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徹 한국외국어대학 노어과 및 동대학원 졸업. 국회도서관 소련 과장 , 외대 서양어대학 학장 역임 . 현재 외대 노어과교수겸 한국노어노문학회 회장 편 저서 떠시아 혁명바사 』 『 표준러시아어 J、 『러시아어 문전 』 역서 『 러시아사상사 』 『 가난한사람들 』 『 부활 』 r 예술이란 무엇인가? 』 논 문 「소비에트 문학의 현대적 좌표 」 「러 시아모더니즘문학」
시베리아 개발사
시베리아 개발사
책 머리에 시베리아 개발의 역사는 우선 러시아 혁명 전의 제정러시아 시대와 혁명 후의 소비에트 러시아 시대를 구분하여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제정러시아 시대로 볼 때, 시베리아는 식민지 적 진출의 대상이었고, 소비에트 러시아 시대에 있어서 시베리아 는 개발적 발전대상이라는 특징을 지녔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 머리에〉에서는 식민지적 진출과정과 개발적 발전과정을 시기적으 로 구분하여 그 특징들을 정리 • 개관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자한다. 러시아가 우랄 산맥 동쪽의 광대한 지역인 시베리아에 눈을 돌린 것은 바로 〈모스크바 왕국 (MocKoBcKoe I\RP CTBO)> 시 대 였다. 말하자면 〈모스크바 왕국〉이전 유럽 • 러시아적인 정권을 바탕으 로 러시아 왕정(王政)의 기초를 닦은 후에, 현재의 또볼리스끄로부 터 이르뜨이쉬강에 이르는 이스께르(11: cKe p) 성(城)을 중심으로 세력을 뻗고 있었던 시비리 (CH6H p b) 한국(汗國)에 대하여 까자호인 예르마끄 (E p MaK) 로 하여금 공략하게 하였던 것은 16 세기 80 년대 의 일이었댜 원래 이 이스께르는 따따르인들의 호칭이었고, 러시아인은 이 한국(汗國)의 수도를 시비리(러시아어로 시베리아를 시비리로 부른 다)로 불렀지만, 세레도닌 (S.M. Seredon in) 교수에 따르면, 수도의 명칭인 시비리로 해서 이 영토가 시베리아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댜 그 이후 우랄 산맥 동쪽의 지역들이 제정러시아의 영역으 로 흡수됨에 따라 시비리의 명칭이 가리키는 범위도 점차 확대되 어, 마침내는 태평양 연안까지의 광대한 지역을 지칭하는 지리적
총칭이 되었다 어쨌든 시비리라는 지리상의 개념은 역사와 더불 어 변천을 거듭하여 왔지만, 러시아 연대기(年代記)의 작가가 시비 리의 호칭을 사용하여 〈시비리 땅 (cH6H p C I< He aeM JI H) 〉이라는 뜻으로 쓴 것은 l407 년의 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동凍)슬라브인들의 시베리아 지역으로의 진출에는 이주 ( nep ec eJI e HHe) 와 식 민 ( KOJ IO HM3anMH ) 이 라는 양면 성 이 있 었 다. 전자의 경우는, 제정러시아의 불리한 생활여건과 예속에서 벗어나 미개한 지역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 지만 점차 점주(占{主)지역에서 민족적 기초를 굳혀 민족적 발전을 이룩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는, 위로부터의 집단적 식민으로 인한 지배성(支配性)의 확대에서 비롯된 새로운 식민정책인 것이다 그러나 순수한 이주도 그들에 대한 민족적 • 국가적 지도로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식민정책에 수렴되게 마련이 다 . 그래서 러시아의 우랄 산맥 동쪽의 광활한 지역에서의 식민지 화 내지는 식민적 개발은, 어떻게 보면 우랄 산맥 서쪽의 러시아 평원에서 전개된 식민운동(제정 국가의 형성)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이른바 근세 대륙적 식민제국의 형성 과정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끌류쳅스끼 (V . 0 . Klyu c hevski i) 교수는 러시아사에 있어서 식민 지적 발전과정을 대략 4 단계로 나눠 그것의 정치적 • 경제적 특징 들을 지적한 바 있다. 제 1 기는 8 세기 초부터 12 세기 말까지의 시기로, 동슬라브 • 러시아인의 주도하에 드네쁘르강, 볼호프강 등의 유역을 점거하여, 정치적으로는 상업도시를 중심으로 토지를 구분하고 경제적으로는 대외무역과 이에 자극된 양봉과 수렵을 영유하던, 이른바 도시 • 상업적인 〈드네쁘르 • 루시(氏i e np onc I< aH Py c1 ,)> 시대였다 . 제 2 기는 13 세기 초부터 15 세기 중엽까지의 시기로, 러시아인이 볼가강 상류지역을 중심으로 지방으로 진출하여, 정치적으로는 분령지(分領地)를 세분하고 경제적으로는 자유농민에 의하여 토지 룰 개발하던, 이른바 공후(公侯)들의 분령화와 자유농경을 특징으
로 하는, 〈상류(上流) 볼 가 • 루시 (Be p xHeBO JI沼 cKaH P y ch) 〉시대였 다 . 제 3 기는 I5 세기 후반부터 I7 세기 초까지의 시기로, 몽고족의 영향력 붕괴와 더불어 러시아인이 볼가강 상류에서 하류 또는 돈강 쪽으로 식민지적 점진을 계속하면서 우랄 산맥 동쪽으로 눈을 돌렸던 시대였다 .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넓은 지역에 걸친 대러시아의 국가적 통일을 성취한 황제 (na p b) 가 대귀족 (6oR p e) 들의 지지를 얻어 유럽 • 러시아 지역을 지배하고, 경제적으로는 농업개발이 농민노동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토지는 점차 귀족계급 의 소유로 된, 이론바 귀족적 • 군사농경적 〈모스크바 대 루시 (MocKOBCKaH BeJ IH Kaf l Py ch ) > 시 대 였 다 그러나 I7 세기 중엽부터 I9 세기 말까지의 제 4 기는, 러시아 민족 이 거의 전 러시아 평원으로 확산되고, 더욱이 외부로 향해 끈질 긴 진출을 도모했던 시기였다. 농노제( 農 奴制) 농업을 근간으로 다소의 공업이 발달되었고, 식민지적 발전면에서 보면, 이른바 〈전 러시아 시대 (Bce p OCCH8CKH8 ne p HOA) 〉나 다름없었다.그래서 끌류쳅스끼 교수는, 결론적으로 말해 러시아는 〈연속적인 식만의 국가〉라고 논평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제 3 기에는 유럽 • 러시아 지역의 식민적 확충과 더불어 시베리아에 처음으로 눈을 돌리면서 근세 식민지 적 발전의 발판을 굳혔고, 제 4 기에는 유럽 • 러시아의 식민적 토대 룰 기초로 하여 시베리아의 식민지적 개발을 추진하고, 제정러시 아의 자족적(自足的)인 식민정책을 근간으로 포괄적인 시베리아 진출이 신장되었다 . 요컨대 〈모스크바 대 루시〉 시대의 식민지적 제반 형상이 〈전 러시아 시대〉의 그것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결과적으로 근세적 식민제국이 형성된 것이다. 그런대 대부분 유럽의 식민제국과 비교하여 제정러시아가 시베 리아 진출과정에서 보여준 특징은, 유럽제국이 초해적(超海的) 진출에 의하여 근세 해양적 식민제국을 형성했다면, 제정 러시아 는 연육적(連陸的) 진출에 의해 식민제국을 형성했다는 점이다 .
이 때문에 시베리아의 러시아화(py CH 如 HKanHH) 는 바로 식민정책의 대외적 촉진과 연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제정러시아가 시베리아 진출과정에서 보여준 특징들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시베리 아 특유의 자연지리적 특징과 관련하여 하천(河川)에 따른 진출이 라는 점이다 시베리아의 대하천인 오비강, 예니세이강, 레나강 등은 거의 규칙적으로 북쪽으로 흘러가고, 또 그들의 지류(支流) 는 아주 광범하게 서로 긴밀한 하천망을 이루었기 때문에 연수육 로(連水陸路)를 이용한 동진凍:進)이 가능했다 . 철도교통이 전혀 발전되지 못했던 시대에 내륙(內陸) 식민이 하천을 따라 옮겨가고 그 유역에 이주부락을 만들었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이같이 시베리아 대하천의 줄기와 줄기들이 자연스러운 통로 역할을 하여 러시아인들의 동쪽으로의 식민적 진출을 보다 용이 하게 만들었다 . 둘째로, 비록 하천과 연수육로에 따른 진출이긴 했어도 경제 적 • 문화적으로 아직 발달되지 못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거기에는 원주민과의 충돌 동 많은 난관이 가로 놓여 있었다. 그러나 여기 서 까자호인(혼히들 코사크라고 불리우는 특수한 지역적 • 신분적 사회집단으로 민족은 아니다)의 용맹스러운 개척정신이 시베리아 진출에서 큰 몫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즈소노프 (B.V. Bezsonov) 교수는, 특히 러시아령의 아시아 역사는 까자흐인들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전제하고 그들의 용맹한 성격 과 행동 등을 무시하고는 시베리아를 논할 수 없다고까지 말했 댜 러시아 최초로 시베리아를 정복한 것도 예르마끄를 비롯한 까자호인들이었고, 이들이 정복자로서, 또 이주자로서 시베리아의 식민화에 기여한 공적은 매우 컸던 것이다. 예르마끄의 원정 후 l00 여년이 지나서 이들의 후예들은 깜차뜨까 반도까지 진출했다 . 셋째로, 시베리아 식민정책에 나타난 또 하나의 특징은 이른바 유형식민제(流刑植民制)이다 . 시베리아 유형이 제도화된 것은 16 세기 말경이었으나, 처음에는 이들에 대하여 식민정책상의 적극
적인 기대를 걸지 않았고 주로 형사상의 중죄인과 정치범들을 보안상 이유로 원격지로 격리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점차 그 성격이 변질되고 유형제도의 적용 범위도 확대되었다. 특히 시베리아와 극동 지방에로의 대량 유형이 행하여진 것은 I8 세기 이후였다 한편 시베리아의 식민지화가 중진됨으로써 유형 지역의 범위도 넓어졌고, 개발의 진전과 더불어 유형생활의 개선 도 도모되었다. 말하자면 유형제 자체를 한충 조직화하여 국가에 유익하게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강제적인 유형 이주와 강제노동이 과연 식민지 개발수단으로 효과가 있었느냐 하는 점에 대하여 삐사레프 (M.N. Pis a rev) 교수 둥은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는 유형제 도가 실시된 기간에 유럽 • 러시아에서 시베리아로 보내진 유형자 는 총 IOO 만 이상에 이르른 데 비하여 개발면에서 이룩한 그들의 역할은 거의 없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그는 시베리아에로의 평화적 식민에는 두 가지 방법, 죽 자유 • 민중적 방법과 강제 • 관 료적 방법이 있었던 바, 현재의 시베리아 주민은 거의 대부분이 전자에 의한 식민지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넷째로, 시베리아 식민정책 추진에 있어서 당해 지역의 러시아 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I9 세기말 이후 시베리 아에 있어서 러시아인의 증가는 눈에 띄게 신장하였고, 도시의 경우는 더욱 현저했다 . 물론 이같은 현상온 교통시설의 확충, 특히 시베리아 횡단철도 및 지선(支線)의 건설에 따라 러시아인의 식민활동이 조장되었다는 데 중요 원인이 있겠으나, 열세인 원주 민에 대한 대 러시아화 정책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고 하겠다. 한편 러시아 혁명후 소비에트 러시아 시대에 있어서 시베리아 개발의 시기구분은 소비에트 학자들에 의해 대충 4 단계로 나눠 고찰되고 있다. 물론 경제개발 5 개년 계획에 입각한 각 차수별 중점사업을 개발내역으로 구분해 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거시적 으로 볼 때 대동소이한 면이 없지 않기 때문에 소비에트의 경제 학자인 구시친 (N. Ia. Gushc hin)의 시기구분을 참고로 하여 각
시기별 개발 특성을 요약해 보기로 하겠다. 제 1 기는 내란이 종결된 1921 년부터 1930 년대 말까지의 시기로, 한마디로 말해서 기초산업형성기이다. 이는 바로 〈사회주의 경제 형성기〉라고 불릴 수 있고, 또한 인민 경제의 토대가 마련된 시기 라고도 하겠으며, 주로 중공업우선정책을 추진하여 우랄 • 꾸즈네 츠끄 콤비나트를 중심으로 석탄과 철강석 생산이 활기를 띠었던 시기이다. 특히 1925 년 시베리아 지역, 1926 년 극동지역의 지방행 정체제가 구축됨과 동시에 지역별로 석탄, 에너지, 기계, 화학, 금속공업이 개발되었다. 농업분야에 있어서도 집단농장화가 지속 적으로 실시되어 부농(富農)체제가 소멸되었고 1937 년에는 꼴호즈 (집단농장)가 농민경제의 93% 를 통합하고 파종지의 99.6% 를 차지 하는 동 시베리아는 명실상부 소련의 농 • 공업 발달지로서 주목 을 받게 되었다 제 2 기는 독 • 소전쟁 시기로 시베리아는 소련의 방위산업을 주도했다. 우랄과 볼가 강은 대규모 병기창으로 변모하였고 항공 및 전차산업이 발달하였으나, 시베리아 개발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시기는 그 성과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 3 기는 제 2 차 세계대전 종결 후부터 1960 년대 초까지로서 산업 의 재배치가 이루어지고 다각적 발전 기틀이 마련되는, 이른바 〈전후 복구기〉라고 하겠다. 시베리아의 생산력과 재분배가 크게 진척되어 수력자원이 중점적으로 개발되었던 시기이다 . 안가라, 예니세이, 오비강의 수력자원이 새로 건설된 노보시바리스끄, 이루꾸뜨스끄, 브라뜨스끄 둥의 수력 발전소들에 의해 알루미늄 • 셀룰로즈 공업 둥이 발달될 수 있는 대규모 종합단지의 기반이 조성되었다. 또한 시베리아 간선철도와 파이프 라인이 준공되어 석유 • 가스공업 동의 토대가 시베리아 중앙지대로 옮겨졌다. 한편 농업은 MTC( 기계 • 트랙터 • 스테이션)를 중심으로 대규모 기계농 업 생산이 시작되었다. 제 4 기는 60 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시베리아 개발에 들어간 〈종합개발시기〉로서, 우선 에너지 공급원으로 석유 • 가스 산업,
석탄 수력 발전 산업을 중심으로 하여 각 분야별로 대규모 공업 단지가 조성되었다. 또한 야금술이 발달됨으로써 꾸즈네츠끄,노보시비리스끄, 끄라스노야르스끄 등이 연계되어 공업의 완전한사이클이 형성되었고, 그 밖에도 목재 가공 공업단지(브라뜨스끄, 우스찌일림스끄), 대규모 화학공업단지(께메로보, 옴스끄, 바로나울)가 발달되 었고, 밤 철도 (BaRRa Ji o-AM yp cRaa MarHcT p a Ji b) 의 완성으로 바이깔호와 극동지역의 종합단지 개발이 구상되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종합적 지역개발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여기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남아 있다고 하겠다. 제 2 차 대전 전에 스딸린이 감행한 시베리아 개발계획은 극히 종합적인 것이었으나, 대전 후 흐루시쵸프가 구상한 시베리아 • 극동지역의 대대적인개발계획이 좌절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소련경제에 있어서 시베리아 • 극동개발의 의의는, 이 지역의 천연자원을 개발하고그것을 공급함으로써 유럽 • 러시아 지역의 집약적 발전을 도모한다는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시베리아 • 극동지역의 개발은,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거점개발주의(撮点開發主義)〉에 기초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 다. 하지만 소련은 시베리아의 장기경제발전의 목표로서 종합적 지역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으며, 또한 이에 따른 엄청난개발비용의 조달과 노동력과 기술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서방세계 의 협력을 공공연하게 구하고 있다. 말하자면 시베리아 개발의 문제는 바야흐로 소련의 국내 경제문제에서 급속히 국제문제화되 고 있는 실정이다. 시베리아의 천연자원이 널리 국제협력에 의해 개발되어, 그 개발의 속도가 가속화된다면, 2000 년대에 이르러 시베리아의 종합적 개발이 이루어지리라고 여겨진다. 이상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시베리아 개발상의 특징들 을 제정 러시아 시대와 소비에트 시대로 구분하여 정리 • 개관해 보았다. 곁들여서 여기에 원고를 마무리하면서 집필과정에서 느꼈 던 소감을 적어둘까 한다. 원고의 집필을 시작한 지 근 5 년이란 세월이 홀렀다. 초고를 써 놓고도 선뜻 대우재단에 제출하지 못했
던 것은, 이 분야에 관한 자료를 광범하게 섭렵하지 못했다는자책감과,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리며 이른바 역사를 체계화하려고노력했으나 역시 시베리아 대지에 대한 막연한 문학적 감상(?) 만으로는 그 작업이 어려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서도 한 가지 위안으로 삼는 것은, 이 개괄서가 바탕이 되어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전문적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 또한 전문가들에 의해 보다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전문서가 나왔으면 하는바램 때문이다. 이제 원고를 대우재단에 넘겨줄 수 있었던 것은, 소비에트 러시 아 시대의 개발과정을 초고해 준 조선대학교 김수회 교수와, 마무리 단계에서 모든 원고를 다시 정리해 준 외국어대학교의 박태성 강사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밝혀 둔다. 이 두 분에게 감서를 드리며, 또한 원고 마감의 날짜가 이미 오래 전에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독촉하지 않고 침묵으로 필자를 격려해 주신 대우재단의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1990 년 4 월 이문동 연구실에서 著者
시베리아 개발사 차례
책 머리에 • 5제 1 장 러시아 국가의 형성 1. 러시아 · 슬라브 민족의 기원 172. 러시아 · 슬라브 지역의 자연환경 203. 러시아 · 슬라브 민족의 혼합과 발전 23제 2 장 제정러시아 초기의 시베리아 진출 1. 몽고의 지배(1240-1488)와 모스끄바 국가의 성립 272. 시베리아에로의 식민진출 303. 시베리아 식민정책과 원정 35제 3 장 시베리아의 식민화 과정1. 시베리아를 향한 식민지 진출 412. 17세기 중엽의 원정 탐험 463. 아무르강 지역으로의 진출과 러 · 중관계(네르친스끄조약) 51제 4 장 18세기의 혁신정책과 학술탐험 1. 18세기초 시베리아의 식민화 문제 592. 깜차뜨까 지방의 식민지화 633. 학술적 탐험사업 67제 5 장 시베리아 개발과정에 따른 통치제도 1. 16-19세기초의 통치제도 712. 스빼란스끼 총독의 제도개혁 793. 시베리아 유형의 조직화 854. 스뺴란스끼 총독 이후의 유형제도 90제 6 장 시베리아 이주식민의 추이
l. 농노해방 (1861 년)전의 유럽 · 러시아 농민의 이주 952. 농노해방과 유럽 · 러시아인의 이주 1023. 19 세기 후반의 시베리아 이주와 철도건설 문제 1054. 20 세기 초기의 이주식민 113제 7 장 제정러시아의 동방진출정책과 만주와 조선1. 시베리아 철도정책의 국제성 1212. 동방정책의 만주에로의 신장 1303. 만주에서 조선반도로 진출 142제 8 장 혁명기의 러시아와 소비에트 정부수립1. 혁명전야의 시베리아 1512. 전시공산주의와 신(新)경제정책 1543. 전체주의체제의 확립 1604. 스딸린치하의 계획경제 164제 9 장 계획경제하의 시베리아 개발1. 계획경제에 따른 지역구분 1772. 시베리아 지역의 특성 및 개발조건 1803. 스탈린 시대의 시베리아 개발 실적 189제 10 장 흐루시쵸프의 경제정책과 시베리아 개발1. 흐루시쵸프의 정책전개 1992. 서(西)시베리아 개발 2083. 동(東)시베리아 지역개발 2124. 극동지역의 개발 222제 11 장 브레즈네프 시대 이후의 시베리아 개발
1. 브레즈네프-꼬스이긴 체제 2312. 경제정책과 시베리아 개발의 추이 2353.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의 개발현황 2394. 고르바쵸프 시대의 개발계획 254제 12 장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 개발의 향방1. 국제협력의 필요성 2592. 협력의 과정 및 현황 2633. 시베리아 개발의 장애요인과 전망 276참고문헌• 283찾아보기 •287제 1 장 러 시 아 국가의 형 성 1. 러시아 • 슬라브 민족의 기원
동슬라브족이 범슬라브족이란 총체적인 집단에서 분파되어 러시아 • 슬라브 민족을 형성하게 된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 이 있댜 그러나 러시아 • 슬라브 민족의 기원 및 러시아 국가의 형성에 관해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두 · 가지 견해로 나누어진다.1)
1) Anth o ny Vasy s, Russia n Area Re 따 er, New York:Pit m an Publi sh - ing Coop e rati on , 1962, p. 1.
첫번째 견해는 일반적으로 〈노르만설 (Norman Theo ry)〉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 l9 제기의 까람진 (H. M. Kap aM aHB), 뽀고진 (M.II, IIoroAHH), 솔로비요프 (C.M. ConoBb8B) 동이 주장하였다. 이에 따르면 9 세기 중엽까지 노브고로드 (HoBro poA) 부근뿐만 아니라 끼예프 (KHeB) 까지 이르는 드네쁘르강 유역은 매우 황량한 곳으로 몽매한 슬라브인, 핀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2) 동슬라브족은 이들을 바랴그라고 불렀으나, 사실 이들은 바이킹족 (The Vik i n g ) 으로 알려진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만족을 말한다. 그런데 러시아 (Russ i a) 라 는 명칭의 어원이라고 여겨지는 루시 (P yc 1,)라는 명칭은 노르만족 또는 노르만 족이 살던 땅을 지칭한 것으로 〈러시아 원초연대기〉는 기술하고 있다.
광야에 스칸디 나비 아로부터 바랴그인 (Ba p RrH)2) 이 와서 원시 적 인 사회조직을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 당시 슬라브인은 민족적으로 분리되어 서로 싸우다 보니 그 속에 질서가 없었기 때문에 바다 건너에 있는 바랴그인들에게 〈우리의 땅은 광대하고 비옥한데, 질서가 없으니 우리를 통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는 것이다 .3) 아울러 러시아 최고의 사료인 『원초연대기』는 슬라브인의 조상, 죽 선사(先史)시대의 고대슬라브인인 슬로벤 (C JI OBaHe) 은 짐승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9 요컨대 북방 스칸 디나비아로부터 바랴그인, 죽 노르만인이 들어옴으로써 슬라브인 들은 사회생활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고, 결국 노르만인이 국가 체제의 서막을 열면서 경제적 관계의 기틀을 구축하였다는 것이 댜 그리하여 노르만설은 이 시대로부터 동슬라브, 즉 러시아 • 슬 라브의 사회사, 경제사, 더욱 나아가 정치사가 시작되었다고 풀이 하는 견해이다 두번째 견해는 〈슬라브설 (Slav i c Theor y)〉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 주로 19 세기의 사가들, 특히 벨랴예프 (11.~.Be JI HeB), 자벨 린 (11. E. 3a6eJIH H) 등이 주장하는 설이다. 이 학자들의 일부는 루시 (P y ch) 의 기원을 끼예프 근교의 드네쁘르강 지류인 〈로스 (Ros) 〉 라는 강의 이름에서 찾기도 하였다친 이 역시 가설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이들은 적어도 한 국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오랫 동안의 사회적 발전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범슬라브적인 영역에서 분리된 동슬라브 또는 러시아 • 슬라브의 생활은 원시적이고 소규모적인 결합에서 점차 문화적이고도 대규모적인 결합의 길을 걷게 됨으 로써 그 점거지역에 도시가 생기고, 그 중 중요한 도시 (BO JI OCTb) 를 중심으로 정치적 조직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3) 淸水睦夫, 『久 子 夕 民族史 0硏究』 山川 出版社, 1983_ p. 2'J 6. 4) 除村吉太郞 l'R, 『口 .} 十 年代記』 1943, pp, II-12. 5) Je sse D. Clarkson, A Hi d ory of Ruuia , New York : Randon Hou-se, 1¢ 9, p. 28.
그러나 랴쉬첸코 (11 . M. J1Rm eHK0) 교수는 이와 같은 견해를 지지 하면서도 동슬라브의 발전에 있어서 바랴그인 진입(進入)의 영향 을 인정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 국가적 결합이 진입자인 바랴 그인의 영향을 받아 외형적인 형태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실질적 으로는 바랴그인이 오히려 슬라브인의 문화를 섭취했다는 것이 댜 그리고 이때부터 국가적 생활은 유사(有史)시대로 접어들지만 공동체생활의 근원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라는 것이다 . 6) 어쨌든 9 세기 중엽에 최초의 러시아 국가가 드네쁘르강 유역에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 이러한 사실은 비잔틴 (B y zan tin e) 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이 기록 속에는 그리스인과 슬라브인과의 접촉이 언급되어 있으며 〈흑해의 북쪽 기슭에 개척 된 식민지는 그리스인을 흑해연안의 유목민과 필연적으로 접근시 켰고, 그리스인은 여기서 다른 유목민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7) 이와 관련하여 일본학자 요케무라 교수는 그의 연구에서 〈바랴 그〉라는 낱말은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스칸디 나비아인을 총칭하고, 부분적으로는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공(公) 이나 상인, 또는 그쪽에서 그리스에 온 용병을 의미하며, 더욱이 〈바랴그해〉는 발틱해의 호칭으로서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사용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 콘스탄티노플은 러시아어로 〈황제 의 도읍〉 (Ua p1, rp a~) 이라고 불리우며, 『원초연대기』에 나오는 〈바랴그에서 그리스에로의 길〉은 발틱해一네바호一라도가호一볼 호프강一일리메니호一드네쁘르강수흑해수콘스탄티노플로 통하는 당시의 중요한 상업로이며, 연대기의 작가가 이것을 상술했던 이유는 러시아 주민의 경제적 정치적 생활에 이 상업로가 커다란 의의를 가졌기 때문이며, 또 그것은 슬라브인과 그리스인과의
6) 大橋與一」帝政口夕十(l)}久 )7 開發上東方進出過程』 東海大學出版 余, 1974, pp. 9-IO . 7) ,,요/나` `y F, 대합羊硏究史』, 日本外務省調査部, 1939, p. €,6_ B. B., Ba- pT am .A, JleB BBrp aA , 1925,
빈번한 교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8) 2. 러시아 • 슬라브 지역의 자연환경 러시아 • 슬라브민족의 형성과 활동을 제약하고 그의 발전에 있어서 특이성을 보여주게 한 여러가지 조건 가운데서 지역적 환경, 특히 산림과 초원 및 하천의 영향은 매우 큰 것이었다 . 첫째, 산림은 동구凍:歐)평원에 있어서 러시아 • 슬라브인의 이동 이나 식민지적 활동과 깊은 관계가 있다 . 러시아 • 슬라브인의 대부분은 거의 I8 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산림지역을 중심으로 생활하거나, 산림과 직접 내지는 간접적인 관계를 가짐으로써 집단생활을 유지하고 민족발전을 이루어 왔다고 할 수 있다 .9) 동슬라브족이 최초로 집단생활을 시도한 드네쁘르강 중부유역은 러시아 산림지방의 남부와 혹토(黑土) 초원지대의 북부를 잇는 요지였었다. 이는, 당시 초원지대의 남부가 그들의 자유로운 」 점거 지로서는 적합하지 못한 데다가 외족의 침입에 따른 위험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고, 또한 건조하고 숲이 없는 남부 초원지대는 당시의 원시적 식민활동에 있어서 경제적인 효용가치를 지니지 못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따라서 그들은 특수한 형태를 띤 사냥이나 농경 등에 종사하게 되었다. 동슬라브인은 드네쁘르강 중류유역에서 곧바로 산림지대로 들어가 생활하였고, 이들의 대부분은 그 지역의 실권자에게 모피 와 같은 공물을 바치면서 사냥이나 밀납채집 둥에 종사하였다. 이와 동시에 개척에 따른 농경지도 얻게 되었다 . 이렇듯 자연조건 온 러시아 • 슬라브인의 생활을 제약하였으나, 그들의 개척활동에 따라 원시적 자연상태, 특히 이주지방에 있어서 산림의 분포에는
8) 除村吉太郞 , 『原初年代記 ^0 誌』, 1943, pp. ~-666. 9) B.O ., RJ il)11 eacRell, Ky pc Py cc 1 'ot l Hcrop u u, I, MocRBa, 1923, p. 20.
점차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유럽 • 러시아의 중부지방에서 원시 림의 범위가 점차 줄어들었던 것은 이주민의 증가에 따른 산림의 벌채와 산림지의 개간이 행하여졌기 때문이다 . 그래서 산림과 초원의 접속지역은 식민적 개발과 더불어 마침내는 문화적 중심 지가 되어 갔다 . 또한 이를 에워싼 지방에서는 농업이 번창함으로 써 식민적 신장추세는 결국 북쪽과 동북쪽의 산림지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요컨대 그들의 모든 경제생활은 산림을 그 기초로 하여 시작되었던 것이다 .10) 둘째로 , 초원은 러시아 • 슬라브인에게 깊은 감동과 낭만을 불어 넣어 주었지만, 지리적 환경으로서 미친 영향은 남부와 북부에서 동일하게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남부의 광활한 초원지대는 유목민들 사이에서 투쟁이 끊이지 않은 곳이 었댜 예를 들어 7 세기 경에는 하자르인 (xaaa p)이 세력을 장악하 고 그 범위를 확대시켜 감으로써 당시의 러시아 • 슬라브인은 그들의 권력에 복종해야만 했던 일도 있었기 때문에 남부초원은 한마디로 말하여 〈위협의 땅〉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북부, 특히 혹토초원에서는 러시아 • 슬라브인의 식민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 고 농업개발이 유망한 곳이었다 . 원래 러시아 • 슬라브인이 거주했 던 이 지역은 기후가 매서울 뿐 아니라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아 농업노동이 가능한 기간이 다른 지방에 비하여 훨씬 짧았다. 그러 나 토지가 평탄하고 비옥하다는 이점 때문에 농업개발이 용이하 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 민족으로 하여금 농경민족의 성격을 띠게 하고 농업국가로 발전할 수 있게끔 만들 어준 한 요인이었다 . 셋째로, 하천은 옛날 시가(詩歌)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에게 활로를 열어 주고 공동생활의 기운을 불어넣으면서 집단 상호간 의 관계를 긴밀하게 해주었다. 또 하천을 이용한 식민활동은 더욱 강화되고, 그 범위 또한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경향은 그들의
10) M. H. IloRp O BCRHA, P y cc ,c댜 HcTop 꼬 8 C 다邱 C:J /Ca TOM O'l ep , ce , OT 8pe eHet tw ux Bp eM eH 8o 1' 0H 나 a XIX cTo.c e rw i, MooRBa, p. 12.
원시식민지시대에 있어서 뚜렷한 특징이었던 것이다 . 11) 유럽 • 러시아에 있어서 하천망은 러시아 • 슬라브안의 이동뿐만 아니라 교역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연안지방에는 교역과 관계 있는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게 됨으로써 상업도시가 발생하였다. 상인들에게 교역물자 , 특히 곡물 , 벌꿀, 밀납, 모피 등을 공급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도시에서 떨어져 농경, 수렵 둥에 종사하는 민중들이었다 . 또 하천망은 정치적인 의의도 지니 게 되었다 죽 하천의 상태에 따라 민중의 거주지가 지리적으로 자리잡게 되고 그 지방의 정치적 생활이 결정되었다. 자연적 통로 로서의 하천에 의해 제약을 받던 민중에게는, 각자의 주거지역을 단위로 한 집단조직이 생겨났으며 , 9 세기 내지는 IO 세기경에 이르 러 이같은 소규모의 지역집단은 확장되거나 통합되거나 하여 마침내 강력한 정치적 기능을 보유하는 대규모의 집단으로 발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지역집단에는 지배자로서의 공후 (RH fl 3L) 가 제각기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유럽 • 러시아에 있어서 원시적 , 종족적, 지방적인 공후 영지의 분포는 수로(水路)라는 하나의 기초적 조건에 의해 이루어 졌다 죽 러시아 평원의 식민적 개발의 초기에 있어서 러시아 • 슬 라브인의 정치영역은 하천에 의하여 지역적으로 구분되고 그 유역을 중심으로 정치적 범주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천은 식민적 팽창을 위한 유리한 자연통로가 되었 지만, 동시에 외적의 침입 경로도 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획득한 집단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고 경제적 , 사회적 내지는 정치적 활동의 진전을 위해서는 하천을 이용할 수 있는 제반 시설뿐만 아니라 하천을 방위하는 설비들도 충실하게 갖추어야만 하였다. 아시아 방면으로부터 오는 유목민의 침입에 대한 불안은 컸으며, 특히 남부 초원과 그 근접지방에 있어서는 물론 북쪽지방 에서도 이민의 침입에 대처할 방위책이 강구되어야 했었다. 이렇 게 볼 때 최초의 러시아국가라고 할 수 있는 〈끼여巴. 루시 (KHeBcRaSI Py c 1 ,)>
11) B. 0. Kn10ti :e BcKHA, 앞의 책 , p. 74.
가 북쪽 내지는 북동으로 진로를 개척하고 열등한 토착민을 홉수 하여 대러시아인 형성(形成)의 기초를 마련한 것도 , 12) 유리한 하천 통로에 따른 남쪽 내지 동쪽에서의 외족침입을 우려했기 때문으 로 풀이할 수 있겠다 . 3. 러시아 • 슬라브 민족의 혼합과 발전 동슬라브인들은 러시아 평원의 드네쁘르강 중부유역을 중심으 로 새로운 환경조건하에서 영토 확장과 더불어 러시아 • 슬라브족 의 식민적 혼합과정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식민적 혼합과정을 살펴볼 때 지리적 조건과의 관계는 물론 사회적 조건, 특히 발전 해 가는 식민활동으로 인해 나타난 다른 종족과의 융합 내지는 협동관계를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러시아 • 슬라브인이 식민활동을 통하여 접촉 , 교류를 한 다른 종족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하자르족, 핀족(«l> HHH), 뱌랴그족이었 다 러시아 • 슬라브인의 입장에서 볼 때, 하자르족은 지방의 생산 물을 남방이나 동방으로 교역하는 데 협력하여 상업의 발달을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상업도시의 발전에도 기여한 바가 컸 댜 핀족은 북방의 이주식민자와 융합하여 대러시아인의 형성에 기여했고 또, 수렵, 어획 둥의 활동울 통하여 산업상의 협력자가 되었다 바랴그족은 러시아 • 슬라브인에게 흡수당하거나 동화되어 도시를 중심으로 한 사회생활에 있어, 이른바 기사(騎士) 계층을 탄생시켜 그의 정치적 지배관계를 조장하였다고 하겠다 .13) 이렇듯 여러가지 영향에 의하여 러시아 • 슬라브인의 민족생활에 식민적 융화현상이 발생하여 그 범위가 확대되었던 것이다. 러시아 평원에 있어서 러시아 • 슬라브인의 민족적 식민생활은
12J 같은 책, p. 69. 13) 大橋與一, 앞의 책, p. 52.
여러가지 상황을 야기시켰다. 활동 초기에 있어서 자주적 도시의 발생, 즉 지방의 정치조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9 세기 중엽이었 는데, 그것은 식민활동을 통한 복합과정이 발전되어 감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도시는 자주적 지위를 확보하고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요새나 기타 방어시설을 구축하고 동시에 기사 라는 특수계급도 생겨나게 되었다. 요컨대 민족복합은 상업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면에서도 지배세력이 광범하게 확장되어 이론바 도시 지 방(都市地方 ; o6 Ji aCTb) 이 형 성되 었던 것 이 다. 도시지방의 명칭은 그 중심을 이룬 주요도시의 이름에 따라 불리어졌으며, 남러시아에 〈끼예프 • 루시〉 국가가 형성되기 전까 지는 끼예프, 노브고로드 (HOB I' OPOA), 체르니고프(lf ep HH I' OB), 스몰 렌스끄 (CMO JI 8HCK) 둥의 도시지방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도시지방의 각 영역은 민중의 종족별 거주지역과 반드시 일치하 지는 않았댜 그리하여 9 세기 후반부터 II 세기 전반까지의 유럽 • 러시아 지역에서는 민족적 거주구분(居住區分)과 도시를 중심으로 한 지방구분(地方區分)이 서로 얽혀 있었기 때문에, 도시지방의 종족적 구성만으로 상이한 민족이 어떻게 결합되었는가를 판단하 기는 어렵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 • 슬라브인과 다른 종족과의 교류는 여러가지 결과를 초래하였지만, 특히 바랴그 공후 (KHH8b) 의 출현은 공국 (KHH >K 8CTBO) 을 탄생케 한 밑거름이 되었고, 러시 아 • 슬라브 민족의 정치생활에도 커다란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바랴그는 스칸디나비아에서 건너온 노르만족으로서 처음에는 주로 생산지의 중심지역에 군집하여 자유무역이나 도시의 방위, 교역로의 경비 등을 맡았지만, 점차 종속적인 지위에서 벗어나 지배적인 위치로 부상하게 되었다. 도시의 기사계충을 형성한 이들에게 지도자가 나타나 세력을 장악한 자들은, 스칸디나비아의 설화 속에서 〈코닝〉 (KOHHH I'), 혹은 〈바이킹〉 (BHKHH I')이라고 불리 었던 것처럼, 슬라브 • 러시아어로서 〈끄냐지〉 (KHH3L; 공후) 또는 〈비짜지〉 (BHTH8b; 무사)로 군림하게 되었다. 바랴그 기사계충을 기반으로 한 수령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구축하게 되자 내적으로는 상호간의 지배권 쟁탈이 심해지고, 외적으로는 인접지역에 대한 진출이 빈번해져서 결국 영토를 병합한 대공국 〈끼예프 공국〉이 일어나게 되었다 . 류리끄 (P10 p HK) 가 죽고나자 그 부족 중의 유력자인 올레그 (011er) 가 끼예프 지방 을 지배하고 인근 공후들에게도 그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러시 아원초연대기』에 따르면 ,14) 올레그는 서기 907 년에 그리스로 원정 하여 공납을 수령하고 조약을 체결하기까지 하였다. 올레그의 후계자이자 류리끄의 아들인 이고리 (Hro p b) 는 내부의 통일울 성취 함과 동시에 그리스로 두 번 원정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 이 고리 의 아들 스뱌또슬라프( CB11Toc11aB )는 964 년 야로뿔끄 (.Rp ono JI K) 를 끼예프에 , 올레그 스뱌또슬라비 치 (011er CBJ IT OCJ ia BH' I) 를 두레블랴닌에, 불라지미르 (B Ji a p; HMH p)를 노브고로드에 배치하 여 통치시키기도 하였다 . 15) 바랴그 기사계층의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이들은 제각기 공국 들을 세웠는데, 그 중에서 가장 강대했던 것이 〈끼예프 공국〉이었 댜 이 밖에도 9-10 세기 사이에 바랴그의 공국들이 잇달아 생겨났 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들을 예로 들면, 9 세기 후반 노브고로도 지방의 〈류리끄 공국〉, 백해 지방의 〈시네우스 (C 血 e y e) 공국〉, 이즈보르스끄 지방의 〈뜨루보로브 공국〉, 끼예프 지방의 〈아스꼴 리드 (ACKO Ji b ,D;) 공국〉, IO 세기에 뿔로쯔끄 지방의 〈로그볼드 공 국〉 등이었다 .16) 이와 같은 바랴그 공국들의 출현은 러시아 평원 에 있어서 이민족들간의 융합 결과이며, 식민적 사회의 형성을 의미해 주기도 한다 . 이와 같이 러시아 • 슬라브인에게 있어서, 드네쁘르강 중부유역 은 최초의 집단 거주지였으며, 동시에 민족발달의 근거지였다고 하겠다 또한 이 지방에 세워진 〈끼예프 공국〉은 남러시아의 식민 적 사회 형성의 중심이었고, 민족적 식민운동의 기점이었다. 다시
14) 除村吉太郞 , 앞의 책, pp. 25-34, 15) 같은 책, pp. 50-51. 16) B. o. KJI l0 q e BCKnn, 앞의 책, p. I~.
말해 러시아 • 슬라브인은 끼예프를 중심으로 하여 남러시아에서 북러시아로 확충하는 식민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 이는 이종족 과의 융합발전을 통하여 민족의 식민적 복합화를 이루었고, 이만 족 문화를 수용함으로써 생활의 식민적 복합화도 수반되었다 . 그러나 여기에서 러시아 • 슬라브인이 식민적 진출을 함으로써 조성된 집단생활의 사회적 기반에다 봉건적 지배조직을 이식, 발전시킨 것은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바랴그인이었다는 것을 간과 해서는 안될 것이다.
몽고족 침입 전 〈루시 〉에서의 제공국 분포개황
, 〈루시〉의 경계선
제 2 장 제정러시아 초기의 시베리아 진출 l. 몽고의 지배 (I240-I488) 와 모스끄바 국가의 성립 유목민족인 슬라브 • 러시아족과 기사계급인 바랴그족들의 융합 국가로서 가장 강대했던 끼예프 공국도 야로슬라프(flp oc Ji aB) 현공(賢公)의 사망후 (IO54 年) 분령국으로 분열되었다. 대공(大公) 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를 쟁취하려 했던 각 공후들은 서로 서로 침입하여 국력을 소모하고 국토를 황페화시켰다. 그 결과 곳곳에서 발생한 봉기를 진압할 힘이 없었고, 이민족의 빈번한 침입을 받다가 마침내 몽고-따따르족의 굴레속에 들어가게 되었 댜 서기 1236 년 카라코름에 있던 칭기스칸의 손자 바뚜의 결정에 따라 몽고군의 서방원정이 시작되었다 . 유럽 • 러시아의 꼴롬나 (KoJI O MHa), 모스끄바, 수즈달리, 블라지미르 (B Ji a 血 MH p), 로스또 프 , 야로슬라블리 , 뻬레야슬라블리 (IIe p e JI C Ji aB JII>), 드미뜨로프(氏 rnT p OB), 볼로책 Bo Ji oR), 뜨베리 (TBe p1,), 람스끼(Jl aMCRHa), 꼬젤리스끄 (Koae JI1> cR) 둥 많은 공국들이 차례로 침공을 당하였다. 노브고로드는 간신히 화를 면했지만, 1240 년에는 〈끼예프 공국〉까지 파괴됨으로써 이른
바 〈루시의 땅〉은 거의 전역이 몽고의 세력하에 놓이게 되었다. 몽고가 중세 대륙적 식민제국으로서 유럽 • 아시아지역을 휩쓸었 던 것은 13 세기 중엽이었지만, 유럽 • 러시아 일대를 직접적으로 지배한 깊차크(Kip chak) 칸국(汗國)의 권력은 그로부터 거의 2 세기 반에 걸쳐 계속되었다.
깊차크 칸국의 지배를 받은 러시아 • 슬라브는 아시아로부터 정치, 경제, 문화적 영향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 그러나 한편으로는 깊차크 칸국이 기존의 종교, 문화에 대하여 관용 내지 는 포용의 정책을 폈기 때문에 선진적인 서구의 종교적, 문화적 영향도 상당히 크게 작용하였다. 따라서 몽고의 지배하에 있던 러시아 • 슬라브인의 사회생활에는 동서 양쪽의 영향을 받아 적잖 은 변화가 일어났고, 특히 몽고세력의 약화라는 상황의 변환에 따라 민족 자각심이 성장하여 독립에로의 굳은 의지가 생겨나게 되었다. 몽고의 정치적 압제는 러시아 • 슬라브인에게 굴욕적인 것이었다. 예를 들어 러시아 공후의 신분에 관련된 야를르이끄 (ffpJILI R) 제도 1) 는 몽고인의 입장에서 보면 정치적 권위의 상징이 었으나, 러시아 • 슬라브인에게는 복종 의례를 통한 민족적 굴욕이 었기 때문에 민족적 자각에 따른 저항의식이 촉진되었던 것이 댜
1) 야를르이끄 제도는 칸 (Khan) 의 특별 칙허장(勅許狀)이라고 할 수 있는데, 러시아의 공후들은 이것을 얻기 위하여 굴욕적인 대우를 감수해야만 했었 다. 이것은 공후들이 자기들의 영역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에 대한 허가장 이라고 볼 수 있으며 , 칸은 몽고지배에 반기를 들지 않는 한 내정문제는 공 후들에게 일임하였다. 따라서 몽고의 러시아 지배의 촛점은 인력과 재력의 공출에 있다고 하겠다.
러시아 • 슬라브인이 몽고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가장 커다란 이유는 민족 통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당시의 러시아 • 슬라브인 사이에는 봉건적인 공후들이 분할되어 통치하 고 있었기 때문에 몽고족의 침입에 공동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따라서 무력 정복에 의한 식민지적 굴종이라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였고, 이를 계기로 하여 대의적인 약세와 현실의 고통에
대처하기 위한 민족적 자각이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민족적 자각 속에서 모스끄바 공국이 점차 그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하였다 . I330 년 모스끄바 대공국의 대공(大公) 직위 를 인정 받은 이 반 다닐로비 치 (MBaH 짜 aHH JI OBH 'I ; 이 반 I 세)는 깊차크 칸국 아래의 총징세관(總徵稅官)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경제적 이익을 축적했고, 북러시아에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여 나중에 모스끄바 정권이 독립하게 될 기초를 마련하였다. 모스끄 바 대공의 자리는 시메온 이바노비치 (C11MeOH MBaHOBH' I), 이반 이바노비치 (MBaH MBaHOBH' I ; 이반 II 세)를 거쳐 드미뜨리 이바노 비치 (AM11T p 11:0 MBaHOBH 'I)가 I359 년에 계승하여 여러 크고 작은 공국에 대한 지도적 위치를 강화하고 통합에로의 기운을 키워 나갔다 깊차크 칸국의 권세는 I357 년 정권의 내분으로 인하여 점점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I378 년 몽고군이 랴잔 지방에서 러시 아군에게 참패당하고 이어 I380 년 돈 (AoH) 강 유역에서 모스끄바 군을 주력으로 한 러시아 군에게 패함으로써 칸국은 급격히 쇠퇴 하였다 이때 드미뜨리 이바노비치가 돈강 유역에서 몽고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던 사실은 러시아 • 슬라브인이 몽고의 지배 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마침내 I480 년 이반 바실 리예비치 (MBaH BacHJ ih eBH' I; 이반 m 세)때 이룰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킵챠크 정권의 붕괴와 더불어 독립된 모스끄바 대공국이 대내외적으로 완전히 전 슬라브적으로 권위를 얻기까지에는 이반 m 세와 그 후계자들의 건설적인 노력이 필요했었다. 아직도 한편 으로는 몽고세력의 잔재가 남아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스끄바 정권에 대한 반항세력이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반 m 세의 정책도 여기에 중점을 두고 실시되었다. 여기서 러시아 • 슬라브인의 사회생활에 있어서 한 가지 유의해 야 될 사실은, 그리스인이나 몽고인이 다같이 전제주의의 모법과 농노제도의 전형(典型)을 러시아에 심어 주었지만, 풍속 • 기술 • 교 화 • 제도 둥 사회생활에 끼친 감화는 그리스인쪽이 훨씬 컸다는
점이다언 끼예프 공국은 그리스 정교를 섭취하여 국교로 삼았고 대공 불라지미르 스뱌또슬라비치는 동凍:)로마 황제 바실리우스 I1 세의 누이 안나와 결혼하였으며, 이반 冊세는 동로마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XI 세의 조카딸 소피야와 결혼하였다. 여기에 는 정책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이러한 특수관계를 통하여 러시아 권력자의 정치의식 속에 동로마제국의 정치적 유산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반 冊세는 동로마제국 황제의 문장을 도용하고 자신을 로마제국 황위의 계승자라고 일컬으면서 〈짜리(I.( a p b) 〉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전 슬라브의 대공(大公)으로 군림하였댜 〈짜리〉 칭호는 이반 W 세, 죽 이반 뇌제(雷帝)에 이르 러 공식으로 선포되었지만, 아무튼 이 시대에 이미 전제 러시아의 건설이 진행되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2. 시베리아에로의 식민진출 동슬라브인은 드네쁘르강 중부유역을 중심으로 최초의 집단거 주지를 형성하여 식민활동의 거점을 마련하였다. 그들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드네쁘르 중부유역으로부터 북방, 또는 동북방 쪽으로 새로운 이주지를 개척해 나감으로써 북러시아 전역에 그 범위를 확대시켜 나갔다. 이와 같이 러시아 슬라브인이 북방 혹은 동북방으로 진출하게 된 것은 단순히 이 지역의 저항세력이 약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다 더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 다. 그 첫째 이유로 당시의 농민들은 똑같은 장소에서 오래 머무 르지 않고 주로 토지에 불을 지르고 경작을 하는 방식을 취하면 서 계속 이동을 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그러한 영토를 쉽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둘째로는 끝없이 이어진 산림에는 짐승들이 풍부하여 당시의 귀중한 교역물자인 모피류를 쉽게 얻을 수 있었
2) 花岡止月 B, 『久 弓 r'/民族』, 東京, 1943, pp. 190-191.
기 때문이다 . 3)
3) C. M .Cep eA OHHH, H crop u'l ec 1 'u a 0'l ep 1 ' 3aeoeBaHU JI A3uarc1 'oa Poccuu. Ilep ec eneH11ec1< o e Ynp aB neHHe rnaBaoro Ynp aB neHH JI 3eMney cT p oa cTBO H 3eMJ I8 A8J IH R, AaHaTc1< a 11 PoccH11, Vol. I. IleTep 6y pr , p, · 2.
이돌의 생활수단은 주로 농업이었으나 나중에는 새로운 촌락들 이 형성됨에 따라 점차 상공업도 발달하게 되었다. 특히 노브고로 드 (HoBro pOA) 지방으로 진출한 식민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귀중한 교역물자인 모피 동을 얻기 위하여 북방의 산림지대나 연해지방 울 거쳐 핀란드 만에서 우랄지방으로 진출하였다. 이렇듯 시베리 아에로의 식민적 전개는 유럽 • 러시아 변경지대의 식민을 거쳐 동진하였으며, 이러한 식민적 세력의 동진에 있어서 개척자 역할 을 한 것이 북러시아의 노브고로드인이라고 하겠다. 즉 시베리아 의 토착민과 최초로 교류한 것이 노브고로드인이며, 이들은 II 세기에 이미 시베리아 주민과 교역하고 있었다. 당시 우랄산맥 북부의 동 • 서 양쪽 경사진 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유그라 (rorpa ) 또는 우그라(y r p a) 라고 불리었고, 노브고로드인과 유그라 인과의 접촉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032 년에까지 거슬러 올라 간댜 4) 따라서 유럽 • 러시아의 주민과 시베리아 주민과의 직접적인 교류는 북방지역에서 노브고로드인에 의하여 II 세기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여러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라 할 수 있다 .
4) M. B .merJIO B, Xp 0H OJ IO rmecKHn nep e eHI , BamHenm 끄 惡 H Hiil X B HCTO- PHH CH6Hp H. Hp Ry TC R, 1883 (序說) , C. M. Cep eA OHHH, 같은 책, (AaHaTCRIUI PoccH11), Vol. I.p . 3.
상공업 이 발달한 노브고로드인들은 동방진출을 계속하면서 유그라인을 무력으로 굴복시켜 공납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비록 쌍방간에는 복잡한 분쟁이 오랫 동안 되풀이되긴 하였으나, 13 세기 후반에 이르러 노브고로드인은 유그라인 지역을 자기들의 고울 (BO JI OCTh) 로 만들 수 있었다 .5) 노브고로드 대공이 유그라를 자기의 영지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남러시아 전역을 휩쓸
5) C.M. C ep eA OHHH. 같은 책, p. 4. 노브고로드 대공국은 IO 세기부터 15 세기까지 존속하였고, 수도 노브고로드 는 14, 15 세기에는 러시아산 모피류 를 서구에 수출함으로써 번성하였음.
었던 몽고세력이 북부 노브고로드까지는 크게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하겠다. 깊차크 칸 정권의 지배하에서 러시아의 공후들 이 자주권을 잃고 대외활동에 제약을 받던 시대에도 러시아 평원 북서쪽에 위치한 노브고르드 지방은 몽고세력의 제약을 비교적 덜 받은 데다가 상공업의 활동도 대체로 자유스럽게 행해지고 있었댜 따라서 노브고로드인은 동쪽의 우랄 산맥 너머로 식민진 출을 계속할 수 있었고 , 그 결과 유그라를 영지 (BO JI OCTb) 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 노브고로드 대공국이 펼친 식민정책의 목적은 우세한 권력을 이용하여 교역물자인 모피류를 용이하게 수집하고 또 이 지방을 발판으로 시베리아 안쪽 깊숙이 식민진출을 꾀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브고로드인과 유그라인 간에는 이해관계에 따른 충돌이 빈번히 일어났댜 마침내 이는 유그라인이 노브고로드인을 살해하 는 사건으로 발전하였고, 또 그 보복을 위해 노브고로드인의 원정 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1364 년 노브고로드인이 대대적인 유그라 원정을 하였을 때, 오비 (06b) 강 하구에서 상류로 향하여 교전하 였던 것으로 보아 당시 유그라인은 오비강 연안에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6) 이렇듯 노브고로드인은 시베리아 북서부를 향해 진출 하였지만 그 지역에 있어서 이들의 세력이 결코 강했던 것은 아니었고, 다만 징수관이 강제로 공납을 거두어 들이고 또 모피 홍정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던 정도였다 .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당시 유럽 • 러시아의 대부분이 킵차크 칸 정권의 지배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의 시베리아 진출이 이루어졌고, 그것이 14 세기 후반에는 이미 오비강 유역까 지 미쳤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당시 노브고로드 인은 우랄 산맥을 통과하는 육로와 하천만을 이용한 것은· 아니었 댜 아르한겔리끄에서 북빙양 기슭을 따라 동쪽으로 항해하여 바이가치 (Baara11) 섬과 대륙 사이의 유고르스끼 • 샤르 (l0ro p c 1< 11a map)
6) 大橋與一, 앞의 책, p. 76,
해협을 지나 까라해 (Ka pc 1< oe Mo p e) 로 나와서 야마르 반도의 무뜨 나야 , 제료나야 두 강을 경유해서 오비강 하구에 이른 해로(海 路)도 이미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7)
7) C. M. Cep e JJ. O HHH. 앞의 책, p. 4.
한편 모스끄바 대공국과 우랄 산맥 너머 동쪽과의 직접적인 교섭으로 킴차크 칸의 권위가 실추되고 모스끄바 대공의 권력이 증대되기 시작한 것은 I5 세기 후반부터였다. 이 무렵 유럽 • 러시 안의 북동부 내지는 남부의 변경지역에의 식민은 서서히 진행되 었지만, 우랄 방면에서 습격해 오는 보굴르이인 (Bor y 11LI) , 유그라 인 (IOr p hI), 오스짜끄인 (OcT H. KH) 의 위협은 모스끄바 대공국으로 하여금 새로운 대책을 강구하게끔 하였다 . 이와 관련하여 I465 년 모스끄바 공국은 우랄 지방으로 원정을 시도해 보았으나 소기 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노브고로드 공국이 모스끄 바 대공국과의 항전에서 패하고 몰락하게 되자 자신들의 식민지 에 대한 지배력까지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에 모스끄바 정권은 이 지역의 혼란을 톰타 질서를 회복시키기 위해 I483 년과 I485 년에 걸쳐 우랄 동쪽으로 원정을 단행하였다 .8) 모스끄바 정권이 모피산지로 원정한 것은 결국 노브고로드의 영지를 상실하게 된 결과가 되었다. 이 원정은 비록 오비강 하류에 있는 오스짜끄 인에 대한 명분상의 지배권을 얻는데 그쳤지만, 이반 m 세는 이 원정을 통해 유그라공(公)들의 충성을 받아 내고 시베리아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는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 9)
8) 大橋與一, 앞의 책 , p. 79. 9) 이반 III 세는 1488 년 자기의 칭호에다 〈유고르스끼〉라는 말을 사용했는 데, 이것은 유그라의 영유(領有)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랄 동쪽 지방, 특히 유그라 지방에 대한 원정은 I499 년과 I500 년에도 행하여졌다. 그 결과 피정복(被征服) 지방의 영주들이 모스끄바 정권의 지배력을 인정하고 공납의 의무를 짊어지게 되었다 요컨대 노브고로드 대공국에 대한 종래의 종속관계를 모스끄바 대공국으로 옮겨 그에 대한 복종을 인장한 것이었다.
유럽 • 러시아로부터 우랄에로의 주요교동로 (12 세기 -15 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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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지만 이 새로운 종속관계가 이전의 그것에 비하여 결코 강력한 것은 아니었다. 이와 같은 우랄 동쪽 지방에로의 원정이 계기가 되어 제정
러시아 초기의 시베리아 진출은 획기적으로 진전되었다. 더군다나 지리상 대발견 시대에 유럽인들이 서구에서 신대륙과 동방으로, 특히 인도나 중국으로 항로를 개척하던 것이 러시아 • 슬라브 민족의 시베리아 진출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겠 댜 10) 예를 들어 1553 년 영국함대를 이끈 u. 위로비 동이 러시아 를 탐방함으로써 모스끄바 회사가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와 같은 관계를 통하여 영국인들이 시베리아의 지리적 사정에도, 특히 오비강, 예니세이강 둥의 상태나 선박 항해의 조건 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명하자, 러시아의 대(對) 시베리아 정책 또한 적극성을 띠게 된 것이었다 .11) 3. 시베리아 식민정책과 원정 모스끄바 대공국의 세력범위가 러시아 전역에 미치고 러시아 제정璋政)의 기초가 확립된 것은 16 세기경이었다. 그 무렵 현재의 또볼리스끄 (To60 JI1, cK) 에서 이르뜨이쉬(J1p T Li m) 강을 약 20km 쯤 거슬러 올라간 이스께르 (11cKe p) 성(城)을 중심으로 그 일대에 세력을 가졌던 시비리 (CH6H p b) 라는 소국이 있었다. 원래 이스께르 는 따따르인이 불렀던 호칭으로, 러시아인은 이 나라의 수도를 시비리라고 불렀다. C.M . 세레도닌 교수에 따르면, 이 수도의 명칭이 시비리였기 때문에 이 국토를 시비리(=시베리아)로 부르 게 되었다는 것이다 .12) 그렇지만 시비리국의 꾸춤 (KY11YM) 칸의 영지, 죽 이르뜨이쉬, 도보르, 다비다강의 유역을 포함한 지역이 시베리아로 불리우게 된 것은 예르마끄 (Ep MaK) 의 원정에 의해 몰락된 1580 년대의 일이었다.
10) 大橋與一, 앞의 책, p, 82, 11) 같은 책, p, 82, 12) C. M. Cep e~ OHHH, 앞의 책, p, 6,
그 후 우랄의 동쪽 지방이 점차 제정러시아의 영토에 병합됨에 따라 시베리아가 지칭하는 범위도 확대되어 , 마침내 태평양 연안 까지 포함한 지역의 지리적 총칭으로 되었다. 이와 같 이 시베리아 라는 명칭의 지리상 개념은 역사와 더불어 변천을 거듭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연대기(JI eTonHCb) 의 저자가 〈 시비리 〉 란 호칭을 사용한 것은 그 이전으로 소급된다 . 1407 년의 기록에 〈시비리의 땅 (CM6M p cKaH 3eM JI H) 〉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던 바, 즉 〈깊챠크 칸 토그다민이 쯤메니 부근의 〈시비리의 땅〉에서 살 해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13) 1483 년부터 1500 년까지 행해졌던 모스끄바군의 유그라 지방 원정은 비록 그 성과가 크지는 않았지만 , 시베리아 북서지방의 권력자들에게 모스끄바에 대한 예속관계를 재확인시켜 준 역 할 을 하였댜 그러나 이 예속관계는 모스끄바 정권에 의한 현지관리의 어려움 , 지리적 환경에 따른 저해요인으로 인해 엄격히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까잔, 아스뜨라한, 끄르임 칸국이 차례로 멸망 • 항복하게 되자 시베리아의 권력자들은 큰 충격을 받고 모스끄바 에 대한 종전의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 예를 들어 모스끄바에 대하여 반항적인 태도를 취해 왔던 시비리국의 에디게르 칸은 1555 년 사절을 모스끄바에 파견하여 이반 W 세에게 까잔, 아스뜨 라한 칸국의 점령에 대한 축하를 표명하였다 . 동시에 에디게르는 시비리 주민의 안전과 영토의 보전을 원한다면서 공납을 바치고 징수관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 한편 이반 W 세는 그 사절을 통하여, 매년 러시아 황제에게 담비가죽 l000 장을 바치고 징수관에게는 다람쥐가죽 l000 장을 공납하도록 명하였다. 시비리국은 처음에는 이룰 충실히 이행하였 으나 점차 거역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물론 시비리국 칸 동의 위치가 불안정했다는 이유가 크게 작용하였다 . 그 대표적인 예로 부하라 칸인 무르또자의 아들 꾸춤 (KY 'I YM) 은 1563 년 수도 시비리
13) M. B. J:ne rnoB, Xp o 1t o .11 ,o eu1 'eC Kua nep e 1' eH b ea3 K:H e4wux 8aHHUX e ucrop u u Cu6up u, Mp K ) leK , 1883 , 1407 r'.'
를 점령하여 에디게르 칸을 살해한 다음 스스로 시비리 황제라고 칭하였다 14) 그 역시 처음에는 제정러시아에 대한 충성과 공납을 서약하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를 소홀히 하기 시작하였다 . 이것은 양자간에 분쟁을 야기시킨 한 원인이 되었고, 시베리아 문제는 결국 제정러시아가 식민진출을 하기에 앞서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 꾸춤은 거리가 먼 것을 이용하여 공납의무를 게을리하고 심지어는 러시아령 지역을 침략 하여 시비리국의 수도에서 우랄에 이르는 하천통로를 탈취하였고 뚜라강 유역의 주민으로부터 모피류를 징발하였다 . 이로 인해 제정러시아는 무력수단을 동원하여 철저하게 응징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러시아 정부는 스뜨로가노프 (r p Hro p H n'. CTp or aHOB) 에게 식민사업 경영의 특권을 부여하였고 예르마끄의 원정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 그리고리 스뜨로가노프는 1558 년에 이미 변경지역에서 대규모의 식민사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 뻬르미 (Ile p Mb) 로부터 추소바 강에 이르는 지역에 많은 공휴지와 밀림과 초지가 있음에도 불구 하고 인가도 없이 아직껏 경작되지 않은 채 버려져 있어 국고의 수입원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황제에게 이 지역에 대한 식민상의 특권을 청원하였다 . 그가 요망한 내용은 , 첫째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식민사업지를 방어할 만한 자위력을 기르 기 위하여 화포나 소총 같은 무기와 초병 등을 보유하는 일 , 둘째 하천 , 늪 밀림 등을 개발하여 경지를 조성하고 이주자의 가옥을 건 축하는 일, 세째 염호(鹽湖)를 발견하여 제염사업을 경영하는 일 등에 관한 것이었다 .15) 이반 W 세는 친서를 보내어 이를 기꺼 이 허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향후 20 년간 각종 세금과 부역을 면제한다는 특전도 부여하였지만,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광산의 소유권은 유보시켰다 . 16)
14) 같은 책, 1563r'.' 15) 大橋與一, 앞의 책, p, 88,
16) P ;7.. 卜 7 久毛者, 東西近代史 硏究余譯, 『口夕十東方經略史』,(原題 : Po- ccH11 H Aa 血, 1933). 生活社 1942, p. 32.
그로부터 IO 년이 경과된 I568 년에는 추소바강 하구에서 까마 (RaMa) 강 하류로 향하는 광대한 유역의 식민사업 경영권이 거의 똑같은 특전으로 형 야꼬프 스뜨로가노프에게 IO 년 기한으로 주어졌다 그리하여 I6 세기 후반에 있어서 스뜨로가노프가(家) 최초의 식민사업 경영지가 뻬르미를 중심으로 한 까마강 및 추소 바강의 유역에 설정되었다. 이는 변경지방에 있어서, 특히 우랄 산맥 지대에 근접하여 경영된 식민사업으로서는 그 규모가 대단 한 것이었다. 이들이 식민사업지를 건설하고 있을 당시 까자흐족의 일부가 무리를 형성하여 볼가강을 항행하는 선박 및 연안 주민에 대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정부는 토벌대를 파견하여 수령을 체포 하도록 명령하고, 이들 약탈자들을 사형에 처한다고 미리 선언하 였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도망쳤고, 수령 예르마끄도 다른 수령들과 더불어 볼가강에서 까마강 상류를 향해 도주하였다. 결과적으로 토벌대의 파견과 엄중한 감시로 인해 까자흐인들은 안전한 장소로 도피한 셈이 되었다 .1 7) 예르마끄가 스뜨로가노프가 경영하는 식민사업지에 나타난 것은 1578 년의 일이었다. 이때는 이미 창업자인 야꼬프와 그리고리 형제는 사망하고 이들의 동생 세문과 야꼬프의 아들 막심, 그리고리의 아들 니끼따 동이 사업을 계승하고 있었다 . 예르마끄의 시베리아 원정이 스뜨로가노프가의 식민사업과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였다 .
17) H. R II(er noB, 앞의 책 , “1577r.
예르마끄는 1581 년 약 540 명의 까자흐 원정대를 인솔하여 추소 바강을 거슬러 올라가 그 상류에서 겨울올 보낸 다음, 이듬해 1582 년 봄에 우랄 동쪽으로 이동했다고 전해진다 .18) 하천을 따라
18) 예르마끄가 우랄 동쪽으로 출발한 시기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으며, 그것 은 주로 연대기의 기록의 차이에서 생긴 것이다. 여기서는 C.M. Cep e A- OHBH 의 의견에 따른 것이다.
우랄 동쪽의 뚜라강에 당도한 까자흐인들은 이 지역의 주민들과 충돌하였고, 계속되는 항쟁 가운데 현재의 쥬메니를 향하였다. 예르마끄 자신도 소수의 까자끄를 이끌고 시비리국을 점령한다는 것을 처음부터 의도하지는 않았으며, 다만 큰 전투를 피하면서 주민들로부터 모피류를 징발해서 후퇴한다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전투는 예상 외의 전과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들이 1583 년 가을 뚜뽀르강에 이르고 거기서 이르뜨이쉬강으 로 진격하여 시비리의 수도 이스께르를 점령한 것은 동년 IO 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까자흐는 오랫 동안의 원정으로 인해 지칠대로 지쳐 있었기 때문에 전과(戰果)의 유지조차도 어려운 상태에 처하 였다 그래서 예르마끄는 모스끄바 정부에 대하여 자신의 원정경 과와 전과를 보고하면서 지원군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사전보고도 없이 추진된 이 불경스러운 원정에 대하여 · 정부는 다소 못마땅해 하였지만, 시비리국의 점령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감안하여 1584 년 세몬 볼호프스끼 (CeM ei H BoJI X OBCKH8) 지휘하에 500 명 가량의 지원군을 파견하였다 .19) 모스끄바의 지원군까지 합세 한 원정대는 1585 년 도주한 꾸짐족을 토벌하기 위하여 이르뜨이쉬 강으로 거슬러 올라갔지만, 따라 (Ta p a) 부근에서 따따르군의 습격 을 받아 큰 타격을 입고 예르마끄와 볼호프스끼는 전사하고 말았 댜 이에 잔존자들은 정복지를 버리고 오비강과 뻬추라강을 따라 본국으로 후퇴하였다. 원정군이 철수하자 정복되었던 지방에서는 토후들이 새로 요새를 구축하였으며 시비리국은 다시 시베리아 따따르의 세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시비리국 원정은 주로 까자흐족에 의해 행해졌으 며, 까자흐족은 유럽 • 러시아, 특히 볼가강을 중심으로 한 지방에 서 몽고 세력과 그 분파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시비리국과 싸우 면서 전진하였다. 예르마끄의 원정은 사적(私的)으로 기도되고 또 개인사업과 관련된 것이었으나, 그 진행과정에 있어서 정부의
19) c. B. Baxp ylII HH, 0'l ep 1'U no UCTOp uu 1'0.II OHU3a 싸 uu Cu6up u 8 XVI u XVII 88., Moc1< B a, 1928, p. I53 .
지원군이 파견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시비리국 원정에 대한 모스 끄바 정부의 공식적인 관여라고 할 수 있겠다 . 따라서 제정러시아 초기에 있어서 시베리아 진출이 몽고세력의 서진(西進) 결과에 따라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받았고, 제정 러시아의 동진정책이 사적 원정에 의하여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제정러시 아의 시베리아 식민정책 또는 개발과정이 그렇게 단순하게 이루 어진 것만은 아니라 하겠다.
16 세기 후반의 시비리국
__ 一 예르마끄 원정 경로 iO 80 90 100 110
제 3 장 시베리아의 식민화 과정 1. 시베리아를 향한 식민지 진출 제정러시아의 식민정책은 예르마끄의 시베리아 원정에 대한 지원대의 파견을 계기로 하여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이와 더불 어 당시 이미 우랄 동쪽으로 진출하고 있던 스뜨로가노프가(家) 의 식민사업은 식민정책을 직접 실천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리하 여 I584 년 볼호프스끼의 지원대에 이어 I585 년에 파견된 군정관 이반 만수로프 (11BaH MaHc yp oB) 의 원정대는 오비강, 특히 이르뜨 이쉬강 하구 부근에 보루를 구축하였다 .1) 그후 이 지역에는 보루 들이 잇달아 건설되면서 원정대도 계속 파견되어 군사시설이 증강되었다. 이반 W 세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표도르 I 세가 I598 년에 사망하자, 보리스 고두노프 (Eo p Mc Fo 짜 HOB) 가 권좌를 차지하고 황제 (Ha p b) 라 자칭하였다 정통성이 없는 고두노프에 대항하여 러시아 각지에서는 내란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스웨덴과 폴란 드가 간섭하기에 이르렀고, 그 중 폴란드군은 모스끄바 부근까지
1) M. B. II(e rJIO B, 앞의 책, I585r .••
침공해 왔다 그러나 국가 존망의 위기는 의용군의 궐기로 모면하 였으며, 국민의회 (3eMeKRa co6o p)의 추대를 받아 미하일 표도르비 치 로마노프 (MHxaR JI e ,l\o p oB R' I PoMaHoB) 가 제위에 오르게 됨 으로써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국내외의 위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에로의 진출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비록 이 혼란시대의 시베리아 식민정 책이 가끔 통일성을 결여하고 조직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할지라도 식민운동은 대체로 진전 추세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주로 오비강 유역의 주요지역에 대해 정복적인 식민지화가 진행 되었는데, 이 지방의 정복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한 단계로서 식민정책의 일반적 방침이 거의 완전하게 중앙 정부기관에 의해서 수행된 것이 그 특징이었다 . 총괄적인 계획뿐만 아니라 세부적인 지령도 모두 모스끄바에서 주도되었 고, 그 지령에 따라 현지의 지사(주로 군대업무에 종사함)가 사업 을 이행하였다 .2) 예르마끄의 원정 이후 시베리아에 대한 러시아인의 국가적 진출은 대체로 정복적인 경향을 띠었으며, 특히 시베리아 지방의 식민지 기초건설에 있어서 그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당시 유럽 • 러시아로부터의 식민자들은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에 비해 두 가지 우월성을 지니고 있었다 . 첫째는 정신적인 우월성으로서 정복자들은 강력한 국가권력울 뒷받침으로 제정러시아의 국민이 며 그리스도 교도라는 국민적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는 물질 적 우월성인데 그들은 화기(火器)를 사용함으로써 시베리아의 미개한 원주민들을 위협하였다. 또 성이나 보루를 구축하여 원주 민들에게 위력을 과시하고, 시베리아의 지리적 특징인 풍부한 하천망을 이용하여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도 신속하게 진출을 꾀하였던 것이다. 1600 년에는 북쪽 오비만 연안지방의 전역을 식민지화할 목적으
2) C. B. Baxp ymH H, Ott ep , cu no ucTop u u ICMOHuaa 나 uu Cu6up u B XI u XV- II BB., MocKBa, 1928 , p. 150 .
