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로티 는 현재 미국온 물론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1931 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시카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예일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웨슬리 칼리지를 거쳐 1961 년 프린스턴 대학교 철학 교수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철학과장을 역임하고 1979 년에는 미국철학회 동부지회 회장을 지냈다 1982 년 버지니아 대학교로 옮겨 인문학 교수가 되었으며 현재 그 대학의
실용주의의 결과
CONSEQUENCES OF PRAGMATISM
(Essays: 1972-1980)by Richard RortyCop yright © 1982 by the University of Minnesota.All rights reserved.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1996 Tong- Sik Kim.Korean translation edi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Minneapolis.이 책의 한국어 판 저작권은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와 독점 계약한 김동식에게 있습니다.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복제와 무단 전제를 금합니다.
실용주의의 결과
한국어판서문 이 서문을 쓰기 바로 전에 나는 네이글 Thomas Na g el 의 저서 『타 자의 마음 Oth e r Mi nd s: Criti m l Essays 1969-1994 』 에 대한 데네트 Da niel Denne tt의 시사적인 논평을 읽게 되었다. ” 네이글과 데네트는 현재 영어로 글을 쓰는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창의적인 철 학자에 속한다. 그 두 사람의 견해는 현대 분석철학(죽 영어권의 철 학)에서 스펙트럼의 서로 정반대 쪽을 차지한다. 데네트는 대부분의 쟁점에서 나와 의견을 같이하는 준_실용주의자로서, 나는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네이글은 중요한 어떤 쟁점에 관해서도 결코 나와 의견 일치를 이루지 못했던 호전적인 반(反)실용주의자이지만, 나는 그에게서 내 입장을 어떻게 정의해야 히는·가에 대해 아주 많이 배웠 다. 만약 네이글이 없었더라면, 한때 데네트가 그렇게 말했듯이, 데네 • 트와 나는 네이글을 창안해야만 했을 것이다. 네이글의 견해는 데네 트와 내가 가장 열렬히 불신하는 모든 것을 놀랄 만큼 명확하고도 설득력 있게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1) 이 논평은 The Jou rnal of P h ilos oph y, vol. 93(Aug us t 1996), pp. 425-428 에 실려 있다.
나는 이 책 『실용주 의의 결과』의 서론에서 네이 글을 나의 변증을 돋보이게 해주는 인물로 삼았고, 그 이후의 저술들에서도 그렇게 해 왔댜 내가 네이글에게로 쟁점을 몰고가는 까닭은, 그는 심오하고도 항구적인 철학적 문제들이 있다고 진심으로 믿기 때문이다. 네이글은 내가 가장 칭송하는 철학 자들(제임 스, 비트겐슈타인, 데이비슨 , 데네트 등)은 그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그것들이 참으로 얼마나 심오한지를 간파하지 못한 채 눈감고 있다고 간주한다. 데네트와 내게는, 네이글 이 일종의 시간 왜곡에 빠져서, 비트겐슈타인 이전의 그릇된 철학관 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네이글에게는 데 네트와 내가 경박하고, 피상적이며, 조심성 없다고 보일 것이다. 데네트와 나는 심오성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철학적 문제들이란 (초역사적이라고 이해된) 인간 정신 속에 있는 심오한 어떤 것의 표현 이 아니라, 오히려 우연하고도 일시적인 지적 정체 상태의 징후라고 간주한다. 그러한 정체 상태는 새로운 용어와 슬로건으로 인해 변화 하는 길목에 놓인 낡은 용어와 슬로건들에 의해 야기된다. 달리 말해 서 이전 시대의 필요에 부응하면서도 새롭고도 예견되지 않았던 상황 들을 다루기 위해 창안된 어휘를 사용하려는 시도에 의해서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문제들은 < 언어가 휴가를 갔을 때 > 발생 한다는 말로 이 논점을 표현하였지만, < 다른 언어, 어쩌면 새로운 언 어를 요구하는 어떤 목적을 위해 사람들이 전통적인 용어를 사용하 고자 애쓸 때> 그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말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 다. 비트겐슈타인이 그렇게 말했더라면 좋았을 그 논점을, 내 생각에 듀이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 <궁극적 실재를 다룬다는 위장( 僞裝) 아 래, 철학온 사회적 전통에 묻혀 있는 귀중한 가치들로 점철되었지만 …… 철학은 사회적 목적들 사이의 갈등에서 그리고 전승된 제도와 그것과 양립 불가능한 현재의 경향들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자면, 서구 사회가 낡은 신학적 언어를 과학적 탐구를 위한 목적에 사용하려 했을 때, (예컨대 갈릴레오와 종교 재판 사이에) 갈등
이 일어났댜 이것은 (교회와 태동중인 세속의 문화라는) 사회 제도들 사이의 갈등이자 동시에 우주를 서술하는 (대략 말해서, 아리스토텔레 스와 데모크리토스 사이의) 방식들간의 갈등이었다 . 이중 후자의 갈등 이 17 세기와 18 세기 유럽의 철학적 문제들을 만들었다. 다른 예를 들 자면, 도덕적 책임에 대한 전통적인 언어를 프로이트 심리학의 언어 와 결합시켜 사용하고자 할 때에도 갈등이 일어난다. 서로 다른 일을 하는 데에는 둘 다 아주 적절하지만 , 동일한 일을 하는 데에는 서로 경쟁적인 도구들을 우리가 갖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예 전에 갈릴레오와 뉴턴이 수행했던 역할을 수행한다. 말하자면, 창의 적 정신들은 한 문화에 이미 익숙하게 길들여진 언어와 쉽게 조화되 지 않는 언어로, 새롭고도 유용한 것을 말한다. 듀이적인 관점에서 볼 때, 철학자의 일이란 낡은 말하기 방식에서 새로운 말하기 방식으로의 전환에 필요한 것들을 매끄럽게 해주는 일로 이루어진다 . 바꿔 말해서 우리가 그 두 방식을 굳이 대척적인 것이 아니라 상보적인 것으로 보게 해주는 일로 이루어진다. 듀이, 데네트 그리고 나를 비롯한 실용주의자들은 항상 다음과 같이 말한 다 . 상이한 어휘들을 실재의 본성에 대한 표상이 아니라 도구로 취급 하라! 그러면 당신은 양자가 서로 결합되지는 못할망정 여전히 제각 기의 목적을 위해 쓰일 수 있다고 보게 될 것이며, 그들 사이에 추정 된 양립 불가능성은 환상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내가 듀이와 (그리고 상당 부분은 데네트와) 공유하고 있는 관점에 서 보자면, 사물들의 서술 방식에 관해서 문화가 (새로운 종교, 새로 운 과학적 발견, 새로운 문예적 • 예술적 장르, 새로운 정치적 제도 등) 새로운 제안들을 지속적으로 안출하고 있는 한, 철학자들이 해야 할 일은 항상 존재한다. 내가 이 책의 서론에서 인용하고 있는 헤겔의 구절을 빌려 말하자면, 철학은 항상 <당대(當代)를 사고 속에 담는 것>이리라. 반면에 네이글에게 과학, 종교, 예술, 정치의 역사는 철학 과 진정으로 연관된 것이 아니다. 그에게 철학이란 피상적인 역사적
변화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숨겨진 심오성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서구의 철학을 아시아에서 수용할 경우나, 혹은 아시아의 철학 사 상을 서구에서 수용할 경우에도, 내가 개략적으로 앞에서 말한 그 대 조가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된댜 종교, 과학, 예술, 정치의 역사는 아 시아와 서구에서 판이하게 달랐다. 역사주의자의 관점, 즉 듀이와 헤 겔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말은 서구에서는 거창하게 보이는 많은 철 학적 문제들이 아시아에서는 전혀 특별한 중요성을 갖지 못할 것이 요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임을 의미한다. 근대 서구 철학의 전 개에서 중심적이었던 지적 정체 상태의 구체적인 사례들은 한국이나 중국이나 일본이나 인도에서의 지적인 발전과 아무런 유사성도 갖지 못할 것이다. 우리 역사주의자들이 보는 바에 의하면, 한국과 프랑스 의 화가들이 동일한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거나 동일한 대가들을 경 의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과 프랑스의 철학 교수 들이 동일한 쟁점을 다루거나 동일한 철학자들을 중요하게 여겨야 할 이유는 없다 . 하지만, 네이글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와 같은 역사적 상이성이 철 학자들에게는 차이를 주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네이글은 (이 책의 서론에 나온 구절을 반복해 인용하자면) <해결 불가능한 문제들이라 도 여전히 실재하며>, 또한 누구든 반성적인 인간의 마음에는 심오 하고도 해결 불가능한 특정한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반면에 실용주의자는 풀 수 없다는 것은 피상성의 깊이의 표시가 아 니라고 믿는다. 바꿔 말해서, 풀 수 없는 문제들이란 사이비_문제들, 언어가 휴가를 가버린 결과라고 본다. 짐작건대 서구인들에 의한 아시아 사상의 전유(專有)와 그 반대의 경우인 아시아인들에 의한 서구 사상의 전유는, 대체로 네이글 같은 사람들――두 전통은 심오한 똑같은 물음에 관해 염려하였지만 상이 한 대답을 제시했다고 보는 사람들-과 대체로 나와 데네트 같은 사람들 사이의 대조를 항상 그 특징으로 할 것이다. 물론 후자와 같
은 사람들은 제기된 물음의 유사성보다는 차이점을 강조할 것이다. 이러한 대조는 문화적 차이에서 야가된 실천적 문제들_평화롭 고, 번영하며, 우애로운 범세계적 정치의 형성에 대해 문화적 차이들 이 제기하는 장애물들—_에 대한 접근법의 차이에 상응한 것이다. 나의 실용주의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상이한 문화들이 서로 조우(造 遇)한다는 것은 새롭고, 종합적인 문화, 즉 예전의 것들보다 더 크고 나은 어떤 것을 창조할 기회를 의미한다. 상이한 문화를 배경으로 하 는 지식인들이 할 일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상대방의 센스를 서로 넓히는 것, 달리 말해서 서로가 전통적인 사고의 습관을 버리게 도움 을 주며, 가능한 한 더 많은 문화적 재료들을 용광로 속에 집어넣는 것이다. 우리 실용주의자들은 문화란 인간의 우연하고도 일시적인 고 안물이라고 보며, 인간 역사의 드라마란 진부한 고안물이 새롭게 개 선된 고안물에 의해 대체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이글의 관점을 채용한다면, 두 문화가 만나서 서로 잘 지내려고 노력할 때, 기본적인 철학적 물음에 대해 그중 하나는 옳 지만 다론 쪽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하다. 혹은 적어 도 다음과 같이 말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 즉 우리의 의견 차이는 매우 심오하고 해결 불가능하며, 그래서 우리는 철학적 미궁에 의해 갈라서 있는 것이라고. 또, 우리의 문화적 차이는 단지 상이한 역사 들의 우연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우주 속의 인간의 본성에 관한 의 견 차이라고. 네이글의 심오성에 비할 때 실용주의자인 나의 피상성이 갖는 한 가지 장점은, 어떤 이론적 쟁점들보다도 세계 사회를 (그리고 결과적 으로 세계 정부를) 형성할 실천적안 프로젝트를 더 우선으로 고려하 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마치 유럽 의 다양한 종교적 분파들간의 차이가 장애물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 가지로 우주 속의 인간에 대한 동양적 견해와 서양적 견해의 차이도 새롭고, 더 거대하며, 더 관용적이고, 내적으로 더 알록달록한 사회를
형성하는 일에 장애물이 아니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유럽인들은 (가 령 구교도와 개신교도의 차이와 같은).종교적 차이는 목숨 걸고 싸울 만한 가치가 아니라고 결정했으며, 진리의 추구보다 인간의 행복과 우의가 더 우선이라고 결정했다 . 실용주의 철학은 관용적인 계몽주의 문화, 다시 말해서 종교 전쟁 은 사람들을 불필요하게 비참하게 만든다는 깨달음의 결과로서 유럽 과 미국에서 성장한 계몽주의 문화의 한 표현이다. 실용주의자들은 진리의 추구란 단지 행복 추구의 한 종(種)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인간 존재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 신념의 추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용주의자들은 거창한 물음이란 다음 과 같은 실천적인 물음이라고 생각한댜 인간 존재들이 서로 다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충분히 동일한 것을 원하도록 그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내가 보기에 우리 서구의 지식인들이 우리와 마주하고 있는 아시 아의 구성원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관용적인 계몽주의 문화가 그것에 앞선 다양한 유럽의 문화들을 어떻게 대체시켰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역사 이야기가 우주 속의 인간의 상황에 대 한 우리의 견해보다 훨씬더 흥미롭고 유용하다. 서양의 사회 • 정치적 역사가 서양의 형이상학과 인식론보다 훨씬더 교훈을 준다. 만일 우 리 실용주의자들이 옳고 네이글이 틀렸다면, 역사는 형이상학과 인식 론의 연구에서도 불가피한 예비적 관문이다. 이제 서두에서 내가 언급했던 네이글에 관한 데네트의 논평으로 돌아가서 결론을 내리기로 하겠다. 네이글의 견해와 자신의 견해 간 의 큰 차이점을 개괄한 다음에, 데네트는 정중하게 평가된 네이글의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논평을 마감하고 있다. 궁극적이며 최선의 중재자로서의 이성에 대한 [네이글의 다음과 같은〕 옹호는 간결하지만 매우 훌륭하며 마치 불끄는 소화전처럼 보유할 가치가
있어서, 나 는 그것 이 널리 유포되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지경 이다. < 이성 의 결과에 대해 시도된 어떠한 도전이라도 궁극적으로는 이성에 대한 호 소라는 점을 피할 수 없으 므로 , 이성은 보편적이다. 가령 논증 으로 제시된 것이 실제로는 합리화라 는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와 같은 시도는 다 른 어떤 것을 믿을 만한 이유 를 제시해야만 애초의 방법이나 실행에 대 한 우리의 확신을 훼손시킬 수 있으며, 그래서 마침내 는 우리가 마음울 정하고자 논증들에 관해 반드시 생각하도록 할 수 있다. > 데네트는 위의 인용 속의 구절이 불끄는 소화전처럼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많은 분석철학자들처럼 그도 역시 지식인의 세계 에는 비합리주의라는 불씨가 번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네이글이 여기서 제기한 논점을 상기하는 일이 그러한 불씨로 인해 야기될 위험성을 우리가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바란다. 이 점에서 데네트와 나는 보조를 같이 하며 , 실로 나는 대부분의 동료 영어권 철학자들과 보조를 함께 한다 . 하지만 나는 <이성>, <합 리성 > 혹은 < 비합리주의>와 같은 것들이 도움을 주는 관념이라 고 생각하지 않는댜 나는 옹호를 필요로 하는 <이성>이라 불리는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또한, 나는 제거되어야 할 바 합리주의라는 불씨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 많은 분석철학자, 실용주의자, 비실용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데네 트는 분석철학자들은 전형적으로 이성과 논증에 헌신하고 있는 반면 에, 이른바 <대륙철학>(죽 비영어권의 서양철학), 특히 니체, 하이데 거, 데리다 등의 추종자들에게는 비합리주의와 논증에 대한 혐오가 두드러진 특징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 다. 나는 분석철학을 쿤이 말한 의미에서 하나의 <분야 모형di s ci pli n a r y ma tri x> 이라고 본다. 바꿔 말해서 그것은 용어와 문제와 영 웅들에 대한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할 많은 묶음들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후설, 니체, 하이데거 등에 관 해 배우고 성장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철학 교수들 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프레게, 러셀, 카르납, 콰인 등에 관해 배우고 성장한 미국, 영국, 호주 등의 철학 교수들과 동일한 문 제에 관심을 갖고, 동일한 어휘를 사용하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공자 에 관해 배우고 성장한 사람들이 로마의 가톨릭에 관해 배우고 성장 한 사람들과 동일한 문제에 관심을 갖고, 동일한 어휘를 사용하기도 역시 어려운 노릇이다. 그러나 이중 어느 경우에도 우리는 합리성과 비합리성 간의 대립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우리는 무엇이 관건인가에 대해, 혹은 무엇이 가장 토론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상 이한 생각들간의 대립을 보고 있는 것이다. 분석철학자들은 식별 가능한 전제와 결론을 가지고서 명제들마다 일일히 논증을 하며, 훌륭하고도 잘 다듬어진 논증을 피력하는 경향 이 있다. <대륙철학자들>은 <헤겔>, <가다며>, <후설> 등의 낱말 을 어휘나 술로건들의 덩어리에 대한 축약형으로 사용해서, 인물들마 다 일일히 논변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통상 훌륭하고도 잘 다듬어 진 논증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크고도 애매모호하며 거칠게 다듬어 진 논변을 갖고 있다. 내게는 두 유형의 논변들 모두 동등하게 존중 되고 동등하게 유용한 분야 모형들의 산물로 보인댜 각각의 분야 모 형과 각각의 논변 스타일은 뚜렷한 장점과 뚜렷한 단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네이글이 <이성>이 보편적이라고 말할 때, 그 주장에 내 가 덧붙일 수 있는 유일한 의미는 모든 언어는 다른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 학습 가능하다는· 점뿐이다. 그것이 바로 공자의 제자 들이 로마 가톨릭의 신학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배울 수 있고, 프레 게주의자들이 헤겔과 하이데거 간의 쟁점에 관해 판단하는 것을 배 울 수 있으며, 하이데거주의자들이 카르납과 콰인 간의 쟁점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이유이다. 나는 <이성>이란 것이 어떤 철학자들에 의해서는 적절히 사용되고 다른 철학자들에 의해서는 부
적 절 하게 혹은 불충분하게 사용되는 어떤 정신 능 력에 대한 이름이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또 , 그것 은 거칠게 다듬어지고 애매모호한 논 변의 경우보다 잘 다 듬 어지고 예리하게 갈아진 논증에 더 많이 연관 된 어떤 정신 능력도 아니다. 만일에 < 이성 > 이란 것이 무엇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 힘에 반대 되는 것으로서의 설득 > 을 의미한다 . 하지만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성이란 물론 < 보편적 > 이지 않다. 설득은 규칙이라기보다는 예외에 속한다 슬픈 일이지만, 대부분의 쟁점들을 해소시키는 데에 여전히 힘이 쓰이고 있댜 내게는 < 우리 모두 이성적이고자 노력해야 한다> 라는 말은, < 우리 모두 관용을 베풀고자 노력해야 한다 . 우리 모두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들이 말하고 있는 언어를 기꺼이 듣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말처럼 보인다. 요컨 대 나는 < 합리성 > 이란 유럽의 경우 예전에 비해 계몽주의 시대 이 후로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 유럽이 아닌 많은 지역에서는 불행히도 내가 잘 모르는 시대에) 훨 씬더 현저하게 발현된 사고의 습관에 대한 이름이라고 본댜 1996 년 9 월 2 일 忍/리처g드로티
서문
이 책에는 1972 년부터 1980 년 사이에 씌어진 논문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대체로 씌어진 순서에 따라 편집되었다 . 서론을 제의하면 , 수 록된 논문들은 모두 이미 발표된 것으로서 몇몇 자구의 수정을 거쳐 다시 출판된 것이다. 특별히 필요해 보이는 몇 군데의 각주에 서지 ( 書 誌 ) 사항을 보완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 책에 수록된 다른 논문 들을 가리키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논문이 애초에 씌어진 이후의 문헌들을 언급하기 위해 참고 문헌을 추가하지는 않았다 . 지금 니는 여기에 수록된 논문들에서 주장된 내용, 특히 1970 년대 초기에 씌어진 것들에 대해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또, 내용들이 충분히 일관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 편의 논문을 예외로 한다면, 수록된 논문들의 내용이 전반적으로는 여전히 옳다고 보기 때문에 다시 출판하였다. 예외가 될 논문은 3 번째 논문으로 하이데거와 듀이 에 관한 것이다. 이제 와서 보니 그 논문의 결론 부분에 나타난 하이 데거에 대한 내 견해가 지나치게 비공감적이라고 생각되지만, 앞부분 이 홍미로울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것을 수록하였다. 집필중인 하이데 거에 관한 책에서 훨씬더 균형잡히고 유용한 해석을 제공하게 되길 바란다 .이 기간중에 씌어진 다양한 다 른 논문 들, 성 격 상 논 쟁 적 이거나 전 문적인 것들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 책에 는 철 학에 문외한인 독자 들이 홍미로워할 논문 들 만을 포함시켰다. 그러한 논 문 들 을 쉽게 구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제안해 준 『 철학과 자연의 거울 』 의 많은 독 자들에게 감사한다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은 『철 학과 자연의 거울 』 에서 주마간산격으로 다루었던 많은 주제들에 대해 좀더 상세히 논 의하고 있다. 끝으로 원고를 다시 타자해 준 카바나 Pearl Cavanaug h , 리 틴스 Lee Rit ins , 로마노 Bunn y Romano, 겟슨A nn Gets o n, 빵요 ura Bell 에 게 감사하며, 편집에 도움을 준 벨레만 Dav i d Velleman 에 게도 감사 한다. 수록된 논문들의 출전은 다음과 같으며, 재출판을 허락해 준 해당 된 학술지나 잡지의 편집인과 출판인에게 특히 감사드린다. 논문 l( 「잘 잃어버린 세계」)은 1972 년 12 월 미국철학회 동부지회에 서 발표되 었으며, 아운 Bruce Aune 과 피스크 Milton F i sk 가 논평 하 였다 . 이 논문은 The Jou rnal of Phil o soph y, LXIX(1W2), 649-665 쪽에 수록되었다. 논문 2( 「철학의 순수화 :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에세이」)는 The Yale Revie w , LXV(1 CJ76 ), 336-356 쪽에 수록되 었다. 논문 3( 「전통의 극복: 하이데거와 듀이」)은 1 CJ7 4 년에 샌디에이고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개최된 하이데거 학술회에서 발표되었 으며, The Revie w of Met:a phys ic s , XXX:(1 976), 280-305 쪽에 수록 되었다. 논문 4( 「전문화된 철학과 초월주의 문화」)는 1976 년에 뉴욕 주립대 학교에서 주최한 철학 200 주년 심포지엄에서 발표되었다. 이 논문은 霜 Georgi a R evie w , XXX(l 罪 6), 757-769 쪽에 먼저 수록되었으며, 나중에 (<우아한 종합, 전문적 분석 그리고 초월주의 문화>라는 제목 으로) 카스 Pe t er Caws 가 엮은 200 주년 심포지엄 논문집 『미국 철학
2 세기 Two Gentr ie s of Phil o soph y in Amer i ca 』 (Ox fo rd: Blackwell, 1980), 228-239 쪽에 수록되었댜 논문 5(r 듀이의 형이상학」)는 존 듀이 재단이 주관하여 1975 년 버 몬트 대학교에서 개최된 듀이 철학에 대한 강연 시리즈 중 하나였 댜 이 논문은 칸 S t even M. Cahn 이 엮은 『 듀이철학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 New Stu d ie s in the Phil o soph y of Joh n Dew ey 』 (H anover, N. H.: Un ive rsit y Press of New Eng la nd, 1977), 45 - 74 쪽에 수록되 었댜 논문 6( 「글쓰기로서의 철학: 데리디에 관한 에세이」)은 New Lit er ary Hi st o r y , X( 19 78-1979), 141-160 쪽에 수록되 었다. 논문 7( 「픽션의 담론에 문제가 있는가?」)은 1979 년 배드 홈부르크 에서 개최된 제 10 회 시학 및 해석학 연구회 Arbe it s gruppe Poeti k und Hermeneuti k 세미 나를 위 해 씌 어 졌으며 , Funkti on en des Fie - tive n: Poeti k und Henneneuti k, X(Mun ich : Fin k Verlag, 1981) 에 수록되었다. 논문 8( 「 19 세기 관념론과 20 세기 텍스투얼리즘」)은 매체트 Ma t che tte 재단의 주관으로 1980 년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개최된 만델바움 Maur ice Mandelbaum 기 념 학회 를 위 해 씌 어 졌고, The Monis t , LXN(1981), 155-174 쪽에 수록되었댜 논문 9(r 실용주의, 상대주의, 비합리주의」)는 1979 년 미국철학회 동부 지회에서 행한 회장 연설문이며, 동학회지 Proceed i n gs oft he A meri - mn Phil o sop h ic a l Assoc iat i on , LII (19 80), 719-738 쪽에 수록되 었다. 논문 10( 「회의론에 대한 카벨의 견해」)은 The Revie w of Meta - physi c s , XXXN(1980-1981), 759-774 쪽에 수록되 었다. 논문 l l( r 방법, 사회과학, 사회적 희망」)은 1980 년 <가치와 사회과 학>을 주제로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개최된 학회에 서 발표한 논문을 수정한 것이다. 애초의 발표문은 하안 Norman Hahn, 벨라 Robe rt Bellah, 레인보우 Paul Rai nbow 가 편집한 『가치
와 사회 과학 Values and the Soc ial Sc i ences 』 에 < 방법 론과 도덕 >이 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것이며 , 수정본은 The Cm1adia n Jou mal of Phil oso p hy , XI(l981) , 569-588 쪽에 수록되 었다 논문 12( 「오늘날 미국에서의 철학」)는 1981 년 미국철학회 서부지회 연례 모임에서 < 철학의 본질과 장래 > 라는 주제로 매킨타이어 Ala sdai r MacIn ty re 와 함께 발표하였던 것이다. 또 스탠포드 대학교의 인문학 센터가 주관한 <1980 년대의 인문학: 쟁점들에 대한 토론 > 이 라는 강연 시리즈 중의 하나였댜 이 논문은(독일어로 번역되어) Analys e und Kr itik(1 981 ) 에 수록되 었고, The Americ a n Scholar (1 982 년)에 수록되 었다.
차례
한국어판 서문/ 5서문/ 15일러두기서론: 실용주의와 철학 211 잘 잃어버린 세계 772 철학의 순수화: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에세이 1033 전통의 극복 : 하이데거와 듀이 1334 전문화된 철학과 초월주의 문화 1715 듀이의 형이상학 1896 글쓰기로서의 철학: 데리다에 관한 에세이 2177 픽션의 담론에 문제가 있는가? 2518 19세기 관념론과 20세기 텍스투얼리즘 3019 실용주의, 상대주의, 비합리주의 33510 회의론에 대한 카벨의 견해 36111 방법, 사회과학, 사회적 희망 38712 오늘날 미국에서의 철학 419옮긴이 해제 449이름 색인 495일러두기 ► 전문 용어는 가급적 관행으로 굳어진 바 를 따르고자 하였으나, 새로 운 용어를 택하거나 혼동이 우려된 경우에는 원어 를 병기하였다. ► 인물에 대한 설명은 책 전체에서 처음 나오는 경우로 한정하였으며, 영문 표기는 각 장별로 처음 나오는 곳에 국한시켰다. ► 고딕체로 표시된 것은 저자가 비판하는 정초주의적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대문자로 표시하는 것에 해당된다. 따라서 가령 진리는 정초주 의적 개념을, <진리>는 반정초주의적 개념을 가리킨다. ► 본문 중의 인용 구절이나 강조는 모두 < >로 표시하였으며, 인용문 내의 재강조는 <‘ '>로 표시하였다. 또, 원문에 대한 보충, 오식의 교정, 역자의 간단한 설명 등은 모두 [ ] 속에 넣어 표기하였다. ► 보충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원저의 각주와 나란히 역주를 붙여 (역 주)라고 표기하였으나, 편집상 역주의 순서를 별도로 부여하지 않고 원래의 각주 번호 속에 삽입하였다. 따라서 각주의 번호가 원저와 다른 경우도종종 있다
서론: 실용주의와 철학
1 플라톤주의자, 실증주의자 그리고 실용주의자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실용주의 진리론에서 도출된 결과들을 담 고 있다 . 실용주의에서는, 진리는 철학적으로 어떤 홍미로운 이론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댜 실용주의자들에게 <진리>란 참된 모든 진술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하나의 속성에 불과하다. 그것 은 <베이컨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쓰지 않았다> <어제 비가 왔 다>것, 유태인들이 마사다 masad 값 에서 옥쇄한 것 등 - ~ 이 공통적으 로 지닌 특징에 대해 논란이 분분할 때 그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과같다 .
2) 기원후 70 년경 예루살렘 함락 후 1 천여 명의 유태인들이 1 만 5 천여 명의 로마 군에 맞서 2 년여 동안 끝까지 항쟁하다 옥쇄한 사해 남동부에 있는 고대의 산 상 요새지.(역주)
실용주의자들은 그러한 행위들이 각 상황에 따라 실천해야 할 선 한 행위라고 보지만, 그러한 행위들을 모두 선하게 만드는 것에 관한 일반적이고도 유익한 논의가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의아하게 생각한 댜 한 문장을 주장하는 일은(혹은 그 문장을 주장하기 위해 요구되는 어떤 태도를 취하거나, 어떤 신념을 의도적으로 견지하~즌 일은) 특정한 상황에서 정당화될 수 있으며 칭찬받을 수 있는 행위이다. 하지만 그 렇다고 해서, 그와 같은 행위를 모두 선하게 만드는 것(그런 주장을 하기 위해 습득해야 하는 특정한 태도나, 그 모든 문장에 공통적인 어떤 특징)에 대한 일반적이고도 유익한 논의가 가능할 것으로 보지는 않 는다. 실용주의자들은 진리나 선을 추출해 내거나 <참이다> 혹은 < 선 하다>라는 용어를 정의하려는 시도들의 역사적 발자취를 볼 때, 그 런 시도가 홍미로운 어떤 일을 해낼 수 없을 거라는 의구심을 갖는 다 . 물론, 실제 역사는 달리 진행되었을 수도 있다. 괴상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힘>의 본질이나 <수(數)>의 정의 따위에 대해 논의하는 걸 홍미롭게 여겨왔댜 그래서 진리의 본질에 대한 논의에서도 무언 가 홍미로운 걸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 였다. 그런 시도와 그것에 대한 비판의 역사는 우리가 <철학>이라고 부르는 문예의 한 장르, 플라톤에 의해 설립된 장르의 역사와 대체로 합치된다 . 그래서 실용주의자들은 플라톤적인 전통은 그 유용성이 소 진되었다고 본다. 이 말이 폴라톤적인 물음에 대해 실용주의자들이 새롭고 비폴라톤
적인 어떤 대답을 갖고 있다는 말은 아니댜 오히려 이 말은 실용주 의자들이 그러한 물음을 더 이상 제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는 걸 의미한다 진리나 선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실용주의자들이 제안할 때, 그들은 < 진리나 선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 라는 식으로 말해서 실재나 지식 혹은 인간의 본질 에 관해 어떤 이론을 개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또, 진리나 선에 관해 < 현실주의적 > 이거나 < 주관주의적 > 인 이론을 피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실용주의자들은 다만 논의의 주제를 바꾸고 싶어한다. 그들은 신의 본성이나 신의 의지에 관한 탐구가 우리에게 도움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세속주의자와 홉 사한 처지에 놓여 있다. 그와 같 은 세속주의자는 엄밀하게 말해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 는 건 아니댜 그 들 은 신의 존재를 확증한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불 분명하다고 느끼는 것이며, 그것을 부정하는 데에 대해서도 마찬가 지로 의미를 찾지 못한댜 그렇다고 그들이 신에 대해 어떤 특별하고 우스꽝 스 럽고 이단 적 인 견해 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다만 우리가 계속해서 신학의 어휘를 사용해야 하는가를 의심하고 있을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실용주의자들은 비철학적인 언어를 사용해 반 철 학적( 反哲學 的)인 논점들을 제기하고자 애쓰고 있다. 왜냐하면 그 들 은 하나의 딜레마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의 언어가 너 무 비 철 학적이고 너무 < 문예적 > 이게 되면, 그들은 주제를 변경하고 있다고 비난받게 될 것이다. 반면에, 만일 그들의 언어가 너무 철학 적이면, 플 라톤적인 가정들을 내포하게 되어 실용주의자들이 도달코 자 하는 결론을 진술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 이 모든 일들은 < 진리>나 <선 > 이라는 용어처럼 <철학>이라는 용어가 애매하다는 사실로 인해 더 복잡하게 된다. 소문자로 표기될 경우 <진리 > 나 <선>은 문장이나 행위 또는 상황의 속성들을 가리 킨다. 반면에 고딕으로 표기될 경우[원문: <대문자로 표기될 경우>], 그 용어들은 특정한 대상, 즉 사람들이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사랑
하는 목표나, 표준이나, 궁극적 관심의 대상에 대한 이 름 이 된다. 마 찬가지로, <철학> 이라는 용어도 소문자로 표기되면, 셀라즈 W i l fri d Sellars 가 <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사물들이 지닌 가장 넓은 의미에 서의 연관성을 밝히려는 시도 > 라고 부론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예컨 대, 아테네 사람들은 < 바인간적인 것을 배제하고 철학한다p h i l®_ ph ein aneu malal< :i as > 고 페리클레스 Pe ri cles 가 그들을 찬양할 때, 철학이란 용어를 그런 의미로 사용하였댜 이런 뜻에서 보면 불레이 크 (W i ll i am Blal<:e, 1757-18 '27)는 피 히 테 (Jo hann Go 떠i eb Fic h te , 1762-1814) 못지 않은 철학자이며, 아담스 (He nry Adams, 1838-1918) 는 프레게 (Go 杖 lob Freg e, 1848-1925) 보다 더 철학자이었다. 철학이란 용어를 이런 의미로 쓴다면 누구도 애매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이란 용어는 더 전문화된 어떤 것을 가리키기도 하며, 애매하기 짝이 없다. 이와 같은 제 2 의 의미에서 철학이란 용어는 플 라톤이나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 의 전철을 밟음으로써 특 정의 규범에 더 잘 따르려는 희망에서 예컨대 < 진리 > < 합리성> <선> 따위의 규범적 개념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묻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진리 Tru t h 나 선 Goodness 또는 합리성 Ra ti onal ity에 관해 더 많은 앎울 가짐으로써 더 많은 진리를 믿거나 더 많은 선을 행하 거나 더 많이 합리적일 수 있다는 발상이다. 이처럼 제 2 의 의미로 <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에는 철학, 진리, 선, 합리성 등이 상 호 연관된 플라톤적인 관념임을 보이기 위해 고딕으로 사용하기로 하겠다. 실용주의자들은 철학을 위한 최선의 바람은 철학을 실천하지 않는 거라고 말한다. 그들은 진리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진리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잘 행위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고, 합리성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합 리적이 되는 데 도움울 주지 않는다고 본다 . 그렇지만, 실용주의에 대한 지금까지의 서술은 한 가지 중요한 구 분을 빼놓았댜 철학 내에서는 진리의 본성에 관해 (플리톤이 그렇게
표현하였 듯 이) 신과 거인의 싸움에 비견되는 오랜 견해차가 존재해 왔다. 한편에는 커다란 희망을 가진 매우 피안적( 彼岸 的)인 사람들, 플라톤 자신과 같은 철학자 들 이 있어왔다. 그 들 은 인간은 두 다리 중 하나 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놓아둘 수 있으므로 자긍심을 지닐만 한 존재라고 갈파하였댜 다른 한편에는 ( 플 라톤아 오 직 피안의 세계 에서만 성립된다고 보았던 수학적 법칙들에 의해 시 ·공간적 사건들이 어떻게 설 명될 수 있는지 를 갈릴레오가 보여주고 난 후에는 더욱더) 시 간과 공 간 만이 실재를 형성하며 진리란 < 바로 그와 같은 > 실재와의 일치 대응이라고 주창하는 철학자들 , 예컨대 홉스 (Thomas Hobbes, 1588-1679) 나 마르크스 (Karl Marx, 1818- 18 83) 등이 있어 왔댜 19 세 기에 이러한 대립은 < 초월주의 철학자 > 대 < 경험주의 철학자>로 혹 은 <플 라톤주의자 > 대 < 실증주의자 > 로 압축되어 나타났다. 그 용어들은 그 당시에도 매우 애매한 것이었으나, 지성인들은 그 두 갈래의 움직임과 연관하여 자신이 어느 위치에 처해 있는지롤 대 충은 알고 있었댜 초월주의 쪽에 선다는 건 자연과학이 최종적인 것 이 아니며 더 발견해 낼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경험주의 쪽에 기운다는 건 자연과학, 즉 시 • 공간에서 사물들이 어떻게 작동 하느냐에 관한 사실이 모든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헤겔 (G. W. Heg el , 1770 - 1831) 이나 그린(J ohn R. Green, 1837 - 1883) 의 편에 선 다는 건 합리성이나 선에 관한 규범적인 문장들이 자연과학에는 포 착되지 않는 어떤 실재와 대응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콩트 (Aug u ste Comt e, 1798 - 1857) 나 마하(E rns t Mach, 1 8.38 -1916) 의 편 에 선다는 건 그러한 문장들은 시 • 공간적 사건에 관한 문장으로 < 환원 > 되거나 아니면 심각한 고려의 대상도 못 된다고 생각하는 것 이었다 . 경험주의 철학자들, 즉 실증주의자들도 여전히 철학을 계속하고 있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과 거인, 폴라톤과 데모크 리토스 Democri tus, 칸트와 밀(J. S. M 비, 1806-l'iS1 3 ), 후설 (Edmund
Husserl, 18.5 9 一 1938) 과 러 셀(B e rtr and Russell, 1872 - 1970) 을 한데 묶어주는 플라톤적인 전제 조건은 평범한 사람 들 이 < 진리 > 라고 부 르는 것 , 즉 참된 진술 들 의 집합체는 하부와 상부로 나누어져 (플라 톤의 용어에 의하면) 단순한 의견과 참된 지식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는 것이댜 예컨대 < 어제 비가 왔다 > 라는 진술과 < 인간은 정의롭게 행동해야 한다 > 라는 진술 사이에 차별적인 구분을 수립하는 것이 철 학자의 일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전자와 같은 진술은 2 류이며 억 측pi s ti s 이나 억견에8 見, doxa) 에 불과하였다. 후자는 아직 진지( 眞 知, ep i s t eme) 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그 후보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홉스 에서 카르납(R udol f Carnap, 1891-l CJ? O) 으로 이어지는 실증주의적 전통에서 전자와 같은 문장은 진리가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범형(範型)이었으나, 후자와 같은 것은 특정한 사건의 인과 적 결과에 대한 예측이거나 아니면 <정서를 표현한 것 > 이었다. 초월 주의 철학자들이 정신적인 것이라고 보았던 것을 경험주의 철학자들 은 정서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경험주의 철학지들이 실재의 본질을 발견하는 자연과학의 성취라고 여긴 것을 초월주의 철학자들은 궁극 적 진리와는 무관한 진리, 실제적인 것으로 보았다. 실용주의는 진리에 차별적 구분이 있어야 한다는 공통의 전제를 의문시하고 초월주의와 경험주의가 내세운 구별을 타파한다 . 실용주 의자에게 참된 문장은 그것이 실재와 대응되기 때문이 아니다 . 그래 서 설령 실재가 있다고 하더라도 한 문장에 대응되는 실재가 어떤 것인지, 그 문장을 참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일단 결정한 다음에는 그 행위를 옳은 것으로 만드는 실재의 존재 여부를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 가지로) 실용주의자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어떤 것이 도덕적 판단 을 참이게 만든다고 생각했던 플라톤이나 칸트가 옳았는지를 염려할 필요가 없고, 그러한 초시공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도덕적 판 단이 <순전히 정서적인 표현>이나 <순전히 규약적인 것> 혹은
< 순전히 주관적인 것>임을 뜻하게 된다고 염려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무관심 때문에 실용주의자는 두 유형의 철학자들 양쪽에서 비난의 대상이 된다. 플라톤주의자는 실용주의자를 단지 애매한 태도 를 취하는 실증주의자로 여긴다. 실증주의자는 실용주의자가 객관적 진리, 즉 < 과학적 방법 > 에 의해 얻어진 참된 문장과 과학적 방법만 이 제공할 수 있는 < 실재와의 대응성>을 갖추지 못한 문장 사이의 구분을 흐리게 하여 플라톤주의를 도와주고 편안하게 해준다고 본다. 양측은 실용주의자가 철학자가 아니라는 이유에서 진정한 철학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점에 의기투합한다 . 반면에 실용주의자는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여, 철학에 반대하면서도 철학자가 될 수 있으며, 플라 톤주의자들과 실증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에서 한걸음 물러나 사물의 연관성을 파악하여 , 철학의 전제 조건들을 포기하는 것이 최선의 길 이라고 말한댜 따라서, 실용주의자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처하는 난 점 중 하니는 근본적으로 반(反)플라톤주의적인 관점이 무엇인가에 대해 실증주의자와 싸워야 한다는 점이다. 실용주의자는 플라톤주의 를 공격하되 실증주의자와는 다른 무기로 공격하고자 한다. 하지만 언뜻 보면 실용주의자는 마치 실증주의의 변형인 것처럼 보인다 . 그 는 지식이란 힘이며 실재에 대처해 가는 하나의 도구라는 베이컨적 이며 홉스적인 관념을 실증주의자와 공유한다. 그렇지만, 그는 실증 주의자와는 달리 베이컨적인 그 관점을 극단으로 몰고 간다. 그는 진 리가 실재와의 대응이라는 관념 자체를 몽땅 빼내버린다. 그래서 그 는 근대의 과학은 무엇에 대응되기 때문에 우리가 대처하는· 걸 도와 주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가 대처하게 해줄 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견해를 지지하기 위한 그의 논변은 (사고가 사물에 대응되든 언어가 사물에 대응되든) <대응>이라는 관념의 의미를 홍미롭게 하려던 수 백 년 동안의 노력들이 실패해 왔다는 논변이다. 이처럼 실망스러운 역사의 교훈을 실용주의자는, <참된 문장은 사물들과 대응되기 때문
에 잘 작동한다>는 주장은 <그것은 도덕 법칙 을 따 르기 때문에 옳 다 > 라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 우리에게 해명해 주는 바가 없다고 본 댜 실용주의자의 눈에는 그 두 주장은 모두 (성공적 인 탐구자나 행위 자에게 주는 수사학적 칭찬처럼 해 롭 지 는 않으나, 일단 진지하게 받아 들여져서 철 학적으로 < 해명된 > 것이 되고 나면 골 칫거리인) 공 허한 형이상학적 찬사로 보인다 2 실용주의와현대 철학 통상 많은 현대 철학자들에게 실용주의는 한물간 철학 사조, 금세 기 초 매우 편협한 분위기에서 융성하였다가 이제는 반박되었거나 지양(止 揚 )된 철학 운동쯤으로 여겨진다. 제임스 (W illi am Jam es, 1842-1916) 와 듀이(J ohn Dewey, 18.5 9 -1952) 등 위대한 실용주의자 들은 (예컨대 전통적 교육관에 대한 듀이의 비판과 형이상학적인 사이 비(似而非) 문제에 대한 제임스의 비판처럼) 플라톤주의에 대한 그 들의 바판 때문에 이따금씩 칭찬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반플 라톤주의적 사상은, 분석철학자들의 눈에는 충분히 엄밀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비분석철학자들의 눈에는 충분히 본격적이지 못했던 것이 라고 간주된댜 논리실증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분석철학의 전통에 서 본다면, <초월적>이며 준( t信 )플라톤주의적 철학에 대한 실용주의 자들의 공격은 <의미>나 <진리 > 와 같은 개념에 대한 좀더 사려 깊 고 세밀한 분석을 거쳐 세련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 3) 또한, 19 세기 의 양대 철학 사조, 즉 초월주의와 실증주의에 대한 니체 (F ri e dri ch Nie t z s che, 1844-1900) 의 비판에 그 시발점을 두고 있는 현대 프랑스 3) A J. Ay er , The Or igins of Pragm atism (San Franci sc o: Freeman, Coope r. , 1968) 은 이 논점에 관한 좋 은 예이다.
와 독일의 반( 反 )철학적 전통에서 본다면, 미국의 실용주의자들은 진 정으로 실증주의 를 탈각하지 못하여 철학을 벗어나지 못한 사상가들 이기 때문이댜 이와 같은 경멸적인 태도는 어느 쪽이나 다 정당하지 못하다고 나 는 생각한댜 내가 『 철학과 자연의 거울 』 51 에서 다룬 바 있는 최근의 분석철학에 대한 설명에 의하면, 분석철학의 역사는 애초의 논리실증 주의적 교의를 점차 <실용주의화>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집필중인 하이데거에 관한 책 61 에서 보여주기를 바라는 최근의 <대륙 철학 > 에 대한 설명에 의하면, 제임스와 니체는 19 세기의 사상에 대 해 홉사한 비판을 제기한다. 게다가 둘 중 제임스의 비판이 더 바람 직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이데거 (M arti n Heid e g ge r, 1889-1ITT6) 가 니체를 비판하고 또 마찬가지 이유에서 데리다(J ac q ues Derr ida , 1930-) 가 하이데거를 비판한 것, 즉 <형이상학적>인 요소를 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7 1 내 견해에 의하면, 제임스와 듀이는 분석철학이 거 쳤던 변증법적 여정의 종착지에 미리 가서 기다렸을 뿐만 아니라 예 컨대 푸코(Mi chel Foucault, 1926-1983) 나 들뢰즈 G il es Deleuze 가 지 금 여행하고 있는 길의 끝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 .81 4)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는 하버마스가 그의 저서 『지식과 관심 Knowled g e and Human In t eres t 』 (Bos t on : Beacon Press, 1968) 에서 퍼스 Pe ir ce 를 비판한 것 (제 6 장 특히 135 쪽)과 이 책의 논문 3 의 각주 76) 에 인용된 하이데거의 글을 볼것 . 5) Rich ard Rort y, Phil o soph y and the Mi rr or of Natu re (P rinc eto n : Pri nc eto n Un ive rsity Press, 1 언 9). 6) 캠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 발간하는 <근대 유럽 철학> 시리즈로 근간될 예 정이다(역주: 그러나 로티가 약속했던 그 책은 그 시리즈로 출판되지 않았다. 그가 언급한 것과 흡사한 내용을 담은 책으로는 그로부터 약 9 년이 지나 출판 된 『하이데거와 그 밖의 사상가들에 대한 논문집 Es say s on Heid e g ge r and oth e rs: Phil os op h ir o l pape rs volume 2 』 (Camb ri d g e: Cambri dge Un ive r-sity Press, 1991) 이 있다) . 7) 이 주장에 대한 상론은 이 책에 수록된 논문 6 과 8 을 볼 것 . 8) 이 책의 논문 11 중 마지막 소절을 볼 것
나는 분석철학이 콰인 (W . V. Quine , 1908 -) , 후기 바트겐슈타인 (Ludw ig W ittge nste i n , 1889- 1 952), 셀라 즈, 데이바 슨 (D onald Da- vid s on, 1917 一 )에서 절 정에 이르러 끝장이 났다고 , 바꿔 말해서 분 석철학은 자기 초월을 거쳐 스스로 를 폐기하였다고 생각한다 . 이 사 상가들은 의미성과 실용성 , 분석성과 종합성, 언어와 경험, 이 론 과 관 찰 사이의 실증주의적인 구분을 성공 적 으로 또 온당하게 완화시켰다. 특히 개념 체계와 내용의 구분에 대한 데이비슨의 공격 9) 은 비트겐슈 타인이 그 자신의 저서 『 논리철학 논고 』 를 조롱하였던 것, 카 르 납에 대한 콰인의 비판 그리고 < 소여의 신화 > 에 대한 셀라즈의 공격을 요약 • 종합하고 있다. 데이비슨의 전체론 ho li sm 과 정합설 coherence th eo ry은 (참된 문장들을 상부와 하부로 구분해 실재와 대응되는 것과 단지 관례나 규약에 의해 < 참 > 안 것으로 보는 , 철학의 주요 전제 들 을 일단 포기하고 나면) 언어가 어떻게 보이는가 를 밝혀준다 . 10) 데이비슨식으로 언어를 보면 데카르트적 인식론의 전통에서처럼 언어룰 실체화하는 걸 피하게 해주며 , 칸트의 경우처럼 사고를 실체 화한 바탕 위에 구축한 관념론적인 전통도 피하게 해준다. 그 견해는 언어가 주관과 객관 사이의 제 3 중간물도 아니며, 실재의 그림을 그려 내기 위한 매개물도 아니라, 인간 행위의 한 부분으로 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 이에 따르면 문장을 발언하는 것은 사람들이 환경에 대처 하기 위해 행하는 여러 일들 중 하나이다. 언어는 그림이 아니라 도 구라는 듀이식의 개념은 그 자체로는 올바르다. 하지만, 그 비유가 9) Donald Davi ds on, On the Very Idea of a Concep tua l Scheme, Proceedin g s and Addresses of the Ameri ca n Phil o sop h ia il A ssoci at i on , 47 (1얽 3 - 1974), pp. 5-20 를 참조 이 책의 논문 l 과, 『철 학과 자연의 거 울 』 제 6 장 그리고 『선험적 논증, 자기 지시 그리고 실용주의 Transcenden ta l Argu - ment, Self -R efe r ence and Prag ma ti sm 」 (Transcendenta l Argu me nts and Sc ien ce, eds. P. Bie r i, R.-P . Horstm a nn and L. Kri.ige r(D o rdrecht, Reid e l, 1979), pp. 77-103) 에서 데이비슨에 대한 나의 논의 를 참조 10) 이 구분에 대한 상론은 이 책의 논문 7 중 제 6 절 을 참조
도구인 언어를 사용자로부터 분리시킬 수도 있다고 암시하거나, 우리 가 목적한 바에 <적 합 > 한지 아닌지를 따져볼 대상이라고 암시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댜 이 두 암시 중 후자는 언어 를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하기 위해 언어로부터 벗어날 모종의 길이 있다는 걸 전제한다 . 그러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세계나 목적을 생각할 수 있는 길이란 없댜 신체를 발육, 강화, 신장시키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단련할 수 있듯이, 언어를 비판하고 확장시키기 위해 언어를 사용할 수는 있다 . 그렇지만, 언어가 거기에 적용되며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하나의 수 단인 무엇과 관계지어진 전체-로서의-언어란 없다. 예술과 과학과 철학이 자기 반성을 하거나 통합하는 것은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은 확장이나 강화의 과정이다. 반면에 이 견해에 의하면, 어떤 것이 특 정한 문장을 진리로 < 만들고> 행위나 태도를 선하게 혹은 합리적으 로 < 만든다>고 주장하여 , < 언어가 세계와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 지>를 밝히려는 시도, 즉 철학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우리들의 피부 바깥으로 나가서, 죽 우리가 생각하고 자기 비판을 하는 언어적 전통이나 그 밖의 전통의 바깥으로 나가서, 우리 자신들을 절대적인 어떤 것과 비교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된 문 장들을 두 종류로 나눈 애초의 플라톤적인 구분은 살아가는 시대와 장소의 유한성이나 < 순전히 규약적>이며 우연적인 삶의 국면들을 벗어나고자 하는 플라톤적 충동에서 빚어진 것이다. 그러한 구분을 공격함으로써 전체론적이며 <실용주의화>하는 분석철학의 경향은, 애매한 화이트해드주의자White hea di ans 와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과 학적 실재론>에 공통된, 형이상학적 충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게 해주었다. 또한 분석철학의 그러한 경향은 어떤 특정한 과학(예 컨대 물리학)이나 특정한 문예 장르(예컨대 낭만주의 시나 초월주의 철학)가 <단순한 의미에서의> 참된 문장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의 편린울 제공해 준다는 아이디어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해주었다. 그런 문장들이 실제로 매우 유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유
용성에 대한 철학적 설명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설명이 있다면 그것 은 그 문장에 대한 애초의 정당화와 마찬가지로 한정된 것, 그 문장 을 동일하거나 상이한 어휘로 달리 표현된 문장과 비교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 비교는 예컨대 물리학자나 시인 그리고 어쩌면 철학자 의 일일 수 있겠지만, (언어나 사고의 유용성, 기능, 형이상학적 지위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전문가라는) 철학자의 일은 아니다. 문장의 종류 구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셀라즈_콰인」계이비슨의 공격은 언어의 편재성(通在性)을 고집하는 반폴라톤주의자를 거들어 주는 분석철학의 특별한 공헌이다. 그 고집은 실용주의나 최근의 <대륙철학>에 공통된 특징이다. 몇 가지 예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사람이 낱말를 만들며 낱말은 그 사람이 부여하지 않는 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직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오로 지 낱말이나 그 밖의 외적인 상징에 의해서만 생각할 수 있으므로, 상황 은 역전되어 이렇게 얘기될 수 있다: 당신은 우리가 가르치지 않았던 것 을 의미할 수 없으며, 따라서 어떤 낱말을 당신 생각의 해석물로 내뱉을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이 사용하는 낱말이나 기호는 그 사람 자신이다. ……그러므로, 나의 언어는 나 자신의 총합이다. 인간이란 바로 그의 사고 이기 때문이다.(퍼스)) 퍼스는 내가 선험적 기의(t he tran scendenta l sig nified , 先驗的 記 意)의 해체라고 불렀던 방향, 이 기호에서 저 기호로 옮겨지는 지시라는 것을 확실히 마감시키는 그 방향으로 더 멀리 나아간다.(데리다 )1 2 1 11) Collecte d Pape rs of Crarles Sanders Peir c e, eds. Charles Ha rtsh orne, Paul Weis s and Arthu r Burks(Cambri dge , Mass.: Harvard Un ive rsit y Press, 1933-1958), 5.313-314. 12) Jac qu es Den ida , Of Gra mm:itol og y(Ba ltir no re: The Joh ns Hop kins Un ive r-sity Press, 1C576), p. 49.
… … < 심리 학적 명목론 > 에 따 르 면 , 종 류 , 유사성 , 사실 등에 관한 < 모 든> 인지 , 요컨대 추 상 적 단위체에 대한 모 든 인지 ― ~실제로 개별자에 대한 모 든 인지조차도―― -는 언어적 사태이다.( 셀 라 즈 ) 대 오직 언어 를 통해서만 우리는 어떤 것 으로 어떤 것 을 의미할 수 있다 . (비 트겐슈타인 ) I II 인간의 경험은 본 질상 언어적이다.(가다머 )1 5) ……언어라는 존재가 우리의 지평 위에 과거보다 더 밝게 빛날 때 인 간은 점점 소멸되어 간다.(푸코 )1 61 언어에 관해 말하는 것은 거의 불가피하게 언어를 대상화하며 …… 그 렇게 되면 언어의 실재성은 사라져버리고 만다.(하이데거 )1 71 그렇지만 이 같은 합창이 언어에 대해 새롭거나 홍미를 유발시킬 만큼 획기적인 어떤 발견이 최근에 이루어졌다는 생각, 예컨대 예전 보다 지금 더 널리 퍼져 있다는 등의 생각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인용된 저자들은 오직 < 부정적인 > 논점들만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언어의 이면( 裏 面)에 파고들어가서 언어를 < 근거 > 짓는 것 , 언어가 13) Wi lfr i d Sellars, Sc ien ce, Percept ion and Reality (L ondon: Routl ed g e and Kega n Paul, 1967), p. 160. 14) Ludw ig Wi ttge nste in , Phil oso ph ia z l Investig ation s(New York: Macm il- Ian, 1953), p. 18. 15) Hans-G eorg Gadarner, Phil os oph ia z l Hermeneuti cs
< 표 현 > 하는 것, 언어가 그것 에 < 부합 > 되기 를 바라 는 무 엇 을 캐내 고자 하였던 시도 들 은 먹혀 들 지 않았다고 말 하 고 있다. 특 정 한 문 화 가 말했던 방식이나 말하고 있 는 방식에 선행하며 독 립 적 인 < 사고의 자연적 시원 > 을 찾 으려던 입 장 에서 검 토 된 모 든 다양한 후 보가 실 패 하고 남겨놓은 빈자리 로 언어의 편재성은 옮겨가고 있댜 ( < 사고의 자연적 시원 > 의 후보에 는 명석판명한 관념 , 감 각 소여, 순수 오성의 범 주 , 선언어적 의식 구조 등 이 포 함된다.) 퍼스, 셀 라 즈 , 비 트 겐 슈 타인은 해석의 뒷걸음질t he reg re ss of i n t erp re tati on 은 데카 르 트식 인식론 이 당연시하는 < 직관 > 따위에 의해 단절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가다머와 데리다는 그러한 뒷걸음질을 단절하고 우연성과 규약으로 부터 우리를 구출하여 진리에 도달하게 해주는 < 선험적 기의 > 라는 관념에 의해 우리 문화가 지배되어 왔다고 말하고 있다. 푸코는 인간 이란 단지 시대와 장소에 국한된 어휘보다는 실재 자체의 언어 를 사 용하는 < 이중성(영혼 혹은 선험적 자아) > 을 지닌 존재로 보는 철학적 전통이 제공하는 < 형이상학적 위안 > 에 대한 신뢰 를 우리가 점차 잃 어가고 있다고 말해 준다 . 끝으로 , 하이데거는 만일 언어 를 철학적 탐 구의 새로운 주제로 설정하게 된다면 존재나 사유에 대해 제기하곤 하였던 절망적인 낡은 철학적 수수께끼들을 재탕하게 될 거라고 경 고하고 있다 . 이 마지막 논점은 베르그만 Gus ta v Ber g mann 이 < 언어적 전회 lin g u ist ic turn>라고 명명한 것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이 파악하였듯이) < 경험>이나 <의식 > 에 관해 칸트처럼 말하되 그와는 달리 심리학자 들의 텃밭을 지나지 않고도 칸트식의 물음을 묻게 해주는 것으로 파 악하면 안 된다는 말에 해당된다 . 실제로 < 언어적 전회 > 의 애초 모 티브는 그와 같은 것이었다 .1 81 그러나 (앞에서 인용한 저자들의 전체론 18) 프레게의 신( 新 )칸트적이며 반( 反 )자연주의적인 모티브에 대한 논의는 Hans Slug a , Freg e( London: Routl ed g e and keg a n Paul, 1980) 의 서 론 과 제 1 장을 볼것.
과 실 용 주 의 덕택에) 언어에 관한 분석철 학은 그와 같은 칸트식의 모 티브 를 넘어서서 언어에 대해 자연주의적이며 행동주의 적 인 태도 를 체택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러한 태도는 언어에 관해 분석철학이, 니 체나 하이데거에서 보 듯 전통적인 칸트식 문제 설정에 대항하는, < 대륙 철 학 > 의 반응과 동일한 결과에 도달하게 해주었다. 이런 수렴 현상은 분석철학을 완고한 심성의 실증주의에, < 대륙철학 > 을 부드 러운 심성의 플라톤주의에 견주어보는 전통적안 연상법이 < 완전히 > 잘못된 것임을 밝혀준다 . 분석철학의 실용주의화는 논리실증주의자 들 의 바람을 만족시켜 주기는 하였으나 그들이 상상했던 형태로 된 건 아니다 분석 철 학의 실용주의화는 철학이 < 과학화 > 되는 방도를 찾 아낸 것이 아니라 철학을 한컨에 치워둘 방도를 찾아내었다. 이렇 게 해서 탈실증주의적인 분석철학은, 플라톤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시 작하여 철학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종결되는, 니체-하이데거-데리다 의 전통과 흡사하게 되었댜 두 전통은 이제 자체의 위상을 묻는 시 기에 처해 있댜 두 전통 모두 한편으로는 거부된 과거와 다른 한편 으로는 어렴풋이 보이는 탈철학의 미래 사이를 살고 있다 . 3 실재론자의 반격(I) : 기술적 실재론 Techn i cal Realis m 탈철학적 문화는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 보기 전에, 작금의 철학적 상황에 대한 나의 서술이 의도적으로 매우 단순화된 것임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한다. 지금까지 나는 실용주의에 대한 반발을 무시해 왔 다 . 내가 스케치한 그림은 10 년 전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적어도 낙 관적인 실용주의자에게 어떻게 비쳤는지를 보여준다. 그후 10 여 년 동안 도버 해협의 양쪽에서는 (<반실용주의>와 같은 뜻을 갖게 되어 버린 용어인) <실재론>을 지지하는 쪽의 반격이 있어왔다 . 그 반격 은 다음 세 가지 뚜렷한 모티브를 지녔다. (1) 언어철학에서 이루어
진 최근의 기 술 적( 技術的 ) 발전은 < 진리대응 설> 에 대한 전통적 실 용주의자의 비판에 의문 을 제기하였으며, 실 용주의자가 자신의 견해 를 피력하기 전에 최소한 몇 가지 까다롭고도 기 술 적인 물음에 답변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는 견해 (2) 전통적이며 교과서적인 <철 학 적 문제들 > 이 지닌 < 심오성 > 과 인간적 의의가 과소평가되었으며, 실용주의자들은 사이비 문제와 진짜 문제 들 을 한꺼번에 싸잡아서 < 해소 > 라는 무책임한 난장판 속에 내다버렸다는 의미. (3) 만일 자 율적인 학문 분야로서의 철학 , 즉 하나의 전문 학과 Fae 距로서의 철학 이 (신학이 그렇게 되었던 것처럼) 문화에서 사라지게 된다면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는 의미. 이중 세번째의 모티브, 즉 만일 철학은 존재하나 철학은 없어지고 만다면 어떤 일이 발생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은 순전히 실직을 걱 정하는 전문가들의 반격만은 아니다. 그것은 철학이 없는 문화란 인 간의 소중한 능력이 사용되지 않은 채 방치되며 중요한 인간적 덕목 이 더 이상 구현되지 못하는 < 불합리한 일 > 이라는 확신이다. 프랑스 와 독일의 많은 철학 교수들과 영국과 미국의 많은 분석 철 학자들은 이 모티브를 공유하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의 철학 교수들은 하이데 거의 유산이었던 <서구의 현전( 現前 )의 형이상학 > 에 대한 문학적, 역사적 <해체 작업 > 의 끝없는 되풀이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하고 싶어할 것이다. 영 • 미의 분석철학자들은 초기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정신 , 즉 철학은 명확히 진술된 문제에 대한 끈기 있고 엄밀하며 가 급적 협동 작업을 통해 누적된 <결과 > 라는 (후기 비트겐슈타인보다 는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 특징적인) 그 정신을 되찾고 싶어할 것이 다. 그래서 대륙의 철학 교수들은 분석철학 특히 철학적 문제를 심각 하게 취급하는 <실재론자>인 분석철학자들을 동경하고 있다 . 이와 는 거꾸로, 대륙철학 이를테면 니체, 하이데거 , 데리다, 가다머, 푸코 에 대한 예찬자들은 영 • 미의 철학과에서보다는 예컨대 비교문학과 나 정치학과에서 더 환영받고 있다. 양대륙에는 철학의 < 과학적> 위
상에 대한 전통적 목소리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철학이 < 한낱 문 예 > 로 귀속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 두려움에 대해서는 과학/ 문예의 구분이 더 이상 문제되지 않을 문화의 전망과 연관지어 나중에 더 상론키로 하겠다. 여기서는 앞의 첫번째와 두번째 모티브에 대해서만 집중하고자 한다. 두 모티브는 확연히 준별되는 철학자들의 두 그룹과 각각 관련되어 있다. 첫번째 모티 브는 크 립 키 (Saul Kripk e, 1940-) 와 덤 밋Mi chael Dummett 등 언어철학자들에게 특징적이며, 두번째 모티브는 카벨 S tanl e y Cavell 이나 네이글처럼 덜 전문화되고 더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는 철학자 들에게 특징적이다 크립키의 견해를 준거로 해서 실재론적 인식론을 지 향하는 사람들 가령 필드 H artry Fie ld , 보이드Ri chard Boy d 그리 고 때로는 퍼트남(Hi l ary Putn a m, 1926-) 등을 <기술적 실재론자> 라고 부르고, 카벨이나 네이글 그 밖에 클라크T hom p son Clarke 와 스트라우드 B arry S tr oud 와 같은 사람들을 <직관적 실재론자>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직관적 실재론자들은 전통적인 철학 문제에 대한 실용주의자의 해 소 방식이 <검증주의적>이라고 반대한다. 그들은 실용주의자는 문 제에 대한 해답을 확증 또는 반증해 주는 기준을 밝힐 능력이 우리 에게 없다는 이유로 문제를 제쳐놓았다고 본다. [실용주의자들이] 그 런 견해를 취한다는 것은, <해결 불가능한 문제라는 이유만으로 그 문제가 진짜 문제가 아닌 것은 아니라는 점>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 한 것이라고 네이글은 말한다 .19) 직관적 실재론자들은 결과를 놓고서 검증주의를 판단함으로써, 언어의 편재성에 대한 실용주의자의 믿음 온 언어가 사실에 적합하지 못하게 될 경우에 철학적 문제가 발생된 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네이글은 <주관적 영역 19) Thomas Nag el , Mort al Qu estio n s(Cambri dg e : Cambrid ge Un ive rsity Press, 1979), p. xii.
에 대한 나의 실재론의 온갖 형태는 인간이 지닌 개념을 넘어선 사 실들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함축한다 > 고 말한댜 :1) ) 이와는 대조적으로, 기술적 실재론자들은 실용주의의 잘못은 심오 한 문제들을 피상적으로 몰아내버린 데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이 그릇 된 <검증주의>의 언어철학에 근거를 둔 데 있다고 본댜 기술적 실 재론자들은 <검증주의>를 메타철학적 결과 때문이 아니라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오해라고 간주하여 싫어한다. 그들의 견해에 의 하면 콰인과 비트겐슈타인은 (낱말 사용자의 의도에 의해 결정되는 어 떤 것인) 의미가 (그 낱말이 가리키는 것인) 지시[被指示體]를 결정한 다고 보는 프레게의 사상을 잘못 추종하였다 . 크립키에 의해 창안된 <새로운 지시 이론>에 근거해서 이제 우리는 낱말과 세계의 관계에 대해 더 나은 비(非)프레게식의 그림을 얻게 되었다고 그들은 말한 다. 프레게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개념이란 무차별적인 다양성을 우리 의 관심에 따라 조각(影刻)하는 것이라고 본다. (즉 셀라즈의 <심리 학적 명목론>, 혹은 존재론에 관한 굿맨식의 무차별성에 상당히 노골적 으로 이끌어가는 견해를 취한댜) 이에 비해, 크립키는 세계란 개별자 는 물론이고 개별자들의 자연종(自然種)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러 한 것들의 본질과 부수적 특성까지도 이미 구별되어 있다고 본다. 따 라서 <‘X 가 ([)이다’는 참인가?'>라는 물음은 누구의 의도에 따를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물리적 사실에 관한 문제로서
혹은 전혀 다른 용어로 표현된 어떤 다른 신념보다 더 유용하게 견 지될 신념인가를 따져 그 물음에 대답하고자 한다. 실용주의자는 <실 재에 대한 대응 > 이라는 관념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물리주의적 지시 이론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나 , 2“ 그와 같은 관념 을 고수하는 일의 의미 를 찾지 못한다. 설혹 우리가 주장을 통해 얻 기를 바랐던 모든 것을 얻었을 때라도, 여전히 우리가 <그릇된> 주 장(즉 어떤 것에 < 대응 > 되지 못한 주장)을 지녔을 수도 있다는 말에 의미를 부여해 줄 진리 개념을 실용주의자는 갖고 있지 않다. ?!) 퍼트 남의 다음 구절에서 보듯이, 문제는 강한 반실재론자{예컨대 실용주의자]에게 < 진리>란 이론 내적 인 의미밖에 없다는 점이다. 반실재론자는 진리를 <진리잉여론 redun 一 dancy t heo ry > 의 의미에서 [즉 < S 는 참이다>라는 문장은 오직 가 의미하는 것과 똑같다는 그런 의미에서] 이론 내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나, 이론 외적인 진리나 지시의 개념을 지닐 수는 없다 . 한 용어의 외연은 바 로 그 용어가 <참 인 > 대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반실재론자는 괴상한 조 작를 거쳐 진리 개념을 보유하려 하기보다는 (이론 외적인) 진리 개념을 거부하듯이 외연 개념도 거부해야 할 것이다. 반실재론자는 듀이처럼 진 리 개념 대신에 < 보장된 언명 가능성 warran t ed asse rti b ility>이란 개념 으로 후퇴할 수도 있다 . …… .231 따라서 기술적 실재론이 제기한 물음은 이와 같은 이론 외적 개념 을 보유하거나 거부할 기술적인 이유가 언어철학의 범주 내에 과연 21) 이 점에 관해서는 이 책의 논문 7 중 제 6 절을 참조. 22) 퍼트남이 『의미와 도덕과학M ean i n g and the Moral Sc i ences 』 (London: Routl ed g e and Keg an Paul, 1ITT8) 의 p, 125 에서 이러한 용어로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정의한 것을 참조 23) Hila r y Putn a m, Mi nd , Lang uage and Reality (C ambri dg e : Cambri dge Un ive rsity Press, 1975), p. 236.
있느냐이다 . 그 물음은 용 어 < x > 가 지 시하 는 것 이 무 엇인가 는 실 용 주 의자의 생각처 럼 (공동 체의 언어 적 행위에 어 떻게 최선 의 의미 를 부 여 할 것이냐 하 는 ) 사회 학적 인 문 제인 지, 아니면 필드 의 다 음 구절 에 담긴 것과 같은 문제인지 를 결정 해 줄 비 직 관 적 인 어떤 방법이 있는 가 를 묻고 있다 . 특 정한 용어의 사회학 적 역 할들 중 한 측 면은 그 용 어 가 언어 공동 체 의 상이한 구성원 들 에게 끼치 는 심 리 학적 역 할 이며 , <첫 번 째 역할 에 환 원 될 수 없는 > [강조 는 저 자 가 추가 한 것 임] 다 른 측 면은 그 용어 가 대신해 주는 물리적 대상이나 물 리적 속성이다 . 2 · II 그렇지만 이와 같은 기술적, 비직관적 방법이 어떤 것 인지는 분명 치 않다. 언어철학이 설명해야 하는 것이 어떤 데이터인지 분명치 않 기 때문이다. 가장 지주 인용되는 데이터는 과학이 < 잘 작동하며, 성 공적이어서> 우리가 질병을 치유하게 해주고, 도시 를 폭파시키게 해 준다 등이다 . 실재론자들은 이렇게 묻는댜 만일에 과학적 진술이 사 물 자체에 대응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 할 가라고 . 이 에 대해 실용주의자는 어떻게 < 그와 같은 것 > 이 설명으로 간주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 아편은 왜 졸립게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졸립게 하는 힘 > 때문이라는 몰리에르의 희곡에 등장하는 의사의 설명보다 그것이 더 나은 설명이 될 수 있게, < 대응 > 이라는 관계가 더 구체화될 수 있겠는가? 말하자면 아편의 경우 무엇이 아편의 미 세 구조에 대응되는가? <대응>의 미세 구조는 무엇인가? 진리 조건 과 충족의 관계에 관한 타르스키 Al fr ed Tars ki식의 장치는 그 요구 를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 . 왜냐하면 그 장치는 필드의 이론처럼 물리 24) Ha rtry Fie ld , Meani ng , Log ic and Concept ua l Role, Jou rnal of Phil o- sop hy, LXXIV( l97 7), p. 398.
주의자의 < 벽돌 쌓기>식의 지시 이론에 부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데이비슨의 이론처럼 정합설적이고 전체론적이며 실용주의적인 이론 에 의해서도 똑같이 잘 부합되기 때문이다 필드 같은 실재론자가 진 리 개념에 대한 타르스키의 설명은 (<유전 인자 > 에 대한 멘델 Mendel 의 설명처럼) 물리주의에 입각하여 < 비의미론적 용어로 환원 >될 것 의 자리 를 표시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때 , 25 1 실용주의자는 리즈 Ste p h en Leeds 와 마찬가지로 < 참 > 이라는 용어는 ( < 선하다 > 라는 용 어와 같이, 그러나 < 유전 인자 > 라는 용어와는 달리) 설명적 개념이 아 니라고 응답한다 . 2 6 1 (혹은, 그것이 설명적 개념이라면 <참>이라는 용어 를 사용한 설명의 구조가 구체화되어야 한다고 응답한다.)
25) Ha rtry Fie ld , Tarski 's Theory of Truth , Jou rnal of Phil o soph y, LXIX (1972), p. 373. 26) 퍼트남은 『 의미와 도덕과학 』 의 p. 16 에서 이 논점을 리즈에게 귀속시키고 있 다. 필드는 우리가 사람들의 신념을 세계 내에서 사물들이 어떠하다는 걸 가리 키는 지침으로 사용한다는 이유를 들어서 이것이 < 실제로> 설명적<이다>라고 아마도 주장하고자 할 것이다(이 논변에 대해서는 그의 논문 ‘'Tarski 's Theory of Tru th의 p. 371 와, 역시 그의 논문 심리적 표상M en t al Rep re senta ion s, Readin g s in Ph ilo soph ic a l Ps ych olog y, ed. Ned Block, vol. 2(Cambri dg e Mass.: Harvard Un ive rsity Press, 1981) 의 p. 103 를 참조). 실용주의자는 이 에 대해 우리가 행하는 비는 <세계가 어떠한지에 대한 신뢰할 만한 지침이라는 단서 조항 ce t er i s [Xlri bus 을 붙여서, 존스가 말한 바를 나는 취하겠다>라고 한 게 아니라, <존스가 말한 것이라는 단서 조항을 붙여서 나는 말하겠다>라고 한 것임을 주장하여 재반박해야만 한다.
실용주의자와 실재론자의 쟁점인 기술적 근거를 규명하는 작업은, 앞서 퍼트남의 인용 구절에서 언급되었듯이, <진리 개념 대신에 ‘보 장된 언명 가능성’이라는 개념으로 후퇴>하여 실용주의자가 듀이를 따를 뿐만 아니라 그 개념을 <참이다>라는 용어의 의미를 분석하는 일에도 사용한다는 실재론자의 가정으로 인해 때때로 작위적으로 끝 나버리고 만다. 그런 분석이 제대로 될 턱이 없디는· 퍼트남의 말은 옳다. 그러나 현명한 실용주의자는 다음 문장의 빈칸을 <탐구의 끝
에서 > 라든가 < 우리 문화의 기준에 의해서 > 라든가 그 밖의 어떤 것 으로 채워넣으려는 유혹에 굴하지 않을 것이다. T, )
27) (나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실용주의자들이 실제로 이와 같은 덫울 피할 만큼 항상 현명했던 건 아니다. 진리란 바로 그것으로 탐구가 수렴되는 것이라는 퍼 스의 진리 정의는 가끔씩 진리는 하나다라는 실재론자의 직관을 포착한 것으로 실용주의자에게는 비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실용주의자는 그것을 포착하려 해 서는 안 된다. 각각의 상황에는 마땅히 행해야 할 단 하나의 도덕적 최선이 항상 존재한다는 직관을 실용주의자가 받아들일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처럼, [진리는 하나이다라는 실재론자의] 그 직관에 실용주의자가 합치되고자 애쓸 아무런 이 유도 없다. 또한 시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어휘들이 끊임없이 번식하는 [탈철학의 문화에서의] 과학이 모든 탐구자들이 통일과학의 언어로 의사 소통을 하는 과학보다 더 열등하다고 실용~ 생각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퍼스 의 진리 정의를 고집할 유혹을 내가 뿌리칠 수 있게끔 설득한 퍼트남과의 논의 에 감사한다. 비록, 그리고 물론, 퍼트남이 그렇게 한 이유는 나의 이유와는 다 른 것이었지만. 또한, 다음과 같은 논점을 제시한 블랙번 S im on Blackburn 의 최근의 논문 『진리, 실재론, 그리고 이론의 규제성 Tru th, Rea lism and the Regu lati on of Theo ry』, M idw est Stu d ie s in Phil o soph y, V(l980), pp. 353- 371 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 ) <[우리 이론들의] 개선이라는 생각은 어쩌면 결과 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이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뜻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하 겠지만, 탐구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정당화하기에는 그걸로 충분한 건 아니 다>(p . 3.58).
S 는 S 가 언명 가능할 때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참이다. 실용주의자는 퍼트남의 <자연주의 오류 > 의 논박이 가진 힘을 인 지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것으로도 다음 문장의 빈칸을 채울 수 없 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로, 아무것도 그 다음 문장의 빈칸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만일에 그리고 오직 일 때 상황 C 에서 A 를 하는 것이 최선 이다. 만일에 그리고 오직 일 때 상황 C 에서 S 를 주장하는 · 것이
최선이다 . < S 를 주장하는 것이 권장 할 만하다는 것 > 과 < S 가 진리이다는 것 > 을 혼동해서는 안 된디는 충고를 받게 되면 실용주의자는 그 충 고가 선결 문제를 요구하고 있다고 응답할 것이다 . 문제의 관건은 과 연 < 참이다(진리) > 가 제임스가 정의하였듯이 < 무엇이든 믿음의 과? 정 에서 좋은 것, 명백하고도 꼬집어 지적해 낼 수 있는 이유에서 좋 은 것이라고 판명될 것 에 대한 이름 >281 그 이상의 어떤 것이냐이다. 제임 스 의 견해에서는 <참 이다 > 는 < 선하다 > 나 < 합리적이다 > 와 마 찬가지로 규범적인 개념, 제 몫을 다하는 다른 문장들과 잘 어울리며 스 스로도 제 몫을 다하는 것으로 보이는 문장에 붙여준 하나의 찬사 이댜 이 견해에 따르면 , 진리가 < 저 바깥에 있다 > 고 생각하는 것은 선이 < 저 바깥에 있다 > 는 플라톤식의 견해와 같다. < 우리는 사멸해 도 진리는 영원하니 / 그걸 아는 영혼은 즐겁네 > 라는 [플라톤적인] 시 구( 詩句 )가 우리를 만 족 시키지 못하면 우리는 곧 < 비합리주의자 > 이 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도덕률은 시 • 공에 묶인 인생사의 영고성쇄와 무관하게 본체의 세계에서 찬연히 빛난다는 [칸트식의] 생각이 우리 의 도덕감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우리는 곧 < 비합리주의자>이다라는 생각과 같댜 실용주의자가 볼 때 < 진리 > 는 < 객관적>인 무엇이라 는 관념은 다음 (I) 과 (II) 사이를 혼동한 것에 불과하다. (I) 세계의 대부분은 그것에 관해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든 간에 거 의 그대로이다 . (바꿔 말해서 우리의 신념은 매우 제한된 인과적 효력 을 갖고 있다.) (II) < 세계에 관한 진리>라고 불리는 세계에 추가해서 (<한편으 로는 사실 그 자체로서의 사실과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에 대한 모든 현 28) Wi lliam Jam es, Pragm atism and the Meanin g of Truth ( Cambri dge , Mass.: H arvard Un ive rsity Press, 1978), p. 42.
실적, 가 능 적 지식의 사이에 놓 인 제 3 의 매개 물 > 이라고 제임 스 가 비꼬 아 불 렀던) 므“ 무언가가 저 바깥에 존 재한다 . 실용주의자는 (I)에 대해 (형이상학적 신앙으 로 서가 아니라 단지 우 리가 그걸 의심할 아무런 이유도 이제껏 없었다는 일 종 의 신 념 으 로 ) 전 폭적으로 동의한댜 하지만 그는 (Il) 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 한다. 실재론자는 (Il) 를 다음 (III) 으로 설명하려 할 것이다. (III) 세계에 대한 진리는 특정한 문장(물론 그중 상당수는 아 직 문장화되지 않았지만)과 세계 자체 사이의 < 대응 > 관계로 이루어 진다 . 이때 실용주의자는 단지 한걸음 물러나서 < 대응 > 이란 것이 무엇 인가를 설명하려 했던 수세기에 걸친 시도는 실패했으며, 특히 미래 의 발달된 물리학의 궁극적 어휘는 얼마쯤은 자연 자체의 어휘가 될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자연에 대한 자연 자체의 생각에 토대를 둔 문 장을 우리가 문장화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설명에 이르기까지 , 그 러한 시도는 쭉 실패해 왔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들로 해서 실용주의자는 언어철학이 어떤 것을 하든 간에 좌우간 제임스가 주장한 바를 넘는 < 진리 > 개념에 대한 정의 룰 운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 실용주의자는 언어 철 학이 수많은 다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혼쾌히 인정한다 . 예컨대 언어철학은 타르 스키를 좇아 특정한 언어에서 진리 술어의 정의가 어떤 것일지 밝혀 낼 수도 있다. 그러한 술어를 정의하는 것은 (가령, 영어 문장들에 대 한 진리 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은) 자연 언어가 학습 가능하며 반복적 구조를 지녔음을 보여주고 그 언어에 대한 체계적인 의미 이론을 제 29) 같은 책, p. 322.
시하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요, 어쩌면 유일한 방법이라는 데이비슨의 견해에 실용주의자는 동의할 수도 있다 30) 그러나 실용주의자는 그러 30) <한 언어에 대한 체계적인 의미 이론 s y s t ema ti c the ory of mea ni n g>이 과 연 있을 수 있느냐는 물음은, 한편으로는 <특정한 자연 언어의 사용자가 유능 한 화자(話者)가 되려면 꼭 알아야만 할 것을 우리가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 는가?>라는 물음과,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의 여타 영역에 정초(定『t)를 제공 할 철학적 의미론phi loso phi cal seman ti cs 을 우리가 얻을 수 있는가? > 라는 두 물음 사이에서 애매한 것임을 주목하라. 철학은 체계적인 것이 될 수 없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메타철학적 견해는 어떠한 <체계적인 의미 이론 > 도 있을 수 없음을 전제로 한다고 덤밋이 말할 때 덤밋은 이 두 물음을 한꺼번에 다뤄 혼 동에 빠져 있다(i'vli chael Dwnmett , Truth and Oth e r Enig mas(C arnbri dg e , Mass.: Harvard Un ive rsity Press, 1978), p. 453).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 은 점을 인정해야만 하며 , 따라서 모종의 <체계적인 이론>에 관여하고 있다고 덤밋이 말한 것은 온당하다. 주어진 어떤 언어에 통달한 사람은 누구라도 그 언어로 된 무한한 문장들 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은 ……각각의 화자는 그 언어 내의 낱말들로 이루 어진 문장의 쓰임을 지배하는 수많은 일반 원칙들을 암묵적으로 파악한다는 것 이외는 달리 설명될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의 사실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라고 간주하더라도, 덤밋처 럼 < 언어철학이 철학의 모든 영역들의 정초이다>(같은 책, p. 454) 라는 생각에 붙잡히는 건 아니다. 어떤 이는 비트겐슈타인처럼 철학이 <분석>을 제공하는 일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덤밋이 <철학의 다른 영역에서 수행된 어떠한 분석이라도 그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우리 언어에 대해 정확한 의미 이 론이 어떤 형태를 지녀야만 하는가를 꽤 확실하게 우리가 알기 전까지는 충분 히 결정될 수가 없다>(같은 책)라고 주장한 바의 전제 조건을 부인할 것이다. 바로 위에서 인용된 얘기가 철학의 여타 영역에 대해 언어철학이 <정초적>이 라는 의미에 관한 덤밋의 유일한 해명이다. 내가 『철학과 자연의 거울 』 제 6 장에 • 서 주장하고자 했듯이, 철학적 의미론이 메타철학적인 배려에 둘러싸여 성장하 였다는 사실은 원숙하고도 성공적인 의미론(성공적인 <언어에 대한 체계적인 의미 이론>)은 필연적으로 메타철학적인 취지를 가진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 다. 아이들은 가끔 그들의 부모를 잃을 수도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업적은, 실증 주의자들이 프레게의 업적이 그런 것을 제공하기를 고대하였던 (그리고 덤밋온 지금도 여전히 바라고 있는) 그 의미에서, <미래의 철학에 확고한 정초를 제
공>하지 못하였다라는 덤밋의 말은 확실히 옳다(같은 책, p. 452). 그러나 의미 론은 철학자들에게 <분석>의 방법을 안내해 줘야 한다고 이미 확신을 가진 사 람만 비트겐슈타인이 <정확한 의미 이론이 어떤 모습일지에 관해 윤곽도 제공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토대로 정초성이 없다고 비난하게 될 것이다{같은 책, p. 453).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란 의미론적인 것이건 다른 것이건 정초를 갖는 유가 아니라고, 비(非)의미론적인 근거에서 믿었다.
한 점을 보여주는 것이 타 르스키가 제 공 해 주는 < 모든 것>이요, 진 리 개념에 대한 철학적 반성 을 통해 얻어 낼 수 있는 모든 것이다는 데이비슨의 견해에 대해서도 동의한다. 실용주의자는 (그 내용 중 에서 실재론을 매력 있게 해주는 것도 모 두 포함해서) < 진리 개념의 직관적 내용을 포착>하려는 유혹에 넘어 가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덤밋처럼 진 • 위에 대한 < 양가성 (兩慣 性, b i valence) > 의 문제에 휘말려서도 안 된다. 실재론에 대해 의심하는 덤밋은 실용주의자와 실재론자 간의 쟁점 중 많은 전통적 인 문젯거리들이 다음과 같은 언어철학상의 기술적 장치에 의해 해 명될 수 있다고 제안한댜 다양한 영역에서 똑같은 일반적 성격을 지닌 철학적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특정한 유형의 논의 주제에 속하는 진술, 혹은 더 쉽게 말 해서 특정한 일반 유형을 지닌 진술에 관한 실재론에 대한 찬반의 논란이 다. [덤밋은 다른 글에서 그러한 일반 유형의 예로서 도덕적 진술, 수학적 진술, 과거에 관한 진술 그리고 양상에 관한 진술을 들고 있다.] 그러한 논란은 문제시되고 있는 유형의 진술들이 지닌 의미의 종류에 관한 두 가 지 견해의 대립이요, 따라서 그 진술들에 진리나 허위의 관념 적용에 관 한 대립이다 . 실재론자는 이렇게 본다. 각 개별 진술이 참이 되려면 어때 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방식에 입각해서 우리는 그 진술 들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일반적으로, 한 진술의 진리 조건이란 그것 이 달성되면 어느 때라도 우리가 달성 여부를 인지할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니며, 더욱이 그 달성 여부를 결정할 효과적인 절차를 우리가 갖고 있
는 그런 것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진 술들 의 진리나 허위 는 일 반적으로 그것 들 이 지닌 진리치(虹理値)를 우리가 알거 나 알 방도 를 갖 고 있는지오片 큰 독립적 이리 는 · 그 와 같은 의미 를 그 진술들에 귀속시키 는 일에 성공하였다.…… 반실재론자는 주 어진 유형의 진술들에 대해 실재론자의 설명과는 반대 되는 해석을 한다 . 그 해석에 의하면, 문제가 된 유형의 진술들이 우리에 게 주어지는 방식은, 우리의 지식이나 앎의 능력고快곤 독립적으로 달성되 거나 않는 것 이라고 우리가 이해하는 진리 / 허위의 조건들에 따르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이 진리이거나 허위임을 입증해 주는 것 이라고 우리가 이 해하는 조건들에 따른다 . 3 1 1 진 • 위에 대한 < 양가성 > 이란 진리가 아니면 허위 둘 중의 하나라 는 것을 가리킨댜 그래서 덤밋은 특정한 영역(이를테면 도덕적 가치 나 가능 세계p oss i ble worlds) 에 관한 < 실재론적 > 견해는 그런 것에 관한 진술의 진 • 위 양가성을 주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 서 덤밋의 방식대로 실재론 대 반실재론의 논쟁을 정리하면, 실용주 의자는 모든 진술에 대해 양가성을 부인하며, < 극단적 > 실재론자는 모든 진술에서 그것을 인정하는 반면에, 사려 깊은 대다수는 (예컨대 물리학의 진술처럼) 양가적인 것과 (도덕적 진술처럼) 양가적이지 않 은 진술을 요령 있게 구별한다는 암시를 준다. 이렇게 해서 <양가 성 > 의 문제는 < 존재론적 관여 > 의 문제와 결합됨으로 해서 케케묵 은 형이상학적 견해를 최신식의 의미론적 언어로 바꿔 표현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 둔갑한다. 만일 실용주의자가 오직 관념이나 문장에 대해서만 존재론적 관여를 하고 , 진술을 참이게 해주는 어떠한 것도 < 저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준( 準 )관념론적 형이상학자로 파악된다면 , 그 실용주의자는 덤밋의 구도에 딱 들어맞게 될 것이다. 31) Mich ael Dummett, Truth and Oth e r Enig mas, p. 358.
