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 童 II 午

저자는 전남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 「李朝時 代의 /}!閑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조겅학과교수로 재직중이며, 문화공보부 문화재전문위원이기도 하다.

한국의 정원

한—국韓 國의園林 硏정究원 一

鄭膳呼 民音社

머리말 주위에서는 아직도 내가 대나무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는 줄로 아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것은 60 년대에 있어서는 대나무에 미 쳐 동분서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분야에 관한 연구는 1971 년에 「왕대나무林에 있어서의 開花進行양상에 대하여」라는 논문 을 마지막으로 하여 손을 떼고 70 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15 여년간을 한국의 전통정원에 관한 조사와 연구에 몰두하게 된 것 이다. 그러니까 내 나이 40 년대에 비로소 造景史學徒가 된 것이 니. 때늦은 감이 없지 않으며 연구경력도 일천할 수밖에 없다. 1972 년도에는 전라남도 문화재위원회의 위원자격으로 무동산 북쪽 기슭에 있는 소쇄원을 한국의 특징있는 전통정원으로 발굴 하여 지방문화재로 지정토록 한 바 있으며 1973 년도에는 이룰 체 계화하여 그 가치를 한국조경학회지를 통하여 발표한 바 있다. 이 를 기점으로 하여 호남지방은 물론 정원유적이 있는 곳이라면 전 국 방방곡곡으로 누비게 되었으며. 그동안 문헌과 유적을 중심으 로 한 약간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발표된 논문에 수정해야 할 점이 적지 않음을 발견하고 부끄 러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선구자적인 입장에서 학문을 개척한다 는 것은 쉽지 않음을 새삼 느끼게 한다. 마침내 대우재단의 배려로 〈한국의 정원〉에 관한 학술논총을 집필하게 되었다. 계획서를 냈을때의 생각과는 달리 막상 펜을 잡 고 보니 책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뼈저리

게 느낄 수가 있었다.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2,000 년간의 조경발달 사를 더구나 연구보고서나 기타 참고문헌이 빈약한 상태에서 한 사람의 힘으로 고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증이 어 렵고 막히는 데가 너무나 많아서 중도에 집필을 포기할까 하는생 각을 가진 적 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간신히 원고를 마무리한 지 금에도 불안은 가시지를 않는다. 그러나 앞으로 더 많은 답사와 연구를 통하여 미비점을 보완하겠다는 약속으로 독자 여러분께 변 명과 함께 인사드리고자 한다. 아울러 지 방에 묻혀 있는 사람으로서 염두에도 낼 수 없었던 저술의 기회를 준 대우재단 측에 재삼 깊은 감사의 뜻을 올린다. 얼마전에 세계적인 조경사학자인 일본의 오까자끼 아야아끼라 (岡崎文彬) 박사께서 보내준 「名園이야기」라는 저술 속에 본 저 자가 발굴하여 문화재로 지정했던 소쇄원과 명옥헌이 세계의 名 園과 함께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보고 지금까지 고생했던 보람을 여 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1986 년이야말로 본인에게 있어서는큰 영 광의 해인 돗싶다. 보잘것없는 저술이지만 한국 전통정원의 연구와 발전에 밑거롭 이 될 수 있다면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1986 년 9 월 연구실 창 너머 무동산을 바라다보면서 정동오

한국의 정원

차례

머리말 6

序 11

前章 庭園槪說

1 정원의 개념 15

2 〈정원〉에 관한 고찰 21

3 정원양식의 성립조건 24

本章 時代別考察

I 삼국시대

1 연구사 35

2 시대배경 37

3 정원각론 43

(1) 고구려 43 (2) 백제 47 (3) 신라 50 (4) 조경식물 66

4 결론 72

II 고려시대

1 연구사 75

2 시대배경 77

3 정원각론 81

(1) 궁궐정월 81 (2) 객관정원 91 (3) 사원정원 92

(4) 민간정원 96 (5) 조경식물 101

4 결론 129

III 조선시대

1 연구사 131

2 시대배경 133

3 정원각론 141

(1) 宮苑 142 (2) 민간정원 184

4 조경식물 270

5 결론 280

終章 韓國庭園의 특징

1 신선사상의 배경 291

2 직선적인 윤곽선 처리 296

3 園池의 형태와 구성의 단조로움 298

4 修心養性의 場 312

5 풍류생활의 場 315

6 자연과의 일체감 형성 318

부록·동양조경사연표 321

색인 341

序 역사적으로 볼 때 1,000 년 이상의 造景文化룰 갖는 나라는 서 양에 있어서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페르시아 둥의 소아 시아지방 그리고 히브리, 그리이스, 로마 둥이며, 동양에 있어서 는 중국, 한국, 일본 동 모두 10 指로 꼽을 수 있을까말까할 정도 이다. 그 중에서 한국의 조경문화는 1,500 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아직 세계에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한국인이 우리의 조경문화의 가치를 일찌기 인식하지 못하 여 발굴과 연구를 통하여 세상에 알리지 못하였고 전통문화를 갈 고 닦아 발전시키지 못한 데 있는 것으로 안다. 반면에 우리나라 를 통하여 직접 간접으로 조경문화를 받아들인 일본은 열심히 연 구하고 기록하며 발전시켜 세계에 홍보하고 기법을 보급하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세계는 동양에서는 일본만이 훌륭한 조경문 화를 간직하고 있는 양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여기에서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하며, 우리의 조경문화가 하루 속히 세계 속 에 부각되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갖는 조경문화를 한 사람의 힘으로 고찰한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학자들에 의한 연구업적 도 찾기 힘든데다, 고구려의 영토와 고려시대의 수도권 및 그 이 북지역이 휴전선 북쪽에 있어 현장답사조차 불가능한 상태에 있 다. 또 이데올로기 문제로 북쪽의 정보를 자유로이 얻기조차 힘

든다. 이러한 제한조건은 저술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고구려와 고려는 상술한 불리한 조건 때문에 고찰에 어려움이 있다고 하지만 백제는 남한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원에 관한 유적을 거의 찾지 못하여 특징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그러나 신라는 경주지방에 임해전 池苑이라든지 포석정의 曲水渠 가 遣址나마 전해 주고 있어 당시의 정원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 료가 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정원도 지난 500 년 동안 청국과 일본국에 의한 수 차의 外侵과 후손들에 의한 관리 소홀 동으로 유적이 많이 파괴 되고 또 형상이 변경되어 원형을 잃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경복 궁의 경회루池苑이라돈가 창덕궁의 후원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京外의 漁湘園이라돈가 廣寒樓, 鳴玉軒, 英菩洞園林, 茶 山草堂, 活來亭, 小開亭등 특징있는 정원이 옛모습을 거의 그대 로 지니고 있어 조선시대의 정원을 연구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 고 있다. 서울의 삼청동에 조영되었던 金祖淳의 玉奎 亭 別莊庭園 은 비록 그 자취는 없어졌지만 「玉奎亭圖」가 전해지고 있어 조선 시대말의 별장정원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어 주고 있다. 그나마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Hubbard* 는 〈造景史學徒는 양식을 창조한 국민의 역사와 특성, 양식의 목적, 작품이 이루어졌던 주위 환경, 그리고 정원에 사용 된 여러 가지 재료 둥을 다 함께 연구해야 하며, 현대의 조경가 는 과거의 양식의 예에서 현재 자기의 작품에 도움이 될 영감과 정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양식을 미래의 창조적인 활동에 이용될 수 있는 자료로서 연구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매 우 좋은 조언이다. 이 논자도 Hubbard 의 견해를 따르고자 힘썼으 나 연구경력이 일천하고 역부족으로 만족할 만한 결실을 얻지 못 한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앞으로도 한국의 전통정원의 연구에 . 더욱 정진하되 亭子, 寺孫IJ, 鄕校, 書院문운으로 범위를 넓힘과 아울러 硏究方法을 개선하여 본 저서에서의 미비점을 보완해 나가고자 한다. * Hubbard H. V and Ki m ball, An Intr .od ucti on to the s t따Y of Land$cape Desig n, Macmi lla n Co., PP. 59-6 0, 1917.

前章 庭園槪說

여기에서는 순서에 따라 〈정원〉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찾아보고, 절을 달리하여 용어에 대한 것과 정원양식의 성립조건에 대하여 고찰하기로 한다.

庭園槪說 l 庭園의 槪念 우선 〈정원〉이라는 용어 속에 들어 있는 뜻이 무엇인가를 살펴 보기로 한다. 造景史上 庭園에 관한 최초의 기록의 하나는 고대 이집트의 나 일강변 Thebe 에서 볼 수 있는 어떤 권귀의 저택정원에 관한 것이 다 P 이 정원은 한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것으로 新王國 제 18 왕 조의 제 9 대 Amenhote p ill (1412~1376 B. C) 때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는 높은 담에 의하여 둘러싸인 사방형의 공간 속에 저택, 포도시렁 탑문을 중심축으로 하여 4 개의 방지와 수림 그리고 園 亭 Pav i li ons 을 좌우대칭적으로 배치하고 있는 평면기하학식 정원 이다. 네 개의 방지 속에는 물고기와 오리가 길러지고 수련이 심 어지고 있으며, 수림은 S y camore 와 Date p alm 으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공간구성을 분석해 본다면 높은 담은 건조한 열풍을 막아주고 수목은 그늘을 주며 못은 물을 증발시켜 시원한 분위기 를 주기 위함이다. 년중 강수량이 30mm 에도 이르기 어렵고 일사 가 강하며 공기가 건조하여 생활에 쾌적함을 주지 못하는 아열대 I ) Nonnan T. Newt on , Desig n on th e Land, The Develop m ent of land- scap e Archit a.tur e, PP. 4~5, 1976.

에 속하는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이디오피아 산지에서 發源하여 북상한 나일강이 유일한 생명선이었다. 5 월과 6 월에 계절풍으로 인하여 쏟아진 강수는 작열의 사막 속을 6,000 여 km 나 유유히 홀 러 이집트에 이르면 7 월에서 10 월에 이르는 사이에 나일강을 넘 치게 한다. 이 물은 바로 이집트인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며 고대 의 그 빛나는 문화를 이룩하는 데 원동력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평소에 갖는 소망은 의, 식, 주 외에 시원한 그늘을 주는 수림이 우거지고, 갈증을 풀어 주는 물이 넘치는 〈天國〉과 같은 세상일 것이다. 그러한 세상을 주거근처에 창조하기 위해서는 관 수기술이 필요했을 것이고 시원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는 어떤 방법이 연구되어져야 했다• 그러면서도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았고,시각적으로 쾌감을 줄 수 있다면 금상침화였 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Thebe 의 저택정원은 만점에 가까운 것 이었다. S y camore 와 Date pa lm 그리고 포도덩쿨은 녹음을 줄 뿐 만 아니라 열매는· 식품이 될 수 있었다. 못에 키우는 오리나 물 고기도 단백질을 공급하는 데 일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 수목이나 못은 기하학적으로 잘배치되어 있어서 못가에 세워진 園 亭에서는 시원하게 앉아 이들을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담과 탑문도 토지의 경계를 나타나기 위하여 설치한 것 이상으로 기능과 미에 관심을 두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시원한 물과 나무 그늘이 있는 정원을 꾸미고 사는 사람은 비록 따가운 아열대의 사막지방이라 하더라도 먹을 것만 있다면 〈天國〉이 부러울 수가 없을 것이다. 기독교의 성전 중에서 창세기의 제 2 장 8 절부터 10 절 사이에는 조원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룰 Ki ng Jam es Versio n 에 따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8) And th e Lord God pla nte d a ga rden eastw ard i n Eden; and th ere he pu t th e man whom he had for med. 9) And out of th e gro und made th e LORD God to gro w every tre e th at is ple asant to th e sig h t, and go od for foo d;th e tre e of life also in th e mi ds t of th e ga rden, and th e tre e of knowledg e of go od 2) Amcr i다 n Bib l e Socie ty, The HOLY BIBLE. Set fon h in 1611, PP ..2 , 1952.

and ·ev iI . 10) And a riv er went out of E'den to wate r the ga rden,and from th ence it was pa rte d , and became i nto fou r heads. 소위 〈에덴동산〉에 관한 기록인데, 여기에는 시각적으로 쾌감 울 주고 좋은 식품이 될 수 있는 온갖 나무를 심고 건조에 마르 지 않도록 네 강에서 물을 끌어 관수했다는 것이다• 창세기는 신 화적인 것이기는 하나 고대의 이스라엘사에 관련되는 만큼 당시 의 정원의 내용을 읽을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g arden 〉이라는 개념은 시각적인 〈快感〉 의 부여와 식품생 산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는 생명의 나무 tre e of lif e 와 지혜의 나무 tre e of knowled g e 가 있다고 덧붙이고 있는 것은 역시 전자와 같이 정신과 물질 또는 미와 경제 두 가지 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위의 두 가지 예에서 고대의 정원에 관한 개념을 파악할 수 있 다. 즉 생활에 쾌적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도 경제적인 면을 고 려하고 있으며 같은 값이면 시각적인 쾌감도 부여할 수 있도록 꾸며진 인공적인 자연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서양사람들이 말하는 〈g arden 〉이란 어떤 뜻을 지닌 것인지 어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g arden 이란 말은 헤브라이어 의 〈g an〉 과 또는 〈 eden 〉과의 합성어인데 은 울타리 또는 에워싼다는 뜻을 갖는 보호나 방어를 뜻하며 또는 〈 eden 〉은 즐거움이나 기쁨을 뜻한다고 한다?그러므로〈g arden 〉이 란 기쁨이나 즐거움을 얻기 위하여 자연재료를 도입하여 울타리 안에 꾸며 놓은 인공적인 자연공간이라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어 원이 쾌감부여에 치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이집트의 정 원이나 성서 속의 〈에덴동산〉의 경우와 같이 그 이상의 뜻을 지 니고 있는 것이 정원이라 할 수 있다. 정원의 다른 예를 극동의 황하문화권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고 대 중국의 秦이나 漢은 都를, 위수, 낙수 및 분수가 연락되는 황하의 상류인 함양이나 장안 낙양 둥에 두고 있었다. 이 지역은 3) Mi ch ael Laurie , An Intr o duc tion lo Landscap e Archit ec lure,Pi im an, PP. 13, 1975.

高 山에 의하여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로서 이 사이를 동서로 흐르 고 있는 위수는 생명줄임에 틀림없다. 진의 시황은 천하를 통일 하고 수도인 함양에다 장려한 아방궁을 건설했다 (212 B.C ). 그리 고는 불로장생을 꿈꾸어 신선사상을 굳게 믿었으며 궁 앞에 위수 를 끌어다가 大長池롤 만들고 봉래산을 축조했으며 길이 200 丈이 나 되는石刻의 諒魚를 배치했다 ~)5) 장안에 도를 정한 한나라의 7 대 무제 (140~87 B . C) 도 상림원에 이궁 70 여동을 세우는 한편 각지에 서 헌납해 온 花樹 30 여종을 심고 百獸를 銅差하였으며 곤명호를 비롯하여 곤령지, 서파지 둥 6 대호를 만들어 주변을 조경하고 대 소 선박 100 여척을 호수에 띄워 줄기거나 水戰敎習을 하게 하거 나 했다. 또 기원전 109 년에는 원내에 梧梁 蓬 (通天 臺 또는 望仙 臺 ) 를 만들고 臺 上에 높이 30 丈의 銅柱를 세워 그 위에 承 露 盤울 들 고 있는 선인을 두었는데 장안에서 200 리나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높이 솟아 있었다. 또한 건장궁 남쪽의 唐中池에는 영주, 봉래, 방장 등의 신선도를 만들었고 못가에는 청동이나 대 리석으로 만든 해중신선인 고래나 조수의 상을 배치하였다고 한 다 .6)

4) 岡大路, 『支那庭園 論 』, 彰國社, PP, 12~ 13, 1943. 5) 諸稿轍次 『大漢和辭典』, 卷九, PP. 1036, 1966. 6) 黃寶均, 『中國建築史』, 正中 畵 局, PP. 68~69, 1973.

위와 같이 秦의 시황이나 한의 무제가 조영한 상림원의 내용을 분석해 본다면 첫째는 제왕의 위락공간으로서의 기능, 둘째는 신 선계의 창조라고 볼 수 있다. 전자에 있어서는 주변 경관의 조망 과 珍獸異腐에 대한 완상과 수렵, 그리고 船遊 동이 포함되어 있 으며 후자에 있어서는 불로장생의 신선사상에 대한 신앙의 강력 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조영한 경주의 임해전池苑은 못을 팔 때 나온흙 으로, 어떤 해안풍경을 본 딴 인공동산을 池岸에 만들었고, 지중 에는 3 개의 대소의 섬을 축조하였다. 이 정원도 임해전에 앉아 호수의 水景과 피안의 인공적인 해안풍경을 관상하며, 즐기거나 수중에서 직접 선유하기 위하여 꾸민 것이지만 지중에 3 개의 섬 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면 秦이나 漢나라에서처럼 불로장생의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중국에 있어서 晋時代 (317~419 A.D) 에 이르러서는 정원의 무

대가 도시에서 산천경개가 수려한 교외의 자연 속으로 옮겨 가게 된다. 그 대표적인 한 예가 왕희지 (307~365 A . D) 의 I 써 存 故* 이다. 그는 수도인 建康보다는 풍광이 明 眉 한 浙江의 會 稽 를 永住 處로 택했으며 永 和 9 年 (353 A. D) 3 월 3 일에는 41 인의 명류, 친지들을 불러 OO 亭 에서 跋秩 의 禮룰 치르면서 〈 流 能曲水〉하며 즐겼거니와 경주의 포석정의 1ll1 水 渠 는 이 를 본받은 것이라 할수 있는데 모두 교외의 자연 속에 마련한 정적인 위락공간이다. 정원은 시각적인 쾌감 부여와 유락 및 쾌적한 생활공간으로서 의 기능 이외에 修 心 箕 性의 장으로서의 기능도 갖는다. 조선시대 의 원림에서 흔히 보는 일인데 池中에 蓮을 심는 것은 꽃을 즐기 기 위함에도 목적이 있겠지만 송의 유학자인 周敦頭가 내놓은 예 은 君 子니라〉고 한 愛蓮說에 영향받은바 크며, 李退溪의 僚 5 友社〉라던가 鄭 榮 邦의 〈四 友垣 〉과 같이 松 • 竹 • 梅 • 菊 의 四節友 를 정원에 심는 일도 많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원은 造營 者나 설계자에 따라뜻과목 적이 다르기 때문에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러나 여러 학자들이 내린 정의는 시대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됨 으로 찾아보고자 한다. 정원에 관한 정의는 1 앉1 ] 기초에 이르러 서양에서 기하학식 정원 에 반발하여 풍경식 정원이 태동되면서 비롯된다. 1712 년에 영국 의 Jo sep h Add i son(1672~1719)” 은 자신이 주필이 되어 발행하고 있는

후 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능에는 고려함이 없이 〈자연스러 운 정원〉의 정도에 따라 미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데 대해서 차차 거부반옹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그 중에서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Sir Wi lli a m Chambers (172 6-- 17% )는중국의 정원에서 본받 을 것이 많다고 강조하였고, Kew Garden 에다 탑을 비롯하여 많은 중국풍의 건물을 도입하였다 .8) 20 세기에 들어와서 정원에 대한 개념이 크게 변하였다. 미국의 하바드대학의 명예총장이던 엘리올 (Charles Wi lli a m Elio t , 1834 -19 26) 은 1910 년에 ASLA 의 기 관지 〈L a 叫 sca p e Archi te ctu re> 의 창간에 즈음하여 조경학의 개념과 조경가의 역할에 대한 기고 를 한 바 있는데 .9 ) 이에 의하면 정원이란 도시인에게 줄거움과 편리함과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도록 조경가에 의하여 꾸며진 옥 외생활공간이라는 뜻을 전하고 있다. 또한 영국출생으로 미국의 예일대학에서 도시계획을 강의하고 있던 Chris t o p h er Tunnard 는 10 ) 정원이 란 하나의 예술작품이 라는 전제하에, 이는 휴식과 레크리에이션의 장이고 원예취미를 가질 수 있는 장이기도 하지만, 〈예술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미적인 구 성이 이루어져 시각적인 쾌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위 두 정의는 기능과 미의 양면이 공존하되 생활공간으로서의 기능 8) 岡大路, 前揚 畵 PP. 199~221 9) HUBBARD and KIMBALL, An Intr o ducti on to the stu d y of Land- 11cap e Desig n , The MacM illa n, PP. I, 1910. Landscap e Archit ectur e ls Prim arily a line art 11nd as such its most im - po rt en t fun c tion Is create and pre serve beauty In surroundin g of human , habit at i on s and In the broader natu r al scenery of the countr y ; but it is al- so concerned wlth .p r m oti ng the comf ort, ronvlnie n re and health of urban po pu lati on s, whic h have scantl y access to rural scenery, and urge n t ly need to have the ir hurrin g , _wo rkaday live s refr es hed and calmed by the beau- tiful and re po 띠fil l sig h ts and sounds whic h natu r e, 11lded by the land- scap e art , 따 n abundantl y pro vid e . 10) Chri stop h er Tunnard, Gardena in th e Modern Landacap e, Lon-

don, The Archit ectur al Press, PP. 106, 107, 1938. A ga lt lcn ls II work of art . It is also a number o 『 oth e r thi n g s , such as a pla ce 『o r rest and recreati on , and for the per sult of hor ticu ltu r e, but to be a g11 f dc n In the tru e sense of the ter m It must be an 11esth e t- ic comp o siti on .

을 강조하고 있다는 데 큰 발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 이 르러 일본의 江山은`” 근대조경학을 정의하기를 〈본래 생물적이 면서 기계적인 인간에 대하여 주로 자연 내지 자연요소와의 공존 울 바탕으로 하면서 합리적이면서 쾌적한 넓은 뜻의 생활환경을 보호 조성하여,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인간, 동적이며 정적인 인 간, 죽 인간의 다양성에 부옹하기 위한 환경계획의 과학이다〉라 고 하였는데, 바꾸어 말하자면 정원이란 정신적이고 육체적이며 동적이고 정적인 인간의 다양성에 부옹하기 위하여 꾸며진 합리 적이며 쾌적한 생활공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고찰해 온 바와 같이 정원은 사상적인 배경이나 시대 에 따라 또 造營者의 취향에 따라 조경목적이 일정하지 않기 때 문에, 보편 타당한 정의를 내리가는 매우 어려운 일로 생각한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관상, 유락, 휴식, 修心養性등의 목적으로 정원을 造營하는 일이 많지만 이 기능은 단독일 수도 있고 복합 적일 수도 있으며, 조선시대에 보는 수심양성의 장으로서의 기능 은 근래에 와서 거의 잃고 있다. 그러므로 정원에 대한정의는시 대에 따라서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石川의 다움과 같은 정의 12 ’ 가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정원이란 주로 土 • 石 • 木둥의 자연재료 및 건축물에 의하여 미적이며 기능적으로 구성된 특정의 구역을 말한다〉 2 〈庭園〉에 관한 고찰 仮園〉이라는 용어는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 최초는 1889 年 12 月에 일본의 橫井時冬이 저술한 『園藝考 d 大八洲學會刊) 로서 여기에는 정원이 라는 용어가 60 여 곳에 쓰여지고 있다고 한 다. 13) 그 후 書名에 공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小澤圭次郞 (1842 - 11) 江山正美 『 ~r- -f子夕千 =7 一明日 O 造園學』, 鹿島出版, PP. 17-18, 197 7. 12) 石川格. 屯봅園學槪論』, 誠文堂新光社, PP. 14, 1978. 13) ‘竹谷鐘吉, 야i治時代 O 造園 書 』, 庭, 4S, PP. 125, 1979

1932) 으로서, 1915 년에 일본원예연구회에서 발행한 『日本園惡史 』 안에 「明治庭園記」라는 제하의 글을 쓴 것이다. ” I 151 그 후 1919 년에는 동경대학의 공과대학 건축과에 정원학 강좌가 설치된 것 을 시접으로 〈정원〉이라는 용어가 보편화된 것이다. 한국에서의 용례를 고려시대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이 시대의 저술 가운데서 조경과 결부되는記述이 가장 많은 것은 李奎報 (I168~1241) 의 시문이다. 『동국이상국집』에 의하면 1 자택의 정 원에 대하여 〈家園〉이라는 말이 쓰여지고 있으며 남의 정원에 대 해서는 楊應才의 林園 이라든가 정문갑의 임원과 같이 〈林園〉 이 라는 용법이 있고 奇相國林泉과 같이 〈林泉〉 이라는 용어도 나온 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園〉자 하나로 편리하게 쓰는 경향이 있다.

14) 上原敬二. 『.::. (!) 目 균見t.:.造園發達史』, 庭, 47, PP. 134~ 135, 1979. IS) 木村三郞,맷上園』, 日本造園雜誌 45(2):19~21, 1981 . 16) 李奎報 대國李相國集』, (古典刊行會, 束國文化社, 1958).

尹은 I 고려시대의 정원용어에 관한 연구에서 고려시대의 중기 에 있어서는 원림, 임천 등의 용어가 가장 많이 쓰여지고 있으며 후기에는 園林, 庭院, 林泉, 花園 둥이 꽤 높은 빈도로 쓰여지고 있지만, 중기와 후기를 통해 가장 보편적으로 쓰여진 용어는 원 림이라 하고 있다• 조선시대도 고려시대와 같은 경향이 있다. 그 러나 고유명사나 보통명사에 붙여 호칭할 때는 말미에 園자만 붙 여, 漏漏園, 淳園, 石林國, 西園, 遺造園, 寄園, 杏園 또는 徐 達城後園 成重卿後園 둥과 같이 쓰기도 하지만 대개는 건축물이 나 중심적인 시설물의 명칭만으로 園林名울 대신하고 있다. 조선 시대의 정원에서 몇 가지 예를 든다면, 경복궁의 경회루,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 남원의 광한루, 영양의 서석지, 강진의 다산초당 과 같은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에서는 고유명사에 원자 를 붙여 쓰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그 예로서, 송에 있어서는 司 馬溫公光의 獨樂園, 董氏西園, 劉氏園, 穀春園, 歸仁國, 苗師園 동동, 명대에 있어서는 抽政園, 萬竹園, 同春園, 長鄕園, 또 청 의 諸超園, 句園, 留園 曲園 둥 한이 없을 정도로 많다• 정원이냐 원림이냐 또는 苑이냐 園이냐 하는 데 異見이 있다.

17) 尹國炳. 慣麗時代의 庭苑用語에 관한 硏究.J, 《韓國庭苑學會誌〉, 1

樂嘉 ~18 ) 는 溫은 성내의 第宅에 꾸며진 것이며, 溫林은 城外에 독립적으로 조영되는 것이고, 苑園는 황실 소유의 f邸篠獸의 區라 하여 서로 구분하고 있다. 樂온 또 성내의 경우 저소득충이 뜰의 일부분에 花場룰 만들고 간단한 조경처리에 그치는 것은 庭이며 부유충이 보다 적극적인 조경처리를 하게 되면 庭園이고,家宅 근 처에 유락목적으로 조영하는 조경공간은 園이라 하여 구분하고 있 다. 그러나 중국의 古 맙 에서는 I 園은 果 • 菜 • 花 • 藥草 등을 심는 곳으로서 울타리가 있으며 , 苑은 鳥獸를 기르는 곳이 며, 울타리 (담) 가 있으면 園라 한다 하고 苑固는 넓은 토지를 요하기 때문에 天 子 諸候의 힘이 아니면 설치하기 어렵다고 적고 있다. 漢의 上林 苑, 宜春苑, 梁의 孝王의 東苑, 文王의 盆固 둥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18) 樂嘉ii, 『中國建築史』, 華世出版, PP. 9~ 13, 1933. 19) 簡壓道明, 『字源』, 角川書店, PP. 372~373, 1955.

또 근래 중국인의 저서 중에는 園林이라는 용어가 많이 쓰여지 고 있는데, 몇 가지 예를 들고자 한다. 1956 년 중국 상해의 동제대학 건축학과 (편저 陳從周)에서 간행 한 『蘇州圈林』에는 抽政園과 유원울 주로 한 소주의 원립이 소개 되고 있다. 이 저서의 후미에 첨기하고 있는 문헌 중에는 上海文 化出版의 『園林談鼓 (1980) 』, 上海科學技術出版의 『揚州園林 (1982 ) 』 동의 저술이 있다. 1979 년에 전 남경공학원 교수가 생전에 저술한 蘇) · I1 古典園林에는 抽政園, 留園, 獅子林, 槍浪亭 둥, 5 개 園林이 소개되고 그 저서 속에는 江南園林志 (1963) 가 있다. 또 1982 년 3 월에 중국건축학회 및 園林학술위원회위원인 趙光華 편집집필의 『中國古典園林』에는 北海, 故宮의 御花園, 頭和園, 寺院行宮庭園 과 貴族庭園 둥 많은 정원을 설명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중국에서는 근래 일본식 용어인 仮룝園〉 대신에 個i 林〉을 쓰는 경향이 있지만 그 내용은 소위 각종 仮릅園〉을 망라 하고 있는 것이다. 죽 의식적으로 일본식 용어를 기피하는 듯하다. 1982 년 10 월 10 일에 〈韓國庭苑學會〉가 창립되었다. 이는 1980 년 12 월 12 일에 창립한 한국정원문화연구회를 발전적으로 승격시 킨 것인데, 지금까지 써 오던 〈정원〉이라는 용어 대신에 値漢i〉

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공식적으로 동장시킨 획기적인 사건이라할 수 있다. 동 학회에서는 새로운 용어를 쓰게 된 데 대하여 20 ) 〈국 적불명의 표기를 쓰는 것보다 역사적으로 보다 깊은 뜻이 담겨진 苑을 살려 庭苑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되었기 때 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기존 재래의 용어를 무시하고 저마다 신용어를 만든다면 용어의 통일을 어렵게 하고 혼란을 가져오며 학계에 커다란 폐를 끼치는 것이다 〉 라고 말한 丹羽의 견해도 2 경 청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저자의 생각으로는 비록 일 본인에 의하여 만든 용어이기는 하나, 현금 중국인들도 쓰고 있 는 실정이므로, 좋은 대안이 나올 때까지는 그대로 쓰되, 좀더 세 분해야 할 경우에는 〈주거역이나 어떤 건축물에 종속적으로 조경 된 울타리 안의 옥의공간〉은 정원이라 하고 별서나 亭 · 堂 · 軒처 럼 교외의 자연 속에 꾸며쳐 보다 자연성이 강한 곳은 원림이라 하며, 도시공원이나 宮苑에는 例i〉자를 붙여 구분하는 것도무방 하리라고 본다. 또한 〈園林〉은 옛날부터 많이 써 내려온 용어이 며, 근래 중국에서도 혼히 쓰고 있으므로 〈庭園〉에 대한 포괄적 인 호칭으로는 좋으리라 생각된다. 〈ga rden 〉이라는 용어도 현대적 인 개념과는 동떨어진 것이지만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처 럼 〈園〉이라는 낱말도 또한 모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20) 尹國炳, 屯苑의 解釋』, 韓國庭苑學 會 誌, 1(1 ), 3, 1982. 21) 丹羽鼎三, E 곧園 D 本質』, , 日本文化上 LT0 庭園, PP. 37~45, ·13 68.

3 정원양식의 성립조건 조경문화가 먼저 싹튼 서양에 있어서는 고대 이집트의 좌우 대 대칭적인 기하학식 정원양식이 13~14 세기에 스페인에서 전개된 이슬람양식과 15. 16 세기의 이태리의 르네상스양식 그리고 17 세 기의 프랑스의 평면기하학양식으로 이어졌으며, 18 세기에 이르러 영국에서 그 패턴이 깨어지고 자연곡선이 도입되는 풍경식정원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동양에 있어서는 고대 중국이 수려한 자연경관을 본 딴 호수중심의 정원을 꾸미기 시작하였으며 그 기

법은 한국과 일본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한국의 정원은 조선시대 에 이르러 중국이나 일본과는 전혀 다른 유럽스타일의 직선중심 의 기하학적인 양식으로 발달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조경문 화에 있어 같은 원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역이나 국가에 따라 유 를 달리하는 양식이 발달하게 되는 요인을 찾아본다면 그 지역 의 자연환경과 신앙(또는 종교). 민족성과 시대성 둥울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항을 달리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1 ) 自然環境 여기에서 자연환경이라 함은 기후와 지형을 들고 싶다. 인간이 쾌적한 생활을 갖기 위해서는 환경문제로서 적당한 습도와 기온 이 요구되며 휴식처가 될 수 있는삼림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기온 과 습도 외에 적당한 양의 수분이 공급되어져야 한다. Kop pen (1846~1940) 은 I = ~ (P 는 강수량, T 는 연평균기온)라는 공식 을 만들어 1<30 일 때는 삼림의 형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하였 는데' 카이로는 I.I이고 테헤란은 0.9 이며 북경조차도 22 에 지나 지 않는다.

22) 和達淸夫, 『氣象 0 事典』, 東京堂 PP. 80 --81 , 1954.

조경문화의 발달경과를 본다면 강수량이 부족하여 삼림의 성립 이 어려운 이집트나 페르시아지방 그리고 중국의 황하상류지방동 에서 먼저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을 보더라도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이들 국민들은 갈증을 풀어 주는 물과 그늘을 주어 더위를 식혀 주는 푸른 숲이 무엇보다도 큰 소원이었으므로 생활공간 속 에 못을 만들고 푸른 나무를 심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경문 화의 창시자가 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가옥구조는 여름철의 건조하고따가운햇 빛을 피하기 위하여 〈口〉字型이었으므로, 방형의 중정이 생길수 밖에 없었으며, 여기에 꾸며진 정원이라야 단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형태는 중세로마의 수도원에서 보는 회랑식 중정으로 이 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되자 보다 개방적 인 별장정원이 조망이 좋고 시원한 경사지에 꾸며지게 된 것인데 비슷한 지형조건을 갖는 우리나라의 산수정원이나 별서를 방불케 한다. 다만 한국의 경우는 보다 자연순옹적이며 자연스러운대 대

하여 전자는 인공성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는 데서 차이점을 찾을 수가 있다. 이처럼 국토의 지형조건도 정원양식에 영향을주는요 소이다. 17 세기에 프랑스가 이태리의 르네상스양식을 도입하려고 했지만 평야지가 많은 프랑스에서는 산악국인 이태리의 노단식정 원이 성공울 거두지 못하고 결국 프랑스의 지형조건에 알맞는 평 면기하학식 정원이 탄생될 수밖에 없었다. 고대중국의 진이나 한의 수도는 고원에 의하여 둘러싸인 황하 상류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기후와 토지조건 때문에 농업에 의존 하여 살기 어려웠으므로 공리적인 신선사상을 믿을 수밖에 없었 으며 황량한 자연조건은 남부의 수려한 호수경관을 동경할 수밖 에 없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나타난 것이 신선정원이요 자연풍 경모사의 정원이었다. 그러나 호수가 많고 자연경관이 수려한 양 자강 이남에 도를 두었던 동진이나 남송시대에 있어서는 북부와 같은 자연풍경을 모사하는 인공성이 강한 정원보다는 자연과 함 께 생활하는 별장정원이 많이 꾸며지고 있었음은 朱密의 『 吳興園 林記』나 王世貞의 『遊金陵諸園記』 23) 그리고 劉 敦 禎의 『 蘇 .J , 11 古典 園林』 24 I 동에서 엿볼 수 있다.

23) 岡大路, 前攝 畵 PP. 83~ Il l. 24) 劉敦禎原署 田中淡江 『中國11)名庭 A 蘇州古典園林) . 小學館, 1982.

한국은 1,000 년 이상의 조경사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고질높은 정 원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경제적인 요건에도 있겠지만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국토의 수려한 자연경관 조건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변화많은 자연지형에다 1,000mm 내외의 강수량이 삼림을 형성하기 에 넉넉하고 7 ()0/4내외의 습도와 9•c (북) 내지 13•c (남)의 평균기온 은 쾌적한 생활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소위 〈삼천리 금수강 산〉을 이루게 되어 시각적인 쾌감부여나 휴양과 위락목적의 인위 적인 조경의 절실함울 실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연 속의 생활 이 필요하다면 전망좋고 경치좋은 산지에다 간단한 정자만 하나 세워 놓으면 되는 것이다. 모든 자연환경이 바로 공원이요정원이 기 때문이다. 2) 신앙(또는 종교) 양식에 영향을 주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동양에서의 신선정원 도 그 한 예가 된다. 神仙思想은 齊나라 때 나타나서 秦과 漢나라

때에 크게 유행했던 공리적인 신앙으로서 신선의 존재를 굳게 믿 고 도를 성실히 닦는 자는 신선이 사는 곳에 이르러 불로장생의 영약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신선이 산다는 봉래선계를 현 실화한 것이 秦의 始皇이 조영한 OO 池宮의 蓬萊池이다. 史記의 封 禪 書 에 의하면 蓬萊 方丈 漏J · l · I 의 삼신산은 勃海가운데에 있는데 여기에 이르면 선산과 불사약이 있고, 여기에 사는 모든 짐승은 백색이며 궁궐은 황금과 백은으로 꾸며졌다고 한다. 이러한 설을 믿은 시황은 서복에게 명하여 3,000 명의 동남동녀를 데리고 발해만 동쪽으로 보내어 신선계의 영약을 구해 오도록 했으며, 마침내는 봉래산이 있는 신선정원을 꾸미게 한 것이다. 그 뒤의 漢의 武帝 도 公孫卿이 신선은 누각에 살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믿고 上林 苑 甘泉殿. 昆明湖 둥의 林苑을 만들고, 장안의 성내에 柏梁臺를 세우며 承露盤울 만들어 불로불사를 빌었다. 또한 이들이 소실된 뒤에는 대규모의 高樓를 세우고 建章宮이라 명명하였으며 그 궁 전 북쪽에는 太液池(唐中池)를 파고 池中에 蓬萊, 奎梁, 方丈, 漏洲!의 신선島룰 만들어 신선정원을 꾸민 것이다. 이와같은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정원은 우리나라에도 전하 여져서 백제의 궁남에 만들어진 方丈島 중심의 池園을 효시로 하 여 조선시대에는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일본의 園池에도직 접 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데 中島를 鶴島, 龜島, 蓬萊島 라 부르는 데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排佛崇盤政策의 영향을 받아 그 유교적 색채가 질 은정원이 발달하기에 이르렀다. 즉 〈修心養性〉을 정신적인 생활 지표로 삼은 선비들은 조경에도 이를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었 는데 절개가 굳다는 〈松, 竹, 菊, 梅〉등 四節友라든가 宋의 유 학자인 周敦願가 愛蓮說에서 군자의 꽃이라 규정한 蓮을 심었다. 또 도연명의 安貧樂道사상을 본받기 위하여 桃,柳, 菊올 즐겨 심는 풍도 있었다. 일본에는 불교가 생활 속에 깊이 뿌리 박고 있다. 그래서인지 정원 속에서 불교적인 색채를 쉽게 느낄 수 있다. 立石에서 須彌 山을 느끼며 대, 중, 소의 3 개의 配石에서는 삼존불을 찾고 中 橋가 있는 園池에서 七寶池나 九山八海를 감지하게 된다. 25) 諸橘織次 『大漢和辭典』, 卷一, 大修館, P. 152, 1955.

『일본 맙 紀』 에 의하면 ) 612 년에 백제인인 路子工 이 와서 飛 鳥宮의 南庭에 須彌山과 吳橋로 이루어진 불교사상 배경의 정원 올 꾸몄다. 須彌山 이란 고대 인도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인 金輪上에 높이 솟아 있다고 하는 山을 말하며, 그 꼭대기에는 喜 見城이 있고 여기에는 帝釋天이 살며 그 천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 중턱에는 동 • 서 • 남 • 북에 사천왕이 살면서 각각 八將이하 귀신을 거느리고 제석천을 받들며 이 국토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수미산 주위에는 七金山이 이를 둘러싸고 있으며, 이 사이에는 七海가 있고, 七金山 밖에는 塩海가 둘러 있고 塩海 건너에 欽園 山이 둘러 있어 須彌世界의 외곽을 이룬다고 하는 것이다 F 일 본은 이처럼 須彌山 정원에서 시작하여 정토정원 (南門-反橋- 中 島-平橋-金堂 형식 ) 그리고 禪사상배경의 柏山水 (唐山水)정원으 로 변천하고 있으며 오늘날에 있어서도 이들의 사상적인 배경에 의한 조경요소가 의식 무의식 중에 일본의 정원에 도입되고 있다. 이처럼 중국이나 한국보다도 더욱 색채가 질은 불교사상 배경의 정원이 일본정원의 中樞를 이루고 있는 것은 불교가 일본인의 생 활속에 깊이 침투해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일본의 名 園이 대부분 사찰에 속해 있으며 그 조영자는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막부정권의 지배층으로 대표된다는 데도 이해된다. 이들은 住居 가까이 사찰을 짓고 정토적인 만다라 정원을 꾸며 극락왕생 을 기원했던 것이다.

26) 坂本太郞 外 校注 『日 本 書 紀 下』, 岩波 書 店, PP. 197~ 199, 1965. 27) 長谷川 正海, 『日本庭園雜考』, 東洋文化社, PP.102~125, 1983.

서양에 있어서 종교적인 배경을 갖는 정원은 중세기에서 찾을 수 있다. 중세 로마시대의 수도원 정원은 건축물에 의하여 둘러싸인 방 형의 중정에 꾸며진 조출한 것이다. 중앙에는 수반이나 간단한 噴泉올 두고.주위에는원색의 아름다운 화초 대신에 상록의 低木 을 심게 한 것은 수도자에게 마음의 긴장이나 규율의 해이를 막 고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함이었다. 수도원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특징을 갖는 정원은 회랑식중정양식 Claus t rum 을 성립하게 하였다. 그러나 중세기말에 꾸며진 스페인의 알함브라성 내의 이슬람정

원양식은 기독교의 수도원정원과는 유를 달리한다. 중정에 수면 이 차지하는 비중이 수도원의 중정에 비하여 훨씬 높아졌으며 사 자의 중정 The court of th e Li ons 에서는 중심에 혹대리석으로 된 12 두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噴泉이 있고여기에서넘친 물은 십자 형의 水渠로 홀러 나가게 되어 있다. 그들은 이 십자형의 도랑 을 천국의 네 강 fou r riv e rs of p arad i se 이라 하고 있다. 이와 같 은 십자형의 수거를 갖는 池園樣式은 인도의 무갈 Mu g hal 양식에 도 나타나는데 라호르의 샤리마르 • 바-그 Shalim ar Bag h Lahore 나 타즈 • 마할 Taj- M ahal 궁원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이슬람정원에 나타나고 있는 십자형지의 근원은 이슬람교의 세 력권하에 있던 페르시아지방에서 찾을 수 있다. 죽 Khosro I 시 대 (531~579) 의 페르시아융단에 그려진 왕실정원 모양을 보면 못 울 중심으로 하여 십자형의 수거 canal 가 수놓아지고 있다.7') 이러 한 관계에서 볼 때 이슬람 정원의 십자형수거는 페르시아 지방의 정원양식에 본딴 것이라 볼 수 있다. 乾風에 스천 불모의 고원을 국토로 하고 있는 페르시아지방은 오랜 기간에 걸치는 심한 더위 로 국민들은 짜증스러운 생활을 겪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가장 희망적인 약속은 시원한 〈물〉과 그늘을 주는 〈숲〉이었다. 그래 서 코-란경 4 장 (여인의 장) 57 절에서는 〈신앙을 가지고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들은 그들을 발아래 시내가 흐르는 낙원 으로 들어가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라고 했다. 〈거기에는 정결한 여인도 있다. 또 우리들은 그들을 시원한 나 무 그늘에도 데려다 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47 장(마호메트의 장) 15 절에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약속되어 있는 낙원에는 흐려지지 않은 맑은 시내가 호르고 있다〉고 하여 신자들에게 맑은 물과 시 원한 그늘이 있는 천국을 약속하고 있다. 또 이슬람교에서는 일 곱 개의 천국 중 다섯 개에는 정원이 마련되어 있고, 하느님의 심 판을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서는 綠陰樹가 심어지고 각각 두 개의 샘이 넘쳐 흐르고 있는 두 개의 정원이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I 28) Tobey, G, B, A Hi s to r y of Landscap e Archit ec tu r e Ameri ca n Elsevie r pu b. PP. 37~38, 1973. 29) The Koran, Translate d from the ARABIC by J. M. RODWELL , The Guernsey Press Co., 1909. ( Last rep rint e d 1983)

3) 民族性 村田과 I 針夕谷은 31) 페르시아 정원은 기후, 종교, 국민성의 3 가지 커다란 영향을 받고 탄생했다고 하였고 黃은 32) 중국건축(園 林을 포함하여) 의 배경을 자연과 인문으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으 며 인문배경 속에 민족을 비롯하여 민권사상, 학술사상, 종교, 건 축전관기구 동을 넣고 있다. 어떤 정원양식의 성립에는 사상적인 배경과 함께 민족성도 크게 관여한다고 볼 수 있다. 그 한 예가 영국의 풍경식 정원과 일본의 축경식 정원의 경우이다. 유럽에 있 어서는 고대이집트에서 시작하여 17 세기의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직선적인 기하학식 정원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영국도 대륙의 영향을 받아 17 세기까지는 기하학식 정원이 지배적이었으나 18 세 기에 이르러 〈자연스러운〉 정원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원 인을, 이 무렵에 영국인들이 바다를 건너 알프스에서 이태리에 이르는 유럽대륙의 여행을 통하여 수려한 자연경관이나 별장정원 둥에서 〈새로운 세계〉를 인식하게 된 것과 당시의 낭만주의 운동 의 여파로 자연이나 변화 있는 경관의 미를 찬양하는 시나 회화가 쏟아져 나온데 자극 받은 데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그러 한 사조를 받아들여 영국적인 것으로 정착하기에 이른 것은 영국 의 민족성 때문이라 생각한다. 유럽대륙도 그러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지만 자연풍경식 정원이 정착하지 못한 것은 반드시 환경 탓 만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30) 村田 孝. 『 4 久 子 J,, 1l)庭園』. * 一 J,, 社, PP. 37~46, 1976. 31) jf'r 谷鏡吉, 면 5 t부造園堤遷史』, 誠文堂新光社,. P. 71, 196 1977. 32) 黃寶諭 『中國建築史』, 正中랴局, PP. 12~37, 1973. 33) Mi ch ael Laur ie, An Intr o duct ion to Landscap e Archit ec tu re, PIT MAN, P. 31, 1976.

동양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은 모두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은 곳 이다. 그러나 정원양식이 모두 다른 것은 역시 민족성 때문일 것 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은 자연풍경을 본따서 정원을 꾸몄다고 하 는데 방대한 국토를 가지며 대륙적인 기질 때문인지 규모가 사실 에 가깝도록 크다. 일본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로서 기후, 풍토가 중국과는 크게 다르다. 일본식 정원은 규모가 작은 축경식 정원이라 하는데 직선을 쓰지 않는 비정형식이다. 같은 섬 나라인 영국의 풍경식 정원과 다른 점을 찾는다면, 영국은 자연

과 일체감을 가지려 하는 데 대하여 일본은 담으로 의부와 격리 하려 하며 그 규모도 작다는 점(축경 정원이므로)을 들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정원에는 유독 직선을 많이 쓴다. 池塘도 方池 이며 花場나 菜菓뻐할 孛 것 없이 윤곽선처리는 의례히 직선이며 꽁 간의 평면형태는 가하학적이다. 園池를 놓고 본다면 일본은 자연 곡선인데 대하여 중국은 자연곡선과 직선을 병용하고 있으나 한 국은 춰선위주이다. 인간 개인에게도 취향이 있듯이 국민성 또는 만촉성에도 어떤 공통적인 취향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時代性 . ’고대로마제국으로부터 중세로마, 르네상스시대로 바뀌어 오면 서 :이 태리반도에 전개된 정원양식은 커다란 변화를 ‘ 가져왔다. 주 택정원의 예를 들면 : 고대로마지대에는 , 柱廊에 의하여 둘러싸안 中庭에는 분수 또는 수반을 중심으로 하여 花丹 影朔뚱이 아름 답게 장식되었으나, : 기독교가 세력을 떨치던 중세의 수도원의 중 정 -을 : 보면 폐쇄적안화랑에 의하여 둘러싸인 방형의 뜰은 십자형 의 원로에 의하여 네 분분우루 구획되고 중앙의 교차점에는 나무 를 심거나 수반 • 분수 ' · 샘들을 -' 설치 , 하였으며, 빈 · 땅에는 잔다를 깔거 , 나 와훼 · ' 초목 ·과수 등을 심었는데 매우단조로운 것이었다 ` 이 수도원 중정은 수사들의 심신을 정화함과 동시에 ,그 들의 휴양 과 사교의 장이기도 했다. 건축물에 의하여 둘러싸인 같.은 종류의 中庭이면서도 • 전자는 화려했던 로마제국시대를 : 반영하고 있으며 후자는 엄한 계율하에 서 생활해야 하는 중세의 기독교적인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그 러나 1 , 5 세기에 이르러 르네상스운동이 한창일 때 조경분야에서도 새 바람이 일어나 소위 〈르네상스 정원〉 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일명 露壇式 정원이라고도 하는데, 교외의 전망이 좋은 산지의 사 면을 段狀처리하고 여기에 별장과 카지노 그리고 분수나 壁泉등 의 수경시설과 화려한 화단정원을 꾸미며 여러 가지 장식적인 시 설물 (添徐物) 을 두었다. 그후 국가는 다르지만 17 세기에는 프랑스에 평면기하학식 정원 이 탄생하였고 18 세기에는 영국에 풍경식 정원이 새로이 등장하 여 새로운 紀元을 이루었다. 동양에 있어서는 일본에서 시대적인 변화를 찾을 수 있다. 귀족

이 다스리던 평안시대에는 대륙적인 풍경모사의 정원과 신선정원 및 發殿造 정원이 뒤섞여 여기저기 조영되더니 막부정치시대인 源氏의 鎌倉시대 (1192~1338) 에는 정토정원이 대종을 이루었고 足 利氏의 室町시대 (1393~1573) 에는 선종의 자연관에 의한 柏山水정 원이 성행하였다. 德川氏의 江戶시대 (161 6~ 1867) 에는 명나라의 유신들의 망명으로 중국적인 색채가 가미된 林泉庭園이 많이 꾸 며졌다. 이처럼 일본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신선정원에서 정토정 원, 선종정원 (柏山水) 그리고 林泉庭園으로 변하고 있는데 시대 성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에 있어서는 삼국시대에는 중국적인 풍경모사의 池園과 王 羲之적인 流森渠가 꾸며졌고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의 영향을 받은 듯 괴석, 화훼, 애완동물이 정원을 채웠으며 산천경개 좋은 곳을 찾아 별서를 조영하거나 茅亭을 세웠으며 溪潭을 막아 船遊의 장 소로 하였다. 그러나 승유배불정책,죽 유교적인 이상정치를 목표로 하는 조 선시대에 있어서는 하나의 특징 있는 정원양식이 성립되었다. 袋 地, 花階, 園池할 것 없이 윤곽선은 모두 직선을 사용하였고 園 池는 中島型 또는 無島型의 方池를 만들었으며 蓮을 많이 심었 다. 園池를 보통 方池 또는 蓮池라 하는 뜻은 여기에 있다. 한국 의 정원에 직선을 많이 쓰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蓮올 십은 뜻은 송의 유학자인 周敦願 (1017~73) 가 蓮의 생태에 서 〈愛蓮說〉을 내놓은 뒤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유독 蓮을 사랑하 여 園池에 심고 즐겼던 것이라 생각한다. 또 松 • 竹 • 梅 • 菊 을 四節友라 하여 정원에 많이 심는 것도 조선시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에서 볼 때 조선시대의 정원은 유교적인 배 경을 갖는 시대성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本章 時代別考察

한국의 정원 (園林)을 발달순서에 따라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 선시대로 구분하고 각 시대에 대하여 연구사, 시대배경, 정원각론 으로 나누어 고찰하기로 한다. 삼국시대에 있어서는 통일 후의 신 라도 여기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한다.

三國時代 l 硏究史 삼국시대의 정원에 관한 연구는 일본인 原j ~(1932) 의 臨海殿庭 園에 관한 것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그는 1920 년 7 월부터 1925 년 8 월까지, 4 회에 걸친 현지조사룰 통해 그 조영시기와 못의 형태 및 구성에 대하여 보고하고 있다. 그후 50 년이 지난 1975 년 3 월부 터 1 년에 걸친 문공부 문화재연구소 주관하의 발굴조사가 있었 으며 그 결과가 인쇄물로 보고된 바 있거니와 2) 동 연구소의 金은 3) 「경주안압지 발굴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안압지의 발굴결과 전 모를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李는 「望海亭과 臨海殿」이라는 논문 4) 에서 양자의 성격을 비교 하고 臨海殿은 백제의 望海亭에서 착상을 얻었을 것이라는 결론 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絶石亭에 관한 연구도 몇 건이 있다. 일본의 加藤이 1971 년에 관서지부의 학회에서 한국 경주 포석정의 곡수지에 관한 연구발표 를 한 일이 있으며, 5) 本中은 古代曲水案遺構의 유속에 관한 연구 l) 原熙, 『朝鮮新羅臨海殿庭園 (一 )』, 日 本園藝學會雜誌. 3(2), 98~ 108, 1932. 2) 文化公報部 文化財管理局, 「애들鴨池〉發堀調査報告홉」. 1978. 3) 金東賢, 「慶J 11 誰輯池發堀애 관하여J, 建築 20( 72), 35~40, 1976. 4) 李基白 「望海亭과 臨海殿」, 考古美術 129 • 130, 5~7, 1976.

에서 한국의 포석정 곡수거를 포함한 중국, 일본 동의 4 개 유구 를 중심으로 한 유속을 바교 고찰한 바 있다 .•) 한편 洪은 7 J 경주 포석정의 명칭과 유배방법에 관심을 갖고 그 결론으로서 , 絶石亭의 곡수거는 음양관계를 도입하여 디자인한 것 이며 그 명칭은 胞石亭일 것이고, 유수거의 형태와 龜頭의 입에 서 토해내는 것이므로 어떤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의문을 던져 주고 있다. 포석정에 관해서는 尹의 연구도 있는데 8 ) 그는 이 곡수거가 정 자형식의 건축물에 의하여 덮여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 크기 는 남북 5 간, 동서 4 간반정도가 될 것이라 결론하고 있다. 이밖에 1969 년부터 시작한 문화재관리국 주관하의 불국사 복원 계획의 일환으로서 1970 년 10 월 26 일부터 약 40 일간에 걸쳐 실시 한 九品蓮池 발굴조사의 결과에서 그 윤곽이 밝혀진 바 있으며, 백제의 公山山城內의 臨流閣 뜰에 있는 井池에 대해서도 공주사 대박물관 성지발굴조사단(단장 安承周)에 의하여 1982 년이래로 발 굴조사작업이 실시되고 있으나 그 결과보고가 나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최근 평양의 대동강상류에 있는 고구려의 大城山城과 安鶴宮에 관한 연구논문이 발표되고 있는 것을 보는데 ,IO J 고구려의 宮苑의 특징을 밝혀내고 신라와 백제의 궁원과를 비교 연구하는 데 중요 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이상에서와 같이 삼국시대의 정원에 관한 연구업적은 매우 빈 약하여 이를 근거로 하여 당시의 조경문화를 정확히 고찰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5) 加藤退允 「韓國慶州絶石亭曲水(J)池t ::.?L 、-c」, 日本造園雜誌, 40(4), J)Jj冊, P. 82-, 197 7. 6) 本中/tl, 「古代曲水案遺溝(J)流速t ::.?L 、-c」, 造園雜誌, 43(3) :25~30, 1980. 7) 洪思俊, 「慶州絶石亭의 名稱과 實物」, 考古美術, 129, 130, 155~ 161, 1976. 8) 尹國炳 「慶州胞石亭에 관한硏究」, 韓國庭苑誌, 2(1):1 ~13, 1983. 9) 文化公報部 文化財管理局, 「佛國寺復元工喜報告 율 」, PP. 60~68, 1976, 10) 千田剛道, 「淸岩里發寺&安鶴宮」, 文化財論淡(日本奈良國立文化財硏究所創 立 30 周年記念論文集), 同朋舍. PP. 1015~1040, 1983.

2 時代背景 11) 단군이래 5,000 년의 역사 를 가졌다고 하지만 기록에 근거를 두 어 조경적인 측면에서 생각할 때는 고구려를 비롯하여 백제, 신라 가 한반도에 정립해 있던 삼국시대부터가 고려의 대상이 되리라 생각된댜 고구려는 부여족의 支族인 고구려족이 모체가 되어 처음에는 송 화강유역에 살고 있다가 기원전 2 세기경에 남하하여 동가강 유역 에서 압록강유역에 걸친 산악지대에서 수렵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중국 (漢)에 대하여 꾸준한 반항을 계속하면서 부족간의 통일을 꾀하고 있다가 마침내 B. C 37 년경에 고주몽(東 明聖王)이 졸본부여에 고구려를 건국하였고, 주몽의 아들 유리왕 (19B. C~18A. D) 은 서울을 압록강중부의 북안지역에 있는국내성(통 구)으로 옮겼다. 그후 차츰 다른 부족들을 정복하여 강토를 넓히 고 세력을 확장하여 오다가제 10 대 山上王 13 년 (209A . D) 에는 환도 성을 축조하였다. 또 미천왕은 재위 14 년 (313A. D) 되던 해에 漢의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과 그 남쪽의 대방군을 정복하여 중국의 세 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17 대 소수림왕 (371~384) 때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들어오게 되 었다. 동왕 2 년 (372) 에 前秦王 부견 (388~85) 이 중 순도와 더불어 불경과 불상을 보내 왔으며 그 2 년 후인 374 년에는 東晋의 중 아 도가 귀화하여 왔는데 아도는 순도와 함께 고구려에서의 불교전 파와 불교문화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소수림왕 2 년에는 중국식 태학을 세워 중국의 고전과 무술 동을 가르쳤다. 20 대 장수왕 (413~491) 은 북으로는 송화강 서쪽으로는 요하, 남으 로는 아산과 삼척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영토를 확장하고 국방에 힘쓰는 한편 전진과 동진을 통해 불교문화를 받아들였으며, 당으로부터 도교를 도입 하였을 뿐만 아니라 漢四郡의 중심지인 낙랑을 점유하였다는 사 11) 李丙 畵 『新修國史大觀』 , 昔文閣. PP. 22~168, 1957. 李弘稙. 『國史大事典』, 知文閣, 1963. 韓泊助, 『韓國通史』, 乙酉文化社, PP. 51~126, 1970. 李基白, 『야國史新 論 』, 一潮問 PP. 52~112, 1976.

실이 중국의 선진문화의 도입에 크게 기여한 바 있었을것으로생 각된다 . 백제는 북쪽에서 남하한 온조 (재위 18B . C~28A . D) 를 시조로 하여 한강 북쪽 위례에 터를 잡고 있다가 그후 강남인 백제로옮겼고, 제 13 대 근초고왕대 (346~374) 에는 마한을 결합하여 통일의 주도권 울 잡게 되었다. 근초고왕은 東晋에 사신을 보내어 선린관계를 틈 과 동시에 영토의 확장과 국방에 힘써 오다가 그의 아들인 근구 수왕대에 이르러 전진 -고구려 -신라의 삼국연맹에 대항하여 동 진과 일본과 손을 잡고 싸우기도 하였다. 이 무렵 백제는 동진을 비롯하여 송, 양, 진 둥과도 외교관계 를 맺어 자주 내왕하고 그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다. 침류왕 원년 (384) 에는 東晋에서 고승 마라난타가 불교를 처음으로 전해 주었 으며, 그 이듬해에는 한산에 절을 지어 포교를 도왔다. 또 오경박 사를 비롯하여 각종 전문에 관한 박사의 제도를 두어 학문을 진홍 하게 하였다. 백제는 진사왕 7 년 (391) 春정월에 궁실을 중수하고 察池造山하 며 異升를 심고 奇爾을 길렀다고 했으나 문주왕 원년 (475) 에는남 한산성을 고구려에 빼앗기고 옹진으로 이도하였으며, 24 대 동성 왕 22 년 (soo) 봄에는 궁 동쪽에 높이 5 장에 이르는 임유각을 세우 고 察池하였으며, 園園를 두고 奇處울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12) 성왕 19 년 (538) 에는 다시 수도를 酒洪로 옮겼으며, 신라와 화친 하는 한편 남조의 양과 교류하며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의 부흥 에 힘썼다. 이때 양나라에 佛 書 와 工匠, 그리고 固師롤 요청하였 으며,음양오행사상도 들어오게 되었고 일본에도 불교를 전하였다. 29 대 무왕 35 년 (634) 춘 3 월에는 궁 남쪽에 못을 파고 20 여 리 밖 에서 물을 끌어다 채웠으며 池岸에다 楊柳를 심고 수중에다 섬을 만들어 方丈仙山을 상징하였다고 하였는데' 고대중국의 신선정 원기법이 도입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31 대 의자왕 (641~660) 대에 이르러 궁궐을 조영 하고 궁녀와 간신들과 밤낮으로 환락에만 빠져 국방을 소홀히 하 12) 徐居正, 東國通鑑 僚印文化社 影 印本, 1974),' 「春百濟起臨流閣於宮東, 高 五丈, 又察池 置圈以養奇鎬」 13) 金富試 三國史記, 百濟本紀 卷五 武王三十五年三月. 「察池於宮南 引水二 十餘里, 四岸植以楊亂 水中築島頓, 擬方丈仙山」

다 660 년에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되고 말았다. 한편 백제는 일본에 대하여 기술면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일본 上代의 수도작농업의 발달은 인공관개시설에서 비롯된 것인 데. 이러한 기술의 전파는 한반도로부터의 이민에 의한것임은의 심할 여지도 없다. 『日 本 書 紀』 ' 에 의하면 應 神 天 皇 代 (270~310A . D) 에 는 한반도로부터 온 사람들이 못을 만들었는데 〈韓人池〉로 불렀다고 했고 古 事 記에서는' 〈百 濟 池〉라 기록되고 있다. 또 최근의 일본 朝 日 新聞에 의하면 (1981 년 II 월 5 일자), 群馬縣郡馬郡 群 馬깥의 「三 `y 寺 」造址에서 발견된 6 세기의 고분시대의 것으로 생 각되는 漆 의 築石技法이나 형태가 한반도에서의 거의 같은 시대 의 것에 酷似해 있음이 고고학자인 同志社大 學 의 森浩一교수의 조사에서 밝혀졌다고 보도되고 있다.

14) 坂本太郞 等 校注 『日本 꿉 紀』 , 卷第十 警 田天 皇 , 應 神 天 皇 七年條, 「七 年秋九月 時命武內宿禍 領諸韓人等作池 因以 名池陳韓人池\」 15) 古 事 記 中卷, · 應 神 天 皇 , 야野 꿍 司校注 岩波 잡 店, 1958 年刊) 「亦新羅 人參渡來 是以建內宿禍命iJ I 率 爲 役之堤池而 作百 濟 池」

조경면에 있어서는 일본서기의 推古天 皇 20 년 (612A . D) 조에서 다 음과 같은 기록이 나타난다. 是 歲自百濟國有化來者其面身皆斑白若有白願者平 惡其異於人 欲棄 海中嶋 然其人曰 若惡臣之斑皮者 白斑牛馬 不可 菩 於國中 亦臣有小才 能溝上岳之形 其留臣而用 則爲國有利 何空之 棄 海嶋耶 於~ 驗其辭 以不棄 的令構須彌山形及吳橋於南庭 時人陳其人 曰路子工 亦名芝耆 摩呂 백제의 渡來人 路子工이 南庭에다 須彌山과 吳橋를중심으로하 는 정원을 꾸몄다는 것인데 일본에 있어서의 조원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라 생각된다. 또 同 書 의 推古天皇 36 년 (626A . D) 조에는 大臣 蘇我馬子가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그가 일찌기 飛鳥河 근처에 있 는 자택의 뜰에다 小池를 만들고 못 안에다 섭을 만들어 즐겼는 데, 그때 사람들은 그를 〈섬 大臣〉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1 蘇我 는 당대를 주름잡고 있던 호족으로서 그의 어머니는 한인이며 증

16) 日 本 꿉 紀』i撮 상 ,「家於飛 鳥 河之傍 乃庭中開小池 切興小 嶋 於池中 故時人曰 嶋 大臣」

조부인 韓子 이래로 친한파에 속하며 백제문화의 도입에 한 몫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 蘇我가 만든 中島가 있는 池園도 백제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奈良時代(7 10~793) 에 이르러 지나칠 수 없는 것은 백제왕의 후예 인 行基 (668~749) 가 土木 事業 에 공헌했다는 사실이 다. 그는 일본 최초의 大僧正이며 (745), 天皇과 황후 그리고 황태후에게 菩薩戒 롤 최초로 주었다는 (749) 기록을 가지고 있는 승려이지만 제자들 을 이끌고 다니면서 몸소 여러 지방의 요소에 교량을 가설하고 제방을 쌓으며, 도로를 수리하고 田池를 개설하며, 港}망을 축조 하였다. 또 여러 사원을 건립하고 布施屋을 세우는 둥 사회의 복 리 증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이처럼 백제는중국으로부터 문 화를 받아들여 한국화하는 한편 일본에도 전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7) 佐藤直助, 平田耿二, 『新版世界人名辭典』 東京堂. PP. 220 -22 1, 1980.

신라는 경주지방에서 일어난 6 개 부족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체 에 의하여 국가의 기반을 다진 데서 출발했으며 4 세기 중엽에 이 르러 주변의 여러 소국을 차례로 통합하여 중앙집권의 정치 체제 도 발전하게 되었고 국호도 新羅로 정하였다. 이 시기에는 중국 의 前秦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통교한 듯하나 지리적인 조건 때문 에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중국문화의 도입과 발전은 지지부진하 였다. 한학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4 세기경 간접적으로 도입되 어 6 세기경 에는 한자의 사용이 급격히 발전한 돗하다. 불교는 5 세기 중엽에 고구려를 통해 신라의 북부지방에 들어왔 으나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가 이차돈의 순교 사건을 계기로 법흥왕 14 년 (527) 에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하게 되었다. 그리하 여 조야의 열광적인 불교신앙으로 興輪寺, 黃龍寺, 三郞寺 둥이 S00 년대에 세워져 포교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600 년대에 이르러는 당과 연합하여 660 년 (신라 무열왕 7 년)에 백 제를 멸망시켰고 이어, 668 년 (문무왕 8 년)에는 고구려를 정복하여 드디어 3 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신라는 군사적인 면에서 당과 연합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불교적인 면에 있어서는 초기에는 고 구려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후 불교의 융성에 따라 학덕이 높은 승

려가 많이 배출되면서 당나라를 비롯하여 인도에까지 가서 교리 를 배우고 聖地를 순례하고 돌아와서 불교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慈藏은 636 년에 제자 質둥 10 여 명을 데리고 당나라에 가 불경을 연구하고 8 년 후에 돌아와 불법에 일 대 부흥을 일으켰다. 특히 645 년에는 백제의 工匠 阿非知를 초청하여 황룡사의 목조 9 층탑을설 계하게 하고 伊干 (i食) 龍春 (태종무열왕의 아버지)으로 하여금 200 여 명의 小匠을 거느리고 완성하게 하였으며, 646 년에는 양산에 通度 寺를 창건하고 10 여 개의 사원을 건조하여 전국에 불교를 확장하 였다. 또 자장은 말년에 강릉에다 水多寺를 창건하였으며, 뒤에 태백산 石南院을 세우고 그곳에서 죽었다. 義湘 (625~702) 은 661 년에 입당하여 終南山의 至相寺에서 華嚴의 깊은 이치를 깨닫고 670 년에 돌아와 676 년에 태백산에 浮石寺롤 창건하고 華嚴을 강술하여 해동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 혜초는 719 년에 입당하여 南印度의 密敎僧 金剛智에게서 불도를 배우고 해로로 인도에 이르러 四大函塔 둥의 모든 聖蹟을 순례하고 五天 笠國, 페르샤, 大食. 安國 둥 많은 지역을 거쳐 727 년에 당나라의 長安에 돌아와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 3 권을 지었다. 700 년대에 는 불국사 (751 년)를 비롯하여 분황사 (751 년) 등이 세워졌다. 전라 남도의 화엄사는 거슬러 올라 544 년에 炯起가 창건한 것이나 643 년 (善德女王)에 자장이 증축했고, 875 년에 도선이 재중축했다. 선 암사는 529 년에 아도가 開山하여 昆盧庵이라 하였고, 신라 말기 에 도선 (827~898) 이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II I 여기에는 卵狀의 中 島가 잎는 長稽円狀의 못〈三印塘〉이 있다. 이처럼 불교의 전파와 함께 건축문화도 크게 발전하고 있다. 751 년에 김대성에 의하여 창건된 불국사는 사찰건축물임과 동시에 하나의 예술작품을 창출하였다. 그 공간배치는 물론 다보탑과 석 가탑, 청운교와 백운교, 자하문 그리고 연화교와 칠보교 둥은 하 나의 예술작품이요 그 기단의 석축기술은 매우 놀랄 만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청운교-백운교 앞의 타원형의 九品蓮池는 독특한 것으로' 신라시대의 불교정원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 료가 된다. 양산에 있는 통도사의 구룡지도 현황에서 본다면 타 18) 李弘讓 隔史大事典』, 上, 知文 00, PP. 415~6, 1963. 19) 崔夢血 「九品蓮池發堀調査報告」. 佛國寺復元工事報告 書 , 文化財管理局. PP. 60 --69 , 1978.

원형의 못이다. 문무왕 14 년 (674) 2 월에는 궁내에다 〈察池 造 山〉하고 〈 種 花 草毅 珍歲奇獸〉 하였는데, 臨海殿에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이 는 어떤 해안풍경을 본따서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또 조경적인 측면에서는 신라말에 조영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포 석정의 곡수거를 빼 놓을 수 없는데 중국의 동진시대에 있었던 왕 희지의 蘭 亭 故 事 (353A.D) 에 유래한 것 같으며, 비록 원형을 유지 하고 있지는 않지만 현존하는 곡수거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 라 생각되며, 특징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어 이 방면의 매우 중요 한 연구자료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 정원문화가 싹트기 시작할 무렵은 중국의 동진과 남 북조시대이며 통일신라가 전성기에 있을 때는 당시대였다. 東 晋 은 수도를 남부의 양자강 남안에 있는 建康 에 두고 있었는데, 남 부의 온난한 기후와 수려한 산수경관의 영향을 받았음인지 난정 고사를 남긴 왕희지 (307~365) 와 安貧樂道의 생활철학을 있게 한 도연명 (365~42 기을 탄생시키고 있다. 납북조시대에는위나라에 華 林園이 꾸며졌고. 수나라때는 양제 (605~616A. D )가 신선사상을 배 경으로 하는 大西苑을 조영하고 있다. 또 당나라 (518~907) 때는 정국이 안정되면서 상, 하를 불문하고 많은 정원을조영하였을것 으로 생각되는데, 왕실과 관계되는 것으로서는 大明宮苑과 禁 苑 인 大興苑 중종의 딸인 안락공주가 조영한 西莊 둥을 들 수있고, 재상인 李 德 裕의 平泉山莊에는 규모와 내용면에 있어 이 시대의 대 표적인 별장정원이 꾸며지고 있었다. 白樂天은 또한 官舍이고 자 택이고 간에 정원꾸미기를 즐겨 했던 아마추어 조경가였다. 이와 같은 중국대륙에 있어서의 각 시대를 통한 造園熱은 지정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던 한반도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임 은 부정할 수가 없다 . 백제에 있어서의 신선정원, 고구려의 安鶴 宮과 신라의 臨海殿에서 보는 자연풍경 모사의 池苑 경주에서 보 는 포석정의 곡수거 동은 그 일례가 될 것이다.

3 庭園各論 1) 高句麗 고구려의 정원에 관하여 직접 고찰한 논문은 찾기가 힘들며 당 시의 영토가 만주와 북한지역에 있기 때문에 유지의 답사도 불가 능한 실정에 있으므로 이 시대의 정원을 다룬다는 것은 매우 어 려운 일로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 북한에서의 「大城山城의 고구려 유적」 발굴보고서를 근거로 한 千 島 의 「淸 岩 里 廢寺와 安 鶴 宮」이 라는 논문이 간행되고 있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안학궁 내의 정원 을 고찰하고자 한다 ' (그립 1, 2, 3 ).

20) 千田剛道, 「淸岩里廢寺& 安따宮」, 文化財 論 殿, 同朋社, PP. IOl5~ 1040.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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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 鶴 宮 0 I 2 3 4 km ► 그립 1 고구려의 옛성터 (千田剛道, 1983, 「淸岩里廢寺& 安 鶴 宮」 에 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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淡 ll 了言尸\\\ ' 二 漆 西 P1 ( (IKC ―집 | ―一. 11 11 ; c::6: J ► 그림 2 安북鶴문宮 사 (이千에田 剛정道원에이 의축함,조 되19어83 ) 있南다宮. 의 제 3 궁과 북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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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립 3 안학궁 남문 상상입면도(同朋社刊, 1982, 『高句麗 O 文化』, PP.307 에 의거함)

안학궁은 1 변 약 620 여 m 의 土 石혼 축 의 방형 성벽에 의하여 둘 러싸여 있으며, 동 • 서 • 남 • 북의 성벽 중앙부에는 각각 성문이 마련되어 있다. 다만 남문의 양쪽에도 1 개씩 성문이 있어 3 개의 남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내에는 남북으로 관통하는 수거가 있기 때문에 이에 따른 수문이 양쪽에 하나씩 만들어져 있는 것 을 본다. 안학궁의 발굴조사에서는 궁 안에 52 동의 건물이 있었 음을 확인하고 있으며, 그중 宮殿址는 21 동, 궁전을 연결하는 회 랑이 31 조에 이른다고 하고 있다. 건물배치 를 보면, 南 宮, 中宮, 北 宮 이 남북의 중심축상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동쪽에는동궁서 쪽에는 서궁이 있다. 남궁은 정면 11 칸 (49m) , 측면 4 칸 (16 . 6m) 의 크기 를 갖는 건축물이며, 그 크기로 보나 앞면이 광장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궁의 중심건물로 여겨진다. 安 鶴 宮에는 여러 곳에 정원이 꾸며진 듯하나 관심의 대상이 되 는 것은 남궁 서쪽에 있는 정원과 북궁과 북문 사이에 있는 정원 이다. 도면만 가지고는 분명치 않으나, 남궁 서쪽의 정원은 남궁 의 서쪽에 돌출한 부속 건 축 물을 중심으로 하여, 자연곡선형의 못 과 인공축산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池中에는 몇 개인가의 섬 (3 개 또 는 4 개)이 있다. 종합대학의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築山上에는 정자자리가 있으 며, 정원址에서는 景 石이 다수 발견되었다고 한다. ' 이와 같은 조경 기법은 경주지방에 있는 임해전 池苑과 흡사한 면이 있으며, 어떤 자연풍경모사의 정원처럽 보인다.

五) 종합대학: 『대성산의 고구려유적』, PP. 258~261. 1973.

또 동 보고서에 의하면 北門 사이에 있는 築山은 현황에서 볼 때 동산의 높이는 8m 이고 동서의 길이는 120m , 남북의 너비는 70 m 에 이른다고 하는데 원래는 훨씬 높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정원은 복궁에 달려 있는 후원인 듯하다. 이상과 같이 안학궁에서 보는 남궁과 북궁의 두 정원은 직선을 도입하지 않은 비정형적인 자연풍경식 정원이다. 이들 정원은 안학궁을 세울 무렵에 꾸몄을 것으로 생각되나 (6 세기 중엽 또는 말엽)정확한 조영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나 동국통감에 의하면, 고구려의 장수왕 15 년 (427 A. D ) 에 수도를 압록강역 (국내성 및 환도성 )으로부터 평 양으로 옮겼고 평 원왕 28 년 (S86A.D) 에 장수왕은 부왕인 광개토왕 (392~412A.D) 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극성기에 이르게 했다. 내적으로는 정치. 경

제 등 가장 완비된 제도를 갖추었고, 외적으로는 중국의 남북 양 조와 모두 통하여 대립된 두 세력을 조종하는 외교정책을써서 중 국을 견제하였다고 한다 .221 이무렵 북조의 수도 낙양에서는 위 나라 (220~264) 때부터의 華林園이 경영되고 있었고, 남조의 수도 건강에서도 오나라 (229~280) 때부터의 華林園울 비롯하여 上林園 樂遊苑 芳 林園 둥의 園林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에서 볼 때 안학궁의 정원도 혹시나 중국의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중국은 한나라의 무제 때 장안의 위수 남쪽에다 上林苑을 꾸몄고 (138B. C ), 또 苑內에다 6 개의 인공호수를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 昆明湖는 남부지방에 있는 西湖룰 본땄다고 한다. 한편 궁궐에 가 까운 禁苑 안에다 太液池와 唐中池를 만들고, 전자에는 池中에다 潮疑를, 후자에는 蓬萊 方丈 漏洲 華梁 등 4 개의 섬을 만들어 海中神山을 상징했다고 한다. 23) 이처 럼 중국의 정원은 고대부터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면서 자연의 수려한 풍경을 본따는 풍경식 정원이 많이 꾸며지고 있었다.

22) 李基白 噴國史新論』 (改定版). 一潮閣 P. 55. 1983. 23) 黃寶諭 『中國建築史』, 正中 書 局 , PP. 68-69, 94~95, 1973.

