(『史記』, 「孟荀列傳」, 劉向孫卿新書敍錄, 東漢應郡風俗通 참조).

法家的 통일체계를 획일적으로 유지하던 秦에 그는 오래 머물지는 않았 고, 모국인 趙에 둘려서(기원전 261 년) 孝成王 및 臨武君과 戰略에 대한 논의 를 벌인 기록이 『 荀子』 「議兵篇」에 보존되어 있다. 여기서도 荀子는 권모술 수가 아닌 예의와 교화로 민심을 통일시켜야만 참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전통적 儒家의 입장을 명백히 표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荀子는 道家사상이 만연한 楚나라에 가게 되는데』촌의 春申君에게 초빙되어 蘭陵令에 임명되었 고 春申君의 사후에는 그곳에 은퇴하여 그의 만년을 보냈다. 이와 같이 荀子는 전국 말기의 대표적 사심H 글을 직접 경험하고 연구함으 로써 그때까지의 중국고대 사상을 독자적으로 비판하고 종합하여 이론적

체계화를 시도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체계적 종합에는 孔子가 해석하여 전승시킨 옛 聖 王 들의 사상, 곧 信 敎가 중십적 규범의 역할을 하였으며, 같은 低 家 내에서도 曾子 • 子 思 • 孟 子 와 대립되어 禮學에 중점을 두는 子弓의 학풍을 중요시하였다전 荀 子 가 孔 子 의 가르침을 禮 중심으로 해석하게 된 배경에는 그의 주지적이고 객관적인 성품뿐만 아니라 그가 살던 전국시대 말기의 정치사회 및 사상적 분위기가 상당한 몫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을 분석하기에 앞서서, 그의 시대적 배경을 타학파와의 관계 안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8) 子弓이 孔子의 제자 중에 누구인가는 분명치 않은데, 楊僚은 仲弓으로 보았고, 武內 義은 子游로 이해하였다(全集 80 면). 여하튼 曾子 • 子思 • 孟子가 孔子의 사상 중에 내면적아고 주관적인 면에 치중했다고 한다면, 荀子는 의면적이고 객관적인 면의 중요 성을 강조하는 학파를 계승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우선 『 荀子 』 「 富 國 篇 」과 「君道 篇 」을 보면, 〈옛날에는 萬國이나 있던 (諸 侯國들이 ) 지금은 (다 없어지고) 십수 개국만 남았다〉(古有萬國, 今有十數焉) 라는 전국 말기를 한마디로 묘사해 주는 荀子의 말을 읽을 수 있다. 이 시기의 정치적 현황의 일면울 보여주는 戰國策울 보면, 이미 周 왕실은 완전 히 小國으로 탈락되어 술책으로 명맥을 거의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음을­ 볼 수 있다 . 秦의 군대가 출동하여 天子의 寶器인 九鼎울 요구했을 때, 周는 齊의 군대를 九鼎울 그들에게 주겠다는 허위조건으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 고, 趙나라가 제사에 쓰는 공물을 재배하는 周의 祭地롤 빼앗았을 때에도 趙의 卜術長官에게 뇌물을 주어 趙王의 질병이 祭地가 노한 탓이라고 말하 게 함으로써 되돌려 받았다산 秦과 三晋과 楚 등 강대국들의 야망 앞에서 이제 周 왕실은 춘추시대에 보유하던 天子로서의 명분을 내세울 수도 없을 정도로 완전히 쇠퇴하였고, 따라서 周의 봉건제도는 실질적으로 봉괴한 것을 볼수있다.

9) 戰國策 東周策 참조. 조셉 니담, 『中國의 科學과 文明 l 』(이석호 外 공역, 을유문화 사), Ill 면, 도표 6, 〈周代封建國家〉에 이 당시 제후국들의 멸망연대가 자세히 표시되 어 있음 . 周初에 諸侯國은 약 800 정도였는데, 春秋時代 初期에는 약 140 으로 통합되었 고 戰國策에 소개되는 국가는 121» 국이다.

봉건적 신분제의 붕괴는 天子와 제후와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제후와 大夫 사이에도 적용되어서, 찬탈에 의하여 新國 家 롤 세웠던 전국 초기 군주 둘의 후손들이 다시 무능하게 되자 군주가 아닌 실력자들이 등장하여 실제 정치를 담당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齊의 孟菅君, 趙의 平原君, 魏의 信陵君, 楚의 春申君은 이 현상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고, 荀子는 바로 이 시대를 살던 思想家였던 것이다. 이러한 실력 위주의 사회적 변동은 또한 庶人들의 진출을 가능케 하여 戰國策에 등장하는 策士들 중에는 빈한한 집안 출신인 蘇秦이나 商人이었던 呂不韋 등 하층에서부터 성공하여 최고의 정치적 역량 을 발휘하던 인물도 있었다. 근년에 행해전 고고학적 발굴을 보더라도 西周 末에서 전국초까지에는 墓葬풍습에서 都의 사용과 禮器의 等差가 신분에 따라 지켜지고 있는데, 전국 후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신분적 구별이 혼란되기 시작하고, 日用器具둘이 禮器를 대체하는 현상아 증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0)

IO) 徐復晟 『周秦漢政治社會結構之硏究』, 103 면.

이러한 실질적 봉건제도의 붕괴를 현실로 인정하고 새로운 정치이념을 제공한 학파는 法家였으며, 法家的 이념을 받아들여 절대군주제의 정치형태 를 이룬 나라가 西方의 후진국이었던 秦이었다. 특히 秦의 孝公(기원전 361~338) 은 기원전 359 년 衛人인 商陝을 宰相으로 채용해 그의 유명한 變法을 강행케 함으로써 봉건귀족제도의 속박을 벗어 버리고 중앙집권화를 이루는 데 성공하였다. 우선 鄕邑울 합병하여 縣으로 승격시키고 이에 縣令 울 임명하여 귀족 영주의 정치세력을 박탈하였다. 토지제도는 경작권만이 인정되던 井田信 |l 를 賊稅制로 바꿈으로써 개인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分家를 법률화하였다. 따라서 새로운 농지의 개간을 격려하며 세금을 공평히 하고, 사회에 안정을 가져올 목적으로 連坐法울 통해 농촌인구의 流出을 막았다. 商軟의 개혁은 刑을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함으로써 法 앞에 서의 만민평등을 주장함과 동시에 政令을 통한 法家的 專制政治의 기초를 놓았다.11)

11) 錢穆은 秦나라가 東方文化에 갖는 태도가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곧 한편으로는 三晋울 중심으로 한 東方의 人士둘을 환영하고 등용하였지만(商峽, 范單 呂不韋 등), 또 한편으로는 이들의 정책에 반발하여 결국 이들의 대부분은 축출되거나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r 秦漢史』, 東大圖耆, 1957, 4~12 면). 〈王子犯法與 庶民同罪〉를 주장하던 상%!-o I 후에 王位에 오른 왕자에 의해 참형을 당할 때에도 秦人둘은 동정을 보내지 않았다고 戰國策秦策은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法家的 정치체계로 실력을 쌓아가던 秦이 기원전 28~ 에는 東方 의 齊나라와 비등한 실력자로 대두하여, 秦의 昭王과 商의 滑王은 각기 西帝 와 東帝로 칭하기로 합의를 보기까지 하였다. 이 두 東西 양대 세력의 두쟁 은 서기전 220 년, 秦이 齊를 마지막으로 정벌함으로써 끝이 나지만, 전국 말기의 정치현실 앞에서 儒家的 王道를 주장하는 것은 너무도 이상적으로 들렸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孔子나 孟子에 못지않게 荀子의 禮 중심적 사회정치관 역시 영구불변한 人道에 대한 儒家的 신념에서만 나울 수 있는 것 °l 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사회정치적으로 유동적이었을 뿐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문란하다고 느껴지리만큼 자유로웠던 분위기에서 儒家的 종합을 시도하던 荀子에게 도전으로 느껴지던 學派들은 어떤 것이었는가? 또한 디론 학파들 울 이단으로 단호하게 배척하던 孟子와는 달리, 荀子가 그들에 대하여 지녔 던 태도는 어떤 것이었는가? 이러한 의문점들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하여 荀子 자신이 孔子와는 다른 가르침을 주장하던 학자들에 대해 비판을 가한 「非十二子篇」과 「解萩篇」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荀子와墨家 우선 荀子는 墨家롤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실용에 눈이 어두워서 문화 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인간의 욕망울 적게 하는 데만 정신을 쓰다가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은 몰랐다.〉 12) 곧, 이들은 節用과 幕欲을 주장하여 인간

12) 〈墨于版於用而不知文, 宋子萩於欲而不知得〉(「解萩篇」 21). 위의 해석은 「天論篇 E} 〈宋子有見於少, 無見於多〉에 비추어서 梁啓雄의 荀子簡釋 주석에 따른 것이다. 宋罰 은 기원전 떼기말의 사상가로 冥欲과 禁攻을 주장하였는데, 『孟子』 「告子」 下에도

나온다 . 「天論篇」에는 墨家를 평해서 〈墨子有見於齊, 無見於崎〉라 했다 . 『荀子 』 내에 墨家가 직접 언급되는 횟수는 모두 20 번으로서 특히 文化의 중십이라고 할 수 있는 禮과 樂論에서 가장 칙접적 비난을 荀子로부터 받고 있다 . 冕家는 監鐵論(기원전 81) 의 학자들 토론에도 참여하고 있으므로 前漢시기까지는 墨家가 아직 활발하였다가 王充(I세기 ) 때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문화의 골격이 되는 分울 무시함으로써 사회의 질서를 문란시키는 과오를 범했다고 지적한다. 사실 墨家는 다른 어느 학파보다도 荀子가 명시적으로 이름을 들면서 논쟁을 벌이는 횟수가 가장 많은 學派로서 孟子시대에 못지 않게 荀子시대에도 이들이 상당히 활동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墨家 의 주장이 비교적 단순했기 때문이었는지 兼이나 利, 節用 등의 사상을 유교 체계 안에서 부분적으로 수용하기는 했어도 荀子의 사상적 종합에 그리 현저한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荀子와法家 초기 法家에 대하여 荀子는 〈法에 눈이 어두워서 賢者의 가치를 모르고、 권세를 고집하는 데에만 정신을 팔다가(신하의) 지혜를 (쓸 줄을) 모른다〉 13) 고 평하였다. 法이 제대로 실행되기 위해서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 法의 義롤 구체화시킬 수 있는 君子의 지혜가 필요한 것인데 法家는 이룰 소홀히 한다고 비평한 것이다. 「君道篇」에서 荀子는 이 점을 더욱 밝혀서 法은 인재가 있어야 사는 것으로 君子야말로 정치의 근원임을 역설하였다. 이런 면에서 「議兵篇」에 기록되어 있는 荀子와 李斯와의 대담은 홍미로운 것이 다.

13) 愼召仮於法而不知賢, 申子萩於執而不知知(「解萩篇」 21~22). 愼到는 서기전 300 년경 의 法思想家이고, 申不害는 君主가 臣下둘을 制御하는 術을 알아 위세를 지켜야 됨을 주장하였다. 法家의 대성자라고 할 수 있는 韓非子는 荀子의 제자로서 그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없다.

李斯가 스승인 荀子에게 여쭙기를, 〈秦나라가 四代 동안 승리를 거두고 군대 가 세상에서 제일 강하여 그 위엄이 제후들간에 떨치는 것은 仁義룰 행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편리한 바에 따라 하고자 하는 바를 행함으로써 된 것일 따름입니다〉. 荀子가 대답하기를 〈네가 제대로 알지를 못하는 것이다. 네가 말하 는 편리라는 것은 不便한 편리이고 내가 말하는 仁義라는 것은 大便의 편리이 다. 저 仁義란 정치를 잘 해나가면 백성들이 윗사람을 친하게 느끼고, 그들의 임금을 좋아하여 그롤 위해 죽는 것을 가볍게 여기게 된다. 그러므로 군대를 다스림에 있어서 군사들을 거느리는 일은 末事인 것이다. 秦나라가 四代 동안 승리하였지만 항상 조마조마하게 天下가 하나로 합하여 자기를 대적할까 두려워 하고 있다. 이것은 이른바 末世의 군사요 아직 本統울 지니지 못한 것이다…… 지금 너는 本에서 구하지를 않고 末에서 찾고 있으니, 이 때문에 세상이 어지러 워지는 것이다〉 .l4)

14) 李斯問孫gt P 子日, 秦四世有勝, 兵强海內, 威行諸侯, 非以仁義爲之也, 以便從事而已. 孫卿子曰, 非女所知也. 女所謂便者, 不便之便也, 吾所謂仁義者, 大便之便也. 彼仁義者, 所以修政者也. 政修ff!J民親其上, 樂其君, 而輕爲之死. 故曰, 凡在於軍, 將李末事也. 秦四 世有勝, 課課然常恐天下之一合而車 L 已也. 此所謂末世之兵, 未有本統也……今女不求之 於本, 而索之於末, 此世之所以亂也(「議兵篇」 72~78). 이 대화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이 책을 편집한 荀子의 제자들이 荀子와 한때 그의 제자였던 李斯와의 사상적 차이를 보였다는 접에서 중요하다.

荀子는 여기서 仁殺를 중심으로 하는- 儒家룰 本 또는 本統으로 보았고, 위세와 형벌을 정치수단으로 하는 法家를 末端의 것에 집중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따라서 비록 荀子가 때로 사회의 질서를 위해 상벌을 엄격히 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禮라는 기준을 규범으로 해야 된다는 기본원칙 안에서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상을 주되 기준에 넘치게 하지 말며, 벌을 주되 기준에 지나치지 말게 해야 한다.〉 15)

15) 賞不欲潛, 刑不欲造(「致任篇」 26). 또한 「疆國篇」에 공로를 세우고도 賞 받기를 사양한 子發이라는 楚나라 장수를 荀子가 先王의 마땅한 道를 위반하여 不遜의 찰못 을 범했다고 규탄하고 있는 것도 같은 사상을 드러낸다.

荀子가 法家의 法사상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말하는 法의 내용은 곧 禮로서, 前훈의 적용범위를 개인의 행위에 제한할 뿐만 아니라 객관성을 지닌 사회적 규범으로까지 확대하고자 한 하나의 과정적

방편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16) 李斯 및 韓 非 子 와 荀 子 와의 사제 관계 및 性惡說에 대한 지나찬 강조로 荀子의 禮사상이 法家사상의 기초가 되었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으나 荀子를 정확하게 읽으면 그의 禮사상과 法家의 法사상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法家의 정치관은 刑罰울 중심으로한 法治인 데 반하여 荀子의 儒家的 정치는 인격 울 이룬 군자의 德治를 핵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 면은 荀子의 政治사상을 고찰할 때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16) 林徐典은 荀子의 禮사상 안에는 法的 의마가 농후하며 이런 의미에서 法家사상으로 넘어가는 과도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보았으나(「荀子散文明思想與藝術」, Un ive rsit y of Sin ga po r e, Occasio n al Pape rs, 1978, 6 月, 5~6 면), 필자는 그 결론을 다르게 보고 . 있다.

荀子와名家 荀子가 비판하고 있는 세번째 학파는 名家로서, 그들은 〈언변에 눈이 어두워져서 사실을 알지 못한다〉 l7l고 혹평한다. 『 漢 書 』 「藝文志」에 의하면 名家는 禮官둘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廣義의 名은 언어로 표현되는 인간문화 전체를 가리키지만 俠義의 名은 官爵과 禮制]를 지칭한다. 武內義雄은 名家가 두 가지 부류로 나뉘어 발전하였다고 보았는데, 한 파는 刑名學派로 法律을 연구하였고, 다른 파는 論理學에 집중하여 보통 名家라고 불리는 說辯家들을 일으켰다. 名家의 주요관심사는 名과 實의 문제였는데, 그중에서도 惠施는 모든 사물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實의 상대성을 강조하였 고, 公孫龍은 名의 영원불변성을 중시하였다. 한마디로, 名家들은 이 세상의 사물은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데 비하여 名은 불변하고 보편적이며 절대적임 울강조하였다.

17) 惠于薛 而不知實(「解萩篇」 22). 「非十二子篇」에는 惠施(孟子와 동시대 인으로 魏의 재상이된 변론가)뿐만 아니라 鄭나라의 저변가였던 鄧析도 소개되고 있다 .

그런데 實보다 名을 중시하는 名家의 이론이 실제 생활에 적용될 때 일으 키는 문제는 심각한 것이었다. 『呂氏春秋』 「浩辭」에 전하는 公孫龍의 名家

的 해결책을 한 예로 들어보겠다. 趙나라가 秦나라와 맺은 상호조약을 깨고 秦이 공격한 魏를 도와주었을 때의 일이다. 항의를 해온 秦王에게 어떻게 답할 것인가를 묻는 趙王에게 公孫龍은 魏를 돕고 있는 趙를 왜 秦이 돕지 않는지 오히려 꾸짖는 편지를 秦王에게 보내라는 형식적인 해결책을 제시하 였다. 다시 말해서 名家의 논리적 변론에 대한 관심은 墨經과 더불어 중국고 대의 논리학 발전에는 기여한 바가 있었지만, 현실적 문제의 해결에는 별도 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荀子는 名家가 주장하는 바는 이론은 장황하지만 실제로는 쓸모가 없고 따라서 정치의 기강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실상 荀子가 제시한 正名論의 상당 부분은 名家들이 불러일으킨 문제에 대한 응답으로 쓰여진 것으로서, 근본적으로 荀子는 명칭(名)이란 사회적 약속으로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사실을 정확하게 지칭하여 인간의 사회생활을 질서있게 하고 소통을 도울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荀子의 정명론이 孔子 나 孟子에 비해 훨씬 더 이론화되고 논리적 세밀성을 갖는다는 데서 名家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학문의 세계에서도 제때에 그칠 줄을 아는 것, 곧 모든 이에게 이해가 되고 예의에 알맞는 한계 안에서 이론을 전개해야 된다는 儒家的 입장을 엄수하고 있다 .18)

18) 「修身篇」에서 荀子는 公孫龍과 惠施의 변론이 기괴하고 보통사람들의 상식으로 따라갈 수 없는 데까지 가는 것을 평하여 그칠 줄을 모론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不 荀篇」에서는 君子는 말에 있어서 남이 살피기 어려운 것을 설명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禮義之中에 있는 것만을 귀하게 여김을 강조하였다.

荀子와道家 끝으로 荀子가 비판하고 있는 학파는 道家인데, 道家와 荀子와의 관계는 다른 어느 학파와의 관계보다도 역동적인 것으로 荀子의 개념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중국 고대사상으로서 道家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老子에 대해서 荀子는 〈유약하게 굽히는 것만을 알고 강하게 펴나

가는 것을 몰랐다〉라는 한마디의 평을 남기고 있고, 莊子에 대해서도 〈天에 눈이 가리워져서 人울 알지 못했다〉 19 타고 평했을 뿐이다. 孟子가 墨子와 더불어 儒家의 맹적으로 지칭하던 楊朱는 지나가는 우화로 『荀子』 「王覇 篇」에 한 번 언급될 뿐이다. 그 의에 「非十二子篇」에 나오는 魏牟, 陳仲, 史뭡 田朋 등 넓은 의미로 道家에 포함될 수 있는 인물들에 대해 荀子는 간략하게 평하고 있다 .20) 즉 荀子는 이들의 특별한 생활양식이 사회의 규범 울 밝힐 수 없다는 면에서 道家的인 자유를- 방종으로 보았고, 결국 人道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전형적인 儒家的 판단을 내린다.

19) 有見於識 無見於信(「天論篇」 51) ;薇於天, 不知人(「解薇篇」 22). 주석가들은 治亂이 인간에게 달려 있음을 莊子가 모른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20) 魏牟는 道家의 公子牟에 해당하리라고 보나(『漢書』 「藝文志」), 楊係注에서는 莊子나 列子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齊의 名族 출신인 陳仲과 衛의 大夫였던 史猶는 모두 청령한 인물로 유명하고, 田硏은 稷下의 학자였는데 齊物論을 주창했다고 한다. 『論 語』 「微子篇」 등에서도 볼 수 있는 이들 은자들의 생활양태가 사회제도 및 文化的인 차별을 배척한다는 의미에서 크게 道家 안에 포함될 수 있겠다 .

그런데 이와 같이 검에 드러나는 면에서는 荀子가 道家思想에 별로 큰 관심을 갖지 않은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 荀子사상의 특칭을 이룬다고 볼 수 있는 전문용어들이 대부분 道家가 儒家에 도전한 것에 대한 그의 응답에 서 유래한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예를 들어 荀子의 禮는 道家의 〈聖人不 仁〉(성 인은 친애하지 않는다) 및 〈天道無親〉(하늘의 도는 특별히 가까이 하는 것이 없다)에 대한 응답에서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고, 分은 〈齊物〉(만물을 고락 l] 함)을, 僞는 〈無爲〉(작위함이 없음)를, 積은 〈虛〉(자기 것으로 갖는 것이 없이 비움)를, 美는 〈撲〉(통나무와 같은 소박함)을, 正名은 〈無名〉(이름을 남기 려 함이 없음)을 답하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또한 墨家가 儒家에 대해 던전 도전적인 문제둘은 이미 대부분 앞에서 孟子의 사상을 다룰· 때 취급했으므 로, 이 장에서는 주로 道家의 사상이 만발한 전국 말기에 荀子가 儒家에 대한 道家의 도전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집중적으로 고찰하도록 하겠 다. 더욱이 道家는 그 사상적 깊이에 있어서 墨家를 훨씬 능가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荀子의 응답 역시 상당한 깊이를 지닌 것일 수밖에 없다

고하겠다. 또한 道家의 도전에 대한 荀子의 응답은 단순한 비판과 배격만이 아니라 창조적 수용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는 면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우선 荀子 가 실천적인 孔子의 君子之道를 일정불변한 人道로 그 개념을 정착시키는 과정을 살펴보겠다• 중국 고대사상사에서 道의 항상(常)성을 처음으로 언급 한 학파는 道家였다. 老子 1 장에 나오는 道에 대한 유명한 정의에 따르면, 〈常道〉요 〈常名〉으로서 道는 영구불변성을 지닌 궁극적 실재인 것이다. 곧 인격적 성격이 컸던 上帝나 도덕의 원천으로서의 天의 개념을 더욱 형이 상학화하여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만물이 돌아가는· 절대원리로서, 변화 속에 서도 변치 않는 道의 항상성을 드러낸 것이다 .21) 道家의 이러한 〈常〉의 개념 울 荀子는 그의 道개념 안에 수용하여 詩書로부터 강조되던 〈天命不常〉 대신에 〈常道〉로서 時空을 초월하는 道의 보편성을 확립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道家의 天道사상을 철저하게 儒敎化시킴으로써, 道는 〈天之道도 아니요, 地之道도 아니며, 人之所道〉(「儒效篇」)라고 정의하여 인간 이 걸어가야 할 도덕적인 常道로 규정하였다. 다시 말해서 夏禮,殷禮, 周禮 등 『論語』에서는 시간의 제약을 받는 禮를, 荀子는 보편적이고 변치 않는 人道로서 확정하여 인간 개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틀로 제시하려 했던 것이다. 이의에도 荀子가 道家에서 수용한 사상으로는 〈至人〉의 개념, 〈淸明〉의 이미지 등을 둘 수 있으나, 수양론의 과정에 있어서는 거의 상반 되는 견해를 보여준다.

21) 關錄과 林韋時 「論老子哲學體系的唯心主義本質」. 『老子哲學討論集』 1959, 223 면.

荀子의 一曲論 이와 같이 道家룰 비롯한 名家, 法家, 墨家에 대한 荀子의 태도가 비판과 수용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이유는 그의 〈一曲〉의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 荀子는 孟子와는 달리 다론 학파를 완전히 배척하기보다는, 각 파가 전리의 한 모퉁이룰 소유하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墨子, 宋子, 愼子,

惡子, 莊子 등의 虛實울 나열한 후에 荀子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들은 모두 道의 한 모퉁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道란 常울 몸체로 하면 서 변화를 다하는 것이니, 한 모서리로서는 그것을 들어 행하기에 부족하다. 한 구석만을 아는 사람은 道의 한 모퉁이만을 본 것이므로 아직 참된 지식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 따라서 그것을 족하게 여기고 그것으로 문식을 하려고 하면, 안으로는 스스로가 혼란될 것이고、 밖으로는 남을 미혹하게 할 것이며, 위에 있으면 아랫사람을 어둡게 하고, 아래 있으면 윗사람을 어둡게 하니, 이것 이 가리워지고 폐쇄됨의 禍인 것이다 .22)

22) 皆道之一隅也 夫道者, 體常而盡變 一隅不足二擧之. 曲知之人, 觀於道之一隅, 而未之 能識也 . 故以爲足而飾之, 內以自亂,外以惑人, 上以萩下,下以薇上, 此萩塞之禍也(「解薇 篇」 24~26).

각 파의 가르침을 道의 一曲 또는 一隅라고 규정함으로써 荀子는 그들의 한계성을 지적함과 동시에 그들을 자신의 儒家的 종합 안에 수용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荀子에게 있어서 道의 전체를 본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孔子였다. 물론 禮에 따른 제도를 제정한 이들은 堯舜禹 등의 先王이었고, 周公은 大儒의 대표적 인물로서 荀子에 와서 특별히 부각되지만, 어디에도 가리워짐이 없이 道의 전모를 밝힌 학자는 孔子였다고 荀子는 단언한다. 孔子는 仁(도덕적 인격성 )과 知(지적 깨달음)에 있어서 모두 가리워점이 없었 다. 그래서 여러 가지 학술을 배웠지만 先王의 가르침을 족히 높일 수 있었다. 한 학파를 형성하여 周나라의 道를 획득하였으며, 그것을 일으키고 씀으로써 (덕을) 쌓아 완성시킴에 있어서 가리워짐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德은 周公과 맞먹고, .i의 이름은 三王과 더불어 함께 할 수 있으니, 이는 가리워지지 않음의 福인 것이다 .23)

23) 孔子仁知旦不藏 故學亂篠 足以爲先壬者也 一家得周道, 擧而用之, 不薇於成積也 . 故德與周公劑 名與三王竝, 此不薇之福也(「解萩篇」 26~28). 이 인용문의 해석은 王先

謙의 荀子集解롤 따랐다. 勞思光은 荀子의 철학이 도가와 묵가의 말을 잡다하게 취하 여 따로 체계를 세워 놓은 것이며 권위주의에 떨어져 法家를 생기게 함으로써 유학 의 뜻에 크게 어긋났다 (r 中國哲學史』’ 「古代篇」, 탐구당, 328 면)고 혹평하였는데, 이는 孟子의 입장에서 荀子를 본 객관적이지 못한 평이라 하겠다.

道의 전모를 밝혀서 先王의 가르침을 확립할 수 있었던 孔子에 대한 荀子 의 경모심은 끝이 없는 것이었다. 孟子와 마찬가지로 荀子 역시 孔子의 후계 자임을 자처하였으며, 名分을 비롯한 사회의 모든 것이 혼란되어 있던 그의 시대를 위해 孔子의 가르침을 새롭게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그의 禮論的 해석은 당대 여러 학파의 사상을 일부분씩 수용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을 儒家사상에 의하여 새롭게 재해석함으로써 중국 고대사상의 집대성 은 물론, 孟子가 이루지 못했던 孔子사상의 다른 일면에 대한 이론적 체계화 를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24) 2 荀子의 인간론:性僞之合 荀子가 인간을 어떻게 파악했는가를 제대로 이해한디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性理學의 영향으로 荀子 하면 性惡說을 상기하게 되는 사조 안에서 荀子의 인간론을 이해하자면 荀子가 제시한 인간구조와 그가 강조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25) 이

24) 荀子와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呂氏春秋』(기원전 24 興 R 경 )의 종합을 보면, 呂不韋 의 三千 F1 客 중에 실제로는 儒家, 道家, 陰陽家가 중심을 이루었으며, 儒家를 중십으 로 해서 전체를 종합하려 했다는 데에서는 荀子와도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呂氏春 秋』가 여러 사상의 철충적 수집이라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 데 비하여 며 5 子』라는 저서는 한 개인의 사상이 표현된 것이므로 전체적으로 하나의 체계 안에 유기적으로 종합되어 儒家的해석을 이루었다는 면에서 차이를 볼 수 있다 . 25) 龍宇純은 荀子의 사상이 性惡으로 대표하게된 역사를 더듬어서 王充이 『論衡』의 本性論에서 孟子와 荀子를 性善과 性惡으로 비교한 데서 시작한 것으로 본다. 荀子 최초의 주석가인 唐代의 楊係이 「性惡篇」의 僞를 여t〉로 이해한 것을 宋儒들은 더욱

발전시켜서 荀子의 예의는 僞裝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荀子애 대한 오해가 쌓여전 것임을 설명한다. 그러나 荀子의 禮는 婚飾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隆禮에 있고 그가 性惡을 말한 것은 禮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임을 밝힌다(『荀子論 集』, 55~75 면) . 필자는 荀子의 중심사상이 性惡에 있지 않고 禮에 있다는 그의 사상 에 동의하면서도, 「性惡篇」에 치중하는 그의 방법론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책 5 장에서 孟子가 인간의 본성을 설명할 때에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즉, 孟子는 인간의 性 안에 食色과 仁義禮智가 공존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食色의 欲(小體)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므로 군자는 그를 人性이라 부르지 않고, 인간에게만 고유한 부분으로 인간 자신이 키워야만 할 四端(大體)만을 인성이라고 부르겠다고 단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단정 아래서 인성이 善하다는 그의 주장을 발전시키고 도덕 적 이상주의의 기초를 놓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孟子는 心에 뿌리박힌 4 단을 인성이라고 규정하였으므로, 그의 인성론은 선천적 지향성을 지니고 있고, 그의 수양론은 천부적으로 받은 것을 자연스럽게 키우고 확충해 나가 는 데 있었다 . 그러나 그가 인간의 食色이 인성의 한 부분임을 보면서도 이론적 체계에서는 그것을 제의시켰다는 것은 孟子의 인간론이 그만큼 부분 적이었음을 말해준다. 荀子의 인간론은 孟子보다 더 현실적이고 전체적인 대신에, 복합성을 띠고 있다. 荀子는 인간 안에 欲과 知와 能, 곧, 첫째로 육체를 키우고 보존 하려는 욕망과 감정적인 면이 있고, 둘째로 경험을 종합하여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지성적인 면을 가지고 있으며, 셋째로 사리에 맞다고 판단된 것을 행함으로써 義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 그런데 인간 안에 주어진 이 세 요소는 조화롭게 결합되어 완성되어야 할 기능테로서의 성격 울 지닌다. 荀子는 타고난 그대로 노력이 필요없다는 의미에서 欲만을 性으 로 규정하고, 知는 思慮할 수 있는 능력이므로 계속 키워나가야 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義는 行울 통해서 이루어져야만 되는 목표로 본다. 따라서 그의 인성론 안에는 선천적인 도덕지향성이 결여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반대로

그의 수양론은 孟子보다도 더욱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런 면에서 荀子의 인간론은 미래지향적이라 할 수 있는 목적론적인 특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으며, 이 점을 파악해야만 荀子의 사상구조를 제대로 이해 할수있다. 氣生知義의 位皆性 우선 荀子가 우주만물 안에서 인간을 어디에 위치시켰는가를 고찰하여 보겠댜 물과 불은 氣는 있어도 生은 없고, 초목은 生은 있어도 知가 없으며, 금수는 知(지각)는 있는데 義가 없다. 인간은 氣와 生과 知롤 가지고 있고, 義 역시 가지고 있다. 따라서 天下에서 가장 귀한 것이다. 사람의 힘은 소만 못하고 달리 는 것도 말만 못하지만, 牛馬롤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인간은 집단을 이룰 수 있는데 그들은 집단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떻게 집단을 이룰 수 있는가 하면 그것은 分 때문이다. 分, 곧 사회적 구별을 어떻게 능히 行할 수 있는가 하면 그것은 義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義룰 가지고 구별할 수 있기 때문에 화합할 수 있고, 화합함으로써 일치하게 되고, 일치한죽 힘아 쌓이고가 힘이 쌓인죽 강하게 되며, 강한죽 다른 것들을 이기게 된다 .26)

26) 水火有氣而無生, 草木有生而無知, 食獸有知而無義. 人有氣有生有知, 亦旦有義. 故最爲 天下貴也. 力不若牛, 走不若馬, 而牛馬爲用, 何也. 曰人能靈, 彼不能靈也. 人何以能婁, B 分 分何人能行, 曰(以)義 故義以分則和, 和 H lJ-, 一則多力, 多力 H lJ張, 張月,J勝物 (「王制篇」 69~73).

荀子는 세상 모든 것이 陰陽의 氣로 이루어졌으며 인간도 이 면에서는 예의일 수 없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荀子는 氣룰 두 가지로 분류하여 지각을 소유하는 동물과 인간의 氣를 血氣라고 하였고, 식물과 無生物의 氣는 그냥 陰陽이라고 불렀다. 이 두 세계의 기본적 공통성을 인정하면서도

荀子는 人間事와 자연계 각기의 自律性울 확인하기에 필요한 이름을 주어 이들을 구별하고 있다 .27) 또한 만물 중 맨 위에 위치한 인간과 맨 밀에 있는 자연물과의 중간 단계에 위치한 식물과 동물은 각기 생명과 지각을 소유한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만물 안에 있는 차등을 분명히 하고 그 고귀함의 질서 를 확립한다. 그러나 사회적 구분과 조화를 가능케 하여 인간에게 고귀함을 주는 義는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治氣養心의 수양을 통해 획득 해야 될 인간 고유의 목표라고 본 것이 荀子사상의 특이성이라고 하겠다. 그러면 義를 달성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心의 작용을 荀子가 어떻게 설명하였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27) 澤田多喜男 「荀子&呂氏春秋 I 댜 ~I t o 氣J, 『氣 m 思想』, 84~88 면 「禮論篇」, 「王制 떠」 등 참조. 『荀子』 안에서는 血氣는 주로 신체적인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서 志意 및 知慮와대비된다.