하지만, 이것은 실용주의자가 본 자기 모습은 물론 아니다. 그는 스스로 <어떤> 종류의 형이상학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저 바깥에 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 < 공간상의 어떤 위 치>를 의미하는 문자 그대로 <저 바깥>이라는 의미를 제외하고는) 도 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플라톤주의자가 <우리 지식의 상태 나 탐구 절차의 가용성 여부와 상관없이 -에 대한 진리 혹은 허위가 존재한다고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선( 善 )이나 수(數)에 대 한 플러톤주의자의 확신을 해명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 문장에서 <존재한다>라는 용어는 실용주의자에게는 <진리는 이 러한 것이다 Tru t h is so> 에서 <이다i s> 라는 용어만큼이나 애매해 보인다. 위에서 인용된 덤밋의 구절을 대할 때 실용주의자는 어떻게 한 <종류의 의미>에서 다론 종류의 의미로 넘어갈 수 있는지 의아 하게 생각하며, 여러 종류의 진술의 양가성이나 비양가성에 관해 <직관>을 지닌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를 궁금하게 생각한다. 그는 그러한 직관을 갖지 않아서 (혹은 그가 갖게 될지도 모르는 그러한 직 관을 제거시키고자 하여서) 바로 실용주의자이다. 주어진 진술 S 에 대해 <그것이 참이 되려면 어떤 경우인지를 아 는가?> 혹은 <그런 종류의 진술의 진 • 위를 수립하기 위해 우리가 인지할 조건을 아는가?>를 실용주의자는 자문해 보고서, <당신은 정말로 사랑에 빠졌소? 아니면 단지 정념에 불타고 있소?>라고 질 문받았을 때처럼 당혹감을 느낀다. 그는 그것이 별로 유익한 질문이 아닐 것이며 어떻든 내성(內省, i nt r os p ec ti on) 에 의해서 답변되지는 못할 거라고 의심한다. 그러나 양가성에 대해서는 어떤 다른 방법이 있는지 분명치 못하다. 덤밋은 이를테면 도덕적 진술이나 양상(樣相) 진술이 양가적임을 주장하는 논변의 좋고 나쁨을 판가름할 수 있는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는다. 그는, 어쩌면 상이하게 타고난 형이상학 적 기질에 따라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저렇게 주장한다고만 말할 뿐이다. 만일 누가 형이상학적 견해를 갖지 않고
태어났거나, 혹은 철학의 효용성에 대해 점차 비관하게 되어 의식적 으로 그러한 형이상학적 견해 를 회피한다면, 그 사람은 전통적 논제 에 대한 덤밋의 재구성은 애매한 것을 똑같이 애매한 것으로 해명하 려는 일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실용주의자와 실재론자 간의 쟁론은 언어철학 내의 협소하고, 명 확히 구획된 근거에 대한 싸움이어야 한다는 < 기술적 실재론자 > 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나는 필드와 덤밋에 관해 논의하였다 . 그런데, 그와 같은 근거란 것은 없다. 확신하건대 이것은 언어철학의 결함이 아니라 실용주의자의 탓이다. 그는 예컨대 < s 는 참이다 > 라 는 문장을 < 분석 > 하게 해주거나, 양가성을 주장 또는 부인하게 해주 는 어떤 입장도 갖기를 거부한댜 참여를 요청받은 < 어느 > 게임에서 도 그는 아무런 수도 두질 않는댜 < 지시의미론 > 이나 < 양가성 > 등 이 그에게 관심을 끄는 시점은 누군가 그러한 관념들을 설명적인 것, < 단지 > 직관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해내는 것, 이를테면 < 과학은 왜 성공적인지 > 를 설명하는 것으로 취급할 때이다 . 32 1 이 시점에서 실용주의자는 그의 보따리에서 절대로 확실한 선수 (先 手 )를 풀어놓는다. 3.1 ) 그는 < 그것이 진리이므로 잘 작동한다>와 32) 실용주의가 과학이 왜 [성공적으로] 작동하는지 를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이는 금명간에 출 판될 보이드Ri chard Bo y d 의 저서에서 가장 잘 전개되고 있는데)에 대해서는 , (앞의 각주 27) 에서 인용된 바 있는) 블랙번의 논문 r 진리, 실재론 그 리고 이론의 규제성」 중 특히 pp. 356-360 를 볼 것 . 나는 <… … 도덕, 조건문, 반사실적 가정, 수 학 등에서 논란되고 있는 여러 사례들에서 실재론이 지닌 값 어치란 실재론을 논란거리가 안 되게 해주는 해석을 옹호하는 일 뿐이다 > 라는 블랙번의 최종 결론에 대해 동의한다. 33) 이 요술의 보따리에는 많은 귀중한 골동품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버 클리로부터 영국 관념론자를 거쳐 실용주의자에게 유산으로 전해진 것도 있다. 그런데 이렇듯 실용주의를 버클리의 현상주의를 지지하는 논변과 연관시켜 연 상함으로써 많은 실재론자들(예컨대 레닌이나 퍼트남)은 실용주의란 (a) 단지 관념론의 한 변종이며 , (b) 본래적으로 < 환원주의>이다라고 보가에 이르렀다. 그러나 버클리식의 현상주의를 지지하는 논변은 사물은 곧 [우리에게 어떠하다 고] 알려진 것이다는 실용주의의 준칙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버클
리의 <관 념 > 이라는 것 no ti on of < i dea > 을 의미 있게 해줄 수 있다는 (레이드 (Thomas Reid , 1710- 17 96), 그린 (Thomas H. Green, 1836-188 2), 비트겐슈 타인, 셀라즈, 오스틴(J. L. Austi n, 1911- 1 960) 그리고 다른 사상가들에 의해 당연하게 비판되었던) 주장도 아울러 요구한다. 이 중 후자, 즉 관념이라는 것 에 관한 주장이 없이 <실 재는 본질상 정신적인 것이다>라는 영국 관념론자의 주 장으로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버 클 리의 전제들 가운데에서 이와 같은 구분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실용주의자는 실재란 < 유순한 것> 이라고 생각한다거나, 물질 세계의 엄연한 저항을 똑바로 인지하질 못하고 있다거나, <물 리 적 사물은 정신에 외부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는 걸 깨닫지 못한 점 에서 관념론자를 닮았 다는 등의 수많은 실재론적 레토릭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같 은 혐의를 받을 만한 얘기 를 제임스가 가끔 말한 적이 있다고 고백해야만 할 것이다{예컨대 그의 저서 『실 용주의와 진리의 의미 』 , p. 125 에 있는 불행스럽게 도 경박한 구절을 볼 것. 이 책의 논문 5 에서 나 는 듀이가 이따금씩 똑같은 오 솔길을 따라 배회하였던 걸 비판한다) . 환원주의라는 혐의에 대해 실용주의자는 이렇게 응답한다. 실용주의자는 모든 어휘들을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 보며 어떤 어휘도 사물이 실재로 어떠한지 를 표상하는 게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비 록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X - 어휘 를 쓰는 게 Y- 어휘 를 쓰는 것보다 더 성과가 좋다고 말할 <가능성>은 있지만,
<그것 이 잘 작동하므로 진리다 > 사이에는 < 신이 그것을 사랑하므 로 그것은 종교적이다 > 와 < 그것은 종교적 이 므로 신이 사랑하다 > 는 말이 그렇듯 아무런 실용적 차이도, 차이다운 차이도 없다고 주장 해 나간다 바꿔 말해서, 그는 진리의 본성과 진리의 테스트 사이에는 아무런 실용적 차이가 없으며, 진술이 주장하는 바에 대한 진리의 테 스트는 (아마 극소수 의 지각적(知礎的) 진술은 예외일지 모르지만) <실 재와의 비교 >는 아니라고 논변한댜 이러한 선수는 실재론자에겐 모두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로 느껴질 것이다. 왜냐하면 실재론자는 어떤 차이는 큰 차이 를 내지 <않 으면서도 > 진정한 차이일 수 있고, 때로는 본질적 질서 ordo essend i가 인식상의 질서 ordo cog no scendi 와 < 다르며>, 때로는 X 의 본성이 X 임 Xness 을 입증하는 테스트가 <아니다>라고 직관하기 때문이다. 결론으로 삼아야 할 것은, 내가 볼 때 기술적 실재론은 직관적 실
재론으로 귀 착된다는 점과, 실재론자가 논쟁 에 임하여 갖고 있는 유 일한 관점은 케케묵은 형 이상학의 문제들이 (이를테면 보편자는 < 실 재로서> 존재 히 는가? 인과 적 효력을 갖는 물 리 대상 들은 < 실 재로서 > 존 재히 는가 아니면 우리의 가정에 불과한가? 등이) 어떤 좋은 목적에 가여하였으며, 무언가 를 밝혀주었고, 중요한 것이었다는 실재론적 확 신이라는 점이댜 실용주의자가 따지고 싶은 것도 바로 그 논점이다 . 그는 한 문장이 참이 되는 필요충분조건에 대해 논란하기를 원치 않 으며, 오히려 진리의 본질을 추출하는 철학적 방식을 발견하고자 하 는 관행이 실제로 < 과연 > 청산 되었는가 아닌가를 따지고자 한다. 그 러므로 실용주의자와 직관적 실재론자 간의 쟁점은 그러한 관행의 역사, 즉 철학의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다. 진짜 쟁점은 서양 의 철학 에서 철학의 위치, 실재론자가 지속하기를 원하는 < 심오한> 철학적 문제들을 제기한 특정한 일련의 텍스트들이 서양의 지성사에 서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것이다 . 4 실재론자의 반격 ( II ) : 직관적 실재론 In t u iti ve Realis m 실용주의자와 직관적 실재론자 사이에 정말로 토론이 필요한 것은 가령 < 진리는 언명 가능성 이상의 것>, < 고통은 두뇌의 상태 이상 의 것>, < 현대 물리학과 도덕적 책임감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존재 함> 등의 결론에 이를 직관을 우리가 갖고 있는가 아닌가를 따지는 문제가 < 아니다 > . < 말할 나위 없이 > 우리는 그러한 직관을 갖고 있다. 어떻게 우리가 그러한 직관을 갖지 않고 배겨날 수 있었겠는 가? 우리는 그와 같은 주장들로 짜여진 지적 전통 속에서 교육되어 왔다. 마치 옛날에는 가령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용되고 만다> <인간의 존엄성은 초자연적 질서와 연관되어 있 다> <신성한 것을 비웃어서는 안 된다> 등의 주장들로 짜여진 지적
전통 속 에서 눌 교 육되었던 것 과 홉 사하게 말 이다. 그 러나 , 그 러한 직 관 들 을 < 포 착> 하는 철 학 적 견 해 를 찾 아내야만 한다 고 말히 는· 것 은 실용주의자와 실재 론 자 간 의 쟁 점을 회피하 는 일 이다 . 실 용 주 의자 는 그러한 직관 들을 <갖 는 것을 멈추기 > 위해 최선 을 다 할 것 과 < 새로운 > 지적 전통을 발전시 킬 것을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 직관적 실재론자 들 이 이 제안에 대해 공격 적 인 태도 를 갖는 까닭 은 직관을 억압하는 것은 실험 데이터 를 억압하는 것 마냥 부 정직 하 게 보이기 때문이다. 직관적 실재론자의 개념에 의하면, (단지 철학 뿐만 아니라) 철학은 사람 들 < 각자 > 의 직관에 공정 할 것을 요구한 다. 그래서 마치 사회적 공정성이 개개의 시민 들 에게 · 정 당화 될 수 있 는 제도에 의해 이루어지 듯 이, 지적 공정성도 충분한 시간과 변증의 능력만 주어진다면 사람 들 각자가 용납할 수 있는 테제를 찾 아냄으 로써 이룩될 어떤 것이다. 지적인 삶에 대한 이 견해는, 앞에서 인용 된 언어 편재성을 주창한 예언자들과는 반대로, 언어가 철저히 맨 밑 바닥까지 편재하지 < 않다 > 는 것, 혹은 겉보기와는 달리 모 든 어휘가 통약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댜 첫 번째 대안은 최소한 어떤 직관 은 사람들이 만났던 텍스트, 다른 사람들, 성장해 오면서 배웠던 말 하기 방식의 함수나 기능이 < 아니라고 > 주장하는 샘이다. 두번째 대 안은 호머 Homer 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영웅들 불교의 현인 들 계몽 주의 시대의 과학자들 그리고 현대 프랑스의 문필비평가들이 의견과 는 달리 정말로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 그 래서, 그런 사람들 모두에 공통된 어떤 요소가 있으며 철학은 그걸 추출해서 그들이 합리적으로 수용할 어떤 테제나 그들 모두가 직면 할 어떤 문제를 구성하는 일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반면에 실용주의지는 보편적인 인간 공동체의 추구는 , 만일 그것 이 모든 지적 전통의 요소들 그리고 각 개인이 지녔던 모든 < 심오 한> 직관들을 모두 보유하고자 한다면, 자멸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 다. 그것은 통약성의 발굴로는, 달리 말해서 아킬레스, 부처, 라부아
지에 Lavo i s i er , 데리다에게 공통된 인간의 본질을 추출하게 해줄 어 떤 공통된 어휘의 발굴로는 달성될 수 없다 오히려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발견이 아니라 만 드는 행위 , 즉 철학적 업적보다는 시적인 업 적에 의해 성취될 성질의 것이댜 동양과 서양, 또는 지구인과 은하 계를 초월하여 종합을 하는 문화란 그 각각에 동일하게 공정한 문화 가 아니라, 후손이 조상에 대해 회고하듯 유쾌한 겸손으로 양쪽울 되 돌아보는 문화이다. 그래서 직관적 실재론자와의 싸움에서 실용주의 자의 논점은, 어떻게 낱낱의 직관이 < 종합>되고 <설 명>되느냐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직관의 < 지위>, 즉 직관이 존중되어야 할 < 권리 > 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자신의 논적을 적절히 대접하기 위해 실용주의자는 문제의 실재론적 직관이 실재론자가 말하듯- 뿌리 깊고 도 압도적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출발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실용주의 자는, < 그런데, 그러한 직관에 대해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 가? 그것을 근절시켜야 하는가? 혹은 그것에 공정한 어휘를 찾아내 야 하는가? > 라고 질문을 해서, 논의의 주제를 바꾸어야 한다. <철 학의 주요 문제>라는, 19 세기의 교과서에 담겨 있는 주제들이 < 심오한 > 것이라는 식의 주장은, 실용주의자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그와 같은 물음에 빠지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모른다면 유럽 역사의 한 시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주장에 불과하다. (중세의 어떤 교부들에 의해 논의되었던 문제 가령 전제 군주제나 아리우스파의 학설 에 대한 문제의 <심오성>에 관한 비슷한 주장을 상상해 보라.) 실용주 의자는 그 범위를 확대해서 (하이데거의 편을 들어) 플라톤을 고심하 게 했던 유의 문제들에 대해 고심하는 것이 어떻다는 걸 모른다면 서양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자 한다. 직관적 실재론자들 은 하이데거나 듀이처럼 역사주의자의 태도를 취하거나 푸코처럼 준 (準)-인류학적인 태도를 취해서 <한발짝 물러나> 있는 것이 아니다. 직관적 실재론자들은 아예 전통을 수호하는 일, 우리를 더 깊이 서구 적이게 하는 일에 몰두한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방식은 가령 클라크
와 카벨이 <회의론의 유산 > 에 대해, 그것은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어떤 유의 존재가 그와 같은 물음을 제기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물음이라고 간주하려 하였던 점에 의해 잘 설명된다. ! “ 그 들은 데카르트와 같은 인물이 있음을 단순히 근대 서구에 대한 것이 아니라 < 인간 존재> 에 대한 어떤 중요한 암시로 활용한다. 이러한 전략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은 칸트가 < 조건적_무조건 적>이라는 이름 아래 부분적으로 중첩되는 문제를 들고나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네이글이 <주관-객관>이라는 이름 아래 외견상 전혀 별개의 문제로 된 일련의 것을 들고나와 칸트를 최신식으로 업데이 트 u pd a t e 한 방식에서 볼 수 있다. 네이글은 다음과 같이 말하여 칸트 를흉내 내고 있다. 어떤 철학적 문제들은 해답이 없다는 것이 참일지 모른다. 가장 심오하 고도 오래된 문제들은 그럴 거라고 나는· 짐작한다. 그런 것들은 우리 이 해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럴 경우 우리가 할 수 있는 통찰은 그 문제를 포 기하지 말고 그 대신에 그것을 강하게 붙잡아, 해결을 위한 새로운 시도 와 그 이전의 시도가 왜 실패하였는지를 이해하게 되는 데에 달려 있다. (그것이 바로 아무도 그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플라톤이나 버 클리와 같은 철학자들의 저술을 우리가 연구하는 이유이다.) 해결 불가능 한 문제들이라고 해서 그 이유만으로 진짜 문제가 아닌 것은 아니다. •:G I 네이글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도덕적 행운>의 34) Thomp so n Clarke, The Leg ac y of Skep ticis m , Jou rnal of Phil o soph y, LXIX(1 9 72), pp. 754-769, 특히 맨 마지막 문단을 볼 것. 그 논문은 카벨과 네 이글 양자에 의해 인식론적 회의론의 전통이 지닌 <심오성>을 명확히 해준 것 으로 인용되고 있다. 카벨에 대한 논의는 이 책의 논문 10 을 볼 것 35) Thomas Nag el , Mort al Qu esti on s, p. xii.
문제에 관한 그의 사례 를 생각해 보자. 이 문제는 실상은 전혀 그렇 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이 누구의 통제 아래 있다는 그 이유 만으로 해서 그 사람이 도덕적으로 칭찬받거나 비난받는 일에 관한 문제이다. 네이글은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행위 원인(作因)의 범위, 따라서 정당한 도덕적 판단의 범위는 이렇듯 엄밀히 따져보면 연장성(延長 性 )이 없는 점으로 축소되는 듯하다. 각각의 것들은 모두, 행위자의 통제 범위에 포함되지 않은 여러 요인들의 복합적인 영향에 의해, 행위 이전과 이후의 제 요인들의 복합적인 영향에 의해 초래되는 것으로 보인다. 荀) 네이글은 이 문제에 대해 전형적으로 천박한, 실증주의자의 <해결 책>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의적 요인들이 행위의 도덕적 가치를 손상시킨다거나 그렇지 않다고 우리가 간주하는지를 상세히 밝혀서 그와 같은 해결책(예컨대 흄의 해결책과 같은 것)에 도달할 수 도 있다 이에 대해 네이글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 대한 이러한 양립가능론자의(예컨대 [행위자가] 강제되지 않았고, 모르지 않았으며, 의도 없이 한 행동이 아님 등의) 설명 은 도덕적 책임에 대한 통상적 조건이 행위자가 행한 바의 일부분이 될 여지를 남겨둘 것이다. 그렇지만 행위자가 행한 것은 그가 행하지 않았던 수많은 [의부적인] 영향들도 배제하지 않고서 이해되어야 한다. •37 1 그러나 이처럼 이완되고, 실용주의적이며, 흄식의 태도__一자유 의지에 관해 어떤 심오한 진리도 없으며, 동료들이 그 사람의 도덕적 책임이라고 짐 지우려는 것에 대해 그 사람은 도덕적으로 책임이 있 36) 같은 책, p. 35. 37) 같은 책, pp. 35-36.
다는 태도 는 거기에 왜 문제점이 있다고 < 생각>되어 왔는지를 설명해 주질 못한다. 다시 네이글의 말을 들 어보자. 이 해결책이 그릇된 까닭은 회의적인 문제 들 이 어떻게 제기되는지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왜냐하면 그런 문제들은 작위적인 외적 요건을 갖지 못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도덕적 판단의 본질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 누가 무엇을 행한 것에서 단순히 발생된 사건을 왜 제외시킬 필요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 행위에 관한 통상적 생각에 담긴 어떤 요 소가 그 까닭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비록 그러한 뺄셈 의 궁극적 결과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 하지만 이것은, 칸트가 (적어도 몇몇 구절에서) 제시한 바와 같은 유의, 자유의 본성에 관한 형이상학적 설명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댜 오히려, 네이글의 말처럼, ……어떤 의미에서 그 문제는 해답이 없다 왜냐하면 , 행위 원인이라는 개념에 포함된 일부 의미는 행위가 [단순한] 사건이 되는 것, 사람이 [단 순한〕 사물이 되는 것과 양립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19 ) 말하자면 사람이 사물이 되는 것 <이의>에는 이무-것도 없기 때문 에, 우리는 <우리 이해의 한계를> 보여주며 따라서 언어의 한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직관을 갖게 될 따름이다. 이제, <도덕적 판단의 본질>에 대한 네이글의 태도를 머독Iri s Murdoch 의 태도와 비교해 보자. 시 • 공간적 사물이 아닌 행위자를 고립시키려는 칸트식의 시도를 머독은 서양의 사상에서 불행하고도 정도(正道)를 벗어난 전환으로 본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특 38) 같은 책, p. 36. 39) 같은 책, p. 37.
정한 포스트칸트적 전통 내에서는, 고립된 의지 를 그려내고자 엄청난 노력이 경주되었다. 그래서 의지는 신념, 이성, 감정 등으로부터 고립되었지만 여전히 자아의 본질적 핵심이 다 .•·•··· · IOl 이어서 그녀는 또 이렇게 말한다. 고립된 의지를 지닌 행위자라는 이와 같은 실존주의적 개념은 인간에 대한 <매우 강한 이미지>를 동반하겠지만 그것은 < 낯설고 신빙성이 없다>라고. 죽 그 인간관은 < 프로이트에 의해 장엄하게 거행된, 칸트식의 자유주의와 비트겐슈 타인식의 논리가 만난 행복하고도 성과 많은 결혼>이라는 것이다 .41) 머독의 견해에 의하면, 실존주의는 대륙에서나 영 • 미의 경우 모두 다 문제를 진지하게 대면 하지 않은 채 해결하려는 시도, 개안에게 의로운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문 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 ……실존주의자가 그려내고 있는 것은, 실로 과학적 사실들의 바다 한복판에 놓인 자그마한 무인도에 버려진 개인의 불안한 고독 그리고 오로지 의지의 격변에 의해서만 과학에서 탈출할 수 있는 도덕성이다 .121 네이글과 사르트르처럼 이러한 그림을 재강조하는 대신에, 머독은 의지에 대한 칸트식의 개념, 결정론과 책임 사이의 반정립에 대한 칸 트식의 구도, 도덕적 자아와 경험적 자아에 대한 칸트식의 구분 등의 배경을 밝히고자 한다. 그녀는 16 세기에 플라톤주의에 기울어진 기 독교 신봉자가 사용하였을 법한 도덕적 반성의 어휘를 다시 포착하 40) his M urdoch, The Sovereig nity of G ood(New York: Schocken, lr.J ll), p. 8. 41) 같은 책, p. 9. 42) 같은 책, p. 없
고자 한다: <자 아 완성 > 이 핵심 요 소 이고 , 도덕적 책임 부여는 오히 려 부수적 요소이며 , (자기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 든) 자아의 발견 이야 말로 사랑의 끝없는 과제인 그 와 같은 어휘 를 . BI 네이글과 머독을 대비시켜 , 나 는 머독 을 실용주의의 동조자 라고 (오도하여) 일컫고자 한 것도 아니며, 머독이 표현한 도덕적 의식의 다양성에 대해 네이글이 둔감하다고 (그릇되게) 비난하려 는 것도 아 니다. 오히려 나는 표준적인 철학의 문제(혹은 자유 의지 , 자아, 행위 자 , 책임 등 상호 연관된 문제의 꾸러미)를 채택하는 것과 반면에 다움 과 같이 묻는 것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 즉 한편으로 <그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얼마나 형언할 수 없이 심오하며, 우리로 하여금 언어의 한계에 부딪히게 하는가? 그것은 ‘인간 존재’ 에 관해 무얼 보여주는가? > 등의 물음을 묻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어떤 사람들이 그런 걸 문제로 여길 것인가? 그런 문제는 어떤 어 휘를, 인간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산출할 것인가? 우리가 그런 문제 에 붙잡혀 있는 경우 우리는 왜 그것을 한 어휘의 모순 덩어리라고 보질 않고 어떤 심오한 것이라고 보게 되는가? 그런 문제를 지속해 묻는 것이 ‘20 세기의 유럽인이 됨’에 관해 무얼 보여줄 것인가?> 등 의 물음을 묻는 것 간의 차이를. 칸트에 의해 가장 잘 설명된 일련의 아이디어에 의해 < 주관성>이라고 불리는 관념 과학도 포착할 수 없고, < 한발짝 물러서 > 바라보는 태도도 포착할 수 없으며, 우리 이해의 한계를 형성하는 개인의 사적인 관점에 우리를 밀어넣는 방 식 _ ― 에 관한 한, 네이글은 확실히 옳고 또 탄복할 만큼 명쾌하다. 그러나 [네이글이 말한 <주관성>의 문제가 끼칠 결과나 영향력은] 과연 <철학적 문제의 해결 가능성, 언어의 한계, ‘실증주의적’ 충동에 대해 그만큼 나쁘다>고 말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충동에 이르게 한 철학적 관념에 대해 그만큼 나쁘다>고 말해야 할 것인지 43) 같은 책, pp. 28-30.
를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네이글이 <주 관성 -객 관성 > 의 이름으로 내놓은 다른 철 학적 문제 들 에 대해서도 똑 같 은 물음이 제기된다. <실 증주의자 > 와 < 실재론 자 > 의 직관간의 충돌은 네이글의 유명한 논문 「박쥐와 같이 된다는 것은 무얼 뜻하나?」에 의해 아마도 가장 잘 설명된다. 네이글은 그 논문에서 박쥐나 개와 비슷하게 된다는 것에는 < 무언가가 있지만 > , 반면에 하나의 원자나 벽돌이 된다는 것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우리 의 직관에 호소한다. 그리고 그 직관은 (비트겐슈타인적이며, 라일 Gil b ert R y le 적이고, 반( 反 )데카르트적인) 현대의 심리철학이 < 포착 하지 못한 >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와 같은 현대 심리철학의 경향 은 데네트에 의 해 다음과 같이 제안된 , < 원초 감각 raw fee ls> - 예컨대 고통에 대한 순전히 현상학적인 성질 자체 -에 관한 건방 진 태도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나는 고통에 대한 느낌은 확고부동하다는 생각을 포기할 것을, 실제로 는 고통의 < 모든 > < 본질적 > 특성도 포기할 것을 권고하며, 고통의 상태 란 모든 정상적 결과를 정상적으로 산출한다고 두뇌 과학자들이 발견해 낸 (만일 그들이 언제가 그런 컬 발견해 낸다면) <자연종(自然種)의> 상 태가 되게 내버려두라고 권고한다 . …. .. 고통에 관한 우리의 직관 중 하나 는 고통을 겪고 있는지의 여부는 이론가의 편의에 따른 결심의 문제가 아 니라, 하나의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직관을 지키려 하지 말라고 권고하며, 당신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내가 낸 이론은 (그것이 얼 마만큼 예측력이 있고 정연한 것이든 간에) 당신의 관점에 의거한 고통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그런 직관과 상관없이 내가 고통이라고 <부르기>로 택한 것에 대한 이론일 뿐이다 . 그러나 만일에 내가 주장했던 바처 럼 우 리가 존중해야 할 직관들이 일관된 짝을 이루지 못한다면, 고통에 관한 참된 이론이란 있을 수가 없으며, 진짜 고통을 느끼는 것과 꼭같을 어떠 한 컴퓨터나 로봇도 고통에 관한 참된 이론을 구체화시킬 수가 없게 된
댜 ……로봇 모델이 우리의 모든 직관 이 요구히는· 바 를 충족 시 킬 수 없 는 까닭은 고통 현상이 영영 신비하기 때 문 이 아니라 , 고통에 대한 우리 의 통상적 개념이 영영 부정합하기 때문일 것 이다 . II I 네이글은 데네트의 권고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 중 하나다. 네이글 의 반( 反 )실증주의는 다음 구절에서 가장 강하게 표출된다. ……만일에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 는 어떤 우주찻!( 宇宙船 )에서 나온 것들이 기계이거나 혹은 의식을 지닌 존재라면, 비록 그것이 우리가 친숙 히 알고 있는 것들과 너무나 판이하게 달라 우리가 결코 찾아낼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가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문제는 하나의 대답을 갖게 될 것 이다 . 그 대답온 우주선에서 나온 것들과 똑같게 될 무엇이 과연 있느냐 의 여부에 달려 있지 우리가 그렇게 말하도록 보증해 줄 행위상의 유사성 이 있느냐의 여부에 달린 게 아니다. …… 그러므로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보다 더 < 실재론적 > 인 입장에 기 우는 것 같다. 이것은 단지 심리적인 것에 국한해서만 그런 게 아니라 모 든 것에 관해 비트겐슈타인의 입장보다 더 실재론적인 입장에 내가 기울 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우주선에서 나온 것들이 의식을 지녔는가에 대한 물음은 <반드시> 대답이 있다고 믿는다. 이런 가정은 특정의 그림이 그 자체가 적용될 사례를 명확히 결정해 버린 데에서 비롯된 근거 없는 확신 의 반영에 불과하다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우주선 에서 나온 것들의 두뇌(혹은 두뇌 대신에 그것들이 지닌 것)에서 벌어지 는 일에 대한 그림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해부되어 관찰될 수 없다는 것 이다. 그 아이디어를 나타내기 위해 내가 어떤 그림을 사용하든 간에, 우주선 에서 나온 것들과 똑같게 될 무엇이 과연 있는가라는 물음의 의미를 니는 · 44) Da niel Dennett , Brain s to r ms(Montg o mery , Vt. : Brad for d Books, 1 甄 8), p. 228.
알고 있는 듯하며, 그 물음 에 대한 대답은 과연 그것들이 의식 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 이 지, 심리적 속성의 유무 를 인간의 경우와 유사 한 어떤 증거의 유무로 확장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 아님을 나 는 알고 있는 듯 하다. 의식을 지닌 심리적 상태는 그것이 내것이든 외 계인의 것이든 실재하는 상태이다 .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도 어쩌면 이와 같은 직관 에 조화될 수 있을지 모르나, 지금 나로서는 그것이 어떻게 가 능할지 짐작이 안 된다 . G I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확실히 그러한 직관과 조화될 수 < 없다>. 문제는 그가 다음과 같은 물음을 과연 수용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 기 때문이다. < 다론 것에 영향을 못 주고 헛도는 바퀴는 그 기계의 일부가 아니다 > 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에 표현된 바와 같이, -16) <차이 다운 차이가 있어야 진정한 차이다 > 라는 실용주의적이며 <실증주의 적>인 직관을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대신에 의식에 관한 네이 글의 직관을 포기해야 하는가? 우리는 확실히 그 두 직관을 다 <갖 고 있다>. 네이글에게 그 두 직관의 병존은 칸트에게 이율배반(二律 背反, an ti nom y)의 발견이 초월적인 어떤 것과의 만남을 가리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해가 한계에 도달한 것, 어떤 궁극적 심오성이 간파된 것임을 밝혀준다 비트겐슈타인에게 그것은 데카르트적 전통 이 매력적인 하나의 그림을, 우리를 < 사로잡게> 했던 그림을 스케치 했다는 것을 밝혀준 데 불과하다 <그것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으며 우리는 그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언어에 저장되어 있으며, 언어는 가차없이 그것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 ' 17 ) 이 소절의 첫머리에서 나는 어떤 직관은 의도적으로 억압되어야 한다는 실용주의자의 제안에 대해 직관적 실재론자가 반옹하는 길은 45) Thomas Nag el , Morta l Qu esti on s, pp. 192-193. 46) Ludw ig Wi ttge nste in , P hi losop h i떠 Investig ation s, I, s ect. '2:11. 47) 같은 책 I, sect. 115.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댜 직관적 실재론지는. (1) 철 두 철 미 하게 언어뿐인 것은 아니라고, 즉 언어로 표현될 수도 없고 어떠한 논증도 그것을 의심스럽게 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한 모종의 인지가 존재한다고 말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2) 모든 전통에 공통적 이며 고 립 • 추출될 필요가 있는 핵심 언어가 존재한다고 좀더 완곡하게 말 할 수 있다. 머독과 대비될 경우 네이글은 머독이 추천하는 유의 도 덕적 담론도 칸트식의 도덕적 담론과 똑같이 < 고립된 의지 > 라는 관 념으로 둘러싸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아마도 두번째 대안을 택할 거라고 우리가 상상해 볼 수 있다. 반면에 우리의 직관을 제거하고자 하는 데네트와 대비될 경우 네이글은 첫번째 대안을 택해야만 한다. 네이글은 우리의 지식이 우리가 말하는 언어에 의해 한계지어진디는· 것을 시종일관 부안해야만 한다. 다음 구절에서 그는 그렇게 이야기 하고있다. 정확한 본성을 우리가 알 가망이 없는 이와 같은 사실의 존재를 우리 가 믿을 수 있다는 점을 누가 부인코자 한다면, 그 사람은 박쥐에 관해 숙 고할 때 우리가 처한 처지란 우리와 같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개념화 하려 할 때 지성 있는 박쥐나 화성인이 처하게 될 처지와 똑같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지성 있는 박쥐나 화성인들의 어떤 심리 구조가 그 일을 성공하지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와 같음이 가 리키는 바가 아무것도 없음이라고 그들이 결론짓는 일은 부당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들이 그와 같은 회의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 부당 하다고 우리가 아는 까닭은 우리와 같음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고 있기 때 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다양성과 복합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비 록 <그것을 적절히 묘사할 어휘를 우리가 못 가졌지만> 그것의 주관적 특성은 매우 구체적이란 것 그리고 오직 우리와 흡사한 피조물에 의해서 만 이해될 수 있는 말로 얼마만큼은 묘사될 수 있디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강조는 추가한 것임 ] 18l
여기에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메타 철 학적인 문제에 부딪힌다. 철학 적 논 변에서 우리 는 비언어 적 지식에 호소할 수 있는가? 이것은 변 증이 궁지에 처한 게 과연 철 학적 심오성의 표식인지 그렇지 않다면 그와 같은 궁지로 치닫지 않게 할 언어로 대체되어야 할 좋지 못한 언어의 표식인지에 관한 물음이다. 바로 < 그 물음이> 직관의 지위에 관한 논의 주제이며, 그것을 나는 실용주의자와 실재론자 사이의 진 짜 쟁점이라고 앞에서 말한 바 있다 . 예컨대 < 도덕적 판단 > 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어떠한 것에 대한 반성도 마침내는 네이글이 묘사하 고 있는 문제점에 봉착할 것이라는 짐작은 토론해 볼 충분한 가치가 있으며, 윤리학의 역사가 그것에 관해 어떤 빛을 던져줄 수도 있는 물음이다. 반면에, 우리와 같음에는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것, 참된 명 제들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와 같이 < 됨으로써만> 배울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는 직관은 제아무리 어떤 것이라 해도 더 이상의 빛을 던져줄 수 없는 유이다. 그 주장은 심오하거나 아니 면공허하댜 실용주의자는 그것을 공허한 것으로 본다. 실로 실용주의자는 <주 관성>에 관한 네이글의 많은 논의를 언어의 그물 한가운데 있는 텅 빈 곳 주위에 선을 그어놓고서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 라 무언가가 있다고 소리치는 격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건 실용주의자가 결과적으로 (셀라즈의 말처럼) <모든 인지는 언어적 사태다 > 라거나 (논리실증주의자의 말처럼) <한 명제의 의미는 그 검 증의 방법이다 > 와 같이 나타낼 만한 철학적 이론에 관한 어떤 독자 적인 논변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와 같은 슬로건은 인지나 의미 에 대한 철학적 탐구의 결과가 아니라 단지 철학적 전통에 대해 사람 들의 눈을 끌게 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마치 <대표 없는 과세 없다> 라는 슬로건이 세금의 본질에 관한 발견이 아니라 당시 영국 하원에 대 48) Thomas Nag el , Morta l Qu esti on s, p. 170.
한 불신의 한 표현이었듯이 . ) 직관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손쉬운 논변이란 것, 그 자체가 직관보다 더 강한 어떤 것에 기반올 둔 논변이란 것은 없다. 실용주 의자에게 네이글의 직관이 잘못된 것은 실용주의자가 생각할 때는 강화되기보다는 차라리 없어져야 할 어휘를, 예컨대 도덕에서 칸트 식의 어휘, 심리철학에서 데카르트식의 어휘 등을 정당화하는 일에 그 직관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 <오로지> 그 점 때문이다. 그러한 직관과 어휘가 없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대한 실용주의자 의 유일한 논변은 그것들이 속한 지적 전통이 아직 청산되지 않았고, 값어치에 비해 말썽이 더 많으며, 우리를 짓누르는 악몽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변의 형태만을 놓고 따진다면] 순환에 빠지지 않을 논변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직관에 대한 네이글의 독 단이나 실용주의자의 무능은 피차 마찬가지이다. 직관의 지위에 관한 실용주의자와 직관적 실재론자 간의 쟁점은 두 가지로 묘사될 수 있다. 직관의 중요성에 관한 직관들의 갈등이거 나, 혹은 어떤 어휘에 비해 다른 어휘를 더 선호하는 것이라고. 두 묘사 중 실재론자는 전자를, 실용주의자는 후자를 더 선호할 것이다. 하지만, 양측간의 <쟁점은 철학이 문화적 전통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어떤 자연적 출발점을 찾으려 해야만 하느냐에 대한 것, 혹은 철학이 해야 할 모든 것이 문화적 전통들을 비교하고 대조하는 일이냐에 관 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면 어느 묘사를 사용하던 문제될 것은 없다. 그 쟁점은, 거듭 말하지만, 과연 철학이 철학이 되어야만 하는가의 문제다. 직관적 실재론자는, 모든 텍스트의 깊숙한 저변에는 (단지 또 하나의 텍스트가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텍스트들이 그것에 <부합> 되고자 하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철학적 진리와 같은 것 이 있다고 생각한다. 실용주의자는 그와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실용주의지는- 어휘와 문화를 거기에 견주어 테스트할 어떤 목적, 즉 <우리가 어휘와 문화~ 구성할 때 달성코자 하는 목
적 > 이라고 추출될 만한 무엇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용주의자는 서로 대조되는 어휘와 문화를 가지고 놀이하는 과정에 서 우리는 새롭고 더 나은 언어와 행위 방식 __― 이미 알려진 기준 에 준거하여 더 나은 게 아니라 그 이전의 것들 보다 분명히 더 나아 < 보인다 > 는 의미에서 그냥 더 나은-을 산출한다고 생각한다. 5 탈철학의 문화 나는 실재와의 대응에 의한 일류급의 진리와 믿어서 좋은 것이라 는 이류급의 진리 사이의 철학적 구분을 실용주의자는 거부한다는 데에서 논의를 시작하였다 . 그리고 이것은 철학이 없더라도, 순전히 우연적이며 규약적인 진리를 그것보다 더 위대한 진리에서 걸러내려 는 폴라톤적인 시도가 없더라도, 하나의 문화가 진척될 수 있겠느냐 라는 물음을 제기한다고 말했다 . 이어서 실용주의에 대한 <실재론 자 > 의 최근의 반박들을 살펴본 3 절과 4 절에서의 논의는 내가 애초에 제시한 철학과 철학의 구분으로 되돌아오게 하였다. 실용주의는 <사 물들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를 본다>라는 셀라즈식의 생각 을 넘어설 가능성을 부인한다. 책 속에 묻혀사는 이 시대의 지성인에 게 그 생각은 모든 다양한 시대나 문화 속의 모든 다양한 어휘들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를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직관>이란 그러한 지성인이 올라타고 있는 문학적-역사적_인류학적一정치적인 회전 목마에서 우리를 내리게 해서 <발전적>이고 <과학적>인 어떤 것에 옮겨타게 하려고 고안된 장치, 우리를 철학에서 철학으로 옮겨 가게 하려고 고안된 장치에 대한 최신판의 이름일 뿐이다. 나는 앞에서 최근의 반(反)실용주의적 반발의 세번째 모티브는 단 지 이러한 회전 목마에서 내리겠다는 바람에 불과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 바람은 만일 하나의 학문 분야로서의 철학이 해야 할 준
(準)과학적인 것이 이무 것도 없다면, 만 일 철학 교수 를 역사학자나 문학바평가와 구별시켜 줄 고유한 전문 분 야란 것 이 전혀 없다면, 서 양의 지적 삶에서 핵심을 차지해 왔던 어떤 것을 잃게 될 거라는 두 려움과 연관되어 있댜 확실히 그러한 두려움은 정당한 것이다 . 만일 에 철학이 사라진다면 서양의 지적 삶에서 핵심적이었던 무엇을 잃 게 될 것이다-마치 지적으로 존중될 만한 철학적 명료화의 후보 중에서 종교적 직관이 사라 졌을 때 소중한 무엇을 잃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계몽주의는 종교의 자리를 이어받았던 것이 < 더 나은 > 것이라고 온당하게 생각하였다. 이제 실용주의자는 계몽 주의가 산출한 < 과학적 > 인 문화, 실증주의자의 문화 를 이어받게 될 문화가 < 더 나을 > 거라는 내기를 걸고 있댜 실용주의자가 그렇듯 낙관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물음은, 진 리를 가질 때 우리가 실재와 맞닿아 있는지를 말해 줄 기준을 우리 가 내부 깊숙이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적어도 지성인이 라면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을 그런 문화를 상상해 볼 수 있는가, 혹은 그런 문화가 바람직스러운가에 대한 물음이다. 거기에서는 성직 자도 , 물리학자도, 시인도, 정당(政黨)도 다른 쪽보다 더 <합 리적 > 이 고 더 <과학적>이고, 더 < 심오하다 > 고 간주되지 않게 될 그런 문 화이댜 거기에서는 문화의 어느 특정 부분도 그것 이의의 부분이 열 망하는 조건을 구현(혹은 구현하지 못한다고 표시)하는 것으로 지목될 수 없다. 예컨대 훌륭한 성직자나 우수한 물리학자가 준수하는 현행 의 분야 내적인 규준을 뛰어넘어 그들 양쪽이 다 준수해야 할 초분 야적, 초문화적, 초역사적인 또 다른 규준이 있다는 말은 아무런 의 미도 없게 된다. 그러한 문화에서도 영웅 숭배는 여전히 있을 것이 다 . 하지만, 그것은 신의 아이들에 대한 숭배, 여느 사람들보다 월등 히 불멸성에 근접한 인물로서의 영웅에 대한 숭배는 아닐 것이다. 그 것은 매우 다양한 일 중 각자의 몫을 아주· 잘해낸 예의적인 남녀에 대한 찬사일 뿐이다. 그러한 인물들은 어떤 비밀을 아는 자도 아니고 ,
진리에 도달한 자도 아니며, 다 만 인 간 다 움의 견지 에서 출중한 자일 따 름 이댜 더 군다 나 그러 한 문화는 문화 가운데 어떤 영역은 왜 그 리고 어떻 게 실재 와 특별한 관개를 갖 고 있는가를 설 명하는 < 철학자 > 라고 불 리는 사람을 하나 도 포함하지 않을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그러한 문화 도 사물 들 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를 보는 전문가들을 포함할 것 이다 .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특정한 학문 분과의 표준에 따라 해 결 해야 할 특별한 < 문제 > 도 없으며, 적용해야 할 특별한 < 방법 > 도 없고, 하나의 <전 문 직 업 > 이라는 집단적인 자기 이미지도 없을 것이 댜 운율보다는 도덕적 책임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며 , 혹은 인간 육 체의 표현보다는 문장의 표현에 더 관심을 가진다는 점에서 그들이 현대의 철 학 교수들을 닮을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떤 것이든 다른 모든 것들과 연관짓게 하려는 바람을 갖고 서, 거의 모든 것 에 대해 견해를 피력할 준비가 되어 있는 만능의 지 성인일 것이다. 그와 같은 가설적인 문화는 플라톤주의자와 실증주의자 양쪽에 의 해 < 퇴폐적 > 으로 느껴진댜 플라톤주의자는 그 문화에는 아무런 지 배적인 원리도, 중심도, 구조도 없다고 본다 . 실증주의자는 그 문화에 는 엄연한 사실에 대한 존중과 객관적 진리의 추구가 정서나 의견에 비해 우선시되는 문화 영역 , 즉 과학에 대한 존중이 없다고 볼 것이 다. 플라톤주의자는 영원한 어떤 것에 의해 인도되는 문화롤 갈망할 것이댜 실증주의자는 일시적인 어떤 것, 즉 세계가 실제로 나타내는 엄연한 효과에 의해 인도되는 문화를· 갈망할 것이다. 그렇지만 양쪽 공히 문화가 제멋대로 하게끔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인도되고>, 속 박되기를 바란댜 그들 양측에게 <퇴폐성>이란 <저 바깥에 있는> 어떤 것에 복종하기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바꿔 말해 그것 은, 사람들의 언어나 사람들 자신도 그것에 <부합>되도록 노력해야 할 무엇이 사람들의 언어를 초월해서 존재한다는 깨달음을 달가워하
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 들 양쪽에게는 부합성 을 지향하는 시도와 그 밖의 것을 문화 내에서 준별하고, 일류급의 진리와 이류급 의 진리를 준별하는 획정의 선을 제공해 주는 분과로서의 철학은, 퇴 폐성에 대한 투쟁과 밀접히 관련된댜 그래서 그러한 탈철학의 문화가 바람직한가라는 물음은 다음과 같 이 바꿔 표현될 수도 있다. 언어의 편재성은 정말로 진지하게 수용될 수 있는가? <채택된 특정한 서술을 통하는 방식 이외의 방식으로 > 우리가 실재에 접하는 일은 결코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가? 즉 굿 맨의 말마따나 19} 우리가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 물음은, 실재는 <본질상 정신적인 것 > 이 라는 사실로부터 우리가 형이상학적 위안을 도출해 낼 수 있다거나 도출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관념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 물 음은 오히려 카벨이 <나에 대한 끝없이 많은 참된 서술들 중에서 나 는 과연 누구인가를 말해 줄 서술의 가능성 > 501 이라고 불렀던 것을 우리가 포기할 수 있겠는가의 물음이다. 그 서술들 중 어느 하나가 바로 그와 같은 일을 해낼 것이라는 희망은 하나의 충동이 되어 현 재 우리의 문화에서 젊은이들로 하여금 도서관을 찾아 독서하게 하 며, 모든 것을 분명하게 하는 비밀을 마침내 찾아냈다고 주장하게 하 고, 과학자나 학자들이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서 자신들이 이룬 업적 이 <철학적 함축>과 <인간을 위한 보편적 의의>를 지니기를 소망 하게 한다. 탈철학의 문화에서는 [앞의 것과는] 다른 어떤 희망이 우 49) Nelson Goodman, Wa ys of Worldmalcin g ( lnd ian ap olis: Hackett , 1978) 을 참조. 나는 굿맨의 <수많은 세계 > 라는 어구가 오도적이라 생각하며, 더 직설적 표현인 < 같은 세계에 대한 수많은 서술들>을(누군가가 < ‘그것은’ 어떤 세계이 냐?>라고 묻지 않는다면) 우리가 넘어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계 에 대한 서술들을 적합성의 관점에서 비교할 길이 없다는 게 그의 논점의 핵심 이며, 그 책의 처음 두 장에서 그는 그 논점을 매우 생생하게 제시하고 있다 . 50) Sta nley Cavel!, The Claim of Reason(Ox ford : Ox for d Un ive rsit y Press, lfJ /9) , p. 388.
리로 하여금 도서관을 찾아 독서하게 하며, 우리가 찾아낸 책들 외에 새로운 것을 추가하게 할 것이다 . 아마도 그 희망은 우리가 이제껏 보아왔던 서술 방식들에 대한 어떤 서술 방식 ――? 인류가 이제껏 해 왔던 서술들에 대한 어떤 서술―~ 우리의 퇴폐주의자들에게 제 공하려는 바람일 것이다. 만일 < 우리 시대 >를 < 이전 시대들에 대한 우리의 견해 >로 간주하고 그래서 헤겔적인 방식으로 세계의 각 시대 가 그 이전의 모든 시대들을 요약 개괄하게 한다면, 철학이란 곧 < 자기 시대에 대한 사상적 이해 >3” 라는 헤겔의 말에 탈철학의 문화 는 동의할 것이다.
51) G. W. Heg el , Phil o soph y of Rig ht, trans . T. M. Knox(Ox for d: Ox for d Un ive rsity Press, 1952), p. 11. 이 구절은, 매우 유명한 바로 그 다음에 있는 구절(<철학이 자신의 잿빛에 잿빛을 덧칠한다면, 삶의 형태는 더 낡아버리게 될 것이다. 철학 이 잿빛에 잿빛을 덧칠함에 의해 삶의 형태가 다시 젊게 되는 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인식될 뿐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깃들 때만 비상(飛翔)한다 > )과 마찬가지로, 헤겔에게 전형적인 것이 아니며 , 그가 철학에 관해 말한 여타의 많은 부분과 조화되기 어렵다 . 그러나, 그 구절은 19 세기 역 사주의의 창안을 돕고, 현대의 문예적 지성인의 사고 속에 파고든 헤겔의 측면 을 완벽하게 나타내고 있다. 나는 이 논점에 대해 이 책의 논문 8 에서 더 논의 한다.
탈철학의 문화에서는 위에서 말한 것이 철학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점 > 이 분명해질 것이다. 철학은 우리 시대의 사싱――一-우 리가 사용하는 서술이나 채용한 어휘 -이 대안적인 다른 어휘가 아닌 [제 3 의] 어떤 것과 무슨 관계를 갖고 있는가를 묻는 물음에는 대답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류가 발명해 왔던 다양한 이야기 방식들의 장 • 단점에 대한 하나의 비교 연구다. 요컨대 , 그것은 가끔 씩 < 문명 비판 > 一―-내가 앞에서 문학적-역사적-인류학적-정치적 회전 목마라고 말했던 것을 가리켰던 용어 ――-이라고 불리는 것과 흡사하댜 근대 서양의 <문명비평가>는 어느 것에 대해서건 논평하 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탈철학의 문화에서 철학에 대한 허풍을
없애버린 철학자, 즉 만능 지성인의 선구자다. 그는 헤밍웨이(E rnes t Hem ing w ay, 1899-1961) 에서 시작해서 프루스트 (Ma1 -c el Proust, 1871-1922), 히틀러 (Adol f Hitler , 1889-1945), 마르크스, 푸코, 더글 라스 M ary Doug la s, 동남아시 아의 현재 상황, 간디 (Mohandas Gand i, 1869-1948), 소포클레스 So p hocles 등으로 재빨리 옮겨간다. 그는 이 와 같은 이름들을 사용해서 일련의 서술이나, 상징 체계, 보는 방식 등을 가리키는 거명주의자다. 그의 전문성은 거대한 그림들, 사물들 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를 보려는 시도들 간의 유사성과 차이점 을 보는 것이다. 그는 사물들의 연관성을 형성하는 모든 방식들이 어 떻게 연관되어 있는가를 당신에게 말해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사물들의 연관성을 형성하는· 모든 <가능한> 방식들이 <반드시> 어 떻게 연관되어야 하는가를 말해 주지 않기 때문에, 즉 그와 같은 초 역사적인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갖지 않아서 시대에 뒷처질 운명을 안고 있다. 하지만, 시대에 너무나도 뒷처져서 이전 세대의 지적인 차 르 czar 가 되려는 사람, 더 이상 누구도 그 사람의 얘기를 듣고 싶지 않을 낡은 서술들을 재서술하려는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신들의 시대를 사상 속에 포착하는 것이 최대 희망인 사람들, 스 노 C.P. Snow 가 말한 <문예의 문화>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그 배후에 항구적인 어떤 것도 남기지 않기 때문에, 플라톤주의자나 실 증주의자에게 그것은 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실증주의자와 폴라톤주의자는 참된 명제들, 단 한번 만에 참된 것이 라고 밝혀진 명제들을 인류의 모든 세대들을 위한 유산으로 남기길 바란다. 그와 같은 불멸의 진리로 상정된 것을 표현하는 어휘도 이내 죽게 마련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역사주의>에 의해 야기된 두려움 과 불신 때문에 철학자들에게, 특히 스노가 말한 <과학의 문화>의 대변자들에게, 헤겔은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 쿤과 푸코는) 진절머리 나는 사람이 된다우 (확실히 헤겔 자신은 철학적이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제안했던 합리성의 시대화(時代化)는 실용주의자가 철학
52) 스노가 (그의 저서 『 두 문화와 과학혁명 Two Cultu r es and the Sc ien ti fic Revolu ti ons 』 (Camb ri d g e: Cambri dg e Un ive rsit y Press, 1959) )에서 그려낸 문예적 문화와 과학적 문화 사이의 대립은 심지어 스노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 다 훨 씬더 심오하고도 더 중요한 것이라고 니는· 생각한다. 그 대립은 한편으로 는 스스로 를 시간 속에 갇힌 사람들, 지속되는 대화중의 어느 무상한 순간이라 고 여기는 사람들과 , 다른 한편으로는 뉴턴의 해변에서 얻은 조약돌을 영원한 구조에 추가시키길 바라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과 매우 잘 합치된다. 그 대립은 문예비평가들이 물리학을 배우거나 물리학자들이 문예 잡지를 읽음으로 해서 해소될 수 있는 쟁점이 아니다. 그 대립은 물리학이 발명되기도 전인 플라톤의 시대에 시학과 철학이 최초로 다툴 때 이미 생겨났다. (이에 부수해서, <하필 ‘무 문화만이 아니라 수많은 문화들…… > 이라는 관점에 서서 스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스노의 논점을 놓쳤다고 생각된다 . 만일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이 얘기 한 바와 같은 두 문화 사이의 산뜻한 이분법을 얻고자 한다면, 서유럽의 서적들 이 자기 나라에 수입될 가망이 있는 동유럽의 검열관 누구에게든 물어보라. 그 검열관이 긋는 선은 역사나 철학 같은 분야에 관련될 터이지만, 거의 언제나 물 리학은 통과시키는 반면에 지식인의 소설은 통과 못하게 할 것이다. 수입 불가 의 딱지가 붙게 될 서적들이란 바로 자기-서술을 위한 새로운 어휘를 암시할 만한 책들일 것이다.)
의 불신에 이르게 된 단계 중 가장 중요한 단계였다.) 사멸하는 어휘와 불멸하는 명제 사이의 대립은, 한편으로는 문예 의 문화에서 특징적인 (모든 이들이 다른 이들의 어휘를 < 지양(止揚, a ujh eben) > 하려는 시도와 함께) 결정적이지 못한 어휘들을 비교하고 대조하는 일과, 다른 한편으로는 수학, 또 쿤이 < 정상과학 > 이라고 부른 것 그리고 (적어도 하급 법원의) 법률 등에서 특징적인 엄밀한 논증 간의 대립으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어휘들간의 비교와 대조는 통상 새롭고 종합적인 어휘를 창출한다. 반면에 엄밀한 논증은 명제 에 대한 합의를 산출한다. 과학이나 철학에 경도된 사람들의 관점에 서 볼 때, 문예적인 지성인들이 정말로 그들을 화나게 하는 일은 어 떤 것을 논쟁의 해소로 간주하며, 참여자들이 호소해야 할 규준(規 準 )이 무엇인지에 대해 합의를 얻고자 하는 그들의 논증에 문예적 지성인들이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이댜 하지만, 탈철학의 문화에서는
그와 같이 화나게 히 는 - 일은 느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한 문화에서는 규준이란 실용주의자들이 보는 바처럼 특정한 공리적 목적을 위해 만 들 어진 일시적인 휴식처로 보이게 될 것이다. 실용주의자의 설명에 따 르 면, 하나의 규준——-공리에서 도출된 것, 계기의 바늘이 가리키는 것, 법규가 말하는 것 등 이 규준이 < 되는 > 까닭은 어떤 일을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 아래 특정한 사회 적 실행이 탐구의 길을 가로막을 필요가 있으며 , 해석의 뒷걸음질을 정지시켜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댜 ;-,.i I 따라서 규준에 대한 합의 , 휴 식처에 대한 합의에 의해 이뤄지는 실행인 엄밀한 논증이 < 일반적으 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다만 탐구의 길을 가로막는 것 이 일반적으로 바람직스럽지 않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야기다 . 5 1 1 엄 밀한 논증이란, 가질 수만 있다면 가져서 더 편리한 어떤 것과 같다. 당신이 얻고자 참여한 목적이 (예컨대 어떤 효소( 醉素 )의 기능 방식, 길거리에서의 폭력 예방, 정리( 定理 )의 증명 방식 등을 알아내는 것처 럼) 아주 분명하게 미리 구체화될 수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얻어낼 53) 물론, 예컨대 논리학의 법칙 , 악명 높은 거짓말쟁이의 보고는 증거로 채택하지 말라는 원칙 동과 같이 문화의 부분끼리의 모든 나눔도 포괄하는 규준들이 많 이 있다 .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그 보편성 덕택에 어떤 특별한 권위 를 지니지 않는다는 건 지렛대 받침, 나사못 그리고 지렛대 등으로 이뤄진 공구 세트가 어 떤 기계에도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특권을 갖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54) 퍼스는 <이성의 제 1 법칙은…… 탐구의 길을 가로막지 말 것>이라고 말했다 (Col /ecte d Pape rs of Crarles Sandes Peir c e, 1.13 5). 그러나 앞에 트인 어떤 길이 든 언제나 끝까지 가야만 한다고 그가 의미한 건 아니었다 . 이것은 그가 <논 리 적 자기 통제>를 <윤리적 자기 통제>의 당연한 결과라고 강조할 때 도출되는 논접이다(예컨대, 같은 책, 1. 606 을 참조). 그가 <이성의 법칙>에서 얻고자 했던 것은 언어의 편재성에 관해 말한 것과 동일한 논점, 죽 우리는 해석의 뒷걸음질 이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멈춰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되지만, 오히려 모든 걸 다시 한번 더 묻게 해주는 어떤 어휘나, 일련의 서술이 항상 다가와 있 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는 논점이다. 규준에 대한 복종은 < 그 자체 > 로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건 자기 통제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룰 바 없다. 그것은 철학적 청교도주의의 한 종류가 될 것이다.
수가 < 있다 > . 반면에 ( 예 컨 대 공정 한 사회의 추구 , 도덕 적 딜레마의 해소, 궁극적 관심의 상징에 대 한 선택, < 포 스 트모더니 스 트 > 의 감수성 에 대한 탐구처 럼 ) 목 적 이 분명치 않다면, 아마도 당신은 그걸 얻지 못 할 것 이댜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는] 엄밀한 논증을 얻으려 애써 서는 안 된다 사 물 을 서 술 하는 다양한 어휘의 차이 중 하나는 사물 을 서 술 하는 목 적 이므로 , 만일에 당신이 < 철학 > 에 관심을 가졌다면. <확 실히 > 당신은 엄밀한 논 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철 학자는 그러한 다양한 서술들 중에서 미리 선결 문제를 요구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철 학은 철학이 되어야 한다고 권유하는 일은, (어쩌면 그중 어떤 것 이 궁극적 어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모든 다른 어휘들의 공 통된 핵심이요 진리라고 미리 알려질 수 있는 어떤 궁극적 어휘를 철 학으로 하여금 탐구하게 하는 일이다. 실용주의자는 그런 권유가 억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탈철학의 문화는· 그것을 억제하는 데 성공할 것이댜 그와 같은 문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는, 모 든 규준을 탐구의 촉진을 위해 공동체가 만든 일시적인 휴식처라고 보는 것이 도덕적 비하( 卑下 )로 보인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가 틀렸 으며, 우리가 진리를 한번도 본 적이 없고,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다 시 본다고 해도 직관적으로 그걸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라고 가정해 보라. 이것은 마치 비밀 경찰이 다가올 때, 혹은 고문하는 자들이 무 고한 사람을 난폭하게 다룰 때,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한다 고 해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당신의 내면에는 당 신이 배반하고 있는 무엇이 없나요? 영원히 지속될 전체주의 사회의 관행을 당신이 구현하고 있다지만, 그러한 관행들을 초월해서 당신들 울 저주하는 어떤 것이 있단 말이요.> 사르트르의 다음과 같은 말이 그렇듯, 이러한 생각을 갖고 살기란 정말 어려운 노릇이다 . 내일 내가 죽은 뒤에 어떤 사람들은 파시즘을 수립하기로 결정할지 모
른다. 그리고 다른 사람 들은 그들 이 그렇게 하도록 내맡겨 둘 만큼 겁많 고 비참할지 모른다 . 그때에 파시즘은 인간에게 진리가 될 것이며, 우리는 그만큼 더 나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사물 들은 인간이 결정한 바에 따라 규정될 것이다.i3 l 이 냉혹한 말은 듀이와 푸코, 제임스와 니체를 함께 묶어주는 것의 의미를 명백하게 해준다 . 즉 우리의 내부 깊숙한 곳에는 우리 자신이 놓아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 우리가 실행을 창안하는 과정 에서 창조해 낸 것들 말고는 어떠한 규준도 없고, 그러한 규준에 호 소하지 않는 합리성의 기준이란 있을 수가 없으며, 우리 자신의 규약 에 복종하지 않는 엄밀한 논증은 하나도 없다는 것의 의미를 말이다. 그래서 탈철학의 문화란 인간들이 초월적인 어떤 것과는 아무런. 연관도 지니지 않은 채 스스로 외롭고 유한하다고 느끼는 문화일 것 이다. 실용주의자의 설명에 의하면, 실증주의는 그러한 문화로 발전 함 사르트르가 표현하듯이 신(神) 없이 살아가는 것을 향한 진 보―—에 있어서 중간 단계에 불과하댜 왜냐하면, 실증주의는 거기 에서 우리 자신이 아닌 어떤 것을 접할 것이며 어떤 서술에도 상대 적이지 않는 발가벗겨진 진리를 찾아낼 거라는 문화의 한 영역, 즉 과학이라는 관념 (그리고 <과학적 철학>이라는 관념) 속에 하나의 신 울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댜 그래서 실증주의의 문화는 한편으로는 <가치는 단지 ‘상대적인’ (혹은 ‘정의적(情諒的)인’ ‘주관적인’) 것>이 라는 견해와,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도덕적 선택의 문제와 연관해 서는 <과학적 방법>을 빌려오는 것이 모든 문젯거리에 대한 해결책 이라는 두 가지 견해 사이를 시계추마냥 끝없이 왔다갔다 하였다 . 반면에 실용주의는 한때 신이 차지하였던 자리를 메꾸기 위해 과 55) Jea n-Paul Sa rtre, L'Ex ist e n ti ali sm e est un Humamanis m e(Pa ris: Nag el , 1946), pp. 53-54.
학을 하나의 우상으로 세우지 않는다. 실용주의는 과학을 문예의 한 장르라고 본다. 바꿔 말해서 문예와 예술도 과학적 탐구와 똑같은 지 위에 서 있는 탐구라고 본다. 따라서 실용주의는 윤리학이 과학의 이 론보다 더 < 상대적 > 이거나 더 <주 관적 > 이라고 보지 않으며, < 과학 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물리학은 우주의 다양 한 부분들에 대처하기 위해 애쓰는 한 가지 방식이며, 윤리학은 다른 부분들에 대처하기 위해 애쓰는 다른 방식이다. 수학은 물리학이 그 몫을 하게 돕고, 문예와 예술은 윤리학이 그 몫을 하게 돕는다. 이러 한 탐구들 중 어떤 것은 명제로, 어떤 것은 이야기로, 어떤 것은 그 림으로 그 결과를 나타낸다 . 어떤 명제를 주장하고 , 어느 그림을 볼 것이며, 무슨 이야기를 듣고 논평하고 풀어서 다시 말할 것인가 하는 물음 등은 모두 다 어떤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혹은 우리가 원<해야 만> 하는 것)을 얻게 도와줄 것인가에 관한 물음이댜 따라서 실용주의자의 진리관 (이것은 적절한 논제일 수 없지만) 그 자체는 과연 <참> 인가라는 물음은, 곧 탈철학의 문화는 추구할 가치 가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댜 그 물음은 <참이다>라는 낱말의 의미에 관한 물음도, 적합한 언어철학의 요건에 관한 물음도, 세계가 <우리 의 정신과 독립하여 존재>하는가에 관한 물음도, 우리 문화의 직관 이 실용주의자의 슬로건 속에 포착되어 있는가에 관한 물음도 아니 다. 실용주의자와 그의 논적 사이의 쟁점이 양측에 의해 합의된 규준 에 따라 엄격하게 되며 해소될 수 있는 길은 없다 . 이것은 모든 것을 단번에 판가름나게 해버리는 쟁점 중 하나이다. 그런 일에서는 <데 이터>에 대해, 혹은 어느 것을 결정적인 물음으로 간주할 것안가에 대해 합의를 찾으려는 노력이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나 쟁점이 혼란 스럽디는 것이 그것을 방치해 둘 이유는 안 된다. 종교와 세속주의 간의 쟁점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듯 이, 그게 판가름 나야 한다는 것은 중대한 문제였다. 내가 이 책에서 제안하는 현대의 철학적 상황에 대한 설명이 맞다
면, 실용주의의 진리성 여부에 관한 쟁점은 헤겔 이후의 모든 중요한 문화적 발전이 일시에 겹쳐져 우리 앞에 놓인 그런 쟁점이다. 그러나 이전의 것들이 그랬듯이 그 쟁점도 사물들이 실제로 어떠하다는 바 에 관한 갑작스런 어떤 발견에 의해 해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 만일에 역사가 우리에게 그와 같은 쟁점을 결정할 여유를 허락한다면, 그 쟁 점은 여러 가지 자기 이미지들 중에서 완만하고도 고통스러운 선택 에 의해서만 결정될 것이다.
1 잘 잃어버린 세계
대안적인 개념 체계들에 대한 관념은 헤겔 이래로 우리 문화에서 하나의 상식이 되었다. 헤겔의 역사주의는 사상과 사회의 발전에서 정말로 참신한 것이 어떻게 이룩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 세월을 거슬러 회고해 보면 , 사상과 도덕에 대한 그러한 역 사주의자의 개념은 그 자신은 조금도 역사주의 철학자가 아닌 칸토 에 의해 그 가능성이 열렸다. 왜냐하면 칸트는 <대안적인 개념 체 계 > 에 대한 관념의 발전에 필수적인 두 가지 구분, 죽 자발성과 수 용성의 구분 및 필연적 진리와 우연적 진리의 구분을 완벽하게 만들 고 규범화하였기 때문이다 . 칸트 이래로 우리는 정신을 능동적 기능과 수동적 기능으로 나누 고, < 세계 > 가 후자에게 강요한 것을 전자가 개념들을 이용해서 <해 석한다 > 고 생각하는 것을 뿌리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알게 되었 다. 또한 우리는 정신에서 떼어내기 어려운 개념들과 정신에서 떼어 내 따로 둘 수 있는 개념들을 구분하지 않기도 어렵다는 점을 알게 되었댜 우리는 그중 전자의 개념들에 관한 진리를 가장 적절하고도 모범적인 뜻에서 <필연적>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 신에 대한 이 그림에 집중하자마자, 헤겔에게도 그랬듯이 우리한테됴 그와 같이 매우 중 요한 개 념 들 , 우리의 경험 이나 도덕 이 장 차 어 떻게 될지 를 결 정히는 선 험적 a pri o r i 개 념 들 이 디 를 - 수도 있 지 않 을 까 하는 생각이 떠오 른 다 물론 우리 는 < 그토록 > 다 른 경 험이나 실 행이 어떤 것 과 같 을 지는 상상 할 수가 없댜 하 지 만, 우리 는 [ 그 리 스 신화에서 나오는] 황 금 시대의 사람 들, 행운의 섬 속 에 사 는 사람 들 , 혹은 미친 사람 들 은 우리의 공 통된 속 성인 직 관 들을 다 른 형태 로 조 형 할 것이며 , 그래서 다 른 < 세계 >를 의 식할 거라고 추 상 적 으 로 제안 할수는 있다. 관찰된 것과 이론적인 것 을 대조시킨 것 에 대한 (예컨대 , 쿤, 파이 어아벤트P aul Feye r abend, 셀 라즈 등의) 다양한 공격은 , 개념 을 바꾸 는 것은 곧 경험하는 바를 바꾸는 것, 또는 < 현상 세계( 現 象 世界 ) > 롤 바꾸는 것이라는 칸트식의 논점에 대한 최근의 새로운 평가로 이 어지게 하였다. 하지만, 그 새로운 평가는 우리로 하여금 자발성과 수용성 사이의 낯익은 구분을 의문시하게 해준다 . 다른 개념 체계가 [성립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 칸트식의 비종합적인 직관은 종합되는 바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는 사실, 바꿔 말해서 기 껏 해 야 우리의 서술로 채택된 개념 체계에 상대적인 방식으로 모든 것을 서술해야 한다는 의미 안에서만 그것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 준다. 칸트식의 직관은 < 단순히 > < 직관적 > 인 것이 아니라, 언표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지각 판단이다. 만일 그것이 언 표될 수 없다면 그것은 어떤 설명적 기능도 갖지 못한 것이다. 헤겔 주의자들이 [칸트의] 물자체에 관해 제기하였던 딜레마와 유사한 이 딜레마는 정신의 < 수용적 > 기능에 대한 관념을 의심케 한다. 그래서 유기체에 가해지는 자극의 물리적인 강요와 , 적절히 프로그램된 유기 체가 그 결과로 형성하는 충분히 의식된 판단 사이에는 아무런 중간 단계도 요청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유기체란 한편으로는 수 동적인 왁스판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이 그 왁스판에 각인한 바 에 대한 <능동적인> 해석자로 이루어졌다고 쪼개어볼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 그러므 로 다 른 선험 적 개념 들 이 만일 가능하다면 그것 들 은 다른 현상 세계 를 제공 할 것이라는 칸트식의 논점은 , 상이한 개념들은 상 이한 세계 들 을 제공한다는 직설적이지만 역설적(逆說的)인 주장을 낳게 하거나 , 그렇지 않다면 < 개념 체계 > 라는 생각을 몽땅 빼내버리 게 한다. 일단 칸트식의 < 직관 > 이 제거되고 나면 < 현상 > 이란 것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얻지 못한다 . 재료로 쓰일 게 하나도 없게 되 면 개념 들 이 중립적인 재료를 형태지운다는 말은 더 이상 의미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자극 그 자체도 유용한 대체물이 되지 못한 댜 왜냐하면 창의적인 정신이 자극을 예측하고 통제하기 위해 구성 하는 < 가정( 假定 ) > 과 자극 그 자체 사이의 대조는 더 이상 언표 가 능한 세계와 언표 불가능한 그것의 원인 간의 대조가 아닐 터이므로 .”
1) 쿤은 (R efl ec ti on s on My Cri tics , eds. I. Lakato s and A Musg rav e, Cri ticism and the Growt h of Knowledg e (New York: Cambri dg e, 1970), p. '2:1 6) 에서 < 의사 소통의 참여자들이 그것에 대한 반응을 단절시켜 버린 자극들 은 유아론 (II 佳 我論 )을 각오한다면 동일하다 > 라고 말하면서 이어서 사람들은 < 하나의 역사…… 하나의 언어, 하나의 일상 세계 그리고 대부분의 과학적 세계 를 공유 > 하므로 사람들의 < 프로그램밍 > 도 역시 그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내 가 지지하고자 하는 견해에 의하면, (마치 초월적 비종합적 직관들과 같은) <프 로그래밍 > 과 < 자극들 > 을 떨쳐버림으로써 반유아론의 부담은 < 모조리 > 견디 어낼 수 있다. 만일 자극이란 것이 다른 개념 체계들에 비춰볼 때 얼마간 <중립 적 > 안 것으로 생각된다면 , 그것은 < 다른 어떤 것도 함께 돌아가지 않는 헛바퀴 돌리기 > 가 됨으로써만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나는 주장할 것이다 (Lud wig Wi ttge nste i n , Philo s oph ia il I nvesti gat i on s(New York: Macm illan , 1958), I, 업 l 참조).
< 대안적인 > 개념 체계라는 관념은 이렇듯 그 뿌리인 <개념 체 계 > 라는 관념에 대한 의심의 씨앗을 포함하며, 또한 그 자체를 해체 시킬 씨앗도 배태하고 있다 . 일단 수동적인 기능이, 더 일반적으로는 중립적인 재료에 대한 관념이 의심을 받게 되면, 그 의심은 개념적 사 고가 형태를 지어준디는 관념에 대해서도 쉽사리 확산되며, 또 일련
의 선 험적 개념에서 다 른 개 념들로 옮 겨가 는 세계 ― 영혼 t h e World- S pirit이라는 관념에 대해서도 확 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여( 所興 the gi ven) / 해석 사이의 구 분 을 공 격해서 얻게 된 헤겔식의 그림에 대한 의심은, 필연 / 우연의 구분을 공 격하여 얻게 된 의심과 바교해 볼 때, 애매하고 산만하댜 선험적 진리와 경험적 진리의 차이란 단지 비교적 포기하기 어려운 것과 비교적 포기하기 쉬운 것 간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콰인의 제안은 의미의 물음과 사실 의 물음 사이에 아무런 분명한 구분도 내릴 수 없다는 관념을 파 급 시킨다. 이것은 다시 (콰인이 카르납을 비판하면서 지적했듯이) 대안 적인 < 이론들 > 에 관한 물음과 대안적인 < [개념] 체계 > 에 관한 물 음 사이에 아무런 구분도 내리지 못하게 한다 ? 콰인이 저항하고 있 는 <의미 > 라는 철학적 개념은 , 그가 말하듯이 , < 관념이라는 관념 ide a ide a> ―그 철학적 전통의 구체화가 바로 < 개념 > 이라는 칸 트식의 관념이었는데 __- 의 최신판이다. 그리고 < 의미 공준( 意味 公 準 , mean ing pos tu lat e s )> 가운데에서의 선택이라는 관념은 대안적 인 개념 체계 가운데에서의 선택이라는 관념의 최신판이다. 일단 필 연성이 분석성과 동일시되고 분석성이 의미라는 것에 의해 해명되면, 하르만이 <의미>의 < 철학적 > 인 뜻이라고 불렀던 3l 그 관념에 대한 공격은 어떤 의미에서건 개념 체계와 < 경험적 이론 > 이라는 관념의 구분을 전제로 하는 <개념 체계>라는- 관념에 대한 공격이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소여와 분석성 양자에 대한 비판이 < 개념 체계 > 라는 칸트식의 관념, 즉 <경험을 통제하거나 예측하는 데에 필수적 으로 적용되는 개념들과는 대립된 것으로서 경험의 구성에 필수적인 개념들>이라는 관념을 부수는 데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살펴보았 2) W. V. Quine , On Carnap' s Vie w on Onto l og y, The Wa ys of Paradox (New York: Random House, 1966), pp. 126-134 를 볼 것. 3) Gil bert Harman, Quine on Mea ning and Ex ist e n ce, I, Revie w of Meta physi c s , X XI, !(Sept em ber, 1 967), pp. 124- 15 1, p. 142 를 볼 것
댜 나는 < 소여 > 라는 관념과 < 선험적인 것 > 이라는 관념이 없이는 <경험의 구성 > 이라는 관념도 없다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새로운 선험적 개념들을 적용함으로써 구성될 대안적인 경험이라든지, 대안 적인 세계라는 관념도 없게 된다. 그런데 <대안적인 개념 체계>라는 관념에 대해 훨씬더 단순하고 도 더 직접적인 반론이 있다. 이제 그것에 대해 살펴보자. 그 반론은 콰인의 미결정성 논제t hes i s of i nde t e rmi nac y와 연관하여 데이비슨 과 스트라우드에 의해 최근에 제기되었다. ” 그 논변은 실증주의적 이 며, 우리의 것과는 다른 개념 체계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식 별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혹은, 달리 말해서 영어로 번역 불가능한 어 떤 것도 하나의 < 언어 > 로 식별이 불가능함을) 겨냥하고 있다. <규약 주의자 > 가 말한 의미라는 관념에 대한 콰인의 공격과 이와 같은 실 증주의적 논변 사이의 연관성은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만일 <의미> 4) 나는 이 논변과 내가 논의하고 있는 이 쟁점의 중요성을 데이비슨이 1970 년에 옥스포드에서 행하였던 로크 강의 중 여섯번째 강의를 읽을 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 그 강의들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출판되지 않았는데, 그 원고와 그가 1971 년도에 행한 < 개념적 상대주의 > 에 관한 런던 대학에서의 강의 원고를 내 가 볼 수 있게 배려해 준 데이비슨에게 대단히 감사한다. 특히 나는 그의 공감 정도가 매우 낮을 듯한 목적을 위해 데이비슨의 논변을 활용하려 하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다 . 데이비슨의 미출판 원고를 읽은 다음에 나는 부분적으로 비슷한 논변을 스트라우드가 발표한 것을 읽 게 되 었다 (B arry Str ou d, Conventi on -alis m and the Indete r m ina cy of Translati on , Words and Obje c ti on s: Essay s on the Worlcs of W V. Qu in e , eds. D. Davi ds on and J. Hint i kka (Do redrecht: Reid e l, 1969), esp. pp. 89-96). 스트라우드와 데이비슨은 <대안 적인 개념 체계>라는 관념의 거부에는 합치하지만, 데이비슨은 <대부분의 우 리 신념들은 참인 것이 틀림없다>는 과격한 결론으로 공공연히 나아간다. 내가 이 논문에서 초점을 두려는 것은 바로 이 과격한 결론이다. (1981 년에 붙인 후 기 : 데이비슨은 아직도 그의 로크 강의 전부를 출판하지는 않고 있으나, 이 논 문과 가장 연관된 것은 그의 다음 논문에 나타나 있다. On the Very Idea of a Concep tua l Scheme, Proceedin g s of the Ameri ca n Ph ilo sop h ia il Assoc iat i on , l7(l<;J7 3 -1974), pp. 5-20.)
라고 하는 것을 심적 본질(관념, 개념, 사고의 투명한 구조 중의 일부) 에 의해서가 아니라 낯선 이의 언어적 [행동] 성향을 찾아내는 것이 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낯선 이가 그릇된 많은 신념을 갖고 있음과 그가 우리말과는 다른 의미 를 지닌 낱말 들을 사용하고 있음을 구분 해 낼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괴상한 번역이 낯설은 신념들 탓이 라고 혹은 그 역(逆)이라고 , 볼 수도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낯선 이가 사용하는 모든 용어 혹은 대부분의 용어 를 우리 가 사용하는 말의 용어들과 짝지어서 의미를 동일하게 하는 번역 체 계에 따를 때,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의 모든 신념 혹은 대부분의 신념이 그릇된 것으로 드러나는 극한적인 경우에 도달할 수는 없다. 우리가 그러한 경우에 도달할 수 없는 까닭은 (데이비슨식의 논변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와 같은 번역 체계란 단지 우리가 적절한 번역의 길을 전혀 찾아내지 못했음을 밝혀주는 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이비슨의 논변을 조금더 확장시키자면) 만일에 우리가 결 코 번역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도대체 우리가 지금 언어 사용자를 대 면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우리는 인간을 닮은 어떤 유기체들이 매우 다양한 상황에서 상대방의 행위에 다양 한 결과를 초래케 하는 것처럼 보이는 낱낱의 엄청나게 다양한 소리 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라고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소 리들과 그 유기체의 환경 및 행위를 체계적으로 상호 연관시키려는 반복된 시도가 실패한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한 가지 제안은 원주민들[낯선 이들]은 <세계를 판이하게 달리 조각 하므로>, 혹은 상이한 <질적 공간>이나 그 비슷한 어떤 걸 가졌으 므로, 우리의 잠정적인 번역 체계에서 쓰인 개념들을 우리가 그들과 공유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분석적 가설일 것이다. 하지만, 한 편으로 이 제안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유기체들의 소리는 <한낱> 소리에 불과할 뿐이라는 가능성 사이를 판가름해 낼 어떤 방도가 과 연 있겠는가? 일단 우리가 세계를 달리 조각하는 방식을 상상하게
되면, 각양각색의 신호 를 방 출 하는 < 어떤 것 > 에 대해서건 그것을 < 번역 불가능한 언어 > 로 귀속시키는 것을 중지할 수가 없다. 그렇지 만, 이처럼 개방성이 끝이 없다는 것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색깔 이라는 관념처럼, 이른바 번역 불가능한 언어라는 관념도 환상에 불 과한 것이라고 검증주의 논변은 결론을 내린다. 분석성에 반대하며 미결정성을 옹호하는 콰인식의 논변이 위에서 살펴본 논변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간파하는 것이 중요하 다. 그 논변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이며, 그 논변에 대한 콰인의 유일한 기여는 <의미>란 것이 낯선 이의 행위에 대한 예측 과정에 서 맥락상의 정의 이상의 어떤 것을 ` 뜻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한 점 뿐이다 의미를 그렇게 [맥락상의 정의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를 채택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쓰는 언어로 말은 하되 우리 가 믿는 것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관념은 부정합하다고 제 안하는 것이 그 전부댜 5) 하지만, 그 논변을 마무리짓기 위해서 그와 같은 관념의 부정합성을 <밝혀내고자 한다면> 낯선 이의 비언어적 행위의 어느 부분이라도 그가 갖는 신념의 전부나 대부분을 그릇되 게 하였던 번역을 용납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는 점을 낱낱히 밝혀 내야만 한다 .6 ) 왜냐하면 예컨대 낯선 이가 특정한 소리를 내면서 나무에 관해 취 급하는 방식이 그의 발언을 <이것들은 나무가 아니다>라고 번역되 어야 할 게 분명하며, 그 밖에 그가 취급하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 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되어야 할 게 분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5) 나는 다른 곳에서 (Inde t e nni nancy of Translati on and of Truth , Sy n - the se, 23(1972), pp. 443-462) 번역이 바른지 그른지에 대한 아무런 <사실 matt er of fa c t>도 없다는 콰인의 독트린은 철학적으로 교각살우(橋角殺牛)와 같은 과잉 방책이며, <관념이라는 관념>은 위에서 논의된 칸트식의 구분들에 대한 공격에 의해 신빙성이 충분히 상실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6) 프리드만은 이 논점의 중요성을 내게 보여주었다. 또, 윌리엄스가 내 논변의 일반적 줄거리에 대해 비판해 준 데 대해 감사한다.
의 발언 중 어떤 것 들 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할지 모 른 다. < 나 는 사람이 아니다 > < 이것 들 은 낱말이 아니다 > < 타당한 논증을 위 해서는 결코 전건부정식 modus p onens 을 사용해선 안 된다 > < 설령 내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아니며 또 내가 존 재한다는 걸 보여주지 않는다 > 등 우리는 그 자신이나 다른 이들에 대한 낯선 이의 비언어적 취급 방식이 실제로 그가 그러한 역설적인 신념을 갖고 있음을 드러내준다고 밝혀냄으로써 그와 같은 번역들을 승인할 수 있다. 이 제안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걸 보이는 유일 한 길은 그와 같은 가상의 낯선 이에 관한 이야기의 전모를 실제로 말해 보는 일이다. 그 일은 그와 같은 그릇된 신념들 상호간의 정합 성과 신념들과 행위 사이의 정합성을 밝히기 위해서 하나의 이야기 가 말해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데이비슨과 스트라우드가 옳다는 걸 보이기 위해서는 실제로 그와 같은 유의 이야기는 말해질 수가 없음을 밝히는 일일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대안적 개념 체계의 가능성울 반대하는 이와 같은 선험적 논변 a prior i ar g wnen t의 건전성을 판가름함에 있어서 그러 한 가능한 이야기들을 훑어보는 것보다 더 간단한 어떤 길이 있을 것 같지 않다 . 그렇지만, 이렇듯 미결정적이라는 것이 이 논변과 흥 미로운 모든 실증주의적 반(反)회의론 논변들에 공통된 특징이다. 그 미결정적 성격은 다음과 같은 패턴에 들어맞는다. (1) 우리 자신들의 (예컨대 타인의 정신, 책상과 의자, 프랑스어를 번역하는 방법에 관한) 신념에 대해, 그 대안들이 참이라는 점은 불행히도 결코 밝혀질 수가 없지만 [우리의 신념에 따른] 판단의 유보를 정당화시켜주기에는 충 분한, 실행 가능한 대안들이 있다고 회의론자가 제안한다. (2) 제안된 그 대안들이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원리상 검증 불가능하며, 따라 서 사용된 용어의 의미 그 자체가 합리적인 대안이 전혀 안 된다는 점을 밝혀준다고 반회의론자가 응답한댜 (3) [그와 같은 반회의론자 의] 실증주의는 본질적 질서와 인식상의 질서를 혼동하고 있으며, 어
떤 대안 들은 우리가 결코 그것이 참임을 알지 못해도 참일 수 있다 고 회의론자는 다시 반박한다. (4) 반회의론자는 제안된 대안을 회의 론 자가 아주 상세히 전개시키기 전까지는 그 문제는 토론할 가치가 없다고 응답하며 , 그와 같은 상세한 [논의] 전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는 걸 암시한다. (5) 회의론자는 제안된 대안을 둘러싼 정합적인 이 야기를 구성하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할 바가 아니며, 그러한 일이 이 루어질 수 없다고 선험적으로 밝히는 일은 반회의론자의 몫이라고 주장하여, 토론은 증명의 부담이 어느 쪽에 있느냐에 관한 싸움으로 퇴행된다. 논란중인 어떤 사례에서 회의론자는 <대안적인 개념 체계들>의 열렬한 옹호자이다. 그는 우리의 신념 구조 전체가 산산히 부서져 녹 아버리고 완전하지만 아주 생소한 대안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고 암 시함으로써 자신의 희의론을 광범위하게 펼친다. 데이비슨적인 반회 의론자는 어떠한 행위 패턴을 그러한 대안을 지지하는 증거라고 우 리가 부를 수 있는가를 캐묻는 입장을 취한다 . 회의론자는 우리는 어 쩌면 <결코> 그런 것에 이르지 못할 것이나, 이는 단지 우리가 빠져 든 자기 중심적 곤경이 얼마나 철저하다는 것을 보여줄 따름이라고 대답한다. 이런 식으로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7)
7) 니는 댜음의 두 논문에서 검증주의자와 회의론자 사이의 이 같은 논변에 대한 견해를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Veri fica tio n i sm and Transcendenta l Argu - ments , Nous, VI(Feb. , 1971), pp. 3-14; Cr iter ia and Necessity , Nous, V 田 (Nov., 1973), pp. 313-329.
그렇지만, 이 경우에서는 (예컨대 <고통>이나 <빨강> 이란 용어가 내게 의미하는 바가 당신에게 의미하는 바와 같은지의 여부에 대한 제 한된 회의론의 경우오柱즌 달리) 회의론자의 포괄적인 접근 방식이 그 에게 논변상 상당히 유리한 점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실험 결과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견해차에 붙잡히지 않고 그 는 그가 제안한 대안을 무엇이 현실화시켜 줄 것인가를 스케치할 수
있기 때문이댜 그는 우리에게 단지 공상 과학 소설의 범위를 넘게 외삼[外播 지금까지의 결고H t 외부로 연장시켜 짐작함]하여 추정된 통상적인 과학적 발전과 문화적 진보에 대해 언급할 수가 있다. 가령 인류의 역사와 전망에 관해 회의론자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할 거라고 생각해 보라. 물질과 운동, 바람직한 인간적 삶 그리고 많 은 것들에 대한 우리들의 견해는 고대 그리스 시대 이래 괴상하고도 복잡한 방식으로 변해 왔다. 노이라트의 보트8 1 의 많은 널빵지들은 찢 겨졌고 [종전과는] 다르게 다시 깔렸다. 그러나 (1) 우리는 그와 같은 각기의 변화들이 왜 <합리적>이었던가를 서술할 수 있으며, (2) 고 대 그리스인의 신념과 우리들의 신념 간에는 상이한 것들보다는 동 일한 것들이 <훨씬> 더 많기 (예컨대 보리가 쐐기풀보다 낫고, 자유 가 노예보다 나으며, 빨강은 색깔이고, 번개가 천둥소리 보다 더 먼저 온다 등) 때문에, 우리는 아직 <대안적인 개념 체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삼가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난 2 천 년 동안 비교적 아주 조금씩이라도 그 보트를 수선했던 것은 어떤 그리스 문장들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중간중간에 끼어든 변화의 <합리성>을 <어떻게> 설명할지를 알아내는 데 있어서 상당한 어려움을 주기에 충분하다는 점도 인정되어야 한다. 게다가, 우리가 그리스인들과 공 유하고 있다고 추정되는 여러 신념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 방식상에 나타난 (예컨대, 쐐기풀의 신품종 발견, 새로운 형태의 노예, 색깔 인지 의 새로운 방식, 천둥소리와 번개에 대한 새로운 설명 방식 등에서 귀결 된) 다양한 변화는 신념의 공유라는 것을 약간은 의심스럽게 한다. 그런 일들은 여기에서도 역시 우리가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 니라 역사를 강요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느낌을 낳게 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우리는 단지 그 보트의 널빵지를 1020 8) 애초부터 완벽한 이론의 보트를 만들려 할 것이 아니라 보트를 타고 항해롤 계속하면서 수선해 가는 게 더 낫다고 한 노이라트의 비유 속의 보트.(역주)
개 변화시켜 온 반면에, 우리가 타고 있는 보트에서 향후 10 'i0개의 널 뻔지 를 때어내고 다시 붙일 거라고 가정되는 미래의 은하계 문명으 로 외삼하여 추정해 보기로 하자. 그런 경우 그 변화들이 공통된 관 심사에 관한 견해에서 일련의 합리적 변화 과정이라는 해석을 제안 한다면 약간은 억지처럼 보인댜 심지어 가장 감정이 풍부한 은하계 문명의 과학사가라도 < 정말이지 우리는 우리를 잘 이해할 수가 없을 거야 > 라고 말하는 염려가 훨씬더 적절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회의론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것이다. 은하계 문명에서의 신념들을 상세히 서술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그것들을 단지 공통된 개념 체계 내에서의 대안적인 이론에 불과하게 만들 것이라는 데이비슨一스트라 우드의 논점은 충분치 못하다라고 . [더 나아가서 데이비슨_스트라우 드의] 그 논점을 인정하여, 가정된 것과 같이 우리가 은하계 문명을 서술한 공상 과학 이야기를 쓰지도 읽지도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리 는 여전히 의사 소통이 불가능하며 이해 불가능한 참신한 것들이 발 생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편이 오히려 합리적이라고 [회의론자들이] 여길 수도 있다. 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본질적 질서와 인식상의 질서 사이에 정말로 차이가 있는 사례를 만나게 되며, 그때에는 어떤 검증 주의 논변도 적용될 수가 없다 . 우리가 여기에서 마주친 이율배반을 강화시키기 위해, 그 양이나 복잡성에서 우리가 가진 신념과 욕구에 비견될 만한 신념이나 욕구 를 부릴 능력을 언젠가 한번은 가졌거나 그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단위체의 필요조건이 사람임pe rsonhood 이라고 순전히 논변의 목적 상 동의하기로 하자. 만일에 우리가 어린이나 미친 사람은 포함시키 지만 개나 단순한 유형의 로봇은 [사람임에서] 배제시키고자 한다면 그런 자격 조건들이 요구된다. 그러나, 동일한 그 자격 조건들은 (어 린아이에게 어떤 말을 가르치는 것처럼) 그의 미발현 잠재력을 계발시 키거나 혹은 (로봇에게 어떤 추가적인 메모리 단위를 접속시켜 주는 것 처럼) 한 사물을 사람으로 전환시키는 일 등에 의해 과연 우리가 사
람 을 교 육하고 있 는지 아닌지가 분 명 치 않 을 경 우에 이 르 면 물론 말 썽을 낳게 된다 . 하 지 만, 그와 같 은 난 점 은 잠 시 제쳐 두 고서 , 위의 자 격 조건 형식은 사람임, 언어임, 신 념 과 욕 구 임에 해당 될 귀속 요건 을 결과적으로 같게 한다는 점에 주목하기로 하자. 그러므로, 만일에 데이비슨이 옳다면 , 한편으로 사람임에 해당 될 귀속 요건과 다 른 한 편으로 그 것 에 대체로 < 맞는 > 신념 들 및 대체 로 < 적 절 한 > 욕구들 에 해당될 귀속 요건은 같다. 이것은 원리상 영어[ 혹 은 우리말]로 번 역될 수 없는 언어로 말하거나 그 신념의 전부나 대부분이 우리 자 신의 것 과 양립될 수 없는 신념을 견지하는 사람 들 이 존재한다는 증 거를 우리가 결코 얻지 못할 것임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사정이 이러하지만 그와 같은 사람둘이 어떻게 존재하게 될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외삼하여 추정해 볼 수는 있다 . 우리에게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온 은하계의 여행자가 있다면 영어 은하계어 사전을 구성하게 해줄 모종의 방식에 따라 우리의 발언을 우리의 환경과 연관시키려던 노력이 실패할 때, 그 여행자는 우리가 사람일 것이라는 애초 가정을 포기하게 될 것이라고 이제야 우리는 알게 된다 . 똑같은 유형의 발견에 의해 은하계에서 온 사절이 사람 이었을 것이라는 우리의 애초 가정도 좌절된다. 서로 상대방에게 제 공할 것이 엄청나게 많은 두 문화가 상대방이 존재한다는 것도 인식 하지 못한다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우리가 [현존 인류와 유인 원의 중간 형질을 갖추었다는 원생 인류의 하나인] 네안데르탈인들 에게로 시간 여행을 하면 은하계인이 처했던 것과 마찬가지 상황에 우리가 처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얼마나 비참한가! 그런데 내가 앞 에서 암시했던 이유로 인해 상황은 그보다 훨씬더 나쁘다 . 우리가 아 는 한, <현대의> 세계는 인지 불가능한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 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볼 수 있다. 왜 우리는 나무, 박쥐 , 나비 그리 고 별들이 모두 번역 불가능한 다양한 언어를 지니고 있으며 그 언 어로 그들의 신념과 욕구를 서로 열심히 표현하고 있을 가능성을 무
시해야만 하는가? 그들의 유기체는 우리와는 아주 판이한 자극을 받 아들이고 또 아주 다 르 게 반응하기에 적절하므로, 그들의 언어상의 구문론과 기초술어가 우리의 언어오快三 아무 관계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앞에서의 [나무나 별들도 언어롤 지니고 있을 거라는] 그 가능성 울 포함시킨다는 것은 무언가 잘못이라는 생각을 줄지 모른다. 어쩌 면 우리는 외삽하여 추정할 가능성을 그토록 너무 쉽사리 허용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쩌면 우리는 사람임에 해당될 귀속에 대한 사고나 신념을 구체화하는 것에 대한 생각에서 너무 성급했다. 왜냐하면 확 실히 나비들은 사람이 아니라는 컬 우리는 이미 알고 있고, 따라서 그것들은 표현할 아무런 신념도 가질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 므로. 그렇지만, 나로서는 제안된 외삼의 추정에서 아무런 잘못도 찾 을 수가 없으며, < 사람이 아니라고 이미 알려진>이라는 말이 나비에 게 적용될 경우 나비가 인간을 닮지 않아 보인다는 것 말고는 무얼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아주 멀리 떨어진 조상이나 후손들 에게는 인간의 권리가 박쥐나 마찬가지로 소멸된 것처럼 여겨질 거 라고 생각할 특별한 이유란 전혀 없다. 사람임에 대한 관념이 제아무 리 복잡하고 복합적인 규준에 의해 정해진다고 할지라도, 니는· 여전 히 그 관념이 복합적으로 얽힌 신념과 욕구라는 관념으로부터 분리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 두 관념 중 후자가 번역 가능한 언어에 대한 잠재 능력이라는 관념과 분리 가능할 거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 그래서 나는 나비를 배제하는 것은 곧 온하계인이나 네안데 르탈인을 배제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은하계인이나 네안데르탈인까 지 외삼해 추정하기를 허용하는 것은 우리의 은하계 후손들이 지니 게 될 신념이나 욕구와 똑같은 것들을 심지어 지금의 나비들도 지니 고 있을 가능성을 허용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입장을 바꾸기 를 거절하고, <사람> <신념> <욕구> <언어> 등의 용어는 <여 기> <지금> <도덕적으로 옳다> 따위의 용어처럼 궁극적으로는 화
자-반영적이어서 각각의 경우 본질적인 지시 대상은 < 우리 > 가 처 해 있는 바에 따라 정해진다고 말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은하 계인을 배제하는 < 유일한 > 방식일 것이며, 따라서 나비 를 배제하는 < 유일한 > 방식이 될 것이다 만일 이것이 곤혹스러워 보인다면, 몇 가지 비슷한 경우를 따져보 면 덜 곤혹스럽게 보이리라고 생각된다. [남미 안데스 산맥 동쪽에 사는 키가 큰 인종인] 파타고니아인들에게는 시( 詩) 가 없으며, 미국 의 붉은 피부를 한 인디언들에게는 천문학이 없고, 몽고라는 별에 살 고 있는 주민들에게는 도덕이 없다고 가정해 보라 . 또, 우리의 편협 한 견해에 항의해서 그 각각의 지역에 사는 원주민이 그 들 이 지닌 것은 각각 <색다른> 유형의 시이며, 천문학이고, 도덕이라고 설명한 다고 가정해 보라. 파타고니아인에게는 호메로스 , 91 셸리 ,10 1 말라르메 ,Il l 드라이든 1 2’ 은 조금도 시인처럼 보이지 않는댜 하지만 파타고니아인 은 밀턴 13’ 과 스윈번 1 . ” 은 아주 애매하게 서술 가능한 어떤 점에서 파 타고니아 시의 범형(範 型 )을 어렴풋이 생각나게 해준다고 인정한다. 파타고니아인에게 그 시의 범형은, 우리의 문화에서 우리의 시인들이 수행하는 역할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중 일부를 분명히 수행하는· 것 으로보인다. 미국의 붉은 피부 인디언은 주야 평분점[춘분점과 추분점]과 극점 [하지나 동지 때처럼 태양이 극쪽으로 가장 치우진 지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행성과 별을 구별해 낸다. 하지만 , 그는 행성 , 유 성, 혜성, 태양을 가리키는 데 똑같은 말을 사용한다. 그가 이러한 천 체들의 운동에 관해 말하는 이야기는 신의 섭리와 질병의 치유에 관 9) Homer: 기원전 10 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역주) 10) Percy B. Shelly, 1792-1822: 영국의 서정시인.(역주) 11) s 均p hane Mallarme, 1842-1898: 프랑스 상징파 시인.(역주) 12) Joh n Dr yde n, 1631-1700: 영국의 시인, 극작가, 비평가 . (역주) 13) Joh n M 뱌 on, 1608-1674: 영국의 시인 . (역주) 14) Alge rnon C. Sw inb urne, 18.3 7 -1909: 영국의 시인, 비평가.(역주)
한 일련의 복잡한 이야기로 짜여 있으나, 반면에 항성에 관한 이야기 는 오로지 성(性 , sex) 에 관한 것으로 짜여 있다. 몽고라는 별에 사는 주민들은 사람들이 사회적 평등에 관해 진실을 말할 때 충격을 받는 듯하며, 사람들이 의지할 데 없는 떠돌이들을 고문하기를 꺼려할 때 놀라고 재미있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몽고라는 별의 주민들은 성에 관해서는 금기( 禁 思)가 전혀 없으나 음식에 관해서는 수도 없이 많 은 금기를 가진 것처럼 보인댜 그들의 사회 조직은 반쯤은 일종의 추첨에 의해 그리고 반쯤은 적나라한 폭력에 의해 결속된 것처럼 보 인다. 하지만, 그들은 지구인들이 도덕적 관점을 파악하지 못한 데 대해, 우리가 도덕과 에티켓을 확실히 혼동하며 단지 방편에 불과한 것을 지속적인 사회 질서라고 혼동한 것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위에서 인용된 세 가지 사례에서, <그것은 다른 ‘유형’의 시나 천 문학 또는 도덕인가? 아니면 그들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 것인가?> 라는 물음은 대답이 요구될 만큼 아주 중요한 물음이 아닌 것이 분 명하다. 또, <은하계인이나 나비는 우리와는· 다론 유형의 사람인가? 아니면 전혀 사람이 아닌가?>라는 물음 역시 매우 중요한 물음은 아 니라고 제안하고 싶다. 언급된 세 가지 경우에서 세세한 사항들에 대 해서는 누구든 무한정 그 논변을 연장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만, 가정에 따라 어떤 번역 체계도 작동될 수 없을 포괄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천문학에 대한 신념과 옳고 그름에 대한 신념을 갖는 특수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포괄적인 측면(신념을 전반적으로 지님)에서 문제의 핵심은 현안이 되는 것을 예측하고, 통 제하며, 일반적으로 대처해 나갈 최선의 방식이다. 이런 일을 해나가 는 과정에서 예컨대 태아, 말을 배우기 전의 갓난이, 컴퓨터, 미친 사 람의 경우처럼 경계선상에 처한 대상을 다룰 경우에 우리는 앞에서 내가 언급한 것과 똑같이 까다로운 물음들 중의 일부와 마주치게 된 다. 그들은 인권을 가졌는가? 우리는 그들을 변호해 주어야 하는가?
그 들 은 생각 을 하 는 가 혹은 본능적으로 행 동 하 는 가? 그 들 은 신념을 지녔는가 혹은 자 극 에 그냥 반응하 는 가? 그 들 은 낱말에 의미 를 부여 하는 것인가 혹은 다만 암시에 따라 소리만 내고 있는 것인가? 이제 많은 철학자 들 은 그러한 물음들에 대답하는- 절차가 < 우리의 언어 > 안에 담겨 있으며, < 개념적 분석>에 의해 발견되기를 기다리 고 있다고 더 이상 믿지 않을 것으로 니는· 생각한다. 그런데 만일 이 것을 믿지 않는다면, 포괄적인 측면에서 < 우리가 결코 사람이라고 인식할 수 없는 어떤 사람들에 의해 견지되며 우리 개념 체계에 대 안적인 개념 체계가 있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마찬가 지일 거라고 [즉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말해도 아마 무방할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물음들에 대답할 일반적인 방식을 우리가 예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것과는 아주 다른 개념 체계인가, 혹은 그것을 하나의 언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잘 못인가? 그것은 판이하게 다른 기관과 반응과 신념을 지녀서 영원히 의사 소통이 불가능한 어떤 사람인가, 혹은 다만 매우 복잡하게 운동 하는 하나의 사물인가? 한편으로는 데이비슨_스트라우드의 논변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회의론자가 외삽하여 추정한 바에 의해 생겨난 이율배반에 대해 내 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이와 같은 <괘념 않기 don' t -care> 라는 결론 이 그 전부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데이비슨과 스트라우드가 말하는· 바의 중요성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생각되어선 안 된다 그런 것과는 오히려 반대로 그 이율배반에 대한 고찰을 통해 그리고 애초의 논변 이 <사람임>이라는 관념에 적용되는 연관성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 그 논변이 지닌 중요성을 우리가 더 잘 볼 수 있는 처지에 놓이게 되 었다고 나는 생각한댜 그 중요성은 (a) 진리정합설에 대한 표준적인 반론(<정합설은 진리를 세계와 무관하게 떼어놓는다>)을 살펴보고, (b) <개념 체계>라는 관념의 칸트적인 연원에 대한 앞의 논의로 되 돌아가는 일에 의해 뚜렷이 부각될 것이다.