또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제 3 개로왕조에 의하면 재위 21 년 (475 A.D) 에 고구려에서 파견한 장수왕의 밀사 道堀의 권고에 따라 백 제는 흙벽돌을 구워 성을 쌓고 성내에 궁실과 누각, 대사를 장려 하게 만들었으며 하천과 뚝에는 나무를 즐비하게 심었다고 하였 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공사를 道堀이 지휘했다고 가정할 때 고구려의 안학궁의 건설과 宮苑의 조영도 믿을 만하다. 그러나 최근 안학궁의 조영년대에 대하여 이론이 나오고 있다. 죽 일본의 千田은 전기 논문에서 10) 최근 안학궁의 유물인 軒平瓦 · 와 軒丸瓦의 형태라든가 渤海 上京 龍泉府 궁전배치에서 볼 때 안학궁은 후기 평양성의 축조연대와 같이 7 세기 후반 이후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600 년을 전후해서 수와 당과 는 전쟁상태에 있었고 내적으로는 연개소문 (?~666) 이 영류왕 (618~641) 과 그의 반대파를 대량으로 학살하고 무단적인 독재정 치를 시작하는 동(마지막 왕인 보장왕 때, 642~668) 혼란상태에 있 었는데다 660 년대에는 당나라와 신라의 양국군에 의하여 협공을 받아오다가 마침내 항복을 하고 말았는데, 이 어려운 시기에 궁 궐을 짓는다거나 유락공간으로서의 궁원을 꾸민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가 한다• 2) 百濟 백제에서의 조경에 관한 기록은 16 대 진사왕 때에 처음으로 나 타난다. 이때는 하남 위례성시대인데 삼국사기의 진사왕 7 년 (391 A.D) 春正月 條에 의하면 I 예計多宮室 察池造山 以養奇歲異丹〉라 하였다. 죽 궁원으로서 못을 파고 그 흙으로 인공동산을 만들었 으며, 진기한 금수와 색다른 화훼룰 길렀다는 것이다. 遺址가 없 어 〈察池造山〉이 어떠한 형태이며 〈奇腐異丹〉가 어떠한 종류인지 알 수가 없다. 옹진성시대 (公) M. 475~537) 에 이르러 23 대 동성왕 22 년 (500) 봄 에 궁 동쪽엔 높이 5 丈의 臨流閣을 세우고 僚켄 1 〉와 〈養奇歲〉 했 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발견된다• 三國史記 : 〈春 起臨流閣於宮東 高五丈 又 察池茂奇貧〉' 東國通鑑 : 〈春 起臨流閣於宮東 高五丈 又 察池 置園以差奇食 >'

24) 金富’!JC. 토國史記』. 卷二十五. 恒f濟本紀』 第三 偉沮i權譯 廣번出版社, 1972) 25) 徐居正 等, 뎅國通鑑』, 卷之五僚仁文化社 影印本. 1974).

위 기록에서의 임류각은 글자 그대로 금강 가 언덕 위에 세워 진 것으로 생각되나 못의 기능과 〈養奇齒〉의 장소가 문제가 된다. 죽 〈察池〉의 행위는 조경적인 측면인가 아니면 용수목적인가 하 는 것이다. 1982 년 9 월 14 일자의 동아일보 사회면에는〈公山山城서 백제연못 첫 발굴〉이라는 제하에 공주사대박물관 公山山城內 蓮池발굴조사 단 (단장 安承周)의 발굴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11 일 길이 21m , 너비 15.3 m , 깊이 7m70 크기의 백제연못을 발굴, 백제연못양식을 처음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 조사단장 安 교수는 삼국사기 동성왕 22 년 臨流閣건립기사에 나오는 연지와 내용이 일 치함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이 연못은 마치 護岸石築에 段을 쌓아 전체모습은 마치 9 층석탑을 거꾸로 쌓은 모습과 흡사하다.

위의 기사대로라면 그 못은 조경적인 측면에서의 관상을 대상 으로 하는 예i池〉로 생각되기 쉬우나, 그 규모에서의 형태라든가 池深에서 볼 때 〈관상〉보다는 OO 水〉 목적으로 察池한 것이 아닌 가 한다. 못을 階段狀의 逆塔狀으로 만든 것은 시각적인 쾌감 부 여를 위해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이 아니라 江岸의 약한 지반과, 깊은 水源조건이 갖는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하나의 토목기술 상의 공법관계라 생각된다. 당시의 조경적인 측면에서의 察池는 고대 중국의 기법을 모방하는 것이 통례인데,이번에 발굴된 公山 山城內의 못은 신선사상배경의 것도 아니요, 자연풍경을 모사한 양식도 아닌 직선에 의한 기하학적인 용수목적의 井池라 볼 수밖 에 없다. 그러므로 臨流條1 의 挑望對象은 이 逆塔狀의 深池가 아 니라 그 명칭에도 나타나 있듯이 눈앞에 유유히 흐르고 있는 넓 다란 강물 줄기와 멀리 전개되는 들판과 산야일 것이다.

► 그립 4

公山城의 錦江岸에서 발狀굴의된 方계池단

史錄과 현실에서 볼 때 〈起臨流閣〉 〈察池〉 〈置固以養奇齒〉은 같은 지역에서 이루어진 행위라 하더라도 기능은 각각 별개의 것 이라 생각된다. 백제는 酒iJt城으로 移都한지 100 년이 가까운 무왕 35 년 (634A.D) 의

陰 3 월에 궁 남쪽에다 池苑 을 꾸몄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무왕 35 년조에 의하면 〈 春三 月 察池 於宮南 引水 二 十餘里 四 岸植 以 楊 柳 水中 築島 峨 擬方丈仙山〉, 죽 못 을 파고 20 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 다 채웠으며 〈四岸 〉 에 〈 楊 柳 〉를 심었고, 수중에는 섬을 만들었는 데 方丈仙山을 상징한 것이라 하였다. 이 池苑의 내용은 三秦 記 의 蓬 萊山 條에 있는 〈 春 始皇作長池 引 消 水東西二百里 南北二十 里 築土爲 蓬 萊山 刻石 爲諒魚長二 百尺〉 ' 2 7 1 이라는 기록과 대동소 이한 바 있다. 특히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三 秦記 에서 築山을 蓮萊 山을 상징했다는 데 대해서 宮南池는 方丈山을 상징한 것이 나, 산명은 다르나 같은 삼신선산이라는 데는 일치한다. 그렇다 면 宮南池는 고대 중국의 조경기법을 본딴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한 못의 형태인데 〈四岸〉에 양류를 심었다는 것을 보면 正方池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에 가까운 方狀池였을런지도 모른다.

26) 岡大路 『支那庭園 論 』, 彰 國 社 , PP. 9, 12-1 3, 1943. 27) 徐世鉉, 맬國庭園回說』. P. 9, 1970.

최근 충남대 발굴조사단은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의 南門址 근 처에서 두 개의 方池를 발견하였는데 東 池는 Jim X IS.Sm, 西池는 llm X 12m 크기 이 며 池 深 은 60cm 가량이 라고 보고하고 있다 (광주일 보, 1984 년 11 월 29 일자). 비록 한 예에 지나지 않지만 부여시대에 직선적인 方池가 있었다는사실온 당시의 池塘형태 를 추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며 宮南池에 관한 〈四岸植以楊柳〉에서 못의 형태 가 방형에 가까우리라는 추측에 보다 강한 배경이 되어 주고 있다 . 이 궁남지는 충청남도의 부여읍 남쪽 왕포리에 있는 마래방죽 이라 보고 있지만 원형을 찾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이 〈마래방 죽〉가에 버드나무 를 비롯한 각종 수목을 심고 中島上에 정자를 지어 육지부와 다리로 연결하여 놓았지만 이는 고중을 통한 원상 태로의 복원이 아니라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서의 기능에 역점을 두고 건설한 것으로 생각된다. 중도상에 정자가 있다든가 다리가 놓여 있다는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그립 5) 한편 삼국사기와 동국통감의 무왕 37 년 (636) 조에는 秋 8 월에 望 海樓에서 군신에게 잔치 를 베풀었다고 하였고, 31 대 의자왕 IS 년 (655) 2 월에는 宮南에 망해정을 세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李 는' 望海樓나 望海亭은 같은 건물에 관한 것이며, 아마도 宮南

28) 李基白 , 「望海 亭 과 臨海殿」 考古 美術 , P129, 130, PP. 5~7, 1976.

► 그립 5 부여궁南池터 (中島上의 정자와 접근용의 다리는 최근에 만든 것이다)

池의 못가에 건축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수긍할 만한 이 유가 있다고 본다. 또한 동국통감 卷之六의 무왕 39 년 (638) 조에 는 〈百濟王與嬪御廷舟大池〉라 했는데, 大池란 (1!,'南池〉가 아닌가 한 다. 백제의 정원은 기록도 적지만 원형을 보여 주는 유지도 찾기 힘들어 특징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3) 新羅 신라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인지 조경문화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 해 늦게 싹렀지만 정원의 종류가 비교적 다양할 뿐만 아니라 臨 海殿 池苑이나 포석정의 곡수거와 같이 질높은 정원유적이 오늘 날까지 전해지고 있어 삼국시대의 정원연구에 유익한 자료를 제 공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 두 정원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 다.

1) 臨海殿池苑 삼국사기에서 臨 海 殿 과 池苑에 관한 기 록을 찾 아 보면 다음과 같다• 文武王十四年 二月 宮內察池造山 種花샤 : 殺珍皮奇獸 文武王十九年 二月 重修 宮訓 頓極 ~I : 麗 李 昭 王六年 九月 寒群臣於臨術殿 穀德王十九年 二月 宮中容大池 惠恭王五年 三月 燕群臣於臨海殿 昭聖 王二年 四月 暴風折木輩瓦 瑞(싸殿 廉飛不知處 臨海仁化 二「'j壤 위의 기록에 의하면 궁내에 察池했디는 기록이 674 년 (문무왕 14 년)과 760 년(경덕왕 19 년) 두 번 나타나며 임해전에서 군신에게 연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孝昭王 6 년 (697) 과 惠恭王 오빈 (769) 에 있 다. 또 소성왕 2 년 (800) 에는 폭풍이 불어 임해문과 인화문이 도 괴했다고 하고 있다. 이상을 정리해 본다면 궁내에 察池했다는 기록이 두 번 나타난 것은 아마도 처음에 팠던 못이 100 여 년이 지나면서 부분적으로 매몰되고 협소했기 때문에 확장한 것으로 해석되며 임해전은 물 가까이 있는 전각이라는 뜻이므로 前記의 못가에 세워진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소위 〈雅鴨 池〉와 임해전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또 폭풍으로 二 r, 이 파괴되 었다는 기록에서 볼 때 임해전을·중심으로 하는 池苑온 담에 의 하여 둘러싸여 있으며 여기에는 임해문과 인화문 둥이 있었던 것 으로 생각된다. 그라나 창건년대라던가 〈雅鴨池〉의 명칭 동이 기 록되어 있는 자료는 찾을 수가 없다. 近來 발굴작업을 통해서 얻 어진 瓦片이나 木簡 둥에서 이룰 구명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문무왕 19 년에 임해전 役毒가 있었다는 것은 금세기에 발견된 瓦片에서 증명되고 있다. 즉 原?熙의 臨海殿址 조사와 최근의 〈雅 鴨池〉 발굴조사에서 30) 찾아낸 瓦片에서 〈儀鳳四年〉이라는t텨 e 를 29) 原黑 「朝鮮新羅臨海殿庭園」 日本園藝學숱雜誌 3(2):98~108, 1932. 30) 金東賢 「慶州誰鴨池發堀에 관하여」. 大韓建築學會誌 20(72):35~40, 1976.

보는데 〈 儀鳳〉 은 당나라 고종대 의 연호로서 그 4 년은 서 기 679 년 에 해당되므로 신라의 문무왕 19 년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 重 修 宮閑〉 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거한다면 임해전의 창건은 그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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夕 〉 ► 그립 6 臨海殿池苑 仁 l 립은 張慶浩에 의함). 《韓國庭苑學會誌》 3(1 ) :29 , 1984.

한편 }圓 L 의 명칭과 구성에 관한 해답을 얻기 위하여 이에 관 한 몇 가지 기록을 전재하기로 한다. 麗末人 金桑村 著 『東京雜記』 (李朝中期에 증보함) ' , 〈雅鴨池 在天 柱寺北 文武王於宮內爲池 積石爲山 象巫山十二峯 種花연t珍皮 其西有 臨海殿不知創於何時 而哀莊 王 五年甲申須修 基礎勅猶在田敵問〉 盧思愼 著 『東國輿地勝빴』 ( 1486) ' ; 〈雅鴨池在天柱寺北 文武王於宮 內爲池 積石爲山 象巫山十二峯 種花丹接珍歲 其西 有臨海殿 基礎勘 猶在田敵間〉 金時習 (1435~1493) 의 梅月堂四游錄 }; 詩 「安夏池」 〈繁池爲海長魚螺 引水龍限勢炭峨 此是新羅亡國 .: J~ 而今春水長嘉禾 〉

31) 李若等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之二十一 凍國文化社 影印本, 1964).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안압지의 명칭이 『東京雜記』와 『東國輿 地勝梵』에 처음으로 나타나며 김시습의 시에서는 비슷한 음을 갖는 〈安夏池〉로 표현되고 있다. 임해전의 못이 이루어진 지 700 여 년이 지난 뒤에야 처음으로 나타나는 〈안압지〉라는 이름이 언 제부터 쓰여졌는지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고려시대인 1145 년에 저술한 삼국사기에 그러한 명칭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본다면 金桑村의 기록에서 유래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1980 년 12 월 30 일자 한국일보의 문화면에서는 경주박물관장 韓 炳三의 備評餘 h 의 원명은 月池다〉라는 제하의 기고문이 있다.그 는 삼국사기의 職官中內省 〈宮內府〉에 소속된 東宮官(太子宮) 이 라는 관청이 있는데 여기에 속해 있는 月池嶽典은 월지의 조경을 관장한 곳으로 大舍 2 인 水主 1 인의 관리가 소속되어 있다. 여기 에서 말하는 월지란 바로 안압지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안압지의 발굴작업을 할때 〈洗宅〉이란 墨書가 적힌 木簡이 몇 개 그리고 〈龍王辛審〉 또는 〈辛審龍王〉 이라 음각된 土器片 이 몇 점 이 나타 났는데 이들은 束宮官에 들어 있는 〈t先宅〉, 〈月池典〉,〈僧房典〉, 〈月池嶽典〉, 〈龍王典〉 둥의 관청명의 하나라는 데 증명될 수 있 는 것이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안압지의 원명은 〈월지〉 이고 〈월 지〉는 東宮 안에 있는 연못이며 동궁은 〈월지궁〉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국립박물관장인 崔淳雨는 그 주장에 타당성

이 있는 것 으로 보고 있으며 동국대박 물 관장인 黃壽永 온 안압지 는 중국 냄새를 풍기는 이름으로 조선조 때 지어졌을 것으로 생각 되었는데 월지라는 이름이 썩 어울린다고 하였다. 서강대의 李基白 교수도 안압지가 있었던 신라의 임해전과 백제의 망해정은 구조 면에서나 태자를 위해서 지었다는 용도면에서 흡사한 점이 많으 며, 태자를 위한 동궁 안에 월지가 있었다고 할 때 안압지의 원 명이 월지라는 추정은 가장 유력한 추정 가운데 하나로 믿어진다 고 말하고 있다. 위에서와 같이 〈안압지〉명은 후세에 붙여진 것이며 원명은 월 지라는 韓炳三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본다. 안압지는 半月城 에 인접해 있는데다 임해전의 위치가 東岸의 築山 위로 떠오르는 달과 池湖속에 아롱거리는 경치를 감상하기에 알맞기 때문에 〈月 池〉가 더 가깝다는 느낌도 있다. 한편 池 東 岸에 축조된 인공동산과 여기에 배치된 景 石 群 에 대 하여 (그림 7) 『 東京雜記 』 와 『 東國輿 地勝 覽』 에서는 〈積 石 爲 山 象 坐山十二峰〉 이라 하고 있는데 과연 의도적으로 巫 山十二 峰 을 상 징할 목적으로 축조했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巫山十二 峯 은 중국의 사천성에 있는 명산으로서 당의 재상이던 李德裕 (787~849) 의 平泉山莊에 대하여 기술한 康駐의 劇談錄 에)

32) 田治六郞 「李 德 裕 O 平泉山莊」 . 味完稿 著者保管)

► 그립 7

池岸의 景 石群

〈像巫峽洞庭十二峯九派〉라는 귀절이 있는데 築山에 대하여 이렇 게 상징하여 말한 것은 처음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안압지에 대한 것도 중국의 예를 본따서 후세 사람들이 그렇게 기록한 것 이지 조영 당시에 그러한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 그립 8 臨海殿池苑 모형

臨海殿池에 관한 연구는 일본인 原i熙의 「朝鮮新羅臨海殿庭園」 I 이 효시이다. 그는 1920 년부터 1925 년까지의 사이에 현장답사와 실측조사를 통하여 많은 새로운 사실을 밝혀 주었다. 죽 池水面 및 建物址를 합한 敷地面積은 12,000 평에 이르며 水面積은 약 5,200 평이고 池中에는 대중소의 3 개의 섬이 있다. 섬에는 景石이 있고, 南島에는 1960 년대에 赤松이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경석 은 사방에 산재해 있는데 그중에도 남 북의 섬과 못의 西南隅 東 北端의 築山과 그 남쪽과 북쪽 기슭에 많으며 크기는 높이 2m, 너비 약 60cm 에 이르는 것도 있지만 대개는 높이 Im, 너바 50cm 이내의 것이 많다. 암석의 종류는 암녹색의 細粒砂岩과 암적색의 半花橘岩의 2 종이다. 또한 址는 평탄하고 그 건너편 못의 동쪽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築山地域으로서 한말에는 약간 북쪽의 池 岸에 정자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1974 년부터 1976 년 3 월까지 약 2 개년에 걸친 문화재당국 의 발굴조사에서 그 전모가 대충 밝혀지고 있다!” 水面積온 原漁 33) 金束랐 「慶)서 雅鴨池 發堀에 관하여」, 大韓建築g瑾t誌 20(72), 35~40, 1976

의 내용과 큰 차가 없으나 새로이 中島의 면적이 대 (南쪽) ;990m2 (약 300 평) 중(북쪽 );660m2( 약 200 여 평) 소(중앙) 66m2( 약 20 여 평)라고 밝히고 있다. 이들 3 개의 섬은 池水面의 형태 때문 인지 동남에서 북서 방향으로 직선상에 배치되고 있다. 이들 3 개 의 섬 가운데서 북서쪽에 있는 것은 也形을 이루고 있는데 장수 영물로서 신선사상과 관련을 지을 수 있는 이 거북이룰 의도적으 로 지원에 도입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하여튼 대 • 중 • 소의 이들 3 도는 크기가 다르고 윤곽선 처리가 자연스러우며 섬 위에 경석 을 적절히 배치했다든가 하는 면에서 볼 때 勃海뀝의 동쪽에 있 다고 생각하는 삼신선도를 가급적이면 자연스럽게 묘사하려고 애 쓴 듯이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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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J, v- ► 그립 9 臨海殿池苑

臨海殿池의 시설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導水部와 排 水部이다. 도수부는 園池의 동남쪽 귀퉁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수로가 苑 池에 연결되는 위치에 상 • 하 두 개의 石水櫓롤 중심으로 하는 완충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이 석수조는 內底面을 2 중 四부로 파 내고 綠部의 상 • 하 양쪽을 오목 깎아 만든 것으로 약 20cm 의 段差를 두어 상 • 하에 배치하고, 그 주변에는 넘 친 물이 지표로 의 流去를 막기 위해서 방상의 저수조가 축조되어 있다. 이 外側

저수조는 底部룰 판판하게 깎은 판석으로 깔고 周緣部는 벽돌모 양으로 다듬은 가공석으로 두르고 있다. 이와 같은 시설은 유속 을 완화시켜 유입부 지저면의 침식을 막거나 유수 속에 들어 있 을 토사를 여과하여 池底에 퇴적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함이라 생 각된다. 또한 도수부의 완충수조를 지나 池內에 수직으로 낙하하 는 위치에는 판판한 돌을 깔아 놓았는데, 이 또한 지저의 침식을 막기 위함이다. 이처럼 도수하는 데도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는 당시의 공법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임해전 지원의 기능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孝昭王六年 九月 宜群臣於臨海殿 惠恭王五年 春三月 燕群臣於臨海殿 憲 安王四年 秋九月 王會群臣於臨海殿 憲 康王七年 春三月 燕群臣於臨海殿 酒羅 上破琴 左右各進歌詞 極歡而龍 敬順王五年 春三月 太祖 率 五十餘騎 至京畿通話 王與百官鄕迎入宮 相對曲 盡 情禮 置冥於臨海殿 위의 기록을 보면 임해전은 왕과 신간의 정적인 위락공간이요. 연회의 장의 기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호수와 인공에 의 한 彼岸의 자연경관을 관상하면서 신선이 된 기분에서 인생을 즐 기는 것이다. 또한 인공호수를 만드는 뜻은 정적인 관상 외에도 직접 호중에 서 船遊롤 할 수 있도록 한 데도 있다. 한의 무제는 昆明湖에 대 소 선박 100 여 척을 띄워 즐겼으며 때로는 水戰 연습도 했다. 임 해전의 못도 규모면에서 볼 때 선유도 가능했을 것으로 보지만 이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다만 尹은' 1976 년도의 발 굴결과에서 못의 동북 구석에 石築계단이 발견되고 못 바닥에서 두 척의 배의 잔해가 발굴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선유를 했음 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다. 임해전의 못가에 어떠한 식물이 심어졌는가에 대한 기록은 없 으나 최근 〈안압지〉의 발굴조사를 할 때 함께 하였던 金.의 池底 34) 尹國炳 隨景史』. 一潮問 P. 235, 1978.

► 그립 10

꾹水流入部의 石水팹 (下部에서 본 것)

-_ 一

► 그립 11 導水流入部의 石水禮 U:部에서 본 것)

의 퇴적층에서 얻은 花粉)에 대한 연구 • 보고에 3S } 의하면 오리나 무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였고 (木本植物의 6OOlo 이상), 다음은 참나 무 (9% 이상), 소나무 (2% 이상) 둥인데 전체적으로는 30 개 목본 종 (科 및 J蜀)이 나타나고 초목종은 20 개 과 및 속의 식물이 나타 나고 있다. 金은 결론적으로 중국굴피나무와 감나무가 안압지를 만들 때 심어졌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당시의 조경식물을 구명 하는 데는 花粉 분석은 매우 좋은 방법이라 생각되나 더 깊은 연 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안다. 原 ( 1932) 에 의하면 29> 1922 년 당시 에는 築山部 의 동남쪽에는 농가가 있었던 뒷자리 에 몇 그루의 감 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山架藥는 못의 서남쪽 귀통이와 뚝의 중앙 못가에 한 그루씩 자생하고 있었으며 1910 년대 초에는 赤松이 築 山部에 있었다고 한다.

35) 金효敏, 맥鴨池出土 1E 粉分析」, 文化財 13, PP. 46-56, 1980

기록상으로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어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 지만 池苑의 형태나 구성, 당대의 중국과의 지정적인 관계 둥에 서 미루어 보아 임해전의 지원은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해안 풍경모사의 정원이며, 그 기능은 정적인 冥遊와 관상 그리고 동 적인 선유에 있지 않았는가 한다. 2) 範石亭의 曲水渠 옛날 중국에서 음력 3 월 3 일에 문인들이 曲折한 流水에다 술잔 을 띄워서 그 流孟가 자기 앞을 지나기 전에 시를 짓고 잔을 들 어 술을 마시며 노는 풍류놀이를 曲水案이라 하며 그러한 목적을 위해 만든 流森渠를 曲水渠라고 한다. 그 근원은 분명하지는 않 지만 顔近之의 「三月三日曲水詩序」 注에 의한다면' 鄭나라 (816~ 3758 . C) 의 풍속으로 음력 3 월 3 일에 淡와 浦의 두 江上에서 난초를 쥐고 혼을 불러내어 不祥을 말끔히 씻어내는 푸닥거리가 있으며, 곡수놀이란 둥글게 도랑을 만들어 물을 호르게 하고 여기에 술잔 을 띄우며 노는 것이라 하고 있다. 또 晋 書 인 東哲傳에 의하 면 무제가 〈三日 曲水〉의 의의를 묻자 哲이 답하기를 옛날 周公이 洛邑에 성을 쌓고 流水에 술잔을 띄운데 연유하며 〈羽鳩隨波〉 에 翰曰 鄭國之俗 三月上已之日 於溪t H 兩水之上 執蘭招魂 跋除不祥 上已郞 三日也 曲水者引水印曲爲渠 以流酒益而行焉.

36) 諸稿轍次, 『大漢和辭全』 卷五, 大修館, P. 956, 1966.

서 〈流梅曲水〉로 이어지는 왕희지의 OO 亭故事도 이를 본땄다. 武帝問 三 日曲水之義 哲曰 昔/서公城洛邑 因琉水廷酒 故逸詩云 羽崩隨波 乃流月바曲水 其來已久蘭亭之台 裝而作此 非 6I J爲也 '0 1 蘭 存之會 란 東晋의 왕희지 (307~365) 가 永和 9 년 (353AD) 음력 3 월 3 일에 孫統 孫緖 王彬之 , 謝安 둥의 名流라든가 아들 疑之, 徽 之, 操之 동 41 명과 함께 會稽의 OO 亭에서 跋秩事를 치룬 뒤에 溪 流를 끌어 이룬 曲水가에 앉아 술잔을 띄우며 一能一泳 하고 줄 겼던 일을 말한다. 蘭亭叔 永和九年 歲在發丑 莊春之初 台于會稽山陰之蘭亭 修萩事也群賢畢至 少 長咸渠 此地有崇山峻嶺 茂林隋竹 又有淸流激瑞 暎帶左右 引以爲流 月 U 曲 水 列坐其次 難無絲竹管鉉之盛 一崩一妹 亦足以暢叔幽情 是日也天朗氣 淸 惠風和暢 仰觀宇宙之大 附察品類之盛 所以遊目駒懷 足以極視 聽之誤 信可樂也 夫人之相與附仰一世 或取諸懷抱 悟言一室之內 或因寄所託 放 浪形該之外 難超舍萬殊 靜操不同 當其狀於所遇 (中略) 難世殊미[異 所以 興恨其致一也 後之度者 亦將有感於斯文 위에서와 같이 流孟놀이는 西曆 前 천여 년 전부터 있었던 것이 며, 처음에는 푸닥거리를 한 뒤에 계류에다 유배하며 즐겼던 풍 이, 후세에 와서는 인공적으로 곡수거를 만들고 술잔을 띄우며 즐 기게 되었다. 왕희지의 난정고사는 너무나 유명했기 때문에 곡수 놀이라 하면 이를 연상하게 된다. 이처럼 곡수놀이는 중국에서 비 롯되었지만 옛날의 유적은 거의 없어졌으며, 경주지방에 남아 있 는 포석정의 곡수거가 거의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어 매우 중요 한 연구자료로 되어 있다. 아마 역사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유지 라고 생각된다. 포석정의 곡수거는 경상북도 월성군 내남면 방리에 있으며, 지 리적으로는 남산의 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慶州絶石亭址〉 라는 문화재명으로 사적 제 1 호로 지정되고 있는 이곳은 정자는 없 어진 채 가공된 석재로 조립된 전복형태의 곡수거만 남아 있다. 이 포석정과 곡수거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한 축조년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삼국유사의 卷第二 紀異 第三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는데, 축조시기와 포석 정의 기능을 이해하는 데 일조가 된다.

處容郞 望海寺 第四十九 憲康大王之代 自 京師至海內 比屋連塩 無 一 草 屋 (中略) 又 幸駒石亭 南山神現舞於御前 左右不見王獨見之有人現舞於御前 王自作 舞 以像示之 神之名或曰祥審 故至今國人傳此舞 曰御舞祥審 或曰御 舞山神 헌강왕대 (875-885) 의 태평스러운 시절에 왕이 포석정에 들러 左 右와 함께 술잔을 나누며 홍에 겨워 춤추고 즐겼다는 내용의 글 이다. 기록에서는 남산신이 나타나 춤을 추므로 왕이 함께 춤을 추었다고 하였지만 곡수거에서의 분위기로 보아 좌우 동석자들과 함께 곡수에 잔을 띄우며 주고받고 하다가 만취한 상태에서 왕이 라는 신분도 잊은 채 춤을 추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헌강왕 때는 천하가 태평하여 가내 가외의 음악소리가 연달아 일어나고 상하 의 환락이 극에 이르렀으며 호화, 안일, 유홍의 습성이 날로 더 하여 내부의 부패가 스스로 붕괴의 싹을 트게 했다고 한 것을 보 더라도) 포석정에서 왕이 춤을 추었다고 하는 것은 수궁할 만 하다.

37) 李丙 ,,H. , 前損끓, P. 158, 1957.

또 『東國通鑑』의 경애왕 4 년 (927A.D) 조에는 왕이 冬十月에 妃嬪 宗威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甄萱軍이 입성했다는 말을 듣고 부인과 함께 황급히 빠져나가 성남의 이궁에 숨었다고 하였 다. 이상과 같은 기록이 포석정에 관한 최초의 것이라 할 수 있지 만, 조영자나 조영년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위락시설은 국가가 안정되고 태평할 때 마련되기 마련이므로 조 영시기를 800 년대로 보는 것이 근사한 것으로 본다. 포석정의 기능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왕과 측근과의 정적인 위락을 위해 꾸며진 것이지만 결국 국방을 소홀히 한 채 환락에 깊이 빠져 들었다가 이 포석정에서 甄萱에 창피한 꼴을 당하고 말았다. 포석정의 현황은 일정시대에 복원한 것인데 (그립 12, 14), 1916 년 에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朝鮮古蹟圖譜』 四에 수록되어 있는 胞石 亭廢址胞石略圖룰 보면 (그립 13), 入水部와 流去部에서 組石 몇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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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없어쳐 있고, 胞形部에 있어서도 틈새가 있는 것으로 보아 問 石이 몇 개 없어져 있는 듯하다. 또 인근에 있는 溪流에서 이곳 까지 연결되는 도수로라든가 곡수지에 주수하는 龜形石, 그리고 배수로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許無否의 『園治』에서는:II) 曲水 의 구성 에 대하여 〈曲水 라는 것은 옛날에는 모두 石檜를 파서 만 든다. 위 에는 石龍頭를 두어 물을 뿜어내게 하되 위에 石泉을 두 고 입은 폭포처럼 한다. 또한 보통의 理潤法처럼 도랑을 파서 流 孟롤 하도록 하는데 자연스럽도록 해야 한다 (曲水 古皆堅石櫓 上置石龍頭濱水者 斯費工類(谷 何不以理制法 上理石泉 口如濕布 亦可流能 以得天然之超)〉고 하였는데 吐水部를 石龍頭또는 石龜 頭形으로 했을 것으로 생각되나 포석정의 吐水部는 없어지고 말 았다. 현황도(그림 14) 에 의하면 曲水渠의 타원형部 안쪽은 12 개, 外廊 部는 2 마의 가공석재로 조립되어 있으며, 流入部는 양편 gn , 배 38) 計無否 瑠治』. 辻甲#院建築~~ . P. 118, 1971 .

출부의 꼬리부분은 47R 로 되어 있는데 합계 41 개에 이른다. 曲水 渠의 크기는 191 61;킨 당시의 형태에서 볼 때 수로 안쪽의 裕 円 部 는 短經 4.4 m , 長 經 5 . 5m 이며, 곡수폭은 약 30cm. 깊이는 20c m 내외 이다.

► 그립 14 포석정의 曲水池 (1981 년 8 월 현재)

일본의 本中은 l 포석정의 曲水流蓋渠에 대한 流速을 계산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全長 22.0m, 始點과 終點의 高 低 差 0.27m, 수심 0.10m, 조도계수 0.04 라는 조건하에서 다음과 같은 치를 내 놓고 있다. 〈 Ku tt ler 공식 적용〉 〈 Mann i n g공식 적용〉 표면유속 32. 1 7cm/ S 표면유속 49. 94cm / S 소요시간 1 분 08 초 소요시간 44 초 양자 사이에 상당한 차가 있으나 本中은 양자의 값을상한과하 39) 本中 眞 『古代曲水案遺構 O 流速t ::.?L` -c」, 日本造園雜誌, 43(3) 25~30, 1980.

한으로 보면 될 것이라 하고 있다. 그는 또한 일본의 平 城宮 東 院에 있는 流益溝와 推定小塾田宮函池 그리고 중국의 송대에 만 들어진 崇福宮 의 廷梅亭 유배거를 한국의 포석정 유배거와 비교 하여 포석정의 것이 유속은 월등히 크고, 반면에 全長 22cm 의 거 리 를 유배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약 1 분 (Ku tt ler 공식 1 분璋조 Mann i n g공식 44 초)으로 가장 적 게 걸린다고 결론하고 있는데 그 비 교표는 다음과 같다(표 I).

표 1 曲水冥遺溝의 流速比穀( 本中頂 에 의함, 1977) 迫蹟 名 時代 平(c均m 流/ S 速 ) 所要時間 日 本 平城宮 東院平安 K. 16.9 2 2 分 18 秒 東南偶流孟溝 M. 26.82 1 分 27 秒 推定小塾田宮 飛 鳥 K. 6.8 4 2 分 27 秒 園池 M. 12.2 9 1 分 28 秒 中 國 崇福宮廷船亭 宋代 G. 6.2 6 2 分 48 秒 流孟渠 M. 10.7 0 I 分 38 秒 韓 國 慶州絶石亭 統 一新羅 K. 32.1 7 l 分 08 秒 流孟渠 M. 49.9 4 44 秒 * K; Ku tt ler 公式 M; Mann i n g公式

洪은' 포석정의 곡수지에 대하여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 다. 그 하나는 현재의 곡수지는 일제 때에 보충 복원한 것으로서 그림 12, 그림 )_1 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형태상 상당한 변화가 있고 곡수거의 유수낙차가 균일하지 못하며, 유배를 위해서는 · 곡수거 내에 만수가 되어야 할 터인데 石也口를 통해 홀러 나온 수량으 로서 과연 유배가 가능할 것인가 하였다• 또한 洪은 포석정의 곡 수지형은 음양의 理를 도입한 것으로서 토수부인 龜頭는 陽,죽 남 근이요, 곡수부는 陰 ,죽 胞宮인 여근이라 해석하고 있다• 한편 포석정의 곡수지에 정자건물이 있었느냐 하는 것과 있었 다면 어떠한 형태인가 하는 수수께끼가 있다. 이에 대하여 尹은 '01 그 해답으로서 곡수지의 유지가운데서 일본의 後樂園 流店과 중국 북경의 紫禁城 秩賞亭의 예를 들어 포석정의 곡수지도 정자 건물에 의하여 덮여졌을 가능성이 크며 그 규모는 남북 5 칸 동서 40) 洪思俊, 『慶州蛇石亭의 名稱과 貨物」, 考古美術, PP. 155~ 161, 1976. 41) 尹國炳 「慶州絶石꾸에 관한 硏究」 , 韓國庭園學會誌 2( I) I~ 13, 1983.

4 칸 반 정도나 될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포석정보다 적어 도 900 여년 뒤에 만든 일본의 岡山 1 f ~I 점의 流店( 1661 년경 완성) 이나 중국의 萩賞亭 (1776 년경) 의 예에서 포석정의 구성을 추정한 다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한다. 동국여지승람의 「古蹟」條에서는 ' 〈在府南七里 金蒸山西麗 鍊 石作抱魚形 故名焉流能曲水造蹟苑然〉이라했고 이인로 (1152~1220) 의 시에서는 僚;亭琴松半 零 落〉이라 했으며 조위 (1454~1503) 의 시 에서는 僚砲魚散落溪水側 春殘石老生 蒼 苦〉라 한 것을 보면 고 려말에 이미 정자는 영락하고 곡수거는 파괴되어 원형을 잃고 있 었음을 알 수 있다.

42) 李츈 홉 『新增東國輿地勝覽』 凍國文化社 影印本, 1964), 卷二十-, 慶州府

李仁老의 詩 石虎宮中有練生 銅駒苗上無人行 危 亭 琴松半零落 殘月 依依照古城 當時絲管克懷噴廷及金船隨曲折 中流空借魏山河 醉鄕不管陳 日 月 曹偉의 詩 淸溪一派流榮回荒凉洞堅造運開 絶魚散落溪水側 春殘石老生蒼苦 羅王昔 日 祗萬機 金輿 玉輩 長俳f回 流連此地弄淸 1.lt 羽崩廷活隨波來 (이하 생략) 4) 造景植物 이 시대의 조경식물에 대하여 직접으로 기록한 문헌이 없어서 정확한 고찰은 어렵지만 고려시대에 나온 『삼국사기』와 『삼국유 사』 그리고 조선시대에 나온 『동국통감』의 기록에 의하여 간접적 인 방법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

43) 鄭 II 旺 「韓國造景植物의 史的考察.J, 全南大 演習林報告. 2, PP. 3~6, 197 7.

®桃 ®李 모두 중국원산의 낙엽활엽수로서 『삼국사기』에서는 8 월과 10 월 의 이상개화에 대하여 〈桃李華〉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백제 의 온조왕 3 년 (16B.C), 신라의 婆娑尼師今 23 년 (103A . D) 奈 解 니사금 8 년 (203A.D) 경덕왕 22 년 (763A.D) 그리고 경문왕 3 년 (863A. D ) 동에 나타나 있다. 이것을 보면 백제는 기원전 1 세기, 죽 건국 초부터, 신라는 기원후 1 세기경부터 궁내의 뜰에다 관상 과 식용을 목적으로 심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桃와 李는 분류학 상으로 같은 장미과에 속해 있는 수종으로서 학명으로는 각각 Prunus p ers i ca 와 Prunus sa li c i na 이지만 中國의 古文 속에서도 한데 묶어 〈桃李〉 라 표현하는 일이 많다. 공자가 편찬했다고 하 는 『시경 』 속에는 l 桃李가 다른 식물에 비해 많이 발견되고 있 는데 國風 의 「何彼樣矣」 라는 詩 에서는, 何彼樣矣 華如桃李 平王之孫 齊侯之子 라고 하였다. 죽 탐스럽게 만개한 복사꽃과 자두꽃은 平王의 손 녀요 齊侯의 아들이라고 桃李華를 찬미하고 있다. 晋代의 도연명 (365~427) 이 2 엇 1 에 농사에만 의존할 수 없어 호 구지책으로 벼슬(江) · I1 의 祭酒)을 하나 얻었으나 적성에 맞지 않음 을 깨닫고 곧 사표를 내던지고 향리로 돌아왔으며 짜세에 「歸園 田居」'라는 허습로 된 글을 지었다. 그 첫수에 〈方宅十余敵 草屋 八九間 輸柳藝後篠 桃李羅堂前〉이라는 귀절이 있다.죽 10 여 敵의 좁은 터에 세워진 8,9 칸의 초가이지만 느릅나무와 버드나무가 뒷 처마를 그늘 지우고 복사나무와 자도나무(桃李)가 堂 앞을 고이 꾸미고 있으니 부족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陶는 또 말년 (s~) 에 桃花源記룰 남긴 것을 보더라도 도화에 상당히 매력을 느낀 듯하다. 北魏의 楊街之가 쓴 『洛陽伽藍記』 (493A.D) 의 「城西」 항에는 壽 丘里의 마을 풍경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귀절이 있다. 44) 良友常 『合本四 꿉 三經』, p. 387 45) 李長之 著 松枝茂夫 和田武司 譯. 먀淵明』, 筑摩 말房 , PP. 334-5 , 1971 .

富山海之超 說山林之樂 爭相忠蓋園宅 崇其門 豊其室 il'iil戶連房 飛館風 山 重樓霧起 高台 芳樹 家家築之 花林曲之 園園有之 桃李夏綠竹柏 冬靑…… .46) 죽 황족을 비롯하여 권귀들이 산수경개가 수려한 이곳에 다투 어 園林을 꾸몄는데 桃李는 여름에 푸르러 녹음을 주고 竹柏은 겨울에도 常靑하다고 하였다. 사마천 (c. 14s~C. 86 B.C) 은 『史記』 (97B . C) 에서 李將軍의 충성됨 을 찬양하고는 〈諺曰 桃李不言 下自成跋 此言難小 可以兪大也〉 UI 라 덧붙이고 있는데 이는 덕이 있는 사람은 말이 없어도 사람이 자연히 따르게 된다는 뜻이 桃李에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 또 桃 李를 심는 자는 여름이면 나무그늘에서 쉴 수가 있고가을에는먹 을 수 있는 과실을 얻게 된다 (樹桃李者 夏得休息 秋得食焉) 라는 옛 중국의 격언도 있는데 이는 좋은 인물을 양성하면 福을 받는다는 뜻을 비유한 것이다. 이처럼 〈桃李〉는 관상과 경제성 (휴식과 식용) 그리고 교육면에서 옛날부터 중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삼국 시대에 백제와 신라의 궁내에 중국원산종인 桃와 李가 심어진 것 은 당시의 지정적인 조건 때문에 중국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46) 林進益 『造園學』, 臺灣中華 書 局, P. 22, 1978. 47) ”嶽次, 『大漢和辭典』 卷六, 大修館, P. 325, 1968.

®梅 『삼국사기』의 고구려 太武神王 24년 (41A.D) 조에 〈梅花發〉 이라 는 기록이 있다. 당시의 고구려의 都는 국내성이다. 梅는 난대에 서 온대북부에 이르기까지 널리 심어지고 있는 중국을 원산지로 하는 낙엽소교목이다. 과실은 약용으로 쓰여지고 있지만 꽃을 관 상대상으로 하고 있다. 학명은 Prunus mume sie b . et Zucc 이다. ®棟 『삼국사기』에서는 백제의 多婁王 21 년 (48A.D) 春 2 월에 궁중의 大棟樹가 스스로 말라 죽었다고 하였으며 『동국통감』에서는 백제 의 의자왕 19 년 (659) 에 궁중의 魄樹가 마치 사람이 곡하는 것처럼 소리내어 울었다(宮中魄樹鳴盤如人笑)고 기록하고 있다. 회화나무

(棟)는 중국의 하북, 운남, 귀주 둥지의 원산종으로서 콩과에 속 하며 학명은 Sop h ora iap o ni ca Li nne 이다. 고대중국의 周나라때 는 궁정에 세 그루를 심어 三 公(太師 太傳, 太保)의 좌위로 했 으며 高 官의 기념식수로 했다는 고사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궁원이나 마을의 요소에 심고 있다. 백제의 다루왕시대는 도읍이 漢山이었고, 의자왕때에는 酒i比였을 때인데 두 도읍지에 모두 棟 木이 있었다는 것은 옛 중국의 풍을 따랐던 것으로 생각된다. 녹 음수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48) Carpe n t er , Walker and Lanp he ar, Plant s in the Landscap e, Freeman and Comp ., p. 119, 197S.

®梨 『삼국시대』에서는 고구려의 양원왕 2 년 (546) 2%l조에 왕도의 梨 樹가 連理하였다고 하였다. 연리란 서로 다른 나무의 가지가 맞 닿아서 결이 통하여 하나로 된다는 뜻으로 이러한 현상은 천자의 덕이 천하에 고루 미쳤을 때 나타난다고 한다. 또 『삼국유사』에 서는 卷第四 義解 第五의 「寶壤梨木」에서 〈師指庭前梨木〉한 것을 보면 사찰의 뜰에 梨木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으며, 동서의 卷第 二 紀異第二의 혜공왕 (765~779) 조에 角于大恭家의 梨木에 참새떼 가 많이 모였다. (大曆之初……角于大恭家梨木上雀集無數) 고 하였다. 고구려의 梨木과 신라의 梨木이 동일종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 나 고구려의 것은 만주와 화북지방에 분포하는 Py ru s ussurie n si s May im , 신라의 것은 우리 나라의 남부와 중국에 분포하고 있는 Py ru s pyr i fol i a Naka i가 아닌가 한다. ®牧丹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기록을 종합해 본다면 신 라의 진평왕 때 {579~631) 당나라의 태종 (627~649) 이 보낸 杜丹 花圓와 그 꽃씨 .( 3 升)를 德壘(선덕여왕의 어릴 때의 이름) 에게 보 여주자· 덕만은 이 꽃그림에는 나비가 없는 것을 보아 반드시 향기 가 없는 꽃이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627 년부 터 628 년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중국의 감숙성과 협서성 지방을 원산지로 하고 있는 작약과에 딸린 낙엽활엽관목으로서 학명은 Paeoni a subf ru t ico sa Andr. 이 다.

木島에 의하면 1 관상용으로서의 재배는 중국의 육조시대부터 이며 수의 양제 (605~616) 가 그 원예화를 꾀했다는 기록이 蘇碩의 『本草圖經』 (1061) 에 있다고 하였다.

49) 木島正夫, 草木風興誌 멤§松新知識」. 夕수 4 種苗. PP.45~46, 1976. 5.

®杏 『삼국유사』 제 5 권 제 6 의 惠通降龍에는 천왕사의 신유림에 있는 山섭t와 溪杏의 꽃이 활짝 피어 울타리를 붉게 물들이고 있어 봄 이 한층 깊어가고 있음을 僧 明朗이 노래하고 있다고 하였다. 惠通降龍(……) 有高僧明朗 入龍宮 得神印 初glj神遊林(今天王寺) (……) 讚曰 山 桃溪杏映籠斜 一經春深兩岸花 (……) 승 명랑은 선덕여왕 원년 (632) 에 당나라에 갔다가 동 4 년 (635) 에 돌 아와서 眞言宗의 別派인 神印宗의 개조가 된 분인데, 이 무렵에 당나라에서 가지고 와 심은 것이 아닌가 한다. 杏온 중국의 북부 및 몽고지방의 원산종이며 학명은 Prunus armenia c a L. 이다. ®楊柳 『삼국사기』의 백제 무왕 3 5\:! (634) 의 春 3 월조에 〈究池於宮南 引 水二十餘里 四岸植以楊柳〉 라는 기 록이 있다. 人工池岸에 楊셈 P 를 심었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인데 수평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전 지역에 분포하는 버드나무 Salix Ko .re ansis Anderson 이라 생각된 다• ®柏 『삼국유사』의 卷五 避隱 第八 信忠掛冠에서는 효성왕 (737~742) 이 潛邸時에 賢士 신충과 함께 궁정의 柏樹下에서 바둑을 두었다 는 기록이 있다•녹음을 줄수'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한국과 중 국에 분포해 있는 Thuja orie n ta l is L. 라 볼 수 있다. 비늘잎을 가 지고 있는 상록침엽수로서, 材는 내구성이 강하며, 사시상청하는

특성 때문에 松, 竹과 함께 청절의 상징으로서 옛부터 많이 심어 지고 있다. 周나라때는 왕자의 기념식수로서 이용되고 있었다. ”' @)英苗 잎을 荷라 하고 열매를 蓮이라 하며 뿌리는 面, 꽃봉오리는 꿉 젊 꽃이 활짝 핀 것은 英答이라고 하나 일반적으로 총칭해서 英 菜 라 한다고 한다. so,

50) 洪萬退 『山林經濟』 卷二 種掛, 팠 1E, c 1715 傑仁文化社 影印本, 1974).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의 祗摩尼師令 12 년 (123A . D) 玲 l 에金城동 쪽의 민가가 땅이 꺼져 내려앉아 못이 되더니 거기에서 英渠가싹 터 나왔다고 했고 『삼국유사』의 卷第三 塔像, 第四 盜山五萬偵身 에서는 淨神大 王 의 두 태자가 산 속에 이르매 홀연히 땅위에 靑 蓮이 피므로 兄太子(貸川)가 암자를 짓고 머물러 사니 이곳을 貸 川庵이라 하였으며, 동북쪽을 향하여 따져 보를 가서 북대의 남 쪽 기슭에 이르니 역시 청련이 피어 있었으므로 아우太子 孝明이 또한 암자를 짓고 머물러 각기 부지런히 업을 닦았다고 하였다. 후자의 경우는 오대산지역에서 선덕여왕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라 생각된다. 蓮 Nelumbo nuc ife ra 은 인도가 원산지로서 우리나라에의 도입은 불교의 전파와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고구려는 불교의 도입이 빨라서 서력 372 년이며 백제는 384 년이고 신라는 이보다 훨씬 늦어 528 년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지마왕대에 연이 자라 났다는 기록은 믿기 어려우며, 후자의 경우는 보장법사가 신라에 돌아왔을 때라 하므로 믿을 만도 하다. 의장은 선덕여왕 5 년 (636) 에 당나라에 들어가 8 년간 불경을 연구하고 돌아왔다고 하니 640 년대 또는 그 이후 무렵이라 생각된다. 한편 6 대 지마이사금 (112 ~134) 때는 민도가 낮고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국과의 교류 가 활발치 못할 때이므로 연이 백제를 통하지 않고 중국으로부터 직접 도입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하기가 힘들다. 신라시대 초에 나타났다는 연은 혹시 睦蓮 N y m p haea tet r a go na- var ang u sta Casp 이거나 개연꽃 Nup h ar jap o nic u m DC 가 아닌 가한다. @松 @)竹 『삼국사기』에는 최치원 (857~? )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뒤로는 세

상에의 뜻을 버리고 산천과 바닷가를 두루 찾아 다니면서 疑배를 꾸미고 〈松竹〉을 심으며 책 속에 파묻혀 풍월을 읊었다 하였는 데 송과 죽을 조경목적으로 인공식재한 최초의 기록인 듯하다. 致遠 自西 事大唐 束歸故國 皆造亂世屯退廷連 動fJI[得씁 自偏不 偶 無復仕進慈 遣造自放於山林之下江海之濱 정정樹植松竹 沈籍占史 悼味風月 (· …·) 『三國史記』 卷四十六 列傳六, 崔致遠 그러나 여기에서 송은 陸松인지 海松인지 분명치 않으며, 대나무 도 太程種인지 山竹과 같은 細程種인지 同定할 수가 없다. @ 山萊莫(산수유) 『삼국유사』의 卷第二 紀異, 第二 「四十八代泉文大王」을 보면 道 林寺의 竹林이 바람이 불면 댓소리 (竹聲)로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의 귀와 같다〉고 하므로 왕이 이 소리를 싫어하여 대나무를 베어내고 대신 山架興를 심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의 진부는 놔두고라도 산수유가 道林寺에 도입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조경행위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에 분포하고 있 는 낙엽활엽수로서 3, 4 월에 황색의 꽃이 피고 1 <>%l경에는 붉은 限質의 타원형열매가 여는데, 꽃이나 열매는 충분히 관상 가치가 있다. 충층나무과에 속하며 학명은 Cornus off icina lis Sie b . et. Zucc. 이댜 경문왕 (861~874) 의 즉위 초인 860 년대 초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 蒼골 (담복 : 치자나무) 『삼국유사』의 卷第三, 塔像 第四에 木影萬佛山에 관한 이 야기 가 있다. 죽 경덕왕 (742~764) 은 당의 대종 (763~779) 이 불교를 숭 상한다 함을 듣고 沈檀木을 조각하여 윷茶羅를 표현한 높이 丈 餘의 假山을 만들어 선사했다는 것인데 여기에 금과 옥을 새겨 店 葛과 花果의 장엄한 것과 百步樓閣 및 臺殿 堂樹룰 만들어 장식 했다는 귀절에서 蒼표(紀子)을 찾을 수 있다. 이 꽃향기 질은 치 자가 조경식물로서 심어졌다는 기록은 없지만 萬佛山이라 일컫는 목조의 만다라세계 속에 동장하고 있다는 것은 당시에 관상용으 로 십어졌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보아 여기에 첨가한 것이다.

중국 남부의 난대지 방에 분포해 있는 꼭두선이 과에 속해 있는 상 록활엽 관목으로서 학명 은 Gardenia jas mi no id e s Ellis f. gr andif lor a (Lour. )M 야i no 이다. 한명으로 「蒼曲」이라고도 쓴다. 지금까지 삼국시대의 조경식물 1 ¥5을 7 고찰하여 왔는데 이 가운 데서 중국원산종은 桃, 李, 梨,杏,梅, 杜丹, 距子 둥 7 종이고 인도원산종으로 1 종 蓮, 한국인가 중국인가 유래원을 알 수 없는 것이 2 종 柏과 山架興, 그리고 국내종이라 생각되는 것이 松, 竹, 楊柳 동 3 종으로 구성되고 있다. 신라가 망한 지 200 여 년이 나 지난 뒤에 기록한 문헌들이어서 어느 정도나 신빙성이 있는지 는 알 수 없으나 당시의 지정적인 관계로 중국산을 비롯한 외래 의 관상식물이 궁정에 더러 심여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삼국사기』에서는 백제의 진사왕 7 년 (391) 春正月조를 보면 馮修宮室 察池造山 以養奇銀異升〉라 하였고, 신라의 문무왕 14 년 (674) 의 져조에도 〈宮內察池造山 種 花草 養珍葛奇獸〉라 하였는데 여기에서 異花라든가 화초를 심고 가꾸었다는 글 뜻에서 본다면 여러 가지 이름모를 화초도 생각치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기록이 사실이라면 異丹도 외래종이 아닐지 모른다. 4 結論 삼국시대는 중국으로부터 한학과 불교가 들어온 서1 ] 기 이후에 야 개명하기 시작하였으며, 조경문화도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듯하다. 그것은 백제의 진사왕이 391 년에 價"多宮室 察池造山 以 養寄歲異丹〉라 한 데서 이해할 수 있다• 600 년대에 이르러는 분황 사와 황룡사의 9 충탑 동 불교의 건축이 이루어졌고 백제의 사비 성 궁남지 (634) 와 신라의 경주 임해전지원 둥이 조영되었으며, 일 본에 들어간 路子工은 飛鳥의 宮南에 吳橋와 須彌山으로 된 불교 사상 배경의 정원을 꾸몄다. 백제의 궁남지는 난지궁의 蓬萊池처 럼 三神仙島中의 하나인 方丈島를 상징한 中島型의 方狀池를 만 들었으며, 신라의 임해전지는 璃홍 l 의 풍경모사의 지원을 만들었 다는 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은 池苑양식은 고대 중국 의 진의 시황이나 한의 무제가 신선사상을 굳게 믿고 불로장생을

염원하는 뜻으로 조영했던 신선사상 배경의 조경기법을도입한듯 하다. 또 고구려의 안학궁 안에 있는 궁원이나 신라의 임해전지 원의 풍경모사의 기법도 한나라의 무제가 조영했던 六大湖가중심 으로 된 상림원과의 연관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 은 신라가 교류했던 당의 수도인 장안은 바로 한의 수도와 같았 으며, 상림원은 여기에 조영되었던 것이다. 포석정의 곡수지도 중국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 면, 삼국시대의 園林은 지정적인 관계에서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 고 있는 것이며, 역사적으로는 백제에 먼저 도입 되었지만 질 적으로는 통일신라때 크게 발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참고문헌 原 t熙, 「朝鮮新羅臨 海 殿庭園」 日本園藝 學 雜 誌 , 3(2):1 2~22, 1932 鄭在隨 「新羅 宮苑池인 雅 鴨 池에 對하여 」, 韓 國造泉. 學 會 誌 ? (2) ; 21~27, 1975. 金東賢 「慶)서雅鴨池發振에 관하여」 , 建築. 20 (72);3 5~40, 1976, 李基白 「望海 亭 과 臨海殿」. 考古 美 術, 129 • 130: 5~7, 1976, 洪思俊, 「慶州胞石 亭 의 名稱과 質物」, 考古 美 術, 129 • 130: 155~ 161, 1976 本中 員 「古代曲水案造梅rJ)流速t :?L .t」, 造 園雜 誌 , 43(3);2 5 ~30, 1980 千田剛這 「淸岩里썰寺&安鶴宮」. 文化財論沒 同朋社, PP, 1015~ 1040, 1983 張慶造 「統一新羅時代의 建築 造 形에 나타난 造 景 的 意固에 關한 考察-照鴨池및佛國寺룰 中心으로」, 韓國庭苑學會 誌 . 3(1 ), PP. 27~ 36, 1984 尹國炳 『造泉史』, 一 潮 00, PP. 192~242, 1978 〔調査報告 書 〕 文化公報部 文化財管理局, 「佛國寺復元工康報告 古 」, PP. 60~68, 1936 文化公報部 文化財管理局, 대街鴨池發堀調査報告 합 」, 1980 종합대학출판사, 대성산의 고구려유적, pp. 108~209, 1973

高麗時代 918 년 태조 왕건에 의하여 건국되어 1392 년 이성계에게 멸망될 때까지 34 대 475 년간에 걸쳐 정권을 유지했던 고려시대는 오대 • 송 • 원으로 정변이 심한 중국과는 어려운 관계에 있으면서도 그 들의 다방면에 걸친 선진문화를 직접 • 간접으로 도입하여 개명 의 계기가 되게 하였으며 조경분야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본장에서는 연구사, 시대적배경, 원림각론의 순으로 고 찰하고자 한다. l 硏究史 고려시대의 원림에 관한 연구는 일본인 田治六i! IS 의 업적이 효 시를 이룬다. 그는 고려시대의 정원에 관한 연구에서 『고려사』,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송경지』 동을 중심으로 하여 고 려시대의 정원을 특징에 따라 분류하고(離宮, 客館, 寺院, 私第, 曲 水案 舟遊 擊球戱 정원식물과 · 동물), 결어로서 고려시대의 정원 은 그 초기에 있어서는 신라의 기법을 이어받았고, 중기에는 '末 의 영향을 받아 크게 발전하였지만 그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쇠 1) 田治六郞. 高麗時代 O 庭園, 日本造園雜誌, 3(2) I~20, 1936.

미기에 들어가게 되어 고려식 정원으로서의 특색있는 것이 탄생 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비록 문헌을 중 심으로 하는 고찰이지만 고려시대의 정원을 전반적으로 다룬 지 금까지의 유일한 논문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 이르러 尹國 炳, 金 鎬 然 閔 庚炫둥을 중심으 ' 로 하는 〈 淸平 寺文殊院 庭 苑 蹟 發 堀調 査〉 팀은 1981 년 8 월 23 일부터 1982 년 5 월까지 9 회에 걸친 현지 조사를 통하여 李資玄이 조영했던 고려시대의 정원에 관한 연구 결과를 보고한 바 있다? 여기에서 金과 尹은 문수원의 括形 池 윗편의 自然石群을 〈인위적인 A전 石 〉 으로 판단하고 일본의 西 芳寺 에서 보는 柏山水 기법과 연결시키려 하고 있으며 閔도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推形池中의 3 개의 자연석을 三 山으로 보고 있다. 고려시대의 〈정원 용어〉 에 관한 尹의 연구보고가 있다 . 3 - 1) 그는 28 종의 문헌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한 결과 정원의 호칭은 〈 園 林〉 이 가장 많이 쓰여지고 다음으로 林園이라는 용어도 꽤 빈도 높게 쓰여진다고 하였다 . 이밖에 정원의 국부명칭과 원지, 정원수, 정원석, 화단, 정원건축, 담장 시골집, 샘, 淵 水, 오솔길 기타 동 다각적으로 구분하여 고찰하고 있다. 저자는 고려시대의 조경식물을 연구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자 료인 『 東國李相國 集』 을 근거로 하여 문집 속의 조경식물을 고찰 한 바 있다: ·2) 동국이상국집은 李 奎報 (1168~1241) 의 각종 저술을 모은 문집으로서 여기에는 44 종의 조경식물이 발견되며 이 중에 서 외래종은 26 종에 이르고 있음을 보고한 바 있다. 위와 같이 고려시대의 원림에 관한 연구는 업적도 많지 않고 자료도 적으며 당시의 왕도였던 송도나 서경인 평양 둥이 모두 이북지방에 있어 현지답사가 어려운 현실에서 당시의 조경문화의 진수를 찾아낸다는 것은 매우 힘드는 일로 생각된다. 2) 金然 尹國炳 柳 福 腐 OO 庚藍 「文殊院庭苑蹟發堀 調 査報告」, 韓國庭苑學 會誌, I 74~95, 1982. 3-1) 尹國炳 「高 麗 時代의 庭苑用語에 관한 硏究」 , 韓國庭苑學白誌, I (I): P.2 8 ~40, 1982. 3-2) 鄭낸ll'f. r* 國李相國渠의 造景植物考」, 演習林報告 第 5~. P.105~121, 1982.

2 時代背景 신라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 (668 년)하고 당의 세력을 몰아 낸 지 (67 턴) 100 여 년 동안은 정치가 비교적 안정되고 문화도 전 성기에 있었다. 그러나 36 대 혜공왕 (765~780) 대에 이르러 시작 된 왕위쟁탈을 중심으로 하는 음모, 반역, 골육상잔의 난리는 제 49 대 헌강왕대 (875~886) 까지 계속되다가 제 50 대 진성여왕 때에 이르러서는 전국적인 동란으로 번지게 되었다. 왕 자신들도 국가 의 안정에는 관심이 적고 행락에만 정신이 팔려 있어서 궁내의 기강이 해이되고 백성들의 신임을 잃게 되었다. 이렇게 나라가 어지럽게 되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 무렵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송악에서 일어서서 후고구려의 왕이라 자칭한 궁예 ( ? ~918) 와 완산에 도 읍을 정하여 후백제를 세운 견훤(? ~936) 이 있다. 이 중에서 궁 예를 섬겨 전공을 세우고 侍中이 되어 신임과 인망을 얻고 있던 왕건 (877~943) 이라는 송악출신의 인물이 있었다. 그런데 泰封王 이 된 궁예가 국력이 강해지자 사치한 생활과 횡포한 언행으로 신하들을 괴롭히며 호화로운 궁궐 건축과 호탕 방일한 생활로 재 정이 궁핍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으며 918 년에 신승경, 홍유 둥에 의하여 궁예는 축출되고 왕건이 왕에 추대되었다. 6 월 15 일 국호를 고려라 하고 919 년에 송악을 왕도로 정하였다. 송악 을 왕도로 정한 것은 왕건의 출신지라는 뜻도 있지만 풍수지리설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죽 金寬毅의 『編年通錄』에 의하면 4) 고려 왕씨의 원조인 虎 景· 의 아들 康忠이 오관산의 마하갑에 살고 있을 때 신라의 監于 八元이라는 풍수에 능한 자가 와서 말하기를 〈송 악은 산형이 우수하지만 童山이므로 만약 山北에 있는 부소군을 山南으로 옮기고 산에 松을 심어 암석을 덮어 준다면 곧 삼한을 통일하는 자가 나타날 것이다〉라고 하므로 康忠은 郡民과 함께 거처를 山南으로 옮기고 산에 소나무를 심었다. 고려태조 왕건은 바로 康忠의 2 대손이다. 고래 민간신앙계에서 축복수라 취급되고 있는 소나무는 상록이며 청색이므로 송악에 두·루 심어 녹화한다 면 水根木幹, 黑親靑子의 國域風水에 알맞으며 水生木의 五行相 4) 村山智凰 「朝鮮

>j :. 에 따르게 되는 것이므로 그 생기 를 받 는 자는 크게 융성한다 는 것이다. 여하튼 왕건은 송악에 定都한 뒤에 신라의 경순왕으 로부터 항복을 받았고 (935 년 ) , 견훤의 아 들 인 신검에 의하여 지 배되던 후백제 를 멸망시켜 (936 년) 드디어 국토 를 통 일하기에 이 른 것이다. 왕건은 국토 를 통일한 뒤에는 신라와 후 백제의 유민 들 을 포섭 하고 융화와 결혼정책을 썼으며 귀족들 을 예우하며 회유 하였다. 또한 승불칭책을 써서 불교 를 국교로 삼아 사원을 짓 고 승려 를 우대하였으며 신라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여 교학사상, 민간신앙을 적극 보호하였고 도참을 믿어 보호하였다. 죽 태조는 불교를 숭상하는 동시에 나라 를 다스리는 길은 유교에서 찾았다• 한편 국방에 있어서는 북진정책을 써서 옛 고구려땅인 서북면을 개척하고 발해의 유민들을 받아들이며 여진족의 거주지 를 공략하 였다. 또한 글안이 발해 를 멸한 뒤 글안과는 국교 를 단 절 하였다. 만년에는 그의 북진정책으로 서북으로는 청천강 하류, 안주지방, 동북으로는 영홍까지 확장하였다. 이렇게 하여 고려의 국기는 다 져졌으며 태조의 정책은 계속되어 갔다. 고려 475 년간 (9I8~1392) 에 있어서 인접 국 인 중국대륙에는 오 대와 송·원 명 등 8 개 국이 모두 망하였다. 이 때문에 국제관 계도 복잡하였다. 고려는 개국이래 梁 • 唐 • 晋 • 漢 • 周 둥 오대 국 (907~960) 과 국교 를 맺었고 그 뒤 중국을 통일한 송과도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것은 신라와 중국과의 관계 를 계승한 것 이었으나, 문물에 대해서는 모화사상의 경향도 컸다• 반면에 북 쪽의 요와는 국교조차 맺으려 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하여 제 6 대 성종 (981~97) 부터 8 대 현종 ( I010~ 1031) 까지의 사이에 수차에 걸친 침범까지도 있었다. 송나라와는 대동관계는 아니었지만 교 류가 빈번하여 각방면에서 그들의 영향을 크게 받기에 이르렀다. 특히 문종 (I047~1082) 에서 인종 (1123~1146) 에 이르기까지 약 1 세기 동안은 가장 친밀했으며 그들의 문화는 정신 물질 양면으로 많이 섭취되었다. 이 무렵에 송의 낙양지방에는 네馬 光 (1018~86) 의 獨樂園을 비롯하여 많은 질 높은 원림이 조영되고 있었으며 李格非의 『洛 陽 名園J c i)에는 머馬光의 獨樂園을 비롯하여 19 개의 5) 岡大路, r 支那庭國 論 」, 彩 國 社, PP.6 7 ~83, 1943.

원림이 소개되고 있다. 이 가운데서 董氏 의 東園에는 流孟亭이 있고 附酒池 가운데에는 含碧 水堂이 있다고 하였으며, 天王院花 園子와 %江대섭에는 서f}이 수천 수만 주가 심어져 있었다. 苗師 園에는 池塘과 橋 亭 , 龍圖格1 이 있고, 송도원에는 못의 전후에 정 자가 세워지고 있으며 李氏의 仁豊園에는 桃 • 李 • 杏 • 蓮 • 牧丹 뚝藥 둥 화목이 100 여 종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민간정원도 이러 한데 궁원이 화려했을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휘종은 宣 和연간 (1119~1125) 에 경성의 동북쪽에 항주의 봉황산을 본따서 萬歲山苑을 꾸몄는데‘ ) 그 둘레가 10 여 리 (약 5.8km) 에 이르렀고 최고봉은 90 보(약 162m) 에 이르렀다. 산 사이와 봉우리에는 갖 가지 화려한 樓 • 亭 · 閣을 세웠으며 산 아래에는 두 개의 섬이 있는 큰 方沼룰 만들었고 굽이치는 계류는 東池와 西池룰 자연스 럽게 연결하였다. 또 이 인조산에는 太湖의 怖石을 날라다가 假 山을 꾸몄는데 장관이었다고 한다? 徽宗은 이와 같이 정사는 돌보지 않고 호사로운 생활에만 빠져 있다가 마침내는 아들인 홈종과 함께 금나라에 의하여 붙잡혀가 는 신세가 되었지만 송의 일부 유력인사들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경관이 수려한 자연 속에 저택과 별장을 짓고 원림을 꾸며 즐겼 다. 그 중에서도 太湖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던 오홍지방은 자연 경관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토지가 비옥하고 문화적으로도 번영 하고 있던 곳으로서, 송의 周密이 쓴 『吳興園林記』 S) 에는 沈德和 의 상서원을 비롯한 32 개의 원림이 소개되고 있다. 여기에서 정 원 속에 石假山 (南沈尙 합 園 丁氏園, 兪氏園), 蓬萊山 (南沈尙 롭 園) , 太湖三峯 (韓氏園), 流杯亭 (趙氏小隱園) 동이 도입되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이 시대에 조경식물에 관한 관심도도 높아지고 있어서 송의 祝穆 (12 세기 말) 이 편찬한 『 18 文類}%』 9) 에는 화훼로서 梅, 桂 (木 罪花), 난 , 菊, 拘記 모란, 작약, 桃花, 李花 (來歲花), 杏花, 梨 (t, 紫薇花, 해당, 惟碑(t, 萱 (t (忘꽃 草 ), 荷花, 楠(t, 英容花, 수 6) 黃貸埼 『中國建築史』, 正中꿉局, PP.142~3, 1973. 7) 杉村勇造, r 中國 0 庭」, 求龍堂, PP.SO~SI, 1966. 이 岡大路, 前撮컵, PP.83~93, 9) 祝穆 여 F 文類衆』, 卷之二 (田以采 朴致維ff, 乙未年, 1175) 十六~十九面 .

선화 등 34 종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 밖에 習端伯의 花十友, 張敏 叔의 花十二客과 같이 화목에 雅稱을 붙여 주는 풍도 일고 있다!C! 송이 금에게 정복되어 남쪽으로 밀려나간 뒤까지도 고려와의 교류는 그치지 않았다. 이 시대에는 해상무역의 발달로 송의 상 선이 빈번하게 내왕하여 문물의 전수가 촉진되었을 것이며 상인 들이 奇花異木과 공작, 앵무새 둥 애완동물을 헌상했다는 『고려 사.I의 누차에 걸친 기록으로 보아 11) 조경문화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10) 岡大路, 前撮압, PP.67~83. 11) 金宗瑞 等. 1451, l'if.'i麗史』 (金鍾權 譯. 廣曺出版社, 1975)(!) 睿宗八年二月 條 〈置花園二于宮南西 (中略) 括民家 1 단[ 移裁其中 以爲不足 又 講於宋商〉@) 소五月 條 여都綱陳守獻白閑〉 ® 睿宗十五年六月 條 어근商林淸等獻花木〉 ® 毅 宗十一年七月 條 여핵引獻閑雄 1L 雀異 1E 〉 ® 毅宗十七年七月 條 여려都綱徐德榮等 來獻 1L 雀及珍阪之物〉

송이 멸망하고 원이 건국하게 되자 고려와의 관계는 불편해져 서 주종관계는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특히 1259 년 고종의 항복 이후로는 원종에서 공민왕 초에 이르기까지 90 여 년간은 그 정도 가 심하여 굴욕적인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국왕은 征東行省의 장관격에 지나지 않았다. 원에서 책봉되는 국왕은 원나라에의 출 입이 빈번하였고, 세자는 인질로서 연경에 머물러 있다가 그곳에 서 축위한 뒤에 귀국하는 왕도 있었다. 이처럼 정치적인 면에서는 굴욕적인 입장에 있기도 하였지만 문화적인 면에서는 얻은 것도 없지 않았다. 충선왕 (1309~1314) 은 세자로서 원에 있을 때 그곳의 유학자들과 교류하였고 돌아올 때에는 송의 秘閣 소장의 서적 4,000 여 권의 책을 얻어 왔으며 왕위를 물러난 뒤에도 원의 수도에 들어가 만권당이라는 서당을 짓고 내외의 고금서적을 수집하고 名盤 이제현을 원으로 불러들 여 그곳의 巨儒들과 함께 고전연구에 몰두하게 함으로써 고려의 유학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m 또 충숙왕 (1315~1339) 이 원에서 돌아올 때는 (1 ,3 16 년), 천하의 韻芳珍草를 얻어 왔는데 국화의 품 종으로서 鳥江 燕京 黃白 闇深 錦銀兩紅, 鶴頂紅, 笑雪白 둥이 있고 모란으로서 白牧丹, 顔紅牧丹, 洛陽紅이 있으며 이 밖에 重茶 山茶, 重茶梅, 碧桃, 粉桃, fj困 k, 瑞香, 靑黑荀菊둥이 포함

12) 韓佑ff/J. 「韓國通史』, 乙酉文化社, PP.206~9, 1970.

되어 있다고 한다 !3 l 원은 몽고제국 이래로 중동지방과 아시아에 걸친 넓은 영역을 정복함과 동시에 그 영역내의 각국인을 채용함으로써 동서문화의 교류가 촉진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에도 사라센계통의 천문, 수학, 의학, 역법, 예술 둥이 원을 통하여 들어왔고 또 직접 아라비아 인의 내왕도 있어 그들과의 교역을 통해서 문물의 교류도 있었다 !O 이처럼 고려는 중국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동안에도 그들이 간 직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화요소를 직접 간접으로 도입하여 사계 의 발전에 촉진제의 역할을 하게 하였음은 부정할 수가 없다.

13) 姜希顔 著 李炳紙 따 『 養 7E1 J、錄』. 乙酉文化社, PP.47~48, 1973. 14) 韓佑lib. 前揚 書 , P.1 8 6

3 庭園各論 田治는 고려시대의 정원을 離宮,客館,寺院, 私第로구분하여 고찰하고 있으나 본저에서는 궁궐정원,객관정원, 사원정원,민간 정원으로 4 구분하여 고찰하되 궁궐정원에 있어서는 離宮이나 行宮 또는 성 밖에 있는 산수원림까지도 왕이 이용하기 위하여 조영한 것이라면 모두 포함시키는 것으로 한다. 아울러 이해를 돕기 위하여 송도의 개략도를 첨가한다. I) 궁궐정원 고려시대의 궁궐정원은 유지에 대한 조사보고서나 연구업적을 손에 넣지 못하여 그 특징을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 고려 사 』 에 나오는 단편적인 기록을 중심으로 하여 먼저 화원과 東池 (또는 角 齡 &1 의 지원)을 고찰하고 아울러 정원의 구성요소가 되는 石假山과 園 亭 , 그리고 동적인 위락공간인 擊 往 場 에 대하여 그 특 징을 찾아보고자 한다. 1) 花園 화원은 고려시대의정원의 특징 중의 하나로서 관상목적의 화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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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 :따~F 2, u -山成 虎후

과 화훼를 중심으로 하는 정원의 일종이다. 화원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의 府 宗 8 年 (1113) 2 月條에 처음 으로 나타나는데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S)

15) 金宗瑞. r 麗史』, 1454 ~鍾權 譯 , 廣팹出版社, 1975).

置花園二于宮南西 時室侍競以移婚 王 起잦.樹峻垣i껍 括民家t E 草 移裁 其中 以爲不足 又隅於 宋商 'l' t I 셔格金幣不賀 旦於京外多作寺院 窮極 土木 物論噴騰班而 二 園恨 I 섭 주 내용인죽 예종은 궁의 남과 서쪽에 화원 두 곳을 두었는데 여기에는 갛: 와 t성룰 일으키고, 높은 담으로 둘렀으며 민가의 화 초를 옮겨 심고 부족한 것은 송나라 상인에게서 사서 채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왕의 화사한 생활에 대하여 민간의 물의가 커지자 모두 폐지하였다고 한다. 또 예종 11 년 (1116A . D) 4 월 丙寅에 왕은 처사 郭輿롤 불러 常安殿 뒤의 〈화단〉에 앉히고 친히 酒食을 베풀었다. 이때에 갑 자기 동남방에 백운이 수 편 떠오르고 그 속으로 · 쌍학이 배회하 자 곽여에게 명하여 시를 짓게 하고 왕도 또한 이에 和誌하였다 고 기록하고 . 있다. 고려에서는 11 대 문종 (I046~82) 이래로 송과의 교류도 빈번 하였고 송의 상선의 왕래도 잦았다. 『고려사』에 의하면 ) 예종 8 년(1 113 년)에는 宋都綱 陳守가 白 鹿}을 바쳤고 同王 15 년 (1120) 6 월에는 宋商 林淸 동이 화목을 바 쳤으며 그후 의종 11 년(1 157) 에도 앵무새와 공작 그리고 異花를 헌상했다고 하였다. 숙종 4 년 (1099) 4 월에 御沙樓에다 사신을 소 집하여 重光殿 의 玉政魂花에 대한 시를 짓게 했다든가 예종 7 년 4 월에 御禁內 沙樓에서 儒臣에게 牧丹詩롤 짓게 했다든가 하는 데 서 보는 上政魂花나 모란은 모두 중국원산종이며 이 모란은 일찌 기 현종 (1009~31) 이 손수 심은 것이다.,” 『고려사』의 의종 IO 년 (I 156) 10 월조에 왕은 평장사 崔允儀, 知樞密院 事 申叔, 石承宜 李元開 둥 II 인을 목청전에 들어오게 하여 善救貸와 양성

16) 金宗瑞 前撮 함 . 卷第十八 . 예종 7 년 4 월조價凉쌉手植杜丹于樓前, 自德宗至肅宗 皆有妹 1E i 寺又有從臣 應製〉

전 그리고 御苑의 화훼를 두루 관람시키고 沖曲 &1 에서 1111$ 을 베 풀었으며 同王 12 년 (1158) 3 월에는 덕수궁으로 행차하여 태평정 에서 제추 대각 사신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이어 어원의 화목을 遊賞하도록 허락하였다. 또 동왕 14 년 (1160) 3 월에도 환궁하여 兩府의 재추와 시신을 불러 어원의 화초와 珍歲奇獸를 완상하게 하고 주과를 하사하였으며 동년 9 월에는 새로 이룩한 藏堂 후원 에 행차하여 주연을 베풀고 국화를 완상하였다. 여기에서 穆淸殿은 수창궁 동쪽의 숭인문 가까운 곳에 있는 돗 하나 수덕궁의 위치는 분명치가 않다. 여하튼 의종도 궁 내외에 위락목적으로 화원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그 위치나 화훼 의 종류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충선왕은 24 년 4 월 戊辰에 壽寧 宮에서 賞花案울 베풀었다고 했 는데, 高裕燮은 17) 수령궁은 수창궁에 인접해 있으며 민천사가 서 있는 자리라 말하고 있다. 충혜왕은 後 3 년 (1343 A.D) 秋 7 월에 화원에 행차하여 연꽃을 관상하였으며 同王 4 년 (1343) 2 월에는 大護軍 朴良衍 에게 명하 여 승교원에 화목을 심게 하였다. 또한 공민왕은 재위 22 년 (1373 A. D ) 6 월에 泥峴에다 팔각전 (2 층)을 짓고 그 주변에다 화목을 심어 화원을 만들고 燕遊하는 곳으로 하였다:홉

17) .Qi裕쳇. 「松都의 古蹟」 (1977 年 I I 月 況話 掌發行本 ), PP. 84~87, 1946. 18) 徐居正, 1484. 『동국통감』, 卷之四十四 傑仁文化社發行, 1974) . 〈命 大護軍 朴良衍 種{t木於崇敎園 先是就崇敎寺蓮池芳 起樓以爲箕遊之所 嬰臣宋明理勸 之也〉.