荀子가 분석한 인간구조의 이중성 『荀子』 전체에서 가장 논리적이고 名辭의 해설을 분명히 하고 있는 「正名 篇」 첫머리에서 荀子는 인간과 관계된 용어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 다. 나면서부터 그러한 것을 〈性〉이라고 하고, 性이 태어난 바와 미묘하게 합하여 감응을 일으키나 노력함이 없이 그대로 그와 같은 상태를 일러서 性이라고 한 다. 性의 좋아함, 미워함, 기뻐함, 분노함, 슬퍼함, 줄거워함 등은 〈情〉이라고 한다. 情이 그러한 가운데 心이 그를 위해 선택하는 것을 〈慮〉라고 한다. 心이 사려하여 能이 그를 위해 행동하는 것을 〈僞〉라고 한다. 사려함이 쌓이고 행동 함이 반복된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을(또한) 〈僞〉라고 한다. 利에 맞은즉 하는 것을 사건(事)이라고 하고, 義에 맞은죽 하는 것을 행위 (行)라고 한다. 아는 까닭이 인간 안에 內在한 것을 @n 〉(인식능력)라 하고,그 知가(道와) 합치됨이 있는 것을 일러 〈智〉(認識)라고 한다. 행하는 까닭이 인간 안에 內在한 것은 〈 'E 〉(행위능력 )이라고 하고, 그 능력이 (道와) 합치됨이 있는 것을 일러 (또한)

〈能〉(도덕행위)이라고 한다. 性이 상한 것을 〈病〉이라고 하고、 우연히 만나는 것을 〈命〉이라고 한다. 이것이 인간과 관계된 일반명칭 (散名)인 것이다 .281 여기서 인간의 세 가지 측면인 性과 知와 能은 각기 두 가지씩을 지칭하 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t〉은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본능적 욕망(欲)뿐만 아니라 자연스러운 감응(情)까지도 지칭하고, 〈知〉는 알 수 있는 인간의 인식능력뿐만 아니라 인식능력이 外物과 접촉하여 알게 된 인식까지도 가리키며, 〈有g〉 역시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행위능력뿐만 아니 라 도덕적 행위 그 자체까지를 지칭한다 •29)

28) 生之所以然者, 謂之性 性之和所生, 精合感應, 不事而自然, 謂之性. 性之好惡喜怒哀樂, 謂之情 情然而心爲之擇 謂之慮. 心慮而能爲之動, 謂之僞. 慮積焉,能習焉,而後成, 謂之僞 正利而爲 謂之事. 正義而爲, 謂之行 . 所以知之在人者, 謂之知. 知有所合, 謂之 智. 所以能之在人者, 謂之能 能有所合, 謂之能 . 性傷謂之病, 節遇謂之命. 是散名之在人 者也(「正名篇」 2~6). 散名은 萬物에 가해지는 이름으로 刑名, 爵名, 文名과 더불어 네 가지 칭호의 하나인데 가장 일반적 성격을 띤다. 29) tfS-1二在, 「荀子의 知識論」(『東西哲學의 響婁』, 이문사, 1981, 323~360 면)에 이 양면성 이 자세히 분석되어 있다. 蔡仁厚는 荀子의 知는 道를 알 수 있는 知로서 행동적 지식이며 自由意志를 지닌다고 지적하였다(다녀頃荀哲學』, 싸 9~411 면).

다시 말해서 荀子는 가능태 Po t en ti al ity로서의 인간능력과 현실태 actu a lity 로서의 결과를 한 가지 용어를 가지고 표현했기 때문에 그의 인간론은 이중 구조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荀子가 가능태보다도 현실태를 중시하여서, 가능태로서의 인간의 인식능력이나 행위능력에 대해서 는 직접적인 언급이 별로 없는 대신에, 사려와 선택을 통해 이루어지는 僞, 곧 인간의 도덕적 행위 및 인격형성에는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다는 것이 다. 〈性僞之合〉(본성과 수양의 결합)이라는 현실태에 대한 분석에 들어가기 전에, 荀子의 인간론에서 한 가지 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될 점은 그의 性 개념 역시 실제로는 두 개의 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곧 그 자신 이 性이라고 정의한 협의의 性과 그의 인간구조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광의

의 性이다. 보통 荀子가 인간의 性에 대해 말할 때에는 欲만을 지칭하는 협의의 性울 가리키지만, 인간 모두가 보편적으로 어떤 구조를 지니고 있다 고 말할 때에는 欲뿐만 아니라 인식능력인 知와 행위능력인 能까지를 포함 한다. 인간의 材性과 知t밝은 군자나 소인이나 일반이다. 영예를 좋아하고 굴욕을 싫어하며,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하는 것은 군자나 소인이나 같은 것이 다. 단지 그것을 구하는 바의 길이 다른· 것이다 . 소인들은 늘 거 짓을 말하면서 남이 자기를 밀어주기를 바라고, 늘 속이면서 남이 자기를 가까이 사귀어 주기 를 바라며, 금수의 행동을 하면서 남이 자기를 선하다고 보아 주기를 원한다. (그가) 사려하는 데에서 知를 발견하기 어렵고, (그의 ) 행동 속에서 편안함을 보기 힘들다… ••• 그러나 소인의 知有읽을 잘 살펴보면 그보다 많은 것을 알기에 족하고 군자의 행위를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30) 荀子의 인간상은 孔子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격의 완성 정도에 따라 군자와 소인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런데 군자와 소인의 知와 能이 같다는 말은 知 (인식능력)와能(행위능력)이 가능태로서 누구에게나선천적으로내재해 있다 는 말이다. 단, 가능태로서만 주어전 것이기 때문에 荀子는 〈사람은 나면서 는 원래 小人이었다〉 31) 고 했고 누구나 그 능력을 키워야 됨을 강조하였다. 비록 가능태이간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사람에게 知와 能의 능력이 있다는 것은, 知와 能 역시 欲과 더불어 넓은 의미의 性 개념 안에 포함시 켜야만 바로소 荀子의 人性論울 오늘날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

30) 材性知抵 君子小人一也. 好榮惡辱, 好利惡害, 是君子小人之所同也. 若其所以求之之道 則異矣 小人也者, 疾爲誕而欲人之信己也. 疾爲詐, 而欲人之親已也, 萬獸之行, 而欲人之 善已也 慮之難知也, 行之難安也……故熟察小人之知能足以知其有餘可以爲君子之所爲 也(榮辱篇」 32~40). 荀子의 本性論이 지닌 二重構造는 澤田多喜南의 「荀子(l)抽象的 人間觀」과 島一의 「荀子의 本性論」, 『東洋學』 40, 1978, I~3 면에 이미 지적된 바 있다. 31) 人之生固小人(「榮辱篇」 49).

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가 전제된 다음에야 荀 子 가 〈 1 生이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변화될 수 있는 것〉 32) 이라고 化育의 가능성을 제시한 근거를 파악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태어난 그대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性이라는 荀子의 性 개념은 협의의 性으로서 욕망만을 지칭차기 때문에 도덕적 방향성을 결여하고 있고, 이 점에서 告子의 性 개념과 간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性 개념을 적용할 때 荀子의 인간구조, 곧 인성론 안에는 욕망뿐만 아니라 道를 알 수 있는 인식능력과 그에 합치 되는 행동을 할 수 있는 행위능력을 포함하고 있음으로 모든 인간은 化育될 수 있는 내적 요인을 자기 안에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33)

32) 性也者, 吾所不能爲也, 然而可化也(「儒效篇」 109). 蔡仁厚는 化性起僞야말로 荀子사 상의 중십임을 강조하였다(『孔孟荀哲學』, 392 면). 33) 陳大齊, 「荀子學說」, 中華文化出版, 1954, 62~63 면. 단 광의의 性 개념은 우리가 荀子 의 사상을 재구성할 때 쓰는 말이고, 荀子 자신은 性울 지극히 협소하게 정의하였음 을 이미 보았다 . 이러한 협소한 정의가 그의 本性論을 오해하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었다고도 하겠다 . 「性惡篇」에 나오는 性 개념만을 가지고 보면 告子의 性 개념보다도 더욱 부정적이라고 하겠다.

荀子의 心 그러면, 인성이 화육될 수 있는 내적 요인의 주체가 되는 心의 성격을 荀子가 어떻게 설명하였는지 고찰하도록 하겠다. 사실 心에 대한 이해는 孟子의 인간론에서도 핵심을 이루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孟子와 荀子의 기본 적 차이점도 여기서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荀子는 인간을 하나의 자율적인 유기체로 보면서 心이야말로 사람의 五官과 모든 분별행위의 主宰者가 되어 야한다고말한다. 心이러는 것은 육체 (적 행위 )의 군주요 정신(적 행위 )의 주인인 것이다. 心은 명령을 내리지만 명령을 받는 적은 없고, 스스로 금하고、 스스로 시키고, 스스로 빼앗고, 스스로 취하며, 스스로 행하고一 스스로 그친다 …… 옳다고 판단하면 받아

들이고, 그르다고 판단하면 물리친다. 心이 (만물을) 받아들여서 그 분별하는 일을 (아무도) 금할 수 없으며, 사물의 잡다함 속에서도 반드시 스스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니 그 핵심에 이르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다……그래서 인간의 心은 마치 쟁반 안에 담겨진 물에 비유할 수 있다. 기우뚱한 것을 똑바로 놓고 움직 이지 아니하면 탁한 것은 아래로 내려가고 위는 淸明하게 되어 수염이나 눈썹까 지 보기에 족하니 理롤 살핀다. 그러나 미풍이라도 지나가면 혼탁한 것이 아래 로부터 울라오고 淸明함도 위에서 혼들려서 큰 물체도 제대로 볼 수 없다. 心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34)

34) 心者形之君也 而神明之主也. 出令而無所受令, 自禁也, 自使也, 自奪也,自取也, 自行 也 自止也……是之 H lJ受 非之月 lj 辭. 故曰心溶:, 起擇也無禁, 必自見其物也雜淸:, 其情之 至也不威……故人心誓如盤水. 正籍而勿動, 則沿濁在下, 而淸明在上, 則足以見紋眉, 而察理矣 微風過之, 沿濁動平下, 淸明亂於上, 則不可以得大形之正也 心亦如是矣(「解 萩篇」 44~45, 46~47, 54~56).

앞 부분에서는 心의 절대적 자율성과 인식능력을 강조하면서도 荀子는 동시에 인간의 마음을 쟁반의 물에 비유하여 욕심이 일어날 때마다 그 판단 능력이 가리워질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즉 인간구조의 세 가지 측면인 欲(性)과 心(知)과 能(行)은 각기의 고유한 활동분야를 가지고 구별되면서도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자율적인 心이지만 내적 욕망이나 관습적 행위에 의하여 이루어진 사회적 편견에 영향을 받을 때에 이들에 가리워져서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한디는· 것이다. 荀子는 心이 가리워질 수 있는 요인 열 가지를 나열했는데, 다섯 분류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첫째는 원함(欲)과 미워함(惡) 때문에 바른 것을 보지 못하는 것, 둘째와 셋째는 時空에 있어서 처음(始)과 끝(終), 멈 (遠)과 가까 움(近)을 평형있게 다루지 못하는 것, 넷째는 지나치게 많이 알거나(博) 지나치게 적게(沒) 알아서 핵심에 이르지 못하는 것, 다섯째는 옛날(古) 것이나 지금(今)의 것이라고 하나를 맹종하는 태도이다 .35) 곧, 욕망, 시간과 공간, 넓이와 선후 등 그 어느 것이든 한 가지에만 사로잡힐 때 인간의

35) 「解萩篇」, 察仁厚 420~421 면 참조.

마음은 가리워진다는 사실을 밝힌다. 따라서 자율적 인식능력을 지닌 心 역시 선천적인 상태로만은 부족하고 계속 키워나가야 한다. 여기서 荀 子 의 유명한 養心,ffi로서의 虛(비움)와 堂 (하나로 모음)과 h爭 (고요함)이 등장하는 데, 그 자세한 내용은 수양론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 그런데 荀 子 는 心은 五官에 대해서는 주재적인 위치에 서지만, 道에 대해 서는 工宰, 곧 관리와 같아서 心이 道에 합치될 때에 비로소 그 분별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고 보았다 .36) 따라서 道와 心과 五官의 관계는 위계적 성격을 띠고 있어서, 心은 道의 지도를 받고, 五官은 心의 통제를 받는다. 荀子는 사람이 五官을 통해 감각으로 경험한 잡다한 사실들을 해석하고 정리하여 통일된 인식에 도달하려면 天君이라고불리는心의 徵知가수반되 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荀子가 位階的 성격을 강조했다고 해서 上位의 것이 下位의 것을 폐지시키거나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서로간에 상호보완적 관계를 지닌다고 보는 것이 荀子사상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36) 心也者, 道之工宰也 道也者, 治之經理也 心合於道 , 說合於心, 辭合於說 正名而期 (「正名篇」 40~41 ).

우선 五官과 心의 관계를 보면, 이 보완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인간이 올바른 지식에 도달하려면 눈, 귀, 코, 입, 몸 등의 五官을 통해 먼저 대상세 계를 경험하여 이를 기억(簿之)해야 한다. 心은 그 기억한 것을 받아 해석하 고 정리하여 개별적으로 경험된 것들의 전체적 의미를 분명히 해중으로써 五官의 작용을 완성시킨다. 이와 마찬가지로 心은 전통 속에서 계승되어 온 영구불변의 人道, 곧 禮를 규범으로 받아들임으로써 心의 주체적 역할을 완성한다. 사실 이 말은 모순인 것 같이 둘리고, 心의 자율성에 대한 강조에 도 불구하고 荀子가 의재적인 禮에 마지막 권위를 두고 있다는 면이 항상 부정적으로 지적되어 왔다. 그러나 荀子의 禮를 그렇게 단순히 외재적인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禮란 모든 인간과 똑같이 欲과 知와 能울 지녔던 聖人이 治氣養心術 울 실천함으로써 인간이 걸어야 될 바를 완성시켜서 이루어전 것이다. 따라

서 밖에서 강압적으로 주어전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가능테가 현실태 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布 戶가 聖人들이 제정한 禮를 보편저 人道로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인간이 도달해야 될 목표를 聖人둘이 객관적 이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孔子가 말했던 〈先王 之道〉와 荀子의 〈人道〉 혹은 〈禮〉 사이에는 별차이가 없다. 荀子에 있어서 禮는 곧 인간성의 완성이며, 性僞之合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식 획득과정에서 볼 수 있던 것과 똑같은 보완관계를 〈 1 生僞之合〉(본성과 수양의 결합)의 인간론에서도 보게 된다. 性僞之合 荀子가 性僞之合울 설명하는 대표적인 예는 19 편인 「禮論篇」에서 찾아볼 수있다. 性이라는 것은 본래 시작이며 재료로서 소박한 것이다. 僞라는 것은 文化와 이치가 융성해전 것이다. 性이 없으면, 僞가 더할 데가 없게 되고、 僞가 없으 면, 性은 스스로를 아름답게 할 수가 없• 다. 性과 僞가 합한 연후에야 뿔人의 이름이 이루어지고, 天下를 통일시키는 功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天地가 합하여 만물이 생기고, 陰陽이 접하여 변화가 일어나듯이, 性僞가 결합되어야 天下가 다스려진다.37)

37) 性者本始材朴也 僞者文理隆盛也. 無性ff l j僞之無所加, 無僞則性不能自美 性僞合然後聖 人之名, 一天下之功於是就也. 故曰, 天地合而萬物生,陰陽接而變化起, 性僞合而天下治 (「禮論篇」 76~78). 性과 僞의 결합을 설명하는 부분을 『荀子』 18 편과 22 편에서도 발견할수있다.

인간의 태어난 상태로의 모습과 사려와 행동을 통한 노력이 합해지는 것을,자연계의 天地와陰陽의 결합에 비유함으로써 荀子는性僞之合이 위장 이거나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마땅히 이루어져야 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荀子가 性과 僞가 결합되어야 함을 말할 때, 한 개인이 자신

의 욕망에 찬 마음을 禮 에 따라서 키우고 조절해야 된다는 修身 ;습 에 머무르 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의 결합에서만 인간집단이 형성될 수 있다는 사회정치 론까지를 포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荀子의 욕망관 荀子의 협의로서의 性이 욕망을 가르킨다는 것을 이미 지적했는데, 「性惡 篇 」을 제의하고 다론 부분에서 荀子는 이 욕망을 惡한 것이라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政治는 이 욕망을 긍정해주는 데서 시작해야 되고, 사려를 통해 절제하면서도 가능한 한 욕망을 채울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고 본 다. 무릇 정치를 말하면서 (백성의) 욕망이 없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욕망을 지도해 중이 없이 욕망이 있다는 사실에 곤란해 하는- 것이다. 무릇 정치를 말하 면서 (백성의 ) 욕심이 적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욕망을 절제하는 것을 가르쳐 중이 없이 욕망이 많다는 사실에 난처해 하는 것이다……욕망은 기대하든 안하 든 일어나기 마련이지만, (인간이) 구하는· 것은 가능한 바를· 좇는다. 기대하든 안하든 욕망이 일어나는 것은 천연적으로 받은 바이기 때문이고, 가능한 것을 좇는 것은 J L 에서부터 나온 것이다……욕망을 비록 다 채우지는 못해도 가까이 갈 수는 있고, 없애지는 못해도 조철할 수는 있다 .38)

38) 凡語治而待去欲者, 無以道欲, 而困於有欲者也. 凡語治而待慕欲者, 無以節欲, 而困於多 欲也……欲下待可得, 而求者從所可 . 欲不待可得, 所受平天也 . 求者從所可, 受平心也 ……磁不可盡 可以近盡也. 欲雄不可去, 求可節也(「正名篇」 55~65). Donald D. Munr~ 〈欲〉을 가능성 또는 방향성이 주어져야 할

인간의 기본적 욕망 자체를 긍정하는 자세는 儒家에 공통되는 것으로서, 孔子는 재산을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인정했기 때문에 재산분배가 지위에 따라 공평해야(均) 됨을 말했고, 孟子는 恒産의 보장을 경제정책의

기초로 역설하였던 것이다. 荀子 역시 욕망의 절제를 중요시하면서도 욕망 자체를 제거하거나 악한 것, 곧 사회혼란의 직접원인으로 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욕망추구에 절도가 없어서 다두게 되는 것이 사회를 어지럽히지만, 욕망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사회의 혼란이 될 수도 있고, 사회를 이룰 수도 있는 것으로서 선천적인 인간조건일 뿐이다. 그리고 이 인간조건을 조화롭게 이끄는 것이 정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性惡篇」에서 인간의 본성은 惡하다는 그의 주장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性惡說의 문제 우선 눈에 띄는 점은 32 편으로 구성된 荀子라는 저서 전체에서 〈性惡〉 이라는 용어가 19 번 모두 23 편인 「性惡篇」에서만 쓰이고, 그 반대어인 〈性 善〉이라는 용어 역시 6 번 전부 「性惡篇」에서만 사용되고 있으며, 이 전문용 어들이 荀子의 디론 부분에서는 전혀 사용되지를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전문용어의 偏在는 荀子 32 편의 最古의 목록을 전해주는 劉向本에서 「性惡篇」이 「雜篇」 속에 들어있었다는 문헌학적인 역사와 함께 荀子사상의 역사적 사료로서의 「性惡篇」의 신빙성을 일단 의심해 보게 한다• 용어뿐만 아니라 사상에 있어서도 「性惡篇표본 荀子의 다른 부분과는 특이한 점을 몇 가지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인성론과 관계된 것만을 지적하겠다. 荀子 는 다른 부분에서 天地와 陰陽의 결합과도 같이 〈性僞之合〉(본성과 수양의 결합)을 강조하였는데, 「性惡篇」에서는 性과 僞를 대치시켜서 〈 1 生僞之分〉 (본성과 수양의 분리)을 말하고, 이 둘의 보완적 관계보다는 상반성을 지속적 으로 제시하고 있다 .39)

39) 그 의에도 聖人觀에 있어서 23 편에서는 制度의 制定者로서의 聖王사상만이 강조된 다. 禮사상 역시 聖 A 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되어야 할 목표라는 면보다는 의부적 규범으로서 강요되는 法이라는 성격이 훨씬 강조된다. 孟子에 대한 바판의 차이접은 이미 지적한바있다.

그러나 善과 惡울 질서와 혼란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性惡 篇 」과 荀子의 다른 부분은 공통성을 지닌다. 〈무릇 고금을 통하여 天下에서 善이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알맞게 평탄하게 다스려진 것이고, 惡이라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 기울어지고 어긋나서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 다.〉 40) 따라서 「性惡篇」에 언급되는 善과 惡울 형이상학적 규범 에 따론 도덕 적 善과 惡으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며, 사회적 질서의 여부를 지칭하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조건을 붙인 후에도, 역시 「性惡篇」의 인간 이해는 분명히 荀子의 다른 부분보다 더 단순하고 부정적인 것이 사실이 다. 〈사람의 情이란 극히 不美한 것입니다. 무엇을 또 물으십니까?〉 4 1) 하는 반문은 儒家의 시각이라기보다는 法家사상에 더 가까운 감정을 느끼게 하기 때문 Ol 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차이점 때문에 「性惡篇五곤 荀子 자신의 사상을 충실 하게 반영한다기보다는 法家사상에 기울어전 그의 후학에 의해 쓰여졌고, 후학들의 글을 모은 「雜 篇 」 중의 하나로 荀子에 첨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 본다 .42) 「性惡篇」이 『 荀 子』 안에서 지닌 의적, 내적 독특성과 荀子의 사상을 오해하도록 했다는 역사성 때문에, 오늘날의 荀子 연구에서 「性惡 篇표본 반드시 분리되어 개별적으로 연구되어야만 한다. 40) 凡古今天下之所謂善者, 正理平治也, 所謂惡者, 偏왔伴亂也(「性惡篇」 36). Benja min I. Schw art z 는 惡의 개념을 荀子 본래의 의미에서 이해해야 됨을 강조하였는데, 이 면에서는 23 편이 다른 편들과 별차이가 없음이 사실이다 (The World of Thou gh t in Ancie n t Chin a, Harvard Un ive rs ity Press , 1985, 292 면) . 그러나 인간의 욕망 자체를 악한 것이라고 보는 관접은 역시 23 편에만 한정된 것이라고 보는 접에서 필자는 그와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41 ) 人情若不美, 又何問焉(「性惡篇」 76). 42) 金谷治, 31~33 면 Munro I 편. 물론 荀子가 欲이라는 인간의 性 안에는 방향성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性惡論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는 사실을 부인 하는 것은 아니다. 단 앞에서도 지적하였듯이 荀子의 안목은 미래지향적이었기에 性을 惡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으며 이러한 단정은 惡한 본성을 지닌 인간이 어떻 게 선하게 될 수 있느냐는 모순접만을 드러내고 있다.

3 荀子의 修養論 荀子의 인간론이 性僞之合울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면, 性과 僞의 결합을 가능케 하는 수양론은 荀子사상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荀子가 제시한 수양론의 특성은 그 과정이 단계적으로 구분되어 있고, 수양 의 방법 역시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荀子』 32 편 중에서도 특히 처음 5 편인 「勸學」, 「修身」,「不荀」,「榮辱」, 「非相」 편에 그의 수양론 이 집중적으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고자 한 다• 우선 荀子의 수양론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治氣養心之術〉(血氣를 다스리고 마읽골 키우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氣는 인간의 血氣, 곧 형의의 인간 본성으로서의 欲울 가리키고, 心은 知慮, 곧 인간 마음의 인식능력 및 그작용을 지칭한다. 氣를 다스리고 心을 키우는 방법은, 血氣가 너무 강하면 그것을 부드럽게 하여 調希 D 를 이루게 하고, 知慮가 깊이까지 빠지게 되면 하나로 통일시켜서 평이하게 하는 것이다 .43) 血氣가 너무 강하다는 것은 용기나 담력이 지나치다거나 경망한 것을 말하고, 知慮가 깊이까지 빠진다는 것은 利롤 탐하거나 고루한 것을 말한 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의 血氣는 나쁘고 心은 좋다는 단순한 논리가 성립되 는 것이 아니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荀子가 浩然之氣를 말한 孟子의 養氣 또는 養心사상을 儒家전통 안에서 더욱 발전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44) 荀子는 인간의 氣나 心 양면이 모두 복합적이라는 현실에 관심을 두었다 43) 治氣養心之術 血氣剛祖 則柔之以調和, 知慮浙深 則一之以易良(「修身篇」 14~15). 여기서 浙은 王念孫을 따라서 潛으로 보고 해석하였다. 44) 「荀子&呂氏春秋 l: :t:i· l t~氣」, 『氣 D 思想』, 38 면, 61 면 참조.

무릇 인간이 (좋은 것을) 취하려 함에 있어서 그 바라는 바가, 아직 순수하지 않은 것도 끼어오게 마련이고, (나쁜 것을) 버리려 함에 있어서도 순수하게 나쁜 것만이 아니라 (좋은 것도) 끼어서 버려지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움직 일 때에 저울을 갖추지 않아서는 안된다… ... 저울이 바르지 않으면 禍가 그 바라는 바에 붙어 있어도 그것을 福으로 알고, 福이 싫어하는 바에 붙었어도 사람들은 그것을 禍로 여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禍와 福을 잘못 알게 되는 것이다. 道란 古今의 바론 저울이니, 道를 떠나서 스스로 선택하게 되면 禍福의 의 탁하는 바를 모르게 된다 . 45)

45) 凡人之取也, 所欲未菅粹而來也. 其去也, 所惡未菅粹而往也. 故人無動而不可以不與權供 …… 權不正, 則禍託於欲而人以爲福, 福託於惡而人以爲禍. 此亦人所以惑於禍福也. 道者, 古今之正權也 離道而內自擇, 則不知禍福之所託(「正名篇」 71~74).

인간의 행위와 지향 속에 순수하지 못한 요소들이 끼어 있다는 사실은 이미 荀子가 인간의 마음을 여러 가지 찌꺼기가 끼어 있는 쟁반의 물에 비교할 때 지적한 바 있다. 욕망의 미풍이 불기만 하면, 사물을 제대로 분별 할 줄 모르게 되는 흐려진 물과 같이, 인간은 참으로 무엇이 禍가 되고 무엇이 福이 되는지를 스스로 구별하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荀子는 올바론 판단을 하기 위해서 인간은 古今의 바론 저울(正權)인 道를 기준으 로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46)

46) 「解阪타에서도 荀子는 衡이라고 해서 道룰 10 가지 욕망에 사로잡히는 폐단을 없애 • 는 저울이라고 불렀다.

〈權〉이란 처한 환경 전체를 저울질하여 구체적 결단을 내린다는 뜻으로, 『論語』에서 孔子도 權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뜻을 같이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평하여(「子후」 30) 權울 중시하였다• 다시 말해서, 權謀 術數와 같은 경우에는 완전히 환경에 따라 지배되는 원칙없는 행위를 가리 키기도 하지만, 權의 본래의 의미는 저울에 다는 것과 같이 원칙에 따르되, 일의 경중과 전후를 살펴서 그때에 적중하는 결정을 한다는 고도의 도덕적 분별력을 지칭한다. 그런데 孔子는 權의 중요성은 언급했지만 權울 행할 수 있는 구체적 지침을 마련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荀子는 『 論語 』 에서는 동사로 쓰이던 權울 명사화하여 이를 곧 人道라고 단언하였다. 결과적으로 모든 이는 인간이 걷어가야 할 道, 곧 先王으로부터 전승되는 禮롤 구체적으로 배우고 따라야 된다고 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荀子의 수양론에서는 학문적 배움이 지닌 위치가 큰 것이 다. 서로의 뜻을 함축하고 있기는 하지만, 學晶1 과 修身이라는 荀子의 수양론 이 지닌 두 가지 측면을 〈學〉(배움)과 〈積〉(쌓음)으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 學 〈博學〉(널리 배움), 〈學數〉(과목을 배움)와 같이 荀子의 인간구조를 이루는 性, 知, 能중에서 주로 인식능력인 知와 연결이 되어 있다. 積은 〈 積 善成德〉(선을 쌓아서 덕을 이룸), 〈 積 德於身〉(자산 안에 덕을 쌓음)과 같이 善 한 행위를 반복해서 실천함으로써 德을 이문다는 의미로 행위능력인 能과 연결되어 있다 .4n

47) 荀子 511룹 에 따르면 學은 荀子 안에 70 번 쓰이는데 博學,學數, 學雜識 등 「勸學篇」 에 집중적으로 나옴올 볼 수 있다. 積은 72 번 쓰이는데 「勸學篇」 • 「儒效 篇 」 등에 積善, 積禮義 등으로 두루 쓰인다. 그러나 積文學(「正制篇」) 등으로 서로 교환될 수도 있어서 이 둘의 구분은 치중하는 경향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다.

修養의 두 길 : 學間과 修身 「勸學篇」에서 荀子는 修養의 과정을 知的 배움과 도덕적 修身으로 구분하 여 그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배움(學)이란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서 끝나는 것인가? 대답하기를 〈그 정해전 교과과정 (數)으로 말하자면, 經을 암송하는 데서 시작하여 禮를 읽는 데서 끝난 다. 그 체득되는 바의 내용 혹은 의미(義)로 말하자면, 士가 되는 데서 시작하여 聖人이 되는 데서 그친다. 참으로 힘들여 쌓음이 오래되면 그 안에 들어갈 것이 니, 배움이란 죽은 후에만 그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과과정 (數)을 배우 는 데는 끝이 있으나, 그 내용(義)을 체득함에 있어서는 잠시라도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실천하면 인간인 것이고, 그것을 버리면 금수인 것이다.〉 l

48) 學惡平姚 惡平終 B, 其數ff lJ , 始平踊抵終平讀禮 其義月 1l, 始子爲士, 終平爲聖人.

眞積力久ff l j入, 學至平投而後止也. 故學數有終, 若其義, ff l j不可須텃舍也. 爲之人也, 舍之 面獸也(「勸學篇」 26~28). 楊注는 術로 보았으나 數를 정해진 교과과정이라고 번역한 것은 『荀子』’ 「君道篇」과 「榮辱篇」 등에서 數가 이미 정해졌다는 定數의 의미를 가지 고 있기 때문이다(龍宇純 『荀子論集』, 175~176 면).

知的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은 교육을 통해 전달될 수 있는 과정인 數로 보았고, 자신이 스스로 행함으로써만 체득되는 修身의 과정을 義라고 표현하 고 있다. 여기서도 義는 미래지향적인 성격이 강하다. 學의 이러한 양면성은 孔子에서부터 전승되는 個家의 기본적 입장으로서 荀子 역시 학문적 배움 보다 도덕적 배움을 더 중요시하고 있다. 단 荀子는 이 양면적 배움의 과정 울 단계적으로 명확히 분류했다는 것이 특이하다. 우선 학문적 배움에 필수적으로 있어야 될 교과서로서 荀子는 유교전통 속에 五經의 개념을 처음으로 확립하였다. 『書經』은 정치의 기강이 되는 것으로 그는 과거의 역사가 오늘을 사는 정치가들의 거울이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詩經』은 인간의 감정을 적중하게 표현하고 알맞는 데서 그칠 줄을 알았다는 데서 인간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사실 『詩經』은 『荀子』 안에서 다른 어떤 고전보다도 많이 인용되고 있어서 인간사 전체를 알려주는 寶庫로 간주되고 있다 .49) 그 다음 『春秋』는 인간 역사의 미묘함을 기록하여 天地의 이치를 알려준다고 하였다. 끝으로 禮와 樂은 사회규범을 밝혀주고 조화의 원리를 알려주기 때문에 배움의 극치를 이룬다고 평하였 다.

49) 牟宗三은 『荀子』, 「儒效篇」에 나오는 〈隆禮義而殺詩촙〉를 여기 「勸學篇 E] 교과과정 과 합쳐서 해석하여, 孟子는 詩홉를 좋아했는 데 바해 荀子는 詩훔를 학문의 시작으 로 작게 보고, 전체에 규범을 주는 禮幾에 치중했다고 평하였다(『名家與荀子』, 195 ~201 ). 그러나 本文의 내용을 보면, 郁鈴行이 지적하였듯이 殺올 敦의 誤字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荀子集解J, 8&면).

그러나 荀子는 이러한 학문적 배움이 모든 사람을 善하게 하는 것이 아님 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學을 다시 君子之學과 小人之學으로 나누었다. 君子之學이란 그 배운 바가 그 사람 전체에 파고들어가 人格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고, 小人之學이란 귀로 들어가 입으로만 나오기 때문에 금수의 상태를 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孔子 역시 그의 제자 子夏에게 小人儒가

되지 말고 君子 個 가 되라고(「 雍 也」 13) 당부한 기록이 『論語 』 안에 보존되어 있지만, 荀子시대에 와서 小人 之學 과 君子 之學의 구별은 더욱 심각하고 분명 해전 현실로 부각되고 있다. 따라서 배움이란 실천되었을 때에만 참으로 그 효능을 발휘하는 것임을 荀子는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배움이란 실천되었을 때에 비로소 그치는 것이다 . (배워서 안 것을) 행했을 때 밝게 이해(明)하게 되고, 밝히 이해하면 聖 A이 되는 것이다 .501

50) 學럭冷行之而止矣 行之明也 明之爲聖人(「信效篇」 102~103).

荀子의 인간구조라고 할 수 있는 性,知, 能의 세 측면 중에서 性과 知에 대한 논의는 비교적 많이 되어 왔으나 能에 대한 설명은 별로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荀子는 知와 완성 역시 能에 의해 실제로 행해졌을 때 비로~ 실현되는 것이라고 보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면에서 性 僞之 合 生에 대한 욕망을 지닌 소박한 인간본성에서 시작하여 知의 思慮가 가미될 뿐만 아니라 知가 옳다고 판단한 것을 能이 실천함으로써, 性과 知와 能이 각기의 역할을 다하였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能의 작용을 표시하는 용어가 〈積〉으로서 荀子는 흙이 쌓이면 산이 형성되고, 물이 모이면 냇물과 바다가 이루어지듯이, 善울 쌓아서 德울 이루면 신묘한 밝음이 스스로 얻어져서 聖人의 마음이 구비될 것이라고 말한다 .5 1) 『荀子』 「勸學篇」 첫머리에 소개되는 유명한 몇 가지 비유는 이런 積 의 결과를 상징하는 이미지들인 것이다. 남빛( 靑 )은 藍이라는 一年草에서 짜내는 것이지만 藍보다도 더욱 푸르고, 얼음(氷)은 물이 얼어서 된 것이지 만 물보다 더욱 차며, 나무는 똑바른 자(繩)에 맞추면 똑바로 되기도 하고 둥근 그림쇠(規)에 맞추면 둥글게 되기도 한다. 처음 두 개의 이미지는 藍이 나 물 안에대재해 있던 가능성을 僞로써 더욱 빛나게 한다는 의미가 분명 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세번째 이미지인 나무의 경우는 그 해석이

51) 積土成山……積水成淵 ...... 積善成德, 而神明自得, 聖心備焉(「勸學 篇 」 17~18).

단순하지가 않다. 부드러운 나무를 곧거나 둥글게 하여 그늘에서 오래 말림 으로써 그 성격을 규정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의부적 강압에 의해 본성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말같이도 둘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바로 군자의 학문과 반성의 생활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 앞의 두 이미지와 마찬가 지로 해석해서 둥근 자나 똑바른 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실현한 것이라 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荀子는 〈聖人이란 인간이 쌓아 울려서 된 것이다〉 52) 라는 의미심장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쌓아울린 정도에 따라서 荀子는 인간 理想像에 발전적 유형을 확립하였다. 죽, 士에서 군자로, 군자에서 聖人으로 나아가는 位階가 성립된 것이다. 法을 좋아하여 行하는 사람이 士이고, 뜻을 돈독히 하여 그것을 체득하는 사람이 君子이며, 편벽됨아 없이 전체를 밝게 통찰하여 막히는 데가 없게 된 사람이 聖人이다 .53)

52) 聖人也者, 人之 P가 積也(「儒效篇」 113-114). 53) 好法而行, 士也 篤志而視 君子也 齊明而不端, 聖人也(「修身篇」 35~36). 여기서의 法은 곧 禮를 가리킨다(『荀子集解』) . 이런 발전적 유형은 「非相」, 「禮論J, 「解萩篇」 등에서 모두 7 번 언급된다 .