로 당시 이미 기초가 마련되어 있던 서부 시베리아 경영의 중심 지인 또뿔리스끄로부터 다즈강으로 향하여 대규모의 원정대가 파견되었다 이와 더불어 다른 원정대도 오비강을 거슬러 올라가 면서 위협을 받던 수르그뜨롤 평정시키고 오비강 상류의 나름 지방을 정복하였다. 이 원정대는 더욱 전진하여 오비강 지류인 도미강을 거슬러 올라가 I604 년 똥스끄 시를 건설하였고, 여러가 지 자연적인 장애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1618 년에는 도미강변에 최남단 거점인 꾸즈네쯔 요새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 이와 같이 제정러시아 세력의 시베리아 진출은 1610 년대에 오비강 유역까지 이르고, 유럽 • 러시아 동부 변경에서의 식민사업 은 우랄 동쪽을 향해 진행되어 갔다. 러시아 정부는 특히 스뜨로 가노프가의 식민활동 및 예르마끄의 시베리아 원정 결과를 보다 발전적으로 추진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 더욱이 이러한 식민사업 이 발전함으로써 부분적으로는 새로운 지방에 대한 개발이 수반 되었으나 , 대개는 원정으로써 이루어졌다. 이 또한 대내적인 혼란 시대에 성취되었던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하겠다. 제정러시아의 세력이 우랄 동쪽으로 뻗어가게 되자 시베리아에 대한 식민의욕의 왕성한 민중들은 진출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 중에서도 선두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은 사냥군과 모피류를 수집하던 상인들이었으며, 이들 못지않게 민병들도 시베리아로 진출하였다. 정규 의용군은 공적 기관의 허가에 따라 조직 , 관리 되었으나, 비정규군인 민병은 그 행동이 자유로왔다. 이를테면 요새나 마을의 수비병은 자의적으로 민병대를 편성하여 새로운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그 대부분이 지방주민보다는 사리사욕을 위해 과중하게 모피의 공납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 그렇지만 이러 한 일들이 결과적으로는 지사(知事)의 지배권 확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하겠다. 바꿔 말하면 l7 세기 이후의 시베리아 진출이 모스끄바 정부의 직접적인 지시에 의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정부는 진출의 마무리를 찰 하여, 죽 점령된 지방에 대해 정치조직를 형성하여 마침내는 그 지방을 영유하게 되었던
제 3 장 시베리아의 식민화 과정 43
것이댜 3) 예니세이강 유역의 식민화는 오비강 지류인 께찌 (KeTb) 강의 남쪽 교통로와 만가제야를 경유하는 북쪽의 교통로를 이용해서 이루어졌다 남쪽 교통로를 따라 께찌 요새 , 마꼬프 요새 , 예니세 이 요새 동이 차례로 구축되었고 I630 년에는 렌스끼 수륙로(水陸 路 : JleH CI< H R BO JI O I<)와 일림스끄 요새도 건설되었다. 이것은 차후 에 레나강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발견하는 데 있어 중요한 거점이 되었댜 북쪽 교통로를 따라 예니세이강 지방으로 향한 러시아인 은 예니세이 하류지방에 이르고, 수로를 따라 동진한 사냥꾼들은 I Q 1] 기 말에 이미 다즈킹에서부터 예니세이 수륙로 (EHHC0RC I< HR BOJ IO I <) 를 거쳐 예니세이강 지류인 뚜르한강으로 나왔으며, 17 세기 초에 는 뚜르한스끄에 근거지롤 마련하였다. 이곳 또한 그후 러시아 • 슬라브 민족의 식민적 동진凍:進)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 댜 러시아인은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모피류를 획득하고 모피를 공납받기 위하여 예니세이강의 하구지방에 도착하였으며, 그중 일부는 북동쪽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뜬드라 지대의 수렵에 종사 하였댜 또 다른 일부는 예니세이강을 거슬러 올라가 뚱그스족과 오스쟈족을 제압하고 예니세이강의 지류인 니즈나야 뚱구스까 강, 뽀드까멘나야 뚱구스까강의 상류지방을 향해 전진하였다. 러시아인의 레나강 지방 진출은 주로 내륙의 하천을 따라 행해 졌을 뿐만 아니라 항해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1633 년 일리야 뻬레피레프 (vl Ji bSI Ile pe q> H p eB) 는 사냥군과 더불어 레나강을 하항 住航)하여, 하구로부터 해로를 따라 동진하여 야나 (HHa) 강 어구에 이르러 강을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새로운 활동지역을 개척하였던 것이다 . 이것은 단순한 항로개척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의 정복지 확장을 뜻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1620 년대에 제정러시아의 권력적 진출이 예니세이강 유역으로 옮아가 그 지방의 지배권을 서서히 확장시켜 가고 있을
3) 大橋與一, 앞의 책. p. 110.
무렵, 러시아 • 슬라브인의 정복적 식민활동은 이미 레나강 지방까 지 뻗치고 있었다. 요컨대 예니세이강 지방을 발판으로 하여 레나 강 지방의 식민지화가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러시아인에 의해 점령된 지방으로부터 사냥군 무리가 레나강 지방으로 이동하였 고, 그 배후로부터 민병을 비롯하여 기업가들이 동진하여 토착민 과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풍부한 자원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 그런데 특히 레나강 지방에로의 진출과정에서 현지의 관 • 민 관계가 소원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상호 충돌이 일어났기 때문 에 정부는 시베리아 경영에 대한 종래의 태도를 바꾸어 강력한 통일정책을 펴기로 하였다. 그래서 특별임무를 띤 총독제가 시행 되어 새로운 지방에서의 군무지사(軍務知事) 등의 행동을 각별히 감독하고 예니세이, 만가제야, 똥스끄 동 지방군인들이 레나강 지방으로 마음대로 여행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리하여 17 세기 러시아인은 광대한 미개지역의 요충지를 비교적 단시일내에 식민 지화시켰으며, 마침내 오호뜨스끄 해 (0xOTCKoe Mo p e) 까지 다다르 게 되었다
시베리아 통일정책의 일환으로 1640 년에는 레나강변에 독립된 야꾸뜨스끄(fli
4) M. B. merJIO B, 앞의 책, “1638r.” 에 따르면 총독이 취임한 것은 1 야 0 년 이라고 하였으나, C. B. Bax pym HH( 앞의 책, p. I 야)에 따르면 야꾸뜨스끄 정청 창설은 1642 년으로 되어 있다.
17 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상과 같은 통일정책이 실시된 이면에 는 두 가지 측면이 있었다고 보겠다. 첫째는, 제정러시아의 시베 리아 정복영역이 대체로 서쪽이 우랄 산맥에서부터 동쪽의 오호 뜨스끄 해안에까지 확장되어 그 지배권이 시베리아 전역에 퍼짐
으로 인해 시베리아의 통일 실현이 정치적으로 요청되었가 때문 이댜 둘째는, 유럽 • 러시아의 변경지방에서부터 오비강 유역까지 의 식민지화가 거의 완수된 이래 비계획적으로 이루어진 정복적 식민활동의 결과가 국가권력에 의해 관할되고, 앞으로의 시베리아 경영에 대한 관 • 민의 동향이 국가방침에 따라 조정될 수 있게끔 시베리아 식민지의 영속화를 꾀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 워낙 광대한 시베리아의 정복은 극히 개괄적이었고 그 지역내 에서도 원정이나 탐사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 적잖게 잔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시베리아의 지배권도 포괄적일 수밖에 없었고, 지역내의 잡다한 민족에 대한 지배관계도 순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듯 광대한 영역에 걸친 정치조직 울 우선 확립하고, 다수의 이종족과의 접촉이나 교섭으로 사회질 서를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였다. 2. 17 세기 중엽의 원정 탐험 I) 시베리아 동부의 탐험사업 제정러시아가 시베리아 통일정책을 촉진하기 위해서 설치한 야꾸뜨스끄 정청은 레나강 지방의 중심적 행정기관이 됨과 동시 에, 레나강 유역과 극동지방의 탐사와 연구의 근거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 정청의 개설과 더불어 시베리아 동부에 대한 탐험과 탐사사업이 잇달아 계획, 실시되었다. 1636 년과 1637 년에는 예니세 이-부자의 해로탐험이 계속되었고, 야꾸뜨스끄의 군인들은 레나강 을 내려가 북빙양 연안을 따라 탐험선(探險線)을 연장하면서 동북 쪽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이들은 1640 년대 초에 아라제야강을
5) 大橋與一, 앞의 책, p. 120.
발견하였고, 1643 년 경에는 꼬루마강에 이르러 이 강 유역을 탐사 함과 동시에 방위책도 강구함으로써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 16 세기 말부터 17 세기 초까지의 혼란시대를 거친 제정러시아는 이후 전반적으로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으며 주로 해양산업을 목적으로 한 동방에로의 해상 교통로가 개척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꼬루마강에로의 해로가 열렸기 때문에 북빙양 해안을 따라 더 먼 동쪽을 향한 탐험열이 왕성해졌고 , 결국 그것은 추꼬두스끼 반도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같은 탐험활동은 결과적으로 새로 발견된 지방에 대한 제정러시아의 지배권이 확장되는 계기 가 되었고, 경제적 이권을 목적으로 하는 산업상의 의의도 갖게 되었다 특히 당시에는 바다의 상아(p꼬 6HR ay 6) 라고 불리우던 고가품 특산물을 얻으려는 욕구가 높았기 때문에 탐험사업이 더욱 활기를 띠기도 하였다. 이같은 탐험사업에는 많은 희생과 어려움이 뒤따랐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탐험대가 조직되었다. 1648 년에는 C. M. 제즈 네프(,Il; e 油 HeB) 의 지도 아래 아나돌리강 탐사룰 취하여 7 척의 배로 이루어진 대규모 탐험대가 편성되어 꼬르마강 하구로부터 동쪽으 로 항행하였다. 이 탐험선단은 도중에 폭풍을 만나 난파하였으나, 시베리아 동북단凍:北端)의 탐험항해가 〈제즈네프 곶(坤 )(M 꼬 C ,Il;em HeBa)), 죽 볼리 쇼이 • 까멘느이 • 노스 (Bo11 1, moR KaMeHHLI8 Hoc) 에 처음으로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돌이 베링해 (Be p HBrOBO Mop e) 해안에 표착한 것이 확실시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야말로 북빙양으로부터 북태평양에로의 항로룰 개척한 최초의 탐험대라 고 말할수 있겠다 . 따라서 〈만일 제즈네프의 항로가 보다 일찍 알 려졌다면, 아시아의 아메리카 대륙간에 해협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가 17 세기에 이미 밝혀졌을 것이다〉 6) 라고 말할 수 있겠다. 17 세기 중반 이후 시베리아 동북부에로의 탐험, 탐사활동은 해로뿐만 아니라 육로와 하천로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죽 야꾸
6) B. B. Bop TO J ibA , Hcrop u ,i Hay 'leH UJ i Bocro,c a s Esp on e u Pocc 叫 JleH HH- rpa A , 1915 , p. 188.
뜨스끄를 기점으로 활동한 탐험대는 레나강을 내려가서 아르딴강 을 거슬러 올라간 후 베르호얀스끼 (Be p XO Jl HCKHR) 산맥을 넘어 야나강 상류지역에 이르렀다 . 또 야나강에서 연산지대(連山地帶) 로 동진하여 인디기르까 상류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꼬루마강 상류지역에 도달하였다. 이 꼬루마강은 베링해 연안방면과 오호뜨 스해 북부연안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 발견의 출발점이 되었 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은 꼬루마강에서부터 그 지류인 아뉴이 (&IIOR) 강을 거슬러 올라가 수륙로를 따라 아나돌리강 상류로 들어간 다음 베링해의 아나드이르스끼 만 (AHaA 1,1p cKHR aa JI HB) 에 도달하였다 2) 시베리아 남부의 탐험사업 원정 탐험에 의한 러시아인의 동방진출은 17 세기 중반에 야꾸 뜨스끄를 주요 근거지로 하여 거기서부터 . 북동방향과 동방의 연해지방 쪽으로 계속되었다 . 이와같은 활동의 한 결과로서 깜가 뜨까 (KaM11aTKa) 의 식민지화 내지는 식민지적 발전의 기반이 I8 세기에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정 탐험에 의한 진출은 레나강 상부지역 또는 아무르 (AM yp)강 지방으로도 이루어져 제정 러시아의 시베리아 통일정책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을 뿐만 아니 라 접경지방과 국제적인 교섭도 갖게 되었다 . 야꾸뜨스끄 정청의 권력이 레나강 상류지방으로 신장하면서 모피세 부과제가 점진적으로 시행되었고, 1642 년에는 야꾸뜨스끄 군인들이 바이깔 (Ba :0: Ra JI)호 부근의 레나강 상류지에 베르홀렌스끄 (Be p xo Ji eHCK) 를 건설하였다. 한편 1648 년에는 예니세이스끄의 이반 갈껀 (lIBaH I' a JI KHH) 이 바이깔호의 북안을 돌아 바르구진 (Ba p ry aHH) 강의 하구에 요새를 구축하였다. 이리하여 예니세이스 끄에서 파견된 러시아인은 예니세이스끄 정청의 권세를 예니세이 강 상류지방에서부터 레나강 상류지방까지 확장하였다. 이들은 점령한 지역에 축대를 쌓고 토착민에게 공납을 강요하였다 . 따라
서 예니세이스끄 정청과 야꾸뜨스끄 정청과의 지리적 환경이 매우 복잡하게 얽힌 예니세이, 레나 두 강의 상류지방에서는 지배 권력 관계와 경제적 이해관계가 상호 경쟁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 댜 시베리아 동부 해안으로의 교통로를 발견하기 위한 러시아인의 활동은 1640 년대 상업적 기업의욕이 고취됨에 따라 적극화되었으 며, 이와 관련하여 아무르강에로의 교통로를 발견하기 위한 시도 또한 계속되었다. 시베리아 4 대 하천의 하나인 아무르강은 다른 세 하천과는 달리 수로방향이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르강 의 위치와 지형적인 이유로 인해 러시아인이 이 하천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비교적 늦었지만, 뒤늦게나마 이 방면에 대한 관 • 민의 관심은 점차 커지기 시작하였다. 초대 야꾸뜨스끄 군정 관인 뽀야르꼬프 (B . ,n; . IIo .11p KOB) 에게 레나강에서부터 아무르강 지류인 쉴까 (mM JI Ka) 강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탐색하도록 명한 이후, 야꾸뜨스끄를 근거지로 한 남방의 교통로 탐사 및 권력적 진출은 눈에 띄게 두드러졌다. I643 년 뽀야르꼬프는 약 I30 명의 까자호인돌로 편성된 원정 탐험대를 이끌고 야꾸뜨스끄를 출발, 레나강을 하항하여 아르단강에 이른 후 그 지류인 우라우르강으 로 이동 , 스따노브이 (CTaHoBo :A:) 산맥을 넘어 아무르강 지류인 제야 (3e .11)강에 도달하였다. 이렇게 아무르강 지류에 들어선 이들 은 제야강, 아무르강 주류를 하항하여 I644 년 오호뜨스끄 해에 이른 다음, 그 해안을 따라 우리야강 하구에 당도하였다 . 거기서 다시 우리야강을 거슬러 올라가 수륙로를 거쳐 마야 (Ma .11)강 상류 에 이른 후, 아르단강을 하항하여 야꾸뜨스끄로 귀환하였다.7) 또한 하바로프(E. II. Xa6a poB) 는 I, 2 차에 걸쳐 아무르 지방의 탐험에 나서기도 하였다 . 그는 I649 년 I 차로 70 명의 까자호인을 이끌고 레나강 지류에서부터 오레구마 지류를 거슬러 올라가 수륙로를 거처 아무르강 지류에 도착하였다 제 2 차는 I65I 년 IIO
7) 같은 책, p.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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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가량의 사냥군과 까자흐인이 합세한 약 400 명의 원정대가 편성되어 아무르강 지방으로 출동하였다. 이 제 2 차 원정대는 원주 민의 저항을 물리치고 알바진(AJI 6aaHH) 을 점령하였으며, 제나강 하구를 바롯한 중요한 지점에 마을을 건설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하바로프의 원정활동은 처음에는 야꾸뜨스 끄 정청에서 자금지원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개인재산이 동원되어 이루어졌다 . 따라서 그의 원정활동은 기업가로서의 개인이익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국가적 사업으로서의 의의를 지니 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의 원정탐험에 의해 아무르강 방면으로 러시아인의 진출로가 개척되었고 이와 동시에 침략적 성격을 띤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분규사건이 일어 나기도 하였다 8) 이렇게 볼 떼 그들의 아무르강 지방 원정활동은 사적 의도에 의해 행해지긴 하였지만 야꾸뜨스끄 정청이 간접적 으로 간여하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밖에도 이 지방에 대한 식민적 진출이 계속되었는데, 모스끄 바 제국은 이 지방을 짜리의 지배하에 예속시키기 위하여 1653 년 지노비예프 특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예니세이강 에서부터 아무르강으로 통하는 길은 열리고, 공식적이든 비공식적 이든 모스끄바 제국과 변경지방의 왕래가 빈번해져 갔다. 3. 아무르강 지역으로의 진출과 러 • 중관계(네르친스끄 조약) 뽀야르꼬프의 탐험에 의하여 1643 년에 발견된 교통로, 즉 아르 단강을 거슬러 올라가 우찌우르강과 수륙로 및 제야강을 통과하 여 아무르강에 이르는 12,3 주간의 경로는 레나강 지방과 아무르강
8) C. B. Baxp ymH H, 011ep 1'u no ucrop u u KOM JH uaaq uu Cu6up u B XVI u XV- II 88., M ocKua, 1928 , p. 166 .
지방을 잇는 제 1 의 간선이 되었다. 또 하바로프의 탐험에 의하여 개척된 교통로, 즉 오레구마강 하구로부터 뜬기르강과 수륙로를 통과하여 아무르강계로 들어서는, II,2 주간의 경로도 레나강 지방 과 아무르강 지방을 잇는 간선이 되었다. 이러한 교통로와 더불어 예니세이강 지방에서 아무르강 지방으로의 교통로도 앙가라강에 서 그 지류와 수륙로를 거쳐 아무르강 상류에 이르는 교통로도 개척됨으로써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 남부, 특히 아무르강 지방으 로의 진출의욕이 고취되었다 . 레나강, 예니세이강 지방과 아무르 강 지방의 연결은 제정러시아의 시베리아 식민지화에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관계로 이 지역에서 여러가지 시도가 이루어졌지 만, 아무르강의 역사적, 지리적 사정으로 인해 아무르 문제는 러시아와 중국과의 국제분규를 일으키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 댜 하바로프의 원정 탐험 후 오레구마강一 - 뜬기르강―수륙·로_아무 르강계의 교통로에는 탐험자, 사냥꾼, 장사꾼들이 개인적 이익을 위하여 밀어닥쳤다. 그것은 이 지방에 광물자원이 풍부하였고, 특히 시르까강의 하류지역에는 동광, 연광이 많았으며, 농산물 가운데서도 곡물이 풍부했기 때문이었다 .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 정부차원에서 볼 때 시베리아 통일정책을 저해시키는 요인이 되었으므로 정부는 I656 년에 유럽 • 러시아 지방에서 이곳으로 군인, 사냥꾼, 농민들이 탈출하는 것을 감시하고 관세를 거두기 위하여 오레구마강 하구에 초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9) 한편 이 지역에 대한 러 • 중 분쟁은 제정러시아의 영토확장이 그 한계에 다다랐음을 보여주었다. I653 년 러시아는 똔기르스끄 수륙로 (T yHrH p CK 떄 BO JI OK) 를 확보하기 위하여 촌락 겸용의 요새를 세워 물자를 저장시키려 하였으나, I659 년 중국이 이곳을 습격해 요새를 파괴하고 말았다. 아무르강 지방의 원정에 참여하고 있던 빠쉬꼬프(A. IlaIIIKoB) 등은 I658 년 치안과 농사를 맡기 위해 네르
9) C. B. Baxp ym HH, 앞의 책, p. 135.
친스끄 요새를 세워 점령지역의 영속적인 지배를 꾀하였으나, 그의 부대가 쑹화쟝(松花江) 하구에서 중국군에게 패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I659 년에는 I6 g년 하바로프에 의해 건설된 군사거점 인 알바진스끄 마을도 역시 중국군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이와 같이 러시아인의 세력이 후퇴하자 중국측은 한층 더 공세 를 강화하였다 . 똔기르스끄 촌락을 습격했던 중국군은 러시아인의 퇴각에 편승하여 수륙로를 점령한 뒤 더욱 북상하여 오레구마강 변의 러시아인 요새까지 밀고 올라갔다. 중국인들은 여태까지 러시아인의 점령 아래 있던 민중들로부터 모피류를 징발하고 그 점령지역을 더 확대시키기 위한 호기를 엿보고 있었다 . 이에 앞서 알렉세이(心 IeKCen) 황제는 바이꼬프 (EanKOB) 등을 대중국 사절단으로 파견하였다 . 이들이 러시아의 수도를 떠나 시베리아로 향하여 오비강 지류인 이르뜨이쉬강을 거슬러 올라간 다음 육로로 몽고를 지나 뻬이찡(北京)에 도착한 것은 I656 년의 일이었다 러시아 황제가 사절단을 파견한 표면상의 주요 목적은 러시아와 중국간의 우호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교섭하는 일이었 다 그러나 바이꼬프 사절에 대한 황제의 훈령속에는, 러시아 황실에 대한 중국 황제의 태도와 의도, 사절에 대한 중국 황제의 반응 동을 관찰하는 일, 중국 국민의 경제생활 및 신앙, 군비, 도읍의 정황, 무역 및 거래경로 동을 조사하는 일, 또 러시아의 수도에서 뻬이찡까지의 통로를 측정하는 일 등이 포함되어 있었 댜 10) 따라서 아무르 지방에서 잇따라 야기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은 아니었다 . 더욱이 사절단 일행이 당시 일반 에게 개방된 경로, 죽 바이깔_-아무르 지방울 통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볼 때 정부가 러 • 중 간의 경쟁에 직접 관여하기를 꺼렸 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사절단 방문의 궁극적 목적은 제정러시 아의 시베리아 진출에 대한 중국측의 의향을 객관적으로 고찰하 고 그 결과를 전반적인 시베리아 통일정책에 참고하려는 데 있었
10) H. B. Ill;er noB, 앞의 책, 1654r'.'
다고 하겠다. 그러나 러시아 사절단은 외국사절들이 관례적으로 지켜야 하는 중국예법을 거부했기 때문에 중국황제와 만나지 못하였다 . 마침내 사절단은 뻬이찡으로부터 퇴거를 요구받고 떠났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황제의 훈령에 위배되지 않고 사절임무를 달성하려던 이들의 노력도 무위로 돌아갔다. 바이꼬프 사절단이 러시아로 귀환했을 무렵 아무르강 지방의 러시아인 세력은 이전에 비해 훨씬 활발하지 못하였다. 중국 청조의 태종이 처음으로 군대를 아무르강 쪽으로 출동시 킨 것은 1636 년이었고 러시아인의 아무르강 유역 진출은 I640 년의 일이었댜 그러나 중국인은 아무르강 남쪽에서 북쪽 영역을 범하 지 않았고 러시아인 역시 아무르강 북쪽에서 남쪽 청조의 유역을 침범하지 않았지만 그 지방의 토착주민이 청조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인에게 저항했기 때문에 양국의 충돌이 일어났다 .11 ) 17 세기 중엽 러시아인의 아무르강 지방 진출은 만주에 대한 위협이었기 때문에 중국의 반격은 당연한 일일뿐더러 점차 국제적인 성격까 지 띠게 되었다. I668 년 강희제(康熙帝)의 만주 초간령(招堡令) 폐지 및 봉금령(封禁令) 실시로 인해 만주지방의 변경수비의 강화 가 요청되었고, 또한 그것은 러시아인의 남하진출에 대한 중국측 의 적극적 대응을 촉진하게 되었다. 또 청조가 아무르강 이북지방 에 대해서 종주권을 주장한 것은 러시아인이 이미 점령한 지방에 대한 중국측의 진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I7 세기 후반에 있어 러 • 중 관계의 한 국면은 극히 긴장된 경향을 보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적 교섭에 의하여 보다 복잡해지는 추세를 보여주었다. 특히 I670 년에 이르러 모스 끄바 정부가 중국과의 통상문제와 관련하여 아무르 지방의 교통 로를 중시하고 그 확보를 위해 적극적인 방책을 강구하려 했던 사실은, 이 지방의 여러 문제들이 모스끄바 정부와 빼이찡 정부와
11) 失野仁一, 『 近世支那外交史』 , 東京, 1941' p, 757.
의 외교적 수단에 의해서 처리될 수 있는 소지를 남겨주었다 . 모스끄바 정부는 I675 년 스빠파리 (H.r. Cna ifi a p ua) 를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중국에 파견하였다. 이 사절은 중국으로의 교통로 룰 상세히 조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밀한 지도를 작성하라는 특별지령을 받고 있었다. 1676 년 스빠파리는 친서를 가지고 양국 간의 분쟁에 관한 교섭을 시작하였다. 이때 중국측은 러시아인은 아무르강 침입을 중단하고 야꾸뜨스끄 지방에서 중국인과 무역하 는 데 그쳐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 교섭에서 스빠파리는 아무르강 및 제야강 하류의 이민족은 중국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과, 이들로 부터의 공물의 징수를 중지한다는 것에 동의하였지만, 러 • 중 간의 현안문제를 해결하여 조약을 체결하자는 것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12) 그러나 그는 중국의 실상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 뿔리스끄로부터 중국 국경에 이르는 교통로의 정확한 기록을 작성하는 데 성공하여 1678 년에 귀환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아르바진 요새에 서한울 보내 아무르 강 , 제야강 유역의 토착민으로부터 모피공세(貢稅)를 징수하지 말라고 권고하였으나 현지의 러시아인은 이룰 무시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1677 년 제야강 상류에 진지를 구축하고 1679 년에는 제야강 전역을 장악하려 했기 때문에 러 • 중 관계는 대립적인 경향이 짙어갔다 1659 년 알바진의 정략敵路) 이후 중국측이 아무르강 지역에 대하여 대규모 출동을 하지 않았던 것은, 외교수단에 의하여 러 • 중 관계의 긴장을 완화시키면서 무력충돌을 피하고, 다른 한편으 로는 국내의 긴급문제를 처리한 후 기회를 노려 러시아 세력을 소탕할 방침을 세웠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13)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러시아측으로 하여금 열세를 만회하고 군사근거지를 증설 또는 강화할 수 있게끔 해주었다. 한편 중국측도 국내사정이 일단 안정되자 군비를 확충시키면서 강경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
12) 大橋與一, 앞의 책, p. 139. 13) 위 의 책, p. 140.
다 예를 들어 1683 년 네르친스끄의 러시아군 지휘관에 대하여 최후 통첩을 보내 제야강 강변의 요새로부터 철수할 것을 요구하자 러시아측은 부득이 이 지역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그 후 중국군이 알바진 요새를 철저하게 파괴하였지만 잇따른 러시 아군의 반격으로 알바진 요새를 에워싼 러 • 중 간의 무력충돌은 첨예화되어 갔다. 알바진스끄 공방전이 재개되자 러시아측은 1686 년 I 월 국경문제 에 관한 대중교섭(對中交涉)을 위하여 전권사절 골로빈(.A. f'OJ IO BHH) 등을 보냈다. 이들은 1687 년 IO 월 셀렌가강변의 셀렌긴스끄의 도착하였고, 중국측은 처음에 이곳을 교섭회의지로 정하여 전권사 절 쑤어투(索額圖), 시우궈왕(修國綱) 둥을 파견하였으나, 그들은 치안상의 장애문제로 목적지까지 도달하지 못하였다 .14) 그래서 회의지를 네르친스끄로 변경하여 사절단을 파견하게 되었고 쑤어 투는 선교사인 프랑스인 장청덴長誠), 포르투갈인 쉬즈성(徐日昇) 을 대동하여 1689 년 7 월 현지에 도착하였다. 골로빈에게는 러 • 중 국경을 아무르강을 따라 그 하구에 이르 는 선까지 할 것, 만일 그것이 용의치 않을 경우 제야강을 경계로 삼을 것, 또 어떠한 경우에도 알바진을 확보할 것 등의 훈령이 주어져 있었다. 그러나 쑤어투는 알바진스끄의 군사시설을 파기하 고, 아무르강 좌안에서 러시아인의 철수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회의는 일시 중단상태에 빠졌으나, 어쨌든 교섭 이후 우여곡절을 겪은 후 9 월 3 일 회의에서 국경 책정문제는 일단 타협을 보게 되었다 결국 알그인강과 실까강 지류인 고르비짜(I' op 6H~a) 강의 연결선을 서방의 경계로 하고, 동쪽으로는 아무르강 북쪽의 모든 지류와 동시베리아의 모든 강과의 분수령을 북방경계로 하여, 동방의 우드스까만(y RCKa .1l ry 6a) 을 태평양 연안상의 경계로 삼기 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알바진은 중국 영역에 속하게 되고 그곳에 주둔한 러시아군은 네르친스끄로 이동하였으며, 네르친스끄에
14) 失野仁一, 앞의 책, p. 6.
파견된 중국군은 철수하면서 알바진 요새를 파괴해 버렸다. I689 년 네르챈스끄 조약의 결과 중국측은 종래 러 • 중 간의 분쟁지역인 아무르강 주요 유역지대를 자국의 영토로 확인한 셈이 되었고, 러시아측은 시베리아 식민활동의 진전과 더불어 원정탐험결과로 점령한 아무르강 상류지역을 자기의 영역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르강 지방의 중심 거점이 된 네르친 스끄는 중국세력을 배제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러시아인이 먼저 건설한 곳이다. 당시 아무르강은 자연교통로로 식민정책상 그 가치가 충분히 인식되지는 못했으나, 강의 주요 유역이 러시아인 의 식민적 발전에 큰 장애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 (17 세기말경)
ICXXI . 2!00 .,
제 4 장 18 세기의 혁신정책과 학술탐험 1. 18 세기초 시베리아의 식민화 문제 네르친스크 조약에 의하여 새로운 러 • 중관계가 정립되었을 당시 러시아에서는 아직 극동정책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반면 청국에서는 강희(康熙)시대의 국가권세가 전성시대를 이루고 있었 댜 1) 그 무렵 알바진 요새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인의 경작지는 2,700 에이커에 달하였으며전 공세징수뿐만 아니라 개척사업에 있어 서도 뚜렷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지만, 이 지역이 네르친스크 조약 에 의하여 중국측에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아무르강 지방의 점령 기도가 좌절되자 러시아인은 결국 나호뜨까해 방면 으고 눈을 돌려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대중국관계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뾰뜨르 1 세, 죽 뾰뜨르 대제 (IleT p Be JI H l< H8) 가 정치적으로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네르친스끄 조약의 결과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였지
l) 失野仁一, 앞의 책, p: 762. 2) 위의 책, pp. 泊 3 구Q.
만, 이에 대한 조치에 앞서 우선 해결해야 될 유럽의 국제문제와 러시아의 내부문제에 직면하였다. 그가 황제로서 특히 통감했던 일은, 러시아가 유럽의 다른 선진제국에 바해 문화적 • 군사적으로 많이 뒤떨어져 있으며, 러시아의 풍속과 관습에 아시아적인 요소 가 많고 정치적 지배조직에 몽고적 잔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 댜 이와 더불어 해양으로 향하는 좋은 문호가 없고 선박마저 적다는 사실은 그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 긴급하고 중요한 과제는, 첫째로 선진 서구문화를 후진 러시 아에 도입하는 일과, 둘째로 의국과의 교류가 용이한 해양 문호를 획득하는 일이었다 .3) 그는 반대세력과 불평분자를 몰아내고 자신 의 의도대로 개혁을 단행하였다. 종래의 귀족의회 (EoH p cKaH 짜r Ma) 를 없애고 황제의 자문기관으로서 원로원을 설치하여 독재권력에 의한 통치방식을 확립하였다. 더욱이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인정 하지 않고 스스로가 러시아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신설된 신성종교회의(神聖宗敎會議 ; CHHO )J;)에 국교(國敎)상 최고의 권 위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공업을 일으키고 교통망을 확장시켰으 며 교육기관을 확충하고 사회시설을 개선하는 등 제정러시아의 문화적 향상과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였다. 또한 그는 I72I 년에 발틱해 연안에 새로운 도시 뻬쩨르부르그 (IleTe p6 yp r) 를 건설하여 제정러시아의 새로운 정치 중심지로 만듬과 동시에 해양으로의 문호를 개설함으로써 유럽제국과 견줄 수 있는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고 세계 문제에 관여하고자 시도하였다. 뾰뜨르 I 세의 서구진출 개척과 시베리아 식민과의 상관관계를 살펴본다면, I8 세기 초기의 제정러시아로서는 서방과 동방이 각기 다른 국제발전상의 과제를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서방에서 의 과제는 서구 제국과의 복잡한 교섭으로 인하여 국제적 지위가 제약된 채 해양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것이며, 동방의 과제는 광대 한 미개발지역을 대상으로 제약된 식민지 정책에 의해 대륙진출
3) J. H. Robin s on, Resent Europ e an Hist o ry, 1921 . p. 376 .
을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제정러시아가 해양진출을 함으로써 획득 하고자 했던 것은 러시아 사회를 향상시키고 국제적 지위를 강화 시키기 위한 선진 서구문화였다. 한편 대륙진출에 의해서 얻으려 했던 것은 풍요한 자원이었는데, 식민적 개발을 함으로써 궁극적 으로는 시베리아 식민사회를 건설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네르친스끄 조약 체결 후 서진정책을 중점적으로 펴왔던 제정 러시아는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주로 통상, 종교의 문제와 이따금 국경문제에 관한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시베리아 원동지 방의 식민지화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러 • 중 간의 관계가 소원 해졌고, 따라서 양국관계를 시정하고 국교를 조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자연히 네르친스끄 조약으로 인한 정치적 패배를 완화하기 위하여 러 • 중 무역의 진홍에 힘을 쏟았다 .4) 그러나 네르친스끄 조약에 따르면, 양국인은 소정의 수속을 거친 후 국경을 자유롭게 왕래하여 무역활동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었 다 그런데 러시아측은 사적 무역뿐만 아니라 정부 주도의 대상 (隊商)무역도 추진하였다. 이 이면에는 무역관계와 더불어 정치관 계도 러시아측에 유리하게 전개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5) 1694 년 뾰뜨르 I 세는 국고수입을 위하여 앞으로 매년 뻬이찡에 무역대상을 파견한다는 칙령을 내렸으나, 1698 년의 칙령에 따라 무역사절단을 2 년에 한 번씩 파견하는 것으로 수정 되었다 그래서 1698 년으로부터 1718 년 사이에 정부주관 무역단이 IO 차례 뻬이찡에 도착하였다 .6) 러시아 정부는 무역단을 파견할 때 러 • 중 무역을 위하여 특별히 세무관과 위원을 임명하였고 동시에 많은 상인과 대리인들도 동행하게 하였다. 수출품은 주로 모피류였고 나머지는 피혁과 잡화 동이었다 . 수출은 해마다 증가 추세를 보였으며 다람쥐류의 모피 따위는 연간 수출량이 200 만
4) 大橋與一, 앞의 책, p. I50. 5) 失野仁-, 앞의 책, p. 762. 6) 위의 책, pp, 763-764,
내지는 400 만 장에 달했으며, 중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은 주로 목 면, 면직물, 의약품 둥이었다 이렇듯 러 • 중 간에 공인된 무역은 상당한 규모로 발전되었는데, 특히 러시아측으로서는 아무르강 변경지방을 국제적 문호로 삼아, 주요 수출품으로 시베리아의 생산물을 팔았으며, 또 수입품의 대부분은 시베리아 식민지롤 거쳐 유럽, 러시아로 들여와 국고 수입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렇게 되자 러시아 정부는 중국정부에 대하여 (I) 통상상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제정러시아의 대표기관을 뻬이찡에 상주 시키고, (2) 중국 영토내에서 러시아 주민의 러시아 그리스 정교 (正敎)를 보호하기 위하여 교회를 건설하며, (3) 전도사를 떼이찡 에 주재할 수 있게 하는 것7) 등을 요구하기 위하여 1692 년 이즈브 란뜨 • 이제스 (Ma6 p aHAT·MAec )8)를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뻬이찡 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이듬해인 1693 년 뻬이찡에 도착했으나, 중국측은 뾰뜨르 I 세의 친서에 중국황제의 이름이 무례하게 러시아 황제의 이름 밑에 표기되었다는 이유를 구실삼아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교섭도 시작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 채 귀환하고 말았다.
7) 제정러시아는 시베리아 식민지화 과정에서 원주민에 대한 포교활동도 행 하여 왔는데, 그것이 18 세기 초에 이르러 한충 강화되었다. 중국 영내의 러시아인을 위한 포교사절은 그로부터 약 IO 년 뒤인 1714 년에야 파견 되어 그 활동이 공식으로 인정되었다. 8) 이즈브란뜨 이제스는 덴마크 출신으로 젊었을 때 러시아에 왔었다 . 그의 러시아식 이름은 이즈브란뜨 (Ma6PaBT) 이다.
그 후 뾰뜨르 I 세는 뻬이찡에 정치 대표를 상주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고, 다시 이즈마이로프 사절단을 보냈다. 이들이 뻬이찡 에 도착한 것은 1720 년 II 월이었다. 사절단에 대한 중국측의 태도 가 극히 정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얻어낸 성과는 겨우 특파사절의 뻬이찡 상주와 교회당의 건설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721 년 3 월 이즈마이로프 사절단이 뻬이찡을 떠나자 중국측의 태도가 돌변하여 북경의 상주대표인 란게마저도 뻬이찡에서 퇴거
당하였다 강제퇴거의 공식적안 원인은 그가 중국 및 인근 제국의 정보를 수집하라는 러시아 정부의 훈령에 따라 활동하던 중 당시 뻬이찡 주재의 조선대표를 책동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이에 대한 중국 정부의 기탄(思情)으로 알려져 있다 . 9) 이렇듯 러 • 중관계는 순조롭게만 진행된 것이 아니라 악순환의 변화를 많이 겪어 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정러시아 사절로 파견된 라구진스끼 (Par y aHHCRHR) 는 1727 년 중국정부와 교섭하여 부린스끼 (B yp HHCRH 0:) 협정을 체결하였고, 이는 1728 년 비준된 까프다 조약에 의하여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러 • 중 국경은 안군 강에서 서쪽으로 더 연장되어 샤빈다바, 죽 예니세이강 상류까지 설정되었다 이 분계가 반드시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사얀 스끼와 딴누 • 올라 양 산맥 사이의 우랸하이 지방을 둘러싼 분쟁 을 야기시킨 것 외에는 별로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더욱이 까프다 조약은 통상 및 종교에 관해서도 규정하여 러 • 중 무역과 포교의 조건이 일단 명백해졌다. 특히 까프다 조약에 의해 이른바 〈어루어쓰관 (1我 羅斯館)〉의 부지내에 교회당 건설이 재확인되고 3 인의 사제직이 보강되었다 . 한편 중국측은 만주어 • 중국어를 연구하는 러시아인 유학자 4 명과 러시아어, 라틴어에 능통한 러시 아인 학자 2 명을 초빙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러시아와 중국 간에 문화교류가 시작되었다는 의의를 지니는 것으로 중국 정부는 이들의 왕복여비뿐만 아니라 유학비용까지도 부담하였다. 2. 깜차뜨까 지방의 식민지화 17 세기말 러시아인의 아무르강 지방에 대한 식민적 진출은 네르친스끄 조약에 의해 극히 제한된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제정
9) B. B. BapT O J I&,A, Hcrop u u Ha y 11eH 꼬 Bocro,c a e Eep o ne u Poccuu, Jlea HH- rp a ,A , 1915, p, 197.
러시아로서는 이 조약의 불바何여備)로 인해 속출하는 사건을 해결 하면서 정세의 만희를 꾀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적 진출방향을 바꾸어 북동방의 오호뜨스끄 연해지방에서 깜차뜨까 반도에 걸친 진로를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베리아의 북동 부에 위치한 깜차뜨까에 대한 러시아인의 정복적 식민은 1697 년 내지는 1698 년에 걸친 아뜰라소프 (B. B. AT JI 8COB) 의 원정탐험을 계기로 전개되었다血 더욱이 깜차뜨까의 산림지대에는 모피수 (毛皮獸)가 풍부한 데다가 해안지대에는 바다표범이 많았기 때문 에 오호뜨스끄해 연안까지 미치고 있던 당시의 식민적 탐사활동 은 최후의 미답사 지역인 깜차뜨까에 대해 관심을 고조시켜 갔 댜 아뜰라소프의 제 1 차 탐험에 대한 보고는 정부의 시책을 구체화 시키는 자극제가 되어, 그는 뾰뜨르 I 세로부터 다시 깜차뜨까 원정을 명령받았다 . 그러나 그는 뜬구스까강에서 상품을 적재한 선박을 습격, 약탈했기 때문에 동행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1) 1707 년 깜차뜨까에서 깜차다르의 반란이 발발하자, 아뜰라소프는 석방되어 반란의 진압에 앞장섰기 때문에 다시 깜차뜨까의 원정 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깜차뜨까룰 식민지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그 반면 그의 난폭한 행동은 깜차뜨 까의 질서를 해치는 결과를 낳았다. 두 차례에 걸친 원정에 의해 깜차다르의 반란은 일단 진압되긴 했지만, 원주민의 생활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들은 공세 (福) 때문에 모피류를 징발당했을 뿐만 아니라 강제 부역으로 많은 노동력을 착취당했으므로, 풍부한 모피수(毛皮獸)가 있었음에 도 불구하고 생활은 가난에 찌들어 있었다 . 더욱이 국고수입을 도모하기 위하여 파견된 징세관들은 그 지위를 남용, 값비싼 모피 류를 부당하게 수집하여 사리를 채우고 있었다 . 이로 인해 징수관 들 사이에 세력투쟁이 일어났고 한편으로는 깜차다르 동 원주민
10) C. B. Baxpy mH H, 앞의 책 . p, 165, 11) H. B. ID:e rJio B, 앞의 책, 1701'.'
의 반감이 격화되었다 . 아뜰라소프도 반란진압 후 권력을 남용하여 막대한 모피류를 수집, 사리를 채웠기 때문에 징세관들과의 충돌이 잦았고 부하의 신뢰를 잃고 말았다. 더욱이 징세관과 까자호인들의 부정행위가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사회질서가 전반적으로 혼란하였다 . 특히 까자흐인들은 징세관들이 부당하게 감춰둔 모피류를 약탈하려고 마침내는 I7II 년에 까자흐 수비대의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대장 아뜰라소프를 비롯한 징세관들을 살해하였고 전재산울 몰수 하여 폭동에 참가한 까자호인들에게 분배하였다. 이 사건으로 개혁의 필요성과 더불어 급선무로서 폭도에 대한 조치를 취해야 만 되었다 . 그러나 충분한 군사력을 갖지 못했던 야꾸뜨스끄 정청으로서는 직접적으로 폭도를 토벌하기보다는 그들을 회유하여 폭력적인 성향을 해외진출로 전향시키는 방침을 취하였다. 그래서 폭도들 자신이 뽑은 꼬즈이 렙 스끼 (M.II. Koa 따 eBCKHn) 를 대 장으로 하여 속죄한다는 명분으로 꾸릴 열도 (K ypH JI LCKHe ocT p ona) 의 탐험과 일본 변경의 탐사를 시켰다 . 제정러시아의 식민정책에 있어 흔히 볼 수 있는 상투적 수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깜차뜨까 수비대의 폭동은 시베리아 식민정책사상 가장 특기할 만한 사건으로서, 폭도에 의한 해양탐험사업이 시작되었다 . 꼬즈 이렙스끼 인솔하의 탐험대가 꾸릴 열도를 충분히 탐방하지 못한 채 철수해야 했던 이유로서는, 지휘자 자신의 항해지식 부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당시 꾸릴 열도와 일본 변경의 지리적 사정이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더러 그 관심도 적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때문에 제정러시아 정부는 시베리아 동북지방의 식민지화 사업의 일환으로서 꾸릴 열도 방면의 실정을 정밀하게 조사하기 위한 탐험사업을 계획하 였댜 이에 I7I8 년 야꾸뜨스끄의 옐리친 (E Ji b떄 HH) 군정관의 지도 아래 깜차뜨까 및 인근 육지의 조사를 목적으로 탐험대가 편성되 었댜 12) 그러나 이 탐험대 역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12 IIep e cenemecKoe ynp邸 neHne rnaBHOro yn p aB neHHn 3eMney cT p o n- CTBa n 3eMnexexH Jl: Aa 四 TC 짜다 PoccuJ t, Vol. II, IleTep 6 y pr , 19 나 , p. 6 p .
때문에 뾰뜨르 I 세는 1713 년 루진(Cl>.Cl>. Jly mHH) 과 예브레이노프 (M.M. EB p 80HOB) 를 중심으로 편성된 탐험대를 다시 파견하였댜1 3) 이돌은 꾸릴 열도를 따라 남하하여 다섯번째 섬까지 이르렀으 나 폭풍 때문에 더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이들이 당국에 대하여 섬의 사정을 보고하였음은 물론이고, 이웃 도서 및 일본의 군사상 황에 대해서도 보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이들의 보고는 비록 정확한 정보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그 후의 탐험 과 탐사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13) 위의 책
17 세기 말 깜차뜨까 원정탐험이 시작된 이후 시베리아 동북부 변경의 깜차뜨까 지방에서는 새로운 이주자의 대부분인 까자흐인 들과 깜차다르 같은 원주민과의 사이에 끊임없는 싸움이 반복되 었댜 그러나 1730 년대에 깜차다르 반란이 해결되면서부터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잔인한 투쟁을 지속해 왔던 러시아인은 새로운 식민정책으로 식민지 지배권의 기초를 다져갔다. 죽 원주 민을 살상하는 행위에서부터 그들을 문화적 생활로 유도하는 활동으로 전환하였던 것이댜 우선 원주민에 대한 모피류의 강제 공납을 완화함과 동시에 새로운 경제부문으로서 농업 및 목축업 울 고려하였다 . 예를 들면 1732 년 깜차뜨까에서의 곡물생산을 위해 최초로 파종실험이 행하여졌고, 또 같은 해 정부의 지시에 따라 약 30 가구가 레나강 지방에서 이곳으로 파종실험을 위하여 이주하였다. 동시에 약 200 마리의 가축이 시험적으로 사육되었 댜 U) 이 실험 둥이 당초에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이러한 시도에 의해서 깜차뜨까 지방은 이른바 정복시대를 지나 바야흐로 식민시대의 경제적 개발로 그 일보를 내디몄다고 볼 수있다. 변경지방의 경제개발에 있어서 운송 및 교통시설은 1 차적 중요
14) M. B. mernOB, 앞의 책, 1732r'.'
성을 지닌 것이지만 , 깜차뜨까 지방에서는 1732 년부터 오호뜨스끄 항구건설이 시작되었다. 종래 깜차뜨까 반도로 향한 도로는 오호 뜨스끄해 연안을 따라 까랴끄 점거지를 경유하게 되어 있었으 나, 북극지방에로의 보다 편리한 교통로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오호뜨스끄—디길리_오호뜨스끄의 해로 개통은 이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또한 오호뜨스끄 항구의 건설은 해군 근거지 창설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 항구의 건설을 위해서 정부는 그리고리 삐사레프 (r p HrO p Ha IlHca p eB)1” 를 기용하였다. 그는 오호뜨스끄 항구 건설, 선박 4 척 건조, 방위업무를 위한 까자호인 300 명 배치, 경작을 위한 농민 50 가구 이주, 목축을 위해 원주민 30 명 징용, 영지 관리인의 감시, 상인에 대한 면세특 전 부여, 여행용 막사의 건설, 그리고 모피류 교환에 의한 주류 제공 등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16) 그 후 이 항구는 시베리아 북동 쪽, 특히 깜차뜨까 반도의 식민지화 내지는 개발을 위한 업무에 주요 역할을 담당하였다.
15) ..2훈土人-끄 항구의 건설계획은 1731 년에 결정되었고, 이 사업은 당시 레나 강변의 지간스끄에 유형중인 전 해군대학 교장 그리고리 삐사레프 가 기용되어 담당하게 되었다. 16) 大橋與一, 앞의 책, p. 166.
3. 학술적 탐험사업 미지 • 미개지방에 대한 개별적 탐험 및 탐사활동은 18 세기 중엽에 이미 시베리아 극동 변경뿐만 아니라 그 부근 해역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이같은 활동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었음은 물론 러시아인의 식민적 동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 댜 시베리아, 특히 변경지방의 식민지화 정책이 강화되면서부터 탐험과 탐사활동에는 국가권력이 개입하게 되었다 . 통제적인 경향
이 농후해졌고, I8 세기부터 I9 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학술적 조사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뾰뜨르 I 세가 처음에 계획했던 것은 메세르쉬치미뜨(,n; .r. Mecce p ~MH~T) 의 학술탐험이었다 그는 뾰뜨르 I 세에 의해 러시 아에 초빙된 외국 학자로서 I7I8 년 n 월 칙명에 따라 시베리아로 파견되었다 그의 주요임무는 시베리아의 지리학 , 역사학, 인종학 에 관한 조사연구였고 , 부수적으로 주목할 만한 특이사항과 약용 식물에 관한 조사였다 .17) 요컨대 그의 활동에 기대된 것은 과학적 방법에 의한 학술적 성과였었다 . 그는 1719 년 3 월 1 일 뻬쩨르부르 그롤 출발하여 3 월 27 일 귀환하기까지 또뿔리스끄, 똥스끄, 예니 세이, 이르꾸뜨스끄 동 여러 현(縣)들과 자바이깔스끄 주(州)를 답사하였고, 또 네르친스끄에 가서 만주 서부지방 일대를 조사연 구하여 많은 학술적 업적을 남겼다 . 또 당시 아시아와 아메리카와의 지리적 관계를 연구조사하는 작업은 시베리아 식민지방의 진전과 관련 있는 중요한 현안문제 로서 뾰뜨르 I 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1725 년 탐험계획을 수립 하였다 이른바 제 I 차 베링 탐험이 그것인데, 대장 베링 (11.B. Bep 11 Hr) 은 I704 년 이후 러시아 정부에서 근무하던 덴마크인이었다. 탐험 선은 1728 년 오호뜨스끄를 출항하여 깜차뜨까 반도를 우회, 아시 아대륙 북쪽 끝에 도달하였다. 탐험대는 이 지점에서 해안선이 서방으로 뻗어 있다는 것과 아시아와 북미 사이에 육지의 접속부 분이 없고 다만 양쪽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다는 점, 즉 나중에 〈베링〉이라고 불리어진 해협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 라브렌 짜 (0.CB . JlaB p e HTH) 섬도 발견하였다. 탐험대는 1729 년에 귀항하였 지만, 베링이 뻬쩨르부르그 정부에 탐험결과를 보고한 것은 1730 년의 일이었다 18) 이러한 제 1 차 베링 탐험의 결과는 제정러시아의 식민정책상 커다란 과제를 제시해 주었다. 북방에로의 항행가능성 문제와
17) 같은 책, p. 170. 18) B. B. Bap T oJ I:i.p;, 앞의 책, p. 212.
시베리아 북쪽 해안을 따라 유럽 • 러시아에 도달할 수 있는 북빙 양 항로의 발견과 그에 따른 학술적 조사연구의 수행방법이 제시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과제는 아무르강 하구까지의 수로 및 일본열도로 향하는 항로를 탐사하고 , 가능하다면 일본과의 유리한 통상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방도를 모색하는 일이었다 .1 9) 이렇듯 제 I 차 베링 탐험은 국가적 사업으로서 실시되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의를 찾을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은 새로운 방향 으로의 발전 가능성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 大橋與一, 앞의 책, p. 172_
그 결과 아파나시 쉐 스따꼬프 (A q> aHac .n R Iq ecTa I< OB) 와 이 반 페도로프 (HBaH e ]J. O p OB) 의 탐험이 전개되었다. 수도에서 제 1 차 베링 탐험이 계획되었을 무렵 추꾸츠족의 정착지방에 대한 탐험 도 기획되었댜 당시 추꾸츠족은 베링 해안으로부터 인데르기르까 강, 또 북빙양에서 아나드이리강에 이르는 지역을 점거한 채 인근 의 까랴끄족을 정복하고 대안(對岸)의 알라스카 에스키모족과 교섭하고 있었다 . 이들은 러시아인에 대해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 고 있었기 때문에 깜차뜨까 지방의 완전한 식민지화와 북미대륙 에로의 식민적 진출에 있어 큰 장애물이 되고 있었다. 1726 년 추꾸츠족 점령을 위해 세스따꼬프를 지휘자로 하는 탐험대가 편성되었다 . 세스따꼬프는 1727 년 뻬쩨르부르그를 떠나 볼리샤 야 • 제믈랴 (Eo JI bmaH 3eM JI H)20) 를 향해 떠나던 중 완강한 추꾸츠족 의 저항에 부딪혀 1730 년 전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하 페도로프 가 탐험대를 지휘하여 베링 탐험과는 별도로 북미대륙으로 향하 여 1732 년 알라스카의 프린스 웨 일즈 (c . Pr inc e of Wales) 곶에 도착, 연해지방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 이는 바로 러시아인이 최초로 북미대륙에 도착한 사례이며, 페도로프는 깜차뜨까에 귀환 한 후 오호뜨스끄 항만사무소에 보고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지 고 있다 21)
20) 〈볼리샤야·제믈랴〉는 러시아인이 추꾸츠족의 말을 러시아어로 직역하 여 부른 것으로, 그것은 북미대륙의 알라스카 지방울 의미했다고 한다.
21) 같은 책, p. 173.
그 후 제정러시아의 시베리아 개발사상 한 시대를 이룩한 학술 적 탐험이 잇따라 이루어졌고, 마침내 I733 년에는 대규모 아카데 미 탐험 대 (aKaReMHq e cKaH 3KCneRMnHH) 가 조직 되 었다. 이 것은 베 링 이 그 대장으로 임명됨으로써 〈베링 대탐험대〉 또는 제 2 의 베링 탐험 대 , 대 북방탐험 대 (60JI b man ceBep Ha H 3KCneRHnMH) 라고 불리 어 졌다 이 탐험대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구체적인 임무가 부과 되어 22) 약 IO 년에 걸쳐 수행되었다. 첫째는 아시아와 아메리카와 의 지리적 관계에 관한 실지조사를 중심으로 한 해양탐험, 둘째는 시베리아의 상세한 학술조사를 중심으로 한 육상탐험이었다. 육상 탐험에 있어 학술 조사연구의 총지휘는 독일인 ]. G. 구멜린 (Jo hann Georg Gume lin)에게 위임되었댜 그 외 프랑스인 J. N. 도릴 Oose p h Ni co lac De li sle) 은 천문학상의 조사룰 맡았으나 I74I 년 깜차뜨까에서 사망, 끄라쉔니꼬프 (C.11. K p ameHHHKOB) 가 그 뒤를 이어 주로 측지 조사룰 담당하였다. 독일인 G. F. 뮬러 (Gerhard Freid r ich M ii ller) 는 역사 조사를 지휘하였고, 시베리아 역사에 관한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 독일인 J. E. 피셔 Oohann Eberhard Fis h er) 역시 역사에 관한 조사연구를 하였는 데, 특히 깜차뜨까에 관한 연구는 정평이 나 있다 .23) 당시 대학에 적을 두고 있던 끄라쉔니꼬프도 1755 년 『깜차뜨까 지지(地誌)』를 저술한 바 있다.
22) C. B. Baxpy mH H, 앞의 책, p, 37. 23) 大橋與一, 앞의 책, p. 175.
이같이 각 분야에 걸친 전문학자들의 조사보고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으며, 광대한 범위에 걸친 대규모 학술탐험은 제정러시아의 시베리아 개발과정에 있어서 또 다른 측면의 현저한 문화적 사업 이라 할 수 있겠다.
제 5 장 시베리아 개발과정에 따른 통치제도 I. 16-19 세기초의 통치제도 제정러시아의 시베리아 식민지화가 전개됨에 따라 식민지개발 울 보다 조직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군정(軍政)이 촉진되었다. 1590 년 꼴리쪼프(B. B. Ko Ji b~OB) 군정관이 지배하는 식민지의 수도 로 뜨뿔리스끄가 지정되어 이를 기초로 식민지화 활동이 더욱 적극화되었다. 이 군정기지의 전설과 더불어 모스끄바 정부는 의무청 (IIoco Ji bC I< H R: n p H I< aa) 을 설치하였다 당시 제정러시아로서 는 시베리아 식민지화 초기 단계였으므로, 그 활동은 극히 미약했 으나, 외무청은 시베리아 식민지화 및 식민지 관리를 목적으로 본국정부에 설치된 최초의 기관으로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 그후 시베리아 통치의 중심은, 1596 년 외무청에서 귀족 고두노 프가 주관하던 행정기관으로 옮겨졌고, 1599 년에는 다시 까자흐 정청微廳)의 소관으로 옮겨져 1637 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시베리아 현지에서의 식민지화 진척에 따라 1628 년 관할구역은 다시 뜨뿔리스끄부(部)와 똥스끄부(部)로 양분되었다. 시베리아 식민지역이 확장되고 군정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모스끄바 정부의
통치기구 확충이 요청되어 1637 년 시베리아청 (CH6H p CRHR np H xaa) 이 설치되었다 . I8 세기초 뾰뜨르 I 세의 내정개혁과 대외진출 정책은 시베리아 의 식민화 또는 식민지 통치제도에서도 나타났다. I708 년 뜨뿔리 스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시베리아현(縣)이 생김으로써 시베리아 청은 폐지되었다. 시베리아현은 최초의 시베리아 식민지로서 특별 취급되던 우랄 동쪽 지역뿐만 아니라 우랄 서쪽의 유럽 • 러시아 변경지역, 특히 뻬르미 (IIe p Mb) 지방의 대부분을 관장하였다 . 따라 서 이 시베리아현은 관할지역이 광대하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미개발된 이민족이 혼재하고 있던 유럽 • 러시아의 동쪽 변경지역 과 식민지화된 우랄 동쪽에 새로운 지역을 포괄하였다는 점에서 복잡하고도 특이한 성격을 띠었다고 볼 수 있다 . 시베리아 식민지 개발과정의 초기단계인 군정제도에는 여러가 지 폐단이 뒤따랐었는데 현정(縣政)실시 후에도 식민지화 내지는 통치방법에 있어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 특히 초대 현지사로 임명된 마뜨페이 가가린 (M.II. rara p HH) 은 불법행위 를 저질렀기 때문에 1719 년 소환, 사형 선고를 받아 2 년 뒤 뻬쩨 르부르그에서 처형되었다 . 그러나 당시 시베리아 식민지에서 자행 되던 불법행위는 비단 지사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행정 관리, 상급군인들도 범법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뾰뜨르 I 세는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행정감찰제도를 실시하였다. 행정감찰 관으로 하여금 현정의 부정을 원로원에 보고케 하여 이에 따라 엄밀한 조사와 그에 대응하는 처벌이 가해졌던 것이다 . 초대 현지사의 부정과 숙청으로 인해 차후 시베리아현에 대한 정책은 보다 신중하게 대처되었다. 1719 년 제 2 대 현지사로 알렉세 이 체르까스끼(A. M. q ep xacRH :0:)가 임명됨과 동시에 시베리아 식민 지의 지방행정이 새로 구분되었다. 종래에는 행정구역이 지나치게 광대한 데다가 군(郡) 소재지들이 먼 곳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관리상의 어려움이 많이 야기되었다. 이에 현정의 합리적 운영을 위 하여 시 베 리 아현을 세 개 의 지방(.np OBHH~H .11)으로 나눠 각각
부지사가 배치되었다 . 당시 시베리아 식민지화는 포괄적으로 원동 지방에까지 미치고 있었으나, 러시아인의 분포나 주민들 생활과의 긴밀한 관계는 여전히 서부 시베리아 지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시베리아현의 주요 군과 면(ffii)' 가구수는 1719 년에 실시된 아래의 통계자료에 나타난 바와 같이 지역적 편재경향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시베리아 현의 주요 군, 면에 등록된 가구수(1 719 년)1)
1) H. B. ~erJio B , Xp o1 10,1 1o zu11ec1 'u tl nep e11 eHb Ba:, ,c1 1elhllux 8a11111 >1.X 6 UCTop u u Cu6up u, Hp Ky TC K, 1883 , 1719r'.'
군,면 가구수 군,면 가구수
1724 년 미 하일 돌고루꼬프 (M. .,D; o Ji ro p)'R OB) 가 제 3 대 현지사로 임명되자, 그는 시베리아 식민지 경영의 재정 기반을 닦기 위한 수단으로 인두세(人頭稅) 제도를 시행하였다. 동시에 방위시설을 담당하는 인원을 충당시키기 위해 주민 가운데서 청년층을 확보 하는 시책을 단행하였다. 후자의 경우 시베리아현의 청년들은 다른 지역으로 전출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이들은 시베리아 수비
대의 보충병 역할을 하였다. I730 년에는 원로원 관장 아래 시베리아를 총괄적으로 담당하는 기관이 설립되었다 . 이는 시베리아를 통치하기 위한 정부내의 중앙관청으로서 그 주된 임무는 정부시책이 시베리아 식민지에 직접적으로 실행되게 하고, 종래 비난 대상이 되었던 지방관리의 횡포를 막고, 유럽 • 러시아로부터 시베리아의 정치적 격리현상을 완화시키는 데 있었다. 따라서 이것은 제 2 의 시베리아청(聽) 시대 라고 할 수 있겠다 1731 년 제 4 대 시베리아 현지사에 알렉세이 쁘레쉬체예프(A. JI. IIpe ~eeB) 가 임명되었는데, 당시는 시베리아의 식민적 개발 과정에 있어 학술탐사가 활발히 전개되었고 식민사업의 조정 내지는 사회질서 의 기반이 확립되어 가던 시기였다. 또 이 시기에 특이할 만한 사실은 전 시베리아의 통신망이 확충되었다는 것이다. 유럽 • 러시 아 지역과 시베리아 식민지방 사이의 우편연락 보급이 계획되어 1733 년의 명령에 따라 실시되었다 . 죽 모스끄바에서 또볼리스끄까 지 월 2 회, 예니세이스끄에서 오호뜨스끄 및 깜차뜨까까지는 격월 에 I 회씩 규정되었다 .2) 아직 교통로가 발달되지 않았던 시기였고 더욱이 그것을 이용할 때 많은 위험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변경지 방까지의 장거리 우편연락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교통 로 정비 및 연해지방의 개척이 요구되었고, 그것은 또한 도로망의 정비와 더불어 그 지역의 문화적 발달을 촉진케 한 수단이 되었 댜 1743 년 제 6 대 시베리아 현지사에 임명된 스바레프(A. M. CBap eB ) 는 시베리아 귀족의 칭호가 누리고 있던 특권과 세습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일종의 사회제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I757 년 제 8 대 시베리아 현지사에 임명된 소이모노프(.If. CoHMOHOB)3) 는 시베 리아 현정사상 상당한 업적을 남겨 원주민으로부터 존경받았다. 오호뜨스끄 항해학교룰 개설하고, 바이깔호에 동대를 설치하고,
2) 같은 책, “ 1733r'.'
3) 그는 뾰뜨르 1 세의 신임을 받은 학식이 풍부한 인물로서, 백해의 지도와 까스삐해 연안의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1740 년 해군차관 재직중 본의아 닌 화를 입어 시베리아에 유형되어 오호뜨스끄지방의 제염장에서 일하게 되었으나, 예까째리나 여제가 그의 무죄를 인정하여 시베리아 현지사로 발 탁되었음.
항구를 만들고, 옴스끄 요새선(要塞線)을 건설하여 끼르기즈인 (KMp r 惡)의 침입을 막는 둥 지방의 번영을 위해 일했기 때문에 1763 년에는 원로원 의원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 예까쩨리나 여제(女帝) 시대에 이르자 시베리아 식민지에 대한 소위 식민제국(植民帝國)의 풍부한 건설이 촉진되었다. 그녀에 의해 시행된 주요시책은 다음과 같다. 가. 〈시베리아 왕국 (Ca6a p cKoe n. a p cTBO) 〉의 출현과 시베리아청 의 페지 예까쩨리나 11 세 치하의 제정러시아는 시베리아 식민지를 〈시베리아 왕국〉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기본 영역으로서 유럽 • 러 시아와 종속 영역으로서 시베리아를 형식상 분리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러시아의 황제가 양자의 최고 권력자임을 재확인함 으로써 통일적 연계를 강화하고 전제정치의 내실을 기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1730 년대 이후 이른바 제 2 의 시베리아청 시대를 이루어 그곳을 관장했던 시베리아청은 1763 년 폐지되고 원로원도 시베리아 통치에 대한 관할권을 잃게 되었다. 그 반면 러시아 황제의 의지에 따라 설정된 정책이 현지 기관에 의해서 직접 실시되었다. 요컨대 시베리아 식민지는 형식상 유럽 • 러시아에 대한 종속적 관계에서 벗어나 〈시베리아 왕국〉으로서 독립된 지위가 부여됨으로써 황제의 전제적 지배가 더욱 강화되었던 것이다 .
나. 이민족에 대한 보호책 예까쩨리나 II 세는 시베리아에 있는 이민족이나 이종족에 대한 보호책을 공포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 즉, 제정러시아에 살고 있는 모든 납세민뿐만 아니라 앞으로 러시아에서 살아가려 는 이민족에 대해서 그들이 희망하는 안정된 생활이 반드시 보장 되어야 한다. 러시아 신민(臣民)은 이들 공납 이민족에 대하여 친절하게 대하고 호의를 베풀며 압박, 약탈, 강간 등의 해를 끼쳐 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사소한 손실도 주어서는 안된다. 만일 이 칙령을 위반하였을시는 법률에 따라 엄중하게 처단하며, 이 포고를 시베리아 전역에 주지시키기 위하여 공시한다 4) 는 내용이 댜 이에 따라 정착 이민족에게 토지를 주어 생활의 기반올 마련 케 하였고, 새로 온 사람들에게는 생업상의 편의를 도모해 주어 정착하게끔 해주었다 . 다. 시베리아 화페의 발행 형식상으로 유럽 • 러시아에 대한 종속관계에서 벗어난 시베리 아 식민지는 1763 년 새로운 화폐제도를 설정하였다 . 이에 따라 시베리아 왕국의 문장을 새긴 시베리아 화폐가 시베리아산 구리 로 만들어지고 관청과 민간에서 통용되었다 . 이 동화는 IO 꼬뻬이 까, 5 꼬뻬이까, 2 꼬뻬이까, I 꼬뻬이까, ½ 꼬뻬이까, % 꼬뻬이 까 등으로 주조되었는데 나중에는 시베리아에서뿐만 아니라 유 럽 • 러시아지역에서도 통용되었고, 총 발행액수는 500 만 루블에 달했다 그러나 1781 년 6 월 7 일의 법령에 의거하여 그 발행은 중단되고 말았다.
4) H. B. m;er noB, 앞의 책 , 1763 r'.'
라. 시베리아 현제(縣制)의 개혁-제 1 차 총독제의 실시 시베리아 식민지를 〈시베리아 왕국〉으로 호칭함과 동시에 시베 리아의 이르꾸뜨스끄 지방을 이르꾸뜨스끄현으로 개칭하는 칙령 이 1764 년 n 월 I9 일에 공포되었다 . 이리하여 또볼리스끄롤 현청 소재지로 하는 시베리아현과 이르꾸뜨스끄현을 합친 〈시베리아 왕국〉이 생기게 된 것이다 . I766 년 〈시베리아 왕국〉의 인구는 시베리아현이 257,452 명, 이르꾸뜨스끄현이 37,566 명 정도였다 . 5) 1782 년과 I783 년 총독제 (HaMeCTHH tJ eCTBO) 가 시행됨으로써 시베 리아 식민지의 통치조직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를테면 1782 년에 또볼리스끄와 똥스끄 두 지방울 하나의 관할구역으로 해서 또볼 리스끄에 총독이 배치되었다. I783 년에는 이르꾸뜨스끄, 네르친스 끄, 야꾸뜨스끄, 오호뜨스끄, 4 개 지방을 하나의 관할구역으로, 또 현으로 개편된 꼴르이바니 (Ko JI HBaHb) 지방을 다른 관할구역으 로 해서, 이 두 관할지역을 위한 총독이 이르꾸뜨스끄에 배치되었 다 요컨대 식민지화된 시베리아는 세 개의 관할구역으로 분할되 어 두 사람의 총독이 관장하게 된 것이다. 예까쩨리나 II 세의 창의에 따라 설치된 총독제는 소기의 성과 도 거두기 전에 여제의 사망으로 새로운 개혁이 기도되었다. I796 년 I2 월 I2 일 러시아 제국 신행정계획에 관한 칙령으로 총독 관할구역이 현으로 개편되었고, I797 년 3 월 4 일 시베리아 식민지 통치제도 변경에 관한 칙령으로 총독제는 폐지되었다 . 이와 같이 예까쩨리나 II 세의 개혁이 현실화되지 못한 이유로는, 유럽 • 러시 아 지역으로부터 러시아인의 이주가 점차 증가된 데다가, 그들에 의해서 개발된 지역이 형식상이긴 하지만 유럽 • 러시아로부터 분리된 왕국으로 취급되었고, 또한 지방의 특수 여건을 고려치 않고 행정계획이 변경되었다는 데 있었다. 이렇듯 시베리아 식민지통치에 관한 제도의 변화는 19 세기에
5) 같은 책, 17() 6r ,
들어서도 되풀이되었다 . 1801 년 6 월 7 일의 칙령에 의해 시베리아 식민지의 실세조사가 행하여지고 , 통치제도에 관한 신중한 검토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알렉산드르 I 세는 1803 년 총독제를 다시 부활시키고 , 칙령에 따라 시베리아를 세밀하게 시찰하고 귀환한 셀리폰또프 (U.0. Ce JI R
6) 같은 책, 18o5( 7) B. B. BapT O m .A, HcropU Ji Hay UJi Bocro1' a B Espo ne u Poccuu, Jlea HH- rp ~. 1915, pp. 233-234.