우선, 설령 진리의 유일한 < 테 스트> 가 우리의 신념간의 정합성 여부라 할 지라도 진리의 <본 성 > 은 여전히 <실 재와의 대응 > 임에 틀 림없다고 말하는, 진리정합설에 대한 전통적인 반론을 생각해 보자. 이 견해에서는 진리는 유일한 것이며, 반면에 동등하게 정합한 대안 적 신념들은 E 뮤라는 것이 충분한 논변이라고 간주된다 .1 5 1 이 논변 에 답하여, 정합설과 실용주의 진리설의 옹호자들은 이렇게 주장해 왔댜 즉 진리는 유일하다라는 이른바 < 직관 > 이란, 만일 모든 지각 보고가 입수된다면 그것들과 다른 모든 가능한 진술들 중에서 단 하 나의 최적의 선택이 가능할 것이고 그래서 이상적으로 균형잡힌 참 된 신념으로 이루어진 단 하나의 신념 체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는 단순한 기대에 불과한 것이라고. 이 답변에 대한 전형적인 논박은 그와 같이 가능한 체계가 분명히 많이 있을 것인데 우리는 그중에서 심미적인 근거에 의해 [어느 하나만을 진리로] 선택할 수도 있다는 논박이댜 한걸음 더 나아가 좀더 심도 있게 느껴지는 논박은 진리를 결정하는 것은 < 세계 > 라는 논박이다. 즉 우리의 감각 기관이 세계의 어렴풋한 모습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우연한 사건과, 우리가 확립해 왔던 술어들이나 우리를 기쁘게 하는 조화로운 이론들의 우연한 사 건은 우리가 [그런 것들에 관해] 믿을 어떤 권리를 지녔는지를 결정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어떻게 <진리>를 결정할 수가 있겠는가?라는 반박이다 .1 61 정합설에 대한 이와 같은 전형적인 반론에 대해 데이비슨-스트라 우드 논변은 비록 임시 변통적이지만 아주 간단한 대답을 준다. 우리 15) 이러한 반론의 최근 형태는 Joh n L. Pollock, Percept ua l Knowled ge , Phil o sop h ia z l Revie w , LXXX, 3(J u ly 1971), pp. 290-292 를 볼 것. 16) 이런 유의 물음은 예컨대 셀라즈와 같은 주장 가능성으로서의 진리이론가에 대해 응답하기 위해서 < 진리 이론>과 <증거 이론> 사이를 구분하려는 시도의 근원이다. 셀라즈의 논점에 대한 하르만의 비판을 참조할 것 (G il bert Hannan Sellars' Semanti cs , Phil os oph ia z / Revie w , LXXIX, 3(J u ly 1970), pp. 404-419, esp. pp. 409ff ., 417ff .).
신념들의 (비록 어느 특정한 신념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틀림없이 참이어야 하므로(그렇지 않다면 그중 대다수가 참이 아니라 는 증거를 어떤 근거로 헤아릴 것인가?), 대안적인 개념 체계라는 유 령은 이제 더 큰 예측력과 매력적인 모양새 등 우리가 원하는 관심 에 따라 현재 우리의 신념들의 묶음을 약간씩 변형시킬 대등하게 좋 은 수많은 방식들의 성립 가능성 여부라는 문제로 움츠러들게 된다. 데이비슨-스트라우드의 논점은 무엇보다도 물리학, 시학 또는 도덕 의 패러다임이 변화할 때 우리 신념들 중 얼마나 작은 부분이 변하 는가를 기억하게 해주며, 그것들 중 <변화 가능한 것>은 별로 없다 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 논점은 13 세기와 19 세기 사이에 유럽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의 경우 변화된 신념들의 수가 살아남은 신념들의 수에 비해 우스울 정도로 작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 그래서 그 논 변은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해준다. <정 합한 신념들의 포괄적 인 묶음에 대해 ‘대안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념들의 양 립 불가능한 대안적 묶음들이 ‘묶이는’ 탐구 영역들이 항상 존재한다 는 것은 전적으로 참이댜> 그러나, 우리는 <항상> 대부분이 참인 신념들을 견지할 것이며 따라서 시간상으로 볼 때 압도적으로 많은 경우에 아마도 <세계와 접촉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그 논 점이 철학적으로 무해(無 害 )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특히 진리는 유 일하며 따라서 <대응>도 유일하기 때문에 우리는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설명하기 위해 정초주의적 인식론을 부활시켜야만 한 다는 주장은 쓸모가 없게 된다 .17) 우리가 확고부동한i nco rrigi ble 진 술이나 기초 진술 혹은 그 밖에 달리 특권적이고 정초적인 진술을 갖고 있건 말건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에서) 자동적으로 <세계와 접 촉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17) 와일 같단 은우 리설가명이 정 당필화수에적 이관게한 된정다합는설 을주 장거에부 하대고한 나옹면호 는정 초P주oll의oc자k,의 앞 용의어 책에 서참 조그`
하지만 , <진리를 결정하는 것은 제계이다 ’> 라는 주장을 이런 식으 로 다 루는 것은 하나의 속임수로 보이기 쉽다 . 왜냐하면, 내가 줄곧 그렇게 사용해 왔 듯 이 , 데이비슨 _스 트라우드의 견해는 < 세계 > 라는 관념을 < 의문시되지 않은 우리 신념들의 대부분 > 이라는 관념으로 대체시키는 마법의 트릭을 행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 세 계 > 라는 관념은 바로 이상적으로 거대한 정신의 완벽하게 정합적인 내용이라는 관념, 혹은 실용주의자들이 말한 < 축적된 경험 > —_ _ 그 신념들이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으며 아무도 그것의 대안을 생각 하느라고 귀찮게 된 적이 없었으므로, 그 순간에 도전을 받지 않는 신념 들 -이라는 관념에 불과하다고 말한 로이스 1 8) 와 같은 정합설 이론가 를 상기시켜 준다 . 그렇지만 이 모든 경우들, 즉 데이비슨, 스 트라우드, 로이스 , 듀이 등에게 있어서는 진리에 관한 쟁점이 그냥 어 • 물쩍 피해 지나가버린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해 질 것이다) 세계라는 우리의 관념은 의문시되지 않았던 신념들, 의문 시되지 않을 만한 신념들, 이상적으로 정합적인 신념들 등의 관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기꺼이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는 별개로 도도하 게 떨어져 서 있는 어떤 견고하고, 단호하며, 고정적인 즉자 존재(卽 者存在, e tr e-en-so i)이기 때문이다. 실재론의 철저한 신봉자는 관념 론과 실용주의를, 마치 신과 신부들에 대해 철저한 믿음을 가진 사람 들이 예컨대 틸리히 19 1 가 < 궁극적 관심의 대상>에 관해 말하는 것을 보는 것과 똑같이, 의심에 찬 눈초리로 볼 것이다 . 201 18) Jos ia Roy ce , 1855-1916: 미국의 관념론 철학자.(역주) 19) Paul Til lich , 1886-1965: 독일 태생으로 미국에 이주하여 활동한 개신교 신 학자.(역주) 20) 실재론을 고취시킬 만한 프로그램에 열중하는 예들은 다음의 두 논문을 참조. Platf on n of the Associa t io n for Re alist ic Ph ilo sop hy , The Retu rn to Reason, ed. Joh n Wi ld (Ch ica go : He1111r Reg ne ry , 1953) ; Prog ram and Fir st Platf on n of Six Rea list s , Edw in B. Holt et al., The New Realism (New York: Macm illa n, 1912), pp. 47lff.
이제 내 의도 를 드러내자면, 나는 실재론의 철 저한 신봉자가 지닌 세계라는 관념은 하나의 직관이 아니라 강박관념이라고 생각한다. 또 세계가 진리를 결정한다는 우리의 직관이란, 어떤 새로운 신념은 평 범하며 의문시되지 않는 지각 보고 등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덩어리 와 부합돼야 한디는 직관에 불과하다는 듀이의 생각이 옳았다고 보 인다 . 그래서 나는 이렇듯 혼쾌한 마음으로 데이비슨-스트라우드 논 변의 골지를 듀이식으로 해석한댜 그러나 나는 실재론의 철저한 신봉자가 서술하는 것과 같은 이른 바 <직관>에 대해서는 반박할 아무런 논변도 지닌 바 없다 . < 오직 제계’만이 진리를 결정한다>는 주장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실 재론자 자신의 < 세계>라는 용어 사용이 애매하다고 지적하는 것이 고작이다. 물론 현재 의문시되지 않은 우리 신념들의 대부분에 의해 생각되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 세계>에 대해서도 [반박할] 아무런 논변도 없다. 21) 데이비슨 ~ 스트라우드의 논변을 받아들인다면, <세계>란 바로 별, 사람, 책상, 풀 등 이따금씩 < 과학적 실재론자 > 인 철학지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 다고 생각조차 않는 그런 모든 것들이다. 그 견해에 의하면, 우리 신 념들 중 대부분은 틀림없이 참이다[참이어야 한다]라는 사실온 우리 가 지금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대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21) < 인과적 지시론 > 의 옹호자들에 의해 제기될 수 있는 쟁점을 비켜가기 위해서 나는 < [세계에] 관한 > 이라는 용어가 아니라 오히려 < [세계에 관해] 현재 의문 시되지 않은 > 이라고 말한다. 인과적 지시론은 우리는 지금 실제로 은하계인이 지시할 것에 관해 말(지시)하고 있는 게 아니며 오히려 그것이 무엇일지 온하계 인들은 알게 될 것이지만 우리는 모를 수도 있다고 제안할 것이다(그러한 지시 이론의 연관성을 프리드만과 드레츠키 Fred Dre t ske 는 내게 지적해 주었다). 여 기에서 발전시키지 않은 나 자신의 견해는 이렇다 . < 지시 > 에 준거해서 인식론 적 물음을 명확히 하려는 시도는 항상 애매한 걸 더욱 애매한 것으로 설명하는 격, 죽 통상적인 말에서 약간의 토대를 지닌 관념들( < 지식>, <진리 > )을 연구 고안되고 끊임없이 논란거리인 철학적 관념으로 해명하는 것이 된다. 이 책의 논문 7 을 참조.
보장해 줄 것이댜 그러 므 로 < 세계 > 란 용어의 한 가지 의미 一 - ―우 리 는 이제 세계가 어떤 모습 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신, 중성미자(中 ' I f l: 微子 ) , 자연 권 등 극 소수 에매한 가장자리의 경우 를 제외하고는) 우 리가 매우 잘 알고 있으며 , 그 점에 있어서 틀릴 가능성이 없다는 의 미 — 一 에 대해서는 진리 를 결정하는 것은 세계라는 논점에 관해 아 무런 논변도 없다. 그 < 결정 > 이 이루어지는 방식이란 눈이 하얗다라 는 우리의 신념이 참인 까닭은 눈이 하얗기 때문이며, 별들에 관한 우리의 신념이 참인 까닭은 별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기 때문이며, …… 등이다. 하지만, 이렇듯 하찮은 의미에서 < 진리 > 는 < 실재에 대한 대응 > 이며 < 우리 지식과는 독립적인 실재에 의존된다 > 라는 것이 실재론 자에게는 충분할 리가 없다 . ?2 1 그가 원하는 것은 바로 데이비슨一스트 라우드 논변이 방해하고 있는 것, 즉 < 우리 지식과는 독립적>인데 < 아주 > 독립적인 세계라는 관념으로서 , 그것은 (우리가 아는 한) 우 리가 그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항상 생각해 왔던 것들을 심지어는 하나도 포함하지 않았음이 입증될 수도 있는 그런 세계이다. 그는 예 22) 나는 내가 타르 스 키의 의미 론 적 이론을 사소한 것으로 본다고 간주되기를 바 라지 않는데, 그의 이론은 (어쩌면 데이비슨이 제안했듯이 언어 학습에 관한 인 식 론을 제외하고는) 인식론과 관련된 이론이 아닌 것처럼 내게는 보인다. 나는 타르스키가 해묵은 문제 를 해 결 한 것 이 아니라 새로운 주제 를 수립한 것으로 간 주 해야 한다고 본다 . 나는 데이비슨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옳 다고 생각한 다 . 타 르 스키의 이론이 하나의 진리대응설이라는 의미에서는 < 아무런 승리도 없었으며. 심지어 진리대응설이나 다른 이론들을 통털어서도 마찬가지이다> (True to the Facts , jo urnal of P hil o soph y, LXVI, 21( N ov., 6 , 1969), pp. 748-764, p. 761). 진리정합설이나 실용주의 진리 설 이 그 대안으로 상정되며 철 학적 논란의 대상이 된 이른바 < 진리대응설 > 은(D a vi dson , 앞의 책, p. 763 에 서 인용되었듯이) 스트로슨 Pe t er S tra wson 이 <한 진술이 참이라고 말하는 것 은 특정한 언어-에피소드 오직 그것만이 세계에 있는 어떤 것에 특정한 규약에 따른 방식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 라고 정의한 이론이 아니다. 왜 냐하면 , 후자의 견해에 관한 한 그것은 예컨대 블랭샤드 [Brand Blanshard, 1892 년생. 미국의 철 학자]나 듀이에 의해서도 완벽하게 용납될 터이므로.
컨대 < 별들이 무엇인지에 관해 우리는 틀렸을지도 모른다>라는 말 로부터 < 우리가 말하는 것들 중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흡사한 것은 하나도 없을지 모른다 > 라는 말로 옮겨가기를 원한댜 이와 같은 투 영을 칸트식으로 말해서 < 조건적 > 인 것에서 < 무조건적 > 인 것으로 의 투영이라고 보자면, 이율배반들이 손쉽게 만 들 어진다는 것도 놀라 운 일은 아니댜 <상이한 개념 체계는 세계를 다르게 조각한다 > 라는 구절에서 쓰 인 바와 같은 <세계>라는 관념은 < 도저히> 구체화될 수 없는 어떤 것_~사실상의 물자체(物自 體 )-에 대한 관념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세계>를 원자들과 공간, 감각 소여와 그것들에 대한 앎 특 정한 유의 유기체에 부과된 특정한 유의 <자극>들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게임을 바꾸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세계가 어떠어떠하다는 특정한 이론의 안에 들어가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찮은 것이 아니며 논쟁적인 진리대응설을 발전시키기 위해 서는 예컨대 <우리의 수용성을 자극하는· 원인이며 우리의 자발적 기 능의 목표>라는 구절의 용어에서 보듯이 오로지 굉장히 애매한 성격 의 규명만이 필요할 것이다. <어떠한 이론에서도 격리된 진리 > 라는 의미에서의 <진리>라는 관념과, <그러한 진리를 결정하는 것>으로 간주된 <세계>라는 관념은 (<주관>과 <객관>, <소여>와 < 의식>처 럼)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념들이다. 어느 쪽도 다른 쪽이 없이는 살아남을수가 없다. 이 논점을 요약하자면 <세계>라는 것은, 언표 불가능한 감각의 원인이자 지성의 목표라는 순전히 공허한 관념에 불과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탐구의 순간에 그냥 그대로 방치된 대상들에 대한 이름, [노 이라트의 비유 속의 이론의] 보트에서 지금 그 순간에 제거되지 않은 널만지들에 대한 이름이라고 나는 주장하고자 한다. 내게는 칸트 이 래의 인식론은 <세계>라는 용어의 이 두 가지 의미 사이룰 오락가 락 왕복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플라톤 이래의 도덕철학이, <선>이
라 는 것 이 한편으로는 도덕 에 관해 우리가 현재 지닌 < 모 든> 견해 들을 거부하게 해 줄지도 모르는 탐구에서의 언표 불가능한 주춧돌에 대한 이 름 이라는 것 과, 다 른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견해들을 가능한 한 많이 이상적으로 정합하게 종합한 체계에 대한 이름이라는 것 사 이 를 오락가락 왕복했던 것과 똑같이. 내게는 이 애매성이 <실 재론 > 이나 <진 리정합설 > 을 논란거리가 있다고 보거나 흥미로운 논제라고 여기는 철 학자 들 의 입장에 필수불가결한 것처럼 생각된다. < 세계 > 라는 용어를 앞에서의 공허한 의미로 사용하려는 < 실재론 적> 유혹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 우리는 그와 같은 용법을 부추겨왔 던 철학적 관념들 전체 -특히 내가 처음부터 논의했던 칸트식의 구분들 ―- —를 모조리 그리고 단번에 삼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 냐하면, 정신의 눈은 사물들의 본성을 명확히 꿰뚫어보는 견해를 제 공해 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제공할 수 없다는 아주 단순한 이론, 예 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 분석론 후서 Pos t er i or Analy ti cs 』 의 일부에 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의 이론을 생각해 보라. 그러면, 대안적인 개념들의 묶음이라는 관념은 아무런. 명확한 의미도 갖지 못한다. [그 런 이론에서는] 이성 Nous 은 오류를 범할 수가 없다. 정신이 한편으 로는 < 단순 관념들 > 이나 <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직관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것은 실질적인 본질을 어떤 것은 명목적인 본질을 의 미하는) 광범위한 복합 관념들로 나누어져 있다는 식의 관념을 우리 가 지닐 때에만, 정합설과 그것에 대한 전형적인 반론 가운데 <어느 하나만>이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오직 그때에만 탐구는 단순히 세계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표 상 > 형성으로 이뤄졌다는 관념이 신빙성 있게 된다 . 만일에 지식 이란 표상들 Vors t ellun g en 을 조작한 결과라는 견해를 우리가 더 이 상 갖지 않는다면, 진리는 실재와의 대응이라는 단순한 아리스토텔레 스식의 관념으로 우리가 가뿐한 마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이제 그것이 실제로도 그렇듯이 논란의 여지
없이 하찮은 것으로 보이게 될 터이므 로 . 그런데 칸트식의 인식론이 이렇 듯 하찮은 의미가 아닌 다 른 의미 에서의 진리대응설이라는 관념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따라서 그 러한 인식론이 < 실재론자 > 의 < 세계 > 라는 관념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한 그 주장을 더 전개시키자면 한 편의 다른 논문이 필 요할 것이므로 , 여기서 그 문제를 더 이상 추구하지는 않기로 하 겠 다. 대신에 나의 결론을 (셀라즈가 말했듯이) 철학적인 지평에 놓기 위해 논의 과정에서 다루었던 역사적 암시들 중에서 몇 가지를 돌이 켜봄으로써 결론을 맺고자 한다. 나는 첫머리에서 < 개념 체계 > 라는 관념과 따라서 < 대안적 개념 체계>라는 관념은 몇 가지 전형적인 칸트식의 구분들에 대한 전제에 의존된다고 말했다. 그와 같은 구분들은 비트겐슈타인, 콰인, 듀이, 셀라즈 등의 공통된 비판의 표적이 되어왔다. 이제 나는 똑같은 논점 을 <개념 체계>라는 관념과 상호 연관된 < 세계 > 라는 관념은 단순 히 칸트식의 물자체라는 관념이라고 말하고, 듀이가 수용성과 자발 성, 필연성과 우연성 사이의 칸트식 구분을 해소한 것은 철저한 실재 론 신봉자의 <세계>라는 관념의 해소에 자연스럽게 이르게 해준다 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요컨대, 당신이 칸트의 인식론으로 출발하 면, 칸트의 선험 적 형 이상학 tran scendenta l me t a p h y s i cs 으로 끝을 맺게 될 것이다. 내가 앞에서 암시했듯이 헤겔은 그 인식론을 지키되 물자체라는 관념을 배제하고자 노력하였고, 따라서 그 스스로가 (그 리고 일반적으로 관념론이) 실재론자의 반박을 잘 이겨내지 못하게 하였다 . 그러나 역사에 관한 헤겔의 재치, 선험적 개념을 포함해 그 어떤 것이라도 문화적 발전에서 면제될 수가 없다는 그의 재치는 듀 이로 하여금 헤겔이 칸트와 공유하고 있었던 인식론에 대해 공격할 열쇠를 제공하였다. 그런데 이 공격은 듀이가 <경험>이라는 용어를 모든 가능한 구분을 호리게 하는 마법적인 장치로 사용함으로 말미 암아 무뎌졌으며, 그래서 더 날카롭게 집중된 비판이 비트겐슈타인,
콰인 그리고 셀라즈 등에 의해 형성될 때까지는 < 세계 > 라는 관념의 <현금 가치>로서 < 축적된 경험 > 에 대한 듀이의 논점이 지닌 힘이 드러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와 같은 비판들이 이루어졌으며, 듀이의 자연화 된 헤겔식의 역사주의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할 때가 도래한 것 같다. 그러한 역사주의자의 비전에서 보자면 예술, 과학, 옳고 그름의 의미, 사회의 각종 제도들 등은 진리나 선 혹은 미를 구현하거나 형 성시키려는 시도가 아니다. 그것들은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 우리가 지금 가진 것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게 신념과 욕구와 행 위를 변경시키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와 같은 관점의 전환이야말로 바로 수용성/자발성의 구분 그리고 직관/개념의 구분을 떨쳐버리고 난 자연스러운 귀결이며, 더 일반적으로는 <표상>이라는 관념과 듀 이는 <관람자 이론>이라고 불렀고 하이데거는 <물리학과 이데아의 동일시>라고 불렀던 인간관을 떨쳐버리고 난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고 제안하고자 한다. 관념론자들은 이와 같은 일반적 그림을 견지하 면서 <지식의 대상>을 재정의하는 일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사람들 은 관념론과 <정합설>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이름을 붙였으며 실재 론과 <대응설>에 대해서는 좋은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만일에 우리가 정합설과 대응설 양측이 비경쟁적인 하찮은 이론임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마침내 실재론과 관념론을 넘어선 곳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바트겐슈타인의 말마따나 우리가 원할 때 철학함을 멈출 수 있게 되는 그러한 지점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른다.
2 철학의 순수화: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에세이
대략 칸트 시대 이후 철학이 자기 의식적이고 전문화된 분과 학문 이 된 이래로 철학자들은 자기들의 주제가 과학, 예술, 종교 등 순전 히 < 일차 의도적인fir s t-int en ti onal > 문제와 어떻게 다른가를 설명 하였댜 철학자들은 무전제이거나, 완벽한 엄밀성을 갖거나, 선험적 이거나, 아무튼 비철학자들의 것보다는 (혹은 실로 자기와 친구들 그 리고 제자들을 제외한 다른 철학자들의 것에 비해 볼 때에도) <더 순 수한> 방법을 발견했노라고 주장하는 데에 끝이 없었다 . 이러한 영 지( 盛智 )의 이념을 배반한 철학자들은 (예컨대 키에르케고르 Soren Ki erke g aard 나 듀이의 경우처럼) 때때로 <진정한 철학자>가 아니었 다고 말해지기도 한다. 비트겐슈타안은 철학의 문제들이 해결 가능하거나 해소 가능하게 진술되도록 철학을 순수화하였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였으며, 자기가 철학의 종언을 도래시켰다고 생각했다. 그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 Tracta t u s Lo gi co-Ph i losop hi cus 』[이하 이 논문에서는 『논고』로 축 약]의 명제들은 세계와 초연하며 논리와도 초연한 것, 즉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는 명제로 여겨졌다. 단순한 사실은 말해질 수 있 지만 철학은 모든 가능한 사실들의 형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트겐 슈 타인은 생 각 했다 . 일단 보 여 주 기 가 말 하 기 의 자리 를 차지하 면 철 학적 논 쟁 들은 끝장 이 날 것 이 고, 그 래서 철학 자체 도 종 언에 이 를 것 이댜 하지만, 비 트 겐슈타인 은 [바 로 그 책의 말미에서] 마침내 자기 자 신이 쓴 바 를 조롱 하였으며 , 특 히 그것 의 위장된 순 수성을 조 롱 하기 에 이 르 렀댜 그렇지 만, 모 든 가 능 한 언어 들 의 형식 을 보여줌에 의해 모 든 가능한 사실 들 의 형식 을 < 보이려는 > 『논 고 』 의 시도 를 조 롱함 으로써, 그는 여 전 히 말해 질 수 없는 어떤 것들 을 < 보여주기 >를 원 했다. 그는 철 학 자체의 근원을 보여주기 를, 즉 무미건조한 교과서 적 인 < 철학의 문제들 > 을 진정한 문제, 또 마음을 사로잡는 문제로 탈 바꿈시키는 형언될 수 없는 관점 전환을 보여주기 를 원했다. 『 논고 』 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 (그 책에서 보여주 듯 이) < 이렇 듯> 언어에는 한계가 있으며 따라서 추론적 탐구에도 한계가 있으므로 , <철 학의 문제 > 이라고 불리는 것을 다루는 진정한 추론적인 학문 분야란 있을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 후기 > 사상을 대표하는 저술인] 『철학 적 탐구 Ph i losop h i ml Inves tiga ti ons 』 [이하 『 탐구 』 로 축약]는 이렇게 말 해 주었다: 당신이 발전시키길 원하는 만큼이나 많은 분야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정말로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가? 『 논고 』 의 밀폐적이지만 여전히 직설적인 문장들을 『탐구 』 의 수사학적인 물음 들로 대체시킨 것은 정확성, 논증 그리고 경험적인 것을 포기하여 < 철학을 확고한 지식의 길로 들어서게 > 하려는 칸트식의 시도와는 동떨어진 움직임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여전히 칸트적인 것이었다. 만 일에 크로너Ri chard Kroner 를 좇아 칸트의 업적 전체를 < 신앙의 여 지를 마련키 위해 이성을 부정>하려는 프로젝트라는 관점에서 본다 면, 또 만일 칸트를 교수이기보디는 경건주의자로 생각하여 < 선험적 관점>의 견지보다는 <실천 이성의 우위>와 연관해 생각한다면, 칸 트와 비트겐슈타인 양지는” 설명, 정당화, 해명의 필요성을 대체시킬
감정의 순 수성p ur it y of h e a rt 을 동 경 하 는 것 으 로 보이게 될 것 이다. 그러한 순수성 은 오 로지 거 듭남 에 의해서, 즉 한때 그와 같은 필요성 에 만 족 하여 탐닉하였던 사 람 들 이 이제 는 회계함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 01 다. 오 늘날 의 강단 철 학과 비트겐슈타인의 관계는 19 세기 초엽 독일의 지성 생활과 칸트의 관계와 홉사하다. 칸트는 모든 걸 변화시켰다. 그러나 그가 말한 바가 도 대체 무엇인지 , 즉 칸트가 무엇을 심각하게 여기며 무엇을 [ 중 요하지 않는 것으로] 제쳐놓고 있는지를 아무공: 확 신할 수 없었다. 그 당시 독일에서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칸트로 부터 무엇을 추려내고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칸트로부터 완전히 등 을 돌릴 어떤 길을 모색할 것인가 그 둘 중 하나이었다. 『 탐구 』 가 출 판된 뒤 20 여 년이 지난 오늘날 철학자들은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 댜 철 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성격 규명을 배척하거 나 아니면 철 학이 해야 할 어떤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철 학자들은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칸트식의 순수성에 대한 이념, 즉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과 다른 한편으로는 비트겐슈타인 이 그 가능성을 제시한 것처럼 보였던 탈전문적, 속죄적, 사적인 감 정의 순수성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한편으로는 순수 한 주제에 정통하면서 뚜렷한 하나의 학문 분야 a dist i nc ti ve Fach 를 보유해 즐길 필요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학문 분야에 대한 비 트겐슈타인의 설명에 부합해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나는 < 주제 subj ec t > 나 < 영역 area > 이란 용어 대신에 <학문 분야 Fach > 란 용어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그 용어는 제임스가 다음과 같이 분트”에 대해 묘사할 때 우아하고도 적확한 맥락상의 정의를 내린 바 있기 때문이다. < 분트는 천재가 아니라 ‘ 교수’, 그의 ‘ 학문 분야’와 연관 된 것에 관한 한 어떤 것이든 다 알며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고유 1) Wi lh elm Wundt, 1832- 19 20: 독일의 생리학자 심리학자, 실험심리학의 창시 자 . (역주)
한 견해를 지니는 것이 의무인 교수이다 . …… 그 는 각각의 가능한 주제 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말한다. ‘여기에 대해서 나는 무엇안가 내 견해를 가져야만 한다. 자, 그게 뭘까? 그게 어떤 것이어야 할까? 가능한 견해 들은 몇 가지나 될까? 셋? 넷? 그렇다! 네 가지뿐이다 . 그것들 중 하나 를 내가 택해야만 할까? 한 단계 더 높은 입장을 택하는 것, 그것들 모 두 사이에서 일종의 중재적 견해를 택하는 것이 더 독창적인 것으로 보 일 것이다. 나는 그걸 해야겠다. 등 ' >2) ) 이런 상황에서 페어스가 그렇게 불렀듯 한편으로는 < 체계적인 언 어철학>과 다른 한편으로는 <비트겐슈타인적인 철학 > 사이에 분열 이 일어났다 ? 데이비슨, 몬태규 R i chard Monta gu e, 하르만 G il be rt Hannan 등의 저술에서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은 현대철학의 논점들을 포함한 전자는, 쿤T. S. Kuhn 과 카벨 S tanl e y Cavell 등과 같이 <비 트겐슈타인적인> 저술가들의 저술과 비교해 볼 때 형식과 기원의 양 면에서 공히 대조적이다 . 4) 왜냐하면 처음 유형의 철학자들에게는 우 리 언어의 구조, 그것을 배우는 우리의 능력 그리고 언어와 세계의 연관성 등이 (아마도 파르메니데스 이래로) 전통적인 의미로 <철학적 인> 일련의 문제들을 형성하며, 추론적인 논변과 아마도 명확한 대 답 가능성에 적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철학자들은 그들의 영감(盛 感)의 일부를 초기의 비트겐슈타인, 즉 『논고』의 저자로부터 얻는다. 그들은 준과학적인 학문 분야로서의 철학 주관과 객관, 정신과 물질에 대한 데카르트적인 구분에 의해 생겨난 사이비 문제들은 피 하는 동시에 언어에 관한 진정한 문제들을 해결할 학문 분야로서의 철학_에서 논리학이 핵심적이라고 본다. 그러한 철학자들은 비 2) 제임스가 스텀프 K 퍼 S tumpf에게 1 泥 7 년 2 월 6 일에 보낸 편지. Hen ry Jam es, ed. Lett er s of Wi lliam Jam es(Bosto n : Nort on , 1920), pp. 263-264. 3) Davi d Pears, Ludwi g Wi ttgen sein ( New York: Vik ing , 1969), p. 34. 4) 하지만, 이 책의 논문 10 회의론에 대한 카벨의 견해를 볼 것. 거기에서 나는 내가 <교과서적인 문제들>이라고 부른 것을 카벨이 너무 많이 존중하고 있는 걸 비판한다 .(1981 년에 추가된 각주)
트겐슈타인은 데카르트적 전통을 온당하게 비판하긴 하였지만, 자기 들이 이제 형이상학이나 어쩌면 철학 그 자체와 맞먹는다고 여기는 언어철학과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여하튼 『탐구』 에서는) 거의 말한 바가 없다고 본다 . 반면에 자신들은 비트겐슈타인이 물려준 지점에서부터 설명을 해 간다고 믿고 있는 [두번째 유형의] 철학자들은 데카르트적인 문제의 파괴를 몇 가지 사이비 문제의 단순한 제거가 아니라 철학의 변형, 어쩌면 사상과 삶 자체의 변형으로 보려 한다 . 그들에게 데카르트와 칸트에게 공통된 준거틀의 분쇄는 몇 가지 교과서적인 수수께끼들을 치워버린 것과는 비교될 수도 없이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것은 사람 들이 아우구스티누스와 뉴먼 3) 에 공통된 기독교적인 준거틀의 파괴를 생각하기에 이르렀던 것과 마찬가지로 수세대에 걸쳐 심오하고도 충 분히 심사숙고되어야 할 대단한 사건이다. 계몽주의 시대에 한편으로 종교 문제를 일축하면서 [여타의] 심각한 문제들에 매달렸던 저술가 들과, 다른 한편으로 종교 문제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종교적 희 의론은 끊임없이 그리고 타협의 여지없이 추구해야 한다고 보는 저 술가들 간에 발생했던 분열이, 오늘날에는 르네상스 이후의 철학적 전통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회의론에 대한 철학자들의 반응 속에 비슷하게 나타난 것이다. <체계적인 언어철학 > 은 스콜라 철학으로 둔갑해서 쓸모없게 될 위험성이 있으며, < 비트겐슈타인적인> 철학은 천재적인 저술가의 아포리아에 대한 김빠진 흉내 내기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댜 하지만, 나는 그와 같은 위험성에 대해서나, 철학에서 비트 겐슈타인 이후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 만 그 분열을 야기시킨 문제를 논의할 배경에 대해 설명할 요량으로 5) Joh n Hen ry Newman, 1801-1890: 영국의 가톨릭 신학자 • 저술가 , l 'o/ 9 년에 추기경이 됨(역주)
그것을 서술했을 뿐이다 . 그 문 제란 바 로 이 것 이다: 새 로 운 철 학적 견해가 철 학의 종언 을 가져온 것 이라고 말하 는 것 이 과연 의미 있 는 것인가? 특히 , < 언어적 사실 들> 로 불리는 어떤 것 들 에 대한 비 트 겐 슈타인의 몇 가지 발견의 결과로 인해 하나의 [탐구] 주제로서의 철 학이 극복되고 , 시대에 뒤지게 되고, 사라질 계제에 다달았다고 말하 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은 또 하나의 애매한 철 학 이론을 제안했거나 그렇지 않다면 그는 전혀 <철 학함 > 을 행하지 않 았다라는 딜레마에서 우리가 빠져나갈 수가 있겠는가? 페어스는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그의 저서에서 이 물음과 씨름하면 서 그가 비트겐슈타인의 < 인간중심주의 an t hro p ocen tri sm > 라고 명명 한 것에 대한 설명을 펼쳐 보이고 있는데 , 그의 저서는 지금까지 나 타난 어느 저술보다도 더 『 탐구 』 의 생각을 충실하게 피력해 주며 『 탐구 』 의 방법과 목표를 잘 이해하게 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하 지만, 나는 페어스가 틀린 길로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비트겐슈타인을, 이미 『 논고 』 에서 그것들을 떨궈버린 바 있으며 또 철학은 엄연히 하나의 학문 분야라는 관념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사 용될 수 없는 일련의 구분들( < 언어적 사실들 > 대 다른 사실 들 , 규약 대 자연 , 조건적 필연성 대 무조건적 필연성, 의미 대 무의미 , < 사실적 지식> 대 다른 담론 영역 등)에 준거한 틀 안에서 해석하고 있기 때 문이다. 만일 어떤 학문 분야를 그 인접의 것 또는 하위의 것에서 분 리시켜 배치할 구분을 갖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그 학문 분야를 설정 할 수가 없다. 반면에 만일 그와 같은 구분들을 받아들인다면 , 페어 스가 제기한 다음과 같은 물음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이 인간중심주의를 취한 것이 옳았는지 아닌지를 우리는 과연 말할 수 있는가? 철학적 진리의 어떠한 시금석이 비트겐슈타인의 인간중 심주의와 <실재론> 혹은 <객관주의 > 사이에서 어느 쪽이 옳다고 판가름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만일 페어스가 사용하는 『 논고 』 식의 다양한 구분들을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물음들은 그 대답 자체가 철
학자의 학문 분야 중 일부에 해당되는 물음일 것이다. 만일 그 물음 들을 거부한다면 , 철학적 견해라고 불릴 만한 것을 비트겐슈타인이 가졌다고 여기기는 어렵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견해가 과연 무엇에 < 관한 abou t >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페어스는 이 딜레마를 잘 인식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해서 비트겐슈타인의 < 극단적인 인간중심주의 > 를 요약하고 있다. 인간의 사고와 언어의 바깥에는 아무런 독립적, 객관적 지지 근거가 없 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독트린이며, 의미와 필연성은 그것들을 구현하는 언어적 절차의 내부에서만 보존된다. 그것들이 안정된 까닭은 다만 실천이 규칙에 의해 모종의 안정성을 얻어서이다. 그러나 규칙들조 차도 항상 다양한 해석들을 허용하기 때문에 한 가지로 고정된 준거점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정말로 실천의 안정성을 부여하는 것은 우리가 규칙 들을 해석할 때 갖는 우리의 합의이다. [예컨대] 우리가 이것 참 다행이다 라고 말하려면, 그 말이 마치 지구상의 생명이 지구의 자연적인 여건을 견디어내는 것이 참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셈이 되는 경우를 배제해야 하 듯이.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그만큼의 안정성이 있다는 점이다 .6) 두 페이지 뒤에 페어스는 다음과 같은 유의점을 소개하고 있다. 인간중심주의로의 이행을 정확하고 중립적인 방식으로 서술하기는 어 렵다. 그것에 대한 어떠한 서술도 그 출발점인 객관주의를 언급해야만 하 며, 그래서 일들이 우리가 상정했던 것에 비해 덜 안정적이라는 암시를 주게 될 것이다. 그런데 바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려면 그러한 암시 를 제거해야 한다. 그는 객관주의를 거부하지도 않으며 어떤 경쟁적인 이 6) Pears, 앞의 책, p. 179.
론을 제시하지 도 않는다 < 인간중심 주 의 > 라 는 용어 를 사용하는 일도 이 와 마찬가지의 잘못된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 그 용어가 부정확한 표식 이거나 다 른 용어가 더 낫기 때문이 아니라 , 오히려 그 용어는 비 트겐 슈 타인의 견해를 곧장 외견상 정반대의 입장에 들 게 하며 그래서 [인간중심 주의가 거부하는] 낡은 규칙들에 따 른 철학적 갈등이 있는 것인 양 간주 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의 의도가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는지를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 그는 두 관점 사이 를 오락가 락함으로써 < 언어의 한계를 고정시키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믿었 다 >. 이때 바깥쪽의 관점은 우리의 언어적 실천들에 대해 독립적인 지지 를 제공하려는 유의 실재론이며, 안쪽의 관점은 언어적 실천들 자체에 대 한 서술인데, 그것은 앞에서 말한 유의 객관주의를 배경으로 하지 않는다 면 완전히 밋밋하게 될 그런 서술이다. 그의 아이디어는 바깥쪽의 관점은 하나의 환영(幻影)이며, 안쪽의 관점이 진리의 총체(總體)인데, 이것은 반드시 바깥쪽의 관점과 대비를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 다만 안쪽의 관접이 객관주의에 대한 대안이라는 함축을 전혀 갖지 않는다면, 안쪽의 관점에 대해 ‘인간중심주의’라는 용어를 적용해도 아~i 잘 들어맞 을 것이다 . > 비트겐슈타인의 아이디어는 유일하게 방어 가능한 객관주의 도 실패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인간중심주의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그러 므로 여기에는 오직 한 가지 가능한 이론, 죽 <언어적 실천들과 연관된 사실들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밖에 > 없다고 말하는 것 이 더 나울 것이다.[강조는 추가된 것임 ]1 ) 여기에서 페어스는 역리(逆理, p aradoxes) 의 곤경에 빠져 있다. 그 러한 역리 중 일부는 비트겐슈타인(그는 『탐구』의 논의 과정에서 예닐 곱 개의 양립 불가능한 메타철학적 견해들을 기분 좋게 툭툭 던져보고 있다) 자신에 의해 정교하게 디듬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페어스가 그 7) 같은 책, pp. 181-182.
것들을 디 룰 때 는 그 역리들이 더 대담하고 또 단호하게 진술되었기 때문에 쉽게 웃어넘기기가 어렵다. 그러한 역리들 중에서 세 가지가 내가 위 인용문 중 괄호로 표시한 세 문장에 예시되어 있다. < 언어 의 한계 를 고정시킴>이라는 관념은 『논 고 』 의 혼적으로서, 예나 지금 이나 논리실증주의를 반대하는 데에 사용되는 표준적인 응답으로 인 정되고 있댜 죽 < 어떤 것이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 촌재한다고 말할 때 당신은 그것이 문자 그대로 말해질 수 없다고 뜻할 수는 없으며, 틀림없이 당신은 그것이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함을 뜻할 것이다. 그러 나 그것이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알 만큼 당신은 충분히 그것을 잘 이해하여야 하며, 만일 당신이 그것을 잘 이해한다면 그것 은 의미를 지녔어야 한다 >. 우리의 언어가 < 저 바깥에 있는> 보편 자, 의미, 혹은 필연성 등을 주축으로 해서 이루어진다는 <객관주의 자 > 의 관념, 즉 엄격함을 조장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 아니며 그렇 게 하는 무엇이 존재한다라는 주장은, 마치 도덕 법칙은 신의 의지를 표현한다는 관념만큼이나 지성적이며 동시에 그만큼이나 의문스러운 것이댜 종교에 대한 어떤 실증주의적 비판도 수세기에 걸친 지적인 논의의 주제였던 진술들을 < 헛소리>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결코 정 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탐구』에서는 <헛소리>란 그 말에 힘을 더 보태주거나 범위를 더 넓혀주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두번째 역리는 내가 괄호로 표시한 두번째 문장에 제시되어 있다. 그것이 역리인 까닭은 만일 < 인간중심주의>의 정의 속에 <객관주 의에 대한 대안 > 이라는 뜻이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면, 그 용어에 는 아무런 힘도 전혀 남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자연> 이 하나의 환영에 불과하다면, <규약>도 그러하며, <인간>도 그러 할 것이다. 대조하는 용어들은 함께 성립하거나 함께 쓰러진다. 필연 성이 어디에서 나오는지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는다는 것은 <낡은 규칙들에 따른 철학적 갈등>을 인정하는 어떤 견해를 갖는 것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랍인이나 범신론자도 신에 대해 (종
교란 것은 심각하게 논의되기엔 너무 유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자기가 신에 대한 하나의 견해를 갖고 있다고 여기는 방식과는 달리) 어떤 견해를 가질 것이라는 그런 의미에서 필연성에 대한 어떤 견해 일 것 이기 때문에. 세번째 역리는 실제로는 두번째 것과 똑같다. 페어스는 이를테면 <언어적 실천들과 연관된 사실들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다>와 같은 형식과, <유일하게 가능한 이론은 언어적 사실들만 존재 한다는 이론이다>라는 주장과 같은 용어의 사용을 좋아한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세계>와 대비되는 <언어> (그리고 <비언어적 사 실>과 대비되는 <언어적 사실>) 혹은 용어는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 다. 만일에 오직 언어적 사실들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모든 낡은 사 실들을 <언어적>이라고 다시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하다. 페어스는 분 명히 두 갈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죽 한편으로는 그가 앞에서 사용한 바 있고 단순히 <유일하게 가능한 이론은 오직 사실들만 존 재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데에 불과한 결연한 동어 반복(<실제 로 존재하는 그만큼의 안정성이 있다>)과, 다른 한편으로는 거기에 <언어적>이라는 용어를 포함시켜 그 논제를 하찮은 것이 아니게 만 드는 일 사이에서 그는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와 다른 어 떤 것 사이의 대비가 없기에 형성된 역리의 문제를 떠나서 보더라도, 이론들이란 늘 동시에 두 가지(혹은 여러 가지)가 함께 하는 것이므 로 <유일하게 가능한 이론은……>으로 시작되는 어떤 문장 속에도 역리는 늘상 있게 마련이다. 신이나 계절에 관해 오직 하나의 이론만 있을 때는 [사실상] 아무 <이론>도 없는 것이며, 그것들에 관해 익 히 알려진 사실들만 존재할 따름이다. 듀이가 말했듯이 이론이란 다 른 모든 사람들이 항상 믿고 있는 것에 대해 누군가가 의심을 가지 고서, 사태를 보는 다른 방식이 있다고 제안할 때 시작된다. 그것에 관해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말할 것인지 아무도 상관하지 않을 정도 로 그 주제에 대한 관심이 아주 쇠퇴하게 될 경우에 이르러야 대안
적인 이 론 의 가 능 성 은 끝 나게 된댜 『 탐구 』 의 핵심 을 서 술 코자 하 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와 같은 역 리에 휘말리게 되 는 이유 들 중 중 요한 한 가지는 비트겐슈타인이 (프 레게, 러셀, 카 르 납 등의 도 움에 힘입어) 철 학 을 < 언어적인 > 것으로 만 들 었다 는 관 념 , < 언어의 중요성 > 을 우리가 깨닫게 그가 도와주었 다는 관념에서 기인한댜 최근에 들어와서 철 학은 진보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것 이 적 절 할 듯 이 보이게 되었으며, < 언어적 전회 > 와 < 언 어라는 새로운 방식 > 등을 들먹이는 것이 근자에 영어권 철 학자들이 하는 것과 그들의 조상 들 이 했던 것 (그리고 시대 역행적인 현대 철학 자 들 이 여전히 행하 는 것 ) 간의 차이를 묘사하는 손쉬운 방식이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낱말 들 에 의해 말해질 수는 있지만 사물들에 의해 마찬가지로 말해질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무도 설명해 내지 못 했으며 , 어떻게 해서 카르납의 < 형식적인 방식 > 이 < 실질적인 방 식 > 보다 더 많은 철 학적 타격의 힘을 지녔는가를 설명해 내지 못했 다. 비트겐슈타인이 『 논고 』 에서 그랬던 것처럼 < 모든 가능한 언어의 형식 > 이라 불리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사람들은 존재론을 논 리학으로부터 도출해 내고자 할 것이다. 그렇지만 심지어 그런 경우 에도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낯익은 슬로건인 < 내 언어의 한계가 곧 내 세계의 한계다 > 와 그 역인 < 내 세계의 한계가 곧 내 언어의 한 계다 >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말하라고 사람들을 몰아세워 난처 하게 할 것이다. 『탐구』에서처럼 일단 존재론이라는 관념이 몽땅 포기되면 , <언 어 > 라는 관념 속에는 대바의 힘이 없어지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야기 될 역리는 몇 곱절로 늘어난다. 모종의 힘을 다시 불어넣기 위한 여 러 시도들은 결과적으로 < 개념적 > (혹은 < 문법적> 또는 <의미론 적 > )인 물음들을 < 경험적 > 인 물음들과 준별시킬 필요성에 대한 수 도 없이 많은 말들을 낳게 하였다. 『탐구 』 의 기여 중 일부는 전통적 철학지들에 의해 이루어진 어떤 제안들이 (예컨대 두 사람이 똑같은
개수의 감각을 가질 수도 있디 는 · 흄의 제안처럼) < 우리의 언어 > 에서 열려 있는 가능성들과 < 우리의 언어 > 에서 닫혀진 가능성 들 을 혼동 한 것임을 보여준 점에 있다고 주장되어 왔으며, 페어스에 의해서도 가끔씩 그렇게 암시되고 있다 8 1 실제로, 페어스는 『 탐구 』 에 대해 다 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에서 올바른 방법은 언어에 관한 사실들을 수집 하는 것이라고 견지하는데, 그렇게 하는 까닭은 그 사실들 자체에 본래 관심이 있어서도 아니며, 가령 모든 언어에 공통된 문법 구조의 이론처럼 그것들에 대한 어떤 과학적 이론을 구축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 사실들 은 그것들 자체를 넘어서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수집된 것이다. 그것들 은 지난 두 세기 동안 비판적 철학이 여행하여 왔던 길의 반대 방향을 가 리키고 있다 . 9, 잠시 뒤에 나는 언어에 관한 사실들을 수집함으로써 행해지는 어 떠한 전통 비판도 사물들에 관한 사실들을 함께 수집하지 않고서는 잘 이루어질 수 없으며, 어떻든 그 두 행위를 산뜻하게 구별지을 방 법은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내가 앞에서 언급한 비트겐 슈타인 이후의 철학에서의 분열상에 대해 단편적인 논의를 함으로써 그 논변에 이르는 길을 준비하고자 한댜 그 분열은 만일에 누가 비 트겐슈타인을 <언어에 관한 사실들을 수집>한 것이라고 생각할 경 우 더욱 조장된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은 퍽이나 자연스러 운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철학의 올바른 방법이라면 그것을 왜 과학적인 방식으로 실천하지 않는가? 왜 비트겐슈타인의 멋들어 진 비유에 대한 직감력을 (혹은 오스틴(J. L. Austin , 1911-1960) 의 깜 직한 구분에 대한 분별력을) 예컨대 일상적으로 진부한 말들을 입력 8) 같은 책, p. 121 참조. 9) 같은 책, p. 112.
시킨 다음에 낱말들의 의미에 대한 진술을 출력 해 내 는 어떤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대체시키려 하지 않는가? 철학을 안전한 과학의 길로 되돌려 놓 으려는 이러한 간절한 권고는 최 근 의 언어철학에서 수많은 프로그램의 시리즈 들로 가지 치기를 하였는데, 그중에서 비트겐슈타 인 자신의 관심과 상당한 연관성을 갖는 것은 거의 없다 . 페어스는 이 점을 염려하고 있으며, 그의 염려는 <철 학이 과연 하나의 과학임 을 회피할 수 있는가> 그리고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 의 형태로 나타난다 페어스는 비트겐슈타인의 < 과학에 대한 저항> 에 공감하고 있지만 , 페어스는 우리가 그렇게 할 만한 어떤 권리가 있는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 한편으로는 만일 하나의 과학을 갖지 못한다면 하나의 학문 분야 를 갖기도 어렵게 된다. 예컨대, 예술은 학문 분야가 아니라, 단순히 기술이거나 어쩌면 천재성을 갖고 있을 뿐이댜 다른 한편으로는 철 학은 경험과학에 비해 더 심오하고, 고상하며, 순수하다고 언제나 자 부해 왔는데, < 언어에 관한 사실들 > 에 대해 경험과학적인 것 말고 도대체 어떤 과학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철학에서의 올바 른 방법 > 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발견은, 언어학을 그 자체보다 상 위의 어떤 것이 되게 하거나 아니면 < 언어에 관한 사실들>을 우리 가 비경험적으로 발견해 낼 수 있다는 주장이 될 것처럼 보인다. [그 럴 경우] 철학은 < 언어과학으로 홉수되거나 >IOI 그렇지 않으면 일종 의 예술이 될 것이다 . 그러나 < 만일에 철학이 정말로 예술과 같은 것이라면, 언어적 사례에 의해 만들어진 그 인상(印 象 )은 어떠한 일 반적 공식(公式)으로도 포착할 수 없는 무엇과 같게 될 것이다 .> I 그러한 공식이 전혀 없는 어떤 것을 <철학>이라고 우리가 부를 수 있겠는가?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페어스의 취급에서는 이렇듯 예술 대 과학의 10) 같은 책, p. 110. 11) 같은 책, p. 196.
구분이 중요하며, 그 구분 은 < 무조 건 적 필연성 > 을 찾 아내려 는 『논 파 의 프로그램의 해소 , 즉 비 트 겐슈타인이 한때 플 라 톤, 데카 르 트, 헤겔과 공유한 바 있었던 프 로 그램의 해소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만일에 < 언어에 관한 우연적 사실 들 에 의 존 되 는 조건적인 필연성 > l ~ l 에 의존하게 되면, 변덕스러우며 , 실천 적 이고 , 불 가예 측 적 인 영역, 즉 실로 그렇게 되어서 는 안 된다고 항상 철 학이 말해 왔던 바로 그 지점에 서 있게 될 것이기 떄문이다 . 만일 < 누구도 다른 사 람과 똑같은 개수의 감각을 가질 수 없다 > 는 말에서처럼 사람 들 이 말하는 방식에서 < 필연성 > 을 얻는다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싫 어하는 철학자들은 왜 말히는· 방식의 변경을 제안하지 않는 것이며 ,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런 논점도 얻지 못하는 것일까? 철 학은 순전 히 < 언어의 추천 > 에 불과하다는 유령은 훨씬더 무시무시한 유령인 < 철학은 기호( 昭 好)의 문제 > 라는 유령을 밀어내고 나서야 들어올 수 있댜 (왜냐하면 만일에 내가 나 혼자서만 새롭고도 더 나은 말하기 방식을 발견해 냈다면, 다른 사람들이 내 추천을 받아들이건 말건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필연성에 관한 인간중심주의(모든 필연성은 사회 적 실행의 우연성에 근거한다는 주장)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었 던 철학의 죽음인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비트겐슈타인은 < 언어의 한계>를 발견하기 위해 경험적 수단들이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거나(그 경우 철학적 오류는 무엇보다도 충분한 사실들을 수집하지 못한 데에 있을 것이다) , 그렇지 않으면 그는 철학적 전통에 관한 우리의 복합적인 느낌들을 가지고 (어떤 때는 풍자가의 방식으 로, 어떤 때는 이론뿐인 정신분석학자의 방식으로) 유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딜레마들이 <필연성>이라는 관념에 달려 있다는 점을 주 목하라. 일단 그것이 발견되고 나면 데카르트, 흄 칸트 등이 어디에 12) 같은 책, p. 111 .
서부터 빗나갔는지 를 우리에게 말해 줄 어떤 것 —―f 언어의 한계 一一 이 어디엔가 존 재한다 는 점을 패어스는 전혀 의문시하지 않는 댜 또한 그는 언어의 한계에 대한 발견이 < 필연적 > 인 어떤 것에 대 한 발견이라는 점도 의문시하지 않는댜 최근의 철학에서 이른바 < 언어적 전회 > 라는 것의 초점은, 옛날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좇아 필연성이 사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나중에는 칸트를 좇 아 필연성이 마음의 구조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해 왔던 반면에, 이제 는 그것이 언어에서 나온다고 우리가 알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 그리 고 철학은 필연성을 추구해야 하므로, 철학은 언어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어 모든 것에 대해 페어스는 만족스럽댜 그의 유일한 문젯거 리는 과연 (또 하나의 사회적 실행으로서의) 언어가 그러한 부담을 견 뎌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한 것이냐이다 만일 언어가 사물들, 혹 은 선험적 자아, 또는 <무엇인가>에 의해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한 다면, 언어의 한계를 발견할 때 정말로 <필연적>이라고 간주될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것일까? 만일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과연 <철학>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처지에 놓인 셈이다. 만일 우리가 필연 성이라는 개념을 제거하면, 우리는 그 딜레마로부터 벗어날 길을 보 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개념을 포기하는 것은 철학이라는 개념 자 체를 포기하는 꼴이 될 것이다. 만일에 우리가 비트겐슈타인은 필연 성이 인간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했던 인간중심주의의 이론가라고 생 각하기를 그만두고, 필연성의 개념이 없이도 우리가 잘 지낼 수 있다 고 제안했던 풍자가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철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어떤 유의 것인지에 관해 훨씬더 미미한 딜레마를 갖게 될 것이나 반면에 철학이라는 학문 분야의 존립 자체가 의문스럽게 되 는 대가를 치루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물음이 남아 있다. 첫째, 비트겐슈타인이 실제로 <필연성>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반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가 있겠는가? 둘째, 필연성이라는 그 관념을 사용하기를 그만두는 것이 과연 좋은 아이디어일 것인가? 첫번째 물 음에 대한 대답은, 내 생각으로는, <그렇다. 대략 절반가량은 그렇 다>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필연성에 관해 말했다는 해석과 그것에 반대해서 말했다는 두 해석 중] 어느 쪽으로도 해석될 수 있으며, 그 경우 서로 다른 쪽의 주석에 대한 결정적인 반박으로서 텍스트가 인 용될 수 있댜 하지만, 나는 두번째 물음만을 논의하려 하는데, 이 경 우에서 대답은 오직 <그렇다>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전기 비트겐 슈타인이 칸트에 속한 만큼이나 많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듀이에 속하며, 듀이가 철학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들을 제거한 것과 예술과 과학, 철학과 과학, 예술과 종교, 도덕과 과학 사이의 구분들을 파괴 하고자 시도한 것들은, 데카르트적 전통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 의 자연스러운 결과에 해당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듀이의 견해에 따르면 플라톤, 칸트 그리고 『논고』에 공통된 것으로서의 <철학>은 실로 하나의 독특한 문화적 전통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의 학문 분야는 아니다. (비록 그것에 대한 연구는 하나의 학문 분야이겠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의 철학一―-대충 말해서, 누군가가 다른 어떤 구 분을 해내지 못할 만큼 아주 철저하게 일반화하는 그런 유의 글쓰기 ―은 그 밖의 어떤 것이긴 하지만 역시 하나의 학문 분야는 아니 다. 그것은 아무 학문 분야도 아니며, 그 주제와 방법에 대해 아무런 메타철학적 문제도 없다. 그래서 내가 쭉 다루어왔던 그런 유의 딜레 마도 없다. 필연성이란 개념의 사용을 그만두는 것은 철학을 순수하 게 지키려는 노력을 중지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필연성 의 개념을 사용해 철학의 순수화를 지향하는] 시도들은 너무나 많은 공력의 낭비를 이미 그 대가로 지불하게 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필연성>이라는 관념이 과연 효용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논 변의 밑바탕은, 페어스가 『탐구』에서 특징적이라고 말한 전체론과 『논고』에서 특징적인 원자론 간의 논변이다. 전체론은 듀앙 ,13) 콰인,
쿤의 경우에서 보 듯 이, 놀 랄 만한 과학적 발견 들 에 ( 혹은 E 철 학 적 곤경 이나, 종 교적 체험에) 맞추기 위해 이미 습관이 되고 굳어진 말 들 을 우리가 재조정하 는 방식 들 이 엄청나게 다양할 수 있다는 사실에 초 점을 둔다 . 이와 같은 다양성이 주어진다면 , 대화 중에서 어느 변화 가 < 신념상의 > 변화 를 표현한 것이며, 어느 변화가 < 특정한 용어에 부여한 의미상의 > 변화인지를 꼬집어 말해 낼 방도에 대해 (특히 콰 인에 의해 그 정체가 밝혀진 바 있는 그런 유의) 의심을 갖게 될 것이 다 . 어떤 사람은 임시 변통적으로 그리고 제한된 청중들에게 < 나는 이제 ‘X’ 에 대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댜 그래서 그 낱말로서 더 이상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 고 말하는 대신에, < 나는 ‘X’ 로 서 내가 항상 의미했던 바를 여전히 의미한다. 하지만 더 이상 모든 'X’ 가 ‘Y' 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 고 말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댜 그러 나, 어떻게 말하든 그것은 수사학적인 문제이지, < 사실적 지식>과 < 철학 > 의 사이에 놓인 선 위의 자국은 아니다. 따라서 전체론은 (듀 이와 헤겔에게도 그랬듯이) 필연성 대 우연성, 언어 대 사실, 철학 대 과학의 구분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페어스는 만일 『논고 』 의 원자론적 프로그램에서 보면 의미가 있겠 지만, 『 탐구 』 의 전체론적 관점을 채택하면 더 이상 홍미 없게 보일 관념들을 스스로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 인간중심주의자 >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페어스는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이 스스로 행했던 바를 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 탐구 』 에는 그 것들을 소중히 할 것인지 아니면 웃음거리로 삼을 것인지에 대해 비 트겐슈타인 AA무 두 갈피를 잡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맥락에서는 『논고 』 식의 관념들이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 어떻게 논변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탐구』가 초월해 버린 『논고 』 식의 구분들에 페어스와 비 트겐슈타인이 매달려 있는 까닭은, 두 사람 다 철학의 순수성을 소중 13) Pier re Duhem, 1861-1916 : 프랑스의 물리학자, 과학사가, 과학철학자.(역주)
히 하고자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내 짐작이다. 양자는 < 철학>이 뚜 렷하고도 비통상적인 어떤 것, 아마도 하나의 학문 분야는 아니겠지 만 페어스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통 상적인 생활과 관념 들 의 바깥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한 이름이기를 바랄 것이다. 두 사람 다 철학이 듀이가 생각했던 것, 죽 다른 여타의 탐구들과 단지 일반성의 수준에 서만 차이가 있는 비판적 사고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철학의 성격에 대해 염려하는 까닭은 < 필연성 > 과 < 언어적 사실 > 이라는 관념의 난점들 때문이 아니라 <철학> 이라는 관념에 난점들이 있기 때문이댜 하지만, 위의 마지막 논점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아무튼 비트 겐슈타인이 철학에 종언을 가져오게 했을 것이라는 관념은 여전히 곤혹스러운 채 남게 될 것이다. 또, 필연성의 인간 중심적인 성격을 인지함에 의해 철학이 종언에 이를 수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제안 으로 말미암아 그는 자기 자신과 페어스를 쓸데없는 골칫거리에 빠 지게 하였다라는 나의 말이 설령 옳다고 할지라도, 여기서 <종언>이 라는 것이 도대체 무얼 의미할 것인가? 철학적으로 홍미로운 어떤 정언적 명제의 <필연성>이란 것이 내가 쭉 주장해 왔듯이 이른바 <뚜렷히 철학적인> 성격의 명제에 대한 수사학적 찬사에 불과하다 고 가정해 보라. 그렇다면 한 명제나 쟁점을 뚜렷히 (혹은 순수하게) 철학적이게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 그렇지 않다면, 종 언에 도달하게 될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껏 내가 밝히 고자 노력해 왔던 점은, 뚜렷히 철학적인 논의 주제(예컨대 필연성)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이론에 의해 철학이 종언에 이르렀다라는 식의 자기 모순적인 주장을 우리가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일 반적인 역리가 남아 있다. 철학은 마치 시간과 공간을 닮았다. 이 셋 중 어느 것도 그 <끝>이 어떻게 생겼을지를 상상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점에서. 그러한 더 큰 역리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철학>이라는 용어가 적
용되는 세 가지 유형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 (1) (셀라즈의 구절에 나오는) <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사물 들 이 가장 넓은 의미에서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에 대한 논의. (2) 대부분의 < 위대한 철학 자들 > 에 의해 논의된 주요한 논의 주제들, 예컨대 주관과 객관, 정신 과 물질, 공리주의와 의무론적 윤리설, 자유 의지와 결정론, 언어와 사고 , 신과 세계 , 보편자와 특수자, 의미와 지시 등의 모음. (3) 하나 의 학문적 주제 an academ ic subje c t, 죽 어떤 논의 주제가 되었든 당신이 좋아하는 철학과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들. 철학의 순수성, 또 철학의 종언 가능성은 이 세 가지 의미 각각에 따라 달리 말해져야 한댜 첫번째 의미에서 철학은 분명히 하나의 뚜 렷한 학문 분야가 아니며 아무도 그 < 순수성 > 을 주장하지 않을 것 이다. 또한 아무도 그것이 끝날 수 있다거나 끝나야 한다고 생각하지 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미에서 <철 학자 > 란 말은 < 지성인> 과 거의 같은 말이 될 것이다. 개괄적인 전망으로서의 철학이란 분명 히 단 하나의 학문적 탐구 분야에만 고유한 영역은 아니다. 만일에 통상적으로 <철 학자 > 로 간주되는 다양한 모든 인물들을 (예컨대 그 들의 이름이 철학 박사 과정의 시험 문제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열거하 자면, 무작위로 말해도 헤라클레이토스 Herac litu s, 아벨라르드 ,1 - 11 스피 노자, 마르크스, 키에르케고르, 프레게, 괴델, 듀이, 오스틴 등을 포함 하게 될 것이다. 아무도 이 인물들을 (예컨대) 유리피데스 ,1 ,1 『위(僞) 디오니소스』 ,1 61 몽테뉴, 뉴턴, 사무엘 존슨 ,1 7 1 랑케 ,l ij l 스탕달 ,1 91 헉슬리 ,201 14) Pie r re Abelard, 1079- 11 42: 프랑스 신학자, 철학자.(역주) 15) Eu ripide s, 기원전 480?- 4O O : 고대 그리스의 바극시인.(역주) 16) the pse udo-Dio n y su s : 바울에 의해 로마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아테네인 디 오니소스 아레오파기타가 썼다고 전해지는 위작으로 저서 4, 서한 11, 기도문 1 이 있으며, 350-500 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역주) 1178)) LSaeompuo eldl Jvooh nn sRoann, k1e7, 0197-19758-148: 8영6 국: 독의일 시의인 ,역 사비가평.가(.역(주역)주 )
에드먼드 윌슨 ,2” 예이 츠 ?3 ) 등으로부터 때어놓 을 만한 하나의 공통 주 제 를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 대학의 철 학과에서 관심을 갖는 논 의 주 제나 저자 들 은 대체로 우연적이며 , 매우 일시적인 뒤범벅 을 이루고 있는데 , 그 대부분은 대학 내에서의 파워 싸움의 부산물과 현행의 유 행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현대의 철학 박사 과정 시험을 1900 년에 치 렀던 것들과 비교해 보고, 또 2050 년에 치르게 될 것이 어떨까 를 상상 해 보라.) 이것은 애통해 할 문제도 아니며 , 교육 과정의 배열은 그다 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사물 일반에 관해 포괄적인 견해 를 갖는 것이 꼭 철학 선생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수반하지 않으며, 그와 같이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꼭 그렇듯 포괄적 인 견해를 가지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그것이 명심하게 해주기 는한다. 두번째의 의미, 즉 <전 통적인 문제들 > 로서의 철학의 의미를 잠시 접어두고서 세번째의 의미도 철학의 순수성에 관해 아무런 문젯거리 가 없다는 것에 주목하자 .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철학과나 철학의 학 파에 의해 논의중인 쟁점들은 어떤 기술적t ec hni cal 인 주제라도 갖고 있는 상투적인 순수성만을 갖고 있다. 그 쟁점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맥락상의 정의를 제공해 주는 일련의 문헌이 있을 것이며, 게다가 그 문헌들은 철학 교수들만 읽었을 것이라는 오로지 그 이유들로 인해 그 쟁점들은 자동적으로 < 순수하게 철학적인> 쟁점이 된다. 이런 순 수성은 상당수의 사람들이 상당 기간 동안 일을 해온 다음에는 영락 없이 어떤 논의 주제에서도 발전되게 마련이댜 그 사람들이 관련된 사항들을 아는 유일한 사람들이 될 것이며, 그들은 그 논의 주제의 이름은 알지만 실질에 대해서는 모르는 비전문가들의 주제넘은 참견 19) Ste n dhal, 1783- 18 42 : 프랑스의 소설가 , 비평가. (역주) 20) Thomas Huxley , 1825-1895 : 영국의 생물학자, 저술가.(역주) 21) Edmund Wi lso n, 1895- 19 72 : 미국의 비평가.(역주) 22) Wi lliam Butl er Yeats , 1865-1939 : 아일랜드의 시인, 극작가 , 수필가 . (역주)
에 대해 정당하게 비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순수성은 뚜 렷하게 <철학적> 인 것이 아니다 . 그런 순수성은 불호}%(弗化物)에 대한 연구에도, 초서 l” 의 운율학 연구에도 있다. < 이런 > 의미에서의 철학 을 종언에 이르게 한다는 데에 대해서는 하등의 문젯거리도 있 을 수가 없댜 기술적인 문제는 국외자들의 눈에 그것이 제아무리 현 학적이거나 멍청하게 보인다고 해도 그 자체로 자연적인 수명을 갖 고 있으며, 그 문제에 한때 매료되었던 사람들에 의해 성공적으로 해 소되거나 그들 사이에서 정말로 그 문제가 끝났다고 합의되는 경우 를 제외하고는 그 무엇도 그 문제를 없앨 수 없다. 그래서 철학의 종언 가능성이 무얼 의미하는지를 보기 위해서 그 리고 철학적 순수성이 사무치게 필요하다는 것을 움미하기 위해서는 , 우리는 비전으로서의 철학과 학문적 전문성으로서의 철학 양자를 모 두 외면해야 한다. [그 대신에] 어떤 명백하고도 항구적인 문제들 一비전을 갖고자 눙는 어떠한 시뚜 부딪혀야만 底 문젯거리 들, 철학 교수들이 현재 몰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지속적으 로 그것에 관해 종사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는 그러한 문젯거리들 에 관한 연구의 명칭으로서의 철학을 생각해 보야만 한다 . 가령 존재의 본성, 인간의 본성, 주관과 객관의 관계, 언어와 사고, 필연적 진 리, 의지의 자유 등 이러한 문제들이야말로 철학 교수들은 어떤 견해 롤 반드시 가져야 할 것으로 상정되지만, 반면에 소설가, 비평가, 역 사가, 과학자 등은 그 논의에서 면제될 그런 유형의 문제들이다. 『탐 구 』 가 우리로 하여금 잊게 해줄 것이라고 비트겐슈타인주의자들이 생각한 것들은 바로 그와 같은 교과서적인 문제들이다. 그들이 염두 에 두고 있는 것은 그 문제들 가운데서도 특히 데카르트적 이원론에 의해 형성된 것들이다: 인간을 하여튼 자연의 나머지 부분들과 절대 적으로 판이하게 다른 존재로, 앎울 여타의 어떤 것과도 다른 절차 23) Geoff rey Chaucer, 1340?-1400 : 영국의 시인.(역주)
로 정신 을 오직 세계의 표 상 들 만 을 인지하 는 것 으 로 ( 그 래서 세계 로 부터 < 단 절 된 > 것으 로 ), 의 지를 신비스럽게 도 물 리 적 인 효과 를 지닌 정신적인 행위로 , 언어와 사고 를 하여튼 세계에 < 대응 > 하 는 표 상 둘 의 체계로서 생각하는 데에서 비롯된 문제 들 등 . < 이상과 같은 > 문 제 들 에 대한 연구에 관한 한 , 페어 스 가 말하고 있 듯 이, <철 학은 종 교 와는 달리 일상 생활의 한 부분이 아니라 거기에서 떠난 일종의 유 람이다 > 라는 말이 맞다. 만일에 그와 같은 문제 들 이 <혼 동 > 에서 기 인된 것이라고 진실로 간주한다면 , < 인간의 사고는 그와 같은 혼동 울 할 자연스럽고도 거의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을 갖고 있으며, 정말 로 심오한 것들이 그 혼동이 가리키는 방향 속에 감추어져 있음을 우리는 느낀다>라고 페어스가 말한 것은 (비록 < 인간의 사고 > 란 아 마도 < 1600 년 이래의 인간의 사고>이겠지만) 지당한 얘기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전형적인 데카르트적 문제들이 < 순수하게 철학 적 > 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확정된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곧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는 과학이(혹은 예술에 연관된 일에 서는 예술이) 행하는 바가 이무찍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이라고 말 하고 있다. 진화, DNA 의 분자, 컴퓨터로서의 두뇌, 아동의 발달, 원 시 종족, 양자역학 등에 관한 사실들은 하나도 쓸모 없을 것이다. 왜 냐하면 그런 문제들은 제아무리 상세한 사항들이 추가되어도 여전히 똑같은 문젯거리로 남아 있도록 구성되었기 때문에. 데카르트적 문제 들에 대한 철학자들의 업적은 수많은 새로운 학문 분야들(형식논리 학, 심리학, 시상사)에 파급되었지만, 문제들은 예전과 똑같이 남아 있 다. 그것들이 변경되었다고 보는 어떠한 관점도 <순수하게 철학적 인> 문제들을 모종의 <단순한 사실적인> 물음과 혼동한 것이라고 해서 제거된다. 각 세대마다 출중하며 효과 없이 철학적으로 순진한 (예컨대 스펜서 Herber Sp en cer, 토마스 헉슬리, 올더스 헉슬리 Aldous Huxley, 피아제J ean Pia g e t , 스키너 B. F. Sk inne r, 촘스키 Noam Chom- sk y 등) 인물들이 각기의 전문 분야를 벗어나서 강단철학의 불모성
을 노출시키고, 낡은 철학적 문제들의 전부나 일부가 어떻게 철학의 외부에서 얻어진 통찰 에 양보하게 될 것인지를 설명하였지만, 철 학 교수 들 은 전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고 지루하게 설명할 따름이다 . 전통적 문제 들 에 대한 해결이라는 이 두번째 의미의 철학은, 순수하 며 뚜렷이 철학적 인 어떤 방법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그 렇듯 < 사실 > 과는 구별되는 물음들은, 마치 아폴론의 성직자들이 교 회당의 지하실로 내려가기 전에 카스탈리아 샘 2 ” 에서 스스로를 정화 하 듯 이, 그러한 문제들이 나온 <숨 겨진 심오성 > 에 부합하는 순수성 을 지닌 어떤 방법에 의해 접근되어야만 한다 . 그래서 『 탐구 』 가 철학의 종언을 가져오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 은, 그 책이 < 우리를 사로잡은 그림 >, 즉 전통적인 문제들을 야기시 키는 인간에 대한 그림을 여하튼 제거해 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할 따름이댜 철학 이 종언에 이를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포괄적인 견해 둘의 견지가 케케묵은 것이 된다거나, [대학의] 철학과들이 [쟁기로 땅을 갈아 밭을 일구듯] 다른 것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 히려 특정한 문화적 전통이 죽어 소멸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이 러한 변화가 발생한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데카르트적인 문제들의 표준 목록을 하나의 학문 분야로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며, 오히려 그러한 문제들을 학문 분야로 한때 느꼈던 관심에 대한 연구를 생각 하게 될 것이다. <신 학 > 에서 < 종교에 관한 연구 > 로의 전환이 이 경우에 가장 잘 들어맞는 비유가 될 것이다. 과거의 한때에는 은총, 구원, 신의 본성 등이 연구의 주제였으나, 이제는 그것들이 그랬다는 사실이 연구의 주제이다. 과거에는 신학이 순수하고 자율적인 주제였 지만, 이제 종교는 심리학, 역사학, 인류학 그리고 거기에 끼여들고자 관심을 갖는 여타 학문들의 연구의 손끝에 그 운명이 달려 있다. 과 24) 그리스 파르나소스 산에 있는 샘, 아폴론과 뮤즈 신에게 바쳐진 영천( 函泉 ) . (역주)
거의 한때 우리는 신의 손에 놓인 인 간 의 그림을 가졌고, 그 사실을 여러 대안으로 서술해 보는 방식을 논 의하는 하나의 학문 분야 를 가 졌다. 그보다 뒤 에 (콩트 (Au g us t e Comt e, 179 8- 1857) 가 말했듯이 <신 학적> 단계를 < 형이상학적 > 단계가 계승했을 때) 우리는 인간이 정 신, 영혼 , 세계 내의 대상들을 선험적으로 구성하는 근원 그리고 감 각 내용들 등의 집합체라는 그림을 갖게 되었다 . 우리는 이 다양한 대안들을 논의하는 하나의 학문 분야를 갖게 되었지만, 인간과 자연 의 관계에 대해 꼭 말해야 할 대단히 중요한 < 어떤 것> _건설되 어야 할 다리, 초월되어야 할 이원론, 메꿔져야 할 간격이 있다는 것 ―에 대해서는 결코 의문시하지 않았다. 만일에 철학이 종언에 이 르러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신의 아이들이라는 그림처럼, 이 그림 도 우리와 동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댜 그날이 온다면, 마치 오늘날 인간의 선( 善 )을 그의 영혼과 신 사이의 특별한 관계로 취급하는 것 이 괴상하게 보이듯이, 인간의 지식이 그의 정신과 그 대상 사이의 특별한 관계라고 취급하는 것이 괴상하게 보일 것이다. 만일 이런 식으로 철학의 종언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몇 가지 혼동 을 노출시킨다거나, 담론의 한계를 표시한다거나, < 언어적 사실들 > 의 일부를 지적한다고 해서 초래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 매우 분명해졌을 것이다. 논리실증주의는 종교와 형이상학을 <헛 소리 nonsense> 라고 불렀으며, 종교의 시대를 부주의한 언어의 사용으로 치부해 제거한 듯이 보였기 때문에 악명을 얻었다. 『탐구』가 데카르 트적인 철학을 유사한 <혼동>이라고 말해 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똑 같은 악명을 『탐구』에 부여하는 셈일 것이다. < 혼동>과 같은 용어들 은 어느 것이나 다 이른바 <우리의 언어>라는 어떤 것이 존재하며, 신학자들이나 철학지들이 (아마도 과학자나 시인들은 그렇지 않겠지 만) 그것을 혼동하게 되며 그 복합성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오용하게 된다고 암시한다. 하지만, 아무도 이것을 정말로 믿지는 않는다. 우리 의 언어는 다른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도 창안될 수 있는 것처럼 신
학자 들 과 철학자들에 의해서도 창안될 수 있으며, 데카르트적 철학자 들이 신학자들의 자리를 이어받았을 때 그 들 이 그렇게 했던 것은 그 들이 덜 (명백하게) 혼동된 언어 를 사용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말했 던 것이 청중들을 사로잡을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 우리의 언어> 란 것은, 마치 신이나 실재의 구조처럼 혹은 데카르트적 전통이 제공 하였던 지식 획득에 대한 도매급의 여느 설명들처럼, 진리나 필연성 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쓸모없는 것이다. 페어스가 제안하고 있듯이 우리의 언어가 ( < 논리 > 나 < 실재론적> 철학 등에 의해 제공될 것으로 여겨지는 < 무조건적 > 필연성들과 대립되는 의미에서) 오직 <조건적> 필연성만을 제공하므로 철학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 우리의 언어 > 란 것이 우리를 데카르적인 정신과 물질 사이 의 간격 속에 빠져들게 하는 장치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므로 철학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이 모든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탐구』가 왜 그처럼 중요한지를 설명해야만 한다. 만일에 그 것이 새롭고, 더 순수하며, 더 강력한 철학적 방법을 제시하지도 않 으며 필연성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제시하지도 않는다면, 그 책이 갖 는 충격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나는 늘 그 대답 중 일부는 그 책이 데카르트적 전통에 반대하여 <데카르트 이래로 철학자들은 한 결같이 인간과 세계의 관계란 이러이러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제 나는 당신들에게 그 관계란 저러저러한 것임을 보여준다>와 같은 형 식을 취하지 <않은> 최초의 위대한 저술이라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 다. 전형적으로 근대 철학의 전통적인 문제들을 뒤집어엎으려는 시도 들은 그와 같은 문제들울 회피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제안들로 나타났댜 비트겐슈타인은 최선을 다해 비판 할 때면 그와 같은 건설적인 비판을 단호하게 피하고, 순전한 풍자에 머문다. 그는 사례들을 통해서 그러한 전통적 문제들이 얼마나 하잘 것없는지를 즉 어떻게 그것들이 마치 해답을 불가능하게 하려는 명
시적인 목적을 가지고 고안된 것 같은 용어에 근 거하고 있는지, 전통 적인 문제들을 낳게 하는 물음들은 어찌하여 그 용어가 없이는 형성 될 수 없는지, 옛 간격들이 새로운 장치 들 에 의해 메꿔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를 보여줄 따름이다. (그 간 격들은 새로 고안된 장치가 쓸모없게 될 정도로 충분히 자동적으로 넓 혀지게 설계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하지 < 않 는다>. 인간이란 지각(知覺)이라는 베일에 의해 대상으로부터 단절 되었다고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그 대신에 인간이란 (예컨대,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칸트, 후설], 또는 정신과 물질이 아니라 즉자 촌 재와 대자 존재로 나누어져 있는 것[사르트르], 또는 기본적인 실존으로 서 세계 내 존재를 채용한 것[하이데거], 또는 감각 내용으로부터 감각 내용의 논리적 구성체의 속성을 도출해 내는 존재[논리실증주의]) 라고 생각하라.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지도 않는다. 그 전 통은 세계에 간격들이 있다는 그림을 그려주었지만, 그 간격들이 메 꿔지면 세계는 아마도 이런 식으로 보일 것이다. 그 대신에 비트겐슈 타인은 거기에 설명되어야 할 어떤 것이 있다는 생각 자체를 조롱하 였을 뿐이다. 그런데 3 백 년 동안의 전통을 단지 몇 권의 풍자로 과연 뒤집어엎 울 수가 있겠는가? 확실히 그렇지 않댜 서양의 지적 삶의 일부로서 신학을 제거한 것은 어떤 한 권의 책도, 어떤 한 인물도, 어느 한 세 대도, 어느 한 세기의 업적도 아니다. 신학의 계승자로서의 철학의 종언, 심오한 문제들이 그에 부응한 순수한 방법에 의해 탐구되는 <순수한> 주제로서의 철학의 종언은 [어쩌면] 우리의 시대에는 도 래하지 않을 것이다. 실로 아무도 그것이 과연 도래할 것인지, 콩트 가 <실증주의적 단계>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변화가 과연 도래하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만일에 그것이 도래한다면, 그것은 콩트가 파악하고 있듯이 모든 것이 <과학적>으로 된 그런 유의 것 은 아닐 것이다. 과학이 (도덕적 탁월성으로서의 단순한 선이나, 예술
에서의 단순한 미보다 더 지위가 높은 어떤 가 치 인) < 진리 > 의 근 원이 라 는 관 념 은 , < 엄 밀한 학문으 로 서의 철 학 > 이라 는 이 념 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질 데카 르트적 인 관 념 이다 . 만일에 인간에 대한 데카르트적 인 그림이 언젠가 해소되어야 한다면, 도덕성과 종교의 주장 들 은 <검 증이 불가능하다 > 는 말이 그 것들 에 대해 뭔가 홍미로운 것을 말 했다는 관념도 함 께 사라져야 될 것이다 . 마찬가지로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심지어 그의 후기 저술에서도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한편 으로는 < 사실의 가능성을 나타내려는 > 명제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 인간의 삶에서 그 것 들이 차지한 위치에 의해 그 의미가 얻어지는 > 명제 들 간의 대비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 과학에 대한 저항 > 은 진리 를 중심적인 가치로 만들었던 문화 전반에 대한 저항――-인간을 세계와 갈라놓았던 간격을 성공적으로 건너간 것 ―이라고 해석되는 것이 최선의 해석이라고 나는· 믿는다. 데카르 트적인 그림이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게 될 시대에는 도덕성과 종교 를 격 리된 독방에 넣어서 보호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풍자와 건설적인 비판 간의 대비는 비트겐슈타인 과 듀이를 비교합으로써 가장 잘 드러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 한댜 듀이는 전체론을 극단까지 밀고 가서 관습화된 <진리 > 와 < 필 연성 > 의 패러다임을 비판하였으며, 데카르트적인 구분들이 얼마나 실제 생활에서 동떨어진 것인지롤 밝혀주었고, 철학의 순수성과 필연 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들을 분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으며, 학 문 분야와 문화적 형태 간의 구분들을 깨뜨렸으며, 인식적인 것보다 는 미학적인 가치가 절정을 이루는 삶에 대한 비전을 구체화하고자 애를 썼다 . 여느 철학자들만큼이나 많이 그는 탈(脫)데카르트적인 문 화의 모습이 어떨 것인지에 대해 제안하였다. 하지만 그의 저술들은 < 경험 > 이나 < 자연> 혹은 < 논리>가 데카르트적 전통이 생각해 왔 던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이러하다는 점을 상세히 설명 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요컨대 듀이는 전통적인 노선을 좇아서 자기
가 지어낸 하나의 새로운 이 론을 창안하였 다 . 따라서 그는, 페어스의 구절처럼, <낡 은 규칙에 의거한 철학적 갈등>을 일으 켰 으며, < 경 험>에 대한 그의 <정 의 > 가 과연 옳은지 그 른 지에 관해 진지한 논의 를 불러일으켰다. 만일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저작이 페어 스 가 사용하 는 구분들에 의해 해석된다면 , 마찬가지 일이 벌어질 거라고 나는 생 각한다. 우리는 조건적 필연성 대 무조건적 필연성 , 다양하게 변용된 여러 형태의 규약주의들 , < 규칙 > 과 < 해석 > 사이의 구분 등과 같은 것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벌이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은 토론은 어쩌면 불가피하며, 지성의 책임은 정말로 그러 한 토론들을 요구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에 철학을 순수하게 지키 려는 충동이 너무 강렬해서, 우리의 관심이 비트겐슈타안의 풍자에서 멀어지고 또 데카르트적인 안경 없이도 우리 삶의 부분들이 보이게 될 새로운 방식들을 묘사하려는 시도에서 멀어져서, 무언가 다른 곳 으로 향하게 된다면 그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볼 때 머독 의 『 선의 주권 Sovere ignity of Good 』과 굿맨의 『 예술의 언어뇨 m guage s of A 따와 같은 저서는 비트겐슈타인의 풍자에서 배웠지만 그것을 되풀이하거나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데카르트적 전통과 적절 한 거리를 유지한 철학적 글쓰기의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댜 머독의 논점 <해방되어야 할 것은 환상적 기제의 바깥에 놓여 있는 무엇에 대한 집착이지 그 기제 자체의 안정성이 아니다 > 25) 는 여기에 잘 들어맞는 말이다. 내 생각에 비트겐슈타인의 저술에 힘을 부여하는 것은 <우리가 원할 때 우리가 철학함을 멈출 수 있는> 지 점에 대한 비전이다. 마찬가지로 머독과 굿맨의 저서들은 도덕적 덕 성과 예술이 <순수하게 철학적>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더 이상 캐묻 지 않게 될 때 그것들이 과연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우리의 관심을 25) Iris Murdoch, The Sovereig nity of Good(New York: Schocken, 1971), p. 67.
쏟게 해준다 . 『 탐구 』 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저서들에서 우리는 하나의 학문 분야를 특징짓는 모종의 순수성에서 벗어나서, 더 이상 대답 불 가능한 물 음 들 에 대답해야 할 필요에 강요당하지 않을 때 얻게 되는 모종의 느낌으로 옮겨가게 된다 .
3 전통의 극복: 하이데거와 듀이
과학자를 부러워하는 철학자들은 철학은 오직 중립적인 용어 경쟁적인 해답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용어 一― 5 로 정형화된 문제들만을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통된 문 제나 논변이 없을 경우 우리에겐 전문적인 학문 분야p ro f ess i onal di sc ip li ne 가 없으며, 심지어는 우리 자신들의 생각을 규제할 방법도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학문 분야가 없다면 우리는 아마도 신비주 의, 시, 영감( 靈感 ) 등을 갖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아무튼 우리의 지성 적 책임들에서의 탈피를 용인하는 어떤 것을 갖게 될 것이다. 하이데 거는 그와 같은 지성적 책임들을 회피하였다고 지주· 비판된다. 그의 옹호자들은 그가 회피한 것은 사상가의 책임이 아니고 단순히 <형이 상학>이나 <존재론>의 전통일 뿐이라고 응수한다. 다음의 전형적인 구절을 생각해 보라. 그렇지만 <존재론> 그 자체는 초월론적아든 선비판적이든 간에 그것 이 존재자들의 존재를 생각하며 따라서 존재를 하나의 개념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의 진리 를 생각 하지 않으며 그래서 개념적인 것보다 더 엄밀한 사고가 있다는 것을 인식 ( … … w1d so verkennt dass es ein Denlcen gibt das str e ng e r ist a/s das Be grijfli che)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판의 대상이 된다. ”
1) Br ief iibe r den 'Humanis m us', M. Heid e g ge r, Wegm ark en(WM) (Fra nkfurt: Kloste rm ann, 1967), p. 187 ; tran s. Basic Wr iting s of Hei- deg ge r(BW ), ed. Davi d I
이 구분을 고찰하면서 혹자는 하이데거가 구분의 양쪽을 다 원하 고 있다고 의심할지 모른다. 한편으로 우리는 통상 < 사고(思考, t hough t)>를 논증적인 엄밀성과 동일시하고 그것을 < 무책임>하다 고 상정되는 다른 대안들 예컨대 신비주의, 예술, 신화 만들기 등과 구별한다 하지만, 위 인용문 중의 < 엄밀한 s tr en g er> 이 무얼 의미
하든 그것은 칸트나 카 르 납이나 후설이 의미하던 것을 뜻하기는 어 렵다 . 그것은 논변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으며 <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 Ph i losop h i e als str e ng e W i ssensc mft > 과도 아무 관련이 없다 . 그러므로 그 구절에서 < 엄밀한 > 은 아마도 < 더 어려운 > 과 같은 어 떤 것을 뜻할 것이다. 이러한 하이데거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존재론 은 쉬운 길이다. 누구든지 케케묵은 존재론적 물음에 대해 새로운 의 견을 내놓을 수가 있다 . 심지어는 존재론에 관해 전혀 새로운 체계나 < 연구 프로그램 > 을 만드는 것도 정말 어려운 일은 아니다 . 그러나 가령 해라클레이토스는 그런 것을 했던 것이 아니다 . 그가 했던 것은 훨씬더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그의 동료 철학자들과 논변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이 시도하는 것보다 훨씬더 어려운 무엇을 자신이 행하고 있다고 그는 말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행하길 원하는 바가 무엇이든 그것은 < 사고 Thou gh t > 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뻔했다고 말 하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 사고 thinki n g>는 어떤 것들과는 확실히 대비되어야 하기 때문이댜 아마도 그것이 <정서>와 대비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보다는 예술에, 철학보디는· 종교에 더 많이 관련된 것과는 반드시 대비되어야 한다. 물론 하이데거가 행 하고 있는 것은 < 그런 것> 이상의 무엇이긴 하지만. 그런데 하이데 거는 이런 다양한 구분들 자체가 형이상학적인 체계 구축의 산물이 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문 분야들간의 통상적인 모든 구분들 __- 인간의 삶을 단계나 양상으로 나누는 통상적인 모든 방식들 __- 은 < 서양의 존재론적 전통 > 을 구성해 낸 다양한 저술가들이 만들어낸 산물이기 때문에, 그 전통을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인물의 업적을 <자리 매김>하기 위해 우리는 그런 구분을 이용할 수가 없 다. 그렇다고 해도 혹자는 여전히 분통이 터질 것이다. 하이데거를 심판할 어떤 기준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같이 경주하는 경쟁자가 꼭 있어야 한다고 그는 느낄 것이다.
그렇지만 답답하리만치 장황하게 하이데거 는 이렇게 제안한다 . 우 리가 분 통 을 터뜨리 는 것 은 플 라 톤 과 2 천 년 뒤에 온 그 의 후 예 들 인 실증주의와 허무주의로부터 얻게 된 관 념 , 죽 철 학은 곧 논 변 들 간의 경쟁이라고 상정된 관념의 또 다 른 산 물 에 불 과하다고. 경쟁이 있어 야 한다는 관념을 탈피하는 것은 그가 < 사고에 대한 기술적( 技術 的, tec hnic a l) 해석 > 이라고 부 르 는 것에서 해방됨 을 뜻 한다. 그런 해석 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 해석의 시원은 플 라 톤 과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 슬 러 올라간다. 그들은 사고thi nldn g 자체 를 하나의 기예[ 技級 , TE 辻 m] , 즉 행하고 만 드 는 데 봉사하는 반성의 과정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반성은 이미 실천 [n {Xif. l(] 과 제작 [1COl T/(J l(] 의 관점에서 본 것 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고는 그 자체만을 놓 고 볼 때 < 실천적p rac ti cal > 인 것 이 아니다. 사고 를 테오리아[ 理論 , 0 t wp la] 로 특 징짓고 지식을 < 이론적 > 인 행위로 결정 짓는 것은 이미 사고에 대한 < 기술적 > 인 해석의 테두리 안에서 발 생된 다. 그와 같은 특징은 실천과 행위에 반대해서 사고 를 구해 내고 그 자율 성을 보존시키려는 반발적인 시도이다. 그때 이래로 < 철학> 은 < 과학 > 에 대해 그 존재를 정당화해야 하는· 지속적인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 철 학은 자신을 과학의 반열에 끌어올림으로써 그 일을 가장 효과적으로 달성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런 노력은 사고의 본질을 포기하는 · 것이다 . …… 그렇다면 , 사고를 그 요소로 반환하려는 노력을 < 비합리주의 > 라고 부를 수가 있겠는가 ? 2 1 그래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편들게 되면, 선결 문제 요구 의 오류를 범하지 않고서는, 하이데거에 대해 비합리주의라고 비난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우리는 <그러면 사고에 대해 플라톤 2) BW, pp. 194-195(WM, pp. 146-147).
과 하이데거 중 누가 옳은가? > 와 같은 물음을 제기할 수도 없다. 왜 냐하면 그 물음은 < 사고 > 라고 부르는 어떤 주제가 있으며 그것에 대해 상이한 견해들이 있을 것이라고 상정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그런 것에 대해 아무 견해도 지닌 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 유의 것 에 어떤 견해를 제시하려는 시도는 < 본질상 역사적인, 존재의 특성 >3l 을 간과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하지만, 사고란 존재에 대한 것이 며, ” 존재는 본질상 역사적이기 때문에, 사고가 무엇인지에 대해 플라 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틀렸던 것인 양 여겨서도 안 된다. 말하자면 하이데거가 나타나서 그것에 관해 제대로 밝혀주기를 사고가 꾹참고 기다려왔던 것인 양 여겨서는 안 된다 예컨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를 이데아 [Lo EO.] 또는 현실태[現實態, EVEPrLa] 로 나타낼 때 하이데거는, < 이러한 것들은 우연히 발전된 독트린이 아니라 존재의 말 words of Be i n g이었다 >5) 라고 말한댜 플라톤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다시 바르게 시작해서 존재에 더 가까이 가는 길이란 없댜 하이데거는 그의 저서 『 존재와 시간』 에서 자신이 제기한 ( <절 대 초월적인 것 das tran scendens sch- lech thi n > 이라는) 존재에 대한 정의는 <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 하며 과거 모든 철학의 오류를 폭로하려는 >G ) 시도가 아니었다고 말 한다. 그는 < 존재를 결정하는 불변의 통일성 > 이라는 관념을 <그것 의 보호 아래 형이상학이 존재의 역사로 발생되는, 하나의 환영(幻 影 )에 불과한 것 > 7) 이라고 간주한다. 따라서 마치 우리가 한편으로는 3) 후설과 사르트르가 이 점과 아울러 왜 <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견해 가 과거에 대한 다른 모든 설명들을 능가하는지 >를 파악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 는 BW, p. 220(WM, p. 170) 참조 또 BR, p. xi v 를 볼 것. 4) BW, p. l96(WM, pp. 146-147). 5) TB, p. 9(ZSD, p. 9). 6) BW, p. 217(WM, p. 168); OWL, pp. 38ff .W S, pp. 133ff .) 참조 7) EP, p. ll( N, II, p. 411 ). 하이데거가 이 구절에서 논의하고 있는 <존재의 본 질적 구성 요소들의 언어적 표현은 변한다고 할지라도, 그 구성 요소들은 ……동
일하게 남아 있다>라는 관념은 최근의 철학사가들이 분석철학에서의 문제들을 사고의 역사에서 줄기차게 출몰해 온 것으로 보려는 경향에 의해 잘 예시된다.