荀子는 德의 실천이 일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노력을 통해 점차적으로 쌓이는 것이라는 점을 중시하였다. 그의 유명한 駿馬와 鷲馬의 비유(「修身篇」)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재능이 부족한 사람이라도 쉬지 않고 계속 노력한다는 데 성공의 비결이 있음을· 그는 주장하였다. 荀子는 중국 고대사상가 중 어느 누구보다도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이었고, 이런 면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신뢰하였던 孔子의 사상을 충실히 발전시켰다 고하겠다.외)

54) 孔子가 제자 円求에게 한 질책의 하나로 논어에 보존된 것을 보면, 자신의 力不足을 탓하는 제자에게 孔子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한계를 그어 놓고 있다 고 지적하였다(「雍也」 12).

士가 배우기를 시작한 초보단계의 학자를 지칭한다면, 군자는 굳은 의지 로 그것을 자신의 행동 속에 구체화한 아로서 그만큼 道에 가까와전 사람을 가리켰다• 聖人은 그 이상 인위적 노력이 필요 없을 만큼 모든 것을 이해하 여 넓고 인자하게 된 至人울 가리켰다. 荀子의 聖人觀에서 볼 수 있는 한 가지 홍미로운 사실은 聖人이 되기까지의 과정에 있어서는 지속적인 쌓음 (積)을 강구하여 인위적인 노력 (僞)을 중시하였는데 ,55) 聖人에 도달한 상태는 道家의 聖人 또는 至人과 매우 흡사하게 無爲的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 다.

55) 慮記흠, 麟麟 而後成謂之僞(「正名篇」 4).

荀子와 老莊子의 修義論 비교 老莊子의 수양론을 荀子의 수양론과 비교한다는 것은 道家와 儒家와의 차이룰 가장 뚜렷이 밝히는 길이 될 수 있다. 『 老子 』 81 장을 보면 聖人은 아무것도 쌓지를 않아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남에게 다 주지만, 주면 줄수록 오히려 자기에게 더 많아전다고 하였다. 이것은 老子 고유의 역설법 울 써서 비움이라는 道家的 수양론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56) 여기서 〈不 積〉이란 자신의 공로를 쌓지 않는다는 뜻으로 일을 이룬 후에는 물러나는 자세를 지칭한다. 따라서 道家的 聖人은 자신의 욕심을 비우는 데 힘쓰고, 인간적 차별을 잊어버리는 〈不學 X 끌 배운다. 無爲로써 만물의 자연스러운 돌아감을 보좌할 뿐 감히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5 7) 이와 같은 사상이 『莊子』(「追造篇」)에서는 至人은 無已(자기라는 것을 내세움이 없음) 요, 神人은 無功(공적이라고 내놓을 것이 없음)이며, 聖人은 無名(이름을 남김 이 없음)이라고 표현된다한 老子나 莊子가 聖人이 디스리는 이상사회를 희구

56) 聖人不積 槪以爲人, 已急多, 匠以與人, 已急多(『老子』 81 장). 河上公은 德ft를 하면 더욱 德이 있게 된다고 설명한다. 57) 是以聖人欲不欲……學不學,……以輔萬物之自然而不政焉(『老子』 장). 老子 안에서 儒사상에 더 명확하게 도전하는 예는 聖人은 不仁하고 (5 장) 不親하며 (79 장), 仁義 孝忠禮는 모두 道가 쇠되하여 나타난 것으로(1 8, 38;< J-) 단정한 것이다. 58) 郭象은 이기십이 없으면 있는 그대로 가게 하므로 모든 것을 준다고 해설하였고,

成玄英은 無功이란 道에 따라 이룰 때 공로의 자취를 남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 다(『莊子集釋』, 21~22 면). 至人,神人, 聖人은 莊子 안에서 眞人과 더불어 道와 하나 가 된 사람을 가리키는 칭호들로서 여러 각도에서 하나의 실재를 표현한 것이다. 莊子 역시 〈大仁不仁〉(「大宗師篇」) 등으로 儒家의 仁, 賢, 君子, 士 등을 비난하고 道家的해석을 제공한다 .

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個家와 공통점을 지니나, 禮法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 의 공적과 이름을 남기려 하지 않는 無爲政治를 주장했디는· 점에 있어서는 儒家와 현격한 차이를 갖는다. 그런데 儒家 중 어느 누구보다도 禮에 따른 正名과 積과 僞를 강조한 荀子의 聖人이 無爲의 인물로 묘사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무릇 미묘한 상태에 이른 사람은 至人이다. 至人이라면 어찌 힘쓸 것이 있겠으 며 인내해야 하고 위태로운 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濁明이란 밖에서만 빛나는 것이고, 淸明이란 안에서 빛나는 것이다. 聖人은 그 원하는 바를 따르고 자기의 情을 다 경비하되, 理에 따라 정도에 알맞는 것이다……그러므로 仁者가 道롤 행하는 데에는 억지가 없는 것(無爲)이다……이것이 곧 마음을 다스리는 道인 것 0] 다 .59) 仁者와 至 A 이 無爲에 이른 것은 안으로부터 그 마음이 淸明한 상태에 다달아서 목표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天論篇」에서도 荀子는 聖人은 자신의 天君을 맑게 하고 자신의 天官을 바르게 하여 자기 안의 모든 情을 키운다 고 설명하였다 .60) 天君은 곧 心이니까, 쟁반 안의 물과 같이 혼잡한 것이 섞여 있는 마음을 맑게 하여, 그 사려와 의지 안에 이치에 맞지 않는 바가 없는 상태에 이르도록 키우는 養心울 말한다. 天官은 五官울 지칭하니까, 인간의 모든 욕망을 바르게 방향을 잡아 주면서 키워주는 治氣를 가리키 며, 이렇게 다스려진 욕망은 道에 맞는 인간감정으로 聖人 안에 제자리를 차지한다는것이다.

59) 夫微者至人也. 至人也, 何祖何忍何危. 故湯明外景, 淸明內景. 聖人縱其欲兼其情, 而制 焉者理矣,······故仁者之行道也, 無爲也……此治心之道也(「解萩엷」 65~68). 60) 聖人淸其天君, 正其天官,備其天養, 順其天政, 養其天情 •• …•• (「天論篇」 14~15).

五官의 주인이 되는 것은 心으로서 心을 인간의 主宰로 보았기 때문에, 荀子는 특히 心을 맑게 하여 키우는(養之以 淸 ) 養心瀋i에 중요성을 두었고, 虛와 登과 靜울 그 구체적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학문적 배움을 위한 과정 으로 五經울 차례로 익혀야 한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修身울 위해서도 주체가 되는 心울 차례로 완숙하게 하는 방안을 말했다고 하겠다. 첫째로, 虛라는 것은 과거의 모든 기억을 마음 안에 간직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받아 둘이기를 거부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로, 사사로운 것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公淡를 실천하는 빈 마음을 지칭한다 .6 1) 登이라는 것은 心이 그 인식능력으 로 많은 것을 구별하여 알면서도 이것으로 저것을 해치지 않고, 유기적인 통일성 속에 모든 것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一以貫之를 가리킨다 .62) 靜이라 는 것은 항상 움직이면서도 상상이나 잡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고요한 상태 를 유지함으로써 道를 정확히 보고 바론 판단을 할 수 있는 動的인 고요함 을 말한다 •63)

61) 人生而有知, 知而有志 志也者, 威也. 然而有所謂虛不以所已威害所將受, 謂之虛(「解阪 篇」 35~36) ;公義明而私事息矣(「君道篇」 59). 62) 心生而有知, 知而有異. 異也者, 同時兼知之. 同時兼知之, 兩也 . 然而有所謂一, 不以夫 홉此一, 謂之登(「解阪篇」 37~38). 君者論一相, 陳一法, 明一指, 以兼覆之(「王覇篇」 118~119). 63) 心~ffJJ夢 倫則 自行, 使之則謀 故心未菅不動也. 然而有所謂靜, 不以夢劇亂知, 謂之靜 (「解萩篇」 38~39).

빈 마음을 간직하면 道를 제대로 인식하여 받아들이게 되고, 하나로 통일 된 통찰력을 지니면 한 모퉁이에 치우침이 없이 온전하게 道롤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맑고 고요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면 모든 것을 정확 하게 판단하므로 道에 맞지 않은 것을 하지 않게 되고, 따라서 道를 완전히 따를 수 있게 된다. 지식을 행동으로 실천함으로써 참으로 알게 된 상태를 〈明〉(밝은 통찰)이라고 불렀던 것과 같이, 荀子는 虛와 登과 靜으로써 완전 히 맑아지고 道로 밝아전 心의 상태를 〈大淸明〉(크게 맑고 밝은 경지)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大淸明이란 소국적으로 말하면, 모든 편벽됨과 가리워짐이 없어전 비워진 상태를 지칭하고, 적국적으로 말하면, 우주의 이치를 환히

통달하여 天地의 化育에 참여할 수 있고 모든 변화에 처할 수 있는 지극한 聖 A 의 경지를 가리킨다. 비워지고 全一하여지고 고요해지니 이룰 일컬어 大 淸 明이라고 한다. 만물이 그 형태가 보이지 않는 것이 없고, 보면 설명하지 못할 것이 없으며, 설명한즉 그 위치를 잃음이 없다. 방에 앉아 있으면서도 四海를 보고 있고, 지금에 처해 있으면서도 영구한 것을 논한다. 만물을 막힘 없이 바라보고 그 실정을 알며, 治亂울 헤아려서 그 법칙을 통달하여 안다. 天地롤 순서있게 경영하여 만물을 적절히 관리하며, 大理를 제대로 적용하며 宇宙 안에 머문다.”)

64) 虛登而靜, 謂之大淸明. 萬物莫形而不見, 莫見而不論, 莫論而失位. 坐於室而見四海, 處於今而論久遠 . 銃觀萬物而知其情.參稽治亂而通其度 . 經緯天地而材官萬物. 制割大 理, 而宇宙裏矣(「解萩篇」 41~43).

방에 앉아 있으면서도 만물의 돌아감을 다 통달하여 안다는 것은 老莊子 의 사상과 같은 것이지만, 聖人이 체득한 道의 성격에 차이가 있다. 老莊子 의 道는 우주적 원리(天之道)요, 인간은 그것의 無爲自然울 배우고 본받아야 하는 데 비하여, 荀子의 道는 人倫(人之道)으로서 淸明해진 聖人의 마음 안에서 체독되는 禮인 것이다. 老莊子와는- 정반대로, 荀子는 養心하여 人道 룰 알면 끝에는 만물의 道를 자연히 알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이 관심을 두어야 할 데는 天之道가 아니라 바로 治心之道(마음을 다스리는 수양 법)라는 것을 강조한 면에 있어서, 荀子의 道사상은 지극히 儒家的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聖人의 志와 慮가 淸明해지면, 결국 天의 淸明함과 비슷해지 고 地의 광대함과 같아져서 天地에 참여하는 인간의 목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 65) 다시 말해서 天地와 하나가 된다는 종국적 목표에 있어서는 같 고, 그 달성된 상태의 지국함도 유사하지만, 老莊子와 荀子가 설명하는 수양 의 과정은상반된다.

65) 君子以鍾鼓道志 以琴瑟樂心, 動以干威, 飾以羽It, 從以磐管. 故基淸明象天, 其廣大象 地, 其附仰周旋有似於四時 . 故樂行而志沿 禮修而行成(「樂論篇」 28~30).

荀子 修養論의 平常性과 普退性 荀子의 중심사상이며 道家와 그를 구분하는 가장 명백한 분기점이 되는 그의 禮사상을 논하기에 앞서, 荀子의 수양론이 지니는 平常性과 普退性에 대하여 고찰함으로써 그의 수양론이 지니는 儒家的 특성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荀子는 德울 닦는 일은 이상한 행적을 행하는 것이나 고차원적인 이론 을 체계화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일상사에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 君子는 행함에 있어서 굳이 어려운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말함에 있어서 굳이 세밀한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이름이 굳이 전하여지는 것을 귀하게 생각지 않는다. 오직 (禮義에) 합당한 것을 귀하게 여길 따름이다 .66)

(j(j) 君子行不貴荀難, 說不貴荀察, 名不貴荀傳 唯其當之爲貴者(「不荀篇」 5) ; 故君子道其 常, ifij,j、人道其怪也(「榮辱篇」 42).

따라서 荀子는 名家의 궤변이라든지 남들이 기적이라고 신기하게 떠드는 일 등을 논할 만한 가치조차 없다고 보았다. 또한 荀子는 그의 당대 사람들이 크게 생각하던 觀相에 대한 儒家的 비판 울 5 편인 「非相篇」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荀子는 키가 크고 작다든가, 얼굴 모습이 좋고 나쁘다는 것 등이 군자가 되는 일과는 무관하며, 吉凶울 판정하는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사실 荀子는 墨子의 「非命 篇」에서 엿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이 儒家 안에 새어 들어온 운명주의적 경향 을 철저하게 정화시키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옛 사람들은 관상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학자들은 이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 법이다. 관상을 보는 것은 心을 말하는 것만 못하고, 心울 논하는 일은 養心之術을 택하는 것만 못하다. 형태는 心만 못한 것이고 心은 養心之術만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養心之術이 바르게 되면 心이 이를 따를 것인즉, 관상이 비록 나쁘더라도 心과 術이 좋으면, 군자가 되기에 해로운 것이 없다. 관상이

비록 좋더라도 心과 術이 나쁘면 소인이 되 지 않을 수 없다. 군자가 되는 것을 가리켜서 吉하다고 하고, 소인이 되는 것을 가리켜 凶하다고 하는 것이다 .67) 荀子는 갑골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중국 종교사상의 기초를 이룬다고 할 수 있는 吉凶개념을 완전히 儒敎的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吉凶은 天이 주는 것도 아니고, 타고난 의모가 가져오는 것도 아니며, 자신이 얼마나 바르게 노력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가 된다는 사실이 곧 吉한 것이고, 소인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凶한 일이다 .68) 따라서 荀子는 治氣養心之術(血氣몰 다스리고 마음을 닦는 수양법)을 닦는 군자는·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굳건하고 삶의 여유와 고귀함을 지닌다고 설명한 다. 君子는 빈궁해도 그 뜻이 넓고, 부귀 속에서도 그 체모가 공손하다 .69) 때를 만나면, 그 안에 공손하게 머물고, 때를 얻지 못하면 공경스럽게 자신을 다스린다 .70) 君子는 (德이) 닦여지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 하고, 욕을 받는 것은 부끄러워하 지 않는다. 믿음(信)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 하고, 신임을 받지 못하는 것은 부끄 러워 하지 않는다. 능력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 하고, 쓰이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71) 67) 古之人無有也, 學者不道也. 故相形不如論心, 論心不如擇術. 形不勝心,心不勝術. 術正 而心順, 則形相難惡, 而心術善, 無害爲君子也. 形相雜善,而心術惡, 無害爲小人也. 君子 之謂吉, 小人之謂凶(「非相篇」 2~4). 術은 주석에서는 道術이라고만 지적하고 있는데 荀子 전체에서 볼 때 心울 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면 禮殺를 따르는 養心之 術이라고 보았다. 68) 臣道篇에서도 吉凶, 賢不肖之極也라고 해서 갇은 사상을 말하고 있다. 69) 君子貧窮而志廣, 富貴而體恭(「修身篇」 45~46). 70) 見由則恭止, 見閉ff l j敬而音(「不荀篇」 17). 71) 故君子恥不條 不恥見汗 恥不信, 不恥不見信 恥不能, 不恥不見用(「非十二子엷」 40~41) .

위의 세 가지 인용문은 실제로 『 論語 』 의 〈若貧而樂, 富而好禮〉(가난해도 즐겁고, 부유해도 예를 좋아한다)(「學而」 15), 〈用之月 1 j行, 舍之ffiJ藏〉(등용되면 정치에 참여하고` 버려지면 물러난다)(「述而」 11),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 A 〉 (남이 자신을 몰라준다고 겨정하지 말고、 남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라) (「學而」 16) 등 자신의 능력 안에 맡겨진 修已를 어떠한 운명적 요소보다 중요시했던 孔子의 삶의 자세를 荀子가 재확인한 것이라고 하겠다. 일상적인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이 자기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인격의 형성을 무엇보다도 중시하면서도, 荀子는 君子는 義룰 위해서라면 죽음을 피하지 않는다고 확언함으로써 72) 平常的인 것 안에서 실천되는 道의 窮極性 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이러한 日常性 안에 있는 窮極性의 존중은 君子가 사는 장소와 사귀는 친구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남의 충고를 받아돌이는 자세에 있어서도 드러나서 荀子는 이 모든 일에 항상 禮룰 규범으로 해야한 다고 보았다. 荀子는 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큰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73) 君子가 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養心(마음을 닦는 일)이라고 보았 고, 바로 이 점 때문에 그의 수양론은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荀子는 養心의 시발점을 誠, 또는 愼獨(혼자 있을 때를 조심함)이라고 보았 다. 수양단계의 초보자인 士는 〈혼자 있을 때 그 몸을 닦으려고 힘쓴다〉 74)

72) 長患而不避義死(不荀篇」 6) ; 重四持義而不視 是士君子之勇也(「榮辱篇」 20). 73) 故君子, 居必擇鄕, 遊必就士. 所以防邪倻而近中正也(「勸學篇」 12~13). 性惡篇에서는 환경의 중요성이 좀더 강조되고 있고, 반면에 養心에 대한 修養論은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다 . 74) 夫士欲獨修其身(「修身篇」 26~27).

고 지적하기도 하고, 마음을 수양하는 데는 성실함(誠)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성실함이 지극하게 되면 다른 일은 필요없게 될 것이다. 이는 곧 仁이 지켜짐 이요, 義가 행해지는 것이다. 마음을 성실하게 하고 仁울 지켜가면 밖으로도 드러날 것이다. 드러난죽 신묘한 힘을 가지게 되고, 신묘한 힘을 가지게 되면, 능히 (남을) 교화할 수 있다. 마음이 성실하게 되어 義롤 실천한죽 이치에 맞을

것이요, 이치에 맞으면 밝아지고` 밝아진즉 능히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 변화가 차례로 일어나는 것을 일러서 天 德이라고 한다. 天 은 말이 없지만 사람들이 그 높음을 推仰하고, 땅은 말이 없지만 사람들이 그 후함을 推仰한다. 四時는 말이 없지만 백성들이 모두 그것을 기다린다. 무릇 이것은 일정함(常)을 지니고 있어 서 그들의 성실함(誠)을 극전히 하기 때문이다 .7 5 )

75) 君子養心, 莫善於誠 致成月1j無宅事矣. 唯仁之爲守, 唯義之爲行 . 誠心守仁ff l j形, 形則神, 神ff l j能化矣 誠心行義則理, 理則明, 明ff lj 能變矣 變化代興, 謂之天德 天不言, 而人推 高焉 地不言, 而人推厚焉 四時不言, 而百姓期焉. 夫此有常, 以至其誠者也(「不荀篇」 26~29).

荀子는 誠이란 인간아 天地 및 四時와 공유하는 덕으로서, 그 일정함이 여기에서 유래한다고 설명한다. 다음 장에서 자세히 고찰하겠지만, 荀子의 유명한 〈天人之分〉(하늘과 인간의 직분을 구별함)은 그의 사상의 시발점일 뿐 전체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參於天地〉(하늘과 땅의 화육 에 참여함)의 비전을 제공함으로써 天地人, 三才의 조화를- 이상으로 하였 고, 이 비전 안에서 그의 사상체계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荀子 는 완성단계에서뿐만 아니라 養心의 가장 중요한 길로 天地人이 모두 함께 나누는 덕인 성실함을 다하도록 권고하는 것이다. 養心溝i로서의 荀子의 誠論이 이미 언급한 虛堂靜의 구체적인 養心 방법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가를 荀子는 명백히 밝혀주고 있지 않다. 내용상으로 볼 때 虛堂靜은 心울 맑게 해주는 내면적이고 구체적 방안이라고 한다면, 誠은 그 이전에 이미 가져야 할 인간의 전체적 삶의 자세 및 의부적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대저 성실함은 군자가 지켜야 할 바이며 政事의 근본이 된다.〉 76)

76) 夫誠者, 君子之所守也, 而政事之本也(「不荀篇」 34).

그의 수양론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보편성을 지닌다는 荀子의 주장으 로 荀子의 修養論에 대한 고찰을 끝내기로 한다. 恭敬스러움을 몸에 체득한 데다가 그 마음이 충실하고 믿음직하며, 禮義를

실천하고 남을 아끼는 心情울 지니고 있으면 天下의 어디를 가든지, 비록 사방 의 이민족 속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더라도, 사람마다 귀하게 여기지 않음 이 없을 것이다 .T1)

77) 體恭敬而心忠信, 術禮義而情愛人, 橫行天下, 雜困四夷 人莫不貨(「修身篇」 22).

人道에는 공간과 문화를 초월하는 항상성 (常)이 있기 때문에, 말과 습속이 다른 사회에서도 인간의 성실함은 이해될 것이고 높이 평가될 것이라는 말이다. 결국 그의 수양론을 통해 荀子가 주장하는 바는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터 온전한 德이나 (禮)義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 인 쌓음(千검) 의 노력을 통해 지극히 성실할 수 있는 법을 배우고 실천함으로써 人道를 완성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지적으로 나 도덕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사실이 필수조건으로 부각된다. 그러나 荀子가 말하는 배움의 성격, 곧 性僞之合의 수양론은 法家에서 처럼 정치적 위세나 상벌의 법적 규정을 통해 의부적 압력에 의해 이루어질 수는 없고 ,78) 인간 각자가 자율적으로 治氣養心울 실천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면에서 儒家的 특성을 지닌다. 『論語』 에서 孔子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언급 한 아마도 유일한 말씀인 〈性相近也, 習相遠也〉(본성적으로는 서로 가까우나 습관에 의해 서로 멀어진다)(「陽貨」 2) 를 荀子는 〈人之生固小人〉(인간은 태어나 면서는 본래 소인이다)이지만 化育이 가능하다는- 그의 수양론을 동해 이론적 으로 체계화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78) 故賞慶刑罰執詐之爲道也. 偏徒弼賣之道也. 不足以合大衆, 美國家. 故, 古之人墓而不道 也(議兵篇」 94~95). 荀子의 「性惡篇」만이 의부적 압력에 의존하는 면을 강하게 지니 고있다.

사실 原始儒敎의 특성은 인성론에 있다기보다는 수양론에 있는 것이다. 孔子는 본성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함이 없이 구체적으로 군자가 될 수 있는 수양론을 제시함으로써 그의 修已安人의 인간론을 전하였고 孟子는 盡心, 存心, 養心 및 養浩然之氣를 말함으로써 수양을 통한 王道의 이상을- 설명하 였으며, 荀子는 治氣養心術을 발전시킴으로써 性僞之合과 參於天地의 聖人의 경지를 주장할 수 있었다. 原始儒家를 대표하는 孔 • 孟 • 荀 모두가 수양론

울 가르침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단 그 구성 및 전달방 법에서 차이를 보여 준다. 孔子는 자기 자신의 삶, 내지 君子라는 구체적 인간상을 가지고 仁울 이루는 그의 수양론을 제자들에게 가르쳤고, 孟子는 인간 모두가 聖人이 될 수 있는 도덕성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확신에 근거하여 盡心할 것을 당대의 君主들과 제자들에게 호소하였으며, 荀子는 그침 없는 배움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는 현실에 착안하여, 그의 수양론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키면서, 養心의 시작이요 끝으로서 時空울 초월하는 보편적 常道로서의 禮사상을 확립했던 것이다. 4 荀子 禮論의 특성 『論語』에서 볼 수 있는 孔子의 禮사상은 종교적 성격을 띠는 제례적인 禮와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인륜적인 禮가 병행되면서 특히 君子의 삶에 있어야 할 틀 또는 바른 표현을 지칭하였다. 〈克已復禮〉에서 드러나듯이 仁울 이루는 과정에서 禮는 君子의 내면적 修已에 윤곽을 제공하고 지침의 역할을 한다는 면에서 중요시되었다. 그런데 荀子에 와서 禮는 개인적인 삶에서는 물론이지만 특히 사회적인 틀 또는 제도적 표현으로서 중시된다는 것이 특이하다 .79) 저 國家리는 것 역시 닦는 숫돌이 필요한데, 禮義와 節奏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운명은 天에 달려 있고, 나라의 운명은 禮에 있는 것이다 .80) 79) 孟子에서 禮는 四端의 하나로 간주되었으므로 人性의 한면으로 心 안에 뿌리박힌 사양할 수 있는 마음을 지칭하였고, 사회적 제도 또는 틀로서의 가치는 별로 강조되 지 않았다. 80) 彼國者亦有祗磁 禮義節奏是也. 故, 人之命在天, 國之命在禮(더量國篇」 4). 節奏는 예의에 알맞는 法度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주석가들은 보았다.

하늘에 있는 것 중 日月보다 밝은 것이 없고, 땅에 있는 것 중 水火보다 밝은 것이 없으며, 물건들 중에 珠玉보다 밝은 것이 없고, 사람 안에 있는 것 중에 禮義보다 더 밝은 것이 없다……예의가 국가에 가해지지 않으면 功名이 드러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命은 天에 있고, 나라의 命은 禮에 있는 것이다 .81) 〈禮〉는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節度의 표준이기 때문에, 상하를 구분하여 조화를 이룰 수 있고, 따라서 사회를 유지시키고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禮義〉는 다스림의 시작이므로 군주가 예의를 모르고 이익을 담하여 권모술 수를 쓰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 .82) 荀子의 유명한 王道와 喬道의 차이 역시 〈義〉가 그 나라의 국시로 채택되느냐의 여부에 달렸다. 〈義가 확립되 면 王者가 되고, 信이 확립되면 覇者가 되며, 權謀가 확립되면 亡者가 된 다.〉 83)

81) 在者莫明於日 月, 在地者莫明於水*, 在物者莫明於珠玉, 在人者莫明於禮義…… 禮義 不加於國家, 則功名不白. 故, 人之命在天, 國之命在禮(「天論篇」 40~43). 82) 禮者, 節之準也……禮以定倫(「致仕篇」 20) ;禮義者, 治之始也(「王制篇」 64). 83) 義立而王, 信立而覇 權謀立而亡(「王覇篇」 4).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荀子사상 안에서 갖는 禮와 義와의 관계이다. 많은 경우에 荀子는 이 둘을 합하여 禮幾라는 복합어로 쓰고 있어서 별차이를 느낄 수 없지만, 각기 독자적으로 사용될 때를 고찰하 여 보면 禮와 義 사이에는 뉘앙스의 차이가 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우선 荀子의 禮에는 郭洙若이 지적한 바와 같이 협의와 광의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협의로 쓰일 때에는 禮儀損讓의 禮로서 士 이상의 신분에게 요구하던 그야말로 의식적 〈禮儀〉를 지칭하고, 광의로 쓰일 때에는 서민을 포함하는 백성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法制刑政까지를 포함하는 보편적 사회 규율로서의 禮를 가리킨다• 郭洙若은 孔子는 德禮刑政울 모든 백성에게 적용 시켰는 데 비해, 荀子는 협의의 德禮를 서민에게서 제의시켰다는 데서 荀子 를 復古的이라고 평하였다 .84)

84) 十批判書 227 면 ; 由士以上ff l j必禮樂節之, 衆庶百姓則必以法數制之(「富國篇」 18) ; 馮友 蘭의 『中國哲學史』, 204 면 참조.

그런데 사실 荀子가 禮롤 협의의 의미로 쓸 때는 지극히 적으며, 대부분 의 경우 그의 禮는 義와 같은 의미로 義와 함께 쓰이고 있다. 殺는 사람을 동물과 구별케 하는 특성이었고, 올바론 정치가 이루어질 때에 君主로부터 庶人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義를 실천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荀子 의 義는 분명히 보편성을 띠고 있다 .85) 또한 義는 군자가 죽을 때까지 그칠 수 없는 배움의 목표이기도 하였다. 결국 〈義〉란 荀子에게 있어서 인간 모두가 가전 가능성으로서 죽을 때까지 노력하여 이루어야 되는 개인 및 사회적 도덕성의 완성이요, 그 상칭이었다. 그에 비해 禮는 그 義를 자신 안에 이미 완성한 聖王둘이 객관화하여 전통 속에 전승시킨 것이므로 義의 의형화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荀子가 禮와 義를 결합하여 대부분 의 경우 복합어로 쓰고 있는 것은, 주관적 도덕성과 객관적 도덕성의 일치를 이상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85) 君臣上下, 賞賤長少, 至於庶人, 莫不爲義, 則天下執不欲合義矣(「强國篇」) . 蔡仁厚는 孟子의 義는 主視內的인 것으로서 仁과 상통하는 데 비하여 荀子의 義는 客觀的 ' 의미를 중시하여 禮와 연결되었고 따라서 정치사회적 效用에 치중된 것이라고 지적하 였다(「孔孟荀哲學」, 456 면). 대체적으로는 옳은 평이지만, 荀子 역시 義를 仁과도 연결시키고 있으며, 주관내적인 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 역시 지닌다고본다.

물론 荀子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예의의 의의를 각 개인의 완성에서 뿐만 아니라 특히 이것을 통해 王道的 국가를 이룰 수 있다는 데서 보았 다. 그러나 개인의 도덕적 완성과 국가의 운명은 개별적인 것일 수가 없었 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사회 전체에 예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양을 통해 자신 안에 이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修身과 爲國은 결국 직결될 수밖에 없다 .86) 따라서 이상적으로 王者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道를 다 구비하여 인간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한 聖人뿐이다 •8n 한마디로 荀子의 禮는 국가와 개인과 세상만사를 완성시키는 척도요 길이요 이치인 것이다. 〈사람으로서 禮가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고, 어떤 일이든지

86) 請問爲國 曰, 聞修身, 未菅聞爲國也. 君者儀也, 儀正而景正. 君者築也, 盤圓而水圓 (「君道篇」 29~30). 87) 非聖人莫之能王, 聖人備道全美者也(「正論篇」 26).

禮가 결여되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나라 안에 禮가 없으면 평안하지 않을 것이다.〉 88)

88) 人無禮則不生, 事無禮ffiJ不成, 國家無禮則不寧(「修身篇」 9~10).

荀子의 禮사상이 지닌 첫째 특성을 객관화된 사회성이라고 한다면, 둘째 특성은 禮를 人道의 국치로서 부각시키며 실제로 禮를 道와 일치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荀子가 道家의 常道개념을 수용하면서도 그 항상성을 인간이 걸어야 할 人道에 적용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지적하였다. 그런데 荀子는 人道를 세분하여 君道,臣道, 兵道 등으로 각자의 本分에 따라 실행해야 할 영구불변의 이치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道가 절대규범이 되기 때문에 忠孝 등의 개념은 자연히 그 밀에 종속된다. 예를 들어 荀子는 大忠 은 君主의 뜻을 따르는 데 있지 않고, 道에 따르는 것이며, 德으로 君主룰 감화시키는 데 있는 것이라는 儒家的 이상을 제시한다 .89) 이와 같은 정신으 로 「雜篇」에는 참된 孝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道룰 따르는 데 있디는 언급을 볼 수 있다 .90) 그러면 그 道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면, 荀子는 묘하게도 다시 도덕적 덕목등을나열한다. 무릇 승리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인심을 얻어야 하고, 인심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道와 함께 있어야만 합니다. 道란 무엇입니까? 대답하기를 〈禮義辭讓忠信이 곧 道입니다〉 . 9 1)

89) 有大忠者, 有次忠者, 有下忠者, 有國賊者 以德復君而化之, 大忠也(「臣道益」 33~34). 90) 入孝出弟 人之小行也 上順下篤 人之中行也. 從道不從君, 從義不從父, 人之大行也 (「子道篇」 1~2). 91) 凡得勝者必與人也 凡得人者必與道也 道也者何也 B, 禮義辭讓忠信是也(「疆國篇」 40~41).

마치 孟子가 仁義禮智의 四端울 말하지만 결국은 仁心 및 仁政으로 모든 덕목을 종합하였듯이, 荀子 역시 禮義辭讓忠信울 禮로 종합하고 완성시킨 다 ..

禮가 어찌 지국한 것이 아니겠는가? 융성하게 하여 그것으로 한계를 삼으면, 天 下에서 더 가감할 것이 없게 된다. 本末이 서로 따르고, 처음과 끝이 상응하 며, 文化를 국전히 하여 차등이 있게 하고、 통찰력을 국진하게 하여 (是非와 분별의 ) 논리가 분명하게 한다. 天下가 그것을 따르면 다스려지고, 따르지 않은 죽 혼란해전다. 따르는 사람은 편안하게 되고, 따르지 않는 사람은 위태롭게 되며, 따르는 사람은 생존하고 따르지 않는 사람은 멸망한다……그러므로 먹줄 은 곧음의 극치요, 저울은 균형의 극치며, 둥글고 모난 자는 원과 사각의 극치인 것과 같이, 禮라는 것은 人道의 극치인 것이다 .92)

92) 禮不至矣哉 立隆以爲楓 而天下莫之能損益也. 本末相順, 終始相應, 至文以有別, 至察以有說 天下從之者治, 不從者亂 從之者安, 不從者危.從之者存, 不從者亡…… 故, 繩者直之至, 衡者平之至 規短者方圓之至, 禮者人道之極也(「禮論篇」 28~30, 33 ~34).

이렇게 荀子 안에서 禮가 절대화되면서 『論語』에서 孔子가 조심스럽게 균형을 유지하던 仁과 禮의 조화가 깨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孔子의 사상 체계 안에서 仁은 質, 곧 내면적 德의 완성으로서 내용을 상칭했고, 禮는 文, 곧 문화적 표현으로서 그 내용이 담긴 툴을 지칭했다. 따라서 仁은 時空 을 초월하는 것이었지만, 禮는 시대에 따라 수정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荀子에 이르러서 禮가 곧 人道의 국치로 간주됨으로써 내용과 표현이 하나 로 일치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荀子의 禮 개념은 常道로서 일정불변하다는 규범성 때문에 공권력의 힘을 빌어 법제화될 때에 사회 전체를 그에 따라 정착시키고 따르게 하는 힘을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고착성을 지니 고 있어서, 시대에 따른 변화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가장 뚜렷한 예로구 신분사회가 붕괴된 현대에 와서는 고착된 荀子의 禮 개념보다는 시대에 따라 변화가 가능하다는 孔子의 禮 개념이 훨씬 더 호소력을 지닌 것이라고 하겠다. 물론 荀子 역시 禮의 실천에 있어서는 제도화된 法 자체보다 法의 본뜻을 이해하고 있어서 환경에 따라 이룰 적응시킬 수 있는 君子의 존재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울 강조하였다. 〈法이란 디스림의 끝이요, 君子는 法의 원천

이 되는 것이다……法의 의미(義)를 모르면서 法의 규정(數)만을 바르게 한다면, 아무리 많은 것을 안다 할지라도 반드시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93) 法制度보다도 인격자의 존재를 중요시하였다는 면에서 荀子의 사상이 法家와 구별된다는 것은 이미 지적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法家에서 만민에게 적용될 수 있다고 제시한 것에 대등할 만한 보편적인 禮法의 확립 에 관심을 두었다. 따라서 그는 法울 儒家的 禮사상으로 해석하여, 常道인 禮에 따라 사회 전체에 位階的 틀을 제공하였다. 곧, 신분적 차등에 따라서 가옥, 거마, 의복, 장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규정함으로써 禮法에 따른 영구한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93) 法者, 治之端也, 君子者, 法之原也 ……不知法之義, 而正法之數者, 雜博臨事必亂. 井出 元 Ide Hagi mei:-荀 子가 法家와 法律主義를 儒家의 입장에서 받아들입으로써 도덕 주의와 법물주의의 조화 및 합일을 그의 性爲論으로 시도하였다고 보았다(「荀子 E 右 ,t 히儒家思想(l)展開」, 壬 7 口 :;硏究 2(1 9 74), 196~7).