던 시기였댜 뻬스켈리는 그의 지위를 남용하여 식민지 주민을 탈취하였으며, 그가 임명한 뜨레스낀 (T p ecKHH) 이르꾸뜨스끄 현지 사를 통해서 현지 주민의 불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리사욕을 채웠댜 총독은 현지에 가지도 않고 수도인 뻬쩨르부르그에 머문 채 뜨레스낀 지사에게 지시만 내리고 총독의 직무를 대행시켜 불법행위를 자행케 하였다. 예를 들어 곡물의 부당한 강제매입과 판매, 불량품의 묵인, 지방관청의 권력남용, 언동의 엄중한 통제, 그리고 이러한 비리에 대한 주민의 탄원을 가로막는 감시망과 그에 따른 희생 등이었다. 결국 정부는 시베리아 총독의 경질뿐만 아니라 모든 제도의 근본적 개혁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2. 스뻬란스끼 총독의 제도개혁 1819 년 3 월 22 일 마침내 뻬스켈리 총독이 파면되고 그의 후임으 로 제 3 대 총독에 M.M. 스뻬란스끼가 임명됨으로써 학정으로 고통받던 시베리아 주민들은 큰 희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시베리 아 통치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시베리아 역사를 식민지 화 내지는 식민통치의 변천과정에서 개관해 볼 때, 예르마끄(?- 1584) 의 시베리아 원정 때부터 뻬스켈리 총독까지의 시기는 무력 정복과 권력지배가 그 특징이었다고 한다면, 스뻬란스끼 총독의 식민지 제도개혁 시기부터 제정 말기까지는 경제적, 문화적 개발 이 그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시베리아 역사가 술로브쪼프 (IT. A. CnoB II. OB) 는 〈스뻬란스끼, 그의 이름은 모든 시베리아 연대기에서 잊혀지지 않는 영원한 것으로 남을 것이다〉 8) 라고 예찬하였고, 바긴(B. H. BarHH) 은 스뻬란스끼에
8) C. B. Baxp ymH H, Oep, cu no ucrop u u 1' 0AOHuaa 서 uu Cu6up u B XVI u XVII 88,, MocKBa, 1928, pp. 49-55.
관한 서술에서 〈 I8l9 년 3 월 22 일부터 시베리아 역사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9) 고 표현하였다. 이렇듯 그의 시베리아 총독 취임은 시베리아 식민지 통치에 있어 일대 전환기가 되었으며, 그에 의해서 행해진 개혁은 시베리아 식민지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하겠다.
9) H. B. 11\e rnoB, 앞의 책, 1819 r'.'
1821 년 정부는 시베리아 총독관내에 있는 여러 지방 행정을 시찰하고 민정을 살핀 스뻬란스끼의 보고를 검토하고 시베리아 식민통치 정책의 기본방침을 심의하기 위하여 스뻬란스끼를 포함 한 〈시베리아 위원회 (CH6H p CKH8 KOMHTST) 〉를 구성하였다. 이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이듬해인 1822 년에는 칙령을 발표, 행정구 역을 변경하여 시베리아는 서부와 동부 시베리아로 분할되고 각기 독립된 총독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서부 시베리아의 총독은 또볼리스끄에 주재하면서 또볼리스끄현, 똥스끄현, 끼리기 즈초원, 옴스끄주를 관할하였고, 동부 시베리아의 총독은 이르꾸 뜨스끄에 주재하면서 이르꾸뜨스끄현, 야꾸뜨스끄주, 예니세이스 끄현 ,10) 오호뜨스끄 지방의 쁘리모르스끄주, 깜차뜨까 지방의 깜차 뜨까주를 관할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식민지로서의 시베리아 정책에는 많은 난점이 뒤따랐다. 이를테면 이민족 문제, 유형제 도, 숙박시설, 지방자치제 문제, 육상교통로의 유지와 곡물저장창 고의 문제 등이 긴요한 과제로 제기되었고, 이와 같은 문제의 처리는 행정구역상의 거리를 고려하여 지방 스스로가 가장 타당 한 방법을 선택하여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0) 예니세이스끄현의 현청소재지는 끄라스노야르스끄인데 이 현은 끄라스 노야르스끄, 예니세이스끄, 아친스끄, 미누씬스끄, 깐스끄 동 5 관구(管區) 로 구성됨.
행정구역의 개혁에 따라 서부 시베리아와 동부 시베리아가 분리되었지만, 이 두 지역은 총독의 관장 아래 있는 중앙관청이 며, 그 밑의 현청(縣廳), 관구청(管區鹿), 시청(市廳), 군 • 옵청 (郡 • 邑廳) 및 이민족청(異民族廳)은 지방관청이었다. 중앙관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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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은 관할 지방관청의 감독과 행정집행의 정확성을 꾀하였고, 긴급시는 중앙관청의 기능에 신축성을 주어 거리의 원격에 따른 장애를 원할하게 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현지의 최고책임자인 동부 시베리아 및 서부 시베리아 총독은 정책 실험단계에 있어 본국 정부로부터 파견된 위원을 포함한 협의기관에 의해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이상의 통치제도 개혁은 스뻬란스끼의 시베리아 통치에 대한 기본 이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는 제도개혁의 입안에 있어서 다음 사항에 역점을 두었다. (1) 권력자 행위의 단독성과 주민생활의 대중성을 조화시켜 주민 의 자유와 안정을 독선적 횡포와 권력남용의 위협으로부터 보호 하는 일, (2) 세분화, 무력화되어 가는 시베리아 식민지의 각 지방 울 특별통치제도 아래 통괄하여 감독을 강화하는 일, (3) 시베리아 의 사회지리적 사정, 특히 광대한 지역에 비하여 그 주민이 극히 소수임을 감안하여 특별통치제를 신축성있게 적용하는 일, (4) 제반 행정수단 및 사무절차의 간소화에 의하여 시베리아의 문화 적, 경제적 사정에 어울리는 행정상의 성과를 거두는 일 동 ll) 이었 다 또 스뻬란스끼는 이민족에 대한 제도도 개선했는데, 이를 일반 이민족에 관한 제도와 끼르기즈족에 관한 제도로 나누어 살펴보 면 다음과 같다 가. 일반 이민족에 관한 제도 그는 시베리아 식민지에 거주하던 일반 이민족을 3 등급으로 나눠 각기 다르게 취급하였다. 제 1 동급에 속하는 자들은 시베리아 의 도시나 농촌에 정착한 이민족으로서, 이들은 각기 소속된 사회 충에 있어 권리와 의무가 러시아 • 슬라브인과 동등시되어 일반적
l1) 大橋與一, 앞의 책, pp. 2II-2I2.
으로 공통법규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별다른 호칭이 사용되지 않았으나 회교도나 기타 이민 족들은 <정 착 이 교도 (OC0 /I,JII,I:0 HHOBep e I{ ) >라 고 불리 었다 . 제 2 동급에 속하는 자들은 계절에 따라 일정한 지역으로 이동하 는 〈유목 이민족 (KO q eBOH HHO p oAen) 〉이다 . 이들은 농민들과 동등 한 사회계충을 이루고 있었지만 형식상 농민과는 다른 지위에 있었다 . 이들은 대개 종래의 권리를 인정받았으나 본인이 원하지 않는 한 다른 사회계층에 편입되지 않았고, 또 보유하던 토지를 점유할 수 있었으며 , 그 지역에는 다른 러시아인이 임의로 거주하 는 것이 금지되었다. 더욱이 이들의 유목지역에서 발생한 범죄 행위는 그들 고유의 관습에 따라 심판을 받았고, 러시아 • 슬라브 인의 거주지역에서 발생한 범죄행위는 공통 기준에 따라 처리되 었댜 이들은 초원 (CTem) 의 관습에 따라 집단의 족장 (ro Ji oBa) 이 나 장로 (cTa p ocTa) 의 지배를 받았으나 특별법규에 의해 납세와 부역 동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들은 경제생활에 있어서 자기의 생산물이나 보호물을 자유롭게 판매할 권리를 가졌고 일반 러시 아인과의 상거래도 허용되었으나, 관리는 여기에서 제외되었다. 이들은 이주할 때 족장이나 장로의 허가를 얻어 500 베르스따 (약 500km) 범위내에서 유목지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있었으나 그 이상의 거리이거나, 특히 러시아인 밑에서 장기노동을 할 경우 에는 지방자치제 경찰의 허가롤 필요로 했다. 종교에 있어서는 완전한 자유를 누렸고 종교의례에 대한 속박도 없었다 . 이들이 사회생활에 있어 신분이 반드시 고정되었다고는 볼 수 없으며, 만일 농민에서 상인으로 옮기려 하면 자기의 의사에 따라 가능하 였다. 또 , 자식을 관립학교에 보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의 학교도 설립할 수 있었다 . 제 3 의 등급에 속하는 자들은 〈방랑 이 민족 (6 po 惡q HR HH0p o Ren) > 으로서, 이들은 하천, 산야를 이동하며 주로 수렵에 종사하였다 . 이들은 대개 〈유목 이민족〉에 관한 규칙을 적용받고 있지만, 이들 에게 지정된 토지는 종족별로 구분되지 않고 하나의 현이나 관구
에서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이동될 수 있었다 . 납세에 관한 엄격한 규정도 없었으며, 지방자치제의 복무의무는 물론 병역도 면제되었다 . 이러한 이민족에 대한 특별 배려는 종래의 시베리아 식민지 당국자들의 횡포와 권력남용이 거의 몽매한 이민족 • 이종족에게 자주 행해졌고, 특히 징세와 부역은 심각한 사태를 야기시켰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스뻬란스끼의 제도개혁에 있어서도 이 점이 신중하게 고려되어 〈유목〉 내지 〈방랑〉 이민족 에 대해서는 특별한 법규에 의하지 않는 한 어떠한 징세도 가할 수 없었고, 또 지방자치제의 부과(賊課)도 법적 근거에 명백히 따라야만 했다 . 정규적인 징세는 반드시 중앙관청의 승인을 얻어 야 했으며, 그것도 확정된 액수 이상으로 거두지 못하게 하였다. 나. 끼르기즈족에 관한 제도 일반 이민족에 대한 제도와는 달리 끼르기즈족에 대해서는 약간의 특례가 인정되었다 . 그것은 이들을 시베리아 식민지의 다른 이민족과 똑같이 다루지 못할 특별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 댜 이들의 주된 분포지역은 끼르기즈 대초원이며, 이들의 유목지 방에 있어서 최소 단위는 〈아울 (a yJI)〉, 죽 끼르기즈 촌락으로 몇 개의 〈아울〉이 하나의 〈볼로스찌 (BO JI OCTh) 〉, 죽 읍을 이루고 몇 개의 〈볼로스찌〉가 하나의 〈오끄루그 (oR py r) 〉, 죽 관구를 이루 고 있었다. 〈아울〉의 촌장은 〈스따르쉬나 (cTa p nmaa) 〉, 〈볼로스 찌〉의 읍장은 〈술딴 (c y maH) 〉으로 불리어졌고 〈오끄루그〉의 행정 담당자는 〈상급 술딴 (cTa p血 m cy maH) 〉으로 그 밑에 러시아인 관구위원 2 명과 끼르기즈인 관구위원 2 명이 〈관구청 (oR py>KH oa np H Raa)> 을 구성하여 행정사무를 관장함과 동시에 경찰로서의 기능도 갖추었다 . 촌장과 관구위원 및 〈상급 술딴〉은 선거에 의해서 선출되었으 나 〈술딴〉에 대해서는 끼르기즈 사회의 전통풍습이 인정되었다.
이에 따라 〈술딴〉은 선거에 의하지 않고 세습적으로 지위를 물려 받았고, 주민이 희망하거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정부에 대표 단을 파견할 권리가 부여되었다 . 그러나 〈술딴〉은 영주나 지주와 같은 권리를 갖고 있지는 않았고, 요컨대 〈볼로스찌〉의 행정상 책임자일 뿐이었다. 끼르기즈의 각 관구는 신제도가 시행될 때부터 5 년동안 여러 과세에서 면제를 받았으나 그 후로는 끼르기즈 대초원 주민의 생업상의 특성을 감안하여 가축에 따른 공세(貢稅)를 받았다. 이들 은 병역의무가 면제되고 부역도 교통로의 정비사업에만 국한되었 댜 끼르기즈 대초원에서 이루어지던 교역은 물물교환이든 매매형 식이든 간에 끼르기즈인이나 러시아인 할 것 없이 원칙적으로 자유로왔으나 술의 자유판매는 금지되었다. 재판은 반역, 살인, 약탈 등 형사사건만 다루었고 그 밖의 사건은 이들 고유의 관습 에 따라 처리되었다. 이 지방의 사회시설에는 다음과 같이 특수한 성격을 띠고 있었 댜 (1) 각 관구에는 끼리기즈인을 위한 의사가 배치되고 병원이 설립되었다. (2) 요새선(要塞線)에는 가축의 질병을 예방하기 위하 여 방역관이 파견되고 검역소가 설치되었다. (3) 이교도인 끼르기 즈인을 그리스도교도로 개종시키기 위해서 강제적 수단보다는 권유하는 방법을 택했고, 교단(敎壇)과 사제들에게는 학교설립과 민중교육에 협력하도록 의무를 부과하였다. (4) 또 이들과는 별도 로 끼르기즈인에 의한 학교설립이 허용되고 이들에 대한 원조도 강구되었다 . (5) 빈곤을 없애고 부랑인을 정착시키기 위한 방책이 관청의 특수업무로 부각되었다. 이를테면 의원, 검역, 종교, 교 육, 자선을 위한 시설이 세워지고 그 운영에 관한 시책이 강화되 었던 것이댜
3. 시베리아 유형의 조직화 시베리아 유형의 초기단계는 유형지방의 식민지적 개발을 의도 한 것이 아니라, 중범자나 반동분자를 머나먼 지방으로 추방하여 유럽 • 러시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서였다 . 이 점에 있어서 시베리아는 유형식민지라 할 수 있으며 유형자 가운데 명문출신 자나 저명인사들이 많았던 것이 그 특색이기도 하였다 . 예를 들면 1599 년 보리스 고두노프 (Bo p HC roJJ .YH OB) 치하에서 로마노프가 ( 家) 의 이반과 바실리 형제, 또 1614 년 미하일 로마노프 치하중 까잔 군정관의 시베리아 유형을 들 수 있겠다 .12) 그러나 시베리아 유형제도는 점차 변천되어 1660 년대에는 우끄라이나의 연합을 반대했던 수천 명의 까자흐인 농민들이 시베리아에 유형되었다. 또한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황제시대 (1645-1676) 에는 유배인들의 출신도 다양해져 귀족, 고급관리뿐만 아니라 근위병사, 분리파교 도(分離派敎徒), 스웨덴인 포로, 폴란드 귀족당원, 상인, 농민 등을 포함하여 절도, 살인죄를 지은 하층계급자들도 유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시베리아 유형이 빈번해지고 그 시설도 확대된 것은 18 세기 초부터였다. 그것은 사형의 제한과 함께 유형이 강화되었 기 때문이며, 그 후 1754 년 칙령에 의해 강도, 절도에 대한 형벌 은 모두 시베리아 유형으로 대체됨 13) 으로써 시베리아 유형제도는 항구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 당시 시베리아 유형자는 이미 <유 형 징 역 자 (ccLI JJ. bHO· J< 8TO p maHHH) 〉와 〈유형 이 주자 (cc 꼬JJ. bHo-noc e JJ. eHen) 〉로 나뉘어져 있었다. 전자는 일반적으로 유형지 작업장 의 강제노동 형벌에 복역하는 자를 말한다. 후자는 유형자로서의 제약 때문에 주로 농업개발 사업에 종사하지만, 이들에게는 정착
12) H. B. merJIO B, 같은 책, “ 1599r.?, ” 16l4r. •• 13) Bce. xKe HKq ey CaKH oeel\ eBy ,n Ppya c Bcn 1e 'uHe H ec ramp oa *BILHlOll>ir os yC nup6 aupB Hu e un 回Cp e38 e1M1ena eAy aCuTup ,o n IlceTpB eO - H 3eM JI8 A8JI H II AaHaTcKa11 PoccH11, Vol. I., IleTep 6 y pr , p. 18o .
농민이 되어야 하는 의무가 있었으며, 정부의 보조로 새로운 지방 을 개척하여 특수부락을 형성하도록 약정되어 있었다. 이렇듯 시베리아 유형은 제정러시아의 시베리아 식민적 개발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지만, 현실적으로 개선의 여지가 많이 있었 댜 19 세기 초 시베리아 유형의 조직화는 긴요한 과제로 제기되어 스뻬란스끼에 의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 이미 조직화의 조짐이 있었던 시베리아 유형제도는 스뻬란스끼의 개혁을 계기로 1820 년대에는 · 법적으로 체계화되었고, 〈유형징역〉과 〈유형이주〉의 구분이 분명해졌는데, 이는 재판의 선고에 따라 결정되었다. 시베 리아 유형에 관한 법규는 435 조로 구성되었으며, 주로 유형자의 수송과 호위, 유형자의 접수와 배치, 유형자의 활용 둥에 관해서 규정하였고 ,14) 또 유럽 • 러시아에서 시베리아에로의 유형자의 접수와 그 배치를 지정하는 유형의 관리기관으로서 또볼리스끄에 특별부처가 설치되었다. 스뻬란스끼 주도 아래 시베리아 식민지 통치에 관한 개혁이 행해졌을 때 시베리아 유형에 관한 종래의 막연한 규정이 '개정되고 새로운 분명한 법규가 제정되었다는 사실은 제정러시아의 식민지 개발과정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이라 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시베리아 유형자를 어떻게 구분하고 다루었는가를 살펴 보면, 시베리아에 이송된 유형자는 (1) 공장노동에 종사하는 자, (2) 육상교통로 노동에 종사하는 자, (3) 수공노동에 종사하는 자, (4) 고용노동에 종사하는 자, (5) 이주농민노동에 종사하는 자, (6) 무능력자 둥으로 분류되었고, 여자 유형자는 특별히 다루 었다. 이들 유형자들은 현(縣)에 따라 취업지방이 구분되고 각 지방의 수요상태 및 작업별 수용량에 부응하여 배치되었다. 무능 력자에 대해서는 소재장소와 생활양식을 지정하여 엄중한 감시하 에 행동의 자유를 속박했지만, 그 반면 구호시설에 의한 생활 보장은 마련되었다. 무능력자를 제의한 나머지 유형자들에게는
14) 大橋與一, 앞의 책, p. 220.
시베리아의 식민지 개발에 있어서, 특히 경제적 효과를 중시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 죽 유형자들·은 시베리아 식민지방에서 유력한 경제적 개발 수단의 일익을 담당하게 된 것이었다 . 가. 공장노역 유형자 이들은 유형지에 도착한 후 제조소나 공장에 배치되어 취업상 태 등을 감시당하였고 작업장에서의 급여나 대우 문제는 지방관 청이나 중앙관청이 규정한 대로 따랐다. 이들이 받은 노임의 2 %는 병환자의 구호를 위해 공제되었다 . 가족이 있는 자와 독신자 의 대우는 달랐는데, 전자는 거주장소가 지정되고 후자는 식량 등이 할당되었다 노임이나 식량은 원칙적으로 남녀 차별 없이 동등하게 받았다 소정의 취로기간이 경과된 자, 또는 취로기간중이라 할지라도 노동에 견뎌내지 못하는 자는 일단 노역에서 해방되어 제조소나 공장 부속지역에 정주하거나 근처의 지정된 촌락에서 다른 일에 종사하였다. 제조소나 공장에서 노동력이 부족할 때는, 다른 종별 로 지정된 유형자가 임시 공장노역자로서 배당되어 왔고, 이들에 대해서는 2 배의 노임이 지급되면서 그 기간은 I 년 이내로 한정하 였다. 나 . 육상교통로 노역 유형자 이 분야에는 건강하고 경험 있는 자들이 배당되었고 이송부의 감독에서 벗어나 육상교통관서의 관장하에서 노역하였다. 노역하 는 도중 부적격자로 인정되면 이송부로 다시 보내져 다른 종류의 노동에 종사하게 했다. 소정의 노역기간을 마치면, 대개 이들은 시베리아 이주자에 준해서 관영 이주지의 농민이 되어 자유로운 신분으로 정주하였다.
댜 수공노동 유형자 이들은 특별한 기능이 있는 자들로서 , 직능별로 배속되어 이론 바 〈 수공업의 집(p eMeC JI 0HHhl :8 ~OM) 〉에서 작업하였다. 이러한 〈집〉은 1799 년에 이미 이르꾸뜨스끄현 지사에 의해 이르꾸뜨스끄 부근에 창설된 바 있으며, 나중에 그것은 400 호가 넘는 수공업자 들의 부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5) 일정한 기간 동안 〈 수 공업의 집〉에서 종사한 유형자나 기능을 배운 그들의 자손들이 그 부근 에 주거를 정하고 생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세대수는 점점 늘어났 고, 〈수공업의 집〉을 중심으로 부락이 형성되었다 . 이들이 〈수공 업의 집〉에서 종사하는 기간은 6 년이며 이송부의 관장하에 놓여 있었댜 라. 고용노동 유형자 이들은 특정인의 하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중노동을 이겨내지 못할 자들 가운데서 배정되었는데, 일정한 고용조 건 에 의해 사용자 조합을 통해 수요자에게 인도되었다 . 이들의 행동은 일반경찰 법규에 따라 규제되었음은 물론, 이들에 대한 사용자의 태도가 부당할 경우 계약을 해제하여 다른 수요자에게 인도되기 도 하였댜 계약된 고용노동기간을 마친 경우 사용자로부터 확인 증명을 받았으며 , 유형노역으로서의 고용노동에 종사하고 자유를 구속당하는 기간은 보통 8 년으로 되어 있었다. 마. 유형이주자 이들은 이주농민 노동에 종사하는 자로서, 국바에 의해 개척지 로 이주되어 농업에 종사케 되는 자와, 기존의 촌락에 이주되어
15) H. B. ID;e rJio B , Xp 0H o.11 ,o eutt ec 1 'u a .11,e p et t eH b sa:i ic HeaU Ju x 8aHHb /,X B ucrop u u Cu6up u, Hp R y Tc R, 1799r'.'
농업에 종사케 되는 자의 두 종류가 있었다. 전자의 신개척지 유형이주자는 주로 기혼자이거나 1 년 이내에 결혼할 수 있는 자, 또는 미혼 여자 유형자를 골라서 배당되었다. 이들은 엄중한 감시하에 있으면서도 정부의 보호하에 정착영농의 자리를 굳혀갔 다 소정의 단계를 거쳐 실질적으로 시베리아의 농업식민자로서 생활이 보장되면, 이들에게는 자유농민으로서의 지위가 주어졌 다 후자의 경우, 기존의 촌락에 이주시켜 농업노동에 종사케 한 유형자는 현청을 거쳐 각 촌락에 배분되었다. 이들은 5 년 이내 에 정착(定着)의 근거를 마련하거나 자신의 노력에 의해 농업을 경영하도록 하는 의무를 지게 되었으며, 그 기간 동안은 엄중한 감시하에 놓여 있었다. 바 . 여자 유형자 여기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었는데, 첫째는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시베리아 유형선고를 받은 남편이나 그 외의 유형남자와 동행하여 시베리아 유형지에 온 여자이며, 둘째는 남편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시베리아 유형의 선고를 받아 이송된 여자이다. 전자는 식량을 제공받아 유형남자와 더불어 시베리아로 이송되지 만 자유의 속박은 전혀 받지 않았던 반면, 후자는 유형자라는 점에서 원칙적으로 남자 유형자와 똑같이 취급되어 엄중한 감시 를받았다 시베리아 유형자는 유형지로 이송 도중 또볼리스끄 (To6o m, cx) 에 있는 유형 관리부처에 의해 배치가 결정되기 이전에는 결혼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었으나, 다만 유형 남자가 자유인 여자와 결혼 하는 것은 허용되었다. 자유인인 처가 시베리아 유형자인 남편과 함께 유형지로 가는 것은 본인의 자유의사에 따른 행위이기 때문 에, 이들의 신분을 저해하는 일은 없었고, 시베리아에서 거주를 계속하든가 아니면 유럽 • 러시아로 귀환하든가 하는 문제도 구애 받지 않았다
4. 스뻬란스끼 총독 이후의 유형제도 스뻬란스끼 총독의 재임중 실행된 시베리아의 식민지화 내지는 식민지 통치에 관한 제반 개혁은 시베리아의 식민적 개발을 촉진 하는 기초를 조직화시켰고, 시베리아 유형에 대해서도 식민적 개발상의 효과가 인정되어 그 체계가 정비되었다. 그러나 근대국 가에로의 발전을 꾀하던 제정러시아의 내외사정이 변화하게 되 자, 시베리아의 식민지화 및 식민지통치에 관한 정책 역시 변화가 요구되어 제도상의 개정과 운용상의 개선이 불가피해졌다. M 젝]란스끼 총독시절의 유형제도에 있어서 유형자의 노역 종별을 엄중하게 고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의 시행과정에서는 적지 않은 결함이 발견되었다 . 특히 유형자는 현(縣)에 따라 그 복무지역이 지정되었기 때문에, 지역별로 볼 때 노동의 종류에 따른 유형자 수요상태가 노역 종별의 지정에 따른 유형자 공급상 태와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노동력의 수급관계를 고려하여 개개의 유형자에 대한 노역 종별의 지정을 변경하고, 한 노역종(勞役種)에서 · 다른 노역종으로 비교적 쉽게 전환할 수 있도록, 또한 복무지역의 변경을 간단하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요컨대 유형자에 대한 실제적 조치에 있어서 현지 기관의 자유재 량권의 폭이 확장되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유형자의 행동제한을 완화시키고 유형생활에 있어 서 어느 정도의 자유를 허용하였으며, 이들과 자유거주민과의 사회적 융화관계를 조장하는 둥 제반 개선책이 강구되었다. 특히 자유거주민과 유형자와의 교류에 있어 양자간의 혼주(混住) 문제 가 제기되어, 결국 자유거주자가 유형자를 떠맡거나 결혼하게 되는 경우 국고에서 I50 루블을 지급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착한 유형이주자에 대해서는, 정부가 관리하는 이주지에 정착한 자유농 민과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길도 1831 년에 열렸다. 그 후 1837 년에는 새로운 조항이 발표되어 유형이주자와, 이들을 떠맡은
자유거주자간의 관계가 명확히 규정되어 , 유형이주자가 자신의 가정을 갖고 싶을 때는 수시로 분리, 독립할 수 있게 되었다 . 16) 이같은 유형제도의 개선이 불가피했던 이유로는, 제정러시아의 일반징벌제도가 점차적으로 진보된 데 반하여 그에 수반되는 유형법규가 이를 뒷받침해 주지 못했다는 점도 있겠으나, 그보다 는 실질적으로 유형자의 숫자가 현저하게 중가되었다는 사실이 새로운 유형시책을 낳게 되었다고 보겠다. 이를테면, 1622 년의 시베리아 인구조사에 따르면, 당시 일반 거주자 70,000 명에 대하여 유형자는 7,400 명 1 7)으로, 광대한 지역에 있어서 그 분포는 정말 하찮은 것이었다. 물론 시베리아 유형에 관한 전담기관이 아직 정비되지 못했던 당시로서는 유형자의 실수를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1807 년의 다소 확실한 자료에 따르면, 그 무렵의 시베리아 유형자는 I 년에 약 2,000 명 정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18) M. 스뻬란스끼 총독시대에 이루어진 유형 제법 규의 편찬은 매년의 유형자 수를 3,00 0- 4,000 명으로 추정하고 있었 으나, 그 숫자는 해마다 증가하여 1823 년에는 6,667 명, 1824-1827 년 사이에는 1 년에 II,000 명까지 이르렀다. 그 후 IO 년간 6,000 -8,ooo 명으로 다소 줄었으나, 그 다음부터는 다시 증가추세를 보여 부득이 유형제도의 재검토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은 유형제도와 시베리아 식민지 개발이 지닌 상호연관성의 문제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6 세기말 유럽 • 러시아에서 시베리아로 향한 농민의 보호이주가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을 전후로 해서 뺄르임 (Ilen J,I M) 을 유형지로 하여 최초의 유형자 이송 이 행해졌다. 그 후 시베리아 유형제는 변천을 거듭하면서 단속적 으로 범위를 확장해 나갔지만, 18 세기 중엽 이후에는 특히 식민지 개발의 유효한 수단으로서 성과를 기대했었다 . 그러나 삐사레프
16) U. B. ID;e rJIO B, 갈은 책. 1831r'.' 17) H M. R .ttp血 neB. Cu6up b, KaK xOH 邸 6 aeoa p a¢ 昭 eCICOM, 31COHOMU'4 e CICOM u UCTOp U '4 e CKOM OTHOI /Se HUU, 1882, p. 127. 18) 大橋與一, 앞의 책, p. 232.
(M.H. II 0: ca p eB) 의 견해에 따르면, 많은 형사범죄에 대한 특별형벌 로서의 유형은 정부가 시베리아의 식민적 개발에 있어서 최종적 으로 취한 수단이었지만, 시베리아 개발에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였으며 , 유형제도가 실시된 이래 전기간을 통해 100 만명 이상 이 시베리아에 이송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유형자들은 후세에 남길 만한 공적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19) 한편 가빠노비치(J.1 . J.1 .ranaHOBH'
19) M. H. IlHcap eB , Cu6up b, ucrop u 1 '<> -eeoep a rp u 'l eC 1 'Ui l o'l ep 1 ', M 따뻑 1915 , p. 18. 20) H. H. ranaHOBH 'I, Poccu; i 6 CeBep <> -BocTO' lHO i l Aauu, Part I, IleKHH, 1933 , pp. 66-67.
또 l9 세기 중엽 알렉산드르 I1 세 시대의 폴란드인 등이 그 중요 한 사례였으며 , 특히 폴란드인과 프랑스인의 유형지역은 극동의 깜차뜨까 지방에까지 이르렀다. 이들의 유형은 시베리아의 식민적 개발에 있어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죽 시베리아에 장기복무하거 나 토착화한 이들은 그들 고유의 생활양식을 이식하여 시베리아 미개지방의 사회적 혼합화 내지는 민족적 복합화를 이루었던 것이댜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권력에 강제 예속되어야 했던 외국인 포로들은 이따금 러시아인의 유형자나 원주민을 선동하여 반란을 꾀하기도 했다. I8 세기 후반의 〈베뇨프스끼 반란 사건〉이 그 한 예로서, 깜차뜨까에 유형된 헝가리인 베뇨프스끼 (M.A . Ben i owsk y)는 깜차뜨까 지방울 제정러시아의 지배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피압박민족을 해방하겠다고 나섰다 .21) 이 기도는 실패했지만, 제정러시아로서는 이를 계기로 시베리아 식민지의, 특히 깜차뜨까 지방의 관리기구를 다시 개혁하기에 이르렀다. 시베리아 유형자의 증가추세는 일반 유형자들뿐만 아니라 외국 인이나 속국인들에게도 해당되었다. 특히 폴란드인의 유형은 두드 러지게 증가하여 I866 년 시베리아에 유형된 폴란드인의 총수는 남녀 합쳐서 18,000 명이었댜 22) 일반 유형자와 의국인 유형자의 일반적 증가추세에도 불구하고 유형시설은 이에 따르지 못했기 때문에 I9 세기 중엽 이후로부터는 점진적인 제도개혁이 수반되었 댜 예를 들어, 종래에 빈번했던 잔인한 처형이나 낙인을 찍는 처벌 등, 재판상의 형벌규정이 개정되거나 폐지되었다. 한편 유형 자의 지능이나 기능을 충분히 고려하여 그것을 시베리아의 식민 적 개발에 이용하는 방법도 세워졌다. 외국인과 속국인으로서의 포로나 반항자 이외에도 러시아인 정치범으로 명문 출신자나 유명인이 많았음은 제정러시아 시대
21) H. H. I'ana HOBH I, 같은 책, Part I. p. 65. 22) H. B. merJIO B, Xp oH O, /I{)Z U' leC 1 'U t l nep e1 1eHb Ba:J ICH et ltaU X 8aHHUX 8 UCTOp u u Cu6up u, Hp Ky T cK, 1883 , 1863 r'.'
시베리아 유형의 한 특징이라고 하겠다 . 이러한 현상은 시베리아 유형제도의 초기에 이미 나타났는데 , 전술한 바와 같이 1599 년 로마노프 왕가의 이반, 바실리 형제의 유형을 필두로 하여 1620 년 로스또프스끼의 공(公)인 로바노프(A. B. Ji o6auoB) 의 유형, 1740 년에는 해군차관 소이모노프( .H. Co :u MOHOB) 의 유형, 그리고 1742 년에는 미니흐 (X.A. MHMX) 원수 23) 동 수많은 인사들이 시베 리아로 유형되었다 이들은 지정된 유형지에서 강제노동에 종사했 울 뿐만 아니라 지능이나 경력 둥을 고려해서 국가나 지방의 실무담당자로 근무한 예도 적지 않았다. 소이모노프 같 은 인물은 나중에 무고함이 인정되어 석방되었으며, 1757 년에는 시베리아 지사에 임명되어 시베리아 식민지 경영면에 큰 공적을 남겼다 . 24 )
23) rocy]J .a p cT »eHBoe Hay t1H oe Ha]J .a Te11&cTBO, Ma11 ,a 11 CoeeTcx: a1 1 91 tttu x:1 1,o - ne8u11, Vol N., p . 7 . 24) H. B. merlIOB, 앞의 책, I757r'.'
19 세기에 들어서자 정치범의 시베리아 유형이 급격히 늘어났 다. 1826 년에는 〈 12 월 당원〉의 대규모 유형 이 있었다. 니꼴라이 I 세 (H:u K oJ ia 8 IIaBJ IO BH11 PoMaHoB) 의 즉위 에 반기 를 든 이 들 젊 은 귀족장교들은 최고재판소에서 1 2 등급으로 나뉘어 형 선고를 받았 으나, 황제의 명에 따라 뻬스켈리 (II.II. IIecTe Ji b) 를 비롯한 주모자 5 명만 사형에 처해지고 나머지 모두는 종신에서 2 년까지의 유형 징역에 처해졌댜 그러나 형기를 마친 후에도 유럽 • 러시아로의 귀환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시베리아에서의 종신유형이나 다름없었다. 알렉산드르 II 세(.AJi eKcau~ p H: uK oJ ia e- BH11 PoMaHoB) 때 이들에 대한사면령이 내려져 세습귀족은 복권이 인정되어 유럽 • 러시아로 귀환하였지만, 대부분의 경우 유형생활 을 통해서 닦아놓은 그 지방에서 식민적 개발이나 문화적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겠다 .25)
25) 깜차뜨까 지방에서의 자발리쉰 (3aBa JlllIIl HH) 대위나 쉬째이켈리 (mTen- re 표)중령 둥의 예가 그것이다.
제 6 장 시베리아 이주식민의 추이 1. 농노해방 (1861 년) 전의 유럽 • 러시아 농민의 이주 유럽 • 러시아로부터 시베리아에로의 식민적 이주는 자연이나 사회적 환경에 따라 동일하지 않았으며, 정세의 변화에 따라 시대 적으로 변천되어 왔다. 식민적 이주를 형식상의 관점에서 구분한 다면, 그 하나는 강제적, 의무적 이주이며 다른 하나는 자율적, 자의적 이주라고 할 수 있겠다. 전자의 경우는 관청이나 권력자의 명령, 지도에 의한 피지배적 경향이 농후했고, 후자의 경우는 자신의 의사나 희망에 따라 농업경영자나 농민, 수렵학자, 상인 둥이 자발적으로 이주한 것으로 자주적 경향이 짙었다. 이때 국가 의 보호나 공공기관의 알선에 의해서 행해진 경우와 개인적, 사적 수단에 의해서 행해진 경우가 있었다. 시베리아 방면으로의 진출이나 이동의 초기 목적은 주로 모피 류 수집을 위한 것이었던 만큼 식민지 사회제도의 건설이나 발달 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극히 미약했다. 이 결점을 극복하기 위해 유럽 • 러시아로부터의 이주자에 의한 식민적 개발이 무엇보다도 절실하였댜 그러나 이룰 위하여 다수의 이주자를 만들어 내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었댜 정부로서도 시베리아의 식민지 개발 중요
성을 인정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 • 러시아에서의 건설사 업에 많은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 I) 유럽 • 러시아로부터 농민 을 이주시킨다는 것은 농업노동력의 감소를 야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주농민의 시베리아 정착 영농시설, 특히 그에 대한 경제적 보장과 지원이 유럽 • 러시아 국민의 무거운 부담으로 대두되었던 것이댜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 유형이주는 시베리아 의 식민적 개발에 있어 합리적 수단아었을 뿐만 아니라 유형자를 유럽 • 러시아와 격리시킨다는 이중의 효과를 가져왔다고 하겠 댜 그래서 제정러시아 정부는 유럽 • 러시아의 농민가족의 이주는 물론 시베리아 유형제도를 시행, 특히 I7 세기에는 집단 유형을 강화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유럽 • 러시아에서부터 시베리아 식민 지방으로의 이주에 있어서, 식민적 개발의 건전한 발전과 식민적 사회의 정착화, 그리고 그 결과를 국가정책에 기여하게끔 국가의 보호시설, 공공기관의 알선 등에 의한 이른바 보호 • 보조 이주 시책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했다. 이러한 제도의 운영은 현지 에서뿐만 아니라 유럽 • 러시아 지방장관의 중요한 책임사항이었 다 요컨대 유럽 • 러시아 사회의 희생이 따른 이주자의 식민활동 으로 인해서 시베리아의 식민적 개발이 조성되었고, 이같은 의존 관계는 시베리아 식민지 사회가 유럽 • 러시아 사회에 종속될 수밖에 없으며, 식민지가 러시아 • 슬라브화되어 가는 과정을 설명 해 주기도 하는 것이다. 시베리아로의 강제적 • 의무적 이주는 물론 자율적 • 자의적 이주에 있어서도, 이른바 공인이주자(公認移住者)인 경우 이동이나 정착시 여러가지 편의나 원조 및 특전이 주어졌던 반면에 이들의 식민생활에는 약간의 제약이 뒤따랐다. 시베리아의 식민적 개발을 촉진하기 위한 조성책은 이주자의 신분이나 직업에 따라 다소
1) Kp eC TbRHCKOe nep e ceJ le HUe u py ccK 댜 1>0 J1 0 1t u aa11u1 i aa Yp a J1 0 M, Ilep e - ceJI e Hq e cKoe yn p aB J Ie mm rnaBHOro yn p aB J Ie HHn 3eMxey cT p o ncTBa M 3eMnep ;e J IH .l l, AauaTCRa.ll Pocc:e JI, Vol: I ., IleTep 6 y pr , p. 442.
달랐으나, 17 세기 및 1 8 세기 경 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 았다. 정부의 지시에 따라 시베리아에서 근 무하는 근 로자 계층이나 특별 모집 에 의해 시베리아에 파견된 사제(司祭) 들 은 이주여비뿐만 아니 라, 현지의 업무나 활동에 필요한 바용을 지급받았고, 농경지나 초지( 草 地)도 분 할 받았다 . 이 모든 급여나 보조는 국가가 부담했으 며 , 사제의 경우 직책에 따라 차동은 두었다 . 수송을 맡은 마부들 은 운송에 필요한 도구들(말, 마구, 배 동)을 지급받았음은 물론 , 1 년치로서 1 인당 IO 루 블 , 곡물 30 체뜨베르찌('1 0TB0 p Tb : 209 . 2I 리 터) , 기타 목초지를 분 할 받았다. 이주농민들은 자작경지 및 목초지 를 분할받았을 뿐 아니라 , 영농 원조로서 5 루블, 말 두 필, 암소 한 마리 , 양 두 마리 , 돼지 한 마리, 닭 열 마리, 기타 곡식 종자 들을 받았댜 이 밖에도 조세곡물의 납부의무가 6 년간 면제되었으 며, 거주지 , 창고 등을 정비하기 위한 자금으로 12 루블의 대부가 있었댜 2) 공 인 이주자들은 급여나 도움을 받은 반면, 그 지방에 대한 봉 사의 의무도 있었다 . 그 것 은 납세, 병역, 기타 공공물의 건설 등 공 적 인 일과 관련된 것이었다. 한편 이와 같은 식민지방의 농업개발을 촉진하기 위한 이주민 증가시책이 전개되던 중 유럽 • 러시아의 혹독한 생활에서 빠져나 가려는 경작농민들의 자의적인 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 이것은 유럽 • 러시아의 지주들로서는 크나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 정부가 지주계급의 요청에 따라 경작농민들의 자의적 이동을 억제했기 때문에, 이들은 머나먼 미개지방에 이주뿐만 아니라 근처의 다른 지주 소유지로의 이주마저도 지주의 이익에 부합되 지 않는 한 금지되었다 . 그러나 경작농민의 처지는 농노와 다를 바 없었으므로 예속적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방에서 생활의 활로를 찾으려는 이들의 의욕을 막을 수가 없었다.
2) B, K Ky a He~oB, Py cc Kue crap o: 1 1Cu .1 11>i B Cuoup u u Cp e 8Hea Aauu, Ilep e- C0J J0 H' l0C K00 Y npa BJ J0 HH0 rnaBHoro Ynp aB J J0 HHII 3eMJ J0 YCTp 0 8CTB8 H 3eMJ J0 A0JJ H II, AaHaTCK8lI PoccHH, Vol. I ., IleTep 6 y pr , p. 181.
러시아 정부로서는 시베리아 식민지방의 농업개발에 필요한 유럽 • 러시아 농민의 유치 필요성을 중시하면서도, 예속된 경작농 민의 이탈로 인한 유럽 • 러시아 지주계급의 불이억을 결코 무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지주계급을 위한 방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유럽 • 러시아의 경작농민들이 도망가는 횟수와 자의적 이주자의 시베리아 잠입은 점점 반번해졌다 . 그래서 정부는 농민 들의 시베리아 도망이 확대될 경우 혼란이 야기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여 마침내 자의적 이주에 관한 준엄한 금지령을 공포했 댜 1683 년 칙령에 따르면, 어떠한 관직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황제의 통행허가~중 없이는 유럽 • 러시아로부터 시베리아로 통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3)
3) Kp e cTMnc,c o e nep e cMenue u py cc ,c댜 1' 0 .4 onuaa 나邸 aa Yp a .4 0 .w , Ilep e - ceneHTecxoe yn p a meHHe FxaBHOro yn p a Bnemm 3eMney cT p on cTBa M 3eMneRenHH, AanaTCKaH Pocc 血, Vol. I., IleTep 6 y pr , pp. 선 3-444.
그러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유럽 • 러시아로부터 시베리아에로 의 자의적 이주, 특히 도망 농민의 잠입을 억제할 수 없었고, 더욱이 그것이 현지 군정관들의 묵인 아래 행해지는 경우도 자주 있었댜 칙령에 따라 요소마다 세워진 관문이나 4) 그 밖의 수단도 실제로는 이들 도망자의 잠입을 막을 수가 없었으며, 이들은 엄중 한 감시망을 뚫고 삼림 속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이들은 목재를 채벌하여 개간하면서 생활하였고, 이러한 행위는 관헌의 눈에 들키지 않는 채 보통 3-4 년간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다 . 혹시 들키는 경우가 있더라도 죽시 세금을 바치고 나면 묵인되었는 데, 관헌에서도 이 사실을 당국에 보고하지 않고 사리를 꾀하였 댜 참입자들은 이주지 부근의 사정을 알게 되면서부터 보다 편리 한 땅을 찾아 옮겼기 때문에 또볼리스끄 (To6o JJ. hC :K)로 통하는 도로 에 연한 뚜라 (T yp a) 강 유역지대에는 많은 잠입자들이 산재하고 있었다. 특히 도로에서 약간 떨어진 하천과 호수 연안에는 부락이
4) 칙령에 따르면 , 쏠리깜스끄 (ConnKaMCK), 체르드니 ('llep AL l:H b) 둥에 관문 이 설치되었다.
형성되기까지 하였다 . 5) 이들 잠입자들은 비록 공인되지 않은 농민이긴 했어도 사실상 의 개척자나 다름없었고, 서서히 경작농민으로 정착되어 갔다. 가축이나 수확한 곡물 동의 처리문제가 어려울뿐더러 위법이주자 증명이 번거로와서 금지령 위반자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지방 의 식민지 개발에 바람직한 이주농만으로서 간주하게 되었다. 결국 정부는 이들을 묵인하거나 또는 기정사실로 인정하기에 이르렀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을 감안한 임시 조치일 뿐 금지령의 폐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소유지로부터 도망쳐 시베리아에 잠입한 일부 예속농민들은 이따금 다시 유 럽 • 러시아로 송환되는 경우가 있었으나, 이들은 송환 도중 다시 탈주하여 결국 생활을 망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이 송환마저 무의미하게 되었다. 요컨대 제정러시아 정부는, 한편으로는 시베리아를 유럽 • 러시 아의 생활 궁핍자들의 이주지로 간주하여 이들을 수용하는 것이 시베리아 식민지 개발을 촉진하는 하나의 수단이라 인정하였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 • 러시아로부터 도망쳐 나온 이주자 및 시베리아로의 불법 잠입자를 방지하기에 힘들다는 것을 인식 하기에 이르러, 농민들의 자의적 이주에 관한 금지조치를 완화하 게 되었다. 17 세기 중엽에서 18 세기 중엽까지 제정러시아는 유럽 • 러시아 에 있는 러시아인의 시베리아 식민운동이 왕성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 시베리아의 인구증가 경향과 이민족과 러시아인의 구성 비를 비교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6) 약 1 세기 동안 통계상 나타난 인구추이는 그 총수에 있어 73 % 이상의 증가롤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이민족과 러시아인으로
5) M. B. mernOB, Xp oH OJ /,0 euuecxua nep eu eHb 6~CHeauux 8aIIHUX e UCT0· pu u Cu6up u, Hp Ky Tc K, 1883, 1683r. 6) 大橋與一 앞의 책, p. 각 9.
시베리아의 인구중가 추세
이민족의 수 러시아인의 수 총 수
대별해 보면, 전자는 감소된 데 반하여 러시아인은 오히려 급격히 늘어났댜 따라서 시베리아 총인구의 증가는 바로 러시아인의 급증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기간중 러시아인은 4 배로 늘어났는데, 그것은 이전부터 거주했던 러시아인의 자연중가에 의한 것임은 물론이고,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이주 러시아인과 그 자손의 중가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말하자면 이주증가 가 자연중가보다 훨씬 많았으며, 또 공인된 이주보다 비공인된 이주가 실질적으로 더 많았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7)
7) H. M 尹.aj> HH~eB, Cu6up b ,ca ,c ,c o ./1, O 'H邸 e zeozp a ,f iu1 t e c,c o M, aronozp a 如 1teC 1COM u UCTo p u 1t eCICO 서 ornota e nuu, 18 82 . p. 119. 사실 18 세기에 이르러 유형이주자와 자의에 의한 이주자가 증가했으나, 후자의 경우 일반적으로 공식 등록없이 인구가 희박한 미개지방에 분산되 어 살았으며, 더우기 도망자, 부랑자, 분리파 교도 등도 넓은 지역에 걸쳐 이동하며 살았다.
이주제도가 정식으로 국가에 의해서 정비된 것은 끼셀료프 (II.p; . RHce Ji eB) 가 실행한 정부 주도 이주정책이었다. 1835 년 시베 리아 식민지에 있어서 이주 지구의 설정은 측량반에게 위촉되었 는데, 2 년 뒤 측량반올 대신하는 특별기구로서 〈시베리아 토지측 량부〉가 설치되었다. 그래서 식민적 이주의 필요와 토지 수요에
관한 사업이 정리될 것으로 기대되었고 , 1838 년 국유재산성 (MHHHCTep cT BO rocyl I,a p C TBSHHLIX HMYIIISCTB) 이 설 치 되 면 서 부터 이주문제가 보다 광범한 의미를 지니고 제기되었다. 국유재산성 장관이 된 끼셀료프는 농민의 경제적 복지를 증진시키고 이들의 정신적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라고 공포하고, 유럽 • 러 시아 농민의 시베리아 이주 정비사업에 착수하였다. 1843 년 국가소유 이주지의 정비에 관한 규칙이 제정되어 농민 의 이주에 대해서, (I) 경작 가능지가 적은 촌락에서 그것이 풍부 한 지방에로의 이주만을 허용할 것, (2-) 그와 같은 이주는 시베리 아 토지측량부가 미리 설정한 이주지구에 대해서만 국한할 것, (3) 이주 희망자는 모두 소속 공동체의 승인을 얻은 후 다시 행정 부서의 허락을 얻어야 할 것 , (4) 이동중안 이주여행자에 대해서는 의료혜택 및 양식을 제공할 것 , (5) 이주 여행자에 대한 접대와 봉사는 주민들이 하도록 권장할 것 동의 내용이 지방장관에게 지시되었다 . 8) 관 주도하에 국가소유 이주지에 도착한 이주농민에 대해서는, 국고로부터 농기구, 소 두 마리, 가옥건축용 목재가 무상으로 지급되었고 , 자금과 종자가 대부되었으며 , 종전의 공인된 이주에 서와 마찬가지 특전으로, 이주지 정착 후 일정 기간 동안 조세와 부역에 관한 의무가 면제되었다챕 이 이주책의 목적은 첫째, 유 럽 • 러시아의 농민, 특히 자유농민의 시베리아 이주 의욕을 높임 과 동시에 시베리아에 있어서 이주농민 생활의 경제적 안정, 정신 적 발달을 도모하는 데 있었고, 둘째는 유럽 • 러시아라는 모체사 회와 시베리아라는 식민적 사회와의 연계 내지는 결합을 강화함 과 동시에 시베리아의 식민적 개발을 촉진함으로써 유럽 • 러시아 와 시베리아간의 농업노동력 배분을 조정하는 데 있었다고 보겠
8) Kp e cTb .l!H cKoe nep ec e/1 ,e Hue u py cc ,c댜 XO /1, 0HU3a 나 UR 3a yP 다 OM, Iiep e - cexeHq e cK0e yn p aB J Ie HHe FnaBHOro ynpa BJ Ie mm 3eMJ Ie y C Tp on cTBa H 3eMJ ie AeJ IH II, AaHaTCRBII PocCHII, Vol. I., IleTep 6 y pr , p. 448. 9) 같은 책, p. 448.
댜 이 사업에 지출된 경비는 모두 국고의 부담에 의존했고, 매년 약 142 , 000 루블이라는 당시로서 결코 적지 않은 금 액을 투자했던 것이댜 이상과 같은 농업 이주사업은 종전과는 달리 많은 성과를 거두 었고 자유농민들은 시베리아 국유이주지에서 비교적 착실한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다 .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럽 • 러시아 자유농민들 의 비합법적인 자의적 이주가 줄어들지 않았다 . 이와 같 은 현상은 관의 보호나 원조를 바라지 않거나 그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처 럼 보여지나, 사실은 보다 복잡한 원인이 있었다 . 지유농젓 l 들이 시베리아 이주를 공인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의적 행동을 택하게 된 이유에는 끼셀료프의 관 주도 이주규칙이 러시아인 , 특히 자유 농민들의 자연발생적 지향성과 어울리지 않았으며 , 또 이 무렵 자유농민들이 시베리아 이주를 원했던 것은 반드시 토지가 적었 기 때문만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주규칙은 여기에만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 현실의 농민생활에 바탕을 둔 민족운동 으로서 시베리아 이주는 결코 권력으로는 억제할 수 없는 자연발 생적인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 2. 농노해방과 유럽 • 러시아인의 이주 유럽 • 러시아 농지의 약 90% 는 특권충인 지주, 귀족들의 소유 지 또는 공유지였으며, 국민의 절반 정도가 여기에 얽매인 농노였 댜 10) 19 세기 중엽 제정러시아에서 농노해방문제는 이들의 신분에 관한 법률상의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심각한 정치문제였으 며, 또한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힌 사회문제이기도 우 하였다. 당시의 농노들을 대략 구분해 보면, 황실령이나 국유지 농노와, 지주나
10) J. H. Robin s on, J. H. Breate d , A General His t o ry of Europ e, Part II, Recent Europ e an His t o r y, 1921, p. 556.
귀족 소유지의 농노로 나뉘어지는데 , 전자의 생활상태는 후자에 비하면 다소 나은 편이었다. 따라서 농노해방 문제는 후자의 경 우, 죽 지주와의 이해관계 속에서 토지를 둘러싼 복잡한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농노해방 실시에 있어서 토지분배의 양에 관한 사항뿐만 아니 라 분배조건에 관한 사항도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경작지는 일정한 의무를 수반한 농민에게 무기한 사용을 목적으로 분배되 었으나, 경작지의 소유권은 원칙상 여전히 지주에게 속해 있었 댜 토지에 대한 농민의 의무조건은 일반적으로 양자간의 임의적 교섭에 따라 결정되었고 일정 기간을 거친 후 갱신될 수 있었으 나, 농민은 의무적으로 일정한 날에 지주의 영지에서 노동하거나 혹은 현금으로 세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듯 무기한 사용권을 인정한, 이른바 〈분배지 (no Ji eBoR aa p; e JI)〉가 설정되고 그에 대하여 임시로 의무를 지게 된 농민은 〈임시의무적 농민 (Bp eM eHHO .o6H3aHHHe Kp ec TLHHe) 〉으로 취 급되 었다 . 그 호칭 에 서 도 엿볼 수 있듯이 〈분배지〉 농민은 지주에 대해 의무를 지게 되어 있었으므로, 농노해방은 종전의 지주 • 농민관계를 일부 법규 화한 데 불과한 것이었다. 토지에 대한 의무가 강제로 남아 있는 이상 실질적으로 농노제 와 유사한 관계가 그대로 존속되었음을 의미하며, 이와 같은 종속 관계는 농민에게 농노해방 전보다 더 가혹하고 불리한 영향을 미쳤댜 이러한 상황은 지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 요컨대 농노제 의 페지와 그에 따른 토지문제의 조정으로 농민들은 사회생활에 있어 신분상의 자유를 얻었고 또 경제생활에서 무기한의 〈분배 지〉를 할당받았지만, 신분상의 자유란 공허한 자유에 지나지 않았 고 토지 또한 제한된 〈분배지〉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이익이라곤 거의 얻지 못했다 . 따라서 이들은 자유의 실질적인 보장과 그에 따른 농경지의 소유권을 요구하게 되었으므로 지주들도 불이익 내지는 어떤 위험마저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제정된 토지배상법은 완전한
자유농민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법 적 장치 를 만들어 주었다 . 농민 은 지주와의 임의적 협정에 따라 〈 분배지〉에 대한 대가를 지불함 으로써 〈토지소유권〉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 토지배상에 의해 〈임시의무적 농민〉에서 〈토지소유농민〉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농민에게는 토지배상의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는 배상계약이 수립될 때 6 % 의 수익에 해당되는 유가증권을 포함한 배상액의 80% 까지는 지주에게 교부해 주고 나머지 20% 의 배상은, 지주와 농민의 임의계약일 경우 농민 자신이 지주에게 지불해 주고 지주의 요구에 의한 경우일 때는 지불하지 않아도 되게끔 하였다 . 그것은 지주의 수취량이 정부에 의해 교부된 80% 상당의 액수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정부에서 교부 된 유가증권 금액은 정부에 대한 농민의 배상의무이며 49 년간의 연부 상환계약으로 맺어졌다. 그러나 농노해방령이 시행된 이후에도 토지문제에 관한 복잡한 사정 때문에 많은 분쟁이 야기되어 이른바 조정관 (MH p OB08 nocp eA HHK) 제도가 시행되었다 . 이에 따라 각 지방에서 선출된 조정관이 토지 에 관한 지주 • 농민간의 분쟁을 조정하였으며, 중대한 쟁의나 의문점들은 지방 조정관회의의 심의를 거쳐 결정되었다. 농노해방 사업은 I86I 년의 일반해방령과 이를 바탕으로 한 1863 년과 I866 년의 법령에 따라 시행되었지만, 수세기에 걸쳐 러시아의 사회생 활과 경제생활의 토대를 형성하고 있던 농노제와 농노제적 요인 을 일시에 해소할 수는 없었다 . 비록 농민의 신분과 토지제도에 관한 획기적인 개혁이긴 했어도, 새로운 지주경제나 농민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을 수반하지 못했던 것이다 . 오히려 농노해방에 따른 제반 경제시책은 결과적으로 유럽 • 러시아의 지주계급이나 농민계급 어느 한쪽에도 만족을 주지 못하였고, 특히 과중한 조세 부담 때문에 해방된 농민의 경제생활은 극도로 어려운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 그런데 시베리아 사정은 이와 달랐다. 이미 유럽 • 러시아로부터 이주가 행해지고 있던 지방에서도 남아도는 땅이 풍부했기 때문
에 토지에 대하여 강 한 집착을 느 끼지 않았다 . 더욱이 농노해방령 은 시베리아에서 노예신분으로 광산노동을 의무적으로 하고 있던 노동자에게도 자유 를 회복해 주었다. 이들은 저렴한 의무노동자에 서부터 고임금의 자유고용노동자로 전환하였다 . 이리하여 처음에 는 생산력의 저하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것이 자유노동계약에 의한 생산의욕의 향상으로 생산력은 회복되었다. 바로 이와 같은 사정이 유럽 • 러시아의 농민들로 하여금 시베 리아로의 식민이주를 시도하게 한 커다란 원인이 되었다. 과중한 조세부담과 협소한 토지는 유럽 • 러시아의 농민경제를 심각한 상태로 몰아넣었는데 , 정부가 이에 대한 적극적 시책을 고려하게 된 것 은 농노해방 후 IO 년이 경과한 무렵이었다 . 한편 몰락한 농민들도 유럽 • 러시아의 협소하고 까다로운 〈분배지〉를 포기하 고 미개발 지방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3. 19 세기 후반의 시베리아 이주와 철도건설 문제 1861 년 농노해방령에 의해 농민들에게는 자기의 희망에 따라 경작지나 기타 재산울 처분하여 다른 지방의 식민지로 이주할 권리가 법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의 식민적 이주에 상당한 장애가 있었다. 농노해방의 결과로 분배받은 땅은 대체로 협소한 데다가 그 밖의 납세의무, 지대(地代) 상환 둥 과중한 부담으로 농민들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으나, 막상 이들 이 유럽 • 러시아의 변경지방이나 시베리아의 식민지방으로 이주 하려 해도 〈미르 (MH p:농민공동체)〉 제도에 의한 구속이 있었다 . 〈미르〉는 소속농민의 토지할당, 납세, 그 밖의 의무를 결정하고 있어서 어느 정도의 행정적 기능이 인정되고 있었다. 정부가 농노 해방령 시행 후에도 〈미르〉제도를 존속시켰던 것은 토지배상금이
나 조세의 징수에 있어 〈미르〉단위의 편의를 고려했기 때문이었 댜 농민은 약정의 배상금을 지불함으로써 분배지를 사유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때 〈미르〉소속 농민의 %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 였댜 따라서 이들이 완전히 독립한 개인 자작농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끼셀료프 입안의 관 주도 이주는 주로 자유농민에 대해 적용된 것이었기 때문에, 농노해방령에 의해 해방된 농민들로서는 비록 풍요한 시베리아 식민지방으로의 이주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그것을 실현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많은 장애가 뒤따랐다 . 행동의 자유는 인정되었지만 이주의 기회를 얻기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더욱이 정부는 유럽 • 러시아 농민 의 시베리아 식민적 이주에 대해서 부정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 댜 따라서 미개척 지방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생활을 꿈꾸었던 농민에게 있어서 처음 부딪친 난관은 무엇보다도 어떤 방법으로 고향에서 벗어나는냐 하는 문제였다. 〈미르〉에서 이탈하는 수단으 로 일시적인 여행을 가장한 채 여비 마련을 위해 몰래 재산을 처분하여 가벼운 짐을 챙기고 시베리아로 떠나는 농민들이 속출 하였다. 물론 이들의 여행은 한마디로 말해서 비참하기 이룰 데 없었댜 농노해방 후 약 20 년간 유럽 • 러시아 농민의 시베리아 이주식 민은 〈미르〉에서 불법으로 도망친 경우뿐만 아니라 합법적으로 탈퇴한 경우에 있어서도 재력과 정신력, 체력을 갖춘 자라 할지라 도 그들의 궁극적 목적을 달성할 숫자는 매우 적었다. 원래 시베 리아로의 강제적 내지는 의무적 이주는 그 숫자상 아주 미약했으 며, 또 자유롭고 자의적인 이주도 광대한 시베리아 전역으로 볼 때 극히 국부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 더욱이 새로운 이주자의 급증 과 이주준비지(移住準備地)의 부족으로 인해 지방관청은 이주자의 정착생활에 대해서 형식적인 조정만 했을 뿐 전반적인 구제책을 강구하지 못했다. 그래서 연간 약 4 만명으로 추정되던 당시 이주 자의 생활은 최악의 상태를 면치 못했고 이들에 의한 사회질서의
혼란도 불가피했다. 한편 유럽 • 러시아에서는, 토지의 일반적 재분할이 실시된다든가 혹은 새로운 의미의 자유가 규정된다든가 하는 낭설이 농민의 정주생활을 동요시켰으므로 경제적 불안과 사회적 혼란의 기운이 싹렀다 . 또 흉작에 의한 곤핍과 토지가격이 나 지대(地代)의 앙동 동의 위협이 뒤따랐으므로 농민의 이주의욕 은 점점더 자극되었다. 이옥고 일반이주법 제정을 위한 특별위원회가 조직되어 1881 년 6 월 1 일 임시 이주규칙이 결정되었다 이 규칙의 입안은 이주 사업을 지금과 같은 불확실한 상태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 아래, 새로운 지방에서의 정착은 특별한 공시가 없어도 농민계급 개개의 집단 요구에 따라 행할 수 있도록 했다. 따라서 종래 이주 희망자가 이주목적지에서 〈미르〉 가입 허가증을 제시해야만 했던 것과 국고의 미납금이 있을 때 이주 전에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의무 조항이 삭제되었다. 요컨대 이주를 희망하는 농민에 대해 이주 허가를 신축성 있게 해주었고, 자의적 행동에서 합법적 행동 에로의 전환을 용이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의 임시 이주규칙은 일반에게 공포되지 않았고, 그것 이 하나의 법률 , 죽 이주법으로 공포된 것은 1889 년 7 월 13 일이었 다 . 당시의 내무장관 두르노브 (H.H. 恥 r p HOl30) 는 알렉산드르 冊세에 게 이주법에 있어서 고려되어야 할 바람직한 원칙과 더불어 디옴 과 같은 정세 판단을 보고하였다. (1) 일부 농민의 이주가 요청되 는 지역은 유럽 • 러시아 중부지방의 하나 내지 두 개의 현에 불과하기 때문에 일정 범위내에서의 이주는 허용되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특전을 부여하는 방책을 취해서는 안 된다. (2) 그 같은 법령의 공표는 민심의 동요를 초래할 우려가 있을뿐더러 이주를 희망하지 않는 농민대중에 대해서도 이주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온댜 따라서 그것은 행정관청에 매우 어려운 사태를 야기시키게 된다 . 11) 11) 大橋與一, 앞의 책, p. 277.
이렇듯 광범한 특전을 부여하는 이주제도에 있어 이주 희망자 들은 행동상의 자의(窓意)를 인정받지 못하였고, 행정관청의 허가 를 중요시하는 원칙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이주제도의 운영을 담당하고 시베리아의 이주지구를 설정하는, 즉 시베리아 이주사업 을 관장하는 기관으로서 내무성 산하의 특별 부처의 설치가 제기 되었다 결국 두르노보 내무장관의 입법 원칙이 수용되어 이주법 이 제정되었지만, 이 법의 시행과 더불어 이주는 내무장관의 사전 허가를 얻어야만 했고, 이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이주한 자는 송환되었다 그런데 법안의 작성이나 심의가 지연되었기 때문에 이주법이 제정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고, 이 준비기간 동안 유럽 • 러시아 농민의 이주는 계속되었으며 실질적으로 증가추세 까지 보였다. 연평균 약 IO 만 명이 이주하였고 그 가운데 근 75% 가 허가 없는, 이른바 비공인 이주였던 것은 12) 유럽 • 러시아 농민생활이 얼마나 핍박했으며 시베리아에 대한 이주 욕구가 심각해졌음을 잘 말해 주고 있다. 특히 신이주법이 시행된 후 최초 2 년 동안에도 자의적 이주는 계속되어, 공인된 이주자가 약 I 만 8 천 명인 데 비하여 전체 이주자는 약 15 만 명에 이르렀 댜 13) 또 1891-1892 년 유럽 • 러시아 중앙지대의 흉작으로 인해 1 년 동안 이 지역 주민 약 9 만 5 천 명이 시베리아로 이주하였 댜 더욱이 이들 모두가 극빈자이며 자의적 이주자라는 점을 감안 한다면, 1889 년 이주법의 주된 목적, 즉 농민이주에 질서를 기하 고 자의적 이주를 억제한다는 목적이 달성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14) 뿐만 아니라 자의적 이주자들의 극히 어려운 생활에 대한 긴급 대책 마련이 현지 행정관청의 당면 과제가 되었다. 따라서 이때까
12) Kp ec TbRHcx: oe nep e ceAeHue u pycc x: a J i x: 0 11, oHuaa 나邸 aa Yp a 11 ,0 M, AaHa- TCRa11 PoccH11, Vol. I ., IleTep 6 y pr , p. 455. 13) 같은 책, p. 456_ 14) A. A. Kay ipM aH, llep ec e. 11e Hue u KaMHuaa11u1 i, IleTep 6 y pr , 19o8, p.3 1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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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의 시책이었던 시베리아 이주 허가제와 공인된 이주자만 보호 하고 원조해 준다는 정부의 방침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 결국 시베리아의 자의적 이주자에게 새로운 토지에 정착시키고 합법적 허가 이주자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게 되어 있었으나, 이들의 숫자 가 엄청난 데다가 극도로 가난했기 때문에 송환조치를 취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드는 비용과 그 밖의 악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시베리아의 현지사정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정책전환을 하게 되었던 정부는 또 다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주여행 이나 정착을 위한 보조금 지급대상의 확대로 인해 국고지출이 증액되었음은 물론 이주자가 격증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수용할 적당한 이주지가 매우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책을 변경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정책을 수정할 수밖 에 없었다 1892 년 농민의 시베리아 이주를 다시 금지시키고 어떠 한 경우라도 당국의 이주 허가를 받도록 함과 동시에 유럽 • 러시 아의 각 현지사에게 농민의 자의적 이주가 없도록 엄중한 조치를 취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도 효과가 없었고 유 럽 • 러시아로부터 시베리아로의 농민이주는 저지되지 못한 채 1893 년 한 해만 해도 약 IO 만 명의 이동이 있었다. 따라서 농노해방 후의 유럽 • 러시아 농민의 열렬한 시베리아 이주는 그 어떤 엄격한 법규에 의해서도 막을 수 없었다. 이들 모두를 이주지방에 수용하기에는 현지의 제반시설이 이를 따르지 못했기 때문에 정책의 전환에 의해 이주 파동을 억제하여 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 요컨대 시베리아 이주문제 는 그것이 유럽 • 러시아의 정세와 연계되는 한 제정러시아의 유럽과 아시아 땅 전체에 걸친 정치문제임과 동시에 경제문제였 으며, 또한 그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사회문제였다고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농노해방은 유럽 • 러시아 사회에 획기적 변혁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그에 따라 심각해진 사회현상, 특히 유럽 • 러 시아 농민의 시베리아 이주는 제정러시아의 시베리아 식민개발에
있어 커다란 의미를 가지며, 실질적으로 공인된 이주자는 물론 자의적 이주자에게 중대한 역할을 다했다고 보겠다 . 여기서 시베리아 이주식민정책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시베 리아의 철도 건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 시베리아 철도건설 문제는 I850 년대 동부 시베리아 총독 무라 비예프 • 아무르스끼 (H.H. M yp aBheB-AM yp cKHR) 에 의해 제창된 후 단속적으로 제기되었으나, I89I 년에 이르러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건설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 15) 위대한 문화적 구상이라고 일컬 어지는 이 철도건설은 시베리아 이주식민의 의의에 대한 정부의 견해를 바꾸어 놓았다 . 제정러시아 정부의 이주식민 정책은 상술 한 바와 같이 농노해방 이후에 격증한 유럽 • 러시아 농민의 시베 리아 이주운동을 조정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비합법적 수단에 의한 자의적 이주를 억제하여 유럽 • 러시아에 필요한 농업노동력 울 확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정한 조건을 구비한 합법적 이주 를 권장하여 시베리아에 필요한 농업이주자의 증가를 꾀하려는 시책도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시베리아 이주문제는 농노해방 후, 극히 해결하기 어려우면서도 그 영향력을 방관할 수 없는 전 러시아적 문제로 간주되었다. 만일 시베리아철도가 건설됨으로써 시베리아는 물론 유럽 • 러시 아에도 이익이 된다면 , 철도 건설사업은 시베리아의 식민지 개발 사에 있어 획기적 사업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 시베리아 철도건설이 결정되자 알렉산드르 m 세는 이 사업을 추진하고 철도 연선지대(沿線地帶)의 경제개발을 촉진시키기 위하 여 1,400 만 루블의 자금을 결재하였고, 1897 년에는 790 만 루블이 추가되었다 .16) 이 자금의 처리 및 사업의 심의와 결정은 시베리아
15) H. A. I'aBp un oB, H. C. Hop KH H, B. Il. B onKoB, llyTu Coo6111eHU. R· )[(e4· e3aeHM1 1iJ ei e y/4 coT p p n 0 u8 ,C TIBleap ec He ne3ae11Me JIc 0KAo8e 血 JYI,n p aAs anHeaHTuCe KIQ 'JnI a sPaoocrCoH YJ In, pV aos nl.e uHn1.,1 IleTep 6 yp r , 1914, p. 513. 16) Kp e cTMHcit oe nep e ceAe/I .u e u pycc it as it OMl /I. U3a 나U.R aa Yp a A o M, AaHa- TCKIUI PoccHH, Vol. I., p. 459.