지금까지의 화원을 정리해 본다면, 화원은 화목 또는 화초를 중심으로 하는 정원을 의미하며, 珍樹異花는 송 및 원나라로부터 많이 들여다 심었던 것으로 보인다. 2 ) 東池 (龜齡閣池苑) 「東池」 에 관한 기록이 제 5 대 경종부터 제 31 대 공민왕대에 이 르기까지 계속 나타난다. 이를 순서에 따라 적어 보면 다음과 같 다(『고려사』 에 의함) . 景宗 二年 (977) 春三月. 御東池龍船 親試進士 賜高擬等及第

靖宗 四 年 (1038) 十 二 月. 內史洞下省 言 東池白節秘鴨山羊之類 日 銅括梁爲費多矣(中略) 放東池危獸. 靖宗 七年 (1041) 十 二 月 辛已 08 射于東池fll. i令 OO. 文宗 十年 (1056) 九月 쫒巳 命太子與諸臣 莊酒東池樓召秀才崔應 李昭御室忠 令賊東池尋勝詩. 肅宗 元年 (1096) 六月 王廷舟東池 置酒召宰相侍臣 社宜相與賊詩 至 夜分 雷 雨乃龍. 同上 八年 ( 1103) 十月 壬申 幸東池 開射中者 賜物有差. 츈宗 九年 (1114) 八月 丙寅 王御東池韋齡閣閔武士. 同 年 十二月 B8 射于東池. 츈宗 十年 (1115 A. D ) 九月 丙戌 親選武士于東池 丁亥觀水戱. 同年 冬十月丁末 親朋六道神騎將士于東池. 同年 冬十月榮丑 親選西京將士于東池. 恭愍王 元年 (1352 A. D ) 七月 丁丑 萬戶印斑;獲倭船 命廷東池觀之. 정종 7 년과 예종 9 년 條에 각각 〈東池角斬淵]〉이라는 말이 나 오는 것을 보면 귀령각은 동지의 주건물인듯 싶으며 경주에 있는 임해전이나 경복궁의 경회루와 같은 기능을 갖는 것으로 생각된 다. 위의 기록에 의한다면 귀령각은 왕과 측근과의 유락의 장이 며 동지에서의 水戱를 관람하며 호수와 눈앞에 전개된 자연 경관 을 관상하는 곳이며 때에 따라서는 왕이 친히 진사의 시험을 치 르기도 한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친히 무사나 장사를 뽑으며 또 이들을 검열하는 곳이기도 하다. 池上에서는 선유도 하고 노획한 왜선을 띄우게 한 것을 보면 동지의 규모는 작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 동지에는 초기에 백학과 거위, 오리 그리고 산양 둥 동물을 사육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御苑으로서의 모든 기 능을 구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제 7 대 목종 10 년 (1002 A.D) 5 월에 토목노역을 위하여 군부를 동원해서 高臺를 쌓고 深池룰 만들어 유상목적으로 하였다는 『고 려사』의 기록은 동지를 확장하고 보수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 이 아닌가 한다. 죽 경종때에 조영했던 동지가 규모가 작고 미비 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동지가 府北 5 리에 있다고 하였으나 그

정확한 위치나 규모, 형태 동에 대하여는 알 길이 없다. 3) 石假山庭園 자연의 기괴한 암석으로 〈썬石爲山〉하거나 石假山을 이루어 정 원을 꾸미는 일이 있다. 중국의 『서경잡기』에 의하면 무릉의 거 부인 袁廣淡 (前漢人)은 북망산하에 동산을 만들고 〈構石爲山〉을 했다고 하며? 白樂天 (772~824) 은 항주 刺史의 任을 마치고 돌 아올 때 天笠石 1 개와 소주에서 太湖石 5 개를 얻어 향리의 집 뜰에 만든 池上에 배치했다고 한다 .m 이 밖에도 같은 당나라의 중종의 딸인 安樂公主 (?~710) 도 西莊에다 〈累石象華山〉 했다고 하며 李德裕 (787~849) 의 平泉莊에는 천하의 진기한 돌을 모아 巫山十二峯 洞庭九派를 이루었다고 한다 .21)

19) 樂嘉溪 『中國建築史』, 華世出版. PP.19~20, 1933. 20) 杉村勇造 「中國(I)庭」, 求龍堂 PP.4 1 ~45. 1966. 21) Ell 治六郞 「李德裕 0 平泉山莊」 여完稿).

고려에 있어서는 〈性石成山〉 의 石假山技法이 l.2 세기를 전후해 서 도입된 듯하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淸器閣 (1116 년에 창건) 에 대한 金仁 存 (?~1127) 의 『案記』 (1116) 에 다음과 같은 귀절이 있다. 闇循之外 愚石成山 庭除之際 引水爲沼 峨粹萬狀 淸浮四澈 죽 자연석을 쌓아 산을 만들고 물을 끌어다 못을 만드니, 자연 다움이 가관이라 한 것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의종 6 년 (1152) 夏 4 월에 壽昌 宮北園에 괴 석을 쌓아 假山을 꾸미고 그 옆에 萬 壽亭 이라는 小 亭 울 세웠으 며 벽은 누런 비단으로 입혀 화사롭기 그지없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案 萬 壽亭 至院乃龍 先是 內侍尹彦文 緊怖石築假山于 壽昌宮 北園 構 小亭其側號萬 壽 以黃綾被壁 窮極著移 또 의종 10 년 (1156) 에는 大內의 東北隅에 沖虛閣을 세웠고 또 그 곁에 정자를 하나 더 세워 箕性亭이라 稀額하였는데 여기에는

괴석을 세우고 명화를 심었다고 하였다. 初王於大內東北隅 起一閣福曰沖虛 金碧鮮明華飾絶麗 又於內闇別室 居 善藥意欲廣治衆病 稀曰善救寶 又構亭其側 緊怪石名花 福曰投性 (東國通鑑) 同王 11 년 { 1157) 4 월에는 민가 50 여 區룰 헐어 太平亭을 세우 고 정원을 꾸몄는데, 옥석을 갈아서 歡喜와 美成의 두 疑룰 만들 었고, 괴석을 모아 선산을 만들었다. 穀民家五十餘區 作太平亭 命太子항額 芳植名花異果 奇麗珍玩之物 布列左右 亭南堅 池 作觀潤亨 其北構왔治亭蓋以靑姿 南構投和亭蓋以 稷 又磨玉 1 i築 歡喜美成二상: 緊怖石作仙山 l} 1 遠水爲飛泉 窮極(多麗 이상은 예종과 의종대에 꾸민 石 假山의 예를 든 것인데 대개 는 괴석을 이용하여 만든 것을 보면 자연의 기암절벽을 모방하여 꾸미거나 아니면 신선계를 울타리 안에 도입하려는 의도가 내재 해 있는 듯하다. 4) 亭子 중심의 원립 亭子란 휴식과 姚望을 위해 원림 내에 설치하는 소건축물이다. 초기에는 전망이 좋은 강안이나 山腹 또는 小丘上에 세우는 일이 많았으나 후에는 정원시설의 일부로서의 기능을 지니도록 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문종 10 년 (1056) 에 西江 耕嶽의 남쪽에 長源 亭 을 세웠고, 同王의 31 년 8 월에는 홍주의 蘇大縣에 安興亭을 창건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자연 속에 휴식과 위락 및 전망을 위 해 세운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園亭으로서의 기능을 갖는 것 은 연경궁 후원에 있는 賞春亭이다. 이 정자는 문종대에 세웠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문종 24 년 (1070) 夏 4 월條에 의하면 왕은 상 춘정에서 곡연을 베풀고 태자와 여러 시신에게 賞花詩를 짓게 하 였다. 고려시대의 역대 왕중에서 원립을 많이 조영한 이는 의종이다. 그는 內侍 尹彦文에게 수창궁北園에〈緊怖石築山〉 하게 하고 그 곁 에 萬壽亭이라는 소정을 짓게 하였으며 이 밖에도 많은 원정을 꾸몄다.

죽 의종이 大 內의 東 北隅에 沖虛 保1 을 세우고 그 옆에 양성정을 세움과 동시에 괴석을 놓고 名 1E 를 식재했음은 전절 〈石 假山 〉 에 서 언급한 바 있으며 동왕 11 년에는 궐동쪽에 이궁을 조영하였는데 수덕궁과 천녕전을 세웠으며 민가 50 여 區 를 헐어 太 平亭園 을 꾸 몄다. 이 원내에는 못가에 관란정을 세웠고 그 북에는 청자지붕 의 造治 亭 이 있으며 남에는 종려껍질 지붕의 幾 和 亭 을 지었다함 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 또 淸靈齋 南麗에 衆美亭을 세워 원림을 조영했다는 다음과 같 은 기록이 있다. 辛酉王微行至金身窟 設羅漢齋 還 玄化寺 與李公升許洪材覺保等 廷 舟衆美亭南池 羅飮極歡先是淸寧齋南麗 構丁字閣福曰衆美 亭亭 之南 淵 築土石肝水 岸上作茅亭 .Rn 射 蘆蓋苑如江湖之狀 廷舟其中 令小 俺 棒 歌漁唱以窓遊觀之樂 위는 『고려사 』 의 의종 21 년條에 있는 글인데 비록 자연 속에 세운 정자이지만 골짜기를 막아 :之 舟하며 즐길 수 있는 호수를 이루고 岸上에 茅 亭 을 세운 것은 하나의 조경행위이며 중미정이 나 모정은 원림 속의 중심시설임에는 틀림없다. 동년 4 월 무인일은 河 淸 節이므로 의종은 만춘정에 행차하여 연 홍전에서 재추 시신들과 잔치룰 베풀었으며, 또 정 남포에 배를 띄우고 수류를 따라 오르내리면서 서로 화창하다가 밤이 되어 파 하였다고 하였다. 이 정자는 송도의 동쪽 장단군 서면의 판적천 주변의 판적요에 있는데 남에는 淵盤을 돌리고 좌우에 송죽과 화 초를 심었으며 그 사이에 茅亭 草 樓가 무릇 일곱이나 있으며, 額 이 있는 네 정자는 靈 德 亭 , 壽 御堂, 鮮碧 齋 , 玉等亭이라 하고 다 리는 금화교 문은 수덕문이라 하였다. 亭在板積흡 初因흡亭而 營 之 內有殿曰延興 南有潤盤 左右植松竹花 草 其間又有茅亭草樓凡七 有額者四曰 靈德亭 , 壽 御堂 鮮碧 齋 玉年 亭 橋曰錦花 門曰水德 其御船飾以錦 繩 假錦爲机以爲流連之樂 窮 著 極麗 勞民빴財凡三年而成 동년 6 월條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庚午에 왕은 玄化寺에 移御하였다. 이보다 먼저 왕은 성동 사 천에 있는 龍福寺의 남쪽에 石壁이 하늘 높이 치솟아 강물에 임 하며 虎嚴에 流水가 머무르고 수목이 울창하다는 말을 듣고 內侍 李唐柱 裂衍 둥에게 명하여 그 곁에 정자를 짓게 한 다음 연복정이라 이름하고 奇 1E 와 異木울 四隅에 심고 뚝울 쌓아 호 수를 만들어 배를 띄워 놀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庚!臼 3 에 왕 은 재상과 시신들과 함께 정자 위에서 잔치를 베풀고 즐거움을 다하였다.〉 庚午 移御玄化寺 先是 王聞 城東沙川龍湖寺南 有石壁數初削立臨川 虎巖流水停瀋樹木퓰蔚 命內侍李唐柱装衍等 構亭其側 名延福 奇花 異木列植四隅 以水凌不可舟 築堤爲湖(中略) 是日與宰相侍臣案于亭 上極歡乃龍 이상과 같이 고려시대에는 대궐의 후원이나 離宮의 별당 또는 자연 속에 정자룰 세워 정적인 위락공간의 기능을 다하도록 하고 있다. 이 원림 속의 정자는 청자지붕 (養治亭), 종려지붕(養 和亭), 茅亭 동 갖가지 지붕형태를 가지고 있다. 5) 擊珪場 『 고려사 』 에 나타난 擊邸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光宗 八年 (957) 春正月 j:. 觀射于往庭 肅宗 九年 (1104} 三月巳卯 設仁王道場於會慶殿 飯僧-萬于往庭 睿宗 五年 (lllO) 春正月庚申 御 重 光殿南樓 閔神騎軍士擊穆 賜物 有差 毅宗 元年 ( 1147) 五月 丁亥 盜陳 以 言事 不報歸第 王 乃下緖杖各六接 二御史 祭 臺奉認鎖壽昌宮 北門 以禁群小出入 王遊 北園 謂左右曰 吾擊 템之技無復試矣已 而取球擊之 人莫有及者 同年 九月 甲申 太白經天二日 御西樓 觀擊往戱. 同年 十月 乙未朔 觀擊秘於西樓, 丁酉 御西樓 觀擊緖凡四日. 同年 十一月 甲申 王擊往于 北園 毅宗 二年 ( 1148) 十二月 壬戌 王擊往於 北園. 毅宗三年 (1149) 二月 選尻勇騎士 十八人 觀擊템于後庭, 三月 御

西樓 # :Jl 峽杜 . i 1 . I, I\}] (Ji 0 나 r及 t I :Jl擊佳 :.II )Lll ?:r.U 1 l lj樓 殺擊佳戱.I;!~ . 毅宗四年 ( 11 5 0 ) 九月 乙未 築佳湯于北園 十 一 月 丙申 御康安殿 命內侍 h t候 以 卜 · 峽佳 . 毅宗五年 八月 丙戌 省宰及깊信束 被 召諸腦侍命 皆不報省宰及御史大 夫先 退 王 引 騎士於後庭 伐鼓擊緖 正言李知深 { 저租力事二日 丁酉 王遊 北 園 命騎士擊往 毅宗 六年 ( 1152 ) 四月 辛巳 陳官伏閣 練擊秘不聽 毅宗 十五年 (116 2) 十一月 壬午 御佳庭 觀樂 甲申 亦 ~n 之 毅宗 十 八 年 (116 3 ) 九月 丁亥 移御志和齋 罰擊M; . 明 宗 十四年 (1184) 十一月 己 亥 設 八 關會 \ | :f視樂于佳庭 랬日 大 會 又 觀 樂于 佳 庭 . 神宗 四 年 (1201) 十月己 亥 設 百 座會于往庭 熙 宗 四 年 ( 1208) 閔三 月 乙亥 召 德陽侯怨 寧仁侯租 侍 中崔 忠 獻等 案於 樓 上 親擊往 賜 打 往者採 用 有差 十月 乙 酉 幸將軍 崔珉第 命李龍擊往 忠烈 王 十 五年 (1289) 五 月 榮未 王及公主 以 端午冥于凉樓 觀擊往 時杜丹花落 盡 以 採織 (午 花綴於 枝 條 忠 惠王 元 年 (1331) 五 月 잦未 · 王行 延 福亭 觀水戱擊往 忠 惠 王 後 三年 ( 1342) 夏 四月 戊辰 王擊往于崇仁 l J外 棋 王 十 二年 ( 1386) 五 月 榮亥 隅 率 群小 擊佳于 市 街 擊 往는 젊은 무관 상류층 청년의 무예의 하나인데 우리 나라에 는 신라시대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왔고 고려때 크게 성행하여 국 가적인 큰 오락으로 되었다. 4 대 광종 (948~75) 부터 32 대 우왕 (1374~88) 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왕들이 무사들의 격구를 관람하 거나 스스로 이룰 즐기고 있다. 특히 의종은 격구광이어서 관련 된 기록이 가장 많다. 왕이 관람하거나 직접 행한 격구장으로서 는 북원과 중광전남루, 서루, 후정, 강안전, 양루, 연복정 또는 시가의 광장동이나 대궐내에 전용구장이 마련되어 있는 듯하다. 조경적인 측면에서는 이들 격구장이 북원이나 후정 또는 누,전동 에 마련되어 있다는 것과 충렬왕 15 년 5 월條에 왕이 凉樓에서 격구룰 관람할 때 杜丹花가 지고 없을 때이므로 그 대신 採蝶 으 로 꽃을 만들어 나무가지에 장식했다는 기록을 보면 정원의 일부 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2) 客館庭園 (順天館) 順天館 은 원래 문종 (1047~ 1082) 이 창건한 大明宮 이라는 별궁 이 었으나 동왕 32 년 6 월에 송나라의 信使 安殺와 陳睦 동이 왔 올 때 순천관이라 이름하고 迎賓館으로 이용했던 모양이다. 죽 『고려사』 의 문종 32 년 6 월條 에는 〈甲寅 宋國信使 左謀大夫安 翔 起居舍人陳睦等 到禮成江 命兵部尙 書 盧旦爲篠伴 至西鄕亭 又 遣 中樞院使刑部尙 書 金描爲鐘伴 入順天館 以知中樞院事戶部尙 홉 金良 鑑 禮部侍郞李梁臣 爲館伴〉 이라 했고 또 6 월 정묘에는 〈命太子 脂順天館 導宋使至閣閣門下馬 • 入會慶殿庭〉 이라 기록하고 있다. 순천관은 송도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지금의 성균관 자리이다. 송나라의 문신 徐統이 인종 1 년 (1123) 에 사신 路允迪를 따라와 서 송도에 약 1 개월간 머물러 있을 때의 견문을 엮은 『高麗固經』 (1124)22) 에는 순천관의 공간구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22) 宜和奉使. r 麗圖經』 卷二十七, 館舍 佳細亞文化社, 高麗 Ill 經, PP.145~ 151, 1972)

외문, 내문의 양문이 있고 좌우로 30 칸의 外廊이 둘러 있다.중문 을 들어서면 좌우에 小亭이 있고 그 사이에는 三間茅屋이 있는데, 이는 예전에 秦樂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正北에 순천관이라는 額 接이 걸린 관청이 있는데 正廳은 5 칸이요 좌우 兩底는 각 2 칸이며 동서의 步段에는 모두 난간을 둘렀다. 이 정청의 좌우에는 내랑이 둘러 있었고 정청 뒷문을 나서면 중앙에 樂賓亭이라는 큰 정자가 있으며 동으로 正使가 거처하는 삼간전당과 서쪽에 부사가 거처하는 삼간전당이 있다. 또 뜰에는 화훼가 널리 심어져 있었다. 여기에서 북문을 빠져나와 고개를 넘어 100 보쯤 서북쪽으로 가면 삿갓지붕에 火珠가 정상에 놓이고 8 면에 난간을 돌린 香林亭이 산허리에 있다. 모든 軒은 산을 대하고 있으며 맑은 물이 정자를 감돌아 흐르고 喬 松名丹가 잘 어울려 있다. 또한 區松 怪石과 女羅 葛燮이 서로 映 帶하며 바람이 소술 불어 暑氣를 잊게 해주고 있다. 순천관 殿廊의 동편에는 5 칸의 淸風 OO 이 있고 그 서편에는 都轄 提轄의 삼간초옥 이 있으며 그 堂 뒤에는 梵石으로 둘러 있는 못이 있다. 산골짜기 에서 홀러내린 溪流가 이 못에 고여 차면 넘쳐 콸콸 소리를 내며

J!J 狀官位의 못에 흘 러 들 어 오고 또 이 東 池에서 넘 쳐 호 론 물은 동편 골을 끼고 홀 러 館外의 계류와 합쳐 나간다. 순천관은 『고려도경』의 기록에 의하면 館공간을 외문-중문(내 문) --정청을 중심축으로 하여 각 부속건물을 좌우대칭적으로 배 치하고 있는 구성양식이 조선시대의 客館 (객사) 의 경우와 흡사하 다. 또한 조경적인 측면에서 주목되는 것은 본관의 뒤편에 따로 세운 樂賓亭의 화원과 산허리에 세워진 향림정의 원림 그리고 관 의 동편에 있는 都 轄 과 提轄을 위한 공관의 上下池이다. 죽 순천 관은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피로를 풀며 즐길 수 있도록 정 사를 세우고 주변에 조경처리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같은 공간처리와 조경기법은 그 후의 고려와 조선시대의 客館 건 축에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3) 寺院庭園 태조의 對內政策은 될수록 전대의 幹政을 시정하는 뜻의 개혁 주의를 택했지만 교학 • 사상 및 민간신앙에 있어서는 依舊主 義 를 지향하여 이룰 유지하고 적극적으로 지키려 하였다. 불교는 그중 의 하나인데 태조는 죽위이래 이를 국교로 삼아 京내외에 많은 사원을 세우고 사방에서 명승 고덕을 맞이하여 왕사와 국사로 삼 았다. 또 태조도 불법을 신앙하는 동시에 팔관회 • 연동회와 같은 토속적인 神事를 중히 여기고 또 당시 민간에 유행하고 있던 음 양지리도참설에도 상당한 신념을 가져 산천지리의 영묘한 초인간 적인 힘에 의하여 자기의 소원을 성취하려는 일도 있었다. 태조 의 이와 같은 정신생활은 그대로 후사에게 전하여지게 되었으며 사원은 이러한 힘을 입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나 반면에 본 래의 기능과는 다른 방향으로 기우는 면도 없지 않았다. 이와 관 련하여 寺院庭園도 화려했을 것으로 생각되나 이에 관한 자료가 빈약하여 寺園의 특징을 찾기는 어려운 듯하다. 몇 가지 문헌에 서 사원에 관한 것을 찾아 보면 다음과 같다. ®大興寺 고려 태조 4 년 (921 A.D) 冬 10 월에 五冠山에 創寺하였다(『고

려사』).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져 마당을 덮고 목련이 피어 맑은 향기가 온 고을에 넘친다. 가을이면 붉은 단풍과 黃菜가 물과 뜰 에 아름답게 수놓으니 眞佳境이 아닐 수 없다. (『高麗古 8I; 김J』). ®安和寺 처음에는 태조 13 년 (930 A.D) 秋 8 월에 安和禪院으로 창건하 였던 것인데 (『高麗史』),예종 때에 安和寺로 再g l] 한 것이다.(이인 로 『破開集』 ). 『高麗圖經』 에 의하면 산허리에 샘이 있는데 맛이 달고 맑아 사 랑할 만하였다. 亭子를 이 위에 세우고 그 샘물 이름을 安和泉 이라 하였으며 주변에다 화훼와 竹 • 木을 심었고 怖石을 놓아 遊 息하며 즐기기에 알맞도록 꾸몄다고 한다. (植花丹竹木憶石 以爲 遊息之玩). ®觀濁 寺 김부식이 창건한 절이다. 절의 北山이 발가벗었으므로 근처에 사는 민간인들을 동원하여 松 • 才百 • 杉 (전나무) , 檜(향나무) 둥 의 수목과 奇花異草룰 심었다. 그리고 단을 쌓아 御室을 짓고 金 碧 으로 장식하였다. 이때 盜롤 쌓는 데는 모두 괴석을 이용하 였다(『고려사』) . 이것을 보면 관란사의 주변은 만다라세계를 방 불케 하였으며 왕이 와서 놀고 줄기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崇敎寺 충혜왕 4 년에 大護軍 朴良衍에게 명하여 崇敎園에 花木을 심게 하였다. 이에 앞서 崇敎寺의 蓮池가에 누를 세워 遊案에 쓰이도 록 하였는데 이는 嬰臣인 宋明理의 권에 따른 것이다.( 『 동국통감』) 이제현의 『樣翁 粹說』 에 의하면 충렬왕 때의 문인으로서 禮賓注 簿 겸 直翰 林院 에 있던 郭預 (1232~1286) 가 비가 올 때마다 홀로 우산을 받치고 龍化院의 崇敎寺에 있는 蓮池에 달려가 빗속의 연꽃을 감상하곤 하였는데 성자처럼 보였다고 한다. 못과루로 이루어지는 이 樓 亭 池園은 1280 년을 전후하여 만들어진 듯하다. ®花嚴寺 못가에는 爲t i h 가 우거 져 있고 階前에는 황모란이 활짝피어 마당

과 담을 누렇게 물들이고 있으며 작약도 붉게 피어 중국 월나라 의 미인 西施 를 취하게 하고 있다고 기 록 하고 있다. ( 『동국여지승 람 』 ) ®水多寺 이규보의 「次 韻惠 文長老 水 多寺 八諒」중의 「f하 池」라는 시 를 보면 荷池는 方池이고 여기에는 연이 심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荷池」 ' 幽翁入水 擊靑羅 微 動方池雅蓋荷 欲識 禪 心元自淨 秋蓮福 流 出 寒 波 이상의 6 개 사찰에 대한 기록을 종합해 보면 조경식물로서는 목 련, 황모란, 작약, 연 기타 奇花 異 草 동 꽃을 관상대상으로 하는 식 물과 松, 竹, 紅 核 檜 동 상록성 침엽수가 심어지고 괴석이 놓 여지며 蓮 池(方池도 있음)또는 池沼가 있다는 외에는 어떤 특징 있 는 양식을 찾을 수가 없다. 이같은 빈약한 자료를 가지고서는 조 경처리가 있다는 것 이상의 고찰은 어려우나 시각적인 쾌감부여 룰 위한 노력이 있었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文殊院의 南池 최근 金 • 尹 • 閔 동이 24) 강원도 춘천지방의 청평산 문수원 (청 평사) 입구 계류가에서 정원유지롤 발굴하고 보고한 바 있는 南 池 또는 影池는 고려시대 초의 禪 學者인 息庵 李資 玄 (1061~1125) 이 선종 때 (1084~1094) 입산하여 조영한 것이라 보고 있다. 이 남지는 그림 2 와 같이 상하 2 단으로 되어 있는 사다리꼴의 못인 데 上池는 동서 12m, 남북 4m 크기의 長方池이며 동서 방향의 뚝에 의하여 분할된 下池 는 윗편의 나비 10m, 아랫편의 나비 7 . 5m 이며, 남북의 길이는 14m 가 되는 無島型池 이다. 下池 안에 大小 몇 덩이의 자연석이 산재해 있으나 900 여 년전 문수원이 창 23) 李奎報 뎅遷 3 李相國渠』, (古典刊行 會 發行, 東國文化 社 印屈 u, 1958). 24) 金鎬然 尹國炳, 閔庚炫 等, 「高 麗初期에 築造된 文殊院庭苑에 관한 調査 硏究.J, 韓國庭苑學會誌, 1(1 ) :74 ~95, 1982.

설될 때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계류 의 물이 상지에 흘러 들어오면 토사는 가라앉고 맑은 물만 넘쳐 하지에 유입되도록 계획되어 있다.

► 그립 2

文殊院의 璃狀樣形池 (南池 ·-B 또는影池) 广A · 국三국 F一§7·~•- ·· · B ,:?. C »l I /tf'. 1 n1.

하지의 남쪽 끝에서 약 8 .5 m 거리에 계천이 인접해 있고 , 상지의 윗편 서면에는 약 8.7m 거리에 높이 약 0.6 5 m, 동서의 너비 약 16m 되 는 자연석에 의한 축단이 마련되어 있다. 이 단의 넓이로 보아 정 자 한 채가 들어설 만한데 만약 정자나 당사가 세워졌다면 마루 에 앉아서 池中에 투영되는 자연의 모습으로부터 무엇인가 깨달 음을 얻을 법도 하다. 이러한 경우에는 影池라는 이름이 어울릴 것이다.

► 그립 3

文殊院 南池 (윗편에서 본것)

► 그럽 4

文殊院 南池의 윗편에 축 조된 坦 과 그윗쪽에 보이는 自然石

또한 축단의 너비 16m 上池의 윗편너비 12m, 兩池의 경계가 되 • 는 뚝의 길이 l0m, 下池의 아랫편 길이 7 . 5m 로서 사다리꼴의 2 段 狀 池塘을 이루고 있으나 이와 같은 독특한 형태에는 어떤 뜻이 새겨져 있는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4) 民間)庭園 고려시대는 宮苑을 비롯하여 山水 園 林의 조영이 성행하였던 송나 라의 영향을 받아 민간정원도 내용이 화려했을 것으로 생각되나 이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당대의 權貸충에 속하는 金致賜이나 李公升. 崔忠獻. 崔璃동의 정원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간단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金致陽(?~ 1009) 金致腸은 목종의 어머니 獻 哀 _ E 后 皇 甫氏 의 외족으로서 당대에 권세가 당당하였는데 『高麗古 都徵 』 에 의하면 251 300 여 칸의 저택 을 짓고 臺 謝와 園池를 만들었는데 미려하기가 그지없었다고 한 다. 그는 성품이 간교하며 중을 사칭하고 천추궁에 드나들며 추 25) ~{I: 謙 『必 麗 · 占都徵』' (§細亞文化 ~H J, 1972), P. 2 25, 「起第至三百餘 1111 .&謝溫池窮極美麗」

문이 있어 성종 (982~997) 이 멀리 장배하였으나 목종 (998~ 1008) 이 죽위한 후 천추태후가 소환, 閣 F% 通 1 t舍 人에 이어 右僕射 겸 三司 事 에 이르게 하였었다. ® 李公升 ( 1099~ 1183) 의종 (1147~ 1170) 초에 殿中侍御史로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다 녀온 일이 있으며 벼슬이 형부상서, 동지추밀원사, 이부상서, 중 서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그는 말년에 圈中에다 茅宇를 짓고, 못 을 파고 동산을 만들어 화훼를 심었다고 한다.琦 ®崔忠獻 ( 1150~ 1219) 고려 후기의 권신으로서 좌승선, 지어사대사, 수태사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어사대사 문하시중(종일품)에 이르렀고 일생 중 신종, 희종, 강종, 고종의 네 임금을 왕위에 세우고, 명 종, 희종의 두 임금을 폐위시키는 동 권세가 당당하였다. 『 동국 통감』 에27) 의하면 희종 원년 (1205) 여름 5 월에 男山里第에 茅 亭 을 세우고, 第宅 옆에 雙松을 심었다고 하였다. 또 이규보의 「晋 康侯茅 亭 記」 에 의하면책 이 園中 에는 연당과 鴨沼가 있었고 奇商

異丹 佳木珍菓가 겨울에도 시들지 않고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 고 있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金致陽,李公升, 崔忠獻 동의 大權 貴 들이 조영한 정원은 매우 화려했을 것으로 생각되나 더이상의 자세한 기록이 없어 보다 구체적인 특징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다음과 같이 奇 洪 壽 (1148~1210) 의 정원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한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의 민간정원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돗 하다. 26) 田治六郞 「高麗時代11)庭園」, 日本造園雜誌 3(2):13, 1936.

@奇洪壽 (1148~ 1210) 기홍수는 고려의 명종, 신종, 희종 둥 3 대에 걸쳐 무관으로 이 름을 날렸는데 추밀원부사, 판병부사, 판이부사, 문하평장사 둥 을 지낸 후 말년에는 관에서 물러나 음악과 독서로 소일하였다. 그는 비록 무인이기는 하지만 문인다운 면이 있었으며 원림을 꾸 미고 갖가지 화초와 애완동물을 기르면서 살았다. 이규보의 「奇 尙 합 退食齋八諒」은 기홍수의 원림에 관하여 비교적 자세하게 언 급하고 있는데 그 前文과 八諒올 다음에 옮기고자 한다. 전문인 「井引」은 조경에 관련된 부분만 뽑은 것이다. 〈奇尙 書 退食齋八諒 井引〉 2, 옛날에는 풀 우거진 길이고 이끼낀 뜰이었는데 지금에 와선 노래 하는 臺이고 춤추는 館이로다. 靈泉이 항상 솟아나 조그마한 티끌 도 섞이지 않으며 얼룩기둥 사이로 힘차게 흐르고 푸른 바위 밑으로 새어 떨어지니 넘실넘실 출렁이는 물결은 쪽(藍)이 아니건만 푸르 고, 냉냉하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아니어도 잘 어울린다. 이미 蓬

萊 磁洲의 園固에다 또 菓文 許由의 衣冠올 갖추었도다. 몇 그루 서늘한 대 (數 殿 凉竹)는 풍우의 하늘을 연상케 하고 한 조각 떨어진 꽃은 신선의 경계를 드러내도다. 세 송이 杜丹꽃과 아홉 송이 舊蒲 꽃이라. 이에 수레와 일산이 문을 메우고 술과 안주가 소반에 가득 하여 구슬항아리의 九猛酒룰 따르고 옥도마의 팔진미 를 차려 내는데 門下에게 지체함이 없도록 훈계함은 鄭司農의 門客을 좋아함이고, 자리가 항상 가득함을 일컬음은 孔大夫의 來賓을 기뻐함이로다. 맑은 날씨가 포근해지고 좋은 바람이 가볍게 불어오면 푸른 소나무 에 기대어 두건을 젖히고, 흐르는 물에 둘러앉아 술잔을 띄우면서 蘭亭의 봄修釋를 그리워하고, 河朔의 피서하던 술잔을 상상하리. (中略) 새 연꽃이 물에 솟아 오르고 늘어 진 버 들 (垂 Wll) 이 난간에 닿으면 붉은 비단 날개새 (紅衣錦羽之*) 들이 玉沼에 떴다 잠겼다 하고 누른 부리 푸른털 새들이 금우리 (金籠) 에서 지저귀도다. 眞定 (地名)의 甘梨를 옮겨오고 房陵의 남색 오얏나무(標李)를 심었구 나. 맞이하는 돗 취한 듯 뻗은 듯 기는 듯한 나무들은 杜牧의 동산 에 무리를 지었고 가는 돗 달리는 듯 움직이는 돗 엎드린 듯한 돌 29) 민족문화추진희, 『국역동국이상국집』 I, 1980

들 은 奇章의 들 판에 줄을 나란히 해 마치 藏春 K g속으로 영접받아 들 어가고 自雨건 t 앞에 노는 듯하다. (이하 생략) 만약 棒玉閣 서문에 落없의 한 귀절이 없었거나 謝公에게 池塘春 1 , t · 의 귀 절 이 없었더라면 청산 이 교제 를 끊으려는 의논 을 퍼뜨리고 꽃다운 나무가 비웃는 얼굴을 나타낼테라. 부질없 이 한 편의 시 를 읊어 공손히 八妹 을 올리노라. 退食齋(命 予 名齋 其餘皆公所傍) 酷용林泉訪廟 n 久組情ifii損天f1 1 唯公別占 風流地 朝退 11 判時載酒過 었泉洞 었派來從石行深 一條 · 7& it粹球塚 愛泉頂超那輕說 諸得餘淸벗洗心 漁暑亭 傍狩凉竹綠陰桐 燒座寒泉奭 氣 浮 每至 l j 三 庚 金伏 H 此 亭淸 冷倍如秋 獨樂園 一泉寒水呼隣吸 滿楊淸風共容分 唯有名園靜中樂 不着容易使人11! 1 燕熱堂 一堂虛白映山明 隱凡 冥 觀漁世情 谷鳥那能暗破寂 心空萬物本無聲 i連佐1 池 碧水無端滿曲池新荷數染樣雄隣 愚公莫憶江湖}* 看取鷲鷲得;[時 綠笛軒 萬樹前頭似一般 唯知歲i섭獨凌寒 諸公用 .CT: 勤封植 莫作 {E 前舊眼看

太湖石 揚歷鷲行四十年 有時淸夢親 雲 炯 從今莫起靑山想 天遺荊盧落眼前 ® 李奎報 (1168~1241) 이규보는 기홍수의 퇴식재 원림을 시적으로 잘 표현하 고 있다. 계류가 흐르고 자연경관이 좋은 곳에 터를 잡았으며 여 기에 退食齋룰 비롯하여 勝王閣, 漁暑 亭 , 燕熱堂, 綠均軒 동 많 은 건축물을 세웠고 영천과 연의지 (연이 심어진 曲池)를 만들었으 며 竹 垂胤 靑松, 李, 甘梨, 杜丹, 荷, 舊蒲 둥의 佳木異井룰 심 었다. 또 뜰에는 갖가지 새와 진기한 짐승이 길러지고 있었는데 『동국이상국집』에 의하면 공작, 앵무, 원숭이 둥이 있다. 이와같 은 퇴식제원림은 규보의 표현처럼 仙境임에는 틀림 없는 것 같다. 『이상국집』의 後集 卷 1 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過故奇相國林泉 (今爲他有) 相公짬此日開篠 一潟靑錢俺百千 爲問華堂誰幻出 不如茅樹舊天然 (公架茅亭於池上 環坐飮酒可愛 今以華屋換之) 규보는 홍수보다 20 세 연하인데 이 시를 쓸 당시에는 고인이 된 홍수의 퇴식재는 이미 타인의 소유가 되었으며 池上의 모정만 아 옛 주인을 생각하듯 쓸쓸하게 서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규보는 대문장가이기도 하지만 원림에 관해서도 관심이 대단하 였다. 그것은 그의 문집 중에 40 여 종의 조경식물이 나타나 있으 며“ 스스로 정원을 꾸미고 즐겼다는 것이다. 갑인년 (1194 년, 27 세때) 에 쓴 면里小園記』 에 의하면 上 • 下園에는 小池가 있고 止 止軒이 있으며, 장미, 복사꽃나무, 살구나무, 자도나무, 능금나 무, 丹佳 竹間 瓜, 溪, 鳳祥花 둥이 나타나고 있다. 또 34 세때 쓴 『四輪亭파(卷 23) 는 매우 기발한 생각으로서 그가 설계한 四輪 亭은 그늘진 곳을 따라 옮기면서 정자 안에서 글을 읽고 술을 마 시며 바둑을 둘 수 있도록 고안된 이동식 정자이다. 30) 鄭謙旺 「東國李相國集의 造景植物考J, 演習林報告. 5 105~ 12, 1982.

이상에서와 같이 제한된 네 사람의 정원을 놓고 살펴본다면 대개는 원내에는 정자가 세워지고 못이 있으며 奇 花 異草 가 심어 지고 있다. 특히 李公 升의 정원에는 동산을 만들고 화훼 를 심었 다고 했는데 못을 팔 때 나온 흙으로 동산을 만든 듯하다. 또 최 충헌의 男 山 里 第와 기홍수의 退食 齋 에는 錦羽를 갖는 물새가 길 러지고 佳木, 珍 菓 가 심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면 당시의 權貸들 의 정원내용은 풍부했으리라고 생각된다. 5) 造景植物 정원은 관상과 휴식을 위해 꾸며지는 것이라면 그 공간을 구성하 는 材料는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材料라하면 土·石. 木 둥이 있으나 살아 있는 식물은 빠져서는 안될 기본적인 요소 가 된다. 저자는 이미 「韓 國 造景 植物의 史的考察」과 「東國李相 國菓 의 造景 植物考」 동에서 고려시대의 조경식물에 대하여 고찰 한 바 있다. 여기에서는 I) 『 동국이상국집 』 의 造景植物考와 2) 고려시대의 조경식물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1) 『東國李相國集』의 造景植物 고려시대에는 많은 원림이 꾸며졌지만 당시의 원림의 구성내용 이나 특징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한 문헌을 찾기 힘들며 조경식 물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고려시대의 대문 호인 李奎報 (1168~ 1241) 가 남긴 시와 문장은 고려시대의 조경문 화를 연구하는 데 대단히 귀중한 자료가 되어 주고 있다. 여기에 는 당시의 大勢道家인 최충헌을 비롯하여 많은 權 貴 들의 원림이 소개되고 있으며 조경식물이 40 여 종이나 등장하고 있다. 규보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인 允緩의 別業원림 속에서 생활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원림을 조영하였으며, 그가 34 세가 되던 해에는 이동식 정자라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담긴 『四輪 亭 記』를 내놓을 정도로 편리하고 쾌적한 휴식공간에 대한 관심도 컸었다. 이와 같 이 『동국이상국집』은 원림연구에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지만 본고에서는 조경재료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식물재료를 연구의 주 대상으로 하고자 한다. 본저에서는 고전간행회의 영인본인 『동국이상국집』을 3° 중심으

로 하여, 여기에서 고려시대에 식재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조경식 물을 찾아내고 그 도입경로 또는 원산지와 이용상의 특징 둥에 대하여 고찰하기로 한다. 『동국이상국집』은 이규보가 남긴 각종 작품을 그가 병들어 누 워 있을 때 (1241) 최충헌의 아들인 佑(朗)가 모아 판각케 한 것 을 규보의 아들인 油이 편집하여 간행한 것뇨로 전집 41 권, 후집 12 권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들린 것과 빠진 것이 많아 1251 년 (고종 38 년) 에 손자 益培 가 개수하여 분사대장도감에서 간행하였 다. 근세에 이르러 1913 년에 경성고서간행회 에서 활판본 국판 • 布製 839 면을 발행한 바 있으며 최근에는 1958 년에 동국문화사 에서 고전간행회편으로 국판 572 면의 영인본을 刊行 하였고 1978 년 12 월에는 민족문화추진회 발행으로 『국역 동국이상국집』 3 권 이 나오게 되었으며 이후 연차적으로 나머지도 간행되고 있다. 『동국이상국집』 의 조경식물에 대해서는 尹 이 31) 모란, 작약, 石 權花, 杜腸花, 攻魄, 蓮, 菊, 石竹花, 萱草, 槿花, 黃蜀英, 鷄冠 花, 四季花, 紫薇, 海業, 玉梅, 鳳翔花, 李花, 木筆花,百葉桃, 金錢花, 地業, 瑞祥花, 酸醉草, 御留花, 冬柏, *竹桃, 石葛蒲, 대나무 동 29 종을 보고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金錢花, 地業, 瑞 祥花, 酸醉草, 御留花 둥은 同定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韓國 造景植物 의 史的考察 F) 에서 35 종을 보고한 바 있으나 臘梅 처 럼 同定이 잘못된 것도 있다. 본고에서는 좀더 깊이 있게 다룬 결과 44 종의 조경식물을 찾을 수 있었다. 이규보의 문집 속에 나타나 는 조경식물을 문헌에 나타나는 순서에 따라 적어보면 표 l 과 갇 다. 표 1 에서와 같이 『동국이상국집』에 나타나는 조경식물수는 44 종에 이른다. 이 가운데서, 桃, 李,梅, 蓮, 梨,杏, 杜丹, 柳, 柏, 松, 竹 둥 II 종은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부터 심어져 온 것이며 街藥」亂 菊, 檜, 槿 동 5 종은 고려시대의 다른 문헌 (高 麗史』, 『동국통감』, 『동사강목』, 『파한집』 동) 에 1100 년대의 식물 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상국집 』 에 새로 나타나는 식물의 종류는 28 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식물을 문헌에 나타나는 차 31) 尹國炳 『造였學』. 一潮 00. PP.2 5 7~8, 1978. 32) 鄭脈Bf. 「韓國造景植物의 史的考察」. ' 演習林報 2, PP.1 7 ~55, 197 7.

표 1 동국이상국집의 조경식물 겔番號 植物名 出現卷次數 ( ) 內는 回數 數出t現 文出獻現上年最代 初 I 桃 前 3,4,5(2),7, 9, 13, 18, 1&3(2), 8 H B.C 16 2 李 前 2, 3, 9, 13, 14, 18 6 16 3 梅 前 I ,7, 10, 11, 13, 18,1 f 9 7 A.D 41 4 蓮 前 2(2 ) , 3, 6, 9, 15, 23, 後 2, 5 9 123 5 梨 前 ),2,6, J O,13 5 546 6 否 前 1,3,10,13,/b,3(2>,9 . 8 C 600 7 牧 丹 前 2, 4 , 10,13(2),17(2),18 後 3 9 C 630 8 柳 (楊) 前 1 , 3(3) , 6, 12(2) , 13(2), 18, 23, 後 2, 3, 8 14 634 9 柏 前 2 I 730 10 松 前 2(2),3,5,6(3), 7, 11, 13, 14, 18, 23, 24, 後 I 15 801 11 竹 前 l, 2(4), 3,S , 6,7( i),9 , ll ,12,14(2), 16, 18,23, 20 801 後 I,II 12 石 竹 前 I I 11405 13 荷藥 前 4 ,16 , 後 I , 3 1147 14 楠 前 6,7,9 3 1151 15 菊 前 6(3),7,l I ,12,13,l4,18(2> f& I ,2,3,4(2)5(4),6, 24 1163 7(3),1 1 16 檜前 5 I 1165 17 熹 前 9 I C 1200 18 槿 前 14 ' I 1241 19 桐 前 l I 1241 20 薔 薇 前 2,5 後 3 3 1241 21 葛 蒲 前 2 I 1241 22 垂 셈 P 前 2,14 2 1241 2243 蘭撲 前前 33,,71,11,61,31 7 後 2 35 I,,I 25 楓 前 6(2) 2 II 2276 瑞四祥季花花 前前 77 ,11 2I I,,I 28 石 舊蒲 前 7,13 2 II 29 金錢花 前 II I 30 菜 前 12 I II 31 蒲 桃 前 12 I II 32 木筆花 前 12 I 33 書帶草 前 12 I 34 海 業 前 13,16 2 II 35 林 愼 前 13 I 36 瓜 前 13 I ’’

番一號連 植物名 出現卷次數 ( ) 內는 回數 溫겹 文出獻現上年最代高 37 黃蜀要 前 14 I II 38 찾(蜀蔡) 前 16, 18 2 II 39 冬 梧 前 16 I II 40 地 梁 後 2, 3(2) 3 II 41 御 留 後 3 I II 42 玉 梅 後 3 I II 43 鷄 冠 後 5(3) 2 2 II 44 鳳翔花 後 17 I II

례에 따라 간단히 고찰하고자 한다. 본고에 있어서의 학명과 원 산지 그리고 식물의 한자명 해석에는 鄭台鉉의 『韓國植物固鑑』 (1957 年 新志社刊), 李昌福의 『大韓植物圖鑑』 {1980 年 鄕文社刊), 牧 野 『新日本植物圖鑑』 (1961 年 北隆館刊), 중국과학원의 『中國高等 植物圖鑑』 {1976 年 科學出版社刊) 둥을 참고하였다. ®桃 문헌상 삼국시대에 가장 일찌기 나타난 조경식물이다 (B.C 16) 『이상국집』 (이하 『東國李相國集』을 『李相國集』으로 약기한다) 의 5 권에서는 규보의 鷲溪草堂의 원림풍경 중에 (복사나무 옆에 푸 론 대나무를 식재하였다 (傍桃裁琴竹)〉는 섯구가 있고 4 월 11 일에 원림을 거니는 중에 도화가 다 지고 귀리와 아욱만 눈에 뜨인다. (桃花淨盡 但見鷲麥與兎꿈) 는 글이 있다. 중국원산종으로서 삼국시 대부터 나타나고 있댜 ®李 백제의 온조왕 3 년 (16 B.C ) 에 桃李가 개화하였다고 하였는데 『이상국집』에서도 桃와 李가 함께 기록되어 있는 곳은 4 권의「木 荷藥」 詩에서 〈禁園桃李潭無色〉 이라 하는 것과 18 권의 「晋陽侯 集其 日 上番門客之姓 爲韻 (……) 」 의 〈安數粉粉桃與李〉 인데 모두 비유적으로 등장시킨 것이다. 과실에 대하여도 12 권의 「六月二十 日 久雨忽晴」 에 〈朱李倒紅鹿〉 라는 표현으로 나타나 있다. 2 권에서 는 奇尙書의 퇴식재에 관한 것이고, 4 권에서는 禁園, 그리고 18 권에서는 晋陽侯家에 관한 기록이다• 중국 원산종이다.

®梅 고구려의 太武神王 24 년 (A.D 41) 條에 처음으로 나타난 바 있 는 중국원산의 낙엽활엽수이다. 『동국이상국집』에는 8 회 나타나 고 있다. ®蓮 1 권의 水多寺 「荷池」에서의 〈幽袁入水擊靑羅 微動方池雅蓋荷 欲識禪心元自淨 秋蓮躍副出寒波〉, 3 권의 「開國寺池上作」에서의 〈仙人掌重蓮承露〉, 15 권의 「夏 日 開國寺尋僧不遇 池上作」에서의 〈露商靑荷樣水銀〉과 같이 주로 寺內의 원지에 심어진 연에 대하 여 읊은 古律詩가 있고, 기타 기상서의 퇴식재원림에 있는 蓮검 5 池 (曲池)와 晉康公茅亭記 그리고 李侍郞 需의 「諒黃紅靑三色」의 운에 따라 지은 시 속에 연이 나타나고 있다. 기록상으로는 신라의 금성에서의 민가와 宮北의 치청 속에서, 또 봉성사의 田中에서 그리고 오대산 중에서 우연히 연이 나타났 다고 하는 것이 최초이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이러한기 록이 어느 정도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여하튼 조경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이상국집』의 기록이 처음인 돗하다. ®梨 고구려의 양원왕 2 년 (546A.D) 2%l에 〈王都梨樹連理〉라고 하는 『삼국사기』에서의 기록이 처음이다. 『이상국집』에서는 @] 나타 난다. 1 권의 古律詩 『天 壽 寺門」에서는 〈滿地梨花白雪繁〉이라 했고 II 권에는 〈沃野縣客舍 次韻板上蔡學士寶丈梨花詩〉가 있고, 13 권에서 는 「八月 見梨花忽開二首」라는 古律詩가 있다. 梨花라는 표현으로 보면 관상목적으로 식재된 중국원산종인 Py r us monta n a var. Rehderi N 야 a 타· 생각된다. 또 2 권의 「奇尙書退食齋八諒 井引」 에서는〈移眞定之甘梨〉 라 했 는데 중국의 진정지방에 산출되는 감리는 크고 맛 좋기로 유명한 것이다. 당대의 권신인 기홍수 (1148~1210) 로서는 중국원산의 감 리 정도는 능히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감리의 학명은 Pg m s ussurie n sis var. culta 로 생각된다.

@ 杏 『삼국유사』의 제 3 권 塔像 「惠通降龍」에 〈山桃溪杏映籠斜〉라 한 것이 처음의 기록인 듯하다. 『이상국집』에 8 회나 나타나고 있다. ®杜丹 삼국시대의 진평왕대에 도입되었다는 『동국동감』과 『삼국유사』 의 기록이 처음인 듯하다. 『이상국집』에 9 회나 나타난다. 18 권의 古律 詩 「晋陽侯 集其 日 上番門客之姓焉韻命 門下詩人益 賊冬 日 杜丹 予亦和進一首傍韻自押」에 (f'버有名花誰所種 白則豊山紫大宋〉이라는 섯구가 있다. 죽 모란에 白 • 紫의 두 가지 품종이 있는데, 전자 는 豊山이고 후자는 大宋種이라는 뜻이다• 後集 3 권에서는 「次 韻諸君所賊山呼亭 杜丹 井序」에 이르기를 內殿의 산호정에 모란 이 성개하면 모란을 시제로 하여 지은 글이 수다하여 百首에 이 른다고 하였다. 그런데 산호정의 모란은 자색이다. 木島는' 중국에서는 수의 양제 (605~616) 가 원예화 했으며, 일 본에는 평안시대의 중기 (1 0 세기) 또는 그 이전에 발해국으로부터 도입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샘 0, ® 垂柳 『이상국집』에 柳는 1~] 나타난다. 정태현은' 柳와 楊셉 P 를 동 종이 라 하고 학명을 Salix Koreansis Anderson 이 라 하고 있다. 楊셈 P 는 백제의 무왕 3 5\j (634A.D) 에 조영한 궁남지의 四岸에 식재 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처음일 것이다. 한편 『이상국집』에서는 垂柳에 대한 시문도 나온다. 2 권의 「奇 尙書退食齋八ii](井引」에 〈新荷出水 垂柳低軒〉, 죽 새 蓮葉이 물 위에 떠오르고, 늘어진 버드나무가 처마 밑으로 내려온다고 하였 고, 14 권의 「春日訪山寺」에서 〈風和日暖鳥馨噴 垂柳陰中半俺門〉 이라, 죽 〈화창한 바람 따뜻한 날 새들은 지저귀는 데 능수버들 그늘 속에 문을 반쯤 닫았네〉하였다. 垂셈 P 는 한국자생종인 Salix P;eudo-las i喝,ne Leve i lle( 능수버들)로 同’足한다. 鄭에 의하면 l 능수버들은 한국의 전지역과 중국의 강 33) 和島J.1.:-X. !j.木風與誌, @ 社) .] -, u ,i.: r 幽伐新知識, ’ + 4 種 苗, 1976. 34) 鄭台鉉, 『韓國植物隣鑑』上, 新志社, P.3 7 0, 1957. 35) 鄭台鉉, ,i~t局바, P.3 6 374

소 및 남경지방으로부터 만주지방까지 분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시문 속에 나오는 柳는 모두가 Salix Koreans i s 라고는 할 수가 없으며 능수버들도 柳라 통칭할 때가 있을 것으로 생각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垂柳라 기록된 것만 능수버들로 취급 한다. @柏 2 권의 「次韻 惠 文長老水多寺八諒」에 柏릅f에 관하여 읊은 古律

詩 중에 〈높게 자란 푸른나무 중천에 솟았는데 (高卓잡憶挑半天)〉 이 라는 싯구가 있는 것을 보면 Bi ot a orie n ta l is var. str i c t a Endl . 라 생각된다. 중국이 원산지이다. r 삼국유사』의 5 권 避隱에 보면 효성왕 (737~741) 의 潛邸時에 현 사信忠과 함께 궁정의 梧樹下에서 바둑을 두었다고 하였는데, 삼 국시대에 이미 정원수로 식재된 듯하다. 周시대에는 백수가 왕자 의 기념식수종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 松및盤松 1 회나 나타나고 있다. 대개는 靑松에 관한 것이지만 後 集 1 권 의 古律詩에서는 「松花」라는 제목도 있다. 품종별로는 赤松인 Pi nu s densif lor a sie b . et Zucc. 가 되겠지만 23 권의 『晋康公茅亭 記 』 와 24 권의 「桂陽 草亭 記」에서는盤松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 을 보면 고려시대의 정원에 반송이 식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盤松 의 학명 은 Pi nu s densif lor a var. g lobosa Mayr . 이 다. @ 竹 일본의 동경제국대학교수인 中井猛之進은 조선총독부 임업시험 장의 위촉을 받고 한반도에 분포해 있는 竹科植物을 조사하여 자 생종으로서 다음과 같이 7 종을 보고했다. ' 이 대 Pseudosasa jap o nic a ( sie b . et zucc. ) M 야i no 고려조릿대 Sasa coreana Nakai 섬 대 Sasa Kurii en sis Makin o et. Shib a ta 36) 中井猛之迫 「朝 鮮 森林植物 編 」, 第 20 輯 朝鮮總 督 府林 業 試驗場, PP.I - 55, 1933

제주조릿대 Sasa q,u elpa erte nsis Nakai 갓대 Sasamorph a Chii san ensis Naka i 괴주조릿대 Sasamorph a gr acil i s Naka i 조릿대 Sasamorph a pur pu r ascens var. borealis (Hacke[) Nakai 한편 中井은 왕대나무 (王竹), 솜대나무 (淡竹) 烏竹 (苦竹), 斑竹 둥은 중국원산종으로서, 도입 식재된 것이라 하고 있다. 또 孟宗 竹은 중국원산종이지만 .1 73 61;j_경 일본에 도입 식재된 것이며, 한 국은 일본인들이 식용목적으로 옮겨 심은 것이고, 海藏竹도 중국 및 일본에 분포하고 있는 것인데 오래 전에 일본에서 가져와 심 은 것이라 하고 있다. 그런데 개성지방에 자생하고 있는 것은 조 릿대뿐인데, 이 종류는 정원에 심었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이상 국집』에 나타나는 竹에 관한 표현을 적어 본다. 〔前集〕 卷 1 古律詩 奇尙 합 林塘 次古人韻. 〈第近走狂陵〉 卷 2 古律詩 ®〈次韻 惠文長老 水多寺八諒〉 竹閣에서 〈齊膜雪重立庭 中〉 ® 奇尙 書 退食齋八泳 井引 〈數菜凉竹〉 〈傍窟凉竹綠陰 OO 〉 〈綠 笛軒〉 ® 同文長老訪尹學錄世儒家 主人與文公次古人韻作詩 予亦次韻 〈甲 第深深竹撲階〉 卷 3. 古律詩 六無奈何 〈婚然竹外斜〉 卷 5. 古律詩 卜 居賜溪 〈傍桃裁琴竹〉 卷 6. 古律詩 暮入幽谷驛 與金君欽酒贈之 〈 r, 外靑松如我度 階前綠竹 似君賢〉 卷 7. 古律詩 ®和宿德淵院 二首 〈竹虛同客性〉 ® 次韻和崔相國說 和 黃郞中題朴內園家盆中六泳 竹偉i中尙有湘江意〉 卷 II. 古律詩 四季花 〈松眞竹悼小柔姿〉 卷 12 古律詩 重遊龍潭寺〈竹嫌消敵千無-〉 卷 14. 古律詩 ®次韻文長老聞友人彈琴 〈寒飯松監月 靜落竹階風〉 @) 潭竹 〈小庭移稚竹〉 卷 16. 古律詩 諒爭 〈此君臼助抗〉 卷 18. 古律詩 晋陽侯集其日上番門客之姓焉 (……) @재위松竹成三友〉 卷 23. 記 晋康侯茅亭記 〈響落竹外想覽 天洞府〉

(f~染〕 卷 I. 古律詩竹第 Q[肖lj珉許 高 百尺〉 卷 I I. 記 朴樞府有 嘉堂 記 〈有竹無慮四十餘本〉 『이상국집』에 나오는 竹에 관한 표현은 위와 같은데, 여기에서 徵菜凉竹〉이라든가 億澄拜軒〉 〈竹雅階〉 둥에서 보면 偉릿대〉 아 니면 〈이대〉와 같은 細程種일 것같이 보이나 (I' 1 外 靑 松如我峴 階 前綠竹似君〉이나 〈寒敵松監月 靜落竹階風〉과 같이 竹을 松과 상 대적인 위치에서 비교하고 있다든가 Gi削珉許 高 百尺〉등에서 본 다면 太程竹인 淡竹 緯竹)일 것으로 보인다. 또 7 권의 「固中尙有 湘江意」에서 〈湘江意〉라면 소상강의 斑竹과 舜王의 二妃인 峨皇 과 女 英 과의 관계를 말하는데, 여기에서의 斑竹이란 Phy ll osta c h- ys nig r a j. borya na Mak i no 이다. 그러나 실제로 斑竹을 심었다 면 〈竹〉이라 하지 않고 여 E 竹〉이라 했어야 옳았을 터인데 竹이라 고 한 것을 보면 보통의 竹類룰 말한 듯하다. 이와 관련된 이인 로 (!152~1222) 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潘 湘夜雨 - 雙 明 齋 이인로 一帶蒼波雨岸秋 風吹細雨洞歸舟 夜來泊近江邊竹 葉 葉 寒 聲 抱是慈 이상과 같은 내용에서 볼 때 고려시대의 정원에 식재된 죽류는 야생종인 조릿대나 이대와 같은 細程種이거나 太程種인 솜대나무 Phy ll osta c hy s nig r a f. henonis Muro i가 아닌가 한다. 솜대나무 는 중국을 원산지로 하고 있으나 언제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는지 는 불명이다. 이대나 솜대나무류 (솜대. 鳥 竹, 斑竹 등)는 비교적 내한성이 강하여 입지와 보호대책 여하에 따라서는 개성지방에서 도 생육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 石竹花 1 권에 다음과 같은 古律詩가 있다. 節肖此君高 花開兒女堯

霜강不雨秋 爲竹能無溫 節은 此君(竹)처럼 높고 더하여 兒女들의 예쁜 얼굴처럽 아리 따운 꽃을 피우지만 서리를 이겨내지 못하니 〈石竹〉이라는 이름 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石竹花에 관해서는 고려의 仁宗時 에 樞密院 知奏事를 역임한 鄭 襲明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石竹花 鄭襲明 世愛杜丹紅 裁培滿院中 誰知荒草野 亦有好 1E 菜 色透村塘月 香傳瑠掛風 地但#公子少 橋態屬田翁 石竹科의 패랭이꽃 類 에서 개성지방에 자생하고 있는 것으로는 술패랭이꽃 D i an t hus Sup e rbus L. 이 있고, 중국 원산종인 Di an t · hes chin e nsis L. 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석죽이라고 한 다. 정습명의 시에서 본다면 전자에 속한 것으로 생각된다. @巧藥 최초의 기록은 이인로의 『破閑集』에 나타난다. 아시아대륙 동 북부의 원산으로 학명은 Paeonia albi flor a J. horte nsis Makin o 이다. ®權 『고려사』의 의종 5 년 (1151) 6 월 조에 먼저 나타나고 있다. 『이상국집』에서는 3 회 나타나는데, 그중 9 권의 고율시에 〈已未 五月 日 知奏 事崔 公宅 千葉協花盛開〉에 즈음하여 〈千葉瑠花〉에 대 한 규보의 試가 있다. 千葉瑠花는 학명 Punic a gr anatu m J. Pleni- flo ra Hay ne 이다. 소아시아산으로 아마 송을 통해 들어온 듯하다• ®菊 『고려사』의 의종 14 년 (1163) 에 후원에서 賞菊했다는 기록이 처 음인 듯하다. 『이 상국집 』에 2G] 의 출현으로 출현수에 있어 으뜸

을 차지하고 있다. 품종수는 많을 것으로 생각하나 기본종은 중 국원산종인 Chrys anth e mum mori( o liu m Rama t uelle 이 다. @檜 『동사강목』의 의종 19 년 (I165) 4 월에 관란사 주변에 松柏杉檜롤 심었다는 것이 처음의 기록인 듯싶다. 檜柏이라고도 한다. 『이 상국집 』에 서 는 5 권의 古律詩 「 卜 居뾰溪 偶 書 草堂」에 洞에 老 檜가 있기 때문에 檜洞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회 또는 檜柏이 라고도 하는데, 재래종인 향나무 Jun ipe rus chin e nsis L i n n.를 말 한다. @槿 고려시대의 문헌중 『동국이상국집』과 최자의 『보한집』에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나고 있다. 『 이상국집』에서는 14 권의 古律詩 「次韻文長老朴 還 古論槿花 井序」에서 취급되고 있다. 죽 長老 文 公은 槿을 無窮花라 하는 것은 이 꽃은 끝없이 피고 진다는 뜻에 서 나온 것이라 하며 朴還古는 〈무궁화〉는 無宮의 뜻이니 옛날 어떤 임금이 이 꽃을 매우 사랑하여 온 궁중이 무색해졌다는 것 을 의미한다고 하여 서로의 논쟁에 결판이 나지 않으므로 규보는 백락천의 시에서 운을 따 賊하고 이에 和하게 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시로써 그의 견해를 말하고 있다. 此花片時榮 尙矢一日久 人嫌似浮生 不忍見落後 反以無窮名 l 尙可無窮有 죽 이 꽃은 하루도 지탱하기 어려워 잠시뿐이니 이는 마치 허 무한 인생과 같아 떨어진 꽃 차마 보지 못해 도리어 無窮이라 이 름했지만 그러나 과연 無窮토록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고 있다. 무궁화는 중국과 인도를 원산지로 하는 낙엽관목인데 오래전부 터 도입된 듯하다. 학명은 Hi bi s c us syr ia c us L. 이다 37) 牧野富太郞 『新日本植物溫鑑』, 北隆館, P.388, 1961 .

@ 熹 9 권의 古갑냐寺 「 萬居天龍寺有作 」에 〈 1 短葉當窓鳳尾長〉 이 라는 싯 귀가 있다 . 苑 죽 色魚 Musa Basjo o Si eb . 는 중국원산으로서 고 려의 『五童始戱鏡』속에도 새겨져 있으며, 崔滋 의 『補閑渠』 에 있 어서도 文安公 兪升旦이 趙文正公의 獨樂園唱和詩에 화답한 시 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보면 1200 년을 전후하여 송으로부터 도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 ®桐 1 권 古律詩 「 諒桐」 은 다음과 같다. 漠漠陰成惟 켕盟葉散圭 本因i',.훼鳳植 空有衆廊梧 죽 오동나무를 심은 뜻은 봉황새를 맞이하려는 것인데, 잡새들 만 모여들고 있다는 내용이다. 수종은 황해도와 경기도. 이남에 분포하고 있는 Pawlownia tom ento s a S t e 떠 el 인 듯하다. 리는젝 문헌에 기록된 것은 物譜일 뿐이다라고 하였으나 이와 같이 고려 시대의 『 이상국집』은 물론 이인로의 『파한집』 (1260) 에도 印 1'} 의 시 「草堂秋七日 桐雨夜 三更 」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이 미 정원에 桐이 식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桐의 꽃은 자색의 筑狀 花로서 그 花色이나 花形이 다른 식물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을 지 니고 있어 봉황이 찾아드는 瑞祥花木으로 생각된 듯하다. @薔薇 『 이상국집 』 에 3 회나 나타나고 있는데, 고려시대에서 처음 보는 기록이다. 2 권에서는 「飮家園 薔薇下 贈全履之」 라는 제하에 시를 지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去年에 장미를 심을 때도 술을 마셨는 데 지금 꽃이 한창 피었기에 술을 들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적 고 있다. 또 5 권의 古律詩에서는 〈四月十一日 與客行園中 得薔薇 於波薄間 久爲凡丹所困 生意蓬微 予Jl ll iili草封植 埋以土擇以架 後 數 日 見之 葉班繁茂 花亦華盛 於是因物有感 作長短句 以示全履之〉 라 하고 있다. 내용인죽 4 월 11 일에 객과 함께 동산을 거닐다가 38) 리휘재. 『한국동식물도감』, 식물편 (화훼류 II ), 문교부. PP.514~6, 1966

잡초 속에 시달려 생기 를 잃고 있는 장미 를 발견하고 곧 잡초 를 제거하여 흙으로 북돋아 주고 시렁으로 괴어 준 지 며 칠 이 지나 가보니 잎이 벌써 무성하고 아황색 꽃도 활짝 피어 향내 를 풍기 고 있었다(湘英姑 否 虎) 고 하는 것이다. 後tt 3 권에는 다음과 같 은 시가 있다. 苦薇 樣院煙追綠暗 I B I 巧粧 金 粉 嬪抵顔 莫 因 帶 刺 爲花累 意欲 防人取 次宗 (樂天云 荊薇帶 刺 宗應 ffll) 한편 중국의 고서에 의하면피 釋 名에서는 〈 菩薇 山刺 牛勒 刺 花 〉 라 했고, 本 草學 者 李 時珍은 〈쭙薇 野 生 林 莖 間 春 抽 徹萊 小 兒招 去 皮刺 食之 班長則成 菜 似 .썼 而莖硬 多 刺 小葉尖薄有細齒 四 五 月掛H E 〉 라 했으며 高 期의 山 亭夏 日時에서는 〈水晶 廉 動微風起 一 架菩薇 滿 院香 〉이라 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기록은 『 이상국집』 에 서의 〈장미〉 의 특징과 일치한다고 생각되므로 이는 野 菩薇 죽 장 미과의 낙엽활엽소관목인 찔레나무 Rosa multi {lo ra Thunb. 라 보 는 것이 옳을 듯하다. @墓蒲 @石舊蒲 2 권에서는 奇尙 딸 의 퇴식재원에 대하여 적은 글 속에 〈 葛 蒲生 九 (E 〉 란 문귀가 있고, 7 권에서는 朴內 園 의 家 盆에서, 그리고 13 권에서는 案 中 三諒 에서 石舊 蒲룰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되 는 것은 後二者의 분재 품종에 대하여 석창포라 이름한 것이다. 모두 같은 천남성과의 식물이지만 창포 Acorus calamus var. ang u sta tu s 는 근경 이 굵고, 中i h 이 있는 총생 엽을 갖는 다년생 초이나 석창포는 가는 근경에다 중록이 없는 짧고 가는 총생엽을 갖는 다년생상록초이며, 학명은 Acorus gr ami ne us Soland 이다• 양자 모두 근경을 건위제로 쓴다. 39) 諸稿轍次 『大 漢 和辭典』, 大 修 館, PP.10300~I, 1966.

@ 蘭 3 권에서는 短松 과 비교하여 芝草 와 I 싸 1cif. 를 찬양하고 있다. 〈 爲 草 希芝 OO 爲鳥慕鷲 鳳 燒汝短旦小 意 若 大 而 長 ) 또 II 권과 12 권에서는 자택의 원림 속을 산책하면서 향기로운 난을 노래하고 있다. 난 은 종류가 많아서 종명을 대기는 어렵지만 緩松 과관련시켰고. 위 치가 개성이라는 점으로 보아 보춘화 Cy m bid i u m vir e scen s Li n - dle y가 아닌가 한다. ®밉桃 3 권에서는 「 六無奈 何」라는 古 律 詩 중에 〈 無奈標桃 何〉라는 귀가 있고. 7 권에서는 「謝梁 校 勘 國 峻送 機섬 E 」와 I6 권에서의 古律詩 「 선退 桃」에서는 붉은 과실의 아름다운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17 권의 「 李 注 書 窓 逆飮 林 園 」 제하의 古律詩는 李,꿈 와 술잔을 나누며 지은 시인데 〈稷序常 置 體 可愛 香味 色〉 죽 앵두 꽃 피는 계절이면 항상 단술을 베푸니 향, 미. 색 모두 사랑스럽다고 하였다. 後 集 2 권의 고율시에서는 侍郞 李 需 의 운에 따라 〈 黃紅靑 三色〉 을 主題로 하는 「 諒 紅」에서 불타듯 붉고 윤기 호르는 樓tj t의 열 매 (燃 樓桃 梵 不 零 ) 에 대 하여 쓰고 있다. 앵도는 樓이라고도 하는 중국원산종의 낙엽활엽저목으로서 학 명은 Prunus to ment o sa Thunb. 이다. ®楓 6 권에 2 회 나타난다. 하나는 〈旅舍有感次古人韻〉 이고 다른 하나는 〈 二 十九日 發 黃 驛 鄕堂 諸 公出錢於南 亭 李秀才贈以詩 郞次 韻答之〉 의 고율시에서 찾을 수 있다. 단풍나무의 종류는 많기 때 문에 종명을 대기는 어렵다. ® 四季花 7 권에는 朴內園 의 家盆中 여섯 가지 화목 (四季花,菊花, 瑞祥花, 竹, 石 葛 蒲) 에 대한 黃 郞中의 「朴內園家盆中六諒」 이라는 題에 대 하여 崔說이 화한 운에 따라 규보가 지은 고율시 가운데서 사계 화에 대한 것은 다음과 같다. 四季花

, ' t l}ij 春 梵 旋 隨 風 欲 6 t秋 否夢又空 I JU 返 群 芳無可 偶 依依 獨 到 雪 中紅 즉 〈 봄꽃과 함께 피 려 했지만 어느새 지나쳐 버 렸고 가을 국화 와 짝하려 했으나 또 헛꿈이러라. 온갖 꽃 둘러 보아도 짝할 만 한 것 없기에 혼자서 싱싱하게 눈 속에 붉었나 보다〉 하는 내용 이다. 또 11 권에는 「四季花 三 首 」의 고율시가 있는데 여기에서 절개를 자랑하는 송, 죽, 매, 국이라 하더라도 어찌 사시에 아름 다움을 뽐내는 사계화에야 미치랴 하는 내용으로 읊고 있다. 리휘재는如 중국원산의 상록관목인 Rosa chin e nsis JA C Q를 漢 名으로 月 季 花라 하며 사계화, 長春花라고도 부르는테, 우리나 라에는 12 세기 훨씬 이전에 도입된 것으로 생각되며 『 養 花小錄』 (1 449) 에 기재된 것이 처음이라고 하고 있다 . 또한 일본에는 『明 月記 』 ( 1213) 에 처음으로 본종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덧붙이고 있 다. 여기에서는 리휘재의 기술대로 사계화는 월계화와 같은 종으 로 취급하기로 한다.

40) 리휘재. 前撮 ;If , PP.4 2 5~6

@ 猫祥花 7 권의 고율시에 전항의 사계화와 함께 朴內園의 家盆 에 심어 진 6 종의 식물중에 瑞祥花 에 관한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外家 鍾 慶 氣 如 春 (朴 君 於相國爲外~) 華屋尋常燕 1' iiii 一 染好花幅欲語 又將何瑞報於人 위와 같은 시의 내용으로서는 瑞祥花가 무슨 꽃인지 가늠하기 가·어렵다. 분에 심은 것을 보면 관목이거나 초본인 듯하고 또 난대식물인 듯도 하다. 최자의 『 보한집 』 에서도 文安公이 최상국 이 지은 「瑞祥花詩」 에 화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 金錢花 II 권의 고율시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次韻文長老未開金錢 1E 무夏移根用意裁 尙 含植 口 侍誰 llrl 千金欲買姚顔笑 自 負錢多不肯廻 활짝 핀 金錢花의 아리따운 모습을 하루 속히 보고 싶지만 돈 많다고 그러는지 (金錢花) 천금을 준다해도 그 웃는 모습 쉽게 보 여줄 것 같지 않다는 재미 있는 시이다. 柳仁의 『物名考』‘”에서는 金錢花에 대하여 〈七月深紅花結黑子 頓類黃蜀莫 花而小 午開 子落〉이라 했는데 그 특성이 牧野의 ) Penta p e te s Phoenic e a L. 과 일치 한다. 金錢花 는 인도원산의 벽 오동과에 속하는 1 년생 초본이며, 子午花 또는 f~落金錢花라고 한다.

41) 柳僖 『物名考』, 1800 년대 초 改雅社 影印本, 1974)

®豪 12 권의 고율시 「重遊龍潭寺」라는 제하의 시에 〈높다란 樓 앞 에서 南으로 달려 엄나무숲 아래 龍潭寺를 찾았네 (……) 동산 의 대추나무 그늘 이제야 보겠으나 (園菜成陰今始見) (……) > 하고 있다. 대추나무는 유럽 남부와 아시아 서남부를 원산지로 하고 있다. 학명은 Zi zy p h us Juj v .ba Mi ller 이 다. ® 蒲桃 12 권의 고율시에 「乾聖寺帝釋殿主謙師所居樓 架蒲桃速陽 賊者 多矣 師請予次韻」 제하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架弓|蒲桃燒屋傍 壓蒼低監琴陰凉 未秋先見團珠露 當畫猶無半樓陽 後菱來扶前菱倒 新莖走軫舊莖長 長渠玉實休輕摘

甘脇偏須得抱霜

위 시의 尾聯 糸썬 U 를 보면 〈 달콤한 맛은 서리 홈뻑 마셔야 하 네 >라 하는 표현이 있는데 이 과실은 여름에 성숙하는 원예종인 포도가 아니라 가을에 성숙하는 머루 종류임을 알 수 있다. 그러 므로 학명은 Vi tis amurensis Ru p rech t로 생각된다. 서양에서는 고대 이집트의 어떤 권귀의 저택 정원에서도 포도시렁올 볼 수 있었지만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이 乾聖寺의 謙師가 기거하는 樓 觀 앞뜰에 만들어진 ·蒲桃架 가 기록상으로는 처음인 듯하다. 이 포도架는 여름철의 녹음용 進陽勃果와 성숙해 가는 과실을 바라 다 보는 관상효과를 노린 것이다. ®木筆花 ® 書 帶草 卷 12 古律詩에 「木筆花」 제하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天工狀 何物 先遣筆 1E 開 好與따帶草 詩家庭鮮裁 木筆 1E 는 辛夷花의 이명으로서' 학명은 Magn olia Liliflor o Des- rousseaux 이다. 鄭은 431 전라북도와 경상남도 그리고 경기도에 분포 해 있다고 하였으나 牧野는' 중국 원산종이라 말하고 있다. 이 시에서는 木筆花는 書 帶草와 잘 어울리므로 詩家는 뜨락에 심는다고 하였다. 書帶草 Op h io p o g o n jap o nic u s Ker-Gaw 는 상록 다년생초인데 우리나라의 중부 이남의 숲속 음지에 자라며 소엽맥 문동이라고도 한다. 〈 書帶草 〉란 옛날 중국의 산동성 치천현에 사 는 鄭康成의 讀맙亭에서 볼 수 있었다 하여 그렇게 붙인 것으로 康成 합 帶草라고도 한다• 蘇試의 「書 軒 」 시에 停;子已生書帶草 使 君疑是鄭康成〉이라는 귀가 있다. ® 海堂 13 권의 고율시에 「白天院貴華家 賊海葉 用樂天詩韻 李秀才同試」 가 있고 16 권의 고율시에는 「海業」 제하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42) 中國科사出版社, 『漢朝植物名稱詞典』. P.694, 1982. 43) 鄭台鉉, 瓚國植物圓鑑』 上 新志社, P. 39, 1957. 44) 牧野富太郞. 따野新日本植物圓鑑』. 水隆競 P.158, 1961 .

海業眼頂困欲垂 治似楊妃被酒時 頓有黃炫呼破夢 吏含微笑帶 l 접擬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Rosa r ug osa로 생각된다. 攻魂라고 도한다. ®林梅 13 권의 고율시 「六月 二十 日 久雨忽晴 與客行園中 記所見」 중에 〈林稿綴珠排頓梵味磁苦〉 죽 능금은 구슬같이 주렁주렁 달렀는데 그 맛이 시고도 덟구나 한 것을 보아 황해도와 경기도 및 경북지 방에 야생하는 능금나무 Malus asia tica Kaka i라고 생각된다. ®瓜 13 권의 고율시 「六月二十日 久雨忽晴 與客行園中 記所見」에 〈瓜 菱走長羅〉라는귀절이 있다.『산림경제』에' 의하면 〈窟 或稱胡磁 或稱黃洪 외 〉라 했고 牧野는 ' 胡瓜를 인도원산의 1 년생만경식물 로서 학명을 Cucumi s sati vu s L. 이라 하였다. 여기에서도 瓜죽 芸이며 胡旅는 胡瓜와 같은 뜻이지만 瓜를 京로 쓰는 것은 잘못 이다. ®黃蜀쫓 14 권 고율시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和友人黃蜀奏 天工看意前湘英 品絶知從蜀地生 露重偏隣金釜 1ll1 J 風輕更見道'1i:f.lf!i 花色(細)과 원산지 (蜀) 그리고 꽃의 착생상태(露直偏 •••• • • )를 잘 45) 洪萬遠 『山林經濟』全 泉仁文化社, PP.143~44, 1974. 46) 牧野富太郞. H i撮흠. P.6 0 8. 47) 諸稿轍次『大漢和辭典』, 大修館, P.9949, 1966

묘사하고 있다. 중국 원산의 1 년생 초본 으로서 담황색의 큰 꽃이 측방을 향하여 피는 황 족 규의 학명은 Hi bi s c us Manih o t L. 이며 일명 측금잔이라고도 한다. ®돛 18 권 고율시의 「 行園 中有感」에서 後首룰 적으면 다음과 같다 . 豪 上 찾 1 E 姉引我 퓰高方 尺尙難登 難開老病身無力 亦爲釣衡重莫勝 臺 上에 곱게 핀 英 花가 손짓하고 있지만 늙고 병든 몸이라 한 자 높이밖에 안 되는 奎 上으로 오르기 힘드니 안타깝다는 내용 의 시인데, 〈縱 引我〉라는 점에서 담황색의 꽃이 피는 @뀜訪혼〉가 아니라 홍, 자, 백 등 아름다운 꽃이 피는 월년생초본인 접시꽃 Alth ea rosea Cav . 라 생각된다. 奏는 소아시아 또는 중국의 원산 종이다 . 한명으로는 蜀奏라 하기도 하고 戒英라고도 한다. ®冬相 16 권의 고율시에 「冬梧花」라는 제하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桃李難天天 浮花難可侍

松梧無抵顔 所貴兩寒耳 此木有好 1E 亦能開 雪襄 細思勝於梧 冬梧名非是 桃李花는 비록 아름다와도 그 浮花는 믿을 수가 없고 송백은 내한성이 있어 높이 치지만 예쁜 꽃이 없는 것이 홈이다. 그러나 동백은 꽃도 아름답고 세한에 피니 도리나 송백에 비할 것이 못 된다. 그런데 동백이라니 실제와 어울리지 않는다 하는 내용 이다. 상록활엽수로서 난대지방에 자생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남해의 도서지방과 그 연해안 그리고 중부지방 이남의 서해안과 인근 도 서지방에 자생하고 있다. 학명은 Camell ia j ap o nic a L. 이다.

