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피 니 건 Jac k Fin e g an 미국 버클리의 태평양신학교 Pacif ic School of R elig ion 및 연합신학대학 원 The Graduate Theolog ical Un i on 의 신약 역사와 고고학 명예교수 . 일 찍이 1934 년에 베 를 린 대학교에서 신학 학위 를 우등 ma g nacumlaude 으 로 취득했으며, 고대 근동 지역의 고고학과 역사에 관한 역저를 다수 집필함 . 저서 『 세계 제종교의 고고학 The Archaeolog y of World Re ligi ons 』 『고대 로부터 바 쳐 오는 빛 ligh t from the Ancie n t Pas~ 』 『 성 경 연 대 기 편 람 Handbook of Bib l i ca l Chronolo gy』 『 신 약 고고학 : 초기 기 독교 사도 들의 지 중해 세 계 The Archaeolog y of the New Testa m ent : The Medit er ranean World of the Early Chris t i an As p os t les 』 『고대 중동의 고고학 역 사 Archaeolog ica l Hi st o r y of the Ancie n t Mi dd le East 』 『 신 화와 신비 : 성경 세계의 이방 종교 개론 My th & My s te r y : An Intr o ducti on to the Paga n Reli gion s oft he Bib l i ca l Worl d_』 등 남대극

The Archeolog y of the New Testa m ent The Li fe o f Je sus and the Beg inn in g of the Early Church by Ja ck Fi ne g a n Cop yrigh t © 1992 by Prin c eto n Univ e rsit y Press All rig h ts reserved. Korean Translati on Cop yri g h t © 1998 by Mi nu msa Publi sh in g Co. , Ltd . Korean tra nslati on edit ion is pu bli sh ed by arrang e ment wi th Prin c eto n Univ e rsit y Press, 이 책의 한국어 판 저작권은 Pri nc eto n Univ e rsit y Press 와 독점 계약한 (주)민음사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칙물이므로 무단전재와무단복제를 금합니다.

신약성서의 고고학 I

잭 피니건 지음 남대극 옮김 딘욥^t

서문 이 책은, 팔레스타인을 방문한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알려진 첫 순 례자 사르디스 (Sar di s, 사데)의 멜리토 Me lito를 추모하여 그에게 헌 정함이 마땅할 것이다. 그는 소아시아의 기독교 지도자로서 160 년 〈동방으로 가서 이 일들이 전파되 고 행해진 장소 t 6 Jt o c;로 왔다〉. 우 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그보다 앞서 그와 같은 순례를 했을 수도 있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른 것은 분명하다. 일찍이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큰 기독교 대학의 학생이었던 갑바도 기아의 알렉산더는 212 년에 〈기도를 드리며 그 장소들을 조사할 목적 으로〉 예루살렘으로 갔다. 멜리토의 경우에서처럼 그 〈장소들t 6 Jt O t〉 이란 거룩한 역사의 현장들이었으며, 〈조사in ves tig a ti on 〉란 말은 히 스토리아 t o -r o pi. a 로 탐구함으로써 배우는 것을 의미하며 〈역사hi s­ t o ry〉라는 영어 단어의 어원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알렉산더 와 함께 공부하던 동료 학생이었고 후에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우두 머리가 되었으며, 그후 팔레스타인에 영주한 오리게네스 역시 몇 년 뒤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발자취를 탐구함으로써 배우기 위하여 어떻게 그 장소들을 방문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방법으

로 그가 얻은 정보는 오리게네스 자신에 의하여 그의 주석과 변증에 관한 학문적인 저작들에 사용되었다. 이러한 연관 속에서 그는 이따 금씩 언급하기를, 하나의 주어진 장소에서 무엇인가가 〈가리켜 보여 졌다 6c t KVU t a t〉라고 한다 유세비우스 Euseb i us 역시 지리적, 및 역 사적 정보와 관련하여 이 단어 [8c t KVU ta t]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 데, 이 모든 정보를 자신의 유명한 『지명록(地名錄, Onomas ti con) 』에다 수집해 놓았다. 이와 같이 동일한 구절을 사용하는 것은, 많은 경우 에 있어서 그의 정보가 오래전부터, 곧 그 동일한 사물들이 이러한 조사 활동에 참여했던 그의 많은 선배들에게 가리켜 보여지던 시대 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r 연대순에 의한 고대 자료 목록 Chronolog ica l Lis t of Anci en t Sources 」 에 나타난 많은 다른 사 람들에게 있어서,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바로 그 현장에서 예수 와 그의 초기 추종자들의 역사에 관하여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조사 롤 통해 배우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이와 같은 조사는 이러한 사 람들에게 그들이 기독교 신앙의 사실들에 대하여 중거하는-어떤 이들에게는 순교의 경지에까지 이르도록 하는一_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깊은 일로 여겨졌음이 분명하다. 그와 같은 홍미를 가진 순례자 들과 다른 사람들이 내방하는 일과 함께, 팔레스타인에 있는 교회의 초기 몇 세기 동안의 전승의 계속성을 주목하는 일도 중요하다. 이 러한 전승의 계속성은, 「유대계-기독교인들J udeo-C hri s ti ans J이란 부분에서 기술된 대로 유대인의 배경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계속적 으로 존재했던 사실과, r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들의 명단과 그에 관 한 해 설 Lis t of Bis h op s of the Jer usalem Church with Ex pla nato : ry Commen t s 』에서 요약된 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계속해서 관련된 사실, 그리고 r 초기 교회의 축제일 개요 Ou tlin e of Festiv a ls of the Early Church 』에서 살펴본 바대로 기념적인 예식 준수를 확

립한 사실 둥에 의하여 제시되고 있다. 현대에 와서 신약 고고학도 〈이 일들이 전파되고 행해진 장소〉에 서 조사를 실시하는 일에 관계해 왔다. 에드워드 로빈슨 E . Rob i nson 은 1 8.3 8 년과 1852 년에 자신이 팔레스타인을 여행한 것에 기초하여 기 록한 『 성경 연구 B i bl i cal Researches 』에서 신구약의 많은 유적지들에 관하여 논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탐사기금, 예루살렘 소재 영국고고학회, 예루살렘 소재 미국동양연구학회, 예루살렘에 있는 도미니크 교단의 프랑스 성경 및 고고학 연구원과 프란체스코 성경연구소, 요르단 정부의 고대 역사부, 이스라엘 정부의 고대 역사 및 박물관부, 히브리 대학교의 고고학부, 이스라엘 탐사학회, 그리고 다른 기관들과 개인들의 활동은 신약과 초기의 팔레스타인 기독교 와 그것의 환경과 관련된 유적지들 및 물품들과 적어도 부분적으로 는 관계가 있었다. 고고학은 그 과정에 있어서 가능한 한 엄격하게 과학적이어야만 한다 . 그러므로 발견되고 취급되는 것들은 유형적인 것들, 명각(銘 刻), 물품, 무덤, 건축의 유적,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들이다. 이것들 은 그 자체로 당연히 조사의 적절한 주제가 된다. 물론 고고학은 단 순히 이것들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또는 이것들이 문화사나 예술사 등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로 인하여 그것들에 관심을 가질 수 가 있다. 이것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구약이나 신약의 성서적인 신앙 에 본질적인 것이 되지 못함이 분명하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 모두 의 성서적 신앙이 특정한 시대와 장소들에서 일어났던 사건들과 관 계하고 있는 한, 그 시대들과 장소들에 빛을 던져줄 수 있는 자료들 의 일부 또는 전부를 조사하는 것은 중요하고도 타당한 일이다. 따라서 본서는 주로 팔레스타인에서 발견된 것들 가운데 예수의 생애 및 초기 기독교의 존재와 연관성이 있거나 그것에 빛을 던져주 는 것은 어떤 것이든 다루고 있다. 고고학적 유적들과 물품들은 관련

된 약간의 그림과 지도와 구도와 함께 사진으로 제시되었고, 위에 언 급된 것들과 같은 고대의 자료들은 이러한 물품들과 유적지들을 확 인하고 해석하는 일에 도움울 주기 위해 신약과 함께 활용되었다. 본 서의 목적은 오리게네스가 표현한 것과 동일한 것, 즉 〈 예수와 그 제 자들의 발자취를 탐구함으로써 배우는 것〉이므로, 본서가 제시하는 순서는 예수와 그의 최초의 추종자들의 생애에 관하여 신약-주로 복음서 -에 있는 기록들의 순서와 대체로 같은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우리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연구한 다는 것을 뜻한다. 먼저 침례자 요한과 관련된 유적지들을 조사하고 그 다음에 베들레헴과 나사렛 사마리아와 갈릴리, 데카폴리스 도시 들의 일례로서의 제라쉬, 로마 시대의 수도 가이사랴, 여리고, 감람 산, 예루살렘 그리고 엠마오로 옮겨갈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거룩한 유적지의 절정을 이루는 곳은 〈성묘 교회〉인데, 이것은 초기에는 〈아나스타시스 Anas ta s i s 〉, 죽 〈부활 교회〉로 알려져 있었다. 이곳에 있는 갈보리의 반석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예수의 무덤은 바위가 깎여나가고 또 그 위에 세워지고 하여, 이러한 공사들이 있기 전에 그것들이 어떤 모양이었는지를 알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는 초기의 상황을 상상하여 그 무덤을 가상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한 댜 그후에 우리는 고대 유대인의 매장지들에 관한 추가적인 정보를 계속해서 수집해 나갈 것이다. 이것은 방금 언급한 무덤의 재구성에 관한 시각을 제공해 주고, 또한 우리의 과제의 마지막 부분인 예수 의 최초의 추종자들이 그 분에 관한 유형적인 혼적들을 남긴 것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준비시켜 준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표의 역사와 묘비들에서 나타나는 이 표의 최초기의 실례들이 적어도 기 독교 신앙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에 관하여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개정판서문 이 책의 원판은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에 의하여 1969 년에 출판 되었으며, 본 개정판의 완성된 원고는 1990 년에 발행자에게 제출되 었다. 그 사이 20 여 년 동안에 역사적 팔레스타인과 관련된 유적지 들에서 많은 고고학적 발굴이 있었고, 또한 학술지와 서적들을 통하 여 관련된 출판물이 많이 나왔다. 이 개정판을 통하여 바라는 것은 본인이 제시하는 바가 가장 중요한 새로운 발견들 및 논의들과 보조 가 맞도록 하는 것이다. 특별히 본 개정판에는 새로운 발굴들과 함 께 이미 다루어진 발굴 지대들에 대한 새로운 논의들이 증보되었는 데, 여기에 포함된 주요 사항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베들레헴 : 고대의 마울의 주변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목자의 들 헤로디움: 헤롯 대왕의 궁전-요새와 매장지, 그리고 초기 회당 나사랫: 〈성 요셉 교회〉 밑에 있는 침례탕과 새로운 〈잉태 고지 교회〉 밑에 있는 존귀히 여김을 받는 석굴들 가나: 키르베트 카나Khirb e t Q ana 와 케파르 켄나 Ke f ar Kenn a/카 름 에르-라스 Kann er-Ras 에 있는 서로 다른 위치의 유적지들 디 베 랴 : 〈함마트 티 베 리 아스 Hammath Tib erias 회 당〉

막달라: 로마 시대의 마을의 윤곽과 초기의 막달라 회당 엣』갑가 e t -Tab g ha: 예수 시대의 평지의 상태와 후기의 상태 비 교, 그리고 〈오병이어 교회〉에 있는 모자이크에 대한 새 연구 가버나움: 회당과 〈베드로의 집〉 쿠르시 Kursi : 「돼 지 이 적 Mirac le of the S wi ne 」 의 기 념 가이사랴 : r 갑궁전(i!J甲宮殿, Promonto r y Palace) 」과 미트래움 예루살렘 : 성전산 Tem p le Mount 주위의 발굴 , 〈 불탄 집〉의 발굴, 「카르도 막시무스 Cardo M axim us 」의 발굴 ·예루살렘 : 〈성묘 교회〉 밑의 발굴 시온 산 위의 부자들의 가옥 과 엣세네인의 진영 발굴 엠마오: 서로 다른 위치의 유적지들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주제들이 근래의 출판물과 논의의 조명 아래서 새로이 다루어졌는데 , 여기에 포함된 사항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r 사해 두루마리 Dead Sea Scrolls 」에 관한 새로운 연구들. 예수의 생애와 초기 교회사의 기록에 남은 유대계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 독교인들의 위치(할례당 출신 예루살렘 감독들과 이방인 출신 감독들 의 순서를 포함하여). 예수의 생애의 날짜들과 관련된 초기 교회의 축제들. 헤롯 대왕의 생애와 예수의 생애의 연대에 관한 문제들(예수 의 탄생, 봉사, 죽음의 날짜에 관한 전통적인 이론들과 급진적인 새 이론 들을 포함하여). 『마이크로그래픽스mi cro gra phi cs J의 발견으로 추출 한 연대들. 고대 예루살렘의 성벽들과 지대들. 베데스다 못 Pool of Be the sda 에 관한 이해. 프래토리움 (Prae t o ri um, 브라이도리온 : 집정관 의 관정-역주)의 위치. 프래토리움으로부터 갈보리까지의 예수의 행로. 갈보리의 반석의 역사. 예수의 무덤의 역사. 〈부활 교회(아나스 타시스)〉의 역사• 〈하기아 시온 교회〉의 역사. 유적지들과 물품들은 거의 모두 저자가 직접 보고 연구한 것들이

다. 다수의 사진들은 저자 자신이 찍은 것들이고, 다른 사진들은 자 료들로부터 모아온 것들인데, 차용한 것들에 대해서는 각 부분의 끝 에 있는 주석에 감사의 말을 적어놓았다. 전에는 켄터키 주의 루이 빌에 있는 남침례교신학교에 있었고, 지금은 미시시피 주에 있는 미 시시피 주립 대학교의 콥 고고학연구소에 재직하는 제리 바더먼J. Vardaman 교수는 이 책의 본문과 참고 문헌들에 포함된 많은 사진 들과 제안들을 제공해 주었는데(보통은 그의 이름이 첨부되어 있음), 이것에 대하여 그에게도 사례의 말씀을 드린다. 7, 19, 33, 41, 53, 77, 107, 138, 143 항의 지도들과 구도들을 제도해 주신 이불린 빙험 E. Bin gh am 씨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독자들이 이 책을 손에 들고서, 실제적으로 또는 상상과 연구를 통하여, 〈동방으로 …… 이 일들이 전파되고 행해진 장소로〉 가게 되 기를 삼가 염원하는 바이다. 잭 피니건

한국어 판저자서문 본인이 한국의 삼육대학교 교무처장 겸 성서 신학 교수인 남대극 박사로부터 본인의 저서 『신약 고고학: 예수의 생애와 초기 교회의 시 작 The Arch :zeo log y of the New Testa me nt : The Lif e of Jes us and the Begi ,nn in g of the Early Church 』 의 개 정 증보판을 한국어 로 번역하여 출판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본인은 그것 울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이 일은 본인의 개인적인 승락 과 함께 판권 보유자인 뉴저지 주, 프린스턴 시에 있는 프린스턴 대 학교 출판소의 허락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번역판의 형태 를 통하여 한국에서 본인의 책을 읽는 분들에게 유용한 책이 되기를 희망하면서, 그곳에서 성경 및 고고학 연구에 종사하는 분들에게 삼 가 본인의 인사를 전하는 바입니다. 1994 년 9 월 6 일 잭 피니건

옮긴이 서문 성경 고고학 분야에서 현대판 고전이라 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 도의 활동 무대였던 팔레스타인 고을들에 대한 역사적 연구의 경전 과도 같은 본서를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실로 엄 청난 작업이었댜 내용의 방대함은 말할 필요조차 없고, 344 개에 달 하는 항목들에 관한 지금까지의 역사적, 고고학적 연구의 결과들을 총망라하여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철저하게 탐색한 석학 잭 피니건 의 압도하는 탐구력 앞에서 역자는 번번이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역자가 이 책을 처음 대하게 된 것은 1980 년대 초반에 미국 미시 건 주에 있는 앤드류스 대학교에서 학위 과정을 이수하던 도중이었 다 . 그리고 나서 역자는 19'& 년 초에 당시 세계적인 고고학자이던 지크프리트 혼 S. H. Hom 박사의 지도 아래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4 주간의 성지 현장 탐사 과정에 참가하면서, 성경 고고학 연구를 위 한 또 하나의 탁월한 교과서 인 키드 스코빌 K N. Schovi lle 교수의 Bib l ia: zl Arcmeolog y in Focus (Grand Rapi ds : Baker Book House, l fJ7 8) 와 함께 본서가 문자 그대로 백미요 압권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후 역자는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학 및 대학원 학생들과

목회자들을 인솔하여 몇 차례 성지 현장 수업을 지도하면서 이런 연 구서들이 우리말로 출판되기를 간망해 왔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대우재단은 이 책을 번역해야 할 학술 도서로 선정하였고 감사하게 도 그것을 번역하는 특권을 나에게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지난 4-5 년간을 이 대작과 씨름하는 희열과 곤고 속에서 보내고, 이제 상재 롤 위한 마지막 손질을 끝내게 되었다. 번역의 초반에는 본서의 초판인 1969 년도 판을 대본으로 삼았으 나, 1992 년에 비교적 대폭적으로 확대된 개정 중보판이 나와서 대본 을 그것으로 바꾸어야만 했고, 중보된 부분을 새로이 번역하여 보충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본서의 원본에는 고고학뿐만 아니라, 고대 역사, 지리학, 문헌학, 서지학, 사본학(寫本 學 ), 미술사, 건축학, 목공술 , 석공술, 장의( 葬 儀) 둥둥에 관한 수많은 전문 용어들이 사용되어 있으며, 그중에서 더러 는 아직도 마땅한 우리말이 없는 것들이 있다. 따라서 독자들의 이 해를 돕기 위하여 본인은 생소한 어휘나 처음으로 옮겨진 용어들이 나올 때에는 괄호 안에 영어 또는 다른 원어를 삽입하였으며, 경우 에 따라서는 간단한 어휘 설명을 첨부하였다. 원래 이 책은 신학 석사 이상의 대학원 과정을 위한 교재 또는 고 도의 전문 연구서로 저술된 것이기 때문에, 원문에는 히브리어, 아람 어, 헬라어, 라틴어 등으로 된 단어들과 문장들이 음역이나 번역 없 이 그대로 인용되거나 사용되어 있다. 하지만 이 우리말 번역판에는 필요에 따라 그것들을 읽는 법과 그 말의 의미를 첨가하였다. 신약 고고학은 세월 속에 감춰진 과거의 역사, 특히 예수 그리스 도의 구속(救蹟) 사건의 현장들을 역사적으로 확인하고 재현시키는 학문이요 작업이며 하나의 과학이다. 이 책에서 다루어진 사항들은 모두가 지금으로부터 약 2,000 년 전에 발생한 위대한 역사적 사건, 죽 십자가의 사건과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련된 것들이다. 우리는

바로 그 사건의 중요성과 그것이 초래한 변화의 효험 속에 살아가면 서 그것이 일어난 땅을 순례하고 탐사하고 발굴하고 연구한다. 이 책이 바로 그 위대한 사건의 참된 뜻을 깨닫고 믿는 한국인들에게 사랑받는 하나의 길동무가 된다면 역자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끝으로 이 번역서에서는 원서의 체제를 상당히 변경했음을 밝혀 둔댜 원서는 한 권으로, 사진 자료와 그에 대한 설명(본문) 및 참고 문헌, 사진 출처 순으로 짜여져 있는데, 번역서는 사진과 참고문헌, 사진 출처를 II 권에다 묶어 두 권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원서의 규격 과 번역서의 규격이 다르기 때문에 취해진 기술적 조치로서 원서의 의미와 형식을 최대한 살리기 위한 것이다. 또한 「연대순에 의한 고 대 자료 목록」 및 r 약어표』 등 여덟 종류의 예비적 사항들이 원서에 서는 목차와 본문 사이에 놓여 있으나 이 번역서에서는 I1 권의 부 록으로 처리하였다. 이 번역서가 원작의 고매한 품격과 그옥한 가치를 조금이라도 손 상함이 없이 이 땅의 성경학도들과 고고학도들에게 전달할 수 있기 를 희망하고, 아울러 이것이 성지를 순례하거나 여행하는 이들에게 는 자상하고도 해박한 지식을 제공하는 안내서가 될 것을 확신하면 서, 이제 이 작품을 강호제현 앞에 펴내는 바이다. 1998 년 12 월 남대극

신약성서의 고고학 I

차례

서문 · V

개정판 서문 ·IX

한국어 판 저자 서문 ·XII

옮긴이 서문 ·Xlll

일러두기 · XXXII

1 침례자 요한의 생애

1 아인 카림과 〈침례자 성 요한 교회 〉의 개관 3(2)

2 아인 카림에 있는 〈성모 방문 교회〉 5(3)

3 아인 카림에서 나온 아프로디테의 대리석 조상(影像) 7(3)

4 유대 광야 개관 8(4)

5 키르베트 쿰란과 「사해 두루마리」 9(5)

6 『훈련 편람』의 제VIII 칼럼 16(5)

7 하부 요단 계곡의 지도 18(6)

8 〈성 요한 수도원〉 근처의 요단 강 19(6)

9 〈성 요한 수도원〉 근처의 요단 강에서의 침례 20(7)

10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서의 여리고 지역 23(8)

11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서의 요단 강 하류 25(9)

12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서의 요단 강 상류 부분 27(10)

13 헤브론 근처 성 요한 사막의 비잔틴 교회에 있는 침례탕과 후진(後陣) 29(11)

14 마캐루스 30(12)

* 괄호 안 숫자는 각 항의 사진 자료가 있는 I1권의 쪽수를 가리킴.

15 사마리아―세바스테에 있는 〈침례자 요한 교회〉 33(13)

16 사마리아-세바스테에 있는 〈침례자 요한의 머리 발견 교회〉 35(14)

2 예수의 생애

베들레헴

17 베들레헴의 단지(段地)로 된 경사면 41(16)

18 남쪽에서 본 베들레헴 42(17)

19 베들레헴 근처의 헤로디움에 있는 요새―궁전의 구도 42(18)

20 해로디움에서 발굴된 요새-궁전을 내려다본 광경 46(19)

21 헤로디움의 회당 48(19)

22 서부 광야의 마사다 50(20)

23 마사다의 회당 54 (20)

24 베들레헴의 구도 54(21)

25 베들레헴에 있는 〈탄생 교회〉의 구도 55(22)

26 베들레헴에 있는 〈탄생 교회〉의 내부 61(23)

27 베들레헴에 있는 교회의 회중석 바닥 모자이크 61(23)

28 배들레헴에 있는 교회 모자이크의 세부 62(24)

29 팔각당 Octagon의 바닥 모자이크 62(24)

30 IX®YC(이크튀스)라는 단어가 적힌 바닥 모자이크 62(25)

31 〈탄생 교회〉에 있는 석주(石柱)와 주두(柱頭) 63(25)

32 〈탄생 교회〉 옆에 있는 제롬의 조상 64(26)

33 베들레헴에 있는 〈유스티니아누스 교회〉의 구도 67(27)

34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서의 베들레헴 69(28)

35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라헬의 무덤 69(28)

36 〈탄생 교회〉의 개관 71(29)

37 〈탄생 교회〉의 입구 73(30)

38 베들레헴 근처 목자의 들에 있는 신성한 동굴 속의 바닥 모자이크 74(31)

39 베들레헴 근처 목자의 들에 있는 지붕 예배실의 바닥 모자이크 77(31)

나사렛

40 나사렛 81(32)

41 나사렛의 구도 82(32)

42 나사렛에 있는 마리아의 샘 83(33)

43 〈잉태 고지 교회〉에 인접한 고대의 석굴 주거 83(33)

44 나사렛을 언급하는 가이사랴에서 나온 명각 85(34)

45 나사렛에 있는 〈잉태 고지 교회〉의 구도 86(34)

46 〈잉태 고지 교회〉 밀의 숭앙받는 석굴 지대의 구도 94(35)

47 〈잉태 고지 교회〉에 있는 「면류관 모자이크」 96(36)

48 〈잉태 고지 교회〉에 있는 「코논의 모자이크」와 명각 97(37)

49 나사렛의 새 라틴 〈잉태 고지 바실리카〉 104(38)

50 〈잉태 고지 바실리카〉에 있는 잉태 고지 석굴을 바라보며 106(38)

51 〈잉태 고지 바실리카〉에 있는 성모상 106(39)

52 나사렛의 〈성 요셉 교회〉 107(40)

53 〈성 요셉 교회〉의 구도 107(41)

54 〈성 요셉 교회〉의 지하 침례탕 113(42)

55 나사렛에 있는 〈성 가브리엘 교회〉 115(42)

56 〈성 가브리엘 교회〉의 지하 토굴에 있는 샘의 방수구 118(43)

57 나사렛으로부터 갈릴리의 전통적인 가나 마을로 향한 노상에서 121(43)

사마리아

58 사마리아의 풍경 132(44)

59 야곱의 우물과 주위를 보여 주는 지도 132(45)

60 그리심 산 133(46)

61 그리심 산에 있는 사마리아인들의 장막 136(46)

62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 나타난 야곱의 우물 지역 137(47)

63 야곱의 우물 145(48)

64 텔 발라타 145(49)

65 수가 145(50)

66 아르쿨프가 그린, 야곱의 우물 위에 지온 교회의 구도 145(51)

67 야곱의 우물 위에 있던 십자군 교회의 구도 147(52)

68 야곱의 우물 위에 있는 미완성의 희랍 정교 바실리카 148(53)

갈릴리

69 갈릴리 바다의 남쪽 끝 149(54)

70 갈릴리 바다의 지도 150(55)

71 갈릴리 해변의 디베랴 151(56)

72 함맛 디베랴에 있는 회당의 바닥 모자이크 153(56)

73 막달라 156(57)

74 막달라에 있던 회당 159(58)

75 게네사렛 평지 162(58)

76 게네사렛 평지에서 본 갈릴리 바다 163(59)

77 탑가에 있는 〈오병이어 교회〉의 구도 165(60)

78 〈오병이어 교회〉의 떡덩이와 물고기의 모자이크 171(61)

79 〈오병이어 교회〉에 있는 물새와 늪 식물의 모자이크 172(62)

80 떡덩이와 물고기들의 모자이크 곁에 있는 모자이크 명각 174(63)

81 현대의 〈오병이어 교회〉 176(63)

82 탑가에 있던 〈팔복 예배실〉과 수도원의 구도 179(64)

83 현대의 〈팔복 교회〉 180(64)

84 탑가에 있던 〈성 베드로의 수권(首權) 예배실〉의 구도 181(65)

85 고라신에 있던 회당의 폐허 185(66)

86 고라신에 있던 회당의 좌석 189(67)

87 가버나움에서 바라본 갈릴리 바다 190(67)

88 고대 가버나움의 개인 집들 Insula II 192(68)

89 가버나움에 있던 회당의 구도 194(69)

90 가버나움에 있던 회당의 모형 198(70)

91 가버나움 회당의 서쪽 벽에서의 발굴 204(70)

92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의 주된 바실리카식 홀 204(71)

93 가버나움 회당의 남동쪽 모퉁이 204(71)

94 가버나움에 있는 조각된 주두 204(72)

95 가버나움에 있는 언약 궤 또는 토라 성감( 倉) 205(72)

96 가버나움에 있는 메노라Menorah 205(73)

97 가버나움에 있는 다윗의 방패 205(73)

98 가버나움에 있는 솔로몬의 인(印) 206(73)

99 가버나움의 인술라 사크라에 있는 건축물들의 구도 206(74)

100 가버나움에 있는 팔각당 213(75)

101 비르암에 있는 회당 215(75)

102 비르암 회당의 주된 출입문 위에 있는 아치 216(76)

103 비르암 회당의 내부 홀 216(76)

104 벳새다 근처의 갈릴리 바다로 흘러드는 요단 강 216(77)

105 갈릴리 바다룰 가로질러 쿠르시를 바라봄 219(78)

105 쿠르시에 있는 돼지 이적의 기념물 221(79)

데카폴리스

107 제라쉬의 구도 226(80)

108 제라쉬의 개선문 230(81)

109 제라쉬의 공회소 230(81)

110 제라쉬의 남북 주랑 거리 231(82)

111 제라쉬의 〈대교회당〉진입로 231(82)

112 제라쉬의 〈대교회당〉의 구도 232(83)

113 제라쉬의 샘뜰 233(84)

114 제라쉬의 〈성 테오도르 교회〉의 구도 233(85)

115 〈성 테오도르 교회〉에서 나온 명각을 가진 깨진 돌덩이들 234(86)

116 〈성 테오도르 교회〉의 침례탕 236(87)

117 제라쉬의 기독교 십자 237(87)

118 〈성 코스마스와 성 다미아누스의 교회〉에 있는 바닥 모자이크 239(88)

119 제라쉬의 회당 교회 밑에 있는 회당의 바닥 모자이크 240(88)

가이사랴

120 가이사랴의 전반적 구도 242(89)

121 가이사랴에 있는 십자군의 해자와 성벽들 247(90)

122 가이사랴 앞바다 조망 250(90)

123 가이사랴의 항구 성채(城柴) 252(91)

124 가이사랴의 십자군 도성의 남쪽에 있는 앞바다 252(92)

125 가이사랴의 비잔틴식 주두와 십자 253(93)

126 가이사랴의 「선한 목자」 조상 254(93)

127 가이사랴의 미트래움에서 나온 대리석 미트라스 메달 257(94)

128 가이사랴의 극장 260(95)

l'29 가이사랴에서 나온 「빌라도 명각」 261(96)

130 가이사랴 〈갑 궁전〉의 바닥 모자이크 263(97)

131 가이사랴의 높은 수로 264(98)

132 가이사랴 회당의 양각 등대를 가진 대리석 주두 270(99)

133 가이사랴에 있는 비잔틴 교회 모자이크 272(100)

여리고

134 공중에서 바라본 여리고의 개관 275(101)

135 구약 여리고의 터에서 제벨 콰란탈을 바라봄 276(102)

136 엘리사의 샘 277(103)

137 신약 여리고의 텔 278(104)

138 툴룰 아부 엘-알라이크에서의 발굴 작업의 구도 280(105)

139 신약 여리고의 정면 282(105)

140 여리고의 〈뽕나무〉 283(106)

141 와디 엘-켈트에 있는 헤롯 대왕의 수로 유적 286(107)

142 전통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여관〉으로 알려진 장소 2S7(108)

감람산

143 감람산의 지도 289(109)

144 남쪽에서 본 감람산과 베다니 291(110)

145 베다니 마을 292(111)

146 나사로의 무덤과 인접 건물들의 구도 296(112)

147 나사로의 무덤으로 들어가는 현재의 입구 296(113)

148 나사로의 무덤 297(113)

149 베다니의 첫번째 교회에 있는 모자이크 포장 297(114)

150 베다니의 새로운 〈성 나사로 교회〉 301(114)

151 벳바게의 프란체스코파 예배실 304(115)

152 벳바게의 돌 위에 그려진 십자군의 그림 308(116)

153 벳바게의 구르는 돌문을 가진 무덤 310(117)

154 〈엘레오나 교회〉의 지하 토굴 311(118)

155 〈엘레오나 교회〉의 구도와 단면도 313(119)

156 〈주의 기도 교회〉 314(120)

157 〈주의 기도 교회〉의 내부 315(121)

158 아르쿨프가 그린 〈거룩한 승천 교회〉의 구도 315(121)

159 감람산 위의 〈승천 사원〉 318(122)

160 감람산 정봉에서 본 예루살렘 개관 319(123)

161 도미누스 플레비트의 프란체스코파 예배실 319(124)

162 〈도미누스 플레비트 예배실〉 안에서 바라본 광경 321(125)

163 도미누스 플레비트에 있는 원위치 그대로의 납골함들 321(126)

164 도미누스 플레비트의 비잔틴 주두 322(126)

165 도미누스 플레비트 근처의 엘-헬로웨에 있는 모자이크 323(127)

166 감람산의 경사면에서 본 예루살렘 전경 323(124/125)

167 성전 지대에서 본 감람산 324(128)

168 감람산과 〈겟세마네 교회〉 324(129)

169 겟세마네 지대의 구도 326(130)

170 동정녀의 무덤 330(131)

171 〈겟세마네 교회〉의 구도 336(132

172 겟세마네 동산에서 338(133)

예루살렘

173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의 구도 340(134)

174 공중에서 본 예루살렘의 개관 347(135)

175 기혼 샘 입구 348(136)

176 기혼 샘 위에 있는 예루살렘 최초기의 성벽 349(136)

177 기혼 샘과 연결된 터널의 구도 351(137)

178 기혼 샘의 동굴과 터널 입구 352(137)

179 실로암 못 353(138)

180 〈반석의 돔〉 아래 있는 큰 반석 356(139)

181 〈해롯의 성전〉의 구도 361(140)

182 〈헤롯의 성전〉에서 나온 경고 명각의 단편 366(141)

183 성전 남쪽 울타리 벽에 박힌 돌 위에 새겨진 하드리아누스의 라틴어 명각 368(142)

184 공중에서 본 성전 지대의 개관 372(143)

185 〈반석의 돔〉에 있는 창문들 375(143)

186 〈알-악사 사원〉 376(144)

187 〈악사 사원〉에 있는 민바르와 미라브의 모퉁이 378(145)

188 성전의 꼭대기 379(146)

189 서쪽 벽 381(146)

190 이중문 384(147)

191 삼중문 385(148)

19'2 성전산 남쪽의 발굴된 지대 386(149)

193 황금문 387(150)

194 로빈슨의 아치 392(151)

195 윌슨의 아치 395(151)

196 〈불탄 집〉의 유적에서 398(152)

197 성전 지대의 북서쪽 모퉁이를 향한 조망 399(152)

198 다윗 망대 402(153)

199 예루살렘 제1 성벽의 서쪽 및 남쪽 부분의 구도 405(154)

200 예루살렘의 카르도 막시무스 412(155)

201 다메섹 문 곁의 고대 성벽과 아치 419(156)

202 예루살렘 구 도성의 북쪽에 있는 한 성벽의 남쪽 면 426(157)

203 〈성 안네 교회〉 429(158)

204 베데스다 못에서의 발굴 441(159)

205 아르쿨프가 그린 시온 산 위에 있는 교회의 구도 446(160)

206 시라아 정교 〈성 마가 교회〉의 문 455(161)

207 아부 투르에서 본 시온 산 455(162)

208 시온 산 위에 있는 다윗의 무덤 456(163)

209 시온 산 위에 있는 다윗의 무덤의 남쪽 벽 456(164)

210 시온 산 위에 있는 고대 교회의 석주 460(165)

211 제14세기 프란체스코파가 복원한 만찬실 464(166)

212 〈갈리칸투의 성 베드로 교회〉 466(167)

213 〈갈리칸투의 성 베드로 교회〉 옆에 있는 고대의 계단길 473(168)

214 힌놈 골짜기에 있는 아겔다마의 전래적(傳來的)인 위치 473(169)

215 안토니아의 구도 475(170)

216 채찍질 수도회의 안마당에서 본 광경 496(171)

217 엑체 호모 아치 497(172)

218 전에 박석(環石)이라고 불린 돌 포장의 구도 499(173)

219 줄무늬진 포장 돌 499(174)

220 포장 돌 위에 그려진 놀이판 500(175)

221 돌 포장 밀에 있는 수조 500(176)

222 오늘날의 비아 돌로로사 노상 502(177)

223 러시아 알렉산더 호스피스 안에 있는 고대의 벽둘 503(178)

224 러시아 알렉산더 호스피스 안에 있는 고대의 아치 505(179)

225 콘스탄티누스의 〈성묘 교회〉의 구도 505(180)

226 〈성묘 교회〉 지하의 고대 석조물 516(181)

227 예수의 무덤의 가상적 재건 518(181)

228 〈산타 푸덴찌아나 교회〉의 후진 모자이크 523(182)

229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서의 예루살렘 525(183)

230 발굴된 비잔틴 거리에 서 있는 수도원장 구레그 카피키안 528(184)

231 아르쿨프에 의한 〈성묘 교회〉의 구도 528(185)

232 〈성묘 교회〉에 있는 종탑 540(186)

233 루터 교회의 탑으로부터 본 〈성묘 교회〉 556(187)

234 루터 교회의 탑으로부터 동쪽을 바라봄 557(187)

235 배와 「도미네 이비무스 명각」 557(188)

236 고든의 갈보리로 알려진 바위 언덕 559(189)

237 동산 무덤 560(189)

238 동산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561(190)

239 〈성 스테반 바실리카〉에서의 발굴 561(191)

240 〈성 스데반 바실리카〉 562(192)

241 〈성 스데반 바실리카〉의 안뜰에서 563(192)

242 논누스 집사의 명각 563(193)

243 성 스데반 문 565(194)

엠마오

244 엠마오의 옛터로 보이는 엘-쿠베이베의 공중에서 본 광경 566(195)

245 고대의 엠마오, 암와스에 있는 로마 시대 별장의 모자이크 568(196)

246 암와스에 있는 바실리카의 구도 571(197)

247 암와스의 침례탕 571(198)

3 무덤

초기 무덤들의 발전 과정

수갱( 抗) 무덤

248 여리고의 무덤 A 111 의 단면과 구도 577(200)

249 여리고의 무덤 A 3의 수갱 578(201)

250 여리고의 무덤 A23 에 있는 매장 현장 578(201)

묘실 무덤

251 므깃도의 무덤 77로 들어가는 입구 579(202)

252 므깃도의 무덤 77의 구도 579(203)

바위턱을 가진 묘실 무덤

253 텔 엔-나스베의 무덤 5의 구도와 단면도 580(203)

254 텔 엔-나스베의 무덤 5의 모형 580(204)

코킴 Kokim이 있는 묘실 무덤

255 텔 엔-나스베의 무덤 4의 구도와 단면 581(205)

아치형 석묘가 있는 묘실 무덤

256 텔 엣-자카리예에 있는 한 무덤의 구도와 단면도 584(206)

함몰 묘가 있는 묘실 무덤

257 텔 엔-나스베의 무덤 33에 있는 아치형 석묘와 함몰 묘 585(206)

258 텔 엔-나스베의 무덤 19의 구도와 단면도 585(207)

마릿사에 있는 헬라 시대의 장식된 무덤들

259 텔 산다한나의 맨 윗도성의 구도 588(208)

260 마릿사의 무덤 D에 있는 시체실과 벽감둘 589(208)

261 마릿사의 무덤 I의 구도와 단면도 590(209)

262 마릿사의 무덤 I에 있는 사냥 장면 590(210)

263 마릿사의 무덤 I에 있는 동물 프리즈의 일부 591(210)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헬라 및 로마 시대의 무덤들

264 야고보의 무덤과 스가랴의 무덤의 구도 596(211)

265 야고보의 무덤과 스가랴의 무덤의 개관 597(212)

266 야고보의 무덤에 있는 명각 598(213)

267 스가랴의 무덤 600(214)

268 압살롬의 무덤과 여호사밧의 무덤의 구도 601(214)

269 압살롬의 무덤 601(215)

270 여호사밧의 무덤의 박공(專桃) 602(216)

산해드리야 무덤들

271 산헤드리야 무덤들에 있는 무덤 XV의 구도와 단면도 604(217)

272 산헤드리야 무덤들에 있는 무덤 XIV의 입구 605(218)

헤롯의 가족 무덤

273 헤롯의 가족 무덤의 구도와 단면도 607(219)

274 헤롯의 가족 무덤에 있는 구르는 돌 608(219)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비 무덤

275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비 무덤의 복원 투시도 609(220)

276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비 무덤에 있는 계단과 수로 및 수조 610(221)

277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비 무덤의 안마당에서 611(222)

278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비 무덤의 돌림띠 611(223)

279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비 무덤의 구도 611(224)

280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비 무덤의 단면도들 612(225)

281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비 무덤의 입구에 있는 구르는 돌 612(226)

지하 묘지: 베트 셰아림

282 베트 셰아림의 개관 614(227)

283 베트 셰아림 지하 묘지의 묘실들 618(228)

284 지하 묘지 제14번 입구 619(229)

285 지하 묘지 제20번의 구도 620(230)

286 지하 묘지 제3번의 메노라 621(231)

287 지하 묘지 제13번에 있는 마리노스와 그의 아내의 비명 (碑銘) 622(232)

로마

288 몬테베르데의 유대인 지하 묘지에서 나온 아람어 명각 627(233)

289 몬테베르데의 유대인 지하 묘지에서 나온 헬라어 명각 628(233)

290 몬테베르데의 유대인 지하 묘지에서 나온 라틴어 명각 629(234)

291 란다니니 포도원의 유대인 지하 묘지에 있는 헬라어 명각 629(234)

292 란다니니 포도원의 유대인 지하 묘지에 있는 라틴어 명각 630(235)

293 토를로니아 별장에 있는 유대인 지하 묘지의 구도 630(236)

294 토를로니아 별장의 유대인 지하 묘지에 있는 그림 631(237)

295 토를로니아 별장의 유대인 지하 묘지에 있는 다른 그립 632(237)

석관

296 헤롯의 가족 무덤 에 있는 석관들 633(238)

297 헤롯의 가족 무덤 에 있는 석관의 장식 634(239)

298 삿단 왕후의 석관 635(240)

299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후의 무덤에서 나온 석관 636(240)

300 베트 셰아림에 있는 사자 석관 636(241)

301 베트 셰아림에서 나온 납으로 만든 관 637(241)

납골함

302 텔 엔-나스베의 무덤 14에서 나온 납골함 645(242)

303 기드론 골짜기의 한 무덤 에서 나온 납골함 명각들 646(242)

4 십자형(十字形)

십자표의 역사

304 텔 아부 마타르에서 나온 십자표를 가진 채색된 조약돌 651(244)

셈어 알파벳의 한 문자로서의 십자 표

305 세라비트엘-카뎀에서 나온 원 시나이어 명각을 가진 사암 조상 654(244)

306 뷔불로스 왕 예히밀크의 명각 656(245)

히브리어 타우 TAW와 그 상당이들 658

보호와 구원의 기호 659

경문(經文)파 하나님 이름의 기호 664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기호 667

307 쿰란의 동굴 1에서 나온 「이사야 두루마리」의 제 XXXV 칼럼 670(246)

유대인 기독교에서의 십자표 673

십자가 STAUROS를 나타내는 십자 CROSS 678

헬라파 교회의 십자가 681

십자의 형태들 684

약자와 축어 686

유대교 및 기독교의 장례 풍습파 관련된 십자 표 694

십자표의 실례들

텔 아랏 항아리

308 히브리어 명각과 타우 표를 가진 텔 아랏의 항아리 699(247)

니카노르 납골함

309 니카노르 납골함의 명각과 십자 표 701(249)

310 니카노르 납골함의 뚜껑에 적힌 십자 표 703(250)

불쾌산의 납골함

311 불쾌산에서 나온 납골함 위에 새겨진 유다의 이름과 십자 표가 있는 명각 704(251)

312 불쾌산에서 나온, 납골함 위에 새겨진 예수의 이름과 십자 표가 있는 명각 706(251)

313 불쾌산에서 나온, 납골함 위에 새겨진 명각과 십자 표 706(251)

314 실완 근처에서 나온 한 납골함의,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가진 명각 708(252)

탈피오트 납골함들

315 탈피오트에 있는 무덤의 구도 711(253)

316 탈피오트에서 나온 납골함 제7번의 명각의 사진과 그림 712(254)

317 탈피오트에서 나온 납골함 제8번의 명각 714(255)

318 탈피오트에서 나온 납골함 제8번의 십자 표 716(256)

도미누스 플레비트 납골함들

319 도미누스 플레비트에 있는 묘지 일부의 구도와 단면도 716(257)

320 도미누스 플레비트에서 나온, 므나헴이라는 이름의 명각 718(257)

321 도미누스 플레비트에서 나온,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명각 719(258)

322 도미누스 플레비트에서 나온, 시므온 바르 …… 라는 이름을 가진 명각 720(258)

323 도미누스 플레비트에서 나온, 샬람시온이라는 이름과 십자 표를 가진 명각 722(259)

324 도미누스 플레비트에서 나온, 디오게네스라는 이름과 십자 표를 가진 명각 724(259)

325 도미누스 플레비트의 납골함 제21번에 있는 표의 사진과 그립 725(260)

326 도미누스 플레비트의 납골합 제18번에 적힌 표들의 사진과 그림 728(260)

헤르쿨라네움

327 헤르쿨라네움의 벽에 그려진 표 729(261)

328 헤르쿨라네움의 스탠드 730(261)

바티칸

329 바티칸 발굴에서 나온 벽서들 731(262)

지하 묘지에 있는 십자 표

330 토를로니아 별장에 있는 유대인 지하 묘지의 채색 명각 733(263)

331 루치나 지하 묘지에 있는 「루피나 명각」 736(263)

332 칼리스투스 지하 묘지에 있는 「이레네 명각」 736(264)

333 도미틸라 지하 묘지에 있는 닻 모양의 십자 737(264)

334 프리쉴라 지하 묘지에 있는 채색된 기호 737(265)

335 프리쉴라 지하 묘지에 있는 「트리소무스 명각」 738(265)

필사본들에 있는 십자 표

336 「파피루스 보드머 II」 (P )의 한 페이지 740(266)

337 「파피루스 보드머 XIV」 (P )의 한 페이지 741(267)

338 『진리의 복음』(「융 사본」)의 한 페이지 741(268)

앙크 ANKH-십자

339 앙크 기호를 형상화한 점판암 접시 743(269)

340 고대 애굽의 앙크 기호 744(269)

341 갑바리에서 나온 명각 745(270)

342 테네에서 나온 명각 747(270)

343 아르만트 근처에서 나온 명각 748(271)

344 카르게의 오아시스에 있는 무덤 예배실의 그림 750(272)

성구 색인 753

신약 성서의 고고학 II

차례

각 항의 사진 자료 1-272

부록

1 연대순에 의한 고대 자료 목록 275 2 팔레스타인의 고고학적 및 역사적 시기 일람표 298 3 로마, 애굽, 마케도니아, 그리고 히브리 달력의 달 이름 일람표 314 4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들과 방향을 가리키는 진술들에 대한 설명 318 5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들의 명단과 그에 관한 해설 322 6 유대계-기독교인들 336 7 초기 교회의 축제일 개요 354 8 약어표 379 9 참고문헌 및 사진 출처 396

옮긴이 해제 457

【일러두기】 1 이 책은 잭 피 니 건의 The Arc/ ne o/og y of the New Testa me nt : The Lif e of Jes us and the Beg inn in g of the Early Church (Princ eto n : Princ eto n Un ive rsi t y Press, 1992) 를 번역한 것이다. 2 저자의 인용 어구나 강조 문장은 < 〉로 표기하였고, 인용문 내의 강조는 <‘ ' 〉 로 표시하였다. 3 인명, 중요한 용어나 어구는 우리말 다음에 원어를 병기하였다. 경우에 따라 독자들 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어휘 설명을 <-역주 〉라는 표시와 함께 첨부하였다 . 4 본문에 사용한 부호 및 기호는 다음과 같다 . • 교회나 사원 둥의 건물__〈성묘 교회〉, 〈제 2 성전〉, 〈반석의 돔〉 • 주요 사건 -~ 〈유대 전쟁〉, 〈제 1 차 항거〉 • 문건, 작품-『히브리인들에 의한 복음서」, 『시내 사본J, 「예루살렘 달력」 • 저서 -『트뤼폰과의 대화 D ial o gu e wit h Tr yp ho 』 5 인명과 지명의 우리말 표기는 가능한 한 원래 이름의 발음에 가깝게 하고자 노력하 였다(필론 P hil o, 콘스탄타누스 Cons tanti ne). 그러나 영어식 발음이 널리 통용되어, 원음을 따라 쓸 경우 오해나 혼란을 유발할 소지가 있을 때에는 영어식 발음을 차용하였다(제롬

Jer ome: 〈 제 롬〉 의 라틴어식 이 름 은 〈 히에로뉘무스Hi eron y mus 〉임) . 그리고 성경에 자주 사 용됨으로써 이미 잘 알려진 것들에 대해서는 개역판 성서(대한성서공회 간행)의 표기 를 따랐으며(나사로 Lazarus, 가이사랴 Caesarea), 성경에 쓰이기는 하였으나 익히 알려지지 않은 것 들 에 대해서는 두 가지 를 병기하든지(아르켈라우스 [Archelaus , 아켈라오] , 데카폴리 스 [6EKOll0Al~, 데가 볼 리]), 또는 원음에 가까운 것을 따랐다(아우구스투스). 특 히, 히브리어 에서 다게시 포르테 dag h esh forte가 찍힌 철 자와 헬라어 또는 라틴어 계통의 단어들 중 에서 자음이 중첩된 부분은 우리말로 표기할 때에도 그것을 반영하는 방법을 채택하였 다(쉼마쿠스 S y rnrnachus , 힙 폴 뤼투스Hippo l ytu s). 그리고 헬라어 〈 EU 〉와 라틴어 〈 eu 〉는 모 두 〈 유〉로 음역하였고(유세비우스 Euseb i us, 유도치아 Eud oci a), 헬라어 〈 u 〉와 로마자 는 〈 위〉로 표기했으나(유튀키우스 Eu ty c hi us, 뒷사 N y ssa) , 이미 굳어진 표현들은 관례대 로 옮겼다(비잔틴 B y zan ti ne, 파피루스p a pyru s) . 라틴어식 모음 〈 ae 〉는 〈애〉로(마캐루스 Machaerus), 헬라어식 모음 〈 O t〉는 〈아이 〉 (카이사레이아 KalOOPEla) 로 각각 음역하였다. 6 모든 연대는 서력 기원을 사용하였다 . 기원전은 B.C. 로 기원후는 연도수만 표기하였 다(경우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해 AD. 로 표기). 다만 필요한 경우 이슬람역인 히즈라력 의 표시로 A. H.를 명시하였다. 7 본문 안의 주석은 아주 간단한 사항만이 표기되어 있으므로 필요한 경우 약어표와 참고문헌을 살펴보기 바란다 .

침례자요한의 생애

1

1 아인 카림과 〈침례자 성 요한 교회〉의 개관 예수의 전주자(前走者)는 침례자 요한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제사 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의 아들이었다 . 마리아가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산중에〉 있는 〈유대의 한 동 네〉(눅 1:39) 로 갔고, 요한이 태어나서 그 이름이 지어졌을 때, 이 사 건은 〈 온 유대 산중에 두루〉(눅 1:65) 화제가 되었다. 여기서 〈산중〉 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bpc w n (오레이네)이다. 77 년에 완성된 『박물 학 Na tu ral H i s t o ry』 (V 15) 에서 플리니우스 P liny는 라틴어로 이와 동 일한 단어를 지역의 이름으로 사용하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예루살 렘 이 예 전 에 그 지 역 에 있 었다고 한다 (D ri nen , in qu a fue re Hi er o- solym a). 확실히 이 이름은 예루살렘이 위치해 있던 그 산간 지대에 적합한 이름이었다. 그러므로 요한의 출생 장소인 사가랴와 엘리사 벳의 집은 예루살렘 주변의 야산 지역 어딘가에 있었다. 150 년 경의 『 야고보의 원복음 The Prote v ang e li um of Ja mes 』 (22:S ; ]ANT 48 쪽 ; HSNTA I, 3Pr/쪽)에 기술된 바로는, 헤롯이 어린 아이들을 살해할

때 엘리사벳이 요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도망을 쳐 산중으로 올 라갔는데, 거기서 한 산이 갈라져서 그녀를 맞아들였다고 한다. 비록 이것이 전설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하여튼 여기서도 산중이 언급 되고 있댜 테오도시우스 Theodosiu s (530) (GEYER 140 쪽 ; LPPTS IT-B, 10 쪽 ; CCSL CLXXV, 117 쪽; WJ P 65 쪽)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침례자 요한 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살던 곳까지의 거리가 5 마일이었다고 한다. 이 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서쪽으로 아인 카림 Ain Karim (포도원의 샘) 까지의 거리 (7.5 킬로미터)와 일치한다. 이 마을은 r 예루살렘 달력 Jer u-salem Calendar 」 (638 년 이전)에 명시되어 있는데, 이 달력에서 그 마 을은 엘리사벳을 기념하기 위하여 거행된 8 월 28 일의 축제의 장소로 나타나 있다. 이 달력 에 언급된 내용은 이 렇다. <엔 콰림 Enq u a rii-n 마 을에서, 의로운 엘리사벳의 교회에서, 그를 기념하여〉 (GOUSSEN 31 쪽/ KOPP 1959 133 쪽). 알렉산드리아의 유튀키우스 Eu ty c hi us (940) 가 쓴 것으로 여겨지는 『논증서(論證 書 , The Book of the Demonstr a- ti on) 』 (312) 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앨리아 Ae li a 지역에 있는 바 이트 자카리야 Ba yt Zaka riya 교회는 마리아가 그의 혈족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을 증거 한다〉 (CSCO 193, 135 쪽). 예루살렘이 하드리아누스 Ha dri an(135) 에 의해 재건되었을 때, 그 도성은 앨리아 카피톨리나 Ae li a Ca pit o lin a 라고 불리었다. 그러므로 방금 언급된 〈앨리아 지역에 있는〉 그 교회는 예루살렘 인근에, 어 쩌면 아인 카림에 있었다. r 예루살렘 달력」에 언급된 〈엘리사벳 교 회〉와 유튀키우스가 말한 〈사가랴 교회〉가 두 개의 다른 교회였는지 또는 동일한 교회였는지를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다니엘 D ani el 이 말한 다음의 이야기에 비춰 볼 때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 다니엘 (1106) 은 분명히 아인 카림에 있었던 별개의 두 교회를 묘사하고 있 다. 그는 말하기를 (LPPIS IV-C, 51 쪽 이하), 예루살렘의 서쪽에 있

는 〈거룩한 십자가 Hol y Cross 수도원 〉 으로부터 출발하여 사가랴의 집, 즉 성모( 聖 母)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러 왔던 집까지의 거리는 4 베르스타 vers t였다고 한다(베르스타는 러시아의 이정[里 程 ] ; 1 베르스 타는 3500 피트 또는 3 분의 2 마일[약 1 킬로미터]). 그는 이 렇게 기록하 고 있댜 〈 지금은 한 교회가 이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면서 왼쪽으로 나지막한 제단 아래에는 전주자 요한이 태어 난 작은 동굴이 있다.〉 다니엘은 계속해서 말하기 를 , 그곳으로부터 반 베르스타 떨어진 곳에 , 헤롯의 군인들이 엘리사벳과 그의 아들을 추격하고 있을 때 그 모자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산이 있으며, 이 장 소에도 역시 한 작은 교회가 세워져서 그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고 한댜 다니엘이 기술한 바 사가랴의 집터에 세우誌진 교회는 아마도 유튀키우스가 언급한 〈 자카리야 교회〉와 동일한 교회이고 , 어쩌면 그 것 은 또한 「예루살렘 달력」에 수록된 〈엘리사벳 교회〉와도 같은 교회일 것이다. 왜냐하면 다니엘에 의하면 이 교회는 마리아가 엘리 사벳을 방문한 장소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교회는 바위가 엘 리사벳과 요한을 맞아들인 곳 에 세워진 것으로, 이것은 분명히 정경 (正 經 )의 복음서에 있는 기사가 아니라 『 야고보의 원복음』에 있는 설화와 관련된 것이었다 . 아인 카림 마을에 물을 공급해 주는 그 샘은 초기로부터 이 지역 에 사람이 거주하는 일을 조장해 왔음이 틀림없다. 중기 청동기 시 대의 도기가 아인 카림과 그 근처에서 발견된 것이다 (G. Ernest Wr igh t in BASOR 71 [Oct. 1938], 28 쪽 이하). 이 마을은 『 70 인역 Sept ua.gint , LXX 』 여호수아 15:59 에 유다 지파의 도성들 가운데 열 거된 카렘 Ka p eµ 과 동일한 마을일 것이다. 사진은 그 마을이 산중에 있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침례자 성 요한 교회 Church of St. Joh n the Ba pti s t〉가 사진의 중앙에 보인다. 이 교회 는 1674 년 이 래로 프란체스코파 Franc i scans 의 수중에 들어 가

있다. 그들은 1941-1942 년에 그 교회와 그에 인접한 수도원의 바로 서쪽 지대에서 발굴 작업을 실시했다. 이 지대에서 바위를 잘라 만 든 몇 개의 방과 무덤들 , 그리고 모자이크 바닥의 포도즙틀과 모자 이크 포석이 깔린 작은 예배실들이 출토되었다. 남쪽의 바위를 잘라 만든 방에는 도기가 들어 있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 주변의 다른 곳에서 헤롯 왕조의 주화들과 함께 발견된 도기 형태와 같은 것이 며 , 따라서 B.C. 제 1 세기 경으로부터 70 년까지의 기간에 속하는 것이 다. 그렇다면 이 방은 B.C. 제 1 세기 경에 존재했을 것이 틀림없고, 따라서 그것은 바로 사가랴와 엘리사벳과 요한의 시대에 하나의 공 동체가 여기에 형성되어 있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다른 발견물들 은 그 공동체가 로마 시대뿐만 아니라 비잔틴 시대와 초기 아랍 시 대에도 계속되었음을 보여 준다. 〈성 요한 교회〉 자체에 관해서 말한다면, 현재의 구조는 주로 제 11 세 기 로부터 내 려 오는 것 이 지 만 (Abel, Geog rap h ie II, 295 쪽 이 하), 벽의 아랫부분은 아마도 비잔틴 시대(제 4-7 세기)의 것이 아직도 남 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왼쪽 측랑(側廊)의 전면 끝에는 하나의 석굴 이 있는데, 이것은 다니엘이 언급한 작은 동굴과 일치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2 아인 카림에 있는 〈성모 방문 교회〉 아인 카림에 있는 다른 하나의 고대 교회는 〈성모 방문 성소 Sanctu ary of the V i s itati on 〉로 알려 져 있다. 그 교회 는 〈성 요한 교 회〉로부터 남서쪽으로 마을 건너편에 위치해 있다. 그 근방에는 바위 를 잘라 만든 두 개의 방, 곧 벽을 돌아가며 선반이 둘러져 있는 방 들이 있는데, 이것은 후기 청동기 시대 말엽부터 팔레스타인에 알려 져서 로마 시대에도 사용되던 형태의 무덤들이었다 (253 항을 보라).

1938 년에 프란체스코파가 〈성모 방문 교회 Church of the Vis i ta - ti on 〉의 옛 폐허에서 발굴을 실시했다. 초기의 성소는 바위로 된 내 리받이 경사면을 배경으로 세워졌으며, 비잔틴 시대와 중세의 벽들 이 발견되었댜 지하 토굴의 한쪽 구석에는 크기가 91X104X70 센티 미터이고 가운데가 자연적으로 움푹 들어간 타원형의 회색 바위 하 나가 놓여 있다 이것은 piet r a del nascond i men t o( 피에트라 델 나스 콘디멘토), 즉 〈요한울 숨겨 준 바위〉로 숭경받고 있는데, 이는 분명 히 야고보의 원복음에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위의 1 항 참고). 3 아인 카림에서 나온 아프로디테의 대리석 조상 아인 카림에서 나온 발굴물들 가운데 이 아프로디테 Ap h rod ite 또 는 비너스 Venus 의 대리석 조상은 두 개의 깨어진 조각들로 발견되 었다. 이것을 다시 결합시키면 그 형상 전체의 키는 72 센티미터이다. 이 조상은 프락시텔레스 Pr axit eles(B.C. 340) 의 작품의 모사품인 것 으로 보이며, 선이 굵고 강한 것으로 봐서 AD . 제 1 세기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헤로도투스 Herodo tu s(! 105) 에 의하면, 여신 아프로디테는 일찍이 애 굽의 프삼메 티 쿠스 Psarnmetic h us 시 대 (Psamt ik I, B.C. 663 -6 10) 에 아스칼론 Ascalon 의 신전에서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 제롬J erome (Let ter 58 to Paulin u s, 3) 에 의하면, 하드리아누스 Ha dri an 의 시대로 부터 콘스탄티누스 Cons tantin e 가 통치 하기까지 - 약 180 년 동안 —십자가가 세워졌던 예루살렘의 바위 위에, 예배의 대상물인 비 너스의 대리석 조상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이것은 335 년에 〈성묘 (聖墓) 교회 Church of the Holy Se p ulcher 〉가 건립되어 봉헌될 때 제 거되었다 (Eusebi us, The Lif e o f Consta ntine , m 26). 여기에 제시된 조상은 제롬이 갈보리에 있었던 것으로 기술한 것과 마찬가지로 대

리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로마 시대 동안에도 아마 아인 카림에 서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비잔틴 시대에, 어쩌면 예루살렘에 있던 것보다는 좀더 후에 역시 철거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증거는 아인 카림을 가리키는 듯하나 다른 전승 들도 있었다. 아랍 시대(제 7..:.10 세기)의 기독교 성소들 가운데, 예루 살렘에 〈침례자 성 요한 교회〉가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감람산 정 봉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그 산의 기슭에 있었다 . 후자에 관하여, 다니엘 (1106) 보다도 더 초기의 문헌인 한 슬라브 Slavo ni c 텍스트 (Ar chi ve s de l'Or ien t Lati n, II, 392 쪽 ; J. T. Milil다 n RB 67 [1960], 562 쪽 ; 357 쪽 참고)는, 감람산 기슭에 있던 교회 의 터 가 바로 요한이 태어난 사가랴의 집이 있던 곳이며, 엘리사벳이 그의 아이룰 데리고 이 집으로부터 산속으로 피신했다고 전한다. 4 유대 광야 개관 요한이 유다의 〈산중〉에 있는 한 동네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1 항), 그에 관하여 누가복음 1:so 에는 그가 이스라엘에 나타나던 날까지, 죽 그가 공적으로 출현하던 날까지 그는 빈 들에, 또는 문자적으로 광야에 sV ,:ate ; spqp .ot c ; 있었다고 진술되어 있다. LXX 에서 일반적으 로 이 단어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l기 2( 미드바르)와 마찬가지로 헬라 어 e pIUi o c;(에레모스)는 황폐하고 공허하고 고적한 땅을 말한다. 그것 은 돌이나 모래가 많은 땅일 수도 있고 때로는 초지일 수도 있다. 그 것은 또한 유목민들의 거처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땅은 경작되지 않으며 사람들이 거기에 영구적으로 거주하지도 않는다. 요한의 출생지가 유대 땅에 있었으므로, 그의 청년 시절을 보낸 광야는 아마도 유대 광야였을 것이다. 유대 광야는 성경의 언급들로 써 그 위치를 찾아낼 수 있다. 민수기 21:20( 난의주)에는 비스가 산

에서 여시몬이 내려다보인다고 기록되어 있다. 〈 여시몬J es him on 〉이란 지명은 황폐하고 황무한 땅을 가리키고 , 따라서 사해 윗쪽의 요단 강 양편에 있는 이회석( 泥灰石 )으로 된 불모의 단지(段地)들과 여리 고의 뒷쪽 및 사해의 서쪽에 있는 경사진 구릉들을 묘사하는 말일 것이다. 여호수아 15:61-62 는 유대 광야에 있던 여섯 개의 〈성읍들〉 을 열거하고 있다 . 그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성음들이 포함되어 있 는데 , 이들은 그 위치가 방금 언급된 지역 안에 있고, 그 이름들이 광야 지대의 성격을 띠고 있다. 벳-아라바 Be t h-arabah( 〈아라바의 집 〉, 즉 요단과 사해 를 포함하고 아카바 만 G ulf of A q abah 까지 뻗어 있 는 〈 건조한 지역 〉 ), 아마도 여리고의 남동쪽에 있는 아인 가르바 &n Gharba 가 이곳인 듯합 이르-함멜라 ‘Ir-hammelah( 소금의 성읍[ 鹽 城]), 아마도 후기의 쿰란Q umran 인 듯함 . 그리고 엔-게디 En-ge di (염소의 샘), 오늘날에도 솟아나고 있는 온천 , 아인 지디 &n Jidi라 불림, 쿰란의 남쪽으로 20 마일 떨어진 사해의 서쪽 해안에 위치함. 전체적으로 이 광야 지대 (7 항의 지도를 보라)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약 35 마일, 동쪽에서 서쪽으로 15 마일이다. 사진에 나타난 유대 광야의 개관은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의 도 로에서 찍은 것이다 . 저 멀리 산들을 가로질러 고대의 오솔길이 나 있다. 5 키르베트 쿰란과 r 사해 두루마리」 요한이 출생했을 때,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이미 나이가 많았으므 로, 그 아이는 미상불 조실 부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아이가 〈빈 들에〉서(눅 1:80)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는, 그곳에 그롤 맞아들 여 도와 준 사람들이 있지 않았다면 이해하기가 곤란하다. 사실 유 대 광야의 쿰란에는 남자들의 공동체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에 관하

여 알려지기로는 그들여 비록 결혼은 하지 않았으나 자녀들을 입양 하여 그들 자신의 교훈대로 양육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요한이 여기 서 자녀로 취해졌으리라는 생각은 적어도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물 론 이러한 가능성은, 쿰란의 사람들과 정규적인 성전 제사장들 사이 에 반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므로 여러 가지 문제들과 마 주치게 된다 (Vardaman). 그런데 침례자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정 규적인 제사장 반열 또는 가계(家系) 중의 하나인 아비야 제사장 가 문에 속하는 사람이 었다(눅 1:5 ). 쿰란은 사해의 북서쪽 해안에 있는 석회암 벼랑들과 이회토 단지 를 헤치고 나 있는 와디 wadi 죽 물길 wa te rcourse( 강바닥)의 이름이 다. 와디 쿰란 Wa di Qumran 옆에 있는 이회토 단지 위에 키르베트 쿰란Khir be t Qumr an 의 유적지가 있다(키르베트는 폐허를 뜻한다). l 'i!:1 3-1 얽 4 년에 이곳에서 커다란 고대의 공동 묘지가 샤를르 클레르 몽-간노 Charles Clermon t -Ganneau 의 주의 를 끌게 되 었으며 , 1947 년 에는 이회토 단지와 그 위의 벼랑들에 뚫려 있는 동굴들에서 고대의 필사본과 필사본의 단편들이 베두인들 Bedo uin s 과 고고학자들에 의 하여 발견되었고, 1951 년부터는 키르베트 쿰란이 고고학자들에 의하 여 발굴되기 시작했다. 키르베트 쿰란에서 발굴된 건축 유적들 가운데서 가장 초기의 것 은 직사각형의 건물과 긴 벽인데, 이것들은 그와 관련된 도기(陶器) 에 기초하여 B.C. 제 8-7 세기(철기 시대 II) 의 것으로 여겨지며, 그 시 대의 이스라엘인의 보루를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키르베트 쿰란은 십중팔구 여호수아 l5:62 의 이르함멜라 ‘Ir­ harnrnelah 죽 염성(鹽城)과 동일시될 수 있을 것이다. 키르베트 쿰란에서 발견된 허다한 주화들에 의하면, 주된 건물들 은 요한 휘르카누스J ohn Hy rca nus(B.C. 135-104) 치하에서 건조되 었을 것이며, 알렉산더 얀내우스 Alexander Jan naeus(B.C. 103-76) 치

하에 거주되었음이 확실하다. 헤롯 대왕 Herod the Grea t의 통치 중 에 이곳은 아마도 한동안 버려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이 왕 의 주화가 극소수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이 그처럼 버려진 것은 아마도, 요세푸스가 말한 바 헤롯의 제 7 년인 B.C. 31 년에 유대 를 강타했다고 하는 대지진 때문이었을 것이다(Ant . xv 5, 2 §122 ; War I 19, 3 §370). 키르베트 쿰란의 큰 망대에, 그리고 큰 저수장으 로 들어가는 계단들의 가운데로 뻗어 있는 큰 대각선의 균열에는 필 시 이 지진을 말해 주는 증거가 있다. 더욱이 쿰란의 북쪽으로 8 마 일 떨어진 여리고에 있는 마카베오 시대의 건물과 궁전들을 에후드 네처 Ehud Ne tz er 가 발굴한 결과, 이와 동일한 때인 B.C. 31 년에 그 들의 거주를 종식시킨 광범한 지진 피해에 대한 폭넓은 증거들이 빛 을 보게 되 었다 (Vardaman). 주화들은 쿰란이 헤롯의 아들 아켈라우스 Archelaus( 아켈라오, B.C. 4-6) 치하에서 재거주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에 아마도 약간의 보수 와 소규모의 수식이 가해졌음을 시사한다. 그때로부터 이곳에 사람 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여 로마인들에 대항한 유대인의 전쟁 때까지 계속해서 거주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68 년 봄에 베스파시아누스 Ves p as i an 가 팔레스타인 정복을 끝내고자 그의 군대와 더불어 가이 사랴를 출발했고, 다이시오스 D ai s i os 월(月)의 제 2 일에 여리고에 이르 러 그 도성을 취했는데, 그곳 주민의 대부분이 이미 산중으로 도피 하고 없었다고 한다 (War IV 8, 1-2 §§443-452). 키르베트 쿰란이 여 리고로부터 멀지 않기 때문에 쿰란 공동체가 이때에, 죽 68 년 6 월에 파멸되었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로마인이 정복하여 파멸시킨 중거 가 키르베트 쿰란에서 발견되었으니, 곧 로마제(製) 철 화살촉들과 불탄 재의 충이 폐허에서 나온 것이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몇몇 로 마 군인들이 쿰란에 숙영했을 것이며, 로마에 대한 유대인들의 〈제 2 차 항거〉 때의 주화들이 몇 개 나온 것은 유대인 병력이 그때에 거

기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때 이후로는 쿰란에 더 이상 사람이 거 주하지 않았다 . 키르베트 쿰란에서 발굴된 건물들은 이곳이 한 공동체의 중요한 중심지였을 뿐,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대부분이 거주하는 주거지 가 아니었음을 시사하는데,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아마도 보다 더 임 시적인 거처들에서나 인접한 동굴들에서 살았을 것이다. 주된 건물 들은 북서쪽 모퉁이에 육중한 이충 망대로 요새화된, 약 100Xl20 피 트 크기의 커다란 직사각형으로 된 방이었다. 남서쪽 모퉁이에는 뜰 과 여러 개의 방이 있었다. 한 방에는 사면으로 돌아가며 낮은 벤치 가 있었는데, 이것은 그 방이 집회 장소였음을 시사한다. 이 지대의 윗충에서 나온 조각돌들을 한 데 맞추면 회(灰)를 입힌 상(床)과 벤 치롤 이루는데, 이것들은 두 개의 로마 시대 잉크 병들――하나는 구리로 만들었고, 하나는 테라 코타(te rra cott a : 붉은 진흙을 설구운 것――역주)로 만들었음-와 함께 성경 필사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십중팔구 그 두루마리들의 다수가 베껴진 바로 그 장소일 것이다. 이 주된 건물들로부터 남쪽으로 연결된 곳에 22 피트 길이의 방 하나가 있는데, 이것은 공동 식당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 인접한 한 작은 방에서 1000 개도 더 되는 사발들이 벽을 향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 물은 키르베트 쿰란 위로 솟아 있는 벼랑들의 밑바닥에 생긴 천연 저수지들로부터 돌로 만든 수로를 통하여 내려와서 모두 40 개나 되 는 수조와 수반들로 연결되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한 열(列)의 계 단들이 수반 bas in을 향해 내려가고 있으며, 때로는 여러 개의 평행 하는 내리받잇길들을 형성하기 위하여 나지막한 칸막이들이 있다 . 그 계단들은 높이가 서로 다른 지점들에서 물을 걷는 일을 보다 쉽 게 하기도 했고, 적어도 약간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수반을 만든 목 적이 단순히 목욕을 하기 위함이거나 어쩌면 의식적인 행위로서의

목욕을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동쪽에 인접해 있는 공동 묘지에는 약 1100 개의 무덤들이 포함되 어 있댜 발굴된 보기들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흔히 있는 형태는 수직으로 된 수갱과 우묵히 들어간 곳 recess 의 시체 놓는 곳으로 이 루어져 있었으며, 이것은 동쪽 벽 아래 있었고 돌이나 진흙 벽돌로 막혀 있었다. 장사는 매우 단순해서 도기류나 보석류는 거의 전무했 다. 흙으로 채워진 부분에서 나온 질그릇 조각들은 그 형태와 연대 에 있어서 인근의 건물 유적에서 발견되는 도기류와 일치한다. 쿰란 지대의 동굴들에서 발견된 고대 필사본들과 필사본 단편들 ―흔히 r 사해 두루마리 Dead Sea Scrolls 」로 알려진-은 필시 그 공동체의 거주 연대와 동일한 연대의 것이며, 그러한 연대는 필사본 들이 발견된 동굴들 안의 도기류에 의하여, 그리고 세마포(細麻布)로 된 두루마리 싸개에 대한 탄소 14 연대 측정에 의하여 중간치 연대 med ian da ta로 33 士 200 년으로 확인되 었다 (D JD I, 18-38 쪽). 이 텍스트들을 인용함에는 국제적으로 받아들여진 약자 체계가 사용되고 있다. 첫째로 문자가 기록된 바탕의 재료를 표시하는 기호 들이 있는데, 아무런 기호를 쓰지 않으면 가죽으로 된 것을 뜻하고, 〈p〉는 p a pyru s( 파피루스)를, 〈 cu 〉는 co ppe r( 구리)를, 〈 o 〉는 ostr ac on (陶器)을 각각 나타낸다. 둘째로 텍스트가 발견된 장소를 표시하는 기호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 1 Q〉는 쿰란에 있는 동굴 l 을 뜻한다. 셋째로 문서의 내용이 표시된다. 성경과 의경의 책들은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약자들로써 나타나고, 주석들은 p esher( 페셰르) 죽 주석 commen tmy을 뜻하는 〈p〉로써 표시한다. 새로운 작품들은 그것들의 이미 알려졌거나 추정되는 히브리어 표제의 첫 글자에 해당하는 글 자로써 표시하고 있다. 이리하여 보통 『훈련 편람 Manual of D i s cipli ne 』으로 불리는 작품 은 l Q S 로 표시되는데, 여기서 〈 S 〉는 그 공동체의 〈명령〉 또는 〈규

칙〉을 뜻하는 P.,O(sereq, 세레크)라는 말의 첫 글자이다. 그리고 『빛 의 아들들과 어 두움의 아들들의 전쟁 The War of the Sons of Lig ht wit h the Sons of Darkness 』은 〈전쟁〉을 뜻하는 n r.i n 넛T:i (m il bamah, 밀하마)의 첫 글자를 넣어서 l Q M이라고 한다. 두루마리들 가운데는 구약의 거의 모든 책들이 다소나마 나타나 있고, 약간의 주석들과 경의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 두드러진 것들은 거의 완전한 「이사야서 필사본 l Q Isa 」과 『하박국서 주석 l Qp Hab 」이다. 또한 방금 언급한 『훈련 편람』과 전쟁을 포함하는 새로운 합성본들도 나와 있 다. 언어와 이상(理想)에 있어서 『훈련 편람』과 흡사한 것은 이른바 『사독 문서 Zadok ite Documen t』인데, 이것은 1896 년에 카이로에서 발견되었으며 이것의 한 단편이 쿰란에 있는 동굴 6 에서 발견되었다 (6QD ). 쿰란을 중심지로 하여 공동체를 형성하던 사람들로서 그 두루마 리들의 출처가 되는 백성에 관해서는, 그들이 엣세네인들 Essenes 과 다소 밀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이 엣세네인들에 관해서는 우리가 요세푸스J ose p hus 와 필론 P hil o 과 플리니우스로부터 배울 수가 있다. 요세푸스(Ant . XVIII 1, 5 §§18-22 ; War IT 8, 2 §§119-161) 는 엣세네인들은 단순한 생활을 하 면서 그들의 재산을 공유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결혼을 경멸하지만 자녀들을 입양하여 그들 자신의 원칙들과 조화되게 양육한다. 하지 만 한 규칙은 결혼을 허용하기도 한다. 그들은 여러 마을들에 정착 해서 산다. 그들은 흰 옷을 입는다. 그들은 일출 전에 기도하고 아침 과 오후에는 노동을 하며, 찬물에 목욕하고 식사는 공동으로 한다. 그들은 고대인의 기록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가진다. 그 종단에 가입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1 년 간 시험을 받고, 그런 다음에 결례(潔 禮)의 물에 참여하도록 허락을 받지만, 정식으로 가입하여 공동 음 식을 먹기까지는 아직도 2 년을 더 시험받는다.

필론 (Eve ry Good Man Is Free 75-91, !CL IX (1941], 53-63 쪽)은 엣세네인들에 관하여 요세푸스가 기술하는 것과 대동소이하게 기술 하고 있다 . 그는 그들이 검소하고, 단순한 생활과, 자족, 겸손, 인간 애, 그리고 친교의 정신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하고, 또한 그들 은 참으로 <미 덕 의 경 기 자들 ath let e s of virtue s>이 라고 한다. 플리 니 우스 (Na tu ral Hi st t or y V, XV) 는 엣세네인들을 사해의 서편에 위치 한 〈외톨이 족 solit ary tri be 〉이라 부르고, 그들에게는 여자가 없고 돈도 없으며 동반자라고는 오직 종려나무들뿐인 것이 특색이라고 말한다. 목욕 재계를 위한 위치와 시설, 공동 식사, 그리고 기록 활동 등에 관한 이와 같은 기술들이 키르베트 쿰란에서 발견되는 것과 일치한 다는 사실은 쿰란의 사람들이 엣세네인들과 동일한 사람들임을 지 지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r 사해 두루마리」에 보 존된 매우 많은 성경 텍스트들과 다른 고대 텍스트들도 고대인의 기 록들에 나타난 바 엣세네인들이 가졌던 비상한 관심과 일치하고 있 다. 또한 특히 『훈련 편람 l Q S 』에 기술된 공동체의 생활은 엣세네인 들에게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특징들과 같은 특징들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같이 그 편람은 〈그 공동체(더 n,, Y 따rid, 야하드)의 명 령〉(I 1) 을 따라 사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 구성원들은 그들의 전 재산을 그 공동체에게 헌납할 것이었다(I 12). 자기 자신의 완악한 마음대로 행하기를 더 좋아하는 자는 아무도 가입할 수 없으며, 그 런 사람은 어 떠 한 씻음으로도 성 화될 수가 없다(ill 4-6). 그러 나 악 으로부터 돌아서서 깨끗함을 받은 자들은 함께 거룩한 회중(i1더3', 'ed ah, 에다)을 형성 한다 (V 20). 이 편람에 있는 쿰란 공동체에 관한 다른 정보로부터 우리는 공중 집회 때에 〈다수인 (C, ::Ji, . robbim , 랍 빔)의 회의 sessio n of the man y〉는 감독자(,p:::i o, meba qqe r, 므박케

르) 또는 감시자(.,`p!i, paqfd, 파키드)가 사회를 보았음을 알 수 있고 (VT 8, 12, 14), 이와 같이 『사독 문서』에서도 우리는 므박케르와 〈회 집( ';,np , qah zl, 카할)〉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는다. 이러한 조직과 관련된 모든 용어들은 또한 초기 기독교회의 조직 과 관련된 것으로서 홍미있는 것들이다. 공동체y abad 를 강조한 것 은 예루살렘 교회의 〈교제 KO t V(!)v i a 〉를 생각하게 하는데(행 2:42), 쿰 란과 예루살렘에는 공히 실제적인 재산 공동체가 있었다. 〈회중〉이 라는 단어는 LXX 에서 보통 卯 VGYUYn( 쉬나고게, 〈회당〉)로 번역되어 있고(출 12:3 둥), 이 단어는 야고보서 2:2( 〈회당〉)에서 기독교 회집 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어 있다. 쿰란 공동체의 〈다수인 rabb i m 〉은 LXX 에서 자주 nA i Ooc( 플레토스, 〈무리〉)라는 말에 해당하는 단어 rab 에서 온 것이며(창 16:10 등), 후자는 사도행전 6:2, 5 ; 15:12, 30 에서 기독교 단체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어 있다. 〈감독자 meba qq er 〉 또는 〈감시자paqfd 〉라는 두 칭호는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이 며, 후자 파키드paqfd 는 LXX 에서 t n i crKo ]t o c;;(에피스코포스)(삿 9:28 ; 느 11: 9, 14, 22) 로 번역되어 있는 한편, 신약에서는 이 동일한 단어가 r 개정표준역 Revi se d Sta nd ard Versio n , RSV 』에서 〈보호자〉(행 20:28 ; 벤전 2: 2.5)와 〈감독〉(빌 1:l ; 딤 전 3:2 ; 딛 1:7) 으로 나타난다. 『사독 문서』에 사용된 〈회집 q아따〉이라는 단어는 LXX 에서 보통 tKK Mcri. a (에클레시아)로 번역되어 있는데(신 31:30, 둥), 이것이 신약에서 〈교 회〉를 뜻하는 단어이다. 6 『훈련 편람』의 제 VIII 칼럼 쿰란 공동체는 유대 광야의 가장자리에 위치하여 사해의 윗쪽에 그들의 중심을 두고 있었다. 광야의 석회석 산들이 낭떠러지를 이루 면서 이회석 단지로 떨어져 있는데, 바로 이 단지 위에 그들의 건물

들이 지어졌다 (5 항). 이스라엘의 경험과 생각에 있어서 광야는 대단 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곳은 정치적 망명의 장소였고 혁명적 행동의 거점이었다. 사울이 다윗을 추적했을 때, 다윗은 엔-게디 황무지(광야)에 피신 했다(삼상 24:l).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An ti ochus E pip hanes 가 유대 인들을 박해했을 때, 〈의와 정의를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광야에 서 살기 위하여 그곳으로 내려갔으니, 곧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과 아내들과 가축들이 함께 내려갔다. 왜냐하면 악한 일들이 그들을 무 겁게 억압했기 때문이다(마카베오상 2:29)>. 그리고 거기 광야에서 그들이 적의 추격을 받는 동안, 안식일에 방어하기를 거절했을 때, 그들은 죽임을 당했다. 이때 유다 마카베오J udas Maccabeus 는 광야 , 에서 자신과 그의 동료들의 목숨을 보존했다(마카베오하 5: 업). 한 애 굽인은 사천 명의 검객단을 거느리고 광야로 갔다(행 21:38). 또한 광야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탈출 exodus 사상이 다. 첫번째 탈출 곧 출애굽은 시내 Sin a i 광야를 가로지르는 것이었 다. 두번째 탈출은 바벨론으로부터의 탈출로 바빌로니아와 팔레스타 인 사이의 광야를 가로지르는 것이었는데, 이 일과 관련하여 이사야 (40:3) 는 다음과 같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 와의 길을 예비하라./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이사야에 있는 이 구절은 쿰란 공동체의 생각에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사진 (6 항)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훈련 편람 l Q S 』의 제 VIII 칼럼 한가운데서 본문은 진술하기를, 이 규칙들을 따라서 그 공동체의 사람들은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죽 성경이 다음과 같이 교 훈하는 바를 이행하기 위하여, 사악한 사람들의 와중에서 떠나 광야 로 나갈 것이라고 한다. 〈너희는 광야에서 …… 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이것은, 제 8 칼럼의 제 14 행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네 글자로 된 주(主)의 이름

(YHWH) 이 들어갈 자리에 네 개의 점이 찍힌 것을 제외하고는 이사 야 40:3 을 정확하게 인용한 것이다. 이 성호는 너무나 거룩하여 기록 하거나 발음할 수가 없었다. 그 다음에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그들이 광야에 나와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신 율법을 `. ,연구하고, 또한 필요에 따라서는 그 가운데 계시된 모든 내용대로, 그리고 또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성령을 통하여 계시한 바대로 행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쿰란 공동체가 광야에 터전을 잡은 것은 계획적인 의도, 죽 거기서 율법을 연구하고 행하며, 그리하여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함이었다. 그 목적은 말하자면 세번째 탈출과 세번째 언약의 땅 정복,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고 또한 그 나라가 임하는 일에 도구가 될〉 (W illi ams) 정복을 하기 위함이었다. 의미 심장하게도 이사야의 이 동일한 주요 구절이, 침례자 요한이 공적으로 출현할 때의 그의 사업을 기술하기 위하여 네 개의 복음서 모두에 (마 3:3 ; 막 1:3 ; 눅 3:4 ; 요 1:23) 인용되 고 있으며, 요한복음 1:23 에 의하면, 요한 자신이 자기의 사업에 관하여 말하면서 이 구절 을 인용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공적인 사업을 수행할 때의 요한과 쿰란과의 관계는 단지 지리적으로 가까운 관계만이 아니라 사상의 형태가 홉사한 관계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한이 착수한 사업은 쿰란 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던 일, 죽 율법 연구가 아니라, 오히려 판 이하게 다른 그 무엇, 즉 회개의 침례를 설파하는 것이었다. 7 하부 요단 계곡의 지도 침례자 요한이 그의 공적인 사업의 무대에 둥장했을 때, 그는 〈요 단 강 부근〉(눅 3:3) 에 나타났으며 요단 강에서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고 있었다(마 3:6; 막 1:5). 약도(略圖)는 하부 요단 지역과 서쪽으

로 여리고까지의 인접한 계곡에 있는 부지들을 보여 준다 . 8 〈성 요한 수도원〉 근처의 요단 강 요한이 요단 강에서 침례를 주기로 선택했을 때, 그것은 아마도 무엇보다도 먼저 그 강이 물에 잠기 게 하는 예식 (~arn:i~(J) [밥티조], 마 3:6 동 ; LXX 에서 낫:::i O [타발]의 역어, 왕하 5:14, 〈잠그다〉)을 행하 기에 적당한 물을 공급했기 때문일 것이다. 요한과 엘리야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음이 인식되었고(막 1:2 은 말 4:5 을 인용함; 또한 마 11:14 ; 17:12 ; 막 9:13 을 보라), 요한이 엘리 야와 같은 옷차림 을 하고 있었던(마 3:4 ; 막 l:6 ; 왕하 1:8 참고) 것이 또한 사실이다. 엘리야는 그의 생애가 끝날 무렵에(왕하 2) 여리고와 길갈에 있다가 그 후에 요단 강을 건너갔다 . 그러므로 요한이 일할 장소로 요단 지역을 선 택한 것은 그가 엘리야의 역할을 수행하는 일과 관련이 있었을 가능 성이 있다. 예루살렘과 유대의 온 백성이 요한에게로 나온 듯이 보이므로(마 3:5 ; 막 1:5), 그가 설교하며 침 례를 주던 장소는 간선 도로나 여 러 도로가 연결된 강의 한 지점이었을 것이다. 앞에서 본 r 하부 요단 계곡의 지도』 (7 항)에 나타난 바와 같이, 오늘날 여리고로부터 동쪽으 로 암만 Amman 을 향한 간선 도로는 로라니 제 여울 Rora nije Ford 이 라는 개울에 놓인 다리 (Allenb y Br idge -역주 )를 통하여 요단 강을 건넌다. 이 지점은 여리고로부터 노상으로 5 마일, 그리고 요단 강이 사해로 흘러드는 입구로부터 강을 거슬러 약 9 마일 떨어진 곳이다. 로라니제 여울 아래 쪽으로 고대에 강을 건너던 곳이 세 군데 더 있었다. 바로 다음 건널목은 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약 4.5 마일 되는 곳에 있었는데, 여기에는 〈데이르 마르 주한나Deir Mar Juh anna>, 죽 〈성 요한 수도원 Monas tery of St. J ohn 〉이 그 강에서 서쪽으로

700 야드 (640 미터) 떨어진 나지막한 언덕에 서 있으며, 그 맞은편에는 동쪽으로부터 이르러 오는 와디 엘-카라르 Wa di el-Charrar 가 놓여 있다. 사진은 이 지역의 강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곳으로부터 1 마일 더 아래 쪽에 엘-하즐라 el-H aj lah 라는 여울이 있는데, 그 근처에 서 쪽으로부터 이르러 오는 와디 엘-켈트 Wa di el- Q el t가 놓여 있댜 다 시 남쪽으로 깊숙이 반쯤 내려와서 엘-헤누 el-Henu 건널목이 있었 다. 위에서 살펴본 바 요한이 일하던 상황으로 미뤄 볼 때, 그의 활 동은 이 지역 일대의 어딘가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 9 〈성 요한 수도원〉 근처의 요단 강에서의 침례 요한복음 1:28( 요 10:40 참고)에는 요한이 일하던 지점을 구체적으 로 가리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 서〉 침례를 주고 있었다는 진술이다 . 신약에서 잘 알려진 베다니는 예루살렘 근처의 감람산 비탈에 있는 도성인데, 이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는 제 4 복음을 제외하고는 아무데서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요한복음 1:28 의 가장 좋고 가장 오래 된 사본들은 그곳을 베다니 Bn8av i a 라고 하는 한편, 그와는 달리 베다바라 Bn8a~a p a 라고 하는 독 법(讀法)도 있다. 후자는 오늘날 몇 개의 비교적 후기 사본들 (n=041 제 9 세기 ; 1l'= 044 제 8-9 세기, 시내 및 쿠레토니아 시리아어 Sin a itic and Cureto n i an Sy riac 둥)에서만 보존되어 있으다, 오리게네스Orig en 는 이것을 알고 있었고, 또한 이것이 옳다고 믿고 있었다. 그가 쓴 『요 한복음 주석 Commenta ry on J ohn 』 (VI 24 GCS Orige nes IV, 149 쪽 ; ANF IX, 370 쪽)에서 그는 설명하기를, 베다니는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던 마을로 예루살렘으로부터는 불과 15 스다디온 (2 마일 미만) 떨어져 있었으나, 요단 강은 약 180 스다디온 (20 마일 이상)의 거 리에 있었고, 그 인근에는 베다니라는 이름의 장소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오리게네스는 〈베다바라가 요단 강의 제방 가에 있었던 것 으로 지적되며, 요한이 거기서 침례를 준 것으로 전해진다〉라고 선 언한다. 이 주제에 대하여 그가 남긴 다른 공헌은 어원상으로 베다 니는 〈순종의 집 House of obe di ence 〉이라는 뜻이고, 베다바라는 〈준 비의 집 House of p re p ara ti on 〉이라는 뜻이므로, 분명히 후자가 그리 스도의 면전에서 길을 준비한 사람의 일을 가리키기에 보다 적합하 다고 시사한 것이다. 유세비우스 Euseb i us 도 『지명록』 (58 쪽)에서 베다니를 감람산에 있 는 나사로의 마을로 기록하고 , 베다바라를 요한이 침례를 준 곳, 그 리고 그의 말대로 지금까지도 많은 형제들이 씻음 받기를 열망하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하나의 본문에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 r 시내 사본 Codex S inaiti cus 』의 제 2 교정자의 수중에 있는, 그리고 하르클 레 아 시 리 아어 Harklean Sy riac 사본의 난의 주에 있는 요한복음 1:28 에 나타나는데, 그것은 곧 베다라바 Be th araba(Bn8a p a~a) 이다. 이것은 단순히 베다바라를 잘못 쓴 것이거나, 여호수아 15:6 에 열거된 바, 아마도 여리고의 남동쪽에 위치했던 벨-아라바 Be th -arabah 와 동일 한 장소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위의 4 항 참고). 보르도 순례자 Bordeaux Pilgrim (333) 의 여정에는 사해를 묘사한 후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GEYER 24 쪽 ; LPPTS I-B, 26 쪽 ; CCSL CLXXV, 19 쪽 ; WET 161 쪽), 〈그곳으로부터 주께서 요한에 게 침례를 받으신 요단 강까지는 5 마일이다. 여기에는 강을 끼고 있는 한 장소, 곧 엘리야가 승천한, 먼 제방 위의 작은 언덕이 있다.〉 순 례자가 로마 마일로 5 마일 죽 영국 마일로 약 4.5 마일 거리를 사해 로부터 거슬러 오르면 대략 〈성 요한 수도원〉이 있는 지점에 이르렀 다. 동쪽에 있는 작은 언덕은 제벨 마르 엘뤼아스J ebel Mar Elya s 또는 성 엘리야 산 Moun t of St. E lij ah 이었는데, 이것은 와디 엘-카

라르 Wa di el-Charrar 에서 윗쪽으로 1. 5 마일도 채 못 되는 곳이었다. 유대인의 전승은 이곳을 엘리야가 승천한 장소로 가리켜 왔다. 열왕 기하 2:4, 6, 8-11 에 의하면,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정말 요단 동 쪽 곧 여리고의 맞은편이었다. 그 언덕 옆에는 샘이 많이 있었는데, 요단 강이 범람할 때에는 여기서 나는 물이 침례를 주는 일에 잘 사 용되었을 것이다. 테오도시우스 Theodos i us(530) (GEYER 145-146 쪽 ; LPPTS II-B, 14-15 쪽 ; CCSL CLXXV, 121-122 쪽 ; WJ P 69 쪽)도 역 시 사해로부터 주께서 침례를 받으신 곳까지의 거리가 5( 로마)마일이었다고 말하고, 그 장소는 하나의 철 십자가가 있는 대리석 기둥으로써 표시되어 있 었다고 언명한다. 그는 또한 그곳에 〈침례자 성 요한 교회〉가 있었다 고는 말하지만, 그 교회가 강의 서쪽에 있었는지 또는 동쪽에 있었는 지는 명시하지 않고 있다. 지금 〈성 요한 수도원〉이 있는 장소가 바로 그곳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주께서 침례를 받으신 장소에 관 해서는 그가 확실히 말하기를, 그것은 요단 강 동편 tran s Iordanem (Trans j ordan) 에 있었다고 하고, 거기에 엘리야가 승천한 작은 산이 있었음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보르도 순례자가 언급한 그 언 덕과 동일한 것일 것이다. 피아첸짜의 무명씨 the Anony mo us of Pi acenza(570) 는 그 동일한 언덕 과 샘을 언급하는데 (GEYER 165 쪽 ; LPPTS II-D, 8-9 쪽 ; CCSL CLXXV, 134 쪽), 이곳은 요한이 침례를 주던 요단 강으로부터 로마 마일로 2 마일(영국 마일로 1. 5 마일 약간 못 됨) 떨어진 곳이었다. 그 계곡 자체는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를 가져다 주던 때에 엘 리야가 있던 곳이다. 따라서 와디 엘-카라르는 〈요단 앞 그릿 시냇 가〉(왕상 17:5) 와 동일한 곳이었으며, 이럴 경우, 요한이 엘리야와 관 련이 있는 환경에서 그의 일을 수행하기로 선택한 사실은 어느 때보 다도 더 분명해진다.

그런데 예수께서 친히 침 례를 받으신 것은 (GEYER 166-168 쪽 ; LPPTS IT-D, 10-12 쪽 ; CCSL CLXXV, 135-136 쪽 ; WJ P 82 쪽) 요단 강에서였다. 그 장소에는 물속에 한 나무 십자가가 서 있었고, 요단 윗쪽에는 강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성 요한 수도원〉이 있었다. 그 무명씨는 말하기를, 주현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침례를 받고자 이 곳 강으로 나왔다고 한다. 사진은 〈성 요한 수도원〉 근처의 요단 강 에 있는 이 전통적인 장소에서 희랍 정교회가 침례 행사를 위하여 준비하는 장면을 찍은 것이다. 10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서의 여리고 지역.

• r 마다바 모자이크」에서는 왼쪽이 북쪽이다― 역주.

바로 위에서 토의한 지역은 r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 Madaba Mo-sai c Ma p』에 자세히 그려져 있다. 우리는 이제 약간씩 겹치는 세 부 분의 사진들에서 이 지 역을 보고자 한다(1 0-12 항). 첫번째 사진은 여 리고 주변의 지역을 나타내고 있다. 지도의 중앙에서 조금 올라가면 서 유대 광야의 거무스름한 산들이 뻗어 있다. 그 너머에는 비교적 밝은 색의 요단 평지가 있고, 오른편 상단의 모퉁이에는 사해의 해 안 곡선이 보인다 . 평지의 변두리와 산들 근방에는 왼쪽으로부터 오 른쪽으로 다음과 같은 곳들이 있다. 아르펠라이스i\p xe J.. a t<; (Jo se- pt0h 0u sd, YAi onu t . 'EXJV..taIaI io1 u3 ,— 1 §이34 곳 0 ;은 X V틀I림II 없2, 이2 §엘31리) 와사 가성 고엘친리 사물의 근 원장(소왕 T하o 2:19-22) 이자 보르도 순례자가 방문한 샘으로서 (GEYER 24 쪽; LPPTS I-B, 25 쪽 ; CCSL CLXXV, 18 쪽 ; WE I' 160 쪽 이하), 여 리 고로부터 1500 보 떨어진 곳이며, 지도에서 이것은 남쪽 탑의 아래 쪽에 있는 성소로 나타나 있고, 이 탑으로부터 시냇물이 도성 안으로 흘러간다.

그 다음은 여리고 ‘I 'c pt xw 이다, 평지의 바깥쪽으로 좀더 나가서 갈 갈라 Gal g ala, 곧 〈열두 돌 Twelve S t ones 〉이라고 불리는 곳 r 야 Y 야Q 먀 Kai Ao8CK 야t 8ov 이 있는데, 이곳은 여호수아 4:20 의 유적지를 표시 하는 것으로 유세비우스 (Onomas ti con 64-67 쪽)가 그 위치를 확인하 였고, 여 리 고로부터 동쪽 방향으로(Jtp oc TJA io u ava-c o Mc 수 4:19 LXX) 2 마일 떨어져 있었으며 지도에서는 열두 개의 흰 돌이 박혀 있는 벽으로 나타나 있다. 그 다음에 는 아닷 타작 마당 Thresh ing Floor of A ta d 으로 지 금은 베다글라 Be th a g la 라고 불리는 곳 AAIOV 'A1 d8 i VOv Bn8GYM 이 있는데, 이곳은 창세기 50:10-11 의 유적지로서 유세비우스 (Onomas ti con 8 쪽) 가 그 위치를 확인하였는데, 여리고로부터 3 마일, 요단 강으로부터 2 마일 떨어진 곳, 죽 지도에 나타난 바와 같이 요단 강 서쪽에 위치 해 있다. 창세기의 구절이 이 장소롤 〈요단 강 건너편〉이라고 한 사 실은, 이 진술이 요셉의 일행이 애굽으로부터 올라올 때의 그들의 관 점에서 표현한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는 이 유적지가 원래는 요단 강 동편 Trans j ordan 에 있었으나 방문하 는 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서쪽으로 옮겨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고대의 어떤 순례자 여정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아르켈라이스로부터 베다글라까지에는 종려나무들이 많이 보이고, 여리고 주변에는 특별히 여러 그루가 그려져 있다. 요세푸스 (An t. XVIII 2, 2 §31) 와 플리 니 우스 (Na tu ral Hi st ory VIII 9, 44) 는 공히 아 르켈라이스에 대추 야자(종려)나무들이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으며, 요세푸스

11 r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서의 요단 강 하류.

• 『마다바 모자이크』에서는 왼쪽이 북쪽이다―역주.

이 사진은 앞에서 본 지도의 동쪽 가장자리(상단)가 겹치도록 찍 은 것으로서 갈갈라와 베다글라에 관한 설명을 전체적 또는 부분적 으로 반복하고 있다 (10 항을 보라). 앞에서 설명한 것들의 그 윗쪽을 보면, 요단 강이 평지를 통하여 흘러내려 사해로 들어가는 것이 보 인다. 강속에는 여러 마리의 물고기가 있는데, 가장 하류에 있는 것 은 강을 거슬러 오르고 있다. 분명히 이것은 아무런 생명체도 살지 않는 사해의 소금물이 싫어서 되돌아가는 것일 것이다. 강의 상류 쪽에는 그 강을 가로지르는 건조물이 있고, 그 아래에 는 배 한 척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 강을 가로지르는 밧줄에 의 하여 인도되던 나룻배일 것이다 . 이 지점의 서쪽 제방에는 하나의 아치 문 위에 세워져서 사다리를 타고 오르게 되어 있는 탑이 있다. 유세비우스 (Onomas ti con 154 쪽)는 막달센나 M ag dalsenna(Mav6야(J EVVa) 라고 하는 한 마을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유대의 변경에 있었 고 여리고로부터 8 마일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 막달 M ag dal 은 히브 리어로 〈망대 Tn r.:i〉를 뜻하는 말이고 그 위치가 대략 맞으므로, 이 탑이 바로 그 장소를 가리킬 수도 있다. 강을 건너는 곳의 양쪽에는 각기 큼직한 사막의 관목 숲이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가시덤불일 것이다 이것들은 강의 이쪽에 있는 여리고 평지와 요르단에 있는 모압 평지룰 표시하는 것이다. 요르단에는 그 형체가 심하게 손상된 사자 한 마리가 영양을 추격하고 있다. 그 위에는 또한 대추 야자(종 려)나무가 많이 있는 두 개의 마울이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채 부분 적으로 손상된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다시 강의 제방쪽으로 와서 침례자 요한이 한 일과 관련된 지명들 을 본다면, 강의 서쪽에 베다바라 Be th abara 라는 지 명 과 그 아래에

붉은 글자로 쓰인 설명(사진사의 삼각가[ 三 脚架]의 다리에 부분적으로 가려져 있음)은 성 요한 (및) 침례의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다 (BE8aPa pa. tb tO o avi o u 1 야 vvou tO o p血tioµ at o<;). 그리 고 하나의 교회 건물이 보인다. 요한복음 1:28 은 베다니(또는 베다바라)가 요단 강 건너편에 위치한다고 말하고, 보르도 순례자와 테오도시우스(위의 9 항 참고)는 공히 예수의 침례 장소를 강의 동쪽에 있던 엘리야가 승천한 언덕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만일 요한이 이와같이 요 단 강의 동쪽에서 일하였고, 예수께서 바로 그 강에서 침례를 받으 셨다면(막 1:9), 그 실제 장소는 아마도 동쪽 제방에 가까운 곳이었 을 것이다. 여기 r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 베다바라 와 전통적인 침례 장소를 서쪽 제방으로 옮긴 것은 순례자들이 그 장소를 방문하기에 편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이것은 그러한 변 화가 일어나게 된 까닭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지도에서 우리는 베다바라와 엘리야의 언덕이 있을 것으로 기대 되는 장소 근처의 강 동쪽에 〈애논, 그곳이 지금은 삽사파스 (Aenon, the re now Sap s ap h as, Atv cl lv ev8a vuv }:따 oa 試)〉라고 새겨진 문구가 있는 것을 본다. 지도는 살렘 S alim에서 가까운 것으로 명시된 애논 (요 3:23) 을 강의 상류 쪽으로 좀 더 떨어진 곳에다 제시하고 있으므 로 (12 항 참고), 지도를 만든 사람의 의견을 따르면 이것은 적어도 그 애논이 아니다. 비록 그가 여기서 그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어떤 전 승이 다른 애논을 현재의 위치에다 두었던 사실을 나타내기는 하지 만, 두 개의 애논은 별개의 것이다. 애논이라는 지명은 틀림없이 〈샘 들 0'1' p〉을 뜻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된 것이므로, 여기서 이것은 엘리야가 승천한 것으로 생각되는 언덕 옆의 샘들, 요단 강 자체뿐 만 아니라 요한이 침례를 주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었던 샘들, 곧 요한이 침례를 준 것으로 전해진 샘과 어쩌면 일치되는 샘을 가리킬 수도 있다 . 이 샘은 피아첸짜의 무명씨가 언급한 바와 같이 요단 강

으로부터 2 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 (GEYER 199 쪽; LPPTS 11-D, 9 쪽; CCSL CLXXV, 134 쪽 ; WJ P 81 쪽 ; 위 의 9 항 참고). 삽사파스 Sap- sa p has 는 〈버드나무〉를 의미하는 듯하다 (Av i -Yonah in IDB I, 52 쪽). 삽사스 Sa p sas 라는 사람이 요한 모스쿠스 Joh n Moschus 에 의 하여 언급되었는데 (MPG ITT, col. 28.51), 모스쿠스는 예루살렘의 엘리아스 Eli as of J erusalem(494-518) 라는 총대주교가 그곳에 교회와 수도원 을 건축했다고 말한다.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는 이 장소에 아무 런 건물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오른쪽에는 나무로 보이는 하나의 물체가 있고, 그 왼쪽에는 동굴을 나타내는 것 같은 형체가 하나 있다. 840 년 경 에 에 피 파니 우스 모나쿠스 Ep iph a nius Monachus (MPG 120, col. 露 WJ P 120 쪽)는 요단 강 건너 편으로 1 마일쯤 되 는 곳에 전주자(前走者)의 동굴 한 개가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는데 (nepa v ,:야 1o p祐 vou c:ic; &Jto µt'J...i.o v ev6c; emt 댜 떄iJ. M t ov ,:of> n:po 6p 6µ ou),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여기서 생각하는 바로 그 장소일 것이다. 12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서의 요단 강 상류 부분.

• 『마다바 모자이크』에서는 왼쪽이 북쪽이다―역주 .

이것은 마다바에 있는 단편 모자이크 지도에 보존된 요단 강의 최 상류 부분이다. 걱 강의 하류에서와 마찬가지로 (11 항을 보라) 강물 가운데 배 한 척이 있고, 그 강을 가로지르는, 아마도 나루터였을 건 조물이 있댜 이것의 아래 쪽에는 하나의 지류__분명히 얌복 강 (와디 지르카 Wad i Zir qa) —— 가 먼 쪽으로부터 들어 와서 요단 강에 소용돌이룰 일으킨다. 이 지점의 서쪽 제방에는 Kop co uc 곧 코레우 스 Coreus 라는 명칭이 붙은 마을이 있다. 이것은 틀림없이 요세푸스 (War I 6, 5 §134 ; IV 8, 1 §449 ; Ant. XIV 3, 4 §49 ; 5, 2 §83) 가 스퀴

토폴리스 Sc ytho poli s 아래 쪽에, 그리고 유대의 변경에 있는 것으로 언급하는 코레 애 Coreae(Kop tat) 이 다. 이 곳은 폼페 이 우스 Pom pey가 B.C. 63 년에, 베스파시아누스 Ves p as i an 가 AD . 68 년에 행군하여 지 나간 지 점 이 다. 현재 의 와디 파르아 Wad i Far'ah 의 하단에 위 치 한 텔 엘-마자르 Tell el-Mazar 가 그곳인 것으로 확인되 었다 (BASOR 62 [Ap r. 1936], 14 쪽). 강을 거슬러 올라 서쪽으로 나루터 맞은편에는 Atv @ v i tw uc t0 U 뇨야龍(아이논 헤 엥구스 투 살렘)이라는 명칭이 붙은 장소가 있는데, 이 것은 이 장소가 요한복음 3:23 의 〈살렘의 가까운 애논〉 (ALv@v 紋 W 述 CO f> }:야바[아이논 엥구스 투 살림])임을 나타내려고 의도한 것이 분명 하다. 이 위치는 요한복음 3:23 의 애논을 스퀴토폴리스의 남방 8 마일 에 두는 유세비우스 (Onomas ti con 40 쪽)와 일치하고 또한 애테리아 Aeth e ri a( GEYER 56-58 쪽 ; LPPTS 1-C, 30-32 쪽 ; CCSL CLXXV, 54-56 쪽; WE I' 108-111 쪽)가 남긴 묘사와도 일치한댜 애테리아는 요단 계곡으로 내려와서 세디마 S edim a 라고 불리는 한 마을에 이르 렀는데, 이곳은 그녀가 이해하게 된 바로는 멜기세덱 왕이 다스리던 살렘이었다고 한다. 그곳으로부터 200 보 떨어진 곳에서 그녀는 성 요한의 정원 Garden of St. J ohn 이라고 불리는 한 정원을 보았다. 그 녀는 여기에 샘이 하나 있어서 물이 한 연못으로 홀러들었으며, 이 연못에서 요한이 침례를 준 것 같다고 말한다. r 마다바 모자이크 지 도』에서는 이 연못을 애논이라는 이름 윗쪽에 청록색을 띤 각석(角 石, cube) 들의 행렬로써 나타낸 것 같다. 여기에 제시된 지역 내에 텔 엘-후슨 Tell el-Husn( 고대의 벤산 Be th -shean 및 스퀴토폴리스)의 남쪽 약 12 킬로미터 되는 곳에는 실제로 풍부한 샘(아인 엣-데이르 Ain ed-D eir 및 다론 샘 들) 이 있는 지 역 이 있다 (RB 22 [1913], 222- 223쪽). 위에서 언급한 바 폼페이우스와 베스파시아누스가 요단 계곡을

따라 행군해 내려온 것은 이것이 주된 여행 통로 중에 있었음을 보 여 준다. 만약 침례자 요한이 요단 강의 하류에서와 마찬가지로(위의 8 항 참고) 이곳에서도 활동했다면, 그는 이 두 경우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지역들에 있었다. 13 헤브론 근처 성 요한 사막의 비잔틴 교회에 있는 침례탕과 후 진(後陣) 침례자 요한의 활동 중심지가 어디였던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 앞 에 서 언급한 (4 - 12 항) 지 역 이 복음서 가 말하는 바와 가장 잘 조화되 는 듯이 보이는 한편, 또한 비교적 후대의 것이긴 하지만 그와는 다 른 전승들도 있다. 무명 씨 작품 II Anonym o us II( ll70) 로 알려 진 순 례자 기록에는 헤브론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일과 〈침례 자 성 요한 교회〉를 지나가는 일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 교회는 요 한이 침례와 회개를 전파한 곳이고 또한 사막 한가운데서 끊이지 않 는 샘물이 솟아나는 곳이다 (LPPTS VI-A, 11 쪽). 헤브론 인근에서 교회와 사막과 샘이 결합된 것은 그 도성으로부 터 서쪽으로 5 마일 떨어진 계곡으로 지금까지 아인 엘-마무디예 &n el-Ma'mud iyyeh 죽 <침 례 의 샘 spr ing of bapt ism > 이 라고 불리 는 샘 과 하나의 작은 비잔틴 교회의 폐허가 있는 계곡과 일치한다. 이 교회 는 아마도 유스티 니 아누스 Jus tin ian (5'2 7- 565) 시 대 에 세워 진 것 이 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후진(後陣, aps e ; 교회 건물의 제단 뒷쪽 [동편]으로 둥근 지붕의 반원형 또는 다각형으로 튀어나온 부분-역 주) 안에는 깊이가 4 피트 이상 되는 원형의 침례탕 ba pti s tery이 있 고, 그 안으로 내려가도록 놓여진 4 개의 대리석 계단이 그 속에 있 다. 한쪽 벽에는 샘으로부터 침례탕으로 물을 끌어오는 도수거(導水 渠, cond uit)가 열려 있다.

〈요한의 사막〉에 대한 다른 하나의 (후보) 위치는, 그 인증이 더욱 더 후대의 것이기는 하지만, 아인 엘-카비스Ai n el-Khabis 즉 〈은자 의 샘 Sp ring of the He rmit> 옆에 있는 아인 카림 Ain Karim의 서쪽 약 1. 5 마일에 있다. 이 것은 1470 년에 뷔르츠부르크 W tir zbur g로부터 예 루살렘으로 여행을 한 울리히 브룬너 Ulrich Brunner 에 의하여 처음 으로 언급되었다 (ZDPV 29 [19 06], 43 쪽). 그 장소에는 지금 프란체 스코 파 Fran ci scans 가 지은 교회와 수도원이 서 있다. 14 마캐루스 침례자 요한의 죽음은 마태복음 14:3-12 과 마가복음 6:17-29 에 기 술되어 있다.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령한 왕은 B.C. 4 년으로부터 AD. 39 년까지 갈릴리와 페레아 Perea 를 다스린 분봉왕 헤롯 안티파 스 Herod An tip as 였댜 마가복음 6:21 에서 말하기를, 그의 생일 잔치 에 〈갈릴리의 귀인들〉이 참예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그 잔치가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 해역에 그의 수도로 건립한 티베리아스 (T i­ berias , 디 베 랴) 도성 에서 개 최 되 었음을 시사하기 도 한다(J ose p hus, Ant. xvm 2, 3 §36). 그러나 요세푸스(A n t. XVIlI 5, 2 §119) 는 요한 이 사슬에 매여서 마캐루스 Machaerus 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죽음을 당했다고 진술한다. 이 사진에 보이는 마캐루스 지대는 요단 강 입구로부터 남동쪽으 로 약 15 마일 떨어진 곳으로, 사해를 동쪽으로부터 굽어보는 거칠고 삭막한 언덕들 가운데 있다. 이 지대의 요새는 원래 하스몬 가 Hasmonean 의 왕 알렉산더 얀내 우스 Alexander Jan naeus(B.C. 103-76) 에 의 하여 B.C. 90 년 경 에 건 립 되 었고 (War VII 6, 2 §171), 폼페 이 우스의 장군 가비 니 우스 Gabi- ni us 에 의하여 B.C. 57 년에 파괴되었다가 (War I 8, 5 §lf!l ) 그 후에

헤롯 대왕에 의하여 매우 화려하게 재건되었다 . 헤롯 대왕이 죽자, 그 요새는 헤롯 안티파스의 수중에 들어갔는데 나바테아 Naba tea와 의 관계 때문에 전략적으로 나바테아의 방향에 위치한 그 장소는 그 에게 틀림없이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헤롯 안티파스가 죽은 (A D. 39) 후에 그의 속령(屈領, tetr arch y)은 헤롯 아그립바 I 세 Herod Ag rippa I 에게 주어졌고 , 이 왕이 그때부터 마캐루스를 지배했다 . 하지만 아그립바가 죽은 (44) 후에는 로마인들 이 나라를 정복하였으며, 68 년의 〈제 1 차 항거 Fir st Revol t〉의 초기에 이르러서야 마캐루스 마을의 유대인들이 로마 수비대룰 퇴거시키고 그 요새를 점령할 수 있었다 (War II 18, 6 §§48.5- 48 6). 마침내 예루살 렘이 파괴된 (70) 후에는 로마군의 새 사령관이자 유대의 총독이 된 루칠리우스 밧수스 Luc ili us Bassus 가 먼저 헤로디움 Her odi urn 에 있 는 유대 수비대를 쉽게 쳐부수고 나서 (71), 마캐루스를 포위하고 탈 취하여 파괴하였다 (72). 요세푸스 (War VII 6, 1 이하, §§164 이하)가 마캐루스에 관한 상세 한 기술을 제공한 것은 바로 이 시점에서이다. 이 지대는 큰 천연적 강점을 가지고 있으니 , 곧 깊은 협곡들 가운데서 사방으로 참호가 둘러 있는 암석 고지( 高 地)를 이루고 있다. 서쪽 계곡은 요세푸스가 아스팔티티스 호 Lake As p hal titi s 라고 부르는 사해까지 60 스다디온 을 뻗쳐 있고, 동쪽 계곡은 100 규빗(1 50 피트) 깊이로 갑자기 뚝 떨어 진다. 특히 그곳이 아라비아에 근접해 있기 때문에 해롯 대왕은 그 장소를 강하게 요새화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광대한 지역 을 누벽과 탑으로 두르고 도성을 설립하였다. 그는 또한 산정(山頂) 에 꼭대기를 둘러가며 높이가 60 규빗 (90 피트)이나 되는 모퉁이 탑들 이 있는 성벽을 쌓았으며 , 이 울타리 경내의 중심에는 장엄한 궁전 을 건립했다. 편리한 지점들에는 빗물을 모으기 위하여 여러 개의 웅덩이가 마련되었다.

아랍어로 마캐루스 요새의 유적지는 칼라트 엘_미쉬나카Q al'a t el- Mi shna q a 라고 불리 고, 그 산의 동쪽에 있는 대지 위 의 마을은 메 카웨르 M eq awer 라고 한댜 이 지대는 1807 년에 독일 탐험가 울리히 제첸Ulri ch See tz en 이 탐방하였는데, 이 마을의 이름은 그에게 헬라 어로 마캐루스 Machaerus(Maxa tpo il c [마카이루스])라는 이름을 상기시 켜 주었다. 마캐루스의 고고학적 발굴은 1968 년에, 그 당시 켄터키 주 루이빌 Lo ui s vill e 에 있는 남침례교 신학대학원 Sou th ern Bap tist Theolog ica l Seminary의 교수였고 후에는 미시시피 주립 대학교 의 콥 @bb 고고학 연구소 소장이었던 제리 바더먼에 의하여 시작되었 으며, 1973 년에는 독일 학자 아우구스트 쉬트로벨 A ug us t S tr obel 이 요새 내부에 있는 방어자들을 로마인들이 포위하기 위해 만든 둘레 벽 wall of c ir cumvallla ti on 을 확인하고 연구하였다. 그리 고 1978- 1981 년에는 비르질리오 코르보 V irgili o Corbo 가 스타니슬라오 로프 레 다 Sta nisla o Lo ffr eda 와 미 켈 레 핏치 릴로 Mich ele P i cc irill o 와 함께 발굴을 수행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예루살렘 프란체스코 성경 연구 소에 속한 사람들이다. 사해의 수면으로부터 1100 미터 높이에 있는 그 언덕의 정상에 오 르면 그 요새의 지대는 길이가 100 미터 폭은 60 미터나 되며, 다각형 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세 개의 커다란 직사각형의 망대들로써 강화되어 있다. 그 망대들과 적어도 벽의 일부는 하스몬 가 Hasmoneans 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나, 구조물들의 다수는 헤롯 시대에 재사용되 었다. 요새화된 지대의 내부에는 방과 하나의 큰 안뜰, 정교한 목욕 탕, 그리고 아직도 남아 있는 바닥 모자이크의 단편들을 포함한 헤 롯 시대 궁전의 유적들이 있다. 언덕의 동쪽 경사면을 따라 좀더 내려가면 다른 벽과 탑이 있는 데, 이것들은 아마 요세푸스도 논급하고 있는 〈낮은 동네 lower to wn 〉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War VII 6, 4 §191). 동쪽으로부터

오면서 또한 추적할 수 있는 것은 그 요새의 저수조들에다 물을 갖 다 주던 수로이댜 이 지대에서 발견된 도기는 후기 헬레니즘 시대 로부터 로마 시대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두 번의 주된 거주 시기, 즉 하스몬 시대 (B.C. 90-57) 와 헤롯 시대(B. C . 30-A. D . 72) 를 확인시켜 준다. AD. 72 년 직후에 이곳은 잠시 동안 사람들이 다시 거주하게 되었으나 그 다음부터는 더 이상 거주하지 않았다. 로마인들에 의하 여 이 지대에 내려진 파괴가 그토록 철저하고 조직적이었던 것이다. 15 사마리아-세바스테에 있는 〈침례자 요한 교회〉 침례자 요한의 죽음은 아마도 의지고 음산한 마캐루스 요새에서 있었던 것 같은데 (14 항), 마태복음 14:12 과 마가복음 6:29 에는 그의 제자들이 와서 그의 시체를 가져가 장사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 므로 그의 무덤은 분명히 마캐루스 이의의 어떤 장소에 있었고, 그 것도 필경 헤롯 안티파스의 관할 구역 밖의 어떤 장소였을 것이다. 침례자 요한의 명성(행 19:3 등 참고)은 그가 여러 곳에서 기억될 정 도로 커서 다메색과 콘스탄티노플을 포함하여 여러 도시들이 그의 머리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알렙포 Ale ppo, 바알베크 Baalbek, 베 이 루트 Beiru t, 뷔 불로스 By bl os, 가사 Gaza, 홈스 Horns 및 트리폴리 Tri poli 둥지에서 주요 회교 사원 또는 교회가 요한이나 그 의 아버지 사가랴와 관련을 맺고 있다. 하지만 알려진 최고(最古)의 전승은 그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사 마리 아-세 바스테 S amari a-Sebas t e 를 지 칭 하고 있다. 아퀼 레 이 아의 루피누스 Ru :finu s of Aq uileia ( 410 사망) (Ch. Hi st. II 28 MPL XXI, col. 536) 와 고레스의 테오도레트 Theodore t of C yru s(466 년 경 사망) (Ch Hi st. ill 3 NPNFSS ill, 96 쪽)는 배교자(背敎者) 율리아누스 Julian the A po s tate (361-363) 의 지휘 아래 이교의 폭도들이 세바스테

에 있던 침례자 요한의 무덤을 약탈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 무덤 이 이미 오랫동안 하나의 성지가 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부여한다. 유세비우스가 『지명록』(1 54 쪽)에서 사마리아 ~OµE p WV 를 기재할 때, 침례자 요한의 무덤을 언급하지는 않고, 그가 단지 여호수아 12:20 (시므론) 및 열왕기상 16:24( 사마리아)과 관련하여 그곳을 논하고 있 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제롬은 『지명록』의 이 사항에 대하여 사 마리아는 침례자 성 요한의 유해가 묻힌 곳이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 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가 쓴 「유스토키움에게 보내는 편지 108, 13 Lette r 108, 13 to Eus t oc hi urn 」 (NPNFSS VI, 201 쪽)에서 제롬은 파울 라 Paula 가 사마리아-세바스테에서 선지자들, 곧 엘리사와 오바댜와 침례자 요한의 최후의 안식처들을 보게 된 경위를 말하고 있으며 (Lett er 46, 13 Paula and Eusto chiur n to Marcella, NPNFSS VI, 65 쪽 참고), 그는 또한 귀신들린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이들은 분명히 치료룰 받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그 거룩한 무덤둘로 나오게 된 이들 이었다(왕하 13:21 참고). 침례자 요한이 그의 사업을 시작할 때에 그와 엘리야 사이에 나타 나 있음직한 연결점들을 재고할 때 (8 항 참고),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 을 엘리야 옆이 아니라-이것은 열왕기하 2:11 에 의하면 말할 나 위도 없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__ , 엘리야의 영감과 겉옷을 물려받 은 사람 곧 엘리사가 안장된 장소에 매장하기로 선택하였다면, 그것 은 순전히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 약 여기에 동장하는 문제의 오바댜가 열왕기상 18:3-16 에 나오는, 엘 리야 당시에 선지자들을 도와 준 그 오바댜라면, 헤롯과 헤로디아에 게 두려움 없이 도전하다가 그들에게 살해된 그가 여기서 안식처를 얻은 것은 아합과 이세벨에 대항하던 용감한 반대자들을 추념하는 일과 연관된 것이었다. 오늘날 사마리아-세바스테에는 침례자 요한의 무덤이 엘리사와

오바댜의 무덤들과 함께 그 마을의 동쪽 끝에 있는 로마 시대의 성 벽 바로 밖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곳에 있는 그 무덤 위 에는 아마도 제 4 세기에 교회가 세워졌으나 남아 있는 것은 몇 개의 돌뿐이다. 제 12 세기 후반에 십자군이 앞서 세워진 교회가 폐허화된 것을 발견하고 하나의 새로운 대교회당을 세웠으나 여기에 지금껏 찬존하는 것은 아치 대문 하나와 다른 부분들뿐이다. 그 후에 이곳 에는 또한 회교 사원이 지어졌다. 사진에서 보는 대로, 그 사원의 첨 탑이 지금 지대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벽들 위로 우뚝 솟아 있다. 무덤 그 자체에 관해서는 늦어도 제 3 세기 또는 제 2 세기의 평범한 로 마 양식인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어쩌면 제 1 세기의 것으로 볼 수 도 있다. 만약 그곳을 침례자 요한의 최후의 안식처와 동일시하는 전통적인 견해가 받아들여진다면, 그 무덤을 제 1 세기의 것으로 보아 야 할 것이다. 16 사마리아-세바스테에 있는 〈침례자 요한의 머리 발견 교회〉 헤롯 대왕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사마리아­ 세바스테의 성채 위에 커다란 신전을 건축하였다. 그 성채를 지나 남쪽으로 내려가면 석주(石柱)들이 늘어선 넓은 거리가 뻗어 있는데, 이 것은 아마도 셉티 미 우스 세 베루스 Sept irnius Severus 가 세바스테 롤 로마의 식민지로 만든 제 2 세기 말에 건설된 것이다. 그 성채와 석주로 된 거리 사이에는 이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폐허가 된 작 은 교회가 있다. 이 폐허는 하버드 대학교, 팔레스타인 탐사 기금 Palestin e Ex plo rati on Fund, 히브리 대학교, 그리고 예루살렘 소재 영 국고고학회 Br itish School of Archaeolo gy의 공동 탐사단이 1931 년 에 사마리아를 발굴할 때, 거의 우연히 발견되었다. 여기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제 6 세기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회

중석 nave 과 두 개의 측랑(側廊)과 튀어나온 후진( 後陣 ), 그리고 모 자이크 바닥을 가진 하나의 작은 바실리카 bas ili ca 였다 . 모자이크 바 닥의 일부는 아직도 남아 있다. 이 교회는 파괴되었으나 제 11 세기에 네 개의 화강암 석주 위에 얹힌 둥근 돔이 있는 교회로 대치되었다. 사진에서 그 석주들 중에 셋은 아직도 서 있고, 하나는 넘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 교회는 다시 한번 재건되었는데, 그 시기는 아마도 그 도시의 동쪽 끝에 라틴 대교회당이 건립되던 때와 같은 무렵인 제 12 세기의 후반이었을 것이다 (15 항). 그 유적지는 1185 년에 세바스테를 방문한 포카스 Phocas 의 기술과 일치한다 (LPPTS V-C, 16 쪽). 그는 먼저 한 교회를 언급하는데, 그 교회는 분명히 그 도시의 동쪽 끝에 있던 대교회당을 가리킨다. 그 런 다음 그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 도시의 상부 중앙에 하나의 언 덕이 있는데, 그 언덕 위에는 옛날에 헤롯의 궁전이 있었다. 이곳이 바로 잔치가 베풀어지고 그 사악한 소녀가 춤을 추다가 그 춤의 대 가로 침례자의 거룩한 머리를 받아간 곳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 장소가 희랍인의 수도원이 되었다. 이 주도원의 교회는 돔으로 덮여 있다. 제단의 왼쪽에 하나의 작은 예배실이 있고, 그 가운데는 매우 깊이 파인 구멍 위에 얹혀 있는 대리석 원주(圓柱)가 있는데, 바로 이 구멍 안에서, 천사들의 존경을 받던 분, 곧 헤로디아에 의하여 그 장소에 매장되었던 그 전주자의 거룩한 머리가 발견되었다.〉 테오도시우스 Theodos i us( 5.30)는 세바스테가 침례자 요한의 목이 베 인 곳이 었다고 말한다 (GEYER 137 ; LPPTS II-B, 7 쪽 ; CCSL CLXXV, 115 쪽 ; WJ P 63 쪽). 그러 나 보다 개 연성 이 있는 일은 그 성 채 위에 있던 아우구스투스 신전의 폐허가 그때까지 헤롯 안티파스 의 궁전 유적지로 여겨져 온 사실이다. 바로 이 궁전에서 요한의 죽 음과 관련된 그 유명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의 머리가 헤로디아에 의하여 그 근처에 묻혔을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이 전설로 인하여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 역사가 제 6 세기까지 거슬러 가고 또한 제 12 세기에 이렇게 추정된 연결점들에 비추어서 포카스가 그토록 틀림없이 기술한 그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부르햐르트 Burchard(1283) 도 그의 당시에 세바스테에 침례자 요 한을 기리는 교회가 둘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하나는 산 허리에 있는 대교회당이었고 , 다른 하나는 한때 왕의 궁전(그도 역시 아우구 스투스를 위하여 세운 헤롯의 신전의 유적지를 이렇게 부른다)이 서 있 던 언덕 마루에 있는 건물이었다. 그가 두번째 교회에 이르렀을 때, 희랍인 수도승들이 그에게 요한이 갇혀 있다가 목을 베인 곳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부르햐르트는 그것이 맞지 않음을 올바로 지적하고 있댜 그 이유는 요세푸스를 포함하여 더 권위있는 전거(典操)들이, 요한은 요단 건너편의 마캐루스에서 목을 베였다는 사실에 동의하 고 있으며, 또한 헤롯은 갈릴리와 페레아의 분봉왕으로서 예루살렘 과 유대처럼 빌라도의 관할 구역 내에 있던 사마리아에는 통할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LPPTS Xll-A, 50-51 쪽).

예수의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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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 17 베들레헴의 단지(段地)로 된 경사면 마태복음 2:1 과 누가복음 2 : 4-7 은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 다고 말한다. 베들레헴 마을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남쪽으로, 그리고 약간 서쪽으로 6 마일쯤 떨어진 곳에, 높이가 약 2500 피트 되는 산둥 성이에 있다 (Euseb i us, Onomasti co n 42 쪽 참고) . 사진은 그 산둥성이 의 남동쪽 끝을 향하여 바라보고 있으며 그 북쪽 경사면에 〈탄생 교 회 Church of the Na tivity〉가 있다. 원래는 마을로부터 분리되어 있 었으나 이제는 마을로 편입된, 암석이 많은 그 언덕에는 동굴돌이 있 으며, 동쪽으로는 가파론 경사 아래 쪽에 들판이 내려다보인다. B.C. 14 세기에 예루살렘의 총독 압디-헤바 Ab di -Heba 는 많은 지 역 을 차지 하고 있는 〈아피 루 백성 the 'Ap iru peop le 〉에 대하여 말하 고, 〈예루살렘 땅의 비트-라미 B it-Lahrni라는 이름의 한 마을〉을 언 급하고 있다(ANE T489 쪽 및 n. 21). 이것은 거의 확실히 베들레헴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름의 뒷부분은 아마도 가나안 신(神)의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로 그 이름 (cnb n’ :::i[베이트 레헴], 헬라어로

는 Bn8:>..eEµ[ 베틀레엠]으로 씀)은 〈떡집 House of Bread 〉이라는 뜻이 다. 제롬 (Le tt er, 108, NPNFSS VI, 199 쪽)은 보고하기를, 파울라 Paula 가 베들레헴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살해당한 천진한 아이들, 격노한 헤롯, 그리고 애굽으로 피난가는 요셉과 마리아를 믿음의 눈으로 보 았으며, 그리하여 눈물과 기쁨이 뒤섞인 채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고 한다.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요 6:51) 이 태어나신 떡집 베들레 헴 만세!〉 구약 역사에서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었고(롯 4:11 ; 삼상 16), 따라서 다윗의 성이었으나(삼상 20:6; 눅 2:4), 그 유명한 왕은 예루살 렘을 그의 수도로 삼기로 선택하였으며, 베들레헴은 요한복음 7:42 에 서 일컬어지는 대로 하나의 〈촌〉(岡 µn [코메])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 나 선지자 미가는 그가 베들레헴을 미래에 있을 메시야적 통치자의 고향으로 기록할 때 그곳이 매우 큰 잠재적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였으며(미 5:2), 이 예언은 마태 (2:5-6) 가 예수의 탄생 이야기 를 기록할 때 인용되었다. 누가복음 2:7 은 그 모친 마리아가 사관(舍 館)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를 구유에 눕혔다고 말한다. 18 남쪽에서 본 베들레헴 이 베들레헴 사진은 그 동네를 남쪽으로부터 뒤돌아본 모습이다. 여기에는 또한 시골 지역의 감람나무 수풀들과 들판을 울타리로 두 른 돌담들도 보인다. 19 베들레헴 근처의 헤로디움에 있는 요새-궁전의 구도 베들레헴의 단지로 된 경사면의 사진 (17 항)에는 왼쪽 지평선 부분 에 인공적으로 돋워진 언덕이 마치 윗부분이 잘려나간 원추처럼 올

라와 있는데, 이 곳 은 베 들 레헴에서 남동쪽으로 5 킬로미터 , 예루살렘 에서 남쪽으로 12 킬로미터 되는 지점이다. 이것이 처음에는 헤롯 대 왕의 요새-궁전이다가 마침내는 그의 매장지가 된 헤로디움 Hero­ di um 인데, 이 왕이 바로 요셉과 마리아로 하여금 예수를 데리고 베 들레헴으로부터 피신하도록 잔혹한 위협을 가한 왕이다(마 2:13 이 하). 헤롯 대왕은, 외부적인 방어를 위해서 그의 왕국의 국경 지대에, 그 리고 내부적인 통제를 위해서는 국내의 전략적 요충지에, 모두 11 개 이상의 요새들을 가지고 있었다(예루살렘에 있는 안토니아 An t o ni a 는 아래 215 항에서 별도로 다뤄져 있다). 이 11 개의 요새들 중에서 베들 레헴 근처의 헤로디움과 요르단에 있는 제 2 의 헤로디움은 헤롯 자신 이 건설한 것인 반면에, 대부분의 다른 것들은 원래는 마카베오 시 대의 하스몬 가문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세워졌다가 헤롯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그 11 개의 요새들은 다음과 같다. (1) 세겜에서 남동쪽으로 15 마일 떨어진 요르단 계곡에 있는 알렉 산드리 움 Alexan dri um( 키 르베트 사르바타 [Khirbe t Sarbata ]) (2) 여리고의 서쪽에 있는 와디 엘-켈트 Wa di el - Q el t의 상부에 위 치한 퀴프로스 C yp ros( 텔 엘-아카베 [Tell el-Akabe]) (3) 쿰란의 남서쪽 광야에 있는 휘르카니아 H yrc ani a( 키르베트 미 르드 [Khirbe t Mird] ) (4) 엔-게디의 상부에 있는 광야에 위치한 지프 Z if(십) (키르베트 지 프 [Khirbe t Zip h ]) (5) 카르멜 Cannel( 갈멜) (키르베트 케르말 [Khirbe t Kerm al]) (6) 헤브론의 남쪽에 있는 아도라 Adora( 두라 [Dura]) (7) 오레사 Oresa( 키르베트 이스타불 [Khirbe t Ista b ul] 또는 키르베트 하릿사 [Khirbe t Ha rriss ah]) (8) 요르단의 엘-홉베이사 el-Hubbe i sa 에 있는 제 2 의 헤로디움

(9) 베들레헴 근처의 헤로디움 (10) 사해의 동편에 있는 마캐루스 Machaerus (11) 사해의 서쪽 연안에 있는 마사다 Masada. 이것들 중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 세 개――해로디움(베들레헴 근 처에 있는), 마캐루스, 그리고 마사다――는 요새이면서 동시에 궁전 이었으며, 헤롯 대왕 후의 사건에서도 또한 계속해서 두드러지게 나 타났다(마캐루스에 관해서는 위의 14 항에서 이미 기술되었다). 여기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헤로디움에 관하여 요세푸스 (War I 21, 10 §§419- 42 1 ; Ant. xv 9, 4 §§323-325 참고)는 말하기를 , 그것은 인공적으로 둥글게 쌓은 언덕 위에 있었으며 헤롯에 의하여 정교하 게 장식되었다고 한다. 그(헤롯)는 그 꼭대기 를 둥근 탑으로 쌓아 올렸으며 경내는 화려한 궁전들로 가득 차서, 그것의 장엄한 모양은 방의 내부에만 국한되지 않 고 외부의 벽과 담장과 지붕 모두가 사치스럽게 부( 富 )로 장식되어 있 었다 . 그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먼 곳으로부터 그곳으로 풍부한 물을 공급하였고, 순백색의 대리석으로 된 200 개의 계단을 만들어 그 언덕으 로 올라가는 일을 쉽게 하였다. 그리고 그 토루(土 壘 )는 전적으로 인공 적인 것이건 하지만 상당히 높은 것이었다 . 밑바닥의 둘레에다 그는 그 의 가구와 그의 친구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다른 궁전들을 건립하였다 . 이와 같이 이 성채는 풍부한 자원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마을과도 홉사 했고, 제한된 지대에서는 하나의 단순한 왕궁과도 같았다. 우리가 요세푸스(의 기록으)로부터 좀더 알게 되듯이, 이 장소는 B.C. 40 년에 헤롯이 그의 가족과 함께 유대인을 다스리던 하스몬 가 문의 마지막 왕 안티고누스 An tig onus 로부터 마사다로 도망하다가 로마로 가서 자신을 위하여 왕권을 얻고자 했을 때, 하스몬 가문의

사람들 및 그들을 지 원하는 파르티 아인들 P arthi ans 과 중요한 전투를 치른 곳이댜 그가 이 헤로디움을 이 지점에다 건립한 것은 바로 그 특별한 경우의 그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War I 14, 8 §26. 5). 요세푸스의 다른 언급들을 살펴보면, 헤로디움은 아마도 B.C. 22 년 과 B.C. 15 년 사이에 세워졌는데, B.C. 15 년은 마르쿠스 아그립파 Marcus A grippa 가 유대를 방문하여 헤롯이 그에게 헤로디움과 다른 그의 건축물들을 보여 준 해 이 다(A n t. XV 2, 1 §§12-13). 헤롯은 여리고에서 사망하였고(아마도 B.C. 4 년 봄에, r 팔레스타인 의 고고학적 및 역사적 시기 일람표」를 보라), 시체는 장례를 위하여 헤로디움으로 운구되었다. 장엄하고 화려한 행렬을 형성하는 부대들 과 수종자들로 이루어진 최초의 행진은 8 스다디온(대략 1 마일)이었 고(A n t. XVII 8, 3 §§196— 19 9 ; War I 33 9 §§670-673 ; Doug la s Jo hnson in CKC 98 쪽 이하 참고), 전체 거리는 약 200 스다디온이었 다(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가 150 스다디온, War IV 8, 3 §474,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헤로디움까지가 60 스다디온, War I 21, 10 §419). 아랍어로 이 문제의 언덕의 이름은 제벨 푸레이디스J ebel Fureid is 인데, 이 이름은 〈낙원〉을 상징하는 단어의 축소형인 것으로 이해되 어 왔으나, 실제로는 바르 코크바 Bar Kokhba 시대에 헤로디움이 혜 로디스 Hero di s 로 불린 것으로 보아서, 〈푸레이디스〉는 〈헤로디스〉 라는 이름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이 장소가 헤로디움이 있 던 곳으로 처음 확인된 것은 1 8.38년 5 월 8 일에 제벨 푸레이디스를 방문하여 이것이 요세푸스가 기술한 그 요새와 도성임에는 〈거의 의 심이 없다〉고 말한 에드워드 로빈슨 Edward Rob in son 에 의해서였다. 토루의 꼭대기에 대한 발굴 작업은 1962-1967 년에 예루살렘의 프 란체스코 성경 연구소에 속한 비르질리오 코르보에 의하여 수행되 었으며, 후속 보존 작업은 1969 년에 이스라엘 정부의 고대 역사부와 국립 공원국의 위임을 받은 G. 푀르스터 G. Foers t er 에 의하여 이루

어졌다. 지하 저수조와 터널들, 그리고 언덕의 북쪽 기슭에 있는 복 합 건물들에 대한 발굴 작업이 1972 년 이후로 히브리 대학교와 이스 라엘 탐사 학회를 대신해서 에후드 네처 Ehud Ne tz er 에 의하여 계속 수행되었다. 20 헤로디움에서 발굴된 요새-궁전을 내려다본 광경 발굴 작업을 통하여 드러난 바와 같이, 제벨 푸레이디스의 꼭대기에 있는 헤롯의 요새-궁전은 두 개의 동심원 고리로 된 벽들을 가진 원 형 구조물로, 내벽과 외벽의 간격은 3.5 미터이고 외벽의 직경은 63 미 터이다. 벽 둘레의 주요 지점에는 네 개의 탑이 있었다. 동편에 있는 벽 속에 세워진 탑(이 사진에 보이는)은 완전한 원형으로 되어 있고, 외부의 직경이 18 미터이다. 서쪽, 북쪽, 남쪽에 있는 탑들은 반원형 으로 되어 있고 바깥 벽으로부터 연장시킨 지하실 조직이 되어 있 다. 벽과 탑들을 향하여 흙과 돌을 채워 넣었기 때문에 그 위로 보 이는 꼭대기들만 남게 되었으며, 따라서 전체가 마치 하나의 커다란 분봉(壤峰), 죽 헤롯 대왕의 능처 럼 보였다(그러나 그의 실제적 인 매 장지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벽의 내부에 있는 원형 지대는 궁전 자체와 그 마당들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은 두 개의 주된 부분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통쪽의 반 은 열주(列柱)(이 사진에서 둥근 탑의 밑바닥에 있는)로 둘러져 있는 정원으로 설계되었다. 정원으로 나가는 곳에는 둥근 천장으로 된 출 입 통로와 문간방이 있는데, 한때 이것은 아마도 요세푸스가 언급한 200 개의 대리석 계단들을 밟아서 그 언덕의 기저로부터 올라가게 되 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위의 19 항을 보라). 서쪽의 반은 하나의 커다 란 식당과 정교한 목욕장을 포함하고 있는데, 목욕장에는 갱의실, 미 온욕실, 온욕실, 냉욕실 둥이 있었다. 바닥은 백색과 흑색의 모자이

크로 포장되어 있었으며, 벽들은 다채로운 색깔의 프레스코 벽화들 로써 장식되어 있었다. 그 위로는 아마도 거처를 마련하기 위하여 적어도 한 층이 더 있었을 것이다. 언덕의 북쪽 기슭에는 통채로 된 하나의 복합 구조물이 있었다. 하나의 매우 큰 궁전 또는 알현실은 길이가 130 미터요 폭이 54 미터 였으며, 대지는 약 7000 평방미터였다(언덕 위의 꼭대기에 있는 궁전 지대의 면적이 약 3000 평방미터였으므로 그것의 2 배도 더 되는 면적이 다). 거기에는 또한 다른 건물들과 함께 로마식 목욕탕도 있었다. 그 큰 궁전으로부터 내려다보이는 것은 하나의 〈코스 course 〉였는데, 이 것도 처음에는 경마장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그러한 목적으로 사용되기에는 너무 좁은 것이었다 . 그것은 어쩌면 운동 경기용 코스 나 산책로, 또는 헤롯 자신의 장례식을 위한 장례 코스였을지도 모 론댜 이것과 마찬가지로 원래의 용도가 불분명한 것 또 한 가지는 그 코스의 끝에 있던 〈기념 건물〉이다. 좀더 아래 쪽에는 거대한 직 사각형의 연못 복합 구조가 있었다. 이 못울 채우는 물은 베들레헴 에서 남서쪽으로 2 마일이 채 못 되는 와디 우르타스 Wa di Ur tas 에 있는 마을인 우르타스 U rta s( 또는 아르타스 Artas ) 근방으로부터 수로 에 의하여 운반되었다. 그러나 상부의 궁전을 위해서는 산 위에 있 는 저수조에서 물을 다시 끌어올려야만 했다. 그리하여 전체적으로 〈대 헤로디움 Grea te r Herod ium > - 위의 요새-궁전과 아래의 전 복합 구조를 통틀어서 이렇게 부른다면­ 은 약 45 에이커의 지역에 걸쳐 있었으며, 건축 작업은 엄청난 규모 의 토공사와 건물 공사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헤롯은 그 자신의 경력에 있어서 하나의 중대한 투쟁을 기념하게 되었고, 예루 살렘으로부터 떨어졌지만 멀지 않는 곳에 자신을 위한 은거처를 마련 하였으며, 자기 자신의 매장지를 위한 웅장한 금자탑을 계획하였다. 헤로디움의 높은 산 정상으로부터 헤롯은 베들레헴을 내려다볼

수 있었으며,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내인 마리암네 M ari amne 와 자 신의 아들들인 알렉산더 Alexander, 아리스토불루스Ari s t obulus , 안 티파테르 An tip a te r,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처단한 사람, 특히 그의 생애의 말엽에는 〈매우 바정하게 되어 모든 사람에게 제어할 수 없 는 노여움과 잔혹함으로 대한〉 (An t. XVII 6, 1 §148) 사람이, 유대인 의 왕이 베들레헴에 탄생했다는 보고를 듣자 베들레헴 지역의 어린 아이들을 모조리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면(마 2:16), 그것은 별로 놀랄 필요가 없는 일이다 . 21 헤로디움의 회당 로마에 대한 유대인들의 〈제 1 차 항거〉 때에 세 개의 요새 - 궁전들 ―죽 헤로디움, 마캐루스, 그리고 마사다――이 모두 혁명가들에 의하여 점령되었으며 (War IV 9, 9 §5.55), 예루살렘이 함락된 (AD . 70) 후에는 이들 중에서 루칠리우스 밧수스 Luc ili us Bassus 휘하의 로마인들에게 가장 먼저 빼앗긴 것은 헤로디움이었다 (War VII 6, 1 §163). 〈제 2 차 항거〉 (132-135) 동안에 헤로디움은 또한 바르 코크바 Bar Kokhba 의 병력의 본거지 역할을 하였다. 이것은 와디 무랍바아 트 Wa di Murabba'a t(헤로디움 근방에서 시작하여 사해까지 내려가는 좁은 골짜기 [de fil e], 쿰란 아래로 약 12 마일)의 동굴들 속에서 그 항거 에 관한 다른 문서들과 함께 발견된 단편적인 히브리어 텍스트에 나 타나 있다. 그 텍스트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스라엘의 총수(總帥) 시 므온 벤 코시 바 Sim e on hen Kosib a ( 이 사람을 랍비 아키 바 Rabbi Aki ba 는 바르 코크바 죽 별의 아들 Son of a S tar이라고 불렀다. 민 24:17) 에 의한 이스라엘의 해방 제 2 년, 스밧 Sheba t(월)의 제 20 일에. 헤로디움에 있는 진영에는 ……•> 발굴자 (Corbo in LA 17 [1967 ], 101-103 쪽)의 견해에 따르면, 헤로

디움에 살던 유대인 거주자들은 트리클리니움을 회당으로 개조했는 데 , 그것의 유적이 이 사진에서는 남서쪽을 향하여 나타나 있다. 헤 로디움 내부의 다른 곳에서 나온 건축적인 여러 요소들로 미뤄 볼 때, 이것은 직사각형으로 된 건물 (10.5 X 15 미터)이었으며 동쪽에 입 구가 있었고 돌 기둥들로써 홀을 구획하였으며, 적어도 제 2 의 건축 단계에서 돌 의자들이 벽들을 따라 놓여졌다. 전반적으로 이 회당은 마사다의 회당 (23 항)과 매우 흡사한데, 마사다의 경우에 발굴자 (Ya­ din, Masada, 181-189 쪽)는 이것이 이미 헤롯 대왕의 치하에서도 회 당이었으며, 그 후 〈 제 1 차 항거 〉 동안에 혁명가들에 의하여 재건되 었음을 믿을 수 있는 이유를 발견하고 있다. 그러므로 헤로디움의 회당에 대해서도 이것과 동일하게 더 이른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 이 다 (Saller, Second Cata lo g ue , 40 쪽 이 하 , no. 43). 헤로디움과 또한 마사다에 있는 이 초기의 회당들로 들어가는 입 구가 동쪽에 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랍비 문헌 (T. Me- 짜 lah 田 22, Levin e , Sy n ago g ue s Revealed, 29 쪽)과 일치 한다 . 〈회 당 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반드시 동쪽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전에서 입구가 동쪽을 향해 있었음을 보기 때문이다 . 〉 두 개의 회 당이 성전의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설계되었다는 사실은 그것들이 〈제 2 성전 Second Tem p le 〉이 아직도 서 있는 동안에 세워졌다는 다 른 증거와 조화를 이룬다. 헤로디움 회당의 동쪽 벽에 인접한 곳에 는 유대인의 의식을 위한 욕실이 있었다 . 유대인 혁명가들은 또한 헤롯의 목욕장도 점유하였으며, 후에 비잔틴 시대와 제 7 세기에 내려 와서는 수사들이 그곳에 수도원을 건립하였고, 목욕장의 남쪽 방에 는 예배실을 세웠다.

22 서부 광야의 마사다 마캐루스 (14 항)와 헤로디움 (19-21 항)과 마찬가지로 마사다도 역시 헤롯 대왕의 요새-궁전이 있던 곳이다. 사해의 서쪽 연안 위로 1300 피 트를 절벽 같이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와 이곳에서 발생한 사건들에 관해서는 요세푸스 (War VII 8, 1-9, 2 §§252-406) 가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상술하고 있다 . 엄청난 주변 경개와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높이 솟은 바위 덩어리는 문득 사면의 깊은 협곡으로 단절되고 , 보이지 않는 밑바닥으로부터 깎 아지론 듯이 솟구쳐 있어, 바위틈 사이로 간신히 올라올 수 있는 두 곳 을 통하지 않고는 어떠한 생물도 접근할 수가 없다 . 이 소로(小路) 중 의 하나는 해돋는 쪽으로(죽 동쪽에서 ) 아스팔티 티스 호 Lake Asph al- titi s( 사해)로부터 올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접근이 좀 더 쉬운 편 으로 서쪽에서 올라가는 것이었다 . 전자를 그들은 뱀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들이 보기에 그 길이 협소하고 계속해서 꼬불꼬불한 것이 마치 그 파충류(뱀)의 모양을 닮았기 때문이다. …… 이 위험한 소로를 30 스 다디온쯤 따라가면 정상에 다다르는데, 이곳에서는 날카로운 산 꼭대기 가 아닌 넓은 평지가 펼쳐진다 (§§280-284). 마사다에 요새를 건설한 첫번째 사람은 유다 마카베오J udas Maccabeus 의 형제이자 그의 추계자로서 유대인들의 지도자(B. C. 161-143) 였던 대제사장 요나단J ona th an 이었다. 결국엔 헤롯 대왕이 이곳을 손에 넣었고, 그가 왕권을 받으러 로마로 갈 때에는 그의 가 족이 안전하도록 이곳에 두고 갔다. 그 후에 그가 실제로 통치하게 되었을 때에는 큰 건축 공사들이 추진되었다(§28.5). 그는 정상 전체 룰 돌벽으로 둘렀고, 그 위에 37 개의 망대를 세웠다. 정상의 좋은 토

양은 경작을 위하여 잘 보촌되었다. 물을 저장하기 위한 저수 시설 로서 바위를 깎아 큰 탱크들을 만들었다. 꼭대기에 있는 누벽 아래 로 북쪽으로 경사진 곳에는 장려한 궁전을 건설했다 (§§286 - 291). 헤 롯 대왕이 사망한 (B.C. 4) 후에 그 요새 - 궁전은 그의 아들이자 후계 자로서 유대를 통치 한 아켈라오 Archelaus(B .C . 4-6) 가 점유했으며 , 그 다음에는 헤롯 아그립바 1 세가 왕이었던 41-44 년을 제외하고 6 년 에서 66 년까지 로마인들이 점유했다. 마침내는 검객단 S i c arii(그들이 휴대하고 다니던 s i cae[ 시캐] 죽 단 검이라는 말에서 붙여진 이름)이 야이루스의 아들 엘르아자르 Eleazar the son of Jairu s( 갈릴 리 인 Ga lilea n 또는 가울란인 Gaulan ite 유다 J udas 의 후손, 이 유다는 보통 열심당 [Zealo t s] 으로 일컬어진 유대인들 의 〈 제 4 철학fourt h phil oso p h y〉의 창설자, 행 5:37 (AD . 6/7 ) ; Ant. XVIII 1, 1 §4 ; 1, 6 §23 ; War II 8, 1 §116 ; 17, 2 §408 ; VII 8, 1 §252-253, 268 ; SHJ P Vennes/M illar, I, 382 쪽)의 지휘 아래 〈제 1 차 항거〉의 초반에 (AD . 66) 마사다를 점령하였다. 이들은 그 후 플라비 우스 실바 Fla vi us S il va( 루칠리우스 밧수스의 후계자로 유대의 총독이 된 사람) 휘하의 로마인들에게 포위되었을 때, 그들 원수의 손에 투 항하기보다는 자결을 택했던 사람들이다 (War VII 8, 2 이하, §§'2:15 이하). 로마인들이 마사다를 취한 일과 그 비극은 필시 74 년으로 확인 되는 해의 크산티코스 Xan thik os 월(月) (오늘날의 우리 달력으로 3 월/ 4 월) 제 15 일에 발생했다 (War VII 9, 1 §401 ; 명각들의 기록온 실바가 73 년 이전에는 총독으로서 유대에 도착할 수가 없었음을 보여 주며, 따 라서 마사다의 함락은 아무리 일찍 잡아도 74 년 봄에 있었음이 틀림없 다. SHJ P Vennes/M illar, I, 512, 515 쪽, citing W. Eck, Sena tor en von Vespa sien bis Hadri an [l 罪 0], 93-111쪽). 아랍인들이 엣-셉 베 es-Sebbe 라고 부르는 마사다의 현장이 잠정 적으로 확인된 것은 1838 년 에드워드 로빈슨 Edward Rob in son 과 그

의 동료 스미스 E . S mith에 의해서였고(R ob in son, Bi bl ic a l Resea, ches, m, 240-242 쪽), 이것이 특별히 로마인의 진영과 포위벽과 관련 하여 연구된 것은 1 8.3 2 년에 독일학자 아돌프 슐텐 Adolf Schul t en 과 아돌프 람머러 Adolf Lammerer 에 의해서였다 (ZDPV 56 [1933], 1- 179 쪽). 본격적인 발굴 작업은 1953 년과 1955-1956 년에 이스라엘인의 예비 조사가 있은 후에 여러 나라에서 온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이 가엘 야딘 Y ig ael Ya din에 의하여 1963-1965 년에 실시되었다. 여기서 나온 발견물들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주된 시기들이 나 타나고 있다. 헤롯 대왕 시기(B. C. 37- 4) , 〈제 1 차 항거〉 시기 (66-74), 그리고 비잔틴 시기(제 5 및 6 세기). 실제적인 구조물들의 대부분은 이 시기들 중의 첫번째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중방벽(벽 사이에 방이 있는 이중 벽)은 정상 전체를 두르면서 1500 야드나 뻗쳐 있고 30 개의 망대와 4 개의 문을 가지고 있다. 요세푸스가 〈북쪽을 향하여 기울어 진〉 것으로 기술한 헤롯의 궁전은 그 산의 가장 협소한 북쪽 끝에 있는 세 개의 하향(下向) 단구들 위에 건설되었으며, 모자이크 바닥 과 채색된 벽, 그리고 고린도식 주두(柱頭)들이 있는 석주(石柱)들 중의 일부는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정상에는 널찍한 저장실 들, 호화스러운 목욕실, 수영장이 가까이에 있는 커다란 서쪽 궁전, 그리고 또한 몇 개의 비교적 작은 궁전들 둥이 있다. 물은 서쪽의 골짜기에 있는 댐에서 도관(導管)을 통하여 끌어 왔는데, 이 도관들 은 바위의 측면에 깎아 만든 저수지들로 연결되었으며, 여기서 물은 다시 손으로 운반되어 정상에 있는 저수조로 옮겨졌다. 〈제 1 차 항거〉 기간 중에 마사다는 요세푸스가 진술하는 바와 같 이 검객단에 의하여 점령되었다. 화살과 다른 무기들, 주화와 다른 발견물로부터 미뤄 볼 때, 혁명가들은 북쪽 궁전을 그들의 군사 본 부로, 그리고 서쪽 궁전을 행정 중심지로 사용하는 한편, 가족들은 작은 궁전들과 이중방벽 및 망대들 속에 있는 방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주화들 가운데는 항거를 계속하던 기간의 제 1 년으로부터 제 5 년 즉 세겔 shekels 이 주조된 마지막 해인 예루살렘이 파괴된 해 (70) 까지 매년의 연대가 찍힌 세겔들이 많이 있다 (Ya din, Masada, 108, 168 쪽). 성경의 책(창세기, 레위기, 시편)과 외경 및 위경의 책들 (벤 시락, 희년서)을 포함한 필사본의 단편들도 있고, 쿰란에 있는 동 굴 4 에서 발견된 텍스트와 똑같은 텍스트도 있는데, 이것은 쿰란이 파괴된 (68) 후에 엣세네인들의 일부분이 마사다의 혁명가들에게 합 류했음을 시사할 수도 있다 (Ya din, Masada, 173 쪽 이하). 약 700 개의 도편(陶片)들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고 더러는 단지 이 름들만 적혀 있는데, 그 중에는 벤 야이르 Ben Ya ir, 죽 아마도 요세 푸스가 마사다 검객단의 사령관이라고 칭한 엘르아자르 벤 야이르 (야이로의 아들)도 포함되어 있다 (Ya din, Masada, 201 쪽). 로마인의 주화들과 여러 개의 라틴어 파피루스들이 나온 것은 실바 S il va 가 로 마 수비대를 마사다에 한동안 잔류시킨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War VII 10, §4CJ 7). 제 5 및 6 세기에는 기독교 수사들이 마사다에 살았다. 그들은 하나 의 작은 교회를 지었는데, 이것은 동쪽 벽에 후진이 딸린 길다란 홀 과 채색된 모자이크로 된 바닥을 가지고 있었다 (Ova di ah, Corp u s, 137-138 쪽, no. 139). 이 사진에는 헤롯 대왕이 그의 북쪽 궁전을 지은 단구(段丘)들이 왼쪽에 있다. 오른쪽에는 요세푸스가 류케 AeuKit (W ar VII 8, 5 §305) 죽 〈흰 (절벽)〉이라고 부르는 바위 동성이가 있는데, 그 위에다 로마 인들은 다시 더 높은 제방을 만들고 돌로 된 대(臺)와 철로 두른 망 대를 쌓아 그 큰 파성퇴(破城捷)를 떠받쳤으며, 이 파성퇴로써 그들 은 마침내 마사다의 정상에 있는 벽을 돌파하였다. 사진의 배경에서 멀리 보이는 것은 사해와 모압 산맥 Mounta ins of Moab 이다.

23 마사다의 회당 마사다의 정상에는 북서쪽 벽을 배경으로 예루살렘 쪽을 향하도 록 지은 하나의 직사각형 구조물(1 2 X 15 미터)이 있는데, 여기에는 동 쪽으로 난 입구가 있고 기둥들이 있으며, 안쪽 벽들을 따라가면서 벤치들이 놓여 있다 . 이곳을 발굴한 결과로 두 차례의 건축 공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 벤치들은 두번째 국면 때에 추가된 것이다. 이 건물의 바닥 밑에 있는 두 개의 구덩이에서는 성경의 책인 신 명기와 에스겔서의 양피지 두루마리의 단편적인 부분들이 발견되었 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적어도 두번째 국면 때, 죽 강력한 율법 지지 자들이었던 검객단/열심당의 시대에 이곳은 회당이었고, 바닥 밑에 두루마리들이 발견된 장소는 일종의 게니자ge n i zah( 사용되지 않는 히브리어 책들을 위한 보관소)였으며, 그 안에는 아마도 마사다가 막 함락하려고 했을 때 필사본들이 숨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후 기의 단계 때뿐만 아니라 제 1 단계 때에 이미 그 구조물은 예루살렘 쪽으로 방향이 잡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예배를 위한 집 을 지을 때에 그 앞서 있던 예배당의 터 위에 그대로 짓던 강한 보 수적인 전통과 더불어, 이것이 헤롯 대왕 시대에도 이미 회당이었을 가망성을 보여 준다. 이리하여 이것과 헤로디움 (21 항)에서 이미 기술 된 것과 비슷한 구조물은 성지에 있는 가장 오래된 회당들 중의 두 개일 가능성이 높다. 헤로디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 마사다에서도 역시 회당으로부터 멀지 않는 곳에 의식을 위한 욕실이 있다. 24 베들레헴의 구도 위에서 우리는 헤롯 대왕의 요새一궁전들 중에서 몇 개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 중의 하나-헤로디움――는 베들레헴을 어렵풋이

굽어보고 있는데, 이제 우리는 그 베들레헴 자체로 가보고자 한다. 1969 년에 이스라엘 고고학 조사단을 대신한 탐사에서 S. 거트먼 S. Gu tm an 과 A 버먼 A Berman은, 구도(構 圖 )에서 그늘진 빗금으로 표시된 지대, 곧 〈탄생 교회〉(질은 흑색으로 표시된 부분)의 동쪽과 남쪽 지대에서 철기 시대의 도기를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이 지대가 고대 베들레헴의 텔t ell 이 있던 지역임을 시사한다. 로마 시대와 비 잔틴 시대의 물품들은 주로 교회의 남서쪽에 있는 잘 건조( 建 造)된 지역에서 발견되는 한편, 현재의 마을은 북서쪽으로 뻗어 나가 있다 (북쪽 방향은 이 구도의 우편임을 유의하라). 〈탄생 교회〉의 바로 북쪽에는 〈성 카테리나 교회 Church of St. Cat her i ne 〉와 함께 〈프란체스코 수도원 Franci sc an Monas t e ry〉 (1881 년 건립)이 있다. 1962 년에 성지 관리국에 의하여 새 학교를 건립하기 위해 준비되는 중에 이 수도원의 북쪽에 있는 터에서 두 개의 무덤 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에는 철기 시대 II 기의 물품들이 포함 되어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서 분명히 비잔틴 식 예배실의 유물들로 보이는 벽들과 모자이크, 그리고 하나의 헬라 어 명각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탄생 교회〉는 철기 시대의 베들레헴 텔의 서쪽 정상에 위치해 있고, 그 언덕의 경사면들은 북쪽과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그리고 만약 로마 시대(죽 예수의 탄생 시대)의 그 마을이 이와 비슷 한 위치에 있었다면, 교회로써 그 위치가 표시된 전통적인 예수의 탄생지는 실제로 그 시대의 그 마을에 있는 것이다. 25 베들레헴에 있는 〈탄생 교회〉의 구도 비교적 후기의 전승은 베들레헴의 예수의 탄생 장소가 동굴이었 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전승들에는 눈에 뛸 만한 하나의 경향이 있었

는데, 그것은 곧 사건들의 기원을 동굴들에다 두려는 경향이다 . 다른 한편으로, 동굴들은 실제에 있어서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팔레스타인 에서는 사람들과 짐승들에게 거처와 피난처를 제공해 왔다. 100 년 조금 후에 네아폴리스 Nea poli s 에서 태어나서 그 세기의 중간 직후 『 유대인 트뤼폰과의 대화 D ial o gu e wi th the Jew Tr ypfw』를 저술한 유스티노스 마르튀로스J us tin M artyr는 이렇게 말한댜 〈그러나 그 아기가 베들레헴에 탄생했을 때, 요셉은 그 마을에서 숙소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마을 근처의 어떤 동굴 속에다 그의 거처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그곳에 있는 동안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출산하여 그를 구유 속에 놓았으며, 아라비아로부터 온 박사들 (Ma gi)이 바로 여기서 그를 발견하였다〉 (D ia lo gu e 78). 이와 마찬가 지로 『야고보의 원복음 The Prote v ang e li um of Ja mes .!I(제 2 세기)도 요셉이 발견한 동굴, 즉 탄생 장소였던 동굴을 언급하면서, 그때 〈그 동굴을 뒤덮는 빛나는 구름〉이 있었다고 말한다 (18 .1 ; 19.2 ; Jam es 46 쪽 ; HSNTA I, 383 쪽 이 하) . 215 년으로부터 계속해서 자주 팔레스타인에 간 적이 있고 248 년 경에 『첼수스에 대항하여 A ga i ns t Celsus 』를 저술한 오리게네스Ori­ g en 는 유스티노스와 『야고보의 원복음』이 제공한 전승과 분명히 동 일한 전승을 보고하면서, 그 자신이 마치 그 동굴을 목격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것처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의 탄생에 관 하여 복음서에 기록된 이야기와 일치되게, 베들레헴에는 그가 탄생 한 동굴과 그가 강보에 싸여 누워 있던 동굴 속의 구유가 가리켜져 있다. 그리고 이 광경은 주변 지역들에서 많이 입에 오르내리고 있 으며, 심지어는 신앙의 적대자들 중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경배하고 숭앙하는 그 예수가 바로 이 동굴에서 탄생했음을 말하는 이들이 있 다〉(Aga i ns t Celsus I 51).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위의 언급둘이 가리키는 동굴이요 원래

의 〈탄생 교회〉가 세워진 곳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The Lif e of Cons ta n ti ne 』 라는 그의 저 술에 서 (ill 25 一 43, 51-53), 유세 비 우스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그 황제가 팔레스타인에서 그리스도와 관련된 신성한 장소들에다 네 개의 교회를 짓도록 했다고 한다. 세 개의 장 소는 확실하게 엄선된 곳들로서, 죽 베들레헴의 탄생지, 예루살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곳 (225 항 이하), 그리고 감람산의 승 천하신 곳 (154-155 항) 등이다. 네번째 장소는 마므레였는데 이것은 〈조금 전에 지상에 나타나셨던 바로 그 동일한 구주께서 오랜 세대 전에 그 분의 신성한 임재의 현현(顯現)을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 에서 팔레스타인의 거룩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신〉(창 18:1 참고) 곳이다. 갈보리와 성묘(聖 墓 )에 있는 교회를 짓게 한 공로는 콘스탄티누스 혼자에게 돌려지고 있으나(소크라테스 [Ch . Hi st . I 1 긴는 그 공로의 한 몫을 헬레나에게 돌리고 있지만), 베들레헴과 감람산 위에 있는 교회 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가 지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녀는 사망하기 (3 '2:1년 경) 조금 전에 80 세의 나이로 성지와 동방의 도(道)들을 방문한 바 있다 (The Lif e o f Consta ntine ill 46). 마므레 에 교회를 짓자는 제안은 황제 가족의 다른 일원, 즉 콘스탄티누스의 황후 파우스타 Faus ta의 어 머 니 인 그의 장모 유토로피 아 Eu tr o pi a 에 의하여 제시되었다(유트로피아에 관해서는 Lou is Duchesne, Early Hi st o r y of the Christ i an C加 rch , 4th ed. [New York: Lon grnans, Green, 1922-1925), II, 65 쪽 이하를 보고, 마므레에 있는 교회에 관해서 는 Ovad iah , Corpu s, 131一 132 쪽, no. 135 를 보라)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 있는 교회들의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위치 들을 찾아내는 일과 그 공사룰 수행함에 있어서 예루살렘의 감독 마 카리우스 Mac ari us(314-333) 가 헬레나와 콘스탄티누스에게 안내의 도움을 베푼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그가 니캐아 종교 회의 Council of N i caea(325) 에 참석하였으며, 후에 콘스탄티누스가 〈성묘 교회〉의 건축에 관하여 장문의 서한을 그에 게 써 보냈기 (225 항) 때문이다. 베들레헴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유세비우스는 그것이 〈구주의 탄생의 무대였던 동굴에서〉 헬레나에 의하여 봉헌되었으며, 헬레나와 콘스탄티누스가 그 신성한 동굴을 풍성한 예물들로써 꾸 몄다고 말한다 (The Lif e of Consta ntine III 43). 그로부터 불과 수년 뒤에 보르도 순례자 Bordeaux P ilgrim (333) 는 베들레헴에 관하여 이 렇게 기록한댜 〈그곳에는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에 의하여 하나의 바 실리카가 건립되었다〉 (GEYER 25 쪽; LPPTS I-B, 업쪽; CCSL CLXXV, 20 쪽; wET 162 쪽). 이것은 마치 그 교회가 그 당시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339 년 5 월 31 일에 와서야 마침내 봉헌이 이루어졌으며(]. T. Milik in RB 67 [1960], 572 쪽), 이때는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사망한 (337) 후였다. 베들레헴 동굴과 그 위에 세워진 바실리카는, 예수의 탄생을 특별 히 기억할 때에는 자연적으로 특별한 주의(注 意 )의 초점이 되었다 . 탄생 일자에 관하여, 로마에서 와서 베들레헴 교회 (32 항)의 지하에 있는 동굴에서 산(38.5 -420) 제롬은 12 월 25 일이라는 로마인의 일자 룰 지지했으나 (Beno it , Ch ristm as, 13 쪽), 예루살렘 교회에 있어서 예 식을 행하는 적절한 일자는 주현절인 1 월 6 일이었으며 (r 초기 교회의 축제일 개요J를 보라), 383 년에 순례자 애테리아 Ae t he ri a 는 주현절 경축을 위하여 바로 그 날에 베들레헴에 있었다. 그녀의 기록에는 이 지점에 와서 상당한 공백이 있지만, 남아 있는 부분과 r 옛 아르 메 니 아 성 구집 Old Armen ian Lec ti on ary」 으로부터 우리 는 사건의 진 행을 따라갈 수가 있다 (GEYER 75-77 쪽 ; LPPTS I-C, 50 쪽 이 하 ; CCSL CLXXV, 71 쪽 이 하 ; WET 128 쪽 이 하 ; Renoux, Le Codex Armenie n Jer usalem 121 [P0 36, 2], 211-225 쪽, nos. I-IX).

예식은 목자들이 천사의 공표를 들었던 베들레헴 근처의 그 전통 적인 장소 (38 항 이하)에서 1 월 5 일 오후에 낭송과 기도를 곁들인 회 집 과 함께 시 작했고, 그 다음에 는 <탄 생 동굴 Cave of the Nati vi ty > 에서 계속되었으며, 자정에 성만찬 Euch ari s t 예식을 행함으로써 끝 났다. 그러고 나면 감독과 예루살렘 수사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서 해가 뜨기 직전에 도착했다(이 시점에서 애테리아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 그러나 베들레헴의 경축자들은 낮까지 그들의 찬송을 계 속했고, 그 후에도 계속해서 8 일 간 예식을 지속했다. 애테리아는 또한 베들레헴에 있던 다른 예식을 기술하고 있는데, 이 것은 부활절 후 제 40 일에 행해졌다 (GEYER 93 쪽 ; LPPTS l-C, 69 쪽 ; CCSL CLXXV, 84 쪽 ; WET 41 쪽 ; Renoux, Le Codex Armenie n Jer usalem 121 [PO 36, 2], 337-339 쪽) . 〈부활절(pas cm [파스카]) 후 제 40 일은 주일 중의 제 5 일(목요일)이다. 주일 중의 제 4 일(수요일)에 모든 사람들은 철야를 하기 위하여 베들레헴으로 간다. 주께서 탄생 하신 동굴이 있는 베들레헴의 교회에서는 철야가 행해진다. 주일 중 의 제 5 일이요 부활절 후 제 40 일인 그 다음 날에는 미사가 순조롭게 드려졌고, 장로들과 감독들은 그 날과 그 장소에 적합한 ap te die i et loco 주제들에 대하여 설교를 하였으며, 저녁이 되면 마침내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우리 가 알기 로는(Ap os to l ic Consti tutio~ V 19, ANF 7, 447 쪽 이 하 ; Renoux, Le Codex Armenie n Jer usalem 121 [p0 36, 2], 337-339 쪽, no. LVII) 부활절 후 제 40 일에 승천일 Ascensio n Day 축제가 있었고, 예수께서 탄생하신 장소는 또한 승천을 경축하기에 적합한 장소로 생각될 수도 있었으므로, 애테리아가 기술한 그 예식의 성질은 바로 이 런 것 이 었다(J. G. Davi es , The Pereg rina tio Eg e ri ae and the Ascensio n , in VC 8 [1954], 93-100 쪽). 애 테 리 아는 이 때 에 이 야기 된 설교들이 〈그 날과 그 장소에〉 적합했다고 말하지만, 승천을 경축하

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는 확실하게 감람산 위로 이곳 베들레헴은 아 니었다. 그러므로 어쩌면 애테리아가 말하는 그 예식에서 기념된 사 건은 베들레헴에 있었던 다른 사건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우 리 는 『 옛 아르메 니 아 성 구집 」 ( r 파리 필사본 44 Pa ris manuscri pt 44 」 에 의하면)으로부터, 베들레헴에서 헤롯 대왕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어 린이들을 기념하는 행사가 5 월 18 일에 있었음을 알게 되는데, 애테 리아가 경축 행사를 위해 베들레헴에 있던 해 (383) 에 그 날짜가 부 활절 후 제 40 일과 일치했을 가능성도 많다(R enoux, Le Codex Ar - menie n Jer usalem 121, 335 쪽, no. LV ; Paulus Devos, Eg e ri e a Beth lee rn , Le 40e jou r apr e s Paqu es a Jer usalem en 383, in AB 86 [1968], 87-108 쪽). 이제 베들레헴 교회 자체로 되돌아가 보면, 현존하는 구조물은 대 체로 제 6 세기에 유스티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재건된 그대로의 교회 이지만, 그 밑에는 거의 확실하게 제 4 세기의 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 의 유적들이 있다. 이 교회의 고고학적 역사는 1932 년과 1934 년에 팔레스타인의 고대 역사부를 대신한 윌리 엄 하비 Wi lliam Harve y에 의하여, 그리고 1949-1950 년에 프란체스코 성지 관리국을 대신한 벨 라르미노 바갓티 Bellan nino Ba g a tti에 의하여 조사되었다. 이 연구들에 의하면, 특히 초기의 결론들에 대한 바갓티의 수정안 들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 교회는 앞마당 또는 안뜰을 통하여 들어 가게 되어 있었으며,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늘을 향해 열려 있 었고 열주(列柱)로써 둘러싸여 있었으며, 열주는 현재의 교회 앞에 있는 현재의 안마당 지대에 있었다 (36 항). 안뜰과 바실리카 본체 사 이에는 배랑(拜廊, n arth ex) 이 있었는데, 이것은 두 줄의 평행 벽들로 표시되어 있었고 아직도 남아 있는 백색 모자이크 바닥 부분을 가지 고 있었다. 바실리카 본체의 내부에서는 세로 모양의 중심 지대가 석주(石柱)들의 행렬에 의하여 중앙 회중석과 양쪽에 있는 두 개의

측랑들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바닥은 모자이크로 덮여 있었다. 그 밖 에도 바갓티에 의하면, 동쪽에 다각형의 후진 a p se 이 있었고 또 팔각 형의 단( 壇 )이 우뚝 솟아 제단을 떠받치고 있었으며 제단은 그 아래 있는 동굴 바로 위에 있었고 한편에는 숭경( 崇 敬)을 받던 석굴로 내 려가는 입구가 있었다. 1932-1934 년과 1949-1950 년에 발굴된 것에 따라 그려진 구도(構 圖 )에서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벽들은 흑색으로 나타나 있고, 그 동 일한 지대의 보충된 부분들은 짧은 점선들로 표시되어 있는 반면에, 점이 찍혀 있는 지대들은 모자이크이다. 명확한 흰 줄들은 제 6 세기 〈유스티아누스 교회〉의 윤곽을 보여 준다. 26 베들레헴에 있는 〈탄생 교회〉의 내부 〈탄생 교회〉를 점검했을 때, 회중석과 측랑들의 현재의 바닥으로 부터 약 75 센티미터 아래에서 바닥 모자이크의 부분들이 발견되었으 며, 또 다른 모자이크 부분들이 후진과 또한 배랑에서도 발견되었다 (25 항). 어떤 사람 (Cro wf oo t)은 이것들을 제 5 세기의 것으로 돌리지만, 그 위치로 봐서 아마도 〈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 이 다 (Ba g a tti) . 이 사진은 회중석 의 바닥이 파헤 쳐져 모자이크를 노출했을 때의 그 교회의 내부를 보여 주고 있다. 후에 는 이 바닥 위에 나무로 된 뚜껑문을 얹어서, 그것을 열면 그 아래 있는 모자이크의 부분들이 보이게 하였다. 27 베들레헴에 있는 교회의 회중석 바닥 모자이크 그 교회의 회중석에 있던 바닥 모자이크의 양식은 기하학적 도안 들로 구성되어 있다. 모자이크 전체는 어떤 면에서 마치 바실리카의

바닥을 덮는 하나의 커다란 양탄자와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해도 좋 을 것이다. 28 베들레헴에 있는 교회 모자이크의 세부 그 회중석 모자이크의 다른 부분을 보다 세부적으로 찍은 이 사진 에서 우리는 기하학적 도안들의 상당히 복잡한 구조를 볼 수 있다. 29 팔각당(八角堂, Oc t a g on) 의 바닥 모자이크 〈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의 회중석의 동쪽 끝에는 팔각형의 단으 로 올라가는 계단들이 있었다. 그 계단들의 둘레에는 모자이크 포장 으로 된 팔각형의 띠 장식이 있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모자이 크의 일부가 이 사진에 보인다. 아칸투스 acan th us 무늬의 테두리, 기하학적 문양들, 여러 가지 꽃과 과실들, 메달 모양의 돋을새김 안 에 있는 새 한 마리와 다른 돋을새김 안에 있는 장닭 한 마리 동이 보인다. 30 IXBYC( 이크튀스)라는 단어가 적힌 바닥 모자이크 후진에 있는 모자이크 포장으로 된 팔각형 띠 장식의 양쪽에는 각 기 하나의 작은 모자이크 화판이 있었고, 왼편에는 이 사진에 보이 는 모자이크 화판이 있다(그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Baga tt i, C加 rch from Genti les , 179 쪽, 그림 51 을 보라). 기 하학적 도안들에 더 하여 , IX8YC( 이크튀스)라는 헬라어 단어가 이 화판의 중심에 새겨져 있다. 헬라어로 이 단어는 〈물고기〉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다양한 기독교 상징들을 암시하는 용어로서 개개의 문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

님 의 아들 구주 Jes us Ch rist , God's Son, Sav i or 〉라는 말의 첫 글자 들로써 이루어져서 하나의 유명한 초기 기독교의 이합체를 만들었 다 (FLAP 535 쪽, 그리고 그림 193 ; 아래의 99 항 참고). 427 년에 황제 테오도시 우스 II 세 Theodosiu s II 는 십 자와 다른 기 독교 상징들을 사람이 밟고 다니는 포도(姉 道 )에 사용하는 것울 금 지하였다 (M. Avi- Y onah in QD AP 3 [1933], 63 쪽 , n. 17). 그러나 그 보다 이른 시기인 이 당시에는 신성한 단어를 모자이크 포도에 써넣 는 것이 허용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여하튼 간에 이 지점은 평상시 에는 아무도 밟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 모자이크의 오른쪽에서 계단들 중 남아 있는 것이 발견되었으며, 이것들은 분명히 그 아래 있는 숭경을 받던 석굴로 들어가는 옛 입구였다 . 31 〈탄생 교회 〉 에 있는 석주와 주두 이 사진은 〈탄생 교회〉 안에 아직도 서 있는 50 개 이상의 석주들 가운데 하나의 상부와 주두( 柱 頭)를 보여 주는데, 이 원주의 대부분 은 두 개의 이중 열(列)로 서서 회중석과 그 옆에 있는 네 개의 측 랑들을 표시해 준다. 원주들은 아마도 베들레헴 근처에서 채석되었 을 홍색 석회석으로 되어 있고, 주두들은 고린도 양식으로 그 꼭대 기에 아칸투스 잎사귀들과 휘어진 소용돌이 무늬가 새겨져 있다. 모자이크 (26 항)에 관해서와 마찬가지로, 석주의 연대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의견들이 있다. 어떤 이들(예컨대 Harvey and Crow foo t) 은 이것들이 먼저 제 6 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의 교회를 위하여 깎인 것이라고 믿지만, 좀더 그럴 듯한 생각 (KROLL 42 쪽, col. 3) 으로는 석주들과 기초, 그리고 고린도 양식의 주두들이 모두 〈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에서 온 것들이며, 이것들은 유스티니아누스가 교회의 바 닥을 돋울 때 올려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돌 받침대 위에

서 있고, 돌 받침대는 다시 세로 모양의 벽들 또는 기부( 基部 )들 위 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부를 놓을 수 있는 장소는 모자이 크를 끊고 들어감으로써 마련되었다. 추가로 열 개의 새 석주와 네 개의 모퉁이 석주들이 그 홀의 확대된 크기에 맞도록 같은 형태로 만들어졌댜 오늘날 석주들 위에 보이는 그림들은 십자군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한 폭의 「마돈나와 아기 Madonna and C hild 」와 함께 헬라어 와 라틴어로 기록된 이름들을 가진 여러 성안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댜 이 교회의 벽들에 있는 모자이크 장식의 유적들도 역시 십자 군 시대의 것이다. 아직도 보이는 것과 콰레스미우스Q uares mi us (1628) 가 남긴 자세한 기술로부터 우리는 그 남쪽 벽에는 마태복음 1:1-16 에 의한 예수의 조상들이 묘사되어 있었으며, 북쪽 벽에는 누 가복음 3 : 23-38 에 의한 그 분의 조상들이 묘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다른 기록부에는 중요한 교회 회의들의 결정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서쪽 벽에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믿어지는 본문 을 들고 있는 선지자들이 있었고, 수랑(柚廊)에는 예수의 생애의 장 면들이 있었다 (KROLL 47 쪽, cols. 2-3) 32 〈탄생 교회〉 옆에 있는 제롬의 조상(彭像) 제롬은 385 년에 베들레헴으로 이주하여, 420 년에 그가 죽을 때까 지 그곳 〈탄생 교회〉의 석굴 근처에 있는 한 동굴 속에서 살았다. 395 년에 그가 쓴 r 파울리누스에게 보내는 편지 58Lett er 58 to Pa u1in us 』 (NPNFSS VI, 120 쪽)에서 그는, 예루살렘에서는 하드리아 누스의 시대로부터 콘스탄티누스의 시대까지 부활을 목격했던 지점 에는 주피터의 상(像)이 들어섰으며, 십자가가 세워졌던 반석에는 비 너스의 대리석 조상이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설명하기를, 이리하여 애초의 박해자들은 〈저들이 우리의 거룩한 장 소들을 더럽힘으로써 수난과 부활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박탈할 것 으로 생각했다 〉 고 하였다. 이와 홉사한 방법으로 그는 베들레헴에 관하여 이렇게 보고하였다 .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의 베들레헴, 시 편 기자가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시 8.5 :11) 라고 노래한 바 있고 전세계에서 가장 숭경할 만한 지점인 베들레헴까지도 담무스 Tam­ muz 의 숲과 아도니스 Ado nis 의 숲으로 말미암아 그늘이 져 있었으 며, 영아 그리스도가 고고지성(孤孤之 聲 )을 발한 바로 그 동굴에서도 비너스의 정부( 情夫 )를 위한 애곡( 哀突 )이 들려 왔다 . 〉 담무스는 식물이 해마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날 때 함께 죽었다가 살아나는 바벨론의 신이었다. 그는 헬라 신화에서 아프로디테 A ph ­ rod ite 즉 비너스의 애인이었던 아도니스 Ado ni s 와 동일시되었다 . 그 룰 숭배하는 자들의 예식적인 애곡이 에스겔 8 : l4 에 언급되어 있다. 제롬의 진술에 의하면, 사람들은 이 신을 그리스도가 탄생한 석굴 안에서와 그 위에 있던 나무 수풀에서도 예배하였다. 예루살렘의 십 자가에 못 박힌 곳과 부활한 곳을 이교도들이 더럽힌 사실과 연결해 본다면 , 기독교의 전통이 이미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바 있는 베들 레헴의 이 지점을 더럽힌 것도 저들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일이었음 을 알게 된다. 제롬이 한 말의 의미를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옳다는 사실은 아마도 독자적이고도 더욱 명백하게 말한 놀라의 파울리누 스 Paul inu s of Nola 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 의 하여 확증된다 (Ep i s t le 31, 3, CSEL XXIX-XXX, 업 0 쪽).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그가 하나의 장소에 치욕을 줌으로써 기독 교 신앙을 파멸시킬 수 있다는 신념으로 수난의 장소에 주피터의 조 상을 봉헌하였고 , 베들레헴은 아도니스의 수풀로 인하여 모독을 당 하였다 . 〉 그렇다면 제롬과 파울리누스로부터 우리는 베들레헴 동굴 이 예수의 탄생 장소로 확인된 것은 이미 하드리아누스의 시대보다

도 더 오래되었다는 것, 다시 말해서 그것은 제 1 세기로, 따라서 유대 -기독교 전승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가 지게 되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교회를 건립하려면 하드리아누스가 설치한 담무 스의 숲을 제거해야만 했고, 예루살렘의 퀴릴 Cy ril of Jer usalem(348) 이 베들레헴에 관하여 〈몇 해 전에는 이 장소에 숲이 우거져 있었 다〉 (NPNFSS VII, 77 쪽)라고 한 것은 이 것을 두고 한 말일 것 이 다. 한편으로 이 진술은 시편 132:6 의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베들레 헴의 고대 이름 ; 아래의 34 항 참고)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 에서 찾았도다〉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표현된 것이므로, 퀴릴의 언 급은 단지 베들레헴에 있는 좀더 오래 지속되는 수풀을 가리키는 것 일 수도 있다. 탄생 석굴 부근에 북쪽의 〈탄생 교회〉 곁에 있는 프란체스코파의 〈성 카테리나 교회 Church of St Cath e rin e > 아래에는 몇 개의 다른 지하 방돌이 연결되어 있다. 제롬이 살면서 일하던 곳, 피아첸짜의 무명 씨 (GEYER 178 쪽 ; LPPTS II-D, 23 쪽 ; CCSL CLXXV, 143 쪽 ; WJ P 85 쪽)가 말하기를, 제롬이 주께서 탄생한 동굴의 입구에 있는 바위롤 깎아서 만들었다고 하는 그의 무덤, 또한 그의 친구들인 파 울라 Paula (404 년 사망 ; Jero me, Lett er 108, 34 참고), 유스토키 움 Eus tochi urn(419 년 사망), 그리고 크레모나의 유세비우스 Euseb i us of Cremona(423 년 경 사망)의 무덤들 둥둥이 이 방들 안에 위치한 것으 로 믿어진다. 〈성 카테리나 교회〉의 한 회랑에 있는 마당에는 이 사 진에 보이는 제롬의 조상이 화강암 석주 위에 서 있다(어떤 이들은 이 석주가 〈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로부터 온 것으로 믿는다.-본서 의 초판에서).

33 베둘레헴에 있는 〈유스티니아누스 교회〉의 구도 칼케 돈 종교 희 의 Council of Chalcedon(451) 후에 기 독교회 는 정 통파 Ort hodox( 그리스도는 두 개의 분리 된 본성 - 인성 과 신성 - 을 가졌다고 하는 칼케돈 신조를 받아들인 사람들)와 일성론자(一性論者, Monop hy si te s ) (인성과 신성을 겸한 〈하나의 본성〉을 가졌다고 믿는 사 람들)로 분리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5 업 -565) 는 모든 〈이단자 들 here ti cs 〉을 제지하겠다고 나섰는데, 그가 다시 정의한 이 용어에 는 기성 교회와 뜻을 같이하지 않는 기독교인들(그러므로 특별히 일 성론자들)뿐만 아니라 또한 정통파(유대인과 사마리아인 포함)도 포함 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는 옛 법을 재천명하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에게 가혹한 제한을 가하는 새 규칙들을 발표했으며, 이것은 529 년, 556 년, 그리고 578 년에 발생한 비잔틴인들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봉기를 유발시켰다(마지막 봉기는 유스티니아누스의 후임자인 유스티 노스J us ti n [565-578] 치하에서 일어남). 마지막 두 번의 봉기 때에는 유대인들도 사마리아인들에게 합세했다. 사마리아인의 항거 때에 많은 기독교회들이 파괴되고 불랐는데, 아마도 베들레헴 교회에 손상이 가해진 것도 이때였을 것이다. 왜냐 하면 회중석에 있는 모자이크 바닥의 일부에서 숯이 된 물질의 켜 [層]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후에 유스티니아누스는 성지에 있는 (또한 콘스탄티 노플 Cons tantin o p le 과 다른 곳에 서 도) 많은 교회 들을 건축하거나 중건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는데, 그는 이 일을 베들레헴 에서도 한 것이다. 유튀 키 우스 Eu ty c hi us(940) 는 그의 책 『논증서 (論證 書 , The Book of the Demons tra ti on) 』 (313, tran s. Watt, I, 135 쪽)에서, 베들레헴의 교회는 그리스도가 그곳에 있는 한 동굴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한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연보(年譜,

Annales) 』 (MPG 111, cols. 1070 이하, 159 이하 ; BREYDY 2, 88 쪽)에 서 그는 사마리아인의 항거에 대하여 논하고 나서 유스티니아누스 가 한 일을 말해 주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의 특사에게 베들레헴의 교회를 허물어뜨리도록 명령했는데, 이 교회는 작은 것 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심지어 거룩한 도성 안에 있는 그 어떤 건물도 능가할 수 없는, 그와 같은 화려함과 크기와 아름다움으로 다시 짓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결국 유튀키우스는 말하기를 , 황제 는 그의 대리인이 해놓은 일에 대하여 불만스럽게 여긴 나머지 그를 참수형에 처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 새 건물은 적어도 532 년까지는 완공되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스퀴토폴리스의 퀴릴 C yril of Sc yth o poli s 이, 요한 헤쉬카스테스J ohn Hes y chas t es 가 그 해에 그 교회의 배랑(拜廊)에서 기도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A. M. Schnei de r in RFAC II, col. 226). 1934 년에 하비 Harve y가 했던 〈탄생 교회〉 탐사(위의 20 항 참고)는 현재의 교회가 그 구도에 있어서 유스티니아누스의 교회와 같은 것 임을 보여 주었다 . 그보다 앞서 있었던 〈콘스탄티누스 교회〉와 비교 해 보면, 〈유스티니아누스 교회〉도 마찬가지로 안뜰과 배랑을 가지 고 있었으나 주된 홀은 더 길었고, 이제는 정사각형이 아니라 직사 각형으로(길이는 먼저 것처럼 26.5 미터가 아니라 33 미터임), 희중석이 넓어졌고 (10.26 미터) 옆에 있는 측랑들은 그만큼 좁아졌다. 더욱이 이 교회의 동쪽 끝은 확대되어 커다란 동쪽 후진을 갖게 되었고 남 북으로 향한 배랑은 그 양쪽 끝에 하나씩 후진을 갖게 되었다. 아래 에 있는 거룩한 석굴로 들어가려면 지금은 계단들을 통하게 되어 있 는데, 이것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이다. 또한 사람들이 여전히 사용하는 커다란 청동 문들은 유스티니아누스가 중건( 重 建) 한 때로부터 내려오는 것들이다.

34 r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서의 베들레헴 베들레헴은 r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서 예루살렘의 남쪽에 나타 난다 (229 항을 보라). 이 지명은 중요한 장소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것과 같은 붉은 글자로 베들레헴 Bn0A t cµ 이라고 쓰여 있다. 그 지명 아래 있는 붉은 지붕으로 된 건물은 분명히 〈탄생 교회〉이다 . 그 교 회가 532 년까지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하여 중건되었으므로 (33 항), 그 리고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는 560 년 경의 것이므로 여기에 나타난 것은 아마도 〈유스티니아누스 교회〉일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 교 희〉의 구도 (33 항)와 세부적으로 일치하는 것을 보기는 결코 쉬운 일 이 아니나, 세 개의 후진들 a p ses 을 가진 바실리카를 보여 주려는 시 도가 있었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만하다. 35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라헬의 무덤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서의 베들레헴 교회 (34 항) 아래 쪽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있다. 'E(}lp a8&( 에브라다) ; 그리고 Paµa. qx!lVT J tv Paµc:t . ,']Koua8n( 라마. 포네 엔 라마 에쿠스테, 〈라마. 한 소리가 라마에서 들렸다〉). 이것은 예레미야 31:15 의 인용인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필요하다. 창세기 35:19 과 48:7 은 라헬의 장지(葬地)가 〈에브랏 곧 베들레헴 (으로 가는) 길에〉 있었다고 말한다. 여기에 사용된 어법은 에브랏 또는 에브라다가 좀더 옛날의 마을이었는데 베들레헴으로 흡수된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미가 5:2 에서는 그 두 지명이 하나로 합쳐져 서 베들레헴 에브라다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사무엘상 10:2 은 라헬의 무덤을 베냐민 경계 안에 두고 있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쪽으로 5 마일 떨어진 에르-람 er-Ram 지대가 아마도 이곳에 있는 라마라는

곳과 일치하는 것 같다. 아닌게 아니라 r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쪽 그리고 약간 동쪽에 다른 Paµa(Ramah, 라마) 를 보여 주고 있다(이것은 10 항과 62 항에서 볼 수 있다). 느부사라단 이 B.C. 588 년에 바벨론으로 유수(幽囚)되어 가던 예루살렘과 유다 의 포로들과 예레미야를 데려간 것이 추측건대 이 북쪽 라마였을 것 이다(렘 40:l). 라헬은 요셉과 베냐민의 어머니였고,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은 북 방 이스라엘과 동의어가 되었다(렘 31:9). 그리하여 예레미야 (31 : 15) 는 라마에서 하나의 소리를 돋는데, 그것은 라헬이 그의 자녀들을 위하여 우는 소리이며, 이것은 아마도 현재 바벨론 사람들에 의하여 유수되어 가는 것은 물론, 북방 이스라엘 자손이 앗수르 사람들에게 잡혀간(왕하 18:11), 먼저 있은 추방(B. C. 722) 과 관련된 것일 것이다. 그 두 장소 중에서 이제 마태는 분명히 라마와 라헬의 무덤이 베들 레헴에 가까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헤롯 대왕이 천진무구한 아 이들을 살해했을 때(마 2:18) 의 베들레헴에서 어머니들이 부르짖은 애곡(哀突) 사이로 라헬의 애곡이 메아리치는 것을 듣고 있다. 제시된 사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전통적인 라헬의 무덤은 그 위치가 〈에브랏(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있었다는 말과 일치되 게 예루살렘으로부터 베들레헴으로 향해 가는 옛길 위에 있다. 보르 도의 순례자 (333) (GEYER 25 쪽 ; LPPTS I-B, 26_ 刃쪽 ; CCSL CLXXV, 19-20 쪽 ; WE I' 162 쪽)는 그 위치를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4 마일 되는 곳의 오른편에, 야곱 의 아내 라헬이 안치된 무덤 monumen tum이 있다. 그곳에서 2 마일을 더 가면 왼편에 베들레헴이 있다.〉 이 동일한 장소는 제롬이 파울라 Paula 의 성지 방문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지점 에 와서 그는 말하기를, 〈그녀가 베들레헴으로 계속 진행하면서 오 직 한번 그 길의 우편에서 멈추었는데, 그것은 라헬의 무덤을 방문

하기 위해서였다〉 (Le tt er 108, 404 년에 기록됨, NPNFSS VI, 199 쪽) . 아르쿨프 Arculf(6 70) (GEYER 258 쪽 이 하 ; LPPTS ill-A, 31 쪽 ; CCSL CLXXV, 208-209 쪽 ; WJ P 105 쪽)는 그의 시 대 에 그 무덤 이 피라미드처럼 생긴 것을 보았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건물은 개 수되어 왔고, 지금 존재하는 무덤은, 1841 년에 유대인들을 위하여 그 무덤을 여는 열쇠들을 입수한 유대인 박애가 모세스 몬테피오레 Moses Mon t e fi ore 에 의하여 개조된 것이다 (MEISTERMANN 300 쪽 이하) . 오늘날 라헬의 무덤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또한 모슬렘교인들에 의해서도 숭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라헬 은 그들의 역사에서도 존귀하게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라헬이 쿠 란Q uran( 코란)에서는 이름과 함께 나타나지는 않지만, 수라 Sura IV 27 (22) 와 XII 77 에는 그녀를 가리키는 간접적인 언급을 볼 수 있다 (Maulana Muhammad Ali, The Holy Qu r‘an [Lahore, 1973], 476 쪽, n. 1247). 후기의 전승에는, 요셉 (Yus uf[유수프])이 그의 형들에게서 팔 려 갈 때, 라헬(Rabil [라힐])의 무덤 곁에 이르러, 그의 낙타로부터 그녀의 무덤 위로 자신을 던져 울부짖기를, 〈오! 어머니, 어머니의 자식을 보시옵소서. 저는 저의 겉옷을 빼앗겼고, 구덩이에 던져졌으 며, 돌에 맞았고, 종으로 팔렸습니다〉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 때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하는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EI ill, 1103 쪽 이 하 ; The Short er Ency cl opa ed ia of Islam [1953], 467쪽). 36 〈탄생 교회〉의 개관 소프로니우스 So p hro ni us(LPPTS XI-A , 29 쪽)는 603/604 년에 그의 『아나크레온 풍(風)의 서정시 Anacreon ti cs 」 중의 하나를 쓰면서 세 개의 화려한 후진(後陣) (tKp CJ [O Oc tpt Kbvxov[Kbvxoc= 홍합 조개와 같

은 것])과 마치 천체들 K 아 d8 (i) O t v du tp o Q EW年의 광선처럼 빛나는 판벽 으로 된 천장을 가진 유스티니아누스의 교회를 묘사하고 있다. 코스로에스 II 세 Chosroes II(59 0-628) 치하의 사사니아 페르시아인 들 Sasan ian Pers i ans 이 614 년에 팔레스타인을 침공했을 때,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성소들을 파괴하고 베들레헴까지 진군해 왔다 . 비록 유스티 노스 마르튀 로스 Jus tin Ma rtyr(D ia lo g ue 78 ; 위 의 25 항을 보 라)는 동방 박사들이 〈아라비아로부터 왔다〉고 말하지만, 알렉산드 리 아의 클레 멘트 Clement of Alexand ria( Str om ata , I 15, 71 ANF II, 316 쪽)는 그 박사들이 페르시아인들이었다는 신념을 확증하고 있다. 베들레헴 교회에서, 박사들의 아기 그리스도 방문(마 2:1) 은 아마도 모자이크에서 그 박사들이 페르시아인의 의상을 입고 있는 것으로 그려졌던 것 같다. 8.'36년의 예루살렘 종교 대회 Sy no d of Jer usalem 에 대한 헬라인의 보도는, 페르시아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별들의 관측자요 자신들의 동족인 그 박사들의 모습을 보고 경탄한 나머지 그 교회를 남겨 두었다고 말한다. 칼리프 (C alip h, 회교국의 왕 또는 모하메드 후계자의 칭호-역주) 우마르 ‘Umar 가 638 년에 예루살렘을 탈취했을 때, 그도 또한 베들레 헴에 와서 그곳에서 멕카 Mecca 를 향할 수 있던 남쪽 후진에서 기도 하였다. 유튀키우스 Eu ty c hi us (A nnales, MPG 111, col. 1100 ; LPPTS XI-A , 67 쪽 ; BREYDY, CSCO 472, 120 쪽)는 이 일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동일한 연관 속에서 그 교회 내에 있는 모자이크 작품을 언 급하고 있다. 당시의 예루살렘 대주교였던 소프로니우스와의 합의에 의하여 모슬렘교인들은 우마르가 기도한 곳에서 계속해서 기도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으며, 베들레헴 교회가 1009 년에 파티미드 칼 리프 알-하킴 Fatir nid Ca liph al-H akim에 의하여 명령된 성지에 있 는 교회들에 대한 전반적인 파괴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바로 이 모슬렘교인들이 그것을 사용한 덕분이었을 것이다.

1099 년에는 십자군이 도착하여 탕크레드 Tancred 가 바실리카 위 에 그의 기 (旗)를 게 양했다. 이 리 하여 볼드윈 Baldw i n 이 1100 년 성 탄 절에 그곳에서 라틴 왕국의 저의 왕으로 대관식을 가졌다. 그 교회 의 북편에 십자군이 하나의 회랑(回廊)과 수도원을 지었는데, 이것들 은 성 아우구스티누스 교단 Canons of St. Au g us tin e 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이 교회와 수도원이 모두 높은 벽과 망대들로써 보호를 받았 으며, 이것들로 인하여 그 교회는 하나의 진정한 요새가 되었다. 후대에 프란체스코파 수사들이 그 바실리카를 접수하여, 황폐된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원에 저들의 터전을 잡아 〈성 카테리나 교회 Church of St. Ca th e rin e 〉를 건립하였는데, 이 교회는 아직도 그들이 소유하고 있다. 라틴 사람들과 헬라 사람들 사이예 소유권의 이전이 수차 반복된 후에, 헬라 사람들이 그 바실리카를 영구적으로 차지하 게 되었으며, 이들은 그 남동편에 수도원을 지은 반면에, 아르메니아 인들은 그 남서편에다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사진은 오늘날의 교회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으며, 바실리카 앞에 있는 직사각형의 포장된 광장은 이전에 안뜰이었던 지역을 부 분적으로 차지하고 있다. 그 교회의 중세식 정면fa ~ade 이 바로 앞쪽 에 있으며, 현대의 묘지와 프란체스코 수도회 Francis c an conven t가 왼쪽에 있고, 아르메 니 아 수도회 Armen ian conven t가 오른쪽에 있다. 37 〈탄생 교회〉의 입구 배랑(拜廊)으로 통하는 세 개의 문 가운데 오직 가운데 문만이 남 아서 사용되고 있으며, 이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것은 동물들 의 출입을 막고 전시(戰時)에 보호를 받기 위하여 오래전부터 대부 분이 벽으로 막혀 있었다. 직사각형의 문간은 현대에 만든 입구이고, 아치는 중세의 것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가로로 뻗친 대들보는, 한

때 웅장하던 유스티 니 아누스 교회 의 큰 문의 배 내 기 (co rni ce[ 벽 윗 부분에 장식 으로 두른 돌출부 __ 역 주])와 받침 대 (corbel[ 돌출부를 받치 기 위한 장치 - 역주])이다. 그 위 에 있는 석조(石造) 횡 렬들(돌 또는 벽돌 따위가 옆으로 줄지은 충-_」역주)도 또한 중세의 것이다. 38 베들레헴 근처 목자의 들에 있는 신성한 동굴 속의 바닥 모자 이크 탄생의 동굴 다음으로 기독교 전통이 베들레헴에서 가장 깊은 홍 미를 가진 곳은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 사들이 나타나 구주의 탄생을 통지한 장소이다(눅 2:8-20). 베들레헴 에 관한 애테리아 Ae th e ri a 의 기록 (381-384) 은 불완전할지라도, 제 7 세 기의 수사 발레리우스 Vale ri us 가 쓴 그 순례자의 생애를 찬양한 편 지를 보면, 그녀가 방문한 장소들 가운데 베들레헴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WE I' 174 쪽). 그리고 집사 베드로 Pe t er the Deacon(ll37) 가 저 술한 『거 룩한 장소들에 관한 책 The Book concernin g the Holy Places 』에 있는 이와 관련된 진술은 아마도 애테리아의 기록에 근거 한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베들레헴 근방에 〈목자의 곳 A t the Sheph e rds(A d Pas to res) 이라 불리는 교회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곳에 사방을 돌아가며 벽으로 잘 둘러진 커다란 정원이 있으며, 또한 천사가 양떼를 지 키 던 목자들에 게 pastor i bu s 나타나서 그들에 게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지한 장소에는 하나의 제단이 있는 지극히 빛나는 luc idis s im us 동굴도 있다〉 (GEYER 109 쪽 이하 ; WE I' 1 8.5쪽 이하)고 기록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롬이 파울라 Paula 와 유스토키움 Eus t oc hi um 의 이름으로 마르첼라 Marcella 가 성지를 방문하도록 초청하고자 편지 를 쓸 때 (386 년에), 그는 다른 많은 거룩한 장소들 가운데서 그들이

〈목자의 울타리〉를 꼭 방문할 것을 짐짓 기대했으며 (Le tt er 46 NPNFSS VI, 65 쪽), 그가 근자에 그의 어머니 파울라와 사별한 유 스토키움을 위로하기 위하여 편지를 쓰면서 (404), 그의 어머니 파울 라가 베들레헴의 탄생 동굴에 처음 도착했을 때 (385/386) 그녀가 한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시켜 주었다. 〈파울라는 조금 떨어진 언덕 아 래로 내려가서 에다르 Edar 의 망대, 죽 ‘양떼의’ 망대에 이르렀는데, 그 가까이서 야곱은 그의 양무리들을 먹였으며, 이곳은 또한 밤에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 위에는 평화, 사람들에게는 선의(善意)로다’라는 말씀을 듣는 특권을 누린 곳이다 (Le tt er 108 NPNFSS VI, 200쪽). 히브리어로 믹달 에데르(Mig dal Eder 또는 에다르 Edar) 는 〈양떼의 망대〉(이 동일한 말이 미가 4:8 에 번역되어 있는 바대로)를 의미하며, 창세기 35:21 에는 야곱이 라헬의 무덤으로부터 계속 여행하여 〈에델 [에데르]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다고 기록되어 있다(그 위치는 아마 도 베들레헴 근처였을 것임). 이러므로 제롬이 언급한 사항에서, 야곱 이 그의 양떼들을 먹인 장소는 후대에 목자들이 천사의 기별을 들은 곳과 동일한 장소인 것으로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은 좀더 나아가서, 신약의 목자들­ 그 당시에 그들의 수효는 3 명이었던 것으로 생각됨-이 그 동일 한 장소에 장사되었다고 믿게 되었다. 아르쿨프 (670) 이 그 장소를 방 문하러 갔던 것에 대해 아담난 Adamnan 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르쿨프는 우리에게 저 목자들의 무덤들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들 려 주었는데, 그들은 주께서 탄생하신 날 밤에 하늘의 밝은 빛이 그 주 위에 비친 자들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가데르의 망대 Tower of Gader 근처에 있는 한 교회에 장사된 저 세 목자의 세 무덤을 방문 했는데, 이곳은 베들레헴의 동쪽으로 약 3000 보(步) (약 1 마일)되는 곳

이다. 주께서 태어나셨을 때, 천사의 빛나는 광채가 양떼의 망대 Tower of the Flock 근처 에 있는 그 장소에 서 그들을 둘러 쌌다. 바로 이 곳에 교회가 세워졌으며, 그 목자들의 묘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GEYER 258 쪽 ; LPPTS ill-A, 30 쪽 이 하 ; CCSL CLXXV, 208 쪽 ; WJ T 105 쪽). 앞에서 언급한 참고문들이 가리키는 전통적인 목자의 들 F i eld of the Shep herds 은 베들레헴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1 마일 떨어져 있고, 베이트 사후르 Be it Sahur 라는 아람인의 마을 근처에 있다. 다른 곳 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동굴이 특별히 전통의 초점을 제공하고 있댜 이 장소는 예루살렘의 희랍 정교 총대주교청의 관할 아래 있 으며, 고고학적 발굴은 1972 년과 그 이후의 밧실리오스 차페리스 Vassili os Tz aferi s 에 의하여 수행되었댜 이 유적지의 역사에 다움과 같은 다섯 단계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1) 신성한 천연 동굴(제 4 세기의 후반) (2) 동굴 교회 (제 5 세 기 ) (3) 지붕 예배실(제 5 세기) (4) 바실리카(제 6 세기) (5) 〈수도원 교회〉(제 7 세기). 바닥 모자이크의 적어도 일부분은 첫 네 단계로부터 잔존한 것으 로, 거기에 적힌 헬라어 명각들과 함께 시대를 매기는 단서를 제공 하고 있다. 이 신성한 동굴 Sacred Cave 은 십중팔구 천연의 바위 동굴이었을 것이고, 그것이 거룩한 장소로 간주되고 사용된 것이 분명하며, 이때 문에 바위 바닥이 평평하게 다듬어지고 그 위에 모자이크 포장이 깔 렸다. 이 모자이크에는 주된 주제가 있는데, 그것(두 번 나타나는 것 으로서 그 하나의 예를 여기에 제시된 사진에서 볼 수 있음)은 두 개의 사각형이 짜맞춰져 이루어진 팔각 별 e ig h t-pointed s tar이다. 이 별

은 하나의 원 안에 둘러싸여 있고, 원은 다시 하나의 사각형 안에 둘러싸여 있다. 그 두 개의 별 도안 사이에는 작은 등변( 等 邊)의 십 자들이 산재해 있다(그 중에 하나가 이 사진의 오른쪽 상단 구석에 보 임). 팔각 별과 등변의 십자가 이른 세기(世紀)들의 여러 배경에서 발견되지만, 이것들이 바로 이 장소에서 나타난 것은 단순히 장식용 이라가보다는 분명히 상징으로 사용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별은 베들레헴의 별(마 2:2) 을 암시하고 십자는 역시 기독교 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고고학적 및 문학적 증거로 볼 때, 이 모자 이크의 연대는 제 4 세기의 후반으로 매겨지며, 바닥 모자이크에 이렇 게 십자들이 나타나는 것은 테오도시우스 II 세가 포도(錦道)에 십자 를 그려넣는 일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 4 '?:1년 이전의 연대와 조화 를 이룬다 (30 항 참고). 형태 면으로 본다면 이 모자이크는 로마 양식 과 비잔틴 양식 사이의 과도적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것 또한 그 와 같은 연대에 적합한 것이다. 이렇게 제시된 제 4 세기 후반이라는 연대가 맞다면, 이것은 성지에서 발견된 최초의 기독교 모자이크들 중의 하나가 된다. 39 베들레헴 근처 목자의 둘에 있는 지봉 예배실의 바닥 모자이크 목자의 들 Fi eld of the She p herds 의 제 2 단계(제 5 세기)에서 실제적 인 작은 교회 하나가 〈신성한 동굴〉 내부에 세워졌다. 이 동굴 교회 는 11Xl5 미터의 직사각형으로 된 건물로서, 서쪽에는 좁다란 배랑 (拜廊)이 있는 주된 홀과, 동쪽에 있는 홀 내부의 반원형으로 된 후 진(後陣)으로 이루어졌으며, 북쪽에는 인접한 두 개의 방이 있다. 벽 은 잘 깎인 돌로 되어 있고, 홀의 지붕은 커다란 석회석 토막으로 올려져 있었다. 땅의 표면 위로 솟아오른 윗부분을 제외하고는 복합 구조물 전체가 지하에 있었다. 홀은 검은 색과 붉은 색의 단충으로

된 모자이크로 포장되었으며 동굴 자체의 모자이크 포장 위로 약 0.3 미터 되는 높이에 있었으나, 이 모자이크들 중에서 남아 있는 것 은 오직 작은 단편들뿐이다. 전체적으로 지하의 교회는 매우 잘 보 존되어서 19 5.5년까지 베이트 사후르 Be it Sahur 의 희랍 정교 공동체 룰 위한 교구 교회로 사용되었는데, 이 해는 이 마을에 새 교회가 세 워지고 오래된 사적지에 대한 고고학적 탐색이 가능하게 된 해이다. 그 동굴 교회의 지붕 꼭대기에서 이 사진에 보이는 모자이크 포장 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건물 역사의 제 3 단계(이것 역시 제 5 세기의 것으로 여겨짐)에서 이곳에 세워진 혹종(或種)의 작은 예배실에 속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모자이크는 반(半) 타원형의 모양으로 되어 있다. 가장자리는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장식되어 있고, 윗 장면에는 포도나무(요 15:1 참고)가 손잡이 둘 달린 항아리 am p hora 로부터 받 어 나오고 (M. Av i-Y onah in ZDPV 3 [1933], 62 쪽 참고), 또한 그 양 편에는 꽃이 피어 있는 가지들이 있으며, 위에 있는 원형 돋을새김 은 빨간 색과 파란 색으로 된 잎과 함께 빨간 색 꽃을 가지고 있다. 아래 쪽에는 헬라어로 적힌 두 개의 명각이 있었는데, 오른쪽에 있 는 것은 심하게 손상되었고, 왼쪽에 있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Mvii aB nn K(up t)t CO U 60UAOU aou Aaa~ap ou Kat 퍄CJll C 더 C Ka pJtO似pi ac a0t 0 0 t A 山V Remember, 0 Lord, yo ur servant Laazarus and all his contr ibu ti on s. t Amen. 기억하소서, 주여, 당신의 종

라아자루스와 그의 모든 현물들을. t 아멘 라아자루스 Laazarus 의 철자가 두 개의 알파 al p has 를 가진 것은 그 이름의 히브리식 발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헌물들〉은 아마도 이 기독교인이 목자의 들에 있는 교회에 바친 후한 헌금일 것이다. 하 나의 십자 표가 헌정(獻星)의 문장과 아멘 Amen 사이룰 분리시켜 주고 있다. 제 5 세기의 비잔틴 모자이크인 이것은 이 시기에 속하는 극소수의 기독교 모자이크들 중의 하나이다. 제 4 단계는 아마도 제 6 세기의 전반부인 유스티니아누스 (5 'Z7 -565) 의 치세 동안으로 그 연대를 매길 수 있을 것이다. 이때로 말하면, 성지 에 대부분의 교회들이 세워진 때이며, 많은 순례자들이 오던 때이다. 동굴 교회를 두르고 있는 지대 전체는 약 60X40 미터 넓이로, 지금 은 무거운 석회석 토막들로 만든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동굴 교회 의 지붕 위에 있던 예배실이 어떤 것이었던지 간에, 그것은 바로 위 에서 기술한 모자이크 포장만을 남긴 채 제거되고 말았으며 전혀 새 로운 바실리카가 그곳에 건립되었다. 이 새 바실리카는 30Xl5 미터 크기였고, 안뜰, 배랑, 회중석, 두 개의 측랑, 후진 동이 다채로운 모 자이크 바닥과 함께 있었다. 그러나 대리석 석주와 고린도식 주두 (柱頭)들을 포함한 건축상의 요소들은 대부분이 분산되거나 재사용 되어 모자이크들 중에서 오직 작은 단편들만이 남아 있다. 불탄 혼 적들도 있으며 그것이 파괴된 것은 필시 614 년에 페르시아인들에 의 해서였다. 제 5 단계 때에, 아마도 제 7 세기에 들어서 과히 오래지 않은 때에, 또 다른 교회 하나가 그 동일한 위치에 세워졌는데, 이것은 대부분 의 양식에 있어서 그 앞에 있던 바실리카의 구도를 따른 것이었으 며, 주된 차이점은 예전에 지붕을 떠받치고 있던 대리석 석주들

columns 대신에 지금은 육중한 돌로 된 대각( 臺 脚)들이 세워진 점이 댜 교회 주위에는 또한 여러 가지의 생활 공간과 다른 시설들이 있 었다. 아랍인들이 정복한 (640) 후로는 아마도 순례자들이 거의 오지 않았다. 이곳이 수도원과 수도원 교회로서 계속 유지되다가 최종적 으로 파괴되고 버려진 것은 제 10 세기였다.