철도위원회가 담당하였다 .17l 이 위원회는 황태자 니꼴라이 (HHKO Ji a 0: AneKcaHAPOB li이 룰 위원장으로 하고 18) 수상, 재무상, 내무상, 국 유재산상, 교통상, 육군상, 해군상 및 회계검사원을 위원으로 하여 I892 년 I2 월 IO 일에 설치되었는데, 특히 황태자를 위원장으 로 임명한 것은 비떼 (C.IO. B li TT0) 의 진언에 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위원회의 임명에 즈음하여 알렉산드르 III 세는 시베리아 철도건설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표명하였다 .19) (I) 동방에 있어서 평화적, 문화적 사업이며, (2) 시베리아의 식민적 개발을 조장하는 모든 시설과 더불어 신성하게 행해져야 한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황태자가 I893 년 2 월 IO 일 시베리아 철도위원회 회의에서 위원장 으로서의 열성을 피력하면서 협력을 촉구한 사실은 위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의 식민사업에 관계 있는 지방의 국민과 관리에게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I86I 년 농노해방 이후 정부가 취한 이주제도 방침은 시베리아 철도건설의 결정을 계기로 필연적으로 변경되어야 했다. 즉위한 뒤에도 계속 위원장의 직위를 보유하고 있던 니꼴라이 II 세는 I895 년 3 월 8 일 의회에서 유럽 • 러시아 농민의 시베리아 이주문제 에 대해 자신의 견해롤 표명하였다. 그는 농민 이주에 대해서 어떤 의구심을 갖고 대처할 것이 아니라 농민 이주에 보다 자각 적 성격이 부여되도록, 또한 보다 적절한 조직을 갖출 수 있도록 유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20) 이 지시에 따라 위원회 의 태도도 더욱 분명해졌다. 요컨대 (I) 유럽 • 러시아로부터의 이주 인원은 매년의 자연증가 인구 IOO 만 내지는 200 만에 비하면
17) H. A. raBp H nOB, H. c. H op KH H, B. n. BonKOB, 앞의 책, A8H8TCK811 poc cHR, Vol. II .. p. 518. 18) C. IO. BHTT8, BocnoMUHaHu.1 1-l(ap cT eoeaHue A. 11e 1 'C aH8p a II H AAe1 'ca H8p a ill. 1923 , pp. 393-3 94 . 19) H. A. raBp Hn OB, H.C .Hop KH H, B. n. BonKOB, 앞의 책, AaHaTCRa Jl Pocc 펙 Vol. II. , PP. 517-5 18 . 20) Kp ec TbRHC1 'oe nep ec e.1 1e Hue u py cc 1'댜 xOHU3au 邸 8a yp‘, AaHaTCK 惡 PoccH11, Vol. I.. p. 46o.
극히 적은 숫자이기 때문에 유럽 • 러시아의 경제상태에 결코 불리한 영향만 미치는 것이 아니다, (2) 더욱이 시베리아의 정치 • 경제적 발전에 유리한 효과를 가져온다, (3) 또 유럽 • 러시아 농민 의 이주는 러시아 문화의 시베리아 이식을 조장하고 아시아 • 러 시아와 유럽 • 러시아간의 긴밀한 연계를 이룬다는 정부시책을 촉진시켜 준다-이러한 견해가 채택됨으로써 향후 이주제도의 운영과 방침을 뒷받침해 주었다. I886 년에 제정된 이주법의 내용은 이같은 방침에 따라 수정되 고 보다 구체화되었다. 여기서는 특히 이주를 제지하거나 비합법 이주자를 송환하거나 하는 것이 불가능할뿐더러 무의미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 또 이들에 의해서 야기된 이주지의 혼란을 없애고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현지사정에 대한 유럽 • 러시아 농민의 인식을 시정하고, 시베리아 이주식민에 대한 이들의 자각 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반영되었다 . 이러한 의견을 고려하 여 제시된 구체적인 주요 시책으로는, (I) 시베리아 이주생활에 대한 예비지식을 함양할 것, (2) 이주지구 선정문제를 돕는 상담제 도를 설치할 것, (3) 이주자의 자각적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 시베 리아 사정 및 이주안내서를 보급할 것 21) 둥이었다. 또 이주허가서 의 교부를 간소화 내지는 원할하게 하기 위하여 I896 년 내무성 산하에 이 주사무국 (IIe p ece Ji eH 'l ec :K oe ynp aB Ji eHHe) 도 설 치 되 었 댜 초대 국장에 기뻐우스 (B. JI!. runnuy c) , 차장에는 토지문제와 농업문제에 경험이 있는 끄리보쉐인(A. B. K p HBO ill 8HH) 이 임명되었 는데, 이는 식민적 이주의 조사와 질서에 관한 중앙관리기관이나 다름없었댜 시베리아 이주식민에 대해서는 이미 1893 년에 이주자 정착방법 의 개선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그 후에도 새로운 법령에 의해 이주 조성 자금제도가 개정되어 의료, 급식시설 둥이 마련되 고, 교회부속학교의 설비가 확충되었으며, 불의의 사고나 재해에
21) A. A. Ray cf,M aH, llep e ce.J UJH ue u Ko JUJ Huaa 나 UR, IleTep 6 y pr , 1905 , pp. 63-67.
대한 특별 구제제도가 창설되었고 , 공공통신기관의 창설과 도로 개수 동도 이루어졌다 . 이와 같 은 적극적인 시책을 시행한 결과 시베리아 철도위원회가 사업을 시작한 I2 년 동안 이주사업에만 약 3 천만 루블을 지출하였고, 남자로만 약 40 만 명의 이주자를 정착시킨 크나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사업의 진전과 더불어 그에 부응하는 기본규정이 필요하게 되어 I904 년 6 월 6 일 새로운 이주규칙이 제정되었다 . 새로운 이주규칙에 따르면 시베리아로의 식민적 이주에 관한 종래의 제한이 많이 완화되고 이주의 자유원 칙도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 이것은 시베리아 철도건설이라는 획기 적 사업의 진행을 수반한 시베리아 철도위원회의 방침에 의해 촉진된 시베리아 이주식민정책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이미 시베리아에 정착했던 비합법적 이주자도 차별대우를 받지 않게 되었댜 하지만 이주의 자유원칙이 인정되긴 했어도 , 예를 들어 정부의 지정이주 허가를 받은 자에게는 일반적으로 정부의 보호 와 보장이 약속되었던 반면, 분배지의 청산제( 淸 算制])가 규정되고 이주자에서 〈미르〉를 형성하고 가입해야만 되었다 . 죽 이주자에게 보호와 보장을 약속한 반면 시베리아의 식민지 개발정책에 따르 는 제약이 뒤따랐던 것이다. 4. 20 세기 초기의 이주식민 니꼴라이 I1 세의 특별칙령에 따라 국유재산성이 개혁되었고, 이전에 이주사업의 총괄적 관리기관으로서 내무성에 설치된 이주 사무국이 1905 년 농지조성 농업총국(I'Ji aBHoe yn p an J ieH He aeMJ ie- y@po RCTBO H 3eM JI eRe JI MH) 에 소속되었댜 종래의 이주사무국은 이주자의 경제생활 확립을 위하여 보조를 제공해 주고 그의 발전 을 촉진하는 데 주력해 왔으나 충분한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 왜냐하면 이주자의 정착생활 조건에만 급급하였고 이주용지의
창설이나 이주지의 수리, 그 밖에 이주농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 들이 이주사무국의 소관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 따라서 농지조성 농업총국은 이주사무국의 업무는 물론 식민적 개발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모든 사항들을 총괄하게 되었다. 시베리아 이주에 관한 규정이 새로운 이주법에 의해 갱신되고 담당 중앙관리기관이 기구개혁에 따라 정비됨으로써 시베리아 이주식민체제가 조직화되었지만, 시베리아 이주식민 사업의 실제 적인 추세는 군사적 사건, 특히 1904-1905 년의 노일전쟁으로 인하 여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 시베리아 식민지로의 합법 적 이주는 1903 년의 6 만 4 천 명에 비해 이듬해 1904 년에는 4,200 명으로 격감 했고, 1905 년에는 3,200 명으로 또 다시 줄어들었다 . 지역적으로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와는 거리가 먼 뚜르가이스까야 주 (Ty pra 8c1< a .1 1 o6 Ji aCTb) 와 우랄리 스까야 주 (Y pa Ji bcKa .11 o6J ia CTb) 의 평원지대에 한정되었다 .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 현상에 그쳤고 전쟁의 종결과 더불어 시베리아 이동상태는 또 다시 활발해지고 1906-1908 년에는 전례가 없을 만큼 증가하였다. 그 주요 원인으로 는 평화회복에 따라 이주진로가 다시 개방되었고, 이주의 자유를 원칙적으로 인정한 이주법이 시행되었으며, 많은 귀순병에 의해 시베리아의 사정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 또 다른 이유로는 이주지구 설정에 관한 조직이 충실해졌고 새로운 이주자에 대한 보조와 융자가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19 세기 말부터 20 세기 초에 이르는 약 20 년 동안 유럽 • 러시아 로부터 우랄 산맥을 넘어 시베리아 여러 지방으로 향한 농민은 약 400 만으로 추정되며, 그 가운데 약 300 만 명은 시베리아 이주 식민이 가장 활발했던 1907-1913 년 사이에 이주한 사람들이라고 전해진다 22) 따라서 이 시대의 토지할당 사업은 종전과는 다소 다른 방법으로 행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Z) Cu6up c ,c u e nep e ceAeH1 >i, Ilep e cene! l'lec Koe Ynp aB J ieH He rnaBHoro Y- np aBneH 回 3eMney cT p ac TBa H 3eMnep ;e JI H11, AaHaToKaR Pocc 血 , Vol. I., IleTep 6 y pr , 1914, p, 189,
시베리아 이주자가 가장 많았던 1908 년에는 약 70 만 명이 유 럽 • 러시아로부터 우랄산맥 동쪽으로 이동했지만, 이 많은 이주자 에 대해 신속하고 적절한 토지할당이 뒤따르지는 못했다. 이주자 에 대한 토지할당은 그들의 정착생활을 위한 기초사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수요량이 급증했기 때문에 최소한의 양적 충족을 기하 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이주자가 많았던 시기에는 연간 400 만 내지는 500 만 제샤찌나(.u; ecHTHHa)23) 의 이주용지가 최소한 필요했는데 이주지구에 대한 상세한 조사를 할 겨룰이 없었던 것이다 또 정착지를 중심으로 이주지 공동체를 설립하게끔 했는 데, 이 경우 5 천 내지 I 만 제샤찌나를 단위구획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식민적 이주의 파동이 다소 누그러지자 이주용 지의 수요량도 연간 150 만 제샤찌나 정도로 감소되었으므로 그 지역의 자연조건, 특히 지형과 지대 동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신설되는 이주지 공동체에 대해 1,500 내지는 2,000 제사찌나를 단위로 하여 적당한 지구가 설정되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
23) 러시아의 토지단위로서 1 제샤찌나는 I, 092 헥타아르임.
식민적 이주에 대한 조성책으로 적절한 이주지를 알선해 주는 일이 중요했지만 그 밖에도 고려할 점이 많았다 . 죽 이주여행 및 이주지 생활에 있어서 의료시설 등이 그 한 예였다. 이에 대해 서는 국고로부터 이미 600 만 루블이 지출되어 우랄 산맥 동쪽의 시베리아 지방에 약 500 개소의 이주진료소가 세워졌고, 150 명의 의사와 650 명의 보조원이 배치되었다. 또 이주자에 대한 식량의 공급과 이주 고아의 보호 및 그 밖의 경제적, 사회적 시설도 고려 되었다 . 한편 유럽 • 러시아 농민의 시베리아 이주절차가 간소화되었 댜 종전에는 공동체 농민이 자의적으로 분배지를 처분함은 물론 자기의 분산된 자그마한 경지마저 처리하는 것이 자유롭지 못했 으나, 이것이 점차 완화되었다. 또 공동체 농민이 시베리아로 이주할 경우 실제로는 분배지뿐만 아니라 모든 부동산을 거의
무상으로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나, 이같은 불리한 사정도 점차 개선되었다 . 그 이유로는 토지정리에 관한 제규정이 생김으 로써 소유주의 권리와 자유가 인정되었고, 그 공동체에 있어서 탈퇴자의 분배지 매수에 대하여 농민은행의 융자가 원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 특히 자기 분배지를 양도하거나 재산을 매 각해서 번 대금을 이주자금으로 갖게 되었던 것은 농민의 이주를 이전에 비하여 한결 유리하게 , 또 간소하게 해 주었다 . 시베리아 식민지로의 이주가 간소화되고 정부시책이 강화되었 음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 이주농민에게는 예기치 못했던 많은 위험과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위험과 어려움이 많으면 많을수록 식민적 이주의 왕성한 파동은 광범한 지역에 걸쳐 확산되었고 동시에 이주지방의 개발도 촉진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이주농촌이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도시도 출현하게 되었댜 예를 들면 똥스까야 현 (ToMCKa .fl ry 6 ep H HH), 중부에 있는 노보니꼴라예프스끄 (HoBOHHKO Ji aeBCK : 현재의 노보시비르스끄)는 19 세기 말까지만 해도 오비 (06 비강 상류 연안의 극히 작은 마을 에 불과했지만 IO 여년 동안에 인구 8 만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또 같은 현의 남부 꿀룬진스까야 평원 (R yJiy H .D; HHCKa .fl CTenb) 은 20 세기 초까지 넓은 지역에 몇 개의 유목인 부락만이 산재했을 뿐인데, 1909 년 초원의 한 지점 인 슬라브고로드 (C Ji aBro po .u;)는 몇 년 사이에 인구 약 8 천명의 지방 중심지가 되어 제분소, 진료 소 • 학교 동이 설립되었다. 노 • 일전쟁이 종결되자 시베리아 극동지방으로의 이주가 급격 히 증가하였고 해당지역의 식민적 발달이 촉진되었다 . 물론 현지 의 수용태세가 미흡했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으나, 쁘리 모르스까야주 (Il p HMo p cKa .fl 06꼬 aCTb) 를 비 롯하여 우수리 (Yccy pH ) 강 유역에도 러시아인의 새로운 식민적 사회가 형성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한낱 자그마한 마을에 불과했던 이만 (HMaH) 둥은 급격한 인구증가로 인해 지방도시로 성장하였다. 이같은 신홍도시 를 중심으로 이만강 연안을 따라 많은 러시아인 이주촌락이 계속
생겨나 새로운 교구가 설정되고 학교가 개설되었으며 공공의 식료품 공급기관도 설치되었다. 요컨대 1910 년대, 죽 제정 말기의 시베리아에서는 이주식민 활동이 광범한 지역에 걸쳐 행해졌을 뿐만 아니라 지방도시를 중심으로 식민적 사회의 건설이 두드러 지게 나타났던 것이다. 제정러시아는 노 • 일전쟁의 결과로 인해 시베리아 식민정책을 재검토해야 했고 또한 격증하는 식민적 이주의 파동에 대응하여 식민지 문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같은 상황하에서 I910 년 현지사정을 직접 이해하기 위하여 스똘르이뻔 (II. A. CT01l I,lil HH) 과 끄리보쉐인(A. B. K p HBomeHH) 이 시베리아로 시찰을 떠났다. 당시 이주민 사업은 이전에 비하여 그 규모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매우 방대하였다. 식민적 이주자는 일시 노동자를 제외 하고 연간 20-30 만 명이었으며, 그중 약 8 만 명이 특전이 부여된 이주자였고 정착한 자는 이들을 포함하여 약 20 만명으로 추정되 고 있다 경비로서는 이주지구의 창설 및 토지의 할당 등에 약 400 만 루블, 새로운 도로의 건설과 낡은 도로의 보수, 이주지구 교통시설의 건설 동에 약 500 만 루블, 또 수리 및 그 밖의 토목공 사에 약 200 만 루블이 지출되었다. 이상은 주로 기초사업에 투입 된 비용이지만, 이주여행 및 이주생활에 필요한 자금의 대부와 보조에는 약 1000 만 루블, 의료 및 식량 보조에는 약 500 만 루 블, 의사 지원 등에는 약 100 만 루블이 지출되었는데, 이것은 주로 이주 및 정착을 위한 보조사업비였다짠 이 밖에도 약간의 항목에 대한 경비가 책정되었는데, 시베리아 이주식민에 대한 국고지출은 연간 2,700-3,000 만 루블에 달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유럽 • 러시아로부터 시베리아로의 식민적 이주는, 그것이 합법 적인 경우는 물론 비합법적인 경우라 할지라도 이주민들이 식민 적 개발에 기여한 공으로 인해 제정러시아의 세력은 시베리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세력은 서서히 동진하여 마침내 시베리
24) Rp e cTMHCKoe nep e ce.1 1,e 11ue u pycc KaR Kono11u3alf UR 3a Yp 섹 ,A3HaTCKaH. Poccun, Vol. I., p. 488.
아 전역에 걸쳐 거의 확대되었지만, 제정러시아는 이를 기반으로 하여 또 다시 외국, 특히 인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될 단계에 이르렀다 아시아 • 러시아의 인구는 1897 년 전 러시아 인국조사에 따르면 13,506,887 명, 면적은 14,044,004 평방 베르스따 (I Bep c Ta=I,067 km) 였다 또 1911 년 조사에 의하면 인구가 19,693,368 명으로 평균밀
아시아 • 러시아의 면적과 인구통계 (1897 년의 전(全)러시아 인구조사와 1911 년의 조사에 의한 산출 )25)
25) Pacnp e 8eAeHue Hace .11 eH 邸 ey 6e p H ut l u o6AacTet l AauaTcKot l Poccuu no g ea8다 , AaHaTcxa11 PoccH. 11, Vol. I., pp. 88-92.
지방별 면적 1897 년 1911 년
세미빠라찐스까야 주 449,8 5 0 684,590 I.52 1 873,76o 1.9 .µ
도가 1,402 명이었는데, 이 기간중 r. 457 배 증가했던 것이다. 러시아 슬라브 민족의 식민적 동진凍:進)은 동유럽 평원에 있어 서 식민운동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으며, 제정러시아 정권은 우랄 산맥 동부의 식민운동 결과를 이용하여 국가권력에 의한 식민적 영 역 을 서 서 히 확장해 나갔다 . 우선 오비 (061, ) 강, 예 니 세 이 (EHECeE) 강, 레나(Jl eHa) 강 동 3 대 하천의 유역인, 이를테면 정치 • 지리적 으로 서부 • 동부 시베리아 지방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을 점차적 으로 식민화하였고, 그 다음 이 지역을 발판으로 아시아의 남서부 및 북동부로 점진하여 이 새로운 지방울 식민적 유역으로 만들었 던 것이다 아시아 • 러시아의 초원지방이라고 일컬어지는 우랄스까야, 뚜르 가이스까야, 아끄몰린스까야, 세미빠라찐스까야 둥 4 개의 주와, 뚜르께스딴 지방(중앙아시아)이라고 일컬어지는 자까스삐스까야, 스이르다린스까야, 사마르깐드스까야, 페르간스까야, 세미레첸스까 야 5 개 주는 유럽 • 러시아에 비교적 가까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 에 서부 시베리아, 동부 시베리아, 극동지방과는 자연조건이나
사회적 상황이 달랐다 . 이 지방은 자연지리적 조건이 특수하며, 오래 전부터 많은 원주민과 이민족에 의해서 상당 부분의 지역이 점거되어 있었으므로 시베리아와는 다른 식민정책에 의해서 경제 개발과 문화적 향상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
제 7 장 제정러시아의 동방진출정책과 만주와 조선 1. 시베리아 철도정책의 국제성 시베리아의 식민적 개발과정에 있어서 철도건설 문제가 구체적 으로 제기된 것은 동진을 계속하던 식민지화 활동이 거의 극동지 역에까지 다다랐던 I9 세기 중엽 이후의 일이었다 . 이미 앞의 장에 서 서술한 바와 같이, I850 년대에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무라 비예프-아무르스끼 동부 시베리아 총독이었고, 그가 최초로 계획 했던 것은 아무르강(흑룡강)과 데 까스뜨리 만(,D; eKaCT p H sa n. HB) 을 연결하는 극히 국부적인 철도건설이었지만, 이것은 끝내 채택되지 못했다 시베리아의 철도건설 문제가 비교적 늦게 제기되었던 원인은, 시베리아의 자연지리적 조건, 특히 지형과 기후의 특이성에 의존 하는 하천교통이 비교적 용이했을 뿐 아니라 사냥꾼과 상인, 그리 고 까자흐인들의 진출에 따른 원시적 도로가 유럽 • 러시아에서부 터 동방으로 점차 열리게 되어 하천과 도로에 의한 교통이 발달 되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 또 다른 이유로는, 유럽 • 러시아와 시베 리아의 정치적 격리성으로 인해 위정자들이 시베리아를 유럽 • 러
시아 사회와 직접 연계가 없는 격리된 유형지 또는 그에 준하는 변경지방으로 간주했던 시기가 너무 오래 계속되었다는 사실 , 또 시베리아의 경제적 가치를 경시하여 철도에 의한 연결을 중요 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 더욱이 시베리아에 있어서는 그 당시 만 해도 철도교통보다 하천교통이 경제적인 면에서 유리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겠댜 무라비예프—아무르스끼가 철도건설을 제창한 후, 주로 상업상 의 이유로 니즈니 노브고로드 (Hu 沼 HHR HoBrop o ,n ;: 지금의 고리끼 시)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태평양 연안까지의 철도건설 계획안이 몇 사람의 외국인 기업가들에 의해, 또 사라또프 (Ca p aTOB) 에서 세미빠라찐스끄 (CeMnna p aTHHCK) 와 미누신스끄(Mlf Hy CHHCK) 를 거쳐 아무르강에로의 철도건설 계획안이 소프로노프 (Co cpp oHoB) 상무관 에 의해 정부에 제출되었다 . 이 계획안들은 당시 정부내의 반대의 견 때문에 모두 기각되었지만 , 19 세기의 6, 70 년대에는 이같은 철도건설에 관한 요망이 단속적으로 제기되었다 . 어떤 때는 유 럽 • 러시아의 경제적 요구를 내세웠고, 어떤 때는 극동에 있어서 식민사업 촉진 등의 이유를 제기하여 시베리아 식민지 철도건설 문제에 대한 관심과 의욕은 점점 높아졌다. 마침내 국고에 의해 유럽 • 러시아에서부터 시베리아로 통하는 최초의 철도로서 예까 쩨린부르그 (EKaTe p nH6 yp r : 지금의 스베르들롭스끄尸수和메니 (TIOM8Hb) 선이 1883 년에 기공, 1885 년 12 월에 개통되기에 이르렀다 . 1) 예까쩨린부르그一쯤메니 선은 시베리아에 건설된 최초의 철도 였지만, 시베리아 식민지의 철도교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주 미흡한 것이었다. 따라서 시베리아 철도건설의 적극적인 주창자인 뽀시예뜨 (IIocbeT) 교통상의 의도에 따라 별도의 철도건설 계획 이, 죽사마라 (CaMa p a: 현재의 꾸이브이쉐프) 부근에서 유럽 • 러시 아의 철도망과 연결하는 동쪽으로의 철도선을 부설하는 계획이 제기되었다 . 이 계획안은 1885 년에 채택되어 이듬해 사마라—우핌
1) 大橋與一, 『 帝政口 .}70 西比利t乙共남石所謂 橫道 鐵 道 0 建設& 事 情 』 , 字都宮大字 宇芸羊部硏究論集, 제 1 號, 1950 年 , p. 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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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까야 철도 (CaMa p o-¥ «f, HMCKaH m.A.) 로 착공되었고, I890 년에는 즐라또우스뜨 (3 Ji aTo ycT) 까지 연장할 계획이었다 . 원래 이 철도선 은 동쪽으로 계속 연장하여 시베리아 철도선으로 만들 예정이었 으나, 그 실현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 즉 시베리아는 당분간 수송바가 저렴한 하천수로나 이미 개통된 예까쩨린부르그 一쥬메니 선으로도 충분하다는 반대의견이 나왔던 것이다. 이렇듯 철도건설에 관한 정부내의 의견이 엇갈렸으나, 1886 년 마침 내 알렉 산드르 III 세는 똥스끄 (ToMCR) ―·이 르꾸뜨스끄 (M p Ry TCK) 철도건설에 관한 이그나찌예프(A. II. MrHaTLeB) 의 요청을 받아들였 다 1887 년 철도노선의 예비조사단을 파견했고, 1890 년 사마라― 우파(¥«f, a) ―즐라또우스뜨까지 연장된 철도선을 다시 첼랴빈스끄 (l.J e JI.R 6HHCK) 까지 연장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알렉산 드르 III 세는 극동지방의 방위에 있어서도 철도건설의 필요성을 인정하여 그 착수를 지시하였다건 이제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태평 양까지 미치는 철도의 건설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었으며, 1891 년 2 월 이를 최종적으로 결정하여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동 • 서 양쪽에서 착공되었다 . 동쪽에서의 철도건설은 우선 우수리체스까야 철도선 (¥cc yp H qe cKaH m.A. .) 의 부설공사부터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르 III 세는 당시 일본방문을 마치고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귀환길에 오른 황태자 니꼴라이 알렉산드로비치를 1891 년 5 월 19 일 블라디보스또 끄 (B JI 8 JJ; HBOCTOR) 의 기공식에 참석시켰다. 서쪽에서부터의 철도건 설은 첼랴빈스끄의 동쪽 노선을 최종적으로 조사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시베리아 식민지의 철도건설에 있어서 당초 예상하지 못했던 많은 장애가 있었는데, 기술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특히 재정적 인 면에서 많은 고충이 뒤따랐다. 1880 년대 말기 이후의 제정러시 아의 철도건설은 종래의 상업적 견지보다는 오히려 국가적 현실
2) H. A. f'an p H JI O B, H. C. Hop 1
에서 고려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어려움이 뒤따랐던 것이다. 특히 사마러―-우파―-즐라또우스뜨—첼랴빈스끄 철도선의 서부 시베리 아 연장공사와 불라디보스또끄―하바롭스끄 철도선의 부설공사가 경비부족과 시공의 어려움으로 인해 당초 계획보다 진척되지 못했다 이러한 부진한 공사룰 우려한 알렉산드르 III 세는 그 타개 안으로 철도건설사업의 계획성을 강화하고 공사의 적극성을 도모 했는데, 이에 적잖온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비떼 (C.IO.BHTTe) 였댜 비때는 시베리아 식민지 철도건설 주창자의 한 사람으로서 시베리아 이주식민의 발전, 광업의 발전, 동방상업의 진전 및 극동 변경의 방위 동에 대하여 그의 중요성을 주장해 왔다친 따라 서 알렉산드르 III 세는 그의 철도문제에 관한 식견과 역량을 인정 하여 1892 년 2 월 비떼를 교통상으로 임명하여 그의 헌신적인 노력 을 촉구하였댜 4) 제정러시아로서는 이같은 철도건설이 시베리아의 식민적 개발에 직접적으로 크나큰 도움이 될뿐더러 경제적 내지 는 문화적 성과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는 강력한 기관이 사업을 관장하면서 획기적인 방책에 따라 재정 적 조치를 취해야 하고, 더욱이 국제적인 협력에 의해 계획을 도모해야 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그래서 비떼는 교통상에 임명된 지 얼마되지 않은 1892 년 8 월 재무상으로 전임되어 극히 어렵고도 중요한 분야를 떠맡게 되었다. 그가 시베리아 철도위원 회 (KoMHT0T CH6:e pC K08 .lR0 J I0 3H08 AOp o rH) 의 설 치 룰 황제 에 게 건의하여 재가를 받고, 또 이 위원회의 의장에 니꼴라이 황태자를 천거했다 시베리아 철도위원회는 국가적 통할기관으로서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1) 위원회의 의장에 황태자가 임명 되었고 알렉산드르 III 세가 죽은 후에도 황제가 의장의 자리를 계속 맡았다는 것, (2) 위원회에는 매우 광범한 권능이 부여되었
3) 같은 책, p. 516. 4) C. I0. BHTT8, BocnoMUHaHUJ I, Jfap c reoeaHue AAexcaH8p a II u AAexcaH8p a III, B ep lll lB, 1923 , p. 399 .
고, 더욱이 그것은 철도정책을 중심으로시베리아의 식민적 개발의 촉진제가 되었다는 것 (3) 위원회 산하에 특별 준비위원회를 설치 하여 철도문제에 관한 처리는 물론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의 지연 울 방지했다는 것 등이다 .5) 당시 유럽제국의 식민지와 제정러시아의 시베리아 식민지를 지리적으로 비교해 보면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유럽 제국의 경우 해양에 의해서 본국과 떨어진 분산(分散)지역인데 비해 러시아의 경우는 본국과 접한 단일지역이라는 점이다. 따라 서 유럽 • 러시아와 시베리아 식민지와의 연락을 위해서는 육상교 통로가 필요함은 물론 식민적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 다도 근대적 교통수단으로서의 철도가 시급한 과제로 되어 있었 다 비떼는 시베리아 식민지 철도건설, 그 중에서도 간선철도의 부설계획을 처음에는 3 기로 나누어 입안하였다. 1 기 사업으로는, 서부 철도선 구역 첼랴빈스끄로부터 오비강에 이르는 1,332 베르스 따, 중부 철도선 지역 오비강에서 이르꾸뜨스끄에 이르는 1,743 베르스따를 부설하고, 또 이미 부설공사가 시작된 우수리스까야 철도선 718 베르스따 가운데서 불라디보스또끄로부터 그라브스까야 (rpa B CK8ll) 역에 이르는 부분을 완성하고, 더욱이 우랄스까야 철도선과 시베리아 철도선의 연결선을 예까쩨린부르그로 통하게 하는 일이었다 2 기 사업으로는, 바이깔호의 므이소바야(MI.I c0Ba11) 역으로부터 스레젠스끄 (Cp eTeHcK) 에 이르는 1,032 베르스따를 부설 하고 우수리스까야 철도선 가운데서 그라브스까야 역으로부터 하바롭스끄까지를 완성하는 일이었다. 3 기 사업으로는, 바이깔 우회철도선 312 베르스따, 스레젠스끄로부터 하바롭스끄에 이르는 약 2,000 베르스따를 부설한 뒤, 이 여러 철도선의 상호연결에 의해 전 시베리아 식민지 철도간선을 개통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극동지역의 철도건설, 특히 아무르스까야 철도선의 부설 공사는 자연적 장애가 많아 예상 외로 어렵다는 것이 밝혀졌고, 한편으로는 동방의 기점인 블라디보스또끄로 빨리 연결해야 할
5) A. A. Kay cpM aH, llep e ceAeHue u KDA0Huaaq1 1.11, IleTep 6y p r , 1905 , p. 46 .
제 7 장 제정러시아의 동방진출정책과 만주와 조선 125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청국의 영역을 거의 직선으로 통과하는, 이른바 동지나凍:支那) 철도의 건설을 고려하게끔 되었다 . 이 문제 에 대해 비때는 몽고 , 만주 를 통과하여 불라디보스또끄에 이르는 노선을 타당한 것으로 보았는데, 그 이유로는 (I) 시베리아 횡단철 도의 건설기간을 단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건설비도 절감할 수 있다는 것, (2) 동방의 러시아령 극동뿐만 아니라 일본과 그 밖의 외국을 유럽 • 러시아와 , 더욱 나아가 유럽제국과 비교적 용이하게 연결할 수 있고, 이렇게 되면 실질적으로 유리한 세계적 교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 6 ) 이 밖에도 여러가지 논의가 있었으나, 어쨌든 제정러시아 정부는 동부 시베리아 철도 내지는 극동 철도노선의 계획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북만주를 거의 횡단하여 동방기점으로 통하는 노선을 설정하는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의국의 영역을 통과하는 철도의 건설과 운영에 있어서는 복잡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제가 뒤따랐기 때문에 건설상의 기술적 어려움이 적고 경제적으로 유리하다 할지라도 러시아와 청국관계는 자연히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댜 이른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일부로서 극동지방에 동지나 철도를 건설한다는 것은 제정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정책에 국제 성이 가미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보겠다 . 그래서 처음부터 아무르, 우수리 두 지방의 유역권을 결정한 제정러시아가 이젠 시베리아 철도문제에 있어서 북만주 지방의 철도이권을 설정하기에 이르렀 던 것이댜 원래 이것은 동지나 철도문제로서 러시아와 청국관계 에 제기된 후, 구체적인 교섭을 거쳐 러시아측이 그의 정책목적을 이루게 된 데에는 청국측의 국내외 제반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 I895 년 제정러시아는 표면상 재정원조를 목적으로 청국의 외채 모집에 대한 보장과 더불어 프랑스 자본의 도입을 꾀하면서 러 •
6) C.IO.BHTTe, BocnoMuHaHU JI, l(ap c reoeaHue Huxa11 ,a a II, V ol .l.,B ep JIH -H, 1923. p. 꾸.
청은행의 설립문제를 전개시켰다? 이 은행의 설립은 러시아와 프랑스의 대(對)청국 차관계약에 따라 프랑스 자본가도 가입시켜 러시아 • 프랑스의 합자형식으로 실현되었으나, 실제로는 제정러시 아가 만주에서의 경제활동에 도움을 받으려는 데 지나지 않았 다 러 • 청은행의 자본금은 처음에는 600 만 루블이었으나 I897 년에는 I,200 만 루블로 증자되었으며, 본사는 러시아에 두고 아시 아 여러 나라와의 무역과 교통을 지원해주는 것이 그 주요업무였 댜 또 I896 년 6 월 니꼴라이 II 세의 제관식에 청국이 특별사절로 리홍장(李鴻章)을 파견한 데 대해 비떼는 이례적인 일이라고 하면 서, 이것은 제정러시아가 청국의 영토보전과 외채모집을 위해 노력한 데 대한 사의의 표시라고 말했으나전 실제로는 청국에 대한 제정러시아의 위력과 술책 때문인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9) 이 른바 <리 (李)-로바노프(A. B. Ji o6aHOB) 밀 약〉 이 구체 화되 었는데 , 이로써 제정러시아는 만주경영에 있어 기본적 이권을 얻게 되었 고, 일본에 대한 러 • 청동맹의 밀약을 맺은 셈이 되었다 .10) 그때 로바노프와 비떼 등온 동지나철도 건설문제에 관한 러시아측의 요구를 리훙장에게 설득하여 그의 양해를 얻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댜 죽 (1) 청국측은 길림, 흑룡 두 성(省)을 통과하여 블라디보 스또끄에 이르는 철도선의 부설을 승인할 것, (2) 이 철도의 건설 은 러 • 청은행에 위임할 것, (3) 계약은 러시아 주재 청국공사와 러 • 청은행간에 할 것, (4) 전시나 평화시를 막론하고 러시아측은 군대 및 병기수송을 위하여 자유롭게 철도를 이용할 수 있을 것 등이었다 11)
7) M. H. IloKp OB CKHR, Py cc -,.a. ri UCTOp U R 8 ca.H O M C~TOM O't ep K e, OT AP0B- HeRmHx Bp eM eH AO KOH~a XIX CTO Ji eT 血, Part ill., (MocKBa, 1926), p.7 2. 8) C. IO. BHTT8, 앞의 책, Vol. , 2 , p. 꾸 . 9) 大橋與一, 앞의 책, p. 379. 10) 위의 책, p. 379. l1) 같은 책, p. 379.
제 7 장 제정러시아의 동방진출정책과 만주와 조선 127
러시아와 청국과의 협상에 따라 동지나 철도는 만조우리(洞洲 里)에서 하르빈을 거쳐 수이펀허(緩芬河)까지 부설되게 되었으나, 리홍장은 이미 그 교섭에서 동지나 철도가 앞으로 영역 내부로 확장될 것을 우려하였다 . 이를테면, 철도이권을 통하여 제정러시 아 세력이 남하할 우려가 있음을 통찰하여 그에 따른 불리하고 불안한 정세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회의중에 〈러시아는 어떠한 경우라도 시베리아 철도를 불라디보스또끄로 연결하는 선보다 더 남쪽으로 진출해서는 안 된다, 만일 러시아인이 남진한다면 반드시 정치적 문제가 야기되어 러시아뿐만 아니라 청국에게도 예기치 않은 재난이 닥칠 것이다. 이 지방의 주민은 유럽인과 접촉하기를 꺼려하며 유럽인이 자신들에게 뭔가 재앙을 가져다 준다고 믿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제정러시아가 동지나철도를 정책적 발판으로 삼아 남하하려는 기도를 경고하였다 .12) 청국정부 는 러 • 청협정에 따라 쿠핑인(庫平銀) 500 만 양여 5) 을 러 • 청은행 에 출자하여 이 은행의 운영에 간여하게 되었다. 요컨대 이 은행 은 러, 프, 청 3 국의 합자은행이 된 셈이 되었으나, 1896 년 9 월 8 일 동지나 철도건설권은 청국정부에 의해 러 • 청은행에 위임되 었댜 13) 러 • 청은행은 니꼴라이 II 세가 재가한 동지나 철도회사에 철도 선 부설 및 철도경영에 관한 권리와 의무를 이양하였으며, 1897 년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회사는 명의상 러시아 재무상의 감독 아래 있는 하나의 법인에 지나지 않았으나, 실질적으로는 정부의 관영사업이었다고 하겠다. 그것은 이 회사에 대해 제정러 시아 정부가 재정관계룰 규정하였고, 회사의 결손이 다년간에 걸쳐 제정러시아의 국가예산에 넣어졌으며, 이 회사의 임원은 관리와 거의 동등한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동지 나 철도는 이론바 이권철도이며 법인조직에 의해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특수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결국 1904 년에 이르러 전
12) c. IO. BHTT8, 앞의 책, Vol. I, p. 66. 13) 大橋與一, 앞의 책, p, 38o,
노선 I,413 베르스따가 개통됨으로 해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동서 양 기점은 일단 완전히 . 연결된 셈이 되었다.
시베리아 식민지 철도의 건설, 특히 극동지방의 노선문제는 동서의 국제세력관계와 관련되어 복잡해졌으며, 동시에 그 본래의 의미도 점차 변질되어 갔다. 동지나 철도에 대해서 비떼는, 처음 그것은 러 • 청간의 상업적 이익을 기조로 평화적 수단에 의해 건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4) 그는 알렉산드르 III 세가 명시한 시베리아 철도의 사명을 존중하여 , 이 철도가 외국에 대한 비평화 적 , 군사적 목적에 이용되는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에 미리 경고한 것으로 보인다 . 또한 러 • 청간의 이해관계를 긴밀화함으로써 시베 리아 횡단철도의 건설이 유리하고도 신속하게 실현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14) c. I O. BHTT8, 앞의 책, Vol. I, pp. 46-47.
그러나 그 후 비떼의 견해에는 다소 변화가 있었다. 죽 제정러 시아가 청국의 영토보장을 존중하고 우방으로서 유사시에 효과적 인 원조를 위해서는, 유럽 • 러시아의 군대를 극동으로 수송할 수 있는 철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15) 따라 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극동지방 간선(幹線)이 만조우리에서 흑룡과 길림 양 성을 통과하여 불라디보스또끄까지 부설됨으로 인해, (I) 흑룡강(아무르강) 북방경로에 비해 건설공사가 용이하고 노선거리를 훨씬 단축시킬 수 있음과 동시에 군사적 의의도 컸 고, (2) 동지나 철도이권을 통해서 북만주에 대한 정책적 진출을 할 수 있음과 더불어 국제성이 증대되었고, (3) 볼라디보스또끄룰 중심으로 군사시설을 급속히 강화할 수 있음과 더불어 시베리아 식민지 개발의 진전에 따른 국제관계의 복잡화를 야기시키게 되었댜 16)
15) 같은 책, pp, 46-48, 비떼가 이같은 견해에 따른 주장을 리훙장과의 교섭에서 역설한 사실은 그의 회상록에서 엿보인다. 16) A. G. Mazour, Russia , Past and Present (New Tork, 1951 ) , p. 151.
시베리아 철도의 건설
2. 동방정책의 만주에로의 신장 1894-1895 년의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 강화회의에 의해 일본은 청국으로부터 남만주 일부의 양도, 타이완(台淸) 및 펑후(影湖) 열도의 양도, 사스(沙市)와 그 밖의 항구 개방 동의 이익을 얻게 되었다 . 그래서 비떼 동은 〈일본의 요동반도 영유를 골자로 하는 청 • 일 조약에 대하여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 영역이 광대하지만 활동적 요소가 결여되어 있는 청국을 이웃으 로 하고 있다는 것은 제정러시아로서 대단히 유리한 일이다 . 청국 을 이 상태 그대로 둔다는 것은 동방에서 제정러시아의 안전을 기하는 상책이며, 또 장래의 번영을 보장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고 말하면서 〈그러나 일본으로 하여금 요동반도와 같이, 어떤 경우에는 뻬이징마저 위협하는 지역을 영유케 한다는 것은 우리 로서는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17)라는 결론에 도달하였 다. 그래서 그는 청 • 일조약의 실행을 방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 17) C. IO. BBTT8, 앞의 책, Vol I. pp. 38 -39 .
하였다 한편 독일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3 국간섭의 국제적 모의가 시도되었다. 러시아와 프랑스간에는 만주문제에 관한 상의 가 이루어지고, 러시아와 독일간에도 마찬가지 내용이 상의되어 이들 3 국의 대일(對日) 행동에는 통첩적인 경향이 짙어졌다 .18) 3 국의 연계가 이와 같이 쉽게 성립된 배경에는, 제정러시아가 시베리아 식민지 철도건설의 자금을 프랑스에 요구하고, 프랑스도 제정러시아와 제휴를 기도함으로써 독일에 대비한다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합친 데다가 독일 또한 프랑스의 자본을 제정러시아 에 유출시켜, 한편으로는 제정러시아가 극동에 진출함으로써 야기 되는 러 • 독간의 마찰을 극소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대독(對獨) 군비확충을 막음으로써 자국의 안전을 꾀한다는 데 그 이유가 있었다 .19)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19 세기 말기의 청 • 일 전쟁이 동아시아 정국에 미친 영향은 막중한 것이었고, 또 그 영향은 청국에 대한 유럽열강의 이권쟁탈을 부추기게 되었던 것이댜 대일(對日)간섭에 참가했던 프랑스는 1895 년 육로통상에 관한 요구를 충족시켰고, 1897 년에는 하이 난 다오(海南島)의 확보, 롱조우(龍州) 철도의 연장, 량광(광동 • 광서)(ffi廣), 윈난(雲南)의 광산채굴권 등을 확보하였고, 1898 년에는 광조우(廣州)만의 조차 (租借)에 성공하였다. 독일은 이미 1869-1870 년에 리히트호펜( Ferdin a nd van R i ch t ho fe n) 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청국에 파견 하여 각 지방의 지리적 사정, 특히 천연자원의 상태룰 정밀하게 조사했는데, 그 결과 이들온 청국에 대한 독일의 활동기지로서 조우 산(舟山)열도나 산뚱(山東)반도가 유리하다고 본국정부에 보고하였다 .20) 그런데 조우 산 열도가 영국의 세력 아래 놓이게 되자 독일은 이를 포기하고 그 목표를 산뚱반도에 집중시켰고,
18) 大橋與一, 앞의 책, p. 383. 19) 같은 책, pp. 3~-386. 20) 같은 책, p. 3 색.
제 7 장 제정러시아의 동방진출정책과 만주와 조선 131
그 욕구는 3 국의 대일간섭을 계기로 노골화되었다 . 한편 제정러시 아도 동아시아로의 세력신장을 꾀하면서 산뚱지방을 탐하였기 때문에 독일의 지아오 조우(藤州)만 점령에 의한 기지건설을 탐탁 하게 여기지 않았다. 따라서 러 • 독관계는 청국내의 기지획득을 위한 쟁탈로 복잡해졌다 . 1897 년 7 월 독일 황제의 러시아 방문 직전, 뻬쩨르부르그 주재 독일대사가 제정러시아의 외상 무라비요프 (M.H. M yp aBbeB) 에게 지아오 조우만 문제를 제기했을 때, 외상은 〈적당한 기회를 기다 리는 것이 어떻겠소. 제정러시아는 올 겨울에도 그 만에 우리 함선을 정박하려 하는데, 독일측에서는 지아오 조우만보다 더 남쪽의 항만을 찾는 것이 어떨지〉라는 미묘한 발언을 하였다 . 더욱이 독일황제가 러시아 수도를 방문했을 때 니꼴라이 황제에 게 〈제정러시아는 지아오 조우만에 대해서 기획하고 있는 바가 있는가〉라는 의미의 질문을 하였을 때 니꼴라이 황제는 〈제정러 시아가 이미 검색하고 있는 장소보다 북쪽의 항만을 점유할 때까 지는 지아오 조우만에로의 러시아 함선의 회항권을 유보한다〉 고 대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1) 이렇듯 제정러시아의 극동, 특히 아무르 연안지대로부터 만주지 방으로의 식민정책 신장은 청 • 일전쟁과 대일 3 국간섭을 계기로 프랑스와 독일이 긴밀해지고, 서유럽 열강들의 청국에 대한 이권 쟁탈이 치열해지자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제정러시아는 지아오 조우만보다 북쪽의 황해 연안에 있는 항만을 바라고 있었으나 , 적당한 항만을 차지하지 못하는 동안은 1895 년에 승인된 지아오 조우만의 우선 정박권을 계속 보유할 생각이었다 .22) 그런데 1896 년 7 월 독일군함 한 척이 태풍 때문에 산뚱에서 난파한 사건이 일어나 독일로서는 산뚱 조차(租借)의 책모에 있어 최초의 희생물이 발생한 셈이 되었다. 1897 년 독일은
21) 東方文化孝院 京都硏究所, 東方文化 硏究報告 . 『 日 淸役後支那外交史 』 1937 年, p. 꾸 6 . 22) 같은 책, p. 423.
해군기지 건설 의도를 경쟁 상대인 제정러시아에 밝힌 뒤, 군함을 파견하고 해안을 측량하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 1897 년 IO 월 I 일 산뚱성 남서부에서 선교사 2 명이 비적(鹿賊)에 의해 살해 된 사건이 일어났다. 청국 관헌들은 이에 대한 응급조치를 취했음 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동양함대는 IO 월 14 일 지아오 조우만을 점령해 버렸다 . 독일의 지아오 조우만 점령은 제정러시아에 심각한 충격을 주었댜 제정러시아로서는 독일의 군사행동에 의해 자국의 지아오 조우만 정박권이 침해당했기 때문에 독일의 군사적 점령을 파기 하든가, 아니면 다른 곳에 기지를 설정하든가 하는 긴급사태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한편 독일에서는, 만일 제정러시아가 자국의 지아오 조우만 점령을 승인한다면, 러시아의 황해 연안 항만획득 울 지원하겠다는 태도였다흐 제정러시아로서는 독일의 지아오 조우만 점령이 달갑지 않은 것이었지만, 그 반면 뤼쉰, 다리엔 (大連)만 획득의 기운을 고조시키고, 청국에 대한 이권설정의 가능 성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독일함대가 지아오 조우만을 점령할 때 무라비요프 외상 같은 사람은 이것을 뤼쉰, 다리엔만 획득의 기회로 이용할 것을 주장한 데 반하여 비때 재무상은 이룰 반대하였다. 회고록을 통해서 그의 견해를 보면 다음과 같다 .24) 일찍이 우리는 그같은 점령에 대해 청국의 영토보전을 극구 주장하 였고, 또 그러한 주장에 따라 일본으로 하여금 요동반도를 포기하도록 노력해 왔다 더욱이 뤼쉰, 다리엔만은 그 요동반도에 포함되어 있다. 그후 우리는 일본과 대항할 뜻으로 청국과 방위동맹밀약을 체결하였 고, 이에 따라 청국의 영토를 점령한다는 일본의 온갖 야욕에 대해 청국을 보호할 의무를 짊어졌다. 이러한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에 버금가는 점령을 하려는 것은 극히 불온하고도 악랄한
23) 위의 책, pp. 423-433_ 24) C. IO. BHTT8, 앞의 책, Vol. I, pp. 120-121.
행동이다 . 만일 이러한 행동을 함으로써 일본이나 청국의 의혹을 사게 된다면 극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동지나 철도를 건설하려 하고 있고 다행히도 그 지방에서 우월한 지위 를 확보 하고 있다 . 따라서 뤼쉰, 다리엔만을 점령한다면, 현시점에서 우리에 대해 극히 복종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청국으로 하여금 심한 반감을 야기시킬 것이다 . 뿐만 아니라 뤼쉰, 다리엔만을 점령할 경우, 우리는 이 두 지점의 점령을 확고하게 보장하기 위해서 이 지방 과 동지나 철도를 연결하는 지선을 설치해야 하는데, 이때 그 지선은 청국인들이 밀집하여 살고 있는 만주를 통과하여 청조의 발상지인 펑티엔(奉天)을 경유해서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결국 이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가장 불행한 결과로 이끌어 갈 것이다 . 요컨대 그는 시베리아의 식민적 개발을 위해 식민지 철도 간선 으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염두에 두었으며, 그 실현을 유리한 노선으로 촉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으로 동지나 철도의 건설을 도모했던 것이었댜 따라서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적 경쟁 에서 중대한 의의를 갖는 독일의 지아오 조우만 점령과 제정러시 아의 뤼쉰, 다리엔만 점령 기도와의 복잡한 관계에 직면하여, 러 • 청 • 일간의 반웅을 고려하면서 국제정세에 따른 신중한 태도 를 촉구했던 것이다. 비떼의 의견은 일단 어전회의에서 받아들여졌으나, 곧 뤼쉰, 다리엔 조차안(租借案)이 황제에 의해 재가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급변은 무라비요프 외상에 의해서였다. 그는 영국함대가 뤼쉰, 다리엔만 부근을 순회하고 있기 때문에, 만일 제정러시아가 이 두 지역을 점령하지 않으면 영국에게 선수를 빼앗길 우려가 있다 는 정보를 황제에게 제공했던 것이다 .25) 그래서 이룰 실현하기 위하여 운송선예 육군을 출동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26) 비떼도 역시 시베리아의 식민적 개발, 특히 그것이 극동지방에서 진전되 면 어차피 부동항 획득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25) 같은 책, Vol. I, p. 123. 26) 위의 책
또 제정러시아의 극동 식민정책이 결국 남만주로 신장되어야 할 추세 를 통찰하고 있었으나 , 다만 뤼쉰 , 다리엔의 획득에 관한 교섭을 구체화하기 위 한 시기와 순서를 배려했고, 또 그 실현이 반드시 무력적 수단이어야만 되는가 하는 점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비떼는 그가 기대했던 평화적 협상 , 주로 경제적 사정을 바탕으로해서 뤼쉰 , 다리엔을 차지하려는 방법이 그렇게 용이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 말하자면 동지나 철도 관리국이 설치 된 후 1897 년 2 월 제 1 차 회의에서 결의된 사항 , 죽 황해안의 한 항구로 이르는 동지나 철도 지선의 부설에 대한 이권요구는 차치 하고라도 당면문제인 지선부설 우선권의 보장과 , 비떼에 의해 입안된 러 • 청은행의 총재가 청국정부에 제출한 사항 , 죽 만주에 있어서 철도, 은행에 관한 계획의 요강도 청국측의 사정으로 해결 되지 못했던 것이다幻 이것은 러시아와 청국간의 교섭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1897 년 12 월 리훙장이 비떼 재무상에게 1 억 양여i)의 신차관에 관한 러시아측의 보증을 요청했을 때, 비떼는 청국으로 하여금 만주 및 몽고에서의 철도 및 공업에 대해 제정러시아의 이익독점 올 승인할 것 동지나 철도 간선으로부터 동 관리국이 후왕 허 (黃河) 기슭에 선정하는 항구까지의 지선부설권을 동지나 철도회 사에 이양할 것, 또 이 항구내에 러시아 선박을 위하여 부두 건설 을 허용할 것 등을 조건으로 내세우면서 이 문제들을 평화적 절충에 의해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 그러나 뤼쉰, 다리엔만의 점령을 긴급히 결의하게 된 정부내 정세의 급변, 독일의 동아시아 정책 특히 지아오 조우만 점령에 따른 강경한 태도와 그것이 러시아에 미칠 영향 등을 고려하여 비떼는 뤼쉰, 다리엔만의 점령 에 대해서 적극 반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뤼쉰 다리엔의 조차문제를 어떠한 방법으로 추진하느냐 에 대해서는 무라비요프 의상도 내외정세와 그 시책의 영향 둥을
27) 東方文化硏究報告, 앞의 책, p. 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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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는 독일군의 지아오 조우만 점령 행동을 중지시키기 위한 대독 교섭을 계속하고 있는 양 꾸미면서 실질적으로는 청국을 원조하기 위하여 뤼쉰, 다리엔만을 점령한다 는 명분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어쩌면 뤼쉰 , 다리엔을 차지하기 위한 하나의 술책으로서, 실제로는 독일이 러시아에 대해서 배신행위를 하지 않는 한 지아오 조우만의 군사적 점령을 굳이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 오히려 러 • 독간의 묵인에 의해 타협적으로 뤼쉰, 다리엔 획득의 목적을 이루려는 의도였다 .28) 더욱이 제정러시아 정부는 한수를 더 떠서, 1896 년 IO 월 2 일 독일 증원군이 지아오 조우만으로 파견된다는 정보로 청국정부가 위협 을 받았을 때, 뻬이찡(北京) 주재 러시아 대리공사로 하여금 리홍 장에게, 만일 철도 및 그 밖의 현안문제들이 모두 만족하게 처리되 고 러시아 함대에게 항만 이용권이 부여된다면, 독일과의 충돌시 제정러시아의 원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달하였다 .29) 요컨 대 러시아 정부는 독일의 대 청국 동향을 뤼쉰, 다리엔의 획득과 그 밖의 식민정책적 이권의 설정 및 확장을 위하여 최대한으로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한편 청국정부는 독일의 지아오 조우만 점령을 퇴치하기 위해 제정러시아에게 원조를 요청하였으며, 또한 러 • 독 경쟁관게를 이용한다면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제정러시아의 원조에 의해 독일군대가 축출되는 조건으로 철도 및 기타의 이권 에 관해서 러시아측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겠다는 태도를 보였 다. 더욱이 1897 년 12 월 중순, 러시아 함대가 뤼쉰항에 입항했을 때 성의를 다해 물자를 공급하는 등, 러시아측의 도움을 은근히 기대하였다. 그러나 기대를 걸었던 러시아측의 적극적인 원조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을뿐더러 그 효과조차도 없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되었으며 , 러 • 독간의 경쟁적 동향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청국에 대한 통첩(通課)의 의혹이 점점 깊어져 청국측의 불안은
28) 같은 책, p. 448. 29) 위의 책, p. 451.
가중되었다 따라서 청국 정부내에서도 제정러시아의 원조에 의존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견해가 생겨났으며, 또 이전에 요청한 원조 도 철회하자는 의견이 유력해졌다. 한편 독일에 대해서는 지아오 조우만 점령을 인정한다는 기본적인 선을 긋고 직접적 교섭에 의해 구체적으로 처리하도록 강구하였다. 1897 년 I2 월 29 일 리홍장은 러시아 정부에 대해 뤼쉰, 다리엔에 서의 철수를 문서로 약속하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서 뻬이징 주재 러시아 공사는 본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1898 년 1 월 7 일 청국 정부에 대해 〈제정러시아는 정치적 사정, 러 • 청 양국의 이익이 허락한다면 언제든지 뤼쉰, 다리엔만에서 철수할 것이다 . 러시아 정부는 이에 대해서 뻬쩨르부르그 주재 청국 공사에게도 보증할 용의가 있다 . 따라서 문서에 의한 약속을 요청하는 것은 제정 러시아를 의심하는 처사이다〉라는 내용의 의사를 전달하였 댜 그와 동시에 뤼쉰 , 다리엔만에 석탄 저장소 택지를 확보하고 동지나 철도의 지선을 뤼쉰, 다리엔만까지 부설하는 데 대한 허락 도 요구하였다 .30) 이와 같이 제정러시아는 남만주에 특별이권을 설정함으로써 시베리아 식민지의 일부인 극동지방에서부터 인접 한 북만주를 지나 더욱 남진하여 황해 연안의 부동항울 획득하려 했다고 보겠다. 이것은 물론 세력팽창을 위한 식민정책의 일환이 었던 것이다. 청국에 대한 제정러시아의 이권요구가 위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것을 청국측에서도 대략 알고 있었다 . 그러나 I898 년 I 월 8 일 리홍장이 동지나 철도 간선으로부터 황해 연안까지의 지선부설에 대해 반대할 수밖에 없다고 회답하면서도 그외 조건 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러시아 정부의 보증에 의한 차관에 대해서 계속 상의할 희망이 있었고, 또 압록강 하구에 항구를 만들어 중국측에서 그곳으로 동지나 철도 지선을 부설할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30) rn11HCRIIR, llpO A02 P y cc 짜-Hn oHc ,c oa BoD Hcl,,I leTep 6y p r , 1916, 大橋與一, 앞의 책,p , 391 에서 재인용.
동지나 철도 간선에서 황해 연안까지의 지선부설에 관한 러시 아측의 요구는 거부되었으나 차관은 러시아의 이권요구에 대한 청국측의 승락을 촉진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러시아 정부 가 1898 년 1 월 II 일 청국정부에 제시한 차관조건의 주요사항은, (I) 이미 성립된 차관의 지불에 충당하고 있는 것 외에도 관세, 죽 동지나 철도 및 만주 각지에 있어서의 관세 를 담보로 제공할 것 , (2) 러시아인 외의 외국인을 만주의 각 성이나 몽고에서 철도 및 공장의 건설과 경영에 참여시키지 말 것 , (3) 동지나 철도에 관한 특허권을 철도 간선에서부터 황해연안에 선정한 항만까지의 지선부설 및 경영에까지 확장시킬 것, (4) 동지나 철도 관리국이 황해 연안의 항만용지를 선정할 수 있도록 허락할 것 , 또 이 항구 에서는 러시아 국기를 게양한 모든 선박의 입항권을 인정할 것 둥이었댜 러 • 청간의 차관문제에 있어서는 제정러시아가 동아시아 식민 정책을 신장시키는 하나의 요건으로서 그 성격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그래서 만일 러시아측이 제시한 차관조건이 승락되고 청국측이 희망한 재정적 조치로서의 차관이 성립된다면 , 새로 설정된 특수이권으로 인해 만주는 물론 그에 근접한 지역들도 제정러시아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세력에 직접 내지는 간접으로 영향을 받게 될 것임을 시사해 주었다. 따라서 청국으로서는 차관 문제에 있어, 특히 차관조건에 따른 특수이권의 허용에 대해서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더욱이 러 • 청관계에 있어서 차관문제에는 제 3 국의 이해관계가 개입되었는데, 특히 영국은 그 중대성을 신중히 고려하였다. 영국 은 러 • 청 차관교섭과 관련하여 자국의 대청정책(對淸政策)에 있어서 경제적 이익이 방해되고 또 국제적 지위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까봐 우려하였다. 이에 러 • 영 양국은 각자 차관조건을 내세 워 청국에서의 이권획득을 위한 경쟁에 나섰다 . 이것은 바로 초해 澤海) 진출을 계속하여 아시아 남부지방에 지배권을 연이어 확보 하면서 동아시아로 뻗으려는 영국의 식민정책적 신장세력과, 연육
(連陸) 진출을 계속하여 아시아 북부지방에 서서히 영역을 확장하 면서 동아시아로 뻗으려는 제정러시아의 식민정책적 신장세력과 의 식민지 특권을 위한 쟁탈전이었던 것이다 . 난처해지고 곤경에 빠진 청국정부는 마침내 양국에 대해 1 억 양個)의 차관을 반반씩 나누어 인수할 것을 제의했으나, 이것이 성공하지 못하자 1898 년 1 월 30 일 어쩔 수 없이 양국에 대한 차관 교섭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청국에 대한 양국의 책동은 멈추지 않았다 . 영국은 차관문제의 보상적 요구 를 제기하였고 제정러시아에서도 대청(對 淸 ) 요구에 관한 강경론이 대두되었다 . 한편 차관교섭을 중단하고 자체충당 방침을 세운 청국정부는 소요액을 모집하는 데 커다란 어려움에 봉착했다. 이로써 영 • 청 간의 제 2 차 차관교섭이 구체화되는 기회가 만들어졌고, 그 반면 영 • 청 차관은 이권요구를 에워싼 러 • 청관계에 심각한 자극을 주었다 1898 년 2 월 5 일 영국이 청국에 대해서 제시한 보상적 요구는, (1) 영국 선박의 청국내 하천 항행, (2) 양자강 유역지방을 할양 (割 讓 )하지 말 것 등이었다 . 청국은 처음에는 거절할 방침이었으 나, 영국이 강경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마침내 2 월 9 일 영국선 박의 하천항해권을 인정하였고, 2 월 m 일에는 양자강 지방을 다른 나라에 할양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말았으며, 그 밖에 많은 이권도 양도해 주었다. 한편 차관문제를 중시해 온 제정러시아는 청국 정부로부터 차관교섭 중지의 통고가 있은 후에도 영 • 청관 계의 동향을 감시하면서 뤼쉰, 다리엔만의 조차를 직접 요구하기 에 이르렀다 1898 년 I 월 육군상에 취임한 꾸로빠뜨낀(A. H.K yp ona TKHH) 은 요동반도를 차지하지 못하면 유사시에 뤼쉰, 다리엔만을 방어 할 수 없고 , 또 동지나 철도 간선에서 뤼쉰에 이르는 지선을 빨리건설해야 한다는 견해를 바탕으로 전 요동반도의 할양을 주 장하였댜 31) 청국정부로서는 제정러시아가 요구하는 조건과 이권을 허용해 31) c. IO, BHTT8, 앞의 책, Vol. I, p,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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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다면, 먼저 요동반도를 마지못해 돌려주었던 일본을 자극하게 되어 그에 따른 불리한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측의 요구를 완화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 또한 뤼쉰, 다리엔 의 조차를 용인한다면 다론 열강들도 틀림없이 비슷한 요구를 하게 될 것으로 보고 이를 피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그러나 청국 의 기도에 대해서 러시아측은 거의 양보함이 없이 기존의 강경방 침을 고수하였다. 제정러시아의 청국에 대한 요구 원안은, (1) 미 즈 지아오(財子 窓)선 이남의 이른바 요동반도 남부를 조차할 것, (2) 조차지역에 접속하는 북방지역에 중립지대를 설치할 것, (3) 부득이 요구를 감축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 중립지대의 북경계선을 조차 예정지 역의 북경계선까지 내리고, 동시에 조차지의 북경계선을 진조우완 (金州淸) 북단선까지 내릴 것, (4) 조차지에는 정해진 경비원을 제외한 청국측의 어떠한 군사적 세력도 진입할 수 없으나, 처음에 는 러시아측의 재량에 따라 러시아 관청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조건으로 한정된 청국측 군대를 진입시킬 수 있다 . (5) 동지나 철도 간선에서 갈라진 남만주 지선의 부설권에 관하여 청국정부 와 협상을 시작한다는 것 등이었다 . 제정러시아는 뤼쉰, 다리엔만의 조차 및 동지나 철도의 남만주 지선부설의 이권을 요구하는 중요한 이유로서 만주를 다른 나라 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형식상의 구실임을 청국은 물론 영국도 알고 있었기 떄문 에 서태후(西太后)는 영국과 일본의 원조를 기대하고 있었다. 따라 서 청국정부는 뻬이찡 주재의 영 • 일 두 대사를 통하여 대 러시 아 조치에 관한 협력, 특히 러시아 군대의 뤼쉰, 다리엔만 철수 후 이 항만을 점령하지 않겠다는 보증을 간청하였다. 청국은 이 보증을 기반으로 하여 러시아측의 요구조건을 거절하려고 기도했 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러시아측은 점점 강경한 태도를 보였 고, 영 • 일에 대한 협력간청 공작이 실패하자 오히려 청국측의 양보를 촉구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더욱이 이권문제를 둘러싸
고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청국에 불리하게 기울어져 갔다. 이 때 러시아 정부는 이면공작을 펼쳤는데, 비떼의 회상록에 따르 면 , 청국인과의 교섭에서 처음으로 뇌물에 의한 사건해결을 도모 했다고 한다 . 뻬이찡 주재 재무관 뽀꼬찔로프 (IIOKOTB JI OB) 에게, 리홍장과 장 인 후안엔競食桓)을 비밀리에 만나도록 명령하고 청국 정부가 러시아 정부의 요구에 동의하도록 하는 대가로 리(李)에게 는 50 만 루블 장佛)에게는 25 만 루블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 32) 청국정부는 러시아 정부와의 작집 교섭에 의해 러시아에 대한 회답을 지연하거나 러시아측 요구의 완화를 꾀하는 방법을 써 보았으나 이것 역시 실패하였다 . 마침내 청국정부는 러시아 정부 의 끈질긴 요구에 굴복하여 1898 년 3 월 27 일 뤼쉰, 다리엔만 조차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 이것은 독일과의 지아오 조우만 조차조약이 체결된 지 불과 3 주 후의 일이었다. 그 주요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33) (1) 제정러시아는 뤼쉰, 다리엔을 조차하며 그 기간은 25 년으로 한다(제 I, 3 조). (2) 러시아 정부가 완전하고도 배타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지역 및 수역의 획정에 관해서 , 그리 고 조차지 경계의 북방에 설정하는 중립지대의 경계에 관해서는 조약 조인 직후 별개의 의정서에 의해 규정한다(제 2, 5 조). (3) 1896 년의 동지나 철도 이권을 확장해서 이 철도 간선의 한 역에서 다리엔만까지, 또 필요한 경우 이 철도선에서 잉코우스 (營口市), 압록강 하구간의 요동반도 연안에 있는 지점까지 연락지 선을 부설한다(제 8 조). 요컨대 뤼쉰, 다리엔의 조차권 및 남만주 지선의 부설권에 대한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제정러시아는 유리한 부동항, 즉 뤼쉰을 군사적 요지로, 다리엔을 무역상의 요지로 설정하였으며, 더욱이 남만주 철도를 시베리아 식민지 철도 간선과의 연결지선으로 부설할 수 있게끔 되었다. 이 조약은 4 월의 뻬쩨르부르그 조약에
32) c. IO. BHTT0, 앞의 책, Vol. l, p. 128. 33) 松原一雄, 外交 & 外交史 硏究, 「 (備考 0 二) 旅順. 大連 想 租借 K 閔寸 조 露淸 條約(試文)」, 1927 年, pp. 53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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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해서 그 법적 근거가 더 구체화되었다 . 이에 따르면, (I) 예정 철도선이 부설됨으로 이익을 얻게 될 지방에 대해서는 외국인에 게 어떠한 철도부설권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제 3 조). (2) 중립지대 의 한 지구라 할지라도 제정러시아의 승락 없이는 이것을 외국인 에게 양도할 수 없으며 , 또한 중립지대의 동 • 서 양안에 위치한 어떤 항구라 할지라도 외국무역을 위하여 개방해서는 안 된다 (제 5 조의 I, 2). (3) 중립지대의 모든 지역에 있어서 러시아 관헌의 승락없이는 철도선의 부설, 광산 채굴 및 상공업 동의 특권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제 5 조의 3) 는 등의 내용을 결의하였다. 제정러시아의 대 청국 이권요구와 그에 따른 러 • 청조약에 대해서 항상 양심적인 입장을 취해 왔던 비떼는 , 그의 회상록에서 〈우리는 위험한 일보를 내딛었다. 마침내 이 일보는 러 • 일전쟁이 라는 불행한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왔다. 이 점령은 청국과 우리의 전통적 친선관계를 파괴하고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 어 버렸다〉외)고 회고하였다. 한편 제정러시아가 요동반도에서의 조차권과 동지나 철도의 남만주 연락지선의 부설권을 획득하자 I898 년 4 월 n 일 프랑스는 광조우(廣州)만의 99 년간 조차권을 얻어냈고, 또 3 국간섭에 참여하였던 독일도 청국내의 커다란 이권 과 이익을 마치 당연한 보수이기나 한 것처럼 얻어내었다 . 이에 뒤이어 이미 상당한 이권을 확보하고 있던 영국도 I898 년 7 월 I 일 제정러시아의 뤼쉰, 다리엔 조차에 대응하는 의도에서 조차기 간도 동일한 조건으로 웨이 하이 웨이(威海衛)의 조차에 성공하였 다. 3. 만주에서 조선반도로 진출 청국에 있어서 이론바 이권경쟁시대, 특히 청 • 일전쟁 후의
34) c. IO. BBTT8, 앞의 책, Vol I, p. 129.
수년간 3 국간섭에 참가했던 러 • 독 • 불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이권을 얻어내었다. 또 이에 직접 간여하지 않았던 영국도 차관을 미끼로 한 경제적 이익을 거두고 타국의 이익설정에 대응하는 의미의 군사 근거지를 조차하기에 이르렀다 . 그뿐만 아니라 이태 리도 저지앙성(浙江省)의 조차를 요구하였다 .35) 나중에 이태리는 이 요구를 철회했지만 36) 열강의 이권획득 경쟁은 중국을 위기에 몰아넣었댜 이 무렵 중국인의 외세배척 사상이 고조에 이르렀 고, I900 년에는 의화단(義和團)의 난이 일어났다. 이 난은 만주에도 파급되어 당시 건설공사중이던 동지나 철도 는 파괴되고 그 밖에 적잖은 피해가 발생하였다. 제정러시아는 이룰 구실로 만주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고 군사적 점령을 단행 하였다 러시아군은 의화단의 파괴와 습격에 대한 보복으로 1900 년 7 월 불라고베쉬첸스끄 (BnaroBe~eHC I<) 전면의 아무르강에서 많은 중국인을 학살하고 원주민들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북만 주에서 남만주를 향해 완강한 정복원정을 감행하여 주요지점을 점령하면서 전 만주에 걸친 군사 포진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러시 아측은, 처음부터 기존의 이권에 대한 침해를 막고 지방치안을 회복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철도 및 기타 이권의 안전이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철수하지 않았다. 또한 중국측의 요구나 일 • 영 양국의 항의에 대해서도 지연전술을 썼을 뿐 아니라 오히려 군대의 강화와 확대를 꾀하였다 .3 7) 의화단의 난에 의해서 일시 중단되었던 동지나 철도 간선 및 남지나선의 건설은 러시아군의 군사보호 아래에서 공사를 계속할 수 있었댜 이러한 소위 특권철도는 동아시아에 대한 식민정책적 신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만주의 경영을 위한 하나의 동맥 역할 을 다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더욱이 제정러시아는 이룰 발판으
35) H. B. Morse, The Inte rnati on al Relati on s of the Chin e se Emp ires . Vol. III, The Perio d of Subje c ti on 1894 -1911 . 1918 . pp. 1 적 -125 , 36) 大橋與一, 앞의 책, p, 402. 37) 같은 책, p. 4°3.
로 하여 그 눈길을 더욱 남쪽으로, 죽 조선반도로 돌렸던 것이 댜 제정러시아의 조선반도에 대한 식민주의적 책모의 동향은 1896 년 2 월 m 일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에 보호를 요청했을 때부터 더욱 노골화되었다. 한편 한반도 침략을 위해 온갖 술책을 다하고 있던 일본은 이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 마침내 1896 년 니꼴라이 11 세 대관식에 파견된 야마가타(山縣) 전권과 로바노프(A. II. Jio6 aHoB) 외 상 사이 에 이른바 야마가타 • 로바노프 협상이 이루어지고, 여기서 조선반도에 관련된 이익에 관한 한 러 • 일 양국은 동동한 권리를 갖는다는 기본적인 선을 긋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제정러시아는 그 후에도 계속 협약을 무시한 채 조선반도 진출을 노렸으며, 이에 당황한 일본은 1902 년 1 월 30 일 역시 이해관계가 얽힌 영국과 제 1 차 영 • 일동맹을 맺었다. 영 • 일동맹은, 영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러시아의 중국 북부지역 침략을 저지하고 해당지역에 있어서 영국의 상업적 이익을 보호 하기 위하여 기도된 것이지만, 이로 인해 적잖은 충격을 받은 제정러시아는 1902 년 4 월 8 일 중국과 다음 사항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1) 만주를 제정러시아에 의한 군사점령 이전의 상태로 복귀시키고, 청국은 만주에 있는 러시아인의 기업과 주민을 보호할 것, (2) 조약체결 후 6 개월 이내 에 펑티엔(奉天)성 남부에서, 그 다음 6 개월 이내에 펑티엔성의 나머지 지역과 지린(吉林)성에서, 또 그 다음 6 개월 이내에 헤이룽 쟝(思龍江) 성에서 러시아군을 각각 철수시킬 것 38) 등이었다. 이렇 돗 제정러시아는 일시적으로 중국에 대해서는 우호적이고 열강에 대해서는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본색을 드러내었다. 이를테면 상기 조약에 따라 제 1 차 철군은 끝냈으나, 제 2 차 철군을 해야 될 당시 돌연 강경한 태도로 변하여 약정을 이행하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만주에 대한 특권을 내세웠다. 만주뿐만 아니라 조선반도에 대한 제정러시아의 침략적 기도는
38) H.·a . Morse, 앞의 책, pp. 413-419.