@ 地堂花 後渠 2 권에는 「地業化」 제하의 고율시가 있고 同渠 3 권에서는 겔地業花 寄李少卿需 井序」와 「次韻 李亞卿需 和寄地葉 1E 詩 井 序」가 있고 「地業」이라는 제하의 시 1 편이 있다. 이들 중 고찰에 참고가 되는 부분을 다음에 옮긴다. 地葉花 葉裁靑玉先花秀 花前黃金後葉敷 世號地業難會意 那知不作字誰呼 論地業 1E 寄李小卿需 井序 〈世洗地葉花者 其花樣黃 可愛 未知古人詩渠中是何花也 有賊之者 耶又未識世之所稱之意 登字之或誰耶〉, 〈懷黃克夏開盆盆〉 『이상국집』에 나오는 〈地業花〉의 특징을 보면 꽃은 농황이고. 여름철에 핀다는 것을 보면 오늘날 말하는 황매화 또는 竹桃花인 Kerria jap o nic a DC. 라 생각된다• 이는 한명으로 棟葉이라고 하 는데 유희의 『 物名考i'’에서는 체당을 얘뀝효三月開花 如小菊色深 黃〉이라 하여 〈山業花〉와 동일종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꽃은 만 춘에서 초하에 걸쳐 핀다. 중국원산종.

48) 柳僖. 前揚畵 P.126.

@御留 後集 3 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지만 御留花의 특징은 설명되지 않았다. 御留花 肥底橋姿被御留 餘花見床得無蓋 楊妃一笑六宮沮 而辱由來不自謀 다만 柳僖의 「물명고』에서는〈海業梨樹似木瓜 二月開花 如膳脂 點落則若宿粒淡粉 實狀/J. n 梨如大含桃〉라 하고 海紅이나 어류화도 해당梨와 같다고 한 것을 보면 중국원산종인 Malus mi cr omalus- Mak i函斗 생각된다. 牧野는 학명으로 · 海紅 또는 海梁梨라 하고

있다. @ 玉梅 後 集 3 권 고율시에 「玉梅」 제하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王梅 何人呼作玉梅傳 脈脈無心超臘天 應思 雪 中開冷淡 入春方作別般硏 섣달도 마다하고 설중에 피는 것도 싫다더니 봄 맞아 피고 보니 비할 데 없이 고운 꽃이라면 〈 雪 中梅〉는 아닌 一 名 郁李인 玉梅 Prunus gla ndulosa f. alb ip lena 로 보아야 할 것 같다. @) 鷄冠花 後 渠 5 권의 고율시에 鷄冠花에 관한 시가 네 번 나오는데 3 편은 계관화에 대하여 李百全學士와 奎報가 함께 賊하고 시로써 화답 한 것이며 다른 1 편은 「說測中鷄冠花 一 首」이다. 그 1 편은 다음과 같다. 鷄冠花滿苑盛開 自 夏至秋季 愛而賊之 切逆李百全學士同賊 花於讓地似或堅 開損 一 區眞盛矣 百花開謝只春夏 ~渠涉夏入秋季 何人始作鷄冠呼 (이하 생략) 계관화는 아시아 열대지방에 자라는 1 년생초본으로서 키는 90cm 정도에 이른다. 다른 꽃은 거의 지는 여름에서 가을에 이르기까 지 적, 홍, 황, 백의 갖가지 계관 같은 꽃을 피우니 사랑할 만하 다. 학명은 Celosid cris t a t a L. 이다. @鳳翔花 後~ 7 권 고율시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李相國仁植朴學士仁械 同訪是七月二十五日也 時家園鳳翔花盛開 唱韻使英上人走筆試之 予亦郞席走筆和示 丹白相交兩絶奇 莫敎風雨卷離彼

早宜빴德下千切 反自爲花(衣一枝 五色錦章渠已得 (이하 생략) 相國見和復次韻奉答 我家曾不種 1E 奇 何日移裁到錦坡 處士休誘鵬哉賊 相君今諒鳳凰枝 (이하 생략) 鳳翔花는 개화기가 늦여름 (7 월 25 일)이고 꽃은丹白五色으로 아 름다우며 풍우가 아니더라도 朔果가 성숙하면 벌어져서종자가튀 어 나간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인도 말레이지아 중국을 원산지로 하는 봉선화 Imp a ti en s Balsami na L. 가 아닌가 한다. 『동국이상국집』에 나타나는 44 종의 조경식물에 대하여 지금까 지 고찰해 온 바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同定을 하지 못한 瑞祥花를 제외한 43 종의 조경식물을 보면 목 본은 28 종이고 초본은 15 종으로 목본이 월등히 많은 비율을 차지 하고 있다. 목본식물 28 종 중에서 상록수종은 침엽 3 종 (松」百' lfi) 활엽 2 종(冬橋 竹)등 5 종에 지나지 않고 낙엽수종이 82% 에 이 르고 있는 것은 고려의 수도역이 온대중부에 속해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원산지별로는 외래종이 자생종보다 월동하게 많은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생종 (15 종) : 松, 楊村 |l, 薔薇 楓 垂柳 檜, 蒲桃 林賜 冬桓 海業, 蘭, 石 舊蒲 , 舊蒲 書帶草 , 石竹. 자생 또는 중국종 (4 종) : 竹 梨, 桐, 木筆 . 외래종 (24 종) 중국 (16 종) :桃 李, 梅, 杜丹, 機 地菜 四季花 柏, 杏, 御留 玉槪 菊, 薰 待藥 黃蜀藥, 蜀要, 젊枝 중국 및 인도 (2 종) : 槿, 鳳仙花 倻男 1 花) 인도 (3 종) : 蓮, 金錢 (E, 瓜

소아시아 (I 종): 瑠. 아시아열대 (1 종) :鷄冠 . 아시아서남부 및 유럽남부 (I 종) :掛. 외래수종 24 종 가운데서 중국원산종은 16 종으로 가장많으며,인 도와 원산지를 같이 하고 있는 槿과 鳳仙花까지 합한다면 18 종에 이르고 있다. 지중해연안과 이란, 아프가니스탄, 북서인도지방을 원산지로 하는 석류는 한나라 때에 菊菊,胡桃, 孔雀 등과 함께 수 입된 것이며, 몽고제국 때도 서역까지 진출한 일이 있으므로 이러 한 경로를 통해서 중국에 들어와 식재되었던 것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오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처럼 중국원산종을 비롯한 외래 수종이 많은 것은 아무래도 중국과의 지정관계라 생각되며 이와 같은 많은 종류의 조경식물을 문예작품 속에 동장시킨 것은 이규보의 높은 관심과 식견 때문이라 생각된다. 2 ) 고려시대의 조경식물) 고려시대는 중국의 원림문화가 꽃핀 송나라와의 교류 때문에 많 은 조경식물이 도입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이룰 전문적으로 다 룬 문헌이 없으므로 사록이나 시문 등에서 간접적으로 찾아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사록으로서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사강목』을, 문집에서는 『동국이상국집』, 이인로의 『파한집』, 최자의 『보한집』 그리고 고려가요를 기본자료로하였으며, 더하여 조선시대의 문헌이기는 하나 姜希顔의 『養花小錄』을 보충자료로 하였다. 『동국이상국집』에 대해서는 앞절에서 독립적으로 고찰한 바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 『고려사』 1111) 조경식물에 관한 한 주로 왕과 궁원에 관한 기록이다. 예종 7 년 (1112) 3 월에 목단에 관한 시가 있는 것을 비롯하여 의종 5 년 (1151) 奉元殿庭에서의 석류화에 관한 七言四韻詩, 同王 14 년 (1163) 의 後苑에서의 賞菊에 관한 것, 그리고 同王 21 년 (1167) 에는 延興殿 남쪽에 있는 淵밍삼을 둘러 좌우에 송죽과 화초를 심 49) 鄭 H l{(ll'f·. 멜國造짜.植物의 迎 !9 考祭」, 演習林報, 2: 1 7~71 . 197 7. 50) 金宗瑞 鄭麟址 編 @i[權 譯. r 麗史』, 廣 밥出版『.I:, 1975) .

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석류와 국화에 관한 것은 한국의 조경식물사상 최초의 기록이라 생각된다. ® 『 고려사절요』 ( 15 42) 5\) 예종 7 년 {1112) 4 월과 17 년 (1122) 3 월에 목단시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의종 5 년 (1151) 6 월에는 석류화詩에 관한것,동 21 년 {1167) 4 월에는 송죽과 화초를 延興殿 남쪽 간반을 둘러 심었다 고 하는 기사는 앞서의 문헌에서도 나와 있지만, 숙종 4 년 (1099) 4 월에 御沙樓에 사신을 모아 놓고 〈重光殿玉改魂 {E 〉 에 대한 시 를 짓게 했다는 기록은 政魂{t에 대한 최초의 것인 듯하다. ® 『동사강목』 (1700 년대 말) 모 모란에 관한 賊詩라든가 송죽 및 화초를 심었다는 기록은 『고 려사절요』의 내용과 같으나 예종 1 戈戌 30 년 (1118) 夏 4 월에는 安 和寺를 중수했는데 四粹에 송백이 參天했다고 하였고, 의종 乙 酉 19 년 (1165) 4 월에는 관란사를 중수하고 주변에 松柏杉檜와 奇 花異草를 널리 심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杉은 Abie s ho/o ph yl l a'1 이 고 檜 는 Jun ip e rus chin e nsis 이 다. ® 東國李相國集 (1241) 5 ― l 에서 다루었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 『 破間集』 (1260) SIi 고려 명종때의 학자인 李仁老 (1152~1220) 가 名儒들의 시문을 수록한 하나의 설화문학집으로서 여기에서 조경식물을 소재로 한 것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이 13 종을 찾을 수 있다. ( ) 안의 숫 자는 출현 횟수임. ® 섬 E (2), ® 李 (I), @ 梅 (I), @ 牧丹 (4), ® 村 |l (2), ® 竹 (l). ® 菊 (I), @ 四季花 (I), @ 桐 (I), @) 街藥 (I)' @ 梧桐 (I). @橘 (l). @熹 ( l) 여기에서 @ 梧 @ 橘 ® 蔡는 처음으로 나타나는 식물인데 橘 51) 春秋館, 高麗史節要, 民族文化推進會 刊. PP.4 5 1~657, 1968. 52) 安鼎福 맹史綱目』, 景印文化社 影印本, 1970. 53) 李仁老 著 破間集 同和出版社, 庫退 3 의 思想大全集』 3, PP.3 9 4~406, 1972).

은 御四 E 에 심어져 있는 것으로 『파한집』에만 기록되어 있다. 하 권을 보면 이인로가 翰林院에서 御花固에 이르러 귤나무를 보니 높이가 한 길이나 되고 열매가 많았다. 苑吏에게 물으니 남주 사 람이 바친 것인데 아침마다 소금물로 그 뿌리를 축여 길렀다고 하였다 한다. 橘 은 오늘날에 말하는 柚子· 로서 Cit ru s Jun os541 Si eb . 라 생각된다. ® 『補閑集』 ( 1254) ss, 최충헌의 아들 佑의 부탁으로 崔滋 (1186~1260) 가 이인로의『파 한집』을 보충하여 엮은 하나의 수필집이다. 이 문집에는 다음과 같은 15 종의 조경식물이 나타나 있다. ® 桃 (2), @) 李 (3). @) 梅 (2). @) 杏 (l). ® 柳 (2), @ 竹 ( 5) . (J) 菊 ( 2) , ® 楠 ( 2) , ® 瑞祥花 ( l) , ® 慈 ( I) ' @ 百葉杜 賜花, @) 樓 (I)• @ 槿 (I), @ 紫薇花 (!), @ 椿 위에서 椿과 紫薇花는 고려시대의 다른 문헌에서 찾기 어려운 조경식물이다. ® 『 고려가요』댜 경기체가인 한림별곡 전 8 경 중 〈花舟〉 와 〈樓閣〉 에 관련된 부 분은 다음과 같다. 花丹 紅杜丹 白杜丹 丁紅杜丹 紅荷藥 丁紅荷藥 御權玉梅黃紫器薇 正芝冬柏 위 間發人泉 괴엇더흐니잇고 合竹桃花고온두분 合竹桃花 고온 두분 위 相映 A 景 괴 엇더갑니잇고 樓 OO 蓬萊山 方丈山 漏洲三山 此三山 紅樓閣 姉的仙子 54) 鄭台鉉, 1933. 『韓國植物圖鑑』 (l:)- P.2 6 1 . 55) 崔滋編 補閑集 (同和出版社, 『韓國의 思想大全集』 3, PP.4 0 7~431, 1972). 56) 良友堂 高麗歌諾, 『韓國古典文學全集』 I. PP.260~75, 197 7.

綠裝額子 錦級i hk 災 珠前겨 가卷 위 登望五湖 A 力t 괴 엇더 합니 잇고 綠楊綠竹 裁 亭 먀애 綠楊綠竹 裁摩鮮애 위 喝黃찮 반갑두셰라. 위의 노래에서 조경식물은 목단(紅 • 白 • 丁紅) 작약(紅 • 丁紅), 權 梅. 菩微 (黃 • 紫) 冬柏, 桃花, 竹 둥 9 종에 이르고 있다. 노래 속에서의 正芝는 白正와 芝草 를 말하나 조경식물로 보기는 어려우며 合竹은 어떤 식물을 말하는지 同定할 수가 없다. ® 『 養花小錄 』 571 강희안 (1417~1464) 의 『양화소록』에 의하면 고려의 충숙왕 (1314~1330, 1332~1339) 이 원나라에 들어가서 원나라 공주에게 장가들어 사랑하다가 본국으로 돌아올 때 元帝가 천하의 진귀한 화초를 많이 주었는데, 국화로는 烏紅, 燕京, 黃白,闇深, 錦銀, 兩紅 鶴頂紅 笑 雪 白둥의 품종이고 목단으로는 黃白牧丹, 赤目紅 牧丹 洛陽紅과 重菜 동이며 이밖에 山茶, 重茶梅 , 碧桃 粉材t, 排 섬 E 와 瑞香 靑黑菊菊동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충숙왕이 원나 라에서 공주와 함께 왔을 때는 1316 년이며 이때의 元帝는 인종 이다. 지금까지 고찰해 온 고려시대의 식물을 총괄하면 다음 페이지 의 표 2 와 같다. 고려시대의 조경식물을 원산지에서 볼 때 한국의 야생종이라 볼 수 있는 것은 楊付 II 를 비롯하여 15 종이지만 외래종은 tJ E. 李를 비롯하여 36 종으로 전체 (53 종) 의 67.9% 에 이르고 있으며, 그중 에서 중국원산종은 26 종이다. 외래수종에는 소아시아의 원산종인 蜀fijiJ, 樞i와 아시아서남 및 유럽남부종인 裂가 있는데, 이들도 중국을거쳐서 들어왔을 것으로 생각 된다. 또한 竹, 장미, 桐처 럼 우리 나라의 야생종인지 중국에서 들어온 것인지 분명치 않은 것도 고려에 넣는다면 더 많은 종류가 중국을 통하여 들여다 심 었을 것으로 본다. 연대별로는 llOO 년대와 1200 년울 전후한 시대의 기록이 많은 것은 송나라와의 빈번한 교류 때문이라 생각되는데 이 시기 (970 ~1254) 에 새로이 나타나는 외래종은 23 종에 이르고 있다. 연대 57) 李炳薰 譯 『養花小錄』 乙酉文化社 刊. 1973.

표 2 고려시대의 조경식물 식물명 원산지 특 징 罰 n· 部分 回出現數 참 고 문 헌 최 초 回 ( ) 내는 출현희수 출현연대 l 桃 중 국 落葉屈葉租木 IE 19 東(1 0) 破 (3) 師)龍 (2) 招 I) B. Cl6 2 李 ’’ II II 10 東 (6) 破(I)補 (3) 16 3 梅 // II II 12 東 (8) 破(I ) 補 (2) 翼(I ) A.D 4 1 4 蓮 인 도 多 1F'J :.水 草 花·葉 10 東 (9) ft(I) 123 5 梨 중 국 落葉國葉困木 花 s 東 (5) 546 6 杏 층국·몽고 II 花 12 東(1 0) 補(I)貴 (l) C600 7 牧丹 중 국 常綠混葉 花 17 東 ( 8) 高(I)高要 (2) C630 東史 o) 破 (3) 麗(I)貸(1) 8 柳(楊) 야 Aj} 常綠針葉喬木 形 19 東(1 4) 破 (2) 補 (2) 爵(I) 634 9 柏 중 국 常綠針葉 常綠性 3 東(I) 東史 (I) 730 JO 松 야 A』 II II 18 東(1 5) 東史 (3) 801 II 竹 야생·중국 常 綠淵葉程 // 21 東 (20) 益(I) 801 12 杜段 1E 야 A』 落葉柚木 花 2 補(I)젊(I) C970 13 政璃花 중 국 花 I 짧要(I) 1099 14 梧 II 落葉罰葉喬木 幹色·綠!i 2 破(I) 麗(I) CIIOO 15 荷藥 II 宿 根 草 IE 5 破(I)東 O) 翼 (l) 1147 16 石竹 IE I 東(I) 1140s 17 植 소아시아 落葉罰葉喬木 IE • 果 6 東{])補(I)高史(I馮(I) 1151 18 菊 중 국 宿 根 草 IE 30 東 (24 激(I浦 (2 馮史 1163 (I) 麗(I)f(1) 19 杉 야 A성 常綠針葉喬木 常綠性 I 東史(1) 1165 D 植 II II II 2 東(1) 東史(I) 116S 21 槿 아중르국메·니인도아 落葉小喬木 花 2 東(I) 補(I) 1241 끄 熊 중 국 宿 根 草 草 形 2 東 (I) 補(I) Cl200 Zl 橘 중 국 常綠目葉喬木 黃 果 I 破(1) Cl200 24 桐 야생·중국 落葉喬木 花 2 東(I) 破(I) 1241 2S 뜹薇 야 A』 落葉證木 花 5 郞)破(I)鼠(I) 1241 죠 Eiii II 多年生常綠草 花 I 東(I) 1241 '갭l1 蘭垂 柳 ,/,/ 落多年葉生喬常綠木草 葉 形 香 23 東東 ((32)) 11224411 D 嬰 중 국 落葉喬木 1E • 果 5 東 ( 5) 1241 l) 五枝 常綠,J、喬木 果 I 東(I) 1241 31 楓 야 생 落葉喬木 秋紅葉 3 東 (2) 翼(I) ” 32 四季花 중 국 落葉權木 花 2 東 (2 ) II 33 石E it 야 생 多年生常綠草 花 2 東 (2 ) ” 34 金錢?t 인 도 1 年生草 花 I 東(I) ” 3S 掛 아유시럽아납서부 누 落葉喬木 果 I 東(I) ”

出現 참 고 문 헌 최 초 식 물명 원 산 지 특 칭 觀買部分 回it數 ( ) 내 는 출현희 수 출현 연 대 36 蒲桃 Of 생 落葉한* 果 2 東 (I) 1t(I) 124 1 3378 木합帶筆草花 O중f 생국 落1 葉年喬生草木 葉花 II 東東 ((II)) ’” 39 海 菜 落葉潘木花 2 東 (2) ” 40 林 植 야 생 落葉喬木 花·果 I 東 (I ) ” 41 瓜 인 도 1 年生冕草 果 I 東 (I) ” 444432 黃冬蜀 蜀蔡梧蔡 。중卜 ,, A국J 常越1 綠年年生喬生木草草 花花花 3II 東東東( ((III ))) 터 ) 貸 (I) ”脣” 4S 地 菜 중 국 落葉溫木花 2 東 (2) ” 46 御 花 II 落葉喬木 花 I 東 (I) 屠 47 玉 梅 ,, 落葉溫木 花 I 東 (1) 信 48 鷄 冠花 아시아열 대 1 年生草 花 2 東 ( 2) ” 4so9 鳳紫 翔 花薇 下인z 도 · 중국국 落葉I喬I 木花花 II 東補 ((II )) 12”54 SI 瑞 香 ,, 常綠瀋木 花 · 香 I 貸 (I) 131 6 S2 茶梅 ,, 常綠小喬木 花 I 貸 (I) 1316 53 蜀甫뚫 소아시아 落葉困木 果 I 箕(I) 131 6 * 文 獻記拔 東 : 東國李 相 國集 高要:高麗史節要 破 :破 閑築 東史 : 束史綱目 補:補閑集 麗 : 高麗歌諾 高:高麗 史 ¥1 : R 花小錄

상으로는 1254 년까지로 되 어 있지만 도입식 재 는 그 훨 씬 이 전 으 로 본다 . 그후 13 세기 이래 몽고군의 침 략과 지배하에 있으면서 (~ I355} 송나라와의 교 류 대신에 원나라와의 교섭이 있게 되어 그들의 문 물 이 받아 들 여지게 된 것인데, 전술 한 바와 같이 강희 안에 의하면 충숙왕이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 1316 ) 천 하의 진귀 한 화초 를 많이 얻어 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고려말에는 원의 附 馬 國의 위치에 있었다는 이유에서도 많은 종류의 관상식물이 들 어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헌상 처음 나타나는 瑞 香 과 茶 梅. 衛菊 도 충 숙왕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것이다. 일본에 있어서는 吉 永義信 이 鎌倉 時代의 歌 人 藤 原定 家 (1162 58) 吉 永 義信 藤原 定 家 & 彼(1) 建築, 園藝作庭 日本造 園雜 誌 . Yol,1 4 ~1 (19 51,9),p . 1 - 21 .

~1241) 의 정원식물을 발표하고 있는데, 萱草 槿花(나팔꽃)』벤麥, 括朋 女郞 1E, 萩(싸리) , 薄(억새), iii, 菊, 麥, 軟冬 , 41·f } , 臨 蹟 (겹 ) , 長春 1E , 黃梅 , 御山 '7 ·:; 毛 雅皮, 南天笠, 椿, 村 Il, 懷 (겹 ) , 梅, 械, 桐, D.li, 稿柏, 猶,棟,桃, 梨, 林橋, 橘, 村子, 杉 , 相,檜,松, 綜『세 , 竹둥 39 종을 대고 있으나 이 중에서 중국 원산종은 菊, 杜丹, 黃梅, 梅, 棟, 桃, 梨 둥 7 종에 지나지 않으 며, 나팔꽃은 아시아의 원산종인데, 외래종이 차지하는 비율이 고려에 비해서 훨씬 낮다. 4 結論 고려시대의 정원문화는 건국초에는 백제와 통일신라시대의 영 향을 받은 듯 부여의 宮南池 (方丈池)나 경주의 臨海殿池와 비슷 한 기능을 갖는 東池가 있어, 船遊와 水戱를 하고 池岸의 龜齡 閣에서는 冥遊, 觀賞, 査 OO, 試驗 동 갖가지 기능을 다하고 있다. 또 신라시대 때 들어 왔다는 중국의 擊往 가 성행하여 궁내외의 往 삽J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특징적인 조경요소를 든다면 괴석에 의한 石假山과 園亭, 飛泉, 花園 둥이며 후원이 나 별당정원에 배치하고 있다. 〈緊性石築假山〉 이라는 말은 의 종 6 년 (1152) 의 壽 昌宮北園과, 소王 10 년 (1156) 의 策 性亭정원 의 조경에 관련되어 쓰기 시작한 것으로` 〈杜石成山〉 이라는 말은 예종 11 년 (1116) 의 淸器閣 조경에 관련하여 쓰여지고 있다. 괴석 에 의하여 산을 만든다는 것은 중국의 南齊시대에 文惠태자의 玄 訓園 (緊奇石 好極山水)과 수의 西苑 (緊巧石爲山) 에서 보는 예로서 자연의 기암절벽을 재생시키려는 뜻이 있는 듯하며 당의 중종 딸

안락공주( ? ~710) 의 西莊 에서도 〈累石象華山〉 죽 累石하여 華 山을 본 따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경식물은 외래종이 중국을 통해서 많이 들어오고 있으며 (68 %), 원숭이, 공작, 앵무새 둥의 애완동물도 도입하여 기르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조경사상 궁원이나 민간정원이나를 막론하고 가 장 화려했던 송나라와 깊은 관계를 맺고 조경자료와 조경기법의 도입이 컸을 것으로 생각되는 고려시대이지만, 관련 자료의 부족

으로 정원의 특징이나 어떤 양식을 구명하지 못한 것은 매우 아 쉬울 뿐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시각적인 쾌감 부여를 위한 관상 위주의 정원이 꾸며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라 말할 수 있다. * 참고문헌 田治六郞, 「高麗時代(!)庭園」, 日本造園雜誌 3(2) : I~20, 1936. 尹國炳 『造係史』, 一潮 00, pp. 243~258, 1978. 尹國炳 『고려시대의 庭苑用語에 관한 연구」, 翰國庭苑學會 誌 I ( I) : 28~40, 1982. 金鎬然 尹國炳, 柳福模, OO 庚炫, 「文殊院庭苑蹟發堀調査報告」, 韓 國庭苑學會誌 I ( I) : 74~95, 1982. 鄭腕 B 午, 「東國李相國渠의 造泉植物考」, 演習林硏報 5, pp. 105~ 121. 1982. 高裕燮, 『松都의 古蹟』, 祝話堂, 1977.

朝鮮時代 l 硏究史 조선시대의 정원에 관한 연구는 일본인 田治六 !!~(1904~78) 에 의하여 비롯된다. ” 그는 문헌을 근거로 하는 논문에서 한국의 方 池는 종교관념에 따르는 모방이며, 인도의 불교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극락정원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남기고 있 다. 한국인에 의한 연구는 1960 년대에 이르러 싹트기 시작하고 있다. 학술적인 논문이 아닌 자료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도 포함 하여 취급해 보기로 한다• 朴裕子는 ZI 1968 년도에 석사학위논문으로서 이조궁궐정원을 고찰 하여 이 분야의 선구자적인 위치에 섰으며, 고미술가인 김호연 (1912~82) 은 31 이조시대의 정원을 京苑, 別堂, 亭子, 宮苑, 寺院 동으로 구분하여 해설하고 한국정원의 계보를 시험적으로 만들고 있다. 문화재관리국의 정재훈은 서원조경에 관한 고찰 4’ 에서 한국 l) 田治六 RI; , 「朝鮮庭園'드見石方池&其(I)起源 ,.:.?L`T 」, 造園雜誌. 2(3):1~8, 1935 2) 朴裕子, 「李朝宮殿庭園考」,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68 3) 金鎬然, 「翰國庭園의 :곳 A! 」, 新東亞. 67 號, pp. 314~331, 1970. 4) 鄭在鐘 「朝鮮朝 ~l 院造係의 考察― 陶 Ul& 院-」 , 文化財 六, pp. 88~98, 1972.

의 조경양식은 回遊林泉式이라 못박고, 도산서원의 경관기능을풍 류의 유희적 경관이라 표현하고 있으며, 1973 년에 발표한 「朝鮮朝 別壁造禁遺蹟의 一 例」라는 논문에서는 S I 윤선도의 英 容洞庭園이 조경에 있어 축대돈 다리든 간에 가공재가 쓰여지지 않는 것이 특 징이며, 자연의 질서를 존중하는 자연귀의성이 강한 정원임울 강 조하고 있다. 한편 김동찬은 61 이조서원조경에 관한 연구에서 서 원은 軸線設定과 좌우대칭 배치에 〈직선적 공간분할〉을 보이고 있 으며, 造園的處理에 있어서는 자연을 경내로 끌어들이는 〈차경적 수법 〉을 도입하여 풍류적 유희공간을 창출하고 있다고 하여 서원 정원의 공간개념에 있어 鄭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任은 이조시대의 궁원을 공간미적인 측면에서 연구하고공간적 인 특성에 대하여 (I) 整齊性과 非整齊性의 並存, (2) 안간적 척도 를 바탕으로 하는 친근감 있는 규모 (3) 공간의 여백성 (4) 공간의 삼투성 (4) 계절감 동을 들고 있다. 연구방법에 있어 지금까지는 공간구성 및 사상적 배경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 풍조에, 미적 인 측면에서 고찰했다는 것은 하나의 발전이라 아니할 수 없다. 閔庚炫은 경상북도의 영양군에 있는 鄭榮邦 (1577~1650) 의 瑞石 池에 대한 연구에서 I J 池底에 石英脈石이 깔려있고 蓮이 심어진 方池에 대하여 무위자연설에 바탕을 둔 林泉庭苑이라 결론을 내 리고있다. 李殷昌은 최근 경상남도의 양산군 물금면 대룡리 새터 (新基)부 락에서 禹奎東 (1850~1929) 의 別堂園林을 발견하고 이는 儒學, 玄 虛 佛敎 吉祥動物에 관한 각종 사상을 배경으로 한 자연순옹적 인 전통조원기 법 이 도입 되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 이 밖에 변우혁 의 「李朝時代庭園의 街木과 配植에 관한 硏究」 (서울大 環境大學院, 1976), 양수룡의 「李朝時代의 住宅庭園에 對 5) 鄭在鐘 「朝Q Wl3 ij앞造j;t這1'1 '1 의 一 例」, 翰造 }; at , I(2):65~68, 1973. 6) 金束贊. 「李朝i' l 院 造셨에 關한 硏究」, 서울大g사交 었境大學院 碩士學位 論文, 1976. 7) 任勝彬 「偉國古庭園의 空 IHl 美 에 關한 硏究, 李朝時代의 宮苑을 中心 으 로」, 서울大, 現境大 l} ! 院 碩士乃1 位 論 文, 1974. 8) 00 庚~. 「瑞石池 를 中心으로한 石 lI 林泉庭園에 관한 硏究」. 韓庭苑誌, 1(1 ) :4~27, 1982. 9) 李殷g, 「朝鮮時代 別壓硏究-禹奎東의 小 nn~ 울 中心으로」, 院星女大論 文集 , 第 27 輯, pp. 217~261, 1983.

한 硏究」 ( 束國大, 1976) 윤영호의 「李朝時代와 現代에 있어서 庭園 樹木의 選定超勢에 關한 硏究」 ( 高麗大, 1977), 손태주의 「卒 子 에 관한 造섰學的 硏究」 (慶北大, 1982) 동 전통정원에 관한 연구가 많 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 연구가 학위논문으로 그치고 연속성이 없는 것이 아쉽다. 저자는 늦게 1970 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연구 를 시작하여 오늘 에 이르고 있다. 1973 년도에는 전라남도의 무동산 북쪽 기슭에 있 는 양산보의 羅疆園에 관한 연구 (韓造 禁誌 1973) 를 기점으로 하여 남원의 廣寒樓庭園 보길도에 있는 尹善道의 英쫑洞庭園, 강진의 만덕산에 있는 정약용의 茶 山 草堂庭園 , 求禮에 있는 柳爾 胃 의 및

鳥樓)廷園 둥에 관한 연구가 있었고 (韓 造係~t:. 1974), 1982 년에는 강진지방에 있어서의 다산초당을 비롯하여. 새로 발굴된 李彬의 白蓮堂과 尹 書有 의 朝夕樓(別業) 동 3 개 정원을 발표하였으며 (湖 南文化硏究, 12 輯), 1983 년도에는 정약용의 문집을 중심으로하여 그 의 일생 동안의 원림생활을 고찰한 바 있다(韓 )廷 苑 誌 2 권 1 호). 이 밖에 1980 년 4 월 II 일의 조경학회총회에서는 吳以J I: 의 鳴玉軒庭園 에 대하여 구두발표한 바 있고, 1983 년도에는 「全南의 傳統文化」 에 이미 발표한 源淵園 , 鳴玉軒 , 英容洞園林 , 雲鳥 樓, 朝夕樓,茶 山 草堂 외에 全新民의 獨守亭, 金成遠의 樓 霞堂 , 許維의 零 林山 房 을 추가한 9 개 정원을 소개한 바 있다. 이처럼 한국정원에 관한 연구인구가 적고 업적이 많지 않아 조 선시대의 정원을 체계있게 \ 논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으 로 생각된다• 2 時代背景 이병도\ 이홍적\ 한우근떤 이기백 131 둥의 저술을 근거로 하여 고찰하기로 한다• 태조 이성계는 송도 海昌 宮 正殿에서 즉위하고 (1397A.D) 난 뒤 10) 李丙殺. 『新修國史大觀』, 뺨文閣, 1957. II) 李弘稙. 『國史,k•J~典』, 知文閣, 1963. 12) 翰# i 勤, 『翰國通史』, 乙酉文化社, 1970. 13) 李床白, 『領 國史 新論』. 一潮閣. 1976.

에 천도의 필요성을 느끼고 新都 의 물색에 나섰는데 계룡산, 무악, 한양 등을 놓고 현지답사 결과와 풍수지리설 을 토대로 논의한 결 과 한양으로 낙착하게 되었다. 이들 후보지역 중에서 한양으로정 하게 된 경과는 다음과 같다. `4) 151 먼저 태조는 胎 室證考 使 權仲 和의 현지 조사보고에 따라 시신들을 대동하여 두루 살피고 계룡 산으로의 도읍을 결정하여 新都 공사를 착수 하였으나 당시에 도 참설의 권위자로 알려진 경기좌우도 관찰사 河衛은계룡산역은산 이 乾하고 수는 箕方으로 흐르고 있어서, 宋朝의 胡舜甲의 書 에 〈水長生은 破局되여 哀敗에 이른다〉 하였으니 불길하다고 반대 의 견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한양의 무악쪽으로의 도읍 올 주장하므로 태조는 계룡산 천도는 포기하고 이곳에 택지를 명 하였다. 그러나 무악남록으로의 도읍은 다시 判 書袁 觀 事 尹莘達 과 書雲 觀副正 劉早雨 동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왕도로서는 적당 하지 않다고 하여 이론을 제기하였다 . 또한 政堂文 學 鄭抱도 무 악은 그 명당이 매우 俠陰하고 主山이 낮으며, 물에 잠기는 듯하 여 水口롤 막기 어렵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또 정도전을 선두로 하여 천도 尙早論이 있기도 했지만 태조는 결심을 굽히지 않고마 침내 한양 (서울)에 이르러 이곳은 i 맵運 의 便이 있고 里程이 균등 하여 인마의 便이 있으므로 왕도로서 적당하다고 생각하여, 먼저 판서 雲 觀 事 尹莘達에게 의견을 물으니 尹은 〈우리 국경 안에 송 악이 제 1 이고 이곳은 다음이지만 다못 恨하는 바는 乾方이 낮아 서 水泉(明 堂 )이 柏湯합니다〉하고 반대하므로 다시 王 師 白超(無 學 )에게 묻자 〈이곳은 사면이 秀 高 하고 중앙이 평탄하여 마땅히 도읍할 만한 好適地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다른 臣들도 태조의 뜻이 굳은 것을 알고 천도하려면 이곳이 적당하다고 대답하므로 결국 태조 3 년 (1394) 7 월에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게 되었다. 그 리하여 1394 년 9 월 1 일에 新都宮 觀造 成都監 을 설치하고 곧바로 계획에 착수하였으며 10 월 28 일에는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궁궐 건축은 태조 4 년 (1395) 2 월에 착공하고 동년 10 월 5 일에 落成의 예를 올렸다. 이 新閑의 명칭인 경복궁은 개국공신인 奉 化伯 鄭道傳이 태조 의 명을 받아 지은 것으로서 詩 傳 周雅의 〈班醉以酒 班砲以德 君 14) 村山智 順 , 『朝鮮

子萬年 介爾泉 福 )이라는 귀절중 〈景福〉 二 字를 딴 것이다. 이 궁 궐의 坐向을 정할 때 僧 無 學 과 개국공신 정도전과의 사이에 논 쟁이 있었다. 無 學 의 의견은 인왕산을 鎖 山으로 하고 남산과 백 악을 좌우의 용호로 하는 좌향 죽 酉坐 卯向으로 해야 한다고 한 데 대하여 정도전은 이와는 반대로 옛날부터 군주란 모두 南面하 여 정사를 보았으며 아직 東面하여 朝會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고 논하여 결국 정도전의 주장대로 궁궐의 基는 남면 즉 壬坐 丙 向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태조 5 년( 1396 ! 에는 전국에서 19 만 7 천여의 民丁을 징발하여 백 악(北), 낙타산(東), 인왕산(西), 남산(南)을 연결하는 총연장 17 km( 퍄 9 천 5 백 척)높이 8mC 니의 성곽을 쌓았다. 이 성곽에는正北 에 숙정문(북문), 正東에 홍인문(동대문), 正南에 숭례문(남대문) 正西에 돈의문(서대문) 동 사대문을 두었고, 또 동북에 홍화문(혜 화문 또는 동소문), 동남에 광희문(수구문), 서남에 소덕문(소의 또 는 서소문) , 서북에 창의문(자하문) 둥 4 小門을 두어 출입토록 하 였다. 성북에는 삼각산과 백악의 두 산이 있다 . 해발고도 630~ 삼 각산은 華山 또는 북한산이라고도 하며, 白 雲 , 國望, 仁 壽 의 3 봉 이 나란히 구름 속에 솟구쳐 英容같기도 하고( 莘 山),세 개의 뿔같 기도 하여 (三角山) 그렇게 이름붙인 것이다. 國望峰온 만경대라 고도 하는데, 僧 無 學 이 이태조의 명을 받고 이곳에 올라가 國都 의 地가 될 곳을 望相했기 때문이며, 萬景은 여기에 올라가면 산 하의 만경을 바라다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仁 壽 峰온 白 雲 의 동방에 있으며 〈仁者樂山〉 , 〈仁者 壽 〉 에서 딴 것이다. 白岳은 일명 북악산이라고도 하며 , 삼각산 만경대의 支脈이 돌 출해서 된 해발고 143~ 이 산은 서울의 鎭 山으로서 그 남록에 궁궐의 기가 정해져 있다. 남쪽에 버 티고 있는 해발고 265 m!긱 남산은 종남산 또는 목멱산 이라고도 하며 서울의 성안 案山이다. 서울의 城南에는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漢水 죽 한강이 있으 며 백악과 인왕산 사이에서 출발하여 東流하여 도성의 중앙을 관 통하는 청계천은 성내의 사방에서홀러내리는 계류 를 받아 중량 포에서 한강에 합류한다. 그러니까 성내의 개천 청계천은 궁궐의 앞쪽을 북서에서 동남으로 돌아 明 堂 水 를 이루고, 성외의 한강은

북동에서 서남으로 남산을 돌아 도성을 안고 있다. 그래서 글자 그대로 山河 標 (개천)帶(한강) 를 이루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한편 한양은 조경적인 측면에서 볼 때 넓은 뜻의 하나의 정원 이 성립되고 있다.북에는삼각산과 북한산을 중심으로 하는 連脈 이 배경이 되었고, 여기에 인공적인 성벽이 사위 를 두르고 있어 하나의 위요공간이 형성되고 있다. 내부에는 경복궁과 창덕궁을 중심으로 하는 정원이 조영되고 있으며, 전면에는 남산이 있어 조 망의 대상이 되고 또 서울의 Landmark 가 되 어주고 있다. (그림 I) 이태조는 그를 도와 이조건국에 큰 공을 세운 주자학의 신봉자 정도전 조준 등의 건의에 따라仰佛崇儒策을 정치의 기본이념으 로 하였다. 주자학은 고려말기에 전래된 것인데 이조시대의 숭유 정책에 따라 임금의 進講을 비롯하여 성균관, 四學, 향교 동의 교 육기관이나 과거동에도 주자학이 한 과목으로 채택되기에 이르 렀다. 한편 새 왕조에 벼슬하지 않고 절의를 지키며 산림에 묻혀 제자들의 교육과 주자학의 연구에 힘쓴 학자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은 길재 • 이황· 이이 둥이다. 길재의 문하생으로 김 숙자 김종직 둥이 있고 그 뒤를 이은 김굉필, 정여창 둥의 신진 사류들은 세종 때부터 차츰 관계에 오르게 되었으며, 또한 세종 때 에 설치된 집현전을 통하여 훌륭한 유학자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 다. 그러나 세조의 찬위를 계기로 유학자는 조정에 기반을 둔 훈 구파와 그 반대 입장에 있는 사림파 그리고 절의를 지키거나 청 담만을 일삼는 절의파와 청담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대체로 이조 때의 유학은 배타적이었으며 마침내는 당쟁을 유발시키고 정치 사 회면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 삼국시대이래로 번성해 오던 불교는 태조의 억불숭유정 책으로 탄압을 받게되어 태종 때에는 많은 사찰이 정비되어 24'1 J~ 만 남게 되었으며 세종때는 7 종파를 선 • 교 두 종파로 통합하는 한편 전국에 선종과 교종에 각각 I 礎 7 산 도합 3~ 산만 인정되었 다. 그러나 세종은 만년에 불교를 믿게 되었고 소헌왕후 (1437~IS 04) 가 죽은 뒤에는 경복궁 안에 내불당을 짓기까지 하였댜 또한 세조 는 불교를 독실히 믿어 처음부터 사원 및 승려의 보호에 힘썼으며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각종의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해 내는 둥 이 조시대 불교의 전성기를 이루게 하는 둥 억불정책하의 이조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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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왕의 불교에의 관심 여부에 따라 성쇠의 기복이 있었다. 그러 다가 선조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휴정 (서산대사), 유정 (사명당), 영 규, 처영 둥이 승병을 이끌고 나라 를 위해 왜군과 싸운 공로를 인 정받아 교세를 만회할 기회를 얻었다. 休 靜 온 선 • 교 양종을 조 계종의 단일종으로 만들었으며 그의 문하에서 유정, 언기, 태능 둥의 高 弟룰 비롯하여 우수한 승려들이 많이 나왔다. 도교는 고려 후기부터 국가적 인 보호를 받아 왔으나 이조에는 활 동은 미미한 듯하며 민간신앙이던 샤마니즘과 고려이래의 풍수설, 정감록 둥의 참위사상이 민간에 깊은 뿌리를 박고 있었다 . 조 선시대는 검소와 실질을 승상하는 유교를 정치의 기본이념으로 하 고 있어 여기에서 태어난 예술은 크게 발달하지 못했으나 소박하 고 순전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중종대에 성리학 자요 도학파의 우두머리인 靜庵 조광조(1 482~1519) 가 부제학과 대 사헌의 자리에 올라 도덕적 이상정치를 꾀하다가 기묘사화에 능 주로 귀양가서 처형되었는데,그 문하에서 수학하고 있던 梁 山甫는 이에 충격을 받고 죽시 귀향하여 광주 무동산의 북록에 은거할 곳 으로서 漁 淵 園을 꾸미고 일생을 마쳤거니와 이 園은 직선처리를 하 고 있으면서도 풍류적인 분위기가 넘치는 수준높은 조선시대의 대 표적인 별서원림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조시대 전기에 있어 조경재료에 관련된 두 가지 저술을 든다 면 강희안(1 417~64 퍼 『 양화소록 』 과 이수광 (156 3~ 1629) 의 『지봉유설』 이다. 『養 花小 錄』 에는 老松울 비롯한 l 礎홉] 조경식물에 대한 특성과 번식법 그리고 괴석의 배치법, 種 盆內 花樹法, {崔花法, 百 花思宜, 取花丹法, 養 花法둥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 있어 이 방면의 최초의 저술이 아닌가 한다. 『芝峰類 說』은 천문, 지리, 관직, 문장, 훼목, 금충 둥 모든 부문에 관 한 사실을 고서와 고문에서 뽑고 틈틈이 一家 言 을 더한 20 권 l0 책으로 되어 있는 책인데 훼목에는 화로서 梅, 蝶梅, 菱 生牧丹, 장미, 荷 둥 19 종의 화목에 대한 특성이 설명되고 있다. 이 시기에 있어 명나라에서는 북경에 자금성과 禁苑이 완성되 었으며 (1430) ,남종화의 대가문징명(1 47 0~ 1559 퍼 『抽政園記』와 왕 세정(1 528~93 회 『 遊金陵諸園記 』, 그리고 문진향(1 58 5~ 1645 회 『長 物志』 1 켓과 계무부(計成 .1 582~1644 퍼 『 園治』(1 634P}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민간에도 많은 정원이 꾸며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국의 한반도 침략으로 두절되었던 한 • 일관계는 1 (i()陀 F 에 德 川家康이 征夷大將軍이 되어 江戶막부를 열게 된 이래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죽 덕천막부의 간청으로 외교관계가 재개되어 1 (i() 7 년 에 조선정부의 正使여우길을 대표로 하는 수호사절이 일본을 찾게 된 것을 시발로 하여 1811 년에 正使 김리교롤 대표로 하는 통신사 의 방일까지의 약 2 따넌 사이에 도합 I~] 에 이르는 사절의 왕래가 있었으며, 이 때 수행원의 총 연인원수 5, JS()c겨 명 가운데서 그 약 IY'/ o 에 이 르는 700 겨 명 이 일본에 잔류하게 되 었다. 신유한의 『海遊錄 F 에서는 당시 (171 턴)의 일본인의 문화수준은 매우 낮았다고 하였다. 이 『海遊錄』 에서는 팔번산의 專修寺와 동해도의 洞 雲 寺에 각각 前

園 속에 方池가 있었고주변에는 괴석이 놓여졌으며 奇花 嘉 升가심 어졌다고 하였는대 이 한국적인 池園은 殘留 수행원과 결부시켜 연구해 볼 만하다.

16) 申維翰 原著, 姜在彦 譯 tt, 『海遊妹-朝鮮通 信 使 0 日本紀行』, 平凡社, 1974.

한편 명나라는 1 失!에 만주지방에서 일어난 청나라에게 멸망 당하게 되자 조선은 그때까지의 친명정책 때문에 한때 청과 어려운 관계에 있었지만 사신과 수행원들이 북경을 드나드는 사이에 천 문, 지리, 화포, 망원경 둥의 과학과 기술과 같은 서양문물이라든 가 천주교에 관한 자료가 들어오게 되었으며 l 때]기에 이르러서는 청조의 학술문화의 영향이 관료와 학자 사이에 미치게 되어 천문 역법, 학교, 職官동 조선의 여러 가지 문물제도의 역사적 변천과 정을 정리한 『동국문헌비고』의 편찬을 비롯하여 법전울증보편찬 한 『大典通編』 무기에 관한 『무예도보통지』,『全韻玉 篇 』 둥 갖가지 서적이 출간되었다. 또한 학문의 방법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당시 과거제도에 따른 詞章을 주로하는 학문이나 사변적인 성리학을 배격하고 현실적으 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학문에 힘써야 한다는 주장이 이조중 엽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17 세기에 이르러서는 주자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에서 연구해야 한다는 학자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尹鎖 (1617~1680) 와 朴世堂 (1629~1703) 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특히 西溪 박세당은 1678 년에 農家寶典이라 할 수 있 는 『稿經』을 저술하였는데 여기에는 곡물, 채소, 약초, 화훼, 과 목, 임목, 가축, 양잠, 양봉, 어류, 조류, HI 家月令, 占驗, 천문,

지리, 造茶食法 동 농업에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온갖 항목이 취 급되고 있다. 여기에서 화훼, 임목, 과목, 田家月令 둥은 당시의 조경재료를 파악하는데 일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청나라의 성조 (1662~1722), 세종 (1723~1735), 고종 (1736~ 1795) 둥은 학예에 취미를 가지고 있어서 학자를 우대하였다. 또 한 원림에도 취미를 가져 성조(강희제)는 1687 년에 暢春園을 완 성하였고 1702 년에 淸il ~l 접을 개수하였으며, 1709 년에는 圓明園 공사를 시작했다. 그 후 고종(건륭제) 대에 이르러 1747 년에 이 태리 인 신부 Jos ep h Cas tig l ig one 에게 의뢰하여 원명 원내에 양식 건물인 借奇越와 海옻堂을 설계하여 세우도록 하였으며, 프랑스 의 예수회 신부인 Beno it에 의뢰하여 大噴泉을 중심으로 하는 프 랑스식 정원을 꾸미 게 하였다!?) 이 시대에 나온 李斗의 『楊州固防錄』 에는 강희, 건륭시대에 번 영했던 楊 111 에 조영되고 있는 33 개의 유명한 원림을 소개하고 있 는데 당시 염업과 滑運의 중심지였던 양주의 수려한 산수경관과 번영된 사회상을 읽을 수가 있다 !8)

17) 下 I i l 眞丸. 『11. U llJ]園(I)修復提案在{상 1111L -C』, 庭, 56:46~51, 1981 . 18) 杉村勇造. 『中國(I)庭』, 求 n tt~. pp. 124~ 137, 1966.

한반도에 있어서 이조중엽 이후에 나타난 저술을 조경적인 측 면에서 찾는다면 홍만선 (1643~1715) 의 『산림경제』를 들수 있다. 이것은 중국의 문헌을 많이 인용하고 있지만 자신의 체험에 바탕 을 두고 엮은 하나의 농가의 생활백과전서라고도 할 수 있는 것 으로 卜居 섭생, 치농, 治빠, 種樹, 幾花, 양잠, 牧rt, 治膳, 구 급, 治藥, 救荒, 辭標, 辭虫, 選擇, 雜方으로 구성되고 있다. 『養花』는 강희안의 『양화소록』을 옮긴 듯한 느낌이 있으나 橘이 빠진 대신에 木笑쨩, 海業, 丁香, 小桃, 山架黃, 모란, 작약, 뜻, 石竹, 萱 파초 동이 더 첨가되고 있다. 또 1745 년에는 신경준 (1712~1781) 의 『淳園花井雜說』이 있고 1802 년에는 성호 이익 (1681~1763) 의 후손이며 실학파의 대가인 松뻐 이가환 (1722~1779) 과 그의 아들 柚軒 이재위 (1745~1826) 에 의하여 초목, 蟲魚, 蟲 창 , 조수, 신체, 人道, 기계, 器用 둥에 관한 명록인 物譜가 저술되었 는데, 화훼에는 37 종의 한명을 한글로 곁붙여 놓았다. 또 순조 때 의 실학파에 속하는 학자요 『언문지』의 저자인 유희 (1775~1837) 가 지은 『 物譜』는 조수, 초목, 土, 石, 金,火, 水 둥의 명록이

며 박물서인데 이 저서의 특징은 한글 이름이 붙여진 것과 일본 어로 주가 달아졌다는 것으로, 그가 일본어에도 능했음을 알 수 있다. 유회는 당시 유명한 국문학자였다. 1800 년대 초에는 영조 때의 경세가인 서유거 (1764~1845) 의 저 술인 『林園經濟志 』 가 나왔다. 여기예 실려 있는 十六志中 「藝’苑 志」에는 조경식물에 관한 다양한 내용이 들어 있으며 화훼류로서 65 종이라는 많은 종류에 대한 특성과 재배법이 기술되고 있다. 同 書 의 「相宅志」에는 占基總論과 八域名基에 관한 기술이 있는데 전자에는 지리, 水土, 生利, 避思, 營治, 開荒, 種植, 建置, 井池, 溝渠 둥이 포함되어 있고 후자에 있어서는 팔도지리총론과 명승 基地의 品第둥을 열거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林園十六志』 는 농가백과사전과 같은 성격의 저술이지만 「本利志」, 「藝腕志」, 「晩 學志」, 「相宅志」 둥은 조경분야와도 깊은 관계가 있는 매우 귀중 한 자료이다. 그는 일찍 일본에 가는 통신사에게 부탁하여 감자 종자를 구하여 호남 각지에 널리 심게 하여 농촌부흥에 큰 도움 울 준 바 있다. 한편 1900 년울 전후하여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치에 놓여 있는 시기에 서양의 문명이 조경분야에도 비치게 되어 1897 년에 영국인 브라운의 설계로 탑동공원 (Pa g oda 공원)의 건설을 보게 되 었고 1906 년에는 영국인 Sir Jo hn Mclery Brown 의 발의와 하아딩 (Hardi ng , G. R.) 의 설계로 덕수궁 석조전과 그 앞에 있는 프랑스식 이라는 沈床庭園이 준공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1905 년 일본과의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뒤로는 각분야에 일본화정책의 거센 바람 이 전국을 휩쓸었으며, 그 여파는 1945 년 8 월 15 일의 주권회복 이 후 40 여 년을 맞이하는 오늘날까지도 가실 줄을 모르고 있다. 3 庭園各論 고찰의 편의상 정원을 소유별에 따라 궁원과 민간정원으로 나 누되, 궁원은 경복궁과 창덕궁 및 창경궁으로, 민간정원은 주택정 원과 별서정원 및 산수원립으로 세분하였다. 이밖에 사원, 객관; 향교, 서원, 재각 동에 딸린 정원도 없지 않으나 저자의 연구가 아직 여기에 미치지 않고 있으며 다른 학자들의 연구업적도 많지

않아 본 논저에서는 취 급 을 하지 않았다. 1) 宮苑 조선시대에 서울에 조영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경 희궁을 합하여 5 궁이라 말하고 있다 . 이 가운데서 광해군 8 년 (1616 A . D) 에 창건촨 경희궁은 융희 4 년 (1910) 합방을 전후하여 일제의 손에 의하여 穀澈되어 원형을 찾지 못할 정도로 되었으므로 본논 저에서는 제외하기로 한다. 1) 景福宮(北縣 ) 苑 태조 이성계가 송도 수창궁에서 죽위하고 동 3 년 (1394) 7 월에 한 양에 도읍하여 맨 처음으로 창건한 正宮이 이 경복궁이다. 경복 궁에서 조경적인 측면에서 고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곳은 경회루

지원과 교태전의 후원인 아미산원 香遠 亭 池園 둥이다. (그림 2) (1) 慶會樓池園 근정전의 서북쪽에 인접해 있는 大方池와 경회루 중심의 池園 이다. 河 ~(1347~1416) 의 記文에 의하면 I 태종 13 년 春 2 월에 경복 궁 提擧司가 그 後殿의 西樓가 기울어 위험하다 하여 의정부에 보 고하니 전하께서 듣고 놀라며 탄식하여 가로되, 경복궁은 先考 (태조 이성계)께서 창업초에 세운 것인데 지금 갑자기 그렇게 되 었는가 하며 공조판서 朴子 靑 董 之에게 명하여 수리토록 하였다. 그래서 자청 둥이 땅의 형태 를 고려하여 조금 서쪽에 옮기고그 터 에 제도를 넓혀 새로이 하고 또 그 땅이 습한 것을 염려하여 누 를 둘러 못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경회루라는 명칭도 이때 지은 것이다. i U J삶 i C 殿下之十三年春二月 景福 宮提 擧 司 以其後殿西機傾뵤危報 議政府 以聞殿下 驚 暎曰 泉福 宮我先考創業之初所建 今 連 若是敗 遂 幸而觀之曰 樓之傾地潤而基不固也 乃命工 曹 半|j 꿉 臣子 靑等 曰 農 a . ~1:,1 19) 李行 等, 1S30, 『新增 동국여지승람』, 卷一, 京都上 宮麟 (東國文化社 刊, 1973).

=[ 143

`羽 g’ 따 `2R ► 그립 2 경복궁지도

近宜役游手者返修之 子靑 等度地移之小西 因基稙廣其制而新之 又慮 其潤 環樓而池 焉 또 『동국여지승람』의 「궁궐」조에 경회루는 사정전의 서쪽에 있 고, 누를 둘러서 못을 팠는데 그 못은 깊고 넓으며 蓮( 英 渠)이 심 어졌고 못 가운데에는 2 개의 섬이 있다고 하였다. 201

20) 李行 等. 前損{t. 京都上 宮腦 「在思政殿西 었樓爲池 池深廣 種 英 困 其中 有二島」 ·

이상을 정리해 본다면 이 자리에 태조 때 창건한 小樓가 있었으 나 오래되어 기울어 넘어질 위기에 있게 되자 태종년대에 누의 규 모를 보다 크게 하여 재건하고 究池하였다고 하였으며, 池內에는 누의 기단부로 되어 있는 大 方島外에 두 개의 섬이 있었고 연 (英 OO 이 십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 대루는 임진왜란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고종 2 년 (1865) 에 대원군에 의하여 중수한 것이다. 경회루의 池園은 약 130 X 110 m3.기의 방지와 3 개의 방도로 이 루어지고 있다. 못의 東岸 가까이에 있는 동서 39m, 남북 50m 의 크기를 갖는 큰 섬에는 정면 7 칸(약 34m), 측면 5 칸(약 29m) 의 팔작지붕을 갖는 누건물이 세워지고 있으며, 누마루를 받치고 있 는 外陳石柱 24 개는 방형이며 내진석주 24 개는 원형이라는특징을 지니고 있다 . 池岸과 약 9.5m 의 거리를 두고 있는 경회루역에는 돌난간이 있는 3 개의 석교로 연결되고 있으며, 그 반대편인 누 서 쪽 중앙에는 池水位까지 石階가 만들어져 있다. 이 석계는 선착 장인 돗싶다. 누 서편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장방형섬에는 적송이 심어지고 있다. 이들 방지와 방도는 모두 화강암의 장대석에 의 하여 가장자리가 처리되고 있으며 樓가 있는 大方島에는 荷葉狀 의 석난간이 둘러져 있다(그림 3). 경회루를 중심으로 하는 이 지원은 원래 宮塩에 의하여 방상으 로 둘러싸였으며 동쪽에는 정문인 함흥문이 있고 서쪽에는 천일 문. 남쪽에는 경회문이 있었다. 경회루의 기능은 외국사신의 영접과 조정의 군신에 대한 연회 장소로 이용되는 곳이다. 아울러 유생에 대한 親試와 觀射 觀武 藝 둥의 기능도 지니고 있음을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알 수 있다 •211

21) 李哲源, 1954, 『 1 :. 宮史』, p. 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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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 경회루池固 좌우대칭적인 3 方島型의 方池

端宗元年 ( 1453) 親試儒生于度會樓 世祖元年 (1456) 上 御凌會樓觀射 九年 ( 1464) 上 御 l 菱會樓領三甲戰法 中宗三十五年 (1540) 上 御座會樓 觀武藝 令侍臣製詩. 明宗五年 (1550) 上 御慶會樓觀射 또 제 IO 대 연산군 (1495~1505) 은 경회루지 서편에 만세산을 만들 고 산 위에 五宮을 건설하되 이름은 만세궁, 봉래궁, 일월궁, 예 주궁, 벽운궁이라 하였다. 이 궁들은 금은과 비단으로 꾸미고 기 괴만상한 금수의 꽃을 진열하였으며, 경회루의 아래충에는 紅錦 帳幕울 둘러치고 興淸과 運平(岐生) 3, 따져 인으로 奏樂하게 하고, 지중에는 산호수를 만들어 세웠다. 또 수백 인이 앉을 만한 龍舟 를 만들어 타고 만세산 밑을 왕래하였다. 연산군 12 년 (1505) 4 월에 만세산에서 관등연을 베풀고, 꿉싶났t, 紫鳳燈 蓮花燈, 杜丹燁 金鳥燈, 玉兎燈, 銀鮮燈, 黃龍燈, 姑蘇 燈, 達萊山燈 동 천태만상의 기기묘묘한 둥을 금과 비취로 장식 하여 산하에 걸었다. 연산군이 黃龍舟를 타고 호유할 때는 笑容 谷 수백 주를 피우고, 峨距(밀초횃불) 천 자루를 켜 밤이 낮같이 밝았으며, 興淸(기생) 수백이 줄로 앉아 주악 하였다. 또한 연산 군은 만세산 옆에 迎忠山과 鎖邪山을 만들고 영충산에는 군자가

득의하여 조정에 현양하며 가무연락하는 모습을 만들어 세웠으며, 진사산에는 소인이 귀양가서 폐의를 입고 형용이 초췌한 모습을 만들어 세웠다.~) 燕山召 U:¢, I-.... :.~F (1506) 三月條 〈座會樓池邊起萬歲山 山上造月宮 前採爲 1E 百花關i位 山中J k 間 奇怖萬狀 旦造龍舟廷池上 以採 R 爲英渠 旦爲刑湖樹뾰植池中 樓 下設紅錦帳孫 會興淸運平三千餘人 笛歌那騰〉 四月條〈王命作萬歲山于慶會樓池西, 山上作蓮萊宮日宮月宮 萊宮碧雲宮 皆以金銀採段錦穀飾之 金碧燦爆耀 日 令興淸奏樂其中 又作黃龍舟可 坐數百人 亦以採段飾之 上乘龍舟 往來萬歲山下〉 〈王微行 至景福宮 御慶會樓 設萬歲山觀燈 宜龍 命承政院入觀 夜二 鼓矣 王命司繪黃小老公孝連 分左右部(句燈 靑鷲紫鳳蓮花杜丹 姑蘇 핼萊山金鳥玉兎銀獅黃龍 千態萬狀窮極奇巧 皆以金銀珠琴飾之 所 費萬計 惡于萬歲山下 王乘黃龍舟觀之 住英菩香數百束 列織垣干柄 夜明 kI1 았 興淸數百列坐奏樂〉 연산군의 이와 같은 호유생활은 마치 중국 북송의 휘종 (1101~ 1125) 의 경우를 방불케 하고 있다 .231 죽 휘종은 정화연간 (1111~ 1117) 에沖京에 조영한 坦林苑의 東南隅에 華觜岡이라는 높이 수십 丈에 이르는 구릉을 만들고 산상에는 금벽으로 꾸민 琴微殿을 세 웠으며, 그 옆에는 雲薛와 層崎t이라는 두 정자를 세웠다. 백석으 로 만든 階道는 곡절하여 산에 이르고, 못가에는 석난간을 둘렀 으며, 홍교는 小溪에 걸려 있어 그 사이로 鳳舟가 꿰어 다녔다. 원문 밖의 산장인 인지전의 좌우에는 거암을 배치하고, 왼편 것 을 〈敷錫神運萬歲峰〉 오른편 것을 〈玉京獨秀太平岩〉이라 이름 붙 였다. 莊의 서남에는 또 琴微閣울 두었다. 풍류황제 휘종은 이것만으로서는 만족할 수 없어 선화년간 (1119 ~1125) 에 도사 劉混康의 말을 믿고 경성의 동북우에 항주의 봉황 산을 본따 만세산울 축조했는데 그 주위가 10 여 리요, 그 최고의 1 봉은 구십 보에 이르렀다. 산정에는 介亭이라는 정자를 세웠으 22) 李哲源, JliJffli'f, p. 13. 23) 杉村勇造, 1976. 『中國11)庭J, PP. 5 0~51 . 1966.

며 대소산간에는 화려한 누각이 점재하였다. 산하에는 큰못을 팠 으며, 유수는 구불구 불 계류 를 이 루 어, 혹은 급 류 로 혹은 완류로 되어 물새 를 놀게 하였으며, 수 리에 걸쳐 관사, ~ t射 를 배치하 여 푸른나무 사이로 붉은 기둥이 울긋불긋 비치어 아름답게 수놓 아지도록 하였다. 연산군은 이와 같은 호사로운 생활 끝에 신하에게 폐위당하고 강화에 추방되어 150 6\::!에 강화에서 죽었으며 북송의 휘종은 金軍 에 붙들려 가서 만주의 오국성에서 일생을 마쳤다. 결론적으로 경회루지원은 누상에서 池中의 蓮을 관상하거나 주 위의 자연 경관을 조망하면서 즐기거나 직접 배 를 타고 놀기 위해 꾸며놓은 유락목적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웅장한 누건 물과 석교 및 누가 있는 方島의 가장자리에 마련된 하엽상의 석 난간도 시각을 즐겁게 해주는 요소이며 연이 없을 때는 이들 건 축물과 두 개의 장방형의 섬에 심어진 赤松群이 수상에 투영되는 모습 또한 시시각각으로 쾌감을 더해 주게 될 것이다. 누는 지붕 의 형태에서 볼 때 남향하고 있지만 기둥 사이에 벽이 없으므로 사방울 조망할 수 있다. 그러나 주 조망대상은 서쪽의 인왕산이 될 것이다. 디자인면에서는 방지의 중앙에 동서축을 가상할 때 경 회루와 서쪽의 두 개의 섬을 양분하는 직선위주의 좌우대칭적인 기하학식 정원이라 할 수 있다. (2) 峨耀山園 (交泰殿後園) 경회루의 북동쪽에 인접해 있는 계단상의 花階룰 峨崎山園이라 고 한다. 원래는 왕바의 침전이던 交泰殿의 후원인데 교태전은그 앞(南)쪽에 있던 康 寧 殿과 함께 1920 년 12 월에 창덕궁으로 이건하 게 되어 (대조전),아미산만 남게 되었다. 교태전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宮蘭誌』의 「交泰殿」 조에 〈世祖五年 上 召申叔舟 語以北伐之意〉라 한 것을 보면 조선 조 초기부터 있었던 것 같으며, 임진왜란때 타서 없어졌던 것을 고종 2 년 (1865) 에 재건한 바 있다• 아미산원은 아마 교태전을 재건 할 때 축조한 듯하다. 축산기법은 낙선재 (헌종 12 년에 창건)의 후원 양식과 비슷하나 후자는 자연지형을 다듬어서 계단식으로 한 데 대하여 아미산원은 평지상에 인공적으로 축조했다는 데 특징적인 차가 있다. (그립 4)

► 그립 4 交泰殿 後園인峨 崎 山園 (계단식 정원이다)

아미산원은 동·서 ·남쪽이 4 段 또는 5 段으로 되어 있고 북쪽 은 수직으로 쌓아 올려 배면을 이루게 하고 있다. 장방형의 기단 은 동서 약 55m, 남북 약 30m 의 넓이 룰 가지고 있으며, 지면부터 최상단까지의 높이는 약 3m(IO 尺)에 이르고 있다.단의 높이나 너비는 동 • 서 • 남이 각기 다르지만 교태전의 뒷편에 대하고 있는 원의 남쪽에 있어서는 제 1 단부터 제 3 단까지는 段 高 가 30cm, 70cm, 80 cm 로 각기 다르기는 하나 段幅은 대략 3m(IO 尺)를 전후하고· 있다. 제 4 단은 높이 75cm, 너 비 2 . 3m 이 며 동서 약 32m, 남북 약 15m 의 넓이를 갖는 정상부는 정자가 한 채 들어설 만한 위치이다. 이들 각 단에는 회화나무, 피나무, 느티나무, 매화나무, 앵도 나무, 말체나무, 배나무, 소나무 둥이 불규칙적으로 심어지고 있 다. 또 전면의 제 1 단에는 괴석 2 개, 연화문과 龍紋의 石池 두 개 가 배치되어 있고 제 2 단에는 목적불명의 방형의 짧 石 1 개와방형 의 석지 2 개가 배치되고 있다. 이 석지는 높이 약 60cm 의 방형 석대 {SOX 50cm) 위에 올려져 있는데 높이 50cm , 가로 세로 각 70cm 의 크기를 가지며, 내측은 구경이 가로 세로 각 46cm 이고 깊이는 약 10cm 이다. 이 두 개의 석지 전면에는 각각 〈函月池〉 와 〈落 霞 潭〉이라 음각되고 있다. 46X46cm 의 좁다란 넓이룰 갖 는 小石池이지만 여기에 보름달을 띄우고, 또 붉은 저녁 노을을 잡아 넣는다는 뜻을 품고 있어 매우 시적이며 풍류적인 분위기가 넘치고 있다. (그립 5)

► 그립 5-1 峨籠山의 添景物

► 그림 5-2 龜背上에 龍紋石池가 놓여 있다.

► 그림 5-3 峨頓山 花階에 배치된 〈油月池〉. (같은 類型의 「落霞潭」 石池도 있다)

제 3 단에는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높이 약 240cm, 벽면의 너비 75~80cm 의 크기를 갖는 6 각형의 굴뚝이 전면에 3 개 남동각에 개 계 4 개가 한줄로 배치되고 있으며 굴뚝의 지붕에는 각각 4 개 의 煙家가 만들어져 있다. 이 굴뚝의 각면에는 여러 가지 무늬가 새겨져 있다. 맨 윗편에는 가느다란 당초무늬를 따로 만들어 끼 웠으며, 그 바로 아랫편에는 板i專에 부조된 辭邪像이 있고, 중앙 부에는 넓다란 장방형 의 회 벽에는 松 • 竹 • 梅 • 菊 과 기 타 의 식물 둥이 수놓아지고 있지만 正北면에는 그림 대신에 〈韓〉 자가 새겨지고 있다. 또 최하의 부위에는 벽사상이 새겨진 정방 형의 薄이 끼어져 있는데, 이는 火魔를 억압하는유형들이라고한 다.' 마치 住家와 같은 기와지붕을 갖는 아미산의 굴뚝은 기능적 인 면에서는 교태전의 구들에서 연결되어 연기를 배출시키는 하 나의 구조물이지만 시각적인 면에서는 쾌감울 부여해 줄 수 있는 하나의 장식물이기도 하다. (그림 6)

24) 李海善, 『韓國의 古宮』, 輯國文化財保護協if, 'p. 56~57, 1980.

► 그립 6

峨輝山園의 장식굴뚝

아미산은 원래 중국의 사천성 아미현의 서남에 있는 명산으로 서 佛 家 는 光明山, 道家 는 能. 函 洞 天 혹은 샀陵 太 妙 天 이라고도 한 다. 大峨 中峨 小峨의 삼산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자연경관이 수려하다는 아미산을 住空 間 안에 도입할려면 중국인이나 일본인 같으면 원형에 가까운 축소형의 경관을 조성했을 것으로 생각되 는데 교태전 후원의 경우에는 전혀 근사성이 없는 직선위주의 계 단식 정원을 꾸며 놓고 있다. 괴석 몇개 를 배치 함으로써 아미산 을 상징했는지는 모르지만 외형상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다 만 석지, 괴석, 장식성의 굴뚝 그리고 화훼와 수목을 배치하여 아름답게 꾸밉으로써 仙界로서의 아미산을 상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해 본다• 아미산원은 교태전의 후원으로서 왕비의 산책과 관상을 목적으 로 꾸몄던 것으로 생각되며 북쪽을 수적벽으로 하고 계단상으로 축조한 것을 보면 私的 공간으로서의 분위기 유지에도 목적을 두 었을 것으로 여겨진다.정상부의 넓다란 長 方形의 터는 亭 子가 세 워질만한 立地이다. (3) 香遠亭池園 경복궁 궐내의 북쪽에 있으며 고종의 침전인 乾淸宮의 남쪽에 인접해 있다. 향원정지원은 고종이 재위 32 년 (1895) 5 월 24 일, 창덕궁으로부 터 경복궁으로 돌아온 뒤에 조석으로 遺造하던 곳이므로 이 무렵 에 완성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中 島 가 있는 이 원지가 언제 창설 되었는지는 확증하기가 어렵다. 다만 『태조실록』의 4 년조 (1395) 에는 신궐 후원에 못을 팠다고 했고 『세조실록』 2 년 ( 1456) 조에 는 후원에 琴 露卒 을 짓고 察池 種蓮했다고 하였지만 이 향원지 원과 동일한 것인지의 여부는 불명이다. 지금의 中 島 上에 있는 향원정은 고종 10 년 (1876) 에 乾淸宮을 지으면서 궁의 곤령각 북 쪽에 있던 醉香樓를 이건한 것이다. 향원지는 동서 약 76m , 남북 약 70m 의 크기를 갖는 부정형의 方狀池로서 지면적은 약 5,000m2 이다. 지름 약 20m( 약 J() ()mZ) 의 크기를 갖는 圓島上에는 정육각형 (I 간 약 2.2m) 의 2 층 누건 물인 향원정이 세워지고 있다. 池岸과 中島를 연결하는 목교를 醉香橋라고 하는데, 원래는 못의 북동안에 있었으나 지금은 남쪽

에 가설되고 있다 (그립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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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립 7 香遠池 中島上에 있는 香遠亭과 醉香橋

池에의 注水는 북서각에 있는 i勇泉에서도 이뤄지고 있으며, 여 기에서 나온 물은 石造 휴水口 (너비 18cm, 길이 30c m, 깊이 4cm) 를 거쳐 반회전한 다음에 導水路룰 거쳐 주수되고 있다. 이 수원인

참遠亭 너르고 둥근 연못 겨을낫철 여러슨져 龍舟錦~Jl으로 凌彼中流 호오실제 水波에 뛰는 고기는 蜀召魚인가 호노라. 〈乾天宮前有池 池中有香遠 亭 〉 안민영의 시조내용에서는 향원지가 원상이며, 못 안에는 연꽃 이 심어지고 고기가 길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황은 직선에 의한 非整形池 인데 과연 고종 당시에는 安의 시조에서처 럼 〈둥근〉 연못이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l 島型의 방상 지라는 점에서는 전통적인 조경기법을 도입하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香遠〉 이라든가 〈醉香〉은 연꽃을 뜻한다• (4) 結語 경복궁은 평지에 터를 잡고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을 하여 각종 건축물을 세웠기 때문인지 이곳에 꾸민 각종 정원은 기하학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죽 경회루의 지원은 직선에 의하여 디자인 된 각종 시설물이 좌우 대칭적으로 배치되고 있으며 향원정의 지 원은 圓島와 부정형의 방상지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전통적인 中 島型 방지의 특징을 잃지 않고 있는 기하학적인 池 E1 양식이고 교 태전의 후원인 아미산정원은 평지상에 인공적으로 축조한 직선 적인 계단식 정원이다. 그러나 직선을 중심으로 하는 기하학식 정원의 단조로움을 보완하기 위함인지 경회루지원에서는 址臺의 가장자리와 3 개의 석교에는 화강석에 의한 아름다운 장식난간이 설치되어 있으며 향원지에는 난간이 있는 목재의 가교와 장식적 인 누건물이 건설되고 있다. 또 아미산 정원의 굴뚝과 석지,괴석 등도 장식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밖에도 慈慶殿의 외벽에 꾸 며진 花紋坡(그림 8) 과 내부의 後坡에서 보는 十長 牛圖 의 장식 벽 (그림 9) 도 시각상의 쾌감을 주기 위한 시도이다. 이처럼 경복 궁 안에서 보는 각종 조경시설은 시각면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 듯이 보인다.

► 그립 8 係福宮 慈慶殿의 花紋瑞(竹, 梅,桃, 橋 菊, 杜丹, 杜腸花 동)

► 그립 9 慈慶殿뒷편間端에 마련된굴뚝의 壁面. 여기에는 十長生과 蓮菊,竹,포도 둥이 수놓아있지다고.

2) 昌德宮凍關)苑 조선시대의 태종 4 년 {1404 A. D ) 에 창건한 창덕궁은 태조 3 년 (1394) 에 창건한 경복궁이 정궁인데 대하여 별궁의 기능을 갖고 있으며 일명 동궐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조경적인 측면에서는 건

축물보다는 옥외공간에 관심이 가게 되므로 여기에서는 후원을 중심으로 하되 樂善畜의 후원도 곁붙이고자 한다. (1) 後苑各論 약 6 만 평에 이르는 후원은 창덕궁의 북동쪽에 위치한 자연구 릉지에 왕가의 휴식과 유락을 위해 修敷된 원림을 말한다. 이를 근래 비원으로 통용하고 있지만 이는 한일합방후에 사용되기 시 작한 용어인 듯하다. 다음에 창덕궁 후원에 붙여진 용어의 사용 예를 적어 보기로 한다• 後園 : 『太祖 貸錄』 4 年 9 月 庚申條 新關 〈後園〉에 整池하다. 後苑 : 『世祖質錄』 2 年 3 月 甲戌條 〈後苑新 亭 成〉 『東國輿地勝覽』 卷 一 京都上 苑園 昌德宮後苑〈與昌德宮 後苑通〉 「肅宗의 愛蓮亭記」 〈爲治亭謝于昌德宮後苑〉 北苑 : 『定宗質錄』 원년 2 월 丙申條 壽 昌宮에 御하여 〈北苑〉 에 登하였다 ( 1399) . 北園 : 『定宗實錄』 원년 2 월 乙丑條 群鳥가 宮城「北困」에서 緊操하였다 (I399). 禁園 : 『英祖'.ft錄』 52 年 9 月 笑巳條 昌德宮 〈禁園〉 北에 奎章相1 을 세움. 秘苑 : 純宗宜錄 附錄 明治 45 년 5 월 2 일條 (1912 년) 仁政殿 「秘苑」昌'災苑 特別縱覽者許可取拔規程告示于外方 이처럼 後園,後苑, 北苑, 北國 禁園, 秘苑 등 용어가 일정하 지 않다. 後園 (_苑) 또는 北苑 (一園)은 창덕궁의 궁궐에 있어서 의 상대적인 위치를 나타내는 수단으로서의 용어이며 後 二者인 금원 또는 비원은 왕실소유라는 개념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특 히 현재 통용되고 있는 비원이라는 용어는 순종실록에서 〈明治〉 라는 일본의 연호가 쓰여지고 있는 점에서 볼 때 일제의 영향을 받고 지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가급적이면 조선시대에 통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後園또는 後苑으로 쓰되 민간정원의 후 원과 구별하기 위하여 〈後苑〉으로 부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창덕궁 후원의 시초가 언제인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太宗實錄』 6 년 4 월 조에 의하면 창덕궁의 동북 한편에 새 정자를 짓고

解溫 亭 이라 명명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위치가 후원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또 『 太宗 1; t錄』 13 년 (1413) 4 월 庚申條에는 〈本宮池魚 皆自死浮水 命移廣延樓解溫 亭 前 池之魚 放于閣會樓下大 池 恐又以水凌自 死也〉 라 한 컷을 보면 정자 앞에는 못이 있었고 물고기가 길러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 太宗質錄』 14 년 6 월 戊午條에는 解溫 亭 울 愼獨 亭 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하였다. 그후 세조조에 이르러 그 ,5 년 (1460) 9 월에 경복궁에서 창덕궁 으로 移御한 왕은 후원에 못을 파게 하고 역부에게 酒肉을 下賜 하였다고 하였으며 (『世祖實錄』) 『 宮閑志』 에서는 261 세조 6 년에 왕 께서 永 l1 頂君 薄(광평대군 珉의 아들)와 鳥山君 樹 (임영대군 I 통의 아들) 에게 지금의 宙合樓 부근에 우물을 파게 했던 바 각각 두 개의 우물을 얻게 되어 왕은 크게 기뻐하고 이름을 붙이기를 摩 尼 破璃 琉璃 玉井이라 하였다고 했다. 세조는 8 년 정월에 宮塔의 확장계획을 세우고 9 년 (1464) 부터 역사에 들어 갔는데 東瑞을 확장할 때는 인가 73 區를 철거하고 연장 4,200 尺을 축조했으며, 북장에 있어서는 58 區룰 철거하고 4,000 척에 이르는 담을 쌓았다. 위와 같은 역사 내용에서 볼 때 세조대에 후원을 크게 확장하였고, 함께 필요한 조경공사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연산군대말에 이르러 瑞意 臺 와 前池의 축조공사가 시작되었 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연산군이 쫓겨나자 이 공사도 중단되고 말았다 .”I 연산군 일기 3 년 5 월중甲子, 10 년 11 월 丁酉, 12 년 8 월 壬戌 조에 의하면 왕은 후원에서 여회와 더불어 遊案하였고 또 歲獸를 놓아 길러서 사냥을 하는 둥 하여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고 하는데 이 때에 화려한 여러 가지 많은 시설이 첨가되었을 것으 로 생각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동궐과 함께 후원의 여러 시설 들이 대부분 불탔거나 황폐되었던 것인데 광해군대 (I609~1622) 에 창덕궁을 복원하기 시작할 때 暎花堂과 小亭등이 조영되었으 나 현재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시설들은 16 대 인조와 19 대 숙종 시에 꾸민 것들이다. (그림 IO). 26) 李哲源, liiiffl 룹 , p. 52. 27) 崔永禧 「瑞意臺 : 에 對하여」, 鄕土서울, 第 18 號, 서울市史編纂委員Et' p. I~14, 1963.