나사랫 40 나사렛 이 사진에서 선인장이 늘어선 길을 따라 그 일부가 보이는 나사렛 성읍은 해발 1150 피트 높이의 갈릴리 산중에 있다. 고지에서 내려다 보면 남쪽을 가로지르는 에스드랠론 평야 Pl ain of Esdraelon 와, 서쪽 으로 갈멜 산 , 동쪽으로 다볼 산, 그리고 북쪽으로는 헤르몬 산이 보 인다 . 구약 여호수아 19:10-15 에는 스불론 지파의 성읍 목록과 함께 야비아J a phi a 라는 이름을 들고 있는데 (13 절) , 이것은 나사렛 남서쪽으 로 1. 5 마일 떨어진, 한충 더 높은 언덕에 있는 야파J a pha 인 것 같다. 그러 나 여 기 에 나사렛은 언급되 어 있지 않다. 〈유대 전쟁 Jew ish War> 당시에 이 지역에서 군사 작전을 책임졌던 요세푸스J ose p hus 는 야파에 진을 쳤고 (L ife 52 §업 0) 그 지 역 을 요새 화했으며 (War II 20, 6 §573), 또한 나사렛의 북쪽 3 마일 지점에 있는 셉포리스 S ep­ pho ri s 를 사령부로 사용했다 (L ife 12 §63 동). 그는 그의 기록 가운데 갈릴리에 있는 45 개 성읍의 이름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나사렛에 관 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있다. 또한 탈무드 Talmud 는 63 개의 갈

릴리 성읍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나사렛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구약, 요세푸스, 그리고 탈무드가 이렇게 침묵하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곧 살펴볼 발굴물들 (43 항)은 이곳이 퍽 이른 시기에 이미 사람 이 정착한 곳이었음을 보여 주며, 나사렛은 또한 가이사랴에서 발견 된 제 3 세기 말 또는 제 4 세기 초의 명각 (44 항)에서도 거명되어 있다. 또한 유세 비 우스가 인용한 율리 우스 아프리 카누스 Julius Africa nus (170-240) 에 의하여, 그리고 유세바우스가 쓴 『지명록』에도 언급되 어 있다 (45 항). 그러므로 초기에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예수의 시대에 나사렛이라 불리는 도성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의 심 (Che yn e in EB III, cols. 3 3.58 -3362) 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 이것 은 단지 요한복음 1:46 에 인용된 바와 같은 얕보는 말에 나타난 것 과도 같이, 그 도성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했음을 증거할 뿐이다. 누가복음 2:51 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나사렛에서 성장하였음에 틀 림없고, 마가복음 1:9 에 의하면 그는 침례를 받으실 때에 나사렛으로 부터 오셨다. 그러므로 그는 〈나사렛에서 나온 이 o cino Na~a pe8 〉(마 2l:11 ; 요 1:45 ; 행 10:38), 〈나사랫인 o Na~a p nv6<; 〉(막 l:24, 등), 혹은 〈나사렛 사람 b Na( (J)p a t oc 〉(마 2:23 등)이셨다. 마지막 두 말은 아마도 언어적으로 나사랫이란 말에서 왔을 것이며, 그 뜻은 〈나사랫의 거 주자 inha bit ant of Nazareth >이 다. 41 나사렛의 구도 이 나사렛의 스케치 구도는 아래의 토의에서 언급되어 있는 주요 장소들울 보여 준다•

42 나사렛에 있는 마리아의 샘 나사렛에서 아마도 매우 초기부터 있어 왔고 20 세기에 와서도 주 요 급수원이 되고 있는 것은 마리아의 샘 Sp ring or Founta in of Ma ry(Ain M ary am) 으로 알려진 샘이다 . 이 샘은 〈마리아의 샘 교회 Church of Ma ry's Foun tai n 〉라고도 하고 〈성 가브리 엘 교회 Church of St. Gab ri el 〉 (55 항)라고도 하는 희랍 정교회 위에 있는 언덕에서 솟아나는데, 그곳으로부터 물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교회의 대지 밑 으로 끌어졌으며, 그 다음에는 파이프를 통해 언덕 아래로 남동쪽으 로 흘러 수원(水源)으로부터 거의 500 피트쯤 떨어진 방수구(放水口) 로 연결되었다. 이 방수구는 나사렛으로부터 디베랴로 가는 도로 곁 에 1862 년에 세워진 것으로서 지금은 새로운 형태로 재건되어 있다. 사진은 나사렛의 여인들이 아직도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그곳으로 물을 길으러 오던 시절의 그 방수구 주변을 보여 준다. 43 〈잉태 고지 교회〉에 인접한 고대의 석굴 주거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인간의 생명이 나사렛 지역에 있었 다는 사실이, 1934 년에 R. 뇌빌R. Neu vill e 이 그 도시의 남동쪽으로 약 1. 5 마일 떨어진 한 동굴에서 발견한 해골에 의하여 증명되었다. 이 해골은 네안데르탈 인 Neande rtal man 의 해골보다 더 오래된 것 으로 보인다. 나사렛 자체의 조사에서도 1963 년 그 도시 상부에서 매장 동굴 단지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중기 청동기 시대 MBA 초반의 도기 가 있었다 (RB 70 [1963], 563 쪽 ; 72 [1965], 547 쪽). 라틴 〈잉태 고지 교회〉의 지대 아래 쪽에는 오랫동안 존속했던 고대 마을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이 교회 내부와 주변에 대한 고 고학적 발굴이 1892 년에는 베네딕트 불라밍크 Be bedi c t Vl amin ck 에

의하여, 1889 년과 19ff7 -1909 년에는 프로스퍼 비오드 Pros pe r V i aud 에 의하여, 그리고 l%5 년과 그 이후로는 전에 서 있던 18 세기 (1730) 의 교회당이 새롭고도 더욱 큰 〈잉태 고지 바실리카 Bas ili ca of the Annunc i a ti on 〉 (49 항)를 짓기 위하여 헐리게 되었을 때, 벨라르미노 바갓티 Bellar mino B ag a tti에 의해 수행되었다. 멀지 않은 곳의 〈성 요셉 교회〉 지역뿐만 아니라 그 교회 아래와 주변도 분명히 농경 마 을 지역이었다. 거기에는 여러 개의 석굴gr o tt oes, 곡식들을 위한 사 일로 s il os, 물과 기름을 넣는 수조들, 건포도와 감람을 찡는 압착기, 그리고 맷돌들이 있었다. 사일로들은 텔 아부 마타르 Tell Abu Ma tar에서 발견된 형 태와 같 은 것으로서 동석기 시대 Chalcoli thic Ag e 만큼이나 이른 것이지만 (IE] 5 [19 5.5], 23 쪽), 여기 나사랫에 있는 사일로 안에서 발견된 최 초기의 도기는 철기 시대 제 1I 기(B. C. 900-600) 의 것이다. 바더먼은 주둥이 옆에 작은 〈깔때기〉가 붙어 있는 특이한 큰 항아리에 관심을 환기시켰다. 이 부착물은 깔대기처럼 고안되었지만, 단지 항아리 어 깨에 붙어 있을 뿐이지, 실제로 항아리의 벽을 뚫고 들어간 것은 아 니다(이런 항아리의 예를 보려면, Ba ga tt i in DB Supp le ment VI, col. 323, 그림 601 을 보라). 그 지대에서 나온 다른 항아리는 헬라 시대의 것이 조금 있고, 로 마 시대의 것이 조금 많이 있으며, 그것의 대부분은 비잔틴 시대의 것이다. 그 수많은 석굴들 중에서 적어도 몇 개는 가정용으로 사용 되었으며, 이러한 목적을 위해 건축적으로 개조된 것도 있었다. 그것 들 중 하나에는 주거지를 만들기 위해 석굴 맞은편에 벽을 쌓았는 데, 이것은 이미 비오드에 의해 〈잉태 고지 교회〉에 인점한 수도원 밑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사진에 제시된 것이다. 또한 23 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잉태 고지 교회〉 로부터 북쪽, 서쪽, 남쪽으로 대략 250-750 야드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댜 이 무덤들은 본래의 마을 의곽에 있었음이 틀림없으므로 , 그들 의 위치는 부락의 경계에 대한 어떤 아이디어를 제공해 준다 . 무덤 들 중에서 18 개는 코킴 kok i m 형 무덤인데, 이것은 B.C. 200 년 경부터 팔레스타인에 알려졌으며 (255 항), 사실상 유대인 무덤의 표준형이 되 었다 . 그 무덤들 중의 두 개, 죽 〈잉태 고지 교회〉로부터 남서쪽으로 단지 60 야드 떨어진 무덤 (PEF Q S 1923, 90 쪽)과 450 야드 떨어진 무 덤(QD AP 1 [1932], 53- 閔쪽)은 아직도 도기 등잔과 꽃병, 그리고 유 리 그릇과 같은 물품들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연대는 아마도 기독 교 시대[西紀]의 제 1 세기로부터 제 3 또는 4 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무덤들 중 네 개는 구르는 돌로 인봉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유대 말기 로부터 70 년까지 의 전형 적 인 무덤 봉함 방식 이 다(업 4 항, 281 항). 그러므로 무덤들로부터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나사렛이 로마 시 대 동안에 유대 색채가 강한 부락이었다는 사실이다(또한 45 항 참고). 44 나사렛을 언급하는 가이사랴에서 나온 명각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발굴 작업에서 나온 발굴물들 (43 항) 은 예수 시대 당시 나사렛에 한 성읍이 존재했음을 말해 주는 명확 한 증거를 제공한다. 히브리 대학교가 남침례교 신학대학원의 협력 을 받아 실시한 발굴 중 1962 년 가이사랴에서 발견된 한 명각의 단 편들은 명각에 나사랫이란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서는 첫 경우이며, 히브리어로 그 이름이 나오는 것 중에서도 최초의 것이다. 두 단편 이 이때에 발견되었으며, 그보다 몇 해 전에 발견된 세번째 것도 분 명히 이것들과 같은 명각의 것으로 인정되었다 . 우리가 여기서 특별한 관심을 기우리는 첫번째 단편은 사진에 보 이는 조각인데, 크기가 153Xl24 밀리미터에 질은 회색의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사각형의 히브리어 문자들이 새겨져 있으며, 네 줄이 부

분적으로 남아 있다. 세 단편을 모두 탈무드와 예전 자료들과 비교 해 볼 때, 그 온전한 명각은 24 제사장 반열의 목록으로서(대상 24:7- 19; 느 12:1-21 참고) 바른 순서대로 각 반열(또는 가족)의 이름과 그 반열이 거주한 갈릴리의 성읍이나 마을의 이름을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제사장 반열이 갈릴리에 있는 주택들로 옮겨진 것은 70 년에 있었 던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연이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앨리아 카 피톨리나 Ae li a Cap itoli n a 영역으로부터 유대인들을 축출한 일 (184 항 참고) 후에 발생했음이 틀림없다. 그 명각 단편들은 유대인 회당이 위치해 있던 가이사랴의 북부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돌판 전체 가 언젠가 회당벽에 고정되어 있었던 것 같다. 가이사랴 회당의 유 적 속에서 355/356 년에 숨겨진 것이 분명한 3700 개의 놋 주화 한 무 더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회당은 제 3 세기 말이나 제 4 세기 초에 건립 된 것으로 믿어진다 (132 항 참고). 그 명각은 이와 동시대의 것으로 판단된다. 사진에 보이는 단편에 나사랫 n., 도이란 이름이 제 2 행에 보이고, 또한 제 4 행에서는 첫 글자 멤 (Mem[o]) 이 소실된 것으로 가 정 한다면 믹 달 우나이 야 Migd al Una iya 혹은 막달라 Ma g dala 를 가리 키는 믹달Mig dal('? 더 l[O]) 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73 항). 45 나사렛에 있는 〈잉태 고지 교회〉의 구도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나사랫의 어느 특정한 위치를 기억해 낼 수 있기 위해서는, 명확한 증거들에 의해, 예수의 가족들 중의 더러가 팔레스타인에 그리고 그들 중의 얼마는 아마도 나사렛에, 제 1 세기 말과 제 2 세기 초까지 머물렀으며, 그 이후의 후손들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 거기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대인 기독교인 저술가 헤게십푸스 He g es ippu s(180 년 경)는 유세

비우스가 인용한 글에서 (Ch . Hi st. , ill11 및 32) 시므온 S ym eon( 예루 살렘 교회의 우두머리로 주의 형제 야고보를 계승하였고, 그 자신은 요 셉의 형제였던 글로바 Clo p as 의 아들로서 예수의 종형제였던 사람)은 120 살까지 살다가 트라야누스 치하에서 순교당했다(유세비우스의 『 연대기 』 [ed . Helm, 194 쪽]에 의하면, 그의 치세 제 10 년 , 죽 1 (J7년에). 또한 그에 따르면 (Ch . Hi st. , m 20) 예수의 형제 유다의 두 손자들은 다윗의 후손으로서의 그들에게 부가한 혐의 때문에 도미티아누스 황제 앞에 끌려 갔으나(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그의 치세 제 15 년 죽 96 년에, Ch. Hi st. , ill 18), 후에 풀려나 트라야누스 (98-117) 시대까지 살았다고 말한다. 황제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이 두 사람은 그들이 참으로 다윗 가문의 출신임을 인정했으나, 그들어 가지고 있는 재산 은 면적이 39 쿼터-에이커 qu a rter -acres(nH8p!J lv }..8' )이고 9000 데나리 온 가치의 땅 한 돼기뿐으로, 그들은 이것을 경작해서 세금을 내고 생계를 유지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노역으로 거칠어진 손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진술을 확인해 주었고, 그리하여 마침내 황제의 의심은 완전히 누그러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농부였으며, 그리고 심문을 받기 위해 팔레스타 인으로부터 로마로 송치된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으므로, 십중팔 구 그들은 나사랫에, 죽 위에서 언급한 고고학적 발견물들 (43 항)에 의하여 그 농경적인 특성이 풍부하게 증명된 한 지역에 살았을 것이다. 석방되자마자 그 두 사람은 또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증인들 µa pi: u p a c;이었고 또한 주의 친척들이었기 때문이 다. 이와 같은 가족들과 또한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 뒤에 다른 사람 들이 팔레스타인과 또 십중팔구 나사렛 마을 내에 계속해서 살았을 것이므로, 적어도 예수의 고향에서 몇몇 특정한 장소들에 대한 기억 이 오래 보존되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 나사렛에 제사장들이 정착하였음을 보고하는 가이사랴 명각 (44 항)

도 유대식의 무덤 (43 항)과 마찬가지로 그 도성에 유대적 색채가 강 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유세비우스가 인용한 글 (Ch Hi st. , I 7, 14) 에서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 us A 苗 canus(200 년 경)는 나사렛 Nazare th과 코카바 Cochaba 를 유대인 마을이라고 말 한다. 에 피 파니 우스 Ep iph an ius (Pan. Frier . I 29, 7, 7 ; 30, 2, 8-9 GCS I, 330, 335 쪽 ; Wi lliam s, NHS 35, 118, 121 쪽)는 요단(동편)에 있는 코 카바라 불리 는 한 장소를 언급하고 있으나 (M. Av i-Y onah, The Holy Land from the Persia n to the Arab Conq u ests [Grand Rapi ds : Baker, 1966], 168 쪽 및 지도, 169 쪽 참고), 나사랫과 연결되어 있는 이 코카바는 아마도 밧토프 계곡 Ba tt o f Valle y에 있는 나사렛의 북쪽, 죽 현대의 카우카브 Kaukab 일 것이다 (S. Lieb ermann and M. Av i- Yonah in QD AP 5 [1936], 171 쪽). 코카바는 또한 r 사해 두루마리 Dead Sea Scrolls 』 중 동굴 5 에서 나온 새로 발견된 지리학적 자료 에서도 언급되는 것 같다 (D JD III, no. 9, 179 및 바더먼이 인용한 다 른 자료들을 보라). 나사렛과 코카바를 유대 마을로 언급하는 것과 함께 아프리카누 스는 그 동일한 문단에서 또한 주의 6eon6 卯 VO t(데스포쉬노이) 죽 친 척들에 관하여 말하는데, 그들은 그 두 성읍 출신이며 그들의 내력 에 관한 기록을 매우 주의 깊게 간직하고 있다. 또한 데치우스 Dec ­ ius (249-2.5 1 ) 치 하에 서 팜푈 리 아 Pam ph yli a 에 서 죽은 코논 Conon 이 라 불린 한 순교자는 그의 심문 때에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나는 갈릴리의 나사랫 도성에 속하며, 나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섬기는 분인 그리스도의 친척이다〉 (KOPP 1959, 90 쪽; SWDCB I, 621쪽). 후에 콘스탄티누스는 디 베 랴의 요셉 Jo seph of T i be ri as 에 게 갈릴리 에 교회들을 지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는데, 이 사람은 유대인 제 사장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백작의 기품을 지닌 · 사람이었다 (SWDCB

m, 460 쪽) . 359 년 경 에 에 피 파니 우스는 그 당시 70 세 이 던 이 사람을 스퀴토폴리스 Sc yth o poli s 에서 만났다. 구리고 그는 갈릴리의 성읍들 에는 아무도 교회를 지을 수가 없었다고(아마도 그 자신이 건축을 하 기 전을 의미하는 돗함) 요셉이 말한 것으로 인용하고 있다 (Pan. haer. I 30, 11, 9 이 하 GCS I, 347 쪽 ; Wi lliam s, NHS 35, 128 쪽). 그 이유는 그들 가운데 헬라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그리스도인은 한 사 람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ev8a nc ; ou6Enoi: £ tcrx ucrcv otK o 6oµfi cra t tKK Anat ac , 8td 댜 밟 1£ mnva, 直t C 2aµap c im v, 岡 1£ Xpt cri:tav ov µEcrov atT 6v ctV Q t). 그들 가운데 이방인이 없었다고 하는 사실은 디베랴 T iberias, 셉 포리스 Se pp ho ri s 라고도 불리던 디오가이사랴Di ocaesarea, 그리고 나 사랫과 가버나움 둥지에서 특별히 그러했다고 요셉은 덧붙였다. 그 러나 우리는 유대계-기독교인들(에비온인들과 나사렛인들)이 〈기독교 인〉이라고 불리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예배 장소를 〈교회〉가 아니라 〈회당〉이라고 부르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유대계-기독교인들 에 관한 서론부의 내용으로부터) 기억하고 있다. 그랴므로 요셉이 말 하는 바가 나사렛의 유대인들 가운데 신자들이 존재했음을 배제하 지는 않고(바로 위에서 말한 바 예수의 가족들이 나사랫에 계속해서 살 고 있었다는 중거를 보라), 또한 회당-교회의 존재를 배제하지도 않 는다(그에 대한 증거를 아래에서 보라). 요셉 자신이 한 일에 관하여 에피파니우스는 , 이교외 신전이 하드 리아누스 시대로부터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디베랴에서 요셉이 그 것을 교회로 재건축하였으며, 또한 셉포리스와 〈다른 성읍들에도〉 교회를 건축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 〈다른 성읍들〉에는 나사렛이 포함될 수 있겠지만, 앞에서 언급된 네 성읍들(디베랴, 셉포리스, 나사 렛, 가버나움) 중에서 오직 둘만이 특별히 여기에 거명되어 있으므로 요셉이 나사렛 또는 가버나움에서도 건축을 했는지 여부는 불확실

한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 에 피파니우스가 359 년에 요셉을 만났을 때 요셉이 70 세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요셉이 활동적으로 교회 건축을 한 것은 잠정적으로 330 년 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나사랫에서 실제로 교회가 · 일컬어지기 얼마 전이다. 유세 비우스는 『지명록』 (ed. Kloste rm ann, GCS Eusebiu s ill 1, 138-141) 에 서 갈릴리에 있는 나사렛의 위치를 레기오 Le gio( 므것도에서 가까움) 의 동쪽으로 15 마일의, 다볼 산 근처에(실제로는 여기서 서쪽으로 5 마 일밖에 안 됨) 놓았다. 그리고 제롬은 자신이 쓴 책(『지명록』)에서 그 것이 비쿨루스 v ic ulus 죽 단순한 마을이었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이 들 중 아무도 그 장소에 교회가 있었다고 언급하지는 않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바로 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설명될 수 있다. r 마다 바 모자이크 지도」의 현존하는 부분들도 역시 그 폭이 나사렛을 보 여 줄 만큼 넓게 펼쳐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 자료에 나타난 것은 더 이상 확인할 수가 없다. 하지만 570 년에 피아첸짜의 무명씨는 디 오가이사랴(셉포리스)로부터 나사렛으로 온 것을 보고하면서 그 지 역의 비옥함에 대해서 말하였다. 또한 그 도성의 여인들, 즉 성 마리 아가 자신들의 친척이었다고 말하는 히브리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 마리아의 집은 바실 리카이다〉 (GEYER 161 쪽 ; LPPTS II-D, 5 쪽 ; CCSL CLXXV, 131 쪽 ; WJ P 79 쪽 이하). 제 19 세기의 마지막 해들과 20 세기의 초반의 해들 사이에 그 당시 에 이칙 서 있던 18 세기의 〈잉태 고지 교회〉에서 베네딕트 블라밍크 Bene dict Vl amin ck 와 프로스퍼 비 오드 Prospe r V i aud 가 수행 한, 앞에 서 이미 언급했던 (43 항) 고고학적 작업에서 그보다 앞서 있던 십자 군 교회의 벽과 주두(柱頭)들이 발견되었다. 한편 그 교회 밑에서는 또한 비잔틴 교회의 유적들과 함께 여러 가지의 모자이크들과 벽서

들graffiti도 발견되었다. 그 후에 새로운 〈잉태 고지 바실리카〉를 건 립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위해 1955 년에 그 작은 18 세기의 교회가 무너뜨려졌을 때, 모자이크로 포장한 바닥이 위로 올라오게 되어 온 전한 조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벨라르미노 바갓티 (1955-1968) 는 그 아래로 암반 바닥까지 내려가는 발굴 작업을 수행하였다 (Ba­ ga tt i, Exazvati on s Nazareth , 114-173 쪽 ; 그리 고 Bag a tt i, Church from Cir c um cisio n , 122-128 쪽 ; Nazareth Toda y, 11-13 쪽). 이제 구도 (45 항)를 보면, 좀더 큰 윤곽은 십자군 교회의 •• 것이다. 이 건물은 길이가 75 미터, 폭이 30 미터였으며, 정동향(正東向)으로 세워져 있었다. 두 줄의 석주가 회중석과 두 개의 측랑들을 구획하 였으며, 홀은 동쪽 끝에 있는 세 개의 후진들로 끝나 있었다. 비오드 가 발견한 십자군 시대의 주두에 관하여 말한다면, 그것들은 그곳에 한 번도 설치된 적은 없으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모습들이 정교하 게 새겨 넣어져 있었으며 지금도 수도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STIASSNY, 114-117 쪽의 사진들). 북쪽 측랑 아래 십자군 교회 의 경 내에 둘러싸여 있는 것은 두 개의 석굴을 가진 바위 땅굴인데, 한 석굴은 좀 큰 것이고 다른 석굴은 좀 작은 것이며(구도의 no. 3), 그 위에다 교회를 건립함으로써 이 석굴들을 계속적으로 숭앙하려고 의도했음이 분명하다. 십자군이 제 11 세기 말에 거기에 도착했을 때는 그 앞서 있던 교회 가 폐허로 남아 있었다. 역사가 두로의 윌리엄 Wi lliam of Ty re (1095-1184, Babcock and Krey, I, 399 쪽)은 뷜론의 고드프리 Godfrey of Bou illon 치하에서 탕크레드 왕자Prin ce Tancred 는 갈릴리의 관할 권을 부여받아서 (1099) 디베랴룰 그의 수도로 정하고 그 영토 안에, 죽 나사렛과 디베랴와 다볼 산 위에 화려하게 장식된 교회들을 세우 는 일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러므로 나사랫에 있는 십자군 교회 가 세워진 연대는 제 12 세기의 벽두이다. 그 직후에 러시아 대수도원

장 다니엘 D ani el(1106) 이 나사렛을 방문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LPPTS IV-C, 69 쪽 이하). 크고도 높다란 교회가 성읍 한가운데 솟아오른다. 그것은 세 개의 제 단을 (세 개의 후진 안에 있는) 가지고 있다 . 그 안으로 들어가면 왼편 으로(죽 북쪽 측랑에) 작은 제단 앞에 , 작지만 깊숙한 하나의 땅굴이 있 다. 여기에는 두 개의 작은 문들이 있는데 하나는 동쪽에 다른 하나는 서쪽에 있어서 이 문을 통하여 석굴로 들어갔다 . 서쪽 문을 통해 들어 가면 오른편에 좁다란 입구가 있는 하나의 작은 방 cell( 죽 큰 석굴, 구 도의 제 3 번) 이 있는데 , 이 방 안에 성 모 동정 녀 holy virgin가 살았다. …… 서쪽 문을 통하여 그 동일한 토굴에 들어가면, 왼쪽 편에는 마리 아의 배우자인 성 요셉의 묘지(죽, 작은 석굴; 이와 같이 위치를 잘못 잡은 일에 대해서는 아래의 48 항을 보라)가 있다. …… 그 동일한 토굴 안에 서쪽 문 가까이에는 ,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천사장 가브 리엘이 마리아 앞에 나타났을 때 성모 동정녀 마리아가 자주실, 죽 주 홍색 실을 자으며 앉아 있던 장소가 있다(아래의 和항 참고). 전통적으로 보다 큰 석굴이 마리아의 주택과 잉태 고지의 장소를 표시하는 것으로 여겨 온 점에 비추어서 이 구도 내에 표시된 다른 사항들에 대해서도 좀 주의해 보자. 바로 북쪽에, 그러나 십자군 교 회의 벽 바깥에 있는 하나의 커다란 인공 토굴(구도의 no. 6) 은 고대 에 포도즙을 짜던 톨이 었다 (Ba g a tti in DB Sup ple ment VI, col. 325). 팔레스타인에서 발견된 그와 같은 다른 많은 포도즙 틀과 마찬가지 로 (Saller, Di sco veri es at St. Joh n's, 'Ein Kari m [PSBF 3], 96-100 쪽), 이것 역시 아마도 로마 시대의 것으로 고대 농경 시대의 나사랫 유적들 가운데 하나이다 (43 항 참고) . 근처에 있는 다른 유적들에는 솥(구도의 no. 8) 과 곡물 사일로 (no . 10) 가 포함되 어 있다 (B ag a tti in

DB Supp le ment VI, col. 326 및 그림 604). 이 런 것들이 전승에 기 억 되어 내려오는 마리아의 집 주변 상황이었다. 이 동일한 구도에서 작은 직사각형의 구조에는 실제적으로 잘 보 존된 벽돌이 검은 색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비잔틴 시대의 교 회였으며, 이 교회는 십자군 교회의 전신(前身)이었다 . 비잔틴 교회 에는 그것의 후신(後身)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회중석과 두 개의 측 랑이 있었으며, 정동향으로 세워졌으나 동쪽 끝에는 단 한 개의 후 진만이 있었고, 서쪽 끝에는 하나의 커다란 안뜰이 있었다. 안뜰은 길이가 거의 21 미터, 폭이 16 미터나 되었으며, 중앙 회중석(구도의 no. 1) 은 길이가 약 19 미터, 폭이 8 미터였고, 두 개의 측랑 (no. 2 와 no. 4) 의 폭은 약 3 미터였다. 남쪽 측랑의 동쪽 끝에는 성구실(聖具 室) (no. 4a) 이 있었고, 남쪽에 있는 교회 바깥에는 작은 수도원 (no. 4b 와 no. 4c) 이 있었다 . 이 교회는 또한 두 개의 숭앙받는 석굴­ 하나는 좀 크고 하나는 좀 작은(구도의 no. 3)- 과의 관련 속에서 설계되었으나, 그 석굴들을 포함한 십자군 교회보다는 작은 구조였 기 때문에 동굴들은 북쪽 측랑의 바깥쪽 아래에 남아 있었다. 아래에 이어지는 부분 (48 항)에서 이 교회가 어쩌면 4 업년 경에 아 마도 예루살렘의 코논 Conan of J erusalem 이라고 하는 어떤 집사의 덕분에 세워진 것임을 보게 될 것이다. 비록 그것이 여러 번 손상을 입고 또 수리되긴 했지만, 제 5 세기로부터 그것이 십자군의 구조물로 완전히 대치된 제 12 세기까지는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Nazare t h To - day, 14 쪽). 그러므로 바로 이 교회가 위 에서 인용된 피 아첸짜의 무 명씨 (570) 의 〈성 마리아의 집은 바실리카였다〉는 진술에서 가리킨 교회였음에 틀림없다.

46 〈잉태 고지 교회〉 밑의 숭앙받는 석굴 지대의 구도 여기에 제시된 구도 (45 항의 구도 를 편의상 90· 회전시킨 것)은 두 개의 숭앙받는 석굴이 있는 지대를 나타내 주는데, 큰 것의 윤곽은 상단 왼쪽 구석에 있고 작은 것은 F 로 표시되어 있다. 석굴과 일직 선이 되도록 세워진 것은 G 로 표시된 벽이다. 이것은 위에 있는 비 잔틴 교회의 기초를 이루는 건물의 남쪽 벽이었다. 이 벽의 돌은 비 잔틴 교회의 회중석과 남쪽 측랑 사이에 있는, 기부( 基 部) (석주 열 [石柱列]을 떠받쳐 주는 낮은 벽)를 만든 이중으로 된 돌벽에 재사용 되었는데 (B ag a tti, Exazva tion s Nazareth , 83 쪽, 그림 42), 이것은 바잔 틴 교회를 짓기 위한 준비로 과괴된, 밑에 있던 건물의 중요함을 명 백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벽 (G) 이의에도 다른 많은 건축적 요소들이 그 동일한 비잔틴 이 전 구조에서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석주, 석주 대좌, 수수한 주두, 배내기 corn ice s, 문과 창문의 버팀기둥j ambs, 그리고 다듬은 다른 돌들이 포함되었다. 양식면으로 볼 때 이와 같은 요소들은 갈릴리와 골란 고원 Golan He ig h ts에서 층위학(層位 學 )적으로 발굴된 유대인 회당들에서 발견된 것과 홉사하며, 이 회당들의 연대는 대략 제 3 세 기 중간으로 매겨지므로 이 건물은 그 무렵에 회당 양식으로 건립되 었음에 틀림 없다 (B ag at ti, Ou.irc h from Cir c u mcisio n , 125 쪽 ; Str ange in ATR 65 [1983), 17 쪽, with refe re nces to Meye rs) 방금 언급한 건축 단편들은 비잔틴 회반죽으로 덮여 있었고, 그 위에는 많은 벽서들이 숯으로 쓰여 있거나 예리한 도구로 새겨져 있 었다. 벽서에 포함된 것으로는 많은 십자표들과 다론 기호들, 그리고 유대계-기독교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짧은 명각들 이 있다. 한 석주에 남아 있는 회반죽에는, 많은 십자들과 함께, 큰 글자로

새겨지고 부분적으로 보존된 한 명각이 있는데 , 거기에는

된 것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거의 의심이 없다. 이 석굴(구도 45 항 의 no. 3, 그리고 본 구도 [46 항]의 상단 왼쪽 구석에 있는)의 크기는 약 16Xl9 피트이다. 동굴을 중심으로 하여 세워졌던 회당-교회의 시대 로부터 남겨진 장식품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이 석굴의 동쪽 벽에 는 바위를 깎아 만든 후진이 있는데, 이것은 예전적(禮典的)인 관련 이 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석굴은 그 자체가 거주지일 필요는 없었으나, 근처에 있는 다른 많은 석굴들과 마찬가지로 지하 저장실 또는 다른 시설로서 사용되 면서,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 버린 주거(住居)와 연결되어 있었을지 도 모른다(B eno it, Ch ristm as, 17 쪽). 예수의 가족들이 적어도 제 3 세 기 중엽까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 점에 비추어 보면(예컨대, 순교자 코논 Conon ; 45 항을 보라), 한 특정 한 장소를 기 억 하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발굴자 자신 (Ba g a tti, Exazvati on s Nazareth , 173 쪽)은 나사렛에 살면서 그리스도의 친척이었던 사람들 이 그들 자신의 소유지에 계속해서 살았고, 나사랫에 있는 유대계­ 기독교인의 교회에서 우두머리 위치에 있었으며, 바로 위에서 기술 한 신앙적 건물을 건립했었다고 생각하는 일에 아무런 어려움을 느 끼지 않고 있댜 47 〈잉태 고지 교회〉에 있는 r 면류관 모자이크」 비잔틴 교회의 유적이 발견되었을 때 (46 항), 모자이크 포장의 남아 있는 부분들이 인접한 수도원(구도 45 항의 no. 4b 와 no. 4c) 과 그 교 회의 남쪽 측랑과 성구실 (no. 4 와 no. 4a), 그리고 구도 46 항에 보이 는 지 역 에 서 나타났다 (B ag a tti, Excavati on s Nazareth , 94 쪽, 그림 49). 구도 46 항에서 D 로 표시되고 본란의 사진에 나타난 모자이크는 r 면류관 모자이크 Mos ai c of the Crown 』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원

래 비오드 V i aud 에 의하여 발견되었으며, 비잔틴 교회의 회중석 중 간에 있었으나 바닥의 나머지 부분보다는 약간 낮은 면에 있었다 (Bag a tti , Exazvati on s Nazareth , 95 쪽, 그림 50). 그리고 그것은 그 교 회의 회중석과 측랑의 방향인 동 • 서로 향해 있지 않고 북쪽을 향해 있었다. 꼭대기 부분이 손상을 입어 유실되었으나 전체 면의 길이는 약 5.3 미터, 폭은 2 미터이다 . 흰색을 배경으로 하여 세 개의 동심원 안에 빨간색과 검정색의 각 석(角石)들로 면류관이 형성되어 있고, 면류관은 두 개의 리본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면류관 속에는 획의 길이가 같은 십자가 그려져 있으며 , 그 안에 로 (rho [P]) 자를 써 넣 어 마치 타우-로(ta u-rho[T-P]) 또는 십자-축어(十字-縮語, cross-monog ram ) (아래의 691-694 쪽 참 고)와도 같은 모양을 만들고 있다. 모자이크 밑을 돋우기 위하여 옛 재료들은 봉함되었는데, 이 경우에는 모자이크의 연대가 제 4 세기인 것으로 나타나며 , 따라서 그 시기는 비잔틴 교회를 건축하기 전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 면의 높이가 다른 것과 방향이 다론 것 등과 조 화를 이룬다 (S tr an g e in ATR 65 [198. 3], 15 쪽) 제 4 세기에 비잔틴 교 회보다도 일찍 만들어진 이 r 면류관 모자이크』는 회당-교회의 역사 에 있어서 후기의 양상을 보여 주고 있으며, 유대계-기독교 건물의 연대를 제 3-4 세기 전체로 보는 것과 조화를 이룬다 (Ba g a tti, Exazva- tion s Nazareth , CJ? -100 쪽, no. 1 ; Str an g e in ATR ffi [19 8.3], 15-17 쪽 ; 하늘의 거처를 상징하는 모자이크에서 이것을 우주적 십자 [cos mi c cross] 로 보는 것에 관해서는 CORNFELD 309 쪽을 보라) 48 〈잉태 고지 교회〉에 있는 r 코논의 모자이크」와 명각 『면류관 모자이크」 (47 항)의 전면에는 바위를 깎아 만든 여섯 개의 계단(구도 46 항의 E) 이 있고, 이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승경을 받는

두 개의 석굴들 앞의 좀 낮은 면에 이르는데, 이것은 위에 있는 교 회의 회중석의 면보다 약 4 피트 아래 있는 것이다 . 작은 석굴로 들 어가는 입구 앞에는 하나의 커다란 모자이크 포장(구도 46 항에 그 윤 곽이 드러남)이 있다. 이것은 원래 불라밍크 Vl ami nck 에 의하여 발견 되었으며, 사각형으로 9 미터까지 아직 잘 보존되어 있다. 아마도 원 래는 동쪽으로 큰 석굴 앞에까지 같은 길이만큼 더 뻗어 있었을 것 이다. 모자이크 판은 정사각형들과 마름모꼴로 나눠져 있으며 , 15 개의 정사각형들 중 내 개에는 획의 길이가 같은 십자들이 있고, 가장자 리 둘레에는 다른 십자들이 있다. 이 판의 북서쪽 구석에 있는 석굴 의 입구에는 커다란 정사각형이 있는데,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명 각이 있다 (M. Av i-Y onah in QD AP 3 [1934], 36 쪽 이 하, no. 271, 2 ; Ba ga tti , Exazvatio n s Nazareth , 100-102 쪽 , no. 2). JIPKQN Q NOCMAK IEPOCOA YMQ N 서두의 약자 TIP 는 〈……로부터〉라는 의미의 속격(屬格)을 동반하 는 (전치사) Jt a p6.(파라)를 가리킬 수도 있고, 어쩌면 여기서는 〈선물〉 또는 <예 물〉을 뜻하는 Jtp OO ql()p6.(프로스포라)를 가리 킬 수도 있다. AIAK (디아크)도 완전한 단어로 쓰면 속격 형 태의 〈집사〉 (6 따 KOVO<;;[ 디아코노 스])라는 단어가 되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본문을 완전하게 채 워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Jtp o 야,op e1 Kcilv wvoc; 6tr u c6vou 1Ep o croMµwv (프로스포라 코노노스 디아코누 히에로솔뤼몬 , 〈예루살렘의 집사 코논의 선물 Gif t of Conan, Deacon of Jer usalem> ).

작은 석굴의 입구 바로 안쪽에도 또한 r 코논의 모자이크 Mos ai c of Conon J와 흡사한 작은 부분의 모자이크가 있는데, 이것 또한 그 형태가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십자-모노그람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면류관 모자이크」 (47 항)와도 홉사하다(B a g a tti, Ex-cavati on s Nazareth , 102 쪽 이하, no. 3). 방금 기술한 세 개의 모자이크 모두가 각기 다른 형태의 십자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들은 , 십자와 다른 기독교 상징들이 포장된 바 닥 위에 사용되어 사람의 발에 짓밟히는 것을 금지했던 427 년의 테 오도시우스 II 세의 칙령 (30 항 참고)이 내리기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만약에 r 면류관 모자이크」가 만들어진 연대가 제 4 세기라면, 그때는 확실히 그 칙령이 내리기 전이었다. 하지만 코논 명각의 연대는 그 황제의 칙령이 나사렛에 알려진 때와 훨씬 더 가 까울 것이다. 왜냐하면 문자를 박아 넣는 방법에 기초하여 판단할 때 이 명각은 보통 제 5 세기 중간 무렵에 쓴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KROLL 88 쪽, col. 1). 하지만 이 모자이크들과는 대조적으로 비잔틴 교회의 남쪽에 있 는 수도원의 모자이크에는 원들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들은 마치 그 안에 십자들을 포함하려고 한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빈 채로 남 아 있다. 그 교회의 다른 부분에 있는 모자이크의 각석과 수도회에 있는 각석이 동일한 것이므로 발굴자는 427 년의 황제의 칙령이 이곳 에 알려진 것은 미술가들이 아직도 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이었을 것 으로 추측하며, 따라서 비잔틴 교회의 추정 연대는 제 5 세기의 전반, 죽 4 업년의 전후에 다 걸쳐진 때일 것이다 (Ba g a tti, Exca vation s Na- zareth , 94 쪽, 그림 49, Room ; 105 쪽, no. 9 ; 100 쪽, 그림 61 ; 108 쪽 ; 그리 고 Church from Cir c umc isio n , 124 쪽 이 하 ; KROLL 8.5쪽, col. 1, no. 2). 코논 명각의 연대가 어쩌면 동일한 시대로 매겨진다면 이것은 비잔틴 교회의 건물을 짓게 한 사람이 바로 그 예루살렘 집사 자신

이었을 것이라는, 좀더 진보적인 추측도 허용하게 된다 (STIASSNY 83 쪽 ; Nazareth Toda y, 14 쪽). r 코논의 모자이크」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설굴 (F) 에 이른 다 . 대수도원장 다니엘 (1106) (위의 45 항을 보라)에게서 따온 인용문 에서 본 바와 같이, 어떤 방문객들은 이것이 마리아의 배우자인 요 셉의 매장지였다고 생각했고 다른 이들은 갈릴리의 교회들을 위하 여 많은 일을 한 디베랴의 요셉 (45 항; KOPP 1963, 64 쪽 이하 참고) 의 무덤일 것으로 추측해 왔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탐사는 다른 이 야기를 하고 있다 . 석굴은 길이가 약 15 피트, 폭이 그 반쯤 되는 땅 굴 cavern 이고 , 그것의 벽돌은 고대에 여섯 번이나 회반죽으로 겹겹 이 덧칠해져 있다. 시초로부터 세번째 입혀진 회반죽 칠에는 젊은 콘스탄티누스의 주화가 그려져 있었다. 따라서 첫번째와 두번째 회 반죽 칠은 제 4 세기보다는 먼저 된 것임에 틀림없다. 최초기의 회반 죽에는 빨간색 명각을 가진 그림이 있으며, 글자들의 모양은 그것의 연대가 제 3 세기임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Ba g a tti, Chruchf rom Ci r 따mcis ion , 127 쪽 ; Str an g e in ATR 65 [1983], 15 쪽 이하) . 우리는 여기서 면류관의 잔여 부분과 일련의 꽃피는 가지들을 보 게 되는데, 가지들 가운데 색채가 칠해진 명각은 거기에 수반되는 장면을 그린 화가와 동일한 사람의 손에 의하여 제작된 것으로 보인 다. 그 명 각은 아래 와 같이 번 역 되 었다 (Ba g a tti, Exazva tion s Naza- reth , 196-199 쪽 ; Testa , Nazaret Giu d eo- C ri stia na, 64-77 쪽 ; Bri an d 20-31 쪽). 한 순교자가 영예를 누린 이 장소로 와서 〈빛을 위하여 …… 기념 물을〉 만든, 다시 말해서 그 순교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 석 굴을 그림으로써 장식한 사람은 분명히 발레리아 Vale ri a 라고 일컬어 진 순례자이다. 그러므로 그 그림에 있는 면류관은 〈죽도록 충성〉하 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면류관이며(계 2:10), 꽃피는 가지들은

내가 빛을 위하여 만든 기념물 占 Lord Ch rist, save yo ur servant Valeri a. Here we praise d the death of (name miss in g). And give to su fferi n g the pal m wh ich (it is custo m a ry to give ) to one who died for Ch rist. Amen. 주 그리스도시여 , 당신의 종 발레리아를 구원하소서. 여기서 우리는 (이름이 빠짐)의 죽음을 찬양했습니다 .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은 사람에게 (통례로 주시는) 종려를 이 고난 당하는 자에게 주소서 . 아멘. 승리자가 보상을 받게 될 낙원의 동산을 대표한다 . 따라서 어떤 때 에 그 실촌은 하나의 순교관 m artyri um 이다. 여기서 영예를 누린 순 교자가 나사랫에서 왔고 또한 예수의 가족에 속했으며, 250 년 경에 소아시아에서 사망한 코논이었다는 사실 (45 항)은 있음직한 일이다. 왜냐하면 특별히 그 석굴 앞에 모자이크와 명각을 남긴 예루살렘 집 사 코논은 이 유명한 믿음의 영옹과 동명이인이었으며, 어쩌면 그의 후손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잔틴 교회의 회중석 중간에 있는 십자-축어(十字_縮語)를 가진 모자이크(구도 46 항의 D) 가 올려졌을 때, 그 밑에서는 같은 구도에서 A 로 표시 된 수조(水櫓)가 발견되 었다 (B ag a tti, Exa: wa ti on s N따 a ­ reth , 115-130 쪽, 그림 70-72 ; Str ange in ATR 6.5 [1983], 16 쪽) . 이것 은 바위를 잘라서 만든 입방체의 탱크인데, 그 길이와 폭과 깊이가 모두 약 2 미터이고, 남쪽에 서향 입곱 개의 계단 (B) 이 있어서 그 안

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다섯 개의 계단은 바위를 잘라서 만들었 고 , 땅바닥 위에 있는 두 계단은 돌과 모르타르로써 축조되었다. 따 라서 어떤 때는 일곱이라는 숫자를 맞추기 위하여 애를 썼던 것이 분명하다. 수조 바닥의 북동쪽 구석에는 4 분의 l 원으로 된 오수구 (汚水溝)가 있고, 멀지 않은 곳에 두 개 의 웅덩 이 가 있다(구도의 C). 그 수조의 연대에 관해서는 그것이 제 3 세기 회당-교회의 남쪽 벽 (46 항)이었던 벽 (G) 의 바로 곁에 있으며 제 5 세기 비잔틴 교회의 남 쪽 기부( 基 部)에 재사용되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그런데 그 수조가 그 벽과 평행을 이루지 않고 북쪽으로 11-12 도 기울어져 있 으므로 그것의 연대는 좀더 초기로 거슬러 오른다. 그것의 기원에 대해서 살펴본다면, 그 수조가 처음에는 포도즙 틀이었다고 생각하 거나 (KROLL 90 쪽, col. 2) 유대인의 예식 욕조 미크바 m i kvah 였다고 생 각하는 (S trang e in ATR 65 [198. 3], 15 쪽 이 하) 등, 여 러 가지 로 생 각되어 왔다. 그런데 그것이 발견되었을 때 그 수조의 벽들은 회반죽으로 칠해 져 있었고, 회반죽이 아직 마르기 전에 거기에 그려 넣은, 따라서 아 마도 그 회반죽 공사를 한 애초의 인부들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기 호들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이 기호들은 유대계-기독교인의 성격을 띤 것으로 이해되는데, 예컨대 작은 식물, 끝이 세 개인 십자, 작은 배, 그물코가 400 개인 망세공(網細工) 등이 그것이다. 그 수조에 내 려가고 올라가기 위한 계단을 정확하게 7 개로 만들어 놓은 치밀성도 또한 구주와 구원받은 사람들이 내려가고 올라가는 일에 관한 유대 계-기독교의 사상과 교차되는 것으로 보인다 (Irenaeus 참고, 〈말씀 the Word 은 피조물에게로 내려가야 하고, 반면에 피조물은 그 말씀을 품어야 하며, 천사들을 지나서 그 분께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 양으로 만들어져 야 한다〉[A dv. Iner. V 36 ANF I, 567 쪽] ; 일곱 하늘 에 관해서 는 Testn me n t of Levi 3 CAP II, 305 쪽을 보라 ; 그리 고 창세

기 28:12 에 기초한 우주적 사다리를 참고하라 [Ba g a tti, Church fro m Cir c umc isi o n , 209 쪽 이하, '2:7 9 쪽 이하]). 그러므로 이 수조는 나사렛 의 유대계-기독교 공동체의 침례탕과 제 3-4 세기의 회당 - 교회의 침 례탕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Ba g a tti, Church from Cir c u mcisi o n , 126 쪽 ; KROLL 90 쪽, no. 3). 그 밖에도 코논의 순교관이 된 작은 석굴(구도 46 항의 F) 이 그 수 조와 웅덩이 곁에 있다. 초기에 그것은 아마도 침례와 관련하여 사 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웅덩이들은 물을 공급하는 곳이었고 석굴은 예비적인 의식들을 위하여, 그리고 수조는 물로써 행하는 예 식 그 자체를 위하여 있는 것이었다. 이것과 매우 흡사한 침례탕 하 나가 〈성 요셉 교회 Church of St. Jo seph > 밑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웅덩이와 석굴이 인접해 있다 (54 항) . 사실 유대계-기독교인들은 적어도 세 가지의 침례가 있다고 주장 했던 것으로 믿어진다-즉, 불의 침례, 물의 침례, 그리고 성령의 침례가 그것이다 (Tes ta, Nazaret Giu d eo-Cr isti an a, 22-53 쪽). 복음서 에 나오는 물과 성령에 관련된 언급들(마 3:16 등)에 더하여, 유스티 노스J us tin의 『 트뤼폰과의 대화』 88 에는 불에 관한 언급이 나오고 (〈예수께서 요단 강으로 가셨을 때, …… 그리고 그가 물속으로 발을 들 여놓으셨을 때, 요단 강에는 불이 지펴졌다〉), 또한 침례에 관하여 기 록하고 있는 『에비온인들의 복음 Gosp el ofthe Eb i on it es 』에는 빛에 관한 언급도 나온다(〈그리고 그 죽시로 큰 빛이 그 장소의 주위에 비쳤 다〉) (HSNTA I, 157 쪽 ; Ep iph an ius , Pan. raer. I 30, 13, 6 ; Wt l- Iiam s, NHS 35, 130 쪽). 그리고 예루살렘의 퀴릴 Cy ril of J erusalem 은 그가 쓴 『교리 문답 강의 Cate c heti ca l Le ctu re 』 IT l5(NPNFSS VII, 12 쪽)에서 이렇게 강권하고 있다. 〈돌아가서 통곡하며, 네 문을 닫고, 잊혀지기를 기도하며, 그 분께서 그대들에게서 그 타는 불꽃을 제거 해 주시도록 기도하라.〉 불과 물과 성령에 의한 세 가지의 침례를

받기 위해서는 아마도 한 장소보다는 더 많은 곳에서의 활동이 수반 되었을 것이다. 49 나사렛의 새 라틴 〈잉태 고지 바실리카〉 앞 부분에서 가상적으로 재구성한 복잡한 역사를 순서대로 요약 해 보자. 제 1-3 세기에는 예수의 가족이 나사랫에서 계속 살았다 (45 항). 제 2-3 세기에는 그들의 지도 아래 마리아의 집터를 표시하기 위 하여 남아 있던 석굴 가까이에 회당 형식의 예배 장소를 건립했으며 (46-47 항), 또한 동시에 인접한 곳에 웅덩이들을 가진 , 바위를 잘라 서 만든 좀더 오래된 수조가 침례탕으로 만들어졌다 (48 항). 제 3 세기 에는 그 근처에 있는 하나의 자그마한 석굴이, 나사랫 출신이요 예 수의 가족이었던 순교자 코논 (250 년 경 사망)을 기념하는 사당이 되 었다. 제 4 세기에는 십자-모노그람을 가진 바닥 모자이크가 이 순교 관을 가리켜 주었다. 제 5 세기의 전반에는 비잔틴 교회가 그 전에 있던 회당-교회의 자리에 섰으며, 작은 석굴의 앞에 그의 이름에 적혀 있 는 예루살렘의 집사 코논이 바로 그 건물의 헌납자였을 것이다 (48 항) . 비잔틴 교회는 아마도 제 7 세기까지 내려오면서 계속 사용되었으 나, 아마도 사사니아 페르시아인의 침입 당시와 (614) 파티미드 칼리 프 알_하킴 Fatim id Ca liph al-Ha kim( 1009) 치하에서 파손되었으며, 그 결과로 제 11 세기 말에 앞에서 이미 기술한 바 있는 그 큰 12 세기 바실리카를 세운 사람들은 십자군이었다 (45 항) . 그 이후의 여러 세기 동안에 피해가 막심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예를 들면 1263 년에 술탄 바이바르스 Sulta n B ai bars 가 자행한 나사 렛에서의 건물 파괴와 기독교인 대량 학살 같은 것이다. 그리고 프 란체스코 성지 관리국이 1620 년에 마침내 그 지대의 소유권을 획득 했을 때, 십자군 교회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 이때는 터키 통치 기간

이었으며 (1517 년 이후), 나사랫에 거주하는 프란체스코파가 새 교회, 즉 계속되는 순서로 볼 때 네번째 교회를 짓기 위한 허락을 얻는 일 은 1730 년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이 교회를 건축하는 일에는 오직 6 개월-모슬렘교인들이 멕카 Mecca 로 갔다 오는 순례에 걸리는 시간의 길이 - 밖에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구조물은 별로 크지 않는 규모로 지어 졌으나 1877 년에 이르러서 약간 확대되었다 (Nazare th Tod ay, 17 쪽). 비잔틴 건물과 십자군 건물과는 대조적으로 프란체스코 교회는 서 쪽에서 동쪽으로 향해 있지 않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해 있었으며, 더 오래된 건물의 맞은편에, 그리고 그 숭경받는 석굴들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교회는 길이 22 미터, 폭 17 미터의 직사각형을 이루 고 있었고, 두 줄로 늘어선 큰 기둥들에 의하여 회중석과 두 개의 측랑들로 나누어졌다. 중앙 회중석의 북쪽 끝에는 잉태 고지 석굴 Grott o of the Annun ci a ti on 로 내 려 가는 계 단이 있는 한편, 좌우에 그 가장 신성한 석굴이 바로 위에 있던 높은 제단으로 올라가는 두 줄 의 계 단이 있었다 (KROLL 85 쪽, no. 4). 새 〈잉태 고지 바실리카 Bas ili ca of the Annunc i a ti on 〉인 다섯번째 교회를 짓기 위하여, 그리고 그와 동시에 위에서 말한 고고학적 탐 사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1955 년에 헐린 건물은 프란체스코파 교회였다. 새 교회를 위한 예비적인 구도는 성지에 있는 가장 아름 다운 현대 교회들 중의 다수를 이미 건축한 바 있는 안토니오 바를 룻찌 Anto n i o Barluzz i가 작성했으나 최종적으로 숭인된 설계도는 죠 반니 무찌 오 Gio v an ni Muz i o 가 작성 했으며 , 건축 공사는 1960 년에 시 작되 었고 그것의 헌당은 1969 년에 있었다 (Nazare t h To day, 17-19 쪽). 나사랫의 일부를 보여 주는 이 사진에서 새 바실리카는 중앙에 나타 나 있다. 이것은 중동 지역에 있는 최대의 기독교회 건물이다.

50 〈잉태 고지 바실리카〉에 있는 잉태 고지 석굴을 바라보며 잉태 고지 석굴과 그 앞에 있는 〈천사의 예배실 Chape l of the An g el 〉은 〈잉태 고지 바실리카〉의 아래충 중앙의 존귀한 자리에 놓 여 있고, 거기에는 8 면으로 된 채광구(採光口)가 있어서 위에 있는 상충 교회로부터 빛이 돌어오게 되어 있다. 그림에 보이는 아치는 그 안에서 석굴이 발굴된 바위이며, 석공술은 비잔틴 교회 때의 것 이다 . 그리고 그 석굴의 측면에 서 있는 화강암 석주들은 1730 년에 프란체스코파가 세운 것이다 . 51 〈잉태 고지 바실리카〉에 있는 성모상 새 〈잉태 고지 바실리카〉는 800 평방미터의 크고도 높은 광장에 서 있고, 이 광장은 그 아래 지대에서 발굴된 고대 나사랫의 주택 유적을 보호해 주고 있다. 바실리카 자체는 이중으로 된 교회로, 상 부는 현재 예배 장소를 제공하고 하부는 개인 기도를 위한 교회와 예전 구조물들의 고고학적 유적을 전시하는 곳으로 쓰인다. 바깥 벽 돌은 서쪽을 제외하고는 십자군 바실리카의 벽돌과 기초의 윤곽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서쪽에는 주된 입구 앞에 광장을 만들기 위해 새로 만든 벽이 약 5 미터 뒤에 놓여 있다. 그 교회의 높다란 둥근 지붕은 5.5미터 높이로 우뚝 솟아 있고 , 내부로부터 보면 〈갈릴리의 꽃〉(J erome, Lett er 46) 이었던 성읍 나사랫은 거꾸로 된 백합처럼 보 인다. 하부 교회의 지붕에 별 모양으로 뚫린 부분은 〈잉태 고지 석 굴〉 앞에 있는 가장 신성한 지점에 빛이 들어오게 하는 것으로, 상 부 교회의 돔으로부터 곧바로 아래 쪽에 위치해 있다 . 장식은 전체 적으로 놋과 착색 유리와 모자이크로 되어 있고, 회중석의 내부 벽 돌과 바깥 뜰의 벽에는 전 세계 여러 나라들이 기증한 성모자聖母

子를 그린 커다란 그림들이 나란히 걸려 있는데, 각 그림은 그것을 기증한 나라의 복식(服飾) 또는 의상으로 되어 있다. 예컨대, 일본에 서 온 것은 루크 하세가와 Luke Hase g awa 와 요시 야마우치 Yoshi Yamauc hi가 그린 몇의 성모 Our Lady of the Flowers 」이다 (한국에 서 온 것은 「평화의 모후」이다-역주) . 52 나사렛의 〈성 요셉 교회〉 〈성 요셉 교회 Church of St. J ose p h 〉는 〈잉태 고지 교회〉의 북쪽 으로부터 100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그 두 교회 사이에 프 란체스코 수도회 (1930 년에 건립됨)가 있다 .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 이 이 지대 전체는 고대의 농촌 나사랫의 중심부였다. 또한 〈잉태 고지 교회〉 (45 항)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대의 석굴과 저수조들과 포도 즙 틀 (Ba g a tti in DB Supp le ment VI, cols. 325- 32 6, 그림 602B 및 603),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들이 〈성 요셉 교회〉의 아래와 주위에서 발견된다. 53 〈성 요셉 교회〉의 구도 바로 위에서 기술한 그 터 (52 항)에서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1754 년 에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하여 하나의 작은 예배실을 건축했는데, 이 것은 1837 년에 지진으로 인하여 파괴되었다가 그 다음해에 재건되었 다 (MEISTERMANN 492 쪽). 1889 년과 그 이후로, 그리고 다시 1908 년과 그 이후로 프로스퍼 비오드 Pros pe r V i aud 가 발굴 작업을 수행 하여 곳에 따라서는 2 미터 높이로 아직도 서 있는 벽들을 파내었는 데, 이 벽들은 제 12 세기의 십자군 교회의 벽이다. 이 기초 위에 새로 운 〈성 요셉 교회〉가 건축되어 1914 년에 완성되었다.

원래 비오드에 의하여 그려 진 이 구도 (Nazare t h et ses dewc egli se s, 134 쪽, 그림 64) 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십자군 교회는 길이가 29 미 터요 폭이 16 미터였다. 건물의 방향은 동향이었고, 입구는 서쪽 정면 의 가운데 있었으며(예루살렘에 있는 〈성 안네 교회〉가 십자군 시대에 복원되었을 때처럼), 건물은 동쪽 끝에 있는 세 개의 후진으로 마무 리되었다. 십자군 교회의 유적 밑에서는 또한 흰색의 각석(角石)으로 만들어 진 비잔틴 시대 모자이크 포장의 단편 하나와, 〈잉태 고지 교회〉에 있는 수조(水權)처럼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가진 수조, 그리고 고 고학적으로 볼 때 그 전 시기에도 사용되었던 지하의 석굴, 둥이 발 견되었다. 그러므로 십자군은 그 전에 이미 있던 비잔틴 시대의 교 회를 재건한 것이 분명하다(R B 2 [1893], 241 쪽). 여기서 그 언덕의 아래로 깔린 바위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경사져 있고, 비잔틴 교회의 바닥도 어느 정도 그 경사면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교회의 중간쯤에서 발견된 비잔틴 모자이크의 단편(구도의 F) 이 문턱의 높이보다 1. 6 미터나 아래에 있으며, 동쪽 끝에서는 그 언덕이 자그마치 5 미터나 아래로 떨어져 있어 매우 가 파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V i aud, Nazareth et ses dewc egli se s, 135 쪽, 그림 65). 구도에 보이는 다른 초기의 시설물들은 다음과 같다. A- 기둥의 대좌(對坐) B- 수조; E- 이 수조로 내려가는 7 개의 계단 c- 수조의 서쪽과 남쪽에 위치한 3 개의 옹덩이 D 국중계 D 를 따라 내려가면 P- 바위를 잘라 만든 통로, 이 통로는 반원형 으로 휘어져서 큰 바위-석굴로 들어가는 입구를 만듦. o- 석굴에 빛이 들어가게 하는 구멍들, 한때는 사일로들의 어귀들,

여러 개의 다른 사일로들도 이 구도에 표시되어 있음. V- 직사각형의 움푹한 땅 방금 열거한 여러 가지의 주요 항목들이 북동쪽으로 약 25 도 돌려 져 있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십자군 교회의 동서로 된 장 축(長軸)과 대조를 이루며, 비잔틴 모자이크의 단편과 함께 이것은 더 전에 있던 다른 방향의 건물이 십자군 교회의 밑에 깔려 있었다 는 결론을 확증해 준다. 더 전에 있던 건물의 이와 같은 방향은 그 주된 석굴과 관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며, 이 석굴은 구도에서도 윤곽이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2 미터가 넘는 높이, 9-10 미터의 길이, 그리고 4-5 미터의 폭으로 된 방이었다. 1970 년에 벨라르미노 바갓티 Bellar mino Ba g a tti가 십자군 교회의 북쪽 벽을 따라서, 그리고 그 벽 아래 있는 석굴들 가운데서 몇 개 를 발굴했다. 1892 년에 중세 교회가 발굴되었을 때 많은 암석 부스 러기들이 이곳에 쌓였는데, 이 부스러기 더미들에서 바갓티는 도기 단편들이 철기 시대로부터 로마, 비잔틴, 그리고 십자군 시대까지 역 순으로 (발굴 작업 당시에 내던져진 대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으 며, 석굴들에서도 마찬가지로 로마 시대의 도기와 함께 십자군 시대 의 도기를 발견하였다. 이러므로 그 터에는 B.C. 1 세기와 AD . 1 세 기, 그리고 그 이전과 이후에 사람이 거주했음이 확실하다 . 이 터에 차례로 세워졌던 교회들의 형체 확인과 그 중요성에 관해 서 아르쿨프 Arculf(6 70, 아담난 Adamnan 이 인용함, 679-704) (GEYER 'Z7 4 쪽 ; LPPTS III-A, 8.3 -84 쪽 ; CCSL CLXXV, 219 쪽 ; WJ P 109 쪽) 는 말하기를, 나사랫에는 두 개의 큰 교회들 eccles ia e 이 있었다고 한 다. 이 중의 하나는 〈천사장 가브리엘이 그 복된 마리아에게 와서 거기서 그녀가 혼자 있는 것을 보면서 그녀에게 말씀한 집이 있던 곳〉이며, 이것은 추측건대 〈잉태 고지 교회〉 (45 항)를 지칭하는 것이 다. 아르쿨프는 그가 언급하는 다른 교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

술하고 있다. 그 도성의 중간에 있는 것(교회)은 두 개의 볼트 vaul t s 위에 건립되 었는데, 여기에는 한때 우리의 주이신 구주께서 자라나신 (nu tritu s, 문 자적으로는 〈영양이 주어진, 양육된 nou rish ed> ) 집이 있었다. 이 교회 는 …… 두 개의 토루(土壘) 위에 세워져 있으며 그 사이에는 아치들이 놓여 있고, 이 토루들 가운데의 땅속에는 매우 맑은 샘 fo ns 이 있어서 모든 주민이 여기서 도르래를 이용한 두레박으로 물을 걷는다. 이 교회를 예수께서 영아 시절에 자라나신 (nu tritus, 영양이 주어진, 양육된 [no uri shed]) 집이 있던 곳으로 기술한 것은 누가복음 4:16 의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이라는 언급과 일치하는데, 이 구절은 라틴 어로 Nazareth , ubi erat nu tritus(나자레트, 우비 에라트 누트리투스)라 하므로 이 말에서 〈양육 교회 Church of the Nu triti on 〉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된다. 이 교회가 그 도성의 중간에 있었다는 진술은 〈성 요셉 교회〉의 위치와 조화되는데, 〈성 요셉 교회〉는 그 가까이에 있 는 〈잉태 고지 교회〉와 마찬가지로 참으로 고대 나사랫의 중심부에 있었다 (43 항). 그 교회가 또한 〈두 개의 볼트 위에 건립되었〉고 〈두 개의 토루 위에 세워져 있으며, 그 사이에는 아치들이 놓여 있〉었다 는 사실도 역시 〈성 요셉 교회〉의 정황과 조화된다. 왜냐하면 서쪽 과 동쪽 사이의 땅속에 깔려 있는 바위의 표면 높이가 달라서 동쪽 끝에 있는 비잔틴 교회의 모자이크 포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치 들을 설치 할 필요가 있었을 가능성 이 많기 때문이 다 (B ag a tti in RB 78 [1971], SITT 쪽 ; 그리고 in LA 21 [1971], 32 쪽). 그러나 이 문제의 교회 안에 매우 맑은 샘이 있어서 모든 주민이 여기서 도르래를 이용한 두레박으로 물을 길었다는 아프쿨프의 진 술에는 문제가 있다. Jo ns 란 단어는 샘 또는 샘물뿐만 아니라 우물,

원천 또는 옹덩이까지도 의미할 수는 있으나, 전체 주민이 물을 마 시기에 적합했던 〈매우 맑은〉 샘은 〈성 가브리엘 교회〉 (55 항) 곁에 있는 마리아의 샘 Founta in of M ary (42 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알 려진 바에 의하면 이 샘은 끊임없이 나사랫의 주된 샘물이 되어 왔 다 . 한편 그 위치는 〈잉태 고지 교회〉와 더불어 있는 〈성 요셉 교 회〉처럼 고대 나사렛의 중심에 있지는 않았다고 알려져 있어 이 문 제 는 미 궁에 빠져 있다 (STIASSNY 96 쪽 ; KROLL 439 쪽, n. 118). 우리 가 참고할 수 있는 다른 하나의 문구가 집사 베드로 Pete r the Deacon(1137) 의 글에서 발견된다. 그녀 she 가 살았던 동굴 (s pe lunca …… in qu a habit auit, 여 기 서 여 성으로 표현한 것은 아마도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뜻하는 것일 터이나, KOPP 1963, 79 쪽에는 〈그 he 〉로 되어 있어서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 은 크고도 매우 빛났으며 , 여기에는 하나의 제단이 놓여 있었고 동굴 그 자체의 내부에는 그녀가 물을 갇던 장소가 있다. 그 도성 안에서 주 께서 이사야서롤 읽으신 회당(눅 4:17) 이 있던 곳에, 지금은 교회가 있 댜 그러나 마리아가 자주 물을 길으러 오던 샘은 그 마을 바깥에 있다 (GEYER 112 쪽 ; w訂 193 쪽). 베드로가 그의 자료의 일부를 애테리아 Ae th e ri a(381-384) 에게서 끌어 왔으므로, 이 문단의 첫 문장과 전체의 반의 출처는 때때로 애 테리아인 것으로 추정되고, 나머지는 다른 어떤 출처에서 따온 것으 로 보인다. 그런데 〈매우 빛나는 동굴〉이라는 생각은 애테리아가 가 졌던 생각이라기보다는 유태계-기독교인의 사상권에서 왔을 가능성 이 더 많아 보인댜 그리고 이것이 맞다면, 이 말의 저작자는 미상으 로 남는다 (B ag a tti, Excavati on s Nazareth , 23 쪽). 이 구절을 전체로 보면 마리아가 물을 걷던 장소가 두 곳이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죽 하나는 그녀가 살던 동굴 안에 있는 것이 었고, 다른 하나는 마을 바깥에 있던 샘물(어쩌면 〈성 가브리엘 교회〉 곁에 있는 마리아의 샘)이었으며, 베드로는 이 둘을 혼동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WET 193 쪽, n. 3, 4). 다른 한편으로 만약 마리 아가 살던 동굴 안에(〈잉태 고지 교회〉 또는 〈성 요셉 교회〉 곁에) 그녀가 물을 걷던 장소가 정말 있다면, 아마도 아르쿨프(또는 그의 필사자 아담난 Adamnan) 가 〈성 요셉 교회 > 곁에 있던 〈가족 우물 family well 〉을 〈성 가브리 엘 교회 > 자리 에 있던 〈공중 샘 pu bli c fo un tain s 〉과 혼동 한 것 일 것 이 다 (BRIAND 54 쪽 ; Baga tti , Excavatio n s Nazareth , 24 쪽). 이 경우 예수께서 자라나신 교회에 관한 아르쿨프의 묘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아무래도 그것이 그 도성의 중앙에 있었다는 진 술일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성 요셉 교회〉를 〈양육 교회〉와 동일 시하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1616-1626 년에 기록을 남긴 콰레스미우스Q uares mi us 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현재의 〈성 요셉 교회〉와 그가 살던 시대에 그곳에 서 있던 십자군 교회의 장소를 명백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BALDI 38 쪽, no. 6 ; KOPP 1963, 82 쪽). 〈만약 그대 가 잉 태 고지 교회 로부터 북쪽으로 돌 하나 던 질 만큼 나가면 qu antu m jac tu s est lap idis ad aqu ilo n em 그대는 한 장소에 이룰 것인데, 이곳은 고대로부터 오늘 날에 이 르기 까지 ‘요셉 의 집 과 작업 장' the house and workshop of Jos eph , domus et ojfici.na Jo sep h 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요셉이 목 수챠 KTWV 였다는 사실은 마태복음 13: 5.5에 명시되어 있고, 마가복음 6:3 에서는 예수 자신도 목수라고 불리신다. 『도마의 유아기 복음 Child hood Gospe l of Thomas.!l( 11, ]ANT 63 쪽 ; HSNTA I, 396 쪽)은 요셉이 목수였다고 말하고 그가 쟁기와 멍에를 침대를 만드는 모습 울 기술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스티노스(『트뤼폰과의 대화 Dia log u e wit h Try ph o.!l 88 ANF I, 244 쪽)도 목수 요셉의 아들로 여

겨지는 예수께서 목수로 일하시면서 쟁기들과 멍에들을 만드시는 것으로 말한다. 요셉이 그의 아내인 마리아와 함께 살았고 또한 애 굽으로부터 돌아온 후에 (마 2:19-23) 그의 작업 장이 있었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있을 수 있는 일이며, 따라서 아르쿨프의 〈양육 교회 Church of Nu triti on 〉와 콰레스미우스의 〈요셉의 집 및 작업장 교회 Church of the House and Workshop of J ose p h 〉는 현재의 〈성 요셉 교회〉의 위치에 연속적으로 존재한 (비잔틴 및 십자군) 교회들의 연 속적인 칭호들일 가능성도 있다. 그 교회의 지하에 있는 침례탕 (54 항)과 관련하여 이 장소를 훨씬 더 초기에 숭앙하기 시작했음을 말 해 주는 증거는 유태계-기독교의 전승과 근거가 확실한 기억에 기 초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54 〈성 요셉 교회〉의 지하 침례탕 구도 53 항에서 B 로 표시된 수조는 바위 속으로 깎아 들어간 것이 며 부분적으로는 석조 구조물 안에 세워진 것이다. 이것은 그 크기 (길이, 폭, 깊이가 모두 약 2 미터)와 그 안으로 내려가는 일곱 계단들 의 배열(구도 53 항의 E) 에 있어서 〈잉태 고지 교회〉 (48 항)에서 이미 기술된 수조와 사실상 동일한 것이다. 여기서는 발굴자들이 발견한 바와 같이 (Ba g a tti , C加 rch from Cir c umc isi o n , 243 - 245 쪽) 계 단 위 에 는 모자이크의 혼적이 있었고, 수조의 바닥에는 모자이크로 된 직사 각형이 여섯 개 있었으며, 북편에는 원형의 오수구(汚水溝)가 있고, 울퉁불퉁한 흑색 현무암이 바닥에 박혀 있다. 계단 옆으로 서 있는 벽에는 역시 모자이크로 장식된 작은 수로가 있으나, 이 수조에는 방수구가 없다. 〈잉태 고지 교회〉에 있는 근본적으로 흡사한 침례탕 과도 같이 이것 또한 아마도 유대계-기독교인들의 침례탕이었고, 어 쩌면 동일하게 이른 시기, 예컨대 2-3 세기의 것이었다.

방금 열거한 건축적 특징들은 유태계_기독교인 사상들을 상징적 으로 반영하는 것들로서 이해할 만하다 (BRIAND 39 ― 50 쪽). 〈잉태 고지 교회〉의 침례탕과 관련하여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일곱 개의 계단으로 된 층계가 있어서 침례를 받으러 갈 때는 내려가고 그 다 음에는 올라가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말씀 Word 이신 분께서 일곱 하늘을 통과하고 그곳의 천사들을 지나서 내려오신 것과 그에 이어 구원받은 사람들이 올라가는 것의 신비를 회상시켜 준다. 여기 바닥 에 박힌 흑색 돌은 바울이 침례에 관한 언급과 관련하여 언급한 바 (고전 10:1-4) 반석 Rock 이신 그리스도를 회상시켜 주며, 모자이크로 된 여섯 개의 사각형 과 함께 『헤르마스의 목자 Sheph erd of Hermas 』 에 나오는 탑에 관한 묘사를 상기시켜 준다. 이 탑은 물위에 세워져서 (Vis. III 2.4 ) 큰 반석 위 에 솟아 있으며 (Sim . IX 4.2), 그 안에 는 다른 돌이 많이 세워져 있어서(Vi s. III 2.5) 마침내는 그 탑이 반석을 품고 있는 하나의 견고한 돌이 되어 버렸다 (S i m. IX 13.5 ). 건물은 6 명의 젊은이들에 의하여 지어졌는데(Vi s. III 2.5), 한 영광 스럽고 위대한 사람이 그들 가운데 있었으며 (S i m. IX 12.7) 이 사람 은 바로 그 탑의 주인 자신이었다 (S i m. IX 7.1 ). 탑은 교회이고 (S i m. IX 13.1 ), 6 명의 사람들은 영광의 천사들이며, 그 영광스러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S i m. IX 12.8 ). 한편으로 다른 곳에서 진술하기로 는 그 반석 자체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S i m. IX 12.1 ).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탑 (S i m. IX 5 .1)이 물위에 세워진 이유는 〈그대의 생명이 물(죽, 침례)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고 또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이다〉(Vi s. III 4.5). 그리고 또한 방수구가 없는 수로도 상징적인 것으로서, 침례의 장소 및 언약의 땅으로 건너가는 곳으로 서의 요단 강을 암시한다. 〈잉태 고지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침례탕은 옹덩이와 석굴에 인접해 있고, 이 모든 것들이 침례를 위하여 소용되었을 것

이다 . 즉 웅덩이는 침례할 물을 담는 것이었고 석굴은 예비적 의식 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수조는 침례탕 그 자체였을 것이다. 55 나사렛에 있는 〈성 가브리엘 교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42 항) 우리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는 초기부터 나사렛의 주된 물 근원이었던 샘은 희랍 정교회인 현재의 〈성 가브리엘 교회〉의 바로 위에 있으며, 파이프를 통하여 그 교회 의 지하 토굴로 들어가고 있다. 아르쿨프 (670) 가 나사렛의 주민들이 그곳으로부터 저들의 물을 끌어온 〈매우 맑은 샘물〉을 묘사할 때 그 샘물이 바로 이 샘인 것처럼 들리고, 따라서 아르쿨프가 말하는 〈양 육 교회〉 자리에 서 있는 〈성 가브리엘 교회〉를 가리킬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앞에서 (53 항) 살펴보았다. 한편으로 아르쿨프는 다른 곳에서 그 장소가 〈도성의 중앙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 진술은 오히려 〈성 요셉 교회〉의 위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들리며, 따라서 이것 역시 〈양육 교회〉와 〈요셉의 집 및 작업장 교회〉 모두를 대표하는 것이라 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성 가브리엘 교회〉와 연관을 짓는 다른 하나의 근거는 의경인 『야고보의 원복음 Pro t evan g el i um ofJa mes 』(대략 제 2 세기)에서 나타 나는데, 여기서는 천사 가브리엘과 마리아에게 한 잉태 고지(눅 1: 26 이하)와 관련하여 하나의 샘이 언급되어 있다. 이 이야기에 의하 면 (]ANT 41-43 쪽 ; HSNTA I, 378-380 쪽) 마리아의 양친인 요아킴 J oac him과 안나 Anna 는 마리아가 세 살 때에 성전의 제사장들이 그 를 돌보도록 위탁했으며, 마리아는 열두 살이 될 때까지 그곳에 머 물렀다. 그 후에 제사장들은 그녀를 요셉에게 주어서 보살피게 했으 며, 요셉은 그녀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으나 그 자신은 가옥을 건축 하고자 출타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제사장들은 성전을 위한 휘장을

만들고자 계획했으며,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자색과 홍색 실로 휘장을 짜는 일을 위한 제비가 마리아에게 떨어졌다. …… 그리고 그녀는 그것들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에 사가 랴가 벙어리가 되었고, 그가 (다시) 말할 수 있을 때까지(눅 1:20, 64) 사무엘이 그의 자리를 맡았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색 실을 취하여 그것 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물동이를 들고 물을 채우러 나갔는데, 보라, 한 음성 이 있어 말하기를, 〈여인들 가운데서 높은 은총을 받은 그대여, 평안할 지어다〉(눅 1:28) 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좌우로 자기의 주위를 돌 아보면서 이 음성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고자 했다. 그리고 나서 그 녀는 떨면서 집으로 돌아가 물동이룰 내려놓고는 자색 실을 취하여 자 기 자리에 앉아서 (그 실을) 이끌어 내었다. 그러자, 보라! 주의 천사 하 나가 그녀의 앞에 서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만물의 주 앞에 은혜를 얻었으며, 그 분의 말씀 Word 으로 잉태하리라〉(눅 1:30 -31). …… 그녀는 자색과 홍색 실을 만들어서 그것들을 제사장에게 가져 갔다. 제사장은 그녀를 축복하여 말하기를, 〈마리아여, 주 하나님께서 너의 이름을 크게 하셨으니, 너는 이 땅의 모든 세대들 가운데서 송축 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구절에 의하면 천사는 마리아에게 두 번, 별개의 두 장소에서 말했는데, 그 첫번째는 그녀가 물동이에 물을 채우러 나갔을 때에 아마도 생수가 나오는 샘 곁에서였고, 두번째는 그녀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있던 때였다. 그 샘은 현재의 〈성 가브리엘 교회〉 근처에 있 는 것으로 아마도 나사렛의 주된 샘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떠났다가 도로 돌아온 그녀의 집은 바로 그 근방에 있었을 수도 있으나 어쩌

면 좀 아래 쪽으로, 우리가 아는 대로 고대 나사렛의 중심부였던 곳, 즉 라틴 교회인 〈잉태 고지 교회〉 또는 〈성 요셉 교회〉 자리에 있었 울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러시아 대수도원장 다니엘 (1106) 이 그곳에 왔을 때 그는 나사랫에 있는 두 교회를 방문하였으며, 그가 그 교회들에 관하여 이해한 것 은 각기 야고보의 원복음에 있는 이야기의 내용과 꼭 같은 것이다. 그 두 교회는 분명하게 현재의 〈잉태 고지 교회〉과 〈성 가브리엘 교 회〉을 계승한 것들이다 (LPPTS N-C, 69-71 쪽) . 그 중 하나는 〈그 성읍의 중앙에 …… 크고도 높은 교회〉이다. 그 교회 밑에 있는 동 굴은 천사장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와서 말할 때, 마리아가 앉아서 자색 실을 짜고 있던 곳이며, 따라서 그 교회는 잉태 고지를 기념하 여 봉헌되었다 . 그것은 전에 파괴되었으나 프랑크인들 Franks 이 복 원하였으며, 라틴 주교가 그곳에 살고 있었다 (49 항 참고). 그 후에 다니엘이 그 성읍을 떠나서, 여름에 해돋는 방향(죽 북동 쪽)으로 화살 한 바탕 쏠 만한 거리로 갔다. 거기서 그는 매우 찬 물 이 있는 매우 깊은 우물을 발견했는데, 그 우물로 이르려면 여러 개 의 계단을 밟고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이 우물은 천사장 가브리엘에게 봉헌된 둥그런 교회로 덮여 있다. …… 거룩한 동정녀가 천사장으로부터 첫번째 통고를 받은 것은 바로 이 우 물 근처에서이다. 그녀는 물을 길으러 와서 그의 물동이에 물을 채웠을 때, 보이지 않는 천사의 음성이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 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눅 1 : 28) 라고 말하는 것이 들렸다. 마리아는 사 방을 돌아보았으나 오직 음성만 들리고 아무도 보이지 않자, 물동이를 도로 들고는 놀란 채로 돌아가면서 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아무도 보지 못한 채 음성만 들었으니,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고?〉(눅 1:29 참고) 라고 하였다. 나사렛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녀는 앞서 말한

그 지점에 앉아서 자색 실을 짜기 시작했는데, 천사장 가브리엘이 그녀 에게 나타나서 위에서 말한 그 장소에 서서 그녀에게 그리스도의 탄생 을 예고한 것(눅 1:30) 이 바로 이때이다. 이와 같이 잉태 고지를 두 국면으로 펼쳐서, 즉 첫번째는 샘에서 (현재의 〈성 가브리엘 교회〉)에서, 그 다음에는 〈마리아의 집〉에서(현 재의 〈잉태 고지 교회〉에서) 한 것으로 이해할 때, 〈성 가브리엘 교 회〉는 또한 〈첫번째 잉 태 고지 교회 Church of the Fir st Annun- c i a ti on 〉라고 불릴 수도 있다. 56 〈성 가브리엘 교회〉의 지하 토굴에 있는 샘의 방수구 스칸디나비아인 순례자 새불프 Saew 따f (1102) 는 그의 시대에 나사 렛 도성 이 사라센족 Saracens 에 의 하여 파괴 된 것을 발견하였다 . 그 유명한 샘에 관해 그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 도성 근처에 있는 샘물은 전에 그랬던 바와 같이 여전히 석주와 평석(平石)으로 둘러 싸인 채 매우 맑게 솟아나고 있다. 아이 예수가 다른 소년들과 함께 그의 모친이 쓰도록 이따금씩 물을 길은 것은 바로 이 샘물에서였 다〉 (LPPTS N-B, 25 쪽). 이 샘의 자리에 세워진 첫번째 교회는 헬 라인들에 의하여 건축되었으며 (MEISTERMANN 496쪽), 헬라인 수 도승 포카스 Phocas(1185) 에 의하여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야고보의 원복음』과 다니 엘이 말한 이 야기 에서와 마찬가지 로(5.5항) 가브리 엘 이 마리아에게 처음 온 것은 샘물 곁에 있을 때였고, 그 다음은 다 시 집에 돌아왔을 때인데, 여기서 이 집은 요셉의 집으로 확인되므 로 그곳은 〈잉태 고지 교회〉의 자리가 아니라 〈성 요셉 교회〉의 자 리에 있었다. 포카스는 부분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MPG 133, col. 936 ; LPPTS V-C, 12 쪽 이 하).

이 큰 마을(나사렛)의 첫번째 문으로 들어가면 그대는 천사장 가브리 엘의 교회를 발견할 것이다. 이 교회에 있는 제단의 왼쪽에는 하나의 작은 석굴이 보일 것인데, 그곳에서 샘물Jtll Vll 이 솟아올라 투명한 시냇 물을 뿜어내고 있댜 무구하신 신모(神母, Moth e r of God, 8rn16Ko c;)께 서 제사장들에 의하여 의로운 요셉에게 주어져 그의 집에 맡겨졌을 때, 날마다 이곳으로 나와서 물을 길었다. 그런데 전주자(前走者, np66 p oµ oc ;) 가 잉태된 지 제 6 월에(눅 1:2 6 ), 그녀가 여느 때처럼 막 물을 걷고자 했 울 때, 그녀는 가브리엘로부터 첫번째 인사 do Jt a oµ bc 를 받았다. 그러자 그녀는 마음이 혼란되어 떨면서 요셉의 집으로 돌아왔는데, 거기서 그 녀는 천사가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Xa ip e, Kexap t -cw µevn>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보라, 주의 여종이 ……〉라고 대답하였다. 이 일 후에 요셉의 집은 하나의 아름다운 교회로 바뀌었다. 그 샘 곁에 있는 현재의 〈성 가브리엘 교회〉에 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1767 년에 시작된 것이다. 이 교회의 축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해 있는 한편, 회중석으로부터 옛 교회의 둥근 천장으로 된 북쪽 수랑(補廊)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여섯 개 있고, 그 옛 교회의 지붕은 지면과 같은 높이로 되어 있다. 그 샘의 물이 빠져나가는 것은 바로 이 지하 토굴에서이다. 예수의 생애의 초기 몇 해가 나사랫에서 보내졌으므로(눅 2:39 이 하, 51), 나사렛 회당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가 종교적인 교훈을 받은 장소이며, 또한 후에는 그가 친히 가르치신 장소(마 13:54 동)이기도 하댜 세속적인 훈련에 관하여는 『도마의 유년 시절 복음Chi ldhood Gospe l of Thomas 』이 말하기를, 요셉이 예수를 한 교사에게 데려가 그 교사가 그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알파벳을 연습했다고 한다 (]ANT 53 쪽 ; HSNTA I, 3ITT 쪽). 그러나 랍비들의 자료를 볼 때 적 어도 후기에는 회당이(아마도 그것에 인접한 공간이) 어린이들이 기

초적 인 교육을 받던 장소였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I. Sonne in IDB IV, 491 쪽), 그러므로 나사랫에 있던 회당은 예수가 그러한 종류의 초기 공부를 하기 위한 장소였을 가능성도 있다. 67 년에 있은 로마인들과의 전쟁에서, 나사렛으로부터 남서쪽으로 1. 5 마일밖에 안 떨어진 야파J a p ha 는 치열한 전쟁터가 되었고, 그곳 의 주민들은 로마인들에 의 하여 대 량 학살을 당했으며 (Jo seph us, War m 7, 31 §§289-306), 그곳의 회당은 파괴되었다 (RB 30 [1921], 434-438 쪽). 그리고 나사랫도 의심할 여지없이 전파되었으며 (KOPP 1963, 53 쪽) 그곳의 회 당도 역 시 파괴 되 었다. 야파 및 다른 갈릴 리 지방의 회당들 (89 항)과 마찬가지로 나사랫 회당도 후대에 다시 건축 되었음에 틀림없다. 나사랫의 마리아의 집이 바실리카로 개조된 것 (45 항)을 발견한 피 아첸짜의 무명씨 (570) 도 우리에게 말하기를, 그 회당 안에는 예수가 다른 어린이들과 함께 앉던 벤치가 있었고 또한 그가 ABC 를 쓴 책 들도 있었다고 한다 (GEYER 161 쪽 ; LPPTS II-D, 5 쪽 ; CCSL CLXXV, 130-131 쪽 ; WP 79 쪽). 집사 베드로 (1137) (위의 53 항에 인용 됨)는 그의 시대에 그 회당을 예수가 이사야서를 읽던 장소로 말하 고, 그 회당이 교회로 개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시온 산의 부 르햐르트 (Burchard of Mount Sio n , 1283) 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LPPTS XII-A, 42 쪽). 그 회당의 터에 관해서는 콰레스미우스Qu ares mi us(1626) (II 632 KOPP 1959, 119 쪽)가 이렇게 말한다. 〈만약 그대가 성 요셉 교회로 부터 좀더 북쪽으로 나간다면 그대는 40 순교자 Fo rty M artyr s 에게 봉헌된 교회에 이를 것이며, 그 너머로 좀더 가면 한 샘과 한 교회 에 이룰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40 순교자 교회 Church of the Fort y M artyr s 〉에 관해서는 그곳이 주께서 전에 방문하신 회당이 있 던 장소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나사렛에 있는 모슬렘 공동묘지는 북쪽으로 마리아의 샘물Mary 's Foun tain로 가는 노상에 있는데, 거기에는 〈 40 명의 장소 Place of the Fort y, maqa m el-'arba' i n 〉라고 불리는 한 작은 사당이 아직도 있으 며, 이것은 콰레스미우스가 언급하는 그 교회에 대한 기억울 보존하 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서 발견되어 지금은 그 도성의 다 른 장소로 옮겨진 네 개의 회색 화강암 석주들은 그 터에 있던 비잔 틴 교회의 유적일지도 모른댜 왜냐하면 그것들은 〈잉태 고지 교회〉 에 있는 다른 것들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터는 회당이 있던 장소 였음을 주장할 수 있는 최적지일 것이며, 정교 헬라안들Orth odox Greeks 에 의하여 그런 곳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현대에 와서는 〈잉태 고지 교회〉에 더 가까이 있는 〈연합 헬라인 교회 Church of the Un ited Greeks) 〉이 어떤 이들 Dalman 에 의하여 회당이 있던 장소를 표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1741 년 이 래로 사용되고 있는 이 교회는 한 방을 원통형-둥근 천장의 지붕으로 이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수리우스 S uri us(1644) (KOPP 1959, 120 쪽) 가 회당의 한 부분이며 그의 시대에는 낙타들을 위한 외양간으로 사 용된 것으로 언급한 그 구조물일 것이다. 하지만 회당을 위한 터로 그 장소는 그보다 더 이른 시기의 중거를 갖지 못하고 있다. 헝 나사렛으로부터 갈릴리의 전통적인 가나 마을로 향한 노상에서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셔서 (17 항 이하) 나사렛에서 자라나셨으며 (40 항 이하),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침 례를 받으셨다 (8 항 이하). 그 후에 그는 그의 첫번째 및 두번째 표적 을 갈릴리의 가나에서 행하셨고, 그 다음에는 유대 지방에서 반복해 서 일하셨으며(요 2:13 등 ; 마 23:37 참고 ; 눅 13:34) (1 43 항 이하), 특 히 갈릴리에서 집중적으로 봉사하셨다 (69 항 이하).

가나에서의 첫번째 표적은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 이었고(요 2:1-11), 두번째 표적은 가버나움으로부터 도움을 청하기 위하여 온 관원의 아들을 그처럼 먼 곳에서 고쳐 주신 일이었다(요 4:46-54 ; 마 8:5-13 참고 ; 눅 7:1_-10). 제자 나다나엘도 역시 갈릴리의 가나 출신이었다(요 2:21). 가나에서의 두번째 표적에 관한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가나로부터 가버나움으로 〈내려온다〉(요 4:47) 고 표현한 것은 현재 문제되고 있 는 가나가 갈릴리 바다보다 높은 어느 산중 시골에 있음을 말해 준 다. 이것 외에는 그 위치를 말해 주는 다른 지리적 세부 사항이 그 복음서에 더 기록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가나를 〈갈릴리에 있는〉 (요 2:1, 11 ; 4:46) 것으로 명시한 것은 이 가나 Cana 를 〈가나를 지나 큰 시돈까지 Kana as far as Sid o n the G~ea t〉(수 19:28) 라고 할 때의 가나 Kana 와 분명히 구별해 준다. 시돈 지방의 가나는 아셀 지파의 영토의 북쪽 경계선에 있었고, 현대에는 두로로부터 남동쪽으로 6 마 일 떨어진 카나Q ana 로 나타나 있다. 그렇지만 『지명록 』 (ed . Klos- term ann, GCS 116 쪽)에서 유세비우스는 〈가나 Kav o., 큰 시돈 만큼이 나 멀리 있는, 아셀에게 배당된 땅〉을 포도주 이적이 베풀어진 장소 와 나다나엘의 고향으로 인용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유세비우스의 동일시는 틀린 것임이 확실하다. 복음서의 가나를 탐색하는 중에 두 장소가 고려의 대상이 되었다. 두 곳 모두 가나 Cana 를 추억하는 오늘날의 이름들을 가지고 있고, 둘 다 방금 살펴본 고려 사항에서 요구되는 바대로 갈릴리 바다보다 높은 산중 시골에 있으며, 이 둘은 사실 서로 6 마일 밖에 떨어져 있 지 않다. 키르베트 카나Qirb e t Q ana 는 사헬 엘-봇타우프 Sahel el- Bu ttauf로 알려진 아름다운 평원을 굽어보는 언덕위의, 사람이 거주 하지 않아 폐허만 남은 곳이며, 이 평원은 고대의 아소키스 평원 Plain of Asoc hi s 과 동일시될 수 있는 곳이다(아소키스 평원에 대해서

는 다음을 보라. Jos eph us, Lif e 4 2 §207 ; LCL Jos eph us I, 79 쪽, n. a, 그리고 412 쪽의 맞은편에 있는 갈릴리 지도; MEISTERMANN 519 쪽 이하). 그 위치는 중요한 도성인 셉포리스 Se pp ho ri s( 삽푸리야 S affuriy a) 로부터 북쪽으로 6 마일, 그리고 나사렛으로부터 북쪽으로 9 마일 되 는 곳이다 1982 년에 그 언덕 정상의 폐허를 조사한 결과, 거리와 광 장, 집의 기초, 그리고 많은 웅덩이의 흔적을 찾아내었으며, 로마 시 대에 사람들이 거주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KROLL 180 쪽, col. 3). 이 가나는 로마인들에 대항하는 유대 전쟁이 발발했을 때 (66), 어느 날 밤 요세푸스가 200 명의 병력과 함께 가나 Cana 로부터 디베랴 T i be ri as 로 행군했다는 기록 (L ife 16-17 §§86-90) 에서 그가 언급하는 그 가나임에 틀림없다. 가나에서 북서쪽으로 1 마일만 가면 요타파타 J o tapa ta가 있었는데, 이곳은 그 동일한 전쟁시에 갈릴리 사람들의 마지막 피난처였다 (War m 7, 3 §§141 이하). 우리가 고려하는 두번째 장소는 케파르 켄나 Ke f ar Kenna 인데, 이 곳은 현재의 사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지금도 사람이 거주하는 마 을 (kefa r[ 케파르]는 〈마을〉을 뜻함)로서, 디베랴로 가는 노상에 나사 랫으로부터 북동쪽으로 4 마일이 채 못 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제롬이 번역한 『지명록.!I (GCS 117 쪽)의 라틴어 판에서 그는 여호 수아 19:28 의 가나에 대한 언급을 확실한 것으로 간주하는 한편, 그 가나가 왜 〈크다gr ea t〉고 일컬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을 삽입하고 있 다. 여기서 그는 한 〈보다 작은 smaller 〉 가나에 관한 그의 지식을 보여 주고 있으며 -〈왜냐하면 다른 작은 것이 있기 때문이며, 그 것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이것은 더 큰 것이라고 불린다〉-제롬 자신이 제 4 복음의 가나로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이 작은 마울일 것 이 다 (KOPP 1963, 149 쪽). 하여튼 제롬이 마르첼라 Marcella 로 하여금 성지를 방문하도록 초 청하면서 (386) 그들이 방문할 장소들을 기술할 때, 그는 이렇게 말하

였다. 〈우리는 그 이름이 의미하듯이 갈릴리의 꽃인 나사랫을 보러 갈 것입니다. 거기서 멀지 않는 곳에는 물이 포도주로 변한 곳인 가 나가 보일 것입니다 (haud pro cul cernatu r Cana)> (L ett er 46, 13 CSEL LIV, 344 쪽 ; NPNFSS VI, 65 쪽). 제롬이 파울라 Paula(404 년 사망)가 신성한 장소들을 방문하는 일을 기술할 때도 이와 마찬가지 로 그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녀는 주께서 자라신 나사렛과 가나 와 가버나움을 신속히 통과했다〉 (Le tt er 108, 13 NPNFSS VI, 202 쪽) . 키르베트 카나Khir be t Q ana 와 케파르 켄나 Ke f ar Kenna 둘 중에 서는 후자가 제롬이 말한 바와 더 잘 조화되는 듯이 보인다. 왜냐하 면 아마도 언제나 작은 마을이었고 또한 둘 중에서는 나사랫에 더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만약에 제롬이 쓴 라틴어가 〈멀지 않는 곳에(나사렛에서 보는 견지에서) 가나가 보일 것이다〉 (NPNFSS VI, 65 쪽)로 번역된다면, 그것은 케파르 켄나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 가나에 있는 사당에 관하여 말한 첫번째 사람은 피아첸짜의 무명 씨 (570) 이다 . 이 순례자는 해안에 있는 프톨레마이스Pt olem ai s( 악고 Acre) 로부터 디오가이사랴Di ocaesarea( 셉포리스 Se pp ho ri s) 까지 여 행 했으며, 그 다음에는 〈 3 마일 mil ia tria 더 가서 우리는 주께서 혼인 예식에 참석하신 가나에 도달했으며,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탁자 (couch, accub itum[악쿠비툼], 손님들이 식사 때에 기 대어 앉는 탁자)에 기대어 앉았는데, 거기서 나는(비록 내가 자격은 없었지만) 나의 양친 의 이름을 썼다. 물동이들 가운데 둘은 아직 그곳에 있고, 나는 그것 들 중의 하나를 포도주로 채웠으며, 물동이가 가득 찼을 때 나는 그 것을 내 어깨에 메고 제단으로 운반했으며, 우리는 축복을 받고자 샘에서 몸을 씻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나사랫 도성에 도달했다〉 (GEYER 161 쪽 ; LPPTS II-D, 4 쪽 ; CCSL CLXXV, 130 쪽 ; WJ P 79 쪽). 케파르 켄나는 셉포리스로부터 동쪽으로 2.5 마일 떨어져 있는데, 이것은 피아첸짜의 무명씨가 진술한 바 있는 셉포리스로부터 가나

까지의 거리인 로마 이수 (n里 數)로 약 3 마일이고, 따라서 케파르 켄나 가 거의 확실하게 여기서 의미하고 있는 장소이다 . 또한 케파르 켄나 는 키르베트 카나가 갖고 있지 않은 좋은 샘을 가지고 있다 (KOPP 1963, 150 쪽) 피아첸짜의 무명씨가 제단을 언급한 것은 그 당시에 케파르 켄나 에 있었던 포도주 이적을 기념하는 교회가 존재했음을 층거하는 것 이며, 그것은 빌리발트 W illi bald(725) 와 그의 동료들이 나사렛으로부 터 그들이 가나(라틴어로 Chanam[ 카남])라고 이해한 마을로 왔을 때, 그들이 본 바 그 동일한 도성의 동일한 교회인 것이 확실하다 . 그들은 나사렛에 있었고, 그러고 나서 〈그들은 주께서 물을 포도주 로 만든 가나 마을로 왔다. 그곳에 는 큰 교회 ecclesia ma gna,가 있고, 교회 안의 제단 위에는 주께서 물로 채우라고 명령하신 후 그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셨던 여섯 개의 물동이 중의 하나가 있다. 그리 고 그들은 그 물동이로부터 포도주를 마셨다 (de illo communia z - verunt vin o , 아마도 이 말은 윌리볼드와 그의 동료들이 성찬식 음료를 받았다는 뜻인 듯하다)〉 (Tobler and Moli nier 260 쪽 ; WJ P 128 쪽). 이 야기가 계속되는 대로는 그들이 가나에서 하루를 머물었고, 계속해 서 다볼 산에 이르는데, 이러한 나사렛-가나-다볼 여정에서는 케파 르 켄나가 가나로서 잘 어울린다. 탁발승 에 피 파니 우스 Ep iph an ius the Monk(750-800) 는, 포도주 이 적이 행해진 가나로서의 케파르 켄나를 방문한 그 당시의 동일한 일 련의 순례자들 가운데 끼여 있는데, 이 지점에서 그는 윌리볼드와 동일한 여정을 따르고 있으나 단지 그 순서를 바꾸어 다볼에서부터 가 나로 하루의 여행을 하였다. 탁발승 에피파니우스는 또한 가나에 있는 한 수도원에 대한 언급을 부가하고 있다. 〈다볼에서부터 그리스도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결혼식이 거행된 갈릴리의 큰 도성 가나까지는 하루 여행길이다. 이적이 일어난 곳에는 한 수도원 µova oi:ftpt ov 이 있

다〉 (ZDPV 87 [1971], 80 쪽 ; WJ P 121 쪽). 의심할 여지없이 그 수도 원과 교회는 하나의 건축 단위를 이루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것을 언급하든지 저것을 언급하든지 간에 중대한 차이는 없다. 『하나님 의 사건 기 념 집 Commemorat or iu m de casis De i』 (808) 에 는 교회와 수도원들의 목록이 여러 곳의 교회직(敎 會職 ) 수효를 규칙적 으로 포함시키고 있으며, 그리하여 그 경우에 남아 있는 본문에 〈주 께서 물로써 포도주를 (만드신) 갈릴리의 가나에 있는〉 (Tobler and Molin ier 303 쪽 ; WJ P 138 쪽)이 라는 진술이 없이 손상되 어 있기 는 하 지만, 그와 같은 수효가 틀림없이 주어져 있었으며, 따라서 하나의 교회 및 수도원이 그 당시에 가나에 아직도 존재했다는 사실과 좀더 초기의 증언에 기초하여 이것이 바로 케파르 켄나에 있었다는 사실 을 결론으로 내릴 수 있을 것이다. 1654 년에 쟝 둡당J ean Doubdan 이 케파르 켄나를 방문하여 고대 의 교회가 아직도 거의 손상 없이 보존되어 있었지만 회교 사원 mos q ue 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하였댜 둡당은 그의 작품 『성지 여 행 Le voy a g e de la Terre Sa i n ts 』 에 서 가나에 있던 교회 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모두 깎인 돌로 지어진 매우 오래된 건물이며 두 개의 커다 란 주된 건물로써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 오른편에 있는 것은 교 회로 둥근 천장으로 된 구조물이며 길이가 약 40 보, 폭은 약 20 보이다. 그리고 그 건물의 중간에는 일련의 석주들이 떠받치고 있으며, 몇 개의 창문들이 있어서 햇빛이 들어오게 한다. 그것은 정말 버려진 건물이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매우 온전하여 그 지방 사람들을 위한 사 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 밑에는 우리의 구주께서 이적을 행하신 바로 그 장소 위에 세워졌다고 말해지는 예배실이 있다. 다른 부분은 하나의 큰 주택인데, 전에 이것은 교회적들 eccles i as ti cs 의 거처였으며 현재는

산톤들 (san t ons, 모슬렘교의 신앙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 이 두 건물 사 이에는 매우 널찍한 뜰이 있고, 그 뜰의 문과 입구에는 인방(引坊, lin~ tel ) 역할을 하는 하나의 커다란 돌이 서 있고, 그 위에는 세 개의 물동 이 또는 항아리가 반쯤 지워진 고대의 기록과 함께 부조(浮影)로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그곳이 그 큰 이적이 행해진 바로 그 장소임을 알려 주는 것이 다 (BALDI 212 쪽, no. 263 ; MEISTERMANN 520 쪽 ; BAGAITI in LA 15 [1964-1865], 업 0 쪽 이 하) . 케파르 켄나에 있는 그 교회가 사원으로 넘어갔다는 이 말이 기록 되기 전까지 얼마의 세월이 흘렀는지는 둡당 Doubdan 이 말하지 않 고 있지만, 아마도 세월이 많이 지났을 것이며, 이러한 사실은 기독 교 순례자들로 하여금 케파르 켄나를 피하게 했을 것이다. 하여튼 십자군 시대에 와서는 사람들이 키르베트 카나Khir be t Q ana 라는 대 체된 장소를 방문하고 있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1099) 후에 순례 기록을 남긴 첫번째 사람인 새불프 (1102) 는 키르베트 카나를 갈릴리의 가나로 지적한 첫 번째 사람이었는데, 이는 그가 분명히 그 거리와 언덕 위에 있는 그 위치에 비춰서 그렇게 생각한 것으로 보이며, 이것을 그는 이러한 말로써 표현하고 있다. 〈나사렛으로부터 갈릴리의 카나 Chana of G alil ee- _우리 주께서 결혼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곳­ 는 북쪽으로 약 6 마일 떨어진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 그곳에는 아르 키트리클리니이(A rc hitri cl i n ii, 〈연회장의 집 House of the Ruler of the Feas t〉)라고 불리는 수도원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BA 旦)J 208 쪽, no. 247 ; LPPTS IV-B, 26 쪽 ; BAGATTI in LA 15 [1964-196 .5], 2.5 2 쪽). 시 온 산의 부르햐르트 Burchard of Mount S i on(1283) 도 갈릴 리 의 가나에 대하여 이와 같이 쓰고 있다. 〈그 장소는 오늘날 여섯 개의 물 항아리가 있는 곳에 서 있으며, 식탁들이 있던 식당은 …… 갈릴

리의 가나에는 북쪽으로 높고도 둥근 산이 있는데, 그 산의 경사면 에 그 마을이 서 있다. 그 산 기슭, 곧 남쪽에는 요세푸스가 카르멜 리온 Carme li on 이라 부르는 매우 아름다운 평지가 있으며, 이것은 멀 리 셉포리스까지 뻗어 있고, 극히 비옥하며 쾌적하다. …… 갈릴리의 가나로부터 남쪽으로 2 리그 lea g uls 되는 곳에 셉포리스가 있다〉 (BALDI 209 쪽 이하, no. 25.5 ; LPPTS XII-A, 38 쪽 이하, 41 쪽). 여기 서도 가나는 셉포리스로부터 북쪽으로 떨어진 그 거리와 아름다운 평지를 굽어보는 언덕 위에 있는 그 위치 때문에 새불프에게 있어서 와 마찬가지로 키르베트 카나와 분명하게 동일시되고 있다. 그런데 콰레스미우스 (1626) 는 그가 쓴 『성지 해설 Elucid a ti o ter rae sanc ta e .!I에서 이 두 개의 가나에 대하여 각각 주장하는 바를 토론하 고 있다. 그 중의 하나인 키르베트 카나에 관하여 그는 기술하기를, 셉포리스로부터는 로마 이수 (n里 數)로 6 마일, 나사랫으로부터는 10 마 일 떨어졌으며 교회는 없다고 하고, 다른 하나인 케파르 켄나에 관 해서는 나사렛으로부터 4 마일 떨어졌고 한 교회가 있으며 심지어 하 나의 샘도 있다고 기술하는데, 이 샘으로부터 물을 길었고 그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고 말해진다 (BALDI 211 쪽 이하, no. 262). 결론적으 로 그는 케파르 켄나가 참된 가나의 유적지임을 알아내었으며, 1641 년에 프란체스코파가 회교 사원 옆에 있는 집을 구입했고, 그 후 1 얽 9 년에는 그 사원 구조물 자체를 매입하여 한 작은 교회를 지었으 며, 이 교회가 그 후로 몇 해 동안에 확대되어 지금은 그에 딸린 수 도원과 함께 그 마을의 중심에 서 있다. 1556 년에 둡당 (1654) 이 기술 한 바와 같이 회교 사원이 아직 사용되고 있는 동안 희랍 정교의 교 회 하나가 어느 정도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졌고, 1886 년에 재건되 었으며, 지금은 그 마을의 귀퉁이에 있는 대로(大路) 근처에 서 있 다. 이것 역시 가나에서 있었던 이적에 영예를 표하기 위하여 의도 된 것이다.

18 c;f7년 이후로 몇 년 동안, 그 작은 프란체스코파 교회가 확대되 고 있으며 에기디우스 가이슬러 신부 Fa t her Eg idius Ge i ssler 가 책임 사제로 있을 때 약간의 발굴 작업이 이루어져, 지금 있는 건물의 지 면 아래로 2 피트 내려간 곳에서 옛 건축물의 유적 중 얼마가 발견되 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모자이크 포장의 한 부분이 제단 가까 운 지역에서 1901 년에 발견된 것이며, 거기에는 아람어로 된 명각 하나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 타불라 (tabu la, n l:,:::i o) 를 만든 부타의 아들 탄홈의 아들(아람어 바르 bar) 요 세와 그의 아들들을 추모하며 그들에게 영광이 있기를! 이것이 그들 에 게 축복이 되 기를! 아멘(H onored be the memory of Yoseh, son [Arama ic bar] of Tanhum, son of Buta h , and his sons, who made this tab ula [nl:, :::io ]) : may it be a blessin g for the m, Amen> (Clermont- G anneau in PEFQ 1901, 251, 374-389 쪽 ; 1902, 132-134 쪽 ; QD AP 2 [1933], 178 쪽 이 하, no. 167 ; Saller, Second Cata lo g ue , 51 쪽 이하, no. 59). 라틴어 타불라와 비슷한 단어는 아마도 〈바닥의 부분〉 을 의 미 할 것 이 며 (Lev ine in Sy n ag og ue s Revealed, 80 쪽), 따라서 모 자이크 그 자체를 가리키므로 여기서는 그냥 〈모자이크〉로 번역해 도 될 것이다. 이 명각의 성격은 기중자 또는 기증자들에게 축복을 표하는 것이며, 이런 것은 많은 회당 명각들에서 발견되는 것으로서, 예컨대 함맛 디베랴 Hamma th T i be ri as 의 회당에 있는 〈그에게 복이 임하기를 ma y he be blessed 〉이라는 구절에서도 볼 수 있다(D o th an, Hammath Tib e ri as, 54 쪽 ; 72 항 참고). 이 러 하여 우리 는 그 모자이 크 가 그 자리에 서 있던 더 초기의 구조물인 회당에 속한 것이었다고 결 론을 내릴 수 있다. 고문서학적으로 본다면, 이 명각은 제 3 또는 4 세기 의 것으로 매겨진다. 셉포리스(삽푸리야)에서 프로스퍼 비오드 Pros per V i aud 가 1908 년 에 미완성 십자군 교회인 〈성 안나 교회 Church of St. Anna 〉의 유

적지를 발굴하여, 히브리어 명각이 포함된 모자이크 바닥의 잔여 부 분들을 발견하였는데, 이 명각은 역시 탄훔 Tanhum 의 아들에게 영 예를 돌리고 있는 점과, 보존된 부분에 관한 한 동일한 언어를 사용 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케파르 켄나의 명각과 거의 일치하고 있 다. 그 내용은 이렇다. 〈……의 아들 탄홈의 아들(히브리어 벤 ben) 랍 비 유단을 추모하며 그에 게 영광이 있기를 Honored be the memory of Rabbi Yudan, son [Hebrew ben] of Tanhum, son of …… > (QD AP 3 [1933], 39 쪽 이하, nos. 295, 296 ; Dalman, Sacred Sit es, 76 쪽 ; Saller, Second Ozta lo gu e, 75 쪽 이하, no. 111). 고문서학적으로 본다면 이 명각 역시 케파르 켄나의 명각과 매우 비슷하며, 이것도 마찬가지로 제 3-4 세기의 것으로 돌려진다. 셉포리스가 에피파니우스 (Pan. lr.ze r. GCS I, 347 쪽 ; NHS 3f5, 128 쪽 ; 위의 45 항 참고)에 의하여 각별히 거명되고 있는데, 그것은 유대계_ 기독교인인 디베랴의 백작 요셉 Count Jos eph of T i be ri as 이 교회들 을 건축한 장소들 가운데 언급된 것이다. 그러므로 합리적으로 추론 할 수 있는 사실은, 330 년경에 여기 셉포리에서 회당의 폐허 위에 교회를 건축한 사람은 요셉이었다는 것과, 그가 거기서 동쪽으로 로 마 이수 (U里 數)로 3 마일밖에 안 떨어진 케파르 켄나에서도 같은 일을 했다는 것 이 다 (MEISTERMANN 522 쪽). 19 5.5 -1956 년, 1965 년, 그리고 1969 년에 고고학적 발굴 작업이 벨라 르미노 바갓티 Bellar mino B ag a tti와 스타니슬라오 로프레다 Sta nisla o Lo ffreda에 의하여 케파르 켄나와 또한 그 근방의 카름 에르_라스 Kann er-Ras 에서 수행되었는데, 이 두 마을은 아마도 고대에는 하 나의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나온 도자기류 c erami cs 는 로마 시대와 비잔틴 시대에 사람들이 거주했음을 보여 주고, 주화들은 헤롯 대왕(B. C. 37-4) 으로부터 콘스탄티누스 (326) 까 지의 연대로 매겨진다. 케파르 켄나의 프란체스코파 교회에서 나온

제 3_4 세기 회당 명각은 이미 토의된 적이 있다 . 카름 에르 一 라스에서 는 두번째 회당에 속했던 것으로 보이는 건축상의 주요 부분들이 발 견되었다 (Saller, Second Cata lo g ue , 52 쪽). 두 개의 회당식 건물들이 존재하는 것은, 갈릴리의 다른 마을들에서도 그렇듯이, 이곳에 두 개 의 공동체, 즉 회당을 가진 유대인 공동체와 회당_교회를 가진 유대 계 - 기독교인 공동체가 있었음을 시사할 수 있다 . 따라서 여기서도 유대계 _ 기독교 전승들이 초기로부터 보존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BAGA1TI in LA 15 [1964-1965], 290, 292 쪽 ; Com feld 309쪽).

사마리아 58 사마리아의 풍경 요단 강의 서편, 갈릴리와 유대 사이에 사마리아 지역이 놓여 있 었다. 요한복음 4:9 에 반영되어 있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적 대감 때문에, 유대인들은 유대와 갈릴리 사이를 내왕하는 여행길에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우회하여 다닌 것이 상례였던 것으로 보 인다. 그러나 요한복음 4:3-43 에 기록된 경우에서는 예수께서 사마 리아를 통과하여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셨다. 이 지역은 예루살렘으 로부터 북쪽으로 40 마일 떨어진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하였으며, 구약 시대에 한동안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도성의 이름을 따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왕상 15:24). 신약 시대에 그것은 헤롯 대왕에 의해 재건되 어 세바스테 Sebas t e 라는 새 이름으로 일컬어졌다(J ose p hus, War I 21, 2 §403). 그 지역은 각기 다른 시대마다 그 경계선이 바뀌었지만, 주로 중앙 고지에 위치한 산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진은 예루살렘 으로부터 북쪽으로 나 있는 도로에서 본 사마리아의 풍경이다.

59 야곱의 우물과 주위를 보여 주는 지도 예루살렘으로부터 사마리아/세바스테로 가는 길은 예루살렘 북방 35 마일에서 요단 계곡으로부터 시작하여 코레아 Corea 를 지나 와디 파르아 Wa di Far'ah 를 통과하여 올라오는 다른 길과 합쳐진다(J o­ seph u s, War IV 8, 1 §449 ; BASOR 62 [1936], 14 쪽). 그리 고 그 두 길은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의 통로를 지나는 동안과 사마리아/ 세바스테로 향해 5 마일을 더 가는 동안 한 길로 나아간다. 유대로부터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갈릴리로 여행하시기 직전에(요 4:3-4) 예수께서는 침례를 베푸는 일에 참여하셨고(요 4:1), 침례자 요한과 어떤 관련을 맺으셨다(요 3:25 이하). 그러므로 이 당시 예수 께서는 요단 계곡으로부터 올라오셨을 가능성이 높다. 방금 언급한 그 도로나 혹은 그 도로와 다소간 평행하면서 지름길들이 있던 한 소로(小路)가 아마도 그 분이 걸어오신 길이었을 것이다. 위의 약도 는 이 길들이 야곱의 우물 근방에서 만나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 의 통로를 지나 나아가는 방향을 보여 준다. 60 그리심 산 예수께서는(요 4:5-6) 수가 (}:uxa p, 어떤 필사본에는 2tx d p , 불가타 Vulga t e 역에서는 S ic har 라고 쓰임) 혹은 세겜(시내 Sin aitic 필사본과 쿠레토니아 시리아어 Cureto n i an Sy riac 필사본에서 그 이름은 헬라어 }:uxeµ [쉬켐], 죽 히브리어로 c:: iw [셰켐]과 일치함)이라 불리는 사마리 아 도성으로 왔는데, 이곳은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준 들판과 가까운 곳이었다. 야곱의 우물(血 V ft, 문자적으로는 〈샘〉)이 거기 있었 고, 예수께서 그 옆에서 사마리아의 여인과 대화하셨을 때, 그 여인 은 인접한 산을 언급하면서 〈우리 조상들이 이 산에서 예배하였나이

다〉(요 4:5-7, 20) 라고 말하였댜 사마리아인돌이 오랫동안 예배해 왔고, 사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자손들이 그 위에서 예배하고 있는 산은 아랍어로 제벨 엣-토르J ebel e t -Tor 라고 알려 진 그리 심 산 (Moun t Geriz irn, c:i.,:Sil, LXX fap t ~i.v, 신 11:29 둥)이다. 그 산의 높이는 해발 2890 피트이고, 그 산과 에발 산 Moun t Eba! 사이에 있는 좁은 계곡으로부터는 700 피트 높이이며, 에발 산의 높이는 해발 3085 피트이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에 분열이 있을 당시, 산발랏 Saballa t은 가리제인 산 (Moun t Ga rize in , ra p맣i. v 또는 「 a pt~i. v) 위에 예루살렘 에 있는 것과 같은 성 전을 건축했는데, 요세푸스(A n t. XI 8, 2 및 4 §§310, 324) 는 이 사건을 알렉산더 대왕 시대에 두고 있다. 그때부터 요세푸스는 이 연대 계산에 있어서 잘못을 범한 것으로 생각되어 왔 는데, 이는 구약에 언급된 그 유명한 산발랏은 느헤미야와 동시대 사람이 며 (느 4:1, 등), 다리 우스 11 세 왕 King Da rius II 의 제 17 년 인 B.C. 408 년으로 그 연대가 매겨지는 한 편지에서도 그의 이름이 언 급되어 있기 때문이다(ANE T492 쪽). 그러므로 그는 알렉산더보다는 1 세기 정도는 더 일찍이 살았다. 그러나 와디 달리예 Wa di Da liye h 에서 「사마리아 파피루스들 Sam ari a Pa pyri」이 발견됨으로써 (Frank M. Cross, Jr., in BA XXVI [4 Dec. 1963], 110-121 쪽), 적 어 도 3 명 의 서로 다른 사마리아 통치자들이 산발랏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음 이 밝혀졌고, 따라서 요세푸스는 그리심 산에 성전을 건축한 산발랏 의 연대에 대해 꽤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같은 책, 121 쪽, n. 'Zl). 요세푸스 CAn t. XIII 9, 1 §§255 이하 ; War I 2, 6 §63 참고)는 또한 이 성 전이 요한 휘르카누스 Jo hn H yr canus 가 세 겜을 파괴 한 바로 그 때에 그에 의해 파괴되었다고(B. C. 135-104) 기록하고 있다. 최근의 발굴을 통해 보면, 이 세겜의 파괴는 B.C. 108/107 년에 있었던 것으 로 보인다 (G. Ernest Wr igh t, Shechem, 1964, 1 8.3 -184 쪽).

135 년 이후에 하드리아누스가 그리심 산 위에 주피터 J u piter의 신전 을 세웠는데, 그것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An toni nus Piu s (138-161) 치 세중에 시작하여 거의 1 세기 동안 계속된 네아폴리스 Nea poli s 조폐 소에 서 발행 된 로마의 주화에 서 나타난다 (BASOR 180 [De c. 196 .5], 40 쪽). 주화는 산기슭에 석주 열(石柱列)이 늘어선 거리와 산 꼭대기 에 있는 신전으로 오르는 긴 충계를 보여 주고 있다. 보르도 순례자 Bordeaux Pilgrim (333) 가 그리 심 산 mans A g azaren 에 대 해 다음과 같 이 말하면서 언급한 것이 바로 이 층계임에 틀림없다 (GEYER, 20 쪽; LPPTS I-B, 18 쪽 ; CCSL CLXXV, 13 쪽 ; WET 154 쪽). 〈사마리 아인 들은 아브라함이 여기서 희생을 드렸다고 말하며, 그 산의 꼭대기로 오르는 계단들이 있었는데 그 수효는 300 개였다.〉 이러한 언급은 사 마리아인들이 그리심 산을 모리아 산(창 22:2) 과 동일시했음을 보여 주는데, 반면에 유대인들에게는(J ose p hus, Ant. VII 13, 4 §333) 아브 라함이 희생을 드린 장소는 다윗이 제단을 쌓은 아라우나의 타작 마 당이었다(삼하 24:18, 또한 아래의 230 항 참고). 그리고 또한 그 계단 들에 대하여 한 말에 의하면, 사마리아인들이 그 당시에 그 산 정상 의 어떤 부분을 아직도 예배를 드리는 일에 사용하고 있었던 것 같 다. 하지만 484 년에 사마리아인들은 네아폴리스에 있는 교회에서 오 순절을 경축하고 있던 기독교인들을 습격하여 그들의 감독 테레빈 티우스 Tereb inthi us( 이 이름에 대해서는 창세기 35:4 의 tereb in th [상수 리나무]를 참조하라)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제노 Zeno 황제 (474-491) 는 사마리 아인들을 그 산으로부터 몰아내고 그 위에 신모(神母, 8co t 6KOC) 로서의 마리아에게 봉헌한 팔각형 교회를 지었는데, 유스티니아누스J us tini an(5 업 -565) 가 이 교회를 위해 성채 를 만들어 주었다 (Proco pi us, Buil din g s V 7. 7). 이 테오토코스 Theo to kos 교회와 그 성채의 폐허는 그리심 산의 보다 높은 남쪽 봉우리에 있는데, 1928 년에 A M. 쉬나이더 A M.

Schn ei der 에 의해 발굴되었고, 1951 년에 그에 의해 보고되었다 (Beitr age zur bib l is ch en Landes-und Alte r tu msk unde heroorge ga ngen aus der ZDPV 68 [1951], 211-234 쪽). 하드리아누스 신전의 폐허는 텔 에르-라스 Tell er-Ras 라고 알려 진 산의 북쪽 돌출부에 있는 한 텔 tell 위에 있다. 그 신전은 1966 년에 드루-맥코미크 Drew-McCor­ mick 탐험대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NTS 13 [1967], 401-402 쪽), 커다 란 충계가 신전으로부터 골짜기 아래 네아폴리스의 동쪽 끝까지 산 을 타고 내려오면서 추적되었다. 또한 신전 아래서 서로 다른 형태 의 건물 벽이 발견되었는데, 이 건물은 헬라 시대의 도기 단편과 관 련이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B.C. 4 세기 경의 사마리아 성전이었을 수도 있다. 만약 이것이 옳다면, 하드리아누스는 베들레헴 (32 항)과 예루살렘 (183, 225 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의 신전들 중의 하나를 이미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던 장소에다 세우기로 선택한 것 이다. 오늘날의 사마리아인들을 보면, 그들은 보다 높은 남쪽 봉우리 의 바로 서쪽에서 그들의 연례적인 유월절 희생을 계속해서 드리고 있으며, 그들은 또한 그 절기가 계속되는 7 일 동안 그곳에서 장막을 (61 항) 친다 (RB 31 [1922], 435 쪽). 여기에 보이는 광경은 에발 산의 경사면에 있는 고대의 수가 Sy char 로 여겨지는 현재의 아스카르 ‘As­ kar 마을에서 본 것으로 그리심 산과 그 꼭대기에 있는 사마리아 사 당이 보인다. 61 그리심 산에 있는 사마리아인들의 장막 이 사진은 60 항에서 언급한 바대로, 사마리아인들이 유월절 희생 을 드리는 구역과 가까운 지역에 있는, 그리심 산 위에 있는 사마리 아인의 장막을 보여 준다.

62 r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 나타난 야곱의 우물 지역 요한복음 4:5 에서 예수께서 오신 사마리아 도성은 야곱이 요셉에 게 준 들판 근처에 있었는데, 야곱의 우물이 그곳에 있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세겜 (C :Jto) 도성으로 와서 그 도성 앞에 장막을 쳤고 그가 장막을 쳤던 땅을 돈을 주고 구입하였다(창 33:18-19). 야곱이 애굽에서 임종할 무렵에, 그는 요셉에게 자기가 칼과 활로 취한 세겜을 그에게 주었다고 말했는데(창 48:22), 이것은 어떤 점에서 마치 실제로 그 땅을 정복하는 일이 있었던 것처럼 들 린댜 방금 인용한 그 구절은 C 그 D( 세켐)이란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도시의 이름으로 볼 수도 있고(예컨대 An Ameri ca n Transla ti on 이 라는 영 역 본에 는 이 라고 번 역됨), 〈산비탈〉 혹은 〈경사면〉을 의미하는 단어로 번역될 수도 있다 (RS V : ). 이것은 그 도성이 산의 경사면에 있는 그 위치로부터 그것의 이름을 따왔음을 시사한다. 사사기 9:7 에 의하면 이 산은 그리심 산일 것이다. 결국 요셉의 미이라(창 50:26) 는 그의 아버지가 매입한 땅(수 24:32) 안에 있는 세겜에 묻혔다. 세겜온 구약 역사의 여러 국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후에, 요한 휘르카누스가 그리심 산 위의 사마리아인의 성전을 파괴하던 그 같은 때 인 B.C. 108/107 년에 그에 의 해 파괴 되 었다(J ose p hus, Ant. XIII 9, 1 §25.5 ; War I 2, §63 ; 위의 60 항 참고). 이 지역에 세워진 새 도시는 플라비아 네아폴리스 Fla vi a Nea poli s 였다. 폴리니우스 (Na t. His t. , V 14, 69) 는 네아폴리스를 언급하면서 그것이 예전에는 마모 르타 Mamo rth a 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요세푸스 (War IV 8, 1 §449) 는 그것을 언급하면서 마바르타 Mab arth a 라는 본토명을 주고 있다. 그

리심 산의 〈산비탈〉을 의미하는 세겜이라는 이름과 마찬가지로, 이 옛 이름도 아마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의 샛길을 칭하는 〈샛길〉 혹은 〈통로〉라는 의미의 ~n.,::iW D(ma,a barta,' 마아바르타)에서 온 듯 하다. 여 기서 출생 한 유스티 노스 마르튀 로스 Jus tin M artyr는 그의 아버 지와 할아버지가 시리아 팔레스티나 S yri a Pales tin a( 또는 팔레스타인 시리아 Pales tini an S yri a) 에 있는 플라비아 네아폴리스의(죠 b OAaui ac Nt ac x6A 塗 더 C 2up iac n 야 a tcr-ci떠<;) 토박이 였다고 말하는데 (A p ol­ ogy I 1 ; Eusebiu s , Ch Hi st. IV 12, I 참조), 이것은 그 도시가 플라 비아 왕조의 창시자인 베스파시아누스 Ves p as i an(69-79) 에 의하여 건립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거기서 나온 주화들은 그 도시가 있 던 시 대의 연 대가 72/73 년 임 울 일 러 준다 (SHJ P Vennes/M illar, I, 520 쪽). 네아폴리스는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의 좁은 골짜기에 놓여 있 는 현대의 나블루스 Nablus 이다. 요세푸스(Ant., IV 8, 44 §305) 가 세 겜(그는 그 이름의 철자를 2iK t µo v [시키몬] 혹은 ~iKt µa [시키마]로 쓴 다)이 〈두 개의 산, 즉 오른쪽의 가리재안 G ari zaean 산과 왼쪽의 ‘권 면 Counsel' (히브리어 에발 [元::i.,1'], 신 11:29 둥, LXX 「 a t Dal [가이발], 여기서는 BouM[ 불레]로 헬라화됨)이라고 불리는 산 사이에〉 있다고 말하므로, 세겜은 바로 두 산 사이에 있는 플라비아 네아폴리스 및 현재의 나블루스와 동일한 터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롬 (Le tt er 108, 13 NPNFSS VI, 201 쪽)도 역시 세겜이 〈지금은 네 아폴리스라고 불린다〉고 말한다. 하지만 유세비우스는 『지명록』 (158-159, 164-1 6.5쪽)에서 요셉의 뼈가 묻힌 세겜 ~ux tµ온 네아폴리스 에 있지 않고 그 근처에 mnoto v Nta c x6Aeuc 있었다고 말하고, 이 점 에 대해서는 제롬도 알려진 정보를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반복하였 다(iuxta Ne apo lim ) .

사진에 보이는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서 상단 왼쪽에 비교적 희미하게 보이는 _10 항에서도 보이는-~지역에 있는 네아폴리스 N 쩌 noA t<;는 분명히 큰 도시로 표시되어 나타나 있다. 꼭대기에 있는 동쪽 문으로부터 열주가 서 있는 거리가 서쪽으로 뻗어 있다. 그 도 시의 남쪽 부분에는 붉은 지붕을 가진 동향의 바실리카가 있다. 아 마도 이것이 484 년에 사마리아인들의 공격을 받은 그 감독 바실리카 일 것이며 (60 항 참고), 그 터는 오늘날 나불루스에 있는 〈주된 사원 Ma in Mos q ue 〉이 차지하고 있댜 동서로 난 길과 남북으로 난 길이 교차하는 지점에는 석주들 위에 얹은 한 돔이 있는데, 이곳이 현재 〈안나스르 사원 en-Nasr Mos q ue 〉이 있는 곳이다 남북으로 난 길 의 남쪽 끝에 는 로마식 구조물이 발견된 아인 카륜 Ain Qaryun 샘 곁의 님프 신전을 나타내는 듯한 반원형의 계단들이 있다. 네아폴리 스의 남쪽에 는 투르 가리 진 Tur Ga rizin (T oup fapt~tv) 이 있고, 동쪽 으로 계곡을 가로질러(이 사진의 최상단 중간에 글자의 하단인 5 개의 점만 보임 [10 항에서는 사진의 중심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글자가 분명하 게 보임 - 역주]) 투르 고벨 Tur Gobel(Toup f lllP rt A) 이 있다. 이것들은 아람어 형태의 이름들로 된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인데, 여기서는 〈산〉을 나타내는 말로 히브리어 더i1 (mr, 하르) 대신에 아람어 —, 0 (tur, 투르)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보는 사진에 나타난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의 부분 이 10 항에 보이는 지도의 아랫부분과 겹치고 있으며, 후자에서는 두 산의 이 름들, 죽 Toup f a pt~t v( 투르 가리 진)과 Toup r (i)p nA( 투르 고벨) 을 분명히 읽을 수 있다. 하지만 10 항이 보여 주는 부분에서 우리는 또한 그 지도가 두 산의 위치에 관한 제 2 의 전승, 죽 분명히 엇갈리 는 다른 전승의 여지를 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아르벨라이스Ar­ chel ai s 의 서쪽에 있는 산 줄기의 가장자리와 성 엘리사 S aint Eli sh a 의 장소(죽 샘)에, 그리고 여리고의 북서쪽으로 멀지 않는 곳에, 두

개의 산을 가리키는 좀 작은 글자로 된 표시들이 있는데, 그 이름들 은 LXX 에 나타난 형태를 취하여 rc p야(게발)과 ra pt (C t V( 가리제인) 으로 되어 있다. 『 지명록.!l (64-65 쪽)에서 유세비우스와 제롬도 역시 두 개의 전승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전승들에 의하면 두 산이 여리고에 인접해 iux ta Ieri ch o 있었거나, 아니면 사마리아인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네 아폴리스에 인접해 iux ta Neapo lim 있었댜 유세비우스는 네아폴리 스의 두 산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신명기 11 : 29 의 축복과 저 주가 번갈아 상대편에 들릴 수 없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의 전승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제롬도 그의 견해를 따랐다. 물론 실제 로는 사마리아인의 전승이 옳았고, 그것은 시켐과 아르가리진 S i chem and Arga rizin(}:iKt µ a Kat j\p va pt~i v) 을 함께 언급하는 요세푸스에 의 해 확인되었으며 (War I 6 §63), 또한 우리가 이미 본 대로 (60 항) 사마 리 아인들이 몬스 아가자렌 mans A ga zaren 에 관해 말한 것을 인용하 고 또한 세킴 Sec hi m 을 그 산의 기슭에다 놓은 보르도 순례자 Bordeaux Pi lgrim에 의해서도 인정되었다 (GEYER 20 쪽; LPPTS I- B, 18 쪽 ; CCSL CLXXV, 13 쪽 ; WE I' 154 쪽). 반면에 여리고 전승이 일어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신명기 11 : 30 의 언어의 모호함과, 사마 리아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대감에 고무된 한 주석에 의하여 가 능하게 되었다. 지도 (59 항)에서 투르 고벨과 투르 가리진 사이에 세겜이 있다 . 표시 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zuxtµ 서 K(at) ziK t µa K(at ) Z 야龍(시 키마 및 살렘이라고도 하는 쉬켐). 이 단어들은 『지명록.!l (150 쪽)에 있 는 목록의 세겜과 거의 일치하는 것인데, 여기서 유세비우스는 이렇 게 기록하고 있다. 〈시키마 S ikima 라고도 하고 살렘 Salem 이라고도 하는 세겜 Shechem (}:uxtµ ti Kat }:lKt µa ii Kat }:야qµ), 야곱의 도성은 이제 황폐해졌다(epil}l O I;), 그 장소는 네아폴리스의 주변(t v np oa crc£ lot 1 ;

―성읍 앞에 있는 공간)에 보이며, 거기에는 또한 요셉의 무덤도 보 인다.〉 살렘이라는 이름과 세겜을 동일시하거나 연결을 시키는 일에 관 해서 말한다면,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에피파니우스가 다음과 같 이 기록할 때 확인된 전승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은 말하기를, 멜기세덱의 살렘은 그 땅이 황무지로 보이는(놓여 있 는) 사마리아의 세겜 맞은편에 있다고 한다〉 (On Weig hts and Mea-sures 74 [75a] ed. DEAN 75 쪽 ; Pan. haer. 5.5, 2 GCS II, HolV Dummer 326 쪽). 그리고 그것은 폐허가 존재하는 것과 조화되고, 아 직도 살림 S ali m 이라는 동일한 이름이 붙어 있는 세겜의 동쪽 마을 과 조화된다. 세겜 그 자체로 보면 그 터는 발라타 Bala tah 마을 옆 에 있는 텔 발라타 Tell Bala tah와 매우 확실하게 동일시되어 왔으며, 1956 년에 착수한 G. 어니스트 라이트 G . Ernest W rig h t에 의하여 발 굴되었다. 그 터는 나불루스에서 남동쪽으로 1. 5 마일 떨어진 평야의 가장자리에 있는데, 유세비우스가 네아폴리스 〈앞에〉라고 지정한 것 과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서의 위치와도 일치하며, 또 그리심 산 의 기슭에 있는 것도 보르도 순례자 Bordeaux Pilgrim의 진술과 r 마 다바 모자이크 지도」에서의 위치와 일치한다. 마다바 모자이크에 나타난 세겜의 바로 북쪽에는 하나의 건물과 Tb t0 0 'Iucrh0( 토 투 요세프)라는 표지문이 있는데, 이것은 문자적으 로 〈요셉의 것 The of J ose p h 〉이라는 뜻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히 〈요셉의 (기념물 죽 무덤)〉이다. 이것은 (위에서 인용한 바대 로) 유세비우스에 의하여 언급되어 있고, 다음과 같이 기록한 보르도 순례자 (GEYER 20 쪽 ; LPPTS I-B, 18 쪽 ; CCSL CLXXV, 13-14 쪽 ; WET 154 쪽 이하)에 의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그 산의 기슭에는 세 킴 Sec him이라 일컬어지는 장소가 있다. 여기에는 요셉의 아버지 야 곱이 요셉에게 준 토지 (es tat e, v ill a) 에 요셉이 안장된 무덤 monu-

men tum이 있다.〉 오늘날 요셉의 무덤 Tomb of J ose p h 은 발라타 Balata h 마을의 북동쪽 변두리에 돔으로 된 모슬렘 건물 Ma q am en- Nebi Yusuf 내부에 돌로 만들어진 묘로 세워져 있댜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서 요셉의 무덤 동쪽에는 투르 고벨과 인접한 마을이 있고, 그 아래에는 부분적으로 지워졌으나 다음과 같 이 복원하여 읽을 수 있는 설명문이 있다. [):u]xap iJ VLV [):u]xwp a (지 금은 쉬 코라 [S y chora] 인 쉬 카르 [Sy c har, 수가]). 의 심 할 여 지 없이 이 것은 미쉬나 (Menaho th 10, 2 DM 505 쪽)에 언급되어 있고 오늘날의 아스카르 ‘Askar 마을로 표시되는 엔 소케르 En Soker 죽 〈쉬카르[수 가]의 샘〉이며, 아스카르는 나불루스의 동쪽으로 l 마일 떨어진 에 발 산 경사면에 샘과 함께 있다 . 세겜의 남쪽에는 남동쪽에 있는 설명 문과 함께 사진에서 뚜렷이 보이는 빨간 지붕의 교회가 있고, <'On ou iJ 血떄 t 001 맥0 0( 이곳은 야곱의 우물)〉이라는 표시가 붙어 있다 . 이것 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발라타 마을의 남동쪽 변두리에 있는 깊은 우 물과 일치한다. 시내 Sin aitic 필사본과 쿠레토니아 시리아어 Cureto nian Sy riac 필 사본에서는 요한복음 4:5 의 사마리아 도성이 세겜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위에서 (60 항) 살펴보았다. 텔 발라타 Tell Bala tah를 발굴함으로 써 그 텔 위에 있던 도시는 B.C . 2 세기 말 경에 멸망되었음을 확인 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세겜이 요한 휘르카누스에 의해 B.C. 108/107 년에 파괴되었다는 문헌의 증거와 일치한다(위의 60, 62 항 참고). 하 지만 발굴자들은 아마도 한 마을이 현재 발라타 마울이 있는 곳에 계속 존재하였다고 믿는다 (G. Ernest Wr igh t, Shechem: The Bi o- graphy of a Bib l ia z l Cit y [Ne w York and Toronto : McGraw- H ill, 1964], 244 쪽, n. 6).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왔다가(요 4:7) 도로 돌아간 마을(요 4:28) 이 다름 아닌 고대의 텔 위에 있던 도 성이 파괴된 뒤에 한 마을의 형태로 존속하던 세겜이라는 추측을 낳

게 한다. 여기에 관련된 거리는 매우 타당하다. 왜냐하면 발라타의 북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요셉의 무덤으로부터 남동쪽 가장자리의 야곱의 우물까지는 약 300 야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요한 복음 4:5 의 쉬카르라는 이름은 쉬켐 Sy ch em 또는 셰켐 (Sechem, 세 겜)의 본문 변형일 수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변형은 보통 가장 신뢰 할 만한 것으로 여겨지는 다수의 필사본에도 적용되었다. 하지만 만약 수가가 요한복음 4:5 의 정확한 독법이라면, 그 사마 리아 여인은 지금 아스카르 ‘Askar 마을로 일컬어지는 도성으로부터 왔다고 추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경우에 거리는 아스카르로부터 야곱의 우물까지 남쪽으로 1 킬로미터이다. 이렇게 거리가 더 멀어짐 에도 불구하고 주요 필사본들뿐만 아니라 고대의 저자들도 그 우물 가에서 있었던 사건과 관련된 도성으로 세겜보다는 수가를 지적하 는 경향이 있다. 유세비우스 (Onomas ti con 164 쪽)는 수가에 대해 다 음과 같은 설명을 부여하고 있다. 〈수가 ~uxa p. 야곱이 그의 아들 요 셉에게 준 들판 가까운 곳의 네아폴리스 앞에 있는 곳. 요한에 의하 면,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있는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 셨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볼 수 있다.〉 시켐 (S i chem, 세겜)과 요셉이 안치된 무덤에 대해 언급한 보르도 순 례자도 이와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GEYER, 20 쪽 ; LPPTS 1-B, 18-19 쪽 ; CCSL CLXXV, 14 쪽 ; WET 155 쪽). 〈거기서 1000 보 떨어진 곳에 세카르 Sechar 라 불리는 곳이 있으며, 그곳으로 부터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걷기 위해 야곱이 우물을 파 놓은 곳으 로 내려왔고 descend it,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녀와 대화하 셨다. 그곳에는 야곱이 심은 플라타너스 나무들p lane tr ees 과 이 우 물물로써 채운 목욕통 (balneus, 아마도 침례탕일 것이다. 왜냐하면 똑 같은 단어 [balneum] 가 얼마 후 예루살렘에 있는 〈성묘 교회〉 뒷편의 침 례탕에 대하여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GEYER 23 쪽; LPPTS 1-B, 24 쪽;

CCSL CLXXV, 171 쪽 ; WET l58 쪽])이 있다.〉 r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J의 이 부분과 지금 관련이 있는 지역들에 관한 고찰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투르 가리진의 서편에 있는 여백 에 붉은 글자로 기록된 본문을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 본문은 이렇다. • I • u g油 COA6Yllot v oc b 8cbc c0Aovt GV Y 처 C t xou 떄 c 퍄VCQ KQ i mAw at c0AOYt dc K[up to] u i 때 QO tO O Jos eph a nd aga in 요셉〈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지니고 있는 땅의 축복으로 그대를 축복하셨도다〉 그리고 다시 〈주의 축복으로 그의 땅은 가득하도다〉 〈그리고 다시〉라는 말에 의해 분리되는 이 두 LXX 인용문은 창 세기 49:25 에서 야곱이, 신명기 33:13 에서 모세가, 요셉을 축복한 말 씀에서 온 것이다. 〈주〉란 단어는 약자로 씌어 있다.

63 야곱의 우물 이 사진은 야곱의 우물의 주둥이와 깊은 우물 속으로 두레박을 내 리는 방법을 보여 준다. 64 텔 발라타 이 광경은 에발 산에서 바라본 것이며, 전경의 한가운데로 내려다 보이는 것은 고도(古都) 세겜의 성터인 텔 발라타이다 . 현대의 마을 과 난민 수용소가 바로 뒤에 있다. 오른쪽에는 좀 낮은 그리심 산의 경사면을 볼 수 있다. 65 수가 이것은 에발 산의 낮은 경사면에 있는 아스카르 마을의 광경인데, 아스카르는 고대의 수가 Sy char 였을 것 이 다. 66 아르쿨프가 그린, 야곱의 우물 위에 지은 교회의 구도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62 항), 보르도에서 온 순례자 (333) 가 언 급한 바, 야곱의 우물에서 길은 물로써 채워졌다는 목욕통 balneus 에 대한 언급은, 그때 이미 야곱의 우물 곁에 침례탕이 있었음을 시사 한다. 만약 그 침례탕이 교회와 연관되어 있었다면 이 교회는 콘스 탄티누스 시대의 것일 것이다. 하지만 보르도 순례자가 교회는 언급 하지 않았으며, 유세비우스도 『지명록』 (164 쪽)에서 우물에 대하여 말 할 때 교회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롬 (Le tt er 108, NPNFSS VI, 201 쪽)은 파울라 Paula(386) 의 순례를 기술하면서,

〈그녀는 야곱의 우물 주위의 그리심 산 측면에 세워진 교회로 들어 갔다〉고 말하였으며, 『지명록 』 (165 쪽)을 번역한 그의 역서에서 그는 우물을 언급하는 계제에 이르러 〈지금은 교회가 세워져 있는 곳〉이 라는 말을 첨가하였다. 그러므로 적어도 380 년경에 거기 우물 곁에 는 교회가 있었던 것이다 . 아담난 Adarnnan 이 기록한 아르쿨프 (670) 의 순례 이야기에는 그 장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GEYER 270 쪽 ; LPPTS ID-A, 41-42 쪽 ; CCSL CLXXV, 216 쪽 ; WJ P 108 쪽). 〈아르 쿨프는 ……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여, 그 도(道)의 도성에 이르렀 는데, 이곳은 히브리어로 시켐이라 불리지만 헬라어 및 라틴어 식으 로는 시키마 S i c im a 라고 일컬어지며, 그것은 또한 이따금씩 매우 부 적당하기는 하지만 시카르 S i char 라고도 불린다. 그 도성으로부터 가 까운 곳에 벽 너머로 세워진 교회 eccles i am 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처럼 기본 방위인 네 방향으로 뻗은 네 팔을 가졌으며, 그것의 구도가 아래에 그려져 있다 . 그것의 중심에 야곱의 우물이 있다 . 〉 아르쿨프는 또한 그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셨으며 그 우물의 깊이 에 관한 수치를 입수했다. 그는 양팔을 뻗었을 때의 길이인 약 6 피 트를 가리키는 오르귀아 or gyi a(6 py ulG) 라는 헬라의 단위를 사용하면 서, 그 우물의 깊이가 40 오르귀아twi ce twe nty or gyi ae 였다고 보고 하였다. 아르쿨프의 기술에 첨부되었던 교회의 구도는 「파리 사본 Codex P ari s in us 」 (Lati n 13048) 으로부터 모사해 온 것 이 며 , 이 사본은 파리 국립 도서관 B i b li o th碩 ue Nati on ale, P ari s 에 소장된 『성지론(聖 地論, De Lods Sanc ti s) 』의 제 9 세기 필사본이다. 아르쿨프는 페르시 아인의 침 입 (614) 과 모슬렘의 정복 (638) 후에 팔레스타인으로 왔으며 그 무렵에는 교회의 윗부분이 파괴되고 없었으므로, 그가 보고 그린 것은 그 우물 바로 위에 있던 십자형의 지하실뿐이었을 가능성이 있 다. 하지만 그가 사용한 언어는 그 교회 자체가 그 당시에 이 형태

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67 야곱의 우물 위에 있던 십자군 교회의 구도 십자군이 들어오기 전에 야곱의 우물의 교회는 아마도 폐허 상태 였지만, 하여튼 간에 그들은 그곳에 새로운 교회를 지었다. 십자군 교회는 1150 년경에 존재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세상의 구주에 게 봉헌되었는데, 이것은 분명히 요한복음 4:42 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바더먼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4 드라크마tetr adra­ chma 짜리 은화 35 개로 된 비장품이 1960 년의 세겜 발굴에서 발견된 것은 흥미있는 일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 주화들 중의 다수는 프톨 레마이오스 II 세 Ptole my II 를 〈구주 (NTIIPO5 [소테로스])〉로 일컫는데, 이 말은 물론 후기에 가서야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대한 칭호로 사용 되 었다 (Sellers, The Coin s of Shechem, in BA 25 [1962], 90 쪽 이하 를 보라). 야곱의 우물에 있던 십자군 교회도 역시 파멸되었다. 1882 년 에 『서부 팔레스타인 조사에 대한 회고록 Memo i rs of The Surve y of Weste m Pales ti ne 』(II, 172 一 178 쪽)은 하나의 깨어진 둥근 천장과 그 지역에서 나는 육중한 흰 석회석 돌 하나만을 기술하는데, 이 돌에 는 두레박을 끌어올리는 밧줄로 인하여 깊은 홈이 패여 있었다. 그 우 물에 관하여 이 『회고록』 (174, 176 쪽)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이 장소는 유대인과 모슬렘교인과 기독교인에 의하여 인정을 받고 있댜 표면에 물샘이 풍성한 곳에서 땅속으로 매우 깊이 내려간 우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 우물에 대하여 독특한 역사를 부여하기에 충분하리 만큼 두드러진 것이다. (세겜의) 골짜기의 입구에 땅 한 되기를 구입하 고 나서 크게 노력한 덕분으로 자기 자신의 소유지 안에 영구적인 급수 원을 확보한 것은 전적으로 그 위대한 족장의 사려깊음과 선견지명의

결과였다. 이 우물은 인근의 물샘이 비우호적인 이웃들(실제로 적대적 인 이웃이 아니라면)의 손 안에 들어 있을 때에도 영구적으로 물을 공 급하였다 …… 그 우물이 땅속으로 매우 깊이 내려간 것은 심지어 극 도로 가문 계절에도 물의 공급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매우 깊은 곳에서 나는 물은 언제나 그 우물의 측면을 통하여 여과되어서 밑바닥에 모였다. 1 88.5년에 희랍 정교회가 야곱의 우물의 소유권을 매입하였으며, 때가 되어 약간의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출토된 유품들은 전적으로 십자군 시대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것들은 여기에 예시된 바 와 같이 십자군 교회의 부분적으로 가상적인 구도를 그리는 일을 허 용하기에 충분했다. 그 교회는 하나의 회중석과 두 개의 측랑을 가 지고 있었고, 동쪽으로 향해 있었으며, 세 개의 후진을 갖고 있었다. 회중석으로부터 두 개의 충계가 오른쪽과 왼쪽으로 내려가서 우물 곁에 있는 지하실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고, 교회는 우물이 중앙 후 진의 아래에 오도록 되어 있었다. 68 야곱의 우물 위에 있는 미완성의 희랍 정교 바실리카 1903 년에 희랍 정교회는 야곱의 우물 위에다 새로운 바실리카를 짓기 시작했고, 1959-1960 년에 그 구조물은 이 사진에서 보이는 시 점에서 중단되었다. 회중석의 상석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임시 두옥 (斗屋, shacks) 은 두 개의 총계로 들어가게 하며, 이 충계들을 밟고 내려가면 지하실과 수원(水源)에 이른다.

갈릴리 69 갈릴리 바다의 남쪽 끝 갈릴리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이름 b.,',l( 갈릴)은 헬라어로는 r 야t Aa t a (갈릴라이아)로 음역되고, 그 의미는 〈원 c ir cle 〉이며, 따라서 〈지역 re­ gion > 또 는 〈구역 di s tri c t〉을 뜻한다. 팔레스타인의 북부에 위치한 갈 릴리는 그 땅의 나머지 지역보다도 더 많이 의부 영향력에 노출되어 있었고, 유대인과 함께 이교도 인구도 가지고 있었다. 이사야 9:l( M T 8:23) 은 이 지역을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의 지역이라고 밝히고, 〈이방의 갈릴리〉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또한 〈이방(또는 열국)의 구역 distr ict of na ti ons 〉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 . 마태복음 4:l4-16 은 이 사야서에 있는 이 구절을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위치했던 예수 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인용하면서 이사야 9:2(MT 9:1) 을 예수의 사업 의 효과와 관계가 있는 구절로 포함시키고 있다. 〈혹암에 앉은 백성 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 도다.〉 요세푸스 (War III 3, 1-2 § § 35-43) 는 갈릴리의 지역이 서쪽과 북쪽으로는 페니 키 아 Phoe nici a 와 시 리 아 S yri a 로 싸여 있고, 남쪽으

로는 사마리아와 스퀴토폴리스 Sc yth o p o li s 지방과 접해 있으며, 동 쪽으로는 힙 포스 Hippos, 가다라 Gadara, 가울라니 티 스 Gaulan itis 지 방 과 접해 있는 것으로 그 범위를 정하고 있다. 그는 아마도 약간의 과장을 섞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땅은 어디나 토양과 초지가 매우 기름져서 다양한 수목들을 산출하므로, 심지어는 가장 태만한 사람들까지도 이토록 쉽게 농업에 투신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사실 그 땅은 한 조각도 남김없이 주민들에 의하여 경작되 어 왔으며 버려진 땅이라고는 한 되기도 없다. 성읍도 또한 조밀하 게 분포되어 있으며, 마을들도 토양이 비옥한 덕분에 모두가 매우 높은 인구 밀도를 보이고 있어서 가장 작은 마을에도 15000 명 이상 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갈릴리의 두드러진 특징인 큰 호수는 구약에서는 긴네렛 C hinn ere t h 또는 긴네롯 Ch inn eroth 바다라고 불리고(민 34:11 ; 수 12:3 ; 13:'2: l), 마카베오상 l1:67 과 요세푸스에서는 겐네사르 Gennesar 바다로 불리 며, 신약에서는 게네사렛 호수 Lake of Gennesare t(눅 5:1), 디베랴 바 다 Sea of T i be ri as( 요 6:1 ; 21: 1) , 갈릴리 바다 Sea of Ga lilee (요 6 : 1 동)등으로 일컬어진다. 이 호수는 길이가 대략 13 마일이고 폭이 7 마 일이나 되며, 수면은 해면 아래로 696 피트에 놓여 있다. 요단 강이 이 호수를 통과하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어 그 물의 신선 함을 끊임없이 유지해 주므로, 그 속에는 40 종의 물고기들이 서식하 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은 그 호수의 남쪽 부분으로부터 서쪽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광경이다. 70 갈릴리 바다의 지도 이 약도는 아래의 토의에서 언급되는, 갈릴리 바다 일대와 그 근 방에 있는 주요 장소들의 위치를 보여 주고 있다.

71 갈릴리 해변의 디베랴 530 년에 테오도시우스 (GEYER 137 - 138 쪽 ; LPPTS II-B, 8 쪽 ; CCSL CLXXV, 115 쪽; WJ P 63 쪽)가 스퀴토폴리스, 즉 남쪽으로부터 디 베 랴 바다 Sea of T i be ri as 로 와서 디 베 랴, 막달라 (73-74항), <일 곱 샘 Seven S pri n g s 〉(엣 - 탑가 e t -Tab g ha, 77-84 항), 그리고 가버나움(텔 훔 Tell Hum, 87-100 항)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이곳들은 가장 중요한 지역들로 호수의 서편에 있는 성읍들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순서대 로 열거한 것이다. 디베랴는 호수의 남쪽 끝에 있는 요단 강의 하구로부터 북쪽으로 약 5 마일 되는 곳에 있다. 셉포리스 Se pp ho ri s 에 거주하던 헤롯 안티 파스 Herod Anti pa s(B. C. 4 - 39) 가 이 도시를 새 수도로 건설하여 티 베리우스 T i be ri us( 디베료, l4_37) 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그의 이름을 따서 그 도시의 이름을 붙였다. 요세푸스(Ant . XVIlI 2, 3 §36) 가 분 봉왕 헤롯에 의하여 디베랴가 건설된 이야기를 본디오 빌라도 Pon­ tius P il a t e 가 행정관으로 (15/16 또는 26) 온 것을 기록한 직후에 언급 하고 있기 때문에, 가끔은 그 도시가 그 무덤에 건설되었다고 주장 되어 왔댜 하지만 주화들과 다른 증거에 의존하여 아비-요나 A vi­ Yonah( IEJ 1 [19 50-1951], 160-169 쪽)는 그 도시의 설립이 기독교 시 대(西紀)의 17 년에서 22 년 사이였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스피커만 Sp ijke rman(LA 13 [1962-1963], 303-304 쪽)은 그 폭을 좀더 좁혀서 17-20 년이라고 하였댜 아비-요나는 이 연도들 안에서 18 년이 가장 근사한 해임을 시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디베랴의 공식적인 건립을 바로 그 해에 있게 한 것은, 그 도시가 그에게 경의를 표하여 그의 이름으로 일컬어진 바로 그 황제의 제 60 회 생일이 있는 해와 일치하 고 때문이다. 복음서에는 셉포리스에 대한 언급은 없고, 디베랴가 요한복음

6:23( 〈디베랴에서 배들이 ……〉)에만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명백한 증거에 따라 말한다면, 예수께서는 이 두 도시 중 어느 곳도 방문하 거나 그곳에서 일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아마도 이 도 시들이 침례자 요한을 마캐루스 Machaerus(14 항)에서 처형한 그 왕 의 수도들이었으므로 이해될 만한 일이며, 사건 당시에 〈갈릴리의 귀 인들〉(막 6:21) 도 그 자리 에 참석 하였다 . 헤롯당(아마도 헤롯 안티파스의 추종자들)은 예수의 반대자들로 나 타나고 있는 한편(막 3:6; 12:1 3 ; 마 22:16), 헤롯 안티파스 자신은 예 수를 죽이기를 원하고 있으며(눅 13:31), 후에 예수를 심문할 때 그 는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눅 23:11) 한 것으로 보도되어 있다 . 하 지만 예수는 헤롯을 교활하고 연약한 사람(〈저 여우〉[눅 23:32]) 으로 간주하였으며, 헤롯이 가한 어떤 위협에 의해서도 그의 영토로부터 쫓겨나지 않았고, 단지 자기 자신의 때와 자기 자신의 운명과 조화 되도록 예루살렘을 향하여 옮겨갈 뿐이었다(눅 13:31-33). 또한 헤롯 의 청지기 (e Jtit PO Jt O<;: [에피트로포스], 눅 8:3, 아마도 재무장관) 구사의 아내 요안나도 예수에 의하여 고침을 받은 여러 갈릴리 여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이 여인들이 후에는 그들의 소유로써 예수 와 열 두 제자를 섬겼으며(눅 8:3), 또한 나중에 빈 무덤에도 함께 있 었다(눅 24:10) 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 이 다. 요세푸스는 헤롯이 디베랴에 자신을 위하여 궁전을 지었으며, 거 기에는 동물들의 형상이 있었고, 부분적으로 금으로 된 지붕이 있었 다고 한다 (L ife 12 §65). 또한 거 기 에 는 공중(公衆) 집 회 들을 위 하여 사용된 경 기 장도 있었으며 (War II 21, 6 §618 ; III 10, 10 §539), 회 당 (JtpO OEUXi t [프로슈케], 문자적으로는 〈기도처〉, 사도행전 16:13, 16 에 있 는 말과 같은 단어)도 있었는데, 이것은 거대한 건물이어서 대규모의 군중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L ife 54 §'l7 7) 고 한다 . 요세푸스는 또한 디베랴가 무덤들이 있는 장소에 건립되었으며

따라서 그곳에 거주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율법과 전통에 위배되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리하여 그곳에 살 입주자를 확보하기가 어렵게 되자 왕은 갈릴리인들과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질적인 인구를 불러들였다. 이 사람들이 모두 이방인들이었을 것으로 생각 되기도 하지만, 큰 회당이 존재했던 사실은 다수의 유대인들도 있었 음을 말해 준다. 사실 디베랴는 135 년 이후로 유대인의 강력한 생활 중심지가 되 었으며, 예루살렘으로부터 얌니아Jamni a 로 옮겨졌다가 (70-132) 다시 다른 곳들로 옮겨진 산헤드린 Sanhed rin 또는 베트 딘 Beth Din이 마 침내 이곳으로 옮겨졌다 (282 항 참고). 또한 이곳에는 유망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무덤들이 있다. 얌니아의 베트 딘의 설립자인 요하난 벤 작카이 Jo hanan ben Zakka i, 바르 코크바 Bar Kokhba 의 지 지 자 랍비 아키바 Rabb i Akiba , 제 2 세기의 학자로서 그 이름의 뜻이 〈빛을 주 는 자〉인 랍비 메이르 Rabb i Meir , 제 12 세기의 의사요 철학자였던 마 이 모니 데스 Ma imo n ide s, 그리 고 그 밖의 사람들의 무덤 이 디 베 랴에 있다. 서쪽으로 5 마일, 그리고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핫틴의 뿔들 Homs of Ha tti n 〉이란 곳이 있는데, 이곳은 십자군이 1187 년에 살라딘 Sala din에 게 패 배 당한 곳이 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다수의 헬라 시대의 성읍의 경우, 세월이 흐르 면서 그 이름이 옛날의 셈어 형태로 되돌아갔다. 예컨대 스퀴토폴리 스 Sc ytho poli s 는 다시 벤-스안 Be th -shean( 벨산)으로, 필라델피아는 암만으로 각각 바뀌었으나, 디베랴는 그보다 먼저 있던 어떤 셈어 이름을 대신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도시의 이름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유지해 왔다. 사진은 시가 호안(湖岸)에 위치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며, 이곳을 요세푸스 CAn t. XVIII 2, 3 §36) 는 갈릴리에서 가 장 좋은 지역이라고 불렀다.

72 함맛 디베랴에 있는 회당의 바一 닥 모자이크 디베랴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하나의 온천과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 울을 요세푸스 (An t. XVIlI 2, 3 §36) 는 암마투스 Ammath u s('Aµ µa8ouc; ;) 라고 부른다. 그는 말하기를 (War IV 1, 3 §11), 이 이름은 〈따뜻한 목욕탕 (8E pµci[테르마])이라는 뜻이며, 그곳은 아마도 여호수아 19:35 의 함맛 Hamma th (non, 〈온천〉)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장소는 의심할 여지 없이 디베랴의 남쪽으로 약 1. 5 마일 떨어진 호안에 있는 온천 들을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며, 이곳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함맛 디베 랴 Hamma th Ti b eri as 로 알려지고 있다. 이 온천들에 인접한 토루(土 壘)에다 1921 년에는 N. 슬루쉬 N. Slousch 가, 1961-1965 년에는 모셰 도탄 Moshe Do th an 이 발굴 작업을 실시하였다. 이곳에는 디베랴의 남쪽 대문의 유적과 이스라엘 시대의 목욕탕의 흔적들이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다섯 개로 된 일련의 덧지어진 건물들인데, 그 대 부분 또는 모두가 대대로 연속적으로 지어진 회당 건물을 보여 주고 있다 . 최하층 (m) 에는 한 공공 건물의 유적이 있는데, 이것은 근래의 발 굴자에 의하여 제 1 세기 또는 제 2 세기의 전반기의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어쩌면 그 시기에 이미 회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IIB 층(발 굴자가 제 3 세기의 것으로 보는)에는 회당이 〈넓은 집 broadhouse> 모 양의 바실리카 (13X15 미터)로 되어 있었으며, 예루살렘을 향한 쪽에 있는 긴 벽에는 입구가 있었다 . 내부는 세 개의 석주 열(石柱列) __ 각 줄에 세 개의 석주가 있는__에 의하여 네 구역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비교적 널찍한 회중석과 양쪽에 측랑이 하나씩, 그리고 동 쪽에는 여분의 측랑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회중석에는 다채로운 색으로 된 모자이크 포장의 단편이 보존되어 있었다. IIA 충(제 3 세기 말 또는 제 4 세기 초반의 것으로 여겨지고 제 4 세기에는 내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은 그 이전 건물의 기본 구도를 그대로 따랐으나 입구 가 이제는 북쪽에 있는 긴 벽을 통해 나 있었고, 남쪽에 있는 긴 벽 의 맞은편에는 토라 Torah 를 위한 영구적인 장소가 마련되었다. 부 스러기 더미에는 벽을 장식했던 다채로운 프레스코 벽화들의 단편 이 있었고, 바닥은 약 30 가지의 색깔로 된 모자이크 포장으로 덮여 있었는데, 이것은 아직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모자이크(여 기에 보이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회중석에 있다. 토라를 위한 장소로 추정되는 곳의 전면에 남쪽으로 토라 성감(聖 織 Torah s hri ne) 을 묘사한 그림이 있는데, 여기에는 메노라 meno­ rah( 가지가 일곱 개인 등대)가 양쪽에 서 있고, 또한 룰랍 lulab( 초막절 에 사용된 종려나무 가지), 에트록 e th ro g(역시 초막절의 상징인 시트런 cit ron ), 쇼파르 shof a r( 축제 때 불던 수양의 뿔), 그리 고 분향 삽 동이 그려져 있다.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판에는 12 궁도의 상징물이 그 려진 원이 있고, 그 중심에는 헬리오스 He li os( 또는 제 3-4 세기에 로마 인들에게 알려진 바로는 솔 인빅투스 Sol Invic tu s, 죽 〈무적의 태양 inv in c ib l e sun>, F MM 210 쪽 이하 참고)가 자신의 병거(兵車)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한편으로 12 궁도를 그린 원의 바깥쪽으로 그 판의 네 모통이에는 한 해의 4 계절들을 상징하는 네 개의 여성 흉상이 그려져 있다. 팔 레스타인의 고대 회당에서 발견된 여러 개의 12 궁도들 가운데서 이 것이 가장 이른 연대의 것이다. 전체 모자이크 중에는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고 헬라어로 된 명 각들이 있다(D o th an, Hammath Tib e ri as, 53-62 쪽). 두 마리의 사자 사이에 끼여 있는 북쪽 판에서는 이 회당의 헌납자들과 설립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한 전형적인 항목을 문자로 옮기면, 〈막시모스는 서원한 것을 성취했다. 그에게 영생이 있기를!〉이다. 여기서 막시모 스 M axim os 라는 사람은 그 회당을 건축하기 위하여 헌금을 서약한

헌납자로 그는 그의 서약을 성취하였고, 따라서 축복을 받게 된 것 이다. 측랑 판에 있는 한 아람어 명각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 거룩한 장소에서 자선을 베푼 자에게 평화가 것들기를! 그리고 앞으로 자선을 베풀 자에게도 축복이 임하기를! 아멘, 아멘, 셀라,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하여 아멘. 〈자선을 베푼다〉라는 구절은 어떤 자선적인 기증을 의미할 수도 있고 건물을 세우기 위한 헌납을 의미할 수도 있다. 〈축복이 임하기 롤〉이란 구절은 약간 변형된 모양으로 많은 회당 명각들에서 나타나 고 있다 (57 항을 보라). 이중 아멘 Amen 은 요한복음과 『훈련 편람 Manual of D i s cip li ne 』 (Vardaman) 에서 사용된 그 반복(〈진실로 진실 로〉, 영어 번역들에는 또는

WJ P 63 쪽)가 다음으로 다른 곳은 〈숙녀 마리아가 출생한 곳 ub i donna Maria nata . est> 인 막달라 Ma g dala 이 다 . 그는 그 거 리 가 2 마 일이라고 하지만, 이 동일한 숫자를 막달라로부터 〈일곱 샘〉까지, 그 리고 〈일곱 샘 〉 로부터 가버나움까지의 거리에 대해서도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우리는 이 숫자를 하나의 대략적인 어림수로 간 주해도 좋을 것이댜 사실 디베랴로부터 오늘날의 믹달Mig dal( 아랍 어로 메즈델 Me j del 로 알려져 있음) 마을에 이르는 연안의 길이는 3 마 일이 조금 덜 (4 . 5 킬로미터) 되는데 , 이 이름은 틀림없이 고대의 이름 을 보존하고 있으며 또한 막달라의 고대의 위치를 실제로 잘 보존해 온 것일 것이다. 이곳은 디베랴로부터 오는 노상에 있을 뿐만 아니 라 또한 이 도로가 나사랫으로부터 오는 고대의 도로와 만나는 교차 로에 있기도 하였는데 , 교차로는 와디 엘-하맘 Wa di el-Hamam, 죽 비둘기 골짜기 Valley of P ig eons 를 통하여 내려오는 길이었고 또한 아르벨라 Arbela 의 큰 벼랑들을 지나서 호수로 향하는 길이었다 . 아르벨라에서 유대인들은 시리아인에 대항하여 싸웠으며(마카베오 상 9:2), 산 중턱의 석굴 속에서 헤롯 대왕은 요세푸스가 산적이라고 일컫는 무리에게 올가미를 놓아 학살하였다(Ant. XIV 15, 5 §§421- 430 ; War I 16, 4 §§310-313). 그리 고 로마와의 전 쟁 에 서 아르벨라 동굴 Cave of Arbela 이라는 마을은 다른 마을들과 함께, 그리고 요세 푸스에 의 하여 요새 화된 타리 케 아 Ta rich ea, 티 베 리 아스 Tib e ri as , 셉 포리 스 Sepp h ois 둥의 도성 과 함께 하부 갈릴 리 Lower G alil ee 의 성 읍들 중의 하나였다 (L ife 37 §188 ; 60 §311 참고). 이러한 전략적인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는 막달라는 아마도 그것의 이름을 믹달이라는 말에서 따왔을 것이다. 이 말은 〈탑, 망대(':,i lO [믹달])〉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이므로, 그 장소가 감시탑 또는 요 새였음을 시사한다.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44 항) 이 이름은 가 이사랴에서 나온 나사렛 명각 Nazare th in sc ripti on 에 나타난다. 탈무

드에는 믹달이 디베랴에 가까운 것으로 언급되었으며, 또한 믹달 누 나이야Mig dal Nuna iya 즉 〈물고기 망대 fish t ower 〉라는 더 자세한 이름이 부여되어 있는데 (Pes ahim 46a SET II, 4, 219쪽), 이것은 이곳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가 잘 되었음을 뜻하는 적절한 이름이었 다. 요세푸스가 타리케아 T ari chea 죽 절인 물고기를 뜻하는 헬라어 t d p lxoc( 타리코스)에서 파생된 이름으로 일컫는 장소 역시 아마도 막달라와 동일한 곳이었을 것이다. 요세푸스 (War ill 9 9, 7-10, 5 및 9 §§443-502, 522-531) 는 베스파 시 아누스 Ves p as i an 와 티 투스 T itu s 가 타리 케 아를 정 복한 일 에 관하 여 매우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이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타리케아는 요세푸스 자신이 요새화한 갈릴리 도성들 중 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 기록에서 그는 로마인들이 스퀴토폴리스 에서 디베랴로 올라가고, 그 다음에는 더 전진하여 npo i '} ..8wv 디베랴 와 타리케아 사이에서 진영을 치고, 마침내는 그 도시를 탈취하였고, 뒤이어 갈릴리의 해상 교전에서 유대인들을 쳐부순 것으로 기술하 고 있다. 지명의 순서가 지형학(地形學)의 기술은 타리케아와 막달라 룰 동일한 곳으로 보는 견해와 전적으로 조화된다. 요세푸스는 또한 타리케아인들의 수가 40000- 아마도 과장된 숫자인 듯함一_이나 된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경마장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도성 의 헬라적 성 격 을 가리 키 는 것 이 다 (War II, 21, 3-4 §§599, 608). 복음서에서는 막달라 Mav6 야 d 가 어떤 필사본들의 마태복음 15:39 과 마가복음 8:10 에 언급되어 있다. 다른 필사본들, 즉 사실 더 좋은 필 사본들은 마태복음 15:39 에는 마가단 Ma g adan 을, 마가복음 8:10 에는 달마누다 Dahnanu th a 를 언급하고 있는 한편, 이 이름의 또 다른 형 태들도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이름의 대부분은 위에서 도 설명한 바와 같이 히브리어 믹달과 관련된 막달라의 이문(異文) 인 반면에 달마누다는 단순히 그 동일한 장소의 다른 이름일 가능성

이 높다 (Au g us ti ne, The Harmony of the Gospe ls 51, 106, NPNF VI, 153 쪽 참고 :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달마누다와 마가단[라틴어 철자] 에 관하여 〈이 두 이름 아래 의도된 곳이 동일한 장소라는 사실을 의심 할 이유가 없다〉라고 말한다). 막달라에 대하여 우리는 또한 막달라인 마리아 M ary Magd alene(Mapi .a iJ Mav6 야 nvh) 라는 이름의 증거도 가지 고 있는데, 이것은 4 복음서 모두에 여러 번 나타나는 것으로서(마 27:56 등), 그 의미는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임이 분명이다. 북쪽으로부터 내려오면서 갈릴리 바다의 북서쪽 연안에 있는 장 소들을 확인하면서 수사 에피파니우스 Ep iph a nius the Monk(Monachus Hag iop o lit a, 750-800) 는 헵 타페 곤 He ptapeg on(77 항)을 거 명 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약 2 마일을 더 가면 막달라라고 불리는 곳에 교회 t KKAno i. a 가 있는데, 그 안에는 그 막달라인의 집이 있다. 거기서 주께서 그녀를 고쳐 주셨다. 거기서부터 더 가면 디베 랴 시 에 이 른다〉(H erbe rt Donner in ZDPV 얽 [1971 ], 78 쪽 ; WJ P 120 쪽). 이 와 마찬가지 로 유튀 키 우스 (940) 도 그 교회 에 대하여 이 렇 게 말하고 있다 〈디베랴에서 가까운 〈막달라 교회 Church of Mag - dala 〉는 그리스도가 이곳에서 막달라인 마리아 속에 있던 일곱 귀신 을 쫓아내신 것을 증거한다〉 (The Book of the Demonstr at i on , ed. Watt, CSCO 193, 136 쪽). 사진은 메즈델 Me j del 마을과 그 뒤에 있는 게네사렛 평지 Plai n of Gennesare t를 보여 주고 있다. 74 막달라에 있던 회당 고대의 막달라 지대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작업이 lITTl-1 언 7 년에 비르질리오 코르보 V irgili o Corbo 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그 발굴 작 업을 통해 부분적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막달라는 북-남으로 뻗

은 주된 거리((Xl rdo maxim us [카르도 막시무스])가 동-서로 뻗은 거 리들 (decumanus [데쿠마누스] : 로마군 진영의 주된 입구인 decum 따四 [데쿠마나]에서 따온 말임 이 진영은 적군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보통 그곳에 진영을 치던 군단의 제 10 보병대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칭해졌음. 200 항 참고)와 교차된 로마식 도시로 설계되었으며, 건물이 규칙적으로 배치된 구획(i nsulae [인술래])을 가지고 있었다 (전반적인 구도를 위해서는 LA 28 [1978], pl. 71 을 보라). 동-서 거리(구도의 Via ill)와 북-남 주된 거리 (V i a II) 의 교차점에, 그리고 건물의 구획들로 둘러싸인 곳에는 ’ 이 사진에 나타난 건물 (8 .1 6X7.25 미터)의 유적이 있다(구도를 위해서는 LA 24 [1974], 24 쪽을 보라). 석주들의 열은 홀을 하나의 회중석과 두 개의 측랑-그 건 물의 길이만큼 뻗어 있는――과 또 하나의 측랑_一뒤편 죽 남쪽 맞은편에 있는—一으로 분리하고 있다. 북쪽에는 다섯 줄의 돌 벤치 들이 놓여 있고, 입구는 아마도 동쪽에 있었던 것 같다. 건축 양식으 로 보건대 이것은 십중팔구 회당이었으며, 구도에 있어서 헤로디움 (21 항)과 마사다 (23 항)에 있던 회당들과 유사한 것으로 봐서, 이것은 아마도 그 회 당들과 거 의 동시 대 의 것 이 며 (Corbo in LA 24 [1974], 22 쪽 ; 그리 고 in Stu d ia Hi er osolym i tana, I [1976], 371 쪽), 그 시 기 는 그것에 인접한 지대인 구역 D 에서 발견된 헬라 시대 말기와 로마 시대 초기의 주화들과 도기로 인하여 확정되고 있다 (S tu d i a Hi er o-solym it ana, I [1976], 339, 371 쪽). 갈릴리 바다의 동쪽에 있는 도시인 가믈라 Gamla 에서 발굴된 것 으로서, 이것과 유사한 양식으로 지어진 한 회당은 67 년에 로마인들 에 의 하여 파괴 되 어 (Jo seph us, War IV 1, 10 §83) 그 후로는 사람들 이 다시 거 주하지 않았다 (Sy na g og u es Revealed, 30-34 쪽 [S. Gut- man], 35-41 [Z. Ma'oz]). 따라서 우리는 이 회당과 함께, 필시 〈제 2 성전 Second Temp le > 시 대의 말기, 죽 제 1 세기, 그것도 70 년 이전에

속하는 발굴된 회당들을 자그마치 4 개-마사다, 헤로디움, 막달라, 가믈라 —— 나 보유하고 있다 (Me y ers and Str an g e 140 쪽 ; Syn ag o - gue s Revealed, 26 쪽). 이 회당의 북쪽에는 그 앞에 뻗어 있는 거리 (V i a ill)로부터 들어 가는 입구와 함께 약간의 보촌된 모자이크가 있는 큰 건물 지역(구 역 C) 은 별장이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서쪽(구역 A 에 있는)에는 로 마 시 대 의 석 조로 된 급수탑이 있고 (S tu d i a Hi er osolym it ana, I [1976], 357 쪽 이 하, 362 쪽 이 하), 남쪽에 는 호수를 향한 입 구와 함께 비잔틴 시대 수도원의 유적이 남아 있으나 (LA 24 [19 74], 7 쪽 이하), 수사 에피파니우스와 유튀키우스가 언급한 (73 항) 그 교회 —— 이것 역시 아마도 비잔틴 시대의 것――는 발견되지 않았다. 고기잡이와 어업의 중심지, 그리고 유대인들이 호수에 뜬 그들의 배들을 타고 로마인에게 저항을 시도할 수 있었던 장소로서의 막달 라/ 타리 케 아 / 믹 달 누나이 야의 특성은 위 에서 도 살펴 보았으며 (73 항),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실은 막달라 항구의 위치가 확인되고 그 도면이 그려졌다는 것이다 (Nun, Anc ien t Anchorag e s, 20 쪽 이하; IDB-S 561 쪽). 1986 년에 가뭄이 장기화되어 갈릴리 바다의 수면이 내려갔을 때, 막달라의 북쪽으로 약 1 마일 떨어진 앞바다에 노출된 바닥에서 고대 배 한 척의 외관이 발견되어, 그 진흙으로부터 파내져서 , 좀더 북쪽 의 호안에 위치한 킵부츠 긴노사르Ki bbu t z G inn osar 에 있는 이갈 알론 박물관 Y ig al Allon Museum 으로 옮겨져서 보관되고 있다. 현존 하는 의관은 길이가 26 . 5 피트이고, 가로들보가 7.5 피트, 그리고 깊이 가 4.5 피트이다. 이 배에는 돛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돛으로 갈 수도 있었고 노를 저어 갈 수도 있었으며, 아마도 커다란 고물 갑판 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막 4:38 참고). 탄소 -14 에 의한 연대 측정에 의하면, 이 배룰 건조하는 데 사용된 목재는 B.C . 40 년士 80 년,

죽 B.C. 120 년으로부터 40 년 사이에 절단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 배 근처의 진흙 속에서 발견된 도기는, B.C. 1 세기 말엽과 1 세기의 중엽 이후까지, 즉 70 년 경까지의 전형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배는 로마인들과의 그 비참한 해상 교전 때에 막달라의 유대인들이 사용 한 배와 같은 종류일 뿐만 아니라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탄 것과 똑 같은 종류의 배였음에 틀림없다. 75 게네사렛 평지 막달라 근처에 있는 언덕들로부터 북쪽으로 호안을 따라 언덕진 곶으로 가면, 키르베트 엘-민예 Khirbe t el- Mi ny eh 로 알려진 폐허가 있는데 그 거리는 약 3 마일이다. 내륙으로 약 1. 25 마일 뻗어 있는 이 곳에는 쾌적하고도 비옥한 평지가 있다.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가, 위의 73 항에서 본 바와 같이 타케리아 즉 막달라를 탈취한 후에 피난처룰 찾아 배를 타고 호수 안으로 들어간 도망자들을 추격하기 위하여 펫목을 준비했는데 (War III 10, 6 §505), 이 지점에서 요세푸 스는 그의 전쟁과 관련된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중단하고, 바로 그 근방에 있는 호수와 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가 겐네사르 Gennesar 라고 부르는 (69 항 참고) 그 호수의 이름은 인접한 지역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말하면서 (War III 10, 7 §506) 그는 그 지역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War III 10, 8 §§516-521). 겐네사르 호수를 둘러싸면서 또한 그 이름을 지니고 있는 한 지역이 있는데, 그곳의 천연 자산과 아름다움은 매우 현저한 것이다. 그곳에는 그 비옥한 토양 덕분에 결실을 맺지 못하는 식물이 하나도 없었다. 경 작자들은 실제로 온갖 종류를 다 가꾸고 있으며, 기온은 너무나 잘 배 합되어 있어서 성격이 정반대되는 식물들에게도 모두 적합하다. 가장

쌀쌀한 기후를 좋아하는 나무인 호두나무가 여기서 무성하게 자라고, 그 바로 곁에는 열을 받아야 번성하는 종려나무들과 비교적 온화한 대 기를 요구하는 무화과나무들과 감람나무들이 함께 자라고 있다 . 자연은 놀라운 재주로 가장 조화가 되지 않는 종류들을 이와 같이 한 곳에 모 아 놓은 것에 대하여 자부심을 느꼈으며, 각 계절은 행복한 경쟁 관계 를 통하여 이 지역이 각기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살았다고 사람들 이 말할지도 모른다. 약간의 부가적인 세부 사항들을 말한 다음에 그는 부연하기를, 이 지역이 호수의 경계선을 따라서 그 길이가 30 스다디온까지 뻗어 있 으며 내륙으로는 20 스다디온까지 깊이 들어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가 방금 그 한계를 정한 평지에 대한 대략의 규모이다. 이곳이 바로 요세푸스가 묘사하고 있는 지역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 할 여지가 없다 . 이리하여 우리는 그 평지의 이름이 겐네사르 또는 복음서(마 14:34 등)에 나타나는 게네사렛 Gennesare t이었음을 알게 된댜 사진은 북쪽으로부터 보이는 게네사렛 평지를 보여 주고 있다. 오 른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는 와디 엘-하맘 Wa di el-Hamam 의 입구 가 있고, 그와 함께 앞에 서 본 (73 항) 아르벨라 Arbela 고지 가 있고, 지평선을 배경으로 하는 〈핫틴의 뿔들 Homs of Ha ttin〉이 있다 (71 항 참고). 76 게네사렛 평지에서 본 갈릴리 바다 5000 명을 먹이신 후에 예수의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의) 건너편으로〉(마 14:2 2 ), 또는 〈건너편 벳새다로〉(막 6:45) 가야만 했다. 벳새다는 필시 갈릴리 바다의 북쪽 끝에, 그리고 요단강 저쪽

편 동쪽에 있는 키르베트 엘-아라즈 Khirbe t el-'Ara j에 위치해 있었 다(1 04항). 이와 같이 벳새다가 호수의 동편에 있었던 것으로 간주할 때, 만약 제자들이 〈건너편 벳새다로〉 가고자 배를 탔다면, 그들의 출발점(및 5000 명을 먹이신 곳)은 호수의 서편에 있는 어떤 장소였음 에 틀림 없다 (Sherman E. Joh nson in 1B VII, 432 쪽). 그들이 호수로 나왔을 때 폭풍이 일어 저녁부터 밤 4 경(四更, 오전 3 시에서 6 시 사 이)까지 계속되었고, 이 폭풍 가운데서 〈바람이 (그들에게) 거슬리〉 게(마 14:24; 막 6:48) 불었으므로, 그 바람은 북풍 또는 북동풍이었 음이 분명하댜 이와 같은 사실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호수를 관류 (貫流)하는 요단 강의 자연적인 흐름과 더불어, 그들이 분명히 남쪽 및 남서쪽으로 떠밀려가서 게네사렛 또는 겐네사르(마 14:34; 막 6:53, 두 가지 철자 모두가 여러 가지 필사본들에서 발견됨)에 착륙한 사실을 설명해 준다. 이렇게 이해할 때 위에서 언급한 사항들은 마 태와 마가의 이야기에 수록된 5000 명을 먹이신 현장이 호수의 서쪽 에, 그리고 아마도 게네사렛 평지의 근방 어느 곳에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이, 좀 다르게 기록된 평행 구절로 간주될 수도 있는 사건, 죽 4000 명을 먹이신 사건에서 마지막 여행은 마가단(마 15:39) 또는 달마누다(막 8:10) 에서 끝나는데, 아마도 이 두 지명은 모두 그 동일 한 평지의 남쪽 끝에 있는 막달라(위의 73 항 참고; 그리고 두 경우에 있어서 어떤 필사본들에서는 막달라가 이문 독법[異文讀法]으로 나타나 고 있음을 주목하라)를 뜻하며, 이 그럴듯한 상황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설득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4000 명 또는 심지어 5000 명을 먹이신 장소로 호수의 동편을 가리키는 다른 증거가 있다(아래의 105 항 참고)• 하여튼 서쪽 연안에 있고 전반적으로 게네사렛 평지의 근방에 위치한 5000 명을 먹이신 장소는 최초의 순례자들에 의하여 확인된 가장 오래된 전승에서 발견되는 곳, 죽 엣一탑가 e t -Tab g ha 이

며, 이것은 아래의 애테리아의 기록에서 보게 될 것이다 (77 항). 이 사진은 게네사렛 평지에서 본 갈릴리 바다의 광경이다. 77 탑가에 있는 〈오병이어 교회〉의 구도 게네사렛 평지의 북쪽 끝에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언덕진 갑(대甲, 곶)이 있는데 (75 항), 그 위에는 키르베트 엘-민예 Khirbe t el- Mi ny eh 라 고 불리는 폐허가 있다 . 이곳은 1187 년에 살라딘 Sala di n 이 방문한 때부터 아랍어 이름인 민예 m i n y e h!.료 일컬어진 곳이다. 1932 년에 A. E. 마더에 의하여 시작된 발굴 작업의 결과로 제 7 또는 8 세기의 아 람인 궁전이 드러났는데, 이것은 정사각형으로 건립되었으며 모퉁이 돌에는 둥근 망대들이 있었고, 남동편에는 맥카 Mecca 를 향한 기도 의 방향을 가리키는 미람rnihr ab 을 가진 사원이 있었다. 북쪽으로 300 야드 떨어진 곳에는 호안으로 가파르게 경사지고 아랍어로 텔 엘_ 오레이메 (Tell el-'Ore im eh) 로 알려진 토루가 있다. 1929 년에 A. 이르 쿠A. Jir ku 는 이 텔에서 후기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 II 기의 도기 를 발견하였고, 1932 년에 A. E. 마더 와 R. 됩 펠 R. Ko ppe l 이 실시 한 측심(測深) 조사는 후기 청동기 시대에 괄목할 정도로 번성했던 한 중요한 도시의 존재를 확인했다. 실제적인 발굴은 1939 년에 괴레스 학회 Gorres Soc i e ty가 카이로 소재 독일고고학연구소와의 협력 아래 수행하였고, 1982 년 이후로는 독일연구협회가 수행하였는데, 이 도시의 역사는 철기 시대에까지 이 르는 것으로 밝혀 졌다 . 이 곳은 아마도 투트모세 III 세 Thutm o se III 의 목록(ANE T 242 쪽)과 구약(신 3:17 ; 수 1l:2 ; l9:35) 에 서 언급된 긴 네 랫 Kinne ret( Kinn ereth , Ch inne reth , Ch inne roth ) 도성 이 었을 것 이 며 (Da lman, Sacred Sit es, 130 쪽), 이 이 름으로 인하여 그 호수가 긴 네렛 바다 Sea of C hinn ere th라고 불리게 되었다(민 34:11, 둥; 위의

69 항 참고). 헬라 시대에 게네사랫 Gennesare t h 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도성이 그 평지의 남쪽에 세워졌으며, 바로 이 도성으로부터 그 평지 와 그 바다가 모두 게네사랫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75 항). 텔 엘-오레이메 옆에 있는 연안을 따라서 길이 뚫리기 전에는 그 쪽으로 지나갈 수가 없었으며, 주된 도로는 서쪽에 있는 계곡을 통 하여 나 있었고 이 산에서 내려다 보였다. 이 길은 이사야 9:1 (MT 8:23) 에 언급된 고대의 바닷길 Way of the Sea(C.,i1 7 더., [데레크 하 양])로서, 스불론과 납달리 땅을 통과하는, 다시 말해서 이방의 갈릴 리(위의 69 항 참고)를 통과하는 것이다. 이 도로는 메소포타미아로부 터 와서 다메섹울 경유하여 요단 강을 건너고 하솔을 통과해 내려왔 으며, 계속해서 가버나움과 〈일곱 샘〉과 긴네렛을 지나서 막달라까 지 왔다. 그곳으로부터 이 도로는 와디 엘 - 하맘 Wad i el-Hamam(73 항 참고)을 통과하여 에스드랠론 평지 Plai n of Esdraelon 를 건너서 므깃 도에 있는 통로에 이르고, 그 다음에는 지중해 해안을 끼고 내려가 서 애굽에 다달았다. 여러 지선(支線)들을 가진 이 노선은 태고적부 터 사용된 국제적인 대로였으며, 예수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쇄도하 던 길이었고, 중세에는 해양로 V i a M ari s 라고 불리던 유명한 길이다. 텔 엘-오레이메로부터 호안을 따라 좀더 북쪽으로 반 마일 조금 더 가면 엣 一 탑가 e t -Tab g ha 에 이르는데, 이 이름은 헬라어 이름 헵 타페곤 He ptapeg on( 五떠Jtll VOY [:xw pl o v]), 죽 〈일곱 샘〉이 있는 마을이 라는 말이 아랍어로 바뀌면서 와전된 것이다. 이곳에는 와디 엣 ― 자 무스 Wadi ed- J amus 로부터 내 려 와서 쌓인 침 적 토로 형성 된 작은 평 지에 참으로 풍부한 샘들이 있으며, 평지는 이 지점에서 호수로 내 려간다. 요세푸스는 아마도 이 작은 평지를 좀더 큰 게네사랫 평지 의 일부로 간주하였으며, 실제로 그 샘의 물은 수로를 통하여 키르 베트 엘-민예의 근방으로 두루 보급되었다. 하여튼 요세푸스는 겐네 사르 지 방에 관한 그의 기술에서 말하기를 (War m 10, 8 §519), <이

고장은 그곳 주민들에 의 하여 카파르나움 Cap h amaum (Ka(}l a pv a oiJ µ) 이라고 불리는 매우 비옥한 샘물로 적셔진다〉고 하는데, 이 샘이 헵 타페곤에 있는 주요 샘들 중의 하나가 아닐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 샘의 이름이 가버나움을 따서 붙여졌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 니다 왜냐하면 가버나움은 호안을 따라서 불과 1. 25 마일만 더 가서 있는 텔 훔(아래의 없항 참고)에 위치했음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 요세푸스는 첨언하기를, 어떤 이들은 그 힘있는 샘물을 나일 강의 지류로 상상했다고 하며, 이렇게 믿는 일은 그 샘물에서 알렉산드리 아의 호수에서 발견되는 코라친 cora ci n 과 비슷한 물고기가 나왔다는 사실에 의하여 고무되었다. 가버나움은 예수의 갈릴리 봉사에 있어 중요한 중심지였으므로(마 4:13 ; 등등), 그 근처에 있는 〈일곱 샘〉의 평지도 역시 그 분의 사업 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으며, 실제로 전승은 복음서의 여러 사건 들을 특별히 이 지역과 연관시키고 있다. 집사 베드로가 인용한 바와 같이, 순례자 애테리아 Ae th e ri a(381-384) 는 디베랴 바다와 디베랴, 그 리고 가버나움에 관하여 말하고, 〈일곱 샘〉의 지대에 관해서는 다음 과 같은 기술을 제공하고 있다 (GEYER 113 쪽 ; CCSL CLXXV, 99 쪽 ; W訂 196, 200 쪽) 그곳으로부터(즉 가버나움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주께서 서 계셨 던 돌 계단들이 있다. 그 동일한 장소의 바닷가에는 마른 풀과 많은 종 려나무가 충분한 풀밭이 있고, 그 근처에는 〈일곱 샘〉이 있으며, 이 샘 들은 각기 풍성한 물을 쏟아내고 있는데, 이 풀밭에서 주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써 백성들을 먹이셨다. 정말 주께서 떡을 올려놓 으셨던 그 돌은 제단으로 만들어져 있어, 이제 그곳으로 오는 사람들은 자신의 치료를 위하여 이 돌을 조각내어 가져가고, 그것은 모든 사람에 게 유익을 준다. 교회 eccles i a 의 벽돌 가까이로 공공 도로가 지나가는

데 , 이곳에 마태 사도가 그의 세무서(th eloneum [텔로네움]=CEMJ V t OV [텔로니온])를 가지고 있었다. 그 근처에 있는 산에는 구주께서 오르셔 서 팔복 Bea titu des 을 말씀하신 동굴이 있다 . 한편으로 , 그곳으로부터 멀지 않는 곳에는 구주께서 저주하신 회당이 있다 .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 확인된 북음서의 사건들에 대한 전통적인 위치 추정은 다음과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 (1) 〈주께서 서 계셨던 돌 계단들〉――부활 후에 갈릴리 바다에 출현하셨을 때(요 21:4) 예수께서 해변에 〈서셨던〉 장소 (2) 〈주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써 백성들을 먹이신〉 풀밭 __ 5000 명 을 먹 이 신 곳(마 14:13-21 ; 막 6:30-44 ; 눅 9:10-17 ; 요 6:1-13) (3) 〈마태 사도가 그의 세무서를 가지고 있던〉 공공 도로――마태 를 부르신 곳(마 9:9 ; 막 2:1 4 ; 눅 5:27) (4) 〈구주께서 오르셔서 팔복을 말씀하신〉 산과 동굴 _r 산상 수 훈(山上垂訓)』을 말씀하신 〈산〉(마 5:1) (5) 〈구주께서 저주하신 회당〉-고라신 도성에 있던 회당(마 11:2 1 ) 1886 년에 탑가 Tab g ha 는 독일 (가톨릭) 성지 협회의 손에 넘어갔 고, 서쪽 지역과 동쪽 지역이 콜로니아의 베네딕트회와 프란체스코 성지 관리국에 의하여 각기 유지되었으며, 이 지역들은 마침내 1933 년에 경계가 지어졌다. 이 지대 전체에 대한 고고학적 탐색으로 인 하여 세 개의 고대 건물의 유적들이 드러났는데, 이것은 분명히 애 테리아가 쓴 구절에 나타난 사건들 중의 세 개를 기념할 의도로 지 어진 건물이며, 지금은 〈오병이어(五耕二魚) 교회 Church of the Multip lica tio n of the Loaves and Fis h es)>, 〈팔복 예배실 Chape l of the Beatit ud es> 그리고 〈성 베드로의 수위권 예배실 Chape l of the

Pri ma cy of St. Pe t er 〉로 알려져 있다. 애테리아가 명백하게 언급한 것은 단지 그 첫번째 사건의 현장에 있던 한 교회뿐이긴 하지만, 다 른 두 사건의 현장에 관해서도 그녀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 두 장소도 기념 건물로써 이미 표시가 되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세 현장이 모두 그녀의 시대, 죽 제 4 세기의 후반에 이 미 그렇게 표시가 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먼저 5000 명을 먹이신 사건을 기념한 것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이 위치가 복음서의 기록에 나타난 여러 가지 암시들과 부합한다는 사실은, 1968 년에 벨라르미노 바갓티 Bellam rino Ba g a tti와 스타니슬 라오 로프레다 S tani slao Lo ffr eda 가 수행한 탑가 지역에서의 탐사와 발굴로 확실해졌다. 일반적으로 이 지대는 앞에서 이미 묘사한 샘에 의하여 잘 표시될 뿐만 아니라 또한 검은 현무암과 석회석 반석의 노두( 露 頭)에 의해서도 명확히 나타나 있으며, 또한 앞바다에서 고기 잡이가 매우 잘되는 것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곳엔 파괴된 급수탑 이 여러 개 있는데, 이것들은 현무암 토막으로 건조되었으며 물을 끌어올려 관개 수로로 흘러 들어가게 하고 물방아들을 돌리는 데 사 용되었댜 이상스럽게도 이것들은 함맘 아이융 HammamA yy ub( 욥의 목욕탕), 탄누르 아이융 Tannur Ay y ub( 욥의 가마), 그리고 비르케트 알리 엣-다헤르 B i rke t Ali ed-Daher( 알리 다헤르 못)라고 일컬어져 왔다. 그러므로 초기에 추정되기로는 예수의 시대에는 탑가가 경작 지대였으며 가버나움을 위한 산업 중심지였다. 하지만 오늘날 발견 된 바는, 제 2 세기 초엽(연대가 108/109 년으로 매겨지는 트라야누스 Traja n 시대의 도기와 주화에 나타난 바대로)에 이곳에는 어떤 농사 짓는 일이나 마울이 있었다기보다는 광범위한 채석장이 있었으며, 모든 석공 건물들은 복음서 시대보다는 더 늦게 지어졌고, 급수탑들 은 4 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건립되었으며, 물방아들은 터키 시대까지 만 거슬러오른다는 사실 동등이다. 따라서 복음서 시대에 탑가는 격

리되고 이용되지 않던 지역이었으며, 농사에는 적합하지 않아 마을 이 들어설 자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의 탑가는 복음서에 기록된 지형학적 세부 사항들과 잘 조화된다 . 그 장소는 적막하여 쉬 기 에 적 절 했다( 막 6:31 __ 〈너 희 는 따로 한적 한 곳 EPT l)lOV ,:6 J{ OV 에 와서 잠깐 쉬어라〉) . 그곳은 호안(湖岸)과 가까웠다(막 6 : 32 ―一〈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쌔〉). 그 근처에는 산들이 있었다(요 6:3, 15). 탑가 자체가 격리되어 있기는 했지만, 농장과 고을까지는 매우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 사람들은 그 고을로부터 도보로 달려서, 배를 타고 오시는 예수보다 먼저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막 6:33), 제자들은 농장과 고을로 두루 나가서 음식을 사먹자고 제안할 수가 있었다(막 6:36). 5000 명을 먹이신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장소에 세워진 교회의 발견과 탐사에 관하여 말한다면, 떡덩이와 물고기들이 있는 바닥 모 자이크는 제 19 세기 말에 비르케트 알리 엣-다헤르 B ir ke t Ali ed- Daher 급수탑 근처 에 서 제 퍼 린 비 버 Zeph eri n B i ever 에 의 하여 발견 되었다. 이 지대는 1911 년에 파울 카르게 Paul Karg e 에 의하여 계속 조사되었고, 그 후 1932 년에 안드레아스 E. 마더 Andreas E. Mader 와 알폰스 M. 쉬나이더 Alfon s M. Schne i der 가 독일 가톨릭 괴레스 협회 German Cath o lic Gorres Gesellsch aft를 대표하여 발굴 작업을 수행하였으며, 1934 년에 쉬나이더에 의하여 독일어로 출판되었고 , 1937 년에는 『떡덩이와 물고기를 많게 하신 교회 The Church of the Multip ly in g of the Looves and F is hes( 오병 이 어 교회 )』 라는 제 목으로 영역본이 나왔다. 1932 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전체 복합 건물 (Schne i der 80 쪽의 맞 은편에 있는 구도 1) 의 바깥 벽들은 불규칙적인 직사각형(엄격히 말해 서 사다리꼴)의 형태로 되어 있다. 방향은 동쪽으로 나 있고 북쪽 벽 은 약간 비스듬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그 옆으로 뻗어 있

던 고대의 도로 때문이었을 것이다. 의부 측량에 의하면, 전체 복합 건물의 길이는 58 미터이고, 동쪽 끝의 폭은 24.3 미터, 서쪽 끝의 폭 은 33 미터이다. 서쪽 끝에 있는 안뜰(여기에 제시된 구도에는 보이지 않음)은 23Xl3 미터 크기에, 서쪽과 남쪽에는 여행자 숙박소 hos pi ce 및 다른 방들이 있었으며, 이러한 방들은 배랑(拜廊, n arth ex) 과 바실 리카 본체의 양편에도 이어져 있었다. 배랑(제시된 구도의 P) 의 크기 는 19X 3 .3 미터이다. 바실리카 본체(길이 33 미터)는 다섯 개의 석주 로 된 두 줄의 석주열에 의하여 각각 회중석 (L) 과 두 개의 측랑들 (I 와 K) 로 나뉘어 있다. 또한 홀을 가로질러 뻗어 있는 한 줄의 석주를 가진 직사각형의 수랑(柚廊, tr anse pt)과 교차되어 있다. 여기에 둘러 싸여 커브를 이루고 있는 후진은 깊이가 3.5 미터이다 (C). 후진 바로 앞에는 떡덩이와 물고기들을 그린 모자이크(D)가 있었 고, 이 모자이크 앞에는 거친 석회석 덩어리(E)가 1 미터 길이로 놓 여 있으며, 그 위에는 한때 제단 상이던 것이 있었다. 그 돌 주변의 네 모퉁이에 있는 바닥의 네모난 구멍들은 그 제단을 떠받치고 있던 네 개의 작은 석주들이 그곳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그 돌에 있는 한 구멍은 한때 하나의 금속 십자가가 그것에 박혀 있었 음을 보여 준다(그 돌과 그 제단 상을 위한 표시들이 그 모자이크에 대 하여 가지는 관계에 관해서는 Schneid e r 14 쪽 이하, illus . 2 와 22 쪽, illus . 2 c 를 보라). 분명히 이 돌은 신성한 돌이었으며, 이 위치에서는 교회의 초점이 되는 역할을 하였다. 78 〈오병이어 교회〉의 떡덩이와 물고기의 모자이크 위에서 이미 언급된 (77 항) 떡덩이와 물고기들의 모자이크는 네 개 의 떡덩이가 보이는 바구니를 보여 주는데, 각 떡덩이에는 십자(十 字)가 그려져 있으며, 바구니 양편에는 물고기가 한 마리씩 놓여 있

다. 양편의 바깥쪽에는 금강석 모양의 표시가 또한 그려져 있다. 떡 덩이와 물고기들은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 자주 나타나고, 성만찬 및 하늘의 식사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기 탑가에서 특별히 고려된 것은 5000 명을 먹이신 이적(異蹟)이라 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다섯번째 떡덩이는 그 바 구니의 속에 깊숙히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복음서에 제시된 바 떡덩이는 다섯 개요 물고기는 두 마리였다는 이야기를 그대로 따 르고 있는 것이다. 79 〈오병이어 교회〉에 있는 물새와 늪 식물의 모자이크 떡덩이와 물고기들의 모자이크 (78 항)에 더하여 , 그 바실리카의 바닥 전체(약 500 평방미터)가 원래는 모자이크로 덮여 있었고 그 중에서 약 절반 가량이 보존되어, 1936 년에는 베론하르트 가우어 Bernhard Gauer 가, 1970 년과 그 이후로는 도도 조세프 셴하브 Dodo Jos eph Shenhav 가 수행한 복원 작업의 대상이 되었다(후자의 경우에는 없어 진 부분들이 재구성되기도 하였으며, 그렇게 재구성된 것으로 분명히 표 시가 되었다). 잔존하는 각석들의 평균 크기에 기초하여 추산컨대, 원래 그 전체 작품에 포함된 각석들의 수효는 700 만 개쯤 되었을 것 이 다 (Gauer in JPO S 18 [1938], 238 쪽) . 잔존하는 주요 부분들은 회중석 (77 항 , 구도의 L) 과 북편 측량 (I) 에 서는 기하학적 및 기타 양식으로 그려져 있고, 수랑(柚廊)의 북쪽과 남쪽 날개방들 (G 와 H) 에서는 동물과 식물로써 그려져 있다. 후자는 가장 눈에 띄는 것들이다. 백색과 흑색으로, 자주색, 홍색, 갈색, 그 리고 황색으로 아름답게 제작된 이 모자이크들은 허다한 늪 식물들 marsh p lan ts과 물새 wa t e rf owl 가 있는 호수의 풍경 을 나타내 고 있 다. 연꽃과 파피루스와 협죽도(來竹桃, oleander), 그리고 엉겅퀴처럼

생긴 관목들 사이에 있는 오리와 비둘기, 왜가리와 거위 , 가마우지 cormoran t와 홍학(紅 鶴 ), 물뱀이 보인다. 또한 건축의 특징들도 몇 가지 포함되어 있다. 북쪽 수랑에는 피라밋 꼭대기처럼 생긴 탑이 있는데, 이것은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스가랴의 무덤 (267 항)과 같은 기념 묘비일 것이며, 두 개의 망대가 있는 도성 대문이 하나 있고, 하나의 정자도 있다. 남쪽 수랑에는 헬라어 글자 바우 vau, 제타 ze ta, 에타 e ta, 테타th e ta, 그리고 요타i o ta로 표시된 여러 층으로 나눠진 탑이 있는데, 이 글자들은 6, 7, 8, 9, 10 이라는 숫자와 일치하는 것으 로서 , 아마도 호수의 물 높이를 측정하기 위한 나일 강 측수계(測水 計 )와도 같은 발명품이었을 것이다. 연꽃과 나일 강 측수계처럼 생긴 탑은 직접 또는 간접으로 애굽의 영향을 받은 것을 반영하는 듯하지만, 다른 모든 식물들은 갈릴리의 토종들이고 새들은 모두 적어도 한 해의 일부를 그 호수 근처에서 보낸다 (Shenhav in BAR 10.3 [May/ Ju ne 1984], 28 쪽). 그 작품과 미 지의 대예술가에 대하여 원래의 발굴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구도가 잘된 구성, 자연을 관찰하는 사랑스런 마음씨와 제작 기법 의 우아함 …… 은 공예 기교에 있어서 전문가였던 한 사람이 교회 룰 위하여 특별히 착안하고 제작했다는 인상을 준다. …… 어떠한 주제도 두 번 반복되지 않았고, 각각의 식물과 동물은 특징적이며 나름대로의 고유한 동작과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미술가는 얼마나 큰 애정을 가지고 이 화려하게 채색된 새들의 무리 전체를 그릴까. …… 새가 스스로 멋을 부리면서 올라서 있는 나뭇잎을 …… 눈여겨 보라 그것의 윤곽의 아름다운 곡선과 그것이 나무 줄기 위에 앉아 있는 우아한 자태는, 그것의 작자가 이 세계의 미학적인 매력과 감 동적인 아름다움에 관한 충만한 지식을 부여받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임을 드러낸다 . …… 우리는 그의 이름이나 태생도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나, 이 지구의 한 외딴 모퉁이에 우리가 그의 손이 빚어낸

한 작품을 소유하고 있나니, 이것은 거의 사라져가지만 영원히 멸하 지 아니할 고대의 아름다움의 마지막 명멸(明滅)을 나타내는 것이 다〉 (Schne i der 78 쪽 이 하). 여기에 제시된 사진에서 우리는 북쪽 수랑에 있는 모자이크 (5.5X 6.5 미터, 가장자리에 연꽃 송이들이 있음)의 오른쪽 하단 모퉁이의 작 온 부분을 보고 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왜가리 한 마리가 연꽃 봉오리 속에다 부리를 집어넣고 있는 것과 오리 한 마리가 연꽃 송 이 위에서 쉬고 있는 것을 본다. 80 떡덩이와 물고기들의 모자이크 곁에 있는 모자이크 명각 모자이크 바닥이 있는 바실리카의 연대에 관하여 발굴자들은 제 4 세기의 말에 그 기초가 놓였다고 보았다 (Schne i der 80 쪽). 그러나 지 금은 일반적으로 그것이 제 5 세기에 된 것으로 본다(예컨대, Loff red a, Sawi di et- T abg lr l, 40, 42 쪽). 떡덩이와 물고기들의 모자이크 (78 항)는 거기에 사용된 돌의 크기 가 약간 큰 것으로 미루어 판단컨대 아마도 원래의 모자이크 포장이 만들어지고 나서 얼마 후에 추가된 것이며, 또한 그 근처에 명각들 을 포함하고 있는 다른 두 개의 모자이크 판들도 그러하였다 (Schne ide r 55쪽). 한 명각은 왼쪽 수랑의 모자이크 위에 있는데 약 자로 된 이것을 채워 넣어서 읽으면 다음과 같다. T[§] dv(tQ ) t 6 邱 Mvft oB (nC )t K(up t)e ~aup ou In this holy pla ce Lord remember Sauros.