「禮論篇」에 나오는 喪禮는 그 대표적 예로서, 亡者가 속한 사회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는 장례기간과 의식 등을 자세히 규정한 후에, 荀子는 상례가 지닌 보편성과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喪事를 당하여 그 (정해진) 예의를 그만두고 누가 장례를 지낼 수 있겠으며, 그 예의를 행한다면 누가 그것을 중지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3 개월의 장례기간 동안에는 亡者의 모습을 살아있을 때처럼 장식하는데, 이것은 망자를 남게 하여 살아있는 이들을 위로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모하는 뜻을 지극히 하고 자 하는 것이다 .94)

94) 當是時也, 其義止, 誰得行死, 其義行, 誰得止之. 故, 三月之葬, 其顔以生設飾死者也. 治非直留死者以安生也, 是致隆思慕之義也(「禮論篇」 59'~ 6 0). 3 개월이란 70 일에서 50 일에 걸치는 장례기간을 지칭한 것이다.

孔子는 장례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형식적 절차보다도 승퍼하는 마음이라 고 했고(「지恥 3, 26), 禮는 사치하기보다는 검소한 것이 좋다고 하였다. 양면을 경비하되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했던 孔子와는 달리, 荀子는 형식과

감정이 병행하고 섞여서 하나가 되는 것이 최상이라고 보았으며, 더 나아가 서는 사모의 감정 그 자체가 상례라는 형식을 통해 적절하게 표현되는 것을 중시하였다 .95) 즉, 性僞之合은 여기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으로 자연스러 운 사모의 정인 性은 상례라는 문화적인 僞에 의하며 완성된다고 본 것이 다.

95) 文理情相爲內外表裏 並行而凍 是禮之中流也(「禮論篇」 38~39).

人道의 극치로서 禮는 生과 死 전체를 바르게 하여, 인간의 자연적 감정 과 사려를 키워 주는 것이다. 너무 길면 자르고、 너무 짧으면 늘이며, 남은 것은 없애고, 부족한 것을 메워준다. 禮는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척도가 되므 로 인간간의 사랑과 공경을 바르게 하고 아름답게 한다. 사실 荀子에서 禮는 美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荀子는 禮롤 체득한 聖人을 아름답다고 하였으며(「正論」 26), 禮에 따라 사회의 모든 풍습이 이루어전 국가를- 아름 답다고(「王森」 145) 묘사하였다. 인간과 인간공동체가 수양을 통해 德울 키워 서 그 되어야 할 목적에 이르른 상태를 아름답다고 표현했기 때문에, 荀子의 美개념은 도덕적인 것이며 사회적인 것이라고 하겠다. 한마디로, 禮가 체현 된 상태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禮의 효능은 인간 사회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어서, 荀子는 인간은 禮로써 하늘을 - 섬기는 것을 배우고, 조상을 공경하며 聖王과 스승을 높이는 것을 배운다고 한다. 이와 같이 禮는 인간의 개인적 삶과 사회생활 및 종교생활 전체를 꿰뚫는 人道의 총체인 것이다. 그래서 禮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聖人뿐이며, 君子는 이를 추구 하여 실천하고, 일반백성은 관습으로 이를 따를 뿐이다. 결국 荀子는 禮의 이해 정도에 따라서 인격완성의 정도를 측정하였다 .96)

%) 祭者志意慕之情也 忠信愛敬之至矣, 禮節文統之盛也. 荀非聖人, 莫之能知也. 聖人明知 之, 士君子安行之, 官人以爲守, 百姓以成俗(「禮論篇」 120~122).

荀子의 禮論이 지닌 셋째 특성은 禮룰 제정한 先王 또는 聖王들보다도 그 의미를 이해하여 후대 사람들에게 禮를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친 聖人들 의 공로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디는· 것이다. 많은 경우 荀子 안에서 聖王과 聖人이 상호교환될 수 있는 동의어로 쓰이고, 聖王도 聖人의 경지를 이루었 기 때문에 禮를 시작할 수 있었지만, 제도의 제정자로서의 〈王〉과 人倫의

완성자로서의 〈聖〉은 개념상으로 구별되고 있다. 배움이란 그 그치는 바를 확실하게 해야 한다. 〈어디에서 그쳐야 할 것인가?〉 대답하기를, 〈至足에서 그칠 것이다〉. 〈무엇이 일러 족한 데 이르렀다고 하는가?〉 대답하기를 〈聖이다〉. 〈聖〉이라는 것은 인륜을 다한 것이고, 〈王〉이라는 것은 제도를 다한 것이다. 양쪽을 다하면 天下의 지극함을 다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學者는 聖과 王울 스승으로 삼고、 聖과 王이 제정하여 이루어진 法에 의거하여, 그 法울 따용으로써 그 구별을 구하며, 그 사람됨을 본받아야 한다 .971 배움의 끝이 聖人이 되는 데 있다는 것은 이미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荀子는 王과 聖의 개념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 先王이란 天子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고대의 제도를 제정할 수 있었던 堯舜禹 등을 지칭하므로, 百家의 학설울 평가할 수 있는 규범적 위치를 차지 하고 있는 〈古〉의 대표자들이다뿌 聖人이란 先王의 뜻을 이해하여 그것을 체득한 후대의 사람들로서, 孔子가 그들을 대표하며 앞으로 나울 많은 인륜 의 완성지들을 지칭한다. 聖人과 聖王의 홍미로운 관계를 荀子는 「非十二子 篇」에서 다음과 갇이 설명한다•

97) 學者, 固學止之也. 惡平止之. 日, 止諸至足 易謂至足 日, 聖也. 聖也者, 盡倫者也. 王也者, 盡制者也. 兩盡者足以爲天下極矣. 故, 學者以聖王爲師. 案以聖王之制爲法, 法其 法以求其統甄 以務象效其人(「解阪篇」 81~83). 98) 百家之說 不及先王不聽也(「儒效篇」 127).

오늘날 仁人은 과연 무엇에 힘써야 하겠는가? 위로는 舜과 禹의 制度룰 본 받고, 아래로는 仲尼와 子弓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다. 이렇게 하면 十二子의 학설을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이고, 天下의 해독은 제거될 것이다. 仁 A 의 일이 완성될 때에 聖王의 발자취가 밝히 드러날 것이다 .99)

99) 今夫仁人也, 將何務哉 上ff l j法舜禹之制, 下則法仲尼子弓之義. 以務息+二 子之說, 始是則天下之害除. 仁人事畢, 聖王之跡著矣(「非十二子篇」 19~21).

규범이 된다는 면에서는 〈古〉가 우선권을 차지하지만, 의미를 밝혔다는

면에서는 〈 今 〉이 더 급한 것이며, 今울 통해서만 古가 밝혀 질 수 있는 것이 다. 荀 子 의 後王 사상에서 이미 확인된 바와 같이 舜과 禹 등 占代 의 先士보 다는 文武 등 周初의 後王 의 정치가 더 잘 알려진 것이며, 더 나아가서 孔 子 와 子弓 이 더 분명하게 聖 王 之道의 의미를 밝혀주었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은 그들에게 더 의존해야 된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荀 子 는 살아있는 당대의 사람 중에서 훌 륭한 스승을 찾는 것이 聖 A 이 되는 가장 효과적인• 길임을 역설하였다 .100)

100) 故日, 欲觀千歲, ff l j數今日 . 欲知億葛 則審一二 . 欲知上世, ff l j審周道 欲知周道, ff l j審 其人所貸君子(「非相篇」 31~32). 三浦吉明, 「荀子(!)後王思想 1:-:, p-r」, (〈集刊東洋 學〉 39, 1978, 14~26) 참조 .

「 修身篇 」에서 荀子는 禮와 스승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禮는 몸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스승은 禮 를 바르게 해준다. 禮 가 없으면 어떻 게 몸 을 바르게 하며, 스승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禮 가 이와 같다는 것을 알 것 인가? 禮가 그와 같기에 내가 그것을 받아들인즉, 내 심정이 禮 안에 안정된 다. 스승 이 그와 같이 말하므로 내가 그것을 받아들인죽, 내 앎이 스승과 같아지 는 것이다. 1 갑이 禮 안에 안정되고 앎이 스승과 같아지면, 이것이 곧 聖人인 것이다… ... 무릇 스승은 자신(의 삶)으로써 (제자의) 바른 모범이 되고- (제자 가) 스스로 안정되는 것을 귀하게 여길 것이다 .10 1)

IOI ) 禮者所以正身也, 師者所以正禮也 . 無禮何以正身, 無師吾安知禮之爲是也. 禮然而然, 則是情安禮也 . 師云而云 則是知若師也 . 情安禮, 知若giji, ff lj 是聖人也 ……夫giji以身爲 正義, 而貴自安者也(「修身篇」 37~39).

荀子는 孟子와는 달리 스승의 선택을 중요시 여겼으며, 전정한 의미의 스승이란 先王의 道룰 이론적으로 알 뿐만 아니라 실천을 통해 그 의미를 체득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스승은 말로 가르치기보다 스스로 모범을 보여서 제자가 따를 수 있도록 해야 된다고 강조한다. 「致仕篇」에서 스승이 될 수 있는 네 가지 자격을 열거할 때에도 荀子는 많은 것을 가르치 는 것은 그중의 하나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102) 다시 말해서 지식을

l02) 師術有風 而博習不與焉 尊般而博,……耆文而信,……iili說而不陵不犯, … ··11] 微而論,

可以爲tiji(「致士篇」 23~24).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스승이 될 수 없고 孔子의 〈 一 以貫之〉와 마찬가지로 모든 事物을 꿰뚫는 일관된 道롤 체득하여 남을 모범으로 교화할 수 있어야 진정한 가르침이 이루어진다는 수양론의 한 부분으로서의 儒家的 교육관을 제시하는 것이다. 荀子의 禮論이 지닌 특징을 종합하여 보면, 첫째로, 국가의 운명은 禮에 달려 있다고 역설하는 바와 같이 禮의 사회성을 강조하여 禮를 사회 전체의 틀, 또는 규범적 지침으로서 제시하고 있디는· 것이다. 둘째로기 禮를 〈人之常 道〉(인간이 걷어야 할 일정한 길)라고 정의함으로써 古今과 東西의 관계없이 인간이면 누구나가 따라야 하는 보편적 이치 (理)로 보았다는 점이다 .103) 그러 나 아러한 그의 보편성의 주장 안에는 荀子가 사회적 구분을- 인간 집단의 기본요소라고 보았기 때문에 오는 신분에 따른 위계성이 포함되어 있다. 셋째로, 荀子는 禮를 체득하기 위해서는 先王보다는 後王울, 後王보다는 孔子와 子弓을 배울 것을 주장하였고, 그들의 가르침을 체득한 살아있는 스승을 가져야 된다고 보았다.

103) 荀子는 〈道之理〉,〈禮之理〉, 〈物之理〉 등으로 만사에 포함되어 있는 이치를 理라고 불렀다. 또한 人之性을 알게 된 사람은 物之理까지를 가히 알 수 있다(「解萩篇」 78) 고 한 접에서 인간중심적 儒家의 관접을 드러낸다. 그러나 宋代 이후의 理 개념 과는 다르다. 新儒學에서의 理는 形而上學的 근원으로서 철대성을 지닌 독립개념이 지만, 荀子의 理는 종속개념으로 禮에 따라야 하는 상대적 가치만을 지니고 있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서, 荀子는 전승되는 전통의 지속적인 해석과정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 가까울수록 그 사상의 핵심이 분명히 전달된다는 장점을 지녔다고 본 것이다. 그의 이러한 해석학적 긍정성은 그가 道의 연속성을 확신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聖 A 이 속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답하기를, 〈聖人은 자신을 척도로 하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사람을 헤아리고, 情으로 情을 헤아리며, 類로 類를 헤아리고、 진술로써 功을 헤아리고, 道로써 보는 바가 다하도록 한다. 옛날과

지금이 헤아리는 바가 하나( 一 )인 것이니, 갖 i가 툴 리지 않는 한 시대가 오래 지나도 理를 같이 하는 것이다〉 .1 이) 孔 子 의 一 以貫之의 〈一〉이 仁울 이루는 修養論인 忠怒룰 지칭했다면, 荀 子 의 〈一〉은 일정불변한 人道로서의 禮義였다 .105)

104) 聖人何以才遺t. 日, 聖人者以已度者也 . 故以人度人, 以情道情,以類度類,以說度功, 以道觀盡 古今一度也. 類不悟, 難久同理(「非相얽」 35~36). 105) 故君子結於一也(「勸學篇」 24) ; 是夫靈居和一之道也(「榮辱篇」 74) ; 百王之道一是矣 (「儒效篇」 66) 등.

예의로써 모든 것을 하나로 묶기 위하여, 荀子는 먼저 인간사와 만둘 전체를 제대로 구별(分)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구별을 혼동함이 없이 모두가 이해하기 위하여 명칭을 바르게 할 것을 역설하였는데, 그것이 곧 그의 正名論이다. 각기의 구분에 따라서 이름을 밝혀서 상하와 귀천의 사회적 구별은 물론, 天과 地와 人울 제대로 구분하여 각기의 직분을 분명히 하도록 함으로써, 만물이 끝에 가서는 조화 속에 하나로 통일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이 조화 속에는 天地人 三才가 모두 포함되는 것이기에, 다음 장에서는 荀子의 정명론과 正名에 따른 사회관 및 天觀울 고찰하기로하겠다.

7 장 荀子의 正名論과天人觀 『 荀子』 第 22 편인 「正名篇J의 첫머리를 고찰해보면, 荀子에게 있어서 명칭 (名)이란, 이름을 가짐으로써 개념화된 인간문화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서, 축적되는 모든 전통과 인간 의식의 대상이 되는 우주만물을- 포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회집단을 통일시켜야 할 직분을 가진 정치지도 자만이 새로운 명칭(新名)을 제정할 권한을 갖는다I) 물론 그 역시 전통을 존중하여 인정된 관습을 따라야 하고, 本國뿐만 아니라 異域에까지 통할 수 있는 보편성을 떤 명칭을 만들도록 해야 한다.

I) 若有王者起 必有循於舊名, 有作於新名 (r 荀子』, 「正名篇」, HYI, II ~12).

후대의 임금이 (모든 것의) 명칭을 정할 때에, 형벌제도(刑名)는 商나라를 따르고, 벼술제도(爵名)는 周나라를 따르며, 예의범절(文名)은 禮에 따르도록 한다. 散名아란 萬物에 붙이는 일반명칭이니 중국의 관습에 따르도록 하되, 먼 지역의 풍속이 다른 지방에까지도 골고루 미치도록 해야 널리 통할 수 있게 된다 .2)

2) 後王之成名, 刑名從商, 爵名從周, 文名從視. 散名之加於萬物者, ffiJ從諸夏之成俗, 曲期遠 方異俗之鄕, ffiJ因之而爲通(「正名篇」 1~2). 주석가들은 荀子가 여기서 中國을 다른 나라들의 표준으로 하고 있음을 지적하였고, 그에 따라 H. H. Dubs 는 마지막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 ( The Work of H퍄

Tzu, Arthu r Prosth a i n, 1928, 281 면 )

여기서 荀子는 인간사회가 지닌 명칭 을 刑名』爵 名 , 文名, 散 名 의 네 가지 종류로 분류하고 있다. 刑 名 이란 司 法관계에 관한 모든 法制度를 말하고, 爵名이란 國家行政에 관계되는 위계적 官職을 지칭하며, 文名이란 학술 • 교 육 • 윤리 • 종교생활에 관계되는 문화제도를 일컫고, 散名이란 인간과 자연에 관계된 그 의의 모든 잡다한 명칭을 가리킨다. 그런데 荀子는 명칭아란 원래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실을 그러한 이름으로 지칭하자는 사회적 약속에 의하여 이루어전 것임을 명백히 지적하였다. 사회적 약속에 의하여 규정된 것이므로 모든 사람에게 분명한 의미를 전달해 줄 때 그 명칭은 좋은 것(善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약속한 바에 변화가 일어나서 사실을 제대로 대변해 주지 못하게 될 때 그 명칭은 의미를 잃게 된다전 따라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때마다 王者 가 일어나서 새로운 명칭을 정함으로써 사실( 實 )과 명(名) 사이의 불일치를 바로잡아야 한다. 이것이 곧 正名으로서, 名이란 實 울 표현하는 形式이기 때문에 새로운 제도를 만들 수 있는 王者만이 새로운 명칭을 제정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지식인인 儒家의 역할은 實에 부합한 名을 정할 수 있도 록 王者를 도와서 사회에 질서를 부여하는 데 있다.

3) 名無固宜, 約之以命 約定俗成, 謂之宜 異於糸 8, ffiJ謂之不宜……名有固善, 樞易而不 掃 , 謂之善名(「正名篇」, 25~27).

荀子는 王者의 직분을 지니지 않은 개인이 마음대로 사물의 명칭을 바꾸 거나 그 의미를 혼돈시키는 일은 사회에 혼란을 가져오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荀子는 名家의 궤변이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을 지적 하였던 것이다 .4) 사실 荀子가 들고 있는 명칭의 두 가지 역할은 사회성과 직결된다는 특성을 지닌다. 죽, 하나는 事物의 同異를 구별하여 그 類를 밝히기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귀천을 분명히 하여 위계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다.

4) 荀子와 名家와의 관계 및 荀子의 共名과 別名에 대해서는 鄭仁在, 「荀子의 正名論」 (《哲學會誌》 9, 43~62 면) 및 牟宗三, 『名家與荀子』(學生書局, 1979) 참조 .

그러므로 (사물에 대한) 지식을 가전 사람은 (그들간의 ) 分別울 명확히 하여 명칭을 재정하고、 그로써 사실을 지칭하게 한다. 위로는 乳膳 g 을 밝히고、 아래로는 同異를 구별한다. 貸 賤이 밝혀지고 同異가 구별된즉, 뜻이 서로 통하지 않는 우려가 없어지고, 일이 곤란해지고 이루어지지 않는 재앙이 없게 된다. 이것이 곧 명칭이 있어야 되는 이유인 것이다 .5)

5) 故知者爲之分g 1 J, 制名以指實. 上以明貴賤, 下以辨同異 . 貸賤明, 同異glj, 如是ffiJ, 志庶不 瑠之患 事無困廢之禍 此所爲有名也(「正名篇」 14~15).

여기서 荀子가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分月 1] 의 개념이다. 그런데 사물의 同 異 와 貴 賤을 분별한다는 것은 荀子의 散名이 내포하고 있듯이 인간사회뿐 만 아니라 우주 만물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다. 荀子는 크게는 天地人 각기의 직분을 구분하여 類에 따른 구별 및 위계를 우주적 체계 안에서 확립하고자 하였고, 작게는 인간사회 안에서 인간 각자 가 지닌 직분의 同異와 貴 賤을 분명히 하여 구별을 통한 조화를· 추구하였 다. 비록 荀子가 후자에 그의 관심을 집중하였고 「正名篇」의 내용아 사회 속의 正名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사상 전체를 체계적으 로 이해하고자 할 때에 그의 正名사상이 天地 A의 구별과 조화에까지 이른 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天論篇」에 언급되는 〈天人之分〉(하늘과 인간의 직분을 구별한다)의 分別 역시 荀子의 正名論의 입장에서 살펴볼 때, 그 의의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至人 혹은 君子는 天과 그 직분을 다투지 않으며, 인간으로서의 類에 맞는 바를 따름으로써 福을 가져오는 사람이라고 荀子는 묘사하고 있다 .6)

6) 故明於天人之分, ffij可謂至人矣 …• .. 夫是之謂不與天爭職 …… /I 頂其類者謂之福, 逆其類者 謂之過(「天論篇」 5~7, 12~13). 片倉望已는 荀子의 天 人之分은 그의 類의 사상에 기초를 두고 그 위에 老子의 逆說的 논리가 첨가되어 성립된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荀子思想(l)分裂&統一-天人之分(l)思想」, 《東洋學》 40(1 9 78), 22 면). 梁啓雄이 그의 r 荀子簡釋 』 에서 分울 職으로 이해하여 天과 人이 다른 직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 라고 지적하는 것도 참조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인간사회 안에서의 〈分〉이 질서와 조화를 가능케 하여 정치의 기초를 이루는 것과 같이, 荀子의 天人之分이란 天地人 각기의 질서와 직분

울 명백히 구별함으로써 각기의 자율성을 존중함과 동시에 궁극적 조호H ! 가능케 한다. 결국, 荀子의 分개념은 그의 사상체계 전체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서 그의 인간론, 사회론, 우주론이 分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는 治氣養 心의 수양론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우선 性과 僞를 구분하였을 뿐만 아니 라, 〈性僞之合〉(본성과 수양의 결합)의 정도에 따라 규정되는 사회적 직분의 賀賤을 구분함으로써 그의 정치론을 전개하였다. 인간과 구체사물과의 관계 및 그의 宇宙論에서 역시 同異와 賞賤의 구분을 적용하여 天地人을 구별하 는 데서 시작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荀子의 正名論은 그의 정치사회관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그의 우주관 및 종교관의 시작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먼저 그의 정치사회 사상으로서의 社會的 正名論을 고찰한 후에 그의 종교사상으로서의 宇宙的 正名論울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사회적 正名論 : 荀子의 정치경제관 儒家 正名論의 시작은 물론 孔子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그의 제자 子路와의 대담에서 孔子는 정치의 시작이 正名, 곧 명칭을 바르게 하는 데 있다고 밝힌 바 있다( 『 論語』, 「子路」 3). 正名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子路에게 孔子는 각자가 지닌 명칭, 곧 직위가 그가 지닌 실제적 권한과 일치할 때 내려진 명령이 실천되고, 명령이 제대로 실천될 때에 일이 이루어 지며, 그런 후에야 禮樂 등 문화적 교육이 가능하게 되고, 刑罰이 올바르게 적용되어 백성의 삶이 편안할 수 있음을 설명하였다. 또한 孔子는 正名의 구체적인 예로서 정치에 관해 묻는 齊景公에게 〈君君臣臣父父子子〉(「顔淵」 II) 를 제시하였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이 각자의 위치와 명칭에 맞는 행동을 실천할 책임을 지닌다는 상호적 윤리 mutu a l e t h i c 가 文質彬彬의 이상과 함께 孔子 正名論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荀子는 孔子의 〈君君臣臣父父子子〉를 다음괴- 같이 확대 해석하고 있다.

君臣, 父 子 , 兄弟, 夫婦라는 것은 (人道의) 시작이자 마침이며, 마침이자 시작 인 것이니, 天地와 더불어 이치(理)를 같이 하고、 萬世를 통해 영구할 것이다. 그래서 아것을 일러 위대한 근본(大本)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초상을 치루고 제사를 지내는 일(喪祭), 제후가 天子를 뵙는 의식(朝賜), 군대의 의례(師旅) 가 (결국)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사회적 上下의 신분(貴賤), 사법제도의 적용 (殺生), 정치 권한의 실천(與奪)이 하나의 (이치인) 것이다. 임금이 임금답고 (君君), 신하가 신하다우며(臣臣), 아버지가 아버지답고(父父), 아들이 아들다우 며(子子), 형이 형답고(兄兄), 아우가 아우다운(弟弟) 것은 하나인 것이다. 농부 는 농부담고(農農), 선비는 선비다우며(士士), 공인은 공인답고(工工), 상인은 상인다운(商商) 것이 (또한) 하나인 것이다.1)

7) 君臣父子兄弟夫婦, 始月1j終, 終1t 1 J始, 與天地同理, 與萬世同久. 夫是之謂大本. 故喪祭, 朝, 師旅, 一也. 貨賤 殺生, 與奪 一也 君君臣臣父父子子兄兄弟弟一也. 震哀士士工工 商商一也(「王制篇」 67~69). 薩文 ;B 는 원본에는 祭祀와 賓客 및 喪紀만이 언급되어 있던 것인데, 師旅가 후에 첨가된 것으로 보았다(『荀子集解』).

우선 荀子는 君臣과 父子관계로 人道룰 대표하던 孔子의 忠孝에다가 兄弟 와 夫婦관계를 첨가시켜서 『論 語』 안에 내포되어 있던 것을 명시하였다• 또한 그는 인간의 사회적 삶에 근본을 이루는 인륜은 天地와도 통하는 것으 로서 영구한 것, 모든 것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分사상에 기초를 둔 경제관 하나이며 시공을 초월하는 人道는 荀子에게 있어서 물론 禮로서, 禮는 文名의 준거가 될 뿐만 아니라, 경제생활의 규범이 됨을 여기서 지적하고 있다. 사실 荀子의 경제관은 分業(직업을 능력에 따라 나눔)에 기~ 두고 있어서, 농부와 공안과 상인 및 지식인과 관리의 역할을 각자의 능력에 따른 다양한 직분으로 이해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거나 같은 보상을 받아야 한디는 절대 평등주의를 荀子는 인간의 본성과 사회형성의 이치를 어긋하는 것으로서 배척한다전 오히려 그는 사회적 직분을 밝혀서

8) 分均月 1 j不偏 執齊則不急 衆齊則不使 有天有地, 而上下有差. 明王始立, 而處國有制

……書曰維齊非劑 此之謂也(「王制篇」 15~16, 18~19).

그 한계를 분명히 하는 데서 정제질서가 시작되는 것이며, 국가적 번영이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荀子는 나라의 경제를 담당하는 이들을 다음과 같이 네 부류로 분류하였다. 땅을 갈고 이랑을 표시하며, 풀을 뽑아, 곡식을 키우고, 비료를 많이 하여 받을 비옥하게 하는 일은 농부 서민들의 일이다. 때에 맞추어서 백성들을 권면 하고, 일을 진척시켜 효과물 울리며, 백성을 화목하게 하고 가지런히 하여 도둑 질하는 일이 없게 하는 일은 관리의 일이다. 높은 데는 가뭄이 들지 않고, 낮은 데는 홍수가 나지 않으며, 추위와 더위가 알맞게 조화되어 오곡이 제때에 익도 록 하는 것은 하늘의 일이다. 무릇 (이 모든 것을) 널리 포괄하여 두루 아끼고 두루 통제하여, 비록 흉년이나 홍수나 가뭄이 들었을 때라도 백성들이 춥고 굶어 죽을 걱정이 없도록 하는 일은 곧 聖君과 賢相의 일이다 .9)

9) tt地表敵 刺山殖穀, 多冀肥田, 是農夫衆庶之事也. 守時力民, 進事長功, 和齊百姓, 使人 不倫 是將率之事也. 高者不早,下者不水,寒暑和節, 而五穀以時執, 是天下之事也. 若夫 兼而覆之, 兼而愛之, 兼而愛之, 兼而制之, 歲難凶敗水早, 使百姓無凍ti之患, 則是聖君賢 相事也(「富國篇」 43~46 면). 天下之事는 내용 및 王念孫의 설을 따라 天之事로 보 았다 .

농업을 국가경제의 중심으로 보던 荀子는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네 가지 요인을 농부, 관리, 기후 및 君主의 바론 정치라고 본다. 이 네 가지 요인 중에 기후를 좌우하는 하늘의 일(天之事)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동시에 그의 天觀이 분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화로 이어진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天之事가 결정적인 요소를 이루는 것은 아니고, 자연적 기후까지를 고려하며 모든 것을 완성시 켜서 백성의 삶을 안정시킬 책임을 정치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이 荀子의 儒家的 경제관이 지닌 특칭이라고 하겠다. 荀子가 물자를 절약해서 민중의 생활을 윤택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두루

(兼) 보살피고 아끼는(愛) 일이 정치가의 가장 큰 임무라고 강조하는 면에서 墨家의 兼愛사상과 節用을 부분적으로는 수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荀 子 의 경애가 禮에 따른 分에 기초를 두듯이 국가경제의 대원칙으 로 節用사상을 채택하는 것을 荀子는 배척하였다. 나라의 비용을 절약한다는 정책하에 모든 음악과 장식을 폐지하게 될 때에 禮樂울 통한 교화를· 베풀 수 없기 때문에 그 나라는 오히려 더 가난해지고 각박해지리라는· 사실을 荀子는 강조하였다 . 더 나아가 그가 墨家의 節用사상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지도자가 霧欲만 알고 多欲울 처리할 줄 모르면 대중 울 이끌 수 없다는 데 있었다 .10) 荀子는 정치가란 인간에게 욕심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둘이고, 모든 이가 가전 욕심을 禮에 알맞게 채울 수 있도록 국가경제를 적극적으로 발전시켜서, 생산을 권장해야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荀子의 경제관은 그의 인간론에 기초를 둔 것으로 지극히 현실적이고, 어느 면에서 현대적이라고도 하겠다.

10) 有少而無多, H lj登衆不 1 t(「天論篇」 53) ; 何故必自爲之, 爲之者役夫之道也. 墨子之說也 (「王覇篇」, 10 면). 上得天時, 下得地利 中得人和, H lj財貨潭如泉源, i/ji月如河海, 暴暴如 丘山 , 不時袋燒 無所威之. 夫天下何患子不足也 故儒術誠行, ll lj天下大而富, 使而功, 權撲擊鼓而和(「富國篇」 66~68).

그런데 세금정책과 重農정책에 있어서는 荀子 역시 보수적인 경향을 띠 며, 孟子와 기본적으로 동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경제사상의 윤곽 을 보여주는 「富國篇」을 살펴보면, 荀子는 세금부과에 있어서 역시 등급을 나누어 각기의 역량에 알맞게 함으로써 백성을 기르는 정치적 원칙을 준수 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孟子와 마찬가지로 田野에는 1/10 稅를 부과해야 된다는 전통적 이상을 고수하였고, 상업과 산림의 관리는 국가가 통제는 하되 그 이익 추구에 직접 참여하여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상공업의 경제행위에 정부의 개입을 경계한 것은 그 전홍을 위해서라기보 다 국가경제의 중심을 싱공업이 아니라 농업과 촌락에 두어야 한다는 전통 적 경제관 때문이었다. 윗사람들이 이익을 좋아하면 나라는 가난해지고, 관리들의 (숫자가) 많아도

나라가 가난해진다. 공인들과 상인들의 (숫자가) 많으면 나라가 빈곤해지고, 도량형이 제정되어 있지 않아도 나라가 빈곤해진다. 아랫사람들이 빈곤해지면 윗사람들도 빈곤해지고、 아랫사람들이 부유해지면 윗사람들도 부유해진다. 그러 므로 田野와 촌락은 재원의 근본이고、 (곡식을 쌓아둔-) 광과 창고는 재원의 말단이다. 백성을 때에 맞추어 화목하게 하는 일과 사업에 순서를 따르는 일은 재화의 근본(本)이 되고、 등급에 따른 세금과 (재물을 쌓아논) 창고는 재화의 말류(末)이다. 그러므로 (정치에) 밝은 임금은 (백성의) 화합을 키우는 데 힘을 쓰고 그 말류는 절약하며, 그 재원을 개발하고 (세금은) 때에 따라 조절한다?) 서민경제의 빈곤이 곧 지배층의 빈곤을 초래한다고 보는 면에서 荀 子 는 儒家 B9 경제관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단, 그가 이익의 추구와 저축 자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데서 孔子나 孟子보다 더 현실적이었다고 하겠다. 인간의 욕심은 제대로 키워져야 교화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天子에 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노력에 따라 보상이 주어지고 모든 이의 생활이 부유해지는 것을 정치의 목표로 보았다 .12)

II ) 上好利ff l j國貧 士大夫衆 HI j國貧 工商衆 R lJ國貧, 無制數度 量 ff l j國貧. 下貧則上貧 , 下富ffiJ 上富 故田野孫鄭者, 財之本也 . 垣窓倉 皮 者, 財之末也.百姓時和, 事 業得敍者, 貨之源 也 等賊府庫者, 貨之流也 故明主必護養其和, 節其流, 開其源, 而時掛酷焉(「 富 國 篇 」, 98~IOI). 12) 훑 地而立國, 計利而畜民, 度人力而授 事 使民必勝事, 事必出利, 利足以生民. 皆使衣食百 用, 出入相排 必時誠餘 謂之稱數. 故自天子通於庶人, 事無大小多少, 由是推之. 故曰朝 無幸位, 民無幸生, 此之謂也(「富國篇J. 19~21 ).

또한 군주는 모든 백성을 키워야 한다는 荀子의 사상은 구체성을 띠고 있어서 스스로 자신의 생활을 윤택하게 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한 후생정책에 도 관심을 표명하였다. 따라서 그는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고 장애자와 병자 둘을 나라에서 부양해야 하며, 그들이 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이런 면에서 그의 경제정책은 현대 적 사회보장제도에 가까운 면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겠다.

分사상에 기초를 둔 정치론 荀子의 경제관이 분업에 기초를 두고 있듯이, 그의 정치론 역시 〈貿愚之 分〉(뛰어난 이와 우매한 이의 구분)에서 시작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욕망을 지니고 있는 점에서 같고, 모든 사람이 聖人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있어서 도 동일하다는 기본전제를 보유하면서도 荀子는 사회를 구성하고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능력에 따른 직분의 구별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그의 사회관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인간 완성의 정도에 따라 이 구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 됨됨의 정도에 따라 서 俗人, 俗僞 雅儒, 大儒의 네 부류로 사람들을 분류하였다. 학문을 하지도 않고 義를 바르게 하려 함도 없이 이득을 보아서 재산을 모으 고자 하는 이들은 1 谷 A 이다…… 대략 先王울 본받는 것 같지만 세상을 혼란시키 기에 족하고, 그 배운 바가 잘못되고 잡다하여 後王울 따를 줄을 모르며…… 남의 上客이 되면 종신 그것에 만족하여 감히 다른 뜻을 갖지 못하는 이들은 俗儒이다. 後王을 본받아 제도를 하나로 통일하며 禮義룰 융성하게 하지만…… 아직 그 밝음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면서도, 감히 태만하 지 않는 이들은 雅儒이다. 선왕을 본받아 예의에 통함으로써,……옛것을 가지고 지금을 지탱할 수 있으며, 하나를 가지고 만사를 이해하여……의심할 것도 부끄 러워할 것도 없이 法을 조절하여 알맞게 적용하니, 어두운 듯하면서도 부절을 맞추듯 적중하는 것은 大儒이다 .13)

13) 不學問 無正義, 以富利爲急 是俗人者也……略法先王, 而足亂世術, 終學雜擧 不知法 後王 ……擧其上客, 1息 然若終身之慮, 而不政有他志, 是俗儒也 . 法後王,-制度, 隆禮義 ...... 然而明不能齊 而不政意徹, 是雅儒者也. 法先王, 統禮義 …… 以古持今, 以-持 萬……無所擬惡, 張法而度之, .l! l 俺然若合符節, 是大儒者也(「儒效篇J, 90~100). 荀子 는 周公을 大儒의 대표적 예로 들고 있으며, 道通사상의 계보에서 周公을 孔子의 직접 선배로 보는 견해 역시 荀子에서 확립된 듯하다 .