► 그립 10 창덕궁지도 /

창덕궁 후원에는 수많은 ,享樓 와 池 泉, 怖石 기타의 조경요소들 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으나 여기에서는 원림공간의 특징에 따라 英容存: 域 魚水堂域 半月 池域 玉i}[ 川域으로 구분하여 고찰하고 자한다. (i) 英容亭域 후원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정원으로서 中島가 있 는 방지를 중심으로 하여 池의 남안에 英容亭 . 池의 동쪽 築坦 위에 暎花堂 서안에 四井記碑閣, 그리고 북쪽 언덕 위에 宙合樓 둥이 세워져 있으며 또 지형적으로는 동쪽은 아무런 장애물이 없 이 트여 있으나 남. 서, 북쪽은 소구릉에 의하여 둘러 싸여 있다. 비록 건축물의 창건연대는 각기 다르다 하지만 현황에서 볼 때 둘 러싸인 아늑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가장 먼저 조선조 초에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영화당은 숙종 18 년 (1692) 에 改建한 것으로서 주변의 꽃을 감상하며 즐기거나 왕이 임석한 가운데 科試룰 치루는 곳이기도 하다 (그립 11). 숙 종의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暎花堂郞 事 春갇新制釜觀昭 朝日輝 4 暎殿언 入眼秋山錦錦席 滿園 霜葉 (年紅鉛

► 그립 11

暎花堂

祥孟長統黃金監 瑞氣恒浮白玉廉 細菊否懿乘興醉 靑天기나 8 月如鎌 이 무렵에는 아직 英容池가 축조되어 있지 않아서인지 가을풍 경 만 노래하고 있을 뿐 원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英容亭 은 영화당을 개조한 지 15 년 후인 1692 년(숙종 33 년)에 창건했으며 정조 16 년 (1792) 에 개건할 때 원명인 澤水齋를 부용 정이라 개명한 것이다. 부용정은 中島가 있는 방지 (35mX 29m) 의 남안 중앙부에 세워진 정면 3 간, 측면 4 간의 단층 다각기와 지붕의 건축물로서 두 개의 석주를 지중에 두고 있다 (그림 12) .

► 그립 12

英菩亭과 圓島型方池

못은 화강암의 長퓸石 에 의하여 직선적으로 축조한 방지이며 池 心에는 직경 약 9m 에 이르는 둥근 섬이 있고 여기에는 赤松이 심어지고 있다. 숙종의 「澤水齋前大池白蓮」 시에 의하면 당시 에는 백련이 심어진 듯하며 다음과 같다. 諒澤水齋前大池白蓮 太液淸波埋 何多白玉智 欲知奇絶處 月色滿池心 정조 (1777~1800) 는 부용정을 개건한 왕인데, 「夜登英容亭小樓

序」, 「夜登英容 亭 小樓」, 「 英容亭 賞 1 t釣魚」, 「 英 容 亭 小樓」 등의 시를 남기고 있다. 사제만 가지고도 부용정지원의 기능이 달맞이 놀이, 釣魚 賞花 동에 있음을 알 수 있지만 「夜登英 容亭 小樓序」 에서는 月夜의 舟遊도 다른 한 기능임을 보여주고 있다. 夜登英菩 亭 小樓序 是夜月明 予謂諸臣曰 原訪有 「宮林待月輪」之句 卿等廷舟太液可平 重臣李文源應聲升舟 從之者十九人, 乃給玉笛 査 酒 沿距于 亭 棋之間 紗 籠三十 對列樹池邊 與花光月 色 上下輝暎 御 英容亭 小樓以觀之 列侍者 閣臣六 史官一 其餘坐池岸 . 樓上人與池中人相語, 眉 詩曰 〈心 장: 花會又 炫樓 爲是今春可樂遊 此夜君臣同祝慈 萬年枝上月長 WI 〉 때는 정조 19 년 (1795) 봄인데 왕이 閣臣들과 함께 부용정에서 賞花와 함께 舟遊, 釣魚 둥을 하면서 달밤을 즐겼다는 내용을 싣 고있다. 池의 서안에 있는 四井記碑閣은 숙종 때 세운 것이다. 세종 6 년 (1424) 에 왕께서 永順君 浦 (광평대군 珉의 아들) 와 烏山君 湘 • (임영대군 瑢의 아들) 에게 지금의 주합루 근처에서 우물을 찾 게 한죽 마침내 각기 두 개의 우물을 얻었으므로 왕은 크게 기뻐 하고 각각에 대하여 이름하기를 摩尼, 破璃, 琉璃, 玉井이라 하 였다. 그후 숙종 16 년 (1690) 에 옛 述盛閣 자리에다 비를 세우고 四井記碑閣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28) 李哲源, 『王宮史』, 東國文化社, p. SI, 1954.

宙合樓는 정조 원년 (1777) 에 창건된 정면 5 간, 측면 4 간의 八 作지붕형 樓 亭 건물이다. 부용정과 중도를 연결하는 정북의 언덕 위에 세워져 있으며 그 南斜面은 직선에 의하여 5 계단으로 처리 하여 소나무, 단풍나무 둥을 심고 있다. 또 주합루의 뒷편 언덕 도 3 계단으로 처리하여 원림을 형성하고 있으며 동편 언덕 위에 露月光風觀울 세워 놓았다. 주합루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서 전망이 좋으며, 眼下에 부용정과 英容池가 한 눈에 들어오게 된 다. 또 부용정에서도 眼下에는 원지가, 眼上에서는 북쪽의 계단 상의 원림과 丘上의 주합루가 한 시야 속에 들어올 수 있어 춘, 하, 추, 동 경관의 계절적인 변화를 즐길 수가 있다. 또 園域의

地形處理는 직선위주이며 건축물의 공간배치는 기하학적임을 알 수 있다 (그림 13).

► 그립 13

英쯤池와 宙合樓

( ii) 魚水堂一愛蓮亭域 英容亭 域의 북쪽 주합루가 있는 언덕을 넘으면 低地가 나타나 는데 여기에는 상 • 하 2 개의 방지가 있고 上池 의 북쪽에는 演慶 堂 이 자리잡고 있다. 이 域의 동쪽에는 尙斗閣의 金馬門과 愛蓮 池 로 통하는 不老門 이 인접해 있다.

► 그립 14

愛蓮池와 愛蓮亭(下池)

愛蓮池는 동서 약 30m , 남북 약 26m 의 크기 를 가지고 있으며 북안에 愛蓮 亭 이 세워져 있다 (그립 14) . 이 애련지의 서편에는 한 단 높은 곳에 약 25m 의 거리를 두고 동서 약 12m , 남북 약 17m 크기의 방지가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魚水堂과 관련 있는 園池이다 (그림 15).

► 그럽 15

魚水堂池(上池)

「창덕궁 궁궐지」에 의하면 l 魚水堂은 演 l慶 堂의 동남에 있는 두 못 사이 에 있으며 (현재는 없음) , 광해비 柳氏 가 피난했던 곳 이라 하고 있다. 또 애련정에 대해서는 〈연경당의 동쪽에 있으며 제 2 연지의 북안에 있다. 숙종 18 년 壬申 (1692} 에 지중에 섬을 만 들고 여기에다 정을 지어 애련정이라 하였다. 이 정의 남쪽에는 活碧亭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동쪽에는 不老門이라는 석문이 있으며 석문 밖에도 불로지라는 못이 하나 있다〉고 하였다. 魚水堂 : 在演慶堂東南兩池之間 東西有池 有門曰靈沼門 南曰 石渠門 光海妃柳氏避難于此 愛蓮亭 : 在演慶堂東 第二蓮池北岸 肅宗十八年 壬申 築島于池中而 構亭 名曰愛蓮 東有石門 名曰不老 亭之南舊有油碧亭 石門外有一池 稱不老池 29) 李哲源, 前播 畵 , p. 54.

또 숙종의 「愛蓮 亭記 」에서는 어수당의 동쪽에 있는 연당 속에 하나의 亭 베 를 세우고 그 이름을 周茂叔의 애련설에 따라 애련정 이라 붙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에서 볼 때 애련정은 원래는 중도상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편의 어수당지는 애련 지에 앞서서 광해군 (1609~1622) 대에 축조했었던 것으로 생각 된다. 肅宗 「愛蓮亭記」 亭以愛蓮名 示微意也 夫四時之花基蕃各有所偏 隱逸之花陶潛處士 之愛 富責之花李唐諸人之愛 君子之花元公茂叔之愛 愛難同而獨愛紅 衣之處 汗濁而不漁不改 以中立而不偏不尙 耿介拔俗 灘湘出鹿 隱然 有君子之德 此所以命名新亭 而數千載之上 與吾同志者其惟嫌溪一 人而己平 予閔寶曆一紀有六之春 爲治亭배于昌德宮後苑 魚水堂之東 蓮塘之中前臨映花後背深秋 千年喬松視若盤龍張蓋 一曲流水望 如玉噴虹起 春風浩 蕩 則百花迎笑 夏 日 陰濃則荷香上蘭 三秋飛霜則錦 線滿眼 窮冬蒸發則層氷輕峨 隨節隨變不可具狀 是固愛蓮 亭 之勝槪也 (이하 생략) 어수당과 애련정을 중심으로 하는 정원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前記 의 숙종의 「愛蓮亭記」 와 다음의 「觀燈詩」 에 잘 나타나고 있다. 魚水觀燈 華堂左右陝池塘 老柏盤松似蓋張 燈火榮燈千萬站 却嫌花月 奪明光 주변에는 老柏과 盤松이 있어 여름에는 녹음을 주교 못 속의 蓮 花는 질은 향기를 멀리 날려 보내주고 있다. 봄에는 백화가 만발 하고 여름에는 연꽃 향기, 가을에는 붉은 단풍, 겨울에는 고드름, 사시절 변화가 무쌍하다. 뿐만 아니다. 밤에 수많은 둥불을 밝힐 때 어수당 양편 못에 비치는 황홀경은, 나무가지 사이로 비추어 오고 못에 뜨는 월광과 다툴 만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에서 볼 때 밤과 낮, 춘하추동을 가릴 것 없이 뜻이 있다면 언제나 즐 길 수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연경당은 어수당이나 애련정보다 약 200 년 후인 1827 년 (순조 28 년)에 珍藏閣의 옛터에다 민가 롤 모방하여 세운 (谷稱 99 간의 건물 인데 단청을 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현황에서 본다면 대문 입 구 양편에 괴석 4 기가 석대 위에 세워져 있다. 長樂門을 들어가 행랑마당에 이르렀다가 다시 행랑채의 좌우 양편에 있는 두 문 (修仁門과 長 陽門)을 지나가면 내당과 사랑채 (연경당)로 이루어진 몸채에 이르게 된다. 사랑채 동편으로 꺾으면 남북방향으로 기다 랗게 건축된 정면 7 칸, 측면 3 칸의 善香 齋 가 있으며 그 뒷편에 〈나자형의 계단식 花階가 四魂石에 의하여 옹벽處理되어 있고 단 상의 가장자리에는 석난간이 있어 쾌감을 더해준다. 단상의 북편 에는 사모기와지붕의 單 r바 1 인 濃 綠 亭이 세워지고 있다. 화계에는 철쭉류와 松과 단풍나무 (3 株)가 심어지고 있다. 이 계단식 후원 은 낙선재의 후원과 같은 양식에 속하겠지만 일직선상이 아닌 〈나자형을 이루게 한 것은 낙선재 동편의 錫福卓f의 경우와 비슷 한 유형이다(그립 16). 濃羅亭에는 완자 (卍 字 )무늬의 四分闇이 달 려 있어서, 여름철에는 위로 매어 달면 벽이 없는 이름 그대로의 정자가 된다. 한적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도록 계획한 것이다. (iii) 半月池域 半月狀의 自然曲線池를 중심으로 한 원림으로서 池形이나 정자 가 他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원지를 흔히들 반도지라고도 하는데 그 기원을 알 수가 없다. 반월지원은 현황에서 볼 때 尊德亭이 있는 上池와 扇形의 親燈 亭이 있는 下池로 이루어지고 있다• 육각형의 지붕을 갖는 존덕정은 인조 22 년 (1644) 에 세운 것으로 卒 북쪽에 방지와 반월형지를 결합해 놓은 듯한 기하학적인 못이 인접해 있다. 東閑圖에 의하면 당시에는 방지와 반월지가 橫斷路 를 사이에 두고 남북에 위치해 있는 것을 보는데, 19 세기말 또는 20 세기초에 변형된 것이라 생각된다. 또 자연곡선으로 윤곽선이 처리된 하지는 동궐도에는보이지 않 고 그 대신에 두 개의 방지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때 오늘과 같은 〈반도지〉는 19 세기말 또는 20 세기초의 일정치하에서 변형 조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宮隣誌』에 존덕정의 건립년도는 기록되어 있지만 하지 (반도지) 東岸에 세워진 扇形의 관람정의 건 축년대가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상지 를 현황에 의하여 살펴 본다면 존덕정에 이르는 석란교의 兩岸에 는 괴석이 석대상에 놓여 있으며 안쪽 橋南에는 日影강:를 두어 시각(욥刻)을 재도록 하고 있는데 점경물의 역할도 하고 있 다 . 존덕정은 육모기와지붕형의 水樹型 단충정자인데, 외측에 처 마 아래에 잇대어 지붕을 올린 퇴칸이 두르고 있어 마치 이중지 붕의 정자로 오인케 한다 (그럼 18).

► 그립 16

演慶堂 善香齋의 계단狀後園. 보이는 정자는 濃繩亭

► 그립 17

尊德亭 (1644) 과 半月池(上池)

숙종 (1675~ 1720) 의 시 「尊德 亭 偶玲」이 있다. 301 氷鮮池塘春水綠 赤魚時遂白魚遊 閑庭無事日初永 斜尙危腦伴睦印 얼음이 녹고 봄이 되어 나무의 신록이 지당에 푸르게 비치는데, 못 속에는 赤魚와 白魚가 쫓고 쫓기며 놀고 있는 한적한 분위기 가 연출되고 있다.

30) 李哲源, 『王宮史』, 東國文化社, pp. 54~55, 1954.

► 그립 18

尊德亭 쪽에서 바라다본 半月池

자연곡선지인 하지 (반도지)의 북동안에도 水謝의 일종인 부채꼴 의 관람정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비슷한 예를 찾기 어려운정 자 형태이다. 못가 언덕에는 괴석이 여기저기 배치되고 있다. 여하튼 상지와 하지로 이루어지고 있는 반월지역은 수림으로 둘 러싸여 있어 깊숙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감돈다. 하지에서는 관람 정에서 낚시질하며 즐기기에 알맞고 상지에서는 낮에는 물속에서 유영하는 물고기를 감상하고 밤에는 물에 잠긴 달을 감상하기에 적합하다. 방지와 반월지로 이루어지는 원래의 〈반월지〉도 이러 한 분위기에 젖어보기 위하여 꾸며졌는지도 모른다.

등/ ► 그립 19 玉流川園

( iv) 玉流川域 후원의 북쪽 가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옥류천을 중심으로 하여 御井 그리고 淸腦亭. 追造亭, 太極亭, 臨寒亭 , 籠山꾸 둥으 로 구성되어 있는 유락공간이다(그림 I9). 이 공간의 중심은 아무래도 〈옥류천〉이라 할 수 있다. 溪流域 의 露頭岩을 수평과 수직으로 서로 직각이 되게 깎아서수평면은 E 자형의 곡수거를 만들고 곡수거를 흘러내린 물이 폭포가 되어 수 직벽으로 낙하하도록 가공하였다(그림 20).

► 그립 20

玉流川湯布

曲水渠面 윗쪽의 석벽에는 하부에 〈玉流川〉이라 음각한 인조대 왕의 어필이 있으므로 이곳을 옥류천이라 통칭하게 된 듯하다•또 그 윗쪽에는 숙종의 御製御筆인 〈飛流三百尺 造落九天來 看是白 虹起 魏成萬堅雷〉라는 시구가 있는데 6 척도 못되는 小濕에 대하 여 〈飛流三百尺〉이라 한 것은 매우 유머러스한 과장된 표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궁궐지』에 〈仁祖十四年秋 整石引川 透造岩呼 流至亭前 落爲湯布〉라 한 것을 보면 이 노두암의 조경공사는 1636 년에 遺造亭과 太極亭 그리고 淸潛亭을 세울 때 함께 한 듯하다. 遣造亭은 옥류천폭포 앞에 있는 단칸의 삿갓지붕의 정자이며, 이곳에 이르는 다리 밑으로 옥류천의 물이 홀러 내리고 있다. 遺 造亭의 창건 당시의 이름은 軟返亭이었다.

► 그립 21 玉流川의 曲水渠

► 그립 22

仁祖의 御筆 「玉流 )|I 」 과 肅宗의 御筆 詩 (윗편)

소요정과 옥류천의 폭포 및 곡수거에 관련된 기능은 다음·과 같 은 시에서 엿볼 수 있다. 肅宗의 詩 「遺遜觀泉詩」 掛綠高亭日正悠 閑 看 洞怒玉泉流 別有此中無限興 f頓船曲水漁幽慈 正祖의 詩 「到遺造亭 觀漏障琴次壁上的 林端飛洙服鳴琴 空琴滋滋小閣深 偶然諸君同此席 道是無心却有心 숙종의 시에서는 높은 정자에 앉아 깊은 골짜기를 흐르는 옥류 천을 한가로이 바라다보는 것도 좋거니와 곡수에 술잔을 띄우면 서 깊은 근심을 씻어내는 것도 무한한 홍이 아닐 수 없다고 했으 며 정조의 시에서는 바위 끝에서 튀기며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마치 가야금을 요란하게 울리는 듯하며 하늘은 푸른데 이 몸이 들 어 있는 小閣은 빗속에 깊이 잠겨 있는 듯하니 道란 본래 僚無心〉 이 〈有心〉이 아니던가 하고 있다. 청의정은 옥류천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삿갓지붕형의 단칸모 정이다. 인조 14 년 (1636) 에 지은 것으로 9.7 m X 7 . lm 의 넓이를 갖는 장방형지의 중도(方島 3.8mX3 . 6m) 상에 세워지고 있다. 청의정의 기능은 자연 속에서의 휴식과 유락이겠지만 다음과 같은 정조의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자에서의 釣魚도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 淸滿亭賞花日 哈示在造諸臣詩 彈琴花底石 擔釣水中亭 雅會切探勝雲端高論聽 청의정의 방지에는 조어하며 즐길 수 있도록 물고기가 길러졌 던 것으로 여겨진다. 옥류천域은 인공적인 5 개의 정자와 청의정의 방지와 방도,御井 (그럽 23), 옥류천의 곡수거와 폭포 둥은, 형태의 다양성 비기하학성 때문에 주위의 자연환경에 대해서나 시각상 어떤 거 부반옹을 주지 않는 깊숙하고 조용한 유락공간이라 할 수 있다.

► 그립 23 玉流川의 御井

(2) 樂善齋 후원 仁政殿의 동쪽에 별궁처럼 자리잡고 있는 口자형의 건물울 낙 선재라 말하지만 그 동쪽에 이어져 있는 錫福軒과 壽康齋 도 여기 에 포함시켜 이들 건축물의 뒷편에 꾸며지고 있는 계단식 후원을 일괄하여 〈낙선재 후원〉이라는 이름으로 고찰하기로 한다.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로서 헌종 12 년 (1846) 에 창덕 궁 燕裵으로 세운 것이다. 小疑宜綠에 의하면 小疑 許維 (1808~1894) 가 헌종 15 년 (1849) 정월 15 일에 왕의 부름을 받고 낙선재에 들어 가 어전에서 그림을 그렀고 왕실소장의 고화와 고서를 평했다고 하였는데 낙선재를 짓고 바로 燕앓으로 이용했던 것으로 생각된 다. 이때 小疑는 창경궁의 선화문으로 들어와서 內司僕 銅龍門, 日影臺, 藏書閣, 回泰門, 東山別監房, 知穀官聽, 壯勇衛廳, 金 馬門, 石渠題, 重垂殿, 崇德門, 多技門, 花草廣을 차례로지나樂 善齋 뜰로 겨우 들어왔지만 唐詩에 있는 〈宮花萬樹 不政擧頭看〉 이 라는 말이 실감났다고 하였다. 또 낙선재 뒤에는 平遠亭 U:凉亭) 이 있었음을 덧붙이고 있다. 낙선재와 석복헌 및 수강재의 뒷편에는 각각 계단상의 花階가 있는 후원이 있다. (그립 24,25). 이들 형태는 각각 다른 특징을 지 니고 있지만 공통점이라면 모두 화강암의 長장石에 의하여 4~5 31) 許維 原著 金泳鎬 編譯 『小擬實錄』, 瑞文堂 pp. 1 69, 1981 .

► 그립 24 樂善齋의 後園花階 (花階앞에 怪石이 세워지고 있다)

► 그립 25

錫福軒의 t園花階(直線적인 계단에 변화를 주고 있다)

단으로 축조된 직선적인 식재용 帶狀地가 마련되어 있으며 그 頂 部에는 높이 1.5 ~2.0m 의 花紋瑞에 의하여 격리된 동산이 있는데 여기에는 정자 또는 당이 세워지고 있다. 죽 화계에 만들어진 계 단상의 통로를 따라 각기 다르게 디자인 된 후문을 지나가면 전 망이 좋은 정상부에 이르게 된다. 낙선재의 경우에는 육각지붕을 갖는 누형태의 上涼亭이 세워져 있어 주위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

► 그립 26 樂善齋後園의 上涼亭

온다 (그립 26). 錫福軒의 후원에는 閑靜堂이 있으며 그 앞에는 47H 의 괴석이 石盆에 심어져 있고 다른 두 개는 석함 없이 그대로지 상에 세워지고 있다. 수강재의 후원에 세워진 琴雲亭은 이름과는 달리 2 칸의 온돌방이 있는 정면 4 칸, 측면 3 칸의 건축물로서 당 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처럼 후원의 높은 곳에 세워진 이 들 건축물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은 전망이 좋을 뿐더러 조용하고 담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어 오붓한 분위기도 넘치고 있다. 또 花階에는 영산홍과 일본철쭉, 옥향나무 둥이 심어져 있으나 아마도 일정시대에 심은 듯 식물에 관한 한에서는 일본냄새가 넘 치고 있다. 전통적인 요소로서는 괴석이 배치되어 있고 장식적인 성격을 띠고 각기 다르게 디자인된 굴뚝은 괴석과 함께 후원의 점경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특히 낙선재 뒷뚤의 화계 앞 에 놓인 괴석대에는 〈小漏김서〉라 음각되어 있는 것을 보는데 (그립 27) 괴석이 삼신산을 상징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듯이. 보인 다. 다른 하나는 (그립 28), 괴석대에 怪獸가 양각되어 있는 것을 본다. 이밖에 각각 특징있게 디자인된 화문장과 후문 또는 옆문 도 시각적인 즐거움을 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그립 2~30). 직 선적인 花階도 낙선재와 석복헌, 수강재의 경우 선의 흐름, 계단 의너비, 頂部의 공간으로 연락하는 직선적인 접근로에적당한변 화를 주어 직선에 의한 단조로움과 지루함을 덜어 주고 있는 것 도 디자인상의 한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 그립 27 樂善齋後園의 怪石 (怪石흉에

〈 小溫洲〉라 음각되고 있다)

► 그립 28 樂善齋 1 t l 점의 怪石 (怪石臺에

怪獸가 陽刻되고 있다)

► 그립 29 樂善齋 後園과 錫福軒 後園과의 通用門

► 그립 30 承華樓와上涼 亭 사이의 출입문

(3) 結語 창덕궁의 후원은 변화 있는 자연지형을 가급적이면 파괴하는 일 • 없이 적절히 이용하여 낮은 곳에는 못을 파고 못가나 높은 곳에 는 정자를 세워 관상과 휴식, 그리고 유락에 알맞도록 꾸미고 修 景 한 궁궐 안의 원림공간이다. 이러한 면에 있어 평면상에 기하 학적으로 배치한 경복궁의 여러 정원과는 유를 달리한다. 그러한 까닭으로 정자 안에서의 정적인 관상과 유락에만 그치지 않고 자 연의 숲 사이로 산책하면서 즐길 수 있는 동적인 공간기능을 부여 하기도 한다. 이 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변화 있는 자연구릉 속의 적소에 각기 특징 있는 池, 亭 , 泉, 水流를 배치하고 있다. 본장에서 거론하지 않았던 淸心 亭 은 丘上에 있는데 정 앞에는 2.lmX 1. 8m 의 넓이와 0.4m 의 깊이룰 갖는 석지가 있고 석지 안으로 기어 들어오는 모습의 石角가 池의 남안에 배치 되어 있 으며 그 龜甲上 에는 〈氷玉池〉 라 음각되어 있다 (그림 31.32,33 ). 또 후원의 중심부 깊숙한 곳에는 氷泉을 중심으로 하는휴식공간 이 있다. 빙천은 지하수를 벽면에서 孤상으로 용출되도록 장치해 놓은 것으로 藥泉의 일종이다. 이 근처에는 괴석이 배치되어 있 고 입구 양편에는 연화봉우리가 새겨진 장식 석주가 세워져 있다.

► 그럽 32

氷玉池: 東西 210cm, 南北 180cm, 池深 43cm. 石龜가 못안으로 기어들어가는 像

► 그립 33

淸心亭 方池岸의 石龜 龜甲上에 음각되〈어氷玉 池있〉음라

► 그립 34 氷川域全崇

► 그립 35

氷J II~ 의 排水口

► 그립 36

氷泉의 洞水口

빙천역은 왕이 이곳에 이르러 약수를 마시고 쉬며 즐기다가 가 는 곳으로 여겨진다 (그림 34,3 5 ,36 ). 어수당 곁의 연경당의 후원과 인정전 동쪽에 있는 낙선재와 석 복헌의 후원은 계단식 화계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여기에는 각종 화목이 심어지고 괴석이 배치되며 丘上에는 정자가 세워지고 있 다. 모두가 시각적인 쾌감 부여와 옥외생활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꾸며지고 있다. 창덕궁의 후원과 연경당 및 낙선재의 후원은 조선시대의 각종 전통정원을 총망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3) 昌慶宮의 通明殿苑 32 1 창경궁 자리는 궁이 되기 이전에 이미 창덕궁에 속해 있는 궁 전이 세워지고 있었다. 이태조가 거처하다 승하한 廣延殿은 건양 문 밖에 있었고 태종이 왕위 를 세종에게 건네주고 { 1418 년 ) , 상왕 이 되어서 지내던 壽 康宮은 창덕궁의 동쪽 가까이에 있었다. 그러 나 궁궐로서의 독립된 창경궁은 제 9 대 성종 14 년 {1483) 에 창건 된 것이다. 성종은 조모인 정희왕후 (세조비 )와 생모인 소혜왕후 (덕종비) 그리고 양모인 안순왕후(예종의 계비) 등 3 대 과부 를 모 시고 있었는데 이들 세 분을 위하여 옛 수강궁의 뒷터에다 세운 것이 이 창경궁이며, 준공은 이듬해 3 월에 이루어졌다. 성종은 대신인 徐居正에게 전각의 이름을 짓게 했는데 殿은 명정전, 문 정전, 수령전, 환경전, 인양전(지금의 함인정), 통명전이며 堂은 양화당, 려휘당이고 閣은 사성각, 亭은 環 琴 亭 이다. 宮塩의 길이는 4,325 척, 죽 1.3 km 에 이르며 담 높이는 外增이 2.7m , 內范은 약 I. 8m 에 이른다. 1592 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명정전을 제외한 모든 궁전이 소 실되었으나 광해군 8 년 (1616) 에 중건되었지만 1624 년 이괄의 난 때 통명전, 양화당, 환경전이 또 타 없어졌다. 그러나 인조의 환 도 후에 중수하여 {1633) 통명전에 환어하였다. 1907 년 순종은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창경궁을 창경 원으로 만들었다. 옛날 勤股場 터에는 큰 蓮池룰 만들었지만 전 통적인 원지양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報漏閣 일대는 동물원을 32) 李哲源 前攝 월 , pp. 5 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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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림 37 창덕궁의 通明 殿 후 원 과 石 關長 方池

► 그립 38 通明殿의 계단식 후원

만들었으며 春塘臺의 일부는 식물원을 만들었다. 慈慶殿 터에는 장서각을 세웠고 時敏堂 근처에는 표본실을 만들어 각 동물과 식 물의 표본을 진열하였으며 각 궁전을 개조하여 미술진열관을 만 들었다. 다만 통명전과 양화당, 경춘전, 환경전, 함인정, 명정전 둥의 건물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창경궁은 일제의 간섭으로 원형을 잃고 있는 부분이 많아 1985 년도에 복구작업에 들어가고 있다. 조경적인 측면에서는 통명전 과 그 주변이 관심의 대상이 되므로 이 지역에 대해서만 고찰하 고자 한다 (1986 년 8 월 23 일 준건공사 완료). 통명전은 창경궁 명정전의 북쪽에 있는 정전으로서 성종 15 년 (1484) 에 창건한 것이나 임진왜란 (1592) 과 이괄의 난 (1624) 그 리고 정조 14 년 (1790) 의 재해 동을 만나 누차 소실되었던 것을 중건을 거듭해 온 것인데 현재의 건물은 순조 33 년 (1833) 에 재 건한 것이다. 통명전이 조경적인 측면에서 고찰의 대상으로 택한 것은 殿後 에 계단상의 동산이 있고 (그림 38) 그 階下 에 列泉 이 있으며 西 쪽에 인접하여 石開干 의 長方形池가 있기 때문이다 (그림 37,38 , 39, 40,41).

► 그립 39 통명전의 中橋型 石 ~I 池

► 그립 40

石腦池의 橋~t쪽 池中에는 괴석이 놓여 있다

► 그립 41 통명전의 石腦池에서 보는 蓮花紋石柱

『宮關誌』 에서 通明殿 주변의 苑林 에 관련있는 것을 찾아 보면 다음과 같다?, 通明殿 : 西有蓮池石腐 宣祖壬辰倭亂 , 仁祖李造亂 正祖十四年 災, 純 祖三十三年重建. 藏春 OO : 在通明殿西(今無), k'] 下항沼 沼上石ff셰印親 沼之北有小井 明聖王后 (顯宗妃) 常御之所, 肅宗御製 藏春閣詩 「仁祖昔年治此軒 一間如斗力何頂 命以覆舟圓壁上 思危思情戒常存」 ~J 泉 : 在通明殿北뽑階下 英祖御製 ~J泉池小識 「通明.1l l 今之熟殿而 北階下有池 乃庚子以後始有者 初不過 一小次 而我聖 母愛之 命緊而廣之 其水淸~J 四時不端 水北有 一面石 其白如玉 隨'J~感興 又將匠風之懷 命名~J泉 初 ,1} 以刻 於石面 池邊又增石築」 위의 기록을 정리하면 통명전의 北階하에 있는 샘은 처음에는 하나의 웅덩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나 숙종비인 인원왕후 (1720 33) 李哲源 前揚書 pp. 82~4.

년대) 가 각별한 관심을 가져 오늘과 같은 것으로 확장하고 미화 하여 열천이라 命名하였다는 것이며 통명전 서쪽에 있는 장춘각 (지금은 없음) 아랫편에 못(i B) 을 파고 石腦으로 윤곽을 둘렀고 이 못 북쪽에는 小)| ·· 이 있다고 하였다. 또 장춘각은 인조가 옛날 에 거처하였으며 현종비인 명성왕후도 기거하였다는 것이다. 여 기에서 열천의 내력은 분명하지만 통명전의 서쪽에 인접해 있는 石腦의 中橋型 長方池 에 대해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 다. 이 中橋형의 장방지는 중교의 연장선과 통명전 앞의 址 갚: 의 통로와 일치되지 않는 것이라든가 東賊圓 (고려대 도서관소장) 에서 의 통명전유지 둥에서 관련시켜 본다면 원래는 통명전보다는 그 서쪽의 장춘각에 속해 있거나, 장춘각과 통명전의 중앙에 위치하 여 이 池上의 중교를 통해 내왕하도록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렇게 생각할 때 前記 〈장춘각〉 조의 〈閣下整沼 沼上石腦璟縱〉 는 이 長方池를 두고 말한 것으로 본다. 축조연대는 전후관계로 보 아 숙종대 이후에서 순조대 사이 (1720~1830) 가 될 것이며 창경 궁의 복원 및 영조공사가 많았던 정조연대 (1777~1800) 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닌가 한다• 석난간과 가공석재 (長 컫石 )에 의하여 윤곽을 처리한 이 中橋型 장방지는 그림 37, 38, 39, 40 과 같으며 중교 남쪽 (B) 부분의 方形 (4 . 6X4 . 6m) 池속에는 연화문이 새겨진 화강암재의 석주가 세워지 고 있으며 북쪽의 장방지 (7 . 8X4 . 8m) 에는 괴석이 2 기 배치되고 있다 (그림 38, 39). 中橋(폭 2.4 m ) 에는 난간이 없으며 화강석재 에 의하여 조립되고 있다. 이 석란지는 우리나라의 園池에서 유 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양식으로서 연봉오리의 石腦과 연화 석주 그리고 중교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바록 방형지 이지만 불국사의 구품연지나 통도사의 구룡지와 같은 정토사상배 경의 지당이라 생각된다. 괴석이 놓여 있는 것은 조선시대의 정 원에서 혼히 볼 수 있는 불로장생을 약속한다는 신선사상과도 관 련되는 바 없지 않으나 하나의 시대사조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통명전의 후원과 관련된 환취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을 수 있다. 〈環琴 亭 〉 在慈慶殿西, 通明殿西北탭階上 (今無),成宗十五年七月 上命構亭於呂

’如宮通明殿北, 至是 告 成, 名曰印菜 命承 旨 金宗 直 記之“ 金宗直 t c lS) 昌 l 葛宮之後苑 有新 卒 曰었琴 直 通明殿之北奧 岡만體勢芳橫 0 l 1l 展 長松 萬株環雅而立 又植密竹數千提以補其際 죽 통명전의 서북 충계상 후원에 환취정을 세우고 주위에 송죽 수천 주를 심었다는, 것으로 통명전을 창건할 때 (1484) 부터 후원 을 조성하고 있으나 통명전 옆의 석란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석란지는 열천이 정비된 이후에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며 오늘날 은 창궁 당시부터 조영되어 온 후원과 1720 년대에 정비된 열천과 함께 하나의 통명전원을 형성하고 있다. 참고문헌 U任 命勝文〕彬 「韓國古庭園의 空間 美 에 關한 硏究 —李 朝時代의 宮 苑을 中心으로」, 서울大學校環境大g!院, I974. 鄭在熊, 「昌德宮後園에 대하여」, 考古 美 術, 136, 137, pp. 202 ~210, 1978. 崔永鎖 「李朝宮開後苑의 造園手法에 관한 硏究」. 서울 大學校 現境大學院, 1975. 〔著述〕 尹國炳, 『造係史』 一潮 00. pp. 261~311 . 1978. 韓國文化財保護協會, 『翰國의 古宮』, 1980. 林應植 「秘苑」, 廣場, 1976. 2) 民間庭園 치와정원 기을능 에정 확따히라 분 다류음한과다 는같 이것 은나 누쉽고지 있않다다.. ”중 국의 藥 嘉 t磁근위 34) 李哲源, 前撮,'}, pp. 84~s .. 3S)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之一 , 京都上 36) 樂嘉蕩. 『中國建築史』, 華世出版社 pp. 9~13, 1933( 初版), 1977( 흉 一 版)

정원 [三: ::家宅 城外―〔別業坐地所在 別莊 災莊所在 죽 주거지에 조영하는 정원은 구성내용의 질에 따라 庭 • 庭園 • 園 으로 구분하고 교외의 것은 기능에 따라 원림과 별업, 별장으로 나누고 있다• 일본의 丹羽는 유럽에서의 慣行法式을 참작하여 일본정원을 다 음과 같이 나누고 있다 I 整形庭園 〔神苑庭園 伽藍庭園 -林泉庭園 -{築山庭 平 庭 훑釋國 (釋風庭係庭園園) 「 借:景望庭園庭 園 일본정원 -路地庭園 茶庭 广山水庭園 후意庭園 吉祥庭園〔:: 五三庭 일본에는 정원유적이 많고 조사 발굴된 것도 많아서 위와 같이 세분하지만우리나라처럼 유적도 극히 제한되어 있을 뿐더러 사찰이 나 서원, 祭閣 둥의 정원에서 어떤 공통적인 특징을 찾기 어 려운 현실에 있어서는 丹羽의 분류방식은 따르기가 어렵다. 차라 리 중국의 樂嘉溪의 분류방식이 적당할 듯하다. 다만 성내의 庭· 庭園· 園올 한데 묶되 住家 근처에 조영되는 정원은주택정원이라 37) 丹羽鼎三, 「作庭形式上J: b 見t.:~ 日 本庭園(/)類別」. 造園雜誌 7(3) : 1~9 . 1940.

하고 부유한 사람들이 도시근교의 산천경개가 수려한 곳에 터를 잡고 자연과 함께 지내기 위하여 세운 집을 별장, 세상의 속된 일 을 잊고 조용히 살기 위하여 마련한 초려를 별서, 그리고 先坐 下에 지어 놓은 別居를 別業이라 하되, 여기에 정원이 꾸며진다면 각각 별장정원, 별서정원, 별업정원이라 하기로 한다. 이밖에 주 거를 멀리 떠나 산천경개 좋은 곳에 간단한 정자를 세우고 자연 과 벗하며 즐기기 위하여 마련된 곳을 樓 亭 園林이라 하여 구분하고 자 한다. 그러나 정자만 세워지고 조경행위가 거의 없는 곳은 인 공적인 〈정원〉의 범위에 넣기 어려우므로 이러한 경우는 본저에서 는 제외하기로한다. 참고문헌 鄭在錄, 「朝鮮朝 찹 院造 景- 의 考察」, 文化財 第六號, pp. 88~98, 1972. 鄭在錢기 「朝鮮朝 別歷造景遣蹟의 一例(尹孤山의 英 菩 洞)」, 韓國 造景學會誌 I (2):65~68, 1973. 金東贊 「李朝 書 院造景에 관한 硏究」, 서울環境大學院, 1976. 李殷昌, 「德德의 雙淸堂, 考古美術」, 4(10), 서울考古美術同人會, 1963. 李殷昌, 「朝鮮時代別整硏究―禹奎東의 小 h1 亭을 中心으로」, 院 星 女大 論文 菓 , 第 27 輯, p. 2 17~261, 1983. 1) 住宅庭園 가족들이 일상 함께 기거하고 있는 주택을 중심으로 하여 관상 과 옥외생활을 목적으로 꾸며진 정원이 여기에 속하는데 사랑채 와 별당에 꾸며진 것도 포함된다. 후원과 사랑정원 그리고 별당 정원으로 구분하여 고찰하기로 한다. (1) 後園 후원이란 주택의 뒷편에 꾸며진 동산을 말한다. 민간정원에서 의 사례는 많지 않은 듯하다. 전라남도에 있는 소쇄원은 양식에서 볼 때 후원의 일종이지만 기능면에서 별서정원의 범주에 넣었다. 여기에서는 소쇄원과 같은 시대에 꾸몄고 그 인접지역에 있는 환

벽당정원을 고찰 대상으로 하고자 한다• ( i) 金允셍표 의 閑 碧堂 庭園 광주지방의 명산인 무동산 (1186m) 의 북쪽 기슭이며 광주호의 상 류역에 자리잡고 있는 해발고 약 IIOm (호수면고 약 30m) 의 구릉 동남쪽에 조영되고 있는 金允f弟의 후원을 말한다. 행 정 적으로는 광주시 충효동 산 386 번지에 위치한 환벽당은 유일하게 전승되어 온 별당건물로서 명종91,1 (1554 년)에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 바 있는 沙村 김윤제 ( 1501~ 1572) 가 말년에 독서하면서 또 자연과 벗하며 한 가로이 지내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송강 정철(1 53 6-- 1593) 은少時 적에 이곳에서 사촌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한 바 있으며 관에 몸을 담고 있을 때나 쉬고 있을 때 몇 번 이 지역을 찾은 일이 있다. 그가 지은 성산별곡이나 息 影亭 雜諒 1 0<;나큰 환벽당의 북쪽 ; 건너편 에 있는 김성원 (152 5-- 1597) 의 서하당과 식영정 그리고 이 환벽당 과 이들 사이에 가로지르며 흐르고 있는 창계천의 분위기를 노래 한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식영정과 환벽당은 담양군고서면 원 강리에 있는 송강정과 함께 정송강의 유적으로서 전라남도 지방 문화재 (기념물)로 지정된 바 있다 (그림 43). 環碧堂은 그림 44 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 동쪽의 측면 두칸은 벽 이 없는 마루로 되어 있지만 서쪽은 두 칸의 방과 그 앞쪽의 마 루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호수면고 30m 안팎의 小丘 동남쪽 허리를 깎아 축대를 이루고 여기에 건축물을 세운 것은 겨울철에 광주호쪽의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북서풍을 막기 위함이며 동남향의 건축물 동쪽 두 칸을 마루로 한 것은 무동산 골짜기 에서 홀러내리는 창계천과 그 주변의 산야경관을 즐기기 위함이라 여 겨진다. 堂의 건축위치나 건축물의 내부형태 그리고 앞면에서 홀 러 내려 좌측으로 빠져 나가는 창계천의 흐름 둥에서 볼 때 입지 선정은 풍수지리설보다는 쾌적한 주거환경과 산수경관의 조망에다 중점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臺 下에는 약 18° 의 경사를 갖는 너비 약 13m, 길이 약 SOm 의 크기를 가지며, 하단을 중앙에서 段差를 두어 직선상으로 석 축처리를 한 장방형의 帶狀地域이 있다. 환벽당에서 전면을 향하 여 우측부분은 자연성을 띤 지역인데, 전면에 두 그루의 느티나 무 (幹周 200cm 와 114cm) 가 서 있을 뿐이다. 당의 전후 중심선을 연장한 축상에는 축대의 끝에서 9m 거리에 베롱나무 (幹周 185c 머

나 L 브 다 .l!.. LL JJ,. i ► 그립 42 環碧堂과 後園

가 심어지고 있으며, 이 나무의 동쪽에는 方池를 중심으로 하는 정원이 꾸며지고 있다. 환벽당으로부터는 동쪽으로 편재해 있는 이 방지는 430cm X 670cm 의 넓이에 약 110cm 의 깊이를 가지고 있 으며 섬은 없고, 지중에 개 연꽃 Nup h ur jap o nic a DC7} 자라고 있 다. 못 윗편에는 3 계단의 직선상 화계가 자연석에 의하여 축조되 고 있다. 못으로부터의 제 1 단은 너비가 180cm 이며, 제 2 단은 높이 70cm, 너 비 240cm, 그리 고 제 3 단은 높이 70cm, 너 비 220cm 이 다. 또한 못의 동쪽과 서쪽에는 각기 1 단 높이의 단이 만들어지고 있 는데 지금은 잡목이 우거져 있으나 옛날에는 어떤 관상식물이 심 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못가에는 벽오동의 성숙목이 2 주

• (幹周 90cm 와 96c 떠 서 있 을 뿐인데 크기 로 보아 일정시대에 심은 듯하다 (그림 45 , 46) . 이 방지중심의 계단상의 정원은 환벽당이 세워진 축대상에서 2 ~4m 나 낮은 위치에 있는데다 방지의 중심은 당의 중심선으로부 터 !O m 이상 좌측으로 편재해 있어서 당의 마루로부터는 직접 관 상할 수가 없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盜 下에 있는 장방형의 원 립 부분은 그 아랫편에 있었던 住家의 후원이라 말할 수 있다. 이 후원이 언제 누구에 의하여 꾸며졌는지에 대해서는 증명할 만한 자료는 없지만,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Km 거리에는 1530 년대에 조영한 양산보의 소쇄원이 있고, 창계천을 건너 북쪽 으로 400m 거리에는 1500 년대에 조영한 金成遠의 樓 앓堂 정원이 있 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이 정원도 그 무렵에 김성원이 꾸몄을 것 으로 생각된다. 고경명 (호: 露 烽 1533~1592) 의 r遊 瑞石錄』 (1574 세 의하면 서하당 뒷뜰의 石 階에는 모란, 작약, 월계화, 일본철쑥 동 이 심어져 있으며 북서쪽 모통이에는 반묘쯤 되는 네모진 못(방 지)에 백련이 너댓 그루 심어져 있고 샘물은 대나무 홈대를 타고 섬돌 아래에 있는 못으로 홀러들어 가도록 되어 있는데 못가에는 벽도와 金樓樹가 몇 그루 심어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산보의

38) 鄭膳許, 「自然속의 園林」, 『全南의 傳統文化』下, 전라남도, pp. 86~88, 1983

► 그립 45

몄碧堂의 後園 (계단식정원)

소쇄원에서 보는 방지와 계단상의 화계, 그리고 서하당정원에 대 한 高露峰 의 기록둥은 金允節의 환벽당후원의 형태와 유사한 점 이 많다. 이들 1500 년대에 조영한 계단상의 후원양식은 조선시대 의 후원양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2) 舍廊庭園 (i ) 柳爾 靑 의 雲鳥樓庭園 39) 전라남도의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柳爾靑 (1726~1797) 의 저택에 딸린 사랑채를 雲鳥樓 라고 한다. 정원은 이 사랑채의 마당에도 꾸며 지고 있지만 대문 앞에도 있다. 그러함에도 〈운조루 정원〉 이라 한 것은 이 저택이 〈 구례운조루〉 라는 이름으로 문화 재 민속자료 제 8 호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에 따른 것이다. 유이주는 자를 聖佑라고 하는데 낙안군수 (1771), 용천부사, 풍천 부사 등을 역임한 바 있다. 운조루第는 그가 낙안군수에 봉직하 다가 〈i曹船吳載〉건으로 三水 에 유배된 일이 있는데 (1774 년) 풀 려 나온 뒤 영조 52 년 (1776) 에 조영한 듯하다 .!01

39) 鄭腕旺 「李朝時代의 庭園에 관한 硏究」, 全南大學校 大學院, pp. 14~ 16, 1974. 40) 尹師國, 「三水府使柳公行狀」, 1803.

유씨제는 안채 (36 칸) 와 내사랑(귀래정 6 칸), 외사랑(운조루, 16 칸), 행 랑 (24 칸)사당 (2 칸) 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원은 사랑

► 그립 46

環碧堂後園의 方池

► 그림 47 五 美 洞家圖 (1922 년)

► 그립 48 雲鳥 樓 정원 평면도

► 그립 4g 雲鳥 樓의 址 효

채의 뜰과 대문 밖에 꾸며지고 있지만 그동안 많은 변화에 원형 을 크게 잃고 있다. 그러나 이 저택의 공간구성을 조감도식으로 그린 〈五美洞家圖〉가 있어 원형울 추적하는데 자료가 되므로 현 황과 오미동가도에 의거하여 고찰하기로 한다. (그림 47,48) 유씨제가 자리잡고 있는 오미리는 지리산의 노고단 (1506 . Sm) 의 연맥이 남쪽으로 점점 낮아지면서 기슭을 이루고 이 연맥의 골짜 기를 따라 홀러내리는 계류가 만들어 준 충적지에 형성된 마을이 다. 마을 앞에는 1. 5km 거리에 섬진강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 고 있으며 그 건너에는 안산격인 오봉산 (200m), 그리고 그 남쪽 에는 계족산 (730m) 이 朝山이 되어 朱雀 역할을 하고 있다. 동쪽 에는 청룡격인 왕시루봉(王甄峯)의 연맥이 뻗고 있으며 서쪽에는 멀기는 하나 구례읍을 지나 10km 의 거리에 천왕봉 (1695.0m) 이 백호 격으로 묵직하게 버티고 있다. 또 노고단의 동쪽 골짜기에 서 흘러 내려오는 계류는 이 마을 앞을 지나 西流하다가 섬진강 에 주입되고 있다. 이와 같은 자연조건 때문에 풍수지리설을 신 봉하던 옛사람들은 이곳 어딘가에 명당자리의 상징인 金龜沒泥, 金環落地 및 五寶交緊의 세 개의 眞穴이 있을 것이라 하여 충청, 경상, 전라 등 각지로부터 부호들이 몰려들어 한때는 백여 호를 헤아리는 큰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4 유이주의 집은 그의 원조인 유부천이라는 사람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300 여 년전부터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산 좋고 물 좋 으며 기름진 넓은 땅이 있어 곡식을 거두어 들이기에 알맞고 사 방의 경개가 좋아 당시에는 살기좋은 농촌임에는 틀림없다. 오미동가도에 의하면 정원은 사랑채의 마당과 대문 밖의 입구 쪽 두 군데에 꾸며지고 있다. 편의상 사랑방쪽의 정원을 내원, 대 문 밖의 정원을 외원이라 부르기로 한다. 내원은 운조루 앞의 지대와 서편 담쪽의 花塘 그리고 행랑쪽의 마당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지대는 높이 약 1.2m 너비 약 1.6 m, 길이 약 1 1. 5m 의 넓이를 가지고 있는데, 오미동가도에서는 중앙 에 있는 계단의 양편에 화분이 4 개 놓여 있고 그 사이에는 괴석 이 놓여 있다. 그러나 현황은 화분 대신에 黃楊, 花楠, 박태기, 木蘭 (柏死) 이 식재되어 있는 것을 본다 (그림 49). 언제 이렇게 41 ) 村山智順 「朝鮮(I)風水」, 朝鮮總督府, pp. 846~849, 1931 .

► 그립 50

花鳩속의 石楊 (안쪽에 怪石이 보인다)

► 그림 51

雲鳥樓內園, 왼편에 淸城柳의 老樹가 기울어진 채서있다

교체되었는지는 불명이다. 어떠한 경우든지 지대 위를 조경처리 한 것은 사랑의 마루에서 관상하기 위해서이겠지만, 대문쪽 마당 에서 볼 때는 관상목적뿐만 아니라 마루 밑의 보기 흉한 부분을 감추어 주는 데도 효과가 있다고 본다. 서쪽의 花鳩는 폭이 안쪽 4m , 앞쪽 7m , 길이 21m 에 이르는 기다란 부분인데, 여기에는 헛간쪽에 동백나무 1 주, 지대 가까이 매화나무 1 주 (3 幹), 그리고 안쪽 누마루 서쪽에 산수유가 1 주 심어지고 있으며 매화나무 아래에는괴석이 2 기가 있고 매화나무와 동백나무 사이에는 넓다란 石床과 石楊이 놓여 있다(그림 so) .그러나 오미동가도에는 마당과 구별되는 경계석에 의한 花i烏가 없고 다 만 매화나무만 1 주 그려지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자손대에 이르 러 동백나무와 산수유를 심고 花土烏를 꾸민 듯하다. 이 花璃는 관 상과 동시에 나무그늘 아래에서 쉴 수 있도록 계획된 소위 〈옥외 생활공간〉 의 기능도 함께 겸하고 있는 뜰이라 말할 수 있다. 마당의 행랑쪽에는 헛간 옆에 위성류를 심었고 (그림 51) 대문 앞에 적송과 다른 화목을 심었던 것이나 적송과 여 기에 곁들여 심은 다른 관목류는 없어지고 말았으며 노쇠한 위성류만이 생존 하고 있다. 여기에서 적송은 〈프라이버시〉 유지를 위하여, 위성 류는 헛간쪽을 감추어 주기 위한 기능식재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고찰해 온 바와 같이 내원의 조경은 관상을 첫째로 하되, 겸하여 차폐 Screen 과 프라이버시 유지효과에도 관심을 둔 것 같으며, 생활공간으로서의 기능도 갖게 하고 있다. 五美洞家 圖에는 뜰에 학이 놀고 있고 한 마리의 노새가 위성류나무에 매 어져 있는 것을 보는데, 樹下의 괴석과 석탑, 석상 그리고 지대상 의 화분 둥을 함께 생각할 때 여유 있는 생활을 느끼게 한다. 대문 앞의 外園은 삼대봉 골짜기에 근원을 두고 이 마을 앞으 로 흐르고 있는 계류를 끌어 들여 대문 앞에 줄행랑방향으로 만 든 동서 약 45m , 남북 약 15m 의 크기를 갖는 장방형의 지당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長方池의 중앙에는 자연석으로 갓을 돌 려 축조한 円島가 하나 있고 여기에는 적송을 심었으며, 못 안에는 수련을 심었다. 또 池岸에는 垂柳와 대나무를, 행랑 쪽에는 垂 8lI, 적송, 목련, 자미 둥을 심었다. 이 中島型의 장방지는 전통적인 신선정원양식이지만 가로 세로의 비가 3 : I 이나 되어 전혀 비례 미를 느끼지 못하게 하고 있다.

대문 앞에 이처럼 지원을 꾸미는 일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 으로, 출입자에게 좋은 인상과 즐거움을 주기 위함이라 생각된다. 울타리 밖에 있으므로 자연과의 일체감을 주게 된다. 柳氏第에는 안뜰온 물론 사랑의 뒷뜰에도 식재를 하지 않았으 며, 후원도 없다. 다만 큰사랑의 뒷마당 (9mX 4.S m ) 담쪽에는 몇 개의 화분과 괴석이 놓여져 관상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운조루정원은 저택의 규모와는 달리 질높은 것은 아니지만, 지 대를 정원의 1 부로 이용한다든지 〈프라이버시〉 유지와 차폐목적 의 식재를 하였고 대문 밖에 인접해서 전통적인 중도형의 방지를 중심으로 하는 정원을 꾸며 주인은 물론 이 집을 찾는 사람에게 즐거움과 좋은 인상을 주고 있다. (3) 別堂庭園 별당은 몸채의 곁이나 뒤에 따로 지은 건축물로서, 몸채에 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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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그립 52 敬亭池園의 평면도(개략도)

어 있거나 가까이 있어 주인이 거처하며 손님을 접대하는 사랑과 구별된다. (i) 鄭榮邦의 敬 亭 池園 경상북도의 영양군 입암면 蓮 塘里에 있으며 石 門 정영방 (1577 ~1650) 이 병자호란 후에 은거할 목적으로 꾸민 방지를 중심으로 하는 정원이다(그림 52). 별서의 기능을 갖고 있기는 하나 정원면 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원지가 직선적인 담장 안에 가득 채워져 있고 지나칠 정도로 인공성이 강조된 공간처리를 하고 있 어 여기에서는 별당정원의 범주에 넣기로 하였다. 이 정원이 위치한 연당리는 자산 (430m) 이 남으로 뻗어 내린 산기슭에 형성되어 있으며 동쪽의 半邊川과 그 지류인 서쪽의 淸 祀溪 사이에 반도처럼 끼어 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은 마치 반도 를 연상케 하고 있으며 마울 남쪽 강 건너 10km 지점에 있는 부 용봉 {376m) 북록의 냇가에 형성된 기암절벽은 강 건너 북쪽의 연당리쪽 냇가의 암산과 함께 장관을 이룬다. 이를 일명 石門이 라고도 한다. 정원의 중심을 이루는 못은 남북이 약 12m 이고 동서가 약 13m 의 크기 를 갖는 방지인데, 북쪽의 主 一 齋 앞쪽에는 四友 培 이라는 장방형의 단 (3mX4.5m) 이 못 안쪽으로 돌출된 상태로 축조되고

► 그립 53

主一齋앞의 사우단과 연지

있다. 정면 3 칸, 측면 1 칸의 맞배지붕의 주일제는 남남동향이며 앞마루에 앉으면 사우단은 바로'눈앞이며, 못의 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또 못의 서안에는 정면 4 칸, 측면 2 칸의 팔작지붕 형 敬亭이 세워져 있어 유락의 장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못의 형태면에서 볼 때 주건축물은 자손들의 藏修를 목 적으로 지었다는 주일제이며, 못의 경관을 관련시켜 본다면 경정 이 기능상 중심건물이 된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후자에 초점을 맞추어 敬亭庭園이라 명명하였다. 한편 池底에는 石英맥이 옥석 을 나열한 듯이 깔려 있어 물 위에 굴절되어 나타나는 모습이 매 우 아름다워 池名을 〈瑞石池〉라 부르고 있다. 정원은 四友단과 池. 그리고 방지 주위의 園路의 耳i분으로 이 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각각 분리하여 고찰하기로 한다. 사우단은 현상태에서는 빈터로 있지만 『敬亭雜諒』 三十二絶에 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림 53). 四友壇 四友者梅竹松菊也, 松菊切舊有 竹移自 笠山 梅重不可致遠 今以紫荊之苦淡 蓮之淸腹 石竹之耿介 資 之以幽貞之超 亦可以補之缺耶 (이하 略) 이 글에서 본다면 사우단에는 梅, 竹,松, 菊을 심어야 격에 맞으나 매는 무거워서 멀리서 옮겨올 수 없었으므로 그 대신 紫 荊 (박태기나무)과 석죽을 옮겨 심어 보완했다고 하였다. 매는 설 중에도 이우러지지 않고 때없는 꽃을 피워 절개의 상징으로 사랑 을 받고 있지만 紫荊은 苦淡이요 석죽은 耿介의 상징으로 알려 지고 있으므로 매화나무를 능히 대신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여 기에서 四友壇의 뜻을 알 수가 있다. 서석지라고 알려진 못의 바닥에는 경정 앞과 그 건너편 지안쪽 에 석영맥의 돌이 대소의 크기로 분리되어 나란히 깔려 있다. 이 池底에 나열해 있는 石英石온 굴절되어 수면에 떠오를 때 보석을 깔아 놓은 돗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석문은 이 못을 이름하여 瑞

石池라 하고 각 석영석에 대하여 그 형태의 특징에 따라 알맞는 아칭을 부여하고 있다. 『敬亭雜諒』 32 절에 나오는 명 칭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42) 『石門先祖文集』, 天, 卷之一, 1821 .

煙遊石 : 4 • 5 인이 앉을 수 있는 네모난 돌로서 선인이 노는 돌이 라는 뜻이다. 通眞橋 : 傳遊石에서 玉成갇에 다리를 놓아 仙人이 건널 만하다는 뜻 이 담겨 있다. 基評石 : 네모 반듯하여 바둑판 같은 돌이다. 爆阿巖 : 基評石 옆에 나란히 있어 바둑구경 하면서 즐기기 에 알맞다. 耀釋盤 :물이 깨끗하니 올라 앉아 갓끈 섯기에 알맞는 돌이다. 花萊石 : 춘하추동 때를 가리지 않고 아름다운 꽃술 같온 돌이다. 戱蝶巖 : 옆에 花梁石이 있으니 나비가 탐내어 와서 놀 수밖에 없다. 封 雲 石 : 海鶴이 靑溪 위에 있으니 그 깃털이 아침 노을을 가릴 수 밖에 없다. 觀測石 : 花藥石 위에 있으니 일렁거리는 물결 속의 화예석을 관상할 만하다. 調天濁 : 모양이 玉奎 닮아서 天濁울 세워 밝힐 만하다는 뜻이다. 玉界石 : 玉成臺 아래에 있는 천계의 돌은 옥계석이다• 魚林石 : 調天獨 오른편에 있는 넓다란 돌인데, 그 아랫편은 깊고 넓 어 물고기가 살 만하다. 마龍巖 : 못 동쪽가에 마치 용이 누워 있는 듯이 보이는 돌이다. 祥 雲 石 : 臣卜龍岩 전후에 접점이 깔려있는 돌인데 마치 상서로운 구름 이 떠 있는 듯이 보인다. 落星石 :물결 사이에 落星처럼 보인다. 垂給石 : 臣卜龍岩 앞에 있어서 낚시대 드리울 만하다. 尙桐石 :옥성대 왼편에 있는데 물 위에 떠 보이는 모습이 마치 禪衣 를 걸치고 있는 듯하다. 灘紅:입구쪽 湯流下에 있는 돌로서 징검다리 위에 하얗고 고운 눈이 내리는 듯하다. 分水石 : 湯流가 있는 注水口의 윗편에 있는 돌로서 물줄기를 갈라 수세를 약하게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물밀에 깔려 있는 돌에 대하여 19 종의 아칭을 붙 이고 있는데 신선 (僖遊石, 通眞橋), 천계 (玉界石, 詞天濁 封 雲 石, 祥 雲 石, 灘雪t:r, 落星石), 禪衣 (尙桐石), 유락 (基評石, 爆祠岩, 垂給 石), 花蝶 (花藥石, 戱蝶岩, 觀測石). 魚 (魚林石), 용(마龍岩), 水(潘 釋盤 分水石) 등이 결부되고 있다. 매우 풍류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못안으로 물을 도입하는 도랑은 맑은 물을 받아 들인다는 뜻으로 t邑淸渠이며, 밖으로 물이 방출되는 곳에는 石植 가 있어 여수를 내 보내도록 되어 있는데 吐樣渠라 이름 붙이고 있다. 서석지의 동안과 서안(입구쪽)에는 너비 약 4m 의 土堤가 있어 서 산책하거나 池園을 감상하면서 즐길만하다. 그래서 동쪽 것을 0 永歸堤라 하였는데 달밤에 읊조리며 산보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池의 남각에는 1 단 높은 방단을 만들고 여기에 은행나무 를 심었는데. 둘레가 580cm 에 이르고 있는 것을 보면 本園을 창설할 때부터 있어온 것인 듯하다. 결론적으로 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방지 (서석지) 와 주일 재 앞의 四友培 그리고 목본식물로서의 송. 죽, 紫荊, 은행나무. 수생식물로서의 연, 초본으로서의 석죽, 국 둥의 조경식물로 구 성되어 있는 敬 亭 池園은 디자인면에서나 구성면에서 매우 단조로 움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池底에 깔려 있는 석영맥의 石群은 물 위에 굴절되어 나타날 때 풍류객에게 줄거움을 주고도 남음이 있 다. 脈石에 대하여 아칭을 부여한 것도 풍류와 관련이 있다. 그 러므로 본 정원의 관상상의 초점은 지중의 〈瑞石〉에 있다고 보아 야 할 것이다. 사상적인 배경으로서는 修心건針生의 지표로서의 송, 죽, 매, 국의사절우와군자의꽃이라는연이언급되고있으며, {뽑遊 石, 通眞橋둥의 명칭에서 불로장생의신선사상도배제할수가 없다. (閔庚炫 「瑞石池를 中心으로 한 石門 林泉庭苑에 關한 硏究」, 韓國庭 苑學會誌, I(I):4~27,1982. ) { ii) 柳運의 花雪堂庭園 431 전라남도의 무안군 청계면 사마리에 있으며 1630 년경에 柳運 (158 0- 1643) 이 소요 자적할 목적으로 세운 별당을 花雪堂이라한다. 화설당의 입지는 해발고 약 40m 의 완구릉지로서 주변에 큰 산 이나 계류는 없지만 북서쪽 약 1km 거리에 바다가 있는데, 마치 호 수처럼 생겼다고 하여 西湖라 부르고 있다. 현황에서 볼 때 정면 4 칸, 측면 3 칸의 팔각질붕의 화설당은 서 향하고 있으며, 좌측에 2 개의 방이 있고 기타는 모두 마루로 되 어 있다(그립 54). 43) 鄭膳許, 「花雲堂」, 全羅南道誌 第 3 卷 全羅南道誌 編纂委員台, pp.3 48 ~ 349, 1984

A

니 Q~i , l ,, 2 ,4 ., .,!i. 』 0 1'\ ► 그립 54 柳運의 花 雪 堂園 ( ) 內의 山茶논 현재 없어지고 池岸의 山茶B { 자리에는 黃楊木이 代植되고 있다.

당 앞에는 1 島型의 방지 (IOm X 7m) 가 있고 中島 (經 2.5 m ) 상에 는 자미나무가 심어지고 있다. 이 中島는 남쪽으로 편재해 있고, 그 양편 지안에는 반원형의 돌출부가 있는데 동백나무 (山茶)가 심 어진 식수대이다. 이와같은 편재현상은 화설당의 마루또는그우 편에 만들어진 누마루와의 관계에서 볼 때 마루에서의 관상 (坐觀) 효과를 고려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또 옛날에는 지중에 연이 심어졌다고 하나 지금은 물이 마르고 그 자취도 없다. 당 오른편(남쪽) 뒷쪽에는 8mX4m 크기의 방형 花鳩가 마련되 어 있으며, 여기에는 梅, 동백 그리고 석류나무가 심어지고 3 개 의 괴석이 배치되어 있다(그립 55). 이 花鳩도 당의 마루에서 관 상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림 55,56) .

► 그럽 55

花雪堂 남쪽화오 속의괴석

이제 『文化柳氏世譜』 (文化柳氏晩隱公派譜編纂會, 1982) 에서 화설 당정원의 창설경과와 사상적인 배경을 찾아 보고자 한다. 화설당을 세운 柳運은 觀水亭 守敬의 아들로서 자는 健叔이고 호는 화설당이다• 그는 말년에 소요자적하기 위하여 亭舍를 세웠 는데, 東說 박남곽은 화설당이라는 堂名을 지었으며, 尤庵 송시 열은 題額을 하였고 (그림 57) 市南 유계는 唱韻하며, 睦隱 강항은 撰記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이것을 보면 화설당 류운은 당대의 명사들과 이 당사에서 폭넓게 교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花雪堂處士公家狀에 의하면, 精舍의 豪下에 못을 파고 자연

석으로 호안처리하며 植蓮, 양어하였다고 하였다. i烏에는 梅와 山茶 (동백나무) 를 심어 동산을 만들어 소요하였다. 특히 〈愛蓮觀 魚〉의 뜻은 염계의 뜻에 따라 줄기기 위함이라(愛蓮觀魚以寫嫌溪之 樂) 하였고 〈 弄 梅撫 A t〉, 즉 매화꽃을 관상하고 동백나무꽃을 어루 만지는 것은 서호의 경승지에서 즐기는 것을 방불케 한다고 하였 댜

一 、 ► 그립 56

花雪堂 南쪽의 口t루끝에 만들어진 다락마루

► 그립 57

尤庵에 의한 扇額

또 처사공행장에는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이 실려 있다. 淸溪卜築林塘靜 白日柴門客到稀 西浦仙人來問竹 一 春 1E 雨鶴篤飛 이 시에서 문객 없는 한적한 분위기 속에서 학과 함께 신선된 기분으로 생활하고 있는 한 면을 엿볼 수 있다. 결국 화설당정원은 중도형 방지라든가 개화기가 장기인 자미화. 柏 中에서 으뜸이라는 동백 (山茶)· 화오 속의 괴석 등에서 신선사 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연을 심은 뜻은 周敦 碩의 애련설에 근거하고 있다• 또 화설당이라는 堂名은 주인유씨 의 청을 받은 강항이 지은 것으로 정원에 심어진 매와 산다(동백) 가 설중에도 이울어지지 않고 곱게 꽃을 피운다는 데서 얻은 것이 다. (iii) 茶山草堂園林 ' 다산초당은 전라남도의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橘洞부락의 後山 죽 만덕산 (408m) 의 남쪽 중복에 위치한다. 만덕산의 동쪽에는 북 에서 남으로 자루처럼 길게 뻗은 강진만이 눈앞에 전개되고 북동 쪽으로 능선을 넘어 500 겨 m 거리에는 고려초에 창건했다는 白蓮 社 (寺)와 천연기념물인 동백나무림이 있다. 다산초당은 원래는 해남윤씨 博 (1744~ ?)의 山亭이나 정약용 (1783~1836) 이 순조 원년 (1801) 의 辛酉敎難에 연루되어 강진에 유 배되어 있던 중에 윤씨의 배려로 이곳에 옮겨와 1808 년부터 II 년 간의 諦居생활을 하다가 돌아갔던 곳이며, 또 이 동안 산정 주변 에 연못을 만들고 화계를 조성하여 하나의 특징 있는 정원을 꾸몄 으므로 그의 호에 따라 〈다산초당원림〉이라 이름붙이게 된 것이다. 약용의 貫鄕은 나주이지만, 출생지는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능 내리이며 그가 귤동의 윤씨 산정으로 오게 된 것은 약용의 어머 니가 해남 윤씨라는 데 있다. 죽 尹傳온 杏堂 復의 6 대손인데 대 하여 약용의 모는 復의 맏형인 橘亭 衛의 5 대손인 恭齋 斗緖 (1668 ? )의 손녀이다. 44) 鄭腦旺 「李朝時代의 庭園에 관한 硏究」, 全南大學校 大學院, 1874.

다산은산정에서 적거하는 동안 독서와저술그리고 제자와 더불 어 강학으로 나날 을 보냈지만 간간이 튬울 내어 강진지방의 명승 지를 찾는 한편 산정 주위에 지당을 확장 수경하고 화계를 만들 어 화초와 관상용의 나무 를 심고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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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山*(초) O im l n 'p元 ► 그립 58 康津萬德山의 茶山草堂園平面圖

다산초당의 원림은 사면을 깎아 만든 너비 약 13m, 길이 약 15 m 의 넓이를 갖는 축대 위에 세워진 초당과 그 동쪽의 中島型方池 그리고 초당 좌우의 사면에 만들어진 段狀花階로 구성되고 있다. (그림 58) . 지당은 가로 IOm 세로 Sm 의 크기를 갖는 방지이며, 池 ,L 에는 자연석을 쌓아 만든 圓島가 있고 그 위에는 괴석이 놓여지고 있다 . 못의 북안에는 자연생인 동백나무 두 그루

와 중국원산종인 자미나무가 두 그루 자라고 있다. 자연석에 의하 • 여 축조된 못은 초당 뒤 언덕 위의 i勇泉(소위 수원지)에서 引水 하여 飛操으로서 채워지도록 되어 있다. 죽 다산연보의 45 1 순조 8 년 戊辰 (公 47 歲)조를 보면, 〈茶山在康津縣南 菓德寺西 處士尹博之山 亭 也 公班徒茶山 築 盜 察池 列植花木 引水 爲 飛激 治東西二庵 藏 書 千餘卷 著 많 以 自 娘 石壁刻 -「 石 二字 以識之於是〉라 하여 다산의 위 치와 조경사실 동을 전해 주고 있으나, 移居 죽시 조경을 했다기 보다는 이곳에서의 II 개년간의 적거생활중에 소일거리를 겸해서 서둘지 않고 조금씩 꾸며 나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 그립 59

茶山 草堂의 丁石(丁石온 Landmark 적 인 E 기능을수행하고 있다

약용의 시문집 46) 에서 「晩春」을 보면 東池는 원래 협소하기가 절 구 같아서 이를 확장했다고 하였으며 (由來 亭東池 陝小如維臼拓展 抵山根). 中島에 대해서는 「茶山四景帖」에서는 蓮池 石假山은 바 45) 尹世鑄 『 T 茶山全 書 』 (完), 文獻編纂委員台, 1961 . 46) 尹世鑄 『丁茶山全 書 』, 上 文獻編纂委員會, 1960, pp. I~ 146, 272~289, 494~SOI.

닷가에서 괴석을 주어와서 봉우리를 만 들 었다고 했고, 「茶山 花史二十首」에서는 三 峯이 있는 석가산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삼 봉이 란 삼신산을 말한다. 蓮池石假山「茶山四泉帖」 沙潟怪石擬爲峯 眞面還i쉽飾假容 截薛巧安三級塩 給判牙因播一枝松 婚退議態路芝鳳 尖處 斑文篠孫龍 復引山泉環作沼 靜看水底琴道道 茶 山花史 二十首 의 둘째 首. 小池眞作草堂顔 中起三峰石假山 . 差次百花常燒翻 水心交 顔顧胡斑

► 그럽 60

茶山 草堂의 나 l 島型方池

이와같이 지당의 현황과 약용의 시문을 통해서 볼 때 이 지원 은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중도형방지의 1 종이라 말할 수 있다. 또 지당의 윗쪽 사면과 동쪽에는 각각 6 단과 2 단의 화계를 만 들었고 초당의 서쪽 사면에는 6 단의 菜lili]가 만들어지고 있다. 전 기의 「晩春」에는 매화나무 아래에 우거져 있는 잡초를 베어내고 차례로 축단하여 9 급의 채포를 만들었다고 하였고 (勅石爲壇 因綠 沒染於其上下爲勅九級 以爲菜團), 새롭게 꾸민 그 단에는 名 1E 佳

丹를 심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당의 서쪽에 있는 9 급의 단에는 채소가 심어지고 동쪽의 못 위에 있는 화계에는 관상식물이 심어 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계단상의 토지에는 현재 잡목이 무성 하여 당시의 상황은 알 수 없으나 다산의 시인 「晩春」과 「茶山花 史二十首」에서 조경 식물을 찾아 보면 다음과 같이' 목본 22 종, 초본 8 종에 이르고 있다. 목본 : 松. 竹 楓 山茶, 楊機 冬靑, 藤 (이상은 자생종). 梅. 섭t, 杏, 垂楊 紫薇 月季, 黃梅, 誘裁 柚, 杜丹. 距子, 鳳尾 (이상 중국원산종). 茶 (印度, 中國의 원산종), 1” 面 (서아시아). 瑠 (소아 시아). 이상 2 2i든 초본 :虎掌 紫草(此哀), 菱꽃 (이상 자생종), 菊, 荷藥. 苑 (이상 중국원산종), 蓮 (인도) , 戒 契 &:아시아)이상 8 종. 목본과 초본을 합하여 刃종류 가운데서 우리나라의 자생종은 10 종으로 33% 인데 대하여 외래수종은 67% 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식물이 다산의 초당 주변에 심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 그립 61

茶山草堂 (지금은 瓦堂)과 알뜰의 茶藝石 ” ~ ‘ 지요

다음은 茶庭으로서의 기능에 대하여 고찰하기로 한다. 초당 앞 뜰에는 길이 약 150c m, 너비 약 110cm, 높이 약 35cm 의 상면이 평 탄한 돌이 놓여 있다. 이 돌을 茶瑠石이라고 한다 (그립 61) . 또 당 의 서 북우에 너 비 60 X 60cm, 수심 30cm 의 조그마한 淸泉 이 있는 데, 약천이라 부르고 있다(그림 62).