이 거룩한 장소에서, 주여, 사우로스 를 기억하소서. 여기서 우리는 어쩌면 그 떡덩이와 물고기들의 모자이크를 만들 었고 그 두 명각을 기록한 바로 그 미술가 자신의 이름을 얻고 있는 지도 모론다. 둘째 명각(여기에 보이는)은 떡덩이와 물고기들의 모자이크에 바 로 인접해 있으며(그 관계에 대해서는 Schneid e r 15 쪽, illus . 2 를 보 라) , 그것을 전사( 轉寫 )하여 번역하면 이렇다. . + 'Yn tp µvitµ Jlc,; [KaL] a.va nail crE w[c,; ] i:oi i np (o cr)EVE :V Ka[v]i: (o c ,;) ocr(t ou ) nai: pL M[ h[ ] …… + To the memory and the rep os e of the spo n sor, the holy Patr iar ch …… + 후원자 , 거룩한 총대주교 …… 를 추념하여 모시며 …… 본문의 손상된 끝부분에 있는 총대주교의 이름 가운데 첫글자인 자와, 그 다음에 없어진 두 글자 뒤에 자가 살아남아 있다. 제 5 세기로부터 제 7 세기까지 예루살렘 교회의 총대주교들 중에서 3 명 의 이름이 〈 M 〉으로 시작한다. 죽 마르튀리오스 M artyri os(478-486), 마 카리 오스 Maka rios (565-5 7 4), 그리 고 모데스투스 Modestu s (631-634) 가 〈 M 〉으로 시작되는 총대주교들인데, 이들 중에서 자와 자를 가졌고 그 사이에 공간이 있어야 하는 요구 사항들을 충족시키 는 것은 마르튀리오스의 이름이다• 셋째 줄의 〈후원자〉로 번역된 단 어가 np oc revt VK et v (프로스에넹케인, 〈설립하다t o fou nd> 또 는 〈바치다 to d edi ca te〉)이라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추정하면, 우리는 여기에 그

모자이크 바닥의 기증자와 어쩌면 그 제 5 세기 건물 자체의 설립자의 이름을 얻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르튀리오스는 이 밖에도 베다니의 동쪽에 있는, 그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수도원의 설립자로도 알려 져 있으며, 청년 시절에 그는 애굽에서 살았다. 그가 그 모자이크 바 닥을 만들기 위하여 애굽으로부터 모자이크 제작가를 데려왔으리라 는 생각은 합리적인 추측이며, 그 작품에 애굽의 영향이 나타나는 것도 바로 이때문일 것이다. 81 현대의 〈오병이어 교회〉 1936 년에, 발굴된 교회의 관리인인 룹퍼 Tupp er 신부의 감독 아래 베른하르트 가우어 Bernhard Gauer 는 모자이크 (79 항)의 복원 작업을 하다가 그 아래에 있는 초기의 예배실을 발견하였다 (Schne i der 10 쪽, n. 2; Gauer 244 쪽 이하). 이것은 돌출한 후진을 가진 직사각형의 홀 이지만 후기의 바실리카보다는 훨씬 작은 건물로, 후진을 포함한 길 이가 17.3 미터에 불과하고 폭은 8 미터밖에 안 되었다. 그 위에 세워 졌던 바실리카의 방향이 정동향인 것에 비하여, 이 예배실은 남쪽으 로 28 도 기울어져 있었다. 여기서도 예배실의 초점은 후진 앞에 있 는 하나의 큼직한 석회석 조각에 있었는데, 아마도 이것으로부터 돌 이 취해져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겨진 후 후기에 세워진 교회의 제단 아래 놓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Schne i der 21 쪽 이하 ; 그리고 illus . 2 ; Gauder 249 쪽). 첫번째 〈오병이어 교회〉였던 이 낮은 예배실의 연대에 관하여 분 명한 사실은 그것이 그 위에 있던 제 5 세기의 더 큰 바실리카보다는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으로, 따라서 그것은 일반적으로 제 4 세 기의 것으로 여겨져 왔다(예컨대 Loff red a, Scavi di et- T abg ra , 40 쪽). 만약 그 연대가 그 세기의 중엽이라면, 이 교회는 애테리아가 언급

한 교회 (77 항)일 것이며, 또한 디베랴의 유대계-기독교인 요셉 백작 Count J ose ph 에 의하여 그 무렵에 세워진 갈릴리 교회들 중의 하나 였을 수도 있다 (Schne i der 80 쪽 ; KROLL 246 쪽 ; 위 의 45 항 참고). 요 셉 백작이 한 일과 관련하여 가버나움이 언급되어 있으나 (45 항), 애 테리아는 말하기를 가버나움에는 성 베드로의 집의 벽들이 그녀의 시대 (381-384) 까지 〈옛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고 하므로 (99 항), 그 곳에 새 교회의 전체는 아직도 세워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 므로 요셉이 한 일은 가버나움 그 자체에가 아니라 가버나움으로부 터 멀지 않는 탑가에 건물을 지은 것일 수도 있다 (Pixn er in BA 48 [1985], 198 쪽) . 파울 카르게 Paul Kar g e 가 1911 년에 이곳에서 수행한 작업을 통하여 그 교회 안뜰의 서쪽 입구에서 나온 포장석(錦裝石) 들 가운데 하나의 커다란 현무암 덩어리(그 후로 상실됨)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심하게 마무된 명각에 〈요세포스J ose po s(1W CJTlJt O<;) 〉라는 사 람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이 본문이 디베랴의 요셉과 어떤 관계 가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그것은 장례의 성격을 띤 것으로, 요세포스 또는 다른 어떤 사람에 관하여 말하면서 〈그는 24 년을 살 았다〉(g (n (J CV gtn K6')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Schne i der 33 쪽) . 하여튼 〈일곱 샘〉에 있는 교회 안에는 제단이 된 돌이 있었는데 이 돌은 주께서 무리를 먹이실 때 떡을 얹어놓은 곳이며, 이 교회가 공공 도로 곁에 위치했다고 하는 애테리아의 기술 (77 항)은 발굴 작 업에서 나온 발견물들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첫번째 〈오병이어 교회〉이 그녀의 당시 (381-384) 에 그곳에 존재했을 가능성 을 매우 높게 해 준다. 1 CJ7 0 년의 측심(測深) 조사에서 스타니슬라오 로프레다 S tani slao Lo ffr eda 가 구도 (77 항)의 G 로 표시된 지역의 폐허 에서 호노리우스 Hono ri us 황제의 주화를 발견한 것은 사실이며, 이 것은 395-408 년 사이에 주조된 것으로 따라서 첫번째 교회는 395 년 이후에 세워진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i n LA 20 [1CJ 70 ], 378-380 쪽).

다른 경우에서 발생한 바 있는(8.5 , 89 항) 고전학적 증거의 불 확 실성 에 비춰볼 때, 이것은 애테리아의 증거를 능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애테리아의 증거는 첫번째 교회가 그녀의 시대, 즉 제 4 세기의 마지 막 몇 십년 간에 이미 알려져 있었음을 아직도 더 확실하게 보여 주 고 있다 (Kroll 443 쪽 , n. 199). 419 년에 비교적 맹렬하고 증거가 분명한 지진이 팔레스타인에 있 는 많은 성읍과 고을들을 파손시켰는데(IE ] l [1950-1951], 225 쪽 ; BASOR 260 [198. 5], 42 쪽 이하), 어쩌면 그때 이 첫번째 교회를 파괴 시키고 나중에 제 5 세기에 모자이크 바닥을 가진 더 큰 교회 를 짓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나중 교회는 또한 551 년의 지진으로 아 마도 매우 많이 파손되었을 것이다. 이 지진은 테오파네스 Theo ­ p hanes 의 『연대 기록 Oir onog ra p hia 』 에서 〈크고도 두려운 지진 ae t야 bc µtva c; Kal (p()p e p 6 c;〉이었으며, 팔레스타인 전역과 그 주위의 나라들 에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기록되었다 (CSHB 32, 352 쪽). 추후에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으나 (Schne i der 80 쪽) , 그 후 페르시아인 (614) 과 아랍 인 (638) 의 침입과 함께 최후의 파멸과 유기( 遺棄 ) 상태가 계속되었 다. 아르쿨프 Arc ulf가 670 년에 갈릴리 바다의 서쪽 연안을 따라 여 행했을 때, 그는 구주께서 떡덩이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써 5000 명을 먹이신 평평한 풀밭을 방문하였으나, 아무런 건물은 보지 못했고, 단지 몇 개의 석주들이 샘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것을 보 았는데, 이 샘은 사람들이 배고플 때 주께서 그와 같은 식사로써 원 기를 회복시켜 주신 날에 그들이 물을 마셨다고 하는 샘이다 (GEYER '1:1 3 쪽 ; LPPTS III-A, 43 쪽 이 하 ; CCSL CLXXV, 218 쪽 ; WJ P 108쪽).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떡덩이와 물고기들이 그려진 모자이 크의 재발견과 함께, 그리고 이어진 발굴 및 복원 작업과 함께 비로 소 연속해서 지어진 두 개의 〈오병이어 교회〉이 다시 밝혀지게 되었

다 . 1936 년에 베른하르토 가우어 Bernhard Gauer 가 모자이크를 수리 한 다음에 그 현장 전체에 지붕을 씌우고 간단한 홀을 주위에 둘렀 으며 (Schne i der 10 쪽, n. 2), 1956 년에는 베네딕트 수도원을 수용하기 위하여 두 개의 날개방이 추가되었다 . 1970 년대 말에는 제 5 세기의 비잔틴 교회와 동일한 양식으로 동일한 지상 구도에 새로운 교회를 짓기로 결정되었다. 흰 석회석으로 건조된 벽들은 제 5 세기의 초석들 위에 놓였으며, 새 석주들은 원래 있던 석주들의 자리에 서 있어서 , 다시금 희중석과 측랑들과 수랑을 가진 바실리카를 만들게 되었다. 유리로 된 판벽들은 제 4 세기 교회의 기초 벽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떡덩이와 물고기들의 모자이크 (78 항)만이 제단 뒤에 있던 그 원래의 위치로부터 제단 앞의 장소로 옮겨졌을 뿐 , 순례자 애테리아가 본 그 거룩한 돌은 전과 같이 제단 아래에 있다. 새 교회 __ 세번째 〈오병이어 교회〉-는 1982 년에 준공되어 헌당되었으며, 여기에 제 시된 사진에 보이는 광경은 안뜰울 가로질러 바라본 것이다. 82 탑가에 있던 〈팔복 예배실〉과 수도원의 구도 애테리아에 의하면 (77 항) 5000 명을 먹이신 장소를 표시하던 교회 의 벽들 바로 곁으로 공공도로가 지나갔으며, 그 근처에 있는 산에 는 예수께서 팔복 Bea titu des 을 말씀하실 때, 죽 「산상 수훈」을 베푸 실 때 올라가신 동굴이 있었다. 여기에 지적된 장소는 지금 프란체 스코 수도회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 위치는 가버나움으로 가는 현대도로 건너편으로, 〈오병이어 교회〉의 북쪽으로 300 미터 떨어진 언덕의 나즈막한 경사면에 있다. 이 장소에 대한 발굴 작업이 1935 년에 벨라르미노 바갓티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한 작은 예배실의 유적이 드러났는데, 발굴자는 이것의 연대를 제 4 세기로 보고 있다 . 건물은 직사각형으로 안뜰 또는 배랑 (4.5X2 . 5 미

터) 하나와 주된 홀(폭 4 .4미터, 길이 9.25 미터)이 있으며, 동쪽으로 불 거져 나와 있댜 일부분은 바위로부터 깎여 있고 일부분은 건조된 후진(깊이 1. 75 미터)이 포함되어 있다. 홀의 북쪽에는 하나의 작은 측 면 예배실이 역시 바위 속에 지어져 있다. 기하학적 양식과 꽃 양식 으로 된 채색 모자이크 바닥은 아마도 제 5 세기에 추가된 것이며, 이 것 가운데서 남은 것들이 후진 앞에 있는 회중석에서 발견되어 가버 나움으로 옮겨졌다. 그 회중석 아래, 그리고 후진의 앞쪽 어디쯤에는 남쪽으로 열려 있는 천연 동굴(길이 4.5 미터, 폭 2.2 미터, 그리고 깊이 3.5 미터)이 있는데, 이것이 어쩌면 에테리아가 지칭하는 그 동굴일 수도 있댜 예배실의 남쪽과 서쪽에는 경사면에 만들어진 안마당의 유적과 함께 건물들의 유적, 아마도 수도원의 유적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후일 비잔틴 시대에 그 예배실은 아마도 지진 또는 페르시아 인 (614) 과 아랍인들 (638) 에 의하여 손상을 입었으며, 그 후에 약간의 복원 작업이 있었으나 마침내 제 10 세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이 유 기되고 말았다. 印 현대의 〈팔복 교회〉 〈일곱 샘〉과 초기 〈팔복 예배실 Chape l of the Bea titu des 〉 (82 항)의 북동쪽에 있는 더 높은 언덕은 오늘날 팔복산 Moun t of the Be- a titu des 으로 알려져 있고, 그 정봉(頂峰) 근처에는 1938 년에 프란체 스코파가 A. 바를룻찌 A Barluzz i를 건축 책임자로 하여 건립한 현 대 〈팔복 교회 Church of the Bea titu des 〉이 있다. 건물은 여 덟 가지 의 축복들(마 5:3-10) 을 기 념하여 팔각형으로 되 어 있고 위 에는 큼직 한 돔이 있으며, 건물을 둘러싼 계랑이 있어서 이것으로부터 호수와 예수의 갈릴리 봉사 현장의 대부분을 바라볼 수가 있다.

84 탑가에 있던 〈성 베드로의 수권(首權) 예배실〉의 구도 〈주께서 서 계셨던〉 돌 계단에 관한 애테리아의 언급은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의 부활 현시(顯示) 때에 해변에 〈서계셨〉던(요 21:4) 곳인, 〈일곱 샘〉 곁에 있는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진 장소를 가 리키는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은 위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77 항) . 그 전체 이야기(요 21:4 - 19) 가운데 예수께서 제자들이 조반을 먹도록 초청하셨고 그들에게 먹을 떡과 물고기를 주셨으며, 후에는 베드로 와 대화를 나누시면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라는 사명을 주 심으로써 대화의 절정을 장식한 사실은 기억할 만한 일이다. 오늘날 탑가에 있는 그 작은 프란체스코파의 예배실 (1933 년에 건립됨)로 인 하여 표시가 된 그곳은 바로 이 전통적인 장소임이 분명하다. 이 건 물은 보통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을 초청하여 들게 하신 조반 식사 를 기념하여 〈주의 식탁 예배실 Chape l of the Table of the Lord 〉이 라고도 하고, 또는 베드로에게 지도력을 이양한 위임을 기념하여 〈성 베드로의 수권(首權) 예배실 Chape l of the Prima cy of St. Pete r> 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그 예배실 안에는 후자의 주제가 강조되어, 제단 위의 아치에 다음과 같은 위임의 말씀이 라틴어로 적혀 있다. Pasce Oves Meas (파셰 오베스 메아스). 그 예배실의 대지는 〈오병이어 교회〉의 남쪽으로 180 미터 떨어진 곳에, 호수의 연안으로 동쪽과 남쪽을 향햐여 곧바로 떨어지는 바위 로 된 단지 위에 놓여 있다. 이 대지에 대한 발굴 작업이 1968 년에 탑가 지역 조사의 일환으로 바갓티와 로프레다에 의하여 수행되었 다 (77 항). 바위에 남겨진 작업의 혼적들은 이곳이 석회석을 채석하던 장소 였음을 말해 준다. 예배실의 북편에 있는 바위의 절단부(구도의 바위 덩어리 H 근처)에서 108/109 년의 것인 트라야누스 황제의 주화가 발

견되었으며, 이것은 역시 거기서 발견된 로마 시대의 도기와 더불어 그 채석장이 제 1 세기의 말부터 제 4 세기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제 4 세기에 채석 작업이 돌연히 끝난 것이 분명한데, 왜냐하면 측면을 따라 절단은 되었으나 암반으로부터 옮겨지지는 아니한 두 개의 직사각형 돌덩이가 발견되었고(구도에서 F 자 근처), 그 돌 근처에 있는 갈라진 틈 속에 두 개의 철쐐기가 그 자리에 그 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추측건대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기독교인들이 들어와서 그들의 첫 예배실을 지을 수 있던 때로, 아마도 첫번째 〈오병이어 교회〉 (81 항)와 〈팔복 예배실〉 (82 항)이 건립된 시기와 같은 무렵이었을 것이다. 예전에 채석장이던 장소가 선택된 것은 이곳이 참으로 거룩한 기념의 장소였다는, 오랫동안 내려온 전통 때문이었 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곳에 있던 첫번째 예배실은 분명히 매우 작은 것이었으며 따라 서 제 4 세기의 중엽 또는 말엽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것으 로부터 남은 것이란 약간의 유적, 죽 몇 개의 홑어진 벽과 흰 회반 죽 조각들, 그리고 도기뿐이다(주로 구도에서 R 로 표시된 지역에서). 아마도 제 5 세기의 전반 어느 때에 좀더 큰 예배실이 세워졌는데, 발 굴자들은 이 예배실의 벽을 현재 있는 예배실의 북쪽, 남쪽, 서쪽 벽 의 기초에서 찾아내었다. 이것이 여기에 제시된 구도에 윤곽이 그려 진 건물인데 이 윤곽은 발굴 작업에 기초하여 작성된 것이며 (Loff red a, Sazvi di et- T abg ln , 54 쪽, 그림 17), 이 미 약 30 년 앞서 바 갓티에 의하여 작성된 구도와 실질적으로 일치하고 있다(같은 책, 41 쪽, 그림 11). 현재 존재하는 벽을 보면, 내부의 규모는 서쪽 벽 (A-B) 이 6.45 미 터 이 고, 복쪽 벽 (A-E) 과 남쪽 벽 (B-F) 은 6.95 미 터 이 다. 동쪽 벽과 후진-후진이 실제로 있었다면-~은 더 이상 흔적을 찾을 수가 없으나, 흔적이 나타나는 벽들은 그 장소에 계속해서 지어진 모든 건물들의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오병이어 교회〉과 〈팔복 예배실〉과 마찬가지로 이 예배실 역시 아마도 페르시아인의 침입 (614) 과 아랍인의 정복 (638) 때에 파괴된 것 같다. 이 현장에서 나온 어떤 증거와 문헌의 언급에 의하면, 세번 째 예배실이 제 7 세기 말 또는 제 8 세기 초에 세워졌으며, 네번째 예 배실이 제 12 세기에 존재했고, 이전의 건물 중 다섯번째이자 마지막 예배실은 제 13 세기에 세워졌으나 마물루크 술탄 바이바르족 Mamluk Sulta n B ai bars 에 의하여 1263 년에 파괴되고 말았다. 현재의 예배실 은 1933 년에 프란체스코파에 의하여 그 동일한 대지 위에 동일한 구 도대로 지어진 것이며, 따라서 이 장소에서 발생한 전통적 사건들을 기념하는 여섯번째 건물인 것이다. 그 정확한 장소는 바위를 깎아 만든 계단으로 이루어진 충계 바로 곁이며, 그 계단들 가운데 다섯 개는 현재의 예배실 호변(湖邊) 벽 옆에 아직도 보인다(구도의 M). 바위를 깎아 만든 계단의 연대는 확 정할 수 없으나, 그것들이 애테리아가 말하는 〈돌 계단돌gra dus lap i de i〉임에는 틀림없다. 그 계단의 꼭대기에는 하나의 바위 덩이가 있어서 현재의 예배실의 벽을 통하여 안으로 뻗어 제단과 후진 바로 앞까지 이르는데, 따라서 현재의 예배실과 그 이전 건물들은 모두 설계를 잘해서 이 바윗덩이가 존귀한 자리를 차지하고 그 건물의 초 점이 되게 하였댜 이 바위가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떡과 물고 기를 차려 주신 곳이었다는 믿음에 따라 이것은 〈주의 식탁 Table of the Lord, mensa Dom i n i〉로 알려졌다. 호수의 귀퉁이 근처에는 여섯 개의 심장 모양의 평평한 돌들(열주의 모퉁이에 있는 두 개의 결합된 석주들의 대좌가 가지는 전형적인 형태)이 일렬로 놓여 있는데, 이것 들은 이 른바 〈사도들의 열 두 보좌 Twelve Thrones (dodid tron i) of the Ap o s tl es 〉에 속한 것이다 . 이 두 명칭과 그 둘의 관계에 대한 근 거는 복음서에서 찾을 수 있다. 누가복음 22:29-30,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 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 〉 마태복음 19:28, <…… 너희도 열두 보좌 808cKd Op bvouc 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두 명칭 은 콤메모라토리움 데 카시스 데이 (Commemora t o ri um de

85 고라신에 있던 회당의 폐허 마태복음 l1:21 - 23 과 누가복음 10:13-15 에 기록된 화(禍)에서 예수 께서는 다른 두 도성, 곧 고라신과 벳새다를 가버나움과 연결시키셨 댜 애테리아 (381-384) 가 〈일곱 샘〉에 있었을 때 (77 항), 그녀는 고라 신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방문하지는 않은 것이 분명하다. 집사 베드 로 ( GEYER 113 쪽 ; CCSL CLXXV, 99 쪽 ; WET 200 쪽 이 하)에 의 하 면, 그녀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그곳으로부터 멀지 않는 곳에 구주께서 저주하신 회당이 있다. 구주 께서는 그곳을 지나시며 회당에서 일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질문하여 이르시기를, 〈당신들은 무얼 하고 있소?〉라고 하자,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주께서는 〈그러므로 만약 당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것은 항상 아무것도 아닐거요〉라 고 말씀하셨다 . 그리하여 그것은 오늘날까지 그렇게 남아 있다. 그 후로 유대인들이 건축울 하고자 할 때마다 그들이 낮에 한 일은 밤에 다 무 너졌고, 그리하여 그것은 저주를 받았을 때의 높이와 동일한 높이로 항 상 머물러 있었다. 『 지명록』 (ed . Kloste r mann, 174 쪽)에서 유세비우스는 그 장소를 가버나움으로부터 2 마일 떨어진 곳에 두고, 그곳을 유기되고 황폐 된 gpIlJl0c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고라신 (Choraz in , 또는 코라짐 Kora- z irn)은 키르베트 카라제(Khir be t Karaze, 또는 케라제 Kerazeh) 라 불 리는 지대에 있었음이 거의 확실한데, 이곳은 텔 훔의 북서쪽에 있 는 던덕들 안으로 약 2 마일 올라가 있으며, 갈릴리 바다의 해발 900 피 트 되는 높이에 있다. 1738 년에 팔레스타인을 방문한 영국 국교의 감독 포코크 Pococke 가 그 장소에 대한 확인을 하였으나 (Wi lli am M.

Thomson, The Land and the Book [New York : Ha rper, Pop u lar ed., 1908-1913], vol. 2, 421 쪽 참고), 에 드워 드 로빈슨 Edward Rob i nson 은 그것을 거 절하였다(Bi bl i azl Researches in Palesti ne , II, 346 쪽 이 하 ; Abel's cri ticis m of Robin s on on this point in ]BL 58 [1939], 370 쪽 참고). 1865-1866 년에 텔 홈에서 첫 발굴 작업을 수행한 찰스 w. 윌 슨 Charles W. W il son 은 고라신 지대를 방문하여 그 주된 유적들을 매우 단단한 검은 현무암으로 지어지고 고린도식 주두(柱頭)와 다른 장식들을 가진 회당의 유적으로 기술하였다. 그의 기술은 H. H. 키 취너 H. H. Kitc hener 가 저술한 『서부 팔레스타인 탐사 The Surve y of Weste r n Pales ti ne 』(I, 1881, 400-402 쪽)에서 다시 반복되고 또한 약간의 세부 사항들이 부가되었다. 그 후에 세부적인 조사가 콜 Kohl 과 바칭어 Wa tzi n g er 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1905), 새로운 발굴 작 업이 이스라엘 고대 역사부를 대표한 제에브 예이빈 Ze'ev Ye i v i n 에 의하여 1962 년과 1 96.5년 사이에 수행되었다. 그리고 좀더 계속된 발 굴과 약간의 복원 작업이 1980 년부터 1986 년까지 있었다. 이러한 발굴 작업에서 탐색된 바와 같이 고라신 마을의 주된 부분 은 언덕의 한가운데에 있는 평평한 대지( 臺 地) 위에 있었으며, 전체 면적은 약 15 에이커 이상이었다. 중심과 주된 도로의 노상에 호수와 예루살렘을 향한 남향의 회당이 있었다. 회당의 뒤쪽, 곧 북쪽에는 상당한 규모의 공공 건물이 있고, 이 것으로부터 멀지 않는 곳에 의 식을 위한 목욕탕(ritu al bath , m ik vah[ 미크바])이 큰 저수조와 인접 해 있다. 회당의 동쪽에는 두 채의 커다란 가정용 복합 건물이 있고, 그 사이에는 조약돌로 된 안마당이 있다. 서쪽에는 아직 거의 탐색 되지 않은 주거 지역이 있고, 동쪽에는 적어도 두 개의 감람유 짜는 틀이 있어서 그곳이 산업 지역임을 말해 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그 마을의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회당은 사각형으로 된 검은 현무암 덩어리로 지어져 있으며 __ 현무암은 그 주위의 산지에서

가장 혼한 돌임 -, 그리하여 그 아래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의 흰 석회석과 뚜렷한 대조룰 이루고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바실리카 구 도는 약간 작은 규모로 된 것 외에는 가버나움의 것과 대동소이하 댜 주된 홀의 길이는 65 피트이고 폭은 45 피트이다. 세 줄의 석주들 ―원래는 12 줄-은 하나의 중앙 회중석과 세 개의 측랑들一―양 편에 하나씩, 그리고 뒤쪽에 하나-의 윤곽을 그려 주고 있으며, 한 모퉁이에는 원래의 벤치 몇 개가 아직도 벽의 방향을 보여 주고 있다. 널찍한 층계가 남쪽에 있는 정면으로 올라갔고, 거기에는 주된 중앙 입구와 두 개의 옆 통로가 있었다. 내부에는 주된 입구의 양편 에 단( 壇 )이 하나씩 있었는데, 추측건대, 한 편에 있는 것은 토라 (Torah) 를 위한 것이었고, 다른 편에 있는 것은 그것을 읽는 사람이 설 장소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회당과 관련해 조각된 석공품의 단편 도 많이 발견되었다. 그 중의 하나는 머리 주위에 아마도 몇 개의 방사상(放射狀)의 표시들을 가진 두상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것은 메두사 Medusa( 헬라 신화에 나오는 괴물 고르곤 Gor g ons 의 여신)와 동 일시되기도 하고, 태양신 헬리오스와 동일시되기도 하는데, 두 경우 모두 단지 관습적인 장식의 요소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다른 네 개의 단편은 회당의 옆 통로 위에 있는 상인방(上引坊)의 부분일 것 이며, 이것들은 일곱 가지가 있는 메노라 menorah 의 여러 가지 본보 기들로써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고라신 마을의 연대에 관해 복음서 의 언급들(마 11:21-23 ; 눅 10:13-15) 은 그 마을이 예수의 시대에 존재했음을 증거하고 있으나, 현시점에서 보고된 발굴 기록으로 볼 때 제 1 세기 때의 마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사람이 거주한 최초기의 중거는 북쪽에 있는 그 마울의 가장 높은 부분에서 나오고 있으며, 여기서 발견된 감람유 짜는 틀은 2 세기보다는 더 늦지 않는 시기의 것으로 판단된다. 고라신 회당의 현존하는 유적은 한때 1 세기로부터 오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그 후로는 일반적으로 제 2-3 세기의 것으로 여겨졌으 며 (N. Av iga d in Sy n ag o g ue s Revealed, 42 쪽), 십 중팔구 제 3 세 기 의 회당일 것으로 간주되었다 (M. Av i-Y onah in QD AP 14 [1950], 5.5쪽 ; Fis c her in Levant 15 [1968], 1 5.5쪽). 하지 만 근 래 의 발굴자 (Ye i v i n in BAR 13.5 [Sep t/Oc t 19 얽], 35 쪽)는 이 회당이 최초로 건설된 시기를 제 3 세기 말 또는 제 4 세기 초로 보고 , 회당과 마을이 제 4 세기의 후반 에 지진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는 그 마을과 회당이 제 5 세기에 재건되었으나, 마을은 모슬렘 시대(제 7 세기 로부터 제 9 세기)까지 계속해서 존재하였지만 회당은 제 7 세기에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고 여긴다. 한 고고학적 세부 사항을 보면 그 회당은 원래 건설될 때 돌 바닥 으로 포장되었음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제 5 세기 말에 회반죽 포장이 파괴되었고 그 자리는 흙으로 채워졌으며, 그 흙 으로 채운 부분에서 2000 개 이상의 주화들이 발견되었다(이것은 가버나움에서 발견된 다 수의 주화와 비교될 수 있으며, 이 주화들의 중요성에 관한 논란은 89 항 에서 참고할 수 있다).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71 종의 주화들(이것들 중에는 같은 종류의 예를 많이 가진 형태들도 더러 있었다)을 수록한 출판 목록에서, 소수는 제 3 세기의 것이고, 다수는 제 4 세기의 것이 며, 더러는 제 5 및 제 6 세기의 것이고, 헤라클리우스 Herac li us 의 주화 두 개의 연대는 612 년으로 되어 있다 (Kloe t z li in LA 20 [1970], 359- 369 쪽). 로프레다 Lo ffr eda( in Sy na g og ue s Revealed, 52 쪽)는 이 주화 들은 그 회당이 적어도 제 7 세기 초까지는 사용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고 주장하나, 아비 - 요나 A vi -Yonah 는 두 개의 주화로는 확실한 연대를 위 한 증거 가 너무나 빈약하다고 본다(in Sy n ag o g ue s Re-vealed, 61 쪽). 예이빈 Yeiv in( in BAR 13.5 [Sep t/Oc t 19 얽], 35 쪽)은 그 회당이 제 7 세기에는 더이상 사용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그 많은 주화들이 나온 것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 있는 설명을 시사하고

있는데, 그 취지는 이렇다. 즉, 그 주화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서 이 현장을 방문한(심지어는 이곳이 파괴된 후에도) 기독교인 및 어쩌면 유대인 순례자들에 의하여 여기에 버려졌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이곳을 찾는 것은 아마도 재난이 있으리라고 한 복음서의 예언의 성 취를 그 폐허에서 목격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위에서 재구성된 역사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만약에 그 회당이 제 3 세기에 건설되었고 그 마을과 회당이 제 4 세기의 전반에(그 세기의 후반이 아니라) 파괴되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지명록』(아마도 330 년 경에 기록됨 一―예이빈이 말하는 것처럼 제 4 세기 말이 아니라)에서 유 세비우스가 말한 바 그의 시대에 고라신은 유기되고 황폐되어 있었 다는 진술과 일치할 수도 있다 . 더 나아가 만약에 그것을 재건할 시 도들이 제 4 세기의 후반에 이미 시작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면, 이 것은 애테리아 (381-384) 가 기록한 바대로 그녀의 시대에 회당을 재 건하려는 시도들이 성공하지 못하여 그것이 계속해서 폐허의 상태 로 남아 있었다는 보고와 일치할 수도 있다. 사진은 그 회당의 폐허와 그 주위의 산지가 바위로 된 형세를 보 여 주고 있다. 86 고라신에 있던 회당의 좌석 아마도 고라신 회당에서 나온 가장 홍미있는 단일 물체는 큼직한 돌좌석일 것이다. 이것은 1962 년에 그 회당의 남쪽 벽 근처에서 발견 되었으며,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것은 높이가 73 센티미터이고, 가장 두꺼운 부분의 두께가 그것의 높이와 맞먹는다 . 좌석의 등받이에는 원형으로 된 꽃 모양의 장식 rose tte이 있고, 전면에는 4 행으로 된 아람어 명각이 있는데 이것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Remembered be for goo d Jud ah (liter ally, Jud an) ben Ishmael who made this sto a and its sta irca se. As his reward may he have a share with the righ te o us. 유다(문자적으로, 유단) 벤 이스마엘은 영영 기억되리. 그는 이 보랑(步廊)과 그 충계를 만들었다 . 그의 상급으로 그는 의인들과 더불어 분깃을 누리기를. 이 번역에서 〈보랑 s to a 〉이라고 옮겨진 중요한 단어가 이제는 어 떤 종류의 단( 壇 )을 의미하는 것으로 믿어지는 한편 , 〈층계 sta ir- case 〉는 단순히 〈계단들〉이라고 번역하면 좋을 것이다. 이러므로 여 기에 언급된 것들은 의자가 그 위에 놓여진 단 또는 상단과 그 단 위에 있는 의자로 올라가는 계단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 의자는 아마도 회당 관리, 즉 마가복음 5:38 등에 나오는 〈회당장〉( 會堂長, tt PX t OUV CJ. Y@YO<;) 이 차지하던 좌석이었을 것이다. 회당장은 회당 예배 때에토라를 낭독하는 사람이었으며, 따라서 그 좌석은 아마도 마태 복음 23 : 2 의 〈모세의 자리 TJ Mwucrewc ; Ka8e6 p a 〉였을 것이다. 87 가버나움에서 바라본 갈릴리 바다 〈일곱 샘〉로부터 호안(湖岸)을 따라 1. 25 마일을 더 가서 현재 요단 강이 호수로 흘러드는 어귀까지는 약 2 마일을 더 가야 하는 곳에 텔 홈으로 알려진 대지가 있다. 이 장소는 예수의 갈릴리 봉사에 있어 서 매우 중요한 중심지였던 도성인 가버나움의 현장에 대하여 가장 잘 진술된 내용과 일치한다. 마태복음 4:13 은 가버나움이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의 해변에 있다고 한다. 여호수아 19 장에 주어진 이 두 지파의 경계를 보면, 납달리는 갈릴리 바다의 바로 서쪽에 있었고 스불론은 그 서쪽에 있었다. 요세푸스는 요단 강의 어귀 근처에서 사고를 당하여 한 마을로 옮겨졌는데, 이 마을은 필사본들에서 케파 르노콘 KEQ ap v U Kbv 또는 케 파르노몬 KE<1 Ja pv w µ6v(Li fe 7 2 §403) 등으로 다르게 불리나 의심할 여지없이 가버나움을 가리킨다. 당시의 상황 에서 그는 적절한 도움을 받기 위하여 가장 가까운 곳으로 이송되려 고 했을 것이며, 이것은 텔 훔에 있던 가버나움의 위치와 맞아떨어 진다 .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71 항) 테오도시우스 는 남쪽으로부터 오면서 가버나움에 이르기 전에 디베랴와 막달라 와 〈일곱 샘〉을 통과했는데, 이것은 그 동일한 장소와 일치한다. 가 버나움 Ka

벨라 Arbella, 그리고 〈핫틴의 뿔들〉 (71, 73 항 참고) 둥을 향하여 갈릴 리 바다를 가로질러 바라본 것이다. 88 고대 가버나움의 개인 집들(ln sula II) 고대 가버나움의 고고학적 지역들에 관한 한 , 서쪽 지역은 프란체 스코 성지 관리국에 속하고, 동쪽 지역은 예루살렘의 헬라 정교에 속한다. 서쪽 지역에는 회당 (89 항 이하)과 팔각형의 교회 (99 항 이하) 가 있고, 이 둘 사이에 고대 마을의 주택지가 있다 . 1968 년과 그 이 후로 비르질리오 코르보의 지휘 아래 실시된 프란체스코파의 발굴 작업 에서 발견된 최 초기 의 주화들은 안티오쿠스 m 세 Anti oc hus ill (B.C . 223-187) (Sp ijke rman, Cata lo g ue delle monete , 26 쪽, no. 147) 와 안티오쿠스 IV 세 에피파네스 An ti ochus IV Ep iph anes(B .C . 175- 16 4) (같은 책, 43 쪽, no. 342) 주화들이며, 그 마을에 사람이 정착한 것은 바로 이 무렵부터 , 이를테면 B.C. 3 세기 이래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Corbo, Gli edifi ,ci , 215쪽). 이 와 같이 고대 화폐 의 증거 는, 이 마을이 회당과 팔각형의 교회와 더불어 붕괴되었다가 다시는 재건되지 않 은 때인 7 세기 전반기까지 정착이 계속되었음을 말해 준다(같은 책, 220 쪽 ; 마 11:2 3 참고). 회당과 팔각형의 교회 사이에 놓여 있는 주거 지역에 관한 것으로 는 발굴 작업을 통하여 일단의 개인 집들(발굴 보고의 Insula II) 이 드러났는데, 이것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뻗어 있는 두 개의 평행 거리 사이에 있으며 그 집들 한가운데는 보다 더 넓은 거리가 있다 . 집 자체는 솥과 맷돌이 있는 안마당들 주위에 배치되어 있다 . 벽은 현무암 돌로 되어 있고 대부분이 진흙 및 조약돌과 함께 붙어 있으 며, 집들은 아마도 단충으로만 되어 있었고 평평한 지붕으로 올라가 는 충계들이 있었던 것 같다.

가버나움의 동쪽 지역에서 1978-1982 년에 이스라엘 고대 역사부 룰 대신하여 예루살렘 헬라 정교의 지원을 받고 미국의 여러 대학교 가 참여한 발굴 작업이 수행되었다. 여기서 고대 화폐 및 도기의 증 거는, 서쪽 지역에 있던 초기의 마을이 붕괴되던 무렵, 죽 9 세기에 새로운 정착이 시작되어 제 10 세기 동안에 최종적으로 버려지기까지 계속되었음을 지적하였다 (Tz af e ri s in BA 46 [1983], 198-204 쪽). 집 들과 곧은 거리들 외에도, 발굴 작업을 통하여 하나의 커다란 공공 건물과 방파제, 그리고 부두가 호수 가장자리에서 드러났다. 서쪽 지 역에서 밝혀진 초기의 가버나움이 거의 전적으로 유대인과 유대계­ 기독교인의 지역이었음이 분명함에 반하여, 동쪽 지역에 있던 후기 의 도성은 주로 기독교인의 지역이었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 근 처의 회당은 재건되지 않았고, 기름 등과 도기 접시들이 십자로 장 식된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팔각형의 교회도 역시 더 이상 사 용되지 않았으나, 신학자 성 요한 S t. Joh n the Theolo gi an 에게 봉헌 된 새 교회가 세워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사 에피파니우스 E pip h ani us the Monk 가 말하기를 그의 시대(제 9 세기)에 〈신학자(요한)의 집〉이 가버나움에서 보이게 되어 있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WJ P 120 쪽). 비잔틴 기독교와 더불어 또한 이슬람의 흔적도 이 후기의 가버나 움에서 나타났으며, 기억할 만한 사실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키르베 트 민예 Khirbe t Miny eh(77 항)에 제 7 또는 제 8 세기의 아랍식 궁전이 있었다는 것이다. 1982 년에 동쪽 지역에서 행해진 가버나움 발굴 작 업시에, 원래는 비잔틴식 집이었던 초기 아랍 시대의 집에서 218 디 나르 d i nars( 제 7 세기와 그 이후의 모슬렘교인들의 으뜸가는 금화)의 저 장품이 발견되었댜 이 주화들은 헤지라의 기원 Anno Heg ira e 77- 126 년 (=A D. 696/697-743/ 7 44) 이라는 연도를 지니고 있으며, 이 연도 에 의하면, 다메섹의 우마이야드 칼리프 Uma yy ad Ca liph of Damas- cus 였던 압드 알-말리크 ‘Abd al-Ma lik(A D. 68.5 -705) 와 그의 후계자

들의 치하에서 주조되었다 . 주화들 위에 새겨진 주된 명각 들 은 『 코 란 』 (9 . 33 ; 112. 1-3) 에서 따온 인용구 들 이며, 그 취지에 있어서는 그 동일한 칼리프가 예루살렘에 있는 동시대의 작품 〈반석의 돔 Dome of the Rock 〉 (1 8.5항)에 기 록한 좀더 긴 코란 명 각들과 홉사하다. 고 대 화폐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주화들은 그 3 분의 l 이상이 주된 명 각들 주위 또는 내부에 벽서들g r affiti울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 서 추가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낙서들은 헬라어, 히브리어 및 아 랍어로 된 작은 낱글자의 형태로 되어 있으며, 더러는 기하학적 부 호들과 축어(縮語)들이다. 앞에서 본 r 팔레스타인의 고고학적 및 역 사적 시대 일람표」에 인용된 미세 문자들은 주화가 찍힐 때 거푸집 di e( 부어서 만드는 물건, 곧 주물[ 鑄 物]의 바탕으로 쓰이는 모형_옮긴 이)으로부터 새겨진 것인데 반하여 이 표시들은 후에 그 연한 금 위 에 긁어서 쓴 것들이지만, 적어도 이것들은 계속해서 주화 위에 추 가적인 표시를 하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것들의 특별한 의미는 분 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어떤 상징적인 취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 다 (Tz afe ri s , Exawati on at Cap e maum, I, 145 쪽 이 하 . [Jo hn F. Wi lson ], 181- 19 0 [Ariel Berman] ; Vardaman tel eph one May 2, 4, 1990). 여기에 제시된 『 인술라 II 』의 가옥 유적의 사진은 회당으로부터 남쪽으로 향하여 팔각형의 교회 대지를 가로질러 그 너머로 호수를 바라보고 찍은 것이다. 89 가버나움에 있던 회당의 구도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 머무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셨고(막 1:2 1 ), 또한 한 백부장을 상대하셨는데 , 이 사람에 관해서는 그 도성의 장 로들이 〈저가 ……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눅 7 : 5) 라고

말하였다. 집사 베드로가 인용한 바와 같이 (GEYER 113 쪽 ; WET 196 쪽) , 애테리아 (381-384) 는 가버나움에 관하여 이렇게 보고한다. 〈 거기에는 주께서 귀신 들린 자 를 치료하신 회당이 있다. 사람들은 많은 계단을 통하여 그곳으로 올라간다. 이 회당은 사각형돌로 지어 져 있댜 〉 1838 년과 1 8.5 2 년에 팔레스타인을 방문했을 때 에드워드 로빈슨 Edward Rob i nson 은 텔 훔의 대지를 살펴보고 기술하면서, 그곳 자 체가 가버나움이었을 것으로 믿지는 않았을지라도 그 주요 유적이 유대인 회당의 유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 하지만 찰스 w. 윌슨 Charles W. W il son 은 텔 훔이 가버나움이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1865 - 1866 년에 그곳에서 첫 발굴 작업을 하였다. 1894 년에 프란체스 코파는 그 불안정된 여건들 때문에 그 지대를 안전하게 지키고자 그 것을 다시 덮어서 묻어 두었다 . 1905 년에 이 회당은 하인리히 콜 Heim ich Kohl 과 카를 바칭 어 Carl Wa tzing er 의 지 휘 아래 독일 동방 학회 에 의 하여 발굴되 었고 , 그 작업 은 1905 년으로부터 1921 년까지 프란체스코 성지 관리국의 지휘 아래 계속되었으며, 그 결과들은 1921 년에 고당스 오르팔리 Gaudence O rfali에 의하여 출판되었다. 오르팔리 (74-86 쪽)는 현존하는 폐허 내의 회당을 제 1 세기와 70 년 이전의 것으로 간주하는 주장을 조심스럽게 개진하였다. 하지만 r 예 루살렘 탈무드 The Jer usalem Talmud 」 (Meg illa h III 1, BA 7 [Feb 1944], 3 쪽)는 베스파시아누스 Ves p as i an 가 예루살렘 도성 안에서 480 개 의 회당들(아마도 과장된 숫자일)을 파괴했다고 말하며, 일반적으로 그럴 듯하게 여겨지는 이야기는 그 나라 전역에서 70 년과 135 년에 절정을 이룬 전쟁들을 치르는 동안에 회당들이 파괴되었다는 것이 댜 회당들을 재건하기에 좋은 다른 시기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Sept irnius Severus 가 199 년에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두루 여행한 후였을 것인데, 그의 치세 (193-211) 와 그의 아들 카라칼라 Caracalla

완 치세 (211-217) 동안에는 유대인들에 대하여 더욱 우호적인 태도 가 보였다 이러한 고려 사항들은 그 유적들의 건축학적 및 예술적 성격에 대한 비교 분석의 결과와 더불어, 콜과 바칭어 (218 쪽)로 하여 금 갈릴리 회당들__가버나움에 있는 회당뿐만 아니라, 코라짐 Koraz irn(고라신, 8.5항 이하)과 케파르 비르암 Kefa r Bir 'am (101 항 이 하)과 그 밖의 곳에 있는 비슷한 형태의 다른 회당들까지一―의 현 존하는 폐허들을 제 3 세기의 것들로 보게 하였으며 (WATZINGER II, 113 쪽), 제 2 세기 말-제 3 세기 초의 연대가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 비르질리오 코르보 V irgili o Corbo 의 지휘를 받는 프란체스코파에 의하여 새로운 발굴 작업이 1969 년에 시작되어 여러 해 동안 계속되 었다. 이 발굴 작업에서 그 회당과 그에 인접한 안마당의 돌 포장 아래 놓인 지층까지 호를 파내려 갔다. 프란체스코파의 발굴자들이 A 지충(최하층)이라고 부르는 충에는 초기 건물들의 벽이 있다. B 지 충에는 땅을 평탄케 하고 단을 만들기 위하여 채운 부분이 있다 . C 지 충에서는 이 채운 부분을 봉하기 위한 회 모르타르의 두꺼운 충이 있으며, 이 모르타르 충 위에는 돌 포장이 놓여 있다 . 이 채운 부분 과 모르타르 속에서 주화와 질그릇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예컨대 발 굴 시초에 중앙문으로부터 내부로 뻗어 있는 1 번 호(구도의 TR 1) 에서 352-360 년으로 연대가 매겨지는 주화 한 개가 발견되었으며, 안마당의 한 모퉁이 아래 있는 4 번 호 (TR 4) 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사후에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발행된 것과 같은 형태 의 341-346 년으로 연대가 매겨진 주화 하나가 발견되었다. 한편으로 수천 개의 주화들이 또 발견되었는데, 어떤 것들의 연대는 심지어 제 5 세기 초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La Sin a go ga , 24, 47, 52, 126, 137, 139 쪽 ; C',qfam ao I, 121, 1 업, 163 쪽). 이 와 같이 안마당 아래 의 23 번 호에서는 수많은 도기의 단편들이 발견되었는데, 이것들 역시 제 4 및 제 5 세기로 그 연대가 매겨진다 (Lo ffr eda in LA 29 [1979], 215-

220쪽). 우리가 알고 있는 바 그 건물의 연대를 그 아래서 발견된 도 기와 주화들의 가장 늦은 연대 이후로 가정하고, 또한 그것들의 보 다 정확한 연대를 위해서는 특히 주화들에 의존하여, 발굴자들은 그 것이 건축된 연대를 4 세기의 마지막 10 년에서 제 5 세기의 중엽으로 보고 있다 (Lo ffr eda in Sy n ag o g ue s Revealed, 52-56 쪽 ; Saller, Se- cond Cata lo g ue , 26 쪽, no. 22 참고). 이와 같은 늦은 연대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역사적 및 양식 상 의 고려 사항들을 보면 제 4-5 세기의 연대보다는 오히려 제 2-3 세기 의 연대 , 아마도 제 3 세기 중엽이 맞다고 주장한다 (F i scher in Levant 18 [1986), 142 쪽 ; 아래의 94 항을 보라) . 그리고 그들은 바로 위에서 기술된 문제의 재료들은 원래의 건축 연대보다는 더 늦은 어느 때에 광범위한 보수 작업의 결과로 현재의 장소에 옮겨졌을 것이라고 주 장한다(i n Sy n ag o g ue s Revealed, 10 쪽 [Levi ne ], 57-59 쪽 [G. Foer-

ste r ], 60-62 쪽 [M. Avi- Y onah] ; Tsaf rir in Sy n ag o g ue in Late Anti qu it y [1987), 154 쪽, n. 2). 우리 가 오늘날 가버 나움에 서 아직 도 볼 수 있는, 부분적으로 복원된 흰 석회석 회당은 사실상 제 2-3 세기 에 처음으로 지어졌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애테리아가 성지를 여 행하면서 (381-384) 본 것이 확실하며 그녀가 사람들이 많은 계단들 올 통하여 그곳으로 올라갔다고 한 것과 그 회당이 사각형의 돌로 지어졌다고 한 것은 정확한 기술이었다. 가버나움 회당의 구도는 바실리카와 그것에 인접한 안마당과 함 께 남쪽에 있는 좁은 현관과 계단의 윤곽을 보여 준다. 기도 홀은 24 .4 X18 . 5 미터의 직사각형이고, 동쪽에 있는 안마당은 정면의 폭이 1 1. 25 미 터 이 다 (Sy na g o gu es Revealed, 13 쪽). 구도에 표시 된 것들은 프란체스코파의 발굴 작업 시에 판 주요 호들의 위치이다 (TR l=l 번 호[tri ncea 1] 동등).

oo 가버나움에 있던 회당의 모형 가버나움에서 예시된 바와 같이 고대 회당들 각각의 연대를 확립 하는 것이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며, 동일한 시대에도 다양한 양식 들이 존재했음을 말해 주는 증거들이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대표적 인 본보기들에 대하여 언급된 연대들이때로는 잠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특징적인 건축 양식들이 식별되고 있다. 이것들 중의 첫째는 보통 갈릴리식 또는 바실리카식이라고 일컫는 것으로, 이미 언급된 바 있는 가버나움과 코라짐, 케파르 버르암 둥지에 있 는 회당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헤로디움 (21 항), 마사다 (23 항), 막달라 및 가물라 (74 항)에 있는 네 개의 매우 이른 시기의 회당 들은 이와 홉사한 바실리카 형이지만 비교적 단순한 형태로 되어 있 다. 양식은 본질적으로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그레코-로만 Greco­ Roman 식 집회 홀의 양식이며, 이것은 보통 직사각형의 건물로 되어 있고, 내부는 몇 줄의 석주로 나누어져 있다 (WATZINGER IT, 108 쪽). 회당이 이러한 형태를 적용함에 있어서 짧은 전면 벽의 방향이 예루 살렘을 향하고 있는데, 이것은 거룩한 도성을 향하여 기도하는 성경 적 관행(단 6:10 등)과 조화를 이룬다. 갈릴리식의 실례에 있어서 때 때로 이 벽의 외부는 비교적 잘 장식된 정면으로 되어 있다. 주된 입구가 같은 편에 있고, 바로 안쪽에는 아마도 토라를 두기 위한 신 성한 구역이 있어서 실내에 있는 사람들이 그 방향으로 돌아서서 바 라보게 하였다. 비잔틴 시대에도 바실리카가 기독교회 건물의 지배 적인 양식이었으며, 유대교와 기독교의 건축 형식들 사이에는 상호 관계와 함께 개별적인 발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기독교 건물의 방향 설정은 동향으로 하였다. 또한 제 2 의 교회 양식이 있었 는데 이것은 거룩한 유물들이나 〈거룩한 장소들 lo 따 sanc ta.〉을 기념 하는 〈기념관〉로 의도된 것이며, 둥글거나 팔각형 또는 십자 형태로

된 동심(同心) 구도로 세워졌다 (Ts afrir in Sy n ag o g ue in Late Anti qu it y, 149 - 153 쪽). 어 떤 경 우에 는 회 당이 요르단의 제 라쉬 Jer a- sh( 거 라사 Gerasa) 에 서 처 럼 (C. H. Kraeli ng , Gerasa, 1938, 234-241 쪽 ; 그리고 아래의 119 항) 교회로 바뀌었거나, 아니면 헤브론에서 남쪽으 로 9 마일 떨어진 에쉬테모아 Esh t emoa 에서처럼(L. A Meye r and A Reif en berg in JP OS 19 [1939-1940], 314-326 쪽) 회 교 사원으로 만들 어졌다. 회당의 주된 건축 양식의 두번째 것은 넓은 집 br~adhouse 양식인 데, 이 양식에서는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는 것이 짧은 벽이 아닌 긴 벽이다. 따라서 토라를 위한 장소는 안쪽에 예루살렘 쪽에 있는 긴 벽의 맞은편에 있고, 입구는 다른 편에 있는 긴 벽이나 또는 짧은 벽 중의 하나를 통하여 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양식으로 된 많은 회당들은 또한 바닥에 모자이크를 사용하는 것으로써 특징을 이루 고 있댜 이러한 양식의 실례로는 북 갈리리의 호르바트 셰마 Horva t Shema 에 있는 초기의 회당(제 3 세기, E. M. Meye rs, The Sy na go gu e at I:Ior vat Shema', in Sy n ago g ue s Revealed, 70-74 쪽)과 이 미 기 술 한 바 있는 제 4 세기 모자이크 바닥을 가진 함맛 디베랴 Hamrna th Ti be ri as 의 회당 (72 항)이 있다. 세번째 양식은 후진 구도가 특징을 이루고 있다 . 이 양식에서 회 당은 예루살렘을 향한 짧은 벽에 후진이 부가된 바실리카이다. 후진 은 토라를 위한 장소를 제공하고, 입구는 다른 짧은 벽에 나 있다. 모자이크 바닥들은 때때로 특별 장식으로 설치되었다. 예를 들면 갈 릴리 바다 남쪽 끝의 동쪽에 있는 야르무크 Yarmuk 강변의 함맛 가 데르 Hamrna th Gader( 또는 가다라 Gadara 옆)에 회당이 있는데 이것 은 제 4 세기 말 또는 제 5 세기 전반에 지어졌고, 아람어로 기록된 기 념 명각의 양편에 사자가 서 있는 모자이크 포장이 있다 (E. L. Sukeni k, The Ancien t Sy n ago g ue of el-Hammeh, 1935). 그리 고 다른

예는 스퀴토폴리스 서쪽의 베트 알파 Be t h Alp ha 에 있는 회당으로, 여기에는 12 궁도의 상징들이 그려진 모자이크 바닥이 있으며 이것 은 제 6 세기의 것으로 여겨지나 더 오래된 모자이크 단편들 위에 놓 여 있으며 한 세기 정도나 더 오래된 듯한 한 건물 안에 있다(E. L. Sukeni k, The Anc ien t Sy n ag o g ue of Beth - Alph a, 1932). 이제는 바실리카 양식의 뛰어난 본보기인 가버나움 회당으로 돌 아가 보자 . 이 회당의 유적은 현재의 호안으로부터 약 100 야드되는 곳에 위치해 있다. 평면도는 89 항에서 보았고 여기에 제시된 모형은 그 건물의 있음직한 외양을 보여 주기 위한 것으로서, 남동쪽으로부 터 바라본 모습이다. 건물의 전면은 거의 남향으로 호수와 예루살렘 을 향하고 있다. 오른쪽으로부터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돋워진 단 또는 열린 현관이 있고, 주된 건물은 왼쪽에 있으며, 여기에는 내부 로 들어가는 문이 세 개 있다. 중앙 출입구의 양편으로 내부에는 구 조물의 기초들이 있고, 예배자들은 이 방향으로, 추측건대 토라를 두 는 성감(聖籠 s hri ne) 과 토라를 읽는 사람,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하 여 바라보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여러 줄의 석주들이 큰 중앙 회중 석의 윤곽을 그렸고, 동편, 서편, 그리고 북편에 있는 측랑들을 형성 하였다. 또한 두 개의 벤치가 이충으로 만들어져 동쪽 벽과 서쪽 벽 울 따라서 뻗어 있었다 . 상충의 계랑(階廊)이 있었는지, 그리고 있었 다면 그것은 여인들을 위한 것이었는지 또는 다른 활동들을 하기 위 함이었는지는 매우 불확실하다 (Lo ffre da, Visi t to Caph arnaum, 51 쪽 이하 ; A Kloner in Sy n ag o g ue s Revealed, 12 쪽). 동편으로 기도 홀 또는 회당 본체에 인접하여 사다리꼴 모양의 뜰이 있는데, 이곳에는 모형에서 보이는 것처럼 하나의 출입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마 도 전면에 두 개의 출입문이 있어서 그곳으로 사람들이 들어갔을 것 이다. 지붕으로 덮인 현관이 3 면의 벽을 돌아가며 뻗어 있었고 그 뜰의 중심부는 노천으로 되어 있었다. 아마도 주된 건물의 중앙 출

입문 위에 아치를 만들고 정면의 위충에 창문을 추가로 더 만들었을 것으로 여겨진 생각이 이 모형에 반영되어 있다 . 94 항 이하에서 이 회당의 풍부한 조각 장식에 대하여 좀더 보게 될 것이다. 91 가버나움 회당의 서쪽 벽에서의 발굴 우리가 아는 대로 흰 석회석 형태로 된 가버나움 회당이 오르팔리 Orfali가 생각한 바와 같이 (89 항) AD . 70 년 이전으로 연대가 매겨지 지 않는다면, 그것은 로마인 백부장이 세운 회당일 수가 없으며 예 수의 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제 2-3 세기 또는 제 4 - 5 세기의 것일 가능성이 더 많으므로 그보다는 훨씬 후대의 것 이다. 하지만 프란체스코파가 발굴한 호( 塚 )들은 지면 위에 있는 현 존하는 건물 유적의 아래와 옆에 있는 낮은 충으로 뚫려 있으며, 현 시점에서는 보다 오래된 건축물들로부터 남겨진 것이면 무엇이든지 간에 거기서 발견되는 유적들은 모두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Corbo in Stu d ia Hi er osolym it :ana, I, 159-176 쪽). 회당의 서쪽에 있는 14 번 호와 15 번 호에 대한 1 얽 4 년의 발굴과 , 회당의 동쪽 측랑과 현관에 있는 17 번 호와 18 번 호에 대한 1ITT5 년 의 발굴 결과로 처녀 토양 위에 놓여 있는 벽들과 포장 도로와 주거 들과 가정용 도기가 출토되었다 . 이리하여 초기 로마 시대의 가버나 움의 인술라 II( 88 항)와 같은 주택 지역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러한 유적 들 위 에 그리 고 또한 다듬어 진 다른 호들 (TR 1, 2, 3, 11) 의 자취 를 따라서 검은 현무암 돌로 된 벽들이 있었는데, 이 벽들을 건설하 기 위해서는 그 아래 있던 집들을 헐어냈음이 분명하다. 그 다음에 는 그 현무암 벽들 위에, 그리고 그 벽들과는 확실히 구별되게 나타 난 것이 후기의 회당에 속한 흰 석회석 벽들이다. 1981 년에는 다른 호들이 뚫어졌는데, 그 중에 주목할 만한 것은

24 번 호와 25 번 호이다. 24 번 호는 그 석회석 회당에 있는 북-남으 로 향한 두 줄의 석주들로 된 기부( 基 部)들 사이의 회중석을 가로질 러 동-서로 뻗은 것이고, 25 번 호는 동쪽에 있는 석회석 스타일러베 이트롤 따라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지역 모두에서 동일한 현 무암 벽들이 그 위에 있는 석회석 벽들과 기부들 아래 있는 것이 발 견되었댜 또한 현무암 벽과 연결된 검은 현무암 자갈로 만들어진 바닥 부분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현무암 벽들로 된 건물의 윤곽은 그 위에 있는 석회석 회당의 윤곽과 동일한 것이었으나, 남 서쪽 모퉁이에서 현무암 벽이 그 위에 있는 석회석 벽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현무암 벽은 그 위에 있는 건물의 일부 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있던 건물의 일부였으며, 먼저 있던 건물의 벽들은 뒤에 지은 건물의 기초로 사용되었다. 제시된 사진은 회당의 서쪽 벽 외부를 찍은 것이다. 위쪽의 층은 후기의 회당에 속하는 잘 다듬어지고 윤기나는 흰 석회석 덩이들인 데, 맨 아래층은 그 밑에 있는 더 오래된 현무암 벽 위에 놓여 있으 면서 그것으로부터 약간 빗겨나와 있다. 현무암 벽에 인접해 있으면 서 그 밑에 있는 것은 더욱더 오래된 집 벽의 모퉁이와 포장의 연장 인데, 이것들 모두가 역시 현무암으로 되어 있다 . 흰 석 회 석 회 당의 기 도 홀의 구도 (89 항) 및 규모 (24 .4 X 18.5 미 터 )와 비교할 때, 후기의 건물 아래에 있는, 검은 현무암 벽돌로 구획된 건 물의 규모 (24.2 X l8.5 미 터 , BAR 9.6 [No v/D e c 1983], 30 쪽)는 거 의 같 은 것이다. 현무암 벽들은 그 두께가 거의 4 피트나 되는데, 이것은 가버나움의 발굴 작업을 통하여 다른 곳에서 알려진 사가(私家)의 벽들보다 훨씬 더 두꺼운 것으로, 심지어는 석회석 회당의 벽들 (2.5 피 트 두께)보다도 더 두꺼운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은 한 개인 건물 이상의 유적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탈무드의 언급은 한 회당은 다른 회당으로 대치하는 것이 관습이었음을 보여 주며

(〈회당은 다른 회당이 그것을 대신하기 위하여 다 지어지기 전에는 허물 어서는 안 된다〉 Baba Bath r a 36 SET 31, 9 쪽 ; Trac t.ate Meg illa h 28b SET 10, 158 쪽), 다른 발굴 작업에서도 새 회당은 가끔 그것이 전신(前身)과 동일한 장소에 세워졌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검은 현무암 벽들과 자갈이 깔린 바닥이 있는 이 건물은 십중팔구 회당이 었으며, 그 위에 있는 석희석 회당의 전신이었다. 이 전신 회당(이 건축물이 참으로 회당이었다고 가정하면서)의 연대 는 그 위에 있는 석회석 회당의 연대(제 2_3 세기 또는 제 4-5 세기)보다 분명히 이른 연대이며, 더욱 정확한 연대는 도기 및 고대 화폐의 중 거에서 찾을 수 있다. 현무암 벽들과 연결된 자갈이 깔린 현무암 바 닥에는 A.D. 1 세기로부터 4 세기까지의 질그릇 조각들이 있었으며, 자갈이 깔린 바닥의 속과 아래에는 AD. 제 1 세기 또는 그 이전의 도 기가 있었다 . 그리고 그 동일한 바닥의 밑에서 발견된 주화들 중의 하나는 프톨레마이오스 VIII 세 Ptol emy VIII, 유에르게테스 II 세 Euerge te s II 의 치세(B. C. 146-116) 의 것으로 연대가 매겨진다. 그러 므로 전체적으로 순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KROLL 221 쪽, col. l). (1) 헬라 시대(이를테면 제 3 세기 이후로)의 집들의 유적, 이 유적 은 헐려서 (2) 현무암 회당(아마도 AD . 1 세기의 전반부에 세워진)의 벽들 아래, 그리고 (3) 흰 석희석 회당(제 2-3 세기 또는 제 4-5 세기) 아 래 놓입 발굴자 (Corbo in Stu d ia Hi er osolym it nna, m, 341 쪽)는 이 렇게 말 한다 . 〈발굴하고 기록하는 일에 13 년 간의 끈기있는 노력을 경주한 끝에, 이 건축물은 정확하게 제 4-5 세기의 회당 자리 아래 있다는 것 이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나는 우리가 제 4 —5 세기의 회당 아 래서 발굴된 현무암 벽들을 가진 이 건축물이 바로 예수께서 그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눅 7:9) 고 말씀하신 로마인 백부장에 의하여

제 1 세기의 처음 몇 십년 동안에 세워진 그 회당이라고 추정하는 것 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92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의 주된 바실리카식 홀 이것은 가버나움에 있는 흰 석회석 회당의 주된 바실리카식 홀의 개관으로 1925 년에 프란체스코파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재건된 것이 며, 방향은 북쪽으로 향하여 끝에 있는 주랑과 북쪽 벽을 바라보고 있다. 건물이 건축될 때 사용된 돌은 아마도 와디 엘-하맘 Wa di el-Harnam( 없항)에서 채석되었을 것이다. 93 가버나움 회당의 남동쪽 모퉁이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회당의 전면에 있는 돋워진 단으로 올라 가는 계단들이댜 콜 Kohl 과 바칭어 Wa tzing er(5 쪽)는 이 계단들이 그 들이 연구한 모든 회당들 가운데서 특이한 것임을 발견하였다. 어쩌 면 이것들은 애테리아가 말한 바와 꼭 같이(위의 89 항 참고) 〈사각형 의 돌들〉로 축조되어 있다. 흰 석회석 돌덩이들의 밑에 있는 벽의 모 퉁이에는 더 이른 시기의 회당의 검은 현무암 덩어리들이 있다 (91 항 참조). 94 가버나움에 있는 조각된 주두 이 실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버나움 회당의 석주들의 주두(柱 頭)들은 코린트식으로 공교하게 조각되었다. 헬라-로마 예술의 테두 리 안에서 주두들의 양식을 비교 분석해 보면, 흰 석회석 회당이 건 축된 연대는 제 3 세기의 중엽 또는 그보다 조금 후기임이 대체로 확

인된댜 95 가버나움에 있는 언약 궤 또는 토라 성감 가버나움 회당의 풍부한 조각 장식품 가운데서 가장 홍미로운 품 목들 중의 하나는 이 사진에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아치로 된 지붕과 끝에 이중의 문들, 그리고 측면을 따라 석주들이 있는 하 나의 궤 ches t를 보고 있다 . 그 아래로 우리는 또한 바퀴들을 보는데 이것들은 궤롤 떠받쳐서 운반할 수 있는 것으로 전체의 수효는 아마 도 네 개였을 것이다. 이것은 광야 방랑 시절의 이동식 언약 궤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이론과, 영구적인 토라 성감(聖兪)이 설치되기 전 에 회당 안에 토라를 말아서 비치하던 성감이라는 이론 등, 서로 엇 갈린 이론들이 있다. 96 가버나움에 있는 메노라 Menorah 이 조각은 일곱 개의 가지가 있는 등대를 보여 주는데, 오른쪽에 는 쇼파르 shof a r 죽 축제 때에 불던 염소 뿔이 있고, 왼쪽에는 분향 을 위해 사용하던 부삽이 있다 (285 집얽, 289 항 참고). 97 가버나움에 있는 다윗의 방패 이 육망성형(六뜬星形)은 가버나움 회당에 있는 조각 장식의 일부 로 사용된 것으로, 후에 다윗의 방패 또는 다윗의 별 Sh ield or Sta r of Dav i d 로 알려졌다.

98 가버나움에 있는 솔로몬의 인 여기에 보이는 이 오망성형( 五 쓴 星形 , pe n tagr am) 은 가버나움에서 조각된 것으로서 , 후에는 솔로몬의 인(印) 또는 솔로몬의 별 Seal or Sta r of Solomon 로 알려 졌다. 99 가버나움의 인술라 사크라에 있는 건축물들의 구도 가버나움에서 수행된 프란체스코파의 발굴 작업에서 호수에 가장 가까운 지역은 인술라 IInsula I 이라고 명명되었고, 거기서 나온 발 견물들 때문에 인술라 사크라 Insula Sacra 라고 불린다. 찰스 w. 윌 슨 Charles W. W il son 이 1865-1866 년에 가버나움에서 첫 발굴 작업 을 했을 때 (89 항), 그는 이 지역에 있는 유적들을 살펴보고 난 후 다 음과 같이 기록했다. 〈회당 본체의 바깥에, 그러나 그것과 연결된 곳 에서 우리는 후기 건물의 유적을 파내었는데 , 이것은 에피파니우스 가 가버나움에 세워졌다고 말한 교회(위의 45 항 참고)와 AD . 600 년 에 안토니우스 An toni us( 이 말은 피아첸짜의 무명씨를 가리킨다. 아래 의 100 항을 보라)가 베드로의 집을 둘러싸는 바실리카라고 기술한 교 회 의 유적 일 수도 있다〉 (The Recovery of Jer usalem [1872], 268쪽). 1921 년에 고당스 오르팔리 Gaudence Orfali에 의하여 추진된 정리 작업을 통하여, 세 개의 동심(同心) 링 ring s 으로 구성되고 모자이크 로 된 부분들을 아직도 그 자리에 가지고 있는 그 교회의 윤곽이 밝 혀졌다. 1968 년에는 이곳에 대한 완전한 발굴이 비르질리오 코르보 Vir gilio Corbo 에 의 하여 실시 되 었다. 가장 낮은 충(l evel 1) 에서 밀접히 연관된 한 타스 남짓한 일단의 주거들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인술라 II( 88 항)와 매우 홉사한 하나 의 인술라를 구성하지만, 훨씬 더 초라한 집들로 이루어져 있다. 벽

은 모르타르를 사용하지 않은 검은 현무암 바위와 조약돌로 되어 있 고, 바닥은 두들겨서 다져진 검은 흙 또는 현무암 조약돌로 되어 있 으며, 소수의 문지방들이 발견되었고 작은 창문의 혼적들도 나왔다. 벽은 무거운 지붕을 떠받치기가 힘들었을 것이고, 지붕은 아마도 진 흙과 짚으로 덮인 나뭇가지들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와 같은 지붕 은 마가복음 2:4 에 기술된 바와 같이 그것을 부분적으로 그리고 일 시적으로 뜯어내는 일을 허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누가복 음 5:19 에 언급된 〈기와〉는 아마도 그 당시 가버나움의 가옥 형태보다는 로마식 별장을 염두에 두고 그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임을 나타낸 다). 연안에 가까이 있는 것으로 봐서 이 주거들은 미상불 어부들의 집 이었을 것이댜 그 폐허에는 요리하는 솥과 남비, 항아리와 등(燈)들 의 조각들이 있었다. 그 집들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은 인술라의 동편 에 있고, 그 크기는 7X6.5 미터이다. 그 안에서 사실상 원형 그대로 의 등 두 개가 발견되었는데, 하나는 헬라식이고 하나는 헤롯식이므 로((,qfa mao I, 91 쪽, foto 45), 이 집은 헬라 시 대(B. C. 1 세기)의 맨 끝 에 지어졌음이 분명하다. 다른 도기들과 주화들도 역시 이 1 번 충의 사가(私家)들의 연대가 B.C. 1 세기와 AD. 1 세기로부터 4 세기까지 걸치는 것으로 보여 주며, 그 지역 자체에는 제 7 세기까지 사람들이 거 주하였다 (Corbo, New Memoir s , 23 쪽 이 하 ; House of Sain t Pete r , 37-39, 69 쪽 이 하 ; Loff red a, Visit to Qzph arnaum, 25 쪽 이 하, 29-31 쪽 ; Recoveri ng Qzph arnaum, Stu diw n Bib l ic w n Francis c anwn Gu ide s 1 Uerusalem : Custo dia Terra Santa , 1985]). 이옥고 이 집과 그것의 중요하고도 가장 큰 방(구도의 1 번)은 특별 한 주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 인술라에 있는 모든 다른 집들의 고대 바닥들은 흔히 있었던, 두들겨서 다져진 흙 또는 현무암 조약돌로 되어 있는 반면에, 그 거무스름한 흙으로 된 최초의 바닥을 가진 한

건물에서는 그 바닥 위에 부숴진 석회석으로 된 여러 충의 잇따른 바닥들이 있다. 이 포장들 사이에서 헤롯식 둥의 조각들이 발견되었 으며, 그리하여 석회석 바닥들을 보고 특별한 주의를 경주한 결과 그것의 연대가 AD. 1 세기까지 거슬러오르게 되었다 (Corbo, House of Sain t Pete r , 44 쪽 이하, 54 쪽 이하, 그림 14a). 그 다음에 이어진 몇 세기 동안에 그 동일한 1 번 방은 그것의 조 야하게 축조된 벽들이 적어도 세 번 회반죽 칠이 되었고 또 장식이 되었다는 점에 있어서, 계속적으로 특별한 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 회반죽의 조각들이 장식과 함께 수천 개 발견되었고, 그것들 중의 다수에는 벽서가 적혀 있으며, 이것은 제 2 세기의 후반부로부터 제 4 세 기 전반부까지의 시대에 귀속되며, 제 3 세기는 이 기간의 가장 중요 한 시기로 여겨진다 (Tes ta, Graf fiti, 9, 81, 108, 147 쪽). 장식들은 다양 한 색채로 되어 있었고, 그 주제로는 꽃, 석류와 같은 과실, 기하학 적 무늬 둥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었다. 특별히 두드러진 것은 꽃 십 자와 아마도 낙원을 상징하기 위하여 배열된 꽃과 과실인데, 이것들 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나사랫의 〈코논 석굴 Gro tt o of Conon 〉에 있 는 장면에서처럼 (48 항), 유대계-기독교인들에게 특징적으로 나타나 는 주제이다 (Tes ta, Graf fiti, 21 쪽 이하, 33 쪽 이하, 38 쪽 이하). 벽서에는 헬라어 조각들이 124 개, 시리아어(에스트랑겔로 Es tr an­ ge lo) 18 개, 히브리어 15 개, 그리고 라틴어 1 개 둥이 포함되어 있으며 (Corbo, House of Sain t Pete r , 68 쪽), 이것들은 그만큼 많은 언어적 배경의 순례자들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임에 틀림없다. 다음의 실 례들은 테스타 Tes ta의 냐 1 서 Gra ffiti』라는 책에서 따온 것이다. 헬라 어 명각들에는 이런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rIETRO(C 또는 Y) BEPENI (KH)

Pete r or of Pete r Beren i(c e) 베드로 또는 베드로의 베레니(케) (60 쪽, no. 47, 그림 9, 47 ; tav . X 田, 47). 베드로라는 이름은 방문을 온 순례자의 이름으로 생각될 수도 있 지만, 여기 가버나움의 이 집에서는 그것이 십중팔구 사도를 가리킬 것이다. 베레니케라는 이름은 12 년 동안 혈루중을 앓다가 가버나움 에서 고침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 여자의 이름으로 여겨졌다(마 9:20-22 ; 막 5:25-34 ; 눅 8:43-48 ; Acts of Pil at e VII [HS NTA 1, 457 쪽] ; the Cop tic Book of the Resurrecti on of Ch rist by Bart ho lomew the Ap o stle UANT 183 쪽]). 유세비우스는 이 여자가 그의 시대에도 여전히 숭앙을 받았으며, 파네아스 Paneas( 가이사랴 빌립보)에 있는 그녀의 집에는 그녀와 예수의 청동상들이 그 이적을 기념했다고 기 록하고 있다 (Ch Hi st. VII 18). (I)X 8YC (1)x86c; Fis h 물고기 (66-67 쪽, no. 77, 그림 9, 77, tav . XV, 77). 이것은 물고기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에 기초한, 초기 기독교의 이 합체(離合體, acros ti c) 를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위의 30 항과 아래의 678-681 쪽 참고).

(XPI) C TE FAEHC(ON) (Xp t)en:t tAt n 6 (bv) Ch rist have mercy. 그리스도시여, 긍휼을 베푸소서. (71-72 쪽, no. 88, 그림 9, 88, color tav . 3, 88C). KE IC XE BOH9I K(up t)e 1 (q)o (ou) X(p tcn:)t Boit 8t Lord Jes us Ch rist help.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도우소서. (72-76 쪽 , no. · 89 , 그림 11, 89, color tav . 3, 89G). 한 라틴어 명각도 AD. 2 세기로부터 4 세기의 것으로 여겨지는 글 자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ROMAEBO PETR US Romae Bo Petr us 로마의 보 베드로 (1 74 쪽, no. 152, 그림 17, 152, tav . XXXV, 152). 〈로마의 of Rome 〉와 〈베드로 Pe ter〉라는 이름은 분명하지만, 〈보

Bo 〉라는 글자는 어떤 단어의 약자이거나 머리글자일 수 있다. 이 단 어를 완전하게 쓸 경우의 가능한 형태로는 라틴어로 bo(na) 또는 bo(num), 〈착한, 좋은, 선( 善 )〉, 그리고 헬라어로는 Bo(it8 t , 〈도우소 서〉), 또는 Bo(n8bc, ”돕는 사람, 조력자〉) 등이 있다 . 만약 우리가 마 지막 해석을 취한다면, 베드로는 로마의 조력자라고 불리게 된다 (Loff red a, Visi t to Caph amaum, 36 쪽). 베드로라는 이름은 또한 한 축어에서도 식별되는데 (169 쪽, no. 128, 그림 16, 128, tav . XXXIII, 128, color tav . 3, 128H ), 여기서는 라틴어 이름이 헬라어 글자 n 와 C 로 기록되어 있고, 그 오른쪽에는 십자와 C 자가 있어서, 완전하게 쓰면 아마도 IlETRYC( 베드로)와 십자 표가 될 것이다. 또한 벽서들에는 유대계-기독교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여 러 가지 상징들도 있다 (refe rences in Testa , Graf fiti). 십자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예컨대 라틴어 T 자형 (153 쪽 이하, no. 111, tav . XXXII, 111) 과 작은 십자를 곁에 가지고 있는 곧바로 선 십 자표 (162 쪽, no. 118, tav . XJO띠, 118) 등등이다. 테두리 안에 곧바로 선 십자표는 십자-방패를 의미할 수 있다 (155 쪽, no. 112, tav . XJO따, 112). 정사각으로 둘러싸인 십자표 (157 쪽 이하, no. 113, tav . XX 지 I, 113) 는 세계의 사방(四方)과 십자가의 우주적 효력을 암시할 수 있 다. 노와 펄 럭 이 는 돛울 가진 작은 배 (159 쪽 이 하, no. 115, 그림 16, 115, color tav . 3, 115F) 는 나사랫의 배들처 럼 (48 항) 유대계-기독교인 들뿐만 아니라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도 의미심장한 상징이었다(예 컨대 Jus tin , Ap o log y I 55, ANF I, 181 쪽, 십 자가의 모양을 가리 켜 이 렇게 말하고 있다. 〈돛이라고 불리는 트로피가 배 안에 안전하게 머물러 있지 않는 한, 바다를 가로지를 수는 없다.〉 Baga t ti , Church from Ci r 따mci s i on, 219-221 쪽; 그리고 아래의 681-684 쪽] 참고). 그러므로 매우 합리적인 해석을 따른다면, 위의 증거들은 이 특정

한 방 (1 번)이 제 1 세기부터 계속해서 숭앙받는 홀로 취급되었으며, 베 드로를 추모하는 일과 연관되었고 , 다시 말해서 그 사도의 집으로 기억되었다. 주화들과 도기에 의하여 4 세기 중엽으로 그 연대가 매겨진 발굴 현장의 충(l evel 2) 에서 발견된 그 문제의 집에는 새 천장이 있는데, 이 천장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은 중앙 아치에 의하여 떠받쳐졌으며, 그 집은 동편과 북편에 추가된 방들로 확장되어 있었다(구도의 2 번 과 4 번). 이것 너머로는 그 숭앙받는 홀을 둘러싸고 있는 전체 주거 구획이 섬세하게 다듬은 현무암 바위들로 만들어진 사변형의 벽으 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벽은 세 변이 刃미터씩이요 동쪽은 30 미터 이며(구도에서 크고 온전한 사변형), 주된 입구는 남쪽의 호안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것은 그 작은 복합 건물 전체를 그 마을의 나머지 부분으로부터 분리시켰으며, 그 숭앙받는 홀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 의 신성한 경내를 형성하고자 의도된 것임이 분명했다. 그와 같은 목적으로 세워진 이 건물에서 우리는 하나의 가정-교 회 house-church(domus eccles ia e) 를 보게 되 며 , 벽 서 들로부터 그리 고 가버나움의 미님 m i n i m 에 대한 유대인의 언급들 (M i drash Rab- bah Eccl. 1, 8, 4 ; 1, 8, 84 ; SMR vm, 29, 210 쪽 ; 그리 고 없항 참고) 로부터 우리는 이것이 가버나움의 유대계-기독교인들의 집회소였음 을 인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버나움에 남아서 베드로의 집을 이 런 방법으로 변형시킨 것은 베드로의 친척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B ag a tti, Church from Cir c um cisio n , 131 쪽) . 이 장소에 서 의 어 부 들의 생활을 확인하는 듯, 그 가정-교회의 마롯바닥에서 낚시 두 개 가 발견되 었다 (Corbo, New Memoir s of Sain t Pete r , f ig. on 30 쪽 ; 그 리고 Qfam ao I, c olor tav . 4 fac in g 80 쪽) . 하여튼 이것이 애테리아가 본 그 교회라는 사실에 관해서는 거의 의심이 없다. 집사 베드로가 인용한 (GEYER 112-113 쪽; CCSL

CLXXV, 98 쪽 이 하 ; WET 194, 196 쪽) 애 테 리 아의 순례 기 록 (A D. 381-384) 에서 그녀는 그 회당에 관하여 기술할 뿐만 아니라 (89 항), 또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더욱이 가버나움에서는 사도들 중에서 첫째 가는 사람의 집들로부터 하나의 교회 eccles ia가 만들어 졌는데, 그 교회의 벽은 전에 있던 그대로 아직도 서 있다. 여기서 주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셨다.〉 애테리아가 기록한 첫 문장은 그때 까지 아직도 서 있던 것은 베드로 집의 원래의 벽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고, 중풍병자를 고친 것에 대한 언급은 예수께서 가버나 움에 있는 〈집에〉(막 2:1), 곧 베드로의 집에 계셨던 사실을 상기시 킨다(마 8:14 ; 막 1:29 ; 눅 4:38). 100 가버 나움에 있는 팔각당 마침내 발굴 현장의 3 번 층(l evel 3) 에서는 그 인술라 사크라의 모 든 사가(私 家 )들이 허물어지고 팔각형의 교회가 그 자리에 건립되었 음이 발견되었다(Cqfa rnao I, 26-58 쪽). 1921 년에 오르팔리에 의하여 이미 인지되었고 1968 년에 코르보에 의하여 완전히 발굴된 현장의 구도 (99 항)에서 그 윤곽이 나타났으며 그리고 여기에 제시된 사진(서 쪽으로부터 찍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교회는 세 개의 동심 링 안에 배열되었댜 중앙 팔각형의 벽들은 그 숭앙받는 홀(구도의 1 번 방)의 기초 바로 위에 놓였으며, 지붕은 여덟 개의 석주에 의하여 떠받쳐 졌다 . 둘째 벽도 역시 완전한 팔각형으로 중앙 팔각당을 둘러싸고 있었다. 셋째 벽도 역시 동심(同心)으로 되어 있었고, 행각(行閣)을 만들어 주고 있으나, 북쪽으로부터 서쪽과 남쪽으로 다섯 부분에만 행각이 있었고, 동쪽과 남쪽으로는 보조 방들을 위한 공간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불과 얼마 후예 침례탕을 포함하는 후진이 동편에 추가되었다.

모자이크 포장이 된 부분들은 행각과 둘째 팔각당과 중앙 팔각당 에서 아직도 발견된다. 중앙 팔각당에 있는 부분은 가장 잘 보존된 것이었다. 그것은 탑가에 있는 〈오병이어 교회〉 (79 항)에서와 같이, 기하학적 도안과 연꽃 가장자리를 특색으로 삼고 있으며, 중심 물체 는 초기 기독교의 불멸의 상징인 공작이었다(Cafa mao I, 50-52 쪽). 주화와 도기들의 중거에 의하면, 팔각형 교회의 건축 공사는 대략 제 5 세기의 중간에 있었다. 이것이 바로 피아첸짜의 무명씨가 AD. 570 년에 다음과 같이 보고한 그 교회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의 심이 없다 . 〈우리는 가버나움으로 성 베드로의 집에 왔는데, 그 집은 바실리카이다〉 (GEYER 163 쪽 ; LPPTS IT-D, 6 쪽 ; CCSL CLXXV, 159 쪽 ; wJP 81 쪽). 건축 연대와 그것을 바실리카로 기술한 것은, 그 팔각형 교회가 이방인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지어졌을 가능성이 농 후함을 알려준다. 이 이방인 기독교인들이란 대부분 그 당시에 먼저 있던 가정-교회에서 예배하던 유대계 - 기독교인들을 계승한 사람들 이었다 . 팔각형 교회는 비잔틴 시대의 나머지 기간 동안에 계속해서 사용되다가 아랍 시대가 시작될 때 (A D. 638) 유기된 것으로 보인다. 건축 양식에 관하여 말한다면, 바실리카식 회당 (90 항)과 기독교 바 실리카 (225 항) (세 개의 후진이 있어서 눈에 띄게 구별되는 십자군 바실 리카[예컨대, 67, 125, 203 항]를 포함하여)는 예배를 위하여 의도된 그 것들의 종적(縱的)인 구도로 특징을 이루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버나움에 있는 팔각형 교회는 중앙 또는 동심 구도(다각형 또는 원 형의)를 가지고 있으면서, 분명하게 하나의 기념 교회 memori a church, 죽 특별한 사건이나 인물을 위하여 의미 있는 신성한 장소 를 표시하고 기념하는 교회로 의도된 기독교 건축물 중에서 성지에 서 발견되는 최고(最古)의 본보기(Cafa mao I, 56 쪽)를 제공하고 있다. 다른 본보기들로는 감람산 위 에 있는 〈승천 교회 Church of the Ascens i on 〉 (158 항), 겟세마네 근처 의 〈동정 녀 마리 아의 무덤 Tomb

of the Vi rgin M ary〉 (170 항), 시온 산 위의 〈비잔틴 교회 By z anti ne Church 〉 (205 항), 〈예수의 무덤 Tomb of Jes us> 위 에 있는 〈아나스타 시스 (로툰다) Anasta s is [Ro tun da]) 〉 (225 항) 둥이 있다. 101 비르암에 있는 회당 훌레 Huleh 골짜기의 서쪽 산중에 있는 케파르 비르암 Ke f ar B ir 'am 은 신약의 장소는 아닐지라도, 그곳에 있는 매우 잘 보존된 회당 유적지 때문에 여기서 언급해도 좋을 것이다. 이 유적지는 가 버나움과 고라신과 함께 전형적인 갈릴리식 또는 바실리카식 회당 건축 구도를 보여 주는 것으로 앞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다 (90 항). 그와 같은 유사성에 비춰보면, 비르암 회당은 아마도 가버나움과 고 라신의 회당들과 비슷한 연대에 속하는 것이며, 적어도 지금까지는 대체로 제 2-3 세기의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 장소를 1852 년에 에드워드 로빈슨 Edward Rob in son 이 방문하 였는데 (B i bl i cal Researches IV, 70 쪽 이하), 그는 『서부 팔레스타인 탐사 The Surve y of Weste m Pales ti ne .!I (1881) 에서, 두 회당에 관하여 보고한 찰스 w. 윌슨 (Charles W. W il son) 이 한 것처럼 그 두 회당의 유적지를 살펴보았다. 그 둘 중에서 작은 것이 지금은 완전히 사라 져 버렸고, 그것의 돌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건축 자재로 떼어갔다. 1861 년에 사각형 히브리어 문자로 된 명각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주된 입구의 상인방(上引坊)에 길다랗게 한 줄로 기록된 것 으로서, 부분적으로 루브르 Louvre 에 보존되어 있다. 그 내용은 이렇 다. 〈이 장소와 이스라엘의 모든 곳에 평화 (c, i, rz' )가 있을지어다. 레 위의 아들 레위인 요세J ose 가 이 상인방을 만들었다. 그가 하는 일 들에 축복이 임하기를 …….> 리즈바르스키 L i dzbars ki (ll7 쪽)는 이 명각을 제 2-3 세기의 것으로 보았으며, 이것은 앞서 가버나움과 고라

신에 있는 회당들과 케파르 비르암에 있는 이 회당을 포함한 갈릴리 형의 회당들을 이 연대의 것으로 본 것과 조화된다. 그 두 회당들 중에서 큰 것은 윌슨에 의하여 〈팔레스타인에 있는 그와 같은 종류 가운데서 가장 완전한 유적〉 (Surv ey 297 쪽)이라고 일컬어졌으며, 그것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직도 놀라울 정도 로 본래의 모습을 지닌 채 서 있다. 정면은 남쪽, 죽 예루살렘을 향 해 있고 하나의 주된 출입문과 두 개의 옆문을 가지고 있다. 이 정 면 앞에는 전면에 석주 여섯 개와 양쪽 끝에 석주 한 개씩을 가전 행각이 있었다• 102 비르암 회당의 주된 출입문 위에 있는 아치 상인방(上引坊) 아래 있는 둥근 장식은 감람나무 잎으로 만든 면 류관이다. 상인방에는 회선상(回旋狀)의 무늬 안에 포도송이와 포도 잎들이 교대로 새겨진 포도 넝쿨이 있다. 103 비르암 회당의 내부 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비르암 회당의 평면 구도는 가버나움과 고라신에 있는 회당들의 구도와 대동소이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것 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바실리카 bas ili ca 였다. 동쪽, 북쪽, 서쪽 삼면 을 감싸는 열주(列柱)가 있어서 회중석 주위로 세 개의 측랑들을 만 들었다. 모퉁이에 있는 석주들은 심장 모양의 대좌들 위에 서 있었 다. 위에 발코니가 있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104 벳새다 근처의 갈릴리 바다로 홀러드는 요단 강 마태복음 11:21-23 과 누가복음 l0:13_15 에서 예수께서 화(禍)를 선 언하신 말씀 중에 벳새다가 고라신과 가버나움과 연결되어 있으나, 빌립은 그곳 출신이며(요 1:4 4; 12:21, 여기서 그곳은 갈릴리 벳새다라 고 불린다). 벳새다는 또한 안드레와 베드로의 도성이었고(요 1:44) 한 소경이 고침을 받은 곳이었다(막 8:22). 복음 역사에 있어서 중요성을 띤 장소인 벳새다는 기독교 순례자 들의 경로 위에 있었으며 순례자의 기록들 가운데 나타난다 . 테오도 시우스 Theodos i us(530) 는 디베랴, 막달라, 〈일곱 샘〉, 그리고 가버나 움이 디베랴 바다의 연안을 따라서 2 마일씩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것 으로 일컫고, 그 다음에 그는 가버나움으로부터 벳새다까지는 6 마일 인 반면에 벳새다로부터 요단 강의 발원지인 파니아스 P ani as 까지는 50 마일 이 라고 말한다 (GEYER 138 쪽 ; LPPIS II-B, 8 쪽 ; CCSL CLXXV, 115 쪽 ; WJ P 63 쪽). 여 기 에 표시 된 마일 수는 어 림수에 불 과하지만 (73 항) , 요단 강의 근원까지 세어 올라간 것은 벳새다의 위 치가 그 강의 호수로 들어가는 곳 근처임을 시사한다. 테오도시우스 는 또한 세베대의 아들들(죽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 안드레, 그리 고 빌립이 벳새다에서 출생했다고 말한다. 요세푸스(Ant. XVIII 2, 1 §28) 는 분봉왕 빌립 (B . C . 4-AD. 34) 이 벳새 다의 지 위 를 마을 KW !lll에 서 도성 Jt 6}.. t<;으로 승격 시 킨 후 그 도성 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딸 율리아Juli a 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 율리 아는 B.C. 2 년에 추방되었으므로, 이 일은 그 연도 이전에 있었음에 틀림 없다 (SHJ P Vennes/M illar II, 172 쪽). 율리 아스 Juli as 라는 이 고 을의 위치를 요세푸스는 하부 가울라니 티스 Gaulan itis, 죽 지금의 골 란 고원에다 두는데 (War II 9, 1 §168), 이곳은 갈릴리 바다의 동쪽에 있던 빌립의 영토였으며 헤롯 안티파스의 갈릴리 영토의 맞은편에

있었다. 요세푸스는 또한 〈율리아스 마을 아래서〉 요단 강이 〈겐네 사르 호수를 가로지 른다〉고 진술하고 있다 (War ill 10, 7 §515). 그러 므로 율리아스 또는 벳새다_율리아스는 요단 강이 갈릴리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에서 조금 위로 떨어진 곳에 있었음에 틀림없고, 또한 그 강의 동쪽에 있었음에 틀림 없다. 요한복음 12:22 과 또한 프톨레 마이 오스 Ptol emy (G eog rap h y V 15, ed. Ste v enson, 128 쪽)가 벳새다를 갈릴리에 속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사실은 문제를 야기시킨다 . 하지만 원래의 벳새다 마을은 베드 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직업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예컨대 마 4:18, 21) 그 이름이 〈어부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에서 유래 된 점이 암시하는 바대로 필시 고기잡이 마을이었고 따라서 그 마을 은 필시 호수 바로 곁에 있었다. 요단 강이 갈릴리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에서 가까운 두 개의 장소 가 실제로 고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첫째는 호안으로부터 불과 50 야드 떨어진 키르베트 엘-아라즈Khir be t el-Ara j이고, 둘째는 연 안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2 킬로미터 떨어진 위쪽의 바위산으로 단 지 엣-텔 e t -Tell 로만 불리는 곳이다. 두 장소 모두에서 로마식 도기 가 발견되었으므로, 두 곳 모두에 논의되고 있는 시대에 사람들이 정착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 두 장소의 지리적인 위치를 각각 살 펴보면, 아라즈는 원래의 고기잡이 마을이었고 엣_텔은 벳새다_율리 아스의 성채가 있던 곳이었다는 가설이 더욱 이치에 맞게 된다. 후 자는 실제로 강의 동편에 있으며, 이것은 요세푸스가 율리아스 마을 을 가울라니티스라는 빌립의 영토 안에 두는 것과 일치한다. 현재 아라즈도 역시 강의 동편에 있으나, 엣-사키 es-S aki라고 불리는 큰 개펄이 아라즈의 동쪽에 있어서 강이 호수로 들어간 어귀에 있던 고 대의 강 줄기를 표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이러한 추측이 맞다면, 벳새다라는 고기잡이 마을이 실제로 갈릴리에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갈릴리 벳새다〉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은 아닐지라도 널리 쓰이는 칭호였을 것이다 (Ra ym ond E. Brown in AB 29, 82 쪽, n. 44). 바로 위에서 기술한 두 장소가 아직 발굴되지는 않았지만, 도기 이외에도 표면에서 얻은 발견물들에는 엣-텔의 남쪽 경사면의 기저 에 있는 큰 돌벽의 유적들과 아라즈에 있는 고대 건물들, 그리고 모 자이크의 흔적들이 포함되어 있다. 빌리발트 W illi bald(725) 와 그의 동료들의 여행 기록에는 가버나움으로부터 〈그들이 베드로와 안드 레가 있던 벳새다로 갔으며, 이제 거기에는 원래 그들의 집이 있던 곳에 교회 가 있다〉 (TOBLER AND MILIN/ER 261 쪽 ; WJ P 128) 는 말이 있다 . 발굴이 되지 않았으므로 그와 같은 교회의 자취들은 발 견되지 않았으나, 엣 - 텔로 들어가는 북쪽 입구에는 하나의 크고 자 르지 않은 현무암 돌이 있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이 분명한 기독교 적인 상징들을 지니고 있다. 즉 한 나뭇가지가 있어서 메시야 예언 으로서의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싹〉(사 11:1 , 10 ; 롬 15:12) 에 대한 유대계-기독교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으며, 그 위에 무지개를 가진 십 자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몇 개의 언약들을 가리키며(창 9:13, 둥), 한쪽 눈은 뜨고 한쪽 눈은 감고 있는 이 두 개의 눈들은 소경을 고치신 이적을 상징한다(막 8:22). 105 갈릴리 바다룰 가로질러 쿠르시를 바라봄 갈릴리 바다의 서편에서, 구체적으로 엣_탑가 e t -Tab g ha(76 항)에 서 5000 명을 먹이셨다고 그 장소를 밝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누가 복음 9:10 에서는 예수께서 벳새다로 물러가셨고 (104 항), 무리들이 분 명히 벳새다로부터 나가서, 그러므로 필시 호수의 동쪽 연안을 따라 좀 멀리 떨어진 어느 곳으로 그 분을 따라갔을 때, 그 사건이 발생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6 : 1 에서 예수께서는 갈릴리 바다의 다른편, 추측건대 동편으로 건너가셨고, 5000 명을 먹이는 일이 그곳 에서 잇따랐다. 그 후에 그의 제자들은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향했는데(요 6:16-17),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도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와 같이 군중을 먹이신 여러 복음서의 이 야기들에는 호수의 서쪽과 함께 동쪽을 가리키는 말들이 나타나고 있댜 또한 5000 명을 먹이신 이야기와 4000 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원래는 한 이 야기 의 단순한 이 문(異文)들이 었다 할지 라도 (76 항), 이 미 마태 복음 16:9-10 과 마가복음 8:19-20 에 는 이 둘을 두 개 의 분리 된 사건 들로 간주되고 있으며, 적어도 후기에 이 분리된 사건들이 두 개의 분리된 장소들에 놓여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애테리아에 의하 면 5000 명을 먹 이신 일은 서쪽 연안에 있는 〈일곱 샘〉(탑가)에서 기 념되었으나 (77 항), 알렉산드리아의 유튀키우스 Eu ty c hi us of Alexan- dri a 에 의하면 4000 명을 먹이신 일과 또한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일은 동쪽 연안에 있는 쿠르시 Kurs i에서 기념되었다. 『논증 서 The Book of the Demons tra ti on 』 (ed. Watt, CSCO 193, 137 쪽)에서 유튀키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디 베랴 바다의 동쪽에 있는 쿠르시 Kurs i의 교회는, 그 사람 안에 많 온 귀신들이 있었기 때문에 군대라고 불린 귀신들린 자를 그 분이 고쳐 주셨음을 중거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그 사람으로부터 나오라 고 명령하셨고, 그들은 그곳에서 풀을 먹고 있는 돼지들 속에 들어가도 록 허락해 주시기를 그 분에게 요청하였는데 그 분이 그들에게 이를 허 락하시자, 그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하 여 귀신들린 돼지떼를 바닷속으로 몰아넣음으로 그것들은 모두 물에 빠 져 죽었' 으며 그 사람은 고침울 받았다 . 그 교회는 또한 그 분이 거기서

떡덩이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써 여자들과 어린이들 의에 4000 명 의 남자들을 먹이셨고 그들이 모두 배부르게 된 것, 그리고 그 제자들이 그 여분에서 일곱 광주리를 가득 채워 모아들인 사실을 중거하고 있다. 여기에 제시된 광경은 호수로부터 동쪽으로, 가파른 언덕들을 바 라본 것인데, 이 언덕에서 연안으로 내려오면 아마도 쿠르시가 위치 했을 장소에 이른다. 106 쿠르시에 있는 돼지 이적의 기념물 유튀키우스(위의 인용구에서 105 항)는 4000 명을 먹 이신 일(마 15: 32-39 ; 막 8:1-10) 을 쿠르시에서 있었던 일 가운데 포함시키고 있으 나, 그가 그 장소와 연관하여 먼저 말하는 사건들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일과 돼지떼를 멸망시키신 일이며,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그 곳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기념된 것은 바로 이 사건들이었다는 것이 다(마 8:28-34 ; 막 5:1-20 ; 눅 8:26-39). 복음서의 이야기들을 보면, 마가복음 5:1 과 누가복음 8:26, '37에서 는 바로 위에서 언급된 두 사건이 〈거라사인의 지방(땅)〉에서 일어 난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이 〈거라사인〉이란 말에는 〈가다라인 Ga­ darenes> 그리고 〈게르게사인 Ger g esenes 〉이라는 본문상의 이문(異 文)들이 곁들어 있으며, 마태복음 8:28 에서는 그것이 〈가다라(인의) 지방〉에 있었다고 하면서, 〈거라사인 Gerasenes 〉 및 〈게르게사인〉이 라는 이문들이 곁들어 있다. 〈가다라인〉이란 이름은 가다라 Gadara 를 가리키는데, 이것은 갈릴 리 바다의 남동쪽 5 마일에 있고 야르무크 강Ri ver Yarmuk 아래 쪽 에 있는 움 케이스 Umm Q e i s 와 동일시되고 있다 (70 항의 지도를 보 라). 〈거라사인〉이란 이름은 지금은 제라쉬 J erash 로 불리는 거라사

Gerasa 를 가리키는데, 이것은 갈릴리 바다로부터 좀더 남쪽으로 30 마 일 이상 떨어진 곳이다 (107 항). 가다라 또는 심지어 거라사의 〈지방〉 이 호수의 연안까지 연장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는 하지만, 거 라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이 사건과 연관될 수 없음이 확실 하며, 가다라에 관해서는 호수까지 이르렀는지 분명하지도 않다. 따 라서 이렇게 하나씩 제거해 가는 과정에 의하여, 귀신들린 자와 돼 지 사건의 이야기 속에서 가장 그럴 듯하게 조화되는 것으로 남는 이름은 〈게르게사인〉이다. 사실 오리게네스는 가이사랴에서 그의 저서인 『요한복음 주석 Comment ;ary on Jo hn 』 (VI 24) 을 쓰면서, 거라사와 가다라는 너무 멀 리 떨어져 있는 것이므로 거절하였고, 게르게사인(「f: PYWaLO t라는 형 태로)과 게르게사 r tpy coa 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게르게사 는 디베랴 호숫가에 있는 고대의 도성 nbA t c 이며, 그곳에 하나의 절 벽이 있는데, 그 절벽으로부터 돼지때가 귀신들에 의하여 쫓겨 내려 온 것이 〈가리켜 보여진다〉고 했다 (BALDI 309 쪽 이하, no. 471 ; R. G. Clapp in ]BL 26 [1907], 65 쪽 ; F. C. Burki tt in ]BL '2:l [1908], 130 쪽). 이와 마찬가지로 유세비우스는 『지명록』 (ed. Kloste rm ann, 74 쪽)에 서 게르게사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이것이 디베랴 호숫가에서 〈가 리켜 보여진〉 마을血四이고, 이곳으로 돼지떼가 던져졌다고 말한다. 또한 시 온 산의 부르햐르트 Burchard of Mount S i on 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거라사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그 마을이 갈 릴리 바다의 연안에 있는 것으로 기술하면서 〈거의 디베랴 맞은편 에, 그러나 그곳으로부터 조금 북쪽에〉 있다고 한다 (LPPTS XII-A, 34 쪽). 게르게사라는 이름이 유튀키우스로부터 인용한 글 (105 항)에 나타 난 쿠르시라는 이름과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은 거의 확실하며, 쿠르

시(또는 케르사 Kersa) 라는 이름이 아직도 붙어 있는 그 장소는, 시온 산의 부르햐르트가 기술한 것과 같이, 갈릴리 바다의 동쪽 연안에 디베랴의 대충 반대편으로 약간 북쪽에 있다. 이 장소는 쿠르시 골 짜기 Valley of Kurs i라고도 알려 진 와디 사마크 Wadi Samak 의 어 귀 에 있다 . 골짜기는 비옥하여 농사 짓기에 좋고, 그 위에 있는 언덕들 은 목축하기에 안성맞춤이며 특히 돼지를 사육하기에 좋다. 바위로 된 산지는 가장 좋은 곳이며, 해안으로 내려가는 경사면은 귀신들린 자와 돼지떼의 이야기에 함축된 바와 같이 퍽 가파르다. 이 스라엘 고대 역 사 및 박물관 부 Dep artme nt of Anti quities and Museums 를 대신하여 밧실리오스 차페리스 Vass ili os Tz af e ri s 가 lCJ? O - 1973 년 사이와 1980 년에 쿠르시에서 발굴 작업을 실시하였다. 골짜 기 위의 경사면들에는 동굴이 있고, 골짜기를 따라 뻗어 있는 능선 의 꼭대기에는 작게나마 사람들이 정착했던 증거들이 있으며, 그 표 면에는 로마식 및 비잔틴식 도기도 있었다. 좁은 해안을 향하여 가 파르게 경사진, 약간 외진 언덕의 기슭에서는 큼직한 수도원 복합건 물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회반죽을 바른 직사각형의 돌벽 (145X 123 미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내부 표면의 부분들에는 장식용 그 림들이 그려져 있으며 그 복합 건물의 중앙에는 바실리카식 교회가 있댜 이 복합 건물과 호수 사이에는 로마 시대의 마을 혼적들이 있 고, 고기잡이 활동을 위한 작은 항구 시설도 있다. 연안에서 가까운 곳으로, 수도원 지역으로부터 300 미터 떨어진 텔 키르베트 엘-쿠르 시 Tell Khirbe t el-Kurs i는 로마, 비 잔틴, 아람, 그리 고 십 자군 시 대 에 사람들이 이곳을 점유했음울 보여 준다. 고고학적으로 탐사된 쿠르시의 후기 역사에서는 세 개의 주된 기 간들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첫번째 주된 기간의 첫번째 국면은 AD. 5 세기 말 또는 6 세기 초로 생각된다. 순례자들을 위한 숙박소를 가 지고 있는 그 교회와 수도원의 기초는 이 시기의 것으로 간주된다.

교회는 그 지역의 현무암 돌로 지어졌다 . 그것은 구도에 있어서 바 실리카이고, 동쪽을 향해 있으며, 열주(列柱)가 있는 안뜰과 배랑, 회 중석과 두 개의 측랑들, 그리고 울타리가 쳐진 후진이 있다 . 석주들 은 고린도식 주두(柱頭)들을 가지고 있었고, 벽들은 회반죽으로 그림 이 그려져 있었으며, 바닥들은 기하학적 디자인과 그 지역의 식물과 동물들의 그림으로 된 채색 모자이크로 되어 있었다. 기도 홀 본체 의 크기는 24Xl5 미터이다. 기본적인 건축학적 요소들은 탑가에 있 는 〈오병이어 교회〉과 대체로 동일하나, 탑가에 있는 교회에 십자형 의 구도룰 부여하는 넓은 수랑(柚廊)은 여기에 없다. 그 교회의 남쪽 에 있는 바깥 예배실은 수도원의 매장지였던 지하 토굴로 들어가는 입구를 제공한다. 수도승들의 거처는 그 교회의 북쪽에 있는 지역에 있었다. 수도원 복합 건물과 교회를 굽어보는 언덕의 가파른 경사면으로 올라가는 중턱에는 그 지역에서 케르사 Kersa 로 불리는 유적지가 있 다. 이것은 다른 구조로 되어 있으나, 아마도 수도원과 바실리카가 건립된 때와 같은 시기에 건축되었을 것이다. 이곳에 한 방이 있는 데 그 위에는 한때 망대가 서 있었고, 이 방은 높이가 7 미터나 되는 육중한 표석( 潔 石)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한편으로 그 표석 위에 있 는 계단뜰에는 모자이크 바닥과 반원형의 후진을 가진 예배실이 있 었고, 그 후진은 바위로 된 천연 대피소 안으로 뻗어 있었다 . 후진은 동쪽으로 향해 있었으나 반원형의 벤치가 놓여 있어서, 거기에 앉은 사람들은 그곳으로부터 다른 방향으로 그 아래있는 계단뜰 위의 둘 러싸인 바위 쪽으로 바라볼 수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그 아래 쪽으 로 수도원과 호수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십중팔구 기독교인들은 이 큰 바위가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고 또한 돼지떼가 바닷속 으로 달려 들어간(마 8:32 ; 막 5:1 3 ; 눅 8:33) 바로 그 장소를 표시하 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 제시된 사진은 그곳 주위에 남아 있는 지

계표(地界 標 ) 바위와 돌덩이로 된 벽들을 보여 주는데, 이것들은 〈돼 지떼 이적 예배실 Chap el of the Mirac le of the Sw i ne 〉의 중심 부분 이다. 쿠르시의 첫번째 주된 기간의 두번째 국면은 제 6 세기 말부터 614 년 의 페르시아인 침입까지의 시기로 매겨진다. 이 시기 동안에는 기독 교 인구가 증가한 것으로 보이며, 그 주된 교회당에는 약간의 개조 작업이 이루어졌다. 특별히 후진에 인접한 방 한 칸이 침례탕으로 변경되었다 . 입구에 있는 모자이크 포장에는 헬라어로 된 명각이 있 어서 , 장로 또는 제사장 n p rn p u i: E p o c;, 그리고 수도원의 지배인 또는 대수도원장TJ VOUµEvo c;인 스테파노스 S t e phanos 라는 사람의 이름을 일 컫고 있고, 비잔틴 황제 모리스 Ma uri ce 의 치세 (582-602) 동안인 58.5년 경이라는 연대를 표시해 주면서, 침례탕 ba pti s t e ry을 〈조명탕(照明 湯 ph oti st e r i on , (lxll ncr 대pt ov) 〉 , 즉 침 례 때에 받는 조명의 장소라고 칭 하고 있다(J us ti n , Di alo g ue I 61 ANF 183 참고, 기 독교 침 례 에 관 하여 : 〈 이러한 씻음은 조명 如ttcrµ bc 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 을 배우는 자들은 그들의 이해에 있어서 조명을 받기 때문이다〉). 두번째 주된 기간은 614 년으로부터 제 8 세기 초까지 걸쳐 있다. 페 르시아인의 침입 (614) 때 심한 손상이 가해졌다. 그 후에 아랍인 모 슬렘의 정복 (638) 으로 인하여 기독교인의 순례는 영향을 받게 되었 고, 새와 동물의 형상들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제 8 세기 초엽에 이 거주지는 유기되었다. 제 8 세기 초로부터 중엽까지의 세번째 주된 기간에 이곳은 잠시 동안 비교적 가난한 무리에 의하여 재거주되었으며, 교회는 가사(家 事 )의 목적들을 위해서만 사용되었다.

데카폴리스 107 제라쉬의 구도 데카폴리스 ACK 畑 oAlc( 데가볼리)는 복음서에서 오직 세 번 언급되는 데(마 4:2. 5; 막 5:20; 7:31), 이 언급들 중에 오직 마지막 구절만이 예 수께서 그곳에 가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 마지막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 언어가 명 쾌하지 않다. 왜냐하면 ttVa . jlf:OO V 1:@ V opi.( i)v ACKQ .Jt6 Ac(i) C (아나 메손 톤 호리온 데카폴레오스)가 〈데카폴리스 지역을 통과하여 throu g h the reg ion of the Decapo lis (R SV) 〉로 번역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데카폴리스 변경의 가운데를 통과하여 throu g h the mids t of the borders of Decapo lis (ASV) 〉로도 번역되며, 심지어는 데 카폴리스 동맹 내에 있는 도성들의 정치적 경계선들 〈사이로〉라는 의 미로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Sherman E. Joh nson, Black's NT Comment .aries , Mark, 139 쪽 참고). 이름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데카폴리스 Deca poli s 는 그 실제적 숫 자가 때때로 다르기는 했지만, 〈열 도성들〉의 연합이었다. 기독교 시 대[西紀]의 1 세기에 플리니우스는 그 연맹에 가입된 도성들의 이름

이 다메섹 Damascus, 필라델피아 P hil adel phi a, 라파나 Ra p han a, 스퀴 토폴리스 Scyt ho po li s , 가다라 Gadara, 힙포Hippo, 디온 D i on, 펠라 Pella, 갈라사 Galasa, 그리 고 카나타 Cana t ha 라고 한다 (Na t. Hi st. V 16, 74). 스퀴토폴리스는 요단 강의 서쪽에 있었고, 다른 도성들은 동 편에 있었댜 또한 이 목록에 의하면, 그 도시들의 영토 전체는 서쪽 의 스퀴토폴리스로부터 북쪽의 다메섹과 남쪽의 필라델피아(오늘날 의 암만 Amman) 로 이어지는 삼각형을 형성하였다. 플리니우스의 목 록에서는 갈라사가 아마도 거라사 Gerasa 와 같은 곳이며, 바로 위에 서 살펴본 바와 같이 (106 항), 이 도성과 가다라는 열 도성들 중에서 복음서의 본문에 언급이 되어 있는 두 도성이다. 로마 제국 내의 헬라 문화적 도성들로서 이 데카폴리스의 성읍들 은 주랑(柱廊)을 가진 주된 거리, 공회소, 극장, 신전 등과 같은 특징 물의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그 〈열 도성들〉 중에서 유적지가 가장 잘 보존되었고 가장 철저하게 발굴된 곳은 거라사 즉 제라쉬 Jer ash 이다. 거라사는 얌복 강Ri ver J abbok 의 지류인, 크뤼소로아스 C luy sorhoas 라고 불리는 강이 흐르는 길르앗 산중에 있다. 지상에 아직도 보이 는 폐허의 많은 유적들 때문에 그곳은 제 19 세기 초엽부터 현대 여행 자들의 관심을 끌어 왔다. 예컨대 1812 년에 그곳에 잠시 있었던 J. L. 부르크하르트J. L. Burckhard t는 성벽, 신전, 극장, 개인 주택, 주 랑이 있는 거리, 공회소 둥을 보여 주는 구도을 그릴 수가 있었다. 그는 공회소가 〈석주들이 한 줄로 웅장하게 늘어선 반원으로 둘러싸 여〉 (256 쪽)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석주들 중에 57 개가 아직도 그대로 서 있고, 그 폐허 전체에서 그는 190 개의 석주들과 이 수의 약 반 정 도의 깨어진 석주들을 헤아렀는데, 이것들은 모두 아직도 그대로 서 있다 (263 쪽 이하). 1884 년에 그곳에 간 기 르 스트랑쥬 Guy Le S trang e 는 폐허 〈팔뮈

라 Palm yra 가 시리아에 있는 그레코-로만 Greco-Roman 통치 시대의 가장 광범위하고 훌륭한 유적지인데도 제외되어〉 있음을 발견하였 고, 그것들이 한낮의 태양 아래 흰색으로 번쩍이며 눈앞에 두드러졌 을 때, 그것들은, 〈폼페이이 Pom peii의 깨끗하게 치워진 거리들의 매 우 현저한 특징을 이루는, 근래에 황폐화된 것과 같은 모양을〉 가지 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167 쪽 이하). 1891 년과 1902 년 사이 에 반복해서 그곳에 간 G. 슈마허 G. Schu- macher 와 자신의 작업 과정 (1898-1905) 에서 비교 연구를 하기 위해 1902 년에 바알베크 Baalbek 에 온 0. 푸흐쉬 타인 0. Puchs t e i n 에 의 한 좀더 세부적인 연구들이 있은 다음에, 보수와 보존 작업은 죠지 호 스필드 Geor g e Horsfi el d 지휘 아래 예루살렘 소재 영국고고학회에 의하여 1925 년에 시작되었다. 호스필드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술하였다. 〈그 폐허는 도보로 가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 으며, 모든 것이 흙과 낙석으로 막혀 있었고, 포장된 거리들은 흙 부 스러기와 넘어진 석주들 아래 상실되어 있었다. 밭들이 기념비들 위 로 잠식하였고 경작지가 극장들 안으로 뻗어 나갔다. 교회들은 거의 보이지 않거나 심지어는 알려지지도 않았다.〉 대규모의 발굴이 1928 년부터 1934 년까지, 처음에는 영국고고학회 와 후에는 예루살렘 소재 미국동방연구학회와의 협력 아래, 예일 대 학교에 의하여 수행되었으며, 그 결과는 1938 년에 칼 H. 크레일링 Carl H Krae ling의 편집으로 출판되었다. 1953-1956 년에 씨오 케이 넌 Theo Canaan 과 다이 애 나 커 크브라이 드 Dian a Kir kb ri de 가 요르단 고대 역사부를 대신하여 남쪽 극장에 대한 복원 공사를 실시하였고, 1959 년에는 파라 s. 마아예 Farah S. Ma'a y eh 가 같은 부(部)를 대신 하여 A.D . 2 세기의 방 무덤들 chamber t ombs 을 발굴하였다. 1 이 5_ 1 '57 6 년에는 하나의 새로운 계획이 요르단 대학교와 함께 요르단 고 대 역사부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이 계획은 1981-1983 년에 같은 부

의 〈발굴과 복원을 위한 제라쉬 기획 Jer ash Proje c t for Excavatio n and Res t ora ti on 〉으로 이어졌으며, 10 개국 이상에서 온 참가자들과 더불어 국제적 규모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에 대한 예비적 보고서가 1986 년에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구도는 발굴된 도성의 주요 특징물들을 보여 주고 있다. 두께가 10 피트요 둘레가 3500 미터나 되는 벽은 그 도시의 가운데를 관류하 던 강의 양쪽에 있는 산의 경사면을 둘렀다 . 주된 유적지는 서편에 있으며 , 이곳에는 남북으로 뻗은 주요 주랑(柱 廊 ) 거리가 강의 흐름 과 대체로 평행을 이루고 있다. 거리의 남쪽 끝에는 부르크하르트가 그 폐허를 감탄한 바 있는 제 1 세기의 큰 타원형 공회소가 있다 . 서 쪽으로 과히 멀지 않는 언덕 위에는 제우스 Zeus 의 신전과 남쪽 극 장이 있댜 주랑이 있는 거리를 따라 북쪽으로 나아가면, 동서로 뻗 은 두 개의 주요 거리의 교차점들에 사방 탑문(四方塔門)들이 있다. 북서쪽의 언덕 위에 있는 이 거리들 사이에는 제 2 세기에 지어져서 아르테미스Art e mi s( 아데미)에게 바쳐진 주 신전이 있고, 그 너머에 는 북쪽 극장이 있다. 남쪽으로 도성의 성벽 바깥에는 경마장이 있 고, 또한 130 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 Emp ero r Ha dri an 가 거라사를 방문했을 때 그를 환영하던 명각이 새겨진 개선문tri um p hal arch 이 있다 . 이 아치와 마찬가지로, 현존하는 건축 유물들의 다수는 제 1 세기 보다는 제 2 세기에 속하지만 , 그 도성이 제 1 세기에 이미 존재했던 그 대로의 구도를 많이 보존하고 있다. 제 4 세기와 제 6 세기 사이에 훌륭 한 기독교 교회당들이 세워졌는데, 그 중에 11 개가 발견되었다. 그 중 다수가 아르테미스 신전으로부터 멀지 않은 지역에 있었고, 하나 는 그 신전의 바로 뒤에 있던 회당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지어졌다.

108 제라쉬의 개선문 이 사진은 바로 앞 부분 (107 항)에서 언급된 개선문을 보여 준다. 발굴 당시 이 아치는 이 정도로 보존된 상태로 발견되었고, 그 이후 로 추가적 복원이 이루어졌다. 고대 도성의 남쪽으로 약 460 미터 되 는 곳에 위치한 이것은 남쪽으로부터 접근할 때 볼 수 있는 첫번째 주요 기념물이다. 이 아치가 발굴되었을 때, 그것의 길이는 37 미터가 넘고 폭은 9 미터나 되는 직사각형의 대지 위에 서 있었고, 중앙 구 조물은 길이가 25 미터이며, 재건된 것의 높이는 2 1. 5 미터이다. 배열 은 그 시기의 개선문들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것이다. 중앙에 폭이 5.7 미터요 높이가 10.8 미터인 하나의 큰 아치 모양의 통로가 있고, 양쪽에 폭이 2.65 미터요 높이가 5.2 미터인 비교적 작은 아치로 된 통 로가 있다. 이 아치의 양쪽 정면은 석주들과 벽감(壁命)들로 장식되 어 있다. 북쪽 면의 중앙 통로 위에는 약 19 개의 돌로 된 머름p anel 이 놓여 있었는데, 그 전체의 길이가 7 미터를 넘었고, 지금은 예루살렘 소재 팔레스타인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 명각을 지니고 있었 다. 그 명각은 이 문(前 An) 을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헌정하고 있으 며, 그가 가진 영예들 가운데 호민관의 권세를 열네번째 가지게 된 것 陣 ap x t K iic; t~o u(J ia c; ,:o t 6' 을 언급하고 있다. 이 것은 그 연대가 129/130 년이었음을 말해 준다 (L i ebenam, Fasti Consulares, KLT 41- 43, 1 (J7쪽). 109 제라쉬의 공회소 이 도성의 구역 안으로 들어가면 이내 공회소(公會所)의 이 부분 에 이르게 된다. 이 공회소의 넓이로 말하자면, 폭이 80 미터 이상이

요 길이가 90 미터이다. 열주들이 각기 다른 타원들을 그리며 그 둘 레를 에워싸고 있는데, 서쪽에 있는 것은 북쪽의 주랑이 있는 거리 룰 향하여 좀더 예리한 각도로 곡선을 그리고, 동쪽에 있는 것(여기 에 보이는 것)은 좀더 완만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다. 묵직한 포도(錦 道) 블록들p a ving blocks 은 주랑 행각의 곡선을 따라서 줄맞춰 놓여 있댜 석주들은 정사각형의 기초 위에 서 있고, 이오니아식 주두를 가지고 있으며, 연속 평방(平坊)을 지니고 있다. 이 공회소의 어떤 건축상의 관련성 을 착안한 예 일 발굴단 (Yale Exp edition ) (Kraeli ng, Gerasa, 157 쪽)은 그것의 연대를 제 1 세기에 두고 있다. 110 제라쉬의 남북 주랑 거리 주된 주랑 거리는 남쪽의 공회소로부터 북쪽 벽에 있는 그 도성의 북문까지 약 800 미터나 뻗어 있다. 주랑 행각들에 있는 석주들 중의 더러는 사진에 제시된 부분에서 보는 것처럼 고린도식으로 되어 있 고, 더러는 이오니아식으로 되어 있다. 이오니아식 원주들은 아마도 제 1 세기 중엽으로부터 온 것이고, 고린도식은 제 2 세기 말에 온 것이 다. 묵직한 포도(錦道) 블록들은 고대 병거의 바퀴 자국을 보여 주는 듯하댜 111 제라쉬의 〈대교회당〉 진입로 남북으로 뻗은 주된 주랑 거리 colonnaded s tr ee t (llO 항)를 따라 북 향하여 남쪽 사방 탑문으로, 그리고 그 너머로 120 미터쯤 나아가면, 왼쪽에 이 사진에서 그 일부를 볼 수 있는 위압적인 진입로가 있다. 그 거리 위쪽으로 불과 몇 피트 떨어진 단지 위에는 주랑 행각들이 서 있어서, 두번째 단지로 올라가는 건 충계 flig h t의 계단으로 접근

하게 한다. 두번째 단지 위에는, 발굴자들이 거라사의 〈대교회당 Ca th edral 〉 (112 항)으로 생각하는 한 교회의 어마어마한 폐허가 남아 있다. 그 긴 충계의 계단 아래에서는 아마도 제 1 세기의 것일 이교 신전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 신전의 크기는 작았지만(길이는 약 25 미 터, 폭은 약 10 미터), 아르테미스의 신전으로부터 멀지 않는 곳에 있 었으며, 아마도 중요성에 있어서만은 아르테미스 신전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112 제라쉬의 〈대교회당〉의 구도 교회는 바로 앞부분 (111 항)에서 기술된 긴 충계의 계단들 꼭대기 에 있는 두번째 단지 위에 서 있었다. 이것은 길이가 40 미터룰 넘는 바실리카였으며 내부 후진을 가지고 있었고, 보통 그렇듯이 동쪽으 로 향해 있어서 거리로부터 그 긴 충계를 올라오는 사람들이 그 건 물의 후진 끝으로 접근하였다 . 안에는 고린도식 주두를 가진 두 줄 의 석주들(한 줄에 각 12 개씩)이 양쪽의 측랑을 중앙 회중석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있었다. 석주들은 아마도 모두가 다른 어떤 건물, 어쩌면 그 전에 그 지점에 있었을 신전으로부터 취해 온 것들이었다. 발굴 자들이 분석한 여러 가지 고려 사항들을 살펴보면, 그 〈대교회당〉은 약 365 년 경에 세워졌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Krae ling, Gerasa, 219쪽). 서쪽 끝에는 그 교회의 안뜰이 있었는데, 이것은 20 평방미터 크기의 주랑들로 둘러싸인 이른바 샘뜰 Foun tai n Co urt (113 항)에 의하여 만 들어져 있었다. 그 뜰의 동쪽에 있는 행각은 아마도 제 2 세기 말경의 고린도식 주두들을 가진 여섯 개의 석주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Kraelin g, Gerasa, 210쪽), 다른 세 방향에 있는 행 각들은 비 교적 낮 았고 이오니아식이었다. 그 뜰의 중앙에는 정사각형의 저수통이 있 어서, 이곳으로 물이 2 마일 떨어진 샘들로부터 〈아르테미스 신전

Temp le of Art e mi s 〉 을 지나서 오는 수로를 통하여 모여들었다. 113 제라쉬의 샘뚤 이 사진은 샘뜰 Foun tain Co urt을 북서쪽을 향하여 대각선으로 바 라본 광경이다. 포도 블록들 밑에서 발굴자들은 그 뜰의 북서쪽 구 석으로부터 샘으로 뻗어 있는 연관(鉛管)을 발견하였으며, 저수통의 동쪽으로부터 배수로가 북동쪽 구석을 향하여 뻗어 있었다. 그 샘의 서 편으로 〈성 테오도르 교회 St. Theodore's Church 〉 (114 항을 보라)의 후진 밑부분을 파낸 약간의 발굴 작업이 있었으며, 한 작은 조각의 로마식 모자이크가 뜰과 같은 높이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제 2 또는 제 3 세기로 거슬러 오르고, 따라서 샘뜰은 그만큼 또는 그 보다 더 오래된 것임에 틀림없다. 375 년에 에피파니우스 E pip ha­ nius (Pan. haer. LI 30, 1-2 GCS Ha ll/Du mmer II, 301 쪽)는 거 라사에 있는 순교자 기념관과 기적의 샘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 매년 주현절 축제일이기도 한 가나의 이적 기념일이 되면 그 샘에서 포도 주가 흘러 나왔다고 한다. 〈대교회당〉과 이 인접한 샘이 십중팔구 그가 지칭한 그 장소들일 것으로 보인다. 제라쉬에서 발견된 몇 개의 명각들이 〈아라비아 신〉인 두사레스 Dusares 를 언급하고 있고, 이것 에도 비슷한 이적이 연관되어 있었던 사실은 거라사에 있던 그 교회 가 이교의 사건을 그 자체의 것으로 취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114 제라쉬의 〈성 테오도르 교회〉의 구도 〈대교회당〉과 샘뜰의 서쪽에 있는 세번째 단지 (111, 112 항 참고)에 는 또 다른 하나의 큰 바실리카가 있었다. 이 구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서쪽 끝에 큼직한 안뜰이 있었는데, 이것은 동서의 길이가 21 미

터 남짓하고 남북의 길이가 50 미터였다. 입구의 홀을 통하여 들어가 면, 북쪽, 동쪽, 남쪽으로 주랑들이 둘러선 널따란 뜰이 나타났다. 석 주들은 이오니아식 주두들을 가지고 있었고 바닥에는 모자이크가 깔려 있었다. 안뜰의 동쪽 행각으로부터는 바실리카로 들어가는 입 구가 세 개 있었다. 이 바실리카는 그 길이가 〈대교회당〉의 길이와 거의 같은 약 40 미터이다. 회중석과 양쪽의 두 측랑들은 고린도식 주두를 가진 두 줄의 석주(한 줄에 7 개씩)에 의하여 구획되었고, 바 닥은 채색된 돌과 대리석 식양으로 펼쳐졌다. 동쪽 끝에 있는 후진 은 외부가 다각형인, 돌로 반원형 천장을 만든 것으로 샘뜰 지대 안 으로 돌출해 있었는데, 이곳은 서쪽에 있던 예전의 행각이 제거된 곳이다. 교회의 후진은 반원형 천장을 떠받치고 있던 두 개의 아치 에 의하여 샘 자체의 정방형 저수통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동시에 샘의 저수통 자체 위에도 어떤 종류의 반원형 천장이 받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쪽 끝에 있던 세 개의 문 의에도 , 바실리카에는 북 쪽에 세 개, 남쪽에 네 개, 그리고 측랑의 동쪽 끝에도 두 개의 문이 있어서, 그것들을 통하여 바깥 샘뜰로 내려갈 수가 있었다. 115 〈성 테오도르 교회〉에서 나온 명각을 가진 깨진 돌덩이들 바실리카 (114 항)의 서쪽 끝에 있는 중앙 출입문 위의 인방돌linte l 에는 교회당의 내부로부터 읽을 수 있는 위치에 명각이 적혀 있었 다. 그 인방은 네 개의 큼직한 돌덩이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것들은 떨어져서 깨져 있었고, 첫번째 덩어리의 왼쪽 끝은 명각의 각 행의 처음과 함께 없어졌다. 없어진 조각은 후에 발견되었는데, 그리하여 그 행의 첫 부분의 올바른 독법을 알아낼 수 있게 되었다(그 전에 추 측으로 복원했던 내용은 모두가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명각은 모두 네 개의 긴 행으로 되어 있었으며 시적(詩的)으로 표현된 헬라어로

적혀 있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첫째 덩어리의 첫째 줄은 십자 표 시가 되어 있고 , 그 다음에 〈더럽혀지지 않은〉이라는 뜻의 ~pa TIO[c;] (아크란토[스])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이 긴 줄은 다른 세 개의 돌덩 이들 위에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그 돌들의 깨진 부분들은 필사본에서 세로 획으로 표시하였음) . 66µoc; ttµt at8 J...o qi6 p o u 8rn61i lpo u, µap 1 up o c; d0avdt I ou 0coct 8 to g o6 KAt oc t | mn tv xOovi K(ai ) Jt b 汀Q. 후의 문장은 둘째 줄의 처음 세 단어로 끝이 난다. Kat 1tp µ aat v I @Kt a voi: o . 전체 문장은 이렇게 번역될 수 있다. 〈나는 불멸의 신 같은 순교자 인 승리한 테오도르의 더럽혀지지 않은 집이니, 그의 명성은 땅과 바다와 대양의 경계를 넘어서 멀리까지 전파되었다.〉 둘째 문장에서는, 비록 순교자의 몸은 땅속에 있지만, 그의 영혼 은 하늘에 있어서 그 마을과 그곳의 주민들을 위하여 악(ttA E~ i. KaK[O] I v, 셋째 줄의 첫째 단어)을 막아 주는 방패가 되고 있다고 진술되어 있다. 셋째 줄의 후반부 쯤에는 셋째이자 마지막 문장의 시작을 표시하 는 또 하나의 십자가 있다 . 셋째 줄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Xdp lt l t0 I U O(co)O t 0cµcAlWOn 라고 적혀 있고, 넷째 줄에는 다음과 같이 계속되 다가 끝을 맺고 있다. tb &mo[v µa] | ptUp t0V llil(v i) Ai.Q tic [… …] Y tv6 (tK n @voc ;) K(at ) avfJJ ...8 tv i:r1. une :[p] I 8up a tv llJl(v t) b.i.Cil 1fic ; e: I [tv]6 (1.K n@voc ;) wu 8vqi 紅 (ou c;). 이것은 이렇게 번역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거룩한 순교자 기념관의 기초가 제 3 차 황제 포 고령이 내린 …… 디오스Di os 월에 놓여졌고, 인방돌은 5.5 9 년 제 5 차 황제 포고령이 내려진 해의 디오스 월에 올라갔다.〉 이 명각은 그 교회당이 봉헌된 대상의 이름과 또한 그 건물의 연 대를 말해 주고 있으므로 매우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순교자 테오 도르는 〈승리한〉 (a8;\.04l6 p o c;,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전투를 이겨 상

을 탄[개선한]〉이다) 사람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사람은 십중팔구 안 디옥에서 율리아누스Juli an(361-363) 에게 고문을 당했고 테오도레트 Theodore t(야 Hi st. III 11, 3 ed. Parmenti er 2d ed. GCS XLIV, 1 얽쪽) 에 의하여 〈진리의 투사〉 (avuv t m i c 'Cic an0eia c , 이것은 d0入n 'C hc 'C차 C an0e i aC 와 동의적인 구절임)라고 불리운 테오도루스 Theodorus 라는 이름의 젊은 시리아인과 동일인일 것이다. 인방돌은 5.5 9 년 (8v 4J' )의 디오스 월, 죽 오늘날의 10 월 /11 월에 (FHBC 68 쪽 Table 24) 올려졌으며, 기초는 그보다 2 년 앞선 같은 달에 놓여 졌다. 만약 그 시대가, 거라사의 명각들의 경우가 일반적으로 그렇게 보이듯이 폼페이우스의 시대였고, 그 시대의 기원을 B.C. 63/62 년으 로 잡는다면, 명각에서 인방돌을 올린 해로 주어진 559 년은 AD. 496 년에 해당할 것이며, 그보다 2 년 앞서 그 교회당의 기초가 놓여 진 해는 AD . 494 년에 해당할 것이댜 발굴 당시, 바실리카의 석주들과 주두들은 모두 그것이 넘어졌던 곳에 그대로 누워 있었으며, 바실리카는 어떤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지진으로 인하여 파괴된 것이 분명했다. 116 〈성 테오도르 교회〉의 침례탕 제라쉬에 있는 〈성 테오도르 교회〉의 구도 (114 항)가 보여 주는 바 와 같이, 바실리카와 안뜰의 양쪽에는 부가적인 건물들이 많이 있었 는데, 이것들은 아마도 예배실, 사제들과 방문객들을 위한 거처 둥이 었을 것이다. 이 건물들 가운데 가장 홍미로운 것은 남쪽에 있는 침 례탕이다• 이것은 침례탕으로 개조되기 전에는 어떤 종류의 예배실 이었을 것이다. 그 주된 방(구도의 7 번)의 동쪽 끝에 반원형의 후진 이 있었고, 여기에 침례반(沒禮盤)이 만들어져 있었다. 사진에서 보 는 바와 같이, 양쪽 끝으로부터 계단이 있어 침례 탱크 안으로 내려

가도록 되어 있었다 . 반원형의 후진에는 일종의 벤치 같은 것이 세 개의 작은 저장소 b i ns 와 함께 설치되어 있었다. 하나의 가설은 이 저장소들이 물에 잠김 imm ers i on 에 수반되는 기 름 바르는 예식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계단은 양쪽 에 있는 매우 작은 방으로부터 침례반으로 내려가고, 이 작은 방들 을 지나면 양쪽에 모자이크 바닥으로 깔린 큰 방 (4 번과 8 번)이 있는 데, 이것은 아마도 예식을 하기 전후에 사용하던 옷 갈아 입는 방들 이었을 것이다. 침례탕 뒤에는 그 침례반에 물을 채우기 위하여 마 련된 하나의 큰 저수통과 토기 배관이 있었다. 117 제라쉬의 기독교 십자 샘뜰의 북에서 일련의 계단들을 밟고 올라가면 전체 시리즈 중에 서 가장 높은 단지 인 제 4 단지 로 나아간다 (111, 112, 114 항 참고). 〈성 테오도르 교회 〉 과 〈 아르테미스 신전〉의 옛뜰 사이에 있던 이 지역에 는 공중 목욕탕과, 발굴자들의 생각에 교직자의 저택이었던 것으로 판단되는 건물들이 있었다 (107 항의 구도에는 없음) . 이 사진에서 보는 조각품 단편은 이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 이것은 화환(花環) 내부에 알파와 오메가와 함께 헬라 십자 Greek cross 를 보여 주고 있다 . 네 개의 단지 위에 있는 모든 건물들 __ 그 첫째 것은 이교의 건물이 요, 후기의 것은 기독교의 건물이다-을 함께 고려하면, 그것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163 미터에 이르는 복합 건물을 이루며, 서쪽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건물들은 주된 진입로가 위치한 (111 항) 주랑 거리의 높이보다 18 미터나 더 높은 곳에 있다. 이 큰 복합 건물은 한 장소에 밀집 구조들을 배열하고 건물들을 수용한 점에 있어서 북 시리아의 〈주상 성자(柱上聖者) 성 시므온 St. Sim e on Sty lites >, 애굽의 〈성 메나스 St. Menas>, 예루살렘의

〈성묘 Hol y Sepu lcher> 둥의 유명한 순례 중심지들에 있는 바슷한 교회 구조들의 배치와 비교될 수 있다. 거라사의 복합 건물을 예루 살렘의 것과 비교하여 ]. w. 크로우푸트]. W. Cro wf oo t는 다음과 같 은 말을 기록하고 있는데(i n Kraelin g, Gerasa, 202 쪽, quo te d cour- tes y Ameri ca n Schools of Orien ta l Research), 우리가 이것을 인용하 는 것은 특별히 우리가 후에 예루살렘에 있는 건물들을 연구하는 일 에 관심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 배열에 있어서 완성된 그룹은 예루살렘의 〈성묘〉 주위에 있는 건물들의 원래의 배열과 엄밀하게 일치한다. 거라사에 있는 노상 행각 과 큰 충계는 예루살렘의 성전 입구와 동쪽 안뜰과 일치하고, 〈대교회 당〉은 〈콘스탄티누스 순교자 기념관Martyri um of Cons tantin e 〉과 일 치하며, 샘뜰은 둘째 안뜰 및 갈보리와 일치한다. 또한 〈성 테오도르〉은 〈아나스타시스〉과 일치한다. 심지어는 두 곳에 있는 침례탕들도 대략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두 지대의 표면 윤곽은 매우 달랐다. 예루살렘에서는 땅이 전반 적으로 비교적 평평했고 서쪽 끝에 바위가 올라온 곳에서는 더욱 심하 게 깎여졌다. 거라사에서는 경사가 완만하게 져 있었고, 알맞은 정도로 둑을 쌓거나 단지를 만듦으로써 상이한 표면의 연속이 형성되어 있었 다. 그러나 이러한 점(배열)에 있어서 두 곳의 배열 상의 유사성은 너무 근사하여, 거라사의 구도가 그 최종 형태에 있어서 예루살렘의 양식을 계획적으로 본딴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이 이제는 예루 살렘에 있는 건물이 한때 어떻게 보였는지를 현존하는 다른 어떤 구조 물들의 그룹보다도 더 잘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의심을 품을 여지가 없다.

118 〈성 코스마스와 성 다미아누스의 교회〉에 있는 바닥 모자이크 〈성 테오도르 교회〉의 안뜰에서 서북서쪽으로 150 미터 떨어진 곳 에 세 개의 교회당이 한 그룹을 이루고 있는데 (Krae li n g, Gerasa, 241-249 쪽), 이것들은 모두 하나의 공동 안뜰쪽으로 열려 있다. 왼쪽 에는 592 년 =AD . 529/530 년(명각 no. 309) 에 성 죠지 St. Geor g e( 성 게오르기우스)에게 봉헌된 바실리카가 있고, 중앙에는 후진 곁에 있 는 방에 침례탕을 가진 둥근 교회당이 있는데, 이것은 594 년=A.D. 531 년(명각 no. 306) 에 침례자 성 요한에게 봉헌되고 모자이크로 장 식된 것이댜 그리고 오른쪽에는 성 코스마스와 성 다미아누스에게 봉헌된 바실리카가 있댜 맨 마지막으로 거명된 교회의 바닥 모자이 크가 여기에 제시된 사진에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여러 개의 거라 사 교회들 안에 있는 모자이크 포장들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된 것이 댜 성상 안치소 chancel 계단 바로 밑에 있는 바닥에는 단 한 줄의 명각이 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두 순교자에게 이 교회당을 봉헌 한다는 것과 그 연대가 595 년=A. D. 533 년임을 말해 준다. 이것 아래로(사진의 최상단에) 잇따라 열 줄로 된 명각이 있다. 이 것은 그 순교자들이 전투에서 승리한 a8Ao (lJ 6 pffi v 것으로 말하고 (115 항 참고), 목자이면서 현명한 안내자인 어떤 감독 바울 B i sho p Paul 을 언급 하고, 이 교회의 건립자의 이름은 立쿠亡쿠꾸 ::::.Prodromos(n p 66 p oµo c;, 〈전주자fo rerunner 〉), 죽 (침례자) 요한의 이름을 보존하기 위하여 기 억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의 뜻은 그 명각의 바로 왼쪽에 있는 테오도르라는 이름을 가진 기증자의 초상에 의하여 잘 설명된다. 〈하나님의 선물〉을 뜻하는 헬라어 이름 테오도르 Theodore 는 분명히 요한 (1 야 wnc ; 1uavdv 울 헬라식으로 바꾼 형태)의 상당어(相當語)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자체가 히브리어 요하난(p n,,, 〈야 훼는 은혜로우시다〉)뿐만 아니라 또한 여호나단 또는 요나단 c,m, il

또는 ,m,.,, 〈야훼께서 주셨다〉)의 상당어였기 때문이다, 명각의 오른 쪽의 대옹하는 위치에 , 사진에서 보이는 것은 오란트 oran t의 자세로 (죽, 두 팔을 뻗고 기도하는 자세로 , 아래의 681-684 쪽 참고) 서 있는 테오도르의 부인 죠지아 Geor gi a( 게오르기아)의 초상이다 . 모자이크의 나머지 부분은 회중석 바닥의 대부분을 덮었다 . 보존 된 부분에는 구불구불한 경계선과 정방형과 마름모의 판이 있다. 마 름모로 된 첫째 줄에는 다른 기증자들을 기념하여 문양을 새겼는데, 즉 초상으로 나타난 아스트리 치 우스 As tri c i us 의 아들 요한 Joh n, 명 각(명각 no. 311) 으로 이름이 기록된 호민관 다기스테우스 Dag ist h e us, 그리 고 초상으로 나타난 칼로에 오니 스투스 Calloeon ist u s 둥이 다. 다 른 마름모들은 매우 다양한 장식 식양들을 보여 주고 있는 반면에, 정방형들은 새와 동물의 형상을 담고 있는데, 역시 매우 다양하게 , 그리고 가로 및 세로로 새들의 줄과 동물들의 줄이 번갈아 나타나도 록 배열되어 있다, 119 제라쉬의 회당 교회 밑에 있는 회당의 바닥 모자이크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07 항), 〈아르테미스 신전〉 바로 뒤에는 교회가 있었으며, 이 신전은 전에 그곳에 존재했던 회당 위에 지어 진 것으로 발견되었다. 교회는 명각에 의하여 530/531 년으로 그 연 대가 매겨졌으며, 건물 형태는 회중석과 두 측랑과 후진을 가진 바 실리카였고 동쪽을 향해 있었다. 또한 그 아래에는 회당이 직사각형 의 바실리카 구도로 되어 있었고, 따라서 후대의 교회에 병합되기에 적합하였으나, 건물의 방위는 동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죽 대체로 예 루살렘 방향으로 향해 있었다. 회당으로 가려면 동쪽으로 안마당을 지나가서 현관방과 세 개의 문을 통해서 들어갔다. 내부에는 두 줄의 석주가 한 회중석과 두 측

랑을 형성하였고 , 석주들 중의 몇 개는 교회 내의 원래의 장소에 재 사용되었다. 서쪽 끝에는 돌출한 방이 있었는데, 이것은 어쩌면 직사 각형으로 된 후진이었을 것이다. 회당은 분명히 교회보다 먼저 있었 고 5 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되며, 아마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 세 의 치세 (527-565) 초에 있었던 반유대인 핍박 때에 유기되거나 파괴 되었을 것이다. 회당의 바닥들은 모자이크로 포장되어 있었는데, 이 모자이크는 비록 단편들로만 보존되어 있지만 고대의 회당 모자이크 작품 중에 서 가장 섬세한 본보기에 속한다. 현관방에 있는 모자이크는 노아의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홍수 후에 그의 가족이 방주를 떠나는 것을 보여 주었다. 여기에 제시된 단편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두 사람의 머리가 헬라어로 기록된 이름과 함께 식별되는데, 그들은 곧 노아의 아들들 중의 두 사람인 셈 (CHM) 과 야벳 (IA !l> IA ; LXX 에서는 Ia 4> E8 으 로 기록됨)이다 . 그 위에 있는 나뭇가지 위에는 잔가지를 부리에 문 비둘기가 있어서, 물이 감했음을 알리는 징조를 가져다 준다(창 8:11). 이 화판 주위에는 서로 다른 동물들의 행렬이 있고――이것들 은 의심할 여지없이 노아와 함께 방주 안에 있던 동물들이다-또 한 동대 menorah, 향 부삽i ncense shovel, 양각 나팔 s hofa r, 종려 가 지 lulah, 아름다운 나무 실과 eth r og 등과 같은 친숙한 상징들이 있다. 헬라어로 된 불완전한 명각 하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지극 히) 거룩한 장소에 (평화가 것들기를) . 아멘. 셀라. 회당에 평화가 깃 들기를 . 〉 북쪽 측랑에는 히브리어/아람어로 된 명각이 있는데, 이것 은 〈온 이스라엘 위에 평화가 깃들지어다. 아멘, 아멘, 셀라〉라는 인 사말로 시작하고, 다음과 같이 기부자들 또는 미술가들의 이름들로 끝맺고 있다. 〈바룩의 아들 비느하스, 사무엘의 아들 요세, 그리고 히스기야의 아들 유단.〉

가이사랴 120 가이사랴의 전반적 구도 가이사랴가 비록 복음서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로마 제국의 팔 레스타인 수도였고 따라서 예수의 시대에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초 기 교회 시절에 이 도시는 자주 언급되었다(행 8:40 등등). 이곳의 간 략한 역사가 플리니우스 P liny (Na t. Hi st. V 14, 69) 에 의하여 기록되 어 있는데, 그는 목록에서 이곳을 〈헤롯 왕에 의하여 건립된 스트라 톤의 망대 Tower of Str ato, 다른 이름으로는 가이사랴 Caesarea, 그러나 지금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Emp er or Ves p as i an 에 의하여 설립된, 프리마 플라비아Prima Fla vi a 라고 불리는 식민지〉라고 기재하고 있 다. 요세푸스(Ant. XIII 11, 2 §§312-313) 는 이곳을 아리스토불루스 Aristo b ulus(B.C. 1 04/ 103) 의 통치 와 관련하여 스트라톤의 망대 Str a-ton 's Tower(~1p a1 (I) v oe; 퍄p Y0C) 라는 이름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 것 은 선원 생활을 하는 페니키아인들 Phoe ni c i ans 에 의하여 하나의 작 은 항구로 건립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돈 S i don 의 마지막 왕들 중의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이 스트라톤 S tr a to n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SHJ P Vennes/ M 沮 ar II, 115-118 쪽). 히브리 대학 교와 남침 례교 신학교의 1962 년도 발굴(아래의 132 항 참고)은 이 비 교적 오래된 페니키아 지대를 발견해 낸 첫 발굴이었다. 바더먼 교 수는 스트라톤의 망대가 일반적으로 후기에 가이사랴의 성읍 한계 선이 된 곳의 북쪽에 위치했으며, 적어도 회당 지역으로부터 북쪽에 있는 헤롯의 성벽의 주변 지대까지 뻗어 있었다고 보고한다. 이탈리 아 발굴팀들은 작업 기간들의 후기에 이 성벽을 치우면서 가장 낮은 충에서 헬라 세대의 도기를 얼마간 캐내었다 (G. Dell' Am ore, A. Calderi ni, L. Crema, A. Frova, S 따 v i di Caesarea Mari tim a [Ro ma : L'Erma di Brets c hneid e r, 1966], 267 쪽, illus . 336 을 보라). 알렉산더 얀내우스 Alexander Jan naeus(B. C. 103-76) 는 스트라톤의 망대를 졸리우스 Zo li us 라고 불리던 지방 폭군으로부터 빼앗았고 (Ant. X III 12, 2, §§324-326), 폼페 이 우스 (63) 는 이 성 읍을 해 방시 켜 서 시리아 도(道)에 부속시켰으며(Ant. XIV 4, 4 §76), 아우구스투스는 이것을 헤롯 대왕에게 주었다(Ant. XV 7, 3 §217). 헤롯은 그곳에 가 망성이 있음을 보고 거기에 화려한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을 요세푸스(A n t. XV 9, 6 §§331-332) 는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가 바다 가까이에 예전에 스트라톤의 망 대라고 불리던 장소, 죽 도성의 부지가 되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 있 음을 보게 되었을 때, 그는 웅장한 설계도를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그 도시 전역에 평범한 재료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흰 돌로 건물을 쌓아올렸다. 그는 또한 그 도시를 매우 값비싼 궁궐로 장식하였는데, 거기에는 시(市) 의사당과 또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노력이 많이 든, 잘 보호된 항구가 있었다. 이 항구는 피래우스Pir aeus 의 크기만 하였 으며, 착륙지들과 내부에 부차적인 정박지들을 가지고 있었다.〉 가이사랴에서의 헤롯의 건축 사업은 12 년(Ant. XV 9, 6 §341) 또 는 10 년(Ant. XVI 5, 1 §136) 이 걸렸으며, 후자의 기록에 의하면 제

192 차 올림피아 대제 Olym piad 기간에 해당하는 헤롯의 치세 제 28 년 에 완성되었댜 만약 헤롯의 치세 제 28 년을 그가 B.C. 37 년의 여름이 나 가을에 예루살렘을 취한 때로부터 계산한 것이라면, 그 해는 B.C. 10/9 년에 해당되고, 이것은 제 192 차 올림피아 대제 주기의 제 3 년과 일치하므로 (FHBC 114, 232쪽), 따라서 B.C. 10/9 년이 바로 그 도시 의 건설이 완성된 연대일 것이다 (A vi -Yonah in IE] 1 [1950-1951] , 169 쪽과는 위배됩 아비-요나는 B.C . 40 년으로부터 계산하여 B.C . 13/12 년에 이르는데, 이 해는 제 192 차 올림피아 대제 주기의 제 1 년보다 앞선 해이다). 그 도성의 준공은 매우 큰 봉헌 축제(A n t. XVI 5, 1 §137) 와 5 년 주기의 경기 제도Jt E 汀Q E tJUJt KOUc dv&V Q c 로써 경축되었다. 아우구 스투스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그 도성은 가이사랴 Kmud p c tQ CAnt. XV 9, 6 §339) 또는 가아사랴 세바스테 Kot a dp ct Q 2c0d0 대(A n t. XVI 5, 1 §136) 라고 일컬어졌으며, 그 항구는 또한 세바스토스 Se­ basto s( ~EPaa i:oc ; 1 tµi]. v) 라고 불렸다. 요세푸스가 언급한 바에 의하면 CAnt. XV 9, 6 §§339, 341 ; War I 21, 7 §§414-415), 궁궐과 항구 이의 에도 로마와 아우구스투스에게 봉헌된 신전이 있었는데, 이것은 그 항구의 입구를 향하고 있는 언덕 위에 서 있었으며, 그 도시 안에는 극장이 있었고, 항구의 남쪽에는 바다룰 향한 전망을 가진 원형 극 장이 있었다(여기서 요세푸스는 아마도 용어를 뒤바꿔 쓴 것 같다. 왜 냐하면 항구의 남쪽에서 발견되고 바다룰 향한 좋은 전망을 가진 것은 원형 극장이 아니라 극장 [128 항]이기 때문이다). 유대 땅이 로마인의 지배 아래 있는 동안, 총독들은 그들의 본부 를 가이사랴에 두었다. 이 사실은 요세푸스의 기록 가운데 있는 여 러 가지 관련 사항들에 의하여 지적되고 있다. 예컨대 빌라도가 로 마 군대를 가이사랴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이동시칸 것 CAn t. XVIII 3, 1 §5.5)과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어떤 요구 사항을 제시하러 가이사 랴로 나아간 것 (War II 9, 2 §171) 둥이다. 가이사랴에 있던 헤롯 대

왕의 옛 궁궐은 의심할 여지없이 총독들의 저택으로 사용되었고, 이 것이 바로 사도행전 23:35 에 〈헤롯 궁 Herod's p rae t o ri um 〉이라고 일 컬어진 것임에 틀림이 없다. 마지막 단어(Jtp a t't WP t OV[ 프라이토리온]) 는 라틴어로 pr aeto r i um (프래토리움)이다. 이것은 원래는 군대의 진 영에 있는 집정관p rae t or 또는 장군의 막사를 의미하다가 나중에는 도(道)의 지사가 거주하는 관저를 의미했다. 41-44 년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을 통치한 헤롯 아그립바 I 세 Herod Agrippa I 는 예루살렘에서 다스렸으나 경우에 따라 가이사랴 룰 방문했는데(A n t. XIX 7, 4, §332), 사실 그가 죽은 곳도 가이사랴 이다. 요세푸스 (An t. XIX 8, 2 §§343-352) 에 의하면, 그는 황제 Caesar( 가이사)에게 존귀를 표하기 위하여 벌어진 장관을 경축하고 자 가이사랴에 와 있었으며(이것은 아마도 헤롯 대왕이 제정한 5 년 주 기의 경기였을 것임), 완전히 은색으로 짠 의상을 입고 극장에 나타 나서는 아첨하는 자들에 의하여 신이라 일컬음 받았으나 혹독한 통 증에 사로잡히게 되어 수일 후에 죽었는데, 이때가 아마도 44 년의 봄이나 여름이었을 것이다 (FHBC302-303 쪽). 이것은 분명히 사도행 전 12:21-23 에 기록된 바로 그 사건이다. 〈유대 전쟁 Jew ish War 〉이 발발했을 때 (66), 20000 명의 유대인들 이 가이사랴에서 학살당하였다 (War II 18, 1 §457). 67 년에 베스파시 아누스 Ves p as i an 는 프톨레마이스Pt olem ai s 로부터 그곳으로 군대를 인솔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요세푸스는 그 도시가 유대에서 가장 큰 도시들 중의 하나로서 그 인구는 주로 헬라인으로 구성되어 있었 다고 말하고 있다 (War ill 9, 1 §409). 방금 인용한 구절에서 요세푸 스는 베스파시아누스가 그의 군대를 〈바다 위에 있는 가이사랴로 e t c ,:TJV napa J.. to v …… Kat cr ap e ta v > 인 솔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 다론 경우에 그는 티투스 T itu s 가 어떻게 그의 군대를 〈바다 위에 있는 가이사랴로부터 辻 b ,:ic txt 0aM .,:,: 11 Kat cr ap e ta <; > 철수시켰는지를

말하고 있다 (War VII 2, 1 §23). 그리 고 이 와 같은 호칭 방법 은 후에 많이 사용된 가이사랴 마리티마 Caesarea M ariti.m a 라는 라틴어 이름 에도 반영되어 있다 (Leo Kadman, The Coin s of Caesarea Mari tim a [1957], 9 쪽 참고) . 앞에서 본 구절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요세푸스의 구절들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유대 전쟁〉을 치르는 동안 내내 가이사랴를 그들의 본부로 삼았다. 예루 살렘이 함락된 후에 티투스는 로마에서 개선을 경축하고자 계획했 으나 70 년 10 월에 가이사랴에서 승리의 경축 행사를 거행했는데(당 시에 18 세가 된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 Do miti an 의 생일에), 이때 행 한 경기에서 2500 명의 유대인 포로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War VII 3, 1 §§37-38). 나라를 재조직할 때 가이사랴는 유대 도( 道 )의 유일한 수도가 되었으며, 타키투스 Tac itu s(H i s t o ri es II 78) 는 가이사랴가 유 대의 첫째 가는 도시였다고 말한다 (hoc Iudaea azp u t est) . 이와 같은 방법으로 플라비아 황제들 Fla vi an em pe rors 에 의하여 존귀하게 여겨 질 첫째가는 도시로서 그것은 〈콜로니아 프리마 플라비아 아우구스타 가이사랴 Colo ni a Prima Flav ia Aug us ta Caesarea 〉라고 불렸고, 우리 는 이미 위에서 플리니우스가 이 칭호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한 것을 살펴보았다. 230/231-253/254 년에 그곳에서 살았던 오리게네스Orig en 와, 아마 도 오리게네스가 죽은 지 10 년 이내에 그곳에서 출생하여 313 년으로 부터 339/340 년에 그가 죽기까지 감독으로 지 낸 유세 바 우스 Eusebi- us 와 더불어 , 가이사랴는 유명한 기독교 중심지가 되었다. 가이사랴 는 614 년에 페르시아인들에 의하여 공략을 당했으며, 639/640 년에는 아랍인들이, 1101 년에는 십자군이, 12 6.5년에는 술탄 바이바르족 Sul- tan B ai bars 이 이 도성을 점령했다. 술탄 바이마르족에 의하여 파괴 된 후로 가이사랴는 끊임없이 홑날리는 해안의 모래 언덕 아래에 가 라앉아 있다가 제 19 세기에 와서야 다시 사람들이 거주하게 되었고,

20 세기에 들어와서 오랫동안 계속된 고고학적 작업에 의하여 발굴되 었다. 이 발굴은 1951 년에 세도트-얌 Sedo t -Yam( 〈바다의 들판〉 ; 고 대 도성의 바로 남쪽)에 사는 유대인 거류민의 한 사람이 밭을 갈다 가 우연히 조상(影像) 하나를 발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고고학적 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따라, 고대 가이사랴의 주요 장소 들과 기념물들이 여기에 제시된 구도에서 다음과 같은 번호로 표시 되 어 있다. 1. 높은 high -level 수로, 2. 낮은 low-level 수로, 3. 비 잔틴 성벽, 4. 비잔틴 벽을 증거하는 탐사 호( 極 ), 5. 헤롯 성벽, 6. 한 개의 다각형 망대와 두 개의 원형 망대(북쪽 문?), 7. 헬라 시대의 유물과 비잔틴 회당, 8. 원형 극장(?), 9. 경마장, 10. 십자군 도성, 11. 아우구 스투스와 로마에 바친 헤롯 신전의 토대 podium , 12. 비잔틴 교회, 13. 비잔틴 거리의 종합 건물, 14. 미트래움mithr aeurn( 미트라 신전), 15. 비 잔틴 문서 보관소(도서 관?), 16. 항구, 17. 비 잔틴 요새 , 18. 극 장, 19. 사자(死者)의 도성 (necrop olis [공동 묘지]), 20. 주된 발굴 지 역 (1975-1979), 21. 〈갑(山用) 궁전 Promonto r y Palace>. 121 가이사랴에 있는 십자군의 해자와 성벽들 가이사랴 성내로 들어가려면 비잔틴 성벽의 선(구도 120 항의 3 번) 울 건너가게 되고, 고대의 경마장 (9 번)을 왼쪽으로 보게 된다. 경마 장은 아직 발굴되지는 않았지만, 길이가 약 320 미터, 폭이 약 80 미터 인 그 경 내 의 윤곽과 그 척 주(音柱) 또는 중앙 울짱 centr al bar rier (경기장을 세로로 분리하는 낮은 벽)을 나타내는 선은 명백히 식별된 다. 척주선을 따라서 아직도 보이는 것은 육중한 방첨탑 obe li sk 과 모 두가 붉은 화강암으로 된 세 개의 원추형 석주들이 넘어져 있는 것 이다. 또한 주행 노선 옆에는 사각형으로 된 붉은색의 거대한 화강 암 덩어리가 하나 놓여 있다. 경마장 lm t66 p oµ oc; (힙포드로모스)을 묘

사—한E l그i s 의 II 글20에, 1서5 -1파9 우L사CL니 m아,스 1 P24a-u1s2a9 n 쪽ia)s 는(D, es경cr주i p로tio의n of한 G쪽r이ee ce다 V른I 쪽보다 더 길고, 그 긴 쪽은 둑으로 되어 있으며 그 둑을 통과하는 길목에는 말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서 있는데, 이것은 타락 십푸스 Tar axipp us(Ta p a~ tmt o<;), 즉 〈말을 놀라게 하는 것〉이라고 불 린다. 아르고스인들 Ar gi ves 이 살던 네메아 Nemea 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이 물체의 한 예를 묘사하면서 파우사니아스는 이렇게 기록하 고 있다. 〈전차의 전환점이 있는 곳 위로 붉은 색깔의 바위가 하나 솟아 있었고, 그것으로부터 비치는 섬광이 마치 그것이 불인 것처럼 말들을 겁나게 했다.〉 추측건대 그 물체를 그곳에 둔 목적은 말을 놀라게 함으로써 달리는 말의 속력을 중가시키려는 것이었다. 가이 사랴 경마장에 아직도 놓여 있는 그 커다란 붉은색의 화강암 덩어리 는 그와 같은 타락십푸스에 대한 하나의 실례이다(따라서 팔레스타인에 서 알려진 것으로는 유일한 것임에 틀림없다). 경마장 너머에는 1954 년 에 우연히 출토된 제 5-6 세기의 비잔틴 유적이 있다. 그 안에는 넓은 충계의 밑바닥에 두 개의 커다란 로마식 조상들이 머리가 없어진 채 앉아 있는데, 하나는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하나는 붉은 반암 으로 만들어졌다. 모자이크 바닥에는 헬라어 명각이 있는데, 거기에 는 시 장(市長) 플라비 우스 스트라테 기 우스 Flav ius S tr a t e gi us(6 세 기 ) 가 공금으로 그 구조물을 건설했다고 기록되 어 있다 (RB 68 [1961], 122 쪽 이하, no. 15). 따라서 그가 고대의 조상(影像)들을 다른 곳으로 부터 장식품으로 들여온 것이 분명하다. 이 조상들이 처음에는 각각 제 2 세기와 제 3 세기의 것으로 여겨졌으나, 지금은 반암 조상은 하드 리아누스 황제 (117-138 년)를 나타내고, 거기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하드리아네움 Ha dri aneum(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쳐진 신전-옮 긴이)에서 온 것으로 생각되며 (A vi -Yonah), 그와 같은 신전이 존재 했다는 사실온 제 6 세기의 가이사랴 명각 하나가 보여 주는데, 이 명

각은 〈하드리아네움〉 (To 'A6 pt aV ELOV, RB 4 [1895], 75 쪽 이하 ; PEFQ S 1896, 87 쪽 이하)의 모자이크와 계단들을 성공적으로 완수(의심할 여 지없이 복원 작업을)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의견 중 아마 도 가능성이 더 낮은 제안(Dip lock) 은, 이 조상들이 헤롯 이후의 시 대에 로마가 가이사랴에게 선물로 준 것이며, 그 중에서 대리석으로 된 것은 클라우디우스 Clau di us(41-54) 를, 반암 상(像)으로 된 것은 티투스 T itu s(79-81) 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하여튼 이 두 조 상의 머리가 파괴된 것은 아마도 아랍인의 정복 기간 중에 있었을 것이다. 이 유적들의 바로 앞쪽에는 십자군 도성의 지역이 있다(구도 120 항 의 10번). 십자군의 요새화 체계 전체가 1960 년에 히브리 대학교의 아브라함 네게브 Avraham Ne g ev 의 지휘 아래 밝혀졌다 . 위쪽 부분 울 제외하고는 성벽들이 매우 잘 보존되어 있다. 남쪽, 동쪽, 북쪽에 세 개의 성문이 있고, 그것들 가까이에 세 개의 협문(來門)이 있다. 동쪽에 있는 주된 대문은 다리를 통하여 이르게 되어 있고, 가까운 벽 위에 있는 망대에 의하여 보호를 받게 되어 있었다. 여기서 바깥 대문은 남북으로 뻗은 홀로 들어가는 대문이며, 그 대문으로부터 직 각 방향으로 안 대문이 나 있어서 그것을 통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 가는데, 이와 같이 직각으로 들어가게 한 것은 방어자들이 공격자들 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게 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십자군 성읍은 그 이전에 이미 요새화되었던 지역일 수도 있으나, 방금 기술된 대문 체계는 제 13 세기에 사용된 것으로 믿어지며, 지금 존재하는 대로의 요새 공사(성벽과 해자)는, 그 도성이 술탄 바이바 르족 Sultan B ai bars 에게 함락되기 불과 수년 전인 1251 년에 가이사 랴를 요새화한 것으로 전해지는 프랑스의 루이 IX 세 Lou is IX 의 공 로로 돌려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해자(核字)는 폭이 30 피트이고, 경 사진 제방은 바닥으로부터 30 내지 45 피트 솟아 있다. 십자군 성읍

의 육지 쪽으로 세 방향을 두르고 있는 이 성벽들은 35 에이커의 지 역을 에워싸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이전 시대 도성의 전 지역 중 약 6 분의 1 에 불과하다. 122 가이사랴 앞바다 조망 사진은 십자군 성읍 안에서 앞바다를 향하여 바라본 광경을 보여 준다. 1· 884 년에 보스니아 Bos ni a 에서 온 모슬렘 망명자들이 이 십자 군 도성의 폐허 위에 정착하여 1948 년까지 그곳에 계속 있었다. 사 진의 왼편에 나타난 것은 그들의 사원의 첨탑min are t이다. 바다 쪽 으로 나가면 현재의 매우 작은 항구가 있고 수면 아래에는 헤롯의 매우 큰 항구의 유적이 있다(구도 120 항의 16 번). 헤롯 대왕이 가이사랴에서 행한 일들을 기록하면서 요세푸스는 그곳의 항구 건설에 가장 큰 강조점을 두고 있다(A n t. XV 9, 6 §§332-338 ; War I 21, 5-7 §§409-413). 그의 설 명 에 의 하면, 도라 Dora (북쪽으로 10 마일)로부터 욥바J o pp a( 남쪽으로 35 마일)까지의 해 안 전역에는 항구가 하나도 없었다. 이 두 곳도 빈약한 항구를 가진 작은 성읍에 불과했고, 남서풍이 그곳들을 치면서 해변의 모래를 휘 몰았다. 이러한 바람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연안을 따라 애 굽으로 항해하는 배들은 불안정하게 공해(公海)에서 정박하지 않으 면 안 되었다. 방파제를 만들기 위하여 헤롯은 길이가 50 피트, 폭이 10 또는 18 피트, 길이가 9 피트나 되는 거대한 돌덩이들을 20 길 fath oms 의 물 속에 내려놓고, 이 해저 기초 위에 그는 해면 위에까 지 올라오는 200 피트 폭의 방파제를 건설하였다. 이것의 바깥 부분 은 큰 파도를 막아 주었고 나머지 부분은 그 항구를 둘러싸는 돌벽 을 떠받쳐 주었다. 벽 위에는 망대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큰 것은 캐사르 아우구스투스 Caesar Au gu s tu s( 가이사 아구스도)의 의붓

아들 드루수스 Drusus 의 이 름을 따서 드루시 온 Drus i on 이 라고 일 컬 어졌댜 항구의 입구는 북쪽을 향해 있었는데, 왜냐하면 여기서는 북 풍이 가장 순풍이었기 때문이었다. 입구의 양쪽에는 세 개의 거대한 조상(影像)들이 있었다. 이것들은 석주 위에 서 있었고, 석주들은 다 시 (항구로 들어오는 배에서 볼 때) 왼편에 있는 망대와 다른 편에 두 개의 곧게 선 돌덩이들 위에 서 있었다. 이 돌덩이들은 함께 맞물려 있었고 망대보다도 오히려 높이 솟아 있었다. 헤롯의 화려한 항구 유적은 지금 가이사랴 앞바다 수면의 15 또는 20 피트 아래에 있으며, 1960 년에 이스라엘에 대한 링크 해양 탐험대 에 의하여 적어도 부분적으로 탐사되었다. 에드윈 A. 링크 Ed win A. L i nk 가 설계하여 마련한 배와 수중 장비를 이용하여 잠수부들이 고 대 항구의 원형 방파제를 도면으로 그렸으며 북쪽에 있는 입구를 탐 사하였다. 그들은 무게가 자그마치 20 내지 30 톤이나 되는 거대하게 깎은 돌들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돌덩이들 밑에, 그리고 커다란 나무 들보로 된 차페물 아래서 제 2 세기의 로마식 족자리 항아리 amp h ora 하나가 원래 모양 그대로 발견되었다. 130 년 경에 가이사랴 지역에 발생한 것으로 기록된 지진으로 (IE] l [1950-1951], 225 쪽) 헤롯이 만든 항구가 적어도 부분적으로 파괴되었고 그때에 이런 물건들이 바닷속으로 굴러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발견물들 가운데서 특별 히 홍미를 끄는 것은 하나의 작은 메달 또는 기념 주화이다. 이것은 한 편에는 턱수염과 돌고래의 꼬리를 가진 남성의 모습이 있다. 다 른 편에는 둥근 석탑들이 있는 항구의 입구가 있고 그 위에는 양쪽 에 조상이 얹혀 있다. 그리고 두 척의 돛단배가 들어오고 있으며, KA 라는 두 글자가 보이는데, 이것은 아마도 가이사랴 Kalod p c t a 의 약자일 것이다. 거의 확실하게 이것은 고대 항구의 동시대, 죽 아마 도 제 1 또는 제 2 세기의 상황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링크 해양 탐험대가 이렇게 시작한 사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1CJ7 9

년에 국제적인 가이사랴 고대 항구 발굴 기획이 형성되었다. 이어진 탐사의 결과로, 해안선으로부터 남쪽 방파제가 서쪽 곧 바닷속으로 뻗어 있고, 그 다음에는 북쪽으로 휘어져서 총 거리가 600 미터를 넘 었으며, 북쪽 방파제는 서쪽으로 200 미터 넘게 뻗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 두 개의 큰 방파제가 그 항구의 북서쪽 모퉁이 에서 서로 접근하는 곳에, 바로 요세푸스가 말한 바대로, 북쪽으로부 터 들어오는 열린 입구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123 가이사랴의 항구 성채(城~) 가이사랴 앞바다의 이 지점은 십자군 성읍의 해안 남쪽 끝에 있 다. 십자군 항구 망대의 유적이 여기에 서 있고, 그 위쪽에는 후기의 건물이 보이는 한편, 망대를 떠받치기 위하여 사용되던 로마식 화강 암 석주들이 물 속에 잠겨 있다. 124 가이사랴 십자군 도성의 남쪽에 있는 앞바다 십자군 성읍의 남쪽을 향하여 바닷속으로 뻗어 있는 갑(曲甲) (123 항) 과 아래에서 기술된, 좀더 남쪽에 있는 〈궁전 갑(宮殿血甲)〉 (132 항) 사 이에는 비교적 큰 만(灣)이 있는데, 그것의 일부가 이 사진에 보인 다. 한때는 헤롯의 항구가 이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곳이, 헤롯의 항구가 아마도 제 3 또는 제 4 세기에 지진을 만났거나 (122 항 참고) 방치됨으로 말미암아 파손되고 유기된 후인 비잔틴 시대의 가이사랴의 주된 항구 자리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125 가이사랴의 비잔틴식 주두와 십자 가이사랴 십자군 성벽의 안쪽에는 바다를 향한 낮은 언덕 위에 널 따란 폐허가 보인다. 이곳에는 십자군 시대의 석조 건축이 갈색의 석회석으로 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흰 돌로 된 많은 건축 석재들이 있다. 헤롯이 가이사랴롤 흰 돌로 건설하고(J ose p hus, Ant. XV 9, 6 §331), 캐사르의 신전을 아우구스투스와 로마의 조상과 함께 항구의 어 귀 를 바라보는 높은 곳에 세 웠으므로

나가 비교적 빈약한 솜씨로 건축되긴 하였으나 그 대교회당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아마도 원래 계획했던 것 보다는 훨씬 더 작은 교회가 후기에 세워졌던 것 같다. 십자군 대교회당의 북쪽에는 매우 큰 바잔틴 교회의 유적이 있는 데, 이것 역시 네게브에 의하여 발굴되었댜 대리석과 아로새긴 포장 (錦裝)의 인상적인 기초들과 미미한 유적들이 출토되었으며, 이와 함 께 여덟 개의 주두도 나왔는데, 그 각각의 전면에는 (여기에 보이는 바와 같이) 십자가 새겨져 있었다. 126 가이사랴의 「선한 목자』 조상 1960 년에 십자군 도성의 남쪽에 있는 성벽 바깥에서 실시한 발굴 작업에서 A. 네게브는 하나의 망상(網狀) 조직의 건물들을 발견하였 다. 여기서 서로 다른 충의 모자이크 포도(錦道)들이 출토되었는데, 이것들은 이 건물들이 4 세기부터 7 세기까지 사용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포도들 위에는 다수의 헬라어 명각들이 있었다. 한 명각은 원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거기에는 (6e 의 생략과 ¢o pt o8a t의 철 자) 로마서 13:3 이 표준 본문과 매우 근소한 편차를 가진 다음과 같 이 인용되고 있다. 명각 표준본문 OtA E t c 0tA e t c 8t µi 如pi(JOa t µTJ 4Jo 0t to8 at 1:TJV t~o uoi av -c~ v e~ouoi av tb dva0bv tb dva0bv JtOic t not ct

영어 번역 문자적 번역 (but) do you wish (그러 나) 너 는 원하느냐 not to fea r 두려워하지 않기를 the auth o ri ty 권세를 the go od 선을 do 행하라 이 건물들 위쪽에서 어린 양을 메고 가는 이 대리석 조상의 r 선한 목자 Good She ph erd 」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제 5 세기의 작 품일 것이댜 이러한 기독교적 특성들 때문에 이것이 오리게네스와 팜필루스 Pamp hilus , 그리고 유세바우스의 큰 학교 및 도서관과 관 련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할 수가 있었다 (Negev in CNI 11, 4 [1960], 22 쪽 ; 그리 고 in RB 78 [1971], 257-258 쪽 ; Lev ine in Qe dem 2 [1975], 46 쪽 및 pl. 8, 3 ; 그리 고 in Qe dem 21 [1986], 11 쪽). 미국 동방 연구 학회가 후원하고 로버트 J. 불 Robe rt J. Bull 이 지 휘하는 합동 고고학 탐험대에 의하여 1971 년에 시작된 가이사랴에서 의 작업의 일부로, 로마서 13:3 을 인용한 헬라어 명각을 가진 건물 (네게브가 발견한 것)에 대한 완전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그 건물은 길이가 60 피트, 폭이 48 피트였으며, 여덟 개의 방을 가지고 있었다. 중앙 홀은 동쪽으로부터 들어가게 되어 있었고, 양쪽에 방이 세 개 씩 있었으며, 여덟번째 방이 서쪽 끝에 있었다. 얇은 층의 재[灰]가 있는 것은 그 건물이 614 년에 페르시아인들에 의하여 화재를 당했음 을 가리킬 수도 있으나, 그것이 최똥적으로 파괴된 것은 640 년에 가 이사랴룰 아랍인이 정복했을 때였다. 이 건물의 원래 구도는 제 3 또 는 제 4 세기에 놓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모자이크 바닥의 맨 위충은 제 5 세기 말 또는 제 6 세기 초의 것으로 여겨지며, 이곳이 바로 여기 에 언급된 모든 헬라어 명각들이 발견된 포도이다. 두번째 모자이크

바닥의 밀에 있는 도기는 제 4 또는 제 5 세기에 건축되었음을 가리킨 다. 그 아래 있는 세번째 모자이크 바닥은 제 3 또는 제 4 세기에 속하 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로마서 13:3 을 인용한 헬라어 명각은 그 건 물의 북동쪽 모퉁이에 있었다 . 남쪽에 있는 방 중의 하나에서는 한 모자이크 메달리온 med alli on 이 그 동일한 본문을 담고 있었는데, 문 장의 균형이 잘 맞춰져 있었으며(아래에 재생됨), 표준 헬라어 본문 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명각 표준본문 Kat g;C t c tJtdt V OV Kat ~~Et <; EJtQ tVO V t; a0t ic t~ a t'.>귬 lC 영어 번역 문자적 번역 and you will have pra is e 그리고 너는 칭찬을 받을 것이다 from it 그것으로부터 다른 헬라어 명각들도 역시 기독교적 의미를 띠고 있는데, 예를 들면 끄 건물의 중앙 홀에 있는 것은 이런 말을 담고 있다. 〈그리스 도시여, 수장(首長) 마리누스 M ari nus 와 암펠리오스 Am peli os 와 무소 니우스 Muso ni us 를 도와 주소서.〉 가장 긴 명각은 서쪽 끝에 있는 방에 있었으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리스도시여, 문서 보 관소의 관리자인 암펠리오스와 재정 담당 비서인 무소니우스를 도 와 주소서.〉 이 마지막 명각의 내용에 비추어 발굴자들은 이것을 〈문서 보관청 Archi ve B uilding〉이라 부르고, 다스리는 권세를 잡은 자들과의 적당한 관계에 관한 바울의 말씀을 참조하여 이 명각들이 만들어진 시대(제 5-6 세기)에 이 건물이 어떤 정부 차원의 기능을 감

당했을 것으로 생각한다(구도 120 항의 15 번). 두 개의 더 낮은 모자이 크 바닥도 또한 명각을 포함하고 있으나, 무슨 말을 한 것인지는 아 직껏 밝혀지지 않고 있다 . 방금 기술된 그 건물의 동쪽에 있는 주된 입구 앞에서 발굴자들은 건물 내부에 있는 세 모자이크 바닥과 일치하는 세 충의 모자이크 포도와 여러 줄의 흰 대리석 석주 대좌( 臺 座)들을, 몇 개의 넘어진 석주 동체와 고린도식 주두의 단편들과 함께 발견하였다(구도 120 항 의 13 번). 계속해서 조사한 결과 , 이것은 다름아닌 비잔틴 시대 가이 사랴의 남북으로 뻗은 주된 거 리 카르도 막시 무스 cardo max i mus 였 으며, 석주의 열(列) 사이에는 석회석 돌덩이로 포장된 18 피트 폭의 도로가 있었고, 그 양쪽에는 모자이크로 덮인 보도가 있었으며, 전체 카르도는 아마도 남쪽에 있는 극장 (128 항)으로부터 북쪽으로 십자군 도성의 터 안쪽까지 뻗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p lan in BAR 8.3 [May/ J u ne 1982], 27 쪽). 그 모자이크의 유망한 연대들이 주어졌으므 로(제 5-6, 4-5, 그리고 어쩌면 3 - 4 세기), 지금까지 발견된 바대로의 거 리는 비잔틴 시대 또는 아무리 이른 시기라 할지라도 로마 시대 말 엽으로 그 연대가 매겨질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헤롯의 가이사랴 의 남북으로 뻗은 주된 거리의 노선을 그대로 따른 것일 수도 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어 있어서 남북으로 난 거리를 직각으로 교차 하는 십 자 거 리 들 (decumanus [데쿠마누스], 복수는 decum 따 1i [데쿠마 니])도 또한 발견되 었다. 127 가이사랴의 미트래움에서 나온 대리석 미트라스 메달 바로 위에서 기술한 카르도 막시무스 (126 항)와 십자군 도성의 남 쪽에 있는 해변 사이에서 매우 많은 지하 저장실들이 발견되었는데, 이것들은 가이사랴의 헤롯 항구를 위한 창고로 확인되었다. 〈문서

보관청 〉과 바다 사이 에 놓여 있으면서 (BAR 8.3 [May/ Ju ne 1982], '2:7 쪽 for locati on pla n), 그 3 분의 2 는 모래로 채워져 있는 일련의 창고 들 중의 한 창고 horreum 는 합동 고고학 탐험대에 의하여 2 년여의 기간에 걸쳐서 발굴되었다. 그것은 길이가 96 피트, 폭이 16.5 피트, 높 이가 15 피트인 둥근 천장으로 된 방이었다. 반암 위에 놓여 있는 가 장 낮은 바닥 충에는 다량의 커다란 저장 항아리들 amp horae 의 파 편이 있었다. 이 항아리들은 B.C. 1 세기 말과 AD. 1 세기 중엽 사이 에 서부 지중해 지역과의 교역에 사용된 항아리의 전형적인 종류이 며(B lakel y in O:ze sarea Mari tim a IV, 57 쪽 이하), 따라서 지하실과 그 해안을 따라 계속 배치돼 있는 다른 지하실들이 그 당시 헤롯의 항구 시설의 일부였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네로 (AD. 54-68) 의 주화들도 발견되었다. 후기에 와서 측면 벽을 따라서 돌 벤치들이 세워졌으며, 지하실의 맨 안쪽 끝에는 돌 제단이 세워졌다. 벤치들과 제단은 회반죽으로 덮여 있었고, 벽들은 회반죽으로 칠해져서 프레스코fr esco 그림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 그림들은 오늘날 보존 상태가 매우 좋지 않으나 미트라Mithr a 를 주제로 한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창시의 장면들인 것 같다. 천장은 청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제단 뒤에는 여기에 제시 된 사진에 보이는 큰 메달리온 med alli on 이 있었는데, 이것이 나타내 는 것은 틀림없이 미트라/미트라스Mithr as 이다. 따라서 이러한 양상 으로 볼 때, 그 지하실은 미트래움Mit hraeum( 미트라 신전)(구도 120 항의 14 번), 죽 미트라/미트라스를 숭배하기 위한 성소였다. 제단의 기초와 지하실의 다른 곳에 있는 도기들――암포래 amp horae, 요리 하는 그릇들, 많은 둥들과 둥의 파편들_一은 218-222 년으로 연대가 매겨진 엘라가발루스 Ela g abalus 의 주화 하나와 함께 그 미트래움이 제 1 세기 말부터 제 3 세기의 중 • 말엽까지 사용되었음을 가리킨다 (Blakely, O:ze sarea Mari tima IV, 101-103 쪽).

방금 언급한 큰 메달리온은 지름이 3 .1 25 인치이고, 황소를 죽이는 장면을 얕은 돋을새김 bas-re li e f으로 새긴 것인데, 이것은 미트라 숭 배 Mithrai sm 에서는 매우 특징적인 것이다 . 프뤼기아 P hrygi a( 브루기 아) 모자와 어깨 망토와 짧은 치마를 착용한 미트라스는 황소 등에 올라타고, 마치 페르세우스 Perseus 가 메두사를 죽일 때 그렇게 한 것처럼 먼 곳을 바라보면서 황소의 어깨를 향하여 단검을 올려친다. 뱀과 개가 그 옆에 있고, 오른쪽에는 카우테스 Cau t es 가 그의 횃불을 위로 치켜들고 있으며, 왼쪽에는 카우토파테스 Cau t o p a t es 가 그의 횃 불을 아래로 가리키고 있다. 그 아래는 아마도 미트라스 앞에서 무 릎을 꿇는 태양신 솔 Sol 과, 솔과 미트라스의 연회, 그리고 비스듬히 기댄 형상을 향하여 황소를 타고 가는 미트라스 등이 있다. 이와 같 은 것으로 알려진 장면들 중 다수의 다른 경우들과 크게 비교가 되 는 것은 이 메달리온이 나타내는 바가 필시 천문학적/우주론적 의미 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FMM 207 쪽 이하). 그 지하실이 미트래움으로 개조되었다는 사실과 동시에 주목되는 점은 발굴자들이 〈존귀 행각( 尊貴行 閣, Honori fic Po rti co) 〉이라고 부 르는 한 건물이 그 위에 건립된 것이다. 이 칭호가 붙은 이유는 그 것이 짧은 단에 기록된 명각들을 포함하고 있고 , 이 명각들에는 한 때 아마도 조각이 새겨져 있었고 이 모든 것들이 군대의 인사(人士) 들에게 존귀를 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쩌면 미트라 숭 배에서 예배와 관련된 로마 군단들이었으며, 이것은 로마 제국의 다 른 많은 곳에서 미트라 명각들이 역시 군대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 과 연관된다 〈존귀 행각〉과 관련하여 그것의 동쪽 끝 가까이에 있 는 지하실의 천장을 깎아서 뚫은 한 구멍이 있는데, 이것은 정확하 게 하지( 夏 至)에, 즉 6 월 21 일 정오 직후에 태양 광선이 바로 미트라 숭배의 제단 위에 떨어지게 유도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128 가이사랴의 극장 우리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120 항), 요세푸스는 가이사랴에 하나 의 극장과 하나의 원형 극장이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는데, 원형 극 장은 항구의 남쪽에 바다를 내다보는 방향으로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 (An t. XV 9, 6 §341 ; War I 21, 8 §415). 구도 120 항에 서 극장은, 그 로마식 도성의 남서쪽 모퉁이 근처이면서 또한 물 속으로 돌출한 두 개의 시설물들 중에 더 남쪽에 있는 것의 바로 너머인 18 번에 위 치해 있다. 그것은 바다를 내다보는 훌륭한 전망을 가지고 있다 . 이 것은 요세푸스가 원형 극장의 위치에 관하여 말한 내용과 일치한다. 하지만 여기에 보이는 유적은 원형 극장의 유적이라기보다는 극장 의 유적이다. 따라서 요세푸스가 단순히 그의 용어들을 바꿔 썼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1882 년의 『서부 팔레스타인 조사 The Surve y of Weste m Pales ti ne 』 (Memo i rs II, 15-16 쪽)라는 책에는 이 지점에 있는 유적이 로마식 극장의 유적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1959 년에 시 작하여 여러 해 동안 계속된 이 극장의 발굴과 복원 작업은 밀라노 의 롬바르도 연구소라는 이탈리아 고고학 사절단에 의하여, 안토니 오 프로바 An t o ni o Frova 의 지휘 아래 수행되었다. 사진에서 보는 바 와 같이, 극장은 절벽을 깎아서 만든 것으로 많은 좌석 충을 가진 반원 형태로 되어 있어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주악석(奏樂席)의 바닥에는 프레스코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고, 무대 위에서는 기름 둥 들이 발견되었다. 헤롯 아그립바 I 세가 죽기 직전에 이 극장에 나타 났기 때문에(행 12:21-23) 이 극장이 신약 역사와 가지는 관계는 이 미 위에서 살펴보았다 (120 항).

129 가이사랴에서 나온 「빌라도 명각」 1961 년에 있었던 로마식 극장 (128 항)에서의 작업 중에 이탈리아 탐험대가 이 명각을 발견하였다. 이 돌은 그 극장의 좌석으로 들어 가는 입구들 중의 하나에 있는 일련의 계단들을 위한 충계참을 형성 하기 위하여 사용되었고, 그리하여 아마도 그 당시에 이미 왼쪽 부 분이 심하게 깎여 나간 상태였다. 원래 이 돌은, 봉헌 명각을 쓰게 된 목적인 그 건물의 벽 속에 끼워져 있었음에 틀림없다. 사진에서 는 보기가 힘들지만 적어도 부분적이나마 네 줄이 판독 가능하게 남 아 있다. 이것을 복원하여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다. [CA 懿 ARIEN] S (IBUS) TIBE 禪 VM PON ]TI VSPILATVS PRAEF]ECTVSIVDA[EA]E To the people of Caesarea Tib e ri eu m Ponti us Pil ate Prefe c t of Jud ea 가이사랴의 백성들에게 티베리에움 본디오 빌라도 유대의 장관(將官) 다섯째 줄에 사선으로 된 강음 기호가 한 개 보이는데, 이것은 둘 째 줄에서처럼 자 위에 그어졌던 것이다. 어쩌면 dedi t(〈주었다〉)

또는 ded i mv it(〈헌증하였다〉)라는 단어가 한때 그곳에 있었을 것이 댜 그러므로 전체 문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댜 〈유대의 장관(將官) 본디오 빌라도가 티베리우스를 존경하는 뜻으로 가이사랴의 백성들 에게 하나의 신전을 헌증하였다.〉 헌증된 건물의 이름은 라틴어로 티베리에움 T i be ri eum 이라고 적혀 있댜 이것은 티베리우스에게 바쳐진 신전으로서 표준 방식으로 형 성된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방식에 대한 실례를 우리는 가 이사랴에서 나온 헬라어 명각에서 이미 보았다 (121 항). 그 명각은 하 드리아네이온 M pt avnov, 죽 하드리아누스를 존경하여 바친 신전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표준 관례가 그러하듯이, 헬라어 E t는 라틴어에 서 e 로 표시된다. 본디오 빌라도 Pon ti us P il a t e 라는 이름은 전혀 오 해될 여지가 없으며, 이것은 본디오 빌라도에 관한 첫번째 비명(碑 銘) 문건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빌라도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연대에 의하면 26-36 년에 유대 를 통치한 사람이다. 그를 언급하면서 타키투스 (Annals XV 44) 와 요 세푸스 (War II 9, 2 §169) 는 그를 〈행정관〉 라틴어로 pr ocurato r [프로 쿠라토르], 헬라어로 tJt l tp O Jt O 이 [에피트로포스〕)이라고 부른다. 이 명각 은 〈장관〉 라틴어로 pra efe c tu s [프래펙투스], 헬라어 ena p xo 이 [에파르코 스]가 이 단어에 해당함)이라는 칭호를 쓰고 있다. 에파르군스는 요세 푸스가 본디오 빌라도의 전임자인 발레리우스 그라투스 Vale ri us Gra tu s(15-26) 에 대하여 (An t. XVIII 2, 2 §33), 그리고 헤롯 아그립바 I 세 뒤 에 온 쿠스피 우스 파두스 Cuspi us Fadus(44-46) 에 대 하여 사용 한 용어이다. 그러므로 이 두 용어는 넓은 의미로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한편, 〈장관〉은 군대의 직함을 가리키는 데 더 많이 사용된 것 같고, 〈행정관〉은 재무 행정의 의미를 더 많이 가졌던 것으로 보인 다 . 또한 〈장관〉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더 선호된 듯하고 〈행정관〉 은 클라우디우스 (41-54) 이후 지배적인 칭호였던 것으로 보인다

(SHJ P Vennes/M illa r I, 358-360 쪽). 이러한 일반적인 전개 과정에는 이 명각의 연대를 본디오 빌라도 의 행정 기간의 후기가 아니라 초기로 매기기 위한 증거들은 아마도 조금밖에 없는 것 같다. 복음서 들은 그를 단지 〈총독 go vernor(TJV f: µlil v) 〉 이라는 일반적인 용어로만 부르고 있다(마 27:2 등). 130 가이사랴 〈갑 궁전〉의 바닥 모자이크 극장 (128 항)의 바로 북쪽과 서쪽에는 바위로 된 갑(血甲)이 바닷속으 로 뻗어 있댜 이 갑 위에는 35 X l8 미터 되는 커다란 연못이 있다. 이것은 1973 년에 조사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바다와 연결된 고기 탱 크fi sh tank(pi s ci na) 로 생각되었댜 이와 동시에 폭우가 맨 꼭대기 충 의 모래를 씻어 내었을 때, 그 탱크의 동쪽 끝에서 섬세한 모자이크 테라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IE] 26 [1C J76 ], 79 쪽 이하). 1 CJ7 6 년에 예 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의 고고학 연구소 (Ne tz er in Qe dem 21 [1986], 149 一 160 쪽)가 발굴 작업을 수행하여, 오늘날 〈갑 궁전〉(血甲宮殿) (구도 120 항의 21 번)이라고 일컬어지는 유적을 들춰 내었다. 그 탱크(이것은 바닷물로 된 고기 탱크라기보다는 민물로 된 수영장 이었을지도 모론다)의 동쪽에는 남북을 축으로 하여 놓여 있는 여섯 개 정도의 방의 혼적이 포착되었고, 그 연못의 서쪽 끝에는 여러 가 지 벽이 있어서, 한 지역이 역시 여러 방과 복도들로 나눠졌음을 분 명 하게 보여 주고 있다. 동쪽에 있는 중앙 방(R oom P 1 in pla ns 15, 16 in Qe dem 21 [1986], 151, 155 쪽)은 치 수가 l1 X 8 미 터 이 고, 그 연 못의 동서 축과 정확하게 맞춰져 있다. 이 방의 주된 특징은 방금 언급한 모자이크였다. 여기에 제시된 사진에 보이는 바와 같이(사진 의 방향은 동쪽으로 향하고 있음) 주된 화판은 5.2 X2.5 미 터 크기 의 〈융단〉으로, 흑색, 백색, 연분홍색, 적갈색의 각석(角石)들을 사용하

여 기하학적 양식으로 만든 것이다. 최대한 복원한 것을 보면, 이 건 물들의 구도가 중앙의 동서 축을 중심으로 좌우 상칭으로 배치된 것 과, 헤롯의 극장을 바로 뒤에 두고 지중해를 바로 앞에 둠으로써 (Frove, Scavi di Oies area, 59 쪽, 그림 11 ) 그 위 치 가 매 우 두드 러 진 것 등은 분명히 이것을 궁전이라고 칭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며, 또한 이것이 다름아닌 가이사랴에 있던 헤롯의 궁전이었음을 시사하기에 충분하다. 그 갑의 서쪽 말미에 서툰 솜씨로 만들어진 반원형의 기능은 알려 지지 않고 있으나, 이것을 볼 때 생각나는 것은 마사다의 헤롯의 북 쪽 궁전의 윗충에 있던 둥그런 테라스 (22 항)이다. 만약 이것이 방금 기술한 건물들의 정체를 밝힌 것이라면, 이 건 물은 헤롯 대왕이 가이사랴에서 사용한 궁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 한 헤롯 아그립바 I 세가 가이사랴에 거주할 때 사용한 궁전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리하여 로마 장관/행정관 (129 항)들이 유대를 다스렸을 때, 그들의 공식적인 거처가 가이사랴에 있었고, 그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바로 그 궁전을 그들의 프래토리움p rae t o ri um( 원래는 진영에 있는 장군의 막사, 그 다음에는 총독의 관저, 헬라어로는 npa ti: rilptov [프 라이토리온]이라고 씀; 215 항 참고)으로 접수하였으며, 이 일에 관하 여 우리는 사도행전 23:35 에서 사도 바울이 〈헤롯 궁 Herod's pra e- tori um 〉에서 감호를 받고 있었다고 한 바로 그 궁전임을 알 수 있다. 131 가이 사랴의 높은 수로 구도 120 항에는 두 개의 수로가 북쪽에서부터 가이사랴로 접근한 다. 하나는 높은 수로로서 구도에서 바다에 가까이 있는 것이고, 다 른 하나는 낮은 수로로서 구도에서 높은 수로 건조물과 대체로 평행 올 이루고 있는 것이다. 높은 수로는 실제로 이중 구조물이며, 아치

들이 그 위에 있는 두 개의 평행 수도를 지탱하고 있다. 두 부분 중 에서 동쪽 수도가 더 일찍 만들어진 것인데, 이것은 거기에 쓰인 돌 들이 양면 모두 다듬어졌다는 사실로 알 수 있으며, 서쪽 수도는 오 직 바깥 측면인 서쪽 면에만 다듬어진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일찍이 만들어진 동쪽 수도는, 가이사랴의 북동쪽으로 6.5 마일 떨 어진 갈멜 Crumel 산맥의 기슭에 있는 비냐미나 B i n yamin a 의 북쪽에 위치한 슈미 Shu mi 샘들로부터 물을 가져온다. 늦게 만들어진 서쪽 수도는, 북동쪽으로 6 마일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암미캄Arnmiq am 지역 의 삽바린 Sabba rin 샘과 다른 샘들로부터 물을 가져 온다. 이 물들은 처 음에 는 갈멜 산 Mount Crume} 의 중턱 에 있는 지 하 터 널을 통하여 이 끌어 졌고 (Ol ami and Peleg in IE] 업 [1':J 77 ], lV-132 쪽), 가이사랴 에 이르렀을 때는 높은 수로의 총 용량을 사실상 배가시켰다. 해안 울 따라 흘러가는 수로는 높이가 거의 6 미터, 폭이 5 미터를 넘지만, 모래 언덕 속에 거의 묻혀 버렸고, 가이사랴에 다다르기 전 약 500 미 터 되는 곳(여기에 제시된 사진에 보이는 지점을 지나서 얼마 안 되는 곳)에서 수로는 끊어지고 만다. 왜냐하면 파도의 작용이 해안을 침 식하여 약 50000 톤으로 추산되는 정도의 흙과 돌을 떠내려가게 했으 며, 이와 동시에 수로의 나머지 부분도 파괴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Reife n berg in IE] 1 [1950-1951], 27 쪽 이하, pl. xii, 그림 6). 요세푸스는 헤롯 대왕이 가이사랴에 수로를 건설한 것에 대해서 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어서, 어떤 이들은 헤롯 시대에 가이 사랴는 팔레스타인의 많은 성읍들처럼 필요한 물을 오직 수조에 모 은 빗물과 우물물에 의 존한 것 이 틀림 없다고 한다 (Re ife nber g in IE] 1 [1950-1951], 26쪽). 하지만 헤롯이 헤로디움 (20 항)과 마사다 (22 항) 에 물을 끌어오기 위하여 설치한 시설들을 기억한다면, 그가 또한 그의 위대한 새 도성에도 적절한 물을 공급하고자 노력했을 것이라 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의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원래의 높은 수

로(일찍이 만들어진 동쪽 수도와 함께)는 십중팔구 그가 만든 것으로 여 겨 진다 (Ol arni and Peleg in IE] 27 [1977], 136 쪽 ; Bull in BAR 8.3 [May/ Ju ne 1982], 30 쪽 참고). 수로의 전 과정에서 높은 수로에는 적어도 아홉 개의 라틴어로 된 명각들이 있으며, 이것들의 연대는 모두 하드리아누스 (117-138 년)의 치세 동안이며, 몇 개의 로마 군단들의 이름을 들고 있다. 다섯 명각 은 제 X 군단 프레 텐시 스 leg io X Fre t ens i s 를 언급하고, 둘은 제 VI 군단 페 라타 leg io VI Ferra ta.를, 하나는 제 II 군단 트라야나 포르티 스 le gi o II Traia n a Fo 屯s 를 언급하며, 하나는 미확인된 군단을 언 급하고 있다 (Ol arni and Ringe l in IE] 25 [1975], 150 쪽).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명각들인데, 이것들은 비냐미나 위의 늪 지대에 있는 수 로의 아치에서 발견되었다 (V iln a y in PEFQ S 1928, 45-47, 108 - 109 쪽) . 한 돌에는 명각이 평평한 직사각형 부분에 새겨졌는데, 그 주위에는 솟아오른 테두리가 둘러져 있다. 그것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IMP(ERATOR) CAESAR TRAIANVS HADRIANVS AVG(VSTVS) FECIT PER VEXILLATIONE(M) LEG(IONIS) X FR(E)TEN(SIS) Irnpe ra to r Caesar Tra ian us Ha.d ri an us Au gus tu s has made (this aqu educ t)

by a deta c hment of Legi on X Frete n sis 황제 캐사르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었다 (이 수로를) 분견대(分遣隊)에 의하여 제 X 군단 프레텐시스의 두번째 돌에는 화환 같은 것이 양쪽 끝에 삼각형들을 가진 정교한 구조 안에 둘러싸여 있고, 양쪽에 있는 주춧대 위에는 로마식 화상 ( 畵像 )이 있으며, 명각은 그 화환 안에 새겨져 있다. 그 기록은 다음 과같다. Il\llP(ERATOR ) CAE(SAR) TR(AIANVS) HAD(RIANVS) AVG(VSTVS) VEXIL(LATIO) LEG(IONIS) VI FERR(ATAE) Imp era to r Caesar Trai an us Hadr ian us Aug u stu s a deta c hment of Leg ion VI Ferrata 황제 캐사르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제 VI 군단 페라타의 분견대 하드리아누스의 칭호는 여기서 〈황제 캐사르 트라야누스 하드리 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이 다 (W . Lie b enam, Fasti Consulares, KLT 41-43, 107 쪽). 그는 130 년에 팔레스타인을 방문하였고, 몇 년 뒤에는 바르-코크바 Bar-Kokhba 의 항거를 진압하였으며, 그의 치세 중에 그 땅에 여러 가지 공적인 건축 사업을 지원하였다.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가이사랴에 하나의 신전이 세워졌으며, 그곳에 있는 조상(影像)이 필경 그의 조상일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앞에서 이 미 살펴보았다 (120 항). 제 X 군단 프레텐시스는 티투스 T itu s 가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 참 여 했고, 그 후로 그곳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며 (Jo seph u s, War VII 1, 3 §17), 팔레스타인의 도처에 분견대(分遣隊)들을 주재시켰다. 예루 살렘 구 도성 Old C ity의 남서쪽 모퉁이에서 이 군단의 약자 또는 머 릿글자인 LEG X FR 또는 LXF 라는 도장이 찍힌 많은 기와 조각들 이 발견되었다 (PEF Q S 1871, 103 - 104 쪽 ; PEQ 1966, 88 쪽). 제 VI 군단 페라타는 하드리아누스가 바르-코크바와 전쟁을 치르 는 과정 (132-135) 에서 그가 시리아로부터 팔레스타인으로 투입한 군 대이다 (PWRE 12:1, col. 1292). 세바스테 Sebas t e 에서 석회석 평석(平 石)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가이사랴 수로의 돌 위에 있는 것과 매우 흡사하게 새겨진 윤곽은 있지만 화환 같은 것은 없다. 또 한 다음과 같은 동일한 군단 이름의 명각이 적혀 있다 (G . A. Reis - ner, C. S. Fis h er, and D. G. Ly on , Haroard Exazva tion s at Samari a [1924], I, 251 쪽, no. 1 ; II, pl. 59, f).