여기서 俗人과 俗儒는 의견상에는 학문 有無의 차이가 있지만 그 내용상

자신의 이득만을 찾는다는 점에서 같은 小人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반면에 雅儒와 大儒는 後 王 을 본받고 예의를 융성케 한다는· 면에서 荀子가 다른 부분에서 말하는 士君子 및 聖 A에 해당한다고 하겠 댜 다시 말해서 荀子가 묘사한 네 종류의 사람들은 크게 소인과 군자, 혹은 愚 A 과 賢人의 두 부류로 양분될 수 있다. 荀子는 「臣道 篇 」에서 신하들을 그들의 자세에 따라 態臣,廷臣, 功臣, 聖臣의 네 종류로 구별한 바 있다. 그런데 아첨으로 총애를 받은 態臣과 군주의 권리를 찬탈하는 썹臣은 愚人 의 부류에 속하고, 충절을 지키며 백성을 아끼는 功臣과 백성을 교화하는 聖臣은 賢人의 부류에 속한다. 결국 賢愚之分이 모든 구별의 기초가 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바른 정치의 시작은 賢愚之分울 제대로 하는 데 있기 때문에, 군주가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은 현인과 우인을 판별히는- 것이었다• 정치의 지름길을 물었을 때 荀子는 德에 뛰어나고 유능한 사람을 순번을 기다리지 않고 채용하고, 德이 없고 무능한 사람은 지체없이 파면시키는 것이라고 서슴없이 대답하였다 .14) 그런데 여기서 혁신적인 부분은- 〈賢能〉의 정도는 오로지 德과 학문에 따라 판정되는 것으로서 출신이나 배경은 고려되어서도 안된다고 荀子가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王公과 사대부의 자손이라도 禮義에 속할 수 없으면, 庶人으로 돌아가게 한다. 비록 서인의 자손이라도, 학문을 쌓았고 그의 행실이 바르며, 예의에 속할 수 있으면 卿相 및 士大夫가 되게 할 것이다 .15) 荀子가 제시하는 신분사회는 확실히 새로운 질서의 신분사회였다. 즉, 혈통과 宗法에 따른 신분사회가 아니라 자신의 학문적 노력과 治氣養心의 수양 정도에 의해 항상 새롭게 형성될 수 있는 儒家的 신분사회였다 .16) 그리 14) 請「議政 曰, 賢能不待次而擧 龍不能不待須而廢(「王制篇」, I). 15) 難王公士大夫之子孫也, 不能屬於禮義, ff lj 歸之庶人. 稚庶人之子孫也, 積文學,正身行, 能屬於禮義, 則歸之卿相士大夫(「王制篇」 2~3). 16) 郭洙若은 『十批判書』에서 이러한 荀子의 계급적 社會截을 〈不平等的 平等〉 혹은

〈平等的 不平等〉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229). 孔子의 君子像에서부터 이런 비전이 보이지만, 이것을 제도화할 것을 아론적으로 분명히 제시한 것은 荀子에서라고 하겠 다 .

고 그 신분사회의 위계를 절정하는 척도는 예의였기에, 賢能과 썬人의 구별 은 예의를 따라 사는가의 여부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결국 각 개인이 지닌 학문과 德이 그가 지닌 사회적 위치와 병행해야 된다는 것이 荀 子 의 이상이 었다. 그래서 「儒效篇」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衆人은 農工商人이 되 고, 이기심을 억제하는 것을 배워서 공평해전 小儒는 士大夫가 되며, 마음이 관대해지고 지식이 禮에 조화되어 있는 大儒는 天子와 三公이 될 수 있다고 한것이다. 배움에 따른 신분사회의 형성 荀子는 디움과 같은 대담을 통해서 배움을 권장하고 있다. 〈만약 내가 천하지만 귀하게 되고 싶고, 어리석지만 지혜로워지며, 가난하지만 부유하게 되고 싶다면, 가능하겠는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오직 배움(學)에 달린 것이다〉 .m

17) 我欲賤而貴, 愚而智, 貧而亂 可平. 曰, 其唯學平(「儒效篇」, 39~40).

학문을 통해서 지식과 지위와 재산을 획득할 수 있다는 荀子의 확신은 현대인이 지니고 있는 사고방식과 별로 큰 차이가 없다. 단지, 그가 말하는 배움(學)이라는 용어 속에는 이론적 지식뿐만 아니라 도덕적 실천이 포함되 어 있고, 人道인 禮義를 자신 안에 체현함으로써 인간성을 완성시킨다는 至高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徐復觀은 儒家가 仁울 禮의 정신으로 규정 함으로써 禮의 의미를 본질적으로 전환시켰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18) 사실 禮뿐만이 아니라 禮에 기초를 둔 신분사회의 개념에도 질적 변화를 가져왔 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 변화가 현대적 민주사회에 비할 만큼 진보

18) 「周秦漢政治社會結構之硏究J, 98 면.

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인간의 노력에 따른 변화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사실 오늘날의 民主主義 개념 역시 완전히 평등한 大同 사회를 이루기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사상 자체의 약점에서보다는 - 인간 사회가 지닌 역사성과 복합성에서 儒家的 身分社會의 한계성을 보아야 할 것 0] 다. 荀子의 君子像 荀子는 〈賢愚之分〉에 대비될 만한 구분을 군주들의 경우에도 하고 있다. 그것이 王者, 覇者, 亡者로 세분되는 荀子의 세 가지 君主像이다. 王者란 儒家의 德治를 국가정책으로 온전히 실천하는 임금을 지칭하고, 前者는 富國 强兵을 국시로 하는 法家的 정책을 실시하는 임금이며, 亡者는 자신의 이득 과 쾌락만을 생각하여 민심을 잃고 국가물 멸망하게 하는 君主를 가리킨다.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이 (나라 안에) 정의(義)를 확립하면 王者가 되고、 신뢰 심(信)을 갖게 하면 絲者가 되며, 權謀를 정책으로 실천하면 亡者가 된다. 이 세 가지야말로 지혜로운 군주가 신중히 고려하여 선택해야 할 바이다…… 국가 믈 통솔함에 있어서 예의를 규범으로 하여 그것을 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한 가지의 불의를 행하거나 한 사람의 무죄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천하를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仁者는 그것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라를 義로 다스 려서 일시에 세상에 드러난이들이 湯王과武王이었다…… 德은비록그에 미치 지 못하고 아직 羲는 확립되지 않았지만, 天下의 이치가 대개 갖추어지고, 상벌 이 정확하게 실시되어 天下에 신용을 얻었다. 비록 (그들이) 지형적으로 구석전 나라에 있다 하더라도 天下에 그 위세를 떨쳤으니, 五覇가 바로 그들이다·… .. 정 의 (義)를 신장하려고 힘쓰거나 신용(信)을 얻으려고 하지도 않고 오로지 이득을 구하여, 안으로는 자기 백성을 기탄 없이 속이고,……밖으로는 국교를 맺은 나라 들을 함부로 기만하며,……權謀가 매일 행해지니, 그 나라는 위태함을 면할 수 없고 결국에는 망할 것이다. 齊閔과 薛公이 바로 그와 같은 이들이다 .19) 19) 故用國者,義立而王, 信立而覇 權謀立而亡. 三者明王之所護擇也……擊國以呼禮羲,

而無以害之, 行一不義, 殺一無罪, 而得天下, 仁者不爲也……故日, 以國齊義, -B 而白, 湯武是 也 …… 義雜未至也 …… 義雜未濟也, 然而天下之理略奏矣 . 刑賞已諾, 信平天下 矣……難在辭炳之國, 威動天下. 五伯是也…… 不務張其我, 齊其信, 唯利之求」치 11 1j不 禪詐其民, ••• …外ftij不揮詐其與, t尉謀日行, 而國不免危削, 萊之而亡. 齊閔薛公是也(「王 覇타, 4~22).

荀 ; f가 군주의 이상으로 제시하는 왕다운 임금, 곧 J검 t가 걷어야 할 王 道란 예의를 그 규범으로 하는 仁政이었다. 따라서 한 가지라도 도덕적으 로 옳지 않은 것을 하지 않는 임금 자신의 온전한 도덕성을 요구한다는 면에서는 孟子의 王道論과 별 차이가 없다. 단 荀子와 孟 子 의 인성론의 차이 때문에 孟子는 자신 안에 내재한 不忍人之心울 그대로 확충하면 王者가 될 수 있다고 본 데 비해, 荀 子 는 선왕으로부터 전승된 예의를 배우고 매일 실천하여 사회제도를 통해 그것을 체현해야 됨을 강조한다는· 데서 차이룰 보인다 .20) 그러나 覇道論에 있어서는 두 사람의 시각이 상당히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孟子는 仁殺禮智信 등의 德目을 동동하게 보았기 때문에 ,21) 荀子처럼 義를 상위개념으로, 信울 하위개념으로 상정하지 않았다. 또한 「梁惠王篇」 첫머리에 명백히 드러나듯이 仁義를 따르든지 利를 택하든지 하는 양자택일 의 킬로 간주했기 때문에, 王道 이의의 다론 길을 허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荀 子 는 分을 기초개념으로 상정하고 인간사회의 현실을 차등적으로 분류하 여 고찰했기 때문에, 翁道政治롤 중간단계로서 인정하고 그 장단점을 평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구체적인 예로서는 五覇의 뒤를 이어 전국말에 최강국으 로 등장하는 秦나라가 바로 覇道 를 따르는 국가였고, 秦昭王과의 면담에서 荀 子 는 법치국가의 강점과 한계성을 명확히 지적한 바 있다. 비록 荀子가

20) 國無禮 1111 不正, 禮之所以正國也(「王覇篇」, 42) ; 故善日者王, 善時者覇 補漏者危, 大荒 者亡(「;:國篇」, 71~72). 蔡仁厚는 孟子의 義는 仁과 결합되어 主觀內在的 성격을 지니고 있고, 荀子의 義는 禮와 결합되어 客觀的이고 정치사회적 효용을· 중시함을 지적하였다 (r 孔孟荀哲學』, 456). 21) 孟子는 대부분의 경우 仁과 義를 병행하여 덕목을 대표하게 하고, 仁義禮智를 2 번 (6A : @口 A : 21 ), 孝怖忠信을 2 번씩 ( IA : 5 와 7A : 32) 사용하고 있으며, 告子上 16 장에 서는 天爵으로서 仁義忠信을 들고 있다.

術道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의 정치관은 王 道論울 추구하는 것이었고, 王道를 실현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 군자다운 인물을 찾아 적재적소에 있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荀子는 王道정치를 하려는 군주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賢能한 재상을 등용하는 것이고, 관리들이 正道에 따라 나아갈 수 있도록 禮로써 그들을 대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道가 있고, 임금에게는 (고유한) 직분이 있는 것이다. 일상적인 일을 처리하고 상세한 세목을 관리하는 것은……百官둘로 하여금 하게 하면 된다…… 따라서 (임금은) 한 명의 재상을 택하여 의논하고, 그에게 모든 일을 두루 총괄하게 하며, 신하와 여러 관리들이 지방에 이르기까 지의 모든 업무를 처리하지 않는 바가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임금의 직분이니, 이와 갇이 하면 天下가 하나로 통일되고, 명성은 堯禹 와 맞먹게 될 것이다 .22) 荀子는 특히 맨 위의 재상을 현명하게 등용하는 일이 王者가 되는 데 가장 절실한 것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23 ) 다시 말해서, 君主는 재상 한 사람을 잘 알고 있으면 되고 한 가지의 法, 곧 禮를 따르고 한 가지의 지 침, 곧 人道를 밝히면 그것으로 천하가 포섭될 수 있다는 것이다.

22) 故治國有道, 人主有職 . 若夫貫 日而治詳 …… 是所使夫百吏官人爲也 …… 若夫:습一相, 以兼率之, 使臣下百吏莫下宿道鄕方而務. 是夫人主之職也. 若是 H lj一天下, 名配堯禹(「王 覇篇」, 52~55). 23) 故能當一人, 而天下取 失當一人, 而社稷危(「王覇篇」, 104 면). 在愼取相, 道莫經是矣. 故智而不仁不可, 仁而不智不可. 紙智旦仁, 是人主之寶也(「君道篇」, 67~68).

分사상에 기초를 둔 관료체계 재상은 국가의 萬事룰 실제적으로 지휘하여 통일시키는 직분을 지니고 있고, 나머지 관리들은 각기 자신들의 소임에 충실할 뿐 그 의 다른 이들의

일을 알려 하지 않는다는 홍미로운 관료체계를 荀 二f 는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각 사람은 자신이 들은 바를 노력 해서 실천하고, 듣지 않은 것을 들으려고 힘쓰지 않는다. 각자는 자신이 본 바를 힘써서 행하고, 보이지 않는 바를 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보고 들은 바 (자신의 직분을) 성실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君主의 길은 가까운 것을 다스리고 먼 것을 다스리지 않는 것이며, 드러난 것을 다스리고 드러나지 않은 바는 다스리지 않는 것이며, 하나를 다스리고 둘을 다스리려 하지 않는 것이다. 君主가 가까운 것을 잘 다스리면 먼 것도 이치에 맞게 되고, 드러난 것을 잘 다스리면 드러나지 않은 것도 화육될 것이다. 君主가 능히 하나를 잘 처리하면 백 가지 일이 바르게 될 것이다 .24)

24) 各護其所聞 不務聽其所不聞. 各護其所見, 不務視其所不見. 所聞所見, 誠以齊矣…… 主道, 治近不治遠 治明不治幽 治一不治二. 主能治近, ffiJ遠者理.主能治明, 則幽者化. 主能當一, 則百事正(「王覇篇」, Ill~114). 이러한 分에 기초를 둔 접전적인 儒家的 정치 방법을 荀子는 曲辨이라고 부른다.

기본적 分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는 職分의 개념이 군주와 재상과 관료 및 사회구성원 전체에까지 미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荀子의 正名論이란 각자가 지닌 名, 곧 직분의 한계를 바르게 알고 실천할 때, 사회 전체가 비로소 조화를 이루며 名과 實이 일치하여 禮에 따른 幾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名은 인간인식과 직결되어 있 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지 않고 둘리지 않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인식이 미치는 한도내에 관심을 둘 뿐, 미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미지의 것은 미지의 것으로 그대로 두는 것이 分울 이해하는 참된 지식이 된다. 또한 가깝고 명백한 것을 잘 처리하면, 멀고 드러나지 않은 것 역시 자연히 이치에 맞게 되리라 는 것은 孔子 이래로 儒家전통 안에 이어져 내려오는 도덕적 확충의 원리이 기도하다. 그런데 荀子가 治國의 원리로서 제시한 이 分의 원칙이 人間事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天人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은 홍미로운 것이 다. 荀子의 天觀은 특히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켜 왔기 때문에, 荀子의 天사 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그의 사상의 기본적 틀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分의 개념, 곧 正名論 안에서 이룰 새롭게 조명해 보고자 한다. 2 宇宙的 正名論 : 荀子의 종교관 荀子는 우주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를 크게 天,地, 人으로 구분하였기 때문에 그의 우주론 역시 三層 89 인 위계적 기본구조를 갖는다 .25) 天과 地 중간에 위치한 人이란 氣와 生과 知와 義를 모두 구비하고 있어서 만물 중에 가장 고귀한 존재라고 荀子가 묘사한 인류 전체를 가리키는데, 그는 인간 고유의 특성을 사회를 이룰 수 있는 정치성 (其治)에서 보았다 .26) 그 뗄, 地란 우선적푸는 곡식을 생산하여 인조떨 기르는 경작이 7 棒한 土地를 지칭하지만, 인간을 제의한 하늘 아래 있는 만물이 모두 그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크게는 天에 대웅하는 大地로서 陰을 대표하는 상칭적 의미를 지닌다. 荀子 안에서 天이란 地에 대응하는 蒼空울 지칭하여 陽을 상칭하지만, 天時 또는 四時라고 불리는 사계철의 변화와 작용을 가리키기도 하며, 荀子가 특히 『詩經』을 인용하며 해석할 경우에는 주재자로서의 상제의 의미 역시 함축하고 있다.

25) 三才라는 용어는 『論語』와 『孟子』에는 물론 r 荀子』에도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周 易』 「說卦傳」에 처음으로 쓰여진다. 그러나 天,地, 人의 3 층적 우주관은 중국문화 최초로부터 유래한다고 볼 수 있는데, 北方의 詩經과 南方文學인 楚辭에서 모두 이러 한 구조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26) 天有其麻 地有其財, 人有其治(「天論篇」, 7) ;上取象於天, 下取象於地, 中取ff l j於人 (「禮論篇」, 106~107) ; 〈天見其明, 地見其光, 君子貴其全也〉(「勸學篇」, 50~51) 에서와 같이 君子가 人을 대표하기도 한다.

天, 地, 人 三才의 의미가 모두 복합적이지만, 荀子 안에서는 天의 사용법

이 특히 다양해서 자칫 잘못하면 荀 子 를 현대적 의미의 합리주의자나 유물 론적 無神論者, 혹은 희의론자로 해석하기가 쉽다 .Tl 그러나 荀 子 의 天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天만을 따로 고찰하기보다는 그가 天과 人 및 天과 地의 관계를 어떻게 보았는지 전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

27) 馮友蘭은 荀子의 天울 唯物論的 自然天道觀으로 해석하였고(『新篇中國哲學』 2 권, 16 면), 侯范 는 荀子에 의해 意志的 天觀이 自然的이며 物質的인 天으로 변화되었다 고 보았다(『中國思想史』, 2 편). 陳大齊 역시 荀子의 天이란 俠義로는 계절적 변화를, 廣儀로는 天地萬物 전체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자연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 기 때문에, 事天地의 의의를 生之本을 잊지 않기 위한 교육적이고 權宜的인 것에서 찾았다(『荀子學說』, 中華出版社, 1954, 13 면).

荀子의 三 才사상 『 荀 子 』 제 17 편인 「天論篇」을 보면, 荀子는 天과 A 을 구별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 天 人之分〉을 밝힐 수 있으면 가히 至人이라고 할 수 있다. 노력하지 않고도 이루고, 구하지 않고도 얻는 것, 이런 것을 하늘의 일(天職)이라고 한다. (그러 나) 이와 같은 일은 비록 (그 의미 자체는) 깊더라도 인간이 거기에 사려를 더할 수 없는 것이고, 비록 (그 자체는) 위대한 것이라도 (인간이 ) 고찰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일에 상관하려 하지 않는 것을 일러서 天과 더불어 직분을 다투지 않는다고 한다. 天은 네 계철을 관할하고, 地는 (만물을 먹일) 양식을 산출하며, 인간은 그 정치적 다스립에 책임을 진다. 무릇 이와 같이 하면 능히 참여할 수 있다고 이르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天地에 ) 참여할 수 있는 자기 고유의 직분을 버리고서 (天地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미혹된 것이 다…… 그래서 聖人은 하늘의 일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聖人은 자신의 天君, 곧 心울 맑게 하고 天官, 곧 五官을 바르게 하여 자신이 키워야 될 바를 구비하고……자신이 노력해야 할 다스림을 온전히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 죽, 자신이 해야 될 바가 무엇이며, 자신이 하지 말아야 될 바가 무엇인지를 안다고 할 것이다…… 위대한 세공가는 손대지 않고 남겨 두는 부분이 있으며,

위대한 지혜는 사려하지 않고 (미지 그대로 남겨 두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天에 대해 (알려고) 할 때에는 (절기 등) 이미 그 현상이 드러난 것에서 그쳐야 하고, 地에 대해 (알려고) 할 때에는 (농사에 필요한) 확실한 것에서 멈추어야 한다 .28)

28) 故明於天人之分, 則可謂至人矣. 不爲而成, 不求而得夫是之謂天職. 如是者, 雜深, 其人 不加慮焉 難大不加能焉, 雜精, 不加察焉, 夫是之謂不與天爭職. 天有其時, 地有其財, 人有其治 夫是之謂能參 舍其所以參而原其所恭ffiJ惑矣……唯聖人爲不求知天 ……聖人 淸其天君, 正其天官, 備其天養…… 以全其天功. 如是ffiJ知其所爲, 知其所不爲矣…… 故巧在所不爲 大智在所不焉 所志於天者, 己其賢象之可以期者矣. 所志於地者, 巳其 見i之可以息矣(「天論篇」, 5~17).

여기서 荀子의 天, 地, 人이 각기 해야 할 본분의 한계가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天은 그 時, 죽 절기와 그에 따른 기후의 변화를 다스리는 직분 울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그에 관여하지 않아도 사계절은 돌기 마련이 다. 인간이 알아야 될 바는 단지 時의 변화에 맞추어 농사를- 제대로 할 수 있으면 족하다는 것이다. 地는 그 財, 곧 萬物울 키우는 작용을- 담당하기 때문에, 인간이 地에 대해 알아야 될 것 역시 농사에 필요한 만큼의 지식이 면 충분하다. 人은 그 治, 곧 治氣養J L 에 의해 올바른 정치사회를 이룸으로 써 天地가 生한 것을 완성시킬 직분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 것은 荀子가 天과 그 작용 및 地와 그 작용을 구분하 고 있다는 사실이다. 荀子는 드러나지 않은 천지 그 자체의 신비를 알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분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荀子는 드러 난 그둘의 작용을 이해하여 그것울 인간사에 적용하는 일만큼은 마땅히 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荀子가 하늘을 이용하고 (用天), 하늘을- 제어하며(制天), 하늘을 부린다(使天)는 등의 표현을 할 때에 쓰이는 天이란 곧 天의 작용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절기와 기후 등을 인간에 게 유리하게 이용하고, 조절하며, 자연적 악조건은 극복하도록 해야 된다는 말이다 .29) 후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천지의 작용이 아니라 天이나 地 그

29) 『荀子』에서 〈制天命〉이라는 말이 〈制天時〉 또는 〈適天時〉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미 지적된 바 있다(『荀子倫理學說平義』, 黃美貞 嘉新水泥公司, 1973, 14 면). 蔡仁厚는 荀子가 말하는 天 안에는 自然義와 本始羲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는데, 역시 이 두 가지의 사용법을 분류한 것이다(『孔孟荀哲學』, 383~4 면).

자체에 대해서 荀 子 가 언급할 때에는 하늘을 섬기고( 車天 ), 하늘을 모범으로 한다{ff l j 天 )는 등의 표현을 써서 天 地를 生의 근본으로서 지극히 존경히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荀子의 天觀울 그전의 전통과 비교하여 볼 때 한 가지 크게 차이가. 、 나는 것은 詩 書 나 『 論語』 및 『 孟子 』 에서는 天만이 생명의 원천으로 간주되고 있는 데 비해, 荀子에 와서는 항상 천지가 만물을 낳은 기원으로 함께 언급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마도 전국시기 말기에 이르러 陰陽사상이 모든 학파에 의해 수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 그러나 天은 至高한 것이고기 地는 지극히 낮은 것이므로 그 上下의 위치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이것이 祭祀의식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荀子의 天地觀은 이런 의미에서 전통적 제사의식의 차등과 새로운 陰陽說이 결합되었지만, 아직 이 두 가지 가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지는 않은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30)

30) 天地者生之始也( 『 王制篇』. 64). 地之生萬物也(「富國篇」, 50) ; 天地者生之本也(「禮論 篇 」, 13) ; 天地合而萬物生(「禮論篇」, 77) ; 有天有地而上下有差(「王制篇」, l5) ; 故天者高 之極也(「禮딸篇」, 36).

인석론적 不可知性 또 한 가지 위의 天, 地, 人에 대한 인용문에서 고찰해야 될 점은 荀子가 지적하고 있는 인식론적 불가지성의 문제이다• 荀子가 天과 人을 구별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天 그 자체를 인식의 대상으로 할 수가 없고 따라서 天職에 아무것도 첨가할 수가 없다고(不加慮 不加能) 보기 때문이다. 荀子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인식하려면 먼저 五官이 그 대상 을 감각할 수 있어야 되고, 五官이 경험한 잡다한 기억울 사려능력을 지닌 心이 그 徵知로써 정리하고 해석하여 의미를 밝혀 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감각기관의 작용과 心의 사려적 작용이 결합될 때에만 지식의

획득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天 그 자체는 인간의 감 각기관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天 은 인간에게 不可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天 의 불가지성은 이미 『詩經』 에서부터 표현되고 있는 중국의 전통적인 사고로서, 『 大雅』 「文 王篇 」의 詩 人은 〈높은 하늘의 하시는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31 ) 고 읊었던 것이다. 여기서 〈 上天之載 〉란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天 命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이다. 德이 있는 사람에게 백성을 디스릴 命을 준다는 의미에서 한편으로는 항상성 또는 일정한 원칙을 지니고 있지 만, 또 한편으로는 보통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감각적 경험을 초월하기 때문에, 하늘의 일을 그 자체로는 꿰뚫어 볼 수 없다는 사고가 동시에 함축 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이 天 命에 합할 수 있는 길은 聖王 둘의 모범을 따르 는 간접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天命의 불가지성에 대한 인식과 人間 事 에 충실함으로써만 天 울 알 수 있다는 天人관계의 간접성은 孔 子 와 孟 子 에서도 지속되는 사고로서 儒 家 전통의 특성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31) 上天之亂 無聲無奧(『詩經』. 『大雅』, 「文王篇」). 또한 필자의 논문 Sil en t Heaven Giv i n g Bir th to the Multit ud e of Peop le ,~ Confu c ia n -Chris t ia n Confe re nce, Ch ine se Un ive rsit y of Hong Kong, Ju ne 8~15 면, 1988 ; Chin g Feng 31, 195~224 면 참조.

荀子에 와서 새로운 점이 있다면,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荀 子 는 天 자체 와 天의 작용을 구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天 의 드러난 작용, 곧 네 계절의 변화와 기후의 규칙성 등을 고찰하여 그 자연적 원리를 인간 샤를 위해 활용할 것을 강조했다 . 이런 점에서 荀子가 과학적 사고를 지닌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현대적 합리주의자와 달랐던 점은 그는 우주: 안에는 인간의 인식을 초월하는 不可知의 영역이 있디는 - 것을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荀子는 인간이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고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하여, 전자에 전력하고 후자에는 상관하려 하지 않는 것을 참된 지혜라고 보았던 것이다. 인간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荀子는 자신이 듣고 보아서 알고 있으며, 자신의 직분에 속하는 가까운 일에만 전심 을 다할 것을 충고하였다. 시기적으로도 자신에게 가까운 後 王 을 존중하며, 上古의 알려지지 않은 古 事 들을 알려고 애쓰지 않고, 미지의 것을 미지의

상태로 그대로 둘 수 있는 것을 지해라고 하였다(「非相篇」). 그러기에 군자 는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존중하고, 天에 해당된 것을 사모하지 않는다. 천지 만물의 형이상학적 생성원리 자체를 설명하려고 힘쓰지 않고、 그 작용을 잘 이용하는 것에 노력을 기울일 뿐이라고 32) 荀子는 지극히 실용적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32) 君子敬其在已者, 而不慕其在天者 (「天論篇」, 26~27) ; 其於天地萬物也, 不務說其所以 然 , 而致善用其材(「君道篇」, 25).

荀子의 天信仰 그렇다면 不可知에 속하는 天 자체에 대하여 荀子가 취한 태도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이 문제는 荀子의 종교관을 다루는 것이 될 것이다. 그가 天을 부정하거나 배제하고 인간 홀로 우주를 통제해야 된다고 보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만일 荀子가 그와 갇은 생각을 했다면 완성된 인간은 天地의 化育 에 참여하게 된다는 〈參天地〉 사상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荀子는 詩 書 에서 대표되고 있는 西周시기 이래의 天신앙을 기본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사상을 확증하기 위해서 인용하고 있는 많은 『詩經』의 구철 중에서 天신앙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를 세 가지 열거한 후 이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여 보겠다. I ) 詩日, 不識不知, 順帝之 HI J, 此之謂也(「修身篇」). 2) 詩云 鹿上帝不時, 殷不用舊. 雜無老成人, 尙有典刑. 曾是莫聽, 大命以傾. 此之 謂也(「非十二子篇」). 3) 夫天生蒸民, 有所以取之. 志意致 {I 組 德行致厚, 智慮致明, 是天子之所以取天下也 (「榮辱篇」). 우선 첫째 인용문은 『詩經』안에서도 상제를 직접 칭송하는 드문 예에 속하는 大雅 「皇矣篇」의 7 절에 나오는 구절로서 文王의 德을 묘사하는 부분

이다. 〈생각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상제의 법칙을 따르는도다.〉 그런데 원래는 天命울 받기 위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德울 닦고 있는 文王 의 자세를 노래한 이 시구를, 荀子는 보편화하여서 군자가 되려는 사람이 禮와 스승을 따라 배움을 닦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다시 말해 서, 禮를 규범으로 삼아 情이 안정되고 그 지식이 스승과 같아전 군주는 인간성을 완성시킴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결국 天, 곧 상제의 법칙을 따르게 된다는 말이다. 不可知의 법칙은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간접적으로, 가까운 것을 성실히 실천함으로써 자연히 이루어지도록 해야 된다는 것이 다. 둘째 인용문은 大雅 「蕩篇」의 7 절을 그대로 인용한 것인데, 文王이 殷나 라에 묻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탄식시의 일종이다. 〈上帝께서 때를 주지 않으심이 아니라, 옛 법을 쓰지 않는 까닭이네. 노숙한 신하는 없을 망정, 법률조차 없을쏜가. 일찍이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니, 天命이 기울어짐 일세.〉 당시의 정치적 혼란에 대한 책임을 인간 자신들에게 묻고 있는 이 詩句를, 荀子는 군주란 계속 배우고, 겸손하며, 덕을 쌓아야만 널리 백성을 포용할 수 있다는 의미로 자연스럽게 풀이하였다. 처음의 인용문과 마찬가지 로 天命 그 자체를 겨정하는 일은 불가지의 것이므로 소용이 없고, 전승된 법을 따르고 德을 쌓는 일에 전심을 다하면, 천명은 자연히 그 안에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셋째 인용문은 大雅 「魚民篇」의 처음 네 글자만을 인용한 후에, 곧바로 荀子 자신의 해석을 소개한 것이다. 〈하늘이 모든 백성을 낳으시니, 각기 취하는 바가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의) 뜻하는· 바가 굳건하여지고, (그의) 덕행이 두터워지며, (그의) 지려가 (모든 것을) 통달하기에 이르면, 이에 곧 (그가) 天子가 되어 天下룰 취하게 되는 것이다.〉 계속해서 荀子는 제후, 사대부, 서민들이 각기의 위치를 취하게 되는 이유를 그들의 수양 정도에 따라 설명하고 있다. 결국 實과 名이 일치해야 된다는 그의 正名論 및 전승되는 禮가 常道로서 불변성을 갖는다는 그의 주장은 종국적으로 불가지의 영역인 〈天生蒸民〉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단, 儒家전통 전체의 특칭인 동시에 특히 荀子의 경우에 현저한 것은, 궁극적인 것에 대해

직접적인 설명을 하는 것을 피하고 天 人之分을 강조하여 不可知를 不可知의 상태로 놓아 두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荀子가 지녔던 불가지의 존중이 회의나 불신앙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荀子 안에서 전통적 天신앙이 표현되고 있는 예를 몇 가지 들어 서, 불가지의 세계에 대한 그의 종교적 기본입장을 밝히고자 한다. I ) 노인들을 노인답게 대접해 드리면, 젊은이들도 모여들 것이다. 궁한 사람을 궁하게 대접하지 않으면, 통달한 이들도 쌓이듯이 울 것이다. 남이 보지 않는 데서 실천하고, 보수를 바라지 않고 베풀면, 賢人이나 不肖者나 하나가 될 것이다. 사람으로서 이 세 가지를 행할 수 있다면, 비록 큰 과실(또는 화) 이 있더라도 天이 그대로 버려둘 리가 있겠는가 ?33) 2) 君子의 큰 마음은 天과 道를 따르고、 작은 마음은 정의(義)와 절제(節)를 실천하고 (그것을 범할까봐) 두려워 한다 .34) 3) 자기 스스로 알고 있는 사람은 남을 원망하지 않고、 命을 이해한 사람은 天을 원망하지 않는다. 남을 원망하는 것은 궁한 것이고、 天을 원망하는 것은 뜻이 (굳지 ) 못한 것이다. 자신이 잃고 나서 남에게 그 탓을 돌리니, 어찌 사리에 어둡다고 하지 않겠는가 ?35)

33) 老老而壯者歸焉 不窮窮而通者積焉 行平冥冥, 施平無報, 而賢不肖一焉. 人有此三行, 難有大過 天其不遂子(「修身篇」, 43~45). 荀子集解에서는 過를 禍로 보았다. 의미는 양쪽이 다가능하다 . 34) 君子大心, 則天而道 小心, 則長羲而節(「不荀篇」, 16). 35) 自知者不怨人, 知命者不怨天 怨人者爵 怨天者無志 失之已, 反之人, 登不辻子哉(「榮 辱타, 21~22).

4) 인간의 운명 (命)은 天에 달려 있고, 나라의 운명 (命)은 禮에 달려 있다…… 天울 위대하다고 사모하는 것과 사물이 축적되도록 그에 알맞게 처리하는 것, 어느 것이 더 나은가? 天울 따르고 칭송하는 것과 天命에 맞추어서 그것 을 이용하는 것, 어느 것이 더 나은가? 때를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과 때에 응하여 그것을 사용하는 것, 어느 것이 더 나은-가?……萬物이 생겨난 이유를 알고자 하는 것과 萬物이 완성되도록 하는 것, 어느 것이 더 나은가? 그러므 로 인간의 것을 버려두고 天의 것을 사모하는 것은 萬物의 실정을 잃어버리

는 것이다 .36)

36) 人之命在天, 國人命在禮…… 大天而思之, 執與物畜而制之. 從天而碩之, 執與制天命而 用之. 望時而待之, 軌與應時而使之 ...... 願於物之所以生, 執與有物之所以成. 故錢人而思 天, 則失萬物之情(「天論篇」, 42~46).