► 그림 62

茶山草堂의 藥泉

이 다조와 약천에 대해서는 「茶山四景帖」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茶冠 靑石磨平赤字錦点茶小霞押堂前 魚疾半倉深色火 獸耳雙察細出煙 松子捨來新替炭梅花佛去晩調泉 侵稿雨氣終須戒 旦(伊丹溫學(放仙 茶麻在池亭之前 藥泉 玉井無i l t:只舌 l i少 .孟閉取奭姿없 初尋石襄承限穴 遂作山中棟藥家 弱柳藍跋斜況葉 小挑泉頂倒 I)H 花 消疾破瞬功뱀綠 作事兼宜碧서바茶

藥泉在池亭西北隅 始唯沮油 余堅之 淸泉自石中退出 다조란 글자 그대로 차솥올 올려 놓는 부뚜막이다. 이러한 용 어가 언제부터 쓰여졌으며, 茶人들의 뜰에 언제부터 도입되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동국여지승람』의 권 44 강릉의 樓 亭 조에서 寒 松亭울 찾아보면 〈亭鮮 有茶泉 石窟 石臼 郞述郞仙徒所遊處〉라 하였는데 고사에 밝은 다산인지라 여기에서 인용했는지도 모른다. 다산이 이처럼 초당에 茶庭을 도입한 것은 적거생활중에 만덕 산의 백련사에서 惠藏禪師 (1772~1811) 와 草衣禪師(張意拘, 1786~ 1866) 룰 만나 知己가 된 데서 비롯된다• 이것은 〈寄贈惠藏上人乞 客〉이라든가 〈謝蹟性寄茶〉 그리고 OO 草衣僧意拘贈言〉 둥의 시문 에서 상호간의 밀접한 관계를 알 수 있다. 초의선사는 182 61;:빈에 해남의 頭輪峯下의 소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진 곳에 터를 잡아 草 室(一枝庵)을 세우고 화초를 가꾸며 上下池를 만들고 선종생활을 시작한 분인데, 茶禪師로 알려지고 있다 47). 결론적으로 다산초당의 원림은 원래 尹博의 산정이었지만,다산 이 이곳에서 적거생활을 하는 동안 (l808 년부터 11 년간)에 조영한 것으로서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중도형 방지와 후원양식인 계단상 의 菜團와 화계, 여기에다 다정의 기능을 도입한 특징 있는 원림 이라 할 수 있다. 다산은 1795 년 규영부교서로 있을 때 정조의 창 덕궁 후원의 賞花案에 참여하여 「英容亭侍冥記」를 쓴 일이 있으 며 평소에 정원 만들기를 좋아하여 자택이나 관사에도 정원을 꾸 몄다. 그리고 일생중 자연탐방과 누정 및 원림의 구경횟수가 허 다하였다 l• 이러한 지난날의 경험이 축적되어 다산원림을 성립 시킨 것으로 안다. 참고문헌 정동오, 「康津地方에 있어서의 朝鮮時代의 園林」, 湖南文化硏究, 12 정동오, 丁若鏞의 園林生活硏究, 韓國庭苑學會誌, 2(1 ): 15~28, 1983. 맵 206~212 1982 . 정동오, 「茶山草堂」, 全羅南道誌, 第 3 卷 全羅南道誌編纂委員 e. PP. 853~855, 1984. 47) 金永鎬 編譯 『小察 實 錄』, 瑞文堂 1981 . 48) 鄭膳許, 「丁若鏞의 園林生活硏究」, 韓國庭園苑學會誌, 2(1 ) :15~28, 1983,

2) 別登 및 別業庭園 (1) 梁山甫의 源疆園 49) 소쇄원은 이조 중종대에 처사 梁山甫 (1503~1557) 가 조영한 일 종의 별서정원이다. 소재지는 전라남도의 담양군 남면 지곡리의 지석촌에 있으며 正南에 무등산 (1186m) 을 대하고 있다. 약 1400 여 평에 이르는 이 원림은 450 여 년의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원 형을 거의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디자인 기법이 뛰어나 조 선시대의 전통정원을 대표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어 1972 년도에는 전라남도의 지방문화재로 지정받게 되었으며 1983 년 7 월 20 일에는 문화공보부에 의해 사적 304 호로 지정된 바 있다. 이 소쇄원에 대해서는 당시의 구성내용을 설명해 주는 여러 가지 시와 문이 남아 있고 또 1755 년에 판각한 滿臘園圖(그림 63) 가 전해지고 있어 본원의 연구와 복원에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i) 조영동기와 시기 문집 『 獨洞園事實』 50 港之一 「處士公世系」 와 卷之二 「處士公宜

49) 鄭!着許, 「梁山甫의 漏灘園에 對하여」, 韓國造景學會誌, 1(2 ):27~33, I9.7 3 . 50) 梁氏門中, 『漏濃園事 實 』, 1155,

► 그립 63

漏溫園圖 (1775 년 판각) . • •• 4 - 을, -·-._.-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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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 에 의하면 양산보는 제주양씨 酒 源 의 세 아들 가운데서 장남 으로서, 연산군 9 년 (I503 년)에 태어났으며 55 세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자는 彦욥1 이며 그가 조영한 소쇄원의 주인이라는 뜻에서 소 쇄공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의 나이 15 에 아버지 蒼 嚴 公 (酒源)을 따라 상경하여 靜菴 조광조 (1482~1519) 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靜 菴이 대사헌의 자리에 있을 때 그의 계청으로 설치된 현량과에 옹시하여 동제되었으나 관직은 얻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에 기묘 사화가 일어나 조광조가 南哀 둥에 몰리어 綾州의 적소로 유배되 자 세상에의 뜻을 버리고 곧바로 하향하여 지석동의 창암촌에 은 거의 처소를 정하고 계곡을 중심으로 하여 점차 원림을 꾸며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조영시기는 알 수가 없다. 『 소쇄원실기』 에서와 李敏斜 의 『 梁公行狀』 에서는 기묘사화 후 바로 하향하여 察池 築 亭 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당시 그의 나이 (I7, 8 세) 로나 恩師 정암의 피화사건으로 인한 착잡한 심정 때문에 조영시기는 그 뒤 로 밀려날 가능성이 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것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소쇄원에 대한 기사가 1530 년대에 비로소 나타나는 것 이다. 죽 1534 년에 쓴 宋守初의 「從弟 梁 彦 鎖源洞亭 」 이라는 시문 이 있고 1540 년에는 雙齋 李洙의 「次 韻 贈 激洞 園 翁 嘉靖 庚子」 가 보이며 1542 년에는 宋純 (1493~1592) 이 외제인 양산보 를 위해 소쇄원의 축조를 도왔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使仰 集 』 年證 壬寅條 (1542) 先生五十 歲 被勘爲全 羅 道 觀察 使 峨而 黃憲 復授吏 曹 與朋好 濟 惡先 生無 意 供職 爲外弟梁公山甫 助築 漏淵 園 또 松江정철 (1536~1593) 의 「 漏 淵園題 草 亭」에는 〈我 生 之 歲 立 斯 亭 人去人存四十齡 溪水冷冷 碧 梧下 客來須醉不須酷〉 이라는· 내 용이 담긴 시가 있는데 정철의 출생년은 1536 년이다. 위의 기록에서 볼 때 양산보가 30 대에 草亭을 짓기 시작하여 40 세에 송순의 도움을 얻어 소쇄원을 완성한 것으로 생각한다. (ii) 園林橫想의 背 景 기묘사화 (1519 년) 로 恩師 조광조가 유배되고 (11 월) 마침내 賜

死되자 (12 월) 세상에의 뜻을 버리고 향리인 창암촌에 은거의 터 전을 잡게 된 것이 소쇄원 조영의 첫째의 동기가 되겠지만 정원 의 규모나 내용에서 볼 때 양산보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 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어떤 외적인 조력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소쇄원사실』 卷之 二 의 『處士公質記」 에는 조원구상에 직접 간 집으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는 몇 가지 기록이 발견되는데 관계귀절을 뽑아 보면 다음과 같다. 瑞石之北有一洞曰支石 蒼嚴公 從其姉夫曹師傳憶冊 居于此始也 茂 林修竹交相薇炳 人不知有滋腦境界也 處士公幼時出遊 偶見野円 0 i公流而 下 公逐流窮源 而上至一處 巖堅幽絶濕流噴淵 公游泳俳御樂其奇勝 顔有 卜築之志一 自'惡禍後 遂結屋于此 常語子弟曰 一丘一堅莫非吾履 康履遊 依平泉古事 勿없於人 亦勿爲不肖支庶之所屬也 先生常慕陶淵明周茂叔 列題 歸去來辭 五村 Il 先生傳, 山海經通먀 愛 蓮說 大極圖篇 于文房左右 위의 두 句節을 살펴보면 앞 부분은 산보가 幼時에 지석의 계 곡에서 노닐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하였으며 기묘사화 후 하 향하여 은거할 곳으로 작정한 뒤 정각을 세우고 조경처리를 하여 소시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과 그가 손수 세우고 애써 가꾼 소쇄원은 이덕유의 〈平泉莊 故事〉와 마찬가지로, 자손들도 결코 남에게 양도하는 일이 없도록 잘 보존하라는 내용이며 뒷글은 산 보가 평소에 도연명을 홈모하여 그의 「歸去來辭」와 「五柳先生傳」 울 탐독했으며 중국 상고의 지리서인 『山海經』을 읽었고 宋시대 의 유학자이며 성리학자인 주무숙 (源溪 1017~1073) 을 존경하여 그의 『통서 』 와 『愛蓮說』 과 『太極圖說』 은 항시 文房 좌우에 간 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양산보는 벼슬을 버리고 안빈낙도의 생 활을 한 도연명의 생활철학을 본받으려 하는 것 같으며 『山海經』 울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도연명이 13 수로 된 시 「讀山海經」을 남기고 있다는 것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 같다. 또 주무숙의 서를 애독한 것은 성리학을 신봉한 은사 조광조의 영향 때문이라 생각되는데, 소쇄원의 두 堂舍에 〈光風情]〉과 <;; 月堂〉 이라 명명한 것도 송의 황정견 (1045~1105) 이 주무숙의 인 물됨을 평하여 (胸懷測落 如光風露月〉 이라 한 데서 얻은 듯하다.

끝으로 평천장은 당나라의 귀족 출신이며 이상주의파의 猛將 이덕유(? ~849) 가 중국의 河南 낙양현의 남쪽에 경영했던 별장 의 이름인데 그 정원은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그의 권좌 덕분에 각지방의 관리들이 앞을 다투어 珍 獸奇 鳥 , 奇 花 異 樹 룰 보내왔다. 그리고 덕유는 자손에게 계고하기 를 〈 平泉 莊 에 있는 一 樹 一石 이 라도 타인에게 양도하는 자는 내 자제가 아니다〉 라고 하였는데 양산보도 이를 본딴 것이다.

► 그립 64

漏 濃園입구 (죽림 사이에 길이 뚫려 있다)

► 그립 65

입구의 前園 Fro nt Garden (前面左側에 五曲 r, 이 뚫려 있다)

李德 裕의 平泉 山 居 戒 子 孫 記 後 代昭 平 泉 者 非我 子孫 也以 平泉一 樹 一 石 與人 者 非佳子弟 也 我 百 歲後 爲 權勢所 1잡. R Il 以先人所 命 泣 而 告 之此 吾志 也Si l

51) 田治六 RI;. 「李德裕 0 平泉山莊」( 未 發表 原稿) .

이상을 정리해 본다면 조원의 직접적인 동기는 은사인 정암이 유배 처형된 데 실망하여 은거의 뜻을 굳힌 데 있으며 원림의 완 성에는 송수초의 조력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iii) 원림구성 소쇄원을 공간기능의 특성에 따라 前 園 , 溪園 , 內 園 으로 구분 하여 고찰하기로 한다. 前園(入口接近路中心의 정원) 소쇄원의 입구인 竹林부터 계류가 흘러 들어오는 五曲門까지의 접근 ap pr oach 공간으로서 계류와 동쪽 담사이에 끼어 있는 이 지 역은 길이 약 50m, 너비 약 l0m 의 넓이룰 갖는다 (그림 64,65). 이 구역은 높이 2m 내외, 길이 연 50m 의 기와지붕이 있는 흙 돌담이 동쪽을 경계로 하여 두르고 있으며 안쪽 계류가에는 자연 석으로 직선적인 옹벽을 만들어 園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 여 기에는 입구쪽으로부터 오곡문을 향하여 園路 왼편에 원림이 꾸 며지고 있는데 시설물로서는 상 • 하의 방지와 水維, 待鳳 갚: 동이 배치되어 있다. 1755 년에 작성한 소쇄원도와 河西의 48 諒 그리고 현황을 근거로 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입구쪽 下 方池는 5 . 5mX4.0m 의 크기를 가지고 있으며 소쇄원 도에서는 塚 菜가 심어지고 물고기가 놀고 있다. 水維는 茅屋 속 에 설치된 소형의 水 車 로서 관상목적으로 만든 듯하다. 건너편에 있는 광풍각에서 수차가 돌 때 포물선을 그리며 계류에 낙하하는 물의 약동을 보고 즐길 수 있도록 꾸민 것이다. 이 수차는 上池 에서 넘쳐 홀러온 물이 도랑을 따라 하지로 홀러가는 도중에서 餘水에 의하여 작동되도록 고안된 듯하다. 上池는 대봉대의 바로 아래편에 있는 2. 8 mX2.8m 크기의 방지인데, 오곡문 옆의 담 아 래에 만들어진 구멍을 통해 홀러들어온 암반상의 계류가 홈대를 타고 주입되어 채워진다. 대봉대는 자연석으로 쌓아 올린 4mX 2.5m 크기의 축단이며 소쇄원도에 의하면 小 亭 이 세워지고 있다. 옆에 桐과 꿇策이 있는 것으로 보아 〈鳳凰 非梧桐不榎 非竹質不

► 그립 66 溪流中心의 遊樂空 r. ., 이다 ~IM)

食〉이라 태평성대를 칼망하는 뜻이 들어 있는 듯하다. 입구에서 2~m 를 북으로 가면 〈기〉자로 꺾이는 부분에 넓이 7mXIOm 의 조그마한 광장이 나타난다. 높은 담에 의하여 둘러싸 인 남서향의 지역으로서, 계류가 얼어 있을 때도 이곳의 적설은 완전히 녹아서 봄별을 무색케 한다하여 愛陽壇이라는 이름이 붙 어 있다. 河西金麟厚의 소쇄원 48 諒中 「陽壇冬年」라는 다음과 같 은 시는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壇前溪尙凍 壇上雲全消 沈脣延陽景 鷄聲到午橋 이 前園域은 제월당과 광풍각에 이르는 하나의 어프로-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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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립 67 五曲門 곁의 溪流流入口 (담밑에 水口가 만들어져

기능을 지니고 있지만, 왼편에 있는 각종 시설(上 • 下池와 수대 그리고 대봉대와 소정, 주변의 수목 둥)을 감상하면서 거닐 수 있 도록 계획한 것이라 볼 수 있다. 溪園 (溪流 중심의 유락공간) 北東角의 五曲門 옆 담 아래에 뚫려 있는 水 口로부터 시작되 는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溪邊空間인데 溪岸상에 있는 광풍각도 포 함된다(그림 66). 이 공간은 윗쪽에 계류방향과 직각으로 쌓아놓 은 높이 2 . 2m 의 흙돌담 아래에 만들어 놓은 높이 I.S m, 너비 각 1.5 m 와 l.8m 의넓이를 갖는 두 개의 유수구(그림 67) 를통하여 들어 온 계류는 암반상에 패인 오곡回부를 굽이쳐 흐른다. 폭포를 이 루어 櫓潭에 낙하하고 대봉대 앞을 통과하여 水維와 광풍각 사이 를 빠져 危橋下로 蛇行 유하한다. 이 계류의 윗쪽 죽 오곡문 쪽의 넓다란 암반(약 7X!Om) 에는 위락공간으로서 床岩, 岩楊. 廣石 둥의 이름이 붙여지고 있는데, 소쇄원도에서는 암반위에서 장기두는 사람과 橫琴울 타는 사람이 보인다. 또 이 암반 아래 편, 광풍각의 동쪽 址 臺 下에는 석가산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음) 신선계를 상징한 듯하고. 각의 뒷쪽 언덕 위 桃鳩에는 단풍나 무와 복사나무가 식재되어 있어 봄철에는 무릉도원을 연상시켜주 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五曲溪流〉 위에는 略 15( 行橋)이 있어 前園과 內園을 연결하고 있으며 하부에는 전원입구와 광풍각을 연결하는 위교가 놓여 있다. 광풍각은 중앙에 방이 있는 정면 3 칸 면 3 칸의 팔작지붕형 정자로서 계류 건너 언덕 위에 세워 놓은 수차에서 포물선을 그 리며 낙하하는 물의 약동을 감상하기에 알맞는 위치 에 놓여 있다. 더구나 이 계변을 덮고 있는 紫薇, 楓, 松, 梧, 竹 동으로 이루 어진 수림은 계절따라 독특한 佳 景 을 연출하여 이곳을 찾는 시인. 묵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함에 족하다. 이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장은 河西의 시제 「廣石臣卜月」, 「楊岩 靜座」, 「王泳橫琴」, 「i伏流傳杯」, 「床岩對基」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풍류객들의 유락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적할 때는 사색의 공간이요 광풍각을 중심으로 하는〈杭 溪文房〉이다. 內 Ill (霜月 堂과 梅臺 중심 의 정원) 오곡문에서 제월당에 이르는 본원의 상부에 자리잡은 공간으로 서 (그림 68,69), 입구보의 前園과는 均橋에 의하여 연결되고 하부 는 계원공간에 인접하고 있다. 오곡문에서 제월당에 이르는 직선 통로의 윗쪽에는 높이 Im 내외, 넓이 l. 5m 의 2 계단의 축단이 있 어 매화나무를 중심으로 하는 수목과 화훼가 심어지고 있는데 〈梅 臺 〉라 이름 붙여지고 있다. 소쇄원도에 의하면 梅, 桃, 蘭, 그리 고 무명의 곧게 뻗은 거목이 보인다. 제월당의 앞뜰 왼편 귀에는 파초가 심어있고 눈풍각쪽 앞뜰 끝에는 복사나무로 보이는 나무 가 2 주 서 있다. 이처럼 제월당의 앞뜰은 거의 공지로 남겨지고 있지만 광풍각의 뒷편 桃塩에 심어진 복사꽃은 봄이면 좋은 관상 대상이 되어줄 것이다• 또 五曲門옆에 있는 巨巖을 「籠岩」이라하 고 「 臺閣勝漏 洲」라 노래한 것은 神仙思想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iv) 조경식물”) 소쇄원 창원당시의 조경식물 목록이 없기 때문에 하서의 소쇄 원 48 諒과 기타의 詩文 그리고 소쇄원도에 의하여 당시의 조경식 물을 추적하고자 한다. 이러한 자료는 소쇄원에 관련된 문집인 『漏漏園事 實 』에 收錄되어 있다• 52) 鄭騰許. 「漏漏 Ill 의 造景植物」, 湖南文化硏究, 1977,p p.1 35~155.

► 그립 68

계단상의 花階(梅츠)가 보인다

소쇄원의 식물을 찾아내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자료는 河西 金麟厚가 쓴 濕洞園 「四十八諒」 (부록) 이다. 여기에서 조경식물을 취급한 시저 I 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 透竹危橋 千年風評 來路(衍符 …… … ……………………… ……… 竹 ® 梅장逆月, 石跋孤梅 …………………………………… ……… ………梅 ® 杏陰曲流 …………………………………………………… …… ………杏 ® 斷橋雙藍 松石天成 …………………… ………… ……………………松 ® 尙睦棟石 …………………………………………… ………… …………棟 : ::::::::::::::::::::::::::::::::: •. ::: ::: : :: ::::::::::::::: : :::::::.:.;回\: ® 激淵葛蒲………… … ………………………………………………… 葛蒲 : ::::·.·.·:.·:::::: ·. ·.·.·.·: ::::: ::·.·.·.·::: :::·. ·.·.·.·::::::·.:·.·.·.·::::::::·.·.·.·::::::::·.~= @ 桐갇夏陰…………………………………………………………………桐 :@ :梧:陰::潟·湯.…·.·…:::…: : :…:::…::…:::…:::…:::…:::…::…:::…:::…:::…:::…:::…::…:::…::: :…:: …:::…:::…:::…::…:::…::: :梧:: ® 柳汀迎客………………………………………………………………… 利 II :® :徵:;潤:::紫::薇:::…::…:::…::…:::…:::…::…:::…::…:::…::…:::…:::…::…:::…::…:::…:::…::…:::…::…:::…::…::: :…: :紫:::薇;: ® 帶雪紅楠 .. ………………………………·, '……………·………………乾 河西 의 48 諒에서 위와 같이 19 종의 조경식물이 나타난다• 또 하서는 다음과 같은 日本 部躍에 관한시를 읊고 있으므로 1 종이 더 첨가된다. 次謝梁兄彦鎭送日本躍躍韻 海外風流絶代姿閑園養得幾多時 誰知終日絲絲雨 爲送連根第-枝 仁齋分得上林苑海外流傳歲幾何 漢上沈流‘it;裏見 好風吹送一根過

日 本 郞踏은 세종대왕때에 일본인이 數盆 진상했던 것을 상림원 에 심은 일이 있는데 강희안 (1419~1464) 은 특별한 배려로 分根 받아 왔다고 한다 .531 李 는 54) 이 일본철쭉을 Rhododendron scabr- um G.Don 이라 생각하고 있으나 소쇄원의 梁彦鎭이 보냈다는 일 본철쭉이 어떠한 품종인지는 알 수가 없다.

53) 姜布顔 著 李炳薰 譯, 『黃 (E 小錄』, 乙酉文化社, pp, 96~98, I973. 54) 리휘재, 『한국동식물도감』, 「화훼류 II 」, 삼화출판사, 1966.

이밖에 梁千運 의 「漁洞園溪堂重修上梁文」 (1614) 에서는 松 • 竹 • 梅 • 楓 • 桐. 梧 • 桃 둥과 함께 동나무가 기록되어 있는데,소쇄 원 안에 동나무가 있었음은 송강 정 철의 「次韻奉上鼓巖丈」 에서 〈羅以紫藤園〉 이라는 시구가 말해 주고 있다. 여기에서 鼓巖 이란 山甫의 次子 인 子激 (자 仲明, 1523~1594) 의 호이다. 이상의 시문 속에 나오는 식물을 총괄하면 21 종에 이르는데 이 를 목본과 초본으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木本植物: ® 山竹(조릿대 ?), ® 藍 ® 楓 ® 藤 ® 柳(이상 온 국내야생종) , ® 왕대 , ® 梅, ® 杏 ® 棟 ® 四季, G) 桃 ® 桐, @ 梧, @ 紫薇 ® 距(이상 중국원산종). ® 日本部躍 (일본원 산종) 草本植物: ® 舊蒲 ® 尊(이상 국내야생종), ® 菊 ® 色魚 (이 상 중국원산종) . ® 英函(인도) 목본 16 종, 草本 5 종, 계 21 종 가운데서 국내야생종은 7 종인 데 대하여 중국에서 들어온 식물은 12 종에 이르고 있으며 일본철 쭉과 英函롤 포함하여 외래식물은 14 종으로 전체의 66.7% 를 차 지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京과 멀리 떨어져 있어 내외의 정보교 환이 어려운 남도의 무동산 북쪽 기슭에서 생활하고 있는 양산보 의 관상식물에 대한 식견이 대단함을 읽을 수가 있다. 한편 「漏漏園圖」 를 보면 1500 년대의 식물에 대하여 동백나무, 선측백나무, 난이 추가되고 있는 반면에 梧,桓, 四季花, 菊 葛 蒲, 日本部躍 동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그동안의 관리 소홀로 고사했거나 代植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83 년 4 월말 현 재로는 표 l 에서 보는 바와 같이 1500 년대와는 커다란 차이를 보 여주고 있다. 1500 년대의 식물로는 단풍나무, 배롱나무, 참오동

표 l 소쇄원 조경식물의 시대적 변천 연 대 별 구 분 학 명 식물명 원산지 1500s 1700s 1900s 木 I Abic s holop h y ll a 杉 松 국 내 종 。 2 Acer pal matu m corcanum 楓 II 。 。 。 3 Ap h ananth c asp cr a 푸 조 II 。 4 Camellia jap o n ic a 山 茶 ’I 。 。 5 Camp s is chin c nsis 金 藤 중 국 。 6 C.Cl tis choscnia n a 팽나무 국 내 종 。 7 Chamaccyp a ris obtu s a 橋 梧 。 8 Cornus off ici n a li s 山萊興 한국·일본 。 9 Crata e g 11 s pinn ati fida typica 山 査 국 내 종 。 10 Di os p yr os kaki 柚 ’' 。 11 Euony m us radic u s 줄사철 II 。 12 Fir m ian a pla ta n if olia 梧 중 국 。 13 Gardenia jas mi no id c s 치자 II 。 ‘ 14 Gin k g o bil o ba 銀 杏 II 。 15 Jugla ns sin c nsis 胡桃 II 。 16 Jun ip cru s chin c ncis horiz o nta l is 뚝 향 국 내 종 。 17 Kalop an ax pict u m typict u m 음나무 II 。 18 La g e 『s t rocm i a ind ic a 紫 微 중 국 。 。 。 19 Paulownia tom cnto s a 桐 II 。。 。 20 Phy ll osta c hy s barnbusoid c s 王 竹 II 。 。 。 21 Pin u s dcnsif lor a 松 국 내 종 。。 。 22 Pin u s rig ida 리기다松 눅” 미 。 23 Prunus A rmcnia n a A nsu 杏 중 국 。。 。 24 Prunus Mume 梅 II 。 。。 25 Prunus per sic a 桃 。。 26 Prunus tom cnto s a 樓 ’’ 。 27 Prunus yod oensis 왕 벗 일본(국내) 。 28 Pseudosasa jap on ic a 簡 竹 국 내 종 。。 29 Punic a gra natu m 楠 ?;;, ,.i- 국 。 30 Rhododendron SPP . (Ja pa nese) 倭躍躍 일 본 。。 3312 SRaolsi ax cbhaibn ye l no snisi c a 垂月 桂楊 중 ,, 국 。。 。 333365 STWZohcipl usk hjtoa e o wr r iaoaa r jisfaclc onpr rtro aai nbl t iaui c s na d a 느紫티 棟柏나 藤무 불국 내,, 종 。。 。。 •。 34 ' 명 。 。

연 대 별 구 분 학 명 식물명 원산지 1500s 1700s 1900s 草本 2l ABcraosreums ag rca hmrei nbee ursi 猛 函 蒲 국 내,, 종 。。 。 3 Chris a nth c mum morifo li um 菊 중 국 。 4 Cy m bid i u m spp . 蘭 국 내 종 。 5 Musa bas j o o 熊 중 국 。 6 Nclumbo nucife ra 蓮 인 도 。 합 겨] 22 16 28 * 1900s 는 1984 年末 현재. •표시는 말라죽은것.

나무, 왕대나무, 소나무, 살구나무, 매화나무, 측백나무 (柏死木) 둥 8 종이 있을 뿐이고 20 세기에 추가 식재되었을 것으로 생각되 는 새로운 식물로서는 전나무, 벚나무, 리기다소나무, 호도나무 동 18 종에 이르고 있다. (4) 結語 소쇄원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민간의 원림 가운데서 디자인면 에서나 구성면에서 단연 으뜸이라 생각된다. 자연사면을 전통적인 직선적인 段狀처리를 하면서도 자연에 거부반옹을 일으키지 않으 며, 각 공간의 부분부분이 무리없이 연결이 잘 되어 있다• 垣培下 의 수구를 통해 들어온 물이 암반상의 오곡回부를굽이쳐 흐르다가 흡 l j木을 통해 待鳳퓰下의 上下池에 주입되는데, 그 물은 上·下池사 이에서 물레방아의 장식용 수차를 돌려 飛湯으로서 광풍각 아래 협곡으로 떨어지게 한 水 景 기법은 낭만적이며 풍류적인 분위기가 감돌게 하는 매우 세련된 기법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겨우 나이 15 세부터 17 세까지 3 년간 서울에 머물면서 靜菴 조광조에게 수학 한 것이 고작인 양산보의 견문과 지식으로서 이렇게 훌륭한 작품 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하향후 에 마을 뒷편 계류가에 조촐한 山 亭 쵸정)을 세워놓고 지내다가, 당시 좌찬성을 지내고 하향하여 {免仰 亭 (1533) 을조영한 바있는 企 村 宋純(守初)의 조력에 의해 완성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원립 구성에는 다분히 사상적인 배경으로서 周敦碩의 유학적인 분위기

가 감돌고 있으며 ( 滿 月 堂 光風閣 蓮), 생활철학으로서는 도연명 적인 안빈낙도사상(桃鳩 菊 柳)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또 상 징적인 요소를 찾는다면 待鳳 盜 下에 竹과 梧가 식재된 것은 태평 성대의 도래를 기원하는 뜻이며, 광풍각 옆의 假山은 그 건너편 언덕의 紫薇수림, 광풍각 뒤의 桃.t烏 溪上의 梅 정: 와 함께 무릉도 원 또는 仙界를 나타내려 한 것이 아닌가 한다. 河西의 48 諒中 頂山籠岩」에서 장閣勝漏洲i라 한 것은 不老長生을 약속한다는 神 仙思想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하서의 四十八諒가운데서 계류의 암반에 대하여 偶紅璋卜月 > 〈써岩靜坐〉, 선淑橫琴〉, 〈ik 流傳杯〉, 〈床岩對基〉 등의 표현은 풍 류적인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다. 소쇄원은 입지선정이라든가 공간처리, 경관요소의 도입 그리고 풍류적인 분위기의 조성 등에 있어 당대의 대표적인 민간정원으 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부록) 源避園 四十八諒 河西 金厚之 551 一 源淵園中 敷 /i~成源洞 亭 J臺祚輪選與 側耳聽壇玲 0 小亭愚腦 一 聽明銀軸淨 水石映圖 · ,!J 精思隨 1 區 {n 紗契入 .苦 魚 0 沈溪文房 一 溪流激石來 一石通全堡 四練展中間 傾康天所j'j l j 0 危嚴展流 四 背負靑山重頭回碧玉流 長年安不tt 臺 閣勝漏i }ll 0 負山酸巖 五 급뿔連三益 慕閑不見危 襄縱元自絶 苦色賤還滋 0 石退擊危 六 方塘未-敵 卿足 l t r 淸淡 魚戱主人影 無心垂釣 H 系 0 1 J、塘魚泳 七 委曲通泉脈 高低竹下池 飛流分水維 染甲細參差 O~l j木通流 八 永 [I 漏浚力 春來自見功 天孫機上錦 tf卷掛 1많 다, 0 春雲水維 九 架堅~fl rf竹 臨危似欲浮 林塘元自勝 55) 『漏洲閑 i m ft』 卷之四. i1ii 3~8, 1755.

得此更淸幽 O 透竹危橋 十 已向空邊滅 끓從靜處呼 無情風與竹 日夕奏笛平 O 千후風뺀 十 南 ) · I1 炎熱苦 獨此占凉秋 風動盜邊竹 池分石上流 O 池 장納凉 士 林斷장的裕 偏宜月上時 最隣雲散盡 寒夜暎永姿 O 梅盜遂月 三 露臣卜靑天月 瑞將石作篠 長林散淸影 深夜未能眼 O 廣石臣卜月 꿇 步步看波去 行哈思轉幽 傾源人未訴 空見透協流 0 垣敍透流 去 肥尺潟淡池 分明五曲流 當年川上 .8 . 今日杏邊求 0 杏陰曲流 尖 爲山不費人 造物還爲假 隨勢起菜林 依然是山野 O 假山草樹 土 片石來崇岡結根松數尺 萬年 1E 滿身 勢縮參天碧 O 松石天成 大 石老雲煙濕蒼蒼蘇作花 一般 丘堅性 絶意向繁華 O 退石蒼蘇 左 慈掛虛坐久 淨掃有溪風 不伯察當篠 偏宜觀物翁 O 揚巖靜坐 干 瑠琴不易彈 擧世無鍾子一曲響祗澄

相知心與耳 O 玉敵橫琴 주 列坐石禍邊 盤疏隨意足 i回波自去來 釜單閑相屬 O il:J;流傳孟 쭙 石岸附寬平 竹林居一 半 賓來一局基 亂없空中散 0 床巖對基 굴 消蕩出鹿想 造造階上行哈成閑節意 哈了亦忘情 0 條階散步 孟 自 掃魏邊石 無人獨坐時 睦來驚起立 恐被蝶王知 O 尙睦魂石 =去 潭淸深見底 浴龍碧鄒鄒 不信人間世 炎程脚沒隆 O 禮泣放浴 궂 짜損 循除水 橋邊樹二松 藍田滋有喜 爭及此從容 O 斷橋雙松

주七 北십·t)품/한碧 束節\i .i \\)) 'i 綠/i:i1 1. ;>.,L ftr'i 歲晩倫風面. O 散 l i싸公菊 十^ 直欲論奇絶 須看排石根 兼將ii W戈 水 跡影入黃香 O 石缺孤梅 元 雪 幹縱縱直 ‘袁消炳姑輕 扶黎落晩籍 解帶挑新莖 O 來路循筑 루 霜根恥染座石上時時露 幾歲長兒孫 貞心老更苦 O 近石竹根 字 翻翻崔際 鳥 時下水中遊飮暎隨心性 相忘抵白蜀 O 絶崔災危 壬 石上數菜1 竹 湘妃餘派斑 山歲不識恨 薄暮自知還 O 菜笛暮鳥 三추 天付幽人計 淸冷_if1ll泉 下流禪不管 分與鴨閑眠 O 塾底眠鴨 干四 삐說溪傍草 能含九節香 飛瑞日噴薄 一色f.t炎凉 O 激淵 葛蒲 干크도 定 自 花中聖 淸和備四時 茅蒼斜更好 梅竹是相知 O 斜衍四季 尹 春入桃花璃 繁紅院霧低 依微巖洞康 如涉武陵溪 O 桃鳩春院 쭙 巖崔承老幹雨露長淸陰 舜 日 明千古 南風吹至今 O 桐젊•夏陰 굿 扶疏綠葉陰 詐夜溪邊雨 亂混潟枝間 還疑白鳳舞 O 梧陰潟潟 天 有客來敵竹 數聲燈 .i 땐 眠 扶冠謝不及 繁馬立汀邊 O 柳汀迎客 모 淨植非凡丹 閑姿可遠觀香風橫度堅 入室勝芝蘭 O 隔淵英葛 모 張翰江東後 風流識者誰不須和玉險 要看長氷絲 O 散池專茅 쁨 世上閑花升 都無十日香何如臨淵樹 百夕對紅芳 O 磯問紫薇

=쁩 鎔젊洪落破投寂銀窮節 低昴舞琴精o 不m;比雨思色 鄕苑 聽 콥 秋來巖堅冷 楓葉早陀霜 寂歷稀露彩 婆娑照鏡光 0 映塾丹楓 뿔 不覺山 雲 暗 開泡 雪 滿園 階平錦遠白 富貸종 1 l 閑 F1 0 平園 姉 雪 뭇 曾聞花六出 人道滿林香 降宜交靑葉 淸硏花雪霜 0 帶 雪紅桓 뿐 壇前溪尙凍 壇上雪全消 tt뽑延陽徐 鷄聲到午橋 0 陽增冬午 ^뽀 長勿爲垣橫風雨百尺數 一一寫新詩0 長有t垣)題.列諒居 障 참고문헌 孟仁在 「源腦園」, 박물관신문, 3:t t, 1973, 11, 1 35 호, 1974, 1. 李鍾建, 명羅i園四十八泳考」, 馬山大學論文渠 6 ( l ) • 3 ~25, 1984. 6. 韓再洙, 「別壓議疆園에 表象된 자연현상의 建築美學的体系에 관한 硏究」, 建築 29 (125) : 16~22, 1985. 7 - 8 . 鄭膳許, 「滋淵園」, 全羅南道誌, 第 3 卷, 全羅南道誌編纂委員會, PP. 839~840, 1984. 12 (2) 尹善道의 英菩洞園林印 해남윤씨 善道 (1587~1671) 의 본가는 전라남도의 해남 蓮洞에 있지만 別堅는 경기도의 양주와 전라남도의 해남군에 있는 水晶 洞, 聞篇洞, 金鎖洞 그리고 완도군의 보길도 동 다섯 곳에 이르 고 있으므로 이룰 구별하기 위하여 〈부용동〉 이라는 이름을 부여 했다. 부용동이란 보길도에 있는 지역 이름이다. 이곳에 조영된 정원은 자연 속에 꾸며진 것이므로 〈부용동원립〉이라 하였다. (i) 원림의 성립g) 56) 鄭膳呼 「李朝時代의 庭園에 關한 硏究」, 全南大學校 大學院, pp, 11~M, 1974. 57) 「孤山先生年譜」, 卷之一 및 卷之二, 1898.

윤선도는 參贊 毅中의 孫이며, 副 正 惟深의 둘째아들로 1587 년 (선조 20 년) 6 월 22 일에 한양 蓮花坊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는 約而이고 호는 孤山 또는 漁椎 怨士 :라 한다. 그는 체격이 단소하 고 체질도 약하여 평생 갖은 병환으로 고생하기도 하였지만 어려 서부터 총명하고 글을 좋아하여 經史 百家에 능하였고 의약, 卜 筑 음양지리에도 정통하였으며 시조는 특히 뛰어났다. 26 세때 進士試에 급제하였으나 등용되지 않았으며 30 세 (1616) 에 제야에 있으면서 光海政亂 때 북인인 李爾照, 朴承宗, 柳希密 둥의 專政 을 극언으로 항소하다가 이것이 화근이 되어 아버지는 관찰사에 서 쫓겨나고 고산은 이듬해 함경도 경원에 유배당하였고 32 세 (I6I8) 때의 겨울에 기장으로 이배되었다. 그러다가 1623 년 인조반정으로 유배생활에서 풀려났으며, 1628 년 (42 세)에는別試 初試에 동과하고 동년 3 월에 이조판서가 되고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師(평에 겸임하게 되었다. 그후 1632 년 (46 세) 司僕첨정 한성부서윤, 1633 년 예조정랑, 관서京試官, 세자侍 講院문학을 역임하다가 집권파인 서인들의 압력으로 성산 현감으 로 좌천되자 이듬해 벼슬을 버리고 향리인 해남으로 돌아오고 말 았다. 1636 년 (인조 14 년) 12 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자 사직의 위급을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즉시 향족과 家備을 모아 수 로로 강도(강화)에 이르렀으나 (1637 년 정월 29 일) , 강도는 이미 함락되었고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적군의 포위망을 뚫고 영남으 로 갔다는 소식을 듣자 해남으로 되돌아 왔다. 이때 왕이 삼전도에 나와 청나라의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 을 듣게 되자 세상에의 뜻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결심하여 바로 배를 띄워 제주도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도중에 봉만이 수 려하고 동학이 깊숙하여 숨어 살기에 알맞은 섬 〈望見峯密秀麗 洞 堅開裕 眞氣滋目 左右溪間 緊帶合流 公曰可以居矣 孤山年譜 丁丑二月 條〉을 발견하고 들어간 곳이 바로 이 보길도이다. 그는 이곳에 이르자마자 곧 원시림을 벌개하여 터를 닦고 길을 내어 格紫峰북쪽 기슭에 樂 書 齋를 세워 그의 생활의 본거지로 했으며 건너편 산허리에 洞天石室을 꾸미고 못을 파서 휴식공간 으로 했다. 또 동구 수리 남직한 곳에 계천이 흐르고 깊고 넓은 潭이 있어 좋은 경치를 이루고 있으므로 潭가에 정자를 세워 洗

然 亭 이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그 주위에 同何 OO. 七岩軒, 呼光樓 둥을 세웠고 자연물에 대해서는 小隱 m. 赫 0 羲 ~ . 浪哈溪, 獨登 臺 , 五 雲~ . 1iil111 if. 賞 春 蓬 동을 그 형태에 어울리도록 명명하였는 데 이것은 세상사를 잊고 자연 속에서 즐거움을 찾고자 함이라 하였다. 그 뒤에도 원림을 꾸미는 일은 계속되어 67 세 때에는 낙 서재앞 龜 岩下에 無 潤 堂 을 세우고 못을 파 연을 심어 안식을 위 한 곳으로 하였으며 82 세때는 東溪上 에 曲水堂올 세웠다. 이처럼 고산은 병자호란으로 인한 보길도에서의 은거생활이 계 기가 되어 이곳의 중심부인 부용동의 수려한 자연 속에 인공적인 수경처리를 하여 은거하기 위한 하나의 別壓園林을 성립시킨 것 이댜 (ii) 원림구성 공간의 기능에 따라 朗哈 溪 域과 洞天石室域 그리고 洗 然 亭域으 로 3 구분하여 고찰하기로 한다. 본고에서는 徐鼎修의 『 孤山遺 稿 』 를 參考 하였다 .S8 1

58) 徐鼎修 '1lllt ll 遺稿』. 卷之-. 1798.

朗玲溪域 朗哈 溪 란 『 孤山遺稿』 卷之一 에 실린 아래 시에 근거를 두었다. 朗哈 溪 (源出格紫峯下) 微玉複J몸窟 玲瑠 紫 小 蓬 洞庭飛過客應向此中來 즉 격자봉의 동쪽 골짜기를 홀러 북쪽 기슭에 이르는 계천에 대하여 물 소리를 구슬 구르는 소리에 비유하여 朗哈溪라 이름붙 인 돗하다. 이 계류 주변에는 일상의 옥외생활공간으로서의 각종 시설이 배치되어 있다 . 해발고 430m 이며 이 섬의 중심이 되어 있는 격자봉의 북쪽 기 슭에 住生活의 본거지로서의 樂 밖齋 룰 세웠다. 이곳은 해발고 100 여 m 지점이며 낭음계로부터는 약 150m 의 거리에 있다. 재의 뒷편에는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암벽이 있는데 〈小隱祥〉 이라 한 다. 또 재 앞의 露 頭岩을 〈危岩〉이라고 하였다. 이 낙선재와 소 은병 그리고 귀암에 관한 다음과 같은 고산의 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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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쩍天后흐 3. 첫?조 흉 0

\ @ 卦 씁島 Q i` Z4 5 + 투 K 1'1- ► 그립 70 보길도의 부용동 원림

樂합齋偶玲(自tt. 壬午陽月底望遊甫吉島) 眼在靑山耳在琴 世間何庫到吾心 滿睦浩氣無人識 一曲狂歌獨自哈 小隱居(自社, 界在樂 합齋 後篠上 比武夷大隱展則小故名, 丁丑) 蒼居自天造 小隱因人名 逸矣廢凡隔 烽然心地淸 龜巖 ( 自 託, 在樂 합齋 前庭, 丁丑) 但知恭四靈 誰識介于石 振爾卜居時宜吾玩月夕 「樂書畜偶哈」은 고산이 56 세때 금쇄동의 별업에 머물러 있으 면서 한때 보길도에 들렀다가 지온 시이다. 여기에서 고산이 자

연과 벗하며 世間 IF 를 애써 잊으려 하는 괴로운 심정을 읽을 수 가 있다. 소은병은 고산의 주에도 있는 것처럼 중국의 복건성 승안현의 武夷山 제 5 곡중에 있는 높이 60 여 丈의 [연昇峯에 대비해서 말 하는 것이나 〈遊矣鹿凡隔〉 이라는 시귀에서 본다면 〈은거생활〉과 도 관계를 지울 수 있는 이 름인 듯하다. 죽 王康璟 의 「反}{係t연詩」 511) 에회 〈小tgt견陵販 大t견隱朝市 伯夷京首陽 老柄伏桂史〉 라 하였는 데, 진정한 大隱者는 민중속 (朝市) 에서 생활하는 데 대하여 소은 자는 산림 속에서 숨어산다는 뜻에서 고산은 스스로를 소은에 비 유하여 소은병이라 이름지은 것이 아닌가 한다. 『고산선생연보』 卷之一 榮巳 (公 67 세) 2 월조를 보면 〈自金鎖入英容源 樂 書齋前角 岩下 築一堂 命曰無潤 繁池種蓮 以高案息之所 東協外 又築小菴 命曰靜成 使居子弟門人〉 이라 하고 있다. 죽 격자봉하에 낙서재를 세운 지 16 년만에 그 아랫편에 無個堂을 짓고 못을 파 연을 심 어 연식할 곳으로 하였으며 동강밖에 靜成菴을 짓고 자제와 문인 들을 살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樂書齋址에서 북동으로 약

59) 諸稿轍次 『大漢和辭典』, 卷三, p.3 71 , 1968.

曲가:쏘쇼(

」J/그 -d T f| 1¥..,.. 휴勿훗一速.(』?) (타熱子唄) ► 그립 71 朗哈溪園林

40m 되는 거리의 溪 (朗哈溪) 변에 동서 약 12m , 남북 약 14m , 깊 이 약 lm 의 方池터가 있는데 지금은 논으로 쓰고 있다. 이 못이 바로 無洞堂 옆의 못이라 생각된다 (그림 71). 또 『고산선생연보』 卷之 二 戊申 (公 82 세)조에는 〈無潤堂東溪上 築小堂命曰曲水〉 라 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있다. 三公不換此江山 遷諦惟慈去此 IH J 蒙被隆思&}故里 不希官錄 喜生還 黃原浦災英 容洞 談屋 三間蓋 我頭 麥飯兩時瓊液酒 終身此外更何求 고산은 1659 년 (公 73 세) 5 월에 효종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복 제문제로 논쟁하다가 서인들에게 몰려 누명을 쓰고 이듬해 6 월삼 수로 유배되었다가 한발 때문에 1665 년 3 월에 광양으로 이배 되어 {79 세) 6 월에 配所에 도착했다. 그러다가 81 세가 되던 1667 년 7 월에 특명으로 석방되어 유배생활 8 년만에 해남으로 돌 아왔으며 (8 월) 9 월에 부용동에 와서 살게 되었다. 그 이듬해 {1668 년 82 세) 무민당의 동쪽 계상에다 곡수당을 새로 지었는데, 비록 조그마한 短屋三間이요 하루 두끼 맥반에다 瓊液酒로 때우 는 생활이지만 죽지 않고 살아온 것이 더할 데 없이 기쁘니 終身 이 수려한 강산속의 생활밖에 더 구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하 며 복받치는 눈물 속의 시를 읊고 있다. 고산은 곡수당을 세운지 4 년만인 1671 년 6 월 11 일에 85 세로부용동의 낙서재에서 영면 한것이다. 지금 낭음계의 동쪽 언덕에는 자연사면을 그대로 이용한 남서 방향의 9.2m (계류방향) X 5.2m( 사면방향) 크기의 장방형지 (깊이 하변 1.3 m, 상면 2.7 m ) 가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다. 이 지당 속 에는 괴석이 3 개 놓여 있는데 삼신선도를 상징한 듯하다. 곡수당 은 아마도 이 지당 곁에 세워진 듯하며 당 안에서 지당도 감상하 고 낭음계의 곡수도 바라다 볼 수 있는 위치일 것이다 (그립 71). 곡수당은 孤山이 다음과 같은 곡수대 시를 남기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광해군 때 (1616 년, 公 30 세) 이이첨의 비행에 대한 상 소건으로 경원에 유배되어 있을 때 찾은 일이 있는 곡수대를 회 상하여 부용동의 낭음계를 굽어볼 수 있는 岩 臺 위에 小堂을 세

우고 곡수당이라 명명한 것이라 생각된다. 曲水잦·(自注 : 在}災源城西五里 羅足盜傍有 人呼韻賊三絶) 曲水깡傍有 小川 眼中佳f(不如邊 奏衣耀足坐巖上 載欽何人飾野田 결론적으로 이 낭음계역은 부용동원림의 중심역으로서 낙서재 에서의 일상생활 중에 사색과 冥息 및 산책을 통해 마음의 안정 울 갖게 하는 정적인 위락공간의 기능을 부여하고 있다. 또 공간 처리면에서는 자연 속에 직선적인 방지롤 도입함으로써 조형면에 서 강한 대비를 이루게 하고 있다. 洞天石室域 『고산연보』 卷之一 丁丑(公 51 세, 1637 년) 2 월조에 〈洞北山膜巖石 絶特 度六重石門 有琴壁層 퓰 作小屋其上 命曰洞天石室〉이라 하고 있다. 이 지역은 낙선재로부터 수평거리 약 1km 거리에 있으며 해 발고 약 100m 의 위치에 있다. 계천을 건너 가파른 사면을 올라 자연암벽들로 이루어진 이른바 석문을 지나면 해발고 약 100m 부 위에 琴壁層盜(岩 ~ ) 가 있는데 그 위에 小屋을 세우고 洞天石室 이라고 명명했다는 것이다. 동천이란 신선이 산다는 곳으로 茅君 內傳」에 는 l 〈大天之內 有地之洞天三十六所 乃眞仙所居〉 라 하고 있으며 또 洞天福池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천하의 명산 승경으로 서 역시 신선이 산다는 곳이다. 石室은 山中隱居之室(神仙傳 : 廣 成子居 蛇洞之山 石室之中) 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면, 결국 동천석 실이란 신선이 산다는 뜻으로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또 동천석실역의 서쪽 약 IOm 거리에는 암대와 석벽사이에 조 그마한 半자연적인 不等邊 삼각형의 池泉(나비 8m, 길이 10m) 이 있고 수련이 자라고 있다 (그림 72). 그 남쪽에는 인접해서 1 변 약 6m 의 방지가 축조되어 있으나 미완성상태여서 저수불능인 채, 수림 속에 뭍혀 있으며 (그림 73), 그 동쪽의 암벽에 바짝 다가서 폭 60cm 정도의 10 개 석계단을 내려가면 깊이 l.5m , 길이 4.5m 너비 4.lm 의 지하석실이 나오는데 여름철의 무더울 때는 시원한 지하실과 같은 기능을 다할 것으로 생각된다. 60) 諸稿轍次 『大淡和辭典』, p. 6812, 1968.

► 그림 72

洞天石室域의 岩壁下의 自然半 人工牛의 睦蓮池

고산의 시 「義皇橋」 의 自 証 에는 〈在石室第二 I~ i P I- 1 區仙臺之 北〉 이라 하고 있지만 현재로는 保仙젊·나 義皇橋 의 위치룰 찾기 가 어렵다. 윤선도의 의황교에 관한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義皇橋(自注 : 在石室第二石 l J外 1 區仙裂之北) 橋北橋南着小關 中相)捨受兩蒲團 靑山露後支顧타 水樂荷否興一般 동천석실역은 보길도의 주봉인 격자산을 남쪽 전면에 바라다 보는 위치에 주로 자연의 암벽으로 이루어진 곳이며 암상에 소옥 을 짓고 암하에 지당과 석실을 축조하여 전망과 휴식에 알맞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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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립 73 洞天石室域의 下池 (그림 72 의 睦蓮池에 인접해 있음)

修景하고 있다. 〈동천석실〉 이 이름하는 것처럼 이곳에 이르면 신선이 된 기분에 사로잡힐 듯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 洗然亭域 『고산연보』 卷之 一 丁丑 (公 51 세)조를 보면 〈洞口數里許 衆 /II 區成廣潭 其深丈餘 港然徹底 潭邊作 亭 命以洗然〉 이라 하고 있다. 이 계담은 마을 어귀에 있으며 지금도 組石石堤에 의하여 조성 된 潭과 여기에 인접한 방지 그리고 주변에 축조된 累石垣 둥이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으나 이 역의 중심건축물인 세연정의 위치 는 유지가 없어 확인할 방도가 없다. 부용동 골짜기에서 북동 방향으로 완만하게 호르다가 洞口에 이르러 넓다랗게 형성된 계담 (수면적 약 2,000m2’) 에 는 풍모가 절 특한 크고 작은 巨성:·이 여기저기 자연스러이 자리잡고 있어 좋은 溪潭景觀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천혜의 호조건 때문인지 고산은 다른 2 개의 원림역에 비해 修 1 갑에 각별히 주력한 듯한 느낌을 주 고 있다. 이곳에는 중심건물로서 洗然亭이 있었으므로 洗然#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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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74 부 용동 洗 然亨 池園 (윤선도 (1587~1671) 의 보길의 別 堂 )

이라부르기도 하였다. 세연정역의 공간구성을 보면 남쪽의 자연계담과 이 계담의 북 쪽에 인접한 인공적인 方池, 그리고 동쪽의 평지상에 축조한 2 개 의 누석단의 3 개 부분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림 74). 계담은 하측을 축대와 4. Jj .l)t에 의하여 저수량을 증가시키고 있 는데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석제의 축조양식이다. 이 石堤 (그 림 75,76) 는 특별히 가공石材룰 쓰고 있는데 상면은 長 2m 내 외, 폭 lm 내외, 두께 약 20cm 정도의 장방형판석을 양측의 입 석 위 턱에 걸터 놓아 回자형의 보( i Ik) 를 만들되 板 :f i과 立石과는 口 字 의 홈에 연결된 돌촉에 의하여 고정되고 있으며 내강부에는 석회성 물질로 채워 누수방지 역할을 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넓이 2.5m , 길이 llm 여의 이 석제는 저수역할뿐만 아니라 교량의 역 할도 겸하고 있다. 고산의 「家 藏 遺 事 」 에 의하면 그는 이 계담에

► 그립 75 洗然亭溪潭의 石狀堤(補修後)

·‘ ► 그립 76 洗然池의 溪潭石狀 조립형태

► 그립 77 溪涼 속의 巨岩

小筋을 띄우고 令童남녀들의 찬란한 採服의 容姿가 수면에 비치 는 것을 보면서 자작의 漁父四詩調롤 유유히 노래부르고 즐겼다 고한다. 계담의 북서쪽에는 중앙축단을 경계로 하여 方島형의 방지가 축조되고 있다 (그림 78) 방지의 크기는 장경 (동서방향) 이 35m, 단경이 24m 에 이르며 중심에는 자연석에 의한 방형의 섬 (4X 4m) 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방도형 방지의 양식이다. 방도상에 정자를 세우고 있는 예는 최윤신이 1400 년대에 경남 김해에 조영한 함 허정과” 인조가 1636 년에 창덕궁 후원에 조영한 청의정이 있기

► 그립 78 洗然池(인공 方島型方池)

► 그림 79

洗然亭域의 방형단

는 하나 중도상에 정 자 가 없는 순 전 한 방도형 방지의 예는 찾기 가 쉽지 않다. 남쪽의 계담과 북쪽의 방지 사이에는 1 변이 약 14m 되는 방형 의 축단이 있고 그 위에 다시 1 변 9. 4m , 높이 0 . 7m 인 네모의 단이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 오르면 사방의 자연경관이 한 눈에 들어 온다. 이 정도의 넓이라면 正面 3 칸, 측면 3 칸의 정자 한 채는 충분히 세울 수 있는 크기이다. 이 중앙축단을 기준으로 한다면 중심으로부터 약 20m(66 尺)거리에 있는 북쪽과 동쪽 방향 의 지안에 각각 방형의 축단이 자리잡고 있다. 북쪽 것은 (I 변이 약 7.Sm) 2 층이며 동쪽 것은 (I 변 약 7m) I 층으로 되어 있다(그 림 79). 또 남지에는 石사犬堤가 있는 남동안에 1 변 약 5m 의 방형의 석 축단이 있고 이 석축단과 중앙축단 사이에 1 개의 人 工島 가 만들 어지고 있다. 그런데 중앙축단과 각 축단 및 중도와의 사이에 각 약 20m 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상호 대칭적안 위치에 배치되 고 있다는 것이다 (그립 74). 이러한 관계에서 볼 때 세연정은 중 앙단의 남서쪽 약 20m 의 거리에 위치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 74 에서 또 @)의 2 층단을 @)의 단과 관련시켜 보면 세연정 (가정)과 중앙단의 연결선인 A-B 선을 중심축으로 할 때 각단 과 중도는 좌우 대칭적으로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설계할 때 의식적으로 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현황에 서 볼 때는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같이 느껴진다 . 지금까지 고찰한 결과를 놓고 볼 때 세연정역은 부용동의 전체 원림 가운데서 가장 정성을 들여 꾸민 곳으로서 관상과 舟遊를 목적으로 하는 계담과 중도가 있는 인공방지를 중심으로 하는 유 락공간이다. (iii) 결 어 윤고산의 부용동원림은 자연 그 자체가 울타리가 없는 정원이 다. 그러나 세상을 멀리하고 자연과 벗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은둔생활을 보다 뜻있게 효과적으로 보내기 위하여 산책하 며 쉬어갈 만한 적당한 장소에 계류를 막아 池를 만들고 돌을 쌓 아 단을 만들었으며 亭 과 軒을 세웠다. 또 필요하면 池내에 수련 61) 李뜸 等 『新增東國輿地勝 覽 』, 卷三十二, 金海都護府 , 樓 亭

을, 못가에는 나무를 심어 경관을 보완했다. 또 어떤 때는 신선 처럼 살기 위해서인지 못안에 괴석을 배치하여 삼봉을 이루었으 며 암석같은 자연물에 仙界와 관련된 명칭을 부여했다. 부용동 의 원림은 〈인공적인 자연〉 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보완적인 입 장에서 修景·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원림 속에는 원지 에 관한 한 선처리라든가 구성면에서는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조 경기법이 도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鄭在i훈, 「朝鮮朝 別壓造慕遺蹟의 一伊 l (윤고산의 부용동) 」, 韓國 造景學會誌 I (2) : 65~ 68, 1973. 丁世勳 外, 「보길도, 윤고산 유적 조사보고서」, 完島郡, I98I . 鄭膳旺 「윤선도의 英容洞園林」, 全羅南道誌 第 3 卷 全羅南追誌 親 墓委員會, pp, 844~846, 1984, 12. (3) 尹書有의 朝夕樓 (別業) Ill) 朝夕樓는 전라남도의 강진군 도암면 석문리의 농소에 있는 翁 山 윤서유 (1764~1821) 의 별업이다. 일명 農山別業이라고도 하 는데, 지리적으로는 덕룡산 (435m) 의 동쪽 기슭에 위치하며 前面 (남면 ) 에는 멀리 (약 1.5 km) 朱雀山 (438m) 을 마주하고 있다. 德 龍山은 도암면 입구의 우측에 솟아 있는 석문산 (281m) 과 남산으 로 연결하여 해남군과의 경계를 이루며 옹기종기 솟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기암절벽의 연맥은 해가 질 무렵이면 가관이 아닐 수 없다. 덕룡산의 동쪽 암벽에는 자연동굴인 용혈이 있어 옛날 부터 유명하다. 해남윤씨 存損의 후손들이 이 지방에 터를 잡고 살면서 이 덕룡산의 동쪽 기슭 농산에다 坐地를 마련하였다. 이곳 에는 옹산 윤서유의 선고 (光宅)와 선고의 고조부 (南紀)의 묘가 았고 그 서쪽에는 작은 골짜기를 넘어 선고의 皇考(以冕)의 묘가 있다. 옹산은 이 묘역 아래에다 永慕齋를 지었으며 그 앞에 樓· 와 館 그리고 謝를 세우고 별업으로 하였으며, 여기에는 못을 파고 나무를 심어 정원을 꾸몄다. 그 북쪽 7km 거리에 있는 만덕산의 山亭에서 적거생활을 하고 있던 다산 정약용은 이 별업을 자주 62) 鄭膳託 「康津地方에 있어서의 朝鮮時代의 園林」 湖南文化硏究, 12, pp. 200~206, 1982.

찾은 일이 있는데 1811 년에 쓴 그의 「朝夕樓記」는 당시의 이 정 원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므로 다음에 이를 옮겨 싣고 자한다. 朝夕樓記 O ) 丁若針 ll 朝夕樓者 尹皆甫之먀樓也 余腐茶山今旦四年 每 {Ell !i試步 必山山 而右越一碩涉一 )II 風平石 P'l 想平龍穴 飮平靑羅之谷 宿平裝山之壁 而後 騎馬而反平山 例也 皆甫 與其從父弟群甫 楓酒持魚而至 或期 平石門 或期平龍穴 或期平靑躍之谷 旺醉而砲 與之宿平裝山之壁 亦 例也 亞山者皆甫別業 農山之~f 郞 龍山之麗嚴考葬焉 歌考之高祖葬 焉 又其西 歌考之皇考葬焉 於其墓道之側 起 一 敵之宮 而屈之曰永慕 齋 齋之左 序因而閣之爲小樓 登斯樓則 龍山百客 *?&h 柳暗而列平 凡 案之前鬱然慈荷 而拔平應埃之表 可驚可稅 若fi't雨連延 而%月 出嶺 若포仙遊戱 而霧孟盤空 薔千里一遇之絶境也 余之足跡 追平龍山 或 遠而望之 或迫而視之 或院其側面或對其正面 皆不過罪兎孫 J[以爲 高而已其歡顔瑞色 未有若登斯樓之爲快也 昔 王子獸 符有味平斯也 特取其朝氣 陶元亮 符有味平斯也 特取其夕氣 乃皆甫兩取之 名其樓 日 朝夕 登惟彼二子者之愚 而皆甫獨慧 二子者之廉 而皆甫獨貧與 薔 其所謂 西山南山者 不若是龍山之秀麗耶 仰二子者之所 h 尉平地者 不 若斯樓之得其要也 余眠宿斯樓矣 夕而競其夕 朝而觀其朝 益信夫二 子者之偏而皆甫之得其全也 樓之四粹 皆買귬巨幹 通一 5빈 :사 하디 門 之西負其束 F f 曰寒玉之館 館之南有樹 大十開 峨웁認怪 曰綠 『柔 之鳩 自培 而t軒東折數十步 有池一曲 以植英菓 以毅赤煙 曰琴高之池 臨 池爲樹曰淮碩之亭 亭之東 有老柏一株 曰~Jf1 西有沼j泉一眼 曰鹿飮 之井井之上有經 可聽田水 臼荷杖之跋 東~f之東 密松萬計 曰約t연之 谷西肝之西 嘉木森列 可休可藍 曰쳅子之岡 自 岡而西 淸流赤石 可沿 可躍 曰敵瓊之間 自 岡而南百餘武 構一草屋 可以禁伐可以讀書 曰 樣菴 而漆林柚園 隨地皆有 亦斯樓之羽翼也 自農山東行數里 曰翁仲 之山 (方言 翁仲 同法壽) 歡 王 考葬焉 亦有園뻐之勝 謂之翁 山別業 嘉慶辛末春. 위의 「조석누기」 에서 옹산별업의 공간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63) 文獻編纂委員台 磁 『丁茶山全산』 上, pp. 272~3, 1960.

윤씨의 선영하에 영모재가 있고, 그 곁에 조석루를 세워 옹산 의 書 樓로 했다. 이 누의 주위는 입구만 남겨두고 왕대나무숲으 로 둘렀으며 그 누문의 서쪽에는 그 東肝을 둥에 지고 세워진 寒 玉관이 있다. 관의 남쪽에는 둘레가 약 150cm(IO 園)나 되는 거 목이 있어 그 수관이 우산처럼 하늘을 받치고 있다고 하여 綠雲 之鳩 라 부르고 있다. 이 동산 (坦) 으로부터 동쪽으로 꺾 어 수십 보의 거리에 원지가 하나 있으며,여기에는 英귬i(蓮)가 심어지고 붉은 잉어 (赤陸)가 길러지고 있는데 琴高池라 부론다. 이 못가에 세워진 정사는 漁視亭이라 부르며, 그 동쪽에는 老柏 1 주가 있어 拘坦이라하였다. 못의서쪽귀에있는샘은鹿飮井이오 샘 윗 쪽에서 조석루에 이르는 샛길은 俺杖跋이다• 동천의 동쪽에는 송 림이 빽빽하여 約隱之鳩라 하고 西肝의 서쪽에는 嘉木이 숲을 이루어 그늘을 주니 휴식에 알맞는 곳으로 腦子之岡이라 불렀다. 이 언덕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청류가에는 赤石이 즐비하여 빨래 하기에 알맞는데, 激瓊之if'a1 이다• 언덕의 남쪽으로 약 90m (백여 武)의 거리에 초옥이 있으며, 나무가 우거져 조용함으로 독서하기 에 알맞다. 樣萊 이라 하는데 여기예는 漆林과 柚園 이 달려 있다• 이상이 옹산별업을 구성하는 원림의 전모인데 화려한 내용은 아니지만 그 원림구성요소의 아칭이 재미있다. 이 아칭을 다시 정리하여 본다면 朝夕樓, 寒玉館, 綠雲之培, 琴高池, 淮視亭, 拘 培, 鹿飮井, 偏杖跋 約t연谷 .팹 子岡, 激瓊之if'세 f女菴 둥이다. 조석루는 누에 올라 서쪽의 덕룡산맥 남쪽의 주작산의 경치를 바라다 보면 조석으로 유다른 감홍을 얻을 수 있다 하여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정다산은 王子獸 (344~88 A.D) 는 朝氣 에서 기쁨을 얻었고 陶元亮 (365~427) 은 夕氣에서 쾌감 을 얻었지만 윤개보는 朝氣와 夕氣의 양편에서 즐거움을 얻었다 고하였다• 조석루의 서쪽에 있는 한옥관은 죽림 속에 있어서 죽의 별칭인 〈寒玉〉 을 이름으로 썼으며 녹운지오는 하늘을 덮은 수관을 푸른 구름에 비유하였다. 琴高池는 池中에 赤煙가 길러지고 있었는데, 잉어를 타고 승천했다고 하는 仙人을 〈琴高〉 라 했다는 중국의 고 사에 따라 이름 붙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淮視之亭은 묵객들이 벼루를 씻을 못가에 있다 하여 붙인 이름 이며, 측백나무가 서 있는 拘壇은 지중에 뜬 달을 움켜쥘 수 있

요드t璃츠쵸

Oo 표나. ?光之 尹 -~' (

맡옳 통 죠t> rII 。 / 寄 k 끊L `i !,iL II.. l0' 브 `一’ ► 그립 80 朝夕樓園林

는 (探月) 위치에 있다는 뜻이 아닌지 모르겠다. i勇泉을 鹿飮ji : 이라 한 것은 밤이면 노루가 나타났다가 마시고 간다는 뜻이 들어 있고 債杖跋란 지팡이에 의지하여 걸어갈 만한 좁다란 길이라는 뜻이다. 표은지곡은 숲이 울창하여 표법이 살만 하다는 뜻이요 , 앵자지강이란 꾀꼬리가 모여 사는 동산이며 激瓊 之間은 물이 맑아 구술을 씻을 만한 개울이고 像冠은 상수리나 무 숲에 쌓여 있는 조그마한 초옥이라는 뜻이다. 위에서 보는 바 와 같이 각 구성요소에 대한 아칭이 매우 시적이며 풍류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별업을 조영한 옹산은 승문원 부정자와 사헌부감 찰 예조정랑(정 5 품)등을 역임한 바 있어 京內外의 많은 원림을 찾아본 듯하며 그 결과로 이와같은 원림의 구상과 아칭이 얻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 별업의 원림은 후손들의 무관심과 관리소홀로 크게 황폐되어 당시의 모습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 그립 81

荒租된 琴高池와 約隱之谷

현황을 보면 1555 년에 창건했고 최근에 재건한 영모재의 건물 이 있으며 그 남쪽 40m 의 거리에 다각형의 못이 있다 (그립 80, 81). 이 못은 3 島가 있는 6 각형지인데 전통원립에서 볼 수 없는 이색적인 형태이다. 이것은 녹음정을 池의 頂部에 두고, 중도 3 개를 3 각형의 頂部에 축조하였으며, 북안에 척연정이라는 정사를 세워야 했기 때문에 이형적인 원지가 탄생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이다. 녹음정은 90X 100cm 넓이에 깊이 30 여 cm 의 크기로서, 지금도 맑은 물이 솟아나고 있다 (그립 82) . 또 못의 북안에는 胸高 둘레 1. 28m 가 되는 선측백나무 Bi ot a orie n ta l i s v ar. str i c t a 의 고사목이 서 있는데 척연정은 이 서쪽 의 지안에 세워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지안에는 여기저기 자 미나무의 말라 죽은 그루터기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다른 남부 의 원지처럼 당시에 십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그립 82 琴 高 池 北角에 있는 鹿飮井

지금까지 고찰하여 온 바를 정리해 본다면, 옹산의 별업은 조석 루와 한옥관 그리고 척연정을 3 각상으로 배치한 듯하며 척연정 앞의 금고지가 원림경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지원은 조선 시대의 전통적인 신선정원양식을 뼈대로 하고 있지만 다각형이라 는 변형적인 池形이라든가 중도의 3 각형배치, 조경요소로서의 方 井의 도입. 구성요소에 대한 아칭의 부여 둥은 다른 정원에서 찾 아 볼 수 없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鄭膳許. 「康津地方에 있어서의 조선시대의 원림」, 湖南文化硏究 第 十二輯 pp. 200~206, 1982. 鄭腕許, 「朝夕樓」, 全 羅 南 道誌 第 3 卷, 全 羅 南道誌編 纂 委 員 會, pp. 851 ~853, 1984. 3) 樓亭園林 별당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으나 住 家 와는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으며 자연의 일부로서 조영되고 있는 누 또는 정 중심의 옥외 생활공간을 누정원림이라 이름붙이기로 하였다. 입지는 주로 배 경이나 조망이 좋은 산기슭이나 언덕 위 또는 강안을 택하게 되

며 울타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범주에 들어가는 원림 은 수시 이용하는 별당과는 달리 주로 여름철을 산수 속에서 시 원하게 지내기 위하여 꾸며놓았다는 데 특징이 있다. 자연경관이 수려한 산수 속에 건립해 놓은 누정은 不知其數이 지만 여기에서는 수목, 池, 괴석 둥과 같은 인공적인 첨경요소가 적극적으로 도입되어 있는 곳에만 한정하기로 했다. (1) 廣寒樓庭園 641 지글은 관에서 관리하고 있지만 근본은 黃喜가 민간인의 신분

64) 정동오 「이조시대의 정원에 관한 연구」, 韓國造景學會誌. 2(1):22~25,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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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10 '0 心 꾼 A ► 그립 83 남원 광한루 지원

으로 조영했던 廣通樓가 전신이기 때문에 민간정원의 범주 안에 넣은 것이다. 광한루는 전라북도의 남원시의 남쪽 요천가에 있으 며 정면 5 칸, 측면 4 칸의 누건물과 그앞에 있는 3 島型池를 중 심으로 하여 정원이 꾸며지고 있다(그립 83). (i) 정원의 성립과 경과 광한루는 전라북도의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는 남원에 있으며 누 앞에는 북동방향에서 남서방향으로 흐르는 夢川 이 있다. 남원 의 後山은 북서쪽 3km 거리에 있는 교룡산(해발고 394m) 이고, 案山온 8km 남쪽에 있는 태두산 (774. 2m) 이요, 동남동 방향에는 方丈山이라고도 불리우는 지리산 (1915m) 이 약 30km 나 멀리 얼 굴을 드러내고 있다. 이 남원은 백제시대에 고룡군과 대방군으로 불러 오다가 고려시대 말에 남원이라는 지역명이 쓰여지게 되었 으며 이조시대의 태종 13 년에는 행정단위로서 남원도호부라 불 렀다. 현재의 광한루의 전신은 광통루인데, 그 조영동기는 다음과 같 은 黃守身의 「廣寒樓記」 ( 1458 A. D) ” 에서 읽을 수 있다.

6S) 趙成敎 南原誌 附綠 南原國民學校, PP.19~20, 19S0.

鄕治之南二里許 地勢高平散淵 廻隔應凡 山園天末白雲半鎖 前泉統 流澈見織麟 波稱佳地 起小樓曰廣通 父老祿人遊賞(이하 略) 죽 지세가 높고 넓으며 앞이 탁 트이고 산수경개가 좋은 이곳 에 아버지인 황희가 터를 잡고 조그마한 누를 세워 벗들과 어울 려 산수를 관상하며 놀고 즐겼다는 내용이다. 또 수신은 「광한루 기」에서 이르기를 누를 세운 자리는 그 전에 그의 선조인 監平이 서당으로 세웠던 〈逸齋〉 가 있었던 곳이라 · 하였다. 이것을 보면 당초의 광통루는 별당으로서의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황희 (1363~1452) 는 고려 우왕 조에 둥과하여 성균학관으로일한 바 있으며, 이조시대에 이르러서는 4 iJl에 걸쳐 24 년 동안 정 승의 자리에 있었던 명망높은 정치가였다. 그러나 태종이 양녕대 군을 폐위하려 할 때 이를 반대하다가 한때 퇴관하여 남원에서 보낸 일이 있다. 이 무렵 (1418~1422) 에 아마도 이 누를 세운 돗 하다. 그러나 그후 오래되어 허물어지게 되었음으로 이를 민망히

여긴 부사 閔汝:!J 맑 은 1434 년에 새로 신루를 세웠는데, 사치스럽지 도 않지만 그렇다고 보기에 흉할 정도는 아니었으며 1437 년에는 柳之 福 가 산뜻하게 단청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후 1444 년에 하동부원군 정인지가 누에 올라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한 나머 지 〈광한루〉 라 개 칭 하였다. 광한루는 그후 몇차례 개축하거나 보수를 해 왔을 것이지만 본 격적인 개축과 조원은 1580 년대에 이루어졌다. 『 龍城i문.J의 官案 에 의하면“ 부사 張義國이 광한루를 개축하고 오작교를 축조했 다고 하였는데, 그의 부사 재임기간은 1582 년부터 84 년까지이므로 이 사이가 될 것이다. 한편 同誌의 「樓亭」편 광한루조의 英祖增 (1752) 에는 監司 鄭澈이 요천에서 끌어온 물이 누 앞을 좁다랗게 흐르고 있던 개울을 크게 넓혀서 平湖로 하고, 은하수를 상징케 했으며, 주위를 석축하고 湖中 에 세 개의 섬을 만들어, 하나에는 綠竹을 심고, 하나에는 백일홍을 심었으며, 다른 하나의 섬에는 蓮 亭 을 세웠고 호중에는 荷花를 가득 심었다고 되어 있다. 그렇 다면 정철의 전라도관찰사 재임시가 1581 년 12 월부터 그 이듬해 인 1582 년 8 월까지 9 개월간이었으므로, 역사년도는 1582 년으로 볼 수 있으니 부사 장의국의 到任년도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광 한루의 조원공사는 감사 정철의 주도와 부사 장의국의 관장하에 이루어진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정철이 광한루의 확장공사에 관여했음을 증명하는 다음과 같은 詩가 있다 P 廣寒樓前水細如帶 浚而拓之 匠又移竹小銀 遂肥杯長哈 俠拓銀河弄明月 裁培苦竹抱淸風 一年南國巡宣化 只在淸風明月 中 送人歸龍城 銀西樓頭烏鶴橋 舊遊回首夢沼迫 當年手植江心竹 千尺如今己上常 次廣寒樓韻以下亂前作 天上十二白玉樓 銀河淸漫掛西頭 66) 李相儀 『南原誌』, 全, P.6 4 ~65, 94, 1960. 67) 鄭澈 松江原集 卷 一 및 續集 卷一, 1633.

年年七夕佳期至 夜夜雙 星 怨淡收 莫道相思是遠別 從來此地有 重遊 可隣人世隔南北碧海庄庄何處求 위의 시에서, 小 溪롤 확장하여 호수로 하였고 지중의 섬에 苦 竹 (烏竹)을 심었으며, 樓頭의 은하수상에 오작교가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호중의 연이나 중도 상의 蓮 亭 그리고 백일홍(紫 ¢k ) 에 관 해서는 언급이 없으며, 중도 수에 대해서도 〈移竹小鉛!〉 라 했을 뿐 더 이상의 암시도 없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오작교와 광 한루의 위치에서 볼 때 세 개의 섬은 균형이 잡히지 않는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많은 문헌조사와 지중의 섬에 대한 축조양식의 비교연구가 있었으면 한다.

► 그립 84

광한루

인조 4 년 (1626) 閔 6 월 초하룻날에 기록한 申鑑의 「광한루 重 修 序」에 의하면 광한루는 翼成公 황희가 처음으로 경영한 것을 뒤에 민여공이 중수하였으나 (1434 년), 정유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선조 40 년 (1607) 예 府使 元愼이 소루를 세웠지만 세월이 흐르고 68) 趙成敎. 『增補版 南原誌』, 南原郡鄕校, P.726, 197 2.

보니 무 너지고 헐 어 져 서 볼품 없이 되어 1625 년에 부사로 부임한 신감이 재 건 의 필 요 성을 인 식하 여 이듬해 정 월 에 착 공하여 7 개 월 만에 완 공 하였다고 하 는 중수 서의 일부 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余於乙 ·T 1# k 來守是邦 槪 名 區埋沒 無有血 建者 乃 拘 諸公卿大 夫 謀 於 自是 鳩材 {戈 石 始役於?없年正 月 訖 工於季 夏 之闇 凡 七開月 矣, 一 I 放 긴潭 l, 宏麗加焉 (中 略) 管是役者 前監 牧 吳 胤祖也 董是 役 者 府 吏 李 時逢 沈鳳 , 裵홉福云 詩 曰 仙府 經상役百었 玲龍星 月 掛窓描 恐腦試望秋 天外 海 上 三 山 點點靑 天啓六年歲舍丙 寅 ra \ l 六月 初 吉 [龍 城誌』 의 순종 후 己 亥增 {1839) 에 의하면 부사 이만길은 정 조 乙 卯 ( 1795) 에 삼신산 混·iJ 1 鼎] 을 중수하였다고 했는데 영주각 은 英祖增 ( 1752 ) 에서의 蓮亭울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광 한루는 오늘에 이르는 동안에 여러 차례 개축하고 중수하며 조경작업이 이루어져 왔으며 1964 년에는 오작교 옆의 섬에 방장 정을 세웠고 1965 년에는 영주각의 丹 靑 을 하였다. 그러나 1970 년대에는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명목으로 오작교 옆의 담을 철거 하여 밖으로 移築 하였으며, 1963 년 말 현재 6 , 000 여 평이던 면 적이 10,000 여 평으로늘어났다. 이 경내에 따로 못을 파고 玩月 亭 을 재건했으며,현대적인 조경을 하여 전통양식과의 공존을 꾀 하고 있다. (ii ) 정원의 구성 본원은 정면 5 간, 측면 4 간의 누건물을 중심으로 하여 (그립 84) 樓 前에 만들어진 동서 100m, 남북 SOm 여의 크기 를 갖는 장방형 의 池湖와, 못속의 3 개의 섬, 그리고 池 서편에 4 개의 虹銃 (經 약 4m) 가 있는 오작교로 구성되고 있다. 오작교 (교장 약 44m. ' 교폭 약 2.4 m ) 는 통과교통을 위한 일반적 인 평교에 지나지 않지만 그 교각의 형태가 원형으로 된 虹橋인 데다(아 L 橋 ),누정원의일부로 처리되고 있어 광한루원에 있어서의 하나의 添景 物이 되고 있으며, 춘향전에 있어서의 춘향과 이도령 의 로맨스가 있는 낭만적인 시설물로 알려지고 있다. 더우기 홍 예가 있는 길이 약 25 m, 너바 약 2 . 6m 에 이르는 원래의 오작교

의 노면은 대소 장방형의 가공된 판석에 의하여 모자익형으로 포 장되어 있어 직선적이고 평탄한 노면에 율동감을 주어 첨경요소 로서의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그림 85, 86). 은하수와 오작교는 〈 俊天造園 〉 의 기법으로서 1I1 治에 의하면 0) 신선사상의 배경이라 할수 있다.

69) 田治六郞. r紫 禁城西苑史抄」, 日本造園雜誌. 22(3), I~S, 19S9.

► 그립 85

오작교

► 그립 86

오작교의 노면

누 앞의 못은 현재의 상태에서 볼 때 I : 2 의 비를 갖는 장방형 으로 축조되어 있으며, 그 안에는 3 개의 섬이 동서방향으로 거의 같은 간격으로 배치되고 있다. 누건물의 서쪽 지안에는 길이 2.9 m, 너비 I. 8 m, 높이 85cm 의 돌자라가 동남방을 향하여 놓여져 있다(그립 87). 자라(蒸) 는 십장생의 하나인 거북 (也) 의 일종으 로서 신선계의 영겁의 표상인 듯하여 광한루 지원의 신선정원성 을 더 욱 강조하는 듯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池內의 섬의 수와 3 개 섬의 명칭이다. 첫째 현재의 3 개의 섬은 누건물에서 볼 때 균형이 잡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치상태가 불안정하다. 누 앞의 두 개의 섬만으로는 누건물에 대하여 균형을 잡고 있지만 동쪽의 섬은 다론 두 개의 섬의 연결선에서 벗어나고 있을 뿐더러 한쪽으로 무게가 기울어 져 일체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 그립 87

광한루 앞의 돌자라

다음에는 3 신선도의 명칭에 관한 것이다. 내 龍城誌 』 의 英祖增 {1752) 에 의하면 못의 중심도는 蓬萊島로서 · 여기에는 綠竹이 狗 狗하고, 동쪽 것은 方丈島로서 백일홍을 심었으며, 湖北의 섬은 漏洲島로서 여기에는 연정이 있고 부교로 연결되어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는 그와는 반대로 동쪽의 섬에는 영주각이 서

있고 (그림 88) 서 쪽 의 섬 에는 방장정 ( 1964 년 건립) 이 세워져 있 어서 ( 그 립 89 ), 1700 년대의 문헌에 나타난 배치와 서로 뒤바뀌고 있는 느낌이 있다. 오 작 교 옆에 있는 섬이 방장도가 아니라 영주 도라 하는 것은 위의 『 龍城誌 』 의 기록 외에도 다음과 같은 시문 에서 증명될 수 있다. 登 漏 洲閣 登洞 房泰根 ( 1670~ ? ) 仙閣新成 淡 水傍 淸 XI; 好踏 人 間 地 廣 寒 從此倍 增 光 何 必乘樣上査 花 與知府 南肅 熙 登 廣 寒 樓 (1837 년경 ) 李友 會 人間有此廣 寒 樓 十 二 曲! 셰 秋月 白 烏韻橋邊 漏 閣 頭 三 千下 界暮 炯收 誰知 長樂 前 賢意 除是南,J 11 無 別 處 我 學 風 流 太守 遊速萊 仙 子更 下 求 즉 房泰 根 의 시 에서는 영주선각이 漢 水 傍 죽 은하수 (오작교) 옆 에 있다고 했으며, 李 友 會 는 〈烏開橋邊 漏 閣頭〉 라 하여 방태근의 시와 뜻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중의 3 도는 서쪽 것이 영 주도이고 중앙은 봉래도, 동쪽은 방장도라 보는 것이 옳지 않을 까 한다. 현재의 영주각은 正 祖 )8 年 (1794) 에 府使 李萬吉이 再 建 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광한루원은 명칭과 구성면에 있어 중국 원나라 때 북경 의 禁苑인 太液池의 북해 안에 있는 稷華 島 에 만든 萬 壽 山정원 과 비슷한 점이 많다. 원래 이 태액지원은 금나라때 창설한 것인 ’ 데 원나라 (1201~1367) 때에 이르러 북해에 있는 경화도 중앙의 만수산 위에 7 간의 광한전을 세웠고 동쪽의 산허리에는 方 盛亭 을, 그리고 서쪽에는 영주정을 세웠다. 또 만세산과 團城사이에는 白 石橋인 영안교가 축조되어 있다. 여기에서 方 奎 는 신선이 산다는 5 산중의 하나이므로方丈과 대체될 수 있는 선산이다. 永 安橋는 團 城 (영주도) 과 경화도 (봉래도) 를 연결하는 백색의 석교인데 원형의 구멍이 3 개가 뚫려 있다. 우연한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광한루 정 원과 북해의 경화도 정원과는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는 신선정원 이라 할 수 있다.