VEXILLATIO LEG VI FERR 므것도에는 엘-렛준 el-Lej j un 으로 알려진 한 마을이 있는데, 이것 은 분명히 〈레지온 Le gi on( 군단)〉이 와전된 것이며, 그 근처에는 로 마군 진영의 유적들이 있고, 인접한 들판에서는 다시금 제 VI 군단 페라타의 약자인 LEGVIF 라는 도장이 찍힌 기왓장 한 개가 발견되 었다 (G . Schumacher, Tell el-Mute s ellim (1908], I, 175 쪽) . 방금 살펴본 명각들은 때때로 이 하드리아누스의 군단의 분견대 들이 먼저 이 높은 수로를 만들었음을 말해 주는 증거로 간주되기도 한다 (Re if enber g in IE] l (19 50-1951], 26쪽). 그러 나 위 에 서 예 시 된 고려 사항들에 비춰 볼 때 더욱 가능성이 큰 이야기는, 군단 병력이 한 일은 수로를 보수하고 원래 헤롯이 지은 구조물에 서쪽 수도(후 에 만들어진 것)를 첨가한 것이라는 결론이다 (Ol ami and Peleg in IE] '2:1 (1977], 136 쪽 ; Bull in BAR 8.3 [May/ Ju ne 1982], 30 쪽 참고). 낮은 수로(구도 120 항의 2 번)는 가이사랴의 북쪽으로 약 3 마일, 그 리고 바다로부터 내륙으로 1 마일 떨어진 캅바라 Kabbara 늪 지대의 많은 샘으로부터 가이사랴로 물을 운반해왔다. 이 샘들은 실제로는 가이사랴보다 더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수면의 높이룰 높이고자 두 개의 댐이 만들어졌는데, 하나는 물을 채우기 위하여, 다른 하나는 그 물이 북쪽으로 홑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이런 방법으로 몇 미터 올려진 물은 먼저 남쪽으로 향하여 바위를 깎아 만든 열린 수도로 들어갔고, 그 다음에는 석조로 된 수로로 돌 어갔다. 그리고 모래 언덕 지역에서 수로는 아치형의 돌 지붕으로 덮였는데, 이것은 한때 높이가 2 미터에 달했으나 지금은 모래가 두껍 게 쌓여 있다(R e ife nber g in IE] 1 (1950-1951], pl. xiv, 그림 9). 1 마 일 남짓 더 간 후에 낮은 수로는 높은 수로의 아치들 중의 하나 아

래로 교차하여 높은 수로의 아치 동쪽으로 도성에 이른다. 낮은 수 로의 작동을 위하여 필요하던 댐들은 제 4 세기의 것으로 믿어진다. 그 당시 이러한 시설의 주된 목적은 농업적 목적을 위하여 물을 공 급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모슬렘교인들이 639/640 년에 가이사랴 에 들어가서 비자틴인들로부터 그 도성을 정복한 것은 바로 이 덮인 수로를 통하여 들어옴으로써 이루어졌다(R e if enber g in IE] l (19 50- 1951], 29쪽). 132 가이사랴 회당의 양각 등대를 가진 대리석 주두 수로들이 도시로 접근하는 곳인 그 도시의 북쪽에는 십자군의 벽 바깥쪽, 그러나 로마 시대의 벽 안쪽인, 해안으로부터 멀지 않는 곳 에 회당의 폐허가 있는 것이 1932 년에 처음으로 보고되었고 , 1945 년 에 부분적으로 파헤쳐졌다. 그리고 1956 년과 1962 년에 히브리 대학 교의 고고학과에 의하여 네게브A. Ne g ev 의 협력과 아비 _ 요나 M. A vi -Yonah 의 지휘 아래 계속 발굴되었고, 1962 년에는 제리 바더먼 의 지휘 아래 발굴되었다. ·이 지역에 헤롯 시대의 건물이 하나 있었 는데, 그 일부가 후기에 회반죽을 바른 연못으로 사용되었고 그 후 에는 흙과 부스러기의 혼합물로 채워졌다. 이 채워진 더미 위로 회 당의 포석이 놓여졌다. 회당은 동서의 길이가 18 미터이고 폭이 9 미 터인 건물이었다. 그 안에서 비장되어 있던 3700 개의 작은 놋 주화 들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또한 회당의 동쪽으로 불과 수백 피트밖 에 안 되는 일반 지역에서 발견된 『나사렛 명각 Nazare t h Insc ripti on 」 과 관련하여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이다 (44 항). 대부분의 주화들은 콘스탄티우스 II 세 (337-361) 때의 것이며, 율리아누스 캐사르 시대의 것도 약간 있다. 율리아누스는 %5 년에, 아우구스투스는 360 년에 황 제 (Caesar, 가이사)가 되 었으므로(Li eben arn, Fasti Consulares, KLT

41- 43 , 121 쪽), 그 저장소를 설립한 연대는 355/356 년으로 가정되었 댜 그러므로 그 회당은 제 3 세기 말이나 제 4 세기 초에 건립되었을 것이댜 주어진 연대인 355/356 년 경에 그것은 파괴되었을 수도 있 고, 그리하여 제 5 세기 초엽에 재건되었다가 제 6-7 세기에 또다시 재 건되었을 수도 있다. 제 4 또는 제 5 세기 회당의 건축 단편들 중에 는 대리석 석주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하나에는 〈올림포스 Ol ympo s 의 아들 테오도로스 Theodoros 가 그의 딸 마트로나 Matr on a 의 구원을 위하여 드린 헌물〉이라는 봉헌 명각이 적혀 있다 (Rabin o w itz, Bulleti n m [1960], 44-45 쪽). 거 기 에 는 또한 변조된 고 린도식의 대리석 주두들이 있는데, 그 중의 둘은 등대의 형상을 지 니고 있으며, 그 하나는 파서 새긴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조로 된 것이다(후자는 사진에 나타나 있다). 후기의 건물에는 헬라어로 새겨 진 명각을 가진 모자이크 포석이 있는데, 글자의 형태가 그것이 제 6 세기의 것임을 암시한다. 첫째 줄의 몇 글자가 손상되기는 하였으나, 전체 명각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모사, 또는 복원 및 번역될 수 있 을 것 이 다 (Rab in o witz, Bulletin 血 47 쪽). BH .. MOCAPXICY KAI o c1 ou< o> , :o u tJtot n c re l:TJV 떤 n Q o0eo t av t0 0 tpL KAi vo u t§ t6t Q

Bery llo s the head of the syn a go gu e and adm inist r at o r , t he son of Iu(s)tu s , made the mosai c work of the tricli n ium from his own means. 베륄로스__회당의 우두머리 그리고 행정자 , 유(스)투스의 아들­ 가 트리클리니움의 모자이크 작품을 자기의 재산으로 만들었다 . [트리클리니움은 옛 로마의 3 면에 누울 수 있는 긴 안락 의자가 달린 식탁, 또는 그것이 있는 식당을 말함-역주] 만약에 첫째 줄의 마지막 단어가 올바로 복원되었다면, 이것은 신 약에서 친숙한 호칭으로(막 5:38 동등), 〈회당장 ruler of the syn a - go g ue (RSV) 〉이라고 번역되고 있다 (86 항 참고). 바더먼도 보고하는 바와 같이, 하나의 큰 집의 유적이 회당 근처 에서 발견되었다 . 헬라식 도기가 그 집의 한 구석에서 발견되었다 (로데스 Rhodes 섬의 항아리 손잡이들, 〈물고기 접시들〉 둥으로, 그 대 부분의 연대는 B.C. 2 세기 중엽이었다). 〈서쪽 경사 지대〉의 세공품의 분리된 단편들이 막대한 분량으로 발견된 것은 분명히 B.C. 3 세기 말 이전에 그곳에 사람이 거주했음을 가리켰다. 이 지역은 B.C. 1 세 기 초에, 아마도 알렉산더 얀내우스 Alexander J annaeus 에 의하여 스 트라톤의 망대가 정복된 후에 유기되었다. 이리하여 그 원래의 마을 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 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20 항 참고). 또 한 스트라톤 망대의 항구 방파제의 일부였을 것으로 보이는 하나의 육중한 벽이 바닷속에 보인다. 133 가이사랴에 있는 비잔틴 교회 모자이크 비잔틴 시대 가이사랴의 성벽 바깥으로 북동쪽인 공동 묘지 지대

근처에서(구도 120 항의 19 번), 1955 년에 이스라엘 고대 역사부를 대 신한 Sh. 예이빈 Sh. Ye ivi n 에 의하여 비잔틴 교회의 유적이 발굴되 었댜 이때 하나의 배랑과 후진이 출토되었는데, 후진은 그 교회의 중앙 축의 북쪽에 있었으며, 더불어 기초의 잔여물들이 발견되었다 . 그러나 이것이 하나의 열린 또는 덮이지 않은 교회 basil iaz descop e rt a 였으리라는 추측을 유도하는 석주나 석주 기초의 혼적은 전혀 없었 으며 , 위치는 그것이 장례식 교회 fune rar y church 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배랑과 측랑에는 기하학적 식양들이 있 다. 분명히 희중석에 해당하는 중앙 모자이크 부분(약 16X13 . 5 미터) 의 테두리에는 곰, 사자, 표범, 코끼리, 황소, 개, 영양 둥과 같은 많 은 동물들이 그려져 있으며, 주된 부분에는 약 120 개의 큰 메달리온 모양이 그려져 있는데, 그 각 메달리온 안에는 새가 한 마리씩 있다. 그 새들은 모두 팔레스타인에 현존하는 것들이며, 이것은 이 포장이 그 지역 기술공의 작품이었음을 시사한다 . 이 교회의 연대는 제 6 혹 은 제 7 세기의 것으로 믿어진다. 초기 기독교의 관점으로 볼 때 홍미룰 끄는 가이사랴의 다른 현장 들은 다음의 것들을 포함한 순례자의 여정에서 언급되고 있으나, 그 장소들이 아직 발견되거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제롬은 기록하기를 (Lett er 108, AD. 404, NPNFSS VI, 198 쪽) 파울라가 가이 사랴에 왔 을 때, 〈그녀는 지금은 기독 교회로 변한 고넬료의 집과 빌립의 초 라한 거처와 ‘예언하는' 네 처녀인 그의 딸의 방들을 보았다〉고 하였 댜 고넬료는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전도한 로마 백부장이었고(행 10-11), 빌립은 전도자이면서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행 6:5), 바울이 가이사랴에 왔을 때 그의 집에 머물렀고, 그에게는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들이었다(행 21:8-9) (전도자 빌립과 사도 빌립 사이의 혼란, 그리고 그 전도자와 그의 딸들의 매장지가 가이 사랴인가 또는 소아시아의 히에라폴리스Hi era poli s 인가 하는 문제를 위

해서는 『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Ch Hi st L ill권 31 을 보라). 피아첸짜의 무명 씨 (AD . 570) (GEYER 217 쪽 ; LPPTS II-D, 35 쪽 이 하 ; CCSL CLXXV, 174 쪽; WJ P 89 쪽)는 스트라톤의 망대/팔레스타인 가이사 랴(이 순례자는 이 가이사랴와 빌립보 가이사랴 Caesarea P hilippi를 또 한 잘못 혼동하고 있다)를 성 팜필루스 St. Pamp hilus (유세 비 우스의 스 승, 310 년에 가이사랴에서 순교함. Eusebiu s , Mart . Pal. XI 14 NPNFSS I, 353 쪽)와 성 프로코피 우스 St. Proco pi us( 유세 비 우스의 기 록 중에 팔레스타인의 순교자들 가운데 첫번째 사람 ; 같은 책, I 1 NPNFSS I, 342 쪽 ; 디오클레티아누스Di ocle ti an 치하에서 303/304 년에 사망함)와 성 고넬료 St. Corne li us( 행 10-11) 등이 잠들어 있는 도성 으로 칭하고 있으며, 고넬료에 대해서는 〈그의 무덤(문자적으로 lectu s [렉투스], 침상, 장례 침대, 관)으로부터 우리는 복 (bened i c ti. o [베 네딕티오], 축복)을 받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여리고 134 공중에서 바라본 여리고의 개관 공관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여행하실 때 여 리 고를 통과하셨으며 (마 20:29 ; 막 10:46 ; 눅 18:35), 거 기 서 그는 소경을 한 사람(막 10:46-52 ; 눅 18:35-43) 또는 두 사람(마 20:29-34) 고쳐 주셨고, 삭개오의 집에 손님으로 들르셨다고(눅 19:1-10) 기록 하고 있다. 여리고는 구약 시대에 이미 잘 알려진 도성이었으며(민 22:1 등), 요르단 골짜기 의 서 쪽에 있는 텔 엣一술탄 Tell es-Sul tan으 로 알려진 큰 토루가 바로 그 도성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도성은 에 른스트 젤 린 Ernst Se llin과 카를 바칭 어 Carl Wa tzing er(lWl 년 이 후), 존 가스탱 Joh n Gars tang (l930 년 이후), 그리고 캐쓸린 M. 케년 Kath lee n M. Ken y on(1952 년 이후)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캐쓸린 M. 케년이 발견한 것들에 의하여, 이 도성은 세상에 알려 진 가장 오래된 도성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장소에 사람이 정주하 기 시작한 것은 자그마치 B.C. 8000 년 경이라 하며, 약 7000 년 경에 이 도성은 강한 돌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그 벽의 망대들 가운데

하나가 아직도 7.75 미터의 높이로 서 있다. 출입구는 동편 아래 쪽에 있고, 꼭대기로 올라가는 내부 충계가 있었으며, 그것의 계단 22 개가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있다 (Ken y on, Exazvati on s ill pla te s , pl. 5). 공중에서 바라본 개관에서 이 최고(最古)의 도성의 텔은 바로 전 경(前景)에 있고, 현대 여리고는 좀 떨어져 있으며, 사해와 모압의 산들은 더 멀리 떨어져 있다. 또한 이 텔에 바로 붙어 있는 기부(基 部)와 사진의 오른쪽 끝으로부터 들어가는 길의 약 3 분의 l 되는 곳, 그리고 하나의 작은 건물에 인접하여, 엘리사의 샘 Sp ring of Eli sh a 의 이중 못이 있다. 135 구약 여리고의 터에서 제벨 콰란탈을 바라봄 텔 엣-술탄으로부터 요단 골짜기의 서쪽에 가파르게 솟아오른 산 맥까지는 1 마일 남짓한 거리이다. 이 산이 바로 여호수아의 정탐꾼 들이 라합의 집으로부터 도망해 간 〈산〉임에 틀림없다(수 2:22). 사 진은 그 텔로부터 서쪽으로 이 산들을 바라본 것인데, 바로 중앙 상 단에 있는 봉우리가 여리고로부터 1200 피트 높이까지 솟은 제벨 콰 란탈J ebel Qu aran ta!이라고 불리는 산이다. 그 정봉(頂峰)은 아마도 마카베오상 16:15 에 언급된 〈도크 Dok 라고 불리 는 작은 요새 〉가 있 던 장소였으며(J ose p hus, Ant. xm 7, 4-8, 1 §§228 이하 참고), 여기서 마카베오 가문의 막내였던 시몬 S im on 이 그의 사위 프톨레마이오스 Pto lem y에게 배반을 당하여 살해되었다(B. C. 135). 그 꼭대기에 있는 유적들의 더러는 아마도 그 요새에 속한 것이 고, 그 단충애(斷層屋)의 기슭에 있는 한 샘은 아직도 아인 두크Ai n Du q라고 불리고 있다. 산 허리에는 카리톤 Ch arito n(340) 과 팔라디우 스 Palladi us (386), 그리 고 그들의 생도들을 포함한 기 독교 은둔자들 이 안에서 수행하던 많은 동굴이 있다.

『카리톤의 생애 Lif e o f Cm rit on 』 (MPG XCV, col. 912) 라는 책에는 〈누가의 산 Luke's Moun tai n 〉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 이름에서 어쩌 면 마카베오 시대의 두크 Duk 를 엿볼 수가 있을 것이다 (AouKa[ 루카] 를 AOUKa[ 두카]의 오기로 봄). 이러한 동일시는 미간행의 제 7 세기 아 람어 필사본에 의해서도 확인되고 있는데, 이 사본에서 클레르몽-간 노 Clermon t -Ganneau (II , 21 쪽)는 엘리사의 샘이 흘러나오는 기슭의 산을 일컬어 제벨 엣-두크J ebel ed-Du q라고 한 것을 발견하였다. 기독교 은둔자들의 중심지는 아마도 정봉까지 오르는 길의 중간 쯤인 현재 희랍인 수도원이 있는 곳에 있었고 , 정봉에는 또한 비잔 틴 교회의 유적들이 있다(D alman, PJ 10 [1914], 16 쪽) . 이 교회는 예 수의 시험 받으심에 관한 전승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여튼 그 꼭대기에다 또한 건물을 지은 십자군과 더불어 이 산이 예수께서 시험 받으신 장소로 알려지게 되었고, 40 일(q uadra gi. n ta die b us, 막 1:13 둥)을 기념하여 콰란타나Q uaran tana 로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 첫번째 시험을 받으신 장소는 산 중턱에 있는 희랍인 수도원에 표시 되어 있고, 세번째 시험을 받으신(마 4:8) 곳은 맨 정봉에 표시되어 있댜 정봉에서 내려다보면 참으로 광범위한 시야가 전개되는데, 동쪽으 로 모압의 산들로부터 서쪽으로는 감람산과 유대의 고원들에 이르 기까지 한눈에 바라볼 수가 있다. 136 엘리사의 샘 구약 여리고에는 엘리사가 소금을 던져 넣어 그 물을 고친 샘이 있다(왕하 2:19-22). 텔 엣-술탄 (134 항 참고)의 동편에, 그리고 그곳으 로부터 나 있는 오늘날의 도로 건너편에, 아인 엣-술탄이라고도 하 고 또한 엘리사의 샘으로 알려진 풍부한 샘이 있다. 여기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겉으로 보기에는 그것이 신통치 않는 이중 못에 불 과하지만, 실은 크고 쾌적한 오아시스 를 위하여 풍성한 물을 공급하 고 있다. 구약에서도 이미 여리고는 〈종려의 성읍〉(신 34:3 ; 삿 1:16 참고)으로 불리고 있었다. 137 신약 여리고의 텔 헬라 시대와 로마 시대에는 여리고 도성이 이미 원래의 텔에 있지 않았으며, 남쪽으로 1 마일 남짓 떨어진 와디 엘-켈트 Wa di el - Q el t의 평지와 양쪽 측면에 위치해 있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도로가 바 로 이 와디 (141 항 참고)를 통하여 나 있었다 . 마카베오 시대에 시리 아 군대의 사령관 박키데스 Bacc hi des 가 여리고에 요새를 건설하였 는데(마카베오상 9:50),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 도로를 장악하기 위함이었댜 폼페이우스는 그곳에 있는, 트렉스 Threx 와 타우루스 Taurus 라고 불리 던 두 개 의 요새 를 파괴 시 켰다 (S tr abo, Geog rap l zy XVI 2, 40). 폼페이우스의 휘하 장군이요 시리아의 지방 총독p ro­ consul(B. C . 57-55) 이던 가비니우스 Gab ini us 가 팔레스타인을 다섯 구 역으로 나누었을 때 , 그는 네번째 구역을 여리고에 할당하여 그 도 성을 수도로 삼았다 (War I 8, 6 §170; SHJ P I I, 372 쪽 이하; Vennes/M illar I, 268 쪽 이 하). 마르쿠스 안토니 우스 Mark An to n y는 여리고의 구역을 클레오파트라에게 주었으나(J ose p hus, War I 18, 5 §361), 아우구스투스는 그것을 도로 헤롯 대왕에게 주었다(Ant. xv 7, 3 §217 ; War l 20, 3 §396). 헤롯은 여리고에 많은 건축 공사를 하였으며, 그 도성을 겨울 수 도로 만들었는데, 이곳은 온화한 겨울 기후 때문에 그렇게 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 성읍 윗쪽에다 그는 하나의 성채를 지어서 그의 어 머 니 의 이름을 따서 퀴프로스 C yp ros 라고 불렀다(Ant. XVI 5,

2 §143 ; War I 21, 4 및 9 §§407, 417). 다른 건물들은 윈형 극장(Ant. XVII 6, 3 §161 ; 8, 2 §193 ; War I 33, 8 §666), 경마장(Ant. XVII 6, 5 §175 ; War I 33, 6 §659), 그리 고 왕의 궁전 둥이 다. 이 궁전은 바로 헤롯이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War I 33, 8 §666). 그가 죽은 후에 그 궁전은 그의 옛 종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이라 는 사람에 의 하여 불타고 말았으나 (An t. XVIII 10, 6 §2:14 ), 그 후에 1. 그것은 아르켈라우스 Archelaus 에 의하여 훌륭하게 재건되었다 (Ant. XVII 13, 1 §340). 스트라보 (Geo grap hy XVI 2, 41) 는 말하기를 그가 여리고라고 부르는 히에리쿠스Hi e ri cus 의 평지와 산들은 그 도 성이 마치 극장 안에 있는 듯한 배경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또 그 평지는 강물들로 적셔 있고 주택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많은 과수들이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종려나무였다고 말한다. 플리니우 스 (Na t. Hi st V 15, 70) 는 또한 다수의 야자 숲과 물이 솟는 샘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요세푸스 (War IV 8, 3 §§459-475) 는 여리고를 〈특혜를 가장 많이 받은 곳〉이라고 부르면서, 그가 게네사렛 평지 Plai n of Gennesare t (75 항 참고)에 대하여 사용한 것과 같은 빛나는 어휘로써 이 지역을 묘사하고 있다. 엘리사가 정화시킨 그 풍성한 샘은 길이 70 스다디온, 폭 20 스다디 온의 평지에 물을 대주고 있다. 거기에는 다양한 종류의 대추 야자 들이 많이 있으며, 그 중에 맛이 좋은 종류들은, 그것들을 눌러 짜 면, 그 지역에 역시 풍부하게 있는 벌들의 꿀보다 과히 못하지 않는 꿀을 내놓는댜 발삼나무 balsam, 삼나무 cyp re ss, 그리고 뮈로발라누 스 m yr obalanus( 열대 아시아 산 사군자 과의 낙엽 교목, 이것의 열매는 다량의 탄닌 tannin을 함유하여 염료, 제혁 및 잉크의 원료로 쓰임 —— 역주)도 역시 번성하다. 참으로 이곳의 따뜻한 기온과 건강에 좋은 물은 식물과 인간에게 공히 유익하다. 요세푸스는 그곳의 〈기후는 너무나 온화하여, 유다의 다른 지방 전역에 눈이 내릴 때에도 그곳

거민들은 아마포 옷을 입는다〉라는 말로써 그의 기록을 끝맺는다 . 138 툴룰 아부 엘-알라이크에서의 발굴 작업의 구도 신약 여리고의 적어도 일부분을 보여 주는 토루들은 와디 엘-켈 트의 양쪽에서 발견되는데, 이곳은 이 계곡이 평지를 향하여 열리는 곳이면서 북쪽으로는 와디 샤크 엣-데비 Wadi Schaqq ed - Deb i와 합 쳐지는 곳이다. 이 토루들은 툴룰(텔의 복수) 아부 엘-알라이크 Tulul Abu el-'Ala yiq라고 불린다. 이곳의 발굴은 예루살렘 소재 미국 동방 연구 학회에 의하여 1950 년에는 제임스 L. 켈소J ames L. Kelso 의 지 휘 아래, 그 다음해에는 제임스 B. 프리처드J ames B. Pritc hard 의 지 휘 아래, 그리고 1973 년부터는 예루살렘의 고고학자 E. 네처 E. Ne tz er 에 의하여 각각 수행되었다. 북서쪽에 있는 토루는 구도에서 텔 A 로 표시되어 있다. 여기에서 는 헤롯 대왕의 궁전(그가 여리고에 지은 세 개의 겨울 궁전들 중의 두 번째 것)의 유적과 하스몬 가의 궁전의 유적, 그리고 그보다 더 초기 의 구조물이 포함된 것이 발견되었다. 초기의 구조물은 헤롯의 궁전 을 건축하는 현장으로부터 그곳으로 버려진 흙더미 아래 묻혀 있었 기 때문에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하스몬 궁전의 확인된 부분 들은 60X50 미터 크기의 중심 건물(구도의 1 번), 긴 열주, 큰 이중 연 못 (3 번)과 인접한 정자 (2 번), 그리고 여러 개의 예식용 욕조 둥이며, 욕조는 하스몬 가의 제사장 혈통에 적합한 것이었고, 하스몬의 건물 위에 덧붙여 지온 별장(?)이 함께 있었다(구도의 9 번). 여기서 발견된 주화들은 하스몬가의 마지 막 왕인 안티 고누스 Anti go nus(B.C. 40-37) 로부터 거슬러 올라와 알렉산더 얀내우스 Alexander Jan naeus(B.C . 103-76) 까지의 시대에 걸쳐 있고, 후자는 아마도 여리고의 쾌적한 겨울 환경에 자신의 겨울 궁전으로 지은 건축자일 것으로 추정되기

도 한다. 헤롯 대왕의 겨울 궁전들 중 첫번째 것은 아마도 그가 유대인들의 왕으로서 실제로 통치하기 시작한(B. C. 37) 직후에 이어졌으며, 이때 는 여 리 고가 아직 클레오파트라(B. C . 30 사망)의 수중에 있었다. 또 한 헤롯이 그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결혼한 하스몬 가의 공주 마리 암메 M ari amme 의 어 머 니 알렉산드라 Alexandra(B.C. 28 사망)가 아직도 하스몬의 가족 궁전을 차지하고 있던 때였다. 하여튼 헤롯은 그의 첫번째 여리고 궁전을 자중하는 자세로 멀리 떨어진 곳인 와디 엘_켈트의 남쪽(구도의 B 와 4 번)에 위치하게 하였다 . 이것은 본래 우 아한 로마식 별장이었으며, 입구가 하나뿐인 것이 특이했다. 벽의 안 쪽에는 커다란 내궁원i nner co urt과 식당tri cl i n i um 과 널찍한 목욕 시설, 그리고 예식용 욕조가 있었다 . 여리고에 있는 헤롯의 두번째 궁전의 중심 건물은 위에서 이미 언 급한 텔 A 에 있었다. 설계도에 포함된 것은 하스몬 궁전의 큰 이중 연못안데, 지금 이것은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또다른 큰 정원은 석주들 columns( p e ri s ty le) 로 둘러싸여 있었다 . 거기에는 또한 식당 tricli n i u m , 열주들로 둘러싸인 웅덩 이, 로마식 목욕 시설, 그리 고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예식용 욕조가 있었다. 헤롯의 세번째 겨울 궁전은 B.C. 15 년 경에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모든 궁전들 중에서 가장 정교한 것으로서 그 구조물들이 와 디 엘-켈트의 양편에 걸쳐 있으면서 서로 마주 보고 있었으며, 와디 를 건너는 다리로 서로 연결되었다(구도의 C 와 5 번). 와디의 북쪽 둑 에는 큰 궁전 (7 번)이 있었고, 여기에는 커다란 옹접실과 두 개의 궁 원(宮園)-그 중의 하나에는 후진이 있었음-과 대형 로마식 목 욕 시설이 포함되어 있었다.

139 신약 여리고의 정면(正面) 와디 엘-켈트의 남쪽 둑에는 헤롯의 세번째 겨울 궁전의 다른 특 징물들 죽 큰 연못(구도 138 항의 8 번)과 와디의 둑에 바로 붙어 선 옹대한 정면이 있었다. 이 정면의 석조물에는 작고도 표면이 사각형 으로 된, 피라밋 모양의 돌들이 나란히 박혀 있어서 그물 reti cu lum 과 같은 인상을 주고 있는데, 이리하여 오푸스 레티쿨라툼 op us re- ticulatum으로 알려진 작품 형태를 산출하게 되었다. 이러한 작품의 한 실례가 사진에 나타나 있다. 정면에는 또한 반원형의 벤치들과 여러 개의 벽감(壁痛)이 설치되어 있다. 외양은 어느 정도 야외 극장 의 모양과 같은 것이었으나, 벤치 위에서 꽃 항아리들을 발견함으로 써 이것이 계단식 정원이었을 가능성이 더 많아졌다 (6 번). 여리고의 오푸스 레티쿨라툼이라는 작품은 헤롯이 로마로 수차 여행한 일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시사하는 이들이 있는데, 거기서 그는 아우구스 투스가 티베르 강을 따라서 이러한 양식으로 건축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좀더 뒤로 와디의 남쪽에는 내부 방들이 있는 이충으로 된 망대의 유적 (5 번)이 있다. 이것 역시 전체 궁전 설계의 일부였던 것 은 분명하며, 또한 이곳은 주변의 경치를 한 눈에 잘 조망할 수 있 는 장소였다. 세번째 겨울 궁전의 유적에서 발견된 것은 헤롯 대왕의 주화 12 개 와 그의 아들이자 유대 나라에서의 후계자였던 아르켈라우스 Ar­ chelaus( 아켈라오)의 주화 22 개, 로마 행정관의 주화 3개 , 그리고 헤 롯 아그립바 1 세의 주화 5 개 둥이다 (KROLL 296 쪽, col. 3). 이것은 헤롯이 죽은 후에 그 궁전이 시몬에 의하여 불타고 말았으며, 그 후 에 아르켈라우스에 의하여 화려하게 재건되었다고 하는 요세푸스의 보고(위의 1 '51항)와 일치한다.

140 여리고의 〈뽕나무〉 여리고에서의 예수와 삭개오에 대한 기사(눅 19:1-10) 에 관하여 율 리우스 벨하우젠 Julius Wellhausen 은 1904 년에 선언하기를 (Das Evan- ge liu m Lucae, 103 쪽),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서 지나가셨다고 하 는 그 첫 절의 진술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과 상충된다고 하였 댜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때 아직도 그 도성의 안에 있지 아니하고 밖에 있었는데, 만약 안에 있었더라면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가지 아 니하고 지붕에 올라갔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선언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도 여리고에서 일어난 이 사건 의 위치에 관하여 의심을 제기해 왔다(예컨대 Rudolf Bultm ann, Di e Geschi ch te der syn op tisch en Tradit ion [1931], 69 쪽 ; S. MacL . Gil mo ur in IB VIII, 320 쪽) . 그러나 벨하우젠의 비평 속에 함축된 가 정은 여리고가 집들이 밀집한 도성이었으므로 삭개오가 올라갈 수 있었던 곳은 지붕이었지 나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텔 엣 - 술탄에서 구약 여리고가 발굴되었을 때 발견된 밀집한 건물 들과는 잘 어울릴 것이다 . 그러나 이 생각은 발굴자들이 로마, 티볼 리 Tiv o li, 그리고 폼페이이 Pom peii와 같은 로마식 도성과 매우 근사 한 비교점을 도출한 툴룰 아부 엘-알라이크에서 발견된 것들과는 조화되지 않는다. 그와 같은 도성들과 마찬가지로 신약 여리고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공원과 별장, 거리와 공공 광장들이 있었으며, 여기 에는 좋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특히, 〈뽕나무〉는 팔레스타인에 서 주로 해안과 요단 골짜기에서 자라고 있다. 이 나무가 고대의 여 리고에 잘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은, 헬라식 요새들 중의 하나에서 바로 이 목재가 연결 부분으로 사용되었음이 발견됨으로써 입중되 었다. 현대에도 이 〈뽕나무〉는 오늘날의 여리고의 중앙 광장에서와 주변 지역에서 여전히 볼 수가 있다. 이 사진에 보이는 〈뽕나무〉에

서 그 가지들이 낮게 뻗은 모습이 특별히 눈에 뛸 것이다. 요세푸스가 쓴 『유대 전쟁사J ew i sh War 』 (IV 8, lf. §§449 이하) 기 사에서 그는 베스파시아누스 Ves p as i an 가 기독교 기원 68 년이라는 해의 다이시오스 D ai s i os 월(月) (=오늘날의 5 월 /6 월)의 제 3 일에 여리 고에 도착했다고 그 날짜를 매기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로마인들은 그 도성 자체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지역에 살던 인구의 대부분이 두려움으로 인하여 도피했기 때문이 었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7 마일 떨어진 쿰란에 나타난 증거에 의하면, 베스파시아누스가 그 장소를 이때에 파괴한 것으로 보인다 (FLAP 275 쪽). 하지만 여리고에 관하여 요세푸스 (War IV 9, 1 §486) 는 베스 파시아누스가 그곳에 진영을 치고 수비대를 주둔시켰다고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지명록』 (104 쪽)에서 유세비우스는 여리고가 예루살렘 이 포위 공격될 때 파괴되었고, 세번째 도성이 그 자리에 건설되었 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 마지막 도시가 언제 건설되었는지는 말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그가 살던 시대에 이미 있었다는 사실과 그 보다 앞서 있었던 두 도시의 흔적들이 아직도 보존되어 었었음을 진 술하고 있다. 세베루스 Severus(193-211) 의 아들 안토니우스 An t o ni­ us 의 시대에 오리게네스Orig en 가 여리고에서 나온 한 항아리 속에 서 구약 필사본 하나를 발견하였으나(E useb i us, Ch Hi st. VI 16, 3), 이 도성이 그 당시에 사람이 살지 않는 빈 도성이었는지 또는 사람 이 거주하는 도성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보르도 순례자 Bordeaux Pilgrim (333) 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고 로, 즉 유세비우스가 기술한 세번째 도성으로 내려와서, 그 도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삭개오가 올라간 〈뽕나무〉를 보았다 (GEYER 24 쪽 ; LPPTS I-B, 25 쪽 ; CCSL CLXXV, 18 쪽 ; WET 160 쪽). 파울라 (386) 도 역시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고로 내려와서 그녀가 그 도성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삭개오의 〈뽕나무〉와 두 소경이 앉아 있다가 예수 께 고침을 받은 길가의 장소를 다 보았다(J erome, Lett er 108, 12 NPNFSS VI, 201 쪽).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0 항)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 (560) 에서 우리는 그 구약 도성(여리고) 곁에 있는 저 유명한 샘을 표시하는 것 이 분명한 성 엘리사 S t. E li sha 의 성소와 그곳으로부터 남쪽으로 여 리고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면서 종려나무들 가운데 위치한 큰 도성 으로 흘러가는 강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비잔틴식 도성임에 툴 림없으며, 신약 여리고의 동쪽으로 1 마일 남짓 떨어진 현대의 여리 고 성읍과 동일한 장소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얼마 후에 피아첸짜의 무명씨 (570) 는 그 도성의 벽들이 (아마도 지 진으로) 파괴된 것을 보았으며, 한편으로 예루살렘 방향으로 과히 멀 리 나아가지 않은 곳에서 지붕이 열린 예배실 안에 감싸인 삭개오의 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다 (GEYER 168-169 쪽 ; LPPTS II-D, 12-13 쪽 ; CCSL CLXXV, 136-137 쪽 ; WJ P 82 쪽) . 아르쿨프 Arc ulf (670) 가 그곳 올 방문했을 때에는 세 개의 연속적인 도성이 모두 폐허가 되어 있 었다 (GEYER 263 쪽 ; LPPTS III-A, 35 쪽 ; CCSL CLXXV, 212 쪽 ; WJ P 106 쪽). 하지만 아랍인들의 치하에서 에리카 e ri k lri-그들은 여리고를 이렇게 부른다――는 다시 중요한 장소가 되었으며, 제 9 세 기의 한 지리학자는 그곳이 고르 Ghor, 죽 하부 요르단 골짜기의 수 도였다고 말한다. 십자군도 역시 이 지역을 매우 가치 있는 곳으로 간주하였으나, 그들의 시대 이후에는 여리고가 작은 마을에 불과하 게 되었으며, 이러한 형편은 제 20 세기의 초까지 여전하였다. 지금은 또다시 여리고가 훨씬 더 큰 성읍이 되어 있다.

141 와디 엘-켈트에 있는 헤롯 대왕의 수로 유적 여리고로부터(마 20:29 및 평행절들) 예루살렘으로(마 21:1 및 평행 절들) 마지막으로 가시면서 예수께서는, 아마도 그가 들었던 비유들 중에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고로 내려가던 한 사람에 관하여 말씀 하실 때에(눅 10:3 0 ) 분명히 언급하신 바 있는, 그 일반적으로 사용 되던 주된 통로를 택하셨을 것이다. 티투스 T itu s 가 예루살렘을 포위 해 공격하던 일과 관련하여 요세푸스 (War V 2, 3 §§ 69-70) 는 로마 군 제 X 군단이 어떻게 여리고를 통과하여 올라와서 감람산에 진영 을 쳤는지를 말해 주고 있는데, 추측건대 그들도 그 동일한 도로를 사용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아마도 대체로는 〈유대 전쟁〉과 〈제 2 차 항 거〉 이후에, 로마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주된 도로들을 포장하여 거기 에 이정석(里程石)들로 표시를 하였다. 도로를 따라가며 간격을 두고 세워진 이정석들에는 보통 그 건설 공사를 수행한 황제와 관리의 이 름과 함께 어떤 참고가 될 지점까지나 또는 그 지점으로부터의 거리 가 새겨져 있었다. 여리고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는 동안에 로마 시대의 도로가 확 장된 혼적들을 찾아볼 수 있으며, 또한 소수의 이정석들이 발견되었 는데 , 이런 것들은 로마 시대의 도로였던 것이 확실한, 더 오래된 대 로의 길이 어디로 났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직선 거리로는 20 마 일이 될까 말까 하는데, 그 거리 안에서 도로가 해면 아래로 770 피 트에 있는 여리고로부터 해발 2500 피트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이다. 여리고를 떠나면서 길은 와디 엘-켈트의 남쪽 벽을 따라서 3 마일 이상을 달리다가 그 다음에는 아마도 남서쪽으로 휘어졌던 것 같다. 현대의 대로는 오르막길이 좀 덜 가파르게 하기 위하여 더 멀 리 남쪽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와디의 벽을 따라 올라가

는 도로도 여전히 사용할 수가 있다. 와디에는 교량과 수로들이 있었는데 ,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유적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러한 장치에 의하여 그 와디 에 있는 세 개의 큰 샘에서 나는 물이 헤롯 시대의 여리고의 연못과 궁전들로 내려 보내졌으며, 그 평야의 관개(湘澈)가 잘 되도록 계속 해서 흘 러나오게 하였다. 142 전통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여관〉으로 알려진 장소 바로 위에서 기술한(1 41 항),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 가는 도로 위에는, 여리고로부터 약 3 마일 이상 떨어진 지점에, 그 지 역 에 서 답부스 엘- 압드 dabbus el-'abd 라고 알려 진 로마 시 대 의 이정석이 하나 있다. 거기서 1. 5 마일 이상 더 따라 나간 지점, 죽 여 리고로부터 약 5 마일 떨어지고 예루살렘까지는 12 내지 13 마일이 남 은 지점에, 해발 885 피토요 여리고로부터 1655 피트 올라온 하나의 샛길이 있다 . 현대의 대로가 그러하듯이 , 로마 시대의 도로가 아마도 이곳을 통과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길이 여리고와 예루살렘의 최 단거리 노선이기 때문이다 . 아랍어로 이 샛길의 이름은 〈피의 비탈 Ascen t of Blood 〉을 뜻하 는 탈라트 엣-담 tal'at ed - damm 이 다 . 이 것은 여 호수아 15:7 ; l8:l7 에 나오는 히브리 어 마알레 아둠밈 C.,r.,N 元낫 WD , 곧 아둠밈 비 탈에 해 당한댜 사실 히브리어 아둠밈 C.,r.,~('adumm i m) 은 붉은 물체, 죽 이 경우에는 아마도 붉은 바위를 뜻하는 듯하며, 원래의 취지는 아마도 이 샛길의 붉은 이회토(泥灰土)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 유세비우스가 『지명록』 (24 쪽) 가운데 여호수아 15 : 7 의 아둠밉 'A6 0µ- µi.µ을 수록하는 곳에서 그는 그 장소가 MCIAn6oµve'i (말레돔네이)라고 불리며, 이것은 전체 히브리어 구절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라고 말

하고 있다. 그는 또한 그곳에 하나의 성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 제롬 이 작성한 『 지명록』 (25 쪽; Lett er 108, 12 NPNFSS VI, 201 쪽 참고) 에서 그는 그 이름을 말레돕니 Maledo mni라고 옮겨 놓고 있으며, 이 것은 헬라어로 &va~aatc ; 1tu pp & v (아나바시스 퓌론), 그리고 라틴어로 ascensus n/oru m siv e rubrant ium (아셴수스 루포룸 시 베 루브란티 움) 죽 〈붉은 색의 비탈 Ascen t of the Red 〉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이름이 붙여진 것은 그 장소에서 강도들에 의하여 반복해서 흘려진 피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제롬도 시사하기를, 주께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에 관한 비유에서 말씀하신 곳이 바로 이 피로 얼룩지고 피비린내 나는 장소였다고 한다. 이 샛길의 윗쪽에 있는 언덕 위에 역시 성을 갖고 있던 십자군은 이 시사(示峻)를 받아들였고, 예컨대 시온 산의 부르햐르트 (LPPTS XII-A, 63 쪽)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여리고의 서쪽으로 4 리그 lea gu es(! 리그는 약 3 마일 또는 약 5 킬로미터 —— 역주) 떨어진, 예루살 렘으로 가는 도로 위에서 콰렌테나Q uaren t ena 의 왼쪽에는 아둠밈 성 Castl e of Ad ummim이 있었는데, 이곳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 고로 내려가던 사람이 도적들에게 붙잡힌 장소였다. 현대에 와서도 같은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사고가 닥쳤으며, 그 장소가 그러한 이름을 갖게 된 것도 그곳에 자주 흘려진 피 때문이었다. 그 곳은 쳐다보기에도 끔찍한 곳으로 , 호위자를 대동하지 않고 그곳을 여행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이 샛길의 전략적 위치 때문 에 그곳은 오늘날 경찰이 주재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제롬 및 십자 군의 견해와 더불어 일반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여관〉이 있던 곳으로 간주되고 있다. 사진은 예루살렘이 위치한 고지대를 향하여 서쪽으로 보고 찍은 것이다.

감람산 143 감람산의 지도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41 항), 티투스가 제 X 군단을 이끌고 예 루살렘으로 올라왔을 때, 그들은 여리고를 통해 왔으며 감람산에 진 영을 쳤다(J ose p hus, War V 2, 3 §§69-70).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그 의 생애의 마지막 날들을 보내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오셨을 때, 그가 감람산(i: 6 opo< ; i:&v tAa t & v, 마 21:1 ; 막 11:1) 에 도착하셨다고 언급한 것을 볼 수 있고(여기서 EAat & v [엘라이온]은 Hala [엘라이아, 〈감람나무〉 또는 〈감람〉]의 복수 속격이며, 따라서 자구적으로 〈감람의 산〉 죽 〈감람산 Moun t of O li ves 〉이란 뜻이다. 누가복음 19:29 의 평행절 에 나오는 이 이름의 약간 다른 형태에 대해서는 아래의 154 항을 보라), 또한 그곳으로부터 도성으로 내려가는 편(눅 19:37) 을 언급한 것도 볼수 있댜 감람산은 동쪽으로부터 기드론 골짜기 Kidr on Valle y를 가로질러 예루살렘을 굽어보는 산들의 능선의 일부이며, 따라서 동쪽으로부터 도성으로 접근하는 자들이 먼저 대하게 되는 곳이다. 이 능선은 길

이가 약 2 . 5 마일이며 세 개의 주된 봉우리들을 가지고 있다. 가장 높 은 봉우리는 북쪽에 있는 것으로 라스 엘-메샤리프 Ras el-M esha rif 라 불리며, 높이가 해발 2690 피트이다. 이 산은 티투스가 그의 예루 살렘 공격을 가장 잘 전개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면서 그 땅의 지 형을 고려하여 그의 첫 진영을 쳤던 스코푸스 산 Moun t Scop us 임이 거의 확실하다 (PJ 12 [1916], 5.5쪽). 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요세 푸스 (War V 2, 3 §67) 는, 이 산이 그런 이름(CJK O Jt 6 c; [스코포스], 〈내다 보는 사람〉)으로 불리는 것은 적절한데, 왜냐하면 북쪽으로부터 접근 해 오는 사람이 이곳에서 예루살렘과 〈멀리서 번쩍이는 성전의 장엄 한 건조물〉을 처음으로 조망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두번째 봉우리는 그 높이가 해발 2660 피트로 도성과 성전 지대로 부터 동쪽으로 기드론 골짜기를 곧바로 가로지른 곳에 있으며, 감람 산의 본체를 형성하고 있다. 그 위치는, 예컨대 감람산이 예루살렘 〈앞〉 또는 〈반대편〉 또는 〈맞은편〉, 곧 동쪽에 놓여 있다고 말하는 스가랴 14:4 과 일치한다. 이 산의 아랍어 이름은 엣-투르 e t -Tur 인 데, 그 뜻은 〈산〉이며, 그 꼭대기에 있는 마을은 케파르 엣-투르 Kefa r e t -Tur 라고 불린다. 그 정봉에는 또한 한 러시아 교회와 사방 에서 볼 수 있는 우뚝 선 경계표인 하나의 높은 망대와 함께 건물들 이 서 있다. 여기서 남동쪽으로 뻗어난 또 하나의 능선이 있는데, 이 것은 감람산에 부속된 능선으로서 라스 엣-쉬 야 Ras esh-S hiy ah 라 는 별개의 명칭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엘-아자리 예 el-'Az ariy eh 라 고 불리는 마을(베다니)은 이 능선의 더 멀리 떨어진 하단 경사면에 위치해 있다. 이 전체 연산(連山)의 세번째 주된 봉우리는 좀더 멀리 남쪽에 있 는데, 이 산은 스코푸스 산과 감람산보다 약간 낮다. 이것은 실완 S il wan 이라는 마을 위로 솟아 있으며, 성전 지대의 남쪽인 예루살렘 의 가장 오래된 부분의 반대편에 있다. 이 산이 아마도 솔로몬이 거

짓 신들을 숭배한 멸망산 Moun t of Corrup tion 또는 불쾌산 Moun t of O ffe nce 일 것이다(왕하 23:13). 지도는 방금 언급한 장소들을 보여 주 고 또한 아래에서 토의할 장소들의 위치를 알려 준다. 144 남쪽에서 본 감람산과 베다니 전통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여관〉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장소 로부터 서쪽으로 약 1 마일 되는 곳에서, 여리고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로가 두 개의 지선(支線) 도로로 나누어진다. 그 중의 한 지선은 현대의 도로가 통과하는 길로, 남서쪽으로 돌 아 엘-아자리예(베다니)를 지나가고 계속해서 멸망산과 감람산 사이 를 통과하여 기드론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서 예루살렘의 북쪽으로 돌아간댜 다른 하나의 지선은 로마 시대의 도로(1 41 항 참고)가 통과하는 길 로 스코푸스 산과 감람산의 본체 사이에 있는 능선 위로 올라갔다 (Dalman, Sacred Sit es, 260 쪽 map) . 이 지 역 에 는 아우구스타 빅 토리 아 황후 기부 재단 Em p ress Aug us ta Vic t o r i a Endowmen t (1910 년에 설립된 독일인의 호스피스, 병원 및 교회)이 스코푸스 산의 남쪽 경사 면에 서 있고, 〈비리 갈릴래이〉 (V iri Ga lilae i; 〈갈릴리 사람들〉이라는 뜻의 이 이름은 사도행전 l:ll 의 사건이 이 지점에서 발생했다고 믿는 전통적인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라고 불리는 희랍인의 예배실이 감람 산의 북쪽 경사면에 있으며, 로마 시대의 도로가 이 둘 사이를 통과 한다. 이 도로의 포장 일부가 현대까지 남아 있었으며, 아우구스타 빅토리아 소유지의 입구로부터 멀지 않는 곳에 한 이정석이 서 있었다. 한편 북쪽으로 난(예루살렘과 네아폴리스 [Nea poli s] 를 연결시키는) 지선(支線) 도로가 그 동일한 기부 재단의 정원을 통과하여 나 있던 흔적 을 찾아볼 수 있다 (P J 12 [1916], 75 쪽 ; ZDPV 40 [1917], 78 쪽,

no. 277). 이곳으로부터 그 여리고-예루살렘 도로가 그 능선의 서쪽 경사면을 따라 내려갔음에 틀림없고 , 이 길을 지나는 여행자들은 기 드론 골짜기로 내려가거나 아니면 도성의 북쪽에 있는 대문으로 향 하여 나아갔을 것이다. 사진은 남쪽에서 본 감람산의 광경이다. 위에서 언급한 (143 항) 러 시 아 망대 Russia n Tower 가 정 봉에 보인다. 엘-아자리 예 마을, 즉 고대의 베다니가 라스 엣-쉬야라고 불리는 능선의 나지막한 경사면 의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145 베다니 마을 베다니 Bn8avla 마울에 관하여 요한복음 11 장은 그 장소에서 나사 로를 일으킨 사실을 이야기하고, 이 일이 예수를 죽이려는 모의를 하게 된 이유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요한복음 l2 : l 은 예수께 서 마지막 유월절의 엿새 전에 베다니에 계셨다고 말해 준다. 그리 고 마태복음 2l:17 _ l8 과 마가복음 11:11-12 은 그가 밤에 유숙하고자 예루살렘으로부터 그곳에 가신 것으로 묘사한다 . 느헤미야 11:32 은 (예루살렘의 북쪽으로 3 마일 떨어진 아나타 Ana ta에 있던) 아나돗과 (스코푸스 산 위에 있던) 놉, 그리고 아나냐를 차례로 언급하고 있는 데, 마지막으로 언급된 장소는 또한 베다나냐 Be th an ani ah 라고도 불 릴 수 있었으며, 이곳이 바로 신약에서 베다니 Be th an y라고 불리는 마을이 었을 것 이 다 (W. F. Albri gh t in AASOR 4 for 1922-1923 [1924], 158-160 쪽). 요한복음 11:18 은 베다니가 예루살렘으로부터 15 스다디온(오리쯤) 떨어져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유세비우스 (Onomas ti con, 58 쪽)는 그 마을이 앨리아 Ae li a 로부터 두번째 이정석이 있는 곳, 죽 감람산의 가파른 비탈에 tv KPJ U1V 4l 있었다고 말한다. 보르도 순례자 (GEYER

23 쪽 ; LPPIS 1-B, 25 쪽 ; CCSL CLXXV, 18 쪽 ; WET 160 쪽)는 베 다 니 마을이 감람산으로부터 동쪽으로 1500 보(步) 되 는 곳에 있었다고 하고, 그곳에는 나사로가 안치되었던 지하 토굴이 있다고 진술한다. 애 테 리 아 (GEYER 77, 82 쪽 ; LPP 露 1-C, 51, 57 쪽 ; CCSL CLXXV, 72, 76 쪽 ; WET 127, 131 쪽)는 베다니의 이름으로 라자리움 Laz ari urn 을 말하고 있는데 (Laza ri um aute m , id est Betr a nia ), 이 것은 분명 히 나사로의 이름에서 파생한 말이다. 그리고 그는 그 마을이 도성으로 부터 1500 보 되는 곳, 죽 둘째 마일mil e 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테오 도시 우스 (GEYER 147 쪽 ; LPP 露 II-B, 16 쪽 ; CCSL CLXXV, 123 쪽 ; WJ P 70 쪽)는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일으키신 나사로에 관해서는 그가 일으킴을 받았다는 것은 알려져 있으나, 그의 두번째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 일은 예루살렘으로부터 2 마일 떨어 진 베다니에서 일어났고, 부활절 전에 있던 〈나사로의 일으킴〉(을 기 념하는 축제)에는 모든 백성이 그 장소에 모이고, 행사들이 개최된다.〉 로마식으로 2 마일 또는 15 스다디온의 거리는 약 3 킬로미터, 또는 영국식으로 2 마일이 못 되는 거리에 해당한다. 이것은 예루살렘으로 부터 현재의 엘-아자리예 마을까지의 실제의 거리이며,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143, 144항), 이 마을은 감람산의 한 능선(라스 엣-쉬 야)의 나지막한 경사면에 있다. 애테리아가 칭한 라자리움이란 고대 의 이름은, 아마도 이 라틴어 이름의 첫 글자를 관사로 취급함으로써 엘-아자리예라는 아랍어 이름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도 있다 (KOPP 333 쪽) . 그러므로 이 마을을 베다니와 동일시하는 일은 받아들여질 수 있다. 사진은 이 마을의 금세기 초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사진의 왼쪽으로부터 3 분의 1 에서 2 분의 1 까지에 있는 집들 너머의 산중턱 온 아마도 더욱 고대의 마을이 있던 위치였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 현재 마을의 서쪽으로 200 또는 300 미터 되는 곳에서 가나안 시대의

것인 수갱(堅抗) 무덤들 (248 항 참고)이 1914 년에 발견되었으며, 달리 별도로 발견된 물품들은 B.C. 1500 년으로부터 A.D . 100 년 사이에 사 람이 거주한 증거들을 제공해 주었다. (사진의 오른쪽으로부터 3 분의 l 되 는 곳에 우뚝 서 있는) 파손된 중 세의 망대의 서쪽에, 그리고 전통적 인 나사로의 무덤 (146 항)의 서쪽 으로 약 80 미터 되는 곳에, 프란체스코파가 소유하고 있는 한 감람 나무 숲에서 1949-1953 년에 프란체스코파에 의한 새로운 발굴 작업 이 있었다. 이곳에는 바위가 갱과 동굴들과 수조, 그리고 무덤들로 사실상 벌집 모양이 되어 있었다. 여기서 발견된 물품들은 대략 B.C. 6 세기로부터 기독교 기원 14 세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계속적으로 사 람들이 거주했음을 보여 준다. 예수께서 친히 사신 바로 그 시대 및 다른 시대로부터 온 허다한 작은 발견물들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오 지 둥(燈), 여러 종류의 사기 그릇, 그리고 주화들이 포함되어 있다 . 주화들 가운데는 헤롯 대왕의 주화 한 개와 본디오 빌라도 시대의 주화 한 개가 들어 있었다. 좀더 서쪽으로 고대의 마을의 서쪽 능선에, 그리고 나사로의 무덤 으로부터 약 400 미터 떨어진 곳에서 눈에 띄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석굴 하나가 1950 년에 예루살렘에 있는 성경연구원 Ecole B i b liq ue 의 도미니크파에 의하여 조사되었다. 작은 중앙 분리대를 가진, 바위를 잘라 만든 계단들을 따라 내려가면 바위를 깎아 만든 입구에 이르는 데, 그 입구 자체는 또한 중앙의 기둥에 의하여 두 개의 통로로 나 뉜다. 그 방 자체의 크기는 약 5 .4 X4 미터이고, 그것의 높이는 3 미터 부터 2.2 미터까지이다. 벽들 위에 발린 회반죽의 원래의 충은 많은 저수조들에 사용된 것과 같은 것이며, 석굴의 원래의 용도는 아마도 저수조였을 것이다. 하지만 회반죽의 둘째 충에는 제 4 세기로부터 제 7 세기까지의 순례자들에 의하여 남겨진 것으로 판단되는 많은 벽서 들이 있는데, 이 당시에 이것은 어떤 종류의 신성한 사당이었던 것

이 분명하다. 이와 동시에 나사로의 무덤은 고대의 마을의 동쪽 능선에서 숭앙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 석굴은 그 묘와 혼동되는 일이 없었다. 그렇 지만 나사로는 또한 여기서도 추모되었으니, 이는 그 석굴의 북쪽 벽에 있는 벽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KE ec o E 「 IPAC TON 凰 ZAPON EK NEKP2N MNHC0HTI TOY llOYAOY COY ACKAHIIIOY KE XIONIOY THC llOYAHC [CO]Y Lord God, who rai se d Lazarus from the dead, remember you r servant Asklepi os and Ch ion ion you r (fem inine ) servant.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주 하나님, 당신의 종 아스클레피오스와 당신의 여종 키오니온을 기억하소서. 다른 많은 순례자의 이름들과 많은 십자 표시들과 함께 또 하나의 명각이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8EAI TQN XPHC TJ ANQN EAEHCON ANAMON TON AMAP T[QA ] ON KE E8A~EPAY TQ TAC AMAPTIAC [AM]HN God of the Ch rist i an s,

have mercy on Anamos and take away his sin s. Amen.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 아나모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그의 죄들을 제하여 주소서. 아멘. 146 나사로의 무덤과 인접 건물들의 구도 우리가 바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145 항), 베다니를 방문하는 기독 교 순례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은 당연히 나사로가 안 치되었던 무덤이었다. 『지명록』 (58 쪽)에서 유세비우스는 베다니를 그리스도께서 나사로를 일으키신 장소로 수록하면서, 〈나사로의 장 소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잘 가리켜지고 있다 8ct KV Ut a t ctc ttt Kai vuv 6 Aa~ap ou -c 6 1t o~ 〉고 말한다. 오리게네스와 함께 유세비우스와 관련하여 진술된 바와 같이 (r 연대순에 의한 고대 자료 목록』의 〈유세 비우스〉 참고), 〈잘 가리켜지고 있다i s pointed ou t〉라는 특징적인 문 구는 의심할 여지없이 매우 오랜 세월 동안 존속해 온 전통을 입증 하는 것이다. 베다니에서 지금까지 잘 가리켜지고 있는 나사로의 무 덤의 위치는 구도의 상단 왼쪽 구석의 1-2 번에 나타나 있다. 147 나사로의 무덤으로 들어가는 현재의 입구 구도 (146 항)에 나타난 바와 같이, 나사로의 무덤으로 들어가는 현 재의 입구는 북쪽에 있는 거리로부터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이 입구

의 외부는 이 사진에 나타나 있다 . 문간을 들어서면 22 개의 계단이 있고, 이 계단들을 밟고 내려가면 그 무덤의 현관방에 이른다 . 148 나사로의 무덤 이 사진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147 항) 현관방을 보여 준다 . 사진에 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여기서부터 두 계단을 내려가면 하나의 좁 은 통로가 있다 . 이 통로를 통하여 5 피트를 더 들어가면 둥근 천장 으로 된 그 무덤의 내실이 있는데, 이것은 길이가 약 7.5 피트, 폭이 8 피트이댜 이 내실의 세 면에는 바위 벽에 만들어진 벽감ni che 들이 있으며, 벽감의 밑바닥은 넓게 벌어져서 약간 높은 선반으로 이루어 져 세 개의 묘지를 만들고 있다. 요한복음 11:38 은 나사로의 무덤이 동굴이었으며, 〈돌로 막았〉다고 기술한다.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는 돌이 그 입구의 계단 위에 수평으로 놓여졌을 것이다. 149 베다니의 첫번째 교회에 있는 모자이크 포장 우리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146 항), 유세비우스는 베다니에서 〈나 사로의 장소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잘 가리켜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제롬이 『지명록』 (59 쪽)을 개정했을 때, 그는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바꾸면서 고딕체로 된 말들을 첨가하였다. 〈그곳에 지금 세워져 있 는 교회는 그의 기념물을 가리킨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유세 비우스가 『 지명록』을 작성한 330 년 이후 , 그리고 제롬이 그것을 번 역하고 개정한 390 년 이전의 어느 때 베다니에 하나의 교회가 그 〈기념물〉로서, 즉 나사로의 무덤을 표시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는 사실이다. 제롬이 사용한 〈지금〉이라는 말은 그 교회가 비교적 근래

에 세워진 건물이었음을 암시하는 한편, 그것은 아마도 381-384 년에 성지를 방문한 애테리아의 시대보다는 적어도 먼저 세워졌을 것이다. 우리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145 항), 애테리아는 라자리움을 베다 니와 동일한 지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엘레오나 Eleona 의 경 우, 애테리아는 이 이름을 감람산의 이름으로, 그리고 또한 그 위에 서 있는 중요한 교회의 이름으로 공히 사용하고 있다 . 이렇게 보는 이유는 그녀가 기록하기를, 〈감람산으로, 즉 엘레오나로 올라간다 ascendet in monte Oliv e ti, id est in Eleona>( G EYER 83 쪽 ; LPPTS I-C, 58 쪽; CCSL CLXXV, 77 쪽; WET 142 쪽)라고도 하고, 또한 〈엘 레오나, 바로 감람산 위의 매우 아름다운 교회에서의 예배 in Eleona, id est in ecclesia , qu ae est in monte 0/ive ti, pu lchra sati s …… celebran tur >( G EYER 77 쪽 ; LPPTS 1-C, 51 쪽 ; CCSL CLXXV, 72 쪽 ; WET l 'Zl쪽)라고도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유추해 본다면, 아마도 라자리움은 그 마을 이름이기도 하고 또한 그곳에 세워진 교회의 이름이기도 했을 것이다. 애테리아 (GEYER 71 쪽 이 하 ; LPPTS 1-C, 45 쪽 이 하 ; CCSL CLXXV, 67 쪽 이 하 ; WET 123 쪽 이하)가 예루살렘 성내와 주위에 있는 여러 교회들, 예컨대, 골고다 의 〈큰 교회 The Great Church> , 〈부활 교회 the Anasta s is > , <엘 레오 나 Eleona 〉 등에서 교회력의 여러 가지 절후(節候)에 거행된 정교한 예배 행사들을 기술하고 있고, 또한 이것들과 함께 〈라자리움〉을 언 급하고 있으므로, 이 교회가 십중팔구 그녀가 살던 시대에 이미 존 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활절 주간의 직전 토요일에 라자리움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거 행하는 예전적인 경축 행사를 기술하면서 애테리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침이 되기 시작할 때, 안식일의 먼동이 터올 때, 감독 b i sho p은 안

식일의 이른 아침 제물과 성찬을 드린다. 그리고 폐회할 때가 되면, 수 집사( 首 執 事 )는 이렇게 소리지른다 . 〈우리는 모두 오늘 제 7 시(오후 1 시) 에 라자리움에 모여 준비합시다.〉 그리하여 제 7 시가 시작될 때에 그들은 모두 라자리움에 온다. 라자리 움 죽 베다니는 도성으로부터 약 2 마일 떨어져 있다 . 그들이 예루살렘 으로부터 라자리움으로 올 때 , 후자로부터 약 500 보(반 마일) 되는 곳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주님을 만난 지점인데, 이곳의 길 위에 한 교 회가 있다 그리고 감독이 여기에 도착할 때는 모든 수사( 修 士)들이 그 를 만나고 , 백성은 따라 들어간다. 한 찬미를 부르고 교창(交唱)이 뒤따 르 며, 그들은 나사로의 누이가 주님을 만나는 것을 기록한 복음서의 구 절 (요 1l:29) 을 낭독한댜 그리하여 기도를 드리고 모두가 축복을 받은 다음 , 그들은 찬미들을 부르면서 그곳으로부터 라자리움으로 향해 간다. 그들이 라자리움에 도착하면 모든 군중이 모여들고, 그리하여 그곳 자체뿐만 아니라 그 주위의 모든 들판들이 사람들로 가득 찬다. 그 날 과 그 장소에 적합한 찬미와 교창들이 불려지고, 또한 같은 방법으로 이 날에 적당한 글들이 읽혀진다. 그들이 해산하기 전에 부활절(p ascha [파스카] : 유월절과 부활절 모두를 의미함)이 선언된다 . 제사장은 높이 돋워진 장소로 올라가서 복음서로부터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 다니에 이르시니〉(요 12:1) 라고 기록된 구절 등을 낭독한다 . 이 구절이 낭독되고 부활절이 선언되면 그들온 해산한다. 이런 일들이 이 날에 거 행되는 것은 복음서에 그것이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서 이루어 졌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 .이 며, 안식일로부터 주께서 만찬 후에 밤에 잡히신 때인 제 5 일까지가 엿새이다. 그 후에 그들은 모두 도성으로 돌 아가서 곧바로 〈부활 교회〉로 향한다 (GEYER 81 쪽 이하; LPPTS 1-C, 57 쪽 ; CCSL CUC.X V , 76 쪽 ; w訂 131 쪽 이하). 베다니에 새로운 〈성 나사로 교회 Church of St. Lazarus 〉이 건립

되기 전인 1949-1953 년에, 프란체스코파는 이 근방의 많은 지역들을 발굴하고 연구할 수가 있었다. 이 지역은 146 항의 구도에서 이미 보 여진 바 있다. 이 구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나사로의 무덤 (1-2 번) 은 서쪽에 있었고 교회는 동쪽에 있었으며, 이 둘을 연결하는 안마 당이 그 사이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 구도는 제 4 세기의 이름 있 는 다른 교회들, 죽 거라사의 〈대교회당〉 (365 년 경) (111 항)에서 발견 되는 것과 동일한데, 여기에는 교회가 그 명성 있는 샘의 동쪽에 위 치하여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 구도 (146 항)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가장 오래된 베다니 교회는 회 중석 (9 번)과 양쪽의 측랑들 (10 번과 11 번)과 후진 (15 번)을 가지 고 있 다. 이 교회의 기초는 프란체스코파의 발굴 때에 다섯 개의 다른 지 점에서 부분적으로 출토되었으며, 회중석과 양쪽의 측랑에 있는 모 자이크 포장들은 상당히 많이 드러났다. 사진은 회중석에 있는 모자 이크의 일부분을 보여 주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판은 모자이크의 주된 필드의 일부이고, 왼쪽에 있는 판은 가장자리의 일부이다. 식양 들은 기하학적 도형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는 어떠한 생물의 형체 도 없다. 또한 작은 십자들이 많이 눈에 띈다. 필드 모자이크는 오론테스 강th e Oron te s( 시리아 북서부의 강_ 역주) 강변의 아파메아 A p amea 에 있는 한 회당의 모자이크 포장과 매우 근사한 평행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거기에 적힌 명각에 의 하여 기독교 기원 391 년의 것으로 연대가 매겨진다(E. L. Sukeni k in HUCA XXIII 2 [1950-1951], 541-551 쪽 및 pl. VI). 그러므로 문헌적 참고 사항, 구도, 그리고 모자이크 등으로 볼 때, 베다니의 첫번째 교회의 건축 연대는 제 4 세기, 그리고 아마도 그 세기의 중간 이후일 것이다.

150 베다니의 새로운 〈성 나사로 교회〉 베다니에서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나사로의 무덤에 세워진 첫번째 교회 (149 항)는 아마도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그 후에 두번째 교회로 대치되었던 것 같다 (Saller, Second Cat.a lo g ue, 35-66 쪽). 구도 (146 항)에서 볼 수 있듯이, 새 구조물의 후진 (12 번)은 그 전에 있던 구조물의 후진을 넘어서 동쪽으로 약 13 미터 옮겨졌으나 기본 구도 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두번째 교회에도 역시 모자이크 포장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큰 부분이 원상(原狀)대로 발견되었다 . 이것도 또한 식양에 있어서는 기 하학적 도형으로 되어 있었으나, 첫번째 교회의 포장과는 대조적으 로 이 모자이크는 십자 모양을 전혀 포함하지 않았다. 이것은 테오 도시우스 황제가 포장을 만들 때 십자의 사용을 금지한 4 'lJ년 이후 의 어느 때를 가리키는 것이다 (Saller, Second Cat.a lo g ue , 43쪽). 동시 에 동물과 인간의 형상이 계속해서 없는 것은 그러한 형상이 보편적 으로 쓰이게 된 제 6 세기 이전의 어느 때를 가리킨다. 알려진 지진, 곧 예루살렘에서 매우 강하게 일어났던 447 년의 지진(D. H. Kallner- Amiran in IE] l [1950-1951], 225 쪽)은 그 첫번째 교회에 손상을 입 혔을 수 있고, 만약 그렇다면 두번째 교회는 제 5 세기의 중엽에 세워 졌을 것이다. 제 12 세기에 두번째 교회에는 상당한 개수 작업이 가해졌으며, 이 때문에 발굴자들은 이것을 이제 세번째 교회라고 부르게 되었으나 기본 구도는 여전히 변경되지 않았고, 후진 (12 번)도 동일한 장소에 남아 있었다. 같은 무렵에 이 복합 구조물 (3-5 번)의 서쪽 끝은 하나 의 분명한 교회로 변형되었는데, 발굴자들은 이것을 네번째 교회라 고 부른다 (Saller, Second Cat.a lo g ue , 67-69 쪽). 이 교회에는 나사로의 무덤과 연결된 하나의 지하 토굴이 있었다.

그런데 모슬렘 시대에 이 토굴은 사원으로 바뀌었고, 그곳으로부터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봉(封)해졌다. 그 후에 북쪽으로부터 무 덤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입구 (147 항)가 건조(建造)되었다. 이 〈네번 째 교회〉는 엘-우제이르 el-Uze ir라는 이름의 사원으로 아직도 사용 되고 있다. 1955 년에 이 사원에는 새로운 첨탑이 붙여졌다. 방금 기술한 교회들의 남쪽에는 하나의 커다란 수도원 시설 또는 대 수도원의 유적 이 있다 (20-38 번) (Saller, Second Catalog ue , 99-130 쪽) . 여기에 있는 많은 돌에는 십자군의 특징을 이루던 석수(石手)의 표 시와 알파벳의 글자들, 그리고 십자 등이 그려져 있다. 초기 베다니 의 유적들이 발견된 대수도원과 감람원 사이에는 그 수도 기관을 보 호하던 망대의 유적(위의 145 항 참고)이 있다. 두로의 윌리 엄 Wi lliam of Tyr e(1184) 은 대수도원과 그것을 보호하 는 망대의 기초와 관련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십자군 왕 앙주 의 풀크 Fu1k of Anj ou(1131 년부터 1143 년까지 의 예루살렘 왕)의 아내 였던 멜리 센 데 왕후 Qu een Me li sende 는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 줄 적당한 장소만 발견된다면, 신앙적인 여성 들을 위하여 하나의 수도회를 창설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녀는 이러 한 방법으로 자신의 영혼과 부모의 영혼을 치유하고, 그뿐만 아니라 그 녀의 남편과 자녀들(맏아들은 1143-1163 년에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볼 드윈 III 세 Baldw in III 였다)을 구원할 수 있기 를 바랐다. 그녀 의 막내 여동생 이베타 Ive ta는 우리 주님의 복된 모친의 모친인 성 안네 St. Anne 의 수도원에서 신앙 생활을 할 것을 고백하였었다 (203 항 참고). 그 왕후로 하여금 이와 같은 사업을 계획하도록 한 것은 바로 이 여 동생을 위한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왕의 딸(멜리센데와 그녀의 여동생은 1118-1131 년에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볼드윈 II 세의 딸이었다) 이 보통 사람처럼 한 수도원장의 권위에 예속되는 것은 부적합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마음속으로 적국을 탐사하면서 그녀가 수도회를 창설할 적당한 장소를 찾고자 철저한 조사를 하였다. 심사숙고 끝에 그녀는 마침내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예수께서 사 랑하신 그들의 오빠 나사로의 고향인 베다니로 결정했다 . 베다니는 우 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그 분의 친숙한 거처요 가정 같은 곳이었다. 이 마을은 예루살렘으로부터 15 펄롱 fur lon g (1 펄롱온 8 분의 1 마일, 약 201 미터 —역주) 떨어져 있고, 복음서의 말씀에 의하면 감람산 뒤, 언 덕의 동쪽 경사면에 놓여 있다. 그 재산은 주님의 무덤 교회에 속해 있 었다. 그러나 왕후가 수도회원들에게 선지자들의 도성인 드고아를 주었 고, 그 대신에 베다니를 그녀의 소유로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 장소가 광야의 귀퉁이에 놓였고 따라서 적의 공격에 노출될 수 있었으므로, 왕후는 큰 비용을 들여서 깎고 윤기나는 돌로 튼튼하게 요 새화한 망대롤 짓게 하였다. 이것은 필요한 방어의 목적에 부응하였으 며, 이리하여 하나님께 헌신한 처녀들은 적의 침입에 대하여 보호벽이 되어 줄 난공불락의 요새를 가질 수 있었다 . 식양을 따라 망대가 완공 되고 종교의 직분을 이행하기 위한 한 장소가 준비되었을 때, 그녀는 성별된 자매들을 그곳에 정주시켰고, 연만(年滿)하고 신앙 경험이 성숙 한 존경할 만한 여성을 그들 위에 수도원장으로 두었다. 또한 그녀는 교회에 많은 부동산을 증여함으로써 현세적인 소유에 있어서 그 교회가 어느 수도원―_남자 수도원이든 여자 수도원이든 간에-~보다도 열 등하지 않고, 오히려 전해지는 말처럼, 다른 어떤 교회보다도 더 부하게 하려 하였다 . …… . 그녀가 이 수도회를 책임지도록 위임한 그 존경할 만한 여인이 죽자, 그 왕후는 자신의 원래의 의도를 시행하였다. 총대주교의 재가와 거룩 한 수녀들의 흔쾌한 승인을 얻어 그녀는 자신의 여동생을 그 수도회의 원장으로 삼았다. 이룰 계기로 그녀는 성작(聖爵), 서적, 그리고 교회의 봉사에 사용되는 다른 장식품과 같은 많은 추가적인 선물들을 주었다.

따라서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녀의 총애로 그곳을 계속해서 부 하게 하였으니, 이는 그녀 자신의 영혼과 그녀가 그토록 극진히 사랑한 그 여동생의 영혼을 위하여 한 것이다. 제 14 세기 중엽에, 위에서 기술한 교회들은 폐허로 남아 있었다 (Saller, Second Cata log u e, 97 쪽). 1949-1953 년의 고고학적 발굴이 행 해진 다음 1954 년에 하나의 새로운 〈성 나사로 교회 Church of St. Lazarus 〉이 세워져 봉헌되었다 (Saller, Second Cata lo g ue, 131-137 쪽). 그것은 두번째 및 세번째 교회의 동쪽 부분 위에 희랍 십자 형태로 지어졌으며, 가능한 곳에는 고대의 기초를 활용하였다. 최초기의 두 교회의 후진들은 새 교회 내부에서 볼 수 있도록 남겨졌는데, 첫번 째 교회의 후진은 서쪽 날개방 안에 있고, 두번째 교회의 후진은 동 쪽 날개방에 있는 제단 뒤에 있다. 그 교회의 서쪽 부분에는 두번째 교회의 모자이크 포장의 일부가 역시 볼 수 있게 남아 있으며, 그 교회의 서쪽에 있는 안마당에는 첫번째 교회의 모자이크 (149 항)의 일부가 남아 있다. 사진은 그 아름다운 정원 안에서 찍은 것으로, 건물의 북동쪽 구 석에 세워진 홀쭉한 망대와 중심부 위에 얹힌 둥근 지붕과 함께 그 새 교회의 동쪽 측면을 보여 주고 있다 . 151 벳바게의 프란체스코파 예배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흔히 〈개선의 입성〉이라고 불리는 일을 위 하여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마태복음 21:1 에는 그들이 감 람산으로 (e t<;, r 바티칸 사본』) 또는 감람산을 향하여(Jtp 6<;, 『시내 사 본」) 가는 벳바게로 (e t<;) 왔다고 진술되어 있다. 이 사건의 평행 기 사들을 보면, 마가복음 11:1 과 누가복음 19:29 은 벳바게라는 지명에

더하여 베다니도 언급하고 있으며, 감람산을 향하여 오면서 이 두 장소로 오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세 복음서 모두에서 잇따라 나오 는 바, 두 제자에게 〈맞은편 마을〉로 가라는 지시는 분명히 하나의 마을만을 가리키는 것 같고, 따라서 마태복음에 오직 벳바게만 언급 한 것과 가장 잘 조화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마가복음과 누가복 음에 베다니가 더해진 것은 그것이 더 잘 알려진 장소여서 벳바게의 위치룰 알려 주기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여리고 -예루살렘 도로를 따라 올라오다 벳바게와 베다니를 향하는 쪽으로 회전하는 일이 친숙했가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마태복음에 보 존된 전승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보존된 전승의 기본이 되는 것 이라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모두가 감람산을 향하여 나아가는 일 과 함께 벳바게와 베다니로 간다고 말하고 있는 사실은, 이 독법이 r 시내 사본」에 보존된 바와 같이 마태복음에 애초에 기록된 독법이 기도 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r 시내 사본」에는 예수와 제자들이 벳바게로, 그리고 감람산을 향 하여 왔다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들에서처럼 전치사 npb c (프로스)가 대격과 함께 쓰이면 문자적으로 〈-를 향하여〉라는 의미를 가지며, 맞은편의 위치를 시사한다. 이러한 의미로 볼 때, 그것은 감람산의 남동쪽 능선(라스 엣국 1 야)의 내리막 경사면의 맞은편에 위치한 베 다니(엘-아자리예 ; 145 항 참고)의 상황을 썩 잘 묘사하고 있다. 그러 므로 이러한 사실들은 벳바게가 로마 시대의 도로와 베다니 사이의 어느 곳에, 그리고 아마도 베다니처럼 감람산의 남동쪽 능선의 맞은 편 어디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만약 예수께서 베다니(엘-아자리예)를 곧바로 통과하여 예 루살렘으로 향하는 현대의 대로와 엇비슷한 통로를 따라 올라오셨 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마가복음 ll:l 과 누가복음 19:29 에 언급된 말씀을 예수께서 그 통로로 오실 때 베다니에 이르기 전에 벳바게에

먼저 오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벳바게의 위치는 베다니의 동 쪽 어느 곳에서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을 고려하여 어떤 이 들은, 벳바게가 그 남동쪽 능선의 훨씬 더 멀리 아래 쪽, 그리고 엘 ― 아자리예로부터 남동쪽으로 하나의 협곡을 건너서 위치해 있는 아 부 디스 Abu D i s 라는 아랍인의 마을에 있었다고 추측하였다. 하여튼 벳바게 Bn8 4>a때라는 마을은 『탈무드 』 에 여 러 번 언급된 베 트 파게 Beth Pa g e(.,l 沿 2 n., 그)라는 장소와 확실하게 동일시될 수 있 다. 탈무드의 언급들은 특별히 성물이 준비되고 사용될 수 있는 정 확한 한계를 명시하는 일과 관련하여 일컬어졌다 . 예컨대 『므나호트 Menaho t h 』 (78b GET VIlI, 680 쪽 ; SET V, 2, 468-469 쪽)라는 책자에 는, 감사제의 제물을 잡는 동안에 감사제의 떡은 〈벽 바깥에서〉 발 견되어서는 안 된다고 미쉬나Mi shnah 의 구절에 진술되어 있다 . 그 리고 게마라에는 이 조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토론이 기록 되어 있댜 한 랍비는 그것은 〈성전 뜰의 벽 바깥에서〉라는 뜻으로 해석하였으나, 랍바 요하난 Rabb i J ohanan( 제 3 세기)은 그것이 〈베트 파게의 벽 바깥에서〉라는 뜻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우리는 베트 파게 또는 벳바게 Be t h p ha g e 가 예루살렘의 교의이며, 아마도 성전의 주된 외벽, 죽 동쪽 벽을 넘어 어느 곳에, 따라서 아마도 감람산 위 또는 그 너머 어느 곳에 위치해 있었다고 추정하는데 이것은 앞 문단에서 연역한 내용과 일치한다. 더욱이 우 리는 여기서 그 베트 파게의 〈벽〉이 -그 마울을 실제적으로 요새 화한 성벽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히 그 마을의 구역 범위를 가리키는 표시였을 수도 있는―—예루살렘의 한계를 명시하는 것으 로 간주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사실에 비춰 볼 때 예수께서 이제 특별히 마련하신 계획에 의하여 벳바게로부터 산에 오르시고 그 지점으로부터 나귀를 타고 오신 사실은 특별히 의미심장한 일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다른 때

는 여리고로부터 올라오는 길고도 가파른 오르막길을 포함하여 팔 레스타인 전역을 걸어 다니시던 그가 마침내 그 거룩한 도성으로 들 어가는 입구를 공식적으로 표시하던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예루살 렘 안으로 나귀를 타고 들어가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분명히 그는 이 입성에 매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셨다. 유세비우스는 『 지명록』 (58 쪽)에 벳바게를 수록하긴 했으나 복음서 에 이미 주어진 정보 이상은 더 이상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 그는 그곳이 주 예수께서 왕림하신 감람산 곁에 npb c t§ 5p ct t& v tk at@ V 있는 마을이라고 한다. 제롬 (Le tt er 108, 12, NPNFSS VI, 200- 201 쪽)은 파울라가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무덤과 함께 벳바게를 방문하였으며, 그리고 파울라로부터 〈곧바로 여리고를 향하여 언덕을 내려갔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추측건대 위에서 기술한 (144 항) 로마 시대의 도로를 따라 내려간 것으로 보인다. 테 오도시 우스 (GEYER 146 쪽 ; LPPTI 汀 I-B, 15 쪽 ; CCSL CLXXV, 122 쪽 ; WJ P 69 쪽)는 감람산에 관하여 말하면서 계속해서 〈성 테클 라 St. Thecla 가 있는 교회 〉를 언급한다. 〈그 장소는 벳바게 라고 불 린다. 그곳으로부터 나귀 새끼 pu llum as i nae 를 가져왔는데, 이것은 주께서 베냐민 문 Gate of Be njamin을 통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 올라타신 것이다.〉 테클라는 추측건대 외경인 바울과 테클라의 행전 Ac ts of P aul and Thecla 의 그 유명한 여주인공이며, 벳바게 교 회가 〈성 태클라가 있는 곳〉이라는 진술이 의도하는 바는 그곳이 그 녀의 매장지를 표시한다고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외경 작 품에서 테클라는 셀류치아 Seleu ci a 에서 죽어 _또는 어떤 역본들에 서처럼 로마에서 죽어 _닙 H 쁜] 무덤 근처에 장사되었으며 (]ANT 281 쪽 ; HSNTA II, 331 쪽 ; SWDCB IV, 885 쪽), 그 벳바게 교회 는 테 클라에게 존귀를 표하는 기념 행사의 장소에 불과하다는 제안이 있 다(J. T. Milik in RB 67 [1960], 564 쪽 이하, no. 41). 하지만 이 이름

은 안디옥의 순교자인 성 펠라지아 S t. Pela gi a(306 년 경 사망)의 오기 일 수도 있고, 이곳에 있는 묘에 잠든 것으로 말해지는 사람이 그녀 일 수도 있다 (TOBLER AND MOL/NIER 67쪽). 하여튼 테오도시우스는 감람산 위의 벳바게를 예수께서 예루살렘 으로 〈개선의 입성〉 하고자 나귀 새끼를 올라타신 장소로 알고 있다 (예수께서 도성으로 들어갈 때 통과하신 베냐민 문은, 테오도시우스에 의하면 성전 지대의 북쪽에 있는 성벽의 양문 [197, 203 항]에 대한 다른 이름이었다. 그 이유는 이 대문이 곧바로 예루살렘의 바로 북쪽에 있는 베냐민 지파의 영토로 나 있었기 때문이다[M'A CKOWSKI 251 쪽]). 예루살렘의 수사 에피파니우스 (WJ P 120 쪽)는 그리스도께서 나귀 새 끼에 올라앉으신 장소가 승천을 표시하는 교회(감람산의 정봉; 158 항) 로부터 약 1000 보 (1 마일) 가량 떨어져 있었으며, 다시 1000 보를 더 가면 베다니와 나사로의 무덤이 있었다고 진술하면서 벳바게의 위 치를 지적하고자 거리들을 말해 주고 있지만, 그 장소에 관한 더 이 상의 세부 사항은 제공하지 않는다. 십자군이 앞에서 기술한 대로 벳바게의 위치를 받아들인 것과 여 기에 제시된 사진에 나타난 프란체스코파의 예배실에 관해서는 152 항 에서 좀 더 살펴보자. 152 벳바게의 돌 위에 그려진 십자군의 그림 프랑크족의 수사 베르나르 Bernard(ITTO) (TOBLER AND MOLINIER 317 쪽 ; LPPTS III-D, 9 쪽)는 십자군이 오기 전의 저술에서 베다니에 관해 말하면서 감람산으로부터 남쪽으로 1 마일 떨어져 있고 나사로의 묘를 전시하는 수도원 교회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말하고(나사로는 후 에 40 년 간 에베소의 감독이었다고 전해진다) 난 후 다시 이렇게 말한다. 〈감람산을 따라 내려가면 서편에 대리석 덩어리가 하나 보이는데, 이

곳은 주께서 나귀 새끼에 올라타신 곳이다 . 〉 독일 순례자 테오도리쿠스 Theodori cu s(1172) (LPPTS V-D, 34 쪽 이하; WJ P 152 쪽)는 십자군 시대 동안과 그들이 11 얽년에 살라딘에 의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추방되기 전에 기록한 글에서 벳바게의 위치를 기술하면서 그 돌과 그 당시에 그것을 둘러싸고 있던 예배실 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r 종려 일요일」에 우리의 가장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 다니를 출발하여 벳바게로 오셨는데, 이곳은 베다니와 감람산 사이의 중간 지점으로 지금은 그에게 존귀를 돌리기 위하여 아름다운 예배실이 세워진 곳이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의 제자들 중 둘을 보내셔서 나귀와 그것의 새끼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는 그 예배실 안에 보이는 큰 돌 위 에 서서 나귀 등에 올라앉아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가셨으며, 그 가 산의 중턱을 내려오실 때 큰 무리와 마주치셨다. 1876 년에 앞에서 지시된 지대에서 입방체로 된 돌덩이(길이가 약 5 피트, 폭이 4.5 피트, 그리고 높이가 3 피트) 하나가 우연히 발견되었는 데, 그 위에는 십자군의 그림과 손상된 명각이 있었다. 이 지대의 소 유권은 프란체스코파가 획득하였다. 그들의 〈벳바게 예배실 Crap e / of Be thp ha g e 〉 (151 항)은 1883 년에 세워졌으며, 그 기념돌은 그 안에 보존되었다. 이와 동시에 그 돌로부터 단지 2 야드 남짓 떨어진 곳에 서 십자군 교회의 후진의 기초가 출토되었다. 십자군이 돌에 장식한 그림들은 이 장소에서 기념된 사건들을 그 린 것들이었다. 남쪽에는 베다니를 향한 곳에 나사로의 부활을 묘사 한 그림이 있다(여기에 제시된 사진). 무덤의 석판이 옮겨지고 한 사 람이 그의 코를 막을 때 예수께서 손을 뻗은 채로(상단 왼쪽) 나사로 더러 나오라고 명령하시는데, 마르다와 마리아(그들의 머리가 하단

왼쪽 구석에 보임)가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는다. 그 돌의 북쪽에는 성벽과 일단의 사람, 그리고 나귀와 나귀 새끼 가 있다. 동쪽에는 종려나무를 든 사람들이 있으나,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장면을 보여 줘야 할 곳은 지워져 있다. 서쪽에는 손상 된 명각이 있는데, 여기에는 벳바게와 그곳으로부터 끌려간 나귀 (ASINA DUCTVS) 에 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다 (MEISTERMANN 285 쪽). 153 벳바게의 구르는 돌문을 가진 무덤 벳바게의 사당에 대하여 s. 솔러 S. Saller 와 그의 동료들이 1949- 1953 년에 수행한 고고학적 연구는 그 지대에 B.C. 2 세기로부터 사람 이 거주했음을 확증하였는데, 이는 거기에서 나온 허다한 주화들이 안티오쿠스 IV 세 Anti oc hus IV(l75-164) 의 치세로까지 거슬러 오르 고 아래로는 대략 8 세기까지 걸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바위를 깎아 만든 10 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이것들은 네 가지 형태의 매장 방법을 나타내고 있다. 죽 벤치 위 코킴 kok im 안 에, 구유 모양의 묘 안에, 그리고 수갱 묘 안에 각각 시체를 안치하 는 방법들이며, 전체적으로는 다수의 납골함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 에 제시된 사진에 보이는 바와 같이, 구유 모양으로 된 형태의 한 무덤(무덤 no. 21) 에는 그것을 폐쇄하기 위한 구르는 돌문이 아직도 입구 앞의 제자리에 놓여 있다. 그 동일한 무덤 안에는 6 개 이상의 벽서둘이 있는데, 이것들은 유대계-기독교의 의미를 띈 것으로 해석 된다. 죽 낙원의 상징들, 구원자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의 이름을 나 타내는 기호들, 그리고 천년기(千年期)와 관계된 명각 둥이 그려져 있다.

154 〈엘레오나 교회〉의 지하 토굴 마태복음 24:3 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그의 마지막 날들 동안에 제 자들에 게 세상의 종말 (OU VtE: A El.Q ,:oi) at@ V OC ; 24 : 6 의 챠 AOC 참고)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감람산 위에 앉아 계셨으며, 마가복음 13:3 에 의 하면 그 지점은 성전의 반대편에 있었다. 누가복음 24:50 에 의하면 부활하신 후에 그는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g(J)c npb c 나가 사 unti l the y were over ag ains t Beth a ny >( ASV) 거 기 서 그들과 작별 하셨댜 그가 그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지신 후에(행 1:9), 그들은 사도행전 1: 12 에 의 하면, <감 람원 이 라 하는 산으로부터 ano opou c i:ou KaAouµevou eAa t @VOC( 여기서 eAat @ v [감람원]은 고유명사이고,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감람원이라고 불리는 산으로부터,' 죽 ‘감람산으로부터’라는 뜻이다. 라 틴어 mans oliv e ti [몬스 올리 베티] 참고, ‘감람원 [ol i ve tum]의 산,' 죽 감 람산一―이 말에서 ‘O li ve t’라는 영어가 유래된다. 누가복음 19:29; 21: 37 에서도 그렇다)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 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안식일에 가 기 알맞은 길, 또는 출애굽기 16:29 의 명령을 범하지 않고 갈 수 있 는 거 리 는 민수기 35:5 에 근거 하여 2000 규빗 (Erub i n IV 3 ; V 7 DM 126, 128 쪽) 또는 약 900 미터로 계산되었다. 요세푸스도 감람산이 그 도성으로부터 5 스다디온 (3000 피트를 약간 넘음)이었다고 말함으로써 거의 정확하게 같은 거리를 말해 주고 있다(Ant. XX 8, 6 §169 ; War V 2, 3 §70 에서 보면, 제 X 군단이 예루살렘으로부터 6 스다디온의 거리 에 있는 감람산에 진영을 쳤는데, 따라서 이곳은 아마도 여리고로부터 올라오는 길의 산 동편이었을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25 항), 콘스탄티누스 황제 치하에서 팔레 스타인에 세워진 교회들 가운데 감람산 위에 있는 교회는 구체적으

로 황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아우구스타가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교 회 중의 하나였다. 유세바우스 (L ife of Consta ntine ill 43) 는 이 렇게 말한다. 〈황제의 어머니는 감람산 위에도 인류의 구주이신 그 분의 승천을 기념하여 하나의 장중한 구조물을 세웠으니, 곧 그 산의 정 봉에 하나의 거룩한 교회와 성전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참으로 근거 있는 역사가 우리에게 알려 주는 바에 의하면, 바로 이 동굴에서 구 주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비밀 계시들을 나눠 주셨다.〉 유세비우스의 수사학적 언어는 약간 혼란을 일으키고 있으나 이 제 곧 언급할 발굴들로부터 확실하게 나타나는 사실은, 헬레나와 콘 스탄티누스가 감람산 위에 오직 하나의 교회만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 교회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종말에 관하여 가르치신(마 24 장과 평행절들) 것으로 믿어지는 곳인 동굴 위에 있었고, 그것은 또한 승 천이 있었던(행 l:9) 것으로 믿어지는 그 산의 정봉에 가까이 있었 다. 감람산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곳과 연관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외경인 『요한 행전 The Acts of Jo hn 』(

있는 그녀의 교회로 올라가는 대리석 총계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소 프로니우스 So p hro ni us(634 년에 예루살렘의 총대주교가 된)는 그가 남 긴 시적인 문구들 중의 하나에서, 그 교회로 향하는 그 충계를 올라 가는 일과 그곳으로부터 서쪽으로 거룩한 도성을 바라보는 아름다 운 전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A nacreon ti az 19.8-18 ; MPG 87. cols. 3811-3812 ; LPPTS XI-A, 28 쪽 및 n. 1). 그 유명한 골짜기(기드론 골짜기)로부터 계단을 올라가면서 나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 올라가신 감람산에 입맞추곤 하였으며, 그것 을 통하여 나 를 구원하신 그 하늘의 지혜의 무한한 깊이를 칭송한 후 에, 나는 그가 자신의 귀한 동료들에게 오묘한 일들을 곧잘 설명해 주 시던 곳으로 재빨리 달려가곤 하였다. 그리고 나서 지붕 아래로 가장 큰 대문을 통과하여 테라스로 나가서는 서쪽으로 향하여 놓여 있던 그 거룩한 도성의 아름다움을 찬탄하곤 하였다. 감람산으로부터 그대의 사 랑스러움을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감미로운 일인가! 오 그대 하나님의 도성이여! 〈엘레오나 교회〉의 유적들은 1910 년에 시작한 L.-H . 뱅상과 도미 니크파에 의한 발굴로 확인되고 연구되었다. 이 지점은 〈승천 사원 Ascensio n Mos q ue 〉 (159 항)이 서 있는 능선의 정봉으로부터 70 미터 남쪽으로 약간 서쪽에 있다. 사진은 위에서 인용된 전승에서 언급된 동굴인 교회의 지하 토굴을 파헤쳐 놓은 광경을 보여 주고 있다. 155 〈엘레오나 교회〉의 구도와 단면도 〈엘레오나 교회〉의 유적은 바위 속을 깎아서 만든 그 교회의 기 초 호( 塚 )들을 포함하여 얼마 되지 않는데, 이것으로부터 뱅상은 이

도해(岡解)에 나타난 구도와 단면도를 작성하였다. 입구는 여섯 개의 석주로 된 행각porti co 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안뜰로 들어가는 문이 세 개 있었고, 안뜰의 중앙 하부에는 하나의 큰 수조가 있었다. 바실리카 본체는 좀더 높은 위치에 있었으며, 안 뜰에서 이곳으로 올라가는 계단들이 있었다. 바실리카는 길이가 약 100 피트였고, 회중석과 양쪽의 측랑과 명각된 후진을 가지고 있었다 . 방향은 동굴-지하 토굴이 후진의 동쪽 끝부분 아래에 오도록 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또한 모자이크 포장의 작은 부분들이 있는데 이것 들은 남쪽 측랑에, 그리고 침례탕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교회의 남쪽 바깥에 남아 있다 . 식양은 베들레헴의 콘스탄티누스의 교회에 있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후기에 세운 건물들이 이제는 서쪽으로 바라보는 전망을 방해하 고 있으나, 그 지점이 한때는 예루살렘과 성전을 향하여 화려한 조 망을 제공했을 것임에 틀림없다(막 13:3 참고). 156 〈주의 기도 교회〉 보호 장치가 되어 있지 않는 감람산 위의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 로 엘레오나 Eleona 도 신 페르시아인들 Neo-Pers i ans 에 의하여 614 년 에 파괴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근방에서 가르치셨다는 전승은 존속되었다. 중세에 한 예배실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으로 여겨지는 장소를 표시하였고, 다른 하나의 예배 실은 사도들이 신경 Creed 을 작성한 것으로 믿어지는 지점을 기념하 였다. 1868 년에 이 지대는 오베르뉴 탑의 공주Prin cesse de la Tour d'Auver gn e 가 구입하였는데, 현재의 〈주의 기도 교회 Church of the Pate r Nos ter〉과 〈신경 (信經) 교회 Church of the Creed 〉은 이 시 대

의 것이다. 고대의 지하 동굴과 엘레오나의 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 의 동쪽 끝은 〈주의 기도 교회〉 밑에 놓여 있다. 1ITT6 년에 프랑스 갈멜 수녀들의 수도회가 또한 이곳에 세워졌다. 이 구조물의 집단은 한데 뭉뚱그려 〈라틴 건물들 La ti n B uilding s 〉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 진은 〈주의 기도 교회〉을 보여 주고 있다. 157 〈주의 기도 교회〉의 내부 이 사진은 현재의 〈주의 기도 교회〉의 복도를 보여 준다. 후기의 전승에 의하여 이 장소에서 가르쳐진 것으로 믿어지는 (156 항 참고) 주의 기도가 62 개의 서로 다른 언어로 그 교회의 벽에 있는 판에 새 겨져 있다 (MURPHY~O'CONNOR 94쪽). 158 아르쿨프가 그린 〈거 룩한 승천 교회 〉의 구도 종려 일요일 Palm Sunda y에 예루살렘에서 거행된 예배 행사에 관 한 기 술에 서 애 테 리 아 (GEYER 82-84 쪽 ; LPPTS 1-C, 58-59 쪽 ; CCSL CLXXV, 76-78 쪽 ; WET 132-133 쪽)는, 사람들이 일찍 이 골고 다에 있는 〈큰 교회 The Great Church 〉로 가고 제 7 시에는 엘레오나 (149, 154 항 참고)로 올라가며, 〈제 9 시가 되기 시작할 때 그들은 〈인 보몬 Inbornon 〉__죽 주께서 승천하신 곳――으로 찬미하며 올라간 다〉라고 말하고 있다. 마침내 제 11 시가 되면 〈그들은 감람산의 정봉 으로부터 그 전체 노정을 걸어서 내려와〉 도성을 통하여 도로 십자 가와 부활 (228 항 참고)의 장소까지 나아간다. 〈인보몬〉이란 이름은 헬라어로 tv o 1il曲 (엔 보모)라는 구절을 라틴어로 옮긴 것으로 설명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높은 곳에〉라는 뜻이며, 01ilµ bc (보모스)는 또 한 히브리어 i1 E2( 바마) 죽 〈높은 곳[山堂]〉을 LXX 에서 헬라어로

옮길 때 정규적으로 사용한 역어(譯語)이다. 적어도 애테리아 (381-384) 의 시대에는 승천이 감람산의 맨 정봉에 있는 이 이름의 장소에서 있었던 것으로 여겨졌다. 애테리아는 인보 몬을 단순히 〈장소〉로만 기술하면서 교회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 은 그곳에 과연 교회가 있었는지에 관한 의문을 야기시키지만 (WET 51 쪽), 사실은 아마도 거기에 교회가 이미 존재하였으며 그 교회는 〈거룩한 승천 교회〉로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 이베리아인 베드로 Pe te r the Ibe ri an(451) 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남긴 장본인이다. 〈폼니아 Po mni a( 포에메니아 Poeme ni a) 라는 이름의 한 매우 존귀하고 독실한 숙녀가 …… ‘거룩한 승천 교회’를 짓고, 그것을 건물들로 둘러싼〉(Ri chard Raabe, Petr us Iberer [Leip z ig , 1895], 35 쪽 ; KOPP 1959, 461 쪽) 것은 378 년 경 이 었댜 그리 고 이 것 이 바로 애테리아가 관습적으로 그곳의 지병을 따라 인보몬이라는 이름을 붙인 그 교회일 것이다 (KROLL 426 쪽, col. 1). 이와 마찬가지로 제롬이 파울라 Paula(386) 의 성지 여행에 관하여 말할 때 (Le tt er 108, 12 ; 404 년에 기록됨), 그는 그녀가 한 말을 다음 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아모스의 고향 드고아를 통과해 가면서 나 는 구주께서 아버지께로 승천하신 곳인 감람산의 번찍이는 십자가 를 바라볼 것이다.〉 이 십자가는 아마도 감람산의 능선 최고봉에 있 는 〈인보몬 교회〉 위에 높이 세워져 있었고, 따라서 예루살렘의 남 쪽으로 10 마일이나 떨어진 드고아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인보몬〉 또는 〈거룩한 승천 교회〉은 1913 년에 뱅상에 의하여 답 사되었고, 1959 년에는 코르보 V. Corbo 에 의해 다시 조사되었다. 그 것의 원래의 모양은 중심을 가진 기념 교회였던 것으로 보이며, 외 부 벽들의 형태는 팔각형이었고 내부에는 돔을 떠받치는 16 개의 석주 로 된 원형 열주가 있었다. 이 교회는 614 년에 페르시아인들에 의하여 파괴된 것이 분명하나

곧 재건되었다. 이것은 그 교회 지대에서 발견된 한 헬라어 명각의 부분이 모데스투스 Modes tu s(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634 년 사망)가 개 축한 사실을 기록한 것을 봐서 알 수 있다. 모데스투스가 〈성묘 교 회〉에 대하여 실시한 광범위한 재건 공사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살펴 볼 것이다 (231 항). 그 근처에 있는 〈엘레오나 교회〉도 역시 페르시아 인들에 의하여 파괴된 것이 틀림없고, 이것 또한 모데스투스에 의하 여 재건된 것 같다 . 왜냐하면 우리는 소프로니우스 So p hro ni us(634) 가 당시에 존재하는 교회를 친히 방문한 것처럼 말하고 있음을 앞에 서 보았기 때문이다(위의 154 항을 보라). 그 교회 에 관하여 아르쿨프 Arc ulf (670) 가 남긴 기 술과 그림 에 의 하면, 재건된 〈인보몬 교회〉도 여전히 중심을 가진 기념 교회였으나 이번에는 그 형태가 원형으로 되어 있었다. 아르쿨프는 말하기를 (GEYER 246-251 쪽 ; LPPTS III-A, 74-75 쪽 ; CCSL CLXXV, 199- 202 쪽 ; WJ P 100-101 쪽), 감람산 정 봉에 하나의 커 다란 둥근 교회 ecclesia ro tun da 가 있었는데, 이 교회의 둘레에는 둥근 천장에 지붕 이 덮인 행각 세 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 교회의 내실은 지붕도 없 고 둥근 천장도 없이 sin e tec to et sin e camera 무개천(無蓋天)으로 열려 있었다. 그 중심에는 주께서 승천하신 곳의 마지막 발자국이 보이게 되어 있었고, 이것은 도르래에 달려서 밤낮으로 타고 있는 하나의 큰 둥의 조명을 받고 있었다. 이 맨 안쪽 건물의 동쪽에는 좁다란 지붕 아래 하나의 제단이 있었다. 서쪽에 있는 맨 안쪽 원형 의 전면, 죽 그 입구에는 여덟 개의 둥이 유리 창문 뒤에 있는 줄에 매달려 있었는데, 이 창문을 통하여 둥의 불빛이 예루살렘에까지 비 쳐 내렸다. 도해는 아르쿨프가 그것을 묘사하면서 그린 그림을 재생시킨 것 으로, 원래는 파리의 국립 도서관에 있는 제 9 세기의 『파리 사본 Codex P ari s i nus 」 (La tin 13048) 에 포함된 것이다. 이 그림온 남쪽으로

부터 세 개의 원형으로 된 행각을 통해 들어가는 주된 입구, 죽 바 깥쪽 입구와 서쪽에 그 입구를 가진 내부의 원형 방, 동쪽에 있는 제단, 그리고 서쪽에 있는 여덟 개의 등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 159 감람산 위의 〈승천 사원〉 아르쿨프가 본 그대로를 앞에서 기술한 (158 항) 〈거룩한 승천 교 회〉은 십자군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구도는 원형 구조물이 이제는 팔각형으로 된 것을 제외하고는 전과 동일하였다. 새 건물로 대치되 기 전에 있던 맨 안쪽 건물과 마찬가지로, 중심에 있는 예배실은 하 늘을 향하여 열려져 있었다. 이 교회는 1187 년에 살라딘에 의하여 점유되었고, 그리하여 회교 사원으로 변한 후 오늘까지도 그렇게 남아 있다. 팔각형으로 된 벽 은 지름이 약 100 피트인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중심 가까운 곳에 지름이 21 피트인 팔각형의 건물이 서 있는데, 그 위를 원통 모양의 고상부(鼓狀部)와 돔이 얹혀 있다. 이것은 십자군의 예배실이었다. 그러나 여덟 개의 측면에 만들어진 아치들은 이제는 벽으로 막힌 채 로 있고, 한때 열려 있던 지봉은 둥근 지붕으로 덮여 있다. 또한 안 쪽으로 남쪽 벽에는 미랍mihr ab 즉 모슬렘의 기도하는 방향을 가리 키는 벽감ni che 이 있다. 이 장소를 회교 사원으로 사용하는 것은 모슬렘의 관점에서 본다 면 적절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 키사 자신에게로 데려가셨다〉라고 하는 『코란』의 진술 (Sura IV 158; ill 55 ; Abdullah Yusu f Ali, The Holy Qu r-an [1946], I, 230 쪽 및 n. 664 참고; 137 쪽 및 n. 394 참고)이 예수의 승천을 믿는 모슬렘의 신 앙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160 감람산 정봉에서 본 예루살렘 개관 감람산 정봉에 서면 사방으로 화려한 파노라마가 전개된다. 동쪽 으로는 15 마일 떨어지고 3900 피트를 내려가는 사해를 향하여 유대 광야가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그 너머로는 모압의 푸른 산들이 둘러 있다. 서쪽으로는 이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드론 골짜기 Kidr on Valle y를 가로질러 성전 지대에 우뚝 눈에 띄는 〈반석의 돔〉 (185 항)과 함께 예루살렘 성 이 보인다. 161 도미누스 플레비트의 프란체스코파 예배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개선의 입성〉을 하실 때, 그는 감람산으 로부터 오셨다(마 21:l ; 막 11:1 ; 눅 19:29). 그런데 누가는 19: 얽에서 는 그 산에서 〈내려가는 편〉을 언급하고, 19:41 에서는 그가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셨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벳바게 (151 항)가 참 으로 감람산의 고지에, 그리고 아마도 그 정봉으로부터 약 반 마일 동쪽에 있었다면, 성으로 향하는 최단거리 직행로는 바로 그 정봉을 넘어서 서쪽의 경사면을 곧바로 타고 내려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이 길은 비교적 가파른 내리막길이었고, 그 성을 뚜렷하게 바라볼 수 있는 조망을 제공하였다(1 66 항 참고). 〈인보몬〉과 〈엘레오나〉은 그 산의 꼭대기에 있는 이 통로에 있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1 58 항), 애테리아 (381-384) 가 그녀의 시대에 있었던 종려 일요일의 행렬을 묘 사한 글에 서 (GEYER 83-84 쪽 ; LPPTS I, 58-59 쪽 ; CCSL ·CL XXV, 77-78 쪽 ; WET 132-133 쪽) 그녀 는 사람들과 감독이 골고다의 〈큰 교회〉로부터 〈엘레오나〉과 〈인보몬〉로 가고, 그러고는 제 11 시에 〈그 들은 감람산의 정봉으로부터 그 전체 노정을 걸어서 내려온다 de summo monte oli ve ti tot u m pe dib u s itu r 〉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감독 앞으로 가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 21:9) 라고 노래하고, 아이들은 종려나무와 감람나무의 가지들을 들고 있다 ramos ten ente s alii [Xllm arum, alii oliv a rum). 이 리 하여 그들은 감독을 호위하며 노래로 화답하면서, 사람들이 지치지 않도록 천천 히 그리고 완만히 lente et lente 성으로 도로 와서는 그곳을 통과하 여 십자가와 부활의 장소에 이른다 (228 항 참고). 이것은 분명히 그 개선의 입성을 재연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당시 에 전통적으로 알려진 그 길을 따라갔을 것으로 짐작되고, 또한 남 겨진 기록이 걸어서 천천히 내려갔음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그때에 사용된 길이 감람산의 서쪽 면을 타고 내려가는 가파른 내리막길이 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가파른 내리막길이 또한 예수께서 짐승을 타고 군중과 함께 가신(마 21:7 이하 및 평행절) 그 길과 가장 근사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마도 의문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의문시된다면, 어쩌면 로마 시대의 노선 (143 항 참고)을 따라 나 있는 좀더 북쪽의 통로가 더 근사한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KOPP 1959, 331-332 쪽). 그러나 애테리아가 확인한 비교적 오래된 전승은 보다 직행으로 내려오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편과 확실하게 조화를 이룬다. 지금 그 곳을 내려가는 길들은 지그재그로 닦아 놓아서 가파른 경사룰 완화 시켜 주고 있는데, 이것은 고대의 길에서도 있음직한 일로 판단될 것이다. 감람산의 정봉으로부터 서쪽으로 직행하는 내리막길을 따라 반쯤 내려오면 도미누스 플레비트 Dom i nus fl ev it로 알려진 지대가 있는 데, 이 이름은 이곳이 예루살렘을 위하여 〈주께서 우신〉(눅 19:41) 장소라는 전통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이곳은 의심할 여지없이 중세 의 순례자들이 가리켜 보인 지대이며, 이들 가운데 포함되는 사람들 은 도미니크파인 리콜두스 데 몬테 크루치스 Rico ldus de Monte Cruds

(1294) (KOPP 1959, 330 쪽, n. 92), 그리고 훔베르트 데 디존 Hwnbe rt de Dijon (1332) (RB 62 [1955], 534-535 쪽)이다. 예를 들면, 훔베르트 데디존은 말하기를 그 산을 올라가는 중간 지점에 돌이 한 개 있는데 거기서 예수께서 우셨고, 또한 거기서 어 리 고 까불어 대 는 새 끼 나귀 pu llus erat iuv enis et las ci vus 에 서 내 리 셔서 큰 나귀를 타셨다고 한다. 마지막 사항은 어떤 면에 있어서 제 롬에 의하여 전래된 것인 듯한데 , 그도 또한 벳바게에서 얻어 온 풀 루스 라쉬비엔스p ullus lasci vi e n s, 까불어대는 새끼 나귀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Le tt er 108, 12). 그 산 위의 이 장소에는 프란체스코파가 사진에 보이는, 우뚝 눈 에 띄는 예배실과 하나의 수도원을 가지고 있는데, 수도원의 벽에는 이 런 말이 적힌 패가 붙어 있다. Locus, in qu o Domi nu s vid e ns civi t atem jlevi t sup e r illam , 〈주께서 성을 보시고 우신 장소 . 〉 162 〈도미누스 플레비트 예배실〉 안에서 바라본 광경 〈도미누스 폴레비트 예배실 Dom inu s Flevit Chape l> 안에서 제단 울 가로질러 바라보는 광경은 곧바로 보이는 성전 지대와 〈반석의 돔〉, 그리고 그 너머의 구 도성 둥이다 . 163 도미누스 플레비트에 있는 원위치 그대로의 납골함들 프란체스코파는 1953 년에 도미누스 플레비트에서 발굴을 시작하 여 수백 개의 묘를 가진 광범한 고대의 묘지를 발견하였다. 여기서 발굴된 물품들에는 주화 , 도기, 그리고 유리와 보석으로 된 물체들이 포함되는데, 이것들을 볼 때 이곳에서의 매장은 서로 구분되는 두 시기에 이루어졌다.

첫번째 시기는 B.C. 135-A .D . 70( 또는 어쩌면 135) 년이었고, 묘들 은 코킵 형태였다(完 5 항 참고) . 두번째 시기는 제 3 및 제 4 세기, 특히 제 4 세기의 것이었고, 묘들은 아치형 석묘 (arcosol i um [아르코솔리움], 복수는 arcosol i a[ 아르코솔리아])로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256 항 참 고). 묘 안에는 7 개의 석관과 122 개의 납골함 또는 그것의 단편이 있 었다. 이 모든 것들은 첫번째 시기로부터 온 것들이며, 이는 예루살 렘에서 납골함이 70 년 또는 135 년까지만 사용되었다고 하는, 다론 방법으로도 지지를 받는 견해와 일치하고 있다(아래의 643 - 645 쪽 참 고). 어떤 학자들의 판단에 따르면, 납골함 명각과 기호의 더러는 초 기의 유대인 기독교를 나타내는데, 이것들에 관해서는 뒤에 더욱 자 세히 토의할 것이다 (319 항 이하). 이 사진은 그 묘실들 중의 하나에서 납골함들을 원래의 장소에 그 대로 둔 채로 발굴한 것의 일부를 보여 주고 있다. 다른 발견물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채찍질 고행 수도회 박물관 Museum of the Con-vent of the Fla g ella ti on 에 보관되어 있댜 164 도미누스 플레비트의 비잔틴 주두 1954 년에 도미누스 플레비트에서 한 비잔틴 교회의 기초가 발견 되었고, 1955 년에는 그것과 동일한 윤곽 위에 현재의 프란체스코파 예배실 (161 항)이 세워졌으며, 먼저 있던 교회와 그것의 모자이크 유 적들은 아직도 가능한 한 잘 보존되고 있다 (MURPHY-O'CONNOR 90 쪽 이하). 정원에 이 주두가 있다. 그 교회는 의심할 여지 없이, 테오도시우 스 (GEYER 140 쪽 ; LPPTS II-B, 10 쪽 ; CCSL CLXXV, 117 쪽 ; WJ P 65 쪽)가 그의 시대 (530) 에 감람산 위에 있었다고 말한 24 교회들 중 의 하나였다.

165 도미누스 폴레비트 근처의 엘-헬로웨에 있는 모자이크 〈도미누스 플레비트 예배실〉의 맞은편에는 아마도 1500 년 경에 세워졌을 〈엘―만수리야 el-Mans uriy a 〉로 알려진 폐허화된 회교 사원 이 있다 (V i ncen t, Jer usalem nouvelle, 408 쪽) . 이 장소는 또한 엘 - 헬 로웨 el-Heloueh 라고도 불린다 . 여기서 1907 년에 타원형의 물통 하나 가 발견되었는데, 그 크기는 75X65 센티미터이고, 모자이크로 포장되 어 있었다. 사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 모자이크의 상부는 빨간색과 흰색의 큰 입방체로 된 기하학적 양식으로 되어 있다. 모자이크의 하부는 잔가지로 둘러싸여 있고, 그 가운데에 하나의 큼직한 십자가 그려져 있댜 이 십자의 가로 획 위에는 I(n(J o u)C X(p tIT T6)C (예수 그리스도) 라는 단어가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알파 (A) 와 오메가 (W) 라는 문자 가 적혀 있다. 십자 모양이 라틴 형인 것과, 오메가의 형태가 이상하 게 보임으로써 어쩌면 헬라어와는 친숙하지 않는 점은 이 기독교 명 각의 연대가 비교적 후기의 것임을 시사하지만, 그렇더라도 그 사원 이 세워지기 전의 것임은 물론이다. 166 감람산의 경사면에서 본 예루살렘 전경 아마도 유대인-기독교인의 매장지들 (163 항)로 인하여 확인되었고 이제는 도미누스 폴레비트로 알려진, 묘지 안에 있는 지대에 관한 기독교의 관심과 비잔틴 교회 (164 항), 그리고 〈엘-헬로웨〉의 모자이 크 등은 전통적으로 이 지점을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성을 보시고 우신 곳으로 간주하는 것과 적어도 상치되지는 않는다. 분명히 감람산의 서쪽 경사면의 거의 모든 곳에서 예루살렘 구 도 성의 극적인 장관을 바라볼 수 있다. 이 파노라마에서 성전 지대를

보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알-악사 사원 Mos que al-Aq s a>, 〈반석 의 돔〉, 그리고 그 지역의 북서쪽 구석에 첨탑, 둥이 보이고, 배경 쪽으로 사원과 돔 사이에 〈루터 교회〉의 망대와 〈성묘 교회〉의 돔들 이 보인다. 167 성전 지대에서 본 감람산 이 광경은 〈반석의 돔〉에 가까운 성전 지대 내부로부터 동쪽으로 홍예랑(虹寬廊)을 통하여 감람산울 바라본 것이다. 왼쪽에 있는 첫번 째 아치를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은 1888 년에 황제 알렉산더 m 세에 의하여 건립된 러시아 정교(正敎)의 〈성 막달라 마리아 교회 Church of St. Ma ry Ma g dalene 〉의 돔들이댜 두번째 아치를 통하여 보이는 것은 감람산 정봉에 있는 러시아 정교의 수도회이다. 더욱 세부적인 것들은 다음 사진 (168 항)에서 지적될 것이다. 168 감람산과 〈겟세마네 교회〉 예수와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 후에 감람산으로 갔을 때(마 26:30 ; 막 14:26; 눅 22:39), 그들은 겟세마네라고 불리는 한 장소 xw p lov( 한 뫼 기 의 땅)로 갔는데 (마 26:36 ; 막 14:32 ; 눅 22:40 참고), 이 곳은 기 드 론 골짜기 Kidr on Valley 건너편으로 거기 하나의 동산 K T)Jt O C::이 있었 다(요 18:1). 겟세마네 rc8 떄 µav t라는 이름은 감람유(敵機油)를 만들기 위하여 사용되는 기름틀을 지칭하는 히브리어 .,32m m (게트 셰마니) 와 일치하는 것이며, 이것은 그 경사면들에 감람나무들이 풍부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붙인 감람산에서 자연스럽게 발견되는 일종의 시 설을 가리키는 것이다. 167 항과 마찬가지로 이 사진은 성전 지대로부터 감람산 쪽을 바라

보면서, 그러나 약간 북쪽으로 나아간 지점인 황금문 Golden Gate (193 항) 근처에서, 죽 그 지대의 맨 동쪽 끝에서 동쪽 성벽의 윗 부 분에 있는 벌어진 틈을 통하여 바라보면서 찍은 것이다 . 산의 정봉에는 러시아인의 탑이 보인다. 그곳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멀지 않은 곳, 죽 이쪽으로 더 가까운 곳에 〈승천 사원〉 (159 항)의 첨 탑이 있댜 좀더 오른쪽으로, 그리고 산의 경사면을 따라 조금 더 아 래 쪽으로 〈엘레오나 교회〉 (154 항)의 부지에 갈멜 수도회의 탑이 있 다 . 이 탑 앞에는 베네딕트 수도회 Benedi ct in e conven t의 큰 건물이 있댜 언덕을 따라 더 내려오면 큰 나무들이 많이 서 있는 한가운데 에 러시아 정교의 〈성 막달라 마리아 교회〉 (167 항 참고)가 있다 . 이제 또한 시야에 드는 것은 산기슭 근처에 , 기드론 골짜기의 저 쪽 끝에 있는 〈 프란체스코 교회〉과 겟세마네 동산이다. 겟세마네 동 산의 왼쪽으로 분명히 보이는 것은 기드론 골짜기로부터 감람산으 로 올라가는 북쪽 통로이다. 능선의 정봉 근처 왼쪽에는 비리 갈릴 래이 Vir i G alil ae i(갈릴리 사람)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더 왼쪽, 즉 북 쪽으로는 로마 시대의 도로가 비리 갈릴래이와 아우구스타 빅토리 아 Aug u sta Vic t o r i a 건물들 (143 항 참고) 사이 의 능선을 넘 어 갔다. 산 을 오르는 중간 통로이면서 가장 곧바르고 가파른 통로는 겟세마네 동산 뒤에서부터 〈성 막달라 마리아 교회〉과 〈도미누스 플레비트 예 배실〉 (161 항)을 지나서 〈엘레오나〉과 〈인보몬〉의 부지로 올라가는 길이다. 세번째로 가장 남쪽에 있는 통로는 더 오른쪽으로 휘어져 올 라서 이 사진의 범위 바깥으로 원을 그리면서 산 꼭대기로 올라간다. 겟세마네 동산의 북쪽을 지나서 내려가는 주된 통로는, 우리가 보 는 사진에 나타난 것의 바로 왼쪽, 죽 북쪽에 있는 한 지점에서 〈겟 세 마네 교회 Church of Geth s emane> 앞을 지 나는 자동차 도로와 만 나게 된다. 여기, 그 통로의 북쪽이요 대로의 곡선 동쪽에는 커다란 바위 덩어리가 있다. 바위 속에는 배반의 석굴 Gro tt o of the Betr ay-

a1 로 알려진 동굴이 있고, 이것의 서쪽으로는 〈마리아의 무덤 교회 Church of the Tomb of M ary〉 (170 항)가 바로 인접해 있댜 방금 언 급한 석굴로부터 〈겟세마네 교회〉까지의 거리는 약 100 야드이다. 169 겟세마네 지대의 구도 이 구도는 바로 위에서 기술한 (168 항) 〈겟세마네 교회〉과 〈배반의 석굴〉이 위치한 지대의 세부 사항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구도에 있 는 숫자들을 따라 살펴본다면, 초기의 바실리카 자리에 현재의 〈겟 세마네 교회〉이 서 있고 (14), 또한 그것에 붙어 있는 동산 (16), 배반 의 석굴 (21) 과 그곳으로 향해 가는 통로 (20), 그리 고 마리 아의 무덤 (22) 등이 보인다. 여리고로 가는 길이 현재의 대로로 나타나 있고 (17), 그것의 서쪽 지역 (19) 과 동산 (16) 안에, 그리고 동산과 석굴 (21) 사이의 지대에는 감람나무들이 있다. 감람산을 오르는 남쪽 통로는 (1 0) 에서 오른쪽으로 회전하고, 중간 통로는 (11) 이며 북쪽 통로는 (12) 이다. 러시아 정교의 소유는 구도에 문자로 표시되어 있고, 수반 된 범례는 다른 어떤 세부 사항들을 가리키고 있다. 『지명록』 (74 쪽)에서 유세비우스는 겟세마네라는 이름 아래 말하기 를, 이곳은 그리스도께서 수난 전에 기도하신 장소(마태복은 26: 36 과 마가복음 14:32 에서는 血pt ov[ 코리온])라고 한다. 그는 그곳은 감람산 에 npb c T§ 6pc t t6 v tAa t 6 v) 있다고 말하는데, 여 기 서 여 격 (與格)과 함께 사용되었고, 가장 단순하게 〈에(서)〉로 번역할 수 있는 전치사 프로스 n p b g는 〈마주하여, 대하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151 항 참 고). 이 장소에서 신도들은 기도 드리기를 열망하였다. 이 말은 이 당시 (330) 에 그 지점이 예수께서 기도하신 겟세마네로 이미 오랫동 안 인정되어 왔던 것처럼 들리게 한다. 그러나 그곳이 교회 건물로 써 표시가 이미 되어 있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지는 않다.

약 3 년 뒤 (333) 에 보르도 순례자 (GEYER 23 쪽 ; LPPTS I, 24 쪽 ; CCSL CLXXV, 17-18 쪽 ; WET 159 쪽)는 감람산에 올라가기 위 하여 도성 으로부터 동쪽으로 cont ra ori en te 향한 대문으로 나갔다. 이 대 문은 성전 지대의 바로 북쪽에 있는 동쪽 성벽의 대문, 죽 후에 성 마리아 문 또는 성 스데반 문 (243 항)으로 알려진 대문이었거나 아니 면 성전 지대 자체의 동쪽 벽에 있는 황금문 (193 항)이었을 수도 있 다 . 대문 바깥쪽에 관하여 그 순례자는 〈여호사밧이라고 불리는 계 곡〉, 곧 기 드론 골짜기 (264 항 참고)를 언급하고 있다. 이제 순례자는 아마도 골짜기를 따라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다가 산의 주된 경사면을 오르기 위하여 동쪽으로 회전한 듯하다. 이 지 점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포도원들이 있는 왼쪽에는 가롯 유다 가 그리스도를 배반한 곳인 바위가 있고, 오른쪽에는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아이들이 그 가지들을 꺾어서 홑날린 종려나무가 있다.〉 이 본문에서 〈바위〉를 가리키는 단어는 페트라p e tra 인데, 이것은 떼내어진 돌 또는 옥석을 뜻하는 Jte -cpo c; (페트로스)와는 구별되게 산 바위 living rock 의 덩어리를 뜻하는 헬라어 Jt e -cp a( 페트라)와 일치하 는 것이댜 그러므로 이 〈바위〉는 아마도 이른바 배반의 석굴 (168 항 참고)이 그 안에서 발견된 바로 그 바위 덩어리일 것이다. 만약 순례 자가 이 지점에서 산을 향하여 쳐다보고 있었다면, 그의 오른쪽에 있던 종려나무는 아마도 그 산으로부터 가파르게 내려오는 길가에 있었을 것이다. 그는 또한 말하기를, 그곳으로부터 멀지 않는 곳에 돌을 한번 던 질 만큼 떨어진 곳에 이사야(이것은 돌 하나로 된 것 mono lith)와 히 스기야의 아름다운 무덤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들은 기드론 골짜 기를 따라 조금만 더 내려가서 아직도 볼 수 있는 헬라군로마 시대의 네 개의 큰 무덤들 (264 항 이하) 중의 두 개임이 확실하다. 그리고 〈이사야〉의 무덤은 아마도 지금은 〈스가랴〉의 무덤으로 불리는 무

덤일 것인데, 이것은 실제로 돌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다 (267 항 참 고). 그러므로 보르도 순례자가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직 후에 일어난 사건(마 26:47 및 평행절들)의 현장, 죽 그리스도께서 배 반당하신 장소로 간주되는 곳을 보았을 때, 그는 우리가 배반의 석 굴과 겟세마네 동산으로 알고 있는 곳의 근방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유세비우스나 보르도에서 온 순례자도 그들이 기술하는 지역에 있어서 교회를 언급하지 않은 반면에, 같은 세기의 후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교회가 그곳에 존재했음을 보게 된다. 거룩한 주일 Hol y Week( 수난 주일) 동안에 예루살렘에서 거행된 봉사에 관하여 애테리 아 (381-384) 가 남긴 기록을 보면 그녀는 종려 일요일에 감람산을 내 려가는 행렬 (161 항 참고)뿐만 아니라 그 주일의 목요일에 있었던 사 건들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 (GEYER 85-87 쪽 ; LPPTS I, 60-6 2 쪽 ; CCSL CLXXV, 78-80 쪽 ; WET 135-136쪽). 목요일 저녁과 밤에 감독과 백성은 〈엘레오나 교회〉과 〈인보몬 교회〉 (154, 158 항)에 와 있다. 닭이 울기 시작할 때(이어진 이야기가 분명하게 말해 주듯 이때는 아직도 깊은 밤이다), 〈그들은 찬미를 부르 면서 〈인보몬〉로부터 내려와서, 복음서(눅 22:41) 에 기록된 대로, 주 께서 기도하신 그 장소로 온다.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 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애테리아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이곳에 한 우아한 교회 ecclesia eleg a ns 가 있다〉고 한다. 교회 안에 서 기 도를 드린 다음, 그들은 200 개 이상의 교회 촛불이 빛을 발하는 겟세마네 로 옮겨가며, 주께서 체포되신 곳에서 복음서의 구절을 낭독한다. 겟 세마네로부터 그들은 마침내 도성으로 돌아들어, 사람이 서로를 식 별할 수 있기 시작할 때쯤 성문에 도착한다. 그들이 십자가 앞에 다 시 올 때쯤에는 날이 환히 밝게 된다. 그러면 애테리아로부터 우리가 알게 되는 사실은 두 지점, 죽 예 수께서 기도하신 곳과 그가 잡히신 곳이 기념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기도하신 지점은 우아한 교회로써 표시가 되었고, 그가 체포되 신 장소는 겟세마네라고 불렸다. 산을 내려오면서 순례자들은 먼저 교회에 이르렀다. 이 교회에 대한 언급과 겟세마네에 대한 언급 사 이에서 애테리아는 백성이 〈매우 큰 산〉을 내려와야 했기 때문에 피 곤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이것은 그 교회가 산 위에 높 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애테리아가 단지 여기서 그 야간 하행길 전체에 대한 개괄적 언급을 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예수를 배반하고 체포한 장소에 대하여 겟세마네라는 이름을 사 용한 것은, 예수와 제자들이 겟세마네에 이르러서 그가 〈조금 나아 가사〉(마 26:39) 〈돌 던질 만큼 가서〉(눅 22:41) 기도하시고는 제자들 이 있던 곳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체포되었다고 하는 복음서의 기록 (마 26:36 이하 및 평행절들)과 조화되는 일이다. 그 장소가 돌 던질 만큼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아마도 그곳이 꼭 〈겟세마네〉의 한계 밖에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유세비우스는 (바로 위에서 인 용한 바와 같이) 분명히 이 이름을 예수께서 기도하신 장소를 가리키 는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390 년에 유세비우스의 『지명록』을 개정하면서 제롬도 역시 이 시 대의 이 지대에 한 교회가 존재했음을 증언하였다. 그는 유세비우스 가 말한 겟세마네의 위치, 즉 감람산〈에〉라는 말을 좀더 정확하게 그것이 그 산의 〈기슭에〉 (ad radic e s, 문자적으로 〈뿌리들에〉) 있었다 는 진술로써 재현하고 있으며, 그런 다음 그는 그 장소에서 기도하 는 신도들에 관한 유세비우스의 진술을 〈이제 하나의 교회 ecclesia 가 그 위에 세워졌다〉라는 진술로써 대치하였다 (Onomas ti con 75 쪽). 그렇다면 우리는 겟세마네가 적어도 이 시대에는 예수께서 배반 당하신 장소와 그가 기도하신 장소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여겨졌 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두 지점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 았으며, 교회가 실제로 세워진 지점은 예수께서 기도하신 곳이었다.

이 두 전통적 지점들은 구도에서 21( 배반당하신 장소)과 14( 기도하신 장소, 곧 교회가 있는 장소)라는 숫자로 표시되어 있으며, 위에서 말 한 바와 같이 (168 항), 이 둘 사이의 거리는 약 100 야드이다. 170 동정녀의 무덤 예수 가족의 후손들이 적어도 제 3 세기의 중간까지 계속해서 나사 렛에 살았다는 사실과 이 무렵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었던 것으로 믿어지는 집이 회당-교회가 되었으며, 제 5 세기 경에는 비잔 틴 바실리카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앞에서 보았다 (45-46 항). 마 리아의 죽음에 관해서는 두 개의 전승이 있다. 한 전승은 그녀가 요 한을 따라서 에베소로 가서 거기서 살다가 죽어 장사되었으며, 그곳 에서 431 년의 종교 회의 때 테오토코스 Theo t okos, 죽 〈하나님의 어머 니〉라는 칭호를 얻었다고 전한다. 다른 전승은, 그녀가 계속 예루살 렘에서 살다가 시온 산에서 (205, 207 항) 또는 여호사밧 골짜기에 있 는 그녀의 집에서 잠들었고(피아첸짜의 무명씨 ; 바로 아래 참고), 그리 하여 여호사밧 골짜기에 장사되었으며, 비잔틴 시대의 〈네아 Nea 교 회〉 (196 항)와 시온에 있는 십자군 시대의 〈상크타 마리아 Sanc ta Ma ria 교회〉 (210 항)가 그녀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하여 지어진 것들 이라고 전한다. 여호사밧 골짜기에 있는 마리아의 무덤을 숭앙한 일은 『트란시투 스 마리애 Transitu s Ma ria e 』에서 확인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의 외경으로서 많은 역본들로 발견된다. 이것은 보통 약 400 년 경의 것 으로 그 연 대 가 매 겨지 나 (HSNTA I, 429쪽), 바갓티 (Tomb of Virg i n Mary , 14 쪽 이하, 57 쪽 이하)는 그것의 원본이 제 2-3 세기로부터, 그리 고 유대계-기독교 배경에서 온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 이 예루살렘의 퀴 릴 Cy ril of Jer usalem , 에 피 파니 우스, 제 롬과 같은

이방 교회의 제 4 세기 저술가들에 의하여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 무덤에 맞춰져 있는 그와 같은 유대계-기독교적 초점 때 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 무덤은 처음부터 적어도 제 4 세기 말엽까지는 히브리 출신의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승상되고 관리되어 왔을 것이다. 하지 만 제 6 및 제 7 세기 무렵에는 이방 출신의 기독교인들도 그 무덤을 숭앙하였으며, 우리는 바로 아래에 인용되는 저술가들로부터 그 무 덤 위에 세워진 교회에 관하여 알게 되는데, 이 교회는 아마도 제 4 세기 말과 제 5 세기에 세워진 비잔틴 교회였음에 틀림없다. 테오도시우스 (GEYER 142 쪽 ; LPPTS II-B, 11 쪽 ; CCSL CLXXV, 119 쪽; WJ P 66 쪽)가 여호사밧 골짜기에 관하여 기술할 때, 그는 그 곳이 유다가 주님을 배반한 곳이며, 또한 그곳에는 〈주의 모친 성 마리아의 교회 ecclesia domnae Maria e matr is Dom i n i〉이 있다고 말 한댜 피 아첸짜의 무명 씨 (570) (GEYER 170 쪽 ; LLPTS II-D, 14 쪽 ; CCSL CLXXV, 137 쪽 ; WJ P 83 쪽)는 감람산을 내려와 겟세마네 골 짜기로 들어가서, 주께서 배반당하신 장소를 보았으며, 그 동일한 골 짜기에서 그는 〈성 마리아의 바실리카〉를 발견하였는데, 〈사람들은 이곳이 그녀가 육신으로부터 취해감을 입은 집이라고 말한다. 이 겟 세마네 골짜기도 또한 여호사밧이라고 불리는 이 장소에 있다.〉 아르쿨프 (670) (GEYER 240 쪽 ; LPPTS III-A, 17 쪽 ; CCSL CLXXV, 195 쪽; WJ P 99 쪽)는 여호사밧 골짜기에 있는 〈성 마리아 교회〉이 2 층 으로 건립되었고, 두 충이 모두 둥글게 지어졌으며, 그 중 아래충에 는 〈성 마리아가 매장된 후에 한동안 안치되었던 그녀의 빈 묘〉가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마지막 참고 구절은 물론 동정녀가 육신 으로 몽소 승천(蒙召昇天)했다는 교리 (1950 년 11 월 1 일에 로마에서 신조 로 규정됨 ; Benoit, Jes us and Gospe l, 253 쪽, n. 1) 를 암시하는 것이다. 십자군이 들어왔을 때, 그들은 비잔틴 교회가 폐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하였으나, 마리아의 무덤 자체는 원래대로 남아 있었다. 러 시 아 대수도원장 다니 엘(Dani el, 1106/1107) 은, 이 장소에 한때 수도 회가 있었으나 이단자들에 의하여 파괴되었다고 말하고, 마리아의 무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Bal di 763 쪽 이하, no. 1067 ; LPPTS IV-C, 23-24 쪽). 골짜기에 위치해 있는 이 무덤은 바위 속으로 깎아서 만든 작은 동 굴로 그 입구는 너무나 낮아서 몸을 구부려야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 울 정도이다. 입구의 반대쪽인 그 동굴의 끝에는 바위 속으로 깎아서 만든 작은 벤치 하나를 볼 수 있는데, 우리의 매우 거룩한 부인이신 하 나님의 어머니의 신성한 시신이 안치된 것은 바로 이 벤치 위였고, 그 곳으로부터 시신은 썩지 아니할 몸으로 일으켜져서 낙원으로 들어갔다. 굴의 높이는 사람의 키 정도이고, 폭은 4 규빗이며 길이도 그 정도이다. 굴의 내부는 하나의 작은 예배실의 국면을 지니고 있으며, 아름다운 대 리석 평석들과 대면해 있다. 다음으로 십자군은 건물 전체를 개축하였는데, 또다시 2 층으로, 죽 한 교회 위에 다른 교회가 있도록 지었다. 그들은 또한 그 옆에 서쪽으로 하나의 커다란 수도원을 지었으니, 이것은 여호사밧 골짜 기 의 〈성 마리 아 대수도원 Abbey of St. Ma ry>이 댜 독일인 순례자 테오데리쿠스 Theoderi cu s(1172) (LPPTS V-D, 37- 38 쪽)는, 그 교회와 대수도원이 이제는 하나의 진정한 수도원-요새 가 되어 있다고 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 교회 자체와 그것과 연결 된 모든 수도회 건물은, 높은 벽과 튼튼한 망대들, 그리고 이단자들 의 반역적인 공격을 대항하기 위한 흉장(胸瑞) 둥으로 강하게 요새 화되어 있다.〉 그는 또한 마리아의 무덤이 있는 그 방에 관하여 이 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녀의 거룩한 묘가 있는 지하 토굴은 대리석과 모자이크 작품으로 된 매우 값비싼 장식품으로써 덮여 있고 ...... 이 묘의 주위에는 20 개의 석주들이 있어서 아치들과 테두리 ,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지붕을 받쳐들 고 있다. 테두리 자체 위에는 이러한 시구(詩句)가 명각되어 있다 . 이곳으로부터, 여호사밧의 계곡으로부터, 하나의 작은 길이 하늘로 나 있네! 여기는 한때 동정녀 곧 하나님의 신뢰하는 여종이 누웠던 곳. 홈 없는 그녀가 이곳에서 일어나니, 하늘 문이 그녀에게 활짝 열렀네 . 불쌍한 죄인들의 빛과 길이요, 그들의 어머니요 그들의 희망이여. · 더욱이 지붕 위에는 둥근 돔이 있으며, 이것을 떠받치는 여섯 쌍의 석주들이 있고, 그 위에는 하나의 공과 십자가가 있으며, 돔을 빙 돌아 가며 세워진 이 작은 석주들의 각 쌍의 사이에는 등이 하나씩 걸려 있다. 살라딘이 〈핫틴의 뿔들 Homs of Ha ttin〉에서 십자군을 패배시키 고 예루살렘을 탈취 했을 때 (1187), 그의 군병들은 그 대수도원과 그 위의 교회를 모두 파괴하여 그 돌들을 성벽을 수리하는 일에 사용하 였댜 그러나 다시 한 번 이 지하 토굴은 그 아래충 교회의 벽의 얼 마와 함께 살아 남았다. 현존하는 마리아의 무덤(구도 169 항에서 22 번으로 표시됨)에서 L.-H . 뱅상이 연구를 수행하였는데, 그 결과로 1925 년에 고대 구조 물들의 구도가 출판되 었다 (Baba t, Plans, 110 . 이 교회 의 상충부 구도 롤 팔각형으로 그린 것[같은 책, 109a] 은 전적으로 가상적인 것이다. Baga t ti , Tomb of Virg i n Mary , 56 쪽 이 하롤 보라). 1937 년에 이 지대에서 참호들이 발굴되었는데, 이때 몇 개의 모자 이크 바닥과 십자가들이 그려진 명각 하나가 출토되었으며, 거기에 는 〈카시오스 Kas i os 와 아디오스 A di os 의 무덤〉이라고 적혀 있었다. 연대 상으로는 아마도 제 6 세기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후대에 십자

군이 그 교회를 재건한 시대의 포장들과 석조 건물, 그리고 대수도 원의 유적 얼마가 서쪽에서 출토되었는데, 오늘날 이곳에는 감람나 무 숲이 있댜 그것의 위치가 기드론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 문에 현재의 교회는 1948 년에 침수되었는데, l

cupo la 을 가진 방인데, 1972 년에야 밝혀졌다. 아치들과 쇠시리들 moul di ng s 로 만들어 진 이 둥근 지붕은 처 음에 는 사각형 으로 솟아오 르다가 그 다음에는 팔각형, 그 다음에는 돔을 이루었다. 제 14 세기부 터 전해지는 순례자의 텍스트들로부터 우리는 그 예배설이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부모인 성 요아킴과 성 안나에게 봉헌되었음을 알게 된댜 그러나 지금 그것은 멜리센데 왕후의 무덤 Tomb of Que en Me li sende 으로 알려 져 있다. 위 에 서 살펴 본 바와 같이 (150 항) 이 여 성 은 1131 년부터 1144 년까 지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십자군 앙주의 풀크의 아내였으며, 1138 년 에 베다니에서 나사로의 무덤 근처에 대수도원을 건립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거기서 그의 자매 이베타가 예루살렘의 성 안네 St. Anne 로부터 내려와 여자 대수도원장이 되었다 (Saller, Excavati on s at Beth a ny, 71, 73, 89, 114 쪽) . 멜리센데 자신은 1161 년에 죽어서 마리 아의 무덤 곁에 있는 십자군 교회 내의 어느 곳에 장사되었으며, 그 녀의 시신은 아마도 제 14 세기 말엽에 문제의 예배실로 옮겨졌을 것 이다 (Prodomo, Tomb of Virg in Mary , 84 쪽 이하, 92쪽). 그 교회의 서쪽(엄격하게 말하면 남서쪽) 벽에 있는 마리아의 무덤 의 정반대 편에 하나의 후진 또는 벽감이 있다(구도의 L). 이 벽감이 1 5&5에 G. 주알라르트 G. Zuall art가 그린 교회 의 구도 (Ba g a tti, Tomb of Virg in Mary , 22 쪽 . 그림 2) 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1609 년에 아미 코 B. Ami co 가 그린 구도(같은 책, 35 쪽, 그림 9) 에서는 나타난다. 따 라서 그 벽감은 아마도 터키 시대인 제 17 세기 초에 바위를 깎아 만 들어졌을 것이며, 모슬렘교인들이 이것을 멕카 Mecca 쪽으로 기도하 는 방향을 가리키는 미랍 m i hrab 으로 사용하였다 . 이리하여 그 시대에는 이 교회가 터키족을 위해서는 회교 사원의 역할을 하였다. 왜냐하면 모슬렘교인들과 기독교인들 모두가 마리아 를 존경하기 때문이다 . 코란은 마리아가 〈세상의 여인들 위에 ……

선택되었다〉 (3 .4 1, Maulana Muhammad Ali, The Holy Qu r'an [Lahore, 1973], 141 쪽)고 단언하고, 무지르 알 - 딘 Mu jir al-D in(제 15 세 기)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의 야간 여행 중에 무함마드 Muham­ mad 가 그의 〈자매 마리아〉의 무덤 위에 하나의 빛이 있는 것을 보 았다고 말한다 (MURPHY-O'CONNOR 90쪽). 동정 녀 의 무덤 Tomb of the V irgin의 정 면으로부터 하나의 좁은 통로가 배반의 석굴(구도 169 항의 21 번)로 인도한다. 이 석굴은, 예수 께서 제자들로부터 돌 한 번 던질 만한 곳으로 기도하러 물러나 계 신 동안에 제자들이 쉬고 있던 곳으로 믿어지는 장소이며, 또한 유 다가 입맞춤으로써 예수를 배반하러 온 곳이다(눅 22:41, 47). 길이가 19 미터, 폭이 10 미터, 높이가 3.5 미터인 이 바위 동굴은 한때 감람유 짜는 틀을 놓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제 4 세기부터는 기독교인의 헌신 의 장소였다. 마리아 무덤의 비잔틴 교회가 십자군 시기에 재건되었을 때, 무덤 과 석굴은 서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살라딘이 그 교회와 대수도원을 파괴했을 때 석굴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아 버렸으나, 후에 새로운 출입로가 만들어졌으며, 이것이 현재 있는 출입로이다. 아마도 비잔 틴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두 충의 모자이크 바닥의 혼적들이 입구 근처 에 있다 (MURPHY-O'CONNOR 90 쪽 ; KROLL 323 쪽). 171 〈겟세마네 교회〉의 구도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168 항), 현재의 겟세마네 동산 및 〈겟세마 네 교회〉(구도 169 항의 16 과 14 를 보라)가 있는 지대는 프란체스코파 에 속한다. 예루살렘 소재 프란체스코 성경연구소를 대신하여 오르 팔리가 1909 년에 발굴 작업을 실시했고, 1919-1920 년에도 다시 실시 하였는데, 이 두번째 작업은 프란체스코파의 새 바실리카를 건설하

기 시작했을 때 이루어졌다. 이 탐사 작업에서 비교적 초기의 교회 두 개가 출토되었다 . 문제 의 지점은 위의 구도 169 항에서 애초의 교회가 있던 곳 (14) 으로 표 시되어 있다. 여기에 제시된 구도에서 우리는 더 이른 시기의 두 교 희가 겹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더 오래 된 교회는 더 질은 윤곽으 로 나타나 있는데 , 이것은 길이가 20 미터요 폭이 16 미터인 바실리카 이다. 이 교회에는 회중석과 두 개의 측랑이 있고, 회중석과 측랑이 모 두 후진에서 끝나고 있다. 건물의 정방향은 동쪽으로부터 북쪽으로 13 도 기울어져 있으며, 이렇게 한 목적은 분명히 거대한 바위 덩어 리(구도에서 A 로 표시된 것)가 중앙 후진과 제단의 바로 앞에 놓이게 하려 함이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 도하신 곳으로 주장되는 그 바위였다 . 그리고 몇 개의 주두와 석주 기부 , 그리고 기하학적 도형으로 된 바닥 모자이크들의 부분들(구도 에서 m 으로 표시된 것)이 남아 있다. 여기서 지적된 모든 사항들이 제 4 세기 후반부의 어느 시기와 조 화되므로, 이것은 제롬이 390 년에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장소에 관하여 유세비우스가 남긴 진술을 수정하여, 〈이제 한 교회 가 그 위에 건립되었다〉 (Onomas ti con 75 쪽; 위의 169 항 참조)라고 말 하면서 지칭한 그 교회였음이 거의 확실하다. 만약에 언어의 표현이 그렇게 시사하듯이, 그 교회가 이 말이 기록되기 조금 전에 건립되 었다면, 그 교회의 건립 연대를 테오도시우스 I 세 대왕 (379-395) 치 하로 보는 것은 가능하고도 개연성이 있는 일이며, 따라서 구도의 범 례 에 서 이 구조물은 <테 오도시 우스의 바실리 카 Basili ca of Theo- dos i us 〉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이 교회는 또한 애테리아가 말하는 우아한 교회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토록 많은 예루살렘 교회들 (156 항 참고)과 마찬가지로, 겟세마네

교회는 페르시아인들에 의하여 파괴되어 (AD . 614), 십자군이 도착하 기까지 폐허로 남아 있었다 (MEISTERMANN 236 쪽). 따라서 그때 까지 그것의 정확한 윤곽은 잊혀져 있었던 것 같다. 하여튼 구도에서 그 윤곽이 또한 나타나 있는 제 12 세기에 세워진 교회는 부분적으로 그 이전 교회의 한 측면에 위치했고, 바로 동쪽 으로 향해 있었다. 이것은 길이 29.75 미터, 폭 17 . 7 미터로 동쪽 끝에 세 개의 후진을 가진 구조물이었다. 구도에서 표시된 바와 같이 중 앙 후진에는 큰 바위(R)가 있고, 측면 후진에는 보다 작은 바위들 (r 와 r' )이 있으며, 이 세 개의 바위를 향하여 방향을 잡은 의도는 세 번 반 복된 예수의 기도(마 26:39, 42, 44) 를 상기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만국 교회 Church of All Na ti ons 〉라 불리는 프란체스코파의 새 바실리카는 건축가 A. 바를루찌 A Barluzz i에 의하여 1924 년에 완공 되었으며, 제 4 세기의 바실리카의 기초 위에 건립되었다. 그리하여 그 큰 바위(구도 171 항의 A) 는 보이도록 보존되었으며, 초기의 모자이크 부분들도 현대의 바닥에서 볼 수가 있다. 172 겟세마네 동산에서 〈만국 교회〉에 바로 인접해 있는 현재의 겟세마네 동산은 여덟 그루의 크고도(둘레가 6-8 미터) 오래된 감람나무들을 안고 있으며, 또한 잘 가꿔진 정원과 화분들을 가지고 있다. 감람나무의 성장은 연륜 연대학이 의존하는 나이테들을 제공하지 않으므로, 이 나무들 의 나이를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다. 우리는 또한 요세푸스 (War VI 1, 6 §§5-6) 에게서, 예루살렘이 티 투스에게 포위되어 공격당할 때, 예루살렘 주위의 모든 나무들이 90 펄롱(약 15 킬로미터)의 거리에 있는 것까지 작벌(硏伐)을 당했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므로 현재의 감람나무들이 예수의 시대로부터 있

어 온 것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이 그 당시에 잘려진 그루터기로부터 다시 자라난 것일 가능성은 없 지 않다 (KROLL 3 '2:1쪽, col. 1) .

예루살렘 173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의 구도 예루살렘이 위치한 대지는, 전체적으로 볼 때 지중해로부터 해발 약 2500 피트 높이에 있는 암반으로 된 사변형의 고원이다. 이 지역 의 서쪽과 남쪽은 구약에서 힌놈의 골짜기(수 15:8),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수 15:8), 또는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왕하 23:1 0 ) 둥 여러 가지로 불리는 계곡과 접경하고 있다. 여호수아 15:8 및 다른 성경절 에서 이 구렁은 히브리어로 .,l (게이)라고 불리는데, 이 말은 〈계곡〉 이라는 의미의 〈골짜기〉를 뜻하며(넓고 평평한 골짜기 또는 평지를 뜻 하는 p ov[ 에메크]와 구별하여), 이리하여 결과적으로 붙여진 명칭인 mi t-., 2 (게이-힌놈, Ge hi nnom) 은 헬라어로 qiapa v~ '0v6 µ (파랑크스 호 놈) (수 15:8, LXX) 으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또한 ra t cvva( 가이엔나) (수 18:16, LXX) 로도 옮겨졌고, 이 결과로 신약의 이름 veiv va (게엔 나, Gehenna) (마 5:29 동)가 만들어 지 게 되 었다. 이 골짜기 에 서 자녀 룰 불에 사르는(렘 7:31 동) 끔찍한 일을 자행한 탓으로 그 이름은 지옥과 동의어가 되었다(마 5:29 둥). 오늘날 힌놈의 골짜기는 와디

에르-라바비 Wadi er-Rabab i라고 불린다. 이 도성의 동쪽에는 키드론Ki dron( 기드론)이 자연적인 경계선을 제공하고 있댜 구약에서 기드론은 언제나 낫 m (나할) (삼하 15:23 등) 이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겨울의 급류를 의미하고, 나아가 그와 같은 시내가 흘러가는 좁은 골짜기 또는 협곡을 넌지시 가리킨다. RSV 번역에서 이 명칭은 ] 와 btu [흐레오, 〈흐르다〉]에서 옴)라는 단어로 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겨울의 급류와 협곡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 18:1 에서 기드론이라는 이름과 함께 사용되었으며, 그 곳에서 RSV 번역 은

다른 낮은 곳들이 그렇듯이 이것도 암설로 채워져서 이제는 엘국가 드 el-Wad 로 알려 진 경 미 한 구링 에 불과하댜 두 개의 능선 중에서 서쪽에 있는 것은 요세푸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War V 4, 1 §137) 더 높고 더 곧은 능선이댜 동쪽 능선은 낮고 양쪽으로 볼록한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요세푸스는 이 사실을 묘사 하여 dµot KU p t0C (암피퀴르토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것은 〈철월〉(占月, m oon), 죽 반달과 보름달의 중간을 묘사하는 단어이다. 그 두 능선의 각각은 또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이 능선들을 가 로지르는 골짜기들로 단절이 되고 있다. 서쪽 능선의 경우 때때로 간단히 십자가 골짜기 Cross Valle y라고 불리는 이 가로지르는 골짜 기는, 일반적 으로 현재의 다윗 거 리 David S tr ee t와 사슬 거 리 Str ee t of the Ch ain의 북쪽으로 평행을 이루면서 서에서 동으로 뻗다가 성 전 지 대 의 서 쪽에 있는 사슬문 Gate of the Ch ai n 의 거 의 맞은편 지 점에서 튀로포에온 골짜기로 합류한다. 이것은 서쪽 능선을 두 부분 으로 나누고 있는데, 이것들은 전 지역을 보는 관점에서 말한다면 북서쪽 언덕과 남서쪽 언덕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성묘 교회 Church of the Holy Se p ulcher 〉는 북서쪽 언덕 부분에 있다. 그 언덕이 계속해서 북서쪽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는 반면에 이 특정 부분은 그 자체가 융기하여 하나의 작은 갑을 이루고 있어 서, 때로는 꼭대기 또는 정봉을 뜻하는 라스 ras 라는 용어로 지칭되 고 있다. 이것의 높이는 해발 약 7 5.5미터 죽 2477 피트이다. 이른바 다윗의 무덤 Tomb of Da vi d 과 그것에 관련된 건물들은 남 서쪽 언덕 위에 서 있다. 이 곳의 대지는 지중해로부터 해발 약 771 미터 죽 2529 피트나 되고 그 도성의 주된 지역에서 가장 높은 부분 이다. 따라서 요세푸스는 이 언덕 위의 도성을 〈윗도성 up per c ity〉이 라 부론다 (War V 4, 1 §137). 같은 구절에서 요세푸스는 또한 다윗

이 이 언덕을 산성 S tr on g hold( (lJp ou pt ov) 이라 불렀다고 말하는데, 이 것은 마치 요세푸스가 다윗이 여부스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것(삼하 5:7) 에 이것이 포함된 것으로 생각한 것처럼 들린다. 다른 구절(Ant . VII 3, 2 §66) 에는 다윗이 〈윗〉도성을 에워쌌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비록 〈윗〉도성 대신에 〈아랫도성 lower c ity〉을 언급하는 다른 독법 이 이 경우에 있기는 하지만, 동일한 인상을 주는 구절이다. 요세푸스가 뜻하는 바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 초기 기독교 전승은 이 남서 쪽 언 덕 을 다윗 왕의 시 온 (Z i on 또는 Sio n [LXX }:tlilv] of King Dav id) (삼하 5:7) 으로 간주했음이 확실하다. 이 것은 보르도 순 례자에 의해서도 암시되고 있는데 (GEYER 22 쪽 ; LPPTS I-B, 22 ; CCSL CLXXV, 16 쪽; WET 157 쪽), 그는 성전 지대에 있었고 그 후 에 시온 산으로 올라가고자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왔으며 exeunti bu s Hi er usalem, ut ascendas Sio n , 그렇게 할 때 그의 왼편에 실로암 못 Pool of S il oam 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유세비우스도 『지명록』 (74 쪽) 에서 말하기를, 골고다가 시온 산의 북쪽에 Jtpb c tO t c Oop ei o tC TOO }:t@ v opo u c; 있었다고 한다 . 이 남서쪽 언덕과 다윗의 시온을 동일시하는 이와 같은 전통적 생 각은 모슬렘교의 〈‘선지자 다윗’ 사원〉 (205 항 이하)이 된 〈최후의 만 찬 교회〉 안에 〈다윗의 무덤〉의 위치를 정하게 된 일과 분명히 관계 가 있었댜 이 남서쪽 언덕으로부터 하나의 부분적으로 분리된 갑이 동쪽의 튀로포에온 골짜기 Tyrop o eo n Valle y로 향하여 뻗어 있었다. 그리 고 이 갑은 하스몬 가의 궁전 Palace of the Hasmoneans 의 부지 였다 (War II 16, 3 §344 ; Ant. XX 8, 11 §190). 동쪽 능선도 역시 남동쪽 언덕과 북동쪽 언덕으로 갈라졌음이 식 별된다. 초기의 가나안인들이 살던 예루살렘 도성은 기혼 샘 (176 항) 위쪽의 남동쪽 언덕 위에 있었던 사실이 발굴에 의하여 이제 확실하 게 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다윗이 여부스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곳이

며, 시온의 성채요 다윗 성이었다(삼하 5:7). 이 언덕의 일부는 오벨 Oph el (元 m p)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혹, 둥근 언덕 hum p〉이라는 뜻 이다(느 3:26 둥). 이 이름은 요세푸스 (War V 4, 2 §145) 에 의하여 아 람어 W 넛모) (오플라)를 헬라화한 필사로 UO 꾜 c (오플라스, O p hlas) 라 는 이름으로 옮겨졌다. B.C. 169/168 년 에 안티 오쿠스 IV 세 에 피 파네 스 Anti oc hus IV Ep i- p hanes 는 예루살렘의 성전으로부터 보물들을 탈취해 갔고(마카베오 상 1:20 이하), 2 년 뒤에 그의 사령관이 큰 병력을 끌고 다시 와서 그 도성을 약탈하였다(마카베오상 1:29 이하). 그때에 시리아인들이 〈다 윗 성을 크고 강한 성벽과 강한 망대들로써 요새화하였고, 그리하여 그것은 그들의 성채가 되었다〉(마카베오상 1:33). 여기에 사용된 단어 는 &Kp a( 아크라, acra) 인데 이것은 가장 높은 지점, 따라서 성채를 의미한다• 이 성채는 다윗 성을 요새화함으로써 만들어졌으므로 그 도성의 요새화된 전 구역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며, 이것이 남동쪽 언덕 위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요세푸스도 〈하 도성〉이 아크라라 는 이름을 가진 언덕 위 에 있었다 (War V 4, 1 §137) 고 말하기도 하 고, 그 도읍의 하부 지역 자체가 아크라로 알려져 있었다 (War I 1, 4 §39) 고도 말한다. 아마도 이 아크라 요새 자체의 기초를 발견한 것으 로 보이는 것에 관해서 아래의 192 항을 보라. 북동쪽 언덕은 성전 지대의 부지이다. 남동쪽 언덕과 북동쪽 언덕 사이예는 한때 넓은 협곡이 있었는데, 하스몬인들이 시리아인의 아 크라를 무너뜨렸을 때 이 협곡을 메꿔버렸다고 요세푸스는 말하고 있다 (War V 4, 1 §139 ; I 2, 2 §50 참고 ; Ant. XIII 6, 7 §215). 이 때 그들은 성채를 붕괴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언덕의 높이를 깎아 내렸 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언덕은 한때 성전 언덕보다도 더 높았다 고 하지만 실제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았을 추측으로 보인다. 북동쪽 언덕에서 성전 지대 자체가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평균 고도가 해발

약 737 미 터 죽 2418 피 트이 다 . 현재 성전 지대의 북동쪽 구석 쪽으로 한때는 기드론을 향하여 대 각선으로 뻗은 하나의 작은 골짜기가 있었다 . 이 골짜기의 상단이 현재의 북쪽 성벽의 외부로는 헤롯 문 Herod's Ga te의 북동쪽에서, 성벽의 내부로는 〈성 안네 교회 Church of St. Anne 〉의 북동쪽과 동 쪽에서 눈에 띈다. 지금은 메꿔진 저수지인 비르케트 이스라인 Bir ke t Israi n 죽 이스라엘 못이라 불리던 저수지가 또한 이 골짜기에 놓여 있었고, 그것은 성 스데반의 문 S t. Ste p h en's Gate 남쪽으로 약 100 미 터 떨어진 기드론 골짜기의 가장자리까지 이르렀다 . 성 안네의 골짜기 St. Anne's Valle y(방금 묘사한 골짜기를 이렇게 불러도 좋 다면)를 중심으로 한쪽으로는 기드론 골짜기 , 그리고 다른 쪽으로는 뒤로포에온 골짜기의 사이로, 우리가 지금까지 말해 온 그 능선이 북쪽과 북서쪽으로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총체적으로 북동 쪽 언덕이라고 칭해 온 것의 북쪽 부분을 요세푸스는 하나의 분리된 언덕으로 호칭함으로써 특별히 취급하고 있다. 그가 열거한 것을 보 면 (War V 4, 1 §§137-138) 첫째 언덕은 남서쪽 언덕이라고 칭한 것 으로 〈상 도성〉이 있는 곳이며, 둘째 언덕은 우리가 남동쪽 언덕이 라고 부르는 것으로 〈하 도성〉과 아크라가 있는 곳이며, 셋째 언덕 은 성전 언덕이고, 넷째 언덕은 성전 언덕에서 북서쪽으로 연장된 것이댜 마지 막 넷째 언덕 에 관하여 요세푸스는 (War V 5, 8 §246), 그것 이 그 모든 언덕들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이었다고 한다. 만약 그의 말이 그것이 동쪽 능선에 있는 정봉들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라는 뜻이었 다면 그의 말은 맞다. 그러나 그 언덕은 서쪽 능선에 있는 정봉들, 즉 북서쪽 언덕과 남서쪽 언덕만큼 높지는 않다. 그는 또한 말하기 를 (War V 4, 2 §149 ; V 5, 8 §246) 이 넷째 언덕은 베세다 Beze th a (Bc(c0d) 라고 불렀다고 한다. 예루살렘의 팽창하는 인구 때문에 이

지역은 하나의 〈근래에 세워진 지구q u art er 〉 (War V 4, 2 §151) 가 되 었으며, 또한 그것은 하나의 시 구역으로서 언덕으로부터 생겨난 베 제타라고 칭해졌을 뿐만 아니라 신 도성(新都城, Ka 1..V 6 1t oh c;)이라고 도불렸다. 그 이후의 세기들 동안 부분적으로는 민족적 및 종교적 공동체들 이 그들의 신성한 중심지에 모여드는 일 때문에, 그러나 부분적으로 는 또한 경제적 및 정치적 요인들 때문에, 예루살렘에는 여러 〈지구 (地區)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두로의 윌리엄 Wi lliam of Tyre(1 184) (Babcock and Krey I, 405-408 쪽 ; Pete r s, Jer usalem, 269- 'l7 2 쪽 참고)은 이 른바 기 독교 지 구 Ch rist i an Quarte r 에 관하여 다음 과 같은 보고를 하고 있다. 〈라틴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온 때로부 터, 그리고 (윌리엄이 말하기) 전에 참으로 여러 해 동안, 총대주교 (그의 저택이 〈성묘 교회〉에 있었다)는 그 도성의 넷째 부분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겼다.〉 그 후 l®3 년(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36 년 전)에 애굽의 칼 리프인 파티미드 무스탄시르 Fa tirni d Musta ns ir (1 035-1094 통치)가 그 도성의 벽들을 수리하도록 명령했으며, 그 공사의 4 분의 l 이 기 독교인들에게 배당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강제 노동과 조공 및 과 세금들로 말미암아 너무나 피폐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 과업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I 세 (1059-1007) 의 도움에 의해서였다. 두로의 윌리엄은 그의 이렇게 보 고를 계속하고 있다. 그 당시까지 사라센족 Saracens( 기독교인들이 모슬렘교인들을 일컫 는 말)과 기독교인들이 서로 무관심하게 함께 거주했다. 그때부터 왕자 의 명에 의하여 사라센족은 예루살렘의 다른 지역들로 강제 이동을 당 했으며, 이름이 붙여진 그 지구를 아무런 논란 없이 신도들에게 남겨

주었댜 …… 그 날부터 방금 기술한 방법대로 그 도성의 이 지구는 총대주교 이 의의 다른 재판관이나 주인을 갖지 못했으며, 따라서 교회가 그 부분을 영구히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게 되었다 . 제 19 세기 말경에 구 도성에는 대체로 오늘날의 상황과 같은 네 지 구가 형성되었다 . (1) 유대인 지구는 남동쪽에 있으며 성전 지대의 서벽(西 壁 )을 경계로 하고 있다. (2) 모슬렘교 지구는 하람 엣_셰리 프 Haram esh-Sheri f (184 항) 의 북쪽과 북동쪽에 있다. (3) 기 독교 지 구는 북서쪽, 〈성묘 교회〉 주위에 있다. (4) 아르메니아인 지구(역시 기독교이지만 교리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음)는 남동쪽에 있다. 174 공중에서 본 예루살렘의 개관 공중에서 본 이 개관은 동남동쪽으로부터 찍은 사진이다. 오늘날 성벽 내부로 둘러싸인 것은 구 도성이다. 전경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은 커다란 직사각형으로 된 성전 지대이고, 그 중심 가까운 곳에 〈반석의 돔〉이 있다. 성전 지대의 왼쪽에는 남동쪽 능선 위에 오벨 이라 불리는 대지가 있다. 사진의 상단 쪽으로 거의 절반 되는 부분 에 남서쪽 능선이 있다. 이 능선 위에는 건물들이 밀집해 있고 그 중의 하나는 높은 망대를 가지고 있으며, 사진의 왼쪽 끝에서 멀지 않은 곳, 즉 현재의 남쪽 성벽 바깥에는 후기에 〈시온〉이 자리한 곳 이 있다. 서쪽 성벽을 따라 약 절반쯤 가다가 각이 진 곳에 욥바 문Jaff a Gate과 〈다윗의 망대〉가 있는 성채가 있다. 그 곳으로부터 성전 지 대 쪽으로 도성을 가로질러 약 절반쯤 되는 곳에 루터 교회의 높은 흰 망대가 있고, 그 곳으로부터 북동쪽으로 가까운 거리에는 〈성묘

교회〉의 돔들이 있다 북쪽 성벽 길을 따라 약 절반쯤 되는 곳에 다 메섹 문이 있고, 이 대문과 북동쪽 모퉁이 사이의 절반쯤에는 헤롯 문이 있다. 동쪽 성벽에는 성전 지대의 북쪽으로 가까운 거리에 성 스데반 문 St Ste ph en's Ga te이 있고, 성전 지대 자체의 성벽을 따라가는 길의 3 분의 l 되는 곳에 벽으로 막아 버린 황금문이 있다. 도성의 북동쪽 모퉁이를 감고 휘어지는 도로는 기드론 골짜기로 내려간다. 175 기혼 샘 입구 남동쪽 언덕의 기슭에 있는 기드론 골짜기의 서편, 죽 오벨로 확 인된 부분의 아래 쪽에 한 샘이 있는데, 이 샘으로 내려가는 통로가 이 사진에 나타나 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구약에서 여러 번 언급된 기혼 샘이다(왕상 1:3 3 둥). 그것의 이름 (71n,l) 은 〈솟아난다〉 는 뜻을 가진 단어 (n,l) 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이것은 그 샘이 간헐 적으로 활동하여 건기에는 하루에 한두 번씩, 우기에는 하루에 너댓 번씩 그 동굴로부터 솟아나는 사실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후기에 이 샘은 아인 싯티 마리암Ai n Sit ti Ma ryam 죽 성모 마리아의 샘 또는 동정녀의 샘 Vir gin's Sp ring, 또는 움 엣-다라즈 Umm ed-Daraj 죽 〈계단들의 어머니〉 등으로 알려져 왔는데, 마지막 칭호는 그 샘 으로 내려가는 30 개의 계단들을 일컬어 붙여진 것이다. 이 지역에 있는 유일한 다른 샘은 기드론 골짜기와 힌놈 골짜기의 합류점 건너편, 곧 우리가 지금까지 말해 온 남동쪽 언덕의 남단으 로부터 남쪽으로 250 야드 떨어진 실완 S il wan 마을 아래에 있다. 이 두번째 샘은 구약에서 엔-로겔 En-ro g el 이라고 불리는 샘(수 15:7 둥) 이었음이 거의 확실하며, 오늘날에는 비르 아이융 B ir Ay yub 죽 욥 의 우물J ob's Well 로 알려져 있다.

176 기혼 샘 위에 있는 예루살렘 최초기의 성벽 기혼 샘은 예루살렘 지역을 가장 오래된 정착지가 되게 하는 결정 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정착지는 동쪽 능선과 남동쪽 언덕의 경사 면 위에 , 즉 그 샘의 위쪽에 있었다 . 1961 년과 1962 년에 여기서 시작 된 발굴에서 캐슬린 M. 케년 Ka thl een M. Ken y on 은 그 샘의 위쪽으 로 멀지 않은 곳에서 거친 표석( 標 石)으로 세워진 육중한 벽을 발견 하였다. 그것의 연대는 중청동기 시대 II 의 초기 , 즉 B.C . 1800 년경으 로 확인되었으며 그 위에는 약간의 개축의 흔적이 보였는데, 발굴자 는 그 연대를 B.C. 10 세기의 것으로 생각하였다. 사진은 그 육중한 벽의 일부와 그 위에 개축된 혼적을 보여 주고 있다. 표석으로 세워진 이 벽은 최초의 마을인 가나안 인의 시기의 마을의 동쪽 벽이었음이 분명하다. 샘으로부터 언덕 안쪽 곧 서쪽으 로 터널이 나 있어서, 마울 벽들의 내부에서 위로 올라온 수갱과 연 결되어 있었다. 그 곳 주민들이 언덕 아래의 벽 바깥으로 난 길을 통하여 그 샘의 입구로 올 수도 있었지만, 이것으로 그들이 마을 내 부에서 안전하게 샘물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제 19-18 세기의 애굽의 저주 문서들 execra ti on texts (ANE T 329 쪽) 과 제 14 세기의 「아마르나 편지들 Amama Lett er sJ (ANE T 487-489 쪽) 이 우루샬림 Urusha lim 또는 우루살림 Urus alim이란 형태로 예루살 렘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방금 묘사한 최초의 벽 뒤에 있었던 정착지는 간단히 최초의 예루살렘 마울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여호수아 18:16 에는 부족의 경계선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것은 〈여부스인들의 어깨 남쪽에 있는 힌놈의 골짜기로 내려〉갔다고 되 어 있댜 여부스인들의 〈어깨〉는 우리가 지금까지 다뤄 온 남동쪽 언덕임에 틀림없고, 이 구절에서 우리는 이 당시에 그 곳에 살던 주 민이 여부스인들이라고 불렸음을 알게 된다. 이 곳이 그 장소임을

확인해 주는 성구는 여호수아 15:8 인데, 여기에는 〈여부스 …… 남쪽 어깨〉라는 비슷한 표현을 쓰면서 그 사이에다 〈곧 예루살렘〉이라는 삽입구를 추가하며 설명하고 있다. 사사기 19:10 에 〈여부스는 곧 예 루살렘이라〉고 한 것처럼, 여부스인들의 이름을 따서 그들의 성읍도 여부스J ebus 라고 불렸댜 비슷한 방법으로 역대상 11:4 에는 다윗과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곧 여부스에 이르니, 여부스 토인이 거기 거 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무엘하 5:6-9 과 역대상 1l:4-8 은 모두 다윗이 여부스 인의 마을을 공략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 시점에 서 그 곳은 또한 〈시온 산성 the str on g h old of Z i on 〉이라고도 불리는 데, 이것은 시온 Z i on ('X, 2 t 0v) 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사용된 경 우이 다(삼하 5:7 ; 대상 11:5). 이것과 어느 정도 비교가 될 만한 급수 터널 장치들이 므것도와 하솔 및 게셀에 있고 이것들이 약간 후기(B. C. 10-9 세기)의 것이고 따라서 여기서도 좀 늦은 연대를 가리키기는 하지만, 방금 기술한 급수 장치 는 다윗(B. C. 1000-965) 이 그들에 게서 그 도성 을 취 한 여 부 스인들의 장치였던 것으로 혼히 생각되며, 어쩌면 정복 과정에 드러 난 것으로 여 겨 지 기 도 한다 (S im ons, Jer usalem, 168 쪽 ; KROLL 107 쪽, col. 3). 다윗이 여부스인들의 성읍을 탈취하는 이야기에서, 여부 스인들은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그것을 보호할 수 있다고 자랑한 것으로 언급되어 있으며(삼하 5:6), 이것은 그 성채의 강함을 시사하 는 것이다. 이때 다윗은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水口) 로 올라가서 ……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삼하 5:8) 고 말한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여기서 〈수구〉(더,J X[ 친노르])로 번역된 용어는 해석상 적지 않은 어 려 움을 안고 있다 (Hans Joa ch im Sto eb e, Die Ein n ahrne Jer usa-lems und der $inno r, in ZDPV 73 [1957], 73-99 쪽). 만약에 〈수구〉 (물 수갱)〉라는 번역이 맞다면, 이것은 기혼 샘과 연결된 터널과 수

갱이 공격자들에게 그 성읍에 접근할 수 있는 틈을 주었음을 시사할 수 있다. 다윗이 그 곳을 공략한 후에, 그 곳은 〈다윗 성〉(삼하 5:9 ; 대상 ll:7) 이라고 불렀다 . 그와 그의 후계자들은 아마도 옛 여부스인 의 벽을 여러 세기 동안 사용하고 또 재사용했을 것이다. 1Tl 기혼 샘과 연결된 터널의 구도 이 구도의 오른쪽 상단에 기혼 샘으로 내려가는 계단들이 보인다. 구도에서 로마 숫자로 표시한 터널 rn 은 샘으로부터 서쪽으로 오벨 아래를 통하여 하나의 웅덩이(마지막 rn 번)로 향하고, 웅덩이 곁에는 바로 앞 장 (176 항)에서 기술한 바 있는 예루살렘 최초의 벽 내부로 부터 내려오는 수갱의 바닥이 있다. 이것은 십중팔구 여부스인들의 것으로 보이는 급수 장치였다 . 터널 I 과 터널 II 는 샘으로 향하는 현대의 계단들 아래 한때 존재 했던 저수지로부터 시작한다. 그 둘 중에 더 오래된 것인 터널 I 은 비교적 짧은 거리까지만 추적되었을 뿐이어서 마지막 목적지는 알 려지지 않고 있다. 터널 II 는 그것의 단면들의 대부분이 추적되었다 . 이 터널은 기드론 골짜기의 측면으로 빠져 나와서 완만한 경사의 노 천 수로로 계속된다 . 하지만 어떤 부분들은 편평한 돌로 덮여 있었 고 , 어떤 부분들은 바위의 충이 더 높기 때문에 또 다시 지하로 둘 어갔다. 그 수로의 동쪽 측면 벽에 있는 벌어진 톰은 그 수로로부터 물을 길어서 기드론의 서쪽에 있는 단지(段地)에 물을 댈 수 있게 해주었 다. 마침내 이 수도관은 지금은 비르케트 엘-함라 B irk e t el-H amra 즉 붉은 못 Red Pool 으로 알려진 실로암 못 아래 있는 연못으로 연 결되었다. 이 수로가 아마도 이사야 8:6 에 〈천천히 흐르는 실로암 물〉에 관한 말로써 가리켜지는 것이고, 이 수로가 연결하는 연못은

아마도 느헤미야 3:15 에 언급된 셀라의 못일 것이다 . 이 이름들이 파 생된 그 어근 (n',rD) 은 〈보내다〉 또는 〈건네 주다〉라는 뜻으로, 물을 그 목적지로 보내는 수로에 대해서는 적절한 의미이다. 산해립의 침공을 우려하여 히스기야는 〈성 밖에 모든 물 근원〉을 (대하 32:3 ) 막았는데, 이 것은 그가 바로 위 에서 언급한 그 수로의 배 수구들을 차단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기혼의 윗 샘물을 막고 아래로 쫓아다윗 성 서편으로 곧게 인도하였〉으며(대하 32:30), 그는 〈못(元 ),2) 과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중으로 인도하여 둘 〉 였다 (왕하 20:20). 이러한 관련 성구들은 거의 확실하게 〈히스기야의 터 널〉로 알려진 터널의 건설을 기술하고 있다. 이 터널은 구도의 수로 m 으로부터 갈라져서 수로 IV 로 계속된다. 이것은 모두 합쳐서 기혼 샘으로부터 실로암 못에 이르는 1749 피트 의 반석을 뚫고 휘어진 지하 수로이다 . 1880 년에 실로암 어귀로부터 약 6 미터 안쪽의 터널 벽에서 히브리어 명각이 발견되었는데 , 이것 은 양쪽 끝으로부터 작업을 해 들어가던 굴착자들이 어떻게 그 터널 을 팠는지와 마침내 그들이 그 산의 한가운데서 어떻게 만나게 되었 는지를 말해 준다. 그들이 일을 끝냈을 때, 〈물이 그 못(i1:>더그)의 근 원으로부터 1200 규빗을 흐르기 시작하였다〉. 178 기혼 샘의 동굴과 터널 입구 이 사진은 샘과 연결된 여 러 수로들 (177 항)을 탐색하는 일을 촉진 하기 위하여 , 물길을 전환했을 때의 기혼 샘을 포함하고 있던 굴을 보여 주고 있다. 먼 쪽 벽에는 터널의 입구가 있는데, 이것은 히스기 야의 공사가 끝난 후에 실로암 못으로 가는 전체 통로의 시발점이 되었다.

179 실로암 못 열왕기하 20:20 과 히스기야의 터널 (139 항)에서 발견된 명각에서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로 언급된 〈연못〉은 이 수로가 흘러 들어가는 저 수지 이 댜 요한복음 9:7 이 실로암 못 T] Ko}..uµ6iL 8 pa -COU ~tNOO.µ을 언 급할 때, 그 이름은 〈보냄울 받았다〉는 뜻이라는 설명이 부가되었다. 실로아 S hil oah 가 히브리어로 이 의미를 가졌고 (177 항 참조) LXX 에 서 2 나 udµ (실로암)으로 옮겨 졌으므로(사 8:6), 기 드론 골짜기 의 가장 자리에 있는 더욱 초기의 수로의 이름이 히스기야의 수도 시설 (177 항 참조) 붙여져서 이 수로가 흘러들어간 못의 이름으로 사용되었을 가 능성이 있댜 이 동일한 이름은 라틴어로 실로애 Silo a e, 실루아 S il ua 등의 형태로, 그리고 아랍어로는 셀완 Selwan 또는 실완 S il wan 으로 나타나는데, 실완은 실로암 못으로부터 기드론 골짜기를 곧바로 가 로질러 있는 마을의 이름이기도 하다. 물이 흘러 들어간 연못이 히스기야의 터널을 만든 목적 및 열왕기 하 20:20 의 진술과 조화되려면, 히스기야 시대에는 그것이 도성 내부 에 있었음에 틀림 이 없다 . 요세푸스 (War V 4, 2 §145 ; 아래의 199 항 참고)가 실로암에 관하여 말할 때, 그 도성의 저쪽 편에 있는 성벽이 〈실로암 샘 위에 untp > 있었고 실로암 못을 향하여 계속 흘러서, 오 플라스 O p hlas( 즉 오벨)를 지나 성전의 동쪽 행각porti co 에 이른 것 으로 말하고 있다(여기서 그 성벽은 실제로 성전 울타리 벽과 평행이 되게 나란히 뻗어 있었다. MACKOWSKI 47 쪽). 이러한 사실은 대개 요세푸스의 시대에는 실로암 못이 성벽 외부에 있었음을 뜻하는 것 으로 받아들여졌다(예컨대, Kath lee n M. Keny o n in PEQ 1966, 86 쪽, 그림 4 ; Joh n Wi lkins on, The Pool of Sil oa m, in LEVANT 10 [1978], 116-125 쪽). 이 말의 더욱 그럴 듯한 의미는 단지 위에 있는 윗도성으로부터 성벽이 내려가는 곳에서 실로암이 보였다는 뜻이며,

한편으로 성벽은 솔로몬의 못 주위로 계속 뻗어 있었는데, 이 못은 아마도 비르케트 엘-함라 B ir ke t el-Hamra 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 요세푸스가 실로암을 샘 또는 샘물(JIT\때 [페게])이라 부르는 사실은 단지 그가 그 터널의 입구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을 생각하고 있었음 을 뜻할 터이나, 한편으로 그의 당시에는 기혼 샘 자체가 덮여 있어 서 어쩌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도 않았음을 뜻할 수도 있다. 3.33년에 보르도에서 온 순례자 (GEYER 22 쪽 ; LPPTS I-B, 22-23 쪽 ; CCSL CLXXV, 16 쪽 ; w訂 157 쪽 ; 위의 173 항 참고)는 시온 산(시온 산은 그 당시까지는 남동쪽 언덕이 아니라 남서쪽 언덕인 것으로 여겨졌 다)에 올라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와서 〈저 아래로 벽 곁 에 있는 골짜기 에 > 실로아 S il oah(S il ua) 라고 불리 는 연못을 보았다. 그것은 사중 행각(四 重 行閣)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의 바깥쪽에는 다 른 큰 연못이 있었다. 하드리 아누스가 앨리 아 카피 톨리 나 Aelia Ca pit o liri a 에 님 프들 t E,: p avuµ gio v 을 위 하여 사중의 사당을 지 었으므로 (Chron i con Paschale [631-641) MPG XCII, col. 613), 그리고 특별히 샘과 관련이 있는 여신들에게 바친 사당이 미상불 이 못에 있었을 것이므로, 그 사중 의 행각은 하드리아누스가 지은 구조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어 왔 다 (KOPP 1959 373쪽). 좀더 바깥쪽에는 큰 못이 있는데 , 이것은 골짜기의 좀더 아래 쪽 에 있는 비르케트 엘-함라 죽 붉은 못과 필시 일치하는 것이다. 이 장소에 있던 교회는 이베리아인 베드로 Pe t er the Ibe ri an 가 〈이른바 실로아의 교회에서〉 거행된 예배에 참석한 451 년에 처음으로 확인되 었다. 피아첸짜의 무명씨 (GEYER 175-176 쪽 ; LPPTS II, 20-21 쪽 ; CCSL CLXXV, 166 쪽 ; WJ P 84 쪽)는 실로암 위 에서 돔으로 된 바실 리카를 발견하였다. 그 무명씨는 말하기를, 이것의 아래에 두 개의 대리석 목욕탕, 즉 남자들을 위한 것 하나와 여자들을 위한 것 하나

를 가진 실로암이 솟아오른다고 하였다 . 이 물에서 치유의 사례가 많이 발생하였으며, 심지어는 문둥병자들도 깨끗함을 받았다. 그 교 회의 안마당 앞에는 인공적으로 건설된 큰 못이 있어서 그 곳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목욕을 하고 있다. 〈일정한 시간이 되면 그 샘온 저절로 많은 물들을 쏟아 내고, 이 물들은 여호사밧이라고도 불리는 겟세마네 골짜기를 통하여 흘러내려 멀리 요단 강까지 이른다 . 〉 이 기록에는 또한 그 당시에는 실로암 샘이 성벽의 내부에 포함되 어 있었다고 진술되어 있다. 이것은 황후 유도치아 Em p ress · Eudoc i a (이 여성은 황제 테오도시우스 II 세 [408-450] 의 소박맞은 부인이었으며 444-460 년에 예루살렘에 살다가 거기서 죽었다)가 도성의 이 지점에 벽들을 증축했었기 때문이다 . 또한 문제의 교회를 세운 사람이 유도 치아였다는 사실도 가능한 일이며 (Koll 275 쪽, col. 1), 이것은 분명히 예수의 이적(요 9:1 - 7) 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 아마도 피아첸자의 무 명씨가 그곳에 오기 불과 10 년 전에 제작된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 에는 예루살렘의 남동쪽 맨구석에 열린 돔을 가진 하나의 건물이 보 인다(모자이크가 손상되어 이 건물이 이제는 거의 식별할 수 없게 되었 다. 229 항의 사진을 보라). 물이 흐르는 곳 위에 지은 건물에 적합한 위치와 건축 양식으로 볼 때, 필시 이것이 바로 그 무명씨가 본 교 희의 모습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교회 는 아마도 불과 수년 후에 (614) 페르시 아인들에 의 하여 파 괴되었으며, 그 후에 재건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l8 切년에 팔레스 타인 탐험 기 금의 F. J. 불리 스 F. J. B li ss 와 A. C. 디 키 A. C. Dick i e 가 실로암 못 바로 위에 있는 언덕에서 비잔틴 교회의 유적을 발견 하여 발굴하였는데,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말해 온 바로 그 교회 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회중석과 양쪽으로 두 개의 측량을 가진 바 실리카였다. 네 개의 커다란 교각들의 기부( 基 部)는 그 교회가 돔으 로 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동쪽 끝에는 그 교회의 후진이 급수

터널의 입구 바로 위에 있었다. 회중석과 측랑에는 바닥 모자이크의 부분들이 아직도 조금은 보존되어 있었다. 발굴 작업을 통하여 또한 나비가 약 72 피트나 되는 거의 정방형의 뜰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덮인 홍예랑(虹寬廊)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것 같다. 그 중심 에는 큰 연못이 있어서 터널의 물이 흘러들었으며, 그 구조는 보르 도 순례자가 언급한 사중 행각인 것이 확실하며, 이것은 추측컨대 하드리아누스에게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그 근처, 곧 기드론 골짜 기의 서쪽 경사면에는 B.C. 2 세기의 것으로 생각되는 둥근 망대의 초석들이 있는데, 이것이 어쩌면 누가복음 13:4 에 언급된 〈실로암의 망대 >일 가능성 도 있다 (KROLL '2:1 7 쪽, abb. 226). 발굴이 끝난 뒤에 실완의 사람들은 그 원래 못의 북동쪽 모서리에 하나의 작은 회교 사원을 세웠는데, 그것의 첨탑이 여전히 현재의 못 위로 솟아 있다. 사진은 오늘날 있는 그대로의 급수 터널 어귀와 실로암 못을 보여 주고 있다. 터널 출구의 아치가 비교적 근래의 것 이긴 하지만, 고대 석주의 그루터기들이 보인다. 18 개의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저수 탱크 자체는 길이가 약 50 피트, 폭이 15 피트인데, 이 것은 직사각형의 홍예랑으로 둘러싸여 있던 고대의 못보다는 훨씬 작은 크기이다. 예루살렘 성내의 남쪽 지역들과 기드론 골짜기의 동 쪽에 있는 실완 마을로부터 사람들이 몸을 씻으러 이 곳으로 온다. 위에서 설명한 어원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그 마을은 이 못으로부 터 그 이름을 따왔으며, 그 주민들은 요세푸스가 (위에서) 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그 물들을 샘, 곧 아인 실완Ain S il wan 이라고 부른다 . 180 〈반석의 돔〉 아래에 있는 큰 반석 위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176 항), 〈다윗 성〉은 기혼 샘 위의 예루 살렘 남동쪽 언덕 위에 있었다.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스라엘에서

온역이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제물을 드리도록 일렀을 때, 갓은 다 윗이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파멸시키는 천사 가 그 옆에 서 있었다)에 제단을 쌓도록 청했으며, 아라우나는 그가 있는 곳으로부터 〈내려다보다가〉 왕과 그의 신복들이 자기를 향하 여 오는 것을 보았다(삼하 24:18 이하) . 그러므로 타작 마당은 필시 남동쪽 언덕 위의 〈다윗 성〉의 북쪽에, 그리고 그보다는 더 높은 위 치에, 비교적 출입이 자유롭고 열린 땅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 은 북동쪽 언덕에, 그리고 지금은 성전 지대로 알려지고 있는 지역 에 있었다 (173, 174 항을 보라) . 이 지대의 중심 근처에서는 북에서 남으로, 그리고 중심의 서쪽에 서는 동에서 서로, 하나의 커다란 자연 반석이 노두( 露 頭)되어 있는 데, 이것은 그 전체 언덕의 최고 지점을 이루고 있다. 그 반석(아랍 어로 es-Sakhra [엣-사크라])은 길이가 약 58 피트, 나비가 51 피트이며, 높이는 4 내지 6 . 5 피트이타. 지금 이것은 〈반석의 돔〉(Q ubbe t es- Sakhra [쿰베트 엣-사크라]) (185 항) 아래의 건물 안에 놓여서 높은 목 조 칸막이로 둘러싸인 채로 여기에 나타난다.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반석의 표면에는 패인 부분들과 구멍들이 있고, 또한 한쪽에는 그 아래에 있는 동굴과 통화하는 구멍 한 개가 있다. 그 지대가 높기 때문에 바람이 잘 통하는 곳이어서 그 반석 자체가 아 라우나에게 타작 마당을 제공했을 것이고, 이리하여 다윗의 제단이 바로 그 위에 세워졌을 것이다 (FLAP 179 쪽 이하). 역대하 3:1 에 의하면, 우리가 바로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다윗과 관련이 있는 오르난(아라우나라는 이름의 이문[異文])의 타작 마당은 모리아 산에 있었다. 이 산의 이름은 아브라함이 그 봉우리들 중 하 나의 위에서 이삭을 제물로 드리도록 했었으나 드리지는 아니한(창 22:2 이하) 모리아 산의 이름과 같은 이름이다 . 이 경우에 브엘세바로 부터 아브라함의 사홀 길이 실제로 예루살렘의 이 지대까지인지 아니

면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Nelson Glueck, Ri ve rs in the Desert: A Hi st o r y of the Neg e v [New York : Farrar, Str au s and Cudahy, 1959], 62 - 64 쪽) 다른 어떤 장소까지인지 간에, 모리아 산이라는 이름 은 적어도 역대서의 기자 Chro ni cler 가 살던 시대 이후로는 〈다윗 성〉의 북쪽에 있는 언덕과 우리가 바로 위에서 기술한 그 큰 반석이 있는 지대에 붙여진 이름이 된다(아래의 231 항 참고). 역대하 3:1 의 같은 구절에서 우리는 이 산 위에 솔로몬이 여호와 의 전을 건축한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성전의 제단이 그보다 앞서 있었던 다윗의 제단처럼(위 참조) 그 신성한 반석 위에 있었으며, 솔 로몬의 경우 성소 자체는 아마도 반석이 뒤쪽, 죽 서쪽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FLAP 180, 326 쪽 이하). 이 첫번째 성전 곧 〈솔로몬 의 성전〉은 B.C. 586 년에 갈대아인들에 의하여 불타고(왕하 25:8 이 하 ; 렘 52:12 이 하) 말았다 (Ed win R. Th iele , A Chronolog y of the Hebrew Ki ng s [Grand Rap ids : Zondervan, 1977], 71 쪽). 539 년에 페르시아인 고레스 C yru s 가 바벨론을 취하여 성전의 재건 을 명하는 조서를 내렸다(대하 36:2 3 ; 스 1:2- 3 ; 6:3 - 5). 학개 (1:2 이 하)와 스가랴 (4:9 이하)의 독려로 여호야긴의 손자(마 l:l2) 요 유다의 총독(학 1:1) 안 스룹바벨의 지휘 아래 이 사업은 추진되었고, 다리오 가 갓 내린 조서(스 6 : 7-8) 에 힘입어 이 왕의 제 6 년(스 6:15) 인 B.C . 515 년에 작업이 끝났다 (FLAP 234 쪽). 첫번째 성전인 〈솔로몬의 성 전〉과 비교할 때, 이 두번째 성전 죽 〈스룹바벨의 성전〉은 오히려 수수한 편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적어도 건축하는 동안에는 그것 의 상태가 첫번째 집을 기억하던 사람들에게는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스 3:12 ; 학 2:3). 또한 탈무드 (Yoma 21b SBT II 5, 94 쪽, JE XII, 96 쪽 참고)도 이 성전이 솔로몬의 성전에는 있었던 다섯 가지 사항, 곧 법궤, 불, 셰키나 죽 하나님의 현현( 顯 現), 성령, 그리고 우림과 둠밈 둥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요세푸스는 그 성전이 헤롯 대왕에 의하여 또한 〈보수 (War I 21, 1 §401) 또는 건축(A n t. XV 11, 1 §380) 되 었다〉고 우리 에 게 말해 준 댜 방금 인용한 두 구절에서는 이 공사가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관 하여 표면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진술을 하고 있다. 즉 전자는 그 일 이 헤롯의 치세 제 15 년에 있었다고 하고, 후자는 그의 치세 제 18 년 에 있었다고 한댜 두 구절 모두에서 헤롯이 예루살렘을 취한 것(아 마도 B.C. 37 년 7 월 ; SHJ P Vennes/M illar , I, 2 92 쪽, n. 12) 을 그의 통 치의 시작으로 보므로, 그의 재위 제 15 년은 B.C. 23/22 년이고 제 18 년 은 B.C. 20 / 19 년이다 이 중에서 더 이른 연대가 예비적인 준비 작업 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면 , 그것은 단순히 착오로 간주될 수밖에 없댜 왜냐하면 이와 관련된 정확한 언급이 분명하게 제 18 년을 가리 키고 있기 때문이다 . 또한 디오(Di o, 54.7.6) 는 그 공사의 시작이 아우 구스투 스 황제가 B.C . 20 년 봄 또는 여름에 시리아에 도착한 때와 일치한다고 하는 확증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SHJ P Vennes/ M 비 ar, 같은 책) . 바더먼 교수는 B.C. 20/19 년이 가뭄이 든 해였고, 따라서 많은 노 동자들을 고용하는 일이 특별히 적절했음을 기억할 때(J ose p hus, Ant. XV 10, 4 §365 를 보라), 이 연대가 더욱 더 지지를 받는다고 시 사하고 있다 . 아마도 이탈리아로부터 헤롯에게 선적된 포도주(이것 은 바로 이 해에 있었던 일이다)는 아우구스투스가 이 가뭄과 기근의 피해를 경감시켜 주기 위하여 보낸 것이었을 것이다 (Y . Yadi n, Ma- sada [London : Weid e n feld and Nic o lson, 1966], 189 쪽). 유대인의 종교적 감수성 때문에 성전 자체 또는 성소 va6<; 는 오직 제사장들의 노동으로 세워졌는데, 그것은 1 년 6 개월만에 완공되었다. 때마침 이 공사의 필역( 畢 役)은 헤롯의 죽위 기념일과 일치하여, 이 두 사건을 경축하는 큰 축제가 열렸으며(Ant . xv 11, 6 §423), 따라 서 이 축제는 7 월에, 그리고 B.C. 18 년에 있은 것으로 그 시기가 매

겨져야 할 것이다. 성전 본체에 대한 제사장들의 공사와는 구별되는 행각과 바깥뜰t d g en:o dc Kai t0U g g:u nc ptp 6Aou g을 만드는 일에 헤 못은 친히 관여 하였고, 이 것들은 8 년만에 끝났다 (An t. XV 11, 5-6 §§420-421). 요한복음 2:20 에서, 예수께서 제 4 복음이 언급한 첫번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실 때, 유대인들은 그에게 성전이 46 년 동안에 지어졌 다 (o t Ko6oµ it 8 rt, 완료된 동작을 가리키는 단순과거 ao ri s t)고 말했는데, 이것은 그 성전이 그 기간 동안 그 곳에 계속 서 있었음을 의미한 다. B.C. 18 년 여름에 완공한 때로부터 46 년을 계산하면 AD. 29/30 년 에 이르고, 문제의 유월절은 30 년 봄에 있었던 유월절일 것이다. 이 연대는 29 년 가을에 있은 예수의 침 례 및 봉사의 시작 연대(위의 9 항 참고)와 조화를 이루고, 또한 제 4 복음에 있는 다른 세 번의 유월절 (이 중에서 둘은 그 명칭으로 밝혀졌고 하나는 그렇게 암시되어 있음 ; FHBC 28.3쪽 이하, tab le 134) 을 더 계산하여 33 년, 그리고 필시 4 월 3 일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으로 연대 산출을 하게 한다 (Ma ier in CKC 124 쪽, tab le 1). (니코스 콕키노스 N ik os Ko kkin os 는 성전에 대한 제사장들의 공사의 필역을 B.C. 19 년으로 두고, 헤롯의 공 사의 필역은 B.C. 12 년에 두어서, 후자의 연도에 46 년을 더하여 예수의 첫번째 유월절을 34 년으로 오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해를 36 년으 로 본다. 바더먼[i n CKC 78 쪽, tab le 4, 그리고 1990 년 1 월 16 일의 개인 적 의견 교환에서]은 B.C. 31 년 봄에 있었던 큰 지진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 이것은 요세푸스에 의하여 확인된 것이다(A n t. XV 5. 2 §§121-122). 바더먼은 또한 성전에 대한 헤롯의 수리 공사가 그 시기에 필요했다고 생각하며, 그 시점으로부터 15 년의 중간을 지나서 행해진 예수의 봉사의 시작과 21 년의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까지를 46 년으로 계산 한다.) 성전의 후기 역사에서, 요세푸스 (War V 1, 5 §36) 는 헤롯 아그립

바 II 세(그가 통치한 여러 지역에 유대가 포함되지는 않았으나 그는 성 전을 관할하고 있었다. FLAP 262 쪽, n. 42) 가 성소에 버팀목을 대기 위하여 레바논으로부터 목재들을 들여왔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으 며, Ant, XX 9, 7 §219 에서 요세푸스는 전체 성전 경내 댜 t£p 6v 가 알바누스 Alb i nus 총독 때 (62 - 64) 필역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불과 몇 년 뒤인 70 년에 이 〈헤롯의 성전〉(〈스룹바벨의 성전〉을 별도로 계 산하여 때로는 이것이 〈제 3 성전〉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유대인 전통 에 있어서 이것은 요세푸스가 말하는 바대로 헤롯에 의하여 복원되고 재건되었을 뿐 여전히 〈제 2 성전〉이다)은 로마인들에 의하여 불태워졌 고, 요세푸스 (War VI 4, 5 및 8 §§250, 268) 와 랍비들 (FLAP 328 쪽, n. 4) 은 공히 이것이 오래 전에 〈제 1 성전〉이 바벨론인들에 의하여 불 태워진 바로 그 같은 달과 같은 날(아브 Ab 월 =7/8 월 제 9 일)에 일어 났다고 말한댜 181 〈헤롯의 성전〉의 구도 〈헤롯의 성전〉에 관한 주된 문헌 정보의 출처는 요세푸스, 구체적 으로 Ant. XV 11 §§380 이하와 War V 5 §§184 이하, 그리고 아마도 제 2 세 기 중엽 에 기 록된 작품인 미 쉬 나 (SET V 6 ; DM 589-598 쪽) 에 있는 소책자 『밋도트 M i ddo t h .!l(측량)이다. 또한 쿰란에서 나온 〈성전 두루마리〉가 있는데, 이것은 1960 년에 베들레헴에 있는 고대 물품 취급자를 통하여 나온 것으로 1960 년에 이스라엘 사람의 수중 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술하는 성전은 이상적으로 되어 있어서 〈헤롯의 성전〉과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는 것 같다 (Y igael Yad in, The Temp le Scroll, 3 vols. [Je rusalem : Israel Ex plo ratio n Socie ty , 1ITT7, 198. 3]). 고고학적 탐색에 관한 한 성전 지대 자체 내에서는 발굴이 전혀

이루어질 수가 없었댜 왜냐하면 그것이 오랫동안 모슬렘교의 신성 한 지대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외부의 사면에서는 찰 스 워 런 Charles Warren 이 1867-1870 년에 약간의 발굴 작업을 할 수 있었고, 수갱과 터널을 통하여 벽의 하부 구조 일부에 도달할 수 있 었 다 (Charles Warren, The Recovery of Jer usalem [New York : Ap -ple to n , 1ITT2], 42 쪽 이하). 그 후 1968 년부터 12 년 동안 연중 무휴로 발굴 작업이 수행되었는데, 이것은 히브리 대학교의 베냐민 마자르 Benja min Mazar 의 지휘 아래 메이르 벤一도브 Me i r Ben-Dov 를 현장 감독으로 하여 성전 지대 남쪽에, 그리고 서쪽의 남쪽 부분에 있는 울타리 벽과 인접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요세푸스 (War V 5, 1 §§184 이하)는 성전 언덕의 정봉에 있는 평 면 지대가 원래는 사당과 제단을 짓기에 거의 충분하지 못한 크기였 으나 여러 시대를 거치는 동안 둑 쌓는 일을 계속함으로써 점차 확 장되었다고 말한다. 헤롯은 새로운 기초 벽들을 세움으로써 친히 그 지대를 확장하여 그것이 이전 넓이의 배가 되게 하였다 (War I 21, 1 §401). 울타리의 각 측면은 이제 길이가 1 스다디온(A n t . XV 11, 3 §400), 죽 약 600 피토가 되었다 소책자 『밋도트.!l(II 1) 는 〈성전 산〉 (이것은 이 책자에서 전체 경내를 일컫는 이름이다)이 500 규빗이었다고 진술하는데, 이는 각 측면이 적어도 750 피트가 되었음을 말해 준다. 오늘날 성전 지대의 외부를 측량하면, 남쪽이 912 피트, 북쪽이 1035 피 트, 동쪽이 1536 피트, 그리고 서쪽이 1590 피트이다. 안마당의 고도는 해발 2418 피트이고, 전체 지대는 약 35 에이커이다. 성전 지대로의 출입은 사방 모두에 있던 대문들을 통해서 가능하 였다. 대문에 관한 약간의 자료가 요세푸스와 『밋도트』에 의하여 제 공되어 있으며, 그것들의 고고학적 혼적들에 대한 토의와 함께 아래 에서 분석될 것이다 (190, 191, 193 항). 성전 지대 내부에는 분명히 사 방 모두에 걸쳐서 큰 〈주랑들〉 또는 주랑 행각들 µCYdAa t Ot o ai ncp t

tb i e p bv 이 있었는데, 요세푸스 (War I 21, 1 §401) 는 이 것들이 헤롯에 의하여 그 기초로부터 재건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 이것들은 그 대부 분이 돌 하나로 된 대리석 석주들의 이중 행렬로 구성되어 있었으 며, 그 높이는 25 규빗이었고 백향목 판자들로 만들어진 천장이 있었 다 (War V 5, 2 §190). 남쪽에는 왕의 행각 Ro y al Po rti co 으로 알려진 열주가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188 항) . 동쪽에 있는 열주는 솔로몬의 이름(솔로몬의 행각)으로 불렀다 (193 항) . 이 행각들은 〈첫째 뜰〉을 둘러싸고 있었으며(A n t. XV 11, 5 §417), 이 큰 지대는 가지각색의 돌로 완전히 포장되어 있었다 (War V 5, 2 §192). 이 뜰은 이방인들에게도 자유로이 개방되어 있었으나, 그 다 음 뜰의 귀퉁이에는 3 규빗 높이의 돌 난간 balus tr ade(6 p u~,:o~) 에 경고 를 발하는 석판이 있었다. 이 경고는 더러는 헬라어로 그리고 혹 은 라틴어로 되어 있었으며, 그 내용은 이방인들을 죽음의 형벌로 써 위협하면서 그들이 더 이상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CAn t. XV 11, 5 §417 ; War V 5, 2 §194). 이 난간 너 머 에 있는 〈둘째 뜰〉(A n t. XV 11, 5 §417) 은 그것 자체 가 가진 벽으로 가리워진 사각형의 지대였고, 벽의 높이는 40 규빗이 었다 (War V 5, 2 §196). 벽 주위에는 단지로 올라가는 열네 개의 계 단이 있었고, 벽에 있는 대문으로 올라가는 다른 다섯 개의 계단이 또 있었다 . 이 둘째 뜰 전체의 첫부분은 벽으로 막혀 있어서 하나의 특별한 장소를 만들었는데 , 여기에는 유대인 여자들일 경우 그 나라 의 원주민이든지 외국으로부터 온 방문객이든지 간에 누구라도 들 어갈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 사람들은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에 있는 각각의 대문 하나를 통하여 출입하였다. 동편에 있는 대문의 반대편에는 다른 하나의 대문이 있어서, 둘째 뜰의 둘째 부분 곧 오 직 이스라엘인 남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부분으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An t. XV 11, 5 §418), 이 부분으로 들어 가는 입구로는 북쪽

에 세 개, 그리고 남편에 세 개의 대문이 더 있었다. 이제까지 설명된 열 개의 대문들 가운데서 아홉은 금과 은으로 입 혀져 있었으나, 하나는 고린도 청동으로 만들어져서, 은으로 입히고 금으로 물린 다른 대문들보다 그 가치가 훨씬 더한 것이었다 (War V 5, 2-3 §§198, 201). 이 청동 대문이 그 유명한 니카노르 문 N ic anor Ga te이었을 것이댜 그런데 이 대문이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들의 뜰 로 들어가는 동쪽 대문이었는지, 아니면 여인들의 뜰 로부터 남자들 의 뜰로 들어가는 대문이었는지는 논란이 되고 있으나 , 후자가 아마 도 더 가능성 이 많다 (193 항 참고).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제사장들만이 들어가도록 허락되어 있던 〈셋째 뜰〉(A n t. XV 11, 5 §419) 이 있었댜 여기에는 커다란 제단(우 리는 이것이 그 거룩한 반석 위에 서 있었을 것 으로 생각한다 ; 180 항 참고)이 있었고, 번제물들이 그 위에서 희생되었다 (An t . XV 11, 5 §419). 그 뒤에 서쪽으로 열두 개의 계단으로 된 별도의 층 계로 올라 가면 성전 건물 본체 6 va6~ 가 있었다 (War V 5, 4-5 §§207 이하) . 그 것의 현관 정면은 높이와 폭이 모두 각기 100 규빗으로 되어 있었 다. 그 건물 자체의 내부는 높이가 60 규빗, 길이가 60 규빗 , 그리고 폭이 20 규빗이었다. 첫째 칸은 길이가 40 규빗이었고, 그 안에는 가지가 일곱인 등대 (출 25:31-40 참고), 진설 병 을 위 한 상(床) (출 25:23-30 참고), 그리 고 분향단(출 30:1-10, '2:7 참고)이 있었다 . 이 물품들 가운데서 상과 등 대는 로마인들이 앗아가서, 예루살렘이 함락된 그 다음 해에 로마에 서 거행된 베스파시아누스 Ves p as i an 와 티투스의 개선 행진에 진열 했던 전리품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War VII 5, 5 §148). 이것의 형상은 〈으로마 공회당 Roman Forum 〉에 있는 티투스의 아치 (A D. 81) 의 내부 측면에 아직도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FLAP 329 쪽 및 그림 120). 성 전 건물의 둘째 칸은 길이 가 20 규빗이 었고, 첫

째 칸과 휘장으로 가리워져 있었다 . 그 안에는 아무런 기구도 없었 댜 〈 접근할 수 없고, 범할 수 없고,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그것은 지 성 소 the Holy of Hol y 라고 불리 었다〉 (War V 5, 5, §219). 분명히 도성의 북단을 표시하는 것으로 예레미야 31:38 과 스가랴 14:10 에 언급된 하나넬의 망대 Tower of Hananel 가 서 있던 곳은 필 시 성전 지대의 북서쪽 모퉁이에 있던 반석 능선이었다. 느헤미야 3:1 과 12:39 은 이 동일한 망대를 함메아 망대 Tower of the Hundred (일백 망대)와 함께 언급하고 있는데, 이 둘은 아마도 느헤미야 2 : 8 에 언급된 〈전에 속한 영문 the fortres s [i1,~::i] of the t em p le 〉의 부였을 것 이 다 (S im ons , Jer usalem, 231, 3'Z 7, 429 쪽 및 n. 2). 이 망대 또는 영 문( 營門 )은, 필시 요세푸스 (An t. XV 11, 4 §403) 가 말한 대로 하스몬 가가 세워서 바리스 B ari s( p&pt c) 라고 부른 그 성채가 되었는데, 바리 스라는 이름은 느헤미야 2:8 에 나타난 〈영문( 營 門)〉(요새)이라는 말 의 히브리어 단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헤롯은 성전의 안전과 보호를 위하여 바리스를 더욱 강화하였고, 그의 친구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Mark An t on y를 기쁘게 하기 위하 여 그것을 안토니아 An t o ni a 라고 불렀다

이 영문이 성전 지대의 행각과 마주치는 지점에는 군인들이 신속 히 내려올 수 있도록 충계가 놓여져 있었다 . 군대의 천부장(千 夫 長) 과 그의 군사, 그리고 백부장(百夫長)들이 바울을 잡고자 이 계단들 을 달려 내려갔으며(행 21:32), 이 충대에서 바울은 사람들에게 연설 울 하였다(행 21:35). 또한 안토니아로부터 안쪽 거룩한 뜰의 동쪽 대문까지에는 비밀 지하 통로가 있었다(A n t . XV 11, 7 §424). 안토니 아와 행각들을 포함하여 성전 경내의 전체 면적이 6 스다디온이었다 (War V 5, 2 §192). 구도는 앞에서 본 〈헤롯의 성전〉에 대한 묘사와 일치한다. 이름이 붙여진 사항들 의에도 성전 지대를 둘러싸고 있는 행각들에 유의하 라. 동쪽에 있는 것은 솔로몬의 행각이고, 남쪽에 있는 것은 왕의 행 각이다. 북서쪽 모퉁이에는 안토니아가 있고, 북동쪽 모퉁이에는 한 때 이스라엘 못(비르케트 이스라인 Bir ke t Israi n. 지금은 성 스데반 문 근처의 주차장으로 쓰기 위해 메워져 있음)으로 알려졌던 연못이 있었 댜 측량의 척도를 규빗과 함께 미터로도 나타내고 있음에 또한 유 의하라. 182 〈헤롯의 성전〉에서 나온 경고 명각의 단편 우리가 바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181 항), 요세푸스는 이방인들의 뜰과 성전 지대의 그 다음 뜰인 더 안쪽 뜰 사이에 있는 난간에는 헬라어와 라틴어로 기록된 경고 명각들이 있었다고 말하는데, 이것 들은 〈죽음의 형 벌로써 위 협 하면서 이 방인 ill OYEY 저의 들어 옴을 금 하는〉CAnt. XV 11, 5 §417) 것이었다. 헬라어로 된 완전한 명각을 가 진 이 평석들 중의 하나가 클레르몽-간노 Clermon t -Ganneau 에 의하 여 발견되 어 1 얽 1 년에 출판되 었다 (FLAP 325 쪽 및 그림 118). 그 본 문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IH8ENAAMO 「 ENHE ii no µn8t: va aJ..lo vi: vf J i:ton o- PE iE~ A I ENTO 홍 rornE pcb co8aL £wbc t0U ncp i PITOIEPONTPi< l>A KT OiKAI tb icp b v tp u 帖 K t OU Kai flEP IBOAOroil iANA H ncp L0 6Aou. 6c 8' &v An- IIBHEATI2A I TI O 있 E i ¢8i tau t § atm oc gg- TAI!i !A TOEAKOJ \O i ta t 8ta 댜 £和 KOAou 一 8EIN8ANATON 8eLV 8avai: ov . No fore ig n er is to ente r 이방인은 아무도 within the balustr ad e ant) 성전 지대 주위의 enclosure around the 난간과 울타리 안으로 tem p le area. Whoever is 들어오지 말 것 누구든지 caug h t w 沮 have hims elf 잡히는 자는 잇따라 있을 to blame for his death 그의 죽음에 대하여 자신이 wh ich will foll ow. 책임을 져야 함. 그리고 동일한 헬라어 명각의 일부분을 가진 두번째 돌의 단편이 성 스데반 문 (243 항) 밖에서 발견되어 1938 년에 출판되었다. 이 돌을 여기에 사진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 경우, 명각은 일곱 줄이 아니라 여섯 줄로 배열되었다 . 적어도 부분적으로 보존된 말들은 다음과 같 으며, 이것을 보면 전체 명각에 적힌 말은 위에 제시된 완전한 표본 과 동일한 (eau 퍄 대신에 Q U t허를 쓴 것은 예외로 하고) 것으로 보인다. MH]8E NAAM[OrENH 삐 8eva c{}..11.[o v tvfJ ENJT OCT Oin[ EP I …… . . TP i tv] tb c t0U Jt[c p i …… .. tpu - ll>AK]T OlKA I [ ~K]i:o u Kat [ A]H~HAi( TQ I A]n 帖 n ab[t§

!J.] IA 1DE ?:[A KOA .O I8E IN 8] ld tb 찌QK OAou0c t v 8ANAT [ON 8ava i:[o v. 흥미롭게도 이 경우에 있어서는 적어도 명각의 글자들이 붉은색 으로 칠해져 있었으며, 그 돌이 발견되었을 때, 새겨져 있던 기호들 은 거기에 채워진 붉은 물감의 다량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1 印 성전 남쪽 울타리 벽에 박힌 돌 위에 새겨진 하드리아누스의 라틴어 명각 70 년 예루살렘이 로마인들에 의하여 점령당했을 때, 성전과 거의 전 도성이 몰락되었다. 그 후에 예루살렘을 관리하기 위하여 제 X 군 단 Fre te ns i s (프레텐시스)이 지역 수비대로서 남게 되었다 (War VII 1, 1-3 §§1-17). 130 년에 (SHJ P Vermes/M illar , I, 541 쪽, n. 120) 하드리 아 누스는 동방으로 여행을 하면서 시리아로부터 애굽으로 내왕하였으 며, 예루살렘을 두 번 방문하였다. 에피파니우스는 그의 책 『중량과 도량법 Weig hts and Measures 』 (14 [54c], ed. Dean, 30 쪽)에서, 비록 그가 이 일이 예루살렘이 파괴된 지 단지 47 년 후인 117 년에 있었던 일이라고 연대를 잘못 매기기는 했지만, 그 여행이 어떤 여행이었는 지는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는 하드리아누스를 〈여러 장소를 구경 하기를 좋아한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리고 그는 베스파시아누스 Ves p as i an 의 아들 티투스가 그의 치세 제 2 년(베스파시아누스의 치세 제 2 년은 70 년 7 월 1 일에 시작했다)에 무 너뜨린 그 유명하고 훌륭한 도성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성전이 짓밟힌 것과 전 도성이 몇 채의 집들과 하나님의 교회 를 제외하고는 온통 황폐화된 것을 발견하였다. 이 교회는 작은 건물로,

구주께서 감람산으로부터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이 올라간 다락방이 있던 곳이었다. 그것은 그 곳에, 죽 파괴를 모면한 시 온의 한쪽에, 시온의 근방에 있는 몇 블럭의 집들과 마치 적막한 오두 막처럼 시온에 남아 있던 일곱 채의 회당들과 함께 세워져 있었다. 이 회당들 중의 하나는 막시모나 M axirn ona 감독과 콘스탄티누스 왕 때까 지, 기록된 바와 같이(사 1:8) 〈포도원의 망대 처럼〉 남아 있었다. 그러 므로 하드리아누스는 도성을 (재)건립하고자 결심하였으나 성전은 세우 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건립되고 있는 그 도성에 자기 자신의 이름과 왕의 칭호를 이름으로 부여하였다 . 그가 앨리우스 하드리아누스 Aeliu s Ha dri an 라고 불렀으므로, 그는 또한 그 도성을 앨리아 Ae li a 라고 불렀다. 디오Di o(229) 는 하드리아누스의 그 동일한 여행을 그의 저서 『 로 마 역사 Rom 따 H is t o ry 』 (LXIX 12) 에 서술하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는 파괴된 성터에서 한 도성을 설립하 여 그것을 앨리아 카피톨리나 Ae li a Ca pit o lin a 라고 불렀으며, 또한 신의 성전 부지에 주피터 J u pit er 에게 바치는 새로운 신전을 세웠다.〉 디오는 계속해서 이 일이 전쟁을 초래했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그들 의 도성 안에 이방 인종들이 거주하고 이방 종교 의식들이 그 곳에 옮겨지는 것을 참을 수 없게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드리아누스 가 아직 애굽에, 그리고 다시 시리아에 가까이 있는 한 그들은 잠잠 히 있었으나, 그가 더 멀리 떠나갔을 때에는 그들이 공개적으로 반 란을 일으켰다. 이 것 이 물론 바르 코크바 Bar Kokhba 에 의 하여 주도 되어 132 년부터 135 년까지 계속되었던 폭동이었다. 에피파니우스로부터 우리는 티투스에 의한 파괴가 있은 후의 예 루살렘과 성전 지대의 황폐된 상황의 생생한 모습을 찾아보게 된다. 디오로부터 우리는, 바르 코크바의 반란을 촉발한 것은 하드리아누

스가 계획한 바대로 새로운 이교의 도성과 그 신전을 건립한 일이었 음을 알게 된다. 그 전체 계획은 아마도 그 반란이 진압된 후에야 완수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가 예루살렘에 신전을 건립했는지에 관해서 는 두 자료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에피파니 우스가 말한 취지는 단지 하드리아누스가 유대안의 성전을 재건립 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만약 이것이 그가 말한 취 지라면, 그것은 디오가 말한 바대로 하드리아누스가 건립했다고 하는 이교의 신전을 그가 건립했을 가능성을 반드시 배제하지는 않는다. 예전의 유대인 성전 부지에 이교의 성소가 실제로 세워졌던 사실 은 제롬을 포함한 다른 저자들에 의해서도 확인되고 있는데, 제롬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Commen tary on Isaia h I ii 9 CCSL LXXIII, 33 쪽). 〈한때 하나님의 성전과 종교가 있던 곳에 하드리아누스의 조 상(影像)과 주피터의 우상이 함께 세워져 있다.〉 보르도 순례자 (GEYER 22 쪽 ; LPPTS I-B, 22 쪽 ; CCSL CLXXV, 16 쪽 ; WET 157 쪽) 가 성전 지대에 두 개의 하드리아누스의 조상을 언급하는 사실은, 필시 그 조상들이 외양으로 너무나 비슷하게 생겨서 그가 주피터의 조상을 황제의 두번째 조상으로 잘못 생각했을 것으로 봄으로써 설 명될 수 있다. 홍미롭게도 성전 지대의 남쪽 울타리 벽 안, 이중문 (190 항)의 바로 동쪽에는 지금도 하나의 돌덩어리가 박혀 있는데, 이것은 이 하드리 아누스의 조상의 기초였음에 틀림없다. 비록 이 돌의 명각이 거꾸로 된 채 벽 안에 박혀 있지만, 우리는 예시된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그것을 뒤집어서 그렸으며, 본문은 다음과 같이 쉽게 읽을 수 있다.