위의 네 가지 天에 대한 荀子의 논평은 인간 자율성의 강조와 天의 도덕 성에 대한 신앙으로 크게 요약될 수 있다• 우선 2) 와 3) 을 함께 살펴보면, 君子의 大心은 天과 道를 따르고 小心은 義와 節을 따른다고 한 것은 결국 자기 안에 주어진 가까운 도덕적 덕목들을 실천함으로써 불가지의 원리까지 도 자연히 따르게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앞에서 논의한 荀子의 『 詩經』 해석에서 본 것과 같은 사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이와 같은 원리를 체득한 군자는 다른 사람이나 天에게 탓을 돌리지 않고 자기 자신울 돌아본다는 면에서 孔子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자기 자신 안에서 구한다는 것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열쇠가 곧 자기에게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율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죽 荀子가 「天論篇」 첫머리에서 부지런히 일할 때 天이 인간을 가난하게 할 수 없고, 때에 맞추어 움직일 때 병들게 할 수 없으며, 道를 닦고 있는데 재앙을 보낼 수 없다고 한 말과 같은 것이다. 荀子는 가난과 질병과 재앙의 원인을 하늘에서가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서 찾고자 하였다. 이런 모든 재앙의 원인을 온전히 인간에게 돌린다는 것은 天 그 자체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天울 완전히 善한 도덕적인 生의 근원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天命不 常〉이라는 西周의 왕조적 개념을 변화시켜서, 荀子는 네 계절의 일정함 속에서 〈天行有常〉이라는 개념을 확립하였다. 그런데 여기서의 常의 개념은 일정한 변화를 가져온다는 주기성뿐 아니라 도덕적인 성격까지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荀子의 誠의 개념에서도 살펴보았듯 이, 天地가 지극한 성실함을 지니고 일정한 도덕적인 운행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에 人道 역시 항상성 (常)을 지닌 것이다 .3n 비록 天道와 人道가 그 직분

37) 天有常道矣, 地有常數矣, 君子有常體矣 君子道其常, 而小人計其功(「天論篇」, 23~

24). 이 책 6 장 주 71 ) 참조.

울 달리하고 있기는 하지만, 끝에 가서 조화를 이루도록 되어 있는 것 역시 誠과 常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天地는 이미 완전히 善한 상태에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할 때에만, 인간사회가 지닌 모든 불행과 재앙 은 인간에게서 기인한다고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荀子야말 로 天의 도덕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38)

38) Edward J. Machle, Hsiin Tzu as a Relig iou s Ph ilos op he r, Phil os op hy East and West( O ct. 1976), 458~459 면 ; 兒王六郞 「天論篇 1 격합자 1 f.:荀子(J)天觀J, 『中國哲 學史硏究論集』 莘書房(1 98 1), 176~188 면을 보면, 그는 荀子의 天觀은 自然天道觀과 主宰天道競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人道가 天道와 具合하는가에 따라 吉凶이 결정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제 인용문 l) 과 4) 를 함께 고찰해 보면, 荀子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해야 될 직분을 남과의 관계에서 다했을 때, 비록 그에게 과실이 있거나 禍를 당하게 되더라도 天이 그를 보호할 것이라는 종교적 신앙을 토로하고 있 다. 또한 〈인간의 운명은 天에 달려 있다〉는 말이 荀子 안에 여러 번 언급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荀子가 〈人之命在天〉이라는 구절에서 의미하는 바는 운명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적극성을 지닌 것으로서 〈國之命在禮〉와 함께 병 행하도록 한 것에서도 이룰 알 수 있다(「强國」 4, 「天論」 42). 인간의 생명은 天에서 나온 것이지만, 사회를 이룸으로써 禮 안에서 완성되어야 한다는 荀子 사상의 핵심이 두 마디 안에 잘 요약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안간은 天의 작용을 알고 그것을 인간사에 활용함으로 써 天에게서 받은 생명을 완성시켜야 한다. 荀子의 〈人命在天〉은 결국 그의 〈參於天地〉 사상에서 그 완전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荀子의 參於天地 사상 荀子의 〈 1 生僞之分〉이 〈 1 生僞之合〉을 위한 것이었던 것처럼, 그의 〈分〉 개념은 〈合〉을 위한 예비적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天人之分〉 역시 〈參於天地〉를 위한 하나의 필요한 과정으로서 강조된 것이었다. 인간이 자신

의 인식능력과 행동능력의 한계성을 밝히 알아, 天地가 하는 것을 알고 하려 고 하지 않고, 자신이 알고 해야 될 직분에 충실한 것이 天人之分을 이해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학문적 배움과 도덕적 수양을 통해 올바른 사회를 이루게 될 때에, 비로소 인간은 천지의 化育에 참여하여 그것을 완성시키는 영광스러운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느 것보다도 배움이) 자신의 가장 좋아하는 것이 된 경지에 이르게 되면, 눈은 五色보다도 그것을 더 좋아하고, 귀는 五聲보다 그것을 더 기뻐하며, 입은 五味보다 그것을 더 즐겨하고, 마음은 天下룰 소유하는 것보다 배움을 더 이로 운 것으로 여기게 된다. 이런 까닭에 권세도 그를 기울어지게 할 수 없고, (많은 숫자의) 군중도 그롤 움직일 수가 없으며, 天下로 그를 동요하게 할 수 없다. 삶도 이 배움에 기초를 두고 있고, 죽음도 이 배움의 실천에서 일어나는 것이 니, 이것을 일러 德操라고 부른다. 德操가 이루어전 후에야, (그 감정이 ) 능히 안정될 수 있고, (감정이) 안정한 후에야 능히 (사물에) 응할 수 있는 것이다. (감정이) 능히 안정되고 (사물에) 능히 능할 수 있게 된 것, 이와 같은 상태를 일러서 〈成人〉, 곧 인간성을 이룬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天은 그 위대함을 드러내고, 地는 그 광활함을 드러내며, 君子는 (인간성을) 온전하게 함을 귀히 여긴다 .39)

39) 乃至其致好之也, 目好之五色, 耳好之五聲, 口好之五味, 心利之有天下, 是故, 權利不能 化夏也, 靈衆不能移也, 天下不能蕩也. 生平由是, 死平由是, 夫是之言『德操 . 德操然後, 麟. 麟然後, 能應 能定能應, 夫是之謂成人. 天見其明, 地見其光, 君子貴全也(「勸學 篇」, 48~51). 여기서 明은 大로, 光은 廣으로 보는 荀子集解의 설을 따랐다.

인격의 완성을 이룬 사람은 그의 心만이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五官과 거기서 나오는 감정 역시 완전해전다. 荀子는 이런 상태를 〈·情安禮〉(감정이 예 안에 안온하게 되다)라고 표현하였는데, 그의 수양론인 治氣養心이 여기서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감정이 안정되고, 사고가 동요되지 않으며, 사물에 바르게 응할 수 있게 된 사람을 〈成 A 〉, 곧 〈된 사람〉이라고 불렀던 것이 다. 인간의 기본구조라고 할 수 있는 性과 知와 能이 모두 온전해전 것을

荀子는 아름답다고 묘사하기도 한다. 사실 荀者의 美的 개념 역시 도덕적인 것이어서, 人道를 모두 구비한 聖人울 그는 〈全美者〉(온전히 아름답게 된 사람)(「正論」 26) 라고 불렀다. 性僞之合을 완성하여 온전하고 아름답게 된 사람은 사회를 안정시키고,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응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갖는다. 그런데 인간사회 뿐만 아니라 天地 역시 시작한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 이러한 군자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고귀함은 그 극치에 이른다• 天地는 군자를 낳았으나, 군자는 천지를 이치에 맞게 조화시킨다. 군자는 천지 에 참여함으로써 만물의 총령이 되고, 백성의 부모가 된다. 군자가 없으면 천지 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예의가 통일되지 못한다. 위로는 君主와 스승이 없 고 아래로는 아버지와 아들(의 도리가) 없는 것, 이것을 일러 지극한 혼란이라 고 한다 . 40)

40) 故天地生君子, 君子理天地 . 君子者天地之參也, 萬物之德也,民之父母也. 無君子, 則天 地不理, 禮義無統 上無君師, 下無父子. 夫是之謂至亂(「王制篇J, 65~67).

天은 時롤 가지고 모든 것을 제때에 돌아가도록 하고 地는 곡물을 생산하 여 만물을 키우되, 인간은 義로써 사회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끝에 가서는 이 三才룰 묶어 조화시키는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荀子의 우주적 비전은 天地人울 독자적인 세 부분으로 본 것이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에 의해 보완됨으로써만이 전체를 이룰 수 있는 유기적 통일체로 본 것이다• 이러한 荀子의 안목은 法家와 같이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상정하여 국가의 富强을 최고의 목표로 하고자 한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또한 道家와 같이 天道의 절대성을 강조하여 인간 문화의 가치를 배척하려 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天과 地를 대웅시킨 면에서는 道家와 시각을 공유하면서도, 천지를 인간 문화와 병행시킴으로써 각기의 자율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끝에 가서는 三才가 조화 속에 서로를 보완하도록 하는 유기적 우주관을 제시한 것이다.

荀子 禮論 속의 제사의식 끝으로, 荀子의 종교관을 전체적으로 살피기 위하여, 제사의식에 대한 그의 관점, 자연재앙에 대한 그의 태도 및 吉凶에 대한 그의 새로운 해석이 지닌 의미를 간단히 고찰하고자 한다• 荀子는 先王으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제사의식들을 그의 禮諦 안에 수용하여 正名의 한 부분으로 확립시키고 있다• 우선 그는 禮에는 세 가지 근본이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른 儀式의 표현이 있어야 됨을 밝힌다. 禮는 三本을 가지고 있으니, 天地논 生의 근본이고, 先f바는 類의 근본이며, 君師는 治의 근본이다. 天地가 없으면 어떻게 生이 있겠으며, 先祖가 없으면 어디서 (인류가) 니올 수 있겠으며, 君師가 없으면 어떻게 治가 이루어지겠는 가? 세 가지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인간사회를 편안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禮는 위로는 天을 섬기고, 아래로는 地를 섬기며, 先祖롤 존경하고, 君師를 융성하게 대하는 것이다 .41) 天地는 生의 근본으로 가장 존귀한 것이기 때문에 荀子는 鄕祭와 社祭의 의미를 「禮論篇」 안에서 자세히 설명하였다. 荀子의 陰陽的 사상구조만을 보면 천지가 合祭되어야 할 것 같지만, 그의 삼층적 우주관 및 제사의식의 전통성 때문에 天에 드리는 제사인 鄕祭를 社祭와 구별하고 있다. 즉, 鄕祭 는 天子만이 행할 수 있는 데 비해, 地에 드리는 제사인 社祭는 제후둘이 지낼 수 있다고 차등을 두고 있다 .42) 우주적 위계가 사회적 위계와 병행됨으 41 ) 禮有三本, 天地者, 生之本也, 先祖者, 類之本也, 君ti!i者, 治之本也 . 無天地惡生, 無先祖 惡出, 無君師惡治 三者偏亡焉 無安人. 故, 禮上事天, 下事地, 尊先祖, 而隆君ti!i(「禮論 篇J, 13~15). 42) xii止平天子, 而社止於諸侯, 道及士大夫(「禮論篇」, 16~17). 이중에서도 〈社止於諸侯〉 가 문제를 지니고 있는데, 王先謙은 止를 至로 보고 道를 通으로 읽어서, 제후에서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社를 지낼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史記』 등 후의 기록에 따르 면 이런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荀子의 경우에는 분류적 차등을 두는 예가 많기 때문 에, 道를 行神으로 보는 것이 본문에 더 충실하리라 생각된다.

로써 二元的 正名이 일치되고 확인되는 것이다. 또한 邪祭 때에 베로 만든 관을 쓰고, 음악 등을 소략하게 하는 이유를 荀子는 禮란 質素한 데서 시작 하는 것을 귀히 여기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여, 생명의 기원을 상징하는 邪祭 의 의미를 밝힌다. 선조는 인류의 시작이기 때문에, 누구나 예의 없이 모든 지위의 사람이 祗上祭를 지내야 한다고 荀子는 강조하였다. 그러나 사회적 위치에 따라서 제사의 대상, 종묘의 크기와 여부 등을 위계적으로 규정하였다. 王者는 太祖 를 天에 配享하고 7 代의 先祗를 제사 지내며, 제후는 宗廟를 모시고 5 代를 제사지내고, 大夫는 3 代를, 士는 2 代를, 서민은 종묘 없이 부모를 제사 지낸 다. 조상제의 종류 구별하여 三年에 한번씩 先祖롤 合祭하는 笛祭의 내용 과, 사계절마다 드리는 및祭의 절차를 자세히 설명한다. 荀子는 제사에서 중요한 것은 本을 귀히 여기는 전승된 文과 실용성을 고려하는· 합리적인 理가 결합하여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결국, 天地와 선조에게 제사를 드리는 이유도 군주와 스승을 섬기는 현실적 노력과 마찬 가지로, 禮의 근본정신을 존중함으로써 禮를 실생활에서 완성하여 聖 A 이 되려는 것임을 荀子는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43) 자연재앙에 대한 荀子의 자세 그 다음으로, 자연재앙에 대한 荀子의 태도를 살펴보면, 100 여 년 후에 나오는 董仲舒와는 정반대의 시각을 지녔다고 하겠다 .44) 荀子는 재앙을 크게 자연적 재앙과 인간적 재앙으로 분류하였다. 자연적 재앙이란 天地의 예의적 인 변화이므로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두려워할 것이 없고, 오히려 인륜이 파괴되고 도둑이 성행하게 되는 〈人萩〉를 두려워하라고 荀子는 경계 43) 賞本之謂文, 親用之謂理 兩者合成文, 以歸大一……天者高之極也, 地 者下之極也, 無窮者廣之極也, 聖人者道之極也 故學者固學爲聖人也(「禮論篇」, 21, 36~37). 44) 董仲舒는 人性論을 논하면서 孟子는 聖人울 생각해서 性善이라 했는데, 자신은 일반 사람들을 생각하고 未善이라고 한다는 면에서, 董仲舒의 사고는 荀子와 멀지 않으나. 그의 天人感應論에 의거한 재앙의 경고사상은 크게 차이가 있다.

하였다. 별이 떨어지고 나무가 울면 나라 안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이게 무슨 일이냐?〉 하고 묻는다. 대답하기를,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天地의 변화요 陰陽의 조화로서 가끔 일어나게 되는 일이니, 괴상하다고는 할 수 있지만 두려 워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무릇 일식과 월식이 생기고, 비바람이 때 아닌 때에 불며, 怪星이 가끔 나타나는 일은 어느 때나 항상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윗사 람이 명철하고 정치가 평안하면 이런 일들이 모두 일어나더라도 해 되는 바가 없을 것이고, 윗사람이 암울하고 정치가 험난하면 이런 일들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더라도 이익되는 바가 없을 것이다.〉 -1 5)

45) 星隊木鳴 國人皆恐, B, 是何也. 曰, 無何也. 是天地之變, 陰陽之化, 物之푸至者也. 怪之可也, 而長之非也. 夫 8 月之有鉉, 風雨之不時,怪星之黨見, 是無世而不常有之. 上明 尋平, 則是誰뾰世起無傷也 上闇而致險 則是誰無一至者無益也(「天論篇」, 29~32 면) .

騎衍의 五德論 및 災異說이 인기를 끌던 전국말의 분위기에서 자연적 재앙에 대하여 이렇게 지극히 人本的이고도 합리적인 해석을 한 荀子의 도덕적 확신은 상당한 것이었다고 평가해야 될 것이다. 祈雨祭와 占術에 대한 荀子의 자세 따라서 그는 가장 오랜 역사룰 지닌 祈雨祭(常)와 占 등을 전승되는 문화 의 한 가지 수식으로 인식할 뿐, 이런 의식을 통해서 구체적인 결과를 얻으 려고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凶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46) 물론 그보다 역사와 전통적인 가치가 훨씬 떨어지는 굿이나 관상 등의 민간신앙에 대하여 荀子 는 더욱 부정적이어서 그러한 종교실천을 無知의 소치로 보고, 君子는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는다고 단정하였다 .4 7) 그런데 이런 민간신앙의 기초사상이

46) 君子以爲文, 而百姓以爲神 以爲文則吉, 以爲神則凶也(「天論篇」, 39~40). 47) 故傷於濕而擊鼓鼓卑 則必有散鼓喪麻之費矣 而未有兪疾之福也, 故推不在夏首之南, 則無以異矣(「解萩篇」, 77~78).

되는 吉凶개념을 荀 二 F 가 완전히 儒家的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있는 점이 홍미롭다. 荀子의 吉凶과 禍福개념에 대해서는 그의 수양론에서 이미 다루었지만,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부분, 즉 불가지의 神靈한 세계로부터 오는 幸이나 不幸의 문제는 중국인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온 닛으 로 命의 개념과 직결되어 있다 .48) 그런데 종합적 경향을 지녔던 荀子는 이 사상 자체를 무시하거나 배격하기보다 그 내용을 儒家的 시각에서 변화시키 고자 하였다. 그래서 荀子는 배움(學)을 통해 이루어지는 人格의 완성이야말 로 참으로 吉한 것이며 진정한 福울 가져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인간다운 인간이 되지 못하고 小人으로 남아 있디는· 사실 그 자체야말로 자산에게는 물론 사회에 凶한 일이며, 결국 禍롤 초래한다는 儒家的 禍福觀울 확립하고자 하였다.

48) 이런 개념은 놀라웅 정도의 지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오늘날 대만의 어디를 가든지 吉, 祥, 福 등의 글자를 紅紙에 써서 대문이나 벽에 붙여 놓은 것을 볼 수 있고, 끓! 자 등 여러 글자를 모아서 招福울 기원하는 것도 자주 읽을 수 있다.

禍胤읍이란 인간의 도덕적 노력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는 荀子의 주장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수용되었는지를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으나, 『荀子』 26 편인 「賊篇」에 보존된 俺詩를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에 띈다. 孔子께서 匡 땅에 갇힌 세상, 그 지혜의 밝음이 그렇게 빛났건만, 어찌하여 時의 不祥을 만나시었나. 그는 예의가 크게 행해지길 원하셨는데, 天下는 어둡고 눈 멀어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밝은 하늘은 돌아오지 않고 시름은 끝이 없구나. 천년이 지나가면 반드시 옛날의 常道가 되돌아 오는 법,

弟子둘은 배움에 힘쓸 것이니 天 은 잊지 않으리. 聖 A 도 손을 모으시고, 때(時)가 오기를 기다리셨네 .49)

49) 孔子拘匡 昭昭平其知之明也, 郁郁平其遇時之不祥也 . 掃子其欲禮義之大行也, 闇平天下 之梅育也. 暗天不復 憂無撫福也 千歲必反古之常也 . 弟子勉學, 天不忘也. 聖 人共手, 時幾將矣(대武篇」, 30~34). 楊係은 郁郁과 掃이 바뀐 것으로 보았다 . 마지막 구철의 해석은 兪抱의 것을 따랐다. 28 편인 「有坐篇」, 33~41 면에도 유사한 사상이 언급되어 있다.

이 「賊 篇 표든 「雜 篇 」에 속하는 것으로서 韻文으로 되 어 있는 6 편의 詩믈 모아 놓은 것인데, 荀子후학들에 의해 쓰여전 것이다. 여기서 감지할 수 있는 점은 荀子의 새로운 禍福觀이 완전히 수용되기에는 인간의 노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 현저하다는 사실이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미 체험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聖人인 孔子 역시 상서롭지 못한 시기를 만나서 어찌할 수 없이 때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堯問篇」에서 荀子의 제자들은 荀子 역시 때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 에 그의 正道를 펼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道를 펴기 위해서도 때를 만나야 된디는 이 〈時〉의 문제는 荀子가 제시한 하늘과 인간 직분의 구분 (天人之分) 및 목적론적인 〈參於天地〉의 이론만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荀子 後學들의 기록인 「雜 篇 」 부분에서는 『 周易』에 대한 관심이 엿보이고, 卦에 대한 해석이 보존되어 있다 .50) 결국 秦漢 시기에 『周易』이 儒家의 經典으로 정착되는 것도 儒家傳統 자체가 지닌 이러한 필요성에 의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50) 「大略篇」에는 威封에 대한 풀이와 小畜封에 대한 주석 등이 보존되어 있다. 咸울 여기서 夫婦之道로 풀이한 것이 周易 序卦傳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夫婦를 剛과 柔 이해한 것은 이미 陰陽說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李鏡池, 『易傳思想 的 歷史.J, 『易學論훔選集』, 長安出版社, 1985, 267~270 면 ).

위의 인용한 「賊 篇 」의 {范詩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孔子가 가르치고 자 했던 바는 〈禮義〉가 세상에 행해지는 것이었다고 읊고 있다는 사실이

다. 이것은 바로 孔子에 대한 荀子의 해석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고 하겠 다. 사실 前漢시기에 이르러, 여러 학파, 특히 法家와 道家와의 두쟁 속에서 승리한 個家가 漢帝國의 공식적 국가이념으로 정착되면서 이루어지는 가장 중요한 편찬은 『禮記』 및 『周禮』와 『儀禮』였다 .51) 중국전통 사회에 제도적 틀을 제공한 三禮는 주로 荀子의 禮論的 해석에 의거하여, 전승되어온 禮의 실천을 종합하고 儒家的 입장에서 그 의미를 유출하고자 한 것이다 .52) 다시 말해서, 荀子는 禮의 객관적 사회성을 강조함으로써 전통적 중국사회에 禮的 체계, 곧 사회적 윤곽울 확립할 수 있는 이론적 기초를 놓은 학자였다고 하겠다.

51) 戰國末에서 秦漢사이에 성립된 周官이라고도 불리는 周禮는 周王朝의 이상적 官制 I 를 묘사한 것으로서 爵名은 周를 따른다는 荀子의 말을 구체화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儀扇읽는 士禮를 중심으로 하여 편찬된 것으로 漢初 禮官들에 의해 편집된 것이다 (『武內羲雄全集』 3 권, 「禮 i C (1)硏究」, 214~306 면 참조). 52) 武內義雄은 『荀子』의 「禮論篇丘斗 『古禮經』 속의 義 사상과의 관계를 논하면서 子illi­ 학파의 禮義에 대한 연구가 荀子의 禮說을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한 바 있다(그의 全集, 3 권 251 면). 左傳 등에서 볼 수 있는 禮에 대한 지대한 관십이 荀子에게 자국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수궁할 만한 츠]적인데, 체계화된 荀子의 禮論이 다시 『禮記』의 이론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따라서 이 책의 결론부분에서는 고대중국전통의 儒敎的 종합이라고 할 수 있는 『周易』 과 三禮를 대표하는 『禮記』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특히 孔孟荀의 사상과 비교하면서 『周易』 의 「易傳」과 『禮記』의 「通論」 부분에 나타난 중요한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비교고찰이 原始儒敎의 특성 과 유교전통 안에서 原始儒敎가 지닌 위치를 더욱 분명히 밝혀줄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 原始儒敎의 위치와 특성 「易傳」과 『 禮記 』 에서의 종합을 중심으로 孔子로부터 시작되는 儒 家 의 가르침, 곧 儒敎의 2,500 년 역사를 독특한 해석체계의 정립이라는 관점에서 분류하여 보자면 原始儒敎, 漢唐 儒學, 宋明 儒學 및 淸代 考證學의 발전이라는·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시기는 이 책에서 취급한 孔孟荀의 原始儒敎 전통이 확립되는 춘추 전국 시기 및 그들의 다양한 이론이 秦 漢代에 이르러 『周易 』 의 「易傳」과 『 禮記 』 안에 종합되는 경전 성립 시기이다.1) 孔子는 『 詩經 』 과 『書 經 』 을 핵으로 하는 周代의 전통문화를 〈修已安人〉(자기를 수양하여 남을 편안하게 한다)이라는 인간론을 중심으로 하여 해석함으로써 儒家의 기본적 방향을 제시하였다. 孟子는 孔子의 인간론을 盡心論的으로 발전시켜서 인간의 도덕 적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 春秋』를 孔子의 저술로 儒家傳統 속에 수용하면서 도덕적 정치론인 王道思想울 확립하였다. 荀子는 제자백가의 학설이 갖는 한계성을 지적하면서도 그들이 지닌 전리의 一曲을 수용하였 I ) 三禮 중에서 『禮記』만을 여기서 언급하는 이유는 『周禮』와 r 儀禮』는 周代의 官制나 士禮 등 세부적 인 禮의 형식을 취급하고 있는 데 비하여, 『禮記 』 는 曲禮 등 가장 오래 된 禮의 자료를 보관할 뿐만 아니라 通論 부분을 발전시켜서 禮의 의미와 기본되는 정신을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禮的 규정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교 전통 안에서도 禮의 변하지 않는 의미를 규명하고 있는 r 禮記』가 가장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 .

다. 그리고 그것들을 유가적으로 재해석하면서 孔子의 인간론을 禮論울 중심 으로 하여 체계화하였다. 그는 사람들의 직분이 구별되어야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分思想에 기초를 두고 禮를 사회의 객관적 규범으로 제시함으로 써 儒家的 사회관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근본적 방향은 같으면서도 그 강조하는 바는 다양한 孔孟荀의 사상을 종합하면서, 그들의 시각으로 중국 고대전승 전체를 조명하여 사회와 우주를 보는 儒家的 세계관을 형성한 것이 「易傳」과 『禮 記 』 이다. 『 周易』은 卦辭와 父辭로 이루어진 經 부분과 「象傳」,「象傳」, 「文言傳」, 「緊辭傳」, 「說卦傳」,다手卦傳」, 「雜卦傳」 등 보통 十翼이라고 불리는 傳 부분으로 구분 된다. 『易經』 부분은 본래 周의 占書로서 갑골문 이래로 중국 최고의 종교 사상을 그 안에 보유하고 있는 卜辭이고, 「易傳」은 1 儒敎의 정신으로 易아 재해석되면서 군자적 수양론과 음양적 우주관 등을 제시한 주석서들이다. 『周易퍼 고대 중국인의 사고적 구조를 대변하는 저서라면, 『禮 記』는 중국 전통사회의 제도적 틀을 규정하고 그 이념을 풀이한 저술이다. 출생할 때부 터 사망할 때까지의 한 인간의 삶은 물론, 사회와 국가의 모든 행동규범과 그 의미를 제시하고자 한 『禮 記』는 고대 중국의 禮法 전체를 孔孟荀의 사상 에 입각하여 새롭게 해석하고 정착시키려는 대담한 시도였다고 하겠다. 그러 나 『 禮記』와 「易傳표본 특정한 저자에 의하여 쓰여전 일괄적인 저술은 아니 다. 秦代와 漢初에 정치적 박해를 경험했던 儒家가 점차로 정통이념으로 정착되어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복합적인 儒家의 공동저술이라는 데 그 특징 이 있다. 전통적으로 『周易』의 十翼과 『禮記』의 해석자를 孔子로 보려고 한 것도, 그가 직접 그것을 저술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그때까 지의 전통 전체를 儒家的으로 해석했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易傳」과 『 禮記』는 한편으로는 原始儒敎 전통을 규범 2) 델信」이나 『禮記』 안에는 직접적으로 子日 혹은 孔子曰로 나오기도 하고 간접적으 로 그의 제자를 통해 그 사상을 전한다는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孔子世家」로부터 孔냐配홈에 이르기까지 孔子의 저술로 믿어오던 十翼은 宋代 歐陽修의 「易童子 F네 」에서

부터 그 친저성이 의심을 받기 시작하더니 淸代에 와서 崔述 등의 고증적 반박을 받게 되었고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孔子의 이름을 빌은 儒者들의 작품이라는 것이 확정되고 있다 . 마치 구약 성서의 「모세오경표卜 모세의 저술로 받아들이는 것이, 모세 를 매개로 하여 시작된 고대 이스라엘 계시 전통의 집합이라는 접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과 같이, 「易傳」과 『禮記』 역시 孔子의 시각에서 이루어진 漢代까지의 고대중 국전통에 대한 유교적 해석의 총집-으로 보면 될 것이다 .

으로 하여 고대 중국전통을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앞으로 계속되는 儒敎傳統 안에서 原始儒敎가 지니는 규범적 성격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가 됨과 동시 에, 다른 한편으로는 五經의 편찬이 완성됨으로써 原始儒敎에서 시작된 低敎 傳統의 첫째 흐름을 완결시켰다고 할 수 있다. 儒敎傳統의 둘째 시기는 董仲舒를 시점으로 하여 이론적 틀로 陰陽五行說 울 전격적으로 수용하고 1 儒學을 국가의 이념으로 정립시킨 漢代로부터 唐代 에 이르는 약 천년간으로서 古注傳統이 형성되는 시기라고 하겠다. 漢唐 유학은 시기적으로는 제 2 시기의 시작과 겹치는 제 1 시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완성된 五經울 핵으로 하여, 訓話的인 주석전동을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 十三經注疏 』 를 형성하면서 중국 고대전승을 매개하는 교육자 및 사회의 제도적 틀을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漢唐 儒學은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제의 이념으로 채용되면서, 임금 이야말로 仁政을 통해 천부적안 인간의 선한 본질을 완전케 할 중대한 임무 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해서 原始儒敎가 제시한 인격을 이룬 〈君子〉라는 보편적 인간상을 고수하기보다는 詩書의 王 중심적인 인간관으 로 돌아가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이 점에서는 모든 사람이 君子와 聖人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原始儒敎의 방향을 역행시켰다고 보겠 다전 陰陽思想은 이미 荀子로부터 儒敎傳統 안에 수용되었고 「易傳」의 기본 적 사상의 틀로 대두된 바 있다. 그러나 漢儒學에 와서는 陰陽論이 天人感應

3) 天生民性有善tt, 而未能善於是爲之 . 立王以善之, 此天뾰也(『春秋繁露 』 卷 10, 「深察名號 篇」 35, 淸凌甲沮 世界書局, 240 면). 天道 자체의 小霜而多露룰 강조합으로써 仁政을 실천할 것을 역설한 薰仲舒의 정치관이 일면 절대왕권에 天道的 규법을 제공하여 왕권을 제한하려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사상의 초접이 士君子로부터 君主로 옮겨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說 및 五行思想과 결합되어 人性과 수양론은 물론 사회관계와 자연 및 신령 한 세계에 이르기까지, 고착된 음양오행의 이론에 따라 우주 전체를 배열시 키는 독특한 해석체계를 발전시켰다는 점이 특이하다. 儒敎傳統의 셋째 시기는 儒學의 정통성을 회복시킨 宋代로부터 明末에 이르기까지 新儒學 Neo-Con fu c i an i sm 이 사상적 주도권을 행사하던 때를 가리킨다. 宋明代의 유학자들은 六朝 시기 이후로 놀라운 발전을 이룩해온 道敎 및 佛敎와의 대결에서 사상적 자국을 받으며, 孔子와 顔 子 의 修已的 이상을 새롭게 표현하고자 하였다. 모든 사람이 聖人이 될 수 있다는 보편적 인간상을 회복시키려는 宋明學者들의 노력에 있어서, 原始儒敎는 규범적 성격을 명과 동시에 이들에게 영감을 제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新個學의 사상체계는 原始儒敎에서는 볼 수 없던 사변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新儒學의 기본적 이론구조라고 할 수 있는 理氣說은, 宋代에 와서 비로소 儒敎傳統 안에 도입된 것으로서 철학적 체계화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사고적 톨이었다 .4) 宋學을 대표하는 朱子의 해석에 따르면, 氣는 만물을 생성하는 자료이고, 理는 각 사물에 내재하여 그 性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안에 내재한 도덕성인 四端은 理요, 淸濁의 개인적 차이를 갖게 하는 氣質은 氣라고 하였다. 新儒學 전통내에서도 학파에 따라서 인간의 性이 理인가 心이 理인가 등의 해석적 차이는 있지만, 인간과 우주 전체를 理와 氣로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4) 理라는 개념은 『論語』에는 전혀 쓰이고 있지 않고, 『孟子』와 r 荀子』에서는 이치 또는 도덕률이러는 의미로 나오고는 있지만 독립 개념이 아니었으며 중심되는 주제도 아니 었다 . 단지 「易傳」 부분에서 陰陽의 원리로 소개될 뿐, 그 후 1,000 년간 儒家에서는 별로 理를 언급하지 않았다. 3, 때 1 기로부터 新道家에서 모든 존재를 주관하는 원리로 서 理를 개념화하였고, 佛敎에서는 특히 華嚴에서 事法界와 理法界를 상통하는 理事無 擬의 논리를 발전시켰는데, 新儒學이 이들의 이론적 구조를 수용한 것이라고 하겠다 (특히 荒木見悟, 『佛敎티儒敎』, 平樂寺, 1978 년 참조).

儒敎傳統의 넷째 시기는 청대의 고증학적 학풍에 의하여 儒敎에 차용된 道佛의 사변적 영향을 제거하고 漢學, 더 나아가서는 原始儒敎의 순수한 형태로 돌아가려는 운동이 일어난 시기를 지칭하는데, 어떻게 보면 이 학풍

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宋學 과 淡學 이 공존하면서 대립 되던 淸 代에 漢唐儒學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 十三經注疏 』 에 校勘記를 쓴 阮元 (1764~1849~ 〈兩 漢 의 經學은 마땅히 따라야 될 것으로, 시기적으로 聖賢들이 세상을 떠난 시기에서 가장 가깝고, 道敎 와 佛敎의 학설이 아직 일어나기 전이기 때문이다〉(漢學師承記 序) 라고 漢學울 중시하는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 말은 결국 原始儒敎야말로 유교전통의 규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을 얼마나 충실히 전승하였는가에 따라 후대의 해석이 지닌 가치가 평가된다는 사상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에 근거를 두고 청대의 고증학자들은 송명학을 비판하였으며, 더 나아가서 古注와 新注 를 비교하면서 자신들의 언어학적 연구를 첨가한 객관적 주석서둘을 편찬하 였던 것이다. 대표적 예를 들자면, 劉寶楠의 『論語正義』 ( 1866), 魚循의 『 孟子 正義』 (1876), 王先謙의 『 荀子集解 』 (1 891) 등을 돌 수 있다.

原始儒敎의 본래 사상으로 돌아간다는 주장은 사실 새로운 해석이 등장할 때마다 있었던 것이다. 新儒學 운동의 시발점인 唐末의 韓念는 孟子 이후로 상실된 儒敎의 전수를 되찾아야 한다고 부르짖었고, 송대의 道學者들 역시 천년 동안 잊었던 孔子의 가르침을 복귀시킨다는 사명감을 지니고 있었다 .5) 그러나 그들이 원하던 이런 복귀가 가능했던 것은 宋代에 이르기까지 교육이라는 매개를 통해 儒敎經傳이 전수되고 있었고, 禮에 따른 사회제도가 실천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5) 예를 들어 『近思錄』 「爲學類」 등을 살펴보면, 療溪 선생으로부터 伊川 선생에 이르기 까지 모두가 顔淵의 好學이야말로 聖人이 되려는 참된 배움임을 강조하고 있다. 經典 울 文章울 배우기 위해서나 訓話的으로 읽어온 漢唐 유학에 대한 강한 비판이 담겨 있음을볼수있다 .