일본과 영국에 크나큰 불안을 안겨주었다 함은 이미 서술한 바와 같다 그러나 제정러시아로서도 일본의 대 러시아 정책 배후에 영국이 있고, 또한 영국도 I9 세기 말부터 이론바 문호개방정책과 기회균등을 제창하였기 때문에 불리한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의 대 중국 요구를 부정하고 열강의 이익을 방해하지 않겠다 는 의견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I903 년 6 월 만주와 조선에 대해 강경론자로 알려진 꾸로빠뜨낀 (A.H . K yponaTKHH) 이 일본을 방문하였는데, 그 주요목적은 일본 정세를 관찰해서 자국의 정책에 반영하려는 것이었다 .39) 그는 돌아오는 길에 뤼쉰에서 지방주재 문무관회의를 주재하고 자신의 적극적인 견해를 설명한 다음 실행을 위한 결의를 표명하였다 . 한편 러시아 정부내에서도 그의 극동여행중 만주와 조선 점령 주창자들의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 마침내 1903 년 5 월 20 일 어전회 의에서 만주철군을 내용으로 한 1902 년 4 월의 러 • 중조약을 파기 하고 조선반도에도 세력을 확장하자는 결의가 채택되었으며, 이것 올 정부의 기본방침으로 결정하였다. I903 년 7 월 I5 일 러시아 정부는 중국정부에 대해, 만주로부터 무조건 철수할 수는 없으며 특히 외국의 간섭과 방해를 배제하여 소신껏 실행하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표명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구개혁의 일환으로 새로 극동총독부를 설치하여 알렉세예프 (E.1'1 . Alr. eKceeB) 룰 그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말하자면 그의 관할권 을 만주 전역에 확장시켰던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강경정책은 만주를 점령한 다음 조선반도에까지 식민정책의 신장을 위한 발판을 구축하려는 것이며, 특히 조선반도에 대한 침략의도는 노골화되어 갔다. 대한제국의 북쪽 경계선에 군인들을 출동시켜 삼림벌채를 이유로 용암포(龍岩浦) 일대를 점령하고 대한제국 정부에 대해서는 조차권을 강요하였으며, 일본에 대해서는 대한제 국 영내의 자유행동을 용인하는 대가로서 거제도(巨濟島)의 조차 를 승인하도록 하여 대마(對馬)해협의 관건을 장악하려고 기도하
39) 大橋與一, 앞의 책, p. 411.
였댜 40) 일본정부는 1903 년 7 월 28 일 러시아 정부에 대해서 , 양국의 이익이 주로 접촉하는 방면의 긴장상태 를 완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였다. (1) 청국과 대한제국 양국의 독립 및 영토보 전의 존중을 서로 약속할 것(제 1 장), (2) 청국과 대한제국 양국의 상공업 발달을 위해 기회균동주의의 원칙을 서로 보장하기로 약속할 것(제 1 조), (3) 제정러시아는 대한제국에 있어서 일본의 우월한 이익을 승인하고 일본은 만주에 있어서 철도경영에 따른 제정러시아의 특수이익을 승인할 것, 그리고 제 1 조의 규정하에서 양국은 각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필요한 조치 를 , 죽 일본은 대한제국에서, 제정러시아는 만주에서 취할 수 있는 권리를 서로 승인할 것(제 2 조), (4) 러 • 일 양국은 제 1 조의 규정에 위배되지 않는 한 , 대한제국에 있어서 일본 및 만주에 있어서 제정러시아의 상업적, 공업적 활동을 방해하지 않기로 서로 약속할 것(제 3 조 1 항) , (5) 금후 대한제국의 철도선을 만주로 연장하고 동지나 철도 선 및 산하이관우장(山海關午莊) 철도선으로 접속시킬 경우에도 방해하지 않기로 제정러시아는 약속할 것(제 3 조 2 항), (6) 제 2 조의 이익을 보호할 목적으로, 또 국제분쟁을 일으킬 반란이나 소요를 진압할 목적으로 일본에서 대한제국으로, 또는 제정러시아에서 만주로 군대를 파견할 필요가 있을 때는 어떠한 경우라도 실제 필요한 인원수를 초과하지 않으며, 그리고 임무를 마친 후에는 즉각 철수할 것을 약속할 것(제 4 조), (7) 대한제국에 있어서 개혁 및 선정慣致:)을 위한 조언과 협조는 일본의 전건에 속함을 제정 러시아는 승인할 것(제 5 조), (8) 이 협약은 종전 대한제국에 관해 서 러 • 일 양국간에 맺은 모든 협정에 대신한다(제 6 조) 동이었 댜41)
40) 松原一雄, 앞의 책, p. 551. 大橋與一, 앞의 책, p. 412. 41) 丸山國雄 , 日本近代外交史, 1940, pp. 251 - 252. 大橋與-, 같은 책 , p. 415.
러시아는 일본의 제안에 대한 협상지를 일본의 수도인 도오교 로 할 것을 희망하였다. 그것은 현지사정을 일본주재 로젠 (P.P . PoaeH) 공사와 뤼쉰 주재 알렉세예프 총독이 잘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섭을 자국에 유리하게 전개시키려는 의도였었다. 그러나 일본측 은 러시아가 협정을 지연시킬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에 반대하였다. 여러가지 곡절을 겪은 후 결국 도오교가 협상지 로 결정되기에 이르렀고, 러시아측은 로젠 공사가 뤼쉰에 체재하 면서 제 1 차 대안을 작성, 1903 년 IO 월 3 일의 고바야시 • 로젠회의 에서 일본측에 제출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일본측 제안의 (1) 부터 (6) 까지는 (제 1 조-제 4 조) 거의 비슷한 것이었으나, (7), (8) 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특히 (7), (8) 의 사항을 배제하 고 러시아측 대안의 제 5 조에서는 대한제국 영토의 극히 일부라 할지라도 군사적 목적을 위하여 사용할 수 없으며, 대한해협의 자유항행을 방해하는 군사배치룰 대한제국 연안에 해서는 안 된다 제 6 조에서는 대한제국의 북위 39 도선 이북에 중립지대를 설치하여 양국 어느 한쪽도 군대를 투입시켜서는 안 되며, 또 제 7 조에서는 만주 내지 그 연안은 완전히 일본의 이익권 밖에 있음을 일본이 승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러시아측 대안은 일본측에 의해서 그대로 승인되지 않았음은 물론, 일본은 IO 월 30 일의 제 7 차 회담에서 수정안을 제출하였다 . 특히 중요한 수정조항으로는 , 러시아측 대안 제 6 조에 대해서 대한제국과 만주의 경계로부터 50km 에 걸쳐 양측이 중립 지대를 설정하고 이 지대내에서는 체결국 어느 한쪽의 승인 없이 는 군대를 끌어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 또 제 7 조에 대해서는 이것 을 완전히 삭제할 뿐만 아니라, 만주에 있어서 제정러시아가 일본 의 상업적 자유를 약속해야 함과 동시에 일본도 제정러시아의 특수권익에 따른 이익보장권을 승인한다는 것, 또 대한제국 철도 선과 동지나 철도선이 압록강까지 연장될 경우, 양 철도선의 연결 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둥의 3 개 조항을 추가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측은, 무엇보다 제 6 조와 7 조에 중요한 비중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양보하지 않았다. 일본측의 수정안에 대한 러시아측의 회답은 I2 월 n 일에 제출되었는데, 여기서도 만주문제를 완전히 협약권 밖에 두었고, 조선반도 문제에 있어서는 북위 39 도 이북을 중립지대로 하자는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이렇듯 만주와 조선반도 를 에워싼 러 • 일의 이해관계가 얽힌 가운데 마침내 I904 년 2 월 5 일 양자간의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 러 • 일전쟁은 이같은 배경 아래에서 발발하였으며, I 여년간의 전쟁을 치루는 동안 승패가 일본에게 유리하게 결정되었을 무 렵, I905 년 6 월 9 일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중재에 따라 강화회 담이 열리게 되었다. 결국 9 월 5 일 강화조약이 체결되었고 , 여기 서 만주관계에 대한 주요사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 (I) 러시아군은 조차권의 효력이 미치는 동북지역 이외의 만주로부터 죽시 철수 하고 청국이 전담하는 행정으로 되돌려 줄 것 . 또한 러시아 정부 는 청국의 주권을 침해하거나 어떠한 영토상의 이익도 만주에서 갖지 못함을 공포할 것(제 3 조), (2) 러시아 정부는 뤼쉰, 다리엔 및 그 부속 영토, 영해의 조차권을 비롯하여 조차권과 관련된 모든 권리 및 특권을 일본정부에 이양할 것이며, 또 양 체결국은 이 규정에 대한 청국정부의 승인을 얻을 것을 서로 약속할 것 (제仁죠), (3) 러시아 정부는 장춘(長春)과 뤼쉰간의 철도 및 지선철 도와 그 지방에 있어서 이들 간선과 지선철도에 따른 모든 권 리, 특권, 재산, 탄광을 아무런 보상 없이 청국청부의 승인을 거쳐 일본정부에 이양할 것을 약속할 것(제 6 조) 동이다. 요컨대 이 조약 에 의해 제정러시아의 남만주에 대한 식민정책적 신장 기반이 완전히 무너진 반면, 일본의 침략적 기지가 확립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댜 더욱이 이 조약에 따라 제정러시아는 조선반도에 있어서도 정치, 군사, 경제에 걸친 일본의 특수지위를 인정하게 되었으며, 또 일본정부가 대한제국에서 필요로 하는 지도(指導), 보호 내지 관리를 하게 될 경우 이를 방해 내지는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 하였다(제 2 조). 이렇게 해서 조선반도 침략을 위한 러 • 일 경쟁에
서 일본이 결국 승리하였으며, 반면 제정러시아의 조선반도 진출 기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
제 8 장 혁명기의 러시아와 소비에트 정부수립 1. 혁명전야의 시베리아 제정러시아 말기와 소비에트 체제에 들어서면서 시베리아 개발 은 이전보다 훨씬 더 중앙정부에 의해 주도되고 그 계획이 실행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장에서부터는 〈시베리아 개발사〉 룰 과거의 시기와는 다소 다르게 국가권력의 향방 추이와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 특히 전제체제보다 더 강력한 중앙통제 방식을 적용할 수 있는 일당독재 체제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최고 지도자의 정책입안이 국가 전반의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치 고 있으므로, 단순히 식민지적 영토확장이나 이권쟁탈이 아닌 세부적인 개발내역에 들어갈 경우 반드시 국가통제의 계획경제와 결부시켜 고찰해야만 할 것이다 . 러 • 일전쟁에서의 패배는 20 세기에 들어서 혼란의 극을 치닫고 있던 러시아의 국내동향을 더욱 난국에 빠뜨리는 주요 동인이 되 었다 . 노동자들의 파업은 전국을 휩쓸었고 간헐적 인 농민소요는 농촌지역의 긴장을 고조시켰으며, 지배층내에서도 개혁을 요구하 는 소리가 높아졌다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원들은 대규
모 스트라이크에 고무되어 조직과 무장봉기의 필요성을 더욱 역설하였고 사회혁명당원들은 테러주의적 전술을 강화하여 반동 고위관리들을 암살하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혁명의 물결은 전국 각지로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1905 년 1 월 22 일 러시아 역사상 〈피의 일요일〉로 기록되는 혁명의 날로부터 농민과 노동자들의 〈짜리에 대한 신뢰〉는 결정 적으로 단절되고 대규모 봉기가 전국 각지에서 발생하였다. 특히 1905 년 여름 도네츠끄 탄전지대에서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지부가 설립되어 탄광 노동자를 조직화시키고 선동하였다 . 이를 전후로 〈철도노동자위원회〉가 발족되어 동년 7 월 4 일에는 인쇄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자 스트라이크는 전도시로 파급 • 확산 되었다 이에 놀란 정부는 7 월 I4 일 도네츠크 현지사에게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급속히 질서를 회복하라〉 1) 고 지시를 내렸으며 지사는 군대동원령까지 공포하여 실력행사를 하였다 . 그리하여 약 2 주간에 걸친 노동자의 요구조건, 죽 노동자의 처우 개선, 미성년자 노동폐지 둥의 의침은 총칼 앞에 무참히 사라졌 댜 그 외 시 베리 아의 많은 도시 노보로시 스끄, 끄라스노야르스 끄, 치따 등에서 봉기를 일으킨 노동자들은 군대의 도움을 받아 경찰들을 무장해제시키기도 하였지만 조직력의 부족과 동시성의 결핍으로 진압당하고 말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는 물론 시베리 아 농민과 병사들까지 지속적으로 봉기에 가담했으며 IO 월 20 일부터 30 일까지 계속된 총파업은 그 절정에 달하였다. 마침내 짜리정부는 비떼의 충고대로 〈 IO 월 선언〉을 발표하고 입헌군주국 으로 탈바꿈하였다. 이로 인해 반정부세력이 분열되어 온건 • 자유 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만족하였지만, 급진주의자들은 제헌의회 소집까지 요구하는 극단으로 치닫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인 국내정세는 대다수 인민들이 혁명에 싫증을 느껴 평화를 갈구하 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안정을 되찾고 정부의 개혁에 기대를
1) 池田博行,『 ?~97 經濟史』 ,7 多 7 經濟硏究所, I 야 6, p .I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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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고 있었댜 이와 때를 같이하여 동장한 스똘르이볜 (M . A. CT01ILIIlHH) 의 농업 개혁은 농민공동체 를 해체하고 강력한 토지소유 농민계급을 탄생 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 특히 농민 토지은행은 농민의 토지 구입을 돕는 데 적극적이었으며 정부는 시베리아와 그 밖의 어느 지역으로도 농민들의 이주를 권장하고 돕기 시작하였다. 적극적인 이주 권장책으로 말미암아 I906 년부터 I9I0 년까지 5 년 동안 약 250 만 명의 농민이 시베리아로 이주하였다 . 또한 농민 토지은행의 활발한 실적은 I906-l9l5 년 IO 년 동안 농민들로 하여금 430 만 제샤찌나 이상의 토지를 구입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 2) 그렇지만 스똘르이뻔의 개혁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성공적이었다기보다 부정적인 견해가 더 지배적이다. 이 개혁으로 인해 특히 농민대중 의 계충분화가 촉진되어 정부의 지원으로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공동체를 나올 수 있었던 부유한 농만들과 , 뒤에 남은 가난하고 힘없는 인민들 사이에 적대감과 위화감만 가중시켜 또 다른 계급 문제 를 야기시켰던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시베리아의 농업개발은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상업적 농업의 색채를 강하게 풍겼다. 또한 낙농업도 발달하여 19 세기 말의 20 개에 불과하던 버터 공장수가 1913 년에는 4 천 개로 대폭 증가했으며, 시베리아 지역의 버터 생산액은 당시 주요 축산 국이던 네델란드의 수출액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낙후된 러시아 에도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공업화가 진척됨에 따라 기계, 기구 및 공업용 원료의 수입이 증대하게 되었는데, 그에 따라 수출용 곡물의 층산이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소맥을 경작할 수 있는 토지를 찾아 시베리아로 이주해 온 농민은 원시림에 통나무집을 짓고 파종면적을 확대시키면서 새로운 층산체제를 준비하였다. 그렇지만 우랄 산맥을 넘어 시베리아에 정주한 사람들 대부분은 서시베리아의 초원지방에 머물고 동시베리아나 극동지방까지 이주해 온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2) 니꼴라이 V. 랴자노프스끼, 『 러시아의 역사』 , 김현택 역, 까치, 1982,p .1 61.
제 8 장 혁명기의 러시아와 소비에트 정부수립 153
제 1 차 세계대전의 영향은 각 지방마다 달랐지만, 시베리아로부 터 징병해 온 수는 약 l00 만 명으로서 이는 노동 가능한 남자의 약 절반에 해당하여 농촌의 노동력 부족현상이 심각해졌다. 그리 하여 1915 년 2 월 23 일 , 포로룰 농업 노동에 사역하게 하는 법규가 공포되어 약 3 만 명이 농촌에 투입되었다. 1917 년 가을 무렵 시베 리아 농촌에는 약 9 만 명의 포로가 영농에 종사하게 되었다 . 따라 서 파종면적도 늘어나고 수확량도 다소 증대되었지만, 시베리아 철도의 수송력이 미진함에 따라 전선에 큰 도움을 줄 수는 없었 댜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의 제분공장을 비롯한 농산물 가공공장 의 부품들 대부분이 독일제 기계인지라 공장 운영에도 애로사항 이 많았다 .3) 1917 년 2 월 혁명이 발생한 뒤 모스끄바에서는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임시 집행위원회〉가 탄생하여 사실상의 실권을 장악하 면서 이중권력의 실체를 나타냈다. 시베리아와 극동지방에도 1 개월 만에 〈노동자 • 병사대표 소비에트〉가 조직되고, 다른 한편 임시정부의 지방기구로 〈사회질서와 안전위원회〉가 나란히 발족 하여 중앙과 똑같은 이중권력의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혁명 세력의 실체인 소비에트 조직이 시베리아의 농민과 노동자를 규합하여 백군(白軍)의 도전과 외국군의 간섭을 물리침으로써 볼쉐비끼 정부가 수립될 수 있는 기반을 닦아놓게 되었다. 2. 전시공산주의와 신(ffi)경제정책 볼쉐비끼는 임시정부의 실정(失政)과 세계대전에서의 패배 및 식량파동의 혼란 속에서 일단 정권탈취에는 성공했으나 마르크스 주의에 입각한 혁명과업의 수행과제가 남아 있었다. 포괄적 개념 의 이상사회 건설 목표는 러시아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거리에
3) 池田博行, 앞의 책, pp. 150-151.
있었으며 혁명적 의욕만으로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더욱이 권력획득 직후 볼쉐비끼 정권이 처리해야 할 당면과제는 구체제 회복을 위해 항쟁하고 있는 백군과의 조속한 내전 종식, 내전에 개입한 외국군의 간섭배제, 반당(反黨) 사회세 력의 제거, 그리고 장기간의 전쟁과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황폐된 농공업 부문의 생산성 회복을 통한 생활필수품의 조달 둥으로 혁명정권의 기반을 다지는 일이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시도된 레닌 정권의 이데올로기적 과업이 바로 1920 년까지 지속된 〈전시공산주의〉였던 것이다.
내전 발생의 원인은 복합적인 양상에서 기인하였다. 우선 정치 적 측면에서 볼 때, 볼쉐비끼는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제헌 의회를 해산함으로써 민주주의 원칙을 공공연히 위반했다. 이로 인해 정당한 선거로 선출된 의원, 특히 다수를 점하고 있었던 사회혁명당원들의 저항과 반정부 수립의 시도는 아주 당연하였 댜 그리고 군사적 측면에서도 구체제하에서 복무했던 다수의 장교들은 독일과의 강화를 적극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엄청난 영토 손실과 같은 국익을 저해시키는 요인이 됨과 동시에 동맹국 들에 대한 배신행위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당시 젊은 지식인 및 대학생들의 공감까지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이 장교 단은 결국 남부 지역에서 의용군을 창설하고, 전통적으로 러시아 와 분리 되 어 특권을 누리 고 있던 돈 ~OB) 및 꾸반 (Ky BaH) 까자흐 족과 긴밀한 유대를 강화하여 공산 지배에 대항하는 투쟁을 개시 하였다 4) 더욱이 우끄라이나인, 그루지아인, 깔므이끄인과 같은 민족은 혁명과 무질서가 연속되는 정세를 러시아와 분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 그들 스스로 자치정부를 수립한 후 백군을 도왔다
4) 일반적으로 까자끄족은 러시아 농민보다 다소 부유했기 때문에 반공행위 를 유도할 수 있었다.
또 사회 • 경제적 측면에서 볼쉐비끼 정권은 군과 도시 프롤레 타리아트에게 식량공급을 원할히 하는 문제가 시급했다. 그러나
농민은 본래 공산혁명의 주체세력이 아닐뿐더러, 공산품과 농산물 의 정상적인 교환원칙을 벗어난 일방적인 협조 강요에는 완강한 저항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볼 쉐비끼 정권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농촌을 부농과 빈농으로 구분하고 상호 대결시킴으로써 중립화 내지 협조적 관계로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테면 빈농 위원회의 창설로 계급구분을 이루어 빈농위원회에게 부농에 대한 잉여농산물 색출 및 탈취권을 비롯하여 전반적인 촌락 업무를 위임시킴으로써 식량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촌락내에서의 계급 투쟁의식을 효과적으로 이식시키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러한 부농과 빈농의 적대관계 조성으로 부농은 백군을 적극 지원하는 상황으로 변했지만, 대다수 농민들은 적군도 백군도 아닌 자신들 의 진정한 이익과 보호를 맡아줄 수 있는 〈녹색 정부〉를 갈구했 으며 적군과 백군의 지원문제는 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수동적 태도를 보여주었다 . 5)
5) George Vernadsky, A Hi s to r y of Russia , New Haven:Yale Univ . Pr., 1974 . pp. 3o2 -304 -.
백군은 주로 사회혁명당원들로 구성된 제헌회의 위원회를 기반 으로 공화정을 표방하는 정부를 볼가강변 사마라 (CaMa p a)6) 에 수립 하였다 백군의 주요 지도자는 남부에서 활약한 육군대장 제니낀 (,Il; eHRKRH) 과 시베리아에서 활약한 해군대장 꼴차끄 (Ko JIq aK) 로서 과도기중 이들의 의도는 강력한 군사정부를 수립한 후 국민의회 를 소집할 계획이었다 . 백군의 전 항쟁기간울 통한 투쟁목표는 제헌이나 공화정 수립보다는 공산주의와의 투쟁에 있었다 .
6) 현재 꾸이브이쉬프 (K y HBHmeB)
내전은 외국군 개입에 의해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진행되었 다. 동맹국들은 I9I8 년 2 월 소비에트 정부가 발표한 제정러시아의 부채상환 거부로 자극되었으며 , 독일과의 단독 강화조약체결에 더욱 분노하였다. 이와 같은 소비에트 정부의 배신행위 이외에도 동맹국들이 무관심할 수 없었던 상황은 미 • 영 • 일로부터 수송된 상당량의 주요 병기가 러시아 북부의 무르만스끄 (M yp M8HCK) 와
아르한겔리스끄 (A p xaHre Ji bCK) 및 태평양의 불라디보스또끄 (Bna ;D;H BOCTOK) 항구에 비축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며, 동맹국들은 이 병기가 볼쉐비끼 정권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 다 이를 구실로 동맹군은 1918 년 4 월 무르만스끄, 아르한겔리스끄 및 불라디보스또끄항에 상륙함으로써 내전에 직접 개입하게 되었 댜 동맹국이 개입할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상호 긴밀한 유대를 확립하고 반공투쟁에 적극적인 열의를 표했음에 반해 미국의 입장은 소극적이었다. 미국은 동맹국과 보조를 맞추어 시베리아에 미군을 파견했으나 이는 극동에 진출한 일본의 야심을 점검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월슨 (W il son) 대통령은 미군 사령관에게 내전에 관해 엄중하게 중립을 지키라고 지시하였으며 단지 체코슬로바키 아에 대해 지원만 했을 정도로 소극적 자세를 보였던 것이다. 동맹국이 북부와 극동지역에 개입할 당시 독일은 우끄라이나 독립을 인정한 브레스뜨-리또프스끄 (B p ecT- JlH TOBCK) 조약에 따라 로스또프 (PocToB), 끼에프 (RHeB), 오데사 (O ;a; ecca), 끄르임 (K p꼬 M) 과 같은 남러시아와 우끄라이나를 장악하였다. 이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소비에트 정부는 1918 년 중반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에 뜨로쯔끼(Jl eoH T p o~KH :B)를 임명하고 오합지졸의 적군을 재정비하였다 . 그 후 새로운 군대는 의무징병제에 의해 조직되었 고, 1917 년에 창설된 병사위원회 폐지와 더불어 당원으로 구성된 정치위원이 군의 세포조직으로 대체되어 엄격한 규율이 확립되었 댜 또한 경험이 풍부하고 숙련된 과거의 군장교들을 대거 충원하 여 지휘체계도 보강하였다 . 백군은 적군에 비해 병력이나 장비면에서 열세롤 면치 못하였 댜 더구나 1918 년 II 월 독일의 항복으로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볼쉐비끼 정권은 과거의 영토를 회복할 수 있었다. 비록 적극적인 반공투쟁을 보였던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군 철수의 공백을 차지하여 러시아 남부에 진주했지만 새로운 양상의 전쟁 올 원치는 않았다. 연합국측은 의교적 개입 명분의 결여, 동맹국 간의 소극적이고 분산된 작전, 적군의 이데올로기적 선전공세로
인한 피해속에서 어려움을 겪다가 마침내 1920 년 II 월 경제적 봉쇄 철회와 함께 철수하고 말았다 . 볼쉐비끼 정권은 내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었으나 전시 공산 주의에 입각한 정책실행의 결과 전 기업과 공장의 국유화, 전쟁목 적을 위한 전 자원의 국가 할당, 사적 교역금지와 재화의 수요 • 공급에 대한 국가통제, 농민들의 잉여농산물 탈취, 군과 노동조합 에 대한 당통제 , 국가와 시민간의 은행 거래에 대한 부분적 제거 동을 물리적 수단으로 강행하여 대중의 불만이 극에 달하게 되었 다? 농산물 수탈정책으로 인한 농민의 저항은 생산량 저하로 나타났고, 물질적 자극배제와 불합리한 경영은 공산품의 양과 질을 저하시켰댜 공업의 지속적인 쇠퇴와 수송의 혼란으로 전국민의 생활은 점점 궁핍해졌다. 공업생산량은 매년 하강하여 1920 년 생산량은 1913 년의 13.2% 에 지나지 않았댜 제품과 전품목의 생산울 반영할 수 있는 수송량을 평가기준으로 볼 때 1916 년 일일 적재화물량이 31,164 톤인데 비해 1920 년의 양은 10,738 톤으로 감소하였다 . 이 밖에 생활필수품의 결핍올 반영하는 설탕의 개인당 소비량은 전쟁전 4.87 금화 루블로 떨어졌으며, 직물류의 개인당 소비량도 6 . 77 에서 0.91 금화 루블로 떨어졌다 . 8) 농산물의 생산량 감소는 더욱 심각하였다. 혁명후 부르조아지의 거대한 토지몰수를 통해 모든 경작지는 농민에게 분배되었다. 농민들은 혁명의 산물로 토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전시공산주의 체제 안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빼앗기는 서러움을 맛보아야 했 댜 따라서 농민들은 자신이 필요한 양 이상의 경작을 기피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 이에 대한 실증적 자료를 살펴보면 1916 년 경작면적이 약 9 천만 헥타르였던 것이 1921 년에는 6 천만 헥타르로 줄었고, 1916 년에 총곡물 생산량이 7 천 4 백만 톤임에 비해 1919
7) Alec Nove, An Economi c Hi st o ry of the USSR, Aleen lane : The Peng uin Press, 19 '>9, p. 74. 8) George Vernadsky, 앞의 책, p. 321.
년의 총생산량은 겨우 3 천만 톤에 지나지 않았다 . 9) 전시공산주의하에서 만연된 불만과 곤궁은 192 0- I92I 년 기간중 연속적인 농민반란을 유발케 했으며, 192I 년 3 월에는 끄론쉬따 뜨 (K p oamTa ,u. T) 에서 수병들의 반란으로까지 인화되었다. 폭동은 군대의 동원으로 수습되었으나 이 사건은 볼쉐비끼 지도층에게 지대한 충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불만 표출의 제거를 목적으로 한 경찰수단이 재도입되었으며, 1921 년 3 월 제 IO 차 당대회 소집을 통해 황폐된 경제재건, 자율적 경제성장 촉진 및 농민회유 목적의 시장기능 일부를 재인정하는 신경제정책 (H0Ba11 aKOHOMH' l8C Ka11 nonMTHKa) 이 채택되었던 것이다. 신경제정책은 그간 농민을 강제 수탈해 온 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정한 것이었다 . 반란을 유발케 했던 물품세 징수는 한정된 세금 할당으로 교체했으며 , 세금은 우선 물품세를 사정한 후 원칙적으 로 곡물로 징수하였다(나중에 돈으로 수납했음). 그리고 농민은 이제 잉여농산물을 시장에서 자유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댜 또한 세금징수 법령은 경제체제 변화를 수반하여 대외무 역을 제의한 상업의 자유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농업부문의 완화와 더불어 공업부문도 유사하게 변화되어 순수 한 사회주의 형태의 생산은 새로운 〈국가자본주의〉체제로 대체되 었댜 중앙집권적이고 획일적이었던 공업운영이 대규모 생산단위 에 대해서는 정부통제를 여전히 유지했지만 소규모 생산단위에 대해선 사기업 활동을 인정하는 〈기업합동〉체제로까지 허용되었 댜 거래방식에 있어서도 정부는 제조공장에 무료로 공급했던 자원과 장비계획을 철회하고 현금으로 구입케 했다. 이러한 변화 는 현금유통체계를 재도입한 것으로서 신용과 은행거래제도의 부활을 의미했고 1921 년 말 국가은행은 전통적인 사업기반 위에서 활동을 재개하기에 이르렀다. 신경제정책의 광범한 경제개혁 중 중요한 핵심요소는 강제노동 폐지에 있었다. 신경제정책의 도입으로 농 • 공업 부문의 생산은 급격히 회복되
• 9) 같은 책, p. 322.
었댜 경작지는 l92I 년에 6 천만 헥타르였던 것이 1923 년에 6 천 5 백만, 1927 년에는 l9I6 년 수준인 9 천만 헥타르로 상승했고, 곡물 생산량도 1920 년 I 천 8 백만 톤에서 1924 년에 3 천 7 백만 톤, 1926 년에는 7 천 4 백만 톤으로까지 상승하였다. 공업부문에 있어서도 석탄생산량이 1922-1923 년 기간중 I 천 I 백 5 십만 톤이었던 것이 1925-1926 년에는 2 천 4 백 5 십만 톤으로 상승했고, 면직물생산은 석탄생산과 같은 기간중 5 천 6 백만 톤에서 20 억 톤으로 상승하는 실적을 보였다 .10) 이처럼 신경제정책이 볼쉐비끼 정권을 심각한 위기로부터 구원해 주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생산부문에서 사회주의 노선의 후퇴는 이데올로기적 모순을 야기시켰기 때문에 일단 회복을 계기로 재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전체주의체제의 확립 1924 년 레닌이 사망하자 신경제정책에 대한 이념논쟁은 권력투 쟁으로 표면화되었으며 뜨로쯔끼의 좌파와 부하린의 우파가 경제 논쟁을 벌이던 가운데 이를 교묘하게 이용한 스딸린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 스딸린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은 첫째, 스딸린의 행정업무 수행능력이 확장일로에 있던 당간부 조직업무 를 관장할 수 있었고, 당조직책 수행을 통해 자신의 아성을 구축 함으로써 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이 될 수 있었다. 둘째 , 스딸린의 권력도전 세력인 좌 • 우파가 그의 야심을 간파하지 못한 채 치열 한 투쟁으로 힘을 소멸시킴으로써 스딸린의 의도를 파악했을 때는 이미 시기적으로 늦은 상태였었다. 셋째, 1917 년 혁명후 상당수의 당원이 유입되었는데, 당시 유입된 당원 대다수는 마르 크스주의나 국제주의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무식한 노동자 • 농
10) 같은 책 , pp. 343 -344.
민들이었다 . 이에 반해 당 최고지도자들은 학식이 높고 자의식이 비교적 정립된 지식인들이었다 . 이러한 상반요소로 인해 좌 • 우파 간의 싸움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고 끈질긴 논쟁을 제대로 인내 할 수도 없어 지식인들을 불신하는 풍토조성과 아울러 대다수 당원들과 유사한 유형의 스딸린이 호감을 얻을 수 있었다 . 이 밖에 스딸린은 민족적 갈등도 최대로 활용하였다. 이상과 같이 스딸린의 성공은 한마디로 러시아 대중의 지지기반, 당내에서의 실권장악, 새로 유입된 간부들과의 개성일치, 정적들보다 적절한 현실적 정책노선 제시에 있었던 것이다 . 명실상부한 실권을 장악한 스딸린은 집권 초기의 온건노선을 버리고 급속한 방법으로 당의 기능이자 사명인 사회주의 달성을 추진하였다 . 신경제정책의 과정은 혁명의 본질 수행상준비단계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데올로기적 목표를 지향하는 노력은 공업화 목적과 병행하여 실행되었다. 공업화 목적을 이데올로기적 목표와 유사한 비중을 두고 동시에 추진하게 된 동기는 복합적 요인에 기인했다 첫째, 소련은 저개발 농업국으로 마르크스의 개념에 따른 착취나 갈등문제 이전에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태로서 공업화를 통한 생산성 증대가 체제 안정의 지름길이었다. 둘째, 볼쉐비끼 체제는 이데올로기의 상이성으로 인해 항상 자본주의 제국의 포위상태하에 위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안보적 수단으로 공업화는 시급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중압 감이 중공업 육성에 최우선 순위를 부여하는 결과로 나타났던 것이다 . 세째는 공업화 수행을 통한 직업 기회 확대로 사회보장 수단을 강구할 수 있고, 체제에 대해 중립적인 농민을 대거 공업 노동자로 전환시켜 체제에 흡수시킬 수 있으며, 농업집단화를 통해 농민의 통제를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스딸린의 의지가 가미된 이상사회 건설목표와 공업화목표는 당의 리더쉽 역할로 통제된 거대한 행정관료체계에 의해 수행되 었댜 스딸린의 이중목표 수행과정은 1927 년 소집된 제 15 차 당대 회에서 구체화되었다 . 제 15 차 당대회가 계획경제에 관한 준비를
명령함으로써 소련은 1928 년부터 5 개년 계획경제체제가 시작되었 다 최초로 입안된 제 1 차 5 개년계획의 목표는 무리 없는 수준으로 수립되었다. 그러나 1929 년 스딸린은 경제적으로 신속한 일국사회 주의 건설과 군수공업 육성을 통한 자위능력 신장목적에서, 그리 고 정치적으로 온건노선을 견지해 온 우파세력의 소탕 목적으로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전 공업생산목표는 2 배로 상향 조정되 었고, 도시의 당간부들은 재원조달 목적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농산물을 강제 몰수하고 반강제적 농업집단화를 추진하였다. 농민 은 농산물을 태워버리고 가축을 도살하는 방식으로 저항했으나 체제는 이에 굴하지 않고 더욱 난폭한 방법으로 강행하여 제 I 차 5 개년계획 기간중 학살된 농민의 수는 약 6 백만 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 2 의 혁명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스딸린의 변혁은 사회 전부문 에 영향을 미쳤다. 모든 경제체계는 중공업 건설에 치중하여 원활 한 자원배분을 돕도록 개편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단기간내에 다수 부문에 대한 급속한 성장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스딸린의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농업부문에서의 변혁은 소규모 사유지를 포함한 전면적인 집단화와 국가통제의 조직화로 나타났다. 공업부 문에 있어서는 경공업에 대한 전면적인 국유화 단행과 사기업 정신을 완전 일소시켰다. 종교에 대한 박해도 본격화되어 1929 -1930 년 기간중 2 천여 명이 목사직을 박탈당했고 상당수의 교회 가 폐지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말살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확보하려는 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데올로기적 기반 확보의 노력과 통제경제체제를 통한 공업화 추진은 비대한 관료체제를 불가피하게 잉태시켰다. 이는 획일적인 통치목적뿐만 아니라 계획경제 운영상 다음과 같은 요인 때문이 었다. 첫째, 자본형성을 위한 세금을 거둬들이고 계획을 지령하는 수단으로써 다수의 관료를 필요로 하였으며, 둘째, 계획수립과 유지를 위해 최근 및 현존 경제활동에 관한 충분하고 정확한
정보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며, 세째, 계획자와 재화(財貨) 및 서비스 생산자간의 적절한 의사전달 수단의 필요성 때문이다 . 이상과 같은 필요성에 의해 1930 년대 초 당, 국가, 경찰장치는 대폭 확대되었다. 특히 이들 기관의 간부는 충성심 여부에 대한 엄밀한 심사와 훈련을 거쳐 충원되었고, 다양한 특권이 부여되었 다 이와 같은 통제국가 재건은 마르크스의 국가소멸 개념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소련 특유의 산물임에 틀림없었다. 1930 년대 중반 국가통제의 범위는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확대 되었댜 예술 • 문학 • 교육은, 당 및 국가의 철저한 통제하에 공업 화와 사회전환 목표에 부응하여 주조되었고, 모든 예술활동을 동원화 노력에 기여토록 통제했으며, 주제선택에 있어서도 체제가 설정한 목표에 공헌할 수 있는 주제만을 다루도록 했던 것이다. 스딸린 치하의 대숙청과 더불어 테러사용은 체제의 하부구조와 사회 전반에 걸쳐 파급되었다 . 이러한 스딸린의 근대화 방법과 개성에 대해 서방학자들은 레닌과 비교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 즉 레닌은 권위주의적 개성과 전통적인 러시아 인민주의(人民主 義) 엘리트로서 , 절대주의 체제를 창조함에 있어 합리성에 의존하 여 목표를 설정 및 추진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스딸린의 절대 주의는 광적 개성으로 인한 강력한 힘에 의존하여 내핍과 능률강 요 및 체제가 지향하는 가치체계를 무자비하게 주입시켜 지도층 내의 대숙청과 대중학살을 보편화한 것이 그 특징이었다.ll} 이 와 같은 스딸린체제 의 특징을 프리 드리 히 (Carl. J. Fr ied ri ch ) 와 브레진스키 (Zb ig n i ew Brez in s ki)는 전체주의 개념 (To talitari an conce pt)으로 집약시키고 있다. 죽, (I) 정교화된 공식적 이데올로 기를 갖고 있는 체제, (2) 한 사람의 독재가에 의해 통치되는 단일 대중정당, (3) 테러체계, (4) 대중전달 수단에 대한 당의 완전 독점, (5) 군에 대한 독점적 통제, (6) 경제의 중앙집권적 통제이다•l2)
11) St an ley Roth m an & George W. Breslauer, Sovie t Polit ics & So- cie t y , West Publi sh in g Co., 1978, pp. 41-42. 12) Carl J, Fried ric h and Zbig niew Brezin s k~ Tota l it ar ia n Di ct a t o r -
ship and Auto cracy, Cambrid ge :Harvard Univ . Pr., 1965 , p. 27.
계급 없는 사회창조를 위한 당의 리더쉽 역할은 당의 독재를 낳았고, 당독재는 일인독재자를 탄생시켜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정당하다는 논리전개로 결국 인민들을 체제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가 야기되었던 것이다. 4. 스딸린치하의 계획경제 1927 년 황폐된 소련의 경제가 제 1 차 세계대전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되자 당은 지체 없이 러시아를 농업국에서부터 공업국으로 전환하는 목표를 추진시켰다. 이 새로운 정책은 1921 년에 시작되 어 경제적 회복을 가져온 신경제정책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 〈공업화대회〉로 명명되고 있는 1927 년 12 월의 제 15 차 당대회에 서 공포되었다. 제 15 차 당대회는 경제적 측면에서 뿐만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도 상당한 의미를 갖는 대회였다. 죽 뜨로쯔끼를 비롯한 스딸린 정적들의 숙청을 공식화함과 동시에 스딸린 독주 시대의 개막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공업화 추진의 기본목표는 스딸린의 제 1 차 5 개년계획 시행 연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스딸린의 〈 5 개년계획 기본 임무는 사회 주의의 기반 위에서 전반적인 공업뿐만 아니라 수송 및 산업을 재무장, 재조직할 수 있는 공업창조〉 13) 에 있었다. 여기서 〈사회주 의 기반 위에서〉라는 말은 레닌이 이미 지적한 사회주의 경제발 전에 있어 지역적인 최적배분(最適配分)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실로 균형된 배분의 개발원칙은 공산주의자들의 계획경제 추진의 명분으로서 이러한 원칙에 의거, 계획경제는 가능한 한 사회적
13) Problems of Lenin ism , 11t h eel, Moscow, 1947. p. 369 as quo te d in Naum Jas ny, ''Th e Great Industr i a l i za ti on Driv e, in Wi lliam L. Blachwelledd. , Russia n Economi c Develop me nt fro m Pete r the Great to St al,in, New Vi ew po in t , 1974, p. 297.
노동경제를 증대하고 재생산과정의 촉진을 목표로 생산의 지역적 배분 보장에 있었다 .14) 공업화 추진의 두드러진 특징은 소련의 전 경제가 제철 및 중공업공장 건설에 치중,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문제는 강철생산과 제철공장 건설의 확대가 건자재 생산이나 수송시설의 확대 없이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와 같은 공장건설 과 가동을 위해서는 최소의 소비재와 주택건설이 필연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했다. 이처럼 불균형적인 중공업의 급속한 확장이 소련경제의 기본 원칙이며, 스딸린 생존시까지 유지된 기본 법칙 이기도 하였다. 계획경제의 착상은 소련 특유의 새로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미 제 1 차 세계대전 수행중 교전국들 사이에서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계획경제를 실시하여 좋은 성과를 올린 바 있었다. 소련도 이미 공업시설을 복구할 목적으로 1921 년 국가계획위원회 (Focn JI aH) 롤 조직했고 1920 년에는 전화(電化)위원회도 설립하였었다. 이러한 조치는 혁명후 효율적인 경제수립 및 이를 위한조직에 지대한 관심 을 쏟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이러한 일반적 관심 속에서 주목할 만한 저서가 1919 년 유능한 공학도 그리네베쯔끼(rp HEeBe HKMn) 에 의해 『러시아 공업의 전후 전망』이란 제명하에 출판되었다. 그리네베쯔끼는 이 책을 통해 러시아의 공장이나 공장설비는 지리적으로 불필요한 수송회피를 위해 원료공급지와 인접시켜 조정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아울러 그는 이상과 같은 논리에 서 지금까지 활발치 못했던 우랄 지방과 광범한 서부 시베리아 지역의 엄청난 잠재적 부(富)를 서둘러 개발할 것을 제의했다. 특히 그는 경제적 측면에서의 대단위 공업시설 재배치 이외에도 군사적 측면에서 향후 예상되는 서구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자국 의 공업시설 보호를 위해 서구와 멀리 떨어진 동쪽으로 옮기는
14) A. N. Lavri sh chev, Economi c Geog r aph y of the USSR, Moscow: Prog r ess Pub., 1¢ 9, pp. 109-no.
제 8 장 혁명기의 러시아와 소비에트 정부수립 165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15)
15) Geog e Vernadsky, 앞의 책, p. 351.
그리네베쯔끼의 안을 중심으로 고스쁠란은 제 I 차 5 개년계획의 윤곽을 작성하여 1928 년 초 발표와 함께 가을부터 실행에 옮겼 댜 그 후 1929 년 최초 계획 할당량을 상향 조정하여 1932 년 제 I 차 계획을 마무리짓도록 결정했다. 제 I 차 5 개년계획의 기본목표는 동력자원의 개발과 금속 • 화학공업의 건설에 중점을 둔 중공업 우선정책에 의한 공업화와 소규모 개인농업의 집단화 및 구조화 룰 통해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전환하는 한편 자본주의적 요소 를 일소하고 사회주의 경제제도를 확립하는 데 있었다. 이 계획목 표는 단기간내 완결될 수 없는 성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4 년 기간중 이룩한 국민총소득은 270 억 루블 (192 6- 1927 년 가격수준) 에서 450 억 루블로 상승하였다 .16) 이러한 막대한 자본투자의 기반 위에서 소련은 광범한 공업확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16) 같은 책, p. 352. 한편 Alec Nove, An Econo 교 c Hi st o ry of the USSR, p. 191 에 의하면 국민소득이 걱 4 억 루블에서 1932 년에 455 억 루블로 증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중공업 육성정책으로 계획경제의 기본 노선이 · 선택된 배경은 서구 제국에서의 공산혁명 발발 가능성이 소멸됨으로써 소련은 단독적인 힘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었 댜 더욱 절박한 상황은 외교적으로 신정권을 인정치 않고 있던 외세(자본주의 제국)의 위협을 신속히 극복하는 길만이 확고한 정권을 유지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공업수준 약세와 자본동원 문제가 난제로 대두되었다. 목재 및 석유와 같은 원자재 수출을 통해 긴요한 외화를 충족하고 있었지만 이는 필요 량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국내자본 동원에 있었고 해결책은 대중(특히 농민)의 희생 이외에 좋은 방도가 없었다. 여기서 농업집단화가 불가피했던 점은 첫째, 공업화에 동원된 노동자들에게 안정된 식량을 공급할 수 있고, 둘째, 농업의 기계 화로 생산을 중대시킬 수 있으며, 세째, 농업부문의 사회화를
보편화할 수 있고 , 네째는 부수적으로 농민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조직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3 0- 193l 년 볼가강 중 • 하류 지역 및 까자흐 북부지역 곡창지 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농업집단화로 농민의 희생은 엄청났 댜 집단화 시도의 초기에는 개인농에 대한 중과세로 유도했으나 거센 반발이 일자 빈농위원회의 기능활성화를 통해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부농은 전재산울 강제 몰수당했고 집단수용소로 보내져 벌목, 운하 및 철도건설과 같은 중노동에 처해졌다 . 제 1 차 계획중의 기본목표 중 하나인 동력자원 개발은 계획목표 220 억 Kw/h 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1927-1928 년 중의 총생산량의 50 억 Kw/h 에서 1932 년에는 134 억 Kw/h 로 상승하였다 . 전력개발사 업 중 야심적인 사업은 첫째, 드네쁘르강 수력발전소 건설사업을 들 수 있댜 이 사업은 미 국인 공학자 코퍼 (Hug h L. Coo p er) 가 설계하고 감독한 대규모 건설공사로 1932 년 완공되었으며 연생산 총량은 20 억 7 천 Kw/h 이고 최대용량은 55 만 8 천 Kw 로 추산되고 있다 . 러시아 공업발전의 기간이 되는 대규모 제철소는 우랄지역 마그니또고르스끄 (MarHHToro pcK) 에 세워져 제 2 차 계획기간중에 완공되었다. 이 밖에 자동차, 트랙터 및 농기계 공장이 고리끼 (I'op LK HR), 하리꼬프 (Xa p LKOB), 로스또프 (PocToB), 스딸린그라드 (CTalIHHrp a' A ), 첼랴빈스끄(tJ e11116HHCK) 에 건설되어 제 1 차 계획기간 중 완공되었다 이외에도 공업발전의 기념비적인 성과는 까자흐 북부의 그로즈느이 (r p 03HLIn) 로부터 뚜아쁘세 (T y ance) 의 혹해에 이른 송유관 건설과 뚜르께스딴一시비리 (T yp KeCTaH -C H6u p1,) 철로 건설이다 .17) 이상과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제 1 차 5 개년계획은 완전한 성공이라 평가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엄청난 인력과 자원이 동원
17) Alec Nove, 앞의 책, p. 355. 자료 : Manaq iee eB, Hcrop u a 11eH006p a aosaHu.1 i s CCCP, MocKBa, 1964 , pp. 2o8 . 4o7 .
제 8 장 혁명기의 러시아와 소비에트 정부수립 167
되었다는 사실과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산율은 낮고 상품 의 질이 저급하여 결과적으로 생산비가 높아졌다는 결론 때문이 댜 계획경제 수행에 있어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노동의 유동 성 문제이다 . 노동자들은 새로운 건설사업장이 대체로 주거시설이 조잡하고 때로는 식 량조달마저 순조롭지 못해 항상 보다 좋은 시설과 조건을 찾아 이동하는 것이다. 그 결과 레닌그라드나 모스 끄바 같은 대도시에 숙련공과 노동자들이 밀집되어 국민경제가 불균형하게 발전될 소지를 많이 안고 있었다. 제 2 차 5 개년계획 (1933-1939) 은 자본주의적 요소의 배제에 의한 사회주의 사회건설과 국민경제 전부분의 장비개선으로 기술수준 향상을 기본목표로 하고, 철강 및 비철금속과 화학공업 육성에 치중한 공업화정책을 추진했다. 이 계획은 1934 년 l-2 월에 개최된 제 17 차 당대회에서 수정안 방식을 추진방향과 방법을 수정 및 보완하여 추진되었다 . 제 17 차 당대회의 수정안은 노동생산성의 중대, 단위생산비용 축소, 제품의 질적 향상, 특히 중공업 부문에 서의 기계화 증대를 촉구하는 안이었으며, 또한 소비재 생산의 증대를 위해 경공업 부문의 행정구조를 지방분권화하였다. 지방분 권화 방식은 민족적 기반을 지역적 기반으로 대체하여 기존 행정 기구 일부를 재조직하고 지방 행정가들에게 주요 책임을 부여케 하는 변화였다 이 밖에 중공업의 지역적 재배치를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 중공업의 지역적 재배치는 이미 개발에 착수한 우랄 및 시베리아 지역의 공업기반에 대한 개발촉구 문제로 이들 지역 의 천연자원 개발과, 서구의 잠재적인 침략에 대비하여 러시아 군수공업의 일부를 동쪽으로 옮기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제 17 차 당대회 이후 몇 개의 새로운 거대한 공업단지가 건설되 었다 이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소위 우랄-꾸즈네쯔끄 꼼비나뜨 (Yp aJ I -K y aH e~I< KoM6HHaT) 라고 명명된 사업이다. 우랄 지역은 이미 제 1 차 5 개년계획하에 탄광개발과 야금공장 건설이 이루어져 마그니또고르스끄의 거대한 프로젝트 일부가 1934 년부터 가동중에 있었댜 또한 이 지역은 1932 년에 개최된 제 16 차 당대회에서 우랄
지역은 철 저장소, 서시베리아의 꾸즈네쯔끄 유역은 석탄 저장소 로 정해진 바 있었다 . 이와 같은 결정에 의해 1,200 마일 이상 떨어진 두 지점은 철로로 상호 필요한 자원을 공급받아 개발되었 다 이 거대한 계획은 당분간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얼마 후 우랄 지역과 근접한 까자흐스딴 (KaaaxcTaH) 북부에서 대규모 신석탄광이 발견되었다. 그 후 신탄전 개발로 얻은 석탄을 우랄 프로젝트에 공급함에 따라 꾸즈네쯔끄 유역은 우랄과 독립하게 되었다 . 그러나 당시 꾸즈네쯔끄 지역에는 이미 야금공장들이 가동되고 있었다. 또한 제 2 차 계획기간중 완공된 대규모 단일공장 지역은 볼가강변에 위 치 한 모스끄바, 하리 꼬프 (Xa p hKOB), 스딸린그라드 (CTa JI HHr p a p;), 고리 끼(f' op hKH8), 우파 (Y if> a) 및 스베르들롭스끄 (Cne pp;JI OBCK) 이 며, 생산제품은 트랙터, 자동차, 기관차, 터빈 발전기와 기계류이 었다 이들 공장은 제 2 차 계획기간중 기술적 장비개선 및 기술수 준 향상 목표에 의거하여 급속한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이와 같은 제 2 차 계획의 고도성장을 통해 소련은 1937 년에는 세계 제 2 위의 공업생산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더욱이 1937 년 소련에서 이룩한 사회주의화 목표는 농업부문에서 총생산량의 98% 이상을 달성했고 기타 부문에서도 거의 IOO% 에 달할 정도였 다. 주요 품목의 생산량은 다음과 같다 .
1932 년 실적 1937 년 실적
에트 정부수립
강철( , ) 5.9 I7·7
자료 : Ma11a
제 3 차 5 개년 계획 (1938-1941) 은 1941 년 6 월 독 • 소전의 발발로 중단되었지만, 기계 및 특수철강 생산과 화학공업 건설에 주력했 으며, 아울러 교통시설 확충과 군수지역 개발에 박차를 가한 시기 였다. 그 후 제 2 차 대전중 소련은 전시경제체제를 구축하고 서부 에 밀집된 주요 공업시설을 우랄 • 시베리아 지역으로 이동하는 한편 군수산업 육성에 주력하였다. 이 기간은 국제정세의 영향으 로 군수공업에 대한 국민적 노력이 강요된 시기였으며, 필요시 전쟁목적으로 쉽게 전환할 수 있는 국제전략에 의거하여 공업이 육성되었댜 개발된 주요자원은 볼가-우랄 지역에서 새로 발견된 유전개발이었다. 당시까지 소련의 석유공업은 거의 모두 까자흐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까자흐는 외부로부터의 공격 취약 지역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발발 직전에 볼가-우랄 지역 사이에서 새로운 유전이 발견됨으로써 본격적으로 개발되었으며 1939 년 초에는 수개의 유전이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교통만 확장사업도 공업개발과 보조를 맞추어 추진되었다. 우선 모스끄바를 항구화(港口化)한다는 견지에서 모스끄바-볼가 운하가 당시 최고의 역점을 둔 엔지니어링 사업과 맞먹는 비중으로 건설 되었다. 당시 건설중에 있던 거대한 철로건설 사업은 극동으로
170
향하는 제 2 간선로이었다 . 이 간선철도는 바이깔호 북부를 피해 오호뜨스끄해 (OxoTcKoe Mo p e) 로 향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 비록 이 철로가 독일과의 전쟁으로 중단되었지만 동부지역에 대한 공업육성 의지의 발로임에 틀림없다. 소련의 철로건설 사업은 타부문에 비해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으나 꾸준히 추진된 점이 특징이댜 건설현황을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I9I3 년 총길이가 5 만 8 천 km 를 약간 상회하던 것이 1932 년에 8 만 3 천, 1940 년에는 IO 만 km 로 증가하였다 . 철로의 수송용량 또한 주행거리보다 더 급속히 증대되어 1931 년 1 억 3 천 2 백만 톤에 지나지 않던 것이 1932 년에 2 억 6 천만 톤, 1940 년에는 5 억 5 천 3 백만 톤으로 향상되 었던 것이댜 18) 농업부문의 성장은 착실한 농기계생산 증대와 외국으로부터의 곡물수입에 그 영향을 받았다 . 제 2 차 5 개년계획 종말에 우끄라이 나, 까자흐 북부 및 서시베리아와 같은 주요 곡창지대의 집단농장 을 지원하고 있던 농기계 트랙터 • 스테이션 (ManmHHO·T p aK-To p HaH CTaHnHH) 은 약 6 천개소에 달했다 . 그리고 농기계 트랙터 스테이션이 보유한 트랙터의 수는 1930 년 7 천대에서 1941 년에는 45 만 4 천 대로 증가했으며, 수확기는 1932 년 3 천대에서 1939 년 12 만 5 천대로 늘었다 .19) 이와 같은 기계사용 중대로 공업과 농업 간의 경제 및 사회학적 균등이란 부가적 효과도 조성되어 갔다. 죽 농기계 트랙터 스테이션 노동자들의 농촌지원 덕택으로 농민 의 소독은 증대되었고, 또 농기계 트랙터 스테이션은 농민들에게 새로운 기계조작 및 숙달과정의 훈련장으로서도 활용될 수 있어 직업확대의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농민의 생산의욕을 자극하는 법적 조치도 단행되었다. 이는 1935 년에 공포된 꼴호즈(집단농장)에 관한 수정법령인데, 비록 토지는 국가 소유이지만 각 꼴호즈에게 토지 소유 허가증을 주고 영원히 운영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18) George Vernadsky , 앞의 책, pp, 3ff i-3 87. 19) 같은 책, p,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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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농장원들은 소유의식을 갖게 되었고, 아울러 집단농장의 번영 이 자신들의 소득중대를 의미함으로써 보다 헌신할 수 있는 분위 기를 조성해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 그뿐 아니라 집단농장원들에 게 농장 안에서의 새로운 권리가 부여되었다. 이는 각 농장원들에 게 1/4 에서 I 헥타르 범위내에서 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소규모 토지경작권과 여기서 생산된 농작물의 자유처분권이 인정되었던 것이댜 이상과 같은 농기계 보급 확대와 제도적 개선의 기반 위에서 빵 및 식량카드제가 1935 년, 제품카드제는 1936 년에 각각 폐지되 었다. 1930 년대 말 당시 소련의 경제적 재구성이 아직 완결되지 못했고 체제의 안정도 불확실한 상태였지만, 이러한 일련의 조치 가 기본적인 생활수준이 향상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댜 1939 년 9 월 I 일 나치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발로 제 2 차 세계대 전이 발발되었고, 1941 년 6 월 독일군의 소련침공에 의해 전쟁에 말려든 소련은 연합국과 공동보조를 취해 전승국으로 남게 되었 다 . 그러나 승리의 대가는 엄청났다. 독일군의 침공으로 소련은 최대의 단일공업지역이며, 최대 농업지역인 전 우끄라이나와 돈 (,Il;OH ) 유역이 파괴되었다. 공식보고에 의하면 당시 98,000 개의 집단농장, 1,876 개의 국영농장, 2,890 개의 농기계 트랙터 • 스테이션 이 유린당했고, 농기계의 손실은 트랙터 137,000 대, 꼼바인 수확기 49,000 대이었다 . 가축은 전전(戰前)의 30% 이상인 7 백만 필의 말, 1 천 7 백만 필의 소, 2 천만 마리의 돼지, 2 천 7 백만 마리의 양과 염소가 손실되었다. 광산(석탄)과 야금공업은 1940 년 생산능 력의 60%, 전력 48%, 선철 74%, 강철 55% 의 유실을 남겼다. 이같은 시설 외에도 집을 잃은 사람은 2 천 5 백만 명이고, 사망자 수는 2 천만 명이었다 .20) 전후 경제계획의 목표는 30 년대에 이룩한 성과로의 신속한 복구였다. 그 첫 계획으로 1946 년 2 월 5 개년 계획이 발표되었다. 20) 같은 책, p. 453.
제 4 차 5 개년계획 (1946-1950) 의 기본목표는 과거 전시경제체제를 평화경제로 전환시키고 중공업시설의 우선 복구에 의해 국민경제 를 전전 수준으로 부흥시키는 데 있었다. 제 5 차 5 개년계획 (1951 -1955) 은 중공업 우선 정책을 견지하면서 새로운 기술도입과 사회주의 경쟁방법을 전개하여 공산주의로의 점진적인 이행준비 를 목표로 하였다 스딸린은 제 4 차 5 개년계획 발표와 함께 향후 15 년간에 걸쳐 달성해야 할 기간산업의 과중한 생산목표량을 제시하고 호도해 나갔다 . 이러한 과중한 부담과 독려는 진정한 번영과 안보를 이룩할 수 있다고 합리화되었다 . 그러나 제 5 차계획 수행중인 1953 년 스딸린이 사망함으로써 말렌 꼬프 (Ma n. eHROB) 가 경제계획을 주도하게 되었고, 말렌꼬프는 농업 과 소비재 생산 강조를 통한 국민생활 수준향상 방향으로 그 노선을 수정하게 되었다 . 전후 스딸린의 야심적인 계획은 너무나 바현실적이었다 스딸린의 호소대상인 노동자들의 소비 수준은 1940 년 수준의 약 40% 로 저하되어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 . 도네 쯔끄(,D; oHe n; R) 유역의 탄광은 아직도 갱 속의 물을 퍼내고 있는 상태였고, 제련소는 단지 1 천 2 백만 톤의 주괴(鑄魂)를 생산하고 있었으며 , 기계제작 공장들은 넝마를 걸친 맨발의 준숙련공들에 의해 작업되는 상태였다. 농업분야의 상황은 더 비극적이었다. 5 개년계획 제 1 차년도의 농산물 수확량은 전쟁전의 60% 에 지나지 않았댜 더욱이 1946 년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3 천 6 백만의 농민이 기아에 허덕임에 따라 심각한 위기에 처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난국에서 자유처분권을 가진 농민의 소규모 사유지는 당시 상황 울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스딸린의 혁명적 추진력은 지칠 줄 몰랐 댜 당초 설정된 계획은 시기가 좀더 앞당겨졌다. 석탄은 12 년 후, 석유는 9 년 후, 철생산은 1950 년대 말 이전에 달성토록 촉구 되었다. 이외에 시멘트 생산과 공업적 건설사업은 4 배로 확대되었 댜 이러한 목표달성을 위해 노동자 개인당 공업전력 사용을 3 배, 기계와 공구생산은 7-8 배로 중가시켜 노동자들의 헌신적 노력
이 강요되었다 . 이 시기에 새로 착수된 산업개발은 핵산업이었다. 핵개발은 엄청난 비용이 요구되는 산업이므로 타부문의 투자 희생이 불가 피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이러한 희생을 무시하고 결국 I949 년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했다. 194 6- 1950 년간 전공업개발에 투자된 자본은 전쟁전 I3 년간 (I928- 나치침공 전) 투자된 총량과 맞먹는 거대한 양이었고, 투자대상도 종전과 다름없는 중공업과 군수공업 에 치중되어 있었다 .21)
21) Issac Deuts c her, Poli tica l . Leader' s of the Twenti et h Centu ry Sta l.in, Pengu _in Books, 1979, pp. 558-56o.
전후 스딸린 사망 (I953) 까지의 전기간을 통한 특징적 성과는 한국전과 농업생산의 저조와 같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초급속도의 공업, 건설, 수송, 국민소득 부문의 성장을 이룩한 것이라 하겠 댜 스딸린이 강조한 철강, 석탄, 석유생산 실적은 다음과 같다.
철강·석유 · 석탄의 생산량
1945 196 0
자료 : Alec Nove, An Economi c Hi s to r y of the U. S. S. R., p . 290.
다음은 주요부문에 대한 생산실적이다.
제 4 차 5 개년계획의 생산실적
1940 1945 1950
생산재 100 112 205
자료 : Alec Nove, 앞의 책 , p. 291
제 9 장 계획경제하의 시베리아 개발 1. 계획경제에 따른 지역구분 1960 년대 말까지만 해도 소련당국은 사회주의 경제의 우월성을 역설하고 또 그 이론적 측면을 실현시키기 위해 주력을 다하였 댜 경제개발의 모든 분야가 국가통제에 의해 조직적인 체계를 거쳐 수행되었고 국가 주도의 산업은 계획경제의 이데올로기를 합리화시켜 나갔다. 현실적인 요구사항, 죽 미국을 위시한 자유주 의 국가들의 침략 위험성을 강조한 안보의식 강화는 경제개발과 안보전략의 불가분한 관계를 조화시켜 주었다. 그 의에도 현실적인 상황이 경제계획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경우는 매우 다양했다. 소련은 다민족을 기반으로 한 연방국가인 만큼 소수민족정책에 신중한 배려를 해야 했다. 소수민족은 슬라 브족이 거주하는 지역보다 개발되지 못한 변방에 주로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 소수민족은 자치권의 한계를 넘어 독립을 원하고 있고, 인구중가율도·슬라브족에 비해 월동히 높아 향후 연방통치 권을 비롯한 다수의 어려운 문제가 예상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무마책과 장기대책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소련체제의 현실
이며 경제계획에도 이 점을 반영해야 했다. 기술의 급속한 혁신 또한 경제계획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의 하나였댜 죽 기술의 혁신은 수송, 채굴 동의 기술발전 및 비용절감을 의미하므로 공간적 위치에 따른 제약을 일소시켜 줄 수 있다. 따라서 먼 지역에 위치한 자원개발의 비중과 이익을 지속적으로 재고하게 되어 경제계획의 지역구분과 세분화에 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이상과 같은 현실적인 주요 요소는, 첫째는 투자정책으로 표출 되어 경제계획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실례를 들면 소비재와 자본재, 근해어업과 원양어업 , 개발지역과 저개발지역에 대한 새로운 공업시설의 위치선정으로 인한 투자배분 문제 동이다. 둘째는 전략적 정책변화로 인한 실례로서 1930 년대 우랄 지역에 건설된 새로운 근대 중공업기지 , 외세 위협으로부터의 보존을 목적으로 한 지역별 자급자족체제, 일본이나 중공을 겨냥한 극동 지역개발 둥이다 . 세째는 기술혁신에 따른 예로 1950 년대 석탄에 서부터 석유와 가스 개발이 촉진된 것은 채굴 기술의 향상이 작용한 결과이며, 1,000 마일 이상 떨어진 원거리의 전력을 송전하 는 사업 역시 기술향상에 의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상황변화에 따른 현실적옹 정책이 이데올로기적 요소와 함께 경제계획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계획경제의 지역구분 필요성을 낳게 했던 것이다. 사회주의 경제에서 지칭되는 〈지역〉은 계획의 목적을 실현시키 기 위해 설계된 개념이다. 소련학자 페이긴(.fl. r.
1) J. P. Cole, A Geog r aph y of th e U. S. S. R., (London:Butt er worth s & Co. Lt d , 1970 ) , p. 76 .
라고 설명하고 있다 . 이처럼 지역은 사회주의와 공업화 추진에 있어 지역 자체의 자원 및 기능적인 역할과 체제의 목적을 결합 한 형태로 나타난 공간적 구획이라 할 수 있다.
콜Q .P. Cole) 라 저먼 (F. C. German) 은 경제지역의 속성을 구체화 시켜 정리하였다. 이들의 연구결과를 요약하면 첫째, 경제지역은 경제계획의 자료수집 및 관리(행정)단위로서 기여하고 있다. 관리 측면에서 지역은 공간적 개발투자에 대한 제 1 단계 기준으로서, 수행된 성과를 목격할 수 있으므로 경제체제를 위한 유용한 계기 &t器)라는 것이다. 둘째, 지역은 부(富)의 균둥을 창조 및 촉진시 키는 단위이다. 혁명후 소비에트 지도자들에게 제일의 책무로 맡겨진 것은 제정시대의 개발 및 소득의 불균등 배분을 제거 내지 완화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여러 개발도상국들처럼 공업 고용 노임이 농업보다 월등히 높아 후진지역을 끌어올리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새로운 공업시설을 개선해 왔다는 것이다. 이러 한 결과로 다수의 공업시설이 불만스럽게 위치했고, 농업임금 부양책으로 농업지역에 건설된 공업은 아직도 가공, 서비스, 소비 재 공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역은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계획단위라 할 수 있다. 세째, 지역은 어느 정도의 자급자족 을 이룩할 수 있는 실체로 간주되고 있다. 더욱이 지역적 경계는 철로, 수로 및 도로에 의한 제품수송에 있어 운임을 가중시켜 지역적 자급자족을 격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2)
2) 같은 책, pp. 'Jf, -77 참조.
다음은 이상과 같은 속성을 지닌 지역의 유형에 따라 소련의 경우를 살펴보면, 소련처럼 광대한 영토와 복합적이고 다양한 특색을 지닌 국가는 여러 목적에서 지역울 구분하고 있다. 일반적 으로 지리학적 지역 유형은 형식과 기능 지역으로 분류된다. 형식 적 지역은 지구의 표피(表皮) 일부를 합리성에 따라 하나로 획일 화시킨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기능적 지역은 보완적이고 상관
적인 관련성에서 구획된 일정한 영역을 지칭한다 . 형식적 지역은 단순화와 분류에 적합하여 학문적으로 유용화되고 있으나 다소 불명확한 것이 단점이다 . 반면 기능적 지역은 행정과 계획에 바람 직하여 현실적으로 보편화되어 있고 명확한 경계를 지닌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실제영역은 보통 지도나 문서로 기록되고 있으 나 물리적 표식이 없는 것이 단점이기도 하다 . 대다수 국가들처럼 소련의 정치 • 행정단위는 기능적 지역분류 방식에 의해 지역망을 형성하고 있다. 이 지역망은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도 있으나 부분적으로는 죽흥적으로 작성된 것이 있으 므로 이상적인 형태라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소련의 경제 및 지리 학자들은 자원과 생산 또는 경제적 기지의 관점에서 형식적 지역 방식의 이상적 형태를 추구하고 있다. 소련은 혁명후 15-20 개의 지역을 유지해 오다가 1957 년 흐루시쵸프의 분권화 통제정책에 따라 104 개의 소브나르호즈 (coBHa p xoa : 국민경제회의) 지역으로 구분하여 운영했다. 이 소브나르호즈 체제는 지역적인 자급자족 보강책에서 기인된 개혁이다 . 그 후 브레즈네프의 동장으로 1960 년대 중반부터 소련은 19 개 지역체계를 수립한 후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 현행 19 개 지역체계는 지역적인 전문성 증진에 역점을 둔 것이며, 지역유형의 측면에서 이는 획일적인 것도 기능 적인 것도 아니므로 지속적인 연구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3) 2. 시베리아 지역의 특성 및 개발조건 시베리아 (Cu6 up b) 는 현행 19 개 경제지역 중 2 개에 해당하는 경제지역이다. 시베리아는 혁명 전에는 우랄 산맥 동쪽의 전(全) 러시아 영토를 일컫는 공간적 의미로 사용되어 오다가 혁명시 계획경제를 운영함에 따라 지역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
3) 같은 책, pp. 77-Bo 참조.
댜 현행 우랄 동쪽의 영역은 서(西)시베리아 , 동(東)시베리아, 극동지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 이들을 공간적 측면에서 세분하면 첫째 서시베리아는 우랄 산맥으로부터 예니세이 (EHHC0 9:)강을 약간 벗어나 북에서 남으로 절단된 지역이고, 둘째, 동시베리아는 서시베리아 경계로부터 중국과의 국경 아무르(心마p)강 만곡부에 서 바이 깔 (BaRKa JI)호 북방 야꾸뜨스까야(.fIKy TcKa .11) 자치 공화국의 서부국경을 따라 라쁘쩨프해 (Mo pe Jl anTeBLIX) 에 이르는 경계내의 지역이다 마지막으로 극동지역은 동시베리아의 경계로부터 일본 해 (flnO HCK00 Mop e ) 및 베 링 해 (Bep H HrOBO Mo p e) 까지 의 지 역 이 댜
19 개 경제지역구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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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면적은 1,000 만 평방 km 로서 유럽 전체의 절반에 해당하며, 극동지역과 합한 면적은 소련 총면적의 1/2 이 조금 넘는 크기이다 . 시베리아의 지역조건은 유럽 러시아 지역으로부터 원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상태나 기후조건이 최악의 수준이 다 . 남부의 일부지역은 경작이 가능하여 토지의 무상분배 및 대여 금 지급과 같은 제정말기의 이민정책으로 인해 농업, 낙농, 광산
업, 목재채벌 및 가공업이 발달할 수 있었으나, 이 지역도 생활조 건이 시베리아의 타지역에 비해 다소 우월한 정도일 뿐이다 . 노보 시비르스끄 (HonocH6H p cK) 를 중심으로 한 I 월의 평균기온은 섭씨 영하 20 도 정도이고 연중 하기(夏期)가 극히 짧은 것이 특징이 며, 2-3 개월의 짧은 해빙기간중 얼어붙은 하천이 범람하여 늪과 수링을 형성시키는 지역이기도 하댜 평균기온은 I 월이 섭씨 영하 28 도이고 7 월의 기온은 섭씨 I6 도 정도이다. 북부지역은 극심한 혹한과 하기가 없는 것이 특징이며 , I 월의 평균기온은 섭씨 영하 36 도이고 7 월은 섭씨 I2 도 정도이다 .