TITO AEL HADRIANO ANTONINO AUG PIO

P P PONTIF AUGUR DD 이 명각에서 P P 는 pater patriae (파테르 파트리 애)의 약자이고 , D D 는 decreto decuri on um (데크레토 데쿠리오눔)의 약자이며, decuri on es (데쿠리오네스)는 로마 식민지 원로원의 회원들을 말한다. 전체 본문 은 다음과 같다. To Tit us Aeliu s Had rian us Anto n i nu s Aug us tu s Piu s , the fathe r of his countr y, pon ti fex , aug ur. By decree of the decu rion s. 티투스 앨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피우스에게 국부(國 父 ), 대사제(大司祭), 복점관( 卜 占官) . 원로원의 포고령으로. 위에서 자세히 설명한 역사에 대한 다른 고고학적 증거는 앨리아 Ae li a 의 주화들에 의하여 제공되고 있다 . 그것들은 그 도성의 공식적 인 이름을 Col(onia ) Ael(ia ) Cap( itoli n a ), 죽 〈식민지 앨리아 카피톨리 나〉로 칭하고 있으며, 매우 빈번하게 주피터의 화상( 畵 像)을 보여 주 고 있다 (SHJ P Vennes/M illar , I 553- 荀 5 쪽 및 5.54쪽의 n. 186). 제롬 이 지적한 『유세비우스의 연대기』의 라틴어 판 (ed. Hehn, 2d ed, 1956, 201 쪽)으로부터 우리는 유대 인들이 로마의 권세에 굴복당한 것 에 대한 마지막 신호로서 앨리아로부터 베들레헴으로 향하여 나가 는 대문의 대리석에 돼지가 조각되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와같

은 조각돌은 아직껏 발견되지 않았다. 184 공중에서 본 성전 지대의 개관 보르도 순례자는 하드라아누스의 조상(影像)으로 추정되는 두 개 의 조상이 성전 지대에 있는 것을 언급한 후에 (1 8.3항), 유대인들이 파괴된 성전을 위한 연례 애곡을 〈구멍 뚫린 돌〉(필시 현재의 〈반석 의 돔〉 아래 있는 신성한 바위를 가리킴. r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들의 명 단』 참고)에서 하는 관습을 언급한다. 그러므로 성전 지대는 순례자 의 여정에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장소는 로 마인들에 의하여 파괴된 이래 대부분이 계속 폐허로 남아 있는 것으 로보인다 유세 비 우스 (Demons tra ti o Evang e lica VIII 3, 12 ed. Heik el 393 쪽) 는 성전 지대와 심지어 전에는 접근할 수도 없던 성소의 돌들이, 우 상의 신전 경내를 장식하거나 공중의 구경거리를 위한 장소들을 건 립하는 일에 사용되기 위하여 운반되어 가는 것을 두 눈으로 바라보 는 것은 슬픈 광경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한 조금 과장하여 언 급하기 를 (Theop lnny IV 18ed. Gressmann 193 쪽), 그가 살던 시 대 에 성전의 황폐된 상황이, 바벨론인들의 시대에 파괴되어 있은 70 년 기 간의 4 배 이상 동안, 이미 계속되어 왔었다고 한다. 이 오래 계속된 황폐는 다름 아닌 예수의 말씀의 성취라고 유세비우스는 선언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 23:38) 고 말씀하셨을 때, 그가 〈집〉이라고 한 것은 다름 아닌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또 제자들이 성전 지대의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을 때, 그는 분명히 이 지대에 대하여 이르기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 24:2) 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보르도 순례자의 본보기는 기독교인들이 성전 지대를 계속해서 방문했음을 보여 주고, 하드리아누스와 주피터의 조상들이 제롬 후 에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있는 사실 (1 8.'3항 참고)은 이와 같은 이 교의 증거물들이 기독교의 영향 때문에 그 지대로부터 제거되었음 울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세비우스가 인용한 구절과 꼭 같은 복음서의 두 구절(마 23:38 ; 24 : 2) 을 인용하는 유튀키우스 (940) 는 기 독교인들이 이 말씀들을 성전 지대에 대한 저주로 여겼음을 분명히 하면서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말한다. 〈이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그 것을 황폐하게 버려두었으며 그 위에는 교회를 짓지도 아니하였다〉 (An nales II ; MPG 111, cols. 1099-1100 ; LPPTS XI-A, 67쪽). 모슬렘교인들이 들어왔을 때 성전 지대의 황폐한 상태가 분명히 이와 같았다. A.H . 17 년 =A D. 638 년에 예루살렘은 무함마드 Muham­ mad 의 두번째 계승자(社꾀ifa h[ 칼리파]) 정복자 우마르 (634-644) 에게 함락되었다. 바로 위에서 인용한 기록을 남긴 유튀키우스에 의하면, 우마르 자신이 성전 지대에 있는 그 신성한 돌 (180 항)에 누적된 많 은 더러움을 씻어 내었다 . 그 후에 어떤 사람들이 하나의 성전을 짓 고 그 돌을 기도의 방향(qi bla[ 키불라])을 표시하는 데 사용하기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우마르는 그 돌이 성전의 뒤에 오도록 성전이 지어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비잔틴 시대의 연대 기록자 테오파네스 Theo p hanes(751-818) 는 우 마르가 창세 6135 년에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다고 말 하는데, 이 해는 알렉산드리아 계통에 의하면 643 년=A. H. 22/ 23 년에 해 당한다 (MPG 108, col. 700 ; Vin c ent, Jer usalem nouvelle, 413 쪽). 그러나 다른 자료들은 그 연대를 몇 년 더 일찍 매기고 있다 (GEMA I, 25 쪽). 테오파네스는 또한 같은 구절에서, 우마르가 그의 건축물이 붕괴되는 난관에 봉착했을 때 유대인들이 그에게 설득하기를, 그가 감람산의 정봉 위에(〈승천 교회〉 위에, 158 항) 있는 십자가를 떼어 내

리지 않는 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자, 우마르가 그 십자가를 제거했다고 말하고 있다. 유뒤키우스와 테오파네스는 우마르가 하나의 〈성전〉을 건립한 것 으로 말하고 있지만, 그가 성전 지대 안에 세운 건물, 그리고 그 방 위 설정에 있어서 키불라 죽 기도의 방향이 하나의 요인이 되었던 그 어떤 건물은 사실을 회교 사원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은 우마르의 공사가 있은 시기로부터 30 년 이내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아르쿨프 (670) 에 의하여 확인되고 있다. 이는 그가 성전 지대 안에 있는 건물을 기술하면서 〈기도의 집〉이라는 용어를 분명하게 사용 하고 있는데, 이 말은 아랍어로 마스지드 masj i d 죽 〈사원〉에 해당하 고, 그 의미는 문자적으로 〈부복(伯伏)의 장소〉라는 뜻이다 (FAWR 508 쪽). 아르쿨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GEYER 226-2 얽쪽 ; LPPTS . ill-A , 4-5 쪽 ; CCSL CLXXV, 186 쪽). 그러 나 동쪽에 있는 벽 의 근처 에 위 치 한 in vicin ia mu ri ab ori en te locatu m 성전이 한때 장엄하게 건축되었던 그 유명한 장소에서, 사라센 족이 이제는 사각형으로 된 기도의 집 qu adr angulam orati on is domurn 에 자주 모이고 있다. 이 집은 그들이 폐허 의 잔유물들 위 에 supe r qu as- dam ruina rum rel iq떠 as 두꺼운 판자와 커다란 대들보들을 올려 조야 (租野)하게 지은 것으로, 한꺼번에 3000 명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다 고한다. 만약 〈동쪽에 있는 벽〉이란 말을 성전 지대의 남쪽을 따라서 남 동쪽 모서리로부터 뻗어 있는 울타리 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 다면, 새로운 구조물의 두꺼운 판자와 커다란 대들보들이 얹혀져 있 는 〈폐허의 잔유물들〉이란 그 유명한 왕의 행각의 열주들 (188 항) 가 운데 그 당시에 남아 있던 것이다. 만약 그 사원이 이와 같이 성전

지대의 남쪽에 위치했다면, 그 신성한 돌은 참으로 그 사원의 뒤에, 죽 우마르가 말한 대로 북쪽에 놓이게 되었을 것이다 . 이렇게 되면 그 건물은 또한 현재의 〈알一악사 al-Aq s a 사원〉 (186 항)과 대충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된다. 〈알一악사 사원〉 건물에서는 미랍 m i hrab 죽 기 도의 방향을 표시하는 벽감 (1 얽항)이 남쪽 벽에 있는데, 그것으로부 터 줄을 내려 벽에서 직각을 이루게 하면 바로 그 신성한 돌의 중심 을 통과할 것이다 (GEMA I, 25 쪽). 이리하여 이때부터 성전 지대는 모슬렘교인들의 수중에 있었다. 그래서 그것은 〈하람 엣~셰리프 Haram esh-Sherif > 죽 〈존귀한 성소 Noble Sanc tuary〉로 알려져 왔다. 이 사진은 그 지대를 공중에서 바 라본 전반적인 개관이다 . 185 〈반석의 돔〉에 있는 창문들 신성한 바위 (180 항) 그 자체 위에 건물을 세운 사람은 다메색의 우마이야드 칼리프 Uma yy ad Ca liph of Damascus( 회교국의 왕, 모함 메드의 후계자의 칭호 __ 역주)였던 압드 알-말리크 ‘Abd al-Ma lik (685-705) 였다. 이것은 사원이 아니라 사당 또는 〈중거의 장소〉 mashhad[ 마쉬하드])였고, 오늘날에는 간단히 〈반석의 돔〉Qu bbe t es- Sakhra [쿰베트 엣-사크라])으로 알려 져 있다 (FAWR 511-513 쪽). 건 축 양식에 있어서 그것은 기본적으로 네 개의 석조 각주와 열두 개 의 대리석 석주가 반석 주위에 원을 이루면서 드럼과 돔을 지탱하고 있는데, 이 원을 돌아가면서 팔각형의 열주와 바깥쪽의 팔각형 벽이 둘러 있다. 이 벽의 각 면에 다섯 개의 창문이 있고 위쪽의 드럼에 도 열여섯 개의 창문이 있다. 이 건물의 내부에 있는 큐픽 Ku fic 문자(고대 아라비아 문자-역 주)로 된 명각은 아직도 〈일흔두번째 해에〉(A. H. 72 년 =691 년)라는

연대를 보여 주고 있는데, 이해는 압드 알-말리크의 통치 기간에 해 당하고, 따라서 이 건물이 그 칼리프의 작품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 리하여 그것은 현존하는 최고( 最 古)의 모슬렘 건축의 기념비이 되었 다 . 내부에 아직도 남아 있는 광범위한 모자이크 장식들은 이 건물 의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는데, 이것들도 대부분이 제 7 세기로부터 오는 것이다. 방금 언급한 명각에는 압바시드 칼리프 알-마문 'Abbasid Ca liph al-Ma'mun'(813-833) 이라는 이름이 삽입되어 있는 데, 그는 필시 그 구조물에 복원 공사를 하였을 것이다. A.H . 407 년 =AD. 1016 년에 목조로 된 돔이 무너져서 그 후에 곧 재건되었으나 근래에 와서 새로운 알루미늄 돔으로 대치되었다. 1189 년에 살라딘은 이 건물의 벽 위에 대리석으로 된 평석을 올렸 다. 낮은 창문들 위에는 터키의 황제 술레이만 대공 Sule im an the M agnifi cen t의 이름과 A.H . 935 년 =AD. 1528 년이라는 연대가 있고 , 창문을 돌아가면서 청색과 백색, 녹색으로 된 아름다운 타일 tile 세 공이 1561 년에 이 통치자에 의하여 추가되었다 . 창문에는 구멍이 있 어서 다양한 디자인으로 된 채색 유리로 채워져 있다. 그 위에는 『코란』에서 인용한 구절들이 아름답게 얽혀진 문자로 기록되어 마 치 프리즈fri eze 처럼 그 건물을 돌아가면서 둘러 있다. 사진은 바깥 에서 한 쌍의 창문을 쳐다보면서 찍은 것인데, 여기서도 위쪽에 적 힌 명각의 일부가 보인다. 186 〈알-악사 사원〉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184 항) , 예루살렘 성전 지대의 첫번째 모슬렘 사원은 칼리프 우마르가 예루살렘을 탈취한 직후인 A.H . 17 년 =A.D. 綴년에 건립한 것이다. 아르쿨프 (670) 의 기술에 의하면, 그 것이 그 지대의 남편에 있던 예전의 왕의 행각 Ro y al Po rti co 의 폐허

에 건립된 것으로 생각되며, 또한 그것은 〈조야하게〉 건축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 첫번째 사원은 두번째의 틀림없이 더 나은 구조물로 대치되었는데 , 이것은 〈반석의 돔〉의 건립자인 압드 알-말리크의 아 둘 우마이야드 칼리프 알-왈리드 Uma yy ad Ca liph al-Wa lid (705- 715) 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다 . 그 자신은 또한 〈다메섹 대사원 Great Mosqu e at Damascus 〉의 건립자이기도 하다 (FAWR 513-514 쪽). 그 기획이 이 시대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연대가 매 겨 진 동시 대 의 문서 인 r 아프로디 토 파피 루스들 Ap h rod ite Pa pyri」 에 서 발견되는데 (GEMA II, 119 쪽), 여기에는 〈예루살렘의 사원 四야t oa 1E p oaoMµwv 〉 공사를 하기 위하여 애굽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내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이 사원은 자주 지진 으로 인하여 손상을 입었으며, 다른 여러 명의 칼리프들에 의하여 반복해서 재건되었음을 말해 주는 증거가 있다. 즉 세번째 사원은 A.H . 154 년 =AD. 771 년에 알-만수르 al-Mansur 에 의하여, 그리고 네번째 것은 A.H . 163 년 =AD. 780 년에 알-마디 al-Mah di에 의하여, 그리고 다섯번째 것은 A.H . 426 년 =AD. 1035 년에 앗-자히르 az­ Z ahir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회중석의 동쪽과 서쪽에는 또한 십자군 이 한 공사도 있지만, 지금껏 서 있는 사원의 실로 많은 부분은 앗­ 자히르의 작품이며, 그의 구도는 알-마디의 구도와 필시 대동소이하 였댜 무캇다시 Mu q addas i (985) 가 남긴 알-마디 의 사원에 관한 기 술 (LPPTS III-C, 41-42 쪽)과 아마도 앗-자히 르의 사원 및 그 이 전의 사원들로부터 남아 있는 석조 건물의 부분들 (GEMA II, 123 쪽, 그림 119) 을 보면, 그 당시의 구도에는 하나의 중앙 회중석과 양편에 일곱 개씩의 측랑이 있었다(현재의 사원보다는 양쪽에 네 개씩 더 있었다). 그 건물의 북쪽 끝에는 미랍의 맞은편에 큰 중앙 출입문이 있었고, 그것의 좌우로 각각 일곱 개의 문이 더 있었다. 측랑의 안쪽은 석주

들과 둥근 각주들의 행렬로 구획지어져 있었다. 건물의 중앙부 위쪽 에는 응대한 박공(片용桃) 지붕이 있었고, 그 뒤로 장려한 돔이 솟아올 라 있었댜 『코란』 (Sura XVII 1, tr. A Yusu f Ali 693 쪽)에는 무함마드가 〈밤 의 여행〉(그가 일곱 하늘을 지나면서 여행을 했다는 그 유명한 미라즈 Mi넒를 위하여 〈신성한 사원 Sacred Mosqu e> 죽 멕카 Mecca 에 있 는 〈카바 Ka'bah 〉로부터 〈가장 먼 사원 Fa rthe st Mos q ue 〉로 데 려 감 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마스지드 알-악사 Mas ji d al-Aq s a> 죽 〈가장 먼 사원〉이라는 이 이름은 예루살렘의 성전 지대가 그 당시의 아랍인들에게 알려진, 서쪽으로 가장 멀리 있는 예배의 장소였음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것은 성전 지대에 건립된 사원의 이 름이 되었고, 예컨대 무카닷시가 그의 시대에 그 곳에 서 있던 사원 에 대하여 기술할 때도(위에서 인용됨) 그렇게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악사 사원 A q sa Mos q ue 〉은 성전 울타리의 남쪽 벽에 대 하여 직각을 이루면서 서 있으며, 양쪽에 있는 여러 가지 부속 건물 들을 포함하지 않고도 길이가 88 야드, 폭이 60 야드나 되는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북쪽에는 일곱 개의 홍예랑으로 구성된 현관을 통하 여 입구가 나 있다. 이 현관은 (12V 년에 사망한) 멜리크 엘-무앗잠 이사 M elik el-Mu'azzam 'Isa 에 의하여 건축되었으며, 그 이후로 보 수되어 왔다. 사진은 이 사원의 북쪽 끝에 있는 현관의 일곱 홍예랑 울 보여 주고 있다. 187 〈악사 사원〉에 있는 민바르와 미라브의 모퉁이 〈악사 사원〉의 남쪽 끝에는 멕카롤 향하여 기도하도록 방향을 지 시하는 미랍이라고 알려진 벽감이 있고, 그 옆에는 민바르min bar 죽 강단p ul pit이 있다. 목재로 조각하여 상아와 자개를 입힌 강단은

A.H . 564 년 =AD. 1168 년에 알렙포 Ale ppo 출신의 한 예술가에 의하 여 제작되었다. 측면으로 대리석 석주들이 접해 있는 기도 벽감은 A.H . 583 년 =AD. 1187 년에 그 사원의 이쪽 끝에 살라딘에 의하여 이루어진 보수 공사의 일부이다 . 사진은 미라브의 윗 부분과 민바르 의 대부분을 보여 주고 있다. 188 성전의 꼭대기 요세푸스가 말한 바와 같이 (War I 21, 1 §401 ; 위의 181 항 참고), 성전 지대를 확장하기 위하여 헤롯은 새로운 기초 벽들을 세워야만 했다. 다른 구절 (War V 5, 1 §188) 에서 구는 또 말하기를, 기초가 가 장 낮은 곳에서는 벽들이 300 규빗 또는 그 이상이 깊은 곳으로부터 쌓아 올려졌다고 하는데, 그러나 협곡의 상당한 부분이 매립되었기 때문에 그 깊이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이 기초 벽들은 동쪽의 기드론 골짜기와 서쪽의 튀로포에온의 경사면들을 따라 내려가면서 잘 세워진 것임이 분명하다. 이 곳이 바로 현재의 성전 지대의 벽들 이 발견되는 곳이다. 남동쪽 모서리에서는 성전 지대의 표면 높이가 지금은 바깥의 지 면보다 약 40 피트 정도 높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골짜기의 경사 면이 많이 형성되었다. 워런 (Recove ry of ]erusalem, 117 쪽)은 여기 서 벽 밖으로 굴대를 박아 넣어 회랑을 뚫고 마침내는 그가 남동쪽 귀통이로부터 북쪽으로 32 피트 되는 지점에서 울타리 벽을 치게 되 었다. 이 지점에서 그는 해발 2312 피트, 또는 위쪽에 있는 성전 지대 의 평균 표면 높이보다 106 피트 낮은 위치에 있었다 (181 항 참고). 그 리하여 벽의 안쪽에는 평평한 지대를 형성하는 일이 필요하였다. 이 일은 필시 요세푸스가 (위에서) 언급한 옛 협곡들을 메꿈으로써 이 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광범한 하부 구조를 건설함으로써 이루어졌

다. 하여튼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이 로마인들에 의하여 포위되어 있 는 동안에 사람들이 성전 지하실 안에 cic t0 bc brovbµouc tO O tcp o 0 , 즉 성전 지대의 하부에 있는 지하 통로들 안에 피난했다고 말하고 (War V 3, 1 §102), 도성이 함락되었을 때 승리자들은 그 곳 지하실 들에서 tv tO tg bIOV6µ0t c 2000 명 이상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War VI 9, 3 §§427-430). 실제로 성전 지대의 남쪽은 거의 전부가 육중하고 천장이 덮인 하 부 구조들 위에 놓여 있다. 남서쪽 모통이에 있는 하부 구조들은 접 근할 수가 없으나, 가운데 있는 것들은 18 개의 계단으로 된 층계에 의하여 다다를 수가 있으며, 이 충계는 〈알-악사 사원〉 입구의 동쪽 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남동쪽 모퉁이에 있는 하부 구조들도 비슷한 방법으로 그 지대로부터 접근할 수가 있는데, 이 부분은 솔로몬의 마 굿간이라고 불린다. 이 이름은 아마도 이 구조물을 재건하여 저들의 말들과 낙타들을 위하여 사용했을 십자군이 붙여 준 이름일 것이다. 여기에는 88 개의 각주를 가진 30 피트 높이의 지하실이 13 줄 있고, 홀의 바닥은 위에 있는 성전 지대의 표면보다 40 피트 이상 낮다. 울 타리의 귀퉁이로부터 그 구조물은 서쪽으로 260 피트 이상, 그리고 북쪽으로 200 피트 이상 뻗어 있다. 헤롯의 석조물은 일부 각주들의 하부에서 아직도 볼 수 있으며, 상부는 십자군 시대에 재건된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요세푸스

라볼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마태복음 4:5 과 누가복음 4:9 에는 〈성전 꼭대기 댜 mcpb v t 0V t0 9 LE p ou 가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 〈성전〉이라는 단어는 그 전체 지대 를 가리키는 단어이고, 〈꼭대기〉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작은 날 개〉를 뜻하는데, 이것은 어떤 물건의 선단 또는 말단을 가리키는 용 어이며, 따라서 끝머리 또는 정봉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언급 된 지점은 정확하게 요세푸스가 기술한 바대로 기드론으로부터 높 이 쳐다보이던 성전 지대의 남동쪽 모퉁이에 있던 그 지점을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그럴 듯한 생각이다. 사진은 성전 울타리 벽의 남쪽으로부터 남동쪽 귀퉁이를 향하여 쳐다보며 찍은 것인데, 이 벽은 방금 제시된 추론에 의하면 복음서 가 말하는 성전의 〈꼭대기〉였다. 이 모퉁이에는 헤롯의 석조물이 벽 의 상단으로부터 약 20 피트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189 서쪽 벽 성 전 울타리 의 동쪽 벽 의 남쪽 부분 (188 항 참고)과 또한 남쪽 벽 및 서쪽 벽에 쌓인 돌의 하부 충들은 모두 같은 양식으로 되어 있 다. 에드워드 로빈슨 Edward Rob i nson 이 1838 년에 이 석공물을 관찰 했을 때, 그는 이 돌들이 경사지게 되어 있다고 말하였더, 그리고 전 체 면이 먼저 절단되어 네모지게 깎였으며, 그 후에 그것의 귀퉁이 룰 따라서 나머지 표면보다는 4 분의 1 또는 2 분의 1 안치 낮게 좁다 란 테를 깎아 만든 것으로 기술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돌이 가장자 리를 돌아가며 이러한 종류의 낮아진 평평한 표면과 또한 가운데에 평평한 표면을 가지고 있으나, 다른 경우에는 가운데에 거친 돌출부 가 있어서 이 돌덩이들이 아마도 지하에 숨겨지도록 의도했던 것처 럼 보인다.

인접해 있는 돌에 반듯하게 맞도록 표면 들 이 직각으로 잘 다듬어 진, 이와 같은 직사각형의 건축용 석재는 오늘날 각석(모나게 깎은 돌―_역주)이라 불리며, 〈초벌 새김한〉 또는 〈테두리한 〉 이라는 용 어는 가장자리를 처리하는 방법에 관하여 일컫는 말이다. 방금 기술 한 이런 종류의 석공술은 여기 성전 지대의 울타리 벽 중 낮은 충 에 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성채 안에 있는 소위 다윗의 망대의 낮은 충들에서(Q DAP 14 [1950], 140 쪽 이하, pla te XLVII, 3), 그리고 헤브론에 있는 전통적인 막벨라 굴 Cave of Mach pe lah 의 하 람 엘-칼릴 ijara m el-Kh alil로 알려진 큰 울타리 벽에서도 발견된다 (L.-H. Vin c ent and E. J. H. Mackay, Hebron, le Ifara m el-K half!. [1923], 99 쪽 이하, 102 쪽 이하, 108 쪽 이하 ; Ovadi ah , Corp u s, 131-133 쪽, no. 135). 다윗의 망대에서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파사엘 Phasael 이라고 불리는 헤롯의 망대 (198 항)에 남아 있던 기초 를 볼 수 있으며, 헤브 론의 석조물도, 비록 요세푸스는 헤롯이 그 곳에 건축 공사 를 했다 고 말하지는 않지만, 십중팔구 해롯의 것이다. 그리고 방금 기술한 예루살렘 성전 울타리의 동쪽, 남쪽 및 서쪽 벽들에 있는 석조물도 역시 확실하게 헤롯의 것이다 (S im ons, Jer usalem, '2:10 , 324 쪽, n. 1, 384-391, 421, 422 이하). 그런데 벽의 남쪽 끝에서 북쪽으로 32 미터 /105 피트 떨어진 지점에 있는 동쪽 울타리에는 〈곧은 접속점 str aigh t j o int〉으로 알려진 수직 접합점이 있는데, 이것으로부터 북쪽으로는 석공술이 다른 형태로 되어 있고, 헤롯 대왕 때보다는 더 오래된 것 이 확실하지만, 그 연대가 헬라 시대인지 페르시아 시대인지, 또는 심지어 솔로몬 시대인지에 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193 항). 성전 울타리의 남서쪽 귀퉁이에는 튀로포에온 골짜기가 성전 지 대의 모퉁이 아래를 대각선으로 달린다. 북쪽에 있는 현재의 광장을 따라서 일곱 줄의 헤롯 석공물이 보이고, 그 지하에는 헤롯 시대의

작품들이 자그마치 열아홉 줄이나 있어서 69 피트 아래에 있는 암반 에 이 르고 있다 (Mazar, Mounta ins of the Lord, 131 쪽). 하드리아누스의 조상들 근처에 있는 〈구멍 뚫린 돌〉에 관한 보르 도 순례 자의 진술 (GEYER 22 쪽 ; LPPTS 1-B, 22 쪽 ; CCSL CLXXV, 16 쪽 ; WET 157 쪽)을 우리는 이미 인용한 바 있는데 (184 항), 유대인 들은 파괴된 성전을 위한 애통함을 표하고자 해마다 이 곳으로 왔으 며, 이 돌이 다름아닌 바로 그 크고도 신성한 반석 (180 항) 그 자체였 다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유대인의 애통의 장소 는 우리가 방금 기술한 성전 울타리의 서쪽에 뻗은 벽의 바깥쪽으로 옮겨지게 되었댜 이 벽의 작은 부분이 사진에서 보인다. 성전 울타리의 기초 벽들에 관하여 말하면서 요세푸스 (War V 5, 1 §189) 는 치수가 40 규빗이나 된 돌들을 언급하고 있다. 다론 곳에서 그는 길이가 25 규빗 (An t. XV 11, 1 §392) 또는 심지어 45 규빗 (War V 5, 6 §224) 이나 된 돌들로 건축된 성전 건물 본당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 우리 앞에 놓여진 돌들, 곧 서벽 Weste r n Wall 의 첫 일곱 충에 놓인 돌들은 매우 큰 돌들이며, 그 중의 다수는 길이가 약 15 피트, 높이가 3 내지 4 피트나 된다. 남서쪽 모퉁이에는 길이가 40 피트, 높이가 3 피트, 그리고 두께가 8 피 트 정도 되는 돌들이 있는데, 이것들의 무게는 각각 약 50 톤 정도일 것으로 추산된다. 이 돌들은 표면이 매끈하고 가장자리를 초벌 새김 한 것으로 헤롯 대왕의 작품에 있어 전형적인 것이며, 돌들은 매우 정밀하게 서로 맞춰져 있어서 아무런 시멘트나 모르타르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헤롯의 충들 위에는 아마도 로마 시대 또는 비잔틴 시대의 것인 매끈하고 초벌 새김이 안 된 돌의 충이 네 개가 있고, 이 충들 위에는 아랍 및 터키 식을 나타내는 비교적 작은 돌들이 얹 혀 있다.

1OO 이중문 요세푸스와 『밋도트』에 의하여 기술된 바와 같이, 성전 지대의 울 타리 벽에는 많은 대문들이 있었다. 요세푸스는 서쪽에 있던 네 개 의 대문들에 대하여 기술하고(A n t. XV 11, 5 §410), 또한 남쪽의 〈중 간에 대문들이〉 있었다고 말하며(같은 책), 로마인의 공격과 성전 지 대의 북쪽에 있던 대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War IT 19, 5 §537 ; VI 4, 1 §222). 그가 동쪽에 있는 대문을 언급하지 않는 사실은 아마도 무심결에 빠뜨린 것에 불과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기본적인 기술 가운데서 그는 성전 지대의 북쪽(A n t. XV 11, 4 §403) 과 서쪽 (XV 11, 5 §410), 그리고 남쪽을 향하고 있는 넷째 면 (XV §411) 에 관하여 말 하면서 셋째 방향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밋도트』 (I 1 ale 3) 는 성전산으로 향하는 다섯 개의 대문들, 죽 남쪽 에 두 개 의 훌다 문들 Huldah Gate s , 서 쪽에 키 포누스 문 Kipo nus Gate , 북쪽에 타디 문 Tadi Gate , 그리 고 〈수산 궁전 Palace of Shu- shan 〉이 그 위에 묘사된 동문 Eas t ern Ga t e 이 있었다고 진술한다. 성전 울타리의 남쪽에는 서로 약 70 미터 떨어져 있고 지금은 벽으 로 막혀 있는 두 개의 대문이 보인다. 이 대문들은 이중문과 삼중문 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들은 보통 요세푸스가 언급한 남쪽의 중간에 있는 대문들과 동일시되고 있으며, 『밋도토』에 언급된 두 개의 훌다 문들과도 동일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때때로 순례자들이 서 쪽 대문을 통하여 성전 지대에 들어갔다가 동쪽 대문으로 나갔다는 추측과 함께 서 훌다 문 Weste r n Huldah Ga te과 동 훌다 문 Easte r n Huldah Ga te으로 불린다. 달리 선택할 수 있는 학설은, 이중문은 순 례자들의 출입을 위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 자체를 두 개의 훌다 문들이라고 한 반면에, 삼중문 (191 항)은 제사장들이 사용하던 문이었 다고 추측하는 것이다.

사진은 현재 상태의 이중문 중 볼 수 있는 부분을 보여 주고 있 다 . 왼쪽에서 침입하고 있는 건물은 십자군 시대에 이중문을 보호하 기 위하여 세워진 십자군의 구조물이다. 입구 바로 위에 있는 장식 용 아치는 무슬림 우마이야드 Mus fun Umayy ad 시대(제 7 세기)의 것 이다. 그런데 이 아치의 뒤에와 위에는 길이가 5.5 미터에 두께가 거 의 2 미터나 되고, 가장자리를 초벌 새김한 거대한 상인방(上引坊) 돌 의 일부가 보인다. 이 돌과 오른쪽 하단 모퉁이에 명확하게 보이는 다른 큰 돌들은 분명히 헤롯 시대의 것들이다. 이 이중문 안에는 이중의 둥근 천장으로 된 현관방과 터널처럼 생 긴 통로가 있어서, 그 위에 있는 성전 지대의 주된 표면에 나 있는 출구로 경사지게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추측건대 이 대문 위의 성 전 지대가 다 메꿔졌을 때, 그리고 헤롯의 왕의 행각 Ro y al Port ico (188 항 참고)이 지어졌을 때, 이러한 지하 연결로를 건설하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 같다 . 현관방과 통로에는 헤롯의 석조물이 아직 도 남아 있다. 오늘날 이 통로는 〈알-악사 사원〉의 중앙 측랑의 조 금 동쪽 지하를 통과하여 그 사원의 면전으로 나온다. 191 삼중문 삼중문은 이중문의 동쪽으로 70 미터 떨어져 있다. 지금은 벽으로 막힌 이 세 개의 아치들은 우마이야드 Uma yy ad 가 건축한 것이었지 만, 그것의 폭은 필시 원래 헤롯의 대문의 폭과 동일한 것이다. 사진 에서 왼쪽 하단 구석 근처에 헤롯 시대의 구조물로부터 남은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버팀기둥 돌의 일부분이 아직도 보인다. 훌다는 이름에 관해서 말한다면(이중문과 삼중문 모두에 적용되든 지, 아니면 전자에게만 적용되든지 간에), 훌다라는 이름의 여선지자가 열왕기하 22:14 과 역대하 34:22 에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인물

과 이 대문들과의 관계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대문으로부터 성 전 지대로 올라가는 터널처럼 생긴 통로에 비춰서 생각하는 하나의 가설 (C. Sch ick in ZDPV 22 [1899], 94-97 쪽)은, 이 이름이 〈두더지〉 와 〈족제비〉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i1-,i, n[ 훌다])에서 온 것으로 설명한다(레위기 11:29 에서 이 단어와 관련된 단어인 -,?n[ 홀레드]가 RSV 에서는 〈족제비〉로 번역되어 있으나, 미국 유대인 출판 협회가 펴 낸 r 토라 새 번역 The New Translatio n of the Torah 」 [1962] 에서는 〈두더지〉로 번역되어 있다). 그 여 선지자의 이름이 이것과 동일한 어 근에서 온 것인지도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2 성전산 남쪽의 발굴된 지대 성전 지대의 남쪽에서, 그리고 이중문과 삼중문의 전면에서 1968 년 에 시작한 현대 이스라엘인의 발굴 작업 (181 항)에 의하여 그 두 개 의 대문으로 올라가는 기념비적 충계가 있는 하나의 커다란 정식 광 장이 드러났다. 후기 비잔틴 시대(제 7 세기 초)에는 훌륭한 비잔틴 가 옥이 이 지대에 세워졌고, 우마이야드 시대(제 7 세기 말부터 제 8 세기 전반까지)에는 모슬렘교인들의 웅장한 궁전들이 비잔틴 가옥의 폐허 위에 지어졌다 . 이 지대에 하나의 고고학 정원을 설립함으로써 그 기념비적 충계가 가졌던 원래 크기의 상당한 부분을 볼 수 있게 되 었다. 아뭏튼 이것이 성전으로 들어가는 주된 길이었음은 분명하며, 이중문과 삼중문에 있는 통로들을 통하여 그 위에 있는 지면으로 올 라갔다. 이중문 앞에서는 돌로 된 기구의 작은 단편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예물 또는 희생 제물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코르반 corban( 막 7:11 참고: 헬라어 Kop Oa v [코르반]은 히브리어 1= 가 P [코르반] 에서 옴)이 적혀 있었다. 이것은 이 기구가 헤롯의 성전에서 사용된

실제적인 도구였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며, 만약 그렇다면 이것 은 그와 같은 것으로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다(이 동일한 발굴 작 업에서 발견된 납골함들에 관해서는 309 항을 보라). 그 동일한 지대에서, 이중문의 남쪽으로부터 40 미터 떨어진 곳에, 후대의 건물들 밑에서 아크라 Acra 의 기초일 가능성이 매우 많은 기 초들이 발견되었다. 아크라는 안티오쿠스 IV 세 에페파네스가 성전을 감시하기 위하여 지은 요새로, B.C. 141 년에 하스몬인 시몬에 의하여 마침내 공략되고 파괴될 때까지 시리아인들에 의하여 점유되어 있 었다(위 의 173 항 참고). 여기에 제시된 사진은 감람산에서 망원 사진기로 찍은 것으로 성 전 지대의 남쪽 끝(〈알-악사 사원〉의 돔과 함께)과 방금 기술한 바대 로 그것에 인접한, 발굴된 지대의 전모를 보여 주고 있다. 193 황금문 성전 지대의 동쪽에 관한 한, 요세푸스(A n t. XX 9, 7 §§220-221) 는 그가 솔로몬의 업적으로 돌리는 동쪽 행각을 언급하고는 있으나 (181 항 참고.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요한복음 10:23 ; 사도행전 3:11 ; 5:12 의 솔 로몬의 행각이다), 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이것 은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무심결에 그렇게 된 것 같다 .190 항 참고). 하지만 『밋도트』 I, 3 은 〈수산 궁전이 그 위에 그려진 동문 Easte r n Ga te〉 (190 항 참고)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수산 또는 수사 Susa 는 페르시 아 제국의 수도였고(에 l:2 ; 단 8:2 둥), 예루살렘 대문 에 〈수산 궁전〉을 그려 넣은 것은 랍비들의 전승 (Menaho th 98a SETV 2, 599 쪽)에 의하면, 아마도 그들이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페르시아의 왕들이 허락한 것을 그렇게 함으로써 기념하려는 것이 었을 듯하다 (180 항 참고).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전 지대의 동쪽 문

을 수산 문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사도행전 3:2, 10 에는 성전의 미문( 美 門, TJ 8iJp a TJ wpa i .a 및 TJ wpa i .a ltlJ An) 이 언급되어 있다. 그 이야기 가운데는 한 앉은뱅이가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서〉(행 3:2) 구걸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자 이 문 곁에 앉혀지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또한 〈성전에 들어가려〉 (행 3:3) 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았고, 걸을 수 있게 된 그는 〈그들 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행 3:8 ). 이 세 구절 모두에서 〈성전〉을 가리키는 단어는 성소 또는 성전 건물 자체를 지칭하는 단어 (va6 c;) 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성전 지대 전체를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 (t e p 6v) 이다 .• 그러므로 이 사람이 데려다 놓여진 장소를 가리키는 대문은 필시 사람들이 성전 지대 안으로 들어올 때 통과하던 외부 울타리 벽에 있는 대문이다. 그 사람은 고침을 받은 후에 베드로 및 요한과 더불어 성전 지대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이 시점에서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 에〉(행 3:11) 모였다. 요세푸스가 (위에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바 와 같이 이것은 동쪽에 있는 행각이었으므로, 그 사도들과 전에 앉 은뱅이였던 사람이 방금 지나간 대문도 역시 동쪽에 있었음에 틀림 없댜 만약 이것이 맞다면, 사도행전 3:2 , 10 의 미문은 수산 문이었음 에 틀림없다. r 베자 사본 Codex Bezae, D 」은 우리가 방금 그 절의 일부를 인용 한 사도행전 3:11 에서 다론 주요 사본들의 독법과는 다른 독법을 가 진 것이 사실이다. 「베자 사본」의 독법은 11 절에 이르러 그 고침을 받은 사람과 백성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베 드로와 요한이 나갈 때 그는 그들을 붙잡고 그들과 함께 나갔고, 그 들(백성)은 놀라서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는 행각에 서 있었다.〉 이 말은 단순히 동쪽 대문에서 고침을 받고 나서 사도들과 함께 성전 지대 안으로 들어갔던 그 사람이 이제 그들과 함께 나가서 솔로몬의

행각으로 가 이러한 흥분된 관심의 대상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일 수 도 있댜 그러나 이 말은 또한 병을 고치는 일이 성전 지대 내부에서 더 멀 리 떨어진 다른 대문에서 발생하였으며 그 곳으로부터 사도들과 그 사람이 이제 돌아나오고 있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 있 어서 흔히 받아들여지는 추측은 미문이 니카노르 문 N i canor Ga te이 었다는 것이다 요세푸스 (War II 17, 3 §411) 는 〈놋문 —— 즉 내부 성 전의 i:ou EV6ov tEp ou 동쪽으로 향한 대문〉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또한 (War V 5, 3 §201 ) 그 대문이 고린도 산에서 만들어진 놋으로 되어 있었으며, 가 치로 볼 때 은으로 입히고 금을 물린 다른 대문들을 능가했다고 말 하고 있다 (181 항 참고). 『밋도트』 II 3 은 아마도 바로 이 놋으로 된 대문으로 보이는 이 대문에 대하여 니카노르 문 (309 항 참고)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있다. 이 대문의 위치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되고 있 다 즉 요세푸스의 글에 언급된 내용은 그 대문이 동쪽으로부터, 곧 이방인의 뜰로부터 여자들의 뜰로 들어가는 통로였음을 암시한다는 것이다(구도 181 항의 고린도 문 Co ri n thi an Gate ) . 하지만 미쉬나 Mi shnah 는 그 대문이 여자들의 뜰과 남자들의 뜰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구도의 니카노르 문). 하지만 이 두 전거(典操)가 실제로는 일치 하며, 이 대문이 동쪽으로부터 죽 여자들의 뜰로부터 남자들의 뜰로 들어가는 통로였을 가능성이 높다 (E. Sta uffer in ZNW 44 [1952- 1953], 44-66 쪽). 그리하여 내]자 사본』의 사도행전 3:11 은 병을 고치는 일이 니카 노르 문에서 발생하였으며, 사도들과 그 앉은뱅이였던 사람은 안으 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가서〉 성전 지대의 동쪽에 있는 솔로몬의 행 각에 이르렀을 때, 무리가 놀라서 거기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

만 사실 녀]자 사본」의 사도행전 3:11 의 독법은 다른 주요 사본들의 독법보다도 신빙성이 적어 보안다. 두 독법 모두가 그 앉은뱅이룰 고친 일에 대하여 굉장한 흥분이 감돌고 있었다 (lK8aµPo t in B etc . ; 8aµPl \8E v tE<; in D) 는 점 에 는 동의 하고 있다. 분명 히 이 흥분은 즉각 적으로 일어났을 가능성이 더 크다 . 이것은 그 치유가 수산 문에서 발생했으며, 그 앉은뱅이가 일어서서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바로 옆에 인접해 있는 솔로몬의 행각이라는 행각으로 걸어서 들어가자 마자 무리가 놀라서 그 주위에 모여들었다는 추측과 일치하고 있다. 적어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기독교 순례자들이 사도행전 3:2, 10 의 미문으로 보고, 또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종려 일요일 의 대문으로 본 그 대문이 수산 문(황금문)이었음이 확실해졌다 . 피 아첸짜의 무명 씨 (GEYER 170-171 쪽 ; LPPTS IT, 14-15 쪽 ; CCSL CLXXV, 163 쪽; WJ P 83 쪽)는 겟세마네로부터 예루살렘 문까지 많 은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일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것이 바로 한때 성전의 미문이라고 불리던 대문과 연결된 성문p o rta civit a tis, qu ae comeri t po rta e spe ci os ae, qu ae fuit tem p li 인 데 , 이 대 문의 문지방과 바닥은 아직도 남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집사 베 드로 Pete r the Deacon(GEYER 108 쪽 ; WET 182 쪽)는 말하기 를 성 전 아래 쪽의 동쪽으로 미문이 있었으며, 여기서 베드로가 앉은뱅이 를 고쳤고 주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이 곳으로 들어가셨다고 한다. 방금 언급된 사항들은 겟세마네 동산 맞은편에 있는 동쪽 성전 지 대의 울타리 벽, 곧 이른바 황금문이 지금 서 있는 곳의 일부를 가 리키고 있다. 미문이라는 이름은 사도행전 3:2, 10 의 라틴어 본문과 또한 피아첸짜의 무명씨 및 집사 베드로의 기록에는 Port a Sp ecios a (포르타 스페치오사)라고 바르게 옮겨져 있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에 헬라어 단어 rll pa i. a( 호라이아, 〈아름다운,〉는 분명히 라틴어 단어 aurea( 아우레아)를 시사하게 되었고, 따라서 Port a Aurea( 포르타 아

우레아) 즉 황금문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헤롯의 성전〉에서는 이 동쪽 대문이 아마도 두 개의 훌다 문들 (190, 191 항), 죽 이중의 둥근 천장으로 된 현관방으로 들어가는 쌍둥 이 통로와 같은 구도로 되어 있었으며, 이 곳으로부터 성전 지대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었다. 원래의 대문은 의심할 여지없이 70 년의 성 전 파괴 때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며, 그 후에 여황제 유도치아 Eudoc i a (444-460 년에 예루살렘 체재)에 의하여 재건된 것으로 믿어진다. 비잔 틴 시대의 구조물 중에서 피아첸짜의 무명씨 (570, 바로 위에서 인용 된 바와 같이)는 오직 문지방과 바닥만을 보았으나, 그 대문은 곧 복 원되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628 년에 황제 헤라클리우스 Hera­ c li us 가 페르시아인들로부터 되찾은 〈참된 십자가〉를 지고 왔을 때 이 곳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바로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집사 베드로 (1137) 는 이 동일한 대 문이 예수께서 개선의 입성을 하신 장소요 그 앉은뱅이 남자가 고침 을 받은 장소인 것으로 이해했으며, 제 12 및 제 13 세기에는 십자군이 이 대문을 다시 복원하였지만 1 년에 두 번씩, 죽 종려 일요일과 거 룩한 십자가의 고양(高揚, Exalta tion of the Holy Cross) 축제일에만 그것을 열었다. 마침내 1538 년에 술레이만 대제 Suleim a n the Mag ni- fi cen t가 현재의 예루살렘 성 벽을 쌓았을 때, 그는 황금문을 벽으로 막아버리게 하였으며,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그 대문은 막혀 있게 되 었다 (KROLL 309 쪽, col. 1). 이에 대한 설명은 에스겔 44:1-3 에 근거 한 기대, 즉 그 대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만 열릴 것이라 는 기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현존하는 황금문은 길이 가 24.6 미터, 폭이 17.25 미 터 인 육중한 구 조물이다. 이 큰 이중문의 양편에는 아직도 두 개의 거대한 버팀기 둥 돌들이 제자리에 놓여 있는데, 이것들은 아마도 헤롯이 지은 건 물에서 남겨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황금문 바로 바깥쪽에 있는

모슬렘교 공동 묘지에서 1969 년에 우연히 발견한 바에 의하여 좀더 이른 시기의 〈낮은 대문 〉 과 좀더 이른 시기의 벽이 나타났는데, 이 벽은 〈곧은 접속점〉 (189 항)의 북쪽에 있는 동쪽 성전 울타리 벽의 석공술과 같은 석공술로 된 벽이다. 그러므로 이 대문과 성벽은 적 어도 하드리아누스 시대 이전의 것이며 매우 이른 시기의 것들이다. 사진은 성전 지대의 안쪽으로부터 찍은 것으로, 현재의 대문 안에 둥근 천장으로 된 현관방-아마도 비잔틴 시대의 것 ― ―울 보여 주고 있다 . • 그러나 바더먼교수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iep b v (히에 론 )이란 단어가 시리아의 시아 S i ‘a 에 있는 나바테아인의 신전 Naba t ean te m p le 에서 어 떻 게 사용되었는지 를 또한 유의해 봐야 한다. 그 곳에서 이 용어는 아람어 Nrli,: ::i(b ir J .u ', 비 르타)의 상당 어로 쓰였고, 이 두 용어 모두는 (바알 샤마인 Baal Shama yi n 을 위 한 ) 성소 자체 룰 가리키고 있다 . 시아에 있는 이 나바테아인의 신전은 헤 롯 의 영토 안에 있었고 , 신전은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의 성전〉이 지어진 것과 동시에 건축되었다 . 나바테 아 텍스트의 보다 온전한 형태 를 위해서는 M. de Vog iie, Sy ria Centr ale , 38 쪽 ; GIL II, no. 163 ; Enno Lit tma nn, Pr inc eto n Exp e dit ion to Sy ria, Semi tic Inscr iption s, 8.5 -90 쪽을 보라. 또한 icp b v (히에론)에 대해서는 Gerhard Kittel , ed., Theolog ical Di ct i on ary of the New Test:a me nt, vol. 3, 232 쪽 이 하 를 보라. 194 로빈슨의 아치 성전 지대의 서쪽에 관하여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 다 CAn t. XV 11, 5 §410). 〈뜰의 서쪽 부분에는 네 개의 대문이 있었 다. 첫째 대문은 사이에 놓여 있는 계곡을 넘어가는 통로를 통하여 궁정으로 가는 대문이었고, 두 개의 다른 대문은 교의로 나가는 대 문이었다 . 마지막 대문은 그 도성의 다른 부분으로 향하는 대문이었 는데, 이것은 그 도성으로부터 계곡으로 내려가서 다시 언덕으로 올 라가는 많은 계단들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었다.〉

『밋도트』(I 3) 는 서쪽에 있는 대문 하나만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것은 아마도 요세푸스가 구체적으로 논급한 네 개의 대문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일 것이다. 『 밋도트』는 이 대문이 키포누스Kipo nus 라고 불렀다고 말하는데, 어떤 이들은 이 이름이 유대 지역의 첫 로 마 행정 장관이었던 코포니우스 Co poni us 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라 고 생각한다 (S im ons, Jer usalem, 405 쪽, n. 3 ; 다른 설명을 위해서는 MACKOWSKI 131 쪽 이하를 보라). 바로 위에 주어진 요세푸스의 글 에서 따온 인용문에 의하면 계곡을 넘어 궁정으로 가는 통로는, 추 측컨대, 성전 지대와 크쉬스투스 X y s tu s( 아마 야손에 의하여 지어진 체육관인 듯하며[마카베오하 4:9], 후에 열주가 있는 산책로로 개조됨)를 연결하던 다리 및 상부 도성과 성전 지대를 연결하던 다리와 동일한 것으로서, 요세푸스가 War II 16, 3 §344 와 VI 6, 2 §325 에서 언급하 고 있는 그 다리이댜 다른 두 구절(A n t. XIV 4, 2 §58; War I 7, 2 §143) 에서 요세푸스는 성전 지대를 폼페이우스 시대에 존재하던 도 성과 연결하던 다리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다리는 심지어 헤롯이 성전을 재건하기 이전에도 성전으로 접근하는 방편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다리로 이어진 대문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전 지대의 서쪽에서 가장 중요한 대문이었으며, 그러므로 아마도 『밋도트』가 말하는 키 포누스 문과 동일한 대문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대문이 므로 요세푸스는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이것을 맨 먼저 언급하고 있다. 〈교의로 나가는〉 다론 두 대문은 새로운 북쪽 교외로 접근할 수 있도록 서쪽 울타리 벽의 좀더 북쪽에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대 문은 〈그 도성의 다른 부분으로〉 향하는 대문이었다고 요세푸스는 말한다. 북쪽 교의 및 왕궁이 있는 서쪽 지역과는 구별되게 이 부분 은 그 도성의 남서쪽 지역이었음에 틀림없고, 그러므로 이 마지막 대문은 주된 대문의 남쪽 어디쯤에 있었다 (S im ons, Jer usalem, 424 쪽

이 네 개의 대문들의 다른 가상적 위치는 181 항의 구도 위에 표시되어 있다). 1838 년에 에드워드 로빈슨 Edward Rob i nson 은 서쪽 성전 울타리 벽의 남서쪽 모퉁이로부터 북쪽으로 12 미터 되는 지점에서 그 벽으 로부터 돌출해 옆으로 줄지어 있는 여러 충의 돌을 발견하였다. 사 진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이 돌들은 고대 아치의 일부로 보이며, 이 때부터 이것은 로빈슨의 아치로 알려져 왔다. 이 돌들은 길이가 20 피 트 또는 그 이상이 되고, 두께가 약 5 피트이다 . 이것은 그 위에 놓인 후기의 석조물과는 대조적으로 애초부터 고대의 벽을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벽을 따라 측량해 보면 그 아치의 길이 는 15 미터를 넘었다. 그 아치가 온전하게 남아 있다면 그것의 만곡부 로부터 내려가는 전장(全長)은 12.8 미터 정도였을 것으로 추산된다. 로빈슨은 이 아치가 위에서 인용된 구절들에서 요세푸스가 말하 는 그 다리에 속하는 일부분이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 찰스 워런 Charles Warren 은 이 아치의 단편으로부터 서쪽으로 직선 위에 작 은 기둥들과 계랑(階廊)들을 파내었고, 그 아치의 계산된 전장이 이 르는 지점에서 하나의 교대(橋 臺 )를 발견하였으나 그 너머로는 아치 들이 계속되었다는 증거를 전혀 발견하지 못하였다 . 이제는 현대의 이스라엘인들의 발굴에 의하여 (181 항), 로빈슨의 아치는, 왕의 행각 으로부터 나와서 그 아래에 있는 거리를 가로지르고 칙각으로 돌아 튀로포에온 골짜기로 내려가는 큰 계단을 떠받치고 있었음이 확인 되었다. 거기에는 골짜기를 통하여 헤롯 시대의 상가(商街)가 성전 지대와 접하여 펼쳐져 있었다. 성전 지대의 그 동일한 남서쪽 귀퉁이의 하단부에서 길이가 8 피 트인 돌 하나가 깨어진 채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두 면과 꼭대기 부 분이 다듬어져 있었으며, 그 귀퉁이의 맨 꼭대기 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위에는 히브리어로 새겨진 명각이 있는데, 보존된 부분에

는 〈나팔을 부는 집을 위하여 …… To the house of trumpeting ……> 라고 적혀 있다 . 이 말은 제사장이 안식일의 시작과 끝을 알리기 위 하여 그 위에 서서 나팔을 불던, 성전 울타리 벽의 꼭대기에 있던 장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195 월슨의 아치 성전 지대의 서쪽 울타리 벽에는 그 남서쪽 모퉁이로부터 북쪽으 로 82 미터 떨어진 곳에 바클레이 문 Barcla y 's Ga t e 이 있는데, 이 이 름은 1848 년에 그것을 발견한 미국인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 여기에는 길이가 7.5 미터, 높이가 2 미터를 넘는 거대한 상인방 돌 li n t el 이 있다 (S i mons, Jer usalem, 364쪽). 이 돌이 그것의 일부였던 그 출입로는 지금은 안쪽에서 벽을 쌓아 막혀 있으며 지하로 깊숙이 뻗어 있다 그 뒤로는 통로가 있는데, 지금은 부분적으로밖에 접근할 수 없으나 한때는 틀림없이 성전 지대 안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이 통로의 일부가 〈알-부라크 al-Bura q〉라고 불리는 사원으로 만 들어졌는데, 이 이름은 무함마드가 하늘들을 날아가는 그의 〈밤 여 행〉 (186 항 참고) 때 타고 다니던 알-부라크라는 말을 이 곳에 매어 두었다는 전통적인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다(A. J. Wensin c k, A Handbook of Early Muhammadan Tradit ion [1960], 40쪽). 이 와 같은 관련 때문에 이 대문은 또한 선지자의 문 Ga te of the Prophe t이라고 도 불린댜 이 대문 위에는 〈하람 엣-셰리프〉로 들어가는 정문, 곧 성전 울타리 벽에 있는 오늘날의 출입문이 있는데, 이것은 밥 엘-무 가리베 Bab el-Mug h a ribe h 즉 회교도의 문이라고 불린다. 위치와 관 련성으로 볼 때 바클레이 문은, 십중팔구 위의 인용문 (194 항)에서 요 세푸스가 언급한 네번째 대문, 다시 말해서 〈그 도성의 다른 부분〉 죽 아마도 남서쪽 지역으로 향하는 대문, 그리고 그 곳으로부터 튀

로포에온으로 내려와 거기서 다시 언덕으로 올라가는 계단들이 많 이 있는 그 대문이 었던 것으로 보인다 (S im ons , Jer usalem, 424 쪽). 바클레이 문의 바로 북쪽에는 전에 통곡의 벽 (189 항)이라고 불린 , 고대의 성전 울타리 벽이 뻗어 있고, 그 너머로는 성전 울타리의 남 서쪽 모퉁이로부터 총 100 미터 거리에 윌슨의 아치 Wi lso n's Arch 가 있다. 이 치점의 지표 높이에서 서쪽으로부터 성전 지대로 들어가는 주된 입구가 있다. 이것은 밥 엣 - 살람 Bab es-S alam 즉 평강의 문, 그리고 밥 엣-실실레 Bab es-Sil sil e h 즉 사슬의 문이라고 불리는 이 중의 대문으로서, 후자는 또한 이 곳에 있는 성전 울타리까지 이르 는 동-서 주요 거리의 이름을 제공하기도 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사 슬의 문 거리 Str ee t of the Gate of the Ch ai n 라는 이름이다 사슬의 문 아래의 지하에는, 1864 년에 찰스 윌슨 Charles W il son 에 의하여 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그의 이름으로 불린 고대의 아치가 있 댜 1867 년과 그 이 후에 찰스 워 런 Charles Warren 이 그 아치 와 그와 관련된 다른 지하의 둥근 천장들과 통로들과 방들을 탐색하였다 . 그 는 뒤로포에온 골짜기의 암반이 여기서 사슬의 문 거리의 현재의 높 이보다 80 피트 아래의 깊은 곳에 있다는 것과 윌슨의 아치의 꼭대기 는 그 자체가 그 거리의 높이보다 약 10 피트 아래에 있다는 것을 발 견하였다. 이 아치는 폭이 13 .4미터 죽 43 피트이고, 전체 길이는 로 빈슨의 아치(1 94 항)를 재어서 산출한 전장과 동일한 12.8 미터 즉 42 피 트이 다. 윌슨 (The Recovery of Jer usalem, 13 쪽)은 이 아치 가 통곡의 장소에 있는 벽과 같은 시대의 것으로 판단하였으며, 이것은 그 아 치가 헤롯 시대의 성전 지대의 일부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 아치가 너무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워런(같은 책, 64 쪽) 온 그것을 제 5 또는 제 6 세기의 것으로 생각하는 편이었다. 이 아치 와 연관된 하나의 커다란 방이 있었는데, 자신이 비밀 공제 조합 Mason ic order 의 일원이었던 워런이 머소닉 홀 Maso ni c Hall 이라고

부른 이 방을 그는 어쩌면 성전 울타리의 벽만큼이나 오래된 것으로 생각하였다(같은 책, 68 쪽) . 이 방은 잘 결합된 사각형의 돌로 건축되 었으며, 각 귀퉁이에는 주두가 있는 벽기둥들pil as t ers( 벽면에서 불쑥 나오게 만든 장식용 기둥들__역주)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북동쪽 모퉁이에 있는 것은 매우 잘 보존되어 있다. 워런의 작업 이후로 윌슨의 아치에 대한 첫번째 과학적 조사는 윌 리엄 F. 스타인스프링 Wi lliam F. S ti nes pri n g에 의하여 1963 년, 1%5 년, 그리고 1966 년에 이루어졌다. 그는 전적으로 초벌 새김을 하지 아니 한 돌들로 건축된 이 아치가 애초부터 성전 지대의 고대의 울타리 벽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었음을 발견하였다 . 그러므로 그것은 아마 도 헤롯에 의하여 건축되었을 것이며, 요세푸스(위의 194 항 참고)가 크쉬스투스 X y s tu s 및 궁정을 포함하는 상부 도성과 성전 지대를 연 결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다리의 일부였을 것이다. 요세푸스는 또한 폼페이우스의 시대에 이 곳에 있던 다리를 언급하고 있으므로, 헤롯 의 다리는 아마도 바로 이 동일한 위치에 있던 마카베오 시대의 작 은 다리를 대치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머소닉 홀 Maso ni c Hall 에 관해서는 , 이 큰 방이 일찍이 헬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어 쩌면 안티오쿠스 IV 세 때에 이미 존재했을 것이라는 것이 예비적인 견해이댜 사진에는 그 아치의 하단부가 보이는데, 이것은 북쪽을 향하여 바 라본 모양이다. 아치의 오른쪽 만곡부에는 직사각형의 톱니 모양들 이 있는데, 이것은 이 아치가 건설될 때 목재 지주(支柱)들을 잡고 있던 것이었을 것이다. 먼 쪽의 끝은 수조의 벽으로 막혀 있어서 총 너비 43 피트 중 'l7피트만을 볼 수가 있다. 오른쪽에는 워런이 판 작 은 기둥의 구멍이 있다 . 현재의 견해로는 헤롯 시대의 윌슨의 아치 는 파괴되었고, 그 후에 아마도 모슬렘교인들에 의하여 재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BAR 12.6 [Nov/D e c 1986], 31 쪽). 오늘날에는 그 전체

가 깨끗이 치워져서 그 큰 아치는 유대인의 간단한 기도실을 위한 장소로 제공되고 있다 . 바닥에 있는 두 개의 수갱은 멀리 아래 쪽으 로 성전 울타리 벽의 기초를 내려다볼 수 있게 해 준다. 196 〈불탄 집〉의 유적에서 1969 년과 그 이 후로 나만 아바 가드 Nahman A vig ad 와 메 이 르 벤­ 도브 Me ir Ben - Dov 의 지휘 아래 유대인 구역에 대한 이스라엘인의 발굴이 진행되었다. 이 지역은 성전 지대의 서벽 Weste r n Wall 으로 부터 튀로포에온 골짜기를 가로질러 구 도성의 남동쪽에 있는 지역 으로서, 이 곳에서 예루살렘의 파괴 (70) 이전 및 그 동안의 〈제 2 성 전〉 시대로부터 오는 많은 폐가( 廢家 )들의 혼적이 발견되었다. 이것 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헤롯의 주택 Herod ian Res i dence 〉 과 〈궁정 저 택 Palati al Mans i on 〉 (215 항) , 그리 고 〈불탄 집 Burnt House> 이다. 〈불탄 집〉의 유적은 사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그 집의 지하 실 표면을 보여 주는데, 그 밖에도 입구의 홀과 네 개의 방과 부엌 , 그리고 물웅덩이가 있다. 이 집은 카트로스 Ka thr os 가문의 일원에 게 속하는 것이었는데, 이 가문에서 대제사장들이 선출되었다 . 로마 인의 정복 때에 그 건물을 파괴한 화재가 있었음을 말해 주는 명백 한 중거들을 아직도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유대인 구역의 최남단에서 아비가드 Av ig ad 와 벤-도브 Ben-Dov 는 하나의 매우 큰 바실리카에서 남겨진 빈약하나마 육중한 유적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의 남동쪽 귀퉁이가 구 도성의 남쪽에 있는 현재 의 터키식 성벽 외부로 돌출해 있다. 이 교회에 대하여 짐작할 수 있는 구도는 회중석과 두 개의 측랑과 동쪽에 세 개의 후진을 가진 것이었다. 전체의 길이가 약 116 미터나 되면서 서쪽에 있는 두 벽의 부분들은 배랑과 입구를 조금 후방으로 카르도 막시무스의 선상에

다 표시하고 있댜 분명히 이 교회는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 Madaba Mosai c Ma p」에 서 예루살렘과 같은 위치 (229 항)에 나타난 큰 바실리카와 일치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서로 연결된 건물들의 한 복합체가 있었고, 지하 의 둥근 천장으로 된 방들은 언덕이 경사진 부분을 떠받쳐 주었다. 그 지하실들에 부착된 한 헬라어 명각에는 하나의 큰 십자가가 곁들 여 있으며, 이 건물이 유스티니아누스J us tini an 황제의 작품이라고 말하면서 그 지하실이 만들어진 연대를 밝혀 주고 있는데, 그 연대 는 아마도 549/550 년에 해당하는 것 같다. 이 교회가 그로부터 6 년 전에 봉헌된 유스티니아누스의 교회요, 프로코피우스 Proco pi us(560) 가 그의 기록을 시작할 때 다음과 같은 말로써 장황하게 기록한 (Buil d in g s V 6) 그 교회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이 없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그(유스티니아누스)는 하나님의 어머니 (The o­ t okos) 에게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당을 봉헌하였다. 이 것은 그 곳 주민들에 의하여 ‘새 교회’라고 불린다 . 〉 그러므로 그 이름을 완전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어머니 성 마 리 아의 새 교회 New Church of St. Ma ry, Moth e r of God> 인 그 교회 는 보통 〈네아 Nea 〉(헬라어로 〈새로운〉이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약칭 되었다. 그 교회는 614 년에 페르시아인들에 의하여 불에 탔으며(아래 의 231 항을 보라), 제 8 세기에 지진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Ova di ah, Corpu s Supp le mentu m, 222 쪽, no. 24). 197 성전 지대의 북서쪽 모퉁이를 향한 조망 성전 지대의 북쪽에 관하여, 우리는 요세푸스 (War II 19, 5 §537; VI 4, 1 §222) 가 그 곳에 하나의 대문이 있었다고 말한 것과 『밋도 트』(I 3) 가 그 북쪽 정문의 이름이 그 의미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타

디 문 Ta di Ga te이라고 한 것을 보았다 (190 항). 그와 같은 대문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으로는 고대 건축의 어떤 유적도 남은 것이 없으 므로, 다른 증거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요세푸스를 제의하고는 예 루살렘의 지형학에 대하여 가장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은 느 헤미야이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제 20 년에 성벽을 재건하기 위 하여 예루살렘으로 왔고(느 2:1), 이 왕이 아닥사스다 F1l Arta- xerxes I 였다고 가정한다면 (FLAP 238쪽), 그 연대는 B.C. 445/444 년 이었댜 느헤미야 3 장의 재건 이야기는 양(羊門)에서 시작하여 구 곳에서 끝난다. 우리가 느헤미야와 함께 한 바퀴 돌면서 그 끝 무렵에 이룰 때, 우리는 분명히 오벨 (3: '2:7)로부터 북쪽으로 와서 동문 (3:29) 과 만 나고, 그 다음에 는 RSV 에 Muste r Gate (집 합문)로 번 역 된 함밉 갓 문 Ha mmiph kad Ga te과 그 다음에 〈성 모퉁이 누〉 (3:31) 에 이 르게 된다. 이 차례에 언급된 〈모퉁이〉는 그 성벽의 북동쪽 모서리임에 틀림없 다. 그 후에 명시된 다음 지점은 양문 (3:32) 이다. 양문 너머로, 즉 서쪽으로 더 멀리, 느헤미야의 기술 가운데서 우 리는 〈함메아 망대(일백 망대 Tower of the Hundred) 에서부터 하나 넬 망대까지〉 (3:1) 이르고, 그 다음에 어문(魚門) (3:3) 에 이른다. 마찬 가지로 느헤미야 12:39 에서는 역순으로, 죽 서쪽에서 동쪽으로, 어문 과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일백 망대)와 양문의 순서로 되어 있 다. 이 차례는 어문이 북쪽 벽에 있었음을 강하게 시사하며, 이것은 적어도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 있던 물고기 상인들이 북방의 도성인 두로에서 온 사람들이었던 사실(느 13:16) 과 맞아 떨어진다. 그리하 여 양문은 성벽의 북동쪽 귀퉁이와 북쪽 성벽을 따라서 좀더 서쪽으 로 나간 어떤 지점들과의 사이에 있었으며, 따라서 그것은 필시 북 동쪽 귀퉁이로부터 단지 조금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런데 성전 울타리의 북쪽에 있던 타디 문 Ta di Ga te과 이 양문 사이에는

아마도 어떤 일치점이 있었던 것 같다 . 하여튼 계속 이어진 이 전통 으로 예루살렘의 양( 羊 ) 시장은 아직도 구 도성의 북동쪽 모퉁이에 서 서고 있다 (MACKOWSKI 54 쪽 이하). 동일한 추리로 함메아 망대와 하나넬 망대는 십중팔구 성전 지대 의 북서쪽 모퉁이 근처의 어디쯤에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적어도 이 이름들 중의 첫번째 것은 아마도 군사적 관련을 내포하고 있는 듯하며, 그 두 망대가 성전을 내려다보는 성채, 곧 느헤미야 2:8 이 〈전( 殿 )에 속한 영문〉(〈t he castl e [i1-,.,~] wh ich app ertaine th to the house> [ ASV], 즉 [ RSV] )이라고 부르는 요새의 동쪽과 서쪽 망대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인 추측이다 (Sim o ns, Jer usalem, 429 쪽, n. 2). 우리 가 이 미 고찰한 바와 같이 (181 항), 이 요새는 바리스 (B ari s, 히브리어 i1-,.,그 [b fr ah, 비라]에서 옴)라고 불린 하스몬인의 성채로 대치되었고, 그 후에는 저 유명한 헤롯의 안토니아 An t o ni a 로 대치된 것이 확실하다(J ose p hus, Ant. XV 11, 4 §§403, 409). 성전 지대의 북서쪽 모퉁이에는 어떻게 지세(地勢)가 안토니아가 서 있던 언덕을 향하여 그 방향으로 올라갔는지에 대한 증거가 아직 도 있댜 사진은 이 지대의 그 모퉁이를 향하여 본 것인데, 북서쪽 맨 귀퉁 이에 있는 첨탑(엘-가와니메 el-Gaw anim eh) 과 그것의 동쪽에 있는 모슬렘 오마리야 학교 Mus lim Oma riyya h School( 초기의 터키 병영이 있던 자리에)를 보여 주고 있다. 그 지대에는 자연 반석이 지표로 솟 아나와 귀통이 쪽으로 올라가는 경사를 이루는 한편, 수직 비탈이 그 안에서 첨탑의 동쪽과 남쪽으로 깎여져 있다. 안토니아에 관해서 는 뒤에 더 이야기할 것이다 (215 항 이하).

198 다윗 망대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173 항) 예루살렘의 남서쪽 언덕은 그 도성의 언덕들 중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그것을 가로지르는 골짜기 에 의하여 북동쪽 언덕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남서쪽 언덕의 북서 쪽 모퉁이는 남서쪽 언덕과 북서쪽 언덕 사이를 가로지르는 골짜기 에 의하여 만들어진 등성이를 굽어보는 지점으로서 분명히 전략적 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요세푸스가 헤롯 대왕이 세 개의 옹대 한 망대를 세웠다고 하는 (War V 4, 3 §§161- 17 1) 높은 언덕의 꼭대 기에 관하여 말할 때 (War V 4, 4 §173), 그가 지칭하는 곳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 사방을 굽어보는 높은 지점이다. 한 망대는 헤롯의 친구의 이름을 따서 힙피쿠스Hippi cus 라고 불 렸는데, 이 사람에 대해서는 달리 언급된 적이 없으나 이 무렵에 죽 은 것은 확실하다 . 이 망대는 사각형으로 된 기초를 가졌고, 이 기초 의 각 면은 25 규빗이었으며, 30 규빗 높이까지 줄곧 견고하게 축조되 어 있었다 . 이 위에는 수조, 이중 지붕으로 된 방, 그리고 소탑(小塔) 들과 흉장(胸 腦 )들이 있어서 망대 전체의 높이가 80 규빗이나 되었다. 둘째 망대는 헤롯의 동생의 이름을 따서 파사엘 Phasael 이라 칭해 졌는데, 그는 파르티 아인들 P arthi ans 에 게 포로로 잡혀 가서 자결하였 다 (War I 13, 10 §Z71). 이 망대는 길이와 폭이 40 규빗씩이었고, 또한 그것의 견고한 기초의 높이도 40 규빗이었다. 이 위에는 호화로운 아 파트들이 있었고, 망대 전체는 궁전과 같은 외양을 띠고 있었다. 그 전 체 높이는 약 90 규빗이었으며, 요세푸스는 그것을 알렉산드리아에 ' 있 는 파로스 Pharos 망대와 비교하기도 하였다 (War IV 10, 5 §613 참고). 세번째 망대는 헤롯이 사형에 처한 애처 마리암메 M ari arnme 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War I 22, 5 §§443-444 ; Ant. XV 7, 4 이하 §§218 이하) . 이 망대는 길이와 폭이 20 규빗에 불과했고 높이는 5.5규

빗이었으나, 그것의 거주 구역 안에는 가장 사치스럽게 설비된 부분 이 있었다. 요세푸스는 말하기를 (War V 4, 4 §§174-175), 이 망대의 돌들은 흰 대리석을 자른 것이었고, 매 토막은 길이가 20 규빗, 폭이 10 규빗, 그리고 깊이가 5 규빗이었으며, 모두가 서로 너무나 잘 연결 되어 있어서 각 망대가 마치 하나의 천연의 바위처럼 보였다고 한다. 요세푸스는 이 세 망대에 관하여 기술하였는데 , 우리가 위에서 인 용한 정보는 그의 기술에서 발췌한 것이며, 또한 프세피누스 Pse­ phi nus 라고 불리는 망대에 관한 언급 (War V 4, 3 §159) 에서도 인용 하였다 . 이 망대는 〈제 3 성벽〉 (201 항 참고)의 북서쪽 귀퉁이에 있었 으므로, 아마도 그는 그 망대들을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열거하여 힙피쿠스, 파사엘, 그리고 마리암메의 순서로 말하고 있다. 그는 또 한 그 세 개의 망대 모두는 그가 〈옛 성벽〉이라고 부르는 성벽 속에 애 초부터 건조되 었다고 말한다 (War V §§161, 173). 헤롯은 이 망대들의 남쪽에 헤롯은 그의 궁전을 건축하였다 (War V 4, 4 §§176-183). 이것은 그 자체가 가진 벽 안으로 울타리쳐져 있 었고 , 연회장과 내빈실, 은둔처, 그리고 정원 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 리하여 헤롯은 우리가 이제까지 기술한 두 개의 궁전-요새들로써 예루살렘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을 확보하였으니, 그 하나는 도성을 내려다보는 이 곳 언덕 위에 서로 인접한 세 개의 망대를 가진 그의 궁전이요 , 다른 하나는 성전 지대를 굽어보며 감시하는 안토니아 An toni a 이 다 (War V 5, 8 §245 ; Ant. XV 8, 5 §292). 티투스 T itu s 가 예루살렘을 취했을 때 (AD. 70), 그는 안토니아를 파괴해 버렸으나 (War VI 2, 1 §93), 망대들 중에서 가장 높은 것들 곧 파사엘과 힙피쿠스와 마리암메(요세푸스는 여기서 망대의 이름들 을 그것의 높이의 순서대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 그 도성을 에워싸고 있는 벽의 일부는 그대로 서 있도록 남겨 두었다 (War VII 1, 1 §§1-2). 망대들은 로마인들이 이겨낸 그 끔찍스런 방어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후손들에게 보여 줘야 했고, 벽은 그 곳에 주둔할 수 비대, 죽 프레텐시스 Fre t ens i s 라고 불린 제 X 군단을 위한 진영을 제 공해야 했다 (131 항 참고). 로마인들뿐만 아니라 아랍인들 , 십자군, 그리고 마물루크 Mam­ luke( 중세 이집트의 노예 기병-역주) 및 터키인 총독들도 헤롯의 궁전 터를 예루살렘 정부의 소재지로 계속해서 사용하였으며, 그 장 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도성의 성채로 알려져 있다 . 성채의 발굴 작업 은 1934 년부터 1948 년까지 C. N. 존스 C. N. J ohns 에 의 하여 수 행되었다. 현재 서 있는 대로의 성(城)은 주로 제 14 세기의 마물루크 의 작품이지만, 그것의 구도는 제 12 세기의 십자군 성의 구도를 따르 고 있다. 이 성에 있는 여러 개의 망대들 가운데서 가장 웅장한 것 은 북동쪽 귀퉁이에 있는 것으로, 이것은 적어도 십자군 시대 이래 다윗 망대 Tower of Da vi d 로 알려 져 온 것 이 다 . 사실 아르쿨프 (670) 는 이미 그것에 인접한 대문을 다윗 문 Ga t e of Da vi d 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GEYER 224, 242 쪽 ; LPPTS III-A, 2, 19 쪽 ; CCSL CLXXV, 18.5 , l

왜냐하면 가장 큰 것들의 무게가 10 톤쯤이고 평균 무게는 5 톤 정도 가 되기 때문이다 . 발굴 작업에 의하여 나타난 바와 같이 다윗 망대의 하부 구조는 모두 16 개의 옆으로 줄지은 층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층들의 전체 높이는 19 . 7 미터인데, 이것은 요세푸스가 파사엘 망대의 견고한 기초 의 높이라고 말한 40 규빗, 죽 21 미터보다 단지 조금 낮은 높이이다. 다윗 망대의 기초를 측량하면 22Xl7 미터가 되는데, 이것은 또한 요세푸스가 파사엘의 길이와 폭으로 제시한 40 규빗이라는 동일한 수 치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일치점들로 미루어볼 때, 다윗 망대의 하부 구조는 사실상 파사엘 망대의 남아 있는 기초 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힙피쿠스는 그것의 서쪽에, 아마도 현재 의 욥바 문Jaff a Gate 가까이에 서 있었고, 마리암메는 동쪽에 있었 을 것임에 틀림없다. 발굴 과정에서 존스는 다윗 망대의 기초가 하 스몬인 시대의 것인 더욱 오래된 고대의 벽 속에 박혀 있음을 발견 하였는데, 이것은 이 세 개의 망대 모두가 〈옛 벽〉 속에 건설되었다 고 한 요세푸스의 진술과 일치하는 것이다. 199 예루살렘 제 1 성벽의 서쪽 및 남쪽 부분의 구도 앞에서 있은 토론 (180 항 이하)은 성전 지대와 그에 인접한 안토니 아, 그리고 그 근처에 위치한 세 개의 큰 망대, 즉 힙피쿠스, 파사엘, 마리암메를 가진 헤롯의 궁전 등에 관하여 긍정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성전과 안토니아 및 궁전에 대하여 요세푸스는 이렇게 기록 하였다 (War V 5, 8 §245). 〈만약 성전이 도성을 굽어보는 요새처럼 놓여 있었고, 안토니아가 성전을 내려다보았으며, 그 초소에 거하는 자들이 이 세 곳 모두를 지키는 파수꾼들이었다고 한다면, 그 위쪽 동네는 그 자체의 요새 一一헤롯의 궁전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지점들은 또한 이 도성의 성벽들에 대하여 요세푸스가 말하는 (War V 4, 1-3 §§136 이하) 바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참고 사항들을 제공 하고 있다. 요세푸스의 시대에는 세 개의 성벽이 있었다. 요세푸스는 말하기 를 (War V 4, 2 §§142-145), 그 셋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d px Qt ov 은 다윗과 솔로몬, 그리고 그들 뒤의 왕들에 의하여 건축되었다. 이 제 1 성벽—一현재 보통 이렇게 일컬어짐__이 뻗어 나간 첫 방향은 요 세푸스에 의하여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 〈힙피쿠스라고 불리는 망대 곁 곧 북쪽에서 시작하여 그것은 크쉬스투스로 뻗어 있고, 그 다음 에는 성전의 서쪽 행각에서 끝나는 회의실과 연결되어 있다.〉 힙피쿠스 망대가 아마도 현재의 욥바 문 근처에 서 있었다는 사실 과 그에 인접한 파사엘 망대는 아마도 현재의 다윗 망대일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다 (198 항). 우리는 또한 그 세 망대, 곧 힙피쿠스와 파사엘과 마리암메가 헤롯 왕에 의하여 〈옛 성벽〉 속에 건립되었으며, 이 〈옛 성벽〉은 분명히 제 1 성벽과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과 하스몬인 시대의 성벽 부분들이 실제로 다윗 망대의 기초에 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요세푸스의 진술 (War V 4, 3 §§161, 173) 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실상 요세푸스가 기술 한 제 1 성벽의 시작 지점을 밝혀 주는 유리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 다. 크쉬스투스는 체육관이었고, 후에는 다리에 의하여 성전 지대와 연결된 산책로가 되었다 (War II 16, 3 §344). 그러므로 그것은 성전 지대의 서쪽에 있는 주된 대문으로부터 튀로포에온의 맞은편 서쪽 어느 곳에 놓여 있었으며, 후자(성전 지대의 서쪽에 있는 주된 대문)는 아마도 현재의 사슬문이 있는 곳 어간에 있었을 것이다 (194 항 이하 참고). 회의실 counc il -chamber(OouM) 은 앞에서는 언급되지 아니한 것으 로, 산헤드린의 집회 장소였다. 그리고 미쉬나에서는 보통 깎은 돌의

방 Chamber of Hewn S t one 이라고 번역되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 나, 아마도 오히려 크쉬스투스의 곁에 있는 방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SHJ P Vennes/M illar II. 223 쪽 이하). 『밋도트』 V 4 는 이 방이 성전 뜰 안의 남쪽에 있었다고 하지만, 요세푸스의 기술은 오히려 그것이 크쉬스투스와 성전 지대의 울타리 벽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말하고 있다. 성전의 서쪽 행각은 물론 성전 지대의 서쪽 측 면을 따라서 만들어진 열주로 된 현관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제 1 성 벽의 진로에 대해 상당히 분명한 암시를 주고 있다. 제 1 성벽은 힙피쿠스 죽 현재의 욥바 문의 근처에서 시작하여 남 서쪽 언덕의 북쪽 모서리를 따라 동쪽으로 뻗어 있어, 가로지르는 골짜기와 평행을 이루고, 또한 현재의 다윗 거리와 사슬문 거리 Str ee t of the Gate of the Cha in(T ari q Bab es-S il si la [타리 크 밥 엣­ 실실라])의 남쪽으로 멀지 않는 곳에서 이것들과 평행을 이루어, 크 쉬스투스와 회의실을 지나면서 그것들을 둘러싼 후, 윌슨의 아치와 현재의 사슬문이 있는 지점에서 성전 지대의 서쪽 울타리 벽과 서쪽 행각에 다다랐다. 그리하여 성벽의 전체 길이가 약 500 미터나 되었다. 예루살렘의 북쪽에 있던 제 1 성벽이 이와 같이 동서로 뻗어 있던 부분에 대한 실제적인 유적이 구 도성의 유대인 구역에서 나만 아비 가드 Nahman A vig ad 가 수행한 발굴 (196 항)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Av iga d, Dis c overi ng ]erusalem, 50-54, 70 쪽 이 하, 32 쪽 이 하의 지 도 8, 그리 고 50 쪽의 구도 30). 이 장소는 성 전 지 대 의 서 벽 Weste rn Wall 의 서쪽으로 약 업 5 미터 되는 곳으로, 사슬문 거리의 남쪽으로 약 35 미터 되는 지점(지도 8 에서 W 로 표시됨), 죽 유대인 구역 거리 에 이르기 전에 조금 떨어진 곳에(더욱 정확하게는 쇼네이 할라카 거 리 Shonei Halakhah S tr ee t와 펠루가트 하코탈 거 리 Pelug a t Hakota l S tr ee t의 모퉁이에) 있었다. 이 곳에는 두 개의 웅장한 돌덩어리 구 조물이 현재의 거리 표면

으로부터 약 15 미터 아래의 지하 지역에 노출된 채로 보존되어 있 다. 그 중의 하나는 하스몬 시대의 것으로 연대가 매겨진 사방 9 미 터의 탑인데, 이것은 B.C. 8-7 세기 이스라엘인의 탑의 북동쪽 모퉁 이와 마주 보게 세워져 있으며, 그 벽들은 두께가 4-5 미터이고, 8 미 터 높이까지 우뚝 솟아 있다. 이스라엘의 탑의 밑바닥에는 탄화된 나무와 재가 있었고, 또한 이스라엘 시대 이 나라에 혼히 있던 형태 의 철 화살촉 네 개와 제 7 세기 말엽 이래로 의국 군대들이 사용하던 형태의 놋 화살촉 한 개가 있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B.C. 586 년 에 도성을 불사르고 성벽을 무터뜨린 바벨론 사람들에 의하여 예루 살렘이 정복된 사실(왕하 25:9-10) 에 대한 증거이다. 이러므로 이 선 상에 있던 성벽은, 요세푸스가 말한 대로, 참으로 〈오래된〉 것이었으 며, 사백 년 후에 하스몬인들에 의하여 그 동일한 선상에 재건된 것 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동쪽으로는 성전의 서벽으로부터, 그리고 서 쪽으로는 헤롯의 망대들에 이르는 제 1 성벽, 즉 예루살렘의 북쪽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워진 성벽의 방향이었다. 이제 우리는 요세푸스 가 제 1 성벽의 계속되는 행로에 대하여 기술한 것 가운데 힙피쿠스 망대가 있는 지점으로부터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그 동일한 지점(힙피쿠스 망대)에서 시작하여 다른 방향, 곧 서쪽으 로 n p o<; 660 1. v( 즉 서쪽을 향하여), 그것은 베트소 Be th so(Bn8cr lil)라고 불 리는 장소를 지나 엣세네인들의 문을 향하여 th v 'E面 nv&v 前 Anv 내려갔 으며, 그 다음에는 남쪽으로 n p bc vb t 0V( 죽 남쪽을 향하여) 실로암의 샘 위로t> ne p 돌아갔다. 그 곳으로부터 그것은 다시 동쪽으로 n p bc dvat 0 Anv (죽 동쪽을 향하여) 솔로몬 못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그들이 오플라스 Oph las(O ph el, 173 항 참고)라고 부르는 한 장소를 지난 다음에 마침내 성전의 동쪽 행각과 연결되었다.

전반적으로 이 기술은, 그 성벽이 서쪽으로 향하는 곳에서는 예루 살렘 서쪽에 있는 힌놈 골짜기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남쪽으로 뻗어 갔으며, 그것이 남쪽으로 향하는 곳에서는 그 동일한 골짜기가 도성 의 남쪽에서 동쪽으로 휘어진 그대로 그 골짜기를 따라서 계속 뻗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성벽의 남북으로 뻗어 있던 부분에 관해서는 그 성벽의 부분들이 1934-1948 년에 존스 C . N. J ohns 에 의하여, 1968- 1969 년에는 롯 아미란 Ru th Amir an 과 에이탄 A E itan에 의하여, 욥 바 문 근처에 있는 성채의 안뜰에서 이 성벽의 행로를 따라 발견되 었다 여기서는 또한 초기 헬라 시대와 하스몬 시대, 그리고 헤롯 대 왕 때의 건축 단계들이 식별되었다(Amir an and Eit an in Jer usalem Revealed, 52-54 쪽). 1971 년과 1975 - 1976 년에는 단 바하트 Dan Baha t와 마겐 브로쉬 Mage n Bros hi에 의 하여 그 성 채 의 남쪽에 있는 아르메 니 아 정 원 Armen ian Garden 에서 그 성벽의 부분들이 탐색되었는데, 여기서는 그 동일한 성벽이 길게 계속된 단편들이 발견되었다. 이것 역시 하 스몬 시대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제 16 세기에 술레이만 대제에 의 하여 세워진 바 있는 구 도성의 현재의 서쪽 성벽을 따라서 곧바로 뻗어 있다 (Baha t and Broshi in Jer usalem Revealed, 5.5쪽 이하 ; Broshi , Alon g Jer usalem's Walls, in BA 40 [1CJ 77 ], 11-17 쪽 ; Bahat, Plans, 20bc, 21b ; AJ PA 2-5, 2-6). 실로암 못과 솔로몬 못에 관련하 여 요세푸스가 기술한 성벽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는 위에서 이미 토의하였다 (179 항). 현 상황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성벽과 베트소 Be th so 및 엣세네인들의 문 Ga t e of the Essenes 과의 연관성 이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173 항) 적어도 초기 기독교 시대로부터 예 루살렘의 남서쪽 언덕 전체는 시온 산이 있는 위치로 간주되어 왔다 (원래 시온 산은 남동쪽 언덕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이 이름은 때때

로 시온 문 지대의 현재 성벽 바깥쪽에 놓여 있는 언덕 부분만을 특 별히 지칭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B aha t , Plans, '2:7, 28, 35b). 그 산의 서쪽과 남쪽에는 힌놈 골짜기가 있고, 그 동쪽에는 튀로포에온 골짜 기가 있다. 요세푸스의 기술에 따르면 제 1 성벽이 분명히 이 지대를 에워싸고 있는데, 이것은 이제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어 있다 . 여기서 우리의 죽각적인 관심을 끄는 참고 사항은 그 지대의 남서쪽에 있는 성 지 연 구소 The Instit ute of Holy Land Stu dies ( 예 전 에 는 Bis h op Gobat School) 와 남쪽에 있는 개신교 공동 묘지 이 다. 1 얽 4 년에 당시 새로 형성된 팔레스타인 탐사 기금의 위촉을 받아 이 지대를 발굴하던 헨리 모즐리는 직각으로 자른 바위와 많은 분량 의 다듬어진 큰 돌로 만든 긴 내벽을 찾아내었는데(이것은 지금 성지 연구소 근처에 남아 있는 성벽 안에 보존되어 있음), 이 모든 것은 아 마도 요세푸스가 기술한 바 있는 제 1 성벽으로부터 온 것으로 보인 다. 이 작업을 계속하면서 볼리스 F . J. B li ss 는 1895 년에 성벽이 비교 적 길게 뻗어 있는 부분과 망대(지금도 하티바트 예루샬라임 Hati va t Yerushala yim이라는 새 도로 곁에 보임), 폭이 8 피트이고 오랜 세월 동안 사용되었음을 보여 주는 네 개의 충으로 겹쳐 놓인 문턱을 가 진 대문, 그리고 북동쪽으로 향하는 포장된 도로 둥울 발견했음을 보고하였다(A ]PA 2-7). 1895 년에 발견된 이 자료들이 후에 흙더미 에 덮이기는 하였으나 그 대문은 바르질 픽스너 Bargi l Pixn er 에 의 하여 그 위치가 확인되고 또한 다시 발굴되었다. 그 장소는 개신교 공동 묘지에 있는 저 유명한 애굽학자 플린더스 페트리 w. R. Fli nd ers Pe tri e 의 무덤 에 서 남동쪽으로 불과 몇 야드밖에 안 되 는 곳 이다 (MACKOWSKI 46, 62 쪽 이하). 이것은 엣세네인들의 문이었음 이 틀림없고, 성벽에 그와 같은 대문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봐서, 여 기 그 벽의 내부에 엣세네인들의 〈진영〉 (mno, 마하네)이 있었던 사 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다.

어떤 집단 정착지에 그 곳으로 향하는 대문이 있을 때, 그 대문이 그 집단 정착자의 이름을 따서 일컬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비슷한 예를 들자면 성전 지대 근처에 있는 현재의 분문( 冀 門)은 예전에는 모슬렘 교인들로부터 밥 엘 마그리 베 Bab el M agri beh 로 불렀다. 이 것은 그 곳에 정착했던 서아프리카의 마그렙 Ma g hreb 인들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MEISTERMANN 213 쪽 ; Bahat, Plans, 37b). 베트소에 관해서는, 이 말이 〈배설물의 집〉 , 즉 〈변소〉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용어(마 nx n.,:::i, bet - $6' 哉 베트-초아)를 헬라어로 옮긴 것으로 인정 되고 있으며(초아 $oah 의 용례를 위해서는 에스겔 4:12 을 보고, 변소를 진 밖에 설 치할 것을 말하는 요구에 대해서는 신명기 23 : 12 - 14 을 보라), 이것은 성벽 바깥에 있던 엣세네인들의 공동 변소 구역을 지칭하는 것 이 었음이 틀림 없다 (G. Dalman, Jer usalem und sein Ge/an .de [Gi. iters loh : Bert els mann, 1930], 86 쪽 이하). 쿰란에서 나온 「성전 두 루마리」에는 요세푸스가 말한 베트소와 동일한 목적을 가진 구역에 대 한 언급이 있는데 (Ya din, The Temp le Scroll, 1, 294-304 쪽 ; 2, 199 쪽 이하 ; 3, pl. 61, col. XLVI, l ine s 13-16), r 성전 두루마리』는 이 구 역 이 도성 밖에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Ya din, The Temp le Scroll, 1, 294 - 304쪽). 또한 쿰란에서 나온 r 구리 두루마리 Cop per Scroll 」에 도 소(氏 ID, So') 라는 비슷한 이름으로 불리는 한 구역이 언급되어 있 는데, 이것은 아마도 예루살렘의 남서쪽 모퉁이에서 가까운 어느 곳, 그리고 성벽 바깥의 어느 지점이었다(J ohn Marco Alleg ro, The Treasure of the Copp e r Scroll [Garden Cit y, NY ; Doubleday, 1960], 46 쪽 이하, col. VIII, 37-38 ; 92 쪽 ; 155 쪽 이하, n. 178 ; 177 쪽, 그림 9). 엣세네인들의 문이 있는 지역의 성벽 안팎에는 또한 예식을 위한 목욕탕들 m i kvao th 과 수조들이 있다. 현재의 구도에는 주된 특징물 들의 이름이 나타나 있고, 그에 더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문자 로 표시되어 있다. (a) 배수관과 하수구, (b) 목욕탕들, (c) 수조들,

(d) 대문 앞의 내벽과 외벽, (e) 소의 묵히고 있는 부분, (f) 소의 물 댄 부분, (g) 게힌놈 골짜기로 향하는 엣세네인의 보도, (h) 북서쪽 방향으로 베트소로 가는 보도, (i) 수로, (T.i ) 망대 I. A JP A 에 있는 구도에서 2-7 번은 현재 토의 중인 성벽과 망대와 대문을 표시하고 있다. 200 예루살렘 의 카르도 막시 무스 예루살렘을 두르는 세 개의 성벽들 가운데 두번째 것(제 2 성벽)에 관해서 요세푸스는 단 한 문장으로 기술하고 있다 (War V 4, 2 §146). 〈제 2 성벽은 그들이 겐나트 Genna th라고 부른, 제 1 성벽에 있는 대 문으로부터 시작하였으며, 그 성읍의 북쪽 지역만을 에워싸면서 안 토니아에까지 올라갔다.〉 조금 후에 (War V 4, 3 §158) 그는 이 〈중간 성벽〉 (그가 여기서 그 성벽을 일컫는 바대로)이 14 개의 망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은 옛 성벽에 60 개, 제 3 성벽에 90 개가 있었던 것과 비교를 이룬다고 진술 하였다. 예루살렘의 〈오직〉 한 구역만이 제 2 성벽으로 에워싸였다고 말한 것과 그 안에 비교적 적은 수의 망대들을 열거한 것은 제 2 성 벽의 길이가 비교적 짧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누가 제 2 성벽을 쌓았는지 곧 말하지 않고 있지만, 그것이 제 1 성벽에 있는 대문으로부터 시작했으므로 제 1 성벽보다는 늦게 건립된 것이 확실 하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41 년 경에 아그립바 왕 (201 항을 보라)에 의하여 건립된 제 3 성벽보다는 일찍 건립된 것이 확실하며, 제 1 성 벽의 후대의 형태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하스몬인들이 건립한 것일 것 이 다 (M. Av i-Y onah in Jer u saJ,em Revealed, 11 쪽). 아마도 이 성 벽과 제 1 성벽은 율리우스 캐사르가 B.C. 44 년에 그것의 복원을 허 락하는 칙서를 내린 바 있는 요새들을 구성하였다 CAn t. XIV 10, 5

§200). 어쨌든 이 두 성벽은 예수의 시대에 존재하고 있었음에 틀림 없다. 겐나트라고 불린 대문은 요세푸스가 다른 곳에서는 언급하지 않 고 있으나 , 그것이 제 1 성벽에 있었으며, 그것에서 시작된 제 2 성벽 이 안토니아에까지 올라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도 성의 북쪽에 있던 제 1 성벽의 동서로 뻗어 있는 부분의 어디쯤에, 죽 힙피쿠스와 성전 지대 사이에 있는 성벽으로부터 대강 일직선이 되는 어디쯤에 있었음이 틀림없다. 요세푸스는 다른 곳에서 제 1 성 벽과 제 3 성벽이 모두 힙피쿠스 망대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므로, 제 2 성벽이 힙피쿠스나 파사엘이나 마리암메에서, 또는 그 근처에서 시작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럴 경우에 그는 분명히 그 웅 대하고도 자주 언급되는 망대들 중의 하나를 참고 지점으로 다시 사 용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 그러므로 문제의 그 대문은 망대들의 동 쪽으로 상당히 먼 거리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겐나트 문이 있던 위치와 그것으로부터 뻗어간 제 2 성벽의 노선 올 보다 정확하게 찾아내고자 진행된 고고학적 조사 활동의 결과로 몇 가지 단서들이 포착되었다. 위에서 (199 항) 우리는 구 도성의 유대 인 구역에서 아비가드가 발견한 제 1 성벽의 유적을 기술하였다. 그 고고학적 활동의 지속으로 1975 년과 1978 년 사이에 그 동일한 성벽 의 다른 부분들이 그 동일한 선상의 서쪽으로 약 50 미터 떨어진 곳 에서 발견되었다. 이 지점은 평행을 이루고 있는 유대인 구역 거리 와 하바드 거리의 사이, 및 이 두 거리의 북쪽 끄트머리 근처, 그리 고 다윗 거리의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이다. 이 곳에서 발굴을 시작한 것은 우선 예루살렘의 카르도 막시무스 를 추적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의도된 것이었다 (A vig ad , Di sc o - veri ng Jer usalem, 213-229 쪽).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74 항), 로마 시대와 비잔틴 시대의 도시에는 카르도 막시무스가 남북으로 통하

는 주된 거리였고, 이것은 동서로 통하는 주된 거리와 교차되었다. 이 동서로 통하는 주된 거리는 로마 군대의 진영의 주된 대문 (decumana [데쿠마나])에 있던 로마 군단의 제 10 보병 대 (decumanus [데쿠마누스])가 늘상 주둔하던 그 위치를 따라서 데쿠마누스 막시무 스 decumanus m 따i mus 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댜 비잔틴 시대의 예루살렘을 묘사한 r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 (2 2 9 항)에서 카르도 cardo 는, 오늘날 다메섹 문 Damascus Ga t e 이라고 하는, 북쪽에 있는 대문 안의 한 장소로부터 시작하여 〈성묘 교회〉을 지나 남쪽에 있는 〈네 아 교회〉 (196 항)까지 뻗은, 열주가 있는 거리인 반면에, 데쿠마누스 는 오늘날 욥바 문이라고 하는 대문으로부터 동쪽으로 난 거리이다. 현대의 거리들로 본다면, 카르도의 노선은 다메섹 문으로부터 남쪽 으로 수크 칸 엣-제 이 트 Suq Khan ez-Ze it를 통하여 (Ba hat, Plans, 90d), 평행을 이루고 있는 세 개의 시장 거리 를 따라 내려가서, 다윗 거리 아래 쪽에서 유대인 구역 거리 및 하바드 거리라고 불리는 두 개의 평행하는 거리들 사이로 계속 내려갔다. 반면에 데쿠마누스의 노선은 다윗 거리와 사슬문 거리를 따라 동쪽으로 향했으며 , 알-바 슈라로 알려진 구역인 , 아마도 현재의 〈카훼 엘-움단Q ahwe el- 'Umdan> 죽 〈석주(石柱) 커피집 Coff ee house of the Columns 〉이란 곳에서 하나의 사탑문(四塔門)을 가지고 있다 (MACKOWSKI, 67 쪽). 전술한 내용 및 r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의 묘사와 일치하는 카르 도의 꽤 넓은 부분들이 유대인 구역에서 아비가드 A vig ad 발굴단에 의하여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다윗 거리의 남쪽으로부터 〈후르바 회 당 Hurvah S y nag o g ue 〉과 〈람반 회당 Ramban S yn a g o gu e 〉의 맞은편 까지 내려가면서 유대인 구역 거리와 하바드 거리 사이의 노선 위에 있는 것 이 다 (A vig a d, Di sc overi ng Jer usalem, map 32 쪽 ; MURPHY- O'CONNOR 53-55 쪽 및 그림 17 ; AJ PA 3-12). 이 곳의 카르도는 폭 이 약 22.5 미터이고, 서쪽으로는 다듬은 돌들로 된 벽과 접해 있으

며, 동쪽으로는 사각형의 기둥들 위에 얹혀 있는 아치들로 이루어진 홍예랑과 접해 있다. 두 줄의 석주들이(그 일부가 제시된 사진에 보 임) 12 미터 폭의 중심 거리에 줄지어 서 있고, 그 양쪽에는 지붕으로 덮인 행각이 있었댜 포도 밑에서 발견된 것이 오직 비잔틴식의 도 기뿐이므로, 이 카르도의 남쪽으로 뻗은 부분의 모두가 로마 시대가 아니라 비잔틴 시대의 것이었다고 하는 것이 발굴자들의 결론이다 . 이러한 결론이 시사하는 바는 이것을 건축한 사람이 〈네아 교회〉의 건축자인 유스티니아누스 (5 업 -565) 라는 것과, 그 목적은 그 새 교회 와 카르도의 북쪽 부분의 중간에 있는 〈성묘 교회〉을 연결하기 위함 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윗 거리의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지점에 있는 유대 인 구역 거리와 하바드 거리로 돌아가 보자. 이 곳은 카르도가 남쪽 으로 뻗은 것 중에 서 맨 북쪽 부분이 발견된 곳이 다 (Av ig ad , Dis - coverin g Jer usalem, 67-69 쪽, pla ns 30, 38). 여 기 비 잔틴식 의 포도 밑에서 고대 성벽들의 네 부분이 드러났다. 그 중의 하나 (no. 3 in Avig a d, 같은 책, 50 쪽, pla n 30) 는 동쪽으로 50 미터 떨어진 곳의 제 1 성벽 부분에 있는 이스라엘인의 망대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시대 의 것이며, 다른 셋(구도에서 5-7 번)은, 동쪽으로 50 미터 떨어진 같은 지점에 있는 하스몬인의 망대와 마찬가지로 후기 헬라 시대 또는 하 스몬 시대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여기에도 또한 이스라엘 시 대로부터 하스몬 시대에까지 이르는 제 1 성벽의 유적들이 있다. 이 지점에서 제 5-6 번이 합쳐진 부분과 제 7 번 부분이 하나의 틈새에 의 하여 분리되어 있는데, 이로 인하여 발굴자는 이것이 대문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것이 사실상 겐나트 문 Genna th Ga t e 으로 확인될 수도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같은 책, 69 쪽). 이러한 확인에 따라 겐나트 문이 후대의 카르도 막시무스의 바로 아래에 있다는 사실은 특별히 의미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카르도와

데쿠마누스는 십중팔구 보다 더 오래된 예루살렘의 기존 거리들의 노선 위에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W ilkin son in Levant 7 [1975], 118 쪽 이하).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시대에 이미 카르도의 노선을 따라서 이 대문으로 향해 올라가는 하나의 거리가 있었음을 상상할 수 있 다. 이 대문으로부터 제 2 성벽은 요세푸스의 기술과 조화되게 북쪽 으로 향했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어느 지점에서 꺾어져 안토니아를 향하여 뻗었을 것이다. 세부적으로 말하자면, 남북 노선은 현재의 저 자 거리인 수크 엘-앗타린 Suq el-'A ttarin과 수크 칸 엣겼1 l 이트 Su q Khan ez-Ze it의 노선이었을 것인데, 이것은 마침내 예수의 십자가 고난 길의 제 7 처 the Seventh S tati on 까지 이르는 것이었고, 동서 노 선은 그 지점으로부터 비아 돌로로사 V i a Dolorosa (222 항)를 따라서 엘-와드 거리에 있는 제 5 처 the Fif th S tati on 까지 이르는 길이었다 (MACKOWSKI 49쪽). 그리고 이것이 대체로 우리의 구도 (173 항)에 나타나 있는 제 2 성벽의 행로이다. 그와 같은 행로는 요세푸스가 말 하는 바와 같이 참으로 도성의 〈북쪽 지역〉을 에워샀으며, 또한 지 형학적 및 방위 상의 고려 사항이라는 관점에서 보아도 합리적인 것 이 었 다 (C. T. Norr is in PEQ 1946, 19-37 쪽, ag ains t N. P. Clarke in PEQ 1944, 199-212 쪽). 이 행로에서 제 2 성벽은 남북으로 뻗어 현재의 무리스탄 M uri s tan 과 〈성묘 교회〉의 동쪽을 지나갔다. 무리스탄은 다윗 거리의 북쪽에, 그리고 〈성묘 교회〉의 남쪽에 위치한 하나의 크고도 비교적 열린 지 역으로서, 길이는 약 170 야드, 폭은 150 야드이다 (Baba t, Plans, 62, 63). 중세에는 이 공간에 순례자의 여관과 구호소들이 있었으며, 특 히 성 요한의 기 사단 Knigh ts of St. Joh n(Hospi taler s ; 자선 기 사단[십 자군 부상자의 구호와 순례자의 접대를 위하여 1048 년에 예루살렘에 조 직된 기사단] __ 역주)의 기관들이 있었다. 후에 모슬렘교인들의 치 하에서 한 구호소가 아랍어-페르시아어인 무리스탄 M uri s tan이란 이

름으로 일컬어졌는데, 이 이름이 마침내 그 땅 전체를 가리키는 데 에 사용되게 되었다. 이 지대의 복동쪽 모퉁이에는 1030 년에 세워진 〈산타 마리아 라티 나 교회 Church of Santa Ma ria La ti na 〉이 있었다. 이 교회는 1898 년 에 독일 루터 교단의 〈구주 교회 >(E rloserkir c he,C hurch of the Re- deemer) 로 대치되었댜 〈구주 교회〉은 원래 있던 교회의 윤곽에 따 라서 지어졌으며, 오늘날 예루살렘에서 눈에 띄는 표적지가 되고 있 는, 하나의 높은 탑을 가지고 있다(1 74 항 참고). 무리스탄의 바깥쪽 에, 그리고 〈구주 교회〉의 북쪽과 동쪽으로 과히 멀지 않은 곳에, 러 시아 계의 〈알렉산더 호스피스 Alexander Hos pi ce 〉이 있고, 그것의 북쪽과 서쪽에는 에티오피아 계의 수도원이 있다. 러시아 계의 호스 피스는 〈성묘 교회〉의 바로 동쪽에 있고, 에티오피아 계의 수도원은 그 교회 의 북동쪽에 있다 (MURPHY-O'CONNOR 36 쪽, 그림 9, A, B, D ; KROLL 375 쪽, abb. 300). 1961 년과 그 후에 캐슬린 M. 케년이, 〈성묘 교회〉의 정남쪽, 그리 고(아마도 제 1 성벽의 노선을 근사하게 따라가는) 다윗 거리의 북쪽에 있는 성 요한 회 order of St. J ohn 에 속하는, 무리 스탄의 한 작은 지 역(케년의 Sit e C) 에서 발굴 작업을 하였다. 그들은 여기서 하나의 깊은 구덩이를 파내었는데, 이것은 15 미터 깊이에서 암반에 도달하 는 것이었다. 이 구덩이의 밑바닥에는 B.C. 7 세기의 도기를 가진 반 석 채석장이 있었다. 이것 위에는 도기를 포함한 하나의 큰 흙더미 (fill)가 있었는데, 도기의 대부분은 기독교 시대(西紀)의 1 세기의 것 이었으며, 소수는 아마도 그 후기 죽 제 2 세기 초의 것이었다. 이 흙 더미는 미상불 하드리아누스가 앨리아 카피톨리나를 건설하는 과정 에서 이 지대를 돋우는 공사의 일부였던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이다. 채석장은 본래가 도성의 내부에 있지 않는 것이 상례였으므로, 이 부지는 B.C. 7 세기 성옵의 외부였음에 틀림없다. 도기와 그 큰 흙

더미 사이에는 아무런 건물이나 거주 층들이 없으므로, 이 지대는 앨리아 카피톨리나가 파괴되기까지 비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Kenyon in PEQ 1964, 14-16 쪽 ; 1966, 86 쪽, 그림 4 ; 그리고 그녀의 Jer usalem, 151-154 쪽 및 pis. 70-72). 이와 마찬가지로 1 CJ7 0-1 CJ7 1 년에 우테 룩스 Ut e Lux 가 〈구주 교 회〉의 밑에 있는 무리스탄을 발굴함으로써, 이 지대가 〈제 2 성전〉 시대의 성벽이 있는 도성의 외부에 있던 채석장이었음을 확인하였 다 (Lux in ZDPV 88 [1C J72 ], 1 8.5 -201 쪽) . 캐슬린 케년과 우테 룩스에 의하여 탐사된 이 지대가 〈성묘 교회〉의 바로 남쪽에 있으므로, 그 교회의 부지도 역시 그 시대에는 도성의 외부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샤를르 코와스농 Charles Co ti asnon 이 〈성묘 교회〉 (225 항) 에 대하여 작업하면서 위에 있는 교회 안에서 예수의 무덤 장소의 바로 남쪽 부분을 발굴하였는데, 거기서도 이 지대가 채석장으로 사 용된 사실과 B.C. 제 7 세기의 것인 도기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Bruce E. Schein in BA 44 [1981], 24쪽). 문제의 이 지대가 도성의 외부에 있었음에 대한 또다른 증거는 〈성묘 교회〉 밀에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들과 앞서 1885 년에 러시아 인의 〈알렉산더 호스피스〉의 북서쪽에 있는 에티오피아안의 수도원 밑에서 발견된 다론 무덤들에서 볼 수 있다 (C. Schi ck in PEFQ S 1& 7, 154 쪽 이하 및 그에 따른 구도들 ; 그리고 in PEFQ S 1893, 192 쪽). 헤롯 아그립바 I 세 (41-44) 의 제 3 성벽이 세워졌을 때 (201 항), 이 지대 도성 내부로 에워싸여졌으나, 그 시대 이전에는 그것이 처음에는 채 석장이다가 후에는 바위 벽을 깎아 만든 무덤둘의 장소였음이 분명 하다. 이 지대가 또한 초목을 가꾸는 장소가 되었던 사실은, 사람들 이 그 곳으로 나가기 위하여 통과하는 대문이 겐나트 문이라고 불렸던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요세푸스가 우리에게 알려 준 이 이름 (revvd0, 겐나트)은 분명히 〈정원〉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

로서, 예컨대 에스더 1:5 등에서 nJl (gnt, 긴나트)라는 형태로 나타나 는 것이다. 따라서 이 대문은 정원문이었다. 201 다메섹 문 곁의 고대 성벽과 아치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의 제 3 성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War V 4, 2 §§147-148). 셋째 것은 힙피쿠스 망대에서 시작했는데, 거기서 그것은 북쪽으로 프세피누스 Pse phinu s 망대 쪽으로 뻗어 나갔고, 그런 다음 헬레나 (아디 아베 네 A di abene 의 왕후요 이 자테 스 Izate s 왕의 딸)의 기 념 비 들 의 반대편으로 dv tt K pb 내려가서, 왕의 동굴들을 통과하여 8td u 問 A Qi. uv O Q O t A t函 V 소위 세탁자의 무덤 Fuller's t omb 의 맞은편에 있는 귀퉁이 망대를 돌아서 휘어진 다음, 기드론이라고 불리는 골짜기에서 끝나는 고대의 누벽과 만났다. 이 성벽은 그 도성에다 후기에 첨가한 부분들, 죽 보호 장치가 전혀 안 되어 있던 부분들을 에워싸기 위하여 아그립바 가 세운 것이다. 이는 그 성읍이 주민들로 차고 넘쳐서 점차로 누벽들 너머로 조금씩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언급된 아그립바는 헤롯 아그립바 I 세 (4l_44) 이고, 요세푸 스도 진술하기 를 (War V 4, 2 §152), 그 왕이 성 벽 의 기초만을 놓은 후에 그 계획을 단념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그립바는 황제 클라우 디우스 Clau di us(41-54) 가 자신이 혁명적인 음모를 가진 것으로 의심 할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다른 구절(A n t. XIX 7, 2 §§326-3 업)에 서는 클라우디우스가 바로 그 같은 이유로 그에게 공사를 중단하기 를 명 령하였다고 말한다. 또다른 구절 (War II 11, 6 §219) 에는 아그립 바가 그의 공사가 계획된 높이에 이르기 전에 가이사랴에서 죽었다

고 (44) 되어 있다.〉 여기에 인용된 첫번째 구절에서 요세푸스는 계속 해서 말하기를 (War V 4, 2 §155), 아그립바가 끝내지 못한 공사를 유대인들이 뒤이어 완성했다고 한다. 그가 그때에 그 성벽이 〈유대 인들에 의하여 서둘러 세워졌다〉고 하므로, 로마인들과의 큰 전쟁이 임박해 있는 동안에, 그리고 그와 같은 비상 사태에 시달리는 와중 에서는 이 성벽이 완성되지 못했을 것 같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그 성벽은 20 규빗 높이까지 올라갔으며, 2 규빗 높이의 흉장(胸 臘 )과 3 규 빗 높이의 방벽(防 壁 )을 가지고 있어서 전체의 높이가 25 규빗이나 되었다.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공격했을 때 북쪽으로부터 침입해 왔으므로 , 그는 세 개의 성벽과 마주 대하게 되었다 . 티투스가 그의 공격 목표 지점을 어떻게 선택했는지를 말해 주는 요세푸스의 이야기에서, 요 세푸스 (War V 6 §§259 一 260) 는 이 지점에서 세 개의 성벽을 모두 언 급하고 있지만, 그것들을 이제는 역순으로――티투스의 관점에서 첫 째, 둘째, 셋째로 __ 말하고 있다 . 〈다른 모든 지점들은 차단되고 , 계곡들은 접근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그 너머에 있는 첫째 성벽은 그가 가진 병기에 비하면 너무나 견고하게 보였으므로, 그는 대제사 장 요한의 무덤 맞은편에서 공격을 가하기로 결정하였다. 왜냐하면 이 곳에는 누벽의 첫째 줄이 비교적 낮은 땅에 있었고 , 둘째 줄은 그것과 단절되어 있었으며, 건축자들은 이 새 성읍의 인구가 조밀하 지 않는 부분들을 요새화하기를 등한히 했다. 반면에 셋째 성벽은 접근이 용이했고, 그 성벽을 통하여 그가 윗 성읍을 점령하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안토니아를 거쳐서 성전을 점령하려는 것이 그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제 3 성벽에 관한 요세푸스의 형식적인 기술에서 언급된 지점들로 부터 우리는 그 성벽이 지나간 경로에 대한 개념을 얻게 되기를 희 망하는데, 그 중에서 한쪽 끝에 있는 힙피쿠스 망대와 다른 쪽 끝에

있는 기드론 골짜기는 말할 나위 없이 잘 알려진 것들이다. 힙피쿠 스로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으로 언급된 지점은 프세피누스 망대이 댜 요세푸스가 기 록한 다른 참고 구절 (War V 4, 3 §§159-160) 에 의 하면, 이 망대는 제 3 성벽의 북서쪽 귀퉁이에 있었으며, 티투스는 그 반대편에 그의 진영을 설치하였다. 그 망대의 모양은 팔각형이었고 높이는 70 규빗이었으며, 그 위에서 사람들은 아라비아와 히브리인 영토의 마지막 한계선인 곧 바다까지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예루 살렘의 현재의 북쪽 성벽의 북서쪽 모퉁이는 참으로 북서쪽 언덕의 고지점에 있어서, 비록 요세푸스가 기술한 것만큼 광범위하게 바라 볼 수 있는 조망은 아닐지라도 퍽 멀리 미치는 조망을 가진 하나의 높은 망대를 위한 장소로는 그럴 듯한 위치에 있다. 성벽의 바로 안쪽에 있는 이 장소에는 매우 큰 돌로 세워진 망대 의 유적들이 있다. 이 망대는 카스르 얄루드Q asr Jalu d 또는 골리앗 성 Castle of Go li a th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다윗이 골리앗을 살해 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는 전승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1099 년에 십자군 탕크레드 Tancred 가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이 성벽을 뚫고 들어갔기 때문에 탕크레드의 망대 Tancred's Tower 라고도 불린다. 1971-1972 년의 발굴 작업에서 연구한 바와 같이(D. Bahat and M. Ben-A ri in Jer usalem Revealed, 109 쪽 이하 ; Bahat, Plans, 8.5b), 이 망대는 크기가 약 35X35 미터로서 전체가 헤롯 시대부터 재사용된 다듬은 돌들로 세워졌지만, 망대 자체는 제 12 세기 초에 건립된 것이 다. 그러므로 그 망대 자체는 프세피누스 망대가 아니지만, 그래도 후자는 그 동일한 지대 내의 어디쯤에 있었을 것이다 (V in cen t in RB 22 (1913], 88-96 쪽 ; 36 [1 CJ7외, 525-532 쪽 ; Sim o nsm Jer usalem, 486- 491 쪽 ; M. Av i-Y onah in IE] 18 (1968], 103-105 쪽). 제 3 성벽이 기드론 골짜기에 다다르기 전에 마지막 지점으로 언 급된 곳은 소위 세탁자의 무덤의 맞은편에 있던 귀퉁이 망대였다.

세탁자의 무덤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입수된 다른 정보가 없으나, 만 약 제 3 성벽이 현재의 성벽이 성전 지대의 북동쪽 모서리로 내려가 기 위하여 기드론 골짜기의 가장자리에서 남쪽으로 회전하는 곳쯤 에서 귀퉁이 망대를 〈돌아서 휘어〉졌다면, 문제의 그 기념비는 지금 팔레스타인 고고학 박물관이 있는 장소인, 카름 엣-셰이크氏 mn esh-She ikh라고 불리는 야산 위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V i ncen t in RB 36 [19 업], 547 쪽, n. 1 ; Sim o ns, Jer uselem, 482 쪽, n. 1). 이제까지 잠정적으로 확인된 지점들 사이에는 아디아베네의 왕후 헬레나의 기념비들과 왕의 동굴들이 언급되어 있다. 말하자면 성벽 이 헬레나의 기념비들의 반대편으로 내려가서 왕의 동굴들을 통과 하여 나아갔다는 것이다. 헬레나의 기념비들은 소위 왕들의 무덤들 Tombs of the Kings ('2:7 5 항 이하)과 동일한 것으로 매우 확실하게 밝 혀졌는데, 이 무덤들은 현재의 예루살렘 북쪽 성벽에서 북쪽으로 직 선 거리 700 미터 정도 떨어진 나불루스 길 Nablus Road 에 있다. 왕 의 동굴들도 마찬가지로 소위 솔로몬의 채석장 Solomon's Q u arry인 것이 매우 확실한데, 이 채석장의 입구는 다메섹 문에서 동쪽으로 100 야드 떨어진 곳에 있다. 이것들은 지하 동굴들로서 그 범위가 1oox200 미터나 되고, 이 곳으로부터 아마도 고대 예루살렘의 많은 건축 석재가 채취되었을 것이다. 길을 건너서 북쪽에는 예레미야의 석굴 Gro tto of J ere mi ah 로 알려진 다른 채석장이 있다. 원래 이것은 아마 솔로몬의 채석장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연결하 는 부분이 끊어져 나가버렸다• 제 3 성벽이 헬레나의 기념비들의 〈반대편ciTit K p u 〉에 있었다는 진 술은 그 사이에 개재하는 상당한 거리를 허용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컨대 티투스의 진영이 프세피누스의 〈반대편〉에 있었으나 또한 누벽들로부터 약 2 스다디온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War V 3, 5 §133). 사실 요세푸스는 다론 곳에서(Ant. XX 4, 3 §95) 헬레나의 무

덤이 도성으로부터 3 스다디온 되는 곳에 있었다고 진술한다. 만약 요세푸스 당시의 북쪽 성벽, 즉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제 3 성 벽이 그 도성의 현재의 북쪽 성벽의 선상으로 뻗어 있었다면, 요세 푸스가 추산한바 그 곳에서부터 헬레나 왕후의 기념비들까지의 거 리는 오늘날의 그 두 지점 사이의 실제 측량 거리인 약 700 미터보다 과히 적은 것이 아니다. 왕의 동굴들과 관련하여 제 3 성벽에 대하여 진술한 것이 때로는 그 성벽이 동굴들을 〈지나갔다〉라는 뜻으로 번 역되기도 하지만 (LCL ), 그 구절의 원문은 8td 떄 nAalwv Daot A tK @ V (디아 스펠라이온 바실리콘)이고, 이것을 엄격하게 번역한다면 〈왕의 동굴들을 통과하여〉가 된다 . 이것은 예루살렘 현재의 북쪽 성벽의 선상에 있는 성벽에 대해서는 정확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성벽은 솔로몬의 채석장의 지붕 속으로 뚫고 들어가서 그 동굴과 그 길의 북쪽에 있는 예레미야의 석굴 사이로 뻗어 있고, 후자는 한때 같은 세트의 동굴들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S im ons, Jer usalem, 461-463, 478-481 쪽) . 『 유대 전쟁사』 V 6, 2 §259 (위를 보라)에 언급된 대제사장 요한의 무덤에 관해서는 티투스가 바깥 성벽의 안쪽에 있는 그의 진영을 이 동한 후에 있었던 싸움에서 또다시 언급되어 있다 (War V 7, 3 §304; V 9, 2 §356 참고). 그러 므로 아마도 요한 휘 르카누스 Joh n Hy r- canus(B.C. 135-105) 의 기념비였던 이 기념비는 제 3 성벽의 안쪽에, 그러나 제 2 성벽의 바깥쪽과 제 1 성벽의 바깥쪽 어디쯤에 있었을 것 이다. 하나의 제안은 그 기념비가 무리스탄의 남서쪽 모퉁이에 있는 비잔틴식의 중세 교회인 〈침례자 성 요한의 교회 Church of St. Joh n the Ba pti s t〉의 부지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S im ons, ]eru- salem, 299 쪽, n. 5 ; AJ PA 3-29). 요세푸스 (War V 4, 2 §147) 에 의하여 이렇게 기술된 제 3 성벽의 선이 힙피쿠스로부터 프세피누스로, 헬레나의 기념비들의 맞은편으

로 , 그리고 왕의 동굴들을 통과하고 귀퉁이 망대를 돌아서, 그리고는 기드론 골짜기로 뻗어 있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현재의 예루살렘 북 쪽 성벽의 선과 매우 근사하게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V i ncen t in RB 36 [19'2 :l], 523 쪽, 그림 1 참고). 1937-1938 년에 R. w. 해밀튼R. W. H amilt on 이 현재의 북쪽 성벽 에 있는 다메섹 문에서 탐색 활동을 한 바 있고, 1966 년에는 헤네시 J. B. Henness y가 훨씬 더 온전하게 발굴함으로써, 보다 초기의 유적 의 위치 위에 있는 대문까지 걸어서 갈 수 있도록 하나의 새로운 다 리가 놓여졌다. 사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현재의 다메섹 문의 동 쪽으로 보다 낮은 위치에는 육중한 성벽의 기초와 하나의 대문의 아 치가 있다. 이 곳 성벽의 돌들은 헤롯 시대의 양식으로 되어 있다(이 양식은 헤롯 대왕[B. C. 37-4] 자신의 이전과 이후에 공히 사용되었다) . 인접한 지대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들은 기독교 시대의 1 세기의 전반 의 것들이었다. 제 1 세기 초의 항아리 속에 있는 한 아이의 무덤을 포함하여 몇 개의 무덤들은 그 당시에 이 지대가 도성의 바깥에 있 었음을 보여 주었다. B.C. 1 세기 말과 기독교 시대의 1 세기 초의 것 인 다른 도기와 행정 장관의 주화들이 발견되었다. 그 후에 그 육중 한 성벽이 세워졌는데, 그러므로 이것은 미상불 41-42 년 무렵의 해 롯 아그립바 I 세의 작품인 것으로 여겨진다 . 다메섹 문의 서쪽으로 비슷하게 낮은 위치에는 또한 이와 동일한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 는 몇 개의 육중한 돌덩어리들이 있다(QD AP 10 [1940], 6 쪽) . 다메섹 문의 동쪽에 있는 성벽과 연결된 아치의 아랫부분도 필시 헤롯 아그립바의 작품이다• 그 아치의 윗 부분은 다른 석공술로 되 어 있으며, 그 위에 있는 돌들이 옆으로 줄지은 첫번째 충에는 하나 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는 앞면의 대부분이 깎여 나가기는 했지만 명각의 몇 글자가 아직도 남아 있다. 밑바닥에서 둘째 줄에는 한 글 자가 남아 있고, 맨 아랫줄에는 이런 글자들이 있다. CO AEL CAP

D D, 죽 Colon ia Aelia Capi tol in a Decu rion um Decreto . 이 것 으로 볼 때 이 명각은 원로원의 포고령 (183 항 참고)을 언급하고 있으며 , 예루살 렘의 이름을 식민지 앨리아 카피톨리나로 칭하고 있다 . 이 명각의 연 대는 아마도 하드리아누스의 시대일 것이다(QD AP 같은 책, 22-23 쪽 및 그림 12). 그렇다면 사진에서 보는 바대로 아치 문 Archwa y온 아마도 그 이 전에 있던 헤롯 아그립바의 아치를 앨리아 카피톨리나의 북쪽 주된 출입문의 일부로 사용하기 위하여 하드리아누스가 재건했거나 완성 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 출입문 전체는 하드리아누스의 다른 큰 출입문들 (217 , 224 항, 108 항 참고)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세 개의 아치로 되어 있었으며, 이 아치는 좀더 높은 중앙 통로와 나란히 나 있는 동쪽 보행 통로였다. 1979 년과 1982 년에 계속된 므나헴 마겐 Menahem Ma g en 의 발굴 작업에서 그 아치들의 양쪽에 있는 망대들 과 둥근 천장들도 역시 탐사되었으며, 하드리아누스의 대문 바로 안 쪽에 있는 넓은 광장의 큰 포장 돌들 (4 X 5 피트 및 5X7 피트)의 거의 100 피트가 발굴되어 지금은 다메섹 문 박물관 내부에 쌓여 있다. 마 물루크족 Mamlukes 과 터키족 Turks 을 포함한, 예루살렘의 이슬람교 통치자들도 그 도성의 성벽들에 대하여 작업을 하였다. 주요 복원 작업은 터키의 황제 술레이만 I 세 대제 (1520-l fx36년 통 치)에 의하여 1537-1541 년에 수행되었다. 그 성벽들의 윗부분에서 후기에 수리한 것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구 도성의 거의 전역에 있 는 현존하는 성벽들의 주된 아랫부분들은 그의 공사로 이루어진 것 들이며, 현재의 다메섹 문은 그의 시대의 모양과 거의 그대로이다. 술레이만의 공사는 그 성벽들에 아직도 박혀 있는 최소한 열한 개의 명각들에 의하여 확인되고 있으며, 이것들 중의 하나가 다메섹 문이 건축된 연대를 알려 주는데, 그 해는 1537 년에 해당한다. 술레이만의 성벽이 주요 지점들에 있어서 하드리아누스의 성벽들과 일치하는

것 에 대 한 증거 가 있으므로 (Ken y on, Jer usalem, 197 쪽), 구 도성 의 현재의 윤곽은 앨리아 카피톨리나의 형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 다. 단지 남쪽에 있어서는 그 도성이 헤롯 시대의 초기와 비잔틴 시 대의 말기에 더욱 아래 쪽으로, 힌놈 골짜기를 향하여 확장되었다 (179, 229 항 참고). 202 예루살렘 구 도성의 북쪽에 있는 한 성벽의 남쪽 면 다른 하나의 성벽의 선이 예루살렘 구 도성의 북쪽에 있는 상당한 유적들에 의하여 나타나고 있다. 이것들은 1838 년에 에드워드 로빈 슨에 의하여 처음으로 주의를 끌게 되었으며 (B i bl i cal Researches, I, 46.5 -467쪽), 요세푸스가 말한 바대로 〈제 3 성벽〉의 일부인 것으로 생 각되었다. 더욱 근래에는 나불루스 길 Nablus Road 과 리샤르 쾨르 드 리 옹 거 리 Rich ard Coeur de Lio n S tr ee t의 교차로에 서 도로 수리 를 하는 과정에 하나의 초벌 새김을 한 커다란 돌 덩어리 하나가 발견 되었는데, 이것은 성전 울타리 성벽의 돌 (189 항 참고)과 비슷한 것이었 다. 1925-1928 년에는 수케니크 E. L. Suke nik와 메이어 L. A. Ma y er 가 발굴 작업을 수행하였다. 그들은 멀리 떨어진 서쪽 곧 스웨덴인 여 자 학교(그들은 이 곳에서 성벽이 전에 존재했었던 사실이 나타날 것으 로 생각했다)로부터 미국동방연구학회의 앞에 있는 살라딘 길 Salad in Road 에 이르기까지 있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1940 년에 그들은 그 같 은 학교의 동쪽에서 다른 부분들을 발견하였다. 그들이 성벽의 북쪽 면으로부터 튀어나온 망대들의 유적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 것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고 믿었으며, 출판물을 통하여 이 발견 물을 헤롯 아그립바 1 세에 의하여 건립된 예루살렘의 〈제 3 성벽〉의 부분들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에 대하여 성 급한 판단을 내리지 않기 위해서 이 성벽을 단순히 수케니크-메이

어 벽 Sukeni k- M aye r Wall 이라 부르는 것이 최상일 것 같다. 이제는 알려진 바와 같이 구 도성의 북쪽으로 1500 피트 떨어진 곳 에 술레이만 대제의 현재의 북쪽 성벽 (201 항)과 나란히 세워진 이 성벽의 전체 노선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약 2500 피트의 거리를 뻗어 있다(B aha t, Plans, 96-W). 전체의 두께가 약 14 피트인 이 성벽 위에 서 언급한 큰 돌덩어리처럼 섬세하게 초벌 새김을 한 돌과 단지 거 칠게 다듬은 돌, 그리고 큰 자연석과 함께 자갈과 모르타르를 포함 하고 있다. 나불루스 길과 살라딘 거리의 사이에 있는 이 성벽의 한 부분에 대한 계속적인 발굴은 1965 년에 E. W. 햄리크 E. W. H amri ck 를 현 장 감독으로한 캐슬린 M. 케년의 작업에 의하여 행해졌다. 그들이 발견한 것에 비춰 내려진 케년의 의견은 그 성벽이 〈확실히 북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향해 있었으며,〉 따라서 확실히 헤롯 아그립바의 도성 의 북쪽 성 벽 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 다 (PE Q 1966, 얽쪽). 하지 만 햄리크의 의견은 그 성벽이 북쪽으로 향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러나 〈그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빈약하고도 서툰 석공술〉을 보면서 햄 리크는 그 성벽이 아그립바의 작품은 아닐 것이라는 견해에 동의하 였다 (BASOR 183 [Oct 1966], 24-25 쪽 ; 192 [Dec 1968], 23 쪽 이하). 이 성벽과 관련하여 로마 행정 장관의 주화 두 개가 발견되었는 데, 하나는 클라우디우스 제 14 년 (54) 의 것이고, 하나는 네로 제 5 년 (58/59) 의 것이다. 따라서 이것 또한 그 성벽이 아그립바보다는 후기 의 것임을 가리키고 있다 . 그러므로 케년은 이것이 요세푸스 (War V 12, 1-2 §§499-511) 가 말한 바대로 티투스가 포위된 도성의 주위에 설치했던 외곽 벽의 일부였다고 시사한 반면에, 햄리크는 이것이 전 쟁의 초기에 유대인들에 의하여 세워진 의보(外堡), 죽 로마인의 노 포(筑砲)가 도성까지 미치지 못할 만큼 멀리 세워진 의보의 일부였 다고 시사했다.

그 당시에 제안된 또다른 이론은, 이 성벽은 전쟁이 끝난 뒤에 티 투스가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하여 남겨둔 제 X 군단 프레텐스시 Tenth Leg ion Fre te ns i s 의 본부와 연관된 것이었다는 것인데 (131 항 및 183 항 참고), 이것은 그럴 듯하지 않은 이론이다. 왜냐하면 이 본 부는 LEG. X. FR. 라는 인(印)이나 이것의 이문이 박힌 많은 타일들 이 발견된, 그 도성의 남서쪽 귀퉁이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 이다 (Ken y on in PEQ 1966, 88 쪽 ; 그리고 그녀의 Jer usalem, 168 쪽). 1972 년과 1974 년 사이에 다시 이스라엘의 고고학자인 사라 벤-아 리 에 Sara Ben 一Ari eh 와 에후드 네 처 Ehud Ne t zer 가 성 벽 을 따라서 팠으며, 북쪽으로 향한 망대들 가운데 또 두 개를 완전히 발굴함으 로써, 그 성벽이 북쪽으로 향해 있었으며 따라서 티투스에 의하여 세워진 공격용 성벽일 수 없었음이 증명된 것으로 느꼈다. 다시 말 해서 그들은 그 발굴된 부분들이 요세푸스가 말한 〈제 3 성벽〉에 속 하는 것이라는 수케니크와 메이어의 원래 의견에 동의한 것이었다. 한편 수케니크-메이어 벽의 선은 요세푸스가 기술한 것 (201 항)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성벽은 아디아베네의 왕후 헬레나의 무덤으로부터 약 250 미터밖에 안 되는데, 요세푸스는(Ant. XX 4, 3 §95) 그 기념비로부터 도성까지의 거리가 3 스다디온(훨씬 더 먼 거 리)이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벽의 선이 어떤 알려진 〈왕의 동 굴들〉도 〈통과하여〉 지나가는 것도 없다. 요세푸스 (War V 4, 2 §153) 도 아그립바가 그 성벽을 〈길이가 20 규빗, 폭이 10 규빗 되는〉 돌들로 시작하여, 〈너무나 조밀하게 연결시켰기 때문에 그것들을 철 연장으로 파내거나 기계를 가지고도 요동시킬 수가 없었다〉고 말한 다. 그런데 이 곳에서 드러난 성벽의 부분들은 별로 잘 건설된 것이 아니고, 위에서도 기술한 바와 같이, 참으로 〈서툰〉 건축물이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성벽은 66 년 경에 유대인들에 의하여 세워진 전 향적인 방어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Beno it in

Stu d ia Hi er osolym i tan a I [1C J76 ], 125 쪽) , 따라서 헤롯 아그립바 I 세의 〈제 3 성벽〉은 여기에 있지 않았고, 오히려 후에 하드리아누스가 세 운 앨리아 카피톨리나의 북쪽 성벽과 술레이만 대제에 의하여 건설 된 바 있는 구 도성의 현재의 북쪽 성벽이 뻗어 있는 선상 위에 있 었을 가능성이 높다 (MACKOWSKI 69 쪽). 사진은 수케니크끄 Il 이어 벽의 한 부분의 남쪽 면을 보여 주고 있다, 203 〈성 안네 교회〉 예수의 예루살렘에서의 초기 봉사 기간 중에 그 도성의 한 특정 장소와 관련된 홍미로운 사건 하나가 요한복음 제 5 장에 기록되어 있 댜 이것은 예수께서 38 년 간 앓아온 사람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 고 하시면서 그를 고치신 사건이다. 그런데 그 날이 안식일이었으므로 그 사람이 그의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불법이라 하여 반대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이 사건은 바로 그 도성 에서 마침내 예수의 죽음으로 연결된 일련의 상황들 중의 하나가 되 었댜 이 사람이 고침을 받은 장소는 요한복음 5:2 에 기술되어 있는데, 이 절의 헬라어 문장은 여러 사본들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나 있다. 그 문장이 〈이제 예루살렘에 …… 있는데〉로 시작하는 점은 모든 사본들이 다 일치한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문제가 바로 〈양의 of shee p〉)라는 의미의 형용사인 헬라어 단어 Jtpo ~a,:tK ~ (pro bati ke , 프로바티케)를 어떻게 연결시키고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구절 울 포함하는 사본으로서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200 년경 의 사본인 戶 죽 r 파피루스 보드머 IIPapy rus Bodmer II 』이다. 이 사본의 제 25 페이지 (KE) 로 매겨진 곳과 제 18-19 번 행에는 (ed. Vic t o r Ma rtin and J. W. B. Barns, 1962) 이 런 말이 있다. Em TH IIPOBATIKH

• KOAlMBHBPA • . 똑같은 구두점이 찍히지는 않았지만 동일한 헬라어 본문이 P75(Pap yrus Bodmer XV, 제 3 세기 초), 「바티 칸 사본 Codex Va ti canus 」, 그리고 다수의 코이네 Koin e 텍스트의 필사본들, 또한 D 와 다른 서방 필사본들, 등에서 발견되는데, 후자에서는 다만 tn t (에피)가 아무런 의미의 변화 없이 tv (엔)으로 대치되어 있다. 프로 바티케가 여기서 〈-에〉 또는 〈곁에〉 또는 〈가까이에〉라는 뜻을 가 진 전치사 t n i(t v 의 경우에는 〈안에〉) 다음에 나온다는 사실은 이 단 어가 여격으로-t n i (tv) 때 n pop an )Ci(〈양 …… 곁에 at the sheep ……〉)―취급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r 파피루스 보드머 II 」에 나오 는 순서에 있어서 마지막 단어 곧 〈연못〉을 의미하는 단어는 그 자 체로서는 또한 여격으로도 취급될 수 있으나, 그럴 경우에 문장의 흐름에 있어서 문법적 혼란을 야기시킬 것이므로, 아마도 그것은 주 격인 JC o J... uµP ft 8p a( 콜룀베트라)로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戶 6 을 기록한 필사자의 이해도 또한 이러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 필사본에서는 이 단어가 구듯점 사이에 놓여 있기 때 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문자적으로 〈한 연못 프로바티케 곁에 at the pro b atike , a poo l 〉로 되어 있다. 이 프로바티케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짐작에 맡길 수밖에 없으나, 이 말이 양 시장 또는 양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은 적어도 무리 없는 추측일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 의미는 서로 연관된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대문의 바깥 에서 양 시장을 열게 되면 자연적으로 그 대문의 명칭을 양문이라고 일컫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추측이 맞다면, 적절한 영어 번역은 다음과 같이 될 것 이 다• ( KJV), 또는 ( ASV), 또는 ( RSV).

그런데, 「시내 사본」에는 단순히 〈예루살렘의 양못J[p o0a tt Kh KOAU J.1 0 ii 8 pa 이 있다〉로 되어 있다. 이것은 앞에서 본 독법과 비교할 때 본문을 단순화한 것이므로 , 이차적인 독법인 것으로 판단된다. 동시에 이러한 독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든지, 아니면 단순히 그 연 못이 양 시장 또는 양문과 가깝기 때문이든지 간에, 그 연못이 적 어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양못〉으로 알려지게 된 듯하다 . 『지명 록 』 (58-59 쪽)에서 유세비우스는 예루살렘에 있는 ‘프로바티케’라고 불리는 연못〉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제롬도 이 말을 반복하면서 덧붙여 말하기를 , 〈예루살렘에 있는 ‘프로바티케’라고 불리는 연못 이 있는데, 이 말은 우리가 ‘가축에게 속하는'이라고 해석할 수 있 는 것 이 다 pisc in a in Jer usalem qu ae voCXlbatu r np oO anKii , et a nobis i n t erp re 回ri po te s t pe cualis > 라 고 한다 . 이리하여 우리는 양과 관련된, 어쩌면 양 시장 또는 양문과 관련 된 어떤 장소 가까이에 위치했던 하나의 연못이 있었음을 알게 되는 데, 이 연못 자체가 적어도 나중에 와서 매우 자연스럽게 〈양못〉이 라고 불리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앞에서 (197 항) 느헤미야가 언급한 양문(느 3:1 ; 12:39) 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과, 그의 말에 의하면 이 대문은 아마도 성전 지대의 북쪽에 있는 북쪽 성벽에, 죽 북동쪽에 있는 〈모퉁이〉와 일백 망대(함메아 망대) 및 하나넬 망대의 사이에 있었으며 , 후자의 두 망대는 아마도 북서쪽에 있는 안토니아 요새의 전신(前身)이었다는 사실을 이미 살펴보았다. 이 대문이 대제사장 엘 리아십과 그의 형제 제사장들에 의하여 건축되었다는 사실(느 3:1) 은 그것이 성전 지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며, 이 대 문은 『밋도트』 I 3 에서 성전 지대의 북쪽에 있는 정문이라고 언급된 타디 문과 동일한 것일 수도 있다 (190 항 참고). 그런데 문제의 그 연 못이 이 대문 〈곁에〉 있었으므로 그에 따라 우리는 그 연못의 대략 의 위치를 정하게 되었다.

요한복음 5:2 의 본문은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라 하는 연못이 있는데〉라고 계속된다. 이 대목에서 그 연못의 이름이 주어지기는 하지만 , 여기에는 또다른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여러 다른 필사본들이 서로 다른 이름들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의 앞부분에서 아마도 가장 정확한 본문을 가진 것으로 여겨 진 필사본들이 이제는, 철자법에 조금씩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 벳새 다라는 이름을 제시하고 있다. p 66 에는 Bn6oat 6a (벨사이다)로 되어 있고 , p 75 와 r 바티칸 사본」과 다른 필사본들에는 BnOoat 8d (벨사이다) 라는 철자로 되어 있다 . 제롬도 이 대목에서 『 지명록 』 (59 쪽)의 철자 룰 바꾸어 Be t hs ai da 라고 적고 있다 .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104 항), 이 이름은 아마도 〈어부의 집〉이라는 뜻이므로 갈릴리 해변 에 있는 한 동네의 이름이다 . 안드레와 베드로 그리고 또한 빌립이 살던 도시였던 이 곳에 관해서는 요한복음 1 : 44 에 그 이름이 이미 언급된 바 있다. 이 이름은 한 어촌의 이름으로는 적합하겠으나, 예 루살렘 도성 안에 있는 한 연못의 이름으로는 덜 적합한 듯이 보인 다 . 그러므로 바로 위에서 인용한 자료들에서 이 이름이 초기부터 넓게 사용된 것이 중명됨에도 불구하고, 이 이름이 여기에 쓰인 것 은 한 필사자가 당시에 잘 알려진 한 마을의 실제적인 이름을 여기 에다 잘못 기록했기 때문일 것으로 판단된다. 제 5 세기의 것인 r 알렉산드리아 사본 Codex Alexan dri nus 」과 「에프 라엠 사본』의 부본 Codex Eph raem i rescri ptus , 그리고 다수의 비잔 틴 필사본을 포함한 다른 필사본들에서 Bn0co8d( 베테스다)라는 이름 이 발견되는데, 이것이 KJV와 ASV 에 채택된 독법이다 . 히브리어로 n`2 (베이트)는 〈집〉을 의미하고 더 WR (아사드)는 〈쏟다, 흐르다〉라는 뜻이며, 이와 연관된 아람어 형태인 R 더 w~ n’ 그(베이트 아스다)가 이 헬라어 이름의 배후에 놓여 있을 수 있다 . 따라서 그 이름에는 〈쏟 아냄의 집 House of Ou tpo따ing〉 또는 〈물이 쏟아진 집 House of

Poured-out Wa t er 〉과 같은 의미가 들어 있다. 홍미롭게도 이것은 제 4 세기의 옥쉬튕쿠스 Ox yr hy nchus 에서 나온 양피지에 적힌 진술(OP 840 line s 25, 32-33 ; FHRJ §262) 을 연장시켜 주는데, 이 진술은 다 윗의 연못에서 ev t저 Aiµ v n t0 U A[QU Et ]6 손수 몸을 씻었노라고 말한 어떤 바리새인에 관한 것으로서, 이 바리새인을 향하여 구주께서는 그가 〈이 홀러 나온 물에서 to tg XE0µt vo t g U[8]d0t V> 몸 을 씻었다고 말씀하셨다 한다. 어쩌면 이 마지막 표현은 달리 어떤 특별한 의미 를 가지지는 못한 듯하나 실제로는 베데스다의 연못을 가리키는 말 일지도 모른다. 이 경우에 옥쉬튕쿠스 양피지에 나오는 바가 다른 곳에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는 다윗의 연못이 베데스다의 연못 과 동일시될 수도 있다. 제 5 세가의 쿠레토니아 필사본 Cure t o ni an manusc ript만큼이나 이 른 시대의 것인 고대 시리아어 역본에는 이 이름이 By t })sci, 즉 베 트-헤스다 Be th -besda( 베데스다)로 되어 있다. 이 형태의 배후에는 히브리어 r,.,2 (베이트, 〈집〉)와 더四 N (아사드, 〈자비〉), 그리고 이와 연 관된 말로서 〈자비의 집 House of Merc y〉이라는 의미를 지닌 아람 어 Ri o n r, .,2( 베이트 하스다)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 이름은 예 수께서 행하신 치유에 비춰 볼 때 확실히 적합한 이름이었으나, 이 미 그 연못과 분명히 관련된 여러 치유들에 비춰 보면 아마도 그 이 전에도 적합한 이름이었던 것 같다. 예루살렘에 하나의 연못 또는 여러 연못들을 가진, 〈베데스다〉라 고 불린 한 장소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 쿰란에서 나온 「구리 두루 마리」의 히브리어 본문에서 확인되고 있는데 (3 Q 15 DJ D ill 'lSJ7쪽, 271-272 쪽 참고 ; J. T. Mi1ik in RB 66 [1959], 328, 345, 347-348 쪽 ; J. M. Allegr o , The Treasure of the Copp e r Scroll, 2d ed. [1964], 84 쪽), 이 두루마리는 아마도 25 년에서 68 년 사이에 기록된 작품인 것으로 생각된다 (F. M. Cross, Jr. in DJ D m 217, 219쪽). 이 두루마리의 제

X1 단 제 12-13 행과 예루살렘의 지명 목록에서 우리는 이런 문구가 있는 것을 읽게 된다. 〈베트 에쉬다타인 Be th Eshda th a yi n(1.,n 기 DR [tt] n., 그)에 -(더) 작은 저수지로 들어가는 연못에 …….> 이것은 〈베데스다〉라는 이름의 한 표기로 위의 둘째 문단에서 제시된 어원 과 맞아떨어지는 것인데, 다만 두 가지의 홍미로운 특징들이 부가되 어 있다. 그 첫번째는 둘째 단어의 첫 글자인 알레프 'ale p h 가 두 번 기록되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인데,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사본들 울 필사하는 과정에서 혼히 일어나는 과오의 형태인 중복 오사( 重複 誤 寫 )의 결과이다. 그 두번째는 이 단어가 히브리어의 양수( 兩數 ) 어 미로 기록되어 있다는 중요한 사실이다. 두번째 사실에 비춰 볼 때,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제 위에서 설명된 〈쏟아진 물〉이라는 구절을 〈연못〉이라는 넓은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여기에 기록된 이 이름을 〈쌍둥이 연못의 집 House of the Twi n Pools 〉 이라는 의미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 여기서 우리는 이 이름이 남아 있는 다른 중요한 이문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댜 그것은 벳자타 Be thz a th a(Bn8~a8a) 라는 독법인데 , 이 독 법은 「시내 사본」에서 발견된다. 또한 『지명록』 (58 쪽)에서 유세비우 스는 이 동일한 이름에서 한 글자를 생략하여 Bn~a8a (베자타)라고 기록하고 있다. r 베자 사본 Codex Bezae 」의 서방 텍스트와 이탈라 I tal a 의 여러 필사본들에는 BcA(c8d (벨제타)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 또한 의심할 여지없이 철자법의 변형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단지 〈벳자타〉라는 이름에 대하여 설명하기만 하면 된다. r 구 리 두루마리」에서 우리는 히브리어의 양수(兩數) 형태인 베트 에쉬 다타인을 보았다. 만약 우리가 이 이름이 아람어로 옮겨진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팔레스타인 아람어에서는 양수 어미가 대체적으로 상실 되 었음을 기 억 해 야 한다 (Franz Rosenth a l, A Grammar of Bi bl i cn l Aramaic [1961], 24 쪽, no. 45). 만약 이 경 우에 히 브리 어 양수가 여 성

복수로 대치되었다면, 이 이름의 아람어 형태는 않n더 0R n.,2( 베트 에쉬다타, Beth Eshda th a) 였을 것이다 . 그렇다면 우리는 벳자타라는 이름을, 아람어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가 있다. 헬라 어 음역에서는 알레프 'ale p h 는 옮겨 적지 아니하고 쉰 s hi n 과 달레트 dale th는 제타 ze ta로 나타내는데 , 이것은 예컨대 히브리어 더'더 WR (아쉬도드, Ashdod [아스돗])를 헬라어 A((ll t0C (아조토스)로 옮겨 놓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 우리는 방금 헬 라어로 벳자타라는 이름을 쓸 때 첫번째 테타th e ta 룰 생략할 수 있으므로, 그 이름은 유세비우스가 그랬듯이 베자타로 쓸 수도 있댜 이 형태로 본다면 그 이름은 요세푸스에게서 발견되 는 베제타라는 이름과 매우 홉사하다 . 왕 헤롯 아그립바 1 세에 의하 여 세워진 예루살렘의 〈제 3 성벽〉 (201 항)을 묘사한 그의 글에서 요 세푸스는 말하기를 (War V 4, 2 §§148-151) , 이 성벽은 후대에 그 도 성에 첨가된 부분들, 곧 성전의 북쪽에 있는 한 구역을 에워싸기 위 하여 세워졌다고 한다. 안토니아의 맞은편인 이 곳에 베제타라고 불 리는 한 언덕이 있었고, 근래에 세워진 구역 또한 흔히 쓰는 말로 베제타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헬라어로 신 도성 New C ity이라고 번 역될 수도 있다고 요세푸스는 말한다 (173 항 참고). 신 도성은 사실상 베제타의 번역 이 아니다 . 다른 문단 (War II 19, 4 §530) 에서 요세푸스 는 보다 정확하게 말하기를, 그 구역이 베제타로 알려지기도 하고 또한 신 도성으로 알려지기도 했다고 한다 l rt V 1E BE~E8c tV …… 111v Kat Kat v6 Jt O At V. 그렇다면 베제타라는 이름은 십중팔구 벳자타라는 이름과 동일한 것이며, 그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도성의 한 구역, 즉 성전의 북쪽에 있는 지역은 우리가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 베데스다/ 벳자타 연못이 그 안에 위치했던 지역이다. 따라서 그 연못 때문에 그 도성의 확장된 구역이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온 합리적인 추측이다.

이와 같이 필사본의 증거에서 나타난 가장 중요한 이문들을 고찰 함으로써 우리는 벳새다라는 이름이 당시에 잘 알려진 한 마을의 이 름을 잘못 기입한 필사자의 오기의 결과라는 사실과 그 밖의 전통은 본질적으로 일관성 있게 같은 내용이라는 사실, 다시 말해서 베데스 다와 벳자타(그리고 이 두 이름의 이문 철자들)는 각기 그 연못 이름 의 히브리어 형태와 아람어 형태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결론짓게 된 다 . 더욱이 이 전통과 쿰란에서 나온 구리 두루마리에 있는 항목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히브리어 양수 어미로 볼 때) 그 연못이 사실을 쌍둥이 또는 이중 연못이었다는 중거를 가지게 된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대로, 유세비우스는 신약 이후로 그 연못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묘사를 제공하는 『지명록.!l (58 쪽)에서 베자타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유세비우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베자 타. 양못 Shee p Pool(TJ n:p oOanK it)이라고 하는, 예루살렘에 있는 연못 으로서 전에 다섯 개의 행각t modc 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온 그 곳에 있는 쌍둥이 연못으로 나타나 있다. 그 중의 하나는 해 마다 내리는 빗물로 차 있으나 다른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자주색을 띤ll: E~ l. V l.Y)lf: VOV 물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자주색은 전에 그 연못에 서 씻김을 받은 희생된 동물들의 혼적이라고 말해진다. 이것은 또한 왜 그 연못이 양못n:p oOanK it이라고 불리는지에 대한 이유인 희생 제 물들 때문임을 말해 준다 . 〉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그 장소가 예루살 렘에서 두드러진 곳이었음을 알게 되고, 또한 거기에는 쌍둥이 연못 이 있었음을 명백히 보게 된다. 희생 제물들과 연결시키는 전통은 그 곳이 성전지대에 근접해 있었음을 암시한다. 성전 근방의 예루살렘을 묘사하면서 보르도 순례자 (GEYER 21 쪽; LPPTS 1-B, 20 쪽 ; CCSL CLXXV, 15 쪽 ; WET 156 쪽)는 다음과 같 이 그 동일한 이중 연못을 얻급하고 있다. 〈그 도성의 좀더 먼 곳에 다섯 개의 행각을 가진 쌍둥이 연못들pi s ici nae g emellares 이 있는

데 벳새다라고 불린다. 그 곳에서는 여러 해 동안 앓아온 사람들이 나음을 받는다. 이 연못들의 물이 요동할 때에는 in modum cocc ini turb ata m 그 물이 붉은 색으로 변한다.〉 여기서 추가되는 사항은 그 연못에서 이따금씩 일어난 것이 분명한 물의 요동에 대한 언급이다 (요 5:7 참고). 연못가에서의 병자의 치료에 관한 설교에서 예루살렘의 퀴릴 C yril of J erusalem 은 이렇게 말한다 (MPG 33, col. 1133). 〈예루살렘에 다 섯 개의 행각을 가진 양못 n pop anK~ Ko1uµP I't 8p a 이 있었는데, 그 중에 네 개는 연못의 주위를 둘렀으나 다섯번째 것은 연못의 중심을 가로 질러 나 있었다. 이 곳(죽 연못의 중심에 있는 행각)에는 한 무리의 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다른 자료들로부터 이 연못이 사실을 쌍둥 이 연못 죽 실제로 두 개의 연못이었음을 알게 되었므로, 우리는 네 개의 행각들이 그 두 연못을 둘러싸고, 다섯번째의 행각이 그 두 연 못 사이로 나 있는 것으로 그려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 곳에 한 교회가 세워졌음을 알게 된다. 451 년 에 예루살렘에 온 이베리아인 베드로 (Raabe 94 쪽 in KOPP 1963, 309 쪽)는 〈성묘 교회〉로부터 겟세마네로 가는 길에 〈절뚝발이의 (교 회) 안으로〉 들어갔다. 알렉산드리아의 유튀키우스 (ed. Watt CSCO 193, 139 쪽)도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터 Place of the Shee p라고 불 리는 교회〉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것이 바로 38 년 동안 마비되었던 사람을 그리스도께서 고쳐 주셨음을 중거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 다. 그러므로 그 교회는 〈절뚝발이의 교회 Church of the Lame Man> 또는 〈양터 교회 Church of the Sheep Place (Proba tike) 〉로 알려진 것이 분명하다. 홍미롭게도 이 연못이 있는 장소는 또한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출 생을 기념하는 일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우선 우리는 그 연못가에 〈성 마리아의 교회〉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테오도시우스는 530 년에,

이 교회가 연못 근처에 있었다는 것만을 말하면서 이 교회를 언급하 였다. 양못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GEYER 142 쪽 ; LPPTS II-B, 11 쪽 ; CCSL CLXXV, 118-119 쪽 ; WJ P 156쪽). 〈거기서 주 그리스도께서 중풍환자를 고쳐 주셨는데, 그의 잠자리가 아직도 거기에 있다. 거기 양 연못 근처에 ‘성 마리아의 교회’이 있 다 Iuxt:a pisc i na m pr obati ca m ibi est ecclesia domnae Marin e .> 그리 고 피아첸짜의 무명씨 (570) 는 그 연못과 관련하여 이 교회의 위치롤 다음의 진술에서 더욱 정확하게 밝혀 주고 있다 (GEYER 177 쪽; LPPTS II-D, 22 쪽 ; CCSL CLXXV, 143 쪽 ; WJ P 84 쪽). 〈도성 으로 돌아오면서 우리는 다섯 개의 행각을 가진 수영장p s i c i na nat: atioi a 에 왔는데, 그 한 행각에는 성 마리아의 바실리카가 있다 . 〉 이 말에 서 우리가 추측하게 되는 것은 이 교회가 그 연못의 보랑(步廊) 안 으로 지어졌다는 것과 따라서 이 교회는 아마도 그 연못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그 〈절뚝발이의 교회〉과 동일한 것이거나 아니면 그 자 리에 다시 지은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무명씨에 의하면 그 연못 자체는 당시에 오물로 막혀 있었고, 이제 그 곳에 보이는 유품은 고 침을 받은 사람의 잠자리가 아니라 유다가 목매어 자살할 때 사용한 쇠사슬이었다. 이러한 관련 사항들로부터는 아직도 이 곳에 있던 교회와 마리아 이름의 별다른 연관성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 장소가 마 리아의 출생지로 믿어졌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그 해답을 얻게 된 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터라고 불리는 교회〉에 관하여, 알렉산드 리아의 유튀키우스는, 바로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것이 그리스 도께서 그 사람을 고치신 장소를 표시했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또 한 다음과 같이 기 록하고 있다 (ed. Watt CSCO 193, 139 쪽). 〈그 교회 는 또한 그리스도의 모친인 마리아의 출생이 그 곳에서 있었음을 증 거한다. 마리아의 아버지는 왕의 지파인 유다 지파의 다윗의 아들들

가운데 빈티르 B i n thir의 아들 요아킵이고, 마리아의 어머니는 제사 장 직분의 지파인 레위 지파의 아론의 딸들 가운데 안네였다〉(또한 Wi lliam of Ty re, 위 의 150 항 참고). 그 후에 유튀 키 우스는 계속해서 마리아의 출생 경위를 간략하게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 요아킴과 안 네가 그들의 서약을 따라서 마리아를 사가랴의 책임 아래 성전에 데 려다 놓은 내력과 거기서 마리아가 또한 한 천사의 손으로부터 음식 울 받아 먹은 것도 말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야고보의 원복음 The Prote v ang e liu m of Ja mes 』이라고 알려진 제 2 세기 중엽의 외경서에 나오는 더욱 자세한 설화 (HSNTA I, 374 쪽 이하) 및 『 코란』 (Surah ill, 35-37) 에 나오는 간략한 요약과 전반적으로 일치한다. 『원복음.!l 에서 이 사건들은 성전과 연관을 갖고 있으므로 요아킴과 안네가 그 근처에 살고 있었다는 추측을 낳게 할 수도 있었으며, 또한 요아킴 은 목자로 나타나 있으므로 그의 주거가 양문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합당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어쩌면 그 양 연못 곁에 있는 장소를 요아킴과 안네의 집이 있던 곳과 마리아의 출생지로 지목하는 일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페르시아인들이 614 년 5 월에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연못가의 교회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이 파괴한 건물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후에 한 작은 예배당이 그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1099 년 7 월 15 일에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에는 그 예배당이 아마 도 폐허가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새로운 성 안네의 바실리카 롤 건축했는데, 이것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1102 년의 새불프 Sae wulf 에 의해서이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LPPTS N, 17 쪽; Vin - cent, Jer usalem nouvelle, 681 쪽). 〈주의 성전으로부터 북쪽을 향하여 가면 복된 마리아의 어머니 성 안내의 교회가 나온다. 여기가 바로 성 안네가 그녀의 남편과 함께 산 곳이며, 또한 그녀가 모든 신도들 의 구원자인, 그녀의 가장 사랑하는 딸 마리아를 출산한 곳이다. 그

근처에는 다섯 개의 행각을 가진, 히브리어로 벳사이다 Be th sa y da 라 고 불리는 프로바티카 연못 Proba ti ca Pool 이 있다.〉 예루살렘을 정복 하는 프랑코니 아인들의 업 적 Deeds of the Franconia n s Conq u eri ng J erusalem(1108) 이라고 불리는 십자군 정복에 관한 이야기는, 십자 군이 교회 〈앞에서〉 다섯 개의 행각을 가진 옛 못의 흔적들을 발견 했다고 진술한다(J er emi as, The Redis c overy of Beth e sda, 22 쪽). 그 러므로 새로운 〈성 안네 교회〉은 오늘날의 교회가 서 있는 베데스다 못의 동쪽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 지하에는 마리아가 출생한 바로 그 장소로 생각되는 석굴이 하나 있다. 하지만 이 교회 이외에도 십 자군은 또한 그 예배당의 폐허 위에 하나의 예배당을, 그리고 못가 에는 비잔틴식 교회를 건축하였다. 이것은 1231 년에 그는 그것을 무 티에 mouti er , 죽 문자적으로 수도원이라고 부렀다 (V in cen t, Jer usal- em nouvelle, 681 쪽). 1192 년에 살라딘은 성 안네의 교회를 모슬렘교 대학으로 바꿔놓 았다. 고대의 이중 연못은 분명히 이미 오래전부터 돌 부스러기로 채워져 있었고, 십자군 예배당도 융기하는 지면 아래로 묻혀 사라지 고 말았다. 1856 년에 〈크리미아 전쟁 Cri me an War 〉이 끝났을 때, 터 키의 술탄은 성 안네의 바실리카를 프랑스의 나폴레옹 田세에게 바 쳤다. 1 얽 1 년에 프랑스인 건축가 C. 모스 C. Mauss 가 그 교회를 복 원하던 중에 북서쪽으로 30 미터 떨어진 곳에서 둥근 천장으로 된 수 조 하나를 발견하였으며, 그리고 이것이 고대의 연못의 일부였을 것 으로 추측하였다. 그로부터 5 년 후에 폭우가 쏟아져서 돌 부스러기 를 좀 더 쓸어내자 그 수조 위로 제 5 세기의 비잔틴식 교회의 일부였 던 구조물이 그 위에 있던 십자군 예배당의 유적과 함께 드러났다. 마침내 그 위에 있던 십자군 예배당의 유적과 함께 드러난 것이었 다. 마침내 l 'ir1 8 년에 프랑스 정부는 〈성 안네 교회〉의 소유권을 백 의 신부회(白衣神父會)에 넘겨 주었고, 그럼으로써 현대의 발굴 작업아

가능하게 되 었다 (204 항을 보라). 사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서 있는 그대로의 〈성 안네 교회〉 (Bahat, Plans, 75), 죽 성지에서 십자군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건축 구조 가운데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본보기를 ·. 보여 주고 있 다. 이 교회의 치수는 112Xl6 피트이고, 서쪽 정면을 통하여 들어가 게 되어 있으며, 내부는 회중석과 두 개의 측랑으로 나눠져 있고, 각 측랑은 동쪽 끝에 있는 후진에서 끝난다. 남쪽 측랑의 중간에는 지 하 석굴(동서의 길이가 약 24 피트이고 남북의 폭이 20 피트인)로 내려가 는 층계가 있는데, 이 석굴은 교회의 지하 토굴을 이루고 있으며 동 정녀 마리아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네가 거주하던, 반은 축조되고 반 은 바위 속으로 깎아서 지어진, 수수한 주택이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MEISTERMANN 215-218 쪽). 204 베데스다 못에서의 발굴 백의 신부단에 의한 베데스다 연못에서의 초기 발굴 작업은 성경 연구원 Ecole B i b liq ue 의 도미니크 수사들의 도움으로 수행되었으며, 계속된 작업은 백의 신부회를 대신해서 루제 J.- M. Rousee 와 드 보 R. de Vaux 에 의하여 1957-1962 년 이루어졌다. 이미 언급된 수조 (203 항)와 후에 발견된 다른 수도는, 두 개의 매우 큰 연못 중에서 북쪽에 있는 것의 전체 지역 가운데서 남쪽의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 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 잘 알려져 있다. 이 연못들은 기드론으로부터 대각선으로 벗어나서 흐르는 작은 골짜기에 있었는데, 이 골짜기는 이미 언급된 바 있으며 성 안네의 골짜기 St. Anne's Valle y라고 불렸다 (173 항). 부분적 으로 이 연못들 은 바위를 깎아서 만들어졌고, 또 부분적으로는 잘 다듬어진 큰 돌 덩이들로 축조되어 있었다. 그 두 연못은 폭이 6 미터를 넘는 돌 방

벽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었다. 그 연못들은 지하로 멀리까지 뻗어 있고 부분적으로는 그 도성의 육중하게 건조된 지역들 아래 있기 때 문에, 그것들의 흔적을 완전히 추적하는 일이 아직껏 가능하지 못했 댜 그 연못들은 대체로 직사각형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불규 칙적인 비율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잠정적인 추산으로는 북 쪽 연못의 남쪽이 174 피트, 동쪽과 서쪽이 131 피트, 그리고 북쪽이 164 피트이고, 남쪽 연못의 북쪽은 189 피트, 동족과 서쪽은 각각 162 피 트와 157 피트, 그리고 남쪽은 215 피트이다. 이와 같은 규격이라면 그 두 연못의 수면의 넓이는 5000 평방 야드를 초과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첫째 수조는 북쪽 연못의 남동쪽 모퉁이에 있는 것 으로, 동서의 길이가 약 16 미터요 남북의 폭이 6 미터인, 둥근 천장이 있는 방이다. 일찍이 1888 년에 관찰된 바에 의하면 (C . Schi ck in PEFQ S 1888, 115-124 쪽, 특히 119 쪽), 이 수조의 서 쪽과 남쪽 및 동 쪽은 바위를 깎아서 만들었고, 그것의 북쪽은 건조된 벽으로 되어 있었다. 이 벽의 가장 낮은 부분은 이제 로마 시대의 작품으로 인지 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수조는 그 연못의 나머지 부분에 의하여 오 염되지 않도록 음료수를 보존하려는 그들의 노력의 일환으로 만들 어졌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두 개의 큰 연못을 위한 물의 근원에 대 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대로 그 연못들의 위치가 골짜기에 있었던 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빗물을 모으기에 좋은 장소에 있었음을 의미 했다. 적어도 고대에는 그 골짜기에 어쩌면 샘이 있었을 것이다. 그 연못들에 물을 대는 수로들의 어떤 특성, 또는 기혼 샘과 같은 간헐 적인 샘이 존재하는 것 (175 항)까지도 요한복음 5:7 과 보르도 순례자 에 의하여 언급된 바 있는, 이따금씩 일어난 물의 동요에 대한 설명 이 될 수도 있었다 (203 항 참고)• 이 두 개의 큰 연못을 최초에 건설한 연대에 관해서는 대제사장 시몬 II 세 Sim o n II (B.C. 220--195) 의 통치와 관련하여 『예수 벤 시락

의 지혜서 Wi sd om of Jes us ben S ir ac 바에 기록된 진술(집회서 5():1 - 3) 은 〈그는 생전에 저수지를 팠는데 그 저수지가 바다처럼 넓었다〉 라고 하는데, 아마도 이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문제의 연못들을 가 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MACKOWSKI 79쪽). 다섯 개의 행각들이 어떻게 생겼으며 그것들이 어디에 위치했던가에 관해서는 현재의 고 고학적 작업의 상황으로서는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WJ JK 103 쪽). 쌍둥이 연못의 바로 동쪽에서 계속된 발굴 작업에서 하나의 자연 석굴이 발견되었고, 그 주위에는 바위를 깎아 만든, 둥근 천장을 가 진 일련의 방들이 여러 개의 웅덩이 및 수로와 함께 있었는데, 그 전체는 그 근처의 〈성 안네 교회〉 밑에 있는 홉사한 시설들과 연관 되었음이 확실하다. 이 석굴들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고, 그 중 더 러에는 그림과 모자이크가 있었던 증거가 나타났다. 일찍이 1866 년 에, 대리석으로 된 깨어진 발이 〈성 안네 교회〉의 둥근 천장 안에 있는 돌 부스러기 가운데서 발견되었다. 그 꼭대기에는 헬라어로 이 런 명각이 적혀 있었다. IlON 町 IA AOYKI MA ANE8H KEN noV JCilta AouKt l ta ( Vin c ent, J er usalem nouvelle, 694- 695 쪽). 그의 이름을 보고 판단한다면 로마인 숙녀인 이 헌납자는 분 명히 그 장소를 방문하였고, 그리하여 그녀의 방문의 표시로서 이것 을 남겼는데, 그 발은 아마도 그녀가 체험한 치유를 기념하는 것이

었을 것이다 . 고문서학적으로 볼 때 이 명각은 2 세기의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필시 제 2 또는 제 3 세기의 것인 다른 서원의 제물들과 그 와 관련된 취지의 물건들도 또한 발견되었다 . 그러므로 이러한 중거 는 이것이 로마 시대의 이교적 치유 신전이었음을 가리키고 있으며, 헬라의 에 피 다우루스 Ep i daurus 와 소 아시 아의 버 가모 Per g amum 에 있는 아스클레피에이아 Ascle pi e i a 처럼 그것이 치유의 신인 아스플레 피우스 Ascle pi us 에게 바쳐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유대인들에 게 있어 그것은 단순히 〈자비의 집 House of Merc y 〉 (아람어로 베데스 다 Be th esda) 이었으며, 그 절뚝발이에게 있어서 그것이 그렇게 된 것 은 단지 예수의 명령에 의해서였다 . 베데스다라는 이름의 아람어 형태가 매우 분명하게 식별되는 필 사본인 쿠레토니아 시리아어 역본 Cure t o ni an Sy riac versio n (203 항 참고)에는 요한복음 5:2 의 본문이 <…… 예루살렘에 침 례탕이 있었 다. ……〉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베데스다 연못들이 어떤 시기에 기 독교의 침례 장소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말해 주는데 , 이러 한 일은 예루살렘에 물이 풍부한 장소가 없음을 고려할 때 얼마든지 있음직 한 사실 이 다(J ere mi as, The Redis c overy of Beth e sda, 33-34 쪽) . 기독교인들이 이 곳에 교회를 짓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들 도 틀림없이 교회를 지었던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그 병자를 고쳐 주 신 것을 기념하고 또한 그 이교 신전을 몰아내기 위함이었다. 우리 가 이미 본 바와 같이 (203 항), 이베리아인 베드로는 451 년에 절뚝발 이의 교회를 언급하였는데,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위치에 있 는 교회, 죽 그 유적이 발굴을 통하여 드러난 교회였다. 그것의 서쪽 부분에는 이 교회의 중심과 주된 입구가 그 두 연못 사이의 바위로 된 방벽 위에 놓여 있는 한편, 그 북쪽은 로마식 구조의 수조 위에 받쳐져 있었고, 남쪽은 일련의 아치들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었다 . 이 것은 각 홀이 동쪽 끝에 있는 동일한 반원형의 후진에서 끝나는 세

개의 홀들을 가진 바실리카였다 . 중앙 홀은 그 바위로 된 방벽과 같은 폭 (6 미터)으로 되어 있었고 , 그 방벽 위에는 그 홀이 동쪽 부분에 놓여 있었으며, 양편의 홀들도 같은 폭으로 되어 있어서 바실리카의 폭의 도합이 18 미터였고 그 길 이는 45 미터였다. 그 두 연못의 동쪽에는 지하의 로마식 성소가 메 워져 있었고, 바실리카의 동쪽은 그것의 세 후진과 함께 바깥의 이 지면에 세워졌다 . 단편적인 유물들로 보건대, 서쪽 끝에 있던 배랑(拜廊, n arth ex) 은 모자이크 바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그 교회의 나머지 부분은 대리석 슬라브들로 덮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추측컨대 이것이 이 베리아인 베드로가 언급한 그 교회이므로 그것은 그의 시대 (451 년) 이전에 세워졌음이 틀림없고, 그 모자이크 바닥에 남아 있는 부분들 위에 십자들이 그려져 있으므로 그것은 4 '2:1년(테오도시우스 II 세가 교 회의 포장한 바닥에 십자를 그리는 일을 금지한 해) 이전에 있었던 일 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 교회가 지어진 대략의 연대는 제 5 세기 초이다 . 방금 기술한 비잔틴 식 바실리카는 아마도 페르시아인들에 의하 여 파괴되었으며 (614 년) , 그 후에 그 교회의 북쪽 측랑 위에 세워진 작은 예배당으로 대치되었으나, 이것 또한 칼리프(회교국의 왕) 하킴 H akim의 유린을 겪었으며 (1009) 따라서 십자군이 왔을 때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이제 십자군은 북쪽 연못의 남동쪽 모퉁이에 있는 로 마식 수조 위에 예배당 하나만을 세웠는데,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203 항) 무티 에 Mou ti er 로 알려 진 예 배 당이 다. 비 잔틴식 천장 아래로 나 있는 계단은 순례자들이 요한복음 5 장의 이적이 일 어난 장소로 추정되는 그 수조의 한 모퉁이로 접근할 수 있게 하고 자 건설되었으며 ,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곳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이 계단을 통해서 뿐이다.

그 근처에 십자군은 전통적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집으로 알려진 그 곳을 보존하고자, 아직도 그 곳에 서 있는 아름다운 〈성 안네 교 회〉을 건립하였는데 (203 항), 이것을 건축하기 위하여 방금 기술한 바 잔틴식 바실리카의 돌들의 대부분을 취해 갔다. 1896 년에 있었던 〈성 안네 교회〉의 지하 발굴에서 판 데르 플리트 Van der Vli e t는 그 교회 바닥의 약 1 미터 아래에서 바위를 깎아 만든 방 한 칸을 부분 적으로 파내었는데, 거기에는 제 2 세기의 것으로 여겨지는 약간의 회 반죽과 모자이크 바닥이 남아 있었다. 처음에 이것은 하나의 예배당 으로, 죽 후대에 이교의 신전으로 대치된 바 있는 원래의 〈마리아의 출생지 교회〉로 해석되었으나 (V i ncen t, Jer usalem nouvelle, 717-718 쪽), 여기에는 나사렛과 가버나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초기 순 례자들이 그 장소를 숭앙했음을 입증해 주는 벽서들과 기호들이 없 으며, 석굴도 단지 위에서 기술한 치유하는 신전의 시설의 일부로 이 해하는 것이 더욱 그럴 듯하다(B a g a tti, Church from Genti les , 162 쪽 이하). 205 아르쿨프가 그린 시온 산 위에 있는 교회의 구도 마가복음 14:15 과 누가복음 22:12 에 의하면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 과 나누신 최후의 만찬은 〈다락방ci v o. va to v 〉에서 있었다. 사도행전 1:13 에 의하면, 제자들은 그 분의 승천 후에 〈다락방 u Jt E pij'i ov 〉에 머물 러 있었댜 이 구절들에서 비록 두 개의 다른 헬라어 단어가 사용되 었으나 그 둘은 모두 위충에 있는 방을 가리키며, 제롬은 그의 라에 서 이 두 단어를 모두 cenaculum( 체나쿨룸)이라는 동일한 단어로 옮 겨 놓았다. 이 단어는 또한 coenaculum( 최나쿨룹)이라는 철자로도 쓰이고 영어로는 cenacle (세너클)인데, 그 의미는 식당이다. 이와같 이 방이 보통 위충에 있었으므로, 그것은 또한 다락방을 뜻하기도

한다 . 최후의 만찬의 다락방과 또한 승천 후에 제자들이 모인 다락방에 대하여 공히 cenaculum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의심할 여지 없 이 여기에 문제된 방이 동일한 방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조장했다. 비록 이 추측은 충분히 논증할 수는 없을지라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 또한 같은 방이 오순절 날에도 여전히 제자들의 중심지였다는 사실 (행 2 : 1) 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 이후에도 다수의 제자들이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함께 모였으며(행 12:1 2 ), 이것 또한 그 〈 다락방〉이 있던 집이었다는 추측도 , 비록 신약 본문만으로 는 충분히 논증할 수는 없을지라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지만 아래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초기의 전승에서는 여러 가 지 연결의 시도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예루살렘의 남서쪽 언덕이 그 도성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었으며 시온으로 불리게 된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173 항) . 그 도성의 이 부 분이 70 년에 로마인들이 침입했을 때 가장 적게 파괴된 부분이었다 는 사실도 또한 기억할 것이며 (183 항), 에피파니우스가 우리에게 말 해 주듯이 (We ights and Measures 14 [54c], ed. Dean, 30쪽), 하드리 아누스가 130 년에 입성했을 때 그는 시온에서 〈조그만한 하나님의 교회 , 곧 구주께서 감람산으로부터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돌아와 서 다락방으로 갔을 때 갔던 곳〉을 발견했으며, 또한 〈시온에 적막 한 오두막집들처럼 쓸쓸히 남아 서 있던 일곱 개의 회당들을 보았는 데, 그 중의 하나는 감독 막시모나 M axim ona 와 왕 콘스탄티누스의 시 대까지, 기록된 대로[사 1:8], ‘포도원의 망대'같이 남아 있었다.〉 에피파니우스(자신은 315 년 경에 팔레스타인에서 출생함)가 기록한 것 으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드리아누스가 본 그 조그만한 교회는 적어도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승천 후에 머물렀던 그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이며(행 1:1 3 ), 따라서 우리는 그 〈다락방〉을 가진 개

인 주택이 이 교회로 개조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종류의 개조는 나사랫 (46 항)과 가버나움 (99 항), 그리고 다른 곳에서 도 확인되고 있다 (MACKOWSKI 145 쪽). 우리가 유세비우스로부터 (Dem. Evang . m 5, 103 GCS Eusebiu s VI, 131 쪽, 위의 〈예루살렘 교 회 의 감독들의 명 단 Lis t of Bis h op s of the Jeu rsalem Church> 참고) 알 수 있는 것은, 하드리아누스의 시대까지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의 형 제 야고보를 위 시 한 <할 례 받은 감독들 bis h op s of the cir cu mci- s i on 〉의 계통에 의하여 주도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교 회가 유대인-기독교인들의 교회였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하드리아누스가 또한 시온에서 발견한 일곱 개의 회당들이 마치 적막한 오두막집과도 같았으므로, 그 회당들은 아마도 사용되지 않 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하여튼 하드리아누스가 앨리아 카피톨리나로 부터 유대인들을 쫓아낸 후에 그 회당들은 분명히 유대인의 예배를 위해서는 더 이상 사용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 4 세기 전반(막시모 나 또는 막시무스 감독 [c. 335-347/348] 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시대)까 지 하나의 회당이 남아 있었는데, 에피파니우스는 이 사실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 막시모나를 특별히 언급한 사실은 하나의 단서 를 제공할 수도 있다.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지를 시온 산으로부터 성묘로 이전시킨 것은 막시모나(막시무스)였고, 따라서 그의 시대까 지 남아 있던 〈회당〉은, 저들의 교회를 그 이름 (ouvaYUYn[ 쉬나고게], 약 2:2) 으로 부르기를 더 즐겨하던 유대인-기독교인들의 교회였을 것이다. 이 설명을 듣고 보면, 에피파니우스가 시온의 원시 교회를 한 번은 교회라고 불렀고 또 한 번은 회당이라고 불렀울 것으로 생각 하는 것 이 가능하게 된다 (Ba g a tti, Church from Cir c umc isi o n , 118 쪽, 그리 고 Ba ga tt i, Church from Genti les , 26 쪽). 보르도 순례자 (333) 는 시온에 올라가서 에피파니우스가 회당들에 관하여 보고한 닙 H t 확인하면서 말하기를, 전에 그 곳에 있던 일곱

개의 회당 중에서 오직 한 개만 남아 있었고 나머지는 〈선지자 이사 야(사 1:8; 미 3:12 참고)가 말한 바와 같이, ‘발같이 갈림을 당하고 그 위에 씨뿌림을 당하였다〉라고 하였다 (GEYER 22 쪽; LPPTS I- B, 23 쪽 ; CCSL CLXXV, 16 쪽 ; WET 157 쪽 이 하). 시 온 산 위 에 있 는 교회에 관하여 보르도 순례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그 의 순례 여정에 시온을 포함시킨 것은 기독교인 순례자에게 시온이 중요한 곳이었음을 보여 주고, 하나의 〈회당〉을 언급한 것은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집회 장소였던 회당/교회를 또 다시 지칭하는 말일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하여 그 이방인 순례자는 달리 더 말할 것이 없을 것 이 다 (Ba g a tti, Church fro m Genti les , 26 쪽 ; Com feld 294쪽). 시온 산 위에 있는 원시적인 회당 교회가 차지하고 있던 그 장소 의 중요성에 관하여 우리가 에피파니우스로부터 알게 된 사실은, 하 드리아누스가 본 그 〈작은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 자들이 감람산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그들이 모였던 다락방이 있는 곳이었다는(행 l:l3) 것이다. (230 년 경으로부터 20 년 이상을 팔레스타 인에 살았던) 오리게네스로부터 우리는 그 장소의 중요성을 가리키 는 또다른 말을 듣는데, 말하자면 이 곳이 바로 최후의 만찬이 있은 장소였다는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그가 쓴 『마태복음 주석 Commen- tary on Ma tt hew 』 (MPG 13, cols, 1736-1737 ; Bag a tt i, Chruch from Genti les , 25 쪽)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자, 우리가 예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그 축복의 떡을 받기를 원한다 면,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킨 장소인, 저 도성 안에 있는 그 사람의 집으로 가자. …… . 그 집의 위충으로 올라가자. …… 그들이 주와 함께 절기를 지키고 축복의 떡을 받으며, 말씀 Word 의 몸 올 먹고 은혜의 행위를 가리키는 잔 ch ali ce 을 마신 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아버지께 찬미하기를 가르치셨고, 하나의 높은 장소에서 다른

높은 장소로 옮겨가게 하셨으며, 신도들이 골짜기에서 할 수 없는 일들 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감람산으로 올라갔다. 오리게네스가 여기서 시적인 방법으로 언급하고 있는 두 개의 높 은 장소는 틀림없이 그 도성의 남서쪽 언덕이자 가장 높은 지점인 시온 산 (173 항)과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에 있는 감람산일 것이다. 그 리고 전자의 산상에 있던 한 집(그 당시에는 〈작은 교회〉)의 위층에 서 최후의 만찬이 베풀어졌다. 유세비우스(가이사랴의 감독, 313-340) 는 시온에 관하여 말하면서 이르기를, 그리스도의 율법인 복음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을 통 하여 예루살렘이 있는 시온 산으로부터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되었 는데, 이 시온 산은 예수께서 오랫동안 머무시면서 그의 제자들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치신 곳이라고 하였다 (Dem. Evang . I 4 MPG 22, col. 43; Baldi 473 쪽 이하, no. 728). 이 진술은 또한 오순절의 사건과 그 날에 〈천하 각국으로부터〉(행 2:5) 온 경건한 사람들에게 베드로 가 설교한 것을 상기시켜 주기도 한다. 알렉산더 감독 B i sho p Alex- ander(212-250) 이 창설하였고 유세바우스가 친히 일한 적이 있는 도 서관이 있는 곳도 아마도 시온 산 위였으며 (Ch Hi st . VI 20, 1 ; KROLL 315 쪽, col. 1), 또한 유세비우스가 기록한 바대로 (Ch Hi st . VII 19) 주의 형 제 야고보의 감독석 8p6 vo~ 이 보존되 고 존중된 곳도 시온 산 위였다. 348 년의 부활절 무렵에 예루살렘의 감독 퀴릴 C yril이 〈성묘 교회〉 에서 교리 문답 강의들을 하였는데, 제 XVI 강의를 성령에 관한 주 제에 할애하였다. 여기서 그는 말하기를 (XVI, 4 NPNFSS VII, 116 쪽), 그리스도와 골고다에 관한 강연을 바로 골고다에 있는 교회에 서 하는 것이 적합한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에 관한 말씀은 〈윗교 회〉에서 tv ti dv(J )ttpq tKK Anoiq > 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회상하기를 , 그 곳에 내려오신 분(죽 성령)께 서는 이 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며, 그러므로 골고다에서 또한 〈윗교회〉의 자리에 내려 오신 분에 관하여 말하는 것도 사실상 부적합하지 않았다 . 제자들 위에 성령께서 내려오셨던 장소를 표시했던 〈윗교회〉는 시온 산 위 에 있던 교회였음에 틀림없으며, 이 무렵에 그 교회는 하드리아누스 가 본 적이 있는 그 〈 작은〉 교회, 곧 아마도 지금의 비잔틴식 바실 리카보다는 더 크고 더 화려한 구조물이었을 것이다 (MACKOWSKI 142 쪽). 애테리아 (381-384) (GEYER 91-94 쪽 ; LPPTS I-C, 67-69 쪽 ; CCSL CLXXV, 83-86 쪽 ; WET 140-141 쪽)도 그녀가 〈시온의 교회〉라고 부 르는 그 교회를 알고 있었으며, 그 곳에서 예배 행사가 행해진 여러 번의 경우를 언급하고 있다. 부활절 일요일 dom i n i따 die pe r pasc/ r i 에 사람들은 저녁에 감독과 함께 〈아나스타시스〉 (〈성묘 교회〉)로부 터 시온까지 걸아가서, 그 곳에서 찬미와 기도에 더하여, 이 날에 〈문이 닫혔는데도〉 주께서 어떻게 이 장소에 오실 수 있었는지롤 말 해 주는 복음서 (요 20:19-25) 를 읽는 일을 하였으며, 이 일은 바로 〈지금 시온에 교회가 있는 그 같은 장소에서〉 있었다. 여드레를 지 나서 다시 일요일이 되면, 시온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여기에는 그 날에 주께서 오셔서 도마의 불신을 꾸짖으신 일에 관한 기사(요 20:26-29) 를 읽는 것이 포함되었다 . . 부활절로부터 오순절(부활절 후로 제 50 일)까지 사람들은 수요일과 금요일 아침에 시온에 모인다 . 마침내 오순절 일요일이 되면 〈대 교 회〉, (〈성묘 교회〉에 있는) 〈순교관 M artyri um 〉에서의 이른 예배가 있은 다음, 이어지는 예배가 시온에서 9 시에 있고(행 2:15 참고), 여 기에는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강림과 방언으로 말하는 일에 대해 기 록한 구절(행 2:1 이하)을 읽는 순서가 포함되어 있다. 〈장로들이 이

구절을 읽는 것은 그 장소가 하나의 교회로 변경된 al i a modo eccle- sia est 시온에 있기 때문인데 이 곳은 전에 주의 수난 후에, 우리가 위에서 말한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무리가 사도들과 함께 모였던 곳 이다.〉 퀴릴과 마찬가지로 애테리아는 시온을 오순절의 절정을 이루 는 사건이 있었던 장소로 강조하고 있으며, 시온이 그 무렵에 〈하나 의 교회로 변경되었다〉고 진술함으로써 그녀는 비잔틴식 바실리카 를 지칭하는 것이 확실한데, 이것의 존재는 바로 위에서 추론한 바 있다. 로마에는 (사도 베드로가 손님으로 있었던 원로원 의원 푸덴스 Pu­ dens 의 집터 위에 세워진 것으로 믿어지는) 〈산타 푸덴찌아나의 교회 Church of Santa Pudenz i ana 〉이 있는데, 이 교회가 최초로 건립된 것 은 제 2 세기 중엽의 교황 피우스 I 세 Piu s I 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고, 후에 교황 시리키우스 S iri c i us(384-399) 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그 안 에 있는 큰 후진 모자이크는 아마도 후자의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FLAP 524쪽), 그렇다면 이 모자이크는 대체로 애테리아와 동시대의 것이다. 전체 모자이크를 가로 질러서 타일 지붕으로 된 하나의 홍예랑이 뻗어 있다. 이 홍예랑의 위와 뒤에는 두 세트의 건 물이 있다. 보는 이의 왼쪽에 있는 건물들은 거의 확실하게 〈성묘 교회〉 (228 항)를 나타내는 것이며, 오른쪽에 있는 건물들은 이제 〈시 온 교회〉(뾰족한 지붕으로 되어 있고 아마도 기념 교회의 형태로 지어 진 팔각형의 건물)를 나타내는 것으로 믿어진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세나클이 있다(그 위와 뒤에는 감람산 위의 엘레오나 [Eleona] 가 있고, 가장 오른쪽에는 남쪽 성 벽 과 대문이 있음) (MACKOWSKI 143 쪽, pl. 125 ; 146 쪽, 그림 24 B ; Pixne r in BAR 16.3 May/ Ju ne 1990, 29 쪽). 테오도시우스 (530) 는 이 교회를 〈거룩한 시온 sanct:a S io n 〉이 라 부 르고, 〈모든 교회들의 어머니 m 먀 er om nium eccles ia rum 〉로 묘사하 면서, 그것은 『복음서』의 저자 성 마가 S t. Mark the Ev ang e li s t의 집

이었으며 골고다로부터 200 보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고 말한다 (GEYER 141 쪽 ; LPPTS IT-B, 10 쪽 ; CCSL CLXXV, 118 쪽 ; WJ P 66 쪽).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유튀키우스 (940) 도, 예루살렘에 있는 성 소들에 관하여 그가 가진 정보의 출처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다 (ed. Watt, CSCO 193, 142 쪽). 〈거룩한 시온 산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의 유월절 날에 그 곳 다락방에서 율법에 있 는 유월절 음식을 잡수셨음을 증거한다.〉 이러한 참고 사항들은 , 본 항목의 서두에 인용된 성경 구절들에 의하여 가능하게 된 모든 연결들이 잘 적용되었음을 가리킨다 . 시온 산 위에 있는 교회는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다락방과, 승천 후의 초 기 제자들이 모인 다락방, 그리고 오순절 때에 그들이 모인 장소를 기념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사실상 제 2 복음서와 저자인 마가 요 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있던 같은 방이었다.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 Madaba Mosai c Ma p」 (560) (229 항을 보라) 에는 테오도시우스가 〈모든 교회들의 어머니〉라고 칭한 〈거룩한 시 온 교회〉로 확실시되는 건물이 시온 지역에 하나의 매우 큰 바실리 카로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성묘 교회〉보다도 더 크게 그려져 있 고 붉은색 지붕과 노란색 대문을 가지고 있다. 주된 바실리카에는 붉은색 지붕을 가진 다른 건물 하나가 부속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 마도 산타 푸덴찌아나의 모자이크에서도 표시되어 있는 만찬실일 것이다. 예루살렘의 다른 많은 교회들과 함께 거룩한 시온 교회는 페르시 아인들에 의하여 파괴되었으나 (614), 20 년 후에 분명히 먼저 있던 건 물의 선상에 재건되었다 (Ovad i ah, Corp u s, 89 쪽 이하, no. 77a /b). 그 당시에 기록을 남긴 소프로니우스 So p hro ni us(634 년에 예루살렘의 주 교가 됨)는 그가 쓴 시들 가운데 한 작품에서 시온 교회를 성령 강림 의 장소, 세족(洗足) 예식과 함께 있은 최후의 만찬의 장소(요 13:4

이하), 그리고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사망한 장소로 예우하였다

은 마리아가 죽은 곳. 206 시라아 정교 〈성 마가 교회〉의 문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관해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시 리아 정교 집단의 전통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그들의 교회인 〈성 마가 교회 Church of St. Mark 〉은 구 도성 의 성 마가 거 리 에 서 있고, 그 교회의 문은 이 사진에서 볼 수 있다. 이 집단에서는 시리 아어가 여전히 활용되는 언어이며, 1940 년에 제 6 세기의 시리아인의 명각이 발견되어 그 교회의 벽에 보존되고 있는데, 이것은 이 건물 이 마가라고 불린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라는 사실과 그리스 도의 승천 이후에는 그것이 사도들에 의하여 교회로 선포되었고, 티 투스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에 73 년에 쇄신되었다는 사실을 확증해 준다. 종합적으로 볼 때 , 시리아인의 전통에 의하면 이 곳은 다락방과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장소요 오순절 사건이 일어났던 장 소였으며, 또한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찾아간 장소(행 12:12) 였댜 성 누가에 의하여 그려진 것으로 믿어지는, 가죽 위에 그 려진 동정녀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그림도 역시 이 교회에 소장되어 있댜 207 아부 투르에서 본 시온 산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199 항), 제한된 의미의 시온 산의 위치는 오늘날 예루살렘 구 도성의 남쪽 벽 바깥에 있다(B aba t, Plans, 30a, 31). 지금 그 곳에는 여러 건물들이 복합된 하나의 콤플렉스 com p lex 가 자리 하고 있다. 죽 성 마리 아가 죽음의 잠 dormi tio sanct.a.e Ma riae에 들게 된 곳으로 생각되는 〈취침 교회 Dorm ition Church 〉과

인 접 한 뷰론 Beuron 으로부터 온 <베 네 딕 트 수도원 Monaste r y of the Bene dict in e s>, 전통적으로 다윗의 무덤 Tomb of Da vi d 으로 알려지고 〈다윗 선지자의 사원 Mosqu e of the Proph e t Dav i d 으로도 사용된 것, 그리고 다윗의 무덤 건물의 이충에 있는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것으 로 생각되는 홀 둥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사진은 남쪽 곧 아부 투 르 Abu Tur 마을로부터 찍은 것인데, 이 마을은 1967 년까지 요르단 과 이스라엘 사이룰 분할하는 경계선으로 나눠져 있었다. 왼쪽에 보 이는 큰 건물들이 취침 교회에 속한 건물들이고, 그것들의 오른쪽으 로 멀지 않는 곳에 보이는 작은 돔은 다윗의 무덤과 최후의 홀 위에 있는 것이다 . 가장 오른쪽 끝에 보이는 돔은 성전 지대에 있는 〈 반 석의 돔〉이다. 208 시온 산 위에 있는 다윗의 무덤 여기, 좀더 가까이서 찍은 다윗의 무덤의 사진을 보자. 무덤은 검 은색의 돔 아래에 있는 건물 안에 있다 . 인접한 사원의 첨탑이 오른 쪽에 솟아 있다. 209 시은 산 위에 있는 다윗의 무덤의 남쪽 벅 열왕기상 2:10 과 느헤미야 3:16 에 의하면 다윗은 다윗 성에 장사 되었는데, 이 곳은 아마도 예루살렘의 남동쪽 언덕을 가리키는 것으 로 추측된다. 요세푸스(Ant. XVI 7, 1 §§ 179 이하)는 헤롯 대왕이 그 무덤을 도굴하고자 시도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나, 그 무덤이 어디 에 위치해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 다윗의 출생지인 베들레헴 도 또한 다윗 성(〈다윗의 동네〉)이라고 불렸고(눅 2:4, 11), 유세비우 스 (Onomas ti con, ed. Kloste rm ann, 42 쪽)에 의하면 다윗의 무덤이 그

곳에 있는 것으로 지적되었으며, 한편 제롬 (Le tt er 46.1 3 NPNFSS VI, 65 쪽)도 역시 베들레헴에 있는 다윗의 〈능〉을 언급하고 있다. 피 아첸짜의 무명씨 (GEYER 209 쪽 ; LPPTS II-D , 23 쪽 ; CCSL CLXXV, 143-144 쪽 ; WJ P 85 쪽)는 말하기를 다윗의 무덤이 베들레헴에서 1 마 일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성 다윗 옥(屋)(At Sain t Dav i d) 〉이라고 불린 바실리카가 그 위에 세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오순절 날에 시 온 산에서 말씀하던 베드로는 다윗에 관하여 말하기를, 〈그 묘가 오 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행 2:29) 라고 하였다. 어쩌면 이것이 그와 같은 전승이 생겨나도록 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마도 이것은 다윗 의 무덤이 거기 예루살렘의 남서쪽 언덕에 있었다고 하는 전승이 이 미 제 1 세기 또는 그보다 앞서 존재했음을 의미하는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 . 『예루살렘 달력 Jer usalem Calendar 」 (638 년 이전)에 의하면, 다윗 축제와 성 야고보 축제는 12 월 26 일에 시온에서 함께 거행되었는데 (Baldi 490 쪽 , no. 748), 야고보가 다윗의 후손이었으므로 이 축제들이 동시에 치러진 것은 부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다윗의 무덤이 시온 언덕에 있었다는 전승은 유대인들과 기독교도들과 마찬가지로 모슬 렘교인들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으며, 중세 말엽에는 그 추정된 무 덤을 포함하는 건물이 〈다윗 선지자의 사원 Mos q ue of the Prop h et Da vi d 〉로 개조되는 한편, 시온 문은 또한 다윗 선지자의 문 Gate of the Propp h et Da vi d( 아랍어로 밥 네비 다웃 Bab Nebi Daoud) 으로 알 려져 있기도 하다. 오늘날 다윗의 무덤은 유대인의 성소이다. 다윗의 무덤을 포함하고 있는 건물은 이충으로 된 구조물이다. 아 래충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은 길다란 직사각형의 홀이 있는데, 지금은 두 개의 방으로 나눠져 있다. 우리의 관심의 표적인 큰 돌 기 념 비 는 북쪽 벽 안에 있는 후진 앞의 동쪽 방에 서 있다 (Babat , Plans, 35ac). 1951 년에 J. 핑커펠트J. Pink e rf eld 는 이 후진에 잘 건

립된 벽을 발견하였는데, 그는 이것을 후기 로마 시대에 속하는 것 으로 판단하였다. 이와 동일한 큰 돌덩이들이 그 건물 북쪽 벽의 동 쪽 부분과 동쪽 벽, 그리고 남쪽 벽의 동쪽 부분에서도 발견되었는 데, 이러한 발견을 통하여 그 건물의 원래 형태의 윤곽을 그 정도까 지 잡게 되었다. 이 벽들의 내부에 있는 건물의 폭은 10.5 미터이고, 서쪽 벽까지의 길이는 20 미터이다. 그러나 그 벽은 후대의 것이므로 이 수치가 원래 건물의 바깥으로부터 보이는 남쪽 벽을 보여 주고 있으며, 사각형으로 된 큰 돌들이 사진의 오른편과 아랫부분에서 볼 수 있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연구에 의하면 동쪽 방에 있는 후진( 後 陣)은 북쪽으로부터 동쪽으로 몇 도 기울어지게 향하고 있는데, 이렇게 함 으로써 정 확하게 성 전산 Temp le Moun t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 이 리 하여 핑커펠트는 이것이 성전 파괴 (70) 후 첫 세기들 동안에 지어진 유대인의 회당이었다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계속된 다른 조사는 그 후진의 방위가 약간 더 서쪽으로 나 있다고 보고 있는데, 이것은 매 우 정확하게 〈성묘 교회〉의 현재의 위치, 죽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소와 그의 무덤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 만약 이것이 그 방향의 의도였다면, 그것은, 이 건물이 사실은 유대계크기독교인들의 회당 교회였다는 추측과 일치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른 증거(아래 참고)가 있다 (MACKOWSKI 195 쪽, n. 16 ; Pix n er in BAR 16.3 [May/ Ju ne 1990], 24쪽). 바닥에는 여러 개의 충이 있는데, 내려가는 순서대로 말하면 터키 시대의 대리석 슬라브들, 십자군 시대의 회반죽이 발린 바닥, 초기 비잔틴 또는 후기 로마 시대의 모자이크 바닥, 돌로 된 포도, 그리 고 제 1 세기의 원래 건물에 속했던 것이 분명한 모자이크 둥이다 (MACKOWSKI 145 쪽). 벽둘 안에 있는 크게 다듬은 돌들은 너무 큰 것들이므로 개인 집에 속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며, 그것들이 그

일부를 이루고 있는 전체 건물은 이전에 있던 집의 터를 표시하기 위 하여 세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그 집에서 베드로가 120 명의 사람들에게 연설을 할 수 있었다면, 그 건물 자체는 아마도 뜰과 많 은 방들을 가진 넓은 주택이었을 것이다. 가장 초기의 충에서 여러 개의 회반죽 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것들은 그 건물 원래의 벽들로부터 온 것임에 틀림없다. 그 파편들 에는 벽서들이 적혀 있었는데, 핑커펠트가 이것들을 모사했으나 해 석을 한 것은 테스타 Tes ta이고, 출판은 바갓티에 의하여 lITTl 년에야 이루어졌다 (Church fr om Cir c umc isio n , 120 쪽 이하, 그림 25). 한 그림 글자에는 헬라어 문자들이 적혀 있는데, 이것은 〈정복하소서, 구주 여 , 자비 를 Conq u er, 0 Savio r , m ercy> 이 라고 번 역 할 수 있는 단어 들 의 첫 글자들로 이해될 수 있다. 다른 것은 예수여, 내가 살도록, 군 주의 주시 여 0 Jes us, tha t I may live , 0 Lord of the au t ocra t〉라고 쓰인 것으로 보이는데, 마지막 부분의 〈구주〉라는 말은 어쩌면 베드 로의 설교 가운데 언급된 다윗(행 2:29) 에 대한 암시를 담고 있는 것 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모든 점으로 볼 때, 이 건물은 아마도 하 드리아누스가 본 회당/교회 (205 항)였으며, 따라서 시온에 있던 초기 유대계 一 기독교인들의 예배 장소였다 (Ba g a tti, 아래의 참고 문헌을 보 라 ; Pix ne r in BAR 16.3 [May/ Ju ne 1990], 25쪽). 현재의 건물 일충 홀의 다른 부분들에 관해서 살펴본다면, 서쪽 벽은 아랍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두 개의 방둘 사이를 분리 하는 벽은 후기 터키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동쪽 방의 북쪽 벽에 있는 후진의 맞은편에는 모슬렘교인들이 남향으로 하나의 작 은 벽감을 만들어 주었는데, 이것은 미람을 사용해 멕카를 향하여 기도하는 방향을 가리키고자 함이었다. 홀 안에 세워진 크고 평평한 기 념 비 는 그 앞면이 아칸투스 acanth u s 잎들로 된 꽃 모양의 장식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십자군 시대의 작품이다. 이 건물의 상단부는

아래에 기술되어 있다 (211 항). 210 시온 산 위에 있는 고대 교회의 석주 966 년에 〈상크타 시온/하기아 시온 Sanc ta Sio n /Ha g ia S i on 〉의 대 비 잔틴 교회 (205 항)는 아랍인들에 의 하여 약탈되 고 불타버 렸으며 (Ovadi ah , Corp u s, 89 쪽 이하, no. 77a /b), 그 후 1099 년에는 십자군이 와서 그 폐허 위에 그들 자신의 교회를 지었는데, 이것은 오늘까지 도 때때로 〈거룩한 시온 교회〉라고 불리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예 수의 모친 마리아에게 봉헌되어 〈시온의 상크타 마리아 Sanc ta Ma- ria in Sio n 교회〉로 알려져 있다. 이 교회에 관하여 우리는 이제 다 니 엘(Dani el, 1106), 뷔르츠부르크의 요한J ohn of Wt irzb urg( l l?O), 테 오데 리 쿠스 Theoderi cu s(ll72), 그리 고 포카스 Phocas(11 8.5)가 남긴 기술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다니엘의 기록을 보자 (LPPTS N-C, 36 쪽 이하). 〈오늘날 시 온 산은 도성의 벽들 의부에, 그리고 예루살렘의 남쪽에 있다. 이 시 온 산 위에 복음서 기자 성 요한의 집이 있었고, 목재로 된 지붕을 가진 하나의 큰 교회가 그 곳에 세워졌으며, 도성의 벽으로부터 거 룩한 〈시온 교회〉까지는 작은 돌을 던질 수 있을 정도의 거리이다.〉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방은 일충 에 있었던 것으로, 그리고 최후의 만찬이 거행된 방은 위충에 있었 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아랫충에는 또한 동정녀 마리아가 운명한 방이 있다고 한다. 뷔 르츠부르크의 요한 (LPPTS V-B, 25 쪽 이 하)도 마찬가지 로 최후 의 만찬의 방 coenaculum 이 그 집의 위충에 있었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장소는 그 집의 아래충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두 사건을 표시하는 것들이 시온 교회 안에 있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

다. 죽 위층에는 만찬 장면을 그린 그림이 하나 있었고, 아래충 곧 지하 토굴에는 세족(洗足) 예식을 보여 주는 화폭이 있었다고 한다. 테오데리쿠스 (LPPTS V-D, 36 쪽 이하)는 성 마리아에게 봉헌되었 다고 하는 교회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 교회는 이교도들의 습 격에 대비하여 벽과 망태들, 그리고 흉장(胸臘)으로 잘 요새화되어 있었다고 한다. 윗방에는 주께서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만찬을 잡수 신 식탁이 있고, 같은 윗방에서 남쪽으로 약 30 피트 떨어진 곳에는 한 제단이 있어서 사도들 위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장소를 표시하고 있는 한편, 아래층의 예배실에는 세족 예식을 하신 장소가 있다. 포카스 (LPPTS V-C, 17 쪽 이하)는 〈교회들 가운데 어머니인 〈거 룩한 시온 교회〉를 둥근 천장이 있는 지붕을 가진 대단히 큰 건물로 기술하고 있다. 아름다운 문들을 통해 들어가면 왼편에 복음서 기자 성 요한의 집이 있는데, 이 곳은 부활 후에 동정녀 마리아가 살다가 잠든 곳이다. 윗방에는 최후의 만찬과 사도들 위에 임하신 성령 강 림의 장소들이 있고, 아랫방에는 사도들의 발을 씻기신 장소가 있다. 십자군 교회도 역시 오래지 않아 파괴되었다. 1219 년에 다메섹의 술탄 곧 멜렉 엘 무아뎀 Melek el Mouadhem 이 예루살렘에 있는 기 독교 성소들의 대부분을 무너뜨리도록 명령하였는데, 〈성령 예배실 Chape l of the Holy S pirit〉과 함께 만찬실은 (또한 〈성묘 교회〉도) 남 겨졌으나 시온에 있는 〈상크타 마리아 Sanc ta Ma ria 교회〉은 크게 파손되 었다 (MEISTERMANN 172 쪽 이하). 그러므로 시온에 있는 십자군의 〈상크타 마리아 교회〉과 그것의 전신인 비잔틴 시대의 〈하기아 시온 Ha gi a Sio n 교회〉로부터는 단지 보잘것 없는 유적(예컨대 여기에 제시된 사진에서 보이는 석주와 같은) 만이 남아서 앞으로의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1898 년에 독일의 황제 빌헬름 II 세가 다윗의 무덤 건물의 북서쪽에 있는 땅 한 되기를 취 하여 독일 가톨릭 성지 연구회에 하사하였는데, 이 곳은 일찍이 두

개의 교회가 서 있던 곳으로, 이제는 〈취침(就 昭 ) 교회〉라고도 하고 〈마리아 교회 Ma rien k irch e> 또 는 〈동정녀 교회 Church of the Vir gin> 로도 알려진 새 교회가 1901-1910 년에 건축가 하인리히 레나르트 Hein rich Renard 에 의 하여 로마네스크 양식 으로 세 워 진 곳이 다. 건축을 하기 전인 1899 년에 레나르트는 소규모의 발굴을 실시하 여 비잔틴 교회의 유적을 밝혀 내었으며, 후에 이것은 또한 뱅상이 조사한 바 있는데, 이 교회는 틀림없이 〈모든 교회들의 어머니〉 (205 항) 로 알려진 제 4 세기의 〈하기아 시온 교회〉였다. 그 교회의 재료들의 대부분은 십자군의 교회인 시온 산에 있는 〈상크타 마리아 교회〉을 건립하는 일에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레나르트와 뱅상은 그 남아 있는 부분으로부터 비잔틴 교회의 길이가 대략 55 미터 정도 이 고 그 폭은 길이의 절반쯤 되었으며, 따라서 다윗의 무덤의 북쪽과 북서쪽에 있는 큰 지대 위로 뻗어 있었음을 추정할 수가 있었다 . 그 교회의 구도를 임시로 재구성해 본다면 , 그것은 하나의 회중석과 양 쪽으로 두 개의 측랑을 가진 바실리카가 되는데, 측랑들은 기부( 基 部)들 위에 받쳐진 네 줄의 석주들로 구획지어져 있다 . 또한 그 교회 에는 동쪽 끝에 있는 세 개의 후진과 큰 중앙 후진, 그리고 내부 측 랑들의 각각의 끝에 작은 측랑이 있다 (Ova di ah, Corp u s, 89 쪽 이하, no. 77a /b, pl. 38, pla n 77 항 ; Babat, Plans, 33b ; KROLL 317 쪽 , abb. 262). 십자군 교회는 대체로 같은 구도로 되어 있었으며, 대강으로 보건대 길이가 55 . 5 미터인 바실리카(비잔틴 바실리카와 거의 같음)였 는데, 회중석과 두 개의 측면 측랑들, 그리고 동쪽에 위치한 단순한 모양의 후진 둥이 있었다. 그러나 주된 축이 어디에 있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들 이 다르다. 레나르트는 주된 선이 북쪽으로 나 있었다고 보아서, 교 회가 〈다윗의 무덤〉과 만찬실의 북쪽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 고, 뱅상은 주된 선을 남쪽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회당 건물이 십자군

교회 의 모서 리 안쪽으로 들어 오도록 하고 있다 (Baha t, Plans, 33a ; KROLL 317 쪽, abb. 262). 테오도시우스 (205 항)의 문헌에 있는 〈상크타 시온 sanctn. S i on 〉이 라는 말이 방금 기술한 바대로 십자군 교회의 전신인 비잔틴 바실리 카의 이름이었을 것이라는 가설은, 그 근방의 힌놈 골짜기(와디 에르­ 라바비 Wadi er-Rabab i)에 많이 있는 돌을 깎아서 만든 무덤들 속의 명각 중에서 헬라어로 적힌 동일한 이름을 발견함으로써 확인되었 다. 다윗의 무덤으로부터 남쪽으로 나 있는 길 옆에는 세 개의 묘실 이 있는 무덤 이 있다 (PEF Q S 1900, 226-2 '2:1쪽). 그 무덤으로 들어가 는 입구 위에는 지워진 두 개의 십자와 더불어 이러한 명각이 적혀 있다. THC AI1AC CIWN 그 무덤 안의 첫째 묘실로부터 둘째 묘실로 나 있는 통로 위에는 역시 십자 기호와 더불어 이러한 명각이 적혀 있다. MNH[MA] THC Af [IA C C]IWN 비슷한 명각들이 이 지역에 있는 많은 다른 무덤에서 발견되고 있 다. 그리고 우리가 보고 있는 명각은 ,:처 c dvi. a c 2t0 v (테스 하기아스 시온, 〈거룩한 시온의 of Holy Sio n > ), µvfJ µ a ,:처 c dvi ac 2t@ v (므네마 테스 하기 아스 시 온, 거룩한 시온의 무덤 tom b of Holy Sio n ) 둥과 같 은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매장지들은 언덕 위에 있는 교회의 소유 로 되어 있었으며, 그 교회의 이름은 〈하기아 시온〉, 〈거룩한 시온의

교회〉이었다. 211 제 14 세기 프란체스코파가 복원한 만찬실 1219 년에 다메색의 술탄에 의한 전반적인 파괴를 모면한 (210 항) 만찬실에 관하여 알아보면, 1228 년에 프란체스코파가 예루살렘에 자 리를 잡았고, 1335 년에는 예루살렘의 순례자들을 위하여 헌신한 시 칠리아의 한 귀부인이 만찬실이 포함된 작은 토지를 사서 그것을 부 분적으로 프란체스코파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 후에 시칠리아의 왕 앙주의 로베르 Rober t of An j ou 와 그의 왕후 산키아 Sanc hi a 가 그 지 역의 땅을 더 구입하여, 프란체스코파가 그 땅의 영구적인 관리자가 되 어 야 한다는 조건으로 그것을 교황 클레 멘트 VI 세 Pop e Clement VI(1342-1352) 에게 헌납하였다. 다시 1342 년 경에 교황은 모슬렘교 인들과 합의하여 프란체스코파가 그것을 양도받았다는 사실과 그에 대한 권리를 확인하였으며, 이리하여 저들의 성지관리국 Custo d ia Terrae Sanc ta. e 이 세워졌다 . 만찬실은 마지막으로 잔존하는 십자군 교회의 부분이므로 프란체스코파는 이 방을 수리하고 복원하였으며, 오늘날의 모습은 그들이 남겨둔 형태 그대로이다. 다윗-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행 2:30) 와 마찬가지로 모슬 T렘h교e 인Ho들ly에 Q게u도 r’a n 선[L지a자ho인re( : Q1 u9r7'3a]n, 242.36 1쪽3,, nM. a6u51la)n —a _M 의u ha매m장m지ad가 A 실li, 제에 있어서는 그 동일한 건물의 하부에 있었다는 생각이 유포되자, 술레이만 대제는 1523 년에 〈만찬실의 수도회와 교회로부터 이교도 들을 추방〉하라는 명령의 칙서를 내렸으며 (MEISTERMANN 173 쪽), 〈다윗의 무덤〉을 안고 있는 건물은 〈다윗 선지자의 사원 Mosqu e of the Prop h et Da vi d 〉 (209 항)으로 개조되어 근래에 이르기까지 계속해 서 사원으로 사용되 어 왔다.