플라톤에서 니체에 이르는 형이상학과 다른 한편으로는 하이데거를 공통된 주제 사고나 존재―― ― 에 관해 바교해서 어느 쪽이 더 나은 설명인지를 결정하게 되지는 않는다. 요컨대 하이데거는 잠재적인 비판자들을 역사 속의 여느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수세적인 처지에 몰리게 하는 일을 참 잘해냈다고 결론 지을 수 있겠댜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지 않고서는 그에 반 대해서 그를 측정해 볼 기준을 제시할 수가 없다. 전통에 대한 그의 단평과, 전통이 자기의 동시대인들의 어휘와 상상력에 가한 제한에 대한 그의 단평은 누군가가 논쟁을 시작하기 위해 어떤 공통된 근거 를 모색하고자 하는· 게 얼마나 바보스러운 짓인가를 잘 느끼게끔 아 주 멋드러지게 고안되었다. 2 이 시점에서 혹자는 <하이데거는 진정한 ‘철학자’가 전혀 아니다> 라고 단정해 버리고 싶을지 모른다. 이것 역시 바보스러운 짓이 될 것이다. 하이데거는 독창적인 철학자라면 누구나 사용했던 수법을 극 단으로까지 훌륭하게 끌고 간다. 그는 이전의 철학자들에 의해 문젯 거리로 간주된 것에 새로운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문제를 해소할 목 적으로 어휘를 창안했던 최초의 인물은 아니다. 스콜라철학의 문제들 에 대한 홉스와 로크의 경우, <사이비 문제>에 대한 카르납과 에이 어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하이데거는 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철학 에서 쓰인 논변의 방식들이 몽땅 오도된 것이라고 말했던 최초의 인 물도 아니다. 방법에 대한 데카르트의 경우, 변증법적 사고에 대한
헤겔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서구 철학 의] 전통은 그 잠재력을 모두 소진했다는 하이데거의 오만해 보이는 주장은 , 8) 다음과 같은 단평에 서 보 듯 이, 매우 유순한 태도를 지닌 철학자들에 의해 이따금씩 구현 된 유의 조바심을 극한점까지 몰고 간 것에 불과하다. < 공리주의에 대한 찬반의 모든 논변은 1900 년 이전에 충분히 검토되었다. > 또는 < 외부 세계에 대한 모든 우려는 감각의 소유를 대상에 대한 관찰이 라고 혼동한 결과이다 > . 91
8) N, II, p. 201. 9) 그와 같은 비평들이 (위즈덤 W i sdom, 바우즈마 Bouwsma 그리고 그의 저서 『 딜레마 』 에서 라일 G i lbe rt Ry le 등에 의해) 도매급으로 제기될 때, 그 비평들은 경망스럽고도 방종한 것이라고 페기되는 경향이 있다-참을성이 없고 부정 ( 否定 )의 고심이 결여된 것으로 치부되어서. 그러나 그의 가장 나쁜 적들이라도 하이데거에게는 그와 같은 용어 사용을 주저할 것이다. 그가 해내려고 애쓰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곡해일지 모르나 쉬운 것만은 결코 아니다.
철 학적 쟁점을 진술할 새로운 어휘를 권하거나, 논증의 새로운 패 러다임을 권할 때 철학자는 이전의 판단 규준에 호소할 수 없다. 그 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굉장한 성공을 거둘 수도 있다. [예컨대] 스콜 라철학의 어휘는 17 세기의 야유로부터 결코 회생하지 못했다. 헤겔 이후에 씌어진 철학의 절반 가량은 그의 『정신현상학 』 에 제시된 유 와 같은 의기양양한 변증법적 종합을 시도하였다. 데카르트와 헤겔은 그들의 많은 동시대인들에겐 < 진정한 철학자가 아닌> 것처럼 보였 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낡은 문제를 대신할 새로운 문제를 창안하 였고 그들을 탁월한 본보기로 해서 철학이 지속되게 하였는데, 되돌 아보면 진보적인 발전 단계로 드러난다. 만일에 하이데거가 마찬가지 위치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고 생각 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데카르트나 헤겔, 후설이나 카르납처럼 < 철학이 예전에 해왔던 바는 저런 것인데, 지금부터는 이렇게 하자>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니체, 비트겐 슈타인 그리고 듀이처럼 이렇게 묻는다. <철학이 예전에 해왔던 바
가 저렇다고 여길 때, 철학은 이제 가능하다면 무엇이 될 수 있는 가?> 그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철학은 그 잠재력을 모두 소진했다고 암시하면서, 철학을 존재하게 했던 그 모티브들이 여전히 있는지 또 반드시 있어야 하는지를 묻는댜 많은 철학자들-~실제로는 사상 운동의 초석을 다졌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인물들-은 이전 철학의 모든 역사가 일련의 그릇된 가정들, 개념상의 혼동들, 실재에 대한 무의식적인 왜곡들의 작용 결과라고 보았다. 그러나 (과학과 뚜렷히 구별되며 예술이나 종교와 혼동되어서도 안 될 하나의 학문 분야로서의) 철학이라는 관념 자체마저도 그런 잘못된 출발점에서 나온 결과의 하나라고 제안했던 사람은 철학자들 가운데 아주 소수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실재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 우리는 그런 잘못된 가정이나 혼동된 개념의 대안을 진술할 입장에 (심지어 는 지금도) 처해 있지 않다고 제안한 사람은 더 극소수였다. 이런 극 소수의 저술가들은, 미래의 철학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안다고 주 장하는 철학자들에 의해, 때때로 경멸당했다. 하이데거의 후기 스타 일은, 그를 단순히 논변하기에 싫증이 난 사람 그리고 자신의 거의 존경에 가까운 초기 저술을 옹호할 시도를 포기한 채 신비에 도피한 사람으로 경멸당하기 쉽게 한다 . 그러나 심지어는 듀이나 산타야나 IO I 와 같은 철학자들도, 그들이 <철학>이라고 불리는 뚜렷한 학문 분야 의 장래를 흥미롭게 보지 않는다는 점에선 하이데거를 닮았지만, 바 로 그런 근거에서 <진정으로 철학적이지 않다>고 경멸되어 왔다. 그 들이 낡은 <연구 프로그램>의 성공적인 완성에 희망을 걸지도 않으 며 그렇다고 새로운 것을 제시하지도 않는다는 이유로 말이다. 이는 마치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전문직에 최소한의 충성심은 지녀 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새로운 문제를 낡은 것의 자리에 대체 10) 주G) eorge Santa yan a, 1863-1952: 스페인 태생의 미국 철학자, 소설가, 시인.(역
해 놓 을 준비가 없이는 낡은 문제 를 해소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것처람 )
11) 이런 방어적인 반발은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저술에 대한 논의들에 공통 된 것이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이러한 반발을 r 철학의 순수화」(이 책의 논문 2) 에서 논의한 바 있다 .
그렇지만 듀이나 하이데거와 같은 전통 비판자들을 아마추어나 , 속물 들 , 신비가 들 혹은 순문학자들로부터 준별해 낼 분명한 방법이 있다 . 그것은 전통의 세세한 부분들에 대해 그들이 행한 비평의 깊이 와 폭이댜 여느 대학 신입생도 < 서양의 사고>를 단지 < 개념적>이 라고 경멸하고 그렇게 끝내버릴 수 있댜 그렇지만 < 개념적>이라는 것이 무얼 뜻하며, < 개념적 사고 > 의 다양한 패러다임들에 공통된 것 이 무언지를 설명하는 건 그다지 쉬운 노릇이 아니다 . 듀이와 하이데 거는 그들 이전의 철학자들이 무엇에 대해 염려했는지를 정확히 알 며, 두 사람은 전통의 변증법적 경로에 대한 설명을 각기 제시해 준 댜 한 철 학자의 자기 이미지, 즉 그가 (아마도 역사가나 수학자나 시 인이 아니라) 철 학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느냐는 그가 철 학의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된다. 그것은 그가 어느 인물을 모방하며, 반면에 어떤 에피소드와 사상 운동들을 경시 하는가에 달려 있다 . 그래서 철학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설명은 가볍게 볼 수 없는 하 나의 도전이다 . 이것은 < 누가 옳은가? 하이데거인가 아니면 여타의 철학자들인가? > 라는 형태의 물음이 의미 있게 되려면, 그 물음은 역 사 편찬hi s t o ri o g ra p h y에 관한 물음이 될 것임을 암시해 준다 .1 2) 이
12) 말 할 것도 없이 , 하이데거는 그 를 다른 누가 이미 행했던 어떤 일 을 하는 자로 간주하는 것 을 경고하듯이 그 를 단지 지성사의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려는 인물 로만 간주하려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EP, p. Tl(N, II, pp. 48.3- 484) 참조: < 우리는 단지 그것들을 현재의 관점에서 이용할 목적으로 과거의 구성 요소들 을 천착하며 노 출 시키는 역사 편찬을 하는 맥락에서 역사를 알고 또 알기를 원 할 뿐이므로 , 존재의 역사에 대한 회상 recollec ti on 도 역시 그 역사가 개념적인 역사 편찬으로 드러나게 만드는 환영의 희생물로 전락하며, 바로 그 점에서 일
방적이고도 산발적인 것이 되게 한다. 그러나 존재의 역사에 대한 회상이 사상 가들을 거론하며 그들의 사상을 추적할 경우에는 , 마치 그러한 주장의 목소리에 의해 조절이라도 되듯 그 사고는 존재의 주장에 속하는 청취 반응이 된다 >. 나 는 다만 철학의 역사에 대한 듀이의 비평들도 똑같이 존재의 주장에 속하는 하 나의 청취 반옹이라고 첨언해 두고자 한다 .
말은 마치 역사 편찬이 가령 인식 론 이나 언어 철학보 다 덜 논 쟁적이 라는 식의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어휘의 채택 - 어느 물 음을 해소하고 무시할 것이며 반면에 어느 물음을 대답할 것인지 를 반쯤은 의식적으로 결정하는 일 은 철 학의 역사와 자신의 관계 룰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거의 전적으로 동기를 부여받게 된다 는 말이다. 그 인식은 자신의 위치를 (과학에서처럼) 발견들이 진보해 가는 계열 중의 하나로 보는 인식이거나, 자기 사회에서 새로이 발견 된 필요성과 희망에 대한 인식이거나, 단지 자신의 사적인 필요와 바 람에 대해 철학의 역사에 등장하는 특정한 인물들이 갖는 연관성에 대한 인식일 수도 있다. 만일에 우리가 서양의 지성사에서 무엇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듀이 의 그림을 갖는다면, 우리는 그 지성사에서 하이데거가 차지하는 역 할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설명을 갖게 될 것이다. 이 경우 하이데거 는 플라톤적이며 기독교적인 초세속성의 스러져가는 마지막 메아리 로 보이게 될 것이다. 역으로 만일 하이데거의 지각을 통해서 본다면 우리는 듀이에 관한 매우 구체적인 그림을 얻게 될 터인데, 이때 듀 이는 유래 없이 나이브 n ai ve 하고 촌뜨기 같은 허무주의자로 나타나 게 될 것이댜 3 다음에서 나는 하이데거를 그렇게 바라볼 것으로 추정되는 듀이의
모습과, 듀이를 그렇게 바라볼 것으로 추정되는 하이데거의 모습을 스케치해 보려 한다. 이런 연습은 어떻게 해서 한편으로는 < 서양 존 재론의 역사의 파괴 >를 위해 필요한 엄청나게 많은 합의가 다른 한 편으로는 <존 재론 >을 계승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전혀 판이한 관 념과 결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그 연습을 통해서 철학적 전통은 그 잠재력을 소진해 버렸다고 본 이후라도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얼마만큼 남아 있는지를 우리가 감지할 수 있게 되고, 하이데거의 < 자리 매김 > 을 행할 때 우리가 서 있을 어떤 근거를 얻 게 되길 바란다 . 하이데거를 향해 빈번하게 쏟아졌던 오만불손하다는 혐의의 일부 는 그가 당대의 다른 <사 상가들 > 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서 연유한 것이다. 그는 만일 다른 산에도 꼭대기가 있다면 이제 거 기에는 오직 시인들만 살고 있을 것이다라는 식의 인상을 안겨준다. 하지만, 철학이 하나의 전문직도, 예술도, 사업도 아닌 그러한 문화에 대한 비전 ,1 31 그리고 그곳에서는 테크놀로지가 <음울한 정신착란 >1 - 1 1 이 아닌 어떤 것일 문화에 대한 비전이 하이데거의 발견이라고 하기 는 어렵다. 그것은 이미 듀이가 생애의 후기 동안 줄곧 우리에게 제 시했던 것이다 . 듀이는 하이데거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데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관념론적이든, 유물론적이든, 기독교적이든, 어떠한 형이상학도 그 자체 의 본질과 합치될 수 없으며, 또 그 자체를 해명하려는 시도들 속에서 [유 럽의〕 이와 같은 운명을 <지탱해 낼>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 15) 13) OWL, p. 43( US, p. 139) 참조 14) IM, p. 37(EM, p. 28) 참조 15) BW, p. 2 21 (W M, pp. 171-172). 하이데거는 유럽의 운명을, (1 936 년을 기준 으로) 아마도 회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지상의 지역들인 러시아나 미국의 운명 과 구별한다. IM, p. 4 5(EM, p. 34) 를 볼 것: <유럽은 러시아와 미국 사이의 집게에 놓여 있는데, 그 둘은 형이상학적으로 말해서 똑같다>. 이 비평의 상
스러운 말투 때문에 그것의 중요성을 얕잡아보아서는 안 된다 . 하이데거는 그 비평이 슈네베르거 G ui do Schneeber g er 의 『 하이데거 보유(?i I i造 )Nachlese zu Heid e g ge ri B em, 1962) 에 다시 안쇄되게 했는데 그와 같이 그를 이끌었던 강렬한 정치 의식은 , 그가 < 사고 >가 해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를 보 고자 할 때 안지될 필요가 있다 . 마치 듀이가 왜 <철학 의 재건 >을 외치는지롤 이해하고자 할 경우 그의 정치 의식이 반드시 기억되어야 하듯이 . 민족과 국가 의 명운에 끼치는 철학의 영향에 관한 하이데거의 복합적인 느낌은 IM, p. lO(EM, p. 8) 를 볼 것
그러나 듀이에게는 < 지탱해 냄 > 에 대한 하이데거의 이어지는 허 식( < 가장 충실한 의미에서 지금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사려깊게 도달하 여 한데 모아놓음 > )은, 존재에 대한 그의 모든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변장( 愛裝 )된 기독교적 형이상학의 또 다른 형태로 보일 것이다 . 그 와는 반대로 듀이의 저서 『경험 과 자연 Exp er i ence and Na tu re 』 은 유물론적 형이상학의 또 하나의 변종, 즉 허무주의의 승리를 외치는 상쾌한 재진술의 하나로 쉽게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피상적인 상호 경멸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기 위해, 두 사람 사이의 몇 가지 분명한 합의점들을 생각해 보자. 나는 다음 네 가지 주제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나란히 인용하겠다. (1) 고대 철학 에서 관조(觀照, con t em p la ti on) 와 행위 사이의 구분, (2) 인식론적 회의론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데카르트적 문제들, (3) 철학과 과학 의 구분, (4) 철학과 과학 양자와 < 심미적인 것> 사이의 구분. 듀이는 이론과 실천의 구분에 대한 논의를 < 신성한 것>과 < 운 좋은 것>의 구분에서 시작한다 .1 6) 그는 종교와 그 상속자인 철학은 < 신성한 것>에 유의하는 것이라고 본다. 반면에 솜씨와 그 상속자인 테크놀로지는 <운 좋은 것>에 기대를 건다. 철학은 < 종교가 관심을
16) 듀이의 『 확실성의 추구 The Qu estf or Ce rtai n ty(QC)』 (New York: Cap rico rn Books, 1960), p. 11 를 볼 것 듀이의 다른 저서에 대해서는 다음 약호 를 서용하 겠다. RP =R econstr uc ti on in Phil os op hy(N ew York: Dover, 1958); AE = Ar t as Exp e ri en ce(New York: Capr ico rn Books, 1958); EN =E xp e ri en ce and Natu re (New York: Dover, 1 958).
가졌던 영역을 상속 >1 7) 했기 때문에 , 자연스럽게 < 고대 그리스 시대 이래로 줄곧 철학을 지배해 왔던 관념, 즉 지식이 해야 할 바는 미증 유의 실재를 찾 아내는 일이라는 그 관념 >1 8) 을 채용했댜 여기에다 종 교에서 연유한 또 다른 상속물, 즉 < 오로지 완전하게 고정적이며 불 변하는 것만이 실재가 될 수 있다 > 는 것을 전제로 놓으면, < 확신 ce rtit ude 의 추구가 우리의 기본적인 형이상학을 결정해 왔다 >19 ) 는 것이 자연스럽게 된다. 그래서 < 형이상학은 고상한 도덕과 사회적 가치의 근원이요 보증자인 관습의 대체물이다 >.20) 이런 생각은 우리가 <철 학의 독특한 지위와, 문제와, 주제는 특정 한 형태를 지닌 철학이 발생되는 공동체 생활의 스트레스와 긴장에 서 비롯된다 >2” 는 점을 인식할 때까지는 그리고 철학이란 <이른바 ‘근대적인’ 철학의 ‘문제들’을 형성시켰던 각종의 이원론의 둥지에서 나온 한배의 새끼들 >?21 에서 비롯된 도덕과 제도에 대한 바판이라고 인식할 때까지는 ,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주관_객관, 정신-물질, 경험-자연의 자그마한 이원론은 듀이에게는 <신성한 것-운 좋은 것>의 거대한 이원론의 변증법적 축소판으로 그리고 각각 일시적인 것과 지속적인 것으로 비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이 모든 이원론들을 극복해야 한다면, 그 경우 철학이란 <경험을 초월하려는 불가능한 시 도들이 아니라 …… 사람들이 가장 깊이 또 열정적으로 참여해 경험 한 것들을 정식화하려는 인간 노력의 의미 있는 기록 > 231 이 될 것이다. 17) QC , p. 14; 하이데거의 IM, p. l06(EM, p. 80) 의 다음 구절과 비교해 볼 것 : < 대중들에게 기독교는 플라톤주의였다는 니체의 말은 옳았다>; 또, EP, p. 24(N, II, p. 4Z7) 를 참조 18) QC , p. 17. 19) QC , pp. 21-22. 20) RP, p. 17. 21) RP, p. V. 2232)) RRPP,, pp.. x25x.x i.
하이데거에게서도 존재 를 변함없이 지속적인 것, 확실하게 알려질 수 있는 것 그리고 수학적으로 취급될 수 있는 것과 혼동하는 것이 철학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든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그리스 철학자 들은 동사보다는 명사를 더 선호했으며, ~ . I) 그들이 존재에 대해 말할 때는 부정사보다는 동명사를 선호했기 :!5 1 때문에 ――一플라톤이 헤라 클레이토스가 투쟁 [TOAc µo s] 과 로고스[理性, A0}0s] 를 결합시킨 것을 내버려두고 퓌지스[自然, ¢v&s] 와 이데아 [l8ca] 를 하나로 합해 버렸 기 때문에 __― 우리는 존재론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 투쟁이 멈춘 곳에서는 존재자들이 소멸된 것은 아니나 세계가 뒤바 뀌게 된다. 존재자들은 더 이상 주장되지 않는다. (즉 존재자로서 보존되 지 않는다.) 이제 그것들은 단지 기성품으로서, 데이터로서 발견된다. …… 존재는 하나의 대상, (견해나 이미지의) 지켜볼 대상이거나 아니면 (생산 되거나 계산될) 행위의 대상이 된다. 세계를 형성했던 애초의 힘, 즉 퓌지 스는 모사되고 모방되어야 할 하나의 본보기로 타락하고 만다. 자연은, 계 획에 따라 만들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이나 혹은 예술과는 차별화되어 하나 의 특별한 분야가 된다 프
24) EP, pp. 5.5- 56(N, II, pp. 458-459) 참조 Werner Marx, Heid e g ge r and the Tradit ion (Evansto n , Ill.: Nort hw este r n Un ive rsity Press, 1971), p. 126. 25) IM, p. 69(EM, pp. 52-53) 와 IM, pp. 57ff .(E M, pp. 43 ff.)를 참조 26) IM, pp. 62-63(EM, p. 4 8). 이미 번역하여 인용했던 구절들과 이 구절이 조화 를 이루게 하려고 Se i enden 의 역어로서 만하임 Mannhe im의
여기서 하이데거는 행위와 관조의 구분을, 듀이가 보듯이 자유인 과 노예의 격차를 반영하는 것떠)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 시원(始 原)에서는 통일되었던 의식을 최초로 (강제) 분리clir em pti on 한 데에 서 기인한 것으로 본다. 그 (강제) 분리는 자연 환경이나 사회 여건
27) RP, p. ix 참조
의 산물로 인과론적으로 설명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쩌면 하나의 숙명 , 또는 존재의 말 가운데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듀이 와 하이데거는 지식과 그 대상에 대한 관람자적 관념의 최초 채용이 그후 철학의 역사 를 결정했다는 데에 대해 동의한다. 하이데거가 『 존 재와 시간 』 에서 외부 세계의 존재에 대한 데카르트적인 문제의 배후 에는 손안의 존재 Zuhandense i n 에 대한 경시의 태도가 깔려 있다었 ’ 고 주장한 것은, 듀이가 17 세기에 나타났던 <각종의 이원론의 둥지에서 나온 한배의 새끼들 > 은 관조의 지속적인 대상과 공예가들의 가공 가 능한 대상 간의 최초 분리에서 기인한다고 되풀이 주장한 것 29’ 과 짝 을 이룬댜 듀이와 하이데거 양자에게는, 관조되고 표상되어야 할 대 상이라는 관념이 주관주의에 이르게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28) BT, sects . 15-21 참조 특히 pp. 98-99(SZ, p. 69) 에서 손안의 존재 개념의 도입과 p. 130(SZ, p. 97) 의 다음 구절을 참조할 것: <그래서 세계 내의 단위체 들에 대한 가능한 접근’의 종류에 대한 데카르트의 논의는 그와 같은 단위체들 자체의 확정적인 영역에서 모아진 존재라는 관념에 의해 지배된다>. 그 영역이 바로 눈앞의 존재 Vorhandense i n 의 영역이다. 후자의 개념과 플라톤적인 이데 아 에네르게이아[i dea ener g e i a] 의 개념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시시아 [s y s i a] 의 개념에 대해서는 Werner Marx, 앞의 책 , 제 2 부 제 1 장을 참조. 29) <탐구 작용은 지식 대상의 구축에 개입하는 어떠한 실천적 활동 요소도 배제 한다>라는 관념론과 실재론에 공통된 가정에 대해서는 QC , p. 22 참조.
경험을 통해 도달되며, 경험 안에서 기능하는 대상이 경험에서 분리될 경우 경험 자체는 단지 경험의 과정으로 환원되고 만다. 따라서 경험을 겪는 것이 마치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인 양 취급된다. …… 17 세기 이 래로 이렇듯 주관적이며, 사적인 경험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된 경험 개념이 전 적으로 물리적인 대상들로 이루어진 자연과는 반대되고 그 위에 있는 어 떤 것으로 설정되었으며, 철학을 황폐하게 해버렸다. :Il l 듀이의 이 서술도 플라톤에서 데카르트롤 거쳐 칸트에 이르는 일
30) EN, p. 11.
련의 과정에 대한 하이데거의 다음 설명과 잘 부합된다. 주체성 [sub i ec tity, Sub i ec tit a t]은 마침내 이렇게 말한다: 존재자들은 현실적인 것 앞에서 제일실체[p ro t e ous ia ] 존재의 특성을 지닌 히포케이 메논 [h Jrpo ke im enon : 모든 존 재자의 밑바탕에 놓여 있 는 것, 基體 ]이란 의미에서 주체 sub i ec tu m 이다.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존재는 철저하게 주 체성 sub i ec tity이다 . 그러나 주체성이 주관성 subj ec ti v ity으로 되는 곳에 서는, 데카르트 이 래로 탁월한 주체 sub i ec t um 인 자아는 수많은 우선성 을 갖는다. : m 근대 철학의 인식론적 문제들을 듀이는 낡은 형이상학적 가정들이 새로운 여건에 적응한 것이라고 본다. 그 문제들을 하이데거는 그러 한 가정들의 내재적이며 변증법적인 작용 결과라고 본다. 그래서 근 대 시대가 그런 인식론을 <발견한> 것이 철학의 참된 정초(定礎)였 다고 여기는 관념 3 2) 과, <주관적인가 아니면 객관적인가?>라는 근대 시대 사고의 특징적인 물음으로의 안이한 후퇴 .l3 I 를 하이데거는 경멸 적으로 논평한다 . 듀이는 고대인들의 경우 지식의 비자연적 대상에 의해 충족되었던 확실성과 고정성의 추구가, 근대에 와서는 < 지식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관념적이며 합리적인 성격>의 것임을 밝히 려는 일로 전환되었다고 본다 3“ 그는 한편으로 객관적인 사실과 다 른 한편으로 주관적인 정서, 문젯거리, 의심 간의 구분을 <인간과 경 험을 자연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습관> 3.3 1 의 또 다른 산물이라고 생각 31) EP, p. 47(N, II, p. 451). 32) 근대 시대에서 <인식론>의 주도적 지위에 대한 논의는 EP, p. 88(VA, p. 67) 를볼것. 33) 『 사물은 무엇인가 ?Wha t Is a Thin g ? .!l, tran s. Ba rton and Deuts c h (Ch ica go : H. Reg ne ry Co., 1967)), p. 업(Di e Frage nach dem Din g 34) (TQtCi b, i np g. e 4n 1: ; NRiPe m, epype. r 4, 91-95612 ),참 조p.. 20) 를 볼 것 .
하고, 그 고립을 영속화하는 일에 근대 과학이 전통적인 신학과 합세 했다고 바평한댜 그렇게 해서 듀이는, 아퀴나스 Thomas A qu i nas 의 스스로 존재하는 자[自 存者, ens a se] 라는 관념과 근대 인식론자들 의 <객관성>이라는 관념에서 발견되는 존재에 대한 태도가 근저에 있어서는 동일하다는 하이데거의 고집스런 주장 'f,) 을 되풀이한다. 두 사상가는 그들을 관념론자나 실재론자, 주관주의자나 객관주의자로 분류하고자 안달하는 열성적이고도 성실한 인식론자에게 실망을 안 겨줄 것들을 말한다. 하이데거의 애태우는 다음 구절을 생각해 보라. <분명하게 인간과는 ‘무관한’ 진리의 독립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 백하게 인간의 본성과 ‘연관된’ 관계이다.>3i l 또, 듀이가 의미와 진리 를 <경험적인> 어떤 것과 <자연에 있는> 어떤 것 간의 관계로 간 주하기를 점잖게 거절한 것 38 1 을 생각해 보라. 철학과 과학의 관계를 논의할 때 그 두 사람은 <철학을 과학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데카르트적, 후설적, 실증주의적 시도들울 철학의 고유한 기능을 포기한 재앙이라고 본다. 듀이는 <철학 은 그 기능이 실재에 대한 지식이라고 당연시해 왔는데, 이 사실이 철학을 과학에 대한 보완이 아니라 경쟁자로 만든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는 철 학은 곧 <비전> 이라는 제임스의 서술을 찬양한다. 3.q ) 철학이 <스스로 35) QC , p. 233. 36) 예컨대 TB, p. 7 와 기독교와 확실성으로서의 진리 그리고 <근대 시대>의 관 계에 대한 EP, p. 22(N, II, p. 424) 에서의 논의를 볼 것. 37) Heid e g ger , Di sc ourse on Thin ld ng , tran s. Anderson and Freund(New York: Ha rper and Row, 1966), p. 84(Ge/assenheit [P fu llinge n: Neske, 1960], p. 66). 38) 예컨대 EN, pp. 32 1ft.와 RP, pp. 156ft . 39) QC , p. 309. 그렇지만 듀이의 다른 한 측면에서는 철학은 비전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인 어떤 것, 즉 도덕과 제도들을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정신에 맞추려 는 희망에서 <과학의 방법>을 따르는 하나의 사회 비판이다. RP, p. xxiii를 볼 것. 철학에 대한 이 관념은, 그가 철학자들을 <인간들이 가장 깊고도 열정적 으로 집착했던 경험들을 정식화하려는 인간 노력들의 기록 >(RP, p. 25) 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유의 관념과 대비된다. 듀이의 이 다른 측면은 아래에서 듀이 의 사상에 대한 하이데거식의 해석을 논쟁적으로 따지는 맥락에서 간략히 재론 될 것이다. 나는 듀이가 최고조에 달하는 것은 그가 철학과 공학의 유사성을 강 조할 때가 아니라 철학과 시의 유사성을 강조할 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논문에서 그 문제를 토론할 수는 없다.
를 ‘과학’의 반열로 끌어올리려는> 시도는 사고의 본질을 포기한 것 이라는 하이데거의 비평은 이미 인용된 바 있다. 두 사람은 공히 철 학이란 실재의 올바론 표상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우리 의 기쁨을 방해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으로 본다. 둘 다 철학의 목표 는 순진성i nnocence 의 재회복과 우리 시대 문화의 탈각(脫 1&) 이라고 고집한다 .1 0) 둘 다 철학과 시(~寺)의 결합을 강조한댜 듀이는 이렇게 말한다. <철학이 사건들의 진행 과정과 협력을 이루고 일상잡사의 의미를 분명하고도 일관되게 해줄 때, 과학과 정서가 서로 삼투하게 될 것이며, 실천과 상상력이 서로 포용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시 와 종교적인 느낌은 억지가 아닌 삶의 꽃이 될 것이댜 > ‘ Il l 그는 철학 이 아놀드 U) 의 <삶의 비평>처럼 시와 합류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 131 하이데거에게는 <오직 시만이 철학과 같은 위치에 선다>. 그 둘에서 만 존재자들은, 다른 존재자들이 아니라, 존재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1 - ll 반면에 그 두 사람은 과학에서 찾아야 할 어떤 것, 즉 <사실>과는
40) EN, pp. 37-38 를 볼 것: <경험적인 철학은 어느 경우에라도 일종의 지적인 발가벗음이다. ……만일에 이하 여러 장(章)에서의 논의가 예술적인 순진성과 단순성에 기여하게 된다면, 그것들은 애초의 목적을 이루게 될 것이다>. 하지 만, 듀이는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교양 있는 소박함 a cultiv a te d n ai ve te 이 란 ……오로지 혹독한 사상의 규율을 거쳐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J. Glenn Gray, The Sp le ndor of the Sim ple , On Understa n din g Viol ence Ph i losop h i따 ly , and Oth e r Essay s( New York: Ha rper and Row, 1970), esp. pp. 50ff . 참조. 41) RP, pp. 212-213. 42) Matt ew Arnold, 1822-1888: 영국의 시인, 비평가.(역주) 43) EM, p. 204. 44) IM, p. 26(EM, p. 20) 참조
대조되는 < 가치 >를 시가 우리에게 제공할 거라는 발상을 혐오한다. 둘 다 사실과 가치의 구분은 주관과 객관의 구분에서 나왔으며 그것 만큼이나 위험스럽다고 간주한다. 하이데거는 < 가치 > 라는 관념 전 체가 존재를 이데아 L6 忠나 표상 Vors t ellun g으로 여기기 때문에 남게 된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 형이상학자가 추가적으로 눈앞의 것 Vorhanden 을 공급하고자 하는 하나의 어색한 시도 , 즉 < 세계의 존 재론을 마무리하기 위해 필수적인> 뒷생각이라고 생각한다 . , L3 ) 하이 데거는 이른바 < 미학 > 이라는 < 주제 > 에 대한 관념 자체가 감각적인 것과 초감각적인 것의 구분 , 주관과 객관의 구분 그리고 퓌지스와 이 데아에 대한 플라톤의 애초 취급에서 연유한 구분들로 인한 또 하나 의 불행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fj ) 이런 점에 대해 듀이는 하이데거에 45) BT, p. 133(SZ, p. 100). 또 하이 데거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IM의 p. 132 와 pp. 47-48 의 sect. 59(EM, p. 36) 를 볼 것: <정 신이 지성으로, 또 도구로 강등될> 경우에는, < 영적인 과정의 에너지, 시와 예술, 정치와 종교 등은 의식 적 인 cons ci ous 배양과 기 획의 주제가 되어버린다. …• •• 이 러한 영역들은, 각기 그 고유한 기준을 설정하며 그 기준에 의거해 가까스로 연명해 가~즌 자유로운 노력으로 이루어진 분야들이 된다. 생산과 소비의 이 기준들이 가치로 불린다. 문화적 가치들은 시 를 위한 시, 과학을 위한 과학처럼 오로지 자율적인 분야에 국한해서 그 의미 를 보존한다 >. 듀이의 사상 전반에 걸쳐 있는 것으로서 학문 분야나 인간 능력에 대한 어떠한 이원론(예술/과학 , 이성/상상력 등)도 분쇄하 려는 그의 시도는 물론이고, 그가 AE 에서 <순수 예술>이라는 관념에 반대하 여 논쟁하며(제 1 장) , 미학을 경험과 지식으로부터 고립하는 칸트에 반대하여 논 쟁하는 것(pp. 252 ff.)과 비교해 보라 . 도덕철학에서는 , 가치란 발견되거나 관조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의해 형성된다는 듀이의 고집과, 존재론과 윤리학의 관계에 대해 하이데거가 보프레 Bea ufr e t에게 응답한 것을 필히 비교해 보아야 할 것이다. BW, pp. 23lff .(W M, pp. 183ff .) 참조 바로 앞 구절에서 하이데거 가 전통적인 윤리학/논리학/물리학의 구분에 반대하여 항의하고 있는 점은, < 보편적 가치 > 나 < 도덕 법칙>을 추구해 내려는 <도덕철학>과 같은 것은 없 다는 듀이의 고집스런 주장(예컨대 RP, chap . 7) 과 반드시 비교되어야 할 것이 다. 듀이는, 소포클레스의 비극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 윤리학E t h i cs 』 보다 에 토스[ 氣風 rf)o s] 를 더 본원적으로 보존하고 있다>는 하이데거의 말 (BW, p. 232; WM, p. 184) 에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 46) OWL, p. 43, pp. 14f f.(US , pp. 140-141, pp. lOlff. ) 참조
전적으로 동의할 것이댜 그래서 < 심미적인 것 > 이나 < 종교적인 것 > 을 < 과학적인 것 > 이나 < 경험적인 것>과 분리하려는 모든 시도 를 그가 비판했던 것처럼, 듀이는 하이데거가 했던 바와 똑같이, <객 관적인 가치 > 와 < 순수하게 미적인 판단 > 이라는 관념의 역사적 연 원을 추적할 것이다. 두 사람 다 시와 철학은 관조와 행위에 대한 구 분이 없는 곳에서 발생하며, 반면에 그러한 구분이 그어질 경우 그것 들은 쪼그라들고 초점을 잃게 될 거라고 본다 .I ii
47) 사고와 이론/실천의 구분에 대해서는 BW, p. 239(WM, p. 191) 를 볼 것. 그 리고 시에 대해서는 IM, p. 26(EM, p. 20) 를 볼 것 듀이의 AE, p. 40 의 다음 구절과 비교해 보라: <심미적인 것의 적(敵)은 실천적인 것도 지성적인 것도 아니다. 지리함, 목적을 잃어버린 이완 그리고 실천과 지성의 절차에서 규약에 예속되는 것이 바로 그 적이다>.
듀이와 하이데거 간의 이런 유사성들을 모두 인용한다는 것은 솜 씨 있게 재주 피우는 일이 될 것이다. 홍미를 끄는 것은 그들간의 차 이점이댜 그러나 나는 유사성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 각한댜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이 새로운 어떤 것이나 적어도 그것 에 대한 희망을 어떻게 제공하는가의 물음은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두 사람이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니체, 카르납에 이르는 전과 정을 어떻게 싸담으려 하는지를 밝혀줄 것이다. 게다가 금세기에 들 어서 그와 같은 일을 한 것은 거의 그들 두 사람뿐이다. 그들은 독특하고 분류 불가능한 독창적인 철학자들이며, 또한 둘 다 골수 역사주의자다. 두 사람 다 비역사주의적인 철학 학파들과 융 합되는 것으로 잘못 간주되어 왔다 . 듀이를 퍼스, 제임스, 콰인 등과 한 부류로 보는 것은, 우리의 과거에 대한 헤겔과 콩트의 바전에 그 가 휩쓸려서 전혀 새로운 지적 세계에 뛰어들게 되었다는 접 1 8) 을 망 각한 처사이다 . 하이데거를 현상학자라고 부르고 후설과 한 부류로
48) 듀이의 자서전적인 논문 ‘‘From Absoluti sm to Exp erirne nta lism (1930), r(eInpdr iinant e adp o ilnis : OBno bEbxsp- Me rieenn iclel,, 1N96a0t)u , r pep .a n3d-1 8F,r eeesdp.o mpp,. e1d0.- 1R1. 를] . 참B조er nste i n
보거나, 실존주의자라고 부 르 며 (초기의) 사 르트르 와 한 부류로 보는 것은, 하이데거 자신이 지적했듯이, 그가 마르크스와 공유하고 있다 고 자부했으며 양자가 헤겔에게서 도출했던 것 곧 역사에 관한 안목 19) 을 무시한 처사다 .
49) 위 각주 3 참조 하이데거의 역사주의와 헤겔에 대한 그의 관계 를 잘 논의한 것 은 Sta n ley Rosen, Ni hi l is m (New Haven: Yale Un ive rsit y Press, 1969), chaps . 3-4 를 볼 것 . 하이데거의 사상적 발전을 논의한 비평가들은 < 서양 존재 론의 파괴 > 가 과연 그의 < 전환 > 이후에도 지속되는 프로젝트인가에 관해 이 견을 보이고 있으나, 스탬바우흐 S tam bau g h 의 다음 단평은 그 프로젝트의 초기 형태에 대한 하이데거의 느낌을 잘 요약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 애초에 계획 된 ‘파괴’는 초월론적 해석학에 의한 현상학적인 것이었다. 하이데거는 『 존재와 시간 .!I 에서 이 요소들-현상학, 해석학 그리고 초월론적 철학―~울 불가분 리적으로 한데 섞어 연계시켰으며, 그의 후기 사상에서 그가 버리고자 했던 것 도 바로 이 셋 전부였다. 따라서 수행되어야 할 그 파괴는 더 이상 그 세 요소 의 특징을 지닐 수 없게 된다 . 왜냐하면, 그것들 자체가 존재론의 역사를 구성 하며, 그래서 결코 그 역사를 ‘ 파괴하거나’ 그만둘 수 없기 때문이다 . 존재론의 역사에 대한 파괴는 존재의 역사가 반드시 떠맡아야 하며, ‘사건 A pp ro pri a ti on 의 견지에서 생각되어야만 한다 >(EP 의 「서론」, p. ix). 그러나 나는 스탬바우 흐가 하이데거의 의도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건 Ere igni s 의 견지에서 생각함 > 이란 것이 어떤 파괴적인 작업을 성취하는· 활동이기에는 너무나 순결하고, 감미로우며, 사적인 것이라고 의심한다. 그리고 그 작업은 현 실적으로 하이데거가 <‘ 개념적 역사 편찬’ 이라고 퉁명스럽게 불렀던 것-스 탬바우흐가 EP 로 번역한 N 의 그 텍스트에 의해 설명되고 있는 유의 것 - 에 의해 이루어졌다 . (위의 각주 11 을 참조)
듀이와 하이데거는 하이데거가 < 존재의 통일된 역사 , 즉 이데아로 서의 존재의 본질적 성격에서 시작하여 힘에의 의지로서의 존재의 근대적 본질에 이르러 완결되는 역사 >50 J 라고 부른 것을 단일한 사건, 장기간에 걸쳐 벌어진 단일한 사건이라고 본다. 하이데거는, 만일 우 리가 플라톤과 더불어 존재를 현전(現前)이나 표상으로 간주한다면 , 니체[의 사상]을 우리가 반드시 끝을 내야 할 곳이라고 여긴다 .5 1 ) 듀
50) EP, p. 48(N, II, pp. 452-453). 51) 「진리에 대한 플라톤의 교의 Pla t o's Doctr ine of Tru th」 (WM, pp. 139 ff.) 참 조
이주의자는 니체를, 도덕의 확실성과 <합 리성 > 에 대한 플라톤의 요 구를 우리가 결코 완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자각에 대한, 과잉 반응 으로 보려 한다. 그런 확실성을 우리가 결코 성취할 수 없을 거라는 그 자각은 우리로 하여금 한편으로는 세계에는 힘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실망감과,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소유한 힘에 중독되는 것 그 양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한다. 아마도 비트겐슈타인을 제외하 고는, 금세기의 다른 철학자들 중에서 플라톤과 니체에 공통된 가정 과 문제들에 [하이데거와 듀이처럼] 그렇듯 소원(陳 遠 )한 철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헤겔이 그들의 공통된 근거이긴 하지만, 그들 사이의 차이점은 헤 겔과 더불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 차이에서 시 작된다. 듀이는, 마르크스처럼, 절대 정신을 배제한 헤겔을 원한다 . 그는 인간과 역사가 제 발로 서기를 원하며, 인간의 역사가 절대 정 신의 자기 실현도, 물질이나 사회 계급의 숙명적인 느릿느릿한 운동 도 아니라 그저 인간의 역사이기를 원한다 . 그는 < 역사 > 를 대문자로 표기된 것[역사]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하이데거와는 달리, 과거 철학 자들에 대한 자신의 비평들이 < 일방적이며 산발적인 개념적 역사 편 찬>에 머물게 놔두는 것을 홉족해 한다. 그리스에서 관조와 행위를 분리한 결과를 거론할 때, 듀이는 자신이 존재의 말들을 회상하고 있 다고 생각지 않으며,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의 구절처럼 <특정한 목적 울 위해 유물들을 모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독일 관념론은 많 은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 근저에서는 유한 계급의 선입견을 위해 존 재론적 보장을 제공하려는 해묵은 폴라톤적 프로젝트를 향한 최후의 절망적인 몸부림이었다고 생각한다 . 52) 반면에 하이데거는 이른바 <독일 관념론의 붕괴>는 관념론의 홈 이 아니라 <그 시대>의 홈, <더 이상 그 정신 세계의 위대성과 폭 52) RP, pp. 49-51 참조
과 독창성을 감당해 낼 만큼 충분히 강인하지 못했던 > 그 시대의 홈 때문이었다고 말한댜 책 하이데거의 가장 강한 느낌 중 하나이며 정 말로 그를 듀이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은 시대와 문화와 국가 와 백성들이 철학자들의 요구에 맞춰서 (오히려 그 반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야 할 것이라는 기대이다. 존재의 역사를 형성하는 것 은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로마, 르네상스 시대의 플로렌스, 프랑스 혁명 시대의 파리, 히틀러 시대의 독일 등이 아니다. 그것은 소포클 레스 , 5 )1 호라티우스 , 55) 단테, fjj) 괴테 , 57 1 프루스트 581 그리고 나보코프지 ) 도 아니댜 그것은 플라톤에서 니체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다. 사고란 항상 곧 존재의 사고인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 오히려, 이러 한 (하이데거가 말하듯 공히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소유격의) 의미에서 존재 < 의 > [존재 < 에 속하는거 것이란 < 오로지> 사고뿐이다 .OO ) 오직 시만이 같은 반열에 들지만, 하이데거가 시도 역사를 · 갖는다고 생각 한다는 암시는 없다. 덜 조야하게 말하자면, 마치 매콜리 6 ” 와 액턴 62 ) 이 문필, 투표소 그리고 영양가 있는 음식 재료 등을 얻는 범위의 점 차적인 확산 과정이라고 보았던 역사에서도 존재의 역사성이 발견되 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에서 존재의 역사성이 발견될 거라고 하 이데거가 생각한다는 암시는 없다. 53) IM, p. 45(EM, p. 34). 54) Soph o cles, 기원전 495?- 40 6?: 고대 그리스 3 대 비극 작가 중 한 사람.(역주) 55) Horace, 기원전 65-8: 로마의 서정시인.(역주) 56) Alig hieri Dante , 1265-1321: 이탈리아의 시인, 『신 곡』의 저자.(역주) 57) Joh ann Wolfg a ng von Goeth e , 1749-1832: 독일의 시인, 작가, 『 파우스트 』 의 저자.(역주) 58) Marcel Proust, 1871-1922: 프랑스의 소설가 . (역주) 59) Vlad imir Nabokov, 1899-1977: 러시아 태생으로 이민 길에 올라 독일, 프랑 스를 거쳐 미국에서 활동한 소설가, 시인, 작가.(역주) 60) BW, p. l94(WM, pp. 147-148). 61) Thomas, B. Macaulay, 1800-18. 59 : 영국의 정치가, 작가 , 역사가.(역주) 62) Joh n, E. E. D. Acto n , 18.3 4- 1902: 영국의 자유주의 역사가, 도덕가.(역주)
<철학자들> 에 대한 이 모든 강조가 듀이에게는 강단 철학 의 편협 성으로 보일 것이다. 결국 철학 교수 이외에 그 누가 20 세기 유럽의 드라마는 형이상학의 완성 Vollendun g der Me ta p hy s i k 과 매우 본질 적인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하이데거의 다움 구절을 생각해 보라. 이 구절은 <존 재의 물음을 고유하게 역사적으로 질문하는 것 이 왜 실제 지상의 역사에 필수적인 부분>인지 그 까닭을 설명하려 는 구절이다. 우리는 세계가 어둠이라고 말했다. 이 어둠의 본질을 이루는 에피소드 들은 신들의 날아다님, 지구의 파괴, 인간의 표준화, 평범한 것의 우월 등 이다 . 우리가 세계의 어둠을 말할 때 우리는 세계란 것으로 무얼 의미하는· 가? 세계는 언제나 <정신의> 세계 world of sp i r it이다. 동물은 아무런 세 계도 어떠한 환경 세계 Umwel t도 갖지 못한다. 세계의 어둠이란 정신의 무기력, 즉 정신의 붕괴, 낭비, 억압 그리고 그릇된 해석을 의미한다. …… 유럽의 상황을 더욱더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 것은 정신의 이와 같은 허약 화가 유럽 자신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비록 그 이전의 요인들에 의해 준 비되기는 하였지만 유럽 자신의 19 세기 전반기의 정신적 상황에 의해 명 확하게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U, 그 정신적 상황이란 무엇보다도 독일 관념론의 <위대함과 폭과 독창성>에 이르도록 살아갈 수 없었던 그 시대의 무능력을 말한다. 혹자는 지구의 파괴와 인간의 표준화는· 악화될 만큼 악화되었으며 , 몬타나 주의 노천 광산, 디트로이트 시의 자동·차 생산 공정 그리고 상하이의 홍위병(紅衛兵)은 정신의 세계를 운위할 필요조차도 없이 세계의 어둠울 충분히 보여준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63) IM, p. 45(EM, p. 34).
<존 재 의 망각 forg e tf ul ness of be i n g >0” 을 한결같이 그릇되 게 다루 었던 최근의 취급들과 똑같이 그것을 손쉽게 취급한 데에 그치고 말 것이댜 하이데거는 훨씬더 심각하게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는 틸리 히마냥 그저 우리의 궁극적 관심의 좋은 상징을 찾아내기가 어렵게 될 것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키에르케고르처럼 그런 상 징 찾 기가 바로 죄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내가 마치 훌륭한 근대인인 것마냥 존재 와 존재자들 간의 <존 재론적 차이 > 를 간과하고 있다는 암시를 줄지 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바로 앞에서 인용한 바와 같은 구절들에서는 하이데거 역시 그 차이룰 간과하고 있는데, 그렇게 한 것은 그를 위 해 잘된 일이댜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존재에 관한 자 신의 이야기와 신과 은총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이야기를 구별시킬 만한 더 이상의 어떤 것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에 하이데거가 < 존재에 대한 한 민족 e i nes Volkes 의 관계 > 와 같은 구절 邑) 에서처럼 존재의 역사를 인간과 민족들의 역사에 연관시키지 못했다면, 그래서 철 학의 역사를 평범한 역사와 연관시키지 못했다면, 그는 다음과 같 이 단지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던 것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죽 근 대 문명의 모든 발전들이 활용되고, 헤겔식의 변증법의 개(犬) 같은 꼬든 속임수가 실천되어 완결되며, 상상해 낼 수 있는 모든 개념들에 의해 연관된 삶과 문화의 모든 측면들이 펼쳐질 경우라 할지라도, 우 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개념적인 것보다 더 엄밀한 s tr en g er als clas Beg rijjlich e 것으로부터 나온 존재일 것이다. 민족들의 역사를 지시하지 않는다면, 남는 것이라곤 몽땅 오직 베 르세니 Laszlo Versen yi가 제안했던 것, 즉 <공허하기 그지없으며, 이따금씩 감정에 젖어들고 신바롭게 종교적이긴 하지만 형식적인, 절 대적 통일체에 대한 사고 > 66' 일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것은 굳이 6645)) IIMM,, pp.. 5119 , (pE. M50, (Ep.M 3,9 )p. . ;E1,5 , EpP. ,3 8p). 1참03조(V A, p. 84) 를 참조
그렇게 안 해도 우리가 갖게 될 것이다. 그렇게 지시함으로써 최소한 우리는 은총이 자신을 하나의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키에 르케고르의 사적이며 개신교적인 희망과 유사하기보다는, 종말론적 이며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기독교와 홉사한 것을 지닌 듯이 보이며, 다분히 자기 모순적인 육화(肉化)의 교의도 믿을 수 있게 된다 . 하이데거에 대한 이런 준( 準 )듀이식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댜 존재, 사고, 존재론적 차이 등에 관한 말은 모두 부 정(否定, ne g a ti on) 에 의해 짜여진댜 그러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긍 정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단지 그것들이 형이상학과는 무관하다는 파악에 불과하다. 형이상학은, 구체적인 쟁점을 따지고 생각하는 과 학적이거나 기술적t echnolo gi cal 인 사고를 제외하고는, 어떤 개념적 사고, 어떤 인과적 사고, 또 우리 자신을 다양하게 인과적으로 연관 된 존재자들 중 하나로 여기는 어떤 사고도 다 내포한다. 그런데 형 이상학은 오직 그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존재 를 말한다고 생각했다가 마침내는 존재자에 대한 말로 끝나게 되었 는지를 보여줌으로써만 설명될 수 있다. 여기까지는 듀이와 하이데거 가동의할수 있다. 듀이는 그 이야기의 교훈은, 형이상학은 그 잠재력을 소진해 버렸 으므로 존재자로서 우리의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식별력의 증가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겨줄 게 없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하 이데거는 소묘된 역사의 그림이 그 밖의 무엇을 얼핏 보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밖의 무엇에 관해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존재론의 파괴를 통한 존재를 향한 부정의 길은 무엇에 대한 사고일지 아무런 힌트도 남기지 않은 채 우리를 존재-없는一존 재자에 직면하게 한다. 모든 형이상학적인 생각들이 부서져버리고 남 66) Laszlo Verseny i, Heid e g ger , Bein g and Truth ( New Haven: Yale Un i- versity Press, 1965), pp. 167-168.
게 될 텅 빈 자리가 바로 우리가 지닌 전부이다. 그러므로 철학의 역 사를 듀이처럼 (다양한 인과 과정 들 이 지적인 < 상부 구조 > 에 작용해 만들어낸 것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하이데거처럼 (존재의 말로) 볼 것인가는 괘념할 필요가 없는 문제인 듯이 보인다. 텅 빈 그 자리는 쌍방에 공히 남아 있을 터이므로. 듀이에게 < 사고 > 에 관해 말하기를 지속한다는 것은 < 형이상학의 종언>이 <철 학의 종언 > 으로 간주되 어선 안 된다 그 이유를 말함이 없이 -고 고집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철학이 폐기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니체식의 힘에 의적 1 지로서의-존재에 대한 통속적 해석 앞에 무릎을 꿇는 일이다. 그것은 어떠한 구체적인 현상一―-한 편의 시, 하나의 혁명 , 한 사람 ――도 바로 그런 식으로, 또는 존재를 향한 발단으로 여겨질 수 있 다는 말이 된다. 아마도 그걸 어떻게 보느냐는 사람들이 최근에 어느 철학자를 읽었으며, 어떤 말투를 좋아하느냐에 달려 있다 . 이렇듯 심미주의적, 상대주의적, 준( 準 )一틸리히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하이데거를 반대하고 듀이에 동조하는 것이다 . 이제 와서는 명 백히 되어야 할 터이지만 그것이 바로 내가 선호하는 태도요, 노선이 다. 그러나 그걸 채용하기에 앞서 나는 사안을 하이데거의 눈을 통해 한번 더 살펴보고자 한다. 하이데거에게 듀이가 저지른 궁극적인 죄 는 실천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심미적인 태도의 채용, 바로 그 점이 라는 것을 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m) 하이데거는 테크놀로지 시대의 결과를 <견해의 세계t he world of V i ew> 로 여기 며, 듀이가 산타야나와 공유하고 있는 철학 체계들에 대한 심미적인 태도를 그러한 태도의 궁극적 표현으로 여긴다. <근대 시대의 근본 적인 사건은 그림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정복이다 .> 68) 자연을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활용되어야 할 것으로 여기는 우리의 근대적인 태도 67) 플라톤이 예술과 수학에 대해 등급을 매겼던 것을 니체가 거꾸로 뒤집었던 것 에 대한 하이데거의 논의에 대해서는 Versenyi , 앞의 책, p. 72 ff .를 참조 68) QT , p. 134(HW, p. 副
를 듀이가 칭찬할 때 그는 한마디 로 < 지각(地 波 ) 을 탄광으로, 토양 을 광물 질 의 원천으 로 >m1 여기려 는 근 대 테 크놀로 지의 아집과 한패 거리가 된 것이댜 이것은 현실 주 의자가 된 것을 뜻 하며, 심지어 하 이데거의 설명까지 동원하면서 비판 할 필요도 없다. 듀이가 <철 학 들 >―~ 플 라톤, 아퀴나스 , 헤겔 등의 사상 __ 을t 엔지니어가 지표 상의 광석 매장 지역을 보는 것처럼 보고자 할 때 하이데거는 움찔 할 것이다. 헤겔의 사상을 하나의 세계관 Wel ta nschauun g으로 취급 하는 것은 그를 계시의 가능성을 제시한 호기로 여기는 게 아니라 이용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철학을 마치 인간의 삶을 강 화하기 위한 수단처럼 취급하는 일이다 . 70) 하이데거에게 듀이의 휴머니즘은 , 사고를 구현한 이런 철학자 들 이 단지 존재자와 존재자 간의 상호 보정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취급 되는 경우에서도 보듯이, 아마도 사고의 가능성 자체가 부인될 경우 롤 제외하고는, 대항해 항의할 아무런 의의도 없는 근대적 의식의 화 신에 불과하다. 하이데거가 의미하는 시대의 통속성은 신성한 것들을 모조리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걸 말하며, 그 대상이 형이상학의 역사 일 때 가장 강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 역사는 존재의 역사이 며, 형이상학의 역사를 근대인을 위한 유용한 교훈으로 만드는 일은 존재 자체를 우리가 사용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 대상으로 만드는 것 이기 때문이다. <세계를 하나의 견해로 그리고 인간을 하나의 주체 suh i ec tum로 >71 ) 취급하는 것은 시류에 영합하는 일에 불과하다 . 그 러나 위대한 철학자들을 디딤돌로 취급한다거나, 마치 좋아하는 그림 을 고를 때처럼 그들 가운데서 선택을 한다는 것은 존재 자체를 우스 갯거리로 만드는 일이다 . 하이데거가 볼 때에는 철학의 역사에 관한 듀이의 소묘들은 기껏 69) VA, p. 14. 70) QT , pp. 133-134(HW, pp. 8.5- 86 ). 71) 같은 책, 같은 쪽
해야 (예컨대 < 경험 > 이나 < 자연 > 등) 형이상학의 어휘를 사용-<5 R 서 형이상학을 극복하려는 부질없는 시도의 가련한 사례에 불과하다. ;~, 심지어 하이데거는 극복을 위한 자신의 초기 시도―~ 물음 을 다시 개시할 방도를 준비하기 위해 현존재 Dase i n 롤 그가 재서술 한 것 조차도 자멸적이라고 본다 . n) 때때로 그는 형이상학을 극 복하려는 < 어떠한 > 것도, 실로 형이상학의 역사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마찬가지로 자멸적일 거라고 제안하여 이렇게 말한다. <형 이상학에 대한 염려는 심지어 형이상학을 극복하려는 의도 속에도 여전히 퍼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극복을 위한 모든 시도를 멈추고 형이상학을 그 자체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미) 그렇지만 여전히 하이데거는 자신이 『존재와 시간』에서 전통의 72) The Qu esti on of Bein g , tran s. Kluback and Wi lde (New York: Tway n e, 1958; Zur Se i nsf i·a g e 의 독영 대역, 원문 p. 25), p. 71 참조 : <심지어 형이상 학의 언어와 형이상학 자체도 그것이 삶에 관한 것이든, 죽은 신에 관한 것이 든, 형이상학으로서 그 선을 넘어서는 것, 죽 허무주의의 극복을 금제하는 그런 장애물을 형성하였다면 어찌할 것인가? > 듀이의 <형이상학>의 부질없음에 대 해서 는 , The Philo soph y of Joh n Dewey, ed. Schi !pp(Ev ansto n , m.: Nort h- weste r n Un ive rsit y Press, 1939) 에 있는 산타야나와 듀이 간의 의견 교환을 볼 것. 나는 산타야나의 논점을 이 책의 논문 5 r 듀이의 형이상학」에서 발전시 키고자 시도하였다. 73) 『 존재와 시간』 에 대해 몇몇 비평가들은 인간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非)데카르 트적인 서술과 라일 G. R y le 의 서술 간의 유사성에 주목하였다. 예컨대, <영어 권 철학자들이 개념적 분석의 개선된 유형이라고 부른 것은 하이데거가 [ 『 존재 와 시간』에서] '존재론’이라고 부르는 것과 매우 홉사하다>는 슈미트Ri chard Sc hmitt의 단평 (Ma rti n Heid e g ge r on Bein g Hwnan(Glouceste r, Me: Pete r Sm ith, 1969), p. 16n.) 을 볼 것. 라일이 하이데거에게 신세 지고 있을 가능성에 대 한 논의 는 Mich ael Murray, Heid e g ge r and Ry le : Two Versio n s of Phenomenolog y, Revie w of Meta phys ic s , XXVII(lf 573 ), pp. 88-111 를 볼 것. 추측컨대, 하이데거는 그 유사성은 실재로 있으나 그것은 『 존재와 시간 』 이 그 자체로 받아들여질 경우 얼마나 오도적이며 부질없게 되는지롤 보여주는 데 불과하다고 말할 것이다. 74) TB, p. 24(ZSD, p. 25).
< 범주들 >을 대신해 실존 범주 Ex i s t en ti ale 를 제시할 때 최소한 존재 의 물음을 지녔다고 고집하며, 그런 유의 어떤 것이 필수적인 최초의 단계라고 여전히 생각한댜 7 .31 비록 듀이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 르트에 공통된 <주관> 과 <객관> 따위의 관념을 대체할 새로운 용 어들을 제시하고 싶어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이데거에게 듀이는 자 기 기만적이고 자멸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만일 듀이를 하이 데거의 눈을 통해 읽는다면, 듀이의 사상은 형이상학에 대한 대안이 될 사고라는 관념은 꿈도 꾸지 못할 지경으로, 그러한 전통적 개념들 에 철두철미하게 오염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래서 듀이는 진리가 미( 美) 에 종속되는 그 자신의 퍼스적인 견지를 망각한 채, 아무튼 <과학>이 철학을 대체하거나, 철학이 < 과학적 > 이게 될 것이라고 본 다 . 철학의 역사에 대한 듀이의 관점은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이전 시 75) < 오로지 하이데거 1 이 생각했던 것을 거쳐야만 하이데거 2 에 의해 생각된 것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 1 의 생각은 오로지 하이데거 2 에 포함되어야 가 능하다 >(BR, p. xxii). 나는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 를 다음과 같이 받아들인다. 만일에 존재에 관해 물음을 묻는 존재자인 인간이, 전통이 그를 생각했던 것과 확연히 다르게 생각되지 않으면, 존재에 관한 물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디는 · 실 증주의의 고집이 정당화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라고. 그래서 만일에 실증주의 가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인간의 개념고柱근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의 개념(예컨 대 『 존재와 시간』에서 제기된 개념)이 그에게 있다는 점을 보지 못한 채 후기 하이데거에 접근하면, 당신은 그의 후기 저술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아내지 못하 게 될 것이다. 반면에, 만일에 당신이 후기 하이데거의 논점들을 파악하지 못하 면, 당신은 『 존재와 시간 』 의 그 새로운 말투 ――-실존 범주t he Exis t e n ti ale ―—룰 추측컨대 듀이가 그렇게 취급할 것처럼 즉 단순히 인간의 삶을 고양시 키는 하나의 새로운 방식에 불과하다(혹은 라일이 그렇게 취급할 것처럼, 데카 르트가 얼마나 얼토당토 않는지를 보이는 것이라고)고 취급하게 될 것이다. 더 심한 것은, 하이데거는 이렇게 덧붙였을 터인데 , 만일에 당신이 『존재와 시간 』 에 의해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했다면 당신은 <하이데거 2> 를 단순히 더 신선 하고 더 재미있는 말투들을 제공해 주는 자로 취급하게 될 것이며, 그래서 당신 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존재에 괘념하지 않은 채로 남게 될 것이다. 자신의 용어 들이 <개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개악(改惡)됨 > 에 대해 하이데거가 노심초사하 고 있는 바에 대해서는 OWL, p. 47(US, p. 145) 를 참조.
대의 모든 잔존물 들 즉 테크놀로지가 최상의 것이 되가 이전 시대의 찌꺼기들로 이루어진 우리의 자기 이미지 를 정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 휴머니스트적인 human i s ti c > 철 학의 최신판이 며 가장 타락한 단계, 하이데거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는 단계의 좋은 본보기이다 완결된 형이상학의 시대에서 철학은 인간학이다 . <철 학적> 인간학을 운위하건 않건 그런 것은 아무런 차이도 못 준다. 그러는 사이에 철 학은 인간학이 되어버렸으며, 이런 식으로 해서 철학은 형이상학_생명과 인간의 물리학, 생물학과 심리학 등을 포함하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물 리학 _ 에서 파생된 것들의 희생물이 되었다. 인간학이 됨으로 해서 철 학 자체가 형이상학을 괴멸시킨다 .j 6)
76) EP, p. 99(V A , pp. 78-79). 실용주의를 하이데거가 기각한 것에 대해서는 QT , p. 153(HW, pp. 103-104) 를 참조: <미국주의 Ame ri c ani sm 는 유럽적이 다. 그것은 그 자체가 여전히 미발달의 상태임은 물론이고, 완결적이며 집적된 근대 시대의 형이상학적 본질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한 것으로서 미처-파악되 지-못한 거대한 것의 한 종( 種 )이다. 실용주의를 통한 미국인들의 미국주의에 대한 해석도 여전히 형이상학의 영역 바깥에 머물러 있다>.
4 이렇게 해서 하이데거에 대한 듀이의 견해와 듀이에 대한 하이데 거의 견해를 살펴보았다. 불편부당하게 공감적인 종합을 해서 결론을 내린다면 참 즐거울 것이댜 그러나 제시할 더 폭넓은 안목이 내게는 없다. 그 두 사람은 비트겐슈타인과 더불어 우리 시대에서 가장 풍부 하고도 독창적인 철학자로 내게는 보이며, 그들을 초월할 방도에 대 해 나는 아무 생각도 못 가지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이 글의 서두에서 시작했던 <철 학의 종 언 > 에 관한 물음으로 되돌아 가서 대립을 첨예화시키고 , 그 맥락에서 듀이의 경우 를 재진술해 보 는 일이다. 설령 우리의 전통에 대해 두 사람이 말한 이야기 방식상의 차이점 들을 어떻게든 화해시킨다고 할지라도, 다음과 같은 막다른 골목이 남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댜 듀이는 전통이 획정지었던 모든 구분들 을 흐트러뜨림으로써 전통을 극복하길 원한다. 반면에 하이데거는 존 재가 존재론적 차이의 의미를 우리에게 보장해 줌으로써 우리를 위 해 전통을 극복할 거라고 희망한다. 특히 듀이는 예술, 과학, 철학 사 이의 구분들이 깡그리 없어지기를 바라며, 문제의 해결과 의미의 제 공에 주력하는 지성i n t e llig ence 이라는 애매하지만 논란의 소지가 없 는 관념으로 그것들이 대체되기를 바란다. 하이데거도 전통적 구분들 을 똑같이 경멸하지만 다만 다음 한 가지는 예외적이다. 죽 그는 그 와 같은 뒤섞기의 와중에서 < 철학 > 이 상실되는 것을 원치 않을 것 이며, 철학을 잘못 위치시키려는 듀이의 시도는 사고와 존재론이 동 연적(同延的, co-ex t ens i ve) 이라고 여긴 [그릇된] 가정에서 귀결된다 고 볼 것이다. 차이의 초점을 부각시킬 한 가지 방식은 이렇게 말해 질 수 있다. 듀이는 철학이란 이제 하나의 학문 분야로서는, 심지어 는 하나의 분명한 인간 활동으로서는 닳아빠져 폐기된 것이라고 생 각한다. 반면에 하이데거는 철학을 그리고 존재론에 반대되는 것으로 서 사고를, 되찾아야 할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비록 그것이 취 할 형태는 우리의 어두운 세상에서는 여전히 눈에 띄지 않지만 . 그와 같이 어렴풋하고, 겸손하며, 분명치 않은 희망에 대해 듀이가 꼭 반대해야 할 어떤 것이 과연 있겠는가? 그렇다. 정말로 그런 것이 있다. 하이데거의 희망은 바로 그 전통 중에서도 최악의 것, 우리로 하여금 존재자와 존재자 간의 관계들-예컨대 만일 근대적인 테 크놀로지의 무시무시한 장치들이 지상의 여타 지역으로 유포되지 않 으면 자신의 자식들이 굶어죽게 될 사람들과 그 장치들 사이의 관계
들 _을 외면하게 했던 것, 바로 신성한 것의 추구이다 .771 Tout commence en my st i qu e et finit en p oltiq ue( 모든 것은 신비로 시작 해서 정치로 끝난다 ). 781 인간에 대한 테크놀로지의 관계에 관한 하이 데거의 관념에서 나오리라고 상상해 볼 수 있는 정치학은 테크놀로 지의 장치 자체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이다. 또, 듀이도 하이데거도 정치학과 관련된 그런 유의 관계를 < 철학적 진리 > 에서 따로 떼어낼 길이란 어디에도 없다. < 철학 > 이라는 관념 ―~심지어 형이상학이 없어지고 난 뒤에도 < 사고 > 라고 불리는 어떤 것이 남게 될 것이라는 가련한 관념 - 에 대한 하이데거의 집착은, 단지 전통에 대한 하이데거 자신의 숙명 적인 집착의 표식이며 , 가장 위대한 독일 교수의 최종적인 결점이다. 그러한 집착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셈이다. < 철학 > 이란 우리의 인간성에 본질적인 어떤 활동에 대한 이름이기 때문에, 설령 플라톤 , 아퀴나스, 데카르트, 니체 등 철학의 한 패러다임으로 예전에 간주되 었던 이들이 모두 다 혼돈에 이르는 하나의 단계에 불과한 것이라고 벌 1백 졌다 할지라도 , 우리는 여전히 철학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 위대한 죽은 철학자들과 더불어 그들의 근거 위에서 경합하려 는 우리의 전문가적인 요구를 하이데거가 제아무리 많이 극복했다고 보이든 말든, 또 그가 (그의 동료 교수들은 언급할 필요도 없이) 전통 과 자신과의 거리를 멀리 해두고자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든 말든, 여전히 그는 그 전통이 우리에게 <존재의 말>을 제공해 준다고 고 집한다 . 그는 철학이 있었던 그 자리가 철학이 있어야 할 자리라고 여전히 생각한다. 그는 플라톤과 칸트가 생각했던 것에 관해 생각하 기를 멈추는 것은 움츠러드는 것이며,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는 것이고 , 어두움 속으로 가라앉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가 우리 77) J. Glenn Gray, 앞의 책, pp. 65- 66 참조 78) Charles Pegu y, Basic Veri ties : Prose and Poetr y(A. and J. Green 에 의 한 불영 대 역 (New York: Panth e on, 1943)), p. 108.
는 <모든 극복하기를 그만두고, 형이상학을 그 자체로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자기 자신의 준칙에 충실하다면, 그는 아무 할 말도 없을 것이며 가리킬 어떤 곳도 없게 될 것이다 . < 하이데거의 사상의 힘은 전적으로 철학의 역사에 대한 그의 설명에 있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은 하이데거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를 고대 그리 스인들에게서 시작된 일련의 과정 속에 설정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 나 그 전통과 그를 연계시켜 주는 유일한 것은 그 전통이, 비록 존재 자들 쪽으로 집요하게 궤도 일탈을 하긴 하였지만, 실제로는 시종일 관 존재와 연관되었으며, 정말로 존재의 역사로 구성되었다는 그의 주장뿐이다. 이는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는 셈이다 . < 사도들과 성 (聖) 바울에서 시작하여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를 거쳐 틸리히와 바 르트刀 ) 까지 이어지는, 어떻게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과거의 관념은 ‘모두’ 한 걸음씩 점점더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는 과 정이었다. 그러나 만일에 우리가 신학의 전통을 극복해 낼 수 있고 심지어 그것을 홀로 내버려둘 수만 있다면, 주의 은총이 우리를 그리 스도에게 데려다 줄 것이다 .> 이렇게 말하는 이는 <존재론>과 <사 고>에 대해 하이데거가 설정코자 하는 구분과 동류(同類)의 것을 <신학>과 <기독교> 사이에 임시방편으로 설정코자 애쓰는 셈이다 . 둘 다 전통이 무엇인지 ―—二그것이 잘못 접근되어 왔던 것인지 아니 면 스스로를 베일 속에 감추어왔던 것인지 -를 전통으로 하여금 식별해 내도록 간청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둘 다 그들이 말하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전통을 철저히 부인할 필요가 있다. 키에르케 고르는 헤겔과 역사를 넘어서 사고가 생각할 수 없는 곳一~일시적 인 것과 영원한 것이 교차하는 곳――-에 도달할 때, 우리가 그것을 <그리스도>라고 불러야만 할 것인지를 전혀 암시하지 않았다. 그리 스도란 결국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는 어떤 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79) Karl Ba rth, 1886-1968: 스위스 개신교 신학자.(역주)
그이댜 801 존재란, 지난 2 천 년 동안의 변증법을 마감하는 순간의 대 변자인 니체가 그 것 이 무엇이었다고 말했던 것, 즉 < 하나의 아지랑 이요 오류 > 이다 .811 하이데거는 < 진정한 물음 > 은 <‘ 존재’는 단지 한 낱말이며 그 의 미는 한낱 아지랑이인가? 아니면, 그것은 서구 세계의 정신적 운명인 80) 그 비교가 암시해 주듯이 , 나는 베르셰니 Versen yi가 하나의 덤으로서 키에르 케고르 적 인 구절 < 절대 타자d as ga nz Andre > 를 들 춰낸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US , p. 128; Verse n y i, 앞의 책, pp. 135ff ., p . 163 참조). 메타(J . L. Mehta , The Ph ilos oph y of Martin Heid e g ger (New York: Ha rper and Row, 1971), p. 119n.) 는 베르셰니가 그 구절을 문맥에 닿지 않게 끌어들인 것 을 비판하나 , 나는 베르셰니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 절대 타자 Wholl y O th er 인 것 을 가시화하고자 하며 , 우리 를 전혀 판이한 차원에 들 어가게 하려는 그의 시도에서 , 하이데거는 일종의 부정의 신학 neg a ti ve t heolo gy과 신비주의에 관여한다: 그는 모든 인간적 경험과 통찰에 대해 거부함으로써 그것의 유일하게 구체적 내용인 신탁의 발언들을 쏟아놓는 다> (p . 163). < 하이데거는 , 철 학적 전통에 의지한 것이건 아니면 일상 생활의 합리적 반성에 의지한 것이건 저술의 선택 및 그의 해석 채택에 대한 어떤 정 당화도, 그가 휴머니즘에 대해 비판한 것들에 그의 사상을 맡기는 꼴이 될 거라 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다 . 이런 철학적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그는 그에게 열 려진 유일한 논리적 수속을 밟는다: 그는 예언자의 관점을 채택하며 자신의 주 장 을 신비적 통찰에 둔다…… > (p . 162). 그렇지만, 베르셰니의 < 신고전주의 입 장 > 이라고 메타가 적확하게 묘사한 것을 채용하지 않고서도 하이데거에 관한 이 모든 것 들 을 말할 수도 있다. 듀이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하이데거가 잘못한 것 은 베르셰니가 제안하듯이 그가 < 합리적 반성 > 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 합리 적 반성이 실패했던 것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을 해낼 모종의 입장에 자기가 서 있다고 고집한 점에 있다. 전통적으로 철학적 논변이 해내고자 했던 것을 신비 적인 통 찰 (또는 그 문제에 관한 평범한 통찰)이 한다는 것은 그 의미가 무엇이 든 간에, 양자의 공통된 목표는 <안생에 의미를 부여함>과 같은 막연한 어떤 것이게 된다. 하이데거에게 반론해 볼 수 있는 것은 그와 같이 막연하며 <휴머 니스트적인 > 목표란 그에겐 충분치 못하다는 점이다 . 그는 플라톤, 헤겔 그리 고 자기 자신이 하나의 공통된 작업 _一존재의 말을 대변하는 것 __- 에 종사 하기를 바란다. 그 속에 철학자와 농부, 시인과 정부 각료 등 우리 모두가 다 연관된 그런 작업을 말이다. 81) IM, p. 36(EM, p. 'Zl).
가?>라는 물음이라고 말한다. K' I 그러나 제안된 이 대안은, 우리가 당 면한 문젯거리들이 좌우간 플라톤 一 니체의 전통에서 연유한다고 제안 함으로써 존재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다시 새롭게 하려는 시도에 불 과하댜 그 전통이 왜 편협한 강단철학적 관심사 이상의 것인지를 설 명하기 위해 하이데거가 할 수 있는 건 그것이 바로 존재의 물음이 물어졌던 곳이라는 게 전부다. 우리가 왜 존재를 하나의 아지랑이요 오류라고 일축해서는 안 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하이데거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무튼 우리의 운명이 그 전통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 고작이댜 결론을 내리자면 이렇댜 듀이와 하이데거 둘 다 원하는 것은, 마 치 헤겔이 인식론에 경도되었던 18 세기의 철학을 우리가 넘어서게 했듯이, 헤겔을 계승한 역사주의자의 철학 세계를 가능한 한 우리가 멀리 넘어서는 데 도움을 줄 안목이었댜 듀이는 하나의 뚜렷한 활동 으로서의 철학을 송두리째 외면하고 일상적인 세계, 즉 철학적 전통 이 발전시킨 구분들을 내다버릴 때 비로소 생생하게 떠오르는 인간 의 문제들로 눈을 돌림으로써 그가 원하던 걸 찾아냈다. 하이데거는 새로운 길이 열릴 거라고 희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우리가 인 간의 문제들로부터 초연하여 가만히 있을 때에만 그 길이 열리는 것 울 보게 될 것이라고, 그 고요함 속에서 아마도 존재의 말을 듣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태도들 중 어느 것을 채용하느냐는 <철학>이리는 관념에 얼마만큼 충실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하이데 거의 약점은 철학자들의 곤경은 단순히 철학자들만의 곤경을 능가하 는 무엇이라는 관념, 만일 철학이 쓰러지면 서구도 무너지게 될 거라 는 관념을 그가 탈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개념 적 인 것보다 더 엄 밀한s tr en ge r als das Begr ijflich e 어 떤 것 을 결여하고 있다는 이유로 하이데거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 우리 가 82) IM, p. '5/(E M, p. 첵
운데 그렇지 않은 자는 거의 없다. 만일 하이데거가 비판받아야 한다 면, 그 까닭은 우리가 수행해야 할 의무인 <철학> 이라고 불리는 특 별한 것이 존재한다는 플 라톤의 관념의 주문(呪 文 )에 우리가 계속 묶여 있게 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하이데거 자신이 니체를 두고 말했 던 것을 그 를 향하게 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플라톤적인 아 이디어들에 대한 피상적 이해로 인해 오도되어서, 그는 그것들을 대 체시키려고 애썼지만 오히려 플라톤주의를 더 새로운 말투로 번역해 버렸다라고 .Kll <철 학적 논변 > 을 < 존재에 대한 개방성>으로 대체할 것을 제기함으로써, 하이데거는 우리가 극복하길 바랐던 전통 중에서 도 최악의 것들을 전부 보유하게 오히려 도와주고 있다 .&II 83) N, I, pp. 585-586, 특히 다음 구절을 참조: <……[니체의] 이론은 그것이 오 로지 특별히 고안된 이데아론의 도치(倒 置 )로 남게 될 만큼 플라톤의 이데아론 의 매트릭스와 아주 잘 맞아떨어지며 따라서 '본질상은’ 이데아론과 동일하다> (나는 이 구절을 베르셰니가 그의 저서 『하이데거, 존재와 진리 He i de gg er, Bein g and Tru t h 』, p. 70 에서 논의한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동일한 논점에 대한 Bernd Magn u s, Heid e g ger 's Meta histo r y of Ph ilos oph y(T he Hagu e : Nij ho ff , 1970), pp. 131-132 참조. 84) 그린Marj o ri e Grene, 스탬바우호J oan Sta mb aug h, 베르셰니 그리고 작고한 동료 카우프만W al t er Ka ufm ann 이 이 논문의 초고에 대해 유익한 비평을 해주 었는데 그들에 게 감사한다. 또, 올랩슨 Frede ri ck Ol af son 과 리 Edward Lee 에 의해 l 언 4 년 라욜라 La J olla 에서 개최된 하이데거에 관한 학회에 초청되어 내가 이 논문을 쓰게 되었는데, 그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4 전문화된 철학과 초월주의 문화
신세계에서의 철학에 대한 산타야나의 반성은 두 가지 장점을 갖 고 있다. 첫째, 그는 우리를 깔보지 않고서도 조롱할 수 있었는데, 이 런 일은 모국 태생에게는 가끔 너무나 난해한 묘기였다. 둘째, 그는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서구의] 정신은 이 땅에서 마감된다는 미국인 의 본능에 가까운 확신에 전혀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다. 즉 그는 여 러 시대가 산출코자 노력해 왔던 것들은 무엇이건 다 매사추세츠와 캘리포니아 사이에서 용해될 것이고, 우리 철학자들은 인간 영혼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 국가 내의 천재성만 표현해 내면 된다는 미국인 의 확신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었다. 산타야나는 우리를 과 거의 여러 제국들에 이은 또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보았다. 그의 애정어린 바람은 우리가 제국으로서의 권한을 지니고 있는 동안 그 것을 제대로 누리는 것이었다. 미국 철학에 관한 유명한 글에서, 산타야나는 우리가 여전히 우리 자신이 즐겨야 할 것을 망치고 있다고 암시한 바 있다. 우리는 캘빈 주의지들을 계승한 초월주의자의 관념론적 형이상학을 지켜가길 원 하면서, 동시에 비논리적일망정 캘빈주의 선조들의 <고뇌에 찬 양 심>도 보유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 형이상학은 그가<인간, 인간의 이성, 선과 악에 대한 인간적 구분 등이 우주의 중심이 요 중추라는 자만에 찬 관념 > “ 이라 이 름 한 것을 구현하였다. 캘빈주 의자의 죄의식과 형이상학적 이기주의가 결합된 것을 그는 < 미국 철 학의 우아한 전통 The Gente e l Trad ition in Ameri ca n Ph ilo soph y > 이라 불렀다. 그는 그 전통에 반대되는 것 으로서 그가 < 미국의 지배 적인 열정, 곧 사업에 대한 사랑 > < 사업 자체와 그 번창함을 즐 기며, 사업을 거대화하고 조직화하며 그것을 삶의 강력한 추진체로 만들기를 즐기는 것 > 이라고 이름한 것과 그 전통을 대비시켜 이렇게 말했다: < 미국의 의지는 초고층의 빌딩에 담겨 있으며 , 미국 의 지성은 식민지 시대의 저택에 담겨 있다. 하나는 미국 남성들의 영역이요, 다른 하나는 적어도 널리 행해지고 있는 미국 여성들의 영 역이다 . 하나는 대단히 공격성을 강조하며 , 다른 것 은 대단히 우아한 전통이다> ? 이런 측면에서 1911 년의 학문 정신 acade mi c mind 은 다 분히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된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 그 우아한 전 통은 학문 정신에 깃들어 있으면서 마찬가지로 학문적인 다른 어떤 요소가 결핍될 경우 그 자리를 차지한다 > . 31 우리는 마치 남성적, 공격적, 사업적인 우리 시대의 학문 풍토를 둘러보듯이 이 모든 것에 대해 미소를 보낼 수도 있다. 미국의 학문 정신은 오랫동안 그 자신의 특별한 기업을 < 거대화하고 조직화하며 그것을 삶의 강력한 추진체로 만드는 > 즐거움을 누려왔다. 권력자들 을 자문하면서 하루를 보낸 뒤 비행기로 귀가중인, 넉넉한 보수롤 받 는 대학 교수는 그 옆자리에 앉아 있는 지방 실업가 사장에겐 부러 움의 대상이다. 만일 미국 생활 속에 우아한 전통과 홉사한 어떤 것 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학문 정신>과 동일시될 리는 만무하다 . 대부분의 학문 종사자들은 이제 고충 빌딩의 숲속에 1) George Santa yan a, Win d s of D octr ine (London: J. M. Dent, 1 913), p. 214. 2) 같은 책 , p. 188. 3) 같은 책, p. 212.
서 가르치고 있다 . 대중들은 더 이상 우리의 전문직을 남자답지 않은 가날픈 것이라고 연상하지 않으며, 오히려 정치적 폭력과 섹스 면허 증 아니면 콧대 높은 대통령 자문가들로 연상하고 있다. 만일 산타야나가 말했던 것과 어렴풋하게나마 닮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지식인의 문화hig hbrow cul t ure 일 것이다. 지식 인의 문화란 시, 연극, 소설, 문학 바평 등을 산출해 내는 문화로 더 적절한 용어가 없기에 우리가 <문화 비평>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말한다 . 일부 지식인들은 대학, 대개의 경우 대학의 문학과에 재직 중이지만, 그러나 학문의 청부업자는 아니다. 그들은 연구 기금을 얻 지 못하며, 연구팀보다는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고, 대학의 고층 빌딩 들 사이사이에 끼여 있는 듯한 낡은 집 어디엔가 여전히 살고 있다. 그들을 대할 때 더 사업가다운 동료 교수들은 한편으로는 장사꾼이 성직자를 대할 때의 존경심과 다른 한편으로는 성공한 자들이 꾀죄 죄하지만 우아한 자들에게 느끼는 경멸감을 교대로 갖는다. 이렇듯 숨가쁘게 바쁜 현대의 대학에서 철학 교수들을 찾는다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이 물음을 적절히 다루기 위해서는 산타야나 가 그 글을 쓴 이래로 철학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살펴보아야 할 터 인데, 그 기간을 둘로 나눌 필요가 있다. 양차 세계 대전의 사이에 낀 기간은 예언과 도덕적 리더십의 시기였다. 그 시기는 듀이적인 실 용주의의 영웅적 시기이며, 그 시기에 철학은 국가 생활에서 산타야 나가 칭송할 만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제 2 차 세계 대전 이후의 시기 는 전문화의 시기였는데, 이 시기에 들어와서 철학자들은 매우 의도 적으로 또 자기 의식을 지니고서 [이전에 인식된] 그와 같은 역할을 포기하였다. 산타야나가 글을 썼던 제 1 차 세계 대전 이전의 시기에 철학은 종교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정의하였다. 듀이적인 시기의 철학은 사회과학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정의하였다. 전문화 시기의 초엽에 반쯤 내키는 마음으로 철학을 수학과 자연과학의 관계를 통 해 정의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사실상 이 시기는 철학이 여타의 학
문과 문화로부터 후퇴한 것, 즉 철학의 자율성에 대한 고집으로 특징 지어졌댜 철학은 하나의 기술적t echn i cal 주제이며 또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는 주장 그리고 그와 같은 최근의 전문화 현상은 중요하며 좋은 일 이라는 주장은 직접적으로 철학자들이 토론하는 쟁점들이 중요하다 고 지적하거나 성공적인 철학적 탐구의 패러다임을 자신 있게 지적 함으로써 노골적으로 옹호되지 않는 것이 통례이다. 오히려 그것은 경쟁의 대상이 되는 것들, 즉 1930 년대의 듀이적인 철학, 현대의 대 륙철학, 지식인들의 문화 비평 등이 논증적 엄밀성에서 매우 낮은 단 계에 있다는 점을 경멸적으로 지적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옹호된다. 심 지어는 전문적 고립화를 탈각하고 싶은 철학자들마저도 그들이 특별 히 기여할 것은 논증의 솜씨라고 고집하곤 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 게 말한다. 철학자들은 어떤 구체적인 사안을 더 잘 알고 있는 게 아 니며, 독특하게 그들에게만 고유한 구분들과 전제 조건들에 대해 일 종의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고 .•1l 과거에 전통 철학자들이 수행했던 기능들 중 많은 것을 지식인 문 화비평가들이 침식한 반면에 지식인들은 현대의 강단 철학자들이 실 제 행하고 있는 바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미국의 철학을 저널리스트적인 냉소로 대하며 그것이 <연관성이 없다>거나 <현학 적>이라고 일축한다. 반대로 철학자들은 산타야나가 우아한 전통을 일축했던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지식인의 문예적인 문화를 일축하 고자 애를 쓴다. 산타야나가 로이스5 ) 와 파머 6) 를 가리켜 고뇌에 찬 양 심을 형이상학적 위안으로 속인다고 보았던 것처럼, 철학자들은 그와 같은 지식인의 문화는 괴팍한 과민증을 미학적 위안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짓이라고 본다. 경박성과 조잡성에 대한 비난이 현학성 4) 나는 이 책의 논문 12 에서 이 주제에 관해 더 상세히 논의하고 있다. 5) Jos ia h Roy ce , 1 辱 -1916: 미국의 철학자.(역주) 6) George Herbert Palmer, 1842-1933: 미국의 철학자.(역주)
과 편협성에 대한 비난으 로 바뀐 것이다. 그러한 비난 들 이 자기 의식화하고 공개될 경우 그 비난 들 은 통상 <철 학의 본질 > 에 관한 견 해 로 제시되곤 한다. 마치 가능한 인간 활 동 들 에 대한 영원하고도 초역 사적인 도식의 한 구석이 텅 비거나 강 탈당할 위험에 처해 있기라도 하듯이. 문학이나 정치학에 본질이 없 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 학도 본질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러한 논쟁은 부질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은 뛰어난 인물들이 현재 형성 해 가고 있는 바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로이스, 듀이, 하이데거, 타르스키, 카르납 , 데리다 등을 < ‘진정한’ 철학자의 자격 > 이라는 관 점에서 비교할 수 있는 공통의 표준은 전혀 없다. 그러나 철학의 본 질은 없지만, 철학의 역사는 있댜 철학 사조들이 참된 철학에서 비롯 되거나 그런 것으로 되돌아간다고 여겨질 수도 없고, 문학이나 정치 학에서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철학의 경우에도 한 사조를 계승한 다 른 사조를 평가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때로는 철학 사조들의 전반 적인 사회적 귀결에 관해 상당한 것을 이야기하는 일이 가능하다. 이 하에서 나는 산타야나가 앞에서 언급된 글을 쓴 이래로 미국 철학에 서 발생한 몇 가지 것을 소묘해 보고, 전문화가 초래할 결과에 대해 몇 가지 예측을 해보고자 한다. 산타야나는 일찍이 제임스 W illi am J ames 가 우아한 전통을 <우회 공격 > 했던 점에 주목하였다 산타야나의 논문이 발표된 뒤 10 년이 지나서, 듀이는 제임스가 이루었던 공적을 더 확고히 하였는데, 산타 야나의 말마따나 <그 전통을 계승할 동등하게 학문적인> 어떤 것의 발견에 필적할 만한 일을 해냈다. 듀이는 미국의 지식인 세계에 사회 과학을 탄탄하게 해놓았다. 1900 년대의 초엽에 대학들은 대여섯 개 의 학과를 신설하였고 거기에 온 새로운 유형의 학자들을 위해 구조 를 개편해야만 했다. 미국의 대학은 미국 사회 질서를 재구축하기 위 해 애쓰는 성역이 되었으며, 미국 철학은 그러한 재구축의 소명에 부 응하였다. 도덕철학이란, 신의 명령을 대신할 일반 원리를 정형화시
킨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지성을 제반 사회 문제에 적 용시킨 것이라는 듀이식의 주장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교육과 삶의 의미 를 새롭게 보 게 하였다. 일반 대중에게는 뉴딜 정책과 더불어 사회과학자들이야말로 대학 의 대표자이고 또한 듀이적인 약속의 구현자로 인식되었다. 대공황의 와중에서 스탈린주의가 지식인 그룹에 스며들고 있을 때, 듀이의 수 제자인 후크 S i dney Hook 를 중심으로 한 작은 서클은 지식인들의 정 치적 도덕성이 살아남을 수 있게 지켰다. 오토 Max Ot to, 메이클존 Alexander Meik l ejo h n, 칼렌 Horace Kallen 등과 같은 철학자들은 학생들에게 <미국의 지배적인 정열, 곧 사업에 대한 사랑 > 이 사회 재건으로 전환될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그들에게 사사함으로써 한 세대 전부가 자신감을 갖고 성장하여 미국은 인정머리 없는 자본주 의와 유혈이 낭자한 혁명 둘 다를 마침내 어떻게 피해 갈 수 있는지 롤 전세계에 과시하였다 . 양차 세계 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에 미국의 철학은 우아한 전통을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한 도덕적 리 더십을 제공하였다. 역사상 최초로 미국의 철학 교수들은 과거 독일 에서 피히테나 헤겔이 수행했던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2 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듀이식의 철학과 사회과 학의 위대한 날들도 막을 내려버렸다. 우아한 전통을 계승했던 활기 찬 개혁주의자의 태도는 다시 과학성과 엄밀성의 호소에 의해 대체 되었다. 사회과학자와 철학자 양측 모두 공공의 태도에 대한 비판을 그만두고, 자기네들이 철저하고도 배타적인 전문가가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자연과학자들처럼 수학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이고 자 하였다. 초기에는 한 창녀집의 주소를 파악하기 위해 5 천 달러의 연구비를 날려버린다고 비아냥을 받았던 미국의 사회학이 이제는 1 천 명의 창녀집 주소를 얻기 위해 사회 • 경제적 변인에 따른 다차원 분석을 해내려고 5 백만 달러의 연구비를 날려버린다고 비아냥을 받 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철학과에 재학중인 학생들은 앞 세대들, 즉
듀이의 제자 들 이 미국의 민주주의, 자연주의 , 사회 재건 등을 찬양하 는 일자리들을 죄다 차지해 버렸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아무도 관념 론자, 주관주의자, 초월주의자 , 심지어는 정통 유신론자가 어떤 모습 울 한 인물인지 기억해 낼 수 없었으며, 그래서 누구도 그들이 바판 되는 것을 듣는 데 관심을 쏟지 않았다. 새로운 영웅들이 필요하였으며 , 그 영웅들은 특출한 일련의 사람 들 , 즉 이민 온 학자들 중에서 발견되었댜 거비치 Aron Gurw it sch 나 슈츠 Schue t z 에게 현상학을 배웠거나, 카르납R. Carna p이나 라이헨바 하H. Re i chenbach 에게 논리실증주의를 배웠던 미국의 젊은 철학자 는, 철학이 하나의 엄밀한 학문 분야이며 공동 연구를 통한 협력과 합의된 결과의 산출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훈련받았다. 1950 년대 중엽에 이르면, 우아한 전통에 대한 실용주의자들의 승리는 마 치 캘빈주의자들에 대한 에머슨 R. W. Emerson 의 승리마냥 먼 얘기 가 되어버렸다. 시각적 인지의 구조, 법칙성의 의연적 규준 등에 대 해 정확한 작업을 해내야 하기 때문에, 후설이나 러셀 이전의 시대에 철학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물어볼 시간도, 필요도 없었다. 논리경험주의가 분석철학으로 탈바꿈되면서 그리고 현상학을 대학 의 후미진 곳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도덕적 • 사회적 물음에 대한 미국 철학자들의 무관심은 가히 총체적이게 되었다. 상당 기간 동안 도덕철학 강좌들은 상식적인 도덕 의식에 대한 정교한 인식론 적 조롱에서 멀리 벗어나질 않았다. 철학자들이 사회과학을 하는 동 료들과 접촉하는 일은 최소화되었으며, 문학을 하는 동료와의 접촉은 아예 부수적이게 되었다. 듀이는 철학이 17 세기의 긴장, 즉 한편으로 수리물리학과 다른 한편으로 상식의 세계 간의 긴장에서 벗어나서 사회과학과 예술에서 연유된 새로운 문젯거리들을 떠맡게 될 거라고 예견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예견은 완전히 빗나갔다. 오히려 정반대 로 그가 해소시켜 버렸다고 생각했던 예의 그 데카르트적인 문제들 이 몽땅 되살려졌으며, 그런 문제들이 형식 언어의 방식에 따라 다시
진술되고 형식주의가 만 들 어낸 새로운 난점들로 겹겹이 둘러싸이게 되었다 하지만, 듀이가 미국의 철학 에 대해 예견했던 일은 실제로 다른 분 야에서 발생하였다. 그것은 바로 대륙 철 학과 미국의 지식인 문예 문 화이다. 검증보다는 해석에 주목한 것, 곧 예술과 < 인간과학 > 에 공 통된 어떤 것을 주목한 것이 문필 지식인의 표징이었다. 그런 관심의 한 가지 결과-이 논문의 목적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결과――-는 철학의 역사가 지식인들의 손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전문 화된 철학자들은 위대한 옛 철인들을 가설의 원천이나 개념적 혼동 사례에 대한 길잡이로 취급하길 고집한 반면에, 지식안들은 여전히 그들을 옛 방식 그대로 영웅이나 악당으로 취급하였다. 듀이만 해도 플라톤에서 자기에게 이르는 철학 전반에 관한 위대한 이야기를 말 하고자 시도했지만, 전문화된 시대의 철학자들은 그러한 이야기들을 <비과학적>이거나 < 비학자적 > 인 것이라고 불신하였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없을 수 없 는 한 장르를 이루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로크, 칸트, 키에르케고 르 등이 주장한 어떤 명제들이 과연 참인지, 타당하게 추론된 것인지 를 캐묻는 필요성 이외에도, 그러한 인물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는 필요하다. 마치 알키비아데스와 유리피데스, 크롬웰과 밀턴, 프루스트와 레닌에 대해 누구든 반드시 어떤 태도를 택해야만 하는· 것과 똑같이. 위대한 옛 철인들의 저술은 서로 교차되고 변증법적으 로 이어져 하나의 다발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누구든 그들 중 일부 에 대한 어떤 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동시에 그들 중 상당수에 대한 태도도 가부간 채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예컨대 칸트에 대한 혹자의 태도는 워즈워스나 나폴레옹에 대한 그의 태도와 무관할 수 가 없다. 죽은 거인들과 그들의 살아 있는 라이벌들에 대한 태도 ―만신전(萬神殿)을 신령한 것과 악령으로 구분짓는 것 ――-를 발전시키는 일이 바로 지식인 문화의 핵심이다. 거명주의, 문맥의 빠
른 전환, 하나의 대 답 에 안 주 하기 를 꺼 리는 것 등 그 문 화가 권장하 는 유형의 것 들 은 전문 화된 강 단의 학문 분야가 대표하는 모 든 것과 반대된다. 통상 적 으 로 대학과 이 문화 사이의 대립은 암묵적인 채로 남아 있을 수도 있댜 그러나 철 학의 경우에는 그것이 표현되기 마련 이댜 왜냐하면 가장 전문화된 철 학자가 아닐지라도 철 학자는 스스로 를 플 라톤이나 칸트의 현대판은 못 되어도 적어도 권위 있는 논평자 로 여기는 것 을 멈 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 논문의 서 두에서 묘사했던 대립, 지식인 들 과 강단 철학자들이 서로 상대방을 똑 같 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 서로 상대방의 악덕을 되풀이 말 하는 대립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 대립은 우리가 큰 관심을 가질 필요도, 해소시키고자 기 를 쓰고 노력할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하고자 한다. 그 대립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이 대체적으로 자 아낼 결과 전문적이며 학술적인 주제로서의 철학은 마치 고생물 학이나 고전문헌학이 그렇듯이 지식인 문화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남 아 있게 될 거라는 결과―― - 에 만족하면서 잘 지낼 수 있을 것이기 에 말이댜 이런 태도를 옹호하기 위해서, 나는 지식인 문화의 특징 인 위대한 철학자들에 대한 그런 취급 방식이 왜 없어서는 <안 된 다 > 고 생각하는지 그 이유와, 또 지식인의 문화를 산타야나가 불평 했던 우아한 전통과 혼동해선 왜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말하고자 한 댜 이 일을 나는 지식인 문화가 출현하기까지의 역사一一-마치 신과 학 New Sc i ence 과 그것이 창출했던 철학적 문제들이 17 세기의 현상 이었던 것과 홉사하게, 지식인 문화는 단연코 19 세기의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그 역사_롤 스케치함으로써 해내고자 한다 .7 J 한 가지 새로운 저술 유형이 괴테 , 매콜리, 카알라일, 에머슨 등의 7) 문예 문화와 전문화된 철 학자 들 간의 대비를 나는 이 책의 논문 8 에서 상세히 전개하고 있다.