1 월의 기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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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불리한 생활조건으로 인해 거주 인구율도 타지역에 비해 월등히 낮은 현상을 보이고 있다. 1960 년대 말 통계에 의하 면 서시베리아의 인구는 약 I 천 2 백 2 십만 명이고, 동시베리아 지역은 서시베리아 지역보다 영토가 넓은 데 비해 인구는 약 7 백만 정도이다 . 극동지역도 소련방 경제지역 중 가장 큰 지역임 에도 불구하고 그 인구는 I9 개 경제지역 중 I8 번째인 6 백만 명을 약간 상회하고 있다 . 결론적으로 시베리아 지역의 인구는 소련
총인구의 약 1 할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4)
4) A. i尸나J L. 『少~l.1 7 開免& 國際協力 0 問題点』. 「自由」 (27 sm:). (1983. 4).p, 135.
7 월의 기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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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장 계획경제하의 시베리아 개발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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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지역이 유럽 러시아의 인구 밀집지역과 원거리에 위치하고 있고 인간의 거주환경으로도 부적합한 최악의 기후와 지형조건에도 불구하고, 혁명후 지속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동기 는 시대적 상황에 따른 요청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개발동기는 시베리아 자체가 보유하고 있는 풍부한 자원 때문이다. 시베리아가 보유하고 있는 자원은 다양한 에너지원을 비롯하여 목재, 금, 은, 아연, 납(鉛), 운모, 석면(石 綿), 몰리브덴, 석염(石鹽), 다이아몬드 동과 같은 비철금속과 철이 다 이들 주요자원의 매장 비중은 소련 전체의 연료 및 에너지 자원의 약 9 할 삼림자원과 담수자원의 3/4, 비철금속을 비롯한 기타 자원의 대부분이 시베리아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5)
5) 같은 책
주요자원에 대한 비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석유 : 소련은 세계 최대의 산유국 중 하나로서 I979 년도 일일 생산량은 사우디 아라비아가 9 . 5 백만 배럴임에 비해 소련은 I I. 9 백만 배럴이다.석유매장량은미국이 260 억, 사우디 아라비아가 I,660 억 배럴임에 비해 소련은 670 억 배럴임이 확인되었다 .6) 소련 의 석유 채굴량은 농축가스를 포함하여 I965 년 2 억 4300 만 톤, 1970 년 켜 5300 만 톤, 1975 년 4 억 9IO0 만 톤, 1980 년 6 억 300 만 톤 , l98I 년 6 억 900 만 톤이며 이 중 시베리아 지역이 점하고 있는 생산비중은 1970 년 8.9 % , 1975 년 30.1%, 1980 년 5 1. 9% 이다? 이러 한 시베리아 지역의 생산비중의 급증은 유럽 러시아 지역의 생산 량 감소와 시베리아 지역의 광범한 탐사활동 및 개발투자 확대, 그리고 동시베리아 지역의 석유매장 가능성으로 인해 계속 증가 할 전망이다.
6) Tim e, ( 19 8<>. 6. 23), p. 6o, Current Dig e st of the Sov iet Press, Vol. XXXIII, No. 10, ( 1981, 4. 8), p. 8 에 의하면 I 야 0 년의 석유생산량은 농축가스를 포함하여 6o3 백만 톤으로 산정되어 있다. 7) A. 『?' J 책』, 앞의 책 , p. 137.
천연가스:소련은 세계 제 3 위의 천연가스 보유국이다. 확인
매장량은 28 조 입방미터로서 현 소비추세로 향후 70 년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 천연가스의 채굴량은 1965 년 1,280 억 입방 미터, 1970 년 1,980 억 입방미터, 1975 년 2,890 억 입방미터, 1980 년 4,350 억 입방미터, 1981 년 4,650 억 입방미터이며, 이중 시베리아 지역이 점하고 있는 생산비중은 1970 년 4.7 % , 1975 년 12.3%, 1980 년 39% 이다전 더욱이 시베리아 북서부지역의 채굴량이 1970 년 95 억 입방미터에서 1980 년 1,560 억 입방미터로 급상승하는 추세를 감안할 때 시베리아 지역이 점하는 비중은 계속 증가될 것으로 보인다 . 석탄 : 소련의 석탄 매장량은 세계 총매장량의 1/4 인 7 조 톤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양은 현 소비추세로 향후 350 년간 사용가능 한 수치이다. 석탄 채굴량은 1965 년 5 억 7,800 만 톤에서 1980 년 7 억 400 만 톤으로 증산되었으며, 이 중 시베리아 지역이 점하고 있는 채굴비중은 1965 년 25.6% 에서 1980 년 32.1% 로 신장되 었다 .9 ) 이같은 증가추세는 석탄자원이 시베리아 지역이 보유하고 있는 자원 중 · 가장 풍부한 자원 중의 하나라는 사실과 유럽 러시아 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대다수의 석탄광이 노후 및 폐광 추세에 있다는 사실과 연계된다. 더욱이 시베리아 지역의 석탄광 대부분 이 노천굴이란 특징으로 인해 채굴비용이 적게 돌고 개발이 용이 하다는 장점도 중산요인 중의 하나이다. 목재 : 소련의 목재자원은 세계 최대로 소련 영토의 절반에 해당 하는 약 13 억 헥타르의 산림면적을 갖고 있다. 그 중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의 목재는 이미 1968 년 이래 국제적 개발단계에 들어 섰으며 상당량이 극동 제국, 특히 일본에 수출되고 있다 . 1973 년 소련의 총생산(반출)량은 387,625 천 입방미터인데 이 중 시베리
8) 같은 책 9) 같은 책
아의 비중은 130,000 천 입방미터로 33% 에 해당되고 있다 .10) 전력자원 : 소련의 전력 산출량은 1980 년 당시 12,950 억 Kwh 이다11) 산업의 원동력인 전력의 시베리아 의존도는 지속적인 개발과 송전을 통해 점차 상승하고 있다. 이는 시베리아 지역의 저렴한 석탄과 오비 (06b), 예니세이 (EHncen) 강과 같은 풍부한 수량 및 입지조건 때문이며, 1990 년대 이 지역 발전 총량은 3, 500 억 Kw 가 될 것이다 1975 년도 총발전량 중 시베리아의 비중은 16.2% 였다 그러나 수력발전량의 비중은 소련 수력발전 총량의 약 70% 로 시베리아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상태이다 . 더욱이 제 2 6 차 당대회 보고에 의하면, 시베리아 지역에서 쓰고 남은 전력을 유럽 • 러시아 지역으로 송전하기 위한 대규모 송전선 건설이 계획되어 1980 년대 초 전소련방 전력체계와 연결된 바 있다. 이로 써 현 소련의 석유소비 억제정책과 더불어 대체 에너지인 석탄개 발 확대를 통한 화력 발전량은 급상승할 전망이다. 철 및 비철금속:소련의 철광석 매장량은 세계 총매장량의 약 40% 를 점하고 있다. 소련의 주 매장지는 유럽 • 러시아와 우랄 지역이댜 시베리아의 매장량은 총량의 10% 미만이고 생산량도 1975 년도 기준으로 6.5% 이댜 이 지역의 주요 철매장지는 동시베 리아 지역의 끄라스노야르스끄 (K p aCHOR p CK) 지방이다. 비철금속류 로는 금, 온, 아연, 납, 운모, 석면, 몰리브덴, 석염, 리듐, 주석, 다이아몬드가 상당량 매장되어 있고, 이중 금, 운모, 핵산업의 기본원료인 리듐(lit h i um) 은 거의 독점적인 자원이다. 이들은 현재 집중 개발되어 이용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시베리아가 점하고 있는 자원비중은 엄청난 정도
10) 해외경제연구소, 「시베리아 개발전망과 한국의 참여가능성 검토」, I9'J 2, I2, pp. 17-18 참조. 11) C. D. S. P. Vol. XXXIII, No, 10, 1981. 4, 8, p.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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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댜 그러나 이를 개발하여 이용하는 데는 상당한 제한조건이 따르고 있다 첫째는 자연 조건이다 . 시베리아는 북위 5 0- 70 도상에 위치하고 있어 혹한의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다 . 더욱이 여름철의 하천 범람 과 기온차의 심한 변화로 지반이 약해 인간의 생활 환경이 부적합 할 뿐 아니라 개발의 어려움이 많이 따르는 난점이 있다. 둘째는 지역간의 거리문제로 유럽 • 러시아 지역은 인구밀도가 높고 공업시설이 발전한 지역임에 반해, 시베리아 지역은 불균형 적인 저개발지역이며 자원을 필요로 하고 있는 유럽 • 러시아 지역과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다 . 따라서 다량의 철로, 파이프라 인, 송전시설과 같은 수송의 제한조건이 개발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셋째는 제반시설의 건설비용이 높다는 점이다. 시베리아는 자 연, 지리, 수송의 제한조건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유럽 • 러시아 지역보다 30% 에서 2 배 이상의 개발비를 요구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개발비 상승요인은 개발만을 위한 기본시설비뿐만 아니라 하부구조 시설 미비로 새로운 도로, 문화 및 서바스 시설비를 추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12) 넷째는 노동력 부족과 노임이 높다는 점이다 . 시베리아 및 극동 지역은 과거부터 인구가 희박한 지역이다 . 1970 년대 초 약 I60 만의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근래의 개발 진척에 따라 약 6oo 만 이상의 노동력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13) 시베리아 개발에 있어 노동력 확보문제는 개발의 진도에 맞춰 개발성격에 적합한 숙련공과 전문가 다수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소련은 교육받은 고급인력의 확보가 어려운 실정이기 때문에 유럽 • 러시 아 지역보다 2-3 배 이상의 임금을 주고 있지만, 고급인력의 오랜
12) Hoil an d Hunte r ed, The Furtu r e of the Sovie t Economy : 1978 -1 985, Boulder:Westv iew Press, 1978, p. 20. 13) 小川和男, `} ~ ) 7 極東開免宅 展望寸乙 (上), 『世界週報』, ( 1974, 4 16), pp. 14-15,
정착이 드물고 , 기존주민들마저 이주현상이 놀고 있어 노동력 확보가 가장 어려운 문제로 부상되고 있다. 다섯째는 투자효율 문제로 시베리아는 철강공업 및 화학공업, 그리고 경공업이 낙후된 지역이다. 그래서 자재공급과 제품소비 차원에서 신규투자가 요구되고 있으며, 이 지역 자체 소비량도 적어 결과적으로 투자효율이 적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3. 스딸린 시대의 시베리아 개발 실적 1917 년 IO 월혁명 후 전시공산주의 시기와 신경제정책 실행 단계 까지는 국내외의 어려운 여건으로 말미암아 국내자원의 조직적인 개발계획은 상상조차 힘들었다 . 그러나 신경제정책으로 식량확보 와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이 조달되자 스딸린의 혁명적 결단력을 기반으로 I928 년부터 경제계획이 실행되었다. 그 이후 시베리아 지역은 천연자원의 풍부성 인식에 의해 개발계획에 포함되어 본격적인 개발작업에 착수되었던 것이다. 제 I 차 5 개년 계획기간중 시베리아 지역이 중공업 우선정책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능력은 충분했다. 혁명 전까지 우랄 동쪽 지역은 경제적 미개발지대였다 . 이곳으로부터 유럽 러시아 지역에 반출된 상품의 구성이 농산물 77% , 비철금속에 속하는 광산물이 23% 이며, 이입상품의 99% 가 가공품이었음이 이를 잘 반영해 주고 있댜 14) 그러나 이미 1890 년대 초부터 1917 년간에 부설된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제정말기의 적극적인 이민정책으로 1917 년 시베리아 지역의 인구는 총 9,046,905 명에 달했고 ,l5) 이곳 풍토와
14) A. Pnaw ,im eB, B. Jior nnoB, B. CaBenLeB, Paasurue 81 'oH oMU1 'U Cu6up u u /{aAbHeeo Bocro1 'a, Bon po cH SKOHOMHKH, Ho116p L, 1982 , AKBA8M 떠 Hay K CCCP, HHCTHTYT 3KOHOMHKH, cTp . 28 . 15) Aauarc1 'aJ I PoccuJ1 , Ci lB, 1914r., cTp . 81., C. M. ,qyupo BCKHR,Cro.c i,in uH-
CX 다 3eMeA6H 다 Per/ Jo pM a , MooKBB, 1963 ' CTp . 390 에서 계산.
풍부한 자원을 기반으로 농업과 공업도 제한적이나마 개발되어 있었다 . 이같은 조건에 부가하여 그리네베쯔끼 (r p HHeBenKMR) 가 주장한 공업시설과 원료공급지 인접론은 시베리아 지역개발을 촉진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아울러 서구의 위협을 직감하고 있던 소비에트 정권으로서는 시베리아를 새로운 공업유치 최적지 로 간주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시베리아 지역 자체가 지닌 제한조건과 정부의 궁핍재정으로 인해 활발한 개발이 진행될 수는 없었으나 단계적 개발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입지조건은 충분했던 것이다.
제 1 차 5 개년 계획기간중 농업부문에서 이루어진 시베리아 지역 의 전경작지 중 집단화율은 1927 년 19.1%. 28 년 39.7%, 29 년 39 %, 30 년 8.2%, J I 년 6.40/0, 32 년 I.9% 로 진행됐댜 16) 이같은 성과 는 투자비용보다 의욕적인 결단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l6) HCy H Xy , Coq u UCTUecxoe gpou Te.A ,b crso CCCP, MocRBa, 1934, cTp . 159-163.
공업부문의 개발은 대규모 투자가 요구되므로 초기 시베리아 지역의 개발은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스딸린의 전문성을 강조한 지역개발 원칙에 의거, 기간산업을 지원할 수 있는 기존 광공업생산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고, 여기서 생산된 자원을 바탕 으로 다소의 신규투자가 이루어졌다.
시베리아의 공업개발에 기초를 이룬 계기는 제 16 차 당대회 (1 929.)에서 채택된 우랄-꾸즈네쯔끄 꼼비나뜨(yp a JI -Ky 3BenK KoM6HHaT) 건설의 결정이다. 이 꼼비나뜨(복합공업)의 건설기반은 마그니또고 르스끼 (Maree :T orop c I< e:a ) 제 철소와 꾸즈네 쯔끼 (K y aee~ 때) 탄전을 상호보완 관계로 연결하여 자원의 효율적 이용 및 개발효과뿐만 아니라 중공업 기업에 대한 새로운 복합체로서 기여토록 계획한 것이다.17) 우랄-꾸즈네쯔끄 꼼비나뜨 건설 결정으로 우랄 지역의
17) A. rnaw ,zm eB (ed .) , 앞의 책, p. 28,
철광석이 꾸즈네쯔끄로 운반되었고, 꾸즈네쯔끄 유역의 석탄과 코크스탄이 우랄로 운반됨에 따라 서시베리아 지역의 석탄자원 개발과 더불어 기간산업 육성의 기틀이 확고히 마련될 수 있었 댜 아울러 고체 에너지원을 기반으로 육성된 플랜트는 군수산업 의 기본자세로 활용되었으며 엄청난 에너지원이 요구되는 아연 (亞鉛)정 련소가 1930 년 벨로보 (BenoBo) 에 준공되 었다. 그 후 1932 년 꾸즈바스 (K y aBacc) 에 종합철(綜合鐵) 및 강철공업이 가동되 었으며 , 이 공장의 철광석 공급은 인접지역인 고르나야 쇼리야 (rop H an mo p H g)로부터 충당되 었다.
동시베리아 지역은 제 I 차 계획기간중 거리상의 문제 때문에 특별한 신규공업시설을 배정받지 못했다. 다만 전통적인 자원을 보다 관심 있게 개발 • 생산하는 데 그쳤다. 이 기간중 개발된 자원은 체렘호보(tJ e p eMxoBo) 지역 18) 간의 역청탄인데 이는 시베리 아 횡단철도의 연료로 1890 년대 초부터 이용된 것이다. 이 밖에 탄전이 개발된 곳은 끄라스노야르스끄 (K p acHOH p CK) 지구이다. 운모( 雲 母)개 발은 브라뜨스끄 (B p aTcK) 지구의 마마쿠느야 (MaMa- tJy 11) 와 바이깔호 남부의 슬류쟌까 (C JI IO 邸 HKa) 로서 소련의 운모산지의 기본이 되었다 . 기타 자원개발은 치따(tJ eTa) 지구에서 행해진 금, 은, 납, 주석 및 이르꾸뜨스끄 (U p1
18) 여기 사용된 〈지역〉은 행정지역인 오블라스찌 (o6nacT.&) 를 의미한다. 경 제지역과의 구분을 위해 향후 행정지역은 〈지구〉로 표기하기로 한다.
결론적으로 제 I 차 5 개년계획 (1928-1932) 중 시베리아 지역의 새로 운 공업개발규모는 전체적으로 볼 때 대단치 않았다고 할 수 있으나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보아 결코 미흡한 배분이라 할 수는 없댜 이 기간중에 나타난 시베리아 지역개발상의 특징은 긴요한 자원개발과 그 자원을 바탕으로 한 전문공업 개발에 있었다 . 자원 인접시에 공업시설을 설치하는 현상은 이 지역의 향후 발전을 예측하는 것이었다.
제 9 장 계획경제하의 시베리아 개발 191
제 2 차 5 개년계획 (1933-1937) 은 제 1 차 계획을 통해 얻은 계획경제 의 기반조성 위에 공업개발 및 생산확대에 초점을 둔 계획이었 다 제 2 차 5 개년 계획기간중 시베리아에 대한 전문성 지향 공업개 발은 제 1 차 계획년도에 비해 확대된 양상으로 발전되었다 . 시베리 아 지역에 대한 공업육성 발판은 1934 년 개최된 제 17 차 당대회에 서 마련되었다 . 제 17 차 당대회는 종래의 유럽 • 러시아 지역의 공업중심지에 경제력을 의존하면서, 극동 및 시베리아 지역에 철강 , 기계 , 연 료, 전력 그리고 그 밖의 공업제품에 대한 집약적인 생산개발로 새로운 공업화 기지를 창설할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이같은 목적 을 달성하기 위해 제 2 차 5 개년 계획기간중 거대한 원자재 및 에너지자원 개발이 강화되었고 투자비중도 향상되었다 . 투자면에 서 볼 때 우랄-꾸즈네쯔끄 꼼비나뜨 완공을 위해 투자된 비율은 소련의 총투자액 중 약 1/4, 중공업부문의 투자액 중 1/3 이상이 충당되었댜 19) 자원의 상호보완적 관계에서 연계되었던 우랄프 F 즈네쯔끄 꼼비 나뜨는 결국 1,200 마일이란 거리상의 단점을 극복치 못하고 1930 년대 중반부터 각각 분리, 운영되었다. 이같은 분리의 결정적 원인은 우랄 지역과 근접한 까자흐스딴 북부에서 대규모 탄전이 발견되었고 , 노보꾸즈네쯔끄 제철소가 제 2 차 대전 전까지 공급받 던 고르나야 쇼리야 광산 및 노보꾸즈네쯔끄 남쪽 45 마일 거리의 쩨미르따우 (TeMH p Ta y)로부터 철광석을 조달받게 되었기 때문이 댜 더욱이 노보꾸즈네쯔끄 제철소는 전후 고르나야 쇼리야 , 따쉬 따골 (TamTaro n.)의 솽르임 (ill a ll. LIM) 과 쉐 레 게 쉬 (ill e p erem) 광으로 부터 철을 공급받고 있다 .20) 꾸즈네즈끄 유역의 개발은 제정말기부터 시작되었다 . 꾸즈네쯔 끄 유역의 석탄채굴은 시베리아 횡단철도 부설과 더불어 이 유역
19) A. I'naA 1 ,1m eB (ed .) , 앞의 책, p. 29 . 20) Theodore Shabad, Basic Industr ia l Resources of th e USSR, Co- lumbia Univ . Pr., 1¢ 9, p. 235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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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의 안제로-수드젠스끄 (AHme p o-C y邸 OHCK) 와 이 유역 북단에서 발견된 상업용 석탄을 철로용 연료로 공급하면서부터였다. 석탄채 굴은 코크스용 석탄이 다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남부로 확대되었 으며, I930 년대에 개발된 탄광은 레닌스끄-꾸즈네쯔끼(Jl 0HHHCK· R y aHe n; KHR)(60 년대 중반의 인구 약 15 만 명), 끼셀레프스끄 (RHceJI 0 BCK) (I5 만), 쁘로꼬삐예프스끼(Jlp OKO il b0BCKH0) (30 만), 오신니끼 (0CHHHHKH) (7 만 5 천)이었다 . 꾸즈네쯔끄 유역에서 생산된 석탄 총생산량은 2 차대전 개시까지의 통계로 연 2,260 만 톤이었으 며 , 그 중 코크스탄은 6 백만 톤이었다. 그리고 1940 년까지 노보꾸 즈네쯔끄 제철소의 연생산 선철은 150 만 톤이었다 . 꾸쯔네쯔끄 유역의 탄은 유럽 • 러시아 도네쯔끄-드네쁘르(凡 OHe n; K 江 Hen p) 지역의 도네쯔끄 유역 탄과 비교하여 질이 좋고 노천채굴로 인한 낮은 채굴비로 유럽 • 러시아 중앙지역에서 동시베리아 지역까지 광범하게 공급되고 있다 . 외부지역으로의 반출량은 1965 년 통계로 연생산량 총 9,700 만 톤(이 중 코크스탄 3,750 만 톤) 중 절반 이상 인 약 5,000 만 톤이다. 이 반출량 중 절반은 우랄 지역으로 수송 되어 고급 공업연료로 사용되고 있다 . 2l 》 제 2 차 계획기간중 개발된 꾸즈네쯔끄 유역내의 다른 공업은 께메로보 (ReMe p OBO) 에 건설된 코크스-화학공업 단지이다. 이 공업 은 코크스 생산과 아울러 코크스 생산과정에서 나온 가스 부산물 을 이용하는 산업이다. 가스 부산물은 염료, 질소비료용 암모니아 합성수소 , 화학섬유의 원료인 카프로랙탐 (ca p rolac t am) 및 카프론 (ka p ron) 과 같은 다양한 물질을 생산하는 기간산업의 원동력이 댜 이 공장설비에 의해 처음 산출된 물질은 염료로서 1934 년에 이루어졌댜 이로써 꾸즈네쯔끄 유역은 1930 년에 개장된 벨로보의 아연 분리공장을 비롯하여 제철과 코크스 화학공업으로 확대되었 댜 이 기간중 착공된 대규모 하부구조 건설사업은 극동의 오호뜨 스끄해로 향하는 제 2 의 간선철로이다. 이 철도의 부설 목적은 경제적 이용뿐만아니라일본,극동에 대한군사적 동기에도있었다.
21) 같은 책, pp. 234-2 38_
제 3 차 5 개년계획 (1938-1941) 은 독 • 소전으로 중도에서 중단되었 으나, 시베리아 지역은 서구와 원거리에 위치한 안보적 이유로 폭넓고 복합적인 개발과 발전계획이 구체화되었다. 제 I8 차 당대회 (1939) 가 규정한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의 생산력 과 천연자원개발의 발전계획에 따라 다음과 같은 과제가 설정되 었다 . 죽 새로운 철강기지의 창설, 극동기지에서의 석탄채굴량을 거의 3 배로 증산하는 일, 시베리아 발전에 있어 망간 광석의 산출 량을 제고하는 일, 자까프까지야 (3aKaBKaa I:, n) 로부터 반입된 망간 합금에 의존치 않고 동부로부터 확보된 양으로 철강생산을 가능 토록 하는 일, 다목적 기계공장을 건설하는 일, 석유정제 • 화학공 장을 건설하는 일, 그리고 동부 제지역의 경우 생산의 확대를 도모하기 위해 필요한 수리공장(修理工場), 식품공장 및 건설시설 을 창설하는 일이었으며, 특히 제 I8 차 당대회는 시베리아 및 극동 지역의 석유탐사 활동을 전개할 결정을 채택하였다 . 22) 에너지자원에 기초한 이상의 공업확대 과제가 전쟁위협의 와중 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얻었는지 명확한 자료를 발견할 수 없지만, 서구 인접지역의 공업시설 소개정책과 결부되어 시베리아 지역의 공업시설은 새로운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 당시 시베리 아 지역으로 이전된 공업시설은 다량의 에너지원을 필요로 하는 공장들이었으며, 전쟁수행에 필요한 자원개발 및 이룰 바탕으로 한 공업시설들이었다. 이전된 공장은 레닌그라드 부근 볼호프 (BonxoB) 에 있던 알미늄 분리공장으로서, 노보꾸즈네쯔끄로 이전 된 후 1943 년부터 정상 가동되었다. 이 밖에 꾸즈네쯔끄 유역내의 기존공업 중 두드러지게 확대된 곳은 께메로보시에 위치한 코크 스-화학공장으로 1943 년까지 다섯 개의 가마가 설치되었으며, 1938 년에 질소비료의 원료인 암모니아 합성용 수소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전쟁수행으로 인해 자원개발 양상도 전쟁목적에 긴요한 자원개 발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취지에서 추가된 개발자원은 니켈, 동,
2~ A. rn:~ men (ed. ) , 앞의 책, p. 29.
알콜, 안티몬 (an ti mon) , 코발트이다. 에틸 (e t h y l) 알콜은 2 차대전중 동시베리아 지역 끄라스노야르스끄 지역에서 개발된 목재 가수 (加水) 공업에서 산출되며 목재와 전력을 상당히 요하는 작업이 댜 죽 목재 폐물로부터 얻은 목재섬유소를 가수 분해하여 알콜을 생산하는 화학공업인 것이다. 끄라스노야르스끄에 새로 출현한 이 화학공업은 전쟁의 수요와 자원의 풍부한 조달능력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다. 안티몬광의 개발은 1930 년대말 동시베리아 지역 예니세이스끄 지방의 라즈돌린스끄 (Paa)\O JI HHC I<)에서 이루어졌다. 니켈과 동은 동시베리아 북극권의 노릴리스끄 (Ho pH JI &c I<) 지역 에서 1930 년대 중반에 발견 , 개발되었다. 노릴리스끄가 북극에 위치했음에도 순조롭게 개발될 수 있었던 것은 예니세이강과 북극해 를 통한 해상통로가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이곳에는 석탄 광이 있어 화력발전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개발 의 원동력은 2 차대전중 급증한 니켈 수요 때문이었다 . 수송의 편의를 보강하기 위해 1937 년 예니세이강 어귀의 두진까(fJ;yAHHI< a) 까지 협궤(俠軌)철로도 부설되어 완공시켰다. 1939 년부터 니켈광은 채굴되기 시작했고, 니켈로(溫)도 꼴라 (Ro Ji a) 반도의 몬체고르스끄 (MoH ti: ero p c I<)에 설비중이던 것 하나를 옮겨와 1942 년부터 조업하 였다. 그리고 조업에 필수적인 발전소 건설도 1942 년에 완공되어 첫 단계로 2 만 5 천 Kw 용량의 전력을 생산했다. 아울러 1944 년 코발트공장도 조업을 시작했다 . 이로써 노릴리스끄는 니켈, 동, 코발트 산지로 부상되었고 아울러 이를 기반으로 하는 야금공업 의 터전이 마련되었다. 제 4 차 5 개년계획 (1946-1950) 은 전후 복구기이다 . 1946 년 2 월 스딸린은 계획발표와 더불어 급속한 전 산업의 재건과 철강, 석 탄, 석유자원 생산중대를 강조하고 군수산업에 있어 핵무기 개발 을 추가시켰댜 시베리아 지역은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유럽 • 러시아 지역의 피해영향을 피할 수가 없었다 . 식량과 생활 필수품의 극심한 부족상태에서 타지역 재건을 위해 기여해야
할 역할은 많았다 . 그 역할이란 기존 공업시설의 생산량 초과달성 과 기존의 개발자원을 확대생산하는 일이었다. 단지 추가된 자원 개발은 핵산업 대두로 인한 리듐 (L it h i um) 이었다 . 소련의 기본적인 리듐 산지는 동시베리아 지역의 치따 지구로서 핵 및 우주시대 개 막과 더불어 전후 쉴 까-아르구니 (illHJ IK a-Ap ry H b) 남부지 역 에 서 리듐이 개발되었다 . 이 밖에 몰리브덴 (Mol y bdenum) 도 이 지역 운다(y Hna) 강 상류에 위치한 베르쉬노 -4 흐따민스끼 (Be p lllHHO maxTaMHHCKHR )와 다벤다 (RaBeHxa) 에 서 개 발되 었다 23) 이상과 같이 스딸린 통치기 시베리아의 개발과정은 석탄생산과 이를 기반으로 한 제철 • 알미늄공장 및 화학공장으로 발전되었 고, 군수산업 위주의 특수자원 및 귀금속자원 개발의 특징을 보였 다. 제 5 차 5 개년계획 (1951-1955) 기간중 시베리아 지역 개발의 특징 은 공업개발의 기반확보를 위한 하부구조 건설과 동시베리아 지역에 대한 개발인식이 중대된 시기이다. 이 기간중 주요 건설사 업은 첫째, 서시베리아 지역의 꾸즈네쯔끄 지역내 대규모 화력발 전소 건설이다 . 이는 195 0- 1954 년에 건설된 용량 50 만 Kw 의 남꾸 즈바스 발전소였다. 둘째는 동시베리아 지역 이르꾸뜨스끄 지역의 복합공업단지 육성노력이었다. 1950 년 안가라 (AHra p a) 강의 수력을 이용한 이르꾸뜨스끄 수력발전소 건설이 시작되어 1958 년에는 총용량 660,oooKw 룰 생산케 되었댜 세째는 브라뜨스끄 지역의 수력발전, 알미늄, 목재-셀루로우즈 공업개발을 위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분기선인 따이쉐뜨-레나선이 1954 년에 완공되었다. 그리고 레나강 끝의 우스찌-꾸뜨 (YcTb•K y T) 에 새로운 항구 오세 뜨로보 (OceT p oBo) 가 1950 년대 중반에 건설되 어 레 나강 유역 의 수로수송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수송수단의 개발로 1954 년 브라뜨 스끄댐이 착공되었으며, 이 발전소는 1963 년 360 만 Kw 의 용량을 산출하게 되었다 전후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의 자원개발은 보다 대규모로 실시
23) Theodore Shabad , 앞의 책 , p. 265.
되었으며, 이 과정에 있어 주요한 프로젝트는 시베리아의 저렴한 하천 에너지를 이용한 세계 최대의 에너지센터 건설(브라뜨스끄, 이르꾸뜨스끄, 끄라스노야르스끄 , 기타 수력발전소), 동부 제지역 의 기계공업 육성에 필요한 철강재 확보를 위한 꾸즈네쯔끄 석탄 과 고르나야 쇼리아 철광석을 기초로 한 서시베리아 제철소의 건설 그리고 가혹한 조건하에서 단기간내에 이룩한 소련 제 3 의 석유 및 천연가스 생산기지 수립이다 . 1980 년대 소련은 시베리아 지역에서 소련 전체 산유량의 반수 이상 그리고 천연가스의 40 %를 산출하고 있으며, 향후 탄화수소 수요의 주요 부문 및 수력 전기를 충족하기 위한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스딸린 통치기의 시베리아 개발성과는 석탄자원 개발과 이에 기초한 철재 및 공업육성 기반이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겠 댜
제 10 장 호루시쵸프의 경제정책과 시베리아 개발 1. 흐루시쵸프의 정책전개 I953 년 3 월 스딸린이 사망하자 소련은 대내외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집단지도체제 원칙이 선포됨에 따라 말렌코 프는 수상직 에 머 무르고, 흐루시 쵸프 (HHKHTa Cep re eBf fll Xp ~ eB) 가 당 제 1 서기에 임명되었다 . 그리고 스딸린 시대의 악명 높은 비밀경찰의 총수 베리아는 새로운 지도체제에 의해 1953 년 12 월에 처형됐다. 새로운 체제의 둥장과 더불어 대중에 대한 정부의 통제 방법은 다소 완화되었다. 스딸린에 의해 강제노동소로 보내졌던 많은 정치범들도 석방되었다. 말렌꼬프는 지금부터 소비재 생산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게될 것이라는 약속도 하였다. 문학에서도 검열이 완화되어 해빙기를 맞이하였다. 새로운 체제동장 초기에 보였던 해빙온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 댜 왜냐하면 우선 신정부는 대중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46 년부터 시작된 전쟁 복구는 계획경제를 통해 상당히 복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상처는 쉽게 아물어지지 않았다. 2 천만 명의 젊은 장병들이 전사
했기 때문에 노동력은 심각하게 약화되었고, 전쟁으로 파괴된 전반적인 경제회복은 더 많은 시간을 요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중공업과 군수공업은 지속적으로 육성되지 않을 수 없는 국제적 상황이었다. 그래서 소비재 증대를 요하는 경공업 육성은 아직 시기상조였으며, 농업생산 또한 위기상태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난제해결 방안을 놓고 지도층 내에서는 권력투쟁을 수반한 논쟁 이 있었다. 말렌코프와 몰로또프측은 중앙집권적인 경제운영을 지속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흐루시쵸프측은 지방분권화 원칙과 지역적인 경제행정기관 설립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흐루시쵸프는 당 조직내의 하부기관에서부터 상부까지 의 요직에 심복을 임명함으로써 자신의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 흐루시쵸프가 당면한 대외문제는 스딸린의 유산인 서방과의 냉전 으로 인한 국제적 고립, 동구 제국의 자주성 추구 및 공산체제에 대한 대중의 저항운동, 그리고 중국을 포함한 사회주의 제국간의 결속유지에 있었다. 특히 만주와 신강, 외몽고 문제로 원할치 못했던 중 • 소관계는 스딸린 사후 경제적 원조가 줄어들고 이념 논쟁이 격화되자 적대적 관계로까지 발전하였다. 산적한 난제를 안고 있던 당 지도층은 I956 년 2 월 제 20 차 당대 회를 소집하였다 . 당대회는 중앙위원회가 제출한 향후 정책안을 통과시켰다. 이 안은 흐루시쵸프와 그의 후원자들에 의해 작성된 것이었다. 이들은 정책안 작성에 있어 스딸린 시대와의 결정적인 단절이 절실하다고 판단하였다. 이 판단기준은 흐루시쵸프 자신의 확고한 권력구축이란 입장에서 세워졌다. 결정된 정책의 핵심은 과거의 일인독재체제를 공식적으로 집단지도체제로 바꾸어 다수 의 공산주의자들이 참여하는 체제를 수립한다는 것이다. 흐루시쵸 프는 비밀연설을 통해 스딸린의 독재와 개인승배에 의한 절대성 의 신화를 파괴하였다. 그리고 당대회는 공산주의의 이론과 당의 조직을 레닌 시대로 전화시키겠다는 흐루시쵸프의 견해를 승인하 였댜 그 후 스딸린의 시신은 레닌의 묘에서부터 옮겨져 크레믈린 성벽에 매장되었고, 레닌 스타일의 당내 민주주의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당의 정부에 대한 통제 및 사회적 리더쉽은 변치 않았 댜 새로운 정책변화의 일환으로 채택된 평화공존론은 대내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 대중의 소비재 욕구를 해결하고 생산 및 사회통제의 효율성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국방 예산 감소와 선진서방과의 경제협력이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흐루시쵸프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범주까지 과격한 방법으로 대내개혁을 단행했다. 그가 실시한 개혁은 국민경제의 분권화, 꼴호즈 체제의 재조직, 사법의 자유화, 비밀경찰 권위의 일부 억제였댜 꼴호즈에 대한 흐루시쵸프의 정책은 이중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다수의 집단농장을 하나의 대규모 농장으로 합병함으로써 이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이었 고, 둘째는 꼴호즈를 소프호즈(국영농장)로 전환하려는 목적이었 다 1953 년부터 1959 년까지 꼴호즈는 93,000 개에서 54,000 개로 줄었 으며, 소프호즈는 약 5,000 개에서 6,500 개로 증가했다.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소프호즈 경작지의 면적은 I 천 5 백만 헥타르에서 약 5 천 4 백만 헥타르로 증가하여 꼴호즈 면적과 거의 동일하게 되었댜 1) 그러나 이와 같은 소프호즈 면적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 고 본질적으로 농업생산량은 증가하지 못하는 결과가 초래되었 댜 실패의 기본 원인은 농장원들에 대한 물질적 유인수단이 결여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의 농업이 당면하고 있던 기본임무인 밀의 생산중대 를 위해 흐루시쵸프는 광범한 처녀지 개발계획에 착수했다. 착수 지역은 볼가강 하류 , 우랄 남부지역, 서시베리아, 그리고 목초지 조성을 주목적으로 한 까자흐스딴의 경작지는 I 천만 헥타르에서 2 천 8 백만 헥타르로 중대되었고, 기타 지역은 3 천 8 백만에서 5 천 2 백만 헥타르로 증대되었다. 이 계획 추진을 위해 적절한 식량 이나 시설 및 장비의 도움을 받지 못한 꼼소몰(공산청년동맹)
1) George Vernadsky, 앞의 책 , p.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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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대가 파견되는 열성을 보이기까지 했다 . 2) 그러나 제 1 단계의 경작지 확보는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농산물 수확은 대실패를 기록하는 좌절을 맛보았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지역은 사막지대 에 있는 까자흐스딴이었다. 경작실패의 주원인은 모래 땅이나 다름없는 곳을 비옥하게 할 만한 비료가 충분치 못했다는 것인 데, 한마디로 이 지역은 농업이나 목초지 조성을 위해서는 적합치 못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 흐루시쵸프의 공업화 추진방향은 새로운 기술개발로 종합적인 기계화와 자동화에 주력하면서 소비재 공업 및 철강 • 화학공업 육성과 에너지원 개발에 치중하였다. 흐루시쵸프의 공업화 추진은 이데올로기적 요소와 결합하여 1959 년부터 본격화된 대약진운동으 로 표출되었다. 흐루시쵸프의 의도는 일반대중에게 평화, 번영, 안보를 조속히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인민에게 국가목표를 광적으로 추진시켜 이념적 목표를 보다 급속하게 이끌 수 있는 체제가 긴요하다는 데 있었다. 흐루시쵸프의 근대화 추진방법은 스딸린의 관료주도형에 의한 강압적 방법과는 달리 광범한 대중 의 참여의식 고조를 위한 캠페인을 통해 대중신분의 열성분자를 동원하였고, 당원의 수적 확장도 병행하여 자발적 분위기 유도로 수행되었댜 특히 흐루시쵸프는 효율적인 목표달성을 위하여 시민 신분의 열성분자들로 하여금 지방관료들을 감시케 하여 책임회피 나 관료적 타성을 배제토록 했다. 이러한 사회적 압력과 공적 비판은 형사상의 의미보다는 공적인 도덕성 위반자에 대한 처리 수단으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소련은 지금 공산주의의 건설을 위한 물질 및 정신적 필요물을 창조중에 있다는 흐루시쵸프의 명분은 타당성 있게 보였지만 수행방법과 과중한 부담이 대중 및 관료충의 불만을 유발시켰 고, 더욱이 흐루시쵸프에 대한 새로운 유형의 도전요인이 조성되 었다 . 비당원 세력인 열성분자에 대한 주도권 부여는 관료와 대중 간의 심리적 마찰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상부로부터의 과중한
2) 같은 책, p.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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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무는 불만 이상의 원망으로까지 발전하였다 . 노동자들은 보다 많은 생산을 강요당했으며, 흐루시쵸프에 의해 지시된 생산목표는 도달할 수 없는 억지에 불과했다. 농민들도 사유지롤 포기토록 강요당했다 . 흐루시쵸프 부상 초기에 표출된 스딸린주의적 독단성 배제로 인해 흐루시쵸프의 인기는 물론 그에게 거는 기대가 상당 했었댜 그러나 권력기반 구축 후 나타난 조급한 착상과 변덕스런 정책수행으로 말미암아 그는 점차 소외되어 갔다. 마침내 대내적 농촌정책의 실패와 대외적 국제 위신의 실추 ~ ~쿠바 미사일 위기 사건――는 흐루시쵸프의 실각으로까지 몰고 갔다 . 3)
3) 정책실패 이외의 직접적인 실각요인은 당지도충에 대한 이해상반적 당규약 개정에 있었다고 할 수 . 있다. 이는 1¢1 년 제 22 차 당대회에서 승인된 것으 로 당중앙위원회 상임위원과 중앙위원을 매기 최소한 1/4 을 개선토록 했고 아울러 3 기 이상 연임할 수 없게 했다. 그러나 3/4 이상의 찬성을 얻은 경 우는 예외로 하여 개인적 충성심을 유발토록 한 것이 그 특징이다.
흐루시쵸프 시대의 기본 경제정책은 소도시와 농촌의 소득중 대, 소비재에 대한 고도생산과 투자, 대규모 농업개발 사업, 주택 건설 및 기타 서비스 시설확대, 그리고 지속적인 기간산업 육성 및 군사력 층강에 역점을 두었다 . 4) 이는 소비재와 중공업의 병행 육성책이다. 이러한 병행추진 정책은 아직도 세계대전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과중한 부담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스딸 린 사후 조성된 해빙무드와 스딸린의 공업화 결과로 이룩된 전문 화 및 사회적 분화가 대중의 욕구를 무시할 수 없어 소비재 공업 육성은 필연적이었다. 중공업 육성도 국력신장이란 견지에서 지속 될 수밖에 없었고, 미국의 압도적인 항공 및 핵무기 우위상태하에 서 불가피했던 것이댜
4) Alec Nove, An Economi c Hi st o ry of the USSR, Peng uin Books, I 야,p. 332.
제 20 차 당대회가 승인한 제 6 차 5 개년계획(당초계획은 1956 - 1960 년까지이나 1958 년까지 수행하고 중단했음)은 새로운 기술개발 및 도입에 의한 종합적인 기계화와 자동화에 주력하면서 처녀지 개발을 통한 농업생산물 증대를 기본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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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목표 아래 소비재 공업의 기반이 기도한 곡물생산 목표는 I 억 8 천만 톤으로 과대하게 책정되었다 (1955 년 생산량은 약 I 억 4 백만톤임 ) . 5) 이에 따라 정부의 통제를 강조시키기 위해 실적이 낮은 꼴호즈를 대 단위 소프호즈(국영 농장)로 통합하는 작업 이 진행됐고,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서(西)시베리아 남부의 변두리 침엽수림 지대에 대한 개간사업이 착수되었다 . 이로 인해 서시베 리아 지역은 밀 재배지와 낙농기반이 확대됨에 따라 식량의 자급 자족은 물론 잉여농산물을 타지역에 보낼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제 6 차 5 개년계획이 설정한 주요목표 중의 하나는 까자흐스딴과 시베리아를 제 3 의 야금공업 기지로 개발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 이 기간중 두 지역에서의 연간 계획 총생산목표는 선철 약 1,50 0- 2,000 만 톤이었다 .6) 이에 따라 꾸즈네쯔끄지역은 제철공업을 확장할 수 있었고 동凍:Y- 1 베리아 지역의 끄라스노야르스끄 (R p aCHOSl p cR) 지구 아친스끄 (A' l'. HHC J<)에 위치한 끄라스노야르스끄 알미늄 공장 이 연생산 용량 8 십만 톤 규모로 건립될 수 있었다 . 또 알미늄 공업의 전력을 지원하기 위해 소련 최대규모인 끄라스노야르스끄 수력발전소가 착공되었다. 제 6 차 5 개년계획 수행과정에서 소련은 경제체제의 대변혁을 단행하였다. 경제체제의 제도와 운영의 개혁은 1956 년 12 월 20 일 개최된 당중앙위원회에서 발단되었다. 당시 당중앙위원회가 다룬 문제의 핵심은 제 6 차 5 개년계획이 모든 산업투자에 있어 균형을 잃고 있으며 , 계획목표도 지나치게 과중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중한 목표책정은 정부의 투자능력 불가능이란 점에서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으며, 더욱이 행정부처 상호간의 투자원 확보를 위한 과대경쟁이 계획자체를 혼란에 빠뜨렸기 때문이라고 풀이되었다. 토의결과 계획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결의되었다. 그후 1957 년 2 월에 제안된 것이 전 경제성에 명령을 내리고 통제 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 국가경제위원회의 설립이었다. 당시
5) 같은 책, pp. 334-335. 6) 같은 책, p. 341.
흐루시쵸프는 헝가리 • 폴란드 사건으로 위축된 상태였고 이로 인해 스딸린 격하운동도 비난 대상이 된 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권한도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 후 흐루시쵸프는 몰로또프 일파를 물리친 후 1957 년 5 월 최고 소비에트를 소집하여 그의 수정안을 합법화시켰다. 흐루시쵸 프의 안은 행정부의 절대권과 행정부간의 비효율적인 협조체제에 대처하여 다수의 공업성을 폐지하고 고스쁠란 (rocn Ji aH : 국가계획 위원회)에 의해 통합조정되는 지역적 구조로 대체시켰다. 이 지역 적 구조가 바로 소브나르호즈 (coBHa p xoa : 지역경제위원회)로서 전국을 ro4 개로 분할하여 경제를 지방분권화한 것이다. 소브나르 호즈 체제에 대한 흐루시쵸프의 타당성은 첫째, 보다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감독이 가능하고, 둘째, 동일 지역내의 기업간 협력이 합리적으로 가능하며, 세째, 중앙의 여러 성(省)의 폐지로 전문가 들을 지역경제위원회 및 지역 산하 기업에 재배치함으로써 생산 과정에 직접 개입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으로 소규모 정책결정의 과다현상과 제공화국의 이해에 치중된 개발현상이 야기되기도 했지만, 흐루시쵸프의 의도는 지역적인 소득중대와 자급자족체제 확립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소련은 1957 년 소브나르호즈 체제로의 개혁후 1958 년 제 6 차 5 개년계획을 중단하고 나머지 가간을 제 7 차 계획에 산입했다. 이러한 중단은 새로운 자원 개발과 소브나르호즈 개혁에 따른 지역적 계획수립의 재정비 필요성으로 불가피한 조치였다. 제 7 차 7 개년계획 (1959-1965) 에 대한 흐루시쵸프의 강조사항은 1958 년 s 월 중앙위원회에서 결정된 후진상태와 화학공업 육성과 연료 사용의 균형적인 전환에 있었다 . 연료문제에 있어 소련은 풍부하고 쉽게 획득할 수 있는 석유와 가스자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연료 사용을 무시한 채 지나치게 석탄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계획의 특징은 화학공업과 비고체(非固體) 연료 부문에 대해 특별한 대규모 투자의 중액 없이 시베리아 지역과 까자흐스딴
지역에 대한 투자비중을 늘린 점이다. 이는 전 기금의 40% 이상 을 시베리아 및 북까자흐 지역에 투입시키는 계획경제 수립 이후 최대의 적극성을 보였던 것이다. 제 7 차 7 개년 계획기간중 서시베리아 지역에서 집중개발된 자원 은 석유와 천연가스였다. 공업부문에 있어서는 노보꾸즈네쯔끄의 제 2 제철소, 금속도금 및 알미늄 분리공장, 노보시비르스끄 (HOBO· CH6H p CK) 와 바르나울 (Ba p Ha yJI)의 주석 용해소, 바르나울의 화학섬 유공장 및 합성고무공장, 노보시비르스끄의 수력발전소가 건설되 었다 동시베리아 지역의 개발은 끄라스노야르스끄 지구의 석탄개 발과 6 백만 Kw 용량의 소련 최대규모의 수력발전소 건설, 알미 늄, 에틸알콜 목재에 근거한 비스코스 라이온 공장, 이르꾸쯔끄 지구의 암염(岩鹽)을 기반으로 한 가성소다 공업 및 금과 운모생 산, 브라뜨스끄 지구의 목재펄프 공업, 부랴뜨 자치공화국의 텅스 텐과 석면, 치타 지구의 금, 은, 연, 아연, 리듐 개발로 확대되었으 며, 이들 산업을 지원키 위한 다수의 화력발전소도 지역별로 건설 되었다 .8) 제 7 차 7 개년 계획기간중 생산재는 1. 9 배 증가했다. 소비와 저축 에 사용된 국민소득은 1959 년보다 1965 년 53% 로 상승했다. 이는 새로운 천연자원 개발, 일반교육 및 대중의 기술수준 향상에 결과 한 것으로 공업생산도 7 년간 84% 증가했다. 주요 제품에 대한 생산중가율은 다음과 같다.
7) 같은 책, p. 354. 8) Theodore, Shabad 앞의 책, pp. 234-2 66,
제 7 차 7 개년 계획목표와 실적
1958 1965 계획 1965 실적
206
소비재(%) IOO 162 -16 5 l6o
자료 : Alec Nove, An Economi c Hi sto r y of the U.S.S.R . Peng uin Books, 1980, p. 353
주요 공업생산 중가율
1958 년에 대 한 1965 년 비 교
강철 170
국민총생산에 대한 공업성장의 기여도는 80% 에서 84% 로 증가 했으며, 총연료 소비에 있어 석유 및 가스의 소비 비중은 32% 에 서 52% 로 상승했고, 전력 및 디젤차량은 24 . 6% 에서 85% 로 증대 되었다 . 그러나 농업생산 목표는 중공업으로부터 얻은 능력의 농업적 활용전도 부진, 과학 • 기술혁신의 도입부진, 제도적 기관 내의 협력 결핍, 생산성 제고를 위한 유인책 부족 둥에 의해 실패 룰 초래하였다 .9)
9) J. P. Cole, 앞의 책 , p. 72.
2. 서(西)시베리아 개발 제 7 차 계획기간중 서시베리아 지역내에서 수행된 개발현황은 다음과 같댜 우선 이 지역에서 전개된 대규모 사업은 꾸즈네쯔끄 지역의 제철공장 확장공사였다. 죽 1960 년 꾸즈네쯔끄 유역의 제철생산을 연용량 350 만 톤으로 향상시킨 노보꾸즈네쯔끄 제철소 의 5 개 용광로 확장공사와 또미 (TOMh) 강 우측 기슭에 제 2 제철소 인 서시베리아 공장이 건설되었다 . 서시베리아 제철소의 제 1 로 (道)는 착공 7 년 후인 1964 년 가동되었으며 제 2 로 (7 만 입방피트) 는 1967 년, 제 3 로 (10 만 평방피트)는 1970 년에 가동되었다. 1967 년 꾸즈네쯔끄 유역내의 2 개 제철소는 550 만 톤의 선철생산 계획량을 갖고 있었댜 철광석 조달은 고르나야 쇼리 야 광산으로부터 필요 량의 약 절반을 공급받았으며, 나머지 부족분은 인접 끄라스노야 르스끄 지방의 하까스 자치지역내에 있는 두 개의 광산 아바자 (A6aaa)(1957 년부터 생산 개시)와 쩨야 (Te11)(1965 년부터 생산 개
시)에서, 그리 고 브라뜨스끄 (B p aTcK) 동부 이르꾸뜨스끄 지 역내에 있는 꼬르슈노바 (Ko pmy HoBa) 광산 (1965 년 개장)으로부터 공급받았 댜 서시베리아 공장의 첫 제철생산은 1968 년부터였다 . 10) 이상과 같은 서시베리아 지역의 제철공업 확장에도 불구하고 서시베리아 가 차지하고 있던 비중은 I962 년 통계에 의하면 도네쯔-드네쁘르 지역이 소련 총생산량의 41%, 우랄 지역이 31%, 중앙지역이 5.4°/o 임에 비해 서시베리아 지역은 5% 에 지나지 않았다 . ll) 꾸즈네쯔끄 유역의 공업시설을 지원하기 위해 제 5 차 5 개년 계획기간중에 건설된 최초의 화력발전소인 남꾸즈바스 발전소에 이어 두번째 건설된 발전소는 노보꾸즈네쯔끄 동 25 마일 지점 므이스끼 (MLICKHR) 에 위치한 또무사 (ToM y ca) 발전소로서 이는 또미강과 우사 (¥ca) 강 이름을 따 1958 년에 가동되었다 . 이들 발전 소는 계속 확장되어 l965 년에는 130 만 Kw 용량을 발전하게 되었 댜 세번째로 건설된 발전소는 1964 년에 개설된 멜로보 발전소로 서 이는 1968 년 120 만 Kw 용량으로 확대되었다. 이들 꾸즈네쯔끄 유역의 발전소들은 220Kw 선으로 노보시비르스끄, 똥스끄, 바르 나울 (Ea p Ha y n) 과 연 계 되 어 있으며 , 1967 년부터 는 500Kw 의 송전선 에 의해 끄라스노야르스끄 수력발전소와 연결되어 있다 .12) 노보시비르스끄와 바르나울은 본질적으로 제조 공업지이지만 1 차 산업지이기도 하다. 노보시비르스끄는 소련 최대의 주석 용해 소이며 , 동시베리아와 극동으로부터 운반된 농축물을 가공하고 있다. 그리고 바르나울은 소련 최대의 화학섬유 공장 중의 하나를 보유하고 있으며, 1960 년 이래 께메로보 (ReMe p OBO) 의 카프로랙탐 (ca p rolac t am) 을 기초로 하여 카프론 (ka p ron) 생산과 1963 년 이래 시베리아 목재펄프로부터 비스코스 나이론 (v i scose ra y on) 을 생산하 고 있다 이 밖에 바르나울은 1963 년 타이어 재생공장이 개방되어 타이어도 생산하고 있다 . 13)
10) Theodore Shabad, 앞의 책, p. 237. 11) J. P. Cole, 앞의 책, p. I83. 12) 같은 책, pp. 238-239. 13) 같은 책, p. 239,
흐루시쵸프의 고체연료 의존으로부터 액체연료로의 대체정책은 석유와 천연가스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을 점차 중대시켰다. 소련 의 기본유전지대는 까자흐 지방과까스삐해 (KacneacxoeMo p e) 로서 소련의 석유화학 공업은 1950 년 초까지 전적으로 이곳 유전에 의존해 왔었다. 그러나 이들 유전은 오랜 사용으로 낡고 생산비가 점증하는 단계에서 볼가-우랄 지역의 유전이 발견되었다. 1950 년대 중반부터 볼가-우랄 지역의 유전은 소련 석유생산의 중심이 되었다 이렇게 생산의 중심이 된 원인은 매장량이나 신개발지라 는 이점에 의한 개발비 저렴에도 있었으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유럽 • 러시아 소비시장과 인접해 있다는 점이었다. 유럽 • 러시아 는 소련 국민생산을 기준으로 한 비중을 볼 때 1940 년 93%, 1945-1950 년 86%, 세계대전으로 인한 파괴 이후 다시 상승하여 1960 년대 초에는 93% 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다 . 14) 제 7 차 경제계획기간중 석유자원 사용의 확대와 더불어 새로운 대규모 유전이 서시베리아 지역에서 발견됨에 따라 생산의 중심 도 동부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서시베리아 지역의 유전은 1950 년대 말과 60 년대 초 오비 (06b) 강과 이르뜨이쉬 (M p Tmn) 강의 광범 한 늪지대에서 발견되었다 . 구체적인 유전지와 발견 연대를 살 펴 보면, 석유는 1957 년 꼰다 (KOHAa) 강 상류의 쇠임 (maHM) 지방 과 1961 년 오비강 중류의 메지온 지방, 그리고 1962 년에 오비강 하류인 우스찌-발르이끄 지방에서 발견되었고, 1960 년대 중반 남서부 시베리아의 쥬메니 (TIOMeHL) 에서 최대 매장량의 유전이 발견되었다. 이 중 최초로 개발된 유전은 쇠임으로 이곳 원유는 1964 년 여름부터 나룻배로 꼰다강과 이르뜨이쉬강을 거쳐 옴스끄 (OMCK) 정제소로 수송되기 시작했으며, 1965 년에는 좌임주주메니간 에 250 마일 길이의 30 인치 파이프라인도 설치되었다. 오비강 중류의 유전들은 좌임 지역보다 훨씬 풍부한 매장량을
14) Leslie Die n se & Theodore Shabad, The Sovie t Energy Sy s te m : R19e7s9o,u rpc. e5 6U, se a 뼈 Poli cie s , Div isi o n of Scrip ta Technic a , Inc.,
갖고 있으나 다소 늦게 개발되었다. 이 지방의 초기 개발 중심지 는 우스찌-발르이끄 유전지이며, 1964 년 이 지대의 유전개발을 위해 노동자 촌락이 네프쩨유간스끄 (He if> TeIOraHCK) 에 건설되었 댜 제 7 차 경제계획기간중 이 지역은 향후 개발을 위한 하부구조 건설에 치중했을 뿐, 개발된 유전은 1965 년에 개방된 서個i)수르구 뜨 (C yp r y T) 유전뿐이었댜 제 3 의 주요 유전지구는 오비강 상류로 서 그 중심지는 1964 년에 창건된 메지온과 니즈네바르뜹스끼 (HH 禪 eBa p TOBCKMn) 유전도시 이 다 제 7 차 경제계획 기간중에 생산울 시작한 유전은 좌임, 수르구 뜨, 니즈네바르뜹스끼를 포함한 쯤메니 유전으로서 원유생산량은 1964 년에 20 만 톤, 1965 년 1 백만 톤, 1966 년 3 백만 톤, 1968 년에는 1 천 2 백만 톤으로 증가했다 . 15) 이밖의 유전으로는 1964 년에 발견 된 소스니노-소베뜨스꼬예 (CocH 血 o-CoBeTcKoe) 가 있으며 이 유전 은 똥스끄 행정구역내에 있다. 옴스끄 (OMcK) 정제소는 본래 따따르-바쉬끼르 (TaTa p -BaIIIK Hp) 유전으로부터 시베리아 횡단 파이프라인에 의해 수송된 원유를 정제하기 위해 1955 년 개장된 것이다 . 옴스끄 정제소는 서시베리 아 지역의 유전개발로 인한 시설확장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다. 옴스끄 시는 1964 년 원유정제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스를 이용하여 합성고무공장을 건설했다. 이 고무는 1958 년에 준공된 타이어 공장에 조달하고 있다. 이러한 옴스끄 석유화학 공업을 지원하기 위해 옴스끄 제 4 발전소가 용량 25 만 Kw 로 1965 년에 완공되었다. 천연가스는 1953 년 베레조보 (Be p eaoBo) 에서 최초로 발견된 후 오비강 하류의 서쪽에서 발견되었다. 따라서 소련의 주요 공업 지역인 우랄로 가스룰 수송하기 위해 제 7 차 경제계획기간중에 본격적으로 파이프라인이 건설되었다. 파이프라인에 대한 구체적 건설과정은 다음 장에서 다루기로 하고 가스 산출지부터 살펴보 자. 상기 가스 산출지보다 더많은 매장량을 가진 가스 산~든지는
15) Theodore Shabad , 앞의 책, p. 걱 o.
19 야 -1966 년간에 발견된 쯤메 니 지 역 북부에 위 치 한 느이 다 (HLI 'A a) 강 유역의 메드베쥐예 (Me 'A Be 짜 be) , 뿌르 (II yp)강, 우렌고이 (Y p eHroa) 서쪽의 우렌고이 가스전(田), 따즈 (Taa) 강 하류 따좁스끼 (TaaOBCKH0) 남쪽의 자뿔랴르노예 (3ano JIJip Hoe), 따르꼬-살레 (Ta p Ko-Ca Ji e) 근처 의 구브낀 (ry 6KHH), 오비만 서안의 야말(.fIM a JI) 반도에 있는 노브 이 뽀르뜨 (HOBLIA Ilop T ) 가스전(田)이다 . 이 중 우렌고이 가스전은 서시베리아 최대 매장지로 알려지고 있다. 그 밖의 천연가스의 매장지는 동부평원으로 바흐 (Bax) 강변에 있는 오흐쩨우리예와 1964 년에 발견된 므일리드지노(止표 h ,JVK HHO) 가스전이다 . 이 지역 가스전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소비지와도 인접해 있어 꾸즈네쯔 끄, 노보시비르스끄 및 기타 서시베리아 공업지대로 수송되고 있다. 3. 동(東)시베리아 지역개발 제 7 차 경제계획기간중 동시베리아 지역의 개발양상은 기존 자원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아울러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자원 을 기반으로 복합공업 육성을 위해 전력 및 교통망 확대, 그리고 화학공업 육성이란 특징을 보였다. 동시베리아는 소련의 경제지역 중 가장 값싼 에너지원의 보고 濱庫)이다 1965 년 동시베리아 지역의 석탄 총생산량은 4 천 7 백만 톤인데 그 중 73% 가 노천에서 채굴한 갈탄으로서 화력발전에 염가로 이용되었다. 동시베리아는 석탄 에너지원 이외에 풍부한 수력발전 능력을 갖고 있다. 수력발전 잠재지역은 예니세이강과 그 지류, 그리고 바이깔호에서 흘러나오는 안가라 (AHra p a) 강이 다 이러한 수력 및 화력개발은 1950 년대에 시작되었으며 , 이를 기반으로 알미늄 분리와 같은 공업개발의 원동력이 확보되었다 . 동시베리아 지역은 자원개발과 개발자원 이용을 중심으로 한
복합공업지대 (KOM6MHaT) 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 복합공업지역을 열거하면 끄라스노야르스끄 (K p aceo a:p c I<), 아바 깐-미 누신 스끄 (A6a I< aH-M u: H yc u: HC I< ) , 뚜빈 자치 공화국( Ty BH HCKan ACCP), 예니세이스끄 (EHMceRCK) , 노릴리스끄 (Ho p H Ji bC I<), 이르꾸 뜨스끄 지구 (M p K y TCKaH o6naCTL) 내의 이르꾸뜨스끄-체렘호보 (IiPI< Y TCI <·tJe p eM XOBO) 및 브라뜨스끄 (E p aTCK) 지역, 부랴뜨 자치 공화국 (Eyp HTCKaH ACCP), 치타(tJu: Ta) 지역이다 광범한 동시베 리아 지역의 개발현황을 파악함에 있어 복잡성을 피하기 위해 이상에서 열거한 공업지역 구분에 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끄라스노야르스끄 지역의 개발 및 생산실적을 먼저 살펴보면, 이 지역의 에너지원인 갈탄 매장지는 깐스끄-아친스끄 (KaHCK A' IHH CI <) 탄전으로 시 베 리 아 횡 단철로가 끄라스노야르스끄 시 동서로 연결되어 있어 수송도 편리한 편이다. 최초의 노천광은 1950 년에 채탄을 시작한 이르샤-보로지노 (Hp ma-Bo p o 邸 HO) 광이 다 이 탄광은 연생산 목표량을 2 천 5 백만 톤으로 계획하고 개발 중이다 16) 이 탄광의 연생산량은 I960 년대 중반 약 7 백만 톤이었 댜 깐스끄-아친스끄 탄전지역의 제 2 노천광은 연생산 목표를 I 천 6 백만 톤으로 1953 년부터 개발 시작한 나자로보 (Haaa p ono) 광이 있다. 나자로보 광의 I960 년대 중반 연생산량은 약 7 백만 톤에 이르렀다 . 제 26 차 당대회 보고에 의하면 깐스끄-아친스끄 유역의 석탄을 합성 액화하여 연료화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있댜 이 밖에 베레좁스꼬예 (Ee p e30BCKoe) 와 이따뜨스끼 (MTaTCKMR) 노천광이 있는데 베레좁스꼬예 노천광은 연생산 5 천 5 백만 톤을 계획하고 개발중에 있는 대규모 광이다. 끄라스노야르스끄 지역의 발전소 건설은 I95I 년에 착수하여 1961 년 I5 만 Kw 용량의 발전기 6 대가 최초로 가동되어 1965 년까지 90 만 Kw 용량을 갖추었다 수력발전소로서는 1950 년대 중반에 착공한 소련 최대규모인 끄라스노야르스끄 발전소가 있다. 이 발전소는 지속적인 확충작업을 통해 1959 년 연 30 만 Kw 용량에서
16) 이하는 Theodore Shabad , 앞의 책, pp. 걱 5-266 을 주로 참고.