〈다윗의 무덤〉 건물의 위충은 사실상 아래층과 동일한 평면 규모 로 되어 있다 (209 항). 모 슬렘 사원의 첨탑이 남서쪽 모퉁이에 솟아 있고, 하나의 큰 돔이 북동쪽 모퉁이 위에 얹혀 있으며, 그 아래에 다윗의 기념비 ceno tap h 가 있다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만찬실은 서 쪽에 있는데 , 이것은 길이가 14 미터, 폭이 9 미터, 그리고 높이가 6 미 터인 하나의 홀이다(B aha t, Plans, 32, 34). 제시된 사진에서 보듯이 그 방의 중간에 두 개의 석주가 있고, 반 기둥들 h alf-pill ars 이 벽 속 에 세워져 있는데, 이것들은 이음매로 연결된 고딕 형태의 둥근 천 장을 지탱하고 있다. 그 홀의 남동쪽 모퉁이에는 작은 방으로 올라 가는 층계가 있는데, 이 방은 성령 강림의 장소였던 것으로 생각된 다 . 이리하여 최후의 만찬이 베풀어졌던 사실과 성령께서 왕림하신 사실을 기념하는 홀이 오늘날에도 고딕 예배실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 시온 교회〉의 약사(略史) 하드리아누스가 본 〈조그만한 하나님의 교회〉 130348 퀴릴이 〈윗교회〉라고 칭함 〈모든 교회들의 어머니〉라고 일컬어진 〈상크타 시온/하기아 시온 교회〉 테오도시우스의 언급 530 페르시아인들이 파괴함 614 아랍인들이 불태움 966 시온에 있는 r 상크타 마리아 교회』, 십자군이 세움 1099 다메색의 술탄이 파괴함 1219 프란체스코파의 성지 관리국 소속 만찬실 C. 1342 〈취침 교회〉 1901-1910

앞부분들에서 본 바와 같이, 문학적 및 고고학적 증거는 엣세네파 의 중심 (199 항)과 최후의 만찬 장소 그리고 초기의 유대계 _ 기독교인 교회의 중심 (205 항 이하)이 시온 산 위에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그들이 상호 관계를 유 지했음을 의미할 수도 있고, 한편으로 쿰란 텍스트들과 다른 한편으 로는 신약의 기록에 나타나는 바 있는 엣세네 공동체들과 초기 기독 교인들 사이의 조직, 예배, 그리고 사회적 구조의 현저한 유사성들을 설명하고 조명하는 일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위의 5 항 참고). 이 모 든 문제들에 관해서는 계속적인 연구가 요청된다. 212 〈갈리칸투의 성 베드로 교회〉 예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체포되신 후에 (168 항 이하) 안나스(요 18:13) 와 가야바(요 18:24) 에게로 송치되셨다. 안나스는 6 - 15 년에 대 제사장이었고, 그의 사위 가야바는 18-36 년에 그 직분을 가지고 있 었다. 서 기 관들과 장로들이 가야바의 집 에 함께 (마 26:57 ; 막 14:53), 죽 대제사장의 집에(눅 22:5 4 ) 모였고, 그 곳에서 예수에 대한 심문 과 정죄, 그리고 베드로의 부인(否認)이 있었다. 요세푸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War II 17, 6 §426), 66 년에 혁명가 들이 윗도성으로 들어가서 대제사장 아나니아(칼치스의 헤롯 Herod of Chal ci s 에 의하여 지명됨. 이 헤롯은 클라우디우스 제 8 년 =48 년에 사 망했고, 헤롯 아그립바 II 세의 전임자였음[Ant . XX 5, 2 §§103-104], 아 나니아는 사도행전 23 : 2 과 24:1 에 나타나고 66 년에 도적들에 의하여 살 해 되었음 [War II 17, 9 §441] )의 집과 아그립바 및 버니게의 궁전들 을 불태웠다. 궁전들은 아마도 아그립바 II 세가 튀로포에온의 서쪽 경사면에 있는 하스몬 가의 옛 궁전(Ant. XX 8, 11 §189) 에 첨가한 것들이었고, 아나니아의 집 역시 윗도성의 터였던 남서쪽 언덕 위의

어느 곳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173 항 참고) . 만약 대제사장의 집에 사 무실이 딸려 있다면, 아나니아가 거주하던 집은 바로 전에 가야바 (와 그의 장인 안나스가 동시에)가 사용하던 그 집이었을지도 모른다. 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 집은 필시 대제사장이 거주했음직한 지 역에 관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보르도 순례자가 이 곳에 왔을 때 (333), 그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이 있던 곳 ubi fuit domus Caifa e sacerdo ti s 〉을 본 것 은 사실 시 온 산 위 에 서 였다 (GEYER 22 쪽 ; LPPTS— B 23 쪽 ; CCSL CLXXV, 16 쪽 ; W訂 137 쪽) . 완료 시제는 그 집이 비록 여전히 잘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폐허로 남아 있었음을 암시하는데 , 이러한 사실은 몇 년 후 에 퀴릴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 퀴릴 역시 그 집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이 폐허가 된 채로 황량하게 서 있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 〈가야바의 집은 그 현재의 황폐된 모습으로써, 전에 그 곳에서 심문을 받으신 그 분의 능력을 보이면서 그대를 고발할 것 이 다〉라고 한다 (Ca t eche ti c 미 Lectu re s XIII, 38, NPNFSS VII, 92 쪽). 그 당시 기독교인의 생각 속에서는 분명히 그 장소가 심판에 대한 하나의 가시적인 표징으로서 폐허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합당하 게 여겨졌다. 테오도시우스 (530) 는 그 집 이 만찬실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에 대하여 적어도 대략의 암시를 주고 있으며(그러나 불행 하게도 어느 방향인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 또한 그 집이 그 무렵에는 베드로의 이름으로 일컬어진 하나의 교회로 개조되어 있었다는 정 보도 제공하고 있다 . 모든 교회의 어머니로서의 〈거룩한 시온 교 회〉 (205 항 참고)를 바로 언급하고 나서 테오도시우스는 이렇게 말하 고 있다 (GEYER 141 쪽 ; LPPTS II, 10 쪽 ; CCSL CLXXV, 118 쪽 ; WJ P 66 쪽). 〈거룩한 시온로부터 지금은 〈성 베드로 교회〉인 가야바 의 집까지는 50 보 안팎이다 De sanct,a Sio n ad domum Caiplrie,

qu ae est modo ecclesia sancti Petr i, sunt plu s mi nu s pass i numero L.> 만찬실로부터 50 미터 떨어진 곳에, 그리고 〈취침 교회〉로부터 하 나의 좁은 길을 건너면 현재의 〈아르메니아 성 구주 수도원 Arme­ nian Monaste r y of St. Sa vi or 〉이 있는데, 이것은 가야바의 집 주위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수도원은 제 15 세기부터 존재한 것이라 하 지만, 발굴 결과들은 제 6 세기에 이 곳에 하나의 교회가 있었음을 보 여 주고 있다. 길이가 4-5 미터이고 폭이 2.5 미터인 비잔틴 모자이크 포장 한 토막이 발견되었고, 서쪽으로 좀 나아간 곳에서는 문지방이 발견되었으므로, 이것들을 종합하면 이 유적들이 길이가 약 30 군 5 미 터되는 교회였음을 보여 준다 (V in cen t, Jer usalem nouvelle, 489 쪽). 이 것이 아마도 테오도시우스가 언급한 바 있는 〈성 베드로 교회〉였을 것이다. 아르메니아인 수도원의 뜰에서 l

막 14:7 2 참고 ; 눅 22:62) 라고 하는 진술에 관하여 에피파니우스는 다 른 장소를 이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가리켜 보이며 그 장소를 표시 한 또다른 교회를 지적하고 있다 . 그가 제공하는 묘사는 시온 산 위 의 성벽 내부에서 북쪽을 향하여 서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른쪽으로 도성 외부의 벽 가까운 곳 에 한 교회가 있는데, 이 곳은 베드로가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한 곳이다 . 그리고 그 교회로부터 오른쪽으로 대략 활 세 바탕 쏠 만한 거 리 에 실로아 못 Pool of S il oah 이 있다〉 (MPG CXX col. 264 KOPP 1959 406-407 쪽). 그런데 가야바의 집에 그리고 〈하기아 시온〉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베드로의 교회와는 구별되게, 이 교회의 위치는 동쪽으로 시온 산의 경사면 아래 쪽에 그리고 아마도 실로암 못으로 가는 길의 중간에 있다 . 그리고 전자가 참으로 〈베드로의 부인(否認) 교회 Church of the Den ial of Pe te r 〉였던 반면에, 후자는 〈베드로의 회 개 . 또는 눈물 교회 Church of the Repe n ta nc e or of the Tears of Pe t er 〉였다. 또한 수사 베르나르 Bernard( 얽 O) 도 〈하기아 시온〉을 방문하고 나 서 이렇게 말하였다. 〈바로 오른쪽에 성 베드로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세워진 교회가 있는데, 이 곳은 그가 주를 부인했던 장소이 다〉 (TOBLER-MOLINIER, Iti ne ra Hi er osolym it ana I 2, 316 쪽 ; RB 23 [1914], 78 쪽 ; Bi bl iaz 9 [1928], 172 쪽). 이 교회 는 에 피 파니 우스가 지적한 그 교회임에 틀림없으나 여기서는 베드로가 부인한 한 장소 와 그가 회개한 다른 장소에 대한 구분이 되어 있지 않다. 십자군 시대에 베드로의 회개를 기념하는 교회가 반복해서 언급 되었는데, 특히 베드로가 자신이 부인하리라고 예언하신 예수의 말 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한 것이 〈닭이 울던ga l/ us canta vit> 때였다는 복음서의 진술(마 26:74 및 평행절들)과 관련하여

그 교회가 일컬어졌다. 새불프 Saewu1 f (1102) 는 〈하기아 시온 〉 에 관하여 말하면서, 그것을 〈성령 교회〉라고 부르고 그 위치는 성벽 외부의 남쪽으로 활 한 바 탕 쏠만한 거리의 시온 산 위였다고 말하면서, 조금 후에 다시 이렇 게 기 록하고 있다 (LPPTS IV-B, 19, 21 쪽 ; Vin c ent, Jer usalem nouvelle, 494 쪽). 〈바깥 성벽의 아래 쪽, 시온 산의 내리막 경사면에 〈갈리칸투스 G alli can tu s 〉라고 불리는 〈성 베드로 교회 ecclesia sancti Petr i qu ae Gallic a nus [sic ] vo aitu r 〉이 있으며, 이곳에는 지금도 여 전히 볼 수 있는 매우 깊은 동굴 하나가 있는데, 베드로가 우리 주 를 부인한 후에 이 동굴에 자신을 숨기고는 자신의 범죄를 뉘우치며 극심하게 통곡하였다.〉 다니 엘 Da niel (1106) 은 시 온 산울 언급하고 나서 이 렇 게 기 록하고 있다 (LPPTS IV-C, 37 쪽) .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산의 동쪽 경사면에 32 개의 계단을 딛고 내려가는 깊은 동굴이 있다 . 베드로가 주를 부 인한 후에 심히 통곡한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이 동굴 위에 하나의 교회가 세워져서 그 거룩한 사도 베드로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리고 그 교회가 닭이 우는 것을 말하는 라틴어 구절과 관계됨을 중거하는 증인을 한 사람 더 인용한다면, 무명씨 vn 세 Anony mo us vn (1145) 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LPPTS VI-A, 73 쪽). 〈시온 산 너머에는 베드로가 닭이 울 때에 in ga lli cantu 주를 부인하다가 도 망갔던 교회가 있다.〉 만찬실로부터 동쪽으로 250 미터 떨어진 시온 산의 동쪽 경사면에 는 앞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지적된 장소에 해당하고 성모 몽소 승천 주의(聖母蒙召 昇天主義) 교부들 Assump tion ist Fa th ers 에 게 속하는 한 지역이 있다. 1888 년에 이 곳에서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1911 년에 한 고대 교회의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 1914 년에는 제르메-뒤랑J. Germer-Durand 이 몽소 승천주의 교부들을 대신하여 발굴을 계속하

였댜 제 5 세기 말엽의 원래의 건물 구조가 테오도시우스 II 세 (408- 450) 로부터 레오 I 세 Leo I (457-474) 까지의 주화들에 의하여 밝혀졌 으며, 작은 규모의 복원 공사(의심할 여지 없이 614 년에 페르시아인들 에 의하여 파괴된 후에)가 제 7 세기의 전반에 있었다는 사실이 포카스 Phocas (602-610) 와 헤라클리우스 I 세 Heracliu s I (610-642) 의 주화들 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발굴자의 구도에 의하면, 이 건물은 세 개의 홀을 가진 직사각형 의 교회로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해 있었다. 원형의 후진이 있었던 혼적은 없고, 그 언덕의 경사면 때문에 동쪽 부분이 가장 많이 파손 되어 있었으며, 거기에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Ova di ah, Corp u s Supp le mentu m , 225 쪽 이 하 , no. 28). 위 에 서 제 시 된 인용구로부터 판 단하건대, 이것이 사도 베드로가 닭이 운 후에 나가서 회개하며 통 곡하던 장소로 추정되는 곳을 표시하는 〈갈리칸투의 성 베드로 교회 Church of St. Pete r in G alli can tu〉였다. 1931 년에 동일한 이름의 새 교회가 몽소 승천주의자들에 의하여 봉헌되었다. 바로 위에서 기술된 교회의 상황은 사진에서 명확하게 나타나 있 댜 이것은 실로암 위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면서 망원 사진으로 찍은 광경이다. 상단의 오른쪽에 현재의 구 도성의 남쪽 벽 일부가 보인 다. 벽 외부의, 시온 산의 정상에는 〈취침 교회〉과 수도원의 건물들, 그리고 높은 망대가 있다. 높은 망대의 오른쪽에는 만찬실과 다윗의 무덤 위에 있는 작고 검은 돔이 있다. 언덕을 내려오면서, 카메라에 서 가장 가까운, 돔이 있는 큰 건물이 현재의 〈갈리칸투의 성 베드 로 교회〉이다. 이 교회의 지하에는 바위를 깎아서 만든 방들이 몇 개 있다 (Babat, Plans, 36). 그 중 하나는 아마도 원래 묘실이었던 것 같다. 동편에 있는 계단들을 따라 그 안으로 내려가노라면 문득 도중에서 중단되면서, 그 방이 후기에 인공적으로 깊이 파내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이 방에는 중앙 뜰을 둘러싸고 있는 계랑과 벽면에 높이 달린 고리들이 있다. 남쪽에는 한 계단이 있고, 여기서 돌 가운데로 난 하 나의 구멍을 통하여 아래 쪽으로 다른 방을 들여다볼 수 있는데, 이 방은 그 자체가 하나의 매우 깊은 구덩이로 되어 있다. 이 구덩이의 내벽과 지붕에는 14 개의 비잔틴 십자표가 있는데, 그 중에 11 개는 벽 에 그려져 있고 3 개는 지붕에 새겨져 있다. 이러한 발견물들에 기초하여 전개된 이론에 의하면 , 가야바의 집 은 사실 만찬실 근처가 아니라 이 곳에 있었으며, 바위를 깎아서 만 든 방들은 그 궁전과 관련된 감옥이었다는 것이다. 다락방은 경비실 이었고, 벽에 달린 고리들은 죄수들을 매질하고자 결박할 때에 사용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래 쪽의 구덩이는 죄수를 감금하는 장소 였고 벽에 있는 구멍온 경비원들이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감시할 수 있게 하였다 . 그렇다면 또한 그리스도께서도 · 역시 가야바 앞에서 심문을 받으시던 밤 동안에 친히 이 곳에 갇혀 있었던 것으로 추측 된다. 가야바의 집의 위치를 이 곳 〈갈리칸투의 성 베드로 교회〉로 보 는 견해롤 지지하기 위하여 다른 하나의 논거를 주장하기도 한다. 가야바의 집이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아르메니아인의 지대에 있 었다면 대단히 가까운 위치였을 텐데, 만찬실이 참으로 승천 후에 제자들이 모였던 장소라면 그들이 가야바의 저택과 그토록 가까운 장소에서 그렇게 일찍이 모였다고 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가야바의 집이 언덕의 경사면 아래로 멀리 떨어진, 뒤 에 말한 장소에 있었다면, 어려움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의 중언들을 가장 자 연스럽게 읽는 길은 가야바의 집을 〈하기아 시온〉의 근방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이 곳 죽 언덕의 더 아래로 내려간 곳에서 베드로의 회개 장소로 추정되는 곳을 표시하는 교회

만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게 된다. 교회의 지하에 있는 바 위를 깎아서 만든 방들에 관해서는 비교적 단순한 설명으로 이해하 는 이들도 있고, 더러는 그 깊은 구덩이가 고대의 수조에 불과하다 고 주장하기도 한다. 213 〈갈리칸투의 성 베드로 교회〉 옆에 있는 고대의 계단길 〈갈리칸투의 성 베드로 교회〉 근처에는 필시 유대 및 로마 시대 와 비잔틴 시대에 도성을 통하던 통로들을 나타내는 골목과 거리의 분명한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이것들 중 하나가 만찬실 근처로부터 실로암 못으로 나 있어서 〈갈리칸투의 성 베드로 교회〉 바로 옆으로 지나간댜 그 교회 옆에 있는 이 길의 일부가 사진에 보이는데, 내리 막길의 가파름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돌 계단들이 놓여 있다. 이 골 목은 유대 시대로부터 존재해 온 것으로 믿어지며,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으로부터 겟세마네로 가셨을 때(요 18:1) , 그가 시온 산으로부터 기드론으로 가셨다면 바로 이 계단돌을 밟고 가셨을 것이다. 214 힌놈 골짜기에 있는 아겔다마의 전래적(傳來的)인 위치 마태복음 짜 3-10 에 의하면,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대가로 받았던 돈을 대제사장들에게 돌려 주었을 때 그들은 그 돈으로 토기장이 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다. 그러므로 그 발은 피밭 dv p bc atµ a wc ; [아그로스 하이마토스] ; 8 절)이라고 불렸다. 사도행전 1:19 은, 예루살렘의 언어로 이 이름 (x (i)p lov atµ a 1oc; [코리온 하이마토스])은 J\Ke Maµci x (하켈다마크, 아겔다마 fAkel dama, RS V])인데, 필시 아람어 wo, 낫p n (하켈 다마)에 해당하는 말이다. 『지명록』 (38 쪽)에서 유세비우스는 이 장소에 대하여 이러한 항목

을 제공하고 있다. 〈아겔다마 . ‘피밭'. 복음서에 (언급됨). 지금까지 앨 리아 안의 시온 산의 북쪽에 ev pop E i.o tc; i:ou it@v opou c; 있다.〉 제롬 (같은 책, 39 쪽)은 이 진술을 고쳐서 북쪽이 아니라 〈남쪽에 ad aus tra lem 〉라고 읽는다. 아겔다마는 또한 도벳 To phe th이라는 항목과 관련해서도 『지명 록』 (102 쪽)에 언급되어 있다. 예레미야 7:31 이하에 의하면, 도벳의 사당이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있었고, 이 곳은 자녀들을 불에 사 르는 곳이었다 (173 항 참고). 유세비우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도벳 예레미야에 있는 도벳의 제단. 이렇게 불리는 장소가 지금까 지 앨리 아의 교외 에 있다. 세 탁자의 못 Pool of the Fuller 과 아겔다마 밭 F i eld Akeldama 이 그 옆에 놓여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아겔다 마는 힌놈 골짜기에, 그리고 세탁자의 못 근처에 있었다. 세탁자의 못은 필시 엔로겔 Enro g el 죽 세탁자의 샘과 동일한 것이며, 이것은 여호수아 15:7 과 18:16 에서 힌놈의 아들 골짜기 와 기드론 골짜기 의 교차점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위치로 볼 때 그 샘은 오늘날 비르 아이욥 B ir Ay yub 죽 욥의 우물J ob's Well 이라고 불리는 우물과 동일한 것으로 볼인다. 이 우물은 와디 엔―나 르 죽 기드론 골짜기의 왼쪽 뚝에, 그것이 와디 에르-라바비 Wad i er-Rababi 즉 힌놈 골짜기와 만나는 교차점 을 조금 지 나서 있는 실 완 마을 아래 쪽에 있다. 따라서 아겔다마는 힌놈 골짜기의 동쪽 끝 가까이 어딘가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피 아첸짜의 무명 씨 (570) (GEYER 177 쪽 ; LPPTS II-D, 22 쪽 ; CCSL CLXXV, 167v 쪽)는 아겔다마로부터 실로암으로 (WJ P 84 쪽) 갔 으며, 가끔 아겔다마를 방문한 (WJ P 100 쪽) 아르쿨프 (670) (GEYER 243, 245 쪽 ; LPP 露 ill-A, 21 쪽 ; CCSL CLXXV, 198v 쪽)는 그것 이 시온 산의 남쪽 지역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ad austr ale m mon tis Sio n pla g a m s i玩고 말하였다.

위의 지적 사항들과 일치하는 전래적인 위치는 힌놈 골짜기 남쪽 경사면의 동쪽 끝에 가까운 곳이다. 이 지역의 개관이 사진에 나타 나 있다. 골짜기의 남쪽을 가로질러 보노라면 왼쪽에 〈성 오누프리 우스의 희랍 수도원 Greek Monaste r y of St. Onu phri us 〉의 울타리와 건물들이 보인다. 서쪽 위에 있는 폐허가 아겔다마의 전래적인 위치 를 가리킨다. 215 안토니아의 구도 26-36 년에 유대의 수세관(收稅官)인 로마 총독 빌라도 (129 항 참고) 앞에 있었던 예수의 심문은 필시 예루살렘의 한 건물 곧 관저 (auM [아울레], 문자적으로 〈안마당〉, 따라서 〈관저〉 혹은 〈뜰안〉[p alace, 궁 정]〉 ; 막 15:16) 에서 열렸다. 이 곳은 마태복음 '2:/:'2:/, 마가복음 15:16, 그리고 요한복음 18:28, 33 ; 19:9 에서 〈관정(官庭)〉(헬라어 npa ttc iJpt0V ) [프라이토리온]은 라틴어 p rae t o ri um[ 프래토리움]에서 빌어온 차용어이 다〉이라고 불린다 . 여기서 빌라도는 재판석(阮fiµ a[ 베마] ; 마 刃 :l9; 요 19:13) 에 앉았는데, 이것은 마지막 성경절이 말해 주듯이 박석 Lit ho str ot o n 곧 포장된 바닥 Pavemen t, 그리고 히브리어로는 갑바타 Gabbath a -At8 6 (J tp(J)tov , 'Eppa lcrt L 6t raPPa86. - 라고 불리 는 장 소에 있었다. 형용사 At0 b (J tp(J)to~ (리토스트로토스)는 t.i.80 ~ (리토스, 〈돌〉)와 (Jtpcilvv uµt (스트론누미, 〈홑다〉)에서 파생된 단어이며, 따라서 〈돌덩이들로 포장된〉이라는 뜻이고, 명사형 to A.t 86 crtp(J)t OV( 토 리토 스트로톤)은 〈돌 포장 바닥〉을 뜻한다. 이 말의 상당어 인 ra00a0d (갑 바타)에 관하여 말한다면, 이것은 아람어 단어의 헬라어 음역이지만 그것의 어원적 출처는 아직도 불확실하다. 벨릭스 총독 시대(그의 연대에 관해서는 FHBC 322 쪽 이하를 보라) 의 가이사랴에 〈헤롯 궁〉 (Herod's pra eto rium , 헤롯의 프래토리움)〉(행

23:35) 이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서 ,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20 항), 우리는 이것이 헤롯 대왕의 옛 궁전이었는데 징수관들이 그들의 공 식적인 관저로 사용하기 위해 접수했던 것으로 추측한다. 예루살렘 에서도 로마 총독들이 헤롯의 건물들을 그들 자신이 사용하기 위하 여 전유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요세푸스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예루살렘에 헤롯 대왕이 마음대 로 사용할 수 있는 세 개의 주요 건물이 있었음을 알고 있다. 우선 로마가 그를 유대 인의 왕으로 세운(B. C. 40) 후에 그가 돌아와서 예 루살렘을 장악하고 하스몬 가의 통치자들의 마지막 사람인 안티고 누스를 로마인들에게 넘겨줌으로써 목베이게 하고 실제로 다스리기 시작했을 때 (B.C. 37), 하스몬 가의 궁전은 자연적으로 그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부터 그가 서쪽 언덕에 자신의 새 궁전을 짓 기까지 약 14 년 간 그 궁전은 그의 공식적인 저택이 되었으며(바로 아래를 보라), 후자와 비교하여 말할 때 하스몬 가의 궁전은 헤롯의 아랫궁전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 그의 아내 마리암메에 대한 심문과 사형 선고가 내려진 (B.C. 29, SHJ P Vermes/M illar , I , 302 쪽) 곳도 어 쩌면 이 곳이었고, 마찬가지로 이 동일한 궁전이 마리암메의 어머니 알렉산드라가 헤롯의 부재시에 소유하고자 시도했다가 동일한 운명 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B. C. 28, SHJ P Vermes/M illar , I, 303쪽). 하스몬 가의 궁전 au 'J..it은 윗도성 Up per C ity과 성전 울타리를 연결 하던 다리 위에(윌슨의 아치에 ; 195 항) 있는 것으로 요세푸스는 기술 하고 있다 (War II 16, 3 §344 ; Ant. XX 8, 11 §190 ; 위의 173 항 참고) . 우리는 또한 헤롯 아그립바 II 세(그는 예루살렘에서 다스리지는 않았 으나 성 전을 감시 했으며 [Ant. XX 9, 7 §222], 그가 그 도성을 방문하는 동안에는 하스몬 가의 궁전에 살았다)가 그의 시대에 이 궁전 안에 하 나의 방을 만들었음을 알게 되는데, 이 방에서 그는 식사 시간에 기 대어 앉아서 성전의 안뜰울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이런 일은 제사장

들을 괴롭게 하여 이옥고 그들로 하여금 그가 바라보는 것을 차단할 벽 을 쌓게 하였다(A n t. XX 8, 11 §§180 이 하) . 그러므로 하스몬 가의 궁전은 성전 울타리 벽의 남서쪽 부분으로 부터 건너편에 있는 튀로포에온 골짜기의 서쪽 뚝 위의 상대적으로 약간 높은 지점에, 다시 말해서, 지금의 구 도성의 유대인 구역에 있 었다. 이 구역에 대한 이스라엘인의 발굴에서 하스몬 가의 궁전이 하나의 탐색 대상이었으나 발굴자들이 거기서 나온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유적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헤롯 시대(B. C . 37-AD . 70) 의 훌륭한 집 여러 채의 유적이 드러났는데, 이 집들은 모자 이크 바닥으로 지어졌고 프레스코 벽화들과 치장 벽토 s tu cco 세공 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A vig ad in Jer usalem Revealed, 41-51 쪽 ; 그 리고 Di sc overi ng ]erusalem, 88-137 쪽 ; 위의 196 항 참고) . 발굴된 주 화들을 살펴보면 , 헤롯 양식의 큰 주택 한 채가 해못 대왕의 치세 동안에 사용된 것이 확실하다 . 그러나 이것은 헤롯의 치세 끝 무렵 또는 그 직후에 그 폐허 바로 위에 새로운 도로 포장이 이루어지면 서 고의적으로 파괴되었다. 이 도로는 매우 큰 판석(板石, 길이가 2-2.5 미터까지 됨)들로 된 매우 넓은 길(어떤 지점은 폭이 13 미터나 되었음)이었으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50 미터나 뻗어 있는 것이 발견 되었다. 다론 주거는 하나의 궁궐 같은 저택이었는데, 그 규모는 그것을 궁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색칠을 한 벽 외에도 안쪽 벽의 더러는 마사다와 헤로디움에서처럼 돌을 다듬는 석공술을 모방하여 치장 벽토의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70 년에 파괴되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그 집에서 호화 물품들이 발견되고 있다. 죽 가장자리에 꽃 모양을 가진 돌 탁자, 부풀린 유리로 만든 장식된 주전자, 이랑 무늬 의 유리 대접, 그리고 정교한 도기 동이다. 이 집이 유대인 구역의 동쪽 끝에(미스가브 라다크 거리 Misg a v Ladakh S tr ee t의 동쪽에, 그리

고 서벽 Weste r n Wall 앞에 있는 광장으로 내려가는 일련의 계단의 남 쪽에) 위치함으로써 성전 지대와 그것을 넘어서 감람산을 바라보는 화려한 전망을 제공하고 있다 . 그 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다론 하나의 저택은 〈불탄 집〉이 라고 불리는 곳인데, 이것은 분명히 어떤 대제사장 가족에게 속하는 것으로 위에서 (196 항) 기술한 바 있다. 이 모든 점에 비춰 볼 때, 이 곳은 예루살렘의 귀족이 거주했던 구역이며, 따라서 하스몬 가의 궁 전 근방에 있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 궁정 저택은 그 궁전에 더불어 지어진 헤롯 시대의 별관일지도 모른다(J aros in Bi be l und Lit urg i e 53 [1980), 14 쪽). 둘째로(위의 181 항에서 본 바와 같이), 헤롯 대왕은 성전 지대의 북 서쪽 모퉁이에 있는 바리스 B ari s 라고 불리던 하스몬 가의 요새를 재건하여 그의 친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그 의 이름을 따서 그 요새를 칭하였다(Ant. XV 11, 4 §409). 이 일은 분명히 안토니우스가 패배하여(B. C. 31 년 9 월 2 일) 헤롯이 그의 충성 심을 옥타비아누스에게로 옮기기 전에 있었던 일임에 틀림없다(A n t. XV 6, 6 §§1 얽 -193 ; Pluta rch , Anto n y 71). 요세 푸스는 이 리 하여 안토 니아로 명명된 이 건물을 요새(it,p ou pto v, Ant. XV 8, 5 §292) 또는 망 대(,rup vo c;, JtUP YOEt 6 itc ; ; War V 5, 8 §§240, 242) 라고 칭하면서 또한 그 내부의 화려한 장치들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War V 5, 8 §241 ). 내부는 그 널찍함과 설비에 있어서 궁전p ao t Ac i(I) V 과 홉사했으며, 온 갖 종류의 방과 갖가지 목적의 방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여기에는 회랑들 과 목욕탕, 그리고 군대를 수용하기 위한 넓은 안뜰 m p a t O Jtt 8uv a0Aat c 마 a t e i a t c ; 〈영문〉[〈 barracks 〉, RSV ], nape µ PoM 참고 ; 행 21:34, 37) 둥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편의 시설을 다 가지고 있는

점으로 봐서는 하나의 성읍 n6A t c 처럼 보였고 , 그 장려함으로 봐서는 하 나의 궁전 0ao i AE t 0V 처럼 보였다(헤로디움에 관한 이와 비슷한 기술을 위해서는 War I 21, 10 §421 을 참고하라). 요세푸스는 이와 같이 안토니아가 왕족을 위하여 적절하게 설비 된 것으로 기술하기는 하지만, 그 건물에 대하여 온전하게 궁전을 뜻하는 단어 aui,. ,ft (아울레)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는 이 단어를 서 쪽 언덕 위에 있는 하스몬 가의 궁전과 헤롯의 궁전에 대하여 사용 하였으며, 그리고 헤롯의 궁전과 안토니아 요새를 언급하는 한 문단 (Ant. XV 8, 5 §292) 에서 오직 헤롯의 궁전에 대해서만 〈그가 살던 궁전〉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비록 헤롯이 경우에 따라 상당한 안락을 누리면서 안토니아에 체류하기는 하였으나, 그 의 진짜 궁전이었던 것이 확실한 건물은 다른 두 개의 건물, 즉 서 쪽 언덕 위에 있는 옛 하스몬 가의 궁전과 그가 손수 지은 구조물이 었다. 그는 두 개의 궁전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서 쪽 언덕에 있던 궁전은 사적인 주거의 호화로움을 제공한 반면에, 아랫궁전은 공적인 행정을 위한 저택, 즉 집정관 궁으로 계속 사용 되었으며, 이러한 용도는 예수 당시의 수세관들p rocura t ors( 총독들) 에 의해서도 계속되었을 것이다 (P ixn er in ZDPV 95 [lrf7 9 ], 86 쪽). 셋째로, 헤롯 대왕은 이미 기술한 바 있는 (198 항) 인접한 망대들, 죽 도성의 〈높은〉 (War V 4, 4 §173) 서쪽 언덕(좀더 정확하게 말하자 면, 남서쪽 언덕의 북서쪽 모퉁이)에 있는 힙피쿠스, 파사엘, 그리고 마리암메 망대를 가진 자기 자신의 새 궁전을 지었다 . 위에서 설명 한 바와 같이 (173, 198, 199 항) 남서쪽 언덕 전체가 후에 시온 산으로 불렀고, 헤롯의 망대들 중의 하나가 현재의 다윗의 망대이며, 헤롯의 궁전의 위치는 부분적으로 예루살렘 구 도성의 성채가 있는 곳에 있 었다 (MEISTERMANN 165 쪽 이하). 이것이 〈윗도성〉 (War V 5, 8

§245) 에 위치했고 그의 아랫궁전과는 구별된 것이었으므로, 이곳에 있는 것이 바로 헤롯의 윗궁전이었다. 이 건축 계획의 시기에 관해서 말하자면, 헤롯의 통치 제 13 년 (An t. xv 9, 1 §299), 즉 25/24 년 (FHBC 232 쪽)에 기근이 들었으며, 이 무 렵에 그는 아라비아에 있는 앨리우스 갈루스 Ae li us Gallus 의 원정대 를 강화하기 위하여 얼마의 군대를 보냈다 (An t. XV 9, 3 §317). 그런 다음 헤롯의 업무가 순조롭게 잘 되어 갈 때 그는 윗도성에다 궁전 을 지었다(A n t. XV 9, 3 §318). 그 후에 헤롯은 헤로디움을 건설했고 (An t. XV 9, 4 §323), 그 다음에 가이사랴의 건축을 시작했는데 (An t. xv 9, 6 §331 ), 이때가 필시 22/21 년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이사 랴의 건축이 완공된 것은 아마도 공사를 시작한 지 12 년 후인 10/9 년이었기 때문이다(1 20 항 참고) . 이와 같이 연결되는 연대들 가운데 (이에 관해서는 SHJ P I i, 406-408 쪽 및 SHJ P Vennes/M iliar , I, 290- 291 쪽을 참고하라) 윗궁전을 건설한 것은 대략 B.C. 24 또는 23 년이 었을 것으로 보인다. 요세푸스는 그 세 개의 망대-힙피쿠스, 파사엘, 그리고 마리암 메-에 대하여 말한 후에 그에 인접한 궁전에 관하여 다음과 같 은 기술을 계속하고 있다 (War V 4, 4 §§176-181). 왕의 궁전 Q'OAQ이 그 궁전의 북쪽에 놓여 있던 이 망대들의 안쪽에 붙어 있었는데, 이것은 가히 묘사할 수 없는 것이었다. 호화로움과 장비 에 있어서 그 어떤 건물도 참으로 이것을 능가하지 못했다. 이 궁전은 30 규빗 높이의 벽으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고, 장식용 망대들에 의하 여 같은 거리를 두고 끊겨 있었으며, 백 명의 손님을 위한 연회장과 침 실을 포함하고 있었다. 내부 시설들은 형언할 수가 없다. …… 사방 둘 레에 원형의 회랑들이 많이 있었고, …… 그것의 바깥 뜰은 온통 잔디 로 덮여 있었다. 여러 가지 나무들로 이루어진 작은 숲은 긴 보도와 교

차되었으며, 보도들은 깊은 수로와 도처에 있는 연못에 접해 있었다. 그러므로 로마인들과 로마의 수세관들이 예루살렘 관할권을 장악 했을 때, 예루살렘에서 헤롯의 아랫궁전 그가 건축한 안토니아, 그리 고 그의 윗궁전은 의심할 여지없이 모두 그들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 가 있었다. 또한 총독 벨릭스가 가이사랴에 있는 〈헤롯 궁〉(행 23: 35) 을 사용한 사실은 바로 위에서 살펴본 내용에서도 짐작할 수 있 는데, 이 궁p rae t o ruiin은 그 장소에 있던 헤롯의 옛 궁전p alace 이었 음에 틀림없다. 그레코-로만 시대에 프래토리움은 총독의 관저로 적 절하게 사용되 었으며 (Be noit, Jes us and Gosp e l, 168 - 172 쪽), 관저 는 아마도 요새보다는 궁전에 있었을 것이므로, 그리고 안토니아는 하 나의 〈 요새 qip ou ptov 〉인 반면에 , 프래토리움은 요세푸스에 의하여 궁 전p alace(auM) 에 어울리는 단어인 아랫궁전과 윗궁전이라고 일컬어 졌 으므로, 예루살렘에 있던 빌라도의 프래토리움(宮)은 십중팔구 이 두 궁전 중의 이쪽 아니면 저쪽 것이었을 것이다 . 사실에 제 7 세기에 이르기까지 순례자들에 의하여 확인된 가장 오 래된 예루살렘 전승은 빌라도의 프래토리움이 튀로포에온 골짜기의 서쪽 뚝에 있었던 것으로 가리키고 있는데, 이 지역은 위에서 기술 한 바와 같이 헤롯의 아랫궁전이 된 하스몬 가의 궁전과 다른 훌륭 한 저택들이 위치한 지역이었다. 그 첫번째 증거는 보르도 순례자 (333) 가 한 보인 것이다 (GEYER 22-23 쪽 ; LPPTS I-B, 23 쪽 ; CCSL CLXXV, 16-17 쪽 ; WET 157- 158 쪽). 이 순례자는 성전 지대로부터 실로암 못을 지나와서 시온 산 에 올라가 가야바의 집터를 보았고(이 곳은 테오도시우스 [WJ P 66 쪽] 에 의하면, 〈거룩한 시온 교회〉로부터 약 50 보 떨어져 있었다), 고대의 일곱 회당들 중에서 아직도 시온에 남아 있던 한 회당을 언급하고 있다 (205 항). 그 당시에 시온 산은 성벽 바깥에 있었는데, 이제 그 기

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 곳을 떠나 시온 문을 통과하여 네아폴리스 문을 향하여 ad po ~ tam Neapo lita nam, 오른쪽 ad partem dextr am 골짜기 로 내 려 가면, 본 디오 빌라도의 집 또는 프래토리움이 있던 곳에 ubi domus fuit siv e pr aeto r i um Ponti i Pi lat i 벽들이 있는데, 여기서 주께서 고난 당하시기 전에 심문을 받으셨다 . 왼손쪽에는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골고다 라는 작은 언덕이 있다. …… 그 곳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령에 의 하여 하나의 바실리카가 세워졌다 . 보르도 순례자는 아마도 현재의 시온 문 근처의 한 지점에서 성벽 안으로 들어와서, 네아폴리스(지금의 나블루르 [Nablus] ; 62 항 참고)를 향하여 북쪽으로 나가는 문, 죽 현재의 다메섹 문을 향하여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MEISTERMANN 219 쪽) . 오른쪽 아래로 튀로포에온 임이 틀림없는 골짜기에는 프래토리움의 터가 있다 . 계속해서 나아 가면서 순례자는 또한 왼쪽에 골고다 언덕과 새로 세워진 〈성묘 교 회〉을 지나간댜 이 베 리 아인 베 드로 (Bal di 5-53쪽, no. 888 ; Raabe 99 쪽 in KOPP 1959, 419 쪽)는 451 년에 북쪽으로부터 왔다 . 그가 먼저 성 스데반의 순교관 rn artyri um 으로 왔댜 이 곳은 일찍이 성 스데반 문 St. Ste - ph en's Ga te이라고 불린 다메섹 문의 북쪽에 있는 장소로서, 여기에 여황제 유도치아 Eudoc i a(444 - 460) 가 그 순교자(행 7:60) 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하여 바실리카를 지었으며, 현재의 〈성 스데반 교회 St. Ste ph en's Church 〉이 〈도미니크 수도원〉과 프랑스 성경 및 고고학 연구원과 함께 그 곳에 서 있다 (239 항을 보라). 그 곳으로부터 베드 로가 골고다로 왔다. 거기서 그는 빌라도의 이름을 따라 일컬어지는 교회로 내려갔고, 그 다음에는 〈중풍병자 교회 Church of the Para~

l yti c 〉(죽 베데스다 못 가에 있는 교회)와 겟세마네를 향하여 계속 나 아갔다. 베드로가 말하는 〈빌라도 교회 Church of P il a te〉라는 이름으 로 보건대, 그 교회는 어쩌면 빌라도의 프래토리움이 있던 곳으로 믿어지는 장소를 표시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 장소는 앞서 보르도 순례자에 의해서도 지적된 바와 같이 , 분명히 저 아래 튀로포에온 골짜기에 있었다 . 테 오도시 우스 (530) 는 우리 가 이 미 본 바와 같이 (212 항) , 가야바의 집을 〈 하기아 시온〉로부터 50 보 안팎 정도 떨어진 곳에 두었으며, 그런 다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GEYER 141-142 쪽; LPPTS II-B , 10 - 11 쪽 ; CCSL CLXXV, 118-119 쪽 ; WJ P 66쪽). 〈가야바의 집 으로부터 빌라도의 프래토리움까지 De domo Caia p h ae ad pr ae- tor iu m P i la ti는 100 보 안팎이댜 그 곳에는 〈거룩한 지혜 교회 Church of Holy Wi sd om (ecclesia sancta e Soph iae ) …… . 빌라도의 집 으로부터 양못 Sheep Pool 까지 De domo Pil a ti usqu e ad pisc i na m p roba ti azm 는 100 보 안팎이댜〉 빌라도의 집과 빌라도의 프래토리움 은 아마도 동일할 것이며, 그 장소를 표시하는 〈성 소피아(거룩한 지 혜) 교회 Church of St. Sop hia (Ho ly W i sdom) 〉은 이베리아인 베드로 가 언급한 바 있는 , 빌라도의 이름으로 일컬어진 교회와 동일한 교 회임에 틀림없다. 빌라도와 관련된 장소에서 그 지명으로 먼저 일컬 어진 교회가 〈빌라도 교회〉라는 이름을 영구적으로 유지하지 않고 다른 이름一―예수를 심문하던 빌라도보다 먼저 있던 〈거룩한 지혜 Holy W i sdom 〉라는 이름 __ 이 주어지리라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테오도시우스가 부여한 거리들은 좀 자의적이고 대략 적인 것이 분명하나, 시온 산 위에 있던 가야바의 집으로부터 양못 에 이르는 노선 (203 항)을 따라가다 중간쯤 되는 지점이 튀로포에온 골짜기의 어느 곳에 이를 것이었다. 피 아첸짜의 무명 씨 (GEYER 174-175 쪽 ; LPPTS II-D , 19-20 쪽 ;

CCSL CLXXV, 141 쪽 ; WJ P 84 쪽)는 프래토리움과 그것의 위치에 관하여, 이와 같은 비교적 초기의 순례자들의 시리즈 가운데 가장 긴(부분적으로는 가장 어리숙한) 이야기를 제공하고 있다. 무명씨는 시온 산에 있다가 실로암 못으로 내려오는데, 그 사이에 다음과 같 은 이야기가 곁들어 있다. 시온으로부터 우리는 성 마리아의 바실리카로 갔는데, 그 곳에는 하 나의 큰 무리의 수도승이 있었고 , 또한 남자들과 여자들을 위한 객사가 있었으며, 여행자들을 위한 무수한 식탁과 환자들을 위한 3000 개 이상 의 침대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주께서 심문을 받으신 프래토리움에 서 기도를 드렸는데, 지금 이 곳에는 솔로몬의 행각 바깥의 실로암의 샘 쪽으로 내려가는 길 아래에, 그리고 〈솔로몬 성전〉의 유적지 앞에 있는 〈성 소피아〉의 바실리카가 있다. 이 바실리카에는 빌라도가 주의 송사(松事)를 청문할 때에 앉았던 자리가 있다. 거기에는 또한 프래토 리움의 중심에 서 있던 사각형으로 된 돌이 있는데, 이 곳에는 피고인 이 심문을 받는 동안에 앉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그를 보고 들을 수 있게 하였으며, 주께서도 빌라도에게 신문을 받으셨을 때 그 위에 앉게 되셨는데 그의 발자국들 ves tigia이 아직도 그 위에 남아 있다. 생전에 그려져서 프래토리움에 걸려 있는 그 분의 초상화는 아름답게 작고 섬 세한 발과 보통 키의 인물, 찰생긴 얼굴에 곱슬기가 있는 머리카락, 그 리고 길다란 손가락을 가진 곱게 생긴 손을 보여 주고 있다. 그 분이 앉으셨던 이 돌로부터 많은 축복이 흘러나온다. 사람들은 그 발자국들 로부터 (축복을) 퍼내어 그들의 여러 가지 질병을 위하여 지니고 다니 면 나음을 받게 된다 . 그 돌 자체는 금과 은으로 장식되어 있다. 시온과 실로암 사이에는 많은 수의 상주자들과 방문객들을 가진 〈성 마리아의 바실리카〉가 있다. 이것은 〈네아〉, 죽 〈하나님의 어머

니 성 마리아의 새 교회〉인 것이 분명하며, 지금은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여 구 도성의 유대인 구역에 있는 남쪽 터키 벽에서 발견되고 있다 (196 항). 따라서 〈성 소피아(거룩한 지혜)〉의 바실리카는 테오도 시우스의 여정(바로 위의)에서 우리가 만난 그 동일한 교회이며 , 이 것은 또한 테오도시우스와 피아첸짜의 무명씨에게 있어서 빌라도의 프래토리움이 있던 장소를 표시하는 그 교회이다. 무명씨의 경우에 있어서 〈성 소피아〉의 위치가 확실하게 알려진 사항들에 관해서는 보다 정확하게 지적되어 있다. 죽 그것은 〈네아〉과 성전 지대의 사 이에, 그리고 실로암 못으로 내려가는 길 아래에 있다(A ]PA By za n- tine Pe ri od 를 보라). 「마다바 모자이크 Madaba Mos ai c 」 (560) 에서 〈네 아〉의 왼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 작은 교회가 필시 〈성 소피 아〉일 것이다. 즉 그 교회의 서쪽 벽에 있는 이색적인 기둥들은 빌 라도의 재판석 (bema) 을 표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며, 그 중앙 정면 에 있던, 지금은 없어진 붉은 돌은 피고인이 서 있던 장소였을 것이 댜 대체로 〈성 소피아〉의 위치는 유대인 구역에서 발굴된 훌륭한 집 들 (196 항)과 헤롯의 아랫궁전이 된 하스몬 가의 궁전의 가상적 인 장소로부터 멀지 않다 (KROLL 339 쪽, col. 2 ; 340 쪽, col. 3). 소프로니우스 So p hro ni us(634) 는 아나크레온티카 Anacreon ti ca 에서 다음과 같이 기 록하고 있다 (MPG 87-3, cols. 3821-3822 ; Baldi 585 쪽, no. 892 ; LPPTS XI-A, 31 쪽). 〈이제, 시온과 언덕들을 떠나서 …… 나는 그 집으로 들어가 모든 지혜의 으뜸이신 분께서 그 자신의 선 고를 들으신 지점을 표시하는 돌을 보며 탄식의 눈물을 홀릴 것이 며, 나는 그 땅에 절하며 그것에 입 맞추리라. 나는 그 거룩한 양못 이 있던 곳으로 들어가리라.〉 소프로니우스가 〈시온과 언덕들을 떠 나서〉 양못으로 간 통로는 반드시 저 아래로 튀로포에온 골짜기를 건너가는 길이었을 것이고, 〈지혜의 으뜸〉이신 분께서 그의 선고를 들으신 장소를 언급한 것은 틀림없이 〈성 소피아 교회〉을 암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프로니우스의 시(詩)는 분명히 전술한 자료에서 나타난 그 동일한 전승을 반영하고 있다. r 아르메니아인의 성지 기술 The Armen ian Descri ption of Holy Places 」 (660) 은 다음과 같은 진술을 포함하고 있다 (Bal di 585 쪽, no. 894 ; PEFQ S 1896, 348 쪽). 〈시온의 오른쪽 〈캅파타 Ka pp a ta〉라고 불 리는 〈빌라도의 궁전〉과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앞에 서 있던 돌이 있 댜 그 위에는 그의 발자국들이 이 날까지 보인댜〉 〈시온의 오른쪽〉 이라는 방향은 튀로포에온 골짜기로 내려가는 쪽을 가리켰을 것이 고, 그리스도의 발자국들을 언급한 것은 피아첸짜의 무명씨가 〈성 소피아 교회〉과 관련하여 말한 것과 일치한다. 따라서 「아르메니아 인의 성지 기술」도 역시 프래토리움의 위치에 관한 전승인 그 동일 한 최고(最古)의 예루살렘 전승에 대한 하나의 증거임이 분명하다. 방금 더듬어본 전승이 갖고 있는 일관성과 오랜 연대는 그것을 진 지하게 다룰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빌라도의 프래토리움은 참으로 헤롯 대왕의 아랫궁전이 된 하스몬 가의 궁전에서나 비잔틴 시대의 〈성 소피아 교회〉이 있던 터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프래토리움이 <성 소피아>에 있었다고 하는 참고 문헌들 . B. Bag at t i, La Tradi zion e della Ch ies a di Gerusalemme sul Preto r i o, in RIVE 21 (lc:J'/3) , 429- 432 쪽 ; Bargi l Pixne r, Noch eiru nal das PI 검tori wn, Versuch ein e r neuen Losun g, in ZDPV 95 (lc:J' /9 ), 56-86 쪽 ; Karl Jar os, Ein neuer Lokal- isie r ung sv ersuch des Praeto riwn , in Bib e l und Lit urg i e . 53 (19 80), 13-22 쪽, abb. 1 의 no. 15, 그리고 또한 abbs. 2 및 3 을 보라. 〈네아 교회〉 (196 항)와 함께 〈성 소피아 교회〉은 의심할 여지없이 614 년에 있었던 사사니아 페르시아인 Sasan ian Pers i an 의 침입 때에 파괴되었으며, 〈성 소피아〉라는 이름은 그 후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J. Rheto re , La prise de Jer usalem par les pers es, in RB 6

[18ITT], 480 쪽). 638 년에 모슬렘교인들이 비잔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성전지대에 새로운 건축 활동이 있었고(칼리프 압드 알-말리크 Ca liph 'Abd al-M alik [685 구 05] 치하에 〈반석의 돔〉을 짓고, 칼리프 알­ 왈리드 Ca liph al-Wa lid[ 705-715] 치하에 〈알-악사 사원〉을 지음. 185, 186 항 참고), 또한 성전 울타리의 주변에도 많은 건축 공사가 있었다 (192 항). 그러므로 〈성 소피아〉의 터가 잊혀지고 일찍이 뒤로포에온 골짜기의 이 장소로 확인된 프래토리움의 위치가 더 이상 입증되지 못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반면에 제 8 세기 이후, 심지어 십자 군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참고 문헌들은 시온 산 위의 한 장소를 프 래토리움이 있었던 곳으로 가리키고 있다. 예루살렘의 수도승 에피파니우스 하기오폴리타 E pip h ani us Hag io- p o lita (780 一 800) 는 이에 관련된 일련의 참고 사항들을 다음과 같이 제공하고 있다(D onner in ZDPV 57 [1971], 69 쪽 이하, 83 쪽 이하 ; WJ P 117 쪽) . 그리고 거룩한 도성의 서쪽 대문에는 다윗의 망대가 있었는데 , 그 안 에서 왕이 먼지 on66o c;(이 단어는 먼지 또는 재를 의미함) 가운데 앉아 서 시편을 기록했다. 그 망대의 오른쪽에는 유다가 주를 배반한 곳인 박석 Pavement( }..t86 o-c pw -co v ) 이 라는 한 작은 교회 가 있다. 그러나 박석 의 오른쪽에는 〈거룩한/하기아 시온 Hol y Sio n > (T la vta otci lv) 곧 〈하나 님의 집 House of God 〉이 있다 . 왼쪽으로 큰 대문 곁에는 지극히 거룩 한 하나님의 어머니가 별세한 후에 거룩한 사도들이 그의 시신을 옮겨 간 장소가 있다. 그리고 …… (그 근처에는) 저들이 우리의 하나님 그리 스도를 채찍질한 곳울 가리키는 돌이 세워져 있다. 또한 성소의 거룩한 대문들 곁에는 그리스도의 발자국들이 나 있다. 그 분이 빌라도에게 재 판을 받으셨을 때 그 분은 그 곳에 서 계셨다 . 제단의 오른편에는 그리 스도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신 다락방이 있다. ……. 그리

고 〈거룩한 시온〉, 다시 말해서 프래토리움의 후진 안에는 KGL ctg tiv K6VX T\V i:f]~ a.v i.a ~ crtc liv f]vo uv i:oi i npa ti: op i. ou 숯 불 화로 를 포함하는 네 개의 석주들을 가진 하나의 작은 구조물이 있다 . 이 곳 에서 성 베드로 가 어린 하녀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 . 그리고 그 동일한 장소에 빌라 도의 궁전이 있고, 또한 안나스와 가야바 그리고 가이사의 궁전이 있다 . 전술한 인용문의 서두에서 에피파니우스 하기오폴리타가 언급한 다윗의 망대가 현재의 욥바 문 근처에 있는 반면에, 무명씨 I(l096) 로 알려진 순례자는 다른 대문을 언급하면서, 비록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있다 할지라도 현재의 시리즈와는 전혀 부합하지 아니하는 진술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LPPTS VI-A, 1 쪽) . 〈네아폴리스 문 근처에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들에게 재판을 받으신 빌라도의 재판 정 pra eto r i um P i la ti.이 있다 . 그 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골고다 죽 갈보리의 터가 있다.〉 보르도 순례자와 관련하여 바로 위에서 살 펴본 바와 같이 네아폴리스 문은 현재의 다메섹 문과 일치하고, 따 라서 여기에 표시된 지역은 시온 산 자체의 북쪽에 있는 것이다 . 무명씨 VII(1145) 로 알려진 순례자는 마리아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하여 시온 산 위에 세워진 교회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Baldi SITT 쪽, no. 902 ; LPPTS VI-A, 72 쪽). 〈이 교회의 왼편에 그리 스도의 재판정 jud gme nt hall, p rae t o ri um 이 있고, 재판이 있었던 장 소에 하나의 예배실이 있다 . 〉 뷔르츠부르크의 요한J ohn of Wt ir zbur g (1170) 은 예수께서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시기 위하여 〈시온 산으로 끌려갔는데, 그 당시 에 거기에는 박석 litho str ot o s 또는 히브리어로 갑바타 Gabba th a (가 바다)라고 일컬어지는 〈빌라도의 프래토리움 Prae t o ri um of Pil ate > (pra eto r i um P ilati)이 있었다〉고 말한다 (Bal di 588 쪽, no. 903 ; LPPTS V-B, 2.8 -29 쪽).

테오데리쿠스 Theode ri cus(1172) 도 역시 빌라도 앞에서의 예수의 심 문을 희 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 록하고 있다 (Bal di 58 얗두, no. 904 ; LPPTS V-D, 41 쪽). 빌라도는 그에게 많은 질문을 한 후에 그를 재판정으로 데려가게 하 였으며, 박석이라고 불리는 장소를 재판석으로 삼아 그 곳에 앉았다. 이 장소는 시온 산 위에 있는 〈성 마리아 교회〉 앞에 위치해 있다. …… 그 교회 앞의 십자가의 모양으로 깎은 돌 위에 이런 말씀이 새겨져 있다. 〈이 장소는 ‘박석'이라 일컬어지며, 여기서 주께서 재판을 받으셨다.〉 이와 같이 무명씨 순례자 V 田 (1185) (LPPTS VI-A, 76 쪽)은 나사 렛으로부터, 죽 북쪽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오는 것에 관하여 말하 고 있다 . 그는 말하기를, 성벽들 밖에서 성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장소를 보게 되리라 하고, 도성의 중심에 오면 〈성묘 교회〉에 이르 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 다음 다시 이렇게 기록한다. 〈이 일 후에 우리는 〈빌라도의 재판정〉이라고 불리는 〈성 구주 예배실 St. Sa- vio r 's Cha pe l 〉이 있는 시온 산으로 온다. 여기서 우리 주께서 관 씌 움을 당하시고 결박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셨으며, 빌라도에게 재판 을 받으셨다.〉 그 밖에도 그는 동정녀 마리아가 운명한 장소와 주의 만찬이 베풀 어진 장소, 그리고 오순절 날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장소 둥에 관하 여 말하고, 〈성 시온〉과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했을 때 숨은 장 소와 실로암 샘에 관하여 말한다. 노선의 향방은 분명하고, 〈성 구주 예배실〉로 불리는 교회로 기념되는 프래토리움은, 북쪽으로부터 올 때 〈하기아 시온 교회〉에 조금 못 미치는 곳인 시온 산 위에 있다. 우리가 이미 알아본 바와 같이(위의 212 항) 한 고대(제 6 세기) 교회의 혼적들이 여기에 지적된 장소, 곧 아르메니아인의 〈성 구주 수도원

Monaste r y of St. Sa vi or 〉에서 발견되었댜 테오도시우스 (530) 는 이것 을 베드로가 그의 주를 부인한 곳인 가야바의 집을 기념하는 〈성 베 드로 교회〉로 알았던 것에 반하여, 우리는 무명씨 VIII(1185) 로부터 그 교회의 이름이 〈성 구주 교회〉로 변경되었으며, 그 장소가 프래 토리움이 있던 곳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성 구주〉라는 이름은 수도원 이름 가운데 존속하고 있다 (MEISTERMANN 293 쪽) . 하지만 현존하는 제 15 세기 예배실은 아직도 가야바의 집으로 여겨 지고 있다 (KOPP 1963, 356 쪽). 그러므로 대부분의 경우, 전술한 참고 문헌들은 프래토리움을 시 온 산 위에 또는 〈상크타 마리아/하기아 소피아 Sanc ta Ma ria/Ha g ia Sop hia 교회〉의 옆이나 근처에 두고 있으며, 이것은 단순히 많은 전 통적인 사건들을 그 지역 내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려는 추세의 일환 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로마인들에 대항하는 유대인의 전쟁이 발발 했을 때 (66 년 9 월) 시온 산 위의 좀더 북쪽에(에피파니우스 하기오폴 리타가 언급하고 있는 다윗의 망대에 인접하여) 있는 헤롯 대왕의 윗 궁전에 관해서 말하자면 , 그 당시에 로마군의 수비대가 점령하고 있 던 그 궁전은 혁명가들에 의하여 불에 타버리고, 요세푸스가 그토록 화려한 것으로 기술한 바 있는 그 건물이 그에게 단지 하나의 〈가슴 아픈 기 억 〉으로만 남게 되 었다 (War V 4, 4 §§182-183 ; II 17, 9 §§430-440 참고). 그러므로 그것이 이와같은 후기의 참고 문헌에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적인 가능성을 논하자면, 비록 최고( 最 古)의 예루살렘 전승이 헤롯의 아랫궁전을 빌라도의 프래토리움이 있었을 가능성이 더욱 많은 장소로 보지만, 윗궁전도 또한 진지한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로마 총독들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의 거처에 관 하여 입수된 증거의 대부분(모두가 아니라면)은 총독들이 헤롯의 궁 전을 사용했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것은 아마도 헤롯

자신이 건축한 것으로서 그의 후년에 틀림없이 그의 주된 거처였던 윗궁전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Beno it, Jes us and Gospe l, 175-179 쪽).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댜 필론 Ph il o (The Embassy to Gaiu s XX.XV III 299 ; XXXIX 306 ; LCL X, 150 쪽 이 하, 154 쪽 이 하)은 어 떤 한 경우에 빌라도가 유대인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황금 방패들을 헤 롯의 궁전에 세워놓았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러한 관련 때문에 필론 은 구체적으로 헤롯의 궁전을 총독들의 저택 (o t K i. a i:@ v t m i:p 6 血 v ; 여기서 필론은 요세푸스 [War II 9, 2 §169] 가 빌라도를 수세관이라고 부 를 때 사용한 그 동일한 단어인 tni .i :po no<; [에피트로포스]를 사용하고 있음)이라고 부른다. 요세푸스 (War II 14, 8-9 §§301-308) 는 총독 겟시우스 플로루스 Gessiu s Florus(64-66) 가 어 떻게 가이사랴로부터 와서 그 궁전에 tv to tc pa6 t A ci. o tc 유숙했는지를 말하고 있는데, 이 궁전은 후에 (War II 16, 5 §328) 안토니 아 요새 와는 분명 하게 구분되 어 있다. 사건들의 진행 과정에서 플로루스는 그의 재판석 (0 i µa[ 베마])을 그 건물의 앞 에 놓이게 하였고, 그의 앞으로 나오는 대제사장들과 다른 사람들을 영접하기 위하여 그 위에 참석하였다. 하나의 봉기가 발생했는데, 그 로 인해 잡혀온 죄수들이 플로루스의 앞으로 몰려왔을 때, 그는 의 심할 여지없이 그 동일한 재판석에 앉아 있었으며, 그 죄수들을 채 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도록 선고하였다. 이것은 빌라도 앞에서 예 수께서 당하신 심문을 너무나 생생하게 연상시켜 주는 장면이다. 고고학과 관련하여 말한다면 헤롯의 궁전 지역, 죽 다윗의 망대와 욥바 문 근처에 있는 성채의 안뜰 및 성채의 남쪽에 있는 아르메니 아 정원에서 실시한 현대의 발굴 작업들에 의하여 주로 출토된 것은 망상(網狀)의 육중한 돌벽들인데, 이것들은 거대한 포디엄 podi um 을 만들기 위하여 엄청난 분량의 흙과 돌들로 채워져 있다. 북쪽에 있 는 성채로부터 시작하여 서쪽에 있는 터키 벽을 따라서 남쪽으로(그

러나 그것의 동쪽 한계선은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건물들 아래 묻혀 있 어 확정할 수가 없음) 뻗어가는 이 큰 단( 壇 )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약 300-350 미터, 서쪽에서 동쪽으로 적어도 60 미터 정도 되는 넓은 지역에 걸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헤롯의 위대한 궁전 종합 건물 의 상부 구조로부터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 단지 돋운 흙더미 속에서 찾아낸 작은 발견물 중에 헤롯 시대의 도기 단편들이 있어서 그 연대를 보증해 주고, 이 유적들을 그 동일한 위치에 (1118 년 이후 에) 세워진 훨씬 더 작은 십자군 궁전의 벽과 구별시켜 줄 따름이다. 만약 헤롯의 이 궁전이 빌라도의 프래토리움이었다면 (SHJ P Ver- mes/M illar , I, 361 쪽), 박석 l ith os tr o t on 과 재 판석 bema 이 있던 장소는 요세푸스 (War II 15, 1-2 §§305, 315) 가 〈‘윗시장’으로 알려진 장터〉 라고 부르고 왕궁 다음에 있는 것으로 말하는 윗도성의 시가지 안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그 곳은 아르메니아 정교 총대주교 관 거 리 Str ee t of the Armen ian Or tho dox Patr iar chate 건 너 편 에 , 북 쪽으로는 〈성 야고보 대교회당 S t. Jam es Ca th edral 〉의 아르메니아 정 교단 Arme ni an Or tho dox 경내에 있었을 수도 있다 (MACKOWSKI 107 쪽 이하). 프래토리움이 헤롯의 윗궁전에 있었다고 하는 참고 문헌들. Pier re Benoit, Preto ire, Lit ho str ot o n et Gabbath a , in RB 59 (19 52), 531-550 쪽, 그리 고 in Jes us and Gospe l, 167-188 쪽 ; Eduard Lohse, Die rom isc hen Sta ttha lte r in Jer usalem, in ZDPV 74 (1958), 69-78 쪽 ; Jos ef Bli nz ler, The Tr ial of Jes us (Cork: The Mercie r Press Ltd., 1959), 173-176 쪽 헤롯의 궁전이 성채에 있었다 고 하는 참고 문헌들. Ruth Amiran and A Eit an, Excavati on s in the Cou rtyar d of the Cit ade l, Jer usalem, 1968-1969 (Prelim ina r y Rep ort), in IE] 20 (1970), 9-17 쪽 ; Herod's Palace, in IE] 22 (19 72), 50 쪽 이 하 ; 그리 고 Excavati on s in the Jer usalem Cita de l, in Jer usalem Revealed, 52-64 쪽 ; D. Bahat and M. Broshi , Jer usalem, Old Cit y, the Armen ian Garden, in IE] 22 (1 頭), 171 쪽 이 하 ; 그리 고 Excavatio n s in the Armeni an Garden, in Jer usalem Revealed,

55 쪽 이 하 ; A D. Tushi ng h am, Ex ro vati on s in Jer usalem 1961- 19 6 '1, I (Toronto : Roy al Onta rio Museum, 198 .5), 25 - 32 쪽, The Palace Comp le x of Herod the Great. 프래토리움의 위치는 십자군이 왔을 때에도 여전히 시온 산에 있 었던 것으로 말해지고 있었으나 , 십자군 시대 (1099-1291) 가 아직 다 가기도 전에 제 3 의 장소가 제안되었는데, 그때 이후로 이것은 오랜 기간 동안 참으로 지배적인 견해가 되었다. 이 경우에도 그 장소를 탐색한 것은 역시 헤롯의 큰 건물들 중의 하나인 안토니아에서였다 .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안토니아는 일차적으로 헤롯의 저 택용 궁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요새였고, 우리가 아래에서 보게 되 듯이 이 위치를 지목하는 일이 초기에는 진지하게 주장되었다. 또한 사실에 있어서 매우 홍미 있는 고고학적 발견물들과 관련된 것이기 는 하지만, 이제는 그럴 듯한 일로 간주되지 않는다. 프래토리움이 분명히 안토니아에 있었다고 하는 참고 문헌은, 1106 / 1107 년에 성지로 온 러시아 대수도원장 다니엘 D ani el 의 기록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 다니엘은 십자가에 못 박은 장소와 성 헬레나가 〈거룩한 십자가 The Holy Cross 〉(죽, 〈성묘 교회〉에 있는)를 발견한 장소에 관하여 말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Bal di ffil쪽, no. 900 ; LPPTS IV-C 18 쪽). 〈그 곳으로부터 동쪽을 향하여 짧은 거리에 군인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로 끌고 온 프래토리움이 있다. …… 또한 그 곳에 한 천사가 밤에 거룩한 사도 베드로를 풀어 준 유대인 감옥이 있다 . 〉 사도행전 12:2-11 에 있는, 헤롯 아그립바 1 세가 베드로를 투옥시킨 이야기는 베드로의 감옥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말하지 않고 있으나, 베드로와 천사가 성으로 향하는 쇠대문을 통과하여 나가고 있음을 말해 주는 10 절에서 서방 텍스트(D)는 〈그들이 일곱 계단을 내려왔

다〉는 말을 첨가하고 있다. 그리고 후에 바울이 백성에게 연설할 때 올라선 충대(행 21:40) 와 같이, 이 계단들은 십중팔구 높은 안토니아 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계단들이었을 것이다(바울이 섰던 계단은 성 전으로 들어가는 계단이었고 이 계단은 시가지로 통하는 계단이었으므 로, 이 둘이 동일한 계단일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다니엘에 의하면 베 드로의 감옥과 빌라도의 프래토리움은 동일한 장소에 있으므로, 이 둘은 십중팔구 안토니아 안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테오도시우스 (530) 로부터 인용한 위의 구절에서는 빌라도의 프래 토리움과 빌라도의 집이 동일한 것으로 보이지만, 테오데리쿠스 (1172) 에게 이르면 우리는 그가 이 둘을 분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바로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그는 빌라도가 박석에서 앉았던 그의 재판석은 시온 산에 있었다고 말하고, 다른 구절에서 그는 빌라도의 집에 대하여 별도로 말하면서 그것을 안토니아 안에 두고 있다 (Baldi 588 쪽 이 하, no. 904 ; LPPTS V-D, 7쪽). 공적인 것이든지 사적인 것이든지 간에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건물 들에 관해서 우리는 거의 아무런 혼적도 발견할 수가 없었으며, 극히 소수의 예의라 할 수 있는 것은 성모 our Lad y의 모친 〈성 안네 교회〉 근처에 있던 빌라도의 집인데, 이것은 양못pi sc i na probati ca 근처에 서 있다 . 요세푸스가 헤롯에 의하여 지어졌다고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으 나 지금은 완전히 파괴된 모든 공사 중에서 안토니아라고 불리던 궁전 의 한쪽 면만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데 , 이 잔여 부분 은 외부 안뜰 곁에 있는 하나의 대문과 함께 아직도 서 있다. 양못은 베 데스다 못 Pool of Be th esda(203 항)이 고, 의 부 안마당 oute r cou rtya rd 곁에 있던 대문은 엑 체 호모 아치 Ecce Homo Arch (217 항)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빌라도가 거한 집은 분명히 안토니아

안에 있다 .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했을 때 안토니아에 있으면서 그 장소에서 업무를 수행했다고 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때 빌 라도가 그 곳에 있었다는 주장은 그때가 유월절, 곧 이따금씩 성전 에서 소요가 있던 때였고, 총독은 본인 자신이 그 근처에 있기를 원 했을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 . 한 비슷한 예를 들자면 요세푸 스 (War II 12, 1 §§224 강'2:1 ; Ant. X X 5, 3 §§105-113) 가 기 록한 바 있 는 유월절이 가까워진 때에 큰 군중이 그 날을 위하여 운집했었다는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이 이 야기 의 첫 번째 판에 는 총독 벤티 디 우스 쿠마누스 Venti dius Cwnanus(48 - 52) 가 봉기를 두려워하여 그의 군대로 하여금 성전의 행각 지붕 위에서 경계를 서도록 명령을 내렸는데, 이것은 이전의 총독들도 행하던 관례였다. 한번은 한 병사가 백성에게 서투른 공격 을 가하자 그들이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쿠마누스는 〈자신에 대한 전반적인 공격을 두려워하여 증원 부대를 요청하는 사람을 보냈 다〉 (War II §226). 이것은 마치 쿠마누스가 바로 가까이에 있었던 것 처럼 들린다. 두번째 판 (An t. XX §109) 에서 요세푸스는 쿠마누스가 소식을 들 었을 때 ctKO UOa<; 그는 백성을 훈계하였고 그 후에 더 많은 군대를 요 청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쿠마누스가 그 일에 관하여 그의 평상시의 거처인 그의 궁전에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본인 자신이 조치를 취하러 현장에 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Beno it, Jes us and Gospe l, 176 쪽). 하여튼 총독들의 정규적인 저택이 안토니아 내부에 있었음을 제 시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우리는 안토니아에 영구적으로 주 둔해 있던 로마 보병대 (War V 5, 8 §:?M; 181 항 참고)가 그 자체의 사령관 지휘 아래 평소에도 그 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실례는 성전에서 일어난 군중 폭동으로부터 바울을 구출 한 사건에서 볼 수 있는데, 이때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그 들에게) 달려 내려〉간(행 21:3 2 ) 사람은 보병대의 천부장 (6 xtAl ap xo c; 韋 crn:e lpn c ;, 〈군대의 천부장〉 ; 행 21:31) 이 었다. 안토니아와 관련된 고고학적 고려 사항들도 역시 예수의 심문에 관한 복음서의 이야기에 기록된 세부 사항들과 일치하는 것으로 생 각되어 왔고, 안토니아가 당시의 빌라도의 프래토리움이었음을 확증 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으나, 보다 근래의 탐사는 그러한 결론을 지 지하지 않는다. 216 채찍질 수도회의 안마당에서 본 광경 이제 안토니아가 위치했을 것으로 보이는 장소를 바라보면서 우 리가 기억할 것은 (197 항), 엘-가와니메 첨탑 el-Gaw anim eh mina ret 과 모슬렘의 오마리야 Om ariyy ah 학교가 성전 지대의 북서쪽 모퉁 이에 있는 경계표들이라는 사실이다. 215 항의 구도에서 첨탑이 표시 되어 있고, 커다란 사각형의 바위 덩어리는 오마리야 학교가 현재 서 있는 곳이다. 안토니아가 위치했을 것으로 보이는 장소가 바로 이 바위 덩어리로 그 치수가 약 120X45 미터나 된다 (Beno it in Je- rusalem Revealed, 89 쪽) . 하지만 그 요새는 더욱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MACKOWSKI 99 쪽 이하) . 이 바위 덩어리의 북쪽을 따라 뻗은 길 이 타리 크 밥 싯튀 마리 암 Ta riq Bab Sit ty M ari am( 성 마리 아 문 거 리 Str ee t of the Gate of St. M ary)인데, 그 길이 터키 벽에 있는 동 쪽 대문으로부터 도성 안으로 뻗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리게 된 것이다. 이 대문은 초기에 성 마리아 문 S t. Ma ry's Gate ( 169, 243 항 참고)이라 불렸고, 지금은 성 스데반 문 S t. Ste p h en's Gate 또는 사자

문 Lio n s' Ga t e 이 라고 일 컬 어 진 다(B aba t, Plans, 72). 이 거리의 북쪽에는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프란체스코 채찍질 수도회 Francis c an Convent of the Flag e llati on , 엑 체 호모 고아원 Ecce Homo O rp hana g e 이라고도 불리는 시온의 성모 수도회 Convent of Our Lady of S i on 와 〈엑체 호모 바실리카 Ecce Homo Basili ca >, 그리고 희랍 정교 수도회 Greek Or tho dox Conven t가 있다. 이 건물 들 밑으로 탐사와 발굴이 이루어져 왔는데, 주로는 M. 고들렌 M. Godele i ne 과 L.-H . 뱅상이 1931-1937 년에 시온의 성모 수도회의 지 하에서 , 프란체스코파가 1955 년에 채찍질 수도회의 지하에서, 그리고 시온의 성모 수도회의 사람들이 1966 년에 〈엑체 호모 바실리카〉 안 에서 발굴한 것들이다. 여기에 예시한 것은 채찍질 수도회의 안마당 으로부터 엘-가와니메 첨탑을 향하여 쳐다본 광경이다 . 217 엑체 호모 아치 시온의 성모 수도회(엑체 호모 고아원)의 앞에 있는 좁은 거리에 보이는 이 아치는 로마 시대 큰 출입문의 중앙 아치 중 한 부분이다 (Bahat, Plans, 79b). 여기에 보이는 주된 아치의 나머지 부분은 시온 의 성모 수도회의 일부인 〈엑체 호모 바실리카 Bas ili ca of the Ecce Homo 〉의 벽 내부로, 북쪽으로 뻗어 있는 반면에, 그 동일한 출입문 의 북쪽 아치는 그 동일한 바실리카 안에 있는 제단 뒤에 서 있다 . 그 출입문의 남쪽 아치는 그 거리의 다른 편에서 없어지고 말았다. 요세푸스는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성전을 파괴했을 때 (183 항 참고) 그가 안토니아의 기초를 무너뜨렸음을 우리에게 말해 주 고 있으며 (War VI 2, 1 §93), 요세푸스는 또한 〈안토니아의 붕괴 tiv Ka8alpE ( J tV tic A Wuv i ac 〉에 관하여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War VI 5, 4 §311). 우리는 그 후에 하드리아누스가 앨리아 카피톨리나라는 새

도성을 건설하였음을 알고 있으며, 러시아 알렉산더 호스피스 (224 항) 안에 보존되어 있는 아치에서 어쩌면 하드리아누스 도성의 서쪽 공 회소로 향하는 큰 출입문의 유적을 보게 된다. 그 출입문을 재건했 음이 거의 확실한 부분은 세 개의 통로가 있는 기념 구조물인데, 그 중에서 비교적 큰 아치는 중심부에 있고, 비교적 작은 아치 둘은 측 면에 있댜 이 곳에는 같은 형태를 가진 다른 출입문의 더욱 넓은 부분들이 보존되어 있다(두 출입문의 재구성을 다음의 책에서 찾아보 라. 러시아 알렉산더 호스피스 안에 있는 출입문을 위해서는 Vi nc ent, Jer usalem nouvelle, 31 쪽, 그림 13 을 보고 ; 〈엑체 호모 바실리카〉에 있 는 출입문을 위해서는 같은 책 25 쪽, 그림 6 을 보라). 같은 형태의 또다 른 출입문으로서 훨씬 더 잘 보존되었고 그 연대도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거라사 도성의 남쪽 입구에 있는 개선문인데, 하드리아누스가 이 곳을 방문한 때 (129/130) 부터 존재해 온 것이다 (108 항).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사실은 여기서 논란되는 예루살 렘 아치도 역시 하드리아누스의 아치라는 것과 그것이 앨리아 카피 톨리나의 동쪽 부분에 있는 한 공회소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이 지 역에서 발견된 석주와 주두 및 그와 같은 종류의 다른 조각들의 일 부는 헤롯 가의 시대로부터 온 것이고, 일부는 하드리아누스의 시대 로부터 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 두 시기 사이에서 분명하게 한쪽을 정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ZDPV 80 [1964], 148 쪽). 또 하나의 이론은 그 아치가 원래 도성의 동쪽 대문이었는데 헤롯 아그 립바 I 세에 의하여 북쪽으로 확대되었고 (201 항), 70 년에 파괴되었다 가 하드리아누스에 의하여 재건되었을 . -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KROLL 353 쪽 및 446 쪽, n. '2:18 ; MURPHY-O'CONNOR 24 쪽 이 하 참고). 그 아치와 그것의 북쪽에 있는 유적물 덩어리는 1 8.5 7 년에 시온의 성모 수도회가 입수했으며, 1865 년에 〈엑체 호모 바실리카〉이 지어

졌을 때 북쪽의 측면-아치가 그 안으로 통합되었다. 그 당시에 그 아치는 빌라도가 〈보라, 이 사람이로다! 160b 6 &v8 p U JtO c 〉(요 19:5 ; 로 마 총독이 법률적인 절차에서 아마도 사용했을 라틴어로는 엑체 호모 Ecce homo) 라고 말한 장소였을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이리하여 엑 체 호모 아치라는 이름이 인기 있는 칭호로서 계속 사용되어 왔다. 218 전에 박석(礎石)이라고 불린 돌 포장의 구도 이 구도는 채찍질 수도회, 시온의 성모 수도회, 그리고 희랍 정교 수도회의 지하에서 발견된 광범한 지역의 큰 돌 포장을 보여 준다. 이 포장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약 32 미터, 북쪽에서 남쪽으로 48 미터 나 되는 지역으로 뻗어 있었으며, 따라서 1500 평방미터가 넘는 지역 을 덮고 있었댜 그 지경 주변에 남아 있는 건축상의 유적들은 이것 이 계랑들로 둘러싸인 하나의 인상적인 안마당이었음을 보여 준다. 포장에 쓰인 돌은 석회석으로 된 평석이며, 더러는 정사각형이고, 더 러는 직사각형으로서, 한 면이 1 미터 정도이고 때로는 2 미터 또는 그 이상이 되기도 한다. 빗물의 배수를 위하여 돌을 안으로 깎아 몇 개의 수로를 만들기도 하였다. 219 줄무늬진 포장 돌 바로 위에서 기술한 돌 포장 (218 항)의 남쪽에는 동쪽에서 서쪽으 로 뻗어 있는 포장 돌들로 이루어져 가로지르는 지대가 있는데, 여 기에 있는 평석들은 홈이 파져 있거나 줄무늬가 져 있다. 줄무늬들 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나 있다. 그러므로 이 곳에 뜰올 가로질러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나 있는 도로가 있었으며, 그 돌에 홈이 파진 것 온 말의 발굽이 미끄러지지.요않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줄무늬진 돌의 얼마가 사진에 나타나 있다. 220 포장 돌 위에 그려진 놀이판 포장 돌의 더러에는 이 사진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도안들이 새 겨져 있다. 그와 같은 도안은 게임을 하기 위하여 그려진 놀이판 pla yi ng board (lusori a tab ula) 으로 생각된다. 빌라도의 프래토리움이 안토니아에 있었다고 하는 십자군 시대의 견해를 따른다면, 그 아치 (217 항)가 바로 빌라도가 〈 보라, 이 사람이 로다!〉 (Ecce homo [엑체 호모]) (요 19 : 5) 라고 말한 곳이 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 포장 (218 항)이 바로 빌라도의 재판석이 있던 박석 lith o str ot o n (>..t 86 cn:p(J)t 0V) 이라는 것(요 19:13) 과 그 놀이판을 안토니 아에 주둔해 있던 로마 군인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믿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 아치가 후대의 것으로 인정되었을 때에도, 그것이 포장 위에 놓여 있었으므로 그 포장은 그에 앞서 만들어졌고 어쩌면 예수 당시의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 하지만 1966 년의 발굴에서 그 아치의 북쪽 교대(橋 臺 )가 암반 위에 놓여 있음이 발견되었다 . 뿐만 아니라 그 바위는 인접한 포장 평석이 고대의 가장 낮은 줄의 낮은 테두리와 마주 대하게 놓이도록 깎여 있었고, 따라서 아치와 포장은 동시에 건조(建造)되었으며, 그러므로 이 둘은 모두 예수의 시대보다 후기의 것이다. 221 돌 포장 밑에 있는 수조 바로 위에서 취급한 지역 (215-220 항)의 지하에는 길이가 52 미터, 폭이 14 미터, 그리고 깊이가 자그마치 10 미터나 되는, 북서쪽에서 남 동쪽으로 뻗어 있는 하나의 매우 큰 옹덩이가 있다. 이것은 흡사 커

다란 이중 터널처럼 보이게 하는 모양의 둥근 천장으로 덮여 있고 , 구도 (215 항)에서 이것은 여기서 〈중간의 맞은편에〉로 번 역된 헬라어 Kai: tt µt oov 은 아마도 실제적으로는 〈바로 중간을 가로 질러〉라는 뜻일 것이다 .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스트루티온 못(이 이 름은 작은 것을 암시하는 cn:po u86<;; (스트루토스, 〈참새〉의 축소형)는 베 데스다 못 (203-204 항)이나 이스라엘 못 (181 항)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못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안토니아에 대한 공격을 저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지금 포장 밑에 둥근 천장으 로 덮여 있는 옹덩이를 가리키는 것임에 들림없다 . 그러나 70 년에는 이것이 포장된 안뜰 밑에 덮여 있는 저수지가 아니었고, 오히려 그 것은 열린 못으로서 로마인들이 안토니아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것 을 가로질러 저들의 둑을 쌓아야 했다. 따라서 다시 한번 엑체 호모 아치와 함께 이 포장이 예수의 시대보다는 후기의 것임이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안토니아를 제외하면, 예수께서 빌라도 앞에 서셨던 프 래토리움이 구 예루살렘 안에 있는 현재의 성채 자리에 있던 헤롯 대왕의 윗궁전 터에 있었던지 , 아니면 최고(最古)의 예루살렘 순례자 의 기록대로 십중팔구 저 순례자들의 시대에 튀로포에온 골짜기의 거룩한 지혜(성 소피아) 교회에 의하여 표시되었던 헤롯의 아랫궁전

터에 있었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222 오늘날의 비 아 돌로로사 노상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장소로부터 골고다의 처형된 장소(현재의 〈성묘 교회〉, 225 항 이하)에 이르는 길은 비아 돌로로사 Via Dolorosa, 죽 슬픔의 길이라고 기독교계에 알려져 있댜 만약 빌 라도의 프래토리움이 튀로포에온 골짜기의 〈성 소피아 교회〉에 의 하여 표시되었던 헤롯의 아랫궁전에 있었다면, 그 길은 아마도 그 곳으로부터 북쪽인, 지금의 사슬문 거리와 다윗 거리의 방향으로 갔 으며, 그 다음에는 서쪽으로 카르도 막시무스가 된 곳의 십자로를 향했으며, 그리고 그 곳으로부터 겐나트 문 Genna th Ga t e 을 통과하 여 골고다로 향하였다 (P ixn er in ZDPV 95 [l

14 처 는 다음과 같다. (1) 안토니 아의 터 와 심문의 장소에 있는 옛 터 기 병 영/현 재 의 오마리 예 학교 Orna riyyeh School, (2) 예 수께 서 십 자가를 지도록 명령을 받으신 박석, (3) 엑체 호모 아치 아래(예수께서 첫번째로 쓰러지신 곳), (4) 예수께서 그의 모친을 만나신 곳, (5) 구레 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린 곳(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기서 길은 골고다를 향하여 오르막길을 이룬다), (6) 베로니카가 냉 수에 적신 세마포 수건으로 예수의 얼굴을 닦아 드린 곳, (7) 예수께 서 두번째로 쓰러지신 곳, (8)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여인들에게 그를 위해 울지 말고 자신들을 위해 울라고 말씀하신 곳, (9) 예수께서 세 번째로 쓰러지신 곳, 그리고 마지막 다섯 처는 〈성묘 교회〉 안에 있 는데, (10) 예수께서 옷 벗김을 당하신 곳, (11)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12) 십 자가에 돌아가신 곳, (13 ) 십자가로부터 내 려지신 곳, 그 리고 (14) 무덤 안에 안치되신 곳 등이다 . 223 러시아 알렉산더 호스피스 안에 있는 고대의 벽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220 항과 173 항의 구도), 예수의 시대에는 예 루살렘의 〈제 2 성벽〉이 십중팔구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현재의 〈성묘 교회〉이 있는 지대의 동쪽을 따라 뻗어 있었다. 그 지대가 고 대에는 채석장이었고, 그 당시에는 동산과 무덤들이 있는 장소였으 며, 그 무덤들 중의 하나가 바로 〈성묘 교회〉 안에 보존된 예수의 묘가 되었다. 후에 헤롯 아그립바 I 세 (41-44) 는 제 3 성벽을 짓기 시작했는데 (66 년 경에야 완공함), 이것은 북쪽으로 쭉 뻗어 나가서 그 지대를 도성 내 부로 에워싸게 되었다. 이보다 더 후에, 유세비우스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바와 같이 (The Lif e of Consta ntine ill 26, NPNFSS I, 5업 쪽), 하드리아누스 (135) 는 그리스도의 성묘를 묻어버리고, 그 지대를 모

두 대량의 흙으로 덮고 그 위에 돌 포장을 놓은 후 바너스의 사당을 세웠다. 앨리아 카피톨리나의 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하드리아누스의 공회소(아직도 엑체 호모 아치와 박석에 의하여 표시가 되어 있는; 217, 218 항)와도 같이, 이것은 분명히 그의 도성의 서쪽에 있는 하나의 새 로운 공회소였다 (S im ons, Jer usalem, 318 쪽 ; Vin c ent, Jer usalem nouvelle, pla nches II, pl. D. 1844 년에 러시아 알렉산더 호스피스(〈성묘 교회〉의 동쪽, 수크 칸 엣-제이트에 있는)에서 실시된 발굴 작업으로 고대의 유물들과 두 개 의 벽 및 출입문의 문지방, 그리고 아치의 한 부분 둥이 발굴되었는 데, 이 모든 것들이 지금은 그 호스피스 내부의 원래 위치에 잘 보 존되어 있다. 벽은 큰 돌덩이들로 세워져 있다 (Baba t, Plans, 71). 한 벽은 남북으로 뻗어 있고 다른 벽은 동서로 뻗어 있으며, 이 사진에 서 보는 바와 같이 (223 항) 이 두 벽이 직각보다는 조금 큰 각도로 만 났다. 동서로 뻗은 벽의 동쪽으로 이어진 부분에는 마치 많은 발자 국 때문인 듯 닳은 평석 두 개가 놓여 있고, 거기에는 문을 떠받치 는 일과 관계된 듯한 홈들이 패여 있다 (V in cen t, Jer usalem nouvelle, 63 쪽, 그림 32). 한때 이것은 예루살렘의 〈제 2 성벽〉(우리는 이 성벽이 수크 칸 엣­ 제이트의 방향을 따라 뻗어 있다고 믿는다; 200 항)의 일부일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그 대문은 바로 예수께서 골고다를 향하여 나가실 때 통과하신 대문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돌덩이들의 다수 가__그 중에 더러는 가장자리가 좁고 중앙에 평평한 돌기가 있음 一실제로 옛날 헤롯 시대의 다듬은 돌들이며, 아마도 70 년에 로마 인들에 의한 성전 파괴 후에도 남아 있던 것들을 하드리아누스가 이 장소에 지은 그의 공회소와 비너스 사당의 울타리를 위하여 사용한 것으로 믿어진다 (Wi lkin son in Levant 7 [1CJ 75 ], 135 쪽). 그렇지만 하 드리아누스의 계획에 있어서 그렇게 많이 닳온 문지방이 무슨 목적

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224 러시아 알렉산더 호스피스 안에 있는 고대의 아치 바로 위에서 기술한 바대로 러시아 알렉산더 호스피스 안에 있는 벽들 (223 항)과 연관된 것으로서 남북으로 뻗은 벽의 남쪽 방향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것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안에 세워진 고린도식 주두를 가진 한 아치의 부분이다. 개조되기는 하였 으나 이것은 한때 이 곳 하드리아누스의 공회소에 서 있던 개선문의 일부인 것으로 믿어진다. 225 콘스탄티누스의 〈성묘 교회〉의 구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은 〈골고다〉라고 불렸다. 마태복 음 'lJ :33 과 마가복음 15:22 은 이 이름을 사용하는 곳에서 그것이 〈해 골의 곳〉 (K p avlou 16noc; [크라니우 토포스])을 의미한다고 삽입구 형식 으로 설명하고, 누가복음 23:33 은 셈어 이름을 생략하고 단순히 그 곳을 〈해골〉 (K p avlov [크라니온])이라고 부른다. 요한복음 19:17 도 또 한 그 곳을 〈해골의 곳〉이라고 부르고, 'E0 pa t m t (헤브라이스티), 죽 〈히브리어로〉(이 말이 문자적으로 의미하듯이, 그리고 요한계시록 9:11 과 어쩌면 또한 요한계시록 16 : 16 에서 실제적으로 의미하듯이) 또는 〈아람 어로〉(이 말이 어쩌면 이 곳과 요한복음의 다른 곳에서 실제적으로 의 미하듯이) 그 이름은 〈골고다〉라고 설명한다. 사실 이 이름은 아람어 로 Nn5l (굴갈타)이고, 히브리어로는 nb1bl (굴골레트)에 해당하며, LXX 사사기 9:53 둥에서 Kp av t ov (크라니온)으로 번역되어 있다. 라 틴어로 해골을 뜻하는 단어는 azlva( 칼바)이고, 제롬이 번역한 신약 의 라틴어역에는 이 곳의 이름이 마태복음 'lJ:3 3, 마가복음 15:2'2 , 그

리고 요한복음 19 : 17 에서는 Qzlva ri ae locus (칼바리애 로쿠스)이며, 누가복음 23 : 33 에 서 는 Qzlva ri ae (칼바리 애) 이 다. 이 리 하여 영 어 로는 Calva ry (캘버라 갈보리)가 되었다. 이 이름에 대한 가장 그럴 듯한 설명은 단지 해골은 죽음을 나타 내고 이 곳이 처형의 장소였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9:20 에 의하면 이 곳은 〈성에서 가까운〉 곳이었고, 히브리서 13 : l2 에 의하면 〈성문 밖〉, 죽 유대인과 로마인의 관습으로, 처형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매 장을 위해서도 틀림없이 적격인 , 도성 밖에 있는 장소였다. 그 곳에 동산이 있었고, 동산 안에 하나의 새 무덤이 있었는데(요 19:41) 이것 이 예수의 무덤이 되었다 . 예루살렘의 초기 기독교인들이 골고다의 위치와 예수의 무덤을 기억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유대안 기독교인들이 〈유대 전쟁〉이 발발하기 전날 밤에 펠라 Pella 로 피신했을 때에도(Eu se­ biu s , Ch. Hi st. m 5, 3) 그들은 불과 50 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고, 유 대인들이 하드리아누스에 의하여 예루살렘 입성을 금지당했을 때에 도 예루살렘에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일련의 감독들 아래에 있었 다. 또한 감독들 가운데서 마르쿠스 Marcus 가 첫번째 이방인 감독으 로서 (Euseb i us, Ch Hi st . I V 6) 감독의 전통을 이어가게 되었다(본서 의 앞부분에 있는 여 1 루살렘 교회의 감독들의 명단』 참고).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183 항) 디오와 제롬은 말하기를, 하드 리아누스가 이전의 유대인 성전 터에 주피터를 위한 이교 성소를 세 웠다고 한다. 이와 같이 제롬 (32 항)도 베들레헴의 예수의 탄생지를 더럽힌 것을 하드리아누스 시대로부터 십자가가 섰던 반석 위에 대 리석으로 만든 비너스 조상이 있었고 (3 항 참고), 부활하신 장소에 주 피터의 형상이 있었던 사실과 비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위에서 본 것처럼 (223 항) 유세비우스는 하드리아누스가 그 전 지대 를 덮고 포장하여 그 곳에 비너스의 사당을 지었다고 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러므로 하드리아누스는 로마인의 사당들을 세우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공히 신성하게 여겨지는 장소들 을 선택하였다(하드리아누스는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도 같은 일을 했 다. 그렇게 생각되는 이유는 그가 그리심 산 위에 주피터의 신전을 지었 기 때문이다 60 항 참고). 그러므로 그는, 그 자신이 살던 시대보다 훨 씬 먼저부터 있어 왔고 이리하여 기독교 운동의 최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적인 사실 인정에 기초하여, 그와 같은 나쁜 짓을 하 고자 갈보리의 장소를 선택했음에 틀림없다(하드리아누스의 신성한 울타리에 관해서는 코르보 Corbo 가 그것이 카피톨리네 주피터 Cap itol - ine J u pit er 에게 봉헌했다는 의심쩍은 추측에 근거하여 그것을 카피톨리 움 Ca pit o li um 이라고 부르는 사실에 유의하라. Bahat in BAR 12.3 [May/ Ju ne 1986], 34 쪽 이하를 보라). 우리가 『콘스탄티누스의 생애』(콘스탄티누스가 사망한 337 년 이후 에 [IV 64], 그리고 유세비우스가 사망한 340 년 이전에 기록됨)에서 이 사건들에 관한 유세비우스의 보고를 계속 읽어 가노라면 이 황제가 비너스 사당의 철거를 명령했다는 사실과, 이 일이 진행되는 동안에 (326/327) 전혀 예기치 못한 일로서 하나의 무덤이 드러났는데, 이것 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친히 회생하신 것과도 같은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III 26 이하). 그래서 콘스탄티누스는 마카리우스 감독 B i sho p Mac ari us 에게 지시하여 그 지점에 교회(황제의 서한 [III 31] 에 사용된 용어는 Pacrt} ..tKi t (바실리케, 〈바실리카〉)이며, 이 단어는 기독 교회와 관 련을 가진 문헌에서는 여기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FLAP 506, 527 쪽]) 룰 짓도록 하였으며, 이 일은 이루어졌다.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을 받은 건축 기사는 제노비우스 Zenob i us 였 으며(이 이름은 테오파네스 Theo p hanes 가 AM. 5828 년 =328 년이라는 연호 아래 명 시 하고 있다. Crow foo t, Early G加 rches, 21 쪽, n. 1), 이 교회의 봉헌식은 335 년(이 해는 또한 콘스탄티누스의 통치 제 30 년

tri cennal i a 이기도 했다), 즉 예루살렘에 성직 임명 예배를 위하여 감 독들의 대회의가 열렸을 때에 있었다 (Socra t es, Ch . Hi st. I 28 ; Sozomen, Ch Hi st. II 26). 유세비우스는 이 행사에 참석하였으며, 그로부터 얼마 안 되는 같은 해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구주의 묘에 관 한 연설 dµ0i t0 U o (J)띠p lou µvft µ0 1oi; Mvo i;과 함께 또한 콘스탄티 누스 룰 찬양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는 이 두 연설을 그가 쓴 『 콘스탄티 누스의 생 애』 에 첨 부하기 를 제 안했으며 (IV 33, 40), 후자는 이 위 치 에 들어 있으나 (NPNFSS I, 581 쪽 이 하) 전자는 오늘날 보존되 지 않 고 있다. 전술한 문맥에서는 유세비우스가 단지 무덤, 즉 부활의 장소에 대 해서만 말하고 있는 반면에, 『지명록』 (74 쪽)에서는 골고다룰 목록에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해를 붙이고 있다. 〈‘해골의 장소’, 그리스 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앨리아에서 시온 산의 북쪽에 표시 되어 있음.〉 그 위치에 관한 이런 일반적인 진술은 우리가 보르도 순례자 (333) 에게서 듣는 바와 일치하고 있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215 항) 그는 시온 산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의 북쪽 벽에 있는 네아폴리스 문을 향하여 갔으며, 골고다의 언덕은 그의 왼손 쪽에 있었댜 보르도 출신의 이 순례자의 여정에서, 방금 언급된 진술로써 시작하여 그 당시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콘스탄티누스의 바실 리카에 관한 간단한 기술을 계속하는 문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 다 (GEYER 22-23 쪽 ; LPPTS I-B, 23-24 쪽 ; CCSL CLXXV, 17 쪽 ; WET 158쪽). 〈왼손 편에는 골고다라는 작은 언덕 이 있는데 a sin i - str a aute m parte est monti cu lus Golgo tl rz , 여기서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 곳으로부터 돌 한 번 덜질 만한 거리에 그 분의 시 신이 안치되셨다가 제 3 일에 부활하신 지하 토굴이 있다 Inde qu asi ad lapi de m mi ss um est cripta, uhi corpu s eiu s po situ m fuit et ter t ia die resurrexit. 콘스탄티 누스 황제 의 명 령 에 의 하여 그 곳에 하나의

바실리카 즉 교회 bas il i따 …… id est dom i n i cum 가 세워졌는데, 이 것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고 그 측면에는 물을 갇는 수조들 excep turia 이 있었으며 그 뒤로 영아들이 씻음을 받는(즉 침례를 받 는) 목욕탕이 있었다 balneum a ter go , ubi infan te s lavantu r .> 이와 같이 유세비우스와 보르도 순례자에 의하여 지시된 골고다 와 그리스도의 무덤의 위치, 즉 시온 산의 북쪽에, 그리고 예루살렘 의 북쪽 벽에 있는 네아폴리스 문을 향하여 나아갈 때 왼손 쪽에 있 었다고 하는 것 은 현재의 〈성묘 교회〉의 위치와 일치한다. 바로 그 것이 하드리아누스의 벽과 북쪽에 있는 현재의 성벽에 해당하는 예 루살렘의 〈 제 3 성벽 〉 의 안쪽에 있었지만, 위에서 제시된 증거에 의 하면 (198 항 이하) 예수 당시의 성벽인 〈제 2 성벽〉의 바깥쪽에 있었 고, 묘지와 동산으로 이용된 바 있는 옛 채석장 지역에 있었다 (198 , 200, 226 항). 그리하여 이 곳은 최초기의 기독교 전승과 조화되는 정 확한 장소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티누스의 생애를 337 년과 340 년 사이에 기록 했을 때, 그 바로 얼마 전에 그 교회가 봉헌되었는데 (335), 유세비우 스는 그것에 관하여 퍽 자세한 기술을 남기고 있다(ill 33-40). 현대 에 와서 조사한 것을 말한다면 1913 년의 L.-H . 뱅상의 연구는 그 교 회의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형태를 비교적 완전하게 보여 주는 구도 룰 작성 하였다(본서 초판의 181 항을 보라). 현존하는 교회 당은 19 刃년 에 막대한 지진 피해를 겪었으며, 윌리엄 하비 Wi lliam Harve y가 실 시한 구조 조사에 의하여 그 건물이 매우 심하게 훼손된 것이 드러 나자, 1938 년에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 Bri tish Mandate of Pales ti ne 』의 행정부는 그 교회의 완전한 붕괴를 예방하고자 그것을 지탱할 만한 철 구조물들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그 교회는 다음과 같은 여섯 개의 교회 단체가 함께 사용하고 있다. 라틴 가톨릭교, 희 랍 정교, 아르메니아 정교 , 시리아 정교, 콥트인들, 그리고 에티오피

아인들 1960 년에 이 곳을 주로 점유하고 있던 사람들인 라틴인과 희랍인 들, 그리고 아르메니아인들이 철저한 복원 공사를 하기로 합의하였 다(희랍 정교의 추가 건물들에 대한 유보 조치에 관해서는 MURPHY- O'CONNOR 40 쪽 이하를 보라). 복원하는 과정에서 광범위한 고고학 적 조사와 발굴이 가능하였으며, 그 결과는 샤를르 코와스농 Charles Co ti asnon 과 비 르질 리 오 C. 코르보 Vir gilio C. Corbo 에 의 하여 매 우 충분하게 보고되었다(이 단락의 끝에 있는 참고 문헌을 보라). 문헌들 과 함께 고고학적 연구는 현재의 구도와 잇따르는 토론을 위한 근거 를 제공해 주고 있다. 구도에서 원래의 교회로부터 오늘까지 계속해서 남아 있는 벽들 은 굵은 흑색으로 나타나 있다. 이제 우리는 유세바우스가 기술한 것을 역순에 따라 구도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즉 동쪽에서 서쪽으 로 옮겨 가면서 그 교회가 네 개의 주요 부분들로 구성된 것을 본다 . 〈첫째 안뜰〉 구도에서 동쪽 안뜰 At ri o Ori en tal e 이라고 일컬어진 것. 이것은 동쪽에 있는 주된 도로 cardo max i mus 로부터 계단을 밟 고 올라가는 열린 뜰이었다. 이 안뜰의 정면에서 콘스탄티누스의 건 축자들은 하드리아누스의 공회소 울타리의 벽을 이용하였으며, 거기 에 세 개의 문들을 통하게 하였으니, 하나는 넓은 주된 정문이었고 둘은 측면에 있는 보다 작은 문들이 었다 (Corbo, Santo Sep o lcro 2, pl. 68, nos. 404-408). 러시아 알렉산더 호스피스 안에 그 유적이 보이는 것은 이 세 개의 출입구들 중 남쪽의 것이다 (223-224 항). 그 육중한 가운데 문의 안쪽 표면과 버팀기둥들은 바로 북쪽에 위치한 수크 칸 엣弓재이트에 있는 〈잘라티모 빵집 Zalati mo Bake ry〉의 저장실 안에 있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형편을 말한다면, 러시아 호스피스에 표 시된 매우 닳온 문지방은 그 교회의 남쪽을 따라 뻗어 있는 회랑으로

들어 가게 하는 통로였다 (Co i.i asnon 45 쪽 ; MURPHY-O'CONNOR 그림 9, C 및 42 쪽 이 하 ; MACKOWSKI 150 쪽). 이 세 개 의 출입 구는 현재의 구도 위에서 401, 402, 403 번으로 나타나 있다. 안뜰은 아마 도 열주들로 둘러져 있었고, 그것을 가로지르면 그 전체 복합 건물 의 다음 주요 부분인 바실리카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그것의 폭 은 바실리카의 폭과 거의 같아서 대략 39 미터쯤 되었고 그 깊이는 약 15 미터 정도 되었다 . 〈바실리카〉 바실리카(구도에서는 〈증거관 M artyri on 〉이라고 일컬어 짐)는 첫째 안뜰로부터 세 개의 문을 통하여 들어가게 되어 있었으 며, 그 기초가 뻗어 있는 부분들이 근래의 발굴에 의하여 밝혀졌다 (Corbo, Santo Sepo lcro 1, 226 쪽 m). 바실리카의 길이는 58 미터였고 폭은 38.5-40 미터였으며, 하나의 넓은 회중석과 양편의 두 개의 측랑 들로 나눠졌고, 중앙의 후진은 서쪽을 향해 있었다. 이 후진(구도에 서 300 번)의 기초들은 1968 년의 발굴 때 드러남으로써 1971 년에 아 타나제 에 코노모풀로스 Ath a nase Ekonomo po ulos 에 의 하여 사람들 앞에 제시되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 후진의 위치와 전체 바실리 카의 방향이 확정적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이렇게 알려진 바와 같이, 바실리카의 동서로 뻗은 축은 무덤 위 에 있는 〈둥근 천장의 홀 Ro tun da 〉의 축과는 대조적으로 남쪽으로 맞물려 있으며, 이리하여 후진은 첫번째 남쪽 측랑과 나란히 서 있 는 갈보리의 반석에 인접되어 있다. 후진을 바실라카의 서쪽 끝에 둔 것은 (기독교 바실리카들에서 매우 혼히 하듯이 동쪽에 두지 않고) 콘스탄티누스의 복합 건물 및 그 곳에 서 있던 하드리아누스 건물의 정면이 동쪽에 카르도 막시무스에 있었던 실제적인 이유 때문이며, 또한 갈보리의 반석과 무덤에 초점을 맞추려는 신학적인 배려 때문 이 었음에 틀림 없다 (Co il asnon 37, 41 쪽 및 pl. xx ; Corbo, Santo

Sepo /cro 2, pl. 3 ; 또한 위 의 117 항에 서 본바 거 라사에 있는 기 독교 복 합 건물의 유사한 배열도 참조할 것). 유세비우스는 그의 기술에서 이 바실리카를, 후기의 순례자들이 그 랬듯이 µap i:up to v (마르튀리온, 증거관)이라고 부른다 (Ae th e ri a, 228 항 ; Arculf, 231 항). 영어 단어 〈 m artyr(순교자)〉는 이와 동일한 헬라어 어 근에서 파생되었으나 이 용어의 원래의 사상은 증거하는 것이며, 마 르튀 리온 mar tyri on 도 증거 하는 장소를 말하므로, 따라서 이 바실 리 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 유세비 우스에 의하면 이 건물의 바닥은 여러 가지 색깔의 대리석 평석들로 되 어 있었고, 지붕은 겨울철의 빗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바깥쪽이 납 으로 되어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서쪽 끝에 하나의 반구T]]lto(lJ a ipt ov 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것은 그가 반 돔 hal f -dome 을 가진 후진을 가 리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에는 열두 개의 석주들이 있었으며, 이 것들에는 황제가 하사한 큰 은주발들로 장식된 주두들이 있었다 . 〈둘째 안뜰〉 바실리카를 지나서 서쪽에는 둘째 안뜰, 곧 고도로 광택을 낸 평석들로 포장된 커다란 열린 뜰이 있는데, 이 평석들의 얼마가 발굴된 제 XIII 호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발굴 작업을 통하여 드러난 것들 중에는 약 35 미터 정도로 뻗은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벽 (구도에서 220 번)이 있는데, 이것은 그 안뜰의 북쪽 측보(側 堡 )를 표 시하였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이 안마당의 세 측면을 돌아가며 긴 행각들이 있었다(코르보 [Santo Sepo lcro 1,. 2 25 쪽 II] 에 의하면, 이 행 각들은 북쪽, 동쪽, 그리고 남쪽에 있었고, 따라서 안뜰은 삼행각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 유세비우스가 이 지점에서 그것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 뜰의 남 동쪽 모서리에는 갈보리의 반석이 있었다(구도에서 200 번). 위에서 인용한 중거를 상기하면, 이 장소의 내력은 아마도 다음과 같다.

B.C . 7 세기로부터 이 지대의 광범한 구역이 채석장으로 사용되었다. 채석장이 폐장된 후 아마도 B.C. 1 세기에 이 구역의 대부분이 흙으 로 메워져서 하나의 동산 또는 과수원이 되었으며, 또한 바위를 잘 라서 만든 무덤들을 위한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형편이 예수 께서 골고다/갈보리로 알려진 바위 언덕 위의 십자가에 못 박히셔 서, 그 근처에 있는,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무덤(요 19 : 41) 에 매장되실 때의 상황이다 . 하드리아누스가 비너스의 사당을 짓기 위 하여 평평한 대지를 만들고자 이 지역을 메웠을 때, 바위 언덕은 아 마도 묻혀 있었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그의 교회를 건축하기 위 하여 이 지역을 정리했을 때, 바위 비탈들은 뒤로 깎여서 갈보리의 무덤과 반석을 고립시키게 되었으며, 후자는 : 4.8 미터의 높이로 선 채 로 남게 되었는데 그것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 그 반석 주위에 는 아마도 단지 하나의 난간이 있었을 것이고 그 위에는 십자가가 있었다 (Corbo, Santo Sep o lcro 2, pl. 67). 〈부활관〉 마침내 서쪽 끝에는 성묘 자체가 있었다. 무덤은 분명히 언덕으로부터 자연스럽게 깎여져 있었으며, 〈전체의 주요 부분으로 서〉 그 무덤은 〈진기한 석주들로 치장되어 있었으며, 온갖 종류의 가장 화려한 장식품들로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E useb i us, The Lif e o f Consta ntine m 34). 무덤 주위에는 하나의 당당한 둥근 천장 의 홀이 세워져 있었으며, 그 전체는 부활관 ava oi: a (Jt c( 〈부활〉을 의미 하는 헬라어 단어, 에테리아가 사용함; 228 항)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여기에 열두 개의 출입구가 뚫려 있는, 길이가 46 미터인 벽 이 있어서, 〈둥근 천장의 홀〉을 둘째 안뜰로부터 분리시켰다. 그 출 입구들 중 넷(구도에서 5, 8, 9, 12 번)은 아직도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원래의 형태를 식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벽의 안쪽에는(즉 무덤이 있는 방향으로) 약 8 미터 폭의 수랑(柚廊)이

있었다. 북쪽 지역(구도에서 46 번)에서 근래에 암반까지 파들어간 발 굴 작업에서는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벽 부분만이 아니라 하드리아 누스 시대의 벽의 기초들과 좀더 이른 시기의 채석장의 반석을 자른 것들도 역시 들춰 내었다 (Corbo, Santo Sepo lcro 2, pl. 10). 수랑의 중심부에서 타진해 본 결과, 그 무덤 앞에서 남북으로 뻗어 있는 콘 스탄티누스 시대의 기부(基部)의 기초를 추적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애테리아가 말하는 바 있는 쇠창살 또는 그물막 (screen, cancellus, 문자적으로는 〈격자창 la tti ce 〉)을 떠받치고 있던 것일 것이 다 (228 항 ; Corbo, Santo Sepo lcro 2, pl. 19). 큰 원 안에 있는 무덤 주위에는(무덤은 방금 기술한 긴 수랑에게 여 지를 주기 위하여 약간 서쪽으로 놓여 있음) 열두 개의 석주(아르쿨포 가 언급한; 231 항)가 네 조로 나뉘어 서 있었고 각 조에는 석주가 세 개씩 있었으며, 세 쌍의 벽기둥이 각 조 사이에 끼여 있었다. 이 원 가운데서 원래의 석주들 중의 두 개가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구도에 서 65, 66 번). 이것들은 기독 교회들에게는 이상할 만큼 큰 크기(지름 이 113 내지 118 센티미터)로 되어 있어서, 그것들이 한때는 한 개의 높은 석주이던 것이 반으로 나눠져 두 개가 된 것으로 믿어지며, 또 한 사실적으로는 그 둥근 천장의 홀에 있는 열두 개의 석주들 모두 가 원래는 이 장소에 세워진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사당에 속해 있던 여섯 개의 높은 석주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Corbo, Santo Sepo lcro 2, pl. 21, 3). 바로 위에서 언급한 기부의 선으로부터 시작하여, 원을 이 루는 석주들 주위의 회랑을 지나서 바깥쪽에 있는 벽은 서쪽으로 하 나의 반원을 만들었고, 그 북쪽, 서쪽, 그리고 남쪽에는 각각 후진이 있었음이 표시되어 있다. 수랑의 동쪽에 있는 벽과 함께, 이것은 D 자 모양을 형성하였으며, 그 위에 있는 커다란 돔을 떠받쳤다. 벽에 있 는 열다섯 개의 창문들과 돔에 있는 하나의 〈눈 oculus 〉이 내부로 빛 을 비춰 주었다. 건축학적으로 말해서, 이 건물 전체는 둥근 천장의

홀 Ro tu nda 이라고 알려져 있고, 신학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목 격자라는 뜻에서 〈부활관 Anas ta s i s 〉이라 일컫는다 . 둥근 천장의 홀의 바로 북서쪽에서 여러 가지의 방들과 하나의 안 마당이 발견되었다(구도에서 대주교관 Pa tri arc hi on 이라고 불림). 이것 들은 후기에 대주교로 알려진 감독의 주택을 이루었음이 분명하다 (Coil as non 46 쪽 ; Corbo, Santo Sep o lcro 1, 22:7쪽 V). 〈둥근 천장의 홀〉의 바로 남서편에 있는 지역은 탐사되지 않았으나 이 곳은 십중 팔구 위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보르도 순례자가 교회의 뒤에 a ter go 있다고 한 침례탕이 위치한 장소였을 것이다 (Co il asnon 48 쪽). 제라쉬 J erash 에서 〈성 테오도르 교회〉에 접해 있는 침례탕 (116 항)은 이와 유사한 위치에 놓여 있으며, 우리는 앞에서 이미 거라사에 있 는 대교회당의 복합 건물 전체가 아마도 예루살렘의 성묘에 있는 복 합 건물들의 배열을 반영한 것이었음을 살펴보았다 (117 항). 전례대로 말한다면 콘스탄티 누스 시 대의 증거 관 M artyri on 은 트리폴리 타니 아 T rip o litani a 의 렙 티 스 마그나 Lep tis Ma g na 에 있는 세 베 란 Severan 바 실리카와 매우 홉사하다는 말씀을 첨가해도 좋을 것이다 (Conan t 8쪽).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인 무덤 그 자체에 관하여 말한다면, 짐작 컨대 그것은 콘스탄티누스의 둥근 천장의 홀 안에서 어떤 종류의 소 전(小殿 eclicu le, 〈작은 집, 조그만한 사당〉)에 싸여 있었으며, 어 쨌든 이 탈리 아의 몬짜 Monza 에 보존되 어 있는 은 거 푸집 silv e r flas ks (amp ullae) —이것은 그 무덤에서 타고 있던 등들로부터 순례자들 이 기름을 날라갈 때 쓰던 것-은 페르시아인의 침입이 있기 약 20 년 전인 제 6 세기 말에 아직도 서 있던, 아마도 콘스탄티누스 시 대의 소전 ecli cule 으로 보이는 것을 재현하고 있다. 그림에서 보는 구 조는 분명히 사각형 또는 다각형이며, 측면에 석주들이 있어서 가파 른 피 라밋 형 태 의 지 붕을 떠 받치 고 있다 (Grabar, Amp o ules, nos. 3, 5, 6, 9, 12, 14 ; Corbo, Santo Sep o lcro 3, ph oto s 81-86).

226 〈성묘 교회〉 지하의 고대 석조물 골고다에 관하여 보르도 순례자 (333) 가 말하는 것 (225 항에 인용됨) 중에는 , 예수를 장사지낸 지하 토굴과 콘스탄티누스의 바실리카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둥근 천장의 홀/부활관과 같은 것에 대한 말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337 년과 340 년 사이에 기록된 『 콘스탄티누스 의 생애』에서 콘스탄티누스의 구조물들에 관한 광범한 기술 가운데 유세비우스 황제가 예수의 무덤에 설치한 아름다운 석주들과 다른 장식물에 대하여 말하지만, 그는 실제의 건물(둥근 천장의 홀)이 묘 위에 세워졌는지 아닌지는 명시하지 않고 있다 . 이와 같은 것에 근 거하여, 바실리카의 건물은 326/327 년에 무덤을 파헤친 직후 시작되 었으며 335 년에 완공되어 봉헌되었다는 것, 그러나 무덤을 감싸고 있는 바위 덩어리를 유지하면서 그 무덤이 묻혀 있던 언덕으로부터 그것을 떼어내는 이 작업은 훨씬 더 긴 과정이었으며, 따라서 둥근 천장의 홀은 380 년 (337 년에 콘스탄티누스가 사망한 지 오랜 후) 이 전 에는 세워지지 않았다는 것이 하나의 이론으로 제시되었다 (Co ii as­ non 14-16 쪽). 그 후에 애 테 리 아 (381-384) 는 명 백 히 하나의 건축물인 장소에서 거행된 매일의 의식들을 기술할 수 있었다. 〈부활관의 모 든 문들이 매일 닭 울기 전에 열린다〉 (GEYER 71 쪽; LPPTS 1-C, 45 쪽 ; CCSL CLXXV, 67 쪽 ; wET 123 쪽). 한편으로 335 년에 행한 그의 r 콘스탄티누스를 칭송하는 연설 Ora­ tion in Prais e of Cons tantin e 」에서 유세비우스는 〈그 분께서 죽음을 이기신 승리의 트로피들-cp 6 Jt a t a 로서 당신이 세우신 신성한 건축물 들과 봉헌된 성전들, 그리고 저 높고도 고상한 구조물들, 죽 당신이 구주의 무덤에 대한 영원한 기념물에 존경을 표하고자 건립하신, 황 제다운 정신의 황제다운 기 념 비 들 imperial monuments of an im- perial s pirit〉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XI 2). 여기서 복수를 사용한 것은

분명히 단지 증거관 M artyri on 바실리카만을 가리키기보다는 더 많 은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들리며, 한 해석에 따르면, 〈봉헌된 성전 들〉은 증거관과 침례탕의 건물들을 말하는 것이고, 〈신성한 건축물 들〉은 무덤과 그에 따른 현관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Conan t 44 쪽). 만약 이 해석이 맞다면, 아마도 콘스탄티누스는 이미 무덤 주위 에 실제적인 건물을 세웠던 것이 된다 . 사실 문서의 증거에 더하여 코르보가 보존된 유적들을 검증한 결과는, 둥근 천장의 홀/부활관은 콘스탄티누스 시대 복합 구조물의 원래의 구도에 포함된 부분이었 을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치하에서 완성되었다는 결론을 도출 하고 있다 (San to Sepo lcro l, 223 쪽 I ; Bahat in BAR 12.3 [Ma y/ Ju ne 1986], 40쪽). 더욱이 그와 같은 건물이 불과 몇 년 뒤에 퀴릴이 그 안에서 강의를 했을 때 거기에 존재했던 것은 확실하다(아래의 2 '2:/항 을 보라) . 둥근 천장의 홀/부활관의 아래로 지하 깊은 곳에, 둥근 천장의 홀 의 뒤에 있는 〈시리아인들의 예배실 Cha pe l of the S yri ans 〉로부터 접근할 수 있는 곳에, 하나의 중앙 반석실 a centr al rock chamber 이 있는데, 이것은 삼면으로 코킴 ko ki m, 즉 길고 좁게 수평으로 패인 공간들로 둘러져 있다. 코킴은 제 1 세기와 그 전후로 한동안 사용되 던 주된 무덤 형태이며(아래 完 5 항 이하, 258 항을 보라), 여기서는 고 대 채석장의 수직으로 된 반석 표면에서 안으로 파서 만들어져 있 다. 이것들 중에서 두 개는 전통적으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것 으로 생 각하지 만(마 '2:/:5 7-60 ; 막 15:43-46 ; 눅 23:50-53 ; 요 19:38- 42), 알려진 증거는 없댜 바로 이 지역의 석희석으로 된 바닥에는 또한 수직으로 파 내려간 수갱 무덤들도 있으며, 또한 교회당 밑으 로 멀지 않는 곳에는 아치형 석묘 arcoso li um 묘실의 유적들이 남아 있다. 여기에 제시된 사진에서 보는 것은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 의 이름이 붙여진 코킴의 맞은편에 있는 것으로서, 커브를 이루는

벽의 일부인 거대한 바위 덩어리 몇 개를 보여 주는데, 이것을 만듦 으로써 다른 코킴 몇 개가 파괴되었으며, 이것은 그 위에 있는 콘스 탄티누스 시대의 둥근 천장의 홀/부활관의 기초에 속하는 것이었다 (MEISTERMANN 125 쪽 이 하 ; MACKOWSKI 158 쪽, pl. 135 ; Bahat in BAR 12.3 [May/ Ju ne 1986], 30 쪽 이 하 ; KROLL 378 쪽, abb. 302). 227 예수의 무덤의 가상적 재건 348 년의 부활절이 다가오는 계절에(사순절의 첫째 일요일, r 초기 교 회의 축제일 개요」를 보라), 예루살렘의 퀴릴은 〈성묘 교회〉에서 그의 유명한 r 교리 문답 강좌 Ca tec he ti cal Lec tur es 』 시리즈를 실시하였다 (NPNFSS VII, 1-157 쪽). 우리는 그의 서론적 인 강의가 교리 입문자 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체 회중 앞에서 바실리카 본당, 바로 증거관 에서 베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퀴릴이, 그들이 그 교회의 장엄한 구조를 바라보는지, 그리고 그들이 그 교회의 직제 (職制)와 종규(宗規), 그리고 성경의 통독 상황 등을 살펴보는지를 그들에 게 질문하는 것을 듣기 때문이 다 (Pro cat eches i s 4, NPNFSS VII, 2쪽). 세번째 강의는 침례를 다룬 것인데, 이때에는 교리 입문자 들이 침례탕 앞에 모였을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퀴릴이 그들에게 말하기를(c:at eche ti azl Lectu r es ill 2), 그들이 이제 한동안 문 밖에 서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여러 편의 후기 강의들에는 갈보리의 반 석을 바라보는 일이 언급되어 있다 . 증거관은 그 배열이 잘 되어 있 어서 회중들 가운데 적어도 얼마는 바실리카의 내부로부터 반석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또한 이 강좌를 위하여 사람들이 둘째 안뜰 a tri um 에 모였 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거기서 퀴릴은 마치 헬라의 철학자들이

보랑(步廊)에서 그랬듯이 행각들 중의 하나에서 강의를 했을 가능성 이 있고, 그리하여 그 반석이 모든 사람에게 보였을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더욱 높은 것은 r 강좌 IV 10 」에서 그는 〈우리가 지 금 모여 있는 이 복된 골고다〉라고 말하고, 계속해서 예수께서 〈이 곳 골고다 위에서〉 (IV 14), 그리고 〈골고다에서〉 (XIlI 23)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한댜 그는 거듭 골고다에 관하여 말하기를, 〈이 곳 우리 위에 서 있는 거룩한 언덕〉 (X 19) 이라 하면서, 〈이 곳은 골고 다〉 (XIlI 4), 〈이 지극히 거룩한 골고다〉 (XIlI 22), 〈이 골고다에 서〉 (XIlI 26), 그리고 〈우리 위에 높이 선, 이 거룩한 골고다〉 (XIlI 39) 등과 같은 구절들을 사용하고 있다. 한 경우에는 그가 그의 청중 들에게 그들이 골고다의 지점을 보느냐고 묻기까지 하고, 그들은 찬 양의 함성 으로 대 답하기 도 한다 (XIlI 23). 「강좌 XVIII 」에서 퀴릴은 교리 입문자들에게 강의를 하는데, 이때 그들은 〈예비일(즉 금요일)의 금식이 연장되고 경성( 警 酸)이 오래므 로 피곤해〉 (XVIII 17) 있었으며, 그들은 또한 부활절 전야에 이제 막 침 례 를 받으려 하고 있었다 (XVIII 32 ; NPNFSS VII xlv 쪽 참고). 침 례식 후에, 그리고 부활절 일요일의 교회 경축 예배 후에 새로이 입 교한 사람들은 그 주일의 둘쨋날에(죽 월요일에) 나흘 동안 강의를 더 듣기 위하여 나와야 했는데, 이때 듣는 강의는 〈신령한 하늘의 오묘들〉 (XIX 1), 죽 완전히 입교된 교인들에게만 가르치는 교리들, 다시 말해서 퀴릴이 그의 이른 바 r 비법 전수 강좌M y s tag o gi cal Lec tur es) 」 (XIX-XXIII) 에서 제시한 교리들이댜 퀴릴이 그의 청중들 에게 부활 후 강좌에 참석하는 일에 관하여 강의할 때, 그는 그들이 〈부활의 거룩한 장소로 &v t 0V t치 c dvamd(J C (J )C Tblt 0V > 와 야 한다고 말 한다. 이것은 틀림없이 그 무덤 주위와 위에 한 건물이 있었으며, 그 건물은 퀴릴이 예고한 바와 같은 집회를 하기에 충분한 크기였음을 의미한다. 좀더 후대에 같은 일이 확인되었는데, 이때는 살라미스의

감독 에피파니우스가 394 년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제롬이 보고한 바와 같이 〈주의 무덤 앞에서〉 감독 요한이 임석한 가운데 성직자와 백성들에게 연설을 한 때였다 (To Pammachi us ag a in s t Joh n of Je- rusalem 11 NPNFSS VI, 430 쪽 ; VII 142 쪽, n. 3 참고) . 「교리 문답 강좌」에서 퀴릴은 골고다와 성묘를 그리스도에 관하 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역설할 뿐만 아니라, 나무로 된 십자가에 대 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X 19 ; IV 10 참고 ; XIII 4).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 보이고 이 장 소로부터 이제는 온 세계를 거의 다 채우고 있는 이 십자가의 거룩 한 나무는, 믿음으로 그것에 참여하는 자들을 통하여 증거하고 있 다.〉 여기에는 예수께서 그 위에 달려 돌아가신 것으로 생각되는 십 자가를 발견한 사실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음이 확실하다. 이 발견 은 소크라테스 Socrat.e s (Ch Hi st. I 17) 와 소조멘 Sozomen (Ch Hi st. II 1) 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 이 제 5 세기 교회 역사가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세 개의 십자가가 발 견되었는데, 예수의 십자가는 기적에 의하여 밝혀졌다. 하지만 유세 비우스 자신은, 헬레나가 팔레스타인을 방문한 사실에 대해서는 말 하지만 (The Lif e o f Consta ntine ill 41- 47 ), 그녀가 십자가를 발견한 일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제 6 세기의 『예루살렘 일과 기도 서 ( 日 課祈 禧書 )』 (GEYER 153 쪽 ; LPPIS II-A, 13 쪽 ; CCSL CLXXV, 109 쪽 ; WJ P 59 쪽 ; Conant 11 쪽)는 진술하기 를, 콘스탄티 누스의 교 회로 들어가면 서쪽에 ab occi de nte 세 개의 십자가가 보이 는 보관소 가 있고, 이 보관소 위에 desup e N.든 좀더 높은 위치에 아홉 개의 석 주들로 떠받쳐져 있는 제단이 있는 장소가 있다고 한다. 이 장소들 은 콘스탄티 누스 IX 세 모노마쿠스 Consta ntine IX Monomachus 의 교 회와 십자군 교회에서 〈십자가 발견 예배실 Chape l of the Fin ding of the Cross> 및 〈성 헬레나 예배실 Chape l of St. Helena 〉이라는 이름

으로 나타날 것 이 다 (232 항). 퀴릴의 r 교리 문답 강좌」 중에서 아마도 가장 홍미 있는 것은 그 가 원래의 무덤 그 자체에 관하여 말하고 싶었던 내용일 것이다. 이 와 관련하여 기억해 둘 사항은 퀴릴이 아마도 315 년경에 예루살렘에 서 출생했으며, 따라서 콘스탄티누스의 공인들에 의하여 변경되기 전과 또한 그 후의 무덤의 모습을 보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 실이댜 무덤의 위치에 관하여 요한복음 19:41 은 그것이 동산 안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퀴릴의 말에 의하면 (XIV 5) 그 무렵에는 그 장소가 왕의 예물들로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으나 〈전에는 그것이 하나의 동산이었으며, 여전히 동산의 흔적과 자취들이 남아 있다〉고 한댜 원래 무덤의 구조 형태와 콘스탄티누스가 건축하는 과정에 가해진 변경의 성질에 관하여 퀴릴은 말하기를 (XIV 9), 구주 의 묘 문 앞에 예전에 하나의 동굴이 있었으나 이 바깥 동굴은 현재 의 장식을 설치하기 위하여 제거되었다고 한다. 그 바깥 동굴을 제 거한 것은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225 항) 무덤 주위에 놓여 있 었다고 유세비우스 (The Lif e o f Consta ntine m 34) 가 말하는 〈진기한 석주들〉과 〈화려한 장식품들〉을 위하여, 그리고 또한 무덤 위에 세 워진 건물을 위하여, 공간을 마련하기 위함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다. 거기에는 또한 무덤의 문을 닫았던 돌이 있었는데, 퀴릴은 이것 이 굴러 내 어 져 서 〈오늘날까지 그 곳에 놓여 있었〉다고 말한다 (XIII 39 ; XIV 22). 퀴릴이 말하는 바는, 이 무덤이 헤롯 시대의 다른 예들로부터 알 려진 것과 같은 정상적인 유대인의 무덤이었음을 암시한다(幻 5-256 항 참고). 가장 단순한 형태이며, 그림에서 보이는 바대로 (2 'n항), 그와 같은 무덤은 다음과 같은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전실 an t echamber(a) 이 있는데, 이것은 바위를 깎아 만든 것으로 몇 개의 계단을 밟고 들어가게 된 공간이다. 그 다음에는 낮은 출입구가 있

어서 하나의 돌문 또는 구르는 돌로 막도록 되어 있었다 (153 , 274, 281 항 참고). 그 뒤로는 하나의 통로가 있어서 일반적으로 직사각형 으로 된 묘실 (b) 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묘실 안에는 무덤들이 있 는데, 무덤은 대개 코킴 또는 아치형 석묘 arcosol i a 의 형태로 되어 있었다. 코크 kok 는 수직적인 바위 면 속으로 뒤로 파고 들어간 수평 적인 갱으로서, 그 안에는 시체가 길이로 놓여졌다. 아치형 석묘는 바위 속에 측면으로 깎여 있는 바위턱 위로 둥근 천장이 있는 아치 를 제공해 주었다. 어느 경우에나 수의( 壽衣 )에 감싸인 시체가 보통 은 맨바위 위에 안치되었다. 때로는 석관이 사용되었다. 그림이 보여 주고자 의도하는 바는 통로에 놓인 구르는 돌과 묘실 안에 있는 아 치형 석묘 무덤이다. 아치형석묘가 측면 벽 속으로 움푹 들어간 것 으로 보이는 것은 단지 그림을 간편하게 그렸기 때문이며 , 그것이 뒤편 벽에 있을 수도 있었다. 전면에 있는 전실 ante c hamber 또는 현 관방에는 앞으로 튀어나온 바위 턱이 있어서 부분적인 지붕 역할을 하였으며, 후에 콘스탄티누스의 공인들은 무덤 자체 를 따로 떼어서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이 부분을 깎아 내었다. 이 재구성은 퀴릴이 암시한 내용들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복음서 에 기록된 이야기들의 세부 사항들과도 일치한다. 아리마대 사람 요 셉 의 무덤 은 바위 에 판 무덤 이 었으며 (마 '2:l:6 0 ; 막 15:46 ; 눅 23:53), 구르는 돌로 입 구를 막았다(마 28:2 ; 막 16:4 ; 눅 24:2 ; 요 20:1 참고) . 아마도 거기에는 사람들이 묘실 자체에는 들어가지 않고 그 앞에서 머물 수 있던 전실(前室)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묘실 그 자체 속으로 들여다보기 위해서 이 현관방에 서서 는 몸을 아래로 굽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요 20:5 ) . 사실상의 매장지는 아마도 선반 또는 바 위턱이었으며, 그 위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아치가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코크라기보다는 아치형 석묘였다. 왜냐하면 시체가 놓여 있 던 그 곳에는 앉을 자리가 있었기 때문이다(막 16:5 ; 요 20:12). •

228 〈산타 푸덴찌아나 교회〉의 후진 모자이크 순례자 애테리아 (381-384) 가 예루살렘에서(그리고 또한 베들레헴에 서 ; 25 항) 거 행된 교회 예배 행사에 관하여 말할 때(앞에 있는 r 초기 교회의 축제일 개요」를 보라), 그녀는 그 행사들 중의 다수가 〈골고다 위의 대교회 the Great Church on Gol g o t ha 〉에서, 그리고 특히 중거 관과 부활관에서 거행된 것으로 말하고 있다. 평상시의 일요일과 부 활절 예비 기간의 매일 등과 같은 날에 그 곳에서 행한 행사들 (GEYER 76-78 쪽 ; LPPTS 1-C, 53 쪽 ; CCSL CLXXV, 73 쪽 ; WET 127-128 쪽) 이 외 에 도 애 테 리 아는 또한 〈봉헌절 day s of de dica ti on >, 라틴어 die s encenia r um [디에스 엔체니아름]=헬라어 ta £YKai vt a [타 앵카이니아])이라고 불리는 8 일 간의 축제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 은 우리가 알기로는 소조멘 Sozomen (Ch. Hi st. II 26) 이 기술한 같은 기간 (8 일 간)의 축제와 동일한 축제로서, 이 기간 동안에 골고다에 있는 〈성전〉(그녀가 이렇게 부름)의 봉헌 기념일이 예루살렘의 교회 에 의하여 경축되었으며, 이 축제의 기간은 솔로문의 성전의 봉헌 때 예식들을 거행한 기간과 같았다(대하 7:8-9). 애테리아의 기록은 다 음과 같다 (GEYER 100 쪽 ; LPPTS I 一 C, 76 쪽 ; CCSL CLXXV, 89 쪽 ; WET 146 쪽). 〈그 날들은 봉헌절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이때에 중거 관(라틴어 mart yrium [마르뒤리움]=헬라어 µap tbp t0V [마르튀리온])이 라고 불리는 골고다의 거룩한 교회와, 주께서 친히 고난당하신 후 에 다시 일어나신 곳인 부활관(라틴어 anas tas e[ 아나스타세]=헬라어 dvden :ao t c [아나스타시스])에 있는 거룩한 교회가 그 날에 ea die 하나 님께 성별되었다.〉 그리고 애테리아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이 축제 는 부활절 및 주현절과 같은 지위를 차지한다고 하였다. 이 진술을 가장 자연스럽게 읽는다면, 우리는 바실리카와 둥근 천장의 홀이 같 은 날에 이중의 예식을 통하여 봉헌되었으며, 따라서 동시에 우리가

이미 그러리라고 생각한 바와 같이 (226 항), 둘 다 콘스탄티누스에 의 하여 지어진 것으로 짐작한다. 애테리아의 보고서에서 우리가 흥미롭게 읽는 다른 내용은 부활 절 주간의 금요일에 거행된 예배 행사들, 특히 그 날의 제 6 시로부터 제 9 시까지 진행된 행사들이다. 여기서 애테리아는 우리가 콘스탄티 누스의 복합 건물의 둘째 안뜰이라고 부른 것, 죽 〈십자가와 부활관 사이에 위치한 매우 크고 아름다운 안뜰〉에 관하여 말하면서, 이 곳 에 〈감독을 위한 하나의 의자aith edra 가 십자가 앞에 놓여 있다〉고 말하는데, 바로 위에서 언급한 그 엄숙한 시간 동안에 거기서 독경 행 사가 이루어진다 (GEYER 89 쪽; LPPTS I-C, 64 쪽; CCSL CLXXV, 81 쪽 ; WET 137 쪽). 이 대목이 특별히 홍미 있는 것은 그것이 사실상 로마에 있는 〈산 타 푸덴찌아나 교회 Church of Santa Pudenz i ana 〉의 후진 모자이크 에 그려진 광경의 대부분을 기술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에 보이는 이 모자이크는 이미 205 항에서 언급된 것인데, 거기서 설명되기로는 그것이 만들어진 연대가 아마도 시리치우스 교황 Po pe Sir iciu s (384- 399) 때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대체로 애테리아 (381-384) 와 동시대의 것이댜 모자이크 배경의 중앙에 있는 것은 틀림없이 갈보 리의 반석이라 불리는 것이고, 이것 위에는 보석으로 장식된 십자가 가 얹혀 있다. 그림을 가로지르는, 기와로 덮인 지붕으로 된 아케이 드는 예루살렘에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복합 건물 내에 있는 둘째 안 뜰의 행각을 나타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 반석 앞에는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셨고, 그 분의 양쪽에는 사도들이 있다. 이들의 수는 한 때 열둘이었으나 양쪽의 맨 바깥쪽에 있는 인물은 후대에 후진을 변 경하는 중에 없어지게 되었다. 그 당시의 로마인의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FLAP 522 쪽 및 524 쪽, n. 47) 베드로는 우리가 보는 방향으로 오른쪽에, 죽 그리스도의 오른손 쪽에 서 있고, 바울은 우리가 보는

방향으로 왼쪽에 서 있댜 이 두 사람의 머리 위에는 아마도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이는 두 여인이 그 두 위 대한 순교자를 위한 승리의 상징인 월계수 화환을 들고 있다 . 위로 하늘에는 네 사람의 복음서 기자들을 나타내는 날개 달린 상징물들 이 부분적으로 파괴된 채 보이는데, 이들은 에스겔 1:10 ; 10:14 ; 요 한계시록 4:7 에 있는 사람, 사자, 소, 그리고 독수리 등으로, 각기 마 테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을 나타낸다 (FLAP 525쪽). 오른쪽의 아 케이드의 뒤에 있는 건물들은 위에서 주로 시온 산 위에 있는 건물 들로 설 명 되 었고 (205 항), 왼쪽에 있는 건물들은 갈보리 의 반석 과 예 수의 무덤에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건물들로 인정되고 있으며, 둥글 게 돔으로 된 건물은 아마도 부활관일 것으로 판정되고 있다. 229 r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서의 예루살렘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 (560) 에서 우리는 비잔틴 시대 전성기의 예루살렘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면서, 그 도성의 모든 기념물들 가 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틀림없이 〈성묘 교회〉임을 식별할 수가 있다. 「마다바 모자이크」는 그 도성이 타원형의 벽으로 둘러싸인 것 으로 그려 놓고 있다. 위 로 왼쪽에 는 i &ma n6At c 1 cpo u oa [A 龍] (헤 하기아 예루살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라는 표시문이 적혀 있다 . 북쪽에서 남쪽으로 도성을 관통하여 열주들이 있는 큰 거리가 뻗어 있 는데 , 이것은 앨리아 카피톨리나와 같은 로마/비잔틴 시대의 도시에 있 던 카르도 막시무스이다 . 이 거리의 북쪽 끝에는 하나의 큰 석주가 있는 타원형의 장소가 있고, 그 벽에는 하나의 중요한 대문이 있다. 북쪽에 있 는 첫째가는 대문인 이것은 보르도 순례자 (333) 가 말하는 네아폴리스 문 Gate of Neapo lis (p o 函 Neapo lit ana) 일 것 이 다 (GEYER 22 쪽 ; LPPTS, I-B 23 쪽 ; CCSL CLXXV, 16 쪽 ; WE I' 158 쪽 ; 215, 2 2.5항 참

고). 테오도시우스 (530) (GEYER 141-142 쪽 ; LPPTS II-B, 11 쪽 ; CCSL CLXXV, 118 쪽 ; WJ P 66 쪽)는 북쪽에 있는 대문을 갈릴리 문 po rta . Gal i laeae 이라 부르고, 그 대문 밖에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 은 것을 기념하여 유도치아 Eudo ci a(444-460) 가 세운 교회가 있었다 고 말한다. 이러한 관계 때문에 이 대문은 또한 아르쿨프 (670) 가 부 르는 것처럼 성 스데반 문p o rta. sancti S t ep mn i으로 알려지기도 했 다 (GEYER 224 쪽 ; LPPTS III-I, 2 쪽 ; CCSL CLXXV, 185 쪽 ; WJ P 95 쪽). 오늘날 이 대문은 다메섹 문이라 하고, 이것의 아랍어 이름은 밥 엘-아무드 죽 석주문인데, 이것은 한때 그 광장에 서 있었고 r 모 자이크 지도」에 나타나 있는 큰 석주를 가리키며 일컬어진 이름임에 틀림없다. 남쪽 끝에는 열주가 있는 주된 거리가 한 작은 대문에서 끝나는 데, 이 문은 〈네아 교회〉 (196, 200 항) 곁에 있고 따라서 네아 문이라 고 불릴 수 있으나 서쪽으로 약 120 미터 더 나가서 있는 시온 문과 혼돈되어서는 안 된다 (A vig ad, Dis c overi ng Jer usalem, 2 '2:7 -229 쪽). 서쪽으로 더 나가면 성벽이 시온 산의 지대를 둘러싸고 있는데, 이 곳에는 큰 건물(사실은 〈성묘 교회〉보다도 훨씬 더 큰)이 〈하기아 시 온〉의 바실리카를 나타내고 있음을 우리는 앞에서 이미 인지한 바 있다 (205 항). 이 동일한 남쪽 벽은 분명히 동쪽으로 계속되어 실로암 못을 둘러싸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피아첸짜의 무명씨 (570) (GEYER 176 쪽 ; LPPTS II-D, 21 쪽 ; CCSL CLXXV, 166 쪽 ; WJ P 84 쪽)가 말 하기를, 유도치아가 실로암을 둘러싸고 있는 벽들을 그 도성에 추가 시켰으며, 그리하여 이 시대의 남쪽 벽 전체는 필시 그 여황제의 작 품이라고 하는 것을 이미 보았다 (178 항).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보 르도 순례자는 시온이 성벽의 바깥쪽에 있는 것을 보았고 (215 항), 수 사 에피파니우스 (750-800) 는 시온이 성벽의 안쪽에 있는 것으로 말 하는 (212 항) 반면에, 새불프 (1102) 는 다시금 오늘날 그러한 것처럼

시 온이 바깥쪽에 있는 것을 본 (212 항) 사실을 상기 할 필요가 있다. 열주가 있는 다른 거리는 광장의 남동쪽 귀퉁이로부터 뻗어 있으 며, 동쪽으로 카르도 막시무스와 대체로 평행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성전 지대와 윗도성 사이의 튀로포에온 골짜기의 방향을 따 르고 있으며, 현대에는 타리크 엘一와드라고 불리는 거리와 일치한 다. 이 거리의 약 중간쯤에 비교적 짧은 거리 하나가 동쪽으로 대문 을 향해 뻗어 있다. 이것들은 타리크 밥 섯튀 마리암 T ariq Bab Sit ty M ari am 이라고 불리는 거리 및 도성의 동쪽 벽에 있는 성 스데 반 문으로 알려진 대문과 일치한다 (216 항 참고). 〈성묘 교회〉로부터 도성의 남서쪽 모서리까지 이르는 길의 약 3 분 의 1 쯤되는 서쪽 성벽에 하나의 대문이 있는데, 이 대문 뒤에는 하 나의 망대가 있고 그 대문으로부터 동쪽으로는 하나의 거리가 뻗어 있다. 이 대문은 현대의 욥바 문과 일치하고, 그 망대는 다윗의 망대 임에 틀림없다 . 그 거리는 도성의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관통하는 거리인 데쿠마누스 decumanus 일 것이다. 모자이크에는 이 거리가 계 속해서 뻗어 있는 것을 나타낼 공간이 없었지만, 그것은 필시 카르 도를 가로질러서 성전 지대까지 계속되었으며, 따라서 현대의 다윗 거리와 사슬문 거리에 해당한다. 이제 우리는 〈성묘 교회〉로 가보자. 카르도의 중간에는 서쪽으로 열주가 네 개의 계단에 의하여 중단되어 있는데, 이 계단들을 통하 여 세 개의 문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되어 있다. 이것들은 삼각형의 박공벽 (H 쁩桃壁)과 십자 모양으로 된 선들로 표시된 붉은 경사면 지 붕을 가진 바실리카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통로이다. 이 바실리카 가 바로 증거관임에 틀림없다. 그 너머로, 죽 이것의 서쪽에는 검은 각석들로 나타난 뜰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갈보리의 둘째 안뜰임이 확실하다. 그리고 좀더 서쪽으로 하나의 큰 돔이 있는데, 이것은 부 활관임에 틀림없다.

교회의 남쪽으로 세 개의 문과 나란히 있는 열린 지대는 필시 앨 리아 카피톨리나의 공회소인데, 지금 이 곳에는 러시아 알렉산더 호 스피스, 루터 교회, 그리고 무리스탄 M uri s tan이 있다 (200, 223-224 항 참고). 이 지대의 서쪽과 바실리카의 남쪽에는 붉은 지붕을 가진 다 른 하나의 건물이 있는데, 이 지붕의 십자 모양으로 된 선들은 아마 도 돔의 모양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 같다. 이것은 아마도 〈성묘 교 회〉에 부설된 침례탕일 것이다. 230 발굴된 비잔틴 거리에 서 있는 수도원장 구레그 카피키안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 (229 항)는 〈성묘 교회〉의 곁에 있는 광장 으로부터 뻗어 있는 다른 하나의 제법 넓은 거리를 보여 주는데, 이 것은 서쪽에 있는 카르도 막시무스와 평행하는 것으로서, 〈성묘 교 회〉과 〈시온 교회〉을 연결할 의도로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이 것이 바로 비잔틴 거리인데, 이 거리를 포장한 석재들이 브로쉬 M. Bros hi가 수행한 아르메니아인의 공동 묘지의 발굴에서 발견되었다 (]erusalem Revealed, 59 쪽). 여기에 제시된 사진에서 이 고대의 거 리에 서 있는 사람은 아르메니아인 공동체의 수도원장 구레그 카피 키 안 Arch ima nd rite Guregh Ka piki an 이 다. 231 아르쿨프에 의 한 〈성 묘 교회 〉의 구도 614 년 5 월에 페르시아인들이 예루살렘 도성을 침입하여 기독교 성소들을 불태우고 그 안에 피신해 있는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으며, 총대주교인 자카리아스 Zach ari as 를 포함하여 여러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갔다. 이때 일어난 사건들에 관한 기록은 유튀키우스 (940) 의 『연보Annal, s 』에서 CAnnales MPG 111, cols. 1082-1084, 1091 ; LPPTS

XI-A, 36-39 쪽 ; tra ns. Breyd y , CSCO 472, 98 一 101 쪽) 다음과 같이 되 어 있음을 볼 수 있댜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사사니아) 제국 사이 에 일시적인 평화가 있던 시대에 페르시아의 왕 코스로에스 II 세 Chosroes II(59 0-628 통치 )와 비 잔틴 황제 모리 스 Mau rice (582- 60 2 통 치)는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다 . 그런데 포카스 Phocas(602-610 통치) 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왕위를 취하고 모리스와 그의 아들들이 처형 되었을 때 , 코스로에스는 모리스의 딸이자 자신의 부인인 마리안 M ari an 의 재촉과 자신의 장관들과 관리들의 충고를 받아 광범한 보 복 전쟁을 수행했다. 〈 기독교인들은 언약에 충실하지도 않고 참된 종교를 갖고 있지도 않다 .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저들의 왕을 죽 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선언하면서 자문관들은 왕에게 저들의 마 음을 상하게 하고 저들의 종교롤 멸절시키는 하나의 행위를 제안하 였댜 유튀키우스는 그 자문관들이 한 말을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다 〈 거룩한 도성 안에 저들이 존중히 여기는 집 한 채가 있습니 댜 그 곳에 사람을 보내어 그것을 파괴하십시오. 이 집을 파괴해 버 리시면 저들의 힘은 꺾이게 되고 저들의 제국은 망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코스로에스의 장군이 팔레스타인으로 나아가서, 비잔틴 인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당한 다수의 유대인들과 합류하게 되었으 며, 그들은 페르시아인들이 교회들을 파괴하고 기독교인들을 살해하 는 일을 도왔다 . 그 페르시아인 장군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유튀키 우스가 이야기를 계속하는 바에 의하면, 그가 파괴한 첫번째 것들은 〈겟세마네 교회〉과 〈네아 교회〉[tr ans. Breyd y , CSCO 472, 99 쪽. 〈 al-Nea 〉는 아마도 반세 기 보다는 좀더 앞서 유스티니아누스가 세운 교회, 196 항을 보라 ; MPG 111, col. 1083 및 LPPTS XI-A, 36 쪽에는 〈헬레나의 교회 Church of Helena 〉라고 되어 있는데 , 아마도 〈엘레오나 교회〉을 말할 것이다 .155 항을 보라; KROLL

420 쪽, col. 1 참고]였는데, 이 두 교회는 오늘날까지 폐허로 남아 있다 . 그는 또한 〈콘스탄티누스 교회〉과 크라니온 Kr ani on( 골고다)과 성묘도 파괴했다. 그는 성묘와 크라니온에 불을 놓았으며 또한 도성의 대부분 을 파괴했다. 또한 페르시아인돌과 더불어 유대인들은 무수한 기독교인 들을 죽였다 . ……. 페르시아인들은 파괴하고 방화하고 살육하고 사람 들을 포로로 잡아간 후에 거기서 떠나갔다. 잡혀간 사람들 가운데는 거 룩한 도성의 총대주교인 자카리아스가 일단의 그의 가솔( 家率 )들과 함 께 있었다. (페르시아인들은) 또한 헬레나가 그 곳에 남겨두었던 십자 가의 나무를 그들과 함께 페르시아로 가져갔다. ……. 모리스 왕의 딸인 마리암이 총대주교 자카리아스와 다른 많은 포로들과 함께 십자가의 나 무를 요청하여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 …… . 페르시아인들이 거룩한 도성의 교회들을 황폐케 하고 그것에 불을 놓고는 떠나간 후에, 모데스투스 Modes tu s 라는 이름의 수도승이 왔는 데, 이는 〈다와케스 수도원 Monaste r y of Dawakes 」 (베들레헴 남동쪽 의 유대 사막에 있는 〈성 테오도시우스 수도원 Monaste r y of St. Theodos i us 〉의 원장이었다. 그는 라몰라 Ramla 와 디베랴와 다메섹을 여행하면서 기독교인들에게 예물과 도움을 요청하여 그것으로 페르시 아인들이 파괴해 버린 거룩한 장소들을 재건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기 부금을 바쳤고, 그는 돈을 모아서 거룩한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부 활 교회〉, 〈무덤 교회〉, 크라니온,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교회〉 죽 오늘 날까지 서 있는 그 건물 둥을 건립하였다 . 641 년 페르시아인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있는 동안에 아랍인 의 무리들이 사해의 동쪽으로부터 와서 성 사바스 수도원 Monas t e ry of St. Sabas( 아랍어로는 마르 사바 Mar Saba, 예루살렘의 남동쪽 ; MEISTERMANN 410 쪽 이하)을 약탈하고 44 명의 수도승들을 죽였 으며, 모데스투스는 또한 그 곳으로 가서 수도원의 생명을 재건하고

자 도와주었다. 안티오쿠스 An ti ochus 라는 사람이 그 수도원의 원장 이 었는데, 그가 만든 「성 경 총람 Pand ict of the Holy S criptur es 」 (NPG 89, cols. 14 '2:7 -1428) 의 서두에 첨부한 안내 서한에서 안티오쿠 스는 이 모든 사건에 관하여 말하면서, 모데스투스의 재건 공사들에 대한 찬사 가운데, 모데스투스가 〈제 2 의 브살렐(출 31:2 - 5) 또는 제 2 의 스룹바벨(스 3:2 이 하)〉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그 동일한 기록들 가운데는 포카스의 후계자인 비잔틴 황제 해라 클리우스 Herac li us(610-641 치세)가 모데스투스를 포로된 감독 자카 리우스의 대리자로 임명하였으며 성묘 교회의 재건을 위한 자금을 제공했다고 ’ 기록되어 있다. 622 년에 헤라클리우스는 페르시아인에 대항한 싸움을 시작하여 628 년에는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 C te­ s ip hon 으로부터 〈참 십자가〉를 되찾아서 의기양양하게 예루살렘으로 가져왔다. 총대주교 자카리아스도 그의 위치로 회복되어 633 년에 그 가 죽기까지 봉직하였다. 그 후에 모데스투스가 그의 총대주교직을 계승하여 그가 죽기까지 9 개월 동안 (633-634) 봉직하였다 (SWDCB IV, 929 쪽). 자카리아스가 그의 위치로 회복된 무렵 (628), 〈성묘 교회〉에 대한 모데스투스의 보수 작업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완료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Co i.i asnon 17 쪽). 페르시아인들은 그 교회의 지붕과 장식품 들과 집기들을 파괴해 버렸었다. 그러므로 모데스투스에 의한 재건 작업이 비록 뛰어나긴 했으나 복원된 교회는 원래의 〈콘스탄티누스 의 교회〉보다는 덜 화려했음에 틀림없다. 전체적으로 봐서 기본 윤 곽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V i ncen t, Jer usalem nouvelle, 218쪽), 〈성 묘 교회〉의 장구한 역사에서 볼 때, 이것을 제 2 의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할 만한 변화들이 있었다. 구태여 비교해 본다면, 대충 동시 대의 건물인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 데메트리우스 교회 Church of St, Deme tri us 〉이 아마도 매우 흡사한 윤곽 위에 세원진 것 같다

(Conant 8쪽). 모데스투스가 복원한 교회에서는 둥근 천장의 홀(부활관)이 하나 의 완전한 둥근 교회가 되도록 건축되었고, 둥근 천장의 홀과 바실 리카(증거관) 사이에 있는 둘째 안뜰은 〈거룩한 정원〉이라고 불렀으 며, 이 뜰의 한가운데에는 〈세계의 중심〉을 표시하는 〈배꼽〉이 있었 다. 전에 그 동일한 뜰의 남서쪽 구석에 자유롭게 서 있던 갈보리의 반석은 이충으로 된 예배실 안에 둘러싸였으며 , 〈아담 예배실 Cha pe l of Adam 〉이라는 건물이 서쪽에 있는 반석의 기저에 지어졌다. 그리 고 그 근처에는 아브라함의 제단을 표시하는 하나의 、 장치물이 있었 다 (KROLL 388 쪽, col. 3-390 쪽, col. 1 ; 바로 아래 에 나오는 아르메 니 아인 순례자와 아르쿨프에 의한 기술들을 참고하라). 방금 언급한 여러 가지 사항들에서 우리는 전승이 유대인의 성전 으로부터 갈보리와 성묘에게로 옮겨진 것을 인지하게 된다(J ere mi as, Golgo tfr :z, 34-50 쪽). 세계의 중심을 성전에 있는 신성한 반석 (180 항) 에 두는 유대인의 전승은 『미드라쉬 탄후마Mi drash Tanhuma 」에 제시되어 있다(J ere mi as, 같은 책, 44 쪽). 이스라엘 땅은 세계의 중심에 놓여 있고,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땅의 중심에 있으며, 거룩한 경내는 예루살렘의 중심에 놓여 있고, 성전 건물은 거룩한 경내의 중심에 놓여 있으며, 언약궤는 성전 건물의 중심에 놓여 있다. 하지만 신성한 반석은 언약궤 앞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그 곳으로부터 세계가 창설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상에 대한 기독교적 적옹은 예루살렘의 퀴릴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잘 나타나고 있다

(Cate c heti ca l Lectu r e XIII, 28). 〈그는 자신이 세계의 끝들을 끌어안 으시고자 십자가 위에서 그의 두 손을 내뻗으셨다. 왜냐하면 이 곳 골고다는 바로 이 땅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갈보리 반석의 밑바닥에 있는 〈아담 예배실〉은 분명히 아담에 관 한 전승과 관련이 있다. 아담과 성전과의 관계에 대한 유대인의 전 숭은 랍비 문헌과 위경들 가운데서 발견되는데, 그 주요 내용은 이 런 것이다. 랍비들이 가르치기를, 〈아담은 모든 인간의 죄를 속죄하 기 위하여 성소(예루살렘의 성전)가 세워질 바로 그 장소의 흙으로부 터 창조되 었다〉(JE I, 177 쪽)고 하였다. 『 희 년서 The Book of Jub i- lees 』는 말하기를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으로부터 나갔을 때, 〈그 들은 그들이 창조된 땅에 있는 엘다 Elda 땅(‘출생의 땅'의 와전)에 거 했으며 >(3 :33),아 담이 죽었을 때 〈그의 모든 아들들이 그가 창조된 땅에 장사지냈다〉 (4:29) 고 한다 (CAP II, 17, 19 쪽). 이와 마찬가지로 『 아담과 하와 서 Books ofA dam and Eve 』는 아담과 함께 아벨의 장 사에 관하여 말하면서, 〈그는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하나 님께서 흙을 발견하신 그 지점에 장사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Ap o calyp s is Mosis 40.6 ; Vita Adae et Evae 45.2 - 3 참고 ; 48.5 - 6 CAP II, 149, 151 쪽 [with note ], 152). 말하자면 아담은 하나님께서 애초에 그를 만드시기 위하여 흙을 취하신 바로 그 지점에 장사되었으며, 이 곳이 또한 후에 성전이 세 워진 곳이다. 아담이 묻힌 곳이 헤브론이었다고 하는, 유대인의 다른 전승은 아마도 후기의 것이며, 신성한 성전이 장지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느낌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전승은 여호 수아 14:15 의 〈가장 큰 사람〉을 아담으로 생각할 때 지지를 얻게 된 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로 〈사람〉과 〈아담〉은 같은 단어이기 때문이 다 Uerome, Lett er 108.11 NPNFSS VI, 200쪽]. 또다른 이야기는 모 슬렘 전승에 나오는데, 그것에 의하면 아담이 창조된 곳, 그리고 묻

힌 곳이 모두 맥카였다(J ere mi as, Golgo tr a , 40 쪽 및 n. 3 ; A J. Wensin c k, A Handhook of Early Murammadan Tradit ion [Leid e n : E. J. Bri ll, 1 960], 11 쪽 참고). 아담의 장지를 갈보리로 옮긴 것으로 생각하는 기독교의 전승 이 전은 오리게네스에게서 확인되고 있다 (O rig en i s in Matt ha eum Com- menta rium Seri es, sec. 126 on Mt 'Z7:3 2, 33, MPG 13, cols. 1777- 1778). 〈해골의 곳에 관해서 말하자면, 히브리인들(의심할 여지 없이 히브리 출신의 기독교인들, 죽 유대계 - 기독교인들을 의미함)은, 아담의 시체가 그 곳에 묻혀 있다는 전승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아담 안에 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같이,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 든 사람이 삶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고전 15:2 2 ; 롬 5:12, 15 참고). 에피파니우스 (Pan. mer. 45.5 ; Wi lliam s NHS 35, 351 쪽 이하)는 이 동일한 문제를 꽤 길게 설명하고 있는데, 비록 그가 말하는 것이 골고다라는 이름에 내포된 원래의 뜻이 아닐지라도, 여기서 그는 또 한 그 이름에 대한 설명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225 항 ; K W. Clark in IDB IT, 439 쪽 참고). 에피파니우스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 도는 아담이 장사된 바로 그 장소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한 다 . 아담이 낙원을 떠난 후에 그는 오랜 세월 동안 그 맞은편에 살 면서 늙어갔다. 후에 그는 예루살렘으로 와서 그 곳에서 죽어 골고 다의 자리에 장사되었다. 이리하여 그 첫번째로 형성된 인간의 유해 가 그 곳에 안치되었기 때문에 그 이름이 〈해골〉 또는 〈해골의 곳〉 이 되었다. 바로 그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찔리신 옆구리로부터 나온 물과 피가(요 19:34) 그 자리에 묻혀 있던 아담에게 뿌려졌으며, 이것은 또한 그의 후손인 우리에게도 희망을 주게 되었다. 실제로 갈보리 반석의 기저에 있는 〈아담 예배실〉의 후진 앞에는 반석에 생긴 균열이 있었다(이것은 오늘날에도 유리창을 통하여 보이게 되어 있다) . 이 균열은 추측컨대 마태복음 'Z7 :51 에 언

급된 지진에 의하여 생긴 것이며, 예루살렘의 퀴릴 (Ca t eche ti cal Lectu re XIlI, 39) 이 〈우리 위로 높이 서 있으면서 오늘날까지 그 모 습을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그때 바위들이 어 떻게 터졌는지를 전시해 주는 이 거룩한 골고다〉라고 기술한 것은, 바로 이 균열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므로 반석에 생긴 균열은 그 리스도의 피가 흘러내려 아담의 해골에 떨어졌다고 하는 신비한 생 각과 조화를 이루었다. 이 동일한 전승이 복잡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마도 제 6 세기의 시 리 아어 작품인 『보물 동굴서 The Book of the Qzve of Treasures.!I (tra ns Budg e , 특히 21, 34 쪽 이하 참고)와 이와 관련된 문헌들에서 발 견된다 (Ba tti s ta and Bag a tti , La Qzve ma dei Tesori , 특히 19, 51, 59- 63 쪽 참고). 여기서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추방된 후에 멀 리 떨어지지 않은 곳인 이른바 보물의 동굴 Cave of Treasures 에 살 았으며, 그 안에서 아담은 황금과 유향과 몰략을 수집했다는 이야기 를 듣는다. 이것은 동방 박사들이 그리스도께 저들의 예물을 바친 베들레헴의 동굴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담이 죽었을 때 그는 그의 여러 아들들과 후손들이 그랬듯이 그 보물의 동굴 안에 장사되었다. 노아가 아담의 시체를 그 동굴로부터 취하여 방주에 넣어서 예루살 렘으로 옮겨 왔는데, 거기서 그 시체는 땅에 뚫린 하나의 구멍 속에 안치되었다. 그리하여 그 시체는 골고다 위의 그것 위에 십자가가 세워질 때까지 그 곳에 남아 있었으며, (롱기누스 Lon gin us 라고 불린) 군인이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피와 물이 아담 위로 홀 러 내렸다. 피는 그에게 생명을 주었고, 물로는 그가 침례를 받았다. 갈보리의 반석에 아브라함의 제단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에 관 하여 말한다면, 이것 역시 유대인의 전승이 성전으로부터 이전되는 것이었다. 창세기 22:2 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울 제물 로 바치려 했던 곳은 모리아 땅에 있었고, 이 곳의 위치는 달리 명

시되어 있지 않으나, 역대하 3:1 에 의하면 모리아 산은 예루살렘에 있었고, 성전이 건축된 바로 그 곳이었다. 그러므로 초기에 아브라함 과 이삭의 사건이 발생한 것은 후대의 성전 지대에서였고, 유대인의 전승은 위치를 이렇게 규명하는 것을 계속해서 받아들여 왔다(또한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드린 제단도 이와 동일한 장소에 있었다고 생각한다[창 14:18 ; JE V 田, 450 쪽]. 한편 모슬렘교의 전승에서는 이스 마엘이 이삭의 자리를 취하였고, 의도된 제사의 자리는 멕카 근처에 있 는 미나로 옮겨졌다고 한다 UE I, 89 쪽]). 이삭의 제사를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 지대에서 있었던 것으로 보는 유대인의 지속적인 전승에 관해서는,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헌을 보라. 『 희년서』(이 책에는 아브 라함을 이런 방법으로 시험할 것을 맨 먼저 제안한 사람이 〈왕자 마스 테마〉라고 하며, 『희년서 』 는 그를 일컬어 사단 Sa tan이라 한다. 17.16) 에 서 그 장소는 시온 산 위이다 (18 .1 3 CAP II, 39, 40 쪽). 요세푸스 (An t . I, ix, 7 §226 ; VII, xiii, 4 §333) 는 말하기를, 다윗이 성전을 위한 대지 로 구입한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180 항)은 아브라함이 그때에 이삭 을 데려왔던 〈바로 그 장소〉였다고 한다. 이 전승이 갈보리로 쪽으로 이전된 것은 , 의도된 이삭의 제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에 대한 하나의 표상이었다고 하는, 매우 일찍 입증된 사상과 조화된다(예컨대 Ep istl e of Barnabas [A.D .C . 100], VII, 3 ANF 1, 141 쪽). 따라서 테오도시우스 (530) (GEYER 140 쪽 이 하 ; LPPTS II-B, 10 쪽 ; CCSL CLXXV, 117 쪽 이 하; WJ P 65 쪽)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있다.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주님의 묘에는 갈보리의 터가 있고, 그 곳에서 아브라함 이 그의 아들을 온전한 번제물 holoazus tum로 드렸다. 그리고 그 언 덕 mans( 문자적으로는 〈산〉)은 바위로 되어 mans pe tr eu s 있기 때문 에 아브라함은 그 언덕 자체에다 죽 그 언덕 자체의 기슭에 제단을 만 들었다. 제단 위로는 언덕이 솟아 있고 그 언덕은 계단을 타고 오르는

데p er grad us scalatu r, 그 곳에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피 아첸자의 무명 씨 (570) (GEYER 204 쪽 ; LPPTS II-D, 16 쪽 ; CCSL CLXXV, 138 쪽 이 하 ; WJ P 8.3쪽)도 이 와 비 슷한 기 술을 하면 서 아브라함과 함께 멜기세덱도 언급하고 또한 그 반석에 있는 균열 도 언급하고 있댜 〈무덤으로부터 골고다까지는 80 보이다. 한쪽은 계 단을 타고 올라가는데 ascenditu r pe r grad us,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자 이 계단들을 타고 올라가셨다. 그 분이 십자가에 못 박 히신 장소에는 핏방울들이 보인다. 반석의 한쪽에는 아브라함의 제 단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을 때 그가 이 삭을 , 드리러 갔던 곳이댜 그리고 여기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제물을 드렸다. ……. 바로 그 제단 곁에는 [반석에] 하나의 틈cirpt:a 이 있는데, 그대가 여기에 그대의 귀를 갖다대면 물이 홀러가는 소 리를 들을 것이다.〉 모데스투스의 공사로 다시 돌아가서 말한다면, 모슬렘교 아랍인들 이 불과 수년 뒤에 그 곳에 왔을 때 보였던 것이 바로 그가 복원한 교회였다. 632 년에 무함마드가 죽자 그를 계승한 첫번째 후계자 칼 리프 아부 바크르 C alip h Abu Bakr(532 - 634) 는 아랍 군대를 시리아 로 보냈는데, 거기서 헤라클리우스 Herac li us 는 그가 페르시아의 크 테시폰 C t es ip hon 으로부터 도로 가져왔던 〈참 십자가〉의 유물을 회 수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옮겨 갔다 (Co i.i asnon 18 쪽). 두번째 칼리프였 던 우마르 (634-644) 치하에서 다메색이 탈취되었고 (635), 비잔틴 군 대는 「 야르무크 강 전투 Ba 떠 e of the Yannuk Rive rJ 에 서 패 배 했으 며 (636), 예루살렘에서는 총대주교 소프로니우스 (634-638) 가 그 도성 을 침입자들에게 내어 주었고 (638 년 2 월), 한편으로 수도 가이사랴는 2 년 뒤에 포위 공격을 받은 후 탈취당했다 (640). 유튀키우스는 모슬 렘교인들이 예루살렘을 탈취했을 때 일어난 일을 우리에게 말해 주 고 있다 (MPG 111, col. 1099 ; LPPTS XI-A , 65-66 쪽 ; Breyd y 118-

119 쪽 ; GEMA I, 25-26 쪽). 정복자인 칼리프가 〈성묘 교회〉로 와서 부활관 Avdmao t c 의 산 sahn( 뜰), 죽 아마도 둥근 천장의 홀 앞에 있 는 둘째 안뜰에 앉았다. 기도의 시간이 가까웠을 때, 우마르는 소프 로니우스에게 〈나는 기도하고 싶다〉고 말했다. 총대주교는 응답하기 룰 〈오, 신도들의 사령관님이시여, 지금 계신 그 곳에서 기도하십시 오〉라고 하였으나, 우마르는 〈나는 여기서 기도하지 않을 거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총대주교는 칼리프를 모시고 콘스탄티누스의 바실 리카 죽 증거관으로 갔다. 그러나 우마르는 〈나는 여기서도 기도하 지 않을 거요〉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칼리프는 동쪽 끝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교회〉의 문어구에 있는 계단에 나가 그 계단 위에서 홀로 기도하였다. 그는 설명하기를, 만약 그가 그 교회 안에서 기도 했더라면 모슬렘교인들이 그것을 그 교회를 빼앗기 위한 이유로 삼 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소프로니우스에게 하나의 강령을 내렸는데, 이 강령은 무엣진 muezz in(회교 사원의 기도 시각을 알리는 사람-역주)의 목소리를 통하여 모슬렘교인들이 기도를 위하여 그 장소에 함께 모이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성묘 교회〉의 입장으로는 페르시아인들이 와서 그 교회를 불태웠을 때보다는 다 행스러운 일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볼 때 그 교회가 회교 사원이 되 었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었더라면 아마 도 1009 년에 파티미드 칼리프 알-하킴 Fatim id Ca liph al-H akim에 의하여 저질러진 완전한 파과는 면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Coil as non 18 쪽 이 하 ; 그리 고 아래 의 232 항을 보라). 페르시아인들에 의하여 파괴된 뒤에 모데스투스에 의하여 복원된 〈성묘 교회〉과 그 후에 모슬렘교인들에 의하여 탈 없이 보존된 그 교회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초의 기술은 660 년에 한 무명 의 아르메니아 순례자에 의하여 남겨진 것이며 (PEF QS 1896, 347쪽), 그의 이야기에는 또한 갈보리의 반석의 기저에 있는 〈아담 예배실〉

을 방문한 한 순례자에 관한 최초의 언급이 포함되어 있다. 그 이야 기에서 그 순례자는 〈생명을 주시는 예수의, 반석을 깎아 만든 무덤 (묘)〉에 관하여, 아래로 열두 개의 석주가 있는 둥근 탑 모양의 교회 (아마도 상부의 계랑을 가진 부활관 Avd en:Q O t c [아나스타시스])에 관하 여, 그리고 65 개(혹은 다른 필사본에 의하면 75 개)의 석주를 가진 〈으 뜸 교회 chi ef church 〉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이 〈으뜸 교회〉는 증 거관 MGP t bp l0V( 마르튀리온)을 가리키는데, 또한 카톨리콘 Ka t ho lik on (KdOoAlKbv) 이라고도 불리며, 이 이름은 〈대성당〉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고, 도성에서 제일 가는 교회와 총대주교가 거하는 저택을 뜻한다 (E. A Soph ocles, Greek Lexic o n of the Roman and By z anti ne Period s, 2 vols. [New York : Frederi ck Ung a r, 1887], 2, 613쪽). 부활 관으로부터 열 계단 떨어전 곳에 갈보리의 반석을 둘러싸고 있는 예 배 실 인 것 이 확실한 〈거 룩한 골고다 교회 Church of Holy Golgo th a > 이 있었는데, 이것은 〈또한 아담의 무덤(죽 그 반석의 기저에 있는 〈아담 예배실〉)이라고도 불렸다. 그로부터 과히 여러 해가 지나지 않아서 (670) 아르쿨프가 그 곳에 왔는데, 그는 이 〈매우 큰 교회〉가 그에게 어떻게 보였는지를 우리 에게 제법 장황하게 말해 주고 있다 (GEYER 2 '2:7쪽 이하; LPPTS III-A, 5 쪽 이 하 ; CCSL CLXXV, 186 쪽 이 하 ; WJ P 95 쪽 이 하). 그는 또한 여기에 전재(轉載)한 교회의 구도를 그렸는데, 이것은 「파리 사 본』 (La tin 13048) 으로 알려진 그의 『성지론(聖地論, De Locis sanctis ) 』 의 제 9 세기 필사본에서 모사한 것이다 (Tes tini in Orien s Anti qu us 3 [1964], '2:7 2 쪽 이 하 참고). 그가 기 술한 것을 읽 고 그가 그린 것을 보 면서 우리는 그가 묘 위에 세워진 하나의 크고도 둥근 교회를 기술 하고 있음을 발견한댜 이 교회는 12 개의 돌 기둥으로 떠받쳐져 있 고(그의 그림에는 나타나 있지 않음), 북동쪽과 남동쪽에 입구가 있으 며, 북쪽, 서쪽, 남쪽에 있는 벽들의 움푹 들어간 곳에 제단을 가지

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동쪽으로 이동하면, 골고다의 자리에 사면으 로 된 교회가 있다. 이것의 맞은편 , 곧 뜰의 북쪽에는 이 구도의 설 명문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주야로 등불이 타오르던 지역이 있다. 이것의 곁에는 다른 하나의 장소가 있는데 , 역시 설명문에 의하면 , 이 곳에 아브라함이 제단, 즉 이삭을 그 위에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제단을 쌓았다 . 계속해서 동쪽으로 가면 증거관으로 알려진 바실리 카가 있다. 이 바실리카 지하에서 강도들의 두 십자가와 함께 그리 스도의 십자가가 발견되었다. 골고다 바실리카와 중거관 사이에는 하나의 엑세드라 exedra, 죽 작은 방 또는 예배실이 있는데, 그 안에 는 주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사도들에게 주었던 잔이 있었다고 전해 진다. 끝으로 남쪽에 있는 사면으로 된 〈골고다 교회 〉 에 접해 있는 것은 사면으로 된, 주의 모친 〈성 마리아 교회〉이 있는데, 이것은 콘 스탄티누스의 복합 건물 (225 항) 안에 있는 침 례 탕의 약간 동쪽에 있 던 건물임이 분명하다. 232 〈성묘 교회〉에 있는 종탑 1009 년에 파티미드 칼리프 알-하킴 (996-1021) 은 〈성묘 교회〉을 파 쇄할 것을 명령했고, 이러한 파괴 행위는 다른 많은 교회들과 또한 회당에도 파급되었다. 파티미드 족 Fa tirni ds 은 그들의 조상이 무함마 드의 딸이요 또한 무함마드의 제 4 대 후계자인 알리의 아내였던 파티 마에게로 거슬러오르는 족속으로서 969 년에 애굽을 정복했고, 멕카, 메디나 , 시리아, 그리고 팔레스타인까지 그들의 통치 영역을 넓혔다. 팔레스타인에서는 716 년에 압드 알-말리크 ‘Abd al-Ma lik(68.5-7 05, 〈반석의 돔〉의 건축자)의 둘째 아들인 우마이야드 칼리프 술레이만 Umayy ad Ca liph Suleim an(7 15-717) 이 라몰라 Ramla( 어 쩌 면 고대 의 아리마대 Arirnath ea 였던 로드 Lo d/뒷다 [Ly dd a, 룻다〕의 북동쪽 10 마일

지 점 [ME ISTERMANN 74-80 쪽 ; KROLL 368 쪽, col. 2] )에 아람/모 슬렘의 수도를 정했었고, 알-하킴의 치하에서 라몰라를 다스린 지사 (知 事 )는 야루크 Yarukh 라고 불렀댜 제 11 세기 안디옥의 아랍인 기독교인 역사가였던 야햐 이븐 사이 드 Yah y a ibn Sa' i d 는 당시에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 다 (PO 23, 491 쪽 이 하 ; Pete r s, ]erusalem, 260 쪽 참고). [카이로에 있는 교회들을 파쇄시킨 후에 알-하킴은] 마찬가지로 시 리아로, 라몰라의 지사인 야루크에게, 〈거룩한 부활 교회〉을 파괴하고 기독교의 문장들을 없애며 거룩한 유물들을 제거하라는 문서 명령을 하 달하였다. [야루크는 예루살렘으로 여러 사절들을 보냈고] 그들은 그 곳 에서 눈에 띄는 모든 가구 집기들을 탈취한 후에, 파괴할 수 없거나 옮 겨가기가 극히 어려운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그 교회를 밑바닥까지 붕괴 시켰댜 그런 다음 해골(골고다) , 〈성 콘스탄티누스 교회〉, 그리고 그 경 내에 있던 모든 다른 건축물들이 파괴되었으며, 신성한 유물들은 완전 히 소멸되었다 (이 일을 하도록 파견된 사람들 중의 하나가) 성묘를 철 거하고 그것의 모든 흔적을 없애려고 시도하였으며, 그리하여 그는 그 것의 대부분을 부수고 무너뜨렸다(그러나 분명히 전체를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 그 부근에는 앗 」 사리 as-S ari로 알려진 수녀회가 있었는데, 이 것도 마찬가지로 파괴되었다. 파쇄하는 일은 1009 년의 9 월 28 일(에 해 당되는 날자)에 시작되었다. 모든 재산과 신앙적인 유산 , 그리고 또한 모든 기명들과 신성한 물건과 금 세공품들도 탈취당하였다. 아랍어로 글을 쓴 시리아인 역사가 이븐 알-칼라니시 Ibn al- Qa lan isi (1 160 사망)도 그 파괴의 역사룰 기록하면서 (Canard in By - zanti ne 35 [1965], 20-24 쪽 ; Pete rs , Jer osalem, 258-260 쪽 참고), 무엇 이 알-하킴으로 하여금 이런 일을 하게 했는지에 관한 홍미로운 이

야기를 수록하고 있다. 내용인죽 그 칼리프는 기독교인들이 유월절 에 거룩한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성묘에 있는 등불들을 켜는 것으로 믿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고 기분이 상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유월절(부활절) 날에 그 곳에 오고, 그들의 감 독장이 공중 앞에 나타나며, 그들이 자신의 십자가를 치켜들고 기도와 예식들을 거행할 때, 그 모든 것이 그들의 심령에 큰 감명을 주고 그들 의 마음에 당황을 일으킨다. 그들은 제단 위쪽에 그들의 둥을 걸고 나 서는 고안된 장치에 의하여 그 둥 안에 있는 발삼 balsam 기름에 불이 켜지게 하는데, 이것은 그 기름이 재스민j as min e 의 기름으로 점화시키 는 성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빛나는 백색의 불꽃을 생산하기 때문 이다. …….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그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 등을 켜 준 것으로 상상한다. 알-하킴이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그 교회를 파괴하고 그 것이 그렇게 되었다는 공식적인 보고를 회보하라는 명령을 라몰라 로 보냈다. 애굽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그 명령을 전해 듣고 예루살 렘에 있는 총대주교에게 알려 주었으며, 그리하여 그 교회의 귀중품 들 중의 얼마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알_하킴의 사절들이 와서 그 교회를 포위하고는 그것을 약탈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남은 것은 무엇이든지 가져가버렸는데, 그것은 상당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건물은 파괴되고 파쇄되어 돌들이 산산히 홀어졌다. 그가 명령한 대로 하나의 보고서가 준비되고 서명되 어 알-하킴에게 보내졌다. 이 사건에 관한 소식이 애굽에 퍼지자, 모슬 렘교인들은 알-하킴이 한 일에 대하여 기뻐하면서 그에게 치사를 드리 고자 감사의 행사들을 거행하였다. 그의 정보 담당자들은 이 일에 대한

여론을 수집하여 보고하였댜 알 구 하킴은 기분이 좋아 여러 지방에 있는 교회와 회당들을 파괴하도록 명령하였다 . 바르 헤브래우스 Bar Hebraeus(l286) 도 알_하킴에 의하여 〈성묘 교회〉이 완전히 파괴된 그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였으며, 그는 무엇 이 그 칼리프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에 관하여 이븐 알-칼라니시 가 보고한 것과 동일한 이야기를 보고한 첫 기독교인 저자가 되었다 ( Chronog rap h y, tran s. Bud ge , 184 쪽). 그리고 이때에 애굽의 칼리파 khal ifa h7r 명령을 내리자 예루살렘에 있는 〈 부활 성 전 Temp le of the Resurrec ti on 〉은 그 밑뿌리 로부터 파헤 침을 당했고, 거기 있는 모든 가구들이 약탈되었다. ……. 이 핍박은 기독교인들을 미워한 어떤 한 사람을 통하여 시작되었다 . 그는 칼리파 하킴에게 다음과 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기 독교인들이 부활절의 축제 를 거행하고자 예루살렘의 성전에 모일 때, 그들은 교회의 감시자들을 교묘하게 다루어, 무덤 위로 등이 걸려 있는 쇠줄에 발삼 기름을 바른다 . 그리고 아랍인들의 총독이 그 무덤의 문~ 인봉할 때(교회의 권리들에 대한 기독교 교파들간의 불화들 때문에 제 11 세기에 만들어져서 오늘까지 계속되는 추후 조치에 의하여, 눗세이베 Nusse i beh 라는 아랍인/모슬렘교인 가족이 그 교회를 열고 닫기 위한 열쇠둘을 가지고 있다. FDI 86 쪽), 기독교인들이 지붕으로부터 그 쇠줄 의 꼭대기에 불을 켜고, 그 불은 둥의 심지로 내려와서 그 심지에 불을 댕긴다. 그 다음에 그들은 ‘퀴리에 엘레에손 '(Kb pt C tAe noov, ‘주님, 자비 롤 베푸소서’)이라고 소리지르며, 자신돌이 하늘에서 무덤 위로 내려오 는 빛을 보는 척하면서 운다. 그러고 나면 그들의 믿음은 견고해진다.〉 〈성무 교회〉에 〈거룩한 불〉이 내리는 것에 관한 첫번째 언급은

프랑스인 순례자 베르나르 Bernard(870) 에 의하여 기록되었는데, 그 는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그들은 한 천사가 들어와서 앞에서 언급 한 묘 위에 걸려 있는 동에 불을 댕길 때까지 계속해서 퀴리에 엘레 에손을 부른댜 총대주교는 이 불 중의 몇 개를 감독들과 나머지 백 성들에게 건네 주어 각자가 그것으로 자기 집을 밝히도록 한다〉 (Tobler and Molin i e r 315 쪽) . 러시아인 순례자 다니 엘 (1106) 은 이에 관한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는데 (LPPTS IV-C, 74-81 쪽), 이 행 사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계속되고 있다 (Pe t ers, Jer usalem, ind ex under Holy Fir e, Descent o f를 보라). 두로의 윌리엄 (1184) (BABCOCKAND KREY I, 66 쪽 이하)은 알_ 하킴에 의한 파괴 행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라몰라의 지 사이며 하킴의 역원(役員)들 중의 하나인 야루크가 스스로 황제의 명령을 떠맡아서 즉시 건물을 붕괴시켰다.〉 제 4 세기의 그 위대한 〈콘스탄티누스 교회〉과 그것을 계승하여 제 7 세기의 모데스투스가 복원한 교회는 사실상 끝장이 났다. 두로의 윌리엄은 또한 그 후에 이어진 기독교인들에 대한 혹독한 핍박에 관해서도 말해 주고 있다 . 그런데 야햐 이븐 사이드 Yah y a ibn Sa'id (PO 23, 505 쪽)가 우리 에 게 말해 주는 바와 같이, 자라 Dj ar rah 가족의 무파리 즈 Mu far - ridj(l 013 사망)라는 이름의 베두인이 한동안 라믈라와 팔레스타인을 관할하고 있었는데, 1012 년에 그의 도움으로 기독교인들은 허락을 얻어 약간의 재건 공사를 시작할 수가 있었다 (EI II, 1965, 483쪽). 1021 년에 알-하킴 이 죽자 그의 아들 칼리프 알-자히르 (1021-1036 통 치)가 그를 계승하였다. 알-자히르는 두로의 윌리엄이 기록한 바와 같이 (BABCOCKAND KREY I, 69 쪽 이하), 비잔틴의 황제 로마누 스 m(1028-1034 통치)와 우호 동맹 관계로 들어갔고, 로마누스의 요 청에 따라 알-자히르는 기독교인들에게 교회를 복원할 수 있는 특 권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그 공사는 중단되었고 , 마침내 칼리프 알-

무스탄시르 Ca liph al-Mus tan s ir의 통치 시작인 1038 년에 체결된 조 약과 함께 간신히 파티미드 가t he Fa timi ds 와 비잔틴 가t he By z an- tine s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가 일시 계속된 동안에야 비로소 그 공 사가 진행될 수 있었다. 하지만 두로의 윌리엄이 계속해서 말해 주 는 바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자력 (資力)이 그토록 중요한 건물을 복원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사 실을 알았으며, 따라서 그들은 그의 치하에서 비잔티움과 파티미드 가 사이에 우호적인 관계가 계속되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IX 세 모 노마쿠스 Consta ntine IX Monomachus(1042-105. 5 통치 )에 게 사절단을 보냈다. 이 사절단을 책임진 이는 어떤 요한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별명 이 카리아니스 C ariani s 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태생의 사람으로서 육 신적으로도 고상한 인물이었으나 성품에 있어서는 훨씬 더 고상한 사람 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세상의 명예를 버리고 제복(祭 服)을 입었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난한 사람이 되어 예루살렘 에 살고 있었다. 그는 이 사명을 부여받고 파송되어 온갖 끈기와 정력 울 다하여 하나님의 사랑받는 주 황제에게 그 문제를 충실하게 제시하 였다. 그는 콘스탄티누스로부터 복원 공사를 이행하기에 충분한 돈을 황제 자신의 국고에서 지급해 주겠다는 약속을 얻는 일에 성공하였다. 그런 다음 요한은 신도들이 그토록 열렬히 바라던 약속을 얻어낸 것을 기뻐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의 여행이 성공적이었고 그의 탄 원이 허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사제들과 백성들의 사기가 되 살아났다. 그들은 마치 중병에서 회복한 사람들과도 같았다. 이때는 총 대주교 니케포루스 Pa tri arch N ic e p horus 가 교회를 관장하고 있었다. 허락이 떨어졌고 제국의 국고로부터 경비가 확보되었으므로, 그들은 〈성 부활 교회〉을 건립했는데, 그것은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바로 그 교

회이다. 이것은 주님의 성 육신 기원으로 1048 년에 있었던 일이다. ……. 그 건물이 완성되었을 때 백성들은 그들이 직면했던 그 많은 치명적인 위난(危難)과 절박한 위험들을 생각하며 위로를 얻었다. 교회의 재건을 위하여 콘스탄티누스 IX 세 모노마쿠스의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1048 년에 제 3 의 형태로 이렇게 다시 올라간 교회는 전에 있었던 것보다는 훨씬 작았다 (Co ti asnon 54-56 쪽 ; Corbo, Santo Sepo lcro l, 229 쪽 ; 2, pls . 4, 5). 첫 째 안뜰과 함께 카르도의 진 입 로 와 대 바실리카(중거관) 전체가 폐허로 남아 있어 영구적으로 버려 진 상태였다. 둥근 천장의 홀(부활관)의 서쪽에 있는 원형의 벽은 어 떤 높이까지는 아직 서 있었고, 이 건물은 대체로 원래의 콘스탄티 누스가 지은 형태로 재건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구도에서 이미 발 견된 세 개의 후진들과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무덤의 전면 동쪽에 네번째의 새로운 후진을 삽입시켰다(pl. 4, nos. 70-71). 무덤 위로 새 로운 팔각형 소전(小殿)이 지어졌고, 반석 벤치의 표면은 대리석으로 덮였다(pl. 4, nos. 1-2). 그리고 증거관이 사라진 것을 부분적으로 보 충하기 위하여 여러 개의 새 예배실이 지어졌다. 부활관의 북쪽에는 〈성 마리아 예배실 Chape l of St. M ary〉이 지어졌고(pl. 4, nos. 126- 129), 부활관의 남쪽에 세 개의 예배실이 지어졌는데(pl. 4, nos. 501- 503), 이 중에서 가운데 것은 침례탕으로 사용되었다. 동쪽으로 지하 에는 옛 로마 시대의 수조가 예배실로 개조되어 서쪽 계단에 접해 있었으며, 그리하여 이 곳은 〈십자가 발견〉의 장소로 추앙을 받게 되었다(pl. 4, no. 309). 모슬렘교인인 순례자 나시르-이 쿠스라우 Nas ir-i Khusraw 는 1047 년에 예루살렘에 있었으며, 콘스탄티누스 IX 세 모노마쿠스의 치 하에서 〈성묘 교회〉의 복원 공사가 거의 끝났을 때 그 교회를 방문했 다 (1048).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가로지르는 그의 여행을 상술한 그

의 일기의 한 부분은 그 교회에 대하여 이와 같은 기술을 포함하고 있다 (LPPTS IV— A , 60-61 쪽 ; Pete rs , Jer usalem, 267 쪽 이 하 참고). 한번은 하킴이 그 교회가 약탈자의 손에 넘어가도록 지시하여 그렇 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것은 폐허가 되었다 . 한동안 그것이 이런 상태 로 남아 있었으나 후에 비잔티움의 캐사르 Caesar of B y zan ti um 가 선 물들과 봉사의 언약과 더불어 사신들을 보내어, 그가 교회의 재건을 위 한 경비의 조달을 허락하는 것을 규정한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이것은 마침내 이루어졌다. 오늘날 이 교회는 매우 널찍한 건물로서 팔천 명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가 있다. 이 건축물은 최상의 기술로 지어졌으며, 채색 대리석과 갖가 지 장식물과 조각품으로 건축되었다. 교회의 내부는 어디나 금과 그림 으로 세공된 비잔틴 식의 무늬가 있는 바단으로 상직되어 있었다(이야 기는 계속되어 예수, 아브라함, 이스마엘, 이삭, 야곱과 그의 아들들­ 〈그들 모두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울 그린 그림들에 그 이름을 붙 이고 있다. 이 그림들은 노간주나무의 기름으로 니스칠이 되어 있고, 각 초상의 얼굴은 얇은 유리판으로 덮여 있으며, 거기에는 또한 천국과 지 옥의 이중 그림도 있었다) . 이 교회에는 매우 많은 수의 사제들과 수사들이 앉아서 복음서를 읽 으며 기도를 드리고 있다 . 왜냐하면 그들은 낮이나 밤에도 이런 일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 콘스탄티누스 IX 세 모노마쿠스의 교회는 1099 년 7 월 15 일에 십자 군이 예루살렘에 진입했을 때 그들이 본 교회였다. 두 순례자, 죽 스 칸디나비아인 새불프 (1102) 와 러시아인 다니엘 (1106) 이 그 직후에 와 서 그 당시에 아직 존재하던 그대로의 그 교회에 대한 기술을 남겼 는데, 이것은 십자군이 그들 자신의 변경 공사를 하기 이전의 일이

다. 그 교회의 현재 형태의 대부분은 십자군의 변경 공사에 의한 것 이다. 새불프 (LPPTS IV-B, 9-14 쪽)는 〈성묘 교회〉이 중거관이라고 불 리며,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어떤 교회보다도 더 유명하다고 말한다. 그 교회의 중앙에 그리스도의 묘가 있는데, 이것은 강한 벽으로 둘 러싸여 있으며, 그 위에 있는 교회가 지붕이 없이 열려 있기 때문에 비롤 맞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하여 덮개로 덮었다 . 묘의 앞쪽에는 안뜰이 있다. 그러고 나서 이미 설명한 (231 항을 보라) 사항들에 대한 다양한 암시들과 함께, 새불프는 그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계속하 고 있다. 그 후에 그대는, 전에 부조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아서 하나님의 명령 에 따라 그의 친 아들을 그 분께 바치고자 준바했던 곳인 갈보리 산으 로 올라간다. 그 후에 바로 그 동일한 장소에서, (이삭이) 예표했던 하 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구원을 위한 희생으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졌다. 그 동일한 반석은 우리 주님의 수난의 중거물로서, 우리 주님 의 십자가가 그 안에 고정되었던 구멍 가까운 곳이 갈라져 있다. 왜냐 하면 수난 기사에서 우리가 〈바위가 터지고〉(마 업 :51) 라는 기록을 읽 는 바와 같이, 그 바위가 터지지 않고는 창조주를 살해하는 일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아래에는 골고다라고 불리는 장소가 있는데, 이 곳은 우리가 우리 주님의 수난 기사에서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 어나되〉(마 '2:7 :52) 라는 기록을 읽는 바와 같이, 우리 주님의 핏줄기가 아담 위에 흘렀을 때 그가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킴을 받았다고 말해지 는 곳이다. ……. 의부의 벽쪽으로 성묘 교회의 두부(頭部), 갈보리의 위치로부터 멀지 않는 곳에, 나침반이라고 불리는 한 지점이 있다 . 이 곳은 그 동일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친수(親手)로 써 세계의 중앙을 지정하시고 표시하신 곳인데, 이것은 시편 기자가 다

음과 같이 증언한 바와 같다. 〈 하나님은 옛적부터 나의 왕이시며, 땅의 중앙에서 구원을 베푸신 분이십니다〉(시 74:12 一역자 옮김 ; LXX 73: 12). 다니엘 (LPPTS IV-C, 11-17 쪽)은 새불프의 기술과 전반적으로 매 우 홉사한 기술을 제공하지만 많은 치수들을 보충해 주고 있으며(영 국인의 단위로 7 피트 또는 2 .1미터에 해당하는 단위인 사게네 sa g ene 로 나타냄), 또한 그 교회에 장식된 모자이크에 관하여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부활 교회〉은 원형으로 되어 있으며, 거기에는 의돌로 된 석주 12 개 와 대각( 臺 脚) 6 개가 포함되어 있다 . 그리고 그 교회는 매우 아름다운 대리석 평석으로 포장되어 있다. 거기에는 6 개의 입구가 있고, 16 개의 석주를 가진 계랑들이 있다 . 천장 아래, 계랑들 위쪽에는 거룩한 선지자 들이 모자이크로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고, 제단 위에는 모 자이크로 그려진 그리스도의 형상이 얹혀 있다. 높은 제단에는 〈아담의 높이 들림〉이 모자이크로 그려져 있고, 그 위에 있는 아치의 모자이크 는 우리 주님의 승천을 보여 주고 있다. 제단 양쪽의 대각들에는 모자 이크로 된 〈잉태 고지〉가 있다. 그 교회의 돔은 돌 천장으로 막혀 있지 않고 나무 대들보로 이루어진 윤곽으로 형성되어 있어 그 교회의 꼭대 기가 열려져 있다. 성묘는 열린 돔의 밑에 있다. 여기에 성묘에 대한 기술이 있다. 그것은 반석을 깎아서 만든 하나의 작은 동굴로서, 그것의 입구는 사람이 무릎을 꿇고 들어가도 잘 통과할 수 없을 만큼 매우 낮고 높이는 얼마 되지 않으며, 길이와 폭이 동일한 그것의 치수는 4 규빗올 넘지 않는다. 사람이 그 작은 입구를 통하여 그 석굴에 들어가면, 오른손 쪽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이 놓였던, 일종의 벤치 같은 것이 동굴의 반석에 깎여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지

금 이것은 대리석 평석으로 덮여 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입맞추는 이 신성한 바위는 한편으로 나 있는 세 개의 작은 구멍을 통하여 볼 수 있 게 되어 있다. 우리 주님의 묘 안에는 다섯 개의 큰 기름 동이 걸려 있 어 밤낮으로 타고 있다. 그리스도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거룩한 벤치는 길이가 4 규빗 폭이 2 규빗, 그리고 높이가 l% 규빗이다 . 동굴로 들어가 는 입구 앞에 3 피트되는 곳에, 여인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에게 그리스도 의 부활을 알려 준 천사가 앉았던 돌이 있다. 이 거룩한 석굴은 마치 솟아오른 단처럼 외부로는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감싸여 있고, 비슷한 대리석으로 된 열두 개의 석주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 위에는 아름다운 소탑이 얹혀 있는데, 이것은 대각들 위에 놓여 있으며, 은박을 입힌 판 으로 덮여 있는 둥근 탑에서 끝난다 . 둥근 탑의 정상에는 보통의 키 위 로, 은으로 된 그리스도의 형상이 받쳐져 있는데, 이것은 프랑크인들이 만든 것이다. 열린 돔의 바로 아래에 있는 이 소탑에는 격자 세공으로 정교하게 제작된 세 개의 문이 있고, 사람들은 이 문을 통하여 성묘로 들어간다 . 그러므로 주님의 묘로 사용된 것이 바로 이 석굴이고, 나는 이 거룩한 장소들을 살살이 알고 있는 가장 나이 많은 주민들의 증언에 따라 그 묘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부활 교회〉은 둥근 모양으로 되어 있고 (다니엘은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각 변의 치수가 30 사게네이다. 그것의 상부에는 총대주교가 사는 널찍한 아파트들이 있다. 무덤의 입구로부터 높은 제단의 벽까지는 12 사 게네이다. 제단 뒤, 벽 의부에는 〈땅의 배꼽〉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의 작은 건물로 덮여 있고, 이 건물의 둥근 천장에는 다음과 같은 명각과 함께 그리스도의 모습이 모자이크로 그려져 있다. 〈나의 발바닥은 하늘 과 땅을 재는 자 measure 로 쓰이노라.〉 〈땅의 배꼽〉으로부터 우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소 및 갈보 리까지는 l 입}게네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소는 둥그스럼한 반석 위에 동쪽으로 향해 있으며, 창 하나의 높이보다 좀더 높은 작은 언덕

처럼 생겼댜 그 정상의 중앙에는 한 규빗 깊이에 둘레가 1 피트도 채 안 되는 꽂이 구멍이 하나 뚫려 있는데, 우리 주님의 십자가가 세워졌 던 곳이 바로 여기이다 . 이 반석 밑에는 첫 사람 아담의 해골이 놓여 있다. 우리 주님이 십자 가에 못 박히시던 때, 죽 십자가에서 그의 영혼이 떠났을 때, 성전의 휘 장이 찢어지고 바위가 터지고 아담의 해골 위에 있던 바위가 열렸으며,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흐른 피와 물이 그 갈라진 톰을 통하여 해골 위 에 흘 러내려 인간의 죄들을 씻어 주었다. 그 갈라진 톰은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으며, 이 거룩한 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소의 오른쪽에 서 볼 수 있다 . 그 거룩한 반석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소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 며, 그것들은 또한 훌륭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건물로 덮여 있다. 동쪽 벽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놀랍고도 생생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 이것은 자연적인 모습보다는 몸집과 키가 더 크게 그려져 있다. 남쪽에는 똑같이 훌륭한 솜씨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거기에는 두 개의 문이 있고 그 문들까지는 일곱 개의 계단을 밟 고 올라가며, 그 다음에는 그만한 수의 계단들이 있다. 바닥은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소의 밑, 죽 해골이 놓여 있는 곳에는 모자이크로 아름답게 장식되고 고운 대리석으로 덮인 작은 예배실이 있는데, 이것은 해골의 장소를 의미하는 〈갈보리〉라고 불린다 그 상부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소는 〈골고다〉라고 불린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과 십자가에서 내려오신 장소 사이의 거리는 합`} 게네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소 주위에는 북쪽으로 우리 주님의 옷 이 나뉘던 장소가 있고, 그것과 가까운 곳에 그들이 그 분의 머리에 가 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우고, 그 분을 조롱하면서 자색 옷을 그 분에게 입히던 장소가 있다. 이 곳 가까이에는 아브라함이 그의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며 이삭 대

신에 숫양을 잡은 아브라함의 제단이 있다. 이삭이 이끌려간 바로 그 동일한 장소에 그리스도가 희생 제물로 잡혀와서 우리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1099 년에 십자군이 왔을 때, 만약 그들이 손수 〈성묘 교회〉을 재 건하기로 했었다면, 그들은 거의 전부가 파괴되어 버린 제 4 세기의 콘스탄티누스의 복합 건물 전체를 재구성하는 일을 시도하든지, 또 는 그 당시에 단지 50 년밖에 안 되었던 콘스탄티누스 IX 세 모노마쿠 스 황제의 비교적 수수한 건물을 보수하는 일에 국한하든지, 양자 간에 선택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양자 중의 어느 것도 택 하지 않고 중간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또 다시 50 년 간의 공사를 요구하는 것이어서, 그들이 지은 교회, 죽 그 기나긴 역 사의 연속에서 네번째 교회를 1149 년 7 월 15 일에야 봉헌을 할 수 있 게 되 었다 (Corbo, Santo Sepo lcro 2, pl. 6). 첫째 안뜰, 중거관, 부활관의 앞에 있는 둘째 안뜰, 그리고 부활관 둥의 네 단위로 구성된 콘스탄티누스의 복합 건물은 모노마쿠스에 의하여 이미 두 단위(부활관과 둘째 안뜰)로 축소되었다. 십자군은 동 쪽 후진을 제의하고는 부활관을 대체로 변경 없이 그대로 두었다. 동쪽 후진은 모노마쿠스가 무덤의 중심점이라고 강조하던 것으로서 (pl. 4, nos. 70-71), 십자군은 이것을 제거하고 대신 하나의 큰 개선 문으로 대치하였다(pl. 6, no. 511). 무덤 자체의 소전(小殿)도 또한 개조되었고 팔각형 모양은 다각형 구조로 대치되었으며, 현관방은 〈천사의 예배실〉로 변경되었다(pl. 6, no. 510). 십자군은 전에 둘째 안뜰 또는 〈정원〉(pl. 4 의 the T riporti co) 으로 일컬어지던 널찍한 지역의 부활관 앞에 전적으로 로마네스크 양식 의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는 방금 언급한 개선문에 의하여 부활관 으로 바로 연결되어 있었고, 이른바 〈코루스 도미노룸 Chorus Dom i-

norum 〉(후에는 헬라인의 성가단 Cho ir of the Greeks), 남쪽 수랑(pl. 6, nos. 514-515 및 538-539) 과 북쪽 수랑(pl. 6, nos 521-522 및 523- 525), 그리 고 사방으로 나 있는 예 배 실들을 가진 회 랑(pl. 6, nos. 5'2: 7, 529, 533) 둥으로 구성되어 있었댜 이제 갈보리의 반석은 더 이상 격리된 예배실 안에 서 있지 않고, 그것의 서쪽 기저에 있는 〈아담 예배실〉(pl. 6, no. 537) 과 함께 신성한 건물의 구역 안에 포함되어 있 었다. 〈아담 예배실〉의 현관방에는 십자군의 첫 두 왕인 곳프레 드 부용 God frey de Bou illo n(llOO 사망)과 볼드윈 I 세 (1118 사망)가 묻혀 있다(pl. 6, A 및 B). 그 교회의 동쪽 끝에 있는 중앙 예배실(pl. 6, no. 529) 곁에는 〈성 헬레나 예배실〉로 알려진 지하 교회로 내려가는 계 단들이 있는데, 〈성 헬레나 예배실〉은 십자군이 제 11 세기의 〈십자가 의 발견 예배실〉에 인접하여 건축한 것이다(pl. 6, no. 309). 그 교회의 남쪽, 남쪽 수랑의 남쪽 끝에, 십자군이 오늘날에도 사 람들이 그 교회에 들어갈 때 여전히 사용하는 두 개의 큰 출입문(pl. 6, nos. 541, 542) 과 위쪽으로 높이 달린 두 개의 창문을 가진 전혀 새로운 정면을 건축하였다. 한편에는 당당한 모양의 종탑(종각 pl. 6, no. 540 및 pl. 51) 이 있었는데, 이것은 남쪽 정면이 이미 완성된 후에 추가된 것으로서, 전에 모노마쿠스의 교회 안에 있던 예배실들 중 하나(pl. 4, no. 501) 의 위에 십자군이 건축한 것이다. 입구의 다른 편 에 는 그 반석 의 북쪽 돌출부에 서 시 작하는(pl. 6, no. 536 ; pl. 40, no. 3b) 더욱 오래된 계단이 아직 잘 보존되기도 했지만, 갈보리로 향하 는 십자군의 입구가 거기에 있었다(pl. 6, no, 543 ; Pete r s, Jer osalem, illus . after '2:7 4 쪽) (지금은 〈프랑크인의 예배실 Chape l of the Franks> 의 계단들과 소전 edi cule 이 있음). 그 정면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원래 하드리아누스가 만든 대(臺)의 울타리 벽 선을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기초 위에 건축한 것이다 (Corbo, Santo Sep o lcro 1, 233 쪽; 이 정면의 조각품들을 위해서는 이 책의 3, ph oto s 194-220 을 보라)•

십자군 교회의 동쪽 문과 서쪽 문 위에 놓여 있는 두 개의 조각된 대리석 상인방은 예루살렘 소재 로크펠러 박물관 Rocke fe ller Muse-um in J erusalem 에 보관되어 있다. 동쪽 상인방은 〈아담 예배실〉을 통과하여 〈코루스 도미노름〉(헬라인의 성가단)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 있었다. 거기에는 나무와 잎, 및 과실과 꽃들 가운데 있는 사람과 동 물의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다. 벌거벗은 사람들의 몸짓과, 맹수, 하 르피 H arpy(헬라 신화에 나오는 괴물로 추녀의 얼굴과 상반신, 그리고 새의 날개와 꼬리와 발톱을 가지고 죽은 사람의 영혼을 나르는 일을 했 다고 함__역주), 켄타우로스 Cen ta ur( 헬라 신화에 나오는 반인 반마 [半人半馬]의 괴물―一역주), 그리고 두 마리의 용이 있는 것은 이것 어 죄와 악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임을 암시하는데, 이것은 아담의 무덤을 지나갈 때 회상하기에 안성맞춤인 장면이다. 한편으로 그리 스도의 장사와 부활의 장소로 들어가는 문 위에 있던 서쪽 상인방은 그 분의 생애 중에서와 그 분이 베다니에서 최후의 만찬석에 계실 때의 장면들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리하여 신자는 구원의 길을 따 라가도록 초청을 받는다. 이 상인방과 나사렛의 십자군 시대의 주두 들 (45 항)은 함께 그 나라에서 발견된 십자군 시대의 조각품들 중에 서 가장 섬세한 본보기들이다. 성전 지대의 발굴에서 l

지 십자군 교회는 사실상 원래의 모양대로 잘 견뎌 왔다 (G . Dalman, Die Grabeski rch e in Jer usalem, i n P] 3 [19ITT], 34 쪽 이 하). 수리 작 업은 그 다음 2 년 동안 희랍 정교에 의하여 이행되었고, 1810 년에 새로이 봉헌된 이 복원된 구조물은 일찍이 콘스탄티누스, 모데스투 스, 콘스탄티누스 모노마쿠스, 그리고 십자군으로 이어진 일련의 이 름들로 그 명칭이 붙은 그 교회의 긴 역사 위에 다섯번째 교회로 간 주될 것이다. 1865-1869 년에 무덤 위에 있는 소전(小殿)이 현재의 형 태로 재건되었으나 몇 개의 고대의 석주들은 보존되었다. 현재의 상 태로는 하나의 작은 문이 조그만 현관방울 향하여 나 있다. 이 현관 방은 추측컨대 천사가 친히 굴려낸 돌 위에 앉아 있던 곳이며(마 28:2 ; 막 16:4 - 5), 그 돌의 한 부분으로 추측되 는 조각이 중심 에 있는 대좌에 삽입되어 있다. 더욱 작은 문 하나가 묘 자체를 향하여 나 있으며, 여기에는 높이가 4 피트되는 방을 두르는 바위가 남아 있다. 그 러나 그 바위는 아마도 시신이 놓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반석 침상 위 에 있는 대리석 평석으로 덮여 있다 (MEISTERMANN 123 쪽 이하 ; MACKOWSKI 159 쪽, pl. 136). 그 무덤의 바위의 한 작은 부분이 또 한 현재의 소전 바로 뒤에 있는 〈콥트인의 교회 Church of the Co pts 〉의 기저에서도 보인다 (MURPHY-O'CONNOR 41 쪽). 그 교회가 또한 19 '2:7년에 지진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심하게 손상 을 입은 나머지 철재 건조물의 떠받침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과, 근 래의 복원 공사가 1960 년에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위에서 이미 살펴 보았다 (225 항). 그러므로 오늘날의 현상으로는 성묘 교회가 본질적으 로 십자군의 교회이지만 , 그 벽들의 내부에는 매우 긴 역사의 혼적 들이 모두 함께 얽혀 있다 . 〈성묘 교회〉의 역사의 요약 1. 335 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하여 건립되어 봉헌됨

614 년에 페르시아인들에 의하여 불탐 2. 628 년경에 모데스투스에 의하여 복원됨 638 년에 모슬렘교인 아람인들에 의하여 보존됨 1009 년에 알-하킴에 의하여 파괴됨 3. 1048 년에 콘스탄티누스 IX 세 모노마쿠스에 의하여 재건됨 4. 1149 년에 십자군에 의하여 재건되고 봉헌됨 1808 년에 불탐 5. 18010 년에 희랍 정교에 의하여 수리되고 봉헌됨 19 업년에 지진으로 손상됨 1960 년부터 현재까지 근래의 복원 공사와 고고학적 연구 사진은 그 교회의 남쪽에 있는 뜰에서 찍은 것으로 주된 입구의 왼쪽에 있는 십자군의 종탑을 보여 주고 있다. 바로 위에서 설명한 바대로, 이 탑은 이때까지 쇠테들로 동여져 있었으며, 그 교회의 벽 을 지탱하는 철 비계의 일부가 오른쪽에 보인다 . 종탑 뒤에는 둥근 천장의 홀의 돔이 힐끗 보인다. 233 루터 교회의 탑으로부터 본 〈성묘 교회〉 〈성묘 교회〉의 이 모습은 무리스탄의 북동쪽 모퉁이에 있는 독일 루터교의 〈구주 교회 Church of the Redeemer 〉의 높은 탑으로부터 북서쪽을 바라보며 찍은 것이다. 왼쪽에는 종탑 (232 항)이 있고 , 그 옆에는 그 교회의 정문이 있다 . 커다란 돔이 무덤 위에 솟아 있다 . 작은 돔은 〈헬라인의 성가단 Cho ir of the Greeks> 위에 있으며, 이것 의 동쪽에는 〈성 헬레나 예배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돔들의 이쪽에 있는 작은 테라스는 골고다의 반석 위에 있는 것이다.