► 그립 88 漏洲閣

► 그립 89

닙l0- :;0i ;l-0처

광한루정원은 황희가 조영했던 광통루에서 시작했지만 1580 년 대에 이르러 전라감사 정철의 주도하에 오늘날과 같은 신선사상 배경의 정원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으며 私(JI.)인 정원이 이제는 관영하의 정원으로 바뀌어지게 되었다. 기능에 있어서도 광통루 시철 (1400 년대) 에는 주변의 산수경관을 감상하면서 즐기는 정 적인 유락시설에 지나지 않았지만 16 세기말 이후로는 정적인 유 락기능 외에 선유하며 또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산책하며 즐기는 동적인 유락공간을 겸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鄭膳許, 「황희의 광한루정원」 月刊文化財, 月刊文化財 社. 1977 年 3 月 號, pp. 39~45. 李相儀 『南原 誌 』 全 南原鄕校 1960. 趙成敎 『增補 南原誌』 南原郡鄕校, 1972. (2) 鳴玉軒園林 70) 전라남도의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후산에 있으며 지리적으로는 마을의 뒷산을 넘어 목맥산 기슭에 명옥헌이라는 정자를 중심으 로 하여 꾸며진 원림을 말한다(그림 90, 91,92). 명옥헌은 정면 3 칸 측면 2 칸의 1 실형의 정자인데 북서향하고 있으며 그 전면 下池와 후면의 뚝 위에 각각 중도가 있는 못이 만들어지고 그 주 변에는 자미나무가 군식되고 있다. 그리고 명옥헌을 마주볼 때 그 좌측에 남동쪽으로부터 홀러 내려 下池 윗편을 따라 북서쪽으 로 유하하는 계류가 있어 이것이 上· 下池의 수원이 되어 주고 있다. 軒下의 못은 길이 약 40m 너비 약 20m 의 l 島型 부정형 의 括形池가 남동에서 북서 방향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남서쪽의 저지가 {h 인 것으로 보아 관개용 저수지의 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지만 지안에 중국 원산종인 紫薇나무가 군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관상목적도 겸하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헌 뒷편에는 계류가에 언덕을 깎아 평탄한 池園터를 마련하였 으며 지름 4.8m , 높이 l.5m 에 이르는 자연岩을 중도로 삼고 · 주 70) 鄭腕ll'f. r,L ...I,;國林」. 全羅南這誌 全羅南道誌 編纂委員會, PP. 843~4, 1984.

위에 llmX 6 m 크기의 장방지 를 만 들 고 있다. 언덕쪽과 명옥헌 쪽의 약 4m 의 넓이 를 갖는 土堤에는 〈 L 〉자형으로 자미나무를 군식하였다. 부분 고사한 것도 있는 이 자미나무의 老樹는 根元 둘 레가 58cm 에서 I16cm 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창원할 때 식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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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軒 1F / \—fD — 4,/ 0 S 10 15 ' 20 ZS .J^DA ► 그립 90 鳴玉軒평면도

► 그립 91 鳴 玉軒전경 (前面에 下池가 보인다)

► 그립 92

산기슭의 자연 속에 造營되고 있는 鳴玉軒 園林

上池 의 윗편 계류가에는 암반이 깔려 있어 이곳에 쉬면서 더위 를 식히기에 알맞다. 이곳의 한 암석의 수적벽에는 〈鳴玉軒 笑丑〉 이 라 음각되어 있는데 (그림 93) 吳氏 의 자손들은 尤菴 송시 열의 글씨임을 믿고 있다. 尤菴 (1607~1689) 의 글씨가 톨림없다면 笑 丑은 1673 년이다.

이 원림이 언제 누구에 의하여 창설되었는지는 분명하지가 않 다. 정 철의 아들인 崎翁 弘漠 ( 1582~ 1674) 이 쓴 〈鳴 玉 §fi e 〉 에는 (그림 94) , 吳希道 ( 1583~ 1623) 의 四 男 인 ’Jj f中 (以兆 藏溪公, 1619 ~1655) 이 세상에의 뜻을 버리고 산수경개가 좋은 이 후산 기슭 에다 몇 칸 안 되는 조그마한 집을 짓고 살았는데, 집 뒤의 언덕 넘어 계천을 흐르는 물소리가 옥이 부딪혀 내는 소리 같아서 정 자의 이름을 명옥헌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鳴玉§f i d 가 새겨져 있는 想板 에는 〈戊辰仲冬下潔 書 〉 라 기록되고 있는데 戊 辰年은 인조 6 년으로 서기 1628 년에 해당된다. 이때의 명중의 나이는 10 세이다. 또 영의정 淸 風 金在魯 (1682~1759) 의 「鳴玉 軒重修記」7Jl에서도 명중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곳에 숨어 살면 서 자호를 藏溪라 하고 그 軒을 鳴玉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아울 러 藏溪公 이 하세한 지 근 100 년이나 되어 헌당이나 뜰이 허물 어져 볼품이 없게 되었으므로 公의 손인 현감 大經 (1689~1761) 이 중수하게 되었고, 자신인 在魯가 중수기를 쓰노라고 하였다. 이때가 1748 년이다.

7I) ill陽郡誌編纂委員會, r潭 陽文獻集』, P.586, 1980. 洪季以井字明{中繼隱于此 自넋藏溪 名其軒曰鳴玉 取其閉料월 循徐 響 如明珠也〉

위의 두 기록을 종합하여 본다면 명옥헌은 오희도의 아들인 명 중이 조영한 것이 톨림없다. 그러나 崎翁 이 명옥헌기를 썼을 때 (I628) 는 명중의 나이가 겨우 10 세인데 〈守志丘園 無求於世 造 於後山支琉 築數ti l 小屋〉 이라는 표현이 적합할는지 의심이 가지 않 울 수 없다. 기옹의 기록내용이 사실이라면 현판에 새겨진 〈戊辰〉 이라는 연대기록에 착오가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혹시나 〈壬 辰〉 이던 것을 판각할 때 〈戊辰〉으로 잘못 옮겨진 것이 아닌가하 는 생각이 든다. 임진년은 1652 년으로서 이때 명중의 나이는 만 33 세이다. 이 나이 같으면 기옹의 글에 신빙성을 둘 수 있다. 결론적으로 명옥헌 원림은 자연계류를 중심으로 하여 명옥헌과 전통적인 중도형의 상 • 하의 방지 그리고 중국원산종인 자미나무 군으로 구성된 매우 단조로운 옥외생활공간이지만 송림 속에 (E 期가 100 일에 이른다는 자미나무를 집단적으로 심은 것은 도연 명의 무릉도원처럼 불로장생의 신선계를 연출할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듯이 보인다. 이곳은 여름철이면 자미화가 만발하여 무릉도 원을 연상시켜 준다.

또 다른 특징은 이 원림 속에는 園 이나 池 또는 축단에 가공석 재를 쓰지 않았으며 장식용인 첨경물도 도입하지 않았고 경계를 표시하는 담도 없다 . 매우 서민적인 자연 속의 옥외생활공간이라 할수 있다. 참고문헌 정동오, 「 鳴 玉軒園林」, 全 羅南 道 誌 , 제 3 권 全羅南道誌編墓委員會 , pp. 843~844, 1984.

► 그립 93

溪流가의 암벽에 음각되어 있다.

崎翁► 鳴鄭그玉弘립軒漠 9記의4 .~' · .... '... - .’,`. .‘ .i ''’..,.f .. ‘ “,쓰‘., 5 .·`스-.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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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李屋의 活來亭池園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船橋莊이라는 건평 319 평에 이르는 저 택이 있다. 이곳은 1700 년대 중엽에 전주인 李乃蕃 이 터를 잡았 고 孫子 인 lg (1773~1832) 가 순조 )5 년 (1815) 에 안채의 서쪽에다 사랑채인 稅話 堂을 세웠다. 그리고 이듬해인 1~16 년에는 대문 남 쪽 약 70m( 東別 堂 으로부터는 약 40m) 거리에다 방도가 있는 방

0 10 20 30 4~0M

► 그림 95 李壓의 船橋莊과 활래정지원

지를 만들고 池의 동안에 호두각(虎頭閣) 형의 정사인 活來꾸: 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72) (그립 95). 활래정은 내당으로부터는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지만 摩 의 성격상 별당의 일종으로 보더라 도 무리는 아닐 돗하다. 명칭은 정으로 되어 있지만 방이 두 개 있고 다실이 있으며 마루는 두 칸이다. 기둥 사이에는 벽이 없고 모두 문으로 짜여 있다. 하지만 수림을 배경으로 하고 경계를 나 타내는 담이 없기 때문에 원림의 범주에 넣었다(그림 96, 97) .

72) 李起堂. 朱明德, r江 陵船橋莊』, 況話堂, 1980.

► 그림 96

뒷편 r• 언덕에서 본 활래정과 지원

► 그립 97

앞에서 본 활래정과 蓮池 (方島型 方池)

활래정이라는 이름은 朱晩翁 (주희, 1130~1200) 의 다음과 같은 시의 끝귀 〈活 水 來〉 에서 딴 것이다• 觀 먀有感 半 敵方塘 一 鑑開 天光 雲影 共俳 個 問渠那得 淸 如 許 爲 有 源 頭活水來 죽 〈 活 水 來〉 란 수원이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 들어 온다는 뜻이다. 못은 1 변이 32m 에 이르는 정방형지로서 지심에는 한 변이 약 7m 되는 방형의 섬이 축조되어 있다. 방지와 방도의 윤곽선 처리 는 모두 자연석에 의하고 있다. 동안에 세워진 활래정은 4 개의 석주를 지중에 두고 있는데 이 부분이 마루로 되어 있어 여름에 문을 열게 되면 벽이 없는 정자가 된다. 원지의 경관을 관상하거 나 낚싯대를 드리우고 즐길 수 있는 정적인 휴식과 유락공간이다 (그림 97). 조경식물로는 中島상의 赤松과 池角쪽의 자미 그리고 지중의 蓮 동 3 종에 지나지 않는다. 공간구성은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지원의 경우와 거의 비슷하다• 다른 점은 건축물의 형태라든가 방지와 중도의 緣石 (가공석이냐 자연석이냐 하는 것) 둥에도 있지만 가장 큰 특징은 부용정의 중 도가 원형인데 대하여 활래정에서는 방형이라는 데 있다. 方島 형 方池는 전라남도의 보길도에 있는 윤선도의 세연정지원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있다. 활래정이 서향하고 있는 것은 인접해 있는 후산울 배경으로 하 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후산에는 적송이 수림을 이루어 좋은 배경이 되어 주고 있다. 참고문헌 尹武炳 『江陵船橋莊』 , 文化財管理局, 1966. 李起堅 • 朱明 德 , 『 江陵船橋莊』, 視話堂, 1980.

(4) 閔胃顯의 臨對 亭 園林 전라남도의 화순군 남면 사평 리 상사평 에 있다• 그 동쪽 1k m 거리에는 鳳頂山 (또는 학산, 해발고 411 .3 m) 이 솟아 마을의 배산 이 되고 있으며, 서쪽에는 사평천이 북동쪽으로 흐르다가 하사리 에서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보성강에 홀러들어가고 있다. 이 원림은 사평천의 東岸에 조성되고 있는데, 도로면으로부터 약 4m 높이의 언덕 위에 세워진 〈임대정〉 이 원의 중심건물로 되어 있 다. 이 정자가 특별히 북서향하고 있는 것은 풍수지리적인 견지 에서 수류를 좌청룡에서 우백호로 호르게 할 뿐만 아니라 하천의 水兼이나 넓다란 들판의 자연경관을 조망의 대상으로 하고자 했 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민주현의 『臨對亭記』 7J) 에 의하면 임대정은 원래 考藥 南彦紀가 은거할 목적으로 조영한 휴식 및 유락처였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는 동안 황폐해 있던 것을 민주현이 1862 년경에 오늘과 같은 모 습으로 일신한 것이다. 임대정을 꾸미게 된 동기와 그 당시의 분 위기를 살펴보기 위해 『임대정기』의 원문을 다음에 옮겨 본다. 壬戌肇夏 余與群從散步於 l J外溪上杏樹邊 而相謂臼 炫丘前臨迎野 南 臨深谷 東北連山 地勢斬截防高 四엮軒踏 旦有茂林菜竹었列井. .(i 奭簡 淸風生於其 ra' l 益 m,1 、樹以爲消暑之it平 儉曰 唯遂鳩 緊如干材構成 一 間草祖 底上雨而通芳風 遠而望之 如菌焉 如蓋焉 人之遊於其上者 如 坐於軒車之上焉 難規模俠陰 結構草率無足觀然溪山幽絶 氣色淸炭 爲 可愛也 每於長夏盛炎 山翁溪맞避返遊衍 顔有爭席爭磯之,i!-. 或哈詩附 · 基欽酒’졌客 不離亭上 而不知人世炎熱單廢也 溪水透返 至 亭 下 I 稱爲小 潭 i弘澄可愛 大小月 峯 直其前 環列如尻障 古人所謂 西山朝來致有炭氣 各 預眼中景也遂取宋儒 終朝臨水對t&V.山之句 名以臨對 節中動靜館理 正好體驗 而此樂難與俗人言也 憶余往日偶常升斗 旅遊京華 南北之山 江漢之限 往往有樓萩亭t탉漏洞 Ml : 麗 昞日登臨 開目娘懷 有信美非吾之 軟 今者與群從兄弟卜築於炳地 遺造於林下 繩樞草屋 旦可以樓止 彼洛 賜亭館 又何足深茨也 昔南考榮先生彦紀 常英菜於此 一丘一堅無不標 奇選勝 考榮園命名記中 所謂垂給쑤 蓋勢露焉 而後人傳稱銀杏섣 因樹 而得名也 갇下有水萩上垂給 當時漆i僕之超可想 而人去世遠 地切蔡投 勘築坦穀 草樹돛주 尋常過者 莫知其奇勝也 今炫小築 可謂水不忍廢 73) 『沙匡先生文集』 卷六 述 1895.

地不忍荒 而年代횃砲興翊相국 安知撲 日 又 ln 考씻去後 安知異 日 又有 人 修築 !;.n 今 日 之 爲 也 然則 平 ;R1E 石 看 作世守之物者 其計亦愚矣 而如欲 守之則 惟有孝友勤儉 以世 其 家者 或庶幾 焉 爾 匠以相語 낌記其溪山之 勝 遊從之樂 以備異 日 山中故 ll t云 남언기는” 의령인 영홍부사 致動의 아들로서 자는 季憲 또는 張甫이며, 호는 考藥 또는 靜齋이다. 그는 소시예 一齋 이항과 河西 김인후에게서 수학하였고 퇴계 이황과 문답하며 그와 교유 했으며 정철, 변성온, 기효련 동과 서로 사귀었다. 선조 원년 무 진 (1568) 에 生員試에 입제했으며, 영조 이탁이 童蒙敎官 빙고별 좌를 주었으나 받지 아니하였다. 그는 이곳 동복현 사평촌 언덕 위에 정자를 세우고 垂給 盜 라 명명하였으며 賓從들과 강론하고 W제 諒하며 즐겼다. 그러나 300 여 년이 지나는 동안에 거의 황폐되 어 있던 곳에 沙桓가 와 보니 四園의 전망이 좋고 절벽처럼 된 언 덕 아래에는 물이 흐르고 있어 臺 上에 초려를 짓고 즐길 만하다 고 생각되 어 오늘에 보는 것처 럼 정사를 짓고 연지를 만들며 수 목을 심었다. 정자의 이름을 임대정이라 한 것은 송유가 〈終朝臨 水對盧山〉 이라 한 데서 얻은 것이라 했는데 여기에서 송유란 宋 대 理學의 개조인 유학자 源溪 주돈이 (1017~1073) 를 말한다. 염 계는 말년에 강서성의 여산에 있는 연화봉 하에 살았으며, 마을 옆을 흐르고 있는 강명이 염계이므로 자신의 호를 염계라 한 것 이다 .75) 沙匡가 정자명을 임대라 한 것이라든가 못에 백련과 홍련 을 가득 심어 놓은 것을 보면 주돈이의 사상을 받드는 듯한 느낌 울 준다. 이 정자는 중건상량문에 〈辛夏孟夏〉 라 쓰여 있으니 1921 년에 중건한 것이다. 임대정원림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그림 98). 약 4m 높이의 언 덕 위에는 정면 3 칸 측면 2 칸의 팔작지붕의 정자. 죽 임대정이 북서향하여 세워져 있으며, 그 북쪽에는 7X6m 크기의 中島型方 池가 정자와는 7m 거리에 만들어져 있다 (그립 99). 이 方池의 中島에는 〈洗心〉이라 새겨진 들이 놓여 있고 오죽이 심어져 있으며 정자쪽의 지안에는 상면의 넓이 50X50cm , 높이 28cm 의 6 면석이 놓여 있는데 동측면에 〈被香池〉, 서측면에 〈抱 74) 金榮胤 『韓國꼴畵人名辭 꼴 』, 漢陽文化社, 163~64, 19S9. 75) 今關天彭. 辛島視, 『宋詩適』, 集英社, PP.309 -31 0, 1966.

淸塘〉, 전면에 〈 跋臨石 壬戌春〉 이라 음각되고 있다 (그립 100). 여 기에서 池名이 〈坡香 池 〉 와 〈 j邑 淸塘〉 의 두 가지가 있음을 안다. 임술년은 재건년대인 1862 년을 나타낸다. 지중에는 수련이 있다. 이 지당은 남쪽의 산골짜기에서 홀러들어온 물로 채우며, 넘친 물 은 서북쪽 池角에서 〈더〉자형으로 꺾이어 홈대에 의하여 飛潘으 로서 下池에 낙하한다.

► 그립 98 'N

臨對 亭 원림 (J) 꼬對 두 o 潔(沙逐廷막,'>(합 ®@力跋莫麟촘캇 , ? 깁 JOM

동남쪽의 입구 좌측에는 지당과의 사이에 높이 l.8 m, 너비 1.5 m 의 넓다란 자연석면에 〈i折匡先生杖履之 FT〉 라 음각된 표석이 있 고 향나무를 심어 테를 두르고 있다. 이 장식적인 연출은 매우 좋은 착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림 IOI) • 정자의 구조면에서 볼 때 북서향인데 이 편의 시야를 가리지 않는 범위에서 은행나무와 느 티나무가 서쪽 언덕에 심어지고 있다. 대하에는 남에서 서 -북쪽으로 臺룰 안쪽으로 안으며 반월형 을 이루는 못이 만들어져 남쪽 골짜기로 홀러내려오는 물이 유 입되고 있다. 이 반월형의 못은 동서방향의 직선상의 土堤에 의 하여 약 lm 의 段差를 두고 兩分되고 있다. 이 못의 서편에 있

는 방상지에는 1 島 가 있고 남쪽의 半月狀池에는 2 島 가 있어 합 계 3 개의 섬이 1 조를 이루고 있는 셈이며, 이 섬에는 모두 자미 나무가 심어지고 과석이 놓여지고 있다. 또 지중에는 백련과 홍

► 그립 99

임대정과 중도형被香池

► 그립 100

上池의 中島와 技臨石. 中島前面石에 〈洗心〉, 技臨石의 우죽에는 〈技香池〉라 陰刻되고 있다

련이 가득히 심어져 있어 여름철이면 섬 위의 자미나무와 함께 장관을 이룬다 (그림 102, 103), 垂給猛· 의 상부정원과 하부의 지원과는 斜 路에 의하여 연결되 고 있는데 자연석으로 계단처리가 되어 있어 자연스러움을 더해 주고 있다 (그림 102). 이처럼 임대정원림은 비록 지형적인 조건 때문에 下池가 반월

형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중도형의 池苑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더하여 괴석, 자미나무 둥이 심어지고 3 島 l 組의 지원이 형성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전형적인 신선정원양식이라 할 수 있다. 또 못안에 연이 심어지 고 있는 것은 관상가치가 높다는 점에서도 설명할 수 있지만 임 대정이라는 명칭에서 볼 때 염계의 애련설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임대정원림은 상 • 하지를 만들고 중도형지를 꾸몄으 e 며 대상에 〈臨對 亭 〉울 세우고 대하의 曲池에 연을 심었으며 중도 상에 괴석을 놓고 花期가 길고 화려한 자미나무를 심어 원림을 형성했다는 것은 이 방면의 상당한 지식과 견문이 없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원림을 조영한 沙匡 민주현 (1808~1883) 은 사헌부집의 (1861 , 54 세) 와 우승지 (1874, 67 세), 그리고 71 세때는 가의대부로 승진

► 그립 101

;;;上의 입구와 池塘사이에 있는 傑石

하고 동지의금부사를 역임했다. 그러한 관계로 京內에서 많은 것 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는 기회 를 가졌음에 틀림없다. 임대정원 림의 건설은 사애가 사헌부집의 를 맡은 이듬해 (1862) 에 조영한 것인데, 『임대정기』 에 있는 바와 같이 在京시에 주변의 산과 강

► 그립 102

臨對卒과 下池中의 蓮 및 中島上의 紫薇花

► 그립 103

臨對 亭 下池의 中島(中島上에 괴紫석薇이花 와있 다)

안에 세워진 소쇄하고 장려한 누대와 정사룰 여가에 가끔 찾고 즐기면서도 〈참으로 아름답지만 내 소유가 아닌 것을(……)〉 하 면서 탄식한 바 있었다는 것을 보면, 향리에 돌아와서 남고반의 수륜대 유지를 찾아 보고 재경 시에 품었던 소원을 풀게 할 충 동을 받게 된 것이며 조경기법도 그동안 눈여겨보았던 것을 근 거로 하여 실천에 옮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정동오, 「臨對 亭 」, 全 羅南 道 誌 , 第 3 卷 , 全 羅 南道 誌組纂 委員 會 , pp. 846~848, 1984. 4 조경식물 조선시대에는 조경식물에 관하여 직접 체험을 통하거나 관계문 헌을 근거로 하여 저술한 책자가 적지 않다. 여기에서는 조경식 물을 직접 간접으로 다룬 다음과 같은 13 종의 자료에 나타난 식 물을 중심으로 하여 간단히 고찰하고자 한다!.7l) ® 『養花小錄』 仁齋 姜希顔 (1417~1464) 의 저술로서, 1474 년 그의 아우되는 景 醉이 엮은 『 晋山世稿 卷四』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에는 老松, 萬年松, 烏斑竹, 국화, 매화 蕙蘭, 瑞香花, 蓮花, 石權花 (百葉 類포함), 桓子花, 四季花와 月桂花, 山茶花(俗名 冬柏), 紫薇花 (속명 백일홍) 日本郡躍花, 橘樹, 石舊蒲 둥과 함께 괴석, 種盆內 花樹法, f崔花法, 百花思宜, 取花升法, 養花法, 排花盆法, 收藏法, 養花鮮 둥이 들어 있으며, 을유문화사刊에는 강인재의 화목구품 (합 52 종)이 부록으로 첨가되고 있다. 화목구품은 다음과 같다. 姜仁齋 의 花木九品 (합 S2 종) 一品:松, 竹, 蓮, 菊, 梅 76) 정동오 , 「한국조경식물의 사적고찰J. 演習林報告, 2: 1 7~71, 197 7. 77) 정동오, 앵약용의 원립생활연구」, 韓國庭苑學會誌, 2(I ): IS~28, 1983. 78) 姜希顔 著, 李炳薰 譯, 『養 1E 小錄』, 乙酉文化社, 1974.

二品:杜丹 三品:四季, 月季, 倭躍躍, 暎山紅, 眞松, 石楠, 碧梧 四品:街藥, 瑞香花, 老松, 丹楓, 垂楊, 冬柏 五品 : 桓子, 海業, 薔薇, 紅桃,碧桃, 三色桃, 白杜脇, 色魚, 荊春羅, 金錢花, 六品:百日紅, 紅躍躍,紅杜陽, 杜沖 七品:梨花, 杏花, 寶薔花, 丁香, 木蓮 八品:蜀찾花, 山丹花, 玉梅, 出着花, 白莫花 九品 : 玉탭花, 佛燈花,連戀花, 草菊花, 石竹花, 뿔栗穀, 鳳仙花, 鷄冠花, 無窮花 眞松, 寶薔花, 出培花, 白興花, 草菊花 둥은 불명종이다. ® 『朝鮮眠』) 명나라의 董越이 사신으로 왔을 때 {1488} 보고 들은 것을 적어 놓은 견문기로서 중국에서 간행했던 것을 우리나라에서는 숙종 23 년 ( 1697) 에 간행하였고, 1937 년에 조선사편수회 에서 옵셋트본 으로 간행한 『조선사료총람』 속에 포함되어 있다. 宮苑描寫에서 〈花則, 薔薇, 躍躍,街藥, tt丹, 餘갑 M, 丁香, 雀 眉, 山깔, 二月方中樓桃盡放 季春末梅郁李皆殘〉이라 하고 있다. ® 『 ;m 園事實』 양산보 {1503~1557) 의 소쇄원에 관련된 문집 속에 나타나는 조 경식물은 1500 년대에는 22 종, 1700 년대에는 16 종에 이르고 있다. 계 23 종이다 (조선시대의 별서정원 참조). ®『芝峰類說』 10) 고서, 고문 등에서 뽑아 엮은 奇庫逸聞集으로서 1614( 광해군 6 년) 에 지봉 李昭光 (1563~ 1629) 이 지어 인조 ( 1623~ 1649) 때 간행 하였다. 본고에서는 제 20 권 丹木部에 수록되어 있는 식물을 대상 으로 하였다. 여기에서는 〈花〉류에 梅, 蝶梅, 墓生牧丹, 장미, 荷花, 菊, 冬柏樹, t危子, 영산홍, 백목단, 봉선화 둥 11 종이 수 79) 李휴. 『신중동국여지승람』 卷之一, 京縣上 凍國文化社 影印本, 1964) . 80) 李睦光 여봉유설』, 但려대 소장본).

록되어 있지만 〈 草〉부에서 Ui ih, 〈 竹 〉 부에서 王竹 , 綿竹, 烏竹 , 〈木〉부 에서 松, 柏, 鴨脚樹 , 合歡木, 蘇欽 등 조경재료로 취급될 수 있는 것도 찾을 수 있다. ® 『 山林經濟 』 조선조 19 대 숙종때 洪萬選 (1643~1715) 이 지은 책으로서 농사, 의약 둥 농촌의 여러 분야에 걸친 일상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담 고 있다!J l 전 4 권 중 조경식물에 관계있는 부분은 1 권의 卜居와 2 권의 義花이다. <卜 居〉편에는 배식법이 吉凶과 관련시켜 서술 되고 있다, 여기에는 桃 桃 梅, 縣 梅 諭 奈, 杏, 楓 李 , 竹, 權, 色熙, 垂楊 둥 14 종이 등장하고 있다.

81) 洪萬遠 「山林經濟」 全 (경인문화사 영인본, 1974).

고대 중국의 전설에 따른 〈龍圖壁〉 와 〈龜文固〉 의 조경법이 소 개되고 있는데, 전자에 있어서는 竹,松, 海松, 側柏, 捨, 紫檀, 眞低 赤木, 黃楊 麥門冬 둥 十長 靑을 조경재료로 하고 있으며 후자에 있어서는 梅, 小섬 E, 山架炭, 辛夷, 杜 Rg , 丁香, 海業, 山 丹, 장미, 臨混 자미(백일홍), 木槿(無宮花), 木英 w, 佛頭花, 杏 (丹杏 流杏), 挑(紅 碧 粉), 梨, 林桃(査果), 奈, 稷桃,相實, 冬 柏 (春柏), 영산홍, 倭踏躍, t危子花, 석류, 月桂, 蓮, 菊, 開, 萱, 吳 모란, 작약, 金藤,E竹, 石葛蒲, 파초, 蒲面, 오동, 杜沖, 楓, 柳 둥 43 종이 심어지고 있다. 2 권의 〈養花〉 편에서는 老松, 만년송, 竹, 梅, 菊, 난, 蓮, 木 英君 山茶, 桓, 瑞香, 石權, 倭廊踏, 四季, 海業,紫薇, T 香, 小섬 E, 山架莫 모란, 작약, 奏 石竹, 萱, 파초, 石墓蒲 둥에 대 한 특성과 재배법 이 적혀 있다. 〈種樹〉편은 직접 조경적인 측면에서 다룬 것은 아니지만 그 중 에서 松, 柏, 側t s, 楓 柳, 栗. 菜, 胡섭t, 銀杏, 梨, 桃, 杏, 李, 稷 8 t, 木瓜, 而荷, 査果 둥은 조경재료로도 취급될 수 있는 것 이다. ® 『淳 Ill 花井雜說』 旅듈 申景淸 (1712~1781) 의 유고 (1744} 10 권 雜著四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조경식물 44 종이 취급되고 있다~) 그런데 원저인 『旅

82) 申景濱 著 『旅꿀全 書 』 I, 卷之十 保仁文化社 刊, 1976)

菴追稙 』 에는 33 종이 수 록 되어 있지만 후일에 (찰 종 6 년, )855) 민 태훈이 원저에서 베껴 썼다는 『 旅菴雜著 』 속에는 전자에 있는 +ti, 禦亂 백합, 相, 四季 忘꽃, 合歡 둥 7 종을 빼고 그 대신에 柳 枝腦 石竹, 雪 拓, 海jt, 鷄冠, 蜀蔡, 丁香, 紫芝, 장미, 杏, 桐 둥 11 종을 넣고 있다. 양서에 공통적으로 있는 식물은 蓮, 蘭퓸, 木加, 模捕, 菊, 성t, 踏躍, 棋 , 작약, 稷桃, 모란, 풍모란, 槿, 眠來, 석류, 蔡, 영산홍 옥잠, 衝天, 錦庭,常山, 冬柏, 자미, 葛 蒲, 山萊興, 竹 (홍竹, 苦竹, 粉竹, 佛竹) 등 26 종이다. 여기에서 풍모란, 眠來,衝天, 錦 l 延 柳枝뾰 등은 무슨 식물인지 알 수가 없다. ® 『 京都雜誌 』 831 조선조 21 대 영조와 22 대 정조대의 한학자인 盤州 柳得恭 (1749 ~ ? ) 이 서울에 관한 풍속과 세시를 기록한 책으로서 여기 에는 倭蘇鐵, 綜f』, 秋海 業 , 梅, 菊, 烏紅, 杏 1E, 桃 1E, 楊村 |l, 荷花 둥 이 기록되어 있다. ® 『 花菴隨錄 』 심재완의 연구논문)과 이병훈 譯의 『양화소록』의 부록예 소 개되고 있는 화목에 관한 저술이다. 그러나 그 저자는 불명이다. 沈은 광주인 海狂송제민의 子 花庵 宋花 (1567~1597) 라고 하고 있으나 『 화암수록』의 말미에 있는 「화암기」에는 〈모든 기쁨, 성 냄, 걱정, 즐거움과 앉고, 눕고 하는 것을 이 服君에 붙여 자아 를 잊고 늙음이 다가오는 것도 잊어버리는 경지에 이르러 갈 뿐 이다〉라고 했는데 20 대 (安士亨과의 서신내용에 임진년으로 되어 있 다) 에 〈늙음이 다가 오는 (……) 〉하고 말할 수 있을런지 의문이 며 송씨문중에서도 전혀 이를 증명하지도 못하고 있다. 수록의 내용중에 난대식물이 많은 것을 보면 전라남도나 경상남도의 남 부 해안지방에 기거하고 있었던 사람이 저자일 것으로 생각되며 소철이나 綜亂 滑城柳 둥과 같은 외래식물이 나타나 있는 것에 서 미루어 볼 때 훨씬 후대의 인물이 쓴 것이 아닌가 한다. 심에 의하면 필사본 속에는 화암의 花木九等品第를 비롯하여 83) 柳掛藍 僚都雜誌』(朝鮮光文台, 맹國歲時記』, 1971). 84) 沈載完. 惟調의 文獻的硏究」, 世宗文化社, P. 128~ 129, 1972

인재의 화목구품이 병기되어 있고, 1E 品詳論, 二十八友總며 , {t 開月 令 {t庵九rt b, 梅倭曲, 村語, {E 庵設語, 花庵 記 , 梅說, ;! }翰, 祭文, 五 言 七 言 의 절귀, 율시 둥이 수 록 되어 있다고 하며 화암 구곡을 다른 시조와 함께 게재하고 있다. 한편 이병훈 譯 의 『양 화소록 』 의 부록으로 있는 「花菴隨 鍊 」 에서는 전기 심 의 문헌에 나오는 花庵九曲, 梅懷曲, 村話, 花庵漫語, 祭文, 칠언절귀, 율시 둥이 누락되어 있다. 「화암수록」 속에 나타나 있는 조경 식물은 화목구동품제 에서 57 종, 화개월령에서 34 종 화암기에서 13 종, 오언절귀에서 梅,菊, 竹, 月四季의 4 종 둥인데 중복된 것도 있으므로 정리해 보면 59 종에 이르고 있다. 『화암수록』의 말미에는 「花菴記」가수록되어 있는데, 시골에서 의 원림생활의 뜻을 적고 있다. 시골의 후미 진 곳에 터전을 잡고 사철에 즐길 수 있는 화목 백여 그루 를 구해서 큰 것은 땅에 재 배하고 작은 것은 오지그릇에 심어 양화 를 취미로 세속을 잊고 스스로 만족해 하면서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粉梅 는 취 함을 금하고 자세히 그 정신을 살펴 보기도 하며 왜철쭉과 영산 홍은 멀리서 바라보면 그 형세가 옹위하고, 丹 藥 과 桂, 桃는 마 치 새로운 美姬를 차지한 듯하고, 距, 柏은 마치 큰 손님을 대한 듯한 고운 모습이 손목이라도 움키고 싶다. 석류는 의사가 헌활 하고 파초와 괴석은 뜰에 명산을 이루었고, 깡마른 소나무는 태고 의 얼굴을 드러내고, . 風.Yr 은싸우는 나라에 군사의 기상을 띠었고, 잡종의 꽃붙이는 시종 노릇을 하고 있다. 蓮花는 마치 송나라의 주무숙을 대한 듯하다. 기이하고 고아한 것을 취하여 스승을 삼

고, 맑고 깨끗한 것은 벗을 삼고 번화한 것은 손님을 삼았다. 사 람에게 양보하려 하나 사람들이 버리기 때문에 스스로 유유하게 살아감을 다행하게 생각한다〉하고 그의 원림 속에서의 일상생활 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 내용에서 주인공의 자연으로부 터의 修 L챔 性:의 뜻을 찾을 수 있으며 연을 심은 뜻이 송나라의 유학자인 주무숙의 애련설에 바탕을 두고 있음도 알 수 있다. 뜰 한편에 연지가 있고 그 옆에는 노송과 괴석이 곁들인 파초가 심 어져 정원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사시상청의 松,竹, 柏과雪中 梅, 그리고 단약과 桂 • 성t는 서로 어울려 선경을 꾸미고 있는 것 이다. 주인은 바로 신선일 수밖에 없다.

花木九等品第 一等 (取高標逸韻) 梅, 菊,蓮, 竹, 松 二等 (取高費) 杜丹. 荀藥, 倭紅, 海瑠, 色 苑 三等 (取韻致) 振子, 名柏,四季, 核『』, 萬年松 四等 (取同韻致) 華梨, 蘇鉉, 瑞香花, 衛菊, 橘 五等 倻(繁華) 石權, 桃, 海業, 薔薇, 垂楊 六等(取同繁華) 杜I!~. 杏, 百日紅', 怖, 梧桐 七等 (以下取名有所長耳) 梨, 庭香, 木蓮, 樓, 丹楓 八等 木槿,石竹, 王普花, 鳳仙花, 杜沖 九等 藥花, 펩秋羅. 金錢花, 昌歌, 華楊木 ® 『物譜』) l 卷 1 冊의 寫本으로서 실학파의 대학자인 성호 이익 (1681~1763) 의 종손 藝圓 李 嘉煥 (1722~1779) 과 그의 아들 柚軒 李載威 (1745 ~1826) 부자에 의하여 순조 2 년 (1802) 에 완성된 초목, 蟲魚, 蟲 창 , 鳥獸, 신체, 人道, 기계, 器用 둥의 名錄이다. 여기에서 조 경식물에 관한 것은 초목부의 「花丹」편에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단 괄호 안의 한글명은 현대어로 고친 것이다. 辛夷(木沿i, 봇꽃, 가지꽃), 椎丹(메개나리), 山丹(붉은 개나리), 百合(흰개나리), 山茶花(산다화), 紅藍(잇꽃), 菩薇(장미. 찔레類 通稱), 鷄冠花(맨드라미), 靑箱 子(강남조), 草百日紅(국수맨드라미) 百日紅(紫薇 백일홍), 千日紅(수훌맨드라미), 萱(원추리), 石竹花 (子爲崔麥석죽화), 錦甄(오색당비름), 應來紅(붉은당비름), 寬(비 름) , 老少年 (秋紅 당비름) , 鷄郡 (円g ,6, 닭의 장풀) , 淡竹 (似雜腸) , 丁香(非我國所謂丁香), 牧丹(모란) , 荀藥(작약), 政魂(我國所謂海 業), 鳳仙花 木槿(무궁화), 生菜蓮(앵속각), 蜀藥{t(규화), 向日蓮 (해바라기), 荷花(연꽃), 福竹 OO( 범부채. 射干花), 玉智(옥잠), 金 錢花(금전화)? 産牛花(白丑 魚丑), 開秋羅(전추라), 菊(국화), 月 紅(월계화) 이상의 37 종 중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식물은 抱丹, 紅熙, 靑 85) 이가환, 『物譜』 (1974 年, 문아사 영인본),

箱, 華百日紅, 천일홍, 頁, g晶蓮 雅來紅 (老少年), 鷄腸 (鴨距), 索 牛花, 而竹蘭 (射-f) , 淡竹 등 12 종이다. 화훼 외에 〈木果〉 및 〈잡 목〉 조에서 조경재료와 관련된 것을 찾아 보면 撲ltli, 桃, 含桃, 朱 稷, 野機 來歲, 杏, 銀杏, 梧, 桐, 白楊, 黃楊, 柳, 程 (消城柳) 둥이 있다. ® 『丁茶山全書』 다산 정약용 (1762~ 1836) 의 문집으로서 본저에서는 1960 년에 문 헌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정다산전서』를 참고자료로 하였다. 이 전서에서는 조경식물로서 목본 42 종, 초본 16 종, 계 58 종을 찾을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6 1 목본식물: ® 蘇跋 @) 鴨脚, ® 杉, G) 松, ® 柏, ® 檜, @) 杜丹, ® 柳, ® 垂楓 ® 垂楊, @ 兪, @ 業梨, @ 野薔薇 ® 菩薇, ® 政魂, ® 月季, @ 梅, ® 桃, ® 杏, @) 嬰, @ 李, @) 梨, @ 甘梨, @ 藤,®棟®橘,@楓,®菊菊,@槿,®木英容,®梧, @ 山茶, ® 茶, ® 紫薇 ® 橋 ® 部躍 ® 捕, ® 拘祀 ® 礎香, @桓,@線球,@竹, 초본식물: ® 虎掌, @) 葛蒲, @) 玉智, @ 百合, ® 水仙花, @) 色照 @) 蘭, ® 石竹, ® 蓮 ® 荀藥 @ 山荷, @ 鳳仙花, ® 蜀蔡 ® 菱, ®莊草 ®菊 위에서 다산문집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외래종인 線往 (중 국원산), 茶(중국및 인도원산), 수선화(지중해연안지방)의 3 종과 야생종인 拘記 稷香, 虎掌 山荀, 菱, 莊돛 둥 6 종 계 9 종이다. 또 다산이 유배중에 기거했던 강진의 다산초당 주변에 식재했 던 조경식물을 찾아 보면 다음과 같이 26 종에 이르고 있다: 蘇鉉 松, 杜丹, 柳, 垂機 月季, 杏,梅, 桃, 藤,橘, 荊菊, 山茶 茶, 紫薇 權, ~. ~tt. 竹, 虎掌 蓮 작약, 蜀찾, 莊妄 菊. 86) 鄭賤旺 「정약용의 원립 생활」, 輯國庭苑學會誌. Vol. 2. 1983.

@ 『林園+六志 』 tfl) 이조 영조때의 경세가였던 楓石 徐有築 ()764~1845) 가 말년에 저술한 治農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농가보감으로서 박세당의 『증 보 산림경제』를 토대로 하고 수많은 참고서적을 이용하고 있다• 조경식물에 관계있는 부분은 「藝腕志」인데 卷一의 總叔 錦置에는 名園雅稱이 있고 品第에서는 8 種上品, 花樹證評. 草花 3 品, 花九 命, 服花九命, 花十友, 花十二客, 花三十客이 있으며 時令에서는 花月令 둥 조경과 관련된 것이 있지만 너무 번잡하고 모두 인용 한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2 권의 花類만을 고찰의 대상으로 하였 다. 화류에서는 총 65 종을 이명과 함께 수록하고 있다. 이 중에 는 불명종인 玉美人과 버섯류의 일종인 盆芝가 포함되어 있다. @ 『列聖御製 』 ) 이씨 조선의 역대 왕들의 시문을 엮어 놓은 책이다. 일반적으 로 왕가에서는 일반 민가보다는 새로운 조경식물의 도입이 앞서 있게 마련이므로 시문 속에 오르고 있는 조경식물을 고찰한다는 것은 당시의 이용경향을 파악하는 데 유익할 것이라 생각된다. 조선시대의 역대 왕 중에서 성종 (1470~1494) 은 시문 속에 조 경식물을 가장 많이 동장시키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마포의 북쪽 언덕에 있었던 안평대군 (1418~1453) 의 별서인 비해당의 원림에 대하여 읊온 「區辭堂 四十八諒」 에서는 조경식물이 33 종이나 을 라 있으며 기타 괴석.假山, 璋璃盆, 뽑 錦錫, 華台 9 동 원림구성 요소들이 시제에 오르고 있어 비해당의 원림내용을 눈앞에 선하 게 보는 듯하다. 관계되는 詩題룰 뽑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匠辭堂四十八諒 (詩題) 梅窓素月, 竹速淸風 日本躍躍 翻培街藥 滿架薔薇 雪中冬梧 春後 牧丹 屋角梨花 点頭紅杏 熟睦海梁 半開山茶 爆愚紫薇 輕盆玉梅 忘꽃萱草 向 H 吳花 l J前楊村 Il 籠炯琴檜 暎日丹楓 凌霜菊 微雪蘭 萬年松 四季花 百日紅 三色挑 金錢花 玉讐花 梧桐葉 捷子花 藤發老松 泡露黃澄 蜀荀菊 安石楠 海南珉牙苦封性石假山炯嵐 瑠璃石 坤環盆 87) 徐有渠 林園十六志, 卷十八~二十二 (서울大學校古典刊行* f!J, 1966) 88) 'rlJ聖御製』, 列聖御製出版所, 1924.

卽眠園 草 水上錦鷄 籠中 華 部 한편 『 列 聖 御 製』 속에 나타나는 조경식물을 찾아 보면 50 종에 이른다. 이상의 12 개 문헌에서 밝혀진 식물은 총 138 종에 이르며 (p 282 에 있는 표 2 참조), 이중에서 식물의 정체를 구명되지 못한 것이 16 종에 이른다. 구명불능종 강인재의 九等品第 : 眞松, 寶薔 花, 出 增 花, 白莫花, 草 菊 董 越의 朝 鮮 賊:雀眉 芝條類說: 菱 生牧丹 홍만선의 『 산립 경 제 』 : 但松, 紫植, 小桃 申 敷濬 의 『 淳 園花升雜說』 : 眠來, 衝 天, 柳枝 關 , 風牧丹 『花菴隨 錄』 : 常海業 黃樓子 徐有渠의 『 임원 16 지 』 : 草 藍 琴 雲草 138 개종 중 각 문헌 속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蓮 • 菊 으로 II 개 문헌 속에 나타나며 梅, 牧丹, 장미, 山 茶 는 IO 개, 자미는 9o o개, , 日 木桃郞 親杏 , 玉振智, 花,竹, 丁第 香 藥 , 둥四은季 7花 개는 문 8헌 개, 속柏에 , 나松타 , 나石竹고, 있燕다. , 이들은 모두 조선시대의 초기인 I400 년대까지에 식재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松과 竹을 제외하면 모두가 꽃을 보기 위해서 가 꾸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중 아름답거나 향기를 피우는 꽃을 관 상대상으로 하는 I8 개종 중에서 국내 야생종인 OO, 丁 香 울 제외 한 나머지는 모두 외래수종이라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수심양성의 指標로 삼고 있던 四節友인 松. 竹,梅, 菊과 군자의 꽃이라는 蓮이 상위에 있으 며 안빈낙도의 생활을 가졌던 도연명과 인연이 깊은 #t와 菊이 역시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나타나는 138 개 조경수종을 원산지별로 분류해 보 면 다음과 같다. 한국 자생종 55 종 (39. 85 %) 한국 또는 중국 3 종

한국 및 중국 1 종 중국 50 종 (36. 23 %) 중국 및 몽고 2 종 중국 및 인도 2 종 중국 및 소아시아 1 종 인도 2 종 서아시아 및 기타 아시아지역 5 종 중국 및 일본 3 종 일본 1 종 열대아시아 및 기타 남열대지방 5 종 지중해연안 1 종 유럽지방산 2 종 북미 1 종 멕시코 1 종 열대아프리카 1 종 이집트 1 종 페루 1 종 이상과 같이 순 한국원산종은 약 40% 에 이르는 데 대하여 중 국원산종은 약 36% 이지만, 중국원산종은 아니라 하더라도 중국 을 거쳐 도입된 것까지를 고려한다면 더 높은 비율을 차지할 것 으로 생각된다. 더우기 근세에 이름에 따라 외래수종의 범위가 동양중심에서 멀리 지중해연안(수선화, 1797 년). 이집트 (紅藍, 1802 년), 멕시코 (草百日紅, 1802 년), 페루 (早蓮, 1840 년경) 동으 로 확대되고 있다. 참고문헌 邊雨燈 「이조시대정원의 수목과 配植에 관한 연구」, 서울大學校環境 大學院 1976. 尹英浩, 「이조시대와 현대에 있어서 정원수목의 選定超勢에 관한 연 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1977. 鄭在鎌, 「한국조경의 植樹配植」 , 文化財 제 13 호. 1980.

5 結論 조선시대에 조영된 궁원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경복궁원과 창덕 궁원은 우선 지형조건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전자는 평지에, 후자 는 자연구릉 속에 원림이 조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인 지 전자는 후자보다 인공성이 강하게 느껴지며, 후자에 있어서는 같은 직선을 주로 하는 기하학적인 정원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에 대한 거부반응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이와 같이 서로 다 른 입지 조건하에서 성립된 두 궁원은 조선시대에 정착한 한국정원의 모 텔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민간정원도 보통 평지에 꾸며진 주택정원.즉 사랑정원이나 별 당정원 또는 화계를 중심으로 하는 후원 둥은 직선적이며 기하학 적인 요소가 많아 인공성이 지배적으로 느껴지지만 교외의 별장 이나 산수 속의 별서 또는 누정중심의 원립은 울타리가없거나있 다 하더라도 자연 속의 일부로서 조영되고 있기 때문에, 공간 속 에 직선적인 방지나 수목 또는 괴석 동이 배치되어 • 있다 하더라 도 자연과 인공 사이에 커다란 갈등을 느끼지 못한다. 조선시대의 정원에서 보는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는 디자인의 기본이 직선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방지가 성립되며 후원은 직선적인 화계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뜰 안의 花i烏도 윤 곽선이 직선에 의하여 처리되고 있다. 정원 중심시설인 방지는無島型과 中島型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무도형의 원지 속에는 연을 심어 시각적인 쾌감부여와 함께 염계 의 애련설에 따른 수십양성의 지표로 삼는 일도 있지만, 맑은 물 만 채워·마음의 거울로 삼는 일도 있다• 중도형의 원지에는 1 개에서 3 개까지의 섬이 만들어지고 있으나 1 개만 있는 경우가 지배적이다. 3 개가 있는 지원의 대표적인 예 는 경복궁의 경회루와 남원의 광한루에서 들 수 있는데, 후자에 있어서는 방장, 봉래, 영주의 삼신산의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 중 도형의 지원은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원에 괴석이 배치되는 일이 흔히 있는데 이것도 삼신산을 상 징한 것으로 여겨진다. 낙선재의 후원에 배치된 괴석대에는 〈小 鷹洲〉라 음각되어 있으며 정약용은 강진의 다산초당에 정원을 꾸 미고 못안에 괴석으로 중도를 이루었는데 〈三峰〉을이루었다고하

였다. 삼봉이란 삼신산 을 말한다 . 조경식물은 전기에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중국원산종이 많 이 이용되고 있었으나 조선시대말에 이르러서는 원산지가 열대아 시아에서 소아시아 지중해연안 이집트, 유럽, 北아메리카, 페루 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이 넓어지고 있다. 이것은 대외적으로 교 류의 폭이 넓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의 조경식물의 선택경향을 보면松,竹」每:菊등의 소위 〈四節友〉와 군자의 꽃이라는 蓮이 많이 심어지고 있다. 이는 유교 적인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修心近性〉에 있는 듯하며, 菊과 柳 와 섭 E 를 많이 심는 것은 도연명의 안빈낙도의 생활철학을 본받으 려 하는 것 같고 竹과 梧룰 심는 뜻은 태평성대를 희구하는 데 있는 듯하다. 이처럼 한국인은 어떤 사상을 정원 속에 표현하려 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조선시대의 정원은 일반적으로 디자인의 기본인 선이나 공간구 성, 재료의 종류 등 매우 단조로움을 느낀다. 재료란 몇 가지 수 종과 몇 덩이의 괴석이 고작이며 원지란 방지로 대표되고 있을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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終章 韓國庭園의 특징 한국의 원림문화는 일본과 함께 지정적인 조건 때문에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아 왔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중국이나 일본 과는 유다른 특징 있는 양식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본장에서 는 그 특징 있는 양식을 성립시키는 요소들을 찾아 결론에 대하 고자한다.

韓國庭園의 특징 1 신선사상의 배경 石 )II 格은 일본정원이 사적인 발전과정에서 불교를 비롯한 각 종 사상,죽 禪 須彌山思想, 신선사상, 정토교, 四神相應說, 음양 설 둥이 각시대의 作庭에 영향을 미치며 그 복합적인 사상이 일 본정원의 형태 형성에 영향을 미쳤디는· 사실이야말로 유럽정원에 서 볼 수 없었던 커다란 특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본정원 , 죽 신선정원이며 사상의 조형이라 하는 근래의 독선적인 경향은 부 정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어떤 특징을 갖는 원립양식에 대하 여 어느 한 가지 사상을 내세워 그 배경을 운운한다든가, 또 는 원림을 조성할 때 의도적으로 반드시 어떤 사상을 도입했다고 는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어떤 원림의 양식이 성립하게 된 근원 울 찾아 본다면 그 주류가 되는 배경사상은 없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본절에서는 그 주류를 이루는 배경사상을 찾고자 하는 것 이다. 우선 한국의 원림은 신선사상을 그 기본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 다고 전제한다. 우리나라의 造景史上 최초로 원림의 특징을 가장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은 백제의 29 대 무왕 35 년 (634 A.D) 에 사비성의 宮南 1) 石川 格, r 庭園學槪論』, 誠文堂新光社, pp.1 48~162, 1978.

에 조영한 지원에 대하여 『삼국사기』 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內 容이다. 察池於宮南 引水二十餘里 四岸植以楊柳 水中築島峨 擬方丈仙山 2) 이 기록은 고려시대에 김부식 (1075~1152) 에 의한 것인데, 과 연 무왕이 진의 시황제나 한의 무제처럼 신선사상을 굳게 믿고 자기의 생활공간 속에 신선계를 의도적으로 도입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저자인 김부식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던 사상에 근거하여 그렇게 표현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기록의 내용에서 판단한다 면 〈宮南池〉는 三神仙山 중 방장선산을 내세운 신선사상 배경의 최초의 지원이라 말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무관이던 기홍수 (1148~1210) 의 〈退食齋〉 원림에 대하여 이규보 (1168~1241) 가 읊은 「奇尙 書 退食齋八諒」 의 서문 속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昔之草經苦庭 今 R IJ歌정舞館 靈泉恒i勇織瑾不沖 拜流駿柱之間 潟落 靑珉之底 波澈滋分 不藍而綠 聲冷冷分 勿鉉而鳴 旺能園圓蓬漏 又作 衣冠菓許 數范凉竹 依稀風雨之天 一片落英 漏浪神仙之境J) 기홍수가 退食齋를 조영할 때 신선사상을 의식하여 조경에 반 영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서문 속에서 〈園固蓬漏〉 이라든 가 〈神仙之境〉이라는 어귀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이규보의 의식 속에는 신선사상이 잠재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의식은 작품 속에서뿐만 아니라 원림조성에도 직접 간접으로 나타나는 경우를 중국, 한국, 일본 둥의 정원에서 흔히 볼 수 있다. 長谷川 ,1 도 일본의 관상물인 中島式의 林泉樣式은 그 기술이입과 함께 정원의 배경사상이 한 그물에 쌓여 이입되었 는데 당시 중국과 한국의 정원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신선사상이 었음은 용이하게 추론되며 문헌도 또 이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 다고 말하고 있다. 또 유감殿造系庭園 인 池泉舟遊園 의 配島 에 따 2} 金富試, 『삼국사기』 卷 第二十七, 百濟本紀 第/i. . 3) 古典刊行A'. 『동국이상국집』 , 卷二, 東國文化社, 1958. 4) 長谷J II 正海, 「 U 本庭園雜考-庭&思想-」 •• 東 洋文化社, pp. I~30, 1983.

르는 의장에는 신선성에다 일본회화적인 미의식의 표상과 현재적 인 권세과시의 강조가 눈에 뜨인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신선사상에서 말하는 삼신산이란 봉래, 방장, 영주의 삼산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불로장생의 仙藥이 있고 부귀 전능의 생활이 가능한 낙원이라고 할 수 있다. 진대의 王嘉가 쓴 「捨造名山記」 에는 삼신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신

5) 岡大路, 「支那庭園論」, 彰國社, pp. II~ 15, 1943.

蓬萊山 亦名防邱 亦名 雲 來 高二萬里 廣七萬里 水沒有細石 如金石 得之 4; 加陶治 自 然光淨 仙者服之 東方爵國時有金霧 諸仙說 此上 常浮輯低品 有如山上架樓 (………) 方丈山 一名節維 東方龍場 地方千里 玉活爲林雲色皆紫 有龍皮骨如 山阜 散百頃 遇其姬骨之時 如生龍 或云龍常鬪此處 行血如水流 音 色者著草木( …… ) 溫洲山 -名兎洲 亦曰環洲東有淵洞 有魚長千丈 色班鼻端有角時鼓 舞群戱 遠見水間 有五色 (………) 또 『史記』 의 封禪書 第六 에도 〈이 삼신산은 발해 속에 있어서 안간계와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여기에는 선인과 불사의 약 이 모두 있으며 여기에 살고 있는 금수는 모두 하얗고 황금과 백 온으로 궁궐을 이루고 있다. 이르기 전에 이룰 바라다보면 구름 과 같고, 이르려 하면 물 아래로 가라앉으려 하며 이르면 바람 이 배를 끌어 멀리 사라지니 끝내 이르지 못한다〉라고 적고 있다. 自威宣燕昭 使人入海 求蓬萊方丈漏洲 此三神山者 其傳在渤海 中 去人不遠 患旦至則船風引而去 蓋常有至者 諸燈人及不死藥 皆在 焉 其物齒獸盡白 而黃金銀爲宮開 末至望之如雲 及到 三神山反居水 下 臨之風祠引去 終莫能至(사마천 저. 『史記』 封禪 言 )‘J 결국 신선사상에 나타나는 산악과 해도는 그대로의 경관으로서 사색과 감상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비록 공리적이기는 하나 공상적인 환상에 의하여 이상화해 간다고 하는 곳에 특징을 가지고 있다.

6) 諸稿轍次 『大漢和辭典』, 大修館, p. 152, 1966.

山治는 중국에 있어서의 신선정원의 실례로서 진의 난지궁의 長 池 한의 건장궁원, 북위의 화림원, 수의 서원, 당의 태명궁원, 남송의 沈德 和 園 同 謝 其 의 西湖區1 . 명의 용상궁원을 들 고, 본 격적인 신선정원은 태명궁원이라 하고 있다. 長 池에는 봉래산이 있고 건장궁원의 唐中 池에는 四 仙 島 가 있으며 화림원의 漢天淵 에는 지중에 봉래산, 산상에 仙 人館 을 지었다. 수의 대서원에 있 는 북해에는 3 선산을 두었으며 당의 大 明 宮'fr! 에는 봉래궁과 봉래 지가 있었고 남송의 오홍에 조영한 심덕화의 원림 속에도 池중에 봉래산을 만들었다. 이와 같이 지중에 1 개 또는 3 개의 선도를 두 어 신선계를 상징한 것이다. 이러한 신선정원양식은 우리나라의 3 국시대부터 도입되어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공식처럼 되고 있다. 백제의 무왕이 재위 35 년에 궁남에다 못을 파고 수중에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상징했다고 한 것은 신선사상을 굳게 믿고 있 었던 진의 시황이 난지궁에다 장지를 만들고 봉래산을 두었다는 것과는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고구려의 - 安 鶴宮 에도 원지 속에 몇 개인가의 섬이 있는 듯하며 신라의 임해전 원지에도 3 개의 섬 이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경복궁의 경회루지 를 비롯하여 남원 의 광한루 순창의 순원, 강진의 조석루 둥의 원지에는 3 개의 섬 이 만들어져 있지만 그중에서도 신선정원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 나 있는 것은 전라북도의 남원에 있는 광한루 정원이다 . 이것은 원래 요천가에 누만 세워져 있던 것을 1580 년대에 누 앞으로 호 르고 있던 좁다란 계천을 확대 확장하여 오늘과 같은 넓은 못으 로 일신한 것이다. 『龍 城 誌』 의 영조 增 (1752) 에 의하면 8 ) 湖中의 중심이 되는 섬은 봉래도인데 여기에는 綠 竹이 무성하며 동쪽 것 은 방장도로서 백일홍을 심었고, 湖北의 섬은 영주도로서 여기에 는 蓮亭 이 있다고 하였다. 못 속에 섬을 만들고 세 개의 섬에 대 하여 이처럼 삼신산의 이름을 하나하나 붙여 주고 있는 기록은 他에서 찾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누 앞의 지안에는 돌자라를 만 들어 방장산인 지리산을 향하도록 배치했다는 것도 신선사상에 결부시켜 생각해 볼 만하다. 자라는 거북과 동류로 취급되며 고 래와 학과 함께 불로장생의 상징으로서 정원에 도입하고 있다. 7) 田治六郞, 「紫禁城西苑史抄( 二 )」, 日本 造 園雜 誌, 22(4), 1959. 8) 李相儀 , 『 南 原誌 全』, pp. 64~65, 770, 776, 1960.

저자의 조사에 의하면 9 ) 한국의 원지 가운데서 섬이 3 개 있는 것은 매우 귀하나 한 개만 있는 경우는 전체 중도형의 원지에 대 하여 8 1. 6% 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같이 중도형지의 대부분은 1 도만 있는 것이지만 진의 난지궁의 長池라든가 백제의 궁남지의 경우와 같이 섬 하나만으로도 신선사상을 전해 줄 수 있는 것 이다.

9) 鄭腦旺 韓 • 13 傳統庭園株式의 比紋硏究 韓國庭苑學술誌. I(1 ) :41~ 62, 1982.

田治는 신선정원의 공통요소로서 시설의 중심은 大池中의 섬 이며 원칙적으로 다리가 없고, 동물이나 식물은 진귀한 것을 도 입한다고 하였다. 또 性 石 , 大石, 淵洞을 두며, 淸 泉도 不可矢 한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와 같은 기본형태가 모두 완전히 부합되는 것은 아니지만 유사한 예도 간혹 볼 수 있다. 윤선도가 조영한 보길도의 원림을 보면 지중에 섬을 만들거나 (세연정), 괴석을 두고 있으며 (朗哈溪域), 〈杜石爲壇〉하고(洗然 亭 域), 洞天石室을 두고 있다. 그는 숨어서 신선처럼 살고자 하 였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정원에는 괴석을 배치하는 일이 많으며, 池에는 池上으로 건너가기 위한 다리를 놓지 않은 것이 또한 특 색이댜 다산 정약용은 강진의 다산초당의 원지 속에 섬을 만들고 그 위에 3 개의 괴석을 올려 〈小池眞作草堂顔 中起三峰石假山〉 이라 했는데 삼봉이란 삼신선산을 말한다. 『花菴隨錄』 에도 이와 비슷 한 표현의 시조가 있다.J O) 모아 구란 層石權]오 트러지은 古桂梅 1 라 三仕性石에 둘닌 솔이 늙어시니 아마도 花庵風景이 너쓴인가 호노라 老橋 老槪 老松이 모두 진기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三峰 性石과 어울리고 있으니 그 정원은 선계의 분위기가 넘칠 수밖 에 없다. 한국인은 중국 전래의 신선사상을 〈십장생〉으로 한국화하여

10) 沈載完, 校本歷代時祠全書, 世宗文化社. 1972.

갖가지 장식물에 반영하고 있다. 정원의 담과 굴뚝에 그림으로 나타나는 사례도 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 를 경복궁의 자 경전 뒷편에 있는 間瑞에서 볼 수 있다. 그 십장생 중 松, 龜 , 학, 鹿 불로초 둥이 담이나 굴뚝에 그림으로 표현되는 일이 적 지 않다. 松은 지중의 섬에 심는 일이 허다한데 경복궁의 경회루 와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을 위시하여 전국의 많은 원지에서 어렵 지 않게 볼 수 있다• 남부지방에서는 중도상에 자미나무를 많이 심고 있는데 아마도 그 꽃의 화려함과 화기가 100 일에 이룰 만큼 길다는 특성 때문에 불로장생의 신선사상을 상징하고자 함인지 모르겠다. 2 직선적인 윤곽선 처리 한국인들은 집을 지을 때 의례히 방형의 敷 地에다 직선적인 담 울 두르고 직선적인 화계와 방지를 만든다• 住空「1 31 의 方形적인 기본형태 때문에 직선적인 처리는 당연할런지도 모른다. 경복궁 은 그 좋은 예로서 궁궐부지 전체가 바둑판처럼 직선적으로 구획 되어져 있는데 그 일부분을 이루고 있는 경회루의 원지나 교태전 의 후원인 아미산정원도 직선적인 처리 를 하고 있다. 창덕궁의 낙선재지역은 경복궁의 경우와는 달리 후면이 자연구 릉인데도 주공간의 기하학성 때문인지 건축물과 평행한 계단식정 원을 만들고 있다. 이것은 사면의 효율적인 이용을 꾀하면서 건 축물과 조화를 이루기 위함인 듯하다. 민간정원에 있어서는 경북의 영양에 있는 敬 亭 의 瑞石池라돈가 달성에 있는 荷 葉亭 의 원지가 모두 방형의 울타리 안에 가득히 만들어진 방지의 예이다. 한국인들은 창덕궁의 후원처럼 자연구릉 속에다 修 景 처리를 하 면서 자연과는 상반되는 직선을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지형조건 같으면 중국인이나 일본인 또는 18 세기말의 영국인 같으면 원지 이건, 원로이건, 화단이건, 築山이건 자연곡선에 의하여 처리했 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화계나 원지를 만들 때 지형조건의 여 하를 불문하고 직선적이며 기하학적인 처리를 습관적으로 하고 있다는 데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광주지방의 소쇄원과 환벽당, 강

진 만덕산의 다산초당, 함평 월야의 백화정 그리고 서울 삼청동 의 옥호정 동의 원림은 수려한 자연경관 속에 조영하면서도 적선 적으로 화계를 만들고 또 지당을 만들어 대비효과를 얻고자 하는 듯이 보인다• 田治도 l” 직선형방지를 한국정원의 특색으로 보고 있다. 죽 그 는 한국과 일본의 정원문화에 많은 영향을 준 중국에서조차도 방 지를 갖는 정원을 열거하기가 힘든다고 하며 原漁의 논문 「西湖 醉 의 佳庭良園」 에서 淸連寺의 정원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경내 에는 4 개의 방지가 있다. 또한 일본에 있어서는 궁궐이나 私第의 정원에 방지가 있다는 말을 돋지 못하였으나 法隆寺에는 유지를 볼 수 있고, 天龍寺나 四天王寺둥 몇 개의 사원에서 직선형방지 룰 찾을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田中온 12) 대체로 일본의 정원은 직선을 잘 도입하지 않지만 천 황을 위해 만든 慶長度內襄와 寬永度內襄, 明政院御所, 그리고 경도의 仙洞御所와 女院御所 동 1600 년대에 만들어진 정원에는 직선이 도입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한 가지 홍미 있는 사실은 1719 년에 일본의 德川吉宗의 장군직 을 축하하기 위하여 파견된 조선통신사의 製述官인 申維翰의 海 游錄에 13) 방지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다. 죽 八幡山의 專 修寺와 동해도의 洞雲寺에는 각각 前園 속에 방지가 있었고 주변 에는 괴석이 놓여졌으며 奇花異升가 심어졌다고 하였다. 이에 대 한 자세한 기록을 일본문헌에서 찾을 수 없어 증명하기는 어려우 나 申의 기록내용에서 보아 한국적인 직선형의 지원인 듯하다. 또 駒 敏郞의 「京 0 庭」 14l 에 의하면 大德寺의 芳春院 원지도 1 島 型 방지인데 이것은 1617 년에 小堀遠州 (1579~1647) 의 지휘하에 꾸며진 것이다. 직선적인 仙洞御所의 원지도 그가 만든 것인대. 遠州는 武將이고 茶人이며 조경가로서, 풍신수길과 德川家康 아,,,래 .에 서, 일하면서 건축과 조원일을 맡았다. 이와같이 1600 년대 11) 田治六郞, 「朝鮮庭園t드見石方池&其(I)起源t적史 L 、-c」, 造園雜誌, 2(3), 1~8, 1935. 12) 田中正大, 『日 本(I)庭園』 , pp. 228~73, 1967, 13) 申維翰 原著 姜在彦 譯沮 『海遊錄-朝鮮通信史 0 日本紀行』, 平凡社. 14) 艦敏郞, 「京 0 庭」, 山&溪谷社, pp. 1 8~19, 1979.

의 일본정원에 직선적인 원지가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주목되 지 않을 수 없다. 이 무렵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있었던 1590 년대를 넘긴 바로 그 다음 세기이며, 왜란으로 한 • 일 양국간에 두절되었던 외교관계가 덕천막부의 출범을 계기로 재개되어, 1607 년에 조선정부의 정사인 여우길을 대표로 하는 수호사절의 일본 방문을 시발로 하여 그후 많은 내왕이 있었다. 1600 년대만 하더 라도 7 회의 왕래에 수행원수는 3,000 여명에 이르며, 大阪지방에 殘留했던 人數는 293 명이나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임진 • 정유의 왜란시 한인의 많은 수가 붙잡혀 갔다는 점 동으로 미루어 보아 1600 년대의 일본에는 한국인에 의한 조경행위가 전혀 없다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직선이 도입된 일본의 원림 에 대하여 한국의 원림문화와 연결시켜 연구해 볼 만한 과제로 생각된다. 3 園池의 형태와 구성의 단조로움 그림 I, 2, 3 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대표적인 원지형태 를 그려 놓은 것이다. 한국의 원지를 보면 경주의 임해전지를 제 외한다면 整形池나 非整形池나를 막론하고 매우 단조로움을 느 낄 수 있다. 직선적인 방지만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방지 중 에 고작 섬이 하나 있거나 두 개 또는 세 개의 섬이 있을 뿐이다. 표 1 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저자가 조사한 118 개의 원지 중에서 섬이 하나도 없는 것이 43% 에 이르며 중도가 있는 원지 65 개 중에서 섬 하나가 있는 것이 81% 에 이르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지나칠 정도로 단조로움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자연곡선지는 현재로는 고구려의 안학궁과 신라의 임해전에 있는 원지에서 볼 수 있을 뿐이며 어떤 해안풍경을 본따 만든 것으로 보이는 임해 전의 원지가 변화 많은 자연곡선으로 처리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의 造景史上 마지막이 된 듯싶다. 한편 일본의 원지는 1,000 년간의 변화과정에서 볼 때 지중의 섬은 우리나라의 경우와 같이 無島型에서 1 도 2 도 3 도형에 이르 기까지 다양하지만, 못의 윤곽선 처리는 시종 비정형의 곡선으로 일관하고 있으면서도 그 선이 둔한 완곡선으로부터 점차 변화가

표; 1 韓國園池의 형태 및 구성별 비교 形 池數 I 47島 中2 3島 島3 s 島 型5 :5t `50 23型 池10數7 :t 百9 分0..7I t 整 直 線型 46 3 s 54 48 I 103 曲 線 型 I l 2 I 4 小計 百分比 85.4 5.5 9.1 100 池 (%) 51.4 46.7 1.9 100 非 直 線 型 I I 1 整 曲 線型 s I 6 1 7 形 付 用 型 I I I 3 3 池合 池小 數gt 563 41 83 6150 SI I 2 1”18 91.030 百 分 比 81. 5 6.2 12.3 100 ~t (%) 55.1 43.2 1.7 100

심한 자연곡선으로 변하고 池形도 方狀에서 점점 細長해 가는 느낌 이 있다. 죽 鶴島 와 龜島 (永保寺池), 神仙島 (桂離宮), 蓬來島 (小石川後樂園, 不義園, 蓬來園 等) 와 같이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원지는 대체로 넓은 폭을 가지고 있지만 16 세기 이후에 나 타나는 園池 (玉泉園 三千院, 仁和寺. 成, 晴 閣 둥) 는 자연의 계류를 닮아 細長해 가고 있다 (그림 2). 중국의 원지는 그림 3 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나라와 당나라의 원지는 윤곽선의 형태가 작은 指円形에 가까운 것으로서 일본의 초기의 원지형태와 비슷한 면이 있다. 그러나 원 • 명 • 청에 이르 는 동안 윤곽선이 복잡해지고 있으며 청대의 環秀山莊이나 佑園 의 못은 일본의 옥천원 (1600 년대) 이나 三千院 (1700 년대) 의 池形 에 닮은 점이 있다. 그리고 중국의 원지형태는 비록 곡선으로 윤 곽처리를 하고 있지만 方狀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에 특징을 찾을 수 있을 것 갇다. 또 중국의 원지에 걸쳐 있는 다리는 〈之〉 형으 로 굴곡되고 있어 변화있는 윤곽선과 함께 원지의 단조로움을 제 거하려 하고 있다• 조경문화의 발달과정에서 볼 때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으면서

► 그림 1

韓 國庭園의 池塘形態 I 整形池 (1) 方池 : 無島 型 ® 內院寺 南池 (I 100s) ® 海州客館 (14 75) ® 瑞石池(1 636) ® 晩睦堂 (cl853)

(2) 方池 : 1 島型

。 曰 | | 0 ® 巴山 書 堂(1 820s) ® 英街洞洗然池 (16 68) (J) 花雪堂(1 6 야年代初) 。 曰 ® 英쩡亭(1 707) ® 活來亭(1 816)

(3) 方池 : 2 島型

r 。 D 广 ® 華城 下南池(1 796) @ 白蓮堂 (c1540)

(4) 方池 : 3 島型

0。0 。 。。 @ 淳園(1 700s) 棟華堂(1 600s) ® 仙岩寺 三聖閣 (不明) OD @ 廣寒樓(1 582) (5) 方池 : 4 島型 ® 慶會樓 (cl412) 0 O O 0 ® 咸平 四梅堂 (C 1700 )

(6) 方池 : 汶池型

틀言 雙勝亭 (1746) 六宜亭 (I745) DD @ 君 子樓汶池 雙勝 亭 과 六宜 亭 @ 風月樓 (13 71) 淮溪 書 院 風水樓 (1552) 上池 ® 海州客館 (1475)

(7) 稽円池

中島型 中橋型 ®仙岩寺 三印塘 ®通度寺 九龍池

(8) 方池 : 中橋型

® 通明殿 石關池

II 非整形池

(1) 曲線型 ®臨海殿 苑池 ® ~石亭曲水渠 ® 英菩洞 洗然池 (汶池)

<

® 奉化 靑岩亭 (cl800) ® 沙坪 臨對亭(1 862)

(2) 直線型

® 景福 宮 香遠亭(1 867) ®康津 道岩, 朝夕樓 琴高池 (cl800)

(3) 直線 • 曲線 硏用型

。 ® 華城, 訪花隨柳亭 ® 光山,晩歸亭(1 671,1927)

► 그림 2 日本庭園에서의 池塘形態의 變遷

® 法成寺 cl020( 京都市) ® 法勝寺 )077 (京都)

® 毛越寺 1117 (岩手 W;fi) ® 永久寺 大喜院, 1173 (天理市)

® 天龍寺, 1240s (京都) ® 永保寺, 1314 (岐阜~)

` 東大池

® 西芳寺, 1339 (京都) ® 大乘院 1480S 僚 良)

® 酸酷寺 三寶院, c l600 (京都) ® 桂離宮, 1624 (京都)

广

® 小石川後樂園, 1629 (東京) @ 不義 園, 1702 (東京)

。蓬

«= @ 修學院 離宮, 1656 --59 (京都) @ 蓬\萊園,' 16:00s 末} (東京) oi$ (` 55.sJ ~ `g5J. . P b‘ ,r's,' o/ ® 玉泉園, 1600s 初 (金澤市) ® 三千院, 1700s (京都)

@ 仁和寺 遼郭\〈亭, 1836- (\京/\都\d) R H\u®. 成樂閣 淸香b軒, 1863( 金澤市안)

/、 \

► 그림 3 中國庭園의 池塘형태

o 二 巳〈

太液池 唐中池 \ ® 漢 西京 建章宮 苑池 ® 漢, 未央宮 塗池 ® 漢, 宜春下苑 曲池 蓬萊池東南院龍首池 山池院池山水池院 ® 唐西京 大明宮苑 ®唐西京 宮城

® 唐,東京 宮城 九洲池 ® 元, 大都 乾淸宮 西苑 (cl280)

巳亡깊 二 <

® 元,蘇州 獅子林 ® 明代蘇州 藝園 ® 明, 蘇州, 抽政園 ((500s)

@ 明~淸, 蘇州 留園 @ 明, 蘇州, 西園寺(1 635)

@ 浦 北京, 圓明園 @ 淸, 蘇 ’) · I · I, 網師園(1 700s)

>

® 淸 蘇州, 環水山莊(1 700s) ® 淸 蘇州 治園 (18 80) 小墨池 @淸, 蘇州, 殘粒園 ® 淸 蘇州, 萬氏宅

도 한국 • 일본 • 중국의 원지는 각기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그중에서 한국의 원지는 직선적인 방지를 기본으로 하는 가장 단 순한 형태인데 비해 일본의 원지는 변화많은 다양한 池形으로 발 달하고 있으며 중국의 원지는 한국과 일본의 중간형태라 여겨 진댜 한편 원지의 시설 및 첨경요소로서는 중도상의 정자라든가 池 內, 池岸의 조경식물, 괴석, 龍 또는 龜의 석상 둥이 고작이다. 중도상의 정자는 지안에 있는 것보다는 전망의 폭이 더 넓을 뿐 만 아니라 수중에 있기 때문에 신선이 된 기분을 더 느끼게 되며 풍류적인 멋도 더하게 된다. 그러나 건축물이 들어서기 위해서는 충분한 넓이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규모가 작은 못에서는 어렵다. 그래서인지 65 개의 中島型 원지 가운데서 중도상에 정각을 두고 있는 곳은 雲 錦樓池園의 익신정을 비롯하여 다음과 같이 20 개 池 園에 지나지 않는다 (표 2). 중도상의 식물을 문헌에 의거하여 고찰하기는 어렵지만 문헌에 나타나 있는 것과 현재 관찰할 수 있는 것을 합한 20 개 중도형 지원을 놓고 본다면 표 3 과 같이 松 9 개園, 자미 7 개園, 竹 6 개 園, 柳 2 개園, 상수리 1 개園의 순으로 식재되고 있는 것을본다. 여기에서 경향을 찾는다면 송 • 죽 및 자미나무가 주로 되어 있는 데, 松 • 竹은 사시상청한 것이며 자미는 중국원산종으로서 화기 가 길어 100 여일에 이르며 幹形이 특이하여 珍樹異木의 하나이다. 池岸식물로는 16 개 종이 동장하고 있으나 柳 16 개園, 자미 13 개園 죽 9 개園과 같이 이들 3 종이 주를 이루고 있다. 柳는 모 든 지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나 자미나 竹온 난대식물 이기 때문에 주로 남부지방의 지원에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개개의 원지에서 본다면 중도와 지안의 식물을 합하여 5 개 종 이상인 콧은 거의 없으며 3 종 또는 4 종이면 고작일 정도로 매 우 단조로움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수종은 柳처럼 전통적으 로 지안에 식재되는 것도 있지만 소나무와 대나무는 四時常靑 하 여 절개의 상징으로서 梅 • 菊과 함께 四節友라 일컬어지는 것이 며 자미는 화기가 길고 화려하며 특이한 幹형 때문에 남부지방에 서는 지원뿐만 아니라 후원에도 많이 심고 있다. 개화성기에는 무릉도원을 연상하게 한다.