50 만 Kw 를 계획하여 I960 년대 말 500 만 Kw 용량의 설비를 마쳤 다 (24 차 당대회보고). 이 지역의 기본적인 에너지 소비공업은 I964 년에 가동된 알미 늄 공장이다 알미늄 공장 하나의 최대 계획규모는 총용량 40 만 톤에 이른댜 아친스끄에 위치한 끄라스노야르스끄 알미늄 공장은 우랄 및 빠블로다르 (IIaBlIOAa p)의 알미늄 원료를 사용하고 있다 . 아친스끄에는 고랴체고르스끄 (ro pJI'1 8rO p CR) 의 알미늄 원료를 사용하는 80 만 톤 생산규모의 복합공장이 I950 년대 중반에 착공됨 으로써 향후 알미늄 공업 성장을 지원하게 되었다. 이 공장의 원료공급처인 고랴체고르스끄 광을 개발중 1950 년대말 고농도의 원석이 꾸즈네쯔끼 알라따우 (K y 3He 耶血 AJiaT ay ) 산맥 반대 비탈 인 끼야-솽뜨이리에서 발견되었다. 이 발견으로 I960 년 고랴체고 르스끄 채굴작업을 중단하고 끼야-솽뜨이리 개발에 착수했으며, 2 년 후 벨로고르스끄 (Belloro p cx) 채굴촌을 건설했다. 끄라스노야르스끄 지역에는 석희석 자원도 매장되어 있다. 석회 석 채굴은 1964 년부터 아친스끄 남서 아르가 (A p ra) 구릉에서 시작되었다. 이 석회석을 이용한 시멘트 공장은 아친스끄에 위치 하고 있으며, 계획용량 5 백만 톤의 제 1 단계 공장이 1965 년에 가동 되었다. 그 밖에도 이 지역은 풍부한 전력과 목재원을 이용하는 화학공업이 육성되고 있다. 이는 목재섬유소의 가수분해를 통해 얻은 에틸 알콜을 이용하는 공업이다 . 알콜은 제 2 차 대전중 군사 용으로 대폭 활용되었으며, 1950 년대에는 이 알콜을 이용하여 합성고무 성분중의 하나인 부타디엔 (Bu t ad in e) 을 생산했고, 1956 년부터는 합성고무를 생산, 1960 년에는 타이어 공장과 목재에 근거한 비스코스 라이온 공장, 그리고 연 2 백만 개 생산용량의 타이어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의 고무공장이 가동되었다. 둘째로 아바깐-미누신스끄 (A6aRaH-MHH y CHHCR) 지역은 끄라스노 야르스끄 지방의 남부에 있는 복합공업지이다. 이 지역 공업은 혁명 후부터 조업한 오래된 체르노고르스끄(tJ ep Horo pc 1<) 탄전에 의존하고 있다 . 이 탄광은 1965 년 470 만 톤의 탄을 생산했으며
이중 170 만 톤은 새로운 노천광에서 채굴한 것이다. 체르노고르스 끄 탄은 깐스끄-아친스끄 갈탄에 비해 질이 우수하나 지하탄광의 노후로 인한 채굴비 상승으로 노천채굴 개발이 확대되고 있다. 이 지역은 석탄자원 이외에 철, 몰리브덴 (Mol y bdenum), 금광이 있다 최초의 철광석 채굴지는 1957 년 개장된 아바자 (A6aaa) 광으 로 연생산 계획량은 300 만 톤이다 . 그 다음은 쩨야 (Te11) 광으로서 아바자 광석의 농도가 45% 임에 비해 쩨야 광석은 35% 밖에 되지 않아 농축이 요구되는 상태이지만 쩨야광의 연생산량은 500 만 톤에 달하고 있다. 이곳에서 생산된 광석은 서시베리아의 노보꾸 즈네쯔끄 제철소로 수송되며, 수송로는 1959 년에 완공된 노보꾸즈 네쯔끄-아바깐 철로를 이용하고 있다. 몰리브덴은 1953 년부터 소르스끄 (Co p cK) 에서 생산되고 있다. 소르스끄는 아바깐-아친스끄 철로선의 예르빈스까야(Ep 6EHCKa .fl) 역과 인접하고 있어 수송에 불편함은 없다. 금광은 19Il 년부터 채굴되기 시작한 아르쩨몹스끼 (A p T0MOBCKH0) 에서 채굴되며 교통 은 I964 년 완공된 아바깐-따이쉬]뜨 (A6aKaH-TaameT) 철로로 연결 되고 있다. 아바깐-미누신스끄 지역은 석탄을 이용한 공업개발을 위한 전력 생산 계획이 1970 년대에 추진되었다. 이 지역의 발전소 개발은 예니세이강 서부 사얀산 계곡에 위치한 사얀 (Ca .fl H) 수력발전소가 1970 년대에 건설되었다 . 이 발전소는 시베리아 지역 최대용량 수력발전소 중의 하나로서 계획된 것으로 발전용량은 650 만 Kw 이댜 교통로는 까므이쉬따 (KaM I,I IIIHTa) 에서 발전소와 인접한 마이 나 (MaRHa) 까지 l968 년에 철로가 완공되 었다. 세째로 뚜빈 자치공화국(Ty BHHCK8 .fl CCP) 은 철, 석면, 코발트, 동, 니켈, 석탄자원을 갖고 있다. 석면은 소련 최대 매장지 중 하나인 악-도부라끄(샤《 -A0B yp aK) 노천광이 1964 년에 개발되었다. 이 석면은 우랄 지역의 아스베스뜨 (Ac6ecT) 석면보다 고농도의 섬유소를 지니고있어 방직하기에 적당한 품질이다. 악-도부라끄의 제 1 단계 석면 생산용량은 원석 60 만 톤과 미제품(未製品) 섬유
약 3 만 톤이었으나 I967 년에는 200 만 톤을 생산했다. 코발트광은 엘레 게스뜨 (8nerecT) 강 상류계곡 끄이즈일 (Khlahln) 남서 50 마일에 위치한 호부-악스이 (XoB y -AKchl) 이다 호부-악스이 는 동-니켈 광석 생산으로도 유명하며 농축은 우랄 지역의 니즈니 우팔레이 (HH 加 HHR y中 anen) 에서 처리하고 있다 . 뚜빈 자치공화국은 비철금속 산업을 개발함과 동시에 울루그 헴('Y n y r-XeM) 유역의 석탄개발도 촉진시켰다 . 이 유역의 2 개 탄광 에서 생산된 양은 I965 년 각각 r5 만 톤이며, I960 년대 말에는 연생 산 50 만 톤 용량의 까휴 Y (Ka-XeM) 광도 개 발되 었다. 네째는 예니세이스끄 (EHHceRCK) 지방이다 . 예니세이스끄 지방내 의 시베리아 횡단철로 북부에 산재한 목재, 광물자원, 그리고 예니세이스끄강과 안가라강 하류의 수력자원은 2 개의 시베리아 횡단철로 지선의 건설로 개발되었다. 제 I 지선인 길이 I70 마일의 아친스끄-아발라꼬보 (A 'I HHC 1< -A6ana 1< 0Bo) 철로는 1963 년에 완공되 었댜 이 철로의 완공으로 시베리아 횡단철로상의 알미늄-시멘트 생산 도시로부터 예니세이스끄 남부와 안가라-예니세이강 합류점 하류인 아발라꼬보-마끌라꼬보 (A6ana 1< 0Bo-MaKna 1< 0Bo) 지 방의 목재가공 지역까지 연결되었다. 이 철로는 새로운 벌목 및 목재가 공 지역과 광물 자원지과의 접근에 기여하고 있다 . 광물 자원지는 1956 년에 발견된 납 매장지인 고레프(r o p eB) 로서 납은 예니세이 스끄 지방의 가장 중요한 광물자원이다 . 제 2 의 지선은 l950 년대 초에 목재화학 공업지인 니즈냐야 뽀이 마 (HzmHaa Ilo0Ma) 를 목적지로 한 선으로 l960 년대 중반에 착공되 었다. 이 지선은 새로운 목재개발과 안가라 강변 보구차느이 (Bor y'l aHhl) 지방의 수력개발을 위한 선이다. 이밖에 이 철로는 차도베쯔(q aAo6e~) 지방에 매장된 알미늄 원광인 보오크사이트 개발과 1930 년대 말부 터 채굴하기 시작한 라즈돌린스끄 (Pa3KOnHHCK) 의 안티몬 (An ti m ony ) 광 수송을 위한 선이기도 하다 . 예니세이스끄 지방에는 상당량의 금 자원이 보유되어 있다. 금광지대는 안가라강과 뽀드까멘나야 뜬구스까 (IIoRKaMeHHaa
Ty H ryc i < a ) 강 사이의 예니세이 우측 강변 예니세이 구릉으로, 19 세기 초부터 금을 생산해 왔다. 한편 이 지대 금광 채굴지인 세 베 로-예 니 세 이 스끄( CeBep o- EH11cefl c1 < ) 는 맥 광(脈鑛) 이 고, 유즈노 예 니 세 이 스끼 (IOmHo-EH11ce fl c 1< 11 fl)는 사광®只廣) 이 다 . 다섯째인 노릴리스끄 (Ho p M JI LCK) 지역은 북극권에 위치하고 있으 나 예니세이강을 통한 수로가 끄라스노야르스끄 지방과 연결되어 있고, 끄라스노야르스끄의 복합공업 확대와 더불어 개발된 곳이 다 . 노릴리스끄의 인구는 1960 년대 말 15 만 명이며, 주요 자원은 니켈 동, 석탄, 코발트, 천연가스이다 . 제 2 차 대전중 니켈 수요의 급층으로 석탄과 더불어 니켈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제 2 차 대전 이후 이 지역의 니켈과 동이 꼴라 반도나 남부 우랄 지역에서 생산된 것과 비교할 때 질이 낮아 중요성을 갖지 못했다. 단지 관심사는 니켈과 동의 광범한 부산물이었다 . 이 부산물은 백금속 (白金屬)으로 특히 동의 전기분해 정련과정에서 얻어지는 팔라듐 (Palladiu m ), 플라티 나 (Pla ti num), 셀레 늄 (Selen i um), 텔루늄 (Tellu nium ), 티타늄 (T it an i um) 과 바나듐 (Vanad i um) 도 생산되고 있다 노릴리스끄 지역의 채굴과 야금공업에 필요한 에너지원 조달을 위해 1965 년 생산된 석탄은 3 백 r 만 톤이다. 이 중 50 만 톤은 코크스탄 생산을 위해 사용됐고, 나머지 양은 20 만 Kw 용량을 갖춘 노릴리스끄 화력발전소에서 사용되었다 . 수력발전소도 1963 년 한따이 까 (XaHTanKa) 강변의 스네 즈노고르스끄 (CHe 油 10ro pc 1<) 에 착공되 었다. 이 발전소의 총용량은 44 만 1 천 Kw 로서 1970 년에 완공되었다 . 이 밖의 에너지원인 천연가스가 노릴리스끄 서방 170 마일 지점 메소야하 (Mecco .11 xa) 강변에서 1960 년대 말 노릴리 스끄를 향한 파이프라인 건설사업이 착공되었다. 여섯번째로는 이르꾸쯔끄 (H p1
한 본격적인 공업이 육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업육성의 기반 은 따따르-바쉬끼르 (TaTa p -BamKn p) 유전으로부터 원유 파이프라 인의 연결과 1950 년대초 개시된 안가라강 수력발전 확장공사에 따른 전력공급의 확대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체렘호보 유역의 역청탄은 I890 년대 이래 시베리아 횡단철로의 연료원으로 기여해 왔으며 1965 년 생산량은 1,780 만 톤이다. 그러 나 체렘호보 유역탄의 고갈과 노후현상이 일어나자 1960 년대초 아제이 갈탄이 개발되었다. 1965 년 아제이 갈탄의 생산량은 160 만 톤이란 적은 양이었지만 매장량은 체렘호보 유역보다 2 배 정도 많은 양이었다. 제 2 차 대전후 체렘호보 탄은 안가르스끄 (AHra p cK) 에 위치한 합성연료 공장으로 보내져 수소 첨가과정을 통한 공정으로 휘발 유와 탄화수소를 생산했다. 이 과정은 196 0- 1961 년 기간중 가동을 시작한 안가르스끄 정유소 건설로 인해 폐지되고, 따따르-바쉬끼 르 유전으로부터 공급받은 정유공정으로 석유화학 공업이 육성되 었다 이 결과 안가르스끄 시는 1967 년부터 요소비료, 플라스틱, 질소비료를 생산하게 되었고, 1967 년에 인구는 18 만 3 천 명으로 증가하였다. 더욱이 안가르스끄 석유화학공업은 소금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우솔리예-시비르스꼬예(y conbe·CM6H p cKOe) 화학공업으 로 보완되었다 . 우솔리예 화학공업은 1965 년 소련 총생산량의 I2% 나 되는 가성소다 16 만 톤을 생산했다. 이상과 같은 공업지원을 위한 전력개발은 1950 년 안가라 강변 에서 개시된 이르꾸뜨스끄 수력발전소로서, 1956 년 한 대의 발전 기 설비를 시작으로 I958 년 8 대가 설비되어 총용량 66 만 Kw 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이르꾸뜨스끄 수력발전소 가동과 더불어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하고 공정과정에서 정확한 온도조절로 인해 전력사용이 불가피한 알미늄 분리공장이 쉘레호프(ill enexoB) 에 세워져 1962 년부터 생산을 개시했다. 이 공장도 시베리아 지역 내의 타공장들과 같이 우랄 지역의 알미늄 원료를 공급받고 있다. 브라뜨스끄 (B p aTCK) 지역은 수력발전, 알미늄, 목재-셀루로우즈
공업이 개발된 지역이다 . 이러한 공업개발은 교통망 개발이 뒷받 침되었다 죽 시베리아 횡단철로의 분기선인 따이쉐또-레나선이 1954 년 완공되어 목재, 광물, 전력 개발에 기여했고, 레나강 끝에 위치한 우스찌 -꾸뜨 (YcTh-K y T) 에 오세뜨로보 (OceT poBo) 항이 1950 년대중반에 건설되어 레나강 유역의 야꾸뜨스까야(.fI K y TCKaH) 로 통하는 관문 및 수로수송에 기여하였다. 공업 육성의 원동력인 전력개발은 1954 년 브라뜨스끄 댐 착공 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이 댐은 1961 년부터 전력을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1963 년 22 만 5 천 Kw 용량의 발전기 I6 대를 설비하여 360 만 Kw 용량의 산출능력을 갖추었다 그러나 브라뜨스끄 지역에 서 이 댐의 발전용량 25-30% 밖에 소비하지 못함에 따라 잔여 전력을 타지역에 송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1963 년 500Kw 송전선 2 개를 설비하여 이르꾸뜨스끄 지방으로 130 만 Kw 를 송전 하게 되 었고, 또 하나의 다른 송전선을 통해 끄라스노야르스끄로 70 만 Kw 를 보내게 되었다 더욱이 1960 년대 말에는 서부지역으로 보내는 2 개의 송전선이 완공되었고, 이 송전선을 안제로-수드젠스 끄 (AHme p o-C y AmeHcK) 및 꾸즈네쯔끄 유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브라뜨스끄 수력발전소는 1966 년말 2 대의 발전기를 추가 설비함으 로써 총 18 개가 되어 401 만 Kw 용량을 갖추었다. 이 발전소는 총 20 개의 22 만 5 천 Kw 발전기를 설비하여 총용량 500 만 Kw 전력 생산을 계획하고 있댜 이러한 풍부한 전력을 기반으로 1961 년에 브라뜨스끄 알미늄 공장이 안제바에 건설되었다. 브라뜨스끄 지방의 제 2 공업은 풍부한 목재에 기반을 둔 화학공 업이다 브라뜨스끄는 시베리아 최대의 목재펄프 산지 중의 하나 로 비스코스 펄프 20 만 톤 용량을 갖춘 공장이 1966 년에 가동되었 다. 이로써 펄프는 시 베 리 아 및 구주지 역의 타이 어-코드(tir e -c ord) 공장으로 보내져 나이론 제조에 기여하게 되었다. 이 지역의 전력 개발은 더욱 확대되어 1963 년 우스찌-일림스끄 (YCTh- li lIHMCK) 및 안가라강 하류의 수력발전 계획이 착수됨에 따라 향후 공업확대 발전의 전망을 밝게 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업들의 개발로 인해
19_ 67년 브라뜨스끄시의 인구는 122,000 명으로 급증하였다 . 이 밖의 자원은 꼬르슈노바 (Ko pmy HoBa) 의 철광과 젤레즈노고르 스끄 (IBe11eaHoro p cK) -일 림 스끄 (H JI HMCK) 간의 자철광(磁鐵鑛)으로 19 야 -1965 년에 채굴을 시작하여 따이셰뜨-아바깐 철로 를 경유하여 꾸즈네쪼끄 유역으로 보내 농축하고 있다 . 젤레즈로고르스끄 광은 1967 년 광석 1 , 200 만 톤과 500 만 톤의 농축물을 생 산했다 . 이 지 역 은 금과 운모(雲母) 산출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 금은 1840 년대에 개발되어 역사적으로 레나(Jl eHa) 의 황금벌판으로 알려지고 있는 보다이보 (EoRan6 이광에서 생산되고 있다. 보다이보 금광은 대규모 채취기를 사용함으로써 1964 년에는 소련 총생산량의 55% 를 생산 하기도 했댜 백운모(白雲母) 산지는 17 세기에 개발된 마마-추야 (MaMa 셔y a) 광으로 1960 년대 말 이곳 생산량은 소련 총생산량의 75% 까지 점하고 있다. 제 2 의 운모 매장지는 1950 년대 초에 개발 된 야꾸뜨스까야 남부 알단 (A11 ;u; aH) 지구이다 . 일곱번째의 공업지대는 부랴뜨 자치공화국 (B yp aTcKaa ACCP) 이다이곳의 기본자원은 텅스텐몰리브덴이며 , 이 밖에 석탄 형성 (營石), 석면(石綿) 자원이 있다 . 이 지역 개발도 제 7 차 경제계획기 간중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 자원 중심으로 개발과정을 상술하 면, 우선 부랴뜨 공화국내의 기본자원안 텅스텐-몰리브덴의 가공 중심지는 드쥐다(氏 KHRa) 계곡의 자까멘스끄 (3aKaMeHCK) 이다. 자까멘스끄는 홀또손 (XO JI TOCOH) 광으로부터 텅 스텐 원석 과 인꾸르 (HHK yp)광으로부터 몰리브덴석을 운반하여 농축하고 있다. 부랴뜨와 울란-우제(yJI aH. y K3) 공업지의 에너지원인 석탄은 구시노제르스끄 (r y cHH030 p CK) 광의 갈탄이다. 구시노제르스끄 광은 지하채굴 60 만 톤과 노천채굴 40 만 톤을 합하여 1965 년에 총 I 백만 톤을 생산했다 . 그러나 이 양은 부랴뜨 지역 필요량의 절반 밖에 충족할 수 없어 나머지 양은 이르꾸뜨스끄 유역의 체렘호보 와 치따 지역으로부터 보충받고 있다. 발전계획은 구시노제르스끄 에 용량 120 만 Kw 의 화력발전소를 개발하고 있고, 전력생산을 위 한 갈탄은 홀볼리 드좌 (Xo1160 J1 b )VK a) 광에 서 연 240 만 톤을 목표
로 개발중이다. 형석광은 1968 년 몽고 국경 북쪽 방향 울란-우제-울란-바또르 (YJ ia H-Y,u ;s -YJ ia H- B aTop ) 철로상의 호론호이 (Xo p oHxoa) 에서 개발되 었다 1968 년 당시의 생산량은 3 만 톤이었다. 석면 매장지는 몰로 제 즈느이 (Mo Ji o ,u; emHLI8) 로서 1963-1964 년에 개 발되 었다. 이 밖에 남 무야산 북부 절벽에서 거대한 노천광이 발견되었으나 교통수 단의 미개발로 지연되고 있다. 여덟번째의 공업지역은 치따 (lIHTa) 이다 . 치따 지역 역시 다양한 광물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미 18 세기 중엽부터 은, 연, 아연광이 번창했던 지역이다 . 혁명후 이 지역은 금과 주석원(朱錫源)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 혁명 정권 초기 주석채굴의 중심지는 올로반 나야 (O Ji oBRHHaR) 로서 1920 년대 말에 채굴을 시작했으나 얼마 지속 되지 못하고 곧 고갈되었다 . 그 후 소련의 주석생산 중심지가 극동으로 옮겨지기 전인 1930 년대에 하쁘체란가 (Xan l ep aara) 와 쉐를로바야 고라(ill e pJi oBaR ro p a) 가 개발되어 소련의 주석생산 기본지대가 되었다. 하쁘체란가 광은 1960 년대에도 채굴되고 있으 며, 쉐를로바야 고라 광은 과거의 사광으로부터 1967 년에는 맥광 을 개발하여 채굴을 지속하고 있다. 금광은 네르친스끄 (He pI HHCK) 지방의 발레이 (Ea Ji ea), 따세예보 (TaceeBo), 베르쉬노-다라순스끼 (Be p nmHo-~a p ac y HCKH8) 에 집중되 어 있댜 1971 년 이후 최대의 금 생산지는 따세예보이며 베르쉬 노-다라순스끼 맥금광(脈金鑛)은 비소여t素; arsen ic), 동, 창연濱: 崎 b i smu t h) 도 동시에 채취되는 것이 특칭이다 이 밖에 불소원료인 형석, 몰리브덴 광이 있으며, 특히 리듐 (lit h i um) 의 주요 생산지로 꼽히고 있다 치따 지역의 리듐은 핵 및 우주시대 개막과 더불어 요구되는 자원으로 쉴까-아르구니 (illHJ I K a-Ap ry a1,) 남부에서 생산된다 주요 리듐광은 1952 년에 개발된 끌리치따 (K JI H I Ta), 1958 년 개발된 까다야 (KanaH) 와 고르느 이 제 렌뚜이 (rop H LI8 3ep eH Ty 8 ), 1960 년대 중반에 개 발된 아까뚜 이 (AxaT y a) 가 있다. 리 듐 채 굴을 위 한 전 력 은 아르구니 (Ap ry a1 ,)
강 왼쪽 쁘리아르군스끄 (II p 11a pr y HCK) 에 건설된 화력발전소에서 공급받는다 이 발전소는 1952 년에 착공되 어 제 1 단계로 1961-1 962 년 12,oooKw 발전기 2 대가 설치되었댜 이 발전소의 연료는 하라노르 (Xa p aHo p) 갈탄광에서 조달받고 있다 치따 지역은 백금 대용품인 탄탈(t an t alum) 의 주요 산지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소련의 기본 탄탈광이며 농축지 중의 하나인 오를롭스끄 (O pJI OBCK) 는 1965 년부터 조업하고 있으며, 이 밖의 주요 매장지는 1969 년에 발견된 에뜨이까 (3mma) 이다. 치따 지역 이 보유한 또 다른 주요자원은 동광이다. 이 지역의 동광으로는 1950 년대 말부터 개 발되고 있는 우도깐 Nn0KaH) 산에 매 장된 것으 로 중앙 아프리카 동맥燁脈) 및 까자흐스딴의 드제즈까즈간(,lvl< esKasraH) 과 맞먹는 대규모 양이 매장되어 있다. 4. 극동지역의 개발 극동지역은 금, 운모, 주석(朱錫), 텅스텐, 기타 금속 및 공업용 다이아몬드 산지로 유명하다. 이들 자원은 가장 독특한 기후와 불리한 물리 • 지리적 조건하에서 개발되고 있다. 석탄자원도 매장 량이 풍부하나 단지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필요한 연료량만 개발 해 왔고, 시베리아 철도가 디젤기관으로 교체된 후부터는 남부에 산재한 소규모 화력발전소 및 북부에 격리된 광산의 전력공급 목적으로 제공되고 있다. 그리고 극동의 수력발전 잠재력은 동시 베리아 지역에 비해 사실상 개발되지 못한 상태이다 . 극동지역도 광범한 영역일 뿐만 아니라 산업개발도 지역별로 다양하므로 복잡성을 피하기 위해 산업중심 지역별로 구분하여 다루기로 하겠다. 첫째는 아무르 지역 (AM yp cRaa 06 Ji acT 1>)이다. 이 지역의 주요자원은 석탄, 금, 수력이다. 아무르 지역 생산의 약 40% 를 점 하고 있는 석 탄생산의 최대 중심지는 부레 야 (B yp ea)
강 하류에 있는 라이치힌스끄 (Pa8 '1 HXHHCK) 지방이다. 이 지방의 주요 석탄광은 1931 년에 개발된 끼브진스끼 (KMB 邸 HCKHa) 광으로 이 광은 2 차 대전시와 1950 년대의 개발확대 시기를 거쳐서 1965 년에 4 개의 노천굴로부터 갈탄 1,200 만 톤을 생산하였다 . 석탄 생산량의 약 1/5 은 이 지역 채탄을 지원하고 있는 화력발전소에서 사용된댜 나머지 석탄은 아무르 지역과 하바롭스끄 (Xa6a p OBCK) 지역의 발전소로 수송되고, 라이치힌스끄와 농 • 공지역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는 1 만 2 천 Kw 용량을 갖춘 아고드좌 (Oro ,Wf《 a) 발전소 및 셀렘드좌 (CeneM 邸《 a) 강 상류의 금광 둥에 연료용으로 공급되고 있다 이 지 역 금광으로는 에낌 찬 (8KHM 'l aH) 북부에 위 치 한 또꾸르 (ToKy p) 맥 광이 있다. 아무르강과 그 지류는 1950 년대 중 • 소 공동조사단에 의해 거대한 수력발전 잠재지로 판명되었다 . 그러나 양국의 경제협력 실패로 개발이 지연되고 있다. 현재 추진된 아무르강의 수력개발 은 1964 년에 시작된 쩨야 (Ten) 사업으로서 이의 설계용량은 1 백 47 만 Kw 이댜17) 둘째는 하바롭스끄 지역이다 . 이 지역에는 극동지역에 얼마 없는 역청탄 매장지 중의 하나가 있다. 이는 부레야 (B yp en) 강 상류에 위 치 한 우르갈 (Y p ran) 광으로서 꼼소몰리 스끄 (KoMCOMO m. cK) 종합제철공장 건설에 대비하여 2 차대전중에 개발된 것이다 . 그러 나 꼼소몰리스끄 제철소 건설계획이 백지화됨에 따라 라이치힌스 끄 노천광에 비해 우르갈 지하광의 채탄비용이 높기 때문에 위축 되어 가는 상태에 있다. 라이치힌스끄 탄에 과중한 의존으로 인해 염가의 지역탄 개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 이러한 동기에서 발견 된 노천광 지역이 비낀 (BHKHH) 이다. 이에 대한 개발은 1970 년대에 행해지므로 다움 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 이 지역내의 주요도시는 하바롭스끄와 꼼소몰리스끄 시로서 이들은 서부로부터 운송되어 온 석유와 사할린 석유를 정제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제조공업 도시이다. 꼼소몰리스끄는 광법한
17) 이하는 Theodore Shabad , 앞의 책 , pp. 268-283 을 주로 참고`
자원개발로 철광석, 소규모 석유정제소, 새로운 주석채광 및 목재 가공업을 지향하고 있다. 꼼소몰리스끄 시 인근의 주석 개발은 솔네치느이 (Co JI HeTHLIn) 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본격적인 개발은 1958 년 고르느이 (ro p HLI 0:), 1966 년 솔네치느이 (Co11He 'I HLIR) 에서 착수되었다. 그리고 제 1 단계 복합농축 시설은 1963 년 고르느이에 서 기공되었다. 세째로는 연해지방(沿海地方 ;IlpH Mop cK H0 : K p aR) 이다 . 남부지역 은 전력망과 석탄광의 조직망으로 개발되고 있다 . 오래된 지하석 탄광들이 불라디 보스또끄 (B JI 8AHBOCTOK) 주위 에 산재 해 있는데 이는 1915 년 이래 개발되어 온 아르잼 (A p TeM) 의 갈탄광과 수찬 (C ytJ aH) 의 역청탄광이댜 아르젬 유역의 탄광에서 생산된 석탄량 은 1965 년 당시 240 만 톤이며, 수찬 유역은 190 만 톤이었다. 이곳 에서 생산된 석탄은 주로 극동지방의 최대규모 발전소인 아르젬 및 수찬 발전소의 연료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탄광은 개발된 지 오래되어 고갈현상을 보일 뿐만 아니라 갱도의 심도로 인한 채굴비용이 상승하여 향후 개발의 중심은 우수리스끄 (¥cc yp H 0: CK) 지구로 옮겨질 것이다 . 우수리스끄 지구에는 2 개의 노천광이 있는 데 이 중 하나는 1961 년에 조업을 개시한 레찌호브까 (PeTTHXOBKa) 로서 1965 년 생산량은 . 120 만 톤이었다. 제 2 매장지는 우수리스끄 북방 치 헤 자 (11Hxeaa) 강 계 곡에 위 치 한 빠불로브까 (IlaB JI OBKa) 노천광으로서 생산용량은 1960 년대 중반 당시 120 만 톤이었다. 우수리스끄 지구는 복합주석 및 형석광도 보유하고 있다. 이들 자원은 제 7 차 경제계획기간중인 1950 년대말 개발되었으며, 개발중 심지는 야로슬라브스끼(flp oc Ji aBCKH 0:)로 주석, 납, 아연, 은을 생산 하고 있댜 그리고 보즈네센까 (BoaHeceHRa) 의 형석과 1963-1964 년에 가동된 제분기에서 얻은 분말은 시베리아 및 우랄지역의 철광과 화학공장으로 수송되고 있다. 또 다른 주석광은 시호쩨 알리니 (CHXOT8- 心 IMm,) 산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의 주석 채굴은 2 차 대전시 시난차 (CHHa ll'l a) 와 리푸드진(JlH如y RaHH) 에서 시작된 후 1950 년대에 이르러 확대 개발되었다. 1961 년에는 수찬으로부터
의 송전선이 완공됨으로 생산이 더욱 증대될 수 있었다 . 이곳에서 생산된 주석은 트럭 에 의해 서 방 바르폴로메 예브까 (Ba p如 o JI OMeeBKa) 역으로 수송되어 시베리아 횡단철로를 이용, 노보시비르스끄 용해 소로 옮겨진다 이 지역내의 까발레로보 (KaBane p oB q)에 주석 농축 소가 있으며, 쩨쯤헤 (TeT10xe) 에는 소규모 납 용해소가 있다. 이 밖의 주석과 텅스텐 산지는 쁘리모르스끼 지방 북부지역으로 1960 년대 말부터 개 발중이 다 . 네째로 꼴르이마 (Ko JI LIMa) 지역은 극동지역의 최대 금 생산지 이다 I950 년대 말부터 금 생산지는 마가단 (Mara )l; aH) 지방의 상부 꼴르이마 유역에서 북방의 추끄치(qy K 面) 민족관구의 빌리비노 뻬베끄 (EM JI M6HH0·IIeBeK) 지역으로 점차 이동하고 있다. 상부 꼴르 이마내의 금광은 1930 년대 초에 개발되었으며, 이 시기 항구도시 인 마가단으로부터 꼴르이마 지구까지 고속도로도 건설되었다. 이 고속도로는 현재 야꾸뜨스끄의 상부 우스찌-네라 (YcTb-He p a) 까지 확장되었다. 꼴르이마 지역의 금은 고농도이며 낮은 지표에 매장되어 있어 경제성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 금 생산은 I930 년대 에 급상승하여 1940 년대에는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그 후 낮은 지표의 매장량 고갈과 지하채굴·증가로 인해 하락하기 시작했 고, 특히 1956 년 강제노동력 동원 종결로 최하 수준까지 떨어졌 댜 그 후 채굴기 도입에 의한 작업조건 개선으로 다시 활기를 띠고 있댜 현재 주요 채굴 중심지는 제빈 ()];e6HH) 강 상류의 야고 드노예(庄댜 vroe) 와 베렐레흐 (Be p enex) 강 상류의 쑤수만 (C yc 'JM_ aH), 꼴르이 마강과 우스찌-옴추그 (YcTb-OM 'iy r) 의 2 개 지류 좌측, 옴차 끄 (OM q aK) 강 인근지류 우측 동지이다. 광업지원을 위한 전력은 1955 년에 개설된 쑤수만 북서 30 마일 지점에서 시설 용량 5 만 Kw 를 갖춘 아르까갈라 (A p x a: rana) 화력발 전소로부터 공급받았다 . 그 후 1958 년 180 마일의 송전선 완공으로 야꾸뜨스까야의 우스찌-네라 지역과도 연결되었다. 꼴르이마 지역 은 주석광도 갖고 있다. 이곳 , 주석은 강제노동력 사용시기 활발한 생산울 보였으나, 그 후 비경제성으로 인해 폐광상태에 처해졌
댜 현재 조업중에 있는 광산은 옴수끄찬 (0MCYK118H) 뿐이 다. 다섯번째로는 추끄치 민족관구이다 . 추끄치 민족관구의 주요자 원은 금과 주석이다 . 이들 자원은 2 차 세계대전 전에 개발되었 댜 주석은 1930 년대 중반 북해로(北海路)를 따라 뻬베끄 (IIeBeK) 항이 있는 차운(tJ ay H) 반도 주변에서 발견되었다. 주석 채굴은 뻬베끄 바로 남쪽에 있는 발리꾸메이 (Ban 1, K y MeR) 맥광과 뻬베끄 동쪽 40 마일 지 점 의 끄라스노아르메 이 스끼 (Kp ac Hoap M e0 :c KH8) 사광倒凡廣)에서 1941 년부터 채광되었다. 뻬베끄 지역의 채광공업은 1958 년에 시작하여 I950 년대 말에 확대되었다 . 그리고 뻬베끄 동쪽 200 마일 지점인 쁠라멘느이 (IInaMeHHLIR) 에서 수은 매장지가 발견됨으로써 I967 년부터는 수은 생산이 시작되었다 . 빼베끄 지역 내의 채광공업 지원을 위한 전력은 선박으로 수송된 석탄올 이용 할 수 있게끔 항구에 건설된 화력발전소에 의해 보급받았다. 이 발전소의 용량은 I 만 7 천 Kw 이댜 풍부한 사금광은 차운 반도 남서席西) 말르이 아뉴이 (ManLIR &Il0R) 유역에 퍼져 있다 . 이곳의 전력은 I960 년대 초에 착공하여 I965 년에 완공된 뻬베끄 송전소에 의해 공급받고 있다. 더욱이 이 지역은 석탄공급의 어려움으로 인해 야기되는 고가의 전력비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빌리비노 (BH JI H6HHO) 지역에 소규모 원자력 발전소가 착공되었으며, 그 일단계로 I 만 2 천 Kw 발전기 4 대를 1970 년에 가동시 켰다 추끄치 민족관구의 세번째 탄광지역은 I959 년에 개설된 이울리 찐(Jiy nhTHH) 의 주석 및 텅스텐 광과 1963 년에 개발된 뿔랴르느이 (IIon11 pH 꼬 a) 사금광이다 이 지역 전력은 오제르느이 (Oae p HLIR) 에 위치한 I 만 2 천 Kw 용량의 발전소로부터 공급받으며, 연료는 l94I 년에 개발된 베린곱스끼 (Be p HHrOBCKHR) 광에서 채굴되고 있 댜 이 탄광의 생산량은 1960 년대 중반 당시 20 만 톤 수준이 었다 여섯번째로 야꾸뜨 자치공화국(.fh《 YTCK811 ACCP) 은 금과 주석 산지로 유명하다. 더욱이 야꾸뜨 자치공화국은 대부분의 소련 다이아몬드 공급원이며, 보통 운모보다 절연도가 높고 고열에
견딜 수 있는 고급운모의 공급지이다 . 이 지역의 주석광은 지구상 에서 가장 추운 지점으로 알려진 야나(flH a) 강 유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채굴 중심지는 베르호얀스끄 (Be p XO ff. HCR) 마을이다. 이 곳의 주석광은 1941 년부터 조업하여 세계 제 2 차 대전시 소련의 핵심 주석산지 역할을 수행한 에베-하야 (36e-Xa ff.)광이다 . 이 광은 현재 상당히 고갈상태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이 밖의 주석공업 중심 지는 북부에 위 치 한 제뿌따뜨스끼 (Aen y TaTc 1< ua) 이 다. 이 사광 은 1953 년에 개발 생산되었고 1960 년대 중반에 풍부한 맥광이 개발되어 농축기 설비도 계획중이다. 금은 3 개 지역에서 생산되고 있다 . 즉 소련에서 가장 오래된 산지 중의 하나인 알단 (A JI RaH) 지역, 알단강 우측 지류상에 있는 알라흐-유니(心 max·IOHL) 지역, 북동의 상부 인지기르까 (MH 邸 rH p Ka) 지역이다 이 지역은 시베리아 횡단철로가 연결된 네베르 (HeBe p) 로부터 1931 년 고속도로가 완공된 바 , 있다 . 1930 년대 초 알단 (AIIAaH) 은 소련 전생산량의 20-25% 를 점하고 있었으나 1934 년 이후 꼴르이마 (Ko JI꼬 Ma) 지역의 추가개발로 훨씬 증가하고 있다. 이 지역의 전력공급은 알단 남쪽 120 마일 지점에 위치한 출리만 {qyJILM aH) 화력발전소로서 1963 년에 가동되었다. 1965 년 생산량은 IO 만 8 천 톤이며, 발전용량은 2 만 Kw 였댜 알단 지역의 금공업은 2 차대전 이후 운모 생산으로 다소 침해 를 받았댜 알단 지역의 운모 생산량은 소련 총생산량의 80 -90 %를 점하고 있다. 기본적인 생산지는 똥모뜨 (TOMMOT) 남동偉i 東) 30 마일 지점인 에멜리드좌끄 (3Me JI L ,IVK aR) 이다. 에멜리드좌끄 광은 1942 년 이래 생산되어 왔고 깐꾸 (KaHK y)광은 1948 년 이후 생산되었다. 이곳에서 생산된 운무광석은 주로 끄라스노야르스끄 와 깐스끄간 시베리아 횡단철로상에 위치한 자오제르느이 (3aoae p a 1,1 a) 와 우야르 (YH p) 가공지역으로 수송된다. 야꾸뜨 자치공화국의 최대 귀금속 자원은 공업용 다이아몬드로 서 1954-1955 년에 발견되었다. 최초 개발지역은 접근이 용이한 6조 3 湜 N II 무였다 채굴 및 가공 중심지는 미르느이 (MH pm.i: a)
로서 이 지역의 발전 지원을 위해 서쪽으로부터 철로와 오세뜨로 보 (OceT p oBo) 항이 건설되었다. 전력은 렌스끄(Jl eHCR) 화력발전소 로부터 1960 년에 연결되었고, 1962 년에는 렌스끄-미르느이간 고속 도로가 개통되었다. 그후 1960 년대 중반에는 빌류이 (BH JI I00) 수력 발전소의 31 만 2 천 Kw 선으로 확대, 연결되었다 제 2 의 다이아몬 드 산지는 1964 년에 개발된 아이할 (66 도 N III 도 30 분 E AaxaJ I) 과 1968 년에 개발된 돌드인(,rt; O JI,IJ; LIH) 강 66 도 20 분 N 112 도 30 분 E 상의 우드치느이(y炳 Hmn) 이다. 에너지원으로서는 깐갈라스이 (RaHra Ji accLI) 와 산가르 (CaHra p) 탄광이 있댜 1965 년 이 두 개의 광산에서 생산된 양은 야꾸뜨 자치공화국 석탄 전체 생산량의 반 정도인 1 백 4 십만 톤이다. 천연가스는 1956 년 빌류이 (BH i IOn) 강과 레나(Jl eHa) 강의 합류점인 따스-뚜무스 (Tac-T y M y c) 에서 발견되 어 1967 년 야꾸뜨스끄( HKy TC K) 까지 250 마일 상당의 파이프라인이 건설되었고 1969 년에는 가스를 연료로 하는 발전소가 개장되었다 . 그 후 파이프라인은 시멘트와 목재가공을 위해 베스짜흐갠 E 끄롭스끄 (EecTHX·IIoK p 0BCK) 까지 50 마일이 더 확장되었다. 일곱번째는 깜차뜨까 (RaM 'l aTRa) 와 사할린 (Caxa JI HH) 으로 이곳은 극동지역과 비교적 고립되어 있어 자원개발에 있어서도 상이한 특징을 갖고 있다. 깜차뜨까의 개발은 1960 년대 중반에 본격화되 었으며, 광물자원으로 약간의 사금 유황偏t黃)이 있다. 향후 에너 지원으로 사용키 위해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화산과 관련된 지하열 이용문제이다. 지하 증기열 개발은 이곳의 특산물인 게와 같은 어물 통조림 공업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사금은 1960 년대 밀리꼬보 (MH Ji bROBO) 근처의 중앙 깜차뜨까 산에서 개발되었다. 그러나 생산량은 미미한 것으로 알려져 있 다. 유황은 북부에서 발견되었으나 아직 정확한 매장량은 밝혀지 지 않고 있다. 그리고 지하열 개발은 시도중에 있으며 지하열을 이용한 실험용 발전소가 남부 첨 단 부근 빠우제뜨까 (IIa y meT 1< a) 에서 설치되었다. 이 발전소는 5 천 Kw 용량을 갖춘 것으로 1965
년에 가동되어 인 근 오제르놉 스 끼 (Oae p HOBCKHR) 통조림 공장에 공급되고 있다. 온천 이용계획은 깜차뜨까의 중심지 뻬뜨로빠블롭 스끄 (IleT p onaB JI OBCK) 에 대한 에너지 공급원으로 추진중이며, 뻬뜨 로빠블롭스끄에는 석유 를 원료로 하는 7 만 Kw 용량의 발전소가 있다 . 사할린 섬은 지역규모에 비해 상당량의 석유, 천연가스 , 석탄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개발도 광범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석유는 북부에 집중되어 있으며 1920 년대부터 상업생산이 시작되 었다 초기 생산은 오하 (Oxa) 에 집중되었으나, 오하 남쪽 5 마일 떨어진 에하비 (8xa611) 지역에서 1937 년부터 새로운 유전을 개발하 여 1950 년대 중반까지 이곳의 주요 석유산지 역할을 했다 . 이곳 연생산량은 총 1 백만 톤이다. 새로운 유전개발은 오하 북부 뜬고 르 (T y Hro p)와 꼴렌도 (KO JI 8H )l; O) 지 역으로 확대 되 었고 1957 년부터 생산을 개시했다. 이 지역 생산량은 1965 년 240 만 톤이다. 이같은 다수의 유전개발과 생산량 증가에도 불구하고 사할린의 석유 생산량은 극동지방 원유 필요량의 30-40% 밖에 미치지 못하고 있댜 사할린에서 생산된 원유는 2 차대전 이전까지 오하 서쪽에 위치 한 모스깔리보 (MocKa Ji bBO) 항구를 통해 선박으로 우송되었으나 전시인 1943 년에는 따따르해협 (Ta :r a p cK11a npo JI HB) 을 횡단하여 아무르 강변 소피스끄 (Co q> H il: CK) 에 이르는 파이프라인이 건설되 었다. 이 파이프라인은 더욱 확장되어 1952 년 꼼소몰라스끄 (H'.O MCOMOJ ibC K) 정유소까지 확대되었다 . 그 후 제 2 의 병행 파이프 라인이 1963 년 착공되어 1969 년에 완공되었다. 또한 1950 년대에 개발된 천연가스도 꼼소몰리스끄까지 가스 파이프라인 개발을 통 해 수송되고 있다. 이 수송량은 1965 년 6 억 입방미터에 달하고 있다. 사할린의 석탄생산량은 1965 년 460 만 톤이다 . 이는 주로 서방 해 변 알렉산드롭스끄(AJi eKCaH .n;p oBCK), 우글레 고르스끄 (Yr Ji ero p cx), 네벨리스끄 (HeBe Ji bCR) 근처와 동부해변의 돌린스끄 (~O JI HHCK) 근방에서 생산된다 . 석탁은 1966 년에 가동된 남사할린 발전소의
제 10 장 흐루시쵸프의 경제정책과 시베리아 개발 229
연료로 주로 공급되고 있다. 사할린섬의 북부와 남부간의 교통망 은 뽀로나이 (IIo p oHa R:)와 뜨이미 (TLIM I,)강의 중앙계곡을 통과하는 고속도로에 의존하고 있다. 철로개발은 1956 년 남부에서 북부로 향한 공사가 뽀베지노 (IIo6eAHHO) 까지 완공되었고, 그 후 1956 - 1963 년 기간중 뜨이몹스꼬예 (TLIMOBCK08) 까지 , 1968 년에는 느이쉬 (HLlm) 까지 완공되 어 결국 북부에 있는 오히꾸}딴글리 (Oxa-HaTaHrnH) 철로와 연결되기에 이르렀다.
제 11 장 브레즈네프 시대 이후의 시베리아 개발 I. 브레즈네프-꼬스이긴 체제 흐루시쵸프의 대내외정책 실패로 야기된 당내 쿠데타로 인해 1964 년 IO 월 브레즈네프(Ji eoHHA l1J ib H' I B p emuen) 가 공산당 제 I 서기, 꼬스이긴(A.Ji eRcea HHROJ ia enH' I Koc Li rHH) 이 각료회의 의장 (수상)으로 각각 대체되었다. 그 후 1965 년 12 월 뽀드고르느이 (HHROJ ia R B. Ilo µ,r o p eLIR) 가 소련방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의장이 되었다 브레즈네프 집권 이후 대부분의 지도층은 이미 흐루시쵸 프 정부의 실각 필요성을 인정했기 때문에 숙청의 대상범위는 적었고, 또한 지도총내에서는 일개인이 당과 정부의 최고직을 독점할 수 없다는 비밀협정도 이루어졌다. 당시 당 지도총내의 영향력 있는 인물은 위에서 언급한 3 인 이외에 이데올로기 업무 와 당조직 업무를 관장하고 있던 수슬로프 (MHxaH JI ABA }le0 BH11 C y o Ji oB) 와 끼릴렌꼬 (ABA pe :0: IlanJI O BH' I lulp H Ji eHRO) 가 있었다. 이들 5 인이 브레즈네프-꼬스이긴 체제의 내부 핵심 인물이며 이러 한 체제는 1977 년 4 월까지 유지되 었다. 브레즈네프-꼬스이긴 체제 초기 (1965-1970) 동안 브레즈네프가
자신의 정치적 권위 및 아성을 구축하기 위해 시도한 증거는 없으며, 실로 정치국은 신기술 및 당엘리트의 집단의지에 의해 지도되었다 그리고 브레즈네프-꼬스이긴 체제는 관료적 능력을 인정받아 부상한 체제이므로 관료들의 의사를 대변하여 조심스럽 고 보수적인 유형의 정책결정을 해나갔다. 이러한 신체제의 권력 바탕과 태도는 흐루시쵸프의 정책 스타일과 극히 대조적인 양상 으로 나타났다 과거 흐루시쵸프가 체제의 능력 한계 를 넘어 물질 적 풍요와 공산사회 실현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기대를 갖게 한 낙관적 스타일과는 대조적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체제는 우선 정책 목표를 낮게 책정하고, 이상사회의 실현은 먼 미래의 문제로 보았다. 접근방법에 있어서도 현실주의에 입각한 계획수립과 현안 문제 해결에 있어서 보다 과학적인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브레즈네프-꼬스이긴 체제는 1965 년 3 월과 9 월에 농업 및 공업 의 현안문제들을 다룬 새로운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은 체제 가 당면하고 있는 경제 및 행정문제에 대해 보다 효율적인 접근 을 모색한 결과였으며, 창의력을 자극하는 수단으로 물질적 보상 을 반영하고 있었다. 계획목표 설정에 있어서도 가능성의 견지에 서 신중한 계산으로 수립되었다 . 운영에 있어서는 당 장치의 철저 한 감독하에 수행토록 했으나 공적 의견에 대한 여론조사의 신장 및 보다 최소한의 압력과 압박 분위기 조성 , 그리고 전문가의 대거 참여를 통한 합리성을 연구토록 했다 . 이러한 브레즈네프-꼬스이긴 체제의 의도가 경제정책으로 구현 된 최초의 계획이 제 8 차 5 개년계획 (196 6- 1970) 이었다 . 제 8 차 계획 은 제 7 차 계획에 비해 공산사회 실현이란 기본목표에는 큰 변화 가 없었으나, 경제적 효율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이윤방식을 도입 하여 경제개혁을 단행했고, 농업 생산과 소비재 생산에도 중공업 못지않게 주력한 것이 그 특징이었다. 그리고 신체제는 과거 흐루 시쵸프가 1956 년 12 월 공식화한 소브나르호즈(국민경제회의) 체제 룰 폐지하고, 중앙집권적 경제체제의 부활 및 서방 선진국과의 통상확대와 경제협력을 증진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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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제는 정치적으로도 전례없는 변혁을 조성하였다 . 전문가들 에겐 연구과제 부여를 통해 연구결과를 정책결정 과정에 반영토 록 보장해 주었고, 주요 권력기관(당장치, 각 성, 군 , 경찰)도 정책 결정 과정의 규정적 접근을 보장하였다. 더욱이 신체제는 〈간부신 뢰〉의 기풍을 조성한 뒤, 유능하고 정직한 관료가 불가능한 것을 성취하도록 압박받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여 이들에게 신분적 보장을 명백하게 해주고 전문가들에 대한 신체제의 관심과 보장 온 I965 년 9 월 꼬스이긴의 발언을 통해 공식화되었다 . 꼬스이긴은 〈소비에트 체제 유지기간중 유능하고 능력 있는 수천의 사회주의 생산조직가들이 우리 나라에서 훈련을 받아왔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복잡화된 책무를 성취할 수 있다는 커다란 힘을 제공해 주었다 당과 인민은 국가의 전문가와 집행가들에게 어려운 일을 전적으로 믿고 지원해야 할 가치가 있다〉 1) 고 하였다 . 이러한 엘리 트의 보장을 통해 신체제는 정치적 지원기반을 공고히 했던 것이다 . 외교정책 수행에 있어서도 신체제는 조심스럽고 보수적인 유형 을 보였다 중국과의 관계개선이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깊이 인식 했지만 양국간의 갈등요소는 상상보다 더욱 복잡해지고 광범위하 게 균열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모택동이 사망하고 나면 보다 기술관료적인 후계자와 난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희망하고 있었 댜 그러나 I976 년 9 월 모택동이 사망한 후에도 완화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체제는 중국의 모험주의가 소련의 국익을 침해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국경지역에 대한 군사 력을 보강해 나갔다. 구주와의 관계에서 있어 신체제는 동구에서의 소련 주도권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얻는 동시에 서구의 위협 완화책을 시도하였 댜 이러한 시각에서 I968 년 체코를 침략하기로 결정하였고, I975 년 구미 35 개국이 참가한 헬싱키 안보회의를 동구에 대한 방어 조치와 종주권을 공식화시키려는 방안으로 삼았던 것이다. 서방과
1) St an ley Roth m an ed. , Sovie t Poli tics & Scoie t y , West Publis h in g Co., 1978, pp. 47-48.
제 II 장 브레츠네프 시대 이후의 시베리아 개발 233
의 데땅트 추구 또한 신체제의 신중한 정책 수행의 결과라고 하겠다. 신체체가 표출한 데땅트는 미국과의 대결을 피할 수 있는 거래관계를 수집해야 한다는 필요성과 소련체제의 현상유지 목적 에서 표출된 것이다. 더욱이 데땅트는 외교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대내 경제개발 및 소비재 육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였던 것이다. 브레즈네프급 1 스이긴 체제의 제 2 단계 (I97 0- I977) 는 다소 상이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 1972 년과 I975 년 극심한 가뭄으로 농업생산 의 위기가 초래되었고, 도시에서는 육류의 부족현상이 야기되었 댜 1965 년부터 실시한 경제개혁은 관료적 타성으로 인해 본래의 기능을 상실했고, 더욱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두브책크 자유화 운동까지 가세함에 따라 체제의 보수성은 점차 강화되었다. 흐루 시쵸프 이래 허용된 과학적 연구 및 출판기회는 폐지되었고, 정 치, 경제, 행정 각 부문의 경비절약과 인원감축을 시행하면서 브레즈네프는 점차 그의 지위와 권력을 확대해 나갔다. 브레즈네 프의 권력집중 현상은 1977 년 5 월이 되자 뽀드고르느이룰 정치국 에서 축출시키고, 동년 7 월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의장직을 장악함 으로써 표면화되었다. 이러한 권력통합의 근본적인 이유가 명확하 게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브레즈네프의 70 이란 나이와 건강악화에 서 유인된 심리적 불안의 소치로 풀이되고 있다. 브레즈네프 치하에서 단행된 경제개혁이 창의성과 혁신성을 유인하는 데 실패한 원인은 한마디로 말해서 시장경제 속성에서 보여주는 자기이익 추구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 더욱이 경제개혁을 통해 개인의 소득이 중대되어도 개인의 기호에 맞는 구매품이 없기 때문에 소득증대의 의미를 상실할수밖에 없었다. 브레즈네프 체제에서 발달된 다원주의적(多元主義的) 형태도 엘리 트 집단이 대중을 위해 권력을 중대하려는 노력이 없고, 책임문제 도 제도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합리적일 수가 없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중앙계획은 그들의 자원을 특수 부문(군사, 우주 개발, 중공업)에 집중시킬 수 있고 극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
댜 그러나 경제는 서구에 비해 소비재 생산 및 서비스 시설에서 후진성을 면치 못하였다. 이러한 불균형을 바로잡을 만큼 소련체 제가 택하고 있는 중앙계획이 효율적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경제 적 불균형은 만성적 골치거리로 대두할 수밖에 없었다 . 이러한 제도적인 결함 때문에 대외협력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적절한 응급조치의 역할을 해왔다. 대외협력은 중앙계획의 차질로 야기된 문제의 처리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단기간에 극복할 수 없는 기술개발 및 투자수단으로서 그 역할을 다했다 . 이러한 협력 단계에 있어 현재 소련이 지니고 있는 유일한 수단은 자원이란 점에서도 시베리아 지역의 자원개발에 일차적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기도 하다 . 2. 경제정책과 시베리아 개발의 추이 브레즈네프-꼬스이긴 집권 초기의 경제정책 기조는 공산주의 사회건설이란 기본목표하에 이윤방식 도입을 통한 효율성 증대에 있었다 그리고 국민생활의 향상과 투자효율의 중대를 기본으로 하는 경제정책하에 투자비중을 구주지역의 기촌공업 확장에 두고 보조적 역할로 시베리아 자원중산에 주력하였다. 죽 시베리아 개발을 과거의 관련산업에 대한 복합개발에서 석유, 천연가스, 석탄, 비철금속, 목재와 같은 전략자원에 대한 선별 개발로 변화 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원인은 국민생활과 밀접한 소비재 산업 육성 및 투자효율면에서 시베리아에 대한 신규투자를 확대할 수 없었던 상황적 요인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선별 개발로 의 변화 속에서도 자원개발을 촉진하고 향후 복합개발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하부구조 건설에 대한 투자를 병행해 나갔다. 이같 은 개발전략 변화는 제한된 재원 속에서 자원활용도 우위에 따른 조치이며, 또한 지역경제체제 부활에 따른 지역단위화 추구노력의
견지(堅持)였던 것이다. 제 8 차 5 개년계획 (1966-1970) 의 주요 책무는, (1) 국민소득을 38-41% 로 증대, (2) 개인당 실질소득을 30% 로 증대, (3) 농촌과 도시간의 생활수준 차이 축소, (4) 국민의 문화수준 증대, (5) 전지 역의 합리적인 노동력 사용과 농촌지역의 노동력 확보, (6) 전 공화국에 대한 전반적인 개발확보 및 각 민족과 공화국 이익의 합치였다 .2) 이같은 경제적 효율성 강조를 통한 국민소득 층대와 사회주의적 견지에서의 지역간 균동 발전 지향정책이 시베리아 개발의 제한조건을 완화할 수 있었고, 과거부터 진행중인 에너지 및 비철금속 생산중대를 통해 기본계획 목표를 충족실킬 수 있었 다 이 기간중 시베리아 지역에 대한 투자량은 총투자비 3 억 1,200 만 루블 중 5 천 90 만 루블로 16.2% 를 차지하고 있다. 이 결과 공업생산율은 연평균 8 . 6% 로 성장했으며, 성장의 기반은 · 주로 에너지원, 비철금속, 화학공업 및 목재가공업이었다. 특히 이 시기 부터 새로 개발된 석유와 가스 및 목재자원을 이용한 복합공업이 새로이 개발되어 주목을 끌었다 . 3) 제 9 차 5 개년계획의 주요과제는 사회적 총생산의 고도성장과 그 효율의 향상, 과학 • 기술의 진보와 노동생산성의 상승 및 국민 생활의 향상이다. 이러한 골격하에 시베리아 지역개발에 대한 관심은 더욱 고조되었다. 지역별로 치중된 개발은 서시베리아의 유전과 가스 및 관련공업 시설개발이었다. 그리고 동시베리아 지역은 철 및 비철금속, 펄프와 제지, 수력발전개발을 통한 복합 공업 육성에 주력했으며, 극동지역은 발전소, 채광, 목재가공, 펄프 및 제지, 수산자원가공, 정유소 건설과 항만시설 증대를 위한 하부구조 개발에 치중했다 .4) 제 IO 차 5 개년계획 (197 6- 1980) 의 기본 방향은 국민의 물질적 • 문 화적 생활수준의 착실한 향상에 두고 있었다. 이를 위해 채택된
2) Ilpa B Aa, 1¢> 6. 2. 20. 3) Ki ich Saeki, Towards Jap a nese Coop e rati on in Si b eria n Develop - ment, Problems of _C ommunis m , ( 1972, 7_-8 ), p. 2. 4) 같은 책, p. 2, Ilpa B Aa(1971. 4. 6, II) 의 제 각차 당대회 지령.
경제전략은 사회적 생산의 다이나믹하고 균형잡힌 발전, 그 효율 의 향상, 과학 기술진보의 촉진, 노동생산성의 향상, 제반 국민경 제의 질적 개선이며, 중점 육성 공업은 강철, 석유, 천연가스, 시멘트, 비료생산에 두었다 . 제 IO 차 5 개년 계획기간중 시베리아 지역에서 이룩한 괄목할 만한 성과는 가스 증산이 이전의 계획기에 비해 50% 증가했으 며, 석유경제가 25-30% 증가했다. 그리고 깐스끄-아친스끄 (KaHCK· A1IHHCK) 의 석탄을 이용한 대규모 전력생산, 연료공급의 안정을 기하기 위한 가스 지하저장 시설, 더욱이 극동지역의 재개발과 태 평 양 진출의 대 동맥 인 2000 마일 길 이 의 밤( BaRKan-AM yp)철도 계획이 1980 년대 중반에 완공될 목표로 추진되었다 .5) 제 II 차 5 개년계획 (I981-I985) 의 기본 책무는 착실한 기반 위에서 보다 높은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을 보증하는 것이며, 국민경제의 진보적 발전, 과학 • 기술 진보의 촉진 및 집중적인 개발노선으로 의 경제전환, 잠재적 생산의 보다 합리적 이용, 모든 형태의 자원 에 대해 가능한 한 최대로 절약, 노동력의 향상 등이다 .6) 이같은 기본계획 목표하에 제 26 차 당대회 (I98I) 의 결정에 의 거,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에서는 제 II 차 5 개년 계획기에 채굴된 원료를 보다 완전히 이용하고, 가공도를 . 높이며, 완제품의 생산중 대를 위한 작업이 실시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석유 및 천연가 스 공업부문에서는 농축 및 기타의 부수성분을 뽑아내고, 석유와 가스를 종합적으로 이용하며, · 석유정제도를 높이면서 2 차 처리의 비율을 높이고, 미생물공업 (m i crob i olo gy) 및 합성세제 생산을 위한 액체 파라핀의 대량생산 조직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동시에 석유화학의 품목 및 생산량 · 중대, 고(高)옥탄가(價)가솔 란 저유황(低琉黃)디젤 및 항공연료, 방향족(芳香族) 탄화수소 (aromati ca l hy dr ocarbon) 및 고품질 윤활유가 중산되 고 있다 임 업, 목재가공 공업 및 제지 펄프 공업에서는 목재의 이용조건이
5) IlpB B AB, I~I , 2, 28, 찌호노프 수상의 연설문 참조 6) IlpB B AB, I~I' 2, 각. 제 26 차 당대회에서의 브레즈네프 보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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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되고 있다. 즉 저질목재의 화학적 내지는 화학 • 기계적 처리 능력이 층대되고 있는 것이다 . 비철금속 공업부문에서는 채굴된 광물로부터 귀중한 성분을 뽑아낸 추출률의 증대, 선광(選鑛)의 처리 노력도 향상되고 있다 . 7) 소련은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 경제의 종합성을 높이기 위해 제 2 의 발전방향을 설정하고 유럽 • 러시아 지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생산성 발전계획을 본격화하고 있다 . 이에 따라 채굴공 업, 지질조사, 건설 및 전송, 부분적으로 농업용 기계화 설비롤 생산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들 생산에 있어 혹한과 같은 기후 조건은 특수 공법 및 처리기술을 요하고 있다. 이들 제품을 생산 하기 위해 소련은 서시베리아 및 극동에 철강업을, 츄메니와 똥스 끄 양 주(州)에는 석유정제품을 기초로 한 화학공업을, 수많은 천연자원 대형개발 지역에는 건설자재 공업을 발전시키고 있다. 이로써 이들 지역에는 최종 완제품 가공공업 부문을 발전시키는 과제가 대두되고 있다. 더욱이 향후 기계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대두되는 사회문제는 조화 및 균형잡힌 지역발전, 지역간의 생산 관계 합리화, 노동력 확보문제들이다. 이같은 문제들은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의 천연자원 및 경제력을 합리적으로 이용하고, 동시 에 재생산의 지역간 격차를 개선하는 제 3 의 〈집약〉 효과를 위한 발전방향이 요구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발전추세와 문제점들의 대두 속에서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 개발은 대규모 자원개발, 에너지 소비형 산업의 집중 배치, 경제발전의 복합성 향상, 하부구조 건설(철로, 도로, 통신시 설, 공공시설) 및 전력과 전연방(全聯邦) 전력체제와의 통합작업을 추진하고 있댜 그러나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개발의욕을 충족 및 효율화시키는 데 있어 막대한 개발자본과 선진기술이 요구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이 브레즈네프 체제에 의해 창출된 대외협력 방식에 의한 개발인 것이다. 막대한 개발자본과 기술 및 장비를 필요로 하는 소련과 자원공
7) A. rnBA 1i1m es (ed .), 앞의 책, pp. 32-33.
급 및 대외시장의 다원화를 추구하는 일본과의 절실한 이해가 일치되자 1966 년 2 월 협상이 시작되었고 1967 년 7 월에는
8) 〈 KS 〉는 일본측 대표단장 Ry o sei Kawa i의 성씨 첫자와 소련대표단장 I. F. Semi ch ast n ov(H. cl>. Ce MH'J aCTHOB) 의 성 첫자를 따서 명명한 것이다. 상기협정은 l 아 7 년 7 월 걱일에 조인되었으며,
3.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의 개발현황 I) 석유 및 천연가스 개발 근래 시베리아 자원개발의 중요성이 점증하고 있는 원인은 국내의 소비중가와 국외 수출원으로서의 역할중대에 기인한다. 소련의 경제규모는 GNP 상으로 1981 년 당시 I965 년에 비해 246 %, 공업생산고는 277% 확대 일로에 있었다. 이같은 확대과정에서 유럽 • 러시아 및 우랄 지역의 공업과 경제진홍 목적으로 이 지역 이 에너지, 삼림, 광물자원을 집약적으로 사용함에 따라 제 IO 차 5 개년계획 (1976-1980) 기간중 자원고갈의 위기가 일어났다. 즉 유럽 • 러시아 및 우랄 지역의 연료 채굴량이 노후화되어 I 억 톤이나 줄었던 것이다. 이처럼 경제규모 확대와 유럽 • 러시아 및 우랄 지역의 에너지 생산량 감소에 대한 보충수단으로 시베리 아 지역의 자원개발은 사활적 요인으로 변모하였다. 이에 대한 증거로서는 시베리아 지역이 점하고 있는 에너지자원 채굴량이 이룰 말해 주고 있다. 소련의 석유 • 가스 농축을 포함한 총채굴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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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1965 년 2 억 4,300 만 톤, 1970 년 3 억 5,300 만 톤, 1975 년 4 억 9,100 톤, I980 년 6 억 300 만톤, I98I 년 6 억 900 만 톤이었다 이중 시베리아 지역이 점하고 있는 비중은 I970 년 8.9 % , 1975 년 30.I %, 1980 년 5L9% 로 대폭 증가하였던 것이다. 또한 천연가스의 총채굴량은 1965 년 1,280 억 m', 1970 년 1,980 억 마 I975 년 2,890 억 m', 1980 년 4,350 억 rn’, 1981 년 4,650 억 m' 였댜 이중 시베리아 지역 의 생산비중은 1970 년 4.7%, 1975 년 12.3%, 1980 년 39% 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 석탄의 경우 총채굴량은 1965 년 5 억 7,800 만톤, 1980 년 7 억 400 만톤인데 이중 시베리아 지역의 비중은 1965 년 25.6 %, 1980 년에는 32.1% 로 신장세를 보여주었다 . 이같은 시베리아 지역의 생산비중 증대현상에 대해 소련방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부(노보시비르스끄)의 경제 • 공업생산조직연구소 Y. 막시모프 박사 의 견해에 의하면, 소련방 총채굴량 중 시베리아 지역의 비중은 1980 년대 57-60% 에서 64 -6 8% 로 증가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9) 더욱이 새로운 유전이 향후 동시베리아에서 발견될 전망이고 보면 이같은 신장추세는 대폭 증가될 것으로 보인다.
9) A. !// 11, , 牙~ V 안開發& 國際協力가讓諒」. 앞의 책, pp. 136-137_
경제규모 확대로 인한 자원수요 중대추세 및 시베리아 지역에 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채굴공업의 발전 필요성은 선진 해외기술 및 장비롤 더욱 필요로 함에 따라 시베리아 자원의 활용도는 대외협력 수단으로서 더욱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같은 맥락에서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의 개발과정과 현황을 살펴보자.
시베리아 에너지원의 우랄 • 서부 반출량
연료 1970 1975 1980
자료 : 3Hep 2 eTu1 ta CCCP e 1978 -1980 . Moc11ua, 1977, p. 148.
1950 년대 말과 1960 년대 초 서시베리아의 오비강 유역에서 발견 된 석유는 1960 년대 중반부터 개발에 착수하여 곧 소련 경제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77 년 서시베리아의 생산량은 2 억 2 천만 톤으로 상승했다. 이 양은 우랄-볼가 지역 생산량과 맞먹는 양이었다 그리고 1978 년에는 전 유럽 생산량과 거의 일치하는 생산을 기록했고 ,lO) 1982 년 서시베리아의 석유생산 비중은 총생산 량의 약 56% 에 이르렀던 것이다.11) 1960 년에 발견된 꼰다강 계곡 쇠임지구는 1960 년대 초 개발을 시작하여 1965 년부터 30 인치 직경의 250 마일 길이 파이프 라인을 통해 쥬메니 (T10MeHb) 로 원유를 수송하게 되었다. 이 지구 생산량 은 1970 년 420 만 톤으로 상승하고 연생산량 500 만 톤 수준을 유지 하고 있으나 더 이상의 생산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12) 유전개발은 미온적인 쇠임 지구 개발로부터 동쪽으로 300 -40 0 마일 들어가 오비강 중류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곳 유전 은 1961 년에 발견된 메기온 (MerHoH) 유전과 우스찌-발르이끄 (YcTb-BaJI L IK) 유전으로 1964 년부터 생산이 시작되 었다. 이 곳 원유는 수로를 통해 이르뜨이쉬강을 거슬러 올라가 오비강을 따라 옴스끄 (OMcK) 정제소로 보내진다. 시베리아산 원유가공의 주요 역할을 맡게 된 옴스끄 정제소는 볼가-우랄 지역의 원유 일부를 파이프 라인으로 받아 1955 년부터 가공해 온 정제소였다. 그 후 1964 년 개장된 제 2 의 안가르스끄 (AHra p cx) 정제소와 연결 되었다 오비강 중류지역의 원유개발은 주로 여름철에 수로를 통한 원유 수송 의존으로 인해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67 년말 이 지역 생산량은 580 만 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67 년말 옴스끄 정제소로 향하는 40 인치의 650 마일 파이프라인 완공으로 생산율은 급상승되었다. 이 파이프라인이 완공 되기
10) Leslie Dien es, 앞의 책, p. 57. 11) News Not es ': Sov iet Geog r aph y , 1982, 4, p. 279 . 12) Leslie Dien es, 앞의 책, p. 57.
전 옴스끄 정제소의 원유처리량 중 서시베리아가 점하고 있던 비중은 17.5% 에 불과했다. 그러나 1970 년에 와서 서시베리아의 원유생산량이 3,140 만 톤으로 상승함에 따라 옴스끄 및 안가르스 끄 정제소의 처리용량 초과분을 볼가-우랄 지역에 위치한 정제소 로 수송하기 시작했다 .13) 1961-1969 년 기간중 오비강 중부지역에 대한 집중적인 탐사노력 으로 59 개의 유전을 발견했다. 이 중에는 5 억 톤 이상의 매장량을 가진 9 개의 대규모 유전도 포함되어 있다. 초대형 유전은 1969 년에 발견된 사모뜰로르 (CaMOT JI O p) 유전으로 매장량은 약 20 억 톤으로 알려져 있다 .14) 이는 소련에서 발견된 최대 유전으로 따따 르 공화국의 로마쉬끼노(p OMSIIIRHHO) 유전과 맞먹는 매장규모이 다. 1960 년대에 발견된 대형유전은 우스찌-발르이끄 (1964 년 가동), 서 수르구뜨 (C yp ry T)(1968), 쁘라브진스끄 (Il p SBAHHCK)(1968), 마몬 또프 (MaMOHTOB)(1970) 를 포함하고 있는 수르구뜨 지역이다. 제 9 차 5 개년 계획기간 (1971-1975) 중 사모뜰로르 유전의 생산이 급층함으로써 서시베리아 지역 유전개발을 압도하였다. 사모뜰로 르 유전은 1969 년에 생산을 시작하여 1970 년 I,000 만 톤을 생산했 으며, 1975 년에는 8,650 만 톤으로 급상승했으며, 1978 년에는 1 억 3 천 -1 억 4 천만 톤 수준의 생산고를 유지하였다. 이 결과 제 9 차 계획기간중 서시베리아 지역의 생산중가량은 66% 상승하였고, 소련 총생산량의 55% 를 점하게 되었다 .15) 그리고 1982 년의 서시베 리아 석유생산 비중은 총생산량의 약 56% 에 이르고 있다 .16) 또한 이 기간중 수로수송의 문제점도 보완했다 . 1975 년 시베리아 횡단 철로로부터 400 마일 거리의 지선을 쥬메니로부터 수르구뜨간 완공 했으며 1976 년에는 니즈네바르뜹스끄 (HHmH8B8 p TOBCK) 까지 연결시
13) 8 1' 0HOMU 'l llC 泣 I'aae ra, 1968, No. 20. 14) Cosercl« JJi Poccw i, 1970, 2. 28. 15) Lesli e Dien es, 앞의 책, p. 58. 16) News Not e s•: Sov iet Geog ra p h y, 1982. 4, p.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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켰다 m 1970 년대 중반 이후의 개발 노력은 오비강 계곡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서시베리아 평원의 늪지대로 옮겨졌다. 이 지역은 수송로 및 전력공급 시설로 인해 개발이 늦어졌으나 초대형 유전지역으 로 근래 각광을 받고 있다. 이 유전은 쯤메니 지역에 위치한 유전 으로 1976 년부터 시작된 제 IO 차 5 개년 계획기간중 집중 개발되었 댜 쯤메니 지역의 유전개발은 1976-1978 년 동안 18 개 유전이 가동되었댜 이 중 4 개의 유전만이 육로 접근이 가능할 뿐이며, 7 개의 유전이 2,400MW 용량으로 설계되 어 1978 년 말에 1,800MW 시설이 완공되는 수르구뜨 화력발전소(본래 가스를 사용하는 발전 소임)와 연결되었다. 1978 년 쥬메니 지역의 석유 산출량은 2 억 4,500 만으로 1980 년 서시베리아 지역의 총생산량 3I2 백만 톤과 비교할 때 약 80% 이상에 해당되는 최대 유전지역이다 . 이 밖의 유전으로 1970 년대 말부터 개발을 확대하고 있는 지역 은 오비강 계곡으로부터 북부에 위치한 수르구뜨 지역과 니즈네 바르뜹스끄 지역이며, 또 다른 개발지역은 똥스끄 (ToMCR) 지역 남서의 바슈간 (Bac10raH) 늪지대이다. 이 지역이 생산량은 1978 년 850 만 톤을 기록하고 있듯이 아직 개발초기 단계이다 .18) 유전 및 가스자원 개발을 위한 하부구조 건설사업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수르구뜨로부터 북부에 위치한 초대형 가스 산지 인 우렌고이 (Y p eHro e:)로 향하는 400 마일 상당의 철로공사가 1976 년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북부 늪지대의 지형조건으로 인해 먼 지역으로부터 대단위 자갈과 침목수송이 요구되는 난공사임에 도 불구하고 강행되고 있다. 천연가스 자원에 대한 개발은 석유개 발보다 덜 시급한 태도를 보여왔다. 이러한 상황은 중앙아시아 가스 자원이 필요량을 일시적으로 충족해 주었기 때문이다. 석유 매장지보다 더 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서시베리아 지역의 가스 산지 개발은 1980 년경 새로운 자극을 받게 되었다. 죽 1980 년경부
17) Leslie Din e s, 앞의 책, p. 58. 18) 같은 책, pp. 58-59.
