沈相弼 서울대학교文理大졸업 파리대학교 정치대 財 經學 部 公 經 濟科 이수 파리대학교 고등사회과학원 경제학 박사 및 소르본느대학 사회학박사 현재홍익대학 교 경제학과교수및 법경대학장 저서 His t o i r e economiq ,ue de la Coree ( 共著 ) , 瓚 國經 濟의 理解 』 ( 共著 ) , 『 프랑스의 경제 』 역서 『경제표 』 ( F. Que snay ) , 『 산업사회의 비교연구 』 (R. Aron)

제 3 세계

제 3 세계

산업화의 가능성을 중심으로 沈相弼 지음 民音社

18642

책 머리에 필자가 후진국 문제에 처음 관십을 갖게 된 것은 지금부터 거의 30 여년 전, 파리대학교에 유학하여 1 학년 재학중이던 대이다. 지도 교수 1) 논 과제 물로서 Jos ue de Castr o 의 Geop ol iti qu e de la fai m 이 란 책을 읽고 비판을 하라고 하였다. 나는 1959 년에 서울에서 대학 울 졸업하였고, 그 당시만 하더라도 여러가지 지표로 볼 때 한국은 후진국임에 들립이 없었는데, 나는 전혀 후진국 출신이란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었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비록 미국의 원조물자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한국은 문화수준이 높 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라는, 국민학교때의 주입식 교육 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다론 한편-~이것이 더 중요한 이유이겠으 나 ___ 그 당시 후진국, 개 도국 또는 第三世界 문제 가 2 차대 전 종료 와 더불어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대부분의 나라에서 활발히 토론되 고 있었는 데 비하여 우리나라에서는 국내 정치문제에 모든 관십이 쏠려 있었던 탓인지 이상의 문제가 별로 소개된 기여도 없다. 더욱 이 이승만 정권하의 한국에서는 개발정책이 不在했기 때문이라고도

1) 논문지도교수가 아니고, 그 대학에서는 약 20 명의 학생을 한 그읍으로 mai tre de con f erence 가 지정돼 1 년 동안 학생지도를 한다.

할 수 있다 .2)

2) 沈相弼 • 李承哲, Ii'한국경 제 의 理解.!I, 法文社.

이러한 無知상대에서 나는 과제를 하기 위하여 도서관에서 그 책 울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책을 읽어나가면서 내 손에서는 땅이 냐 기 시작하였고 이옥고 얼굴은 열이 올라서 벌정개 달아 있음을 느 꼈다. 비교적 두꺼운 책이었으나 나는 단숨에 그 책을 다 읽고 말 았으며, 그리고 나서는 허탈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럴 수가…… 지 금까지 그 책은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그후 나는 파리의 학계에서 후진국 문제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음 울 알게 되었고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도 〈개발도상국〉이라는 제하에 2 년에 걸천 강의가 있었다. 물론 나도 그 강의를 듣고 학접도 취득 하곤 하면서 계속 관심은 갖고 있었으나 어단지 뒷맛이 개운치 않 음을 느꼈다. 그것은 이 開途國의 문제가 간단한 처방에 의하여 간 단히 해결될 수 있는-~일부 미국계 학자들 가운데 그렇게 생각하 는 사람도 있었다――문제가 아니라 문화와 역사, 경제와 사회구조 가 각기 다른 수많은 나라가 유일한 공통접으로 갖고 있는 〈빈곤〉 의 문제이며, 이 빈곤을 퇴치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회의가 나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죽 이 개도국―—제삼세 계―_-의 문제는 인간적인, 대단히 인간적인 문제이며 따라서 지구 에 촌재하는 다양한 민족과 인간의 현재 또는 미래의 문제에 그렇 게 쉽게 접근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로부터 나 자신도 모르게 이 문제는 서서히· 나의 참재의식 속 으로 참기면서, 그러나 나로부터 분리되어 나가지 않고 항상 막연 하게나마 나의 의식의 일부를 점유하고 있었다. 1970 년 내가 귀국하였을 때, 한국은 무슨 熱病에라도 걸려 있는 듯, 온통 〈수출이 국력이다〉라는 캐치프레이츠 아래, 곧 今時發福 이라도 할 돗 희망에 들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조용범 교수의 『후 전국 경제론』이란 책이 눈에 띄었는데, 그것은 마치 고독한 개쳐자 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세상이 온통 〈한강의 기적〉과 성장의 찬가 로 뒤꿇던 중에 茶월간지에 실린 변형윤 교수의 글-~ 뮈르달

을 소개하면서 군사정권의 수 출 드라이브 정책을 신랄히 비판한­ 도 역시 나의 참재의식에 강한 자국을 주었다. 그로부터 한국에서 논 이 개도국문제가 『 發 展 論 』이라는 교과서에 맡겨졌고 지식사회의 토론의 대상이 되지는 못하였다. 이 문제가 〈 문제 〉 로서 제기된 것은 80 년대초.-이른바 종속이론 이 산발적으로 소개되면서 〈 의식있는 지식인 〉 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 면서부터이다. 영홍철 교수가 『종속이론』이라는 단행본을 출 간하였 고, 일부 〈 민중민족학자 〉 둘은 이 종속이론을 우리나타 현실에 적용 시켜 성장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기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 대우재단에서 연구지원 과제로 〈 第三世界 〉 를 내어놓 았을 때, 이것은 30 여년 전의 데마라는 생각이 들면서 전부한 느 낌도 들었으나 다른 한편 제삼세계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포착, 종 합하기 위한 의도로 생각되어 내 참재하던 호기심을 일깨웠다. 또 한 나는 그동안 이 문제에 관하여 수집했던처서나 자료를이용, 세 상에 내어놓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이상이 간단히 말하여 내가 이 문제를 다루게 된 동기이다. 그리고 또한 이번 기회에, 한나라가선전국이 된다든가또는모든 사람이 원하는 만큼 소비할 수 있는 풍요로운 사회가 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는 접을 말하고 싶었다. 죽 후진국과 선전국 의 문제는 G.N.P. 성장속도 차이에서 오는 tim e ga p의 문제가 아 니며, 제삼세계를 구성하는 많은 나라는 사람에 비유하자면 각국이 그 독특한 인격을 지닌 個體로서, 이들 국가는 전보에 대하여 각기 다른 태도를 갖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前 篇 에서는 현재의 후진국이, 19 세기에 선전국이 걸었 던 길을 되풀이할 수 없는 이유를 역사적으로 해석하였고 따라서 각국은 그 개성과 자원 등의 여건에 따라 각기 적절한 개발정책을 모색하여야 한다는 접을 서술한 다음, 실례로서 현재 제삼세계를 대표하는세 가지의 해결방법과 경험을 제시하였다. 곧 이 책에서는 제삼세계 산업화의 가능성을· 중심테마로 잡고 논리를 전개하였다. 결국 경제발전, 사회발전, 정치발전은 각국 구성원의 창조성에

달려 있으며 특히 그 사회 엘리트의 質 的 수준과 양십에 달려 있다 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여, 비아프라 B i a fr a 나 방글라데쉬 Bang la desh 의 〈빈민 중의 빈민 Jes pa uvres pa rmi Jes plu s p ~uvres 〉에 게 있어서 해로드 Harrod 나 도마 Domar 의 스마트한 방정식이 무슨 관계가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개발의 문제는 극히 인간적이고도 사회의 모든 요 소가 복합적 으로 작용하여 만들어 내 는 종합적 인 문제 이 다. 이 기회를 빌어서, 나의 오랜 숙원이던 이 과제믈 풀· 수 있도록 지원하여 준 대우재단에 각별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특히 원 고를 집필중이던 작년 여름, 불의의 신체적 사고로 작업을 6 개월 이상 중단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계속할 수 있게 하여 준 후의에 감사한다. 그리고 이 원고를 처음부터 읽고 다듬어 준 湖西大 李承哲 교수, 지역경제문제의 자료를 정리하여 준 弘益 大 박사과정의 田炫重 군, 그밖에 여러가지로 도움을 준 現 파리대 박사과정의 金辰郁 군, 본 대학의 조교 姜丞遠 및 趙洪來 군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1990 년 4 월 著者 識

제 3 세계/차례

책 머리에•5

제 1 장 제삼세계 개념의 정의

제삼세계의 개념과 범주•13

제삼세계에 관한 최근의 연구동향•22

제 2 장 자립적 • 자기중심적 산업화 전개의 예

산업혁명의 기원•32

농업발전이 산업화를 유발시키는 메카니즘•41

독립적 • 자기중심적인 산업화 추진의 메카니즘•48

제 3 장 후진국의 도약을 저해하는 경제외적 요소

자연조건•65

식민주의와 자립적 성장의 장애•71

제 4 장 제삼세계의 자립적 산업화를 저해하는 제요인

상황의 변화•85

인구•86

농업과 수확체감의 법칙•103

공업의 파행성•115

기술상의 격차•126

운송비의 격감이 후진국의 자본재 산업건설에 장애요인으로작용하는 메카니즘•139

후진국의 채광산업이 현지의 加工産業올 일으키지 못한 메카니즘•149

산업투자비용과 자립적 경제발전•152

제 5 장 불평등교역과 가치의 이전-제삼세계의 공업화를 위한 원시자본축적이 형성되지 않는 근본원인

세계무역의 변천•161

아시아 NICS를 제외한 후진국의 수출이 저조한 이유•165

교역조건의 악화• 168

후진국 1차산품의 교역조건이 악화되는 이유•179

제 6 장 제삼세계의 공업화는 가능한가?

〈공업을 유발시키는 공업〉 정책의 예•199

제삼세계 산업화를 위한 새로운 방법의 모색•208

제 7 장 세 가지 경험

―사회주의 쿠바 • 내부지향적 인도 • 외부지향적 NICS

혁명 이후 쿠바 경제정책의 조정•226

내부지향적 경제개발 전략을 추구한 인도•254

다이내믹한 발전전략 : 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의 예•276

결론에 대신하여•301

참고문헌•305

찾아보기•313

인명색인•317

【제 1 장] 제삼제계 개념의 정의

제 1 절 제삼세계의 개념과 법주 후진국, 처개발국, 개발도상국, 제삼세계!) 등 그 용어의 다양성 과 마찬가지로 후진국 2) 은 세계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면서 인구 또 한 전체의 약 3/4 에 달한다. 그런데 어떤 나타를 후진국의 범주 에 포함시킬 것인지 그 기준은 일정치 않으며 후진성의 개념에 관 하여서도 많은 논의가 있었다 .3) 사실상 후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는 각기 그 사회경제적 구조 및 문화역사적 배경도 모두 다르고 국가 와 국민의 규모 또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 고 남미의 많은 나라들은 사실상 그 · 자연조건과 참재적인 생산능력 등 한마디로 · 말하여 경제적 조건이 상이하며, 주민들의 경제에 대 한 태도도 또한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I) 이 용어는 프랑스의 인구학자 A. Sauv y가 1952 년에 처음 사용하였는데, 그는프 랑스 혁 명 당시 의 계 상신분 le Ti er s Eta t 와 일종의 Analog ie 로서 모든 후진국 을 지칭하려 하였다. 2) 계상세계와 후진국을 동일한 의미로 파악하면서 편의상 이하 〈후진국〉으로 사 용한다. 3) J. Frey ss in e t, Le concep t de sous develop pe ment.

후진성은 결국 정치, 경제, 사회, 인구, 사회십리 등다양한요소 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유발된 상황으로서 이의 〈총체적인 현상을

포착하려면 사회과학의 모든 분야가 협력하여야만 가능하다〉 .4) 많은 학자들, 특히 경제학자들은 후진성을 단순하게 인식하였고 그런 만큼 그 처방 또한 단순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후진성이란 선전국에 대한 상대적, 물질적 〈뒤떨어침 re t ard 〉에 지나지 않았다. 일부 evolu ti onn i s t es 들은 이 후진성을 선전국의 산업화 前단계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0 년대 중반부터 일군의 마르크스주 의 경제학자들은 후진성이 사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선전 국과의 관계, 죽 식민지 지배국과의 역학적 관계에서 사후적으로 전유성발 되이 었라다든고가 〈주개장 발한 d다ev e(lAo. pGp. e mFerna ntk〉,의 S개. A념m i자 n)체 . 를또 거일 부부한 다학.자 ”는 이 후들 에게 있어서 각국은 그 나름대로 어떤 구조적 군형을 갖고 있으며, 〈개발〉이라는 이름하에 취해전 여러가지 정책은 이 균형을 깨뜨리 논 것이며, 그로부터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뒤 에서 〈후진성〉에 관한 사회학적 고찰을 시도하겠지만 우선 여기에 서는 후진국, 또는 제삼세계를 하나의 실체로 받아들이고 그 범위 및 기준을 요약하여 보기로 한다.

4,>) JC.. FArlevyas rs eisn, e t•,R 전e f게us 서d e, dpe, v3 6e8lo. pp eme nt, FDTUm de Dev., Geneve, Oc t., 1983.

지리학자들은 후진국이 대부분 아열대지방이나 열대지방에 위치 한다고 본다. 물론 1960 년대 이 전의 한국처 럼 온대 지 방에 속하는 경우도 있지만 현재의 대부분의 후진국은 건조하거나 지나치게 습 한 기후대인 아프리카, 동남아, 또는 남미에 위치한다고 본다. 여 기에서 곧 염두에 떠오르는 것은 인종차별적 racis t e 시각인데, 이 를 떠나서 지리적으로 볼 때 우연하게도 후진국은 이상의 다온다 습한 열대지방이나 건조한 아열대에 속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러한 자연조건이 경제개발에 적합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60 년대 이전의 한국과 같은 나라를 제외하고 이상의 기 후대에 속하는 지역은 풍부한 광물자원과 농업자원을 보유하고 있 다. 사막지 대의 석유라든가 또는 銅, 망가네스, 코발트, 우라늄 등

은 거의 모두가 후진국에 묻혀 있다. 이밖에 일부지역에서 득수 영 대작물이 풍부히 생산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서 기아 fai m 가 있거나 다수 주민이 불충 분한 영양섭취를 하고 있다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이상과 같 이 공간적으로 어떤 구획을 그을 수 있다면 후진국의 일반적인 목 칭은 무엇인가? ® 일부 학자들에게 있어서 후진국이란 그 주민들이 필수품을 갖 지 못하는 경우라고 정의된다. 그러면 필수품이란 무엇인가? 물론 이 필수품이란 개념 자체도 경제와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내용 울 달리할 수 있다. 그런데 후진국 문제에서 일반적으로 제기되는 것은 〈 기아 〉 이다. 이 기아는 후진성의 대표적인 그리고 상칭적인 칭후로서 제시되고 있다 .6) 물론 〈 기아 〉 는 인류 역사상 수천 년을 두고 꿇입없이 있어 왔다. 영국이 산업혁명을 추전하던 19 세기에 도 기아를 볼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도 역시 19 세기에 많은 근로자 들이 빵 한 덩어리를 입금으로 지급받고 기아선상에서 힘겁게 살았 다. 그리고 미국의 대공항 때나 소련의 초기 5 개년 경제개발계획 기간중에도 대부분의 근로자와 그 가족들은기아를겪었다. 물론여 기에서 제시된 기아는 현재 일부 후진국에서 겪고 있는 만성적 기 아에 비 해 불충분하지 만 후진국의 상황을 설명 하는 중요 요소로 간 주될 수 있다.

6) Jos ue de Castr o , Geop o/ iti qu e de la /aim .

® 일부학자들에게 있어서 후진성은 불충분한 생산가능성과 관련 되어 정의된다. 죽 어떤 학자는 지역의 자연자원에 비하여 상대적 으로 인구가 과밀한 경우를 들며(방글라데시 등), 또 다론학자는이 상과 같이 자원을 자연적인 것에 국한시키지 않고 광범위하게 확 대시컨다. 그동안 많이 거론되었던 기술·자본 및 기능공의 부족 등이 그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후진성은 결국 급속도로 증가하는 인구성장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부족한과소생산의 문제로요약된다. ® 일부학자들에게 있어서 후진성은 충분한 자연자원의 불충분한 개발로 정의된다. 물론 이 정에 있어서는 석민제국주의자들이 자국

의 이익을 고려한 기형적 개발이란 점도 있으나, 이 문제는 후에 따 로 취급한다. 이상의 경우, 불 충 분한 개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비 단 자연자원뿐만 아니라 인적 자원 및 자본도 해당된다. 여기에서 인력과 자본은 그 효율적 배분과 사용이 왜곡되거나 특 히 실업상태 에서 유휴하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 일부 학자들에게 있어서 1 인당 G.N.P. 의 수준은 후진 성을 정 의하는 편리한 도구로 사용된다. 그런데 이에는 어느 수준부터 선 전국이고 어느 수준 이하는 후진국이라고 간주할 수 있느냐라는 문 제가 제기되는것 이의에도 경제 ·사회구조가 각기 다른 나라들, 에 컨대 소말리아와 미국의 G.N.P. 수준을 평면적으로 비교한다는 것 이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도 지적된다. ® 일부학자들에게 있어서 후진성은 낙후한 전통분야의 현존으로 정의된다. 이들은 일부 후진국의 현재 상황을 유럽의 산업혀명 이 전의 사회경제구조와 비교하면서 그 기준을 산업화의 정도에 두고 있다. ® 또 다른 일부 학자들은 후진성의 특칭으로 취약한 공업구조를 강조한다. 결국 후진성에서 전통적 측면을 강조하논 학자들과 현재 의 상황을 석민주의의 소산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공업구조의 취약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의견을 같이 한다. 예컨대 남아연방은 마 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중십부에 해당한다 .7) 그런데 비록 이 나라는 현대적 공업이 촌재한다 하더라도 다수의 원주민이 극빈 상태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여야할 것이다• 또한공업화가 후진성을 탈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인식되면서, 남미의 여러 나라들이 이 공업화전략에 일찍이 뒤어들었으나 다수의 국민들은 극빈상태를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7) S. Am in, L'accumulati on a l'echelle mondia l e, p. 124 , Pari s, ed. Anth r- op o s.

® 후진성 은 경 제 적 봉쇄 bl?cag e economi qu e 를 의 미 하기 도 하는 데 이것은 기술과 자본, 기능인력 부족, 시장과 판로의 협소성으로 경계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처개발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관

점이다. ® 일부 학자들은 후진국의 목 칭으로서 경제의 이중구조를 들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경제가 근대부문과 전통부문으로 분리되어 상 호연관도 없고 통일성도 없는 불균형 사회로 정의되기도 한다. 죽 이 사회에서는 서구의 첨단기술이 도입됐지만그것은·독수분야에 국 한되어 있고 여타 부문은 전 통 적인 경제 ·사회구조에 머문다는 주 장이다. ® 일부 학자들은 특히 이상의 이중구조론을 비판하면서, 현재의 후전성은 제국주의적 식민주의 지배로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에 후진적인 경제가 형성된 결과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종속론자로 불 리는 이 이론가들은 전 통 사회가 와해된 것은 제국주의자들이 그들 의 중심 부 metr o p o les 경 제 를 위 하여 주변부 pe rip h erie s 경 제 를 재구 성하는 과정에서 야기되 었 으며, 이들 식민주의자들은 잉여가치를 중십부로 이전시키면서 후진국에서의 현대적 산업의 발달을 의도 적 으로 방해 한다고 주장 한 다. 이 러 한 중십 부-주변부 관계 는 不平 等交易 8) 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현재에도 지속되는데, 일부 종속론자 논 이 것 을 선식 민주의 neo-colonia l is m e 라고 부른다. 그러 나 현대 의 후진국 문제를 순전히 지배와 펴지배, 착취와 괴착취라는 종속관 계에 국한시켜 조명하는 데는 그 한계가 있으며 이는 뒤에서 따르 다룰 것이다.

8) A. Emmanuel, L'echang e ine g a l, ed. Masp e ro, Paris . 9) P. Jal ee, Pil l ig e du tiers monde, ed. Maspe ro, Pari s.

이상에서 우리는 후진국을 이해하고 규정하려는 여러가지 관접을 멸 가지로 분류하여 보았다. 그러나 이상의 定 義 는 경우에 따라 후 전국의 한면을 강조하거나부각시킨다는 결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 리하여 많은 전문가들은 국가나 사회의 목수성에 관계없이 한 나라 가 후진국의 범주에 속하는지 여부를 가리기 위한 기준을설정해 보 기도 하였다 .10)

IO) 이 기준선정은 .::z. 자체로 여러가지 문계정 을 안고 있다.

여 기 에 Y. Lacos t e11) 가 설정 한 14 가지 기 준을 열거 하여 보면 다 음과같다.

n) Y. Lacoste , Geog r aph i e du sous deve/o ppe ment, p. 53, P.U.F., Paris .

®식량부족 ® 주민 다수의 영양부실, 높은 문맹률, 다수의 질병 감영, 높은 유아사망률 ® 자원의 낭비 또는 미개발상태 ® 생산성이 낮은 농민 數의 높은 비중 ®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도시민, 〈 中産層〉의 형성 부전 ® 제한되고도 불완전한 산업화 ® 비대한 3 차산업 및 기생인구의 높은 비중 ® I 인당 G.N.P. 의 낮은 수준 ® 경제적 예속상태 ® 실업자 및 위장실업의 촌재, 아동의 노동 @ 첨예화된 사회불평등, 계급간의 대립 @ 경제와 사회구조의 왜곡 현상 ® 높은 인구중가울 ® 후진성의 자각 이상의 기준은 후진국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증후를 요약한 것이다. 그런데 후진성온 그 자체가 동적인 개념이다. 죽 이 상태 는역사적 발전과정에서 하나의 단계로볼수도있다. 물론많은나 라는 수세기 또는 그 이상의 기간 동안 거의 같은 상황에서 정체 된 상태 하에 있 었고, 그 不動主義 im mobil ism e 가 또한 극히 후진적 현상이라고 지적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는 변한다고 할 때 그리고 현재의 많은 후진국이 개 발율 적극적으로 추전하려는 의지를 보일 때, 이상의 기준 가운데 많은 요소는 단시일내에 사라질 수도 있다. 예컨대 문맹률이나 의 료시선 등은 2 차대전 이후 사회주의 체제를 채택한 나라에서 짧은 시간 안에 사라졌고, 또한 이 체제하에서는 실업이라든가 소득의 격 차(비목 하향조정되었다 하더라도)도 사라졌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개발전략을 채택한 일부의 나라(한국, 대만 등)에서도 이상의 기준 가운데 많은 요소가 사라졌다. 결국 후진성이란 상대적이고 유동적 인 개념이며 후진국의 범주에 속하는 나라들 가운데에서도 그 차이 는 확대된다. 그러면 이 제삼세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어떻게 위치시켜 야 할 것인가? 우선 Y. Lacos t e 의 지정학적 분류를그림으로보면 다음과같다.

제상세계 `

Y. Lacoste , Geog r aph i e du sous developp e ment, p. 58.

이상의 그림에서 일부 사회주의 국가를 제삼세계에 포함시킬 수있 는가의 여 부는 일부 학자들간에 논란이 있 었다. P. Jal ee 는 그의 Ii'제 삼세 계 의 약탈 Pi llag e du tier s monde 』에 서 다음과 같이 서 술 하고 있다. 〈 후진국이란 지배받고 있는 나라이며, 사회주의 국가는 피지배국이 아니다. 〉 따라서 사회주의 국가논 제상세계에 포합시킬 수 없다는 주장이다· 또한 S. Am i n 도 사회주의 국가를 제삼세계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사실상 현재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경제구 조상의 근본적인 변화가 진행되어 왔고, 앞에서도 언급했거니와 후

전성울 특칭지우는 많은 요소가 사라졌다. 그러나 국민소득 수준, 또는 일반적으로 말하여 그들의 생활수준은 아직도 후진국의 카데고 리를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이 나라들의 경제자립 또는 경제독립은 업청난 사회비용을 그 대가로 지불하고 있으며 이것을 깨달은 듯, 많은 나라는 페쇄경제체제에서 차츰 개방경제체제로의 전 향 을 시도 하고(중국, 소련), 경 제의 완전독립 ind e pe ndance eco nomi q u e 에 서 상 호의 존적 보완관계 int e r-dep e ndance 로 나갈 것 을 모색 하고 있 다. 좌 우간 쿠바와 共産베트남 그리고 중공 등은 제삼세계의 일원임을 강 력히 주장한다. 제 삼세계 Ti er s Monde 라는 용어 가 현재의 후진국_ 貧國 울 프랑 스 혁명 당시 핍박받는 서민 tier s et a t s 과 비교, 그들의 생존권 요구 와 유사한 경 우로 생 각하고 사용된 것 이 라면 (A. Sauv y) 현재 일부 학자들에 의해서는 그 原意 가 변질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즉 그들 에게 있어서 제삼세계란 미국과 소련울 중십으로 한 양대 세력권에 속하지 않은 나라들로 구성된 아시아 • 아프리카 • 남미 3 대륙을 의 미한다(I. Wallerste i n ) . 이것은 유럽, 미국, 소련 등에 대한 대립개 념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1974 년 석유파동이 있은 후, 일부 여론에서는 제사세계 Qu art Monde 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 용어는 후진국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그밖에 자원이 없는 이른바極貧國을지칭하는개념이라 할 것이다. 이의에 70 년대 이후 한국 • 대만 • 홍콩 • 성가포르 등 수 출 주도형 개발전략을 동하여 고도성장을 실현시키고 있는 경제를 가리켜 신 흥공업경제 NICS 로 지칭하고 있다. 이 경제들은 선진국의 문턱에 도달합으로써 후진국―제삼세계의 대열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되 고 있으며, 현재는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이 제 Y. Lacoste 의 도형 을 보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선전국

사회주의 국가 제삼세계

제 2 절 제삼세계에 관한 최근의 연구동향 2 차대전 이후 후진국에 대한 논문과 저서는 그것이 대부분 선전 국의 사회과학자에 의하여 전행되었다는 사실 이외에도 양적으로 엄 청나게 많다는 특칭을 지닌다. 마치 선전국 사회과학자들은 이 문 제의 논의로써 그들의 활로를 찾는 듯한 인상을 줄 정도로 후진국 문제 연구에 몰두하였다. 여기에서 다양하고도 많은 그들의 연구를 전부 요약할 수는 없거 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 필자가 처음 과리 대학에 유학할 당시, 화 페론강의 첫시간에 교수는 다음과 같은 말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화페론에 관한 처서만 가지고도 대단히 큰 도서관울 하나 차릴 수 있을 것이다. 문제논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느냐에 있다. 그 많은 처 서둘은 대개 5~6 개 주요 저서만 읽으면 전부 필요없다고할수있 으며,‘ 이 주요처서에 많은 처자들의 이야기가 모두집약되어 있다.〉 우리는 후진국 문제에 관하여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제 우리는 그 연구의 경향을 다음과 같이 제 가지로 분류할수있다. I 주류경제학자들의 견해 이들은 지역과 각국의 문화역사적 배경 및 사회구조의 차이접, 규

모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제삼세계에 적용될 수 있는 하나의 모형을 설정, 그 문제 해결에 대한 처방과 전단을 내린다는 특칭을 갖고 있다. 단순하고도 낙관적인 이 성장이론은 모두가 후진국에서 의 자본형 성 一―두자―一울 문제 의 핵 으로 삼고 있 다. P. Rosente i n - Rodan 에 게 있 어 서 후진국의 두자부족 현상은 企業家 分散의 결 과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그는 국가가 종합적인 두자계최을 작성하 는 것 이 중요하다고 권고한다. 〈 균형 성 장이 론〉의 시 나리 오로 알려 진 이 제안은 후진국에서의 경제계최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는 공적을 인정받는다. 사실상 2 차대전 이후 신생국들 가운데 계최경제를 채택한 나라는 많이 있다. 그것은· 소련이 계최경제를 추전하면서 중공업에 집중투 자, 〈 후발성 이익 〉 을 실현하면서 빠른 성장률을 보이는 데 성공하 자 이에 감명을 받은 일련의 사회주의 경향을 떤 국가들의 모방에 의 해 서 이 다· 그러 나 P. Rosente i n - Rodan 은 〈시 장원리 〉에 기 초를 둔 균형성장이론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후진국들이 처한 근본문제의 전단에서 P. Rosente i n - Rodan 과 근본적 으로는 다르지 않은 A. Hi rc hman 은 이 른바 〈불균 형 성장이론〉을 제시, 기업가의 두자의욕을 자극시키기 위하여 수 입제한과 수입대제산업의 개발을 권고한다. 이상의 제안이 자본형성 또는 두자촉진의 이론이었다면, 그보다 전일보한 단순논리로서 Harrod 와 Domar 는 얼마 만큼을(최적처축의 문제 ) , 어 디 에 (두자의 배 분) 두입 하며 , 어 떠 한 테 크놀로지 (기 술의 선 택)를· 사용할 것인가에 관한 제안을 하였다. 그리고 이 성장모델에 서는 부족한 국내처축을 충당하는 수단으로서 外資의 역할이 강조 되었다. 이상은 후진국의 문제를 구조적으로 접근하면서 50 년대와 60 년 대를 지배하던 樂觀論의 대표이며, 이것은 그후 역사의 발전을 단 순적·최일적으로보는이른바 단계론적 접근으로 이어진다. w. Ros t ow 는 선전국의 경제발전 과정울 역사적으로 고찰, 처축 • 두자 가 이루어지는 단계를 〈도약기〉로 보고, 이 현상은 모든 경제사회

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후진국의 문제를 보다 종합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는 이상의 모 델이 갖는 단순성의 약점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었다 (G. My rd al, A. Lewi s) . 특히 R. Nurkse 와 A. Le wi s 는 후진국의 농촌에 촌재하는 〈무한한 노동인력〉에 착안하여, 〈 위장실업〉 상태의 인력이 예컨대 도시의 수출산업에 동원된다고 할 때, 그 임금은 저생산성의 농촌 임금수준을 넘을 수 없다는 접을 지적하였다. 다른 한편 후진국과 선전국과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지적된 〈교역 조건의 변화 〉 와 그에 따른 후진국 자원의 수탈을 방지하는 조치로 서, 남미에서 일련의 후진국 전문가들은 〈수입대체산업〉을 장려 (P. Presbis c h) 하기 도 하 었 다. 2 종속론자의 등장 제삼제계 문제의 분석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면서 논쟁에 활력 을 불러일으킨 것은 소위 종속론자의 등장에 의한다. 그런데 목이 하게 도 이 종속론자 12) 들은 1960 년대 중반까지 후진국 문재 에 관 하여 침묵을 지켜왔었다. 그것은 이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 야 할 것인가 하는 방법론적 • 인석론적 준비기간이 필요했거나, 또 는 레 닌의 『제 국주의 론 L'im p e rlism e, sta d e sup r eme du ca pit al is me 』 에서 주요논제가 이미 다루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의 논의가 불필요 하다고 생각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여기에서 이 종속이론의 〈元祖〉라고할수있는죠 슈에 드 까스트로 Jos ue de Castr o 를 빠뜨릴 수 없다. 『기 아의 지 정 학적 고찰 Geop o li tiqu e de la /a i m 』이 라는 명 처 가 출판된 것 은 1952 년(佛 譯 판)이었고, 이 책에서 까스트로는· 세계 각 지역의 십각한 기 근상태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면서 남미 대부분의 국가 경제가 마 국의 〈독점자본〉에 예속되었음을 이미 고발하였다.

I 각 종속이른의제표져 인물들은 거의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사실이 주목된다 (S. Ami n, A.G. Frank, P. Jal ee, etc . ).

까스트로가 현실분석을 동하여, 자본주의 선전국과 후진국의 종 속관계를 적나라하게, 충격적으로 서술하였다면, 프랑크 A.G.Frank 와 아민 S.Ami n 등은 이러한 종속관계를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과 도식에 따른 이론적 체계화 룹 시도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구체적 논거 를 제시함으로써 종속이 론을 학문적 인 수준으로 꿀어 올린 학자 로서 『불 평등 교역론 L'echan g e i ne g a 새의 엠마뉴엘 A.Emmanuel 을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이 종속이론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돌은· 현재 세계경제를 중십부 m e t ro p oles 와 주변부p er ip her i es 로 분류하고, 후자에 속하는 후진국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면 서 선전자본국인 중심부에 종속되는 경제체제를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처발전이 유발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이들에게 있어서 후진 국 내지 후진성은 하나의 실촌적 현상이 아니라 자본주의 선진국 에 의하여 事後 的으로 조성된 현상으로 파악된다(저발전의 발전­ develop pe ment du sous develop pe ment) . 그리 고 이 러 한 상황은 선전 국의 〈 독접 자본 〉 이 제 삼제 계 에 서 행 하는 초착취 sup e r-exp ol i tai o n 와 그 잉여가치의 선진국에의 이전으로 이어져 이른바 세계수준의 자 본축적 Accumulati on a I'echelle mond i ale( 자본주의 국가에서)이 계속 진행되면서, 세계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경계체제하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 그 리고 이 메카니즘의 구체적 실현도구로서 같은 생산성 을 지닌 제삼세계의 노동력에 지불되는 임금은 선전국의 그것에 비하여 상대 적 으로 낮고, 그로 인하여 주변부와 중십부간의 교역에 서 불평등교역이 일어나며 나아가서 전자로부터 후자에 부당한 가 치이전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변부는 중십부의 이익에 봉사할 뿐이고 결과적으로 처발전은 십화된다는 것이다. 레닌의 『제국주의론』울 제삼세계의 시각에서 재구성하고 있는 이 종속이 론은 이들이 지칭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간과해버린 양 세 계의 대립관계, 후진국 내부를 지배하는 정치 ·사회적 요소 . , 제 계경제의 특화이론의 허구성 지적 등 그 나름대로 제삼세계를 이 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새로운 시각을 제기하였다는 접에서 그 공적

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이론이 내포하는마르크스주의적 단 정론-제삼제계가 자기중십적 auto - cent re , 자립적 경제를 건설하 기 위하여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에서 탈되, 사회주의 체제를 선 택 하여 야 한다는 주장 (S. Ami n, L'im p er ia l is m e et le developp e ment i neg al) —온 도식적이고 경칙된 제계관이라는 단접을 지닌다. 신흥공업국의 등장과 그의 위치를 인정, 세계체제에서 그의 역할 을 설명 하는 왈러 스타인 Wallerste i n (I'e conomi e monde) 이 나, 이 른바 후기 종속학파로 분류되 는 카르도소 E.H. Cardoso, 에 반스 P. Evans 등은 득히 남미의 공업화 노력에 주목, 경제발전을 결정하는 요인 으로서 내적 동력(주변부)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후진국은 선전국자 본과 연계되면서 〈 종속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 종속적 발전도 그것이 내포하는 경제구조의 파행성, 기술과 자본의 해의 의촌 등에 의해 국내 자본축적이 자체적으로 형성되지 못한다 는 점에서 역시 종속상황은 유지된다고 지적된다. 3 NICS 의 등장 남미의 신흥공업국이 이상과 같은 자립적, 자기중십적 경제발전 건설에 실페한 것으로 이해된다면 아시아의 NICS 는 발전론자들에 게 새로운 분석의 계기를 마련하여 준다. 수출주도형 경제발전 전 략으로 요약되는 이 방법은 노동집약적 경공업의 다발적, 양적 확 산에 의하여 공업화를 가능케 할 수 있다는 실증분석의 자료를 제공 하였 다 (Balassa, Lit tle, Sc itov sky , Scott , Bhag w ati , Krug er , Dong es ) . 그리고 이 아시아 NICS 의 경험은 종래의 고전적 확신, 즉 공업발 전은 공업 화를 가져 올 수 있 논 공업 一一죽 중공업 (ind ustr ies in dust- rial is a nte s ; F. Perroux) 건설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는 신화를 깨 는 중 거로 채택되어 후진국도 기간 산업이 부재한 가운데 경제발전을 실 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그런데 우리는 이 아시아 NICS 의 발전전략이 과연 선전국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다시 한번 던져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선전국 또는 복지사회 건설은 G.N.P. 성장률 등의 경제지표만을 가지고 간단히 이해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구체적인 예로서 한국경제논 여러가지 측면에서 고려할 때 소득의 분배 및 임금의 격차, 조잡한 공익시섣과 공공시설, 매우 낮은 수 준의 사회보장제도 등 아직도 여러 면에서 그 후진성을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유럽 공업화의 역사적 진행 과정 울 분석하고 그에 비추어 현재 후진국의 발전모델을 비교분석, 그 선전화의 가능성 을 점 검 해 보는 작업 (P. Bair o ch) 도 필요하다고 생 • 각한다. 물론 이것은 현재의 후진국이 19 세기의 선전국을모방하여 야 한다는 당위론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경제발전이라는 문제를 포괄적인 역사적 발전의 진행과정으로서 파악해 보려는 시도에 의 한다. 그리고 이것은 〈 로마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 처럼 선전사회의 건설도 한 세대에 이룩될 수 있는 간단한 사업이 아니라는 접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이다.

[제 2 장] 자립적 •자기중심적 산업화 전개의 예

현재의 후진국을 그 경제사회구조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려 고 할 때, 우리는 농업중십의 경제였던 과거 선전국이 어떠한 계기 와 경로를 거치면서 공업국으로 탈바꿈했는지 그 과정을 다시 한번 돌이켜보는 것이 현재 후진국의 문제를 조명하는 데 도읍이 된다고 본다. 죽 모든 사회가 산업사회를 지향한다고 할 때, 선전국의 경 험은 현재 후진국이 당면한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웅이 될 수 있다 는 뜻이다. 물론 현재의 후진국을 지금의 선전국이 산업혁명을 이 룩하기 전의 단계에 일괄적으로 위치시킨다는 단계론적 접근은 일 종의 단순논리로서 그 자체 많은 모순접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경제의 목적이 무엇이냐라는 가치관에 관한 문제이 기도 하다. 여기서는 선명의 편의상 富의 원천이 공업에 있다는 전 제하에 선전국의 경험을 요약하고, 이에 비추어 현재 후진국의 산 업화가 계기하는 문제를 다루기로 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대 단히 독득하고도 홍미 있는 주제 를 발표한 P. Bair o ch 의 견해를 소개한다 .I)

x) P. Bair o ch, Le tiers monde dans /'imp as se 와 La revoluti on ind ustr i e l le et sous develop pem ent.

제 1 절 산업혁명의 기원 I 산업혁명과 농업혁명 〈산업혁명〉이란, 급작스런 변화를 의미하는 〈혀명〉이란 말에도불 구하고 사실상 18 세기 중영부터 접전적으로, 특히 영국을 그 시초 로하여 서구사회를 농업중십에서 공업중십의 경제로 변화시킨 역사 적 웅칙 임 mouvement his t o r iq u e 의 일면을 뜻한다. 그런데 여 기 에 서 Ba i roch 가 득히 주목하는 것은 이 산업혁명이 앞에서도 언급했듯 이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완만히 진행되면서 경재 ­ 사회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 가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산업혁명과 역사적 현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하겠으며, 이러한 서구의 경제변화의 완만성 그 자 체가 갖는 복수성이 오늘날 후진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똑같은 경험 으로 되풀이될 수 없는 구조적인 원인을 내포하고 있음을 Bair o ch 논 보여주고 있다. 1) 잉여농산물의 역할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산업혁명을 논할 때는 주로 새로운 산

업―공업의 출현에 초접을 맞추어 그 변화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 러나 실제적으로 볼 때 이 산업혀명은 농업혀명을 전제로 할 뿐 아 니라 농업의 발전이 산업혁명을 유발시켰다는 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농업발전은 인류문화 발생의 기본이 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그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사실상 인류문화 발달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는 이 른바 신석기혁명이라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인간은 수렵과 열매를 취하는 채취경제체제에서, 토지를 경작하며 가축을 기르는 농업경 제를 운영하기 시작한다. 지금부터 9 천 년 내지 일만 년 이전에 일 어난 이 첫번째 경제혁명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죽 인간은 그 역사상 처음으로 활동인구 1 인당 식량생산과 공급이 자 신의 소비를 충족시키고도 남는 이른바 잉여가치를 창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며, 그로 인하여 주민의 일부는 식량생산에 종사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접이다. 또한 이러한 잉여가치로 인하여 사람들은 生計 이의의 다른 활동에도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접이다. 그로 부터 인류는 分業울 하게 되고 이들이 群居하는 都市生活이 시작된 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생활은 문화를 꽃피우며, 그로부터 古代文 明이 발생하게 된다. 사실상 모든 고대문명의 발생지는 강을 끼고 있는데, 우리는 강의 주변이 비옥한 토지를 갖고 있었다는 것과 이 러한 토지는 농업생산에 적합하고 그로부터 생긴 잉여가치가 도시 생활과 타산업을 일으킬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러한 농산물의 잉여분은 전반적으로 볼 때 그렇게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고대문명과 서구문화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 기 전까지 이 잉여분의 규모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유럽에 서 산업혁명이 전행되기 시작한 18 세기 초기만 하더라도 가장 부 유했던 나타의 경우에도 활동인구의 75~80% 는 농업에 종사하여야 했다. 한국에서도 지난 1960 년대까지 활동인구의 대부분은 역시 농 업에 종사하였다. 다시 말하여 국민의 식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경계주체의 다수가 농업생산에 두입되어야 하였다. 그에 바하여 국 민의 평균 농산물 소비수준은 오렌 기간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

다. 더욱이 모든 나라는 곡물을 그대로 섭취하여 필요한 칼로리를 얻는 칙접적인 방법을 유지하였고, 이것은 한국을 바롯한 모든 후 전국에서는 아칙도 그러하며, 농업혁명과산업혁명을 일찍이 성취한 유럽과 기타 선전국만이 간접 섭취방법——죽 곡물을 사료로 사용 하여 축산을 하고 사람은 육류를 소비하는 방법-으로 전환하였 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이 곡물을 칙접 섭취하여 얻는 칼로리의 열 량은, 곡물을 사료로 사용하여 얻은 고급식품(육류, 유류)을 섭취하 여 얻는 열량의 약 1/3~1/8 에 불과하다고 한다 .2) 다시 말하여 유 럽인이 동물성 식품(육류, 유제품)을 섭취함으로써 얻는 열량울 한 국인이 쌀과 김치 등 식물성 식품으로 얻을 때, 그 비용이 3 배에 서 8 배 가량 더 돈다는 뜻이 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전통사 회에 서 의 농부는, 巨視的 단순화에 따르면 그 가족을 부양하고 약 20~30% 의 초과식량, 즉 잉여가치를 창출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 의 20~30% 는 앞에서 언급했던 활동인구의 비율과 일치하지 않으 나, 그것은 사회구성원 중 일부 집단의 높은 소비수준을 감안하여 대략적으로 추정한 수치이다. 그런데 이 20~30% 는 경제발전을 섣 명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수치라고 한다 .3) 즉 모든 농경사회에서는 기후조건의 변화에 따라 농업수확량의 변동이 있기 마련이다. 풍 년과 흉년이 교차하는 이 경기변동은 고대 이집트로부터 최근의 한 국에 이르기까지 항상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구약성서에는 이집트 에 서 <7 년 간의 마론 암소 sep t annees de vaches ma ig res 〉와 <7 년 간의 살짠 암소 sep t annees de vaches g rasses 〉라는 표현을 빌 어 일 정 기간 지속되는 주기적인 풍년과 흉년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 7 년만의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린다〉라는 말이 있다. 제본스 J evons 가 태양의 혹접설울 주장하면서 경기변동의 원인을 설명하려고 할 때, 이 역시 산업혀명 이전까지 산업의 중심이며 부 의 원천이던 농업과 기후조건과의 상관관계를 암시적으로 시사해 준다.

2) F.A.O. 의 계산. 3) P. Bair o ch, Le tiers monde dans /'imp as se, p. 21.

그런데 기후변화에 따른 농업생산의 변동폭은 평군 25% 수준을 능가했다고 볼 수 있다. 흉년이 지속되어 계속적으로 평군 25% 이 상의 농업생산 감축이 생길 때, 이것은 많은 주민들을 아사상태로 몰아넣거나 또는 심지어 하나의 문명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 그리 고 우리는 이러한 예를 역사를 동하여 무수히 알고 있다. 결국 농업의 생산성이 이 치명적인 분수령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향상되지 못하면 인류의 역사나 전보는 생길 수 없으며, 현대문명 을 목칭짓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도 도모할 수 없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농업생산체계의 개혁을 통하여 이 함정을 뛰어 넘을 수 있었고, 그것이 산업혀명을 가능케 하였다. 유럽에서 추전 한 농업혁명은 40~60 년 기간에 걸쳐 그 생산성을 꾸준히 증가시 킴으로써 평군 잉여분을 25% 에서 50% 또는 그 이상으로 끌어올렸 다. 그리하여 인류역사상 최초로 인간은, 비록 흉년이 있을지라도 기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상의 전개논 어디까지나 거시분석이며, 우리는 여기에서 한 국가, 한 사회의 특수한 구조와 그에 따른 需給不均衡 및 분배 의 왜곡에 따론 기아문제는 편의상 취급하지 않기로 한다. 우리에 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충분한 농산물 잉여의 형성이 농촌생활에 큰 변화를 일으켰고, 병목현상울 타파하면서 유럽에서 산업혁명을 유발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2) 농경기술혁신 많은 경우 농업은 고대로부터 전래되는 기술과 방법에 따라 경험 적으로, 타성적으로 경영되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농업은 최근까 지만 하여도 많은 나라에서 기후의 변덕스런 변화에 그 운명을 말 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아러한 숙명적 타성에서 탈피하려는 적극적인 시도가 이미 16 세기 네덜란드에서 추전되고 있었다. 물 론 이러한 노력은 당시 네덜란드가유럽에서 상대적으로인구밀도가 가장 높았다는 점과도 인과 관계가 있다. 즉 인구밀도가 높았기 때 문에 농업생산의 수확울증가시키려는노력을하게 되었으리타는 것

이냐 반대로 농산물의 생산중가가 인구중가를 야기시켰다는 견해 도 있을 수 있으나, 이상의 두 가지 요인이 원인과 결과의 상호작 용을 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할 것아다. 즉 네덜란드는 생산의 획기적 증가를 동하여 그 돌파구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 좌우간 네덜란드는 이미 16 세기 〈 유럽의 농업기술의 중십 〉 이었 고 여기에서 개발된 기술은 17~18 세기에 영국으로 이전됨으로써 이 나라의 농업생산성이 획기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그런데 영국은 그 초기에는 네덜란드에서 도입한기술율 적용하였 으나 1730 년대 부터 는 독자적 인 기 술혀 선율 도모하였고 그로부터 세계 농업기술의 중심이 되면서, 이 기술은 유럽과 미국 등으로 전 과된다. 그러면 농업혁명을 가쳐온 이 새로운 경작방법을 간추려 보기로 하자. ® 유럽에서는 전통적으로 토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休耕제도를채 택하였었다. 그리고 이 휴경제도는 輪作制와 연관되어 3 년에 한번 씩 토지를 쉬게 하는 그런 제도이다. 그런데 새로운 방법이란 이런 휴경제도를 페지하고, 그대신 작물올 바꾸어가며 경작하는 것이다. 즉 작물은 각기 ’ 특수성을 갖고 토지와 상호작용을 하는데 같은 토 지에 같은 작물을 계속 경작할 때, 이 토지는 그 작물이 필요로 하 논 모든 화학적 요소를 흡수당하여 펴패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데 작물을 바꾸면, 흡수하는 화학적 요소가 다르기 때문에 토지가 원상을 회복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휴 경제도의 페지는 특히 축산을 위한 초지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구리고 축산율 통하여 생산되는 되비는 토지를 비옥하게 하기 때문 에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 농업혁명이 진행되는 기간 토지의 소유제도에 대한 개혁이 유 렵에서 있었고 러시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농노제도가 사 라졌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新作物의 재배 : 이는 휴경제도의 페지와 칙접 관련이 있는 것 이 다. 그 당시 유럽 에 서 는 순무 bett_ rav e, 클로버 , 옥수수, 홍당무,

모밀, 감자 등이 도입, 재배되었다. 특히 다양한 목축용 풀이 재배 되는데 영국을 비롯한 유럽은 이때에 곡물 중십의 농업에서 목축업 으로의 구조변화를 준비하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소비 패턴도 低 칼로리의 곡물과 채소를 칙접 섭취하던 방식에서 고급식품인 육류 와 유제품의 섭취, 즉 간접 소비방식으로 서서히 전환된다. ® 농기구 개량 및 新도구의 발명 : 생산성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에 서 가장 현처한 변화를 보인 것은 쟁기의 개량으로서, 도구의 형태 와 구조를 변경시켰을 뿐만 아니라 보다 많은 철을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낫과 과종기 등도 보다 편리하고 생산적인 것으로 설 계되었다. ® 이 기간중 품종개량을 위한 조직적이고도 과학적인 연구 실험 이 추전되는데, 이것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 노력 의 결실로서 특히 비육을 위한 가축의 중량이 크게 늘어나고 우유 의 생산도 격증하게 된다. ® 경지면적의 확장 : 영국 및 유럽대륙에는 늪지가 많은데 이때 에 본격적인 배수시설 등을 통하여 이 지역을 농업적으로 이용가능 토록 함으로써 경지면적이 크게 늘어났다 .• ® 유럽에서도 농사에 소를 이용했었으나 이를 말로 바꾸어 나간 다. 말의 견인력은소보다 약 50% 가량 더 큰 것으로 평가된다. 예 를 들어, 17 세기 소를 이용하여 I 일 o.4ha 불 경작할 수 있었다 떤 그 수치는 말을 이용할 때 0.5~o.6ha 가 되며, 앞서 언급한 쟁기의 개량으로, 이 수치는 I8 세기말에는 o.8ha 로 증가한다. 죽 과거의 방법보다 2 배의 생산성 증가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수치 논 I9 세기말 증기기관을 이용한 트랙터를 이용하면서 I 일 5ha 를 경작하게 되는데, 현재에는 I2 시간에 약 4oha 를 경작할 수 있 다. 이상이 요약하여 본, 18 세기초부터 진행된 농업에서의 기술개 량의 골자이다. 이 개량은 그동안 지속적으로 . 추전되었고, 특히 기 계의 도입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는데, 그에 따라 농업기 술혁신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그 중십이 옮겨진다. 그리하여 이 분

야에서의 노동조건과 생산성은 일대 혁명 을 겪게 되는데 미국의 경 우 1800 년초에 2,7 t의 밀을 생산하기 위하여 373 단위의 노동시간 이 소요되었다면 1840 년에는 233 시간, 1880 년에는 152 시간, 1900 년초에 는 108 시 간, 1966~70 년에 는 IO 시 간으로 줄어 든다. 4) 물론 미국은 그 광활한 토지로 인하여 기계의 사용이 유럽보다 유리하다 논 조건을 갖춘 점도 있고, 다론 한편 이러한 자연조건이 기계의 사 용을 유도하였다고도할수 있다 .5)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할것은 산 업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에 유럽과 미국의 농업은 상당한 수준의 이 른바 현대화와 생산성 향상을 기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4) P. Bair o ch, 전개 서 , p. 41. 5) 프18랑80 스년·경독 활일동 6인h구a, 1이 인태당리( 남5자h)a, 경벨지기면에적 3은h a다, 음한과국 같1다h.a 미미만국. 71 ha, 영국 8ha.

2 농업생산성의 향상 이상에서 우리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에 유럽의 농촌은 근 본적인 구조 변화를 겪으면서 전반적으로 부유해지고 있음을 보았 다. 다시 말하여 산업혁명은 부유한 농촌을 배경으로 농촌에서 출 발하였다는 점이며, 이제 그 메카니즘을 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전통사회에서 그러하듯이 인구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여 왔음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약 80% 의 인구가 농촌에 있 다고 할 때, 그리고 앞에서 본 농업의 기술혁신으로 인하여 그 생 산성이 급격히 상승한다고 할 때, 그 효과(영향)는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생산성의 향상은 일차적으로 보유양식을 충분히 만 들었고 실제로 그 잉여생산가치는 대단히 컸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 다. P. Ba i roch 의 추계에 따르면 6) 영국에서 1 인당 농업활동인구 의 생산량은 1700 년에서 1800 년 사이, 즉 일백년 사이 약 100% 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의 1700~1800 년대에 해당하는 시기 에 (프랑스는 영 국보다 약간 후에 농업 혁 명 을 추전한다) 프랑스의 증가울 은 70% 정도라고 하는데, 이 나라에서는 대혁명과 나폴레옹의 전

6) P. Bair o ch, 전계 서 , p. 46.

쟁 등으로 농업발전이 순조롭게 추전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역시 Bair o ch 의 계 산에 따르면 1840 년과 1900 년 사이 농업 생 산성 의 중 가는 다음과 같다. 러시아는 30%, 오스트리아가 45%, 벨기에와 이 태리가 50%, 스웨밴 75%, 스위스 90%, 독일 190% 그리고 유럽 전체를 볼 때 평군중가율은 75% 이며, 연평군 중가율은 0 . 9% 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그 내용 을 살펴보자. 영국에서는 17 세기 후반기 부터 주곡인 밀의 수확량이 그 전세기에 비하여 대단히 빠른 속도 로 증가한다. 18 세기에 들어서면서, 그리고 새로운 농업기술이 적 용되면서 곡물의 생산은 칼로리로 표시된 국내 필요량보다 15% 나 상회하는 과잉생산을 보인다 .7> 1760 년경, 식량중산을 가능하게 한 인구증가에 자극되어 영국의 농업은 엔클러져 enclosure 운동과 더불 어 농업 경 영 구조 변화를 가속화시 켜 나간다.

7) P. Bair o ch, La rev o luti on ind ustr i e l le et sous develop pe ment.

프랑스에서는 1750~1760 년대에 경작방법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 작한다. 영 국의 기 술혁 신을 참고 삼은 이 나라는 중소 규모의 자영 농이 지배하는 특수한 토지제도로 인하여 그 혁신의 속도가 영국처 럼 빠르지는 못했지만그런 대로 지속적인 발전울 기록한다. 1751~ 1760 년에서 1771~1780 년 사이 프랑스의 연평군 농업생산 중가울은 I·4% 로 추산된다. 그러면 이상과 같은 농업발전은 어떠한 결과를 가쳐왔는가? 일차적으로 농산물의 증산과 풍부한 식량의 생산은 소비자의 소 비량을 높인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상 유럽에서는 초기에는 식량 소비량이 증가하면서 식품의 질이 고급화된다. 우선 처질의 곡물 (보리, 호밀) 등으로 만들었던 검은 빵은 밀빵에게 밀려 나가고 8)' 이보다 더욱 중요한 현상으로 사람들은 곡물을 칙접 섭취하는 식물 성 소비 패턴에서 육류, 유제품을 섭취하는 고급식품으로의 소비 패턴으로 바꿔나간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로서 1 인이 섭취할 수 있는 칼로리에는 한계가 있다는 접이다. 죽 주민 1 인당

8) 한국에서 1950 년대까지 도시의 소수 를 계의하고 다수의 국민이 보리 을 주식으 로 삼은 것과 비교됨.

1 일 최 고 소비 량을 3, 500 킬· 로리 라고 할 때 , 그 이 상의 소비 는 육체 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오히려 곤란하다는 사실이다. 또한 당시 유럽 의 문화를 지배하던 기독교사상은 모든 종류의 낭비를 최악시하였 으며 금욕을 미 덕 으로 삼고 있 었 다. 한마디 로 말하여 , E.Eng e l 이 지적한 대로 식료품 소비는 소득수준에 비해 경직성을 띠고 있다는 접이다.

제 2 절 농업발전이 산업화를 유발시키는 메카니즘 1 연관효과 eff et d'entr a in ement I 우리는 앞에서 유럽의 농업생산성의 발전에 관한 실증적인 조사 를 소개하였다. 그리고 이 농업의 발전은 산업혁명보다 시기적으로 선행하고 있음도 지적하였다. 그런데 홍미있는 사실로서 이 농업의 발전이 공업화를 유발시키는 결정요인이라는 정을 간과해서는 안된 다. 이것은 통념적으로 산업혁명이 〈일련의 기술의 발명과 그의 생 산분야에의 적용〉”의 견과로 정의되던 학설이나 또는 이 산업혁명 울 〈상업자본의 축적이 산업자본화하였다〉라고 하는 학설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경제발전의 문제에 접근하는 시도라고 할 것이다. 이제 농업발전이 어떻게 산업화를 유발시컸는지 그메카니즘을보 기로하자.

9) R. Barre, Economi e Politi qu e, p. 65.

I) 농업발전과 칙물공업의 발흥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인간이 매일 섭취할 수 있는 식품과 칼로

리에는 생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한계가 있다. 그러면 농업생산성의 향상에 기인한 농산물증산과 그에 따론 농촌의 부의 축적분은 어떻 게 사용되는 것인가? 물론 이러한 잉여가치의 사용에 관한 선댁의 문제는 문화적, 정치 적 배경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상 식적으로 식생활이 해결되면 곧바로 보다 나은 의복을 생각할 것이 며, 이는 En g el 이 이미 통계적으로 확인한 사실이다. 사실상 유럽 온 대서양의 영향을 받아 기후의 변화가 십하다. 따라서 생활의 여 유가 생길 때 사람들의 관심은 일차적으로의복에 쏠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당시 유럽에서 주로 사용되던 직물은 모칙으로서, 이 모직 온 공급측면에서 경칙성을 띠고 있었다. 죽 모직의 원료가 되는 원 모의 생산울 중가시키려면 양의 수를 늘려야 하는데 이것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기적적으로 해결하여 준 것이 떤칙 co tt on 의 등 장이다. 초기에는 직물수요의 증가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유럽에서 떤칙을 수입하였고 그후 원면을 수입, 이로부터 본격적인 떤방칙공 업이 번창하게 된다. 그리고 산업혁명을 상칭적으로 표현하는 세 가지, 측 면칙물 • 철 • 증기기판에서 면직물이 첫번째로 꼽히는 것 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사실상 1850 년경 영국에서 직물공업은 2 차산업 총고용의 75% 를 접유하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면직물공업은 50% 를 차지하였다. 이때에 면제품은 이미 영국의 총수출의 40% 에 달한다. 물론 영국 은 특히 인도를 식민지화함으로써 원료의 수탈과 그 제품의 재수출 이라는 식민경제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면방칙공업은 영국 보다 뒤에 산업화를 추전한 여타 유럽국가에서도 고용이나 생산면 에서 볼 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떤방직공장은 공업의 상칭이었고, 산업화 초기에는 근로자의 불행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10) 떤방칙이 산업화에서 또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은 이 면사가 직조

10) 沈相弼, Ii'프랑스의 노사관계사』(전경련 연구총서 I).

의 기계화를 가능케 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대규모의 칙조기 생산 이 유발되었다는 접이다. 죽 면사는 모사나 麻와는 달리 기계로 처리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고 있다는 접이다. 그로부터 발명가 (J. Kay, Arkwrig h t) 들은 보다 생 산성 이 높은 적 조기 를 경 쟁 적 으로 만들게 되었고 이것이 방직업의 도약을 가져오게 하였다. 2) 농업혁명과 製鐵業의 탄생 우리는 앞에서 유럽의 농업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여러가지 요 소들을 요약하였다. 그런데 새로운 경작방법들은 모두가 철의 수요 증가를 유발시키는 칙접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30~60 년전,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공 장이 전설되기 이전에 철의 소비가 대폭 중가하고 있다. 구체적으 로 영 국의 예 를 보면 1720 년과 1760 년 사이 철의 총소비 는 약 50% 증가한다. 그런데 이 40 년 기 간 동안, 철을 많이 사용하는 영 국의 船隊나 공업 생 산은 15~20% 밖에 증가하지 않고 있 다. 인구증가 역 시 같은 기간 IO% 에 머문다. 결국 이 기간중 철 수요의 증가는 농 업에서 진행된 최기적인 경작방법의 개량에 기인한다고할수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농업혁명이 일으킨 여러가지 기술혁신은 새로운 농기구의 사용을 가져왔고, 말의 대체 역시 마구의 확대생산을 유 발시컸다. 휴경지 제도의 페지로 인한 작업량은 50~60 년 기간 약 45% 증 가한 것으로 추산되는데 11) 그로 인한 농기구의 마모와 대체는 鐵의 수요를 중가시켰을 것이다. 또한 기존 농기구의 개량에서 목재는모 두 철로 바뀌었다고 한다. 결국 이상에서 간략히 본 요소들이 복합 적으로 작용하여 농업부문에서의 철의 수요는 대폭 증가하였고, 농 가가 개량된 신도구를 확보할 수 있게 된 주된 이유는 농촌이 부유 하여졌기 때문이다. 좌우간 철의 총소비에서 농업부문이 차지한비 중은 30~50% 로 추산되며 12) 이 비중은 농가가 비생산부분에서 사

u) P. Bair o ch, 전게 서 , p. 52.

12) P. Bair o ch, 전계 서 , p. 53.

용한 철의 소비량을 제외한 순 농기구 사용분이다. 이상과 갇이 철의 수요 및 생산의 증가는 주로 농업부문에 기인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명백한 사실온 일반적으로 이해 되고있는 도식 죽 철도건설이 철의 수요를 증가시켰다는 결론을 뒤 엎게 한다. 한편 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P. Ba i roch 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즉 1824 년 영국은 철도가 정 상적으로 운영되기 이전에 이미 55 만톤의 선철을 생산하였다고 한 다. 당시 활동인구의 약 30% 는 농업에 종사하였다. 이것은 1720 년 생 산량의 20 배 에 달하는 수치 이 다. 프랑스의 경 우도 1828~4I 년 사이 철도부문의 철 수요량은 총생산의 2% 에 불과하였으며, 역 시 벨기에의 경우 1832~34 년 사이, 즉 이 나라에 철도가 건설되 기 이전에 철의 생산량은 IO 만톤에 달하며 이는 주민 I 인당 25kg 에 달하는 수치이다 •13)

13) P. Bair o ch, 전개 서 . A. Audig a nne, Les chemi ns de fer aujo ud'hui et dans centa n s.

결국 철의 수요는 영국의 경우 1720 년경부터 급격히 증가하며 그것은 농기구 생산의 증가에 기인하였다. 여기에 관하여 영국의 산업 혀 명 사를 가장 정 확히 서 술하였 다는 P. Manto u x 는 다음과 같 이 말하고 있다. 〈공장이 건설될 당시 이미 농업은 현대화되었었 다. >14 )

14) P. Manto U J C, La revolut ion ind ustr i e l le au XVIII si ec le, Paris .

2 연관효과 II 농촌이 부유하여침에 따라 유발된 칙물공업의 발흥과제철업의 발 달은 제 2 의 효과를 일으킨다. 그것은 석탄공업의 개발이다. 죽 제철업은 갑자기 늘어나는 철의 수요에 칙면하여 생산중가를 위한 방법을 강구하여야 하였다. 그런데 종래까지 제철소에서 사용 하던 연료는 그 열량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격증하는 생산량을 감 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농경지 확장에 따른벌목은木

材의 공급을 그만큼 감소시 켰다. 이 러 한 병 목현상 go ulot d'etr a n- gle 1nent 을 해소하기 위한 이상적인 방법은 연료로서 사용하던 목 재 대신 석탄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 국은 석탄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석탄은 산업혁명의 원동력 이 되었으며 오늘의 석유처럼 전략적 가치를 갖기도 하였다. 물론 석탄이 목재의 대체재로 승전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 되었다. 영국의 경우, 농업혁명이 시작된 후 30~40 년간, 중가하는 철의 수요는 수입으로 충당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火木의 가격이 다른 財貨보다 2 배 이상 폭등하고 있다. 죽 연료의 문제는 석탄아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전, 유럽이 해결하여야 할 근본문계였다. 그리하여 18 세기에 들어서면서 석탄 소비량은 급증하기 시작, 영 국에서는 1750 년경 주민 1 인당 석탄 소비량이 800k g에 달한다. 그 로부터 영국은 철과 석탄생산이 타국에 비하여 우위를 접하게 되 며, 세계 최강의 공업국으로 군립하게 된다. 1806 년, 영 국의 철생 산은 235 천톤으로서 1760 년 생 산량의 IO 배 에 도달하며, 이물 위하여 140 만돈의 석탄을 사용한 것으로 추계 된다 .15)

15) P. Bair o ch, La revoluti on ind ustr i e l le et sous develop pe ment, p. 1 야

이상과 같이 한 부문이 야기시킨 연관효과는 계 2, 제 3 부문으로 확산되는데 우리는 그 가운데 방칙업의 기계화가 가져온 효과를 살 펴보기로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칙물공업의 기계화는 농업이 도약한 시기로 부터 30~60 년 후에 진행된다. 그리고 이 산업의 기계화는 농업혁 명에 기인한 철의 수요증가에 뒤이어 또다른 철의 수요증가를 야기 시키게 된다. 왜냐하면 칙조기는 초기에 주로 목재를 사용하였으나 꾸준히 추전된 기계의 개량과 더불어 목제는 철제로 대체되었기 때 문이다. 그리하여 1786 년에는 대부분의 방적기계가 鐵製로 바뀌었 으며, 영국의 방칙공장울 방문한 프랑스인은 다음과같이 말하고있 다. 〈이곳에서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된공장에서는 철물을 능숙히 다 루는데, 이들이 만든 기계의 특칭은 그 運動이 정확하다는 것이다.

몹니바퀴모양의 부품들이 연결된 이 기계들은 鑄鐵로 제조되어 있 냐 〉 16) 프랑스에서는 목제기계의 대체가 1825 년경부터 진행되어 1832 년 에는 거의 모든 기계가 철제로 바뀐다.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분야로서의 방칙공업은 농기구와 더불어 침­ 의 수요를 이렇게 대폭 증가시키고 있다. P. Ba i roch 의 계산에 따 르면) 영국에서 1845 년경 자동 면방직기계는 약 20 만대에 달하는 데, 그것은 24 만톤의 철에 해당한다. 여기에 타섬유를 취급하는 칙 조기를 더하면 철의 소비는 약 36 만톤으로 집계된다. 이상의 수치 에 재래식 방칙기를 더하면 면방칙공업에서 철의 총 소비량은 1 백 만톤에 달한다는 것 이 다. 영국보다 산업화를 늦게 추전한 프랑스의 경우 1846 년 면방칙 자 동칙조기는 3 만 1 천 대로 추산되며 타 심유칙조기는 약 3 만대에 달 한다. 이 나라에서도 칙조기에 사용된 철의 소비량은 12 만톤에 달 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칙물공업이 제철업의 발전에 미찬 영향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분만 아니라 이 산업은 산업혁명 초기 중기기관 울 가장 많이 사용한 분야로서 1800 년대 까지 Watt 가 제 조한 증기 기관은 289 대였는데 그중 58 대는 석탄채광에 사용되었고, 31 대는 운하 등의 취수분야에 그리고 30 대는 금속공업, 23 대는 주조업에, 104 대는 방직공업에서 사용되었다 .18)

16) P. Manto u x, La revoluti on ind ustr i e l le au XVIII sie c / e, P. Bair o ch 에 서 재 인용 . 17) P. Bair o ch, 전게 서 , p. 91. 18) J.H . Clap h am, An economi c his t o ry of modern Great Brita i n , p, 157, P. Bair o ch, 전게 서 에 서 재 인용.

프랑스에서도 1835 년에 생산된 증기기관의 약 50% 를 방칙공업 에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유럽의 산업화가 농촌에서 출발하여, 그것이 타 산업의 발전을 유발시키면서 파급효과를 나타내고 있음을 구체적으 로 선명하려 하였다. 그리고 이 파급효과는 제 2. 제 3 의 연계, 연

쇄반응을 일으키면서 경제,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변혁을 가져왔고 이러한 변혁은 접전적으로 경제를 서서히 선전화시켰다. 그런데 우리가 제삼세계 문재를 취급하면서 선전국의 구조변화 메 카니즘을 분석하는 이유는 선전국의 산업화과정이 이른바 자기중십 적 auto - centr e 발전의 구체 적 인 예 이 며 , 바로 이 자기 중십 적 발전 모델이야말로 오늘날 후진국이 후진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S. Am i n 은그의 처서인 Ii'세계 차원 의 자본축적 L' ac cumulati on a l'echelle mond i ale 』에 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경제발전 또는 발전정책의 기술은 저개발과 발전이 론에 근거를 두고 구체적인 수준에서 추전되어야 한다. 즉 발전 전략의 기술은 그 목표로서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 경제적 선택을 전개하여야 한다. 구체적인 상황이란 특수한 역사와 구조를 가전 후진국의 조칙 적 이 고 구조적 인 변화의 전망이 며 , 통일성 homog e ne 있 고 자기 중십 적 auto - centr e 이 며 자체 동력 적 auto - dy n ami qu e 경 제 의 의욕적 건설을 뜻한다. 이 기술은 국민경제의 해방이라는 전망하에 추전될 수 있 다. >19 )

19) S. Ami n, L'accumulati on a l'echelle mondia /e, p, 50, ed. Anth r op o s, Pari s.

그러면 선전국의 농업혁명이 성장, 발전을 접화시켰다면, 이 접 화가 어떤 경제 ·사회적 상황에서 자기중심적, 자체동력적 발전을 유발시켰는지 그 메카니즘을 분석하여 보자. 물론 이 분석의 목적 은 그것이 현재의 제삼세계의 상황과 어떠한 유사성과 차이접을 갖 는지 규명하기 위함이다.