시대에 시작되어 발달해 왔다. 새 저술 유형은 문학 작품에 대한 평 가도 , 지성사도, 도덕철학도, 인식론도, 사회 예언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한 장르 를 새롭게 이룬 것이 었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이 장르는 아주 그럴듯한 이유로 지 금도 가끔씩 문예 비평으로 < 불리곤 한다> . 그 이유는 19 세기가 경 과하는 동안에 젊은이들의 고뇌에 찬 양심을 형성하고 위안하는 데 있어서 상상력이 가득 찬 문학이 종교와 철학 두 가지를 모두 대신 하게 되었가 때문이다. 이제 소설과 시는 총명한 젊은이가 자기 이미 지를 획득하는 주요한 수단이댜 또, 소설 바평은 획득된 도덕적 품 성이 세련되어 가는 주요한 형태이다 . 우리는 도덕적 감수성을 말로 표현하는 것과 문학적 감수성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명확히 구별되 지 않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종교의 역사와 철학의 역사에서 연유 한 에피소드들은 문학적 영감의 원천이 되기보다 오히려 문학 패러 다임들이 사례화(事例化)되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종교적 교리나 철학적 교의는 소설가가 그려낸 등장 인물이나 시인이 그려낸 이미지 의 장식물이며, 결코 그 관계가 뒤바뀐 것이 아니다. 철학은 이제 드 라마나 소설이나 시와 비견되는 한 장르로 취급된다. 그래서 우리는 바이힝어 V aihi n g er 와 발레리 Vale ry에 공통된 인식론, 말로 Marlowe 와 홉스 Thomas Hobbes 에 공통된 수사학, 포스터E. M. Fors t er 와 무 어 G.E. Moore 에 공통된 윤리학을 운위한다. 문화 바평이 행하지 <않는> 것은 과연 발레리가 말로보다 더 아름다운 시구들을 썼는가, 혹은 과연 홉스가 무어보다 선에 관한 진리를 더 많이 말했는가 등 을 묻는 일이다. 문화 비평이라는 생활 양식에서는 진, 선, 미라는 것 이 사라져버렸다. 문화 비평에서의 목표는 이해이지 심판이 아니다. 만일에 시와 종교와 사회와 철학을 각각 충분히 이해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해함에 있어서 무언가 값어치 있는 일을 했을 거라는 것이 문화 비평에서의 바람이다. 우리 선조들의 우아한 전통과 오늘날의 문화 비평 간의 관계를 이
해하려면, 산타야나가 구분지은 < 초월주의 > 란 용어의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를 면밀히 검토하는 게 도움을 준다. 산타야나는 초월주의 형이상학 체계 들 은 자기 중심적인 것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그는 그 런 체계들을 그가 < 진정한 초월주의 > 라고 명명하였던 것과 [구분지 어] 대바시켰다. 그는 진정한 초월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낭만주의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물들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특 정한 도그마가 아니며, 그것은 사실들로 간주된 우주에 관한 체계도 아니 다 . ……그것은 하나의 방법이요 관점인데, 무엇을 포함하는 일이든지 자 기 의식적인 관찰자에 의해 그 방법과 관점에서 접근될 수 있다. ……진 정한 초월주의는, 근대 시대에 형성된, 사색에 대한 주요한 공헌이다 . ~I 이러한 초월주의자의 관점이 곧 지식인의 표징이다. 그것은 한편 으로 우리 자신과 다른 한편으로 판단되는 사물의 사이에는 정신, 언 어, 10 여 가지 관점들 중에서 채택된 어느 한 관점, 수천의 서술 중 에서 선택된 한 서술이 언제나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진리나 선이나 미 따위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보는 태도이다. 한편에서 보자면 그것[초월주의자의 관점]은 시인들이 그러하다고 플라톤이 보았던 것과 같은 <진지한 태도의 결여>이며, 키츠가 셰익 스피어를 찬양했던 <부정적인 능력 ne g at i ve ca p ab ility>이다. 디론· 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단토Arth ur Dan t o 가 제안하듯이 우리가 그 림으로서의 언어 이론과 진리란 정확한 표상이라는 플라톤적인 진리 개념을 포기할 때 처하게 될지 모르는 사르토르적인 의미에서의 불 합리성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만일에 당신이 어떤 것에 대 해 [私的으로]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억지 의미 부여에 불과하 듯이, 그것은 억지춘향이었다 .9) 그것을 혐오한 하이데거에게서 그것 8) George Santa ya na, 앞의 책 , pp. 193-194. 9) 원문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에게서는, 만일에 당신이 어떤 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 의미를 억지로 인정하는 것이었다>나 앞뒤의 문맥이 맞지 않아 고쳐 옮김.(역주)
[초월주의자의 관점]은 그가 < 세계관의 시대 > 라고 이름 붙였던 근 대의 헌장(志 章 )이었다 데리다에게서 그것은 < 사고라는 잃어버린 조국에 속한 순전히 어머니나 아버지만 아는 언어의 신화 > 에 대한 포기 선언이다. 그리고 그것은 푸코가 < 아무 얼굴도 갖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 > 고 말할 때 그의 주장에 담긴 결정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초월주의는 스스로 과학자나 전문가가 되기를 원치 도 않으며 지식인의 정직성은 쿤이 < 분야 매트릭스[ 分 野母型] > 라고 불렀던 것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지식인들의 입지를 정당화해 준다. 그것이야말로 스노에게 스캔들을 안겨주었던 과학에 대한 문필 지식인의 태도를 허용케 한 것이다. 그 태도란 다름 아니 라, 예컨대 양자역학을 서투르고 애매한 언어로 씌어진 악명 높게 위 대하지만 거의 번역 불가능한 한 편의 시로 보는 관점이다 . 초월주의 는 바로 <지식인>이라는 관념, 포스트낭만주의적이며 포스트칸트적 인 그 관념에 의미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18 세기에는 재치 있는 사람들 학식 많은 사람들 경건한 사람들이 있긴 하였으나, 지식인들 은 없었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적들이 다양하게 되었으며, 오늘은 사랑받지만 내일은 배신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책이 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체계적인 뼈대도 없고 근거도 막연한 책들을 보는 독자층을 일구어낼 만큼 되었다 . 칸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철 학은 도덕적 믿음의 여지를 마련하기 위해 과학과 신학을 파괴하게 되었으며, 실러]. C. F. Sc hill er 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도덕을 위해 비 켜놓았던 그 자리를 예술이 차지할 가능성이 엿보이기 시작하였다 . 산타야나가 (좋은 의미에서의) <초월주의>를 칸트에까지 거슬러 추적하였을 때, 그의 논점은 과학적 진리에 대한 칸트의 취급 방식은 과학을 수많은 문화 현상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러
나 과학적 진리는 17 세기 이 래로 철학적 진리의 유일한 모델이었기 때문에, 과학적 진리에 대한 칸트의 취급 방식은 산타야나 자신의 철 학적 비전에 대한 미학적인 태도로 연결된다. 바로 이것이 산타야나 가 우리는 에머슨을 찬양해야 한다고, 로이스를 닮은 에머슨보다는 휘트먼 Wal t er W 血 man 을 닮은 에머슨을 찬양해야 한다면서 생각했 던 상대성과 열린 가능성의 의미였다. 우아한 전통을 단지 우아한 것 에 불과하게 만들었던 것은 이 현란한 귀족주의적 입장을 견지할 수 없었던 무기력이었다. 그 전통은 사람들이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진 리 양자를 철저히 진지하게 간주하고 그것들을 한데 짜엮음으로써 과학보다 더 고상하고, 종교보다 더 순수하며, 그 둘보다 더 참된 새 로운 어떤 것, 즉 초월론적 철학을 직조(織造)해 낼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에 대해 듀이와 러셀은 반발하고 나섰다. 듀이는 사회에 대 한 관심을 통해 반발하였고, 러셀은 과학적이고 엄밀하며 철학이 그 렇게 되기에는 어려운 어떤 걸 창안해 내는 일을 통해 반발하였다. 이 두 사상가를 영웅으로 상정함으로 해서 미국 철학에서 주류를 이 룬 두 사상 운동[실용주의와 분석철학]은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았던 문화 생활의 양식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강박관념을 지니게 되었다. 미국 철학자들은 관념론적 사변들이 활자화되는 일이 이미 오래전에 마감되고 난 다음에도 스스로를 그러한 사변에 대항하는· 수호자로 여겼다. 그들은 자기네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 즉 전반적인 가망성에 서 볼 때 실낱 같은 신용뿐인 자기 자신들의 학문 분야 바깥에 있는 것들은 어느 것이든 죄다 <관념론적>이라고 [매도해] 불렀다. 그 결과 엘리엇T. S. E li o t이나 윌슨E dmund Wi lso n, 트릴링 L i onel Tr illi n g이나 굿맨 Paul Goodman 같은 저술가들의 문화 비평은 철학 자들의 안중에 들어올 수가 없었으며, 그런 철학자들이 가르쳤던 학 생들 중 출중한 이들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듀이의 시대가 끝 났을 때, 미국 지성인들의 도덕 감각은 철학 교수의 개입 없이 형성
되기 시작하였으며, 철학 교수들은 괜찮은 아이라면 누구나 자기네들 과 마찬가지 유형의 실용주의적 자유주의자로 장성하게 될 거라고 가정하였댜 블룸 Harold Bloom 이 적고 있듯이, 오늘날 미국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역사나 철학이나 종교를 가르치는 사람들 보다 훨씬더 많이, 과거의 현재성p resen t ness of the p as t을 가르칠 괴로운 운명을 지 게 된다 . 왜냐하면 역사, 철학, 종교는 교 훈적 교육의 무대에서 교사로서의 기능을 철회해 버렸기 때문이다. …… 10) 위대한 옛 철인들의 현재성을 가르치는 일을 어떤 교수들이 떠맡 게 되든지간에, 그 철인들은 도서관이 존재하는 한 교훈적 교육의 무 대에 현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젊은이들의 고뇌하는 양심이 존재 하는 한 교훈적 교육의 무대는 상존하게 될 것이다. 그 양심이란 18 세기의 캘빈주의나 19 세기의 일반적인 종교들과 더불어 잊혀져 버린 어떤 것이 아니다. 양심이란 것이 어릴 적에 사랑했던 것들을 일찍 저버리는 행위에 의해 자라나는 게 아니라고 할지라도, 높은 보수를 받고 있는 미국의 학자들이 예컨대 칠레나 러시아에 있는 그들의 동 료가 감옥을 지키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지금 굴욕과 고통을 감수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면 되살아날 것이다. 미국 문화는 고뇌하는 양심을 형이상학적 위안으로 다독거리려는 노력을 그만두 어야 한다고 산타야나는 소망하였지만, 그러한 양심이 실종되리라고 까지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고뇌하는 양심의 손길이 닿는 어떤 것이라도 곧장 형이상 학적 위안으로 여겨지는 것을 미국의 철학자들은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네들이 적절한 전문적 논제들을 제기히는· 것처럼 보이게 10) Harold Bloom , A Map of Mi sr eadin g (N ew York: Ox ford Un ive rsit y Press, 1975), p. 39.
하려고 위대한 옛 철 인 들 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재해석하는 반응을 내보였댜 그러한 재해석의 결과는 과거의 현존성을 희미하게 해버린 것 그리고 철학 교수 들 을 학생들과 초월주의 문화로부터 멀어지게 한 것이었다 . 오늘날 초월주의 문화와 대학의 문학과들 사이에 존재 하고 있는 유의 연계성이 홋날 대학의 철학과들 사이에도 유사하게 존재할 것인가 아닌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철학은 예전의 철학들이나 철학의 문화적 역할에 대해 관 심을 갖기보다는 분야 매트릭스를 발전시키는 일에 더 관심 갖는 일 을 아마도 지속해 나갈 것이다 . 이것이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며, 어쩌면 좋은 일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과 더불어 시작되었던 변증론의 드라마들은 지속될 것이다. 그 드라마들은, 만일 플라톤에 대해 가르치는 대가로 급여를 받는 사람들이 상연하지 않는다면, 다 른 사람들에 의해 상연될 것이다 . 그 다른 사람들은 < 철학자>라고 불리지 않고 어떤 다른 이름, 어쩌면 <비평가>로 불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 비평가>란 이름이 가령 닥터 존슨]“이 본다면 어색하듯이, 또 우리가 사용하는 <철학자>란 이름 이 소크라테스가 본다면 어색하듯이, 아마도 그들에게 붙여질 이름도 마찬가지로 어색한 어떤 것일 게댜 이것이 산타야나가 글을 썼던 시대 이래로 미국의 철학에서 벌어 져 왔던 일들에 대한 고찰을 통해 내가 내리고자 하는 결론이다. 그 것은 전문화된 철학이 초월주의 문화에 동참할 수도 있고 안 할 수 도 있지만 초월주의 문화를 타도하려고 해서는 · 안 된다고 말하는 것 에 해당된다. 나는 다시 한번 더 산타야나에게 되돌아가서 애초에 그 에게 부여하였던 두 덕목들 중 두번째 것을 추천함으로써 이 글을 마무리짓고자 한다. 그 덕목이란 미국은 곧 역사가 지향해 달려왔던 11) Dr. J oh nson: 영국의 시인, 비평가, 사전 편찬자인 Samuel Joh nson( l70 3- 1784) 에 대한 통칭 . (역주)
그 지향점에 해당된다는 확신과, 따라서 미국의 천재성을 표현하며 하나의 덕목을 마치 거대한 미국 삼나무나 미국산 방울뱀처럼 미국 인 특유의 것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미국의 철학이 해야 할 몫이라는 확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산타야나가 구비하고 있다는 점이 었댜 그와 같이 완화된 쇼비니즘 1 2) 은 듀이가 활동하던 시대에서는 인기를 누렸으며, 여전히 우리도 이따금씩 그것에 대한 향수를 느끼 기도한다. 그러나 니이버 1 3 ) 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듀이적인 철학이, 미국의 혁명과 산업혁명은 그 둘 사이에서 고뇌하는· 양심을 사라지게 해버 렸다는 가정 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또, 듀이와 그의 제자들 이 펼친 희망섞인 레토릭[修辭學]이 상당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레토릭은 미국의 사회 제도와 과학적 방법을 결합시킨 것이 인류에 게 좋은 삶을 가져다 줄 거라는 점을 정말로 깨우쳐 주진 못했다. 그 레토릭에 담긴 태도는 <실용주의와 인생의 비극적 의미>라는 제목 을 붙인 후크의 논문에 가장 잘 표출되어 있는데, 그 논문은 디옴꽈 같은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실용주의란 …… 위태롭고도 비극적인 세상에서 지성적인 사회 통제라는 예술에 의해 인간의 자유를 확대 시키고자 하는 이론과 실천이댜 그것은 가망 없는 주의(主義)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더 좋은 주의를 알지 못한다 .>141 실제로 더 좋은 주의란 없으며, 전문화된 시대의 철학지들이 예언 자적인 듀이 시대에 대해 느껴왔던 향수는 그들이 행하길 원하는 만 큼 그러한 주의를 충분히 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에서 연유한다. 하지만, 그러한 주의에 대한 옹호란 도덕 원리들을 어떻게 정형화하 느냐는 문제에 부수적일 뿐이며, 또 도덕 교육이란 하나의 주의를 선 12) Chauvin ism : 호전적, 열광적인 애국주의.(역주) 13) Rein ho ld Nie b uhr, 1892-1971: 미국의 신학자.(역주) 14) Sid n ey Hook, Pragm atism and the Trag ic Sense of Lif e(N ew York: Basic Books, 1974), p. 25.
택하고 옹호하는 문제에 부수적일 따름이다. 게다가, 비록 미국이 여 지껏 존재하였던 다른 어떤 제국들보다 더 그러한 주의를 많이 행함 에 따라 역사에서 내리막길로 치닫게 될지라도, 역사의 눈에 의해 한 나라의 철학자들이나 실제로 그 나라의 지성인들이 그 나라의 정치 적, 사회적 제도들과 마찬가지 덕목들 중의 하나로 여겨져야 할 특별 한 이유란 없는 것이다. 마치 로마법은 로마 제국에서 성취되어야 하 고 문필 문화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성취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 민주주의가 한 약속의 최종적인 성취가 미국에서 발견될 거라고 생감해야 할 이유는 없다. 또, 어느 제국의 지식인 문화가 실제로 그 성취를 이루어내든 간에 그것이 우리들 자 신의 문화와 닮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때에도 도덕철학의 교수들은 지금 정형화된 도덕 원리들에 기초하여 체계를 세울 거라고 생각할 이유란 많지 않댜 설령, 모종의 믿기 어려운 행운에 힘입어 미국이 그 자유를 손상당하지 않은 채 살아남고 또 여러 나라들의 집합 장 소가 된다고 할지라도, 동강 나지 않은 그 세계의 고급 문화가 특별 히 미국적인 어떤 것을 중심으로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그것 은 다른 어떤 것보다 특정의 어떤 것을 <중심으로>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중심이 되는 것은 시(詩)도, 사회 제도도 T 신비주의도, 심층심리학도, 소설도, 철학도, 물리학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어디에나 다 그 중심이 있으며 어디에도 그 둘레가 없는, 철두철미하 게 초월주의적인 문화일 것이다. 그러한 문화에서는 에드워즈 1 5 1 와 제퍼슨 ,161 헨리 제임스 WI 와 윌리엄 제임스 ,IH I 듀이와 스티븐스 ,19) 퍼스와 베블렌 Thors t e i n Veblen 등이 15) Jon ath a n Edwards, 1703-1758: 미국의 목사, 신학자.(역주) 16) Thomas Jef fe rs on, 1743-1826: 미국의 정치가, 제 3 대 대통령, 독립선언문의 7] 초자.(역주) 17) Henr y Jam es, 1843-1916: 미국의 소설가.(역주) 18) Wi lliam Jam es, 1842-1910: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심리학자, 헨리 제임스 의 형 . (역주)
모두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표: 그중 누가 미국인이며, 심지어 는 누가 철학자 인지 도 아마 따지지 않을 것이다. 19) Wallace Ste v ens, 1 얽 9 - 1955: 미국의 시인.(역주)
5 듀이의 형이상학
그의 생애의 거의 끝 무렵에 듀이는 그의 저서 『 경험과 자연 Ex 一 pe r ien ce and Na tu re 』 의 새 판을 쓰되 , < 제목뿐만 아니라 그 내용 도 『 자연과 경 험』 내지는 『 자연과 문화 』 로 바꾸어 > 출판하기를 소망 하였다 벤틀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듀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1) Arthu r F. Bentl e y, 1 얽 0-1957 : 미국의 철 학자, 정치학자 . 듀이와 함께 사회를 인간의 거래나 교섭으로 설명하는 교류설을 개발하기도 하였으며, 그와 공동으 로 뎃 k 과 그 대상』 을 집필하였다 . (역주)
나는 어리석게도 옛 텍스트를 집필할 때에는 그렇게 바꿀 필요성을 간 파하지 못 했 다. 그 당시 나는 철학적 용어인 < 경험 > 이란 말이 [일상의] 관행 적 인 용법으로 다시 바뀐다면 구제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는데, 나의 바람은 역사적으로 우매한 짓이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듀이는 < 형이상학>이란 용어를 복원시키려 한 자신의 시도를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 21 그가 인지하게 되었듯이,
2) 제목 변경을 제안한 것에 대해서는 Joh n Dewey and Arthu r F. Bentl ey , A P(Nheilwo s oBpr hu ian :szlw iCcko : rrResuptgo en rdse nUcen iv1e9 r3s2it-y 1 9P51re, sse,d .1 9S6.4 )R, a pt.n e 6 r4 3a n참d 조J. < A형ltm이 a 상n
학>이란 용어의 복원에 대해서는 Joh n Dewey, Exp erien ce and Ex ist e n ce: A Comment , Phil o soph y and Phenomenolog ica l Research, 9(1949), p. 712ff . 참 조
종종 < 형이상학에 관한 듀이의 대 표적 저술> 이라고 불 리기도 히 는 · 『 경험과 자연 』 이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아리 스토 텔레 스 의 『 형이상 학』 의 주요 부분 들 스 피 노 자의 『 윤리 학 』 , 로이 스 의 『 세계와 개별자 』 와 같은 전형적인 저 술들을 포함하는 장 르 [형이상 학 ]에 비 견 될 수 있 는지 를 말하기가 곤란하였다. 아주 간략히 말해서 듀이의 그 책은 전 통적으로 < 형이상학적 > 이라고 불렸던 문제 들 에 대해 그 역사 적 • 문 화적 연원을 설 명하고, 그가 생각할 때 그 문제 들 의 허 구 성i rreal i ty 을 (혹은 적어도 그 회피 가능성을) 우리가 간파하는 데 도움을 줄 여 러 가지 용어들을 산발적으로 추천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책 은 하나의 형이상학적 체계라고 생각되기보다는 형이상학이란 것 이 왜 아무에게도 필요하지 않는지를 설명해 주는 책으로 생각되는 것 이 더 용이하다.
3) 예컨대 A 며 1ur E. Mu rph y, Dewey' s Ep ist e m olog y and Meta ph ys i c s , The Ph ilos oph y of Joh n Dewey, ed. P. A . Schi lpp(Ev ansto n and Ch ica go : Tudor Publis h i ng Co., 1 939), p. 219.
그래서 그 책은 오히려 『자연과 문화 』 로 불리는 것이 마땅한 책이 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것은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 형이상학 』 중 제 1 권이나, 칸트의 「반성 개념의 애매성」, 헤겔의 『 정신현상학 』 , 러브 조이Art hur Love j o y의 『 존재의 대사슬 』 , 푸코의 『 사물의 질서 』 와 같 은 저술처럼 더 적절한 이름이 없어서 우리가 관념의 역사hi s t ory of i deas 라고 부를 만한 어떤 것에 비견될 저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렇게 간주될 때 우리는 그 책을 < 경험적 형이상학 > 이 아니라, < 형 이상학>이라고 불렸던 문화 현상에 대한 역사적-사회학적 연구서라 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그 책은 [듀이의 다른 저서들인] 『철학 의 재건 』 이나 『확실성의 추구 』 에서 제기된 그 전통에 대한 논쟁적인 비판의 또 다른 형태로 간주될 수 있다.
하지만, 듀이는 그의 일생의 대부분의 기간중에는 이와 같이 보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댜 어떻게 해서든 그는 조 H 넋} 하나의 형이 상학적 체계 를 저술하길 < 원하였다 >. 평생토록 그는 철학에 대한 치 유적인 견지와 그것과는 판이한 또 다른 견지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여기서 또 다른 견지란 철학이 < 과학적>, < 경험적 > 이게 되어 진지 하고, 체계적이며, 중요하고, 건설적인 어떤 일을 해내게 됨을 말한 다. 듀이는 철학이란 곧 문화 비판이라고 종종 묘사하기도 하였지만, 그는 스스로를 [문화에 대한] 훈수꾼이나 치료사나 지성사가(知性史 家 )라고 생각하는 데에 결코 홉족해 하지 않았다. 그는 두 견지의 일 을 모두 해내길 원하였다. 산타야나가 『경험과 자연 』 에 대한 서평에 서 < 자연주의적인 형이상학 > 이란 말은 용어 자체만으로도 모순된 것이라고 지적하자, ” 듀이는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댜 나의 < 형이상학 > 의 범위와 방법은 이렇다: 그런 일들을 있게 하는 예 술, 과학, 기술(技術), 정치, 종교 등의 제도와 더불어 인간의 고통과 줄 거움, 시도와 성패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또한 항구적인 특징들은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의 고유한 특징들과 서로 상통한다 . 그 방법은 , 가령 어떤 탐구자가 특정한 관찰과 실험 그리고 계산과 해석을 할 때, 이미 있는 가 용한 아이디어들을 활용함으로써 제한된 범위 내에서 자연의 일부 측면에 관해 무엇인가를 그가 정말로 알아내는 데에 성공했다고 결론짓는 것과 조금도 다룰 바가 없다. 만일에 『경험과 자연 .!l 에 조금이라도 참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상식인들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형이상학>에 그 방법을 활용한 것이 아니라, 철학을 골치 아프게 해왔던 특별한 부류 의 문제들을 이해하는 일에 그 방법을 활용한 점에 있다 .5) 4) Dewey' s Natu ralist ic Meta ph ys i c s , repr int e d in Schi lpp, 앞의 책 , p. 2 45. 5) Joh n Dewey, Half- H ea rted Natu ralism , Jou rnal of Phil o soph y, 24 (19 'l7 ), p. 59.
이 구절에서 듀이는 , < 나는 철 학적 전통의 죽은 나뭇가지들을 치 워내고 있으며 > 그리고 < 그렇게 하기 위해 나는 내 자신의 강력한 창안물인 한 방식, 즉 과학적이며 경험적인 방법을 철학에 적용하는 방식을 시용하고 있다 > 라고 동시에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만, 두 세대에 걸친 듀이 평론가들은 도대체 어떤 방법이 실험실의 과학 자가 채용하는 방법과 < 조금도 다를 바 > 없으면서도, <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간의 차이에 구애됨이 없이, 모든 종류의 존재에 의해 구현된 일반적 속성의 특징들에 대한 진술 >6) 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말해야 할지 곤혹스러웠다. 또 , 그러한 일반적 속성의 특징들을 제시 했을 때 어떻게 해서 전통적인 철학 문제들이 진부하지 않게 되거나 해소될 수 있는지도 분명치가 않았다 . 듀이의 사상에 내재된 이러한 긴장을 달리 표현하는 방식은, 문화 내에서 철학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듀이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서 술한 후크의 단평에 암시되어 있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언제나 이른바 실재의 본성으로부터 연역되었다 는 미명 아래 현존하는· 일련의 사회 제도들을 정당화하거나 혹은 평가 절 하하기 위해서 얼토당토않는 특정한 가치 체계들을 우주에 강요하려는 폭 력적이며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시도들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형이상 학적 교설도 일단 그 껍질을 깨뜨리고 나면, 드러나는 것은 검증 가능한 지식이 아니라 노골적인 편견에 불과하다. ……철학의 항구적인 주제는 바로 사물들과 가치들 사이의 관계였다 . 7 1 이 견해를 갖는다면 우리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듀이의 형이상 학은 그가 노골적인 편견들과 가치들로부터 추상해 내어 <경험적> 6) Joh n Dewey, Exp e ri en ce and Natu re (New York: W. W. Nort on , 1929), p. 412. 7) Sid n ey Hook, Joh n Dewe y(N ew York: Joh n Day, 1939), p p. 34-35.
인 방식으로 형이상학을 하는 길을 찾아냈으므로, 사회적 가치들에 관한 노골적인 편견들을 지닐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전통적 인 형이 상학>과 구별되거나, 그렇지 않고 그가 <모든 종류의 존재에 의해 구현된 일반적 속성의 특징들>을 운위하기에 이르렀다면 듀이는 약 간 오도된 신념에 빠져든 것이다. 이 딜레마의 첫번째 뿔은 듀이주의자들 중 누구도 택하기 를 원치 않을 것이댜 그러므로 듀이에 관한 최선의 길은, 듀이는 플라톤처럼 <모든 시대를 통찰하며 영원성을 보는 관람자>인 체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철학을 (심지어는 어쩌면 가장 고고하고도 순수한 형태의 철학 인 형이상학마저도) 사회 변화의 도구로 활용했다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 그런데 형이상학에서 <경험적 방법>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를 우여곡절 끝에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설명은 <모든 종류의 존재에 의해 구현된 일반적 속성의 특징들>을 제시하는 학문 분야에 전통적으로 속해 왔던 고압적인 중립성과는 (듀이 자신의 원 리들에 의하면) 관련되지 <않아야> 한다 . 설령, 『경험과 자연 』 에서 거론된 < 관찰과 실험>이 무엇인지롤 듀이가 설명<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관찰과 실험은 사회적 가치와 연관된 어떤 문제들을 해결 하기 위한 도구라는 듀이 자신의 언급이 그의 저서에 대해서도 마찬 가지로 적용되게 해야 한다. 만일에 내가 말했듯이, 『경험과 자연 』 의 실제 내용이 주관_객관, 정신-대(對)-물질 등과 같은 사이비 <철학 문제들 > 이 어떻게 야기되며 어떻게 해소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일련의 분석이라면, 그 프로젝트의 성격은 분명해진다 . 하지만, 문화 비평으 로서의 철학에서 그와 같은 모든 저술들의 위대한 선구였던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관찰과 실험>에 대한 이야기 가 그 프로젝트의 달성과 무관하다는 점도 역시 분명해진다 . 이 논점은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논리실증주의자들의 태도와 듀이 의 태도를 후크가 다음과 같이 대비시켜 말할 때 잘 부각되고 있다.
듀이는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 들 의 대 부분은 사이비 문제였다는 것, 바 꿔 말해 그것들은 설정된 문제 자체로만 보더라도 해결될 가망이 없는 것 이었음을 밝혀주었다. 똑같은 일을 논리실증주의자들은 훨씬더 형식화된 방식으 로 행하였으나 거기에서 멈추었다. 그러나 원리상 어떤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결코 딱 들어맞게 될 수 없는 형식화에 대한 논란 의 지속이 부질없음을 논리적으로 증명한 곳 에서 멈추는 대신에 , 듀이는 성 과없는 말씨름의 근저 에 놓여 있는 진정한 갈등 이 무엇안가를 계속 탐구 해 나 갔 다 . S I 이것이 연관된 차이점들에 대한 적확한 설명으로 보이며, 미국 철 학사에서 지난 40 여 년간의 다양한 변화 양태를 설명하는 데에도 도 움을 준다. 듀이식의 자연주의는 한때 주도권을 누린 다음에 논리경 험주의가 각광을 받던 시절의 수십 년 동안에는 미국 철학의 무대 전면에서 밀려났다. 러셀, 카르납, 에이어A.J. Ay er , 블랙 Max Black 등이 사이비 문제들의 < 사이비성 > 을 듀이보다 더 잘 보여주었다고 간주한다면, 이 점은 쉽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 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지닌 결함에서 연유한 장점 덕분이 었다 . 오늘날 (논리경험주의의 가정에 대한 예컨대 콰인과 셀라즈의 비 판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들에게는 논리경험주의 운동의 독단과 임 의성으로 보이는 것이 [과거에] 논리경험주의가 전통적인 것을 매우 예리하고도 효과적으로 비판하게 해주었던 바로 그것이었다. 논리경험주의자들은 철학을 안전한 학문의 길로 들어서게 하려는 소망에서 칸트를 추종하였으며 마치 헤겔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 럼 글을 썼는데, 그들은 데카르트, 로크, 칸트 등에 공통된 [숨은] 가 정들을 유지한 채 결론을 도출하여, 전통 철학의 문제 설정 방식을 불합리한 것으로 매도하였다. 그들은 확실성의 추구가 함축하는 바를 8) 같은 책, p. 44.
밝히고 , 데카 르트 의 관람자 지 식 론 과 오 스 틴J. L. Aus ti n 이 < 감각적 잡 다( 서[多 )의 존 재 론> 이라고 불렀 던 것 을 일단 수용하면, 흄의 결론 들 [회의 론을 벗어나기 어립다 는 것 ]에 저항해 낼 방도가 없다 는 점을 밝힘으 로 써, 듀이가 분 명하게 하지 못 했던 것 바꿔 말해 근대의 위대 한 철 학자 들 에게 공 통 된 그림이 왜 포기되어야 하는지 를 분명하게 했다. 하지만, 오 스 틴이 에이어 를 반대하고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러셀 과 무어와 자신의 초기 입장에 반대해 손가락질했던 것처럼, 논리경 험주의자 들 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의 입지를 파괴시켰다. 논 리경험주의보다 더 단명했던 < 옥스포드 일상언어학파 > 조차도 논리 경험주의가 스스로 자처했던 것처럼 당당하게 < 논리적 > 중립성의 관점에 서서 전통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얼마나 전통을 불합 리한 것으로 매도했는지 를 간파하게 도와준다. 듀이는 더 넓은 범위 를 다루며 전통을 보는 안목을 지녔던 까닭에 못 해낸 일을, 논리경 험주의자들은 그들이 전제로 삼았던 이원론들9 1 의 편협성과 인위성 덕택에 해낼 수가 있었다. 반면에 < 성과 없는 말씨름의 근저에 놓여 있는 진정한 갈등 > 을 듀이가 탐구해 간 것은 그 장점에서 연유한 결 함을 갖고 있었댜 그 결함이란 데카르트적-흄적-칸트적인 가정들은 < 그 자체로 볼 때 > 자기 비판적이란 점에 깊이 관심 갖지 못한 것 을 말한댜 실증주의자들과 후에 < 옥스포드 [일상언어학파] 철학자 들 > 은 그들의 비전이 훨씬더 편협했던 덕택에 이와 같은 내적 모순 점을 듀이나 그의 추종자들에 비해 훨씬더 예리하게 부각시켰다. 후크의 설명은 듀이에 관한 관심이 최근에 다시 일고 있는 점을 해명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사이비 문제들의 사이비성을 들춰내는 일은 이제 와서는 친숙하다. 자기네들의 영감의 샘이 메마르게 되면 늘 그렇게 했듯이, 영어권 철학자들은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 9) 가령 주관과 객관, 논리와 경험, 분석 명제와 종합 명제 , 사실과 가치 등 . (역주)
자 대륙철학을 둘러보고 있는데, 그 들 이 거기에서 찾아내는 것은 바 로 듀이가 이미 소망했던 것이다 . 1930 년에 듀이는 이렇게 썼다. 지적 예언이란 위험 스 런 일이다. 하지만 , 시대의 징후 들 을 내가 제대로 읽었다면, 과거에 수학과 물리학이 사고의 대상 들 에 대해 그렇게 해왔던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장차] 사회과학과 예 술 의 의의가 반성적 관심의 대상이 될 때 그리고 그 것들 의 의미가 충분히 파악될 때 , 철학에서 다음 시대의 종합적인 사조가 출현하게 될 것이다 . ) OJ 하버마스와 푸코 같은 저술가들에게서 우리는 < 사회과학이라는 아이디어>를 태동시켰던 문화의 모형( 母 型)에 대해 그리고 사회 • 정 치적 물음들에 관한 논쟁에서 사회과학의 모호한 자기 이해가 야기 시킨 문제점들에 대해, 듀이가 관심 갖기를 원했던 것과 같은 유형의 관심을 발견한다. 데리다와 같은 저술가들에게서 (그리고 데리다의 저술을 찬양하는 카벨 S tanl e y Cavell 과 단토와 같은 미국 철학자들에게 서) 우리는 철학과 소설, 철학과 연극, 철학과 영화의 관계에 관한 물 음들이 다뤄지며 [그 과정에서 그 물음들이] 철학과 수리물리학이나 내성심리학의 관계에 관한 전통적인 칸트식, 후설식, 혹은 카르납식 의 물음들을 대체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러한 물음들이 제기 된 것은 철학의 역사에서 볼 때 이번이 처음안 것은 분명코 아니다. 가령 니체, 딜타이, 카시러 Erns t Cassir er 등을 생각해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의 모델을 <수학적이며 물리학적인 과 학들>에 두고 그러한 과학들의 자료와 방법을 철학적 탐구의 주요한 장소로 보는 칸트적인 강박관념을 우리가 마침내 극복해 냈으므로, 이제 우리는 헤겔적인 역시주의의 시기를 맞아 철학의 황금기에 접 10) Joh n Dewey, From Absoluti sm to Ex perime nta lism (19 30), rep rint e d in jo hn Dewe y on Exp e ri en ce, Natu re and Freedom, ed. Rich ard J. Bemste in( New York: The Lib r a ry of Lib e ral Arts, 1960), p. 18.
어들게 될 것이라는 따위의 예언을 이 자리에서 하고 싶지는 않다. 고백건대 나는 일이 그렇게 진행되기를 <소 망한다 > . 허나, 그 소망 이 헛된 것일지도 모른다 . 지금의 이 맥락에서 나는 단지 만일 당신 이 칸트로부터 헤겔로 전환하며, <경험의 형이상학 > 으로부터 문화 발전에 관한 연구로 전환중이라면, 듀이야말로 당신이 다시 읽기를 원하는 철학자라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이러한 대비점을 고려해서, 최근의 철학적 유행에 대한 곁가지 논 의를 벗어나, 이제 내가 논의코자 하는 듀이 사상 내에서의 긴장에 관한 문제로 다시 돌아가기로 한댜 언급된 그 긴장을 한번 더 부연 설명하기 위해, 듀이가 다음과 같은 지독한 말로 전통 철학을 논평했 던 것을 생각해 보라 <철학은 실재에 대한 한 가지 지식으로 그 기 능을 누려왔는데, 그러한 사실은 철학으로 하여금 과학에 대한 보완 이 아니라 경쟁자가 되게 한다 .>Il l 그런데 만일 이와 같은 사고의 노 선을 일관되게 추구하려면, <경험의 가능성에 대한 선험적인 설명> 을 이미 진심으로 포기했듯이, 우리는 <경험의 형이상학>이라는 발 상도 버려야만 한다. 위에서 인용된 것과 흡사한 여러 구절들이 듀이 의 가장 훌륭한 점들을 대표한다고 생각되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구절들과 그가 산타야나에게 응답했던 <일반적 특징들>을 운위한 구절을 조화시킬 방도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컨대 <존재에 관 한 일반 이론으로서 형이상학의 목표는 ……기본적인 연관 유형들과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발견하는 것 >1 21 이라고 서술했던 호프슈타터 11) Joh n Dewey, The Qu est f or Certa int y (N ew York: iVIint o n , Balch, 1929), p. 309. 나는 이 책의 논문 3 에서 듀이의 사상에 담긴 이 요소와 <형이상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 사이의 유추 를 추적하였다. 12) Albert Hofs ta d te r , Concern ing a Cert ain Deweya n Concep tion of Meta - ph ys i c s , Joh n Dewey: Philo sop h er of S dence and Freedom, ed. Sid n ey Hook(New York: Dia l Press, 1949), p. 269. 이런 유형의 견해에 대한 비판은 랜달Jo hn H. Randall, J r 에 대한 후크의 논의 를 볼 것: The Qu estf or B ein g (New York: St. Ma rtin's Press, 1961), pp. 163ff .
AJb e1t Ho f s t ad t er 처럼 형이상학자-로서의거두이에 대해 공감히는· 해설가들은, 우리가 왜 그토록 일반화된 차원의 학문 분야를 <필 요 로 하는지>, 또한 그와 같은 <발견> 의 결과들이 어떻게 해서 하찮 은 것이 아닐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댜 듀이 자신을 포함해서 그 누구라도 소설가, 사회학자, 생물학자, 시인, 역사가 등에 의해 다뤄지지 않고 남겨진 < 기본적인 연관 유형 들>을 전담하는 어떤 학문 분야가 존재한다고 과연 믿을 것인가? 철 학자가 행하기를 우리가 원하는 것이란 고작해야 당대의 소설, 시, 역사, 사회학 등을 좀더 큰 단위로 종합하는 것일 것이다 . 하지만, 그 러한 종합은 사실상 모든 부문에 있는 <어느 학문 분야에 의해서 도> 제시되는 것이다. 단순히 < 연구의 수행자>에 머물지 않고 지성 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모종의 종합에 도달하는 것을 일 컫는댜 이렇게 볼 때, 오로지 종합적인 학문 분야의 전형을 제공해 주는 <철학>이라는 어떤 특별한 것이 존재하며 지성인의 전형은 곧 <진정한 철학자>라 불리는 인물이라는 신화만이, 전문적인 철학자 가 <모든 존재의 일반적 속성의 특징들>에 대한 목록을 그려내지 못하거나 <기본적인 연관 유형들>을 발견해 내지 못하면 그 철학자 의 저술은 아직 미완이라고 말한다 .13) 여지껏 나는 전통에 대한 치유에 반대되는 <경험의 형이상학>이 라고 불릴 만한 것을 『경험과 자연』에서 찾아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해 왔다. 철학의 본성과 기능에 관한 듀이 자신의 견해가 그런 것 을 배제한다는 근거에서. 이를 확인하려면 듀이가 그 저서에서 경험 에 대해 실제로 말한 바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나는 잠시 후에 그 13) 여기에서 다시 한번 더 하이데거의 경우와 유용하게 유추될 점이 있다. <기본 적인 연관 유형들>을 발견해야 한다는 발상은 바로 하이데거로 하여금 그의 저 서 『 존재와 시간』에 실존 범주의 목록들을 그려넣게 하였던 발상과 같다. 이것 이 그가 폐기시키고 싶어했던 <인본주의 hum ani s t> 전통의 형이상학의 일부임 을 깨닫고서 후기 저술에서 그는 그와 같은 어떠한 프로젝트도 단념하였다 .
렇게 할 작정이다 그에 앞서 나 는 듀이의 초기 견해 중 하나에 대한 설명을 삽입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 심리학으로서의 철학 > 이 라는 생각인데, 이 생각은 듀이가 1880 년대에 견 지 하였으며 그것에 대해 핫지슨 Shadwo rt h Hod g son 과 주로 논쟁하였다. 듀이의 철학 경력의 초기로 거슬러가 보면, 내 생각으로는 그가 왜 < 경험의 재서 술 > 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 그리고 그가 그러한 재 서 술 을 왜 <철 학의 모든 것 > 이라고 서술코자 했는지를 밝혀줄 것이 다. 듀이는 여우형의 철학자라기보다는 고슴도치형의 철학자였다 . l11 듀이는 단 하나의 비전을 가다듬고 재서술하는 일에 일생을 보냈으 며 , 그의 만년의 저술들에서 발견된다고 내가 주장했던 그 긴장이 그 가 30 대에 쓴 저술들에 벌써 나타나고 있다. 듀이가 젊은이다운 패기로 < 심리학 속에는 과학과 철학, 사실과 이유가 한데 어우러져 있으므로, 심리학은 철학의 완성된 방법이다> 라고 주장한 데에 분개하여 반발하면서 핫지슨은 이렇게 썼다. [듀이의 논문에 있는] 그 구절은 심리학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 바로 옆에 적혀 있다. 그러나 방법으로서 심리학의 요체는 그것이 경험을 절대적 전체로 다룬다는 점, 가령 신체진화론자들처럼 전체를 설명하기 위해 경험의 일부 중 어느 한 측면을 설정하지 않으며, 예컨대 이른바 경험심리학자 들처럼 경험의 외부나 초경험적인 어떤 것에 근거하여 경험의 본성을 결정지으려 하지도 않는디는 점이다. 여기서 그 방법은 부정적 방식으로만 서술되어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14) 이 표현은 벌린 Is ai ah Ber li n 이 그의 톨스토이 연구서에서 한 말을 따온 것으 로 < 고슴도치 > 는 한 가지 큰 것을 추구하는 사람을, <여우 > 는 작지만 많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을 빗댄 표현이다.(역주)
는 신체진화론자 들 과 다 른 한편으로는 경험심리학자들이 구현하고 있는 잘못을 회피하는 지침으로 이뤄져 있다. 반면에 어떻게 탐구를 해나갈 것 인가에 대해서는 백지 상태이다 . 이것이 바로 심리학을 선험철학과 동일 시할 때 우리가 기대해야 할 바인 셈이다 .1 51 핫지슨의 비판은 전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 자연주 의 형이상학>의 가능성에 대한 산타야나의 비판과 유사한 것으로서 듀이의 저술에 반복해 나타나는 홈을 잘 꼬집어 밝혀준다. 그 홈이 란, 실제로 제기하고 있으며 또 제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는 다만 전통에 대한 비판이 전부인 때에도, 그가 당돌하고도 새로운 어떤 적 극적인 프로그램을 발표해 버리는 습관을 말한댜 <방법으로서의 심 리학>이라는 것은 사실 듀이가 채용했던, 소리만 컸지 속은 텅 빈 일련의 슬로건들 중 첫번째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특별히 왜 그 슬 로건이 그에게 매력적이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핫지슨에 의해 공격받고 있는 여러 논문들 중 하나를 듀이는 다음과 같은 말 로 끝맺고 있다. 이 모든 문제들의 결론은, <인간과 같은 존재>는 자기 의식 때문에 하 나의 개별화된 우주이고, 따라서 그의 본성은 철학의 고유한 [탐구] 재료 인 것이며, 그 전체성이야말로 유일한 [탐구] 재료이다. 심리학은 이러한 본성에 관한 과학이며, 그 속에 포함되거나 그것에 관한 어떠한 이원론도 지지될 수 없다 .l 6 J 15) Shadwort h Hodg so n, Illusory Ps y cholo gy(이 논문은 듀이에 대한 공격으 로서 1886 년도의 Mi nd 에 최초로 실렸다), rep rint e d in The Early Works of Joh n Dewe y, l(Ca rbondale: South e rn Illin o is Un ive rsity Press, 1969). 이 구절은 그 책의 p. !v i에 수록되어 있으며, 거기서 인용된 듀이의 두 구절은 각 각 pp. 157-158, pp. 161-162 에 수록되어 있다. 16) The Early Works of Joh n Dewe y, 1, pp. 171-172.
이 구절과 그 책에서 거기에 이르는 앞의 여러 페이지들에서 우리 는 다음과 같은 독트린들을 얻게 된다 (1) 철학이 직면해 왔던 대부 분의 문젯거리 들 은 지지될 수 없는 이원론 들 에서 나온다. (2) (흄, 버 인, ) 핫지슨 등에 의해 대표되는) 전통적인 경험론은 개념 conce pt s 을 지각p erce pt s 과 분리시켜 버리는 < 경험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을 제안하고 있댜 1 8) (3) 경험론이 개념에서 지각을 분리시키고 이에 따 라 의식에서 자기 의식이 분리되어 야기된 그러한 이원론들을 극복 하는 길은,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지 않다고 말해 주는 학문 분야인 < 심리학 > 이댜 핫지슨에 대한 응답에서 듀이는 심리학의 방법이 무 엇이냐는 핫지슨의 물음에 결코 제대로 답하지는 못하지만, 부드럽게 다음과 같이 말한댜 내가 개념 질서 이외에 지각 질서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또 개념 질 서가 보유한 내용과 동떨어진 행위자나 담지자를 알지 못한다고 말할 때, 나는 독일식의 선험론자가 아니라 나의 초라한 기준에 따른 심리학자로서 말하고 있다. 심리학자로서 나는 각각의 것을 다른 것에서 추상하여 분석 해 낼 가능성을 보며, 내가 그러리라고 핫지슨이 믿는 바처럼 만일 내가 그 분석 결과들을 실재하는 것으로 승격시키기를 좋아한다면, 구체적인 경험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이 현실에서도 판이하게 다른 것들이라고 마땅 히 추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이 내게 가르치는 바에 충실하자면, 나는 그것들이 존재하는 어떤 실재 -의식 경험 -의 여러 측면들, 죽 그것을 분석해 도달한 여러 측면들이라고 고집해야 한다 . 1 9) 17) Alexander Ba in, 1818-1903: 스코틀랜드 철학자, 심리학자.(역주) 18) <경험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 혹은 그보다는, 부분적 경험에 대한 설명이 총체 인 것마냥 기대되는> 견해로서의 <경험론>이란 관념에 대해서는 The Early Works of Joh n Dewey, l, p. 161 참조 19) 같은 책, 1, pp. 171- 17 2.
물론 듀이에게 이것을 가르쳤던 것은 < 심리학 > 이 아니라 오히려 그린이었댜 그린은 칸트가 흄을 비판한 것, 즉 제아무리 요술을 부 리는 지각이라도 자기 의식을 산출해 낼 수 없다는 비판을 되풀이하 는 데에 심혈을 쏟았으며 , 영국 경험론자가 주장하는 감각적 인상이 라는 발상은 생리학적인 인과 과정을 자기 의식적인 지각 신념으로 혼동한 것이라는 교훈을 이끌어냈댜 .!O I 하지만, 듀이는 그린의 그 경 험 분석이 베인이나 핫지슨이 행한 흄적인 설명보다 더 나은 분석이 라는 데에 만족할 수 없었다. 듀이는 그린이 말하는 것도 경험 자체 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바라고 고집할 필요가 있었다.
20) T. H. Green, Works, l(Lo ndon, 188 .5), pp. 13-19 참조 이 구절에 담긴 그 린의 논점은 핫지슨이 비판하고 있는 듀이의 논문들 가운데 하나에서 공공연하 게 나타나 있다( The Psyc h olog ica l Sta nd po int , The Early Works of Joh n Dewe y, l, pp. 125-126). 또 듀이가 가끔씩 그린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음을 주목할 것(같은 책, p. 153). 흄에 대한 그린과 듀이의 논점 중 핵심적인 것들을 현대적인 외투를 입혀 놓은 견해는 Wi lfrid Sellars, Emp iricis m and the Ph ilos oph y of Mind , sect. VI(repr int e d in W. Sellars, Sc ien ce, Per- cept ion and Realit y(L ondon: Routl ed g e and Keg an Paul, 1963) 와 J. Bennett, Locke, Berkeley and Hume(Ox ford : Ox for d Un ive rsity Press, 1971), sect. 4 참조
우리는 만약 자기 의식이 <경험된 사실>이 아니라면, 바꿔 말해서 만 약 자기 의식이 심리학의 영역을 구성하는 한 개별자에 의한 우주에 실현 되는 실제의 국면이 아닐 경우에, 그 점이 철학에 끼치게 될 효과가 무언 지를 살펴봄으로써 문제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그 효과 는, 재론하지만, 철학의 성격에 관한 어떤 이론 아래에서도 철학이 가능하 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너무 자주 반복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철학은 다 만 사물들을 영원의 관점에서 [sub sp e c ie aete m i tatis: 스피노자의 용어 에서 따온 말] 또는 보편적인 질서i n ordin e ad un i versum 에서 보는 것 으로 이뤄졌다. ......그 러므로 자기 의식이 심리적 경험에 관한 것임을 부 정하는 일은 철학의 가능성조차도 부정하는 일이다 .2 ))
21) The Early Works of Joh n Dewe y, l, p. 152.
비록 듀이는 철학 에 대한 이러한 정의를 곧 철 회하였지만, 다 른 이 들 이 경험에 대해 말한 것은 분석의 자료와 분석의 결과를 혼동한 것인 반면에, 경험 에 관해 자기가 말했던 것은 경험 자체가 어떻게 생겼는지 를 묘사한다는 생각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선험적인 형이상학자였을지 모르나, 듀이는 <초 라한 심리학자 >였 다. 다른 철학자들은 < 분석의 결과를 실재하는 존재로 승격시키기 > 때 문에 여러 형태의 이원론들을 산출한다고 그는 평생토록 고집하였다. 그러나 듀이 자신이 제안한 바와 같은 유의 경험에 대한 반이원론적 설명은, 정말로 사실 자체 d i e Sache selbs t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비록 그는 자신의 고유한 <철 학적 방법 > 을 위해 < 심리학 > 이란 용 어를 포기하였지만, 그것을 훨씬더 애매한 관념인 < 철학의 과학적 방법 > 이라든가 < 형이상학에서의 실험주의 > 등으로 대체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의 논적들을 가리켜, < 전체 경험, 즉 반 성적 경험의 방법과 그 결과에 의해 형성될 수 있는 일종의 형식인 전체 경험의 우선성과 궁극성 -통제되지 않는 형태로 주어지므로 우선적이고, 더 잘 규제되고 의미 있는 형태로 주어지므로 궁극적인 ―에 대한 인지를 포기하였기 >221 때문에, 이원론을 내세우는 사람 들이라고 항상 고집스레 주장하였다. 1880 년대에 핫지슨을 격앙시켰 던 것이 1930 년대의 다른 비판자 세대들을 격앙시켰다. 이 비판자들 은 전통적인 경험론과 합리론에 대해 듀이가 제안했던 원인 진단과 치유책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환영을 표했으나, 이원론에서 해방된 철 학적 말투를 만들고자 하는 듀이 자신의 <건설적>인 시도에서 그리 고 듀이가 그의 논적들에 비해 자기의 방법이 더 <경험적>이라고 주장한 바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의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듀이의 아주 초기 프로그램과 방법의 한 형태에 대한 이 고찰을 마무리하자면, 그의 말마따나 듀이가 일단 <헤겔주의로부터 떠밀려
22) Joh n Dewey, Exp e ri en ce and Natu re , p. 15.
서> i1 ) 거기에서 벗어났더라면, 경험론에 대한 칸트-헤겔 - 그린의 비 판이 인간 이해에서 핵심이라는 그의 예전 신념에도 충실하고 , 또 우 주를 영원의 관점에서 보려는 철학에 대한 그의 커져 가는 불신에도 충실하기가 얼마나 손쉬웠겠는지를, 내가 앞에서 인용했던 구절들로 부터, 우리가 간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 갈등에 대한 듀이 의 해소책은 이렇게 말해질 수 있다: < 일반적 특징들 > 을 통해 경험 을 파악할 수 있는 어떤 관점이 틀림없이 있을 터인데, 그 특징들이 일단 인지되고 나면 전통적인 철학 논쟁의 따분한 주제였던 주관_객 관, 정신-물질 등의 이원론을 야기시킨 오도적인 방식은 더 이상 서 술되지 못할 것이다. 이 견해는 아우구스티누스 St. Au g us ti ne 나 스 피노자가 <영원성>이란 관념을 사용하면서 배제시켰던 시간성과 우 연성을 틀림없이 강조할 것이므로 영원의 관점이 될 수 없다. 하지 만, 그것은 미래의 탐구에 대한 영구적이며 중립적인 모형( 母 型)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닮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은 자연주의 형이상학은, <이것이 바로 이원론자의 분석이 가해지기 전 에 경험이 실재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바이다 > 라고 말할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철학은 한편으로는 <독일식의 선험철학>을 향한 모 든 유혹을 일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젊은 듀이가 헤겔에게서 발견했던 <거대한 해방감과 자유 > 2 ” 의 혜택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23) 이 구절은 듀이의 자전적안 에세이 From Absoluti sm to Expe rime nta lism , repr int e d in Bernste in, 앞의 책, p. 12 에서 따온 것이다. 그것이 인용된 페이지 에서 듀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날카로운 비판자들이 때때로 참신한 발견이 라고 언급하는 것, 죽 헤겔을 알게 된 것이 나의 사고에 영속적인 침전으로 작용 하고 있다는 점을 니는 부정하기는 고사하고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 > 24) Joh n Dewey, From Absoluti sm and Ex perime nta lism , p. 10.
헤겔에게도 충실하면서 <자연주의>에도 충실코자 하는 어떤 생각 이 듀이가 『경험과 자연』에서 스스로 설정한 프로젝트의 배경이었으 며 , 젊은 듀이룰 이렇게 되돌아보는 것이 이제부터 내가 그 저서에 대해 비판하고자 하는 논점들의 신빙성을 더해주는 데 도움이 되기
를 바란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일반적인 비판은, < 자연주의 형이 상학 > 은 용어 자체만으로도 모순적이라는 산타야나의 주장을 반복 하는 일이다 이 논점은 어쩌면 누구도 로크J ohn Locke 와 헤겔 양자 에게 모두 봉사할 수 없다는 말로 가장 잘 표현될 것이다. 어느 누구 든 만일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은 자기가 처한 역사적 시기의 변증법 적인 상황, 즉 자기 시대 인간의 문제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는 해 겔의 견해에 동의한다면, <‘경험’의 포괄적 통합>이라 불리는 어떤 것에 대한 <경험적> 설명을 제시하지도 못할 것이며, 그것을 <철학 적 사유의 출발점인 통합된 단일체 > 251 로 간주할 수도 없을 것이다. 반면에 로크처럼 우리는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서 초연해질 수 있으 며, 단순한 경험들에서 복합적인 경험들이 출현되는 것을 검토하는, < 평이하고도 역사적인 방법 > 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댜 인간이건 하급 동물이건 구조를 지닌 생리학적 유기체가 적응을 해가 며 생명의 유지를 위해 물질들을 사용한다는 점은 부정될 수 없다. 대뇌 와 신경계는 행동 수행을 위한 일차적 조직인데, 생물학적으로는 일차적 경험도 그에 상응하는 유형이라고 위배됨이 없이 주장될 수 있다 . 따라서 역사적이며 자연적인 연속성이 손상되지 않았다면, 인식적인 경험은 반드 시 비인식적인 것 내에서 연유한 것이다 프' 또, 경험의 <일반적 특징들>에 대한 적절한 설명은 생리학과 사 회학을 가르는 구분-한편으로는 인과 과정과, 다른 한편으로는 인과 과정들이 이루어낸 자기 의식적인 신념과 추론 양자 간의 구분 ―올 무시하고 가로질러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듀이가 그랬듯이] 『경험과 자연』에서 <자연, 생명 그리고 신체와 정신>이라 25) Joh n Dewey , Expe r ien ce and Natu re , p.9 . 26) 같은 책, p. 23.
는 제목의 장( 章 )을 쓸 수 있었 을 것이며, 또 식 물 과 신 경 계와 물리 학자에게 동등하게 적용 될 어떤 말투 를 발전시키고자 시 도 했 을 것이 댜 T, ) 그러나 다윈의 후원 아래 이루어진 이러한 로크적인 사고 방식으 로의 복귀는 듀이가 그린에게 신세지고 있었던 다움과 같은 통찰에 정면으로 배치된 것이었다 . 그 통 찰 이란, 지식의 선행 원인 들 을 서술 하는 어휘와 어떤 주장을 지식으로 정당화하려고 제시하는 어휘를 한꺼번에 추구하여 인간 지식에 대한 이해를 도모코자 하면 얻는 것 이 하나도 없다는 통찰을 말한다 . 듀이의 자연주의 형이상학은 로크 가 말한 < 평이하고도 역사적인 방법 > 의 최신판을 제시함으로써 인 식론적인 문제들을 제거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그린과 헤겔이 간 파했으며, 듀이 스스로도 < 형이상학 > 을 행하면서 옆길로 빠진 때를 제외하고는 완벽하게 잘 간파했던 점은, [지식의] 정당화는 사회적 실행 및 인간의 필요와 동떨어진 다른 무엇에 반드시 기초 를 두어야 한다는 그 가정을 제거함으로 해서 인식론적인 문제들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었댜 듀이가 그렇게 말하기를 바라듯이, 지식의 획득은 곧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라면 신경계와 사람들 사이에, 혹은 <경험>과 <자연> 사이에 어떤 < 연속성>을 굳이 찾 아내야 할 필요는 없다 . 가령 어떤 행동이 우리가 취할 수 있었던 최 선의 것이었음을 안다는 우리의 주장을 정당화하려 할 때, 대뇌가 <행동 수행의 조직>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은, [행 동을 수행하는] 대뇌를 [설명할 때 그것을] 구성하는 소립자들 자체 도 어떤 행동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 찬가지다. 요컨대 듀이는 철학적 이원론들에 대항하는 두 가지 상이한 방식 27) 듀이와 벤틀리가 [1949 년에 펴낸 그들의 공저인] 『앎과 그 대상K now i n g and the Known J 에서도 여전히 추구하였던 그런 유의 말투를 말한다 .
을 혼동한 것이댜 첫째 방식은 그 이원 론 이 특별한 문화적 이유 들 때문에 전통에 의해 부과된 것이나, 이제는 그 유용성이 다했다고 지 적하는 것이다. 이것은 헤겔적인 방식이며 듀이가 그의 논문 「경험론 에 대한 경험적 고 찰 」에서 채용한 방식이다 . 둘째 방식은 현상들을 서술하되 < 저급 과정과 고급 과정 간의 연속성 >을 강조하는 비(非) 이원론적 방식에 입각하여 서술하는 것이다. 이것은 로크식의 방식으 로서, 로크로 하여금 모든 정신적 행위를 생생한 느낌 raw f eels 으로 비유해 보게 했으며, 따라서 흄식의 회의론을 위한 길을 닦아놓게 했 던 그 방식이댜 이 비유는 칸트로 하여금, 라이프니츠는 현상을 <오 성화 >했 던 반면에 < 로크는 오성의 모든 개념들을 감각화했다 >꼬 ) 는 논평을 하도록 유발시켰으며, 로크가 그 대표자로 보이는 < 자연주 의 >로 부터 독일의 사상이 등을 돌리게 하였다. 그 비유는 『경험과 자연 』 에서 재등장함으로써 논리경험주의자들로 하여금 듀이가 <심 리적 > 인 문제를 < 개념적 > 인 문제로 혼동하고 있다고 비난하게 하 였다. 듀이는 로크와 같은 자연주의자이면서도 [동시에〕 헤겔과 같은 역 사주의자가 되기를 원했다 . 이것은 실제로 성취될 수 있다 . 우리는 로크와 함께 인간 유기체에 진행되는 인과 과정들이 어떠한 비(非) 자연적인 것의 개입이 없이도 (도덕적, 수학적, 경험적 그리고 정치적) 지식의 획득을 설명하는 데에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우리 는 헤겔과 함께 지식-주장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은 언제나 인간 존 재들이 특정한 시대에 처한 문제들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사고 노선은 교차하지도, 갈등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그것들 을 분리해서 유지하는 것은 바로 듀이 자신이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이점(利點), 즉 회의론에 의해 동기화된 전통적인 <인식론의 문제 들>이 구성되지 않게 봉쇄하는 이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한 28) Immanuel Kant, Kr itik der rein e n Vern 떠t, AZ7l = B3'lJ .
다는 것 은 < 체계적인 철 학 > 이나 < 형이상학 > 이 할 일을 없애버린 다. 그런데 듀이는 철 학의 사명은 치료의 사명과 마찬가지로 스 스 로 롤 폐기시키는 것이라는 바우즈마 0 . K. Bouwsma 식의 입장을 결코 채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 경험과 자연 』 에서 , 경험의 < 일반적 특징들 > 에 대한 < 참된 > 발견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밝혀낸다고 생 각하였다 . 이 비판점을 좀더 구체화하기 위해 , 심신 문제를 듀이가 어떻게 취 급하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는 이 문제를, 유물론의 조야성과 역리를 피하는 동시에 전통적인 이원론들에 의해 제기된 < 비과학적인 > 이 론화의 방식도 피함으로써 < 해결 >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 그 해결이 란 다음과 같이 말히는 것이댜 느낌들이 의미를 형성한다. 사건이나 대상들의 직각적 의미안 느낌들 이 바로 감각이며 , 더 적절히 말하자면, 감각 소여다. 언어가 없을 경우 , 느낌들로 이루어진 유기체 행위의 성질들이란 잠재적이거나 혹 은 예상되 는 고통, 쾌락 , 향기, 시끄러움 , 가락 등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언어와 더 불어 차별화되고 식별된다. 그때라야 그것들은 < 대상화 > 되며 사물의 직 각적 특징이 된다 . 이러한 < 대상화 > 는 유기체나 영혼으로부터 발생해서 외부 사물들로 향하는 기적 같은 분출물도 아니며 , 물리적 존재에 심리적 존재를 부과하는 어떤 환상도 아니다. 그 성질들은 결코 유기체 < 안에 > 들어 있지 않았으며, 그것들은 항상 비유기체적 사물과 유기체 양자가 참 여하는 상호 교섭의 성질이다 .:!9 1 29) Joh n Dewey, Ex pe ri en ce and Natu re , pp. 258-259( 역주: 이 구절에서 듀이 가 말하는 <상호 작용>은 데카르트식의 심신 상호 작용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 이다. 후자는 심-신을 이원론적으로 설정한 다음 그것들간의 인과적 상호 작용 을 가리킨 데 비해, 전지는 이원론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유기체와 비유기체 사 이의 상호 작용이나 교류를 가리킨다).
< 상호 교 섭의 성 질 > 과 같 은 구절들은 심신 문 제 를 문 젯 거리로 보 지 않 는 사람 들 을 진 정 시키겠 지 만 , 그것을 문제로 보는 사람 들 을 화 나게 한댜 그 래서 후자에 속 하 는 이 들 은 이렇게 말한다 . 그러한 상 호 교섭 들 이 무얼 뜻하 는지 좀더 상세히 말해 보시오. 가령 사람 들 과 책상 들 사이의 상호 교섭인가요? 내가 이 갈색 책상과 < 상호 교섭 > C 한다는 것 은 내가 예 전 에 생각 했듯 이 그 < 책상 > 이 갈 색 을 지녔다는 것과는 다른 건가요? 그래서 누구든 < 갈색 > 이란 낱말이 뜻하는· 것 을 이해하지 못 하면 그 책상이 갈색이었다는 것을 아무도 알 수 없 다는 점에 덧붙일 만한 뭔가 대단한 점을 듀이가 말하고 있나요? [뭔 가 대단한] < 그 것 은 > 느낌에 대해 의미 를 부여하고자 개념이 사용 되기 이전에는 대상들 상호 간에 혹은 대상과 그 성질들 간에 아무 런 구분도 없다는 칸트식의 논점을 말한 건가요? 하지만, 선험적 관 념론에 빠지 지 않고도 그 논점을 이뤄낼 수가 있나요? 선험적 자아 는 경험 적 자아와 물질적 세계 양자를 구성한다고 한번 더 말하기만 하면, 우리가 그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게 되나요? 일련의 이 수사학적 물음들은 듀이가 얼마만큼은 칸트나 그린처럼 관념론자인 반면에 아리스토텔레 스 처럼 상식적인 실재론자가 되려고 시도한 점에 대해 그의 독자들이 가끔씩 느끼는 분통 터질 안타까움 의 표현이다. 오직 선험적 관념론자만이 경험적 실재론자가 될 수 있 다는 칸트의 견해에 듀이가 동조한다는 점은 분명히 < 상당한> 의미 를 갖고 있다 . 그 의미란 다음과 같다고 생각된다.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며 어떤 소여도 결코 <생생한 > 것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 던 칸트와 그린이 그랬던 방식으로, 흄식의 경험론과 결별한 사람만 이 갈색 책상과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색깔 없는 원자들의 소용돌 이는 똑같이 <경험의 소여>라고 말할 수 있다고 듀이는 믿었다. 바 꿔 말해 그는 셀라즈가 < 인간의 과학적 이미지와 명백한 이미지 간 의 충돌>이라고 불렀던 문제는, 오직 <갈색> <못생김> <고통스러 움> <책상> 등과 같은 상식적 개념들을 한 유형의 상호 교섭에 의
한 성질로 ·간 주하며, < 원자 > <질 량 > 등 과 같은 과 학적 개념 들을 다 른 유형의 상호 교섭에 의한 성 질로 긴주·할 때만 해소 가 능할 거라 고 생각하였다. 칸트가 < 개념에 따 른 직관의 종합에 의해 경험 세계 가 구성된다 > 고 불렀던 것을, 듀이는 < 비유기체인 사물 들 과 유기체 들이 공히 참여하는 상호 교섭>이라고 부르고자 하였다. 하지만 , 듀이는 이렇듯 악의 없이 들리는 자연주의적인 그 구절이 < 대상의 구성 > 을 언급한 칸트의 말이 수행했던 바와 동일한 일반성 을 지니며, 또 그것과 동일한 인식론적 업적을 성취해 주기를 원하였 다 . 듀이는 예컨대 < 환경과의 교섭 > 이나 < 조건에 대한 적응> 등과 같은 구절들이 자연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선험적이기 를, 바꿔 말해, 그것들이 심리학자들에 의해 파악된 인간의 지각과 지식에 대한 상 식적인 논평이면서도 동시에 <경험의 일반적인 특징들>에 대한 표 현이 되기를 원하였다 . 그래서 그는 < 교섭>이나 < 상황 > 등과 같은 관념을 그것들이 < 제일질료 > 나 < 물자체 > 와 같이 신비롭게 들릴 때 까지 한껏 부풀렸다. 그래서 그는 마치 책상의 < 실재 > 모습은 뾰쪽 한 모서리가 사람들을 부딪히게 하는· 못생긴 그 갈색의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미립지들의 소용돌이도 아니라, 그 둘에 공통된 어떤 것, 즉 상황에 따라 변형될 준비가 되어 있는 순전한 잠재성인 것처럼 들리게 하였다 . 어떤 면에서 보면 듀이는 바로 1880 년대에 그가 원했 던 것, 바꿔 말해, 심리학과 형이상학이 하나로 되기를 원하였다. 그 러나 그 둘이 하나로 되는 길이란 단지 진화론 생물학자들의 어휘를 실험실에서 꺼내 들고와서 <지식>이라고 간주될 만한 어떤 것에 대 한 서술에도 그것을 활용하는 일로 이루어졌다. 물론 그것이 그렇게 활용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도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는 않는다――-마치 로크가 개념을 <감각화>해도 아무 문제도 해결 되지 않았던 것처럼 심신 문제로 되돌아가서, <비유기체인 사물과 유기체가 함께 참여 하는 상호 교섭의 성질>로서의 제 2 성질에 관해 내가 인용했던 구절
은 자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유 도한 다: 그 두 종류의 사 물들 이 서 로 상호 교섭하지 않을 때 는 어떤 성질을 갖는 가? 이 맥락에서 듀이 는 항상 우리 를 자연주의적이며 상식적인 곳 으 로 향하게 한다. <존 재 들 의 일반적 특징들> 에 관한 이야기는 갑자기 사라지고 그 대신 에, 상호 교섭중인 것은 바 로 예의 그 책상과 예의 그 상식적인 인간 육체라고 설명되거나, 미립자들의 두 소용돌이, 혹은 다른 어떤 비일 반적 서술이라고 설명된댜 만일에 라일 , 셀라즈, 비트겐슈타인, 하이 데거가 그렇게 했듯이, 관람자 지식론 모델 때문이 아니라면 우리는 애당초 심신 문제란 것을 결코 갖지도 않았을 거라고 말하는 선에서 듀이가 그만두었더라면, 듀이는 확고한 근거를 가졌을 것이며 말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내 생각으로는) 얘기했을 것이다 . 그러나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 그는 회의적인 진단뿐만 아니라 적 극적으로 형이상학 체계의 구축도 원하였다. 『경험과 자연 』 에서 구축 된 체계는 마치 관념론인 것처럼 들렀으며, 그 책이 내놓은 심신 문 제에 대한 해법은 선험적 자아에 대한 또 다른 호소로 보였다. 왜냐 하면 듀이가 감행한 추상화의 수준은 칸트가 작업했던 것과 동일한 수준이었으며, 지식의 모델도 동일한 것으로서 두 가지 미지의 것들 이 작용함으로 해서 지식 대상을 구성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 층더 일반적인 어떤 것을 통해서, 생리학적인 로크식의 설명과 사회 학적인 헤겔식의 설명 두 가지롤 다 제공하고자 하는 인간 지식에 대한 < 어떠한 > 체계적 설명도 겪게 마련인 운명은, 그것이 칸트의 아야기와 홉사하게 들린다는 점이다. [오스틴이 말한 바의] <감각적 잡다의 존재론 > 이야말로 그러한 속성을 지닌 주관-객관, 정신-육체 등을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모든 철학자들에게 공통된 운명인 것이다. 지금 나는 듀이의 <자연주의 형이상학>에 대해 내가 해야 할 모 든 바판을 마쳤다. 이제 때로는 그에게 실례가 되겠지만, 듀이가 성 취했던 바에 관해 짧막한 찬사를 제시하면서 끝을 맺고자 한다. 듀이 는 전통적인 철학의 이원론이 우리 문화에 끼치고 있는 해악을 밝혀
내고자 하였으며 , 그 일을 하려면 하나의 형이상학이 필요하다고, 바 꿔 말해 문화 발전의 새 길을 열어줄 뿐만 아니라 철학 의·전 통적 인 문제 들도 해결(혹은 해소)해 줄 존재들 의 일반적 특징 에 대한 서술이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그가 더 포괄적인 목표, 즉 문화 발 전의 새 길을 열어주는 일에서는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난 3 백 년 동안 서구에서 우리가 발전시켜 왔던 것들과는 판이하게 다 른 노선에 따라 조형될 어떤 문화 를 착상하기에 충분할 만큼 광범위한 상상력을 지닌 금세기 극소수의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듀이 의 오류 ― -—비록 나는 이 논문의 대부분을 그것에 할애하였지만 그 것은 사소하며 그리 중요한 오류는 아니다-는 문화 비판은 < 자 연>이나 < 경험> 혹은 그 둘 모두에 대한 재서술 re-desc ripti on 의 형태를 띠어야만 한다는 발상이었다. 만일에 듀이가 『 경험과 자연 』 을 · 대체시킬 저서인 『 자연과 문화 』 란 책을 집필했더라면, 그는 아리스토 텔레스적이며 칸트적인 모델들을 잊어버리고 그가 다른 (그리고 더 훌륭한) 많은 저술들에서 그렇게 했듯이, 철두철미하게 다만 헤겔주 의자였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헤겔주의자>란 말로서, 그것을 보존하며 보호해야 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라고 칸트가 생각했던 바로 그 문화의 발전을 단순히 세계 정신의 일시적인 처소(處所, s t o ppi n g-p laces) 들로 취급 하는 것을 의미한다 . 칸트는 세 가지 항구적인 철학의 재료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1) 뉴턴 물리학과 거기에서 귀결된, 미세 구조에 대한 수학적 서술을 중심으로 한 통일된 과학의 개념, (2) 북부 독일의 경 건파 기독교도에 공통적인 도덕 의식, (3) 18 세기의 미학적 의식에 의해 제공된 것으로서, 과학적 탐구와 도덕적 의무의 절대적인 명령 들에서 벗어난 유희적인 해방감과 섬세한 감각. 철학의 목표는 이와 같은 문화적 성취들 사이에 선을 (각각에 대해 분리된 책을 저술하는 일이 바람직스러운 것인데) 그어주고,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조화를 이루며 또 <필수적>인지를 밝혀줌으로써, 그것들을 보존하는 일이
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그랬듯이, 칸트에게 철학은 과학적 탐구 가 도덕을 간섭하지 못하게, 미적인 것이 과학적인 것을 간섭하지 못 하게 ……등의 방식으로 경계선을 긋는 것이었다. 반면에 헤겔에게 뉴턴 물리학, 회한(梅恨)에 가득 찬 의식, 경치 좋은 정원(庭園)에서 의 희열 등은 정신의 발전에서 짤막한 에피소드였으며, 이 모든 것들 을 서로 구별함이 없이 포함할 어떤 문화로 가는 징검다리였다. 듀이 에게는, 만약에 당신이 진리란 것은 <표상의 정확성>이고, 도덕적 덕성이란 것은 감성의 순수성이며, 미란 것은 <목적 없는 목적성 > 'I O I 이라고 생각할 경우에만, 진리와 도덕적인 덕성과 미학적인 환희의 추구가 구별되고 또 잠재적으로 경쟁적인 활동으로 보이게 된다. 듀 이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18 세기적 사고 방식을 칸트가 정확히 서술 하고 있는지를 묻지 않았다. 그러나 헤겔과 함께 듀이는, 18 세기에 머무는 것이 필연적인가를 질문하였다. 만일 칸트식의 구분을 폐기한다면, 우리는 철학이란 것이 (예컨대 감각 경험과 이론적 지식 간의 관계에 대해 합리론자와 경험론자~ 화 해시킬 어떤 이론을 지님으로써, 혹은 정신과 육체 사이의 관계에 대해 유물론자와 범심론자(t凡心論者, p anp s y c hi s t s) 를 화해시킬 어떤 이론을 지님으로써)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철학이란 무엇보다 먼저 그 문젯거리들을 허용했던 구분들을 한컨으로 치워놓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앞에서 내가 암시했듯이, 듀이는 철학적 문제들을 해소시키는 데에 있어서는 초기나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추종자들만큼 잘해내지 못하였다. 그러 나 그는 더 광범위한 목표에 대한 안목을 지녔다. [그 안목이란 새로 운 문화에 대한 안목을 말하는데], 듀이[가 바라는] 그 문화는 낡은 문제들을 잉태시켰던 진, 선, 미 사이의 구분을 더 이상 만들지 않을 30) purpos iv e ness wi tho ut pu rp os e: 미의 본질에 대한 칸트의 용어에서 따온 말(역주)
것이기에, 낡은 문제 들 의 새 로 운 형태 들 이 지속적으로 발생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 문화를 소묘하 길 원하였다. 이렇 듯 광범위한 작업을 함에 있어서 듀이의 주요한 적 ( 敵 )은 표 상의 정확성이 곧 진리라는 관념 , 훗 날 하이데거, 사르트 르, 푸코 등 에 의해 공격받게 된 그 관념이었다. 듀이는 만일 자기가 그 관념을 깨뜨려버릴 수 있고 , 또 과학적 탐구가 모사( 模寫 )가 아니라 적응(適 應 , ada pti n g)과 대처( 對處 co pi n g)임을 보일 수 있다면 과학, 도덕, 예술 간의 연속성은 명백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는 예술 작품의 < 순수성 > 이나 그것에 대한 우리 경험의 < 순수성 > 따위와 같은 물음을 더 이상 제기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데리 다의 생각과 같이 언어란 실재를 표상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 우리 가 그 속에서 살며 움직이는 하나의 실재라는 관념을 수용하게 될 것이다 . 전통 철학은 시간성에서 영원성으로, 자유에서 필연성으로, 행위에서 명상으로 도피하려는 시도라는 사르트르와 하이데거의 진 단을 우리는 수용하게 될 것이다 . 우리는 사회과학을 볼 때 그것이 물리학자의 정밀성, 확실성 그리고 < 가치 > 중립성을 흉내 내려는 어 색하고도 성공적이지 못한 시도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예술 작품으 로 만들고자 하는 여러 방식들에 대한 제안이라고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근대 과학을 스노가 보듯이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간적 성 취라고도 볼 것이며 , 또한 쿤이 보듯이 위기들과 그 중간중간에 끼여 있는 무풍의 상태들로 이루어진 일련의 시리즈, 즉 최종적으로 정확 한 실재의 표상인 <진리의 발견 > 에서 결코 마감되지 않을 시리즈 속의 한 에피소드로도 보게 될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문화 비판의 < 철학적 기초 > 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경험의 형이상학 > 이라 불리는 어떤 것이 필요하다는 칸트의 관념 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철학자의 문화 비판은 노동 운동 지도자나, 문학비평가나, 은퇴한 정치인이나, 조각가의 문화 비판들보다 더 <과학적>이지도, 더 <근본적>이지도, 더 <심오 > 하지도 않디는· 깨
달음에 이르게 될 것 이다 . 철학자들 은 더 이상 모든 시대와 영원성을 관람하는 자도 아 닐 것 이며, (사회과학자들마냥) 자연과학의 성공적이 지 못한 모방자도 아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자 자신 들 도 [실 재의] 관람자나 [ 실재를] 표상해 내는 자로 보이지 않게 될 터이므로. 철학자들은 철학 의 역사와 <철 학적 > 이라고 불리는 아이디어들 <존 재 들 의 일반적인 특징들>을 서술하고자 했던 과거 시도들의 찌 꺼기들-이 문화의 여타 부문에 끼치는 이 시대에서의 효과에 관 해 작업하는 사람 들로 보이게 될 것 이다. 이것은 마치 새롭게 조형하기 위해, 혹은 더 기초적인 소립자를 발 견하기 위해 돌을 깎는 것마냥 겸손하며 제한된 작업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때로는 위대한 업적들을 산출하기도 한다. 듀이의 저술은 그 와 같은 업적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이 위대한 까닭은 자연이나 경 험이나 다른 어느 것의 일반적 특징들의 정확한 표상을 제공하기 때 문이 아니다. 그것의 위대성은 우리의 지적인 과거를 어떻게 벗어던 질 것이며, 그러한 과거를 우리에게 과제와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라 고 파악하지 않고 유희적인 실험 재료로 파악하여, 그것을 어떻게 취 급할 것인지를 제안하는 순전히 도발적인 성격에 놓여 있다. 듀이의 저술은, 예술가들은 전통적으로 그것을 못 갖지만 철학자들은 전통적 으로 그것을 견지한다고 추정되어 왔던 <진지한 정신 자세>를 그만 두게 도오듐든다 . 그 진지한 정신 자세란 것은 인간의 삶은 삶을 넘어 선 어떤 목적을 성취하려는 시도요, 혹은 자유로부터 도피하여 무시 간성을 추구하려는 시도다라고 보는 지적 세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 기 때문이다 . 자기네들의 저술에 대한 철학자들의 태도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교육이나 일상적인 말속에도 여전히 그와 같은 지적 세 계의 개념이 담겨져 있다 . 하지만, 듀이는 우리가 그것을 제거하는 일을 돕는 데 최선을 다했으며, 간혹 자기가 치유하고자 애쓰는 질병 에 그가 감염되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해 비난을 받아서 는 안 될 것이다.
6 글쓰기로서의 철학: 데리다에 관한 에세이
물리학을 이런 식으로 볼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사물들 이 존재하며, 그것들이 다른 모든 사물의 부분이고, 그것들의 움직임 에 따라 다른 모든 사물들의 작동 방식이 결정된다. 물리학은 그렇듯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들에 대한 정밀한 서술을 탐구하며, 눈에 보이 는 것들을 더 잘 설명할 방도를 찾아냄으로써 발전해 간다. 결과적으 로 언젠가는 심적인 것에 대한 미시생물학의 해명과 언어의 메커니 즘에 대한 인과적 설명을 통해서, 우리는 물리학자들이 집적해 놓은 세계에 대한 진리 자체도 그렇듯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들간의 교섭 tr ansac ti on 으로 보게 될 것이다. 반면에 물리학을 다른 식으로 볼 수 있다: 물리학자들은 자연이란 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궁리하는 사람들이다. 정상과학의 진부한 시기가 지난 다음마다 그들은 새로운 모델, 새로운 그림, 새로운 어 휘를 생각해 내며, 그러고 나서는 그 책의 참된 의미가 발견되었다고 공표한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결코 참된 의미의 발견은 아니다. 마 치 [셰익스피어의 비극 중 하나인] 『코리올라누스 Co ri olanus 』나, [영국의 시인 포프 (Al ex and e r Pop e, 1 688- 17 44) 의 시 집 ] 『 둔 시아 드 The Dunc ia d 』 나, [헤 겔 의 저 서] 『 정 신 현 상 학 』 이나 , [비 트 겐 슈 타인의 저 서] 『 철학적 탐구 』 등의 참 된 의미 가 결코 발견될 수 없 는 것 과 마찬 가지로. 그러므로 그 들을 물 리학자이게 하 는 것 은 그 들 의 모든 저술 이 얼마간은 < 동일한 것에 대 한 얘기 >, 즉 그들 의 저술 이 자연이란 책에 대한 앞선 해석자 들 의 저 술 에 관한 주석이기 때문이다 . 그 들 의 탐구가 그걸 향해 꾸 준 히 수렴해 가 는 보이지 않 는 신이나 자연 inv is ib i l ia Dei siv e na t urae 에 대 한 이 야기 여 서 가 아니 고 . 옳고 그 름 에 대해 이런 식으로 생각 할 수 있다: 공통된 도덕 의식 은 평등, 공정성, 인간의 존엄성 등에 관해 어떤 직관을 포함하고 있 으며 , 법률을 만드는 데에 활용 가능할 원칙 형태로 그것이 명백하게 될 필요가 있댜 골 치 아픈 사례들을 생각해 보고 또 우리 들 (서구인) 의 문화와 다른 문화 간의 차이점을 추출함으로써 우리는 더 니은· 원칙들 예전의 것보다 훨 씬더 도덕 률 자체에 밀접히 부합되는 원칙 들을 구성해 낼 수 있다. 반면에 옳고 그름에 대해 다른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사람 들 이 나 문화가 오래되면 될수록 아마 더 많은 프로네시 스 [ 質賤舞 ph ronesis ] 一타인들에 대해 더 민감하며, 동료나 자기들 스스로 를 더 정교하게 서술하는 방식 一 __ 를 운 좋게도 얻게 될 것이다 . 타인 들과의 교제도, 소크라테스적인 토론도 그 일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대 이래로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시인들, 소설가들 , 이데 올로기 주창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도움을 받아왔다 . 『정신현상학 』 은 우리에게 철학의 역사뿐만 아니라 서구의 역사도 역시 교양 소설 B i ldun gs roman 의 일부로 볼 것을 가르쳤기 때문에, 우리는 도덕적 지식을 [플라톤식의] 참된 지식( 眞 知, ETLmn /1TI)의 일종으로 갈구하지 않았다 . 오히려 우리는 서구의 자기 서술과 우리 자신들의 자기 서술 이 주제에 따라 좌우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죽고 또 서구 가 없어지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직조되어 갈 색깔 있는 주단의 디
자인이라고 여겨왔다. 철학을 이런 식으로 볼 수 있다: 시작할 때부터 철학은 사고와 그 대상 들 표상과 표상된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염려해 왔댜 가령 비 존재자에 대한 지시에 관한 해묵은 문제(예컨대 용은 무엇을 가리키 는가 등의 문제]는, 의미와 지시에 관한 철학적 문제를 과학적, 윤리 적, 종교적 관심에서 연유하는 철학 외적인 물음과 적절히 구별하지 못한 불찰로 인해, 불만족스러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취급되어 왔다. 하지만, 이런 물음들이 일단 적절히 선별<되고 나면>, 철학이란 언 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일련의 물음들을 중심으로 하는 분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념에 대한 이야기에서 의미에 대한 얘기로 전환 한 최근의 순수화 경향은 과거에 대부분의 철학적 계기가 되었던 인 식론상의 회의론을 불식시켰다 . 이것은 철학을 좀더 제한하였지만, 그러나 더 자기 의식적이고 더 엄밀하며 더 정합적인 탐구 영역이 되게 하였다 반면에 철학을 다른 식으로 볼 수 있다: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 과 논변에 대한 사랑이 혼동된 결합체로 출발하였다. 그것은 수학적 논증의 엄밀성이 정치인들과 시인들의 허세롤 노출시키고 또 바로잡 는 데에도 활용될 수 있다는 플라톤의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 철학적 사고가 변화하고 또 이 같은 이중적인 에로스 c{ X,) S 에 의해 파종된 것 이 성장함에 따라, 스스로 독립해 뿌리를 내린 싹을 퇴우게 되었다. 지혜와 논증은 둘 다 플라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더 다양해졌다. 예컨대 교양 소설, 비유클리드 기하학, 이데올로기적인 역사 편찬, 멋 쟁이 문인들, 정치적 무정부주의자 등 19 세기에서의 복잡 미묘한 성 격을 고려하면, 철학이 문화에서 뚜렷히 다른 별도의 지위를 차지하 고 별도의 주제를 가지며 또 별도의 방법으로 진행된다고 추출해 낼 방도가 없댜 심지어 학술적인 학문 분야로서 철학의 본질조차 찾아 낼 수가 없다(그렇게 하려면 찾고자 하는 대학 소개서들의 국적(國籍) 부터 먼저 선택해야 할 것이므로). <철학>에 대한 철학자 자신들의
현학적이지만 어설 픈 뜻매김은 단지 논쟁을 위한 장치, 지적인 혈통 이 낯선 사람들을 영예로운 전당에서 배제시키려고 고안된 장치에 불과하다. 우리는 특정한 일련의 역사적 인물 들 [ 철학자들 ]에 관해 누 가 주석을 하고 있는가를 지목하기만 해도, 현대의 지성 세계에서 <철학 자들>이 누구인지 금방 꼬집어낼 수 있다. 문화의 한 영역에 대한 이름으로서 <철학> 이란 것이 의미하는 것은 <플 라톤, 아우구 스티누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프레게, 러셀 …… 등 수많은 인물들 에 관한 이야기 > 일 따름이댜 철학은 일종의 글쓰기라고 볼 때 가장 잘 파악된댜 그것은 다른 여느 문필 장르와 마찬가지로, 형식이나 재료에 의해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통에 의해, 예컨대 아버지 파르 메니데스, 정직한 아저씨 칸트, 짓궂은 동생 데리다 등이 포함된 하 나의 가족 소설에 의해 테두리가 정해진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두 가지 사고 방식이 있게 된다. 나는 그 두 방식들을 대체로 칸트에서 시작된 철학적 전통과 대체로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시작된 철학적 전통 간의 차이가 남긴 유 물이라고 묘사하였댜 첫번째 전통은 진리를 표상과 표상된 것 간의 수직적(垂 直的 ) 관계로 생각한다. 두번째 전통은 진리를 수평적(水平 的)으로, 옛 사람들의 재해석에 대한 우리 앞 사람들의 재해석에 대 한 재해석 …… 등이 절정에 다다른 것으로 생각한다. 이 전통은 표 상이 표상 이의의 것과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가를 묻지 않으며, 표상 들끼리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보이는가를 묻는다 . 그 차이는 진리에 관한 <대응설>과 <정합설> 간의 차이가 아니다. 비록 그와 같은 언필칭의 이론들이 그 대비점을 부분적으로 나타내주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오히려 그 차이는 진 • 선 • 미를 두고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우리가 정착시키고 밝혀내야 할 영원한 대상으로 간주히는· 것과, 다 른 한편으로는 그 근본 디자인을 우리가 가끔씩 변경시켜야 할 인공 물로 간주하는 것 간의 차이다. 첫번째 전통은 과학적 진리를 철학적 관심의 핵심으로 설정한다
(그리고는 통 약 불가능한 과학적 세계상에 대한 관념을 경멸한다). 그 전통은 다 른 탐구 분야들이 과학의 모델과 얼마나 잘 부합되는가를 묻는다 두번째 전통은 여타 영역 들 과 마찬가지로 과학을 문화의 (유 별나게 특권적 이거나 홍미로운 것이 아닌) 한 영역, 역사적으로 파악 될 경우에만 의미 를 지닌 한 영역으로 간주한다 . 첫번째 전통은 사물 들 을 올 바르게 하기 위한 단도직입적이며 철저하게 과학적인 시도라 는 자화상을 좋 아한다. 두번째 전통은 가능한 한 많은 외국어와 암시 와 거명의 방식을 동원해서 스스로를 완곡하게 나타낼 필요가 있다. 퍼 트남Hi l ary Putn a m, 스트로슨P . F. Str aw son, 롤즈J ohn Rawls 등 과 같이 신칸트적인 철학자들은, 매우 직설적인 < 순수화 > 를 위한 일 련의 탈바꿈 과정을 가짐으로써 칸트의 논변이나 주장과 연계되는 자기 나름의 논변과 주장을 각기 갖고 있으며, 그 탈바꿈 과정은 완 강히 버티는 문젯거리들을 점점더 명확히 파악해 주는 것이라고 간 주되고 있다. 비칸트적인 철학자들에게는 완강히 버티는 문젯거리와 같은 것은, 어쩌면 칸트주의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말고는 없다. 하이데거나 데리다 등과 같은 비칸트적인 철학자들은 문제의 해결도 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논변이나 주장도 < 갖고 있지 않은> 대표 적인 인물이댜 그들은 자기들의 선구자들과 공통된 주제나 방법 때 문에 연계된 것이 아니라, 뒷사람들이 앞사람들에 대해 논평자에 대 한 논평자의 관계로 형성된 < 가족 유사성 > 에 의해 연계된다. 데리다룰 이해하려면, 그의 저술을 이와 같은 비칸트적이며 변증 론적인 전통 중에서 최근의 발전 형태 -사물이 실재로 어떻게 되 어 있는가를 정확히 표상하는 자라는 칸트주의자들의 교묘한 자기 이미지를 분쇄하려는 변증론자들 가운데에서 최신의 시도――-라고 보아야 한댜 데리다는 언어에 대해 굉장히 많이 말한다. 그래서 데 리다의 저술들은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관한 여타의 연구들과 유용 하게 비교될 수 있어서 그를 <언어철학자>로 간주해 버리기 쉽다. 그러나 언어에 관해 그가 글을 쓰는 까닭은 왜 어떠한 언어철학도
존재해서는 안 되는가 를 보여주기 위한 시도라고 말하는 편이 차라 리 오해 를 없애줄 것이다. ” 그의 견해에 따 르면 , 언어는 칸트적인 전 통의 최후 도피치다 그것은 인간이 영원히 응시할 어떤 것들(우주의 구조, 도덕률, 언어의 본질)이 존재하며, 철학은 그것들을 더 분명히 볼 수 있게 해준다는 발상의 최후 도피처다. < 언어철학 > 이라는 관념 이 한낱 허상에 불과한 이유는, 철학이란 것 곧 칸트적인 철학――― 일종의 글쓰기 이상의 어떤 것으로서의 철학_이 허상에 불과한 이유와 같다 . 언어철학으로의 전환을 통해서 표상과 그 대상에 대한 칸트의 일반적인 이론을 순수화하려 한 20 세기의 시도는, 데리다에게 는 철학을 훨씬더 비순수한 것 ―—―더 비전문적이며, 익살맞고, 암시 적이고, 섹시하고, 무엇보다도 <글로 씌어진 > 것 으로 만들어 맞대응해야 할 일이다. 따라서 데리다가 가령 프레 게 Go tt lob Freg e 에서 데이비슨D onald Da vi dson 에 이르는 작은 전통에 대해 어떤 태 도를 갖는다면 그것은 언어에 관한 후설의 논의에 대한 그의 태도와 마찬가지다. 그 태도는 간략히 말해서, 언어에 대한 20 세기의 관심 중 대부분은 칸트적인 철학의 극단적인 형태, 칸트가 (그리고 그에 앞 서 플라톤이) 대규모에 걸쳐 행하고자 시도했던 것을, 불쌍하리만치 소규모로 행하고자 하는 절망적인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보는 것이 1) 현대의 언어철학 특히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데리다의 관계에 대해서는, New ton Garver 의 [데리다의 다음 저서 영역본에 붙인] 『서문』(J ac q ues Derr ida , Sp e ech and Phenomena, and Oth e r Essays in Husserl 's Theory of Sig ns, tran s. David B. Allis o n(Evansto n : Nort hw este r n Un ive rsit y Press, 1972) 과 Derr ida on Rousseau on Wr iting , Jou rnal of Phil os oph y, 740977), pp. 663-673; Ma rjor i e Grene, Lif e, Death , and Lang u ag e : Some Thoug h ts on Wi ttge nste i n and Derr ida , Phil o soph y in and out of Europ e (Berkeley and Los Ang el es: Un ive rsit) r of Calif ornia Press, 1976), pp. 142-154; «: 그림 문자G ly p h ~ 란 잡지의 처음 두 권에 수록된 썰J ohn Searle 과 데리다의 상호 의견 교환; Rich ard Rort y, Derr ida on Lang u ag e, Bein g , and Abnormal Ph ilo soph y , Jou rnal of Phil o soph y, 740977), pp. 673-681 를 볼 것.