제 11 장 브레즈네프 시대 이후의 시베리아
터 소련의 석유공급이 점차 팽배해지게 되자 석유자원의 내수량 을 일부 가스로 대체함과 동시에 가스 수출을 통한 외화획득 방안을 고려하였던 것이다. 제 II 차 5 개년 계획기간중 단일 유전으 로 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우렌고이 가스산지는 과거에 설치 된 2 개의 파이프 라인에 추가하여 총길이 I2,000 마일 상당의 6 개 파이프 라인도 포함되어 있다. I982 년 서 시베리아의 가스 생산량은 총생산량의 약 46% 에 이르고 있으며 I985 년까지 57% 로 상승시킬 계획으로 추진되었다 .19) 니즈네바르뜹스끄 북부는 철로가 없어 주로 안가라강의 수로를 이용해 왔다. 그러나 수로는 짧은 여름철에만 가능한 뿐이므로 엄청난 비용을 들여 육로를 건설해야만 했다. 이 육로는 제 1 단계 로 I970 년대 말 약 150 마일이 완공되 었는데, 마일당 건설비가 50 만 루블에서 IOO 만 루블까지 소요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비용은 우랄-볼가 지역의 도로건설비가 IO 만 루블에서 15 만 루블까지 지출된 것과 비교할 때 엄청난 비용이 아닐 수 없댜 20) 이처럼 건설 및 개발비용 과중으로 인해 영구정책을 위한 건설투자는 최소한도로 억제하고 소위 노동력 이동방법을 광범하 게 채택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시 말해 수르구뜨나 니즈네르뜹스 끄와 같은 기지로부터 고립된 유전 및 가스산지까지 헬리콥터를 이용한 수송작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 이 지역의 주요 유전지 인 홀모고르이 (Xo JI Moro p LI) 에는 소규모 영구 정착촌 건설안이 제기되고 있지만 기타 지역은 엄청난 하부구조 건설로 인해 노동 력 이동방법이 더욱 지속될 전망이다. 오비강 중류 및 북부 지역 개발에 있어 또 다른 어려운 문제점 중의 하나는 노동력 확보문제이다. 이 지역에는 한뜨이-만시이 (XaHTLI-MaHC:e :a ) 민족자치구가 있고 1965 년 이래 개발과 더불어
19) 같은 책, pp. 281-282. 20) P. V. Vasnev, Phy s ic a l Economi c Condit ion of Industr i a l Develop - ment in the Ob' North , Geog r afi ch eskiy e Uslov iya Asvoy e niy a Obskog o Severa, Irkut sk : Insti tut e of Geog r aph y, 1975 , pp. 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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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년에는 3 배 이상 중가한 38 만 5 천 명의 인구 를 보유하고 있으 나, 최악의 생활조 건 으로 인해 장기체류자가 적고, 인구의 역류현 상이 현저한 상태이다. 더욱이 유전개발에 필요한 숙련채굴 기술 자가 부족하여 1977 년부터 정부의 압력에 의해 볼가-우랄 지역 및 따따르-바쉬끼르 자치공화국 노동자를 일시적으로 대여받고 있는 실정이다 . 또한 일반 노무자의 유인수단으로 다른 지역보다 2-3 배 이상의 차동 월급제까지 채택하고 있으나 근본적인 해결책 울 못 찾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오비강 중부 유전지대에 대한 탐사작업은 1978 년 다른 지역 탐사반의 협조를 받아 5 백만 미터의 굴착계획을 수행하는 둥 광범한 탐사 및 개발작업이 확대되고 있다 . 21) 쯤메니 지구 북부에 대한 개발과 동시에 뜸스끄 지구 근처에서 도 새로운 개발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똥스끄 지구는 서시베리아 지역의 주요한 석유 산지 중의 하나이다 . 대규모 유전 은 1962 년에 발견된 소스니노-소베뜨스꼬예 (CocHRHo-CoBeTcKoe) 로 알려진 유전이다. 이 유전은 1970 년대 중반 약 5 백만 톤을 생산하였다. 똥스끄 지구에 위치하고 있는 또 다른 유전은 1976 년에 재생산 하기 시작한 바흐 (Bax) 유전이 있다. 이 지역 개발 울 지원학고 있는 유전촌은 스뜨레제보이 (CT p e .m eBo 0:)이댜 이 지역 개발은 1977 년 이후 바슈간 (BacroraH) 늪지대로 전진하기 시작했으며 개발은 두 갈래로 나누어져 진행되었다. 하나는 똥스 끄구주메니 지구 경계인 올레니예 (O JI eHLe) 유전지대로서 1978 년 중반부터 생산울 시작하여 시베리아 횡단 파이프 라인으로 연결 되어 있댜 다른 하나는 똥스끄-노보시비르스끄 지구선상(地區線 上)에 있는 뉴롤 (Hro po JI) 침전유역으로 1974 년에 발견된 유전이 댜 22) 끝으로 극동지역에 위치한 사할린 섬의 석유생산은 일본 군정 점령시인 1921 년부터 생산되기 시작하여 1925 년부터 1928 년까지
21) He¢r.JIH oe zoa.J Ia cT80, I978 , No. 4 . 22) HaBeCTHJ I, 1974, 4. 19., llpa B AB, 1978,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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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의 상업 특허하에 9 만 톤을 생산했다 . 그 후 소련 점령 하에 북동해협 오하 (Oxa) 가 주생산지가 되어 1930 년대에 개발이 재개되었다. 1940 년 사할린의 석유 생산량은 51 만 톤이었지만 종전 후 1945 년에 는 약 80 만 톤으로 증대 되 었다 . 1942 년에 꼼소몰 리스끄 정제소로 보내는 파이프라인이 부설됐고, 그 후 약 10 년간 의 공사 끝에 1974 년에는 제 2 의 파이프라인이 완공되었다호 비록 사할린 섬에서 생산되고 있는 유전의 수는 제한되어 있지만 1965 년 이후 약 250 만 톤을 유지하고 있다 . 사할린의 생산량은 1965 년대 말 극동지역 필요량의 40% 를 충당하였지만 1970 년대 중반에는 이 지역에서 필요로 하는 1,200 만 톤의 약 20% 밖에 충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1971 년 오하 근해개발을 통해 대규모 유전 징후를 발견했다. 그러나 근해개발 기술협력의 결핍 으로 인해 1975 년 1 월 일본과 공동개발 협정을 체결하였다 . 그 결과 1978 년 오하 남쪽 100 마일 떨어진 몬기-다기 (MoHrw 氏 arM) 유 전에서 3 백만 톤의 석유를 생산하였다 . 2') 2) 기타 자원 및 복합공업 개발 시베리아 지역의 석탄 및 수력자원 개발은 1950 년대에 시작되 어 현재에도 계속 추진되고 있다. 이같은 에너지원 개발과 더불어 알미늄과 같은 전력집약 산업이 이 지역에 위치되어 육성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전후 연속적으로 진행된 수력발전 개발사업 의 결과로 4,ooo -6,o ooMW 용량을 갖춘 세계 최대 발전소가 건설 되었다. 이는 안가라강에 건설된 브라뜨스끄 (B p aTc 1<) 및 우스 찌-일림스끄(y CTEMaHMCK) 발전소이며, 예니세이강에 건설된 끄라스노야르스끄 발전소이다. 네번째로 건설된 대규모 수력발전 소는 예니세이강 상류에 위치한 사얀 (CaHH) 발전소로 1978 년
23) CTpo U TeAbHC JJJ I'aae Ta , 1974 . IO . 9 . 24) 81 '0H OMU1 'a LI op e aHuaay wi npo M b illl .U H HOZO np u a600CT60, 1977. No. 6. p.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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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부터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다섯번째로는 안가라강 중류에 위치한 보구차느이 (Bory미 aHm) 발전소로 I970 년대 말에 착공되었 다. 여섯번째의 대규모 발전소 위치 선정과 계획착수 지점은 레소 시비르스끄(JI ecoCM6M p cK) 에서 진행중인 중류(中流) 예니세이 발전소로서 향후 I5 년 후에 완공될 전망이다. I980 년대 초 시베리 아의 수력발전 비중은 전체 생산량의 40% 이상이며 , 이 양은 제 n 차 5 개년계획중에 진행되고 있는 전력통합 계획으로 인해 계속 증가될 전망이다. 이러한 전력개발로 인해 발전소 주변은 도시화되고 있으며, 값싼 전력을 이용한 알미늄 복합산업이 미개 발 상태에 있던 예니세이-바이깔호 북부로 스며들고 있다 .25) 예니세이강 상류에 위치하여 I978 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전력을 생산하고 있는 사얀 수력발전소 주변은 비교적 생활조건도 좋아 유럽지역의 노동력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조건으로 인해 사야노고르스끄에는 알미늄 공장이 건설중에 있으 며, 이 밖에 복합제조공업(꼼비나뜨)이 추진되고 있다 . 죽 예니세 이강 좌편에 위치한 아바깐 (A6a J< aH) 지구에서 수송장비(차량) 산업과, 예니세이강 우편의 미누신스끄 (Mlm y c 血 CK) 에서 다양한 전력장비 제조업이 건설중에 있다 .26) 대량의 값싼 전력생산울 기초로 최근에 형성중인 사얀 꼼비나 뜨는 근대적인 공업설비를 갖춘 IOO 여개의 대기업이 참여할 계획 이댜 국가적인 특징을 지니고 기여하게 될 경제부문은 위에서 언급한 전력생산 및 이룰 바탕으로 한 전기야금(우선 먼저 비철금 속 야금), 그리고 기계공업이다 . 사얀 꼼비나뜨의 핵심은 약 650 만 Kw 출력 의 사얀-슈센스끄 수력 발전소 (Ca JI HO· illym eHCK8 JI r8C) 로서 연간 230 억 Kwh 의 전력을 발전할 예정이었다. 이 발전소의 건설은 제 n 차 5 개년계획기 (1981-1985) 에 기본적으로 완공되었으
25) Theodore Shabad , Siberia n Develop me nt and Sovia , Pol ict in East Asia , The lnst iut e for Far East e rn Stud ies Ky ungna m Univ - ersit y, SeouL Korea, Asia n Persp e cti ve , Vol 6 , No. 1982 , pp. 198-199. 26) B. B. Co1< 0 JI H ROB&, CasHc 1'따 Ha po玩 oaCTeeHH 피 a 1'0M n-'ti1 'c, MooRBa, ffa~ 8T8J II,C TBO MHCJ IH , 1974 , CTp ,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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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이 전력의 주된 수요공업인 사얀 알루미늄 공장의 일부도 제 II 차 5 개년계획기에 완공되었다. 사얀 꼼비나뜨내의 최대 기계 공장인 아바깐 부근에 건설중인 차량 제조공장은 향후 소련 최대 의 차량 제조공장이 될 것이다 . 죽 매년 4 만 량의 대형 화차를 국민경제에 공급할 예정이다. 이 밖에 다양한 전기기계 공장중 주요 공장은 미누신스끄 및 그 부근에 배치될 예정이며 II 차 5 개년 계획기간중 유럽 • 러시아 지역으로부터 상당량의 공장이 이전되어 최초의 전기제품을 생산하였다. 이로써 이 지역 노동자 수도 1 만에서 1 만 5 천 명이 추가로 필요하게 되었다.27) 이처럼 사얀 복합공업지대는 동시베리아 지역의 미래를 지향한 주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으며 근래 대규모 투자가 활발하게 이루어 질 공업지역이다. 제 II 차 5 개년계획중에 추진된 시베리아 전력통합 계획과 더불 어 시베리아의 풍부한 고체연료를 전력화하는 계획이 추진중이 댜 이 사업은 석유자원에 대한 국내 소비절약 정책으로 인해 장기개발 계획의 성격을 띠고 있다. 제 1 단계로서는 대규모 저질의 갈탄을 보유하고 있는 깐스끄-아친스끄 (KaHcK-A 'I HHCK) 유역 이 었 댜 깐스그아친스끄 개발계획은 탄광 주변에 화력발전소를 건설 하여 고압 송전소를 통해 유럽 전력소비지로 보내는 사업이다. 깐스끄-아친스끄 유역의 화력발전소 건설에 추가하여 갈탄으로부 터 액화연료를 추출하는 계획이 설계중이다. 깐스끄-아친스끄 꼼비나뜨의 형성은 수천억 톤의 석탄이 집중적 으로 매장되고 노천굴로 인한 개발상의 경제적 효율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죽 유럽 • 러시아 지역의 도네쯔끄 탄전에 비해 8 배의 투자설비가 가능하고, 출탄능력에 있어서도 동일한 투자비용에 의해 꾸즈네쯔끄 탄전보다 평균 6 배의 출탄효과를 얻을 수 있으 며, 혁신적인 개발 시스템 도입 및 최신의 초대형 고성능 기계 이용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깐스끄-아친스끄 탄은 수분 함유량이 극히 높아(약 40%) 국민경제 활동에 있어 다소 문제를
27) A. r JIB~꾜 men (ed .) , 앞의 책, p. 36.
야기시키고 있다 죽 수분함유량이 높아 쉽게 금이 가고 급속히 산화하여 발화되고 겨울에는 얼어버리기 때문에 장기저장과 장거 리 수송에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 밖에 발열량도 1kg 당 2,500-4,oooKcal 로 낮은 열량을 갖고 있댜 이같은 결함으로 깐스 끄-아친스끄 탄의 이용방법은 채탄지로부터 가까운 곳에 대형발전 소를 건설하여 이용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련 화학발전소 중 초대형급인 나자로프 (Haaa p oB) 화력발전소가 이미 가동중에 있으 며 베 레조프 (Bep eaoB) 화력 발전소가 가동될 예정 이다. 이와 같은 발전소 건설은 발전 단가가 유럽 • 러시아 지역에 위치한 발전소 의 단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고, 투자액에서도 수력발전소 보다 현격히 낮기 때문에 활발히 진척되고 있다. 이같은 이유로 유럽 • 러시아 지역으로 송전할 경우에서도 가격상으로 이익이 되고 있으나 향후 해결해야 될 과제는 단지 초고압 송전선 건설 과 원거리 송전을 위한 기술상의 문제이다 . 28) 그러나 기술상의 문제는 투자배분 여부에 달린 문제이며 효율적인 다량의 탄을 이용한 전력생산과 더불어 타지역과 같은 꼼비나뜨 건설이 앞으 로 활기를 띠게 될 것이다 . 다음은 다소 제한된 규모이지만 생활조건이 좋지 못한 북극에 서, 니켈과 백금 원료인 플라티늄 생산의 중요성을 띠고 있는 노릴리스끄 (Ho p H Ji bC I<)의 복합공업 육성이다 . 이 지역은 광산과 제련업 개발을 기반으로 1980 년대초 인구 20 만 명으로 부상하였 댜 브레즈네프 통치기에 있어 두드러진 개발영역은 해양수송 수단의 확대사업이었다 . 과거의 교통수단이었던 예니세이강 수로 이용이 동기 결빙으로 인해 불편하고, 유럽 지역과의 왕래에 있어 서도 지리상으로 멀기 때문에 북해로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196o 년 이래 운항하기 시작한 44,000 마력의 핵연료 추진식 쇄빙선 레닌호에 이어 1970 년대 말 75,000 마력의 핵추진식 아르끄찌까 (Ap KT HKa) 및 시비리 (CH6H p b) 쇄빙선이 운행되고 있으며, 이와 유사한 성능의 로씨야 (Pocc11 리호가 건조중이다. 이와 같은 쇄빙
28) 같은 책, p. 35.
선의 활동으로 노릴리스끄는 1 년내내 북해를 통해 서부와 연결되 어 있댜 동시베리아 및 극동지역은 유럽지역과 너무 원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서시베리아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상태이 댜 단지 지금까지의 추세로 보아 개발되고 있는 자원은 금과 다이아몬드 같은 귀금속과 주석, 운모, 형석, 리듐 및 끄라스노까 멘스끄 (R p acHo I< aMeHC I<)에서 채굴되는 우라늄과 같은 전략자원이 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복합공업이 발달하고 있는 영역은 풍부한 석탄 및 목재자원과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베리아 횡단철로 주변 이다 또한 현재까지 개발된 공업은 석탄을 기반으로 한 알미늄 제조업과 목재를 원료로 하고 있는 펄프, 에틸 알콜, 합성고무, 비스코스 라이온 제조업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개발 영역의 측면 에서 볼 때 동시베리아 및 극동지역의 개발은 귀금속 자원을 중심으로 한 국지 개발의 성격을 띠어 왔으며, 공업 역시 시베리 아 철로 연변의 남부지역에 불과한 상태이다 . 동시베리아 및 극동지역 개발양상은 1970 년대 중반 이래 새로 운 변화의 국면을 맞고 있다 이는 과거 소극적이고 국지적 개발 자세로부터 보다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지역개발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1974 년부터 동시베리아 및 극동지역에 부설중인 3.100km 상당의 BAM 철도에서 적극적인 개발자세를 엿볼 수 있 다. 그동안 BAM 철도 부설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으나 공통된 견해는 소련지도층이 이같은 야심적인 사업을 통해 소련 의 경제력을 유럽 중심에서부터 극동까지 확장시키려는 시도로 보고 있댜 죽 BAM 철로 부설은 군사전략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다. 죽 BAM 철로는 시베리아 횡단철로보다 중국국 경에서부터 더 깊숙한 북부에 위치함으로써 안보적으로 시베리아 횡단철로의 교체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경제적으로 BAM 철로는 과거에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자원개 발을 촉진할 것이며 중요성을 갖지 못한 비귀금속 자원개발을 본격화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자원개발은 소련 국내경제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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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지대한 기여를 할 것이며, 동아시아 제국과의 대외무역에 있어 서도 확고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BAM 철도 는 조만간 남북으로 향하는 지선을 부설하여 광범한 자원이 매장 되어 있는 북부지역으로 깊이 침투할 예정이다. 이에 대한 조사가 이 미 완료되 어 동 • 서 주선(主線)상의 교차점 인 뜨인다 (T 묘 HAa) 로부터 야꾸뜨스끄로 향하는 BAM 철로 지선이 부설되고 있다2 9) 이러한 BAM 철로의 수송기능은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의 새로 운 목재, 석탄, 비철금속 및 철금속 자원개발과 동아시아와 태평 양 지역으로의 수출로로서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BAM 철로는 부수적으로 시베리아 횡단철로의 과중한 수송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 이러한 운송로로서의 기능은, 현재 일본 선박회 사와 경쟁중에 있는 일본으로부터 시베리아 횡단철로를 경유하여 유럽지역으로 수송되고 있는 화물을 보다 많이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중요성도 갖고 있다. 대외무역의 측면에서 BAM 철로는 태평양 제국에 대한 석탄, 목재, 석유 및 액화 천연가스와 같은 자원 수출로로서의 역할이 예상된다. 일본의 경우 지리적으로 인접하기 때문에 경제적일 수밖에 없는 소련의 자원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I96o 년대말 이래로 확대일로를 걷고 있다. 이미 일본의 극동지역으로부터의 석탄과 목재 수입량은 상당량에 이르고 있다. 더욱이 자원확보 노력의 일환으로 공동개발 사업을 통한 목재, 석탄, 제철, 유전개발 참여 는 I970 년대 중반 이후 활발히 진척되고 있음을 볼 때 BAM 철로 의 기여도는 가히 짐작할 만하다. BAM 철로는 1974 년에 착공되었 으며, 연평균 200 마일의 공정으로 진행하여 I983 년에 완공할 예정 이었으나 대규모 사업이 지닌 차질로 인해 I984 년 m 월 완공되었 댜 그리고 제 n 차 5 개년계획 (I98I-I985) 중에는 지역수송 시설, 전력공급원, 건축시설, 건축자재 및 식량공급과 같은 하부구조 개발에 치중하였다. 본격적인 자원개발은 제 12 차 5 개년계획 (1986- 1990) 기간부터 진행되고 있다.
29) Si b eria n Develop me nt and Sovie t Poli cy, 앞의 책, p.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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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M 철로 건설로 인해 자원개발이 구체화된 지역은 남야꾸뜨 (IO 禪떠 HRy T ) 지방의 네륜그리 (He p IOHr pH) 석탄광이다. 네륜 그리 노천광은 1970 년대 말부터 일본과의 경제건설 차관 협정 하에 개발되었으며, 일본은 자국의 제철공업 연료원 확보를 위해 투자 및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 네륜그리 탄전의 매장량은 400 억톤 이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가치가 높은 원료탄으로서 풍부 한 탄충이 2 만 5 천km'에 걸쳐 있다 . 제 II 차 5 개년 계획기간중 이 탄광은 연간 1,300 만 톤의 채굴능력과 연 900 만 톤의 석탄공장이 건설되었으며, 탄의 대부분은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한편 이곳에 서 생산되는 석탄을 원료로 한 화력발전소도 건설중에 있다. 이들 발전소로서는 원료탄의 탄층에 도달하기 위해 제거된 표충의 산화탄을 기반으로 출리마깐(qyJI bMaKaH) 화력발전소가 가동중에 있으며, II 차 5 개년 계획중에 건설된 출력 120 만 Kw 용량의 네륜 그리 화력발전소도 제 1 기 공사가 본계획 기간중에 가동되었다 . 더욱이 이 곳의 석 탄은 하바롭스끄 (Xa6a p oBcR) 지 방 및 아무르 (AM yp)주의 화력발전소로도 이용될 예정이다 .30) 남야꾸뜨 꼼비나뜨는 철광석 중산에 장래성이 있는데 , 이의 기반은 알단(A.rrp; aH) 철광상(鐵鑛床)이며 고도의 철분 함유량을 가진 철광석이 25 억톤 이상 매장되어 있다 . 이같은 다량의 철광은 인접지역에 원료 탄전을 두고 있어 극동지역에 철광기지 건설과 기계공업 육성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석탄 및 철 광석 개발 외에 비철금속 개발도 활발하다. 이 중 가장 야심적인 개발 사업은 우도깐(y ROKaH) 동광 개발과 몰로데즈느이 (Mono ;n; emH Li a) 석면광 任綿鑛) 개발계획이다. 이 계획은 상당한 액수의 투자가 요구됨으 로 개발에 앞서 먼저 면밀한 검토가 선행되었다.그리하고 제 II 차 계획기간중 구체적인 개발계획이 완료된 후 1985 년부터 본격 적으로 착수되었다. 특히 소련은 상기 계획 추진에 있어 일본의 참여를 계속 요구하고 있다 . 31)
30) A. rna~meB (ed .) , 앞의 책, p. 37. 31) B. qi. 3a~op o >K a ua, Problems of Develop m ent of th e Udokan Cop pe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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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p os it , Sov iet Geog ra p h y , 1981 , 3 , pp. 325-3 31.
BAM 철로 완공 이후 극동지역에 새로운 철 및 제철공업을 개발할 계획이 수립되었다. 1985 년 당시 극동지역에는 꼼소몰리스 끄에 1 백만 톤 용량의 제강 공장이 하나 있었을 뿐이며 , 이 공장 은 그 지역에서 조업하고 있는 기계제작 공업의 수요량 중 50 %밖에 조달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 향후 1990 년 극동지역의 제강 수요량은 360 만 톤으로 상승할 32) 전망이므로 제철공업 육성 은 시급한 상태가 아닐 수 없다. 현재 새로운 제철 및 제강공업 육성지구로는 철광과 석탄광을 보유하고 있는 남야꾸뜨가 거론되 고 있댜 또한 일본은 이 사업의 개발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주 고 있다
32) V. Mozhin ed. , 앞의 책., p. 22.
BAM 철로 건설 이후 구상되고 있는 또 다른 광공업 개발은 꼼소몰리스끄 인접에 있는 솔네치느이 (Co JI H0 '1 HLI 0:) 주석공업 확장을 포함하여 칼륨 및 인산비료 개발사업이다 . 칼륨 매장지는 바이 깔호 북부 끝에 위 치 한 스인느이르 (CLIHH Lip) 산맥 안에 있 다 이 광산에는 알미늄 원석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소련은 예니세이 및 안가라강의 값싼 수력전력을 이용하여 세계 제 2 의 알미늄 공업을 육성했지만 알미늄 원석이 부족한 상태이다 그래서 서아프리카 기니아 (Gu in ea) 에서 알미늄 원석인 보크사이트를 개발하여 수입하고 있으며, 수입량은 전체 사용링:의 40% 이다. 그러므로 BAM 철로의 부설로 인한 광업자원 개발 이외 에 철로 주변의 목재공업 개발은 가장 현저히 나타나고 있으며, 상당량의 목재가 태평양 제국으로 수출될 것으로 보인다. 태평양 제국에 대한 수출 확대책은 이미 일본과의 공동개발을 통해 활발히 준비되어 왔다. 이는 1970 년 일본과의 경제협력으로 나호드까 (Haxo 'A Ra) 만의 브란겔랴 (Bp aHre JI H) 반도(半島)상에서 추진 시킬 보스또치느이 (BocTO 'I HLIR) 항 건설사업이다 . 보스또치느이항 건설은 나호드까항의 적하 용량 5 배인 최대 용량 4 천만 톤으로 설계되 었다. 제 1 단계 공사는 1973 년부터 1978 년에 완공되 어 연간
제 ll 장 브레즈네프 시대 이후의 시베리아 개발 253
8 백만 톤의 적하용량을 갖춘 4 개의 부두를 갖추었다. 제 2 단계 공사는 약 1,500 만 톤의 적하능력 설비공사로 1980 년대 중반에 완공될 예정이었다. 이로써 보스또치느이항은 향후 극동 및 태평 양 유역 국가들과의 중추적 무역항으로 기여할 것이다 . 93) 소련의 동부지역에 대한 개발은 서시베리아로부터 동시베리아 지역을 거쳐 극동지역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BAM 철로 부설을 통해 남부에서 북부로 향한, 중심지를 깊숙이 파고드는 개발의 추세를 보이고 있다. 더욱이 꼼비나뜨 형태의 개발방식으로 보아 앞으로 상당기간의 개발기간이 요하며, 막대한 투자비 및 기술인 력의 필요, 그리고 부진한 경공업에 대하여 무엇보다도 관심이 쏠릴 것으로 보인다. 4. 고르바쵸프 시대의 개발계획 고르바쵸프 서기장은 1986 년 블라디보스또끄와 1988 년 끄라스노 야르스끄 연설을 통해 극동의 장기적 발전을 계획하는 종합적인 구상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 〈장기극동종합계획〉의 초안은 하바롭스끄의 경제연구소와 과학아카데미 극동지부에 의해 작성 되었는데, 보다 진취적인 내용이 가미되어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의 승인을 얻게 되었다. 이 계획의 목적은 2000 년까지 극동의 사회발전의 모든 지표를 다론 지역의 평균지표에 뒤떨어지지 않게 하고, 극동의 산업구조를 개선하며, 태평양지역의 분업체제 속에 극동경제룰 편입시키려 하는 것이다. 현재 극동의 경제 • 사회발전의 모든 지표는 소련의 평균지표보 다 하회하고 있다 . 이렇게 된 가장 큰 요인은 · 장기적인 안목에 입각한 국가투자정책이 수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전통적인 자원
33) Theodore Shabad, Si b eria n Developm e nt and Sovie t Poli cy, 앞의 책, pp. 207-2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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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취산업에만 의존하여 가공산업 부문이 육성되지 못했기 때문이 기도 하다. 따라서 국제 시장가격의 약세로 야기된 수익성의 저하 로 개발의 여력이 없어졌으며, 노동생산성이 낮고 혹독한 자연 환경으로 말미암아 노동자의 정착률도 저조한 형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장기극동종합계획〉이 책정 되었고, 극동지역에만 1,980 억 루블에 해당되는 방대한 자금을 투자할 계획이다. 그러나 이 투자액의 재원확보 문제가 현실적인 난관에 부닥친 만큼 국제시장의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합작기 업법이 개편되고 (1987 년 1 월) 개방정책에 따른 외국기업의 인센티 브를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극동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추진되고 있는 시베리아 • 극동지역의 개발현황과 그 계획을 살펴보면 다음 과같댜 석유 • 천연가스 생산량은 2000 년까지 원유를 3.1~3.8 배, 천연가 스를 7.2 -9 .3 배 중가시킬 계획이다안 제 n 차 5 개년계획 (1991-1995) 기간에 서야꾸뜨 및 사할린 대륙붕의 신규 광상이 개발되고 미 • 소 • 일 3 국의 탐광 개발사업으로 에너지원으로서의 천연가스 와 원유 생산은 배가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사할린의 석유 • 천 연가스는 극동지역의 자체 소비량을 충당해야 할 임무를 띠고 있는 만큼, 연간 300 만 톤의 산유량과 IO 억굽 천연가스를 생산하 기 위해 혹독한 자연조건속에서 개발에 필요한 거대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1985 년 현재 극동지역의 발전량은 약 400 억 Kwh 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수력 발전량은 78 억 Kwh 인데 이는 수력발전 가능량에 비추어 보면 불과 2.6% 에 지나지 않으므로 35) 향후 수력발전 의존 도는 거의 무궁무진하다 하겠다. 물론 자금난의 애로사항으로 화력발전소와 원자력발전소도 계획중에 있으며, 실질적으로 극동 발전량의 43% 가 여전히 석탄에 의존하는 화력발전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더불어 석탄개발 계획도 활발히 추진되어 I995 년까지
34) K. F. St ro ed, Economi c Geog r aph y (M oscow, 1988) , p. 78. 35) Vestn i k St a ti st i ki, No.12, (Moskva, 1988)
제 11 장 브레츠네프 시대 이후의 시베리아 개발 255
4.1-4.5% 신장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증산 대상지역은 남야 꾸뜨 탄전의 데니소프 탄광, 츄리마깐 탄광, 네륜그리 탄광 둥으 로서 연간 80 0- 900 만 톤 정도가 채탄될 것으로 전망된다. 중공업 부문의 기간을 이루는 철강산업은 극동지역에서 매우 취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하바롭스끄 지방에 아무르스따 리 제강소(연생산 IOO 만 톤)와 이와 인접해 있는 꼼소몰스끄 전기 제강소 (200 만톤)가 이 지역의 철강 생산을 맡고 있지만, 절대수의 부족으로 수백만 톤의 철강제품을 유럽지역으로부터 들여오고 있는 실정이다. 제 I2 차 5 개년 계획기간중에도 제철소 건설작업이 명문화되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생산되는 양온 이 지역의 수급 균형에 미치지 못한 관계로, 거리가 먼 유럽지역보다는 일본과의 협력관계가 더욱 긴박하게 요구되는 부문이기도 하다 . 극동의 비철금속 가운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다이아몬드 • 주 석 둥으로서 국가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투자 재원은 야꾸뜨 자치공화국, 마가단주, 츄꼬뜨 지구에 있는 새로운 광산개발 및 광업소 건설에 충당된다. 하바롭스끄 지방 및 연해지 방에는 광석의 화학적 야금처리를 위한 4 개의 비철금속 기업 신설이 계획되어 있다. 이는 극동지역을 단순한 원료공급지가 아닌 일련의 가공공업 기업지대로 건설하려는 목적하에서 이루어 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극동의 산림자원은 풍부하면서도 반출되는 목재의 60% 이상은 통나무 그 자체로 공급되고 있다 .36) 원목조달 의존형의 임업부문 을 목재가공 부문 중시형으로 재편하는 것이 2000 년까지의 주요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대규모 건설 계획으로 아무르주의 대형 펄프판지 콤비나트 신설, 사할린주의 펄프공장 신설, 채벌현장 부근 목재의 화학적 • 기계적 처리공장 건설 둥이 있는데, 투자의 대부분이 목재가공 부문 설립에 중점을 두고 있다. 소련 전체 어획량의 약 40% 를 생산하고 있는 극동의 어업자원 온 장비의 노후화와 노동력의 비효율적 운영에도 불구하고 중요
36) St ro eb 앞의 책, p.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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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냉동창고나 수산가공공장, 수리공장 둥 기계설비가 부족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장비의 현대화와 더불 어 520 만 톤 증산계획을 달성하기 위한 새로운 가공부문에 집중투 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 따라서 가공어선의 설비갱신 및 공선(工 船)의 신조가 계획되어 연해지역의 어류 가공공장에서 산출되는 어육제품이 기대되고 있다. 아울러 연어 • 송어 등의 양식장을 개조하고 신설하여 부족한 농축산물 생산을 대체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각적인 개발계획은 외국 자본의 유치효과에 따라 그 성공 여부가 가늠되어지겠지만 현실적으로 크게 낙관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산업철도로 완성된 BAM 철로의 경우만 보아 도 경제성의 부족으로 정부로부터 매년 보조를 받아야만 운영되 는 실정이니만큼, 높은 속도의 발전계획이란 그 실현 가능성이 극히 미 약하다 하겠다. 더군다나 열악한 하부구조(infr as t ruc tu re) 는 노동력 부족과 함께 시베리아 • 극동개발의 커다란 장애요인이 되고 있으니, 사회자본의 재투자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경제구조의 개편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현실이다 .
제 12 장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 개발의 향방 1. 국제협력의 필요성 소련측 입장에서 볼 때 시베리아 개발은 소련의 지속적인 경제 성장과 더불어 공업력의 중추요소로 간주되어 변모되어 왔다. 이제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은 산업의 원동력인 석유, 천연가스, 석탄, 수력발전과 같은 에너지원과 목재자원 생산의 기본 산지가 되었으며, 지속적인 개발추이와 유럽지역 자원의 고갈현상으로 보아 조만간 소련경제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굳히 게 될 것이다. 이 밖에 귀금속을 포함한 철 및 비철금속 자원도 생산비중 면에서 에너지원 못지않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풍부 한 자원을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 지역개발 원칙 및 자원과 인접 한 지역내의 공업육성 원칙에 의해 관련공업 개발도 자연히 중대 되고 있다. 이와 같이 풍부한 자원개발과 관련공업 육성은 향후 소련의 국력증대와 직결되는 문제이자 요망 사항이므로 급히 서두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문제는 엄청난 개발비용 조달이다. 이 지역은 유럽지역 으로부터 원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개발에 필요한 장비, 건설자
재, 소비재 수송비용이 많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엄청난 하부구조 설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생활조건의 최악상태로 인해 노동력 확보가 어렵고 기술 및 장비의 후진성까지 겹쳐 개발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기술 및 장비의 후진성 문제는 브레즈네프 체제의 과학 • 기술혁명과 생산의 효율성 강조로 더욱 현실화되었다. 이와 같은 복합적 난제 해결을 위해 소련은 I965 년 이래 서방세계와의 국제협력을 통한 개발을 모색하게 되었 고, 시베리아의 에너지 및 목재자원 수출을 통해 과중한 투자비를 충당하고 있댜 현재 소련의 성장전략에 있어 대외 선진기술의 도입은 새로운 국면으로 대두되었다. 197 6- 1980 년 기간중 선진장비 수입은 매년 50-60 억 달러에 이르렀다. 주요 수입장비는 건설용 중장비, 채유 (採油) 및 채광장비와 시베리아 개발을 위한 기술이었다 .1) 이같은 기술 및 장비도입이 소련의 산업생산 체계를 급변시킬 수는 없지 만,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부분적 수용까지 대두되고 있다. 이 밖에 소련은 상당량의 곡물을 주기적으로 미국을 포함한 카나다 로부터 구입하고 있다. 이러한 원인은 기후불순과 농업경영 불합 리로 인한 불치의 고질병이다. 소련이 서방세계로부터 수입되는 곡물비용은 연 40 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룰 타개하기 위해 고르바쵸프 정부는 농지의 사유화 문제까지 검토하고 있는 실정이댜 이상과 같은 전반적인 기술 • 장비, 곡물수입이 국제수지 균형을 압박하고 있어 자원개발을 통한 자원수출이 불가피하며 개발차관 도입이 필수요인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자원수출 문제는 꼬스이긴 생존시 브레즈네프와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별다 론 돌파구를 찾지 못해 자원수출과 개발을 위한 국제협력이 가속 화되고 있다.이에 따라 소련은 장기·저리차관을 갈구하고 있으며, 한편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자원수출 시장을 찾고 있는 상태이다.
1) Hunte r Holland ed. , The Futu re of the Sovie t Economy :1 978-1985, Boulder:Westv iew Press, 1978, p. 22.
서방, 특히 일본측 입장에서 볼 때 시베리아 및 극동에 대한 관심은 자원, 시장성, 투자로 집약되며, 이들 나라들은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보유하고 있는 상태이다 . 소련방 과학아카데미와 세계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의 뻬뜨로프 (AMHT pHR IleTp O B) 교수는 1970 년 일본을 방문하여 일·소 무역추이에 근거한 국제협력 문제를 언급한 바 있다. 그의 발언에 의하면 1970 년 당시 소련의 대서방 제국과의 교역비율 중 일본이 점하고 있는 비중은 3% 에 불과하지만 계속 상승할 것으로 전망하고, 시베리아 및 극동문제에 필요한 직물류와 다른 소비재의 수출 가능성에 대해서도 보완적 거래 입장에서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뻬뜨로프 교수가 주장하고 있는 일본과의 거래 이점은 수송 문제이다. 그에 따르면 유럽 • 러시아로부터 극동까지 철로를 통한 수송시간이 IO 일이나 소요됨에 비해 일본의 니가다항으로부터의 수송시간은 단지 0.5-1 일밖에 소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는 극동에서의 활발한 거래로 양국간의 긴장완화라는 공동이해 도 기대할 수 있다고 암시한 바 있다 .2) 일본측에서 볼 때 소련 경제계획에 참여하려는 관심은 다음과 같은 동기에서 유발되었다. 죽 무역확대의 열망과 경제적이며 믿을 수 있는 공업 및 에너지 자원 공급처 확보에 있었다. 일본 경제에 있어 무역확대는 고도성장과 지불균형 유지의 결정적 요소이다 특히 국제재정 체계의 불확실성 속에서 일본은 수출시 장을 다원화시켜야만 했다. 이러한 다원화의 노력표출로 소련과의 무역량을 증대시키려 했던 것이다. 소련은 1950 년대 이후 대외무역 활동을 증가시킴에 따라 일본 과의 무역확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양적 종대도 이루었다. 195 0- 1965 년간 소련의 교역량은 5 배로 증가했으며, 이러한 중가추 세는 1965 년 이후에도 아래와 같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2) Kii ch i Saek~ 앞의 책, p. 2.
소련의 대서방 교역비율(%)
1965 1970
자료 : B11et1 1U J 1J/. Top z oe./I Ji CCCP e 1965z., MocKsa, 1966
소련 대외무역의 성장추이(백만 루블)
1965 1970
자료 : Hap o 811oe Xoa11acTBO CCCP B 19'1 0 2~ Moc1< n a, CTaTHCTHI
일본은 이같은 소련의 교역확대 정책에 따른 유럽 서방제국의 소련 시장 침투에 자극을 받아 소련으로의 시장진출에 있어 최적 기반(最適基盤)으로 삼기 위하여 시베리아 개발협력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일 • 소 교역확대는 1966 년 이래 본격화된 것이 다. 일본의 경우 경제성장과 수출확대간의 절대적인 밀착관계는 안정된 자원 및 에너지원 공급확보에 달려 있다 . 일본은 거의
90% 에 달하는 기본자원을 외국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석유소비 는 I970 년 230 백만 킬로리터에서 I985 년에는 800 백만 킬로리터로 상승되었다잡 이러한 자원의 대외 의존이 일본경제를 국제적 상황 에 극히 민감하게끔 미치고 있어 일본으로서는 모든 국가들과 친선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자원공급원을 찾아야 할 입장이다 . 이러한 절박한 상황이 일본으로 하여금 필수자원의 공급원 다원 화를 추진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소련과 시베리아 및 극동개발 프로젝트에 협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소련과의 경제협력을 통해 저렴한 가격의 자원을 대량 공급받을 수 있는 기반을 계속 다져나갔으 며, 이러한 기반을 일 • 소 공동개발 프로젝트의 참여 폭 확대를 의미한다. 소련산 자원의 가격저렴은 지리적 근거리에 서 오는 이점도 있는데, 예를 들어 미국산 석탄 1 톤의 가격이 일본에 도착시 8 달러 드는 데 비해 소련의 극동산 석탄은 3 달러 밖에 안 된다 이러한 자원의 가격요인이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에 서 대의협력개발 전망을 밝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 2. 협력의 과정 및 현황 소련과 일본간의 광범한 이해 일치와 절실한 동기로 인해 1966 년 2 월 협상이 시작되었고,그 결과 일·소 공동경제위원회가 설립되어 경제적인 공동사업 가능성을 심사하게 되었다. 일 • 소 공동경제위원회의 구성은 소련대표단이 계획 및 교역기관에 소속 된 인사들로 구성된 데 비해 일본은 재계 및 사업가들로 구성된 민간인들이었다. 다음은 자원보고인 시베리아와 지리적으로 인접 하여 이익관계에 가장 민감했던 일본을 중심으로 양국간의 협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1966 년 3 월에 개최된 제 1 차 회담에서 토의된 사항은 사할린
3) 같은 책,p. 5.
제 12 장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 개발의 향방 263
북부의 천연가스 프로젝트, 서시베리아 석유와 가스 매장지 개 발, 극동의 항구시설 확장, 극동의 목재 및 펄프공업 개발문제였 다 .4) 이 회담은 구체적 협정으로 결말을 보지 못했지만 소련의 희망사항과 일본의 참여범위를 파악하는 데 크게 기여한 회담이 었댜 제 2 차 회담은 1967 년 6 월 12-14 일간 개최되어 일반협정을 맺는 데까지 성공하였다. 이 협정은 소위 〈 KS 공식〉으로서 향후 시베리 아 개발문제를 다루고, 생산물을 배분하는 데 있어 모델 케이스룰 만들어 주게 된 의미 있는 협정이었다. 규정된 협정내용을 소개하 면, (I) 일본은 소련에 총 163 백만 달러 상당의 개발 및 소비재를 3 년에 걸쳐 공급하고, 이에 대해 소련은 163 백만 달러에 상응하는 대가의 목재 8 백만 입방미터를 일본에 선적하여 보낸다. (2) 소련 은 163 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20% 를 예치하고 예치분에 대한 이자 는 5 년간에 걸쳐 5.8% 로 한다. (3) 일본의 소비재 수출 30 백만 달러에 대해 소련은 1969 년에 I5 백만 달러를 지불하고 나머지는 향후 4 년 후에 지불한다 . (4) 소련 목재 가격은 I968 년 가격을 기준으로 1969 년과 1970 년은 입방미터당 2I 달러이며, l97I 년부터 매년 기준가격의 I% 를 상승시키도록 한다 . 이 협정의 유효기간은 1969 년부터 1973 년이며, 협력확대를 위한 회담은 1972 년 말에 열기로 합의한다 .5) 일 • 소 공동경제위원회의 제 2 차 2 기 회담은 1968 년 12 월부터 1970 년 I 월중에 개최되었으며, 세부 분과위원회를 통해 공동사업 에 대한 전반적인 제안을 협의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상호 합의사항 없이 폐회되고 말았다. 제 3 차 회의는 1970 년 2 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사항을 합의, 협정을 맺는 성과를 올렸다. 합의사항은 (1) 브란겔만 내의 신항구(보스또치느이항) 건설을 위한 장비와 자재
4) Main ich i Shim b un (Toky o) , 1¢ 6 . 3 . 13., Nic h on Keiz a i Shim bun (To-ky o ), 1¢ 6. 3. 23. 5) Kii ch i Saeki, 앞의 책, p. 6.
의 설계 및 공급협력에 관한 계약협상 촉진, (2) 야꾸뜨스끄 자치 공화국과 사할린섬 내의 천연가스 자원개발을 위한 기술 및 경제 적 연구진척, (3) 일본에 석탄과 철광석 공급문제의 조기 타결 목표로 정보의 준비, 교환하는 문제를 진척, (4) 일본에 제공할 짚 (c hip s), 펄프, 목재의 생산개발에 관련된 상업적이고 기술적인 문제의 협상 진척, (5) 벌목과 철, 강철, 트랙터, 건설장비 및 가재 생산 기술의 전시, 그리고 전문가의 검사룰 통한 과학적이고 기술 적인 교류촉진이다 .6) 이처럼 이 협정은 상호협력 부문과 그 범위 를 합의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 협정에 의거, 제 1 단계로 연 1,000 만 톤의 석탄과 80 만 톤의 목재짚 및 기타 화물처리 능력을 보유하게끔 건설 계획한 브란겔 항만개발에 집중되었다. 그 결과 1968 년 12 월 공동위원희가 개최 되어 항구 수송위원회를 설립하고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처리하 기 시작했다. 그 후 1970 년 12 월 18 일 제 4 차 회담에서 브란겔 항만건설 프로젝트에 관한 기본협정이 맺어졌다. 이로써 일본은 건설장비와 기계를 공급하게 되었고, 그 시설용량도 연 12-14 만 톤으로 확정했으며, 7 년에 걸친 현금상환 조건으로 6% 이자의 차관 8 천만 불을 제공하였다 . 이 협정은 1971 년 9 월 22 일 일본 외무성과 소련 대외무역성간의 지원각서를 교환함으로써 공식화 되 었다7) 부가적으로 양 정부는 1971-1975 년간 516 억 불 상당의 새로운 5 개년무역협정을 가조인했다. 그러나 시베리아 지역개발 공동경제 프로젝트에 관한 구체적 협정은 맺지 못했다. 그 후 1971 년 4 월에 개최키로 계획된 제 5 차 회담은 두 · 번씩이 나 연기되었다. 소련의 끈질긴 속개 열망에도 불구하고 연기된 원인은 경제협력 규모에 대한 일본의 불안과 염려 때문이었다. 일본 상시들은 보장 없는 대규모 현금상환이나 물품인도를 기피 했으며, 서시베리아 유전개발과 극동지역의 파이프라인 건설공사 진행 전에 아주 세부적인 자료를 열망했다. 마침내 1972 년 2 월
6) Nih o n Keiz a i Shim bun, 1970 . 2 . 16 . ·7) Nih o n Keiz a i Shim b un, 1971. 9. 29.
제 12 장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 개발의 향방 265
21-24 일간 제 5 차 회담이 소집되었으며 , 협상진전을 의미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게 되었다 . 공동성명에 의하면, 일본과 소련은 파이 프 라인 건설과 소련이 일본으로부터 구매하게 될 철관(鐵管) 및 기타 장비에 대한 차관조건에 관해 쌍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협정 초안 작업을 각각 작업집단에 의뢰할 것이다 8) 라는 내용이었 댜 이 회담에서 소련은 그동안 지체된 협상을 가속시키기 위해 서시베리아의 쯤메니 유전을 방문 및 조사토록 일본에게 허락하 였고, 일본정부는 답례로 외무성 , 재정성, 국제무역 및 공업성의 고위관료를 파견하여 관심을 보였다. 소련은 1973 년 5 월 I 일 메이데이를 시발로 일 • 소 및 자본주의 제국과의 경제협력을 표면화시켜 호소하였다 . 5 월 5 일자 쁘라브다 지는 〈상호이익의 기초 위에 소련의 대외경제 관계의 신형태〉, I6 일자에 〈사회주의와 외국간의 경제협력〉이란 제하의 사설을 싣고 소련과 상이한 체제간의 경제협력 가능성 및 이러한 경제협 력이 레닌의 노선에 모순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브레즈네프 정책을 옹호하였다. 이같은 대외협력 공식회를· 통한 소련의 대일협력 촉구에 이어 1973 년 IO 월 다나까 수상의 방소 당시 5 대 프로젝트에 합의함으로 써 시베리아 개발을 포함한 경제협력이 폭넓게 재추진되었다 . 그 내용으로는 1973 년 협상을 시작하여 1974 년 6 월에 기본계약이 이루어진 남야꾸뜨 석탄개발 프로젝트, 1974 년 12 월 미 • 일 • 소가 공동으로 기본계획을 체결한 야꾸뜨 천연가스 개발 프로젝트 , 1974 년 3 월부터 협상을 개시한 쥬메니 석유의 대일공급 및 수송수 단 문제, 제 2 차 KS 협정으로서 극동지역 산림자원개발 및 수입 프로젝트였다. 이중 기본계약이 조인된 남야꾸뜨 지역의 네륜그리 석탄개발 프로젝트는 은행차관 4 억 5 천만 달러를 1975-1982 년간에 제공하고 이에 대한 상환기간은 1983-1990 년이며, 금리는 6.3 7 5 %였다 . 또 일본은 이 프로젝트 개발에 필요한 장비(화물자동차, 기중기 예비부속품, 공구, 석탄기업용 설비 및 케이블)를 수출키로
8) The New York Ti m es (New York) , 1972 . 2 .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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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고, 석탄수입량은 총 1 억 440 만 톤에 달했다 . 야꾸뜨 천연가스 개발 프로젝트는 1976 년 3 월 은행차관 35 억 달러 규모로 3 국간 기본조약이 체결됐으나 미국의 이해타산으로 지연상태에 빠졌 댜 끝으로 1974 년 7 월 3 일 재계약된 KS 협정은 일본이 5 억 달러 를 은행차관으로 제공하고, 소련은 5 년간 제재용 원목, 펄프용 원목 및 제재목 2,650 만 입방미터를 수출키로 되었다. 그리고 목재가격은 매년 협의키로 합의하였다 .9) 그 후의 과정은 1974 년 IO 월 제 6 차 회담에서 극동 제지펄프 공장 프로젝트 협력을 소련이 제안하여, 1975 년 3 월 합의에 도달 했댜 더욱이 1976 년 일본의 산업계 대표단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 브레즈네프와의 회담을 통해 제 IO 차 5 개년계획 사업 이후의 협력을 요청받았다. 토의 내용은 제 IO 차- 12 차 5 개년계획간의 장기 협력에 대한 관심 촉구, BAM 철도 연변의 개발계획에 적극 참 여, 장기은행 차관 기대, 일본의 기계 • 장비 플랜트와 소련의 원료 및 제품교환 방식에 의한 거래 검토, 일본의 대규모 플랜트 수출시 노동력도 함께 포함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내용이었다 . 일본 산업대표단의 방소 후 제 7 차 공동위원회룰 1976 년 II 월에 개최키로 합의했으나, 미그 25 기의 북해도 침입사건으로 지연되어 오다가 1977 년 9 월에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합의된 프로젝트는 (1) 극동의 목재 • 짚 프로젝트, (2) 남야꾸뜨 석탄개발 프로젝트, (3) 야꾸뜨 천연가스 탐사개발 프로젝트, (4) 사할린섬의 대륙붕 석유 • 가스 개발 프로젝트, (5) 사할린 제지펄프 공장의 근대화 프로젝트로 요약된댜 10) 그 후 1979 년 9 월 제 8 차 공동위원회에서 합의된 프로젝트는 보스또치느이 (BocTO 'l H 꼬 R) 항 프로젝트, 우도깐 (Y, u; oKaH) 동광개발 프로젝트, 모로죠지노에 • 아즈베스뜨 광상(鑛床) 개발 프로젝트,
9) 鈴木啓介『日 、J 經濟協力一夕/ < IJ 7 開發協力& 日本 』 , 東京, 國際問題 硏究所 1975, pp. 139:-14°. 10) L. Petr o v, In the Inte rest of Sovie t. Jap a n ese Economi c Coop er a- tion , Foreig n Trade USSR, ( 1978, 5 ), pp. 37-39_
극동제련소 건설 프로젝트였다 . 이 밖에 1981 년 3 월에는 이미 1969 년부터 개시된 극동 삼림자원 개발 프로젝트의 제 3 차 기본조 약이 체결되었다. 일 • 소의 협력문제는 나까소네 정권 이후 미묘한 정치적 이유 로 다소 활기를 잃고 말았지만 1986 년부터 시작된 제 13 차 5 개년계 획 수행과 더불어 확대 가능성이 타진되었다. 일 • 소간의 구체적 인 프로젝트 진행상황은 p. 270 의 표와 같다. 서유럽제국의 경우도 일본과 유사하게 폭넓은 자원을 외국에 의존하고 있다 . 이들은 NATO 와 같은 군사동맹체를 주축으로 소련 및 동구 공산체제에 대치상태에 있지만 , 1960 년대 이후 데탕 트 무드에 편승하여 공산체제와 정치 • 경제 • 문화 교류의 폭을 넓혀왔다. 경제적 교류의 폭은 비군사부문에 한정되어 있지만 사기업의 합작투자 형식으로 시장확보의 성격을 띠며 확대되고 있다 정치차원에서도 차관 제공을 통한 화해분위기를 조성해 가고있다 소련과 유럽제국간의 대규모 경제협력 추진 계기는 1973 년의 오일 쇼크 이후이다 특히 중동의 산유국들은 서방세계의 경제질 서를 혼란시킬 목적으로 석유수출량 조절 및 가격을 조작해 왔 다. 이에 따라 서유럽은 상당량의 에너지원을 저렴한 가격으로 소련에서 구입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서시베리아 개발에 참여 하게 되었다. 물론 미국의 압력으로 에너지원 수급계획이 원활히 진행되지 못한 적도 있지만 서유럽의 입장에서는 불안한 중동시 장보다 소련의 광대한 자원시장을 선호하는 경향이다 . 1981 년 IO 월 소련과 EEC( 유럽공동체) 제국이 맺은 협정에 의하 면 소련은 1985 년 부터 향후 25 년간 연 4 백억 입방미터의 천연가 스를 서유럽제국에 공급해 주고, 서유럽제국은 가스관 건설에 필요한 장비와 기술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이 공사를 위해 서독, 프랑스, 이태리, 영국은 연리 8% 의 차관 총 50 억 달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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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하기로 약정했다 . 이 협정으로 소련은 연 l00 억 달러에 달하 는 외화를 벌어들이게 되었으며, EEC 제국은 약 IIO 억 달러의 장비를 팔 수 있게 되었다 . 서유럽제국이 공급하는 주요장비는 압축기와 터빈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서유럽제국의 소련 가스 의존도는 1999 년까지 30% 가 될 것이며 석유를 포함한 열에너지 의존도는 5% 정도이다. 특히 서유럽제국으로서는 전체 에너지 수요의 80~90% 를 수입 에 의존하고 있어 그들이 필요로 하는 에너지를 어디서든지 수입 해야만 하는 입장이다 . 소련측으로서는 시베리아 개발을 위해 서방제국으로부터 자본과 기술 및 기자재(機資材) 도입이 불가피 한 실정인 바 , 서방 제국과 소련의 경제협력 관계는 미국의 압력 에도 불구하고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경우 일본이나 서유럽제국보다 기술과 자본면에 있어 비교적 우위에 있는 입장이지만 실질적인 시베리아 개발협력은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소극적인 참여를 하는 이유로서 는, (1) 자국에 각종 자원이 비교적 풍부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점 , (2) 자국과 시베리아와의 거리가 멀다는 점 , (3) 미국의 저리 (低利) 차관자금을 시베리아 개발에 사용하는 것보다 미국내 또는 가까운 지역의 에너지 개발에 집중 투자해야 한다는 국내여론이 높다는 점, (4) 중동전쟁이나 소련의 반유태 정책 동 여러가지 정치적인 감정 악화로 인해 미국내의 대소련 여론이 좋지 않다는 점, (5) 중소대립 및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라는 정치, 군사적 문제로 인해 협력에 한계가 있다는 점 둥을 들고 있다. 또한 미국 의 개발 참여는 모두가 일본과의 공동참여일 뿐이며 단독으로 참여하는 프로젝트가 없다는 것도 그 특징이다 . 이처럼 일본을 비롯한 서유럽제국과 미국 동이 상호이해의 맥락에서 협력체제를 구축해 가고 있으나, 제한적 요소가 뿌리깊 게 깔려 있어 앞으로의 진전에 낙관만은 할 수 없는 상태이다.
제 12 장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 개발의 향방 269
일 • 소 시베리아개발협륀
프로젝트명 신용공급형태 및 조건 일본의 수출
立로젝트 추진상황표
1981 . 10. I 기준
프로젝트명 신용공급형태 및 조건 일본의 수출
자료 : 『소련 동구무역조사월보』 (일본수출입은행 해외투자연구소) 1981, IO,
일본의 수입 실적 및 교섭경위
3. 시베리아 개발의 장애요인과 전망 광대한 자원의 보고(寶庫)인 시베리아를 개발하는 데 있어 현실 적인 장벽을 가져다 주는 여러가지 장애요인이 무엇인가부터 파악해야만이 그 대처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장애요인으로 들 수 있는 문제점으로서는 우선 수송문제이다. 현재까지 유일한 물자수송 수단은 철도로서,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최근 완공된 BAM 철도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하천을 이용 한 수로교통 또한 일익을 맡고 있지만 9 월 중순부터 4 월까지의 결빙기에는 사용할 수 없다는 난점을 안고 있다. 석유나 가스 개발에는 파이프 라인을 이용하고 있지만 이에 부수되는 도로사 정이 좋지 않아 도로개발이 시급한 실정이다. 둘째는 노동력문제이다. 인구밀도가 희박한 시베리아 지역예 외부인력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과외의 비용을 더 투자하고 여러 가지 이점을 제공해 주는 정책을 폈지만 노동자의 유동성은 멈추 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대처방안으로서 의국인 노동력을 들여오 는 방안과 더불어 외국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 병력의 철수에 따른(예를 들면 아프가니스탄 철수군, 바르샤바 조약군 감소) 군대 의 노동력 전환 방안을 고려하고 있지만 쉽게 해결될 전망이 보이지 않고 있다 . 셋째는 노동력 부족현상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문제로 서 거주환경 문제이다. 나쁜 기후조건으로 말미암아 거주환경과 노동조건의 열악한 상태에서 주택 건설이 시급한 과제이다. 또한 공공문화시설 및 서비스 부문도 부진한 실정이어서 영국 거주를 할 목적으로 이주해 온 노동자도 생활공간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쉽게 떠나고 만다. 더욱이 교육시설의 부재는 자식들의 장래를 생각하는 노동자들에게 커다란 관건으로 작용하여 더 머무를 수 있는 여지를 앗아가 버리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국가관리 기구가 조직화되어 있지 않은 결과 효율적인 개발관리 문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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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두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자본과 기술문제로서 투자할 수 있는 소련 국내 자본이 충분치 못할 뿐만 아니라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도 자본 부족 현상으로 말미암아 중단되고 있는 심각한 상태이다. 자원 금고를 열 수 있는 열쇠에 해당되는 기술 또한 부진한 실정이어서 최신 기술과 장비 를 선진제국으로부터 들여와야 할 형편이다 . 이러한 재정난과 기술부진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 소련 당국 은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 현재는 아시아의 개발도상국들에게도 협력의 제스츄어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 여기서 소련이 국제협력을 구하는 데 있어 서로간의 문제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을 공동 개발하기 위한 구체적 협상단계에 이르러 상호 당사국간의 가장 큰 장애요인은 소련의 장기, 저리 은행차관에 의한 협렵요구이다. 이같은 소련의 요구는 1971 년 4 월 소련 대외무역 은행대표단의 일본 방문을 통해 명백히 밝혀졌다 . 이 대표단의 일본에 대한 수출입 은행과 시티뱅 크 (C ity Bank) 의 개발참여 요구는 긍정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으 며 , 제 5 기 공동위원회 개최를 지연시킨 주요인도 되었다. 소련은 이태리로부터 은행차관 형식의 I0% 예치와 6% 이자 및 IO 년 상환조건으로 차관한 바 있다. 소련이 일본에 요구하고 있는 조건 은 바로 유럽제국이 제공한 차관조건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태도는 유예기간 없이 최대 5 년의 상환조건을 제시하였던 것이다.ll) 일본이 이같이 차관조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이유로 서는 첫째, 거액의 차관에 대한 위험부담 때문이며, 둘째 무역에 의한 일본의 수출초과가 결과적으로 차관액을 계속 증대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일본도 급속한 경제성장 정책으로 인해 항상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으며, 더욱이 저개발 국가들에 자금수 출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선진공업국 중 하나인 소련에 대해 대규모 차관을 제공할 필요성이 있느냐 하는 반론 · 때문이다. 넷째
11) Ki ich i Saeki, 앞의 책, p. IO.
제 12 장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 개발의 향방 277
는 차관조건에 있어 일본 기업들은 자신들도 서유럽제국으로부터 3-5 년간 상환 및 9% 이자조건으로 연편균 약 5 억 달러를 빌어오 는 입장에서 소련이 요구하는 장기 6% 의 이자조건은 무리라는 입장이다 . 이같은 상황으로 인해 일본은 시중은행을 통한 차관제 공이 어려움을 갖고 있어 정부차원의 수출입 은행을 통한 차관제 공이 불가피한 상태에 처해 있다. 두번째로 지적될 수 있는 주요 장애요인은 가격문제이다. 소련 측은 국제가격에 의한 거래를 원하는 데 반해 일본은 공동개발 자원에 대해서 새로운 〈생산분배체계〉를 요구하고 있다. 죽 개발 비용(투자, 감가상각, 이자)과 약간의 이익마진을 고려하여 국제시 세보다 낮게 책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세째 주요 장애요인은 기술 및 경제적인 정보교환이 미흡하다 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련이 일본에 석탄 및 철광석을 수출한다 면 이들 자원에 대한 연간 화물처리 및 수송능력을 알려 주어야 하며, 천연가스의 경우 파이프라인 수송과 탱크 수송간의 유리한 수송비용 비교자료 문제 동이 제시되어야 한다. 심지어는 언제부 터 자원공급이 개시되고 얼마간의 기간과 양 및 가격에 대해서도 불명확하여 프로젝트 참여에 대한 수익성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문제가 대두된다. 네째로는 프로젝트 개발에 대한 참여영역의 확대문제다. 일본은 개발도상국들에 적용하고 있는 공식을 주장하고 있다. 죽 투자전 조사권에서부터 완전한 프로젝트 수행까지의 모든 단계에 대한 참여확대이다. 그러나 소련은 제반 운영권을 자신이 단독 주도해 야 한다는 원칙하에 일본이 제시하고 있는 공식을 거부하고 있 다 . 다음은 경제협력의 전망과 아울러 국제정세와 관련된 대외협력 의 장애요인을 언급해 보자. 일 • 소 양국은 공히 개발협력에 있어 예상했던 것보다 타산적이고, 기대와는 달리 진통을 겪고 있음을 통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개발의 유용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대규모 경제협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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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의 하부구조 건설이 대규모 투자와 인력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장기화될 뿐만 아니라, 복합공업 개발 역시 이와 유사한 상황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개발후 발굴된 자원이 소련측의 이용도만 높게 해주어 생산분배에 있어 손해를 보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으나 결과적으로 일본과 서유 럽제국과 경쟁적 은행차관 제공에 자극되어 차관의 양과 규모를 확대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일 • 소간의 경제협력 중대는 상호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적 긴장완화에도 지대한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결과적으로 미 • 일 • 중 • 소간의 세력판도에 새로운 변화를 야기시켜 앞으로 일 • 소간의 밀착이 미 • 중간의 세력대칭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가능성이 1976 년 3 월에 미 • 일 • 소간의 체결된 야꾸뜨 천연가스 개발 프로젝트 차관 제공을 지연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서유럽제국과 맺은 I98I 년 I0 월 협정에 의거, 서유럽제국이 수출하고 있는 가스 관 수출은 미국의 안보적 이유에서 발동한 금수澤浦 I) 압력으로 진통을 겪다가 1982 년 II 월 안드로뽀프 체제의 출범을 계기로 진행되었다 서유럽이 제공하기로 되어 있는 압축기와 터빈 중, 터빈설계 및 생산의 주요기술은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사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죽 미국이 터빈 생산의 축차 (ro t or) 와 파이 프 입구 끝부분인 노줄 (nozzle) 생산기술을 관장하고 있음으로 해서 앞으로의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어떻게 작용될지 불투명한 상태이다. 시베리아 및 극동개발 참여가 중국을 자극하고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74 년 중국을 방문중인 일본 경제사 절단에 대해 주은래 수상은 〈소련과 관계를 갖는 것은 자유지만 후에 후회할 것이다〉라고 중국의 입장을 일본에 전달한 바 있 댜 일본도 중국의 입장을 이미 간파하여 1974 년 츄메니 석유 수송수단 문제를 놓고 철도가 아닌 파이프라인 건설을 통해 공급 받겠다고 고수한 자세는 바로 중국을 의식한 처사라 하겠다. 그러
나 고르바쵸프 동장 이후 중소 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1989 년 6 월), 중국은 당시 천안문사태로 난국에 처해 있었지만, 소련의 개혁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따라서 주변국의 눈치만 살피던 일본으로서는 또 다른 노선 선택을 해야 할 입장에 처해 졌댜 일 • 소 당사국의 상황 또한 상호 수조롭지는 못하다. 소련은 일본 경제 성장력이 군사력으로 전환할 가능성에 민감한 반옹을 보이고 있으나, 시베리아 및 극동개발에 있어 일본의 자본과 기술 유용에 더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다. 한편 일본으로서는 꾸릴 죠서와 같은 영토문제가 아직 미결상태로 남아 있으며 미국과의 경제적 연계를 희생시킬 수 없는 입장에 있다. 더욱이 중국과의 데랑트 및 새로운 시장개척이란 과제가 있는 한 이들을 모두 도외시하고 소련과의 일방적 관계중진을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 나 일 • 소간은 물론 국제간의 개발협력이 현재의 정치 • 군사 • 경 제적 현상을 호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무한한 것이다 . 특히 고르바쵸프가 등장한 후 실시되고 있는 개방 • 개혁정책에 힘입어 소련의 극동, 시베리아 정책은 훨씬 다양해지고 있다. 경제재 활성화를 위해 뻬레스뜨로이까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소련으로서 시베리아 자원은 간과할 수 없는 보고이며, 이 지역의 개발사업을 위해 아시아 • 태평양 지역으로 눈을 돌려야 했던 것이다. 1986 년 블라디보스또끄 선언을 비롯하여 1988 년 끄라스노 야르스끄 연설을 통하여 고르바쵸프 서기장은 소련의 대아시아 정책을 더욱 적극적으로 밀고 나갈 의사를 표명하였고, 낙후되어 있는 시베리아 지역을 다각적인 방법으로 개발할 열의를 보이고 있다. 〈 2000 년까지의 극동경제지구, 브리야뜨 자치공화국 및 치따주 생산력의 종합 발전계획〉이란 긴 이름을 가진 계획안은 1987 년 7 월 소련공산당 정치국에서 승인받아 실행단계에 들어섰다. 약칭 〈시베리아 2000 년 개발계획〉은 시베리아 지역을 대상으로 장래 소련 전체 또는 국제적 분업에 편입시키는 것을 전제로 자원기반
과 생산기반을 정비 , 효율 높은 대단위 종합산업단지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 구체적 개발내용은 시베리아 산업생산고를 2000 년까지 2.4~2.5 배로 증대시키고, 에너지자원 중 발전량은 2.6 배, 천연가스 7.2~9.3 배, 석유 3.1~3.8 배, 석탄 8,200 만 ~8,500 만 톤으로 증가시킬 계획이다 또한 어업 부문에서 소련 전체 어획량의 45% 를 극동에 서 충당토록 어획량을 30% 이상 증대시키고, 새 축산단지를 조성 하여 식량의 상당량을 자급할 수 있도록 하며, 연간 300 만 톤을 생산할 수 있는 제철소를 가동시킬 준비를 갖추고 있다. 이 지역 에 투자하는 경제진홍자금은 2,320 억 루블에 달하고 , 이 중 30% 는 사회문화 발전에 지출할 계획인데, 특히 주택난을 해소할 수 있도록 향후 13 년 동안 과거 15 년보다 2 배 이상 투자할 계획 울 수립하였다 12) 이러한 광범한 개발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고르바쵸프는 국제협력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으며 〈새로운 사고〉에 입각한 적극 적인 외교정책을 펴고 있다 . 우선 6 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긴 국경 선을 맞대고 있는 중국과의 관계개선이 시급한 문제였고,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로부터 환심과 인정을 받음과 동시에 구체적인 개발협력 사항울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 대한민국 또한 소련의 자본과 기술 공급처로 인지되어 여러가 지 정책실행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간접무역에 지나지 않던 대소무 역 관계는 소련의 무역대표부가 서울에 설치됨으로써 단순한 상품교역 단계에서 시베리아 진출을 포함한 전면적인 경제교류 단계로까지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소련은 오래전 부터 개발의 투자재원으로 일본을 생각해 왔지만 현실적으로 일본이 적극적으로 투자하지 않고 있는 이상 한국을 제 2 의 투자 지원국으로 고려, 이를 계기로 일본의 자극을 유발시키려는 의도 도 있는 듯싶다 . 그러면서도 소련경제의 만성적 정체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12) Sankei Shim b un , 19M, n. 4,
제 12 장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 개발의 향방 281
몸짓으로 시도되고 있는 개혁, 개방정책의 일환으로 제시된 시베 리아 개발계획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사회주의 경제의 한계 룰 어느정도 극복할 수 있으며, 선진 자본국들과의 경제협력이 어느 단계까지 이루어질 것인가는 가히 주목의 대상이 된다 하겠 다 이와 더불어 대한민국의 시베리아 진출이 양국간의 경제교류 는 물론, 정치교류까지 가능하게 해줄 것인가 하는 점은 국제정세 의 민감한 표적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입지 (立志)는 보다 능동적인 자세로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태도로 국제무대의 장(場)에 뛰어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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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깜차뜨까 228 깜차뜨까지지 70 고르바쵸프 254 꼴르이마 225 꼴호즈 201, 204 꼼비 나뜨 168, 166, 213 꼼소몰 201 공업화대회 164 국가경제위원희 204 국가계획위원희(고스쁠란) 165, 166, 205 국민의희 42 귀족의회 60 끄냐지 62 끄라스노야르스끄 213 끼 예프공국 25, 27, 30 끼예프루시 22, 24 L 네르친스끄조약 51, 57, 59, 61, 63 노르만설 17 노릴리스끄 217 노브고로드인 31, 32 노일전쟁 116, 117 농노해방 95, 102, 104, 109 농민은행 116 농업집단화 166 니꼴라이 1 세 64 니꼴라이 1I 세 111, 113, 1 없, 128, 143
E: 대숙청 163 도시지방 24 뚜빈자치공화국 215 三 러일전쟁 147, 151 레 닌 155, 160, 163 로마노프 42, 85 류리끄 25 리 -로바노프밀 약 127 리홍장 127 口 모스끄바공국 29, 33 목재 186 미 르 105, 106, 107, 113 t::I 바랴그인 18, 19, 23, 23, 27 밤철도 237, 250, 251 베링 68, 70 보리 스 고두노프 41, 85 뾰뜨르대 제 59, 60, 61, 62, 64, 68, 72, 92 부랴뜨 자치공화국 220 분배지 103, 104, 105, 116 브레츠네프 231 블라지마르 25, 30 비떼 111, 124, 129, 130, 132, 133, 134, 140
비철금속 187 人 사할린 228 삼국간섭 130, 141, 142 석 유 185, 210, 239 석탄 186 소브나르호즈 180, 205, 232 수立굼츠 201, 204 수공업의 집 88 술딴 83, 85 스딸린 160, 161, 162, 174 스똘르이 뻔 117, 153 스뜨로가노프 37, 38, 41, 43 스빼 란스끼 79, 80, 81, 83, 86, 90 스뱌또슬라프 25 슬라브설 18 시모노세키 강화회 의 130 시베리아왕국 75, 77 시베리아 위원희 80 시베리아 철도위원희 111, 113, 124, 125 시베리아청 72, 74, 75 시베리아 토지측량부 100, 101 시비리 35, 36, 40 10 월선언 152 신경제정책 159, 160, 161 신성종교회의 60 。 아무르 222 아바깐-미 누신스끄 214 알렉산드르 I 세 78, 92
알렉 산드르 1I 세 92, 93 알렉산드르血세 107, 110, 111, 123, 124, 129 알렉세이 53, 85 야꾸뜨 226 야꾸뜨스끄 정 청 45, 46, 48, 49, 51 야로슬라프 27 야를르이끄 28 에니세이스끄 216 연해지방 224 영일동맹 143 예까쩨리나여제 75, 76, 77, 92 예르마끄 35, 38, 39, 41, 42, 43, 79 올레그 25 원초연대기 18, 25 유그라인 31, 32, 33 유형이주자 85, 88 유형징역자 85 이고리 25 이르꾸쯔끄 217 이반 다닐로비치 29 이반 II 세 29 이반 m 세 29, 30, 33 이반 W세 30, 36, 37, 41 2 월혁명 154 이주규칙 101, 102, 107, 113 이주법 107, 108, 112 이주사무국 112, 114 이주중가 100 :,:;: 장기극동종합계획 254, 255
288
짜리 30, 41 전력자원 187 전시 공산주의 155, 158, 159 전화위원회 165 제 1 차 5 개 년 계 획 166, 168, 191 제 2 차 5 개년계획 168, 169, 192 제 3 차 5 개년계획 170, 194 제 4 차 5 개년계획 173, 195 제 5 차 5 개년계획 173, 196 제 6 차 5 개년계획 203 제 7 차 5 개 년계 획 205, 206, 210 제 8 차 5 개년계획 232, 236 제 9 차 5 개년계획 236 제 10 차 5 개년계획 237 제 11 차 5 개년계획 237, 248 조정관 104 天: 천연가스 186, 210, 212, 239 철 187 청일전쟁 131 추끄치 226
치따 221 구 깊 차크 28, 29, 32, 33, 36 E 특별위원희 107 포 표도르 I 세 41 피의 일요일 152 핀족 23 궁 하바롭스끄 223 하자르인 21, 23 혼란시대 47 흐루시 쵸프 199, 200, 202, 205
李徹 한국외국어대학 노어과 및 동대학원 졸업 국회도서관 소련과장, 외대 서양어대학 학장 역임 현재 외대 노어과 교수 겸 한국 노어노문학회 회장 편 • 저서 『러시아 혁명비사』 『표준 러시아어』 『러시아어 문전』 역서 『러시아 사상사』 『가난한 사람들』 『부활』 『예술이란 무엇인가?』 논문 「소비에트 문학의 현대적 좌표」 「러시아 모더니즘 문학」 시베리아 개발사 대우학술총서 • 인문사회과학 43 찍은날一― -1990 년 5 월 20 일 •펴 낸날-―_ 1990 년 5 월 30 일 지은이――-李徹 펴낸이――朴孟浩 펴낸곳 ___ 民音社 ■ 출판등록 1966. 5. 19 제 1-142 호 우편대체번호 010041-31-0 5 23282 은행지로번호 3007783 1i0 -1i 1 서 울 종로구 관철동 44-1 734 -42 34 • 6110 (편집부) 734 -20 00 • 2101, 735-8524 (영업부) 733-7010 (팩시밀리) •Prin ted in Seoul, Korea 값 5,000 원 ©휘· 1990 인문사회과학 • 역사 KDC/947
대우학술총서 ( 인 문 사회과학 ) I 韓國語 의 系統 全芳폴 /5 . 00J원 2 文壓社會壓 김 련/값 3 . 寒원 3 商周史 尹乃ii/값 6. 였)원 4 人間의 知能 輝奎/ 값 I . ::,()'.) 인 65 中B 國本의古 代萬文葉學集史 金 思金燁요/값 / 값5 . 印3 . 8원(X) 원 7 現代意昧論 李益煥 / 값 5 . 幻원 8 베 트남史 躍홈 /타 .幻원 9 印度哲學史 吉熙t/값 5. 印원 10 韓國 의 屈水思想 崔타 / ;}6 . 知위 11 社會科墨과 數學 李承 勳 91/ 값 2. 印원 12 重商主義 金光 洙/ ;; 2 . ::,()'.) 운 13 方言學 휴성님 /; / 5 . 00J원 14 構造主義 蘇 斗 */값 4. 00J원 15 外交制度史 습책/값 2. 知원 16 兒童心理學 똘敬淑 /;) 7 . 00J윈 17 언어십리학 卽騰 /값 5 00J원 18 法 사회학 梁 뮬 / 값 6 . 00J운 19 海洋法 相 § 浩 · 柳唄 /타 .却원 20 한국의 정 원 鄭護 許 / 값 6. 00J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