제 3 절 독립적 • 자기중심적인 산업화 추전의 메카니즘 영국이 인구나 농업생산, 국내 처축 둥 그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프랑스보다 뒤떨어지면서도 산업혁명을 가장 먼처 추전할 수 있었음 은 그 나라의 특수상황에 기인한다. 그런데 우리의 관십사는 영국 이 다몬 나라보다 상당히 앞서서 산업화를 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다론 나라는 영국의 생산체계에 편입되지 않고 각기 독자적 인 산업화를 추전해 나갔다는 사실이다. 죽 현대적인 용어를 빌리 자면, 당시 영국과 기타 유럽 諸國이 중십부와 주변부의 관계를 형 성하지 않은 가운데 각국이 독자적으로 먼처 산업혁명에 착수한 영 국과 유사한 과정을 밟으면서 時差를 두고 독립적인, 자체동력적인 성장을 추진하여 나갔다는 사실이다 . 여기에서는 이상과 같은 독립적인 성장을 가능케 한 구조적인 메 카니즘을 분석하기로 한다. 1 국민경계의 자생적 • 자립적 발전을 가능케 한 구조적 메카니즘 1) 소규모의 두자비용 오늘날 일부 후진국의 개발전략에서 볼 수 있듯이, 산업화는 일

견 대규모의 자본과 두자를 초기부터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후진국의 문제는 자본과 기술의 부족으로 요약되 기도한다. 그런데 유럽이 산업혁명을 추전하던 초기에는 활동인구 1 인당 소 요되는 두자비용이 대단히 적은 규모였음을 지적할 수 있다. 우선 Ba i roch 가 조사한 결론부터 소개하자면 1812 년 영국에서 활동인구 1 인당 두자비용은 당시의 4 개월 임금에 해당하는 적은 액수였다. 이 수치는 I760~1790 년에는 더욱 적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1 인당 소요 두자비 용은 18o0~1820 년 기 간 약 6 개월에 서 8 개월의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이러한 고용인원당 시설재 두자비용 은 그후 꾸준히 늘어나 1953 년 미국에서는 29 개월의 임금에 해당 할 정도로 대폭 중가한다 . 2 0 )

20) P. Bair o ch, La revolut ion ind ustr i e l le et sous develop pe ment, p. 115.

이상의 조사결과를 풀이하자면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예컨대 칙물 공장을 차린다고 가정할 때, 그 직물기계 한 대를 제조하는 바용은 고용인 1 인의 6 개월 또는 8 개월의 임금에 해당한다는의미인데, 그 것은· 우리가 상석적으로 생각하여도 수긍이 갈 수 있는 사실이다. 즉 초기의 칙물기계는 과거 우리나라 농촌의 중농 수준의 가정에 서도 보유하고 있었던 베틀 정도의 초보적인 기계로서, 이의 제조비 용은 현재의 자동 칙조기에 비할 때 대단히 처령하였을 것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초기의 〈 기업가〉는 농촌이나 또는 도 시에서 〈 공장 〉 을 차릴 때, 이상과 같은 초보적 기계를 서너 대 가지 고 〈 사업 〉 을 시작하였고, 따라서 루자비용-죽 자본의 규모는 대 단히 영세하였다는 뜻이다. 따라서 영국을비롯한 유럽의 각국은자 체의 능력으로 소규모의 제조업을 일으킬 수 있었다. 2) 기업의 영제성 또 한편 산업화 초기단계의 기업은 그 집중도가 대단히 낮았다는 접이다. 즉 대부분의 기업은 중 • 소기업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는 데, 여기에는 구조적인 원인이 있다. 죽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초기

의 산업의 기술수준은 극히 초보적이었으며 , 이러한 초보적 기술수 준과 제조방식으로는 기업의 집중이 오히려 불리하였다. 다시 말하 여 기업집중은 그 기술수준이 고도화하여 두자에 많은 비용이 들 때에만 경제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기업경영 구조상의 이유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실은 당시의 불안정한 운송수단과 높은 수준의 운반비 가 기업규모의 확장을 여제했다는 접이다. 그리고 이 겁은산업혁명 울 늦게 시작한 유럽의 각국이 자생적, 자립적 경제성장 을 성취가 능토록 한 역설적인 요인이며 또한 현재 국제간의 다양한 운송방법 과 운송비 절감이 후진국의 자생적 경제발전을 처해하게 한 근본적 원인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21 )

21) 이 검은 뒤에서 자세히 다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 생 산단위 를 확장하여 제 품생 산 울 대 량화 하려면, 이 제품을 소화시킬 수 있는광여의 시장이 필요하다. 그런 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못했고 따라서 운송바용 도 높을 때, 생산자논 그 판로에 위험이 따르는 대량생산 을 여제하 고 소규모의 생산을 동하여 안정된 시장에서 제품을 판매할 것이다. 3) 루자비용과 관련하여 당시의 기업에서 사용된 시선재(기계)의 특칭은-그것이 방칙업이건, 또는 他산업이전간에 모두가――츠 L 생산능력에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당시의 〈 大企 業 〉 이라하더라도소기업에서 사용하는기계를수적으로더 많이 확 보하고 있다는 이의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이상과 같은 특수 조건과 상황에 따라 또 하나의 결정적 요소가 발생한다. 4) 기업가 출현의 용이성 당시에는 낮은 수준의 두자비용과 산업자본의 영세성으로 말미암 아 누구든 의욕과 의지만 있다면 기업에 뛰어들 수 있었다. 실제로 초기의 기업가는 대부분 농만출신이거나 또는 소자본을 가전 장인

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출신이 어떠하든간에 창의력과 이니셔 티브만 있으면 기업에 뛰어들 수 있었는데 이것은 현대의 기업창업 과 여러 모로 큰 차이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산업화 초기에는 고용인원 I 인당 필요한 농업자본 과 산업자본 사이에 상당한 격차가 있었다. 즉 농업자본이 산업자 본보다 상대적으로 월등히 높은 수준에 있었다. 이제 그 구체적인 통계 를 인용하여 보자. ® I8I2 년 영국 : 산업부문의 고용인구 I 인당 자본비용은 37 과 운 드 인 데 비하여 농업부문의 수치는 300 파운드이다. 즉 I : 9 의 격 차를 보인다. ® 1853 년 프랑스 : 산업 부문의 고용인구 I 인당 자본은 약 850 프랑인 데 비하여 농업에는 약 7 , 000 프랑으로 I : 8 의 격차를 보인 다. 농업자본이 산업자본보다 그 비중이 높다는 사실은.다른 나라 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다음은 산업자본을 I 로 하였을 때의 농업 자본의 비중을 보여주 고 있다 . 2 2 )

22) P. Bair o ch, Le tier s monde dans /'imp as se.

1850 년의 벨기 에 I : 6 1880 년의 미 국 I : 2. 5 1905 년의 일본 I : 8

미국의 경우이 비울이 상대적으로낮게 나타나는이유는이 나라의 거의 무한한토지로 인해 상대적으로처령한토지가격에 기인한다 .23) 이상의 격차는 당시 농업에 종사하던농민이 큰 부담없이 제조업 으로 그 사업을 쉽게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 한편 당시의 농부는 농사에서 시간적 여유가 생길 때 칙물을 짜는 즉 半 農 半工의 신분을 갖고 있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

23) 미 국의 팔요 농업 자본과 산업 자본과의 비 율은 Kuznets , Long ter m chang e s in the nati on al inc ome of the Unit ed Sta t e s of Americ a sin c e 1870, • Income and Wealth (serie s JI ) , Cambrid g e , 1952.

것은 유럽에서는 남자가 칙조를 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았고, 한국의 과거 농촌에서와 같이 오로지 여자만이 베틀에 앉고 부업일 을 한다는 특이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의한다. 이 렇게 농업에서의 I 인당 고정자본의 비율이 높다는 것은 바꾸어 말 하면 농민이――비록 수익성이 낮은 농지라도――토지와 구 부대시 설을 매각하여, 그 대금으로 쉽사리 4~5 인을 고용하는 소규모의 공장을 차릴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실제로 영국에서 있었 던 〈엔클러져〉 운동온 공동경지를 페지하면서 소지주들을 限界化시 켰고 결과적으로 이들의 전업을 가속화시켰었다. 이제 망뚜 Man t oux 가 조사한 당시 영국 기업인의 뿌리를 묘사한 구철을 인용하여 보 자. 〈기업인의 대부분은 농촌 출신이다. 이들은 영국 인구의 대부 분이 그러하듯이 半農, 半工人이었다. 이들의 근본을 거슬러 올라 가면, 이 들은 모두가 농민으로서 ‘ye omen’ 의 후계 자라는 것 을 알 수 있울 것이다.〉 24) 선생기업과 기업가의 대부분이 농촌출신이라는 사실온 산업화 초 기과정에서 자본가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 며, 이는 그동안 유럽의 산업혁명을 설명하는통설에 위배되기도한 다. 그리고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특히 상업자본이 산업혁명 초기에 제조업에 대량 두입되었다는 증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논거 를 증명하는 사실로서 유럽에서 I6, I7 세기부터 重商主 義 的 교역을 통하여 상업자본을 축적한 네덜란드, 이태리, 스페인, 포르두갇 둥 은상업자본의 축적이 이들보다상대적으로 처조했던 영국, 프랑스, 독일보다 오히려 뒤늦게 산업화를 추전했다는 것이다. 또한 한 나 라―예컨대 프랑스에서도동방무역과 아프리카교역으로상업자본 의 중십지였던 마르세이유, 보르도, 낭드 등은 산업의 성장핵 po le de cro i ssance25) 이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보르도나 낭드 등은 아프리카 교역이 되조하면서 사양화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 다. 물론 베니 스, 제노바, 브리 스를, 풀라이 마우드, 두브르가 산업

걱) ·P. M. an to u x, La revoluti on in dustr i e l le au XVIII sie c le, p. 385. 25) 성장핵의 이론에 관하여는 F. Perroux, L'economi e du XX- sie c le.

중심지가 되지 못했음은 현실이 증명한다. 이에 대하여, 이상의 도 시에 축적된 상업자본이 산업중심지로 이동 두자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당시 의 초보적 인 금융기 관과 자본시 장의 상태 로 보았을 때 거의 불가능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결국 산업혁명을 일으킨 주역은 자본가가 아니며 대부분이 농촌에 근거를 둔 농민 또는 半 농, 半공인으로서 이들이 새 시대의 새로운 기업인으로 탈바꿈했다 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했던 경제적 배경은 앞에서도 언급 했듯이 초기의 제조업 두자비용이 오히려 농업자본보다 덜 들었고, 또한 기업의 규모도 영세하였다는 점이며 따라서 원하기만 하면 누 구라도 제조업에 두신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초기의 산업화 시대에는 대부분 〈 공장 〉 으로서 농촌이나 도시의 〈헛간〉을 이 용했다고 하며, 기업 경영도 현대처럼 이른바 전문경영인이 필요할 정도로 복잡하지 않았고 독수한 기술이나 전문지식이 필요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려는 사람이면 누구나 용 이하게 기업가가 될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은 구조적인 요인__죽 초기 산업두자비용의 영세성, 초보적인 기술수준, 기업의 영제성 등-으로 말미암아 농업혁명 을 성취, 부유해전 농촌을 배경으로 한 나라라면, 산업적 변화를 자생적으로 그리고 독립적으로 추전할 수 있었다. 2 자생적 • 자립적 공업화의 추전을 가능케 한 구조적 메카니즘 I) 보호주의 18 세기와 19 세기에 산업화를 추전한 모든 나라는 자국의 공업을 보호하기 위한 수입제한 조치를 취한다. 영국이 자유무역주의를 택 한 것도 자국의 공업이 국제경쟁력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판단되는 1846 년경이었다. 전통적인 보호주의 국가인 프랑스는 1860 년 영국 과 자유무역을 위한 조약을 체결했으나 1881 년 또다시 보호무역주 의로 돌아갔다. 미국은 1864 년 수입품에 대한 고울의 관세를 부과

하면서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였다. 보호주의 무역에 관하여 가장 많이 인용되는 주장은 〈 유치산업〉 보호를 위한 L i s t의 주장이다. 이상과 같은 보호주의는 영국의 석 탄산업, 면칙물공업을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프 랑스의 제철공업도 강력한 보호무역장벽 아래서 발전할 수 있었다. 2) 자연적 보호수단으로서의 높은 운송비용 교역이 있으려면 상품을 운반하는 운송수단이 발달하여야 한다. 또한 의국상품을 영가로 수입하기 위해서는 이 운송비가 처령하여 야한다. 그런데 I830 년경만 하더라도 예컨대 영국에서 수입한 폴란드의 소백 은 그 운송비 용이 상품가격 의 IOO% 에 달한다는 계 산이 있 다. 26) I800 년대초 프랑스 국내에서 밀값이 가장 높은 지역은 가장 낮은 지역에 비해 그 가격이 260% 나 더 높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육로 를 동한운송비가 비쌌기 때문이다. 결국육로를 택했을 경우 400~ 500km 의 거리마다 밀값이 그 운송비로 인하여 2 배로 상승하게 되 었다는 것이다.

26) P. Bair o ch, La revoluti on ind ustr i e l le et sous develop pe ment, p. 78,

이렇게 높은 운송비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이 부피가 크고 무거운 상품일수록 더욱 급격히 늘어났다. J.U . Ne f의 계산 27 ) 에 따르면 I550~I700 년 기간 생산지 (광산) 가격과 소비지인 런던에서의 석탄 가격의 차이는 I : 5 에 달한다고 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도매업자 의 중개료도 포함되었을 것이나 당시의 운송수단을 상정할 때 그 소비가격이 대단히 높았을 것임은 불림없는 사실이다. 프랑스에서 도 역시 광산에서의 석탄가격은 q u i n t al 당 巧수 Sous 인데, 그것이 30km 마다 운반비가 I5 수씩 부가되었다고한다 .28) 이상의 例는 운 하와 기차, 또는 기선이 없는 가운데 馬車, 또는 범선을 이용한 운

27) J.U . Nef, The ris e of the Brit ish coal ind ustr y , P. Bair o ch, 전게 서 , P. 129 에서 재인용. :z8) Di ct i on nair e Univ e rse/ de Commerce, vol. I , Pari s, 1805, P. Bair o ch, 전 게서에서 재인용.

송이 얼마나 높은 비용이 드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운송방식이 내포하는 여러가지 위험부담은 계산되지 않았다. 이렇게 불편한 교통과 운송수단으로 말미암아 당시 신생기업은소 규모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기업은 제한되고 상대적으로 고립 된 시장을 대상으로 제품생산을 하였으며, 전국적으로는 이렇게 제 한된 영역을 행동반경으로 하는 수많은 중소기업이 산재하게 되었 다. 그리고 당시의 기술수준이나 금융조칙의 미비성으로 인하여 기 업집중은 상당기간 후에나 발생하게 되었다. 기업이 영제하고 기술 수준이 초보적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산업의 설립이나 전입은 용이 하였고 특별한 자격이 없더라도 기업인이 될 수가 있었다. 물론 이상과 같은 상태는 서서히 전행된 기술의 발달과企業의 성 장에 따라 변화하였는데 특히 운송수단과 시설이 근대화하면서 기 업집중도 가속화된다. 그런데 초기의 높은 운송비용은 우리의 관심사인 자기중심적, 독 립적 경제발전을 가능케 한 모순된, 그러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의 재삼세계에 속하는 많은 나라가 그 도약 tak e- o ff울 성취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를 설명하여 주기도 한다. 3) 높은 운송비가 자기중십적 경제 발전을 가능케 한 메카니즘 우리는 앞에서 철도나 기선아 사용되기 전의 높은 운송비의 실례 를 몇 가지 보았다. 또한 영국을 비롯한 모든 나라는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고울의 관세정책을 사용하고 있음도 보았다. 그런데 높은 운송비는 사실상 고울의 관세제도보다도 더욱 효력 있는 수입제한적 역할을 하였음은 상식적으로도생각할수있다. 여 기에서 중요한것은이 높은운송비가각국이국내시실재산업을자 생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만 일 그 당시 운송비가 처렴하였다면 영국보다 뒤늦게 산업화를 추전 한 나타는 영국으로부터 시실재를 수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것은 마치 현재 한국과 같은 많은 개도국-~後發 또는 先發 통털 어-들이 그들의 시설재를 국내에서 생산하지 않고 선전국으로부

터 수입하여 그를 기초로 소비재를 가공, 생산하는 경우와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같은사태가 벌어졌었다면 영국을 제의한 유럽 의 다른 국가들은 그들의 산업혁명을 순조롭게 진행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설재산업은 여타 산업에 대한 연관효과와 파급효과를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즉 그것이 방칙기계이전 농기구이건, 또는 운송시설(철도 등)이건, 이의 제조 및 수요 중가는 타산업에 일련의 파급효과를 일으킨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이상의 기계, 기구 등 에 대 한 수요 증가는 철의 수요 증가를 일으키 고, 철의 수요 중가는 석탄의 수요 증가를 일으키며, 석탄의 수요증가는 증기기관의 수요 증가를 일으키는 등, 산업의 연쇄반응을 일으키면서 무수히 많은 연 관산업의 성장을 유발시킨다. 이러한 연쇄반웅이 승수효과 또는 가 속도 원리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국민생산은전반적인 성장을 기록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시실재산업은 소비재공업과는 달리 한 나라의 경제를 전체적으로 끌고 가는 연관 • 파급 효과 e ff e t d'entr a 'in e ment et de d iff us i on 를 갖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제삼세계에서의 시 실재산업 또는 기간산업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제삼세계가 자기중십적이고도 균형된, 통일성 있는 경제 발전과 도 약을 못하는 원인은 바로 이 시설재산업이 발달되지 못했기 때문이 며 여기에는 여러가지 구조적 • 상황적 원인이 있다. 이렇게 높은 운송비가 국내의 시실재산업을유발시킨원인으로등 장한 사례로서 우리는 프랑스의 예를 들 수 있다• 죽 1835 년 이 나 라에서 가동하고 있던 중기기관 1,403 대 가운데 I, I12 대 (85%) 는 프랑스에서 제조한 것이다. 1842 년에 이르면 총 보유 증기기관 5, 9II 대 가운데 프랑스에 서 칙 접 생 산한 제 품은 5, 272 대 (89%) 에 달한다 .29) 이렇게 시설재를 칙접 생산하게 된 주요원인은 당시의 운 송비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죽 프랑스는 기술적으로 앞선 영국

29) Encyc lo#die du Commerfa nt, Di ct i on nair e du Commerce et des Manchan-dis e s, Annuair e e de l'economi e pol i tiqu e, 184 4, P. Bair o ch, 전게 서 , p. 13l 에서 재인용.

제를 수입하기보다는 칙접 생산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 이다. 더욱이 프랑스의 산업 중심지는 항구도시에 위치한 것이 야 니라 파리, 알사스 등 내 륙지 방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도버해협을 건너는 해운비 이의에 육로로 도착지까지 기계를 운반하는 데 상당 한 어려움과 비용이 들었던 것이다• 1820 년대 프랑스에서 陸運費 는 본당 1 km 에 0. 30 프랑으로 나타나 만일 500 km 를 운반한다면 그 운반비 는 물품가의 17% 에 해 당한다는 계 산이 나온다. 30)

30) P. Bair o ch, 전개 서 , p. 132.

이 제 프랑스가 1825 년부터 1904 년까지 시 실재 (운송시 선 포항)의 총소비 와 수입 을 가치 로 환산한 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 표 I> 프랑스 시선재의 총소비 및 수입

二:一一二―二〔혼」 시설재 의 총소비 | 시실재 (의단 위수 :입 [0 0 만I t프랑습,깁 경어 ~상1 일가격한) 11I1III1888888886342875955555555 ~~~~~~~~ 1111I11I888888898936457044444444 1III,,,, 3492715 II6208I62OO000000 I55l225339III . 2 4035111l..... ... 74270950%%%%%%%%

이상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시선재의 대부분은 국산이며 수입재 품은 1870 년까지 2% 미 만에 그찬다. 프랑스의 이 른바 〈도약〉을 1850 년대 로 잡는다 하더 라도 31) 이 나라는 산업 화를 거 의 전부 국 산 기자재에 의촌하면서 추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은 한국이 1960 년대에 취한 개발전략에서 시실재와 중간재를 거 의 수입에 의촌한 것과 다른 것이다.

31) A. Phil ip, Hi st o i r e des fai l s e conomi qu es et soc iau x T.I., p, 117.

이상과 같이 프랑스는 영국에 인접해 있으면서도 생산시설의 거 의 전부를 독자적으로 개발하였고, 이어서 대륙에서 19 세기에 산업 화를 추진한 모든 나라도 독자적 으로 생 산재 산업 을 개 발하여 국산 에 의촌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독일의 경우 오히려 강화되면서 이 나라는 현재 세계제일의 시설재 생산, 수출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3 2 )

32) J.P . Mi ng as son, Politi qu e economi qu e de la Rep ub li qu e Federate d'Allem-ag n e, Cours de L'I .E . P. de Pari s, 1978, Pari s, p. 36,

자기중심적 공업발전을 성취한 일본의 경우도 유럽의 다른 나라 와 유사한 과정을 밟고 있다. 일본은 거리상 유럽에서 멀리 있기 때 문에 시설재 수입의 운송비는 비록 1900 년대에 들어선다 하더라도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분만 아니라 이 나라는 1901 년 시설재 수입에 대한 관세를 5% 에서 30% 로 대폭인상하고있다. 따라서 이 나라가 수입하던 증기기관차, 화물차, 인쇄기 등의 수입이 줄어들 고 이의 국내 대체생산이 일어난다. 이때부터 일본은 국제교역에서 현재 볼 수 있는 경향을 띠기 시작한다.

〈 표 2> 일본의 시실재 생산과 수입

二 국내생산(백만엔)| 수입 (백만엔)( 연 평I 군,국 수산1입9에1의4 년대비 기율 한준 ) I 1914 201 32 16% I9l9 ~ I92I 1,030 130 13% 1924 ~ 1926 561 I53 27% 1929 ~ 1931 678 II9 18% 1934 ~ 1936 1,350 I48 11% 자료 : K. Ohkawa, The gr owt h rate of the Jap an ese economy sin c e G18.C78. A(Tlloekny, o A ) 에 s서h or계t 산e.co nomi c his t o r y of modern Jap an 1867~ 1937.

이상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유럽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후진국인 일본은 그 시설재의 약 80% 를 국내생산으로 충당하고 20% 만을 수

입하여 사용하고있다. 죽 이 나라도 일찍이 그 시설재의 생산울 국 내에서 해결하고 있다. 우리는 영국에서 출발한 산업혁명이 유럽과 일본에까지 전과되면 서 각국이 자생적, 자립적 발전을 추전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이 자립적 성장은 각국의 독자적인 시설재 생산에 의촌하고 있음도 보았다. 이것은 경제발전율 설명해 주는 관건이며 해답이고, 또한 20 세기의 제삼세계가 어찌하여 성장의 熙火 amorce 를 못하고있는 지에 대한 정답이기도 하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영국이 비록 기술적으로 앞셨지만 이 기술의 이전은 완제품의 수입이라는 수단 을 통하여 이루어전 것이 아니고 거의 대부분 기술의 모방에 그쳤 다. 즉 유럽과 일본 등 후발국들은 영국에서 개발한 기술을 약간 변 형시키거나 개선하면서, 각국은 자체의 능력으로 생산재를 생산해 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생산재의 생산이 타산업에 파급효과를 유 발시키면서 전반적인 경제성장을 가져오게 하였다. 유럽의 후발국이 선전국인 영국으로부터 기술만을 도입, 그를 소 화할 수 있었던 데는 당시의 또 다른 상황적 원인이 있다. 4) 선전국의 기술이전이 용이했던 이유-기술의 단순성 영국으로부터의 기술이전은 영국인 기술자에 의한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기술자에 의한 칙접적인 기술원조는 그리 중요한 · 비 중을 차지 하지 는 않았다. 다시 프랑스의 예 를 들어 보자. 프랑스 의 방칙공업에 기술 자문을 하여준 영국인은 Holker 와그가 데려온 소수의 기술자가 전부였다고 한다. 또 다른 예로서 프랑스에서 대혁 명 이후 현대적인 제철공장을건설할 때에도 영국의 제철업자 W ilk i- nson 의 동생이 유일한 영국인 기술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제철 공장은 코크스 석탄을 이용하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근대적 기술을 채택한 대규모의 생산업체였다 .33) 칙접적인 기술원조에도 불구하고 후발국이 생산재를 칙접 계조할

33) C.H . Ballot, L'in tr o ducti on du machin i s m e dans /'ind ustr i e /ranfi ase , Pari s, 1923, P. Bair o ch, 전게 서 재 인용.

수 있었던 비결은 당시 사용된 기계나 기구가 단순하였던 데에 있 다. 사실상 산업화 초기에 있어서 경제와 과학과의 관계는 동념적 으로 생각하듯이 그리 밀접한 것은 아니었다. 즉 그 당시 기계의 선 계는 주로 경험에 의하였고, 대장간에서 농기구를만들거나또는시 계를 고칠 수 있는 정도의 기술자라면 산업혁명 초기에 사용되던 기계는 손수 제조할 수 있었다. 바교적 세련된 칙조기를 고안한 Watt 는 목수였 고 Arkwrig h t 는 이 발사였 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산업화 초기에 사용되던 기계는 각 분야에서 칙접 제조되었다. 방칙업계에서는칙접 방직기계를 제조하였고 타분 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독립된 시설재 산업이 별도로 기계를 생산, 관련산업분야에공급하는수준은아니었다. 이것은기계의기 술수준이 그만큼 초보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각 산업분 야가 필요한 기계를 직접 생산하던 제도는 영국의 경우 1800~1810 년경 , 프랑스는 I820~1830 년경 에 와서 전문 제 조업 이 담당하게 된 다. 그렇다고 하여 과거의 목수나 주물업자가 완전히 기계생산에서 손을 멘 것은 아니었고 기계를 제작, 수리하는 〈 전문工 〉 과 전래적 인 목수, 주물업자사이에 건널 수 없는 장벽이 형성된 것도 아니었 다. <1 880년 경 에 도 마을의 대 장장이 는, 그가 영 국인 이 건 프랑스인 이 건 독일인이 건, Mac Cornic k 형 최 신모델 수확기 를 수리 할 수 있 었다. >34 )

34) P. Bair o ch, La revoluti on ind ustr i e l le et sous deve/op pe ment, p. 136.

결국 19 세기말까지 사용되던 기계는 특수한 기술교육을 받지 않 온 전태적인 장인 수준에서 취급될 수 있었다. 전문지식과기능을요 하는 기술자와 엔지니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전기의 발명 및 그의 다방면에의 응용, 그리고 내연기관 mote u r a exp los i on 의 발 명과때를같이 한다. 분만아니라 이렇게 전문기술자가등장하는시 기는 운송비가 상당히 절감되기 시작하는 때이다. 따라서 이 시기 에는 이마 국내자원(물질적, 인간적)을 이용하여 국산기재를 제작, 사용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과, 외국산 기계를 수입함으로써 소요되 는 비용을 비교할 때 후자가 보다 유리해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의국에서 생산된 생산재를 수입, 사용하는 순간부터 기술의 전과, 이전은 중단되며, 국내에서 생산재를 생산함으로써 야기되는 他산 업과의 연관·파급효과도 사라지게 된다. 만일 한 나라가 외국산 생산재를 사용하면 이것은 마치 인체에 타인의 기관을 이석시킹과 같은 것이다. 이 경우 여러 기업이 상호 연계되어 하나의 발전핵 을 구성하면서 경제 전반에 그 효과를 일으키는 선전산업국형 성장 방석은 기대할 수 없게 되며, 이것이 20 세기 많은 후진국들아 당 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제 3 장] 후진국의 도약을 저해하는 경제의적 요소

제 1 절 자연조건 1 지정학적 위치 우연의 일치타고도 할 수 있으나 I8 세기와 I9 세기에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을 성취한 이른바 선전국은 지리적으로 예의없이 온대지방 에 속한다. 그에 비하여 대부분의 후진국은 열대지방이나 아열대지 방에 위치 하고 있 다. I960 년대 이 전의 한국을 후전국이 라고 규정 한다면, 한국은 온대지방에 속하는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리고 이 상과 같은 분류는 지구 전체를 대상으로 보았을 때 분명히 나타날 뿐 아니타, 각 대륙을 대상으로 볼 때도 그러하다. 유럽에서도 납 부(포르루갈, 스페인 등)는 I960 년대까지만 하여도 상대적으로 발전 수준이 복부보다 뒤떨어졌었다. 남마에서도 온대지방에 속하는 아 르헨티나, · 우루과이, 칠레 등은(물론 여러가지 칭후로 볼 때 제상세계 에 포항시킬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타국보다 경제개발이 일찍이 진행 되었었다. 선전국과 후전국이 이렇게 지리적 위치상 분명히 분류되는 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로만 돌릴 수는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러한 현실의 원인을 규명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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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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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성 기후조건이 경제경장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논 지는 대개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그 첫째는 자연조건이며, 그 둘째는 이러한 자연조건이 인간의 노동능력에 미치는 영향이다. 이 열대성, 또는 아열대성 기후에서 토지는 그 비옥도를 빠른 속 도로 상실한다는 것 이 농업 기 술자들의 조사결과이 다. 뿐만 아니 라 열대지방에서는 농부로서 인간이 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파괴적이라 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농경울 하기 위하여 숲과 초원 savane 울 불살라야 하기 때문이다. P. Gourou 에 따르면 열대지방에서 행 하고 있는 火田방식은 그것이 지역적으로점진적으로확산되면서 토 지를 빈약하게 하였고, 이 토지를 재생시키려면 수년간을 휴경상태 에서 보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열대성 기후 아래서는 온대지방에서보다 더 많은 풍토병 이 있고 이것이 주민의 활동을 둔화시킨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온도가 일정수준을 넘어서면 인간은 신체적으로, 십리적으로 그 기 능이 처하되며 이러한 상대는 보다 조칙적이고 적극적인 노동활동 을 요구하는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에 제한적인 요인이 되었다는 접 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에 대하여 일부 학자, 특히 마르크스주의 계열 에 속하는 학자들은 열대 및 아열대지방의 불행이 자연조건에 기안 하기보다는 인위적인 것임을강조한다. 〈 노예인신매매가가쳐온결 과는 아무도 정확히 규명하지 않았다. 남미에서 벌어전 인더언의 제 거 역시 그 휴·유중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주 민의 강제이주가 그곳의 질병을 유행시켰다면 유럽인과 열대지방 근 로자의 유럽, 미국 이주는 폐결핵, 성병 등을 유행시켰고 알콜중독 자를 양산시켰다. 이러한 질병은 사회적 질병이며, 열대성 풍토와 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이 지역의 불운은 빈곤과 처개발의 결과이 다.〉 l) 물론 이러한 논리를 전개하는학자들에게 있어서 @1 개발〉 역 시 식민주의자에 의하여 사후적으로 야기된 상태임은 두말할 필요

1) J. Dresch, Geog r ap h ie et tier s monde, Connais s ance du tier s monde, Cahie r s Ju ssie u 4, Pari s.

도없다. 요약하여 유럽에서 산업혁명 이전에 추전된 농업개량은 이 지역 에서는 여러가지 요인에 의하여 일어나지 못했으며, 오히려 이 지 역은 이른바 중십부로 볼리논 유럽과 미국 등에 대한 특수작물공급 지로 전락하면서, 농업이 균형있는 식량공급의 역할을 상실하였다. 2 높은 인구밀도 현재의 후전국이 산업화로의 전입이라는 축떤에서 기본적으로 유 럽보다 불리한 접들 가운데 하나는 상대적으로 높은 인구밀도라 할 수 있다. 득히 아시아는 오랜 농경역사와 이미 높은 기술수준을 갖 고 있었다. 이 지역은 정치적, 사회적 제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일찍이 농업혁명을 실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이 농업혁명의 장애요인이 될 수 있는 요인도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즉 그것은 높은 인구밀도이다. 1700 년경, 총인구와 경지면 적의 비율에서 영국은 I,5 인당 1ha, 프랑스는 I.I 인당 1ha 였는 데 비하여 중국은 1810 년 3.6 인당 1ha 였고 인도는 1950 년 3.8 인 당 1ha 였다. 한국은 18 세기에 경지면적 1ha 당 이마 4~5 인의 비 울을 보이는 높은 밀도를 갖고 있었다. 결국 아시아 지역 전체의 평균치는 1 ha 당 3~4 인의 비율이며, 이것은 유럽이 농업혁명을 추전할 때의 밀도보다 훨싼 높은 것이다. 아시아에서 이렇게 인구 밀도가 높은 것은 이 지역에서 밀농사보다는 쌀농사를 집중적으 로 하여 왔다는 사실이 증명하여 준다. 죽 쌀농사는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 집약농업의 대표적 농업임과 동시에 쌀은 밀보다 열량 이 훨씬 높다는 사실과 칙접 관련이 있다. 바꾸어 말하여 이 지역 은 첫째, 목축을 확장할 만한 토지가 이미 높은 인구밀도에 의하여 제한되었고 둘째, 결국 제한된 토지에 많은 노동력을 두입하는 대 신 보다 높은 칼로리를 갖는 작물을 경작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쌀 이 가장 이상적인 작물이었기 때문에 쌀농사가 중십산업이 된 것이 다. 이것은 자연적 필요에 인류가 적응해 나간예 중의 하나이다. 지

난 1970 년대, 한국에서 일부 영양학자가 쌀과 밀의 영양소를 비교 분석하여 밀이 쌀보다 영양가가 높기 때문에 쌀보다 밀가루를 섭취 하기를 때때로 권장한 것은 이러한 자연적 이치를 망각한 〈 무식한 전문가 〉 2 ) 의 과학적 판단의 소치 이 다. 쉽 게 말하여 쌀은 확실히 밀 가루보다 〈 든든하며 〉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여 밀가루음식은 목축업 에서 공급하는 동물성 단백질(육류, 유제 품 )과 상호보완적인 데 비하 여 쌀은 이러한 동물성 단백질이 없이도 비록 부족하나마 주식물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벼농사 중십의 농업체제는 유럽에서 있었던 여러가지 경작방법의 개량-작물의 순환적 대체 경작, 새로운 농기구의 사 용 등――에 부적합하였고 그것이 수확량 정체요인 중의 하나였다. 이상과 같이 제삼세계에 속하는 대부분의 나라는 기후조건과 이 미 높은 인구밀도로 인하여 순조로운 농업의 발달을 경험하지 못하 였다. 그리고 이러한 내재적 장애 위에 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은 서구의 식민팽창주의가 이 지역에 미찬 영향이며, 이 영향은 후 전국을 후진국으로 묶어놓는 전정적 장애요인이었다.

2) Or teg a Y. Gasset, La revolt e d es 血호” ·

제 2 절 식민주의와 자립적 성장의 장애 현재의 대부분의 후진국이 한국 등 극히 일부 국가를 제의하고 열 대 또는 아열대 기후대에 속한다는 것 이의에, 또다른 명백한 사실 로서 거의 모든 후진국은 의부세력의 침입과 지배를 경험한 나라들 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식민주의는 남의 나라의 주권을 박탈 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명 (콜롬부스의 아메리카 발견 以前의 문명)을 말 살시켰고 경제를 해체시켰다. 국가수준의 살인, 약탈행위로 요약 되는 이 식민주의는 한마디로 말하여 〈폭력〉 바로 그것이었다 .3) 초기의 식민주의 (I6 세기부터 유럽의 산업화 이전까지)를 희귀품의 약 탈과 그를 위한 인명살상으로 특칭지울 수 있다면 산업혁명 이후의 식민주의는 또 다론 형태를 취한다. 쥴 휘1 리 J. Fe rry는 Le ton kin et la mere pat r i e 에 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 다. 4) 〈식 민정 책 은 산 업정책의 큰딸과 같다. 자본이 축적되고 부유하게 된 현대국가는 산업국가로서 국민의 다수가 산업에 종사하게 되고, 이들은 오로지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한다. 농업 역시 기업화되어야

34)) FC.a lFveans,o nL, esL ePs adyas m enne sv oide e dlea dteerv reel,o pep de. mMenats,p e C roo,u rPs adri'Is. .E .P;, Paris , p. 48 에 서 재인용.

한다. 그러므로 산업발전의 필수조건은 바로 수출이며, 수출을 위 하여는 시장이 확보되어야 한다. 〉 19 세기 ~20 세기초의 식민주의는 선전공업국이 후진국을 그들의 생산체계에 편입시켰다는 특칭을 갖 고 있으며, 그로부터 한편으로는 산업에 필요한 자원공급을 확보.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본과 제품의 수출을 통하여 선전국 산업구 조의 고도화를 도모하는 경제적 식민주의였다. 이제 지역벌로 이러 한 식민침략의 페해를 간략히 살피기로 한다. I 남미대륙의 해체 콜품부스에 의한 미대륙의 발견은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 불행 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이 대륙의 문명을 완전히 해체시키는 결과 를 가쳐왔다. 유럽인의 전출이 양적으로 대륙을 해체시킨 구체적인 한 사례로서 현재의 인구전문가들은원주민의 소멸을 들고있다. 죽 일부 전문가들 (Berkel y 학과)은 16 세기초, 대륙의 인구를 약 8 천만 내지 1 여으로추산하고있다. 이러한추산의근거는논의의 대상이 되어야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1650 년경 원주민의 수는 1,000 만명 수준으로 대폭 격감되었다는 것이다. 침입자들에 의한 무차벌 적, 무자비한 원주민 살상은 가히 〈 인간사냥 〉 과 같은 것이었고 여 기에서 유럽인들은 그들의 야만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칙접적 인 원주민 살해에 못지않게 이곳 주민을 괴멸시킨 또 하나의 요인 은 그들이 가져온 온갖 바이러스와 유행성 질병이다. Dresch 가 사 회 적 질병 maladie s soc ial es 으로 명 명 한 이 질병 은 특히 천연두, 터 프스, 페스트, 문등병과 같은 무서운 전염병이었으며 원래 아프리 카에 유행하던 황열병까지 묻어 들어왔다. 여기에 덧붙여 원주민의 혹사를 통한 광물자원 그리고 농업자원의 개발은 이들을 병들게 하 였다. 이상과 같은 침략자들의 비인간적인 횡포의 결과는 이 지역의 경 제, 사회, 문화의 완전 붕괴이다. 여기에 관하여 Ba i roch 는 다음 같이 말하고 있다. 〈 19 세기조에 와서 이 지역의 문명은 하나의 독

립적이고도 조직된 실체로서의 위치를 상실하였고, 이미 2 세기 전 에 그 존재에 종지부를 찍었다. 〉 16 세기부터 유럽인이 이곳에 진주 한 이래 원주민 인구는 6 분의 I 내지 IO 분의 I 수준으로 줄어들었 다. 5)

5) P. Bair o ch, Le tier s monde dans !'imp as se, p. 128.

2 남미 __- 식민지의 역사 이렇게 하나의 문명이 뿌리채 사라지게 되고 난 후 그 위에 새로 이 자리잡은 경제 사회는 어떠한 것인가? 식민경제의 득칭을 가장 찰 보여주는 남미의 경우를 간단히 보기로 한다. 우리는 앞에서 남북미의 문명은 유럽인의 침략과 더불어 존재를 상실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니까 현재 형성된 경제구조는 원주민 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식민제력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토착 사회의 희생 위에 구축한 새로운 형태의 경제구조이다. 마르크스주 의계열 종속론자들의 논리의 근저에는 이상과 같은 사실이 깔려 있고, 결국 남미의 후진성 또는 후진상태는 이러한 침략자들에 의 하여 야기된 것이며, 선협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러한 후진 상태는 남미대륙에 침입한 유럽인의 작품이며, 그후 이 대륙을 선전공업국의 보조적 역할을 하도록 만 들었다는 것이다. 이제 남미의 석민주의가 경제를 어떻게 왜곡시켰는지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1532 년, 스페인의 약탈자 삐자르 P i zarre 가 200 여 명의 용병을 데리고 페루에 상륙하여 시작한 일은 그들을마중나온 왕과선하 및 주민들을 예고도 없이 즉석에서 무참히 학살하고는 금은보화(주로 金製品)몰 약탈하는 행위였다. 이렇게 막을 연 남미 식민주의논 1570 년대까지 귀금속의 약탈로 일관된다. 즉 당시의 스페인, 포르두갈 등 유럽의 이베리아 반도인들은 金이 곧 富 또는 富 의 상칭이라는신 념을 갖고 있었는데 때마침 이지역에 풍부하게 존재하던 금, 은 등

귀금속은 이베리아 반도인들의 원시적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 분했 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수세기 또는 수십 세기 동안 축적된 이들 문명의 소산인 금은보화를 혈안이 되어 약탈하였다. 그러나 이 〈보물〉은 무전장 있을 수는 없었다. 이것을 모두 가져간 유럽인들 은 그 다음에는 광물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멕시코에서 매장량이 풍부한 은광을 발견한 유럽인들은 이를 개 발하기 시작하였고, 필요한 인력확보를 위하여 아프리카로부터 사 람을 잡아오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이른바 〈 노예 〉 의 인신매매가 성 행하게 되고,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아 〈 노예 〉 들은 새로운 남북미 경제구조의 기반이 된다. 광물자원의 개발에 이어 유럽인들이 눈을 뜬 것은 이 지역과 유럽 과의 기후의 차이다. 이 지역은 열대 또는 아열대지방으로서 유럽 에서는 재배되지 않는 열대 독수작물을 풍부히 생산할 수 있는 기 후적 조건을 구비하였다. 유럽인은 그로부터 노예를 이용하여 이 열대 목작물을 대량생산, 유럽으로 가져가는 이른바 국제 특화 sp e cia l i sa ti on int er nati on ale 시 스뎀 을 구축한다. 이 열 대 성 작물은 유 렵에서는 대단히 희귀한 식품이었다. 그것은 당시 운송바가 상당 히 높았기 때문에, 생산지에서 소비자에게까지 도달하려면(중개상 인의 커미숀울 제외하고라도) 그 비용이 상당히 높았다는 사실에 연유 한다. 우리는 18~19 세기만 하더라도 유럽에서 이러한 異國식품이 얼마나 소중히 취급되었는가를 당시의 소설 등을 통하여 알 수가 있 다• 6) 물론 유럽 인들은 일찍 이 동방무역 (주로 중국과 인도 등) 에 서 조미료 7) 를 수입하였지만, 남미에서 재배할 수 있는 열대 식품은 기 호품으로서 또 다론 특수성 을 가졌고 그의 소비 도 유럽 의 소득의 증대와 더불어 대단히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욕구를 충 족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강구된 것이 이 지역에 대규모의 수출용

6) 예컨대 Balzac 의 Eug e nie Grande t”에서의 설탕에 판한 이야기. 7) 프랑스에서는 이것을 e pi ces 라고 하는데, e pi ces 는 원태 약품이란 어원을 갖고 있다. 죽 동양에서 가져온 조미료는 약품처럼 귀하게 취급되었다는것올 보여 주 는것이다.

목수작물을 재배하는 것이었고, 그 첫번째 작문은 사탕수수였으며, 다음으로 커피가뒤를 이었다. 주로 아프리카인에 의하여 재배되는 이 득작물은 노동집약적이라는 점에서 역시 대규모의 〈 노예 〉 인신 매매를 야기시켰다. I8 세기 중남미지역에만 잡혀온 아프리카인의 수가 7 백만에 달하며 이러한 아프리카인의 강제 이주는 1880 년, 형식적인 노예제도 페지가 있기까지 남북미대륙 통털어 약 1,500 만명 에 달한다. 8)9) 이상의 열대작물재배는 그후 바나나, 고무등으로확대되는한편, 이 지역의 〈 特化〉는 더욱 심화된다. 그리고 이는 식민체계의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다. 즉 지배국은 산업화가 전전됨에 따라, 공업생산 은 자산들이 독접생산하며, 이 제품의 일부를 후진국으로 수출하면 서, 후진국의 득작물을 수입해 오는 이른바 제국주의적 생산체계가 확립되게 되는 것이다 . 물론 I9 세기 남미의 각국은 유럽으로부터 정치적인 독립을 성취하지만, 식민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경제구조 는 그대로 유지되는 가운데 __- 때로는 중십부와의 은밀한 공모에 의 하여__소위 국제분업체제하에서 特作物생산에 안주하는경향을며 었기 때문에 그들의 종합적인 경제개발정책이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국제분업은 나름대로 이론적 근거를 갖고 있다. 즉 남미는 그 유리한 자연과 기후조건에 따라 열대작물생산이 바교우위를 갖 고 있 는 만큼, 이 분야에 전문화하는 것 이 유리 하다는 주장이 다. 10) 뿐만 아니라 남미가 정치적 독립을 최득한 시기는 유럽 특히 영국의 경제변화가 상당히 전전된 시기였다. 죽 이 나라들은 생산비를 철 감할 수 있는 기계화를 적극적으로 추전, 보다 처령한 가격으로 공 업제품을 무전장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미가

8) 기록에 의하면 I90I 년에도 노예 문 수송하던 선박이 나포됐다고 한다. 9) 여기에서는 이 돌 아프리카인이 어떠한 상태에서 수송되었는가는· 다루지 않겠다. 여 기 에 관하여 는 Pere Die u donne Ric h an, La tra it e et l'esclavag e du Con- IO) g이o la국is제 p 분a업r !의e s 이E u론r져op e허e n구s.성 에 판하여 는 S. Ami n, L'accumulati on a l'echelle mondia l e, ch. I 을 참조할 것 .

공업화에 뛰어든다는 것은, 유럽의 공산품에 대해 높은 관세를 부 과하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남미가 19 세기 유럽 에서처럼 자생적 공업화를 추전할 수 없게 된 또하나의 요인은, 이 지역을 지배하던 스페인, 포르두갈 등이 유럽의 〈 후진국 〉 으로서 영 국과 大陸의 선전공업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낙후되었고, 산업화 도 본격적으로 추전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러한 경제적 후진국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남미가 후진성을 탈피하는 데 더 욱 큰 지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은, 한국이 20 세기초 빈 곤한 신생공업국인 일본의 정치적 지배하에 놓이게 됨으로써 장기 간 경제적 후진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한번 고려 해 볼 가치가 있다 .11) 3 출발부터 그릇된 아프리 카 12) 아프리카가 식민화되기 전, 이 대륙은 그 나름대로의 문명을 가지 고 있었다. 14 세기와 15 세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던 이 대륙은 이미 금, 동, 철기문화를 갖고 있었다 .13) 아프리카가 농업의 발전을 괴 하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을 찾는다면, 여기에서는 유럽에서처럽 쟁 기나 수레바퀴를 이용하지 못하였고, 특히 소나 말을 이용한 견인 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접이다. 그러나 보다 결정적 요인은 아프 리카의 농경방법에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화전방식이 주종을 이루는 곳에서는 이 방법이 토지를 황페화시키기 때문에 토지의 활력을 재생시키려면 수년간의 휴경이 필요함도 이미 지적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아프리카는 이상의 결점에 대한 높은 대가를 치루 고있다. 그러나 이보다도 아프리카의 경제를 왜곡시킨 더욱 결정적인 사

II) 구체적인 例로한국은 영국의 식민지인 홍콩이나 싱가포르에 비하여 60 년대까지만 하여도금융산업아나 일부방칙업이 뒤떨어졌었고지금도어느면에서 그러하다. 1132)) RR.. DDuummoonn tt, 의전 L계' A서 f, ric q hua ep intorei r e l le. st mal p ar ti e 라는 著읍 의 제목.

건은 유럽인의 남북미 정복에 따론 인력의 강제송출이다. 유럽인은 중남미가 아프리카와 같은 열대성 기후라는 접에 착안, 이의 개발 을 위한 인력확보 수단으로서 아프리카인을 집단 납치, 이송하여 이 둘을 〈 노예 〉 14) 로 만들었다. 이로부터 〈 흑인 노예의 買賣 tra it e des esclaves 〉 라는 인간모독의 대사건이 5 세기에 걸쳐 유럽, 아프리카, 남북미 등 삼대륙을 연결하면서 대성업을 이루었다. 이 기간중 납 치이송, 판매된 흑인의 규모는 처자에 따라 다르나 대개 I,500 만에 서 2 천만에 달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여기에 이둘을 납치하는 가 운데 생긴 살상, 지옥과 같은 여건의 범선을 이용하여 운반하는 도 중 사망한 숫자를 더하면 이들의 수는 약 3,000 만에 달하리라는 계 산이다. 이렇게 납치된 흑인들은 도착지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인간 적 대우를 받았다. 그로 인하여 송출된 흑인은 〈再生産 〉 에 큰 지장 을 받았다. 구체 적 인 예 로 쌩 도멩 그 Sain t -D omi ng ue 에 는 약 50 년 사이에 220 만의 흑인이 이송되었는데, 이들은 무리한 혹사와 영양 부족으로 인하여 그 수가 60 만명으로 격감하였다고 기록되고 있 다 .15) 〈 인신매매로 인한 간접적인 인명피해__주민의 납치와 그에 대한 처항에서 생간 피해-등을 합한다면 인신매매가 아프리카대 륙에 끼찬 인적 출혈은 4 천만에서 I 여으로 추산된다. 이 대륙은 I7 세기 세계인구의 약 5 분의 I- 유럽과 같은 수준-~을 점하였 는데 현재는 15 분의 I 밖에 되지 않는다. 〉 16) I6 세기에 시작된 이 아프리카인의 남북미대륙으로의 강제송출은 19 세기말에나 그찬다. 이것은 미국의 경우 1865 년에, 그리고 브 라질에서는 1888 년에 노예제도가 페지되면서부터이다.

14) 노예는 라틴어 Sclavvs(--+Salvs--+Slave) 에 근원운 두며 , 지중해 연안국에 古代 부터 성행하던 제도로서 끝없는 전쟁과, 이 전쟁에서 생긴 포로가 노예로되며, 그로부터 인신매매가 생겼다. 러시아의 Slave 족 역시 이 라던어에 근원을 둔 15) EP다e.ur reo pD€ iee n1 1s,d oPnaner i sR, ic 1h9 o2n9,, LR.a Dtrua mit oen t,e t L /'A'efs crli qa vu aeg n e o idr eu esCt o mnga o/ lapias r tpie a. r /es 16) R. Dumont, L'Af ri q u e noir e est ma/ par ti e, p. 24, Pari s.

이상의 흑인노예의 인신매매는 그 규모 하나만으로도 아프리카 대 북의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더욱이 이러한 타격을 가중시킨 것 은 이들이 모두 젊고 튼튼한 男 女 활동인구라는 점이다. 아프리카주민의 납치, 매매는 백인이 인간의 촌업성에 대해 처지 론 가장 큰 최악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죄악은 비록 남북미에서 법 적으로 노예제도가 페지되었다고논 하나 1900 년초까지 일부 인신 매매업자에 의하여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그러나 노예제도의 페지가 백인에 의한 아프리카 대륙의 약탈행 위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아니다. 유럽인들은 인간의 약탈 대신에 그곳의 광물과 농업 자원을 약탈하는 전략으로 전환한다. 죽 19 세 기말, 백인은 아프리카의 대륙을 탐험하기 시작하였고 이어서 1885 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분할 점거, 식민화를 가속화시켜 나간다. 이 식민화는 물론 유럽대륙이, 그 경제성장과 생활수준의 향상에 따라 접증하는 열대석품의 수요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이 지역 농업생산의 특화와 경제구조의 왜곡은 아프리카가 자 생적이고도 균형있는 경제발전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결정적인 원인 으로 등장한다. 4 아시아 국가 〈아시아는 인간의 대지이며, 기아의 대지이다. 지구상의 어느 곳 도 아시아처럼 인간의 흔적이 깊이 새겨진 곳은 없다. ….. . 제계에 서 가장 오래 된 인간의 화석 -sina nth r op u s pe kin e se 는 아시 아에 서 발견되었고, 인류역서상 가장 오래된 기아의 역사 또한 이곳에 서 기록되고 있다.〉 1 7) 세계문명의 중십지, 인간의 흔적이 가장 깊게 남아있는 이 아시 아가 유럽과 본격적인 관계뮬 갖게 되는 것은 I6 세기부터이다• 1498 년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에 도달한 이래 1760 년까지 약 2 제 기 半의 기간은 특히 포르두갈, 스페인이 우월한 항해술――그것도

17) Jo sue de Castr o , Geop ol iti qu e de la /aim , p. 240.

중국에서 발명한 나침반을 이용하여――-에 힘입어 아시아대륙에 발 을 디디면서 교역을 강요하는 시기이다· 포르투갈에 이어 네덜란드 그리고 17 세기에 들어서면서 영국과 프랑스 등이 아시아 전출에서 횡재를 꿈꾸고, 그것을 실현시켰다. 이상의 국가에서는 폭리를 가 져다주는 이 동방무역에서 이윤을 독점하기 위해 〈 동인도회사〉 등 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영국을 필두로 한 유럽국가와의 본격적인 거래는 1757 년 뿔라씨 p!a ssey 전두에 서 영 국군이 승리 하면서 시 작된다. 영 국은 이 볼 기화로 〈 대영제국 〉 의 근거지를 아시아에 마련하게 되는데, 그로 부터 아시아대륙과 유럽과의 관계는 그 내용과 규모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갖게 된다. 5 대영제국의 탄생 쁠라씨 전두에서 승리한 영국은 그 대가로 2,oookm2 를 양도받는 다· 그러나 이 조그만 영토의 양도는 그후엄청난 결과를가져온다 . 죽 영국은 이 지역을 출발겁으로 1790 년부터 그둘의 접거지를 확 장, 1820 년경에는 인도대륙의 거의 전부를 완전 장악한다(약 半은 식민지이며 나머지는 보호령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대북의 접거는 십각한 경제적 결과를 양측에 야기시켰다. 죽 I820 년의 인도가 정 치 적 으로 1720 년의 인도와는 전혀 다른 체 제로 변모하였다면, I820 년의 영국은 경제적으로 I760 년의 영국과 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경 제구조의 십충적인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1820 년에 영국의 농업 은 활동인구의 35% 만을 고용하는 고도화된 산업구조를 갖고 있었 다. 이러한 비율은 유럽대륙의 경우 I950 년에, 한국의 경우 1779 년에 나 달성 된다. I820 년의 영 국은 인구가 1, 200 만이 었으나 6 여 6 천만 인구가 살고 있는 여타 제계보다 더 많은 강철을 생산하고 있었다. 주로 인도에서 수입되는 원면의 수요 역시 1740 년경부터 격증한다. 1820 년의 방칙공업은 1760 년대의 그것보다 40 배나 많

은 원면을 사용하였다• 1780 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추전된 방칙업의 기계화는 생산원가를 대폭 철감시키면서 영국과 기타 세계와의 교 역의 흐름을 뒤집어놓았다. 즉 영국은 I8l3 년부터 랑카셔의 방직 공장에서 여공과 소년들이 I 일 I6 시간씩 노동하여 생산한 면칙물 울 인도에 강매하기 시작하였다• 18) 영국의 대 인도수출은 그로부터 폭발적으로 중가한다. I8 세기초 IO 만 파운드에 그쳤던 영국의 공산품 수출은 1760 년경 IOO 만파운 드의 선에 도달하였 고 그것 이 1856 년에 는 I, 000 만 파운드, 1867 년 에는 2,000 만 파운드그리고 1 차대전 전에는 무려 7 천만 파운드에 이른다 .19) 주로 칙물과 기타 공산품으로 구성된 이상의 대규모 수 출은 인도의 수공업을 완전히 망쳐 놓았고, 따라서 현대적인 제조 업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철저하게 무산시켰다. 당시 인도는 3 여의 인구를 갖고 있었으며, 이의 칙물 수요는 거의 전적으로 영국 수입품에 의하여 충당되었다. 그러면 영국으로부터의 공산품 수입대금은 어떻게 지불되는가? 인도는 국민의 70~80% 가 농업 에 종사하는 대 단히 빈곤한 나타이 다· 또한 만성적인 영양부족과 주기적인 기근을 겪고 있는 나라이 기도 하다. 이러한 가운데 공산품 수입의 대금은 주로 영국인 소유 의 토지에서 재배되는 농업원자재의 수출로 상쇄되었다. 홍차, 원 면, 황마, 인디고 염료 등이 그것이며, 이 원료생산은 물론 현지의 값싼노동력을 이용, 생산·수출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빠드릴 수 없는 것은, 영국인들이 중국을 골수로부터 병들게 하기 위한 아편 울 이곳에서 대량생산, 중국대륙에 강매하였다는 사실이다. 아편수 출은 19 세기에 인도 총수출의 3 분의 1 에 도달하였고, 1881 년까지 는 인도수출의 주종품이었다고 P. Ba i roch20) 는 서술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수출용 작물 재배는 앞에서 언급한 인도의 만성적 기

18) P. Bair o ch, Le tier s monde dans /'imp as se, p. 139. 2109)) PP.. BBaaiirr oo cchh,, 전전게게 서서 ,, pp.. 114309..

근의 칙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기근을 가중시 키는 역할을 하였음은 돌림없다. 왜냐하면 영국인둘은 가장 비옥한 토지물 강접했고, 따라서 이미 부족한 식량생산이 그만큼 줄어들었 기 때문이다. 인도는 물론 특수한 종교적 가치관을 갖고 있으며 가장 업격한 카스트 사회계급제도를 유지하는 등의 국민적 노력과 산업의 발흥, 근대화에 적합하다고 할 수 없는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었으며, 영 국은 이러한 접을식민통치에 유리하게 이용하였다고할수있다. 이 러한 영국의 장기적 지배는 다른 유럽국가들을 유혹하였으며, 인도 에서 거접을상실당한네덜란드와프랑스는 각기 인도네시아와 인도 차이 나 반도를 점 령 , 동남아시 아는 바야흐로 유럽 인들의 원료공급지 로 전락하게 된다. 석민정치는 예의없이 찬인하였지만 그 가운데서 도 가장 노골적인 약탈정책을 사용한 네덜란드는 1820 년경, 인도네 시아의 가장 비옥한 토지 중 5 분의 1 을몰수하여 여기에 그들의 기 호품인 조미료를 재배토록 하였다. 이를 위하여 농민들은 年 100~ 200 일간 강제동원되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접령은 1862 년에 시작되지만, 이 지역은 곧 바로 고무나무 등의 농업원료 재배지로 재빨리 탈바꿈한다. 필리핀 온 1565 년에 식민지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이 나라는스페인의 식민 지였던 멕시코의 스페인인에 의하여 접령당한다) 역시 원자재 공급지가 ’ 된다. 이상과 같은 유럽세력에 의한 동남아시아 일대의 식민지화는 앞에 서 본 〈농업혁명一산업혁명一경제의 성장〉이라는자생적 구조변화의 기회를 방해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며, 이 지역은 아칙도 경제 변화를 위한 도약에 점화를 하지 못하고 있다.

[제 4 장] 제삼세계의 자립적 산업화를 처해하는 제요인

제 1 절 상황의 변화 우리논 前 章 에서 유럽이 19 세기에 산업화를 추전해 가논 과정을 요약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제삼세계가 처한 경제 ·사회적 상황은, 의부적 세력개입 (식민주의)에 의한 구조적 왜곡과 과행에 의하여 19 세기 유럽이 처해 있던 그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검토하였다. 이 러 한 상황의 변화에 따라 후진국은 19 세기 선전국의 산업 화과 정을 재현하고 모방하는데 있어서 구조적인 장애에 봉착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논 자립적, 자기중십적 경제발전에 대한 몇 가지 장애 요인을 분석한 다음, 후진국의 진로를 모색하여 보기로 한다.

제 2 절 인구 I 문제의 제기 인구중가가 후진국의 생활수준 향상에 처해요인으로 작용하는지 또는 이러한 증가가 경제발전을 수반하는지의 여부를 포착하고자 할 때, 가장 편리한 방법은 일정 기간 동안 1 인당 국민소득의 중 가(不 變 價格)와 인구중가간의 상관관계를 측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서 는 J.C . Chesnais 가 「휴전국의 경 제 발전과 인구변화」 1) 라는 제 하 에 작성한 동계적 연구를 소개하고, 이어서 그에 반대되는 주장을 제시한다. 우선 그 전체 적 인 경 향을 보면 후진국의 인구는 1950 년대 들어 서면서 빠른 증가울울 기록, 60 년대에 철정기에 접어들며, 그후 1970 년대에 들어서면서 그 증가울이 약간 둔화된다. 결국 1950 년 ~80 년 기간은 후진국의 인구증가가 그 최고접에 도달하는 기간 이 다. OECD” 의 자료에 의 하여 작성 한 상관관계 는 다음과 같은 표

1) t•rPe rnotge r e asn se cdo'neoxmp ei qriue en cee(t 1 9tr5a0 n~s1i9t i8o0n ) ,d emPoopg ur al apt hi ioq nu , e Rdeavnues lIeNs EpDa, y sJ apn av u-Fverevs.,, 2) 1C9e8n5t. r e de develop pe ment de l'OE CD, Comp tes nati on alis m des pay s moin s

developp es , Pari s.

로 요약될 수 있다.

〈 표 3> 후진국의 경제성장과 인구증가

(기 간 I950~I952~1967~1969) 인구의 연평군 증가울(%) I 해당國의 數 I 의I 인연 당평 실군질증 국가울민생(%산) <2 IO I. 7 2.0~2.4 IO I. I 2. 5~2.9 14 I. 8 ~3.0 24 2. 8 58 I

0 이상에서 산유국이며 인구밀도도 비교적 낮은 리비아, 베네쥬 엘라,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아랍에미레이트 연방공화국 등은 제 의시켰다. 그 이유는 이들 나라의 석유수출에 의한 막대한 수입이 소수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개인당 평군생산의 개념이 그의미를상 실하기 때문이다. 0 남아프리카공화국, 로디지아등도제의되었다· 그것은이나라 들에서도 국민소득이 유럽계 백인과, 다수의 빈곤한흑인 원주민 및 아시아계 근로자 사이에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0 배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알제리, 이란, 이라크 등도 제의되 었다. 이 국가들은 지난 IO 여년간 지역분쟁과 정치적 변혁을 겪었 거나 겪고 있다는 특수한 상황하에 놓여 있다. 0 완전계최경제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는 그 국민 회계의 작성방법이 상이하기 때문에 내용의 통일성을 위하여 제의 시켰다. 이상의 표에 따르면 많은 나라의 인구증가울이 연평균 2% 를 능 가하고 있으며, 그중의 반 이상이 연 2.5% 또는 3% 정도의 증가 울을 기록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증가울에 의하면 인구는 이상의

3) 일부 마르크스주의 경계학자둘은 사회주의 국가문 계상세계에 포합시키지 않으 나 중국, 쿠바 등은 자국이 제 삼세계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기간중 약 2 배로 증가했다는 결과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 의 주목을 :n..는 것 은 인구 증가울이 가장 높았던 나라에 서 국내 총 생산의 중가도 빨랐다는점이다. 죽 인구중가울 3% 또는그 이상의 나라에 서 1 인당 국민생 산 증가율은 2. 8% 를 기 록했고, 그 이 하의 인구중가율을 보인 국가에서의 국민생산은 연평군 1.8% 이하로 거 의 정체상태에 있다는 접이다. 이러한 사실은현재까지의 일부후진 국 전문가의 주장과는 모순되 는 현상으로서 , 이 것 은 또한 Boserup n 의 주장을 뒷받침하여 주기도 한다. 죽 그에 따르면 인구밀도의 증 가는 기술혁신을 자국시키면서 경제성장에 처해가 되는 전통적인 요인을 제거시킨다는 것이다.

4) E. Boserup , Pop ul ati on and tec hnolog y, Oxfo r d.

이상과같은 독창적인 견해와결론은 1960~70 년기간, 연평군인 구중가율이 3% 를 넘는 많은 나라의 경우 사실로서 확인된다. 죽 인 구증가울 3% 또는 그 이상의 나라에서는 1 인당 실질국민소득의 연평군 증가율이 4% 선인데 비하여, 인구층가울이 2.6~3% 사 이에 있는 나라에서는 실질국민소득 증가율이 2.5%, 인구증가율· 2.5% 이하의 나라에서는 실질국민소독 증가율이 I.5% 라는 수치가 나온다.

〈표 4> 후진국의 인구중가와 경 제성 장

(1960~1980) 평인 구군중의가연울 의대 상 수국 119 6개국0 ~민인7 0당생 기 평 산간 군중 실가질율 |1 의대 상국수 11 9국개71민 인~ 8당0생 기평산 균간중 실가질율 ~2.0% 18 I. 65 14 4. 55 2. I~2. 5% 24 I. 48 23 I. 95 2. 6~3.0% 24 2.48 27 3. 04 >3.0% II 3. 95 13 I. 67 I 77 I I 77 I 자료 : Centr e de develop pe ment de l'OE CD, lnf-0 r mati on s recente s sur Les comp tes nati on aux des pa y s en develop pe ment, 1981 에서 계산.

〈표 5> 인구중가와 I 인당 실 질 국민생산의 성장 : 先發 후진국

(연평균, %) 국 가(지역별) oJ 구 I l 인당 실질 생산 1960~197 0 I 1970~1980 I 1960~1970 i 1970~1980 아 XI 리 '7} 2. 5 2.9 2. I I. 6 이 집 트. 2. 5 2.5 2.0 5. I 두] 니 又 l 2. I 2.5 2.3 5. I 라틴아메리카 2.8 2.7 2.5 2.8 코스타리카 3. 5 2. 5 2. 9 3. 3 쿠 바 2.0 1. 5 -I. O 4.5 도 미 니 J} 2. 9 3.0 I. 5 3. 5 자 머] 이 7} I. 5 I. 6 4. 0 -2.9 멕 入 l 코 3.4 3.6 3.7 I. 6 과 · 나 마 3. I 3. I 4.6 I. o 트리니다드·토바고 2. I I. 3 2. I 4.2 아 르 헨 티 나 I. 4 I. 3 2.8 0.7 브 라 질 2.9 2. 8 2.4 5. 5 칠 러 1 2, I I. 6 2.3 . o. 7 콜 몽 바 아 2. 9 2., 2. I 3. 2 우 루 과 이 I. 3 I. 0 -o. I 2.5 아 시 아(중공제의) 2.4 2. 3 3. I 4.0 oJ 도 2. 2 2. I I. 4 I. 4 스 리 랑 7} 2.4 I. 6 2.8 4.7 홍 콩 2.7 2.2 7. 2 6. 8 인 도 네 시 아 2. I 2.4 o.8 5.o 한 국 2.6 I. 7 5. 9 7.7 말 레 이 지 아 3,0 2.7 2.8 5. I 入J 7} 포 르 2.3 I. 4 6.3 6.9 대 ..,i 3. I I, 9 6.6 7.2 자료:표 4 와 같음.

표 4 는 I960 년과 70 년 기간 77 개국의 경우를 바교분석한 결과 이며 여기에서도 이상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즉 인구증가울 연

평군 3% 를 상회하는 나라에서 일인당 평균 실질국민생산 증가울 은 4% 선인 데 비 하여 , 인구중가울이 2. 6~3% 의 경 우 그 중가울은 2.5% 에 머물고, 인구중가율 2.5% 수준을 넘지 못할 경우 국민생 산 중가율은 I. 5% 로 떨어진다는 패러독스가 발견된다. 다시 말하 여 인구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나라에서 경제발전 역시 고성장을 기록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사실온 일반법치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즉 일정기간이 지나면 위에서 볼수 있었던 경향은 逆轉 되기 때문이다. 연평군 인구증가율이 3% 를 상회하는 나라는 70 년과 80 년 기간에 접어들면서 국민생산 성장률이 I . 67% 로 떨어지는 반면( 표 4 참조), 인구증가율 2% 수준의 나라는 연평군 국민생산 성장 률 이 4.5% 이 상으로 급상승한다. 따라서 우리가 순전히 인구와 경제성장과의 상 관관계만을 따질 때, 이상의 결과는 혼란을 가져다줄 뿐이다. 표 5 에서는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에서 경제개발을 추전한 이른바 중전국 또는 신흥공업국 (NICS) 의 인구중가와 경제성장률을 대비시켜 보았다. 이 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인구중가율은 대 체적으로 높은 편이나 국가간의 편차또한상당히 높다(우루과이 I% , 멕시코. 3.6% ) . 이상의 국가 중 3 분의 2 는 그 인구중가율이 2~3% 나 되는데, 이러한 증가율은 산업화 초기 (I9 세기) 유럽의 인구중가울보 다 약 2 배 가량이나 높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높은 중가울은 한 국, 대만, 성가포르, 홍콩 등 이른바 〈 신홍공업국 〉 과 스리랑카 등 울 제의하고는 계속 유지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아시아의 4 대 신흥공업국은 그 산업화 추전 초기에는 여타 국가에서 볼 수 있는 높은 인구중가율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고도성장을 실현시키고 있으 며, 성장이 지속되는 가운데 인구증가율은 연평군 2% 미만으로 떨 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상 선발 후진국 사이의 경제성장률 격차는 인구중가의 격차보다 더 크게 나타나고 있다· 표 5 의 例에서, 대상국의 약 半 에 해당하는 국가는 세계경제가 침체국면에 빠져 있던 1970 년대 에도 높은 I 인당 실질국민생산 중가율을 실현하는데, 이것은 지속

적이고 안정된 번영을 구가하던 1960 년대 유럽의 경제성장률(연평 군 4.l%, 시장경제체제국가, 1973 년, Chesna y와 Sauv y의 추정) 보-다·도. 더욱 높은 것이다. 반면 남미의 일부 국가――아르헨티나, 과나마, 칠레 등――는 경제가 침체하면서 그 성장물도 1% 수준에 머물며, 자메이카 같은 나라는 마이너스 성장 (-2.9% )을 보이고 있다• 그러 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선발 후진국들의 경제성장률은 인구중가울 이 높은 他후진국에 비하여 보다 유리한 상태에 있다. 이제 선발 후진국의 인구중가와경제성장률울대비시켜 보면 다음 표와같다.