그리고 또 한 가지 지적해야 될 점은 宋明儒學의 경우에는 心性論을 중심 으로 한 이론이 확립되어 뚜렷한 하나의 해석체계로서의 모습을 보여준 데 비하여, 청대의 고증학 전통은 본문 비판과 實事求是의 經世論에 있어서 는 많은 공헌을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독자적인 해석체계를 형성하는 데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20 세기초 과거제도가 폐지되 고 중국의 전통사회가 붕괴되면서, 유교전통의 단철을 경험하고 다시 일어서

는 현대의 個學을 새로운 조류의 형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고증 학이나 陽明學 傳統의 지속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가 문제로 대두된다. 杜維明은 유교사의 발전을 크게 셋으로 구분한 후, 漢儒學과 新儒學에 이은 제 3 의 유교적 인문주의가 오늘날 싹트고 있다고 말한다 .6) 그는 儒敎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및 베트남 등 束亞文化圈의 사회적 규범 및 주도적 사상으로 그 범위를 확대한 것이 新個學 시기에 이루어전 한 가지 특성이라고 지적하면서 이제 제 3 의 儒敎運動은 세계적 관점을 갖고 다른 사상체계와의 진지한 대화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熊十力 울 선두로 하여 唐君毅, 牟宗三, 錢穆, 徐復觀 등의 이름이 언급되고, 다른 소장 유학자들의 이름아 이 대열에 나열되기도 한다? 이들에게뿐만 아니라 사실 오늘의 유교전통에서는 西洋思想의 도전과 민주사회로의 이상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현실적 필요 때문에 또 하나의 해석학적 시도가 독자적으로, 또는 고증학적 전통과 의 연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망이 크다고 하겠다전

6) Tu Wei- ming, Toward a Third Ep oc h of Con fuc ia n Huma nism : A Backg rou nd Understa n din g , Confu c ia n is m : The Dy n ami cs of Tradit ion , ed. by Irene Eber, Macm illan , 1986. 7) Joh n Bert hr ong, Adju s tm ent : Dual Transcendence and Fid u cia ry Commun ity, Inte rn ati on al Confu ci a n -Chris tian Confe re nce at Hong Kong (Ju ne, 8~15, 1988) 에서 제출된 논문 안에 劉述先 杜維明, 成中英, 泰家懿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8) 우리나라의 경우, 18 세기 丁若鏞의 經典해석은 이런 면에서 중요하다. 이미 新儒學의 理이라는 사상적 틀을 벗어버리고、 原始儒敎 속에서 유교의 본모습을 찾으려 한 그의 추구 속에는 西洋文明에서 오는 자국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茶山 연구는 유교의 새로운 해석과 병행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새로운 해석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영감과 규범을 제공해온 原始儒敎, 곧 孔孟荀의 사상이 秦漢時期 고대 중국전통 전체를 儒家的으로 해석하려 했던 儒學者둘의 최초의 노력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가를 살피기 위하 여 이제부터 「易傳」과 『禮記』의 내용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l 「易傳」 : 『周易』의 儒家的 주석서 十三經의 첫자리를 차지하여 중국사상을 대표하게 된 『 周易』을 연구한 독일 학자, 빌헤름 Hellmu t W i lhelm 은 64 卦룰 중국인들의 〈총체적 우주관〉 또는 〈삶과 세상에 대한 상칭체계〉라고 불렀다산 중국인 철학자 牟宗三 역 시, 『周易 』 의 64 卦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모두 포괄하는 우주의 表象으로 서, 세상을 符號로 표시한다는 특성을 갖는다고 논평한 바 있다 .10) 卦象은 자연현상과 사회현상 사이의 관계를 반영해주고, 圖象의 해설은 변하는 환경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도리를 해설하고 있는 것이다.11) 그런데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周易』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안에 經 과 傳으로 구분되는 두 개의 사상적 충이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 을 염두에 두는 일이다. 첫째 충은 「易經」이라고 불리는 卦辭와 父辭로서 占에 사용되는 文章둘이다 .12) 『周易』에서 가장 오래된 이 占辭는 顧吉罪岡j, 屈萬里 등이 지적한 바와 같이, 殷末周初의 古事둘을 여러 개 간직하고 있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보아 西周 初의 卜莖를 담당하던 관리들에 의해 쓰여졌 을 가능성이 높다 .13) 『 周易』의 卦父辭는 商代나 西周初의 갑골문과 마찬가지 9) Hellmut Wi lh elm , Eig h t Lectu r es on the I Ch i n g (1943 년 北京에서 한 강의), 영역 본( Cary Bay ne s 역 ), Prin c eto n Un iv. Press, 1960, 9 면 . 10) 牟宗三 『周易的自然哲學與道德固我』, 文津出版社, 1988, 뎀打言」 1~13 면 . 그는 『周 易 』 의 의미를 세 가지로 분류하여, 변하는 세계로서의 물리적 인 易, 변화의 조리관계 를 나타내는 수학적인 序, 吉凶梅杏울 취급하는 윤리적 値로 이해하였다. 11 ) Jos ep h Needham 은 『周易』을

編, ,長安出版社, 1985 년에 수록되어 있음).

로 占 卜的 기록이지만, 占을 칠 때마다 매번 甲骨이 불에 달구어져서 새겨진 형상을 통해 神意을 읽어야 했던 甲骨占과는 달리, 64 卦 384~ 로 일종의 수학적인 규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14) 또한 「易經」 안에는 갑골문에서는 보이지 않던 인간 경험에서 우러나온 참언적인 성격의 문장들이 섞여 있어서 지혜문학적 요소 역시 포함되어 있다고 하겠다 .15) 특히 謙卦 (15) 나 恒卦(3 2) 와 같 이 그 성격상 이미 도덕적 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卦들은 吉하거나 不吉하거나 어떤 환경에 처하든 지 겸손과 항구함을 지닐 때 모든 일에 허물이 없을 것임을 강조한다. 孔子 가 『論語』에서 인용하고 있는 유일한 父辭가 〈자신의 德에 항구하지 않으면 수치를 당할 것이다〉빡카는 구절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고 하겠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 점은 孔子는 마지막 占부분은 무시하고、 「子路 篇」 22 장 앞부분에 나오는 남방사람들의 격언과 동등한 위치에서 『 周易 』 의 이 구절을 인용한 후 〈不占而已〉, 곧 점을 칠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결론짓 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孔子는 易에 인용된 잠언의 의미를 취했을 뿐, 占의 결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4) 부호의 본래 의미에 대한 여러가지 추측들이 있으나 菩草의 배열방식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같은 책, 238 면 참조) . 15) 이 면은 이미 Arth u r Wale y가 지적한 것으로, 그는 이런 농경사회의 잠언들을 주관 적인 것(咸 靈), 동식물과 새들의 행위해석(屯」壓 解, 大壯), 자연현상의 해석(震) 등으로 드分한 바 있다. 그는 민간의 참언돌과 占書가 기원전 1,000~600 년경 사이에 결합된 것으로 보았다 {The Book of Change s , Bulleti n of the Musewn of Far Easte rn Anti qu it ies 5, 1933, 121~142) ; 余敦康 「從易經到易傳」, 『易學諸者選集』· 230~235 면도 참조. 16) 不悟其德 或承之墓 占咨(梅卦九三).

이와 같이 『論語』를 통해서 볼 때 孔子는 占 卜을 중시하지 않았으며, 그의 제자들 중에서 『周易』을 배우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孟子 역시 易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17) 孔門의 이러한 경항은 춘추시대에 싹튼 새로운 인본적 사조를 반영하는 것이다. 『春秋左傳』과 『國語』에 언급되는

17) 李鏡池 「易傳思想的歷史發展」, 『易學論著選集』, 265~268 면.

22 번의 占法 을 고찰해 보면,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는 결혼 • 生 子 • 出仕 • 出 兵 등의 중대사를 결정하기 위한 占 卜으로 사용되었으나, 소수의 경우에는 도덕적 해설을 첨가하여 인간의 반응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론이 나울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81 한 가지 예를 들자면, 『左 傳 』 昭公 12 年條에 南杭 l j라는 士가 모반을 꾀하면 서 占울 치고 나서 그것을 子 服惠伯에게 보이자, 자복해백이 남괴에게 다음 과 같이 충고하는 말이 나온다.

18) r 左傳』에 20 번, r 國語』에 두 번 나오는데, 그중 16 번은 占으로만 해석되고, 나머지 6 번은 도덕적 해석을 시도한다. 占 흡 의 사용법이 春秋 중엽 이후 새로운 면을 띠기 시작했음을 알려준다(高亨, 「左傳國語的周易說通解」;余敦康, 「從易經到易傳J, 같은 책 참조).

『 周易 』 에서 이르기를 〈누른 치마이니 으뜸으로 길하다〉라고 했는데, 黃色은 가운데의 색깔이요, 치마는 사람의 아랫부분을 장식하는 것이며, 으뜸이란 善의 최고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속이 충실하지 못하면 그 색깔을 얻을 수가 없고, 아랫사람으로서 공순하지 않으면 그 치마에 해당되지 않으며, 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면 그 국전함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19) 坤卦六五에 나오는 〈黃袋元吉〉이라는 단순한 占辭률 도덕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이런 경향은 더욱 발전되어 『 周易』의 「易傳」 전체가 이와 같은 특칭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象傳」을 보면 〈黃袋元吉〉이라는 같은 父辭를, 文德이 그 자리를 알맞게 차지하여 臣道룰 다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20) 「文言傳」은 이것을 좀더 발전시켜서 孟子의 大人 과 같이 이치에 통 달하고 덕을 지닌 사람은 그 내면의 아름다움이 몸 전체 에까지 드러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2 1)

19) 故曰, 黃裝元吉 . 冀 中之色也, 裝,下之飾也, 元, 善之長也. 中不忠, 不得其色, 下不共, 不得其飾 事不善, 不得其極.… … (『春秋左傳』 昭公 十二年). 20) 象 El, 黃元吉, 文在中也(坤六五, 象). 王弼은 坤이 臣道임을 지적하여 柔順之德으 로 그 위치에서 모든 일에 성공함이라고 풀이하였다. 21 ) 君子賀中通理, 正位居體 美在其中, 而暢於四支, 發於事業, 美之至也(坤, 文言).

그런데 「易傳」의 儒家的 해석을 분석하기에 앞서서 孔子에게서 별 주목을· 받지 못했고, 孟子와 荀子에서도 관심 밖이었던 『周易』을 매개로 해서 儒者 둘이 자신들의 사상적 발전을 이룰 필요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의 실마리는 역시 秦始皇帝의 梵書抗儒라는· 역사적 현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봉건제도 동 原始儒敎傳 統에서 이상으로 해온 정치사상을 통제해야 된다는 국가정책하에서 秦代 초로부터 탄압을 받은 儒者들은, 占書라는 이유 때문에 禁書에서 제의되었으나 도덕적 해석의 가능· 성을 지니고 있는 易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들은 周初로부터의 전통을 지닌 『周易』을 儒家的 시각을 가지고 해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十翼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七篇에 이르는 이들 주석서들을 분석해보 면 크게 각각 다른 세 시기에 걸쳐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象傳」과 「象傳」은 秦漢間에 齊와 魯지방의 儒者들이 저술한 것으로서, 剛柔說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 다음, 「緊辭傳」과 「文言傳표본 前漢 武帝 때의 통일사상을 반영하는데, 剛柔 • 賞賤 • 動靜 등 모든 대립을 국복하는 陰陽의 生生之道로서 易울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쓰여진 「說卦J, 「序 卦」, 「雜卦傳표본 8 卦와 6 佳떠 순서를 설명하고 문자적 訓誌를 첨가하였다. 이들은 漢儒學의 訓話的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서, 『周易』 에서는 유일하게 五行思想이 나온다는 것 의에는 사상적으로 중요한 것은 없다 .22) 결국 「易傳」의 사상적 발전은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다袁 • 象 傳」의 해석이 1 차적 단계를 보여주고, 「緊辭 「文言傳」의 해석이 2 차적 발전 울드러낸다고하겠다.

22) 馬王淮의 『漢用書易經』을 보면 여卦의 이름은 갇으나, 그 순서가 달라서 漢代에는 祖峰 나열하는 방법이 여러 종류가 있었음을 알려준다(高亨, 「周易大傳通說」, 갇은 책, 310 면).

「象· 象傳」과 孔孟荀과의 비교 「象傳」과 「象傳」이 한 사람에 의하여 쓰여전 것은 아니지만, 秦漢間 儒家

의 易學派에 의하여 저술된 것이라는 시각에서, 그 공통적 경향을 孔孟荀의 사상과 비교하여 보고자 한다. 우선, 孔子의 인간상과 대비해 불 때, 孔子가 제시한 인격완성자로서의 〈君 子 〉와 인격을 이루지 못한 〈小人〉이라는 상반 되는 인간상이 「象 • 象傳」에도 지속되는 주제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吉凶 의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孔子와는 달리 「象 • 象傳」의 저자들은 吉凶 의 개념을 일면은 儒家的으로 해석하면서도 또 일면은 상대화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예를 들어, 泰卦(I I) 「象傳」을 보면, 〈안에는 군자가 있고, 밖에는 소인이 있으니, 君子道는 홍할 것이고, 小人道는 쇠퇴할 것이다〉 23) 라고 하였다. 군자가 소인을 극복하리라는 吉한 상태를 말해준다• 그러나 그 다음 卦인 否卦 「象傳표는 정반대되는 현상을 지적하고 있어서, 인간사에 존재하는 군자와 소인의 알력관계를 한편으로는 인정하면서도, 결국 시간의 흐름 속에서 吉凶울 상대화하며 天 1 f의 양면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 「象 • 象傳」의 사상을 孟子와 비교해 보면, 「家 • 象傳표끈 孟子의 〈時〉 개념과 〈J I I 負命〉의 개념을 받아들여서 적절한 시기에 자신의 위치에 알맞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최고의 덕행으로 보고 있다. 예를 들면 節卦 (60) 「象傳표든 이러한 지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天地는 절제함이 있어서 네 계철을 완성시키고, (聖)\은) 절제로써 제도를 실시하여 재물을 손상시키지 않고 백성을 해치지 않는다.〉%) 天地를 본받아 때에 맞추어 모든 것을 적절하게 행하는 것을 〈時行〉 또는 〈時中〉이라고 하는대, 이것은 한 사람의 움직임과 조용함이 그 때를 잃지 않는다는 儒家 최고의 실천적 이상 이 된다 .25)

23) 內君子而外小人 君子道長, 小人道消也 刺卦 (23). 「家傳표본 이러한 消息료효가 天行 임을 설명한다. 24) 天地節而四時成, 節以制度, 不傷財, 不害民. 25) 時止ffiJ止, 時行ffiJ行, 動靜不失其時(良卦 52, 더읽傳」).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멈추고 행하는 바가 때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라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天道와 연결 된 人道의 구체적 상황을 파악하여 적중한 시기에 적중한 방법으로 그것을 실천하는 성숙한 지혜를 말하는 것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

에 易의 군자는 죽더라도 뜻을 지키고(致命遂志 困卦象) , 성할 때나 궁할 때나 올바름을 중히 여긴다고 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孟子의 〈 義〉 전통을 계승한 儒學派가 大象울 씀으로써 秦의 정치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다는 說은 상당한 신빙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26)

26) 李鏡池 「易傳思想的歷史發展」, 『周易探源』(1 963), 『易學論著選集』 257~306 면에 수록 됨 . 그는 大象은 정치와 수양만을 논하는 德治的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참변을 당한 孟子學派가 袋書抗儒 이후의 정치설을 이를 통해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278 면) . 今井 宇三g E 은 大象의 연대를 늦게 잡아서 說 • 序 • 雜卦와 함께 前漢末로 보기도 하였다 (r 氣®思想』, l08).

끝으로 「象 • 象傳」의 사상을 荀子와 비교해 볼 때에, 「象 • 象傳」이 〈分〉 과 〈禮〉를 중시하고 있다는 면에서는 부분적으로나마 荀子의 사상 역시 수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물론 天人의 分을 말하지는 않고 人道내에서의 分, 특히 剛柔의 分을 통해 得中, 곧 강함과 유함의 적중한 조화를 얻어야 함을 강조한다. 앞에서 이미 인용한 節卦 (60) 「象傳」의 앞부분을 보면, 〈岡 l 과 柔가 분리하여 剛함이 적중함을 얻었다……기쁘게 험한 일을 실천하 니 (자산의) 위치에서 절제를 행하고 中正으로써 형통한다〉 27)고 하였다. 그런데 剛柔思想은 본래 老子에서 기안한 것으로서, 老子의 道는 剛울 배척하고 柔를 그 특성으로 삼고 있다. 『 老子 』 78 장을 보면, 〈弱한 것이 强한 것을 이기고, 柔한 것이 剛한 것을 이긴다. 天下에 이것을 알지 못하는­ 이가 없지만 아무도 능히 실천하지 못한다〉짝라고 하였다. 水를 예로 들어서 柔弱의 德을 높인 老子와는 달리, 「易傳」을 쓴 儒者들은 天德을 剛으로, 地德을 柔로 상정함으로써 剛柔의 中울 얻는 것을 중시하였다 .29) 따라서 때에 맞는 位, 곧 剛父가 剛位에, 柔交가 柔位에 있는 것을 正이라 불렀고, 행동의 剛柔가 中을 얻는 것을 在中 혹은 得中이라고 하였다 .30) 이와 감이

27) 剛柔分而剛得中……說以行險, 當位以節中正以通 비슷한 예로서는 范爲卦 (21) 「象 傳」과 賀卦 (22) 「家傳표t 참조. 28) 弱之勝强 柔각券同 l, 天下莫不知, 莫能行 (r 老子』 78). 29) 「家傳七小象 D 倫理思想」(『武內義雄全集』 3~, 133 면), 今井宇三郞 「易傳 I: :f:i' l t~ 陰陽&IIJIJ柔」, 『氣 D 思想』, 101~125 면. 30) 正中이란 위치에 맞는 二父와 五父를 지칭하였고, 득히 九五에서 中正울 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 五位가 天, 帝, 尊位로서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父는 인간의 위치를 표시하기 때문에 剛柔의 문제가 父의 위치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

시공의 개념을 포괄하는 역동적인 환경 속에서 道 에 적중하는 결단을 해야 한다는 時 中의 이상은 댜 袁 • 象傳」의 저자들이 孔 子 가 제시한 군자의 中 사상을 孟 子 의 時개념과 荀 二 f의 分개념과 결합하면서 道家 의 柔 뭉검 에 응답하 기 위하여 형성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緊辭 • 文言傳」과 孔·孟·荀과의 사상비교 「易傳」 안에서도 가장 성숙한 사상을 간직하고 있는 「緊辭傳」과 「文言 傳표본 剛柔의 개념을 수용하면서도 그보다 상위개념으로서 陰陽 論 울 발전시 켰다 . 3 1) 「繁辭 • 文言傳」은 64 卦 전체에 관심을 두기는 하지만, 乾坤울 기본적 인 두 개의 卦로 보는 입장을 취하여, 결국 乾坤으로 표시되는 陰陽 二氣가 감응하여 모든 변화를 시작한 것으로 풀이하였다. 「繁辭傳」에 나오는 〈하나 의 陰 과 하나의 陽의 움직임, 그것을 가리켜 道라고 한다〉 3 2 ) 는 유명한 「易 傳」의 道思想은, 사실 인간이 걷어야 할 길인 君子之道 혹은 人道를 말하여 온 孔孟荀의 사상보다는 道家의 道思想에 더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繁辭 傳」의 道개념이 道 家 의 양면적인 道개념 중에서 모든 것의 근원으로서의 無名 89 인 면은 太極으로 새롭게 명명하고기 변화하는 현상세계에 내재한 有名 的인 면만을 道라고 부름으로써 道룰 인간의 정치윤리적 삶과 직결시켰다는 면에서는 역시 儒家的특성을 보유했다고 하겠다.

31) 멜 經』 안에서 陰 陽 이 언급되는 곳은 中후卦 (61) 「九二」에 한 번 있는데, 그것도 철학적 의미가 결여되어 있다 . 十翼중에서도 「家 • 象傳」에는 3 번 小人과 君子를 설명하는 데 쓰일 뿐이며, 「繁辭」와 「文言傳」에 와서야 비로소 陰陽思想이 易의 전체 구조를 설명하는 것으로 정착된다고 하겠다 . 32) 켜陰一陽之謂道 新儒家들 중에서 특히 程願는 道는 氣인 陰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陰陽의 所以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고, 朱子 역시 道는 形而上者인 理라고 해석하였지만, 『周易』 본레의 의미 안에는 이런 구별이 없다.

「繁辭傳」과 「文言傳훑 道룰 生生의 원리로서 설정하여 乾坤,剛柔, 動

靜, 吉凶 전체를 포괄하게 함으로써 모든 대립을 극복하는 원리로 제시하였 댜 또한 孔子를 鬼神의 일을 포함한 세상 萬 事 의 모든 신비를 아는 초월적 인 聖人으로 높이고 있다오 한마디로, 「緊辭傳」과 「文 言 傳」의 사상은 原始 儒敎에서는 볼 수 없었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지극히 복합적임을 알 수 있다. 道思想에서와 마찬가지로 聖人觀에 있어서 역시 『 論語 』 의 〈 {I 多己安 A 〉이나 『孟子』의 〈盡心〉, 『荀子』의 〈情安禮〉한 人格者와는 달리, 天地의 道롤 알아서 卦를 만들고 吉凶을 예측하여 陰陽의 道에 따라 無爲로 써 天下의 일을완성케 하는신비적 능력을지닌 인물로 소개되기 때문이다. 결국 「易傳」은 『 易經』의 占 卜 思想을 그 기 저 에 깔고서 道家의 造化的 道사상과 無爲思想, 철학적 陰陽論 등을 광범위하게 수용한 후에 ,34) 原始儒敎 의 도덕적 인간론에 입각하여 중국 고대사상을 전반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原始儒敎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儒 家 고유의 특징이 어느 정도 모호해전 것은 사실이지만, 그대신 고대 중국인의 사상 전체를 儒家的으로 해석했다는 강점울 갖는다. 이와 갇이 고대 전승에 儒敎的 해석 울 첨가하여 종합적 세계관을 형성하고 經典化함으로써 漢 代 이후로의 儒 家 가 천년 동안 사상적 주도권을 빼앗길 때에도 중국의 문화를 전승하는 매개 자로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33) 夫大人者, 與天地合其德,與日月合其明,與四時合其序, 與鬼神合其吉凶(乾卦文言); 聖人以此洗心, 退藏於蓋 吉凶與民同患 神以知來, 知以藏往(「繁辭」 上 10). 34) 陰陽論의 기원은 분명치 않은데, 춘추시기까지는 별로 쓰이지 않아서 『論語』에는 陰陽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詩經』에서는 산기슭의 웅달진 면, 밝은 면을 지칭할 뿐이며, 老莊子나 楚辭九歌의 大司命의 역할로 陰陽이 언급되었다 . 사실 고대 陰陽思 想울 가장 찰 볼 수 있는 것은 「易傳」에서이다.

2 『禮記』 : 通論을 중심으로 新儒學의 영향을 아칙도 질게 받고 있는 우리 학계에서는 宋代 이후 『 論

語 』 와 『孟 子』 와 더불어 四 習 로서 각광을 받은 『 禮 記 』 내의 두 편인 「大學」 과 「中庸」에 대한 개별적인 연구는 많이 나왔지만, 『禮記』 전체에 대하여는 별로 학문적 관심을 쏟고 있지 않다. 그러나 儒家의 역사적 발전을 더듬어 갈 때에 중요한 것은 『 禮記』 안에 있는 개별적인 논문의 사상적 발전에 못지않게 漢 儒學者들에 의하여 고대로부터의 禮가 편집되고 이들 禮가 지닌 사상적 의미가 밝혀져서 『 禮記』 안에 종합되었다는 사실이다 .35)

35) 王夢鷄는 『禮記 』 가 儀禮와 周禮를 이해하는 열쇠일 뿐만 아니라 孔子로부터 西漢시 기까지 발전한 孔門의 공통적 학설을 총집한 하나의 幾 書 라고 보았다(王夢댑 注譯, 『禮記今往 今譯 』, 「敍禮記」 참조) ; 高 明 역시 『禮學新探』(學生書局, 1984, 5 판)에서 r 禮記 』 는 한초까지의 여러 학파로 분류된 儒學者둘의 사상이 결집된 것으로 보았 다 . 『禮記』의 성립에 대하여는 전통적으로 4 가지 설(鄭玄의 六藝論, 陳깁 B 의 周禮論 , 隋 魯 經籍志, 初學記 21 권)이 있는데, 武內羲雄은 晋나라 陳召 B 의 설이 가장 사실에 가까울 것이라고 결론내렸다(全集 3 권, 228~9 면). 곧 古禮 204 편이 기원전 1 세기에 戴德에 의하여 85 편(大戴禮)으로 편집된 것을, 다시 戴聖이 46 편으로 편찬하였으며, 그 후 후한의 馬融 • 蘆植 등이 다른 禮의 기록을 참고로 하여 현재의 49 편을 완성시 켰다는 것이다 .

『 儀禮 』 와 『周禮』는 上古의 禮俗과 儀式 및 이상적 건국제도를 세밀하게 기록한 것이어서 시대적 변천에 따라 그 유용성이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미 唐代의 학자들은 이 두 책을 읽기가 어렵다고 평하였던 것이 다. 그러나 『 禮記』 안에는 구체적 儀禮둘이 지니고 있는 원리를 제시한 通論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인간을 위해 불변하는 윤리적 이상을 제시한다는 강점이 있다. 여기서는 『禮 記 』 49 편 중에서도 「曲禮」,「月令」, 「禮運」, 「禮 器」, 「學記」, 「中庸」, 「 經解 」, 「大學」 등 도덕론이 제시된 부분을 중심으로 하여 『禮記』의 사상을 孔孟荀의 인간론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36)

36) r 禮記』 안에서 通論 부분을 규정하는 것도 일정하지 않아서 鄭玄의 설로는 15 편, 驛의 설로는 8 편 등 다양한 분류가 있는데, 대체로 이론 부분이 『禮記』의 약 I/ 3 정도를 차지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구체적인 禮로는 喪禮에 대한 부분이 가장 많고 그의에 祭祀, 가정생활, 국가적 공동생활, 국제관계 등에 대한 규정이 언급되어 있다.

『禮記 』 의 머리말인 「曲禮」 上 제 1 장은 다음과 같은 修已安人的 이상을 제시하고 있다•

(몸가짐에는) 공경스럽지(敬) 않음이 없고` 생각은 엄연하며, 말은 부드러우면 서도 명확하게 하면 백성을 편안하게 할(安民) 수 있다 .37)

37) 曲禮日, 毋不敬, f嚴若思, 安定辭, 安民哉.

古注 전통에서는 禮가 敬울 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이 구절 은 君子의 생각과 봄, 듣고 말함이 모두 제사 때의 공경스러움과 같아야 됨을 지적한 것으로 풀이하였다. 사실 인간사에서 실천되어야 할 禮의 규범 으로 제사 때의 禮롤 제시한 것은(『論語 』 「지分篇」, 「顔淵」 2 등) 孔子로부터 시작되는 儒敎傳統의 하나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 공경스러운 몸가짐이 安民이리는 정치적 역량으로 직결된다고 보는 것 역시 〈敬으로써 자신을 수양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論語 』 「憲問 篇」 )는 孔子의 사상과 부합한다고하겠다. 『禮記』의 첫머리에서부터 孔子의 가르침에 따라 禮俗 전체를 해석하려는 이러한 자세는 사실 『禮記』 전체에 일관된다. 그러나 『禮記』의 복합적인 사상체계는 『論語』 속에 보이는 孔子의 인간론뿐만 아니라 孟子와 荀子의 이론적 발전을 종합적으로 수용하면서 더 발전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 다한 따라서 『禮記』와 孔孟荀과의 관계를 禮思想, 天人觀, 修養論의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禮記』의 골격이라고 할 수 있는 禮思想은 근본적으로 荀子의 禮論 울 계승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孟子에서와 같이 본성적으로 인간의 마음 안에 내재한 四端의 하나로서 禮룰 보는 것이 아니라, 聖人이 백성들을 가르 쳐서 인간이 스스로 금수와 구별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이룬 것이 禮라고 본다 .39) 따라서 인간사회 안에 禮가 행해지면 삶이 편안하게 되고 국가가 바르게 되지만, 禮가 없어지면 위태롭게 된다고 말한다 .40) 禮는

38) 勞思光도 「大學」이 孟子와 荀子의 학설을 섞어 결합하여 이루어전 것이며, 「中庸」 역시 그 사상이 복합적이며 道家의 개념도 수용하였음을 지적하였다(『中國哲學史』 「漢唐篇」, 鄭仁在 역, 探求堂, 1987, 54 • 63 • 80 면 등) . 39) 聖人作爲禮以敎人, 使人以有禮知自別於食獸(曲jli). 이렇게 가깝게 荀子의 禮p 을 따르고 있지만, 性惡이나 性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는 것이 홍미롭다. 40) 人有禮則安, 無禮則危(曲禮上) ; 禮之於正國也 猶衡之於輕重也(經解) ; 故聖人以禮示之,

故天下國家, 可得以正也(禮運).

도덕생활, 군신과 부자관계, 소송, 祭祀 등 인간사 전체의 지침이 되고、 親疏 와 是非貴賤과 同異를 밝혀주는 규범인 것이다. 이렇게 荀子의 禮論울 거의 그대로 수용하고 있으면서도 『 禮記 』 에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文質의 관계로 禮義와 德行을 바라보는 점이다. 〈先王이 禮를 세울 때에 本과 文이 있게 하셨다. 忠信은 禮의 本이 되고 義理는 禮의 文인 것이다. 근본(本)이 없으면 설 수가 없고, 형식 (文)이 없으면 실천 할 수가 없다.〉 4 1) 도덕적 실천과 그 문화적 표현을 質(本)과 文의 관계로 이해한 것은 『論語』의 사고였다. 이런 면에서 『禮記』를 편찬한 漢代의 儒者 들은 孔子와 荀子의 禮思想울 결합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 禮記』의 복합적이고도 단편적인 성격 때문에 이 두 사상을 이론적으로 종합하여 체계화하려는 시도를 찾아볼- 수는 없다.

41) 先王之立禮也』『本有文. 忠信禮之本也, 義理禮之文也. 無本不立, 無文不行(「禮器篇」) ; 行f l 多言道, 禮之質也(曲禮上).

둘째로, 『禮記』의 天人觀울 살펴보면, 인간의 근원적인 본성의 문제를 설명할 때에는 孟子의 天命論에 기초를 두지만 종국적인 면을 말할 때에는 荀子의 〈參於天地〉(天地의 화육에 참여한다)의 사상을 수용하고 있다. 「中庸 篇」 제 1 장을 다음과 감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면, 漢代의 儒者둘이 天人觀에 있어서 孔孟荀의 사상을 어떻게 종합했는가에 대한 대표적 예를 볼 수 있을 것이다. I) 天이 명한 것을 본성(性)이라고 하고구 그 본성을 따르는 것을 (인간의) 도리 (道)라 하며, 道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 2) 道라는 것은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만일 떠날 수 있다면 道가 아닌 것이다…… 3) ……(인간이) 中을 지켜서 (모든 것에 절도가 맞는) 조화로운 상태에 이르 게 되면, 天地가 그 위치를 바로 갖게 되고, 萬物이 자라나게 되는 것이 다 .42)

42) CD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 道也者, 不可須央離也 可離, 非道也…… ®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中庸」 上半에 나오는 中의 사상은 「象 • 象傳」의 中의 사상과 같은 것으로 거의 갇은 시기에 쓰여졌으리라고 지적된 바 있다(『武內義雄全集』 8 권, 93 면) .

처음 1 절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天으로부터 부여된 것임을 밝힘으로써 天人관계를 직결시키고 있고, 이런 면에서 孟子의 인성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인간 안에 부여된 도덕적 본성, 곧 德울 키워야 될 사명이 모든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는 儒家의 기본적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제 2 절은 인간이 실천해야 할 道란 인간의 삶 전체를 감싸는 것이기 때문에 잠시라도 떠날 수 없다는 道 실천의 절대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 論 語 』 에서 볼 수 있었던 仁의 실천이 지닌 절대성을 그대로 계승한다고 하겠 다. 실상 「中庸」의 道는우선적으로는 仁之道로서, 君子之道 (12, 13, 15, 29, 33 장)라고도 불리고 ,43) 忠怒룰 그 방편으로 삼으며(1 3 장), 仁울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20 장) 면에서 孔子의 사상을 따른다.

43) 「中庸」에서 道는 人之道뿐 아니라 天之道 (20 장), 天地之道 (26 장)로도 쓰이나 道보다 도 우주적 원리로 발전되는 개념은 誠으로서, 특히 「中庸」 後半部에서 天時라는 의적 요소와 〈中庸〉이라는 내적 요소가 결합되어 誠 개념의 확대를 가능케 했다. 곧, 天道 는 誠 그 자체요, 誠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人道라고 함으로써, 誠은 그 안에 형이상 학적 개념과 윤리적 개념을 모두 포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中庸」 1 장 제 3 절 후반부를 보면, 인간이 道룰 닦아서 仁, 또는 中希 D 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天地가 제대로 자리를 잡고 만물이 化育된다고 한 다. 인간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도덕적 완성이 정치를 바르게 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된다는 것은 孔子가 확립시킨 儒家의 기본적 입장이지만, 〈參於天 地〉라는 확대된 개념은 荀子에 와서 비로소 체계화된 사상이다 .44) 人道를 다함으로써 천지의 화육에 참여한다는 荀子의 사상은 「中庸」 32 장에서도 수용되고 있으며, 「孔子間居」 등 『 禮記』의 디른 부분에서도 여러 번 보인

44) 「中庸」 16 장과 19 장 등에 보이는 祭亂 E 의 문제들도 天地의 化育에 참여한다는 의미에 서 이해해야 될 것이다 . 26 장의 〈無爲而成〉 〈天地之道〉 등의 표현은 道家的 성격이 강한 것이지만, 이미 荀子가 도교의 사상을 수용하여 儒敎化시킨 바 있으므로 「中 庸丘즌 그의 종합적 경향을 계승했다고 보겠다.

다. 『禮記』의 〈參於天地〉 사상이 荀子와 다른 점은 荀 子 의 경우 처음에는 天人之分울 강조하고 끝에 가서만 參於天地룰 주장하였는데, 『 禮記 』 에서는 처음부터 天地人 三才의 感應을 말한다는 것이다 .45) 「中庸」 20 장에 나오는 誠의 개념 역시 漢 儒學이 孔孟荀의 原始儒敎傳統울 어떻게 종합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中庸」 20 장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哀公이 孔子에게 정치에 관하여 묻는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孔子가 답하는 내용을 보면, 『 論語』에서와는 달리 〈仁은 사람다운 것으로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46) 는 孟子的해석을 소개 하고 있고、 〈義란 바른 것으로서 뛰어난 인재를 존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 다〉 4 7 ) 는 荀子的 해석 또한 첨가하였다• 그리고 모든 인간사에 차등을- 두는 데서 禮가 생긴다는 荀子的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끝부분에 가서 誠 개념을 소개하는데, 天之道와 人之道를 종합하고 있을 뿐 아니라 孟子와 荀子의 사상을 결합시키고 있다. 즉, 〈성실 그 자체는 天之道요, 성실해지려고 하는 것은 人之道〉라는 孟子의 사상에서 시작하지만, 〈성실해지려는 사람은 善울 택하여 그것을 굳게 지키는 사람으로,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밝히 분별하며, 독실하게 행해야 한다〉 48) 는 실천론에서는 荀子的인 결론을 내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45) 『 禮記 』 안에서 「月令篇표는 天地人의 조화와 감응사상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 〈是月也, 不可以稱兵, 稱兵必天秩……毋變天道, 毋絶地之理, 毋亂人之紀〉(『禮記 』 「月 令」) . 「月令丘 『 呂氏春秋』와 『淮南子 』 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본다 . 46) 仁者 人也, 親親爲大. 47) 義者, 宣也, 尊賢爲大 唐君毅는 그의 「原性篇」에서 「中庸」에서 誠울 말할 때는 孟子 나 荀子가 誠울 말하는 의미와 같은 바가 많으므로 분명히 그들 후에 이루어전 것이 며 더 나아가서 誠울 萬物의 始終으로 본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59~6~). 48)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 博學之, 審問之, 愼心之, 明辨之, 篤行之 「中庸」 後半 부분의 중심이 되는 誠의 개념은 우주의 원리인 동시에 人道의 기초로서 「繁辭傳」 및 「文言傳표] 사상과 비슷하기 때문에 같은 시대 의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武內義雄全集』 8 권, 93 면, 3 권, 133~136 면 참조).