234 루터 교회의 탑으로부터 동쪽을 바라봄 루터 교회의 탑으로부터 바라보는 또다른 광경은 무리스탄 및 성 묘 지대와 예루살렘의 나머지 지역과의 관계를 확연하게 알도록 도 와준다. 도성의 옥상을 가로질러서 멀리 보이는 것은 성전 지대에 있는 〈반석의 돔〉이고, 그 너머로 높은 정상에 러시아 탑이 있는 감 람산이 보인다. 235 배와 「도미네 이비무스 명각」 〈성묘 교회〉의 지하에 있는 〈성 헬레나 예배실〉과 〈십자가의 발 견 예배실〉 (232 항)은 아르메니아인들의 소유로 되어 있다. 아르메니 아인 수도원장 구레그 카피키안 (230 항)의 지도 아래 , 〈이스라엘의 책 의 전당 Israe li Sh rine of the Book> 이 스라엘 국립 박물관-역주)의 관장인 마겐 브로쉬 Mage n Bros hi의 감독으로, 1ITT5 년에 〈성 헬레네 의 예배실〉(아르메니아인들은 이것을 〈성 크리코르 죽 그레고리우스의 예배실 Chape l of St. Krikor , i.e., Gre g o ry〉이라고 부름)의 후진들 뒤쪽 (동쪽)과 〈십자가의 발견 예배실〉 북쪽에서 발굴 작업을 수행했다. 여기서 한 공간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고대에는 봉쇄되어 있었으 나 지금은 깨끗이 치워져서 하나의 새로운 예배실, 곧 〈성 바르탄과 아르메니아인 순교자들의 예배실 Chape l of St. Va rtan and the Ar- meni an M artyr s 〉로 조성 되 었다. 〈성묘 교회〉 지하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은 B.C . 7 세 기에 하나의 채석장이었으며(무리스탄에서도 보았듯이, 200 항), 또한 여기에는 하드리아누스의 비너스 신전 (223 항)의 복합 건물에서 포장 한 바닥을 떠받치는 둥근 천장 구조의 벽으로 보이는 벽들이 포함되 어 있었다. 이 벽들 중의 하나 (IE] 35 [198. 5], 120 쪽, 그림 5, wl, 그리

고 124 쪽 이하)는 필시 이 둥근 천장 구조의 일부인데(또는 어쩌면 하 드리아누스 이전 시대의 것일 수도 있음, KROLL 385 쪽, col. 3; abb. 308, no. 4), 이것은 특별히 홍미 있는 것이다. 이 벽에는 길이가 83 센 티미터, 높이가 45 센티미터이고 면밀하게 다듬어진 돌덩어리 하나가 붙박혀 있고, 그 위에는 여기에 제시된 사진에 보이는 그림과 명각 이 있다. 흑색과 적색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로마 세계에서 잘 알려 졌던 형태의 범선을 묘사하고 있다. 고물[船尾]에는 거위 머리 모양 의 장식 chen i scus 이 붙어 있고, 두 개의 키[操蛇]가 있다. 돛대는 내 려져 있고(어떤 이들은 부러졌다고 생각한다), 앞 돛은 이물[船頭]에 놓여져 있는 반면에 큰 돛[主机]은 분명히 개켜져 있다 . 그 아래에 있는 명각에는 Domi ne ivi m us (도미네 이비무스, 〈주여, 우리는 가오 리다〉)라고 적혀 있다. 이 두 단어는 요한복음 6:68 의 라틴어 본문 (Domi ne , ad qu ern ibi m us [도미네, 아드 램 이비무스 ; 라틴어에서는 b 와 v 는 서로 바꿔 쓸 수 있다], 〈주여,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에 들어 있다. 하지만 여기에 암시된 성구는 아마도 시편 122:1 , 〈우리가 여 호와의 집으로 가자〉일 것이다. 이 구절의 라틴어역은 In domum Domi ni i b i mus( 인 도뭄 도미니 이비무스)이다. 다른 여러 개의 연관 된 시편들과 마찬가지로 이 시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A Song of Ascen t s 〉(R SV) 라는 표제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그 시 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자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IB 4, 638 쪽 이 하). 그 명각이 라틴어로 적힌 것과 순례를 암시하는 것, 그리고 그 배 의 모양이 로마식인 점 둥은 우리가 여기서 보는 기록이 서방으로부 터 어떤 신성한 장소로 온 순례자들이 그들의 도착에 대한 행복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그럴 돗함을 시사한다. 이 글의 자체는 제 3 세기 후반으로부터 제 4 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대 의 것으로 판단되며 (TESTA 221 쪽), 이 기록이 여기에 남겨진 것은

아마도 콘스탄티누스의 바실리카가 건립된 무렵, 이 를 테면 330 년경 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연도의 기록이라면 이것은 기독 교 순례자가 남긴 것으로는 팔레스타인에 알려진 최초기의 명각과 그림 이 며 (Br oshi , IE] 35 [19& 5], 124, 128 쪽), 이 것들이 담고 있는 취 지는 그 당시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성지와 〈성묘 교회〉이 있는 곳을 찾는 수많은 순례자들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 236 고든의 갈보리로 알려진 바위 언덕 앞에서 본 바와 같이 (225 항 이하), 현재 골고다와 성묘가 있는 지 대의 의양이 예수 당시의 모습과는 판이하다는 사실은 명명백백하 댜 위의 분석이 바르다면 그 당시에는 이 지역이 성벽의 외부에 있 는 동산 지역이었으나, 지금은 지역이 성벽의 내부에 있고 건물들로 꽉 들어차 있다. 또한 하드리아누스가 앨리아 카피톨리나의 공회소 를 지었을 때 , 그리고 콘스탄티누스의 공인들이 갈보리의 반석과 무 덤의 많은 부분들을 깎아냈을 때 야기된 수정과 변경은, 제 1 세기의 자연스럽고도 옛스러운 특징들 중에서 남아 있던 의양을 매우 크게 바꾸어 놓았으며, 다른 한편으로 십자군의 교회는 제 4 세기의 중거 관과 부활관과는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다르다 . 이러한 이유 때문 에 예루살렘 현재의 북쪽 벽 외부에 있는 한 바위 언덕과 그에 인접 한 동산 무덤이, 어떤 방문객들에게는 그들이 골고다와 그리스도의 무덤을 상상하기에 보다 나은 장소로 생각되었다 . 예루살렘의 현재의 북쪽 벽 아래, 다메섹 문의 동쪽으로 약 100 야 드 떨어진 곳에 솔로몬의 채석장이라고 알려진 고대의 채석장이 있 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으며 (201 항), 예레미야의 석굴 Grott o of J ere mi ah 로 알려진 다른 하나의 채석장이 북쪽으로 도로 맞은편에 놓여 있다. 이 두 채석장은 아마도 그 사이에 있는 바위를

깎아냄으로써 서로 분리된 것 같다. 예레미야의 석굴은 엘-헤이데미 예 el-he i dem iy eh 라고 불리 는데, 1842 년에 옷토 테 니 우스 Ot to The- nius (in ZHT 1842, 16 쪽 이하)는 이것이 진정한 골고다의 언덕이었 다고 시사했다. 1867 년에 이 언덕의 북서쪽 경사면에서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 이 발견되 었다. 1883-1884 년에 찰스 G. 고든은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원래 테니우스에 의하여 제안된 그 견해를 받아들였다 (Gordon in PEFQ S 188 .5, 79 쪽 이 하). 그 후에 그 언 덕 은 고든의 갈 보리 Gordon's Calv ary로 알려지게 되었다. 1894 년에는 그 언덕 아래 있는 무덤 과 그 주위의 동산을 영 국의 동산 무덤 협 회 Garden Tomb Assoc i a ti on 가 구입하였고, 그리하여 그 무덤은 동산 무덤 Garden Tomb 으로 알려 져 있다 (237 항). 문제의 그 바위 언덕이 이 사진에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구 도성 의 북쪽 벽으로부터 찍은 광경이다. 이 언덕의 꼭대기에는 모슬렘 공동 묘지가 있다. 237 동산 무덤 이 사진은 방금 언급한 무덤 (236 항)을 보여 주는데, 이것은 어떤 사람들이 갈보리의 언덕이라고 믿는 그 언덕의 비교적 낮은 경사면 에 있는 바위 속을 깎아 만든 것이다. 입구로부터 한 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전실(前室)이 있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향하면 묘실로 들어 간다. 위쪽으로 그 입구의 오른쪽에는 작은 창문이 있어서 이 방으 로 햇빛을 받아들이고, 그 방 안에는 세 면으로 바위 턱들이 있으며, 그 중에 왼손편, 곧 북쪽에 있는 것이 가장 잘 마무리된 것이다. 인 근의 〈성 스데반 수도원〉 (242 항)의 땅 속에 있는, 지리적으로 연관된 많은 무덤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 동산 무덤은 원래 〈제 1 성전〉 시대인 B.C. 8 세기 및 7 세기의 것으로 믿어진다. 그때로부터 5 세기

내지 6 세기(비잔틴 시대)까지의 기간에는 그것이 사용된 혼적이 없으 며, 그 무덤은 아마도 비잔틴 시대에 다시 깎여 현재의 모양을 갖게 되었댜 1867 년에 그 무덤이 발견되었을 때, 그 묘실의 동쪽 벽에는 붉은색으로 그려진 비잔틴식 십자가가 두 개 있었다. 238 동산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동산 무덤 (237 항)의 입구 통로가 여기 오른쪽에 보인다. 우리는 또 한 바위를 깎아 만든 홈통tr ou gh 을 보는데, 이것은 지면 높이에 있 는 무덤의 앞면 전체를 따라 뻗어 있다. 이 홈통은 어떤 다른 예루 살렘 무덤들 (274, 281 항)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구르는 돌문이 무덤을 봉쇄하도록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게 보이며, 그것의 목적은 아마도 단지 위에 있는 낭떠러지로부터 내려오는 빗물을 날라가기 위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D obson, The Garden Tomb, 20쪽). 239 〈성 스데 반 바실리카〉에서의 발굴 기억할 일은, 451 년에 이베리아인 베드로가 북쪽으로부터 예루살 렘으로 와서 도성 안으로, 그리고 골고다로 들어오기 전에 성 스데 반의 순교관을 본 사실 (215 항)과, 530 년에 테오도시우스가 도성의 북 쪽 대문――이 대문을 그는 갈릴리 문이라고 부른다一―바깥에는 유도치아 Eudoc i a 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것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가 있었다고 한 사실 (229 항), 그리고 아르쿨프가 그 북쪽 대문을 성 스데반 문이라고 부른 사실 (229 항) 둥이다. 피아첸짜의 무명씨 (GEYER 176 쪽 ; LPPTS II-D, 21 쪽 ; CCSL CLXXV, 166 쪽 ; WJ P 84 쪽)도 역시 우리에게 말하기를, 예루살렘의 남쪽 벽들을 확장시켜 서 그것들이 실로암의 샘을 에워싸도록 한 유도치아 (444-460) (179,

229 항) 자신이 성 스데반의 바실리카와 무덤을 세웠으며, 그리고 그 녀 자신의 무덤을 성 스데반의 무덤 곁에 두었다고 한다. 전통적인 장소의 확인과 건축 공사에 도움을 얻기 위하여 유도치아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 당시의 예루살렘의 감독인 유베날J ubena1(422 - 458) 의 협력을 받았다. 이러한 지적들과 가장 잘 조화되는 장소는 나블루스 길 Nablus Road 노상에 다메 섹 문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320 미 터 떨어 지 고 동 산 무덤 Garden Tomb 에서 북서쪽으로 150 미터 떨어진 곳이다. 동산 무덤은 나블루스 길로부터 옆으로 뻗어나간 곁길로 갈 수 있게 되어 있다 . 1881 년에 이 곳에서 어떤 고대의 유적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다음해에 그 장소는 프랑스 도미니크회가 취득하였다 . 1885 년에 도 미니크회는 중대한 발굴 작업에 착수하였는데, 이 작업은 그 후로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 이 발굴을 통하여 제 5 세기의 바실리카의 유적들이 발견되었는데 ,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유도치아가 건축한 것이다 . 안뜰의 지하에 는 하나의 큰 수조가 있었다. 바실리카에는 회중석과 두 개의 측랑 과 동쪽으로 향한 후진이 있었다 (V in cen t, Jer usalem nouvelle, pl. LXXVII). 석주와 주두의 파편들이 많이 발견되었으며, 역시 제 5 세 기의 것인 모자이크 포장도 상당 부분들이 발견되었다(QD AP 2 [1932], 176-177 쪽). 사진은 이 발굴 공사가 아직 진 행 중이 던 때 의 광경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광경은 북서쪽으로부터 멀리 베제타의 언덕 쪽으로 바라본 것이다• 안뜰에 있던 수조와 바실리카의 부스러 기들이 눈에 띈다. 240 〈성 스데반 바실리카〉 예루살렘의 북쪽에 있는 유도치아의 바실리카 (239 항)의 노출된 위

치는 의심할 여지없이 614 년에 페르시아인에 의하여 즉각 파괴된 지 점이댜 제 2 세기의 끝에 새로운 예배실이 옛 바실리카의 안마당에 세워졌고, 이 예배실온 십자군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이 건축 공사들 의 유적이 또한 그 발굴 작업에서 드러났다 (239 항) . 1900 년에 유도치 아의 교회의 기초 위에 세워진 현대적인 〈성 스데반 바실리카 Ba­ sili ca of St. S t e p hen 〉이 봉헌되었으며, 이 사진은 그것의 정면을 보 여 준다. 이 바실리카에 인접하여 도미니크회 수도원과 프랑스 성경 및 고고학 연구원 Ecole Bib l iq u e et Archeolog iqu e Fran~ ai se 이 있는 데, 후자는 1890 년에 창설된 것이다. 241 〈성 스데반 바실리카〉의 안뜰에서 이 사진은 제 5 세기 교회의 안뜰 위에 세워진 현대 바실리카의 안 뜰을 보여 준다 . 그 중앙에는 고대 교회의 석주 일부가 서 있다. 242 논누스 집사의 명각 〈성 스데반 바실리카〉의 대지에서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들이 많 이 발견되었다. 이 무덤들은 거기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239 항 참 고) 동산 무덤 (237 항) 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이 모든 것은 원래 제 1 성전 시대(B. C. 8-7 세기)로부터 온 것이며, 비잔틴 시대 (5-6 세기)에 다시 사용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237 항 참고). 1889 년의 발굴 작업 중에 그 바실리카 안뜰의 북쪽 행각에서 하나의 평석(平石)이 발견 되었는데, 이것은 5 세기 중엽의 비잔틴식 무덤으로 내려가는 계단들 올 덮는 것이었댜 그 돌 위에는 헬라어 명각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 은 십자로 시작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8HK 幽 8~ic ( n) ot a ct ,tp( ou(J a ) Novvoii 6 t야 (6vou) tlvt ( J(tµo u) t처g ~EPNON a.v( la<,;) ,:(Jii X(p t(Ji:o) ii i\(v a(J td( J C (J ))<,; K(ai. ) i:fi<,; µo(µfi< ,;) aUt ic NOY血 KONIC THCAf T OYXYACK THC 血 YTH C Priva te tom b of the deacon Nonnus Onesir nu s, of the Holy Anasta s is of Ch rist, and of this monaste r y . 그리스도의 〈성 부활관〉에 속하고 이 수도원에 속한 집사 논누스 오네시무스의 개인 무덤. 이것은 바로 그 수사 논누스 오네시무스가 평생 동안 부활관 죽 〈성묘 교회〉에 배속되어 있었으며, 그가 묻힌 장소인 성 스데반 수 도원의 일원이었음을 말해 준다. 앞에서 말한 모든 것들을 고려할 때 방금 인용한 명각이, 콘스탄 티누스의 부활관이 〈성 스데반 바실리카〉의 부지에 있어야 한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부활관이 동산 무덤 쪽으로 가 까운 곳에 있었음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 스데반 바 실리카〉 근처에 〈제 1 성전〉과 비잔틴 시대의 이 여러 가지 무덤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볼 때, 멀리 떨어지지 아니한 동산 무덤이 어쩌면 같은 부류와 같은 시기에 속하는 다른 무덤이었을지도 모론다 (237 항 참고).

243 성 스데반 문 우리가 바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239 항) 최초기의 전승은 스데반 이 죽은 장소(행 7:60) 와 그의 순교관을 예루살렘의 북쪽 대문 바깥 에 두는데, 이 대문은 아르쿨프에 의하여 성 스데반 문이라고 불렀 고, 오늘날의 다메섹 문에 해당한다. 제 9 세기 무렵에 다른 전승이 여호사밧 골짜기, 즉 기드론의 골짜기 (169 항)에 있는 성 스데반에게 봉헌된 한 예배실에 관하여 말하기 시작했는데, 의심할 여지없이 이 것은 순교자들을 이 골짜기와 연결시키려는 경향과 조화되는 것이 었다 (V in cen t, Jer usalem nouvelle, 758쪽). 같은 방법으로 스데반을 돌로 친 장소도 후대에 어떤 이들은 예루살렘의 동쪽 문 바깥이었다 고 생각하였으며, 이리하여 성 스데반 문이라는 이름이 성전 지대의 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의 동쪽 벽에 있는 대문에 부착되었다. 하지 만 더 초기에는 저 아래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마리아의 무덤과 관 련하여 (170 항), 이것이 성 마리아 문으로 알려졌다. 또한 그 대문으 로부터 도성으로 들어가는 거리는 성 마리아 문 거리 Str ee t of the Gate of St. M ary를 의미하는 타리크 밥 싯튀 마리암 T ariq Bab Sit ty M ari am(216 항)이라고 불렀다. 사진은 현재 성 스데반 문이라고 불리는 대문을 보여 주고 있다. 다메섹 문과 마찬가지로 이 대문은 제 16 세기에 술레이만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201 항 참고). 아치의 양쪽 에 있는 사자들은 마물루크 술탄 바이 바르족 Marnluke Sulta n B ai bars 의 문장 상징들이었는데, 술레이만에 의하여 재사용된 것이 다 (MURPHY-O'CONNOR 17 쪽).

엠마오 244 엠마오의 옛터로 보이는 엘-쿠베이베의 공중에서 본 광경 그리스도가 부활 후에 나타나심에 관하여, 예루살렘과 그 주변 및 갈릴리 이외에 특별히 언급된 한 장소는 엠마오로 가는 노상이다(눅 24:13 웁 5). 여기서(눅 24:13) 엠마오'Eµ µaou c;:는, r 파피루스 보드머 XIV Papy rus Bodmer XIV) 』(제 3 세기 초의 p 75) 와 r 바티칸 사본』 및 다 른 많은 필사본들에 의하면, 예루살렘으로부터 60 스다디온(cn: a6 i ou c;: 떠 KOW a, 약 〈 7 마일〉, RSV) 의 거리에 있는 것으로 말해지지만, 「시 내 사본』과 r 팔레스타인 시리아어 Palestin ian Sy riac 역본」을 포함한 몇 개의 다른 필사본들에 의하면, 160(eKQ tOV £~[t KO V1:Q)스다디온(약 18 마일)의 거 리 에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문 독법들에 나타난 두 가지의 거리와 일치하는 장소 들로서 고대의 엠마오인 것으로 생각되는 두 개의 주된 위치가 있으 니, 곧 엘-쿠베이베 el- Qu be i beh 와 암와스 ‘Amwas 이다. 엘-쿠베이베 라는 현대 마을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서쪽으로 뻗어 있으면서 도 성으로부터 7-8 마일의 거리에 있는 도로에 위치한 네비 삼윌 Neb i

Sam wil을 지나서 있는데, 이것은 r 파피루스 보드머 XIV 』와 『바티칸 사본』 및 다른 필사본들에 기록된 60 스다디온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댜 하지만 이 장소의 고대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아랍 어로 된 이 이름은 단지 〈작은 돔〉을 의미하고, 이것은 어쩌면 조그 마한 모슬렘 사당을 가리킬지도 모르는데, 그나마도 십자군 시대에 와서야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제 15 세기의 말 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이름은 분명하게 누가복음 24 장에 나오는 엠마오의 이름으로 제시되었다. 1485 년에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탁발 승 프란체 스코 수리 아노 Francesco S uri ano 는 다음과 같이 기 록하였 다(II Tratt ato della Terra Santa , 19, Baldi 717-718 쪽, no. 9& 5). 로마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는 간선 도로 노상에 로마 이수(里數)로 15 마일의 거리에(Quin dece rniglia, 이미 언급된 60 스다디온보다 과히 많지 않은 개산[槪算]임), 아랍어로 쿠베베 Chubebe (Qub e i beh) 라고 불 리는 엠마오 성 castle of Emmaus 이 자리잡고 있다. 그 성 안에는 〈글 로바 Cleo p as 의 교회〉이 서 있는데, 이 곳은 그와 성 누가가 (부활 후 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떡울 떼며 만찬을 든 곳이다. 1852 년에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이 곳이 교회의 폐허임을 알게 되 었고, 1861 년에는 그 부지를 구입하였으며, 1902 년에는 그 옛 교회의 폐허 위에 교회를 건립하였는데, 이것은 지금도 그대로 서 있다. 그 들이 발굴한 것에 의하면, 새 건물의 기초로 사용된 옛 교회는 십자 군의 바실리카였다. 그 울타리 안에는 더욱 고대의 것인 구조물의 유적이 있었는데, 이것은 비잔틴 시대의 교회였을지도 모른다. 그러 나 어떤 이들은 이것이 로마 시대의 집이었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바로 글로바의 집이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1943 년에 시행된 추가 적인 발굴로 인하여 그 교회와 매우 가까운 곳에 한 마을이 그리스

도 당시에 존재했음이 확인되었다 . 하지만 이 장소를 신약의 엠마오 와 동일시할 수 있는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취지로 말하는 전승들이 모두 후기의 것이기 때문이다 . 공중에서 본 광경은 예루살렘 방향의 동쪽으로 본 것으로 엘-쿠베이베 마을을 보여 주고 있는데, 바로 그 너머에는 방금 기술한 부지 위에 세워진 프란체스코파의 교회와 수도원이 보인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서북서쪽으로, 엘-쿠베이베와 거의 같은 거리 인 약 7-8 마일 떨어진 곳에 아부 고쉬 Abu Ghosh 마을이 있다 . 이 마을의 이름은 터키 시대의 산적 두목의 이름을 딴 것이지만, 좀더 초기의 이름은 카르예트 엘-에납Qary e t el-Enab 이었으며, 이것은 언약궤가 20 년 동안 머무른 구약의 도성 기랏-여아림 Qirya t Yea rim 또는 Kiri a th-j e arim(삼상 7:2) 의 다른 형태이다 . 처음으로 이 지대를 신약의 엠마오와 동일시한 것은 그 곳에 교회 (1944 년에 발굴됨)를 세 운 십자군에 의해서였고, 이것은 아마도 바로 그 거리가 60 스다디온 (눅 24:13 [(25 리〉])과 일치하는 것에 근거했던 것 같다 . 그러므로 아 마 아부 고쉬도 역시 신약의 엠마오가 아닐 것이다. 245 고대의 엠마오, 암와스에 있는 로마 시대 벌장의 모자이크 지금의 캐나다 공원인, 아랍인의 마을 암와스 ‘Amwas 의 부지는, 근처에 있는 시토 수도회 (C i s t erc i an ; 1098 년에 프랑스 시토 Cit ea ux) 에서 창설됨 - 역주)의 〈라트룬 대수도원 Abbey of Laoun 〉과 함 께, 예루살렘으로부터 욥바로 향하여 서북서쪽으로 뻗어 있던 고대 의 간선 도로 위에 놓여 있다. 그 장소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18 마 일 되는 곳인데, 이것은 r 시내 사본』과 r 팔레스타인 시리아어 Pales- tinian Sy riac 역 본」 의 누가복음 24 : 13 에 언급된 약 160 스다디 온과 같 은 거리이다. 아랍어 형태 가운데 바로 그 엠마오라는 이름이 보존

되 어 있으므로, 이 곳이 마카베오상(I Mace 3:40, e tc.)과 요세푸스의 책 (War II 5, 1§ 71 i\µµ aouc; ; Ant. XVIl 10, 7 §282 'Eµ µauc ;, e tc.)에서 자주 언급되는 고대의 엠마오 마을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 의 여지가 거의 없다. 이 엠마오에 관하여 요세푸스는 이야기하기를, 그 곳이 시리아를 다스리던 로마의 총독 바루스 Varus(B.C . 6-4) 에 의하여 불태움을 당 했다고 한댜 한편으로 소조멘 Sozomen (Ch Hi st. V 21) 은 보고하기 를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에는 엠마오에게 니코폴리스 N i co poli s 라는 이름이 주어졌다고 한댜 마침내 유세비우스는 그의 『지명록』 (90 쪽)에서 엠마오가 바로 〈지금 팔레스타인의 유명한 도시 니코폴리스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이 잘 알려진 엠마오와 누가복음 24:13 의 엠마오를 동일시하기에 이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르도 순 례 자 (GEYER 25 쪽 ; LPPTS I-B, 28 쪽 ; CCSL CLXXV, 20 쪽 ; WET 163 쪽, n. 2) 도 니코폴리스라는 이름의 한 도시를 언급하면서 그것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로마 이수(~里數)로 22 마일 되는 곳에 있었다고 한 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암와스까지의 이 거리가 자주 이 곳과 누가복 음 24:13 의 엠마오를 동일시하는 일을 반대하는 논증으로 주장되어 왔으나,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그 거리는 r 시내 사본』과 (아마도 팔레스타인의 전승을 대표하는) r 팔레스타인 시리아어 역본」에 있는 본문의 160 스다디온과 잘 조화되고 있다. F.-M. 아벨과 J. w. 크로 우푸트 J. W . Crow foo t (PEFQ S 1935, 43 쪽)는, 팔레스타인의 국토와 백성의 습관을 익히 아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글로바와 그의 동료가 당일에 예루살렘으로부터 암와스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올 수 있었다 는 사실을 믿는 일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경연구원 Ecole B i b liqu e 의 도미니크회 수사들 에 의한 암와스 발굴 작업이 l 'ir7 5 년에 시작되어 1924-1930 년에 끝났 다. 주된 부지에서 상당한 크기의 건물 다섯이 식별되었다. 그 첫째

건물은 L.-H . 뱅상이 제 12 세기의 전반기, 죽 십자군 시대의 것으로 생각하는 한 작은 교회였다. 그 아래에는 더 초기의 것으로 훨씬 더 큰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이것은 회중석과 두 개의 측랑, 그리고 남 동쪽으로 향한 세 개의 후진을 가진 바실리카였다 . 이 바실리카의 바닥은 십자군 교회의 바닥보다 70 센티미터 밀에 있었다. 한편 이 바실리카의 북서쪽 모퉁이 아래에는 그 바실리카가 세워질 때 부분 적으로 파괴된 가옥의 유적이 남아 있었다. 이 바실리카의 서쪽 벽 의 일부가 그 집의 벽들 중 하나와 일치되어 있었고, 그 집의 바닥 모자이크의 얼마는 그 교회의 바닥 모자이크로 재사용되었다 . 그 집 은 북쪽으로 좀더 멀리 뻗어나갔고, 거기서 그 벽들 중 하나와 마주 보면서, 그 큰 바실리카와는 하나의 작은 뜰로서 분리되어 있는 다 론 하나의 좀더 작은 바실리카가 세워졌다 . 이 작은 바실리카의 남 동쪽 끝에는 침례탕이 있었다. 이것들이 그 다섯 건물인데, 죽 십자 군의 교회, 좀더 큰 바실리카와 좀더 작은 바실리카, 침례탕, 그리고 가옥, 둥이다. 뱅상 (Emmaus, pl. VIlI) 은, 훌륭한 로마식 별장의 일부로 추측되 는 그 가옥의 모자이크를 세베란 Severan 시대, 죽 제 2 세기 말엽 내지는 제 3 세기 초의 것으로 간주하며, 모자이크를 재사용한 그 큰 바실리 카는 제 3 세기의 것으로 생각했다. 그 중에 작은 바실리카는 큰 바실 리카가 무너진 후인 제 6 세기에 와서야 세워졌다고 그는 생각했다. 바칭 어 (II, 126 쪽)는 그 가옥이 제 3 또는 제 4 세기 에, 그리 고 큰 바실 리카는 그 후에 세워졌다고 생각한다. 크로우푸트 (PEF Q S 1935, 45-47 쪽)는 그 가옥을 제 5 세기 말 이후의 것으로, 그리고 큰 바실리 카를 제 6 세기 중반 이후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모자이크롤 가진 가옥이 아직 서 있던 동안에도 그 작은 바실리카가 어쩌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큰 바실리카에 재사용되었고 새들과 초 목들을 두드러지게 그린, 그 가옥의 모자이크 한 부분이 이 사진에

나타나있댜 246 암와스에 있는 바실리카의 구도 여기에 그려진 구도와 복원된 형태는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245 항), 회중석과 두 개의 측랑 및 세 개의 후진을 가진 큰 바실리 카를 보여 주고 있댜 이 교회의 규모는 길이가 46 미터, 폭이 24 미터 이댜 247 암와스의 침례탕 두 개의 바실리카가 각각 가지고 있는 벽의 간격이 약 6 미터이고, 그 중에 작은 바실리카는 그 북쪽에 있는 큰 바실리카와 평행되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것의 남동쪽 끝에, 주된 바실리카에 있는 세 개의 후진과 곧바로 나란히 하나의 작은 울타리가 있었는데, 그 안 에는 침례 수조가 있었다. 이 사진은 그 침례탕의 위에 있는 현대적 대피소의 귀퉁이에서, 죽 남서쪽으로부터 찍은 것이다. 모퉁이 근처 에 있는 왼쪽 벽에는 인근의 저수지로부터’침례탕으로 물을 대어 준 수로들의 구멍이 있다. 침례 수조 자체는 네 개의 잎사귀를 가진 꽃 처럼 사엽(四葉) 장식의 형태로 되어 있다.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앞에서 말한 세 곳 (244 항 이하) 중 어느것 보다도 더 신약의 엠마오로 생각되는 제 4 의 장소가 있는데, 이번에 는 그 곳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요세푸스 (War VII, 6, 6 §217) 는 오직 한 곳에서 엠마오라는 한 마을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마을 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단지 30 스다디온(약 3.5 마일)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암와스와 동일시될 수 없다고 말한다. 예루살렘과 매우 가까 운 이 장소에 베스파시아누스 Ves pe s i an 는 75 년에 800 명의 고참병들

을 주둔시켰다.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4 마일 떨어지고 욥바로 내려가는 간선 도로변에 있는 모차-일리트 (Mo tz a- Illit)의 현대 이스 라엘 정착지와 가까운 지점에 칼로니예 Q alo niy eh ――아마도 라틴어 콜로니아 Colo ni a 에서 유래된 듯함-라고 불리는 한 장소가 있으 므로, 이 곳은 요세푸스가 한 곳에서 언급한 그 엠마오의 위치일 수 도 있다. 1942 년과 1964-1965 년에 그 폐허를 발굴한 결과, 비잔틴 시 대(제 5-6 세기)의 한 기독 교회와 수도원의 유적이 나타났다. 하지만 순례자의 기록들 중에서는 이 장소에 대한 초기 문헌에서의 중거는 결여되어 있다. 또한 예루살렘으로부터 30 스다디온 떨어진 이 거리 는 누가복음 24:13 에 기록된 훨씬 더 큰 숫자인 60 또는 160 스다디 온과 맞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승천과 연관된 장소들에 관해서는 앞에서 감람산 위에 있는 부지들을 고찰하는 일과 관련하여 이미 취급한 바 있다 (154 항 이하).

무덤

3

앞에서 우리는 예수의 무덤을 가상적으로 재구성한 것을 보았는 데 (2 'l:t항), 이것은 동시대 유대인의 무덤들에 관한 지식, 그리고 복 음서에 기록된 관련 사항들을 서로 비교한 것에 기초한 것이었다. 거기서 간단하게 말한 것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이제 우리는 유대인 무덤들의 발전 과정을 살펴볼 것인데, 이것은 또한 우리가 장지에서 발견된 여러 가지 표시와 기호들을 관찰할 때 나타나는 문제들을 해 결하기 위한 준비도 될 것이다. 이 장지들 중에서 더러는 초기 기독 교와 어쩌면 관련이 있고, 더러는 확실하게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최초로부터 팔레스타인 무덤의 대다수는 단순히 땅에 토장한 것 들이어서 오래전에 이미 되찾을 수 없을 정도로 유실된 것으로 짐작 된댜 도기를 사용하기 전인 신석기 시대 여리고에서는 가옥의 바닥 아래에 구덩이를 파서 무덤을 만들었다. 청동기 시대의 텔레일라토 갓술 Teleila t Ghassul 에 는 집 안에 만들어 진 어 린 아이 의 무덤 이 있 는데, 이것은 하나의 도기 항아리 속에 들어 있고 그 주위는 돌로 싸여 있다. 무덤 구덩이가 이따금씩 그렇듯이, 돌들로 덮여져서 그 윤곽이 나타날 때는 이런 것을 석궤 무덤 cis t b uri al ――헬라어 Kt m n

(키스테)와 라틴어 cis ta , (치스타), 〈통, 궤〉에서 온 단어 - 이라고 하는 것이 관례이다. 사람이 판 구덩이와 함께 자연 동굴도 역시 장 지로 이용되었으며, 이것들은 물론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다소간에 변형될 수도 있었다. 보다 더 정교한 무덤들은 바위 속을 깎아서 만들었다. 이것들은 보다 더 정교하고 또한 만들기도 더 어려웠기 때문에, 이런 무덤들 은 보통 그것들을 만들 만한 여유가 있는 소수의 부유층의 소유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예루살렘에는 알려진 고대의 바위 무덤이 대략 500 개쯤 있으며, 이것들은 그 무덤들이 사용되던 시기 동안에 그만 한 크기의 도성에 있어야 했던 무덤 수의 5 퍼센트도 안 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의 주된 형태들이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과정은 아래에 예시될 것이며 (248-258 항), 그런 다음에 신 약 시대의 몇몇 특정한 무덤들의 형태도 살펴볼 것이다 (259-281항).

초기 무덤들의 발전 과정 수갱 무덤 248 여리고의 무덤 A 111 의 단면과 구도 제 4 천년기의 후반기부터 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리고에는 수 백 개의 무덤들이 바위 속을 깎아 만들어졌는데, 이것들은 그 고대 도성의 텔의 북쪽과 북서쪽 지역에 있었다. 가파른 경사면의 허리에 거의 수평적으로 입구가 나 있는 철기 시대의 무덤들을 제의하면, 이 무덤의 대부분은 수직으로 된 수갱(堅抗)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 밑바닥에는 하나의 돌 또는 여러 돌들로 닫혀진 하나의 작은 구 멍이 있어서 묘실로 들어가는 입구의 역할을 했다. 그와 같은 수갱 무덤이 어떻게 배열되어 있었는지는 이 단면과 구도에 잘 나타나 있 다. 여리고의 발굴 작업에서 이 묘는 무덤 A 111 (Tomb A 111) 이라 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것은 초기 청동기 중엽 또는 중기 청동기 시 대에 속하는 것이다.

249 여리고의 무덤 A 3 의 수갱 이 수갱 무덤도 역시 초기 청동기 중엽 내지 중기 청동기 시대의 것이다. 이 수갱을 내려다보면 묘실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고 있는 큼직한 돌이 보인다 . 250 여리고의 무덤 A 23 에 있는 매장 현장 이 매장(埋葬) 현장은 여리고에 있는 다른 수갱 무덤, 곧 무덤 A 23 으로 알려진 무덤의 내실에서 원래의 모양 그대로 발견되었다. 시 신은 머리를 서쪽으로 향한 채 쪼그린 자세로 그 묘실의 뒤쪽에 안 치되어 있었으며, 두 팔과 가슴에는 하나의 단도( 短 刀)가 놓여 있었 댜 이것의 연대는 초기 청동기 중엽 내지 중기 청동기 시대에 속한 댜 수갱 무덤들은 여리고 이의에 다른 많은 곳에서도 발견된다. 홍미롭게도 이것과 매우 유사한 형태의 매장법이 기독교 이전 시 대의 마지막과 기독교 시대의 시작에 여리고로부터 여러 마일 떨어 지지 아니한 저 유명한 쿰란 지대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다. 여 기에는 주된 거주 지역의 동쪽에 널따란 묘지가 있고, 이 큰 묘지의 북쪽과 남쪽에 두 개의 작은 묘지들이 있는데, 이것들을 합하면 아 마도 1200 개 정도의 무덤을 가진 묘지가 된다. 이 무덤들 중 하나가 l 'o/ 3 년에 샤를르 클레르몽-간노 Charles Clermon t -Ganneau 에 의 하 여 발굴되 었고, 40 개 이 상이 1909 년과 1955 년 사이 에 드 보 R. de Vaux 에 의하여, 그리고 또 한 개가 1966 년에 스테콜 S. H. S tec koll 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이것들은 약 4 또는 6 피트 깊이의 수갱으로 이 루어져 있었는데, 그 밑바닥에는 매장지 자체를 위한 측벽(側壁)에 와혈(腐穴, 벽이 움푹 들어간 곳-역주)이 있었다. 이와 같이 와혈이 있는 쪽으로 그 수갱의 바닥 부근에 하나의 작은 바위턱이 있었고,

햇볕에 말린 벽돌들이 이 바위턱의 떠받침을 받아 시신 위쪽으로 쌓 여 있었다. 입구는 납작한 돌로 닫혀졌고, 마침내 그 수갱은 흙으로 채워졌다 . 이러한 것을 볼 때 아래에서도 보게 되겠지만(§§25.5 -256), 팔레스 타인의 다른 곳에서는 다른 형태들이 유행하고 있을 때, 쿰란은 초 기 형태의 무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묘실무덤 251 므것도의 무덤 T/로 들어가는 입구 정상적인 수갱 무덤의 경우에 설계에 있어서의 특징적인 형태는 수직으로 된 수갱이며, 이 수갱은 보통 하나의 묘실 또는 여러 묘실 들로 이어진댜 다소간 조심스럽게 바위를 깎아서 만든 내부의 방 또는 방들을 강조할 경우와 수직으로 된 수갱 이외의 여러 방법들, 죽 직접 통하는 출입구나 수평 또는 경사로 된 통로, 혹은 계단과 같은 것을 통하여 무덤에 들어갈 수 있는 경우, 우리는 이것을 묘실 무덤 chamber t omb 이라고 칭할 수 있다. 므것도에 있는 지금까지 탐 사된 많은 청동기 시대 무덤의 지배적인 형태는 여전히 정상적인 수 갱 무덤의 형태이지만(무덤 84 와 같은 것들은 다수의 묘실을 가지고 있다), 후기 청동기 시대에는 묘실 무덤의 예들이 발견된다. 이 무덤 들 중의 하나로 들어가는 입구가 이 사진에 보인다. 252 므것도의 무덤 T/의 구도 이것은 2.5 1 항에서 그것의 입구를 사진으로 보인, 후기 청동기 시

대 무덤의 구도이다. 무덤은 짧은 통로와 바위를 깎아 만든 내실로 이루어져 있다. 안쪽 곧 남서쪽에는 와혈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의 솟아오른 부분에 의하여 주된 묘실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전장( 全 長) 의 성인이 안치되기에 충분한 크기로서 아마도 그렇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발견될 당시 그 무덤에 남아 있던 뼈와 도기는 모두 주된 묘실의 바닥에 있었다. 묘실 무덤들은 므깃도 이외에도 다른 많은 곳에서 발견된다.

바위턱을 가진 묘싣 무덤 253 텔 엔-나스베의 무덤 5 의 구도와 단면도 앞의 구도에서처럼 시신을 땅바닥 위에나 심지어 와혈 속에 두지 아니하고, 바위턱이나 선반 혹은 벤치나 벽의자 위에 시신을 안치할 자리가 마련될 때에는-이런 식의 배치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 리운다-, 독특한 형태의 묘실 무덤이 개발되었다. 이 구도와 단 면도는 텔 엔-나스베 Tell en-Nasbeh 의 북쪽 공동 묘지 에 있는 무덤 5 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배치의 훌륭한 실례를 보여 준다. 그 안 에서 발견된 도기에 의하면, 그 무덤은 철기 시대 I 기와 철기 시대 II 기에 사용되었는데, 아마도 제 10 세기에 시작해서 제 8 세기까지 계속 된 것 같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전반적으로 이러한 형태의 무덤이 후 기 청동기 시대로부터 알려져, 제 9 세기와 그 이후로 지배적인 형태 가 되었으며, 헬라 시대의 새로운 양식들에 의하여 점차적으로 대치 되었으나, 로마 시대의 몇몇 실례에서 아직도 발견되고 있다.

254 텔 엔-나스베의 무덤 5 의 모형 253 항에서 본 구도와 단면 이외에도 〈세부적으로 예시한〉 이 모형 은 텔 엔-나스베의 무덤 5 를 구상화할 수 있게 해 준다. 거기에는 바깥 뜰이 있었고 , 사각형으로 된 작은 입구와 계속해서 다섯 개의 계단이 있어서 그것으로 내려가면 직사각형의 방으로 들어가게 되 어 있었다. 발굴 당시 이 방의 양쪽으로 후반부에는 뒷벽을 향하여 만들어진 하나의 바위턱 또는 선반이 남아 있었다. 뒷 선반의 오른 쪽 끝에는 다른 하나의 사각형으로 된 작은 입구가 있었는데, 여기 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넓은 계단이 한 개 있었고, 이것을 통하여 들 어가면 규모가 거의 정육면체로 된 평평한 내실이 있었다. 대다수의 무덤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오래전에 도굴되었으며, 그 속에 남겨진 것들, 즉 보잘것없는 유골들과 다량의 도기가 널따란 묘실 안에 함께 버려져 있었다. 하지만 원래는 죽은 사람들의 시신 들이 필시 그 널따란 묘실 안에 있는 바위턱들 위에 안치되었던 것 으로 보이며, 새로운 매장을 위하여 이 바위턱들 위에 공간이 필요 했을 때는 오래 전에 매장한 시체들의 유골을 아마도 뒤쪽에 있는 보다 작은 묘실 안에 모아놓았던 것 같다. 이와 같은 허다한 실례들로부터 우리는 매장 바위턱들을 가진 이 러한 형태의 묘실 무덤이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 왕들의 시대와 페르시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코킵 Ko kim이 있는 묘실 무덤 255 텔 엔-나스베의 무덤 4 의 구도와 단면 또다른 형태의 묘실 무덤이 개발되었는데, 여기에는 내실 또는 묘

실들 안에 있는 장지들이 벽의 뒤쪽으로 곧바로 파들어간, 수평으로 된 갱들 또는 벽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와 같은 갱은 보통 사각 형으로 만들어졌고, 그 천장은 둥글게 되어 있었으며, 그 규모는 시 체 한 구를 들여놓을 만한 길이였는데, 아마도 머리를 먼저 집어넣 었을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무덤의 좋은 실례는 텔 엔-나스베의 북 쪽 공동 묘지에 있는 무덤 4 에서 발견되는데, 이것의 구도와 단면을 보면 여기에 제시된 그림과 같다. 거기에는 땅 속으로 파인 커다란 앞마당과 함께 지붕이 덮인 현관방과 작은 입구가 있었는데, 이 입 구는 의심할 여지없이 한때는 움직일 수 있는 돌로 닫혀 있었다. 주 된 묘실은 대충 정사각형처럼 생겼고, 그 바닥의 중심에는 네모난 구덩이가 있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유골들을 모아놓던 장소였을 것 이다. 이 구덩이의 사면 주위에 남아 있던 넓은 바닥면은 묘실이 있는 벽에 인접한 통로를 마련해 주었다. 이 바닥의 표면 높이에 묘실이 있는 벽들 내부를 깎아서 수평으로 된 무덤 갱들을 만들었는데, 북 쪽에 세 개, 동쪽에 세 개, 그리고 남쪽에 두 개가 있었다. 남쪽에 있 는 한 갱은 삼면으로 널따란 바위턱과 접해져 있었는데, 이것은 아 마도 가족의 우두머리와 같은 특별히 중요한 인물을 위하여 만들어 진 것으로 보인댜 이 무덤 안에 있는 도기는 헬라-로마 시대의 것 이며, 헤롯 아켈라오 Herod Archelaus 의 청동 주화 한 개가 발견되었 는데, 이 것은 아마도 이 무덤 이 그의 치 세( B.C. 4-A. D. 6) 동안의 것 이었음을 말해 준다. 여기에 예시된 형태의 무덤은 애굽에서 기원된 것으로, 페니키아 인의 영향으로 팔레스타인에 알려졌을 것이다. 지하의 방 또는 홀에 는 거기서 뻗어나간 수평으로 된 무덤 갱들이 여러 · 줄 있는데, 이와 같은 방은 특별히 알렉산드리아의 사시(死市, 〈사자[死者]의 도시〉라 는 의미의 대형 공동 묘지 __ 역주)에 흔히 있는 것이며, 페니키아의

도시들과 헬라 세계의 다른 곳에서도 알려져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는 이것이 B.C. 200 년경에 존재한 페니키아의 거류지였던 마릿사 M ari ssa(259 항 이하)에서 이미 발견되었다. 예루살렘에서는 대다수 의 고대 무덤들이 이러한 형태로 되어 있으며, 그 연대는 대략 B.C. 150 년으로부터 150 년 사이 이 다. 이 러 한 형 태의 무덤 이 사실상 유대 인 가족 무덤의 표준형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헬라 세계에 있던 이와 같은 무덤들에 관하여 논하자면, 우리가 지금까지 말해 온 수평으로 된 갱들 또는 벽감들을 시체실 (locul i[로 쿨리], 단수는 loculus[ 로쿨루스])이라 칭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작은 장소〉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에서는 랍비들 이 무덤 갱을 일컬을 때 쓰는 후기 히브리어 단어인 C’='=( 코킴, 단 수는 코크)을 사용하는 것이 관례이다. 벽감들에 대하여 이 용어를 쓰면서, 그리고 6 손바닥 넓이 =1 규빗=약 18 인치 되는 길이를 나타 내는 히브리어의 관습적인 명칭을사용하면서, 『미쉬나』 (Baba Bath ra V1 8 fol. 100b-10la GET V1 1211 f. SET N 3, 42lff. DM 375) 는 한 가족 무덤의 건설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석굴의 중앙 공간 은 4X6 규빗(의 면적)이 있어야 하며, 여덟 개의 무덤 벽감들ni ches (ko ki m) 이 그 속으로 개설되어야 하는데, 곧 이쪽에 세 개, 저쪽에 세 개, 그리고 (통로의) 건너편에 두 개가 있어야 한다• 벽감들은 길 이가 4 규빗, 높이가 7 손바닥 넓이, 그리고 폭이 6 손바닥 넓이가 되어 야 한다.〉 여러 랍비들의 다양한 견해들이 잇따르고 있으며, 그에 수 반된 게마라에서는 각기 다른 구도들과 규격들이 자세히 토의되어 있다.

아치형 석묘가 있는 묘실 무덤 256 텔 엣-자카리예에 있는 한 무덤의 구도와 단면도 텔 엔-나스베에 있는 무덤 5 의 본보기에서 예증된 바와 같이 (253 - 254 항 이하), 철기 시대로부터 팔레스타인 지방의 친숙한 무덤 형태 는 묘실 형태였으며, 이 묘실 안에는 무덤을 파 들어가는 과정에서 바위턱 또는 선반을 만들어 두었는데, 이것은 시체를 올려놓는 장소 였댜 바위턱이 옆쪽으로 바위 벽 속을 깎아 만들어져서 불쑥 나온 아치 또는 둥근 천장 같은 것이 그 위에 형성되었을 때는 하나의 특이한 매장지롤 이루게 되는데, 이것은 관례적으로 아치형 석묘 arcosol i um 라는 용어로 불린댜 이 라틴어 용어 (arco, 〈아치 [arch]+soliu m , 〈석 관, 석묘 [sarcop !rigus]〉는 특별히 로마 시대의 지하 묘지들에 있는 아치 형의 벽감에 대하여 사용되는데, 여기에는 자주 석관이 놓여 있었다. 이 형태 자체는 그리스도와 소 아시아로부터 시리아를 거쳐서 팔레스타인 으로 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쉽사리 받아들여진 것은 바위턱 무덤 이 이미 매우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의 무덤 구조의 비 교적 정교한 본보기――다섯 개의 아치형 석묘를 가진――는 여기에 제 시 된 구도와 단면도에 나타나 있다. 이 무덤은 셰펠라 Shep helah( 평 원) 에 있는 텔 엣-자카리 예 Tell ez-Zaka riyeh , 그 연 대 는 아마도 후기 헬라 시대일 것이다. 도해에서 A 는 전체 무덤의 구도이고, B 는 A 에 있는 장축(長軸)의 단면도이며, C 는 단축(短軸)의 단면도이다 . 다음 의 도해 (257 항)에 있는 본보기가 보여 주듯이, 아치형 석묘 형태의 무덤은 기독교 시대의 제 4 세기에도 여전히 팔레스타인에서 사용되 고 있었다.

함몰 묘가 있는 묘실 무덤 257 텔 엔-나스베의 무덤 33 에 있는 아치형 석묘와 함몰 묘 아치형 석묘 아래 있는 묘를 위한 바위턱 (256 항 참고)은 단순한 선 반일 수도 있고, 앞 테두리에 솟아오른 가장자리와 머리끝에 솟아오 른 부분을 가진 것일 수도 있으며, 또한 시체를 담기 위하여 하나의 온전한 홈통 또는 함몰 묘(隋沒墓)로 깊숙이 패인 것일 수도 있다. 텔 엔―나스베의 서쪽 공동 묘지에 있는 무덤 33 은 아치형 석묘와 함 몰 묘가 결합된 예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 무덤에서 장원형(長圓形) 의 수갱을 통과해 가면 이상한 모양의 돌로 닫혀 있는 작은 사각형 입구가 있는데, 이것을 통해 들어가면 직사각형의 묘실이 있다. 입구 의 왼쪽에 있는 벽에는 세 개의 코킴이 있고, 뒷벽에 세 개가 더 있 으나, 오른쪽에 있는 벽에는 도해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 선반에 함 몰된 묘를 가진 아치형 석묘가 있다. 이 묘에는 다량의 유리 구슬과 팔찌와 다른 물품들이 있었다. 무덤 안에는 여러 개의 둥들이 있었 는데, 그 중의 더러는 기둥과 아치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심지를 꽂 기 위한 구멍이 일곱 개나 되는 것도 있었다• 6 개의 둥은 십자가들 로 장식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무덤이 마침내는――원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덤의 연대는 비잔틴 시대의 초엽, 아마도 제 4 세기 무렵일 것 이다. 258 텔 엔-나스베의 무덤 19 의 구도와 단면도 무덤 19 는 텔 안-나스베의 서쪽 공동 묘지에 있다. 원래의 무덤은 아마도 하나의 단순한 묘실로서 무덤 5(254 항)와 텔 엔-나스베의 다

른 무덤들에서와 같이, 매장지를 위한 바위 선반을 가지고 있었을 것 이 다. 그 안에 서 저 유명 한 야아사니 야(J aaz ani ah, 왕하 25:2 3 ; 렘 40:8; FLAP 176-177 쪽 참고)의 인장이 발견되었으므로, 원래의 무덤 은 아마도 포로 시대 만큼이나 오래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기에 이 무덤은 이 구도와 단면도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함몰 묘를 포함하 는 원통형의 둥근 천장이 달린 큰 와혈들을 붙임으로써 확장되었다. 무덤 안에 있는 소량의 도기와 야아사니야의 인장은 중기 철기 시대 에 속하는 반면에, 나머지 도기와 특히 많은 동들은 기독교 시대의 제 4 내지 제 6 세기에 속하는 것들이다 . 둥의 3 분의 l 이상이 확실하 게 기독교 시대의 것들인데, 이는 그것들이 십자가들로 장식되어 있 으며, 그 중의 하나는 오기된 형태로 ~c; Xp toi:ou (포스 크리스투, 〈그 리스도의 빛〉)라는 명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다른 많은 예들도 역 시, 함몰 또는 홈통 묘들을 가진 둥근 천장의 묘실 무덤을 널리 사 용한 시기가 제 4 세기부터 제 6 세기까지였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 러한 양식은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서 본질상 기독교적인 무덤 형태 로 일컬어져 왔다. 주된 형식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묘실로 내려가는 수직으로 된 깊은 수갱을 가진 수갱 무덤은 청동기 시대 동안에 계속 널리 보 급되었으며, 어떤 곳에서는 훨씬 후대에도 사용되었다. 묘를 위한 바 위턱을 가진 묘실 무덤은 이미 후기 청동기 시대에서도 발견되며, 철기 시대(이스라엘의 열왕 시대와 페르시아 시대에 들어서기까지, 그 리고 〈제 1 성전〉 시대에는 널리 보급되었다. 코킴이라고 불리는, 수평으 로 된 벽감을 가진 묘실 무덤은 헬라 시대에 나타나며(팔레스타인에서 는 B.C. 2 세기에 마릿사 M ari ssa 에서 처음 나타남. 259 항 이하), 〈제 2 성전〉 시대의 끝까지 주된 형식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아치형 석묘 들 arcosolia (단수는 arcosol i um) 을 가진 묘실 무덤 은 묘를 위 한 바위

턱 위로 지붕이 아치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더욱 정교한 형태 이며, 이것 역시 〈제 2 성전〉 시대에서 발견된다 (BAR 12.2 [Ma r/ Ap r 1986], 36 쪽). 석관들 (296 항 이하), 죽 전신장(全身長)의 매장 퀘 들 b uri al ches t s 은 보통 돌로 만들어졌고 때로는 고도로 장식되어 있 는데, 이것들도 또한 헬라 시대와 로마 시대의 것으로 발견된다. 납 골함들 (302 항 이하), 죽 무덤 에 있는 뼈 들을 이차적으로 수거 하여 넣 어두기 위한 비교적 작은 돌궤들은 주로 헤롯 왕의 치세로부터 3 세 기 초반까지 사용되었다 . 비잔틴 시대에는 묘실 무덤이 일상의 형식 이 되었고, 때로는 둥근 천장으로 만들어졌으며 , 묘를 위한 바위턱 또는 벤치가 때로는 홈통 또는 함몰 묘로 깊숙이 패이기도 했으며, 더러는 머리 끝에 솟아오른 부분을 가지기도 했다.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신약 시대에 와서도 사적인 무덤으로 여전히 사용된 바 있는, 수직으로 된 수갱 무덤에 있어서는 그 수갱의 입구에 돌을 가로놓아서 막았다(요 11:38; AB 29, 426 쪽 참고) . 그리고 수평으로 된 통로를 가진 묘실 무덤에서 는 입구를 둥근 돌로 막았다. 그러나 B.C. 1 세기 AD. 1 세기의 보다 우아한 무덤의 예들('Z7 4, 281 항)에서는 평원반di sk 형태의 돌이 출입 구 앞에 있는 채널로 굴려 들여졌으며, 무덤을 열기 위해서 그것이 〈굴려 옮겼〉졌다(눅 24:2 ; 막 16:3 ; AB 29A, 982 쪽 참고).

마릿사에 있는 헬라 시대의 장식된 무덤들 259 텔 산다한나의 맨 윗도성의 구도 텔 산다한나 Tell Sandahannah 는 셰펠라에 있는 베이트 구브린 Be it Guv rin (엘류테로폴리스 Eleu th ero poli s) 의 남방 2 킬로미터에 있다 . 아랍어 이름은 그 근처에 있는 비잔틴 시대의 바실리카 위에 제 12 세기의 십자군이 세운 건물인 〈성 안나 교회〉로부터 와전된 것이다. 이 텔은 아마도 헬라어로 마릿사 M ari ssa 로 알려진 마레사 Mareshah 라는 구약의 도시와 동일시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이것은 가나안 인의 도시였고(수 15:44, LXX Map rtcr a), 르호보암에 의하여 요새화되 었다(대하 l1:8 LXX Map cL adv). 또한 B.C. 110 년 경에 요한 휘르카누 스 Joh n H yr can y s 에 의 하여 이 두메 인들 Idumeans 로부터 탈취 당했고 (Jo seph us, Ant. XII 9, 나 257 Mtip tcra ; Ant. XII 8, 6 §353 에 있는 어떤 필사본 중거 에 의 하면 Mtip tcrc ra), B.C . 40 년에 파르티 아인들 Pa rthian s 에 의 하여 파괴 되 었다(Ant. XIV 13, 9 §364). 그 텔 위에 있던 고대의 마을은 1900 년에 팔레스타인 탐사 기금에 의하여 조사되었다. 최대의 규모로 봐서 대략 500 평방피트 되는 이

마을 지역은 그 텔의 가장자리 또는 경사면의 약간 아래 쪽에 있는 내벽과 그 경사면을 따라 좀더 멀리 내려간 곳에 있던 외벽으로 둘 러싸여 있었다. 내벽 안의 마을은 거리의 구획들로 대충 나눠져 있 으며, 가옥들과 건물들은 거리에, 그리고 구획들 안에 있는 빈 뜰 주 위에 세워져 있다. 비교적 규칙적인 구도와 또한 거기서 발견된 물 품들-도기, 주화, 헬라어 명각 등을 포함하여 -은 그것이 헬라 시대의 마울임을 보여 준다. 발굴된 부분의 가운데 충은 B.C. 3 세기 와 2 세기의 것으로, 위층은 B.C. 1 세기와 그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260 마릿사의 무덤 D 에 있는 시체실과 벽감둘 1 얽 3-1'&4 년에 클레르몽-간노는 산다한나/마릿사에 있는 〈성 안 나 교회 〉을 연구했고 (Ova cli ah, Corp u s, 135-137 쪽, no. 138), 같은 지 역 내에서 꼭대기가 삼각형으로 된 시체실들을 19 개 가진 무덤 하나 를 검토했으며, 같은 형태로 된 두번째 무덤을 고찰하였다. 1902 년에 피터스 Pe t ers 와 티어쉬 T hi ersch 는 남쪽으로 4 분의 1 마일 떨어진 곳 에 서 이 러 한 형 태의 무덤 들을 4 개 더 조사하였다. 1961-1963 년에 오 렌 Oren 은 텔 산다한나의 주변 지역에서 이미 알려진 것들을 포함하 여 52 개 이상의 무덤들을 검토하였다. 모든 무덤들은 같은 방법에 의해 동일한 기본 구도로 바위 속을 깎아 들어간 것이었다. 꼭대기에는 아마도 피라밋 모양이었던 구조 들의 남은 부분이 있다. 계단을 밟고 돌문을 통해 들어가면 입구 홀 이 있다. 입구 홀로부터 중앙 무덤 홀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는데, 이 무덤 홀에는 그 곳으로부터 가지를 쳐나간 묘실들이 있다. 후자에는 시체실들 죽 삼각형으로 된 꼭대기를 가진 코킴이 있다. 이것들은 평석이나 진흙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와혈 위에는 고인의 이름과 때 로는 그의 사망 일자가 붉은 물감이나 진흙, 혹은 숯으로 기록되어

있다. 명각들은 헬라어, 나바테아어, 그리고 아람어로 씌어 있고, 그 연대는 B.C. 3 세기 초부터 1 세기까지 걸쳐 있다 . 코킴 아래 있는 바 위턱보다 작은 벽감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이전 무덤에서 나온 뼈들 을 간수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것 같다. 예시된 사진은 오렌이 명 명한 바 있는 무덤 D 를 보여 주고 있는데, 이것은 박공이 있는 시체 실과 그 아래에 작은 벽감들을 가지고 있다. 261 마릿사의 무덤 I 의 구도와 단면도 마릿사에 있는 무덤들 중에서 피터스와 티어쉬가 무덤 I 이라고 명 명한 무덤은 가장 잘 알려진 것이며, 여러 면에서 여전히 가장 홍미 있는 것이다. 제시된 도해의 구도와 단면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 이, 이 무덤의 입구는 평평한 지붕으로 된 앞칸 (A) 으로 들어가는 통 로로 이어진다. 양쪽에는 원통형의 둥근 천장으로 된 장원형의 방 (B 와 C) 이 하나씩 있고, 앞쪽에는 평평한 지붕으로 된 주된 방(D)이 벽감처럼 확장된 부분 (E) 과 함께 있다. 방의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바위턱 또는 선반이 있고, 그 위에는 벽 속을 직각으로 깎아 들어간, 꼭대기가 삼각형으로 된 시체실이 41 개가 있다. 주된 방의 동쪽 끝 에 있는 확장된 부분(E)으로부터 더 들어간 곳에는 세 개의 묘실이 있는데, 이것들은 아마도 석관들을 넣어 두기 위한 것으로서, 그 무 덤 안에 매장된 사람들 중의 우두머리들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262 마릿사의 무덤 I 에 있는 사냥 장면 마릿사의 무덤 I 은 그것의 주된 방 (261 항의 D) 의 그림들 때문에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양쪽에는 수닭이 한 마리씩 그려져 있고, 오른편 문설주에는 머리가 셋 달린 재컬 모

양의 개, 죽 희랍과 로마의 신화에서 지옥을 지키는 케르베로스 Cerberus 가 있다. 내부의 코킴 바로 윗벽에는 동물 프리즈fri eze( 소 벽)가 있는데, 이것은 남서쪽 구석에서 시작하여 반대편인 북서쪽 구석 근처에서 끝난다. 이 프리즈의 첫부분이 여기에 보인다. 한 남 자가 긴 나팔을 부는 동안, 말을 탄 사냥꾼이 사냥개들의 도움을 받 아 표범을 항하여 그의 창을 치켜들고 있다. 이 동물의 정체와 이 프리즈에서 뒤따라 나오는 다른 동물들의 정체는 위의 헬라어로 기 록된 이름으로 밝혀져 있으며, 이 경우에는 止난>tiM OC (파르달로스, 〈표범 〉 )라고 적혀 있다. 263 마릿사의 무덤 I 에 있는 동물 프리즈의 일부 무덤 I 에 있는 전체 프리즈에서, 명각을 읽을 수 있고 그림이 확 실한 경우로는, 다음과 같은 동물들을 찾아볼 수 있다. 표범, 괜써 표범p an th er, 황소, 기린, 수돼지, 그리핀griffin(독수리의 머리 • 날개 • 발톱에 사자의 몸을 가진 기괴한 짐승-역주), 오릭스 o :ryx(아프리카 산 영양의 일종――역주), 코뿔소, 코끼리, 악어, 따오기, 하마, 들 당 나귀, 호저( 豪 猪) , 그리고 삼괭이가 그것이다 . 본보기로 제시된 사진 은 그 프리즈의 남쪽에 있는 마지막 부분을 보여 주고 있다. 나타난 동물들은 적갈색으로 칠해진 뚱뚱한 코뿔소 PINOKEPWC 와 회흑색의 코끼리 EAE ll> AC 이다 . 동물의 정체를 밝혀 주는, 아마도 그 그림들이 그려질 때 기록된 명각들이 그 동물들 위에 적혀 있는 것 이외에, 거기에는 다수의 시 체실로 들어가는 입구들 바로 위에 다소 비슷한 글씨로 적힌 벽서들 이 있다. 예컨대 사진의 오른쪽에서 우리는 시체실로 들어가는 입구 의 오른쪽 꼭대기의 경사선과 동물 프리즈의 밑변 사이에 있는 삼각 형 지대에 다음과 같은 명각이 기록된 것을 본다.

MilvilITP IOY TOY MEEPBAAOY 이것은 〈메에르발의 아들 데메트리오스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데메트리오스는 흔히 쓰이던 헬라식 이름이고, 메에르발은 흔히 쓰 이던 페니키아인의 이름인 마헤르바알 Maherbaal_ _〈바알의 선물〉 ―의 헬라어 형태이다. 이 무덤의 주된 방의 확장된 부분(E) (261 항 에 있는 구도를 보라)의 남쪽에 위치한 석관 묘실로 들어가는 입구 위에는 비슷한 글씨로 된 긴 벽서가 적혀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im oU0 4xi떄c; ~Ec rµa lou cip~ ac; CCilV EV Map i.Ol J ~t6© Vl. © V ftn tptOK OV' tQ xat tpl a xat voµt cr8 Et c; I 퍄vi: ©v t& v xa8' aot o v xpn ( Jt 6t a t o c ; xat 4ltA o t KE t6t a t o c ; ciltt8a vEv 6t Ptli laa c; E'tl l I tP6 oµ iiKo v i:a Kat te( Jc r ap a et. Ap ollo p ha nes, son of Sesma ios , was the ruler of the Sid o n ian s in M 頭 se for thirty-three ye ars, and he was recog nize d as the kind est and most household-lov ing of all tho se of his time , and he died hav ing live d seventy -fou r ye ars. 세스마이오스 Sesm 책 )S 의 아들 아폴로파네스 A po llo p hanes 는 33 년 간 마리 세 에 있는 시 돈인들 S i do ni ans 의 통치 자였으며 , 그는 그의 당대 의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친절하고 가장 가솔(家率)을 사랑하는 사 람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그는 74 년을 향수하고 죽었다. 이것을 기록한 사람은 끝에 ttn ( 에테)라는 단어를 다시 반복하기 시작했다가 그의 실수를 깨닫고는 중단했다. 이 명각의 중요성은 분명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장소의 이름이 마릿사(헬라어 철자로 Ma pi.떄 [마리세])임을 확인해 주고, 시돈으로부터 온 페니키아인들의 거류단

이 이 곳에 정착했음을 보여 주며, 3 분의 1 세기 동안 그들의 우두머 리였던 통치자의 이름을 밝혀 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다른 무덤 명각들이 시체실들 위에, 보통은 동물 프리즈 자체 안에 그려져 있으며, 이것들은 때때로 동물 형상을 가로질러 기록되 어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형상을 손상시키고 있는 것으로 봐서 후기에 기록된 것임이 확실하다. 이와 같이 첨기된 글들의 일례가 사진에서도 나타나 있다. 그것은 해 y ear 를 뜻하는 각진 기호와 숫자 2 에 해당하는 베타라는 문자로 시작하여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LB /J.Y CTPOY CABOYC THC KOCNATANOY In the second ye ar in the month Dyst r os . (Grave) of Sabo, the daug h te r of Kosnata no s. 제 2 년 뒤스트로스 월(月)에. 코스나타노스의 딸 사보의 (무덤 ). 코스나타노스는 〈코스가 주었다 Kos has gi ven 〉라는 의미의 이두 메인 이름이다. 이것은 요세푸스가 헤롯 대왕의 누이인 살로메와 결 혼한 것으로 언급한

위의 명각에 있는 〈제 2 년에 (be ta)〉라는 연대와 비교하여 또한 주 목할 만한 것은 다른 곳에 그려진 첨기에 기록된 〈제 1 년에 al pha 〉라 는 연대와 한 벽서에 기록된 〈제 5 년에 (e p s il on) 〉라는 연대인데, 후자 는 그 무덤 안에서 고문서학적으로 가장 후기의 첨기들 중의 하나이 다. 이 세 연대는 아마도 매우 근자에 수립되어 마릿사에 도입된 어 떤 기원을 기준으로 매겨진 것이다. 근방에 있는 도성인 엘류테로폴 리스 Eleu th ero poli s 에서 어쩌면 그리스도의 탄생 무렵이나 그보다 더 일찍 시작된 기원인 하나의 지역적 기원을 사용한 것에 대한 명각의 증거 가 있으므로 (RB 11 (1902], 438 쪽 이 하), 이 연 대 들은 이 기 원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다른 면으로 본다면, 이 사시(死市)의 무덤 I 과 다른 세 무덤들에 있는 퍽 많은 연대들은 제 117 년으로부터 제 194 년 까지에 걸친 일관된 연결을 이루고 있다. 만약 이 연대들이 당시 널 리 사용되 던 셀류시드 기 원 Seleucid era 울 기 준으로 하여 마게도니 아 달력 (FHBC §193) 을 따라서 말한 것 이 라면, 그 시 기 는 B.C. 196/ 195 년으로부터 119/118 년까지 에 걸친 연대 에 해 당한다. 마릿사에 있는 이 사시의 다른 무덤들은 길게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무덤 II 는 무덤 I 과 대동소이한 구도로 건조되었다 . 전반적 으로 그것은 그 안에 포함된 명각들과 비교적 단순한 배열로 되어 있었고, 그림들도 비교적 소수였다• 그림들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된 것은 다채로운 색깔의 줄무늬가 있는 의상을 입은 음악가 두 사람 —남자 한 사람과 여자 한 사람_一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마찬 가지로 무덤 m 과 무덤 IV 도 전반적인 배열이 동일하게 되어 있었 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볼 때 마릿사에 있는 이 사시는 헬라 시대 의 한 공동체를 나타내 주고 있다 . 그것은 이두메인의 영토 안에 있 었고, 이두메인의 신 이름이 명각들 중에 있는 개인 이름들 가운데 나타난다 . 그 지역은 B.C. 198 년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Pt ol emi es 의 지배 아래 있었고, 동물 프리즈에 그려진 짐승들은 주로 애굽의

것들이다. B.C. 198 년 이후로는 이 지대가 셀류시드 왕조 Seleu ci ds 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나타난 연대의 대부분이 셀류시드 연대이다. 마 릿사에는 시돈인의 거류단이 정착하었고, 그들의 우두머리 아폴로파 네스 A po llo p hanes 와 그의 가족 중 다른 이들이 이 곳에서 장사된 것 이 분명하다.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헬라 및 로마 시대의 무덤들 264 야고보의 무덤과 스가랴의 무덤의 구도 고대의 예루살렘 곧 여부스인의 도성이 기드론 골짜기의 서쪽, 기 혼 샘의 위쪽에 있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176 항). 골 짜기를 가로질러 감람산의 서쪽 경사면과 현재의 도미누스 폴레비 트 Do min us flev it (161 항 이하, 319 항 이하)가 있는 지대에 여부스인 의 매장지, 곧 중기 청동기 시대의 말부터 후기 청동기 시대에 들어 가기까지, 다시 말해서 대략 제 16 세기부터 제 13 세기까지 사용되던 사시(死市)가 있었다. 요엘 3:2 은 여호사밧(〈야훼께서 심판하신다〉) 골 짜기를 말하고 있으며, 보르도 순례자 (169 항 참고)와 유세비우스 및 제롬 (0no l1J[lSti con 118-119 쪽)은 이 골짜기가 예루살렘과 감람산의 사이에 위치해 있고 기드론 협곡과 동일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 리하여 초기로부터 이 골짜기의 경사면들에 무덤들이 있었다는 사 실은 선지자의 말씀이 그 골짜기를 최후의 심판이 있을 장소로 가리 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사실과 함께 그것이 여러 세기를 통하여 유 대인들과 어쩌면 기독교인들 (326 항), 그리고 모슬렘교인들을 위하여

많이 사용된 매장지로 보게 하였다. 그 골짜기에 있는 다수의 무덤 들 중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헬라 시대와 로마 시대의(근래의 견해 에 의 하면 헤 롯 대 왕의 치 세 와 70 의 사이 . Rahma ni in BA 45 [1981 ], 47 쪽) 네 개의 무덤, 죽 일반 대중에게 야고보의 무덤 , 스가랴의 무 덤, 압살롬의 무덤 , 그리고 여호사밧의 무덤으로 알려진 무덤들만 여 기서 토의할 것이다. 구도에서 야고보의 무덤은 왼쪽에 있고 , 스라갸의 무덤은 오른쪽 에 있댜 야고보의 무덤의 행각은 사실에 있어서 절벽의 측면에 높 이 있고 (256 항을 보라), 그 뒤에 있는 현관은 두 개의 통로룰 통하여 들어가게 되어 있다 . 한 통로는 북쪽에 있는 것으로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이고, 다른 한 통로는 남쪽에 있는 것으로 스라갸의 무 덤 주위의 울타리와 연결되는 것이다. 현관을 통하여 큰 방 (A) 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고, 이 방은 다시 많은 묘실들 (B, C, D, E) 로 연 결되며, 묘실들 안에는 코킴과 아치형 석묘들이 있다 . 265 야고보의 무덤과 스가랴의 무덤의 개관 거듭 말하지만 야고보의 무덤은 왼쪽에 있고 스가랴의 무덤은 오 른쪽에 있댜 야고보의 무덤의 행각은 두 개의 도리스식 석주와 위 에 있는 돌림띠를 떠받치는 두 개의 모퉁이 벽기둥이 특징이다. 왼 쪽에는 열린 출입구를 가진 반반한 바위 표면이 있고, 출입구로부터 바위까지는 짧은 거리에 불과하다. 정면의 이 부분은 한때 아마도 피라밋 형태의 더 높은 상부 구조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가설은, 열주(列柱)와 피라밋을 결합시킨 애굽의 장례 구조물의 예들 과 비교해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 건축 양식에 근거하여 말한다면, 이 무덤은 B.C. 2 세기 후반기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헤 실

1벳 셉

오 '

_

엘르아살 하니아 요아살 예후다 시므온 요하난 I l | 요셉 엘르아살 266 야고보의 무덤에 있는 명각 야고보의 무덤의 현관에 있는, 두 개의 도리스식 석주들이 바로 위에 놓인 처마 도리 arc hitr ave 에서 이 명각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사각형의 히브리어 문자들로 기록되었는데, 이러한 문자를 고문서학 적으로 판단한다면 기독교 시대의 제 1 세기 전반기, 죽 그 무덤이 애 초에 준비된 때로부터 아마도 두 세대가 지난 후의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명각을 옮겨써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mmi 1’ 더:::l P i1r 1:::l oo,., .,-3: :: l | ,3m., '’立 0W i1’'i1., —r p,. , i1., 3n ― r 元낫 N 났 w 더 .,r i1 .,3::: l0 c.,3i1 = I i1.,Jn .,3::: l 더 r 있가이 모 O ':::l'p 이것은 헤실 Hez ir의 아들들의(가족의) 제사장인, 오벳 Obed 의 아들 요셉의 아들들인 엘르아살 Eleazar, 하니아Hani ah, 요아살J o'azar, 예후 다 Iehudah, 시므온 S him e'on, 요하난 Iohanan, (그리고 또한) 하니아의 아들들인 요셉과 엘르아살의 무덤과 네페쉬 nep hesh 이다.

따라서 이 무덤은 브네이 헤지르 Bene Hez ir(더.,Ti1 .,J::l) 즉 〈헤지르 (헤실)의 아들들〉이라는 제사장 가족의 매장지였다 . 이 명각에 암시 된 족보를 정리하면 위와 같다. 구약에서 헤실이란 이름은 역대상 24:15 에서 제사장 집안의 우두 머리의 이름으로 나타나고, 느헤미야 10:20 에서 느헤미야와 연관된 사람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 명각의 서두에서 이것이 밝혀 주는 바에 의하면, 이 기념비는 거기에 장사된 사람의 〈무덤과 네페쉬 m23i1 1 더::ip〉로 기술되어 있다. 네페쉬라는 단어가 보통은 〈생명〉, 〈영혼〉, 또는 〈자아〉를 의미하지 만, 경우에 따라서는 무덤이나 묘 기념비를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한댜 여기서는 이 단어가 〈무덤〉이라는 단어에 추가하여 사용되었 으므로, 그것은 〈묘 기념비〉를 의미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전 체적 배열의 특징으로 볼 때, 이것이 본래의 무덤과는 구별되는 〈기 념비〉였음이 확실하다. 만약 실제로 왼쪽에 피라밋 형의 상부 구조가 원래부터 있었다면, 그것이 아마도 〈기념비〉 죽 네페쉬였을 것이다. 다른 하나의 가능성 은 브네이 헤지르, 〈헤실의 아들들〉의 매장지의 네페쉬룰 스가랴의 무덤 (267 항)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스카라의 무덤은 멀리 떨어져 있 지 않고, 하나의 통로가 있어 야고보의 무덤 현관으로부터 그 주위 롤 두르는 울타리까지 이르게 한다. 바로 위에서 기술한 매장지는 명각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브네이 헤지르의 매장지였던 반면에, 전통적으로 야고보의 무덤으로 일컬어 져 왔다. 예루살렘에 있는 초기 기독 교회의 우두머리는 주의 형제 였던 야고보였다(갈 1:19). 헤게십푸스는 그가 성전의 꼭대기 pin- nacle( 뾰족탑, ITTEPUV t OV) 으로부터 내리던져지는 순교를 당했으며, 그 의 기념비가 아직도 남아 있는 그 장소에 장사되었다고 말한다 (Eu­ sebiu s , Ch. Hi st. II 23 에 의하면). 만약 성 전의 〈꼭대 기 〉(마 4:5 ; 눅

4:9 참고)가 울타리 성벽의 남동쪽 모서리, 즉 기드론 협곡 위로 너 무나 높이 솟아 있어서 거기서 〈내려다보는 사람은 현기증이 났다 〉 (Jo seph us, Ant. XV 11, 5 §412) (188 항 참고)고 하는 그 모서 리 였다 면, 야고보는 브네이 헤지르의 무덤의 거의 맞은편 지점에 있는 골 짜기 속으로 떨어졌을 수도 있다. 후대에 그 무덤이 야고보를 기념 하는 기념비였다고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267 스가랴의 무덤 264 항의 구도와 2 6.5항의 사진은 이미 스가랴의 무덤과 야고보의 무덤의 관계를 보여 준 바 있는데, 이것은 스가랴의 무덤 서쪽 전면 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것이다. 이 기념비는 높이가 9 미터, 폭이 5.2 미 터 되 는 의돌 mono lith로, 절벽을 깎아서 만든 것 이 다. 측면은 이오니아식 주두들을 가진 벽기둥과 석주들로 장식되어 있고 꼭대 기는 큰 피라밋이다. 건축 양식으로 볼 때, 그 연대는 B.C. 1 세기의 후반일 것으로 짐작된다. 아무데도 트인 곳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이 것은 아마도 무덤이기보다는 묘 기념비(네페쉬)일 것이다. 야고보의 무덤 현관으로부터 스가랴의 무덤을 두르는 울타리로 나아가는 통 로는 스가랴의 기념비가 브네이 헤지르의 무덤과 연관된 네페쉬라 는 생각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만약에 그 네페쉬가 한때 브네이 헤지르의 무덤 바로 곁에 존재하던 피라밋 형의 상부 구조였다면 (266 항 참고), 스가랴의 무덤 은 어 쩌 면 다른 무덤 콤플렉스 bu rial com p lex 의 네페쉬이고 그것과 연관된 무덤들이 인접한 언덕의 어딘 가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 전통적으로 이 기념비를 스가랴에게 돌리는 것은 어쩌면 요아스 왕의 치하 당시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에 맞아 죽은 제사장 여호 야다의 아들 스가랴(대하 24:20-22) 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마태복음

23:35 에서 대부분의 필사본들은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스가랴)를 언 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그의 아버지가 베레갸였던 , 잘 알려진 선지자(슥 1:1) 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겠지만 , 이 선지자가 그와같은 살해를 당했다는 것에 관해서는 아무런 다른 정보가 없다. 사실 「시 내 사본」은 여기서 아무런 아버지의 이름도 없이 스가랴(사가랴)만 을 언급하고 있고, 『히브리인들에 의한 복음서」에는 〈여호야다의 아 들〉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3 : 35 의 원래 내용은 의심 할 여지없이 역대하 24:20 - 22 의 순교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는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죽임을 당했으므로 그의 기념비를 성전으 로부터 과히 멀지 않는 곳에서 찾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268 압살롬의 무덤과 여호사밧의 무덤의 구도 이 구도는 압살롬의 무덤 Tomb of Absalom 과 여호사밧의 무덤 Tomb of J ehoshapha t의 배열과 관계를 보여 준다. 269 압살롬의 무덤 스가랴의 무덤 (267 항)과 마찬가지로 압살롬의 무덤도 역시 아랫부 분을 절벽의 측면으로부터 깎아서 만든 외돌 무덤이다. 기념비의 이 쪽 부분은 폭이 6 미터이고 높이는 6.5 미터이다. 그것은 처마도리, 소 벽, 그리고 배내기 co rni ce 가 있는 돌림띠 en ta blat ur e 를 떠받치는 모 서리 벽기둥과 이오니아식 석주들로 장식되어 있다. 이것 위에는 큰 돌덩이로 된 사각형 구조물이 있다. 남쪽에는 배내기의 위쪽에 계단 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고, 이 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두 개의 아치 형 석묘가 있는 작은 내부 묘실에 이론다. 그러므로 이런 점으로 미 뤄 볼 때 이 기념비는 무덤이었다. 사각형의 구조물 위에는 원통형

의 몸통과 원추형의 탑을 가진 상부 구조가 있어서, 다 합치면 기념 비 전체의 높이가 16.5 미터나 된다. 건축 양식을 보면, 이것은 헬라 및 로마 시대의 묘 기념비에서 발견되는 톨로스th olos 와 같은 것인 데, 이것과 다론 점은 원통형 부분 위에 있는 원추형 부분을 받쳐 올려 죽은 사람들의 조상을 갖다놓을 장소를 제공하는 석주들이 여 기서는-유대인의 환경에서는 이해할 만하게__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상부 구조가 그 아래에 있는 무덤을 위 한 네페쉬 (266 항 참고)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무덤의 연대는 기독교 시대의 1 세기 초일 것이다. 이 기념비를 압살롬과 연결시키 는 일에 관해 언급한다면, 이 전승에는 이 기념비가 바로 압살롬이 자신을 위하여 왕의 골짜기에 세운 그 비석 (LXX mnAn) (삼하 18:18) 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는 것이 분명하며, 여기서 왕의 골짜기는 아 마도 기드론을 가리키는 이름일 것이다. 270 여호사밧의 무덤의 박공 여호사밧의 무덤은 압살롬의 무덤 뒤에 있고 (268 항의 구도를 보 라), 일련의 충계들을 딛고 폭이 8 피트인 문간을 통하여 들어가게 되 어 있다. 사진은 이 문간 위에 있는 삼각형의 박공(片專桃)을 보여 준 다. 그것은 아칸투스 acan th us 무늬와 오렌지, 레몬, 포도, 감람나무 가지들로 장식되어 있다. 문간을 통해 들어가면 큰 직사각형의 방이 있고, 그 곳으로부터 다시 묘실들(구도의 A 로부터 H 까지)로 이루어 진 콤플렉스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다. 한 묘실 (E) 에는 코킴 무덤들 이 있고, 몇 개의 다른 묘실에는 아치형 석묘들이 있다. 이 무덤 콤 플렉스와 압살롬의 무덤을 연결시킨 사실은 둘이 모두 같은 연대, 죽 기독교 시대 제 1 세기 초의 것임을 시사한다. 압살롬의 무덤은 또 한 그 뒤에 있는 매장지 전체룰 표시하는 하나의 무덤 기념비일 수

도 있다. 이와 같이 비교적 큰 매장지와 그것이 걸출한 네페쉬(만약 압살롬의 무덤이 네페쉬로 간주될 수 있다면)가 여호사밧의 골짜기에 위치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그것과 여호사밧의 무덤을 동일시하는 것은 매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기술한 네 개의 〈무덤들〉에 대하여 위에서 제시한 연대 들이 맞다면, 이 모든 기념비둘은 예수 당시에 이미 기드론 골짜기 에 존재했다. 그가 이 골짜기를 건너셨을 때(요 18:1) 그는 이것들을 보셨을 것이고 , 따라서 그가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 석을 꾸미〉는(마 23:29) 외식적(外飾的)인 사람들에 관하여 말씀하셨 울 때, 바로 이 대상물들을 염두에 두셨을 가능성이 있다.

산해드리야 무덤들 271 산헤드리야 무덤들에 있는 무덤 XV 의 구도와 단면도 소위 산해드리 야 무덤 들 Sanhe driyya Tombs - 전에 는 판관(判 官)들의 무덤이라고 알려지기도 했음 __ 은 예루살렘의 북쪽 교외 의 사무 엘 거 리 (Sarnmuel Str ee t, Rehov Shemuel Hannavi [르호브 셔 무엘 한나비])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제 17 세기 초에 이 무덤 들이 발견되었을 때, 그 곳에 70 개의 매장지가 있었던 것으로 계산 되었다. 모세가 임명했던 70 장로(민 11:24) 와 같이, 산해드린 San­ h edrin도 70 명의 의원을 가지고 있었고 (Sanhedr i n I 6 DM 383) 대제 사장이 의 장이 었다(마 26:57 및 평 행 절 ; Jos eph us, Ant. XX 9, 1 §200). 바로 이 때문에 이것이 그 70 명사들의 매장지였다는 생각이 발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산해드린의 의원들이 그들 자신의 가족 무덤이 아닌 다른 곳에 장사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것은 유대인 의 정상적인 관습으로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며〉(창 25:8 동),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창 47:30 동), 그리고 〈너는 너의 열조

와 함께 자려 니 와〉(신 31:16) 와 같은 구약 구절들에 의 하여 확인되 고, 또한 『산헤드린 VI』(D M 391 ; SET IV 5, 305) 에 있는 〈그들의 고유의 장소에 장사되었다〉라는 문구에서도 확인되는데, 이 문구가 가족 매장지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율리우스 요탐-로트쉴트Juli us J o t ham-Ro th sc hil d 가 그 무덤들 을 자세히 세어보았을 때, 그는 알려진 코킴이 55 개, 아치형 석묘가 4 개, 그리고 납골함들을 넣어두기 위해 사용된 동굴이 2 개뿐임을 알 게 되었댜 무덤들은 참으로 크고 훌륭하며, 따라서 부유한 가족의 무덤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산헤드린의 의원들이 개별적으로 이 무덤들 일부에 장사되었을 수는 있겠으나, 이것이 산해드린의 집 단 매장지였던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연대 상으로 이 무덤들은 헤롯 대왕과 70 년 사이의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Rahm ani in BA 45 [1981], 49쪽). 구도에서 산해드 리야 무덤들은 앞마당fo reco urt, 현관방 ves ti bule, 그리고 인접한 옆 방울 가진 주된 방 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매장지들은 코킴, 아치형 석묘들, 그리고 바위 벤치 또는 선반들 등이다. 또한 거의 모든 무덤 들은 별개의 작은 방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 방들은 뼈들을 수거해 놓거나 납골함을 담아 두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무덤 XIV 로 알려진 무덤은 건축 양식 면에서 뛰어난 것이며, 여기 구도와 단면도로 제 시된 것이 바로 그 무덤이다. 272 산헤드리야 무덤들에 있는 무덤 XIV 의 입구 여기에 보이는 산해드리야 무덤들에 있는 무덤 XIV 의 앞마당은 폭이 9.9 미터이고 길이가 9.3 미터로, 크기에 있어서는 왕들의 무덤 ('Z7 7 항)의 앞마당 다음으로 첫째가는 것이다. 세 측면에는 거의 완전 하게 보존된 벤치들이 있으며, 이것들은 바위를 깎아서 만든 것으로

서 마지막 예식을 거행하는 동안에 사람들이 아마도 그 위에 앉아 있었을 것이댜 무덤의 현관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휼륭한 정면 이 있고, 박공에 는 아칸투스 acanth u s 잎과 석 류, 시 트런 cit ron s 동이 새겨져 있다. 내부의 묘실들은 단면도 (Zll 항)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점점 내려가는 세 개의 충으로 배열되어 있다. 산헤드리야 무덤들에서 발견된 도기는 이 무덤들의 연대를 결정 하는 일에 요긴하게 활용된다. 다수의 항아리들이 B.C. 1 세기 중간 과 기독교 시대 70 년 사이에 흔히 있던 형태로 되어 있다. 값비싼 기름이나 포도주를 담기 위해 사용되던 서양 배 모양의 병들은 헤롯 시대의 여리고에서 발견된 병들과 같은 종류이다. 둥은 주걱처럼 생 긴 노즐을 가진, 둥글면서도 닫힌 형태로 되어 있으며, 헤롯의 치세 초년에 속하는 주화들과 함께 여리고에서 발견되는 둥과 같은 형태 이다. 그러므로 이 무덤들은 헤롯이 실제로 그의 통치를 시작한 (FHBC §363) B.C. 37 년 경으로부터 70 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까 지 걸쳐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시기로부터 발견된 다른 중요 한 물체들은 석관의 파편들과 어쩌면 납골함이 깨진 것으로 보이는 파편들이다. 윤기낸 세공품과 유리의 파편들 및 재료는 이 무덤들이 제 13 내지 제 15 세기에 아마도 주거로 사용되었음을 보여 주는데, 이 때로 말하면, 아람인들이 무덤 XIV 의 앞마당에 아마도 대상 숙박소 (隊商宿泊所)를 가지고 있던 시기이다.

헤롯의 가족 무덤 273 헤롯의 가족 무덤의 구도와 단면도 요세푸스가 〈유대 전쟁〉을 서술하면서 (War V 12, 2 §507) 언급한 예루살렘의 지계표(地界標)들 중의 하나는 헤롯의 기념비 또는 기념 묘댜 'Bpcil6 ou µ떠µi't ov 이다. 한 문단 (War V 3, 2 §108) 에서 그는 복수 를 사용하면서 헤롯의 무덤들이 뱀못 Se rpert 's Pool 근처에 있는 것 으로 말하고 있댜 예루살렘 구 도성의 서쪽이자 다윗 왕 호텔King Dav id Hote l 근처에, 그리고 다윗 왕 길 King Dav id Road 에서 떨어 진 곳에, 여기에 제시된 구도와 단면도로 된 지하 매장지가 있다. 이 무덤은 견고한 바위롤 깎아서 만든 것이며, 그것의 복도와 방 들도 훌륭하고 큼직한 석회석 덩이로 쌓은 벽으로 둘러져 있다. 묘 실들 안에는 코킴이나 아치형 석묘들이 없고, 매장 방식으로는 아마 도 석관을 사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두 개의 석관이 그 가장 긴 묘 실 (F) 에 아직도 남아 있었다 (296 항을 보라). 이 무덤 역시 지금은 없 어진 상부 구조를 아마도 가지고 있었을 터인데, 이러한 인상적인 건축 양식은 요세푸스가 언급한 바대로 이것을 헤롯의 무덤으로 판

정하는 일과 잘 맞아떨어진다. 만약 이 판정이 맞다면, 요세푸스가 헤롯의 무덤 근처에 있는 것으로 기술한 뱀못은 아마도 가까운 곳에 있는 마밀라 못 M amill a Pool 과 동일시될 수 있을 것인데, 마밀라 못 의 연대는 적어도 로마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헤롯 대왕 자신은 이 무덤에 장사되지 않고 , 베들레헴에서 남동쪽으로 4 마일 떨어진 헤로디움 (19 항)에 장사되었다 . 그의 장자 안티 파터 An tip a te r 는 휘 르카니 아 H yr c ani a 에 장사되 었으며 , 이 곳은 아마도 쿰란에서 남서쪽으로 5 마일 떨어진 키르베트 미르드Khir be t Mird 와 동일한 곳으로 확인되었다 (FLAP 280쪽). 그리고 헤롯 대왕 의 다른 두 아들 곧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루스는 여리고에서 북쪽 으로 17 마일 떨어진 알렉산드리움 Alexan dri um 에 장사되었다 . 헤롯 가족의 다른 자손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이 무덤에 잠들어 있을 가능 성이 있다. 274 헤롯의 가족 무덤에 있는 구르는 돌 헤롯의 가족 무덤에는 매장지의 입구를 막기 위해 사용되던 〈구 르는 돌〉이 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에서 아직도 두 개의 본보기 중 의 하나로 유명하다(다른 하나는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비 무덤 [Tomb of Que en Helena of A di abene] 에 있다 ; 281 항). 헤롯의 가족 무덤의 구도(업 3 항)에서 주된 입구는 A 로 표시된 지점에 있다. 여기 에는 옆으로 파진 홈이 있고 그 홈의 끝머리에는 큼직한 돌이 서 있 는데, 출입구를 닫고자 할 때에는 그 돌을 그 곳에서 앞으로 굴려낸 다. 사진은 이 돌이 맷돌과 같은 거대한 원반인 것을 보여 주는데, 지름이 1. 6 미터, 두께가 0.8 미터인 이 돌은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비 무덤 275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비 무덤의 복원 투시도 이 무덤은 예루살렘 구 도성의 북쪽, 〈성 죠지 대교회당 S t. Geor- ge 's Cat h edral 〉을 지나서 가까운 거리에, 그리고 살라딘 길과 나불 루스 길의 교차로를 바로 지나서 있다. 케냐르 드 솔시 L. F. Ca i-gn a rt de Saulc y가 1863 년에 이 장소를 발굴했을 때, 그는 이 것들이 유다의 왕들의 무덤들이라고 믿었으며, 그리하여 대중들에게는 그때 부터 계속해서 왕들의 무덤들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 무덤들이 상부 티그리스 강에 있던 한 구역인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비에 의 하여 세워 진 매장지 였음을 믿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 (P liny, Nat. Hi st. V 13, 66 ; V 16, 41-42). 요세푸스는 헬레나와 그의 아들 이자테스 Iza te s 가 함께 유대교로 개종했다고 말한다(Ant. XX 2-5 §§17-117). 헬레나는 예루살렘에 있 는 성전에서 예배하기 위하여 그 곳으로 여행을 했으며, 그때 큰 기 근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또한 백성을 위하여 알렉산드리아와 구 브로 C yp rus 로부터 음식물을 조달해 갔다. 이 기근은 티베리우스 알

렉산더 Ti be ri us Alexander 가 수세관으로 있을 때 (46-48) 일어났고, 어쩌면 클라우디우스 때에 (41-54) 있을 것으로 사도행전 11 : 28 에 언 급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 이자테스가 죽자 그의 형 모노바쭈스 II 세 Monobazus II 가 그를 계승하였다. 조금 후에 헬레나도 죽었는데, 요세푸스(A n t. XX 4, 3 §95) 는 〈그러나 모노바쭈스는 그녀의 뼈와 자기 동생의 뼈를 예루살 렘으로 보냈고, 그 뼈들을 예루살렘 도성으로부터 3 스다디온 되는 곳에 위치한, 어머니가 세워둔 세 개로 된 피라밋에 묻도록 명령하 였다〉(위의 201 항 참고) . 다른 곳에서 요세푸스는 또한 헬레나의 기 념비들 또는 무덤 t@ v 'E A t때 c µ떠 µe i wv 을 잘려진 예루살렘의 겡계들 로 언급하기 도 한다 (War V 2, 2 §5.5 ; 3, 3 §119 ; 4, 2 §147). 파우사니아스 Paus ani as (VIII 16, 4-5) 는 예루살렘에 있는 이 무덤 을 할리 카르낫수스 H ali carnassus 에 있는 마우솔루스 Mausolus 의 무 덤과 비교하고, 유세비우스 (Ch . Hi st. II 12, 3) 는 헬레나 왕비의 이 찬란한 기념비들 m 저 AQ l &때Q VEL C.:이 그의 시대에 앨리아 Ae li a­ 당시에 예루살렘이 이렇게 불리었음-의 교외에서 아직 보였다고 말한다. 요세푸스가 언급한 세 개의 피라밋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 는댜 그것들은 압살롬의 무덤 (269 항)의 외양과 어느 정도 비슷한 것 이었을 것이며, 이 그림에 포함된 것은 그것들을 가상적으로 복원한 모습이다. 276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비 무덤에 있는 계단과 수로 및 수조 이 사진은 앞의 그림('2:1 5 항)에서 보이는 기념 건축물의 총계 바닥 을 보여 준다. 이 충계를 타고 내려가면 무덤을 가라앉은 안뜰에 이 른다. 물이 이 충계들로부터 모아져서 바위 옆 벽에 있는 수로들을 통과하여 계단의 밑바닥 근처에 있는 두 개의 큰 수조로 흘러 들어

갔댜 이와 같은 장치는 장례 의식과 관련된 세정식(洗淨式)을 위하 여 물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277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비 무덤 안마당에서 앞의 도해(업 6 항)에서 계단들을 타고 내려가면 무덤의 안마당에 이르는데, 이 안마당은 바위 낭떠러지의 꼭대기로부터 8 또는 9 미터 아래로 깊이 가라앉아 있고 그 넓이는 약 26.5 평방미터이다. 이 사진 은 그 뜰의 서쪽에 있는 현관방을 향하여 찍은 것이고, 이것을 통해 들어가면 묘실들이 나타난다 . 278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비 무덤의 돌림띠 앞의 사진('2:77 항)에 보이는 무덤의 현관방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는 폭이 12 미터이다. 지금은 없어진 두 개의 석주가 돌림띠를 떠받치고 있었는데, 그 돌림띠의 중앙 부분과 오른쪽 부분이 여기에 보인다. 처마 도리에는 두터운 잎장식과 석류, 그리고 솔방울 둥이 얕은 양 각으로 새겨져 있다. 그 위에 있는 소벽에는 세 줄기 가로홈 장식들 과 원형 장식들이 있고, 중앙에는 한 다발의 포도가 있으며, 그것의 양쪽으로 각기 면류관과 세 겹으로 된 종려가 있다. 배내기 corn ice 는 돌출한 바위턱들로 이루어져 있다. 279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비 무덤의 구도 무덤의 현관방으로부터 왼쪽으로 나 있는 통로를 따라가면 약 6 평 방미터되는 커다란 앞칸 (A) 에 이른다. 이 곳으로부터는 다론 통로 들이 코킴과 아치형 석묘들이 있는 묘실들로 인도한다. 어떤 무덤들

을 위해서는 또한 석관들도 사용되었다. 묘실들은 돌쩌귀에 얹혀서 돌아가는 돌문들로 닫혀졌다. 280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비 무덤의 단면도들 이 무덤의 묘실들이 가지를 쳐서 확장된 사실은 그것들을 만드는 일이 상당히 긴 기간에 걸쳐서 계속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두 개 의 묘실(구도와 단면도에서 C 와 E) 은 그보다 낮은 층 위에 덧놓여진 것이다. 약탈된 적이 없고 보통보다 낮은 묘실에는 하나의 석관이 아직도 고인의 유골을 간직하고 있었다 (298 항을 보라). 281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비 무덤의 입구에 있는 구르는 돌 이 무덤의 모든 지하 묘실들로 들어가는 입구는 현관방의 왼쪽 끝 에 있는 통로를 통해 나 있다('Z7 9 항의 구도 참고). 이 사진은 그 입구 를 막기 위한 장치를 보여 주는데, 그것은 깊이 가로지르는 홈에 맞 춰 넣은 하나의 큼직한 구르는 돌로 되어 있다. 이 돌 뒤에는 그 돌 울 앞으로 밀어 통로를 가로막게 할 사람들이 들어서기에 딱 맞은 만큼의 작은 방이 있다. 파우사니 아스 Pausa nias (VIII 16, 5) 는 이 무 덤에 관한 그의 설명 중 아마도 이 돌에 대하여, 자체의 구조가 연 중(年中) 어느 특정한 날의 일정한 시간에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도 그 문을 열고, 짧은 시간이 경과한 후에 그 문을 도로 닫곤 했다 고 보고하였다. 이것은 분명히 제 2 세기에 사람들이 믿던 하나의 전 설에 불과하지만, 그 커다란 구르는 돌 자체는 매우 다루기가 쉽다• 이것과 헤롯의 가족 무덤에 있는 비슷한 돌 (274 항)은 예수의 매장 지와 관련하여 복음서(마 'Z7:6 0 둥)에 언급된 바 있는, 무덤을 폐쇄하 는 형태에 대하여 예루살렘에서 볼 수 있는 두 가지 본보기이다. 그

와 같은 돌들은 또한 벳바게 (153 항), 나사렛 (43 항, KROLL 369 쪽, abb. 297, 3), 그리 고 아부 고쉬 (244 항 , KROLL 369 쪽, abb. 2CJ 7, 1) 등 지에도 있다. 이미 알려진 본보기들을 가지고 판단한다면, 이와 같이 구르는 돌로써 무덤울 폐쇄하는 방법은 오직 70 년까지의 로마 시대 에만 행해지던 유대인의 관습적 특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NAEHL 63 쪽).

지하 묘지 : 베트 셰아림 282 베트 셰아림의 개관 어떤·장황에서 유대인의 무덤들은 지하 묘지라고 알려진 형태로 확장되었다 (FLAP 469 쪽 이하 참고). 이것은 계랑들과 칸막이한 방들 로 구성된 지하의 공동 묘지인데, 그 벽에는 단순한 시체실들 또는 보다 정교한 아치가 달린 아치형 석묘 형태의 매장 벽감들이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유대인 묘지는 베트 셰아림 Beth She' arim에 있댜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9 항), 산헤드린 Sanhed rin (1.,'.,i13 0, 卯 ve6 pt ov) 으로 알려진 유대인의 법정은 예루살렘 안의 깎인 돌의 방이라고 흔히 번역되는 이름의 장소에서 열렸는데, 사 실은 이것이 크쉬스투스의 곁에 있는 방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 다. 예루살렘이 파괴된 (70) 후에, 법정은 물론 다른 곳으로 이전해 야만 했다. 『탈무드.!l(R osh Hashanah 31 a-b SET II, 7, 149 쪽)에서 랍비 요하난 Rabb i Joh anan('2:1 9 사망)은 〈산헤드린이 열 장소로 쫓 겨다녔다〉는 전승을 보고하고 있다. 우리는 산헤드린의 원래 위치

와 그것이 이동해 간 열 장소의 목록을 약간의 설명서와 함께 가지 고 있다 깎인 돌의 방(또는 크쉬스투스의 곁에 있는 방) . (1) 하누트 Hanuth . 아마도 제사장 가문인 하난 Hanan 의 아들들의 방(렘 35:4 ). 산헤드린이 사형에 처할 만한 중대한 송사들을 재판하 는 일을 중지했을 때에 옮겨간 장소 . (2) 예루살렘(앞의 두 장소가 예루살렘 안에 있었으므로 여기서는 무 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3) 야브네 Jab neh. 야브느엘 Jab neel 또는 얌니 아 Jamni a 라고도 불 림 유대의 서쪽 변경에 있는 마을 아스돗의 북서쪽 9 마일, 그리고 지중해로부터는 불과 4 마일 떨어져 있는 곳.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 랍비 요하난 벤 작카이 Rabbi Joh nan ben Zakk ai가 법 정 을 이 곳 으로 가져왔고, 그리하여 그것은 이제 베트-딘 Be th-Di n( 재판소)이라 고 불리면서 132 년에 〈제 2 차 항거〉이 시작되기까지 얌니아에 머물러 있었댜 (4) 우샤 Usha . 갈릴리에 있는 마을 . 이것은 랍반 가말리엘 II 세 Rabban Gama liel II 의 시 대 에 있었댜 (5) 야브네 Jab neh. 요하난에 의하면, 우샤로부터 도로 이 곳으로 옴. (6) 우샤. 야브네로부터 다시 도로 이곳으로 옴. (7) 셰 파르암 Shefa r 'am . 역 시 갈리 리 에 있는 마을. 마지 막 셋은 랍 비 시므온 벤 가말리 엘 Rabbi Sim e on ben Gam ali el 의 시대에 있었다. (8) 베트 셰아림 Beth She'a r im. (9) 셉포리스 Sepp h ori s. (10) 디베랴 T i be ri as. 〈그리고 디베랴는 그 모든 것들 가운데서 가 장 낮은 곳에 놓여 있는 것이다〉――이것은 디베랴(그 도시 자체가 지중해의 표면보다 696 피트 낮은 갈릴리 바다의 해변에 있음. 71 항 참 고)에서 산헤드린의 권위가 최하의 수준으로 떨어졌음을 비유적으로 말한것입

현재 우리의 관심의 대상인 베트 셰아림에 관해서 말하자면, 법정 과 유대인 연구의 중심을 이 장소로 옮긴 사람은 보통 랍비 유다 하­ 나시 Rabbi Jud ah ha-Nasi ( 〈하-나시〉는 〈왕자, 방백〉이라는 뜻임)라고 불리는 총대주교 유다 I 세 Patr iar ch Jud ah I 였다는 사실이 탈무드 (JE VII, 333-337 쪽 참고)에 있는 많은 언급들에 의 하여 밝혀 졌다. 유다는 『미쉬나 M i shnah 』의 대편집자로서 명성이 높고, 『미쉬나』에 는 그 자신의 진술들의 다수가 〈람바가 가로되〉라는 말로써 소개되 어 있으며, 그의 시대로 말하자면, 정의를 따른다는 것은 그 랍비를 따라 베트 셰 아림 으로 가는 것을 의 미 했다고 한다 (Sanhe drin 32b SET N 5, 205 쪽). 유다는 히브리어 연구와 병행하여 또한 헬라인의 문화에 대해서 도 너그러운 태도를 취했으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So t.ah 49b SETIII 6, 269쪽). 〈왜 이스라엘 땅에서 시리아 언어 (죽 일반적으로 무식한 사람들이 말하는 아람어)를 사용하는가? 거룩 한 말(죽 히브리어)을 사용하든지 헬라어를 사용하든지 하라!〉 그 총 대주교는 병이 들어 앓는 동안 보다 더 높은 지대와 보다 더 신선한 공기를 찾아 셉포리스로 옮겨갔으며, 그 후 220 년 경에 茂세를 일기 로 죽어서 그를 위하여 베트 셰아림에 예비된 장소에 장사되었다 (Keth u both 103b SET III 4, 663 쪽). 죽기 전에 그는 이러한 말로 그 의 역 할을 분담시 켰다 (Ke th ubo th 103b SET II 4, 658 쪽)〉 . <나 의 아 들 시므온은 하캄 Hakam( 죽 지혜자)이 되고, 나의 아들 가말리엘은 나 시 Nas i(즉 〈왕자, 방백〉 __그의 아버지를 계승하여)가 되고, 그리고 하 니나 벤 하마 H anin a ben Hama 는 의장(즉 산헤드린의)이 될 것이다.” 히브리어로 〈베트 셰아림〉이란 이름은 〈대문들의 집 House of Ga t.e s 〉이란 뜻이다.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이 이름이 헬라어로 0nodp a (Besara, 베사라)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L ife 24 §§118-119). 베트 셰아 림이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과 특히 『탈무드』의 언급들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토록 크게 두드러진 점에 비춰볼 때, 그 장소가 된 것은 놀 라운 일이다. 하지만 사실이 그러하였으며 후에는 랍비 유다 하-나 시의 무덤이 그가 사실 사망한 곳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장사된 곳은 아닌 마을인 셉포리스에 있었다고 추측되기도 하였다(IE ] 5 [1955], 237 쪽). 그러다가 1936 년에 우연히 하나의 무덤이 발견된 것을 기화 로 탐색과 발굴 작업이 이어졌는데, 그 결과 하나의 마을과 다수의 매우 큰 지하 묘지가 드러나게 되었고, 이것은 거의 확실하게 그토 록 오랫동안 잊혀졌던 베트 셰아림을 재현하고 있었다. 이 부지는 셰이크 아브레이크 She ikh Abre iq라고 불리는 아랍인 동네의 인근에 있었는데, 이 이름은 한 지역 성인의 이름을 따서 붙 인 것으로서, 흰 돔으로 된 그의 무덤이 작은 언덕 위에 있다. 1936 년 에 유대인 청년 단체가 이 곳에 주둔하여 최초의 발굴을 실시하였 고, 이것에 이어 이스라엘 탐사 학회가 1936-1940 년에 베냐민 마이 슬러(마자르 Mazar) 의 지휘 아래, 그리고 1953 년부터 그 후로는 나만 아비가드 Nahman A vig ad 와 다른 사람들의 지휘 아래 발굴을 계속 하였다. 요세푸스는 베사라가 가바 Gaba 로부터 20 스다디온 떨어져 있었 다고 말했다 (L ife 24 §118). 가바는 가바 힙페움 Gaba Hippeu rn(f6 .~a , n6'J. .t<;; tnn elil v) 죽 〈기병대의 도성〉이었는데, 이 곳은 헤롯 대왕이 그 의 제대한 기병 대원들을 주둔시킨 곳이며 갈멜에 인접한 곳이었다 (War m 3, §§35-36). 위에서 지적된 베사라의 위치는 하이파와 나사 랫 사이의 대로 곁에 있는 셰이크 아브레이크의 위치와 일치한다. 더욱이 초기의 발굴에서 베사라 Brn 6.p a 라는 이름 자체가 셰이크 아 브레이크의 한 대리석 평석 위에서 헬라어 명각으로 발견되었다 (Ma isle r, Beth She'a rim, 3 쪽). 발굴자들에 의하면 베트 셰아림의 토루 위에 있던 그 도성은 아마 도 원래는 B.C. 2 세기에 세워졌고 기독교 시대의 3 세기와 4 세기 초

에 전성기를 이뤘으며, 제 4 세기에 아마도 콘스탄티우스 II 세의 처남 갈루스 Gallus 가 갈릴리의 유대인 반란을 진압한 해인 351 년에 파괴 되 었다(IE ] 10 [1960], 264쪽). 발굴단들은 하나의 큰 회 당(가버 나움에 있는 것과 같은 것)과 바실리카, 공공 건물들, 주택들, 아직도 그 자리 에 놓여 있는 거의 9 톤 무게의 유리 평석을 가진 유리 공장(IE J 15 [19 6.5], 261-262 쪽 ; Arcmeolog y 20 [1967] , 88-95 쪽), 감람유 짜는 틀, 그리고 물론 지하 묘지 등을 발견해 내었으며, 지하 묘지는 지금까 지 다양한 매장 방법들과 함께 20 개 이상이 발견되었다. 베트 셰아림의 이 개관에서, 지하 묘지 제 20 번과 제 14 번이 사진의 중앙 바로 위로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 보일 것이다. 각 지하 묘지 위에는 노천 구조물이 언덕의 중턱으로 깎여 들어간 것이 식별되는 데, 이것은 그 구조물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계획된 것임이 확실하다 (284 항도 보라). 이 구조물들에는 돌 벤치들이 갖춰져 있으며, 이 곳 은 분명히 애도와 기일 예배를 위한 집회의 장소였다(IE ] 9 [1960], 212-214 쪽). 283 베트 셰아림 지하 묘지의 묘실들 일반적으로 베트 셰아림의 각 지하 묘지는 언덕 속을 깎아서 만든 열린 뜰을 통하여 들어가도록 되어 있으며, 뜰의 삼면에 입구가 나 있다. 이 입구들은 큰 돌문으로 닫혀 있는데, 돌문들은 돌쩌귀에 달 려 있고, 그것들이 나무로 만든 문처럼 보이게 하고자 머름과 손잡 이들로 장식되어 있다. 내부에는 이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묘실 로 들어가는 아치형의 통로들로 이루어진 긴 홀이 있다.

284 지하 묘지 제 14 번 입구 베트 셰아림에 있는 모든 지하 묘지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큰 관 심의 대상은 제 14 번일 것이다. 그것은 삼중의 아치형 주된 정면과 그 위에 있는 집회 장소에 노천 돌 벤치들을 가지고 있다(위의 282 항 참고). 이 지하 묘지는 베트 셰아림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 중의 하나 로 판단되며, 그 정면은 아마도 제 3 세기의 전반에 와서야 덧붙여진 것이지만, 지하 묘지 자체는 기독교 시대의 제 2 세기 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IE ] 4 (1954], 106 쪽 ; 5 (1955], 225-226 쪽). 그 안에는 연결된 복도룰 가진 두 개의 큰 방이 있다. 여기에는 흔히 그렇듯이 벽 속을 깎아서 만든 여러 가지의 무덤들이 있고, 아 마도 뼈를 모으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벽감들이 있다. 그 러나 좀더 먼 곳에 있는 큰 방에도 또 하나의 . 건조된 무덤이 있다. 그 첫번째 큰 방의 왼쪽 벽 끝에 있는 긴 매장 벽감에는 수직 평석 의 일부가 아직도 제자리에 놓여 있다(IE] 4 (1954], pl. 9 c). 그 위 에 는 붉은 색 의 큰 글자로 1' 曰 U .,r 더 (Rabbi Sim e on, 랍비 시 므온) 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같은 책, 104 쪽, 그림 6). 건조된 무덤을 가진 방으로 들어가는 통로의 오른편에 있는 첫째 시체실 위에는 검은 글 자로 기록된 이중 언어의 명각이 있다. 그것은 히브리어로 2 낫 R., 넛t:IJ .,그더 났 D ,r 〈이것은 랍비 가말리엘 M 의 [무덤]이다〉라고 적혀 있고, 헬라어로는 PABI rAMAAI 恥 (〈랍비 가 말리엘〉)이라고 적혀 있다(같은 책, 104 쪽, 그림 7). 시므온의 무덤으 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지면 높이의 벽 속을 깎아서 만든 다른 무덤 하나가 있는데, 그 통로 위에는 히브리어로 ,~pn ~J., 3R (,〈 아니나 하一카탄〉), 죽 〈작은 아니나Anin a the Li떠 e 〉라고 적 힌 명 각이 있다 (IE] 5 (19 5.5], 222 쪽, 그림 9). 홍미롭게도 방금 인용한 명각의 이름들은 정확하게 랍비 유다 하_

나시의 두 아들, 즉 시므온과 가말리엘의 이름들이요, 한편으로 아니 나는 하니나 H anin a, 죽 유다가 자기가 죽은 뒤에 산헤드린의 의장 직을 수행하도록 지명한 사람의 이름과 같은 것이다 (282 항 참고). 이 러한 연결이 물론 확증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들이 동일한 인 물들이었으며, 그리고 이것이 다름아닌 랍비 유다 하-나시의 가족 무덤이었을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그 전체 지하 묘지 중에서 명백 하게 가장 중요한 무덤, 즉 건조된 묘에 관해서는 이것이 그 대주교 자신의 무덤이 아닐까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되어 왔다 . 그러 나 그 묘에는 아무런 명각이 붙어 있지 않고, 따라서 그에 대한 확 인은 미결로 남아 있다. 285 지하 묘지 제 20 번의 구도 베트 셰아림에 있는 지하 묘지 제 20 번 (Ca ta comb, no. 20) 도 무척 홍미를 끄는 것이었다. 그것의 정면은 개관 (282 항)에서 볼 수 있고, 이 약식 구도는 전체적인 복합 구조를 보여 준다. 입구를 통해 들어 가면 남북으로 뻗은 긴 중앙 홀이 있고, 그 양편에는 가지를 친 방 과 내실들이 있다. 맨끝부분에는 바위가 붕괴되어 여러 개의 방을 파괴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방에는 벽 속에 아치형 석묘들이 있고, 또한 수직식 평석으로 닫혀 있는 작은 벽감들이 있었는데, 후자는 아마도 지하 묘지 제 14 번에서와 같이 (284 항), 뼈들을 모아 놓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IE] 7 [1957], 81 쪽). 어떤 방에는 바닥을 깎아서 만든 묘들도 있다. 대부분의 베트 셰아림 무덤들은 아무런 관도 없이 장사룰 지냈고, 특히 이 지하 묘지에서는 나무, 납, 도기 둥으로 만든 관에 넣어서 매장한 혼적이 빈약할 뿐만 아니라, 돌과 대리석으로 만든 석관들이 많이 있었다. 때때로 이것들은 벽의 움푹 들어간 곳에 놓여졌으나,

대부분의 경우에 그것들은 구도의 많은 예들에서 보이는 바대로 방 안에 서 있었다. 이 매장함들 가운데 원상태 그대로 또는 부분적으 로만 원상태대로 발견된 것들은 모두 석희석으로 된 것들이며, 그 수는 대략 130 개이다. 대부분은 장식 없이 매끄럽게 만들어졌으나, 동물이나 정물로부터 따온 무늬들로 된 여러 가지의 양각 세공으로 장식된 것들도 적지 않다. 여기에 그려진 것들 가운데는 사자 (300 항), 소의 머리, 독수리, 영양을 추격하는 사자, 그리고 턱수염이 난 사람 의 머리 또는 가면 둥과 함께 꽃 모양 장식, 조개, 아칸투스 acan thu s, 측면에 석주들이 서 있는 대문, 그리고 메노라 menorah 죽 일곱 가 지 가 있는 등대 둥이 있다 (286 항 참고). 286 지하 묘지 제 3 번의 메노라 석관 위에 있는 메노라(위의 285 항 참고) 의에, 지하 묘지 제 20 번 에 있는 한 방 (no. XXI 끄)의 벽에도 이 상징물이 새겨져 있다. 베트 셰아림의 다른 지하 묘지들에서는 메노라가 벽에 그려진 것이 매우 자주 발견된다. 이 사진에 보이는 훌륭한 본보기는 지하 묘지 제 3 번 의 홀 E( Ha ll E) 에 있는 것 이 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메노라 즉 일곱 가지가 있는 동대는 출애굽 기 25:31-39 ; 37:17-24 로 거슬러 올라가며, 예루살렘의 성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FLAP 329쪽), 도처의 회당과 가정에서도 발 견된다. 이와 같이 그것은 유대교의 상징이었으며 (FLAP 45.5쪽), 장 례와 관련된 배경에서는 그것이 내세를 위한 준비물로 생각되기도 하였고, 이리하여 특히 (영혼) 불멸 사상과 연관되기도 하였다.

287 지하 묘지 제 13 번에 있는 마리노스와 그의 아내의 비명(碑銘) 랍비 유다 하-나시가 아람어보다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사용할 것을 권장한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282 항). 베트 셰아림에 있는 대부 분의 지하 묘지들에서는 명각에 사용된 언어가 주로 헬라어이지만, 제 14 번과 제 20 번은 주로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특히 이 두 지하 묘지가 랍비 가족들을 장사하기 위한 것이라는 추측과 잘 맞아떨어진다. 지하 묘지 제 14 번으로부터 이미 제시된 예들에서 (284 항) 우리는 히브리어로 된 명각과 이중 언어 즉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된 명각을 보았다. 이 사진은 베트 셰아림의 지하 묘지 제 13 번에서 발견된 대리석 평 석 위에 새겨진 헬라어 명각을 보여 준다 (The Greek Inscri ption s, by Schwabe and Lif sh i tz, 64 쪽, no. 149 를 보라). 이 평 석 의 치 수는 18X~ 센티미터이다. 그것에는 메노라 (286 항 참고), 쇼파르 shof a r( 축 제 때에 [시 81:3 참고], 특히 새해에 불던 수양의 뿔 Mi shnah Rosh ln-Slrmah 3.2-5 ; 4.7-9 DM 191, 193 쪽 이하), 룰랍 lulab( 초막절에 사 용하던 종려나무 가지[레 23:40 참고]), 그리고 삽(향을 위하여[출 '27:3 ; 38:3 ; 민 4:14 참고], 특히 대속죄일 [Yorn Kipp ur] 에 제단에서 사용하던 [Mish nah Yom a. 4.3-4 ; 5.1 - 2 DM 166 쪽 이하]) 등이 새겨져 있다. 명각은 7 행으로 되어 있고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T6Jt o c; Map tvo u Kai Eto u (J m ac YUVCKbc abt 0 0 (

,〈 마리노스와 그의 아내 유스타의 장소[즉 무덤]〉). 위의 예에서처럼, 주어진 무덤에 장사된 개인 또는 개인들의 신원 을 밝혀 주는 일에 더하여, 명각은 때때로 누구든지 그 무덤에 손을 대는 자에게 저주를 선언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무덤의 도굴을 예방 하고자 할 때 흔히 사용하는 수단이다. 예를 들면 아마도 제 3 세기의 후반의 것인 지하 묘지 제 12 번에는 제 III 호 방의 아치형 석묘 제 3 번

위에는 이러한 명각이 있다. 〈그 안에 누가 있든지 간에 이 무덤을 여는 자는 죽어서 악한 종말을 당할 것이다 An y one who ope n s this bu rial upo n whoever is ins id e shall die of an evi l end> (IE ]4 [19 54], 95 쪽). 그러나 이와 같은 저주들에도 불구하고 베트 셰아림에서 발견 된 모든 무덤둘이 오래전에 약탈을 당했다. 다른 하나의 재미있는 명각은 지하 묘지 제 20 번에서 발견된 여섯 개의 헬라어 명각들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3 행으로 기 록된 벽서이다(IE ] 7 [1957], 247쪽): EYTYXVvC E 虹 ux& c; TH YIV 禪 댜 uµ&v ANACTACI avdm:uot Good fortune 행운을 m yo ur 그대의 resurrecti on 부활 때 이리하여 (영혼) 불멸의 사상과 병행하여(만약 메노라가 불멸을 상 징한다면), 부활에 대한 믿음도 있었음이 또한 베트 셰아림에서 입증 되고 있다.

로마 가장 많고 가장 이른 유대인 지하 묘지는 로마에 있는 것이므로, 예수의 생애 및 초기 교회와 대략 같은 시대의 유대인 매장지들에 관한 연구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로마에 있는 지하 묘지들을 고 찰하는 일이 필요하다. 로마에서는 지하에 깔린 화산 석회화(石灰華) 가 이러한 형태의 매장지를 건설하는 일에 특별히 적합했고, 적어도 여섯 개의 유대인 지하 묘지들이 그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 첫번째 것은 안토니오 보시오 An t o ni o Bos i o 에 의하여 1602 년 에 발견되었다. 그것은 티베르 강의 서쪽에 있는 포르테세 문 Po rta Port ese 밖으로 약 1 마일 떨어진 몬테베르데 Mon t everde 의 포르투엔 시스 길 V i a Po rtu ens i s 에 있었다. 그 후로 그것은 다시 잊혀졌다가 1904 년에 우연히 재발견되었으며, 이때 니콜라우스 뮐러 Ni kol aus M illl er 가 그 곳을 부분적 으로 발굴하기 시 작했다. 그때 그 지 하 묘 지로부터 찾아낸 명각들과 1913 년에 습득한 다른 것들은 로마에 있 는 라테 란 기 독교 박물관 Museo Cr ist i an o La te ranense 의 유대 관 Sala G i u dai ca 에 비 치 되 었다.

두번째 유대인 지하 묘지는 , 산 세바스티아노 문 Po rta San Seba-sti an o 밖의 압피아 길 Vi a Ap pia 노상에, 그리고 압피아 피냐텔리 길 Vi a Ap pia P ig na t e lli이라고 불리는 곁길 근처에 있는 란다니니 포 도원 V ig na Rand anini에서 1859 년에 발견되었다. 이 지하 묘지를 탐 색하고 거기서 나온 다수의 명각들을 출판한 사람은 라파엘레 가룻 치 Ra ffae le Garruc 이였다. 세번째 지하 묘지는 1867 년에 죠반니 밧티스타 데 롯시 Gio v a nni Batt ist a de Ross i에 의하여 치마라 포도원 Vig n a C im arra 에서 발견 되었는데, 이 곳도 역시 산 세바스티아노 길 밖의 압피아 길 노상에 있다 . 네번째 것은 1882 년에 맛죠레 문 Po rta Mag gior e 밖 1 마일 남짓한 곳에 있는 라비카나 길 Via Labic a na 위의 아폴로니 포도원 Vig na A p ollo ni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오라찌오 마룩키 Orazio Marucc hi에 의하여 탐색되었다. 다섯번째 것은 이미 언급한 란다니니 포도원의 공동 묘지 근처에 있는 압피아 피냐텔리 길 위에서 니폴라우스 뮐러에 의하여 1885 년 에 발견되었다. 마지막으로 여섯번째 유대인 지하 묘지는 · 피아 문 Po rta Pia 밖으 로 약 반 마일 떨어진 노멘타나 길 V i a Nomenta na 위에 있는 토를 로니아 별장 V ill a Torlo ni a 에서 1919 년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것은 아고스티노 발렌테 Ago sti no Valen te에 의하여 발굴되었으며, 로베르 토 파리 베 니 Robert o P ari be ni에 의 하여 , 그리 고 후에 는 헤르만 바이 어와 한스 리츠만에 의하여 조사되었다. 위치로 볼 때 몬테베르데에 있는 유대인 지하 묘지는 유대인들이 티베르 강의 건너편에 있는 로마의 큰 구역에 거주했다고 하는 필론 P hil o 의 진술 (The Embassy to Gaiu s XXIII 155) 에 부합되 고, 압피 아 길 위에 있는 세 개의 지하 묘지들은 유대인들이 압피아 길 위에 있

던 옛 카페나 문 Po rta Cape n a 근방에 살았다는 유베날J uvenal 의 언 급 (Sat i re ill 10-15) 과 일치한다. 지하 묘지들에서 인(印)이 찍힌 벽 돌들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연대를 말해 주는 공식들이 적 혀 있다. 몬테베르데에서 발견된 벽돌들은 , 그 첫번째 무덤 계랑이 기독교 시대 이전(B.C.) 1 세기에 파서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기독 교 시대의 1 세기에는 그것이 틀림없이 사용되고 있었고, 제 2 세기와 제 3 세기에는 매우 광범하게 활용되었으나 , 제 4 세기에 와서는 유기되 었음을 보여 준다 . 토를로니아 별장 V ill a Torlo ni a 의 지하 묘지에서 나온 벽돌들은 기독교 시대의 1 세기와 2 세기의 것이므로, 그 지하 묘지가 늦어도 2 세기와 3 세기 이전에 만들어졌음을 보여 준다. 란다 니니 포도원의 지하 묘지에서 나온 인 찍힌 벽돌들은 기독교 시대의 2 세기의 것이댜 그러므로 유대인 지하 묘지들에서 나온 명각들은 필시 200 또는 300 년 이상의 기간에 걸쳐서 만들어진 것이다 . 모두 약 500 개의 명각들이 알려져 있다 . 그것들은 로마에 있던 거의 열두 개에 달하는 회당들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당시에 비 교적 많은 유대인 인구가 존재했음을 확인해 주는데, 추정된 인구의 수는 20000 에서 60000 에 이른다. 명각들을 언어별로 세어 보면, 366 개 죽 74 퍼 센트가 헬라어로 되 어 있고, 120 개 죽 24 .4퍼 센트가 라틴 어로, 8 개 죽 1. 6 퍼센트가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되어 있다 . 그러 므로 로마의 유대인들은 대부분이 헬라어를 사용하였으며, 한편으로 좀더 로마화한 사람들은 라틴어도 사용하였으나, 셈 언어는 상대적 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명각들 가운데 기록된 500 여 명의 개인 이름들 중에서 40 퍼 센트는 순전히 라틴어 이름들이고, 32 퍼센트는 헬라어, 13 퍼센트는 히브리어 이름이며, 나머지는 라틴어와 헬라어 또는 라틴어와 히브 리어의 합성어로 되어 있다. 히브리어 이름의 비율이 가장 높게 (17 퍼 센트) 나타난 곳은 몬테베르데에 있는 지하 묘지이고, 토를로니아 별

장에 있는 지하 묘지에서는 헬라어 이름들 (43 퍼센트)이 라틴어 이름 들 (37 퍼센트)보다 더 많고, 압피아 길의 위에 있는 세 개의 지하 묘 지들에서는 라틴어 이름의 비율이 가장 높다 (50 퍼센트). 따라서 구태 여 구분을 해 본다면,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 티베르 강 건너편에 있 었고, 가장 많이 헬라화된 집단이 북동쪽(토를로니아 별장)에, 그리고 가장 많이 로마화된 집단이 압피아 길 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압피아 길에서 발견된 그림이 그려진 지하 묘지의 방들은, 날개 가 달린 승리 의 신 Vic t o ry, 죽 풍요의 뿔 cornucop ia( 헬라 신화에 서 어린 제우스에게 젖을 빨게 했다는 염소의 뿔, 풍요의 뿔-역주)을 가진 여신 포르투나 Fo rtun a 와 같은 이교의 우화적 상징들과 계절의 수호신들을 보여 주고 있으며, 토를로니아 별장에 있는 방의 그림들 은 형식에 있어서는 헬라식이지만 유대인 신앙의 상징들을 강조하 고 있댜 그러나 몬테베르데에 있는 지하 묘지에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그와 같은 그림들이 없다 . 288 몬테베르데의 유대인 지하 묘지에서 나온 아람어 명각 몬테베르데의 유대인 지하 묘지가 오랜 세월 동안 또다시 폐허가 되어 있지만, 거기서 나온 많은 명각들이 로마에 있는 라테란 기독 교 박물관 Museo Cri st i an o La t eranense 에 소장되 어 있다. 그 박물관 에는 여기에 보이는 대리석 판이 유대관의 소장품 제 21 번으로 표시 되어 있다. 본문의 첫째 단어는 아마도 안니아Anni a 라는 인명인 것 같은데, 이것은 히브리어 i1.,:in (하니아 H ani a 또는 한니야 H anniy a) 에 해당하 는 것으로서, 그 모양에 있어서는 어쩌면 헬라어 i\vv i. a (안니아)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에 따라 본문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나 왔으나, 첫째 줄의 둘째 단어는 아람어의 소유 대명사를 포함할 수

도 있어서 〈그의 아내〉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나서 둘째 줄은 〈……의(―)〉를 반복하면서 그 남편의 이름을 말해 주고 있다 . 이 이 름은 아람어 바르 ba 쳐룹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벤 ben 에 상당하는 것으로서 〈아들〉 또는 〈……의 아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그 사람의 출신 지방인 남부 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 Calab ri a 를 그의 이름의 일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 이러한 해석 이 다 맞다면, 그것의 번역은 문자적으로 〈안니아, 그의 아내, 바르­ 칼라 브리아의 (아내)〉가 되고, 좀더 간단하게 말하면 , 〈안니아, 바르 -칼라브리아의 아내〉가 된다. 따라서 무덤 명각들에서 흔히 그렇듯 이 고인의 이름과 가족 관계를 표시하는 문구가 적혀 있다. 289 몬테베르데의 유대인 지하 묘지에서 나온 헬라어 명각 지하 묘지에서 나온 이 대리석 판은 라테란 박물관의 유대관에 있 는 제 28 번이다. 여기에 사용된 철자들이 그 당시로서는 매우 혼한 것 이었으나 좀더 정상적인 철자로 쓴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tv8 a6E KEt tat 10b8ac tcp c b g . 번역하면 〈제사장 유다스가 여기에 누워 있 다〉이다. 첫 두 단어 〈여기에 누워 있다〉는 무덤 명각들에 적힌 하 나의 표준 공식이다. 본문과 함께 세 개의 문체가 나타나 있다. 그 중앙에는 메노라, 즉 일곱 가지가 있는 동대 (286 항 참고)가 있다. 왼쪽에는 아마도 등대 위의 둥잔에 필요한 감람유를 담아 두는 것으로 생각되는 병이 한 개 있다(출 업 :20 ; 35:14). 오른쪽에 는 담쟁 이 덩 굴 같은 잎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보통 헤데라 Hedera 로 알려진 포도나무 속(屬)으로 분류되는 종류이다. 이와 같은 담쟁이 덩굴 잎은 라틴어 명각들에서 도 사용되어 있고, 또한 헬라어 명각들에서는 단어들을 분리하고 약 어들을 표시하는 둥의 목적으로 전용되 기 도 하였다 (Ca g na t 28 쪽 ;

Avi- Y onah, Abbrevia t i on s, 38 쪽). 그러 므로 여 기 서 는 그것 이 아마도 단순히 명각에 첨가된 관습적인 장식물로 사용된 듯하다 . 하지만 그 잎이 일종의 포도나무 류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한, 그것이 유대인의 명각과 함께 사용된 사실이 어쩌면 포도나무로 서의 이스라엘의 개념(예컨대 시 80:8) 과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또한 부언해야 할 사실은 담쟁이 덩굴 잎을 그리는 것과 에트록 e t hro g을 그리는 것을 구별하기가 언제나 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후자는 하여간 독특한 유대인적 상징이다. 초막절 (레 23:40) 에 룰라브 죽 종려 가지('2KI항 참고)와 더불어 사용된 것은 시트런 c itr on 이고, 에트록과 룰라브는 상징물로서 함께 자주 나타난 댜 다른 과실들도 또한 나타나는데(예컨대 석류), 때로는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판정하기가 쉽지 않다. 290 몬테베르데의 유대인 지하 묘지에서 나온 라틴어 명각 라테란 박물관의 유대관에 있는 제 32 번 품목인 이 대리석 판은 세 조각으로 깨어졌고, 한 부분은 완전히 없어졌다. 메노라는 왼손편의 위쪽 귀퉁이에 있고, 첫째 줄의 마지막 글자는 이중 윤곽으로 그려 져 있댜 여백의 크기로 봐서 판단한다면, 넷째 줄의 첫째 단어는 약 자로 기록된 것 같으며, an(nos) (안[노스])라고 읽어야 할 것이다. 마 지막 줄에서는 (die ) s ([디에]스)라는 단어의 첫부분이 아마도 지금은 깨어져 나간 자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번역은 〈 23 년 14 일을 산 플라 비우스 콘스탄티우스〉이다. 291 란다니니 포도원의 유대인 지하 묘지에 있는 헬라어 명각 아직도 지하 묘지에 있는 이 대리석 판에는 네 줄로 된 본문과 메

노라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본문은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을 것이 다. '£V8 d8c KCt tat vnmoc Map K t AA oc. '£V c ipn vn h Koi µn mc oou. 본문은 그 첫째 줄에서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표준 구절(위의 289 항) 을 사용하고 있고, 마지막 두 줄에서는 유대인의 묘지 명각들에서 역시 매우 관례적인 다른 구절(시 4:8 참고)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뜻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 아이 마르켈로스가 누워 있다. 너의 잠이 평안할지어다.〉 292 란다니니 포도원의 유대인 지하 묘지에 있는 라틴어 명각 이 대리석 판도 역시 아직 지하 묘지 안에 있다. 본문은 이렇다. Deute r o gramateo bene merente dulcis ( sim o). 데우테로스 Deute r os 는 라틴어 이름 세쿤두스 Secundus 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름이고, 둘 치스 dul ci s 는 최상급 형용사 둘칫시모 dulc i ss im o 의 약어로 빈번히 발견되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 명각은 이렇게 번역될 수 있다. 〈그것 을 받으시기에 매우 합당하시고 지극히 다정하신 서기관 데우테로 스에게.〉 본문 아래, 중앙에는 메노라가 있다. 왼쪽에는 에트록이 있다. 에 트록과 더불어 룰라브가 또한 자주 보이는데, 혹시 후자가 한때 이 판 위에 있었는지 모른다. 지금은 그것이 더 이상 보이질 않는다. 오 른쪽에는 율법 두루마리 와 담쟁 이 덩굴 잎이 있다 (289 항 참고). 293 토를로니아 벌장에 있는 유대인 지하 묘지의 구도 이 지하 묘지의 계랑들은 두 충으로 되어 있으며, 구도에서 높은 충의 윤곽은 굵은 선으로 그려져 있고, 낮은 충의 윤곽온 점선으로 그려져 있다. 참고할 지점들은 대문자로 표시되어 있고, 보다 중요한

칸막이 방들 cub i cula 과 아치 묘실들은 로마 숫자로 표시 되 어 있으 며, 명각들은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되어 있다. 낮은 충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서쪽에 A 라고 표시된 지점에 있다. M 이라고 표시된 교차로 에서는 높은 충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하지만 원래는 높은 충으로 들어가는 별도의 출입구가 있었음에 틀림없고, 그것은 아마 도 동쪽에 P 라고 표시된 현재의 복도 끝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충의 지하 묘지와 낮은 층의 지하 묘지는 실제로는 분리된 복합 구조들이었다.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인 찍힌 벽돌들(위의 624-626 쪽) 은 낮은 충의 북쪽 지역에 속한 것들로서, 이 지역이 제 2 세기 또는 제 3 세기 초에 세워졌음을 암시한다. 한편 별도의 높은 충은 늦어도 제 3 세기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구도의 범례가 보여 주듯이, 대 부분의 명각들이 보존된 곳은 낮은 층의 북쪽 지역이고, 높은 층의 보다 큰 칸막이 방들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294 토를로니아 벌장의 유대인 지하 묘지에 있는 그림 구도 (293 항)에서 표시된 칸막이 방 II 번은 이 지하 묘지 안에서 가 장 충만하게 장식된 방이다. 이 사진은 북쪽에 있는 아치 묘실의 아 치에 있는 그림을 보여 주고 있다. 중앙에는 일곱 가지가 있는 동대 가 있는데, 이것은 검정색으로 뒤발린 녹청색으로 그려져 있고 불꽃 은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두 개의 동심원-하나는 빨간색, 하나는 청록색으로 된 - 안에 놓여 있다. 왼쪽에는 뿔(나팔) 죽 쇼 파르 slwf a r 가 있고 (287 항 참고), 오른쪽에는 홉사 석류같이 보이는 둥근 모양의 빨간 과실이 있다.

295 토를로니아 벌장의 유대인 지하 묘지에 있는 다른 그림 이 그림은 칸막이 방 II 번의 동쪽에 있는 아치 묘실의 아치에 그 려져 있다 . 또다시 빨간 불꽃들을 가진 일곱 가지가 있는 등대가 중 앙에 있고, 왼쪽에 빨간 과실이 있다. 그런데 오른쪽에는 토라 Torah 즉 율법의 두루마리가 있다. 그 두루마리의 양쪽 끝이 동시에 보이 고, 두루마리는 막대기에 감아 놓은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그것의 손잡이는 굵은 점으로 표시되어 있다. 상단에는 삼각형으로 된 작은 고리끈이 있는데, 이것은 두루마리에 교착시켜 그 제목을 기록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석관 296 헤롯의 가족 무덤에 있는 석관들 앞에서 본 무덤의 대표적인 형태들에 관한 조사 (248 항 이하)에서 우리는 사망자의 시체를 바위턱 위에 올려놓거나 시체실 안에 넣어 놓는 것과 같은 간단한 방법으로 무덤 안에 안치하는 사례가 자주 있었음을 보았다. 이러한 경우에 비교적 초기의 관습은 아마도 그 사람이 살았을 때 입던 옷으로 시체를 싸는 것이었다. 이것은 엔돌 의 영매가 사무엘이 〈겉옷을 입〉은 노인으로(삼상 28:14) 올라오는 것을 본 사건에 반영된 바와 같다. 그리고 비교적 후기의 관습은 시체를 세마포 수의에 싸는 것이었 는데, 이것은 예수의 장례에 관하여 진술된 바(마 업 :59 및 평행절)와 같다(위 의 2 '2:7항 참고). 후자의 관습은 또한 탈무드가 람반 가말리 엘 II 세 Rabban Gama liel II (fl. A.D.C. 140-165) 에 관하여 〈그들이 그를 세마포 옷으로 싸서 운구해 나갔고, (그러자) 모든 백성이 그의 사례 룰 따라서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고자) 세마포 옷을 입혀 운구해 나갔 다〉라고 말하는 경 우에서 도 분명 하게 반영 되 어 있다 (Ke th ubo th 8b

SET , m 3, 43 ; Moed Kata n 27b SET II 8, 178 참고). 그런데 시체를 담기 위하여 궤나 관을 사용하는 일은 애굽인과 헬 라인과 로마인들 가운데서도 흔히 있는 일이었으며, 또한 오래지 않 아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그러하였다. 이 장사를 위한 궤들 중 최초 의 것은 아마도 나무로 만들어졌을 것이며, 한 랍비 문헌 (Pal. M. K 1, 5, 80c ap. Rahma ni in 'Atiqo t 3 [1961], 102 쪽, n. 48) 은 사망자들의 시체들과 뼈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백향목들 속에 장사되었다〉, 즉 백향목 나무로 만든 상자들 속에 장사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와 같은 관이 돌로, 특히 석회석으로 만들어질 때, 그것은 석관(石 稽)이라고 불린다. 헬라어와 라틴어로 oa p KO 帖 YOC (사르코파고스)와 sarcop mg us(사르코파구스)는 〈살을 먹는〉이라는 뜻이고, 관으로 널 리 사용된 일종의 석회석을 묘사하기 위하여 형용사적으로 사용되 었다. 왜냐하면 그 석회석은 시체들의 살을 빨리 없애버렸기 때문이 다 (P liny Na t. Hi st. XXXVI 'Zl). 이 동일한 단어들이 명사적으로 사 용되면 관(稽)을 의미했고, 이리하여 〈석관〉이라는 뜻의 영어가 되 었다. 이러한 큰 돌궤들은 이따금씩 정교하게 조각되기도 하여 결코 값싼 것들이 아니었으므로, 보통 그것들은 부자들에게 속했던 것으 로 보이는 무덤에서 나타난다. 이와 같이 헤롯의 가족 무덤에서 가 장 긴 묘실('2:1 3 항의 구도에서 F) 에는 아래에서 보이듯이 아직도 두 개의 석관이 있었다. 297 헤롯의 가족 무덤에 있는 석관의 장식 이 사진은 방금 언급한 헤롯의 가족 무덤에 있는 두 개의 석관 (296 항)의 앞면을 보여 준다. 그 중앙에는 아칸투스 무늬가 꽃병 모 양의 물체 위에서 올라오고, 잎들을 가진 소용돌이 무늬가 양쪽으로 뻗어 있는 한편, 꽃 모양의 장식들이 소용돌이 무늬의 곡선 안에 놓

여져 있다 . 장례 미술에서 흔히 쓰이는 상징인 꽃 모양의 장식은 궁극적으로 는 여러 개의 꼭지점을 가진 별의 형상에서 유래된 하나의 양식화된 그림처럼 보이며, 별과 꽃 모양의 장식은 초기 메소포타미아 이래로 고대의 근동 지방에 매우 널리 퍼진 상징들이다. 수메르의 그림 문 자들에서 별은 〈하늘〉과 〈신〉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 이리하여 꽃 모 양의 장식은 빛과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을 상징하기에 이르 렀고 , 그 분 안에 있고 하늘에 있는 생명에 대한 희망을 표현할 수 가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꽃 모양의 장식은, 자주 금성과 동일시된 여신 이난나 Inanna 또는 이쉬타르 Ish tar의 별에서 어쩌면 유래되었을 수 도 있다. 여덟 개의 꼭지점을 가지고 나타나는 이 별은, 예컨대 함무 라비 직후의 카사이트 시대 Kassite peri od 의 지계석(ANE P, no. 518) 위 와 디 글랏-빌 레 셀 m 세 Tig la th -piles er ID (B.C. 744-?Zl) 의 시 종 벨-하란-벨-우수르 Bel-harran-bel-usur 의 석비(ANE P, no. 453) 위 에 나타나는데, 이 석비에서는 이난나가 〈별들의 빛나는 여신〉이라 고 불리고 있다(ARAB I, §824). 또한 후기의 유대인 사상에서 별은 천사를 나타내고(예컨대 에녹 II 서 30:1 4 ) 천사들은 사망자들을 하늘 로 데려가서(눅 16:22), 에녹이 여섯째 하늘을 방문했을 때 본 것처 럼(에녹 II 서 19:5 ) 거기서 그들의 영혼을 돌본다. 이러한 계통의 사 상을 따르노라면 , 이 꽃 모양의 장식은 장례와 관련된 배경에서는 매우 적절한 상징이 될 것이다. 298 삿단 왕후의 석관 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이 석관은 예루살렘에 있는 아디아 베네의 헬레나 왕후의 무덤 (280 항 참고)의 개봉되지 않은 아랫방의

아치형 석묘에서 발견되었다. 뚜껑을 열었을 때 내용물은 이미 오래 전에 흙이 되어 있었다. 앞면에 있는 명각에는 아람어로 ~n::::,':,o ,더 T (Zaddan malalda', 잣단 말락타), 그리고 히브리어로 i1n ::::,':,2 TTT (Zaddah ma1akt:ah, 잣다 말락타), 죽 삿단 또는 삿다 왕후 Qu een Saddan or Saddah 라고 적혀 있다. 헬라 시대에 유대인들 가운데 널 리 퍼진 관습인 셈어 이름과 헬라어 이름을 둘 다 사용하던 관습에 따라 생각하면, 그 유명한 아디아베네 A di abene 의 왕후가 이 셈어 이름과 함께 요세푸스가 정규적으로 사용하는 헬라어 이름인 헬레 나('E A t띠[헬레네])로도 알려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만약 이것이 맞 다면, 이 석관은 그 전체 무덤의 주인으로 여겨지는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후의 석관이다. 299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후의 무덤에서 나온 석관 이 큰 석관은 역시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것으로, 이것 역시 예루 살렘에 있는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왕후의 무덤으로부터 왔을 것이 다. 그것은 큰 꽃 모양의 장식들로 이루어진 꽃 무늬들로 꾸며져 있 다 (2ITT 항 참고). 300 베트 셰아림에 있는 사자 석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28.5항), 석관들은 베트 셰아림에서도 사 용되었고, 지하 묘지 제 20 번 (Ca ta comb, no 20) 에서는 특별히 다수의 석 관들이 사용되 었다(IE J 7 [1957], 82-92 쪽). 이 사진에 보이 는 석 관 은 이 지하 묘지 벽의 움푹 들어간 곳에 여전히 그대로 남겨진 채 발견되었다. 앞면 머름의 양각으로 된 조각에서 우리는 그 양쪽 끝 에 꼬인 기둥이 서 있고, 또한 상단을 가로질러 일종의 꼬인 줄 같

은 장식 이 있는 것을 본다. 왼쪽의 수사자와 오른쪽의 암사자가 하 나의 용기를 중간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그들은 아마도 그 용기로부터 곧 무엇을 마시려고 하는 것 같다. 만든 솜씨가 원시적 이기는 하지만, 힘세고 사나운 인상은 확연하게 드러나 있다. 헬라 및 로마 시대 팔레스타인의 무덤과 회당의 다른 곳에서도 사자는 장 식들 가운데서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 (Goodenou g h I, 68, 95, 18. 5, 195, 199, 207 쪽 외 참고). 301 베트 셰아림에서 나온 납으로 만든 관 베트 셰아림의 지하 묘지 제 20 번(위의 282 항 참고) 위에 있는 언덕 의 경사면에는 일단의 지면(地面) 무덤들이 있었다. 제 4 세기 중엽에 마을이 파괴되고 지하 묘지를 파는 일이 중단된 후 이곳에 장사를 지냈을 것이다. 이 무덤들 중의 하나에는 납으로 만든 관이 있었는 데, 그 관의 한쪽 끝이 이 사진에 보인다. 관은 길이가 1. 94 미터, 폭 과 높이가 0.3 미터이고, 테두리들을 돌아가며 여덟 곳에 용집된 뚜껑 이 있다. 이 관의 치수는 이것이 온전한 시체를 넣기 위한 용기가 되기에 충분하지만, 발굴자들은 다음에서 토의될 납골함의 경우에서 와 마찬가지로(아래의 639 쪽 이하를 보라), 사망자들의 뼈만 그 안에 매장되었다고 믿는다 (IE] 9 [1959], 215, 217 쪽). 장식에 있어서 이 납으로 만든 관의 뚜껑과 긴 측면들은 포도나 무, 사발에 담긴 것을 마시고 있는 새, 사람의 머리, 그리고 작은 메 노라 둥으로 장식되어 있다. 좁은 측면의 다른 쪽에는 장식이 없으 나, 이쪽에는 코린트식 주두를 가진 기둥들에 떠받쳐진 아치가 있고, 아치 길에는 메노라가 있다. 동대에는 세 개의 다리가 있고, 가운데 다리에는 세 갈래가 있다. 오른쪽에는 쇼파르와 향삽이 있고, 왼쪽에 는 룰랍과 에트록이 있다(沈 7 항 참고).

홍미롭게도 이 관은 제 19 세기에 페니키아의 시돈 S i don 에서 발견 된, 납으로 만든 다른 관과 사실상 똑같은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 면, 후자에는 아치가 양쪽에 다 있으며, 한쪽의 아치 길에는 아마도 고인으로 추측되는 서 있는 사람의 형상이 있고, 다른 쪽에는 그리 스도-축어 C hri s t -mono gr am 가 있다 (691 쪽 이하 참고). 이 축어(縮語 ―성명의 첫 글자 등으로 줄여서 짜맞춘 글자__역주)에는 그 주위 로 돌아가며 축어의 글자들 사이사이에 IX8YC (이크튀스, 〈물고기〉) (30 항 참고)라는 단어의 글자들이 적혀 있다 (Goodenou gh V, 56 쪽 및 그림 59). 이와 같이 비슷한 관 위에 유대교와 기독교의 상징들이 각기 고인 의 신앙과 조화되게 사용되었다. 베트 셰아림의 관이 시돈 출신의 유대인에게 속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있음직한 일이다. 왜냐하면 거 기에 적힌 비명(碑銘)들은 많은 시돈 계 유대인들이 이 장소에 매장 되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납골합 납골함은 보통 나무나 돌로 만든 작은 궤이다. 그것은 보통 길이 가 50-80 센티 미 터 (20-32 인치 ), 폭이 28-50 센티 미 터 (11-20 인치 ), 그리 고 높이가 25-40 센티미터 (10 一 16 인치)로, 말하자면 한 번의 장사에서 뼈들을 담을 수 있는 크기이다. 그와 같은 용기가 돌로, 특히 석회석 으로-보통 그렇듯이 _一만들어질 때는 〈 sarco p h agu s 〉 (296 항 참 고)라는 단어와 유사하게 〈뼈를 먹는 bone ― ea ting〉 (S tr abo XVI 4, 17 참고)이라는 뜻의 헬라어 단어 oITTO\ lXIYO C .: (오스토파고스)를 사용한다. 라틴어로 그것은 ossuariu m (옷수아리움 ; os, ossis [〈뼈〉]에서 파생됨) 이라 불리고,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영어 단어 (〈납골함〉 또는 〈납골당〉)를 갖게 되 었다. 납골함은 뼈를 이차적으로 처분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때때로 석 관이 매장을 위해 사용되어 (296 항 참고) 유해를 안치하는 영구적인 안식처의 역할을 하였으나, 대다수의 경우에 시체는 단순히 바위턱 위나 시체실 또는 코크 안에 놓여졌다. 그리고 이 같은 장소는 후에 또다른 안장(安葬)을 위해 필요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여지

를 만들기 위하여 , 마지막으로 남은 뼈들은 모아서 어떤 장소 또는 어떤 용기에 담아 간직하였다. 텔 엔-나스베의 무덤 5(253-254 항)는 바위턱 매장지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뒤쪽에는 그와 같이 뼈들을 모아놓기 위하여 사용된 것으로 생각되는 작은 방이 있었다. 텔 엔­ 나스베의 무덤 4( 25.5항)는 코킴 매장지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주된 방의 바닥에는 같은 방법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구덩이가 있 었댜 마릿사에 있는 무덤들 (260 항)에는 매장을 위한 시체실 아래에 벽감이 있으며, 이것들도 아마 같은 모양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이러한 관습으로부터 납골함을 사용하 는 풍습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 산해드리야의 무덤에 있는 어떤 작 은 방들은 그와같은 용기들을 넣어 두던 장소들이었을 것이고, 이 무덤들 안에서 발견된 돌 단편의 더러는 아마도 납골함 및 석관들의 단편들일 것이다('l7 1 항). 베트 셰아림에는 관이 없는 해골이 몇 개 있었고, 나무와 돌로 만든 석관들이 사용되었으나, 아마도 뼈를 모아 놓기 위하여 사용되었을 작은 벽감들이 있었다. 위에서 기술한 납으로 만든 관 (301 항)은 아마도 단지 뼈들을 담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발굴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그 곳에서 돌과 나무 로 만든 납골함의 단편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그들은 말하기롤, 이차 적으로 매장하는 관습이 당시에는 규칙이었던 것이 확실하다고 한 다. 죽 뼈들을 베트 셰아림으로 운반해 갔거나 아니면 거기, 아치형 석묘과 코킴에 놓여 있던 납골함에 모아 놓았다고 한다 (Be th She'a rim, Vol. I by Mazar [Ma isle r], Eng lish summa ry, 1st ed. 7 쪽, 2d ed. viii쪽). 사실 한 헬라어 명각에는 다음과 같은 매우 홍미 있는 말이 적 혀 있다 (Be th She'a rim, Vol. II by Schwabe and Lif shitz, 25 쪽, no. 78).

MAf NA rAOCO KOMW KITE 죽 Mavva VAOOOK6 四 K tt E( 마그나 글로소코모 키테). 헬라어로 Y 畑 oo6K0µoc (글롯소코모스) 또는 Y 油 oo6K0µov (글롯소코몬)이 라는 단 어는 정확하게 피리의 〈입에 무는 부분을 위한 상자〉를 가리키며, 일반적으로는 작은 상자 또는 관이나 석관을 말할 때 사용된다. 이 경우에 있어서 이 단어가 납골함을 의미함에는 아무런 의심의 여지 가 없는 듯하며, 발굴자들은 〈마그나가 납골함 안에 안치돼 있다〉라 고번역한댜 이러한 이차적 매장의 관습은 『 미쉬나 』 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고 유한 장소 〉 라는 말이 가족 매장지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하여 이미 인용된 한 구절('2:1 1 항)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살이 완 전히 분해되었을 때 , 뼈들은 모아져서 그것의 고유한 장소에 매장되 었다〉 (Sanh edri n VI 6 DM 391 쪽 SET IV 5, 305 쪽). 유월절과 초막 절의 중간 날들 동안에 허용되는 것으로 간주된 활동들에 관한 토의 에 서 랍비 메 이 르 Rabbi Meir (fl. A.D .C. 140 - 164) 는 이 렇게 말했다. 〈사람은 그의 아버지나 어머니의 뼈들을 한데 모을 수도 있다. 왜냐 하면 이것은 그에게 기쁨의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Moed Kata n I 5 DM 208 쪽 ; Pesah im VIII 8 DM 148 쪽 참고). 이 와 마찬가지 로 며 도에 관한 소논문 Tracte on Mo urning」 에 는 랍비 엘르아자르 바르 자독 Rabbi Eleazar bar Zadok (1 세기 ; JE V, 120 쪽)이 죽을 때에 그 의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인용되어 있다. 〈내 아들아, 나를 처음에는 해자(核字)에 매장하여라. 세월이 흐른 뒤에는 나의 뼈들을 모아서 납골함 속에 넣어라〉 (Semabo t 13, Zlotn ick 82 쪽). 뼈를 모으는 것이 기쁨의 기회로 생각된 하나의 이유는, 살이 썩

는 과정이 하나의 속량 e xpi a ti on 의 수단으로 간주되었으며, 이것이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라야 속죄가 성취된다는 사실에 있었을 것이 다. 바로 위에서 인용한 첫번째 『 미쉬나』 구절에 대한 『탈무드』의 토의에서는, 범죄자의 경우에 그가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처형에 의 한 죽음과 범죄자의 묘지에 매장되는 것 두 가지 방법 모두가 필요 한 것은 물론, 그보다도 더한 것이 요구된다고 진술되어 있는데 〈살 이 썩는 것도 또한 필요하다〉고 한다 (Sanh edrin 47b SBT IV 5, 314 쪽). 그런데 의인들도 역시 동일한 속량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선을 행 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기(전 7:20) 때문이 다 (Sanh edri n 46b SBT IV 5, 308 쪽). 부활에 대한 신앙이 있는 곳에서는 납골함을 사용하는 것이 좋게 여겨질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영혼은 육체와 함께 죽는다〉라고 주장하던 사두개인들은 그와 같은 신앙을 부인하였으 나(J osep hus, Ant., XVIII 1, 4 §16 ; 마 22:23 및 평 행 절들 참고), 바리 새인들은 부활을 확신하였으며(행 23:8), 많은 사람들이 이 신앙을 유대인의 믿음에 있어서 율법에 대한 신앙만큼이나 기본적인 것으 로 생각하였다 (Sanh edrin X 1 DM 397 쪽) . 에스겔 37 장에는 이스라 엘 공동체가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는 것에 적용된 부활의 상징에 는 마론 뼈들이 다시 결합되고 살이 입혀져서 살아나는 광경이 포함 되어 있었다. 여기서는 민족이 상징적인 방법으로 언급되었으나, 이 사야 26:19 에는 거의 확실하게 개인들의 문자적인 부활 사상이 있었 으며, 이 구절이 그들의 시체는 일어나리라고 말하는 곳에서 타르굼 Tar gum은 〈그들이 죽은 몸의 뼈들〉이란 말을 첨가하고 있댜 이와 같은 관념들이 있었다면, 뼈를 납골함 속에 모아서 간직하는 것은 특별히 적절한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 사상의 어떤 측면들은 원래의 매장 과정에서 더 나아가는 어떤 관습도 용인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유대교에서는 죽은 사람의 유해에 접촉하는 일은 어떤 종류의 것이 든지 금지하는 매우 강한 감정이 깔려 있었다. 민수기 19:16 은 시체 나 사람의 뼈 혹은 무덤을 만지는 사람은 부정하게 된다고 말한다 (민 6:6 참고). 마태복음 23:27 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 러운 것이 가 득〉한 〈회칠한 무덤〉을 기술하고 있으며, 누가복음 11:44 은 무덤을 분명하게 표시하는 것은 사람들이 부지중에 그 위를 밟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이었음을 시사한다. 이와 같이 묘지의 표시를 하는 일은 미쉬나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미쉬나』는 〈회를 물에 타서 묘 위에 뿌림으로써〉 묘를 표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Maaser Shen i V l DM 80 쪽), 또한 이 일은 분명히 해마다 아달 Adar 월 15 일에 시행 된다고 진술하고 있다 (Shek alim I 1 DM 152 쪽 ; Moed Kata n I 2 DM 208 쪽 참고). 우리는 또한 완성된 매장지에 가하는 하등의 훼손에 대해서도 저 주가 선언되어 있었던 사실과 그에 관한 구체적인 실례를 앞에서 살 펴보았다 (287 항). 다시 우리는 사람이 죽은 다음에 시체 부검을 통하 여 나이를 확인하고자 시체를 파내는 일이 요청되었던 경우를 보는 데, 랍비 아키바 Rabb i Aki ba 는 이러한 불명예스런 행위를 허락할 것을 거절하였다 (Baba Bath ra 154a SET IV 4, 669 쪽). 그렇지만 이 와 같은 고려는 이차적인 매장의 관습과 납골함을 사용하는 일을 막 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위에서 제 시된 바와 같이 그러한 사례들이 행해진 것을 보여 주는 허다한 증 거가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인들도 납골함을 사용했을 가 능성이 매우 큰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다수의 초기 기독교인들 가 운데는 율법의 모든 세부 사항을 존중하는 태도가 조금 덜 엄격하게 된 경향이 있었으며, 또한 부활에 대한 강조가 점중하는 추세도 있 었다. 하여튼 우리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고인의 뼈를 보존한 사실을

말해 주는 여러 가지의 관련 언급들을 가지고 있다 . 이냐티우스 I gna ti us 가 로마에서 짐승들에게 던져진 후에(A. D.C. 110), 〈 그의 거 룩한 유해 중에서 보다 견고한 부분들만이 남았고 〉 , 이것들은 안디 옥에 있는 그의 고향 교회가 간직하도록 귀환되었다( 『 이냐티우스의 순교 The Mart yrd om of Ig nati us 』 6 ANF I, 131 쪽). 이 와 마찬가지 로 폴뤼카르푸스 Pol y c arp가 스머나에서 화형에 처해졌을 때 (156), 그의 동료들은 〈그의 뼈가 보석보다도 더 가치 있고 금보다도 더 귀중했 으므로 그것들을 거둬서 적당한 장소에 안치하였으며 , 그들은 해마 다 그의 기일(문자적으로, 〈그의 죽음의 생일 〉 )에 그 곳으로 함께 모 였다〉( 『 폴뤼카르푸스의 순교 The Mart yrd om of Poly azrp 』 18 ANF I, 43 쪽). 그런데 만약 우리가 납골함들 위에서, 초기 기독교와 관련될 가망성이 어느 정도 있는 기호들과 표시들, 그리고 이름들 둥을 실 제로 발견한다면, 그와 같은 관련의 가능성을 부정할 참된 이유가 없 으며, 아마도 오히려 그것을 확정할 수 있는 참된 이유가 될 것이다. 납골함의 연대에 관하여 말한다면, 그 단편들이 산헤드리야 무덤 들('2:1 1 항)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무덤들은 헤롯의 통치 시작(B. C . 37) 부터 예루살렘의 함락 (70) 까지의 기간에 속하는 다른 내용물에 의하 여 매우 확정적으로 그 연대가 매겨지고 있다. 예루살렘에 있는 다 른 많은 무덤들에서도 상황은 대동소이하며, 납골함을 사용한 것은 B.C. 50 년보다는 과히 많이 이르지 않는 시기에 시작하여 기독교 시 대의 70 년 경까지 계속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Rahm ani in 'Atiqo t 3 [1961], 116 쪽 및 n. 4). 도미누스 플레비트 Do min us flev i t (319 항 이하) 에 있는 묘지에서도 많은 납골함들이 발견되었는데 , 여기에 있는 무 덤들은 70 년까지, 그리고 어쩌면 135 년까지 사용된 것들이다 (W. F. Albri gh t in BASOR 159 [Oct 1960], 37 쪽). 예루살렘에서는 납골함의 사용이 70 년에 있었던 그 도성의 함락과 함께, 또는 적어도 135 년에 하드리아누스가 유대인들(과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그 지역으로부터

추방한 일과 함께 중단된 사실은 이해할 만하다 . 하지만 다른 곳에 서는 납골함이 훨씬 더 긴 기간에 걸쳐서 사용되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 있댜 게셀 Gezer 에 있는 〈마카베오 시대의 묘지에서 많은 납골함들이 발견되었는데(R. A. S. Maca list e r in PEFQ S 1904, 340- 343 쪽), 따라서 납골함은 헬라 시대, 이를테면 B.C. 150 년 경 (Good­ enoug h I, 114-115 쪽) 또는 B.C. 200 년 경 (Vi nc ent in RB 43 [1934], 564-567 쪽)에 도 사용되 었음에 틀림 없다. 굳이나프 Goodenou gh 와 뱅상은 또한 그 관습이 150 년 또는 200 년 경까지 계속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위에서 인용한 베트 셰아림에서 나온 증거는 납골함이 제 3 세기와 제 4 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곳에서 여전히 사용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납골함에 대한 명백한 언급 이 있는 것으로 인용되는 헬라어 명각은 제 4 세기의 전반기에 속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BASOR 189 [Feb 1968], 54 쪽). 하지만 예루살렘에 있어서는 가장 근사한 연대가 B.C. 약 50 년부터 70 년 또는 135 년까 지 이 다(위 의 163 항 참고). 납골함들 위에서 가장 혼히 볼 수 있는 장식은 우리가 이미 논한 바 있는 (297 항) 상징적인 꽃 모양의 장식이다(예컨대 302 항을 보라). 많은 경우에 있어서 납골함들은 명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들은 굵 어서 쓰거나 조각하거나 숯으로 그리거나 물감으로 칠해진 것들이 다. 이 명각들은 일반적으로 이름들인데, 이 이름들은 대체로 그 속 에 자신의 뼈가 간직된 사람들의 이름들일 것으로 추정된다. 302 텔 엔-나스베의 무덤 14 에서 나온 납골함 이 납골함은 텔 엔-나스베의 서쪽 묘지에 있는 무덤 14 에서 발견 되었다. 이 무덤은 아마도 철기 시대부터 로마 시대까지, 말하자면 제 3 세기까지도 사용된 무덤이다. 그 궤는 길이가 71 센티미터 (23 . 5 인

치), 폭이 28 센티미터 (11.25 인치), 그리고 높이가 34 센티미터 (13 . 5 인치) 이다. 그 위에 덮인 뚜껑은 원통형의 둥근 천장처럼 생겼고, 그 테두 리는 돌출한 사각으로 되어 있다. 이 궤의 앞면은 두 개의 큼직한 꽃 모양의 장식들로 치장되어 있고, 그 중간에 하나의 짧은 기둥이 삼단으로 된 받침 위에 세워져서 큼직한 주두를 떠받치고 있다 . 뒷 면은 석재를 규칙적으로 쌓아서 만든 벽처럼 보이도록 조각이 되어 있고, 그 위에는 세 개의 꽃 모양 장식이 그려져 있다. 다른 하나의 꽃 모양 장식이 그 궤의 왼쪽 끝에 또 보이는데, 이와 비슷한 장식 이 한때는 다른 쪽 끝과 또한 뚜껑 위에도 있었을 것이다. 이 꽃 모 양의 장식이 가진 의미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급하였다 (297 항). 뒤쪽을 석재로 된 벽처럼 보이도록 조각한 것 또한 납골함들에서 혼히 나타나는 친숙한 장식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집의 벽을 나타 내는 것처럼 보이므로, 어쩌면 이것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마 지막 안식처인 C닛p n.,2 (베이트 올람), otK o g aL&voc (오이코스 아이 오노스), domus aete r na (도무스 애테르나), 즉 〈영원한 집〉(전 12:5) 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03 기드론 골짜기의 한 무덤에서 나온 납골함 명각들 1934 년에 베이트 사후르 엘-아티카 근처의 기드론 골짜기에서 하 나의 단순한 무덤이 히브리 대학교의 고고학과에 의하여 발견되었 다. 이 무덤은 부분적으로는 바위를 깎아서 만들었고, 부분적으로는 돌을 쌓은 층들로 세워진 단칸방으로 되어 있었다. 여기서 나온 소 수의 도기 단편들에 의하면, 이 연대는 헤롯 시대로 추정된다. 그 방 에는 다섯 개의 납골함이 있었는데, 그 중의 대부분이 그 무덤의 지 붕이 붕괴될 때 파손되었다. 세 개의 납골함에는 아래의 예시에서 보는 바대로 명각들이 있었다. 명각된 납골함의 첫번째 것은 길이가

67 센티미터, 폭이 30 센티미터, 그리고 높이가 39 센티미터였다. 그것 은 네 개의 작은 발 위에 서 있었고 평평한 뚜껑으로 덮여 있었다. 뒷면에는 연한 돌을 예리한 도구로 깎아 쓴 명각이 있는데, 사진 에서 1 로 표시된 것이다. 이 명각은 다음과 같이 옮겨 적을 수 있으 며 아람어 인 것으로 보인다. i1 W3 낫R T: ::i R 門 .,:n. 그 첫째 단어는 의 심할 여지없이 오니아스 O ni as (tlvt a~) 라는 이름을 표기하는 한 가지 철자법으로, 이것은 마카베오서와 요세푸스의 책에서 친숙하게 등장 하는 이름이댜 알레프 'ale p h 는 아마도 성(姓)의 뒤를 따르는 외글자 인 머릿글자로 무심코 쓴 것이며, 그 후에 바르 죽 〈 C …·의) 아들〉 이란 말을 먼저 삽입해야 하는 것이 생각났던 것으로 보인다. 성(姓) 에서 카프 ka p h 와 쉰 s hin은 헬라어 크시(xi)를 음역한 것일 수 있으 며, 따라서 이 이름은 알렉산더 Alexander( 'AJ.. e~av6 p o~) 의 애칭형이거 나, 알렉사스 Alexas ('AJ.. E~ ci~)를 약간 짧게 한 단축형 일 수 있는데, 이 두 이름은 요세푸스의 책들(예컨대 Ant. XVIII 5, 4 §138) 에서 잘 알려져 있다. 이럴 경우 이 명각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 〈알 렉사의 아들 오니아스.〉 명각된 납골함의 두번째 것은 파손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길이는 알 수 없으나, 폭이 26 센티미터요 높이가 29 센티미터였으며, 둥그스 름한 뚜껑을 가지고 있었다. 긴 측면의 단편들 위에는 헬라어로 된 명각이 적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읽을 수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예시에서 3). AllI AC A8. 그 동일한 궤의 한쪽 끝에 약간 더 조급하게 긁어 쓴 것으로 온전 하게 보존된 것은 히브리어로 된 벽서인데 이것은 상기한, 헬라어를 히브리어로 옮겨 쓴 것으로 여겨진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예 시에서 2). rz,더 11nR n= on.,!:l ~. 첫째 이름은 빌레몬서 2 절의 i\Jr4)i.a (압피아, 압비아)와 동일한 이름이지만 여기서는 속격으로 기록되어 〈압비아의〉 납골함임을 의미한다. 사실 히브리어에서는 이것이 필요

하지 않지만, 헬라어의 속격을 가리키는 시그마 s ig ma 가 히브리어로 옮겨 쓸 때 싸메크 samekh 로 재현되곤 하였다. 히브리어는 또한 그 다음에 바트 ba t h 즉 <(·… •• 의) 딸〉이라는 단어를 넣음으로써, 첫째’ 이름이 둘째 이름으로 일컬어진 사람의 딸의 이름임을 확실히 하고 있 다. 둘째 이름의 히브리어가 온전하므로, 이것이 어쩌면 i\8n vav6p ou (아테나고루)라는 속격 형 태로 된 헬라어 이름 AOnvGYbp ag (아테나고 라스)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명각의 번역 은 이렇다. 〈아테나고라스의 딸 압피아(의).〉 명각된 납골함들 중에서 세번째 것은 하나의 평범한 궤였으나, 그 것의 뒷면에는 이러한 벽서가 긁어져 있었다(예시의 4). OCTO A 「 OC OC[T] 여 Aroc. 두 번 반복된 이 말은 bo t 0 帖 YOC (오스토파고스 ; osto ph a gus [오스토파구스]), 죽 〈뼈를 먹는〉이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639 쪽 이하) 납골함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sarcopl r zg us (사르코파구스, 석 관), 즉 〈살을 먹 는〉 이 라는 용어 와 유 사한 것이다. 다론 납골함들은 추후에 다룰 것인데 (309 항 이하), 거기서 우리는 어쩌면 초기 기독교와 관계되고, 또 예수에게까지 거슬러 오르는 관 련성을 지닌 몇 개의 기호들과 이름들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 우리 가 관심을 갖게 될 대상은 주로 십자 기호이다.

십자형(十字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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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 표의 역사 304 텔 아부 마타르에서 나온 십자 표를 가진 채색된 조약돌 두 개의 다소간 곧은 선들이 교차함으로써 생기는 모양을 의미하 는 십자는 만들기도·쉬운 가장 기본적인 표 중의 하나이다. 브엘세 바의 남동쪽 1. 5 킬로미터에 있는 텔 아부 마타르에서 1952-1954 년에 동석 기 시 대 Chalcoli thic Ag e 의 한 작은 거 주지 가 발굴되 었다. 가장 낮은 두 층은 지하 가옥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것들은 무리를 지어 터널로써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유형의 주거는 태양과 모래 폭풍으로부터 보호를 받기에 용이하여 중앙 네게브에서는 베두인 Bedo uin이 아직 도 사용하고 있다. 여기 가옥 l 'n의 가장 낮은 충과 가장 초기의 바닥에는 한 무더기 의 〈채색된 조약돌〉이 있었다. 열네 개로 된 이 납작한 돌들은 초생 달 형태로 배열되어 있었고, 각 돌은 붉은 이토(泥土)로 표시가 되어 있었으며, 이 표시는 그 조약돌들이 그 곳에 놓인 후에 손가락으로 이토를 찍어 발라서 그린 것이었다. 대부분의 표들은 십자 형으로 되어 있다. 이 조약돌들이 그 원래의 장소에서 발견되었고 또한 그

주거를 건립하는 일과 지충학적으로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십 자형의 표를, 악을 막아 주고 보호를 베풀어 주는 상징으로 삼고자 했다는 추측이 나올 만도 할 것이다. 이와 비슷한 표들은 전 종교 역사를 통하여 광범하게 발견되고 있으며, 또한 비슷한 보호적인 의 미는 여러 종교에서 종종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사진은 십자 표 시가 된 조약돌들이 원래 놓여 있던 모양대로 브엘세바의 네게브 박 물관에 전시된 광경을 보여 주고 있다. 셈어 알파벳의 한 문자로서의 십자 표 단순한 십자 표는 또한 가나안어, 페니키아어, 히브리어 및 아람 어를 포함하는 셈 Se miti c 언어에서 알파벳의 한 문자가 되었다. 1905 년에 W. M. 플린더스 페트리 W. M. Fli nd ers Pe tri e 는 시내 반도 의 세라비트 엘-카뎀 Serabit el-Khadem 에서 소위 원(原) 시나이어 명각들p ro t o-S inaiti c i ns cripti ons 을 발견하였다. 그가 당시에 알아낸 바로는 이 명각들의 연대는 B.C. 1500 년 경이다. 이 명각들은 특정한 물체를 묘사하거나 적어도 표현하려는 듯이 보이는 문자들로 이루 어져 있었다. 예컨대 소의 머리는 매우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었고, 또 직사각형의 모양이 있었는데 이것은 때때로 한쪽이 열려 있어서 집의 윤곽을 그린 것으로 보였다. 여러 번 그 문자들은 일정한 순서 를 따라 나타났는데, 그것을 차례대로 말한다면 집 눈, 소 모는 막대 기, 그리고 십자의 순서였다. 이 부호들을 읽는 순서는, 그것들이 때 로는 세로로 된 기둥에 적혀 있어서 틀림없이 위에서 아래로 읽히다 가 때로는 가로로 적혀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힐 때에도 동일한 순서로 되어 있는 사실에 의하여 확정되었다. 1915 년에 앨런 가디너 Alan Gar din er 는 이 문자들이 사실상 두음

자어(頭音 字語 )를 이루고 있음을 제시하였다. 이 말은 하나의 주어진 문자가 그것이 묘사하는 물체의 이름의 첫 음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이리하여 가디너는 방금 언급한 문자들의 순서가 셈어 글자들, 죽 히브리어로 말한다면, 베트 be t h, 아인 ‘ay in, 라메드 lamedh, 타우ta w 등과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 문자들의 순서가 〈여성 바알〉을 의미하는 〈바알라트 Ba'ala t〉라는 이름이 되는 것으로 판독하였다. 가나안 여신 바알라트는 바로 아래에서 언급될 명각 (305 항)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애굽인들에 의해서는 하토르(H a­ t hor) 라고 불렸고 , 하토르는 그 명각이 보여 주듯이 세라비트 엘-카 뎀 Serabit el-Khadem 에 있는 터 키 청 록옥( 靑 綠玉) 광산의 여 신으로 알려졌는데, 이러한 확인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부호들의 설명을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원 시나 이어 명각들에서 셈어 알파벳의 초기 형태를 얻게 된다. 이 초기 알 파벳 기록에는 소의 머리가 포함되어 있고, 히브리어에는 알파벳의 첫 글자가 알레프 'ale p h 인데, 이것은 소를 뜻하는 단어(더낫 R[ 엘레프], 구약에서는 오직 복수로만 나타난다, 0., 타낫 R[ 알라핌] ; 예컨대 잠 14:4) 이댜 다른 하나의 문자는 집이고, 히브리어로 둘째 글자는 집을 뜻 하는 단어 (n., :::i [바이트] ; 예컨대 출 12 : 30) 인 베트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문자들을 그리는 일이 점차적으로 더 관습화하게 되었고 따라 서 우리는 마침내 히브리어로 소의 머리 대신에 R( 알레프)라는 글자 와 집 대신에 2( 베트)라는 글자를 가지게 되었다. 또다른 문자는 하 나의 단순한 십자 표이고, 히브리어로 알파벳의 22 번째이자 마지막 글자는 타우ta w 인데, 이것은 표 또는 기호를 뜻하는 단어 ('n[ 타우]; 예컨대 겔 9:4) 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토의한 문자들이 본질적으로는 작은 그림들이므 로, 그것들은 우리에게 애굽인의 상형문자의 그림 글pi c tur e writing 울 상기시켜 주며, 이러한 기록의 형태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애굽인의 영향으로 생겨났음을 암시해 준다. 하지만 그림 문자는 두 음자어의 원칙에 따라 사용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진정한 알파벳 문 자이며, 따라서 그러한 점에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발명임을 보여 준댜 바로 아래에서 제시될 보기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알파벳이 널리 사용된 지역에 비춰 볼 때, 그 기원은 시리아-팔 레스타인 지역의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 참으로 이제는 그 원 시나이어 명각들이 가나안어 Canaa nite 계통이며, 그 자체는 그 시기 죽 B.C. 15 세기 초의 정상적인 알파벳 체( 體 )의 가나 안어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FLAP 148-149 쪽). 305 세라비트 엘-카뎀에서 나온 원 시나이어 명각을 가진 사암 조상 이 조상은 현재 카이로의 이집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남자가 옹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은 혼히 있는 애굽인의 전형이다 . 명각(시리 즈 no. 346) 은 원 시나이어로 되어 있고, 기록된 글자의 주된 부분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여 있으며, 조상의 전면을 가로질러 약간 아 래 쪽으로 경사져 있다. 가디너의 설명에 의하면, 여기에 기록된 것 은 라메드, 베트, 아인, 라메드, 그리고 타우에 해당하는 일련의 문자 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이것은 〈바알라트에게 속하는〉이라는 뜻이다. 현재 우리가 관심을 두는 문자는 오른편에 있는 마지막 글 자, 곧 알파벳의 한 글자로도 쓰이고 히브리어 타우에도 해당하는 십자 표이다. 〈바알라트〉라는 단어를 이루는 문자들이 동일한 순서로 나타나는 몇 개의 다른 실례들 가운데서 하나만 더 언급하자면, 지금은 영국 박물관에 있는 세라비트 엘-카뎀 Serabit el-Khadem 의 사암(砂岩) 스핑크스 초석의 왼쪽에 새겨진 명각이다 (no. 41748). 이것은 그 스

핑크스의 오른쪽 어깨에 상형 문자로 된 명각이 있기 때문에 특별한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명각에는 〈터키 청록옥(의 숙녀), 하토르의 사 랑을 받는〉이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어서(시리즈 no. 345), 바알라트 와 하토르가 동일한 여신임을 확증해 주고 있다. 우리가 특별히 관 심을 가지는 문자, 죽 단순한 십자 표는 사실 원 시나이어 명각들 가운데 35 회 이상 나타나는 가장 혼한 기호이다. 셈 언어들을 기록한 알파벳의 발전 과정을 예증하는 많은 명각들과 텍스트들은 그 외에도 더 존재한다. 이것들 가운데서 우리는 1500 년 동안 십자 표가 알파벳의 문자로 사용된 것을 계속해서 발견하고 있 댜 예를 들면 이 표가 다음과 같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나안어로는 베들레헴의 서쪽 5 킬로미터 지점인 엘-카드르 el ­ Khaclr 에 서 나온, B.C. 1100 년 경 의 청 동 투창의 머 리 부분에 있는 명각들에서 이것이 나타난다(위에서 아래로 읽는 각 명각의 마지막 문 자). 푀니키아어로는 이것이 뷔불로스 (no. 1141) 에서 발견된 B.C. 950 년 경의 예히밀크 왕Ki n g Ye himilk(아래의 306 항을 보라)의 신전 명각 에서 나타난다(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서 첫째 줄의 두번째 문자). 아람어 로는 B.C. 850 년 경 다메 색 의 벤-하닷 I 세 Ben-Hadad I 가 멜 카르트 Mel qart 신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그의 초상을 새겨넣어 만든 서원의 돌 vo ti ve s t one 인 비르-하닷 석비 Bir -H adad s t ela 에서 이것이 나타난다(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서 넷째 줄의 첫번째 문자). 히브리어(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음)에서는 십자표가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B.C . 925 년 경의 이른바 〈완전한 고전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고 하는 며]셀 달력 Gezer Calendar 』에서(셋째 줄 끝에). 또한 B.C. 588 년 경의 라기스 도편들 Lac hi sh os tr aca 에서(예컨대 r 편 지 II 」에서 둘째 줄, 여섯번째 글자). 그리고 쿰란에서 나온 여러 개의 양피지 사본들 중에서, 죽 동굴 4 에서 나온, 출애굽기의 많은 부분을

포함하고 있는 B.C. 225-175 년 경의 커다란 두루마리 (4 Q EXa) 에서(예 컨대 출애굽기 32:10-30 을 수록하고 있는 페이지에서 일곱째 줄, 여덟 번째 문자). 동굴 6 에서 나온 아마도 B.C . 2 세기 후반의 창세 기 단편 (6 Q l) 에서(찰 읽을 수 있는 부분의 둘째 줄의 두번째 문자, 그리고 많은 다른 경우들). 동굴 l 및 동굴 2 에 서 나온, B.C. 125-75 년 경 의 레 위 기 단편들 (1 Q 3 및 2 Q 5) 에서 (1 Q 3 의 둘째 단편, 다섯째 줄, 두번째 문자; 2 Q 5 의 셋째 줄의 다섯번째 문자와 다섯째 줄의 네번째 문자) 둥, 306 뷔블로스 왕 예히밀크의 명각 B.C. 15 세기의 세라비트 엘-카뎀의 반석에 새겨진 명각들로부터 B.C. 2 세기와 1 세기 쿰란의 양피지에 적힌 텍스트들에 이르기까지, 바로 위에서 인용된 문서들의 연대는 근 1500 년의 기간에 걸쳐 있 다. 또한 그 자체는 돌에 명각들을 새겨넣은 비명체(碑銘體)로부터 도편(陶片)과 양피지에 텍스트들을 기록한 초서체(草 書體 )에 걸쳐 있다. 그러나 우리가 토의하고 있는 이 알파벳 문자는 본질적으로 단순 한 십자 표의 모양을 계속해서 이루어 왔다. 그것이 기록되는 방법 에 있어서의 주된 차이는 그 글자의 세로(수직) 획과 가로(수평) 획 이 똑바로 그어져 있느냐, 아니면 그것들이 옆으로 기울어져서 X 모 양을 하고 있느냐에 있다. 앞에서 예로 든 세라비트 엘-카뎀 (B.C. 1500 년 경)에서 나온, 옹크리고 앉아 있는 조상 (Insc ripti on, no 346, 본서의 305 항)의 명각에서는 텍스트 전체의 행이 약간 기울어진 것 을 제의하고는 문자가 매우 바르고 균형되게 적혀 있다. 하지만 스 핑크스 (Ins cripti on, no 345) 에 적힌 텍스트에서는 그 문자의 세로 획 이 상당히 옆으로 비스듬하게 그어져 있다. 엘-카드르 명각들(B. C. 1100 년경)에서는 한 경우에 가로 획이 상당히 기울어쳐 있긴 하지만

십자가 아주 곧바르고 균형잡힌 모양으로 되어 있다 .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예시하는, 뷔블로스에서 나온 예히밀크 명 각 Ye himi lk ins cri ption (B .C. 950 경)에서는 그 문자가 완전히 비스듬 하게 밀려서 X 모양이 되어 있다. 방금 언급한 텍스트에서 그 기호 는 첫째 줄의 두번째 문자(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음)로부터 시작하 여 이따금씩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 이 문자는 〈집〉(이 경우에는 신전을 의미함)이라는 뜻의 단어 n:::i (베트 , be th ) 의 두번째 글자이다. W. F. 올브라이트의 번역에 의하면, 사진으로 제시된 돌 부분에 해 당하는 행들의 본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뷔불루스의 왕 예히밀크가 세운 신전- 이 신전들의 폐허를 회복시킨 이는 그 분이시다. 바알_샤멤 Baal - shamem 과 바알(라트)-게발 Baal[a th ]-Gebal, 그리고 뷔불루스의 거룩한 신들의 총회가 예히밀크의 날들을 연장해 주시고, 뷔불루스룰 다스리는 정당한 왕과 뷔불루스의 거(룩한) 신들 앞에서 다스리는 참된 왕으로서 그의 해들을 연장해 주시기를! 십자 표가 똑바로 선 모양으로 되어 있는가, 또는 바스듬히 기울 어져 있는가 하는 주된 차이점 이의에도 다른 차이점들이 있다 . 이 차이점들에는 『게셀 달력』에서 가로 획이 길어진 것, 비르-하닷 석 비 Bir -H adad ste la 에 서 세로 획 이 길어 진 것, 라기 스 도편들 Lach ish os tr aca 에서 주된 획 이 두꺼워진 것, 그리고 쿰란 단편들에서 주된 획이 두꺼워지고 휘어진 것 둥이 포함된다. 히브리어로 된 텍스트들에 관한 한, 우리가 지금까지 토의해 온 것 자체는 일반적으로 페니키아 히브리어, 고-히브리어 Paleo-Hebrew, 또는 옛(古代) 히브리어라고 불린다. 이 시점에서 결론은 간단히 내

려질 수 있을 것이다. 죽 고대 히브리어 자체에서는 타우라는 글자 가 십자 표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 이것은 우리가 보통 〈 십자(가)〉 라고 할 때 의미하는 것처럼 똑바로 섰든지, 또는 X 자와 같이 비스 듬히 경사졌든지, 또는 그 중간의 약간씩 변화된 모양을 가졌든지 하였으나,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하나의 십자 표였다. 이 표가 사용된 실례들은 우리가 살펴본 바대로 세라바트 엘 - 카뎀에서 나온 B.C. 15 세기의 명각들로부터 쿰란에서 나온 B.C . 2 세기와 1 세기의 단편들에 까지 걸 쳐 있다. 사실 제 롬 Un Hi ez echi el en III 9, 4 CCSL LXXV 106) 은, 십자와 비슷했던 타우ta w 롤 포함한 고대의 히브리어 글자들 이 그가 살던 시대에도 사마리아인들에 의하여 아직 사용되고 있었 다고 말한다. 라기스에서 나온 도편들의 펜과 잉크로 쓴 본문들 , 그리고 쿰란으 로부터 인용된 단편들에는 그 문자의 주된 획을 휘게 하는 결정적인 경향이 나타나 있고, 한편으로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기록된 다른 사 본들에서는 옛날의 돌에 새긴 비명체로부터 상당히 수정된 초서체 가 개발되고 있었다 이러한 발전 과정은 엘레판티네 Ele p han ti ne 에 서 나온 제 5 세 기 의 아람어 파피루스들과 B.C. 165-37 년 경 의 히 브리 어 문서인 「내쉬 파피루스 Nash Pa pyru s 』 및 대다수의 「사해 두루 마리』에서 볼 수 있다 . 최종 결과는 히브리어에서 아직도 표준체로 간주되고 있는, 소위 정사각형 문자이다. 여기서 타우는 십자 표와 점점 거리가 멀어져서 마침내는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와 같은 문자 (n) 로 변모하기에 이르렀다 . 히브리어 타우와 그 상당어들 그러므로 히브리어로 타우라는 말은 〈표 mark 〉를 의미하기도 하

였고, 또한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 곧 고대 히브리어 자체에 있어서 적어도 신약 시대 직전까지 또는 심지어 신약 시대에까지 십자의 기 본 형태로 기록되던 글자의 이름이기도 하였다. 알파벳의 계속적인 진화 과정에서 셈어 타우는 헬라어 알파벳의 타우t a 硏와 라틴어 알 파벳의 t가 되었다. 헬라어 글자 키 c hi (XL) 도 또한 타우의 상당어로 인정되었다. 이렇 게 되는 일이 보다 쉬워진 것은, 한편으로 초기 헬라어에서 키가 가 끔 똑바로 선 십자 표처럼 쓰였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우 자체가 가끔 비스듬한 모양으로 쓰여서 그런 모양이 이미 후기의 일 상적인 키 (x) 모양과 같이, 그리고 라틴어의 X 자와 같이 되어버렸 기 때문이댜 그런데 타우가 때로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 였기 때문에, 때때로 헬라어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 오메가@ µt Ya 도 또한 그것의 상당어라고 생각되었다. 이 모든 상당어 관계의 실례들 올 아래에서 보게 될 것이다. 보호와구원의 기호 구약에서 타우라는 말은 세 개의 문단에서 나타나는데, 그 세 문 단 모두에서 이 말은 일반적인 의미로뿐만 아니라 알파벳의 문자이 기도 한 십자 표라는 특별한 의미로도 〈표〉라는 뜻을 매우 잘 나타 내고 있다. 사무엘상 21:1 3 (MT 21:14) 에서,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 를 매우 두려워했을 때, 그는 미친 체하면서 대문짝에 그적거렸는데, 여기서 〈그적거린다〉는 말은 동사형으로 사용된 타우이며, 따라서 본문의 의미는 다윗이 〈대문의 문짝에 표들을 그었다〉 (RSV) 는 뜻이 다(이 사항은 필라델피아 소재 재건주의 랍비 대학 Recons tru c ti o ni s t Rabbin ica l Colle g e 의 Rabbi Ivan Ca ine and Rich ard Hirsh in BAR

6.2 [Mar/Ap r 1980], 51 쪽을 참고한 것 임 ). 여 기 에 적 힌 표들은 십 중팔 구 오래전에 텔 아부 마타르 Tell Abu Ma tar의 채색된 조약돌 위에 그려져 있던 십자 표들 (304 항)과 동일한 형태와 동일한 의미의 것, 죽 마귀를 쫓아내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을 그은 목적은 위 험을 물리치고 보호를 베풀게 하기 위함이었다. 욥기 31:35 에서 욥은 전능자로부터 오는 말씀을 듣기를 간절히 열 망하면서,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R SV) 라고 말한다. 이 말의 히 브리어를 문자로 옮기면 〈나의 타우가 여기 있다〉(죽 〈나의 표가 여 기 있다!〉가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욥은 아마 적어도 상징적으로는 십 자 표의 형태로써 그의 표를 삼았으며, 이 십자는 똑바로 선 모양이었든 지 또는 마치 오늘날 한 개인이 법적인 서명으로 X 자를 쓸 때처럼 X 자 모양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에스겔 9:4-6 에 이 단어가 다시 나타난다 . 9:4 에 가는 베옷을 입은 한 사람이 예루살렘 도성 중에 순행하여 그 성읍 가운데서 행해지는 모든 가중한 일에 대하여 탄식하여 우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taw를 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9:5-6 에서는 우리는, 멸망시키는 자들이 와서 천사의 뒤를 따라 그 도성을 순행하면서 늙은 자와 젊은 자, 그리고 처녀와 어린아이 및 부녀룰 쳐서 죽이라는 명령을 받는 한편, 이 냉혹한 사 명을 부여받은 그들이 또한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손을 대지 말라는 엄격한 지시도 아울러 받는 것을 본다. 여기서 다시 이 표는 보호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것 역시 텔 아부 마타르의 채색된 조약돌 위에 그려져 있던 십자 표들과 다윗이 대문의 문짝에 그적거 린 표들을 상기시킬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상상되는 것은 다름아닌 주께서 명하신 궁극적 심 판이다. 그때에는 그 땅의 가증한 일들에 대하여 죄가 있는 모든 사 람들 위에 멸망이 임할 것이다. 그 도성의 죄악에 대하여 슬퍼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주께 대한 자신의 신실함을 나타내는 자들만이 목

숨을 구할 것이며, 결정적인 시간이 올 때 그들이 누구인지를 표명 하는 것은 그 세마포 옷을 입은 사람에 의하여 주어지는 표이다. 종교 역사에서 허다한 실례들을 찾아볼 수 있듯이, 이마에 표를 받은 까닭은 이마가 자주 예식적인 표를 하기에 좋은 곳으로 선호되 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그 표의 형태가 어떠했는가에 대해서 말 한다면, 아마도 알파벳 문자인 타우로도 쓰인 십자 표 그 자체였을 것이며, 이러한 사실은 다음의 두 문단에서 제시되는 증거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실증될 것이다. 「다메섹 언약자들의 카이로 문서 The Ca iro Document of the Damascus Covenante r s, CD 」 -더욱 간단하게 r 다메섹 문서」 또는 「사독 문서 Zadok ite Documen t』로 알려져 있으며, 일반적으로 쿰란 공동체의 것과 같은 운동을 나타내는 것이 확실한 문건-에는 에 스겔서의 구절을 가리키는 의미심장한 언급이 있다. 본문 중에 이에 관한 사항에 이르면, 목자를 치고 양들이 흩어지는 일에 대한 스가 랴의 예언(슥 13:7) 을 가리키는 서론적 언급이 있고, 그 다음에 우리 의 관심을 끄는 구절이 계속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스가랴 11:11 을 넌지시 암시하는 내용과 에스겔 9:4 을 그대로 따오는 명백한 인용이 포함되 어 있다 (Manusc ript B, VII [XIX] 9-12 Rabin 30). 〈그 리고 ‘그 분께 주의를 기울이는 자들’은 ‘양떼 중에 가난한 자들’이 다. 이들은 권고하시는 때에 피신할 것이나, 주저하는 자들은 아론과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오실 때 칼에 넘어질 것이다. 마치 열조들을 권고하시던 시대에 그 분께서 에스겔의 손에 의하여 ‘탄식하여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 고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졌듯이.〉 이 구절에 대한 논쟁은 극히 홍미롭다. r 다메섹 문서」의 다른 진 술들 (VII 9; VIII 2-3 RABIN 28, 32) 이 명백하게 말해 주듯이, 권고 하시는 때는 최후의 심판이다. 그때가 와서 메시야가 나타나면 에스 겔이 기술한 바와 같은 예루살렘 멸망의 상황이 반복될 것인데, 다

시 말해서 저들의 이마에 타우를 받은 자들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 다. 이 진술이 상징적인 것에 불과할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저들이 입교를 위하여 침례를 받을 때에는 최후의 심판에서 저들의 구원을 보증하는 기호로서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 이마에 문자적으로 타우 표가 찍혔던 것은 적어도 있음직한 일이다. 그런데 에스겔 9:4 의 마 소라 텍스트 Masore ti c t ex t에는 단순히 ’n( 타우, 〈표〉)라는 단어만 있지만, 여기 r 다메색 문서』에서의 인용문에는 그 동일한 단어가 정 관사와 함께 씌어서 ’.,nn (〈그 타우〉)라고 되어 있는 사실이 또한 눈 에 뛸 것이댜 그러므로 우리가 이미 추측해 온 대로, 에스겔 9:4 의 표의 형태는 알파벳의 문자 타우ta w 이던 십자 표의 형태였음이 거 의 확실하다.

에스겔 9:4 의 타우를 십자 표의 형태로 된 알파벳의 문자로 이해 하는 것은 이 구절을 번역한 몇 개의 헬라어 번역들에 의해서도 잘 나타나고 있댜 LXX 은 참으로 단순하게 이 곳의 히브리어 타우를 〈표〉 또는 〈기호〉를 의미하는 띠µti ov( 세메이온)으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오리게네스 (Selec ta in Ezechi el em 9 MPG XIlI 800) 는 아퀼 라와 테오도티온이 그 구절을, 그 타우(th e tau , i:ou 8au) 의 표가 충 성된 자들의 이마에 찍혔다는 뜻으로 번역하였으며, 그 이름을 정관 사와 함께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우리가 토의하고 있는 그 알파벳 문자를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다고 진술하였댜 테르툴리아누스 Tert ullian (Aga in s t Marci on ill 22, ANF ill 340) 도 이 와 바 슷한 형 태의 본문과 친숙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가 그 구절을 이렇게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 대문을 통과하라. 예루살렘의 한가운 데를 지나면서 사람들의 이마에 타우 Tau 표를 하라.〉 따라서 필시 그 원래의 의미에 있어서, 그리고 이 헬라어 번역들과 r 다메섹 문 서』의 이해에 있어서, 에스겔 9:4 은 다름아닌 알파벳 문자 타우, 죽 보호와 구원과 구속을 뜻하는 십자 모양으로 된 하나의 표taw를 지

칭하는 것이 확실하다. 에스겔서의 이 구절의 영향은 또한 r 솔로몬의 시편 Psalms of Solomon 」에서도 눈에 띄는데, 이것은 B.C. 1 세기 중엽의 작품으로서 헬라어와 시리아어 사본에 들어 있지만, 원래는 틀림없이 히브리어 로 기록된 것이다. 이 작품의 15:8, 10 은 〈의인들이 구원을 받도록 하나님의 표가 그들 위에 있다〉고 말하고, 죄인들에 관해서는 〈멸망 의 표가 그들의 이마에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것이 에스겔 9:4-6 울 암시하는 것이 틀림없지만, 여기서는 죄인들이 멸망을 위한 표를 받고 의인들은 구원을 위한 표를 받는다 . 〈표〉를 의미하기 위하여 헬라어는 두 진술에서 모두 때 µ£LOV (세 메이온)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의인을 위해서는 그 표가 의심할 여지없이 구원을 의미하는 타우였고, 죄인을 위해서도 그 표 자체는 동일한 표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히 정반 대의 뜻, 죽 멸망의 뜻을 담은 것이었다. 에스겔 9:4 과의 연관성을 명백하게 보이면서 『탈무드』 (Smbba th 55a SET II 1, 253-254) 도 역 시 두 개의 타우를 말하며, 그 둘 사이룰 〈의인들의 이마에 있는 먹 으로 쓴 타우〉와 〈악인들의 이마에 있는 피로 쓴 타우〉로 구분하고 있댜 이 동일한 문맥에서 랍비(제 3 세기)의 말이 설명 가운데 이렇 게 인용되고 있다. 〈타우는 門 .,nn (그대는 살리라 또는 살지어다) (라 는 뜻이고), 타우는 mon (그대는 죽으리라 또는 죽을지어다) (라는 뜻 이다).〉 여기서 또한 언급하고 넘어갈 사항은, 우리가 위에서 말한 에스겔 서 에 관한 토의 에 서 , 오리 게 네 스 (Sele cta. in Ezechi el em 9 MPG XIII 800-801) 가 타우 주제에 관하여 전해 내려온 가르침들에 대하여 유 대인들 가운데서 그가 어떻게 질문하였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는 사 실이다. 그가 얻은 대답들은 다음의 구절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의 전체를 여기에 인용하는 것은 그 안에 진술된 의견들 중에 어떤 것

은 우리가 앞으로 행할 조사 과정과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그 타우th e Taw(i:o u 8au) 에 관한 어떤 전통적 인 가르침을 말해 줄 수 있는지를 물었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은 말하기를, 히브리어 굴자의 순서에 있어서 타우는 22 개의 자음 가운데 마지막 자음이라고 했다 . 그러므로 마지막 자음은, 자신의 덕행으로 인하여 백성 가운데 있는 죄인들을 위해 탄식 하고 신음하며 범법자들과 함께 고난당하는 자들의 완전함에 대한 증명 으로 간주되었다. 다른 사람은 말하기를, 타우는 율법의 준수자들을 상 징한다고 했다. 유대인돌이 토라 Torah 라고 부르는 율법은 타우라는 자 음으로 시작하므로, 그것은 그 율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상징이다. 세 번째 사람(유대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말 하기를 고대 (히브리어)에 있어서 타우의 형태가 십자가를t 00 6t dU p o0 (투 스타우루) 닮았으며, 그것은 기독교인들의 이마에 찍히게 될 표를 예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경문과 하나님 이름의 기호 이제까지 우리는 이마에 의식적인 기호를 착용한 일이 종교 역사 에서 광범위하게 중명되고 있다는 사실과, 하나의 구체적인 경우로 서 에스겔 9:4 에서 충성된 자들의 이마에 있던 타우는 그들이 여호 와께 속한 백성이며 구원을 위한 그 분의 보호 아래 있음을 증명한 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또한 이마에 그와 같은 표를 문자 그대로 찍는 일이 쿰란 공동체, 또는 그와 관련된 단체의 사람들이 행하던 관습이었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마에 의식적인 기호를 붙이는 근본 사상을 좀 다르게 적용한 예

는 마태복음 23:5 에서 일컫는 바 있는 경문( 經文 )을 착용하는 데서 볼 수 있댜 무교절에 관하여 출애굽기 13:9 과 13:l6 은 〈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으라 〉 고 명하고, 여호와의 명령에 관 하여 신명기 6 : 8 과 11:18 은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 라고 말한다. 이러한 진술들이 애초에는 상징적인 의미로 주어졌든지 또는 문 자적인 의미로 주어졌든지 간에, 그것들은 문자적인 실행의 근거가 되었댜 성경의 부분을 담은 작은 통이 이마에 부착되었고 , 손과 팔 에도 그런 것이 부착되었다. 그와 같은 통은 히브리어로는 규,=J n (tefilla h , 테필라 , 〈 기도 〉 라고 불렸고, 헬라어로는 OUA 血떄pt ov (필락테리 온, 경문, 〈 호위 장치 〉 )라고 불렸다. 『 탈무드』에는 테필린 tefi lli n 에 관 한 언급이 많이 나오고, 특히 Menahoth 34a-37b (SET V 2, 215- 232) 에는 이에 대한 폭넓은 기술이 실려 있다. 손 테필라 hand teffi lah 는 손에, 더 정확하게 말해서 왼팔의 하박 (下牌)에, 또는 한 권위 있는 전거(典 操 )에 의하면 이두박근 위에 착 용하였으며, 머리 테필라 head tefi llah 에 관해서 성경이 말하는 장소 인 〈 네 미간 〉 은 눈썹 사이가 아니라 머리의 이마 위를 뜻하는 것으 로 해석되었다 (Menaho t h 37a-37b SET V 2. 228-230). 머리 경문을 너무 낮게 착용하는 것이나 다른 경문을 손바닥에 착용하는 것은 이 단의 풍습이 었다 (Me gi llah 24b SET II 8, 148). 이 마에 착용한 테필라에 는 그 양쪽에 쉰 s hin (rD) 이 라는 글자가 있 고, 그것을 고정하는 끈은 달레트 dale th(더)라는 글자 모양의 매듭으 로 묶인다. 또한 팔에 착용하는 테필라도 요드y odh(.,) 라는 글자 모 양의 매듭으로 묶인다. 이 글자들이 함께 모이면 하나님의 이름 .,더 m (샷다이 Shadd ai)를 형성한다 (Menaho t h 3.5b V 2, 222, note 3). 이 말 은 LXX (예컨대 욥 5:1 7 동)에서 가끔 naWOKp dt u p (판토크라토르)라 고 번역되어 있고, 이리하여 지금은 보통 〈전능한〉이라는 말로 옮겨

져 있다. 그래서 신실한 유대인은 하나님의 이름의 첫 글자 shi n 로 된 약자(tD)의 형태로, 또는 그 매듭이 달레트를 만드는 것으로 여긴 다면 그 이름의 처음 두 굴자로 된 약자(기 m) 의 형태로 하나님의 이 름을 자신의 이마에 붙이고 다녔으며, 한편으로 팔에 있는 매듭 y odh 은 그 이름의 철자를 완성하는 것(.,더 U) 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 이마 위의 통에 적힌 쉰 s hin이라는 글자가 전능하신 분의 이름을 나타냈고, 그것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 그 분께 속한다는 것을 의 미했으므로, 우리는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타우가 그것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 여호와께 충성되며 그 분의 보호 아래 있음을 의미하 면서, 과연 그것이 여호와의 이름 자체를 나타내는 것인지가 의아해 진다. 위에서 인용한 오리게네스의 말에 의하면, 유대인의 전통 중의 한 견해는 타우가 히브리어 알파벳의 22 번째이자 마지막 글자로서 완전을 나타낸다고 한다.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로서 그것은 또한 이 사야 44:6 과 48:12 에 있는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는 여호 와의 진술과도 연결될 수 있다. 이 진술은 참으로 첫 문자인 알레프 와 마지막 문자인 타우가 함께 여호와의 이름을 나타낼 수 있었음을 시사할 수 있다. 실제로 창세기에 관한 『미드라쉬 랍바(Mi drash Rabbah) 」 (81, 2 SMR II 747) 에는 하나님의 인이 세 글자, 곧 알파벳의 첫, 중간, 마 지막 문자인 알레프, 멜 타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셋이 합치면 〈진리〉를 뜻하는 no~('emeth , 에메트)라는 단어를 만든다는 사실이 이사야 44:6 을 분명히 인용하면서 진술되어 있다. 이 글자들 가운데 서 특별한 중요성이 부여된 것은 맨 마지막 글자인데, 『탈무드』 (Sh: Jhbath 55a SBT IT 1, 254) 는 이 동일한 하나님의 인에 관하여 말 하기를, 〈타우는 거룩하신 분의 인의 끝이다〉라고 한다. 이 모든 점을 종합하면 히브리어 알레프와 타우는 헬라어 알파와 오메가에 해당되며, 이 두 문자를 나란히 놓으면 우리는 아마도 〈나

는 알파와 오메가요〉라고 하신 요한계시록 1:8 및 21 : 6 의 하나님의 진술과 요한계시록 22:13 의 그리스도의 진술의 기초가 되는 히브리 어 표현을 갖게 된다. 더욱이 위에서 인용한 r 솔로몬의 시편」 (15:8, 10) 에서와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에서도 의인과 죄인들이 모두 표를 받는다. 짐승을 따르는 자들은 오른손이나 이마에(계 13:16), 또는 미 상불 두 곳 모두에(계 20:4) 표를 받는다. 이 표의 위치는 우리가 위 에서 기술한 유대인의 경문을 상기시키지만, 짐승을 따르는 자들을 위한 방법은 유대인의 관습을 우스꽝스럽게 바꿔놓은 것이다. 왜냐 하면 여기서 한 표는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에, 다른 표는 이마 위쪽 이 아니라 이마 위에 on(eJtl ) 맞기 때문이다. 144000 명의 하나님의 종들은 그들의 이마에 인침을 받는데(계 7:3; 9:4 ; 14:1 ), 이것은 분명히 에스겔 9:4 을 반영한 것이다 . 에스겔 9:4 에 서 충성된 자들의 이마에 있는 표는 그들이 여호와께 속한 백성임을 보여 주었댜 그런데 그와 똑같은 표로 짐작되는 것이, 여기 요한계 시록 14:1 과 22:4 에서 하나님의 아름을 나타내는 것으로 분명하게 진 술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 기독교적인 적용에서 확실히 그렇듯이 이미 유대인의 사상에서도 타우는 그 표를 맞은 사람들을 문자적으 로 또는 상징적으로 보호하고 구원하기 위한 표시임과 동시에 하나 님의 이름을 뜻하는 것이었다고 하는 것이 합리적인 결론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기호 타우-기호는 구원과 하나님의 이름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 나님의 이름은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뜻하는 것이었 으므로(예컨대 신 12:11 을 보라. 여기서는 그 분의 이름이 성전에 거하 게 되리라고 하신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 그리

스도 안에서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예컨대 요 17:6 을 보라. 여기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상의 유형이 아마도 유대인 기독교 집단에서 널리 퍼져 있었던 사실과 그 〈이름〉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칭호였다는 사실 은 다음의 두 문헌에서 가장 유력하게 제시되어 있다. 첫째는 야고보서 2 : 7 인데, 여기서 말하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컬 어진 그 존귀한 이름〉 [ASV margi n] ; 행 15:1 7 참고)은 아마도 그리 스도의 이름이거나 또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포함하는 것이다. 다음 은 『진리의 복음 Gosp el of Tru th 』 (338 항 참고)인데, 이것은 유대인 기독교 신학의 요소들을 강하게 지닌 제 2 세기의 영지주의적( 靈 知 主 義的) 작품으로서, 〈그러나 아버지의 이름은 아들이다〉라고 잘라서 말하고 있다 (ed . Ma linine , Puech, and Quisp e !, Evang e liu m Veri tatis, folio XIX verso, 38 쪽, line s 6-7 ; Da niel ou, The Theolog y of Jew i sh Ch risti a nity, 147-163 쪽 참고 ; Prim i tive Chris t i an Sy m bols, 141- 142쪽). 그러므로 유대인 사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뜻하던 타우-기호는 아마도 유대인 기독교 사상에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뜻하기도 하 였다. 사실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요한계 시록 22:4 에서 주목할 만한 사항은 바로 그 앞 절에 하나님뿐만이 아니라 또한 어린 양도 언급이 되었다는 것이다. 헬라어가 알려진 곳에서 타우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뜻하게 되는 것은 또다른 이유 때문에 거의 불가피했다 . 특히 타우가 비스듬한 자세로 기록되었을 때, 그것은 즉시로 헬라어 키 c hi와 같은 모양이 되었는데, 키는 헬라어 단어 xp t0t b c (크리스토스 Ch rist o s , 그리스도) 의 첫 글자이다. 물론 이 단어는 LXX 과 그 밖의 다른 곳에서 히브 리어 단어 〈기름 부음을 받은 이 anoin ted>, 죽 메시야를 번역할 때 쓴 일반적인 역어이다. 그리고 〈기름 부음을 받은 자〉와 연관하여

또한 이마에 표를 하는 특징적인 관행이 있었음을 보는 것은 홍미 있는 일이다. 구약에서 왕(삼상 10:1) 과 제사장은 그 직분에 위임될 때 기름 부 음을 받았다. 대제사장에게 기름을 붓는 본보기는 레위기 8 : l2 에 기 록된 바대로 모세가 아론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 주어졌다. 〈또 관유 로 아론의 머리에 부어 발라 거룩하게 하고.〉 『탈무드』 (Hor ay o t h 12a SBT IV 7, 86 ; Keri tho th 5b SBT V 6, 36 참고)에서는 이 구절 이 〈부어〉와 〈발라〉라는 두 단어에 상응하는 두 행위를 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 실제로 붓는 일은 분명히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으 로 이루어졌고, 바르는 일은 이마에 그리고 구체적으로 미간에 약간 의 기름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다음으로 토의될 문제는 어느 것이 먼저 행해져야 하는가 하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기름을 바를 때 그 기름이 이마 위에 남기는 자국의 모양에 관한 매우 홍미 있는 진술이 있다. 〈우리의 랍비들은 이렇게 가르쳤다. 왕들은 어떻 게 기름 부음을 받았는가?-화환(花環) 모양으로. 그러면 제사장 들은?-키 모양으로. ‘키 모양'이란 무슨 뜻인가? 갓다의 아들 랍 비 메나샤R. Menashy a b. Gadda 는 대답하였다. 헬라어 x (키)의 모 양으로.〉 그러므로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의 이마에 묻은 기름 표는 타우 의 옛 글자였고, 어쩌면 그것이 비스듬한 방향으로 쓰여서 즉각 헬 라어 키 자와 같은 모양으로 보이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헬라어로 크리스토스 (Xp tcn:6< ;, Ch rist o s ), 죽 〈기름 부음을 받은 이〉라는 단어 의 첫 글자가 되었다.