〈표 6> 선발 후진국의 인구성장과 경제성장

(1960~1980) 연평군인구 기 간 1960~1970 I 기 간 1970~1980 증 가 울 국조사 의대수상 1 연I 인 평당 실군 질증 국민가 소울득 1 조국사 의대수상 1 연1 인 평당 실균 질증 국민가 소울득 :s;;2 % 4 I. 72 IO 4.58 2. I~2. 5% 8 I. 38 7 2.27 2. 6~3.0% 6 3, 13 3 5. 39 >3.0% 4 4,28 2 I. 58 I 22 I I 22 I

1960 년대 에 인구중가율이 높은 나라가 기 록하던 유리 한 경 제 성 장 은, 1970 년대에 들어서면서 그 경향이 역전된다. 표 6 에서는 이러 한 전환현상이 표 5 의 77 개국 대상의 조사표에서보다 더욱 뚜렷 이 나타난다. 그러면 이러한 현상은어떻게 설명될 수있을것인가? 첫째로, 주목되는 것은 비교적 철제된 인구성장물 (2% 또는 2% 以下, 예컨대 한국)을· 보이는 나라의 수는 1960 년대의 4 개국에서 1970 년대에는 IO 개국으로 늘어난다. 그리고독기할 만한 사실로서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중에는 아시아의 4 대 신흥공업국이 유례없는 고도성장(연평균 7~8%) 올 보이면서 이 그룹 (10 개국)에 전입한다. 대 만은 1960 년대만하더라도연평군 인구중가울이 가장높으면서도 경

제성장률은 처조한 나라였다. 한국 역시 60 년대 인구중가율은 높 으면서 (연평군 2.6%), 60 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고도성장을 기록 한다.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아시아의 4 대 신흥공업국을제외하면 두 기간 사이의 상이정은 다론 나라의 경우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인 구중가의 속도가 국민의 생활수준에 칙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증 거를 찾홀 수도 없다. 다시 말하여 인구중가율의 차이는 경계성장 의 차이를 설명해 주는 주요 변수는 아니라는 점이다. 즉 인구문제 에 관한 지배적인 견해와는 달리, 높은 인구중가울은 해당국의 경 제발전에 처해요인으로작용하지,않았다는 접이다. 오히려 인구중 가가 높은 나타에서 경제성장도 활발히 진행된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2 相關關係는 촌재하는가 ? 인구증가가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을 규명하기 위한 작업은 60 년대부터 활발히 진행되었다. Kuzne t s 는 산업혁명 초기부터 선전 국의 경제변화를 포착하기 위한 통계를재구성, 여기에서 인구와경 제 성 장과의 관계 를 규명 하려 한다. P. Ba i roch6) 는 선전국의 • 산업 화 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시기와 현재의 처개발국에서 볼 수 있는 인구와 성장과의 관계는 그 상황이 다르다는 점을 통계를 이용하 여 보여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선진국의 경우는 당시 경제성장 이 인구중가를 야기시킬 수 있는 경제구조적 조건을 구바한 데 비 하여 현재의 후진국에서는 인구의 폭발적 증가가 성장의 처해요인 으로 충분히 작용할 수 있 다는 결론이 유도된다. 그러 나 A. Sauvy , Chesnay, Lefe v re, Barag u il lau mont, Hag e n, Sim on 과 같은 학자들 은 인구와 경제성장과의 상관관계에서 一次的 意味가 촌재하지 않 는다고 주장한다 .7)

5) S. Kuznets , Qu anti tat i ve aspe cts of economi c. g r owt h of nati on s, Levels and 6) VP.a rBi aabi ri ol ictyh, oLf ar artee vs o,l uEt icoonn oinmd i uc s Dtr ei ve el lleop e mt esnotu sa ndde vCeluolpt puer am le nCth. ang e .

7) J.C . Chesnay, Prog re s economi qu e et tra nsit ion demog r ap h iq u e dans !es pa y s pa uvres, 전개서, 1985.

이 두 현상의 비교에서 어떤 결론을 도출하려는 시도는 첫째, 그 것이 방법론상으로 간단하게 여겨졌고 둘째, 처개발상태에서 과다 한 인구와 높은 인구중가율은 직감적으로 볼 때 경재성장에 볼리한 조건이 될 것이라는 선험적 판단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그후 연구 작업은 아러한 판단을 증명하려는 의도에서 전행되었다. 그러나 두 현상의 비교에 있어서 방법론상의 문제정은 Chesna y에 의하여 다 음같이 지적된다. I) 부정적 견해 ® 두 현상의 비교에서 사용되는 총량지수로서의 G.N.P. 는 후진 국의 경우 경제의 주요부분이 자급자족이고 화페경제에서 제의됐기 때문에 그 정확한 추정이 어렵다는 고전적인 지적이 있다. 다론 한 편, 인구중가율에 관해서도 그것이 비록 정확히 측정된다 하더라도 인구의 구성과 구조는 국가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A 와 B 라는 두 개의 현상이 역사적으로 共 變 한다고 할 때, 여기에는 4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죽 A 가 B 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 B 가 A 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 이 두 현상에 C 라는 제 3 의 현상이 작용하는 경우, 또는 그 변화가 순전히 우연에 의할 수도 있다는 등의 해석이 그것이다. 이상을 참작하여 이제 인구와 경제성장과의 관계에 관한 그동안 의 많은 연구와 견해를 요약하여 보자. 그 첫번째는 물론 新말더스 주의라고 할 수 있는 부정적인 견해로서, 한마더로 말하여 이 견해 의 주창자들은 후진국의 높은 인구중가울이 경제발전에 결정적 장 애요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죽 인구의 증가는 제한된 자연과 자원 에 압력을 가하므로 특히 농업분야에서 1 인당 경지면적이 줄어들 고, 따라서 수확체감의 법칙이 작용하며, 경작방법의 전통적 방식 에서 탈피할 수 없게 된다는 설이다. R. Dumon t 8) 은 1960 년대초부

8) R. Dumont, La crois s ance de la fam i ne , 1975, :Pa ris.

터 앞으로 지구가 당면하게 될 식량위기에 경종을 울리면서 〈우리 논 기아를 향하여 전전하고 있다 〉 고 하여 경각심을 계속 일깨우고

〈표 7> G.D. P . 와 총자본형성에 기초한 자본 - 산 출 계수의 비교

(선 진국 의 산 업 화 초 기) 국 가 및 7] 간 자본 - 산 출 계 수 영 국 1700~1740 17. 0 1740~1770 6.o 1770~1800 4. 3 I8oI/I8II~I82I/I83I 2. 9 I82l/I83I~I85I/I86 I 4. 3 1851/1861~1870/1879 4.7 독 일 1851/1855~1866/1875 4.9 1866/1875~1886/1895 7. 2 1886/1895~19u/1913 7.9 이 태 리 1861~1876/188 5 10 .7 1876/1885~1896/190 5 II. O 1891/1900~1914/1916 6.8 벤 마 크 1870~1885/189 4 3.6 18 8 5/1894~ 1905/19 1 4 3.6 1890 /1 899~1914 3. 9 노르웨이 1865~1880/188 9 6. 7 1880/1889~1900/190 9 6.4 1890/1899~1910/1919 6. 。 스 웨 r산 I86l~1876/18 85 3. 7 1876/1885~1896/190 5 4. 2 1896/1905~19n/1920 4. I n] 국 1869/1878~1884/1893 3.8 1884/1893~1909 /19 1 8 6. 2 1914/19 2 3~19 3 4/1 943 9. 0 일 본 I885/I889~1904/19 08 2.6 1895/1899~1914/1918 3. 4 1920/1924;...,1938/19 4 2 3. 3 자료 : S. Kuznets , 전게 서 , pp. 22~24.

〈표 8> 후진국의 자본 - 산 출 계수

국 7} 및7] 간 자본-산출 계 수 버 마 1954~60 40287I443I26263324624339스 리 랑 카 1954~60 칠 레 1954~60 콜 롬 비 아 1954~60 그 리 스 1954~60 자 메 이 카 1954~60 한 국 1954~60 멕 시 코 1954~60 나이제리아 1951~57 페 루 1954~59 포 르 두 갈 1954~60 베네쥬엘라 1954~60 자료 : P. Bair o ch, 전게서, p. I5I.

있다. 그는 이러한 비관척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로서 사하라, 이디오피아, 방굳라데쉬 등울 예로 들고 있다. 물론 Dumon t이 영 려하는 세계적인 식량위기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기우는 아 칙도 부분적으로 설득력을 갖고 있다. ® 인구가 증가하면, 선두자가 장애를 받는다는 주장이다. 즉 기 촌인구와 추가된 인구에게 모두 같은 정도의 생활수준을 유지시킨 다 하더라도 민간 및 정부두자의 일부는 기존 생활수준을 유지시키 는데 사용된다는해석이다. 예컨대, 한계자본계수가 3 또는 4 일 때 그리 고 인구중가울이 3% 일 때 , 이 추가인구는 국민소득의 9~I2% 를 흡수한다는 선명이다. Ba i roch 는 후진국의 인구중가가 장애요 인입을 증명하기 위하여 cap ital -outp u t ra ti o” 를 표 8 과 같이 계산 하며, 이 ra ti o 를 적용했을 때 후진국이 필요한 무자율을 산출하고 있다. 이상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간의 자본산출계수는 대단히 차

9) P. Bair o ch, 전게 서 , p. 151.

이 가 있 다. 그논 평 균치 로서 후진국의 cap ital -outp u t rati o 를 4~5 로잡고, 1 인당 국민총생산을 1% 증가시키려면, 인구중가율이 연 2.2% 라고 가정할 때, 국민 총생산은 3.2% 성장하여야 된다는 계 산을 하고 있 다. 각 cap ital -outp u t rati o 를 4 로 정 했 을 때 는 4 x 3.2%, 5 로 정했을 때는 5x 3 .2%, 죽 투자는 총생산의 12.8% 또 는 16% 나 되어야 한다는 계산이다· 그것도 1 인당 국민소득을 1% 증가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두자액이다. 만일 이상과 같은 ra ti o 하 에서 1 인당 국민소득을 2% 증가시키려연 필요한 자본형성은 (국민 총생산의 )17~21% 나 되는데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주장 이며, 이것은 현재의 선전국이 그 산업화 초기에 필요했던 자본축 적 5~6% 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라는 주장이다. 결과적으로 인구 의 증가가 있으면 근로자 1 인당 사용할 수 있는 시실재의 비율이 낮아지고 따라서 생산성 역시 낮아진다는 결론이다. ® 현재 후진국이 그 산업화를 시작할 때 안고 있는 핸디재은 선 전국이 산업화 초기에 칙면했던 그것보다 훨씬 크다는 주장으로서, 현재 후진국의 1 인당 국민소득은 선전국의 산업화 초기 때보다 휠 씬 낮고 10) 인구중가율도 현재의 후진국은 산업화 초기의 선전국보 다 I. 5~2 배 나 높다는 說 (Kuznets , Bair o ch) 이 있 다. Ba i roch 는 산업화초기의 연평군 인구중가율을 표 9 와 같이 계산 하고있다. 표 9 에서 볼 수 있듯이 현재의 선전국은 그 인구중가울이 일본을 제의하고 모두 1% 이내였다. 이것은 현재의 후진국의 인구중가율 2.3% 와 비교된다. 후진국의 인구 인플레이션 II) 이 가장 십각한 문제를 야기시키는 분 야는 농업이다. 우선 농업은 공업부문과는 달리 그 중가율이 경직 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에서 누차에 걸쳐 언급했듯이

10) 이 설을 뒷받침하는 논거로서 현재의 선진국은 산업혁명 이전에 농업혁명을 거 쳤고, 그것이 농촌을 부유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Bair o ch, 전개서. 11) P. Bair o ch 는 현재 후진국의 폭발져 인구증가 를

〈표 9> 인구중가운(연평군 중가운)

18~19 세기에 산업화에 착수한 국가 I 이섭읽 갈 ?H t IXJ .급집겁긱혀살나울 영 국 0.2 % o. 6 % 포 랑 스 o. I% 0.4% 벨 7] 어] 0.7% 독 일 o.8% 스 워] E산 0.7% 0.7% 일 본 0.3% 1.0% 이 태 리 0. 5 % o.8% 후 츠i 국 I I953~I96 o 아 '1 아 · 실 론 2. 7 % OJ 도 1.9% 인 도 너] 人] 아 2.2% 말 러] 이 X] 아 3.0% 이 라 크 2.. 9% 필 리 핀 3.8% 。 1- XE 리 7} 콩 고 2. 2 % 나 이 저 1 리 아 I.9% 알 처 1 리 2. 3 % 모 로 코 3.0% 아 랍 연 llJ- 2.4% 뒤 니 Al I.5% 우 간 다 2. 5 % 全 아 xz 리 7} 2.2% 중 미 2. 7 % 남 미 2.3 % 人1 납 아 入 l 아 2.6 % · 남 아 ~1 아 1.7% 동 납 아 AI 아 2.0% 동 아 入 1 아 2.0% 자료 : P. Ba ir o c h , 전개 서 .

〈표 IO> 총자본형성이 G.N.P 의 I2~I5% 인 국가의 1 인당 소득수준 추계

12% 의 총·자본형성 15% 의 총 자본 형 성 I 인당 소득수준 I 인당 소득수준 국 가 도달시기 경업 :),.I0.). 구gg매$5력7 ), 도달시기 경( 麟)人。 ) . 구U(1S 매95$력 7 ) , 영 국 1900 42 690 1950 210 I. OIO 포 랑 스 1860 500 240 1880 600 320 독 일 1870 290 230 1910 670 480 이 태 리 1900 43° 300 1915 55° 280 스. 위] E신 189 0 280 3IO 1930 I, 300 900 자료 : S. Kuznets , 전계 서 , p. 58, p. 64, p. 69, p. 87.

〈표 II> 1 인당 농업생산지수

(1952/53~1956/57, 평 군= IOO) 농산 물 전체 농산물전체 :>:l 역 2 차대전 前 11996508//6519 2 차대전 前 11996508// 56 19 평 균 평 균 평 균 평 균 남 ’ 이 109 105 104 102 중국을 제외한 극동 • IIO 106 I08 107 중 드。 94 IO5 94 104 아 3 리 7} 92 108 95 95 자료 : Rapp o rt annuel de la F.A .O ., La sit ua ti on mondia l e de l'alim enta t i on et de l'ag r ic u ltu re, Rome, 1961.

선전국의 산업화는, 농업중산에 따른 농촌의 여유와그결과로서 공 산품에 대한 수요증가가 유발됨으로써 그것이 일종의 기폭제가 되 었다. 그리고 당시 이러한 농산물 증가는 인구중가울보다 · 훨씬 높 은 성장률을 보였다 .1 2 )

12) S. Am i n 은 그의 L'accumulati on a l'echelle mond i ale( p .58) 에서 〈현재 제삼

세계의 농업위기는 선전계국주의의 침략에 따른 전봉산업(수공업)의 붕괴의 결 과〉라고 단정한다.

물론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 장기적으로 본 선전국의 농업생산 중 가율은 연평군 I. 5% 를 능가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완만한 증가율은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선전국이건 13), 그 중가울은 中期로 보았을 때 연평군 2% 를 초과하지 않는다. 우리가 여기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현재의 많은 후진국의 I 인당 농업생산 증가울은 대 단히 미 미 하거 나 또는 정 체 , 후되 하고 있 다는 사실이 다(표 I I 참조). 그리고 일부 후진국에서의 인구중가율이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사 실을 고려하면, 이 1 인당 농업생산 중가울은 현실적으로 보다 처 조하다고도 할 수 있다. H. G ill e 은 『국동지역에서의 인구의 가속 적 증가』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표를 제시하고 있다.

〈표 I2> 인구중가울

(연평균, %) 국 가 I 기 간 I 0' 1 1l。 ~I ;r I 공 식 추 계 인 도 1951~1961 2. 。 I. 4 파 키 스 란 I95I~I96I 2. 2 I. 7 일 본 1955~1960 0.9 I. 。 필 리 핀 1948~1960 3.2 2.4 태 국 1947~1960 3. 。 2.0 한 국 1955~1960 2. 9 I. 6 스 리 랑 카 I947~I96o 2. 5 I. 3

이상과 감은 정부통계와 현실과의 괴리는 동계처리상의 마비성에 기인한다기보다 생산측면을 과대평가하려는 정부기관의 의도된 오 류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현재의 후진국에서 인구 인플레이션은 산업화의 주된 장애 요인으로 등장한다고 단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장애요인은 거의

13) 대부분의 선전국은 농업富國이다(例 : 미국, 프랑스).

잉 여 가치 를 창출하지 못함으로써 국내 자본형 성 을 불가능하게 하거 나, 그 기여도가 대단히 낮은 편이다. 2) 긍정적 견해 이상의 부정적 견해에 비하여 인구중가는 처개발의 원인이 아니 며 경제성장에 영향을 미치지 않거나 또는 오히려 긍정적 효과를 일 으킬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인구중가 에 따른 세계 위기선을 반박하며 말더스를 〈 경제학자 가운데 가장 기분나쁜 인물〉 14) 이라고 평한다. 클랏쯔만 Kla t zmann 은 현재 지 구의 모든 경지가능지를 개발하면 l00 여 인구가 살 수 있는 식량 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인구중가가 경제성 장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주장을 요약하여 보자.

14) A~ik i n ~ , Pe~see ec~noi _n~qu ~ ~v!1 n t Marx, Sauvy , L~s pro blemes de pop u l -ati on dans le monde 에 서 재 인용.

이것은 유리한 조건에서 공업화가 추전될 때 인구중가는 자연자 원을 개발하는 데 인력을 공급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체로 시 장의 확장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규모 생산체계를 가능케 한다는 견해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전반적인 생활수준의 향상이 생긴다 는 것이다 (19 세기말 미국의 경우). 다시 말하여 인구의 증가는 경제주 체의 수요와 공군에 모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설이다. 그 메카니즘을 보면 다음과같다. 주민의 수가 증가하면 그만큼 욕구도 증가하고 따라서 소비도 늘어난다. 물론 이것은 국가의 특수성에 따 라 그 정도에 차이는 있다. 두자 역시 인구와 같이 증가할 수 있다. 예컨대 인도의 경우·국민소득에서순자본축적물은 50 년과 70 년사 이 2 배로 증가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욕구가 증가되면, 기업의 확장과 그에 따른 규모의 경제가 실현될 수 있으며 생산울 위한 노 력 역시 배가될 수 있는데, 이것은 그동안 사용되지 않던 유휴노동 의 동원과 자원의 개발에 의하여 가능하며 농업생산에서도 경작방 법의 개선을 동하여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비료의 사용, 관개사업, 기계화, 다수확 작물 경작 등 : Boserup ).

®노동공급의 변화에 따른생산성 향상의 메카니즘:농촌의 인 구압력의 결과로 산업분야별 인구이동이 일어난다. 죽 생산성이 낮 은 농업에 종사하던 활동인구의 공업에로의 이전이 그것이다. C. Clark 는 비농업분야에 종사하는 인력의 증가가 I 인당 실질생산성 의 증가를 가져왔다고 결론짓는다. 이러한현상은특히 일본에서 관 찰되며, 60 년대 이후 한국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 비농업분야 종사 활동인구의 증가는 다른 한편 농산물 가격의 인상을 유발시키 며, 결과적으로농산물공급의 겅칙성을해소시킬수있다. 또한저 령한 인전비 지출의 혜택으로 노동집약산업의 집중개발을 동한 성 장을 도모할 수도 있다(한국의 경우). ® 교육받은 제대와 무교육제대와의 교체 : 후진국에서의 교육문 제는 지난 20~30 년간 괄목할 만한 개선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두 세대간의 교체는 그경제적 효과에서 대단히 중요한역할을한다. 이상이 인구와 경제성장과의 관계에서 낙관적인 견해와관~울간 추란 것이다. 그런데 서구의 경제발달사를 보면 산업화는 인구중가 를 야기시키면서 두 가지의 현상이 등시에 상호작용을 하면서 진행 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경제가 고도성장국면에 접어들면서 인 구의 증가율이 둔화되 는 양상을 보이 고 있 다. 결국 이 두 가지의 현상은 어떤 기계적인 관계를 지닌 것은 아니 다. 그리고 1950 년대 이후 제시된 인구론(부정적 효과론)은 역사적인 현실을 설명하는데 충분한 논리를 갖지 못하였다 .15) 구체적으료 후 전국의 I 인당 G.N.P. 성 장률은 1950~1975 년 기 간 선전국의 그것 보다 약간 높았다 (3.4%:3.2%). 1975 년과 81 년사이, 이 두세계의 차이는 미미한 정도로 유지되었다 (2.4% : 2,8%) .. 선 전국은 인구중가 라는측면에서 후진국보다는 유리한 입장에 있으면서 20 세기 중반 까지 그들의 I 인당 국민소득은 연 2% 씩 증가하였고 (OECD) 반면 에 상당수의 후진국은 수세기 동안 제로 성장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2 차대전후 후진국의 폭발적 인구중가가 선전국과의 격차를 크게 하면서 결국 큰 재앙으로 끝날 것이라는 비관론은 그 현실성

지 물론 국가간에 차이가 있으나 전반적인 현상으로 볼 때 아 논리는 타당성 있다.

운 잃게 되었다. 물론 많은 후진국이 아직도 원활한 석량수급을 갖 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비관론이 타당성을 잃게 된 까닭은, 그것이 인구중가율과경제성장물을별도로취급, 두개의 중 가울 사이의 속도경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적 경험에 따르면 이 두 현상온 구조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경우에 따라 각 기 다른 양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죽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경제성 장이 인구증가를 유발시키는 경우도 있고(선전국형), 경제성장이 인 구증가를 둔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70 년대 한국형). 문제는 각국이 처한 상황에 따라 취해전 개발전략이 어떤 방향으 로전개되는가에 달려 있으며,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한 지나찬 비 판론도, 지나찬 낙관론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각국은 그 자연적 제약에 따라 적정규모의 인구를 가질 필요는 있다.

제 3 절 농업과 수확체감의 법칙 후진국의 경제발전에 관한 전략에서 농업의 역할과 비중은 많은 전문가들에 의하여, 그리고 경제정책담당자에 의하여 무시되었거나 2 차적인 문제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많은 나라에서는 아칙도 인 구의 다수가 농촌에 머물고 있다(평균적으로 남미에는 60%,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70% 정도 ).16) 뿐만 아니라 후진국에서 농업부문은 국 민총생산의 35% 를 차지하며, 비산유국 제상세계 수출총액의 60% 룰 담당한다. 일반적으로 후진국의 농업은 이른바 이중구조로 목칭지위진다 .17) 즉 한편으로는 석민체계에 의하여 개발, 정착된 수출용 목수작물 재 배가 있으며, 이 분야는상당히 앞선 농업기술을 사용한다. 다론 한 편으로는 이상의 목수작물재배에 의하여 가장 비옥한 토지가 접유 당하고 상대적으로 비옥도가 낮은 한계적 토지에서 〈전통적〉이고,

I6) 한국은 66 년에도 전체인구의 53.6% 가 농업인구였다. I7) 후진국의 二重구조에 관한 개 념 은 Lambert, Toy n bee, Furta d o 등에 의 하여 사 용되었으나 종속론자들은( 목 히 A.G. Frank) 이 二頂구조라는 개념 자체 문 부정 한다. 여 기 에 판하여 는 A. G. Frank, Cap ital is m e et sous develop pe ment en Ameriq u e /ati ne , p, 141, p, 203 참조. 여 기 에 서 사용하는 二重구조라는 개 념 은 이상의 전문가들아 사용하는 의미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자급자족적 농업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구조는 많은 나라의 경우명백한현실로서, 이 두 분야는 별도로 분석되어야 한다. I 수출용 작물의 확산 우리는 앞에서 남미의 경우, 그 열대성 기후를 이용하려는 유럽 인들이, 16 세기부터 이 지역에 수출용 특수작물을 대량 재배하여 자국의 수요를 충족시켜왔음을 이미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 수출용 작물은 당시의 높은 운송비에도 불구하고, 기호품이 갖는 특수성 때문에 그리고 특히 〈 노예 〉 의 혹사를 통하여 충분한 채산성을 갖고 있음도 지적하였다. 남미에서 시작된 이 특수작물 재배는 그후 아 시아와 아프리카에 확산되는데, 여기에는 증기기관을 이용한 수송 선의 등장으로 인한 수송비 철감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뻗찬 식민 지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19 세기 후반에는 열대 작품의 재배와 수출이 격증하였다. 유럽이 부유해짐에 따라 무역으 로부터 귀하게 얻었던 조미료 이의에 커피, 홍차, 코코아와같은기 호품의 수요가 급증하였고 이를 값싸게 풍부히 구입할 수 있게 되 었다. 이러한 경향은 20 세기에 들어와서 더욱 확대되어, 열대과일 (감눌류 및 바나나 등)과 각종 식 용 유류 등은 오늘날 일상생 활에 빠질 수 없는 평법한 생필품이 되었다. 열대작물의 생산은 20 세기초에서 1930 년대에 이르는기간동안급 속도로 증가한다. Bair o ch 의 계 산에 따르면 1898~1902 년과 1934 ~1938 년 사이 이 특작물의 생산은 약 200% 증가하였고, 1934~19 38 년에서 1969~1970 년 사이는 약 100% 의 증가울올 보이고 있다. 구체적으로 이 열대작물을 대표하는 커피, 홍차, 바나나, 코코아, 땅콩, 면사, 천연고무 등의 생 산량 중가울은 1952~5_6 년 과 1969 년 사이 평균 71% 로서 같은 기간 제삼세계의 식량생산 중가울 49% 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18)

18) P. Jal ee, Le pilla g e du tiers monde, p• 겔

〈표 I3> 세계 주요 열대 작물의 생산

(단위 : IO 여론, 5 년간의 평균치)•> I I900 I 1936 I I962 I 1970 바 나 나 1,800 8, 100 19,400 25,300 코 코 아 102 730 I, 060 I, 370 커 펴 97° 2,420 4,070 3,760 고 무 60 995 2,260 2,650 원 떤 b> 1,200 3,280 6,IOO 6,830 식 용 TO _c) 2, 700•> I2, IOO 18,800 22,000 홍 차 dl 290 44° 960 I, 150 자료 : P. Bair o ch, Le tiers monde dans /'imp as se, p. 183. 주 : a) 1966~1979 년의 평 균치 b) 미국, 소련 제의 c) 땅콩, 코프라, 야자유 d) 소련 계의 e) 1910 년

그런데 1800 년대말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열대작물의 생산이 둔 화하는 원인은 제삼세계의 내부적 구조변화에 기인한 것이 아니고 이 작물의 소비지인 선전국의 수요가둔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이 수요의 둔화는 열대식품에 대한 소비시장의 포화상태에 기인한다. 선전국의 식료품의 소비한계에 관하여 앞에서 언급한바 있고이 열 대식품도 식품이기 때문에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그 수요는 비탄력 적으로 된다. 죽 이 식품의 수요증가는 안구증가율을 따르는데 그 친다· 예컨대 프랑스에서의 1 인당 코코아 소비는 1830 년에 20g , 1900 년에 450g , 1930 년에 x, ooog , 1950 년에 I, 500g 으로 계 속 중 가하었 으나 1970 년에 는 1950 년 수준에 머 물고 있 다. 19) 죽 대 부분 의 선전국 소비자는 다른 식품에서와 같이 이 열대식품에 대해서 도 이미 오래 전에 포화상태에 있다. 분만 아니라 이 식품은 稅制면 에서 국내 생활필수품과 같이 취급되기 때문에, 예컨대 국내산 청과 물보다 가격이 오히려 상대적으로 처령하다고 할 수 있다 .20) 또한

19) P. Bair o ch, 전제 서 , p. 184. 20) 물론 프랑스에서 생 산되는 사과와 바나나윤 갈은 상품 수준에 서 비 교할 수는

없다.

커피, 코코아 등도 대단히 저령한 가격으로 무제한 공급받고 있다. 이것은 원산지에서의 낮은 인전비, 생산비와낮은 운송비에 따른처 령한판매가격이 모두소비자에게 혜택을가져다주는경우이고, 이 것은 모든 선전국에서 동일하게 볼 수 있는 현상아다. 후진국의 이러한 일부 작물생산에의 목화는 이른바 單 一경작 mo- nocul t ure 의 결과를 야기시키면서 주민들의 식량공급 및 균형 있는 영양공급에 차질을 빚게 하는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다 .21) 사실상 남미 와 아프리 카의 거 의 모든 나라들은 선전국의 〈 안뜰〉 이었다. 예컨대 쿠바는 담배와 설탕을 주로 생산했고 코스타리카는 미 국의 unit ed frui t s 社 의 바나나 발이 었 고, 콜롬바 아는 미 국의 커 펴받이었다 .22) 이러한 예는 아프리카, 아시아 등에 무수히 있고, 수 출을 위한 특작물의 재배는 식량생산과 부정적 경쟁관계에 들어 간다. Jos ue de Castr o 가 그의 저 서 『기 아의 지 정 학적 고찰』에 서 가 장 적나라하게 고발한 이 식민경제의 유산은 아칙도 촌속하는 가운 데 아열대지방의 농업구조를 왜곡시켰고 많은 경우 식량부족사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21) 한국에서도 日帝의 침략과 더불어 만일경작 monocul t ure 의 시비가 일부경제학 자에 의하여 제기되었으나 한국의 단일경작으로서의 벼농사는 남미나 아프리카 의 그것과 성격을 달리한다. 족 한국의 단일경작 작물로서의 쌀은 한국인의 主 食物이며, 이 주식물 생산은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부과된 것이 아니라 일계가, 갈은 주식물인 쌀울 한국에서 약탈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농업생산의 균형적 인 측면에서 본 한국의 단일경작은 다른 각도에서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沈相 22) J弼o s•u 李e 承de哲 ,C as『tr한 o ,국 경G e제op 의 o l i理t i解q.!u Ie, dpe. 8la3, /a法i文m社. .

결국 후진국의 주민은 이러한 생산체계에 따라 만성적인 영양부 족, 특히 동물성 단백질의 부족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값싼 노동력과 자원을 제공하면서 富國의 기호식품을 공급해중으로 써 부국인의 과잉 영양섭취에 기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후진국 은 자국의 농토 가운데 가장 비 옥한 부분을 수출용 작물재 배 에 사용, 그 생산물을 선전국에 값싸게 공급하고, 그 수출대금으로서 선전국 으로부터 값비 싼 양곡을 수입 하여 식 량으로 충당하는 이 른바 2 중

적 착취의 대상이 되었고, 이러한 불평등교역이 소박한 형태로 고 발되면서 (1950 년대 )2 3), 그것이 현재의 종속이론으로 발전하였다 .24)

23) Jo sue de Castr o , 전게 서 . 걱) A.G. Frank, S. Ami n, A. Emmanuel 등의 저 서 참조.

이제 이상과 같은 불공평한 상황을 요약하자면 후진국은 커펴, 바나나, 코코아, 코코넛 油의 경우 세계생산의 전부를 공급하며 홍 차는 약 70%, 땅콩은 95% 를 공급한다. 이밖에 과인애플을 비롯한 많은 열대성 청과물은 후진국의 생산에 전적으로 의촌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강조하여야 할 것은 이상과 같은 특작물들은 제 삼세계에 그 품목이 다양하게 분산 재배되는 것이 아니라, 품목별 로 몇 개국에 집중, 목화되어 있다는 접이다. 예를 들어 인도와 스 리랑카 두 나라는 홍차 세계생산의 60% 를 공급하며 가나, 나이제 리아, 브라질, 코트디 브아르, 카메룬 등 5 개국은 코코아 제계 생 산의 4 분의 3 을, 파키스탄과 인도 등 2 개국은 黃麻의 제계생산 의 4 분의 3 을, 천연고무는 말레이지아와 인도네시아가 세계생산의 70% 를 공급한다. 한 나라의 경제가 이상과 같이 제한된 독작물을 대량 공급수출하 논 체제에서 상정될 수 있는 문제로서 우리는 국제시장에서의 가격 의 변동과 그것이 국내경제에 미치는 충격을 생각할 수 있다 . 더욱 이 국제시장에서 이상과 같은 농산물의 가격이 대부분의 경우 수요 자가격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 나라들은 부국의 횡포를 감수하여 야 하고, 이것이 곧 〈 교역조건 〉 의 문제이다. 2 식량생산 르네 뒤몽 R. Dumon t은 〈 인류가 모두 기아를 향하여 달리고 있다 Nous allons a la fa m i ne 〉라고 경 고하면서 현재 후진국의 인구 증가 와 식량생산의 전망을 비관적으로 또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말더스 이래 계속되는 이 기우는 어떠한 근거를 갖고 있는가? 공산권율 포함한 후진국에 속하는 지 역 에 서 농업 에 종사하는 인

구는 1970 년대 약 7 여으로 추산된다. 그중 6 여 5 천만 명은 부족한 대로 식량생산에 종사하며 나머지 5 천만 명은 수출용 목작물 생산 에 종사한다. 이 식량생산을 위한 농업에 종사하는 활동인구의 비 울은 후진국의 경우 약 65% 에 달한다.

〈표 14> 지역별 농업인구의 비울 (1970)

소 련 II 32% AU1. S.A . /T。캐 나 다럽 I I94%% · 중 미 | 47% 아납시 아(중국제외)미 |I 6339%% 아 프 리 카 I 69% 자료 : F.A .O . Annuair e F.A .O . 1971. . P. Jale e, Le pilla g e du tiers monde, p. 45 에 서 재 인용.

한 나라 경제에서 1 차적인 중요성을 갖는 분야가 주민의 식량을 생산하는 농업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앞에서 유럽의 산 업혁명이, 풍요하여전 농촌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이미 소개하였다. 그러면 현재의 후진국에 속하는 나라에서 식량생산의 현황은 어 떠한가? 이 지역에서의 식량생산에 관한 통계는 1930 년대 이후에 나 사용될 수 있 다. F.A .O . 역 시 1934~38 년 이 후의 통계 를 이 용한 다. 이제 후진국의 식량생산 추이를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 1900 년부터 2 차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후진국의 식량생산중가 울은인구중가울보다 낮은 수준으로 볼 수 있으며, 이 두 변수 사 이의 격차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였는지는 계산하기 어렵다. ::::z. 러 나 1934~38 년까지 만 하여 도 후진국 전체 로 보았을 때 의 곡물 의 무역수지는 오히려 후진국의 혹자로 기록되고 있다. 이것은 전 체의 평균치로서 그 자체로서 커다란의미를갖는다고할수는없

다. 죽 각종 기아의 문제는 그 나라 독유의 소득분배제도-농지 제도와 관련한-의 결과이기도하다. 또 한가지 동계적 사실로서 이 기간중 남미는 아시아 또는 아프리카에 비하여 비교적 식량생산 이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예로서 우리논 제계 소백생산국의 하나인 아르헨티나 25) 의 경우를 들 수 있 울 것이다 .

25) 처자에 따라 아르헨티나 를 후진국의 법주에서 계의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 나

라는 일찍아 1930 년대에 경제도약을 시작하던 중 50 년대에 듄어와서 이른바 〈중단된 성 자〉 (Crois s ance arrete e 또는 blocag e de crois s ance 로 표현됨 ) 을 가 록하고있다.

후진국의 식량생산에 관한 보다 신빙성 있는통계자료는 1934~38 년 이후 F.A.O. 등 각 국제기관에 의하여 작성되었고 공산권을 제 의한 후진국의 식량생산의 추이는 다음 표와 같다.

〈표 15> 공산권을 제외한 후진국의 농업생산지수

(1952~56= I00) 7] 간 총생식산량 생II산 인 당 총생농산업 생II산 인 당 1934~38 75 104 77 107 1948~52 87 94 87 95 1958~62 I20 IO4 I2I IO5 1666~70 148 104· I48 105 자료 :FP.. A.BOa.i r o ch, Le tier s monde dans /'imp as se, p. 186 에서 재 인용.

이상의 표에서 2 가지 사실이 주목된다. 그 첫째는 농업총생산의 중가울이 상대 적 으로 높다는 점 이 다 (1934~38 년 기 간과 1966~70 년 기 간 20%). 이것은같은 기간선전국의 농업생산중가율과 같은수준이 며, 선전국의 산업화 초기보다는 휠싼 높은 중가울이다. 예컨대 18 세기 영국의 농업생산 중가율은 연평군 1%, 프랑스 o.6%(19 세기에 는 0.9%), 벨기에는 19 세기 후반기 1% 이다. 선전국 가운데 증가율

이 높은 미 국은 (1870~1910 년 사이 연평 군 2. 5 %) 특수상황에 기 인 한 다. 죽 이 시기, 미국은 끊입없이 농경지를 개간하면서 (西部), 농업 인구의 대폭적인 유입이 촌재하였다. 그런데 후진국의 1 인당 농업생산과 식량생산은 負(_)의 중가를 보이거나 또는 일정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것은 후진국에서의 높은 인구중가울이 농업생산중가울을 상쇄하였기 때문이다. 결국현재의 제삼제계와 산업혁명 초기의 유럽과의 농업부문에서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각기 다론 인구중가율에 기인한 것이다. 죽 현재 대부분의 후진국의 인구증가울은 연평군 2.5% 안 데 비하여 선전국은 산업화 초기 0.7% 미만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이상의 통계에서 우리는 후진국의 식량생산이 과대평가된 경우 와 인구중가울이 과소평가된 경우를 상정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1 인당 식량생산 중가율의 추이는 위의 표에 나타난 것보다도 오히 려 부정적으로 변화한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공산국과 아르 헨티나를 제의한 후진국의 양곡 대의수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표 16> 후진국의 양곡수지

연 도 I 대의수지 1936 년경 I 1,100 만t의 혹자 1950 년경 I 600 만t의 적자 1960 년경 I 2,000 만t의 적자 1966 년경 I 2,800 만t의 적자 1972~73 I 5,000 만t의 적자 1983~84 I 1 여 9 백만t의 적자 자료 :F. A. O.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후진국의 양곡생산 부족은 1950 년 이래 매 년증가하여 83~ 씩년에 와서는 I 여 t이상을수입에 의존하고있다. 물론 이러한 상태는 지역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죽 남미에서

는 ,(--1량생산이 현처히 증가한 반면 특 히 아시아지 역 (中 國 제외)에서 논 담보상태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이상의 두 지역에서는 인구중가울이 농업생산을 상회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남미에서는 그 생산구조자체가 준문제를안고 있음도 많이 지적되고 있다. 그곳에는 대규모의 토지를 소유하는 기업농 Lati - fu nd i a 이 있는가 하면 자급자족에도 부족한 영세농 역시 수없이 많 이 있 다• 특히 브라질의 경 우 이 Lati fun dia 는 그 토지 의 확장을 폭 력적인 수단에 의하기도 한다. 3 농업생산성

I) I9IO~I970 년 사이 26)

26) 이 계 산은 P. Bair o ch 에 의 한다. P. Bair o ch, 전게 서 , p. 189.

제삼세계의 70 년대 식량농업생산성은 60 년 전보다 오히려 낮은 것 으로 나타나며 1 세기 전보다도 떨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러한 현상은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일부국가에서 두드러지게 나 타난다. 중국을 제의한 아시아에서는 약 15%, 아프리카에서는 약 35% 의 생산성 하락현상이 있다· 그러나 남미의 경우는 오히려 그 것이 상승하고 있다. 식 량생 산중가를 국가적 사업 으로 추전한 중국은, 물론 그 자료의 미비정 때문에 정확한 생산성의 추이를측정할수 없지만, 서구전문 가둘의 계산에 따르면 1934~38 년과 1960~64 년 사이 그 생산성이 약 15%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중공의 정부산하통계에 의 하여 제시된 65% 보다 낮은 수준이니 아마도 실질 증가울은 15% 와 65% 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후진국의 식량농업의 생산성이 정체 또는 후되하는 근본적인 원 인은 전반적인 인구중가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그 규모를 보면 1910 년과 70 년 사이, 이 지역의 농촌인구는 2 배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법칙으로서 이 경우 농업에 서는 이른바 〈수확체감의 법칙〉이 작용한다. 죽 제한된 토지에 접

중국과 아프리 카의 1 인당 곡물생 산추이

(1950~1984) kg ` 300 200 100 1950 • 1960 1970 1980 자로:미국 농업부 Y. Mens, La faim : les donnees actu e lles, Faim -deve!opp e ment Dossie r , oct. 1985, Paris .

증적으로 노동력을 부입할 경우 그 수확량온 두입된 노동량에 비하 여 상대적으로 체감하면서 증가한다는 단순한 법칙_一이것은 I8 세기 프랑스의 재상이자 경제학자인 뒤르고 Tur g o t에 의하여 명백 히 표현되었다――에 의한다. 그런데 많은경우인구밀도가높은후 전국은 20 세기초 이미 이 법칙이 작용하였다. 이것은 산업혀명을 추전한 유럽과 대조되는 현상이다. 즉 유럽에서의 농업발전은 19 세 기초 농촌인구가 안정을 유지하다가 19 세기말에는 줄어들기 시작,

2 차산업으로 흡수되는 가운데 산업발전에 기여한다는 고전적인 도 식과 다론 현상이다 .27) 우리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선전국은 그 산업화과정에서 전체인구 증가울이 그다지 높지 않은 가운데 새 로이 발흥하는 2 차산업 과 3 차산업 이 농촌의 초과 활동인구를 흡수 하였고, 이것이 현재의 후진국과 다른 점이다•

27) 후진국의 농촌인구가 불충분한 2 차산업에 흡수되지 못하고 위장실업, 실업의 상태에서 3 차산업분야를 포화상대로 만드논 현상은 따로 취급한다.

후진국의 식량농업 생산성이 정체하거나후되하는또다른이유는, 이 지역의 비옥한 토지가 거의 수출을 위한 특수작물에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특수작물재배는 선전국의 수요증가에 따라 접차 확대되면서 식량생산농업을 압박, 이를 비옥도가 낮은 한계적 토지 로 물아 냈고, 이 박토에서의 식량생산농업은 현대적인 기술도입을 의면한 가운데 〈전통적〉인 방법에 의하여 경작되는 경우가 허다하 다. 따라서 이 분야에서의 생산성은 정체하거나 후되할 수밖에 없 는 것이다• 2) 선전국과의 비교 우리는 앞에서 현재 선전국의 산업화과정에서 농업생산성의 증진 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음을 강조하였다. 죽 유럽에서의 농업생산성 의 향상온 한편으로 충분한 잉여가치를 창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는 활동인구의 일부를 농사에서 해방, 그들이 다른 산업에 종사할 수 있게끔 하였으며 부유한 농촌의 소비수요증가(특히 칙물)는 서서 히 그리고 접전적으로 산업화로의 도약을 가능케 하였다는 접이다. 그러면 현재의 후진국의 농업생산성은 유럽이 산업화를 시작하던 그 시기와 비교할 때 어느 수준에 있을까? P. Bair o ch 의 계 산에 따르면 현재의 선전국이 그 산업 화를 시 작 하던 시기의 농업생산성은 현재 후진국의 평군수치보다 20~25% 가 량 높다고 하며 28) 아프리카나 중국을 제의한 인구 과밀 아시아지역 보다 경우에 따라서 40% 나 높았다고 한다.

28) P. Bair o .:h, 전게 서 , p, 192.

이 40% 의 격차가 갖는 의미는 현재의 후진국이 선전화하는 데 있 어서 그 시초부터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후진국은 이 40% 의 격차를 뛰어넘어야 정상적이고도 균형있는 산 업화를 추전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산업화가 반드시 현재 의 선전국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모방하여야 한다는 법은 없으며, 또한 각국은 그 나라 특유의 경제사회적 여건에 따라 독자적인 경제 발전 정책을 추전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볼 때, 그리고 현재의 후진국의 경제변화의 장애가 어디에 있는가를 규명하려는 시도에서 우리는 이상과 같은 장애요인을 지적하는것이다. 또한여기에서 강 조하여야 할 한 가지 사실은 현재의 대부분의 선전공업국은 부유한 농업국이라는 접이다(미국, 캐나다, 프랑스 등). 그런데 후진국의 농업생산성 향상온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토지소유재도, 정치사회 및 국민 의식구조등이 전반적으로 관계된다. 득히 활동인구당 경지면적의 확장은 그 기본조건이 되는 데, 이 점에 있어서 현재의 후진국, 득히 과밀지역은 대단히 불리한 여건하에 놓여 있다.

제 4 절 공업의 파행성 1945 년 이후 식민통치하에 있던 많은 나라가 주권을 다시 찾으면 서 거의 동시에 시도했던 정책은 공업화였다. 〈 높은 굴뚝에서 뿜어 나오는 검은 연기 〉 는 〈 국력의 상칭 〉 이었고, 공업은 경제발전과 동 의어로 사용되었다. 사회학자인 R. Aron 은말하기를 〈 모든 사회는 산업사회이거나 산업사회를 지향한다 〉 고 하였다. 물론 발전, 또는 진보의 개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리고 행복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이상과 같은 명제는 달 라질 수도 있으나, 일반적인 개념으로 볼 때 공업화는 경제발전을 실현시키고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여기서는후진국의 특수성에 따라 광공업과 제조업을 구벌하여 고 찰하는 것 이 타당하다고 생 각된다. I 채광공업 중국을 제 의 한 29) 후전국의 광공업 은 1900 년 이 태 빠른 속도로 성

29) 중국의 광공업은 현지 산업에 원료 를 공급하는 이은바 前方산업 l'ind ustr ie en amon t의 역할을 하고 있다.

장하였 다. 1900 년과 1948 년 사이 이 분야의 연평 군 성 장률은 5· 5% 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 기간중 전반적인 경제동향으로 볼 때 이것 온 대단히 높은 증가율이다. 특히 세계경제가 1930 년대의 공황기 를 거치는 기간중에도, 후진국의 채광산업은(평균치이기는 하지만) 지 속적인 성장을 보인 셈이다. 이는 다시 말하여 후진국의 광물자원 이 강도 있게 개발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후진국의 채광산업 이 가속적 인 팽 창을 보인 것 은 1948~70 년 기 간으로서, 이때에 이 분야의 연평군 성장물은 9% 에 달한다. 1963 년을 기 준년으로 사용, 그 지 수를 l00 으로 할 때 1969 년 선전국의 채광산업 지수는 117 인 데 반하여 후진국의 그것은 I59 로서, 60 년 대 후진국의 성 장물은 선전국의 3 베 반에 이 른다. 이상과 갇은 팽창은 우선 原油생산에 의한다. 즉 이 분야는 후진 국의 채광산업의 85%( 가치기준)를 점유한다. 그러나 60 년대부터 기 타 광물자원도 활발히 개발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강조하여야 할 점은, 후진국의 채광산업이 현지 의 수요롤 충당하기 위한 것이 아니타는 사실이다. 사실상 현지의 산업은 이 채굴된 광물의 미미한 부분만을 사용할 뿐이다. 구체적 인 예를 들자면 브라질, 칠레, 라이베리아, 말레이지아 등은 채광 된 철광석의 80~l00% 를 수출하고 있다. 1956 년 후진국에서 채광된 철광석은 세계생산의 13% 였는데, 그 것은 1968~1969 년 27%, 1970 년에는 40% 를 차지하게 된다(공산 권 제의). 그런데 이 지 역 에서 칙접 생산된 강철은 세계 총생산의 4% 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고철의 재사용을 감안한다면 후진국에서 채광된 철광석의 95% 이상이 선전자본국의 용광로에서 녹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 른다. 후진국에서 생산되는 철광석은 또한 그 철의 함량이 특히 우수하 다. 시에타리온과 칠레의 광석의 함량은 60%, 칠레 63%, 앙골라 63%, 가봉 64%, 모리 타니 • 브라질 • 베 네쥬엘라 • 인도의 철광석 은 65% 의 함량을 가진 우수한 광석들이다.

석유의 경우 1970 년, 제삼세계의 생산량은 세계총생산의 57.5% 에 달한다. 이제 제삼세계가 제계생산에서 차지하는 광물산업의 비 중을 보면 다음과 갑다.

〈표 17> I969 년 제계 총생산(광물)

국 가 I A성 A士 물 소련 딪 동구 I 31.5% 선전자본국 I 4I% 제상세계 I 27.5%

〈표 18> 제계 총생산에서 후진국이 차지하는 광물별 비중 a)

|철 광(%) I 알루미늄원광 (%)1 석 유(%) 1900 2 bl 土 4 1913 3 c) 14 1928 7 21 25 1948 8 61 36 1960 29 68 56 1970 40 60 70 주 : a) 소련 딪 공산권 제외 b) 무시할 정도의 소량 c) I% 미만 자료 : P . .Ja lee, Le pillag e du tier s monde, p. 52. ~-B air o ch, Le tier s monde dans !'imp as se, p. 201.

이밖에도 크롬 (97%), 망가네스 (89%), 코발트 (75%), 안티몬 (90%) 등은 거의 전적으로 후진국에서 생산되며 거의 全量이 선전자본국 으로 수출된다. 제삼세계의 · 채광산업은 운송수단의 발달에 따른 운송비의 철갑과 병행하면서 활기를 떠었다. 왜냐하면 원광의 생산지와 소비지의 거 리가 멀리 떨어전 상태에서는 철 • 금속의 함량이 상대적으료 높은 우수한 광석만이 채산성이 맞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9 세기만 하

더라도 재철업은 석탄생산지와 철광생산지가 이웃하는 그런 지역에 서 발달하였다(프랑스 북동부, 중부, 독일의 루르지방). 1930 년대만 하 더라도 운송비는 철공업의 채산성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 중의 하나 였다.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채광산업은 60~70 년대에는 이 운송비를 절감하기 위한 기술적인 수단 을 개발하였고, 따라서 후진국의 채광 산업 도 같은 리 듬으로 발전하였 다. 선진국 또는 한국 같은 신흥공업 국이 광석의 하역지인 항구 주변에 재철공업을 설립하는 이유도 여 기에 있다. 또 한 가지 구체적인 사례로서 우리는 유조선의 경우 를 들 수가 있다. 즉 1970 년대 중반부터 사용되는 유조선 (35 만 톤 급)은 1958 년의 그것보다 15 배나 용량이 크고, 최초의 유조선 (1868 년 영국)보다 150 배의 수송능력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하여 운송비의 지속적인 철감은제삼세계의 채광산업을활 발하게 하였다. 이것은 선전국의 유리한 조건의 광맥이 접차로 소 전된 결과이기도 하다. 2 채광산업과 경제발전 유럽의 경우 원자재의 탐사, 개발은 타산업을 유발시키든가 또는 타산업에 의하여 유발(영국의 석탄)되는 이른바 前方산업 lndustr i e en amont 과 後方산업 ind ustr i e en aval 을 탄생 시 키 면 서 상호 연관 된 산업조칙을 형성시킨다. 이것은 운송수단이 발달하기 전, 즉 운 송비가 높던 시대에는 일종의 자연적 제약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산업구조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경우 원료, 원자 재가 매장되어 있는 지역은 이의 개발과 더불어 이의 가공산업 및 제조업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 보동 예이다(독일의 루르 지방, 프랑스 의 동복부). 그런데 운송수단의 발달과 운송비의 철감으로 원자재의 개발지역과 그 가공산업이 상당한 거리를 두고 별도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기에 후진국이 선전국의 원자재 공급지로 전락 하게 된 원인이 있다. 선전국의 에너지 및 광물자원의 대 후전국

예속상황을 국내 수요울로 보면 다음과 같다 (1970 년 ).30)

30) P. Jal ee, L' im p er ia l i sme en 1970, chap . 2°9, Paris .

석유 55% 철광 35% 알루미늄 원광 64% 크롬, 망가네스, 안티몬 85% 코발트 70% 주석 82% 銅 40%

후진국의 채광산업 및 자원 반 출 이 그 지역의 자생적 공업발전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면서 대단히 빠른 속도로 팽창하는 이유는 이상과 같 이 선전국의 수요를 만족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산업이 또한 현지경제에 부정적인 작용을 하는 이유는, 대부 분의 경우 이 산업의 개발, 경영, 관리는 선전자본에 의한다는 접 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하여 〈 독점자본 〉 이라고 명명되는 이 선 전국 기업들의 일차적인 목표는 현지의 경제발전의 철대적 필요성 에는 등을 돌린 가운데 최대한의 이익을 실현, 그를 본국에 송출하 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전국기업이 후진국의 채광산업에 두자를 결 정할 때는, 그것이 본국에서 같은 분야에 행하여겼을 때보다 확실 히 수익성이 높다는 계산이 나올 때에만 이루어졌었다. 이 의국인 회사가 현지에서 개발하는 자원을 이용한 후방산업을 일으키지 않 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즉 후진국의 국내시장은 상대적 으루 협소하기 때문이다. 결국 〈 득점자본 〉 이 후진국에서 홍미를 갖 는 것은 오로지 地下 資源 이며, 이들이 현지에서 다양한 산업을 일 으킬 이유는 거의 없다. 이 채광산업이 자원소유국의 경제발전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여기에 사용된 시설 • 장비는 모두 수입품이라는 접이다. 분만 아니라 채굴된 원광을 싣고 그 도 착지(선전국)로 간수송선은, 돌아오면서 소비재를싣고 와서 현지의

근로자나 선전국 간부사원에게 판매하는 이중적 이득을 올린다. 뿐 만 아니타, 이 채광산업은 고용효과가 극히 낮다는 특칭을 갖고 있다. 이밖에도 이 산업의 가장 부정적 측면의 하나로서, 지하자원은再 生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 독점자본 〉 둘은 채굴조 건이 유리한 자원을 개발하기 시작하였고 그의 채산성이 불리하게 되면 언제라도 페광시키고 출발한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 에서 중요한 것은 이 지하자원이 고갈됐을 때, 고것이 후진국에 미 치는 결과이다. 후진국은 이 자원의 개발을 의국인에게 맡기고, 그 대가로 일정액의 로얄티를 받았을 분, 자원이 고갈되면 남는 것 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하여 후진국이 자체의 제조업을 설립, 값 싼 자원을 국내에서 조달하여야 할 때에는 이미 자원은 남은 것이 없고 오히려 의국에서 필요자원을 비싸게 수입하여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이러한 전망은 자원 생산국인 후진국 당사자에 의하 여 신중히 고려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여 이 채광산업아 현지 제조 업의 도약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현재와 같은 규모와 속도의 자 원개발과 수출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문제는 이상과 같이 간단하지마는 않다. 즉 선전국은 특히 석유가의 인상 이후 대체 에너지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核 에 너지의 생산원가 철감은 그 좋은 예이다. 그밖에 후진국이 전통적 으로 공급하던 원자재 가운데 상당부분을 合成製品(고무 등)으로 대 체하려는 노력도 꾸준히 추전되고 있다. 그럴 경우 앞으로 15~20 년 뒤에는 석유 등 일부자원이 그 경제적 가치를 상당히 상실할 위 험도있다. 3 제조업 이상과 같이 후진국의 원자재는 대부분 선전자본국으로 수출되며 후진국은 그를 기초로 한 자생적 공업을 구축하지 못하였으므로, 현 재의 공업화 노력은 대단히 특이한(유럽의 산업화와 비교하여) 양상

울 띠고 있다. 후진국의 공업화수준을 수치로 보면 1969 년 세계 제조업에서 이 지역이 차지하는 비율은 7.1%, 자본주의세계에서의 비율은 10.4% 이다. 이상과. 같은 미미한 비중도 大陸에 따라 그 격 차가 심하다. 남미 4·9% (인구 2 억 7 천 5 백만) 동남아 3. 7% (인구 II 여 5 천 5 백만) 아프리카 및 중동 I. 8% (인구 4 여 I 천만) 인구비율로 보았을 때 남미의 공업화는 동남아보다 5 배 가량 높 고 아프리카, 중동보다는 4 배 가량 높다. 그러나 선진국의 공업화 는 남미의 그것보다 7.5 배나 높다. 물론 한 나라, 한 지역의 공업 화의 수준을 지수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고 이것은 후진국이 자생적 • 자립적 공업화를 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검증하 려는 우리의 연구목적과도 위배된다. 그러나 질적인 떤울 고찰하기 에 앞서 현재 후진국의 제조업의 규모를 우선 측정하여 본다떤 다 음과같다.

〈표 19> 1969 년 후진국 제조업 생산지수(공산권 제의)

(1963= 100) I 서] 겨] I 납 미 I 아 시 아 1938 29 28 30 1948 41 46 34 1955 61 65 56 I960 86 88 83 1965 II7 II6 I20 1969 148 145 153 자료 : 『 U.N. 경 제 연감』 ※참고 소련 및 동구권 I64, 선전국(남아연 포함) I45, 재상세계 (남아연 재의) I48, 중남미 I45, 동남아 I53.

1938 과 48 년 기 간, 후진국(공산권 제의 )의 제 조업 은 약 40% 증가 함으로써 연평군 3-5%(1 인당 2% )의 중가율을 보인다. 이는선전국 (공산권 제외)의 그것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증가율이다. 2 차대 전을 전후로 하여 많은 식민국이 주권을 다시 찾고 〈 의욕적인 〉 경 제개발계획을 수립하면서 적어도 총량지표로 볼 때, 경재성장률은 더욱 가속화한다. 그리하여 I950 년과 60 년 기간, 제조업 연평균 성 장률은 7%(I 인당 5% )를 기록하였고, I960~70 년 기간은 8% 로서 1 인당 성장률이 무려 5.5% 나 된다. 이 성장률은 유럽이 그 번영을 누리던 l9 세기의 성장률보다도 빠른 것으로서, 사실상 유럽의 1 인당 제조업 성장률은 그 초기 산 업화 단계에서 I.5%~3.0% 를 넘지 못하였다. 유럽 (대 륙 )이 그 역 사상 가장 빠른성장률을기록하던 I960 년대만하더라도연평군 5% (I 인당 4% )를 넘지 못하였다. 이러한 후진국의 제조업 성장률은 일 본과 이태리의 초기 산업화 과정의 그것보다도 높다. 후진국의 제조업 형성, 발전은 특수한 상황과 목수한 패턴을 갖 고 있으며, 이는 유럽의 그것과 전혀 다른 과정을 밟고 있다. 우리 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럽의 제삼세계 전출 및 석민화가 현지의 수공업을 완전히 몰락시켰고, 제삼세계는 유럽으로부터 필요한 공 산품을 수입 하여 사용하였 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 변화가 생간다. 그것은 먼처 남미에서, 특 히 브라질에서 이미 양대전 사이에 이른바 〈 수입대체재 산업 〉 이 발 흥하게 되는 것이다. 제조업이 이렇게 생성되는 데는 ® 30 년대 공 황으로 인한 원료, 원자재 수출의 부전에 따른 유럽 으로부터 의 수 입능력의 감소 ® 2 차 세계대전에 따른 수입의 장애 등에 의하여 현지에서 필요한 생필품을 생산해야만 하였다는 등의 이유가 작용 하였다. • 좌우간 1950 년부터 남미의 몇 개국에서 〈 수입대체산업 〉 이 본격적 으로 가동되기 시작하였고, 이는 산업화의 한 해결방법으로 인식되 었다. 초기에는 유럽과 미국에서 공급한 부품을 조립하는 수준의 기업

이 출현하였고, 그로부터 섬유를비롯한경공업이 창출되었으며, 시 멘트 • 컬강 등 〈 重工 業〉 산업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조업의 건설은 경제를 전반적인 산업화로 이끄 는 추가적인 파급효과몰 일으키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수입 대체산업은 국민의 다수를 점유하는 농업인구를 그 판매시장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이 국내시장이 포화상태가 되는 순간 성장둔 화현상을 보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60 년대에 이미 남미는 이론 바 〈 성 장의 봉쇄 blocag e de crois s ance> 또는 〈 정 지 된 성 장 crois s ance arr e t e e 〉 에 직면하게 되었고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 종속론자 〉 는 이 러 한 공업 화의 환상을 고발하게 된다• 31)

31) 특 히 A.G. Frank, Cap ital is m _e e t sous develop pe ment en Ameriq u e lati ne 울 참조할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또는 이러한 궁지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의도에서-일부 남미국가는, 선전국과 국제금융기관 등으로부터 대규모의 차관을 도입, 중공업 건설을 시도하였으나 현재로서는 누 적된 외채만이 그 결과로 남았을 뿐이다. 이에 비하여 60 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아시아의 신홍공업 국 NICS 는 남미의 공업화와는 그 출발점부터 다론 양상을 띠고 있 다. 즉 남미가 1 차상품의 수출로 얻어전 대가로 유럽, 미국으로부 터 2 차상품의 수입을 하던 〈 종속적 〉 구조가 의생적 요인에 의하여 장 애를 받으면서 수입공산품을 칙접 생산하려는 이론바 수입대체산 업을 전설하고자 하는 노력을 통하여 공업화를 시도하였다면, 아시 아의 NICS, 특히 한국은 그 시초부터 수출산업의 건설과 제품의 수출을 동하여 경제발전을도모하였다. 요약하여 남미가 그 지리적, 자연적 조건의 혜택으로 1 차상품의 수출一수입대체산업一수출산업 의 전략을 취하였다면, 한국과 대만은 수출할만한 1 차상품이 없는 가운데 공산품을 수입할 의화가 없었기 때문에 유럽이나 미국으로 부터 공산품, 생활필수품을 수입할 수 없었다. 즉 한국은 절대적 빈곤(특히 자원과 자본) 상태 에 서 부족한 생 필품은 부족한 대 로 거 의 대부분의 주민이 최처 생활을 하여 왔다. 이러한 상태는 일제시대까

지 계속되다가 1945 년 해방과 더불어 50 년대는 미국으로부터의 원 조물자의 도움으로 식 량 등 필요한 생 필품을 공급받는다. 이 시기에 원면, 원당 등을 공급받고 그것을 가공하는 가공산업이 태동하였는데 우리는 그것을 일부 발전론자들이 규정한 것처럼 수 입대체산업이타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은 남미처럼 공산품 울 완제품 상태로 수입한 경험이 없거나 극히 제한되었고 최근까 지만 하여도 애국십에 호소, 조잡하고도 가격경쟁에서 불리한 국산 품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호주의논, 80 년대에 도 계속되고 있으며, 무역수지가 혹자로 바뀐 1986 년부터 의부의 압력 (주로 마국)에 의하여 수입의 개방이 고려되고 있다. 좌우간 한국은 노동집 약적 수출산업 을 동한 공업 화를 추전, 60 년 대 이후· 그 산업구조의 급속한 변화를 32) 기록하고 있으며 이른바 신 흥공업국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수출주도형 신홍공업국 이 과연 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논의는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여기에서 지적할 수 있는 톡칭으로서, 이 NICS 는 유럽 의 선전화와는 반대되는 경로를 밟았다는 사실이다. 죽 이 신홍공 업국에서는 시설재 산업이 부재한 가운데 노동집약산업을 다발적으 로 건설, 그 양적인 팽창과 확산을 통하여 수출과 국민생산을 신장 시키는 방법을 채택하였다는 특칭을 갖는다.

32) 沈相弼 • 李承哲, Ii'한국경 계 의 이 해.!l, 법 문사.

아시아 신흥공업국의 제조업이 세계 공업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 은 약 10% 미만 (I977 년)이고 세계공업 제품수출에서 NICS 가 차지 하는 비율은 7.12%(1977 년)에 달한다. 33)

NICS 에 의 한 제 조업 제 품의 수출은 특히 중국문화권에 속하는 대만, 한국, 홍콩, 싱가포르에 의하여 주도되며 이 4 개국에서는 특 히 양질의 풍부한 노동력이 동원되었으며 그들의 높은 생산성에 비 하여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이 기업의 성장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수출주도형 공업화는 싱가포르, 홍콩, 한국, 대만등지에서 초

33) 이러한 비율은 최근에 급격히 상승하였는데 그 구재적인 내용은 뒤에서 다시 다 루게 된다.

〈표 20> NICS 의 세계공업생산에 대한 비중(%)

I 1963 I 1970 I I977 한 국 o, I I 0.22 0.69 대 t>J: o. I I 0.23 0.46 브 라 질 1.57 I. 73 2.49 멕 시 코 1. 04 r. 27 I, 45 NICS JO 개국 합계 | 5·40 I 6.6, I 9.28 자료 : OECD. The im p ac t of newly in dustr i a l iz i n g countr i e s , 1979. p. 18.

〈표 21> 제계 공업재품 수출 가운데 NICS 의 비중(%)

I 1963 I 1973 I 1977 한 국 0.05 0.78 I. 20 대 uJ: o. 16 1,04 I. 23 브 라 질 0.05 0,35 0,41 멕 시 코 o. 17 0,64 o. 5I NICS IO 개국 합계 I 2. 59 I 6.29 I 7. 12 자료 : OECD, 전개서, p.1 9. 신태곤, 「산흥공업국 공업화정책의 제유형 비교분석」에서 재인용.

기의 低부가가치 잡화류(직물, 의류, 완구, 신발 등)로 시작한 가운데 일부 분야(자동차, 전자)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기술을 소화하였고, 일부 제 품은 1960 년대 유럽 의 수준에 육박하고 있 다. 그런데 문계 는 이러한 기술이 대부분의 경우 모방이나 칙수입되었다는데 있고, 현재에도 선전국과 신홍공업국간에는 상당한 기술수준의 격차가 있다.

제 5 절 기술상의 격차 일반적으로 선·후진국의 차이를 규정하는요소로서 기술의 격 차를 논하는 경우가 많다. 죽 현재의 후진국과 선전국 사이에 놓여 있는 과학과 기술상의 격차는 〈영원히〉 촌재하거나, 이 격차는 점 차로넓어진다는것이 통념이다. 따라서 후진국은이러한과학·기 술상의 후진성 때문에 선전국의 경제적 예속상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타는 논리를 종종 접하게 된다. 양 전영간의 이상과 같은 격차가 항구적인 것인가, 또는 그것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논의를 하기 전에 우선 우리논 이상 과 같은 격차가 생기게 된 메카니즘을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그것이 현재 후진국 발전의 장애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는 사실을 분석하여 보자. 우리가 앞에서도 보았듯이 산업화 초기의 기술수준이란 과학이타 고까지 할 수 없는, 극히 단순하고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다른 말 로 표현하여, 당시 과학은 경제변혁과 칙접 연관이 되지 않았든가 또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 산업혁명 초기의 수십년, 죽 공업 • 농업 생산의 기계화의 초기 단계에서 사용되던 기술은 과학의 힘을 빌지

않았거 나 거 의 관련이 없었다. 3~) 또한 P. Ba i roch 는 이상의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럿셀 B. Russel3 5) 의 산업화 초기 기술의 역할에 관한 언급을 인용하고 있 다. 〈 당시 사용되던 대부분의 기계는 과학적이라고 할 만한 아무런 요소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 기계는 인간이 몸으로, 더 정확히 말하여 손으로 하던 규칙적인 동작을 기계라고 불리는 물체로 대신 한 것 에 지 나지 않았다. 특히 직 조와 제 사의 경 우가 그러 하다. 36) 또 한 철도의 발명과 증기엔진을 이용한 기관선의 발명 역시 과학과는 칙접 관련이 없었다. 이상의 기계에서 인간은전혀 신비스럽다고할 수 없는 힘을 사용하였을 뿐이다. 그 효과가 놀랄 만한 사실이었다 떤, 그 자체는 놀랄 만한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

34) P. Bair o ch, Le tier s monde dans ['imp as se, p. 265. 35) B. Russel, L'espr i t scie n ti /iqu e, Pari s. 36) 유럽 초기 산업화 시대에 사용하던 칙조기는 1950 년대까지 한국 농촌에서 사용 하던 〈베 를 〉 정도의 기술수준을 지닌 기계에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초기 산업혁명단계에서 기술수준이 단순했던 만큼, 그 기술의 전 과도 용이하였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사용하는 칙조기를 프랑스에 서도 제조하기 위하여, 프랑스인이 영국에 가서 기계를그림으로그 려오면, 그것울 기초로 프랑스에서도 갇은 성능의 기계를제조할수 있었다· 또한 영국 이외의 대륙국가에서는 이 기계를 조작, 사용하 기 위한 특벌한 기술자를 양성할 필요도 없었다. 즉 영국에서 사용­ 되 던 최 초의 자동칙 조기 가 목수, 또는 이 발사인 아크라이 트 Ark- wr ig h t에 의하여 설계되었다면, 그의 제작은 당시의 장인이면 누구 타도 할 수 있는 간단한 원리의 것이었다. 철의 생산도 초기에는 火木을 사용하다가 그 수요의 증가에 따라 화목이 석탄으로 대체되면서 대량생산 체계로 들어갔지만, 이 과정 에서 과거의 대장간 주인은 새로운 생산양식에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데 필요했던 지식이 있 었다면 그것은 극히 단순한 〈 요령〉을 얻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결국 전통적인 know-how 와 新기술사이에는 그리 큰 차이가 없 었으며, 이러한 현실은 기술의 이전을 수월하게 하였고 기술자의

양성 또한 특별한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기 술수준의 단순성 , 이것은 영국에서 출발한 산업혁명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대륙으로 확산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이렇게 간단한 기술로 시작한 산업화는 보다 높은 생산성의 추구 에 따라 접전적으로 복잡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과학의 힘에 의존 하게 된다. 그런데 유럽의 19 세기에는, 비록 경제와는 직접 연관을 갖지 않았다 하더라도, 과학의 발전이 꾸준히 추전되었었고, 이러한 배경에서 과학의 경제에의 웅용이 비교적 용이하게 실현될 수 있 었다. 죽 19 세기에서 20 세기에 걸쳐 기술과 과학은 상호 연관성을 갖 기 시작하였고, 기술수준이 높아지고 기계가 복잡하여점에 따라 전 통적인 기술과의 단절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전기 및 내연기관 의 등장과 더불어 전통기술과의 단절이 본격화된다. 즉 20 세기 초에 제조된 생산재―기계류는 대장장이나 시계 수리공이 그들의 know-how 를 동원하여 만들 수 있는 그런 수준을 뒤어넘었고, 그리하여 이때의 기계는 전문 기술자에 의하여만 그 제작이 가능 하게 되는 수준으로 들어서게 된다. 이렇게 기술수준이 과학에 의 촌하여 어느 선을 뛰어넘으면서 그것은 더욱 복잡성을 떠었고 전자 및 핵산업으로 불리는 이른바 hig h -te c h 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I 후진국에 제기된 기술상의 문제 이렇게 현재의 선전국이 100 여년의 기간에 걸쳐 산업화를 추전 하는 과정에서 전통적 기술로 출발하여 첨단과학의 경제적 이용시 대로 접어들었다면, 특히 外勢의 영향으로 구조적 파행의 상대에서 경제적 〈도약〉울 도모하려는 현재의 후진국에게 제기된 문제는 다 음과 같다. 즉 현재의 후진국은 그 경제발전 수준에 적철한 기술 tec hnolog ie app ro p ri e e 을 채 택 , 19 세 기 에 유럽 이 추전하던 소규모 져, 전통적 소생산자형의 길을 택하면서 자급자족적 체제를 지향할 것인가? 또는 유럽이 19 세기에 추전하던 산업화의 방법을 모방할

것 인가 ? 37)

37) 한국을 비못한 이른바 아시아의 NICS 는 또 다론 방법을 보여주는 새로운 모델 로서, 뒤에서 따로 취급한다.