다 . 여기서 칸 트 가 행하고자 했던 것 이란 , 어떻게 무시간적인 진리가 시 • 공간적인 매개체 속 에 포함될 수 있는지를 규명하고, [인간과 인 간 이 추구 하는 것 사이의] 관계 < 구조>를 밝히며 모 든 가능한 해석 들 의 구조를 밝혀 재해석 들 이 연달아 이어지는 역사적 과정을 동결 얘澤) 시켜 인간과 인간이 추구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규제 할 수 있는지를 규명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데리디는 언어에 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지만 철 학에 대 해서는 해줄 말이 대단히 많은 것이다 그의 저술을 이해하기 위해서 는, 그가 다음과 같은 물음에 대답하고 있다고 간주해 보는 것이 좋 을 것 이다. <철학 은 ‘실제로’ 일종의 글쓰기‘이다’라고 볼 때, 이 제안 이 왜 그렇게 거센 저항을 받는가? > 그의 저술에서 이 물음은 좀더 구체적인 형태의 물음으로 바뀐댜 < 이와 같이 특징짓는 것을 반대 하는 철 학자들은 ‘글쓰기’란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들이 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글쓰기라는 발상을 그들은 왜 그토록 공격적 인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 데리다에게 위대한 스승격의 인물인 하이데거는 헤겔의 역사주의에다 역사적인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최 초로 헤겔을 < 자리 매김 > 한 (혹은 < 초월 > 하거나 < 거세>한) 반면에, 데리디는 글쓰기에 대한 하이데거의 불신을 설명함으로써 하이데거 를 <자 리 매김 > 하길 (혹은 어떤 표현이든) 원한다. 사실 하이데거는 많은 저술을 내었지만, 그는 항상 (<전환> 이후에는) 우리가 조용히 머물면서 그리스 단어로 된 어떤 운문을 감상하길 권유한다. 데리다 는, 산꼭대기에서 말로 하는 입말 s po ken word 의 단순성과 그 광채 롤 하이데거가 선호하는 것에 대해서도, 또 감옥처럼 움푹 들어간 계 곡 속에 휘갈겨 써놓은 각주에 대해 하이데거가 경멸하는 것에 대해 서도 자못 의심쩍어 한다. [말하기에 대한] 하이데거의 선호는, 칸트 주의와 플라톤적인 <현전(現前)의 형이상학>의 치명적인 결함을 배 신하는 일이라고 데리디는 생각한다 . 왜냐하면 그 전통이 실제로 얼 마나 많은 글쓰기를 행하든 간에 칸트적 전통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철학도 <꼭 글로 씌어져야 한다고 > 생각하지 않을 특징을 갖고 있 기 때문이다. 글쓰기란 불행한 필수품에 불과하며, 정말로 필요한 것 은 등장 인물이 세계를 제대로 응시하게 보여주고, 증명하고, 가리키 고 드러내도록 만드는 일이댜 관념에 대한 모사설, 관람자 지식 이 론, <표상의 이해 > 가 철학의 핵심이라는 발상 등은 한결같이, 표상 울 <통해서 파악 > 하기 위한 텍스트의 [사실이나 참뜻에 대한] 통찰 을, 그 전통의 그러한 필요성이 대신케 하려는 수작의 표현이다 성숙된 학문에서는 연구자가 연구의 결과를 <기록 유지>하는 낱 말들은 가능한 한 수가 적고 또 투명해야 한다. 하이데거는 비록 이 런 유의 발상에 대해 그리고 특히 [과학에서와 같은] < 연구 프로젝 트>를 철학적 사고의 모델로 삼는 것에 반대하여 용감히 투쟁하였지 만, 입말의 순수성과 간결성에 대한 마찬가지 향수에 결국 굴복하였 다. 시각적 비유를 하이데거가 청각적인 것으로 대체시킨 것, 바꿔 말 해 시간과 영원성에 대한 관람지를- 존재의 소리를 듣는 것으로 대체 시킨 것은 단지 하나의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데리다는 생각한다. 말 하자면, 모든 것을 자리 매김해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철학 을 종결시키겠다는 칸트주의자들의 외침과, 방념(放念, Gelassenheit ) 과 비은폐성 Unverborg enhe it에 대 한 하이 데거 식 의 외 침은 똑같은 것이댜 칸트주의자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하이데거에게서 철학적 저술은 글쓰기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목표를 겨냥하고 있다. 반면에 데리다에게 글쓰기는 항상 더 많은 글쓰기로 그리고 거기에서 더욱 더 많은 글쓰기로 나아가는 일이다. 마치 역사가 절대적 지식이나 최 후의 투쟁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역사로, 거기서 더욱더 많 은 역사로 나아가듯이. 진리란 재해석들에 대한 예전의 모든 재해석 들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는 『정신현상학』의 비전은 최종의 해석, 최후의 <올바른> 해석이라는 플라톤적인 이념을 여전 히 구현하고 있다. 반면에 데리다는 철학에 대한 헤겔의 발상을 지키 되, 그것이 담고 있는 목적론과 방향성과 진지함이 없이 그 수평적
성격만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2 지금까지 이 논문에서 나는 데리다를 철학의 공간에 자리잡게 하 는 일에만 열중해 왔다. 이제 나는 <그들이 행하는 일이 바로 글쓰 기라는 제안에 대해 그토록 심히 불쾌하게 여기는 철학자들은 글쓰 가란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데리다가 어떻게 대답하는가를 좀더 명확하게 살펴보는 일에 관심을 갖고서, 글쓰기에 관한 그의 몇몇 단평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대충 말해서 그의 대답은, 철학자들은 글쓰기란 곧 사실을 표상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며, 더 많은 <글말로writt en> 씌어진 저술一 __ 표상하고 있 는 것에 견주어 덜 투명하고 다른 사람들의 글과 더 많이 연관된 저 술一 __ 일수록 틀림없이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자기의 대답을 내뱉는 방식은, 내 생각으로는,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 가 사물을 칸트식으로 보는 방식을 왜 <해체 decons tru c t>하게 도와 준다고 그가 생각하는지 그 이유를 간파하게 해준다. 먼저 다음과 같 은 구절을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좋은 글쓰기와 나쁜 글쓰기가 있다. 좋고 자연스런 것은 가슴 과 영혼 속에 담겨 있는 신의 새김(刻印)이요, 심술궂고 예술적인 것은 신체의 바깥으로 추방당한 테크닉이다. 플라톤적인 도식의 변형이 잘도 들어맞게 된다. 마치 양심의 소리와 육신의 소리가 있듯이, 영혼의 글쓰기 와 육신의 글쓰기, 내적인 글쓰기와 외적인 글쓰기, 양심의 글쓰기와 정념 (情念)의 글쓰기 …. •• 등으로 말이다. 따라서 좋은 글쓰기는 언제나 이렇게 이해되어 왔다. 그것들은 창조되 었건 않았건 간에 자연이나 자연법의 테두리 내에 있으며, 무엇보다도 영
원히 현재히는 것 이라 고 생각되며, 이해되어야 할 어 떤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 그러므로 좋은 글쓰기는 전체의 테두리 내에서 이해되었으며, 한 권 이나 한 꾸러미의 책 속에 담겨졌다. 책 이라는 아이디어 는 완결되거나 미 완이거나 간에 기표( 記標 , the s ig n ifi er) 들이 하나의 전체를 이 룬 다 는 아이디어다 . 만일 기의(記意, th e s ig n ifi ed) 에 의해 구성 되 는 어떤 전체 가 미리 존재해서 그 문자와 기호들을 지도 하며 그 관념성이 독립적 인 것 이 아니라면 , 이와 같은 기표들의 전체는 하나의 전체가 될 수 없다. 그런 데 언제나 어떤 자연적 전체를 지시하는 책이라는 아이디어 는 글쓰기 의 취지와는 근본적으로 낯선 것이다. …… 만일 책과 텍스트를 내가 구별해 말할 수 있다면, 지금 모든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바와 같은 책 의 파괴 는 텍스트의 겉껍질을 벗기는 일이라고 나는 말하겠다 .~I 위와 같은 구절들에서 데리다는 글쓰기의 새로운 대상 세계 가 아니라 텍스트들 을 창안하고자 노력중이라고 생각해 보라. 책들은 사물에 관한 진리 를 말하는 것이다. 반면에 텍스트들은 다른 텍스트에 관해 논평하는 것이며, 우리는 텍스트들이 표상을 정확히 나타내는가를 검사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데리다는 이렇게 말한 다: <텍스트 읽기는 ……텍스트를 그것 이외의 어떤 것, 죽 피지시체 (형이상학적, 역사적, 성격 분석적인 어떤 실재)나 텍스트 바깥., 바꿔 말해서 그 낱말이 지금 글쓰기 일반의 바깥에 있음을 우리가 허용한 다는 의미에서 기표의 내용이 언어의 바깥에서 발생될 수 있거나 발 생되었을 수 있는, 텍스트 바깥의 어떤 기표를 향하게 하는 것은 범 칙 행위이며 도저히 정당화될 수가 없다 . …… 텍스트의 바깥에는 아 무것도 없다>? 데리다는 <책이라는 것>을 극복할 필요성, 바꿔 말 해서 특정한 주제를 정확히 취급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며 (좀더 2) Jac q u es Den ida , OJ Grammato l og y, tran s. Gay a tr i Chakravort y Sp iva k 3) (B같a 은lti m 책o, r ep: , T 1h58e. J oh ns Hop kins Un ive rsit y Press, 1976), pp. 17-18.
운 좋은 상황이었더라면) 명시적 지칭의 정의에 의해서 , 혹 은 지식을 곧바로 대뇌에 집어넣는 일에 의해서 전달될 수 있을 어떤 메시지 를 전달하는 글쓰기라는 관념을 극복할 필요성을, 어떤 텍스 트를 막론하 고 다른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 되게 그 텍스트를 사용하는 것을 정 당화해 주는 구실로 삼고자 한다 그의 저술에 관해서 가장 충격적인 일, 철 학의 역사를 성적(性的) 인 것으로 그가 해석한 것만큼 웃기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일은, 여러 언어들을 사용한 그의 말장난, 농담 섞인 어원학, 끝없이 이어지는 암시들 발음과 철자법을 활용한 트릭 등이다 . 가령 < 헤겔 He g el > 에 대한 프랑스인의 발음[즉 < 에글 > ]이 영어 < 이글 [ea g le, 독수리]>에 해당되는 프랑 스 어[즉 < 에글aig le > ] 와 비슷하다는 사실 이 , 마치 헤겔을 이해하는 데에 관련성이 있는 것마냥 그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 데리디는· 헤겔의 책을 이해하길 원치 않으며 , 다만 헤겔과 더불어 유희하고 싶어할 따 름이댜 데리다는 언어의 본질에 관한 책을 쓰길 원치 않으며, 사람 들이 언어에 관해 자기네가 써놓았다고 생각했던 텍스트를 가지고 유희하고 싶어한댜 이 시점에서 도버 해협의 양측에 있는 진지한 마음의 철학자들이 < 관념론 > 에 관해 투덜대며 술렁이는 것을 우리는 상상해 볼 수 있 댜 칸트적인 철학자들 사이에는 [철학자라는] 직업과 연관된 건강 위험에 대한 모종의 깊은 공포감이 있는데, 그것은 세계에 대한 우리 의 관계를 지나치게 열심히 탐구한 다음에 철학자가 자신의 신경, 이 성(理 性 ) 그리고 세계를 동시에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관념들이나 표상들 심지어는, 맙소사 신이시여! 텍스트들로 된 꿈의 세계 속에 철학자가 움츠러들면 영락없이 그렇게 되고 만다. 그러한 유혹을 막기 위해서는, 오직 선험적 관념론자만이 경험적 실재론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고 칸트적인 철학자들은 말한다. 표상과 표상된 것 사이의 관계를, 19 세기의 인식론자 및 20 세기의 언
어철학자에게 특징적인 까다롭고도 엄밀한 과학적 방식으로 이해한 사람만이 < 표상이라는 것 자체 >를 정확하게 표상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이 요구하는 의미에 들 어맞게 선험적일 수가 있다. 표상의 관계 에 대한 그와 같이 정확한 선험적 설명만이 주관과 대상, 언어와 세 계 , 과학자와 소립자 , 도덕철학자와 [도덕] 법칙, 철 학 자체와 실재 자체를 연계시킬 수가 있다 . 그래서 변증론자 들 이 정합설적이며 역사 주의적인 견해들을 피력하기 시작할 때면 언제라도 칸트주의자들은 그건 버클리 Geor g e Berkele y의 질병에 걸린 잘못된 또 하나의 사례 라고 설명하며, 그 질병에 대한 치료는 표상에 대한 훨씬 더 낫고, 더 명백한 확신을 주며, 더 투명한 철학적 설명 이외에는 묘약이 없 다고 말한다. 자기들이 관념론에 빠져 있다는 의혹을 받게 되면, 변증론의 철학 자들은 자기들은 다만 특정한 철학 사조의 오류에 반대해서 저항하 고 있는 것이지 실제로는 평범한 사람들이 반대할 만한 어떤 것도 결코 말한 게 없다고 설명함으로써, 마치 버클리가 그의 비판자들에 게 응답한 것과 마찬가지로 늘 응답한다. 오스틴J . L. Aus ti n 이 이 점 과 관련해 말했듯이, <어떤 말을 해야 할 사정이 있는가 하면, 그 말 을 철회해야 할 사정도 있는 법이다>. 데리다의 경우에는, 철회해야 할 사정에 처해 있지 않다는 점이 퍽 기분 좋은 일이다. < 그의 철 학>을 상식과 조화시키는 일에 그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는 어떤 철학을 글로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는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 도, 포괄적인 견해를 제기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철학 사조의 <오 류>에 반대해서 저항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언어철학 이란 것, 즉 언어가 세계에 연관된 방식을 실재론적으로 추구하는 탐 구로서의 언어철학이란 것이, 유별나게 작은 하나의 장르 이상의 무 엇이라는 관념, 닙坪j 말해 그게 바로 제일철학이라는 관념에 반대해 서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제일철학>의 자리에 올 어떤 후보를 갖고 있기에 하는 저항이 아니요, <제일철학>이라는 관
념 자체에 대한 저항이다. 만일에 그가 그렇게 하길 원한다면, 그 역 시 이 장르 내에서 어떤 판단들을 내바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가 령 < 실재론적 > 언어 철학 중에서 더 나은 것과 더 못한 것에 대해 자기가 생각한 바를 내비쳐, 예컨대 스트로슨과 썰J ohn Searle 이 고 유 명사의 지시체에 관해 터무니없게 틀렸다는 최근의 모든 언어철 학자들의 견해에 대해 자기도 역시 동의한다는 것 동으로 말이다. 그 러나 데리다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 당신 들은 의미와 지시를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 까진 다 좋다. 하지만 그것이 그토록 중요한 건 아니다. 당신은 단지 ……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라고. 그는 마치, < 신이란 존 재하지 않는다 > 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 신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관한 이런 모든 말은 이제 부질없게 되어버렸다>라고 말하는 세속주 의자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W illi am J ames 가 <진리란 믿 음의 과정 중에서 좋은 것 > 이라고 말할 때, 그는 다만 인식론의 허 구성을 폭로하고자 하였지 어떤 <진리론>을 제시하려 한 것이 아니 었다 마찬가지로 데리다가
tl 1e i sm) 의 신이 우리의 궁극적 관심에 부적 절 한 상징이라는 것도 아 니다. 그것은 신에 대한 견해 를 꼭 가져야 하지 않기를 바라는 입장 이댜 그것은 < 신 > 이라는 낱말이 인식상 무의미한 표현이라는 점을 안다는 것도,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닌 다른 언어 놀이 속에서는 그 낱말이 나름대로의 역할을 갖는다는 점을 안다는 것도 아니다 . 다만 그 낱말이 그토록 많이 사용된 사실을 유감으로 생각할 따름이다. 마 찬가지로 데리다는, 칸트식의 철학 용어가 그토록 많이 사용된 것을 유감으로 여긴다. 주관과 객관, 표상과 실재 사이의 관계에 대해 수 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염려에 대한 데리다의 태도는 신과 인간, 신 앙과 이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 수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염려에 관 한 계몽주의의 태도와 마찬가지댜 실로, 하이데거처럼 데리다에게 이런 염려는 죄다 똑같은 염려, 즉 그것에 순응하는 것이 인간의 신 성한 의무인 어떤 절박한 것에 대한 우리의 접촉이 끊길지도 모른다 는 염려이다. 프로이트처럼 데리다에게 그것은 우리들의 아버지들이 우리에게 갖고 있는 온갖 형태의 염려이다. 사르트르처럼 데리다에게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인지 가능한 대상으로 전환시켜 스스로를 알 고자 하는 온갖 형태의 시도, 즉 특유의 법칙을 따르는 대자 존재(對 者存在, e tre -en-so i)로 전환하려는 온갖 형 태의 시도이다. 그러므로 데리다에게서 인용하였던 텍스트들에 내가 부과하고 싶 은 바를 요약하자면, 19 세기의 세속주의 지식인들이 그들의 문화에 대해 행하였던 바와 마찬가지 것을 데리다는 우리들의 지식인 문화 에 대해 행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만일 우리의 도덕 생활이 종교에 의해 직조되지 않았더라면 사물들이 어떻게 보일 것인지를 그의 선 구자들이 제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데리다는 만일에 우리의 지적 생활이 칸트적인 철학에 의해 직조되지 않았더라면 사물들이 어떻게 보일 것인지를 제시하고 있다.> 내가 말하고 있는 세속주의자들은 <신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 당신은 무슨 논변을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 공세를 끊임없이 받았다. 데리다는 <우리가 텍스트로써 텍스트
가 아닌 어떤 것을 지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에 대해 당신은 무슨 논 변을 갖고 있는가? > 라는 질문 공세를 끊임없이 받고 있다 . 그런데 그들 중 어느 쪽도 흥미 있는 논변을 갖고 있지 않다 . 그 까닭은 그 들이 자기들의 논적과 똑같은 규칙에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 이다 . 세속주의자나 데리다는 어떤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중이다 진지한 태도의 결여, 죽 내가 방금 데리다에게 귀속시켰던 그런 의미에서 진지한 태도의 결여는, 단지 표준적인 규칙들울 진지 하게 간주할 것에 대한 거부에 불과하며, 동시에 그것은 <옛 놀이를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자는 것인가 아니면 차라리 새로운 놀이 롤 하자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분명히 대답하기를 거부하는 것과도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마치 세속화의 예언자들이 진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데리 다가 정말로 매우 진지한 다른 의미가 있다. 그는 우리 자신들을 변화 시킬 필요성, 그가 <해체(解體)>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진 지하댜 그래서 그는 우리가 <문자학(文字學, gr amma t olo gy)>을 하 나의 새로운 연구 프로그램으로, 무언가 건설적이며 진보적인 일을 행하려는 시도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면서 이렇게 밀하고 있다. <그것은 아르케[印재, 原質]를 체계적으로 삭제하며 기호학(記號學, sem iolo g y) 일반을 문자학으로 전환해서, 차연[差延, diff erance]~) 의 테마와 양립되지 않는 형이상학적 가정들을 조금이라도 포함하는 기 호학 내의 어떤 것에 대해서든, 심지어는 기호의 모형 개념(母型槪 念)에 이르기까지 속속들이, 문자학이 핵심적인 일을 수행하게끔 하 는 것이다 .>5) 이와 같은 구절로부터 우리는 데리다가 자신의 작업을 4) 데리다의 독특한 신조어. 공간적 差異와 시간적 延掛l 의 뜻을 함께 담고 있으 며, 모든 개념적 대립의 공통된 뿌리요, 구분 부호를 생산하는 힘으로서, 이것은 낱말이나 개념도 아니며 명명할 수 없는 이름이라고 일컬어지지만, 대체로 모든 문자의 가능 근거 혹은 原文字를 가리킨다.(역주) 5) Jac q ue s Den ida, Sp e ech and Phenomena 에 영어로 번역된 <차연Diffe ranee> 중에서, p. 146.
순전히 부정적인 것, 바꿔 말해 텍스트들이 뭔가를 표상해야 할 필요 가 있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발가벗은 채로 남아 있게 하고자 현전의 형이상학을 해체하는 작업으로 여기고 있디는· 결론을 어렵지 않게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한 견해는 소쉬르 fi l 에 대한 자기의 고압적인 취급을 데리다가 이런 식으로 변명하는 데에서도 역시 암시되어 있다 : < 나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변호할 수 있을 것이댜 이것[소쉬르의 텍스트 중 하나] 과 (글쓰기 개념을 일반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다론 지침들은, 분석이 나 해명이나 독해나 해석 등 서구의 온갖 방법들이 글쓰기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을 한번도 던져본 일도 없이 거기에서 산출되었던, ‘가 장 거대한 전체’ _참된 지식 (e pi s t eme, in知) 및 로고스 중심적 (log o centr ic, 理性中心的) 형이상학이라는 개념 ――_ 의 해체 문제를 꺼내게 하는, 확실한 수단을 우리에게 이미 제공하고 있다> ? 이 구 절은 내가 지금까지 제시하였던 데리다에 관한 그림, 즉 하이데거가 시도했던 <서구의 형이상학적 전통을 극복>하는 작업을 하이데거보 다 더 잘해내기를 원하는 인물상과 잘 부합된댜 하지만, 그 그림은 지나치게 자비로울지 모른다. 왜냐하면 불행히도 구성적인 것이라고 보이는 데리다의 또 다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그가 결국에는 향수(鄕慈), 즉 철학적인 체계를 구축하려는 유혹 특히 또 하나의 선험적 관념론을 구축하려는 유혹에 굴복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다른 측면이 데리다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나는, 지금까지 내가 논의해 왔던 데리다의 저술 중에서 그늘지고 해 체적이며 좋은 측면과는 대조되는, 밝고 구성적이며 니쁜· 측면에 대 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6) Ferdi na nd de Saussure, 18.5 7 -1913: 스위스의 산스크리트 학자, 언어학자. 구 조주의 언어학을 발전시칸 중심 인물(역주) 7) Jac q ue s Den ida, Of Grammato l og y, p. 46.
3 어디에서 그리 고 왜 데리다가 구성적이게 보이 는 지 를 설명하기 위 해서는 , < 언어 철 학 > 에 대한 그의 태도에 관해 내가 앞에서 언급한 논점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우리는 < 가장 거대한 전체의 해체 > 을 꾀하는 데리다의 시도 를 언어란 곧 비언어적인 것의 표상이라는 관념을 제거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 데리다는 · 셀라즈가 < 심 리학적 유명론 > 이라고 불렀던 비트겐슈타인의 독트린 , 즉 < 모든 인 지는 언어적 사태( 事態 )이다 > 라는 독트린을 수용해서, 그것을 극단 까지 몰고 간다 . 8) 하지만 , 데리다는 (언어를 신이나, 자연이나, 역사나, 인간 등의 범주에 비견될 만한 일반적인 탐구 주제라고 여기는) 언어에 대한 최근의 관심을 일종의 사이비-유명론이라고 본다 .9 ) 그것은 마 치 칸트주의자들이 < 사고 > 나 < 정신 > 과 같은 관념들이 공격받게 되 자, 언어에 의해 표현되는 사고에 이르는 언어의 심연을 차단할 길은 없다고 보게 된 것 __-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 언어와 그 대상의 사이에 끼여들 > 길이 없다고 보게 된 것 -과 흡사하다. 하지만, 칸트주의자들의 응답은, 이제 언어가 어떤 것을 표상한다 고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결론이 아니라, 오히려 대략 다 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 이제 우리는 언어가 사고의 표현이 아 니라고 보지만 언어가 세계를 ‘정말로 표상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에 관해 진지해질 수가 있으며 언어와 세계 사이의 ‘직접 적인’ 연계성을 탐구함으로써 언어에 대해 제 몫의 관심을 기울일 수 가 있다 > . 현대의 언어철학자들에게는 새롭게 발견된 언어의 측면처 럼 보였던 것이 데리다의 눈에는, 언어를 제자리에 두겠다고 하며 언 어는 언어 바깥의 어떤 것을 표상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고집하고 8) Wi lfrid Sellars, Sc ien ce, Percept ion and Reality (L ondon and New York: Routl ed g e and Keg a n Paul, 1 963), pp. 160ft . 참 조 9) Jac q u es Derr ida , OJ Grammato l og y, p. 6.
언어는 표상하는 작 업에 < 적절 해야 > 한다고 고 집하는, 하나의 속 임 수 같은 시도에 불과한 것 으 로 보 였 댜 데리다 는 여기서 도출 되어야 할 적 절 한 교훈은 언어란 도 구가 < 아니라 > 그 속 에서 우리가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댜 그러므로 < 언어가 어떻게 그 기능을 하는가? > 라고 묻는 것은 심리학적 유명론과 배치된다. 만일에 모든 인지가 언어적 사태라면, 우리는 결코 한편으로는 어떤 낱말을 인지 해 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낱말들에서-초연한 - 사물을 인지해 내어 전자가 후자에 부합된다고 할 수가 없댜 하지만, < 기호 > 나 < 표상 > 이나 < 언어 > 라는 관념들 자체가 벌써 그와 같은 일이 < 가능하다 > 는 관념을 담고 있다. 언어철학은 인식론의 후계 분야라는 생각은 이 제는 표상의 문제를 < 적절하게 > 다루는 방법, 칸트가 필요하다고 보 았던 그 작업을 적절히 수행할 방법을 우리가 찾아냈다는 것 을 암시 한댜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고 볼 때, 데리다는 < 기호 > 나 < 표상 > 이나 <보충 > 이라는 관념을 담고 있지 < 않은 > 언어에 관한 어떤 이야기 롤 해낼 방도를 모색한다. 그의 해결책은 < 흔적( 振述 , tr ace) > 과 같 은 관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관념은 최근 그의 추종자들에게 새 로운 <연구 주제>와 아주 흡사한 것같이 되었다. 하지만, 이 대안을 발전시킴에 있어서, 데리다는 언어철학을 제공하는 일과 위험스러울 정도로 가깝게 되었으며, 그래서 그와 하이데거가 < 존재-신학 on t o th eolo gy의 전통 > 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되돌아가는 과오에 위험스 러우리만치 가깝게 되었다. 그 전통이란 다음과 같은 변증법적 운동 에 의해 이어지는 어떤 전통을 말한다. 먼저, 전부를 포괄하는 무조 건적인 어떤 것이 마치 하나의 제약적인 것, 조건적인 것처럼 취급되 고 있다는 점을 누군가가 깨닫게 된댜 그러고 나서, 그 사람은 그것 은 전적으로 판이한 어휘로 묘사되어야 할 만큼 뚜렷히 다른 것이라 고 설명하면서 새로운 어휘를 창안해 간다. 끝으로, 그의 제자들은 그가 새로운 탐구 분야를 창안하였다고 간주하여 그의 새 어휘에
넋을 빼앗긴다 그래서 [그 변증법의] 모든 과정이 다시 새롭게 시 작된댜 이런 일은 교부( 敎父 ) 들 이 플라톤주의에 의거하여 신을 시간과 공 간에서 초월하게 끌어올리고 난 다음에, 신은 형언될 수 없다고 고집 했을 때 < 신 > 에 대해 벌어졌던 일이다. 그로 말미암아 신은 아리스 토텔레스를 읽었던 교회 박사들에게는 속임수의 대상처럼 되었는데, 그들은 형언 불가한 것이 결국에는 어떻게 형언될 수 < 있는지>를 다만 < 유추( 類推 )를 통해 > 설명하였다. 또 , 칸트가 ([그의 저서 『순 수이성비판 』 중] < 순수 이성의 오류 추리>에서) 인식 주관은 실체가 아니라고 설명함으로 해서, 피히테와 19 세기의 사상가들로 하여금 주 관에 대해서는 실제로 할 말이 아주 많지만 그것은 단지 <선험적으 로tr anscenden tally > 그럴 뿐이다라고 설명하게 했을 때, <정신>에 대해 흡사한 일이 벌어졌다. 이 두 경우에서 어떤 이(아우구스티누스, 칸트)는 무조건적인 것을 서술하려 들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으며, 다 른 이(아퀴나스, 피히데)는 그 목적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특별한 테 크닉을 꿈꾸고 있다. 만일 내가 데리다를 의심하고 있는 점이 맞다 면, 이와 똑같은 패턴이 하이데거와 데리다에 의해 되풀이되고 있는 광경을 볼 위험성이 다분히 있다 . 그래서 하이데거가 형언 불가하다 고 생각했던 것을 실제로는 형언이 가능하다고, 다만 <문자학적으 로 > 그럴망정 가능하긴 하다고 [데리다를 좇아서] 우리가 생각하게 될지도모른댜 하이데거는 자기 이전의 모든 사상가들이 존재자와 존재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간과하였다고 설명하는 데에 평생을 보냈으며, 종국에는 X 가-<되어>-드러남B e i n g X-ed ou t과 같은 식의 말을 우리가 써야 한다고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IO ) 하이데거는, <이제 우리 10) Ma rtin Heid e gg er , The Qu estio n of Bein g , trans. Wi lliam Kluback and Jea n T. Wi lde (New York: Twayn e , 1958), Zur Sein sfrag e (Fra nkfurt: Kloste r mann, 1959) 의 영어 번역 참조
는 존재론적 차이를 명심하고 있으니, 존재에 관해 뭔가를 알려주시 오>라고 말하는 제자들이 나오지 않도록 줄곧 애썼다. 그래서 마침 내 그는 형이상학적 전통, 존재-신학적 전통이 존재자와 존재를 혼동 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 시도마저도, 호도적인 형이상학적 시도의 하 나라고 말했다. 그는 그의 논문 <시간과 존재>를 이렇게 말하면서 끝맺고 있다 존재자 없이 존재를 생각함이란 곧 형이상학과 상관없이 존재를 생각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형이상학에 대해 상관하는 것도 여전히 형이상학 을 극복하려는 의도에 젖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모든 극복을 멈추는 것이며, 형이상학을 그 자체로 놔두는 것이다. 만일에 극복이 필수적인 것으로 남게 되면, 그 점을 공공연히 생각하는 일은 극복을 말하기 위해 극복으로 극복에 관해 말하는 전유화(專有化 혹은 固有化, A pp ro pri a ti on) 에 빠져들게 된다 . 우리의 과제는 그와 같이 부적절한 말을 산출하는 경향이 있는 장애물 들을 끊임없이 극복하는 일이다. 앞의 전유화에 관해 강의의 형태로 말하는 것 자체도 이와 같은 유의 장애물로 남게 된다. 그러한 강의는 단지 명제화된 진술로 말해진 것에 불과하다 .111 그러나 물론 전유화E re igni s1 ” 는 우리의 탐구가 지향할 목표에 대 한 또 하나의 이름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이 존재라는 형언 불 가한 것을 입에 담자마자, 형언 불가한 한 가지 것에서 다른 것으로 11) Ma rtin He ide g ger , On Tim e and Bein g , tran s. Joa n Sta mb aug h (New York: Ha rper and Row, 1ITT2), p. 24. 12) 원문에 표시되어 있듯이 이 말은 대략 <존재의 고유함 속으로 존재자를 포섭 함>의 의미를 지닌 하이데거의 말
(예컨대, < 존재 > 에서 < 전유화 > 로) 옮겨가는 하이데거 사유에서의 이 같은 움직임은, 논평의 주제가 될 수 없는 < 어떤 것 > ___ 가령 < 존재의 사건 Ere igni s 에 관한 하이데거의 독트린 > 처럼 탐구의 주 제가 될 수 없는 어떤 것 ――-을 찾아내려는 시도로 간주될 수 있 다 . 하이데거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옛 작가들 한테서 차용해 온 용어들이 갖는 시각적 • 청각적 이미지를 제거해 버리고 , < 오로지 > 글쓰기에만 관련된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 내는 길뿐이라고 데리다는 생각하고 있거나 , 혹은 적어도 그의 저서 『 문 자학D e la Gramma t olo gi e 』을 시작했을 때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의 이러한 충동을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구의 전통이 자체를 조직화해야만 하였고 또 살기 위해 지속해야만 하였던 그 범위 내에서 되풀이되는 증거는 따라서 다음과 같다 : 기의(記 意 )의 질서는 결코 현재의 것아 아니며 , 기껏해야 기표(記標)의 질서와 유사한 것이거나 혹은 그것을 교묘하게 어긋나도록, 숨소리 하나만큼 극 미하게 어긋나도록, 거꾸로 뒤집은 것이었다. 그리고 기의(즉 의미나 사 물, 노에마 noeme 나 실재)는 그 자체로 하나의 기표, 죽 <흔적>이 아니 며, 어떤 경우에라도 가능한 어떤 혼적과의 관계에 의해 그 의미가 구성 되지 않기 때문에, 기호는 이질적인 것들의 통일체가 되어야만 한다 . 기의 의 형식적안 본질은 < 현전(現前, p resence)> 이며, <소리p hone> 로서 의 로고스와 흡사한 그것의 특권은 곧 현전의 특권이다. 이것은 누군가가 < 기호란 무엇인가? > 라고 묻자마자, 바꿔 말해 본질 죽 <티 에스티ti es ti > [본질]에 관한 물음 속에 기호라는 항목을 넣자마자 불가피하게 얻 게 되는 옹답이다. 기호의 <형식적인 본질>은 오직 현전에 의해서만 결 정된다. 그 질문의 형식에 도전해서 기호는 잘못 이름 붙여진 A 불인 것 뇽, 철학의 제도화된 물음인 <……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빠져나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비로소 생각할 경우를 제의하고는 그러한 응답에서 빠져 나올 방도는 없다 .13 1
이 구절에서 우리 를 머뭇거리게 하 는 것은 < 유일한 길 > 이라는 말 이다 그것은 마치 하이데거가 실패했던 어떤 일 , 바꿔 말해 논평의 주제가 될 수 없으며 < 기호에 관한 데리다의 교의 > 라는 식의 철학 박사 학위 논문을 쓸 수가 없는 말을, 아무도 그것을 조건적인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이름인 것처럼 도저히 취급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것에 대한 한 가지 표현을, 찾아내는 일을 마치 데리다 자신은 해낸 것인 양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댜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그 와 흡사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 플라톤에서 루소와 헤겔에 이르기 까지 좁은 의미의 글쓰기에 대한 혼적 지우기 운동이 있어왔다. 그와 같은 교체 작업의 필요성이 이제는 확연해질 것이다 . 글쓰기는 혼적 일반을 대표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지, 흔적 자체가 아니다. ‘혼적 자 체란 존재하지 않는댜'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 컬쳐t o on' 있음 이요 어떤 것의 단위체가 됨이며 , 어떤 것에 컬쳐’ 현전함이다) > ) ” 이 구절에 대해 우리는, 존재-신학적 전통에 속한 작가에게서 무슨 관 념이 신의 자리를 차지했는지롤 알고자 한다면 언제나 그 작가가 존 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살펴보면 된다라는, 다소 냉소적 인 논평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형언 불가한 것의 이름일 것 이요, 보여줄 수는 있지만 말해질 수는 없는 것일 터이며, 믿어질 수 있되 알려질 수 없는 것이고,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우리 의 존재를 얻는 전제 조건이지만 언급될 수 없는 어떤 것의 이름이 리라. 그것은 표현 불가한 줄 알면서도 무조건적인 것을 표현해야 할 필요성이며,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다음과 같이 묘사한 지점으로 우 리를 이끌고 간다: <때때로 철학을 함에 있어서, 우리는 말도 안 되 는 소리를 발언하길 그냥 원한다 .>151 하자만, 누가 어떤 소리를 말하 13) Jac q u es Derr ida , OJ Grammato l ogy , pp. 18-19. 14) 같은 책, p. 167. 15) Ludwi g Wi ttge nste in , Phil o sop hiail I nvesti ga ti on s(New York and Lon- don: Macm illan , 1953), pt. 1, sect. 261.
든 간에 바로 그것에 관해 누군가가 학위 논문을 쓰는 것을 그 논점 이 막지는 못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데리다는 내가 방금 묘사했던 유혹, 혼적을 신격 화하며 글쓰기를 <흔 적 자체가 아니라 혼적 일반을 대표하는 것 가 운데 하나 >( 이 구절은 <흔적> 을
< 보이지 않는 신> 가운데 하 나로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취급하는 그 유혹에 대해, 경고 롤 해준 최초의 인물이었댜 『 문자학 』 바로 다음에 출판된 『차연 D iff erance 」이라는 논문에서 그는 한편으로는 제도화된 철학의 물음 을 벗어날 유일한 것으로서의 <기호t he s ig n > 와, 다른 한편으로는 하이데거의 <존 재론적 차이 > 를 포함하여 이 역할에 도전했던 과거 의 모든 실패한 후보들 사이에서, 그가 찾아내기를 바라는 차이를 식 별해 내고 있다. 그 논문에서 데리다는 자기를 언어철학자와 거의 흡 사한 어떤 일을 하는 자에서 철학의 철학자로 전환시키고 있다. 후자 에게서 철학이란 바로 특정한 종류의 자기 의식적인 글쓰기 놀이이 다. < 흔적 > 과 달리 < 차연>은, 그것 때문에 칸트적인 철학이 무조건 적인 조건들을 추구했던 사물이나 신이나 정신 등과 상관이 없듯이, 기호하고도 전혀 상관이 없다. 차연은 변증론의 철학자가 거기에서 출발하는 어떤 상황에 대한, 즉 낡은 물음들이 제기되는 것을 허용하 지 않을 새로운 어휘의 창안을 통해서 현재 어휘의 영속화나 세계화 에 항거하려는 소망에 대한 이름이다 . <차연>이라는 논문에서 데리 다는 하이데거와 그 이전의 자기 자신 양자에 대해 준엄하게 질책하 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들에게 차연은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로부터 얻은 모든 이름은 그것이 이름인 한에서는 여전히 형 이상학적이다. ..... . 존재 자체보다 더 <오래된> 것이지만 우리의 언어는 그와 같은 차연
에 대해 아무런 이름도 갖지를 않았다. 하지만, 만일 그것이 이 름할 수 없 는 것이라면 단순히 일시적인 것이 아님을 우리는 < 이미 알고 있다>. 그 까닭은 우리 언어가 이 < 이 름>을 여지껏 발견해 내지 못했거나 얻지 못 했기 때문도 아니며, 그것을 어떤 다른 언어, 죽 우리 언어의 유한한 체계 바깥에서 구해야 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 까닭은 이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 이름 > 도, 심지어는 본질이나 존재마저 없기 때문이며 , 그래서 이름 같 지도 않은 <차연>이라는 저 이름조차도 순수한 형식적 통일체가 아니라 그것을 연쇄적으로 대체할 다른 것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해체될 것에 불 과하다. ..... . 고유한 이름이라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심지어는 존재의 이름도 그렇 다. 그래서 그것은 아무런 그리움도 없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바꿔 말해서 그것은 사고라는 잃어버린 조국에 속하는 순수한 모계(母系) 언어나 부 계(父系) 언어라는 신화를 떠나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허나, 그런 일과는 반대로 우리는 그것을 웃음과 춤으로 맞으면서 <긍정해야>만 한다 니체가 유희를 긍정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1 61 4 내가 지금까지 말해 온 바가 제기히는· 주된 물음이 무엇인지를 되 돌아보자.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그 최초의 덩굴에 해당되는 변증 론의 침 덩굴에서 데리다가 그중 최근에 개화된 그리고 가장 큰 꽃 이라고 간주된다면, 이는 단지 그 덩굴 식물이 무성해지는 것을 근절 시킬 필요성을 보여주는 데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이제 우리는 그 침 덩굴들에 의해 뒤덮여 가리워진 거대한 칸트적인 저택의 아직 채 16) Jac q u es Derr ida , Sp e ech and Phenomena, and Oth e r Essay s in Ilusserf s Theory of Sig ns, pp. 158-159.
완성되지도 않은 벽과 지붕 둘 위에 기어오 르 고 있는, 그 기생 식물의 홉근 ( 吸根 )을 벗겨내야 할 필 요성 을 한층 더 잘 볼 수 있지 않은가? 만일에 언어는 표상의 체계가 아니라는 이 모든 난센스가 참이라고 간주되고 또 데리다가 그것에서 어떤 흥미로운 결과 를 도출해 냈다 면 , 우리가 이제야 정신을 차려서 그건 거짓이라고 말하며, 또 철학 은 어떻게 해서 표상이 가능한지를 이해하려는 느 려터지고도 끈기를 요하는 작업으로 다시금 잘 복귀해 갈 것이라고 말 할 수는 없지 않 겠 는가? 이에 대한 변증론자의 응답은 내 생각으로는 두 가지여야 한다. 첫 째, 언어가 과연 표상의 체계인가 아닌가에 관한 물음은 < 어떤 사람 도 > (칸트주의자든 아니든) 응답의 방도를 알지 못하는 물음이며, 따 라서 어떤 대답이 주어지든 그것이 정답일 수가 없다고 우리는 응수 할 수 있댜 문제의 핵심은 < 언어는 표상의 체계이다 > 라는 말은 그 말이 사물들의 모습에 대한 정확한 표상이냐 아니냐에 따라 가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둘째, 언어가 표상의 체계로 간 주되었을 경우 그것은 < 말할 것도 없이 > 수많은 목적에 유용하다고 우리는 응수할 수 있다. 마치 물리학 이론이 우리가 양자의 차원으로 내려가서 보게 될 모습에 대한 근사치로서 매우 유용하듯이, 또 도덕 철 학이 < 도덕률 > 에 대한 근사치로서 유용하듯이, 그리고 철학이 전 통적인 물음들에 대답함에서 더 순수하고 더 나은 탐구로써 유용하 듯이. 이러한 접근법들 가운데 < 어느 것 > 이라도 유용하고 생산적이게 하려면 우리는 역사에서 현재의 시대 (혹은 계급, 사회, 학파) 어휘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해야만 한다. 일단 이 언어 놀이 속에 안전하게 정착하고 나면, 무엇이 무엇을 똑바로 표상하며, 그것을 우리가 어떻 게 알고, 그것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내는지에 관한 물음은 경탄할 만한 의미를 갖게 되며 또 유용한 대답을 얻게 될 것이다. 칸트적인 전통에서 이루어진 일 중에서, 변증론의 전통에 의해 특정한 역사적
운동의 실행에 대한 서술 현재 벌어지고 있는 바를 분명히 포착 하기 위해 방편상 역사 의식을 잠시 눈멀게 했을 때 얻게 되는 그러 한 유의 서술-~로 취급될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물리학, 옳 고 그름, 철학, 언어 등에 대한 자기네들의 현재 견해를 칸트적 전통 이 영속화하며 세계화하려 할 경우에 <있어서만> 그 두 전통은 정 말로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예컨대 물리학을 쿤이 <정상과 학>이라고 부르는 시기에 고착시키고 나면, 우리는 확정된 관찰 언 어와 일련의 의미 규칙들 및 몇 가지 이론 선택의 규범들로써 이론 에 대한 정당화의 실행을 묘사해 낼 수가 있다. 만약에 우리가 설명 을 위한 보조 장치인 이것을 다양한 시대와 문화에서의 자연에 대한 설명이라고 간주되는 모든 사례들에 적용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시대 착오에 빠져들거나 아니면 가령 <이론 용어들 의 지시 변화에 대한 규준>과 같은 초점 잃은 난문 속으로 빠지고 말것이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만약에 우리가 데이터를 <고양이가 담요 위에 앉아 있다>'는 말에서부터 <그 소립자는 왼쪽 슬릿을 통과해 갔 다>는 표현 등의 모든 범위에 걸친 주장이라고 간주한다면, 그 표현 들의 각 부분이 표현 전체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그리고 언어 사용자 가 그 표현들을 어떤 조건 아래에서 채용하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설명을, 여하튼 구성해 내는 일이 가능하긴 할 것이다. 다만 우리가 이런 식의 설명을 적용하고자 발벗고 나서서, 예컨대 <열이란 것은 수많은 분자들의 운동이다>나 <언어가 사람됨을 말해 준다>나 <신 의 본질은 신의 존재함이다> 따위의 주장들에 대해서도 모조리 은혜 를 베풀려 하거나, 거꾸로 그 일로 인해 낭패하게 될 경우에만, 우리 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만약에 우리가 그와 같이 <문자적인 것 대 17) 분석철학,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그림 이론과 연관해 거론되는 고전적인 예문 중 하나.(역주)
( 對 ) 비유적인 것 >, < 서 술 문장의 비진술적인 사용 > 등과 같은 것 을 운위함으로써 체계상에서 차별적이며 또 환원적으로 되고자 노력 한다면, 언어철학은 인식론과 관련을 갖게 되고 논쟁거리가 되며 또 우리의 자기 이해에 본질적인 것처럼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또한, 언어철학은 하이데거와 데리다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유의 것 들과도 충돌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더 나쁜 일은 하이데거와 데리다 가 말해 주고 있는 유의 것들이 예컨대 프레게와 카르납과 퍼트남이 말한 것과 경합하는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 그러나 그와 같은 경합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언급했던 언어철 학자들 중 누구의 견해와도 다른 견해를 데리다가 견지하고 있는 그 러한 주제, 특히 기호와 기의의 관계 및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관한 그러한 주제는 하나도 없다 . 또, 그들의 견해를 보충해 주는 어떤 통 찰을 데리다가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 반복해 말하지만, 데리다는 언어철학자가 아니다 그가 언어철학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것은 왜 기호와 기의의 관계, 죽 표상의 본질에 대한 견해가 우리의 자기 이 해, 지혜에 대한 사랑 곧 철학의 출발점이 될 수 있었던가에 대한 역 사적인 물음에 그가 관심을 갖는 데에 국한된다. 그는 <칸트적인> 철학관과 <칸트적인> 언어관 사이의 연관 관계, 바꿔 말해 왜 현재 의 것을 영속화하고 세계화하려는 최근의 칸트적인 노력이 언어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야 하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다 . 이 점에 있어서 그 는 뭔가 할 말을 < 정말로> 갖고 있으나, 그것은 철학에 관한 것이지 언어에 관한 것은 아니다 . 데리다의 견해에 의하면, 칸트적인 철학은 글쓰기가 되기를 원치 않는 일종의 글쓰기다. 그것은 하나의 몸짓이거나, 천둥의 굉음이거 나, 하나의 통찰이 되길 원하는 어떤 장르다. <그것은> 신과 인간, 사고와 대상, 낱말과 세계가 만나는 곳이며, 우리가 소리 없이 말하 기를 원하는 곳이며, 그 행복한 쌍들의 중간에 더 이상의 어떠한 말 도 끼여들게 허락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칸트적인 철학자들은 글
쓰기를 원치 않으며 그 대신에, 다만 < 보여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네들이 사용하는 말들이 무전제의 것이 될 만큼 아주 단 순하기를 원한다. 그들 중 일부는 물리학도 역시 일종의 글쓰기가 아 니라고 생각하길 좋아한다. 그래서 그들은, 적어도 몇몇 나라에서는, 철학은 이제 학문으로서의 안전한 길을 성취했으므로 문필로서의 요 구를 전혀 갖지 않게 된 것이라는 생각을 품기도 한다. 물리학에 대 한 칸트적 견해에 의하면 물리학은 물질의 핵심을 곧장 가리켜줄 역 사적인 자기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과 아주· 홉사하게, 철학 에 대한 칸트적 견해에 의하면 정신의 핵심, 즉 표상의 관계 자체를 곧장 가리키기 위해서는 자기들의 칸트적인 동기에 대해서는 괘념할 필요가없댜 이에 대해 데리다는, 이미 수립된 맥락 속에서 어떤 것의 위상을 드러내는 일로 만족하려 한다면 누구든 문필로서의 요구에 괘의치 않고도 즉 글쓰기에 대해 괘념치 않고도, 잘해 나갈 수 있다고 응답 한다. 통상의 과학이나, 통상적인 철학, 통상적인 도덕, 통상적인 설 교에서 우리는 더 이상의 논평이 사족처럼 되도록, 제 조각이 제 구 멍에 딱 들어맞기를 통상적인 스릴을 갖고서 기대한다. 루소에 관해 논평을 하면서 데리다가 말하듯이, 글쓰기란 마치 자위 행위가 표준 적이고, 실질적이며, 어엿한 성행위의 일종에 해당되듯이 위에서 말 한 바와 같은 단순한 유의 <올바르게 만들기>에 해당된다. 작가들이 과학자들 요즈음 시대에서 <행동하는 사람들> 과 바교될 경우 바생산적으로 여겨지는 이유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그 두 활 동 유형 간의 차이는 그들이 다루는 주제 분야의 차이, 달리 말해서 가령 경성(硬性)과학이 다루는 냉혹한 소립자와 연성(軟性)과학이 다루는 유동적인 인간 행위 사이의 차이가 아니라, <오히려 통상성 normal ity이나 비통상성 abnormal ity[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이 때 통상성이란 것의 의미는 (과학적 또는 명시적) 입증에 정당성을 부여히는 언어의 배경 장치들을 아무런 의문도 없이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정상과학 내에서 활동 하 는 과학자 들 은 그 렇지 않으나, 혁명 적인 과학자는 글쓰 기 를 필 요 로 한다. 의회에 진 출 한 [통상적인] 정 치인 들 은 그렇지 않으나, 혁 명가적인 정치인은 글쓰기 를 필요로 한 다. 칸트 적 인 철 학자 들 은 그렇지 않으나, 데리다와 같은 변증론의 철 학자는 글 쓰기 를 필요로 한다 . 대부분의 메타 철 학적인 논쟁에 데리다가 도색적(挑色的)인 색조를 칠 해서 구체화시킨 통상과 비통상 사이의 프로이트식 구 분이야말로 칸트주의자들과 변증론자들 간의 차이와 연관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적 절 한 유희인 것처럼 내게는 보인다 . 만일에 그 차이를 영속성과 시 간성 , 이론과 실천, 자연과 역사, 항구불변성과 변화, 지성과 직관, 과 학과 예 술 등에서 각기 열성파들간의 차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것은 너무나 일시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고 또 심각하거나 논 쟁거리가 될 쟁점이 전혀 없는 듯이 보이고 말 것이다. 칸트적인 철 학과 비칸트적인 철 학 사이의 쟁점은, 내 생각에는, 통상적인 성행위 관행과 변태적인 성행위 간의 쟁점만큼이나 심각한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남자들이 자기들의 정체성(正 體 性)과 성실성이 거 기에 달려 있다고 느낄 만한 쟁점이다. ( < 사람들 > 보다는 < 남지들.>이 다. 잠자리에서 무얼 어떻게 행하는지에 관해 말하는 것이 특히 남성다 운 성향의 뚜렷한 특징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 ) 따라서 그것은 중요한 문제라는 뜻에서 보자면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토론의 여지가 있는 것 , 즉 토론의 쌍방 모두 할 말이 많은 문제라는 의미에서 보자면, 결코 심각한 문제가 <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 력투구를 해서 (논적들을 대량으로 학살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좀더 대화적인 방식을 통해) 반드시 해소해야 할 그런 쟁점은 아니다. 실 로, 우리에게는 그것이 해소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그 쟁점이 언젠 가 일단 해소<될 거라고 가정하면>, 철학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터이므로. (혹은 더 이상 홍미로운 글쓰기는 전혀 없게 될 것이므로` 결국 철학이란 비록 더 이상은 만학의 왕 re gi na s ci en ti arum 은 아닐망
정 여전히 주도적인 학문 분아 dom i na trix d i s cip l i narum 이며, 아무도 자 신이 써놓은 것이 <철 학적 함 축>을 가질 거라 는 막연한 희망도 없이 정말로 <글 쓰기다운 > 어떤 글쓰 기 를 하려 들 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일에 통상적인 성행위와 변태적인 성행위 간의 차 이가 대량 학살이 아니라 합리적인 논증에 의해 이쪽이든 저쪽이든 어느 한쪽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혹은 쌍방이 도덕적으로 동등하 다고 언젠가 판명되어서 일단 고착되고 나면, 그 경우에도 오늘날 문 제되는 것만큼이나 지주 성행위가 문제시될지는 불투명하다. 프로이 트가 서구의 문화를 창조했던 신경증 환자들을 처형한 것에 감사하 는 성적인 억압 충동을 우리는 갖고 있다고 말할 때, 그는 문자 그대 로 그걸 의미하였댜 만일에 데리다가 『 문자학』 이후의 저술에서 철 학적 텍스트들을 다룰 때 방향을 제대로 잡고 있다면, 우리는 이 문 화가 어떻게 해서 승화된 성적 충동에 의해 살찌어져 왔는지에 대해 좀더 구체적일 수 있을 것이다. 칸트주의자와 비칸트주의자 간의 대 조는 이제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해서 (쳐다보고) 제 조각이 제 구 멍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신하기를 원하는 사람과, 현재 사용되는 어 휘를 조각과 구멍으로 구분되도록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사람 사이의 대조로 나타난다. 이것은 조건적인 것과 무조건적인 것, 형언 가능한 것과 형언 불가한 것의 변증법이 왜 그와 같이 독특한 스릴을 지녔 는지를 파악하게 해준다. 입에 담을 수 없는 가능성들, 언급 불가한 행위들이란 바로 새롭고, 혁명적이며, 헤겔적이고, 비통상적인 어휘 속에서 말해지고 언급된 것들이다. 철학자는 스스로를 죽자-대자 존 A ]lp ou r- so i -en-so i로 재창조함으로써 신이 되려고 시도한다고 설명 한 사르트르의 말은, 최근의 서구 문화에서 통상적인 사람, 죽 자연 법과 도덕법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법관념을 가진 사람에게 칸트 적 전통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에 대해 프로이트가 암시하는 설 명과잘부합된댜 또 이와 같은 프로이트식의 곡해(曲解)는, 비록 그것이 가령 데리
다가 행한 어떤 말 혹은 콰인이 행한 어떤 말과 양립될 수 있다고 할 지라도, 우리가 왜 그 차이를 느긋한 마음으로 갈라놓을 수 없는지를 간파하게 해준다. 칸트주의자들은 그들 나름의 (자기 소멸적인) 글쓰 기 유형을 보유하고, 또 헤겔주의자들은 그들 나름의 (자기 확장적이 며, 침 덩굴 같은) 다른 글쓰기 유형을 보유하게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다. 그와 같은 방식의 회유책은 이 두 전통이 각기 상대방이 죽을 때 살고 상대방이 살 때 죽는다는 사실, 달리 말해서 통상적 성행위 와 변태적 성행위 사이의 관계와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애매하게 하 는짓이댜 칸트적 인 규범은 조만간 지루하게 될 터 이며 아노미 [ano mi e: 무규 범적 상태] 현상과 변칙 사례로 가득 찰 것이기 때문에, 변증론자는 만일 충분히 오랫동안 기다리면 언제나 승리할 것이다. 반면에 칸트 주의자는, 단지 자신의 힘든 행위들과 변증론자의 빈말들의 대조를 통해서만, 하찮은 것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자기 정체성과 자기 의식 적인 긍지를 얻게 된다. <그는> 결코 생산력이 없는 기생충이 아니 며, 오히려 인간의 지식, 인간의 사회, 참된 인간의 도시라는 대건축 물을 건설하는 인간의 위대한 경험 전달 작업에서 자신의 몫을 해내 는 자이다. 그런데 비칸트주의자는 그 대건축물이 어느 날에는 저절 로 해체될 것이며, 위대한 행위들은 재해석될 것이고, 반복해서 재해 석될 것임을 안다. 하지만, 비칸트주의자는 말할 것도 없이 기생하는 존재<이다>. 만일에 갈라진 틈새로 홉근(吸根)을 끼워넣을 수 있을 그러한 대건축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변증론의 덩굴에서는 아무런 새싹도 돋아날 수 없을 것이다. 건설하는 자가 없다면 해체하는 자도 없다. [정상적인] 규범이 없 다면 [도착적인] 이상 상태도 없다. 극복해야 될 <현전의 형이상학> 이 없다면, 데리다는 (하이데거처럼) 글쓰기를 할 것이 없게 되리라. 반면에 기생하는 존재를 짓밟는 재미가 없다면, 칸트주의자는 건설 작업을 지속하는 것이 권태로울 것이다. 통상적인 철학자들은, 가령
현대 분석철학의 강력한 도구들을 풀무질해 갈고 닦을 때, 퇴폐적인 변증론자들과 겨루게 될 다가오는 결전에서 승리를 안겨줄 무기를 자기네들이 발전시켜 가는 중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각기 상대 편이 필요하다. 자기 의식의 발전 과정에서 이 지점에 이르게 되면 칸트주의 및 비칸트주의 메타철학자들은 저쪽의 반대자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이쪽에서 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칸트주의자는 비칸트주의자를, 가령 말과 세계에 관한 고유하고도 규제된 철학적 견해를 갖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이지만 그런 것을 정합적이며 엄격 한 형태로 한데 통합해 유지할 줄 모르는 자라고 생각한다. 헤겔주의 자는 침 덩굴과 그것이 덮고 있는 저택 사이의 대조는 실제로 없으 며, 오히려 이른바 저택이란 것이 사실은 죽은 나무들과 과거에는 싱 싱하고도 꽃이 만발하였지만 지금은 빌딩의 모습처럼 보이기에 이른 위대한 침 덩굴 자체의 부분들이 집적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통상적인 사람은 비통상적인 자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비난의 대상이 아닌 연민의 대상이라고 본다. 거꾸로 비통상적인 자 는 통상적인 사람을 뛰쳐나올 용기가 없는 사람, 그래서 육신은 살아 있되 그 속에서 죽은 자라고 보며,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 도움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본다. 이런 유의 대비는 무한정 지속될 수 있다. 그러한 대비가 바로 우 리가 얻게 될 모든 것에 해당되며, 그것에 종지부를 찍거나 그것을 지양(止揚, au fh eben) 해 낼, <문자학이라는 새로운 학문>과 같은 술 책은 사실은 없다는 것이 바로 데리다의 논점이라고 나는 받아들인 다. 일단 철학을 일종의 글쓰기라고 생각하면, 이 결과를 놀라워해서 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생각한다는 것은 이른바 <제일철 학>인 언어철학, 모든 가능한 견해들에 대한 어떤 견해, 에피스테메 의 에피스테메[참된 앎에 대한 앎, c1ClmnJU I C1Clmnµns], 하나의 항구 적인 틀 속에 과거와 미래의 모든 글쓰기가 담겨진 채 파악될 수 있
는 자기 상승적인 어떤 관점 등을 얻으려는 노력을 중지하는 일이기 때문이댜 그러한 관점까지 < 상승해 올라갔던 > 사람만이 글쓰가를 내려다볼 권리 를 가지며 , 글쓰기를 (플라톤처럼) 2 급의 것이라거나, (루소처럼) 죄악이 자신을 저주해 내린 비통상적인 활동이라거나, 한 분야가 학문으로서의 안전한 길에 도달하면 마땅히 없어도 되는 것 으로 여길 수 있다고 간주된다. 하지만, 말하기가 글쓰기보다 더 우 선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데리다의 논쟁은, 사르트르가 < 못된 믿음> 이라고 불렀던 것, 바꿔 말해서 스스로를 신격화하여 모든 가능한 문 제들이 정착될 방도와 그 해소의 규준을 미리 알고자 하는 시도에 반대히는 논쟁으로 여겨져야 한다. 만일에 글쓰기보다 말하기가 더 우선이라는 <로고스 중심적>이며 플라톤적인 말하기의 관념이 옳다 면 , 마지막 말이 바로 거기에 있게 될 것이다. [즉 말하기의 한계점이 바로 거기일 것이다.] 데리다의 논점은 최종적인 논평, 최종적인 논 의를 담은 노트, 더 나은 글쓰기를 상회하는 더 좋은 글쓰기라는 관 념 따위에 대해서는 그 누구라도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7 픽션의 담론에 문제가 있는가?
l 머리말 현대 분석 철 학은 < 픽션적 대상에 대한 진리 > 에 관해 많은 논의를 낳게 하였으나 , 그 논의의 모티브는 문학 이론과는 퍽 동떨어진 것이 었다. 앵글로색슨[영미]의 언어철학 내에서 픽션이란 논제는 통상 다 음과 같 은 진부한 물음들과 연관해 제기되었다: < 글래드스턴 은 영 국에서 태어났다 > 와 < 셜록 홈즈는 영국에서 태어났다 > 와 같은 문 장을 둘 다 참이게 하려면 진리에 대해 어떤 얘기를 해야 하는가? 픽션의 진리에 관한 철 학적 논의의 중요성은 이 문제에 대해 어느 해결책을 택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진리 일반에 관한 논의를 결정 한다는 데 있다. 만일에 진리가 <실재와의 대응>이라면 우리는 하나 의 문제에 봉착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두번째 문장에 대해서는 도대 체 어떤 실재가 대응된다고 말할 것인가? 하지만, 만일에 진리란 단 순히 < 보장된 언명 가능성>이라고 한다면, 그 문제는 덜 까다로워 보일 것이다 . 그 경우 우리는 다만 각 문장을 주장하는 데에 관련된 1) Wi lliam E. Gladsto n e, 1809-1898: 영국의 정치가 . (역주)상황이나, 규약이나, 전제 조건 등을 판별하면 그만이댜 진리를 <실 재와의 대응 > 으 로 여 길 것인지 혹은 < 보장된 언명 가 능성 > 으로 여길 것인지에 관한 물음은, 언어 를 그림으로 취급할 것 인지 혹은 놀이로 취급할 것인지에 관한 물음이다. 이중에서 후자의 쟁점 -아주 간략히 말해서 비트겐슈타인의 전기(前期)와 후기 간 의 쟁점 -은 < 픽션의 진리 문제 > 에 관한 쟁론들에 의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댜 왜냐하면 실재론 대( 對 ) 관념론, 혹은 <표상 주 의 > 대 < 실용주의 > 라는 대결 전반에 걸친 문제가, < 만일 차이가 있 다면 ‘실제로 존재함’과 ‘만들어짐’ 간의 차이는 무엇에 달려 있는 가? > 라는 물음으로 선명히 부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목적을 위해, 편의상의 픽션이 실재만큼이나 좋을 수가 있는가? 이런 식으로 해서 의미론의 테두리 내에 속했던 꽤나 까다롭고도 기술적 (技 術的 )인 쟁점에 대한 논의들이, 불현듯 한편으로는 진리는 곧 비 은폐성이라는 하이데거 유의 관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는 지식과 실재의 부합이라는 관점 간의 대결을 살펴보게 하는 물음들을 야기 시킨다. 이렇듯 기술적인 쟁점이 더 넓고, 더 막연하며, 게다가 더 홍미로 운 쟁점으로 옮겨가는 경로는 매우 복잡하다. 더구나 특정한 의미론 적 연구 프로그램 내에서 퍼즐의 해결 조건을 미리 고착시키는 간단 한 방식을 통해, 그 쟁점들 중에서 임의의 것을 회피해 버릴 수도 있 다. 나는 그러한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여하지 않는다. 그래 서 글래드스턴과 홈즈에 관한 문제에 대해 어느 특정한 해결 방안이 좋다고 그 덕성을 논변하려 들지도 않을 것이고 , 하물며 그 해결 방 안이 언어나 진리에 관한 일반적인 견해를 지배한다거나 혹은 일반 적인 견해에서 도출된다고 주장하지도 않울 것이다. 오히려 니는 · 각 방안을 제시한 철학자의 가정이 무엇인가를 특히 주목하면서, 학계에 최근에 제시된 4 가지 해결 방안을 고찰하고자 한다. 나는 <파르메니 데스적인> 일련의 핵심 가정들이 4 가지 모두에 공통적이라는 주장
을 펼칠 것이다. 나 는 그 가 정들 을 수용하지 않지만 , 내가 반 론 을 펴 기 에는 그 것 들이 너무나 추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그 가 정들 이 전제되지 < 않으면 > 일이 어떻게 보일지 를 밝히는 데에만 주 력할 것이다. 끝으로 이같은 파르메니데스적인 견해가 픽션 들 , 특히 발 견 된 것이 아니라 만 들 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자의식 적 으로 반영하 는 픽션들 ― ―― < 픽션임 > 을 중시하는 픽션 작품들-에 있어서 왜 그토록 중요한지 롤 제안함으로써 결론을 맺기로 하 겠 다. 글래드스턴과 홈즈에 관한 문제에 대해 내가 차례로 논의할 4 가지 방안은 다음과 같다 . (1) <홈 즈에 관해 말하는 것은 실제로는 코난 도일 AC. Do y le 의 소설 들 에 관한 것 > 이 라는 표준적 인 러 셀 Be rtr and Russell 식의 견해 . (2) 썰J ohn R. Searle 의 < 가장(假 裝 )된 주장 > 이라 는 관념 (3) 지시가 화자( 話者 )의 의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러셀과 썰 에 공통된 견해 를 반대하면서 도넬란 Ke it h Donnellan 이 제시한, 비 존 재자의 지시에 관한 < 물리주의자 > 의 견해. (4) 파슨스T erence Par s ons 가 제시한, 지향성의 < 어떠한 > 대상에 대해서도 지시가 가 능하다는 견해인 < 마이농주의 Me i non giani sm > 의 최신판 . 이중 나중 의 3 가지 견해들은, 이 쟁점에 관한 논의에서 수년 동안 < 표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통의 배경을 제공하였던, 러셀의 견해에서 어 느 하나 혹은 다른 요소들에 대한 반발이다 . 2 러셀 : 인식론으로서의 의미론 러셀은 생애의 다양한 시기에 따라 의미론 seman ti cs 과 인식론 양 자에 관해 다양한 견해들을 견지하였다. 하지만, 그는 다음의 (1) 과 같은 견해와 거기에서 (2) 가 도출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혼들리지 않 았다.
(1) 피지시체는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2)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외견상으로 지시하는 진술은, 실제로 는 비존재자를 지시하는 진술의 축약이며 비존재자를 지시하는 진술 로 반드시 <분석되어야> 한다. 게다가, 더욱 논란거리인 것은, 그는 때때로 다음 (3) 을 견지하였 는데 그것은 곧 (4) 를 귀결시킨다. (3) (지성이 보편차를 <직접적으로 알며> 감각이 개별적 감각 소여 sense-da t a 를 <직접적으로 안다>는 의미에서) 오로지 <직접지(直接 知, knowled ge by ac q u ai n tan ce)> 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에 대해 서만 우리는 말할 수 있다. (4) 모든 진술은 <진짜 이름들 >(가령 <이것>이란 용어와 같은 지 시사 등의 <논리적 고유 명사>)을 포함하는 진술로 분석될 수 있다. 위의 (1) 을 옹호하기 위해 러셀은 그의 <기술론(記述論, the ory of desc ripti ons) >을 제안하였는데, 그 이론은 예컨대 <둥근 사각형>이 나 <황금산> 등과 같은 외견상의 지시 표현을 술어 표현이라고 평 가한다. 그러한 지시 표현을 사용하는 진술은, 관련된 술어 표현(즉, <둥글고 사각형임>, <황금으로 되고 산임>)이 참으로 되고, 또 존재 하는 것에 대한 명시적 주장을 포함하는 다른 표현에 의해 분석되었 다. 이것은 비존재자에 관한 모든 진술은 곧 거짓으로 판명될 것임을 뜻하며, 러셀의 견해에 따르면, 스트로슨이 다음과 같은 반론을 주장 할 때까지는 그 논점이 분석철학 내에서 대체로 도전받지 않았다. 스 트로슨은 다음의 두 진술 중 처음 것이 두번째 것을 <주장하는> 것 2) 普過者, unive rsals: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며, 특수한 것에 대응되는 보편적 존 재. 예컨대 이순신, 정약용 둥은 개별자이나 안간은 보편자이다.(역주)
이 아니라 <전 제한다 > 고 주장하였다. 아프리카에는 황금산이 있다. 거기에는 산이며 동시에 금으로 된 어떤 것이 존재한다. 스트로슨의 견해에 의하면, 만일 두번째 진술이 거짓이라면, 첫번 째 진술은 참도 거짓도 아니다. 그 논점을 되살리려는 썰의 시도와 연관해서 스트로슨의 논점에 대해서는 잠시 후 재론할 작정이지만, 지금 여기서는 그 논점을 (3) 과 (4) 와 대비시켜 한 가지만 간단히 언 급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러셀의 주장 (2) 는 다음의 두 진술에서 처 음 것을 두번째 것으로 분석해 냄으로써 <픽션의 담론에 관한 문제 를 해결>하고 있다. 홈즈는 베이커가(街)에 살았다 <홈즈는 베이커가에 살았다>는 진술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이 진 술을 귀결시키는 다른 진술들을 포함하는 코난 도일이 지은 일련의 소설이 존재한다. 이중 두번째 것이 참이므로 처음 것도 참이다. 그런데 이를테면 <제우스>나 <열>처럼 존재한다고 그릇되게 믿어진 단위체와 같이, 일부러 창작된 픽션 이외의 비존재자에 관한 사례들로 옮겨가면 사 정이 좀 묘하게 된다. 우리는 예컨대 <제우스는 번개를 내린다>와 <열은 자연히 상승한다>는 두 진술을, 비존재자가 존재한다고 주장 하기 때문에 <거짓이라고> 평가하거나, <혹은> <실제로는> 어떤 신화나 거짓인 화학 이론에 관한 진술로 분석 가능하기 때문에 <참 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이 두 진술들이 등장하는 어떤 대화에서 는 처음 평가가 적절하나, 다른 대화에서는 두번째 평가가 적절하게 된다.
그런데 러셀은 왜 주장 (1)을 견지하였는지를 묻게 될 경우, 그 대 답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그가 주장 (3) 을 견지하였기 때 문이러는 점이다 바꿔 말해서 그는 프레게의 의미론적 개념인 < 지 시 >를 전통적인 영국 경험론을 핵심으로 하는 자신의 인식론을 위 해 봉사하게 했던 것이다. 프레게와 그후에 『논 리철학 논고』에서의 비트겐슈타인은, < 어떤 대상이 지시되는가? > 라는 물음을, 대상이 어 떻게 알려지는가라는 물음이나 심지어는 대상의 인식이 < 가능한가 > 라는 물음과는 구별시켰다. 이에 비하여, 러셀은 한 진술이 표현한 명제 - ――의미되는 바 __- 에 대한 앎을, 그 진술의 진 • 위 판별을 위해 어떤 대상을 잘 알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앎과 확고하게 동 일시하였다. 러셀의 견해에 대한 반발의 역사 중 많은 부분은 의미론 을 인식론적으로 <순수화>하려는 시도와, < 지시 > 를 검증( 檢證 )의 문제에서 해방시켜 묘사하려는 시도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점이 내가 강조하고 싶은 논점인데, 러셀을 비판하는 사 람들도 대개는 주장 (1) 의 진리성을 여전히 고집하고 있다 . 도넬란이 표현하듯이, < 진짜 이름>에 대한 러셀의 관념은 , 인식론과도 무관하 며 아마도 프레게와 젊은 비트겐슈타인의 모티브가 되었을, <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어떤 <자연스러운 견해>와 잘 어울린다 . 이때 <자연스러운 견해>란 <적어도 개별자에 대해서는 양화사3 ) 를 도입 하지 않는 지칭어의 수립이 틀림없이 가능하다>는 견해를 말한다. 도넬란은 <소크라테스는 납작코이다> 등의 문장에서 개별자 지칭 표현인 <소크라테스>는 <화자가 말하기를 원하~근 것을 꼬집어 가 리키기 위해 사용된 단순한 장치>라고 말함으로써, 러셀의 이론에 담긴 그 핵심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 . 달리 표현하자면, <그와 같은 단순 문장을 사용함에 있어서 ……우리는 세계에 관해 어떤 일반적 3) 世 化辭 qu anti fier s: 예컨대 (Ex)Fx, (y)G y , (¢)(x)(y) ¢xy 둥에서 괄호 안에 표기된 것과 같이 한 명제의 술어의 범위를 한정해 표시하는 술어 논리의 기 호(역주)
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 . ” 그런데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단 위체 를 꼬집어 가리키는 < 지시>라고 불리는 어떤 관계가 있다는 이 견해는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저서 『논 리 철학 논고 』 에서 발전시켰던 < 언어 그림 이 론> 의 본질에 해당된댜 지시라는 그 관계는 설령 어 떤 지시 표 현의 사용자가 자신이 지시하고 있는 대상이 무엇일지, 또 심지어는 그 대상을 발견해 낼 방법이 어떤 것일지에 대해 아무런 아이디어가 없을지라도 견지될 수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견지된다.) 만일에 주장 (1) 을 만족시키는 관계가 낱말과 세계 사이의 < 연결 고리 >를 형성하지 않는다고 보면, 셜록 홈즈에 대한 진리에 관해 아 무런 홍미 있는 문젯거리도 안 생기는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라는 점을 주목하라 그렇게 보는 사람은, 썰처럼 픽션의 담론이 지닌 < 논 리적 지위 > 에 관한 논문을 쓰지도 않을 것이며, 파슨스처럼 < 마이농 주의자>가 되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겠고, 도넬란이나 퍼트남, 필드 Ha rtry F i eld 처 럼 < 물리주의자 > 가 되는 번거로움을 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에 <순수하게> < 언어 놀이 > 의 견해를 취해서 언어와 < 세계의 연결 고리 > 에 관한 물음이 제기되지 않는다면, 검증 의 방법을 아는 일은 진술의 의미론적 특징을 알기 위해 필요한 <모 든> 것을 아는 일이 될 것이댜 그리고 그러한 앎은 의미론적인 이 론에 상관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 노하우 know-how> 에 불과할 것이댜 이와 흡사한 어떤 것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태도였다. 그는 자신 의 초기 입장과 프레게와 러셀은 모두 <하나의 그림에 사로잡혔다> 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으며, 자신과 러셀이 <이름 names 은 단순자를 실재로 표기한다는 아이디어>에 왜 그토록 열성적이었는지를 숙고 하였댜 5) 나는 다음의 제 6 절에서 『논리철학 논고』에 대한 후기 비트 4) Keith Donnellan, Sp eaking of Noth ing , Phil o sop hiro l Reuie w , 83(1 fJ74 ), 5) p.L 1u1d.w ig Wi ttge nste in, Phil o sop hiro l Jnu esti gat io n s(London: Macm illan ,
195. 3) , pt. 1, sect. 46.
겐슈타인의 비판에 관해 상론할 것인데, 여기서는 < 낱말이 세계와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지 를 설명한다 > 는 그 발상 자체가, 주장 (1) 과 흡사한 어떤 것에 대한 믿음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주목하는 것 으로 만족하겠다 하물며, 픽션의 담론에 관해 무언가 철학적인 퍼즐 이 있다는 견해가 그러한 믿음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3 썰과 언어 놀이 썰의 저서 『언어행위론 Sp eech Ac ts 』은 <낱말은 세계와 어떻게 관 계되어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시작된다 . 61 그 책은 러셀의 논리경험 주의에 대한 반발의 결과로 말미암아 인기를 누리게 된 한 가지 대 답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낱말과 세계의 관계는 (러셀의 <진짜 이름>에서처럼) 낱말이 실재와 맞닿는 곳에서부터 이 해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낱말이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이해되어야 한댜 오스틴과 썰의 발상, 즉 언어철학은 <언어 행위> 라는 관념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발상의 배경을 이루는 것 은 감각 소여에 대한 오스틴의 논박 그리고 <언어 그림 이론>에 대 한 비트겐슈타인의 논박 등이댜 그들의 전략은 언어를 마치 놀이처 럼 규약 지배적인 행위로 보려는 것이며, 또 <지시>의 문제를 우리 가 놀이할 때 성공적인 동작을 행하고자 한다면 꼭 준수해야 할 규 약들을 통해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 견해에서는 감각 소여적인 경험 론뿐만 아니라 인식론이라는 것조차도 아예 다른 컨으로 제쳐져 외 면된다. 따라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우리의 언어에 해당될 그 놀이
6) Joh n R. Searle, Sp e ech Acts (C ambri dg e: Cambri dg e Un ive rsit y Press, 1969), p. 162.
규약에 대한 서 술 과, 다 른 한편으 로는 그것을 놀 이합에 있어서 모티 브나 보 상 따위에 관한 고 찰 간 의 혼 동 을 피 할 수 있기 를 바라게 될 따 름 이댜 썰 은 러 셀 의 < 기 술론> 이 갖 는 부자연 스 러움을 반대함에 있어서 스트로슨을 따 른 다 . 그래서 다음의 첫 진술이 두번째 진술 을 < 주장 한다 >( 그 분석의 일부분으로 포 함한다)는 논 점 을 반박한다. 아프리카에는 황금산이 있다 . 거기에는 산이며 동시에 금으로 된 어떤 것이 존재한다. 그 반박으로 제기된 논변 중 하나는, < 어떤 확정 서술이 지시 용 어로서 쓰인 발화 수반적 행위ill ocu ti on ary ac t는 존재에 관한 명제 이면서 , 아울러 거기서 주장된 그 대상의 존재에 관한 어떤 다른 언 어 행위로 평가되어야 한다 > 는 주장은 얼핏 보아 엉터리로 보인디는· 점이댜 71 단순 술어 문장 속에 담긴 의심되지 않았던 복잡성을 들춰 내 주는 러셀의 < 분석 > 이라는 관념은 , 언어 행위 이론 속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썰은 러셀이 왜 그와 같이 역설적인 주장으로 치닫는지 그 이유를 묻고서 , 이 렇 게 대답한다. 일단 그러한 역 설 이 제거되고 나면 , 기술 론 이 갖는 신빙성은 지시의 성 공 여부가 지시 대상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다는 점(존재함의 공리)에서 모두 도출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 그 지시 대상이 존재한다는 명제가 참 이지 않으면 , 그 지시를 포함한 명제도 참일 수 없다. 그러나 이어서 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7) 같 은 책, 같은 쪽.
어떤 유형의 행위가 특정한 조 건 아래에서만 수 행된다 는 사 실로 부터 그 행위 를 수행히 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와 같 은 조 건의 달 성 을 주 장한다고 곧장 도 출 되지는 않는다 81 그러고 나서, 썰은 고유 명칭에 대한 자신의 특유한 이론을 제시하 고 있댜 고유 명칭은 서술의 도움이 없이는 대상들을 꼬집어 가리킬 수도 없고 , 서술을 축약시킨 것도 아니라서, 꼭 < 동일한 > 서술일 필 요도 없고 또 꼭 < 정확한 > 서술일 필요도 없지만 화자( 話者 )와 청 자( 聽者 ) 모두에게 식별 서술i den tifyi n g desc ripti on 을 < 환기시켜 > 준다고 썰은 주장한댜 91 이 이론은 < 식별 서술의 원리 > 를 수용하는 데, 그 원리는 퍼트남, 크립키 그리고 도넬란 등에 의해 < 관념론적 > 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 그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재론키로 하고, 지 금 여기서는 썰이 <존재함의 공리 > 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러셀의 주장 (1) 이라는 데에 관해 논의하고자 한다. 주장 (1) 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피지시체는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썰은 이 첫번째 공리에 두 가지 공리를 더 추가하고 있는데 그것 은다음과같다. <동일성의 공리>, 즉 (5) 한 술어가 한 대상에 대해 참이면, 그 대상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 대상과 동일한 어떤 것에 대해 서도 참이다. 8) 같은 책, p. 160. 9) 같은 책, pp. 170- 17 1.
< 식별 가능성의 공리>, 즉 (6) 만일에 화자가 어떤 대상을 지시하면, 청자를 위해 그 대상을 다른 모든 대상들로부터 식별해 달라는 요구에 응하여 화자는 그것 을 식별해 주거나 그렇게 식별해 낼 수가 있다 .1 0, 썰이 픽션의 단위체에 대한 지시 문제를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살 펴보기 전에, 우리는 순수한 < 언어 놀이 > 접근 방식에서는 주장 (6) 이 주장 (1) 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즉 언어 란 특정한 지점에서 세계와 맞물려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규약적인 행위라고 우리가 보는 한, 대화의 지속을 위해서는 [대상이] 존재하 는가 않는가를 식별해 낼 능력만으로 족하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서, 하나의 놀이라고 보자면 홈즈와 열과 같은 단위체들이 정말로 존재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지는 대화는 글래드스턴이나 전자 ( 電子 )에 관한 대화와 똑같은 것이다 . 주장 (5) 와 (6) 은 그러한 대화 를 규제하기에 충분한 규약으로 보인다. 따라서 잠시 후에 우리는 썰 이 왜 주장 (5) 와 (6) 에 만족하지 않고 주장 (1) 을 확보하려 하는지 그 까닭을 묻게 될 것이다 . 하지만 , 그렇게 하기 전에 홈즈에 관해 썰이 얘기한 바를 생각해 보자. 「픽션적 담론의 논리적 지위」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썰은 그의 저서 『 언어행위론』에서 이미 제안했던 자신의 견해를 더 구체화하였 는데, 그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즉 우리는 <픽션의 담 론>과 <실재 세계에 대한 말> 등 2 가지 판이한 언어 놀이에 종사하 고 있으며, 실재 세계에 대한 말에서는 <셜록 홈즈>와 <셜록 홈즈의 아내>라는 두 표현은 그런 사람들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시하질 못한다. 10) 같은 책, pp. 77-79.
픽션의 담론에서 보자면 < 셜록 홈즈 > 는 그러한 등장 인 물 이 소설 속에 정말로 존재하므로 지시 를 해내고 있으나, < 셜록 홈즈 의 아내 >는 그러한 등장 인물이 없으므로 지시 를 못 해내고 있다 . I ll [ 소설 속의 셜록 홈즈는 독신 남자이댜] 썰은 자신이 다음과 같이 믿는다는 말로써 그 책보다 나중에 출판 된 그의 논문을 시작하고 있다 . 우리가 발언하는 낱말이나 문장의 의미와, 그러한 낱말이나 문장의 발 언을 통해 우리가 수행하는 발화 수반적 행위 사이에는 체계적인 일련의 관계가 존재한다. 그런데 그와 같은 견해롤 견지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픽션적 담론의 존 재는 까다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 …… 어떻게 해서 픽션적 담론 속의 낱 말과 기타 요소들은 통상적인 의미를 갖지만, 그러한 낱말과 기타 요소들 에 달라붙어 그것들의 의미를 결정하는 규칙들은 …… 한결같지 않을 수 가 있는가 ?' 21 이어서,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틀림없이 <픽션적 언어 행위에서 는 의미론적 규칙이 변경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지연된다 > 고 썰은 말한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픽션 작품의 저자는 통상적인 경우라면 대표적 유형에 해당될 일련의 발화 수반적 행위를 수행하는 것처럼 가장(假裝)한다>는 점 을 간파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이런 점들을 간파해야 한다. 11) 같은 책, p, 78. 12) Joh n R. Searle, The Log ica l Sta tus of Fic t io n al Dis c ourse, New Lit era ry Hi st o r y , V(l 昭), p. 319. 이 논문에 대해서 앞으로 내가 제기할 비 판과 흡사한 비판에 대해서는 Sta nley Fis h , Is There a Text in the Class? (Cambri dg e, Mass.: H arvard Un ive rsity Press, 1980), chap. 9 를 볼 것.
픽션 작품을 구성하는 가장된 발 화 수반 행위i llocu ti ons 는, 발화 수반 적 언어 행위i llocu ti on ary ac t s 와 세계 를 관계짓는 규칙 들 이 통상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을 지연시키는 일련의 규약이 있음으로 해서 가능하 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말투 를 빌리자면, 픽션적 담론 은 정말이지 별도의 언어 놀이다. 그 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비록 의미 규 칙은 아닐망정, 일련의 규약 들 이 별도로 요구된다. 그리고 그 언어 놀이 는 온전한 발화 수반적 언어 놀이들이 아니라, 그것에 기생하는· 어떤 놀 이이다 .I ,I ) 따라서 < 픽션을 가능케 해주는 것은, [주장 발화 언어 행위를 지 배하는] 규칙들에 의해 이미 확립된 낱말과 세계 간의 연계성을 파괴 하는, 일련의 언어 외적이며 비의미론적인 규약들이다 >.1 - l l 예컨대 < 주장을 행하는 자는 표현된 명제의 진리성을 그 자신 스스로 믿고 있다 > 1 5) 는 규칙을 파괴하는 등의 규약에 의해 픽션이 가능하게 된다 . 썰의 애초 문제에 견주어볼 때 이 해결책은 충분히 의의가 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 의미 결정>이란 것을 <낱말—세계 간의 관 계를 결정함>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해결책은 여전히 하찮은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낱말의 쓰임을 지배하는 규칙들이 [픽션의 담론 속에서는] 변경될 경우에도, 옛 규칙을 따르고 있다고 우리가 가장할 수 있으므로, 낱말들이 예전과 똑같은 것을 의미할 수 있다고 썰은 말한다. 그러나 만일에 가장이 실재만큼이나 훌륭할 경우, 언어 행위 의 수행을 지배하는 규칙이 의미를 결정한다는 애초의 주장에 대해 우리는 의심을 품게 될 것이댜 이 쟁점을 좀더 분명히 보기 위해서 는, <지시 언어 행위의 성공적 수행 조건 중 하나는 화자가 지시하 고 있는 어떤 대상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16 J라는 썰의 주장을 생 13) Searle, 앞의 책, pp. 325-326. 14) 같은 책, pp. 326. 15) 같은 책, p. 322.
각해 보자. 썰은 이 조건이 픽션적 담론에서도 성취될 수 있다고 말 해야 한다: <이러한 가공의 등장 인물들을 저자가 창작해 냈기 때문 에, 등장 인물인 그들에 관해 참된 진술을 우리가 행할 수 있다 >.171 따라서 낱말과 세계 간의 연계성이 언어 행위의 수행 규칙에 의해 수립되는 <세계>란 픽션적 대상들도 포함하는 세계이다. <나는 실 재하는 셜록 홈즈를 지시하려고 ‘가장했던’ 것이 아니라, 픽션 속의 셜록 홈즈를 ‘실제로 지시하였다 ’.>1 81 그러나 한편으로, 러셀의 편에 서서 다음 두 표현이 대략 같은 주 장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러셀에게 반대하는 썰의 편에 서서 우리가 [픽션 속의] 홈즈를 <실제로 지시한다>고 말하는 것 간 의 차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홈즈는 베이커가(街)에 살았다. 홈즈에 관한 이야기는 <홈즈는 베이커가에 살았다>는 등의 진술 을 포함하고 있다. 글쎄, 적어도 이런 차이는 있다. 러셀이 주장 (1) 을 구성해 내놓을 때는, 위의 보기에서와 같은 <분석>을 이용해서 반증 사례로부터 그 것을 보호하려는 뜻을 담고 있었다 . 우리가 이미 살펴본 이유들 때문 에 언어 행위 이론은 달갑잖은 지시 표현들을 <분석을 통해 배제하 는> 이 전략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래서 주장 (1) 을 구제하려면, 썰 은 [러셀식의] 분석이라는 관념을 대신해 어쩔 수 없이 <픽션-속에 존재함>과 <픽션적 담론에 대한 지시>라는 관념을 구성<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은 애매성과 사소함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비로소 구제된 것이다. 16) 같은 책, p. 330. 17) 같은 책, p. 329. 18) 같은 책, p. 330.
러셀은 < 존재합 > 이란 용어로서 (그것에 관한 앎은 < 논리적 > 보편 자에 납한 직접지에 근거한다고 그가 생각했던, 수학적 대상들을 허용 하는 단서 조항을 덧붙이긴 하였지만)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의미에서 시 •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뜻하였다. 만일 <픽션의 등장 인물을 창안>해 낸 결과들이 주장 (1) 을 만족시키도록 허용코자 한다면, 우 리는 < 존재함>이란 이제 < 시 • 공간적으로 존재함이거나, ‘아니면’ (시 • 공간적인) 실재 세계에 기생하는 언어 놀이 속에서 지시될 능력 및 실재 세계에 관한 말과는 구분되어 화자에게 알려질 능력>을 말 한다고 해야 할 것이댜 (이 마지막 제한 사항은 열이 실재한다고 생각 했던 화학자들에 의해 열이 지시의 대상으로 창안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수적이댜 아마도 과학사가들이 자신들이 수용하지 않는 어떤 이론을 논의하는 맥락에서 <열은 자연히 상승한다>고 주장할 경우에는 그런 식으로 대상이 창안될 것이다.) <존재한다>는 용어의 의미를 확장시켜 주장 (1) 을 개정하는 것이 떠맡을 문젯거리는, 내가 앞에서 언어 놀이 접근 방식과 연관해 제기 한 그 물음을 코앞에 들이댄다는 점에 있다: 주장 (1) 과 주장 (6), 즉 존재함의 공리와 식별 가능성의 공리 사이에 정말로 차이가 있는가? 왜 그런가 하면 픽션적 담론에서 (혹은 기생적인 그 밖의 언어 놀이에 서)
를 수행해 나가게 될 것이댜 일반적으로 < 무엇이 썰의 주장 (6) 을 만족시킬 식별 서술로서 ‘충분할 것 인가? > 라고 묻는다면 , 그 대답은 아마도 이런 것일 게댜 최소한 그것은 피지시체에 대한 물음에 답할 때 관련된 사항의 의미 를 제공해 주는 것이어야 할 거라고 . 하지만 , 그 말은 그 사물에 대한 표준적인 언어 놀이의 놀이 방법을 아는 사 람은 누구든지 어떤 것에 대한 지시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 보인다. (앞의 열에 관한 사례가 보여주듯이, 비록 시 기의 차이에 따라서 판이하게 다른 놀이가 될 수도 있겠지만 . ) 내가 이끌어내고자 하는 결론은, 언어는 < 진짜 이름 > 을 통해 세 계와 맞닿아 있다는 러셀식의 그림에서 벗어나서 썰로 하여금 < 언어 놀이 > 접근 방식을 향해 나아가게 했던 바로 그 고려 요소들이, 썰 의 < 존재함의 공리 >, 즉 러셀의 주장 (1) 에 대해 사소함을 넘어서는 어떤 의미 부여도 못 하게 한다는 점이다. 반면에 상당한 의미 부여 를 행하려는 썰의 시도는, 실제로는 그렇게 믿지 않으나 마치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척 가장해 말하는 것을 허용하는 규약들이 있 다고 썰이 인지하는 한에 있어서만 완벽하게 작동한다. 그러나 이 같 은 의의를 지닌 인지는 <낱말이 세계와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가 > 에 관한 일반 이론의 일부가 되거나, 혹은 다양한 종류의 담론들의 < 논 리적 지위>에 관한 일반 이론의 일부가 되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이 다. 썰의 접근 방식이 허용해 주는 것은 고작해야, 무슨 동작들이 허 용되는지를 말해 줄 규약들이 있기만 하면 어떠한 게임이라도 놀이 가 가능한 그런 곳[언어 놀이]에서, 낱말들은 주장-및-부정하기 놀이 에 쓰이는 [예와 아니오의] 응답 항목들이 됨으로 해서 세계와 관계 를 맺는다는 점이 고작이다. 그러나 말해져야 할 바가 이걸로 끝이라 면 (사실상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도 언어가 어떻게 작동하 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언어철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꿈꾸지 않 을 것이다. 썰은 시 • 공간적 세계에 관한 <암묵적 주장>이라는 러셀 식의 관념을 포기히~즌 한편, 주장 (1) 에 의해 문맥상 부분적으로 정
의된 러셀의 지시 관념을 보유합으로써 두 개의 의자 사이로 나자빠 지고 말았던 것 이댜 4 도넬란과 물리주의 의마론 나는 이제 러셀과 <그 리고 > 썰에게 공통된 관념에 반대하는, 즉 고유 명칭에 대한 식별 서술을 갖고 있는 덕택에 (실재 대상이나 아 니면 픽션적 대상에 대해) 고유 명칭을 사용한다는 관념에 반대하는, 한 가지 반발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반발은 크립키, 퍼트남, 필드, 도넬란 등과 연관되어 있댜 나는 도넬란에 대해서 논의할 것 인데 그 까닭은 이른바 < 인과지시론 causal theo r y of re f erence> 과 연관된 그룹에 속하는 학지들 가운데서 픽션적인 단위체의 지시 문 제를 공공연히 논의한 글을 발표한 사람은 오직 도넬란 혼자뿐이기 때문이다. 도넬란은 <홈즈 는 베이커가에 살았다 > 라는 표현을 <홈즈 에 관한 소설들에 의하면 , …… > 운운하는 표현의 축약형이라고 취 급하는 것에 대해, 즉 우리가 적절히 동의할 만한 그러한 규약들이 존재한다는 러셀의 견해에 대해 아마도 동조할 것이다. 하지만, 도넬 란은 그 이상의 어떤 물음에 답하기를 원한다. 그 물음이란, (그 자체를 실재라고 감쪽같이 속이는 데 성공적인 어 떤 픽션의 경우와 같이) 그와 같은 규약들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 에서, 어떻게 해서 <피지시체가 없는 개별자 지칭 표현을 사용해서 우리가 말을 할 수 있으며 또 심지어는 그게 ‘이해될’ 수가 있는가 [?]>이댜 1 9) 도넬란은, 산타 클로스의 존재를 <믿고 있는> 어린아이 가 <오늘밤에 산타 클로스가 올 거야>라고 말할 때, 그 말이 참된 명제이기는 고사하고 하나의 명제를 형성한다는 것조차도 허용하고 19) Keit h Donnellan, Sp eaking of Noth ing , pp. 6-7.
싶지 않은 것이다. :!()) 그 아이의 부모는 그걸 믿지 않으면서도 마찬가 지 형태의 말을, < 전설에 따르면 오늘밤에 산타 클로스가 올 거다 > 라는 말의 축약형으로 사용함으로 해서 , 참된 진술을 말할 수도 있 다. 하지만 , < 산타 클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 라는 말의 진리치는 그 전설이 말한 내용의 기능이나 함수가 아니다. 또, 도넬란의 설명 에 따르자면, 그것은 러셀식의 설명처럼 <이러이러한 단위체는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의 축약형도 아니다. 왜냐하면 도넬 란은, 지시란 <식별 서술>을 통해 성취된다는 러셀식의 관념이 근본 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도넬란은 어쩌면 썰의 견 해에 포 ·감 된 결함도 러셀의 견해 속에 숨겨진 오류를 들춰내 주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도넬란은 러셀과 썰 의 견해 사이의 관계는 죄와 죽음의 관계와 홉사한 어떤 것이라고 간주할 것이댜 이 문제에 대한 도넬란의 해결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근 저에 놓인 러셀에 대한 비판을 이해해야 한댜 <인과지시론>을 선호 하는 사람들은, 지시란 <화자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것>에 의해 성 립된다고 여김으로써 러셀이 모종의 관념론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특 히, 이 오류는 러셀로 하여금 <지시>를 낱말-세계의 연계성과 분리 시키게 하였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언어와 세계의 <연결 고리>를 인식론적 관념 ―—-오직 <이것>이란 용어 따위의 지시사만이 이른 바 <진짜 이름>이라는 러셀의 악명 높게도 애매하고 또 작동 불가 능한 이론을 산출시켰던 그 관념 ―—-인 <직접지> 안에 잘못 위치 시키게 하였다. 그래서 도넬란은, 러셀이 그러한 인식론적 관념을 피 력함으로써 시도코자 했던, 도넬란 자신이 말하는 <자연스러운> 견 해를 지켜가길 원하지만, 그 견해가 자신의 이른바 <역사적 설명> 견해의 핵심 테제와 일관성을 유지하게 하고자 한다. <역사적 설명> 20) 같은 책, pp. 20-21 .