표 2 中 島 上에 亭閣을 갖는 池 園 池 園 名 소재又 조영시 기 釋中島名上 의 橋 名 I 雲錦樓 수원 C1 33 7 異新亭 2 風月樓 평양 137 1 愛蓮堂 (凌虛橋) 3 油虛亭 김해 C1 400 茅 亭 略杓 4 鹿會樓 서울 cl412 慶會樓 3 列 의 石開橋 5 衆遠樓 고oT = 1475 衆遠樓 6 秋 月 軒 창영 C1 500 滿香亭 7 英菩堂 해주 1562 英容堂 8 廣寒樓 남원 1582 蓮亭 현재 漏洲臣1 과 方丈 亭 있음 9 淸競亭 서울 1636 淸競亭 10 靈沼亭 직산 1666 茅 亭 II 晩 歸亭 광산 1671 茅亭 현재 中 島 上에 襲香閣 있음 12 蓬來閣 원 주 1684 蓬萊閣 13 愛蓮亭 서 울 1692 愛蓮亭 14 I j 、 荷 堂 해주 C1 7()() 小閣 15 雙淵亭 남영 cJ 70 0 閑 睦 亭 16 洗 視亭 산청 C!7( )() 漏淵亭 17 衣 綠池 선산 1741 愚說閣 18 君 子 樓 영흥 (@!) 117744 56 六텐 宜勝 亭亭 19 靑 岩 亭 봉화 c)800 靑岩亭 20 香遠亭 서울 186 7 香遠亭 ( 醉香橋 )

표 3 中島및 池岸의 조경식물 일련 池 園 名 조영년대 造 煥 樹 木 번호 中 島 上池岸 I 宮 南 池 634 柳 2 閣 會 樓 Cl412 松 3 善 山 南館 143 0 柳 4 雲 錦 樓 c1440 竹 5 德民 亭 1450 竹 6 緊 遠樓 1475 竹 7 風 月 亭 1480s ? 柳 8 望湖 軒 c 1500 ? 柳 9 漁漏 園 1530s 竹 , 梧 ,紫薇 楓 10 白 蓮堂 C1 540 松 紫薇 ”12 廣花 雪寒堂樓 11568020s 初 紫紫 薇 竹薇柳 느山 티茶 나무 13 二 樂堂 C1 600 紫薇 14 瑞 石 池 C) 63 6 松't'r . 은행나무 15 玉 潘 庵 1600s 初 松 , 竹, 梅 16 鳴玉軒 1600s 初 紫薇 17 洗 然 亭 1668 松 山 茶 18 蓮 亭 1600s 末 柳 竹 19 光 風 樓 1600s 紫 薇 20 棒華亭 C1 660 竹 , 紫 薇 21 同 春 堂 Cl660 松 柳 22 南 間 精舍 1683 柳 柳 , 竹 23 英 菩 亭 1707 松 24 百 花 亭 1746 不 明 紫薇 ,서어나무,柳 25 暎 碧 亭 C! 7()() 梨 26 雲 鳥 樓 1776 松 柳, 竹 27 淳 園 1700s 상수리 紫 薇 28 華 城龍 淵 1794 松 柳 29 華城 下南池 1794 松 셉 U 30 谷山府政閣 1798 柳

4 修心 養 性의 場 인재 강희안 {I417~1464 ) 이 하루는 해질 무렵에 허리 를 구부리 고 화단에 꽃 을 심고 있는데 한 손이 찾아 와서 〈이제 노년에 이 르러 체력을 소비하며 마음과 눈을 미혹시켜 외물의 끌림이 되었 으니 당신의 뜻이 빼앗겨 잃지 않았소 ? >하 고 말하므로 이에 대 답하되 〈 사물을 관찰하는 자는 몸을 닦고 앎에 이르고, 뜻이 성 실해야 함은 옛사람이 일찍부터 말해 온 터입니다. 이제 저 蒼 官大 夫(松 을 말함)의 외롭고 굳건한 의지는 홀 로千 丹百木 의 위 에 솟아 있음은 이미 말할 나위가 아니요, 그 나머지 은일을 자 랑하는 국화와 품격이 높은 매화 또는 난초, 서향 둥 10 여 품종 도 각각 품격과 운치를 떨치고 창포는 고고하고 깨끗한 절개가 있으며 괴석은 굳건하고 확실한 덕을 지녔으니 이것 들 은 진실로 군자가 벗 삼아 마땅한 것이라 항상 함께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익혀서 몸에 배게 할 것이지 그저 멀리하여 버려두지 않을 것이 오. 저들 화목의 지닌 물성을 법도로 하여 나의 德 을 삼아 가면 그 유익함이 어찌 많지 않으리오? 그 뜻이 어찌 호연하지 않으 리오 ? >하 였다 !5 1 인재가 화목을 가꾸는 뜻이 『修 心 養性』 에 있음 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병훈 역의 『 양화소록 』 부록에는 인재 의 52 종의 화목에 대하여 그 품격에 따라 9 品 級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松 • 竹 • 梅 • 菊 • 蓮 은 일품이며 모란은 이품에 넣고 있다. 또 이퇴계 ( 混 I501~1570) 의 『 도산잡록 』 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꼬 옛날 산립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 거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 째는 玄虛 를 사모하여 高 尙으로 일삼음을 줄기는 사람이요, 둘째는 도의를 줄기며 심성 기르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첫째 사람을 말하면 몸을 더럽힐까 두려워함으로써 세상과 인연을 끊고, 심한 이는 새 • 나 짐승같이 살면서 그것을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둘째 사람으로 말하면 즐기는 것이 禮 柏뿐이어서 전할 수 없는 묘한 이 치에 이르러서는 구할수록 더욱 얻지 못하거늘, 즐거움이 어디에 있 겠는가. 그러나 차라리 둘 째 것을 위하여 힘쓸지언정 첫째 것을 위 IS) 姜希顔 著 . 李炳 薰 譯 , 『양화소록』, 乙酉文化 社 , pp. 127~129, 1973. 16) 民族文化推進 會 , 『국역 퇴계집』 , 1968.

하여 스스로 속이지는 않아야 할 것이어늘 어느 여가에 이른바 세속 의 번거로운 것이 내 靈팡에 들어 오겠는가‘ 이와 같이 퇴계도 시골에서의 산수생활을 수심양성에 두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그 중거로서 그는 堂의 동쪽에 단을 축조하여 松 • 竹 • 梅 • 菊을 심고 〈節友社〉 라 이름하였으며 당과 절우사 사이에는 小方塘을 만들고 연을 심어 淨友塘이라 명명했는데 〈淨 友塘〉을 시제로 한 다음과 같은 칠언절귀가 있다. 淨友塘 物物皆濁妙一天 派溪何事獨君隣 細思馨德眞難友 一淨稱呼恐亦偏 여기에도 嫌溪의 「愛蓮說」을 연상시켜 주고 있다. 경상북도의 영양에 있는 정영방의 서석지에도 지안에 四友壇이 있는데,사우란 松 • 竹 • 梅 • 菊을 의미한다. 전라남도의 무안군 청계면에 있는 柳運온 花雪堂의 못에 연을 심었다. 柳는 愛蓮과 觀魚의 뜻을 염계의 樂을 본따기 위함이라 했다. 한말의 시조작가인 안민영은 정원에 못을 파고 연을 심어 蓮湖라 하였는데 그의 다움과 같은 시조 속에서 염계의 애련설에 동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周源溪는 愛蓮하고 陶靖節은 愛菊이라 蓮花는 君子어늘 菊花는 隱逸士 1 라 至今에 方塘에 蓮 시무고 號稱蓮湖 같더라. 원지 속에 연을 십고 있는 곳은 부지기수이지만 池園의 건축물 의 명칭에 연에 관련된 것도 적지 않다. 평양 風月樓의 池內 中 島上에 있는 愛蓮堂, 창덕궁 후원의 애련정과 부용정, 이천의 애

련정, 영흥의 군자루, 경복궁의 香遠亭· 동이 그 일례이다. 쩝· 의 도연명 (365~427) 은 너무나도 가난하였다. 이를 보다 못한 叔 夫 의 도움으로 41 세에 한 시골의 읍장(彭澤의 令)이 되었으나 l 년도 못 채우고 겨우 80 여 일만에 사직원을 내던지고 집으로 돌 아오고 말았다. 가난하고 먹을 것은 없어도 구속받지 않고 자유 스러워 좋았다. 이때의 심정을 적은 것이 「귀거래사」 인데 여기 몇 구절을 적고자 한다. 歸去來分 田園將無 胡不 歸 班自以心 爲 形役 矣個 恨 而獨悲 悟己往之 不 練 知來者之可追 店迷途其未遠 覺今是而祚非 돌아갈거나돌아갈거나 田園이 묵어 가거니 어이 아니 돌아가리 내 이미 肉身을 위해 마음을 팔았거늘 이제 새삼 혼자 슬퍼하여 무 엇하리. 지나간 일 고칠길 없으매 앞에 오는 일 바로 잡기 꾀하련다. 진실로 길 잃음이 오래지 않았으니 오늘이 옳고 어제 그름을 깨달 았노라. 富 ft非吾願 帝鄕不可J OJ 懷良辰以孤往 或植杖而耕好 登 束 阜以舒셔i 臨 淸流而賊詩 卿乘化以歸 盡 樂夫天命復矣疑 부귀는 내 소원 아니거니 仙鄕이야 다시 바란들 얻을 건가? 좋은 때를 알다 외로히 가고 지팡이 세워 받갈고 풀 매도다. 동산에 오르면 휘파람 날려보고 개울 을 따라 나가 시 를 읊노라. 애오라지 자연을 따라 돌아가리니 천명을 즐기면 그만이지 다시 무엇 의심하리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이같은 도연명의 고절과 안빈낙도의 생활 철학을 본따려 했다. 그래서 동쪽 울타리 아래에 국화를 심었고 후원에 무릉도원을 조성했으며 문전에 五村 II 를 심었다. 조선시대에 이처럼 원림 속에서도 〈수심양성〉의 도를 구하려 한 것은 당시 사회의 배경을 이루고 있던 유교적인 풍토 때문이 라 생각된다.

5 風流生活의 場 풍류란 속된 일을 떠나서 풍치가 있고 멋스럽게 노는 일이라 하 는데, 우리나라의 원림은 풍류의 장으로서의 기능을 다하도록 꾸 며진 곳이 적지 않다. 경주의 남산 서록에 만들어진 포석정의 곡수거는 왕실 중심 의 유락공간이다. 곡수거의 형태에서 〈포석지〉라고도 하는데, 也 頭 但.는 it頭)의 입에서 흘러 나와 전복모양의 細溝로, 유유히 홀 러 돌아가는 수류에 술잔을 띄우며 시를 지어 읊고 줄길 수 있도 록 꾸민 것이다. 이는 설명할 필요도 없이 東晋의 왕희지의 蘭亭 고사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신라의 왕가에서도 왕희지의 곡수연 을 맛보기 위하여 남산의 기슭에 멋있게 조형된 곡수거가에 희빈 종척들을 불러 앉히고 置酒하며 즐겼다. 특히 헌강왕은 남산신이 어전에 나타나 춤을 추므로 자신의 위치도 잊은 채 함께 춤을 추 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원림의 풍류적인 기능은 조선시대의 정원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서거정 (1420~1488) 의 「해주객관 동헌 중신기」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11 , 西北쪽으로 가면 三棟亭이 있는데, 경치 좋기로 楠亭과 서로 甲乙 을 다툰다. 그 남쪽에 못이 있어 연을 심으니 붉은 향기 푸른 그림자 가 좌우로 어른거리며 그 헌 앞에는 욕실 두어 채가 있고 욕실 아래 위에 모두 새 못을 파니 넓이가 IO 여 길씩 되며, 연을 심고 고기를 기르니 윗못의 물이 졸졸 섬돌밀을 따라 돌아서 아랫못으로 들어간다. 목욕을 마치고 난간에 의지하면 유쾌하고 시원하여 번거로운 세상 생 각 씻고 혹심한 더위를 잊올 수 있다. 동헌 옆에 또한 누가 있는데 높고 밝으며 상쾌하여 사신이나 손님이 오면 반드시 여기서 술 마시 고 시 짓는다. 西北有三棟亭 其爲勝與楠亭相甲乙 其南有沼 끓以英꿇 紅香緣影 映帶左右 前其軒有浴貸數~ 浴室上下皆整新池 廣圭名十餘丈 植 種蓮種魚 上池之水浮 R 混循階除入干下池 浴龍恐蘭 夷然浴然 可以 禪柚 而消酷暑矣軒之傍又有一樓 高明奭瑞 使賓客之來止必船 p永於斯此 ' 17) 민헉근화추진회, r 국역신중동국여지승람』 v, 경인문화사, pp.3 98~401,1969. 18) 민족문화추진회, 前撮간, 『신중동국여지승람』 卷之四十三, 海州牧, 宮室, 客館東軒.

해주객관의 동헌 앞 욕실의 상 • 하지와 그 兩池 를 연결하는 계 단상 수로에 관하여 설명한 글을 보면. 서양의 cascade 를 연상시 켜 주고 있다. cascade 는 물이 계단을 흘러내려 올 때 孤狀을 그 리며 튀겨 가는〈물의 약동〉을 감상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 객관의 상 • 하지 사이에 만들어진 偉t〉가 어떠한 형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글의 내용으로 보아 상지를 채우고 넘친 물이 〈石 階〉를 지나 하지에 주입된다고 볼 수 있으므로 여름에는 심리적 으로 시원한 느낌도 주지만 하나의 멋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또 동헌 옆에는 또 다른 누가 있어, 이 〈石階〉를 물방울을 튀기 며 홀러 내려가는 모습과 함께 상 ·하지에 심어진 연꽃과 池 속에 뛰어 다니는 고기 (魚)를 바라다보면서 술잔을 기울고 시를 읊으 며 즐기는 생활은 하나의 풍류적인 놀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1519 년 II 월에 恩師 조광조가 유배되고 12 월에 마침내 賜死되자 양산보는 곧 바로 하향하여 은거할 목적으로 소쇄원이라는 원림 을 조영했다. 공간에 안정감을 주기 위해서 土石으로 직선적인 담 울 쌓았지만, 골짜기의 물을 원내에 도입하기 위해서 담 아래에 몇 개의 돌을 받혀 水口를 만들었다. 이 물은 오곡문 안으로 들 어와 암반 위에 패인 홈을 따라 認J자 형으로 굽이쳐 흐르다가 암반 아래로 폭포가 되어 떨어져 가게 되어 있지만 그 일부의 물 은 통나무 홈대를 타고 待鳳 퓰 아래의 上方池에 들어 갔다가, 넘 치게 되면 하방지로 유입하게 된다. 그런데 이 상 • 하방지 사이 에는 장식용의 소형 水車가 있어 공간에다 포물선을 그리며 물방 울을 튀기면서 소계곡으로 낙하하여 흘러 간다. 이와 같은 물의 약동을 건너편 언덕 위의 광풍각에서 시인 묵객들은 술잔을 기울 이며 시를 읊고 홍을 돋구는 것이다.

또 소쇄원도에 의하면 계류의 암반상에서 장기를 두고 橫琴을 튀기고 있으며 입구쪽에는 말을 타고 들어 오는 그림이 있다. 소 쇄원은 바로 풍류객들을 위한 유락공간으로서 이곳을 찾고 놀면 서 詩作한 유명 인사들이 허다한데, 河西 김인후, 仇仰 송수초,露 峯 고이순, 松江 정철, 玉峰 백광훈, 高峯 기명언, 樓 霞 김강숙, 崎菴 정홍명, 松湖 백진남 동이 그 대표가 된다. 소쇄원은 자연 계류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데도 그렇지만 공간처리면에서 낭 만적인 멋을 풍기고 있다. 고산 윤선도도 당대의 최고의 멋장이임에는 톨립없다. 비록 병

자호란으로 인한 치욕적인 사태에 은거생활을 결심하고 보길도에 들어온 그지만 곳곳에 원지를 만들고 정자를 세워 풍류생활로 일 생을 보냈다. 부용동입구의 계류를 중십으로 하여, 여기에 조립 石材로 보를 막아 潭을 이루고 그 북서쪽에 인접하여 중도형 방 지를 만들었으며, 이 두 개의 수경시설이 한눈에 보이도록그서 남쪽에 정자를 세워 세연정이라 했다. 고산은 홍이 나면 溪潭에 小防을 띄우고 令童 男女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혀 춤추게 하고 자 작의 漁父四時調룰 유유히 노래 부르고 즐겼다. 앞개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어라 배 띄어라 썰물은 물러가고 밀물이 밀려온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江村 온갖 꽃이 먼 빛이 더욱 좋다. (漁父四時調의 「春」장 제 1 절 ) 고산은 또 格紫峰 북사면의 계천 (朗哈溪)을 중심으로하여 좌우 에 방지를 만들고 堂 (無個堂과 曲水堂)을 세웠으며, 格紫峰의 건 너 맞은편 山腹에 있는 절벽의 암상에는 정자를 세웠고 암하에 는 半人工池와 지하석실을 만들어 유락의 공간으로 하였다. 고산 이야말로 한국의 역사상 가장 멋있게 살다가 간 풍류객이라할수 있으며, 부용동의 원립은 바로 풍류의 장이다. 인조 (1623~1649) 와 숙종 (1675~1720) 도 왕 이전에 풍류객이었다. 인조는 재위 14 년 (1636 년 )에 창덕궁 후원의 가장 깊숙한 곳에 휴식공간으로서 소요정과 태극정 그리고 청의정을 세웠다. 청의 정은 방지 속에 방도를 만들고 그 위에 세웠으며 물고기를 기르 고 낚시질도 즐기게 하였다. 또한 그 아래 축 소요정 서쪽에 있는 노두암을 깎고 다듬어, 流杯渠를 만들어 잔을 띄웠으며 이 도랑을 굽이쳐 흐른 옥류천의 물은 수적벽으로 낙하하여 폭포가 되게 했 다. 숙종은 높이 6 척 남짓한 인공폭포에 대하여 시로 표현하기를 〈飛流三百尺 造落九天來看是白虹起 魏成萬堅雷〉라 하였다. 수직 벽의 높이 1. 7m 에 지나지 않는 곳으로 낙하하는 소폭포에 대하여, 〈飛流三百尺〉이라 했고, 무지개가 일어나는가 했더니 폭포로 되 어 쏟아지는 소리가 萬堅올 울리는 뇌성과 같다고 했으니 무위자

연으로 돌아가 줄기는 풍류객이 아니면 이와 같은 과장적인 표현 법은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소요정에서 옥류천의 물이 암반상의 流杯渠 를 蛇行하다 수직벽으로 낙하하는 광경을 보며 시 를 짓고 즐기는 풍은 소쇄원의 광풍각에 앉아 건너편 수차에서 낙하하는 물의 약동을 보며 줄기는 선비 들 의 기분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또한 경복궁의 교태전 후원인 아미산에는 두 개의 조그마한 방 형의 石池가 있는데, 하나에는 油月池라 했고 하나는 落 霞潭 이라 했다. 지름이 겨우 1 척 반 밖에 안 되는 석지이지만 이 물속에다 달 울 잡아놓고 불그레한 저녁노을을 가두어 즐기는 모습을 생각한 다면, 풍류에는 상, 하와 빈부, 귀천이 없음을 새삼 생각하게 한 다. 이처럼 한국의 선비들은 경치좋은 곳에 정자를 세우고 못을 파 며, 몇 그루의 화목을 심고 괴석 몇 덩이 룰 놓으면 즐기기에 족 했다. 그러면서 자연과 벗하며 못속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술과 노래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풍류적인 생활을 가졌는데, 조경에도 관심을 가져 구불구불한 길을 만들고 홈대로 물을 떨어뜨려 飛濕 을 이루며, 담 아래로 물을 끌어들였으며 물의 약동을 감상하기 위하여 인공폭포를 만들고 물레방아를 돌렸다. 정원은 바로 그들 의 풍류의 장이었다. 6 자연과의 일체감 형성 정원은 바로 자연의 일부이다. 한국의 정원은 주택정원이 됐건 별서정원이 됐건 공간 속에 여 백이 많고 앞이 트여서 답답하지가 않다. 부득이 담을 만들어야 한다면 낮게 하거나 지대를 높게 하여 앞면의 시야를가리우지 않 는다. 나무를 십더라도 측면이나 귀퉁이에 심으며 정면에 높은 나 무를 심지 않는다. 담은 경계 표시에 불과하니 높게 쌓아 案山올 가리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의 전통정원 은 주로 다실 (사랑방) 앞에 정원을 꾸미되 깊은 숲속의 분위기가 나타나도록 상록수를 빽빽하게 심고 園路에는 징검돌을 놓아 이 끼가 끼고 나무잎이 깔리게 하여 ~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한 다. 그러하기 때문에 원내는 답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Je ll ico e

는 영국의 풍경식은 외향적이고 자기팽창형인데 대하여 일본은 내 향적이고 자기수축형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한국의 원림은 의향적이며 자연의 일부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 다고 말할 수가 있다. 또 한국의 원림은 수목에 인공적인 조형처리를 하지 않는다. 이태리의 르네상스정원이나 프랑스의 기하학식정원에서는말할것 도 없고, 일본의 임천정원에서조차 수목에 인공을 가하여 조형처 리를 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자연스럽게 자라기를 바라는 듯 가위질을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수종도 수 심양성으로서의 지표가 되는 松, 柏, 竹 등은 상록수이지만 대부 분은 楓 柳, 紫微 魏 梅, 梧, 瑠 등과 같이 낙엽활엽수를 심 는다. 이것은 사계절 자연의 변화를 즐기기 위함이다. 비록 원내 에 담이라든가, 화계, 지당 둥 직선적이며 기하학적인 요소가 있 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에 대한 거부반응을 느끼지 못한 것은 이 때 문이라 생각된다. 한국인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 생각하며 줄기 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정원을 자연의 일부로 취급한 듯하다.

부록 • 東洋造景史年表 中國· 日本 ·其他 西 紀 韓國 〔中國〕 O 周 : 文王代 ◄ | IIB 세.C기 都 澄水에 靈台, 飯沼 盆亂 못가에 누각둥을 造쌍, 〈詩經 • 大雅〉 • 周시대말 : 神仙思想 퍼짐. O 春秋·戰國時代 584 I ► 箕氏朝鮮 • 孔子 (551~479B . C) : 人情 仁올 諒讓王 元年 後苑에 淸流閣 세움.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의 〈大東史綱〉 근본으로 함. • 老子 (5C~4CB.C) : 無爲 , 自然 으로서 修身治國의 道로 하 고 儒敎의 仁義 • 禮樂을 배 척함. • 莊子 (365~290B.C) 人智룰 버리고 無爲自然하여 無益無用일 것을 요구함. ◊秦 • 始皇 (245~210B.C) 蘭池宮에 神仙庭園 만듦 ◄ 212 「(信長地 引消水 東西二百里 南北 二十里 築土爲蓬萊山 刻石爲 諒魚一長二百尺」 〈三秦記〉 194 I ► 衛滿 朝鮮에 亡命하여 王儉城에 도옵하고 建國함. ◊漢武帝(1 40~87 B.C) • 大月氏와 결연하여 句奴를 토 I 139 벌하려 했으나실패함. 그러나 그 후 東西 교통이 트 여 西洋文明과의 교류가 있었 음. 이 때 西洋의 포도, 호도, 석류, 공작새, 타조, 사자를 도입함. • 長安에 上林苑 꾸밉. 上林苑에 119 는 昆明湖둥 6 개의 人工湖水

만듦 昆明湖의 東岸 에는 産牛와 織 女의 石像 그리고 諒魚의 石 像을 배치함. • 建章宮의 南쪽에 있는 唐中池 에는 漏州, 蓬萊 方丈, 蓋梁 의 神仙島 있고, 海中神仙인 龜魚의 像 있음. 建章宮의 北 에 太液池 있고, 池中에 潮 갇 있음. •武帝, 長安城中 의 北關口에 梧

梁 갚 만듦 I> 115 t> 漢武帝 : 朝鮮侵略, 衛氏朝鮮 멸망함 眞蕃 樂浪 臨屯, 玄英둥四郡설 치함. 57 ◊新羅 : 朴赫居世 (居世干) i災 ) , 11 에서 죽위하고 國號룰 徐那伐 이라 함. l8l8l 6◊ 高句麗 : 高 朱蒙(東明王) 卒本扶餘 에서 즉위함. • 溫祚王 갖 F 冬十月 tJt·李의 꽃 이팜 • 溫祚王 14 年 漢山에 도읍함. A. D O 高句麗 : 瑠璃王 22 年 十月 都邑을 | 3 國內城으로 옮기고 慰那巖城을 〔中國〕 O 後 漢 明帝 大月 氏國에 蔡恒 67 쌓음 . 올 파견하여 佛敎를 도입함. 101 O 新羅 : 婆娑王 22 年 月城을 쌓고王 은 月城으로 옮김 . 102 • 婆娑王 23 年 桃 李 꽃 핌 . 132 O 百濟 : 蓋婁王 5 年 北漢城 쌓음. 198 O 高句麗 : 山上王 1 年 丸都城 쌓음. O 魏文帝(220- 25) 洛陽城안에 芳林 I 22200S3 O 新羅 : 奈解王 8 年桃 · 李 꽃 핌. 園올꾸밉 . • 文帝 黃初떠 ~(223A _ . D) 靈蘭池 l 243 ► O 百濟 : 古爾王 10 年 큰제단을쌓 만듭 黃初펴터 天淵池 만듦 고 天地 山川에 제사 지냄. 黃初 7年 七華堂 만듦 247 ► O 高句麗 : 東 川王 21 年, 平壤城을 쌓음.

頂 本〕應神 天皇 代 (270~310) • yl t 半 l¥P 에서 온 사람 들 에 의하 276 여 奈良地方에 用池만듬(야人 池) 〈日本 따 紀〉 • 百濟人 王 仁博士, 論語및 千 285 字文 전함. 〈古 1 i i e 〉 〔中國〕束 晋 (317~420) • 東築 晋함 . 成이帝,무 렵苑 城海에西 公新은宮 울鐘 Jt修l 333340 I ► ◊高句麗 故國原 王 坪 八月 平壤 에 流杯 Il 版 k 를 만들고 百僚에 城을 증축함. 게 잔치를 베품. • 束 판 : 王 羲之의 1 싸 亭 故 '. l i 永 353 和 九年 三 月 三 日 「流船曲水」 놀이 를 함. 372 I ◊高句麗 : 小獸林王 2 年六月 前秦王 僧但및 佛像, 經文동 보내옴. 384 I 0 百濟 : 東晋에 중 마라난타가 佛敎 룰전해옴. 391 • 辰斯王 7 年 春正月 「 直 修宮室 察 • 陶淵明 (365~427) 의 安貧樂道 池造山 以칸t奇皮異丹」〈三國史記〉 생활®歸去來辭 ® 五柳先生傳 ®m (詩) @) 桃 {E 源 i 3 1405~::: O 高句麗 : 長 壽 王 15 年 平壤으로 遷 O宋文帝 (424~453) 玄武湖와 3 神仙 446 都 島로 된 정원 꾸밉.〈宋 :J} 何尙子〉 4 | ► 新羅 : 고구려를 통해 佛敎 뚱거움 475 I ◊百濟 : 文周王 元年 態津으로 천 도함. 487 I 0 新羅 • 炤知王 9 年 月 城修理 488 • 炤知王 )0 年 正月 15 日 王天泉亭 에 감. 때에 池中에서 老翁이 나 O 北魏의 政治家 楊術之 「洛陽伽藍 ◄ 493 타남. 못을 찹 出池라 함. · , i d 」씀. 〈三國遺事〉 soo I ◊百濟 : 東城王二十二年 봉에 宮東

쪽에 臨流 1 싸 l 을 세우고 못을 파며 〔日本) 武烈天皇 8 年 皇居에 못올 ◄ 50l l 奇皮울 기름. 파〈日고本 苑합 을紀〉 만들어 금수를 기름 5 | O 新羅 : 法興 王 22 年 多和塔 세움. s46 I ◊高句麗 : 陽原王 2年 二 月 王都에 梨 樹가 連理함. 〔中國〕 梁 : 孝王限華宮에 兎園을꾸 552~54 밀 園 안에는 百盆山과 雅池있 고 池內에 鶴서 1 와 ·兒 猪있음. 586 ► O 高 句麗 平原王 28 年. 都邑을 長 • 茂陵의 商人 袁廣漢이 人 工 激 安城으로 옮김 . 流있고 流水안에 섬이 있고石 假山과 奇獸 珍鳥 異草있는정 원꾸밀 O 隋 : 揚帝 大西苑안의 北海에 3 I 605 C 620 ► 0 新羅 : 唐帝 牧丹 {E 固및 종자 보 神仙島 만듬. 내음 . 〔日本〕 百濟人路子工 飛鳥의 宮南 612 624I ◊高句麗 : 榮留王 7 年, 唐에서 神仙 庭에 須彌山과 吳橋로 이루어 진 思想 들어음. 아울러 이 무렵 唐 정원을 꾸밉 〈日本 합 紀〉 高祖의 命을 받들어 道士가 天尊 像과 道法을 가지고 와서 老子를 · 蘇我馬子 죽음, 飛鳥J II 근처 ◄ 626 강론함. 에 있는 馬子의 뜰에는 작은 섬이 있는 小池룰 만들었다 . 그래서 그때 사람들은그를「島 5 大臣」이라 불렀음. | 600 年代 •安鶴宮에 庭園만듬. 南宮에는섭 이 있는 自 然曲線池와 係石이 세 워진 人工築山이 있으며 北宮에 도 築山으로 된 後園있음 . 634 O 百濟 : 武王 3 켜 2 三月 宮南에 못을 파고 方丈仙島를 축조했으며 西 岸에 楊柳심음. 636 • 武王 37 년 八月 望海樓에서 群臣 에게 잔치를 베품. 〈東國通鑑〉 648 0 新羅 : 眞德女王 2 년 義藏法師가通 度寺 세움.(九龍池 있음)

655 I ◊義慈王 IS 년 二月 太子宮을 수리 했는데 매우 화려함. 宮南에 望 〔日本〕 飛鳥川의 西쪽에 수미山 ◄ 657 1 海亭 세움. 像을 만듦 660 • 義慈王 19 년 八月 熊津城에서新 羅에 降伏함. 668 I ◊高句麗 : 寶藏王 27 년 羅唐軍에 항 복함. 674 I ◊新羅 : 文武王 1« 二月 宮中에 못 을 파고 造山하여 珍腐奇獸를기름. 676 I • 半島에서 唐의 세력을 몰아내고 三國을 統一함. 679 • 文武王 19 년 二月 宮궐을 중수 했는데 매우 壯麗함. (唐의 年號 儀鳳떠三) 〔中國〕 唐 : 禁苑인 大興苑안에 球場 C·7 0 0 亭과流杯亭을 둠 • 中宗의 딸 安樂公主 死亡 • 生 710 前에 꾸몄던 西莊에는 華山을 상징하는 累石假山 만들어짐. [日 本) 太安萬{呂에 의 하여 「古事記」 712 완성. 〔印度〕 사레센의 카-심 장군의 침 입과 함께 이슬람文化 들어옴. 〔日本〕 舍人親王동에 의하여 「日本 720 • 聖德 19 년 皇龍寺 9 층탑 중수 書 紀」 완성. • 金大城에 의하여 佛國寺創建 • 百濟王의 후예인 行基 (668 ◄ 706 自 雲橋와 靑雲橋, 七寶橋와 蓮 ~ 749) 대보살이 寺院을 세우 ~37 花橋 須彌塔上의 臣影樓, 多寶 고 각종 土木事業을 주도함 塔과 釋迎塔. 九品蓮池. 石燈둥 京都에 西芳寺률세움 • 있음. [日 本을〕 본奈딴良 時井代手 :別 橋業諸의兄 庭海園岸꾸風밈.景 776502 I ► 景德王 23 年경 唐代宗 (763~779) 에게 臺茶羅세계가 새겨진 木影 • 平安京으로 천도함. ◄ 기 山 보냄. 〈三國遺事〉 • 桓武天皇 처음으로 神泉苑 ◄ 800 ► 昭聖王 2 年 四月 暴風으로 臨海. 에가다. 仁化 두 門이 허물어집.

〈束國通鑑〉 804 • 哀莊王 5 年 七月 臨海殿을 중수 함. 〔中國〕 唐 : 李德裕 (787~849) 平泉山 820 莊올 꾸밉 巫山十二峰있음. [日 本〕 京都에 能峨院庭園 꾸밈 . 834 大澤池 있음. (何因遠覽迷漏池 象外勝形此處 看 」 〔中國〕 蜀의 詩人 白樂天 (居易 772~ 846 846) 死亡. …나세때 (815) 盧山의 香遠峰 아 847 | ► 新羅·文聖王 9 年 二月 平議殿과 래에 草堂정원을 꾸밉 . 臨海殿을 重修 함. • 5 3'\세 때 스스로 庭園을 만들고 852 I ► • 文聖王 l 떠 2 七月 鳴鶴樓를 중수 天笠石을 배치하고 池塘올 만 합 들며 花草를 가꾸고 鶴울 키 867 | ► • 泉 文王 7 年 正月 臨海殿을 重修 움. 함. 879 I • 憲康王 (875~887) 와 2 三月 王 이 抱石 亭 에 또 나가서 놀다, 이때 〔캄보디아〕 王都에 方池만듬 . C880 I 南山神이 나타나 御前에서 춤을 • Harih aralay a lndravaraman I 추었다. (877~889) 가 lndrata ta k a 池롤 造營함. (東西 3 . 7 km, 南北 0 . 7km 의 長方池 中央에 祠堂있음. • Yasovarmcn 1(889~912) 의 Yasodharata k 池 (東西 7 km, 南 C900 | ► 崔致遠 (857~ ? )의 山水生活 保年 北2km, 깊이 3km) 중앙에 祠堂 에 台와 梅를 만들고 松竹을 심으 이 있음. 며 別歷생활을 함.) [日 本〕 朱雀院庭園에 梧梁殿과 中'島 899 가 있는 못이 있음. 〈源氏物語〉 918 1 • 王建이 高麗를 建國함. 919 니公탑 1; (開城)에 都邑하고 궁궐올 造營함. 922 • 高麗 太祖 5 년 滿 月 豪와 後苑 만듬 • 藤原家의 東三條殿에 園池률 ◄ 978 만듦 977 • 崇宗 2 年 春三月, 東池에 龍船

을 띄우며 친히 進士 시험을 봄. 〔中國) • 宋·太宗 3 年 宮 後苑에 流 986 益殿 있음. • 太宗代 (976~997), 金明池와마 주보는 위치에 瓊林苑을 造 ,8 합 石橘園 과 앵도園 있음. [日 本) 平安 時代 : I災 滋保胤「池 亭 記 」 | 982 씀 淨土形式의 庭固 에 관한 최 • 穆宗 6 年 金致陽 300 fb 9 의 邸宅을 초의 기록임 . I 1003 짓고 ?,;f, 謝, 園池만듬. 매우華 麗함. 〔中 國 ) 宋 : 眞宗때 (998~ 1022) 崇 ◄ CIOOO 福宮 에 :反 船亭과 曲水渠를 만듦. 1007 ·穆宗 10 年 五月 높은 효를 축조 〔 日 本 〕 法成寺庭園, 方形의 中庭에 1022 하고 깊은 못을 파 遊賞토록 함 . 中 島型 池와 中橋있음. 그모양이 淨士와 같았다고 함( 藤原道長 이 造營 함) I 1035 • 靖宗元年 四月 禮部의 건의를받 아 京城名山의 땔나무를 베지 못 하게 하고 두루 나무를 십게 함. 1041 • 靖宗 7 年 十二月 東池의 龜 B g OO 에서 開射함. 〔中國〕 宋 : 仁宗 I~ 曆年間(1 041~1048) 1040S 에 蘇舜欽 蘇 111 에 泊浪亭을 造 營 함. 頂 *]源 輯通 平等院庭園 만듦 . 1053 (淨土정원) 107 。 I ► 文宗 24 년 延慶宮의 後苑의 賞春亭 에서 曲案올 베품. 〔中國〕 니t宗의 傑學者 周敦願가 ◄ 1013 I • 文宗時에 園團를 맡아보는 기관 死亡함. (1017~). 으로서 內苑署률 둠 太極固說 通바, 愛蓮說둥 내놓 음 . 〔日 本〕 白河天皇(1 072~86) . 城南에 鳥 1086 羽莊 御苑을 造營함. (或模於蒼 1os9 I ► 宣宗 (1083~94) 坪 十月 13¾ 黃金 海作島 或寫於蓬山壘巖) 塔을 만들어 台慶殿에 둠. ·藤原淸齒 中尊寺률 平泉에造 1095 쌍함. (淨土정원) 1096 | ► .戶輯年 東池예 배를띄움.

109 9 I • 소 4 年 四月 御沙樓 에 詞臣울 부 르고 「 道光殿玉攻魂花」 란 제 목 으로 詩룰 짓 게함 . 〔中 國 〕· * : 李格非, 洛陽名園 i c 를 CIIO O ► • 李資玄 (1061~ 11 25) 宣宗 때 淸平 엮음, I 8 개 園 이 收 錄 됨 . 山 文殊院 에 서 禪學을 닦음. 溪 [日 本 〕 藤原家 의 東三條 殿 에 ◄ l100s 流 가에 珪웃狀 의 사다리 꼴 못 이 發殿造 정원 만 듦 . 있음. 1102 • 肅宗 7 年 八月王 은 美花亭 에서 曲案을 베 풀 고 「 有美 亭 」이라 賜 額 함. 1104 • 소 9 年 八 月 王 이 장謝 와 園 OO 를 遊覽 하였 음 . 〔日 本 〕 • 九 條殿 庭園 이 完成 됨 . ◄ 110 5 睿宗 8 年 二 月 宮 의 南 과 西 에 地 形 이 幽 奇 하고 水石이 絶 勝 했 두개의 花園을 둠. 다고함. 1113 · 소年 五月 宋 의 都綱 陳守 가 白 鵬룰 바침. 1115 | • 睿宗 I~ 九 月 王 은 친 히 東池 에서 武士룰 선발하고 水戱를 관람함 . 1116 | ·소王 II 年 四月 王 은 處 士 郭與 룰 불러 常安 殿 뒤의 花 壇 에 앉 히고 친히 酒 食 을 베풀다 . • 金仁存의 淸燕閣 案記 에 는 「壘 石成山」 명|水 爲沼 」라는 文 句 가 나옴 . 1120 • 睿宗 15 年 六月 宋 商 林淸 동이 〔中 國 〕 宋 , 徽宗 (1 101~25) 이 · 太湖 石 I ,( 1 23 花 木올 바침 . 으로 築 山하여 萬歲 山 園 (良山) 을 꾸몄는데 杭 1 서의 鳳凰 山올 본 땄다고한다 . I 1124 I ► • 仁 宗 2 年 宋人 徐統이 見聞 記 인 高麗圖經 올 완성함. • 金 軍, 宋의 徽 宗과 欽宗 을 잡 | I 127

아감. 徽 宗의 아들은 都룰 杭 J 11 로 옮기고 南宋 을 건국하여 1 no I • 仁宗 8 年 , 坦 然 이 「 淸 平寺文院院 初代로 高 宗이 됨. 紀碑」 를 쓰다 . 1145 I • 金 富 輯이 三國 史 記를 편찬함 . 〔日本) 一 乘院惠 信 , 淨 瑠璃寺 정원 1150 올 축조합( 京 都府) 〔 日 本올) 꾸岩밈 手 .縣 의 平泉 에 毛 越寺 정원◄ C1l115s20 I . 毅宗 坪 二 月 萬 壽亭 에서 연회 있었음. 앞서 內侍 尹彦文이 品 昌宮 北園에 怪石으로 築山하고 〔 中國 ) 金 , 貞 元 元年 三月 燕京 (北 l153 I 그라 하곁였에다 .小 亭 을 세워 萬 面亭 이 京 )으로 천도함 . ◄ 1157 ► 毅 宗 II 年 四月 民 家 5P1 구를 헐어 宮殿 을 세우고 禁苑 을 꾸몄음 . 내고 太平 亭 庭園을 만듦 玉 石 을 갈 太液池 와 경화도 만듦 . 아 쌓아올린 觀 喜 , 美 成의 두 성 와 怪石으로 만든 仙山, 飛泉둥이 • 南 宋 : 高 宗(1 131~ I 162) 1100S 있음. 德壽 宮을 造 營 함. 西湖 를 본 • 소王소年 七月 宋商이 앵무새와 딴 大 池와 飛來 峰 을 본 딴 築 孔雀 그리고 진기한 花木올바침. 山 있음. 1158 ·소 王 12 年 三月 王은 홉 昌宮 御 苑의 花木을 遊賞함 . 1163 • 소 王 17 年 七月 宋商 孔雀과珍 맙끊올 바침 . 1167 • 毅宗 21 年 三月, 李公升, 許 洪材 둥과 함께 衆美 亭 南池에서 뱃 놀이 룰 함. 앞서 淸寧齊 南쪽 기슭에 丁字 閣올 세우고 衆 美亭 이라 이름하 였으며 亭 南쪽 개울을 막아 肝 水하고 岸上에 茅亭을 세웠다. ·소王 六月, 王온 玄化寺로 갔다. 앞서 龍 淵寺 南쪽 溪流가에 內 侍 李唐 柱와 裵衍둥에게 命하여 延福 亭 을 짓고 내 귀에 奇花異 木올 列植토록 하였다. 溪流가에는 虎岩이라는 絶壁이 있

고 樹木 이 우거져 절 경 을 이 루고 있었다 . 1168 I • 毅宗 22 年 李公升 ( 1199~ 1183 ) 벼 슬 올 그만 둔 뒤 庭園울 만 들 고 悠 悠自適 함 . 園中 에 茅亭을 세우고 못 을 파며 동산 을 만 들 어 花丹룰 〔日 本 〕 • 大雲 山의 龍雲 寺 경내에 鏡 | 11s9 I 심음. 容池 중심의 정원 을 꾸밈 . 池안 에 는 辨 天 島, 伏虎島 등 3 島 가 있 는方 狀池 입 • 榮西禪師, 中 國 南宋 에서 茶 | 1191 나무 가져오고 採茶 마시는 법 올배워 옴. 〔中 國 〕 南 宋의 祝穆 , 事文類緊룰 저 1 2 세기말 • 奇洪壽 (1 148~ 1210) 退食齋造營 固 술함. 卷 之二에 林 木 部 와 花 丹 內 에 亭. ff , 大湖石, 連摘池 ( 曲池 ) 部 있음 . 둥이 있 음 . [日 本 〕 鹿苑寺 (金 閣寺 ) 庭園 京 都 ◄ 1224 ? • 李實 忠 , 경기도 富平, 南 山에 漁몽 에 造營 亭 ( 茅亭 )을 造營 . 「 築石爲豪 疏水 作 沼 , 導 而 東 之 穴其 壇入其流 池」 〈 東國與 地 勝登 〉 1232 I • 高 宗 ) 9 年 , 蒙 古의 侵略 (1 2 3 ) )으로 首都룰 江華 로 옮 김. 1234 I • 崔 璃가 私第룰 造營 함. 園內 에 松梧을 많이 심음 . 1241 I • 李奎報 (1 168~ )死亡 . 東國李 相 國集을 발간함 . 〔日 本 〕 龜 山 기슭에 仙宮( 龜 山 殿 ) ◄ 1270 ► 元宗 I I 년 江華 에서 開 京 으로 천도 의 池庭園 이 완성됨 . 함 . 1274 • 忠烈 王 , 元의 王 女와 결혼함 . 〔中 國 〕 O 南宋 1200 年 代 •周藍 吳興 園 林 記 씀. 33 개의 園林 이 소개됨. • 花에 대한 雅稱 부여 0 曾 端伯의 花十友 0 張敏叔의 花十二客

姚家의 花五十客 O 元 : 世祖 中統十六年, 大都 에 궁 1270s 궐을 재 건함. 太液池롤 造營. [日 本 〕 • 京都에 南禪院庭固을 造營 함. 池泉 無水操布三尊石 . 達萊 石 있음. 1316 I ► 忠 患王 (1 294~1339), 元에서 天下 의 韻芳珍章을 얻어옴. 〈姜希顔의 • 構浜市에 稱名寺庭園을 꾸밈 . 1322 I ft花小錄〉 (淨土式庭園) • 夢窓國師, 鎌倉에 瑞泉寺를창 1337 I • 水原의 玄 福君 權候 池東쪽에 설 雲錦 樓 세움. 池는 方백묘에 이르며 荷花심어 • 夢窓國師, 京都의 西芳寺에 ◄ 1339 I 짐 . 있는 池泉을 改修하며 淨土 형 식의 禪利 정원을 꾸밉. ◊ • 室町時 代(1336~ 1573) 禪宗庭園 의 例 0 京都의 西芳寺庭園 Cl341 0 京都의 天龍寺 庭園 1345 〔中國〕 元 : 僧 天如惟則 獅子林 造 1342 營 (蘇州). 設計는 便 雲 林과 朱 德潤 이 맡음 . 太湖石에 의한 石 假山 있음. 〔中國〕 O 元나라 망함. 1367 O 明나라 建國 1368 1371 • 평양. 迎仙店의 옛터에 風月樓 세움. 樓 左右에 中島가 있는方 池가 있고 蓮이 심어질 • 恭愍王(13 51~74)2 껴 2 六月 泥峴 에 2 층의 八角殿을 세우고 두루 花木을 심어 案遊에 이용토록함. 花園도 만들었음. 1392 10 七月 高麗 가 亡하고 李成桂가 朝 鮮을 建國함. 壽昌宮 에서 郞位함. •園林을 관장하는 기관으로「東山

色」을 둠 • 이무렵 高麗의 遺臣인 全新民 전 라남도의 無等山 북쪽 기슭에 터 룰 잡고 隱居할 목적으로 獨守 亭을세움. 1393 • 二月 國號를 「朝鮮」이라고 함. 1394 • 「上林園」(園園룰 맡아보는 기관) 으三 古,::· 1395 • 太祖석三, 新朋 後苑에 못을 팜. 〔日本〕 南禪院 정원을 수리하고 ◄ I 1396 ► •漢陽으로 천도함. 못을 龍池라고 함. 1398 • 太祖 7 年, 牧使 金懷鍊이 海,J 1 i에 客館을 세움. 東軒에 上. 下池가 있고 水階殷 에 의하여 水流가 연결됨. 1405 I • 太宗켜三 三月 : 「山澤司」를 두어 山澤 津梁 苑園, 種植花木 둥 울 맡게 함. 1406 | • 昌德宮 東北隅에 解溫亭을 세우 고 亭앞에 못을 만듦. 1409 • 昌德宮에 廣延樓가 이룩되고 樓 앞에 못을 팜. 1412 나炅會樓가 완성됨. 그 주위에 못 을 팜. 〔中國〕 明 : 北京에 紫禁城 완성 ◄ I 1417 (제 3 대 永樂帝에 의함) 後園에 I 御花園있음. 1420 •世宗二年 六月 豊壤離宮의 水 閣이 완성됨, 上王이 兵曹에게 命하여 防牌補充으로 못을 파고 池上에 水閣올 짓게 한 것임. Cl420 나毛村 黃喜(1 363~ 1452) 南原에 流 〔日本〕 酸酷寺 三寶院 정원을 축 ◄ 1430 配(1 418~22) 中에 廣通樓를 세움. 조함. 1430S • 崔潤德( ? ~ 1446) 汶方池에 雙池 亭만듦 1434 • 南原府使 閔 汝恭이 廣通樓룰 고 쳐 지음. 1441 l • 日 本國이 世宗大王에 게 일본철

쭉 몇 盆올 공물로 보내음. 〈箕花小錄〉 1444 I •太守 吳瑾이 井邑 客館 西쪽에 못을 파고 洛城亭을 세웠으며樹 下에는 돌을 쌓아 계단을 만듦. 1446 • 河東府院君 鄭麟址가 廣通樓를 「廣寒樓」라 고쳐 부름. 〔日本〕 京都의 龍安寺 方丈에 柏 ◄ I C1450 • 安麻平浦大北君쪽 (언李瑢덕,위 에14 1&甄~解 14堂53 ) 別登이 山水 庭園 만듬 1450 를짓고 정원을 造營함. 14S1 • 世祖 2 年後苑에 新亭(琴露亭)을 세우고 亭前에 못을 파고 蓮을 심음. 1460 • 景福宮에 交泰殿을 지음. 1465 • 府使 李來夜, 江陵의 雲錦樓률 고쳐지음. 中島上에 대나무심음. 1460S • 昌寧에 成重卿, 後園 만듦. 累石假山, 淸泉, 飛澤, 松竹,花升 있음. 1466 • 世祖 12 年 上林園을 掌苑署로 고 침. 1474 • 姜希顔(1 417~ 1464) 養花小錄 (픕 山世橋 권 4) 을 씀. 1483 • 成宗 l 떠탁 世祖妃, 安順 王后동 3 대 과부를 위해 昌慶宮올 창건 합 l484 • 成宗 I~ 通明殿 後階上에 環琴 亭을세움. 1486 아成宗 17 年 盧守愼등束國輿地勝覽 올 엮음. [日 本〕 京都의 慈照寺에 銀閣을 ◄ 1489 준공함. 淨土寺로서 庭園온 巡 1503 ► 燕山君, 쩍:二月에 掌苑署로 하 觀式 書 院양식임 여금 坊內의 人丁을 동원하여 奇 (足利義政이 造營한 東山 山莊 花異草를 구하여 禁園에 심 게 함. 입) 1506 •燕山君 12 年 慶會樓池 서편에 萬 歲山을 만들고 山上에 五宮을 건

설하여 萬歲宮 蓬萊宮 日 月 宮, • 京都 의 大仙院션院 뜰에 禪僧 1513 萊珠宮 碧雲宮이라 이름함. 古嶽宗耳이 정원을 꾸밈 . 〔印度〕 무굴제국이 이룩됨. 1526 1530 • 中宗 25 年 李菩둥 新增東國輿地勝 봤을 간행함. 1533 • 中宗 28 年 企村 宋純(1 4 93~ 1583) 전 라남도 潭賜郡 鳳山에 1免 仰亭을 세움. 1530S • 梁山甫 瑞石山(無等山)北쪽 기슭 에 源淵園을 꾸밉 1552 • 姜翼 咸陽의 水東에 淮溪 합院 을 세움 . 정원에 汶方池 있음. 1557 • 李混 (15 01~70) 慶 北 退溪에 陶山 합院 세움 . 淨友塘과 節友社 있음. 〔中國〕 明 : 嘉靖年 1 버 ()522~ 1566) 에 Cl560 | ► 全羅道 親察使 鄭澈 南原府使 張 王獻臣이 抽政園을 造營함. 직 義國 과 함께 南原의 廣寒樓 앞에 園 〔日 本선〕 狀•의 織 田中信庭長池,와 將中軍島 있義음昭.의 ◄ 1569 I 池”룰橋 확 장만하듦고 3神 仙島를 축조합 二條城 庭園울 만들어줌. 1582 ► • 考葉 南彦紀 同福 沙坪村 에 垂 〔日 本〕 茶人, . 千利休 (1522~ 1591) ◄ 1591 I 給장園을 造營 함. 뾰 臣秀吉의 命으로 自 殺함. ( 茶 室庭園을 발전시킵) 〔中國〕 王世貞(1 528~93) 「遊金陵園 ◄ | 1500 年代 末 林記」엮음. 36 개 園林이 수록되어 있음. • 米萬鍾 北京城의 西北에 別 莊庭園 句園을 造짧함. 大池, 定訪 六折橋 月 台, 水上長廊. 太湖石에 의한 假山있고, 池 內에 白蓮이 심어집. 〔日 本〕 • 豊 臣秀吉 , 京都에 酸蘭寺 | 1598(~ 1610) 三寶院 庭園올 造營함.

3 島 가 있는 林 泉 池가 있음 . • 德 川 家康 이 디 床城에 二 rT)丸 Cl601 庭 函을 造상 함. 池中에 3 개의 섬이 있음 . (1664 年 에 完 成) 1614 I ► • 李 粹 光 (1593~1629) 芝峰類說 을씀 . 여 기에 「井 木 」 엷: 가 있음. • 京都 에 桂 離 宮울 造營 함 . ◄ 1624 池內에 3 神仙 島를 만듬 Cl630 ► 柳運( 1580~ 1643) 全南務安 · i出溪 에 • ,J堀遠) · I1 , 金 地院 정원을 만 1632 花 雪堂 정 원 을 造營 함. 方池안에 만듬 円 島 가 있고 池 岸 에 동백나무가심 • 金澤 에 玉 泉園 정원을 꾸밉. ◄ 1634 어짐. 玉泉園 은 築山林 泉 정원으로 서 壬辰倭 ?i l 때 豊臣秀吉 이 붙 Cl630 다貝以井, 潭賜 古西의 後山에 鳴 잡아온 金 時 省 의 아들(日 本 名 玉軒園林 造營 上, 下池 있고 紫 協田 九兵 衛直賢 ) 이 造營 한 것 藏樹 를 群 植 함. 임 ► • 仁祖 14 年 , 昌德宮 後園에 玉 流 〔中 國 〕 明의 計 成 (1583~1644) 園 治 를 1634 川 중심 의 遊樂園을 꾸밉 . 方池의 를 저술함 . 方島上에 淸發 亭 있고 岩盤에 曲水 渠와 飛流만듬. 1636 I • 鄭榮邦 (1577~ 1650) 慶北의 英 陽 에 敬 亭 과 主一齋 세우고 方 池와 四友 壇 만듦. 떠 다 (1585~1645) 長 物 ◄ | 1600 1년63대7 初 1 • 尹英 荀善 洞道(에1 58園7林~ 올16 7造1), 營 甫 함.吉 島의 志씀• (室盧 花*, 水石 , 翁 魚 , 찹盡 凡楊. 器具, 衣飾. 舟 車. 位置 香客) 1644 • 仁祖 22 年 昌德宮後園에 半月 池 를만듬 〔日本〕 • 智忠親王, 京都에 桂 離 ◄ 1649 池 岸 에 觀 撲 亭 있으며 池는 方 宮庭園, 대립遊式林泉庭園」 으로 池와 半月池로 구성될 완성함. 〔中國〕 明, 西苑인 北海 I 셔의 瓊華島 1651 山J:에 永安寺의 白塔올 세움 .

〔印 度 〕 Mu g hul 제국의 Shah Ja han( 在 1653 位 1628-1658) 이 王妃 Mum t az Maha 딸 추모하기 위 하여 Taj Mahal 炅廟를 지음. 十字形 의 canal 있음. 〔日本〕 • 德 川 家 綱 京 都에 修學 院 1659 離 宮 만들어 後水尾上皇의 山莊 으로 기중합 廻遊式林泉庭園있 음 . l668 1 , 甫吉 島 英 菩 洞의 無 洞 堂 • 德 )1| 頓 原 江戶에 小石川 後 ◄ 1669 東溪上에 曲水 堂 올 세움 . 樂園을 着 工함. (1629) 2 代 光 OO 가 완성. 明의 遺臣 朱 舜水의 도움이 큼. Cl670 I ► 李敏迪(1 62S~73) , 安 東 豊 山에 別 壁룰造 營 함 . 棟華亭과 3 島 가 있는 長方池있옵. Cl680 I ► 宋時烈(1 607~ 1689), 大田佳 陽 洞 • 松浦隆 信 과 鎭 信父子, 江戶에 | 1600 年 代末 | 가에 있南潤는緖 못舍이의 있庭음.園 을 꾸밀 中 島 迷萊園을 造 營 함 〔中國〕 淸 康熙 26 年, 離宮인 暢春 1687 園을完成합 (北京 西쪽 2.0km) 1692 I ► 昌德宮後園에 愛蓮 亭 池園만듬 . 方池의 中島上에 亭 을 세움. • 北京의 願和園을 改修함 . 1701 〔日本〕 • 柳 澤 保明, 江戶에 中國風 1702 의 六 義 園을 造 營 . • 德川綱豊 江戶에 浜離宮을 造 1101 I ► 肅宗 22 年 昌德宮 後園에 澤 水齋와 쌈 (i夕入式池泉廻遊정원) 英菩池 만듦 〔中國〕 淸 康熙 4~ 三, 圓明園올 着 工 C11770190 I ► ~-~(1 643~ 1715) 이 山林經濟롤 펴냄. (卷之一 卜居 卷之二種樹養 〔日本〕 京都에 仙洞御所룰 세움. ◄ C1740 I 花) 北池와 南池가 있는 池泉廻遊式 정원. 1745 I ► 申景濬 (1712~1781) 淳園花丹 雜說 (旅菴全 書 卷之十)펴냄.

1745-6 • 咸鏡南迫의 永興에 있는 君子樓 左右에 汶池 만들고 東池에는六 宜亭(1 745), 西池에는 雙勝亭(I 746) 〔中國〕 乾隆 12 年, France 人 神父 Beno it 1747 을세움. 에게 長春園 北쪽 圓明函離宮에 西洋式건축과 噴水룰 만들게 함. 造}갑은 )t al y의 선교사. Cas tig l ig one 에 의 뢰 함 • 이무렵 度北, 達城에 朴光錫 荷 [日 本〕 松平頓恭, 江戶에 栗林園 만 葉亭(別堂)세우고 中島가 있는 듬 (1875 年, 公園이 됨) 方池룰 만듦. 〔中國) France 人 선교사 Jea n Denis At tile t ( 宮庭面家)가 친구에게 보낸 北京의 円明園을묘사한서 한(1 749) 을 sir Harry Beaumon t이 •A Descrip tion of th e Emp e ror of Chin a's gar dens and Pleasure h-1755 I ► 뎅훑淵園固」가 판각됨 (崇禎紀元後 ousc near Pek i n 이 란 제목으로 三乙亥 淸和下洗) 英譯 London 에서 출판함. • W ill im Chambcrs(1 7 26~ 1796) 1757 가 中國 見|_lfjgc. 'Desig n of Chin e se Buil d in g s ,Furnit ur e,Dresses. --M achin ess,and U t ens i ls' 간행. Cl770 | ► 柳爾胃(1 726~1797) 求禮. 土旨面五 美里에 雲鳥樓 庭園을 造찰함 (大 r, 앞에 1 島가 있는 長方形池 있음.) 나갑乾,隆 (乾티隆점 41만 年듬,. 弘曆皇帝 (高宗) 11777767 | ► 正祖元年 昌德宮 後園에 宙合樓세 5 계단으로 된 계단식 庭園임. 움. 大石假山과 萩賞亭 小飛虹橋 1792 I ► 正祖 16 年 昌德宮 後園에 있는 澤 둥이 있음. 水齋를 改建하고 英容亭이라 改名 함. (英容池의 北岸丘上) 1794 I ► • 華城 城役중에 園池룰 많이 만듬. ®龍淵 C) 北池® 東池@)洛南軒池 (南池는 1796 年에 만듦.) • 尹皆甫(書有 1764~1821) 康津 道 岩에 別業인 「朝夕樓」정원造·!f, 3 島가 있는 琴高池 있음.

1808~ I8 • 丁若~Ii (1762~1836), 康津萬德山 에 있는 尹博의 山 亭 에 議居 중 에 中島型方池와 계 단상의 花培 〔日本〕 束睦和尙 江戶의 妙心寺안 1814 를 만듬. 에 東海庵庭園을 造장함. 三神 仙島를 나타낸 柏山水 있음. 1815 | ► 永安府院君 金祖淳 (1765~1831), 서 울 三淸洞에 玉 華亭 別莊 정원을 꾸밈. 1815 • 李壓 江陵의 雲亭 에 船橋莊과活 來亭 池園을 造營. 方島가 있는 方池가 있음. 1826 • 草衣 張意怖 (1786~ I86) 海南의 頭輪峰下에 一枝庵을 세 우고 上· 下池 만듬. CI830 •東腦圖가 만들어짐. 1837 • 憲宗 3 年 樂善齋를 준공함. 1830S •宮殿誌가 간행됨. 1800S • 徐有渠 (1764~1845) 林園經濟志 씀 (또는 林園十六志 라고도 함 . ) [日 本〕 水戶의 借樂園을 준공함. ◄ 1842 藝苑志(1 8~22 권)에는 (E(5E 중) 丹類(1 5 종), 花名致둥 있음. 1847 • 韓在 ~(1775~1818) 高麗古都徵을 저술함. 1856 • 小擬 許鍊(1 808~ 1893), 珍島의 尖察山 기슭에 雲 林閣과池園造 營 1857 • 昌德宮 樂善齋에 後園울 만듦. 〔中國〕 淸 : 圓明園이 英國과 프랑 ◄ 1860 (계단식 花階 있음) 스의 연합군에 의하여 파괴됨. 1862 •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沙坪에있 는 南彦紀의 垂給台 옛터에 沙 匡閔胃顯(1 808~1883) 이 臨對亭 園林을 造 營 . 上 • 下池 있음. 1864 • 領議政 金興根(1 796~ 1870) 서울 三淸洞에 別莊 造營. 玄對樓 月 泉亭, 中國式家屋. 六

茅卒 , 동나무시렁, 奇花異草 있 음 (l 浙 a 質 錄 〉 1867 • 高宗, 醉香樓룰 池內中島上에移 建하고 香遠亭이라 命名하고 산 〔日 本) 江戶時代(1 616~ 1867) 墓府政 1868 책과 遊樂空間으로 造營. 治 막을 내리고 明治維新시대로 들어감. • 岡山後園을 後樂園이라 고쳐 1871 부름. • 東京의 小石川 後樂園을 일반 1875 에게 公開함. 이 때 後樂園을 小石川植物園으로 고침. 〔中國) 淸 : 德宗, 蘇 111 에 있는 劉怒 1876 의 寒碧山莊을 손에 넣고 改修 하여 ”留園이라 고침. • 德宗, 西太后의 願和園울 재 1888 건함. 〔日本改〕造 함• .新 宿(~御90苑6)의 日本式 정원을 11889975 | ► • 國號를 「韓」으로 고침. •獨立門 세움. • 英國人 B rown 설계로 塔洞공원(_ 名 Pa g oda 공원 )만듬. 공원 안에 世祖 n 年(1 468) 때 만 돈 13¼ 石塔과 圓覺寺碑, 해시 계(仰釜日룡)있음. 〔中國〕 淸 : 兪林(1 821~ 1906) 蘇서 1 에 ◄ I Cl900 ► • 禹奎東( 1850 ---1 929), 경상남도 梁 曲固만듬. 山에 小開亭 山水園林을 꾸밉. 曲池와 曲水亭 있음. I 1901 • 德壽宮 石造殿 英國人 Sir Joh n Mclcr y Brown 에 의한 제의로 G. 〔日本〕 明治 36 年 東京의 日 比 野 ◄ I 1903 R.Hard i n g설계하여 工事착공하고 公園이 開園됨. 1906 년에 준공합 프랑스式 Su- nkcn garden 있음. • 新宿御苑이 Versa ill es 의 원 ◄ I 1906 ► 서울에 日 本의 統監府가 설치될 예 학교수 Henr i Ma rti n et의 자 문을 받아 現代式 공원으로 I 1907~8 ► 昌慶宮이 크게 改修됨. 改修됨. Fran ce;式과 英國式정 報漏閣온 動物園, 春塘臺는 植物

원이 만들어짐. 園 勸裝湯은 蓮池와 水 OO 이 造 첩 됨. 1910 I • 동물원과 식 물원을 昌座苑 이라 [日 本〕 • 「史蹟名勝天然記念物 保 ◄ 1919 | ► • 장命충名함단.( 英忠壇) 공원이 開園됨 . 存法」이 공포됨. 1921 • 사직 (社稷) 공원이 개원됨. (43.000 평 ) 〔日本〕 • 日本造園學會 創立. ◄ 1924 1929 •孝昌公園이 開園됨. (54,000 평) 1932 • 日 本人 原源t 「朝鮮新羅 臨海殿 庭園」硏究보고서 넬 (日本園藝學雜誌). 1933 • 朝鮮總督府制令 제 gi로 「朝鮮 寶物古蹟名勝 天然記念物保存令」 공포함. 1934 • 三淸公園 開園 (54,000 평 ) 1930S •南山公園을 開園함. 1945 • 日帝로부터 解放됨 .(8 월 IS 일) 1962 • I 월 10 일 文化財保護法 공포 . 1967 • 3 월 3 일 公園法法律 제 1909 호로 공 포됨. 1967 •智異山지역이 國立公園 제 1 호로 지정됨. (1 2 월 25 일) 1972 • 한국造景學會 創立(1 2 월 29 일, 初 代會長 金彰洙) 1973 • 서울大學校와 嶺南大學校에 造 景學科 創設. 1974 •서울 어린이大公園 준공 (5 월 5 일) 1978 • l~S 일 自然保護憲章 공포 . 1986 • 8 월 23 일 창경궁중건복원 공사준공.

재기 이,_

기 가―든 gar den 17 가마꾸라 日本 시대의 식물 129 강희 안 姜希顔 126, 273 객관정원客館庭園 91 건청 궁 사시 경 乾天宮 四時景 152 격구장擊包場 89 경 도잡지 京都雜誌 273 경림원瓊林苑 146 경 복궁원 景福宮苑 142 경 정 잡영 敬亭雜諒 198 경화도瓊華島 254 경회루지원 慶會樓池園 142 계관화鷄冠花 121 고려 가요 高麗歌諾 125 고산수柏山水 정원 32 곡수거 曲水渠 59 곡수당曲水堂 232 곡수연유구 曲水要遺構의 流速 65 곤명호昆明湖 57 과瓜 II8 관란사視潤寺 93 관람칭觀燈亭 I64 광통루廣通樓 248 광한루廣寒樓 247 괴 棟(회화나무) 68 교태전交泰殿 147 구룡지 九龍池 41 구풍연지 九品蓮池 4X 국菊 II 궁궐정원(고려) 8I 궁남지 宮南池 49

귀거래사歸去來辭 314 귀령각지원 龜齡閣池苑 84 귀문도龜文圖 272 규奏 ll9 근槿 무궁화 Ill 금고지 琴高池 243 금전화金錢花 ll5 기상서되식재팔영奇尙書退食齋八誌 98 . 기홍수奇洪 壽 98 김치양金致陽 96 L 낙가조 樂嘉漢의 정 원분류법 x84 낙서재 樂書齋 230 낙선재후원 樂善齋後園 x 낙양가람기 洛陽伽藍記 67 낙하담落霞潭 I48 난정고사蘭亭故事 19, 42, 59 납언기 南彦紀 265 낭음계郞哈溪 229 노단식정원露壇式庭園 3.l 노자공路子工 28, 39 녹군헌綠答軒 99 녹음정鹿飮井 244 농산별업 農山別業 241 누정원링 樓亭園林 246 C 다산사경칩茶山四景帖 209 다산초당茶山草堂 204

다산화사이십수茶山花史二十首 207 다조茶憲 209 단성團城 254 단우丹羽의 정원분류법 I85 담복 南 菊 72 당중지 唐中池 46 대봉대待風 臺 215 대홍사大興寺 92 도리桃李 67 도연명 陶淵明 67, 314 독락원獨樂園 99 동桐 II2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IOI 동백冬柏 II9 동지東池 84 동천석실역 洞天石室域 233 근 르네상스의 정원 3I □ 만불산萬佛山 72 만세산정원萬歲山庭園 145, 146 만수산정원萬 壽 山庭園 254 만수정 萬 壽亭 86 만춘정萬春亭 88 망해루望海樓 49 매梅 68 매괴政魂 124 , 275 명옥헌원링 鳴玉軒園林 256 모정茅亭 88 목단牧丹 69 목필화木筆花 117 무민당無情堂 232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峯 53

문수원文殊院의 南池 94 물보物補 275 민주현 閔 胃 顯 264 닌 반송盤松 107 반월지역 半月池域 164 방장산方丈山 293 방장정方丈 亭 251 백柏 70 백량대柏梁 臺 18, 27 백제지 百濟池 39 백화정 百花 亭 297 범상정 ? 芝 崩亭 65 별당정원別堂庭園 I96 별서정원別맏庭園 211 별업정원別業庭園 241 보한집補閑 集 I25 봉래산蓬萊山 293 봉상화鳳祥花 I2I 부거英渠 71 부용동원림英容洞園林 227 부용정英容 亭 I58 비류삼백척 飛流三百尺 168 비폭飛 澤 206 비해당 48 영 匠辭堂四十八泳 277 빙옥지 氷玉池 175 빙천氷泉 175 人 사계화四季花 II4 사랑정원舍廊庭園 191 사문정기 四輪亭記 100 사문유취事文類衆 79 사우탄四友壇 198

사원정원寺院庭園 92 사절우四節友 27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 160 산다山茶 202, 203 산림경제 山林經濟 272 산수유山萊英 72 삼봉三峯 207 삼인당三印塘 41 삼일곡수三日曲水 59 상량정上涼亭 172 상링원上林苑 18, 46 상천조원象天造園 252 상춘정賞春亭 87 생명의 나무 17 서대초害帶草 II7 서상화瑞祥花 II5 서석지 瑞石池 198 서유거 徐有渠 277 서총대 瑞慈臺 156 서하당정원樓霞堂庭園 190 석가산정원石假山庭園 86 석복헌錫福軒 l73 석죽石竹 109 석창포石舊蒲 II3 선교장船橋莊 26I 세심석 洗心石 265 세연정 洗然亭 235 소가노우마꼬蘇我馬子 39 소쇄원還漏園 211 소쇄원도浦漏園圖 2II 소쇄원 48 영 灘濃園四十八泳 224 ~27 소영주小溫洲 173 소요정 消造亭 168 송松 70 송도풍수松都風水 77 수강재壽康齋 I7I

수다사水多寺 94 수도원정원修道院庭園 28 수류垂柳 106 수륜대垂給臺 265 수미산須彌山 28, 39 수심양성修心養性 278 수창궁복원壽昌宮北園 86 순원화훼잡설 淳園花井雜說 적 12 순천관順天館 9I 숭교사崇敎寺 93 승로반承露盤 18, 27 신경준 申 景浦 272 신선사상神仙思想 18, 26 신이화辛夷花 II7 심덕화沈德和의 원링 園林 294 십자형수거 十子形水渠 29 십장생十長生 295 。 아미산굴뚝 I’° 아미산원峨幅山園 147 안민영安汶英 313 안압지 應鴨池 51, 53 안하지 安夏池 53 안학궁安鶴宮 45 안화사安和寺 93 애련정 愛蓮亭 I6I 애양단愛陽壇 216 앵도嬰桃 II4 야락금전화夜落金錢花 u6 양류楊柳 49 양산보梁山甫 2xx 양성정養性亭 87 양주화방록楊州 畵訪錄 140 양화소록 養花小錄 270 어류화御留花 I20

어부사시조漁父四時調 3I7 어수당魚水堂 161 에덴동산 17 에 디 슨 Jos ep h Addis o n 1672~ 1719 19 엘 리 엇 Charles W illiam eli ot 20 연목당燕默堂 99 연복정 延福亭 89 연의지 連游池 99 열성어제 列聖御製 277 열천i列泉 182 영주각溫洲閣 2 영주산溫洲山 293 영지影池95 영천동益泉洞 99 영화당映花堂 158 오곡문五曲門 217 오미동가도五美洞家圖 193 오작교烏鶴橋 251 오홍원림기吳興園林記 79 오희도吳希道 259 옥류천역玉流川域 I68 옥매玉梅 I2I 옥호정玉蓋亭 I2, 297 옹산별업 翁山別業 242 용도서龍圖堅 272 우상곡수羽惟曲水 59 우상수파羽崩隨波 58 운금루지원雲錦樓池園 3o9 운조루雲鳥樓 191 원림園林 23 원명원圓明園 140 원야園治 62, 138 원유苑園 23 원정園亭 15 원희原混 51, 55. 월지악전 月池嶽典 53

위성류滑城柳 195, 273 유금응제원기 遊金陵諸園記 I38 유독공柳得恭 273 유배정 流杯亭 79 유상곡수流崩曲水 60 유서석록遊瑞石錄 190 윤선도尹善道 227 윤언문尹彦文 87 읍청당抱淸塘 266 이가환李嘉煥 275 이공승李公升 97 이소원기理小園記 100 이수광理粹光 27I 이스람정원 29 이자현의 문수원文殊院 94 이집트의 정원 I5 일본철쭉 270 일영대 日影臺 165 일지암一枝庵 2IO 임금林橋 II8 임대정기 臨對亭記 264 임대정원림 臨對亭園林 264 임류각臨流閣 47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I4I 임천정원林泉庭園 32 임해전臨海殿 50 x: 자경전의 十長生圖 I53 자미나무 紫薇 125, 296 자오화子午花 Il6 작약苗藥 110 장물지長物志 I38 장미薔薇 II2 장민숙 張敏叔의 花十二客 80 장의국張義國 249

장춘각藏春閣 I82 전치육랑 田治六郞 75 절우사節友社 3I3 정다산전서 丁茶山全書 276 정림사定林寺의 쌍지 灰池 49 칭약용丁若鏞 204 칭우당淨友塘 313 칭원 庭園 23 정원의 개념 I5 정원庭園의 용어 2I 정자亭子 87 정철 鄭澈 249 조석우朝夕樓 24I 조석루기 朝夕樓記 242 조선부朝鮮賊 271 조선시대의 조경식물 282 존덕정 尊德亭 I65 졸정원기 抽政園記 I38 죽竹 7I 중미정 衆美亭 88 증단백 曾端伯의 花十友 80 지당화地業花 I20 지봉유설 芝峯類說 I38, 27I 지혜의 나무 I7 天: 창덕공원 昌德宮苑 154 창포舊蒲 ll3 칙서정 淡署亭 99 척연정 淮現亭 245 천지조산察池造山 47 첩석위산壘石爲山 86 청심정 淸心亭 I75 청연각정원淸惡閣庭園 86 청의정 淸漏亭 I68 청풍각淸風閣 9I

챔 버 -즈 Si r W illi a m Chambers 20 최충헌崔忠獻 97 취향교醉香橋 151 취향정 醉香亭 151 측금전側金錢 ll9 치자나무 72 침전조정원鹿殿造庭園 32 = 쾨펜 Kop pe n 25 크라우스트럼 Claustr u m, Clois te r 28 E 태°석지 太液池 46 태평정 太平亭 87 태호석 太湖石 IOO 택수재 澤水齋 I59 터 나드 Ch risto p h er Tunnartl 20 테베 Thebe 의 정원 I5 통명전通明殿 I78 통천대 通天臺 I8 퇴식재팔영 退食齋八諒 99 고 파한집破間集 124 평원정 平遠亭 171 평천산거계자손기平泉山居戒子孫記 2I5 평천산장平泉山莊 42 평천장고사平泉莊故事 213 포도蒲桃 m6 포석정均石亭 59 풍楓 114 풍류생활의 장 3I5

피향지 拔香池 265 -lo 하荷 7I 한양천도풍수 135 한인지 韓人池 39 함월지 函月池 I48 함허정 函虛亭 3IO 해온정 解溫亭 I56 해 유록 海遊錄 139, 297 해주객관海州客館 3 해당海業 II7 행 杏 70 행기 行基 40 향립정 香林亭 9X 향원정 香遠亭 I 홍만선洪萬選 272 화계 花階 172, 296 화림원華林園 46 화목구동풍제 花木九等品第 275 화목구품 花木九品 270

화문장花紋培 153 화설당花雪堂 200 화암기 花庵記 274 화암수록花庵隨錄 273 화엄사花嚴寺 93 화원花園 8I 화자강華觜岡 I46 환벽당環碧堂 187 환취정環菜亭 178 활래정 活來亭 26I 활수랙 活水來 263 황촉규黃蜀要 n8 황희黃喜 248 회檜 Ill 회랑식중정 廻廊式中庭 28 회화나무棟 68 훗바-드 Hubbard 12, 20 후원後苑 155 후원後園 186 흉회쇄락 여광풍제월胸懷源落 如光風 靈月 213

鄭騰呼·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및 동대학원 졸업 농학박사(「이조시대의 정원에 관한 연구」) 현재는 전남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문공부 문화재전문위원 논문으로는 「한 • 일 전통정원의 비교연구」 「한국정원의 池塘 형태 및 구성에 대하여」 외 다수 한국의 정원 대우학술총서 인문사회과학 20 초판 펴냄 —198 6 년 I2 월 I5 일 • 4 쇄 펴냄 - I99I 년 2 월 I5 일 • 지은이_鄭騰許 펴낸이-朴孟浩 펴낸곳_民音社 출판등록 1966. ,. 19 제 I·I42 호 우편대체번호 01004'23282 은행지로번호 3007783 '·I20 서울 강남구 신사동 ,06 번지 강남출판문화센터 5 층. '·2003~' (편집부) ,1,-2000---2( 영업부) ,.1, -2007, 2101( 팩시밀리) Print e d in Seoul, Korea 값 6,`-·5 00 원

대우학술총서(인 문 사회과학) l 韓國語의 系統 김방한 2 文學社會學 김현 3 商周史 윤내현 4 A間의 知能 황정규 5 中國古代文學史 김 학주 6 日本의 萬葉集 김사엽 7 現代意味論 아익환 8 베트남史 유인선 9 印度哲學史 걸희성 IO 韓國의 風水思想 최 창 조 II 社會科學과 數學 이승 훈 12 重商主義 김광수 13 方言學 이익섭 14 構造主義 소두영 15 外交制度史 김홍철 16 兒童心理學 최경숙 17 언어심리학 조 명한 18 法 사회학 양전 19 海洋法 박춘호 • 유병화 20 한국의 정원 정 동오 21 현대도시론 강대기 22 이슬람사상사 김정위 23 동북아시아의 岩刻畫 황용 훈 24 자연법사상 박은정 25 洪大容評傳 김태준 26 歷史主義 이민호 27 인구어 비교언어학 김윤한 28 中國古代音韻學 문선규 29 韓國의 住居民俗誌 김 광언 30 한국의 고문서 허홍식 31 역사비 교 언어학 김방한 32 묵자 김학주 33 영국혁명의 수평파운동 임회완 34 性格 김경회 35 중국의 考古學 최무장 36 歷史의 方法 양병우 37 朝鮮時代地方行政史 이수건 38 한 국 女俗史 김용숙 39 한국農學史 이춘녕 40 한국의 家族과 宗族 김광규 41 제 3 세계 심상필 42 코란의 이해 김용선 43 시베리아 개발사 이철 44 스페인 문학사 김현창 45 영어사 김석산 46 어원론 김방한 47 조선의 서 학사 강재언 48 한국음악학 이강숙 49 증국언 어 학 문선규 50 스포츠 심리학 류정무 • 이강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