우선 후자에 대한 해답을 하여 보자. 그리고 이것은 현재의 후진 국이 자립적, 자생적 경제개발을 추전하는 데 칙면하는 장애요인에 관한 분석이기도 하다. 앞에서도 언급하였거니와 19 세기 유럽에서 新기술 제품으로 등 장한 농기구나 직조기 등은 당시의 농민이나 장인 등에게 있어서 그 리 복잡한 것이 아니었고, 이 新기계는 그들이 칙접 제작할수도있 는 수준의 기술혁신이었다. 실제로 산업혁명 초기 많은 제조업자 들은 제조기계를 전문업체로부터 주문생산하지 않고, 손수 제작 하여서 사용하였다. 죽 I9 세기 유럽의 농부에게 있어서 신도구는 전통적인 도구에 비하여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들이 칙 접 생산, 조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20 세기 중엽 후진국의 농 부에게 있어서 산형 트랙터나 수확·탈곡기 등은 그들의 전통적 도구와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는 전혀 새로운 것들이다. 전자의 경 우 전통 농기구와 개량된 신형 농기구 사이에 큰 기술적 격차가 없 다면, 현재의 후진국에서의 전통적 농기구와 신형 농기계 사이에는 농부의 know-how 가 뛰어넘을 수 없는 기술적 격차가 촌재한다. 즉 현대의 농기계는 전문 생산공장에서 특수 기술에 따라 제작되어 농부에게 공급된다. 19 세기의 주물업자나 대장장이는 〈요령〉만 있 으면 칙조기를 직접 만들 수도 있고 칙조기 몇 대를 모아놓고 공 장을 차릴 수도 있었으며, 또한 납이 차려놓은 공장에 가서 어렵지 않게 적응하여 공원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선전국에서는 기술의 접전적인 변천이 있었는데 비하여, 현대의 제삼제계는 ® 전통적인 생산방식과 기술수준의 한도에서 경제생활을 하든가 ® 선전국에서 1 백여년에 걸쳐 발전되어 지금은 과학과결합한 상당히 높은 수 준의 기술에 칙면, 이룰 소화·사용하여야 한다는제약에 처해 있 논 것이다. 구체적인 예로서 후진국의 촌락 장인이 그의 솜씨를 발 휘한다하더라도 현재 선전국에서 사용하는자동칙조기를만들기 어

렵다는 사실 그 자체가 기술상의 격차를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현 재의 후진국 장인의 〈 솜씨 〉 는 그런 대로 가치가 있고 쉽게 모방할 수 없는 기술이다. 문제는 선전국에서 생산구모의 확장으로 경쟁에 서 승리하기 위해 기술개발이 꾸준히 진행된 데 비하여 후진국에서 는 기술발전의 봉쇄 현상이 생겼다는 접이다. 요약하면 많은 후진국은 과거 의 높은 문화수준과 유럽 의 18, 19 제기 장인의 기술보다 훨씬 정교하고 숙련된 기능을 가졌음에도 불 구하고, 그것을 현대적 산업기술로 발전시키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전통기술 〉 과 선전국의 첨단기술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생기게 되었다. 사실상 선전국에서는 6~8 세대에 걸쳐, 그 들이 사용하던 도구 • 기계를 개량하였으며 19 세기말, 20 세기초에 는 이 개량작업에 과학의 힘까지 개입되면서 이른바 첨단산업기술 로 발전하게 된다. 2 대중교육의 필요성 이러한 변화는 현대적인 산업시설을 이용하는데 있어서 근로자의 최소한의 교육을 팔수조건으로 만들었다. 죽 20 세기의 후진국의 산 업화는 文盲되치와 최소한 초등교육의 의무화가 전제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접이다. 왜냐하면 현대의 생산과정은 근로자들의 최소한의 교육이 없이논 어렵거나 불가능한데, 그것은 앞서 분석한 기술수준 의 발전에 의하여 부과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은 유럽의 산 업화 초가와는 또 다론 계약이 된다. 죽 유럽에서는 기술이 접전적 으로 발전해 가면서 근로자가 변화에 적응하여 나갔기 때문에 문맹 자들도 당시의 새로운 산업에 어렵지 않게 적웅할 수 있었다. 구체 적인 예로 산업혁명이 전행되는 시기에 유럽의 文盲者의 비율은 상 당히 높으며, 우리논 산업화 초기의 유럽의 문맹자와 현재 후진국 의 문맹자 비율을 비교함으로서 지금까지의 논거에 확증울 얻을 수 있다. 죽 유럽이 그 〈도약〉을 준비하던 기간의 문맹자(成人)는 70~80%

〈표 22> 문 맹 물

국가 및 기준년도 I 문 ..,J 겸e 入i ;;,.J. 국 (tak e off 前 또는 그 기 간중) 영 국 1I884300 4424 젊 xz 랑 스 1686~1690 78% 1786~1790 63% 1816~1820 56% I832 53% 1840 47% 텔 7] 어] 1846 50% 1866 42% 독 일 1830 21% 1878 12% 이 태 리 1830 75% 1878 55% 러 .).1 o} I875 79% 1890 69% 후 츠J_ 국 멕 A] 코 1950 43% 온 두 라 스 1950 65% 굽} 이 티 1950 90% 우 루 과 이 I938 15% 퍼] 루 1940 57% 볼 리 비 아 1943 Bo% 필 리 핀 I948 39% 스 리 랑 카 1946 42% 터 '7] 1950 65% 인 도 1951 80% 콩 고 1951 63% 마 다 가 스 칼 1953 66% 이 츠J 트 1947 78% 英領소말리아 1951 99% 중 국 (1949 년이후) 47%

에 달하며 현재의 다수 후진국의 문맹자 비율도 거의 같은 수준이 거 나 그보다 약간 낮게 나타나 있다(표 22 참조). 그럼 에도 불구하고 유럽이 〈 도약 〉 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기술수준이 낮아서 문맹자라도 선산업 (당시의)에 종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 하여 현재 후진국의 문맹자가 현대적인 산업시설을 작동, 조작하는 데는 무리가 있거나 전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38) 좌우간 유럽에서 경제발전 수준보다 월등히 앞선 교육제도를 가 겼던 독일을 계의하고 유럽에서 문맹자가 40% 이하로 떨어지기까 지는 상당한 세월이 걷렀다 .3~ ) 1840 년대의 영국, 죽 산업혁명이 시 작된 지 80 여년이 지난 후에도 문맹자 비율은 42% 에 달하였다 .40)

38) 한국이 1960 년대 수 출 산업 개 발 (비 목 노동집 약형 이 지 만) 을 급속도로 추전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받은 양질의 유 휴 노동력이 다수 참재해 있었다는데 기인한다. 39) , 4沈0)相 P弼. •B 李ai承r o哲 c,h, 전La게 서re,v ol제u t4 io 장n in참d 조u.s tr i e l le et sous develop pem ent, p. 169. 4I) , 42) Sir E. Ashby , Educati on for an ag e of tec hnolog y, A his t o r y of tec hnolog y, vol. V., Oxfo r d, 1958.

우리는 이상의 사실로부터 교육수준과 경제발전의 관계는 현재의 후진국에서 혹은 긍정적으로(한국의 예) 혹은 부정적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 기술수준과 연관되어 생긴 현상 임을 알 수 있다. 즉 유럽 (독일을- 제외한)에서 산업화는 교육보다 앞 서서 일어났고, 대중의 교육화가 그 뒤를 이었다면 현재의 후진국 에서는 교육이 산업화의 전제조건이 되고 있다. 3 과학·기술교욱 이상과 같은 논리에 따라 서구에서의 과학, 기술교육은그산업화 초기 에 는 극히 제 한되 었 었 다. 이 접 에 관하여 P. Bair o ch 는 Ashby 4 0 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죽 영국에서 기술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한 시기는 1851~67 년경이며 <1 851년 , 영국의 기술 전문학원은 영국의 데크놀로지 발전에 기여한 바가 거의 없다. 대 학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42) 여기에서 1851 년을 참고 年

度로 상은 것은 이 해에 런던에서 만국박람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 국이 과학 • 기 술교육의 필요성 을 철실히 느낀 것 은 I870 년에 파리 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영국의 경제적, 기술적 우월성이 도전을 받는 순간부터 이 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문기술자의 등장은 I880 년대 이후였고 그로 부터 과학과 기술은 아마추어의 손을 떠나게 되었다. 영국에서 전 문가가 등장하였다면 그것은 산업의 수요에 의한다기보다는 오히 려 접점 복잡하여지는 과학발전의 산물이었다. 산업이 이 전문가 의 가치를 발견한 시기는 20 세기를 넘기면서부터이다. 오늘날 발 명가는 건문가에 의하여 대체되었으며 거의 모든 산업에서 그들은 수공업자를 밀어냈다 .43) 현재의 후진국이 경제도약을 하려면 많은 전문가와 기술자가 필요하다. 현대산업은 이러한 전문가에 의하여 서만 관리 • 운영될 수 있으며, 그것은 과거 유럽에서 소수의 기업 인이 경험과 타고난 재능을 동원하여 기업을 운영하던 시대와는 다 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전문기술자의 육성에는 장기간의 교육과 수련이 필요하다.

43) E. Ashby , 전게 서 , P. Bair o ch 에 서 재 인용.

4 후진국에서 시설재산업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 우리는 앞에서 시설재(예를 들어 농기구나 칙조기)가 상류 • 하류에 위치한 타산업의 발전을 유발시키는 메카니즘을 분석하였다. F. 뻬 루 Fran<;ois Perroux44) 와 드 베 르니 G. Desta n ne de Bernis 4 5' 등은 후 전국의 공업화전략의 모델에서 〈공업을 유발시키는 공업〉을 필수조 건으로 상고 있 다. 1950 년 이 래 , 남미 에 서 도 CEPAL(Commi ss io n Economi qu e po ur !'Ameriq u e lati ne ) 의 제 의 에 따라 2 차 및 3 차 5 개 년 개발계획에서 이 〈공업을 유발시키는 공업〉의 건설이 중십 전략

44) F. Perroux, L'economi e du XX sie c le, Les ind ustr i e s rno t r i ces,” 와 Les eff et s d'entr a 'in e ment, P.U.F., 1965. 45) mG.e nDte, s t aR n enveu ed eD Beve. meit s , C ivL .' ,i nP d aursi tsr, i a1l9 i 6sa4, t i on des pa y s en voie de develop pe-

으로 채택되었다. 뿐만 아니라 2 차대전 이후 거의 모든 신생국(목 히 인도)은 중공업 건설을 개발전략의 요체로 삼고 그의 성공이 곧 경제의 선전화를 가쳐다주는 것으로 인식하였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소련이 중공업중십의 경제개발 계획에서 초기의 높은 성장 물울 기록한 데 자극을 받은 결과이가도 하다. 좌우간 〈 공업을 유발시키는 공업 〉 , 즉 중공업 또는 시설재 산업 은 그것이 가쳐오는 연관효과 및 국내산업간의 연계, 나아가서 군 형있는 분업관계를 형성시킨다는 인식 아래 자립적 • 자생적 국민경 제 건설의 定石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해결의 관건이 될 수 있는 시설재 산업이 후 전국에서 형성되지 못하는 이유는, 현재의 후진국에 인적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즉 앞에서 보았듯이 현재의 시실재는 상당히 세련된 과학과 기술교육이 없이는 제조가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하 며, 많은 후진국의 교육수준은 1840 년대 문맹자의 비율이 높던 유 럽의 수준과 비슷하거나그보다는 약간 높을 뿐이기 때문이다. 바꾸 어 말하여 현재의 많은 후진국이 도약단계에 전입하지 못하는 이유 는 유럽 산업 화 초기 와 같은 교육수준을 가전 상황에 도 불구하고 기 술과 과학이 월등한 수준으로 복잡하여졌기 때문이다. 죽 전통 기 술과 20 세기 중반의 기술 사이에는 대단한 격차가 있으며, 이 격차 를 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반적인 교육수준의 향상과 특수 기술, 과학교육의 창달에 의하여만 가능하다. 결론지어, 서구에서는 경제발전이 일반교육과 기술교육을 선행하였다면 후진국에서는 이 상의 교육이 선행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구와 경제성장의 관계와도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다. '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대부분의 후진국은 기계류 등 생산재 산업 의 건설을 포기한다. 그것은 전통기술이나 국내적 여건(자원, 인력) 에 비추어 볼 때, 그 모방이나 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국가에서는 중공업 건설을 통한 경제성장을 시도했으나 대부 분의 경우 그것은 경제에 누적적 효과와 연계효과를 가져다 주지 못한 가운데 正劃內의 고립적인 초현대 산업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

았다(인도). 또한 이 시설재 산업의 건설을 불가능하게 하는 직접적 인 이유로서, 이 산업은 상당한 기술수준의 선행조건 이의에도, 그것이 수익성을 유지하려면 대규모의 생산체제를 전제조건으로 · 한 다 . 그런데 대부분의 후진국은 제한된 자원과 협소한 국내시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독자적인 현대적 시설재산업은 사실상 불 가능하다. 1) 시설재 산업의 수입―一선전국과의 예속관계 이상과 같아 시설재를 자체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후진국이 산 업화를 추전하기 위하여는 필요한 기계류를 수입하는 것 이의의 다 론 해결책이 없다. 또한 산업화가 전전되면 될수록 시설재의 수입

〈 표 23> 자본형성 (기계와 운송자재)과 시설재 수입의 비교

국 가 연 도 1기;R 자 ?재(일A 강 )I 시실( B재 수)입 I B/A 아 르 헨 티 나 1956~1960 240,600 II7, 000 48% 버 마 1956~1960 I, 9IO I, IJO 59% 스 리 랑 카 I956~I960 900 1, 250 138% 싸 이 프 러 스 1956~1960 40 42 105% 어] 쿠 아 도 르 1956~1960 3,8 50 2,560 66% 그 리 .,,_al 1956~1960 34, 120 27, 62ob> 8l% 온 두 라 스 1956~1958 IOI 90 89% 한 국 I956~I960 260 66 25% 말 r I956~1960 18. 9 17.6 93% 나 이 제 리 아 1954~1957 I20 Il2 93% 필 己l 고J 1956~1960 2, 190 1, 4oob> 64% 포 르 루 갇 I956~I960 I7, l40 16, 810 98% 로니 ] ; 아랜 드• 1956~1960 302 282bl 93% 트리 다드-토바고 I956~I959 297 271 91% 베 네 쥬 엘 라 1959~1960 4,000 3, 07ob> 77% 자료 : 국제연합기구 (U . N.), 1955, 1959, 1960, 1962. 주 : a) 백만 (자국통화) b) C.I. F . 가격

〈표 24> 한국의 자본형성과 자본재 수입의 비교(운송기재 재외)

연 도 | 1973 |」 975 | 1977 TI9 78 | I97911980 「 198(1단 위I : 1백9만8달2l러 ,1 98%3 ) 수생 산입 ((BA))1/98 7715-. 59/ 1I779676.. 80/ 26734I 4I.. 7I/ 47770949/ 95594245.. 95! 48514939.. 64/ 150347641.. 62 /152343509.. 22l r56443527.. 38 비 율 ·(B/A)l110 .9l ro1.7/ 42.7/ 60.4/ 62.11 55-41 51.41 42.91 41.8 (B/A+B) I 52. 61 50. 41 29. 91 37. 71 38. 31 35. 71 33. 91 30. ol 29. 5 자료 : 경제기획원, Ii'광공업 동계조사보고서』 (1982) 를 기초로 계 산.

비중은 그만큼 높아진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신흥공업국이라고 불 리논, 죽 공업화가 상당히 전행되었다고 하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서도 볼 수 있다. 후진국의 시실재 수입과 對 선전국 예속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노 력으로서 P. Ba i roch 는 앞 페이지의 표 23 를 작성하고 있다. 그 런데 우리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산업화를 최초로 진행했던 영국으 로부터 프랑스가 수입한 시설재는 거의 무시할 정도였다. 즉 프랑 스의 초기 도약단계 수십 년에 걸쳐 총두자에 대한시설재 수입의 비 울은 I.5% 를 넘지 않고 있으며, 이러한 비율은프랑스보다늦게 산 업화를 추전한 미국, 일본 등지에서도 거의 비슷한 수준을 보여 주 고 있다. 다시 말하여 현재의 선전국은 모두가 시실재를 자체 생산 하고 . 있었다. 그에 비하여 현재의 후진국에서는 수입 시설재(운송시설 포함)가 총두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대단히 높다(표 자 참조). 후진국 가운 데 가장 낮은 비율올 보여 주는 나라는 아르헨티나 (48% )이며, 스리 랑카나 싸이프러스같은 나라는 총두자에 비하여 100% 가 넘은 시설 재수입물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의 표에 의하면 후진국에서 시실재 의 총수요 가운데 수입제품이 차지하는 비율은 평군치로 볼 때 약 90~l00% 에 달한다. 다시 말하여 후진국은 그들의 공업 화를 수입 시설재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한국의 경우는 뒤에서 별도로 취 급한다).

따라서 이 시설재를 직접 생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상류·하류 산업의 발달 및 그 파급효과는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후진국은 기술적으로 선전국에 예속되며, 그로 인하여 선 • 후진국간의 기술격차는 접접 벌어지게 된다. 2) 전통기술 및 중소기업의 되조와 몰락 유럽의 현대적 산업기술로 생산한 제품이 후진국에 유입되기 전 까지 후진국은 부족한 대 로 그들의 전통기 술을 사용하여 일상용품 여물 및 기타)을 생산하였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칙접 펴해를 입은 인도의 경우만 하더라도 18 제기와 19 세기까지, 이 나타의 기 술수준은 영 국의 그것 보다 훨씬 높았고 중국의 경 우는 그보다 더 앞 섰거나 동일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유럽의 상품은 후진국의 전동적 인 가내공업을 거의 훼손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죽 중상주의의 기치 아래 선전유럽제국의 공업제품이 후진국으로 전출하고, 후진국에서는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으므로 그 결과가 전통적 산업의 파괴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서 선전국과후 전국 사이의 발전과정의 커다란 차이정 이 부각된다. 유럽의 산업화 과정은 농업의 잉여생산물아 축적됨으로써 시작되었고, 공업부문은 농업부문의 유휴노동력을 효과적으로 흡수할수 있었다는특칭을갖 논다. 그러나 후진국에서는 유럽제국의 공업제품이 수입됨으로써 전 통부문이 파괴되었으나, 거기에서 발생한 유휴노동력을 자체적으로 흡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촌의 생산체계가 와해될 수밖에 없었 다. 특히 농업부문에서 축적된 잉여농산물과는별도로, 자체내의 필 요에 따라 생성되었던 중소규모의 가내공업과 그에 사용되는 전통 적 기술은 일시에 유입된 유럽산공산품으로 인해 설 자리를 잃었기 때문에급속한 되조를 면치 못하였다. 후진국에서 나타난 기촌 생산체계의 와해현상과 경제 • 사회적 조 칙의 재편은 궁극적으로 후진국을 과행적이고 대의의존적인 산업화 과정으로 몰아넣을 만큼 철대적인 것이었다 .46)

46) S. Ami n, L'accumulati on a l'echelle mondia l e, 1970, pp. 260~265.

이상에서 보았듯이 현재의 후진국은 공업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중적인 장애에 부딪치고있다. 그첫째는, 자체의 능력으로시섣 재 산업을 건설하기에는 벅찬 기술의 전보가급속히 이루어졌고, 따 라서 기술상의 핸디 7십 이 메울 수 없을 정도로 격차가 벌어져서 연관 효과가 높은 이 산업의 건설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데 산업조칙은 이 시실재 산업을 기초로 짜여진다고 할 때, 후진국 은 그 공업구조의 형성에서 시초부터 취약점을 안고 출발한다는 사 실이다. 두번째는, 이상과같은상황에서 장인중심의 전통적 수공업 온 그것이 기반이 되어 보다 발전된 기술혁신을 일으킬 수 없는 가 운데, 오히려 유럽상품과의 경쟁에서 무참히 사라지게 됐다는 접 이다. 그로부터 후진국의 공업화는 파행적으로 진행되든가 또는 과 란상태에 머물고, 대부분의 경우 기술과 자본재의 對 선전국 예속 상태로 들어가면서 미래의 발전의 기회를 상실하고 있다.

제 6 절 운송비의 격감이 후진국의 자본재 산업전설에 장애요인 으로 작용하는 메카니즘 P. Bair o ch 는 기 술의 발달과 그에 따른 운송비 의 격 감은 후진국 의 발전에 오히려 장애요인으로 등장했다는 홍미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제 그 내용을 소개하여 본다 .47)

47) P. Bair o ch, La revoluti on ind ustr i e l le et sous develop pe ment, chap itre 13,

여기에서 특히 그부정적 효과를발휘한것은선·후진국간의 교 역로에 사용된 해운운송비에 관한것이다. 후진국의 국내 수송시설 온 그 식민시대에 건설되면서 대단히 부족한 상태에서 운영되어 왔 다. Bair o ch 의 조사에 따르면 2 차대 전 前, 몇 몇 후진국가의 철도길 이는 다음과 같다. 알제리 5,oookm, 뒤니지와 모로코 약 2,000km, 인도 70,200km, 불령인도차이나 2,400km. 식민체제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오래 전에 획득한 나라의 경우도이 접에서는예의가 아니다. 브라질 36, 000 km, 멕 시 코 29, ooo km, 이 집 트 5, 400 km. 아프리카 대륙은 말할 나위도 없이 현재 후진국의 국내수송시설, 그중에 서 득히 철도망의 경 우는 유럽 의 1850~60 년대 수준에 머 물 고있다.

I 운송비용 격감의 규모 운송비의 격감이 후진국 발전에 미찬 부정적인 효과를 다루기 전 에 우선 그 격감 폭을 엿보기로 한다. 1) 海運의 경우 18 세기말까지만 하여도 해운은 안전한 운송방법은 되지 못하였 다. 해적이 출몰한다든가 또는 풍랑을 만나면 선박은 침문할 수 있 었다. 따라서 운송비는 대단히 다양하였고, 당시의 운임을 측정할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그러나 18 세기 후반기부터 운임과 보 험료가 하락한듯하다. 해운비용의 절감을축정할수 있는자료가보 유된(기록된) 것은 1820 년경부터인데, 1820 년과 50 년 사이 운송비 가 상당폭으로 하락한 것으로 나타난다. 예를들어 New York 에서 Liv e rpo ol 까지 원면의 파운드당 운송비 는 1820~24 년의 I. I 펜스 에서 1820~24 년에는 0.7 펜스로, 1840~44 년에는 ’ 0.4 펜스, 1850 ~54 년에는 0.2 펜스로 떨어지고 있다. 또 다른 예는 Anvers 에 서 출발, 뉴욕행 범선의 화물 운송비는 본당 78 프랑 (I822 년)에서 톤당 22 프랑 (1850 년)으로 하락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예는 독 일 등 유럽 전역과 남미 등 他대륙간의 운송에서도 일반적으로 볼 수있다. 이러한 운송비 격감의 예는 뉴욕과 리버풀간 운임의 변천이 구 체적으로 보여준다. 한 자료에 의하면 1820 년과 1910 년 사이 이 구간의 해운입은 약 7 분의 1 로 줄어들고 있다. 1910 년경부터 이 러한 추세는 약간 둔화되고 있다. 또한 항로에 따라 가격변화도 다 르게 나타난다. 2) 육로의 경우 육로의 경우 운하를 이용하지 않을 때, 밀의 운반비는 그것이 400~500 km 에 달할 때 밀값과 거의 같은 수준이 었다. 그러 던 것 이

철도의 등장과 더 불어 운반비 는 1860 년경 부터 6 분의 I 로 떨어 졌 고 1900 년부터는 미국의 서부에서 동부(약 5,oookm) 까지의 밀 운 송비는 밀값의 3 분의 I 에 해당하는 것으로 계산된다. 요약하여 1800 년과 1900 년 사이 육로(철도 및 자동차)를 통한 운반비는 전체적 으로 보아 약 20 분의 I 로 격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과 같은 운송수단, 시설의 발전과 그 비용 하락이 후진국의 산 업화에 미찬 영향은 다음과 같다. ® 우1 형 부담과 가격이 높은 운송수단과 비용은 한 나라가 산업화 를 추전하는 데 있어서 그 유치산업에 대한 자연적인 보호장벽의 역 할을 하였다. 즉 각국은 어려운 운송수단의 관계로 인하여 독자적 인 산업화를 추전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각국은 기계류, 생산도구 등을 독자적으로 제조 • 생산하였고, 그것이 국내 경제에 상호작용하면서 초기의 추전력에박차를가하게하는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사실의 구체적인 예로서 일본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죽 일본은 산업혁명의 요람 인 유럽으로부터 지리적으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고, 당시의 운 송수단과 비용으로 볼 때, 유럽으로부터 기계를 도입할 수가 없었 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사람을 유럽으로 보내서, 그곳에서 기술 울 습득시키고, 이 지식을 토대로 자국에서 독자적인 산업화를 추 전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과같은자연적인 보호장벽이 무너침에 따라 그리고세 계가 여러 면에서, 특히 통신 • 운수수단과 정보교환에서 I 일권으로 바뀜에 따라, 기업은 국내의 제약된 인력 및 기술·자본의 어려움과 초과비용을 감수하면서 자본재를 생산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안전하고 편리 한 운송방법 과 처 령 한 운송비 용 그리 고 know-how 까지 제공되는 생산시설을 수입하여 그를 이용한 소비재 생산이 휠 씬 간단하고 수익성이 있으며 물가동향에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재 이러한 상황에서 인위적인 관세장벽을 통한 자본재 수입의 여제정

책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 논리적 근거름 상실하고 있다. 후진국 의 기술적 후진성과 그로 인한 장애 때문에 시설재 산업을 건설하기 보다는 선전국으로부터 기술과 자본재를 도입하는 것이 오히려 합 리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주장 때문이다. 어느 면에서 볼 때 이러 한 논거는 일리가 없지 않다. 죽 후진국은 선전국이 그 기술을 개 발하기 위하여 두입한 비용과 노력을 값싸게 사오는 것이 유리하 며 (A. Pi at i er ), 이미 선전국이 걸어온 길을 반복할 이유가 없는 것 이다. 그로부터 후진국은 다음과 같은 〈 악순환 〉 에 빠지 게 된다. 그것 은 기술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산재를 수입할 수밖에 없고, 이렇 게 생산재를 수입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기술능력을 발전시켜야 한 다는 자극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문 기술자 또는 고급 엔지 니어의 양성온 그만큼 장애를 받고, 우수한 인력은 행정이나 관리 칙으로 집중되는 결과를 야기시킨다. 여기에 W. Ros t ow 를 당혹시킨 의문에 대한 해답이 있다. 로스토 우는 自問하기를, 유럽 ( 특 히 영국)에서 칙물공업의 발흥은 전반적인 경제성장을 일으킨 데 비하여, 상당한 수준까지 발전했던 후진국(인 도, 멕시코)의 칙물공업은 같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이유가 무엇 인가 하였던 것이다 .48) 그런데 이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죽 이 나라의 칙물공장은 모두가 수입된 직물기로 시설되어 있기 때문에 칙조업의 기계화가 야기시키는 간접효과중의 하나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48) W. Rosto w , The pro cess of Economi c gr owt h, Oxfo r d, 1960, p. 300.

〈 反공산당 선언 〉 의 작가로부터 〈 공산당 선언 〉 의 주인공으로 옮겨 보자. 칼 마르크스는 1853 년 다음과 같이 서 술하고 있 다. 〈 영 국의 자본가들이 인도에 철도를 건설하는 아량을 베푼 것은 그들이 원 자재를 수거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접을 나는 찰 알고 있 다. 그러 나 철과 석 탄광을 보유하는 이 나라에 교동동신수단 기 계 가 한번 도입되면, 이 나라는 기계를 자체생산하고 말 것이다. 이 렇게 지리적으로 거대한 나라에서 철도가 운영되려면 그에 따른 필

요한 모든 종류의 공업생산이 뒤따르게 마련이고, 그로부터 철도와 는 직접 관련이 없는 他분야의 공업에서 사용되는 기계생산이 야기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인도의 철도건설온 실제로 현대적인 공업의 모 태가 될 것이다. 〉 49)

49) K. Marx, 1853 년 8 월 8 일의 New York Dail y Trib u ne 의 기 고문, Lebret, Dy n ami qu e concret dtt developp e ment, Paris , 1961 에 서 재 인용.

마르크스의 오류는 운송비의 격감을 과소평가한 데에 있다. 왜냐 하면 철도운영이 일으키는 파급효과를 論 하기 전에 그는 다음과 같 은 사실에 주목하여야만 했다. 죽 인도의 철도전설은 대륙의 접근 지점으로부터 내륙으로뻗어나가며, 철도건설은이렇게 시작된 기접 울 중십으로 연장된다는 접과 50) 후진국에서 철도건설이 1850 년경에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건설은해운운송비가 격감된 1880~1910 년 에 진행되었고, 따라서 일단 철도가 전설된 후 이에 소요되는 연 료나 부속품 등은 현지에서 생산될 필요가 없이 값싼 해운을 이용 하여 간단히 수입될 수 있었다는 접이다• 이상이 후진국에서의 철 도 건설과 문명이 산업과 경제전반에 파급효과를 일으키지 못한 주 요 원인이다 .5 1)

50) 유럽에서는 수도 를 중십 거점으로 철도망이 거미줄처럼 건설, 연장되어 갔으나 51) P후. 진B국ai에r o c서h는, L항a 구re 를vo l기,u t정 i o으n 로in d 철us로tr가 i e l 전le선 e되t 었so다us. develop pe ment, p, 181.

현재의 후진국은 시설재를 칙접 생산하기보다는 수입하는 편이 단기적 비용면에서는 유리하며, 항공의 발달은 수입에 소요되는 기 간을 단축시 켜 준다. 따라서 필요한 부품을 짧은 시 간내 에 공급받 을 수 있기 때문에 시설재의 수입에 따른 부수적인 문제논 제기되 지 않는다• 2 운송비 절감과 소비재 편리한 운송수단과 그 비용의 철갑은 후진국의 소비재산업에도영 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후진국은 여러가지 정책수단을 통 하여 소비재의 수입을 여제할 수도 있다. 사실상 한국 같은 나라는

그 목적이야 어쨌든간에 국산품의 애용을 애국심에 호소하면서 철 저 한 수입규제를 통 하여 국내산업을 보호하였다. 그것은 한국의 산업 구조가 자원생산국과 다르고 소비재 수입에 필요한 외화를 충분히 보유하지 못한 이유에 기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후진국에서는―一즉 남미와 아프리카둥지에서는―― 식민세력에 의한 산업구조의 왜곡에 의하여 생 활 필수 품 및 석량을 수입, 소비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조성되어 왔 다 . 이들 나라에서는 일찍이 유럽으로부터 양질의 처령한 소비재를 다량 수입함으로써 현지의 수공업 -특히 높은 기 술수준을 요구하지 도 않으며 또한 전 통적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던 칙물공업과 같은-이 몰락 하였고 반면에 수출작물과 채광산업에의 특 화가 십화되면서 불균형 경제구조를 갖게 되었으며, 따라서 소비재수입은 일상생활에 필수 불가결하게 되었다. 3 수출작물 생산 및 그 특화 이미 앞에서도 보았거니와, 한국 등 소수의 국가를 제의한 대부 분의 후진국은 열대 내지 아열대지역에 우1 치하며 따라서 이 지역 에서는 온대지역에서 재배되지 않는 사탕수수, 코코아, 고무, 커 피, 원면 등이 유리한 자연조건에 따라 풍부히 생산될 수 있다. 이 열대작물은 산업혁명 이전에는 유럽에서 극히 귀한 사치성 소 바재였었다. 그것은· 운송비가 격감되기 전까지 이 작물의 수입이 제 한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1850 년경 영국의 연간 홍차 소비량은 약 25, 000 톤에 볼과했으며 , 그것 이 1960 년에 는 IO 배 로 중가한 250, 000 톤이 된다. 열대작물이 유럽에 대량 수입되면서 고급재에서 일상 소비재로 되는데는 운송비의 격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로 부터 유럽 은 후진국의 특작물 특화를 강화시 키 고, 후진국은 필요한 일상용품과 식량을 선전국으로부터 수입하는 경제구조를 갖게 되 었다. 또한 후진국에서는 가장 비옥한 토지가 대부분 특작물 재배 에 사용되었고, 인력도 이 분야에 종사하게 됨에 따라 식량생산농

업은 수익성이 낮은 한게토지에서 경작되게 되어 결국 식량을 수입 하는 방향으로 압력을 받게 되었다. 선전국에서 이상의 열대작물이 사치성 고급재에서 일상소비재로 격하되는 데는 18 세기, 19 세기 산업화에 따른 전반적인 소득의 증 가도 그 한 이유가 된다. 죽 커피 ·코코아 둥이 과거에는 특수계층 의 전유물이었다면, 현재에는 대중 소비품이 된 것이다. 구체적으 로 프랑스의 코코아 수입은 1831 년의 631 톤에서 1960 년에는 5,700 톤으로 증가한다. 커피의 세계 생산량은 1840 년경의 IO 만톤에서 1880 년경에는 50 만본, 1906~1910 년경에는 II7 만톤으로 증가한 다. 세계 고무생산도 1850 년경 I,400 톤에서 1890 년경에는 27,000 돈으로, 그리 고 1930 년경 에 는 886, ooo 톤으로 증가한다. 52)

52) Ann11air e sta ti~tiqu e de Ia France, vol. 57, P. Bair o ch, 전게 서 재 인용.

이러한 추세는 2 차대전이 끝난 후 더욱 강화되는데, 그것은 표 25 와 같다.

〈표 25> 세계 생산•>

(1000 론, 연평 균) 작 묻 I I934~I938 I 1958~1960 I 증 가 울 다0 코0 9,000 13,500 + 50% 목화씨 (미국 제의) 6,700 14,500 +rr6% 팜유 460 1,170 +154% 코코아 690 980 + 42% 커피 2,420 4,020 + 66% 홍차 463 742 + 60% 담배 (미국 제의) 2, 120 2,760 + 30% 목화(미국 제의) 3,200 7,700 +I4% 천연고무 97ob> 2,020 +108% a) 소련 제의 b) 1935~1938 자료 : I934~I938 ; 『 U.N. 통계 연갑』 1955, U.N., New York, 1956, pp. 88~III. 1958~1960 ; 『 U.N . 동계 연갑』 1960, New York, 1962, pp. 92~I I7.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수출작물재배는 상대적으로 식량생산농업을 위축시키고 식량수입을 증가시칸다. 현재의 후진국은 대부분 그들 의 식 량소비 를 선전국에 의 촌한다. 53) 이 제 후진국의 식 량예 속관계 를 보여주는 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표 26).

53) 현재의 선진공업국은 또한 농업부국이기도 하다(미국, 캐나다, 프랑스 등;표 26 참조).

〈표 자〉 식료품의 소비지출과 수입의 비교

국 7l- I 연 도 』 출장료 품(가A소)격 의바 (I 식단 위료 품:( B1수00) 입 만 I현추:지 〕 자의동(C 가화 ) 치• 경I 상 C가/격A) 스 리 랑 카 1957~1960 9,300 2,940 5,300 57% 에쿠아도르 I957~I960 16,450 47° 850 5% 그 리 스 1956~1959 . 9I, I8o 10, 770 19,39o 21% 온 두 라 스 1956~1958 707 42 75 II% 자 메 이 카 I957~I96o 24I 54 IOO 42% 한 국 (10 여) 1958~1960 2,294 65 120 5% 말 E 1957~1960 512 40 70 14% 나이제리아 1954~1957 2, 150 81 150 7% 과 나 마 1957~1960 483 55 100 2I% 펴] 루 I956~1959 39,270 4,300 7,740 20% 로니데아지살아렌드· 1957~1960 534 69 130 24% 트-리 토-니 U? r고 1956~1959 640 240 43° 67% 자료 : 『국민회계연감』 1961, U.N., New York, 1962 와 Yearbook of int e r nati on al tra de sta t isti cs 1955, 1959 et 1960, U.N ., New York. ※ 한국은 온대지방에 위치하며 독작물 재배 수출국이 아니다. 여기의 수 입은 국내 생산양곡이 소비와의 차이를 보충하기 위한 수입이다.

이상의 표에서, 식량소비기준 가격과 수입가격 (CIF) 에논 하역비 와 유통비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즉 이것은 도매시장가격과 같기 때문에, (C) 에서는 이 수입가격에 80% 를 가산하며 소비자가격을 환산하고 있다.

이제 후진국의 농업이 겪어온 구조적 변천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대부분의 후진국의 농업은 원주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식민제 력이 본국주민을 위하여 조직적으로, 파행적으로 조성된 경제이다. 이 농업에서는 원주민의 노동력을 거의 무상이거나 선전국의 같은 생산성을 가전 노동력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대단히 낮은 보수를 지 불하고 고용하면서 많은 이윤을 거둬둘이는데 이 이윤은 대부분 식 민본국으로 송출되며, 현지에 재두자되지 않는다. ® 이윤이 석민본국으로 송출될 분더러 석민 경작자와 현지의 〈엘 리트 〉 둘은 그들의 소비제품을 수입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그들의 소 비생활은 현지의 공업발전과는 전체 관련을 갖지 못한다. 이들의 수 입제품 사용은 운송비의 철감으로 인하여 더욱 조장되었고 그것은 식민동치하에 있던 모든 나타에서의 소비재 수입을 확대하도록 하 였다. 여기에서 또한 주목하여야 할 사실로서, 후진국의 특작물 재배에 사용된 농기구 역시 모두 수입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가 앞 에서 지적했듯이 선전국의 I9 세기 산업혁명은 농촌의 농기구 수요 에서 시발점을 갖는다는 논거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농기구 수입 은 후진국의 공업화를 위한 〈 도약 〉 을 일으키지 못한 원인으로 충분 히 간주될 수 있다. ® 수출용 특작물재배에 사용된 현대적 장비와 방법은 전통적인 식량생산농업에 도입되거나 모방되지 못하였다. 즉 경작의 성격이 다론만큼 전자에서 사용된 기술이 후자에 이전되지 못하였다. 그로 부터 이른바 〈 경제의 이중구조 〉 가 인위적으로 형성되었다. ® 후진국의 임금구조는, 전동농업부문의 처생산성과 처임금으로 인하여 전반적으로 낮게 되면서 불균형상태를 유지하였고 총수요는 처수준에 머물게 되었다. 따라서, 공업제품의 시장은 대단히 협소 하였으며, 그것이 공업발전을 자극시키지 못한 원인이 된다. 이러 한 현상은 유럽의 산업혀명 초기에, 부유한 농촌에서 창출된 공업 제품의 수요증가가 있었다는 것과는 다르다.

® 후진국에서 목작물 재배수출로 생긴 소득은 현지 근로자들로 하여금 국산품 소비보다는 수입된 식량과 수입된 공산품을 선택하 도록 함으로서 국내산업은 발전의 계기를 얻지 못하였다 . 뒤몽은 Ruanda 의 예 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 다. 뤼 안다의 고지 N. Gozi 에서 커피를재배, 수출하며 2 여 프랑(벨기에 프랑)의 소득을 올렸는 데 그중 1 여 2 천만 프랑은 우즘브라 Uzumbra 의 유럽 인 맥 주공장 에서 맥주를 사는 데 사용되었다. 54)

54) R. Dumont, Accelerer le develop pe ment ag r ic o le afr ica in , P. Bair o ch, 전게 서에서 재인용.

결국 후진국의 특작물 재배는 그 나라 경제에 부정적인 효과를 미 쳤고, 경제를 선전공업국에 예속시켜 놓는 결과를 가져 왔다.

제 7 절 후진국의 채광산업아 현지의 加工産業울 일으키지 못한 메카니즘 유럽에서 증기기관이 운송수단(기차, 선박)에 이용되지 못하던 시 기에는 채광된 원광의 원거리 수송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것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운송비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광의 가 공산업은 광산으로부터 수백 km 이내에서만 설립될 수밖에 없었 고, 그것도 운하가 있을 때에만 그 수익성이 보장되었다. 유럽의 공 업지대는 대부분광산주변(독일의 루르, 프랑스의 복동부)에 집중되면 서 이 른바 〈발전 핵 pol e de develo pp emen t〉을 형 성 하고 있 다. 그러나 운송비의 절감에 따라 이상과 감은 구조에도 변화가 생겼 다. 죽 선전국은 세계 어느곳에서나 필요한광물자원을개발, 본국 으로 수송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타 선전국 내부에서, 종 래의 광산지역 주변에 형성된 가공산업 지역은 국내 어디에서든지 가능하게 되었다. 과거의 산업단지조성에 있어서 운송비가 고려되 었다면, 현재는 지역의 균형발전과 고용효과가 더욱 큰 결정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55)

55) 沈相弼, 「프랑스의 국토균형발전정책」, 한국 국토개발원.

물론이상과같은경향은 2 차대전 이후 심화되는데 예를들어 프랑 스의 제철업은 1952 년과 60 년 사이에 해의로부터 原鑛수입을 300% 나 증가시키고 있다. 이 나라는 아프리카의 챠드 또는 남미의 브라 질에서도 원광을 수입한다. 다음 표에 서 는 1948 년과 60 년 사이 후진국의 광물생 산증가를 보 여주고 있다. 이 표에 의하면 그 중가율은 같은 기간중 150% 나 되 는데, 결국 유럽과 미국으로의 광물수출은 후진국의 처령한 인전비 와 질감된 수송비에 의하여 본격추전된 것이다. 그 한 예로 미국의 원광수입 현황을 보면 1960 년 망가네 스는 98 만돈, 동은 34 만톤, 납 은 12 만 5 천톤, 아연은 41 만 6 천돈, 알루미늄원광은 974 만돈 등이 다. 원광생산이 급증한 예는 득히 철광의 경우인데, 후진국의 철광 생산은 1948 년 8 백만톤(중국, 북한 제의)으로서 세계생산의 7.7% 이던 것이 1960 년에는 무려 午만 5 백만돈으로서 세계생산의 약 20% 를 점 유하게 된다. 그런데 1960 년 후진국의 강철생 산은 세 계 생 산 의 3% 에 볼과하였다. 이 원광은 가격이 처령하기 때문에 이의 수 출입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운송비이다. 죽, 대규모의 저령한 운송수단이 사용되면서 이의 원거리 수출입이 급격히 늘어난 것이

〈표 27> 후진국의 광석 생 산

(단위 : I, ooot, 텅 스텐 : t) I I948 I 1960 I I948~I960 망 가 네 스 910 2,280 +150% 철 7,980 45,020 +4 야% 銅 980 I, 840 + 88% 납 39o 660 + 69% 아 연 35° 730 +109% 보크사이트 4, 150 15,940 +284% 주 석 140 130 - 7% 크 롬 I8o 1,290 +617% 팅 스 텐 5,400 6,500 + 20% 자료 : 『 U.N. 통계 연갑』 1961, New York, 1962, pp. 140~150.

다. 그리고 이러한 추이는 계속 강화되었다. 후진국의 광물수출은, 그것이 의화의 수입원이 된다는 점도 있으 나 국민경제 특히 현지의 시실재 산업과 소비재 수요에 미치는 영 향은앞에서 본특수농작물과같이 별로긍정적인효과를가져다주 지 못한다. 즉 이 광물수 출 은 현지의 가공산업을 유발시키지도 못 하고 따라서 산업화에 칙접적인 기여를 못하거나 부분적 결과만을 가져을 뿐이다. 광물수출은 열대작물처럼 선전국을 위한 것이며, 이 것이 선전국에 의하여 개발, 관리될 때에는처축의 유출이 일어난다. 목 작물과 같이 이 광산의 개발에 사용되는 장비와, 여기에 종사 하는 의국인 기술자들의 생활필수품은 대개가 수입되기 때문에 현 지의 시설재, 소비재의 수요는 거의 증가되지 않는다. 물론 앞에서 보았듯이 이러한 장비와 소비품도 운송비 절감으로 그만큼 용이하 게, 처령한 가격으로 조달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제기 되는 것은 광물수출이 현지에 가공산업을 유발시키지 못한다는 접 이다. 죽 후진국은 자생적, 자립적 공업화를 위한도약의 계기를갖 지 못한다.

제 8 절 산업투자비용과 자립적 경제발전 19 세기 산업혀명을 가능케 한요소중의 하나는우리가 앞에서 보 았듯이 초기 자본축적과정에서 산업투자비용이 대단히 낮았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제 조공장의 설립이 의욕만 있으면 소규모의 자 본으로도가능하였고특수교육을 받은 엔지니어나 경영인이 아니더라 도 공장을 쉽게 제운 수 있었다. 물론 두자비용이 처립했던 이유는 당시의 기술수준이 유치한 단계에 머물렀기 때문입을 이미 앞에서 상세히 분석하였다. 그러나 기술혁신과 전보는 기본적인 상황의 변 화를 야기시켰다. Bair o ch 는 La revoluti on ind ustr i e l le et sous develop pe in e nt 에서 19 세기 선전국과 현재의 후진국간에 두자비용의 차이를 비교 분석하고 그것이 후진국의 개발전략에서 장애요인이 되고있다는결 론을 도출하고 있다. 이 제 그의 연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19 세기초 프랑스에서 1 인당 총 산업두자비용은 평군임금 의 6~8 개월분에 해당한다는 계산이다. 그것이 20 세기 중반의 미 국에서는 약 30 개월의 임금으로 상승된다. 1960 년대 이 후 두자비 용은 급상승한다. 즉 현재의 후진국에 서 첨 단기술을 사용하는 공장에서 근로자 1 인당 시실재의 비용은 그 근

로자의 350 개월 봉급에 해당하는 계산이 나온다. 350 개월, 즉 거 의 30 년에 해당하는 이 비용은 현재의 미국에 미하여 12 배, 19 세 기초 프랑스에 비하면 40~50 배 이상의 바울에 해당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산업혁명 초기, 공장의 기계비용이 그 기계률 사용하여 일하는 공원임금의 6~8 개원분(평군치)에 해당하는 정도였다면, 현 재의 후진국에서의 첨단분야에 대한 두자비용은 현실적으로 감당하 기 어려울 정도의 높은 수준이다. 물론 19 세기에도 이미 프랑스에서의 산업투자비용은 같은 시기 영국의 그것보다 약 2 배 가량 높았다. 그러나 이 정도의 격차는 현재의 그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근소한 것이다. 즉 프랑스는 영 국보다 두 배의 비용이 들더라도 . 영국의 기술을 도입, 자체생산할 수는 있는 정도이다. 따라서 현재의 대부분의 후진국에서 자생적이고 독립적인 경제발 전이 용이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여 주는요소가운데 하나로 우리 는 이 두자비용의 상승울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죽 이미 지적했듯 이 18 세기말 영국에서의 고용인 1 인당 선비두자비용이 4 개월의 봉 급에 해당하는 수준이었고 19 세기초 프랑스에서는 그것이 6~8 개 월 임금에 볼과한 금액이었다면, 1970 년대 후진국의 고용인 1 인당 설비두자 (1950 년대 미국 기술수준의 기업) 비용은 350 개월의 평균 입 금에 상당하는 금액이다 .56) 유럽에서 초기에 약간의 처축을 보유한 농민이나 수공업자가 자기자본울 가지고 어렵지 않게 제조업에 두 자할 수 있었다면, 현재의 후진국에서는 전혀 다른 현실에 직면하 고있다.

56) P. Bair o ch, Le tiers monde dons /'imp as se.

이상에서 본 설비두자비용의 비율이 현대적 산업구조를 단시일 내에 조성하는 데 충분한 장애요인이 된다면, 이 격차를 더욱 가중 시키는 요소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현대적 기술을 이용한 산업이 수익성을 가지려면 적정규모가 되어야 한다는점과, 그로인하여 현 대의 산업은 유럽의 산업화 초기보다는 시초부터 수저으로 더 많은 고용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죽 유럽의 산업화 초기에 비하여 현대의 후진국이 공장을 가동시 키려면 유럽보다 약 5 배 가량 높은 수준의 고용인이 필요하게 된다 는 뜻이다. 이러한 격차는 산업혁명 초기 영국과 현대의 후진국을 비교할때, 그리고공업에의 전입이라는 점에서 양자를 비교할때 I : 250( 최처수준)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57) 다론 한편 유럽에서 그 산업화 초기에는 농업경영에서 자본(토지 +가변자본)이 차지하는 비울은 제조업에서 고용인 1 인에 소요되는 설비투자비용보다 훨씬 높았다. 따라서 농민이 제조업으로 직업전 환을 한다는 것은 비용면에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죽 농업자본 의 제조업으로의 이전은 용이하였다는 점이다. 19 세기초 1 인이 경작하는 농업에서 그 평군수확량이 평군수준의 철반 정도라 하더라 도, 이 농부가 제조업으로 이전을 할 경우 농부는 4 인의 고용인을 둘 수 있는 제조업을 창업할 수 있었다 .58) 그에 비하여 현재의 후 진국에서는 이상과 같은 전업을 하려면 50 인이 경작하는 규모의 토 지와 기타 자본을 처분하여야만 같은 결과 즉 4 인의 고용인을 둘 수 있는 공장을 건설할 수 있다. 같은 규모의 공장을 건설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의 격차가 I : 50 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여 현대의 농업중십 경제구조의 후진국이 공업중심경제로 전환하려면 그 비용 은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비싸다.

57) P. Bair o ch, 전개 서 , p. 291. 58) P. Bair o ch, 전계 시 , p. 292.

후전국의 설비두자비용이 임금으로 환산할 때 어느 정도나 되는 가를 보여주는 예를 들면 표 28 과 같다. 이에 따르면 후진국의 I 인당 선비두자비용은 평군임금의 350 개 월분에 해당한다는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이 표에서 총 자본은 고정자본 (A) 과 가변자본 (B) 으로 구분되며 그 상대적 비율은 표 28 의 첫째줄과 같다. 이제 구체적으로 인도의 사례를 비교, 대조하면 다음과 같다. 1954 년 시멘트 공업에서 고용인 I 인당 고정자본비용은 24,49° 루삐이며, 제지공장의 경우는 I6, I90 루삐, 직물공업은 9,950 루삐,

〈표 28> 1950 년대 미국에 촌재했던 것과 유사한 형태의 시선재로서

현재 후진국 • 중전국의 입 금으로 환산된 공업 자본비 용의 추계 총자본에 미국에서의 月미전어數 국국서비과에임교 b후있 금/ a 후진국에서의 대한 비율- 임금月數 (a) 임금月數 (b) I. 장 비 19% 5. 5 17 93.5 II. 구 조 물 23% 6. 7 5 33.5 A) 고( I 정+ II ;} 본 42% 12. 2 127. o w]I.. 재월 임 금고 562%% 1I5.. 7I 15I 22I6.. 57 B) 가(m 변+ 자W ) 본 58% I6. 8 228.2 총자본 (A+B) I 100% I 29,0 I I 355. 2

제 당공장은 15, 690 루삐 로 계 산된다. 인도의 계최수립자가 추산한 59) 제철공업에서의 I 인당 설비투자 비용은 IO 만루삐이며, 산업 전체의 평군 I 인당 설비두자 비용은 2 만루삐로 계산된다.

59) G. Rosen , Industr i a l Chang e in India , Glencoe 1958, P. Bair o ch, 전계 서 재 인용.

그런데 1954 년, 인도 제조업의 월 평군 임금은 93 루삐 60) 에 지나 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인도의 I 인당 고정두자 (A) 비용은 표에 나타난 I27 개월보다도 훨씬 높아진다.

6o) B. I.T ., Annuair e s Sta t i sti qu es du Travail , 1961, P. Bair o ch, 전게 서 재 인용.

P. Ba i roch 는 같은 계산을 터어키에 적용시키고 있다. 터어키는 그 평군 국민소득이 인도보다 3.5 배 높은데도, 50 명 이 상 고용하는 제조업의 I 인당 시설재는 평군임금의 50 개월분에 상 당한다. 결국 이상의 계산에 따르면 1950 년대 기술수준의 기업체를 세우 기 위해 현재의 후진국이 부담해야 되는 1 인당 자본두자비용은 평 군 1 인입금의 350 개월(약 30 년) 분에 상당하는데, 이 수치논현재의

미국의 그것보다 12 배, 19 세기초 프랑스의 그것보다 43~58 배나 높은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논 후진국이 현대적 산업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 높 은 두자비용이 상당한 장애요인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러한 높은 두자비용은 그 기술수준이 초기의 산업화 당시보다 도 훨씬높은 결과이며, 여기에서 또 다론 장애요인이 등장함을 우 리는 앞에서 분석하였다. 죽 현대적 공장을 건설, 관리, 운영하려 떤 장기간의 특수교욱을 받은 엔지니어, 전문경영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이것은 초기 산업화 당시 약간의 〈 요령 〉 과 의지만 있으면 누구라도 제조업에 뛰어들 수 있었던 상황과는 또 다론 현실이다.

[제 5 장]

불평둥교역과 가치의 이전 제상제계의 공업화 를 위한 원시자본축적이 형성되지 않는 근본원인

현재의 제상세계와 선전국간의 무역은 t 6 세기초로 거슬러 울라 가며, 이때부터 양지역간의 교역은 중요성을 십화시켜 나갔다. 그 것은 첫째로 이 양지여간에 존재하는 기후와 지리적 조건의 차이에 기인한다. 죽 열대와 아열대 지방에 속하는 농작물은 유럽에서 재 배가 불가능하였고 그 특이한 맛과 영양에 의하여 유럽에서는 이 작물이 사치성 기호품으로 널리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요인 으로서 당시 유럽은 특히 중국에 비하여 문화적으로 뒤떨어전 〈洋 夷〉 로서 , 이 〈 야만인 〉 들은 문화수준이 훨씬 높았던 중국, 인도 및 동남아시아에서 멀리 사용하던 조미료반 茶類, 비단, 중국의 자기, 인도의 면직물 등을 수입하여 귀족과 부유계층에서 희귀품으로 취 급하였기 때문이다.

1) 프랑스 말로 epic e s 는 원래 약 물 이 라는 뜻이 며 , 프랑스인 들 은 동양에 서 수입 한 조기 미때료 문 를아 e다 p.i ce현s 재라 의고 식하 료였품는상바운 그 e것pi은c e r이ie 라상고풍 이하 는약데처 럽이 귀단한어 의것 으근로원 은취 급이 되상었에 의한다.

세계의 교역이 근본적으로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것은 유럽의 산업 화에 의한다. 즉 유럽경제가 농업위주에서 제조업 중십의 산업구조 로 개편됨에 따라 국제무역의 규모와 구조도 일대 변혁을 맞이하게

된다. 즉 19 세기 중반부터 서구의 생활수준의 향상, 운송수단의 현대화 및 식민주의의 팽창이 잇달아 생김으로써 이의 결과로서 계 삼세계는 열대작물과 지하자원의 공급지로 전락하게 되고, 선전국 온 그들의 공산품을 이 지역에 쏟아넣게 된다. 그리하여 제삼세계 논 세계 교역에서 양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며, 이러한 경향 은 20 세기초에 더욱 강화된다.

제 1 절 제계무역의 변천 공산권을 제의한 제삼세계의 대의 교역은 20 세기에 들어서면서 두 개의 기간으로 구분되는데, 그 첫번째는 〈팽창기〉로서, 19 세기 중 반부터 1950 년대 에 결찬 기 간이 이 에 해 당된다. 1900 년에 후진국 의 수출은 제계교역의 16~17% 를 정유하였고, 이 비율은 1928 년에 23%, 1950 년에 는 30% 수준까지 도달한다. 그러나 제 2 기에 해당되는 1950 년대부터 국제 무역에서 후진국의 비중은 급격히 줄어드는데, 특히 1955 년을 기접으로 그 비율은 급 속히 떨어 진다. 죽 1956 년에 25% 미 만으로, 1970 년에 는 17% 로 급강하한다. 이러한 양적 감소와 더불어 이 기간은 이른바 〈교역조건의 변화〉 를 수반하는, 즉 후진국에게는 대단히 불리한 기간이다. 이렇게 무역량이 감소하면서 후진국의 무역수지는 십한 적자를 기록하는데, 1957 년 그 적자액은 45 여불에 도달하나 그후로는 세 계경제의 부침에 따라 적자폭의 변동도 십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에 산유국의 무역수지 혹자는 후진국의 평군 무역수지 적자를 감소시키는 효과를 갖고 있다. 이제 지역별로 본 무역수지 적자수 준은 다음과 같다.

〈표 29> 후진국의 무역 수지 (공산권 재 외 )

(단위 : 백만분) 연 도|수 oJ I 수 출 | 세계 교역량에서의 비중 I900 1,600 1,600 16% I9I3 3,500 3,800 I9% 1928 6, 500 7,600 23% I938 5,800 5,900 25% 1950 17,500 19,500 31% 1955 24,400 23,700 25% I960 30,200 27,300 21% 1965 37,900 36,400 20% 1970 56,ooci 55,000 17% 자료 :: P『 U. . BN.a ir통 o c계h , 연L감e 』ti e r s monde dans /'imp as se, p. 217 에 서 재 인용.

〈표 30> 지 역 펄 무역수지 (1969)

(단위 : 백 만 불 ) xl 역 I 수 oJ I 수 출 |찬 고 남미, 카리브 연안국 16,390 15,580 -810 남아프리카 9,260 8,970 -290 중동 및 북아프리카 9,73° 13,850 +4, 120 동남아 및 태평양 17,580 13, 190 -4, 39°

이상에서 특히 동남아의 적자폭이 높은 것은 1970 년대만 하더라 도 한국, 인도, 타일랜드, 베트남 등이 만성적인 무역수지 적자국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80 년대 중반부터는특히 대만, 한국등이 무역 혹자국으로 전환하였고 기타 아시아의 후진국도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을 추구함에 따라 세계 무역구조는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 다. 아시아의 NICS 를 제의한 여타 후진국이 1955 년부터 제계무역에 서 급격히 수출증가울이 감소하는데는몇 가지 구조적인 원인이 있 다. 이제 그 내용올 보자. 전반적으로 볼 때 첫째로, 세계 수 출 은

1955 년과 70 년 사이 940 여에서 3, 100 여으로 팽창하는데 그것은 ® 유럽이 60 년대에 지속적인 성장과 번영을 구가하면서 (연평균 성장 물 5%) @ 유럽공동체와 같은 지역경제동합을 결성, 域內무역을 강 화하였고 ® 선전국간의 무역이 활기를 띠면서 팽창하는 데 기인 한다. 1950 년 세계 수출에서 자본주의 선전국이 차지하던 비중은 46% 였으나 1966 년에는 75% 로 증가한다• 유럽 6 개국의 역내 교역량은 1955 년 62 억불(세계 수출의 6.5%) 이었는데, 공동체를구성한 후 계 속 중가, 1969 년에는 368 여불로서 세계수출의 13.5% 에 도달한다. 여기에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이 팽창하는 선전자본국간의 교역에 서 공산품이 차지하는 위치이다. 죽 선전국간의 공산품교역은 전 체의 70% 이다.

〈 표 31> 선 • 후진국간의 교역 량 추이

도 착 X] (단위 : IO 여분, ,t경 상_가격) --I 후선출 진言진발十 지국 국 -후I- 9 5 0진--11 1591국625 87 8 -34선- 따 25123 전- 1-9국695 6 26-12-3I 9 5 0 638411 9611 52355 364 자료 : AS.n tAh r mopi no, s , LP'aarci cs.u mulati on a l6 'echelle mondia l e, p. 123, ed.

〈표 32> 세계 무역구조 (1966)

l 수출 (FOB) l 수입 ((C만l f위) : IIO 여 분수, 경 상가A격l ) I. 선 전 국 미 국 3o. 3 27. 3 +3.o 기。 럽 82.5 93.o -IO, 5 일 본 9. 2 8.8 +0.4 뉴캐 나질 다랜 , 드오 스릿 트남 리 아 아 공, 14. 7 16,4 — I. 7 계 1 I 136.7 I 144.5 I -8.8 2. 후 진 국 ’ 산 유 국 IO. 2 5. 3 +4,9 비 . 산 유 국 24. 8 31. 0 -6.2 계 2 I 35,o I 36.3 I -1.3 라 틴 아 메 리 카 (10. 7) (9. 5) (+ 1. 2) 중 동 (6. 8) (5. 4) (+1. 4) 아 x 리 7}- (7. 4) (6. 8) (+o. 6) 아 人 l 아 (8. 1) (ll. 6) (— 3. 5) 3. 공 산 국 동 구, 소 련 5,7 6.6 -0.9 중국, 복한,베트남,쿠바 I. 6 I. 8 —0 .2 자총료 : S. A계m i n3, L'ac겨c1 u mulIl a t ion 1 8a71 ,l.34'e cheIlIl e mo1n9d82i..a04 l e, pII. 124.- -1I0.. 6I

제 2 절 아시아 NICS 를 제의한 후진국의 수출이 처조한 이유 결국 후진국은 선전국의 60~70 년대 경 제성 장과 무역 중가의 혜 택을 입지 못하였고 세계수출에서 차지하는 바중도 감되되었는데 그 첫번째 이유로서 제삼세계의 수출구조에 문제가 있음은 많은 후 전국 전문가에 의하여 지적되었다. 죽 1969 년만 하더라도 제삼세계 의 대 선전국 수출의 약 80% 는 1 차산품(농업원자재, 광물)으로 구 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구조는 1956 년 이후 벌로 큰 변화를 보이지 못하는 가운데 그 경향이 일관되고 있다. 그에 비하여 선전국의 對 제삼세계 수출은 약 80% 가 공산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수출입 구조는 〈자본주의 체제내에서의 분업을 증명하는 것 으로, 이 분업 은 새 로운 석 민협 정 pa cte colonia l 이 의 에 아무것 도 아니다〉 .2)

2) P. Jal ee, Le pilla g e du tiers monde, p.7 3, ed. Masp e ro, Paris.

후진국의 수출품 구조는 벌로 변화가 없다. 바나나, 코코아, 원 유, 또는 알루미늄원광과 같은 상품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지역의 수출품은 선전국이 보다 높은 부가가치를 갖는 공업제품의 생산을 확대, 수출을 늘려가는 가운데, 이러한 공업제품의 원료―원자재를

〈표 33> 선전국과 후진국간 무여구조의 일관성

제수삼 세계一선진자본출 국 I| 선수전 자본국一제삼세출계 공 AJ - 품 ·l 1956 11 . 8% 77 ,4 % 1969 20.6% 79.8% 연 료 및 윤활제 1956 21. 5% 3.1 % 1969 34. 2% I. 5% 원 자 츠사 1956 3°.9% 4.1% 1969 20.3% 4, r% 식 료 품 1956 35. 1% 12. 8 % 1969 24. 2% IO, 4% 겨] I 1956 99. 3% 97.4% 1969 99. 3% 95. 8% 자료 : 『 U.N. 동계연감』 1965, 1970, P. ]alee, 전개서에서 재인용. a) 이 가운데 상당부분은 업밀한 뜻에서 공산품이라고 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고 한다.

공급하는 역할에 머물고 있다 .3) 그것은 제삼세계의 공업화수준이 아칙도 극히 낮은 수준에 있음을 말하여 준다.

3) 1960 년대부터 홍콩, 싱 가포르, 대만, 한국의 공산품 수출은 후진국의 평군 공산 품 수출 비율을 어느 정도 높이는 결과가 되었다.

죽 이 지역의 공산품수출은 1970 년경 20% 수준에 머물고 있음에 비하여 같은 기간 선전국의 수출 가운데 공산품이 차지하는 비율은 75% 에 달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이러한 선·후 전국간의 수출구조의 차아가 아니다. 죽 현재의 후진국이 선전화 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전망하려는 시도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그것은 현재의 선전국의 수출구조는 그 산업화 초 기부터 주로 공업제품으로 구성되었었다는 사실이다. 선진국의 산업화 초기, 수출에서 차지하는 공산품의 비중은 총수 출의 50~60% 에 달한다· 또 한 가지 사실로서 현재의 선전국은 그 산업화 이전에 거의 자급자족적인 경제구조를 가졌다는 접이다. 죽

산업화 이전에 현재의 선전국에서 무역이 국내생산 가운데 차지하 는 비중은 4% 마만이었다. 이에 비하여 현재의 후진국(공산권제외) 의 무역의존도는 약 15% 에 달한다 .4) 결국후진국의 對 G.D.P. 수출 비율은선전국의 산업화이전의 그것보다 4 배 정도나높은것이고, 많 은 경우 이 수출은 정부의 재정수입 이나 또는 필수품을 수입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의화를 획득하는 결정적인 역할울 한다는 접이다. 여 기에서 선 ·후진국이 갖는 수출의 의미는 각기 다르다.

4) 한국의 60 년대와 70 년대의 높은 무역의존도는 극히 예의저인 사건으로서 귀에서 이 문제논 따로 취급한다.

이렇게 수출의 의미가 다른 만큼 선 • 후진국에서의 무역의존도의 정도와 내용 또한다른의미믈갖는다. 총량면으로볼때 선전국에게 있어서의 후진국 시장은 벌로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G.N.P . 의 2%, 1970 년 경우). 그러나 후진국에게 있어서 선전국 시장은 死活이 걷 려 있 는 경 우도 있 다 (선전국 시 장은 후진국 G.N. P. 의 IO% 를 흡수한다. 1970 년). 그리고 이러한 제약은 60 년대 전후의 일본과 60 년대 후반 의 아시아 NICS 에게도 다같이 해당된다. 사실상 60 년대 일본은 수 출이 냐, 죽음이 냐 〉 라는 구호 아래 적극적 인 수출 드라이브정 책을 펼 쳐 나가서 오늘에 이 르고 있 다. 한국은 60~70 년대 〈수출은 국력 이 다 〉 라는 구호 아래 이를 동한 빈곤으로부터의 탈출과 선전국으로의 전입을 도모하고 있다. 많은 후진국은 농업 특작물을 수출하고 식 량을 수입하여 산업화를 위한 자본기술, 시설재를 확보하려 한다. 이러한 불리한 상황은 일부 열대작물이냐 광물자원이 전적으로 후진국에 편재한다는 사실 때 문에 그 협 상력 barga i n i n g po wer 이 높 아질 수도 있고 힘의 관계에서 후진국에게 유리할 수도있으나(특히 석유), 1950 년대 이태 선전국은 에너지원 및 원자재의 대체재를 적 극적으로 개발하면서 對 후진국 의촌도를 줄여나가고 있다. 이와는 달리 현재의 후진국은 많은 경우 그 시실재의 도입과 기술의 개발 에서 아직도 선전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제 3 절 교역조건 5) 의 악화 선진자본국이 식민지의 자원을 〈 조용히〉 수탈하는 동안, 즉 후 자가 주권을 회복하기 전까지, 양지역간의 교역은 세계 관심의 대 상이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세계가 남과 복으로 분류되고(이것은 동·서간의 분류를 대체하고 있다) 디스라엘리 D i srael i가 말하던 2 개 의 국민이 2 개의 인류로 대체되는순간, 그리고국민속에 촌재하는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제계적 자각이 〈 프롤레타리아 국가 〉 6 ) 에 관한 인식으로 바뀌는 순간, 빈곤과 富 는 병존하는 상황으로서 촌재하는 것이 아니타 구조적으로 연결되면서 한 편이 다론 한 편의 구조를 조성시키는 것으로 인식되는 순간, 고전적이고 팽창적인 원심력이 〈성장의 핵〉을 중십으로 富를 빨아들이는 구십력으로 바뀌는 순간, 그리 하여 2 차적 • 내 재직 역 동작용에 의 하여 격 차를 해소시 키 는 재군 형 메카니즘이 안정된 균형을 이룩한다는 가설은 중충적 불균형과 악순환을 가쳐올 분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서 이 교역조건에 관 한 논의는 새로운 차원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7)

5) 교역조건이란 한 나라 수 출 의 평군단위가격과 수입의 평균단위가격 사이에 촌재 하는 비 율을 의미한다• 6) 프 를 레 타리 아 국가 les nati on s pro leta i r e s 에 관한 개 념 에 관하여 는 A. Em manuel 과 Ch. Beth e leim 간에 의 견 을 달 리 하고 있 다. 7) A. Emmanuel, L'echang e ine g a l, ed. Maspe ro, Pari s. p.4 4.