307 쿰란의 동굴 1 에서 나온 따|사야 두루마리』의 제 XXXV 칼럼 타우 표가 〈기름 부음을 받은 이〉, 곧 메시야 를 가리키는 말로 사 용된 또다른 예는 쿰란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 동굴 1 에서 나온 r 이사야 두루마리 Isai ah Scroll, 1 Q ls 3 」에는 그 사본의 난외 여백 mar gin s 에 표시된 일련의 부호들이 있다. 이것들 중의 하나가 십자 표인데, 이것은 마치 키처럼 비스듬히 쓰여진 타우일 가능성도 있다. 이 것은 11 번, 즉 제 XXVI, XXXV(2 번), XXXVI, xxxvm, XLI, XLV, XLVI (2 번), XLVIIl, Lil l 칼럼에서 나타난다 . 각 경우에 있어서 이 표는 그것의 왼쪽에 있는 구절을 표시하고자 한 것처럼 보인다. 제 XLV 칼럼의 예는 예외적인 경우로서, 여기서는 그 표의 위치로 봐서 그것의 오른쪽에 있는 본문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더 커 보 인다. 만약 이것이 옳다면 십자 표들로 주의를 기울이게 한 구절들은 이 사야 32:1 이하, 42:l 이하 및 42:5 이하, 42:19 이하, 44:28, 49:5-7, 5.5: 3-4, 55:1-2, 그리고 56:3 이하, 58:l3 이하, 66:5 이하 둥이다. 일반 적으로 이 구절들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메시야적 기대와 관계가 있 는 구절로 이해될 수 있는데, 이러한 기대는 우리가 다른 문헌을 통 하여 아는 바와 같이 쿰란 공동체에서는 지대한 관심의 주제였다. 제 XXVI 칼럼에서는 이 표가 양피지의 이은 자리 왼쪽에 있고, 따 라서 그 표는 그것의 왼쪽에 있는 구절을 가리킨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 구절은 이사야 제 32 장의 시작인 〈보 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하실 것이요……〉라는 부분이다. 여기에 예시된 제 XXXV 칼럼에서는 그 표가 오른쪽 난의 여백에 두 번 보인다. 첫번째 표의 왼쪽에 있는 본문은 제 42 장의 시작인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라는 부분이고, 두번째 표의 왼쪽에 있는 본문은 여호와께서

그의 〈종〉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부분인 42:5 이하이다. 이 칼럼 상단 근처의 왼쪽 여백에 있는 동일한 표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 의 왼쪽, 곧 제 XXXVI 칼럼에 있는 구절을 가리키고 있으며, 여기서 첫 세 줄인 42:19 이하에서는 여호와께서 또 〈종〉에 대하여 말씀하 신댜 오른쪽 여백의 하단부에 다른 하나의 기호가 있는 것이 또한 눈에 뛸 것인데, 이것은 사실상 하나의 직선 위에 고리를 그린 것으로 이 루어져 있으며, 고리는 그 선 아래로 한 획을 그어서 연장되려는 듯 이 보인다 사실 만약 세로 획이 아래 쪽으로 좀더 연장되었다면, 우 리는 고대 이집트의 앙크 ankh( 고대의 이집트 미술에서 볼 수 있는, 위에 고리가 붙어 있는 T 자 형의 십자로서 생식과 장수의 상징-역 주) 기호와 매우 홉사한 모양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앙크는 우리가 아래에서 예시하는 바와 같이 (339 항 이하) 콥트 기독교인들 Cop tic Ch rist ia n s 가운데서는 십자의 한 모양이 되었다. 이 경우에 있어서 는 이 기호가 그것의 오른쪽인 제 XXXIV 칼럼에 있는 본문과 더욱 밀접히 관계된 것처럼 보이는데, 이 부분은 이사야 41:17 이하로서, 마지막 때 천연계에 일어날 변화에 관하여 말씀하신 종말론적 구절 이다. 우리는 「이사야 두루마리」에 있는 이러한 기호들과, 392 년에 기록 된 작품인 「무게와 치수에 관하여 On Weig hts and Measures 」에서 에피파니우스가 제시한 기호의 목록을 비교할 수가 있다. 이 책은 그 첫부분이 후기 헬라어 사본으로 현존하고 있으며, 책 전체는 제 7 세기와 제 9 세기의 두 사본으로 된 시리아어 번역으로 남아 있다. 이 책의 서두 부근에서 에피파니우스는, 예언적인 기록들에 사용된다고 하는 많은 기호들을 열거하고 있다 . 이러한 기호들 중 하나가 헬라어 사본들 가운데서 (MPG 43, '237) 똑바로 선 균형잡힌 십자 표로 나타나고, 시리아어 사본에서는 (ed.

Dean, 15) 비스듬한 모양으로 쓰인 십자 표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두 가지 모양의 타우로 나타나 있다. 에피파니우스는 이 기호가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라고, 죽 그것은 메시야의 의미를 지닌 구절들을 표시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라고 말한다 . 쿰란 공동체의 「이사야 두루마리」에서 메 시야 구절들을 표시하는 것은 바로 키와 같은 모양의 이 기호이다. 그러므로 에피파니우스에 의하여 확인된 바대로 기독교 서기관들의 후기의 관습은, 여기 유대인의 종파적 공동체에서 예증된 바와 같이, 유대교 서기관들이 사용한 표시에서 그 선례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유대교 및 후기의 기독교의 표를 하는 전통에서 타우=키는 메시야 와 관계가 있는 구절들을 위한 표였다. r 이사야 두루마리」와 에피파니우스에서 기호들을 사용하는 전통 이 계속된 것은, 우리가 이사야 사본에서 본 바 있는 다른 기호인 앙크와 약간의 유사성을 지닌 기호의 경우에서도 확인되는 것 같다. 이사야 필사본에 서 이 기 호는 제 XXVIII, XXXII, XXXIV, XXXVII, XLil l, XLIX 칼럼에 나타나고, 이사야 36:1 이하, 40:1 이하, 41:17 이 하, 45:1 이하, 52:7 이하, 60:1 이하를 가리키는 듯이 보인다. 여기 이 사야 41:17 이하를 가리키는 제 XXXIV 칼럼에서 우리가 보는 예와 같이, 이 모든 구절들은 종말론적인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다시 에피파니우스에게로 돌아가서 우리는 그가 열거하는 여러 가지 기호들 가운데 마지막 것은 아마도 이 앙크처럼 생긴 것과 매 우 흡사한 것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헬라어 필사본들에서는 그것이 그와 같은 것으로 인지될 수는 없고, 이 필사본들에서 이 지 점에 모사된 그 기호는 그 목록에서 앞서 나타나는 다른 기호와 사 실상 동일한 것이며, 따라서 그대로 정확하게 모사된 것이 전혀 아 니다. 그러나 시리아어 필사본들에서 우리는 고리가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아마도 이사야 필사본에서 보는 것과 동

일한 기호를 이 지점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 기호의 의의에 관하여 에피파니우스의 텍스트는 말하기를, 헬 라어와 시리아어 필사본 모두에서 그것은 미래의 사건들을 예언하 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r 이사야 두루마리」에서 이 기호로 표시된 구절들의 본질이다. 거의 모든 구절들이 그 성격상 명백히 종말론적이며, 심지어 순전히 역사적인 것으로 보이는 첫번째 구절 까지도 어떤 종말론적 해석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에 피파니우스가 말하는 바가 r 이사야 두루마리」에서 나타나는 증거와 일치하는 것은, 우리가 기독교 기호들을 유대교 서기관들로부터 물 려받은 유산으로 보는 것과, 이사야 필사본에 나타나는 십자 표들을 타우=키라는 알파벳 문자로 인지하는 것이 정당함을 말해 준다. 이 문자는 어쩌면 앙크-십자와 관련된 다른 기호가 종말론적인 성격의 구절들을 표시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메시야적 의미를 지닌 구절들 올 뽑아내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었다. 위에서 인용된 증거가 보여 주는 사실은 타우라고 일컬어진 십자 표와, 그 표로 이루어지고 타우라고 불린 알파벳 문자가 이미 유대 인 사상에서 구원과 종말론적 구속을 나타냈으며, 어쩌면 또한 하나 님의 이름과 메시야도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 기호는 + 또는 X 로 기록되었으며, 문자적으로 또는 상징적으로 이 기호롤 지닌 사람은 여호와께 속한 사람으로 구별되었고 마지막 때에 구원을 얻도록 표 시가 되어 있었다. 유대인 기독교에서의 십자 표 십자 표가 초기 기독교에 전래되어 사용된 것이 이러한 배경에서

였던 것 같다 . 우리는 먼저 유대인 기독교에 관하여 말해야겠는데, 여기에는 70 년 이전에 팔레스타인에 있던 종말론적 공동체와 그 시 기 이후에 시리아와 다른 곳에 알려진 유대인 기독교가 포함된다. 기독교를 후기 유대교의 사상 형태로 표현하였고 따라서 우리가 말 하는 유대인 기독교의 증인이 되는 저술가들과 저술된 문헌에는 다 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 어 있다 . r 헤르마스의 목자 The Sheph erd of Hennas 」는 90 년과 140 년 사이 예 아마도 로마에서 기록되 었으며, 유대 인 묵시 문학 a p ocal ypti c 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안디옥의 감독 이냐티우스 Ig na ti us 는 110 년 경에 트랴야누스 Traj an 치하의 로마에서 죽었다. 비록 그의 이름은 라틴어로 되어 있지만(혼히 그랬듯이), 그의 문체 는 매우 셈적 Se miti c 이며, 그의 사상은 시리아 기독교를 표현하고 있다. 「바나바의 편지 The Lett er of Barnabas 」는 70 년과 132 년 사이, 아마도 120 년 경에 애굽에서 기록되었으며, 여기서는 성경을 표상적 풍유적으로 주석하고 있다. 「솔로몬의 송가 The Odes of Solomon 」는 아마도 제 2 세기 중엽에 시리아에서 헬라어로 기록되었으며, 현존하 는 것은 시리아어로 되어 있다. 『요한 행전 The Ac ts of J ohn 」은 아 마도 제 2 세기 말엽에 시리아 또는 소 아시아에서 기록되었을 것이 다. 「도마 행전 The Acts of Thomas 」은 어쩌면 제 3 세기 초엽에 시 리아에서 기록되었다 . 「신탁집 The Sib y lline Oracles 」은 여러 시대에 기록된 것이며, 더러는 유대교의 것이고 더러는 유대인 기독교의 것 이다. 이 모든 문헌들은 아래에서 인용될 것이다. 위 에 서 인용한 오리 게 네 스 (Selec ta in Ezechi el em 9 MPG XIII 801) 의 기록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였던 한 유대인, 죽 유 대인 기독교인이 오리게네스에게 고대 히브리어 자체의 타우는 기 독교인들의 이마에 찍힐 표를 예언한 것이라고 말했던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유대인 기독교에는 이마에 찍히는 문자적 또는 상징적 십

자 표의 개념이 존재하였으며 , 이 표는 의강할' 여지없이 그 기호의 역사적 선례가 제시해 주듯이 표를 받은 사람은 여호와께 속한 사람 이며 , 구원을 얻도록 표를 받은 것임을 의미하였다. 초기 역사에서 이미 그 표가 주( 主, 여호환 ).B . 또.는 메시야의 이름을 나타내었으므로, 여기서도 또한 하나님 또든 구 '리 스도의 이름을 나 타낼 수 있을 것이댜 그러므로 이 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아마 도 『헤르마스의 목자」 IX 13, 2 의 〈그 이름을지닌다〉라는 구절과, r 솔로몬의 송가」 8:15 (HARRIS AND MINGANA IT 254) 의 〈그리 고 그들의 얼굴에 나는 나의 인(印)을 찍었다〉라는 진술에서 볼 수 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침례의 사상이 거의 확실하게 내포되어 있 다. 「헤르마스의 목자』 VIII 6, 3 에 의 하면 기독교 신자들은 그 인을 받은 자들이고, IX’ i6 , 3 이하에 의하면 그 인은 침례 때 받는다. 『도 마 행전」 120 기 21 장(AAA II 2, 229-231 ; KLI JN 129~130) 에서 뤽도 니 아 M yg do ni a 가 <메 시 야(그리 스도) 예 수의 기호를 나에 게 주시 오 A6c µ0t th v 6OPQ Y t 8a 1noo0 X pt 0t OD 〉라고 요청하자, 그 사도는 나아 가 그 여자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그에게 침례를 준다. 또다른 구 절 (157 AAA IT 2, 266- 26 7 ; KLI ]N 149) 에서는 일단의 사람들에게 기름을 바르고 침례를 주는 일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가 그들에게 기름을 바르고 난 다음에, 그는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 와 아들과 성 령 의 이 름으로 물 속으로 내 려 가게 하였다〉 (25, 'lJ, 49, 132 장 참고) . . . 헬라어로 기호 또는 인은 o(lJ pa vi.c ; (스프라기스)인데, 이 단어는 무 엇보다도 먼저 어떤 것을 표시할 때 쓰는 실제적인 인(印)홀 의미한 다. 그러므로 위의 참고문은 아마도, 침례시에 후보자가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타낸 하나의 기호를 이마에 실제적으로 받았 음을 의미한다 . 이것이 바르는 의식으로 행해졌으므로, 그것은 기름 으로 행해졌다 . 그리고 그것이 침례와 연관하여 행해졌으므로, 스프

라기스 s p hra gi. s 죽 〈인〉이란 말은 침례 자체를 뜻 하는 용어가 되었 댜 인 또는 표를 찍는 관습은 인용된 문서들이 기록된 시대에 유대 인 기독교 내에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그리고 이마에 쓰인 타우에 비교될 만한 상징적 또는 문자적 언급이 쿰란에도 있었다. 그러므로 그 무렵의 그 지역에, 다시 말해서 70 년 이전의 팔레스타인 유대인 기독교 내에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타내던 하나의 표가 사용되어 구원의 확증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 표가 바로 타우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방금 유대인 기독교 문헌들에서 살펴본 개념은 또한 발렌티누스 파 영지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발견되며, 영지주의( 函知主義 )가 유대 인 기독교의 많은 요소들을 보유했던 것이 분명하다 . 알렉산드리아 의 클레멘트 Clemen t of Alexan dri a 가 발렌티누스파 교사인 테오도투 스의 가르침으로부터 뽑아낸 『 발췌 문집 Exce rpt s 』 에 는 침 례 에 관한 토론이 있다 (77-86 GCS Clemens Alexand rinu s ill 131- 13 3 ; Casey 86-91). 여기서도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의하여 인쳐진 oop ay t u0 ctc > (8 0,3 ) 것과 관계된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런 다음 (86, 1-2) 가이사의 직 함 supe rs cri ption {Eitt vp a l!ll\)이 새 겨 진 주화에 대한 예수의 말씀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충 성된 자도 이와 같다. 그는 그리스도의 직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 름을 가지고 있다. ……. 그리고 말 못하는 동물들은 인을 통하여 6tc t oop ay t 8o c 각자가 누구의 소유인지를 보여 주며 그 인에 의하여 청 구된다. 이와 같이 또한 충성된 영혼은 진리의 인을 받고 ‘ 그리스도 의 표들 mt W Gt G (혼적)’을 몸에 지 닌다.〉 동물에 찍 힌 소유권의 표처 럼, 신자는 그가 누구의 소유인지를 보여 주는 표를 가지고 있다. 문 자적으로 또는 상징적으로 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 으로 표를 받았으며, 이 표가 눈에 보이게 되거나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한, 그것은 여전히 초기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가졌던 타우

일 것임에 틀림없다(여기서 언급된 사항과 암시가 어쩌면 예수께서 요 한복음 6:27, 3:33 에서 〈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 〉 라고 말씀하실 때에 염두에 두셨던 〈 인 〉 일 수 있을까?라고 바더먼 교수는 묻는다). 앞의 인용문들에서 우리는 〈인〉을 뜻하는 명사 oop aY i c (스프라기 스)만이 아니라 〈 인으로써 표시한다〉는 뜻의 동사 0¢POYi (u (스프라 기조)도 사용된 것을 보았다. 다른 구절에서도 우리는 이 동일한 동 사를 발견하는데, 그러나 거기서는 앞에서 본 인용구들의 특징을 이 루는 침례와의 연관성이 없다 . 『 요한 행전』 115 장에는 그 사도가 죽 기 직전에 취한 행동이 이러한 말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을 온전히 인치고 나서 uop am odµcvoc EGUt b v 6Aov, 그는 일어서서 이렇 게 말했댜 ‘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당신은 나와 함께 계십니다.'〉 여기에 쓰인 동사는 요한이 자기 자신에게, 참으로 자기의 신체의 각 부분에 문자적으로 또는 인의 모양을 따라하는 몸짓을 했다는 뜻 에서 어쩌면 상징적으로 인을 친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확실하다 . 다시 말해서, 〈 인친다〉고 하는 것은 인을 형성하고 있던 기호를 그 리는 것을 의미했고, 이제까지 제시된 바에 의한다면, 그것은 십자 표 곧 타우에 해당하는 기호를 그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와 같은 동 작이 최초기의 유대인 기독 교회 시대로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는 사 실은 실제로 가이사랴의 바실 Bas il of Caesarea 에 의하여 확인되었 댜 그는 『성 령 론 On the Sp irit.!) (3 75) (初 NPNFSS VIII 41) 이 라는 그의 작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신뢰한 자들을 십 자의 기호로 표시하는 것〉은 사도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불문 의 전통에서 유래되는 교회 내의 관습들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설자가를 나타내는 십자 』 언'가레· . . l스지 앞기타에고독인서 있교의 다우에 .서리초 그 창는 신기 표십앙 는공자의 본동 째표 질사스가적회쳐 으에침로로례서 에사 아여 용전마있된하어도 둥셉서. -그 검 어•·것 〈:를: -인:처이 할 〉 가파으시지벳로행게 과된사 · 의 용.에.듯, :얽꿨 .스.한.으고 ·.겔 ;펴 중 ;급9유겨 : 、4대롤 괄에 있는 구절의 타우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종말론적 구속을 나 타낸다. 하지만 위에서 인용된 오리게네스 (Selec ta in EzecIii ele m 9 MPG ID 801) 에게서 따온 인용문에 보면, 유대안 기독교인으로서 그 에개정보를 제공한 자가, 고대 히브리어 터우는 기독교인들의 이마 에 적힌 표를 예언한 것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이 십자 가 md 印 b 어롤 닮은 것이었음을 그에게 \ 말해 주었댜 스타우로스 St miro s 는 똑바로 선 말뚝에 가로대를 그 꼭대기에 또는 꼭대기 군 처에 놓은 모양의 처형 도구였으며(Artemi dorus, Onir o cri tico n II 53 PACK 183), 또한 예수를 죽인 도구였다(마 업 :32, 등). 타우가 스타우로스와 유사했다고 한 오리게네스의 정보 체공자의 진술은 분명히 맞았고, 이러한 유사성이 유대인 기독교 사상에서 발 견되었다는 사실은 유대인 기독교의 여러 가지 저술들에 나타난 암 시들에 의하여 확인되고 있다. 예를 들면 유대인 기독교의 『신탁집 The Sib y lline Oracles 』 Vlll 217-250 (Geff ck en 153-157) 에는 저 유명 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이합체(離合體)의 정교함이 、 나타나 있으니, 곧 헬라어로 된 이 단어들의 첫 글자들이 합치면 i았 0bc( 이크튀스, 〈물고 기〉의 철자가 되는 11\0 0 0 c; Xp tcrtoc ; 8Eofi Tloc ; ~tJw:· (예수스 크리스토스 테우 휘오스 소테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라는 문구 이다. 여기 r 신탁집」에는 ~1aup ~ (스타우로스, 〈십자가〉)라는 단어가 그 정해진 문구에 첨가되어 있고, 따라서 이 연속된 전체 단어들(두 번째 단어의 철자가 Xpc t m 6c.: [크레이스토스]로 되어 있음)의 글자들은

'-’.~ i:t,..7..' ..J .1 . 그 、 -、 .` ` . \ .걸 라 같 군 ::\· 's 다 E·m 夕핵 U\.<;}, • TAhned wlifoe 따 ·of (~du e> v.oovu) t s mhaelnl , boeo 細i · o네c 떠 굽be o1n. i o~f古 .s ` 畑 'th函e-d函es iroe fd thheo rnw o(Krl£d 9, 0(;), (如ti V} . 如.the函 int he wate rs by mean~ of·. . tw elve spr ings, `i . 寧Our '.o ~f i r?-nn; :ow w h icpho rtwr ail yl s려.. `죠 .~;.멉 .« . 선血; 타、‘,_ .印 .덴 .幸 e· ,;_ ·, - • v • e -·(n•p o yp *tc;) i.n’ .·,. .,th> e? ~.. - acrosucs \맥p omx i o t c), is .thigm e , .` ·· , ' ... Savio u r immo rta l, king, ·the 야-· , :e 'wh o suf fers for our sake. 기호 (0 池 a) 는 그러므로 모든 죽을 인간을 위한 것, 두드러진 인 (에p nv tc; .) , 나무 (~U;\.OV .) 는 모든 신자들을 위한 것, 그들의 바라는 뿔 (Kep ac ;) , 그리고 믿음이 독실한 사람들의 생애, 그러나 때로는 세상에 걸려 넘어지고, 최후의 버쉼 (4Xu -ci. ~ov) 은 열두 샘을 통하여 물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을 위한것, . 철 막대기는 목양하고 통치할 것이며, 우리 하나님은 지금 이합체 문구들 (aK po야i. x t oK) 위에 기록되고 (xpo - V 印炳i 9) ·, ’ .‘` . . 그려져 있는 분이시요, 불멸의 구주, 왕, 우리틀 위하여 고난당하시는 분 . 이 구절에 있는 다양한 암시들에서 우리는 다시 스프라기스~p hra­ gi s( 여기서는 약간 변형된 헬라어 철자[(J卯 nv t c, sp hreg i s] 로 됨), 죽

〈인〉과 침례(如 ,:l~ov ; 〈비쉼〉이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널리 쓰이던 어 법과 일치함. 예컨대 Jus tin , Ap o log y I 61, 14, ANF I 1 8.3)에 대하여 듣고 있으며, 이것들과 함께 우리는 〈나무〉 (~UAOV; 신 21:22 참고; 행 5:30 둥)에 대해서도 듣고 있는데, 이것은 스타우로스라는 의미의 십 자가이댜 스타우로스는 또한 〈뿔 KE p a c;〉로서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 이것은, 신명기 33:17 의 〈외뿔소의 뿔들〉 (KW) 에서 십자가 sta uros 의 표상을 보는 유스티 노스(J us ti n, Di al og ue wi th Tr yph o 91, 2, ANF I 245) 와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모양에 있어서 십자가는 뿔을 가졌고, 의의에 있어서 그것은 힘을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뿔〉은 구약에서 힘의 상징이었기 때문 이다. 십자가의 모양에 관하여 유스티노스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한 기둥을 똑바로 놓고, 그 기둥의 맨 꼭대기 부분을 일으켜 세워 하나의 뿔이 되게 한다. 이때 다른 기둥을 그 위에 맞춰 세우면, 기 둥의 두 끝이 마치 뿔들이 그 한 뿔에 결합된 것처럼 양쪽으로 나타 난댜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들이 매달린 곳인 중앙의 고 정된 부분도 하나의 뿔처럼 두드러져 나온다 . 따라서 그것도 마치 다른 뿔들과 함께 결합되고 고정된 하나의 뿔처럼 보인다.〉 또한 npo v p a4 JE lc; (프로그라페이스)라는 단어로써 저자는 그가 이합 체 문구 전체에서 〈위에 기록한〉(엡 3:3 참고 : n:po i:v p a l !fa , 〈내가 이미 [앞에서] 기록했다〉) 것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또한 〈십자가에 못박 히신 tcri:au p wµ i: vo c; >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묘사되어 JtPO EYp a¢ n> 있는 지를 말하는 갈라디아서 3:1 을 넌지시 암시하기도 한다. 추가해서 말 하자면, 「신탁집」에 있는 이 구절을 유세비우스 (Ora ti on of Const.a n- tine 18, NPNFSS I 574 이하)는 전문을 인용하였고, 아우구스티누스 (Cit y of God XVIII 23, NPNF IT 372 이하)는 스타우로스에 관한 마 지막 부분을 제외하고 인용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두합체 의 〈물고기〉에 관한 설명을 부가하였으며, 이것은 위에서 제외된 것

과 함께 원문대로 남아 있다. r 바나바의 편지 The Lett er of Barnabas 」는 스타우로스에 관한 진 술이 들어 있는 유대인 기독교 분위기에서 산출된 문서의 또다른 예 이다. 이 편지는 헬라어로 기록되었고, 따라서 이제 십자가를 나타내 는 것으로 칭해지는 것은 셈어 타우ta w 가 아니라 헬라어 타우ta u 이 댜 여기 (IX 8) 에 성경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의 가솔 중에서 십팔 인과 삼백 인에게 할례를 주었다〉고 한다. 이 것은 창세기 14:14 과 17:26 - 27 에 주어진 내용을 간단히 진술한 것이 댜 그리 고 나서 18 은 헬라어 글자 요타(i o ta =lO) 와 에 타 (e ta =8) 로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글자들은 예수 이름의 처음 두 글자이다. 300 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타우ta u 가 가리키는 수치이고, 따라서 그 수에는 십자가가 상징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두 글자로는 예수를, 다른 것으로는 십자가 crcau p6~ 를 지칭하고 있 댜〉 헬라파 교회의 십자가 기독교가 헬라 및 라틴 사상과 언어의 지역으로 들어갔을 때, 의 심할 여지없이 거기에는 어떤 강조의 변화가 뒤따랐다. 셈어 타우의 의미와 그와 함께 에스겔 9:4 에 대한 원래의 이해는 자연적으로 희 미해져 가는 경향을 띠었다. 하지만 이마에 의식적인 표를 하는 것 에 관한 생각은 종교 역사에 있어서 너무나 오래되고 널리 퍼져 있 던 생각이어서 이방 세계에도 물론 알려졌다. 예컨대 테르툴리아누 스 (On Prescr iption ag a in s t Hereti cs 40, ANF III 262) 는 그가 사단 의 왕국이라고 일컫는 곳에서 어떻게 〈미트라Mithra가 …… 그의 병사들의 이마에 그의 표를 찍는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여기서

는 그 개념이 ’ 에스겔 : 9:4 에서처럼 종말론적으로 안을 치는 개념이 아닐 것이지만, 그 표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 신에 속하는 것과 그렇 게 우함리으가로 씨변 :살 1펴 외본 모떠호}를로 ,받 게테 르되툴었리음아을누 의스미 한자다신.이 : . 〈타우 표〉가 예 루살렘 사람둘의이마에 찍혀야 한다고 하는 에스겔 9:4 을 인용하고, 이 인용구에 관하여 그는 곧 이어 계속해서 이 렇게 말한다(Aga i ns t Marcio n ill2.'2; ANF ill 340 이하). 〈이제 헬라어 글자 타우와 우리 자신의 글자{英語 .] T 는 바로 십자가의 모양이고, 이것은 그가 예언 · 한대로 참된· 보편적 예루살렘에서 우리의 이마에 찍힐 기호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 표는 여전히 기독교인들의 이마에 문자적으로 : •. 또는 상징적으로 찍혀 있으나, 여기 그레코-로만 세계에서는 그것이 • \ 셈어 타우가 아나라 헬리어 타우 또는 라틴어 T 이고, 그것은 특별히 · 십자가, 죽 예수께서 그 위에서 돌아가신 사형 도구와 관계가 있다. 사실 테르툴리아누스가 다른 곳에서 단순히 〈그 기호〉라고 부르 는 이 표는 이방기독교인들에 의하여 가능한 모든 경우에, 적어도 몸짓으로 이마 . 위에 분명히 그어졌다. 테르툴리아누스 (The Chap le t 3 ANF ill 94 쪽 이하)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 가거나 움직일 때마다, 들어가고 나갈 때마다, 우리가 옷을 입거나 신발을 신을 때, 목욕할 때, 식탁에 앉을 때, 등불을 켤 때, 침상에서, 좌석에서, 일상 생활의 모든 평범한 동작들에서, 우리는 이마에 그 기호를 긋는다.〉 마찬가지로 퀴릴 C yril도 348 년에 예루살렘에서 행 한 그의 . 『교리 문답 강의』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i}가에 못 박히신 분을 시인하기를 부끄러워하지 말자! 십자가는 • 우리의 손가락으로 우리의 이마와 모든 곳에 담대하게 찍는 우리의 인이 될지어다! 곧 우리가 먹는 떡과 우리가 마시는 잔 위에, 우리가 들어올 때와 나갈 때, 잠자기 전에, 누울 때와 일어날 때, 길을 가고 있을 때와 멈춰 서 있을 때도 그러할지어다! 위대하도다, 저 경문이

여 µtYa tb Q uA 血떄pta v! ….. . 그것은 충성된 자들의 기호요 마귀들 이 무서워하는 것이로다. 〉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 기독교인들도 또한 구약 성경에서 여러 형태의 십자가를 발견하였다 . 예컨대 유스티노스 (Di alo g ue wit h Try ph o 112 ANF I 255) 와 테르툴리아누스(A n Answer to the Jew s 10 ANF m 165 이 하)가 우리 에 게 말해 주는 바 와 같이, 모세의 뻗어 있는 손들(출 17:12) 과 장대 위에 매단 놋뱀(민 21:9) 등이 그것이다. 그들은 또한 그들 주위의 세상에 있는 많은 대 상물들 가운데서도 십자가를 식별해 내었으며, 예컨대 테르툴리아누 스(같은 책)는 이 점에 있어서 선박의 돛대와 활대를 언급하고 있다. 미누치우스 펠릭스Mi nuc i us Fe li x(166) 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The Octa v iu s 29, ANF IV 191 ). 〈선박이 불룩한 돛들과 함께 항진 할 때, 그것이 뻗어 있는 노들과 함께 미끄러져 나아갈 때, 우리는 확실히 십자 기호를 본다 . 그리고 군용 키의 가로대(손잡이)가 위로 올려질 때 , 그것은 십자 기호가 되며, 그리고 사람이 순결한 마음으 로 두 손을 뻗고 하나님을 찬양할 때도 또한 그러하다.〉 미누치우스 펠릭스가 말한 마지막 사례는 제 4 세기 말에 시내 Sin ai 에 살던 유명 한 금욕주의자 성 닐루스 St. N il us 의 진술 (SWDCB IV 43 쪽 이하)과 비교될 수 있는데, 그도 역시 기도할 때 두 팔을 뻗은 채 서 있는 것은 십자가의 모습이면서 부활에 대한 간증이라고 설명 한다 (MPG LXXIX Ep p. I 86, ITT ; ID 132 참고). 이 제 십 자가는 배 의 돛대와 활대로 비교되고, 기도할 때 두 손을 뻗은 사람과 비교되므 로, 십자가의 모양은 T 자에서만이 아니라 교차된 두 개의 대에서 세로대가 연장된 곳에서도 인지되었음이 분명하다. 지금까지의 고찰을 요약하면, 우리는 + 또는 X 로 기록된 셈어 타우가 구약과 유대교에서, 그리고 또한 유대인 기독교에서 구원의 기호였음을 보았다 . 이미 유대인 기독교에서, 그리고 또한 특별히 헬

라파 기독교에서 그 동일한 기호는 예수께서 그 위에서 돌아가신 사 형 도구th e s ta uros 와 연관성이 있었으며, 그리고 그와 같은 연관 속 에서 여전히 타우, 죽 +의 모양으로 사용되었으나, 한편으로 또한 그것에 상당하는 타우인 T 의 모양으로, 그리고 또한 t 모양으로도 사용되었다. 셈어 타우는 또한 여호와와 메시아의 이름을 나타내기 도 하였댜 똑바로 쓰거나 비스듬히 쓰면 헬라어 키가 그것의 상당 어로 인식되었고, 사실 헬라어 키 자체도 균형잡힌 십자 표처럼 똑 바로 기록되기도 하고 또한 보다 친숙한 x 모양으로도 기록되었다. 키 (X) 는 물론 〈메시아〉를 번역한 헬라어 단어, 죽 Xp tcrr 6<; (크리스토 스, Ch ri s t os) 의 첫 글자였다. 그러므로 특별히 헬라파 교회에 있어서 키처럼 기록된 십자 표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 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의 확실하게 이런 의미를 보여 준 사례로서 우리는 유세비우스 (Mart yrs of Palestin e VIlI, NPNFSS l 349 ; Schwa rtz GCS II 2, 926) 가 인용한 순교자 발렌티나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녀가 법정 가운데로 재판관 앞에 끌려 왔을 때, 그녀는 구주의 존귀한 이름을 기록하였다 Ka t 10 oip a oµ o v wu 0@1fJ po c; t.Jtt vp aWaµe 떄 ovoµa. 이 것은 그녀가 그 이름을 자신에게, 아마도 자기의 이마에 새겼음을 의미하 는 것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이것은 그 자신에게 적어도 몸짓으로 하나의 표를 그음으로써 행해졌음이 분명하고, 그리고 그것이 키로 이해되고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의 첫 글자이면서 약자로 이해된 십 자 표 이의의 다른 어떤 것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십자의 형태들 그러므로 문헌의 중거를 찾아보는 본 연구에서 고찰된 십자의 형

태들은 다음과 같다. (1) 등변 십자一_이것은 원래 똑바로 선 자세의 셈어 타우이고 헬라파 교회에서 여전히 널리 사용되었으며 흔히 희랍 십자로 알려 져 있댜 (2) 타우 십자 (crux comm i ssa) _이것은 모양에 있어서 헬라어 타우 및 라틴어 t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 글자들은 각기 그 언어들에 서 히브리어 타우의 첫번째 상당어들이다. (3) 라틴 십자 (crwc i mm i ssa) _이것은 희랍 십자와 같이 생겼으 나 아래 쪽 획이 다른 세 획보다도 길다 . (4) 비스듬히 쓴 타우 같은 십자__이것은 헬라어 키와 라틴어 X 또는 〈십 (10) 〉처럼 생겼기 때문에 크룩스 데콧사타 crux decussata . 로 알려져 있다. 원래 이 십자 표는 구원과 하나님의 이름을 의미하 였으며, 이 표가 예수의 처형 도구와 연관되었을 때에도 그것은 계 속해서 그의 죽음을 통하여 역사하는 구원의 능력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두 개의 다른 십자 형태들을 또한 대하게 될 것이다. 그 중의 하나는 (5) 크룩스 감마타 crux ga mmata . 또는 <감 마디 온 ga mmad ion > 이 다. 이것은 등변 십자의 각 획의 끝에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직각을 이루는 다른 획을 하나씩 덧붙여서, 마침내 전체가 네 개의 헬라어 대문자 감마가 직각을 이루며 결합된 것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댜 이것은 종교 역사에서 널리 발견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원래는 태양의 상징 또는 생명이나 축복의 기호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인도 에서 이것은 그 바깥 획들이 오른쪽으로 꺾였을 때는 스와스티카 (swasti ka ; su [〈좋다, 건강하다〉]와 asti [〈그것은 …… 이다〉]에서 온 단어)라고 불리고, 그것들이 왼쪽으로 꺾였을 때는 사우바스티카 sauvas ti ka 라고 불린다. 다른 하나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6) 크룩스 안사타 crux ansata 죽 손잡이가 달린 십자이다. 이것은 고리의 모양을 한 손잡이가 얹혀 있는 타우 십자처럼 보인다. 이것 은 본래 이집트의 앙크의 모양인데, 맨 처음에는 매듭울 지어 만든 부적이었을 것이며, 생명과 번영을 의미하는 표로서 상형 문자 기록 에서 발견된다 (339 항 이하 참고). 이 두 가지 형태 모두, 죽 크룩스 감마타와 크룩스 안사타는 기독교 십자의 형태로 채택되었다. 약자와축어 명각들과 필사본들을 기록함에 있어서 기독교 시대 이전의 마지 막 몇 세기 동안에 이미 약자들이 사용되었으며, 기독교 시대에 들 어와서는 점점 더 많이 사용되었다(헬라어 약자들을 위해서는 Av i- Yonah, Abbrev iati ons 를 보고, 라틴어 약자들을 위해서는 CAGNAT 399-473 쪽을 보라). 세기별로 연대가 매겨진 약자들의 통계표는, 기 독교 시대의 2 세기와 3 세기, 그리고 다시 6 세기와 7 세기의 명각들이 약자들을 사용하는 비율이 가장 높았음을 보여 준다 (A vi -Yonah, Abbrevia t i on s, 17 쪽). 약자는 보통 한 단어의 글자 중 얼마를 생략해 버림으로써 만들어 지며, 그 결과 한 글자 또는 그 이상의 글자들이 남아서 그 단어 전 체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와 같은 약어들은, 그 글자들 가운데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위에나 중간 혹은 아래에 긋는 가로 줄과 같은 관례적인 표를 더함으로써, 또는 그 글자들 가운데 하나 또는 그 이 상의 위치나 모양을 바꿈으로써 표시되곤 하였다. 여기서 뒤에 언급 된 과정의 한 특별한 형태는 둘 또는 그 이상의 글자들을 연결시킴 으로써 한 개의 복합 문자가 이뤄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합자(合 字, lig a tur e) 라고 칭하며, 이름의 첫 글자들을 따서 그 이름 전체를

나타낼 경우에는 축어( 縮語 , mono g ram) 라고 일컫는다. 창세기 14:14 의 318 이란 숫자에 관하여 r 바나바의 편지」 (IX 8) 가 300 이 헬라어 타우로 표현되므로 십자가를 드러낸다고 말한 것과 I (요 타)와 H (에타)로 표현된 10 과 8 에서 〈너는 예수를 모시고 있다 txc tC 'InooDv> , 즉 너는 그의 이름의 약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이미 위에서(위의 678-681 쪽) 보았다. 그러므로 헬라 어로 된 예수의 이름 첫 두 글자로 구성된 이 약자는, r 바나바의 편 지 Lett er of Barnabas 」가 기록된 시대(아마도 70 년과 132 년 사이)와 또한 분명히 그보다 더 이론 시기에도 그 편지에 나타난 유대인 기 독교 단체들에서 친숙히 알려져 있었다. 이 약자를 구성하는 요타 i o ta와 에 타 e ta를 함께 쓰면 하나의 간단한 축어 ( 田 )가 된다. 동시 에 이 도안은 두 개의 세로 획 사이에 똑바로 서 있는 하나의 분명 한 동변 십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징은, 아마도 콘스탄티누스 이전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아나톨리 아에 서 나온 한 명 각에 서 볼 수 있다 (W. M. Calder in ASR 88-89 쪽, no. 10 ; 또한 Dolge r I, 263 쪽 참고). 예수라는 이름과 그리스도라는 칭호의 첫 글자들, 죽 요타와 키는 또한 한데 어울려 쓸 수도 있다. 이것은 사실상 십자 표와 세로 획 을 결합한 것이 되고, 가장 단순한 형태로 쓸 경우 여섯 모서리가 있는 별(*) 처럼 보일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과 칭 호를 합자의 모양으로 나타낸 약자가 될 수도 있다. 세로 획을 예수 의 이름 첫 글자와 약자로 간주하면, 키는 십자 표로 간주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실례가 프뤼기아의 유메니아에서 나온, 아마도 콘스 탄티누스 이전 시대의 것인 한 명각에서 (Ramsa y, Ph rygia, 526-5 '2:7쪽, no. 371), 그리고 바티칸에 있는 벽서에서(아래의 329 항을 보라) 발견 된다. 두 개의 제 15 세기 필사본에 보존된 한 구절에서 (Cod. 26 of M~

ton Colleg e and Har. 3049) 제 롬은 십 자와 히 브리 어 와우 waw 자로 구성된 것으로 보이는 하나의 축어를 언급하고 있다. 세로 획이 약 간 휘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이 상징의 모양은 바로 위에서 언급된 것과 거의 같은 것이다. 하지만 와우는 히브리인의 숫자 체계에서 6 의 수치를 갖고 있다 . 그런데 예수 이름의 헬라어 철자 (1noo0c) 에는 여 섯 개의 글자가 있으므로, 와우는 그 이름의 기호로 쓰일 수도 있다. 이런 것에 비춰 볼 때, 이 축어는 예수와 십자가의 개념을 표현하는 것 이 다. 또한 와우와 십 자는 유스티 노스 (D ialo gu e wit h Try ph o, 112 ANF I 獨)가 거기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표상을 보았던, 광 야의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생각나게 할 수도 있다 (681-684 쪽 참고). 바로 위에서 와우에 대하여 제안된 것과 같은 숫자적 해석이 견강 부회(奈强附會)가 아니라 이미 초기에도 그렇게 하던 사례가 있었다 는 사실은, 위에서 인용된 바와 같이 (687 쪽), 「바나바의 편지」 (IX 8) 에 제시된 숫자적 이해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레내우스(Aga i ns t Heresie s I 14-15) 도 마르코스 영 지 주의 자들 Marcosia n Gnostic s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연결시킨 여러 가지 수치들을 언급하고 있 댜 이것이 비록 『바나바의 편지」에 있는 것보다 후기의 언급이고, 또 숫자학이 황당한 영지주의적 억측과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영 지주의자들은 그들이 사용한 적지 않은 요소들을 유대인 기독교로 부터 끌어온 것 같으며, 이 같은 다른 숫자적 관찰들 중의 일부가 역시 그 근원에서 올 수도 있다. 앞 문단에서 히브리어 와우 (=6) 가 예수의 이름을 나타낼 수 있음 을 알 수 있었듯이, 여기 이레내우스가 보고하는 것 가운데서는 예수 의 이름이 여섯 글자로 이뤄져 있고, 따라서 헬라어 문자 바우 (=6) 가 그것을 나타낼 수 있음을 보게 된다. 정규적인 헬라어 알파벳의 24 문 자와 함께 숫자 체계에 사용된 다른 고체(古體) 문자들인 콥파 (ko p­ pa, =90) 및 삼피 (samp i, =900) 와 마찬가지 로, 바우는 하나의 에 피

세몬 E pi semon 이 라고 불렀다(t b t n i떄 µov ; 구별하는 표 또는 고안물 [Herodotu s I 195] ; t nl 때 µo c; [표가 있는, 주목할 만한]에서 음[롬 16:7 참고]). 그래서 마르코스 영지주의자들의 용례를 따라 이레내우스는 바우가 〈에피세몬 수 E pi semon number 〉였으며, 그리하여 예수의 이 름을 나타내는 기호였다고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라는 이름(분명히 X p E t ITT6<; 라는 철자를 썼음)이 여덟 글자를 가지고 있고, 이것은 8 의 수치를 가지고 있는 헬라어 에타로써 그리스도를 표현할 수 있는 가 능성을 가리키는 것임을 여기서 보게 된다. 그러나 그 동일한 구절에서 이레내우스가 보고한 다른 관찰들에 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알파와 오메가 라고 불릴 때(계 22:13 참고), 801 이라는 숫자가 된다 (A=l+ Q =800= 801) . 이것과 같은 숫자를 비둘기가 상징할 수도 있는데, 이 단어의 글자들의 총계가 바로 그 숫자이기 때문이다 (n= 8Q +E=5+ p =100+ t= 10+(J =2 00+-c = 300+E=5+p = lOO+a=l=801). 또한 예수의 이름의 모든 글자들의 수치를 계산하면 합계는 888 이다(I =lO+n =8+(J = 200+o=70+u=400+c; = 200=888).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약자로서, 그 첫 글자 키 이외에도 그 첫 두 글자 키와 로도 사용될 수 있었으며, 이것은 또한 쉽사리 축어의 형 태로 함께 붙어서 쓰여질 수도 있었다. 이 동일한 두 글자는 물론 많은 다른 단어들의 시작이 될 수도 있으며, 다른 단어들의 약자로 서 축어의 모양으로 쓰였다. 예컨대 키의 십자 표 중심을 로가 수직 으로 통과하도록 써서 만들어진 키-로 축어는 〈천 명의 사령관〉을 뜻하고 또한 로마인의 tribu nus m i l itum(트리부누스 밀리툼), 죽 〈군 단 지휘관〉의 번역으로 사용된 X(t }..ta.) p (때 c) 의 약자로 나타난다. 키-로 축어는 또한 〈유용하다〉는 뜻의 XP( it(J마 ov) (크레시몬)과 〈시 간〉을 뜻하는 xp (6 voc; ) (크로노스)의 약자로도 나타난다 (A vi -Yonah, Abbrevia tion s, 112 쪽). 따라서 이 축어의 의미는 특별히 그것이 격리

되어 나타날 경우, 언제나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다른 경우들에 있어서, 이 축어는 틀림없이 기독교적인 문 맥들 가운데서 나타난다. 이것은 프뤼기아의 유메네이아 Eurnene i a 지역에서 발견된 두 개의 장례 석비들 위에 기록된 명각에서 볼 수 있다. 가이우스 G ai us 라고 하는 한 사람의 제법 긴 명각은, 그것의 언어로 볼 때, 그 저자가 그리스도인이었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으로 우선 판단된다. 그 연대는 아마도 200 년 경이다. 이 기념비 전면 (A 11) 의 마지막 줄에서 우리는 축어의 약자로 기록된 0(E0)O (테우, 〈하나님의〉라는 단어와 바로 뒤에 지금 우리가 논하고 있는 축어, 죽 Xp( tcn:ou ) (크리스투, 〈그리스도의〉)라는 글자를 볼 수 있다 (]RS 16 [1926], 61-64 쪽, no. 183). 글뤼코니 데스 Gl y co ni des 라고 하는 한 사람 의 과히 길지 않는 비문은 그 연대가 아마도 제 3 세기 후반으로 매겨 지는 명각인데, 이것은 그 사람을 (그 석비의 기둥 몸의 첫째 줄에서) EuµEvEu<; Xp( tcn:tav oc ;) eniC JKo noc;: (유메뉴스 크리스티아노스 에피스코 포스)라고 신원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이 축어 (X p)는 글뤼코니데스 가 유메네이아의 시민이요 감독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들 사이 에 나타나므로, 그것은 〈그리스도인〉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 다 (]RS 16 [1926], 73-74 쪽, no. 200). 다른 단서들도 또한 이 축어의 기독교적 의미를 증명해 주고 있 다. 그 중의 하나가 두라-유로포스 Dura-Euro po s 에서 발견되었다 (YCS 14 [1955], 194 쪽, no. 216). 이것은 그 연대가 제 3 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깨어진 도기 단편 위에 기록된 벽서에 있는 것이다. 그 축어 의 왼쪽으로 바로 곁에는 큰 글자로 대문자 알파가 쓰여 있다. 이것 은 혼히 키-로 축어와 함께 (그리고 또한 뒤에 언급될 십자-축어와 함 께) 기록되는 알파와 오메가를 시사한다. 또한 그 축어 곁에 오직 알 파만 기록한 다른 예들도 있다 (DACL 1:1, cols. 11-12). 그 축어와 함 께 단독으로 쓰인 알파는 또한 i\p(x it) (아르케, 〈태초〉)의 첫 글자라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TESTA 365-366 쪽, 22 항; 403 쪽, 1 항). 〈알파 2와2 : 1오3 에메서가 댜유래 w된..qi a것 K이a다t .1: o 마 @지〉는막 물두론 구요절한에계서시는록 〈1처:8음 ; 과2 1:끝 6, i그 d리px고 n Kai tb [Ho c;〉이 란 말이 〈알파와 오메가〉와 평 행을 이루고 있으며, 첫 구절(계 1:8) 에 있어서 「시내 사본」의 독법은 〈알파와 오메가〉 대 신에 〈처음과 끝〉이다. 바로 위에서 인용한 것과 같은 경우에 있어서, 문맥과 그에 수반 하는 단서들이 콘스탄티누스 이전 시대에 그 상징을 기독교적인 의 미로 사용한 것이 거의 확실함을 증거하고 있으므로, 그 축어가 이 미 콘스탄티누스 이전 시대에 단독으로 나타날 때에도 그것이 기독 교적인 의미를 가졌을 가능성은 상당히 크다. 키와 로를 그리스도 및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첫 글자로 이해 하는 것 이외에,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알파벳의 문자들에 대한 숫 자적 이해에 비춰 보면 다른 해석의 가능성도 제기된다. 헬라인의 숫자 체계에서 로라는 문자는 백의 수치를 가지고 있다. 아브라함이 사라와 자신 사이에서 이삭이 출생하리라는 언약을 받았을 때 그의 나이가 백 세였으므로(창 21:5 ; 롬 4:19 이하), 로와 키(또는 로와 타 우)의 결합은 십자가에서 그 언약의 성취를 나타낼 수 있었다. 시리아인 에프라엠 Ep h raem the Sy rian (373 사망)은 다른 해석을 인정하고 있댜 그는 (ed. Assema ni ill 477C) 로가 십자 위에 놓이면 도움 hel p을 의미하는데(문자적으로, 〈기호로 보여 주는데〉, 이것을 계 산하면 백 이 된다 떠 µa t ve t Oot OE t a 阿 n0 t쳅µi vov eKa[6v. 〈도움〉을 뜻 하는 단어 p onoc t a( 보에테이아)는 또한 그것의 실제적 발음에 부합 하는 대중적인 철자였던 Po i\ 8 t a( 보에티아)로도 쓰였다 . 수치 상으로 이 단어의 글자들은 도합 100 이 된다

가는 (우리의) 도움(이다)〉라는 것이 확증된다 (RAE VI, 84 - 85 쪽). 헬라어 글자들의 또다른 결합은 앞에서 본 것과 약간 비 슷 한 축어 를 만드는데 , 이것은 타우와 로의 합자로 이뤄져서 우라는 기호로 나타나는 것이다 . 이것은 이교의 명각들에서 여러 가지 단어들의 약 자로 나타나고 있댜 예컨대, tp(tQJCd c) (트리아카스)의 약자로 나타나 는데 (A vi - Yonah, Abbrevia t i on s, 105 쪽), 이것은 30 이라는 숫자와 또 한 달의 제 30 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 이 기호는 또한 헤롯 대왕의 주 화들에서 그의 재위 제 3 년을 가리키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헤롯 의 주화들에 나타난 이 축어에 관한 토의를 위해서는 BA 26 [May 1963], 48 쪽 이 하 [Vardaman] 를 보라). 그러나 두 글자의 결합은 또한 기독교적 의미를 가질 수도 있었 댜 o-ca up 6< ; (스타우로스)라는 단어가 약자의 형태로 um 閃라고 쓰이 면, 타우와 로의 통상적인 결합을 만들고 따라서 0 우 o<; 라는 약자를 만드는 일이 쉽게 이뤄졌다. 이것은 일찍이 200 년경의 기독교 필사 본에서 실제로 발견되고 있다(아래의 336 항 이하를 보라). 동시에 타 우 자체도 기독교의 십자 형태로 인정되었으며, 이러한 인정과 함 께 타우와 로의 결합을 십자-축어(우) 를 형성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었댜 우리가 이것을 십자-축어라고 부르는 것은 키자와 로자의 결합으로 구성된 그리스도 - 축어(~) 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십자 -축어가 이집트인의 앙크와 약간의 유사성이 있고 그것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뒤에서 좀더 논하게 될 것이다 (339 항 이 하). 십자-축어에 관하여 로마에서 발견된 한 비문은 비교적 초기의 실례를 제공하고 있다 . 이 명각은 압피아 길 V i a A ppi a 과 라티나 길 Vi a Lati na 사이의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Aurelia n Wall 내부 지역에 서 발견된 무덤의 시체실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 도시의 성벽 내부 에는 매장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이 토장은 아우렐리아누스('Zl O-

275) 가 그의 이름을 붙인 그 성벽을 건축한 때보다 먼저 있었음에 틀림없다 . 이 무덤은 베라티오 니카토라 Bera ti o N i ca t ora 라는 사람의 무덤인데, 이 이름은 그 명각의 첫째 줄에 기록돼 있다(B HPATIOYC NIKATOPAC). 헬라어와 라틴어를 혼합해서 쓴 이 명각 바로 아래 에는 십자-축어가 두 번 나타나고, 그 아래에는 어떤 형체들, 죽 요 나, 「선한 목자」, 낯, 사자 둥의 형체가 그려져 있다. 서체는 제 3 세 기의 어느 시기를 가리키는 점에 있어서 그것이 발견된 장소와 조화 를 이 룬다 (Oraz i o Marucch i in BAG 1886, 15-17 쪽). 나아가서 두 형 태의 축어인 구와 옳 모두가 바티칸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벽 서에서 발견되었다 (M. Black 319 쪽 ; 아래의 329 항울 보라). 잘 알려 진 이 야기 (Lacta ntius , Of the Manner in Whic h the Per- secuto r s Die d , 44 ; Eusebiu s , Lif e o f Consta ntine , I, 28-31) 에 의 하면 콘스탄티누스는 그가 밀비안 다리 Milvian b ri d g e 에서 승리하기에 앞 서 (312) 꿈 또는 환상 가운데서 어떤 기호를 보고는 그것을 그의 병 사들의 방패에 새기거나 군기 또는 제국 기장으로 만들었다. 락탄티 우스 Lac tanti us 는 이 기호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금으로 입혀진 길따란 창은 그 위에 놓여진 가로대로 인하여 십자의 모양을 이루었다. 그 전체의 꼭대기에는 금과 보석으로 만들어진 고리 가 부착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구주의 이름의 상징, 곧 그리스도의 이 름을 가리키는 두 글자가 있었는데, 이것은 그 이름의 첫 글자들로 되 어 있었고 P 자의 중심에 X 자가 교차된 것이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수직으로 세워진 투창의 꼭대기에 가로대를 붙이면 우리가 위에서 타우-십자라고 부른 모양을 형성하는 한편, 그 꼭대기에 헬라어 글자 두 개, 즉 키와 로를 함께 쓰면 그리스도 의 이름을 의미했음을 깨닫게 된다. 이 모두를 종합하면 십자-축어

와 그리스도-축어 모두를 갖게 되는데, 이 두 형태를 결합한 것은 또한 그것들이 모두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전의 기독교 전통으로부 터 왔음을 시사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환상을 본 시기로부터 오래지 아니하여, 이 기호 는 로마인의 장례 명각에 나타나는데(Di ehl, no. 3257), 이것은 Severo et Ru fino conss. (세베로 에트 루피노 콘스.), 죽 세베루스 Severus 와 루피누스 R ufi nus 가 집정관이던 때로 323 년이라는 연대가 확정적으 로 매겨져 있다 (Fas ti consulares im p e ri i, ed, Wi lly Lie b enam, KLT 41-43, 3.5쪽) . 그때부터 이 기호는 자주 나타난다. 그러나 위에서 인 용한 증거는 그리스도-축어와 십자-축어가 모두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전에 이미 긴 역사룰 가졌던 것이 틀림없음을 보여 준다. 종합해서 말한다면 우리는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세기들 동안에도 이미 십자 표와 요타, 에타, 키, 타우, 로 등의 글자들이 기독교적 의 미를 지닌 약자들로 사용된 것을 보며, 또한 이것들의 결합이 축어 들을 형성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田 , *,구, and 윷 둥을 형성하게 되 었음을 보게 된다 (Dol g er I, 386 쪽 참고). 유대교 및 기독교의 장례 풍습과 관련된 십자 표 앞에서의 토의에서 기본 구절인 에스겔 9:4 의 타우 표가 보호와 구원을 뜻하며, 특히 궁극적 심판이 있을 마지막 때로 인식될 위기 의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더욱이 또한 위에서 고증(考證)된 바와 같이 유대교 문헌(예컨대 『다메섹 문서』), 유대인 기독교 문헌(예컨대 r 솔로몬의 송가」), 이방인 기독교 문헌(예컨대 테 르툴리아누스 [Te rtullian ]) 둥에서 이 구절(겔 9:4) 을 인용하거나 암시 한 것은, 이 기호의 저변에 깔려 있는 종말론적인 의미에 대한 이해

가 이 모든 영역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한편으로 예수의 십 자가 및 그리스도의 이름과의 특유한 연관성이 유대인 기독교 사상 과 이방인 기독교 사상에 도입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 기호가 최후의 심판에서의 구원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매장지와 관련하여 사용되기에 특별히 적절한 표시였으며, 이것은 이미 유대인들에게 사실이었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 리스도인들에게도 그러했다 . 유대인 풍습에 있어서 무덤에 하나의 표 또는 기호를 부착하는 일 에 관하여, 우리는 아마도 7 년으로부터 29 년 사이의 바리새인 저자 의 작품인 r 모세의 승천 Assump tion of Moses 」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11:1-6 CAP II, 423 쪽)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게 된 것을 슬퍼하면서 이렇게 묻는다. 〈어떤 장소가 당신을 받아들일까 요? 다시 말해서 (당신의) 묘를 표시하는 기호는 무엇일까요?〉 꽃 모양의 장식 과 같은 순수한 장식용 도안들 (2 CJ7, 299 항)에 더 하여, 유 대인 지하 묘지들과 유대인 석관들 및 납골함들에서 이미 발견된 실례 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특징적으로 사용된 것들은 메노라, 쇼파르, 분향 삽, 룰랍, 그리고 에트록 동과 같은 상징들이다 (259 항 이하). 납골함에는 또한 십자 표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때때로 순전히 세 속적인 의미를 띤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그 함의 측 면에 있는 십자 표와 그 뚜껑의 측면에 있는 그에 상응하는 십자 표 는 그 뚜껑이 꼭 맞게 닫히도록 그것을 얹어놓는 방법을 보여 주는 것이며, 궤의 끝부분에 단지 그와 같은 표가 있는 것은 관이 무덤의 벽감으로 들어갈 때 그 쪽이 먼저 들어가야 함을 보여 주는 것일 수 도 있다(Rahmani in BA 45 [1982], 112 쪽). 하지 만 납골함에 있는 다 른 십자표들은, 특히 좀더 크고 좀더 형식을 갖췄울 때는_그러나 반드시 이럴 경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님 __ , 보호와 종말론적 구원 을 뜻하는 표인 타우의 의미로서 그 유대인 납골함들에 그려져 있었

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Di nkler in ZTK 48 [1951], 163-169 쪽 ; 그리고 in ]AC 5 [1962], 97-99 쪽). 유대인 기독교 단체들에서 무덤에 하나의 표나 기호룰 부착하는 풍습에 대하여, 우리는 에스라 n 서(에스드라스 IV 서 [IV Esdras]) 의 첫 두 장에서 하나의 관련 사항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 작품의 일 부는 아마도 150 년 직후에 기록된 것 같다. 여기서 (2:23) 「불가타 Vulga ta 역 」 의 라틴 어 본문은 다음과 같다. Mortu o s ubi inv eneris, sig nans commenda sepu lcro, et dabo tibi pr im am sessio n em in resurrectio n e mea. 여기서 sig nans (시냔스)라는 단어는 mortu o s (모 르투오스)에 관련될 수 있으며 번역은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다. 〈 네 가 어디서 죽은 사람들을 발견하든지 간에 그들에게 기호를 붙이고 그들을 무덤에 안치하라. 그리하면 내가 나의 부활 시에 그대에게 첫째 자리를 줄 것이다〉 (Oes t erle y 11). 또는 보다 더 큰 본질적 인 가 능성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sig nans (시냔스)라는 단어가 sep u lcro (세 풀크로)와 관계될 수 있는데 , 이럴 경우에 번역은 다음과 같다. 〈네 가 누구든지 죽은 사람들을 볼 때엔, 그들을 무덤에 안치하고 그것 에 표를 하라(또는 인을 치라) . 그러면 내가 나의 부활 시에 너에게 첫째 자리를 줄 것이다〉 (RSV) . 〈표하다〉 , 〈인치다〉, 또는 〈……에 기호를 붙이다〉라고 번역되는 s ignans(시냔스)의 의미에 관해서는, 그것이 십자 표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위의 678-681 쪽 참고). 이 동일한 점에 대하여 역시 유대인 기독교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다른 하나의 더욱 명백한 예증은 주님의 형제이자 예루살렘에 있던 교회의 우두머리이던 (AD. 61 /62 ; GCS Eusebiu s VIl 182 이하 참고 ; Jos eph us, Ant. XX 9) 야고보의 순교에 관한 유세비우스의 기록 (Ch . Hi st. IT 23) 에서 발견된다. 야고보는 성전의 꼭대기에서 뾰족탑으로 부터 내리던짐을 당했다. 〈그리고 그들은 현장에서 그를 성전 곁에

매장하였고, 그의 기념비 (0 ti An[ 스텔레])는 성전 곁에 여전히 남아 았다 〉 라고 유세비우스는 기록하고 있다. 이 지점에 이르러 『 교회사 Church H i s t o ry 』 의 한 초기 헬라어 사본에는 하나의 부가적 인 주해 가 붙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기념비 m iA n 는 매장된 야고보의 이름을 비명 t m yp a0 i v 으로 기록한 못생긴 돌(71.l 8oc …… e1. µo p ~oc) 이었다. 이것을 본받아 오늘날까지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의 무덤에 돌을 세우고, 그 위에 글자yp dµµma 를 쓰기도 하고 십자 가의 기호댜 때 µc t ov t0 0 0t au p oD 를 새겨넣기도 한다.〉 이 증거에 의 하면 야고보의 시대로부터, 무덤의 비석에 관습적으로 표시를 할 때 에는 고인의 이름의 〈 글자들〉과 십자 표의 〈 기호〉를 포함시켰다.

십자 표의 실례들 이제 우리는 십자 표를 가진 물체들에 관한 일련의 실례들을 보고 자 한다. 이와 함께 세부 사항들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관련된 물 체들도 경우에 따라 실례를 들고자 한다. 바로 위에서 인용된 관련 사항들에 비춰 보면 십자 표가 나타나 있는 기념비들은 가끔 장례의 성격을 띤 것들임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사실은 다른 경우에 있어서 도 동일한 것임이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선 십자 표가 순 전히 세속적인 의미의 관습적 기호로만 나타나는 사례들로부터 시 작하고자 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특별히 장례와 관련하여, 위에서 설명한 어떤 종교적 의미 때문에 그 기호를 부착한 것으로 믿어지는 문맥들 안에 있는 십자 표의 실례들을 찾아볼 것이다. 위에서 도출한 이론적인 이해에 의하면, 이것들 중의 더러는 유대 교적인 것__그 정황 속의 다른 요인들이 그러한 사실을 가리킨다 면-이지만, 그것들 중의 또 더러는 유대인 기독교적인 것一_-상 황이 그 방향으로 가리킨다면-이다. 만약 우리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기독교의 십자 표에 대한 실례들을 갖게 된다면, 이것은 아

마도 최초기의 기독 교회에 관한 최초의 고고학적 증거가 될 것이 댜 이와 마찬가지로 헤르쿨라네움에서 나오는 십자 표는, 만약 그것 이 참으로 기독교의 기호라면, 이방 기독 교회의 지역에서 그와 비 슷한 우선적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또한 틀림없이 기독교적인 십자 표의 실례들 을 볼 것이며, 본 연구는 로마와 이집트에 있는 십자 표들과 그것들 의 두드러진 변형을 살펴봄으로써 마무리될 것이다. 이제 인용하고자 하는 비교적 초기의 여러 경우에 있어, 우리는 예루살렘의 납골함에 대하여 관심이 있으므로, 예루살렘 내부와 주변에서 납골당이 사용된 것은 아마도 대략 B.C. 50 년에서 AD. 70 년 또는 어쩌면 135 년까지의 기간에 있었던 일임을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위의 645 쪽을 보라). 텔 아랏 항아리 308 히브리어 명각과 타우 표를 가진 텔 아랏의 항아리 1962 년 동부 네게브에 있는 하나의 큰 텔인 텔 아랏 Tel Arad 을 발굴할 때에 발견된 이 항아리에는 타우가 명각에 알파벳의 한 글자 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 항아리의 어깨에 하나의 분리된 표시로도 나타나 있다. 이 항아리는 연대가 B.C. 7 세기 경인 제 IV 충 S tratum VI 의 어떤 집의 방바닥에 놓여 있었다. 항아리의 측면에 두 줄로 쓰 인 명각은 초기 히브리어 문자를 검은 먹으로 기록한 것으로서 아마 도 다음과 같이 쓰여 있는 것 같다. ntD', tD::::i bslst In the third (yea r), 제 3( 년)에, n3 n 더., yrb $b the month $ab. 차흐달.

만약 이것이 그 명각을 바르게 음역하고 해석한 것이라면, ye ra]) 潟(예라흐 차호)는 이스라엘인의 달력에 있어서 예전에 알려지지 않은 달(이름)이다. 이것은 또한 이사야 18:4 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쬐이는 일광 같고〉라고 번역되어 있으나) 〈차흐 달의 뜨거 움 같고〉라고 번역될 수 있으므로 이 달이 여름철의 달임에 틀림이 없다. 이 명각의 의미에 관하여 추측을 하자면 그 항아리는 향품을 저장하기 위한 것이었고, 날짜는 그 항아리가 채워진 날인 것 같다. 비스듬한 자세의 십자 표로 기록된 알파벳 문자 타우는 그 명각의 첫째 줄 왼쪽 끝에 있는 마지막 글자이다. 그리고 또다시 바스듬한 자세의 십자 표로 기록된 타우taw 표가, 검은 먹으로 좀더 큰 크기 로 그 항아리의 목 바로 아래, 손잡이 가까이의 곡선 부분에도 나타 나 있다. 후자의 표가 갖는 의미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것은 어쩌면 십자 표를 단순히 관습적인 표로 사용하거나 오로지 세속적인 의미 로 사용한 예를 제공하고 있다. 먹과 숯으로 기록된 타우 표의 비슷한 예들이, 마사다의 바위 위 에 있던 헤롯 대왕의 요새 창고를 발굴할 때 발견된 저장용 항아리 들에서도 보인다. 이 경우 발굴자 이가엘 야딘 Y igael Ya d.i n 은 이 표 를 출애굽기 29:27(-28) 둥에서 〈거제(擧祭)〉와 제사장들의 분것으로 일컬어진 (RSV 참고) 히브리어 단어 no,-,n( 트루마, f ram 助)의 약자 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마사다의 방어자들이 열심당 Zealo t s 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마사다에서의 그 어려운 생활 조건들에도 불구하 고 십일조 헌납과 같은 명령들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엄밀한 율법 준 수자들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니카노르 납골함 309 니카노르 납골함의 명각과 십자 표 성전 지대가 똑바로 건너다보이는 감람산의 북쪽 끝에 있는 한 유 적지에서 네 그룹의 방들이 있는 정교한 무덤이 1902 년에 발견되었 댜 그 무덤으로부터 일곱 개의 납골함을 습득하였는데, 여기서 취급 하는 납골함은 현재 영국 박물관에 있는 것이다. 이것의 전면에는 꽃 모양의 장식으로 된 채색된 빨간 장식물이 있고, 그 후면과 뚜껑 및 한쪽 끝에는 꼬불꼬불한 줄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여기에 제시 된 명각이 있다 . 이것은 처음에 상당히 조심성 있게 시작하였으나, 계속해서 써 내려감에 따라 점차로 서두르고 조심성이 없게 제작된 것이 분명하다 . 다음과 같이 처음 세 줄은 헬라어로, 넷째 줄은 히브 리어로 새겨져 있다. OCTATWNTOYNEIKA NOPOCA 艦 AN 사 IBWC IlOi lICA NTOCTAC8YPAC t-to ::i ',t-t iJP J 첫 두 줄은 다음과 같이 읽 을 수 있다. Uot & t& v tO O NEt K dvop oc 'Af...e ~av6p e(J )<;. 여기서 우리는 첫째 단어가 〈뼈들〉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 (b0 tt a) 의 복수 단축형 일 가능성 이 있고, 둘째 단어 와 셋째 단어 사이에 〈아들들〉, 〈후손들〉, 또는 〈가족〉과 같은 단어가 생략된 것으 로 이해하여 그 단어를 삽입해 생각할 수 있다. 만약 이런 짐작이 다 옳다면, 그 번역은 〈알렉산드리아인 니카노르 N i canor 의 (아들들) 의 뼈〉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런데 첫 줄의 처음 일곱 글자가 하나

의 단어, 죽 dm Qt 0v( 오스타톤)이란 단어를 형성할 수도 있다. 이런 단어가 다른 곳에서 알려진 예는 없지만, 〈뼈를 담는 용기〉를 의미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따라서 bo t0 帖 Y0C (오스토파고스)의 상당어일 수 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알렉산드리아인 니카노르의 납골함〉이라고 번역하고자 한다 . 후자가 옳은 해석이라는 확증은 이 명각의 히브리어 부분에서 볼 수 있다. 첫번째 히브리어 단어는 니카노르 N i canor 의 히브리어 철자 인 nq nr 인데, 또한 다른 곳에서는 -,,:p.,:i (ny q nwr) 로 쓰인 것도 발견 된다 둘째 단어는 알렉사 Aleksa 로 판독될 수 있는 '!ks’ 이다. 이것은 臥 c;&c (알렉사스)의 히브리어 상당어일 가능성이 있는데, AAc:&c (알 렉사스)는 다시 〈알렉산드리아 인〉을 뜻하는 臥 c: Q V8 p c0c (알렉산드 류스)의 단축형일 가능성이 있다 . 이 명각의 히브리어는 아마도 단순 히 〈알렉산드리아인 니카노르〉라는 이름만을 말해 주고 있으며, 따 라서 이것이 그 사람의 납골함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을 도와주 고 있다. 이 니카노르에 관하여, 헬라어의 셋째 줄은 그를 not iOQ V -C0 C td c OUp ac who made the ga te s 대문들을 만든 사람 으로 밝히고 있다. 『탈무드』 (Yoma 19a, SET II, 5, 82 쪽)에는 니카노 르 문 N ic anor Ga te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 대문은 성전 뜰의 동쪽, 아마도 여인의 뜰과 이스라엘인의 뜰(위의 193 항을 보라) 사이에 있 었다. 금으로 되 어 있던 다른 대문들 (Mi ddo th II, 3, SET V, 6, 7 쪽)과 는 대조적으로 이 대문은 고린도 놋으로 되어 있었고 (Yoma 38a,

SBT II, 5, 175 쪽), 따라서 요세푸스 (War V 5, 3, §201) 가 다음과 같은 말로 두드러지게 나타낸 것과 동일한 것임에 들림없다. 〈대문들 가 운데 아홉 개는 금과 은으로 입혀졌고, 또한 그 대문들의 설주와 인 방도 그러했으나, 그 중의 하나, 곧 성소의 바깥에 있던 대문은 고린 도 놋으로 되어 있었으며, 가치에 있어서는 은으로 도금하고 금으로 입힌 것들을 훨씬 능가하였다.〉 이 대문의 문짝들에 관하여 『탈무드』 (Yoma 38a, SBT II, 5, 174 쪽) 는 또한 니카노르가 그것들을 애굽의 알렉산드리아로부터 가져왔다 고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다. 그 문짝과 그것들을 운송하는 일에 관 하여, 어떤 기적들이 또한 여기에 곁들여져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그 문짝들에 기울여진 관심이 어떠했는지를 입증해 준다. 그러므로 납골함 명각에 적힌 〈대문들을 만든 알렉산드리아인 니카노르〉가 바로 이 니카노르와 동일인이라는 결론은 십중팔구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람이 골짜기 건너편의 감람산 위에, 그의 유명한 대문 이 한눈에 다 보이는 곳에 장사되었다는 것은 매우 적절한 일이었다. 홍미롭게도 1968 년 성전 지역의 남쪽 벽 발굴에서(위의 189 항 참 고), 약 다섯 개의 매장 동굴들 b uri al caves 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 셋은 납골함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한 납골함 위에는 〈성전 건축자 시몬〉이라는 히브리어 명각이 두 번 나타나 있었다. 니카노르 이외 에 헤롯 성전의 건축과 연관이 있으면서 그의 개인적 유해가 발견된 사람으로는 이 사람이 유일한 다른 경우이다. 310 니카노르 납골함의 뚜껑에 적힌 십자 표 앞에서 제시된 예증 (309 항)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니카노르 납골함의 측단에, 세 줄의 헬라어 본문 아랫쪽에, 그리고 한 줄의 히 브리어 텍스트 왼쪽에 비교적 크고 퍽 불규칙적인 십자 표 하나가

비스듬한 자세로 그 돌에 새겨져 있다. 여기에 제시된 사진에서는 그것과 매우 홉사한 십자 표 하나가 그 납골함 뚜껑 꼭대기의 한쪽 가장자리 부근에 새겨져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납골함의 측단에 있는 십자 표는 아마도 그것과 나란히 적혀 있는 명각과 의도적으 로 연관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을 위에서 (658- 659 쪽) 토의한 바 있는 유대인의 타우 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는 보다 간단한 설명이 더욱 받아들일 만 한 것이다. 1903 년에 글레이디스 딕슨 양Mi ss Glady s Dick son (309 항 의 참고 문헌을 보라)은 이 납골함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녀는 그 납골함의 측단에 있는 십자 표와 그 납골함 뚜껑의 가장자리에 있는 십자 표가 서로 대응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관찰하였고, 따라서 그녀는 그 두 십자 표가 납골함의 뚜껑을 닫을 때 단지 그것 의 방향을 바르게 잡도록 하는 것이었음을 시사하였다 . 불쾌산의 납골함 311 불쾌산에서 나온 납골함 위에 새겨진 유다의 이름과 십자 표 가 있는 명각 1873 년에 바위를 깎아 만든 방 하나가 예루살렘 남동쪽, 베다니로 가는 길에서 멀지 않는 불쾌산(또는 멸망산; 143 항 참고) 위에서 발 견되었다. 이 방은 다론 매장지들로부터 수집해 온 납골함을 넣어 두기 위한 창고인 듯한 인상을 주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이러한 매장 궤들 b uri al ches ts이 적어도 30 개 정도 간직되어 있었기 때문이 다. 비록 그 납골함들이 곧 분산되고 또한 다수는 깨어졌지만, 샤를 르 클레르몽-간노는 이런 일이 있기 전에 그 명각들과 장식의 탑본

들을 만들어서 그 전체 그룹의 세부적인 기술을 편찬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납골함들은 한 측면에 꽃 모양의 장식들을 가지고 있었으 며 (2 紅 299 항 참고), 다수는 긴 측면이나 짧은 측면 또는 뚜껑 위에 명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명각은 예리한 도구로 긁어서 썼거나 혹은 펜으로 그렸거나 아니면 숯으로 쓴 것이었다. 여기서는 또한 히브리어(또는 아람어)와 헬라어가 모두 발견된다. 쿨레르몽-간노가 해독한 바대로 그 명각들은 다음과 같은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 이름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제사장 시므온의 딸 샬람 시 온 Shalamsio n , 서 기 관 유다 Jud ah, 서 기 관 엘르아자르 Eleazar( 엘르 아살)의 아들 유다 Jud ah, 나타이 Na tai의 아들 bar 엘르아자르, 파스 칼 Pascal 의 딸 마르타 M arth a( 마르다), 그리 고 유다의 아내 살로메 Salome. 헬라어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 예수스J esus( 예수), 나타니엘 Nath a niel, 모스카스 Moschas, 마리아도스 M ari ados (이것은 〈마리아 의〉라는 뜻의 속격일 것이다), 퀴르타스 K yrt has, 그리고 헤데아 Hedea. 그 명각들 중에서 적어도 세 개는 십자 표를 수반하고 있으며, 이 중에 첫번째 것은 클레르몽-간노의 탑본에서 복사된 것으로 여기에 재현시켜 보았다. 히브리어 문자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i1더'i1., (yh wdh, 예후다)로 읽 혀져야 할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 친숙한 이름 유다를 가지게 된 댜 이와 동일한 이름이 다른 납골함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또다른 납골함의 뚜껑에는 매우 조심스럽게 새겨진 〈서기관 유다〉라는 명 각이 있고, 아마도 그 동일한 납골함에 속하는 하나의 작은 측단에 는 〈서기관 엘르아살의 아들 유다〉라고 조심성 없이 쓴 명각이 있 댜 엘르아자르도 또한 친숙한 이름이고(예컨대 마카베오하 6:18), 단 축된 형태로는 라자루스 Lazarus( 나사로)로 나타난다(예컨대 Jo se- ph us, War V 13, 7 §567 ; 요 1l:5 이 하)• 또다른 납골함과 뚜껑 에 는 또한 〈유다의 아내 살로메〉라는 이름이 있다. 여기에 제시된 명각에

나타난 유다의 이름 밑에 그려져서 아마도 그 이름과 어떤 방법으로 든 관계가 있는 상징으로 여겨지는 그림은 하나의 동변(等邊) 십자 이다. 312 불쾌산에서 나온, 납골함 위에 새겨진 예수의 이름과 십자 표가 있는 명각 여기서 우리는 1ncrou~ (예수스, 예수)의 이문 철자로 보이는 IECOYC 라는 이름을 대하고 있다. 이것과 동일한 이름이 이 명각들 중의 하 나에서 히브리어(또는 아람어)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읽 을수 있다. p,D 'I i:l 1’ 幻 Em 이 경우에는 그 유명한 구약의 이름 여호수아 (mm, 門기가 후기의 형태인 예수아Je shua 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헬라어로 예수J esus 라 는 이름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시므온 바르 예수아 Sim o n bar Jes hua, 죽 예수의 아들 시 므온을 뜻한다. 특이 한 것은 여 기서 예시된 명각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같은 줄에 두 번 기록되어 있는 것인데, 이것은 적어도 이례적인 것이다(아래의 316, 317 항 참 고). 왼쪽에는 또한 가로 획이 약간 바스듬하게 그어져 있고, 비교적 희미하게 그려진 십자 모양의 기호가 있다. 313 불쾌산에서 나은, 납골함 위에 새겨진 명각과 십자 표 이 텍스트는 납골함의 정면으로 깊이 새겨진 두 개의 헬라어 대문 자, 죽 에타와 델타로 이루어져 있다. 같은 그룹의 납골함에는 여자

의 고유 명사 'H6 ta (헤데아 Hedea) 의 이문 철자인 듯한 恥出라는 글 자가 적혀 있다. 이 이름의 처음 두 글자가 여기에 예시된 텍스트의 두 글자와 똑같기 때문에, 후자는 전자와 같은 이름의 약자일 수도 있댜 아니면 이 두 글자가 서로 전혀 다른 어떤 의미를 가졌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는지는 말하기가 어렵다. 하여튼 그 두 글자 위에, 그리고 돌에도 역시 깊이 새겨진 것은 세로 획이 가로 획보다 더 긴 십자, 즉 crux i mm is sa( 크룩스 임밋사) 또는 라틴 십자이다 (685 쪽 참고). 클레르몽_간노 (I, 404 쪽)에게 이 십 자는 틀림없이 기독교의 상징으로 보였으며, 그리하여 이것은 불쾌 산의 납골함에 있는 다른 많은 기호들도 어쩌면 기독교의 의미를 가 졌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확인해 주었다. 베다니 도로 근처, 그리 고 그 마을의 유적지 근처에서 발견된 이 명각들의 그룹 전체가 그 장소에 속한 복음서 인물들의 이름을 거의 모두, 죽 엘르아살(나사 로)과 시몬과 마르다 둥을 포함하고 있는 사실은 또한 클레르몽_간 노(i n PEFQ S 1874, 10 쪽)에게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보이지 않았 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들을 〈기독교가 어떤 공식적인 입장을 취하 기 전에 그것이 탄생한 바로 그 토양으로부터 나오는 바대로 기독교 의 시작기에 속하는 기념비들〉이라고 기술하였다(in PEFQ S lITT4, 9 쪽). 그는 또 이렇게 기록하였다. 〈불쾌산 위의 동굴은 새로운 종교 에 가담한 최초기의 기록들 중의 하나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그룹의 석관들은 더러는 기독교의 상칭을 가졌고 더러는 갖고 있지 않은데, 여기서 우리는 말하자면 기독교가 실제적으로 펼쳐지는 일 을 조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두말할 나위 없이 다른 사람들의 반론에 부딪쳤으나 아직도 매우 조심성 있게 고려할 가치 가 있는 것으로 남아 있다. 클레르몽-간노(I, 404 쪽)가 이 기념비들 가운데 가장 늦게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의 통치 이후의 것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

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예루살렘에서 납골함의 사용이 단지 70 년 또는 135 년까지만 계속되었다는 견해에 비춰 볼 때(위의 645 쪽 참고), 거의 수용될 수 없는 생각이다. 그것들의 의미가 무엇이든지 간에 명각과 그것에 수반하는 기호들은, 그 연대법에 의하면 기독교 시대 의 1 세기경보다 더 후의 것은 아니며, 만약 그것들의 기독교적 성격 이 입증될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중요하고도 괄목할 만한 아주 초기의 것이 될 것이다. 탈피오트 Tal pi o th (315 항 이하)와 도미누스 플레비트 Do mi nus flev i t (319 항 이하)의 납골함과 비교해 보면, 이것 이 훨씬 더 잘 입증될 것이다 (Ba g a tti, Gli s awi de! Domi nu s f[ev it [이 자료는 319 항의 참고 문헌에 자세 히 언급되 어 있음] , 170 쪽 이 하, 그 림 39, nos. 7, 15, 16 참고). 314 실완 근처에서 나온 한 납골함의,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가진 명각 실완 마을의 남쪽에 있는 불쾌산 (143 항)의 동일한 지대에서, 바위 를 깎아서 만든 또 하나의 방이 1941 년에 수케니크E. L. Suke nik와 아비가드 N. A vig ad 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배열을 보면 그 방의 바 닥에 깊이가 1 미터 되는 직사각형의 구덩이가 있는데, 이것은 입구 의 벽을 제의한 다른 벽들을 따라서 세 개의 선반들 형성하지만, 거 기에 코킴은 없다 선반 위와 구덩이의 일부분에는 뼈가 있었고, 한 쪽 끝에 있는 선반에는 열 개의 납골함이 있었으며, 다론 쪽 끝에는 한 개의 납골함이 있었다(발굴자의 보고서에서 11 번). 죽은 사람들이 장사되었을 때 그들은 선반 위에 안치되었으며, 후에 뼈들이 수거되 어 납골함 속에 넣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방의 도처에는 도기들이 흩어져 있었고, 소위 헤롯 시대의 동과 다른 물품들은 그 연대가 아 마도 1 세기일 것으로 시사하고 있다. 납골함들 중의 하나를 제의한

모두와 도기는 팔레스타인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납골함 제 9 번 은 히브리대학에 가 있다. 납골함에는 장식이 없으나, 두 개 (2 번과 10 번)를 제외한 모든 납골 함에는 명각이 있는데, 그 중에서 여덟 개는 헬라어로, 두 개는 각각 히브리어 (1 번)와 헬라어 및 히브리어로 (9 번) 되어 있다. 모든 명각들 은 이름을 말해 주고 있으며, 그 이름은 의심할 여지없이 죽은 사람 의 이름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알려진 거의 모든 납골함 명각들에 서 나타나는 관습이다. 여기에 제시된 납골함 9 번의 뚜껑을 찍은 사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유골이 이 곳에 안치된 사람의 이름은 알렉산더이다. 이 이름 은 그 납골함의 뚜껑 위에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산뜻하게 명각되어 있다(IE] 12 [1962], 10 쪽 , 그림 16 및 pl. 4A). 동일한 이름이 초록색 분필(?)로 그 납골함의 앞면에도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아무렇게 나 써져 있는데,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헬라어로 되어 있고 또한 시 몬이라는 이름과 함께 적혀 있다. 앞면에는 시몬이란 이름이 주격으 로 되어 있으나, 뒷면에는 적절하게 속격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 시 몬이 알렉산더의 아버지인 것이 분명하다. 뒷면에 있는 명각은 다음 과같다. 멘血Q NA 庫 Sim o n Ale 시 몬 알레 A 사프 AN 사 0 뿐 Alexander 알렉산더 반 MQ NOY (Son) of Sim o n 시몬의 (아들) 서툴렀던 것이 분명한 조판공은 여기서 실수로 아버지의 이름인 시몬으로부터 시작하여 알렉산더라는 이름의 첫 세 글자를 쓰다가 다시 시작하여 그 이름들을 올바른 순서로 기록했는데, 이번에는 시 몬의 이름을 적절하게 속격으로 씀으로써 알렉산더를 시몬의 아들

로 확인시켜 주고 있다. 여기에 제시된 사진에 나타난 납골함의 뚜껑 위에 기록된 이중 언 어의 텍스트로 돌아가 보면, 큰 글자로 쓴 헬라어 행(行)은 단지 알 렉산더라는 이름만 말해 주고 있으나, 그 아래 있는 히브리어로 된 행은 그와 동일한 이름을 히브리어로 제공하고 있으며, 그에 뒤이어 n.,1., p(QR NYT )라는 글자를 적고 있다. 여기서 마지막 글자(타우)를 왜 썼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첫 네 글자는 확실하게 퀴 레네 C yr ene( 구레네) (헬라어로 Ku pit패 [퀴 레네])라는 이름 을 히브리어로 전사했음을 나타내 준다. 그리고 이 말은 아마도 알 렉산더의 출신지를 일컬는 것으로, 도미누스 플레비트 Dommus fl e vit의 한 납골함 명각에 적힌 〈퀴레네인 필론 P hil on the Cy re- ni an 〉(¢頃 v Ku p nva t oc) 이라는 이름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Milik in BAGA1TI AND MILIK 81 쪽). 홍미롭게도 그 근처에 있는 납골함 제 5 번은 〈프톨레마이스의 시 몬의 (딸) 사라〉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이 시몬의 딸 사라는 시몬의 아들 알렉산더의 자매임에 틀림이 없으며, 그 아들이 미상불 퀴레네 인 C yr e ni an 이었으므로, 이 딸의 고향인 프톨레마이스는 아마도 퀴레 나이카에 있는 프톨레마이스였을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여기에 적어도 시몬이라는 어떤 사람의 두 자녀가 장사되어 있다는 뜻에서 하나의 가족 매장지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들의 출신지는 아마도 퀴 레네였던 것 같다. 사도행전 6:9 로부터 우리는 예루살렘에 구레네인들의 회당이 있었 음을 알게 되고, 마가복음 15 : 21 은 예수의 십자가를 지도록 강요받은 사람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의 시몬 2 t µuv Kup nv at og 이었다고 한다. 이 수수한 무덤이 바로 이 시몬의 가족 중 적어도 두 사람의 유골을 안치한 마지막 안식처였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 다. 그 가족의 구성원들이 유대인 기독교인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음

직하다. 왜냐하면 마가가 알렉산더와 루포를 지칭한 것은 그들이 당 시의 기독교 권내에서 잘 알려져 있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따라 서 마가복음 15:21 의 루포가 또한 로마서 16:13 에서 바울에 의하여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자로 일컬어지면서 그의 어머니와 함께 문안을 받는 그 루포와 동일한 사람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J ohn Knox in IB 9, 659 쪽) . 탈피오트 납골함들 315 탈피오트에 있는 무덤의 구도 이 구도가 보여 주는 무덤은 1945 년에 예루살렘 남쪽이자 베들레 헴으로 가는 구 도로 곁에 있는 탈피오트 Tal pi o th 교의 근처에서 발 견되었댜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안마당이 있다. 주된 묘실(구 도에서 I 로 표시됨)에는 직사각형의 패인 곳이 있어 머리 위의 공간 을 허용하고 삼면에 벤치처럼 앉을 곳을 제공한다 . 벽에는 코킴 형 태로 된 시체실들이 있는데, 동쪽 벽에 두 개, 남쪽 벽에 두 개, 서쪽 벽에 한 개로 모두 다섯 개이다. 이 무덤에는 열네 개의 납골함이 있었다. 세 개는 그 무덤을 발견 한 일꾼들이 꺼내 가버렸다. 나머지 열한 개는 애초의 발견이 있은 직후에 실시된 발굴에서 수케니크와 아비가드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 열한 개의 납골함이 발견된 장소들은 구도에서 1-11 의 숫자로 표시 되어 있다. 이 무덤에는 약탈자들의 칩입을 받은 중거가 있었다• 약 탈자들은 여러 개의 시체실을 뚫고 들어가서 여러 개의 납골함을 가 지고 나갔다. 그러나 분명히 뼈밖에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음에 실 망한 나머지, 그들은 다른 납골함을 있던 곳에 그냥 버려 두었고, 그

리하여 고고학자들이 그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덤 안에는 연대가 42/43 년의 것인 헤롯 아그립바 1 세의 주화 하 나가 있었다. 도기는 후기 헬라 시대와 초기 로마 시대의 것이었다 . 따라서 그 무덤은 B.C. 1 세기의 어느 때로부터 기독교 시대의 1 세기 중엽 이전까지 사용되던 것으로 보인다. 세 개의 납골함에는 히브리어 문자로 거칠게 새긴 명각들이 있는 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이 읽고 번역할 수가 있다. 납골함 제 1 번에서 氏::I O 더::I ,’立 2D (시므온 바르사바 Sim e on Barsaba), 납골함 제 4 번에서 ’'幻 ED n 더 2 c., 기 2 (시므온의 딸 마리암M ari am, daug h te r of Sim e on), 그리고 납골함 제 10 번에서 .,n2( 마타이 Mata i) __ 이것은 맛티아스 Ma tthi as( 맛디 아)의 약자 형 태 일 수 있다. 두 개의 납골함, 죽 7 번과 8 번에는 헬라어 명각들이 있는데, 이 중 제 8 번에는 큰 십자 표들이 있다. 이 구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두 납골함은 분명히 그것들이 놓여 있던 원래의 위치인 지점인 그 무덤의 동편에 있는 시체실의 후면 끝에서 나란히 발견되었다. 이 두 납골함은 다음에서 더욱 자세하게 기술될 것이다 (316, 317 항). 316 탈피오트에서 나온 납골함 제 7 번의 명각의 사진과 그림 이 납골함은 앞면에 아로새긴 판벽들과 꽃 모양의 장식 두 개로 꾸며져 있는데, 이것은 그 시대의 다른 납골함들에서 친숙한 장식 형태였다(幻 7 항 참고). 뒷면에는 여기에 제시된 명각이 있는데, 이것 은 숯으로 그린 것이며 단 한 줄의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판독이 가 능한 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다. IHCOYC IOY Jes us iou 1ncrou~ 1.o u 예수유

수케니크가 그 명각을 그린 실물대(質物大)의 그림에서(A ]A 51, 358쪽), 그가 마지막 윔실론 up s i lon 의 오른쪽에 대각선으로 된 한 획 울 보여 주기는 하지만, 다른 글자가 더 이상 없다고 잘라서 말하고 있으며 (363 쪽), 〈유i ou 〉는 〈슬프도다 woe 〉라는 의미의 헬라어 감탄 사라고 시사한다 . 고전 헬라어에서 슬픔과 비애를 표현할 때 이 감탄 사가 보통 두 번 겹쳐 쓰였으나, 때로는 한 번의 부르짖음으로도 사 용되 었다(Ari s t o p hanes, The Thesmop h oria z usae, 245 LCL m, 152 쪽). 그것은 또한 기쁨에 찬 놀라움의 외침이기도 하고(Ari s t op hanes, The Knig hts, 1096, LCL I, 230 쪽), 한 고전 주해자 Scho li as t는 말하 기를 괴로움을 표현할 때는 tou tou (유…유)로 쓰였고, 기쁨을 표현 할 때는 tou tou (유^ 유^)로 쓰였다고 말한다(Ari s t o p hanes, The Peace, 317, 345 LCL II, 30, 32 쪽) .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수케니크는 이 두 단어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에 대한 기독 교인의 애도, 즉 〈예수, 슬프도다!〉로 이해하고 있다. 다른 많은 해 석 들 가운데서 , 헴 펠 Hemp el (ZAW 62 [1950], 업 4 쪽) 은 마지막 윔실론의 오른쪽에 있는 대각선으로 된 획에 유의하면서 거기에 한 개의 문자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바갓티와 밀리크Milik (170 쪽, no. 17) 는 그 대각선을 알파의 일부로 생각하고 델타를 보태 어, IOT 쏘 (유다)라는 이름을 읽고 있다. 만약 이것이 맞다면 그 전체 는 〈유다의 아들 예수〉라는 어떤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여기서 1n(J o uc; -co u 1ou6a (예수스 투 유다) (눅 3:33 참고) 또는 'In(J O Oc ut bc 10b8a (예수스 휘오스 유다) (FREY I, 24-25 쪽, no. 31 참고)라는 말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가 읽는 방법은 좀더 확실해질 것이다. 그런데 케인 Kane (l crt쪽)은 여기에 보이는 혼적을 매우 조심성 있게 따라가는 중에 1n(Jo uc; (예수스)의 윔실론 up s il ion (u) 아래 있는 다른 윔실론의 윗부분을 발견하고는 이 아랫줄 에 오미크론 o mi cron 을 복원하여, 그 전체 명각을 다음처럼 읽고 있다.

1naouc.: 1ou6 예수유다 [o] ii [의] 여기서 두번째 이름(철자가 아랫줄까지 계속된)은 유다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이름 역시 다른 곳의 납골함 명각들에서 매우 혼하 게 나타나는 이름이다. 따라서 이것을 문자적으로 읽는다면 〈유다의 예수〉, 죽 〈유다의 아들 예수〉이다. 317 탈피오트에서 나온 납골함 제 8 번의 명각 명각은 이 납골함의 뚜껑에 예리한 도구로 새겨져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댜 lliCO YCMW8 Jes us aloth 1noofi< ; 碑 8 예수 알로트 여기서 수케니크(A ]A 51, 363 쪽)는 〈알로트〉가 히브리어 및 아람 어 규낫 k(‘ 알라)에서 파생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는데, 이 단어에는 다 른 의미도 있지만 〈울부짖다〉, 〈애통하다〉라는 의미가 있으며, 따라 서 이 명각은 납골함 제 7 번 (316 항)에서 〈슬프도다〉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 단어와 동일한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다. 〈알로트〉에 대한 다른 해석들 중에는 그 헬라어 단어가 히브리어 동사 규낫?(‘알 라)의 부정법 형태인 m 낫?(‘알로트)를 옮겨놓은 것이라고 시사하는 사례도 있다 (Gus taf sson). 이 동사는 구약에서 친숙한 단어로, 여러 가지 문맥들에서 위로 올라가는 움직임의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특 히 이것은 에스겔 羽 :l2-13 의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 오게(올라오게) 하고〉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는 동사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적힌 말은 죽은 자가 일어날 것을 예수께 청하는 호소일지도 모른댜 하지만 알로트

318 탈피오트에서 나온 납골함 제 8 번의 십자 표 납골함 제 8 번의 각 측면 중앙에는 숯으로 그린 큰 십자 표가 있 다 . 여기에 보이는 것은 그 납골함의 한쪽 긴 측면에 있는 것으로, 거의 같은 길이의 획을 가지고 있다. 다른 세 개의 십자 표들은 약 간 불규칙한 길이의 획을 가지고 있다. 이 표를 그려놓은 목적은 그 납골함들이 사용 중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는 주장이 있으 나 (Wi ll ou g hb y in ]BL 68 [1949]), 이것은 그 납골함이 원래의 위치 곧 시체실의 뒤쪽 구석에 놓여 있었던 것과 그것의 노출된 두 측면 이 다른 두 개의 납골함들(제 6 번과 제 7 번 ; 구도 315 항을 보라)로 덮여 있었음에 비춰 볼 때, 거의 필요치 않는 일이었다. 그 표들은 그 명각 (317 항)을 기록한, 동일한 사람에 의하여 그려졌 을 것이며 그것들의 크기가 큰 것과 배치가 뛰어난 점 등은 좀더 의 미 있는 어떤 목적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만약 이 십자 표들이 상징 적인 의미룰 부여하도록 의도된 것이라면, 그리고 만약 이것이 유대 인의 가족 매장지라면, 이 표들은 유대인의 타우일 가능성이 많다 (Dinkler in ZTK 48 [1951], 150 쪽 이 하). 하지 만 바갓티 와 밀 리 크는 이 십자들을 도미누스 플레비트 Do min us fl e vit에 있는 유대계一기독 교 기호들과 비교하고 있으며 (170 쪽, no. 6 ; 173 쪽 이하), 콘펠드 Com fe ld 는 탈피오트의 묘실을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매장지로 보고 있는데, 이것이 가장 그럴 듯한 견해인 것 같다. 도미누스 플레비트 납골함 319 도미누스 풀레비트에 있는 묘지 일부의 구도와 단면도 감람산에 있는 도미누스 플레 비트 Dom inu s fl e vit의 프란체스코파

성소(위의 161 항을 보라)에 새로운 성벽이 건축되었을 때, 전에 알려 지지 아니한 고대의 공동 묘지가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이 공동 묘 지는 1953 년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있는 프란체스코 성경 연구소의 바 갓티 신부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이 공동 묘지는 매우 광범위하여 500 개 이상의 알려진 매장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타난 증거 에 의 하면 (BAGAITI AND MILIK 43-44, 163-164 쪽) 그것은 서로 다른 두 기간에 사용되었다. 첫번째 기간에 그 무덤들 은 코킴 kokim 형태로 되어 있었으며, 거기서 나온 주화들은 하스몬 가의 시대부터 수세관 발레리우스 그라투스 Vale riu s Gra tu s 의 제 2 년 까지, 즉 B.C. 135 년부터 15/16 년까지의 것들이다. 그리고 그 무덤들 이 사용된 가장 늦은 연대를 잡는다면 아마도 70 년(어쩌면 135 쪽)까 지일 것이다 (645 쪽 참고). 두번째 기간에는 무덤들이 아치형 무덤이 라는 특징 을 이 루고 있으며 , 주화들은 갈루스 Gallus (AD. 251-253) 시대부터 헤라클리우스 Herac li us 제 16 년 (626) 까지의 것들이다. 이 공 동 묘지는 제 3 세기와 제 4 세기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특히 제 4 세기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거기에는 주화들 이외에도 토기로 만든 램프와 항아리들, 그리고 유리와 돌로 만든 다른 물건들이 있었다. 무덤들 안에는 일곱 개의 석관과 122 개의 납골함 또는 그것의 단편들이 있었는데, 이 모든 것 들은 그 공동 묘지가 사용된 첫번째 기간으로부터 온 것들이다. 납 골함들 위에 적힌 명각과 기호들은 아래에서 살펴볼 것이다. 여기에 예시된 것은 그 전체 공동 묘지 중에서 발굴된 지역의 남 동쪽 구석 근처에 놓인 한 작은 부분만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 구 도와 단면들이 보여 주는 이 지대에는 발굴자들이 65 부터 80 까지로 번호를 매긴 매장지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아래에서 자주 언급될 것 이다. 이 지대는 중앙실 (74 번)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 곳으로부터 사 방에 있는 매장지로 들어가게 되어 있으며, 특히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통하여 하나의 석굴 (79 번)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이 석굴은 2.2X2 .l미터의 크기이고, 그 안에는 14 개 이상의 납골함들이 간직되 어 있었다 (12-25 번 ; BAGAITI AND MILIK 52-53 쪽). 320 도미누스 플레비트에서 나온, 므나헴이라는 이름의 명각 40 개 이상의 명각들이 〈도미누스 플레비트〉 납골함 위에서 발견 되었다 (MILIK IN BAGAITI 70-109 쪽). 그것들은 거칠게 새겨졌거 나 숯으로 그려졌으며, 히브리어, 아람어, 또는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히브리어로 된 명각들은 비교적 소수이고, 아람어와 헬라어로 된 것 들은 거의 같은 수효이다. 납골함 명각에서 흔히 그렇듯이 (303 항 참 고) 이것들은 보통 죽은 사람의 이름을 보여 주고, 때때로 가족 관계 를 가리키기도 한다. 때때로 이것들은 또한, 이 명각 제 22 번의 경우 가 그렇듯이, 일상 생활에서 고인이 하던 일을 구체적으로 적고 있 다 . 이것은 매장지 제 299 번의 납골함 제 83 번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매장지는 이미 언급한 매장지 그룹인 제 65-80 번(위의 319 항)의 북서 쪽으로 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다. 돌에 새겨진 히브리어 텍스트는 다음과 같이 옮겨 쓸 수 있다. 'D 리 T J O CT3, R3::: i ,n::, 첫째 줄의 첫 단어는 명각 제 26 번에서도 발견되는 므나헴 Mena-

hem 이라는 이름이댜 이 이름은 구약(왕하 15:14 이하)에서 알려진 것으로, LXX 필사본들(왕하 15 : 16) 에서는 Mava 加 (마나엠) 또는 MavaI\ V (마나엔)으로 번역되어 있다. 후자와 같은 모양으로 이 이름은 사 도행전 13:1 에서 나타난다 . 그런데 여기에 제시된 명각에 있는 이 므 나헴은 브네 야킴 Bene Ya kim 죽 〈야킴 의 아들들〉 중의 한 사람으 로 그 신원이 밝혀져 있는데, 이들은 아마도 역대상 24 : 17 에 언급된 야긴 Jac h in (1.,2.,, LXX 1ax i vAx tµ)의 가족인 것 같다. 끝으로 마지 막 줄에서 그는 코헨 1i1 ~(kohen) 죽 제사장으로 묘사되어 있다. 도 미누스 플레비트에 있는 납골함 명각의 대부분이 아마도 기독교 시 대의 1 세기 초반에 속하는 것인데, 이것은 세기가 바뀌기 전의 것으 로 보이며, 따라서 전체 그룹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 중의 하나로 생 각된다 . 321 도미누스 풀레비트에서 나온,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명각 이것은 매장지 제 70 번(위의 319 항을 보라)의 납골함 제'2:1번의 명각 제 7b 번이다. 이것은 그 납골함의 긴 측면에 크지만 얕은 홈으로 새 겨져 있다. 밀리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읽는다. n r,더 E i Ma rtha 마르다 。.,i E Miriam 미리암 첫 이 름은 또한 아람어 로는 있 n it.:I (마르타)로, 헬라어 로는 齡p 0a (마르타)로 나타난다 . 둘째 이름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모두 여기에 제시된 것과 같은 모양으로 나타난다. 헬라어로 이것은 M apt aµ( 어미 변화 없음)이라는 동일한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끝 글자 m 을

생 략하여 Map tci (마리 아) 또는 Map la c; (마리 아스)로 하나의 모음을 첨 가하고 때로는 m 을 두 개나 쓰기도 하여 Ma ptci[미血 (마리암메) 또는 Map ta[ µ]µnc; (마리암메스)로, 혹은 s 를 첨가하여 Map tac ; (마리아스)나 Map tci6o c; (마리아도스)로 쓰기도 한다. 이것과 동일한 두 개의 히브리 인 이름이 또한 그 납골함의 뚜껑과 다른 긴 측면에서도 발견된다. 마지막 경우에서 우리는 두번째 이름의 철자가 i1., -,D (마리아)로 된 것을 보는데, 이것은 Map ta (Ma ria, 마리아)와 일치하는 것이다. 322 도미누스 플레비트에서 나온, 시므온 바르 …… 라는 이름을 가진 명각 이것은 매장지 제 79 번(위의 319 항을 보라)의 납골함 제 19 번에 숯으 로 쓴 명각 제 11 번이다. 밀리크는 처음 다섯 문자를 쉰 sh in, 멤 mem, 아인 ‘a yin, 와우 waw, 눈 nun 으로 읽고, 그 다음 두 문자는 베트 be th 와 레쉬 resh 가 함께 쓰인 것으로 읽는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모든 글자는 다음과 같다 . .,:J ,’1'r.itD Sim e on Bar 시 므온 바르 마지막 네 문자는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요드y odh, 와우, 눈, 그리고 헤 he 일 것이고, 따라서 다음과 같은 단어가 될 것이다. 門 3,, Jon ah 요나 시므온과 요나는 구약의 히브리인 이름들이고 바르는 아람어로 〈아들〉이다. 그레코-로만 시대에 시므온은 특별히 인기 있는 이름이 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그것이 헬라어 이름 2 t卽 V (시몬)에 상당하는

이름이기 때문이가도 하다. 헬라어 성경의 마태복음 l6:17 에 2 i血 V Bap tuv d (또는 恥p 1uvd) (시몬 바르요나)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위에 나온 이름의 정확한 상당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납골함 명각의 마 지막 단어의 독법이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은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 시므온이라는 이름은 또한 매장지 제 65 번에 있는 납골함 제 8 번의 명각 제 5 번과 매장지 제 437 번에 있는 납골함 제 1 (J7번의 명각 제 34 번에서도 나타난다. 도미누스 플레비트 명각에서는 방금 언급된 이름들에 더하여 다 른 이름들도 많이 있다. 이것들은 신약에서도 친숙한 이름들로서 , 그 목록을 작성 하면 다음과 같다 .

이름 원어 명각 납골힘 매장지

국어 영어 번호 번호 번호 엘르아살 Eleazar (Lzarus) .,rp5 R 25 52 376 야이로 Jairus Iaei .po <; 1 31 42 요한 Joh n [J(J) ]a 떠 C 18 68 280 요나단 Jon ath a n ( 행 4:6 D) 1m1n 、 1 16 36 80 요셉 Jos eph 기°’ 20 75 았 유다 Jud ah (아래의 325 항을 보라) Iou6a 13 a 21 79 유다 Jud as Iou6ac; 18 68 220 마르다 Ma rtha (위 의 321 항을 보라) nni o 7 업 70 미리암 Miriam (Ma ry) (위 의 321 항을 보라) C` 더D 7 2I 70 맛디아 Matt ia (Matt hias ) i1가 T3 3 33 었 므나헴 Menahem (위의 320 항을 보라) en 마 2 22 8.3 299 살로메 Salome C1 넛p 8 29 70 삽비라 Sapp ira (아래의 325 항을 보라) R 더 `OO 13 b 21 79 시므온 Sim e on (본란 322 항을 보라) ’'wau 11 19 79 여호수아 Yeshua (Jes us) p’°` 29 93 425 스가랴 Zecha riah Zaxap tou 30 95 431

이 목록과 비교될 수 있는 신약의 이름들이 또한 불쾌산(위의 311 항 을 보라)과 탈피오트(위의 315 一 317 항)에서 나온 납골함들 위에서 발 견된다 . 불쾌산 탈피오트 엘르°}살 Eleazar 바사바 Barsaba 예수 Jes us 예수 Jes us 유다 Jud ah 유다 (?) Jud ah (?) 마르다 Martha 마리암 Ma riam (Ma ry) 마리아 Marias (Ma ry) 마타이 Mata i (Matt hias ) 나다나엘 Nath a n 시므온 Sim e on 살로메 Salome 시므온 Sim e on 납골함과 신약에서 이러한 여러 가지 이름들이 나타나는 빈도는 거의 같은 정도이다. 323 도미누스 폴레비트에서 나온, 샬람시온이라는 이름과 십자 표를 가진 명각 납골함들 위에는 명각처럼 새겨졌거나 숯으로 그려진 기호들도 많이 있다 (BAGA TI'I AND MILIK 63-69 쪽). 이 들 중 더 러 는 단지 실제적인 목적에 부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자면 몇몇 경우에 있어서 하나의 표, 즉 아마도 삼각형이나 곡선으로 된 표가 그 궤의 끝부분에 그려져 있고, 그 궤의 바로 위에 놓이는 덮개의 끝부분에 는 그 표시와 상옹하는 또 하나의 표가 그려져 있었으며, 이것들은 그 뚜껑을 궤 위에 덮울 때 그것을 놓는 방법을 보여 주도록 의도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310 항 참고) (매장지 제 459 번에서 나온 납골함 제

64 번, BAGAITI AND MILIK 54 쪽, no. 64 ; 65 쪽, 그림 17, 17 및 18, tav . 2:7, fot. 74 ; 그리고 100 쪽, 명각 제 43 번, tav . 37, fot. 117 ; 매장지 제 301 번에서 나온 납골함 제 89 번, BAGAITI AND MILIK 5.5쪽, no. 89, tav . 업, fot. 72 ; 그리고 매장지 제 4 'J7번에서 나온 납골함 제 115 번, BAGAITI AND MIIJ K 54 쪽, 그림 16, 115 ; 57 쪽, no. 115 ; 및 ffl -98 쪽, 명 각 제 37 번 ; 91 쪽, 그림 23, 6, tav . 34, fot. 105 등을 보라). 그러나 다른 기호들은 명백하게 실용적인 의미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봐서 상징으로 쓰여질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매장지 제 79 번 에서 나온 납골함 제 12 번에는 그 궤의 끝부분에 새겨진 크고 똑바로 선, 대략 등변(세로 획과 가로 획이 각각 13 센티미터와 10 센티미터이 다)의 십자 표 하나와 둥그렇게 생긴 덮개의 끝부분에 비스듬한 자 세로 새겨진 약간 작은 십자 표 하나가 있다 (BAGAITI AMD MILIK 52 쪽, no. 12 ; 54 쪽, 그림 16, 12 ; 64- (36쪽, 그림 17, 2, 8). 이 납골함에는 그 밖의 장식이나 아무런 명각이 없으나, 다른 경 우들에서는 명각이 있을 경우에는 십자 표가 수반되었다. 여기에 예 시된 사진은 도미누스 플레비트에 있는 매장지 제 84 번에서 나온 납 골함 제 1 번에 적힌 명각 제 17 번을 보여 주고 있다. 히브리어 이름이 궤의 긴 측면 오른손 편의 상부에 깊고도 넓은 획으로 패여져 있고, 또한 그 위에 있는 뚜껑의 구석에도 좀 작은 명각으로 반복되어 있 는데, 그 이름은 다음과 같이 읽힌다. 1., 적입낫 m. 이 이름은 〈평화〉를 뜻하는 단어 샬롬 smIom 과 예루살렘에 있는 거룩한 산의 이름 시온(구약에서의 철자는 ,,.,3 임 ; 175 항 참고)을 결 합한 것이 분명하댜 이것이 참으로 개인의 이름이라는 사실은 그것 이 동일한 히브리어 형태로 불쾌산에서 나온 한 납골함에서 나타남 (위의 311 항 참고)으로써 입증되었다. 거기서는 그 이름 다음에 〈제 사장 시 므온의 딸〉 이 라는 칭 호가 따르고 있다 (Clermon t -Ganneau I, 386-392 쪽). 헬라어로 된 이 동일한 이름이 도미누스 플레비트에서

나온 다른 납골함에 기록되어 있는데(매장지 제 42 번에서 나온 납골함 제 32 번에 적힌 명각 제 2 번, BAGAITIAND MILIK 71-74 쪽, tav . 35, fat. 109), 그것을 복원시켜서 읽으면 다음과 같다. p야 a]µm[uv]. 요세푸스 (An t . XVIII 5, 4 §130) 에서는 이 동일한 이름이 헤롯 대 왕과 마리암메의 딸 이름인 노야 aµ 'l'tlil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이름을 샬람_시온 (Shalam-Z i on 또는 Shalams i on) 으로 옮겨쓸 수 있고, 어원적으로 〈시온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진에 나타난 궤의 측면에 적힌 이름을 다시 보노라면, 우리는 라 메드 lamedh 와 멤 mem 바로 밑에 대략 등변으로 된 십자 표가 비스 듬한 자세로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324 도미누스 풀레비트에서 나온, 디오게네스라는 이름과 십자 표를 가진 명각 이것은 도미누스 폴레비트의 매장지 제 299 번에서 나온 납골함 제 81 번에 적힌 명각 제 21a 번이댜 텍스트는 그 납골함의 덮개에 깊이 새겨져 있으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MOrnNHCf lp0 CHAYTOC ZHNA A t o yt때 0 Jtpo onAUt 0 C Znv& 궤의 모서리에는 이와 비슷하게 다음과 같이 새긴 명각이 있다. AtO Yt W lc Znv& Jt[p]O Oi AU t 0 C

그러므로 이것은 광범하게 사용되던 디오게네스라는 헬라어 이름 을 가진 어떤 사람의 납골함이었으며, 그는 아마도 제나 Zena 라고 하는 사람의 아들이었다. 그는 또한 개종자, 죽 유대교 신앙으로 전 향한 사람(마 23:15 참고)이었다. 다른 두 개의 도미누스 플레비트 명 각들에도 개종자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하나는 아래에 인용될 명각 제 13 번이고 (325 항) 다른 하나는 매장지 제 432 번에서 나온 납골함 제 97 번에 적힌 명각 제 31 번이다 (BAGATTI AND MILIK 82 쪽, 그림 21, 6 ; 95 쪽, no. 31, tav . 32, fot. 97). 후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門더 .,l i1 cl:, ro Salome the pro selyt e 개 종자 살로메 개종자 〈디오게네스〉라는 이름을 가진 명각 제 21a 번으로 돌아가 보면, 여기에 제시된 사진에서 그 명각의 좀 아래 쪽 왼편에 비스듬 한 자세로 새겨진 십자 표 하나가 있는 것이 눈에 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납골함의 가장자리에 적힌 비슷한 명각 다음에도 이 와 비슷한 십자 표 하나가 그려져 있다. 325 도미누스 플레비트의 납골함 제 21 번에 있는 표의 사진과 그림 납골함 제 21 번 (BAGAITI AND MILIK 52 쪽)은 도미누스 플레비 트에 있는 매장지 제 79 번에서 발견된 14 개의 납골함들 중 하나이다 (위의 319 항을 보라). 그것은 꽃 모양의 장식들로,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다. 덮개의 중심에는 명각 (BAGA1TIAND MIUK 84- &5쪽, no. 13 b ; 86 쪽, 그림 22, 3, tav . 29, fot. 82) 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숯으로 쓰여졌고 다음과 같은 단 하나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N-.,2rz , Sapp hira 삽비라

이 납골함 내부에는 긴 측면의 가장자리 아래에 헬라어로 적힌 더 욱 긴 명각이 있다 (BAGATTIAND MILIK . 84 怒쪽, no. 13 a; 91 쪽, 그림 23, 4, tav . 35, fot. 112). IOY 昴 N 昭)C HAYTO TYPA 이 명각의 서두에 있는 1oo6a (유다)라는 이름은 영어로 Jud ah (마 1:2 등 참고) 또는 Jud as (마 13:55 등 참고)로 옮길 수 있는 1 oo6ac; (유다스)의 속격 일 수 있다. 약자 v [N] 은 VE0t c po c (네오테로스, 〈더 젊은, 보다 어린〉)를 나타낸다. 그 다음 단어는 분명히 Jtpo aiA u t o g (프 로셀뤼토스, 〈개종자〉, 마 23:15) 의 속격 형태인데, 단지 마지막 글자 시그마 s igm a 가 빠져 있다. 둘째 줄에 있는 단어는 어려운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만약 그것 이 1op ou (튀루)로 읽 힐 수가 있다면, 그것 은 tb po c (뒤로스, 두로Tyr e) 성읍의 속격이 되어 그 사람의 출신지 룰 가리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t u p a( 튀라)일 가능성이 더 크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tu p& c (튀라스)의 속격으로 보고, t u p&c 는 〈치즈 제조자〉를 뜻하는 1up o1 to t6 c; (뒤로포이오스)의 통속적인 형태 로 해석했다. 이럴 경우 텍스트는 이런 뜻이 된다. 1ou6a v(tw i:e p ou ) n p o 에 Mno[u] nup a (Bones) of Jud ah the You nge r, a pro selyte , a cheese maker 개종자, 치즈 제조자, 젊은 유다의 (유골) 이 납골함은 한쪽의 짧은 끝부분에 숯으로 그려진 기호들 때문에 특별한 관심을 끌고 있는데, 그 기호들이 적힌 단편들이 이 사진과

그림에 나타나 있다. 왼쪽에 있는 기호는 좀처럼 사진으로 잘 찍히 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면밀히 조사해 보면 그림으로 재생된 것 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그것은 여덟 개의 모서리가 있는 별 또는 어떤 종류의 축어일 것으로 보인다 . 만약 그것이 기독교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에게 친숙한 요타와 키의 결합으로서 예 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표일 것이며(위의 684-685 쪽 참고), 이에 더 하여 십자 표를 하나 더 첨가하기 위해 가로 획을 더 긋거나, 좀더 간단하게 말해서 두 개의 십자 표, 즉 X 와 +를 결합시킨 모양일 것이댜 오른편에 있는 기호는 거의 틀림없이 헬라어 글자 키와 로가 함께 쓰여 하나의 축어를 이루고 있다. 이 축어가 콘스탄티누스 시대보다 훨씬 전부터 사용된 사실에 대한 증명은 위에서 이미 제시되었고, 그것을 기독교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여러 가지의 가능성도 이 미 살펴보았다(的 7 쪽 이하).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축어라고 부른 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토록 자주 나타나는 이유가 그리스도라는 이 름의 약자, 즉 Xp( l.m 6c) (크리스토스)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다분히 그리스도인, 죽 Xp (m nav6c) (크리스티아노스)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세속적인 의미로 보는 다른 이해들도 역 시 가능하고, 그에 대한 몇 가지의 예들이 위에서 주어지기도 하였 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납골함에 관해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의 미가 아마도 가장 그럴 듯한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붙여진 이 칭호는 44 년 경에 안디옥에서 (행 11:26), 그리고 64 년 경에 로마에서 (Ta citu s, Annals XV 44, Chris- tian os)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제 1 세기 중엽에는 아마도 여러 곳에서 잘 알려졌을 것이다. 안디옥과 로마에서는 이 칭호가 주로 이교로부 터 온 사람들에 게 적 용되 었고 (Ado lf Harnack, The Mi ss io n and Expa nsion of Christ ia n it y in the Fir s t Three Centu ries , 2d ed. 1008,

II 126 쪽 참고), 이 납골함의 내부에 있는 명각에 의하면 여기서의 유 다는 개종자였다 . 다시 말해서 그는 유대교와 (만약 그 축어가 참으로 이것을 가리킨다면) 기독교로 입교하기 전에는 이교도였다. 326 도미누스 풀레비트의 납골함 제 18 번에 「처 힌표들의 사진과 그림 납골함 제 18 번 (BAGATTI AND MILIK 52 쪽)도 역시 도미누스 플레비트에 있는 매장지 제 79 번에서 발견되었다. 그 납골함 덮개의 한 모서리 가까운 곳에 새겨진 이 표는 이 사진과 그림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표들을 결합한 것이다 . 오른쪽으로 갈라진 금은 무시하고 이것을 보면, 우리는 대충 세로로 된 등변(等邊)의 십자 표를 보게 된다. 이 십자 표의 오른쪽 팔로부터 한 획이 내려와서 두 개의 곡 선을 그려 대문자 베타처럼 보이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그 다음에 대각선의 획 하나가 그 전체를 가로지르며 깊이 새겨져 있다. 이 모 든 것을 다 합치면 요타, 키, 베타라는 글자로 형성된 하나의 축어로 보일 수도 있다. 위에서 살펴본 이와 비슷한 사례들 (686-694 쪽)에 비춰 볼 때, 이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도움(이시다)〉와 같은 의미를 가진 1nooiic ;; Xpi o-co c;; Bo it 8na 룰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도움 Bonoela 〉의 개념에 대한 관련 언급은 히브리서 4:l6 에서, 그리고 유 스티노스 마르튀로스 (D ia log u e 30, 3) 가 한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저 우리는 그 분을 돕는 자와 구원자라고 부르나니 pon 0bv Yap EKELVOV Kat AU Cpll lCT JV K 야 o ii µev, 그의 이름의 권능은 마귀들도 두려워 하느니라.〉 도미누스 플레비트에서 나온 것으로서 지금까지 살펴본 사항들 (320-326 항)에 관하여,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기독교적 해석이 가

능한 다수의 기호들과 신약에서도 알려진 다수의 이름들이 매장지 오 . 제 65-80 번 그룹에서, 특히 매장지 제 79 번 (319 항 참고)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댜 매장지 제 79 번에는 +와 X 로 표시된 납골함 제 12 번과, 축 어로 된 요타, 키 chi , 베타 be ta를 가진 제 18 번, 시므온 바르 …… 라 는 이름을 가진 제 19 번, 그리고 축어로 된 키와 로와 함께 유다 J udah 와 삽비라 Sa pphir a 라는 이름을 가진 제 21 번 등이 있다. 그런가 하면 매장지 제 79 번의 바깥쪽에 있는 제 65-80 번에도 역시 샬람시온 Shalams i on 이라는 이름을 수반하는 십자 표를 가진 납골함 제 1 번, 마르다 M art ha 와 마리 아 M ary라는 이 름을 가진 제'2:7번, 살로메 Salo- me 라는 이름을 가진 제 29 번, 그리고 요나단J ona th an 이란 이름을 가 진 제 36 번 등이 있다. 이리하여 기독교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기호 들과 신약에서 자주 또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름들이 -따라서 이것들은 기독교인들이 선호하는 것이었을 것이다-있는 곳에서 는(적어도 이 특정한 지역은) 그 식구들 중의 더러가 기독교인이 된 유대인 가족들의 매장지일 가능성이 거의 확실해진다. 해르쿨라네움 327 헤르쿨라네움의 벽에 그려진 표 팔레스타인에서 발견된 표들에 관한 비교와 설명을 제공하기 위 하여 팔레스타인의 바깥에서 나온 유사한 표들에 대해서도 간략히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이탈리아의 헤르쿨라네움 마을은 베수비우스 Vesuv ius 화산의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으로 10 마일 떨어진 폼페 이 Pomp eii 시 와 마찬가지 로 79 년의 그 화산 폭발로 말미 암아 파괴되었다.

이 곳에 있는 소위 <이 백 주년 기 념 관 Bic e nte n a ry House 〉의 다락 방에서 , 여기에 제시된 사진에 보이는 벽의 표가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이것은 벽토 stu cco 판벽 위에 눌려 패인 것으로서 그 와 동일한 모양의 물체가 그 벽에 고착되었다가 그 후에 제거된 혼적 일 것이다. 그 패인 곳과 또한 판벽의 다른 곳에도 못자국들이 있다. 한 이론에 의하면 이 패인 곳의 모양을 라틴 십자의 모양으로 보 고(的 5 쪽 참고), 만약에 나무로 된 십자가가 그 벽의 이 지점에 못으 로 박혔다가 그 후에 제거되었고 나무로 된 덮개가 그 지점 위에 못 으로 박혔었다면, 그것 때문에 지금도 보이는 모양이 나타나게 되었 을 것으로 시사한다. 이럴 경우 십자가가 있는 다락방은 일종의 개 인적인 기독교 예배실이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십자가를 제거하고 그 지점에 덮개를 덮은 것은 기독교인들 스스로가 했거나 다른 사람 들이 했을 수도 있으며, 이런 일이 있었음직한 때는 64 년의 네로에 의한 박해와 같은 기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견해는 그 벽 위의 그 장소와 십자 모양의 표를 단순 히 어떤 실용적인 물건, 아마도 벽장 같은 것을 한때 부착했던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328 헤르쿨라네움의 스탠드 이 사진에 보이는 나무로 만든 가구는 헤르쿨라네움에 있는 〈이 백 주년 기념관〉의 다락방 내부의 십자 모양의 표를 가진 판벽 밑에 벽을 대하여 서 있었다. 발견되었을 당시 그것은 79 년의 화산 폭발 의 퇴적물로 완전히 덮여 있었다. 만약 위쪽의 벽에 있는 그 표가 십자가로 간주된다면, 그 아래 쪽에 있는 스탠드는 일종의 제단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스탠드는 단지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용된 것일 수도 있다.

바티칸 329 바티칸 발굴에서 나온 벽서들 로마의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 교회〉은 원래 콘스탄티누스 황 제에 의하여 지어진 것으로, 그 하부에 대한 발굴 작업이 1940 년에 실시되었고, 그 후에는 전통적으로 그 사도의 무덤으로 알려진 무덤 근처에서 발굴이 있었다. 발굴 작업에서 알게 된 바와 같이, 그리고 과르듯치 Guarducc i에 의하여 주어진 연대들로 보건대 (Tomb of St. Pete r , 79-91, 95 쪽 이하) 이른바 붉은 벽 Red Wall 이 약 146 년과 161 년 사이에 축조되었는데, 이것은 좁다란 길거리 겸 하수도와 인근에 있 는 제 1 및 제 2 세기의 무덤들이 있는 지대 사이의 경계를 확실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붉은 벽이 축조된 (160 년 경) 것과 동시에 그 벽 속으로 움푹 들어 가도록 이중의 벽감이 만들어졌는데, 그 중 낮은 벽감 곁에는 대리 석으로 된 두 개의 석주가 있었다. 이것은 하나의 작은 사당을 형성 한 것이 분명하며, 십중팔구 이것은 200 년 경에 로마의 가이우스 G ai us 가 언급한 베드로의 〈트로피 trop h y> 또는 묘지 기념비였다 (Eu sebiu s , Ch Hi st. II 25 ; _FL AP 382, 514 쪽). 250 년 경에 이 지대를 안정되게 하기 위하여 벽 G( 발굴자들이 그 벽을 이렇게 부름)가 붉은 벽과 직각을 이루는 버팀벽으로 축조되었 다. 315 년 경에 콘스탄티누스는 그 사당과 벽 G 를 대리석 기념비로 둘러쌌고, 그 후 322 년 경부터 그 전체 위에 그의 옹대하고도 새로 운 바실리카를 건축했다. 그런 다음 그 사당과 콘스탄티누스의 대리 석 기념비 위에는 일련의 겹쳐놓인 제단들, 죽 그레고리우스 대왕 (590-604) 과 칼리 스투스 II 세 Ca llistu s II(ll l9-1124), 그리 고 클레 멘 트 VIII 세 (1592-1605) 의 제단이 세워졌으며, 클레멘트 VIII 세의 제단

은 그 교회 안에 있는 현재의 제단이다 . 벽 G 는 벽서 투성이로 되어 있으며 , 그 두께가 매우 두꺼워 어떤 곳에서는 두 개 또는 세 개의 층들이 겹쳐 있다 . 거의 모든 벽서들 이 라틴어로 되어 있으며, 이것들은 이 성스러운 장소를 방문한 많 은 순례자들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 그 대부분은 이름과 간단한 기도들――살아 있거나 죽은 친척들 또는 친구들의 영적 안 녕울 위한一―이다. 방금 개괄한 역사에 비춰 볼 때 이 벽서들의 연대는 대체로 290 년 으로부터 315 년 사이이며 (Guarducc i, I graffiti, II 443 쪽), 그것들 중 의 다수는 312 년에 콘스탄티누스가 〈콘스탄티누스〉 축어를 만든 것 보다 먼저 쓰여진 것이 확실하댜 이와 관련하여 위에서 언급한 바 와 같이 (692-693 쪽), 벽 G 의 벽서들 중에는 키_로 축어( 요 )의 예들 이 허다하며 십자국죽어(유 ) 의 예도 하나 있고, 또한 X (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그리스도 이름의 다른 약자들도 있다 (Guarducci , 같은 책, II, 461 쪽 이 하, 471 쪽 이 하에 있는 색 인들을 보라). 여기에 제시된 겹쳐지는 사진들은 벽 G 의 상단 왼쪽 구석의 일부 를 보여 주고 있다 (sec. 1 및 2, 그리고 tav . 1 및 2 in Guarducci, 같은 책, ill). 첫째 사진의 꼭대기로부터 약 3 분의 1 쯤 내려와서 왼쪽 가 장자리로부터 가로질러 둘째 사진의 중간을 넘어가는 큼직한 벽서 가 보이는데, 이것의 주된 구성 요소들을 더듬어 가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Guarducci , 같은 책, II, 6 쪽). 이것은 한 여인의 이름인 레오니아 Leo ni a 이고, 그 앞뒤로 그리스 도의 키 - 로 축어가 연결되어 있다. 키의 한 획은 그 사람 이름의 첫 글자인 L 과 연결되어 있고, 이것은 그리스도와 그 사람 사이에 연결 이 있기를 바라는 소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레오 니아가 고인이 된 여인이라는 사실은 키_로 맞은편에 기록된 소원 (여기 사진 복사에는 나타나 있지 않음), 죽 i(n ) viv i s tu v(i) v( e) a(d)

pe t( r um), 〈그대는 베드로 가까이에 살고 있는 자들과 함께 살지어 다〉라는 소원에서 나타나고 있다 . 기본적인 벽서와 함께 그 안에 짜여진 모든 다른 기호들에서 그치 지 않고, 그 이름의 끝에는 N 과 A 사이에 있는 I 의 꼭대기 위로 가 느다란 선이 지나가고, I 의 꼭대기 위로 가느다란 선은 여기서 T- 십 자를 그려 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리하여 레오니아의 이름은 그 리스도의 기호와 십자가의 기호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 N 과 A 를 연 결시킨 것은 또한 승리(헬라어 v t K Q[니카] , 라틴어 n i ca[ 니카])의 부르 짖음인 〈이기다, 정복하다〉의 단축어를 제공하기도 한다. 동일한 의미를 지닌 후기의 벽서 한 개도 그 위, 레오니아의 이름 앞에 있는 키-로의 오른쪽에 기록되어 있다. 이 명각은 두 줄로 되 어 있으며 HOC VIN(CE), 죽 〈이것을 이기다〉라고 적혀 있고, 키­ 로 다음에 위 치 해 있으므로 밀 비 안 다리 Milvia n b ridg e 에 서 의 전투 가 있기 전날 밤에 콘스탄티누스가 본 이상을 가리키는 말임에 틀림 없다(위의 693 쪽 참고). 따라서 이 위쪽 벽서는 그 연대 (312) 후에 있 은 벽 G 위의 벽서들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Guarducc i, Tomb of St. Pete r , 112-118 쪽, 123-125 ; 그리 고 I graffiti, II, no. 2, 6-75 쪽). 십자-축어(구) 를 가진 벽서는 벽 G 의 상부 중심 근처에서 볼 수 있다 (Guarducci , I gr af fiti, m, sec. 3 및 4, 그리고 tav . 3 및 4 에서 꼭 대기로부터 약 3 분의 l 되는 곳. 329 항에서는 나타나지 않음). 기본적인 형 태에 있어서 명각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NIKAS! VIBAS IN 융 여기 있는 이름은 니카시우스 N ik as i us 로서, 제 1 세기 로마의 기 독교 사회에 흔히 있던 이름이며, 벽서는 고인이 된 이 사람이 〈그 리스도 안에서 살기를〉 바라는 희망과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 데 이 이름에 있는 K 는 정교하게 그려져서 십자-축어룰 이루고, 그 다음에는 그 아랫부분을 A 가 되게 함으로써 아마도 알파(및 오메가) 룰 시사한 것 같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추가적인 기호들이 마지막

키-로 안에 짜여져 있다 (Guarducc i, 같은 책, II, no. 8, 89-95 쪽). 지하 묘지에 있는 십자 표 330 토를로니아 별장에 있는 유대인 지하 묘지의 채색 명각 로마에 있는 유대인 지하 묘지 (288-295 항 참고)에서는 십자 모양 의 표들이 발견되는 예가 매우 드물지만, 이 사진은 하나의 실례를 보여 주고 있다 토를로니아 별장 V ill a Torlo ni a 에 있는 지하 묘지에 서 붉은색으로 채석된 이 명각은, 구도(위의 293 항)의 복도를 표시하 는 글자 C-G 오른쪽에 24 번으로 매겨진 지점의 시체실 안, 벽토로 된 묘실 폐쇄 장치의 한 부서진 조각에서 발견되었다. 보존된 부분 의 텍스트는 다움과 같다. ITAfXAPO IC nGYXdp toc KAAWC EN8A 삭: K 어血 c tv8 d6c 왼쪽이나 오른쪽 또는 양쪽에 원래의 명각 중에서 얼마나 더 없어 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른 많은 예들(위의 289 항 둥)과 바교할 때, Ket tat (케이타이)라는 단어를 여기에 사용하였거나 또는 있는 것으 로 이해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하여 이 텍스트는 〈팡카리오스 Panch ari os 는 명예롭게 여기에 누워 있다〉로 번역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예들을 보면, 0tO oac (비오사스)라는 단어가 K 야 6c (칼로스)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있다• 이리하여 압피아 길 V i a Ap pia 도상에 있는 란다니니 포도원의 유대인 지하 묘지 내부의 대리석 장식판에 새겨 진 명 각 (Fre y I, 81-82 쪽, no. 118 ; also nos. 9, 23, 82, 117, 119, 336,

353, 411, 509, 537 참고)은 이 렇 게 시 작한다. ZWTIKOC APXWN EN8A /ill KEIME KAAWC BEIWCAC 如tt Kbc &px uv tv8 d8c KCt µ( at ) K 아如 c 0(c)tW oac (I,) Zoti ko s, an archon, lie here, hav ing live d well (or, h onorably) . (나,) 집정관 조티코스는 생애를 잘(또는 명예롭게) 마치고 여기에 누 워 있노라 이러한 유추에 의하여, 우리는 위에서 본 명각에 두 단어를 보충 함으로써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plO oac K 아 6c tv8 d8c KCt tal. 따라서 이 본문은 〈팡카리오스는 생애를 명예롭게 마치고 여기에 누워 있다〉로 번역할 수 있다. 본문 아래에는 세 개의 그림 이 또한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다. 왼쪽에 있는 것은 규명하기 어려 우나 과실인 것 같은 그 무엇을 제시하고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그 것은 아마도 에트록 e th ro g일 것이다 (289 항 참고). 중간에 있는 것은 분명히 다른 곳에서도 매우 자주 발견되는 것과 같은 (289 항 참고) 담 쟁이덩굴의 잎인 것 같다. 오른쪽에 있는 것은 십자의 日 R} 획이 오 른쪽으로 꺾 인 스와스티카 swasti ka 또는 크룩스 감마타 crux ga m- ma ta이 다(的 5 쪽 참고). 그런데 이 십자의 바깥 획들은 주된 가지들보다 더 여리게 칠해진 듯하고, 바닥에 있는 것은 아예 확실하게 드러나지도 않는다. 그러므 로 바깥 획들은 후기에 첨가한 것이며, 원래는 여기에 동변 십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이것이 묘실 명각에 수 반되기에 적절한 상징으로서, 구원의 의미와 함께 사용된 히브리어

타우의 한 예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 또한 그 모양을 스 와스티카로 바꾼 것은 그 원래의 십자 표가 기독교의 상징으로 너무 나 널리 인식된 나머지, 더 이상 유대인의 공동 묘지에는 적절하지 않게 된 이후에 있었던 일인가 하는 물음도 나올 수가 있을 것이다. 3.31 루치나 지하 묘지에 있는 r 루피나 명각」 로마에 있는 기독교 지하 묘지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네 곳은 루 치나, 칼리스투스, 도미틸라 Do mitill a, 그리고 프리쉴라Pri sc ill a( 브리 스킬라)라는 이름들을 가진 지하 묘지들인데, 아마도 이들 모두는 적 어도 제 2 세기 중엽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FLAP 456 쪽 이하). 루치나 지하 묘지에서는 이 사진에 나타난 명각이 그것이 원래 놓여 있던 자리인 한 시체실의 폐쇄 장치 위에서 그대로 발견되었다. 그것은 여성 이름인 POYI NA (루피나 R ufin a) 라는 고인의 이름 (Pre i sig ke, Namenbuch, col. 355) 과 EIPHNH (에이레네, 평화)라는 단어 하나를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단순한 비명이다. 그 아래에는 하나의 등변 십자 또는 헬라 십자가 있다(위의 685 쪽). 연대는 제 2 세기의 중엽 또 는 제 2 세기로부터 제 3 세기로 바뀔 무렵이다. 332 칼리스투스 지하 묘지에 있는 「이레네 명각」 이 명각은 칼리스투스 지하 묘지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에서 발견 되었는데, 그 연대는 제 2 세기 중엽일 것이다 (W ilpert). 비명은 IRENE 라는 고인의 이름만으로 되어 있지만, 세번째 글자와 네번째 글자 사이에, 그리고 그 행보다 좀 위로 올라간 위치에, 라틴어 글자 T 가 삽입되어 있다. 이것은 헬라어 타우에 해당하는 글자로 십자 모 양을 이루고 있다 . 이것과 관련하여 기억할 사항은(위의 681-684 쪽),

테르툴리아누스 (A ga i ns t Marcio n m 22) 가 예루살렘 사람들의 이마 에 찍힌 〈타우 표〉(겔 9:4) 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 였다는 사실이다. 〈이제 헬라어 글자 타우와 우리 자신의 글자 T 는 바로 십자가의 모양이다.〉 333 도미틸라 지하 묘지에 있는 덫 모양의 십자 이 깨어진 대리석 장식판은 도미틸라 지하 묘지에서 발견됐다. 여 기서 십자는 덫의 모양으로 되어 있으면서 양쪽에 물고기 한 마리씩 을 가지고 있다. 이 경우에 있어서 아마도 물고기들은 십자가에 의 하여 잡혀온 기독교인들일 것이다. 십자의 윗부분에 있는 동그라미 는 태양 원반일 것이다. 오른쪽에는 또한 십자로 결합된 알파와 오 메가가 보인다. 334 프리쉴라 지하 묘지에 있는 채색된 기호 이 기호는 붉은 색으로 채색된 것으로, 프리쉴라 지하 묘지에 있 는 시체실에 그대로 부착된 채로 발견된 타일 위에 그려져 있다. 연 대는 아마도 제 2 세기의 중엽일 것이다 (W ilpert). 오른쪽에 있는 표들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왼쪽에 있는 표들은 사실상 헬라어로 예수 이름의 처음 두 글자인 요타와 에타로 구성되어 있 댜 이것들은 앞에서 이미 언급된 축어에서 본 것(위의 688-691 쪽)과 약간 비슷한 방법으로 결합되어 있지만, 이 경우에는 글자들을 하나 씩 차례로 쓴 다음에 그 두 글자를 관통하는 가로 획을 길게 그어 글자들 밖에까지 나오게 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결과 마치 세 개 의 헬라 십자들이 나란히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箕 프리쉴라 지하 묘지에 있는 「트리소무스 명각」 프리쉴라의 지하 묘지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은 소위 아칠리아인 들의 휘포게움 H ypog eum of the Ac ili ans 이다. 세 구의 시체를 위한 무덤 (triso mus, a gra ve for three bod ies ) 이 한 통로의 바닥에 파여 있었으며, 따라서 그것은 이 지역이 묘지로 활용되던 두번째 시기를 나타내는 것임에 틀림없다. 예시된 사진에서 보이는 명각된 대리석 장식판은 이 무덤 위에 원래 놓여 있던 위치에서 그대로 발견되었다. 연대는 아마도 여전히 제 2 또는 제 3 세기일 것이나 (de Rossi) , 제 4 세기 까지 내려오지는 않는다. 아래에 제시된 이 헬라어 본문의 모사에서 단어들 사이에 공간들 을 둔 것은, 첫번째 경우(처음 두 단어 다음에)를 제의한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 공간들을 표시하는 하나의 작은 관습적인 기호를 사용한 것과 같도록 하기 위함이다. 접속사 카이 Ka i가 나타나는 두 경우에 서는 그것이 캅파 kapp a 위에 한 획을 그은 약자로 되어 있다. 뉘 nu 와 피 pi, 그리고 뉘 nu 와 타우ta u 의 합자(合字)가 첫째 줄에서 눈에 띄고, 에타와 뉘의 합자가 둘째 출에서 (세 번) 눈에 띈다. 명각은 두 개의 기호로 끝나는데, 그 중에서 적어도 첫번째 것, 즉 키-로 c hi­ rho 축어는 본문의 일부로 읽혀지도록 되어 있다. OIIATHP TWNITANTWN OYC EITOI I-ICE C K Il.APF AABHC EIPHNHN ZOHN K M 사 )KEMON COM08A EN~ b JtQt龍 C@ V 퍄 w (J) V 05c tJtOtno ec Kat JtapE M~nc; E tpft때 v, Z6nv, Kat Map Ke :U Ov aot 66~a t,v Xpt aC(i)

문법상의 오류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 명각은 매우 분명하게 다음 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 0 Fath e r of all, who hast create d and taken (to thy se lf) Eir en e, Zoe, and Marcellus, to the e be glo ry in Ch rist. 만인의 아버지, 에이레네와 조에와 마르켈로스를 창조하셨고 취하신 분이시여, 당신께 그리스도 안의 영광이 있을지어다. 키―로 축어 다음에 있는 기호는 덫이다 . 히브리서 6:l9 에 의하면 소망은 영혼의 낯이고, 따라서 맞은 고인이 영원한 평화의 항구에 안전히 도착해 있다는 확신에 대한 상징이 되었다. 배와 관련된 이 와 비슷하게 생긴 다른 물체들(위의 681-684 쪽을 보라)과 마찬가지 로, 맞도 또한 십자의 한 형태로 인식되었다. 이에 비춰 보면 그 덫 은 십자가가 기독교인의 소망의 기초임을 말해 주고 있다. 만약 여기에 제시된 명각에서 맞이 본문의 일부로 읽혀야 한다면, 그 마지막 줄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께 영광이 있 올지어댜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소망이 (있사옵니다).〉 그러나 만약 마지막 줄이 우리가 위에서 번역한 것처럼 읽혀야 한다면 맞은 하나 의 분리된 기호, 죽 지하 묘지에 있는 다른 많은 비명에 수반된 표 로서, 십자가에 기초한 기독교인의 소망, 죽 고인이 영원한 평화의 포구에 안전하게 도착하리라는 소망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필사본들에 있는 십자 표 336 따피 루스 보드머 ||」 (Poo) 의 한 페 이 지 r 파피루스 보드머 IIPapy rus Bodmer II) 」 (p 66 ) 는 페이지의 숫자가 매겨진 사본 형태의 한 필사본인데, 여기서는 요한복음의 대부분인 1-14 장과 그 복음의 나머지 부분인 21 장까지의 단편들이 담겨 있다 . 이것은 적어도 200 년 경에는 기록되었다. 이 필사본에서 cri: au p 6c ;; (스 타우로스, 〈십자가〉)라는 명사와 cri: au p 6w (스타우로오, 〈십자가에 못 박 다〉)라는 동사가 나타나는 곳들의 대부분에는 타우와 로가 함께 쓰 여 우라는 기호로 만들어진 하나의 단어 약자가 나타난다(위의 691 - 693 쪽 참고). 여기에 제시된 사진은 이 사본 137 (PAZ) 페이지의 현존하는 단편 들을 보여 주고 있다. 셋째 줄의 시작 부분에는 요한복음 19 : 16 의 빌 라도가 예수를 〈못 박히게〉 넘겨 주었다고 진술된 부분이 담겨 있 다여기서 cri: au p w8 처 (스타우로테이)라는 동사는 0 우 0n 라는 약자로 되 어 있다. 첫 글자 시그마는 보존 상태가 나쁘지만, 나머지 글자들은 그 위에 그어진 약자를 표시하는 윗줄과 함께 분명하게 읽을 수가 있다. 제 6 행은 요한복음 19:17 의 골고다에 대한 언급을 담고 있으며, 계속해서 요한복음 19:18 의 시작하는 말씀인 〈저희가 ……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가 나온다. 여기서 ecri: au p wc rav (에스타우로산)이 라는 동사는 %f av 이라는 약자로 되어 있으며, 첫 글자 엡실론 e p s il on 은 여기서 보는 바대로 다른 글자들의 높이보다 위로 치켜져 있다. 제 10 행은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라고 하는 요한복음 19:19 의 한 부분을 담고 있다. 여기서는 파피루스에 생긴 손상 때문에 판독하기가 더욱 어렵기는 하지만, cri: au p ou (스타우루) 란 명사는 0 구 OU 라는 약자로 되어 있다.

337 「파피루스 보드머 XIV 」 (p 75) 의 한 페이지 r 파피루스 보드머 XIV-XVPap yru s Bodmer XIV-XV) 」 (P 찍는 누 가복음의 대부분인 3 - 24 장 (r 파피루스 보드머 XIV 」)과 요한복음의 대 부분인 1 - 15 장 (r 파피루스 보드머 XV 」)을 담고 있는 하나의 사본이다. 이 필사본의 작성 연대는 아마도 제 3 세기의 초엽, 어쩌면 175-225 년 의 범위 안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실질적으로 戶짜위의 336 항)과 같은 연대의 것이며, 아마도 과히 오래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필사본에서도 〈 십자가 〉 와 〈십자가에 못 박다〉라는 헬라어 단 어들이 약자로 되어 있다. 어떤 곳에서는-안 그런 곳들도 있지만 -p 66 에서와 마찬가지로 약자로서 우 기호를 쓰고 있다. 요한복음 의 경우 『파피루스 보드머 XV 」는 제 15 장에서 중단되어 있어서, 〈십 자가〉 및 〈 십자가에 못 박다 〉 라는 단어들의 용례가 모두 나타나는 제 19 장은 검사를 하기 위해 입수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약자를 쓴 실례들은 모두 누가복음, 즉 「파피루스 보드머 XIV 」에 있다. 사진에 나타난 이 파피루스의 페이지는 누가복음 9 : 23-33 을 담고 있다 . 제 8 행은 누가복음 9:23 의 일부인데, 여기서 예수께서는 누구든 지 그를 따르려거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라고 말씀 하신댜여기서 mau p bv( 스타우론)이란 명사는 0 우 ov 이라는 약자로 되어 있댜 翁 『진리의 복음』 U 융 사본」)의 한 페이지 『진리 의 복음 Gosp e l of Tru t h 』 (FHR J 336 이 하 참고)은 나그 함마 디 Na g Harnma di에 서 나온 콥트어 영 지 주의 필사본들 Cop tic Gnas- tic manuscri pts 가운데 포함된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사본 I 에 있는 두번째 작품이며, 아마도 제 4 세기 중엽에 모사된 것 같다.

이 작품에는 표제가 없지만, 〈진리의 복음은 기쁨이요 ……〉라는 말 로 시작하고, 따라서 그러한 표제의 책으로 인식되었다. 180 년 경에 기록을 남긴 이레내우스(Aga i ns t Heresie s ill11 , 9) 가 말하기를, 이것 은 근래에 발렌티우스파 영지주의자들에 의하여 작성되었다고 한다. 이 사본의 페이지들은 상단에 조심스럽게 번호가 매겨져 있으며, 이절판(二折判) X 의 왼쪽 면 (verso) 인 이 페이지에는 캅파 kapp a 가 있는데, 이것은 그 면을 20 페이지로 매기는 것이다. 제 27 행에서 본문 은 분명히 골로새서 2:14 에 근거한 진술을 하고 있는데, 그 취지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는 또한 아버지로부터 온 성 향(性向, 8 t dTG YJl G) 의 행위를 〈십자가에〉 붙들어 매었다는 것이다.여 기 사진의 그 줄(제업행)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십자가 〉 란 단 어가 C 우 0C 라는 약자로 되어 있다. 앙크-십자 앞에서 본 약자들 가운데 (336-338 항) 타우와 로의 합자는(적어도 그것이 혼자 서 있을 때는) 우리가 십자국축어라고 부른 하나의 기호 를 형성한다(위의 691-693 쪽 보라). 그것 자체로서 하나의 기호인 이 것은 결정적으로 애굽의 앙크 기호를 생각나게 하는데, 이 앙크 기 호는 십자의 한 형태가 되었고 크룩스 안사타, 즉 손잡이가 달린 십 자로 알려져 있다(위의 68.5쪽을 보라). 이와 같은 유사성 때문에, 그 리고 타우-로 축어가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애굽에서 모사된 것이 확실한 파피루스 필사본들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형태 의 축어가 애굽에서, 그리고 앙크 기호의 영향으로 인해 시작되었으 리라는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이 십자_축어가 『융 사본 Jun g Codex 』 에 포함된 발렌티 누스파 영

지주의의 『진리의 복음』 모사본에서 발견되므로, 이 기호의 발전을 구체적으로 발렌티누스파 영지주의자들의 덕분으로 봐야 하는가 하 는 질문이 또한 제 기 될 수 있다. 하지 만 이 기 호가 요한복음(p66)과 누가복음(p 75) 의 보드머 파피루스들 Bodmer p a pyri에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십자-축어의 기원을 하나의 특정한 지점으로까지 추적해 내 려가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여튼 우리는 이제 애굽으로 방향을 돌려서, 거기서 앙크의 예 (339-340 항)와 십자-축어의 예들 (341 항), 그리고 크룩스 안사타의 예들을 볼 터인데, 후자는 그것의 발생지인 애굽에서 우리가 앙크-십자라고 부를 것이다 (342-344 항). 339 앙크 기호를 형상화한 점판암 접시 앙크는 애굽의 미술과 기록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기호 의 이름이다. 그 형태를 볼 때 그것은 우선 하나의 매듭이었던 것으 로 보이고, 그 다음엔 아마도 매듭 모양의 호부(護符)였던 것으로 보 인다. 이것이 상형 문자로 된 기록에 사용될 때에는 우라는 기호로 나타나서 〈생명〉을 의미한다. 사진에 나타난 점판암(結板岩) 접시는 초기 왕조 기간의 것으로 서, 두 개의 상형 문자 기호돌을 형상화하여 그것들을 하나의 축어 가 되도록 결합시키고 있다. 접시의 돋워진 후단(사진의 오른쪽 끝 _역주)은 양쪽 측면으로 돌아 팔 모양으로 계속되어서 손으로 끝 난다. 이것은 쿠 ku 또는 카 ka 를 나타내는 상형 문자인데, 아마도 사 람의 특성에 대한 형상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때때로 〈정신〉으로 번 역된다. 이것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여기서 이 정도로 끝내자. 다른 상형 문자는 앙크이다. 그 접시의 손잡이와 나머지 측면, 그 리고 그 내부의 원형 부분이 솜씨 좋게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매듭 울 지은 테이프처럼 보이고, 따라서 그 기호가 매듭에서, 어쩌면 샌

들 끈이나 머리띠에 있는 매듭에서 유래되었다는 이론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340 고대 애굽의 앙크 기호 〈생명〉의 기호로서의 앙크는 모든 시대에 걸쳐서 고대 애굽의 기 념비들 위에 나타난다. 여기에 보이는 것은 상부 애굽의 데이르 엘_ 바리 Deir el-B ahri에 있는 핫셉수트 여 왕 Qu een Hats h eps ut (B.C. 15 세 기)의 저 유명한 단지 신전(段地神殿, terr aced t em p le) 의 석주(石柱) 위에 적힌 다른 문자들과 함께 새겨진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이것 이 가끔 신이나 왕의 손에 쥐어져 있다. 이 경우 앙크의 관습적인 형태는 아주 단순하게, 마치 타우 십자 꼭대기에 고리를 얹은 것으 로 묘사될 수 있다. 이러한 모양으로 이 십자는 기독교인들에 의하 여 기독교 십자의 형태로 채택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 그것의 의미가 〈생명〉이므로, 그렇게 채택된 것은 적절한 일이기 도 했다. 십자가와 생명과의 연관성은 신약의 여러 곳에서 함축되어 있는데, 이냐티우스 I gn a ti us (To the Ep h esia n s XVIII 1) 에 의하여 신 약 언어와 사상을 다방면으로 반향(反 響 )하고 있는 한 문단에서 다 음과 같이 표출되어 있다. 〈나의 영이 십자가에 t00 6t au p oU( 고전 1:18 참고) 바쳐 졌나니 Jt E pt罰 µa( 고전 4:13 참고), 이 는 믿지 않는 자들 에게는t O tc 畑t moUo t V( 벨전 2:7 참고) 거치른 돌血 dv8 야 ov( 고전 1:23 ; 갈 5:11 참고)이지만, 우리에게는 구원과 영생 ~(J)TJ a tcil v t o<;( 요 6:54 등 참고)이로다.〉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세라페움이 테오필루스 총대주교p a tri arch Theop hilus (A. D. 391) 에 의하여 파괴되었을 때, 소크라테스 (Ch . Hi st. IV 17) 와 소조멘 (Ch Hi st. VII 15) 이 십자들의 모양을 가진 상형 문 자의 글자들이 어떻게 발견되었는지를 말하면서 지칭한 것은 의심

할 여지없이 바로 이 기호이다. 그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교의 회 심자들은 그 글자들이 〈장차 올 생명 ~wi Jv snE p xoµe 때 V 〉을 의미한다 고 설명하였다 (FHR J §85). 앙크-기호가 기독교적 의미로 적응될 수 있는 가능성이 이보다 훨씬 전에 이미 보였고 작용했었다는 사실도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 댜 바로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740 쪽 이하), 타우_로 약자와 십자_ 축어는 필시 앙크를 반영하고 있으며, 이것들은 애굽에서 적어도 제 3 세기까지 사용되었는데, 이에 대한 중거는 위에 인용한 필사본들 (336-338 항)에서뿐만 아니라 다음에서 보게 될 명각 (341 항)에서도 볼 수 있댜 앙크-십자 자체는 일반적으로 그 연대가 적어도 제 4 세기까 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생각되고 (343 항), 경우에 따라서는 그보다 더 초기로 올라갈 수도 있다고 추측되는 기념비들 위에 나타난다. 341 갑바리에서 나온 명각 갑바리 Gabb ari는 마레오티스 호수 Lake Mareo ti s 와 서항(西港) 사 이에 있는 좁다란 땅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의 교의이다. 갑바리의 북서쪽 해변에서 1876 년에 하나의 휘포게움 h ypog eurn 이 발견되었는 데, 이것은 제 4 세기까지 거슬러오르는 것으로 보였으며 기독교 명각 하나를 포함하고 있었다.그 근처에, 그것도 지면에 하나의 명각된 대 리석 명판이 있었는데, 그 크기는 19X21 센티미터로, 지금은 알렉산 드리 아의 그레코-로만 박물관에 있으며 (소장품 no. 11(J 76 ), 여 기 사 진에 나타나 있다. 서체는 고르디아누스 III 세 (Gor di an III, AD. 238- 244) 황제 시대 명각들의 서체와 비슷한 것으로 판단된다. 헬라어 본 문은 다음과 같다.

KYPIOCMNHC8I THCKOil vIHC EOC 8EOl10THC KAIANA 血 YCEWC NIAAMMWNOC 마지막 줄(제 5 행)에서 첫 두 굴자 또는 세 글자는 판독하기에 약 간의 어려움이 있어서, 어떤 이들은 NM 대신에 MA 또는 MA 로 읽 고자 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제시된 독법이 옳은 것 같다. 이 독법은 다른 곳에서도 알려진 하나의 이름 N t Mµµ (i) v 을 보여 주고 있는데 (Preis igk e, Namenbuch, col. 235), 이것은 글자들을 다르게 결합할 때 는 경우가 달라진다. 더욱이 이 지점에서 단 한 개의 단어로 단 하 나의 이름을 구성하는 것은 제 3 행에 있는 동일한 것과 완전한 균형 을 이룬다. 그러므로 헬라어 본문은 다음과 같이 고쳐 쓰고 또 번역 할 수 있을 것이다. KUp t0C µWlo0i Lord, remember 주여, 기억하소서! 더~ KOt llilOE O~ the rep os e 테오도타의 8eo66 떄 C of Theodota 휴식과 Kal civa nauoEw<; and the rest 닐람몬의 Nt.M µµ xvo c; of Ni lar nmon. 안식을. 이 본문의 아래에 그 명각의 여섯째 줄을 구성하는 것은 양쪽에 알파와 오메가를 가진 십자-축어이다(위의 691-693 쪽 참고).

342 테네에서 나온 명각 테 네 Tehneh 는 나일 강의 동쪽 아스유트 As yut의 아래 쪽으로 약 95 마일 떨어진, 미니에 Mini eh 의 맞은 편에 있는 옛터이다. 제벨 엘­ 테이르J ebel el-Te ir라고 불리는 산의 기슭에 로마 시대의 사시(死 市)가 있고, 이것의 북쪽에는 기독교 사시가 있으며, 여기서 헬라어 로 적힌 짧은 명각들을 가진 장례 석비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것 들 중의 하나 (Le fe bvre, no. 146 ; XXV 쪽 참고)는 순교자들의 시 대 Era of the M artyr s 의 제 239 년으로 연대가 매겨져 있으며 (FHBC §217 참 고), 이것은 522/523 에 해당한다. 이것은 그 공동 묘지의 가능한 연 대를 제 5 세기와 제 6 세기로 시사한다. 다수의 명각들에는 작고 분명 하게 새겨진 앙크-기호들이 본문에 첨가되어 있다. 이것들은 아마도 제 5 세기로부터 오는 것으로 보인다 (Cramer 48 쪽). 여기에 예시된 명 각 (Le fe bvre, no. 138) 은 이 공동 묘지에서 나온 것이며, 지금은 알렉 산드리아에 있는 그레코-로만 박물관에 있다(소장품 no. 27867). 크 기가 27Xl8.5 센티미터인 이 석회석 조각은 하나의 단편에 불과하다. 이것은 붉은색의 흔적을 띠고 있다. ACETE HKAI 十 AMWNIA HC L'IA ENKW N 硏 제 3 행에서 시작하여 제 4 행에서 끝나는 한 단어는 아마도 Aµ(i) v i.> . [재 ]C (아모닐[레]스)라는 형 태로 된 아모닐라 &no nill a 라는 이름일 것

이다 (Pr ei s igke, Namenbuch, col. 29 참고). 이것 다음에는 〈해 ye ar> 또는 〈해들y ears 〉을 나타내는 각진 기호가 따르고, 그 다음에는 ll( I= lO+A=l) 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그리고 제 5 행에서 우리는 약자 로 된 tV KU [p遠] (엔 퀴[리오], 〈주 안에서〉)라는 말을 보고, 제 6 행에 서는 역시 약자로 된 1[nao]u (예수, 〈예수의〉)라는 말을 볼 수 있다. 이에 더하여 제 2 행의 끝과 제 6 행의 약자로 된 예수의 이름 앞에 앙 크 기호가 있는데, 이것은 이 문맥에서 앙크-십자로 인지될 수 있을 것이다. 명각이 보다 완전하게 보존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 기호가 단순히 행의 말이 끝남으로 빈 자리가 생긴 곳에 삽입된 것인지, 아 니면 그것이 본문 자체의 일부로 읽힐 수 있는 것인지는 확실히 말 할 수가 없다. 343 아르만트 근처에서 나온 명각 고대의 헤르몬티에스 Hermon ti es 죽 남부의 온 (On) ――북부의 온 On 죽 헬리오폴리스 He li o poli s 와는 대조를 이루는 곳-인 아르만 트 Arman t는 룩소르 Luxor 위쪽으로 약 15 마일 떨어진, 나일 강의 서쪽 제방에 놓여 있다.아르만트의 서쪽에 있는 사막의 가장자리에 는 왕조 이전 시대로부터 존재해 온 많은 공동 묘지들이 있고, 그 곳에서의 발견물들 가운데는 많은 콥트어 묘석들 Co pti c tom bsto n es 이 있다. 이 사진에 나타난 헬라어 명각을 가진 비석 (55X20 센티미 터)은 아르만트에서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고, 그 장소의 인근에서 입수되어 1892 년에 더볼린에 있는 왕립 아일랜드 학술원에 보고되었 다. 본문은 새겨진 테두리의 안쪽에 명각으로 쓰여 있고, 몇 개의 기 호들이 첨가되어 있다. 명각의 연대는 제 4 세기와 제 6 세기의 사이인 것으로 판단된다. 퍽 시적인 성격을 띤 이 본문은 다음과 같이 바꿔 써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npi .v oe Mvnv @간 )µp c ttc i ti.vo c tv8 d8c KEt tat 기 0tn An poa& 函 a t nap ep x o µevot< ; o&µa µtv tv8 d8e KCt tat dctµ v nmou M 血 ap c i. nc @c tOo c e06EOt uv vcuodµcvov 8avdt O U abt h 8' oop av t nv dYi. u v n6Mv aµQ tno Acbct µta8 ov fxo uoa n6v1Jl v oop av i. o u<; m:테:a vou<; Befo re yo u say , 0 tom b, who or whose lies here, the ste l a pro clai ms to all who pa ss, the body lies here of the ever-remembered Makareia , as is the custo m of the piou s, hav ing tas te d death , she is herself busy in the heavenly cit y of the sa ints, hav ing heavenly crowns as a reward of her su fferings. 오 무덤이여, 누구 또는 누구의 몸이 여기 누워 있는지를 네가 말하 기 전에, 석 비 (石碑)는 지나가는 모든 이 에 게 선포한다 . 여기에 영원히 기억될 마카레이아 Makare i a .Q:J 몸이 누워 있음을 . 죽음을 맛본 경건한 자들이 늘 그렇게 하듯이, 그녀 자신도 성도들이 거하는 하늘 도성에서 분주히 살리, 그녀의 고난의 상급인 하늘 면류관을 쓰고서 . 명각에 첨가된 네 개의 기호들은 새겨진 테두리의 안쪽에 배치되 어 있고, 하나는 본문의 마지막 줄 왼쪽 끝에 있으며, 다른 셋은 그 줄 아래에 있다.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그것들은 그리스도-축어, 십 자-축어, 앙크-십자, 그리 고 다른 그리 스도구축어 (c hi -rho) 로 배열 되어 있다 .

344 카르게의 오아시스에 있는 무덤 예배실의 그림 마지막으로 우리는 아스유트 As yut의 남남서쪽으로 150 마일 떨어 진 오아시스인 카르게 Khar g eh 에서 발견된 한 폭의 그림을 보여 주 고자 한다. 이곳에는 연대가 페르시아 시대의 것인 하나의 커다란 애굽 신전과 로마 시대의 것인 비교적 작은 신전, 그리고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하나의 커다란 기독교 사시(死市)가 있다. 그 지역 에서 엘-바가와트 el-Ba g awa t로 알려진 이 사시는 수백 개의 벽돌 무덤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구조물들은 사실 무덤-예배실들이며, 각 방은 돔으로 덮여 있고, 의부로 두드러진 후진과 내부에 있는 그 림들, 그리고 때로는 전실도 가지고 있었다. 그림들의 연대는 아마도 제 4 세기 말과 제 5 세기 초보다 더 늦지 않 을 것이다 . 보존된 그림들 중에서 가장 섬세한 것들은 사시의 남쪽 끝에 있는 둔덕의 무덤_예배실에 있다. 이 무덤 - 예배실에 있는 돔의 그림이 사진에서 보인다. 그것은 동심원으로 된 네 개의 띠로 나눠 져 있고, 이 띠들은 빨간색 고리에 의하여 서로 분리되어 있다 . 세 개의 띠는 순전히 장식용이지만, 폭이 가장 넓은 띠는 성경의 사건 들과 다른 인물들을 보여 주고 있다. 그 인물들의 이름은 그에 수반 하는 빨간색 고리에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다 . 방에 들어가면서 맨 먼저 보이는 주제 ― ― 사진에서 맨 아래 쪽에 있음――는 사자 굴에 있는 다니엘이다. 그 오른쪽으로 나무가 있고, 그 다음에는 EIPHNH( 에이레네, 평화)라고 밝혀진 한 여성의 모습이 보인다. 그 여자는 왼손에 홀 (W) 또는 횃불을 잡고 있다. 그녀의 오 른손에는 마치 그가 고대 애굽의 기념비에 그려진 인물인 듯한, 하 나의 크고도 분명하게 그려진 앙크 , 죽 이 경우에 있어서는 앙크-십 자를 잡고 있다. 계속해서 그림들의 원을 돌아가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연달아 그려진 것을 본다. 이삭의 희생, 아담과 하와, 초기 애굽의 두 성도인 테클라 Theda 와 바울 Paul, 마리아에게 하신 잉태 고지, 방주 안에 있는 노아, 팔을 들고 기도하는 야곱, 그 다음에는 기도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인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손에 저울을 들고 다른 손에 풍요의 뿔(헬라 신화에서 어린 제우스에게 젖을 빨게 했다 는 염소 아말태아의 뿔, 풍요의 상징 ; 그 속에서 꽃과 과실과 곡식이 쏟 아져 나오는 모양을 나타내서 물건의 풍족함을 나타냄 - 역주)을 들고 있는 정의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인물. 기독교적 이해에 있어서 앙크-십자가 〈장차 올 생명〉을 의미한다 는 사실 (340 항 참고)은, 그것의 외형이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이러한 십자-기호의 모양도 역시 원시적인 표인 구속의 타우-표와 무관하 지 않음을 뜻한댜 유대적 배경에서 유래되고, 어쩌면 제 1 세기의 괄 레스타인에 있던 납골함들 위에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이미 사용한 바 있는 그 표는 보호와 종말론적 구원 및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냈 으며, 또한 예수의 죽음의 도구를 대표하는 것으로 인식됨으로써, 그 것은 그 죽음을 하나님의 도우심의 표현으로 나타내 보였다. 이러한 의미와 함께 타우 기호는, 그 혼적들이 최초기 교회로부터 이제까지 잔존하는 최초의 기념물들로 남아 있으므로, 십자 기호의 많은 형태 와 의미들의 원초적인 기초가 되었다.

鬪醫畵틀] 구약 [醫 廳醫霞| 창세기 8:l1 …………………… …… … ……… 241 9:13 .……………………………………· 1.9 14:14 …………·……………… .. 681, 687 14:18 ……… ………………………… .. 536 16:l 0 …………………………………… 16 17:26-V ……………… …………… .. 681 l8:l ……… …………………………… .. 57 21:5 ……·…… ……………… …… … . . 691 22:2 …………………………… .. 135, 535 22:2 이하 ……………'…………… .. 357 2.5: 8 …………·……………………… .. 604 33:18- 19 …………………………… .. 137 35:4 ………………… ………………… 135 35:19 ……………… ……………… …. . , 69 35:21 ·… …… ……………………… …. . 75 47:30 ……………………………… ..... 604 48:7 …………………………………… .. 69 48:22 ………………………………… .. 137 49:2.5 …… …………………………… .. 144 50:10-11 ………………………………, 24 5():2 6 ………… ………………… …… .. 137

출애굽기 12:3 …………………………………… •• 1 6 12:30 ………………… ……… ………·· 653 l3:9 ………………………… .. ……… · 665 13:16 ………………………………… .. 665 16:29 ………………………………… .. 311 17:12 ………………………………… .. 683 25:23-30 …………………………… •• 364 25:31-39 …………………………… .. 621 25:31-40 .…… …… … ………………. 364 Z7:3 …………………………………… 622 까 :20 ………………………………… .. 628 29:'Z l(- 28) ………………………… •• 700 30:1-10 ……………………………… · 364 30:'Z7 ………… …… ………………… .. 364 31:2-5 ………………………………·· 531 32:10-30 ……………… …………… .. 656 35:14 ·………… ………………… …… · 628 37:17-24 ………………… ………… ·· 621 38:3 ……………… ………·…………·· 622 레위기 8;12 …………… ……………………··· 669 l1:29 …………………………………·· 386 23:40 …………………………·--6 22, 629

민수기 4:1 4 ·…… ………… …… …………… •• 622 6:6 ………… ……… ……… ……… …•• 643 11:24 …… …… … … ………… …… …•• 6 0 4 19:16 …………… ……… …… ……… •• 643 21:9 •• ……… ………… …………… …· 683 21:20 …… …… ……………… ……… …•• 8 22:1 …… … ………… …… …… …•… •• 275 24:17 …… … ……………………… .• …· 48 34:11 …… ……… .. …… …… … -15 0, 165 35:5 …… ………… …… ……………… 311 신명기 3:17 …… … … … … … … …… …… …… 165 6:8 ……………… …… … ……………·· 6 65 11:18 ……… ………………………… ••6 6 5 l1:29 ……………… ……. 134, 138, 140 11:30 …… ……… …… …… ……… ..•. . 1 40 12:11 …… …………………… ……… ••6 6 7 21:22 ………………… ………… …… .• 680 23:12-14 ·…… … … …… …… ………. 411 31:16 …………… …… ……… …… …•• 6 0 5 31:30 ……………… …… …… …… …… 16 33:13 …… …… … … •• ? •… …… …… … . 144 33:17 …………… …… ……………… .. 68 0 34:3 …………… …… ……·… … … …•• 2 7 8

여호수아 2:22 …… …………… •. ………… …… -2 76 4:l 9 …… … …… …… … ……… …… ….• 2 4 4:20 …… …… .. ……………………… ... 2 4 .11 :2 .…… …………………………… .. 165 12:3 …… …… ………………………… 150 12:2 0 …… ……… …… … … ……… ….. . 34 13: 衍’ …… …… …… ………………… .. 150 14:1 5 ……… …… … … …………… ….. 533 15:6 ……… …… ………………… …… •• 21 15:7 …… … … … … …•… .. 287, 348, 474 15:8 ·…… … …… …… …… ……. 340, 350 15:4 4 …… … ………………… ……… •. 588 15:59 …… … …… … …………… …… … •• 5 15:61- 62 ……………… …………… ….. 9 18:16 ……………………. 340, 349, 474 18:17 …… …………… …… … ………·· 2 87 19 …… …… ……………………… …… 191 19:10- 15 ..… … … … ……… ………… .. 81 19:13 ……… ……………………·…… •• 81 19:28 ………………… …… …… …… •• 1 22 19:3 5 ……… …… … …… ……… 154, 165 24:32 …… …… … … ……… …… … … •• 137 사사기 1:16 ·…… ………… …… ……………·· 278

9:7 …………………………………… •• 137 9:28 ……………………………………·· 16 9:53 …………………………… ••… …· 505 19:10 ………………………………… •. 350 롯기 4:11 …………………………………… .. 42 사무엘상 7:2 …… ………………………………·· 5 68 10:1 ……………·………………… …·· 669 10:2 ……………………………………·· 69 16 ……………………… ………… …… •• 42 20:6 ·………………………………… •••• 42 21:13 …………………………………·· 659 24:1 …………………………………… •• 17 28:14 ………………… ………… …… ·· 633 사무엘하 5:6 ………… …………………………·· 350 5:6-9 …………………………………, 350 5:7 ……………………… .. 343, 344, 350 5:8 ……………………………………·· 350 5:9 ……………………………………·· 350 15:23 ………………………………… •. 341 18:18 ………………………………… •• 6()2

24:18 ……………… ………………… •. 135 24:18 이하 ……… …………… …… ·357 열왕기상 1:33 ……… …… ………… ………·…·· 348 2:10 •••• ……… ……………………… ·· 456 15:24 …………………………………·· 132 16:24 ·…… …………………………… •• 34 l7:5 ……………………… …… ………·· 2 2 18:3-16 ……………………………… •• 34 열왕기하 1:8 ………………………………………· 19 2 ………………………………………… 19 2:4 …………………………………… •••• 22 2:6 ………………………………………· 22 2:8-l1 …………………………………· 22 2:11 …………………… ……………… ••3 4 2:19-2'2 …………………………-2 3, 277 5:14 …… ……………………………… •• 19 13:21 ………………………………… ••• 34 15:14 이하 ………………………… .719 15:16 ……………………………… ..••• 719 18:11 ••… ………………………………. 70 20:20 ..•.. ………………………. 352, 353 2'2:1 4 ••••• …………………………… ... 3g5

23:10 ………… ..•… ………………… •• 340 23:13 ………………………………… ••2 9 1 25:8 이하 ………•………………… •• 358 25:9-10 .. ……… ……………………·· 408 25:23 ·……… …… …… …… …………· 586 역대상 11:4 ……………… …………… …… .•. 350 11:4-8 ……………………………… .. 350 l1:5 ………·………………………… .. 350 11:7 …·……………………………… .. 351 24:7 - 19 ……………………………… .. 86 24:15 ………………………………… .. 599 24:17 …………………………… …… •. 719 역대하 3:1 …………………………… ... 357, 536 7:8-9 …………… ……………………, 523 11:8 ……………………………·……,. 5 88 24:20-22 .………… …… …… .. 600, 601 32:3 ……………·…………………… •• 352 32:30 ……………………… ………… .. 352 34:22 ………………………………… •• 385 36:23 ,… …………… …… …… ……… · 358

에스라 1:2-3 …………………………………· 358 3:2 이하 …………………………… .. 53 1 3:12 …………………………·……… •• 358 6:3-5 …… ……… …………… ……… · 358 6:7-8 …………………………………· 358 6:15 …………… .. ……………………. 358 느헤미야 2:1 …………………………………… •• 40 0 2:s …… …………'… … ……… .. 365, 401 3 …… ………………………………… .. 4()() 3:1 ……………………… .. 365, 400, 431 3:3 …………………………………… .. 400 3:15 …………………………………… 352 3:l 6 ………·…………………………·· 456 3:26 ……………………·… ………… •. 344 3:Z7 …………… ………·……………,, 4 ()() 3:2 9 …………·… …………………… .. 4()() 3:31 ……………………·…………… •• 4()() 3:32 …………………………·……… •• 400 4:1 ……………………………………·· 134 10:20 …… …………………………… •. 599 11:9 …… …… ………………………… •• 16 11:14 …… …… ……………… ………… 16 11:22 …… … … …… …… …………… …1 6

11:32 ………………………………… •. 292 12:1-21 …………………… ………… •. 86 12:39 ……………… …… · 365, 400, 431 l3:l 6 ………………………………… .. 400 에스더 1:2 …………………………………… •• 387 1:5 ……………………………………·· 419 욥기 5:17 ·……………… ………………… •• 665 31:35 …………………………………·· 660 시편 4:8 ……………………………………·· 630 45:8 ……………………… ……·…… •• 715 74:12 ………………………………… .• 549 8():8 …………………… …·………… •• 630 81:3 ……………………………… •• …· 622 8.5:1 1 ………………………………… ... 65 122:1 …………………………………·· 558 132:6 ……………………………… •. …· 66 잠언 14:4 ……………… ……… ……… •• …· 653

전도서 7:20 ………………………………… ••• 642 12:5 …·……………………………… •• 646 아가 4:14 …………·…………… ………… •• 715 이사야 l:8 ……………………… •. 3 69, 447, 449 8:6 ……………………………… 351, 353 s:23 (MT) ……·…… …… …., }49, 166 9:1 ……………………………… 149, 166 9:1 (MT) …………………………… 149 9:2 ………………………………… ••••. 149 ll:1 ………………………………… ••• 219 l1:10 ………………………………… •• 219 18:4 ………………………… •• ……… ·700 26:19 ………………………………… •• 642 32 ·………………… ……………… …• • 670 32:1 이 하 ……·………………… …·· 670 36:1 이하 …… .. …………………… ·672 40:1 이하 ………………………… ••• 672 40:3 ……………………………… .. 11, 18 4l:17 이하 ………………… .,.671, 672 42 •• ……………………………………· 670 42:1 이하 ……………………… ...•.. 670

42:5 이하 ……………………. 670, 671 42:19 이하 …•……………… .. 670, 671 44:6 ………………………………… ... 666 44:28 ……… ……………… ………… •• 670 45:1 이하 ………………………·… ,.672 48:12 ………………………………… .. 666 49:5-7 …… ….. • :…… ………………· 670 52:7 이하 …•• ………………………· 672 55:3-4 ………………………………., 670 56:1-2 ………………………………,. 670 56:3 이하 …………………………… 670 58:13 이하 ……………… ………… · 670 60:1 이하 .………………………… .. 672 f,6:5 이하 •• …… …………… …… …·6 70 예레미야 7:31 ·… ……………………………… .. 340 7:31 이하 ………………………… ... 474 31:9 …… ……………………………… .. 70 31:15 ………………………·……--6 9, 70 31:38 ……………………………… ..... 365 3.5: 4 ………·………………………… ··615 40:1 ·………… …… ………………… .... 70 40:8 ·…………………………………·· 586 52:12 이하 …………………………· 358

에스겔 l:10 …………………………………··· 525 4:12 ·…… ……… ……………… …… •. 411 8:l4 ……………………………………·· 65 9:4 ……………… .. 653, 660, 661, 662, 663, 664, 681, 682, 694, 737 9:4 - 6 ………………………… .. 660, 663 9:5-6 …………………………………· 660 10:14 …………………………………·· 525 印 ……………………………………··· 642 '51:1 2-13 ………………………… ….. 714 44:1-3 ……………………………… .. 391 다니엘 6:10 ……………………………… …… 191 8:2 …… ……… ……… …… ………… .. 387 요엘 3:2 ……………………………… 341 ’. 596 3:12 …………………………………… 341 미가 3:12 ………·………………………… .• 449 4:8 ·……………·……………………… •• 75 5:2 ……………………………… …- 42 .’ 69

학개 1:1 ·…………………………… ?… … •• 358 1:2 이하 …… ……………………… .. 358 2:3 ………………………… ………… ··35 8 스가랴 1:1 …………………………………… .. 601 4:9 이하 …………………………… .. 358 11:11 …………………… …… ……… .. 661 13:7 ·……… ………………………… ·· 661 14:4 ……………………… .. …………· 290 14:10 ………………………………… .. 365 말라기 4:5 ………………… .••. ……………… …1 9 에스드라스I V 서 2:23 ·…………………………………·· 696 집회서 50:1-3 ……………………………… .. 443 솔로몬의 시편 15:8 ····……………………… .... 663, 667

15:10 ……………………… .• …-6 63, 667 마카베오상 1:20 이하 ………………………… ••• 344 1:29 이하 ………………………… ..• 344 1:33 ·……………… ………………… •• 344 2:29 •• …………………………………… 17 3:40 ………………·…………………·· 569 9:2 ·……………………………………· 157 9:50 …………………………………··· 278 ll:67 ………… .••• …………………… · 150 16:15 …………………………… …… ·· 276 마카베오하 4:9 ………………………………… ..... 393 5:'l:7 …………………………………… .. 17 6:18 .. …………………………………· 705 모세의 승천 11:1-6 ………………………………·· 695 - 신약 - 마테복음 1:1-16 .. ……………………………… .. 64 1:2 ·…………………………… .......... 726

1:12 ………………………………… ... 358 2:1 …………………………………. 41, 72 2:2 …… ………… ………………… ……. 77 2:5-6 ……·…………………………… .. 42 2:13 이하 …………………………… .. 43 2:16 ..........._ .. .... …………… …… ….. 48 2:18 …………………………………… .. 70 2:19-23 …………………… …………. 113 2:23 ……………………………………·· 82 3:3 ………………………………………, 18 3:4 ·……………………………………… 19 3:5 ………………………………………, 19 3:6 ………………………………………, 19 3:16 …………………… ……………… 103 4:5 ………… ..... ... ……………. 381, 599 4:8 …………………… ………… …… .. 277 4:13 …………………………… .. 167, 190 4:14-16 ……… .... …………………… 149 4:18 …………………·……………… ••2 1 8 4:21 ……… …… ……………………… . 218 4:2.5 ....... ………………………… ….. 226 5:1 ·……………………………………. 168 5:3-10 ………………………………·· 180 5:29 ………… •• ………………………. 340 8:5-13 …·……………………………. 112 8:14 ……………………………………. 213

8:28 .. …………………………………. 221 8:28-34 …… ………… …… … ………, 221 8:32 ……………………………·…… .. 224 g:g …… ………………………… 168, 184 9:20_22 ………………………………· 209 1l:14 …………………………………… 19 11:21 ………………………………… .. 168 11:21-23 ………… …… .. 185, 187, 217 11:23 …… …………………………… .. 192 l3:54 ………………………………… .. 119 13:55 …………………………… 112, 726 14:3-12 ·…………… ……… …………· 30 14:12 ………………………………… .. , 33 14:13-21 …………………………… ·· l68 14:22 ………………………………… .. 163 14:24 …………………………………·· 164 14:34 ……………………… …… 163, 164 14:3 2 -39 …………………………… .. 221 15:39 …………………………… 158, 164 16:9-10 ………………………………· 220 16:17 ………………………… ……… •• 721 17:12 …………………………………… 19 19:28 …………………………………·· 184 20:29 ……… .. ……………… …- 27 5, 286 20:29-34 …………………………… .. 275 21:1 ……………… . 286, 289, 304, 319

21:7 이하 ……'…… ……………… .. 320 21:9 …… ·…… … …… … … ………… •. 32 0 21:1 1 …… ·… … … …… …… ……… …., 8 2 21: 17 -18 …………………………… ••2 9 2 22:16 …… …… … …… … … …… … … ·· 1 52 22:23 …………………… …… ……… •• 642 23:2 …………………………………… 190 23:5 …… …… …… …… ………… ·…• • 66 5 23:15 …… … … …… … ·…… ….. 72 5, 726 23:'Z7 …… … ……… …… ………… …•• 6 4 3 23:2 9 …………… ………………… …•• 6 ( )3 23:35 …………………… …… … 600, 601 23:'5' / ………………………… …… ….• 121 23:38 …… ·… … …… …… … … .. 37 2, 373 24 …… …………… .. ……………… …- 31 2 24:2 .………………… …… ……. 372, 373 24:3 •• …………… …… … … …… ……· 311 24:6 …………………………… …… .• •3 1 1 26:30 …… …… …… ……… …… …… ••3 2 4 26:36 ·…… ……………… …… .. 32 4, 326 26:36 이하 …………………… …… .3 24 26:39 ……………·…………… .. 32 9, 338 26:42 …… ……… …… … …… ……… •• 33 g 26:44 ………… …… … … ………… …•• 3 3 8 26:47 ……………………… …… …… •• 32 8 26:57 ………… …… … …… …… 466.’ 604

26:68 …… ………… …………… …… ••• 95 26:74 …… ……… …… …… … …… ….• 467 26:75 ……… ………… ……… ……… ·· 468 Z7:3-10 …… ………………………… .47 3 'Zl:8 .… …… ………………………… ••4 7 3 Z1:1 9 ……… …… … …… ……… …… •• 475 z : 업 …… … … …… ………… …… …•. 47 5 Z7:32 ………………… …… ……… …·· 6 78 Z7:33 ……………… …… ……… …… ·· 505. Z7:51 …… …… …… …… … ·… .. 53 4, 548 업 :52 …… … …… … … …… …… … … ·· 548 Z7:fi6 .…… …… …… ……… ………… · 159 Z7:57-6( ) …… ……………………… ·· 517 업 :59 …… …… …… …… …… …… …·· 633 Z7:6( ) …… … ………………… ... 5 22, 612 28:2 …… …… … ……………… .. 522, 555 마가복음 1:2 …… … ………………………………. . 19 1:3 ………………………………………, 18 1:5 …………………………… …… …… · 19 1:6 …………… …… ……………………, 19 1:9 ……………………………… .,,, 26, 82 1:13 ……… …………… …… ……… ... 277 1:21 …… ……………………………… 194 1:24 …… … … …………………… …… .. 82

1:29 ………………………·… … …… •• 213 2:1 …………… …… ……………… ….. 213 2:4 …… …………… ……… ………… .. 207 2:14 …………………… ……… ……… 168 3:6 ……… …………… .. '…… ………… 152 3:18 ………… …… …………………… 191 4:38 ………………… ………… …… .. , 161 5:1 ………… ………… …… ……… ….. 221 5:1-20 ·…… … …… … …………… …. 221 5:13 ………………………………… ... 224 5:20 .…… …………………………… ••2 2 6 5:25-34 ………… …………………… · 209 5:38 ·……………………………· 190, 272 6:3 ………………… ………………… .. 112 6:17-29 ·………………………………. 30 6:21 ……………………………… 30, 152 6:29 ···… …… ………………… ……… •• 33 6:30144 ………………………………· l68 6:31 …………………………………… 170 6:3 2 ………………………… ………… 170 6:33 ···………………………………… 170 6:36 …………………………………… 170 6:45 ……………………… …… …… .. , 163 6:48 …………………………………… 164 6:53 …… .... ………………………… .. 164 7:11 ……………………………………· 386

7:31 ………… ·…………… ………… .. 226 8:1-l0 ……………………………… .. 221 8:3 ………………………… …… …… .. 152 8:l 0 ··… … …… … ……… ……… 158, 164 8:19- 20 ……… …… …………………. 220 8:22 …………………………… .. 217, 219 9:1 3 …………………………………… .. 19 10:46 ….. ...… …………… …… … .. …· 275 10:46-52 …… …………… …… …… .. 275 11:1 ……………… . 289, 304, 305, 319 11:11-12 …………………………… .. 292 12:13 ………………………………… .. 152 13:3 ………………………… ….. 311, 314 14:15 ………………………………… .. 446 14:26 ………… ……………………… .. 324 14:32 ………·…………… …… .. 324, 326 14:53 ………… ……………… ……… .. 466 14:72 ………… ………………… …… .. 469 15:16 …………………… …………… .. 475 15:21 …………·……………… .. 710, 711 15:22 ·…… …… ………………………, 505 15:40 ………………………………… .. 191 15:43-46 …… ……………………… .. 517 15:46 ·…………………………………· 522 l6:3 …·… …… …………… ………… ·· 58 7 16:4 ·……… …… …… ……………… .. 522

16:4-5 ……………………………… •• 5 55 l6:5 …………………·……………… •• 522 누가복음 1:5 ……………………………… …… . ... 10 1:20 …………… ………… …………… 116 1:26 …………………………………… 119 1:26 이하 …·… …… …… ………… .. 115 1:28 …………………… .... . 9 5, 116, 117 1:2 9 …………………………………… 117 1:30 …………… …… …… …………… 118 1:30-31 ………………………………· 116 1:39 ………………………………………. 3 1:64 …………………………………… 116 1:65 ……… ……………………………… . 3 1:80 …………………………………·· 8, 9 2:4 ……………… …… ………… ··42, 456 2:4-7 ………………………·………… •• 41 2:7 ………………………………………· 42 2:8-20 …………………………………. 74 2:11 …………………………… ……··· 4 56 2:39 이하 ………………·………… .. 119 2:51 .. ……………………………. 82, 119 3-24 ……………… …… …………… •• 741 3:3 ……… ………………………………· l8 3:4 …………………………… …… ……· 18

3:23-38 ……………………… ……… .• 64 3:33 ·………………………………… •• 713 4:9 …… ……… ……… ……… .•• 3 81, 599 4:16 ……………………………… …… 110 4:17 ……… ……… …………………… 111 4:38 ……………·……………… …… ··21 3 5:1 …………………………………… .. 150 5:19 ………………… ……… ……… ... 207 5:'Z7 ………………………………… … 168 7:1-10 …………… …… …………… •• 122 7:5 ………………………………… .•..• 194 7:9 …………………………………… ··2 0 3 8:3 ··… ……………………………… ••• 152 8:26 ·… …………………………… …• • 221 8:2 6 -39 ………………………………. 221 8:33 ·…… …… …………………… ..... 224 8:37 ………………………………… ... 221 8:43-48 ………………………………. 2()( J 9:10 ………………… …………… …. .. 219 9:10-17 ……………………… …… …· 168 9:23 …………·……………………… •• 741 9:23-33 ·…………………………… ... 741 10:13-15 ……………… .. 185, 187, 217 10:30 ………………………………… .. 286 1l:44 …•………………………………. 643 13:4 …………………… •• ……………· 356

l3:3 1 …… …… …… …… …… … … … •• 152 13:31-33 …… …… …… …… ……… •• 152 13:34 ••… … …… …… … …… …… …… 1 21 16:2 2 ……… …… ……… …… ……… •. 635 18:3 .5 …… ……… ……… ……… …… ·· 2 75 18:3.5 - 43 …………… …… ………… •• 275 19:1 - 10 ………… ………… ….. 27 5, 283 19:29 …… … .28 9, 304, 305, 311, 319 19: 찌 …………………… ·…… .. 28 9, 319 19:40 …… …… … … … … … ………… ••7 6 1 19:41 ……………·…………… .. 319, 320 21:37 ………………… …… ………… ••3 1 1 22:12 ·…… …… …… …………………· 446 22:29~30 …… … … … ……………… ·· 1 83 22:3 9 …… …… … … … ……………… ••3 2 4 22:40 …………………… …… ……… •• 324 22:41 ………… ………… . 328, 329, 336 22:47 ……………… …… … … ……… •• 336 22:54 ……… ……… …… … …………·· 4 66 22:52 •• …… … … … ……… …………··· 4 69 23:11 …… …… ………………… …… •• 1 52 23:32 …… ……… …… … … …… … … .• 152 23:33 •• …… ……………………-5 05, 506 23:00-53 …… … …… …… … ……… .• 517 23:5 3 …………… …… …… … ………·· 522 24 …………………·……………… …·· 5 67

243214B20ii一二 41 23 412345 05 6 6 ’ 56 8 ’ i一三956 , 떠臨區257785 요 “ 43 43322222E22E1EEELL. 11.. . · ..~~. ~~~一~~一i그책 ~~~~i 二 二二二7,,121二二 6432240紅E4107774 읽\4~.唱 } ~~i~ ~~i~一二二:a

4:3-43 ……………………………… .. 132 4:5 ……………………… .. 137, 142, 143 4:5-6 ·… …… ………………………… 133 4:5-7 …………………………………· 134 4:7 ……………………………………·· l43 4:9 ……………………………………·· l32 4:20 ………………………………… …1 34 4:28 ………………… …… …… … …… 143 4:42 …………… …… ………………… 147 4:46 …………………………………… 112 4:46-54 …………·…………………… 122 4:47 ………… …… …………………… 122 5 …·…………………………… 00 429, 445 5:2 ……………………… .. 429, 432, 444 5:7 ………·… … ……… …… …·· 43 7, 442 5:8 …………………………………… .. 429 6:l ……………………………… 150, 220 6:1-l3 ………………………………·· 1 68 6:3 ……………………………………·· 170 6:15 ·…… …… ………………………·· 170 6:16-17 ………………………………· 220 6:23 …………………………………… 152 6:'2:1 ………·…………………………·· 677 6:51 …………………………………… ••4 1 6:54 …………………………… .•… …. 744 6:68 …………………………… .• ……· 558

7:42 …… ……. …… …………………… .. 42 9:1-7 …………… …… …… … …… .... 355 9:7 …………………………………… .. 353 10:23 ……………… …… … …… …… .. 387 10:4 0 …………… …… ………·……… .. 20 11 ………………… …… …………… ... 292 11:5 이하 ………·………………… .. 705 1l:18 ·…… …………………………… .292 11:29 …… …… …… … …… …… … … .. 299 11:38 ·…… …………………… .. 297, 587 12:1 …………………………… .. 292, 299 12:21 ……………………………… ..... 211 12:22 ………………………………… .. 218 13:4 이하 …… … … ………… .. 453-454 15:1 …………………………………… .. 78 17:6 ……… .. …………………………· 668 l8:l …… ……… …. 324, 341, 473, 603 18:13 ………………………………… .. 466 l8:24 …… …… …… ………………… .. 466 18:28 …………………………… …… .. 475 l8:33 ………………………………… .. 475 19 .. ……………………………………. 741 19:5 …………………………… .. 499, 500 19:9 ………·………………………… .. 475 19:13 …… ………………………, 475 500 19:16 ………………………………… .. 740

19:17 ……………………. 505, 506, 740 19:18 ………… ……………… ……… •• 740 19:19 ………………………………… ••7 4 0 19: 幻 …………………… •.••.… ………· 506 19:34 ………………………………… .. 534 19:38-42 ………………………… ..... 517 19:41 ……………………. 506, 513, 521 20:1 ……………… ………… ……….,. 5 22 20:5 ………………………………… ... 522 20:12 ·…………………………………, 522 20:19-25 ……………………………·· 451 20:26-29 …………………………… .. 451 21 •• ……………………………………, 740 21:l …………………………………… 150 21:2 …………… ……… …………… ... 122 21:4 …………… ……………… .. 168, 181 21:4-19 ………… ………………… …. 181 사도행전 1:9 …•………………………… .. 311, 312 1:1 1 ……·…………………………… .. 291 1:12 ………………………………… ... 311 1:13 ………·…………… .. 446, 447, 449 1:19 ………………………………… ... 473 1:23 …………………·……………… .. 715 2:1 ………………………………… ..... 447

2:1 이 하 …………………………… .. 451 2:5 ………………… ……… ………… .. 450 2:15 ……·… …… …… …………… ….. 451 2:29 ………………………………… ... 457 2:42 …………………………………… .. 16 3:2 ·…………………………… .. 388, 390 3:3 ……………… …………………… .. 388 3:8 …………………………………… .. 388 3:10 …………… …………… ….. 388, 390 3:11 ………………… .. …. 387, 388, 390 4:6 …………………………………… .. 721 5:12 ……………… ………… …… … .. , 387 5:30 ………………………·… …… ….. 680 6:2 ……… ………… …………………… . 16 6:5 ……………………………… .. 16, 273 6:9 …………… ……………… ……… .. 710 7:60 ………… ………………… .. 482, 565 8:40 …………………… .. ……………· 242 10-11 …………… ……… …… .. 273, 274 10:38 ………·………………………… .. 82 11:26 ………………………………… .. 727 11:28 ……………………… ………… .. 610 12:2-11 ………………………………, 493 12:l0 ………………………………… .. 493 12:12 …………………… .. ……, 447, 455 12:21-23 ………·…………… .. 245, 260

13:1 ………………………………… ... 719 15:12 ·…… … ………………………… .. 16 15:17 …………… …… …… ……… …·· 668 15:22 …… … …………… …… ……… .. 715 15:30 …………… …… ………………… 16 16:l3 …… …… … … … …… …… … …·· 152 16:16 …………………………………·· 152 :1:9;:3: -·…9• … .…… .… ……· ··…·…… . …• …•\… .…\ ….…… …···· 2.3 :3: 21:31 ………………………………… --496 21:32 …………………·……… --496, 366 21:34 ………………………………… ··478 21:35 ………… ……………………… .. 366 21:37 ………………………… …… … ··4 7 8 21:38 …………………………………… 17 21:40 ………………………………… .. 494 23:2 ………………………… .. ……… ·466 23:8 ………………………………… ... 642 23:35 ………. 245, 264, 475-476, 481 24:1 ·…………………………………·· 466 로마서 4:19 이하 .. ………………………… ·69 1 5:12 …………………………·……… .. 534 5:15 ……………·…………………… .. 534

13:3 …………………… ... 254, 255, 256 15:12 …………………………………--2 19 16:7 …………………… .... …………·· 689 16:13 ·………………………………… ·711 고린도전서 1:18 ··……………… …… ……………. 744 :1:2;3\ ·\… …\…\……\ … …..…•.\ … …..…•.…: ::….: : ... :74:4 15:22 ………………………………… .. 534 갈라디아서 1:19 ……………… .. ………………… .599 3:l …………………………………… ··680 5:11 ………………… …… ………… ... 744 에베소서 3:3 ·……………………………………· 680 빌립보서 1:1 ·……………………………………… 16 골로새서 2:14 ……………………………… ...... 742

디모데전서 3:2 ………………………… …… …… •••• 1 6 디도서 1:7 ……………………………………… . 16 빌레몬서 2 …… …… …… … ……………… …… .. 647 히브리서 4:16 ………·……………… ………… ••7 2 8 6:19 ………………………………·… •• 739 13:12 ………………………………… .. 5() 6 야고보서 2:2 …………………………… …·· 1 6, 448 2:7 …… ……………………………… ·· 66 8 베드로전서 2:7 …… ……………………………… •• 744 2:2.5 ……………………… …… ………·· 16 요한계시록 1:8 ………………… …… …… .. , 667, 691 2:10 …………………………………… 100 4:7 …………………………………… •• 525

7:3 …… … … … … … … … ……………·· 667 9:4 ………………………………… …·· 667 9:11 ……………………………… …•. . 505 13:l6 …………………………… …… ·· 667 14:1 ………………………… •• ……… · 667 16:16 ………… …… … … …… … …… .. 505 20:4 ………… ……… ……………… ... 6 6 7 21:6 ••… … ………… .. …………. 667, 691 22:4 …………………………… .. 667, 668 22:l3 ……………………. 667, 689, 691

잭 피니건 Jac k Fin e g an …… 지 은이 미국 버클리 Berkele y의 태평양신학교 Pa cifi c School of Relig ion 및 연합신학 대학원 The Graduate Theolog ica l U ni on 의 신약 역사와 고고학 명예교수. 일 찍 이 1934 년에 베 를 린 대학교에서 신학 학위를 우등 magn a. cum laude 으로 취득했으며, 고대 근동 지역의 고고학과 역사에 관한 역저를 다수 집필함. 저서 : 『 세계 제종교의 고고학 The Archaeolog y of World Rel igi ons 』『 고대 로부터 비쳐오는 빛 Lig ht from the Ancie n t Pas t 』『 성경 연대기 편람 Handbook of Bib l ia il Chronolo gy 』 『신약 고고학 : 초기 기독교 사도들 의 지 중해 세 계 The Archaeolog y of the New Testa m ent : The Medit err anean World of the Early Chris t i an Asp os t les 』『 고대 중동 의 고고학 역 사 Archaeologi (XJl Hi st o r y of the Ancie n t M idd le Eas t 』 『 신화와 신비 : 성경 세계의 이방 종교 개론 My th & My s te r y : An Intr od ucti on to the Paga n Relig ion s of the Bi bl i(X Jl World 』 동. 남대극(南大極) …… 옮 긴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동 대학원 독어독문학과 졸업(문학사, 문학석사), 삼육대학교 신학과 졸업(신학사), 필리핀 Adventi st Inte r nati on al Insti tute of Advanced Stu dies 졸업 (M . A., M. Div . ) , 미국 Andrews Un ive rsit y 신 학대학원 졸업(신학박사, Th.D .) , 육군사관학교 독일어 교수 역임. 현재 삼육대학교 신학부 교수 및 신학연구소장. 저서 : 『 오실 자의 표상 : 구약의 그리스도 』 『율법과 구속(球照)의 경륜(經給) : 오경(五經)의 기별』 『풍습에 비추어 본 모세 오경』 『구약의 역사와 고고 학의 중거』 The Throne of God Moti f in the Hebrew Bi bl e 둥 역서 : 『구약개요 』 (공역) 『신약개요』 『히브리서 주석』(공역) 『예언의 신에 의한 다니엘서 강해』(공역) 동

신약성서의고고학 I 대우 학 술총서 • 번역 123 1 판 대 펴 냄 1998 년 12 월 30 일 지은이 잭 피니건 옮긴이 남대극 펴낸이 박맹호 員 펴낸곳 (주)민음사 r 출판등 록 1966 년 5 월 19 일 (제 16 -4 90 호) 135-120 서울 강남구 신사동 506 강남출판문화센터 5 층 』.t1 대표전화 515-2 따 3/ 팩시밀리 515-' 2f JJ7 © (주) 민음사, 1998. 기 독교 K.DC /230 Print e d in Seoul, Korea 값 42 ,®찬 ISBN 89- 37 4-4 1 23-3 942 앗) *.、.` ISBN 89-3 7 4-30 0)-2 (세트)

1 대우학술총서 1 번역) 1 1 유목민족제국사 콴텐 / 송기중 46 그리스 국가 에렌버그/ 김진경 89 殷代貞卜人物 通考 l 라오쫑이 / 손예철 2 수학의 확실성 클라안 / 박세희 47 거대한 변환 폴라니 / 박현수 90 殷代貞 卜 人物通 考 胤 라오쫑이 / 손예철 3 중세철학사 와안버그 / 강영계 48 법인류학 포스피실 / 이문웅 91 순수경제학 레옹 왈 라 스 / 심상필 4 日本 語의 起源 밀러 / 김방한 49 언어철학 올스톤 / 곽강제 92 문화유물론 마빈 해리스 / 유명기 5 古 代漠語 音 韻學槪要 50 중 세 이슬람 국가와 정부론 93 포유동물의 가축화 역사 칼 그렌 / 최영애 램톤/ 김정위 줄리엣 클루톤브록/김준민 6 말과 사물 푸코/이광래 51 전통 쉴즈/김병사신현순 94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 7 수리철학과 과학철학 와일 /김상운 52 몽골문어문법 뽀폐/유원수 E 카시러/박지형 8 기후와 진화 피어슨/김준민 53 중국신화전설 1 원가/전인초김선자 95 화학적 진화 SF 메이슨/고문주 9 이성 진리 역사 파트남/김효명 54 중국신화전설 Il 원가/전인초김선자 96 과학의 한계 바이츠제커 /송 병옥 10 사회과학에서의 場理論 55 사회생물학 I 윌슨/이병훈·박시룡 97 러시아 연해주와 발해 역사 레빈 / 박재호 56 사회생물학 Il 윌슨/이병훈·박시룡 예 퀘 샤브꾸노프 / 송기호 • 정석배 11 영국의 산업혁명 57 일반언어학의 제문제 I 98 경제정책의 원리 딘 / 나경수·이정우 밴베니스트 / 황경자 발터 오이켄 / 안병직 • 황신준 12 현대과학철학논쟁 58 일반언어학의 제문제 Il 99 비코와 헤르더 쿤 外/ 조 승 옥김동 식 밴베니 스 트 / 황경자 이사야 벌린 / 이종홉 • 강성호 13 있음에서 됨으로 프리고진 / 이철수 59 폭력과 성스러움 100 실용주의의 결과 14 비교종교학 바하/ 김종서 지라 르/ 김진식·박무호 리 처드 로티 / 김동식 15 동물 행동학 하안 드 /장현갑 60 갑골학 60 년 董作賓/이형구 101 국제 지층구분 지침서 16 현대우주론 시아마/양종만 61 현대수학의 여행자 A 살바도르/백인성 17 시베리아의 샤머니즘 피터슨/검인수 ·주형관 102 국가론 헤르만 헬러/홍성방 디오세지 '호팔/최길성 62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 103 경험과 판단 후설/이종훈 1 8 조형 미술의 형식 모 르 너)/주명철 104 17 세기 프랑스 정치사상 힐 데브란트 / 조창섭 63 해석학과 과학 앙리 쌔/나정원 19 힐 버트 리 드/ 이일해 커널리·코이트너 / 이유선 105 고대 노예제도와 모던 이데올로기 20 원시국가의 진화 하스 / 최몽룡 64 서 양 고대 경제 편리 / 지동식 M.l 핀리 / 송문현 21 商 文明 張 光 直/ 윤내현 65 음 악사회학 베버 / 아건용 106 里鄕見聞錄 22 마음의 생태학 베이촌/ 서석봉 66 앙띠 오이디푸스 유재건 / 실시학사 고전문학 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