견해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개별자와 화자에 의해 사용된 그것의 이름 사이에 역사적 연계성 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는, 화자의 서술이 그 개별자에 대해 제아무리 정확하더라도 그 개별자는 피지시체가 아니다 . ……반면에 비록 화자의 서술 자체만으로는 그 개별자를 꼬집어낼 수 없을지라도, 어떤 이름의 사 용과 한 개별자 사이에 모종의 역사적 연계성이 존재한다면 그 개별지는· 피지시체가 된다 . 2 1) 이 견해는 <식별 가능성의 조건>을 <존재함의 조건>과 전혀 다 른 것으로 구별시키기 때문에, 썰의 견해와 첨예한 대비를 이룬다. 픽션의 등장 인물에 관해 규약-규제적인 대화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다는 사실이 픽션적 담론에서 < 존재함의 조건>이 만족되어야 할 이 유라고 말하는 것이 썰에게는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반면에 도 넬란은 지시되는 것과 화자 자신이 그것에 관해 말했다고 지적할 것 사이에서 아무런 필연적 연계성도 보질 못한다. 그러므로 도넬란이 선택한 자신의 문제, 죽 피지시체가 없는 개별자 지칭 표현을 사용할 때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고 또 이해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화자나 청자의 의도나 성향이나 지식과는 이무문 1 관 련도 없게 될 것이다. 그의 해결책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만일 N 이 한 개별자를 지시할 의도를 담은 서술적 진술에서 사용된 고 유 명칭이라면,
능성도 배제되는 사건으로 마감됨 > 이라고 정의된다 츠 “ 따라서 만일 에 홈즈가 글래드스턴과 동시대인인 어떤 실존 인물이라고 일반적으 로 생각되었지만 그후 역사적인 연구의 결과 오로지 코난 도일의 소 설 때문에 사람들이 홈즈에 관해 말하였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면, 우 리는 파국에 직면한 것이다. 그 시점에서 우리는 <홈즈는 베이커가 에 살았다>와 같은 유의 모든 진술들은, 만일 그것이 <홈즈에 관한 소설에 따르면, 홈즈는 베이커가에 살았다>라는 말의 축약형으로 의 도되지 않았다면, 모두 거짓이라고 결론지어야 한다. 이 해결책을 평가하기 위해서, 썰과 도넬란 양자가 다 보유하기를 원하는 <자연스러운> 견해란 것이 다음과 같다는 것을 상기해 보자. (<소크라테스는 납작코이다>와 같은) 단순 문장을 사용함에 있어서 우리는 세계에 관해 어떤 일반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죽 양화 사(量化辭)의 도움을 받아 정확히 분석되어야 할 어떤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 그러한 경우에 화자는 다른 어떤 개별자 ―지칭 표현 들의 도움을 받아, 그 표현들이 동일한 개별자 지시를 위해 사용되는 한, 아주 높은 개연성을 가지고 동일한 사물과 동일한 진술을 말할 수도 있었 을 것이다 .2 . 11 이 견해에 반(反)-러셀적 주장인 <고유 명칭은 아무런 서술 내용 을 지니지 않는다 >25) 는 주장을 합해서, 도넬란은 <오늘밤 산타 클로 스가 올 거야>라는 표현이 명제를 형성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다. 만일에 주어 안에 아무런 <서술 내용>도 담겨 있지 않다면, 적 절한 역사적 연결 고리가 없는 한 아무런 명제도 표현될 수가 없다. 이것은, <산타 클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은 물론이고 고 23) 같은 책, p. 23. 24) 같은 책, p. 11. 25) 같은 책, p. 21n.
유 명칭 을 포 합 한 존 재 - 진술 일반에 대해서, < 어떤 명제가 표현되는 지에 대해 우리가 분 명한 관념을 갖지 못하게 된다 > 는 것 을 의미한 댜 < 그래서 우리 는 한 진 술 이 어떤 명제 를 표현하는지 를 아는 것 과, 그 진 술 의 사용 방법 을 아 는 것을 반 드 시 분리시켜야 한다. > 러 셀 과 썰에게 공통된 견 해, 즉 < 의미는 마음속에 있다 > 는 견해를 배 격하는 반면에, < 자연스러운 > 견해를 지속해 보유하는 대가는 다음 의 두 가지다 . (a) 피지시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역사적 탐구에 의존된다는 반 ( 反 ) -직 관적인 관념을 수용해야만 한다. (b) < 표현 S 에 의해 어떤 명제가 표현되었는지를 아는 것>과 을 동등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 .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이 결과를 썰에 대한 우리의 논의 결과와 대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죽 픽션적 단위체에 관한 말에서 우리가 < 실제로 지시한다 > 는 썰의 주장을 만일 거부한다면 , 그 경우 우리는 (러셀의 경우처럼) 지시를 직접지라는 인식론적인 관념들과 연계시킨 지시 관념에 빠져들게 되거나, 혹은 (도넬란의 경우처럼) 존 재-진술들에 대해서는 불가하고 오로지 서술-진술들에 대해서만 < 언어와 세계 사이의 연결 고리 > 를 이해할 수 있는 견해로 이루어 진 지시 관념에 빠져들게 된다 . 달리 표현하자면, 만일 썰에 반대해 서 단지 시 • 공간적으로 존재함이 지시에 관한 <존재함의 조건>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고집한다면, 그 경우 우리는 러셀을 좇아 다음의 (i)이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도넬란을 좇아서 (ii)라고 말 해야만 할 것이다. (i) 지시 관념은 문장들이 실제로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분석>해 냄으로써 보강될 필요가 있다.
(ii) < 언어와 세계 사이의 연결 고리 >를 구체화하는 지시 관념은 <홈즈는 존재하지 않았다 > 와 같은 유의 참이면서도 이해 가능한 진 술들에 대해서는 적용될 수가 없다. 만일 (ii)를 채용할 경우, 러셀의 주장 (1), 즉 존재하는 것만을 지 시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이제는 심각한 양보를 대가로 해서 보유케 된디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러셀은 주장 (1) 에 따르는 의미에서의 지시란 곧 세계에 관한 의미 있는 말이 갖추어야 할 전 제 조건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도넬란의 견해에 따르 면, 시 • 공간적 세계에 관한 참이고도 이해 가능한 주장들을, 심지어 지시 표현을 전혀 포함하지 않은 채로도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다 . 여기에서 우리는 러셀과 <인과지시론>의 옹호자들 사이에 각자의 모티브가 첨예하게 다르기 때문에 야기된 한 가지 결과를 보게 된다. 러셀은 <검증주의> 인식론을 더 잘하기 위해 의미론을 원했으며, 따 라서 우리의 이해 방법을 노정시키고 그것을 검증해 줄, 세계에 관한 참이면서 이해 가능한 모든 진술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목표로 하 였다. 주장 (1) 을 견지하기 위해 러셀이 치렀던 대가는 어떤 진술들 에 대해서는 역설적일 만큼 복잡한 <분석>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반면에 도넬란과 크립키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퍼트남이 <실재론자> 인식론이라고 부론 것을 더 잘하기 위해 의미론을 원한 다. 이때 <실재론자>란 곧 <언어 그림 이론>으로 완전히 회귀하는 것을 의미한다우 따라서 도넬란의 경우에는, 이해 가능하면서도 참인 많은 진술들에 의해 무슨 명제가 표현되었는지 말할 수 없다는 점이, 그가 주장 (1)을 위해 치렀던 대가에 해당된다. 러셀의 역설들은 언 어-행위를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판독해 나갈 때 비롯된 26) Hilary Putn a m, Meanin g and the Moral Scie n ces(London and New York: Routl ed g e and Keg an Paul, 1978) 를 볼 것
댜 도넬란의 역 설들 은 < 언어와 세계의 연 결 고리 >를 주장하는 것처 럼 보이는 많은 참 된 진 술들 에 대해 그러한 연결 고리 를 주지 않으 려 할 때 비 롯 된댜 퍼트남, 크립키 그리고 도넬란 등이 의도하는 의미에서의 < 실재론 자 > 인식론이라는 관념은 복합적이며 애매하다 . 하지만, 이 맥락의 목적상, 그것은 다음 (7) ― (9) 의 세 가지 논제들이 귀결시키는 어떤 것을 명확히 설명하려는 시도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7) 지식은 우리에게 물리적 세계에 대한 어떤 그림을 제공한다. (8) 어느 것이라도 특정한 규약에 따라 실재에 대한 어떤 그림이 될 수가 있다. (9) 그러므로 < 대안적 개념 체계들 > 에 의한 상대주의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낱말-세계 간의 관계는 규약, 개념 체계, 식별 서술, 혹 은 여타의 < 주관적 > 요소들의 선택과는 독립적이며 그것 자체가 물 리적 관계인 어떤 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해야만 한다 . 요컨대 실재론적인 인식론 그리고/혹은 언어철학은 <낱말들이 어 떻게 세계와 관계되는가 > 에 대해, 실재 세계에는 적용되지만 픽션의 세계에서는 동등하게 적용되지 않을 그런 설명을 발전시키기를 원한 다. 실재론자의 눈으로 보면 언어를 러셀이나 썰과 같은 방식으로 파 악하는 것의 치명적인 결함은 인생이 한낱 꿈일 경우에도, 혹은 데카 르트의 악마가 실재할 경우에도, 혹은 우리 모두가 통속에 갇힌 뇌일 지라도 그것이 동등하게 적용<될 거라는> 점에 있다 . 27 1 내가 다른 27) < 데카르트의 악마 > 는 그의 저서 『 방법서설 』 에서 실제로는 거짓인 것을 참된 지식이라고 믿게끔 우리 를 교묘히 속이고 있을지 모른다고 데카르트에 의해 상 정된, 가상의 악마 를 가리킨다. < 통속의 뇌 > 란 반( 反 )실재론자들을 비관하기 위해 퍼트남이 < 통속의 뇌>란 제목을 붙인 한 논문에서 제안한 공상과학적 사 고 실험으로서, 육체와 분리돼 통속에 담겨 인식 활동을 하는 뇌를 말하며, 대
체로 관념론적 혹은 유아론적 지식 개념에 대한 풍자나 반증 사례로 자주 원용 된다 . (역주)
논문에서 제시했던 이유 들을 ~I 근거로 해서 니 는 嗣 이런 유의 실재론이 정합적인 프로젝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문제에 관한 더 이상의 논의는 소절 7 로 미루기로 하고, 다음 소절에서 나는 픽션에 관한 진리 문제에 대한 표준적인 전략들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짓기 위해 한 가지 견해를 더 디루·고자 한다. 5 마이농주의와 〈불완전한 대상들〉 애초에 러셀은 자신의 기술론을, 모든 지향적 대상들이 존재한다 고 간주하는 것, 즉 그가 마이농 291 에게 귀속시켰던 견해를 피하기 위 한 방식의 하나로서 제안하였다. 러셀은 마이농의 견해들을 정확히 설명하지도, 그것들에 대해 분명한 반대 논증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나도 역시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글래드스턴과 홈즈에 관한 지시가 아주 똑같은 방식으로 발생되며, 또 실존 인물과 픽션 인물 간의 차이는 의미론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어떠한 지시 이론에 대해서도 <마이농주의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사용해 온 관행을 나는 단순히 따르기로 하겠댜 가장 최근에 그와 같은 견해를 피력한 인물은 파슨스이다 . 30) 나는 픽션에 관한 진리를 파슨스가 취급하는
28) Rich ard Rort y, Rea lism and Refe r ence, The Monis t, 59(1976), pp. 321-340; Philos oph y and the M irr or of Natu re (P rinc eto n : Princ eto n Un ive rsit )1 Press, 1979), chap. 6 를 볼 것 . 또, Donald David s on, Rea lism Wi tho ut Refe r ence, Refe r ence, Truth , and Reality , ed. Mark Platt s (London: Routl ed g e and Keg an Paul, 1980), pp. 131-140 를 참조 29) Alex ius Mein o ng , 18. 53- 1920: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브렌타노 Franz Brenta no 에게 배우고, 그라츠 대학에서 가르쳤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들이 있으며, 그것들이 참된 술어가 될 수 있다는 독특한 견해를 피력하였다.(역주) 30) Terence Parsons, A Prolego m enon to Mein o ng ian Semanti cs , Jou rnal
of Philo soph y, 71(1974), pp. 5.51 -5 6 0, 및 ‘'A Mein o ng ian Analys i s of Fic ti on al Obje c ts , Grazer Phil os op hi s c he Sf:l. 1d ie n , 1UITT4), pp. 73-86.
일반 적 인 방식 을 간 략히 살 펴보고 , 그러고 나서 곧 장 대부분의 철 학 자 들 이 반( 反 )직관 적 이라고 여기는 마이농식의 한 관념, 즉 <불 완전 한 대상 들> 이라 는 관념에 대해 초 점을 맞추고자 한다 . 기본적으 로 마이농식의 전략은 다음의 (1')로 러셀의 주장 (1) 을 대체하는 것이다 . (1') 피 지 시체는 반드시 하나의 대상이어야 한다. (1) 피지시체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여기에 담긴 아이디어는 우리가 하나의 피지시체를 < 꼬집어낼 > 경우 사용하는 < 식별 서술 > 을, (어쩌면) 더 큰 속성 집합의 한 부분 집합에 포함된 원소들에 대한 매거(枚 擧 )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이때 더 큰 속성 집합이란 곧 그 대상 자체에 해당되며, 그 집합에서 나머 지 원소들은 [그 대상의 속성들 중에서] 아직 언급되지 않은 속성들 전체로 이루어진다 . 마이농주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것이라고 여 겨질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식별 서술을 충분히 갖고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속성들을 지닌 개별자에 관해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 . [즉 개 별자들 없이, 식별 서술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마찬가지 관점에 서, 버클리 Geor g e Berkele y는 충분한 관념들을 갖는다면 성질들을 담지하는 물질적 기체( 基體 ; subs tr a ta)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으며, 또 칸트는 충분한 정합적 표상들을 갖는다면 물자체(物自 體 )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전략의 효과는, 사실상 어떠한 것에 관해서도 지시가 가능 하고 따라서 어떠한 것에 관해서도 진리를 말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디는 점이다. 지시에서 파슨스가 배제할 만한 유일한 유형의 표현은
< 둥글고 동시에 둥글지 않은 것 > 따위이다. 반면에 그는 < 둥근 사 각형 > 은 지시 표현으로 혼쾌히 포함시킨댜 그의 견해에 따르면, 둥 근 사각형이 둥글다는 것은 참이댜 마치 평소에 헨리 제임스 J” 를 식 별 가능케 해주었던 그 밖의 많은 다양한 속성들에 추가해서 퍼스의 파리 체류 기간중에 퍼스를 만났던 속성이 참인 것과 마찬가지로. 바 로 그러한 의미에서 셜록 홈즈가 프랑스인의 모계 혈통을 지녔다는 속성을 갖는 것도 참이다. 이 전략에 있어서 문젯거리는, < 존재한 다>와 같은 속성들을 생각하는 중에 셜록 홈즈의 모든 속성들에 추 가해서 또 하나의 속성, 즉 존재함이란 속성이 포함되는 어떤 집합이 과연 있는지를 캐묻게 될 경우에만 일어난다. 또, < 아직 고려되지 않 았음>이라는 속성을 포함시켜서 문젯거리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여 기에서 파슨스의 전략은 이를테면 일상적인 비지향적 서술 판단에 등장하는 유의 속성들과 같은 <핵심 속성들에 의해서만 대상이 구 성된다 > 32 ) 고 말함으로써, 이런 유의 < 특별한 > 골칫덩어리 속성을 <비핵심 속성>으로 취급해서, 그와 같은 모든 역설들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
31) Hern y Jam es, 1843- 19 16: 미국의 소설가.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 W i l li am J ames 의 동생으로, 파리에서 퍼스를 만났던 일에 관해 형 윌리엄에게 보냈던 그의 편지는 퍼스의 괴팍한 성격의 단면을 보여주는 자료로 가끔 인용된다. (역주) 32) Parsons, Prolego menon, p. 573.
이와 같은 핵심-비핵심 속성의 구분에 관한 세부 사항이나 난점들 에 관한 논의를 생략한 채, 나는 파슨스의 이론이 픽션의 등장 인물 에 적용되는 문제를 곧장 다루기로 하겠다. 파슨스는 이 문제에 대한 적용이 자기 이론의 진리성을 확인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33 ) 그 는, 픽션적 대상들에 관한 말은 <오직 실재하는 대상들만을 지시하 는 것으로 부연해 분석되어야 한다-어쩌면 소설이나 소설 속의 문장들을 지시하는 것으로 부연해 분석되어야 한다> -는 직관을,
33) Parsons, Mein o ng ian Analys i s , p. 74.
<최근의 영미 철학에 나타난 하나의 특이 현상 > 으로 간주한다 . L I ’ 그 는 자기의 견해가 러셀적 전통이 금지시켰던 많은 것들, 가령 홈즈는 탐정이고, 페가수스 Peg asus 는 날개 돋친 말이며, …… 등을 말할 수 있게 허용한다고 권고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셜록 홈즈>의 경우[에〕 우리는 불완전하며, 가능하긴 하나, 존재하지 는 않는 대상으로서 그것의 핵심 속성들 중 일부는 탐정임, 범죄자 를 체 포함, 파이프 담배를 피움 등인 하나의 대상을 얻게 된다. 전형적으로 괵 션적 대상들의 모든 속성을 관련된 문학 작품들이 결정할 수 없기 때문 에, 픽션적 대상들은 불완전할 것이다. 예컨대 코난 도일의 소설에 따르자 면, 홈즈가 왼쪽 다리에 사마귀를 갖고 있다는 것도 참이 아니고 그가 왼 쪽 다리에 사마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도 참이 아니다. …… 그는 그 속 성에 < 관한 한 미결정 상태 > 이다 . G) 파슨스는 우리가 이 결과를 냉정하게 받아들이길 바라지만, <불완 전한 > 대상이라는 관념 속에는 분명히 말썽의 소지가 있다. 그 난점 은 파슨스가 루이스 Da wi d Lew i s 한테서 인용해 왔듯이 가령 <스타 웁 S ta ub 이란 용은 마법의 고리 10 개를 가진 용이었다. 끝>처럼 <너 무 간단한> 이야기들의 경우에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 경우 어떤 이 는 심지어 불완전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으로 가져야 할 속성 의 개수가 있게 마련인데 스타움은 자격 미달이라고 말하고 싶어할 지 모른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마찬가지로 루이스에 의해 지적된 그것과는 반대되는 난점도 있다. 죽 우리는 두 대상을 구성해 낼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홈즈가 갖고 있다고 말해지는 모든 속성들로 이 루어진 집합이며, 다른 하나는 그 모든 것에다 왼쪽 다리에 사마귀를 갖고 있다는 점울 포함하는 집합이다. 실로 사마귀들을 다른 어떤 부 34) 같은 책, p. 77. 35) 같은 책, p. 80.
위에 나 있는 것으로 변경시킴으로써 이런 유의 홈즈적-대상 들 을 우 리는 무한정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 홈즈에 관한 소설들은 그중 어 느 대상에 대해 참인가? 자연스러운 대답은, 오직 첫번째 것뿐이라는 말이다 . 물론 그게 자연스럽기는 하나, 작위적인 것처럼 보인다. 홈즈 와 상관할 경우 진리는-대상-과의-대응이라는 관념을 우리가 일단 의면한다면, 왜 우리가 코난 도일이 그러한 진리를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가 불완전한 대상들을 회피하려 한다고 가정해 보자 . 우리는 소설 속에서 홈즈에게 귀속된 속성들을 근거로 해서 하나의 < 완전 한> 대상을 구성하려 할 것이다. 가령 헨리 제임스에 대해서 (그는 퍼스를 만났던가? 그는 하루에 두 번씩 면도를 하였던가? 등처럼) 합리 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의미 있는 어떠한 질문에 대해서도 가부간에 대답이 존재한댜 바록 통상적으로 우리가 모르는 것이긴 하겠지만. 좌우간 그 점이 헨리 제임스가 완전한 대상인 이유이다 . 불가능하긴 하겠지만, 만일에 헨리 제임스에 관해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모든 물음들의 목록을 정해 그걸 홈즈에게 제기한 다음에 작위적인 답을 부여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완전한 대상을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루이스의 논점은 여기에도 물론 적용된다. 만일 한 질문에 대해 상이한 작위적인 답을 부여한다면, 우리는 완전하지만 다른 대 상을 얻게 될 것이다. 소설 속에서 홈즈에게 귀속된 모든 속성들을 생각하는 것이 실천적으로 불가능하디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물음 들을 죄다 목록화하는 것이 실천적으로 불가능하디는· 것은 그러한 대상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좌절된 거나 마찬가지이다. 파슨스의 이론이 갖는 이러한 결과들을 놓고 볼 때 우리를 괴롭히 는 것은, 내 생각에는, 이야기들에 관한 러셀식의 축약형 진술들을 고려치 않고서도 <홈즈는 탐정이다>와 <페가수스는 날개 돋친 말 이다>와 같은 표현을 우리가 말할 수 있다는 그 즐거움이, 홈즈에 관한 진리를 문장과 대상 간의 관계로 간주해야 한다는 요구 조건
때문에 줄 어 들 게 된다 는 데에 있댜 파 슨스 가 그렇게 하 듯 이 만일에 대상이란 단순히 < 그 이야기 속의 모든 문장 들 ‘그리고 오로지 ’ 그 문장 들 의 대상 > 이라고 한다면 , 그와 같은 요구 조건은 발생되지 않 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대상에 대해서 그 문장이 참인가 를 정작으로 꼬집어내는 어려움을 생각하자마자, 갑자기 대응이 곧 진리라는 관념 이 여기에서는 송두리째 잘못 적용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 불완전한 대상에 대응된다 > 는 관념도 마찬가지인데, 그 까닭은 특 히 우리가 완전한 [대상으로서의] 홈즈를 구성해 내기 위해 수억에 달하는 작위적인 추가 속성들을 부여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19 세기 의 런던에 관한 완전한 이야기에 (슬프게도, 이미 다른 대상들로 가득 차 있는 모든 시 • 공간의 간격 속에) 부합될 수 있는 어떤 대상을 결 코 구성해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시 • 공간의 어 느 간 격도 현실 세계와 동일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구성 해 내야만 할 것이댜 그러나 속성을 추가함으로써 < 새로운 > 시 •• 공간을 구축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칸트가 [그의 저서 『 순수이성 바판 』 중] < 선험적 감성론 > 에서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한 직관들을 모조리 반대해 거슬러가게 될 것이다: 하나 이상의 시간이나 공간은 존재할 수가 없다. 개별자들을 속성의 다발로 대체하겠다는 기본적으 로 마이농식의 전략은 우리가 시 • 공간적 관계의 문제에 이르자마자 곧 망가져버린다. 이러한 불안감을 덜어준다고 얘기될 만한 마이농식의 장치들은 여 러 가지가 있는데 그것들 중 대부분은 <지시의 대상이 되는 것>과 < 시 • 공간적 대상이 되는 것 > 을 혼동하지 말 것을 고집해 주장하는 일이다. 마이농식의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적어도 비트겐슈타인이 『 논리철학 논고 』 에서 사용한 게겐슈탄트3 61 만큼이나 모호한 [그리고 36) Geg e nsta n d: 독일어로 일반적으로는 < 대상 > 을 가리키나 그 책에서는 < 대 상 >, < 단위체 > , < 사물 > 등 하나의 사실을 구성하며 그 사실 속에 포함된 핵 심 단위나 요소 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그 쓰임의 범위에 대해서는 이
하에서 암시됨(역주)
광의적인] < 대상 ob j ec t > 의 관념을 원한다. 만일 < 진리 > 나 < 지시 > 와 같은 의미론적 개념을 가령 수학의 방정식과 시 • 공간적 사건에 대한 보고에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라고 간주하려 한다면, 물리적 실 재에 대한 언어적 그림을 구성하는 일에서 유리된 실재 _ 와의-대응이 -진리라는 관념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주장 (1) 을 도넬란이 <자연스러운 견해>라고 불렀던 것 _<일반적인 것에 관해 > 언 급함이 없이 단순하게 < 어떤 것을 꼬집어 가리킴 > 으로써, < 양화사 를 도입하지 않은 개별자 지칭 용어 > 의 성립 가능성을 고집해 주장 하는 견해 _과 연관되지 않게 하고자 할 것이다. 바꿔 말해서 적 어도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의 <꼬집어 가리킴 > 이란 관념을, 언급중 인 것과 연관된 <어떤 시 • 공간적 영역을 고립시키는> 상식적 활동 과는 별도의 관념으로 여기기를 원한다. 그래서 < 꼬집어 가리킴 > 이 이를테면 하나의 가능 세계나 <논리적 공간> 내의 어떤 항목에 적 용 가능토록 반드시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누가 마이농주의를 어디까지 얼마나 옹호해 갈 수 있겠는 가를 검토하는 대신에, 나는 마이농식의 제안이 야기시키는 반론이나 응답에 대해 이 정도의 막연한 암시를 논의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댜 다음 소절에서 나는 더 일반적 성격의 논의 즉 대응에-의한 진리란 관념이 과연 물리주의 ――-모든 진리는 여하튼 시 • 공간적 세계가 펼쳐진 모습에 관한 진리라는 직관_~와 분리 가능한지 (따라서 <지시>란 관념이 문제의 대응이란 것을 해명하는 데에 필수적 인 관념인지) 또 얼마나 분리 가능한지를 추궁해 보고자 한다. 나는 지금껏 논의된 네 사람의 저자들 모두가 사용-하고 있는 의미에서의 <대응>과 <지시>의 관념은 물리주의와 분리 가능하지 않다고, 즉 이 점에 관한 한 도넬란이 옳다는 논변을 펼칠 것이다. 그래서 니는 우리에게는 오직 <두 가지> 대안밖에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즉 그
와 같은 관념들이 송두리째 없어 도 되 는 < 순수한 > 언어 놀 이 접근 방식이거나 , 그 관념 들을 물 리 적 인과성을 통해 해석하 는 엄격한 물 리주의의 접근 방식 등 두 가지뿐이라고 . 이 룰 나의 주요 논의 주제 와 연관해 표현하자면 이렇다: 그 대안 들 중 하나는 의미론을 인식론 으로부터 철저히 분리해서 의미론은 사실의 진리나 픽션의 진리 사이 에 홍미 있는 아무 구분도 만들지 못하게 하 는 것이며, 반면에 다른 하나는 의미론을 < 그림 그리기>의 실재론적 인식론과 한데 모음으로 써 도넬란의 방식처럼 픽션에 관한 진리를 전혀 허용치 않는 것이다. 6 파르메니데스식의 그림이라는 그림 언어와 진리에 관한 아주 단순한 견해, 지금까지 논의되었던 모든 문젯거리들을 피할 수 있는 아주 단순한 견해로 피력함으로써 내가 이제껏 얘기해 왔던 복잡한 이야기의 교훈을 이끌어내기로 하자. 그 단순한 견해는 듀이J ohn Dewey, 셀라즈,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따라 모든 주장들을 놀이 속의 동작으로 간주한다. 듀이가 <보장된 언명> 이라고 부론 것들 ___ 우리가 통상 <진리>라고 부르는 것들 은 담론의 논제 가짓수가 많은 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보장된다. 다음 보기를 생각해 보라 . <2 더하기 2 는 4 이다>, <홈즈는 베이커가 에 살았다>, <헨리 제임스는 미국에서 태어났다>, <세상에는 더 많 은 사랑이 있어야 한다>, <베르메르가 광선을 솔직담백하게 사용한 것은 라 투르3 7) 가 사용한 트릭보다 더 성공적이다>. 이것들은 죄다 보장된 언명들이며 정확히 동일한 의미에서 모두 참이다. 그것들끼리 의 차이점은 사람들이 각각의 언명을 정당화할 방식에 대한 사회학 적 연구에 의해 밝혀질 일이지 의미론에 의해 밝혀질 것이 아니다. 37) George de La Tour, 1593?-16. 52 : 프랑스의 화가.(역주)
혹은 달리 표현하자면, 의미 론 (또 는 < 언어 철학> )이 무엇을 하는 것이 건간에 그것은 < 낱말 들 이 세계와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지 > 에 관해 어떠한 것 도 말해 주지 않을 것이댜 거기에서 < 일반화되어 > 말해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므로. 이 견해에 의하면 주장 (1) 을 만족시키는 관계로서의 < 지시 > 라는 관념은 부질없는 것이며, 철 학자의 창안물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필 요한 것은 다만 < ……에 관해 말하기 > 라는 상식적인 관념이 전부이 다. 이때 한 진술이 무엇에 < 관한 > 것인지의 기준은, 그것이 무엇이 건 간에 발언자가 < 마음에 두고 있는 것 > , 죽 그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그가 < 생각하는 > 것이다. 진리를 < 실재와의 대응 > 이라고 여기는 철학자의 진리 관념은 위에서 언급된 베르메르에 관한 문장 과 같은 것을 < 고양이가 방석 위에 앉아 있다 > 와 같은 문장의 형태 로 억지로 조형시키려는 부질없는 시도이다. 이 견해는 붙임성 있게 단순하며 , 만일에 누가 분석 철 학적인 언어 철학에 의해 픽션의 본질에 대한 어떤 영감을 얻고자 한다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지만, 내 생각으로는 옳은 견해이다. 픽션에 관해 생 각해 보려는 목적에 <정작으로 도움을 주는 > 일은, 내가 믿기론, 분 석적인 언어철학이라는 현상이 왜 있는지 혹은 좀더 명확히 말해서 왜 주장 (1) 이 그토록 심각하게 여겨졌는지를 캐묻는 일이다 . 다음의 두 진술 중 처음의 것과 같이 완벽하게 수긍되는 인식론적 논점이 왜 두번째 것과 같은 의미론적 주장으로 표현되었던 것일까? 셜록 홈즈에 관해 알아보는 최선의 길은 코난 도일의 소설들을 읽 는일이다. 셜록 홈즈에 관한 진술들은 실제로는 코난 도일의 소설에 관한 것이다. 글쎄, 어쩌면 그것은 다음의 두 진술 중 처음 것이 나중의 것에 의
해 표현된 이유와 똑 같 이 그릇 된 이유에서 그랬 을지 도 모 른 다. 별 들 에 관해 알아보 는 최선의 길 은 당신의 감각을 사용하는 것 이댜 별 들 에 관한 진 술들 은 실제로는 감각 소여에 관한 것이다 . 하지만 , 더 계몽된 2 차 세계 대전 이후의 후기 경험주의 시대의 분 석 철 학에서 의미론이 인 식 론에서 일단 분리되고 난 후에도 , 왜 썰과 스트로슨은 < 지시 이 론> 을 시도하기보다는 놀이로서의 언어에 만족 하질 않았던 것일까? (가령 < 사랑은 미움보다 더 낫다 > 란 표현처럼) 다만 외골수 플라톤주의자만이 < 대상에 관한 것 > 이라고 고집할 것 으 로 보이는 보증된 언명들을 우리가 가질 수 있다고 간단히 말하지 않고 , 왜 주장 (1) 과 홉사한 것 을 구제하기 위해 지시의 대상들을 창 안하 는 마이농주의자가 되고자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내 생각에 그 대답은 , 그 렇 듯 분리하였다는 광고 들 과는 달리, 의미 론이 인식론과 완전히 결 별하지 < 못하였다 > 는 점이다. 대부분의 언 어 철 학자들은 , 데카르트에서 치좀 Rode ri ck C hi sholm 에 이르기까지 의 인식론자들이 원했던 바를 의미론에서 이끌어내고자 한다. 그들이 원했던 바는 바로 우리가 세계와의 접촉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보증 해 주 는 세계에 대한 표상들에 관한 어떤 설명이거나 , 혹은 표상의 성격에 대한 일반적 설명에서 유출되어 나오는 회의론자에 대한 어 떤 응답이다 . 심적 표상과 언어적 표상 간의 차이는 표상에 대한 연 구의 모티브를 변화시키지 않았다. 과거에는 회의론자에 대항해 논증 하기 위해 우리가 특권적 < 관념>이나 표상V ors t ellun g en 들(예컨대 감각의 단순 관념, 명석 판명한 관념, 카테고리 등)에 관한 제 이론을 지녔었던 반면에, 오늘날 우리는 <언어를 세계와 연결시키는> 특권 적 담론의 요소들(예컨대 이름, 식별 서술 등)에 관한 제 이론을 갖고 있다. 전통적 인식론과 최신의 의미론 양자는 그 활동을 단순히 마음
이나 언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설명이라고 묘사해서, 이 모 티브 를 은폐코자 하는 자기 기만적인 시도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 설명은 항상 디음-과 같이 질문을 퍼붓는 회의론자가 요구하는 응답 이 되지는 못한다: 만일 모든 것이 한낱 꿈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달 라질 것인가? 만일 모든 것이 <만들어진> 것이라면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표상되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어떻게 달라질 것인 가? 지식을 갖는다는 것이 시를 짓고 이야기를 하는· 것과 어떻게 다 른가? 그러한 물음들에 대답하라는 권고만이 주장 (1) 과 같은 관념을 살 아남게 지키려 든다. 좀더 명확히 말해서, 그런 권고만이 상식적 관 념인 <……에 대해 말하기>에 추가해서 <지시>라고 불리는 홍미로 운 관념이 존재한다고 철학자들이 생각하도록 한다 . 진리가 있는 곳 에는 바로 <대상에의 대응>이 있다는 그 관념만이 썰로 하여금 가 령 <셜록 홈즈>에 관해 놀이된 언어 놀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픽 션-속에-존재함>과 같은 관념이 요구된다고 생각하게 하였을 터이 기에 말이다. 오직 그러한 관념만이 주장 (1) 을 부정하며 그것과 더 불어 러 셀의 (2), (3), (4) 를 일소해 버 리 기 보디~ 차라리 마이 농식 의 <대상>을 제시함으로써 러셀의 <분석>에 도전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처럼 보이게 할 것이다. 오직 그러한 관념만이 <오늘밤 산타 클로 스가 올 거야>라는· 말이 명제롤 표현하지 못한다는 도넬란의 주장이 나 <산타 클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어떤 명제를 표현하 는지 알 수 없다는 그의 주장에 신빙성을 갖게 한다. 왜냐하면 언어 가 세계와 접촉을 잃게 될 거라는 절망적인 두려움만이, <‘S' 에 의해 어떤 명제가 표현되는지를 아는 것>이 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아는 것과는 무관하고 오히려 가 참이 되기 위해 세계에 있는 무엇을 꼬집어 가리키는 일과 관련된다고 생각하게 할 것이다. 주장 (1) 을 지속적으로 보유해야 한다는 그 고집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에 스케치된 [다음과 같은] 그림에 사로잡혀 있음의 한 표
현이라고 볼 때만 설명될 수가 있다 . 대상은 단순하다. 복합체에 대한 각 진술은 그 구성 부분들에 대한 진술로 분석될 수 있 으며, 나아가 그 복합체를 완전히 묘사하는 그와 같은 명제들로 분석될 수 있다. 대상 들 이 세계의 실체를 형성한다. 따라서 대상들은 복합적인 것일 수 없다 . 만일 세계가 실체를 지니지 않는다면, 한 명제가 의미를 지녔는지의 여 부는 다른 명제의 진리에 의존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참이든 거짓이든) 세계에 대해 그림을 형성하는· 것이 불 가능하게 될 것이다. 상상된 세계가 실재 세계와 얼마나 다르든지 간에 그것이 실재 세계와 어떤 것 _―-하나의 형식 -울 꼭 공유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고정된 형식이 대상들을 이룬다. :' [비트겐슈타인의 저서] 『철학적 탐구』에 나타난 언어 놀이 접근 방식은, 바로 한 문장이 의미를 지녔는지의 (죽 이해 가능하며 참이나 거짓일 수 있는지의) 여부가 다른 문장이 참인지의 여부에 의해 의존 38) Ludw ig Wittgen ste in , Tracta tus Log ico -Ph ilos oph i c u s(London: Routl e d ge , 1922), 2.02-2.023.
< 될 수도 있다 > 고 허용함으로써, 언어에 대한 이와 같은 < 그림이라 는 그림 > 을 포기한다 이러한 가능성은 픽션적 담론의 경우에서 (러 셀을 따라서 < 분석 > 되지도 않으며 , 썰이나 파슨스의 경우에서처럼 특 별한 피지시체 를 부여받지도 않은 채, 겉모습 그대로 간주될 때) 전형 적인 것이기 때문에, 일단 그림이라는 그림이 배제되고 나면 픽션에 대한 철학적 문젯거리들은 아예 야기되지도 않는다. 비슷한 이유로 해서, 인생은 한낱의 꿈이라는 회의적인 문제도, 어떻게 과학적 이론 들이 시로부터 < 철학적으로 > 구별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도 야기 되지 않는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의 공통된 뿌리는 담론적 사고에 의해 제공된 잡다한 가능성들이 우리를 거짓으로 속여 우롱할 것이며, 실재 세계 와 <접촉을 잃게> 할 거라는 두려움이다 . 이 두려움은 하이데거가 주장했듯이 서구의 철학적 전통이 갖고 있는 굴레이다 . 비트겐슈타인 이 [『논리철학논고 』 에서] 왜 비(非)-그림적인, <놀이> 이론들은 <세계의 고정된 형식 > 39) 과 접촉을 잃게 될 것이며 < 의미 결정 > · 10) 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던가를 보기 위해서는, 파르메니데 스까지 [서구 철학적 전통을] 거슬러 올라가 회고해 볼 필요가 있다. 언어의 시적이며, 유희적이고, 작위적인 측면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의 두려움은 그로 하여금 술어적 담론 자체를 불신하게 할 정도로 대단 한 것이었다. 이 불신은, 오로지 실재히는· 것에 의해 포착되고 요구 되며 파악된 것만이 억견([정見)이 아닌 진지(眞知)를 표현할 수 있다 는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파르메니데스가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 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할 때, 나는 그 말을 그와 같이 파악되지 않는 담론은 진지를 표현할 후보조차도 못 된다는 뜻으로 간주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실재에 대해 두 개의 다른 표현들을 사용하는 담론 은 부정하는 술어가 아니면 불필요한 짓을 범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39) 같은 책, 2.026. 40) 같은 책, 3.23.
술어적 문장도 억견을 표현하는 것 그 이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 다. 그에게는 술 어적 담론이 말할 수 있는 사물 들 의 다양성은, 곧 그 러한 담론이 표상의 규약들에 의존된 것, 따라서 자연의 것 ¢OOEl 이기 보다는 오히려 법에 의한 것 m 陶처럼 보였다. <존재 와 이해가 본질적으로 함께 있음>을 상실한 것에 대한 이러 한 불안은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고 하이데거 가 진단한 것이 만일 옳다면, 우리는 인식론과 의미론의 역사를., 술 어적 담론의 <근 거 >를 실재와 그 담론이 갖는 비규약적인 어떤 관 계 위에 설정하기 위한 시도의 역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근 거 설정은 술어적 담론을 두 부분으로 가른다. 한 부분은 인식론적으 로나 의미론적으로 매개(媒介) 없는 관계들에 <낯 울 내리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길에 상응하며, 다른 부분은 <낯 을 내리고 > 있지 못 하기 때문에 억견의 길에 상응한댜 !” 에피스테메(~턴 知 )나 과학은 첫 번째 유형의 전형일 것이요, 포에시스 [nOL T]O LS , 産出 함]나 시( 詩 )나 만들어진 것 등은 두번째 유형의 전형일 것이다.
41) 이 두 <길>은 본디 파르메니데스가 대비시켰던 것으로, 저자는 그것을 빗대 어 표현하고 있다.(역주)
두 유형의 담론간에 이러한 구분이 필요하다는 점이, 내 생각에는, 한편으로는 러셀의 주장 (1) 을 고수하는 20 세기 의미론적 전통과, 다 른 한편으로는 < 눈으로 보는 것 v i s i on> 이 심적 표상을 실재와 연계 시켜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옛 인식론적 전통 사이의 연결 고리로 보인다. 다시 한번 더 하이데거를 따르자면, 러셀이 말하는 <직접 지>라는 관념은 눈으로 보는 것을 진지의 모델로 삼으려는 플라톤적 인 시도 ___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명제의 진리성을 의심할 수 없게 할 때 그것을 믿게 하려는 모종의 <강요>를 탄탄하게 하려 는 시도 의 상속자라고 여겨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폴라톤과 러셀 양자는 이렇듯 강요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시각적 지
각(知 登 )이 발생되지 않으면 지식과 억견, 논리와 신비, 과학과 시 ( 詩 ) 사이에 아무런 구분조차도 없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이데거는 언어와 술어에 대해 최초에 파르메니데스가 가졌던 불신과, 플라톤이 가졌던 불신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스케치하고 있다 . 이데아 L8m 란 낱말은 가시적인 것 속에서 보여지는 것, 그 것 이 제시해 주는 면모를 의미한다. 제시된 것은 곧 우리와 대면해 있는 것의 현상, 즉 에 이도스 ElOOS 이다 .411 문제의 관건은 퓌지스 [¢ools, 자연]가 이데아로 특징지어져야 했던 데 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데아가 존재자의 유일하고도 결정적인 해 석으로 되어야 했다는 데에 있다. •13 1 퓌지스는 발생하는 힘이요, 스스로-거기에-서-있음이요, 안정성이다. 이데아, 죽 보여진 바로서의 현상은 그 안정된 것이 눈에 의해 목격됨으 로써 그리고 목격되는 한에 있어서만 결정된 어떤 모습이다 .~ 1 ) 하이데거는 이어서 이렇듯 눈으로 보는 것을 존재에 대한 우리의 관계의 모델로 채용한 것은, 진리를 표상의 정확성으로 (즉 알레테이 아{야沿 aa, 진리]보다는 오히려 올바름 o p)~따 s 으로) 여긴 아리스토텔 레스적인 관념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진리는 이제 로고스의 올 바름이 되었다 >. , 15) 그러나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현대의 분석적 언어철학 양자 42) Martin Heid e gg e r, Intr od ucti on to Meta phys ic s (New Haven: Yale Un i- versity Press, 1959), p. 180. 43) 같은 책, p. 182. 44) 같은 책, 같은 쪽. 45) 같은 책, p. 186.
가 공히 당연시하는 견해 를 거부하기에 충분할 만큼 여전히 파르메 니데스주의자이었댜 문제의 그 견해란, (그 언어 사용이 거짓이기 때 문이거나 아니면 부적절한 어휘로 말해졌기 때문에) 실재를 <잘못> 표상함에도 불구하고 지시의 관계 덕택에 실재와 <연계>되어 있으 며 <더 나은> 표상을 향해 나아가는 가설이나 디딤돌로서 기능하 는, 그와 같이 충분히 의미 있는 언어 사용이 가능하다고 보는 견해 를 말한댜 그래서 화이트 N i cholas Whit e 는 플라톤에 대해 이렇게 말한댜 [그는] 완벽하지 못하고 실재의 궁극적 표상이 아닌 언어들에 대해 완 전한 의미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인지 가능한 세계에 관한 참된 이론, 즉 이데아들의 세계에 관한 이론에는, 진정한 선례뿐만 아니라 다른 대안 조차도 없댜 血 화이트는 플라톤이 결과적으로 가설의 관념을 거부하기에 이르게 된다고 설명한다 . 그 까닭은, 플라톤이 <이데아를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 속에 언어오快든 독립적으로 지식에 이르는 큰 길을 갖고 있다> 고 말하며,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희망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 이다. [우리는] 그것이 예전의 탐구에 과연 대답이 될 것인가 혹은 그것이 우 리가 익숙한 것에 의해 어떻게 묘사될 것인가를 염려하지 않고서도, 우리 가 알 수 있는 바가 발생되리라고 단순히 희망할 [수도 있다.] 그가 관조할 수 있는 이 최후의 편의적인 그림을 가능케 해주는 것은 바로 이해 가능한 실재의 성격에 대한 플라톤의 그림이다. 왜냐하면 만일 에 누구든 단지 방해물들을 치우기만 한다면, 그 사람의 심적 응시 앞에 46) Nic h olas White, Plato on Knowledg e and Reality (I nd ian apo lis: Hackett, 1976), p. 228.
평범히 놓여 있는 것 이 바 로 이데아라고 플라톤은 생각할 수 있기 때문 이다. ' 이러한 보는_것의-인식론은 니하마스 Alexander Nehamas 가 다음 과 같이 플라톤의 < 유일-명칭에 대한 가정 > 이라고 부르는 의미론적 인 결과를 초래한다 만일에 0 가 a 의 이름이라면, w 는 a 가 지닌 유일한 이름이며 또한 a 는 Q 에 의해 일컬어지는 유일한 대상이다 . IHI 또 플라톤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고 말할 때도 그는 똑같은 논점 올 지적하고 있댜 [플라톤은] 명칭 ooom 을 그것이 이름하는 것의 본성을 들춰내 주는 것이 라고 생각하며, 한 낱말이 실재의 어떤 항목을 꼬집어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매우 강한 의미론적 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 이 <매우 강한 의미론적 관계>는 더 강한 관계인 파르메니데스식 의 추리되지-않고-파악됨이라는 관계의 상속자이며, 더 약한 관계인 러셀식의 <지시>라는 관계의 조상인데, 후자가 최근의 의미론을 지 배하고 있댜 이상의 세 가지 관념들은 모두 이 부문에서 < 가장 약 한> 의미론적 관계인 단순히 <……에 대해 말하기>의 관계, 죽 비 존재의 단위체 특히 픽션적 단위체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는 있으나 지시할 수는 없다는 뜻의 어떤 관계와 대비된다. <그러한> 관계란 47) 같은 책, p. 230. 48) Alexander Nehamas, Self- P red ica ti on and Plato ' s Theory of Forms, 49)A 같m은er i c책a,n pP, h1 i0l0o. s oph ic a l Qu arte r ly, 16(1 r:;f79 ), p. 101.
담론에 의해 <구성될> 수 있는 관계이댜 왜냐하면 셜록 홈즈나 열 에 대해 말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셜록 홈즈>와 <열> 이라는 낱말들이 체계적으로 유포되는 것 말고는 없을 터이므 로.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파르메니데스적, 플라톤적, 러셀적인 관계 들은 담론의 <전 제 조건>이자 <정초 fo unda ti ons > 인 낱말 - 세계 간 의 관계들이댜 그것들은 진리를 가능케 해준다고, 좀더 정확히 말해 서, 가령 <홈즈 는 베이커가에 살았다>라는 표현이 갖게 되는 기생적 이며 2 차적인 종류의 진리와는 반대되는 의미로, 1 차적인 진리를 가 능케 해준다고 추정되는 관계들이다 . 그와 같은 관계들의 필요성에 대해 젊은 시절의 비트겐슈타인이 느꼈던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 책임성 있는 > 담론과 <책임성 없는> 담론을 구분지을 필요성, 즉 우리를 어엿한 서구인으로 만들어줄 과학과 시 사이의 명쾌한 구분 에 대한 필요성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한다. 7 물리주의와 사실성 만일 파르메니데스적인 필요성이 진리를 제약하지 않았으며 고유 명칭에 의해 사물들을 이름 부르도록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지식 론>이라고 불리는 학문 분야가 <객관성>에 대해 말해 줄 것이라고 우리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며, <언어철학>이라고 불리는 다 른 학문 분야가 낱말이 세계와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지롤 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놀이> 이론이 <아니라> 심 적 혹은 언어적 표상에 관한 이론―――표상된 대상들과 순전히 규약 적 관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관계를 지닌 그러한 표상들을 발견 해 낼 어떤 이론-을 우리가 가질 수 있으리라는 그 아이디어는, 서구 문화가 <현전(現前)의 형이상학>에 의해 강박되었다는 하이데 거의 견해와 같은, 어떤 견해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을 정도로 아
주 괴상스런 것이댜 하지만, 그러한 발상에 덧붙여서, 인식론이 아니 라 최근의 의미론이 < 제일 철 학 > 이라는 프레게 이래로 유행하는 관 념이 주어졌다고 가정하고, 다시 거기에 덧붙여 러셀의 접근 방식이 순전히 의미론적 고려 사항을 인식론적 고려 사항과 혼동한 것이라 는 생각이 주어졌다고 가정한다면, 모종의 < 인과적 이론 > 에 대한 요 구가 파르메니데스적인 열망의 최종적인 형태가 될 것임은 아주 자 연스러운 일이댜 앞의 명제들 (7)-(9) 에서 제기된 논변이 말하는 것은 그림으로서 의 언어라는 그림은, 낱말이 세계와 어떻게 연계되어 있느냐를 설명 함에 있어서 규약적 관계들이 물리적 관계들에 의해 대체될 경우에 만 성립될 것이라는 점이다. 내 생각에 이 논변은 타당하지만, 그것 은 명제 (7) 에 대해 귀류법 50) 을 구성시킨댜 내가 지금까지 말했던 논 점은 단지 이러한 논변이 유도하는 [결론인] 물리주의를 어떻게든 회 피해 보려는 (썰이나 파슨스의) 시도들은 초점을 잃은 것이라는 점이 다. 썰과 더불어 러셀의 주장 (1), 즉 < 존재함의 공리 > 가 픽션의 등 장 인물에 의해 만족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거나, 파슨스와 더불어 그 것이 비(非)-시 • 공간적 대상들에 의해 만족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공리의 요점울 모조리 앗아버리는 짓이다. 그 공리는 언어 가 가령 러셀식의 <직접지>와 같은 비규약적 관계에 의해 시 • 공간 적 세계와 연계되어 있다는 점을 확실히 하고자 하여 만들어진 것이 기 때문이다. 일단 그러한 인식론적 관념이 사라지고 나면, 요망되는 연결 고리의 한 후보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일상적인 물리적 인과성 이다.
50) 歸證法, redut io ad absurdum : 한 주장이 타당함을 증명하는 논리학의 한 방 법으로 가령 내 주장의 전제가 틀렸다고 가정하면 반드시 오류에 귀착된다는 것을 보여서 결과적으로 내 주장이 옳다고 입증하는 간접 증명의 한 방식.(역주)
그러면 파르메니데스적인 여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물리주의의 성 공 여부에 대해 우리는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에 물리주의
적 인 의미론을 그 옹호자 들 중 일부 학자 들 이 보는 것처럼, 그것을 <실재론 자 > 인식론 을 위한 하나의 서론격의 시도라고 본다면, 그 전 망은 어둡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 지금처럼 낱말 들 을 사용 하기에 이르렀으며 어떻게 해서 지금처럼 명제 를 주장하기에 이르렀 는가에 대해 우리가 능력껏 (예컨대 진화론적 설명처럼) 어떤 인과적 설명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실재를 정확히 표상하고 있 는지의 여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밝혀주지 않기 때문이다. 상당히 완전한 언어를 갖고 있으며 상당히 창의적인 과학적 세계 - 이야기를 보유하고 있는 < 어느 > 공동체라도, 그 공동체가 어떻게 해서 지금처 럼 말하고 또 믿기에 이르렀는지에 대해 그런 식의 설명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 퍼트남이 < 내적 실재론>이라고 부른 것, 즉 과학이 그 자체에 다시금 적용되어서 과학의 기원을 설명하는 과학의 능력은, 올바른 유일한 표상 자체를 꼬집어내도록 실재가 우리를 제약하였다 거나, 혹은 제약하는 과정에 있다고 느끼는 파르메니데스적인 필요성 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후자는 퍼트남이 <형이상학적 실재론 > 이라 일컫는 것으로서, 그는 그것이 부정합적이라고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 5 1) 우리의 과학이나 문화의 밑바탕에 철학적 정초를 슬쩍 끼워넣겠다는 데카르트적이며 칸트적인 여망은 물리주의적 의미론에 의해 충족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유형의 여망은 충족이 <될 것이다>. 이것은 과학과 비과학, 그림을 그리는 1 급의 담론과 그림을 안 그리는 2 급의 담론, 세계에 대한 말하기와 우리가 <만들어낸> 것에 대한 말하기 사이에 어떤 원리상의 차별성을 찾아내려는 여망이다. 물리주의적 의미론이 세계를 우리가 올바로 파악하는 것을 보증하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물리주의 의미론은 최소한 과학 자체가 단지 하나의 신화 만들기에 지나지 않는디는 두려움을 불식시킬 한 가지 방도를 제공해 줄 가망 51) Hilary Putn a m, Meanin g and the Moral Sci en ces, pt. 4 참조
이 있다는 여망인 것이다. 그 두려움이란 에피스테메[恨知]와 포에시 스 [nOl T/0 ls, 산출, 창작] 사이에 전혀 아무런 구분도 매겨질 수 없다 는 두려움이다. 그것은 관념론과 철저한 <언어 놀이> 접근 방식 양 자가 공히 고취시키는 두려움이요, 언어와 세계 사이에 아무-런 연계 성도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우리가 진리에 의해 제약되는 것이 아니 라 차라리 우리 자신의 창안물들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두려움이 댜 그런 것과는 대조적으로 물리주의 의미론은 언어 행위에 대한 이 상적(理想的)인 인고肉 설명이라는 관념을 통해 에피스테메와 포에시 스 간의 구분에 대한 설명을 제시해 준다. 그런데 언어 행위에 대한 이상적인 설명이란 모든 사건에 대한 이상적인 설명의 일부분, 즉 왜 인간 존재들이 지금처럼 말을 하는지에 대한 설명의 일부분이다 . 그 들이 말하는 것들 가운데 일부는 실재가 그들의 말과 같음을 근거로 해서 설명될 것이요, 다른 부분들은 다른 방식으로 설명될 것이다. 이 중에서 처음 부류는 1 급의 그림 그리기 담론에, 나중 것은 2 급의 놀이 같은 담론에 해당될 것이다 . 직관에 있어서 이 아이디어는 이상 적인 설명 속에서 언급된 단위체와 지시 표현들 사이에 인과적 연계 성이 존재할 경우, 우리는 [세계에 대한] 그림을 얻게 된다는 발상이 다. 반면에 그러한 것이 없는 경우, 즉 인과적 통로에 대한 추적이 봉쇄되어 도넬란의 말마따나 <파국에 다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하 지 못하게 된다. 그렇듯 실재에 이르는 길이 <파국에 다다른> 표현 을 포함하는 참인 진술들은 <픽션 속의 진리>이며, 언어 놀이적 의 미에서의 진리이고, 그 진리성이 보장된 언명 가능성에 <불과한> 진 술들이다. 이 점과 연관된 물리주의자의 직관을 가장 명시적으로 진술한 것 은 푈스달D a gfi nn F0llesdal 이 콰인의 한 주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제시하였다. 푈스달은 콰인이 그의 미스터리 같은 <번역의 이중적 미결정성> 논제를 통해 무엇을 하려 하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문 제의 그 논제란 <알려진 것이거나 미지의 것이거나, 관찰 가능하거
나 관찰 불가능한 것이거나, 과거의 것이거나 미래의 것이거나 자연 에 대한 진리들의 총체는 번역을 미결정인 채로 남겨둔다>는 주장을 말한댜 < ‘rou g e’ 란 용어는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 라는 물음에 대해 콰인은 < 이미 인지된 자연에 대한 이론의 과소 결정성의 ‘범위 내에 국한하더라도 사실이란 것은 하나도 없다 > 521 라고 말한다. 5: l l 이러한 주장을 푈스달은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52) Wi la rd V. 0. Quine , Repl y to Chomsky , Words and Obje c ti on s: Essay s on the Work of W V. Qu in e , ed. Donald Davi ds on and Jaa ko Hint i kk a(D o rdrecht: Reid el , 1969), p. 303. 53) 콰인이 말하는 <번역의 미결정성>이란 간략히 말해서 제아무리 노력을 하더 라도 화자의 행위 관찰을 토대로 그가 사용하는 낱말의 의미를 우리가 결코 정 확히 포착할 수가 없다는 것을 가리키며, < 이론의 과소 결정성>이란 증거만을 토대로 할 경우 그걸 설명해 내는 이론들이 많기 때문에 그중 어느 것이 맞는 이론이라고 결코 판가름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역주)
모든 진리들은 자연에 대한 이론에 포함된다. ……모름지기 이러한 증 거들을 설명해 내는 가장 단순한 이론에 부합되는 것만이 우리가 정당하 게 가정할 수 있는 단위체이다. 그러한 단위체 및 그것의 속성들이 세계 에 존재하는 것들이며, 주장을 맞거나 틀리게 하는 것들에 해당된다. 이러 한 것들에 대한 모든 진리도 자연에 관한 우리의 이론 속에 포함된다 . [반 면에] 번역을 할 때에는 우리가 실재의 새 영역을 더 서술하는 것이 아니 며, 존재하는 것들에 관한 포괄적인 두 이론을 상호 연계시키고 있을 따 름이다. …… 바로 이 점이 번역이 자연에 대한 이론과 다른 이유이며, 따 라서 번역의 미결정성이 야기되는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히) 여기서 모름지기 < 이러한 증거들을 설명해 내는 가장 단순한 이 론>에 부합되는 단위체만이 그것들에 대해 우리가 맞거나 틀리게 되 는 대상들에 해당된다는 원리는 이상적인 인고臣! 설명이 그림 그리기
54) Dag finn F0llesdal, Mea ning and Ex perien ce, M ind and Lang uage, ed. Samuel Gutt en p la n(Ox ford : Ox for d Un ive rsity Press, l
담 론 의 한계 를 결 정한디 는- 주장 이다 . 그 러나 그 것들 의 참 됨에 관해 우리가 말 할 수 있 는 많은 것들- 가령 낱말 들 의 의미나 행위의 도덕적 가치 등―__이 있지만 , 그 와 같 은 참 된 진 술들 은 <홈즈 는 베이커가에 살았다 > 와 마찬가지 로 실재 를 그려내지는 않는다. 그런 것 들 은 세계의 실재 모습 이외의 어떤 것 덕택에 참인 진 술들 이다. 이렇듯 파르메니데스적인 필 요성을 최소로 충족하는 방식을 취하 면 < 원자 들 과 허공 >죠) 에 관한 것 이 아닌 진술 들 은 다만 < 규약에 따 론 진리 > 라는 주장에 모종의 의미 를 부여하도록 허용해 준 다. 이런 물리주의에 의해서 안전하게 된 < 지시 > 의 관계 즉 세계 _ 낱말의 연 계 관계는 단지 다움 (10) 의 조건에 부합되는 관계에 불과하다 .
55)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적 유물론자인 데모크리토스는 세계가 원자들과 허공의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 저자는 그것을 빗대서 < 세계에 대 한>이란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 (역주)
(10) 피지시체는 , 우리가 뭔가를 말한 것에 대해서 이 상적인 인과 적 설명을 부여하려면 그 대상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대상이어야만 한댜 그와 같은 대상들은, 만일에 환원주의자의 희망이 실현되는 날이 온다면, 옛사람들이 말한 < 원자들과 허공 > 의 최신판에 해당될 것이 다. 도넬란, 크립키 그리고 다른 물리주의자들은 이러한 데모크리토스 적 직관을 <근거 설정하는 > 주장 (10) 을 옹호하는 어떠한 논변도 제 공코자 애쓰는 척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다만 이 직관을 특정한 철학 적 어휘의 범주 내에서 해명해 버리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
8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시인의 빛 나는 파르메니데스적인 직관 들 이 근대의 문학 발전에 대해 갖는 중요성을 언급하고, 또 우리 문화 내에서 그러한 직관들의 존재가 시 인들과 소설가들 그리고 비평가들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물로서 기능 하는 방식에 관한 몇 가지 유품들을 제시함으로써 이 논문을 끝맺고 자 한다. 말라르메 沈) 와 조이스5 7 l 이래로 일련의 작가들은, 낱말들을 대상이면서 동시에 표상이게 만듦으로써 언어의 표상적 기능을 흐려 놓았다. 특히 보르헤스와 나보코프를 비롯한 소설가들의 전통은 관람 하기 좋은 아치형의 특별석에 의해 정의되었던 공간을 침범함으로써 그들의 효과를 달성해 왔다. 니체가 <진리에의 의지>를 문제삼고, 하이데거가 <현전의 형이상학>을 문제삼은 것을 본떠서, 일련의 비 평가들은 (특히 데리다는) < 피지시체>라는 관념을 없애버리도록 노 력하였으며, <텍스트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따위의 것을 말 하였다 . 이렇듯 고조되는 합창을 혹자~ 파르메니데스적인 전통에서 우리가 해방되는 것의 시초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자는· 보르헤 스와 나보코프, 말라르메와 발레리 죄) 와 스티븐스 59), 데리다와 푸코 등 을 가리켜 그들이 우리를 주관_과-객관, 낱말-과-의미, 언어-와—세 계 등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빠져나오도록 인도하여, 서구 문화를 괴롭혀 왔던 노모스 [OO JlD S, 법]와 퓌지스[mxJ lS, 자연], 에피스테메[진 지]와 포에시스[산출] 사이의 숙명적인 구분들을 고대 그리스인들이 최초로 만든 이래로 꿈도 꾸지 못했던, 더 새롭고 더 나은 지성의 우 주로 인도해 갈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내 생각에는, 대단한 잘못이다. 그 사람들은 파르 56) Ste p h a ne Mallarrne, 1842-1898: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역주) 57) Jam es Joy c e , 1882-1941: 『율리시즈』를 쓴 아일랜드의 작가 . (역주) 58) Paul Valery , lITTl-1945: 프랑스의 시인, 비평가, 사상가.(역주) 59) Wallace Ste v ens, 1879- 19 5. 5: 미국의 시인.(역주)
메니데스적인 전통을 그것이 없는 곳 에서는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 는, 변증론을 위한 어떤 장식물 즉 자신들을 돋보이게 해 주는 하나의 장식물로 활용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차라리 더 나을 것이다. <견고 한 사실>이라는 관념, 즉 실재에 의해 진리가 강요받는다는 파르메 니데스적 관념이 설 자리가 별로 없는 문화에서는 , <모 더니스트 > 의 글쓰기라는 장르 전체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또 , 거기에서는 < 간( 間 ) 一 텍스트성i n t e rt ex tu ality > 이라는 관념은 귀여운 장난꾸러기 같은 스릴을 전혀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특히 < 모더니즘 > 이 과시했던 < 진리[또는 , 眞實 ] >를 향한 아이러 니컬한 태도는, 정신이나 언어를 그림이라고 여기는 그림을 소멸하지 않게 해주는 활발한 철학적 전통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오류에 서 벗어나게 해주며 진리에 향하도록 제약해 줄 표상의 형식을 철학 자들이 창안해 내지 않고, 또 오직 놀이들만 있는 곳에서 철학자들이 그림을 찾아내려는 운명적인 투쟁을 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아이러니도 없게 될 것이다. 과학과 시( 詩 ) 사이를 뚜렷히 갈라 대비 시키지 않는 문화에서는, 시에 관한 시가 없을 것이며 글쓰기 자체를 찬양하는 글쓰기도 없을 것이댜 파르메니데스적인 철학자들은 우리 를 위해 그러한 대바가 소멸되지 않게 지켜주고 있다. 1 급의 담론과 2 급의 담론 사이를 구분짓고자 끊임없이 시도함으로써, 그들은 말하 자면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 우리가 갖게 되었을 것보다 훨씬더 나은 2 급의 담론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댜 60)
60) 나는 이 테마를 앞의 논문 6 에서 더 상론하였다 .
만일에 그림이라는 그림의 불합리성이 언젠가 보편적으로 인정되 고 만일에 우리가 과학과 도덕에서 진심으로 실용주의적이게 되며, 만일에 우리가 언젠가는 진리를 보장된 언명 가능성과 < 단순하게 > 동일시한다면, 우리의 몽상가들은 아무런 테마도 갖지 못할 것이고 모더니스트들은 아무런 아이러니도 갖지 못할 것이다 . 윌리엄 제임스
도 헨리 제임 스도 러셀이 없 는 세계에서 는 아무 할 말이 없을 것이 며, 보르헤스는 도넬란이 없 는 세계에서는 아무 할 말이 없을 것 이 다 . 근 대의 문예에서 가장 뚜릿히 근대적인 것은 그 효고 H t 직설적인 사람 들 특히 <상식적 인 실재론>을 옹호한 철 학자들에 의존하고 있 는 것이다. 그들은 바로 관념론자, 실용주의자, 구조주의자 그리고 그 밖에 과학자와 시인 간의 구분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항하는 철학자들이댜 푸코가 < 기표의 주권 > 이라 부른 것에 반대한 근대의 저항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서술, 새로운 어휘, 새로운 장르의 창 안이야말로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하게 도와준다 . 바 꿔 말해서 그 저항은 인식 주관이 아니라 오히려 시인이 인간의 본 성을 구현한 인물이라고 암시해 준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천만한 것 이며, 시인은 그의 친구들로부터 구출될 필요가 있다. 만일에 그림이 라는 그림이 내가 생각하듯 불합리한 것이라면, 이 불합리성은 널리 알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좋다. 왜냐하면 아이러니스트인 시인 은 과학자에 비해 훨씬더 많이 파르메니데스와 서구적 형이상학의 전 통에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의 문화는 이 전통에 대한 믿음을 상 실해도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문예의 문화는 그렇지 못할 것이다 .611 61) 이 논문을 유용하게 고치도록 나의 초고에 대해 논평해 준 스미스B arbara Herrnste in Sm ith 양에 게 감사를 드린다.
8 19세기 관념론과 20세기 텍스투얼리즘
19 세기에는 오로지 관념들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있 었는데, 금세기에 들어와서는 오로지 텍스트만 존재하는 것마냥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 내가 <텍스투얼리스트t e xtu al i s t s> 라고 부를 이 사람들 가운데는 예 컨대 블룸 Harold Bloom, 하르트만 Geo ffr e y Ha rt- mann, 밀러J. Hillis Miller, 드망P aul De Man 을 중심으로 한 <예일 학파 > 의 문학비평가들, 데리다J ac q ues De rri da 와 푸코와 같은 프랑 스의 < 후기 구조주의자들 > , 화이트 Ha y den Whit e 와 같은 역사학자 들, 레인보우 Paul Rai nbow 와 같은 사회과학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자기들의 출발점을 하이데거로 잡지만 통상적으로 볼 때 철학자들의 영향력과는 비교적 거리가 멀다. 그들이 그려내고 있 는 지적 운동의 무게 중심은 철학이 아니라 문예 비평lit er ary criti- ci sm 에 쏠려 있다. 이 논문에서 나는 이 운동과 19 세기 관념론 간의 유사점 및 차이점 몇 가지를 논의하고자 한다. 첫번째 유사점은 두 운동 모두 자연과학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한 다는 점이다. 둘 다 자연과학은 주도적인 문화 형태가 되어서는 안되며, 정말로 중요한 건 과학 적 지식이 아니라고 제안한다 . 둘 다 과 학적 관점과 는 다 르 며 또 얼마 간 은 더 높은 어떤 관 점 이 있다고 고 집한다 . 그 운동 들 은 인간의 사고 는 < 과학 적 방법 >을 적 용함으 로 써 절정에 도달한다는 발상에 반대하 는 경고 를 하고 있다 . 양자 는 스 노 C. P. Snow 가 < 문예의 문화 > 라고 불렀 던 것을 자화상으로 삼으며 , 일련의 수사학적 장치 들 을 제시한댜 두번째 유사점은 양자 공히 우리는 결 코 인간의 사고나 언어 를 매 개체가 없이 발가벗은 실재와 대조시킬 수 없다고 고집한다는 점이 다 . 관념론자들은, 관념과 같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다른 관념뿐이라 는, 버클리 Geor g e Berkele y의 주장에서부터 출발하였다. 텍스투얼리 스트들은 모든 문제와 논제와 구분들은 언어에 상대적이라는 주장, 즉 우리가 사용키로 선택한 특정한 어휘, 우리가 놀이하기로 선택한 특정한 언어 놀이의 결과라는 주장에서 출발하였다 . 둘 다 이 논점을 자연과학의 위상을 설정하는 데에 사용한다. 관념론자들은 자연과학 의 개념들이란 정신이 감각적 인상들을 종합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 순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칸트에 의해 밝혀졌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과학은 현상 세계만을 알 수 있다. 텍스투얼리스트의 용어에 서 이 말은 과학의 어휘란 단지 여러 어휘둘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 다는, 즉 자연 현상에 대한 예측과 통제를 잘해내게 된 어휘에 불과 하다는 주장에 해당된댜 과학의 어휘는 물리주의자들이 우리가 그렇 게 생각하게끔 말하듯 자연 자체의 어휘가 아니다 . 도 두 운동은 공히 동일한 논점을 예술의 기능을 찬미하기 위해 사용한다. 관념론자들에게 예술은 과학이 볼 수 없는 우리 자신들의 부분, 즉 가상계(可想界)의 자유롭고도 영혼적인 부분과 접촉토록 해 주는 것이었다. 텍스투얼리스트들에게 , 문필가가 자신은 발견이 아니 라 만들기를 하고 있음을 스스로 인지하는 것,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반어적(反語的)인 모더니스트가 자신은 사물이 아닌 텍스트에 응답 하고 있다는 자기 인식은 그롤 과학자보다 한 단계 위에 머물게 해
주는 것이댜 두 운동은 과학자 자신이 아이디어를 한데 모은다거나 새로운 텍스트 를 구성하는 것 < 이상의 > 어떤 일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 를 순진하다고 취급해 버린다 나는 이 두 가지 유사점에 대한 지적이, 텍스투얼리즘을 19 세기의 관념론에 필적하는 현대적 키운터파트로, 죽 텍스투얼리스트들을 관 념론자들의 정신적 후예로, 또 동종의 것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여 나타난 것으로 간주하려는 나의 시도를 정당화하는 데 충분한 것이 기를 바란댜 이때 환경의 차이란 바로 이런 점이라고 나는 주장할 것이댜 즉 19 세기 초에는 잘 정의되고 좋은 것으로 여겨진 학문 분 야로서 철학 이란 것이 존재했으며, 그것은 문화를 위한 지식 체계라 고 주장되었고, 그 범위 내에서 형이상학적 논제들도 논의될 수 있었 댜 반면에 우리의 현대 문화에서는 그러한 학문 분야가 없다 . 관념 론은 형이상학적 논제를 근거로 하였지만, 텍스투얼리즘은 그렇지 않 댜 데리다와 같은 철학자들이 <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등의 얘기를 할 때 그들은 어떤 이론적인 논평, 즉 인식론적이거나 의미론적인 논변이 뒷받침된 논평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들은 (진리란 대응이요, 언어는 그림이며, 문학은 모방이라는 등) 상호 연관된 관념들로 이루어진 특정한 개념 체계는 마땅히 폐기되어야 한다고, 암호적이며 경구적인 말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진리 나 언어나 문학의 < 진정한> 본성을 발견했노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와 같은 것들의 <본성>을 발견한다는 발상 자체가 우리가 꼭 폐기시켜야 할 지적인 개념 체계의 일부, 바 꿔 말해서 하이데거가 <현전(現前)의 형이상학> 또는 <존재-신학 적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의 일부라고 말한다 . 만일 누구든 그 전통을 거부하면, 그는 과거에 실재론자와 관념론 자를 한데 묶어 주었던 <철학>이라 불리는 관념을 거부하는 셈이다 . 달리 말해서 실재나 지식에 대한 특정한 견해를 찬성하거나 반대하 는 생각들에 무게를 실어줄 수 있는 비경험적인 준(準)-과학이 존재
한다는 관념을 거부하는 셈이다 가령 19 세기 관념론자 들 과 실증주 의자들 간의 쟁점들은 칠지난 어휘에 의해 창안된 것이라고 말하며, (일부 현대 분석철학자 들 이 바라 듯 이) 그 문제는 재구성되어 명확히 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소되어야 마땅한 것이라고 텍스투얼리스트 들이 말할 때, 그들은 이 주장을 < 철학적 논증 > 이라 할 만한 어떤 것에 의해 옹호하려 들지 않는다 마치 카르납이 그렇게 했다고 종종 실증주의자들이 잘난 체 주장하는 것과 꼭같이, 그들은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을 마감시켰다고 종종 주장하는데, 이건 사실이다. 하지만, 잘난 척하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있는 법이다. 하이데거는, 카르납이 언어에 관해 상당한 것을 발견했노라고 주장했던 방식마냥 어떤 새 로운 철학적 발견을 공표하지는 않았다. <실상이 어떠하다는 데 대 해 무언가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어떤 새로운 어휘를 채용한다는 발 상 자체가 벌써 하이데거가 해체코자 하는 <현전의 형이상학> 속에 담긴 또 다른 요소에 불과하댜 나는 첫째, 과학이 인간 활동의 패러다임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점에서 관념론과 텍스투얼리즘은 공통적이라고 말해 왔으 며, 둘째 그것들 중 하나는 철학적 교의인데 비해 다른 하나는 철학 에 대한 의구심의 표현인 점에서 다르다고 말해 왔다 . 이 두 논점은 다음과 같은 말로 한꺼번에 표현될 수도 있다. 19 세기의 관념론은 한 유형의 과학(철학)으로 다른 유형의 과학(자연과학)을 대체하여 문화 의 중심을 삼고자 하였는데 비하여, 20 세기의 텍스투얼리즘은 문예를 문화의 중심에 위치시키고 과학과 철학 양자를· 기껏해야 문예의 장 르들이라고 취급하려 한다. 이 논문의 나머지 부분은 조야한 이 표현 을 세련되게 만들고 또 설득력 있게 하려는 시도가 될 것이다. 먼저 그 표현에 사용된 용어들을 내가 사용코자 하는- 의미로 정의하는 일 부터 시작하기로 하겠다. 나는 <과학>이란 용어로써 논변이 비교적 용이한 활동을 의미할 것인데, 그 활동 내에서는 한 영역의 담론을 지배하는· 어떤 일반 원칙
에 동의 할 수가 있으며 , 그러고 나서 이 원 칙 과 더 구체 적 이며 더 홍미 로운 명제 들 사이에 놓 인 추 론 의 고리 를 추적함으로써 마침내 합의에 도달하리라고 목표 할 수 있 는 , 그러한 활 동 을 과학이라고 말할 것이다. 칸트 이래의 철 학은 다른 모 든 과학 들 을 심판할 수 있는 것 , 즉 마땅히 하나의 과학이 되어야 할 어떤 것 으로 간주되었다. 지식의 과학, 과학 의 과학 , 지식학 W i ssensc haft slehre, 인식 이론E rkenn tni s th eo ri e 등 으로서의 철 학은 과학적 담론을 과학적이게 해줄 어떤 일반 원칙을 찾 아낸다고 주장되었으며, 따라서 다른 과학들과 스스로 를 위해 < 근거를 제공해 준다 > 고 주장되었다. 과학의 한 특징은 문제 구성의 바탕이 되는 어휘가 그 주제에 종 . 사한다고 간주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수용된다는 점이다. 그 어휘 는 변화될 수도 있지만 , 그것은 일련의 새로운 이론어를 안출함으로 써 현상을 더 잘 설명해 내는 어떤 새로운 이론의 발견을 의미할 따 름이요 , 설명항들이 서술되는 어휘는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내 가 < 문예 > 라고 부르게 될 문화 영역의 한 특징은 시나 소설이나 비 평적 에세이 등의 경우처럼 , 아주 새로운 장르를 < 논증이 없이> 도 입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 성공 때문에 성 공한 것이지, 시나 소설이나 에세이가 옛 방식보다는 새로운 방식으 로 씌어져야 할 좋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 아니다. 에세 이나 시나 소설에는 옹호되어야 할 가치나, 모방되어야 할 대상이나, 표현되어야 할 감정 따위들을 서술하는 불변적인 어휘란 없다. <문 예 비평 > 이 <비과학적 > 인 이유는 누구든 그와 같은 어휘를 만들고 자 하면 오히려 멍청이가 된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문예 작품들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용어들의 범위 내에서 비판될 수 있는 것을 < 원하지 > 않는다. 오히려 그 작품들과 그것에 대한 비평 양자가 < 새로운 > 용어들을 제공해 주길 바란다. 따라서 나는 <문예>라는 말로써, 포괄적인 비판의 어휘를 추구하는 논변을 매우 의식적으로 앞질러가며, 따라서 논증하기 자체를 앞질러가는 문화 영역들을 의미
할 것이다 . 비록 조야한 것임에는 틀 림없지만, 과학과 문예 를 이런 식으로 분 리하는 것은 적어도 관념 론 과 텍 스투 얼리즘 양자에 관련된 한 구분, 즉 한 명제가 참인지 를 발견해 내 는 것과 한 어휘가 좋 은 것인가를 알아내는 것 간의 구분에 집 중 할 수 있게 해주는 장점 을 지니고 있 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명제 를 믿느냐가 아니라 어떤 어휘를 사용하느냐라는 논제를 가리켜 나는 < 낭만주 의 > 라고 부르고자 한다 . 이렇게 볼 때 나는 낭만주의야말로 형이상 학적 관념론과 문예적 텍스투얼리즘을 묶어주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양자는 과학자들이 자연을 맨눈으로 적나라하 게 보는 것이 아니며 과학의 명제들이 감각에 박힌 활자와 같은 것 이 아님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양자는 현행의 과학적 어휘는 다 른 수많은 어휘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것에 우선권을 줄 필요도 없고 , 다른 어휘들을 그것에 환원시킬 필요도 없다는 보조 정 리를 끌어낸다. 양자는 사물들의 실재 모습을 발견해 낸다는 과학자 들의 주장에 제한이 필요하다고 보며 , 고삐를 채워야 할 필요가 있는 허풍이라고 본다. 그들은 과학자는 < 단지 과학적 > 이거나 , < 단지 경 험적>이거나, <단지 현상적 > 이거나, < 단지 실증적 > 이거나, < 단지 기술적(技術的)>안 진리들을 발견해 내는 중이라고 말한다. 그토록 경멸스러운 험담은 과학지는 순전히 기계적인 절차를 통해 명제들의 진리치를 검사하는 일 ― 一-미리 결정된 체계에 맞춰 우주를 정리하 는 창고지기나 디를· 바 없는 일 올 수행한다는 」 의구심을 표현하 고 있다. 갈릴레오나 다윈 같은 인물이 갑자기 새로운 체계를 제안하 는 아주 드문 창조의 순간을 제외한다면, 과학이란 실리적인 것이라 는 느낌이 낭만주의의 본질이다. 낭만주의는, 칸트가 그의 제 3 비판서[즉 『판단력 비판 』 ]에서 부여한 확정적 판단과 반성적 판단 간의 우선 순위를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 한다. 그래서 낭만주의는 확정적 판단一 __ 공통적이며 공적인 규준
을 제시함으로 써 개념의 사례 들을 점검하 는 활동 _ ― 一 을 단지 < 합 의 >를 산 출 하 는 것 에 불 과하다고 본다. 칸트는 그러한 활동의 결과 를 일컫는 < 지식 > 이란 말이 하나의 찬사라고 생각하였다. 낭만주의 는 객관성이란 규칙에 부합되는 것이라는 칸트의 논점을 수용하긴 하지만, 그 말의 강조점을 변경해 버린다 . 그래서 객관성이란 < 단 지 > 규칙에 부합하는 것, 대중에 영합하는 것, 단지 합의대로 수행하 는 것이 되게 해버린댜 반면에 낭만주의는 반성적 판단을 정말로 중 요한 것이라고 본댜 여기서 반성적 판단이란 규칙 없이 작동하는 활 동으로서, 특수한 사례들을 그것 아래에 묶어줄 개념들을 추구하는· (더 확장시켜 보자면 예전의 어떠한 규칙에도 맞질 않아서 <위반하기 > 에 해당될 새로운 개념들을 구성해 내는) 활동을 말한다 . 칸트는 미학 적 판단은 규칙에 따른 것이 될 수 없으므로 비인지적인 것이라고 말해서 그것에 2 등급의 지위, 과학의 문화가 문예의 문화에 항상 부 여해 왔던 그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과학이란 <단지> 인지 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때, 낭만주의는 그러한 관점을 뒤엎고자 하는 것이다. 요컨대 포스트-칸트적인 형이상학적 관념론은 낭만주의의 특별한 철학 형태였는데 비해 텍스투얼리즘은 [낭만주의의] 특별히 탈(脫) 철학적인 형태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다음 소절에서 나는 철학과 관 념론이 부침( 浮 沈)을 같이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어서 소절 3 에서 나는 낭만주의의 탈철학적 형태인 텍스투얼리즘과 실용주의의 관계 를 논의해서, 모순된 말투로 말하자면 실용주의는 곧 탈철학의 철학 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끝으로 소절 4 에서 나는 텍스투얼리즘과 실용 주의에 공히 적용되는 몇 가지 비판점들에 대해 논의하기로 하겠다.
2 만델바움은 그의 저서 『 역사와 인간과 이성 H i s t o ry, l\llan and Reason .1 에서 계몽주의 이후의 시기에 < 상당히 새로운 형태의 사고 와 평가 기준이 태동하였다 > 고 말하며 , 대략 100 년 ―—一 정확한 건 아니지만 대충 볼 때 19 세기와 일치되는 에 걸친 이 시기 를 통 해서 줄곧 < 비교적 높은 수준의 지속성을 각각 보유한 것으로는, 오 직 형이상학적 관념론과 실증주의 두 가지 철 학 사조의 흐름만이 존 재하였다.…… > 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형이상학적 관념론을 다음과 같은 견해라고 정의한다 자연적인 인간 경험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실재의 궁극적 본성을 이 해하기 위한 암시를 찾아낼 수 있는데, 그 암시는 인간을 정신적인 존재 로 준별해 주는 특징들을 통해 드러난다. ” 만델바움이 강조하듯이 이 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실재 의 궁극적 본성 > 과 같은 것이 < 존재할 >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한다. 또한, 설령 <자연적인 인간 경험의 테두리 안에 > 남아 있으면 서 정보의 원천을 초자연적인 것에서 구하려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도 과학이 그 주제에 대한 최종적인 말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러한 두 믿음들 중 어느 하나를· 왜 견지하는 것일까? 왜 과학과는 별도로 <형 이상학 > 이라고 불리는 것이 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만일 당신이 누군가에게 다짜고짜로 < 실재의 궁극적 본성은 무엇 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면 그는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알 수 없을 1) Mauri ce Mandelbaum, Hi st o r y , Man, and Reason(B a ltim o re: The Joh ns Hop kins Un ive rsit y Press, 1CJ 71 ), p. 6.
것이댜 가능한 대답이 어떤 것일지에 대해 얼마만큼이라도 어림잡을 센스가 필요하다. 계몽주의는 그 물음에 대해 설명을 부여하고 센스 를 줄 간단한 대비( 對 比) 를 갖고 있었는데, 그 대비란 아퀴나스 S t. Thomas A q떠 nas 와 단테에 의해 제시된 세계상과, 뉴턴 Issac New- t on 과 라보아지에 !I 에 의해 제시된 세계상 간의 대바였다. 이 두 그림 중 하나는 미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데 비해 다른 것은 이성에 의 해 안출된 것이라고 일컬어졌다. 칸트 이전의 사람들 중 누구도 제 3 의 대안을 제시해 줄 <철 학>이 라 불리는 학문 분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였다 . 칸트 이전의 이른바 <근대 철학자들>은 과학과 분명히 구분될 만한 어떤 것을 행했던 것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로크J ohn Locke 나 흄 Dav i d Hume 식의 심리학자였다. 크들은, 뉴턴이 외계의 공간에 대해 그렇게 했듯 이 내적 공간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일 종의 기계론적 설명을 부여코자 하는 희망에서, 칸트가 <인간 이해 의 생리학>이라 불렀던 것을 제공한 심리학자였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적인 세계상을 확장시키는 문제였지 그것을 비판하거나 근거짓 거나 대체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다론 이들은 라이프니츠식으로, 데 카르트적인 과학 속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어휘를 끌어들이되, 쌍방 모두에 통용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많이 숨겨 들여움으로 해서, 종 교적 전통을 과학적으로 호교( 護敎 )하려 애쓰는 사람들이었다. 하지 만, 이것도 역시 과학을 비판하거나 근거짓거나 대체하려는 문제가 아니요, 궁지에 처한 신, 자유, 영혼 불멸 등을 구해내기 위한 희망에 서 과학으로 땜질을 하는 문제였다. 로크의 과학 개념과 라이프니츠 의 과학 개념은 각각 스키너 3) 와 르콩트 드뉘이 LeCom t e de No liy의 과학 개념과 비슷한 것이었다. 어느 쪽도 자연과학의 주제나 방법과 판이하게 다른 어떤 자율적인 학문 분야가 실재의 궁극적 본성에 2) Anto i ne L. Lavois ie r , 1743-1794: 프랑스의 화학자 . 산소를 발견함.(역주) 3) B. F. Ski nn er, 1904-: 미국의 행동주의 심리학자 . (역주)
관한 제 3 의 견해에 입각한 진리를 증명해 보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 았댜 그런 생각을 갖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제 3 의 대안적 견해가 무엇 일까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어야 한다. 관념론 즉 실재의 궁극적 본 성은 < 인간을 정신적인 존재로 준별해 주는 특징들을 통해 드러난 다 >는 견해는 [그와 같은 제 3 의 대안적 견해로서] 가능성의 < 하나 > 가 아니라 , 지금껏 제시되었던 어쩌면 거의 < 유일한 > 가능성일 것 이다 그러나 관념론은 버클리와 칸트의 손에 의해, 아낙사고라스”에 서 시작해서 플라톤 및 다양한 형태의 플라톤주의를 거쳐온 전통과 는 매우 다른 어떤 것으로 변질되었댜 물질적 세계는 실재하지 않 는다는 관념론적 전통의 다양한 제안들 중 어느 것도 과학적 논증의 결과로서, 즉 현저한 과학적 난점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되지는 않 았댜
4) Anaxago ras, 기원전 500?-4 28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기하학자. 만물의 원질 은 누우스 (nous, 精神)라고 하였다.(역주)
반면에 버클리에게서 관념론이란 바로 그와 같은 것, 바꿔 말해서 정신은 오직 정신의 관념들만 인지한디는· 새롭고도 < 과학적인 > 독 트린에 의해 창안된 난점을 산뜻하게 대처해 가는 방식이었다. 핏처 George Pit cher 가 말하고 있듯이 < 멋지기도 하며 또 터무니없는 > 버클리식의 철학은 <감각과 지각에 대한 ……냉정하고도 해박한 설 명 > 5) 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버클리가 대면했던 문제는 흄이 말했 듯이 <정신의 지각이나 인상이나 관념들 말고는 어떤 것도 실제로 우리 마음에 현시될 수 없으며, 외부의 대상들은 지각에 의해 마주치 게 될 경우에만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다는 점이 철학자들에 의해 보 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 61 는 사실에서 야기된 문제였다 . 문제의 <철학자들>이란 로크와 같은 사람들로서, 그들은 우리가 심리학, 특
5) George Pit che r, Berkeley( L ondon: Routl ed g e , Keg an Paul, 1977), p. 4. 6) Davi d Hwne, Treati se of Human Natu r e, I, ii, 2 .