그것은 특히 한국의 6.25 사변 이후, 일부 원자재의 국제가격이 급격히 하락하면서 극적인 성격을 띠고 문제로서 부각되었다 .8) 교역조건의 변화는 원자재의 수출에 의촌하는 후진국의 수입을 증감시키기 때문에, 그리고 이 지역에서의 원자재 수출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리고 不平等 교역 은 현재의 후진국이 후진국일 수밖에 없는 결정요인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상세히 다루어보기로 한다.

8) A. Emmanuel, 전계 서 . 9) A. Emmanuel, 전계서.

I 역사적 변천 통상 후진국과 선전국간의 교역조건에 관한 통계는 I950 년 이후 에나 신빙성 있는 자료가 제공될 뿐, 그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학자에 따라 그 추정치가 다르다 . P. Ba i roch 는 적어도 l950 년대까지는 교역조건이 오히려 후진국 에게 유리하게 변화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국제연맹 Socie te des Nati on s 의 통계 자료를 이 용한 그의 계 산에 따르면 1876~80 년과

〈표 34> 교역 조건의 변천

(1963=100) 7] 7J: 수출가후격 |수입 전가 격 1 교역국 조건 교Ai 역;,:.조J. 건국 1938 34 43 80 99 1948~52 114 105 108 91 1958~62 102 99 102 98 1962~64 100 100 100 100 I965~67 103 IO3 100 IOO 1968~70 IO7 105 102 IO2 자료 : 『 U.N. 동계연감』. P. Bair o ch, 전게 서 , p. 228 재 인용.

1928~29 년 사이 교역조건은 약 20~40% 가량 후진국에 유리하게 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10 ) 1 1)

10) P. Bair o ch, Le tiers monde dans /'imp as se, p.2 27. II) 이에 판하여 A. Emmanuel 은 같은 U.N. 봉계자료 를 인용하면서 19 세기말과 2 차대전 前까지 의 1 차산품 생 산국의 교역조건이 약 40% 가량 악화되 었다고 한다. 전게서, p.4 2.

원자재가격이 국제시장에서 폭등한 경우는 I950 년 한국에서 6,25 동란이 발발하면서 세계가 냉전체제로 전환, 유럽과 미국이 재무장 함에 따라 원자재 수요가 급증한 때 이 다. 〈 한국 인플레 이 션 Infl a tion corenne 〉 이라고 명명된 당시의 선전국 및 제계경제의 경기는 인 플레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원자재의 도매가격은 I 년 사이 (1950 년 6 월 ~1951 년 4 월)에 2 배로 뒤었다. 2 1956 년대 이후 교역조건의 악화 그러나 1962 년 이후 원자재의 교역조건은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1962 년 이래 제삼세계와 선전국간의 교역조건은 낮은 수준에서 안 정기에 들어간다. 이 시기에 후진국의 불리한 교역조건에 관한 고발

〈표 35> 선전국과 후진국 교역에 있어서 수출의 단위당 가치의 지수

(1963= IOO) I I953 I 1958 I 1964 I 1969 선전국의 對 후진국수출 中 96 98 102 106 기계류맞시선재 83 94 IOI 112 후진국의 對 선전국수출 中 109 106 IO3 105 식 료 품 Il3 llO Io8 103 원 자 zI 107 98 IO2 97 어] 너 X] 源 103 ll5 99 97 공 산 품 109 89 104 137 자료 : P『 U. .JNa.l e통e, 계 전연게감 서』 , 1p9.7 08.0 재 인용.

이 강력 히 나타난다. 참례 P. Jal ee 에 따르면 1956 년과 69 년 사이 교역조건은 16% 나 후전국에 불리하게 악화되었다고 한다 .12) 이러 한 사대는 국가에 따라, 그리고 생산물에 따라 각기 변동의 차이가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하여 60 년대에는 세계 원자 재시장의 품목 ll실 조직화를 주창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1 차산품의 교역조건이 악화되었다면, 선진국의 공산품은 오히려 그 수출가격 이 상승하는 것 으로 나타나고 있 다. 1953 년과 1969 년 사이 선 • 후 전국 제 품의 교역 조건을 비 교하면 다음과 같다. 후진국의 전반적 수출가격의 하락 가운데 가장 큰 변동폭을 보인 것은 식료품으로서, 이러한 상황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브라질의 죠슈에 드 카스트로의 말을 인용해 보자. 〈 1954 년에는 커피 14 포 대를 팔면 찔차를 한 대 수입할 수 있었으나 1962 년에는 같은 차를 수입하는 데 커펴 39 포대를 팔아야 했다. 〉 13) 1950 년대 중반부터 후진국이 1 차산품을 수출하면서 손실을 본 총액 은 선진국이 1953~55 년과 1957~59 년 기 간 후진국에 게 증여 한 원조의 半정도에 해당한다고 U.N. 의 보고서는 서술하고 있다 (A. Emmanuel 전개 서 에 서 ) • 그러 나 찰레 는 Centr e int e r nati on al de develo pp emen t의 연구보고서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 다. 〈 선전국이 대 후진국무역에서 거두十들인 이익은그들이 중여한 원 조액 80 여 달러와 거의 비슷한 금액이며, 결국 선전국은 자기네들 이 판 구멍을 메꾸어주는 꼴이 되었다. 〉 14) 뤼쉐르 F. Lucha i re 에 게 있어서 이 선진국의 대 후진국 원조는 일종의 〈원상복구〉에 불 과한 것이다 .15)

12) P. Jal ee, Le pilla g e du tier s monde, p.8 1 . 13) Le monde, 8 Mars, 1969, P. Jal ee, 전게 서 에 서 계 인용. 14) , 15) P. Jal ee, p. 82, 전개 서 .

3 1974 년부터 현재 (89 년)까지 전반적 인 I 차산품의 수출가격 하락은 60 년대 까지 지 속되 다가 I970 년대초에는 갑자기 상승국면으로 접어든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것은 물론 오일 쇼크였다. 산유국의 카르텔 형성 (OPEC) 과 더불어, 이들이 일방적으로 울린 석유의 국제시장가격은 1972 년과 74 년 사이 4 배로 뛰었고, 이에 편승하여 다론 원자재도 80~120% 가량 상승하였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세계는 자원난이라는 강박관 념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이것은 당시 로마클럽으로 알려진 일군 의 미래학자들의 연구보고서와 예언을 확인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 다. 4 1974~80 년 기 간의 두자확장 이러한 급변하는 상황에 맞추어 자원생산국은 1974~Bo 년 기간, 그 생산능력을 확장시키기 위한 대규모의 두자물 감행하며 후진국 의 이러한 두자를 용이하게 한 요인으로서 당시의 낮은 국제금리수 준과 오일달러의 범람을 둘 수 있다. 이 상의 유리 한 자금사정 을 이 용하여 대 부분의 후진국은 채 광산업 과 기타 원자재 및 수출용 특작물부문의 생산능력을 증대시켰다. 예를 들어 베네쥬엘라는 알루미늄원광을, 칠레는 동광을, 말레이 지아는 주석의 생산시설을 각기 확장시켰다. 수출용 득작물산업에 서도 역시 말레이지아(고무, 팜유), 아이보리코스트(코코아), 세네갈 (낙화생)은 두자를 대폭 늘렸다. 이러한 두자재원의 많은 부분은 의채에 의한 것이었고, 그리하여 1974 년과 8m민 사이 산유국을 제의 한 후진국의 외 채 는 20% 가량 증가하고 있다. 물론 이 외채는 인도나 남미에서 공업개발계획에 사용된 것도 있으나 많은 경우원자재 생산시선 확장에 충당되었다. 그런데 열대작물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십을 때와 그 열매를 수 확할 때까지의 기간은 4~5 년이 소요된다· 또한 광물자원의 개발 에 있어서도, 그것이 구체적인 생산단계로 들어가려면 계획으로부 터 5~6 년이 소요된다. 후진국이 I 차산품의 증산율 결십하게 된 배경에는 첫째로 국제 시장에서의 가격상승과, 둘째로 낙관적인 수요예측에 기인한다. 이

수요예측은 60 년대와 1 차, 2 차 쇼크가 있던 I973 년까지 선전국경 제의 지속적인 성장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이 기간은 선전국에서 원자재확보를 위한 노력을 가중, 국제시장에서 수요자 가격이 형성되면서, 생산국은 수출소득의 안 정을 위한 국제적인 보증을 요구하게 되었다. 1964 년 결성된 UNC- TAD 는 제삼세계 원료, 원자재 생산국의 모입으로서 이 기관에서 는 당사국간의 토론을 거쳐, 이러한 수출소득의 안정이 약속된다 떤 생산울 증가할 것이타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러한 상승분위 기 가운데 커피, 코코아, 설탕, 주석에 관한 국제협약이 갱신되었 다. 특히 주석의 경우, 그 국제거래가격은 대단히 높은 수준에서 결정되었다• 여기에서 특기할 것은 1975 년 이후 계속 연장된 로메협약 !'accord de Lome 이다. 이 협약은 유럽공동체와 그의 원조하에 있는 아프리 카의 후진국 ――일명 ACP 국가-간의 원자재 수출가격의 안정에 관한 것인바, 초창기에는 12 種의 농업 원자재와 철광에 관한 유럽 의 가격지원을 규정하였다. 그후 이 지원체제는 50 여 종의 산품에 확대되었고, 그 해당국가는 67 개국에 달하였으며, 이러한 특수 지 원체제의 칙접적인 결과로서 자원생산국은 원자재 생산을 확장, 특 화룰 심화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자재의 수요둔화와 가 격하락은 후진국의 수출수입을 감소시키며 외채를누적시키는 결과 로 나타난다. 5 1981 년 이래의 특칭 사실상 세계경제논 1981 년부터 장기적 침체국면에 접어들었고, 따라서 원자재의 수요도 감소하였다. 1980~82 년 사이 공업원자재 논 10%, 농업원자재는 18% 씩 그 가경이 하락하였으며 이 가격의 하락은 원자재 사용자의 최 적 스톡 sto c k 관리 에 의 하여 접 차로 가 독속화관되리었를다 .하 게그 런된데 배 원경자에재는 `사미용국 자의 들고이금 리이 상정과책같이 은깔짜려입 새있다 .있 는또 스한

편 I98o~82 년에는 달러의 평가절상이 있었고(유럽통화 ECU 에 대하 여), 그로 인하여 달러권에 속하는 기업은 경쟁력을 상실하게 되었 으며, 달러권 外에 속하는 기업은 원자재 구입에 어려움을 겪게 되 었다(대부분의 원자재는 달러화로 거래됨). 따라서 사용자들 一―달러 권내나 권의에 위치한 모든기업들 __· 은보다효율적인 스목관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 원자재시장에서 가격하락의 압력을 가한 요소로서 남미제국 의 영가판매를 빠뜨릴 수 없다. 남미의 자원생산국은 대부분 외채 상환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수출만 된다면 가격수준에 관계하지 않고 무조전 방매하고 있다. 물론 세계경제는 1983~84 년 회복국면 울 맞이하는 듯했으나 원자재 수요는 제한적이었다. 1984 년, 원 자재 가격은 1982 년의 그것보다 약 IO% 정도 상승하고 있다. 선전 국 경제가 (참정적) 회복제를 맞이함에도 불구하고원자재 수요가 증 가하지 않는 구조적 원인으로, 첫째는 이 경제가 후기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통신, 운수, 건설 등의 하부구조가 이미 포화상태에 도 달하였고 둘째는 인구증가울이 사실상 정체상태에 있다는 접이 지 적되고 있다. 이러한 전반적 경제변천과 더불어 그동안 선전국은 자원의 대체재 개발 및 자원절약형 기술을 꾸준히 개발하여왔고, 그것이 원자재 수요를 감축시킨 결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1984 년 국제 원자재시장에서 거의 모든 가격은 일제히 하강국면에 접어들면서 원자재의 생산능력이 과잉상태에 있음을 보 여주었다. 1986 년, 공업원자재의 가격은 1984 년의 그것보다 평균 16% 나 하락하였고, 농산물 가격은 같은 기간 약 24% 나 뗄어졌다. 여기에는 제계 제일의 농산물 생산국인 미국과 유럽의 역할을 무시 할 수 없다. 죽 미국정부는 농민들에게 생산을 제한하기 위한 보조 금을 지급하고, 유럽에서도 농민으로 하여금 그들의 생산에 스스로 책입지도록 조치를 강구함에도 불구하고, 농산물의 과잉 생산은 계 속되었다. 열대성 작물의 경우에도 70 년대말에 두자를 하였던 홍 차, 코코아, 팜유 등이 수확기를 맞아합으로써, 이 분야에도 대규 모의 과잉생산율 기록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전반적 가격하락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상품별 가격협정의 점진적인 페기 (설탕, 천연고무)나 일시적인 무효화(주석) 를 수반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를 야기시킨 배경에는 협정 이행에 필요한 재정수단의 결여와, 시장의 룰을 지키지 않는 여러 가지 변태적 거래 ( 특 히 대량 생 산국에 의한)가 깔려 있다. 따라서 이 원 자재가격 안정에 관한 새로운 국제협약은 대단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6 세계교역에서 차지하는 원자재의 비중 부뤼셀의 Kredit Bank 의 연구보고서 16) 에 따르면 , 명목가격으로 본 현재의 세계 원자재 가격은 1974 년 가격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 러나 실질가격으로 환산하면 원자재는 1974 년 이래 계속 하락하고 있다. HWWA 의 원자재 〈 p acka g e 〉 지수는 1973 년 이래, U.N. 지수 에 포함된 공산품 p acka g e 에 비하여 그 구매력이 약 45% 가량 하 락하고 있다 .17)

16) Bulleti n hebdomadair e de la kredit e b ank, ple th o re de mati er es pre mi er es 참조. l7) 전계 보고서 , U.N. 의 Month l y Bulleti n of Sta t i sti cs.

이러한 원자재의 상대가격의 하락은 국제교역에서 원자재가 차지 하는 비중을 감소시키는 주요원인으로지적되고있다. 사실상 1960

〈 표 36> 1973~1985 년간의 제계교역량 및 교역가격 a) 의 연평군 성장률(%)

1 양 I 가격 I I o^lc I 가격 식 료 품 5. 5 7.2 에너지원총생산 -3.9 I5. 5 농업원자재 3. 3 0.5 일 차 산 물 -0.1 IO. 2 광 물 I. 6 6. 8 최종생산물 4. l IO. 9 총 원 자 재 4.3 6,7 총세계교역량 2. 6 IO. 6 a) 미국 달러화 자로 : GATT 연차보고서

원자재 가격의 추이

( 실 질 가격 기준) 1975= 1 00 145 140 135 130 125 120 115 110 105 100 95 90 85 80 75 7071'72'73’ 7475'76'77'78'79' 80' 81'82‘83'84‘85'86

년과 1972 년 사이 이 비중은 이미 45% 에서 25% 로 줄어들었다. 그 리고 1985 년에는 세계교역의 17.5% 를 접유할 뿐이다. 그런데 국제교역에서 원자재의 비중이 감소되는 현상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로서 우리는 원자재 생산국 및 그 수출대상국의 대폭적 인 변화를 지적하여야 할 것이다• 죽 표 36 에서 볼 수 있듯이 선 전국은 후진국으로부터의 원자재 수입을 줄여나가고 있으며, 득히 식료품의 경우 자급률을 높이고 있다. 또한 앞에서 언급했듯이 선 전자본국은 원자재소비 철약형 성장패턴을 추구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선전국이 I 차산품의 수출물량울 증가시키고 있다는 사 실이다. 특히 식료품(육류, 곡물)의 경우, 선전국은 대 후진국 수출 을 강화하고 있음을 이상의 표에서 볼 수 있다 .•

〈 표 37> 원자재 세계무역구조(%)

二생 :산 :지 \::73 『: l9도 : II ::3 ;,:! 19: :5I1착 :::: \의::: I :지: ::|1 1985 제자 료 : GA계T I T 7의4 연I 차6보6 고I 서에16서 I작 성.21 I JO I 13 I JO O I JO O

세계시장에서 원자재 공급이 풍부함은 그 사용자에게는 유리하나 생산자축으로 볼 때는 여러가지 문제를 야기시킨다. 문만 아니라 이 러 한 상황은 부메 랑 Boomerang 효과를 일으켜 사용자에 게 도 부 정적 효과를 미칠 수 있다. 우선 원자재의 가격하락은 생산국의 수 출 收入과 구매력을 감소시키며 결과적으로 선전국으로부터의 수입 온 그만큼 축소된다. 그런데 산업 구조상 이 수입 이 필수불가결할 때 이 자원생산국은 어려움을 겪게 되며 현재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인도네시아 등이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런 가운데 일부 후진국은 계속 그 생산능력을 확대함으로써 과 잉생산의 정도를 가중시키고 있다(인도네시아-고무와 팝유, 타일랜드 -고무, 브라질-코코아) 광물자원의 경우도 브라질(알루미늄, 철광), 쿠바(니젤), 중국(주 석) 등은 생산규모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이에 비하여 광물의 소비 논 정체하거나 극히 소폭상승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주석의 소 비중가는 年 0.5~1% 에 그치며, 철광은 그 소비수준이 불변이고 주석은 오히려 감되하고 있다. 그것은 플라스덕, 제라믹 등이 철금 속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화선은 동 대신에 광성유를 사용하게 되고, 자동차에도 접차로 플라스틱, 세라믹 등의 부품 사 용이 늘어간다. 분만 아니타 기술의 전보를 통한 원자재의 철약은

꾸준히 추전되고 있다. 후진국 수출상품의 교역조건 악화가 세계여론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부터이다. 〈목 히 일부 I 차산품의 가격폭락은 전례 없는 극적인 상황에서 문제를 심각히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 18)

18) A. Emmanuel, L'echang e ine g a l, p. 선

그로부터 이 문제는 이른바 60 년대 〈南 北대화 〉 의 중십 데마였 고, I 차산품 가격안정을 위한 협의기구로서 UNCTAD 를 창설시키 는 계기가 되었다. 강철 (35%) , 동, 주석 (30 % )은 재생으로 생산된 것 이다. 결국 광물의 생산 및 처리가 감소 추세에 있는 경우는 유럽 과 미국에 제한되고 있으며, 기타 후진국에서는 그둠의 두자계획을 재조정하지 않고 있다.

제 4 절 후진국 1 차산품의 교역조건이 악화되는 이유 이 60 년대는 또한 정치적으로 주권을 다시 회복한 신생국들이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확립, 양대 불릭에 대하여 대등한 관계를 주 장하면서 교섭력 barga in i n g p ower 을 확대하려고 노력하는 시기이 다. 따라서 후진국의 〈 교역조건의 악화 〉 문제는 세계적인 쟁접으로 대두하였고 많은 전문가들은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시도를 하였 다. I 불평 등 교역 론 l' echang e ine g a l 의 논증 엠마뉴엘에게 있어서 리카도와 그의 후계자들은 이 교역조건의 악화라는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 에 따르면 〈 리카도의 정리의 기준에서 볼 때 교역조건의 변화폭 은 비교생산비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고 지적된다. 죽 한 나라가 다른 나라 또는 일련의 그 룹 의 국가와 교역을 함으로써 잃을 수 있 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교역국보다 이익을 덜 얻을 수 있다 논 정 이의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 정리는 증명하여 준다는 것이다 .19) 다시 말하여 교역국은 모두가 비교생산비 한계내에서 득

19) A. Emmanuel, L'echang e ine g a l, p. 39.

을 얻을 뿐이라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고전과, 신고전과 이론 에 있어서 후진국간의 교역조건의 악화현상은 분석의 대상이 되 지 못한다는 것 이 다. 사실상 J.S . 밀, J.R. 힉 스, A. 마샬 등은 리 카도의 비교생산비 한계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 문제에 관한 새로운 설명을시도한뮈르달 M y rdal, 넉시 Nurkse 등은 1 차산품의 · 낮은 가격탄력성에 주목하였고 이어서 성거 Sin g er , 프레비쉬 Prebis c h, 루이스 A. Lewi s 등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수요의 가격탄력성이 낮다고 할 때, 그것은 가격이 하락 할 때는 큰 피해가 되지만 가격이 상승할 때는 유리한 결과를 가져 다 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가격의 변화에 대하여 수요가 비탄력적 일 때, 그 판매량은 가격의 변화와 관계없이 일정할 수 있기 때문 이 다. 따라서 이 논거 는 가격 이 하락함에 도 불구하고 1 차산품의 판매량이 정체한다는 사실을 설명하는데는유효할지라도가격의 하 락 그 자체를 설명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 결국 공급 의 탄력성을 개입시키지 않는 한, 추론은 그 근거를 상실한다. 따라서 동원된 이론은 1 차산품에 대한 수요의 낮은 소득 탄력성 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엥겔의 법칙에 근거를두고있 다. 그런데 독기할 것은 제삼세계의 대부분의 농작물은 사치품으로 서, 이 산품의 수요의 소득 탄력성온 대단히 크다는 접이다 .20)2 1)

20) A. Emmanuel, 전개 서 , p. 46. 2I) 그러나 선전국에서 일부 연대식품(예컨대 바나나, 코코아, 커피 등)은 그 공급 의 과잉에 따라, 그리고 수입자유에 따라 이미 사치품의 법주에서 벗어나 대중 소비품으로 되었다.

엠마뉴엘에개 있어서 후진국 수출품의 처가격의 원인은 국가간의 자본의 유기 적 구성 의 차이 dif fere nce de la comp os it ion orga n iq u e de ca pit al 와 그에 따른 잉여가치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하며, 그는 마 르크스의 생산가격 론을 응용, 불평등 교환론을 전개 하는데 그 요지 는 다음과같다.

2 불평등 교환론의 내용 국제교역에 관한 고전적 이론의 근원은 리카도 R i cardo 의 비교 생 산비에 근거하고 있음을 우리는 찰 알고 있다. 리카도는, 교역국(예컨대 포르루갈과 영국)이 각기 가장 유리하다 고 간주되는 한 재화의 생산에 특화를 하면 양국이 모두 得을 얻고 결국 특산품의 교역은 양국의 국민소득울 증가시킬 수 있다는 논리 를 전개하였다. 리카도와 그의 뒤를 이은 고전학과에게 있어서 교. 역 상대 국간 상품의 교환은 결국 상품에 두입 된 노동량의 교환으로 집약되며, 이 상품은 각국에서 각기 다론 사용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 한 나타 안에서 두 개의 상품이 교환될 경우 동일 한 노동량이 두입된 두 가지 상품 사이에서는 교환가치와 가치의 법칙이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데 비하여, 국제교역간의 상품교환 에 서 는 투입 된 노동량이 각기 다론 상품울 교환하고, 또한 노동의 생산성도 각기 다르다는 데서 발생한다. 우리 는 리 카도의 그 유명 한, 포르무갈의 포도주와 영 국의 담요 의 교환에서 각국이 한 가지 상품에 특화했을 때 양국이 다같이 득 을 얻는다는 정리를 다시 한번 상기하여 보자. 죽 이 정리에 따르면 포르투갈에서는 포도주 1 단위를 생산하는 데 80 시간, 담요 한 장 울 생산하는 데 90 시간이 소요되는 데 비하여, 영국에서는 술 한 단위에 I~O 시간, 담요 한 단위 생산에 l00 시간어 소요된다고 가정 한다· 포르투갈에서 는 포도주는 물론 담요의 생 산도 영 국보다 적 은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지만 포르루갈은 포도주 생산 한 가지에 목화하면서 영국에서 담요를 수입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볼 때 득 이 된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담요를 수입 (비록 포르두갈에서는 영국 보다 적은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더라도)하논 것이 득이 된다는 주장이 바로 리카도의 경제이론에의 기여이다. 이 주장의 이해를 돕기 위 하여 엠마뉴엘의 설명을 빌려 보자 .22)

22) A. Emmanuel, L'echang e ine g a l, p. 30.

〈표 38> 국제분업과 이익

트거 화 이 전 I 특 화 이 후 포도주|담 니 총 계 1 포도주 1 담 요卜총 계 포영 루트갈국 I 128o0 I IO9O0 I 2I7200 I 니 200 2I60o039° I 360

이상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리카도의 관십을 끈 것은 특화 이 후, 포르두갈과 영국 두 나라는 390 시간보다 30 시간이나 줄어든 360 시간으로 두 상품을 생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하여 얻은 30 시간의 이득을 양국은 어떻게 분배하는 것 인가? 리카도는 여기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의 간결한 논리전개에서는 다만 포도주 1 단위와 담요 한 단위가 맞교환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럴 경우 포르두갈은 무역을 함으로써 IO 시간 을, 영국은 20 시간의 이득을 얻게 된다. 물론 여기에서 운송비는 계산되고 있지 않다. 또한 이 定理에서 양국간에 교역이 가능하려 면 1 단위의 포도주 =8/9 담요, 1 단위의 포도주 =12/10 담요라는 비율 사이에서 교환이 성립하여야 한다. 이상과 같은 가정하에서 양국은 자유무역을 함으로써 득만 있고 실은 있을 수 없다. 포도주 =8/9 담요일 때 영국은 교역에서 생기 는 모든 이득을 얻으며, 포르두갈은 현상유지를 할 따름이다. 포도 주 =12/10 담요일 때에는 포르두갈이 모든 이득을 얻고 영국은 교 역전에 비하여 잃는 것은 없다. 상대가치가 이 한계 사이에 위치할 때 그 이 득은 양국이 분할한다. 23) 결국 리카도의 증명은 포르두갈이 상대국보다 모든 부분에서 후 전성올 보이더라도 목화를 함으로써 득이 있을 수 있음올 보여주는 데 있다. 그리고 리카도의 증명은 여기에 그찬다 .24)

23) A. Emmanuel, 전계 시 , p. 30. 걱) S. Ami n, Le develop pe ment ine g a l, p. u6. ed. Mi nu it .

그러면 국제교역이 어떤 조건하에서 불평등하게 진행되는가를 엔 마의 뉴불엘평의 등 교〈역불 평론등을교 역〈론근본〉적을 인통 하기 여여 〉살로펴 보간자주.하 는여 기그에의서 는찬 양엠자마인뉴 엘s. Ami n 의 요약을 전재 한다. 25)26)

25) S. Ami n, Le develop pe ment ine g a l, p. 117, ed. Mi nu it , Pari s. 26) A. Emmanuel, 전개 서 참조.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가정은 노동의 이동(한편으로는 자본주의 경 제분야간의 입 금평등화와 다론 한편으로는 국가간의 입 금평등화)과 자 본의 이동(이윤울의 평등화)를 내포한다. 이러한 추상적 가정은 자본주의 생산양석을 연구했던 리카도와 마르크스의 논리적 들을 구성한다. 마르 크스는 국제 교환의 문제에 접근하거를 꺼려하였고 그의 일련의 문제 속 에는 국제 교환이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못했다. 그는 국가 내부에서 자 본 혹은 노동의 불완전한 이동에 의해 나타날 수 있는 결과와 그 문제의 유사성을 지적하면서, 단지 노동과 자본의 불완전한 이동에 의해 나타날 수 있는 견과들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하는 데 만족했다. 리카도는 국제 무역을 취급하였는데, 그것은 애매한 방식으로 행해졌 다. 경 험 론자로서 그는 자본과 노동의 상대 적 부동성 을 사실로서 인정 했 다. 리카도가 서술했던 그 당시에 있어서도 적어도 사실 그 자체로는 비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중십부 자본주의의 어떠한 사회 • 경제적 조칙도 순수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이 논의의 여 지가 없는 것과 같다. 중심부 자본주의 발전이 국가마다 불평등하게 진행 되었다는 사실이 논의의 여지가 없듯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과 노동의 생 산성 및 노동력의 가치가 국가마다 동일하지 않다는 것아다. 그러나 리카 도는 구체적인 사회적 형성의 구도, 순수 자본주의 생산양식, 사상의 가설 위에 놓여지는 이런 문제들을 그 자신의 논리체계 속에서 원용할 법 칙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의 이론은 국가간의 실질입금의 동일화를 받 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단지 자본의 부동성 위에 국제 교환을 위치시킬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엠마뉴엘에 의하면, 〈이것은 요소의 이동에 관한 것 으로서, 리카도는 단지 그 결과 죽 보수의 평군화에만 판십이 있었다. 그 러한 이유로 그는 이윤의 평균화에만 집착하고 있다. 이 평균화는 요소 의 부동성 록히 자본의 부동성에 의하여 지장받을 수 있으며 입금의 평균

화는 하부로부터 (즉, 처입금 수준에서) 전행되는데 그것은 노동의 이동이 있든 없든간에 인구 동계학적 조정 장치의 중개자에 의해 진행된다고 보 았다. 리카도에게 있어서는 비평군화가 상대 비용의 법칙이 작동할 수 있 는 필요충분조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 지적되지 않았던 매우 중요한 접이나 〉 (p .90) 만일 자본 이동이 가능하고 동일한 입금(실질적인 생계바)의 가정하에 서라면 생산성 차이가 있을 때에만 교환이 발생한다. 이는 〈천연적 〉 차이 의 가능성(노동과 자본 그리고 토지가 같은 양이더라도 기후척 원인으로 영국보다 포르두갇에서 포도주가 더 많이 생산되듯이)에 의해서나, 또는 자본주의 발전의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차이에 의 해서 유래된다. 그러나 이런 경우 임금은 평등화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노 동력은 윤리적 • 역사적 요소인 가치의 관정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노동과 자본 두 요소가 완전히 이동한다면 헥서가 증명한 대로 거 래는 사라져 버릴 것이다. 엠마뉴엘의 주장에 의하면 목 화는 상대적 최적 만을 나타낸다고 지적한다. 〈철대적 최적화란 포르투갈이 포도주에 목 화 하고 영국이 섬유에 목화하는 것이 아니타 영국이 포도주와 섬유 둘 다 생산하기 위해 포르부 7J :에 그들의 자본을 이전하는 것이다.〉(p .30) 다음에는 생산물이 가치대로 교환되지 않는 국제교환의 두 형태를 발 견할 수 있나 첫번째 경우에 있어서는 입금(그리고 증가울)은 동일하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차이로 인해 생산 가격-여기에는 이윤울의 평군 화가 내포되어 있다-이 차이가 나는 경우로, 보다 발달된(더 높은 유기 적 구성으로 목칭되는) 국가의 총노동시간(적집과 간접)이 처개발 국가의 총노동시간보다 더 많은 생산물을 취득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를 구체적 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니l (볼겁자본니) I (가;자본니) l (增 m 니價 )1 (가 V ;::,1I)1 (이 p :운 )1I ( 생산P가 :격: )

A : 처개발국 (c/v=1) B : 선진국 (c/v=2,3) 증평가균울이 윤: 울10 0:% 1 7•/ 43=40%

엠마뉴엘에 의하면 이런 경우 총노동 시간이 동일한 생산물의 교환을 보장하지 않음에도 봉구하고 불평 등하지 않다고 만한다. 왜 냐하면 이 런 종류의 〈불 평등 交換〉은 국가 내부관계 를 목칭지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생산 가격은 …… 겅쟁적 체계에 내재하는 요소들로 구성된다〉 (p.1 92) . 그럽에도 불구하고 교환은 그 자체 전혀 평등하지 않은데 이 불평등성 은 생산성의 불평등을표현하는것이다• 왜냐하면 기술적 차이를 지닌­ B 국에서는선전적이고, A 국에서는후진적인_같은생산물의 생산 조건 을 나타내는 위의 두 개의 방정식은 가치 방정식 (A,B 각각의 개벌적으로 고려된 노동시간으로 나타난)이기 때문이며 이는 중요한 접이기도 하다. 사용 가치로서 생산물의 양은 A 와 B 에서 동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생 산력 수준에서 B 가 휠싼 앞서고 있기 때문에, 가령 B 에서는 적절히 사 용된 총 30 노동 시간(직접과 간접)으로 생산물 90 실질 단위를얻는데 반 해, A 에서는 60 단위라는 적은 症밖에 얻지 못한다. 만일 A,B 가 동일한 세계시장 속에 통합된다면 생산물은 단지 유일한 가격, 즉 선전국의 가격 을 가질 따름이다. 달리 말하면 A 에서의 30 노동 시간은 B 에서의 30 노 동 시간과 가치가 다르고 A 에서는 30X60/90=20 시간의 가치만을 가전 다. 부언하여 생산물의 가격이 단위당 IO 프랑으로서 그것이 노동자의 소 비에 사용된다면, B 에서의 30 노동 시간은 9oxro=900 프랑, 노동 시간 당 30 프랑을 지급받는 데 반해 A 에서는 시간당 20 프랑만을 지급받는다. 비록 생산성이,다문지라도 A 와 B 에서의 실질입금이 동일하다면 A 에서 논 생산성 열등을 보상하기 위하여 증가울이 더 커야 하는 것이다. 즉 Io/10 으로 동일한 상대에 있던 증가에 대한 가변자본의 비율이 r5(1ox . 90/60)/5 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Charles Bett el heim 이 지 적 한 대 로 교환이 불평 등한 이 유는 본질적 으로 는 생산성의 불평등(이 불평등은 유기적 구성의 차이에 기인한다) 때문이 고, 부차적으로는 유기저 구성의 차이가 이윤율의 평군화를 통해 생산 가 격을· 개벌적 가치에 의거하여 달리 결정하기 때문이다. A 와 B 에서 필요 한 중가율의 차이 (A,B 에서 노동의 실질 보수가 군등화되기 위해)에 의해 문제논 다시 훨씬 복잡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엠마뉴엘의 주장은 또 다몬 경우에 기반올 두고 있다. 이 는 교환되는 생산물의 유기적 구성이 유사한 경우이다. 논의 전개의 출발 검으로 발전 수준이 동일한(동일한 유기적 구성) 생산 기술과 입금 수준

의 평등화(增價 率 의 동일화) 를 가정하자. 교환은 정확히 평등할 것이다. 생산 기술이 동일한 상태에서, 현재 어떤 이유로 A 에서의 입금이 B 에서 의 입금의 1/5 밖에 되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를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같다.

I 잃t!~ 때작일:츠tl> I( 가변V 자 본 )1( Jfl m 價 )1( 가 V 츠 ])1( 이 p운 )1( 생 :가 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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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와 B 는 동일한 기술로 동일 생산물(가령, 석유)을 생산하고, 이 생 산물윤 세계시장에 판 것이다. 그렇지만 A 에서의 실질임금은 B 의 그것 보다 낮은 상대이다. 생산물은 세계 시장에서 유일한 가격을 가져야 한 다. 이 가격은 무엇음 표시하는가? 국가 사이의 가치 이전이라는 말 속 에는 무엇이 내포되어 있는가? A 에서의 增價 率 의 상승은 A+B 의 평균 이윤울을 I4% 에서 20% 로 꿀 어 올린다. 임 금이 낮은 국가 (A) 는 국제 교환에 서 ――같은 생 산성 수준과 동일 노동 총량(칙집과 간접)을부입하고서도――상대국 B 보다적게 받는 다(정확히 76%). 엠마뉴엘은 이러한 교환을 전정한 불 평등 교환이라고 규정하며, 입금의 역만큼의 차이 를 보상하기 위하여 그렁게 되어야 하는 국가간 이윤울의 격차가 실로 중요한 정이란 것을 입증하고 있다. 앞의 예에서처럽 A 에서의 입금이 B 에서의 그것에 비해 I/6 밖에 되지 않는 상태에서 교환이 평등해지기 위해서는 B 에서의 이윤울이 I4% 인 데 반해 A 에서의 이윤울은 26% 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두번째 경 우는 실제 상황에 사실적 으로 부합된다. 왜 냐하면 많은 부분에 있어서 제삼세계의 수출은 생산성이 낮은 후진적 농업 부문 의 농업 생산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략 35° 여 달 러 (1966 년) 에 달하는 처 개 발국의 총수출액 중에 초현대 적 자본주의 부문 (석 유, 광물칙 , 1 차 무기 재 료, 중남미 에 서 의 Unit ed Fruit 나 아프리 카와 말레이지아의 Un il ever 에서 관리 생산하는 현대적 푼렌데이션)이 적어도 전체의 3/4 인 260 여 달러를 차지한다. 만약 이들 생산물이 동일한 기술 로-그러므로 동일 생산성으로――선전국에서 공급되었다고 하면, 그리

고 100% 의 증가융(대략 3.5 정도의 자본계수에 해당하는것)로 평군 이운 울이 고정자본의 15% 정도이고 고정자본의 I/7 로 표시되는 작업에 두입 된 불변자본 (10 년에서 5 년 사이 에 대체, 평균적으로 7 년)이 있는 상대 라면, 그것들의 가치는 최소한도로 34° 여이 될 것이다. 그것만 가지고도 주변부에서 중심부로의 가치 이전은 아무리 적게 평가하더라도 80 여 달 러에 달한다. 취약한 생산성을 지닌 후진적 부문에 의해 공급되는(전통적인 시골에서 공급되는 농업 생산물) 제삼세계의 또 다론 수출품에 있어서는 사정이 더 욱 자명할 것이다. 여기에서의 노동 보수(입금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차 이는 더욱 더 열악한 생산성운 수반한다. 어떤 비울로인가? 일반적으로 상호 비교될 수 없는 생산물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무어라 말하거는 어렵 다. 주변부에서는 단지 차, 커피, 카카오만을 재배할 뿐이다. 그런데 주 변부에서는 보수가 생산성보다 더욱 더 비례적으로 열악해진다는 것은 확 실히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농부가 I 년중 100 일간 매우 고된 노동의 댓가로 받은 수입으로 유럽에서 수입된 공업생산물을 받는 다고 하자. 그리고 그 공산품위 가치는 유럽의 기능공의 약 20 일간의 보수에 해당된다고 하자. 만약 이 농부가 현대적인 유럽 기술로 생산 활 동을 한다면(그리고 이것은 농학자에 의해 진행된 현대화 계획에 의해 구 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는 일년에 300 일을 일하고 양적 으로 휠싼 많은 6 배의 생산물을 얻을 것이다. 그의 시간당 생산성은 2 배 또는 그 이상이 될 것이다. 이령게 될 때 교환은· 실로 불평등하게 된다. 만약 노동의 보수가 그 생산성에 바례한다면 이 생산물의 가치는 약 90 여 달러가 아니라 그것의 두배 반인 약 230 여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변 부에서 중십부로의 가치 이전은 약 140 여 달러에 달한다. 이 가치 이전 이 현대화된 산업생산물에서 발생하는 가치 이전보다 훨씬 더 비례적으 로 많다는 사실온 놀라운 것이 아니다. 실로 수입된 기계장비의 내용물은 상당히 높은 수준인 데 반해 전통적인 농업 생산에서는 그 생산물 가치의 총량이 거의 노동력에 의촌한다. 결국 주변부의 수출이 대 략 350 여 달러 라면, 그리 고 노동의 보수와 생 산성이 중십부와 동일한 경우, 그 가치는 대략 570 여 달러가 될 것이다. 주변부에서 중십부로 은폐된 가치 이전은 불평등 교환의 메카니즘을 통해 대 략 220 여 달러 에 달한다. 그것은 주변부에 주어지는 민간자본과 공공 원조의 3 배에 달한다. 이것으로 볼 때 제상세계가 전적으로 수탈을 당하

고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선진국에서 수입하는 제삼세계의 생산물은 선전국 국내 생산의 2~3% 에 지나지 않는다• 1966 년에는 12,000 여 달러를 선진국에서 수입하였다. 그러나 처개발 국가의 수출은 그들의 국내총생산(약 1,500 여 달러)의 약 20% 를 차지 한다. 불평등 교환에 따른 은폐 된 가치 이 전은 국내 총생 산의 약 I5% 를 차지하며, 그 규모는 상대적으로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엑수이 고 여기에서 주변부 성장의 장애와, 중십부와 주변부의 뿌리깊은 격차의 원인이 설명된다. 이 이전이 수혜자인 중심부의 관접에서 볼 때에도 중십 부 생산물의 I.5% 에 달하므로 무시할 수 없다. 이 이전은 득히 직접적 수혜자인 거대 기업에게 있어서는 실로 중요한 것이다. 불평등 교환의 주장은 3 가지 유형의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Bett el heim 은 마르크스에 의거하여 국제관계의 영역에서 생산 가격에로의 가치변형 과 增價率이 중십부에서 훨씬 높은 것인데도 Emmanuel 은 이에 따론 적 절한 가선의 추가에 의해 모델을 확장함으로써 적절한 논리적 결론을 추 론해 내지는 않았으며 불평등 교환의 희생자는 후진국이라는 결론을 도출 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또 다론 비판은 중심부에서는 노동생산성이 휠 씬 높으므로 임금도 훨씬 높다는 것으로 이 논거는 불평등을 〈합리화〉하 는 이론이다. Emmanuel 에 의하만 마르크스에게 있어서는 노동력의 가 치가 노동생산성과는 독립적이타는 접을 상기해 봄으로써 이에 대한 . 반론 을 제기할 수 있다. 세번째 비판 그룹의 태도는 의견상 훨씬 더 교묘한데 그들은 불평등 교환이 그 언어 자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Emmanuel 에게는 가치변형 모델의 사용권을 부여하지도 않는 다. 이 비판자들에게 있어서, 이 모델은 자본주의 생산양석의 들 속에서 만 의미를 지니며, 다른 구성체 사이의 관계로 확장 • 적용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세계자본주의 단일 체계가 촌재함을 부정하는 것 이고, 말하자면 제국주의 그 자체를 결국 부정하는 것이다. 물론 변형 모 델이 모든 상황으로 확장되어 적용될 수는 없다. 가령 고대 그리스와 페 르시아의 교역관계물 분석하는 데는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의 경우와는 다론 것이다. 중십부와 주변부는 자본주 의 체계 그 자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 산양식 에 판한 이 론을 창출해내 고는 생 산양식 의 세 가지 조건을 추상적으로 정의내렸다. 생산물의 상품형태의 일반화(일 반화된 시장), 노동력의 상품형태의 일반화(단일 노동시장의 촌재), 자

본경쟁의 일반화(이윤울의 평군화 를 표시하는, 획일적으로 평등한 자본 시 장의 존재). 이 세 가지 조건은 마르크스가 연구한, 그리고 I9 세기 중엽 영국이 그 연구의 구체적 모델이 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실체를 추상적 으로 해석한 것이다. 세계적 자본주의 체계 또한 실체의 도안이고, 만약 그것의 이론적 분석을 원한다면 마찬가지로 그것이 추상적으로 정의되어 야 한다. 이러한 수준에서, 세계 체계는 세계적 상품시장의 촌재와 자본 의 세계적 이동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다. 제계적 상품시장이 존재하기 때 문에 국제적 수준에서의 가치 문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련 문제 가 촌재하므로 가치변형 모델을 사용해야 한다. 엠마뉴엘은 제계체계를 프롤레타리 아 국가 Nati on s Proleta i r e sm 와 부국 Nati on s ric h es 으로 분류한다. 다시 말하여 현재 의 제 상제 계 는 전자에 속하고 선전공업 국은 후자에 속한다고 본다. 그런데 전자로부터 후자로 잉여가치의 이전이 진행되면서 부국이 제삼세계 를 초착취 sur-exp lo it at i on 하고 있 다는 사실에 서 , 이 두 세 계 의 대 립관계를 고전적인, 마르크스의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대립관 계로 대체시킨다. 엠마뉴엘에게 있어서 프롤레타리아들의 초국가적 연대의식은 현실을 몰이해한 것으로 간주되며 부국, 즉 중십부의 프롤레타리아는 그들의 위치를 유지시키기 위하여 자국의 부르주아 와 공모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본다. 이제 그의 견해를 인용하여 보 자 (A. Emmanuel, 전개서 p. 210)•

27)

자본주의 最先進國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국가이 익 울 방어 하는 데 앞장서 논 경우도 종종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부두 하역자들이 파업을 일으 켰을 때, 존슨 대통령의 〈이러한 노동쟁의는월남전쟁 수행에 지장을 초래 한다〉는 말 한마디 에, 과업 노동자들은 파업 을 중단하였다. …… 과거 에 부두 노동자들이 제국주의침략을 반대한다는 의미의 파업운 하였다면 현 재 그들은 이러한 침략에 조금이라도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하여 파업을 중단한다. 그들은 쿠바와 무역을 하는 회 2R 의 선박에서 하역하기를 거절 하기 도 한다. 물론 정 부의 경 고에도 불구하고……

마국에서 현재 봉 수 있는 혹 인 들 의 폭동 은 그 폭력적 수 단이나 형 태로 볼 때, 이것은 오히려 〈 위대한 미국사회 〉 와 그의 해외침략에 반대한 비 판 이라기보다는 동업자로서 자기 몫을 갖지 못한 자의 분 노의 표 현 이다. 이 폭동기간 중 그들이 내세운 주장 은 사실에 있 어서는 일 종 의 협박이었다 . 즉 미국의 흑인은 자국에서 白人에 의하여 부정되 는 원 칙 때문에 아시아에 가서 싸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여 만일 이 원칙이 그 들 ( 혹 안) 에게도 인정이 된다면_그것은 구체적으로 불 가능한 것은 아니다-그 들은 베트남 민중 을 쳐부수는 데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 을 것 이다. 오스카 탕즈 0. Lang e 의 〈 민중적 제 국주의 I' im p e ria l is m e du pe up le > 는 오늘날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하나의 생생한 현실로 등장 한다. 물론 30 여 년 전만 하더 라도 〈 사회 국수주의 socia l p a t r i o t e 〉 라 는 칭호는 모든 노동자( 참 여하는)들에게는 용서받을 수 없는 모욕 이었다. 그런데 현재 누가 그런 표현을 쓸 수 있을 것인가? G. 미 르달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만중운동’이란 50 년 전에는 국제주의의 성격을 떠었으나 현재에는 편협한 만족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 영국에 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잇는다. 〈 노동 당 출신의 경제전문가들은 그들의 우익찬구들보다도 : 더욱 협소한 국수주의적 公 準 의 대두리에서 공부한 사람들이다. 〉 이렇게 말하면 서 미르달은 〈인류전체의 십리적 기저에는 인류 사이의 연대의식은 촌재하지 않는다 〉 2 8) 라고 결론 내린다.

:z8) G. My r dal, Une economi e int e r nati on ale, P.U.F., 1958, Paris , A. Emmanuel, 전게서에서 재인용.

현재 선전자본국의 노동계급은 제삼제계에 대한 태도에서, 마치 I9 세기 영국의 노동계급이 여타 세계에 대하여 갖고 있던 태도와 접접 흡사하여 간다. 국내적으로 그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대 단히 능률적이고도 폭력적인 행위_여기에 때때로 해의문제에 관 한 전위 적 태 도의 의 사 표명 울 한다. 이 것 은 챔 버 린 Chamberli n 이 다음의 등식으로 표현한 바와 갇다. 죽 민주주의=제국주의+사회 개혁. 사회주의자이며 마르크스주의자이고 동시에 다윈이스트인 칼 피어슨 K. Pearson 은 이미 1894 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어떤 사회주의자라도 그가 신중한 사람일 때, 그리고 만 일 랑카셔市가 굽주리게 됐을 때 우간다의 주민을 착취하는 행위를 거철하지 않을 것이다. 〉 2 9)

29) Semmel, Imp er ia l is m e, p, 25, Emmanuel 의 인용.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영국의 노동자가 지구의 노동귀족 노릇을 하고 있을 때, 이들에 관하여 이미 어떤 환상을 갖지 않았었다. 그 둘은 임금을 덜 받는 아일랜드 노동자에게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 하고있다. 〈 영국의 주요 공업중심지에는 아일랜드출신 프롤레타리아와 영국 인 프롤레타리아 사이에 심각한 반목이 있다. 천박한 영국노동자는 아일랜드 노동자를 증오한다. 그들은 아일랜드인에게 대하여 민족 적, 종교적 반감을 느깐다. 그들은 마치 미국 남부의 ‘가난뱅이 백 인’이 흑 인 노예를 쳐다보듯 아일렌드인을 쳐다본다. 〉 30)

30) Marx-Eng e ls, Texte s sur le colonia l i sm e, Emmanel 의 인용.

이상에서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영국인 프롤레타리아의 본성 울 주처없이 비판한다. 그들은 이 노동자들의 지도급들이 보이는 기회주의나 배신행위 따위는 취급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 날 노동당의 간부나 당 소속 인텔리의 머리속에는, 그리고 일부 자 유주의 부르주아의 머리속에는 오히려 노동계급의 감정과 반웅에 서는 볼 수 없는 사회주의사상과 세계주의 사상이 있는 듯싶다. 국 회의원 선거가 있을 때마다 보수당원들은 노동당을 가리켜 그들이 또 다른 국영화를 최책한다는 말만 꺼내어 노동당을 대단히 곤혹 스럽게 만들었다. 물론 노동당은 즉각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하 며 이는 〈 중상모략 〉 이타고 반박한다. 제삼세계의 대표들은 이 접에서 아무런 오해를 하고 있지 않 다. 그들의 분석은 서구 마르크스주의자의 그것보다 오히려 정확하 며 , 그들은 유물사관의 방법 론을 사용하여 극히 현실적 인 결론에 도달하고 어떤 환상도 갖지 않는다. 〈 내가 오랫동안 믿었던 것과는 반대로 프랑스에서 촌재한다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와 자유주의자 들의 촌재는 알제리 문제의 기본적 여건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다주

지 못하였다 .31) 결국 계급이란 한 민족을 초월하여 통합될 수 있는 구성은 아니다. 그 중거로서 서구의 노동계급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후진국과의 교역에서 생간 이득의 일부를 가로첸다. 〉 이상 은 마마두 디 아 Mamadou Di a 의 성 명 이 다. 32)

31) F. Abbas, La huit colonia l e, Presence Af ri c a in e , Le Tr im, 1962, Emmanuel 32) M에 am의a한do u인 용D.i a , Nati on s Af ri c a in e , p. 7, Emmanuel 에 의 한 인용.

이상에서 우리는 선전국의 노동자. 또는 프롤레타리아들의 에고 이즘을 하나의 현실로 보는 엠마뉴엘의 시각과 그를 뒷받침하는 역 사적 사건을 보았다. 죽 엠마뉴엘에게 있어서 노동계급의 세계적 연대의식은 어디까지나 화려한 환상이며 〈 공산당 선언 〉 에서 부르짖 는 〈모든 나라의 프롤레 타리 아는 하나로 뭉치 자 ! >( pr oleta ir e s de to us pa y s, unis s ez vous! )는 외침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제계 체계를 이상과같이 〈 프롤레타리아 국가對 부르주아 국가〉로 대립시키는 엠마뉴엘의 시각에 대하여 강한 반박 도 없지 않다. 그의 학문적 선배 인 베 멜 렘 Ch. Beth elheim 은 엠 마뉴엘의 〈 불평 등 교역론〉에 서론을 쓰면서 (책의 뒷 부분에서 베멜램은 ues th eoriq u es 라는 제하에 그의 학설을 동렬히 비판하고 있다)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 다. 첫번째로 엠마뉴엘은 원칙론상에서 마르크스주의적 현실분석에서 이 탈하였 다는 주장이 다. 내가 보기 엔 마르크스에 의 하여 창시 된 인석 론적 단절과 그로부터 설정 된 계급의 위치에 관한 관접을 인정하느냐 또는 부정하느냐 하는 원칙적 인 문제에서 엠마뉴엘과 나의 위치는 분리된다. 죽 이론적인 차원에서 (물 론 사회적 차원이 아닌) 이 인식론적 단철을 기준으로 하여 두 가지의 각 기 다른 혁명적 행동과 사상의 경향이 생긴다. 그 첫번째 경향은 마르 크스의 위치 (후기의 마르크스)를 따르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인식론적 단 절을 이루었고 그로부터 유물사관을 형성시키는 쪽이며, 그 두번째 경향 온 비판 이전의 위치에 머물렀거나 이 위치로 되돌아온 경우이다. 이 두

번째 경 향은 오늘날 다수의 소 부르주아들의 혁 명 운동을 포합함으로써 십 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 들 은 무정부주의자이거나 또는 극좌세력 一여기에 관하여 기회있을 때 상세히 다루겠다一으로서 현재 남미의 혁명세력에서 볼 수 있는 경향이다. 이 경향은 프볼레타리아의 지도적 역 할을 부정하며 마르크스주의에 의하여 인정된 근본적인 대립관계, 죽 부 르주아와 프롤레 타리 아의 대 립 관계 에 〈 선진국과 후진국〉, 또는 〈부국과 빈국〉의 대립관계를 대체시키려 한다 .33)

33) A. Emmanuel, L'echang e ine g a l, p. 13.

베멜렘에게 있어서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중요한 것은 〈인식론적 단절 〉 이며 엠마뉴엘은 우선 출발접에서부터 원칙적으로 이탈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리하여 (그의) 세계경제체제의 새로운 대립관계 의 설정은 〈소시민적〉 사고의 소산이라는 접이다. 베 멜 램 은 정 통 마르크스주의 자 orth o doxie 로서 그의 비 판을 뒷 받 침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 이 상과 같은 사고는 부국의 프롤레 타리 아 를 마치 빈국의 착취자로 만 들고 있다. 다시 말하여 부국의 프롤레타리 아는 그 자신이 이 미 착취 당하고 있지 않다고 간주하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은 그들의 (부국의 프 롤 레타리아) 노동이 더 이상 증가의 근원이 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 과 같다 . 그런데 실제 에 있어 서 부국의 노동자는 빈국의 노동자보다 일 반적으로 더욱 더 착취(엄격한 의미의)되고 있으며, 이 접은 마르크스 7 l­ 이미 강조한 바 있다 .3‘)

34) A. Emmanuel, 전게 서 , p. 327.

이상의 논쟁에 우리가 끼어들 생각은 전혀 없으나 다만 한 가지 의문은 제기하고 싶다. 죽 베 C빌 렘의 주장대로 선전국가의 노동자가 아칙도 (엄격한 의미에서) 착취를 당한다고 봉 수 있느냐는 것이 그 첫째이고, 선전국의 노동자와 후진국의 노동자 사이에 어떤 연대의 식을 찾을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그두번째이다. S. Am i n 의 말처 럼 베멜렘은 아직도 고전적인 테두리, 죽 레닌 이전의 위치에 머물 고 있으며, 그는 계급두쟁을 단순히 국가적 차원에서 고려하며, 그

것은 마치 제계체계가 〈국가자본주의의 並列인 것처럼 인석하여 현 재의 국제문제를 전혀 다론 영역으로 취급하고 있다 .35) 한마더로 말하며 베멜램의 입장은 정몽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그의 분석의 대 상은 고정되어 있고, 현대 경 재 분석에서도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를 두영시키고 있다는 겁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실온 현대의 선전자본주의의 노동자계급은 마르크스시대의 그들과 다르다는 접이며, 이들은 이미 부르주아화되었다고 볼 수 도 있다. 죽 여기에서는 의식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생긴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엠마뉴엘의 관접은, 국가간의 연대의식( 특 히 노 동자 계급간)은 촌재하여 본 일이 없고, 후진국의 노동자는 선전국 의 노동자와 같은 생산성을 가졌다 하더라도, 단순히 후진국 사람 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입금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다. 또한 이러한 처임금에 의한 잉여중가분이 중심부로 이전되는 과정에서 득을 보는 사람은 중십부의 자본가, 노동자 모두가 포함 된다는 것 아 다. 그는 귀 드 라샤리 에 르 Guy de Lacharr i ere36) 를 인 용하면서 다음같이 말하고 있다. 〈귀 드 라샤리에르는 지금까지 시장가격에 관한 주류경제이론을 전혀 비판하지 않았을 분 아니라 불균형교환론 37) 을 마르크스주의적 이단에 의한 논리로 치부했었다.…… 이 낮은 생산비(선전국 제품과 경쟁을 하는 후진국의 제품의 생산에 드는)는 생산의 합리화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노동자의 처입, 여성 • 아동의 고용, 사회보장 제 의 不在와 무의 미 한 역 할에 기 인한다. 즉, 이 는 Dump ing soc ial 에 의한 것이다 .38) ……

35) S. Ami n, L'accumulati on a l'echelle mondia l e, p. 44 참조. 36) Guy de Lacharrie r e, Commerce exte r ie u r et sous develop pe ment, 1964. Paris , Emmanuel 에 서 재 인용. 37) l'ec hang e i ne g al 은 넓은 뜻의 불평등교역이며 l'echang e non·e qu i valen t e 는 칙역하여 〈불균등 교역〉이라 한수 있다. 38) Emmanuel, 전게서 p. •l l 7 에서 재인용.

[제 6 장】 제삼제계의 공업화는 가능한가?

우리는 지금까지 선전공업국의 산업혁명의 발전과정을 요약하였 고 이어서 현재의 제삼세계가 처해 있는 경제 • 사회적 여건, 특히 인구와 농업이 산업혁명 초기의 유럽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불리한 상황하에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여건은 식민주의에 의하여 造型 발전(처개발의 발전)되었으며 , 그로 인하여 산업화를 추전하는 데 여러가지 장애에 봉착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선전국의 산업화에서 특히 강조되었던 사실로서, 이 변화는 어디 까지나 전보적 변화이며 과학에 힘입은 혁명적 변혁이 아니었으며, 이러한 전보는 60~70 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을 두고 서서히 전 행되었음은 이미 강조된 바 있다. 또한 이 전행과정에서 우리논 농 업의 발전이 그 산업화를 접화시키는 결정적 요인이었음도 강조하 였다. 즉 선전국에서는 부유하여전 농촌에서 소비재수요(주로 칙물) 의 중가가 있었고,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한 기계(생산재)의 생산이 前方, 後方 연관효과를 일으키며 산업의 전반적인 발흥과 경제의 성장을 유발시켰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초기의 농기구 수요증가는 소비재산업 및 그 기계의 생산중가와 병행 진행 되었다는 검도 지적하였다.

즉 선전국의 산업화는 소비재산업과 생산재공업이 동시에 일어나 떤서 균형있는 산업조칙의 형 성과 경제성장을 실현하여 나갔다는 점이다. 이에 비하여 후진국의 산업화는 이상과 같은 과정과 경로 를 갖지 못하는 가운데, 이 과정과 경로를 생략하고, 선전국에서 장기간에 걸쳐 생성된 공업경제 를 이식시키는 데서 여러가지 구조적 모순과 발전의 장애에 봉착한다. 이제 후진국 산업화의 경험의 예 를 들어보기로 하자.

제 1 절 〈공업을 유발시키는 공업〉 정책의 예 남미에서 〈 수입대체산업〉이라고 불리는 소비재 공업이 건설되거 시작한 것은 양차대전 사이 죽 1920~40 년대였다. 앞에서도 언급 했듯이 이 산업은 유럽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촌하던 생활필수품을 칙접 생산하기 위한 방책에 의한다. 그리고 이렇게 토착산업이 일 어나게 된 배경에는 ® 열대, 아열대 특작물 및 광물의 수출둔화로 인한 수입능력의 감되 ® 2 차대전으로 인한 유럽으로부터의 수입 장애 등이 원인이 되었다. 남미에서 소비재 위주의 수입대체산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기간 은 I950 년대이다. 이 기간 많은 공산품수입이 국내생산으로 대체 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대부분의 후진국이 공업화 전략을 채택하 면서 그를 통한 선전화에 낙관적인 기대를 갖고 있는 때이다. 그리 고 남미에서의 소비재산업 전설이 그 성공의 예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을 때이다. 이 기간은정부가 공업화에 정책적으로 그리고 적극적 으로 개입하거나 주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I) 이때에 . 사용된 공업

1) 이런 겁에서 한국은 그의 본격져인 공업화정책올 1960 년대에 둘어서면서 추진 하는 후진성운 보였다. 물온 공업화에 뒤늦게 눈을 돌리계 된 배경에는 한국전 (1950~53 년)과 그 전후복구사업이 있었기도 하지만 대제로 위정자둔의 겅계져 무지에 기인하기도 한다.

화 장려책으로서 경쟁상품의 수입금지를 통한 유치산업의 보호가 가장 일반적인 조치였고, 그 밖에도 조세감면, 재정지원, 금융대출 목혜 등 다양한 것들이 있었으며 우리는 이와 유사한 조치를 한국 의 수출산업 육성정책에서 취해전 수단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 목 칭이 있다면 남미나 기타 후진국의 소비재 공업전설은 이른바 토착자본에 의한 것도 있으나 의국인기업에 의한 경우도 있 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소위 미국이나 유럽의 다국적기업의 역 할은 주목할 만하다. 어쨌든 이 국내생산은 보호관제의 혜택으로, 그리고 높게 책정된 국내판매가격에 의하여 높은 이윤을 실현시켰 으며 이러한 상황은 의국인기업의 현지두자를 더욱 장려하는 결과 로 나타났다. 이 수입대체산업은 초기에 있어서는 주로. 유럽과 미국에서 생산 한 부품의 조립이라는 수준을 넘지 못하였고, 이어서 직물공업이 생겼다. 또한 시멘트처럼 분량이 큰 제품은 현지에서 생산함이 유 리하다고 판단되었고, 이것은 당시 〈 현대화 〉 의 신화와 더불어 추전 된 하부구조(도로, 댐, 항만시설, 공항, 공장건물 등)의 건설 ?1 확장됨 에 따라 그 수요가 급증, 현지생산이 유리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 련의 산업의 발흥은 남미 일부국가를 중전국의 범주에 넣으면서 후 전국의 공업 화에 낙관적 전망을 갖도록 하였 다. 그러나 1960 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이 〈중전국 〉 의 공업생산은 정체하거나(정지된 성장 Crois s ance arrete e ) 둔화하였고 마르크스주의 계연의 종속론자들은 이러한 산업화 방식의 〈환상 〉 을 고발하였다 . 그것은 이상의 산업화가 누적적 성격을 갖지 못하여 산업전반에 연 계되지 못하고 따라서 자립적, 자생적 공업화를 실현시키지 못한다 는 지적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I 중공업 정책 중공업전설이 자립적 경제발전과 향후 경제성장의 기반이 된다 는 인식은 이미 1917 년 러시아의 볼셰비키혁명과 더불어 소련에서

강조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득 히 스탈린은 중공업전설에 〈낭만 적인 애착 〉 2 ) 을 갖고 이의 중정개발울 도모하였다. 1945 년 이 후 많 은 신생국 가운데는 사회주의와 중공업전설만이 공업화시거를 단축 시키며 산업화 를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 이 분야에 중정두자를 한 경우도 있다.

2) Casanova , Prin c ip le s d'analys e economi qu e.

이제 다시 남미로 돌아오자. 이 지역의 소비재 대체산업이 60 년 대 중반에서 그 한계성을 보.이자 공업정책의 전환이 시도되었고 납 미의 국가들은 〈 산업화를 유발시키는 산업 〉 의 건설에 뒤어들었다. 죽 이 산업은 연관효과를 갖고 있다는 접에 주목하였고, 그중에 서도 1 차 산업혁명의 상칭인 철공업과 금속공업, 그리고 2 차 산업 혁명의 상칭인 중화학공업이 첨병으로 선택되었다. 남미의 여러 국 가, 인도, 알제리 등은 그리하여 이상의 중공업을 건설하였고 한국 온 1970 년대에 들어서면서 이 분야에 집중두자를 하였다. 2 후진국 중화학공업 의 제 문제 이렇게 건설된 중화학공업은 일반적으로 다음 같은 이유에서 거 의 실패하고 말았다. ® 판로와 시장의 부족 ® 수익성에 입각할 때 그 최적규모보다 적은 소규모의 단위 이상의 결과로서 이 공업에서 제조된 시실재의 가격은 국제시장 가격보다 월등히 높았다. 그런데 이 산업의 제품을 타산업에서 사 용할 때, 그 높은 가격으로 인하여 후방산업의 가격상승요인이 되 었고, 그것이 경제전반에 인플레이션 효과를 일으키면서 국민생산 시설의 효율성을 떨어드리는 결과를 가쳐왔다 .4)

3) 한국은 그 반대 경우로서의 한 예이다; 4) Mois e s Ikonic o ff , Trois Theses erronees sur !'ind ustr ial i sa ti on du tier s monde, Revue du tiers monde, avril- ju i n 1987,

다시 말하여 선전국의 산업화과정에서는이상의 두 분야――철공 업 및 금속공업과 화학공업 __- 가 경제발전을 가속화시켰다면 제삼

세계에서의 중화학 전설은 〈 경제봉쇄 〉 를 일으키거나 장기침체의 원 인이 되었다. 죽 남미의 경우 소비재 중심의 산업구조가 일정 한계 에 도달하여 그의 타개책으로 채택한 전략이 오히려 경제봉쇄물 누 적적으로 일으켰던 것이다 .5)

5) 한국의 중화학공업이 일으킨 경제침체현상은 뒤에서 다두겠다.

중화학공업 건설이 경제전반에 비용인상의 효과 를 과급시키지 않 은 경우가 있다떤 그것은 이 분야에 관리가격제도를 부과함으로서, 부정적 결과를 제한시켰기 때문이다. 죽 대부분의 국가는 이 분야 가 경제전반의 가격인상 요인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이 러한 관리가격은 때에 따라서 너무 낮게 책정되기 때문에 생산업체 는 적자운영을 하게 되고, 결국 정부는 여러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기업의 도산을 방지하여 왔다. 그리고 이의 수단은국가에 따라 성격을 달리한다. 남미에서는 이 중화학공업 분야의 두자비용을 철감시키기 위하여 정부가 공장 건 설에 필요한 모든 시실재를 선전공업국으로부터 수입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그리고 이 수입을 위하여 선전국은 그들간의 경쟁에 따 라 대단히 유리한 조건의 융자를 하여 주었다 .6) 이에 비하여 인도 와 알제리, 그리고 한국 등에서는 정부가 보조금 등을 통하여 적자 기업을 지원하는 방법을 채택한다. 그런데 이 중화학공업에의 정부 지원은 그의 건설단계에서와 마 찬가지로 국내자원 배분의 왜곡을가져온다. 한국에서도 1976 년중 화학공업에의 집중두자는 타산업에의 자금압박을 유발시켰다. 인도 에서도 이 산업에의 정부보조금 지원으로 말미암아 생산적인 他산 업이 위축되었다. 알제리는 석유수입 자금으로 철공업과 석유화학 공업의 적자 및 비효율성에 따른 낭비를 충당하였다. 후진국의 중공업 건설은 그것이 전체 산업의 수요에 의하여 자연 발생적으로 서서히 진행된 것이 아니고 사후적으로 독수 목표를 가 지고 기촌 경계조칙에 이식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선전국의

6) 그러나 남미의 중공업 건설은 누져되는 의제 요인 중 하나이다. 외채문계는 따 로 취급한다.

산업화과정에서 봉 수 있던 것처럼 〈 자본축적과 경제잉여의 창출 〉 7) 을 유발시키지 못하였다. 오히려 이 산업은 경제의 타분야에서 형 성된 잉여 가치를 흡수함으로써 그 운영이 가능하다. 분만 아니라 이 산업은 외부로부터 끊임없는 융자를 필요로 하며, 결과적으로 외채의 누적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8)

7) M. Jko nic o ff , 전개논문에 서 인용. 8) M. lkonic o ff , 전계 논¾oil 서 인용.

3 중공업과 시실재 공업 우리 는 후진국에 서 〈 산업 화를 유발시 키 논 산업 〉으로서 의 중화학 공업, 그중에서도 독히 철공업 • 석유화학공업 등의 전설이 선전국에 서처럼 연관·파급효과를 일으키지 못하고 오히려 경제적 비효율 의 근원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 산업이 경제에 연관 효과를 일으키지 못하는 이유로서, 이 산업건설에 사용된 시설재가 거의 수입품이었다는 정을 지적하였다. 또한 우리는 앞에서 영국보 다 늦게 산업화를 추전한 프랑스 등 대륙국가가시설재를칙접 생산 함으로써 그 수입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이러한 자체 생산 이 후발 산업화를 일으켰음을 보았다. 그러면 이 산업에 사용된 시 실재를 국내생산으로 충당했을 때 그것은 선전국에서처럼 연관효 과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이상과 같은 의문에 대한 부정적 해 답으로서 우리는 역시 인도의 경우를 예로 보기로 한다. 인도는 특히 소련, 미국, 영국으로부터 기간산업 분야의 공장을 수입하였고, 다론 한편으로는 자체의 능력으로 시실재 산업을 건설 하였다. 그러나 이 산업은 기술적인 낙후성을 보였고, 이 분야가 국내생산자의 독점상태하에 있었기 때문에 낙후성은 개선되지 않 았다 .9)

9) Mrin a l Datt a Chaudhuri, La sta g n ati on de l'ec onomi e ind ie n ne : une inte- rpr e ta t i on , Indep en dance et sty le de deve/o ppe ment, Paris , OECD, 1985.