이제까지 『 禮記 』 의 禮論과 天人觀을 살펴 보았는데, 끝으로 『 禮記』의 수양론을 고찰하도록 하겠다. 「禮運 篇 」에서 인간의 七 1 법은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제시되고, 聖人이 제정한 禮로써 그것을 다스 려 절도에 맞게 하는 것이 修養의 시작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七情은 결국 인간의 마음에 뿌리 박힌 근본적 실마리 (心之大端), 곧 삶을 원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상반되는 두 가지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라 고 주장하는 사실이다 .49) 心性에 대한 「禮運篇」의 이러한 설명은 孟子의 四端論과는 상당한 차이를 가전 것으로 荀子의 人性論에 오히려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보존을 으뜸으로 삼는 인간의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서 지속적인 배움이 강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49) 欽食男女, 人之大欲存焉 死亡貧苦, 人之大惡存焉. 故欲惡者, 心之大端也. 人藏其心, 不可沮 l j度也……欲-而窮之, 舍禮何):).哉.

「學記篇」을 보면, 학생을 교육하는 점차적인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후에,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記에 이르기를, 개미는 때에 맞추어 흙울 운반하는 법을 배워서 (議塚을 이룬다고 했는데), 이는 학문이 점차로 大成하 는 것을 이론 것인가.〉 50) 이 개미의 비유와 더불어, 스승이 존경되어야 道가 존귀해진다는 「學記篇」의 주장은 荀子의 사싱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또한 음악이 인간의 마음에 절도를 가르쳐주어 수양을 돕는다고 보는 「樂記」나 「仲尼燕居篇」의 樂論 역시 荀子의 사상을 발전시킨 것이다 .51)

50) 記日, 峨子時術之, 其此之謂平 51) 是故先王之制禮業 人爲之節(「樂記」) ;禮也者, 理也, 樂也者, 節也(仲尼燕居) .

『 禮記』의 수양론을 가장 명확하게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大學篇」을 살펴보겠다. 「大學」 1 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 부분에서 는 君子가 되는 방법을 明明f息 親民, 止於至善의 세 과정으로 나누어 설명 하고 있다. 〈밝은 德울 밝힌다〉는 것은 분명 孟子의 사상에 기초를 둔 것으 로서 인간 본성 안에 부여된 德울 밝게 드러나게 히는· 것이 修身의 시작이 라고 본 것이다. 〈백성을 친자식 대하듯 보살핀다〉는 것은 儒敎의 정치론으 로서 孔子의 安人이나 安百姓, 또는 孟荀의 仁政울 소박한 말로 표현한 것이

다. 〈지극한 善에 머무른다〉는 사상은 荀子的 수양의 경향을 함축하고 있 다. 지적 배움을 五經의 점차적 습득으로, 도덕적 수양을 士 • 君子 • 聖人의 위계적 과정으로( 『 荀子 』 「修身 篇 」 등) 체계화시킨 것도 荀子였고기 마음이 安定 되고 조용해전 후에 능히 思慮할 수 있다고 말한 것도 荀 子 였기 때문이다으 「大學」 1 장의 전반부가 明德이라는 孟子的 전제에서 시작하여 荀子的 思慮로 끝난 것과 마찬가지로, 후반부 역시 그 구체적 修養의 과정에 있어서 는 荀子的 특색을 띠고 있다. 治國과 齊家의 기초가 되는 修身을 하기 위해 서는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하고(正其心) 자신의 뜻을 성실하게 해야 (誠其意)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곧 인간의 心이나 意가 자연적 상태에 머물 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다. 더욱이 마음과 뜻을 바르게 하기 위한 선수조건으로 사물의 이치를 통달하는 지식(格物致知)을 요구함으로써 지적인 이해가 수양의 기초가 된다고 주장한 荀子의 修身論울 대체적으로 따르고 있다고 하겠다 .53)

52)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 1 용(「大學」 1 장). 예를 들어 〈安〉은 孔子에서는 최고의 개념이었는데, 荀子의 聖人은 〈情安禮〉라는 감정의 수양과 더불어서 〈知若師〉라는 知的 통달이라는 면이 중요시되고 있다. 53) 徐平章은 『荀子與兩漢儒學 』 (文津出版, 1988) 에서 子夏와 荀子는 六藝의 학문을 전하 여 禮를 중심으로 한 漢學의 조상이 됨을 밝힌 바 있다(1 12~3 면, 136~138 면 등) .

결국 『禮記』의 禮論, 天人觀, 修養論 등은 孔孟荀의 사상을 두루 종합하면 서 漢代의 시대적 사조와 요구에 따라 이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표현한 것이 었다. 孔子가 제시한 修己安人의 君子的 理想, 孟子가 주창한 天命論과 時思 想, 荀子가 체계화한 禮倫과 점진적 修養'습은 『禮記』와 『 周易』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집대성 되는 과정에서 잣대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原始 儒敎를 규범으로 해서, 漢代에 이르기까지의 중국전통 전체에 儒家的해석을 시도하여, 『周易』은 가치와 세계관 등 사상적인 측면에서, 『禮記』는 개인 및 국가적 삶의 구체적 행동의 측면에서 거대한 종합을 이룬 것이었다. 漢儒 學者들의 이러한 시도가 바록 완전히 두명하게 原始儒敎의 본래 사상을 반영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儒家의 가르침이 중국역사 속에서 2,000

년이나 지속될 수 있는 힘을 갖게 했다는 사실은 지대한 중요성을 지닌다 하겠댜 3 결론 : 原始儒敎의 특성 孔子에서 시작되어 孟子와 荀子에 의하여 이론적 확립을 이룬 原始儒敎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안간론을 중심으로 한다는 데 있었다. 인간론 중에서도 철학적 성격을 떤 인성론의 문제보다도 실천적인 수양론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論語』에서는 본성에 대한 논의가 없었고, 孟子와 荀子에서 비로소 본성의 선악, 또는 性僞之合의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여기서도 후의 宋學에서 와 같이 인성론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간은 누구 나 천부적인 德을 닦음으로써 君子와 聖人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배움의 첫째 목표로 제시되었고, 이 면에서 孔孟荀의 가르침은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단, 그 수양의 방법론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차아를 가지고 있었다. 『論語』에서 孔子는 〈忠怨〉(자신에게 하듯이 남에게도 하라)라는 대인관계 안에서의 德의 실천을 仁을 이루는 方法으로 제시한 데 비하여, 孟子는 성心〉(자신의 마음에 박힌 仁義禮智의 실마리를 보존하여 모든 일 속에 이루어지 게 하라)이라는 도덕적 내면성의 확충에 착안하였으며, 荀子는 治氣養心 또는 〈情安禮〉(인간의 욕십과 감정이 禮에 의하여 바르게 방향을 잡아 편안하게 되게 하라)라고 해서 배움을 통해 聖人이 이루어 놓은 禮를 체현하는 문화교 육의 길을중시하였다. 이러한 原始儒敎의 가르침을 종합하고 재해석한 「易傳」과 『禮記』 역시 인간론을 중심으로 하되 수양론에 역점을 두었다. 「易傳표본 계속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道에 적중하는 삶을 역동적으로 살 수 있는 時中의 이상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하는 길을 보여주기 위하여 64 卦에 儒敎的 주석을 첨부 하였다. 따라서 吉凶이 교차되는 인간의 삶에서 알력과 운명적인 요소를

받아둘이면서도 때를 기다릴 수 있고, 그 알력을 극복하여 전체를 조화시킬 수 있는 힘을 키워주고자 했던 것이다. 『 禮記 』 는 제사 때에 하는 것과 같은 공경스러운 자세로 일상사에 임하며, 구체적인 禮의 실천을 통해 마음을- 지국히 성실하게 하는 법을 가르치고자 했다. 자신을 다스리는 것에서 시작하여, 집안을 바르게 하고, 사회와 국가 전체를 평안하게 하고자 하는 德에 근거를 둔 禮敎룰 禮俗울 통해 전승시키 며, 국가적 제도 안에 정립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禮가 형식 화되기 쉬운 약점을 안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동시에 제도화되지 않은 카리스마란 지속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禮敎에서의 문제는 어떻게 계속 〈 1 眞其獨〉(홀로 있을 때를 조심하여 내면적 修已에 정진하는 일)에 철저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論語』에서 孔子가 논의하였던 文質의 本末的인 문제는 『禮記』에서 재론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54)

54) 覇道를 숭상했던 齊나라가 한번 변하면 魯나라와 같이 될 것이고, 禮를 숭상했던 魯나라가 한번 변하면 道, 곧 德治에 이를 것이라고(「雍也」 24)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孔子는 禮敎의 부족함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原始儒敎의 둘째 특성은 강한 사회정치적 지향성을 갖고 있다는 데 있 다. 孔子가 값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팔리기 위한 玉에 자신을 비유하였던 (「子年」 12) 것과 같이, 孟子의 17 년간의 정치유세와 荀子의 齊, 楚로의 여정 도 道롤 세상에 펴서 널리 〈安百姓〉(백성을 편안케함)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다. 그런데 漢代에 완성되는 「易傳」이나 『禮記』와 구별되는 原始儒敎의 특징은, 그 초점이 王 자신에게 있다기보다는 王울 도와 실질적 으로 政治를 담당하여 儒家的 정치이상을 펼 수 있는 군자적인 인물을 육성 하는 데 있었디는 것이다. 〈有敎無類〉(가르침이 있을 뿐 신분을 가리지 않는 다)라는 孔子의 교육원칙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修已로부터 시작되는 교육을 통해서 경제, 정치, 사회 전반에 仁政울 펼 수 있는 知德울 겸비한 정치인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孔子는 正名울 중시하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 사람이 자신의 위치에 서 해야 될 일을 다할 때에 비로소 정치가 바르게 행해질 수 있다고 역설하 였다. 따라서 그가 제시한 군자는 〈和而不同〉(「子路」 23) 한 인물로서 남의

의견에 항상 동의를 하지는 않지만, 주체성을 지니면서 다른 이들과 화합할 수 있음을 이상으로 하였다. 인간의 도덕적 주체성울 중시했기 때문에 孔子 의 경제론 역시 均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는 재물이 사회적 위치에 따라 공평하게 분배될 때, 조화로운 사회가 지속될 수 있음을 간파하였던 것이다 (「季氏」 I). 孔子의 이러한 사회관은 이론적으로 체계화된 것은 아니었으 나, 『論語』에 보존된 그의 언행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다 . 孟子는 德治를 이상으로 하는 王道政治룰 주창했는데, 임금이 이익(利) 이 아니라 仁義를 기준으로 하는 도덕적 정치를 실행할 때에만 별들이 북극 성을 향하듯 民心이 자연히 모여들 것이라고 하였다. 백성들에게 편안한 삶을 보장하는 것을 국가의 우선적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그의 경제론은 恒産(생활을 할 만큼의 항구한 재산을 모든 사람이 갖게 함)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일반 서민은 가족을 부양하기에 넉넉한 재산이 보장될 때에야 도덕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실질적인 근거에서, 孟子는 恒産울 갖지 못한 모든 빈민들을 국가에서 부양할 것을 제의하였던 것이다. 그는 민심이 天意룰 대표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임금의 정통성도, 관리둘의 신임성도 모두 민심에 의해 측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어떻게 보면 현대적 민주주의의 이상을 거의 다 간직하고 있다고도 보겠으나, 구체적으로 民意룰 측정하는 방안이 제시되고 있지는 않았다는 한계성을 지닌다. 荀子는 그의 사상의 기본이 되는 分 개념에 기초를 두고 직업과 신분에 등급을 결정함으로써 사회에 질서와 조화를 주고자 하였다. 그는 경제활동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양하게 구별되는 것과 같이, 정치구조도 교육정도와 도덕성의 함양에 따라서 위계적인 질서를 지녀야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의 정치론은 王道를 이상으로 하면서도 覇道를 중간단계로 인정하였고, 상벌의 유효성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그의 실용적이면서도 객관성을 중시하 는 정치사회관은 禮라는 전통적 툴 안에서 구체성을 띠게 되어, 漢儒學者둘 에게 儒家的 시각에서 모든 관습과 제도를 조명하게 하였고, 결국 三禮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禮記』와 「易傳」의 사회관은 대체적으로는 孔孟荀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는데, 한 가지 새롭게 강조된 것이 있다면 人道에 한정되고 있던 原始儒敎 와는 달리 天 地人의 感應에 기초를 둔 우주관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따라 서 사계절의 움직임 등 우주적 陰陽의 변화에 대응하는 도덕적 정치관을 펴고 있다. 우주의 변화에 대응히는· 정치를 묘사함에 따라 修己룰 통해 인격 울 이룬 일반 군자보다는 국가를 움직일 수 있는 王에게로 초점이 바뀌게 된다. 예를 둘어 「緊辭傳」의 聖人은 인격의 완성자라기보다는 卦를 만들고 문화를 일으킨 聖王이란 의미를 가진다. 秦漢의 중앙집권적인 정치체계가 이러한 경향을 요구하고 더욱 촉진시켰을 것이며, 결국 漢儒學은 임금을 중심으로 한 聖人觀을 형성하여, 聖人視을 일반화시킨 原始儒敎의 방향을 역행하기에 이론다. 原始儒敎의 셋째 특성은 孔孟荀 모두가 인간론의 기저에 天思想울 공유하 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사상체계에서 天論이 개별적으로 발전되는 것은 아니지만, 君子論의 기초로서 天은 도덕의 원천과 규범이 되며 인격 완성의 궁극적 保證 ul ti ma t e re fe rence 으로서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孔子는 자신의 德은 天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그렇기에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天뿐 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따라서 道의 종국적 成敗도 天에 달렸다고 보았다. 孟子는 孔子의 天命論울 더욱 이론화시켜서 인간 本性에 부여된 四端은 天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단정하여 天人관계를 보편화시켰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 안에 있는 도덕성을 키워서 天爵울 완성시킬 때, 곧 天울 알게 되고 섬기게 되는 것이리는 個敎的 종교관을 확립하였다. 荀子는 그의 특이한 天人之分의 논리 때문에 도덕성의 원천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한 바가 없고, 오히려 목적론적 tele olog ica l 인간 구조 안에서 禮에 따라 性僞之合울 이룬 聖人은 天地의 化育에 참여하여 그것을 완성한다고 하였다. 인간의 종국적 운명을 天地와의 관계 안에서 설정하고 있다는 면에서 荀子 역시 天人관계를 중요시하였다고 하겠다. 「易傳」과 『禮記』의 天觀은 道家와 陰陽論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原始儒敎 중에서는荀子의 天사상에 가장 가깝다고하겠다. 「易傳」과 『禮記』 의 天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地에 대응하는 蒼空으로서 현상 계를 대표하고 陽의 원리를 상징한다. 곧, 天道와 地道는 陰陽으로 해석되

며, 인간은 이러한 天地의 道를 따라야 한다고 본다. 天의 둘째 용도는 전통 적 최고신을 지칭하며 도덕의 원천이 되는 절대자를 의미한다. 惡울 멀리하 고 善울 실천함으로써 군자는 천명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55) 天에 순응 하는 구체적 방법이 「易傳」에서는 時行으로, 『禮記』에서는 禮의 실천으로 제시되고 있다.

55) 君子以湯惡揚善順天休命(大有卦 14, 「象傳」) ; 承天而時行(坤卦 2, 「文言傳」) 등. 『周易』에 天은 모두 221 번 언급되는데, 그중 7 번만이 父辭에 나오고 나머지는 모두 十翼에 언급된다 . 또한 帝나 上帝는 祭文에서만 쓰인다.

原始儒敎에서 天사상이 갖는 중요성에 비해볼 때 陰陽:움이 차지하는 위치 는 미소하다는 것이 홍미롭다. 陰陽이란 용어가 『論語』에는 전혀 쓰이지 않고 있으며, 『孟子』에서도 언급되지 않는다. 『 荀子』에서 비로소 陰陽論이 儒敎傳統 안에 수용되는데 荀子는 性僞(인간이 태어난 그대로의 상태, 곧 욕망 에다가 禮에 따른 僞, 곧 사려와 노력이 가미되어 아름다운 文化가 형성됨을 말 함)가 합해져서 인간사가 다스려지는 것을, 天地가 결합되어 만물이 생기고 陰陽이 교접하여 변화가 일어나는 것에 비교하였던 것이다 .56) 그러나 荀子의 사상체계에서 陰陽論이 갖는 위치는 그리 큰 것이 아니었고, 性僞之合울 제의한 그의 인간론은 陰陽이라는 틀에 맞추어짐이 없이 전개되고 있다.

56) 天地合而萬物生, 陰陽接而變化起, 性僞合而天下治 (r 荀子』 「禮論篇」).

그러나 「易傳」과 『禮記』에 이르면, 陰陽論은 사고의 기본적 틀을 형성하 고 있다. 「易傳」, 특히 「繁辭」와 「文言傳」의 사상은 陰陽으로 우주만사의 돌아감을 설명하고 있고, 『禮記』는 여기에다 오행사상까지를 수용하여, 陰陽 五行的인 툴 안에서 국가의 제도와 정치 일반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 해야 될 것은 음양오행설은 전국시기말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漢儒學者 둘이 전폭적으로 수용한 사고적 틀로서, 原始儒敎와의 관계는 얕은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陰陽論은 儒敎 본래의 핵심을 이루거나 유교의 고유한 사상은 아니다. 天地人으로 이루어진 우주관 역시 『論語』와 『孟子』에서는 체계화된 바가 없었고, 『荀子』에 와서 이론화된 것이다 .5 7) 荀子는 天과 地와 人의 역할을

57) 戰國 초기까지 중국에는 宇宙라는 개념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최초로 墨經 「經」

上과 「經說」에 久와 宇로서 시간과 공간 개념이 소개되고 있고, 『莊子』, 雜篇인 「庚 桑楚」에 宇宙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다(宇同, 『中國哲學問題史』 文史哲霞書 , 31~35 면 참조). 물론 우주가 天地人으로 구성되었다는 사고는 오래된 것으로 『詩經』과 『楚辭』 등에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을 이론화한 것이 荀子라는 말이다.

구분하여 天은 만물을 낳고, 地는 만물을 기르며, 인간은 사회를 제대로 다스려서 모든 것에 제자리를 갖게 한다는 三才論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易傳」과 『禮記』는 天地人의 분리라는 荀子의 사상을 수용하지 않는 대신, 三才가 서로 感應하면서 조화를 이룬다는 宇宙觀울 확립하였다. 「繁辭傳」의 三極之道와 『禮記』의 「月令」은 이러한 宇宙觀울 보여주는 대표적 예라 하겠 다 .58)

58) 三才라는 용어는 「繁辭」 下 8 에 2 번, 說卦에 1 번 쓰이고 있고 「緊辭」 上 2 장에는 三極之道, 8 장에는 掛一以象三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제까지 孔孟荀의 原始儒敎와 「易傳」 및 『禮記』의 사상적 구조를 비교해 보았는데, 이 비교고찰을 통해 原始儒敎의 특성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고 하겠다. 인간완성을 목표로 하는 修已의 修養論, 修已룰 통해 安人 및 安百姓한디는 사회정치적인 지향성, 도덕성의 최종규범이며 인격 완성의 보증으로서의 天觀, 이 세 가지 특성은 孔孟荀이 共有하여 原始儒敎의 골격 이 됨은 물론, 계속되는 儒敎傳統에서 변치않는 핵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해석체계가 형성될 때마다 이 세 가지 핵이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되지만 때에 따라 그중의 하나가 더욱 강조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宋明 學 聖人이 되겠다는 修養論의 이상을 회복시킨 것이었다고 한다면, 淸代의 實學은 사회정치적 지향성에 역점을 둔 것이었다고 하겠다. 현대에 와서 형성되고 있는 儒敎傳統의 제 3 혹은 제 4 의 해석체계가 어터에다 중점을 둘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지만, 孔孟荀의 原始儒敎 안에서 그 영감과 규범 울 찾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시공을 초월한 인간론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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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感應(說) 301, 309, 325, 331 剛柔(說) 316, 318 兼愛(說) 149, 155~162, 279 敬 73,· 1 41, 143 敬鬼神而遠之 143, 162 ~ 67 古今 247 告朔 142 考證學 27, 42, 307 霧欲 176, 198, 225, 279 觀相 256 禪 56, 300 狂(人) 55, 63 九夷 92 國命在禮 297 國人 51, 87, 90, 193 君君臣臣 118, 276 君子 9, 77, 78, 93, 96, 98~ 104, 112, 123, 128, 176, 186, 317 君子儒 9, 99 君子之道 89, 98, 127, 129 窮極性 258 權 131, 210, 247 鬼神 141~145, 159, 160 貴賤 275, 316 規短 161, 205 均 120~122, 201, 330 克已復禮 112~113, 171 祈雨祭 46, 302 吉凶 257, 303, 317

L f*lt 142 南面 91 農家 165, 199 E: 多欲 279 短命 147 唐石經 13 大司冠 80, 85 大人 176 大體(者) 176, 177 德 52, 54, 55, 59, 60, 100~IOI, 102, 106, 119, 169, 186 德操 298 德之.賊 185 德治 89, 118, 190 道 —先王 僧王)之道 41, 93, 128, 149, ————荀孔기老1 5子子8莊 타 의의子 의3道道1 9 ,道 3 2223501, 1,2 1922,3 722~,3 1123,4 112 ,5 52 55, 264 道家 11, 147, 148, 229, 230, 252 , 320 同樂 191 同異 275 三 樂 llO 禮—― 百宗禮禮 7733

類 270, 274, 275 祿 129 利 100, 131, 155, 157 □ 馬舍 80 馬車 80 亡者 262, 284 命 —使命 133, 134~ 141 _. 運命 131 ~ 134 _— 天致命命 113332 , 194 名家 228, 229, 274 木鑄 135 無道 130 無名 139, 230, 252 無言 139, 162 無爲 230, 252 墨家 10, II, 99, 147., 148~151, 155~164, 195, 225 文(文章) 81, 107~108, 114, 186, 219 文名 273, 274 文質彬彬 107, 162 民 51, 52, 56, 184, 193, 195 民心 193, 194, 195, 330 닌 撲 230 百神 65, 141, 145 法家 89, 224, 226, 227 別愛 149, 155, 162 保身 148

報怨以德 119 普通性 256 福祿 58, 64~65, 141 卜 莖 313 分業 277 不可知(性) 291, 292 不忍人之心 190 非攻 196 非命 160 非樂 214 貧者 202 賓個江)天 48, 59 人 四端 II, 29, 106, 169, 170~173, 181 斯文 135 四方(神) 48 死生有命 133 四書 13, 17 四時 132, 259, 288 思誠(者) 181 社稷 49, 89, 120, 300 事(!lJ)天 183, 291 散名 237, 273, 274 三年喪 197 三才(天地人) 259, 271, 289, 290, 325 喪 _ 喪禮 266 — 喪事 115, 266 常道 231, 265 尙同 162, 195, 213 上帝 45~47, 49 上天之載 292

生 62, 316, 319 悲 114 庶民 77, 294 先梵者 177 先公 49 先王 10, II , 49, 232, 268 性(本性) 81, 82, 167~169, 182, 237~239 聖(人, 王) 29, 30, 55, 58~63, 71, 94~98, 158, 166, 189, 203, 205, 208~212, 269 誠 29, 180, 181, 187, 258, 259, 325 性善 29, 167, 220 性惡 30, 220, 221, 244 性僞之分 244 性僞之合 237, 242, 267, 331 聖人不仁 230 小人 9, 77, 99~102, 176, 317 小體(者) 177 束修 92 宋明儒學 42, 307, 333 數 248, 249 修已安A. 78, 94, 104, 123, 125, 166, 188, 307 修已以敬 105, 113, 144 拘葬 47 述而不作 41, 128 崇德 106, 107 時 130, 200, 205, 304, 317 時空 240, 319 時中 131, 211, 317, 328 時行 317 食色 168, 176, 177

信 119, 262 新儒學 270, 310, 311 』 心 ———荀孟養子子心 의의 1心心75 , 121726717, ,, 1217387,93 ~~1128472,51 ,,2 421158,32 253, 259 一 기타 327 十大主張 149 。 夜氣 175 養 175 良能 29, 171, 179 養 148, 175 良心 171, 174 良知 29, 179 余一人 46, 64 禮 65, 66, 72~74, 77, 112, ll4, 116, 117, 156, 186, 219, 228, 241, 261~270, 322 禮 99, 115, 151, 279 禮儀 33, 262 禮治 89, 190 五經 13, 16, 17, 249, 309 五官(天官) 239, 241, 253, 291 五百年 週期說 206, 207 王 44, 46, 52~56 王者 262, 284 用(制], 使)天 290 月食 302 宇宙(觀) 255, 276, 288, 332 有敎無類 II, 92, 329

有道 130 六藝 84 陰陽說) 16, 17, 218, 235, 291, 309, 316, 319, 320, 332 義 _ 『論語』의 義 100, 107 _ 『荀子』의 ~ 234, 236, 249, 262, 263 葬(弁) 61 . 理氣說 310 異端 17, 211 仁 60, 95, 96, IOI, 111~I15, 156, 157, 171~173, 186, 188 仁政(論) 29, 30, 148, 172, 188, 189, 191, 193, 198, 285 仁之方 96, 114, 120, 127 人能弘道 130 人命在天 297 仁義 29, 177, 179, 191, 196 人之常道 231, 270 _曲(隅) 231, 232, 307 一以貫之 95, 254 日食 302 그 爵名 273, 274 積善成德 248 井田(制法) 199, 201 祭祀 46, I 16, 141 ~ 145, 291, 300 祭主 160 節用 166, 214, 225, 279 占 (術) 44, 46, 302, 313 正 118, 120, 155, 201

正名——(論荀孔)子子 의의 正正名名 3101,8 , 22392,9 230, 271, 274, 276, 287 貞人 45, 46 帝 47, 48, 59 帝五(工)神 48 祖上神 45, 47, 48, 141 調禾 D 297 宗廟祭 33, 56, 57, 144 罪 52, 53 周禮 116, 305 主忠神 107 知 127, 234, 237 知慮 246 知我者 137, 187 知天 148, 182, 183 知天命 54, 95, 137 至人 231, 252, 289 直 82, ll9 盡心 167, 173, 181, 186, 212~213, 307, 328 質 107~ 108, 114, 186 云 參於天地 259, 289, 293, 297 天 50~53, 59, 62, 67, 69, 70, 134~141, 158~160, 181, 184, 187, 288, 292, 293, 331 天道 132 , 231 天天道命 無親29 , 4293, 0 51~56, 69, 70, q3, 194 天命不常 53, 231

天生德於予 100, 106 天生魚民 61, 106 天人之分 259, 275, 289, 331 天爵 185, 331 天志 148, 160~162, 187, 213 天行有常 296 哲(人, 王, 婦) 54, 55, 58~63, 69 徹法 199 淸明 231, 240, 253, 254 楠祭 144~145 忠怒 25, 114, 127, 156, 191, 328 治氣養心(術) 236, 241, 246, 257, 290, 328 親親 196 七情 326 E 泰山 88 工 八僧舞 87, 88, 144 覇道 30, 75, 89, 190, 285 平旦之氣 174 平常性 256 굴 下學而上達 137 學 11, 108, 187, 248, 283 漢唐儒學 42, 307, 309 漢(嘉)石經 2l 鄕黨 88, 141 恒産 197~200, 202, 330 恒心 198

虛登靜 241, 254, 259 革命(論) 194, 195, 213 賢(人, 者,臣) 30, 71, 76, 94, 103~104 貸愚之分 281, 282 玄鳥 62 來谷의 曾盟 80 血氣 235, 246 刑名 228, 273, 274 刑罰 100, 228 惠 100 浩然之氣 '17 4, 175 好學(者) 108~llO, 186, 311 禍福 160, 303 黃元吉 315 孝 60, 73, 141~145, 157, 172, 187, 264 孝tNl 102, 114, 187, 204 後王 218, 269

기 季梁 71, 160 季(孫)氏 72, 80, 87, 88, 120, 122 顧喆剛 35, 313 公西華 95 公孫龍 228 孔安國 20, 35 孔糸 E( 叔梁) 83 郭洙若 207, 220, 221, 262 管中 25, 89 屈萬里 29, 31, 34, 37, 313 宮崎市定 96 金谷治 28~31 吉 )I| 幸次郞 144 A.C. Graham 167 L 蘭降 222 勞思光 175, 233, 322 魯哀公 109, 12i, 143 E: 渡邊卓 150 董作賓 44 董仲舒 17, 301, 309 杜維明 312 ’蔚文公 165, 189 譯塚隣 22, 23 Davi d S. Niv ision 49 Donald Munro 243 근 H.H. Rowley 161

Ronald Eg an 37 □ 萬章 28, 194 牟宗三 19, 183, 221, 312, 313 目加田誠 32 木村英一 26, 30, 80 武內義雄 15, 22, 24, 25, 166, 228, 305 武王 23, 157, 194 文王 52, 54, 93, 157, 192, 294 Marcel Granet 32 l::t 伯魚 33, 140 伯夷叔齊 103 與週 91, 112 Bernard Karlgr en 22, 37 Beja min Schwartz 245 人 司馬遷 14, 27, 34 商陝‘ 89, 224 三桓(氏) 72, 80, 87 徐復觀 51, 123, 221, 283, 312 昭公 73 小林勝 A 28 孫始讓 151 狩野直喜 99 。 顔淵(回 ) 103, 109, 112, 123, 139, 186 楊係 30, 218 楊朱 10, 147, 148, 230

梁惠王 28, 153, 190 円有(求) 88, 109, 120, 122 王先謙 233, 300, 311 王孫買 138 王肅 20 王充 21, 24 堯舜 23, 96, 117, 203 龍宇純 218, 233 牛山 174 阮元 13, 311 衛露公 85, 91, 190 魏文侯 154 降德明 21, 137 羲封人 135 李相殷 177 李斯 226, 228 李孝定 50 臨溫 152, 174 Arth u r Waley 26 Edward J. Machle 297 x: 子貢(賜) 25, 81, 95, 103, 114, 123 子路 110, 120, 137 子犯 74 子思 164, 207 子産 89, 127 子王 74 子游 95, 151, 223 張光直 44 錢穆 166, 312 丁若鏞 61, 97, 312 井出元 266

鄭玄 20, 21, 321 齊景公 276 齊宣王 89, 153, 189 齊桓公 89, 189 周公 35, 36, 51, 53, 86, 93 朱子 10, 13, 27, 105, 174, 310 竹內照夫 172 仲弓 91, 113, 223 重耳(晋文公) 74, 75, 89 曾子 25, 114, 127 稷下 29, 31, 154, 174, 222 陳大齊 239, 289 陳夢家 44 津田左右吉 22, 23 Jo sep h Needham 313 蔡仁*厚 221, 239, 291 椎循 311 崔述 22, 27, 121, 309 = Kwang -c hi h ·Chang 32 H.G. Creel 15, 22, 34 E 湯王 23, 157 澤田多喜男 236 貝塚茂樹 121 馮友蘭 159, 289 皮錫瑞 36 E.G. Pulley blank 37

궁 何꽃 39 韓非子 89, 228 韓~ 13, 27, 311 惠施 228, 229 互鄕 92 胡厚 宣 46, 48 桓楚 106, 135 皇 m 26 荒木見悟 310 Hans-Georg Gadamer 167 Herbert Fin gar ett e 39 Henri Maspe r o 243 Hellmut Wi lh ehn 313

부록:역사지도

l 春秋時代 (『論語』 관계 지도) 2 戰國時代 (『孟子』 • 『荀子』 관계 지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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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勝惡 1965 서강대학교 史學科 졸업 1979 京都대학에서 박사논문 연구 1981 하버드 대학교 종교학 박사 1988 대만 중앙연구원 歷史言語硏究所에서 연구 현재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부교수 저서 The Rig h teo us and the Sage , 『宗敎學의 理解』 原始儒敎 대우학술총서 • 인문사회과학 51 찍은날 • 1990 년 12 월 5 일 펴낸날 • 1990 년 12 월 15 일 지은이·金勝惠 펴낸이·朴孟浩 펴낸곳·民音社 출판등록 1966. 5. 19 제 l-14 tt 은행지로번호 3007783 우편대체번호 010041-31-0 5 23282 135-120 서울 강남구 신사동 506, 강남출판문화센터 5 층 515-2000~2 (영업부) 515-2003~5 (편집부) 515-2007( 팩시밀리 ) © 金勝惠 1990 인문사회과학, 철학 KDC / 152 . 21 Prin ted in Seou l, Korea 값 6,5 筑

대우학술총서 ( 인문사희과학) l 韓國語의 系統 김방한 2 文學社會學 김현 3 商周史 윤내현 4 人間의 知能 황정규 5 中國古代文學史 김학주 6 日本의 萬葉集 김사영 7 現代意味論 이익환 8 베트남史 유인선 9 印度哲學史 길회성 10 韓國의 風水思想 최창조 II 社會科學과 數學 이승훈 12 重商主義 김광수 13 方言學 이익섭 14 構造主義 소두영 15 外交制度史 김홍철 16 兒童心理學 최경숙 17 언어심리학 조명한 18 法 사회학 양건 19 海洋法 박춘호 • 유병화 20 한국의 정원 정동오 21 현대도시론 강대기 22 이슬람사상사 김정위 23 동북아시아의 岩刻畫 황용훈 24 자연법사상 박은정 2 5 경 t大容評傳― 감 태 츠- 26 歷史主義 이민호 27 인구어 비교언어학 김윤한 28 中國古代音韻學 문선규 29 韓國의 住居民俗誌 김광언 30 한국의 고문서 허흥식 31 역사비교언어학 김방한 32 묵자 김학주 33 영국혁명의 수평파운동 입회완 34 性格 김경희 35 중국의 考古學 최무장 36 歷史의 方法 양병우 37 朝鮮時代地方行政史 이수건 38 한국女俗史 김용숙 39 한국農學史 이춘녕 40 한국의 家族과 宗族 김광규 41 제 3 세계 심상필 42 코란의 이해 김용선 43 시베리아 개밭사 이철 44 스페인 문학사 김현창 45 영어사 김석산 46 어원론 김방한 47 조선의 서학사 강재언 48 한국음악학 이강숙 49 증국언어학 문선규 50 스포츠 심리학 류정무 • 이강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