다음으로 인도와는 조금 다론 경우인 한국의 중화학공업 건설과 그에 따른 연관효과를 살펴보자.

한국의 공업화 전략은 원자재, 중간생산재 및 시선재를 수입, 가 공하여 주로 미국시장에 수출함으로써, 이 메카니즘을 통하여 경제 성장을 도모하는 이른바 의부지향적 발전전략이다. 이 전략은 선전 국의 도약기에서 볼 수 있는, 소비재와 시설재를 동시에 생산하던 도식과는 전혀 다론 형태이다. 죽 한국의 중화학공업은 산업구조와 연계되지 않은 가운데 기존 구조위에 이석된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될 수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한국 경제기획원이 작성한 제 4 차 5 개년 개발계획에 나타난 전설 취지가 찰 설명하여 주고 있다. 이제 이 계획안에 담은 중화학 공 업육성 필요성의 논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한국의 공업구조는 경공업 중십으로 구성되었으며 중공업의 비중은 지극히 미미하다는 약접을 갖고 있다. 또한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에 기초한 공업의 발전은 한계성을 갖 고 있으며 지속적인 성장울 기대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국내시장 에서의 경공업제품에 대한 수요의 소득탄력성이 감되됐고, 경공업 제품의 수출이 선전국의 수입규제 장벽에 부딪치게 되었으며, 한국 보다 후진상태에 있는 국가들이 처임금을 앞세워 제계시장에 침투 함에 따라 경쟁력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 한국은 중 공업을 위주로 하는 공업구조의 개변을 해야만 한다 .10 ) 결국 가속적인 성장세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노동집약적인 경공 업을 자본집약적인 중공업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11) ® 수출목표는 정치체제의 효울성을 보여주는 증거인 동시에 경 제성장의 쳐도로 간주되었으며 1991 년에는 수출총액이 500 여 달러 (1975 년도 불변가격)에 이를 것으로 추계되었다 .12) 그런데 이러한 묵 표논 제품의 구성으로 볼 때 수출수입, 즉 부가가치가 대단치 않은 경공업 제품을 위주로 해서는 달성이 곤란하며 상대적으로 부가가 치가 크고 수출수입의 규모가 큰 중화학공업 제품의 비중을 높여야 그 목표달성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미래의 수출을

IO) K.D.I. , Ii'경계사회장기전망 (1977~1991) 』. 1976. u), 12) 전게보고서.

위 하여 중화학공업 의 육성 이 필요하다는 논리 는 수출에 관한 한 목 적과 수단이 혼동되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설득력이 있었다. ® 중화학공업의 육성정책은 정치적 이유가 내포된 것이기도 하 다. 죽 공산주의 를 표방하면서 1950 년 이 후 무력 적 화통일의 환상 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복한당국의 무력강화에 대하여 한국은 자 체 생산이 가능한 군수산업을 건설할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미국 의 카터행정부가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자 현 대적 무기를 미국에 의촌하던 한국군은 국방의 자주화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화학 공업은 군수산업의 기본 조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상과 같은 논리 에 따라 한국은 1976 년부터 이 부문에 대 규모 의 두자를 감행한다• 그런데 한국의 중화학공업 건설의 특칭은, 대부분의 후진국에서 이 분야가 정부에 의하여 직접 건설되거나 이의 건설을 위한 특수 기관의 설립을 통한 간접적 참여의 방식을 택한 데 비하여, 한국에 서는 민간기업, 죽 재벌기업이 혹은 자발적으로 혹은 정부의 권유 에 따라 칙접 두자에 뛰어들었다는 접이다. 이제 한국의 중화학공 ~ 업 〈봄〉 의 배 경 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소비재산업과 경공업 분야에서 기반을 닦은 재벌기업들은 그들 의 社勢롤 확고히 해줄 수 있는 새로운 분야를 모색하고 있었다. 실제로 경공업 분야에의 루자는 이미 한계에 도달하였을 뿐 아니라 어떤 분야는 생산과잉 상태에 있었다. 결국재벌기업은새로운 돌파 구로서 중화학공업 에 의 두자를 택 하였 다. ® 두자의 기회를 찾던 이 재벌기업에게 있어서 정부의 중화학전 섣 정책은 일종의 횡재와 같았다. 더욱이 정부는 경공업 분야에 대 한 은행의 대출을 제한하였고 중화학 분야 두자에 대하여는 신용대 출을 보장하였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은행의 신용대출을 확보할수 있음은 곧 재벌이 될 수 있거나 재벌기업이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이었기 때문에, 재벌기업은 은행의 대출을 받기 위하여서 라도 중화학공업에 두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이상과 같은 한국의 특이한 경계풍토에 연유한 이유 이외에도 60 년대 중반부터 급성장한 대부분의 대기업은 의류, 신발류, 껌, 조미료 등의 생산 및 국내의 판매훌 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 적인 주력산업을 갖고 있지 못한 가운데 의형만 확장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기업은 사후적으로 기업다운 기업의 면모를 갖추기 위하 여서라도 한두 업종의 중공업 ·화학공업을 건설, 주력산업으로 육 성할 필요가 있었다. 이 상과 같이 한국의 중화학공업 은 산업 의 수요에 따라 자연발생 적으로 서서히 생성, 성장된 것이 아니라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건설, 기촌 산업조칙과 並列되었다는 특칭을 갖고 있 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중화학공업 건설이 전방, 후방산업에 연 관효과를 일으키면서 전반적인 산업화를 유발시켰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산업은 기존 경공업과 더불어 13) 산업조칙을 평면적 으로, 양적으로 확대시켰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사실상 한국의 중화학공업 건설은 수송기계와 조립금속을 제의하 고는 계속 무역적자를 보이고 있다. 특히 기계공업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일반기계의 경우 그 적자폭은 1979 년 이후 오히려 십화되 고 있다(표 39 참조). 이것은 한국의 중공업이 경공업이나 기타 산업 에 시실재를 공급하지 못하거나 부분적인 공급에 그찬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하여 주는 것이다.

J3 ) 사실상 〈중화학공업 〉의 법 주에 포함시 키는 많온 산업 --스 E 히 건자산업~ 노동집약져 경공업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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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절 제삼세계 산업화를 위한 새로운 방법의 모색 前節에서는 많은 신생국이 공업화문제에 쉽게 접근한 예를 들었 다. 물론 1 차대전중 소비대체산업으로 산업화를 시도해 보았던 납 미가 〈성장의 봉쇄〉에 봉착하면서 서구화에 실패한 예를 우리는 앞 에서 보았지만, 이상의 신생국들은 의욕과 의지를 앞세워 공장건설 에 착수하였으나 그것이 대부분의 경우 〈환멀〉로끝났다. 그로부터, 죽 이 짧은 역사의 경험을 통하여 70 년대 초기 산업화에 관한 새 로운 웁칙임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운동은 결국 제삼세계가 경제적 왜곡과 빈곤을 탈피하기 위하여 어떠한 기술을 선택하여야 할 것인 가라는 의문으로 집약된다. 앞에서도 보았거니와 산업을 유발시 키논 중공업 정책은 연관효과를 일으키지 못하는 가운데 경제침체 (소련 릿 동구권을 포함하여 )만을· 가져왔다. 그렇 다고 경 공업 중십의 산업화는 단기간내에 경제력을 배양시킬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이 로부터 출발한 새 로운 개 념 이 바로 〈적 정 기 술 tec hnolog ies ap pro p r ie e s> 에 관한 것이다. 이 새로운 개념이 계시되기까지는 많은 요인이 상호 작용하였 다. 그것은 그동안 남과 복에서 共히 경험한 개발 전략의 결과를 모두 참고하여 고안해 낸 개념이다. 죽 선전국의 경우 생산규모의

축소지향화와 소비사회의 페해에 대한 비판 및 환경보호를 위한 의 침과, 이상의 산업사회의 부정적 결과를 지양하는 〈 또 다른 발전형 태의 모색 〉 이라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그에 비하여 제상세계에 서는 모택동치하의 중국식 농촌기술의 재평가와인도식 연구개발방 식에 새로운 매력을 느끼기도 하였다. 결국 미래제계의 건설이타는 과제 아래 남과 복의 경험에서 가장 유리한 측면을 취사선택, 종합 하자는 것이 이 새로운 운동의 취지이다. 제삼세계의 산업화는 선 전국의 모방이어서도 안되고 또한 지금까지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 논 그러한 방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많은 개념―—거 의가 유사한 가운데 어떤 구분을 지울 수 없는-둘이 쏟아져 나왔다• 중간기 술 tec hnolog ies int e r media i r e s, 연성 기 술 tec hnolog ies douces, 〈 적 응된 adap tee s >, 〈 비 용이 덜 드는 pe u coil teu ses>, 〈적 정 a pp ro p r i e es 〉 기술 등의 표현 이외에도 명백한 개념구별이 없는 유사 한 용어와 전략이 제시되었다. 이제 이 새로운 운동을 요약 정리하 고 그것이 과연 제상제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 , 그 여 부를 점검하여 보기로 한다. I 중간기 술론 tec hnolog ies in te r media i r e s 70 년대초 제일 먼저 거론된 이 개념은자본비용을철약하면서, 농 경사회에서 사용하던 전통적인 기술을 개선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여기에서 〈 중간 〉 이란 용어가 내포하는 의미는 수십 년간 불변하는 전통적 기술과 다론 한편 빠르게 변화하는 첨단기술간의 등거리에 위치하는 기술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전동적 기술에서 교 묘하게 유도된 새로운 기술을 의미한다. 제삼세계의 경제개발을 위하여 이 신기술을 이용하는 것이 바람칙 하다는 철학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 14) 라는 명제에 근거를 두고 있 다. 이 철학은 제삼세계 개발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해결책

14) Schumacher, Small is beaut iful economi cs as if peo p le matt er ed, Harpe r & Row Publis h er, 1973.

울 도출하기도 한다. 즉 생산규모의 축소, 고용의 중대, 선전산업 사회와 다론 형태의 소비생활 그리고 독히 선전국의 지배적 사상 인 자연의 정복이타는 전통을 배격하고, 인간이 자연과 융화, 공 촌하는 체계 등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들이 전개된 계기 는 I 차 오일쇼크를 출발접으로 하며, 당시 많은 전문가들은 인류 의 자산을 보다 소중히 여기는 다른 형태의 에너지 사용을 모색하 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위기와 핵공포가 종말론적 위기 의식을 야기시키는 가운데 새로운 문명을 탐색하였다. 아러한 일련의 현상 의 구체적 표현으로서 서구에서는 환경보호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현재까지의 서구문화를 지배한 기술문명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 시 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초기에는 〈 연성 데크놀로지 〉 로 불리던 새 로운 형태의 기술, 죽 〈 중간 기술 〉 이라는 개념이 여러 사회에서 적 극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종교단체, 또는 급전적 그룹, 평화적 혹 은 생태학적 조칙체들이 여기에 관십울 가졌고 이어서 이의 구현 을 위한 연구단체가, 후진국보다는 선전국에서 수없이 나타나게 되 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에 대한 남부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그것 은 이 새로운 개념과 이룰 동한 개발제안이, 제삼세계를 기술적인 면에서 하위수준에 머물게 하려는 선전국의 책략이 숨어있다는 의 십을 낳게 하였기 때문이다. 선진국의 산업화 결과가 가져온 사회 적, 생태적 피해를 사전에 방지하며__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후진국의 산업 화를 도모하자는 순수한 의 도에 서 출발한 이 새로운 개발제안은 일종의 〈기술후진의 계회화〉로 받아들여전 것이다. 뿐 만 아니라 이상의 철학에 따라 제삼세계가 개발을 추전한다면, 이 는 주로 국내시장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데 그칠 뿐, 공산품의 수출 은제한을받게 되는것이다. 왜냐하떤국제시장에서공산품의 경쟁 에 이기려면 최신기술의 끊임없는 습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과 같은 경우는 그 수출을 통한 경제개발 초기 단계에서 부가 가치가 낮은 노동집약적 가공품을 대량으로 해외시장에 수출하는 · 전략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이 수출경쟁에서 탈락되지

않으려면 기술개발이 필요하며 그를 몽해 고가품을 수출하여야 한 다는 주장을 계속 들어왔다. 이 재안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학적 이유로서 대부분의 후진국의 지도급 인물은 농촌이나 도시빈민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으며, 그들이 대체로 선전국의 데크놀로지와 소비모델을 지향한 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이다 .15)

15) 한국의 경제계획수립자는 한국이 현재의 선진국권에 진입하는 것을 최종목표로 삼고 있다.

2 적 정 기 술 tec hnolog ies app ro p r ie e s16> 개 념 의 등장 이 개념은 농촌에서 사용하는 전통적 기술과 대규모의 자본집약 적 두자계획을 配合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이 개념이 출현한 시기 는, 석유가격 인상과 더불어 업청난 외환수입을 갖게 된 OPEC 회원 국이 이 특수경기를 이용, 대규모의 두자사업과 선전국으로부터의 기술도입을 하면서 산업의 지역발전을 도모하던 때이다. 또한 감 자기 부유하여진 이들 산유국이 이른바 77 그룹에서 의교적으로 우 세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던 때이다. 여정기술〉은 그것이 사용되는 지역의 환경과 기타 경제 사회조 건에 부합하는 기술을 선택하는 것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17) 따라서 각국은 그 개발전략에 필요하다고 간주되는 〈적철한〉 기술을 도입 하라는 것이다. 이 적정기술은 모든 종류의 기술을 포함한다. 즉 가장 기초적이고 단순한 기술에서 가장 세련된 첨단기술에 이르기 까지 모든 범위를 포함하며, 다만 선택된 기술도입의 전제조건으로 서 이 기술을 선택한 나라의 사회 경제적 환경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접이다. 우리는 이 이론에서 종래의 기술의 단계적 발전이라든가, 또는

16) P. Gonad, Mate r i au x po ur la pro s pective tec hnolog iqu e-p ro ducti on ,tr a vail , Revue de l'ins ti tut int e r nati< ma le d'etu d es soci a les, Geneve,1986. 17) Jos e Gir a ! et Sergi o Gonzalez, Technolog ia ap ro p riad a Univ e rsid a d Ni떠• onal Auto n ame de Mexic o , 1980.

주어전 경제수준하에서 첨단기술 수용능력의 볼가능성 등에 관한 이론이 무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의 이접이 있다면―__그것이 내포하는 모호성을 제의 한다면__이 방법은 대단히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이른바 〈기술적 복합성〉 18) 에 따른 새로운 관리체계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 나라가 산업화를 추전함에 있어서, 그 기술적인 면 에서 일정 수순의 기술을 최일적으로 도입하여 사용하기보다는, 다 양한 기술(수준상의)을 적철히 사용하자는 주장이다.

18) lgn acy Sachs, Technolog ies ap pro p ri e e s pou r le tier s monde, Pari s, OECD, J9 74-

일견 매력적이며, 제삼세계가 안고 있는 여러가지 개발상의 문제 를 해결하여 줄수 있듯이 보이는 이 제안은그러나 이 제안의 주창 자들을실망시키는경우가많았다. 이 착상이제시된지 IO 년이 지 난 1985 년경 , 일부 후진국에 서 는 기 술의 복합적 인 사용을 분야에 따라 적용하기도 하였으나 특히 농업부문―—제삼세계의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아칙도 인구의 대부분이 이 분야에 집중되어 있다_ 에서는 이 방법이 거의 채택되지 않고 있다. 생태계와 환경보호를 의식한 농촌 주거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전혀 개량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매력적, 이상적 개발방식이 그 한계성을 드러내는 이유를 간추려 보자. 첫번째로 우리는 사회학적 이유를 들 수 있다. 죽 대부분의 후진 국에서 볼 수 있는 다수의 빈민과실업자또는위장실업상태에 있는 활동인구는 그들의 고용기회를 창출시킬 수있는노동집약산업의 전 설을 원할 것아고, 비록 산업기술울 도입하거나 국내에서 연구개발 하더라도 많은 인력을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선택하게 된다. 분 만 아니라 이 〈대중〉둘은 이런 방법 이의에 다른대체적 개발방식을 택함으로서 형성될 수 있는 다른 수준의 〈사회의식〉에 관한 정보를 거의 접하지 못한다. 쉽게 말하여 대중들은 자기들의 상황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그것은 마치 〈부르주아지〉가 자기들의 기득 권에 집착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이 대중들은 산업기술의 선택에서 결정권을 갖고 있지 못하 다. 현재 제삼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초기의 사회주의적 개발방식에 서 탈피, 시장경제체제 를 체택한 상황에서 이 기술의 선택은 기업 가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결정된다. 그런데 인력의 철약이라는 측면에서, 선전국이나 후진국은 共히 같은 경영철학을갖고있다고말할수있다. 왜냐하면노동력은 기계 처럼 단순하지는 않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인력을 철약하는 방식을 택한다. 노동자는 그 수가 늘어나면 조칙된 힘으로 나타나서, 권 익의 요구와 그의 실현을 위하여 파업을 감행한다. 이러한 집단행 동이 이른바 强 性정권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탄압되기 전에는, 노동 자들은 반드시 그들의 〈 몫 〉 을 요구하게 된다. 결국 기업이 크면 클수록 다수가 되 는 인력 관리 는, 프로그램 에 따라 in pu t- o ut pu t 이 결정되는 기계(로봇 등)의 관리보다, 대단히 어려우며 우리는 현재 한국에서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적정기술 방석이 내포하는 두번째의 위험은 다음과 갇은 사실에 기인한다. 죽 이 방법은 선전국에서 시형되지 않은 일종의 기술조 합 combin a is o n t echnolo giq ue 으로서 그 진행과 결과가 미지수타는 점이다. 이 기술조합은 .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는데 그 모델의 하나로서 선전국의 중십기술에다 주변국의 지역 기술을 배합시키는 방법이다 . 다시 말하면 선전국에서 제공한 기술의 집합체 __- 대규모 의 두자사업에서―一에 지역의 부가가치를 최대한으로 두입, 배합하 는것이다. 예컨대 지역기술이 담당할수있는부분으로서 건설분야, 시설재공급, 사업의 집행을 담당하는 엔지니어링 및 기타 하청업을 들수 있다. 그러나 이 방식은여러가지 난점을 갖고있다. 죽 이러 한 공조체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두자사업을그구성벌로 세밀하게 분해하여야 하며 지역경제가 제공할수 있는부분을세밀히 조사 접 검하여, 그것을 빈톰없는 계최하에 추전시켜야 한다. 이러한 작업 은 제삼세계가 이른바

화할 수 있지만 기숟의 습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벌로 연관효과 를 갖지 못한다. 죽 이 방법은 기술 수해국이 이미 충분한 습득능 력을 보유하지 않는 한 장기적으로 볼 때 그 위험부담은 더욱 크다 고 할 수 있다. 〈 적정기술 〉 이 미미한 결과밖에 갖지 못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이의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비를보면 알수있다. 죽 1975 년 이 기 술개발을 위하여 사용된 재원은 선전국에서 기술개발에 사용된 재 원의 12, 000 분의 I 에 그찬다는 사실이 다. 19 ) 이 러 한 상황은 그후에 도 개선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후진국이 후진성을 벗어나려면 그 자체의 연구개발 능력을 함양 하여야 한다. 그런데 선전국의 對 후진국 기술원조는 제삼세계의 개발에 참여한다는 것으로만족할수는없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상호 개 발 co-develo pp emen t 〉 이 어 야 한다. 적정기술이 봉착하는 네번째의 난관은 인구의 동원에 필요한 조 건에 연유한다. 이 기술이 후진국 자체에서 개발되었거나, 또는 남 복 공동작업으로 개발되었거나, 좌우간 이것은 일상적으로 말하는 〈기술문화 〉 와 유사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이 기술문화는 적극 장려 할 필요가 있 다. J. de Noble t 20) 는 다음같이 정 의 하고 있 다. 〈기술문화란 하나의 테크놀로지가 그 사용자에게 익숙하여지면서 형성되는 사고이다. 〉 이는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 적정기술 〉 인 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 이 기술정복은 국민 전체 에 의한 再습득이며 문화와 기술의 혼합을 의미한다.〉 2 1) 그런데 이 러한 문명이 창달되기 위해서는 일련의 조건이 갖추어져야한다. 예 를들어 농촌에 적용될 기술에 있어서, 무엇이 어느수량만큼필요한 것인지는 개인과공동체의 산경험을동하여 얻어질 수 있고, 되도록 이면 의부로부터의 지원 __- 정보., 방법, 재정지원__울극소화하면

19) Jeq u ie r , Ap pro p ri a t e tec hnolog y-pro blems and pro mi se s, OECD, Pari s, 1976. 20) J. de Noblet, Manif este pou r le develop pe ment de la cult ur e tec hniq u e, Pari s, C.R .C.T., 1981. 21) A.S. Bhalla, Le dil em me tec hnolog iqu e du tier s monde,• Travail et socie t e . vol. 9, 財`

서, 이 지원도 당사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성격이어야 한다. 이것은 종래의 〈 기술원조 〉 방석의 근본적인 재고와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다섯번째의 난접은 기술의 보급과 관련하고 있으며 이는 가장 주 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상 기술을 발명하고 지역경제조건에 적 절한 방법을 개발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이 기술 울 기업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 자. 대부분의 〈 적정기술 〉 은 인도에 의하여 개발되었는데, 그것은 주 로 지역의 원자재를처리하는데 사용되는기술이었다. 이 기숟은연 구 • 개발비가 비교적 낮으면서 기술적인 해결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경우였다. 일반적으로 이 기술은 자본비용이 적게 들고소규모 생산 에 적용되는 기술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를 위한 연구개발노력 이 무의미할 정도로 단순한 것은 아니다. 이 기술은 90% 가 각 연 구소에 의하여, 그리고 나머지 IO% 만이 기업에 의하여 개발된 것이 다. 그런데 하나의 개발된 기술이 기업에 의하여 채택, 생산활등에 자동적으로이용된다고는볼수없다. 왜냐하면, 이렇게 지역에서 개 발된 기술은 기업의 입장에서 볼때 반드시 매력적이라고는할수 없 기 때문이다. 즉, 대부분의 후진국에서 과학과 기술의 연구소로 형 성되는 하부구조와 생산부문과의 연계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전무하다. 이른바 산업협동의 필요성이 아무리 강조되더라도 이것 이 구체적으로 생산활동에 연장되는 경우는 드물다는 뜻이다. 연 구소와 생산업체와의 연계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조칙적 인 메카니즘에 의하여서만 가능할 수 있다. 여섯번째로 생산시설의 축소가 기술의 단순화를의미하는것은 아 니라는 접이다. 우리는 최근 일부 산업에서, 〈규모의 경제〉의 웁칙 임이 반전되는 현상을 접한다. 물론 대기업은 지난 40 여년간 신기 술의 개발을 주도하여 왔다. 그러나 일부 산업분야에서 이 〈규모의 경제〉는 · 한계점에 봉착하였고 특히 勞使분쟁이 발생할 경우 대단히 큰 취약접을 노출한다. 분만 아니라 〈문어발〉형 대기업은 그 경영도 복잡하다. 결과적으로 일부산업에서는규모의 비경계현상이 나타나

기도한다. 이러한 축소지향 웁칙임은 제상세계로하여금, 초창기부터 대규모 의 두자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기업설립이 가능하도록 만든 다.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할것은 앞서도언급했듯이 기업의 규모축 소가 반드시 단순한 경영, 단순한 기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접 이다. 예를 들어 소규모의 제철산업이라도 기술적으로 간단하지는 않다. 일본제 미니트랙터는 1,500 개의 부속품으로 구성되었으나(대 형은 3,000 개) 그 기술수준은 대형과 다를 것이 없다. 득히 전자산 업의 〈 ch ip〉은 축소화된 기술의 대표적인 예로 들 수있는데, 이 또 한 구 기술적 측면에서 볼 때는 대단히 복잡하다고 할 수 있으며, 현대의 첨단산업에 속한다. 테크놀로지의 축면을 떠나서 일반적으로 중소기업은 그 경영관 리가 용이하다고논 하나, 경쟁시장에서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상당 한 임격성이 요구된다. 즉 중소기업은 대기업이 그 규모의 경제에 · 의하여 향유할 수 있는 완충벽을 갖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중소기 업은 생산성 제고라는 · 면에서 보다 강도 있는 요소를 동원하여야 한다. 제삼세계가 적정기술을 채택하는 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시 실재 산업의 취약성에 기인한다. 현재 제삼세계는세계의 시선재 생 산의 5% 를 생산할 따름이다. 그런데 이 시선재산업과 기술혁신 사 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우리는 앞에서 산업의 연관효과 가 산업화의 열쇠라는 접을 선전국의 예를 들어 서술하였다. 죽 시실재란 결국 생산기계류라고 할 때, 그리고 19 세기말까지는 농 촌의 대장장이가 당시의 시설재를 적당히 만들수있었다고 한다면, 현재 후진국의 대장장이논 단순 농기구(낫이나 칼 등) 이상의 기계 (예를들어 가장단순한경운기)를 만들수는 없다. 이러한 경운기 수준· 의 기계라 하더라도, 그 생산을 위하여는 일정 수준의 기술을 구비 한 산업구조를 전제로 한다. 그령기 때문에 후진국에서 접전적으로 복잡한 기술을 소화할 수 있는 하부구조는 필수불가결하며, 이를 토대로 시실재 산업도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부구조는 어

느 정도의 교육수준을 전제조건으로 하며, 이것이 형성됨으로써 선 전국으로부터 이전된 기술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서, 기 술을 최소한 재생, 모방할 수 있다. 이상과 같 은 전계조건은 또한 기술혁신 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상에서 〈 적정기 술〉 이 후진국에서 한계적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이유 를 요약하여 보 았 다. 지난 IO 여년간, 새로운 개발방식 으로 제시된 이 모델은 많은 연구 보고서와 논란을 낳게 하였으나 그 결과는 현실적으로 보찰것없었다. 대부분의 후진국에서 기업은 기술의 선택에 있어서 자본집약형 현대적 시설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의채의 상환능력이 가능한 한, 그리고 대규모의 두 자계최이 진행되는 한 계속될 전망이다. 왜냐하면 후진국에 있어서 과학과 기술의 하부구조는 아직도 불충분하여 이상의 선택에 대체 되는 그 무엇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서 이른바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 적정기술 〉 을 동한 개발론은 일견 가장 이상적인 방법인 것처럼 생각되나 현실온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죽 이상 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특히 한 나라가 어떤 방법을 택하여 산업화 를 추진하는가 타는 문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제 이 방법에 관한 두 가지 상반되는 견해를 요약하여 보자. 일부 학자에게 있어 22) 개발전략에서 선택의 대상이 되어야 할 기 술은, 철대치로서의 · 생산의 극대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생산과 노 동, 생산과 자본의 상관관계를 고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서 궁극적으로 도달하여야 할 목표는 주어전 자원을 이용, 생산을 극대화할 수 있어야 하며, 고용중대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원칙적으로자본루입이 상당히 큰 기술, 죽 가장 현대적인 시설을 근로자에게 공급하여야 하며, 결과적으 로 단위당 근로자의 생산성이 가장 높은, 그러한 시설이 공급되어 야 하며 그로부터 가장 빠른 성장속도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이론의 주창자에 따르면, 개발을 위한 산업화는 꿍극척으로

22) A. Emmanuel, Technolog ie app ro p ri e e ou tec hnolog ie sous develop pee ?, Pari s, P.U.F., 1981.

근로자의 소득을 증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이러한 명제하에 노동집약적 산업기술을 선택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죽 노 동집약 산업이란 처입금하에서만 가능하며, 이 체제논 또한 저개발 하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진국에 〈적정한 〉 기술은 저개 발 기 술 tec hnolog ie sous develop pe e 이 며 이 기 술을 채 택 , 개 발정 책 을 퍼는 한, 경제는 정체하고 처개발을 재생산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논 이상에서 최소한 개발문제에 관한한원론적이고도식적인 논리가 일마나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후진국이 생산성이 높은 첨단 기술, 기계 률 사용하려면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과학과 기술의 하부구조가 형 성되어 있어야 하며, 현실적으로 제삼세계의 많은 나라는 이 한 가 지 사실에 있어서도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일부 전문가는 후진국에의 기술이전, 특히 자본 집약 기술이전을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선전국의 기술이전은 전동사회를 파괴하거나 불안정화시키며, 일부 산업기 술이전이 가쳐온 결과는 대단히 실망적이며, 특히 아프리카에서 볼 수 있는 농업 및 위생분야에서의 관찰 결과는 보찰것없고, 이식된 공장도 〈공장묘지〉로 되었음에 비추어, 전반적으로 기술 이전에 대 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일은 각국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야 한다 는 것이다. 이러한 관접은, 한 나라 경제가 자체의 창조적 능력이 없이는 전정한 의마에서의 경제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서 출 발한다. 죽 현재까지의 관행인 선 • 후전간의 기술이전이 갖는 지배 적 관계를 탈피, 상호 교환관계로 대체하며 새로운 기술은 인류 전 체에 도움이 될 수있는 독창적인 면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 고 이러한 새로운 기술은 인류에게 새로운 길을 재시하며 문화적 욕구와 아이덴티티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현재 세계의 위· 기논 산업문명의 위기이며, 따라서 이에 대한 해결책은 종 태와 다른 文化에서 찾아야 하고 각기 다른 새로운 문화의 창달과 이 문화가 창조할수 있는 새로운형태의 가치관의 정립에 귀착되어

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자면 〈적정기술〉이야말로 새로운 형 대의 개발을 주도하는 중십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논리가 현실로 옮겨지려면 각국 지도충의 확신과 의지가 필요하며, 현재의 선택을 결정하는 가치체계의 변화 를 전제조건으로 한다 . 뿐만 아니라 이러한 웅칙입은 각국의 모든 사회구성원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하여만 가능하다. 새로운 문화의 창조 그 자체가 다양하고도 복잡한 사회정치적 과정이라고할때, 현실적으로이러한제안은신현가능성이 있을까? 이 의문에 대한 긍정적인 해답을 하기에는 거의 모든 후진국의 사 회현실은 너무나 〈현실적〉이고 미래의 이상사회 건설보다는 현재의 빈곤문제 해결이 더욱 철실하다는 데에 모든사람은동의할 것이다.

[제 7 장]

세 가지 경험 사회주의 쿠바 내부지향적 인도 의부지향적 NICS

우리는 지금까지 제상제계가, 선전국이 산업화 과정에서 걷어온 길을 되풀이할 수 없는 증거를 예시하려고 노력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삼세계 구성원 각국은 각기 그 나라의 기본적 여건에 따라 가장 적합한 개발 전략을 모색하여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발전 develop pe ment, 전보 pro g r es 또는 성 장 crois s ance 이 라 는 개념은 사실에 있어서 대단히 다양한 정의를 내릴 수도 있다 . 발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우선 시간적 시각에서 레이몽 아롱 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 첫번째는 과거 의 사회보다 현대의 사회가 우월하다고 분명히 결정지어줄 수 있는 인간의 활동은 무엇인가? 둘째의 의문은 다음과 같다. 전체사회의 경우 시간상으로 이러한 구벨을 지어줄 수 있을 것인가?1)

1) R. Aron, Ii'산업사회의 비교연구(沈相弼 譯 ).!I, 一朝閣, p.3 4-

우리는 이상과 같은 의문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구체성을 떤 해답 을 할 수 있는 분야로서 역시 경제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경 제발전은 개인당 생산량에 의하여 측정될 수 있다고 하거나 또는 현대 경제이론에서 말하고 있듯이 경제발전은 인구에 비한 전체적 인 자원의 증가로 정의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의 쿵극적 목적은 생산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서 최대 의 재화를 생산하는데 있지 않고 인류의 근본적인 빈곤을 해결하는 데 있으며 다수에게 인간조건을 보장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인구의 개인당소득이 증가하였다는 사실로부터 그에 상웅하는노동에 있어 서의 인간조건이 개선되었느냐는 것은 확실히 증명되지 않으며, 개 인간의 재화의 분배가 전체적으로 부가 늘어난다고 하여 공평히 이 루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2) 우리는 이상의 의문과 회의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가에 관한 세 가지 해답을 여기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그 첫번째는 쿠바의 경우로서 이 나라는 사회주의적 해결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전형적인 〈 자본주의 세계체계 〉 에 통 합 된 종속국가로서, 그리고 그 굴레에서 벗어나 미국과의 종속관계를 청산하고 독자적이며 자기중심적이고 통일성 있는 경제전설을 시도 하려는 쿠바는 자본주의 세계시장과의 단철을 통하여 경제성장을 기 도한다. 〈이 시 장(자본주의 ) 에 통합된 틀 속에 서 개 발전략을 추전 한다는 것은 실패를 가쳐올 문 〉 3) 이라는 S. Am i n 의 주장을 뒷받 침하듯, 초기에 과감하게 미국과의 모든 경제관계를 단철하고 독 자적인 개발전략을 추전한 예로서, 여기서는 그 전전과장을 객관적 으로 서술하려 노력하였다. 또한 그러기 위하여 침발리스트 A. Zim bali st 와 엑 스타인 S. Eckste i n 의 Patt er ns of cuban develop - ment, the first tw enty -f i ve ye ars 를 주로 이 용하였 다.

23)) RS.. AAmroin n,, 전L'게ac 서cu ,m pu. l3a9t.i on a l'echelle mondia l e, p. 58.

두번째로서는 인도의 경우를 제시한다. 그것은 이 나라가 이른바 〈내부지향적 개발전략〉을 추전하기 때문이다. 이 전략은 그동안 많은 종속론자에 의하여 가장 바람칙스런 해결책으로 주장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테두리 안에서, 후진국에 결여된 전체적인 결합 울 새로운 경제에 보장하는 방향으로 발전전략을 선택하는 것이 필 요하다. 이는 정확하게 선택된 발전핵을 건설하면서 상호 보완적인 산업체가 통합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조화된-또는, 이

론바 자기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는――경계는 내부지향적이며, 이 전략은 외부지향적 후진경제와 대조된다• 새로운 경제는 하나의 유 기체 를 형성하며, 여기에서 각 부분은 상호 연결되어지고, 기술혀 신과 전보는 전체에 파급될 것이다 . W 내향적 경제발전전략-국 내에서 생산할 수 있는 것은그- 상대적 비용과 관계없이 국내에서 생산한다는 전략-이 과연 〈 기술혁신과 전보 〉 를 전국토에 파급시 키면서 조화 있고 독립적인 경제변화를 가져다주는지 그 여부를 인 도경제의 예에서 보기로 한다.

4) S. Ami n, ;인게 서 , p. 52.

세번째는 한국을 비롯한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이른바 신홍 4 개국이 채택한 해결책으로서, 이 나라들은 〈 외부지향적 〉 경제개 발 전략의 대명사로 되어 있고 우리는 그장단정에 관하여 이미 많은 논란 을 접하였다. 그리하여 여기에서는 그 구조변화를 통계적으로 보면서, 이 전략에 관한 찬성과 반대론을 대비시켜 보았다. 어떤 방법이 최적의 방법인가는 아무도 말할 수 없으며 이것이야 말로 각자의 가치관에 입각한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두에서 말했듯이 〈 전보 〉 〈발전 〉 〈 성장〉이란 개념은 정 의 내리기가 어렵고 본질적으로 상대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제 1 절 혁명 이후 쿠바 경제정책의 조정 경제성장은 두말할 것도 없이 두자 수준과 밀접한 관계 를 가지고 있다. 두자에 사용할 수 있는 가용자본이나 잉여가치는 처축이나 公 債 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피델 카스트로 정부가 잉여가치의 창출과 사용을 위해 시행한 상대적인 정책은 그러한 면에서 근본적 인 문제점이 아닌 수 없었다. 여기서는 1959 년 이후에 이루어전 쿠바 경제정책의 현실과 결과 를 살펴볼 것인바 이 선명은 대내의의 다양한축적의 원천이라는각 도에 서 시 도될 것 이 다. 이 연구는 A. Zim balis t 와 S. Eckste i n 의 Patte r ns of Cuban develop m ent 에 근거 를 두고 있 다. I 초기 IO 년 (I959~1969 년) 카스트로는 1959 년 정권을 장악하자 곧바로 자원의 재분배를 실 시하였으며, 지금까지 유휴상태에 있던 자원을 사용하여 경제를 부 양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쿠바의 생산 능력을 칙접적으로 증가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게다가 쿠바정부는 물가를 동결하고 조 제와 이자를 갑축하였으며, 사치품의 수입을 금지하였다. 또 공업

에서 생긴 이익금을· 재분배하였고 소작인과 소유권이 없는 토지경 작인에게 소유권을 부여하는 농업개혁을 단행하였으며, 대규모 소 유지를 국영농장이나 협동농장으로 변경시켰다(처음에는 협동농장으 로 설립하였다가 나중에는 국영농장으로 항). 이 조치에 따라 고용은 증­ 가되었으며 기촌의 시선 이용률은 최고치를 나타냈다. 이러한 조치 들은 여러가지 효과를 가져왔지만 그중에서도 수요를 크게 팽창 시켰으며, 이 수요의 팽창은 다시 생산을 더욱 증가시켰다. 그리하 여 1959 년에서 I9& 년까지 농업생산은 거의 9% 증가하였으며, 1958 년에서 19& 년까지 공업생산은 약 8.3% 증가하였다. I) 초기의 난관 그러나 l962 년에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나타났다. 초기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은 기촌의 시설능력을 완전히 가동함에 따라 쉽게 얻을 수 있었는데 마침내 그것이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러한 팽 창정책의 추구는신구두자를필요로하였다. 그러나여러가지 요인들 에 의하여 투자에 필요한 잉여가치를 축적하려는 국가의 능력은 제 한되었다. 우선 여기에는 해의로 이주한 자유칙 종사자(변호사, 의 사등), 엔지니어, 기술자들울 대선할 양질의 새로운 인력 양성에의 필요가 있었다. 또 한편 생활조건을 개선할 수 있도록, 교육체계에 접근할 가능성이 보다 불리한 집단에게 교육의 기회를제공하기 위해 과중한 지출이 요구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형태의 지출은 자본 축적과정에서 장기적으로는효과를나타내나 단기적으로는 역효과를 나타낸다. 두번째, 쿠바에 대한 미국의 위협과 미국에 의해 행해지 논 계속적인 방해공작은 쿠바정부가 생산을 회생시키면서 국방부문 에 자원의 일부를 할당하도록 강요하였다. 셋째로, 공업발전을 위 해 필요한 기 간산업 이 부족하였 던 까닭에 생 산능력 을 확장하는 데 새로운 자원을 배분하기에 앞서 우선 전화, 도로건설, 항만시설 등 울 위한 대규모 두자를 실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편, 대의교역을 통한 잉여가치의 창출 가능성은 줄어들었으며, 미국의 동상금지조치는 시실재 산업의 이례적인 증가를 야기시켰

다. 소련은 가장 전 략적안 수입 을 위한 유일하고도 가능한 원천이 되었다. 그런데 소련의 시선재는 미국제품에 비해 가격이 비쌀 뿐만 아니라 질이 뒤떨어졌으며, 이를 수입하는 데는 훨싼 더 많은 수송 바를 부담하여야했다. 더구나미국의 동 상금지는 부품 교환에도 영 향을 미쳤으며 노후한 미국 제품이 고장이 나면 이것을 모두 새로 운 소련 제품으로 대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쿠바정 부는 자기중십적 생산 체계를 건설한다는 방향을 택하였다. 때문에 수출 收入의 감소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62 년에 쿠바는 십각한 국제 수지의 적자 를 나타냈다. 그 리하여 카스트로 정부는 국내 소바를 회생시키면서 수 출 산업을 장 려하였으며, 이것은 그가 정권을 장악했을 때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사태였다. 이러한 쿠바를 돕기 위하여 소련과 동유럽 국가 및 중국 이 설탕 구매에 관한 중요한 장기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에서 쿠바는 국제 시장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으로 안정된 수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그로부터 쿠바는수출收入이야말로국제수지 적자 문제를 해소시컬 뿐 아니타,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본 축적의 주요 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단기적으로 볼 때 국내 시장을 위한 생산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자본 축적이라는 관점 에서 볼 때 바람칙스런 해결은 아니었다. 그것은 국제수지 위기를 가중시킬 분이며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수출 증가문이 었다. 2) 설탕 수출에 기초를 둔 개발전략 쿠바는 설탕수출에 기초를 둔 개발로 발전전략을 수정함에 따라 설탕 생산에 대한 의촌도는 증가하였으며, 설탕 수출이 차츰 쿠바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쿠바가 자본주의-제국 주의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고 그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 다는 뜻이다• 혁명도 여기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60 년대의 〈대규모 제당사업〉은 기대했던 결과를 나 타내지 못하였다. 설탕 생산은 1963 년에 일정 수준을 초과하지 못

하였으며 1970 년에 와서야 기록적인 생산수준을 달성하였다. 그러 나'그것은 매년 실시하는 생산 예측 수준을 항시 밑돌고 있었다. 한편, 국제시장 가격의 하락을 고려하면 수출 收入은 생산량과 그 비용에 비례하여 증가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쿠바가 소련권 국가 들과 체결한 장기 계약은 설탕 가격의 불규칙성으로부터 설탕 산업 울 보호해 주었 는데 COMECON 국가는 60 년대 말 쿠바 설탕수출 의 약 55% 를 수입하였다. 이 구매의 대부분은 실물로 지불되었으 며, 총액은 COMECON 의 과대평가된 가격에 따라 계산되었다. 이 러한 수출 전략의 실패는 생산성의 정체에 기인하기도 한다. 1966 년에서 1970 년 사이에 쿠바의 경제성장률은 연간 0.4% 씩 떨어졌 다(다음 절의 표를 참조할 것). 한편, 〈 대규모 제당사업 작전 〉 에 등 원된 도시 근로자의 생산성은 낮았으며, 제당산업과 관련된 산업에 동원된 근로자의 생산성 역시 처조하였다. 그리하여 60 년대말 시 행된 정책은 국내적으로 또는 국의에 근원을 둔 일반적인 자본 측 적과정에서 역효과를 나타냈다. 3) 꽁꽁부문의 개발과 생산의 재조칙 쿠바경제구조의 재조칙과 설탕 생산율 극대화하는 계획을 이행할 당시 근로자에 대해 적용되었던 새로운 자극은 똑같이 생산성에 대 해 負 (―)의 반향을 보였다. 60 년대 쿠바논 접전적으로 많은 경제 부문을 국유화하였는데 득히 1963 년에는 농업 부문과, 1968 년에는 상업 부문의 거 의 전부를 국유화하였 다. 1963 년의 농업 개혁 은 67 헥타르 이상의 모든 농장을 국유화하였다. 이는 민간부문 경작지 의 30% 에 해당하며 민간부문에 고용된 농업 근로자의 30% 에 달 한다. 따라서 쿠바정부는 농업 소득을 국가에서 취하고 생산율 조 칙화하는 능력울 증가시켰다. 이러한 2 차 농업개혁에 앞서, 쿠바 정부는 조세를 이용한 정부수입 증가에 어려움을 가졌었다. 더구나 농업 종사자들은 국내 시장을 겨냥한 상품생산에 더욱 큰 유혹을 가졌으며 자본축적 과정을 극대화하는 데 알맞는 재화를 반드시 생 산하지는 않았다. 수많은 학자들은 1963 년의 농업개혁이 경재적

관점에서 볼 때 비합리적이라고 지적하였다. 그것은 농업 생산성이 국유화된 농장에서 상대적으로 민간 소유지보다 낮게 나타났다는 사실과 국가 소작지가 적자를 나타냈다는 사실에 근거를 든다. 걷 국 이 농업개혁은 수출을 통한 자본축적을 시도한 쿠바정부의 전 략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정부가 일단 민간부문의 토지롤 소유하 떤, 정부는사탕수수경작면적을확대시킬수있었다• 바목생산성이 떨어지고 단위당 설탕 생산 비용이 높아전다 하더라도 쿠바정부는 이러한 정책이 수출 收入울 증가시키기만 하면 중요한 경제적인 문 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농업개혀이 있고 난 다 음 한해 동안 설탕 생산에 투입된 토지는 약 38% 증가하였으며 이 러한 추세는 60 년대말까지 계속되었다. 다른 한편 정부는 공공부문의 확대를 실시한 뒤 생산 조칙과 노 동관계를 수정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꽁산주의로의 이행을 가속화 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그것은 같은시기에 처축과수출을 이용하여 축적을극대화하려는쿠바정부의 의지와 일치하였다. 1964 년에 쿠바 정부는 근래에 몰수한 농경지를 확고히 하고 농업 활동의 통제륜 중앙집중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쿠바정부를 위해 일했던 Edward Boors t e i n 에 의하면, 쿠바가 수출에 크게 의존함으로써 이러한 정 책을 정당화하였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생산의 재조직은 무 역 혹자의 극대화만큼 공업부문 관계의 사회화 추구를 목적으로 하였다고 하는 것이 매우 타당할 것이다. 2 차적으로, 쿠바정부는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간의 차별을 없애고 공산주의 원칙에 따 라 물질적 급부보다는 정신적인 고무를 택하였다. 분만 아니라, 칙 접생산 비용운 극소화하면서 모든 설탕 생산에서 나오는 수입을 극대 화시 키 기 위 해 도시 의 무보수 근로자 -C. Mesa-Lag o 의 용어 를빌리면, 보수를받지않는도시근로자一―륜동원하였다. 수집된 동계에 따르면 1968 년의 경우 농업 부문 근로자의 15~20% 는 전 에 다른 경제 부문에 고용되어 있었으며, 1970 년에는 경제 활동 인구의 1/3 이 상이 농업 부문에 서 pa rt tim e 으로 일하였 다. 만약 쿠바정부가 도시 근로자를농촌으로유인하기 위해 화페수입의 증가

라는 자극책을 이용하였더라면 임금 인상을 제시해야 했었다. 이는 한편으로 입금이 농업 부문보다 공업 부문에서 보다 높았기 때문 이며, 다론 한편으로는 도시의 일자리가 보다 매력적이었기 때문 이다. 그러나 쿠바정부는 임금인상정책을 퍼지 않았다. 마침내 60 년대말, 쿠바정부는 이전의 몇몇 농업 노동자들에게 공여했던, 적 은 몫의 토지롤 박탈하였다. 이들은 국영 농장에 고용되어 있으면서 개인 소유가 인정된 작은 땅을소유하고있었다. 이같은일은, 이들 농부들이 국영 농장에서보다는 자기 소유 부문에서 더욱 열심히 일하였다는 접과 수출 생산물보다는 국내 시장에 판매할 수 있는 작물을 경작하였다는 이유로 추전되었다. 60 년대말 쿠바는 남아 있던 개인 농장에 대해서도 똑같이 생산 통제를 확대했으므로 사유 재산권의 개념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였다. 나아가서 쿠바정부는 농민들로 하여금 낮은 가격 으로 국가에 생산물을 판매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또한 쿠바 정부는 개인 소유의 농경자들에게 토지를 양도하도록 권장하였으 며 , 국영 공장에 서 pa rt tim e 으로 일하기 를 권고하였 다. 한편 쿠바 정부는 자영 농민들이 정부와 협력하기를 원했고 그를 위하여 〈전 보적 농업 운동 〉 에 가담하도록 하였다. 이 운동은 물론 정부의 계 최 실현과 오로지 국가를 위한 사업에 참가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 러나 이러한 정신적인 압력은 득립자영농민의 충분한 협력을 얻지 못하였으며, 결국 정부는 민간부문의 토지를 임대함으로써 설탕 재배의 경작 면적을 증가시켰다. 더구나 쿠바정부는 토지에 대해 정부가 지불했던 소작료를 줄였으며 기본적인 생필품을 구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준 이하로 임대료를 책정하였다. 이는 농업 경영 자들로 하여금 국가에 토지를 양도하고 국가를 위해 일하도록 장려 하는수단이었다. 쿠바정부는 소규모 농장 경영자의 활동을 제한하고, 국영 농장 에 고용된 노동자로부터 그들이 개별적으로 소유하던 소규모 토지 의 소유권을 박탈함으로써 단기에 얻을 수 있는 이익을 회생시켰 다. 그렇게 함으로써 규모의 경제를 통해 생산을 극대화하고, 수출

울 위해 생산하도록한 것이다. 이러한수출 제일주의는 60 년대 아 시아 4 개국(한국, 대만, 홍콩, 성가포로 등)의 그것과 내용의 차이는 있으나 일백상통하는 바가 있다. 좌우간 최후까지 남은 자영농은 의 국시장보다는 국내 시장을위해 생산하기를선호하였는데 그 이유는 국내시장을 위한 과일과 채소의 생산은 특히 기계보다는 인력을 동 원함으로써 보다 나은 이익을 실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가 이들의 생산물을 공공 수집 기관에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도록 강화 하는 순간 암시장이 출현하였고 농민은 여기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 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쿠바인 가운데 가장 여유가 있는 사람은 자영 농민들이었다. 따라서 국가로부터 민간부문 활동의 규재는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합티화되었고 또한 물질적인 측면에서는 이 규제가 비록 전반적인 농업 생산을 회생시킨다 하더라도 수출을 동한 축적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접에서 합리화되었다. 좌우간 설 탕은 농산물 가운데 가장 좋은 수출품이 었다. 이 기간 동안 (60 년대) 공업 부문에서 나타난 구조의 변화는 농업 부문의 그것에 비하면 큰 변혁은 아니었다. 이 부문은 이미 카스토 로 정부의 초기 2 년 동안 거의 전부가 국유화되었기 때문이었다. 1968 년까지 공업 부문에서 얻어전 결과는 농업 부문의 그것보다 훨씬 양호하였 다. 1959 년에 서 1968 년까지 주요한 공산품들 중 1/4 이상이 적어도 100% 의 생산 중가율을 보였다. . 이러한 생산 증가는 경공업과 기간산업의 여러 분야에서 다같이 나타났다. 그러나 1969 년 공업 생산은 그때까지 높은 능률을 보인 부문까지도 축소되었 다. 공업 부문의 위축은 1970 년 이후 전체 경제를 동원하면서 〈설 탕 1 천만 돈 수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설탕수출에 총력을 기 울인 결과였다. 그러나 공업 부문의 축소는 또한 60 년대말 당국에 의해서 행해전 구조 변화의 결과이기도 했다. 죽 쿠바정부와 黨 온 노동자의 동제를 중앙에서 . 장악하면서 근로자들의 기업 경영 참여 를 여제하고 나아가서 국민 경제에 관한 근로자의 발언권도 줄였 다. 분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물질적인 자극도 줄였고 정부 예산과 총체적인 경제 계획 작성도 중단하였다.

4) 정치적 • 경제적 위기 수출 위주의 생산을 위하여 국내 소비 중십과 공업을 종속시킨 사실(기간산업의 개발과, 보건 빛 교육에 대한 우선 순위 역시 보류됨)은 자본 축적을 극대화하는 전략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정부는 투자율 울 중가시켰다. 죽 총두자는 1962 년에 실물총생산의 16. 9% 였으나 1967 년에는 25.3% 로 증가하였다. 두자 능력울 증가시키기 위하여 쿠바 당국자들은 화페경제의 영역을 축소시키면서 임금의 감소를 강요하였고 그것은 소비의 감되로 나타났다. 열십히 일한 근로자, 또는 시간을 초과하면서 일한 근로자들에 대한 보상도 중단되었고 공공부문의 임금은 모두 줄었으며 (60 년대초에는 입금을 증가시켰었다) 그 가운데 임금이 가장 낮은노동자만 이 조치에서 제의되었다. 1966 년에 서 I97I 년까지 공공부문 노동자의 임 금은 평 군 I2% 가 줄어 들었다. 반면 1962 년에서 1966 년 사이에는 3.5% 가 증가했었다. 농업 노동자들만이 낮은 보수를 받고 있었으며, 60 년대말에 가서 야 이들의 입금이 인상되었다. 이러한 물질적인 자극의 포기는 이념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당화 되었다. 죽 〈각자는 능력에 따라〉라는 원칙은 공산주의 원칙인 〈각 자는 필요에 따라〉로 이행되는 참정기간에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 러나 축적의 극대화는 지도자들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목표였기 때 문에 우리는 그기간 동안 (60 년대)의 이데올로기와공식적인 정책에 대한 재해석을 내릴 수밖에 없다. 사실상 정부는 국민간의 평등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물질적이고도 정신적인 자극을 사용하였으며, 육체 노동자와 정신 노동자 사이의 차별을 제거하고, 민간부문을 공공부문에 종속시키기 위한 모든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런데 수 출지향적 생산양식과 두자율의 증가로 인하여 이러한 물질적인 자 극이 그 효력을 발생시키기에는, 소비재와 서비스가 60 년대말까지 만 하더라도 대단히 부족하였다. 더 많은 노동과 생산율 하는 노 동자에게, 더 많은 임금울 중으로써 보상을 한다는 정책은 그것이 풍부한 소비재가 있을 때에만 유효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재화가 부족한 상태에서 쿠바 당국자들은 노동 인구를 부추키기 위해 비물

질 ;:,4 인 자극을 사용할 수밖에 없 었 다. C. Mesa-La g o ” 는 쿠바 정치를 설명하면서 이데올로기에 매우 큰 비 중을 부여 하는데 , 그것 은 잘못이 었 다. Mesa-L ag o 에 의 하면 쿠 바의 60 년대말 정책적 실패의 이유는 그것이 극단 칙 인 아상주의 (S i no - gu e var i sme6 ) 라고도 함 )와 비실용주의의 중시에 근거 를 두고 있 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약 이데올로기가 그 시기 (60 년대)의 경제문 제에 있어서 부분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집 행 된 전략은 물질적인 기반에 근거 를 두고 있었다. 이론 적 으로 이 전 략은 쿠바로 하여금 교역과 저축 및 국내두자를 자극하도록 허용하 는 것이었으며, 결국에는 국제 수지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었다. 그러나 불리한 국제시장가격 -1966 년과 1968 년 사이에 原 糖 의 가격은·파운드당 2 센트이하로떨어졌다-온이러한수출 전 략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였다. 분만 아니타 정부의 투자 선택은 반 드시 합리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며 일부 두자의 성과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쿠바 국민들은 이상과 같은 실패에서 생기 는 물질적인 희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 을 뿐만 아니 타특히 기업 안에서 노동자들의 참여가제한되었고물질적인 자극이 없었기 때문에 볼만은 가중되었다. 이렇게 시행된 정책과 이데올로 기 를 동한 정 당화는 정 치 적 • 경 제 적 위 기 를 야기 시 킬 뿐이 었 다• 정 부 가 선택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축적을 위한 노 력은 생활 수준을 개선하고 기업내에서 보다 나은 위치를 확보하려 논 노동자들의 칙접적인 이해관계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공산주의의 빠른 정착 〉 에 강한 처항감을 보였다.

5) C. Mesa-Lag o, Cuba in the 1970s, nouvelle edit ion , Albuq u erqu e, Univ e r- sit y of New Mexic o Press, 1978. 6) 중의 국•형사 상C윤he g말 u 합ev.a ri sm e. Cheg u evaris m e 은 분리 비 아 혁 명 가 Che Guevara 의 주

60 년대에 시행되었던 정책에 대한 불만은 정책적인 행위에 의해 서라기보다는 근거가 모호한 행동 때문에 생겨났다. 1968 년 200 개 이상의 기업을 대상으로 한, 생산성에 관한 한 연구에 의하면 I 일 노동량의 I/4 에서 I/2 정도가 낭비되었다고 지적되었는데 그 원인

은 노동자의 규율이 해이했거나 초과인원이 배당되었기 때문이다. 1970 년 사탕수수의 수확 후 결근율은 경 제 활동인구의 20% 까지 상 승하였다. 60 년대말 생산성의 감소는 상세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러가지 자료를 대조해보면 농업, 건축업, 전기 • 통신 분야에서 는 단위당 생산량이 감소하였으며 공업, 운송, 상업 분야에서는 늘어났음을 추축할 수 있다. 뒤의 두 부문(운송 및 상업 부문)에서 나타난 단위당 생산량의 증가는 아마도 단순한 물가 상승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자료에 따르면 임금하락이 있었던 두 부문에 서는 생산성이 개선되어졌고, 평균적으로 입금 상승의 혜택을 입은 한 부문에서는 오히려 생산성이 떨어졌다. 이것은 보수 체계가 경 제 위기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이 있지 않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홍 미로운 사실이다. 생산성의 하락은 또한 1968 년 소기업의 국유화 당시 이미 자영 상인에게 고용되어 있던 노동자들을 공공부문으로 이전시킴으로써 발생했음을알수있다. 또사탕수수의 경작에 필요 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비농업 부문 노동자들을 계철적으로 이 동시키는 데에서도 생산성 하락의 이유를 찾을 수 있으며, 의사 결 정 과정에 노동자들의 참여를 제한했다는사실도 그원인 중의 하나 이다. 2 1970~1986 년 기 간 쿠바의 정 책 70 년대에 들어와 쿠바는 정치적, 경제적 위기로 말미암아 개발 전략을 바꾸어야 했다. 쿠바정부는 모든 성장 목표를 낮추었으며, 경제를 합리화하기 위한 여러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60 년대말의 모든 문제가 정치적, 경제적 중앙집중화 및 관료화 때문에 발생되 었음을 자각한 쿠바 지도자들은 노동 현장뿐만 아니 타 정 부규모에 관한 의사결정에 하급 노동자들을 참여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기술 개선과 더불어 유리하계 전개된 국제 정세의 도움으로 이러한 변화 는 소비뿐만 아니라 자본축적 과정에도 매우 긍정적인 결과를 가 쳐왔다. 또한 충분한 자원과 유연한 생산체계는 경제의 지방분산화

실시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이는 또한 정치적으로도 필요한 조치였 다. 그러나 그후 대의부문으로부터의 잉여가치 획득은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쿠바정부는 다시 한번 십각한 무역불균형과 과중한 의채 에 칙면하게 되었다. 1980~1982 년에 있었던 세계적인 불경기와 설탕 가격의 재하락 및 부채의 원리금 상환부담으로 인하여 대의교 역은 잉여가치의 생산자이며 동시에 〈소비자 〉 가 되었다. 그러나 COMECON 에 의한 지원금이 공여되었고, 무역의 계회화 및 수입 대체산업의 건설 등이 성공하였으며 효과적으로 진행된 기존의 두자 및 국제 경제상황의 개선으로 쿠바는 80 년대 초반 이후 경제 성 장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국내 정책의 상대 적인 변화와 쿠바의 의국과의 관계를 차례로 설명하고자 한다. 1) 국내 경제정책의 수정 표 40 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사회 총생산”은 70 년대 상반기 동 안 불변가격으로 매년 7. 5% 씩 증가하였다. 공업 특히 ' 생산재 부 문은 이러한 팽창에 핵십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 국내 자원에 기반 울 둔 농업 부문(수확기계, 비료, 살충제의 생산율 포함한)과 어업 부 문도 크게 발전하였 다. 한편 효과적 인 1 차 부자의 결과와 노동자 들의 교육 수준의 개선은 확실히 70 년대초의 경제 부문에 긍정적 인 결과를 가쳐다 주었다. 구조적 개혁의 실시와 축적의 대의적인 원천을 자극하는 유리한 국제 정세도여기에 효과를더하여 주었다.

7) 사회총생산 (G.S.P.) 과 국민총생산 (G.N.P . )을 칙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으나, 사회주의국가에서는 G.N.P. 를 추계하지 않기 때문에 G . S.P. 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구조적 변화는 우선 작업장에서 이루어졌으며, 보다 일반적으로 는· 정치제도 및 경제 분야에서도 이루어졌다. 이 변화로 말미압아 특히 지역 수준에서 의사 결정 과정에 대중들이 참여할 기회가 확 대되었다. 한편, 70 년대말에 쿠바가 채택한 효과적인 경제구조의 들을 세우고 국내 자원을 이용하여 축적을 장려하려는 정책은 쿠바 로 하여금 새로운 경제계획과 지도체계를 정착하도록 하였다.

〈 표 40> 공식적안 G . S.P . (사회 총생산)의 성장을

(연평균, 분변가격) \ 1962~1965 I 1966~1970 I 1971~I975 1l976~1980 I 1981~1985 託 기 : :: I -:::: I ::~: I :::: I ~:!: 자료 : Mesa-Lag o, C. , The Economy of socia l is t Cuba, Albuq u erqu e, Univ e rsit e of New Mexic o Press, 1981, p. 17, Banco Nacio n al de Cuba, lnfo m e Econ6mi co , 1984, p. 17, Comi te esta t a l de esta d is - tica s, Anuario esta d is t i co de Cuba, 1981 (p. 67) , 1982 (p. 98), 1984(p. 54 et 95) , CEE, La Economi a Cubana, 1982 (p. 17) et 1983 (p. 18) , Granma Weekly Revie w , 16 fe vrie r 1986 (p. 2) , Cuba: Indic a dores economi co -socia l es y po li tico s (1981~1985), uEdit or ia Polit ica , 1986(p. 1). 주 : 쿠바통계 위원회에 따르면 이 공식적인 비율은 불변가격 성장 률을 나 타낸다. 공식적으로, 인 플 레이션 (G.S.P. 의 암묵적인 지수)은 1976 년에 서 1980 년 사이 에는 매 년 o. 86 % 였 으며 , 1981 년에는 II, 7%, 1982 년과 1983 년에는 I. 2% , 1984 년에는 -0. 04% 였다. 1968 년에서 1980 년 기 간을 근거로한 G.S.P. 가 불 변가격으로 주어졌음에도 불구 하고, 교역부 문에서 주로 뜻밖에 나타난 물가상승 때문에 (1968 년 소기업의 국영화 에 따라 교역부문의 생산물가격에 사업총액에 대한 세금의 대부분 율 포 함한 결과), 이 표에 나타난 총 0~ 은 물가 상승에 따라 수정되어졌으며 (아마 1968 년과 1969 년 동안은 제 의 하고) , 따라서 실질성 장률 을 나타내 고 있다. 쿠바 성장에 대한 공식적인 통계의 평가와 비공식적인 추정은 한으편로는으 로C는om Bp arur nadti evne in Eu cso n와o_ mZii m c bSatl uisd t i e에 s 의의 해1 98이5 루년어 봄졌호 으와며 , 가다을론호 에한서편 발표된 Mesa-Lag o 와 Perez-Lop e z 를 반대 하는 논쟁 에 서 보고되 었 다. 참조 D: eZviem lo bpa mli es nt , t , A v.,o l. C 1u5b, an7 •I 1n d(u1s9t8r 7ia).l Growt h (1964~1984 년), ” World

® 노동자들의 의사결정 과정 참여의 전전 70 년대초 노동자들은 의사결정 과정에 보다 광법위하게 참여함 으로써 새로운 구조의 설립과 동시에 기촌에 촌재했던 구조의 왈 성화를 도모하였다. 지역 계최문제에 있어서 노동조합은 회원들의 의견에 보다 더 귀를 기울이계 되었고 또 기업의 관리에 보다 활동 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약 26,000 개의 새로운 노조 지부

가 탄생했으며 지역 수준에서 노조원선거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 로 인하여 이미 당선됐던 118,000 명 중에서 87% 는 그 입기를 끝 까지 마치지 못하였다. 이러한 대규모의 변화는 60 년대말 정부에 의해 시행된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반영한 것이었고 쿠바국 민들은 노동조합의 대표자들을 정치에 참여시켰음을 명백하게 보여 주었다. 이러한 개편으로 지역 수준에서 노조 대표들은 다시 활동을 재개 하였고 노동자들은 노동 조건과 생산에 관한 문제믈 논의하기 위해 정기적인 집회를 가졌다. 기업에서 노동자들에게 보다 많은 발언권울 주기 위해 새로운 데 카니즘이 세워졌다. 이 제도에 따르면 근로자들의 대표들도 기업의 지도부에 출석하며, 그럼으로써 임금 정책과 생산 수준에 대한 그 둘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게끔 되었다. 노동자들은 경제계획과 생 산, 위생 및 안전상태, 칙업훈련 등에 관한 일정한 목표설정에 대 한 토론과 회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노동자가 기업의 운영에 보다 많이 관련됨으로써 노동자들은 그 들이 합의한 정책에 대한 책임감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생산성의 향상이 이 루어 졌 다. C. Mesa-Lag o 에 따르면 , 예 를 들어 1972 년의 경우 노동자들은 국민 생산의 21% 를 증가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어떤 전문가들은 70 년대초 생산성의 향상이 물질적인 자극을 이 용한 결과 때문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이러한 분석은 거의 설득력이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쿠바정부가 임금을 생산성과 연결하려고 한 것은 1974 년 이후이며, 이러한 의도는 그후 매우 서서히 실현 되었기 대문이다. 더구나 70 년대초에는 쿠바 경제가 유동성의 초 과를 나타냈는데 이는 국민 개인이 현금을 지나치게 많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1972 년의 생산성의 도약을 물질적 자극과 연계시키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그밖에 또 다론 요인이 개 입되기논 하였지만, 기업 내부의 인간관계가 결국 노동자들의 생산 동기를 자극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생산 체계의 효율성을 개선하 는 데 유용한 대책을 제시하도록 하였다.

한편, I97I 년에 공표된 의 무적 노동에 관한 법 물도 확실히 생 산 성의 개선을 가져왔다. 이 법률에 따르면, 결근을 하는 노동자들은 휴가나 사회적 득해(예를둘어 구내식당의 이용)에서 제외되었으며, 삼 한 경우에는 이들 모두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어졌다. 그때까지 카­ 스트로 정부는 모든 근로자에게 완전 고용을 보장하였고 최처입 금 소득제를 실시하였는데 그것은 시장의 변동이 갖는 부정적인 걷 과를 완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60 년대말에 있었던 결~ 울의 증가는 당국자들에게 노동자의 협조가용이하지 않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 다. I97I 년의 법 ―—이 법 에 따라 노동은 하나의 의 무이 며 〈 사회주의적 권리〉라고 규정하였는데, 60 년대초의 부정적인 경 험에 대한 반웅으로 채덱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법률은 생산성 향 상에 관한 한 역효과를 나타낼 우려도 있었다. 왜냐하면, 의욕이 없거나 혼히 자격이 미달된 수천의 노동자들울 기업에 두입시킴으 로써 오히려 생산량의 감소가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견 근율이 줄어들면서 1 인당 생산성 (특히 시간당)은 명백히 개선되어 겼다. I970 년대 노동자들의 기업 참여는 건국 수준에 이르기까지 계속 하여 확대되었다. 물론 노동자들의 참여는 기업과 당, 그리고 정부 지도자들의 의지와 반대되는 희망을 수락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 간 하였다. 근로자들은 특히 희소하고, 수요가 큰 내구소비재와 주택을 자기들끼리 분배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를 뒷받 침하기 위하여 쿠바의 중앙 정부는 기업들에게 내구소비재와 주택 울 위한 건축 자재를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공급된 재화는 근로자들이 자치적으로 분배하였다. 이 분배의 기준은 각 근로자의 능력 (출석과 작업성과)과 필요.(가족수와 생활 수준)에 따라 결정되었 다. 쿠바정부는 국가 계획의 수립과 이를 기업에 적용하는 데 있어서 근로자의 의견청취를 확대해 나갔다. 공식적인 보고서에 따르면 기 업내에서 연차 계획과 수정 작업에 관한 노동자들의 참여수는 1975 년 I.26 백만 명에서 1980 년 I.45 백만 명으로 늘어났다. 약 91% 의

기업에서는 노동자둘이 80 년대의 계최 수립에 대한 토의에 참여하 였으며, 약 59% 의 기업에서는 이 토론을 통해서 처음의 수치에 대 해 수정 을 가하였 다• 1984 년 쿠바 국제 경 제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 면 노동자들은 1984 년 계획작성에 휠싼 많이 참 여 했 던 것으로 나 타났다. 약 24,000 건의 제안이 계최화 기간 동안 제시되었으며 그 중 17,000 건은 받아들여졌다. J UCEPLAN( 쿠바 국가계획화 기구)의 책 입 자인 Humberto :Pe rez 는 이 러 한 폭넓 은 대 중 참여 의 필요성 울 강조하였다. 그는 국회에서 연설하기를 1984 년의 토의는 쿠바 역사상 가장 폭넓고 중요한 대중토론이었다고 규정하였다. 한편, 쿠바 국민들은 그들의 참여가 중요하며, 단지 형식적인 데 그쳐서는 안된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1975 년의 연구에 따르 면 질문을 받은 노동자들의 85% 는 기업의 운명에 있어서 하부근로 자의 의견청취가 중요하다고 대답하였다. 그 다음 해에 실시된 또 다론 조사에 서 질문을 받은 355 명 의 노동자 중 80% 는 생 산에 관한 회의를 할 때마다 매번 혹은 거의 매번 개인적으로 개입을 한다고 밝혔 다. 실제 로 1977 년 두 명 의 쿠바 조사자들이 노동자의 참여 에 대한 연구를 실시하였다. 하바나에 있는 대기업에서 무작위로 추출 한 I,000 명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이 조사에 의하면, 기업 방침 을 결정하는 데 있어 노동자의 참여가 보다 더 장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 6 개의 다른 수준에 고용되어 있는 대다수의 노동자에 따르면 한달에 한번 열리논 생산에 관한 회의에서 노동자들의 참여 논 활발하였으며 지도부는 그들의 제안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인 것 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당면한 문제는 거의 매번 취급되었으며 적 어도 부분적으로나마 해결되었다. 1980 년부터 작업조(기업의 하급 단위를 구성하는 노동자의 한 조)의 형성 역시 기업의 운영에 노동자들의 참여를 확대하는 데 기여하였 다. 이 작업조는 적당한 책임자를 선출하였으며, 생산에 관한 계 약을 기업과 체결하였고, 생산 과정을 계획하였으며 경제적 자극과 함께 회계의 통일성을 세웠다. 이러한 경험은 지금까지 경제적, 사 회적 측면에서 볼 때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쿠

바는 작업 조의 증가를 기 도하였 다. 1985 년, 농업 부문에 는 I, 000 캐 이상의 작업조가 구성되었으며 공업 부문에는 200 개 이상의 작 업조가 있었다. ® 지방 분권화와 경제 운영의 개혁 a) 인민권력기구 (OPP) 와 신경제계최 및 관리기구 (SDPE) : 레닌 의 신경제정책 (NEP) 을 연상시키는 이 개혁은 1975 년 쿠바정부에 의하여 취해졌는데 그것은 지방 분권화와 경제운영의 자치를 목표 로 하는 조치이다. 새로이 조직된 〈 인민권력기구 (OPP) 〉 는 서비스 의 관리와 무역 그리고 지역 수준의 공업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사 실상, 이 기 구는 전쿠바 기 업 의 34% 롤 담당하였 다. 물론 지역 당국은 JU CEPLAN 이전의 최종 기관으로서 책임을 가졌으나, 일부 중앙기관은 그들의 권한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 나 OPP 는 계최의 선택과 관련하여 유리한 협상 카드를 장악하고 있으며, 기업의 長울임명 ·교체하는권한을가졌다.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지역 책임자들은 정기적으로 회의를 갖는다. 회의 참가자들 은 그들의 관심사에 관해 토론을 하며 현직 책임자들이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 새로운 선거를 실시하도록 요청할 수도 있다. 이 회의에 서 취급된 문제는 소비재의 부족과 도시 공공서비스의 부족에 관 한 것으로서, 이는 관료주의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 정에 관하여 OPP 는 보다 높은 능률을 갖도록 하기 위해 지역 수준의 생산단위에게 압력을 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압력은 가용자원을 머 욱더 효울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고, 국내 처축을 장려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대중은 정치제도에 관하여 보다 만족하게 되 었다. 이러한 조치는 지역 및 국가 차원에서도 노동자와 대중의 참여를 확대 장려하논 것이었으나, 이를 위한 메카니즘의 정착은 보다 간 접적이거나 한정적이다. 더구나 지금까지 이러한 메카니즘은 대중 으로 하여금 정부와 일체갑을 갖도록하는데 사용되었고 국가적 차 원의 결정에 그들을 참여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본질적인 국가 수준의 결정에서 대중의 책임은 제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OPP 의 회원들은 경제 문제 를 연구하는 국가위원회와 협 력하고 있으며 연차 및 5 개년 계최의 수립시 우선 순위를 조정하 기 위해 JU CEPLAN 및 내각 회의와 토론 을 갖는다. 70 년대 후반에는 1 차 5 개년계획이 작성되 었 으며 새로운 경제 기구인 〈 신경제계최 및 관리기구 (SDPE) 〉 가 정전적으로 정착되었 다. 이 두 가지 일은 쿠바 경제조직의 성숙과 제도적인 성장 을 냐 타내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SDPE 는 많은 면에서 1965 년에 실 시된 소련의 개혁을 본받았다. SDPE 의 목표는 기업의 자기 금융 증진 및 물질적 자극을 수반하는 수익성 기준의 설정, 지방 분권 화 그리고 구조의 동질성과 효율성이었다. 소련의 경제개혁과 마 찬가지로 SDPE 는 특히 일부 관료주의와 비합리 적 인 가격구조, 소 비재의 부족으로 득칭지위지는 쿠바 경제내에서 금융 자극정책의 비효율성 등에 의해 발생하는 장애물에 칙면하였다. 공식적인 연구 와 기업경영자 빛 미국으로 이주한 기업가들과 가졌던 회견에 따르 면, 이러한 장애물을 척결하지 않은 가운데 효울적인 SDPE 의 정 착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쿠바 당국자들 역시 계최경제 체계의 관료적 경칙성에 관한 불만을 토로하였고 새로운 조치의 적용이 지 연된다는 접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사실온 J UCEPLAN 의 前책임 자인 Humberto Perez 가 1985 년 5 월 SDPE 의 제 4 차 총회 의 연설 에서 밝혔으며, Fid e l Castr o 역시 1986 년 2 월에 개최된 최근의 당대회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 SDPE 가 설치되는 순간, 쿠바인들은 이 기구가 전형적인 소련식 국영기구 형태로서 쿠바의 문화에 바추어 볼 때 지나치계 경직적 이고, 지나치게 중앙집중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1976 년 에서 1980 년 사이 지방 분권을 촉진하고 지방 주도에 보다 큰 위 치를 부여하기 위한 새로운 조치가 매년 취해졌다. 그러나 1980 년 쿠바 당국은 수정 속도가 지 나치 게 빠르다고 생 각하였 고, 그로 말 미암아 운영이 해이해지며 불안정이 야기되었다. 결국, 쿠바 정부 는 3 차 당대회 기간인 1985 년 12 월까지 지방 분권화 개혁울 중단 하기로 결정하였다.

제 3 차 당대회에서는 SDPE 의 결함에 관한 보고서가 제출되었고 그물 보완하기 위 한 조치 는 뒤 로 미 루어 겼 다. 현재 , Group Centr a l 과 목별계획위원회는 지방 분권화에 관한 중요한 조치를 준비중 에 있으며, 기업 지도총의 경질이 있었다. 이것은 미래의 변화를 예 고하는 것 이 다. 특히 Humberto Perez 및 Mi ch el Fig ue ras 가 교체 되었다. 이에 관하여 서방세계의 명몇 학자들은 이를 SDPE 실패 의 증거로 보았다. 사실상 이러한 개편은 계희체계를 재활성화시 키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인간관계의 정착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럼으로써 과거의 방법이 실패를 유발시키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쿠바인들은 SDPE 의 결함에 관해서 자유스럽게 비판을 가하였는 데 이 비판은 혁명 지도자들의 갈망과 자기비판의 표현이다. 그러 나 이러한 SDPE 의 완만한 전전과 결함에 대해 불만이 표시된 반 면, 쿠바인둘은 이 기구가 쿠바 경제의 운용을 개선하였다는 데는 의견을 일치시키고 있다• 결국 SDPE 는 쿠바경제에 대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SDPE 가 쿠바 경제에 미찬 유익한 효과를 보다 찰 이해하기 위 해서는 지방분권화 조치를 평가하는 여러가지 분석이 요구된다. b) 개혀의 실시 : 인간 부문의 활동에 관한 법률은 1976 년에 처 음 공석적으로 채택되었다. 그로부터 쿠바인들은 독립적인 자유노 동자로서 가정 전기 기 구, 자동차의 수리 그리 고 목공업 같은 서 비 스륜 제공할 수 있었다. 쿠바정부는 국가에 의해 계획된 활동에 장애가 되지 않는 한도 에서 노동허가서를 발급하였다. 그러나 이 경제적인 개방이 자본주 의 체제로의 회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관료주의적 비능률 에 짓눌린 불충분한 공공부문을 보완하기 위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 다. 또한 이러한 시도는 인력의 충분한 활용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이 허가제도에서 생긴 수입은 국가로 하여금 민간부문의 공급을 칙 접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처음한달동안이 법이 적용된 하 바나에서는 2,000 여 명이 허가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1981 년 민간

협 동소합은 주택 건설의 38% 를 담당하기 에 이 른다. 이 렇 게 쿠바 경 제의 일부가 민간화된다는 것은 다론 한편 공공부문의 생산성을 감 되시키는 위험을 내포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은 자기의 개인적 사용을 위하여 공공기업에서 기자재를 홍치고, 그리고 부업에 종사 하려고 작업장을 비우거나 자기의 원래 칙장에 관십을 덜 기울이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민간부문의 활동은 통제하기가 어려운 것이 다. 70 년대 중반경, 쿠바정부는농업 부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개 혁을 단행하였다. 죽물질적인 자극을통하여 농업생산의 발전율 도 모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자영농과 농업노동자들이 공식적인 할당 분을 국가 구매기관에 판매하는데 그 가격을 인상하여 주었고, 할 당분을 초과하여 생산한 생산물은자유스럽게 판매하도록허락했다. 또한 쿠바 당국자들은 농민에 가했던 압력을 해소하면서 그들이 국 영농장에서 일하고 정부의 농업계획에 협력하도록 유도하였다. 결 국 경제계획에 참여했던 농업경영자들의 수는 1973 년과 1977 년 동 안 철반으로 줄어들었다. 쿠바정부는 농민들이 협동조합을 구성하 는 것을 장려하였으며, 이 조합내에서 농민은 독립적인 경작권을 보유하고, 동시에 규모의 경제 (물론 이론적이지만)의 혜택을 입도록 하였다. 이러한 협동조합의 수는 1977 년 44 개에서 1985 년 1,400 개로 늘어났으며 결과적으로 민간부문이 다시 보유하계 된 토지 의 60% 를 포함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몇 년 동안 쿠바정부는 국 영농장에도 생산작업조와 農家口에 근거하여 결합된 계약형태를 도입하였다. 이러한 계최의 수정으로 인하여 쿠바에서 〈암시장〉이 크게 성행하였고, 쿠바정부는 민간부문 생산에서 나오는 수입에 대해 과세를 하였다. 그러나 1980 년 5 월 중개 상인의 출현, 협동 조합의 확산 그리고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암시장의 번성을 맞이 하여 쿠바정부는 농촌의 자유 시장에 대해 종지부를 찍게 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협동조합에 부과된 쿼터 초과분을 〈자유시장〉 가격 으로 환매함으로써 농민의 수입 을 보장하는 한편 그들의 생 산울 고 무하기 위한 자극은 지속시키려는 정책을 병행하였다.

쿠바정부는 지금까지 고용되어 있지 않던 노동력 (여성 노동력)을 흡수하여 국내 자원의 완전 고용을 실현하고자 하였 다. 1970 년 전 체 여성 가운데 경제활동인구는 18% 였다 (1958 년에는 13% 였던 대 비 해). 이러한 노력이 계속되어 1984 년에는 여성 경제활동인구가 약 38% 에 이르게 되었다 (1970 년에 비해 IO0% 증가함). 이웃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미 경험한 것과는 반대로 쿠바에서는 근로여성의 대다 수가 고용안정의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실업수당과 연금 및 실질 임금에 따른 사회적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여 성들이 관리부서나 경영부서에서 근무하는 경우는 얼마 되지 않았 으나 1983 년의 경우, 기술자의 53% 가 여성이었다. 이러한 통계가 반영하는 여성의 사회적 진출율 제의하고도, 여성의 높은 경제활 동 참여는 가용 인적 자원의 활용을 개선한 중거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쿠바의 출산울은 위협할 정도로 낮으며, 인구중가의 추세는 연금 수익자의 수가 증가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것은 국가 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 쿠바정부는 출산울을 증 가시키려는 의도에서 여성 노동을 제한하려고 하고 있다. 한편, 쿠바정부는 임금과 소비에 관한 정책도 수정을 가하였다.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임금수준의 결정은 생산성 (1979 년 조사된 바에 의하면 고용인구의 약 50% 의 경우) 및 기업의 성과와 연결되어졌을 뿐 만 아니타, 근로자의 자격에 따라 그 상승률도 정비례하였다. 쿠바정부는 소비에 관한 정책을 수정하였고, 이것은 새로운 입금 및 사회정책의 개선과 상호 작용을 하면서 쿠바 경제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그리하여 가용 재화의 양과 종류가 빠르게 증가하였다. 1970 년, 95% 의 소비 지출이 배급 체제하에 있었다면 현재 수많은 생산물이 이 체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I980 년에 그 비율은 감소해서 약 30% 를 조금 넘을 분이다. 한편, 주택을 위한 새로운 정책에 따라 쿠바인들은 주택울 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 전 제입자는 주택의 소유주가 될 수 있으며 소유주는 방울 제놓을 수 있도록 하였다. 쿠바정부가 소비자에게 기울인 관십은 국내 수요에 대한 연구소

의 활동에 반영되었다. 이 기구는 규칙적으로 소비자의 선호에 대 해 조사하였으며 가용 재화의 재고 조사를 실시하였다. 뿐만 아니 라 이 기구는 소비정보에 관한 월간지를 발행하였는데, 1976 년부터 는 다양한 민간서비스와 관련된 각종 광고도 싣고 있다. 이렇게 소비자 선택의 촌중은 두자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켰으며, 1970 년부터는 이러한 정보가 정부 정책결정에 있어서 주요한 요소 가 되었고 국내 축적 전략의 일환으로 사용되었다. 결과적으로 비 교적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 더욱 많은 재화와 용역은 노동자 의 동기를 자극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효과를 나타냈으나, 국내 자 원의 이용에 있어서의 상당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지방분권화의 과 정은· 부존 자원과 관련된 제약과 계회화의 메카니즘을 완화하지 못하는 당국자에 의해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SDPE 에 의해 주 도된 물질적 자극율 제고시킬 계최에 따라, 기업은 수어의 일부를 〈자극을 위한 기금 〉 의 명목으로 보유하도록 허용되었다. 그렇지만 쿠바 경제를 유연하게 하지 못하는 당국자들의 경직성을 고려하면, 이러한 기금설치의 효과는 서서히 나타날 수밖에 없다. 죽 계획화 의 법위에서 생산된 재화 이의의 부분에서 물자의 결핍이 촌재하는 한, 기업이 보유하는 일부 수익은 그다지 큰 자극제가 되지 못한 다. 1979 년 기업의 2.8% 만이 〈 자극 기금〉을 이용하였다. 초기에 SDPE 가 이 기금에 대해서 예상한 3 가지 용도는 다음과 같다. 노 동자에게 부여되는 상여금, 사회 ·문화적 바용 및 처령한 시설 두 자 등. 그렇지만 사실상 계회화의 유연성 부족과 축적에 대한 상대 적인 문제접 등으로 인하여 이 기금의 사용은 뒤로 미루어졌다. ® 해의 원천의 자본축적 쿠바정부는 70 년대에 자기중심적 개발 정책에 우선 순위를 부여 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해의 자원에 의한 경제적 팽창 전략을 결 코 포기하지는 않았다. COMECON 과 서방 국가들과의 교역과 두 전영에서 공급된 금융자원은 쿠바 경제의 발전에 주요한 요소가 되 었다. 그것은 쿠바정부가 60 년대말에 시행한 전략 때문에 생건 정 치적 및 경제적 위기로부터 · 벗어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쿠바와

서방전영간의 무역은 현재에도 해결되지 못한 새로운 문제들을 포 함하고 있기 때문에, 쿠바와 소련의 관계는 경제면에서 매우 큰 비 중을 갖게 되었다. a) 설탕 수출과 국제 시장가격의 변동 : 설탕 생산은 쿠바 경제에 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계속해왔다. 1970 년에 있었던 〈 설탕 I 천 만톤 〉 생산작전에서 위기를 맞은 이후, 정부는 생산 목표를 축소시 켰다. 그러나 기계화의 전전으로 설탕 생산은 높은 수준을 유지하 였으며 (1970 년의 기록적인 수준을 넘지는 못함), 보다 적은 인력을 필 요로 하게 되었다. 한편 쿠바정부는 도시 및 농촌의 민간부문의 개인적 경제활동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설탕 산업에서 필요하였던 인력을 부분적으로 감축시킬 수 있었다. 1975 년의 경 우 사탕수수 베기와 수확온 각각 25% 와 95% 가 기계화되었으며, 1985 년에 는 이 들의 기 계 화 정 도가 62% 와 IOO% 로 증가하였 다. 70 년대 설탕수출 정책이 불안한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것은 생산 의 재조칙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세계 설탕 시세의 변화 대문이었 다. 세계 原糖 가격은 1974 년에 기록적인 수준에 도달한다. 이러 한 가격인상하에서 소련은 쿠바로부터 수입하는 설탕의 수입 가격 울 인상하였으며, 쿠바가 COMECON 회원국에게 판매할 것을 약속 했던 일정량의 설탕을 세계 시장에 판매하도록 허용하였다. 결국, 쿠바의 설탕 수출 收入온 기록적인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세계 및 소련의 설탕 수입가격과 쿠바의 경제 성장간에는 명백 한 관계가 촌재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961~1982 년간을 추 정한 결과 세계 설탕 가격의 10% 인상과 쿠바의 노동자 當 총생산 의 9% 증가간에는 통계적 상관 관계를 보이고 있다. 수출 收入의 증가는 국내 생산에 필요한 생산품을 수입할 수 있는 소득원이 되 었으며, 경제계최올 보다 유연성 있게 관리하도록 하였고 나아가서 지 방분권화를 가능케 하였 다. 70 년대 수출에 의한 성장 전략은 그 이전까지 추전했던 정책과 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서방 국가들과 밀접한 교역하에서 전행됐 기 때문이다. 1974 년에는 보다 새로운 교역 정책이 실시되는데, 이

때부려 정부는 브유의화(주로 강세동화)를 사용하여 서방의 데크놀로 지와 재화를 칙접 수입한다. 그러나 서방국가와의 교역으로 경제성장을 도모하려는 쿠바의 능력은 유리한 국제 정세에 기인하며 그것은 단기간으로 그쳤다. 세계 설탕 시세는 1974 년 II 월 파운드당 68 센트의 기록적인 수준 에서 3 년 후에는 약 7 센트로 떨어졌다. 설탕 생산이 생산 단위당 收入의 손실분을 보상할 만큼 충분히 빠른 속도로 중가하지 못하였 으므로. 쿠바는 1 차 원료와 시설재 또는 기술의 수입을 동해 축적 과정을 촉진시킬 수 있는 능력이 감소되었다. 더구나 쿠바는 세계 설탕가격이 높은 수준이었을 때 체결한 엄청난 의체를 상환해야만 했다. b) 서방국가에 대한 의채 : 서방국가둘이 쿠바에게 대출해 준 자 금으로 쿠바는 COMECON 회원국이 보유하지 못하는 기술과 재화 를 수입하였다. 70 년대초에 볼 수있었던 경제적 개선온 대부분 수 출 收入의 중가와, 그것으로 가능하게 된 두 • 융자에 의한다. 앞에 서 언급한 구조적안 변화는 확실히 필요하였지만, 그것이 빠른 경 제성장을 가져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한편, 서방 은행은 쿠바에 더 많은 융자의 편의를 제공하였는데 그 이유는 1973 년 OPEC 에 의해 단행된 유가 상승 이후 유동성이 크게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서방의 은행과 정부는 쿠바믈 〈안전한 고객〉으로 간주하였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세계 설탕 가격은 높은 시세를 보였고 사회주의 전영 국가의 지불 능력이 양호했기 때문이 다. 그렇지만 설탕 가격의 폭락과 이자율의 인상은 서방국가에 대 한 쿠바의 부채를 크게 증가시켰다. 쿠바의 부채는 1974 년 6 여 달 러였으며 1983 년말에는 28.6 여 달러로 증가하였다. 수출로 최득 한 의화(강세동화 기준) 收入에 대한 쿠바의 원리금 상환 비울은 1980 년에 48% 에 달하였다(총수출 收入에 비해서논 18.7%). 다른· 라틴 아 메리카 국가와 마찬가지로 쿠바는 지난 몇 년 동안 부채 상판에 관한 재교섭을 시도하였으며, 좋은성과를거두기도하였다. 그러나 쿠바에 가해지는 정치적 차별 때문에, 이러한 재교섭의 조항들은

부채의 합계가 보다 막대했던 다른 이웃나라에 비하여 보다 불리굴 F 였다. 강제통화 부채의 비중이 높아지고 세계 설탕 가격이 계속적으로 하락함에도 불구하고, 대외채무는 쿠바의 경제 활동을 혼란시키지 않았다. 표 36 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실질 G.S.P. (사회 총생산)는, 1981 년에서 I985 년기간에 대한 공식동계에 따르면 약 7% 증가 하고 있다(이 전과는 대부분 경제구조의 재편성 및 1976 년에서 1980 년까 지 증가된 두자율에 의함). 이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평균적으로 실질국민소득의 하락을 나타냈을 때 기록한 것이었다는 접에서 의 미가 있다. 물론 다론 자료에 의하면 I98I 년의 성장률은 신빙성 이 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 근거는 같은 해의 도매물가상승률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론 전문가에 따르면 불변 가격을 사용하였을 때에도 각 분야의 부가가치 중에서 실질 공업생 산은 1981 년 II. 7%, 1980~84 년 기 간 5. 5% 증가한 것으로 추 계된다. 한편, 쿠바에서는 실업이 거의 없는데 이것은 엄청난 실업 률올 보이는 다른 남미국과 대조된다. 뿐만 아니라, 쿠바논 남미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파탄을 수반하지 않았다. 쿠 바 실업자의 대부분은 최처생계비를 받으며 무상 의료 및 다양한 기본 서비스(보조금이 크게 주어침)의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의채의 원금 및 이자 부담은쿠바로하여금 수출을 늘이고 輸入을 줄이도록 강요하고있다. 쿠바는두자를감소시켜야만 했다. 따라서 I984 년도에 계최된 두자율은 G.M.P. (실물 총생산)의 18% 에 그쳤는데 그것은 I976 년에서 1980 년도까지의 루자율 29·4% 와 비 교된다. 이러한 두자율의 하락은 아마도 80 년대의 후반에 성장률 을 둔화시킬 것이다. c) 괄목할만한 국내 수입대체생산의 전전: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는 국내 생산으로 수입을 대체하고, 수출 상품을 다양화하면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하고 있다. 시실재, 내구소비재, 화학제품, 의 약품(쿠바는 국내에서 필요한 양의 83% 를 생산함), 전기 제품, 컴퓨터, 철강 등은 생산량이 대수롭지는 않았으나 (I958 년에는 촌재하지도 않

았음), 현재는 가속적인 팽창을 보이고 있다. 1959 년 기계공업 제 품과 시선재는 전체 공업 생산물의 1. 4% 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부문은 1970 년도부터 성 장률이 매 년 16. 6%에 달함으로써 1983 년에는 기계공업 제품과 시선재가 공업 생산의 13. 2% 를 차지하게 되었다. 다론 부문도 마찬가지로 1958 년 이래 비약적인 발전울 기록하고 있다. 즉 감굴, 수산물, 계란, 니켈, 시멘트, 전기의 생산이 여기 에 해당된다. 한편 쿠바는 사실상 새로운 사탕수수 수확기계, 관광 버스, 냉장고, 기타 내구소비재의 대부분을 생산한다. 수출의 다양화에 관해서 살펴보면, 총수출에서 설탕이 차지하는 비중은 1975~1979 년 기 간에는 평군 86. 8% 였으나 1980~1982 년 기간에는 79.9% 로 줄어들었다. 쿠바의 설탕 수 출 에 대한 의촌도 가 줄어든 것은 지난 기간 동안에 기록됐던 세계 설탕 가격의 하 락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설탕 가격은 1975~1979 년 동안 평 균적 으로 파운드당 11. 49 센트였 던 데 반해 , 1980~ 1983 년 동안에는 18.16 센트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두번째 기간 (1980~1983 년)에는 가격이 평군 58. I% 가 더 높았다. 따라서 설탕 의 수출 비중은 9. I% 가 줄어든 셈이다. 설탕 가격의 변화를 고려 한 조정에 따르면 쿠바의 설탕 수출에 대한 의촌도는 휠싼 더 줄어 든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 이후 쿠바의 총수출에서 설탕이 차지 하는 바중은 더욱 줄어서 1983~1984 년 동안 평균적으로 75·7% 로 감소되었다. 한편, 쿠바는 1976 년에서 1980 년까지 I15 개의 새로운 품목을 수출하였으며, 1981 년에는 17 개의 다론 품목을 추가하였다. 설탕 이의의 상품 수출액은 1978 년 2 여 3 천 5 십만 페소였는데 비해, 1982 년에는그것이 2 천 7 백 5 십만 페소로.중가하였다. 그리고 1984 년에는 감소추세를 보였지만 1985 년에는 이 수출액이 기록적인 수 준에 도달하였다. 한편 1983 년에는 석유의 재수출을 통해 쿠바는 1 백 5 십만 페소 이상의 收入울 얻게 되었는데, 이는 소련이 넘겨 준 석유의 일부를 강제 동화국에게 판매하도록 허용하였기 때문이

다. 재 수출 (1981 년과 1984 년 사이 에 국영 광산의 생 산이 3 배 늘어 나고, 에너지절약 계획에 매우 좋은 결과 를 가져옹으로써 가능하게 됨)을· 통동}여 1983 년에서 1985 년 사이 쿠바는 총강제통화 수입의 39.5% 를 획득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6 년의 석유가격 하락은 아마도 같은 해 에 2 여 달러 이상의 收入울 감소시켰을 것으로 추측된다. d) 새로운 대외관계의 형태 : 그러나 강세통화로 표시된 수출 收 入온 쿠바가 부채를 상환하고, 수입 필수품을 구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지는 못했다. 한편 70 년대말부터, 쿠바지도자들은 해의 자 원(해외 직접두자와 경영 및 기술에 관한 전문지식을 가전 의국인의 활용) 에 기초를 둔 다른 자본 축적정책을 경험하였다. 새로운 정책은 1977 년에 생산 계약과 합작기업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생산 계약 울 함으로써 쿠바는 기업의 초기 두자 및 융자를 지원하기 위한 자 금을 조달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기업은 생산품의 판매를 통하여 자기 금융을실현하여야만하기 때문이다. 반면, 합작기업의 경 우에 는 국가가 부분적으로 필요한 자본울 공급하여 야만 한다. 쿠 바정부는 일본과 조선 부문에 대규모 합작기업을 설립하기로 협정 울 맺었으며, 멕시코와는 유통부문과 농기계 제작 부문에서 합작 기업을 설립하기로 협정울 체결하였다. 한편 쿠바정부는 다른 수많 은 사업울 장려하였는데 1982 년 쿠바 당국은 해외 자본을 유치하 기 위해 외국인 두자에 관한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였다. 이 법률에 따르면 외국인은 기업 자본의 49% 까지 보유할 수 있도록 허용되고 있으며, 수익의 일부룬 본국에 송금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 라 인력과 생산물 가격에 관해 나름대로의 적철한 정책을 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또한 쿠바는 캐나다와 유럽의 수많은 기업 들과 협상온 시작했지만, 레이건 행정부에 의해 행사된 압력으로 일련의 두자 사업을 이행하는 데 방해를 받았다. 그러나수입품의 국내대체생산, 수출상품의 다양화 및 석유재수출 등의 정책이 부분적으로 주효하여 그 결과로서 무역수지는 혹자를 기록하였고, 이 혹자 규모는 강제통화로 1982 년과 1983 년에 각각 7 여 4 천 9 백 9 십 p,l- 페 소와 4 여 4 천 7 십 p,l- 페 소에 탈하였 다. 쿠바

는 1982 년 파리 큘럽에 의해 정해전 외채에 관한 재협정에서 고 정된 목표를 초과하였다. 한편 레이건 행정부는 쿠바에 대한 압박 을 더욱 강화시켰다(어느 국가도 쿠바와 교역을하지 못하도 록 재 3 국애 게 압력울 가하였으며, 미국인들이 쿠바에 관광을 하러 가는 것 을 금지함). 그러나 1981 년부터 설탕 가격의 폭락에도 불구하고 쿠바는 수익을 실현할 수 있었다. 쿠바가 COMECON 내에서 차지하는 독별한 위치로 말미암아, 이 나타는 세계 시장의 변동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몇 년 동안 소련은 설탕 및 니켈의 가격 안정을 위하여 막대한 보조금을 제공하 였고, 기술의 이전과 재정지원을동하여 이 나라의 발전에 기여하고 대의 채무의 결제를 위한 금융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 한 지원은 미국의 공식적 자료와 보도에 따르면 그 렇 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미국인들은 설탕 가격의 유지를 위해 부여된 보조금 의 액수가 과대 평가되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은 소련 의 설탕 시장 가격과 제계 시장 가격을 비교하는 대신 서방의 보조 금이 포함된 설탕 가격과 비교를 하며, 달러와 페소의 칙접 환율을 산정하여 기준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소련 의 쿠바에 대한 원조를 과소평가한다(쿠바가 소련에 수출을 하고 받 은 루분을 가지고 구매해야 하는 소련제 수출품은 조악한 질과 높은 비용이 요구되는 득칭이 있다). 소련의 원조에 대한 완전한 평가를 위해서는, 소련과 쿠바와의 우호 관계가 쿠바로 하여금 미국으로부터 금융 원 조를 받고 미국과 교역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여야 한 다. 어떤 연구자들은 쿠바에 대한 소련의 증여는 지난 몇 년 동안 , 줄어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양자간의 교역 조건을 갱신 하는 1976 년도의 협정이 준수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한편 1972 년에서 1986 년으로 연기된 쿠바 부채의 지불 기한은 한 차례 더 연기되어졌다. 그러나 쿠바는 여전히 설탕 수출에 크게 치 우침으로써 생산의 다양화가늦어지고있다. 또한 세계 설탕 시제는 파운드당 6 센트 이하에 머물며, 국제 수지의 감소와 강세동화로 표시된 외채의 원리금 상환 부담으로 인하여 쿠바의 외국과의 교역

은 80 년대의 남은 기간 동안 쿠 바의 자본축적을 방해하고, 쿠바의 발전 가능성을 재한하는 장애물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라고 침작케 한다. 결국 쿠바논 〈미제국주의자〉들이 남겨 놓은 유산-죽 설탕의 단일경작체제-울 그대로 이어받아 그 체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전영의 도웅을 받았다. 카스트로의 혁명에서 기대했던 유 산의 청산은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쿠바는 완만하지만 개량적 사 회주의의 건설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제 2 절 내부지향적 경제개발 전략을 추구한 인도 인도는 오랜 영국 식민통치하에서 독립, 이론바 강대국에 대해 알 레르기적 반웅올 보이는 나라이다. 더욱이 이 나라는 그 문화적 긍 지나 국가의 규모로 볼 때 충분히 자립적 • 독립적 경제건설을 수행 할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제 2 차 대전 이후 세계가 양대 전영으로 갈라졌을 때, 이 거대한 나라는 그 독립성을 유지, 문자그대로제삼제계에 스스로를 위치시 키면서, 한때는 신생국들 모임으로서의 〈 제삼세계 〉 의 리더를 자처 하기도 하였다. 미국에 의하여 주도되던 자유세계 및 소련에 의하여 관장된 공산 전영 등 양대불러에 둥거리 외교를 펼치면서 비록 양전영과 경제 협력관계는 맺으나, 인도의 기본적인 철학은 내부지향적인 경제, 죽 자생적이고 독립적인 경제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40 여 년이 지난 오늘날 이러한 개발전략의 결과를 접검해봉으로써 우리 는 이 모델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리는데 도움을 얻을 수있을것이 다.

1 개 관 인도는 정부 주도하의 개발정책을 추구하였으며, 수출 등을 동 한 국제 관계보다는 국내 시장에 우선을 두는 경제전략을 실시하였 다. 이러한 개발 모델은 일면으로 볼 때 그 타당성이 인정되나 다 론 면, 즉 전략의 유효성으로 볼 때에는 문제가 전혀 없는 것도 야 니었다. 이제 이 개발 전략을 지배한 6 가지 원칙을 요약하여 보 자 .8 )

8) Rene Le Moal, lnde : l'es po ir ind ustr iel, L'Usin e Nouvelle, 1979.

첫째, 국내에서 제작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국내생산을 도모하 고 그렇지 못한 분야에 국한하여 수입을 실시한다는 정책이다. 그 로부터 〈 턴키 〉 시스템과, 수입 부품으로 단순히 〈라이센스하의 조 립〉이라는 방법은 거의 이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시스템을 받아들 인 경우라도 장기적으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원칙은 시설재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죽 두자를 원하는 모든 인도 기업 들은 우선 기계나 부품을 가지고 있는 국내의 제조업자를 찾을 수 밖에 없다. 그로부터 인도의 제조업은 매우 다양하며 질적으로도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갖는 산업을 일으킬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관행은 국내 제품을 선호할 수 있도록 관세와 기타 규제의 장벽에 의해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그 결과 인도는 여러 부문에서 〈자급자 족〉할 수 있게 되었으며 국제수지도 마침내 호전되었다. 둘째, 서구의 기술을 최대한 흡수한다. 그러나 그 기술이 반드시 첨단 기술일 필요는 없다는 전략이다. 인도는 매우 여러 분야에 대 해 기술의 모방울 시도하였다. 원자력으로부터 자전거, 기중기에서 자동타자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술을 모방하려는 시도가 이루어 쳤다. 예컨대 드레그 G. Dre g회사는 모든 종류의 문자-로마 문 자, 그리스, 아람과 힌두어 등――를 칠 수 있는 타자기를 제조하 였다. 물론 이러한 기계들의 질적 수준으로 말하면 그것은 유럽의 어느 회사의 비서도 원치 않을 그런 조악한 제품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전기 기기에 대한 기술 도입은 우선적으로 고려 되지 못하였으나 그후 역시 국내에서 제조되었다. 핵 설비 또한 기 술적이고도 고장이 갖은 것이지만 스스로 건설하였다. TV( 흑백) 공장도매우유치스런수준이었다. HMT 社는 매년 백만개의 부 인용 손목 시계를 제작할 수 있도록 두자를 하였다. 이러한 기술모방 정책의 가장 괄목할 만한 결과는 인도가 두 가 지 모델을 제작한 자동차의 경우에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F i a t와 Mor i s 를 50 년대에 복제한 것인데 좌우간 이 인도산 자동차가 거리 를 질주하고 있다. 이 자동차는 연료가 많이 소모되지만 위풍도 당 당하게 그리고 대단히 견고한 모습을 하고 있다. 도로 사정이 유럽 보다 대단히 나쁜 인도에서 이 자동차는 많은 승객들을 태운 채 IO ~15 년 동안 운행되고 있다. 셋째, 인도 주민들로 하여금 필요하지 않는 소비재의 구입을 철 제하도록 한다. 불요불급한 소바재의 구입은 인위적인 욕구와 사회 긴장을 불러일으킨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다른 분야에 우선순위가 주어졌다 . 중공업 (철강, 화학), 에너지 (석유람사), 시설재 (기계 공구, 내연기관, 컵퓨터), 중간재 등. 인도의 자동차생산은고의로 낮은 수준(안구 6 여 5 천만명에 대해 1 년에 5 만대 생산)에 머물러 있도록 여제되었다. 자동차 가격은 상대 적 으로 바 서J: 편이 었 으며 (약 25, 000 프랑) , 생 산된 자동차의 2/3 는 정 부에 의해 구입되었다. TV 생산량은 미미하였고 자전거는 거의 생 산되지 않았다. 반대로 의류와 식량 생산에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 댜 따라서 섬유와 식료품 가공 산업이 장려되었고 이 분야는 거의 목표에 도달하고 있다. 또 국민들의 일상적인 욕구를 위해 매년 500 편의 매우 대중적인 영화를 제작하고 있으며, 종교도 여기에 한몫 을 하고 있다. 넷째, 완만하지만 확실하게 국내 시장을 창조한다. 이 원칙은 생 활수준을 향상시키며 산업발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가의 고용 정책은 일차적 목표로서 민간부문에도 더욱 많은 사람을 고용 하도록 하고 있다. 물론 이런 고용 우선 정책은 생산원가에 압력

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기업간의 경쟁이 십각하지 않으 며 기업은 충분한 이익을 실현하기 때문에 이러한 박애주의적 고 용 정책을 실시할 수 있다. 즉 근로자들은 하루에 8 시간, 일주일 에 6 일간 일하고 한달에 300 프랑 상당의 보수를 받는다. 통상 엔 지니어와 간부들의 임금은 2,500 프랑 이상을 초과하지 않는다. 따 라서 이 나라에서 중요한 것은 다수이며, 생산량이다. 물가수준은 비교적 낮게 유지되며, 그에 따라 가격상승에 의한 이윤확대는 크 게 기대할 수 없다. 다섯째, 단기적으로 농가 소득의 개선은 우선순위 가운데 최우 선 목표이다. 이 원칙은 새 정부의 주요한 목표 중의 하나로, 사실 상 인도 인구의 75% 는 농촌에 근거를 둔 70 만개의 촌락에서 집단 울 이루어 거주하고 있다. 그들의 생활 조건은 토지제도와 예측할 수 없는 기후의 악조건 때문에 장기간 궁핍한 상태에 있었다. 토지제도는 강압적으로 개선되었고 기후 조건에 따른 불리한 경 작여건도 개선되었다. 즉 인도에는 풍부한 수확을 가쳐다주는 계 절풍이 있었으며, 또 비료와 관개시설의 확산은 이러한 풍작을 가 능하게 하였다. 정부는 농촌에 중소기업을 건설함으로써 농업 발전을 보완시키려 한다. 물론 이러한 계획은 야심적이며, 어떤 사람은 이것을 유토괴 아적이라고 표현한다 • 실제로 자본과 기계가 부족한 상태에서, 그 리고 마울이 분산된 상태에서 IO 명 이상의 고용인을 수용할 수 있 논 제조업을 건설하기란 용이하지 않았다. 인도인들의 주장에 따르 면 한 중소기업에 5 만 프랑을 투자할때마다 22 명의 고용을창출한 다고 한다. 만일 규모가 큰 공장을 설립한다면 IO 배의 비용이 더 둘면서 IO 배의 인원을 멀 고용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공식적인 술 로건은 다음과 같았다. 〈중소기업에 대해 행해질 수 있는 모든 일 은 무엇이든지 하여야한다.〉 그리하여 500 여종의 상품울 중소기업 이 전담 생산하도록 하였다. 죽 비누, 성냥, 가죽, 섬유, 플라스 틱, 식품 그리고 자전거의 골격 등은 중소기업의 생산품 목록의 제 일 첫머리에 기록된 것이다. 가능하다면 대기업은 생산품의 일부를

중소기업에 양도하고 하청을 맡기거나 전출을 돕기 위해 자금을 융자하도록 권장하였다. 이와 같은 조치는 명백하게 농업을 소홀히 하였다고 비난을 받은 인더라 간디 정부에 대한 하나의 해답아기도 하다. 따라서 비료, 건설, 관개 및 농기구, 電 化를 위해 국내 시장 이 성립되었어야 했다. 이 정책의 결과는 인도의 공업으로 하여금 풀 가동을 가능케 하는 것이었으나 현실온 그렇지 못하다. 이러한 미니 중소기업과 대기업 중간에 위치하는 사업체로서 都 市, 또는 도시외곽에 하청업체가 건설되었다. 인도에 전출한 필립 스 Phil lips 社”는 560 업 체 로부터 부품을 공급받는데 그중 480 업 체 의 年 매상고는 l00 만 프랑 미만이다. 뉴델리에 있는 Escor t s 社는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며 그 가운데 Ford 의 마크를 붙인 이룬트랙 터를 생산하기도 하는데, 이 회사에 부품울 공급하는 수많은 업 체 가운데 많은 수가 그들의 침울 말이나 나귀에 싣고 本社로 들 어가고 있다. 이 회사의 하청업체는 565 개에 이르며, 고용원은 각 기 약 20 명 정도를 넘지 않는다. 이들은 이륜트랙터 부품의 30% 를 공급한다. 이들 하청업체의 총 매상고는 5 천만 프랑에 달한다. Escor t s 社는 인도 전역에 2,000 개의 부품 공급업자를 갖고 있으며 이들은 총 부품의 70% 를 공급한다.

9) 내덜란드 계통의 다국적 전자산업.

여섯째, 〈인도(또는 의국)의 자본주의는 이러한 묵적을 확실히 달 성하기 위한 규제 능력이 없다 〉 . 그러므로 민간부문의 대기업 (지나 치게 큰 기업)에 대한 감독이 행해졌으며, 그것은 이 기업의 과거의 남용에 의하여 정당화되었다. 그리하여 국가는 대기업의 두자와 대출을 동제하였고, 이 기업의 주식을 국가가 은밀히 사들였다. 이상에서 우리는 인도 경제의 개발 모델과 공업화 원칙의 특칭을 요약하였다. 2 경제성장의 요인 인도는 반복되는 경제위기에 시달려왔다. 그러나 1950~1980 년

기간 동안 인도의 국내총생산은 연평군 3·5% 증가하였으며, 그것 은 I 인당 소득이 I~I.5% 증가함을 의미한다. 제 6 차 5 개년 계 최 기간 (I980~I985 년)인 지난 5 년 동안의 경제성장 속도는 매년 5% 에 달하였으며, 이것은 인도에게 있어서 매우 고무적인 견과였 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부분적으로 여러가지 유리한 요소들이 복합 적으로 작용하여 생간 것으로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즉 1979 년 의 국내총생산이 전년도보다 4.8% 감소한 낮은 수준이었고, 유전 이 발견된 이후 석유 생산량은 예의적으로 빠른 팽창을 보였다 .10)

10) 석 유총생 산량은 I98o~1981 년 사이 에 10. 5 백 만 돈 에 서 1984~1985 년 사이 에 29. 6 백 만 돈으로 층가하였 다. 1984~ 1985 년도의 29. 6 백 만 론 중 3/4 은 Bombay Hig h 가 공급하였 다.

I) 국내시장의 확대 인도의 인구는 7 여 5 천만명이 넘으며 매년 2% 인 약 I 천 5 백만 명이 증가하고 있다. 매 IO 년간의 인구성장률은 다음과 같다. 죽 1960~1970 년 기 간은 2. 3%, 1970~I980 년 기 간은. 2. 1%, 1980~ 2000 년 기간은 2.0% (추정)이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참재 수요도 늘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국 내 시장은 오늘날까지 보호 관세와, 당국에 의해 필요하다고 판단 되는 상품의 반입만을 허용하는, 일련의 양적 규제에 의해 효율적 으로 보호되어겼다. 그러나 이러한 보호주의와 계최경제체제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최종 수요는 일상용품에서 현대적인 소비재(즉 자전거, 선풍기, 냉장고, 라디오와 TV 수신기, 풀라스틱 가정용품, 양수 기, 전기제품 등) 등 다양한 상품을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계속되는 최종 수요의 증가는 거대한 빈곤 계층에 의해 제한된 다. Panjo b 지 방에 서 일하는, 〈 가난한 자 中의 가난한 자〉라고 일 컬어지는,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일용노동자들은 현재 하루에 IO 루 피를 받고 있으며, 그나마 녹색혁명 이전에는 하루에 I~2 루피밖 에 급료를 지급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세금이 거의 부과되지 않는 인도의 농촌에서는 점접 더 많은 공산품을 소비하고

있다. 즉 비료의 소바는 4 년 동안 50% 나 중가하였다. 두번째의 한계는 이념상의 문제이다. 1956~1957 년 이래 각 겅 제계최에서는 국가의 개입을 동하여 富 의 재분배를 실시한다는 목 표를 내세웠다. 다시 말하여 서비스를 점접 더 사회화한다는 것이 다. 富 의 재분배를 이루기 위해서 정부는 不要不 急 하다고 간주되는 소비재의 수요를 여제하고 산업의 상위 부문인 공업 개발을 확대하 도록 유도하였다. 여기에서 계획은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죽 제 6 차 계획에서 고려된 개발 전략은 두자와 정부소비를 위해 수요 구 조를 수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반드시 상웅하는 민간 소비의 대규모 수정을 요하는 것이다 .11)

11) Six t h FYP(Fiv e Years Plan), 2-2 장, p. 22.

2) 농업생산성의 향상 장기적으로, 인도의 , 농업생산성은 매년 약 2.5% 증가하였다. 이 러한 농업생산성의 증가는, 제한된 지역에서나마 몇몇 농산물이 매 우 활발하게 생산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러한 웅칙임은 그후 차츰 다른 농산물 생산과 다른 지역으로 전달, 확대되는 추세이다. IO 여년 전의 녹색혁명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판잡 지방에 소백 생산을 ! > 그러나 이 슬로건은 현재 동쪽 지역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충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죽 이 새로운 지역에서 쌀농사 와 식물성 유류를 짤 수 있는 농업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도의 농가는 대규모의 변혁을 맞이하고 있다. 표 37 은 경작 떤 적과 생산성, 생산량의 변화를 비교한 것이다. 인도농업발전의 열쇠는 3 가지 투입물인물, 비료, 선별된종 자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인이 펀잡 지방에 국한시켜 관개시설을 정비하였다면 현재 이 시설은 인도의 전역에 걸쳐 진행되며 계최의 주요 실현과제 중의 . 하나이다. 오늘날 인도는 계회화의 실시로 매 년 약 2 백만 헥타르 12) 를 새롭게 〈관개된 지역〉으로추가하고있다.

12) 이 수치는 총 량이며, 다몬 이유(영분, wate r -log ging 등) 때문에 유실된 면져 은 계산되지 않았다.

〈표 4I> 경작면적, 생산성, 생산량

(연간 변화운, %) 경 작 면 적 Aj 산 Aj A 성 入J 량 I I II I I II I l I 총생산물 o. 51 o. 30 I. 30 2. 29 2.26 2,96 곡 식 류 0.40 0, 30 I. 50 2. 7I I. 91 3. 01 곡 물 류 o. 31 0.36 I. 90 2.86 2. 22 3.23 야 채 류 o.77 0,02 -I. 27 0.87 -o. 51 0.90 식(땅물콩성, 기겨 름자씨 등) 0.58 I. 55 2.30 2. 9I 2. 90 4. 51 기 간 I : 1967~1968 년부터 1975~1976 년까지 기 간 II : 1976~1977 년부터 1983~1984 년까지 자료 : Economi c Survey 1984~1985, p. 12.

그 결과 인도는 영국과 맞먹는 면적의 수리시설을 갖게 되었다. 소규모 관개 사업은 대규모 관개 사업보다 빠르게 전행되었다. 이 사업은 수익자들이 직접 사업에 착수하거나 또는 은행 융자를 통하여 p anchay a t s13) 들이 착수한다(표 사 참조).

13) 인도와 네팔에 있는, 오랜 전몽운 가진 마을회의. 1958 년부터는 마을 단위로 개발을 관장하는 기구의 역할운 합.

이에 비하여 대규모 토목사업은 인도 주정부의 책입하에서 이루 어전다. 그런데 수자원 확보를 위한 설비가 계속 진행되면 그에 따 라 비용도 상승하게 마련이며 경제적 생산성도 낮아진다. 그리하여 관개 시스텔의 운영은 많은 비판을 불러일으켰는데 득히 수자원을 이용하는 농민들이 실질 비용을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공 재정 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인도의 토양온 대단히 박토화되어 유기비료나 화학비료의 공급 이 필요하다. 인도 농촌의 특수성 (일상용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쇠똥 등을 이용하며, 녹비가 없는 등)은 화학비료의 생산을 꼭 필요하게 하 였다. 1984 년 비료의 총소비량은 8. 4 백만 돈으로 높아졌는데 이것 은 1980 년에 비해 52% 나 중가한 양이었다. 초기의 5 개년 계최 이

〈 표 42> 참재직 관개시설의 개발과 이용

( 백만 헥타 르, 누저치) 대규모 토목사업 소규모 토목사업 총토목 사업 7] 7& 참재면적|이용면적 참재면적 1 이용면적 참재면적 1 이용떤적 1979~1980 26. 5 22. 2 30. 0 30. 0 56. 5 52. 2 I980~I98I 27.3 22. 7 31. 4 31. 4 58. 7 54. I I98I~1982 28.2 23. 2 32.8 32. 8 6I. 0 56.0 1982~1983 29. I 24. 0 34.2 34.2 63.3 58.2 1983~1984 30.0 24,9 35. 6 35. 6 65.6 60. 5 I984~I985 홑) 3o.9 25.8 37. I 37. I 68.o 62.9 최대참재력 58. 5 55. 0 113. 5 자a) 료목 :표 E치co nomi c Survey 1984~1985, p. 12.

래, 정부는 질소비료를 자급자족할 목표를 설정하였으며, 이 목표 를 달성하는 데 상당한 자금을 할애하였다. 질소비료를 자급자족 하려는 목표는 부분적으로 달성되었을뿐 아니타그 생산비가 대단 히 높기 때문에 예산을 통한 정부보조로 충당되었다. 다수확 품종의 다양한 도입은 녹색혁명에 대한 비판 요인이 되 었다. 1979~1980 년과 1983~1984 년 사이에 다수확 품종이 경작된 면적은 37.4% 가 늘어났다. 1970~1971 년 이래 다수확 품종의 경 작 면적은 3.5 배로 늘어났다. 오늘날 다수확 품종을 파종한 면적 온 관개된 면적 전체에 이른다. 지금까지 다수확 품종은 고등작물인 밀과 벼(즉, 쌀)에 국한되었 다. 그에 비하여 식물성 유류 공급 작물(땅콩, 겨자씨 등)이나 식료 품으로서의 역할이 강조되는 소채류 등에 관한 품종개량 연구는 뚜렷한 결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이 작물들은 아칙도 박토나 수 리시설이 없는 토지에서 경작된다. 관개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이 지역에서는 경작자들이 국가가 구매를 통하여 가격을 유지해주는 새로운품종을선택하여 씨를뿌리고, 가장데마르고비옥하지 못한 토지를 구분하여 다론 작물을 경작한다.

녹색혁명의 성공적 결과는 전동적인 농업 부문의 안정을 변화시 키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시켰지만 수지를 따져보면 이 변화는 생 산, 소득, 고용 등의 측면에서 매우 긍정적이다. 그러나 1977~ 1980 년에 일어났던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인도 농업의 기후에 대 한 의촌성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 한편으로 농업 생산기반은 계속 확대되었다. 국가는 가격과 은행대출 및 작물의 구매와 처장 등 직접적인 조치를 취하였고, 그에 따라 최근에 들어와서 인도는 큰 어려움 없 이 〈 정상적 〉 이라고 간주되던 흉작의 연속에도 대처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농민들이 받아들인 전보된 기술은 경제적, 사회적 변혁을 일으키면서 다른 지역으로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그러나 농업 부문에 도입된 현대적인 기술은 다음 두 가지 측면 에서 첨예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첫째, 농촌 인구는 매년 2% 씩 일 정하게 증가하는데; 그것은 경작 가능 면적의 한계를 곧 드러내게 된다는 사실이다. 현재 조사된 토지 사용 면적은 앞으로 중대한 생

〈 표 43> 농업 신기 술의 발전

겨 l 획 I 1970~1971 I 1975~1976 I 1980~I98I I l983~I984 다수확품종 a ) 며 (쌀) 5. 59 12.44 18.23 22.28 밀 6.48 13.46 I6. IO 18. 55 옥수수 0,46 l. l3 I. 58 I. 81 모든 다수확품종 15,38 3I. 89 43.05 52.49 관개면적 38.00 45-3° 54. IO 60.50 화학비료 소비 b) 질소비료 1. 49 2. l5 3. 6 8 5.22 인산비료. 0.46 0,46 I. 2I I. 73 칼뮴 비료. 0.23 o. 28 0.62 0. 77 겨] I 2. 18 I 2. 89 I 5. 52 1 7.72 a) 백만 헥타르 b) 백만톤 자료 : Economi c Survey 1984~1985, p. 104.

태적 불균형을 유발시킬 수 있다. 중세에 인도를 뒤덮었던 삼림은 히말리아의 높은 계곡을 제외하고는 오래 전부터 사라지기 시작했 다. 이 지역에서도 삼림이 인간과 이득의 유혹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다. 석물로 덮혀있던 모든 평원은 거의 사라질 정도로 메마르게 되었다. 토양과 자연림의 황페화는 큰 재앙을 야기시킬 수 있는 것 이다. 둘째, 전반적으로 빈곤충인 인도의 농촌은 재정에 부담이 되 며 모든 주정부는 같은 현실에 칙면해 있다. 관개용수의 무상 공급, 비료대금의 부담을 경갑시키기 위한보조금지급, 국가에 의한 주요 재화에의 가격 지지와 같은 모든 조치들은 거의 조세를 동한 재원 확보라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실시되므로, 농업 부문에 제공 하는 정부예산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컬 것이기 때문이다. 3) 처축과 두자 인도의 경제개발 모델은 많은 결함과 오류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 만 그런 대로 그 공적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도는 개발의 문 계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국내 처축률을 높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 노력은 중앙에 집중된 경제계최화에 의하여 일관성 있게 추전되었고 안정된 정치가 이를 가능하게 하였다. 결국

〈표 44> 소득, 소비 , 저 축 (1979~1980 년, 1984~1985 년)

(G.N.P. 에 대 한 비 운, %) I 1979~1980 I 1984~ 1985a) 공공부문 처축 327 6.o 민간부문 기업 저축 I. 5 2. 0 가계저축 15. 8 16.4 가처분소득 100 100 -소비 79,0 75.6 -처축 21.0 24·4 a) 예상치 자로 : Six t h FYP, p. 35.

총 국민 처축 대 시장가 져 국내 총 생산

2(%6 .) 22 18 14 195 0 l 앗 60 197 0 . 1980 . 자료 : CSO, Nati on a l Accounts Sta t i st i c s .

국내 총처축률은 1950 년에서 70 년대 중반까지 규칙적으로 증가하여 G . N.P. 의 22.5 % 를 차지하기에 이르렀으며, 70 년대중반 이후부터 는 이 수준을 유지하거나 예의적으로 초과하기도 한다• 계획위원 회 는 총 국내처축 률 이 1984~1985 년에는 24- 5 %, 1994~ 1995 년에는 27.5 % 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또 현실적으로 는 부정되기도 하였지만 공공부문이 점접 더 많은 자원을 이용하는 만큼 더 많은 처축 을 야기시키리라는 가정을 하였다. 70 년대에 걸쳐, 처축과 두자의 군형은 의국의 〈차관 〉 에 의존함 이 없이 실현되었으나, 6 차계최 기간 동안에는 외국에서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불균형이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해의저축에 의한 자 금의 유입은 다음 표 45 에 명백하게 나타나있다. 1983 년과 1984 년의 자료는 6 차계최 기간 동안 저축과 두자가 균형접에 이르렀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것처럼 공공부

〈표 45> 처축과 두자의 구조 (1970~1985 년)

(시장가격, G.D.P. 의 비융 %, 5 년 평군) I 1970~1975 11975~1980 I 1980~1985 I 1980~I982a) 무 자 18. 3 22. I 25. 7 24. 6 -llJ .간부문 7. 5 9. 9 12. 0 IO. 5 _공공부문 Io. 8 12. 2 I3. 7 14. I 국내처축 17. 6 22. I 23. 4 22.3 一민간부문 3. 2 4. 6 4. 8 3.8 —.:,oZ..: o,Z . --r_>I_T..E 14. 4 l7. 5 18. 6 I8. 5 해의처축 o. 7 -0.03 2. 3 2. 3 국차내처이축과 루자의 -0.7 0.03 _·2. 3 —2 , 3 ―민간부문 -4. 3 -5.3 -7.2 -6.7 -공공부문 3.6 5. 3 4.9 4·4 a) 추정치 자료 W: “oTrkhien g F iPn a anpce irn sg , no°f 5i4n3v . estm ent in India 1975~1985, World Bank

문이 모든 처축과 투자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였다면, 이 차이는 민 간부문(기업과 가계)에 의하여 보충되었다. 사실상, 총고정 자본형 성이 예상보다 적게 증가하였음에도 봅구하고 G.D.P. 의 성장은 매 년 5. 2% 에 이 르러 당초의 예 상 목표에 도달하였 다. 5 가지 가능한 저축의 원천 가운데, 3 가지(기업, 가계, 해의)는 예상 목표에 도달하 였거나 초과 달성하였다. 반대로 정부부문과 민간부문은 일정 수준 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저축이 예상된 속도로 증가하 논 것온 총자본 계수가 다소 감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3 경제성장의 제동 인도형 성장방식의 특칭은(힌두식 성장을이라고도 함) 그 속도가 대 단히 느리다는 데 있다. 그것은 개인당 추계 방석으로 측정하지 않 더라도 같은 결과를 보인다. 지난 30 년 동안의 국내총생산의 성장

물을 IO 년 단위로 계산하면 다음과 감이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1950~1951 년에 서 1960~1961 년간에 매 년 3. 8%, 1960~1961 년에서 1970~1971 년간에는 매년 3.6%, 1970~1971 에서 1980~ 1981 년에는 매년 3. 2% 의 성장률을 나타냈다. !sher Ahluwal i a14) 의 추계 에 따르면 성 장률의 감소 추세 는 공업 생산품만을 고려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이 공업부문 성장에 관한 연구의 결과는 지난 수년동안 끊임없는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15)

14) !sher Ahluwali a, Industr i a l Sta g n ati on in India sin c e the Mi d- Six t ies , India n Council of Research in Inte r nati on al Economi c Relati on s, New Delhi, 1983. 15) 1983 년 10 월 MIT 와 Harvard 의 Cente r for Inte r nati on al Stu d ie s 에 서 개 최 된 회의에서 주요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 표 46> 인도의 공업 성장(%)

I 7] 7J: I I 7] 7J: Il 용도별 분류 총 중가울 8. 0 5. 7 기초생산물 I I. O 6.o 중간재 5. 7 4.4 시 실 재 I5·4 6. 8 소비재 4.7 5. 6 ―내구재 I I. 5 II. 5 -바내구재 4.2 4.9 원료 벌 분류 가공석료품 3. 7 4. I 금속제품 14. I 6.5 화 학제품 3. 2 8.4 주 : 생 산물은 용도와 두 임 물에 따라 구분함. 기 간 I : 1959~1960 년부터 1965~1966 년까지 . 기 간 II : 1966~1967 년부터 1978~1979 년까지 . 자료 : !sher Ahluwalia , Industr i a l St ag n ati on in India sin c e th e Mi d -S i x t ies, India n Council of Research in Inte r nati on al Economi c Rela- tion s. New Delhi, 1983.

Isher Ahluwalia 의 주장은 공업 부문의 성 장을 나타낸 표 42 의 자 료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K. N. Raj 는 !sher Ahluwalia 의 기 간 구분을 비 판하였 다. K. N. Ra j는 최초의 자료에 근거를 두어 G.N.P. 와 공업 제품 생산의 성장률은 조금도 감속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1976~1977 년 에 서 1983'1984 년까지 는 완만한 증가를 보였 다고 추정 하였 다. IG) 이 논쟁에서 어떤 입장을 취한다고 할지라도, 오늘날 경제 학자들 은 인도의 경제가 보다 더 가속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다는 데에 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물론 이들은 현 재 현상의 원인규명 에는 각기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그동안 권력의 고삐를 쥐고 있 었던 계최 경제의 신봉자들은 자신들의 방법이 현사태에 내한 일말 의 책임이 있음을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중앙 정부는 인더라 정권하에서도 그랬지만 라지브 정권하에서는 보다 간접적이고 덜 교조적으로 경제를 운용하려는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경향을 보 였다.

16) K. N. Raj, Some observati on s on Economi c Growt h in India , Economi c and Poli tica l Weekly, volume XIX, n°41, octo b re 1984.

경제성장에 제동을 거는 주요한 요인을 찾기 위해서는 가장 일반 적인 문제에서부터 가장 목수한 문제까지 고려하여야 한다. 죽 구 조적인 요인에서부터 최근의 개발에 관련된제문제를고려하여야할 것이다. 1) 경제성장의 회생으로서의 하부구조 인도의 공식 통계에서 사용하는 하부구조의 개념은 다음의 각 부문을 포함한다. 즉 석탄, 전력, 석유 채유와 정유, 철도 운송 및 해운 등이 그것이다 . ' 17) 이 기간산업은 경제 운용에 있어서 그 중요 성이 강조되지만 농업보다는 후에 그리고 기타 공업보다는 앞선 80 년대초에서야 제자리물 찾았다. 이것의 중십적인 역할이 강조된 것

17) 우리 는 이 분야 를 기 간산업 의 법 주에 속 하는 것 으로 간주한다. 하부구조 !'inf r a- s t ruc t ure 는 보다 더 광범위한 분야, 예컨대 도로망이나 상 • 하수도 시설 등을 지칭한다.

은 1979~1981 년의 위기에서였다. 즉, 하부구조는 다른 분야에 철 대 적 으로 필요한 주요한 두임 물 inp u t 을 공급하며 이 두입 물은 상 호 의존관계에 있 다는 사실이 부각된 것이다. 예컨대 철도는 채탄 산업에 필수불가결하며 또한 석탄은 철도 운송에 꼭 필요한 것이 다. 그러나 이 기간산업은 전적으로 국가에 예속되어 있다. 국가 는 株 主이며 경영자이고, 자금을 공급한다. 예를 들어 철도 운송에 관해서 살펴보면,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제 계 유수의 철도망 (50,oookm) 을一一아시아에서는 가장큰규모인―― 물려받았다. 이철도는 2 차 5 개년계획 기간동안그유지와현대화 를위해 막대한자금과설비를 할당받았다. 고러나 제 3 차 계획 (1961 ~1965 년)부터는 총자본형성에서 철도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 들었으며, 두자를 위한 대출도 실질가치로 볼 때 감소하였다 . 컬 도망의 노후화는 1979~1981 년 기간중 하부구조의 침체를 가쳐온 중요원인이었다. 이 에 대 하여 Isher Alhuwalia 는 60 년대 중반부터 70 년대 중반 까지 공공부문 두자의 감소는 모든 하부구조 부문에서 일어났으 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결과가 발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첫째, 모든 기간산업에서 일련의 결핍(단전, 전기망 차단, 객차의 부족 등) 이 발생하였고, 둘째로 기간산업의 큰 소비자인 상부 산업의 제품 (철강, 객차, 제조공장, 중기 등)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였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역설이 생겨났다. 기간산업과 공공투자에 의촌하는 발전모델에서 이 기간산업은 ` 그 활동을 유지하고 확대하 는데 필수불가결한 수단을상실하였다는접이다. 계최 모델은 여러 가지 생산 단위를 건설하는 데 있었으나, 역설적으로 이 생산 단위 는 사용되지 않는 가운데 다른 분야로 배분될 수 있는 자본을 동결 시키고 말았다. 사실상, 제 2 차 계최초 (1957~1958 년)부터 시작된 병 목현상의 악순환은 1963 년 이 후에 더 욱 악화되 었 다가 80 년대 초에야 완화되었다. 이러한상황속에서 불규칙한 장마나 의부 충격 (OPEC 의 유가인상 등)이 발생한다고 할 때, 1973~1975 년과 1979~ 1981 년의 경우와 같은 십각한 위기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물론 중앙 정부의 노력―一일부 공공 서비스의 상황을 개선하려는 ―에도 불구하고, 하부구조가 가지고 있는 결접은 제거되지 않고 있다. 화력 발전의 경영계수는 1976~1977 년 55% 였던 데 비해 오 늘날에는 50% 미만에 머물러 있다. 철도망은 계속적인 현대화 노력 을 요구한다. 물론 그 이 용자들은 보다 유리 한 육로 수송으로 방향 을 바꾸기도 하는데 계최수립자들은 이 새로운 경향을 무시하고 있었다. 2) 국제수지의 취약점 제 6 차 계최의 국제교역에 관한 章 은 다음 같은 실패의 고백으로 시작하고 있다• 즉 〈인도 경제는 제 1 차 계최 때부터 항상 국제수 지의 어려음에 칙면해 있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의하고 인 도는 지난 30 년 동안 계속 무역수지의 적자롤 기록했다. 이러한 국제수지의 만성적 적자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 도가 6 차 기간 동안 국제수지에 대해서 극복해야 할 문제는 매우 십각할 것이며, 혀신적인 접근을 필요로 할 것이다. 〉 18)

18) Six th FYP, p. 70.

우리가 여기에서 먼처 지적해야할사실은, 세계시장은 인도를 매 우 주변적인 국가로 취급하며 아무런 관십을 갖고 있지 않으며, 세 계 시장에서 인도가 차지하는 비중도 감소하였다는 것이다. 인도의 수출은 1960~1961 년에 세계 수출의 I. 05% 를 나타냈으나, 오늘날 에는 단지 0.47% 를 나타낼 뿐이다 .19) 보다 중요하고 놀라운 사실 은, 동남아시아(중국 제외) 국가의 수출 중 인도가 차지하는 비중은 1968 년 20% 에서 1983 년에는 5% 에 그쳤다는 접 이 다. 70 년대 동안 상대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수출은 같은 기간 동안 한국, 홍콩, 대 만, 싱 가포르의 수출보다 2~3 배 느린 속도로 증가하였 다. 현재 인도의 해의 교역은 중국의 절반을 차지할 뿐이다. 20 년 전처럼, 오늘날에 있어서도 국제수지문제는 경제정책의 주 요한 제약 중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국제수지의 균형이 제시하는

19) GATT 의 1983~1984 년 보고서 의 통계 에 의 합.

〈표 47> 국재수지 요약 (1971~1972 년과 1981~1982 년)

(단위 : 10 여 달러) I 1971~1972 I 1981~1982 수입 2,680 15,484 수출 2,090 I 8,658 무역수지 _590 -6, 825 무역의수지 -I85 3,683 현금지불찬고 _772 -3, 142, I 민간자본의 이동 -IO. 6 9r. 3 공공자본의 이동 179 -262 상환 -336 -729 순자본 -146. 7 -952. 2 오차 및 누락 —8 6.4 -441 총찬고 -I, 005, 3 -4, 535, 3 적자충당을위한자금조달 ―해외원조 1,038 2,020.8 —- IMF 102.6 7IO 一외환보유 변동액 -135. 2 I, 804, 5 총액 I, 005, 3 4, 535. 3 현금지불찬고국' 총생산 I I. 5% I 2.0% 자료 : Economi c Survey 1984~1985.

문제는 변하였으며, 국제수지의 구조도 변화되었다. 표 47 은 IO 년간의 국제수지의 개요 및 IO 년을 기간으로 한 융자의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이 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전 동적으로 적자를 나타내고 있는 무역수지는 IO 년마다 계속해서 전체수지 균형의 결정요인이 되고 있다는 접이다. 둘째, 무역의수· 지(관광, 해의교포의 송금)는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혹자를 발생시키기도 한다(그러나 지난 2~3 년 동안은 혹자가 감소하 는 경향을 보였다). 셋째, 자본거래 계정은처개발국의 전형적인 〈초

기〉 단계 (필수적인 자본을 의국 원조에 의해 조달하는 단계)로부터 고전 적인 채무국의 단계로 변하였다. 모든 자본, 죽 순수한 의미의 원 조, IMF 의 편의, 은행 대출, 만간 두자 등에 의촌하는 형태률 취 하고 있다. 마지막 항목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그것은 국내에 거 주하지 않는 인도인에 의한 외화예금형태로서 이 항목은 3 년 전부 터 크게 늘어났다. 넷째, 인도의 상황은 부채가 매우 가벼운 상대 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시적인 군형 상태는 언제나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달러로 표시된 외채는 1974 년 u6 여 달러에서 1983 년 214 여 달러로 늘어나 IO 년 동안 2 배가 되었다. 인도 경제에서 오 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초기 IO 년 동안에는 G.D.P. 의 13~14% 였던 데 비해 현재는 II,4% 로 다소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 수출의 9% 를 차지하는 외채 원금 및 이자의 비율은 이자가 서J: 장기 차입금이 므로 큰 부담을 주지는 않는다. 반대로 의환 보유고는 5 년 전부터 크게 낮아졌다. 순외환 보유 고를 산정하기 위해 IMF 에 대한 부채를 고려하믿 순외환 보유고 는 I979~I980 년에는 7~8 개월분의 수출액이었으나, 현재는 1. 5 개 월분만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표 48). 의환보유고의 감소는 I98I 년초 인도가 십사숙고한 끝에 취한 일 종의 도박으로서 그 결과는 식량 부족으로 목칭지위지는 위기 상황 과 연쇄적인 일련의 병목현상 그리고 2 차 석유파동에 따른 어려 운 사정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도는 IMF 의 지원 아래 접

〈표 48> 인도의 외환 보유고 변동

(백만루피, . IO 여 달러) 총 。각 IMF 의 순 지원액 루 모 l 1 달 러 루 포] 1 달 러 1930 년 3 월말 59. 2 7.6 59. 2 7.6 1983 년 3 월말 47.6 4.8 20,0 2. 0 1984 년 3 월말 59.45 5. 5 I8. o I. 7 자료 : Economic Survey 1984~1985.

전적으로 문제륜 타개하려 하 였 다. IMF 는 50 여 SDR 을 대 출 하였 고 그중 39 여 SDR 을 사용하였다. 국제수지의 개선은 보다 적극 적인 수출 전략을 요구하며, 재화와 용역의 수출은 제계 경제에 대 한 개방울 반대 급부로 요구한다. 또한 기업에 부과된 여러가지 제 약과 규정도 완화되어야 한다. 지난 몇년 동안의 인도 경제는 미마하기는 하지만 누적적 효과를 지닌 변화를 겪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인도는 중요한 전환접에 놓여 있는 듯하다. 1981 년부터 가속화된 경제성장과 더불어 기업 을 압박하던 제반 행정 규제도 완화되고 있다. 그러면 인도는 로스 토우 類 의 tak e o ff를 시작하기 칙전에 있는 것인가 . ? 좌우간 인 도에는 민간부문이 사용할 수 있는 참재적 자원이 존재한다는 사 실을 감안하여야 한다. 공업 부문에 대한 두자의 재개와 봄베이 증 권 시장의 공업 부문 주식가격의 폭등은 상칭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정부로부터의 십각한 제약들은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 이다. 인도의 농업 생산을 0.5% 증가시킨다는 것은, 그 바울은 미 미하지만 대단히 야심적인 목표이다. 그리고 인구 증가율의 감소 역시 〈 목수한 조치 〉 를 대한다는 전제하에 우선순위 중의 우선이 되 어야 한다. 하부구조의 현대화는 역시 기본적으로 달성하여야 할 목표이 다. 물론 이 의 달성 을 위 하여 공공부문이 사용하는 자본의 일부를 동결시켜야 할 것이다. 수출의 필요성은 산업구조의 조정과 국내 시장의 개방울 함께 요구하는데, 이는 정치적인 결과를 초래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인도의 상황에서 보면 이 점에서는 시장보다는 정 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정부의 제약과 여러가지 유인 정책은 벌로 효과가 없다. 정부는 총생산시설의 60% 를 소유하며 생산업체 2/3 의 고용을 장악하고 있다. 관리가격의 부과, 두자에 대한 통 제, 정부의 구매 형태 그리고 은행가의 역할에 대한 규제 등으로 국가는 경제의 핵십이 되고 있다. 인도의 G.D.P. 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부문은 〈공공행정 및 국방〉이다. 또한 행정부의 역 할은 꿇임없이 증가하고 있다. 죽, 〈공공행정 및 국방 부문〉은 30

년 동안 8 배로 늘어났으며, 공업 부문의 생산은 4 배로, 농업 부문 의 생산은 2 배로 늘어났다. 공공지 출 의 팽창은 이상의 〈협 상 〉 의 결과이다• IO 년전 이 지출 온 G.D.P. 의 20% 였으나 현재는 36% 에 도달한다. 행정부의 소요 비용은 G . D . P. 의 IO% 에 달한다• 각 주정부의 예산은 대개가 파산 칙전에 있으며 이로 인하여 중앙정부는 이 주정부에 어떤 감독과 통 제를 가할 수가 있다. 인도의 경제를 전망하는 데는 그 국가의 본질――죽 총 체적으로 볼때 2 분화된 현상을 보이는-울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인도는 〈 사회 • 정치적 〉 으로 분열되어 있다. 사회의 각 구성원은 성장의 혜 택을 불공평하게 받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선거에서는 한 표를 구사할 수 있다. 다른 분열은 〈 지정학적 〉 인데 어느 지역은 하 나의 독자적인 〈국민국가 〉 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 準 國 家 는 그들의 ide nti ty 룔 주장할 것 이 다. 20)

20) Pranab Bardhan, The Polit ica l Economy of Develop m ent in India , Basil Blackwell, 1984, pp. 65~66.

3) 모순의 나라 독립과 더불어 30 여년간의 5 개년 경제개발계최_—내부지향적인 개 발 전략-~울 추전한 인도 (1987 년 개 인당 G.N. P. 250 달러 )의 손익 계산서를 작성하여 보면 한마디로 모순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산업 의 천국인 방갈로르 Bang al ore 는 현대 적 인 공장이 꽃밭에 둘러 싸여 있 으며 새 들의 노래 소리 가 들리 고, 공원들은 tea tim e 을 줄기 며, 영국에서보다도 더 엄청난 입금인상 요구를 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 캘커타 Calcu tt a 에서는 초과밀 인구가 생지옥 같은 곳에서 영 양실조와 실업 및 무주덱자로서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한편으로 국가는 모든 권력을 움켜쥐고, 기업주로서, 은행주로서…… 감독하 고 조정하며 5 여에 달하는 빈민의 존재를 책임지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로 대 자본가는 Buic k 나 Benz 를 굴리 며 프랑스 말을 완벽 하게 구사하면서 근로자의 주택 이 나 아동들의 학교는 아랑곳하지 않는

가운데 국내의 시장에 끊임없이 두자하며 산뜻한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고 때로는 국가에 호통을 치면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다. 한편으로는 국영 탄광회사(석탄)에서의 끊입없는파업으로 발전시 설과 열차 운행이 마바된다. 다른 한편 캘커타에는 아칙도 카스트 제도(공식적으로는 페지되었으나)가 업격히 지켜지는 가운데 새로 사 회에 전출한 기업의 중견간부, 엔지니어는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 고 활보하며 때로는 해의 이주도 서슴지 않는다 .2 1)

21) Rene Le Moal, lnde : l'espo ir ind ustr i e l , L' Usin e Nouvelle 5, 1979.

우리는 이상에서 하나의 자립적 • 자생적 개발모델로서의 인도가 자본주의 경제에 내포하는 모순과 국가자본주의―좌익 노동주의 tva vail lism e de g auche 가 갖고 있는 결접을 버리지 못하면서 특이 하고도 완만한 경 제성 장을 추구하는 경 우를 보았다.

제 3 절 다이내믹한 발전전략 : 한국 • 대만 • 홍콩 • 성가포르의 예 I 가속적 성장 아시아의 NICS( 또는 NIES) 로 불리는 한국, 대만, 홍콩, 성가포 르 등은 최근 세계경제무대의 전면에 크게 부각된 국가둘이다. 1960 긴대 중반까지 이 네 나라가 차지했던 세계수출에서의 비중은 겨우 i%에도 못 미치는 것이 었으나 1987 년에는 무려 6. 5% 정도를 차지 하는 놀라운 성장세를 보였다. 이 국가들의 가장 주요한 수출대상국은 미국으로, 전체수출액의 ~o% 이상을 미국 한 나라가 차지하고 있으며 . , 1980 년 이후 1986 년 까지 이 네 나라가 기 록한 수출증가액 560 여 달러 중에 서 54% 에 같하는 300 여 달러를 미국이 수입한 것으로 나타난다(표 49 참조). 1986 년의 한해 만을 살펴볼 때 , 미 국이 아시 아의 신흥공업 국들로 부터 수입한 총액은- CIF 가격 기준으로 약 500 여 달러에 달하는데, 기 규모는 미국 총수입의 13% 에 해당하는 것일 분만 아니타 유 럽(프랑스, 독일, 영국 등)지역으로부터의 수입액과거의 맞먹는 액수 기다. 반:면 이들· 국가에 대한 미국의 수출은, 미국이 1980 년대초

〈표 49> 한국, 대 만, 홍콩, 성 가포르의 수출 증가액

(1980~1986 년) 수 oJ 국 I IO 여 달러 미국 29. 8 EEC 3.2 일본 5· 4 기타 아시아 신흥 공업국 4.2 기타 아시아 국가 8.o 나머지 세계 여러 국가 a) 5. 9 총증가액 (1980~86) I 56.5 a) 중동국가 포함.

부터 이들 국가에 더 많은 수출을 하려고 시도해 왔음에도 불구하 고, 미국 총수출의 9% 에 그쳐서 결과적으로 1986 년에 미국이 기 록한 무역수지 적자액 (약 170 여 달러)의 20% 에 해당하는 금액은 이 나라들에 대한 역조의 결과이다. 아시아의 신홍공업국들은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 출중대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그 주요대상국이 마국이기 때문에, 그리고 미국은 무역수지적자의 상당부분이 이들 국가와의 만성적 무역수지적자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아시 아의 신흥공업국들에게 무역수지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압력 을 가하는 것은 한편으로 당연한 귀결이다. 미국이 이들 국가에게 취한 조치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주요한 것 들만을 살펴본다면 첫째, 달러貨에 대한 이들 국가화페가치의 평 가절상요구 둘째, 미국산 상품에 대한 각종 수입장벽의 철페요구 셋째, 미국의 통상법 제 301 조의 발효에 의한 불공평 무역거래의 제 소 넷째, 그동안 지속적으로 실시해왔던 일반특혜관세제도 (GSP) 의 수해대상국에서 이들을 제외시키는 것 등을 둘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시아의 신흥공업국들이 미국에 대해서만 무역수지혹자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나라들은 전체적으로 유럽지역에 대해서도 무역수지혹자를 나타내고 있다(표 50 참조).

〈표 50> 한국, 대 만, 홍콩, 싱 가포르의 총무역 수지 및 경 상수지

(IO 여 달 러) I98o 1985 1986 수출 (FOB) 76.4 114. 0 l3I. 2 미국 19. 0 39. 6 49. I (전체바울, %) (24. 9) (34, 7) (37. 4) 일본 7.7 ll. 4 13. I (전체비울, %) (Io. I) (Io. o) (10. o) EEC 12. 7 12. 3 17. 3 (전체비울, %) (16. 6) (10. 8) (13. 2) 수입 (CIF) 88. 5 107.2 II6. I 미국 15. 6 18. 。 I8. 8 (전체비율, %) ( I7. 6) (16. 8) (16. 2) 일본 20.7 24.5 3o.9 (전체비율, %) (23. 4) (22. 9) (26. 6) EEC 8.8 II. 5 14. I 무역(수전체지비 율, %) —·I(29 .. 9I ) (Io6.. 87 ) (1125.. 2I ) 미국 3.4 21.6 30.3 일본 -13. 0 — 13. I -17. 8 EEC 3. 9 o.8 3, 2 기타국가 -6.4 -2. 5 -o.6 겅상수지 -9.0 12. 2 22.3

그러나 개별적으로 볼 때, 이들 네 나타의 대미 무역수지와 대유 렵 무역수지의 추이는 매우 상이하게 나타난다(표 51,52,53,54 참조). 먼처 홍콩과 성가포르의 무역수지를 살펴보면 이 두 나라는 미국 과의 무역에서 기록한 혹자를 기타 국가들과의 교역에서 기록한 적 자가 거의 상쇄시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경상수지는 균형을 이 루고있다. 한편 대만과 한국의 경우는 이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먼처 대 만의 경우 일본을 제의한 모든 나라와의 교역에서 혹자를 보여 경

〈표 5I> 홍콩의 무역수지 및 경상수지

(IO 여 달 러) I 1980 I I985 I 1986a) 수출 (FOB) 19. 7 30. 2 34.5 수입 (CIF) 22.4 29.7 34.9 무역수지 -2.7 o. 5 -0.4 일미국본 -42..2 5 -56.. 6 5 —85.. 5I EEC I. 8 o. 3 I. I 기타 다론 국가 -2.8 -0.7 -4. I 겅상수지 -I. 3 4.2 2.4 a) 추정치

〈 표 52> 싱 가포르의 무역 수지 맞 경 상수지

(IO 여 달러) I 1980 I 1985 I I 986a) 수출 (FOB) 19. 4 22.8 22. 0 무수일E미E입역본국C 수 (C지IF ) —-——2o0244..... 6097I -——23o6o2..... 58335 ---23305I..,.· 3 33II 기타 다른 국가 -0.9 -I. 5 -1.4 겅상수지 -I. 5 -0.3 o. 2 a) 추정치 .

상수지는 1980 년 이후 혹자를 기록하였고 그 폭이 접차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 한국도 일본과의 교역에서 나타난 큰 폭의 무역 수지 적자를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 기록한 혹자로 상쇄시킵으로써 1986 년 이후 경상수지가 혹자로 전환되었다. 특히 한국과 대만은 유럽지역에 대한 수출증가가 매우 완만하게 나타나지만 혹자규모가 꾸준히 증대하고 있다. 또 미국이나 유럽을 제외한 기타 국가들과

〈표 53> 한국의 무역 수지 및 경 상수지

(IO 여 달 러) I 1980 I 1985 I l986a) 수출 (FOB) 17. 5 3°. 3 35.8 수입 (CIF) 22.3 31. I 32. 3 • 무역수지 -4.8 -0.9 3. 5 미국 -0.3 4·3 7. 5 일본 -2.8 -3.0 -5.8 EEC I. 2 o. 2 0.6 기타 다른 국가 -2. 9 -2.4 I. 2 겅상수지 -5. 3 -o.6 4.7 a) 추정치

〈 표 54> 대만의 무역수지 맞 경상수지

([0 여 달러) I 1980 I 1985 I 1986' 수출 (FOB) 19.8 30.7 38.8 수입 (CIF) 19.8 20. I 23.6 무역수지 o.o IO. 6 15. 2 미국 2. I 10.0 13. 4 일본 -3. 2 -2. I -·3 · 4 EEC 0.9 I. o I, 6 기타 다른 국가 0.2 I. 7 3.6 경상수지 一 0.9 9.2 15. 0 a) 추정치

의 교역에서도 한국과 대만은 일본과 치열한 경쟁상태로 동장하여 수출을 계속 중가시키고 ' 있는 실정이다. 대체적으로 본 이러한 상황으로 판단할 때 아시아의 신흥공업국 들이 세계무역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며, 비교적 짧은 기간내에 놀라운 발전을 한 것임에 불림이 없다. 한국 을 위시한 대만, 홍콩, 싱가포르가 후진의 굴레믈 벗어나 고성장을

구가하는 가장 주된 요인은 물론 수출증대를 통해 경제발전을 이루 려는 의연적 성장정책의 결과이다. 이 국가들이 의연적 성장정책을 채택하여 크게 성공한 사례로 주목받고 있는 이 시접에 있어서 먼 처 이들 4 개국의 유사접을 비교해 보고, 어떠한 방식으로 의연적 성장정책을 추구했는지 검토하기로 한다. 2 아시 아 신홍공업 국들의 유사접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는 경제발전의 과정이 유사한 것처럼 경제발전이 본격적으로 추전되기 전의 기본조건에서도 여러가지 공 통접이 발견된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들을 몇 가지 살펴보면 다음 과같다. 첫째, 이 국가들은 모두 부존되어 있는 천연자원이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찬 표현이 아니다. 따라서 자국내의 자원을 이용하여 급 속한 경제발전을 괴한다는 것온 실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일이었 다. 둘째, 이들이 채덱한 기본적인 발전전략은 원자재를 수입한 후 가공 • 변형하여 수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경제발전은 수출을 동해 주도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무역, 특히 수출은 경제발전의 열쇠이며, 그 발전속도는 국민총생산이 연평군 10% 내의로 증가할 만큼 빠를 것이었다. 결국 이 국가들은 한마디 로 대의지향적 경제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수출주도형 경제발전전략은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 가능하였다. 왜냐하면 이 국가들은 모두 발전 초기와 중기에 있어서 수작업에 능한 값싸고질좋은노동력이 상대적으로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특별한 경우안 홍콩을 제의 한다면, 모든 국가들이 비교적 최근까지 노사분쟁이나 반국가행위 가 컬처히 배제되거나 여제될 수 있는 강력한 국가권력구조를 가졌 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넷째, 제조업분야, 특히 경공업분야의 발전이 1960 년대 이후 급

속히 발전하였고, 생산되는 제품이 대부분 수출상품 위주였다• 다섯째, 농업 부문은 급속한 경제발전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하고 단지 이차적인 역할을하는데 그쳤다. 특히 도시 국가인 홍콩과 성가포르는 농업 부문이 거의 촌재하지 않았다는 특 칭을 갖고 있었다. 대만은 농업정책이 상대적으로 가장 잘 실시된 국가이며, 그와는 반대로 한국에서는 농업 부문이 가장전통적인 분 야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소비조차 충족시킬 수 없을 정도로 국민경 제의 부담이 되었다. 여섯째, 홍콩, 성가포르, 대만 등 제 나라는 중국계 인구가 지베 적이며 한국도 여사적으로 볼 때 중국문화권에 속한다. 따라서 이 둘 모두가 공통적인 문화를 소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수출주도형 경 제 발전전략의 채덱 세계무역에서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의 신흥공업 국들이 괄목할 만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이들이 수출에 기반 울 둔 개발전략을 채택하고 꾸준히 추전해 온 결과이다. 세계경재가 호황과 불황을 겪으면서 현재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 고 이듄 국가가 수출을 통해 놀라운 성장세를 유지해온 것은, 이 국가들의 주요수출상품이 선전국에서는 사양화된 산업에 속한 것이 거나 소비재 위주의 상품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는 않다. 더구나 이들은 거의 전적으로 수출중전에 전력을 다함으로써 내포적 경제 성장전략을 채택했던 여타 개발도상국들에 비해 훨씬 높은 국내 총 생산증가울을 기록하였으며, 그에 따른 견과로 1 인당 국민소득도 보다 크게 나타난다(표 55 참조). 수출에 중점을 두는 의연적 성장정책은 기본적으로 소규모의 국 내시장을 겨냥하는 산업보다는 업청나게 큰해의시장을목표로하여 수출참재력이 있는 산업에 생산요소를 집중적으로 두입하는 것이 다. 따라서 이러한 성장정책이 성공하려면 세계시장의 추세를 정확 히 파악할 수 있는 능력에서부터 비교우위산업의 선정, 규모의 경

〈표 55> 경제성장의 비교와 수출의 결과

국내 총 생산 | 수 출 1 인당 국내총생산 연평균 증가율 (1976~86) (%) (1986 년) (%) 호。 콩 8.6 8.4 6,620 한 국 7.2 13. 5 2,140 싱가포르 6. 5 8.3 6,560 디] uJ : 8.o 13.2 3,230 인도네시아 5· 5 3.0 45° 말 레 이 지 아 5. 9 6. I I, 800 필 리 핀 2.4 6.2 540 태 국 6.2 12.0 8IO 아르헨티나 0.4 9.0 2,290 브 라 츠J 3, 4 I2. 8 I,730 칠 러] 4.6 7. 7•l r,840 멕 시 코 3. 7 6.6 1,370 a) 1978~86.

제를 실현할 수 있는 자원의 배분, 적철한 기술수준의 제고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조건들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국내의 생산요소(자원, 자본, 기술 경영 등)가 부족한 경우에는 가능한 한 낮은 비용으로 원자재 ·시설재 ·기술 등을 수입하여야 한다. 따라 서 수출울 중가시키려연 필연적으로 수입의 증가를괴할수 없게 되 며, 수출입의 불군형은 외환시장을 통해 조정되어야 한다. 홍콩을 제의한다면-홍콩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고 그 득수 성에 기인하여 중계무역지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___ 한국과 대만, 그리고 성가포르가 처음부터 수출주도형 발전전략을 채덱했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국가들은 수입대체를 목적으로 하는 국내 소비재 산업의 육성에 초접을 둔 발전전략을 기본적으로 채택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0 년대초까지의 결과는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을 뿐 만 아니라, 앞에서도 지적했던 천연자원의 부촌량이 극히 적었고

기술수준이 낮을 뿐만 아니라 국내시장이 지극히 협소하다는 등의 뚜렷한 한계에 칙면하여 의연적 경제성장정책으로 전환하게 되었 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의 전환이 여타 개발도상국들보다 훨씬 빨 랐을 뿐만 아니타 몇 가지 장점들이 적철히 결합하여 빠른 경제성장 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다론 국가들에서 볼 수 없는 적절한 조치들을 취 하였는데-그 조치들이 반드시 바람칙한것들이라고 할 수는 없지 만-그로 인해 외연적 성장정책이 성공할 수 있는 경제환경이 조 성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4 수출중대를 위해 취해전 조치들 의연적 성장정책을 채택한 아시아의 신흥공업국들은―~특히 한 국과 대만은-수출기업들에게 국내소비를 묵적으로 한 상품생산 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보장하도록 여러가지 특혜를 베풀어, 수 출중대에 필요한 경제환경을 조성하였다. 수출업자들온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나 시설재 등을 관세 없이 또 는 낮은 관세로 수입할 수 있었으며, 영업제의 상당부분이 감면되 는 혜택을 누렸다. 뿐만 아니라 한국과 대만의 경우 수출상품의 생 산에 참여하는 납품업자들에게도 같은 득해가 주어졌다. 또 수출업자들에게는 여러가지 금융상의 혜택도 제공되어 저리의 융자가 가능하였다. 그밖에도 공공요금을 할인하여 주는 조치둘도 취해졌다. 결국 수출업자들은 각종 조세상의 특혜, 금융상의 특혜, 공공요 금의 할인 등과 같은 혜택을 누림으로써 실질적으로 수출보조금을 지급받는 것과 동일한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개략적으로 살핀 수 출업자들이 얻는 수출보조금의 크기는 상품수출에서 얻는 부가가치 의 약 I5~20% 에 달하는 막대한 것이었다. 이들 신흥공업국가에게 있어서 선전기술의 도입과 해의자본유입 온 수출을 목적으로 한 산업화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답

당하였다.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은 적극적으로 의국의 자국내 칙접두자를 유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라이센스의 도입, 기술제공협 정, 기계수입 등을 통하여 선전국들의 기술에 접근하는 수단을 적 절하게 이용하였다. 이와는 달리, 한국은 의자도입에 크게 의존하 는 방법을 채택하였으며 의국인에 의한 기업의 인수나 의국인 칙접 두자의 과실송금 등에 상당한 제약을 가하는 조치를 비교적 오랫동 안 취했다. 또 한국은 자국의 기업들이 수입한 기술을 장기적으로 자국화하도록 적극 장려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시행으로 한국은 다 론 산흥공업국들보다 비교적 빨리 기술독립에 접근할 수 있었다. 아시 아의 신흥공업 국가들이 수출중대 를 위 해 취 한 조치 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환윤정책이타고 할 수 있다. 환율정책은 이 네 국가 들의 외환 및 금융제도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으나 한국과 대만을 한 묶음으로, 그리고 홍콩과 성가 포르를 다론 한 묶음으로 구분하여 살펴 보기 로 하자. 이 렇 게 구분 하는 까닭은 이 네 나라가 모두 국내의 경제성장을가속시키고 수출 경쟁력을 제고시킬 수 있는 환율정책을 실시했다는 사실에서는 이 론의 여지가 없으나 홍콩과 성가포르가 금융시장의 국제화를 도모 한 반면, 한국과 대만은 그렇치 못하였다는 점에 따른 것이다. 한국은 I970 년대 후반에 경기의 과열에 의한 인플레이션 압력이 가중되고, 원유가격과 원자재가격이 급격히 상승함에 따라 지속적 인 원화의 평가철하를 경험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대만, 홍콩, 싱 가포르 등에서도 비슷하게 벌어졌는데, l98I 년에서 I984 년까지 미국의 달러가치가 상승할 때, 이들 네 국가의 화페가치는 상승 하지 않음으로써 수출이 증가하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홍 콩의 경우는 머지않아 중국에 귀속된다는 목수성에 기인하여 홍콩 달러화의 평가절하가 I983 년 이후 급속히 이루어졌고, 싱가포르는 I985 년경부터 건축경기의 종료, 의국인 칙접두자의 대폭적인 감 소 등에 의해 나타난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그동안 유지해왔던 강세동화정책을 포기하고 자국화폐의 평가철하정책으로 전환하였 다.

어쨌든 아시아 신흥공업국가둘이 취한 자국화페의 평가절하조치 는 경기의 회복과 국제수지의 개선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결국 1986 년 이후 미국으로부터 평가철상의 압력을 받게 되기에 이르렀다. 수출중대를위해 이 네 나라가취한또하나의 정책은고용정책――­ 임금정책을 포함하는 __- 이다. 일반적으로 노동자의 임금수준은 노 동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그리고 노동자의 기술수준이나 숙련도 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국가에서는 수출증대를 위해 임금수준이 상대적으로 낮게 책정되었을 분만 아니타, 낮은 임금수준을 높이고 직업교육을 확충하기 위한 재원의 확보를 위해 서도 수출이 중대되어야 했기 때문에 전반적인 고용 • 임금제제가 거의 수출의 중대에 적 • 간접적으로 연관될 수밖에 없었다. 최처입금제의 실시, 노동자에 대한 사회보장적 의미의 이익제공 등과 같은, 선전국에서는 일반화된 제도가 이들 국가에서는 기업들 에게 요구되지 않았으며, 산업간 노동력의 이동이 수출산업분야 에 집중될 수 있는 여건이 제공되었다. 이에 따라 수출기업들은 도 시의 실업자, 농촌을 떠난 노동력-홍콩의 경우에는 피난민들의 노동력 ―一등을 흡수하여 처 임 금으로 노동집 약적 생 산방식 을 채 택 할 수 있었다. 싱가포르의 경우, 1980 년대 후반 이후 부가가치가 높은 양질의 상품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의 질적 수준을 제고시켜야 한다 고 판단하여 상당한 임 금상승을 정 부가 적극적으로 유도하기 도 하 였 으나, 대 체 적 으로 아시 아의 신흥공업 국가들은 노동생 산성 의 상승 에 미치지 못하는 임금인상폭을 유지하는 처임금정책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처임금정책의 유지는 수출상품의 가격을 낮게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접 이외에도 물가상승률울 여제하는 이득도 제공한다. 아시아 선 흥공업국들의 소비자물가수준은 1980 년대 이후 크게 낮아졌으며, 최근에 들어와서는 그 정도가 더욱 두드러진다(표 56 참조). 한편 주요 개도국들의 제조업부문 생산성과 실질임금의 변화추 이를 보면 아시아의 신흥공업국들의 경우 생산성의 향상에 대한

〈표 56> 소비 자 물가의 변화

(I2 원 ~I2 원 ; 연평군, % ) I 1975~79 I 1980~84 I 1985 l 1986 .::홍 콩 6,7 10.7 2.6 3. 9 한 국 16, 8 Io. 5 3. 2 I. 3 싱대 가포르ll& 26.. 7I 63.. 85 —0I,. 7 3 --I2.. 83

〈 표 57> 제조업의 생산성과 실질입금의 변화

(연평균, %) A 성 산 AJ 실 久J 임 금 1975~1979 I 1980~1985 I975~1979 I 1980~1985 홍 콩 7· 9 7. 2 5. 3 I. 7 한 국 6,2 5.6 I2. 9 4.0 싱 가 포 근 4.0 3.0 5. 8 6. 8·l 대 口i II. 5 4. 0 IO .8 4.6 칠브 라 츠러J 1 o3.. 76b ) 3o.. 62 1IO4 .. 44b > —40..23 p식 ...tl 코 6. o 2. 2 2. 5 - 6. I a) 19~0 ~ 1984 년. b) 1976~1979 년.

실질임금 의 상승비율이 상대적 으 로 여 타 국가에 비해 크게 낮 아 , 경 제성장이나 수출증대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 다 (표 57 참조). 일반적으로 볼 때, 아시아 의 신홍 공 업국가들 은 거시경제 정 책을 적철히 운용하 여 국내 의의 경제상황 이 변화하는데 따른 대웅조 치를 신속하게 취한 것 으 로 여겨진다 . 즉 이 들 네 국가는 무엇보다도 수 출을 위한 생산 의 중대에 필수적 인 기간산업 (교량이나 도로의 건설, 공업단지의 조성, 전기 및 통신망의 구축 등과 같은 사회간접자본 분 야 ) 에 막대한 두자를 집중시켰다 . 홍 콩이 나 싱가포르 와 는 달리 국방 비의

지출이 재정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높은 한국과 대만에서 도 이 분야에 대한 두자는 막대한 것이었다. 더구나 한국의 경우에 논 매우 짧은 기간내에 기간산업 분야뿐만 아니라 중화학공업 분야 에도 업청난 두자를 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특히 70 년대 중반 이후 제철, 조선, 석유화학, 자동차, 기계 및 전자산업 등에 두자재원의 ~ 상당부분을 집중시켰 다. 이 당시를 전후한 경제상황은, 물가상승압력이 높았을 뿐만 아 니타 원유가격이나 원자재가격이 폭등하는 좋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투자의 무리함이 지적되기도 하였으나 최근에 두자에 따른 이득이 괄목할 만큼 급증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수출산업의 지원자로서, 그리고 수출기업의 소유주로서 공공부문 이 수행한 역할은 이 네 나라에서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싱가포르 의 경우에는 정부가 수출기업에 자본을 출자함으로써 기여하였으 며, 빈번히 두자와 그의의 결정에 있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 다. 한국정부는 막대한 경제력을 가전, 그래서 산업을 주도하는 IO 여 개의 종합무역상사와 밀접하게 연관을 갖고 수출정책의 전반적 사항울 주도하였 다. 대 만정 부는 수출업 무를 관장하는 상업 은행 에 대한 통제를 동해 수출에 관여하였으며, 단지 홍콩의 경우에서만 정부당국이 비교적 자유방임적인 정책을 선택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들 신흥공업국가의 모두는 국영기업이 생산활동이나 노 동시장에 미치는 영향에 칙접적인 통제를 가함으로써 자유로운 기 업활동을 여제하였다. 한편 이들 신흥공업국가에 의해 채택된 수출주도형 발전전략으로 가능하게 된 생산과 고용의 증가는, 강력하게 추전된 재정 및 금융 정책에 의해서 국내저축을 증진하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이 국가들 에서 저축온 두자증대를 가능하게 하는 재원의 원천이며, 각국의 산업화 과정을 보다 촉진시킬 수 있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축적된 자본이 벌로 없었던 이들 국가에서는, 실질이자율을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유지 하는 고금리 정 책 을 채 택 함으로써 (한국의 경 우는 예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소비를 낮추고 처축을 높이는 효과를가쳐

〈 표 58> 두 자와 처 축 의 변화

(연 평 균, G.N.P. 비 운 , 경 상 가격) l 총 두 자 1 총 국민처축 1 해 의처축 홍콩 1975~79 26.3 35.o -8.7 1980~84 29.4 32. 3 -2.9 1985 I9. 8 31. 4 _II. 6 1986 20.4 29.7 -9.3 한국 1975~79 30.0 25·4 4.6 1980~84 30.6 23.2 7·4 I985 3r. 2 28. I 3. I 1986 3r. 4 34,2 -2.8 싱가포르 1975~79 37. 9 3o.3 7. 6 1980~84 46.8 38.7 8. I 1I998856 4442.. 35 4416.. 78 —02..52 대만 197 5 ~79 30. 5 32,4 —·I . 9 1980~84 26.9 32.2 -·5. 3 1985 17. 6 33.6 -16. 0 I986 I6. 5 37. 5 -21. 0

왔다. 한국을 제의한 홍콩, 성가포르, 대만은 1970 년대에 이미 국 민처축률이 30% 를 상회하는 놀라운 현상을 나타내었고 한국도 1986 년 이후 국민저축률을 30% 이상으로 제고시켰다(표 58 참조). 평군 국민저축물이 가장 높은 싱가포르의 경우에는 근로자의 수 입에서 상당한 부분을 강제적으로 처축하도록 하는 조치에 힘입은 바 크지만, 어쨌든 그 수준은 상당한 것으로 평가된다. 대만과 홍콩은 1980 년대 이후 총무자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였 으며, 그 폭이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국내처축물이 30% 이상을 거

의 일정하계 유지하였기 때문에 외국의 자본을 도입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특칭을 갖는다. 최근에 들어와서 홍콩은 오히려 의국에 자본을 빌려주고 있으며, 대만은 의환보유고가 엄청나게 중가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과거에 국내처축몰이 가장 낮은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에, 막대한 두자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의국의 자본울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결과로 1980 년대 중반에는 외채문제가 크게 부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1980 년대 중반 이후 국내처축률이 크게 높아져 최근에는 그 수준 이 30% 울 상회할 정도가 되었다. 5 수출시장의 편재성 공산품이 주종을 이루는 아시아의 신흥공업국들의 수출은 1960 년대 중반에는 연간 30 여 달러 정도의 수준에 봉과하였으나, 1986 년의 경우 무려 45 배나 늘어난 I,312 여 달러 규모에 달한다. 그런데 이 네 국가들의 수출시장은특정 지역에 편재되었다는취약 점을 안고 있다. 미국은 이들 국가의 가장 주요한 수출대상국이 다. 이 네 국가가 미국에 수출한 총액은 1980 년의 경우 총수출의 I3~34% 의 수준이었고, 1986 년에 이르러서는 25%( 싱가포르)에서 50% (대만)에 달하고 있다(표 59 참조). 한편 I986 년의 경 우 일본에 대 한 수출의 비 중은 총수출의 4-5 % (홍콩)에서 15% (한국)에 불과한 것으로 이러한 비중은 80 년대초와 별다론 차이가 없는 것이다. 또 유럽지역에 대한 수출이 전체수출 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살펴보면 1980 년에는 13%~24% 정도였는 데, 1986 년에는 상당히 감소한 II% 에서 15% 정도에 불과한 것으 로 나타난다. 아시아의 신흥공업국가들이 특정지역에 편중된 수출을 할 수밖 에 없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를 든다면 역시 수입수요의 크기에 따른 것이다. 마국의 경우 1980 년대에 들어와 서 공산품의 수입규모가 크게 증가하였기 때문에, 이 네 나라가 미

〈 표 59> 아시아 신홍 4 개국의 대외무역 중 선전국이 차지하는 비중

( 총 수 출 릿 수입의 비운, %) 수 출 수 임

1980 I986a) I98o I986a) 홍콩 미국 26·224··63 6 31 . 9 II. 8 8. 5 일본 4. 5 23.0 20.2 EEC 15. 3 12. 5 12. 。 한국 미국 26.3 39,7 21.9 20.8 일본 17. 4 r4.9 26.3 34.3 EEC 16. 5 I3. 5 7.6 13.2 싱가포르 미국 I2·7I8 3I 9 23,4 14. I I5, 2 일본 · 8. 5 17. 8 I9,7 EEC · I3· 4 I I. 5 I2, I 대만 미국 34. I 48.2 23,7 22.4 일본 I I. O II. 2 27, I 33.o EEC 12.6 I I. O 8, I II. I a) 대만의 경우 I 월 ~9 월, 홍콩과한국의 경우 1 월 ~IO 월, 싱가포르의 경우 I 월 ~II 월.

국에 수출한 총규모는 1980 년부터 1986 년의 기 간 동안 달러 가치 를 기준으로 164% 나 중가하였다. 이것은 미국의 공산품 수인증가율 (같은 기간중 136%) 보다 상당히 높은 것으로, 이러한 증가추세에 힘 입어 미국의 전체수입에서 차지하는 이 네 국가의 비중은 1980 년의 13% 에서 1986 년에는 14.6% 로 높아졌다(표 60 참조). 한편 일본으로의 수출은 일본의 수입규모가 절반적으로 낮은 수 준의 증가율을 보였 기 때 문에 그리 높은 것 은 아니 다. 198o 년부터 1986 년 사이에 일본의 수입은 23% 의 중가에 그쳤는데, 아시아의 신흥공업국들의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0 년에 5.7% 에서 1986

〈표 60> 선전국의 공산품 수입

(IO 여 달러) | 1980 I 1986a) | 증가율(%) 미국 총수입액 131. 5 310,6 I36 아시아 신홍 4 개국 수출액 I7. 2 45·4 I64 (전체비율, %) ( I 3. I ) (14. 6) 일본 총수입액 40. I 40.2 23 아시아 신홍 4 개국 수출액 5. 7 7.6 34 (전체비울, %) (14. 2) (15. 5) EECb> 총수입액 178. 5 195-3 9 아시아 신흥 4 개국 수출액 12. 6 IJ. I 4 (전체비율., %) (7. 1) (6. 7) a) 미국과 일본의 경우 연간 액수는 1 월 ~II 월, EEC 의 경우 연간 액수 논 I 월 ~6 월. b) 공동체내의 교역은 제외.

년에 는 15. 5% 로 같은 기 간중 34% 의 신장률울 기 록하는 데 그쳤 다. 전세계에서 단일경제권으로는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는 유럽공동 체 (EEC) 로의 수출은 이들 4 개국이 해결해야 될 과제 중의 하나이다. 1980 년의 경우 아시아 신홍 4 개국이 유럽공동체에 수출한 액수는 126 여 달러로, 전체 수입 액의 7. I% 였으나 1986 년의 경우에는 오 히려 그 비율이 낮아져 6.7% 에 그쳤다. 더욱이 이 기간중의 수출 증가울은 4%에 불과하여 유럽공동체의 수입증가울인 9% 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온 아시아의 신홍 공업국가들이 지속적으로 수출을 증대시키고, 나아가서 수출지역을 다변화하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6 수출상품 구조의 변화 전체로 볼 때 아시 아의 선홍공업 국들의 수출상품구조는 크게 바

뀌었으며, 그 가운데 가장 놀라운 변화물 보인 나라는 한국이다. 아시아의 4 개국은 가전제품, 정보 및 자료 처리용 컴퓨터, 전기 통신 분야의 제품 등에 대한 전세계적 수요증가에 적극적으로 대웅 함으로써 과거의 단순한 공산품 수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실질적 으로 볼 때, 여전히 의류 및 칙물 등의 섬유제품과 비내구성 소비 재의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도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특기할 만한 것은 한국이 다론 3 개국과는 달리 보다 자 본집약적인 상품의 수출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였다는 사실 이다. 대만이 과거에는 비교적 수출경쟁력에 뒤어났던 전자제품의 수출에 주력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반도체산업, 소형 컵퓨터 산 업, 첨단 전자제품산업, 자동차산업, 선박 및 해상구조물(유전담사 기지용) 등과 같은 조선업분야의 상품수출에서 급성장하였다. 도 한국은 섬유제품의 수출에 있어서도 수출대상국가들과 협정을 맺 음으로써 섭 유제 품수출의 규모가 1986 년에 70 여 달러 이 상을 유 지할 수 있는 기본적 여건을 마련하였다. 대미수출의 비중이 지나치게 높다는 취약접을 가지고 있는 한국 은, 미국으로의 수출상품구조에 있어서는 매우 다양하다. 죽 섬유 제품과 같은 경꽁업제품에서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상품을 미국시장에 비교적 손쉽게 판매하고 있는 것이다. 최 근 한국은 세 계 의 자동차시 장에 전출하였 는데 미 국으로의 수출 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은오랫동안, 수입한자동차 부품을 조립하는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자동차의 질적 수 준은 매우 낮았고 그 생산비용도 상대적으로 높은 것이었다. 그러 나 1983 년 이후 선전국들과 각종 협정을 맺음으로써 낮은 비용으 로 현대적인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다. 그에 따 라 1986 년의 경우, 한국은 연간 45.5 만대의 자동차를 생산하였으 며, 그 가운데 2/3 를 수출하였다(미국에 20.4 만대, 캐나다에 6.5 만대, 일본에는 2.8 만대)• 그리고 1987 년에는 미국시장에만 약 47 만대의 자동차를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한국의 자동차 생산업체들은 자동차의 질과 안정성, 그리고 공해방지에 관한 의국의 기준을 동

과하기 위해서 상당부분의 의제부품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수입이 19~ 년의 17 여 달러에서 1986 년에는 32 여 달러로 늘어났 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 나 한국은 1986 년에 13 억 달러 이 상의 순수익 을 자동차수출에 서 기 록하였 고, 수출증가에 따른 고 용증대와 기타 연관 산업의 성장이라는 커다란 이득을 얻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자동차부품의 국산화로 막대한 부품수입비용을 줄인 다면 커다란 경제적 이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7 무역수지 불균형의 심화 아시아 신흥공업국가들은 수출의 규모를 크게 신장시킨 반면, 그 들의 수입을 비교적 낮은 수준으로 증가시켰다. 1980 년부터 1986 년까지의 기간중 이들의 수입은 수출과는 달리 겨우 31% 의 증가율 울 기록했다. 〈 4 마리의 용〉으로도 불리는 이 국가들은 총수입의 20% 에서 33% 에 이르는 부분을 일본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으며, 미 국으로부터의 수입은 전체의 17% 정도 수준을 거의 일정하계 유지 하고있다. 그런데 이 신흥공업국들의 경상수지는 전체적으로 볼때 지속적으 로 큰 폭의 혹자상태를 나타냄으로써 수지불균형을 보이고 있다. 앞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1985 년의 경우 이 4 개국의 경상수지는 122 여 달러 였 고, 1986 년에 는 223 여 달러 로 증가하였 다. 그런데 중 요한 것은 이들의 대미 경상수지는 1986 년에 300 여 달러 이상의 혹자를 기록한 반면, 대일 경상수지는 180 억 달러 이상의 적자를 나타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국가별 무역불균형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에 의해서 더욱 십화된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수출대상국의 수입수요 측면에서 볼 때 미국의 수입수요는 일본의 그것에 비해 훨씬 빠른 증가추세를 보였다. 둘째, 최근의 수년 동안 달러가치의 변동으로 미국의 대의경쟁력 이 크게 낮아졌을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보호무역주의적인 일본시

장에 비해서는 미국으로의 전출이 훨씬 용이하였다. 물론 I985 년 이후 지속되고 있는 엔고 현상으로 신홍 4 개국이 대일 무역수지적 자폭을 어느 정도 감소시킬 수는 있었을 것이다. 셋째, 엔高와 함께 달러화의 약세는 이들 4 개국이 수입선을 일 본에서 미국으로 돌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는 하였으나, 동 시에 이들이 일본보다는 미국에 수출을 많이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 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 까닭은 일본으로의 수출이 용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의 경쟁력 약화를 기회로 미국시장에서의 시장점유율을 높이고자 하는 노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편 신홍 4 개국의 무역수지를 개별적으로 살펴보면, 홍콩과 싱가포르는 한국과 대만의 경우와는 상당한 차이접을 나타낸다. 이 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 있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다 만 표 6I 에 나타난 것처럼 한국과 대만은. I986 년 이후 무역수지 의 혹자폭 이 증가하는 반면 홍콩과 싱 가포르는 적 자폭이 증가하고 있다는 특칭을 보인다는 점과, 그것이 한국과 대만의 경우에는 대 미 혹자가 증가한 결과이며, 홍콩과 싱가포르는 미국 이의의 국가 에서 증가한 무역수지의 적자가 대미 혹자보다 크기 때문이라는 사 실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표 61> 무역 수지

(FOB/CIF; IO 여 달러) I I985 I 1986 I I987•l 홍 콩 0.5 -0.4 -1.5 한 국 -0.9 3. 5 6.5 入J 가 포 르 -3.5 -3.3 -4.0 I 다 1 ”J: 10.6 15. 6 18. 5 a) 계획치.

8 종합적 평가 수출산업발전에 근거를 둔 이른바 의향적 extr a verti e 개발정책에

관하여는 그동안 국내외에서 많은 찬반논쟁이 있어 왔고, 아칙도. 계속되고 있다. 여기서는 이 전략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비판 울 가한 종속론자 중 S. Am i n 의 견해를 인용한 다음 전략도 하 나의 가능한 방법이라는 견해를 갖는 학자의 판단을 간략히 소개하 고 그 종합적인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기토 한다. S. Ami n 은 그의 Ii'불평 등 발전론 Le develop pe ment i neg al 』 22 ) 에 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새로운 경향으로서의 이 국제분업은제삼 세계 전체로 볼 때 눈에 떠도록 활발하지는 않다. 그것은 다만 동 아시아(한국, 대만, 홍콩, 성가포르) 국가들과 멕시코에서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우리는 그 결과롤 검토할 수 있다. 이 지역에 이식된 runaway ind ustr i e s 은 미 국 • 일본 • 영 국의 국적 으로서 , 이 산업 이 식 은 60 년대에 조칙적으로 이루어져서 재조업의 극히 예의적인 고도 성장 16~35% 를 일으켰다. 이러한 형태의 산업에 기초를 둔 국 민생산은 年 7~IO% 의 성장률을 보였다. 이상의 5 개국은 제삼세 계의 제조업 총수출의 4 분의 3(44 억 달러)이나 차지한다. 이들의 산 업에서 만들어전 상품은 특히 미국시장을 위시한 선전국으로 수출 된다. 수출상품은 주로 경공업 제품(칙울 의류, 피혁 등 I6 억 달러, 식 료품, 음료수 등 8 여 달러, 목제 가구 4 여 달러)이다. 아러한 수출산업이 몇 개국에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 라도 이러한 전략이 제삼세계 전체에 확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앞서 인용한 5 개국은 그러나 서방세계에게 있어서는 중국공산주 의와 라탄아메리카의 국수주의에 대한 하나의 모델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이미 실망을 보여준다. 수출의 높은 중가율 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들의 국제수지는 대단히 취약하다. 그것은 첫째로 이 수출산업에 집중된 두자로 인하여 농업 부문이 펴해를 입 었을 뿐 아니라 국내시장용 공산품 산업 역시 피해를 입었다. 그리 하여 이 두 부문의 수입은 급속히 증가하였다. 두번째로 시설재, 및 半제품의 수입은 산업화의 전전과 병행하여 증가한 것이다. 셋

22) S. Ami n, Le develop pe ment ine g a l, ed. Mi nu it , Paris .

째로 가시적 도는 온퍼]된 이윤의 이전은 수출이익의 대부분을 흡수 한다. 새로운 자본의 수입속도가 완만해지면 그 즉시 국제수지도 악화된다.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종속적 성장의 〈 봉쇄 〉 모델에 지 나지 않는다. 이 나라에서 높은 성장률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들 중 어 떤 나라도 자주적 이 고 자기 동인적 auto -ent re nue 인 성 장­ tak e o ff . 론에 서 주장하는一―단계 에 접 근하지 못하고 있 다. 이 나 라들은 산업화를 시작하기 20 년 전보다 현재 더욱 종속적이다 .23)

23) S. Ami n, Le deve/o ppe ment ine g a l, ed. Mi nu it , p. 184 , p. 185, Paris .

우리는 이상의 논리전개의 몇 군데에서 이론과 현실의 미래를 주 목할 수 있다 . Am i n 은 자기의 종속이론의 불에 맞추어서 5 개국을 조명하는 데서 무리를 처지르고 있다. 그가 말한 미국, 일본, 영국 의 runawa y산업 이식의 문제에서 고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한국, 대만 등은 60 년대 유럽과 미국이 인전비 상승으로 사양화, 패쇄된 산업 (칙물, 피혁류)을 칙접 두자형식으로 이식받기보다는 자 체적으로 건설한 경우가 지배적이다. 이 나라들은 그리하여 초기의 노동집약적 처질상품을 다량생산, 수출하는과정에서 접전적으로 수 출품의 질을 개선해 나간 것이다. 또한 Am i n 은 이 5 개국이 이상의 노동집약산업 수준에 머물 것으 로 판단하였으나 현재의-특히 동양 4 개국의-수출품은 직물이 나 봉제품에 그치지 않고그보다는기술과부가가치가높은제품(자동 차, VTR 등)도 수출하기에 이르렀다는접이다. 결국 Am i n 은 4 개국 의 생산기술을 과소평가하면서 정체적인 분석을 하는 데서 현실과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하는데, 이상의 국가들이 만성적인 국제수지 적자에서 혹자국으로 변신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깨닫지 못하 였다. 그리고 이상의 나라들이 tak e of f 단계에 접근하였는지 여부 에 관하여는 다른 시각에서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죽 이러한 수출산업 위주의 개발전략이 야기시키는여러가지 문제―-―强性정치 제도, 소득분배의 불균형, 농업의 침체, 하부구조의 결여 등――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를 토대로 전략의 가치에 대한 판단을 내림으로 써 보다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이 될 것이다.

이상의 부정적 시각에 反하여 일부학자들은 외부지향적 개발전략 이 앞에서 본 것처럼 〈 산업을 일으키는 산업 〉 을 통 한 전 • 후방 연 관효과를 일으키지 못한다 하더라도, 수출산업의 다발적, 평면적 확산도 성장을 결과적으로 유발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타고 간 주한다. 아 제 바그와티 J.N . Bhag w att i 의 말을 인 용하여 보자. 50 년대와 60 년대의 경 험이 보여준 바에 의하면 국내문제가 보다 복잡 하여 국의문제에 관한 비관론은 사실상 그 근거가 희박하다. 이제 극동의 4 개국-그들은 이 비판론 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은 지체없이 수 출 증진을 위한정책방향을선택하였고, 그로부터 업청난 이익 을 얻을수 있었 다. 이 사실은 경험적인 현실보다는 편견에 집착한 사람 들 만이 인정하려 듣지 않는다. 또한 이 수 출 전략은 오로지 반동적인 정치체제에 의하여 추 전된다고 믿는 사람들에 의하여 거부된다. 이러한 현실은 수 출 전략을 거 부하는 일부 극단주의 경제 학자와 그의 찬구들을 대 단히 곤란하게 만든다. 현재 많은 경제학자의 연구에 의하여 검증된 현실을 받아 들 이지 않는 것을 볼 때 나는 아칙도 프 롤 레타리아의 궁핍화론-아직도 그 신봉자 를 만날 수 있다-울 확신 있게 믿고 있는 일부 학자들을 생각하게 된 다 .24)

찌 J.N . Bhag w att i, Une re/Iexio n sur qu arante ans de deve/op pe ment, n• i. vol. 2, 19 84. Asia n Develop m ent Bank.

또 한편 프랑스의 제상제계 전문가인 이꼬니꼬프 M. Ikon i co ff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와 반대로 일부 제삼세계 지역에서 시도한 공업화는 〈 산업을 일으키 논 산업〉의 논리에서 제시된 바를무시하면서 다양한공업을 설립함으로써 ―이 공업 은 연관산업 을 일으키 는 그런 것 도 아니 다 -Indus t r i al dy n - am i sme 을 일으키고, 그것이 후진국 경제구조의 본격적인 재구성과 사 회의 재편성을 야기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 산업을 유발하 지 않는 산업〉의 대표적 케이스로 지목되는 칙물공업, 봉제업에 있어서 수출을 위한 상품의 생산·제조는 대단히 중요한 다양화(산업의) 과정을

일으키면서, 산업구조의 팽창을 야기시켰다. 이것은 지난 IO 여년간, 특 히 한국에서 볼 수 있었던 사실이다 .25)

25) M. Ikonic o ff , Trois the ses erronnees sur !'ind ustr ial i sa ti on du tier s monde, Revue du tier s monde, avril- jui n 1( )87 , Paris .

아시아 4 개국은 그 산업구조의 근본적인 변화에 성공하였다. 그 리고 이는 종속론자들의 주장처럼 무시할 정도의 무의미한 것도 아 니며 종속성을 심화시킨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이 나타가 선 전국__득히 정치, 경제, 사회 및 하부구조에서――으로전입할 준 비가 되어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가속적인 G.N.P. 성장 물이 자동적으로 여러가지 측면에서 선전국화를 가져다 준다고 단 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론에 대신하여 아롱은 말하기를 〈 모든 사회는 산업사회이거나 산업사회를 지향 한다 〉 고 하였다 .I) 결국 2 차대전 이후 모든 제삼세계의 노력은 산 업사회-선전국과 동의어로사용되는――의 전설을정책의 꿍국적 목표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제도를 채택한 나 타, 더 빠른 속도로 선전사회를 건설하는 수단으로서의 사회주의 체제를 채덱한 나라,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일종의 혼종 hy b rid e 체제를 채택한 나라 등 모두가 산업화를 위하여 돌진하였 다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산업사회는 곧 소비사회이며 〈 풍요한 사회〉를 의미하였다. 이러한 〈 지상낙원〉에의 기대가 크면 쿨수록 실패에 대한 실망은 더욱 컸다. 목표가 보이지 않는 주행은 피로를 가중시킬 분이다.

1) R. Aron, Ii'산업사회의 비교연구./], 沈相弼 역, 一潮閣

우리는 앞에서 자기중십적인 산업화가 어느 시정에서 여러가지 조건이 결합된 가운데 자연발생적으로 서서히 진행되었음을 살펴보 았다. 그리고 현재의 제삼세계는 전혀 다론 상황과 여건하에 놓여 있음을 보았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제삼세계의 여건과 상황이 변한 만큼 선전국의 산업화 경험과 결 과 역시 또 다론 면을 내포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산업사회의 위기 〉 라고 불리는 일련의 부작용과 역작용-인간성의 상실, 자연 의 오영과 훼손, 소비위주 사회의 처속화, 대중화, 고상한가치관의 상실, 각종 범최의 확산 그리고 경제위기에 대한 공포 둥 많은 문 계는 우리로 하여금 서구식 산업사회가 인류의 궁극적인 목표인가 하는 데에 대한 의문접을 갖게 하였다. 특히 산업화의 부정적 측면 은, 산업화를서두르는 제삼세계에서 산업사회를 건설하기도 전에, 극명하게 드러났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개발의 문제를 고려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가 바람칙스런, 전통적 가치관을 유지하면서 다수가 빈곤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에 대신하기 위하여 우리는 기술의 발전에 관한 구체적인 예를 몇 가지 들어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인간의 역사는 도구(기술)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으며 어떤 생산도구가 최적의 결 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가를 따져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개발문제에서 가장 쉽게 접근되는 방법은 선전국으로부터 첨단기 술의 도입과 그를 이용한 대기업 중십의 개발방식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첫째로, 선전국에서 이전시켜주는기술은항상한 단계 지난 기술이타는 점에서 문제시되며 둘째로, 대기업 중십의 개발방식은.:::J.. 동안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고발된 이른바 경제의 이중구조를 낳게 하면서 여러가지 구조적 문제를 야기시킨다. 그중에도 이 방법은 도시의 빈민을 양산하면서(남미, 한국등) 사회적 갈등을 수반하는 가운데 서구적 소비모델을 모방하며 또한 기촌 전통가치관의 와해 를 야기시킨다. 우리는 앞에서 제 가지 구체적 해결방식을 예시하였다. 그러나 필 자의 솔칙한 십정은 이 세 가지 모두가 만족스러운 해답을 가쳐다 주지 못하였다는 접이다. 사회주의 혁명은 그 경적성과 인간을 개 조한다는 무모한 시도에 의하여 오히려 경제를 정체화할 우려가 있

다. 인도석 개발양식도 비록 경제의 독립성 을 지킨다고는 하나, 그 효율성이라는 면에서는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 다. 남미식 공업화 는 소득의 불평 등과 계 급의 갈등을 유발시 킨다. 이러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개발방식은 어디서 찾 아야 할 것인가? 1983 년 ONUDI 가 개최한 국제 for um 에서 〈 인류를 위한 기술의 개 발 tec hnolog ie au servic e de l'human it e 〉 이 라는 개 념 이 등장했다. 이 새로운 개념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현대적 기술과 기술전보 를 사용함으로써 경제적으로 헐벗은 다수의 빈민을 구출할 수 있 는 데크놀로지로서, 이는 ‘빈민 중의 빈민'을 위한 것이다. 〉 이 신 기술이 적용될 수 있는 분야는 식량중산, 영양개선, 물과 위생, 기 본적인 의료행위, 오염방지와 농촌의 에너지 문계를해결하는데 도 웅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현재 선전국의 미래 첨단산업으로 각 광을 받는 bio t e c hniq u e, 유전공학이 큰 역 할을 할 것 이 며 농촌의 산업화는 b i omasse2) 에 근거를 두고 전행됨으로써, 식물의 뿌리에서 잎에 이르기까지 모든 요소를 사용하는 이 신기술은 기존기술과 새로 개발될 기술을 이용하여 연계적인 산업그룹울 창출할 수 있 다는 것 이 다. bio m asse 에 기 초를 둔 산업 화는 식 량, 사료, 연료, 비 료, 의약품, 건자재 등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 제안은 대단히 매력이 있으며 현재 세계에 촌재하는 다수의 빈민을 구제하는 데 구체적인 방법으로 각광을 받는다. 그런데 이 러한 아이더어의 정착과 구현 및 적용은 종래의 국제관계--―동서, 남북관계——롤 청산할 새로운 국제관계하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지금까지 남북의 협력관계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도 못했으며 선전국의 對 후진국 원조는 오히려 선전국을 위한 것 이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 .3) 첨단기술에 있어서 선·후 전국의 이해관계가 없는 협상은 불가능하며 이상의 계안이 결실을 보려면 후진국의 첨단기술 과학자간의 긴밀한 협력을 동해서만 가

23)) T생i태 bo 계r 를M e파nd괴e,하 D지e /않'a으id 면e 서a l식a 물re계co 를lon 전is a체 ti져 on으 , 로ed . 개S발eu전il ,략 P에a ri 이s. 용 하자는 이론.

능하다. 문제논 후진국의 당사자들이 인류의 문제에 관한 공통인식 을 가질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드골이 그의 전기 에서 말했듯이 국제관계는 철처한 〈 에고이즘 e g o i sme sacre 〉 에 의하 여 지배되기 때문이다.

참고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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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l 가속도 원리 56 가치 방정식 183 가치 변형 186 가치 이전 184 강세통화 부채 247 강제통화 정책 283 개량적 사회주의 25I 개발 I4 개발도상국 282 개인당소득 2I9 개 혁 주의 론자 evoluti on is t e s 14 경 상수지 276, 292 경 제 계 획 pl anti fica ti on 23 경 제 적 봉쇄 blocag e economi qu e 16,200 경제적 비효율 2OI 경제적 예속 I8, I26 경제적 이중구조 I7,299 경 제적 활동인구 233, 243 고금리 정 책 286 고용 284, 297 고용우선 정책 254 고용효과 149 고정자본 I54 관리가격제도 200 관세정 책 55, I4I 교역 조건 .te r me de l'echang e 166 교환가치 185 국가자본주의 병 렬 jux ta p o sit ion I92 국내총저축물 263 국제분업 294

국제 주의 int e r nati on ali sm e r88 국제동화기금 IMF 270 국제 특화 sp e cia l i sa ti on int e r nati on ale 74 군수산업 203

규모의 경제 213, 281 균형성장이론 23 기 간산업 225, 230, 266, 285 기술모방 253 기술문화 2I2 기 술조합 combin a is o n tec hnolog iqu e 21 I 기 술적 격 차 tec hnic a l ga p 126, 137, 183 기술적 복합성 pl uralis m e tec hnolog iqu e 210 기 술혁 신 inn ovati on s 41, 129, 214 기술후진의 계회화 208 기 아 £aim 15, 109 기 업 농 lati fun dia I 11 L 남북대화 l76 내구소비재 237 내 부지 향적 개 발전 략 220, 252, 272 내재적 역동작용 166 노동귀 족 aris t o c rati e ouvrie r e 159 노동력의 상품형태의 일반화 186 노동보수 185 노동생 산성 179, 186, 284 노동집 약 75, 124, 202 녹색혁명 259 농업생산성 Ill 농업혁명 34,36,69 누적 적 효과 eff et cumulati f J3 4, 27I E: 다국적 기업 197 단계론적 접근 23 단일경제권 290 대외경쟁력 188 • 대외지향적 경제 279

도약 tak e off 56, 147, 27I 독접자본 24,II9 동방무역 79 2 라이 센스하의 조립 253 로메 협 약 !'accord de Lome 171 □ 마르크스주의 적 단정 론 26 명목가격 I73 무역의수지 269 무역수지 269 민중적 제국주의 l'im p e ria l i sm ' du pe up le 188 1:::1 반제품 294 발전 develop pe ment 219 발전 핵 po le de develop pe ment 149, 220 병목현상 go ulet d'etr a ng le ment 45, 267 보호주의 53 부가가치 202, 208, 284 부동주의 im mobil ism e rB 부르주아화 embourge o is e s I92 부메 랑효과 eff ect of Boomerang I75 부의 재분배 r54

불공평 무역거래 275 불균형교환론 I92 불균형성장이론 23 불평등 가격론 r79 불평등 교역론 25,178,rBr 불평동 교환 r84 불평등 발전론 le develop pe ment ine g a l 294

비교생산비 178 비교우위산업 280 비내구성 소비재 291 비실용주의 232 人 사양화산업 280 사용가치 I79 사회 국수주의 soc ial pa tr i o t e 179,294 사회 적 질 병 maladie s soc ial es 72 사회주의적 권리 237 사회 총생 산 GSP 235 산업구조의 왜곡 I44 산업자본화 4I 산업 혁 명 32, 52, 127 산업두자비용 I52 상대가치 I80 상대바용의 법칙 I82 상호개 발 co-develop pe ment 2I2 생산가격론 I79 생산물의 상풍형태의 일반화 r86 선진국화 297 성비두자비용 r54 성 장 crois s ance 219 성 장의 봉쇄 blocag e de crois s ance I2I, 206 소득탄력성 I79 소부르주아 pe ti ts- bourge ois 191 소비대체산업 206 소비자뭉가수준 284 수요의 가격탄력성 I79 수임 대 체산업 24, !20 , 195, 224 수 충 드라이 브정 책 I65 수출제일주의 230 수출주도형 발전전략 28I 수확체감의 법칙 III 순외화 보유고 270

승수효과 56 시선재산업 r33,I42,2I4 시장점유율 293 식민주의 7I 식민협정 I63 신경제계획 및 관리기구 SDPE 239 신경제 정 책 NEP 239 신말더스주의 93 신흥공업 국 NICS 21, 261123, 160 실질가격 I73 실 물총생 산 GMP 247 실질이자율 286 실질임금 285 CEPAL 133 。 악순환 r42,267 엥겔의 법칙 r79 에 고이 즘 eg o 'is m e 301 엔클러져운동 enclosure movement 39,52 연 관효과 eff et d'entr a in e ment 4I, 56, l94 연 성 기 술 tec hnolog ies douces 207 완전계회경제제도 87 외부지향적 발전전략 202,223 외연적 성강정책 279 외환보유고 288 요소의 부동성 I8I 운전자본 r54 원리금 상환 246 원상복구 resti tut i on r69 원자재소비절약형 성장패턴 I74 원화의 평가철상 275 원화의 평가절하 r79 위장실업 24,2IO 유물사관의 방법론 I89

유인정 책 271 유치산업 195 유휴노동 100, 137 이중구조 .10 3, 147 인 구인 풀 례 이 션 inf l at i on demog ra p h iq u e 96 인구론 IOI 인민권력기구 OPP 239 인 식 론적 단절 coup u re ep ist e m -olog iqu e I90 인적 자원 I33 일반특혜관세제도 GSP 275 잉 여 가치 42, IOO, I79, 20I ACP 국가 I7I ECU I72 FAO IOB OECD 86 ONUDI 188 OPEC I 70, 209, 246 UNCTAD I7r, 176 A 자기 중심 적 발전 auto - centr e pro g res 47,58,226 자본경쟁의 일반화 187 자본의 부동성 181 자본산출 비 율 cap ital outp u t rat1 0 95 자본주의 생산양식 181 자본집약 215 자본축적 201, 225, 251 자본두자바용 155 자생적 공업화 195,252 자원의 재분배 224 자유칙 종사자 225 자체동력적 auto - dy n ami qu e 47 작업조 238 참재수요 257

저 개 발기 술 tec hnolog ie sous develop pe e 216 저임금 정책 284 적 정 기 술 tec hnolog ies ap pro p r ie e s 206, 209 전 방산 업 ind ustr i e en amont II5. II8, 204, 267 전동농업부문 147 정 지 된 성 장 crois s ance arrete e I23 제 국주의 론 l'imp e ria l i sm e 24 제 4 세 계 Qu art- M onde 21 제 3 세 계 문제 24, 207 제 3 세 계 의 약탈 pillag e du tiers monde 19 조형발전 194 종속이론 24 종합무역상사 286 좌익 노동주의 tra vail lism e de ga uche 273 주변부 pe rip h erie s 25, 185 중간기 술 tec hnolog ies int e r media i r e s 207 중간재 57, 254 중계무역지 281 중심부 25, 181 칙집생산비용 228 진보 pro g re s 219 진보적 농업운동 229 天 채산성 II8 채취경제 33 초착취 sup e r-exp lo it at i on 25, 187 초현대적 자본주의 부문 184 최저임금 소득세 237 최저 임금제 284 77 그룹 209

구 카스트 81, 273 쿠바국가계 획 화기 구 JU CEPLAN 238 COMECON 229, 244 E

턴키시스템 253 통상금지 조치 225 통상법 제 30I 조 '27 5 두입 산출 inp u t- o utp u t 2II 특화 Io6, I44J 79 立 파급효과 56, 59, r 23, r37 패 러 독스 pa radoxe 90 팽창정 책 225 프 롤 레타리 아 국가 nati on s pro leta ir e s r87 프 롤 레타리아 궁핍화론 296 필수풍 r5 눙 하부구조 I95, 2I3, 266 한계자본계수 95 한계토지 I45 해외자원 249 협동농장 225 협 상 력 barga in i n g po wer r65, I78 환융정책 283 후발산업화 2OI 후발성이익 23 후방산업 ind ustr i e en aval I 18, 199 후진성 13, 73, 180 휴경제도 36 힌두식 성장률 264

인명색인

A Abbas, F. 190 Ahluwali a, I. 265 Allen, G.S. 59 Alvanes, C. 14 Ami n, S. 14,47, 137, 294 Arkw r ig h t 43, 60 Aron, R. 115 Ashby , E. 13 2 Audig a nne, A. 44 B Baia q u il l aumont 92 Bair o ch, P. 31, 44, 72, 92, 136, 152 Ballot, C.H . 60 Bardhan, P. 272 Barre, R. 41 Bernis , G. D . 133 Bett el heim , C. 183, 190 Bhag w att i, J.N . 296 Bhalla, A.S . 2r2 Boorste i n , E. 228 Boserup, E. 88, 100 Brundenin i .t s 235 C Calvez 71 Cardoso, E.H. 26 Casanova I 99 Castr o , F. 240 Castr o , J. r5, 78, I06 Chamberlin I 88 Chesnay 189 Clap h am, J.H . 46 Clark, C. 101 DDi s r aeli 166

Domar 23 Dresch, J. 68, 72 Dumont, R. 76, 107, 148 E Eckste i n , S. 220 Emmanuel, A. 17, 107, 166 Eng el , E. 40,·42 Evans, P. 26 F Fanon, F. 71 Ferry, J. 7I. Fig ue ras, M. 241 Frank, A. G. I4, 24, ro3 Freys s in e t, J. r3, r4 Furta d o 103 G Gonod, P. 209 Gonzales, J.G . 209 Gourou, P. 68 H Hag e n 92 Hirc hman, A. 23 Harrod 23 I lkonic o ff , M. 199, 296 J Jal ee, P. 17, 105, 163 .K Kay, I. 43 Klatz m ann 100 Kuznets 51, 92, 98

L Lacharrie r e, G. I 엇 Lacoste , Y. rs, 21 Lambert ro3 Lang e , 0. r88 Lefe v re 92 Lenin e 24 Lewi s, A . r 79 Luchair e , F. r 69 이승철 I24 .I\f Mamadou Di a 190 Manto u x, P. 44 Marx, K. 142 Mende, T . . 300 Mens, Y. rr2 Mesa-Lag o , C. 228 Mi ll, J.S . 179 Mi ng a sson, J.P . 59 Moal, R.L . 273 Moussa, P. 187 My rda l 24, 179, 188 N Nef, J.U .. 54 Noblet, J. 212 Nurkse, R. 23, 179 。 Ohkawa, K. 58 p Pearson, K. I 89

Perez 238 Perroux, F. 52, 133 Phil ip, A. 57 Pia t i er , A. 142 Pi za rre 73 Presbis c h, P. 24, 179 R Raj, K.N . 266 Ri ch on, P.D. 75 Rosen, G. 155 Rosente i n - Rodan, P. 23 Rosto w , W . 23, 142 Russel, B. r 27 s Sauvy, A. r3, 20, 9r Schumacher 207 Sim on 92 Sin g e r r8o 심 상필 4I, 124, 149, 298 T Toy n bee 103 Turgo t u2 w Wallerste i n 26 Wi lk in s on 60 Watt 6r z Zim bali st, A. 1201 235

沈相弼 서울대학교 문리대 졸 업 파리대학교 정치대 財經學部公經濟科 이수 파리대학교 고등사회과학원 경재학 박사 및 사회학 박사 현재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 및 법경대 학장 저서 : Hi st o i r e economi qu e de la Goree( 共 著) , 『韓國 經濟 의 理解』(共著), 『프랑스의 경 제』 역서 : 『경제표』 (F. Qu esnay ), 『산업사회의 비교연구』(R. Aron)

제 . 3 세계 대우• 학술총서 • 인문사회과학 41 찍 은날 -1990 년 4 월 15 일 펴 낸• 날 -1990 년 4 월 20 일 지은이――-沈相弼 퍼낸이-__朴孟浩 퍼낸• 곳-民音社 출판등록 1966 • 5 • 19 제 1-142 호 우편대 체 번호 010041-31-0523282 은행지로번호 3007783 110-111 서운 종로구 관천동 44-1 734-4234 • 6110( 편집부) 734-2000 • 735-8524( 영 업 부) 733-7010( 팩 시 밀 리 ) Pri•n t e d in Seoul, Korea 값 6,000 원 © 沈相甄 1990 사회 과학 • 경 제 학 KDC/320. 1 3나 ’ ; {·

대우학술총서 ( 인문사회과학 ) I 輯國語의 系統 金芳漠 /5, 00'.l원 2 文 學社會學 김 현/값 3 ,500 원 3 商周史 尹乃鉉/값 6,500 원 4 人 間 의 知能 黃禎至 / 값 7 ,500 원 65 中日國本 古의 代萬 文葉學集史 金 思金燁 툰/ 主값/ 값5 ,35,0 o0o 원:J 원 7 現代意昧論 李韓/값 5,500 원 8 베 트남史 i1 11 二 퓸 /값 5 ,500 원 9 印度哲學史 吉熙星 / 값 5 , 500 원 10 韓國의 風水思想 崔呂 祚/ 값 6, 00'.l원 I I 社 會科學과 數學 李承 勳 9\ /값 2 ,500 원 12 重商主義 金 光洙/ ~j 2 , 500 원 13 方言學 李翊 뿔/값 5, 00'.l원 14 構造主義 蘇 斗 *I 값 4, 00'.l원 15 外交 制度史 金책 /값 2 . 知원 16 兒童心理學 崔敬淑 /~l 7 , 00'.l원 17 언어심리학 卽腦i /값 5 /XI)운 18 法 사 회 학 梁뮬 / 값 6, 00'.l원 19 海洋法 相 룝 浩權炳 / 값 4,500 원 20 한 국의 정 원 獻 I B'f /값 6, 00'.l원 21 현대도 시 론 좇 大 基 /값 4, 00'.l원 22 이 슐람사상사 김정위/값 3 , 5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