히 인지심리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수행한 사람들이었다. 버클리는 관념들은 그 대상 들 을 닮았다는 퍼즐에 관해 너무나 < 잽싸지만 더러 운> [간이(簡 易 )의] 해결책, 즉 < 관념들 말고는 ‘아무것’도 관념과 같을 수 없다 > 는 해결책을 제안함으로써 심리학자의 대열에서 빠져 나왔댜 이것은 마치 모든 물질은 살아 있다는 범심론자( i凡 心論者, p an- p s y c hi s t)의 제안이 오늘날의 진화론 생물학자들에게 일격을 가 하듯이 버클리의 당대인들에게 일격을 가하였다. 문제는 그것이 멍청 한 아이디어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전혀 < 도움되지> 않을 만큼 너 무나도 추상적이며 공허한 것이라는 데에 있다. 하지만, 설령 버클리 자신이 제시한 형태의 관념론은 단지 하나의 홍밋거리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버클리는 왜 관념론이 진지하게 간 주되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는 데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버클 리의 관념론은 피안의 세계를 동경하는 플라톤식의 관념론이 아니라 과학적인 물음, 즉 관념이 그 대상들과 닮았는가에 관한 로크의 물음 에 대한 냉정한 대답이다. 흄온 로크의 물음을 우리가 과연 <대상> 이라는 것을 운위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일반화시켜 나갔으 며, 이것은 칸트로 하여금 심리-생리학적 메커니즘에 관한 과학적인 물음을 과학 자체의 정당성에 관한 물음으로 바꿔 물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칸트는 다음의 세 가지 논점에 의해 그렇게 하였다. (a) 과학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선험적 관념의 어떤 세계에 대응한다고 말함으로써만 과학적 진리의 본성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b) <관념>의 사용은 <앎>에, <의지>의 사용은 <행위>에 대비 시킴으로써 각각의 것을 과학과 도덕에 대비시켜야만 우리는 만듦과 발견, 선험적 관념성과 선험적 실재 사이의 대비를 설명할 수 있다. (c) 과학과 도덕의 각 영역을 할당해 주기 위해 그 둘보다 더 위에 올라갈 수 있는 학문 분야인 선험철학은 실재의 궁극적 본성에 관해
말해 주는 학문 분야인 과학을 대체하여 그 자리 를 차지한다. 따라서 칸트는 미해결의 과학적 문제 , 즉 지식의 본성에 관한 문제 를 이어받아서는 그것을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쟁점으로 변질시 킴으로써 과학과 종교, 이성과 미신 사이의 대립이라는 계몽주의적 관념에 대해 트릭을 부렀던 것이댜 이 변질은 <관념들 말고는 아무 것도 관념과 같을 수 없다>는 버클리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서 그것을 <어떤 관념도 관념으로 이루어진 세계 이외의 것에 대해 참일 수 없다>고 고쳐 읽음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 그러나 관념으 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이 후자의 발상은 그 관념들이 누구의 관념인 가에 대한 뒷받침을 위한 후속적인 설명을 필요로 한다. 버클리의 신 은 칸트에게는 가용할 수 없었가에 칸트는 그 일을 담당할 선험적 자아란 것을 창안해야만 하였다. 칸트의 후예들이 곧바로 지적하였듯 이, 선험적 자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그것 을 생각할 수는 있으나 알 수는 없는 도덕적 행위자, 죽 자율적인 초 월적 자아 nournenal sel f와 동일시하는 것뿐이었다. 이 지점에서 관념론은 단순히 지적인 호기심이기를 그만두게 된 댜 왜냐하면 이제 그것은 감각과 외부 대상들 간의 관계에 대한 문 제를 해결코자 하였던 버클리의 임시 변통적 술책으로 된 해결책<만 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예술과 종교와 도덕이 갈릴레오적인 세계 상에 어떻게 부합되는가의 문제에 대한 한 가지 해결책을 제시해 주 기 때문이다. 이렇듯 약간은 겸양 섞인 정신적 난점에 대한 해결책 을, 완벽하게 존중되어야 할 과학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의 보조 정리 라고 우리가 일단 간주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두 해결책들을 제시 하였던 학문 분야가 <과학을 대체한다>고 간주하며 그리고 그것이 계몽주의에 대한 루소J.J. Rousseau 의 불신을 존중하도록 해주는 것 이라고 간주할 수가 있다. 따라서 철학은 과학이 되었으며 (왜냐하면 과학이 풀지 못했던 문제를 그것이 해결해 주지 않았던가?), 동시에 과
학이 앗아가버렸던 것처럼 보였던 도덕과 종교를 다시 얻게 해주는 한 방식이 되었다 도덕과 종교는 이제 이성 자체의 한계 내에 둘러 싸이게 되었댜 왜냐하면 철학에 의해 이성은 과학보다 더 넓은 것이 라고 밝혀졌으며, 따라서 철학은 스스로 하나의 <초(超)>-과학임을 보였기 때문이댜 지금까지 나는 선험적 관념론은 실재의 궁극적 본성에 대한 제 3 의 결정적인 견해를 제공해 줌으로써, 종교와 과학 양자를 초월할 수 있 는 이른바 <철학>이라 불리는 학문 분야에 대한 발상을 의미롭게 하는 일이 필수적이었다는 논변을 제기하였다. 내 설명에 따르자면, 칸트적인 체계는 과학적 문제에 대한 해결을 통해 과학의 특권적 지 위를 차용한 데서 시작하였고, 그러고 나서는 과학을 2 급의 문화적 활동으로 강등시키는 데로 나아갔다. 그 체계는 종교와 과학 양자에 서 최선의 것을 어떻게 얻어내는지를 보여주는 한편, 그 둘을 내려다 봄으로 해서 철학을 1 급의 것으로 승진시켰다. 관념론은 버클리와 칸 트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 죽 감각과 대상 간의 관계에 대한 로크의 심리학적 문제 때문에, 하나의 과학적인 논제, 바꿔 말해서 그걸 옹호하기 위해 누군가가 실제로 그렇게 논변할 수 있는 하나의 논제처럼 보였다. 철학은 칸트와 헤겔 G.W.F. He g el 이 공통적으로 지닌 것, 즉 예술과 도덕과 종교에 대한 과학의 관계라는 문제에 관 한 해결책 덕택에 하나의 초-과학처럼 보였다. 선험적 관념론의 한 측면은 뉴턴, 로크, 관념의 길 그리고 지각의 문제 등을 향하고 있댜 그것의 다른 한 측면은 실러 ,7) 헤겔 그리고 낭만주의를 향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성의 양립은 왜 19 세기의 초엽 에 선험적 관념론이 증명할 수 있는 진리처럼 보일 수 있었던가를 설명하게 해준다. 또, 그것은 선험적 관념론이 한 세기 전에 뉴턴적 인 과학이 그렇게 보였듯이, 극적이고도 참신하며 영원한 것을 문화 7) J. C. F. Schi lle r, 1759-1805: 독일의 시인, 극작가.(역주)
에 덧붙여 주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던가를 설명하게 해준다. 이 두 가지 환상은 오로지 칸트의 한 측면 이 지닌 특권적 지위가 다 른 측 면에 차용되었기 때문에 이뤄 질 수 있었다. 칸트의 제 1 바판서[즉 『 순 수이성바판 』 ]가 뉴턴의 『 프린키피아 Ph i losop hi ae natu r alis Princ ipia ma th ema ti ca 』 그리고 로크의 『 인간오성론 Essay s on Human Un- ders ta nd i n g 』 과 공유하고 있는 논증적인 성격은, 그의 제 2 비판서[즉 『실 천이성비판 』 ] 및 제 3 비판서[『판단력 비판니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피히테]. G. F i ch t e 에게도 펼쳐지는 과학성 W i ssensc haft li chlce it이라 는오로라를 창출하였다 하지만, 관념론의 발전에서 그 다음 단계는 관념론과 철학 양자에 겐 종말의 시작이었다. 헤겔은 철학이 단지 반성적이기보다는 사변적 이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선험적 자아의 이름을 <정신>으로 바꾸었 고 갈릴레오적인 과학의 어휘를 정신이 스스로를 서술하기 위해 선 택한 수십 가지의 다른 어휘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라고 취급하였 다. 만일 칸트가 헤겔의 『정신현상학 』 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오래 살 았더라면 그는 철학은 불과 25 년 동안만 안전한 학문의 길에 머물 수 있었디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헤겔은 문제들이 진술되고 논 변이 가능할 수 있는 중립적인 어휘를 기꺼이 얻고자 하였으며, 그래 서 <과학>이란 이름을 과학의 뚜렷한 특징이 없이 지속해 보유하였 댜 칸트가 발명해 낸 덮개인 <철학>이라 불리는 새로운 초 - 과학의 이름 아래에, 헤겔은 논증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음에도 불구 하고 강박 관념 때문에 『지식의 체계』나 『논리학』이나 『철 학 백과사 전』 등의 표제를 붙인 문예 장르를 고안해 냈던 것이다. 마르크스 Karl Marx 와 키 에르케고르 Soren Ki erke g aard 의 시 대에 이르면, 누구든지 다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죽 관념론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증명 가능한 준( 準 )-과학적인 논제가 아니라고 말하였 다. 19 세기가 끝날 무렵에 (그린 T. H. Green 과 로이스J os i ah Ro y ce 의 시대에) 이르면, 관념론은 피히테적인 형태, 즉 감각과 판단 간의 관
계에 관한 무미건 조 한 칸 트적 인 논 변 들 이 강한 도 덕적 진지성과 뒤 섞여 이 루 어 진 집 합 물로 되 돌 아가 정돈되기에 이 르 렀다. 그러나 피히 테가 확신했 던 것 은 증 명 할 수 있 는 진리와 인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의 개막 등 두 가지 모두 를 망라하였는 데 비하여 , 그린과 로이 스 가 적적한 마음으로 알고 있었던 것 은 다만 일단의 철 학자들의 의 견 이 고 작 이었다. 19 세기의 끝 무렵에 이르면 , <철 학 > 이란 단어는 오 늘날 남아 있는 그 모습처럼 되었다. 즉 < 고전 > 이나 < 심리학 > 과 같 은 낱말과 마찬가지로 , 혈기 찬 희망에 대한 기억이 간직되어 있고 과거의 영광을 회복키 위한 불만스러운 동경이 살아남아 있는 대학 의 한 학과에 대한 이름에 불과한 것으로서 말이다. 우리들 철학 교 수 들 이 칸트나 피히테에 대해 처한 입장은, 마치 고전학의 동료 교수 들 이 스 칼리제 8) 와 에라스무스 91 에 대해 , 혹은 심리학 교수들이 베인과 스 펜서 1 01 에 대해 처한 입장과 마찬가지이댜
8) Julius Caesar Scalig e r, 1484-15. 58: 이탈리아 태생인 고전학자.(역주) 9) Desid e ri us Erasmus, 1466?-1536: 네 덜 란드의 인문학자, 신학자, 문예 부흥 운동의 선구자. (역주) 10) Herbert Spe n cer, 1 820- 19 03: 영국의 철 학자, 사회학자.(역주)
철 학이 문화 전반을 위한 지식 체계가 되어야 한다는 허풍을 지닌 하나의 자율적인 학문 분야인 까닭은 우리가 그 지율성이나 허풍을 정당화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독일 관념론자들이 그러한 학문 분 야가 인류의 희망이라고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관념론 은 더 이상 < 중요한 인물들의 > 의견이 아니고, 또 관념론 대 실재론 의 대립은 단지 역사책 속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에 불과하게 되었 으며 , 철 학자들은 실재나 그 밖의 어떤 것에 관한 궁극적 본성을 자 기들이 말하고 있다는 확신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태생상 의 권리가 문화의 나머지 것들을 주재하는 것이라고 막연히 느끼긴 하지만, 그것에 대한 주장을 어떻게 정당화할 건지 도무지 알지 못한 다. 나의 역사적 설명이 맞는 거라면, 철학자들은 실재의 궁극적 본
성에 대해 과학의 견해와 경쟁할 수 있는 어떤 견해를 제시하지 않 는 한, 옛 지위 를 되찾지 못할 것이다. 관념론이야말로 이러한 점에 대처해서 철학자들이 흥미롭게 제안하였던 유일한 것이므로, 그들 이 관념론을 부활시킬 수 있는 경우에만 문화의 여타 분야들은 철학 자 들의 허풍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이 가능성들 중 어떤 사태도 실제로 일어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3 과학적이고 논변 가능한 하나의 논제로서의 관념론이 사라지고 난 후 거기에서 살아남은 것은 다만 낭만주의뿐이었다. 소절 1 에서 나는· <낭만주의>라는 용어로써 어떤 명제가 참인지를 발견해 내는 것이 필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무슨 어휘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논제를 지칭하였다. 이것은 애매하고도 싱거운 말처럼 들릴지 모르나, 나는 이것이 19 세기에 영향을 끼친 헤겔의 주 된 유산이었던, 과학으로부터의 해방감을 표현하는 최선의 방식이라 고 생각한다. 헤겔은 과학-으로서의-철학이리는· 칸트의 이념을 아수 라장으로 남겨두었지만, 내가 말했듯이 그는 하나의 새로운 문예 장 르를 창안하였다. 그 장르란 어휘 선택의 상대적 중요성을 드러내준 것으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어휘들이 본디 제각기 불안정할 뿐만 아니라 너무나 다양해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러한 장르였 다. 헤겔은 각각의 새로운 어휘, 새로운 장르, 새로운 스타일, 새로운 변증론적 종합이 매번 성취될 때마다 부여되는 깊어지는 자기 확신 을 아주 분명히 해주었다. 죽 마침내 사물들이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이제야 우리가 최초로 파악하게 되었다는 그 느낌을 잊지 못할 만큼 아주 분명하게 해주었다. 그는 또 그러한 확신이 왜 단지 한순간만 지속되는지 그 이유를 잊지 못할 만큼 아주 분명하게 해주었다. 그는
각 세대 를 자기 희생과 변 형 으로 내 모 는 충동을 제공하 는 정념(t 沿念, p a ss i on) 이 어떻게 각 각의 세대 를 휩쓸며 , 또 이성의 간지(好 智 )로서 기 능 하는가 를 밝혀주었다. 그는 오 늘 날의 문예 문화가 지닌 특칭인 아이러니와 시대 를 뒷서가는 목 소 리로 글을 썼다 . 사고가 어떻게 작 용하는지에 대한 헤겔의 낭만주의적 서술은 헤겔 이후의 정치학 과 문학에는 적절하나 과학에는 아주 부적절하다. 이 차이점에 대해 혹자는 < 그만큼은 헤겔의 잘못이다 > 라고 말하거나, 혹 은 < 그만큼은 과학의 잘못이다 > 라고 말해 대응할 수도 있다. 이 두 반응간의 선택은 스노가 말한 < 두 문화 > [ < 과학의 문화 > 와 <문 예의 문화 > ] 간의 선택이다(그리고 그 두 문화에 대해 이를테면 공적 인 대리인 관계 를 맺고 있는 < 분석철학 > 과 < 대륙철학 > 간의 선택이기 도 하다). 헤겔 이래로 줄곧 세계나 자기 자신들을 변형시키길 소망 하 였 으며 과학이 제공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무엇을 원했던 지성인들 온, 과학에 대해선 그저 < 망각해 버릴 >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느꼈 다 . 헤겔은 자연에 대한 연구를 상대적으로 낮은 그것의 제자리에 가 져다 놓았다 . 또한 , 헤겔은 논증이 없이도 일종의 합리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 정신적 자유가 최고조에 달하게 되면, 쿤T. S. Kuhn 이 < 분과 모형( 分 科 母型 ) > 이라고 부르는 것의 테두리 바깥에서 작동하 는 일종의 합리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헤겔 자신의 의도와는 오히려 반대로 이성은 간교하게도 헤겔을 고용하여 우리의 근대적인 문예 문화를 위한 헌장을 쓰게 하였던 것 이다 . 그 문화란 과학과 철학과 종교에서 가치 있게 여겨진 것은 무 엇이건 간에 뒤엎었으며 , 또 다시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문화, 더 높 은 지점에 서서 그 세 가지 모두를 내려다보는 문화를 가리킨다. 그 것은 공공 복리의 수호자, 즉 콜리지 1“ 가 말한 <나라의 지식인>이 될 것을 제창한다. 이 문화는 카알라일 1 2) 에서 벌린 Is i ah Ber lin으로 , 11) Samuel T. Colerid ge , 1772-18. 34: 영국의 시인, 비평가.(역주) 12) Thomas Carlyl e , 1795-1881: 스코틀랜드의 평론가, 역사가 , 철학자 . (역주)
아놀드에서 트릴링 L i onel T1 i ll i n g으로 , 하이네 l ” 에서 사 르 트르로, 보 들레르에서 나보코프로, 도스토예프스키에서 레싱 Do ri s Less i n g으로, 에머슨 Ral ph Waldo Emerson 에서 블 룸 Harold Bloom 으로 펼쳐져 있 댜 그것의 현란한 복잡성은 < 시 > 와 < 소설 > 과 < 문학 바평 > 과 같 은 낱말들을 단순히 합한다고 해도 전달될 수가 없다. 이 문화는 계 몽주의가 예견할 수 없었던 현상이댜 인간의 가능한 활동 영역을 3 분하여 과학적 인식과, 도덕적 행위 그리고 인식 능력을 자유로이 유 희함으로써 이루어진 미적 즐거움 등으로 나눈 칸트는 이 문화에서 는 설 자리가 없다. 하지만, 헤겔은 이 문화가 태동되기도 전에 마치 그것에 관한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것마냥 보인다.
13) He inrich Hein e , 1797-1856: 독일의 서정시인, 비평가.(역주)
그렇다면 형이상학적 관념론의 주요한 유산이란, 문예의 문화가 과학과 따로 존립할 수 있으며, 과학에 비해 정신적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고, 인간 존재에 가장 중요한 것을 구현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라고 나는 말하고자 한다. 이해의 어휘, 즉 과학의 어 휘를 사용하는 것은 인류가 할 수 있는 훌륭한 일 가운데 다만 < 하 나에> 불과하다는 칸트의 제안은, 세속적이면서도 비과학적인 문화 를 존중하게 하기 위한 처음이자 절대적으로 중요한 단계였다. 그러 한 문화가 무얼 제공할 수 있는지를 헤겔이 무심코 구현해 보인 것, 죽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따라 원칙들이나 어휘들이 갖는 상대성에 대한 역사적 센스, 새로운 용어로 말하게 되면 모든 것들이 변화될 수 있다는 낭만적 센스는, 두번째이긴 하나 적잖이 필수적인 단계였 다 . 헤겔이 철학에 끌어들였던 낭만주의는 장차 철학을 계승할 주제 분야는 문예일 거라는 희망, 즉 철학자들이 추구해 왔던 바인 정신의 가장 깊은 비밀이 새로이 출현 중인 문예 장르에 의해 마땅히 발견 될 거라는 희망을 다시 강화시켜 주었다. 하지만, 문예의 문화에 자율성과 우월성을 수립하는· 과정에는 제 3
의 단계가 있었다. 이 단계는 니체 F ri ed ri ch W. N i e t zsche 와 제임스 Wi llia m J ames 에 의해 수행되었댜 그들의 기여는 낭만주의를 실용 주의로 대체시킨 데에 있다. 어휘의 발견이 숨겨진 비밀을 밝혀줄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대신에, 그들은 새로운 말하기 방식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게 도오H 중 거라고 말했다. 궁극적 실재에 대한 발견자 로서의 철학을 장차에는 문예가 계승할 거라고 암시하는 대신에, 그 들은 실재에의 대응이 곧 진리라는 관념을 아예 포기해 버렸다. 니체 와 제임스는 비록 다른 색조의 목소리로 말하긴 하였지만, 철학 그 자체는 칸트와 피히테가 과학에 부여했던 지위, 즉 유용하거나 위안 을 주는 그림을 창안하는 그 지위를 지녔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니체 와 제임스는 형이상학적 관념론과 더 일반적으로는 <실재의 궁극적 본성>에 관해 무엇인가를 얘기하려는 권유를, 심리학적인 용어로 해 석해 버렸다 물론 마르크스가 이미 이런 일을 행하였으나, 마르크스와는- 달리 니체와 제임스는 관념론을 내려다볼 어떤 새로운 철학적 입장을 형 성하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들은 문화를 탐구할 아르키메데스 적인 준거점의 추구를 의식적으로 포기하였다. 그들은 초-과학으로 서의 철학이라는 관념을 포기하였다. 그들은 칸트와 헤겔이 제시한 (전통적 실재론자의 발견하기란 메타포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만들기라 는 메타포를 칸트와 헤겔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들>에 대해서도 적용시켰다. 니체가 말했듯이, 그들은 자기네들이 진리를 확보하고 있다고 믿지 않은 최초의 세대였다 . 그래서 그들은 <이 모든 끔찍한 얘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때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거요?>라는 물음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갖지 않은 것을 오히려 만족해 하였 다. 그들은 <진리>, <과학>, <지식>, <실재> 둥과 같은 낱말들에 의해 이름된 사물들의 본성에 관한 어떤 견해를 제시하기보다는 오 히려 그 낱말들의 후광을 지워버리는 일에 만족하였다. 이렇듯 철학 내에서 낭만주의를 실용주의로 대체시킨 것은 문예
문화의 자기 관념 내에서 발생된 한 가지 변화와 비슷하다 . 금세기의 문예 문화에서 위대한 인물들, 또는 위대한 < 모더니스트들 > 은 니체 가 <형이상학적 위안 > 이라고 불렀던 것에 대한 희망을 우리가 갖지 못할 경우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 것인가 를 보여주고자 노력하였 댜 내가 < 텍스투얼리즘 > 이라고 부르고 있는 운동이 실용주의와 이 러한 형태의 문예를 고집하고 있는 점은, 문학을 궁극적 진리의 발견 자로 만들고자 하였던 19 세기의 시도가 형이상학적 관념론과 낭만주 의적 시를 고집하였던 점과 홉사하다 . 금세기에서 텍스투얼리즘이 차 지한 역할을 가장 잘 이해하는 길은, 그것이 철저한 실용주의를 통해 생각하려는 시도라고, 죽 신학과 과학에 공통적으로 담겨 있는 < 진 리의 발견>이라는 관념에 대한 철저한 포기를 통해 생각하려는 시도 라고 보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브람스는 한 논문에서 그가 <새로운 읽기 > 라고 부르며 내가 <텍스투얼리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전통적인 <휴머니스트 > 의 개념과 상반된 것이라고 양지를- 대비시키고 있는데, 후자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저자는 인간 존재와 인간적 관심의 문제에 관한 행위에 대해, 자기가 기호화하고자 시도중인 것을 그가 쓴 것을 이해할 능력을 갖춘 독자들 앞 에 스스로 말함으로써 말로 현실화하고 또 기록한다. 독자는 그가 저자와 공유하는 언어적, 문학적 전문성의 놀이에 빠져듦으로 해서, 저자가 고안 하고 기호화하였던 것을 찾아내기 위해 스스로 노력한다. 저자가 기호화 하고자 시도하였던 것에 접근함으로써, 독자는 그 작품의 언어가 의미하 는 바를 이해한다. 1 사 14) M. H. Abrams, How to Do Th ings with Texts , Part isa n Revie w , 46 (19 79).
하지만 , 텍스투얼리스 트 의 비평 개념은 저자가 기호화하고자 시도 한 것을 싹 쓸어내버리고 두 가지 아주 상이한 방침 중 어 느 하나를 택한다. 첫번째 방 침은, 에 드워드 사이드의 말을 인용하자면 , 텍스트 를 다음과 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텍 스트를] 그것 자체 내에서 홀로 작동하며, 특권적 이거나 설령 특권 적이지는 않더라도, 검토 안 된 채로 선천적인 어떤 내적 정합성의 원리 를 포함하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 이다 . 다른 한편으로 텍스트는 (추정된) 이상 적 인 독자에게 그것이 끼칠 특정한 매우 명확한 효과들을 내는 데에 서, 텍스트 자체로서 충분한 원인이라고 간주된다 .1 31
15) Edward Sai d, Roads Taken and Not Taken in Conte m p orary Cri ticis m , Conte m p o rary Lit era tu re , 17(Summer, 1976), p. 3 37. 이 논문에서 사이드는 한편으로는 블룸과 푸코 (그리고 배이트와 루카스 둥),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인용한 구절에서 서술된 접근 방식을 구현한 비평가들 양자 사이에 한 가지 구 분을 해내고 있다 . 그 구분은 강한 텍스투얼리스트와 약한 텍스투얼리스트에 대 한 나의 구분과 대체로비슷하지만, 사이드는 그 차이점을 골수-실용주의자와 반쪽짜리-실용주의자 를 기준으로 제시한 게 아니라 <형식성 대( 對 ) 실질성>을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
반면에 그 방침을 대신해서 텍스투얼리스트는, 텍스트의 창안자와 전혀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기계라는 텍스트의 관념을 싹 쓸어내버리 고, 블룸이 <강 한 오독 s tr on g mi srea di n g > 이라고 불렀던 것을 [새로 운 방침으로] 제시할 수도 있다. 비평가는 저자의 의도나 텍스트의 의도를 묻지 않으며, 텍스트를 순전히 비평가 자신의 목적에 봉사할 형태의 것으로 두들겨 만든다. 비평가는 무엇이건 그 목적에 관련된 것을 텍스트가 지시하게 한다 . 비평가는 텍스트에서 사용된 어휘나 저자에 의한 어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하나의 어휘 __- 푸코의 용어로는 하나의 < 이야기틀gri d>- 를 텍스트에 끼워넣고 나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봄으로 해서 그렇게 만들어간다 . 여기에서의
모델은 정교한 장치들을 모으는 호기심 많은 수집가가 그 장치들을 분해해서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살필 때, 그것 들 이 지녔을지도 모르는 외부적 목적을 주의 깊 게 무시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정신 분석학자가 하나의 꿈이나 농담 을 살인광의 징후라고 들뜬 마음으로 해석하는 방식이다 텍스투얼리즘의 이해를 위해서는 이러한 두 가지 방침 모델간의 유사점과 차이점 양자를· 함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요한 유사 점은 두 가지 방침 모두 실재에의 대응이 진리라는 생각에 대한 실 용주의자다운 거부에서 출발한디는· 점이다 . 텍스트의 비밀을 찾아냈 다고, 그 암호를 해독해 냈다고 주장하는 유형의 텍스투얼리스트는, 그 이전에 텍스트가 생각했던 바나 저자가 말했던 바를 전혀 흐트러 뜨리지 않았음을 자랑으로 여긴다 . 푸코와 블룸과 같은 강한 오독자 는 똑같은 것에서부터, 텍스트의 저자나 텍스트에서 의도되고 있는 독자들이 거기에서 발견해 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꺼낼 수 있디는 점을 자랑으로 여긴다. 양자는 공히 내가 아브람스를 인용하 였던 그 구절에서 설명된 실재론과 결별하고 있다. 그러나 첫번째 유 형의 비평은 단지 반쪽짜리 - 실용주의자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반 쪽짜리-실용주의자는 정말로 비밀스런 암호가 있으며 일단 그것이 발견되면 우리가 텍스트를 제대로 파악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 는 비평이란 창안이 아니라 발견이라고 믿는다 . 반면에 강한 오독자 는 발견과 창안, 찾아내기와 만들기 간의 구분에 괘념하지 않는다 . 니체나 제임스 못지 않게 그는 이것이 유용한 구분이라고 생각지 않 는다. 그는 어떤 것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에서 자 신이 끌어낼 것을 얻기 위해 텍스트에 머물며 비평을 한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점을 더 분명히 해줄 수 있는 다른 방식으 로 이 대바점을 바꿔 진술해 보자. 아브람스가 말한 <휴머니스트> 비평가는 다양한 문예 작품들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를 서술해 낼 커 다랗고, 포괄적이며, 공통된 하나의 어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유형의 덱스투얼리 스트, 즉 약한 텍스투얼리스트는 각 작품은 다 른 작품들의 어휘와 통약 불가능할 저마다의 고유한 어휘, 그것만 의 비밀 암호 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 두번째 유형의 텍스투얼리 스트, 즉 강한 텍스투얼리스트는 그 자신의 고유한 어휘를 갖고 있으 며 다른 사람이 그것을 공유하고 있을지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 나 의 설명에 따르자면, 니체와 제임스의 진정한 상속자, 따라서 칸트와 헤겔의 진정한 상속자는 바로 강한 텍스투얼리스트이다. 약한 텍스투얼리스트, 죽 암호 해독자는 실재론의 희생물이요, < 현전의 형이상학 > 의 또 다른 희생물이다 . 한 텍스트의 테두리 내에 머물면서 그것을 분해하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밝힌다면, < 기표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 될 것이며 실재의 거울이라는 언어의 신화를 타파할 것이며 ……등의 일이 가능하리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과학을 흉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 댜 그는 비평의 < 방법론 > 을 원하며, 자기가 비밀의 암호를 판독해 냈다는 데에 대해 모두가 동의해 주길 바란다. 자신의 말투와 자신의 문제들에 대해 단지 300 여 명의 다른 미생물학자들만이 이해 가능한 어떤 미생물학자가 합의의 안락함을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약한 텍스투얼리스트는 그 합의가 비록 문예 계간지의 독자들에 의해서 이뤄진 것에 불과할지라도 합의의 안락함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강한 텍스투얼리스트는 그러한 안락함이 없이 살고자 노력한 다. 그는 니체와 제임스가 깨달았던 것, <방법론>이라는 아이디어는 < 특권적인 어떤 어휘 > , 또 대상의 본질에 이르게 하는 어휘 그리고 우리가 읽어 들어가는 속성들과는 대립되는 속성들을 스스로 지니고 있는 어휘를 전제로 한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니체와 제임스는 그러 한 어휘에 대한 관념은 하나의 신화라고, 바꿔 말해서 철학은 말할 것도 없고 과학에서조차도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게 해주는 어휘를 찾아다닌다고 말하였다. 내가 말했던 것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형이상학적 관념
론은 낭만주의의 출 현 과정에서 바 록 중요하긴 하였지만 일시적인 것이었댜 종교에 대한 세속적 대체 물 로서 과학을 철 학이 대신할 수 있다는 발상은, 문화를 주재하는 학문 분야로서 문예가 과학을 대신 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하긴 하지만 일시적인 것이었다. 낭만주의는 실용주의로 , 즉 새로운 어휘 들 의 의의는 암호 해독의 능 력에 있는 것 이 아니라 단지 그것들이 갖는 유용성에 있디는- 주장으로 지양(止 揚, a ufg ehoben) 되었댜 실용주의는, 경험에 대한 충실성이나 이미 존재 하는 의미의 발견이 아니라 그 자체의 자율성과 참신성을 긍지로 여 기는 유형의 문예, 즉 문학에서의 모더니즘에 대한 철 학에서의 카운 터파트이다. 강한 텍스투얼리즘은 모더니스트의 문학이 주는 교훈을 도출하여 그것으로부터 진정으로 모더니스트적인 비평을 창출한다. 이 요약은 나로 하여금 이 논문의 서두에서 내가 제시한 약간은 작위적인 비교, 즉 단지 관념만 존재한다는 주장과 단지 텍스트만 존 재한다는 주장 간의 바교로 되돌아가게 해준다. 형이상학적인 소리로 들리는 후지를 (그 발설자인 데리다와는 달리)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텍스투얼리스트는 약한 텍스투얼리스트들이다. 그들은 작품이 다루는 근본적인 문젯거리들을 자기들이 비로소 찾아냈기 때 문에, 문예 작품들을 분석할 참된 방법을 자기네들이 이제 발견해 냈 다고 생각하는 비평가들이다. 이런 유의 주장이 행해지는 까닭은, 철 저한 실용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책상과 텍스트 사이에 그리고 양 성자와 시 사이에 흥미로운 구분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그 비평가 들이 아직 간파하지 못한 데에서 바롯된다. 실용주의자들에게 이것들 은 모두 쓰임을 위한 영원한 가능성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재서술 과 재해석과 조작의 영원한 가능성에 불과하다. 그러나 약한 텍스투얼리스트는 딜타이 W il helm D ilth e y와 가다머 Hans-Georg Gadamer 등과 더불어, 과학자들이 행하는 것과 비평가 들이 행하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1 6) 과학자 들끼리는 종종 동의하는 데 비하여 비평가들은 통상 그렇지 않다는
16) 이 논점에 대해서는 A Rep ly to Drefu s and Tayl o r, The Revie w ofM e- taphys ic s , 330980), pp. 36-46 에서 테일러 Charles Ta y lor 의 딜타이적인 견해 들에 대한 나의 논평과, 이 책의 논문 11 을 볼 것.
사실은, 그 두 주제 분야 들 의 본성에 관해서, 혹은 양자의 방법론이 부딪히게 되는 인식론상의 특별한 난점들에 관해서, 무언가를 시사해 주고 있다고 약한 텍스투얼리스트는 생각한다. 강한 텍스투얼리스트 는, 엔지니어나 물리학자가 수수께끼 같은 물리적 대상에 대해 묻는 다음과 같은 똑같은 물음을, 단지 텍스트에 대해 제기할 따름이다: 내가 원하는 바를 이것이 행하게 하려면 나는 이것을 어떻게 서술해 야 할 것인가? 이따금씩 위대한 물리학자나 위대한 비평가가 와서,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새롭고도 놀라운 일을 행하게 하는 어떤 새로 운 어휘를 제공해 준댜 그러면 우리는 이제 우리가 물질이나 시나 다른 어떤 것의 참된 본성을 발견했노라고 경탄할지도 모른다. 그러 나 쿤의 낭만적인 과학철학과 블룸의 낭만적인 시철학(詩哲學)에 구 현된 헤겔의 망령은, 우리로 하여금 어휘들이란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라고 일러준다. 실용주의자는 새롭고도 유용한 어떤 어휘란, 불현듯 떠오론 사물에 대한 매개 없는 투시이거나, 있 는 그대로의 텍스트의 모습이 아니라, 단지 새롭고 유용한 것에 지나 지 않는다고 일깨워준댜 핵심을 찌르는 짧은 공식들이 늘 그러하듯이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데리다식의 주장도 그것이 암묵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옳고, 그것이 공공연히 주장하는 바에 대해서는 그르 다. 텍스트가 비(非)텍스트적인 것들을 지시하지 않는다는 말의 <유 일한> 힘은, 피지시체에 대한 어떠한 구체화도 결국 어떤 어휘 속에 있게 된다는 실용주의자의 진부한 얘기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서술을 물자체(物自體)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는 한 사물에 대한 두 가지 서술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얘기는 곧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는 칸트의 슬로건의 확장된 형태에 지
나지 않으며 , 그 슬로건은 또 다시 < 관념들 말고는 아무것도 관념과 같을 수 없다>는 버클리의 교묘한 논점을 세련되게 재진술한 것이었 댜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실재를 평범하고 가식 없이 맨눈으로 응 시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하는 오도적인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텍스투 얼리즘은 새롭게 오도적인 한 가지 이미지를 제의하고는 이 주장에 대해 아무것도 덧붙일 것이 없다. 그 이미지란 현재까지 사용된 모든 어휘들로 세계가 구성된다는 것을 말한다. 텍스투얼리스트의 실행이 덧붙이고자 하는 것은 다만 한 텍스트의 저자는, 그의 텍스트가 유용 하게 서술될 수 있는 어떤 어휘를 몰랐다는 몇 가지 당당한 사례들 뿐이댜 그러나 이 통찰, 즉 자기 서술을 행하는 어떤 사람 자신의 어휘라 할지라도, 그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필수적인 어휘가 아니라 는 통찰은 어떠한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의미론적 뒷받침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그 주장이 권장하는- 실행의 사례들을 쌓아 감으로 해서 확신을 갖게 해주는 그런 유의 주장이다. 블룸과 푸코와 같은 강한 텍스투얼리스트들은 그와 같은 사례들을 제공하는- 일로 바쁜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실재론적 물음들 때문에 고민하던 일을 일 단 멈추고 난 후에 우리가 얻게 될 사례들을 논외로 친다면, 낭만주 의와 실용주의에 텍스투얼리즘이 덧붙일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니는· 결론짓고자 한다. 문제의 실재론적 물음들이란, <그것은 텍스트가 실제로 ‘말하는’ 것인가?> 혹은 <그 시가 실제로 그것에 ‘관한 것이 라고’ 어떻게 논변할 수 있는가?> 혹은 <텍스트에 있는 것과 바평가 가 텍스트에 부과하는 것 간의 구분을 어떻게 해낼 것인가?> 따위의 것을 말한다. 세계란 곧 텍스트들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세계란 곧 운 동 중인 물질이라거나, 감각의 영원한 가능성이라거나, 우리에게 책 임지어진 감각 가능한 재료라는 등의 주장과 똑같은 유의 속편한 엉 뚱한 얘기에 불과하다. 강한 아이러니로 간주될 경우, 모든 것이 텍 스트라는 그 주장은 다음과 같은 얘기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읽혀질
수 있다: < 모든 것이 텍스트라는 그 주장은 데모크리토스는 원자 수 집가예 불과하다는 말에 비하여, 원자들은 데모크리토스의 텍스트다 라는 말이 갖는 것만큼의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두 슬로건 모두 한 어휘에 대해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려는 시도이며, 따라서 둘 다 똑같이 멍청한 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 별로 융통성 없는 의미로 간주될 경우 그 주장은 또 다른 형이상학적 논제에 불과하다. 슬프게 도, 언어는 비언어적인 어떠한 것도 지시하지 않으며, 따라서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 텍스트라는 것을 <철학이 ‘증명해 냈다'>고 우리 에게 올빼미같이 알려주는 그러한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있다. 이것은 물자체의 인식 불가능성을 칸트가 증명해 냈다는 주장과 마찬가지 식의 주장이댜 두 주장은 공히 한편으로는 모종의 실재에 대한 비담 론적이며 매개 없는 투시와,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실제로 말하고 생각하는 방식 사이의 가짜 대비에 근거하고 있다. 두 주장 공히 잘 못된 추론을 해서 <우리는 개념 없이 생각할 수 없으며, 낱말 없이 말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부터, <우리들의 사고나 말에 의해 이미 창안된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생각하거나 말할 수가 없다>는 주장 을 도출해 내고 있다. 이제 문예가 우리 문화를 주재하는 학문 분야로서, 종교와 과학과 철학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주장을 옹호하기 위한 <가장 취약한> 방 식은, 현대 비평의 실행에 대한 철학적 정초를 찾는 일일 것이다.17) 이것은 갈릴레오적인 과학을 옹호하되 그것이 성서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통해 옹호하려는 것과 같을 것이며, 선험적 관 17) 따라서 『 해체와 비평 Decons tr uc ti on and Cri ticism A (N ew York: The Sea-bur y Press, 1979, p. 6) 의 서문에서 하르트만 Geo ffr e y H artman이 문학 비평 과 철학이 상호 작용하는 것이 생산적일 거라고 말할 때 그는 패배한 적에게 단순한 예의를 차리는 것처럼 내게는 보인다. 그러나 어쩌면 그의 말은 철학책 을 많이 읽었던 사람들이 시와 소설들을 많이 읽었던 사람들과 합세하여 두 가 지 텍스트들을 서로 연관시키는 것이 유용할 거라는 아주 온당한 말로도 읽혀 질수있다.
념론을 심리학적 연구의 최신 결과라고 옹호하려는 것과 같게 될 것 이다. 그것은 마치 찬탈자의 주장들을 입증코자 쫓겨난 군주의 권위 를 인정하는 꼴이 될 것이다 문화의 다른 영역들을 주재하려고 찬탈 하는 한 학문 분야의 주장들은, 다른 학문 분야들을 제각기의 자리에 놓아둘 능력을 과시함으로 해서만 옹호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이 문예의 문화가 최근에 대단한 성공을 거두면서 행하고 있는 바이다. 그일은 과학이 종교를 대신하였을 때 행했던 것이었고, 또 관념론 철 학이 잠깐동안 과학을 대신하였을 때 행했던 것이었다. 과학온 종교 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내지> 않았으며, 철학은 과학이 단지 현 상적이러는 것을 <증명해 내지> 않았고, 모더니스트 문학이나 텍스 투얼리스트 비평도 <현전의 형이상학>이 철 지난 장르라는 것을 <증명해 낼> 수 없댜 그러나 각각의 것들은 논증 없이도 각기의 논 점을 차례로 피력해 왔다. 4 텍스투얼리즘은 헤겔의 낭만주의와 니체 및 제임스의 실용주의에 한 가지 메타포를 덤으로 추가한 것을 제의하곤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는다고 말함으로 해서, 나는 이를테면 그라프 Gerald Gr aff와 같은 텍스투얼리즘의 비평가들에게 동조하고 있는 셈이다. 그라프는 문예 비평의 현재 패션들은 이미 신바평에서 진술된 테마 문학이 <단지 사물들이 우리의 의식에 어떻게 떠오르는가가 아니라, 사물들 의 참모습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 기여 >M) 할 수 있다는 낡은 견해와, 그가 대립시키고 있는 <언어와 지식과 경험에 대한 모더니스트의 가 18) PrGeesrsa,l d1 9G79ra ),f fp, . L7i. t er atu re Ag a in s t Its e (f( C h ica g o: Un ive rsit y Of Ch ica g o
정들>! !JI_ 一―의 지속적 발전이라고 온당하게 말하고 있다. 또, 이 가 정들을 지지하기 위해 아주 드물게만 논변이 제시된다고 그가 말한 점도 온당하다. 그러나 그가 다움과 같이 말한 점은 그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언어가 실재와 대응될 수 없다는 논제에서, 모든 문예 작품들을 그들 자신의 인식론적 문제들에 대한 논평으로 읽어버리는 일로 구체화된 현재 의 수정주의자 해석 방식으로 옮겨가는 것은 불과 몇 발자국도 안 된다 .20) 그 길은 실제로 먼 길이며, 또한 뒷걸음질치는 길이다. 그라프가 말하는 경향성은 정말로 실재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철학을 흉내 내 는 일, 무엇보다도 < 인식론적인 것>이 됨으로 해서 문예가 철학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사고 경향을 말한다. 약한 텍스투얼리스트 들에게 인식론은 여전히 고전같이 보인다. 그들은 한 시인이 인식론 을 갖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일이라고 생각 한다. 그들은 심지어 시인의 지식론을 비판함으로 해서 자신들이 단 순한 비평가 이상의 어떤 일, 즉 사실상 철학자가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댜 그렇듯 정복한 무사들이 그 지역의 원로원 의원들에게서 빼앗 은 추레한 겉옷을 자신들이 걸침으로 해서, 백성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거라고 그릇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최근의 대다수 텍스투얼리스 트 비평이 지닌 괴상하리만치 진지한 허풍을 지적하였던 그라프와 그 외의 사람들은, 그러한 비평가들은 논변을 제기할 필요가 없이도 철학의 특권적 지위와 흡사한 것을 갖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는데, 그 말은옳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내가 그라프와 주로 견해를 달리하는 곳은 그의 다음과 같 은주장이다 2109)) 같같은은 책책,, pp.. 59..
효과적이가 위해 글쓰 기 는 삶에 대 한, 혹 은 적 어도 작 가가 다 루 고 있는 삶의 그 국면에 대한, 하나의 정 합적이 고 도 확 신 을 주 는 철 학에서 우러나 온다 . 문예는 설령 그 이데 올로 기가 모 든 이데 올로 기 를 의문시하 는 것 이 라고 할지라도, 조尸구간 하나의 이데 올로 기 를 꼭 가져야 한디는· 사 실 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모 든 < 소박한 > 실 재론 들을 부인하 는 행 위 자체도 하나의 객관적 관점을 전 제로 한다. i I I 이것은 효과적인 글쓰기에 관한 진술로서는 틀린 것으로 내게는 보인다. 이 구절은 보들레르와 나보코프는 효과적인 글쓰기를 못했든 지,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아이러니즘이 하나의 < 정합적이고도 확신 을 주는 삶의 철학>을 표현했든지, 그 둘 중 한 가지를 말하라고 강 요하는 것 같다. 또, 그것은 실재론의 진리성을 부인하는 데에 요구 되는 것에 관해서도 틀린 것으로 보인다. 누구든 실재나 지식이나 언 어의 참된 본성에 관한 < 객관적 > 이론을 제안하지 않고도 그 일을 행할 수 있다. 그것은 논적을 논파하기 위해 논적의 어휘나 방법이나 스타일을 채용해야 할 필요가 있는 그런 경우가 아니다. 홉스 Thomas Hobbes 는 단테의 세계상에 반대하는 신학적인 논변을 갖지 않았고, 칸트는 과학의 현상적 성격을 논변함에 있어서 아주 어설픈 과학적 논변만을 가졌고, 니체와 제임스는 실용주의를 변호하기 위한 어떠한 인식론적 논변도 갖지 않았댜 이러한 사상가들은 저마다 지적인 삶 의 새로운 형태를 우리에게 제시하였으며, 우리로 하여금 옛 것과 견 주어 그 장점들을 비교하도록 요구하였다. 인식론적 논변이 인식론을 새롭고도 더 잘하게 해줄 길을 제시해 준다는 식의 허풍을 좋게 평 가해 달라는 요구는 별로 의미가 없다 . 텍스투얼리즘에 대한 심각한 반론은 내 생각에는 인식론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다. 그러한 반론을 그라프가 제기한 데에 대해 21) 같은 책 , p. 11.
트릴링과 아브람 스 등 의 작가 들 도 아마도 동조할 것이다. 아브람스 는, 텍 스 트의 저자 를 소 거시켜서 인간적인 영향력을 비인간적인 간텍 스 트성으로 대체시키고자 하는 데리다와 푸코의 시도에 대한, 블룸의 반발에 공감하고 있댜 그러나 아브람스는 블룸이 예이츠 W illi am B. Yea t s 나 스티븐스 Wallace S t evens 에 관한 블룸 자신의 저서들을 < 강한 오독 > 이라고 스스로 자기 서술한 것을 수용할 수가 없다. 아 브람스는 예전의 실재론적 의미에서 < 올바른 > 방식에 의해 블룸이 예이츠와 스티븐스를 가끔씩 올바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블룸이 이 점을 인정하길 바란다. 아브람스가 이걸 원하는 까닭은, 내 생각 에는 그가 예이츠와 스티븐스는 그들의 후예들을 위한 단순한 이용 물 이상의 어떤 존재라고 보길 원하기 때문이다 . 아브람스는 그들의 도덕적 진실성이 블룸의 취급 방식에 의해 비판 • 훼손되었다고 생각 한다. 게다가 아브람스는 문예 비평이 논변이 가능한 분야이기를 바 라며, 따라서 그것이 누구든 < 창의적이거나 홍미로운 오독>을 얻고 자 하는 바람에서 내키는 어떠한 이야기 틀이라도 제멋대로 걸쳐놓 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어떤 분야가 되기를 바란다. 따 비록 아브람스는 자신이 말하는 < 새로운 읽기>는 < 몇 번이고 되 풀이 논의되었던 한 문예 작품에 대해서, 새롭고도 자극적인 것들을 말하게 > 해준다는 점을 인정하긴 하지만, 그는 <급진적인 새로운 읽 기와 옛날의 읽기 방식 간의 선택은 문화적인 비용을 따져서 결정될 문제 > 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잃게 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트릴링에 이르는 우리 앞 세대의 휴머니스트들과 비평가들에 의해 그러한 텍스트들에 관해 씌어졌 던 계몽적인 일들에 대한 접근뿐만 아니고,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그 리고 인간에 관한 확정적으로 의미 있는 텍스트로서 문예의 헤아릴 수 없 22) M. H. Abrams, How to Do Th ing s with Texts , pp. 584-58 .5.
는 다양성에 대한 접근도 잃게 된다 . :II 이 단평에 암묵적으로 담겨 있는 것은, 아브람스가 트릴링과 공유 하고 있는 도덕에 관한 어떤 견해이댜 그 견해란 모든 지성인들이 그들의 트릭을 재주껏 뽐냈을 때 결국 널리 공유된 것으로 남게 되 고 또 반성의 준거가 되는 것은 도덕성이라는 견해, 즉 도덕성은 모 든 이들의 공통된 의식 속에 이미 암묵적으로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도덕성이야말로 창안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라는 견해를 말 한다. 내 생각에는 바로 이러한 칸트식의 확신 때문에, 트릴링은 낭 만주의와 우리의 문예 문화의 가장 뚜렷한 특징들 중의 하나인 것, 죽 다음과 같은 정의를 통해 그가 작가들 중의 <인물들>이라고 명 명한 것을 만들게 하는 능력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것이댜 인물들이란 바꿔 말해서 그들의 작품이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에 특 별히 양심적인 연구가 요구되는 창의적인 영혼들을 가리킨다. 그 작품 속 에는 우리가 느슨하고도 일반적인 의미에서 문예라고 부르는 것을 넘어서 고 또 우리가 매우 훌륭한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넘어서며, 그래 서 그것을 우리 문화 속에서 성취될 수 있는 신성한 지혜와 홉사한 것으 로 비견되게 할 분명한 의의나, 심지어는 미스터리나, 혹은 권력조차도 포 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 2 11 여기에서 트릴링은 칸트가 <제 학파들의 형이상학>에 관해 말했 던 것, 즉 일상의 품위 있는 시민들보다 도덕성에 대해 그리고 이른 바 도덕성의 <정초>에 대해 더 잘 안다고 주장하는 지식인에 관해 말했던 바를 되풀이하고 있다 . 이 측면은 칸트가 헤겔 쪽보다는 루소 23) 같은 책, p, 588. 24) Lio n el Tr illing , Why We Read Jan e Austi n , The Last Deazde(New York: Harcou rt, Brace, Jov anov ich , 1 언 9), pp, 206-207.
쪽 을 향해 더 기울어 졌 던 측 면이다. 그것은 엘리트주의가 아니라 민 주적인 측 면, 즉 문화 를 (헤겔의 경우처럼 그 역(逆)이 아니라) 대중 들 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측 면이다 트릴링과 아브람스와 그라프는 공통적인 도덕 의식보다 더 우선적인 어떤 신성한 지혜가 < 존재한다 > 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 시인을 < 인 물 > 로 만들려는 낭만주의적인 시도에 저항하며, 또한 오독지는· 자신 의 오독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는 지들·과 논변을 주고받을 아무런 의 무도 없다는 제안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그들은 비평이 앞서 있는 도 덕성에 빛을 던져주고 그것을 확산시키며 풍부하게 해주길 원하기 때문에, 그러한 과제가 어떻게 잘 수행될 수 있는지에 관해 비평가들 이 서로 논변을 주고받을 아무런 공통된 어휘도 없다는 제안에 대해 저항한다. 텍스투얼리즘에 대한 이 도덕적 반론은, 모든 어휘들 심지어는 우 리 자신들의 자유주의적 상상력에 의한 어휘조차도, 다만 일시적인 역사적 휴식처에 불과하다는 실용주의자의 주장에 대한 도덕적 반론 이기도 하댜 그 반론은 또한 문예의 문화가 인간적 공통의 관심사로 부터 유리되는 것에 대한 반론이기도 하다 . 그 반론은 니체, 나보코 프 불룸 , 푸코 등과 같은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은 도덕적 대가를 치 르고서 그들의 결과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이를 실용주의자가 선호하 는 비용 계산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지성인의 강한 오독에 의해, 또 그의 신성한 지혜의 추구에 의해 제공되는 그의 사적인 도덕적 상상 력에 대한 자극은, 그 자신을 동료 인간들로부터 고립시킨 것을 대가 로 지불하고서 얻어진 것이라고 그 반론은 말하고 있다 .25) 나는 이 도덕적 반론이 덱스투얼리즘에 관해 그리고 실용주의에 관해 정말로 중요한 쟁점을 진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니~ 25) 이 책의 논문 9 에서 나는 실용주의가 도덕적으로 위험스럽다는 주장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그 쟁점을 처리할 수 있는 미리 준비된 아무런 방식도 갖고 있지 않 다. 그래서 나는 강한 텍스투얼리스트들 예컨대 블룸과 푸코 사이에 한 가지 구분을 더 도입함으로써, 그 쟁점을 다룰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블룸은 제임스의 방식을 따른 실용주의자인데 비하여, 푸코 는 니체의 방식을 따른 실용주의자다. 제임스와 블룸에게 나타난 실 용주의는 유한한 인간의 투쟁들을 통한 정체성의 확인으로 나타난다. 푸코와 니체에게 실용주의는 각자의 유한성에 대한 경멸로서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양도할 어떤 거대하고도 비인간적인 힘에 대한 추 구로서 나타난다. 블룸이 텍스트들을 다루는 방식은 시인과 그의 시 사이룰 오락가락함으로써 어떤 공통의 인간적 유한성에 대한 우리들 의 센스를 보유하고 있댜 푸코가 텍스트를 다루는 방식은 저자를 소 거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실로 <인간>이라는 관념 자체를 소거시키 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댜 나는 푸코의 비인간주의를 옹호할 의사가 조금도 없다. 반면에 나는 우리들의 공통된 인간적 운명에 대한 블룸 의 센스를 극구 찬양하고 싶다. 그러나 이러한 선호를 어떻게 논변으 로 뒷받침해야 할 건지, 혹은 심지어 연관된 차이점들에 대한 명확 한 설명으로 어떻게 뒷받침해야 할 건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걸 행하는 일은 사적인 성취, 죽 자아 실현과 공적인 도덕, 죽 정의에 대한 관심을 결합시킬 가능성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에 뛰어들게 할 것이다 .26) 26) 저자가 여기서 암시한 공적 도덕과 사적 자아 실현의 관계나 그 결합에 관한 논의는 훗날 나온 그의 저서 『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s( 1989) 에서 상당히 집 중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그 책의 주요 내용에 대해서는 『옮긴이 해제」를 참 조(역주)
9 실용주의, 상대주의, 비합리주의
1 실용주의 <실 용주의 > 란 용어는 막연하며 애매하고 식상해진 용어이다. 하 지만, 그것은 미국의 지적 전통에서 주된 영광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어떤 작가도 과거와 판이하게 다론 미래를 일궈내기 위한 급진적인 제안을 제임스 W illi am J ames 와 듀이J ohn Dewe y가 했던 것처럼 제 시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현재 이 두 작가들은 소홀히 취급되고 있 다. 실용주의에서 중요한 모든 것들은 분석철학 속에 보존되었으며, 분석철학의 필요에 따라 조화되었다고 많은 철학자들은 생각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실용주의는 초기의 논리경험주의가 갖고 있던 원자론적인 교의들을 수정케 한 다양한 전체론적 관점을 제안 했던 것으로 여긴다. 실용주의를 이렇게 보는 것은 그 점에 국한해 볼 때는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임스와 듀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무시하고 있다. 논리경험주의는 표준적이고, 학술적이며, 신칸트적인 인식론 중심의 철학이다. 위대한 실용주의자들은 그러한 유형의 철학 중에서 전체론적인 어떤 변종을 제안한 것이 아니라, 오 히려 칸트적인 인식론의 전통 전부와 결별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제임스나 듀이가 < 진리론 > 이나 < 지식 이 론> 혹은 <도 덕 이 론 > 등을 갖고 있다고 본다면 우리 는 그 들 을 잘못 파악하게 될 것 이 며 , 그러한 문제 들 에 관한 이 론들 이 <존 재해야 > 한다 는 가정 을 그들 이 비판한 점을 간과하고 말 것이댜 또 , 그 들 의 사상이 얼마나 급진 적인 것이었는지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고, 철 학을 하나의 정 초적 인 학문 분야로 만들고자 하는 칸트, 러셀, 후설 , 루이 스 에게 공 통된 시 도에 대한 그들의 비판이 얼마나 철저하였는지 를 보지 못하게 될 것 이다 . 이렇듯 초점이 빗나간 한 가지 징후는 퍼스를 과찬하는 경향이다. 퍼스가 칭찬받는 이유 중 일부는 나중에 논리경험주의자들이 물려받 게 된 여러 가지 논리적 개념들과 (예컨대 반사실 적 조건문 등 ) 여러 가지 기술적(技 術 的)인 문제들을 그가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 퍼스에 대한 과도한 찬미의 주된 이유는 기호 일반 이론에 대한 그 의 이야기들이 언어의 중요성에 대한 선구적 발견처럼 보인다는 데 에 있다. 그러나 그의 대단한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퍼스는 기호 일반 이론에 대해 그가 원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그게 어떤 모습의 것이어 야 하는지, 논리학이나 인식론과 그것이 갖는 관계는 무엇인지 등을 결코 작정하지 못하였다 . 실용주의에 대한 그의 기여는 단지 그것에 대해 어떤 이름을 주었던 것과“제임스에게 자극을 주었던 것이 고작 이댜 퍼스 자신은 사상가들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칸트주의자였 댜 그는 그 속에서 여타의 담론들이 적절한 위치와 등급을 부여받게 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비역사적인 맥락을 철학이 제공해 준다고 철저히 확신하는 칸트주의자로 남아 있었댜 제임스와 듀이가 반발을 했던 것은 그와 같은 맥락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인식론과 의미론 이 그것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거라는 바로 그 칸트적인 가정이었다. 1) 퍼스는 제임스가 <프래그머티즘p ra gm a ti sm > 을 오용 • 왜곡시키고 있다고 반 발하여, 자기가 말한 것에 대해 훗 날 < 프래그머티시즘p ra g ma ti c i sm>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 (역주)
우리가 그들의 중요성을 적절히 간파하고자 한다면 이와 같은 반발 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댜 이 반발은 요즈음 제임스나 듀이보다 더 많이 인구에 회자되는 다 른 철학자들 가령 니체나 하이데거 등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 만, 니체나 하이데거와는 달리 실용주의자들은 자연과학자들을 도덕 적 영웅으로 삼고 있는 공통체, 계몽주의적 자기 의식을 지닌 세속적 지식인들의 공동체에 등을 돌리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제임스와 듀이는 과학자를 도덕적 본보기로 삼은 계몽주의의 선택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과학이 창출했던 기술 문명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니체나 하이데거와는 달리, 제임스와 듀이는 사회적 희망의 정신에서 글을 썼다. 그들은 우리의 문화, 우리의 도덕 생활, 우리의 정치, 우리의 종교적 믿음 등을 <철학적 근거들> 위에 <근거 설정>하겠다는 발 상을 단념함으로써, 우리의 새로운 문명을 우리가 해방시키기를 요청 한다. 그들은 갈릴레오의 새로운 우주론에 놀라서 얻게 된 결과의 하 나였던 노이로제 같은 데카르트적인 확실성의 추구와, 다윈에 대한 반발 가운데 하나였던 <영속적인 정신적 가치>의 추구와, 헤겔식의 역사주의에 대한 신칸트적 응답인 학술적 철학을 순수 이성의 법정 으로 만들고자 하였던 열망 등을 우리가 포기할 것을 요청한다. 그들 은 사고나 문화를 항구적인 초역사적 모형(母型) 속에 근거 설정하 겠다는 칸트식의 프로젝트를 <반동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것을 우 리에게 권유한다. 그들은 칸트가 뉴턴을 관념화한 것이나, 스펜서 Herbert S pe ncer 가 다윈을 관념화한 것은, 마치 플라톤이 피타고라 스Pyth ag oras 를 관념화한 것이나,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관 념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부질없는 짓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 같은 사회적 희망과 해방의 메시지를 강조하게 되면, 제임스와 듀이는 사상가라기보다는 예언자처럼 들리게 된다. 이건 오 해의 소지가 있다. 비록 교과서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라는 의미 에 걸맞는 진리와 지식과 도덕성에 관한 <이론들>을 그들이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 그 들 은 그러한 것들에 대해 할 말을 갖고 있 었댜 다음에서 나 는 그들의 핵심적인 교의라고 내가 간주하는 것들 에 대해 짤막한 슬로 건 같은 세 가지 특징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실용주의에 대해 내가 제시하려는 첫번째 특 징은 < 진리>, <지 식>, < 언어 >, < 도덕성 > 등의 관념이나 그것 들과 유사한 철학적 이 론화의 대상들에 대해 적용될 때, 실용주의는 한마디로 반( 反)본질 주 의 an ti essen ti al i sm 라는 점이댜 나는 이 점을 < 진리 >란 < 믿어서 좋 은 것>이라고 말한 제임스의 정의를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이 정의 는 제임스의 비판자들에게는 마치 아스피린의 본질은 두통에 좋은 것이라는 정의마냥 요점에서 어긋난 것 그리고 비철학적안 것으로 비쳐졌다. 하지만, 제임스의 논점은 그 이상 더 심오하게 말해질 아 무것도 <없다는> 것, 즉 진리는 본질 따위를 < 갖고 있는 > 것이 아 니라는 점이었댜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진리가 <실 재에의 대응 > 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무곡] 효용도 없디는· 것이 그의 논점이다. 세계 가 어떠하다는 데에 대한 특정한 언어와 견해가 주어지면, 우리가 참 된 문장이라고 믿는 문장의 내부 구조가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들과 동형 구조를 형성하도록 우리가 언어와 세계의 부분들을 서로 짝짓 게 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우리가 가령 < 이것은 물이다>나, <이것은 빨갛다>나, <저것은 추하다>나, <저것 은 부도덕하다> 등 과 같은 일상적이며 심사숙고되지 않은 보고들을 내뱉을 때, 우리의 짤막한 단정적인 문장들은 쉽사리 그림으로 생각되거나, 혹은 한데 어울려 지도(地圖)를 만들어주는 상징으로 생각될 수가 있다. 그러한 보고는 실제로 세계의 일부와 언어의 일부를 짝짓는다 . 일단 [가령 <모든 까마귀는 하얗지 않다> 등] 부정적인 전칭의 가설 언명이나 그와 홉사한 것에 이르게 되면, 그와 같은 짝짓기는 혼란에 빠지고 임시 변통이 되기는 하겠지만, 아마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의 논점은, 그러한 연습을 수행하는 일은 왜 진리가 믿어서 좋은 것인지에 대해, 우리에게 깨우쳐주는 바가 없을 거라는
점 그리고 세계에 관한 현재 우리의 견해에 대해 그것이 과연 대체 로 우리가 견지해야 할 견 해인지 , 혹은 왜 그것 을 견 지 해야 하는지에 대해 어떠한 암시도 제시해 주 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 중에서 후자와 같은 물음에 대답하기 를 원치 않는다면, 아무도 진리 에 관한 < 이 론> 을 구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진리가 본질을 갖기를 원하는 사람 들 은 지식, 합리성, 탐구 , 사고와 대상의 관계 등이 본질 을 갖 기 를 원한다. 더욱이 그들은 그와 같은 본질에 관한 자기네들의 지식을, 자기네 들 이 그릇된 것이라고 간주하는 견해들을 비판하는 · 데 에 이용하고자 하며 , 그래서 더 많은 진리의 발견을 향한 진보의 방 향 을 가리키는 데에 활 용하고자 한다. 제임스는 이러한 희망들은 부 질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댜 그러한 영역에서는 어디를 둘러봐도 본질 같은 것 은 없다. 탐구의 과정을 지시하거나 비판하거나 승인하는· 동 도 매급의 인식론적 방식은 없다 . 실용주의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진리에 관해 무언가 유용 한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론보다는 실천의 어휘를 통해서이며, 명상보다는 행위 를 통해서라고 . 아무도 < 이것은 빨갛다>라는 말이 세 계 를 어떻게 그려내는가를 알고자 하여 인식론이나 의미론에 뛰어 들지는 않는다. 오히 려 우리는 질병 에 관한 파스퇴르 Pas t eur 의 견해 는 어떤 의미에서 세계를 정확히 그려내고, 그와는 · 대조적으로 파라 셀수스 Paracelsus 의 견해는 어떤 점에서 부정확한 것인가를 알고자 하며, 마르크스가 마키아벨리보다 더 정확히 세계를 그려냈던 점이 엄밀하게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 그렇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그 림 그리기 > 의 어휘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다 . 우리가 개별 문장으 로부터 어휘나 이론으로 관점을 옮기게 될 때, 중요한 용어들은 동형 구조나 상징이나 지도 그리기 등의 비유에서부터 유용성이나 편이성 이나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게 될 가망성 따위에 대한 이야기로 자 연스럽게 옮겨간다 . 그래서 만일에 <목성은 위성(衛星)을 갖고 있다>는 등의 문장을
생각한다면, 적절히 분석된 참된 문장은 그것과 짝을 이루는 세계의 일부와 동형 구조 를 갖게 배열될 수 있다고 말히는· 것이 설득력 있 는 말로 들린댜 그런데 그 말은 <지구는 태양의 둘레를 공전한다> 는 문장은 설득력이 약간 더 줄어든 것처럼 들 리고, < 자연적 운동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훨씬더 줄어든 것으로 들리며, < 우주 는 무한하다 > 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처럼 들 리게 한다. 후자와 같 은 유의 문장에 대한 주장을 칭찬하거나 비난함으로 해서 우리는 그 러한 주장을 하기 위한 결심이 무슨 용어를 사용해야 하며, 무슨 책 을 읽어야 하고 무슨 프로젝트에 가담해야 하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등의 복합적인 전체 결정들과 과연 어떻게 부합되는가를 밝 히게 된다 . 이런 점에서 그러한 문장들은 < 사랑이 유일한 법이다> 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이야기이다>와 같은 문장들과 유사하다. 이러한 경우에서는 <대상들에 대해 > 참이다라는 관념이 실제로 걸 맞지 않는 것과 똑같이, 동형 구조나 상징이나 지도 그리기 등의 어 휘가 전혀 걸맞지 않게 된댜 만일에 이 문장들이 참이라고 주장하는 대상들이 무엇인지를 묻게 되면, 우리는 거기에서 쓰안 주어들 <우 주>, <법>[<사랑>], <역사> 따위를 반복하기 때문에, 아무 짝에도 도움이 안 되는 대답만을 얻게 될 뿐이다. 혹은 심지어 도움이 더 안 되는 대답으로서, <사실>이나 <세계의 방식> 운운하는 이야기를 얻게 될 뿐이댜 그러한 문장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접근은 <그것들은 올바른 것인 가?>라는 물음이 아니라, 오히려 <그걸 믿으면 무엇처럼 될 것인가? 내가 그렇게 믿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내 자신이 무슨 일에 뛰 어든 것일까?> 따위의 물음이 더 근사하다고 듀이는 말한다. 명상이 나, 눈으로 보기나, 테오리아t heor ia 의 어휘는 관찰보다는 이론을, 입 력보다는 프로그램을 디루고 있을 때에만 우리에게 대가를 보상해 준다. 명상적인 정신이 그 순간의 자극과 유리되어 거시적인 견해들 을 다루게 될 경우에는, 그러한 활동은 표상의 정확성을 결정하는 것
이기보다는 오히려 무엇을 행할 것인지 를 결정하는 것과 홉사하게 된다 진리에 관한 제임스의 준칙은 실천의 어휘가 제거 불가능하다 는 것을 말해 주며 , 따라서 어떠한 유의 구분도 기술이나, 도덕적 반 성이나, 예술로부터 과학을 분리해 추출해 내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래서 실용주의의 두번째 특징은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위와 사실에 관한 진리 사이에 아무런 인식론적 차이도 없 고, 사실과 가치 간에 아무런 형이상학적 차이도 없으며, 도덕과 과 학 사이에 아무런 방법론적 차이도 없다. 심지어 실용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조차도 플라톤이 도덕철학을 선의 본질을 발견하는 것으로 간 주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생각하며, 밀J. S. Mil l 과 칸트가 도덕적 선 택을 규칙으로 환원시키려 한 것도 잘못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잘못을 범한 이유라고 언급되는 것들은 한결같이, 인식론적 전통이 과학의 본질을 구하려 하거나, 합리성을 규칙으로 환원시키려 한 잘못을 범한 이유라고 언급되는 것들에 해당된다. 실용주의자에게 과학적이든 도덕적이든 모든 탐구의 패턴은, 여러 가지 구체적인 대 안들의 상대적 매력에 관한 사려 분별이다. 과학이나 철학에서 사변 의 대안적인 결과들을 놓고 따지고 사려 분별하는 것을, <방법론>이 라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발상은 다만 희망적인 관측에 불과하 다. 그것은 마치 도덕적으로 현명한 사람은 선의 이데아에 대한 회상 을 통해 혹은 도덕률에 대한 관련된 논문을 읽고서, 자기가 처한 [도 덕적] 딜레마를 해소할 수 있다는 발상과 홉사하다. 그것은 합리성이 규칙성에 의해 제약된다는 하나의 신화이다. 이러한 플라톤적인 신화 에 따르면, 이성의 삶이란 소크라테스적인 대화 conversa ti on 의 삶이 아니라 의식이 계몽된 상태이며, 그 상태 속에서는 상황에 대한 가능 한 서술이나 설명이 소진되었는지를 결코 물어볼 필요가 없는 그러 한 상태이다. 거기에서는 그저 기계적인 절차들에 복종함으로- 해서 참된 신념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
전통적이고도 플라톤적인 인식론 중심의 철학은 그러한 절차에 대 한 추구이댜 그것은 대화와 사려 분별의 필요성을 회피한 채 단순히 사물들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그 방식을 조사할 수 있는 길을 추구 하는 것이다. 그 발상은 홍미롭고도 중요한 문제에 대한 신념을 획득 할 때, 가능하다면 마치 이미 프로그램된 바에 따라 대상을 대면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시각에 의한 지각에서처럼, 신념을 획득고자 한다. 프로네시스(p hrones i s, 質賤知)를 테오리아(th eor ia , 理論知)로 대체 하려는 이러한 권유가, 바로 <자연적 운동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 는다>는 문장이 <고양이가 방석 위에 앉아 있다>는 문장과 마찬가 지 방식으로 대상들을 그려내준다고 말하려는 시도의 이면에 놓여 있다. 그 권유는 <사랑은 미움보다 낫다>는 문장으로 그려지는 대상 들의 배열이 발견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의 배후에도, 또 그와 같은 대상들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깨달음에서 야기된 좌절의 배후에도 역시 놓여 있다. 그러한 전통의 중대한 오류는, 실용주의자의 말에 따르면 시각적 비유, 대응, 지도 그리기, 그림 그리기 등과 같이 조그 맣고도 일상적인 주장들에 대해 적용되는 표상이, 거대하고도 논쟁적 인 주장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한 점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오류는, 대응될 대상이 없는 곳에서는 우리가 합리 성을 얻게 될 가망이 없고 다만 기호(暗好)와 정념과 의지만을 얻게 될 것이라는 발상을 낳게 한다. 그러므로 실용주의자가 진리는 곧 표 상의 정확성이다라는 관념을 공격할 때, 그는 이성과 욕구, 이성과 식욕, 이성과 의지 따위의 전통적인 구분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이 시각적 모델에 입각하여 생각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듀이가 <관람자 지식 이론>이라고 불렀던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구분들 중 어떤 것도 의미를 갖지 못할 터이기 때문이다. 실용주의자는 우리가 일단 이 모델을 제거하고 나면, 이성의 삶에 대한 플라톤적인 아이디어는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고 말해 준다. 대상들을 정확히 표상하기 위한 삶이란, 계산의 결과를 기록하
고, 연쇄논법 을 통해 사유하며, 사물의 관찰 가능한 속성들을 포기하 고, 애매성이 없 는 규준에 따라 사례 를 평가하며, 사물을 올바르게 하기 위해 일생을 보내는 삶이 될 것이다. 쿤이 < 정상과학 > 이라고 부 르는 것이나 혹은 그와 홉사한 사회적 맥락의 범위 내에서 누구든 지 실제로 그러한 삶을 영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폴라톤주의 자에게는 , < 사회적 > 규범에 부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선( 善 )한 것이 되지 않는댜 그는 당대의 규율들뿐만 아니라 초역사적이며, 실 재 자체의 비인간적 본성에 의해서도 제약되기를 원한다. 이 충동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 하나는 마음에 소중히 간직된 명제들에 대응될 진기한 < 대상들 > 을 요청하는 애초의 플라톤적인 전략이며, 다른 하나는 지식이나 표상이나 도덕성이나 합리성의 본질 에 대한 정의가 될 < 원리들 > 을 발견하기 위한 칸트식의 전략이다. 하지만 당대의 어휘와 실행을 벗어나서 초역사적이며 필연적인 어떤 준거점을 발견하려는 양자에게 공통된 재촉에 비하면 ,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 그 공통점은 <내가 참이라고 간 주하는 것을 왜 믿는가? > 라는 물음이나, < 내가 옳다고 간주하는 것 을 왜 행하는가? > 와 같은 물음들에 대해, 자신의 현재 견해에 이르게 해주었던 바와 같은 일상적이며 소매적이고 자세하고 구체적인 이유 들과는 다른, 그 이상의 어떤 것에 호소함으로써 대답을 하자는 재촉 이다. 이 재촉은 19 세기 관념론자와 현대의 과학적 실재론자 그리고 러셀과 후설에게 공통된 것이고, 서구의 철학적 전통을 정의해 주는 것이며, 그 전통이 말하고 있는 문화를 정의해 주는 것이다. 제임스와 듀이는 우리가 그러한 전통과 그러한 문회를· 폐기시킬 것을 요구함에 있어서 , 니체와 하이데거와 함께 공동의 보~ 취하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실용주의의 세번째 특징을 제시함으로써 요약하 기로 하겠다. 실용주의는 대화의 제약을 제의하고는, 탐구에 아무런 제약도 없다는 교의, 즉 대상들의 본성이나 정신의 본질이나 언어의 본질에서 파생된 어떠한 도매급의 제약도 없으며, 오로지 우리의 동
료 탐구자 들 이 행한 논 평 들 이 제 공 히 는 · 소매 급 의 제약만이 있디 는 교의이다. 적절히 프 로 그램된 화자( 話者 )는 그 앞에 놓 인 헝 깊 조각 이 빨갛다 는 것을 믿지 않 을 수 없다 는 투의 방식은, 인식론 적 반성 을 야기시키는 더 홍미롭고도 더 논 쟁 적 인 신 념들 과는 < 아무런 > 유 사성도 없다. 만일에 우리가 대상 들 에 접근할 때 맑은 정신의 눈이나 엄밀한 방법론이나 명료한 언어로 접근한다면 , 그 대상 들 이 그것에 관한 진리 를 우리가 믿게끔 제약해 줄 것이라는 희망은 부질없는 바 람이라고 실용주의자는 말한다. 실용주의자는, 신이나 진화나 그 밖 에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상의 밑그림을 그려주는 어떤 것 이 우리로 하여금 정확한 언설의 그림을 그리도록 기계적인 프로그램을 심어넣었다는 발상과, 그 프로그램을 우리 스스로가 판독할 수 있는 자기 인식을 철학이 가져다줄 것이라는 발상을, 우리가 포기하기를 원한다. 진리에 대해 우리가 제약을 받는 유일한 의미는, 퍼스가 제 안했듯이 모든 반박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것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발상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는 그러한 제약뿐이다 . 그렇지 만 반박들 즉 대화의 제약은 결코 예견될 수가 없다. 누가 < 언제 > 진리에 도달했는지, 혹은 그 이전보다 더 진리에 접근했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실용주의를 특징지는 데에서 이 세번째 방식을 더 선호한다. 그 까닭은 그것이 반성적인 정신이 대면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근본 적인 어떤 선택, 즉 출발점의 우연성을 수용하려는 시도와 그러한 우 연성을 회피하려는 시도 사이의 선택에 , 초점을 집중시켜 주는 것처 럼 보이기 때문이다. 출발점의 우연성을 수용한디는· 것은 우리가 동 료 인간들에게서 물려받은 유산과 그들과 벌이는 대화를, 길잡이룰 위한 유일한 근원으로 수용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우연성을 회 피하려는 시도란, 적절히 프로그램된 기계가 되고자 하는 희망을 말 한다. 그 희망이란, 우리가 가설의 영역을 뛰어넘을 때, [지식의 유형 에 대한] 구분선의 꼭대기에서 성취될 수 있으리라고 플라톤이 생각
했던 바로 그 희망이었댜 기독교인들은 가슴 깊은 곳에서 신의 목소 리와 조호H } 이루게 될 때 그것이 성취될 거라고 희망하였으며, 데카 르트주의자들은 마음을 텅 비우고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게 되면 그것이 이룩될 거라고 희망하였다. 칸트 이후의 철학자들은 어떠한 가능한 탐구나 언어나 사회적 삶의 양식에 대해서도, 그것의 선험적 인 구조를 발견해 낸다면 그 일이 달성될 거라고 희망하였다. 만일에 우리가 이 희망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니체가 말했던 <형 이상학적 위안>을 잃게 될 것이지만, 공동체에 대한 아주 새로운 의 미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의 공동체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정체 성(正體性) 우리의 사회, 우리의 정치적 전통, 우리의 지적 문화 유산 등-은 우리가 그것을 <자연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 으로 볼 때, 즉 <발견된 것>이 아니라 인류가 만들어냈던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로 <조형된 것>으로 볼 때, 한층 더 각광받게 된다. 결 국 중요한 것은 사물들을 올바르게 하겠다는 희망이 아니라, 한데 뭉 쳐서 어두운 것을 반대해 가는 다른 인간 존재들에 대한 우리의 충 성이라고 실용주의자는 말한댜 실재론자와 관념론자들에 반대해서 제임스가 <인간적 악마의 혼적이 도처에 있다>고 주장할 때, 그는 우리의 영광이 영원한 비인간적 제약에 대한 복종에 있는 것이 아니 라, 오류 가능하고 변화 가능한 인간적 프로젝트에 대한 참여에 있다 는 점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2 상대주의 <상대주의>란 특정한 논제에 대해, 혹은 어쩌면 <어떠한> 논제 에 대해서건, 어느 신념이든지 다른 신념만큼이나 좋다는 견해를 말 한다. 이런 견해를 견지하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따금씩 부화뇌 동하는 대학 신입생을 제외하곤, 중요한 논제에 관해 서로 양립 불가
능한 두 의견이 대등하게 좋다고 말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다. < 상대주의자>라고 <불 리게 > 된 철학 자 들은, 그와 같은 의견 들 가 운데에서 선택을 행하는 근거들이 예전에 생각되어 왔던 것마냥 알 고리즘적 [al g o rithmi c : 연산 공식 에 의 해 답이 나오는] 이 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용어의 친숙성이야말로 물리과학에서 이 론 선택을 위한 규준이라는 견해를 견지한다거나, 현재의 의회민주주 의 제도와 정합된 것이야말로 사회철학에서의 규준이라는 견해를 견 지한다는 것이 빌미가 되어서 상대주의자로 공격받을 수도 있다. 그 와 같은 규준이 제기되면, 그로부터 수반된 철학적 입장은 <현 재 우 리의 개념 체계>나 우리의 목적이나 우리의 제도를 정당화되지 않은 채로 우선성을 부여하는 [잘못된] 가정에 빠져 있다고 비판자 들 은 말 한다. 즉 문제의 그 입장은 철학자들이 마땅히 행하도록 채용된 바를 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받게 된다. 바꿔 말해 왜 우리의 개념체 계, 문화, 관심, 언어 등이 마침내 올바론 길로 들어선 것인지, 즉 왜 그것들이 물리적 실재나 도덕률이나 실수( 質數 )나 혹은 모사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다른 종류의 대상들과 접촉하고 있는지를, 아 직 설명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받게 된다. 그래서 진짜 쟁점은 어떤 견해든지 다른 견해만큼이나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다 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의 쟁점이 아니다. 오히려 그 쟁점은 우리의 문화나 목적이나 제도들이 대화적인 것 말고는 지지의 근거가 없다 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것 말고도 다론 종류의 지지에 대해 여전히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쟁점인 것이다. 만일에 상대주의자들이 <있다면>, 물론 그들은 어렵지 않게 논파 될 것이다.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프로타고라스를 논파하기 위해 사용 했던 자기 지시적 sel f -re f eren ti al 논변을 약간 변형해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말쑥하고도 자그마한 변증론적 전략 은, 오직 가볍게 스케치된 허구적인 인물들에게만 먹혀둘 수 있을 따 름이다. 심각하고도 양립 불가능한 신념들 사이의 고리를 우리가 오
로지 < 비합리적 > 이거나 < 비인지적 > 인 숙고를 통해서만 깨뜨릴 수 있다고 말하는 상대주의자는 , 단지 소피스트나 회의론자나 도덕적 허 무주의자 들 과 똑같은 차원에 머물고 있는, 플라톤주의나 칸트주의 철 학자들의 상상의 소산물인 놀이 상대자에 불과하다. 미혹되지 않거나 괴팍한 플라톤주의자와 칸트주의자는, 때때로 이러한 인물들 가운데 어떤 인물의 역할을 대역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대역을 수행할 때 그들은 결코 상대주의나 회의론이나 허무주의 등이 우리 가 일을 달리 행할 어엿한 대안이 될 정도로 진지한 제안을 제시하 지는 못한다. 따라서 그러한 입장들은 <철 학적 > 논점들을 얻기 위해 서 , 바꿔 말해 공동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동료-참여자들이 아니라, 가상의 논적들을 상대로 벌이는 일종의 유희적인 게임에서 쓰인 몸놀림에 불과한 것이다. 실용주의를 상대주의라고 연상하는 것은, 실용주의자들이 갖고 있 는 <철학적> 이론들에 대한 태도를 < 실질적인 > 이론들에 대한 태 도라고 연상한, 혼동의 결과이다. 확신컨대 제임스와 듀이는 제한된 의미에서 메타철학적 상대주의자이다. 바꿔 말하자면 그들은 가령 전 형적인 플라톤적 유형이나 칸트적 유형 등 양립 불가능한 철학 이론 들 사이에 선택의 길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그중에서 선택을 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이론들은 우리의 실행들 중 어 떤 요소를 그러한 실행의 바깥에 있는 무엇 위에 근거를 설정하려는 시도이다. 실용주의자들은 그와 같은 철학적 근거 설정은 어느 것이 나 다 솜씨가 얼마나 빼어나건 말건 그것과는 무관하게, 근거를 제공 코자 하는 실행만큼이나 좋거나 혹은 나쁘다고 생각한다. 실용주의자 들은 근거 설정의 프로젝트란 기계 속에서 아무런 역할도 못 하는 헛바퀴나 마찬가지라고 간주한댜 이 점에 관한 한 , 그들이 아주 옳 다고 나는 생각한다. 뉴턴적인 시대에 걸맞는 순수 이해의 범주들을 누군가가 발견해 내자마자 , 다른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시대나 아인슈타인적인
시대에 걸맞는 범주들을 발견해 낼 것이다. 기독교인을 위한 정언명 법을 누군가가 도출해 내자마자, 다른 사람은 식인종들에게 걸맞는 정언명법을 도출해 낼 것이다 우리의 과학이 왜 그렇게 좋은지에 대 한 진화론적인 설명을 누군가가 전개시키자마자, 다른 사람은 통방울 눈을 가진 괴물 과학자들이 괴물 같은 이론을 값진 것이라고 찬양하 는, 퉁방울 눈 괴물의 진화론 인식론자에 관한 공상과학 소설을 쓸 것이다. 이 놀이가 이렇듯 쉽게 성립될 수 있는 까닭은, 이러한 철학 이론들 중 어느 것도 매우 어려운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짜 작 업은 인내심과 천재성을 가지고 설명적 이론들을 발전시킨 과학자들 이나, 투쟁과 고통으로 도덕성과 제도들을 발전시킨 사회학자들에 의 해 이루어졌다. 플라톤적인 혹은 칸트적인 철학자가 행한 것이라고 는, 완료된 일차 레벨의 생산물을 붙들고서 추상화를 감행하여 그것 을 몇 레벨 밀어올린 다음에,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의미론적 어휘를 창안하여 그 어휘로 번역을 행하고 나서, 그것의 <근거 설정을 해냈 다>고 발표하는 것이 고작이다 . <상대주의>는 만일 그것이 단지 철학적인 이론들에 관한 것이 아 니라 실질적인 이론들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면, 반박되어 마땅할 귀 찮은 어떤 견해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정언명법과 양립 불가능 할 대안이 될 어떤 정식(定式)이 과연 있는지, 순수 이성의 범주와 양립 불가능할 어떤 것들이 과연 있는지를 정말로 관심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면에 우리는 구체적이고도 상세한 우주론의 대안이 나, 구체적이고도 상세한 정치적 변화의 대안에 대해서는 <정말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한 대안이 제기될 때 우리는 범주나 원리 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지닌 여러 가지 장단점을 통해 그것에 대해 논쟁을 한다. 상대주의가 플라톤적 혹은 칸트적 철학자들 가운 데에서 그토록 많이 거론되는 까닭은, 철학 이론―~일차 레벨의 이론들을 근거 설정하려는 시도 __- 에 관해 상대적이게 되면, 일차 레벨의 이론들 자체에 대해서도 상대적이게 된다고 그들이 생각하기
때문이댜 만일 누군가가 한 이론의 값어치는 그것의 철학적 근거의 값어치에 조回 L 된다고 정말로 믿는다면, 그 사람은 철학 이론에 관한 상대주의가 극복되기 전까지는, 물리학이나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회 의적이어야 할 것이다 다행히도 그런 식으로 믿는 사람은 거의 아무 도없댜 사람들이 실제로 믿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 수학, 물리학, 신 그리 고 여타의 것들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모든 것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관한 하나의 정합적인 이야기와 잘 부합된다면 좋을 것이 라는 점이다. 그와 같은 윤곽의 견해를 얻기 위해 종종 구체적 사안 들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급격히 l:ll-7r어야 할 요구에 맞닥뜨리기도 한댜 그러나 재조정을 행하는 이러한 전체론적인 과정은 광범위한 뒤섞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플라톤적_칸트적인 근거 설정의 관념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반면에 그러한 근거 설정의 관념은 제 약 사항을 찾아내고, 필연성을 입증하며, 스스로 그것에 복종할 불변 의 원리들을 발견하는 것과 연관된다. 제안된 제약 사항과 필연성과 원리들이 산딸기만큼이나 많다는 것이 드러나면, 다만 문화의 여타 분야들이 철학자들을 대하는 태도만 바뀌게 될 따름이다. 칸트의 시 대 이래로 비철학자들에게 외견상 점점 더 분명해진 것은, 정말로 전 문적인 철학자는 어떠한 것에 대해서라도 철학적 정초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점이다. 금세기가 경과하면서 철학자들이 문화의 여타 분 야로부터 점점 더 고립되기에 이른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이런 걸 보증해 주며 또 저런 걸 명확히 해준다는 우리 철학자들의 제안 은, 우리의 동료 지식인들에겐 이제 한낱 희극처럼 보이기에 다다른 것이댜
3 비합리주의 상대주의에 관한 나의 논 의가 진짜 쟁점 을 슬쩍 회피한 것처럼 보 일지 모른댜 아마 어느 누구 도 상대주의자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수많은 철학자들이 실용주의에서 발견하게 되는 매우 공 격적인 측 면 을 가리키는 이름으로서, < 상대주의 > 라는 이름은 걸맞는 것이 < 아 닐 > 것이다. 그렇지만 어딘가에 중요한 쟁점이 < 있다 > 는 점은 확실 하다. 실제로 쟁점이 있기는 있으나 , 그 쟁점이 쉽사리 진술되지도 않으며 또 쉽게 논변으로 표출되지도 않는다. 나는 그 쟁점을 미세한 측면과 거시적인 측면 두 가지 다른 맥락에서 전개시켜, 그것을 논의 의 초점으로 삼고자 한다. 미세한 측면의 쟁점은 철학에 관한 것이기는 하되, 가장 편협한 의 미에서의 철학, 즉 미국철학회 Ame ri can Ph ilos op hica l Assoc i a ti on 의 활동에 관한 것이다 . 미국철학회는 전통적으로 우리가 자유롭고도 교 화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논증적이면서도 전문적이어야 하는가에 관한 물음에 의해 자극을 받아 왔다. 나의 목적과 연관해 볼 때 이 물음은 우리가 실용주의자들이 될 수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전문적 인 철학자들로 남아 있을 것인가에 관한 쟁점으로 바뀌게 된다. 거시 적인 측면에서의 쟁점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철학, 즉 모든 것들을 서로 연관지어 파악하려는 시도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한편 으로는 소크라테스와 다른 한편으로는 폭군 사이의 쟁점이며, 바꿔 말하자면 대화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기 기만적인 레토릭을 사랑 하는 사람들 사이의 쟁점이다. 나의 목적과 연관해 볼 때, 그것은 우 리가 소크라테스를 배반하지 않고서 실용주의자가 될 수 있느냐, 혹 은 비합리주의에 빠지지 않고서 실용주의자가 될 수 있느냐에 관한 쟁점이다. 먼저 전문화에 관한 미세하고도 덜 중요한 측면의 쟁점부터 논의 하겠다. 왜냐하면 그 쟁점은 종종 중요한 쟁점인 비합리주의에 관한
문제와 혼동되기도 하며, 또한 비합리주의에 관한 문제에 우리가 집 중 하도 록 해주기 때문이다. 철 학 교수 들 이 과연 교화를 행해야 하는 가라 는 물음은 , 미 국철 학회의 초 창기 수십 년 동안 미국 철 학회 를 자 극하였다 2) 제임 스 는 철 학 교수 들 이 교화 를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였 으며 , 점증하는 철 학의 전문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실용주의에 대 한 위대한 반대론자인 러브조이Art hur 0. Love j o y 는 전문화를 혼합 되지 않은 축복으로 보았다. 거의 동시에 영국에서의 러셀과 독일에 서의 후설에 의해 말해진 바에 화답하여, 러브조이는 미국철학회의 제 16 회 연례 모임에서, 철학을 하나의 과학으로 만들 것을 목표로 삼 자고 촉 구하였다 . 그는 미국철학회가 예리하게 정의된 문제들에 관한 잘 짜여진 논쟁으로 그 프로그램을 편성해서, 각각의 모임이 끝날 때 는 누가 승리자인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였다 . 3} 러브조 이는 철 학은 교화적이고 또 비전을 제시할 수 있거나, < 그렇지 않으 면 > < 객관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명확히 전달 가능한 진리들>을 산 출 하거나 그 둘 중 하나이지 , 그 둘을 한꺼번에 행할 수는 없다고 고 집하였댜 제임스도 이 점에 대해서는 아마도 동의를 하였을 것이다. 그도 역시 한 사람이 실용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전문적인 철학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제임스는 전문화를- 합리성의 승리 가 아니라 , 오히려 신경이 둔감한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는 사물들 울 연관되게 하는 활동은 < 객관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명확히 전달 가능한 진리들 > 을 아마도 산출하지 <않을 >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2) 이 논문은 애초에 저자가 미국 철 학회 동부 지 회장 자격으로 동학회에서 회원들 에게 행한 연설문이었음을 상기할 것.(역주) 3) A. 0. Lovejo y , On Some Cond ition s of P rog res s in Ph ilos op hica l Inq uiry, The Philo sop h ic a l Revie w , XXVI(1917), pp. 123-163 (특히 결론 페이지) 참 조 나는 러브조이의 논문에 관한 서지 사항을 윌슨D ani el J. Wi lson 의 돋보이는 다음 논문에서 따왔다: Profe s sio n a liza ti on and Orga nize d Disc ussio n in the Ameri ca n Phi lo sop hica l Associa t io n , 1900-1922, Jou rnal of t he His t o r y of Philo soph y, XVII(1979), pp. 53- 69 .
또 그것이 아주 중요한 문젯거리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물론 이 싸움에서 러브조이가 승리하였다. 철학자는 가급적 최대 한으로 과학자를 닮아야 한다는 그의 확신에 동의하는 사람은 그 결 과에 대해 즐거워할 것이다. 반면에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76 주년을 맞은 미국철학회에 관해, 노년에 이르러 그것을 얻게 될 경우 롤 대비해 젊은 시절에 소망하는 바를 조심해야 한다는 괴테J ohann W. Goe t he 의 준칙을 마음 깊이 되새겨보게 될 것이댜 이중 어떤 태 도를 택하는가는 오늘 우리가 논의하는 문제를 플라톤, 칸트, 러브조 이 등에 의해 논의되었던 문제와 연속적인, 인간의 사고에 관한 영원 한 문제라고 간주하는가, 아니면 그 문제를 죽은 쟁점에 생기를 불어 넣으려는 근대적인 시도라고 간주하는가에 달려 있다 . 러브조이식의 설명에 따르면, 철학자들과 여타의 고급 문화 간의 차이는 물리학자 들과 일상인들 간의 차이나 마찬가지에 해당된다. 그 차이는 논의되 는 문제의 임의성에서 창출된 것이 아니라, 진정한 문제를 다루는 기 술적(技術的)이고도 명확한 방식의 발전에 의해 창출된 것이다. 하지 만, 실용주의자의 반(反)-본질주의에 동조하는 사람은, 철학자들이 <객관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명확히 전달 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하 는 그러한 문제들을 역사의 유물이라고, 즉 지식과 도덕성의 숨겨진 본질을 찾아내고자 하는 계몽주의의 잘못된 탐구가 남겨놓은 유물로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동료 지성인들 가운데 많은 사 람들에 의해 채용된 관점인데, 그들은 우리들 철학 교수들을 특정한 시대의 포로가 된 사람들이라고 보며, 계몽주의 시대를 다시 한번 더 살고자 애쓰는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본다. 내가 전문화에 관한 시대 착오적인 쟁점을 여러분께 상기시킨 까 닭은, 그 쟁론 중에서 어느 한편을 여러분이 편들도록 설득하기 위해 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한 까닭은 반(反)-실용주의자가 지닌 열 정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표출시키기 위해서다. 그 열정의 근원은 바 로 대화는 반드시 동의와 합리적인 합의 도출을 목표로 한다는 것,
즉 더 이상의 대화가 불필요한 것이 되게 하려고 우리가 대화를 한 다는 반실용주의자의 확신이다 반실용주의자는 플라톤식의 상기론 (想起論)과 홉사한 어떤 것이 옳은 경우에만, 즉 우리 내부의 어딘가 에 사고의 자연적인 출발점을 갖고 있으며 그 출발점을 가장 잘 표 현하는 어휘 를 우리 모두가 한번 듣기만 해도 인지하게 된다는 식의 이론이 옳은 경우에만, 비로소 대화가 의미를 갖게 된다고 믿고 있 다. 왜냐하면 그런 것과 홉사한 어떤 이론이 옳을 때라야 대화는 자 연스러운 목표를 갖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계몽주의는 그러한 어휘, 말하자면 자연 자체의 어휘를 찾아내기를 희망하였다 . 스스로를 < 구 제받지 못한 계몽주의자 > 라고 서술하였던 러브조:이는 그 프로젝트 를 지속하기를 원하였다 . 우리가 그와 같은 어휘에 동의를 할 경우에 만 실제로 대화는 논증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며, 문제들에 대한 <객 관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명확히 전달 가능한 > 해결책의 탐구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반실용주의자~ 실용주의자가 전문화 를 경멸하는 것은 곧 합의에 대해 경멸하는 것이라고 간주할 것이며, 그것은 개개의 인간이 그 내부에 진리의 씨앗을 담고 있다는 기독교 적이며 민주적인 생각에 대한 경멸이라고 보게 될 것이다 . 반실용주: 의자에게 실용주의자의 태도는 엘리트주의적이며 호사가적인 것으로 보이고 , 소크라테스보다는 알키비아데스 Alc i b i ades 를 연상시켜 줄 것 이다. 상대주의에 관한 쟁점이나 전문화에 관한 쟁점은 이러한 대립을 표현하기에는 어색한 시도이다. 진정하고도 격렬한 대립은, 동료 인 간들에 대해 충실하는 일이 소크라테스적인 방식으로 대화~ 지속해 야 할 <이유>를 설명해 줄 영원하고도 비역사적인 어떤 것의 존재 를 혹은 합의를 보증해 줄 어떤 것의 존재를 반드시 전제로 하는가 아닌가에 관한 물음이다. 반실용주의자는 그와 같은 본질이나 그러한 보증이 없다면 소크라테스적인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고 믿 • 기 때문에, 실용주의자를 냉소주의자로 본다. 따라서 철학 교수들이
어떻게 대화 를 행해야 하 는 가에 대한 미세 한 쟁 점 은 우리로 하여 금 곧바로 다음과 같 은 거대한 쟁 점 으 로 옮겨 가게 해 준 다: 과연 우리 는 비합리주의자가 되지 않고서도 , 또 는 소 크라테스에 대 한 충실 성 을 포 기하지 않고서도 실용주의자가 될 수 있는가? 비합리주의에 관한 물음 들 은 금세기에 들 어와 매우 민감한 것 이 되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에 반대하는 죄 를 범하며 , 또한 대화와 공동체로부터 후퇴하는 - 음울한 불쾌감이 최 근 에 상세히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들 서구인의 지적 전통은 이제 < 단지 개념적인 것> , 혹은 < 단지 존재적인 것 > 혹은 < 추상을 감행하는 것> 으로 오용되 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 비합리주의자들은 이른바 < 직관 > 이라거나 , < 정교히 표현되지 않은 전통의 의미 > 라거나, < 피 끓는 가슴으로 생 각하기 > 라거나, < 피압박 계급의 의지 표현 > 등 구닥다리 사이비 」 인 식론적인 관념들을 제안한다. 우리 시대의 독재자나 악한들은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더 혐오스럽다 . 그 까닭은 그들이 그와 같은 자기 기만적인 레토릭에 가담해 지성인다운 포즈 를 취하기 때문이다. 이들 독재자들은 아침에 철학을 쓰고, 오후에는 사람들을 고문한다 . 또, 이 들 악한들은 횔덜린”의 시를 읽으면서, 사람들을 처참하게 살육하는 폭격을 감행한다. 그래서 우리의 문화는 예전의 어느 시기보다도 계 몽주의의 희망, 즉 칸트로 하여금 철학을 형식적이고도 엄밀하며 또 전문적인 것으로 만들게 하였던 그 희망에 매달리게 한다. 우리는 이 성과, 과학과, 사고와, 지식과, 도덕성의 < 올바른 > 개념들, 즉 그것들 의 <본질>을 표현하는 개념들을 정형화함으로써, 비합리주의자의 불쾌감과 증오에 대항하는 방패를 갖게 되기를 희망한다.
4) Joh ann C. F. Holderi n, 1770- 18 43: 독일의 시인(역주)
하지만 실용주의자들은 이 희망이 헛된 것이라고 말해 준다. 그들 의 견해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적인 덕성들, 바꿔 말해서 이야기하기 를 즐겨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기를 즐겨 하며, 우리의 행위가
타인 들 에게 미치 는 결과 에 비 중을 두기를 즐겨 하는 것 등은 < 단순 히 > 도덕적인 덕성에 불과하다. 그러한 덕성들은 말로 설득되는 것 도 아니며 , 본질 에 대한 이론적인 탐구를 통해 굳어지는 것도 아니 다. 우리에게 피 끓는 가슴으로 생각하라고 말하는 비합리주의자들 은 , 사고나 지식이나 논리의 본 질 에 대한 더 나은 설명을 통해서는 반박할 수가 없다. 실용주의자는 대화를 지속하는 것이 우리의 도덕 적 의무라고 보며, 오직 대화 < 그것만이 > 우리의 프로젝트이고 서구 지성인의 생활 양식이라고 말해 준댜 그것은 성공을 담보해 주는 아 무런 형이상학적 보증도 인식론적 보증도 갖고 있지 않다. 게다가 (이것이 중요한 점인데) < 우리는 단순히 ‘지속하는 것’ 말고는 ‘성공’ 이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목표를 갖고 있기 때문에 대화를 해나가는 것이 아니다 . 소크라테스적인 대화는 그 자체가 목적인 활동이기에 우리는 대화를· 한다. 동의를 이루는 것 이 대화의 목적이라고 고집하는 반실용주의자는, 마치 놀이를 행하는 이유는 득점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농구 놀이꾼과 같다. 그 는 한 활동의 과정 중에서 본질적인 어떤 순간을 마치 그 활동의 목 적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 더 잘못된 일은 반실용주의자 는 마치 모든 사람은 천성적으로 농구하기를 원한다고 주장하거나, 사물의 본질은 농구 골대 속으로 공이 들어갈 수 있는 것과 마찬가 지라고 주장하는 열성적인 농구팬과 홉사하다는 점이다. 반면에 전통적인 플라톤적 혹은 칸트적인 철학자에게는 서구적인 삶의 양식에 대한 < 근거 설정>의 가능성, 바꿔 말해서 서구적인 삶 의 양식이 서구적인 것 이상의 어떤 것이며, 우연한 인간적 프로젝트 이상의 어떤 것임을 밝히는 일이 철학의 주요 과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철학자는 소크라테스에 반대하는 죄를 범하는 것은 단지 우 리의 공동체에 반대하는 것에 그치는 일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에 반 대하는 죄를 범하는 일임을 밝히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는 실용주의 자를 비합리주의자로 본다. 실용주의는 곧 <상대주의>다라는 혐의
는, 우리의 가장 심오한 희망에 대해 냉소적인 것으로 보이는 실용주 의의 가르침에 대한, 사려 깊지 않은 첫 인상에 의거한 단순한 역겨움 의 표현에 불과하댜 하지만, 만일에 전통적인 철학자 가 그와 같은 욕설의 차원을 넘어선다면, 그는 실용주의자가 반드시 대면하지 않을 수 없는 물음, 죽 과연 < 대화 > 라는 관념이 < 이성 > 이라는 관념을 대 체시킬 수 있는지에 관한, < 실천적인 > 물음을 제기하게 될 것이다. 플라톤적이며 칸후적인 전통에서 그 용어가 사용되는 바와 같이, <이성>이라는 관념은 진리는 곧 대응이라는 관념, 지식은 곧 본질의 발견이라는 관념, 도덕성은 곧 원칙에 대한 복종이라는 관념 등 실용 주의자가 해체하고자 하~근 제 관념들과 맞물려 있다. 좋건 나쁘건 서 구의 전통은 플라톤적이며 칸트적안 어휘들로 소크라테스적인 덕목 들을 서술하고 또 찬양해 왔다 . 그와 같은 어휘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우리가 과연 그 덕목들을 서술할 방도를 알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따라서 실용주의자가 부추기고 있는 [그들이 비합리주의자라는 혐의 에 대한] 깊은 의혹은, 마치 알키비아데스처럼 그가 본질적으로 경박 스럽다는 데에 있다 . 바꿔 말해서 그는 그와 같이 좋은 것을 보유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하면서도 논란의 여지가 없는 공동선을 추천하고 있다. 실용주의자는 순전히 부정적인 비평의 줄거움을 위해 우리에게 공통된 서구의 프로젝트를 희생의 제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합리주의에 관한 쟁점이 더 첨예하게 될 수도 있다. <‘진리’, ‘지 식’, ‘도덕성’, ‘덕성’ 등을 해명하기 위해 행해질 수 있는 모든 일은 고작해야,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용어들이 성장 • 발전해 온 문화의 구체적인 세부 항목들로 거슬러가게 하는 일에 불과하다>라고 실용 주의자가 말한 것을, 계몽주의의 옹호자가 <진리와 덕성은 단순히 한 공동체가 그러하다고 합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말로 받아 들인다는 점을 주목하면, 쟁점이 더 첨예하게 될 수 있다. 실용주의 자가 <우리는 서구의 대화에서 창출된 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을
진리와 덕성으로 간주해야 한다 > 고 말할 때, 전통적인 철학자는 서 구에 관해 그토록 특별한 것이 무엇인지 를 알고자 한다. 실용주의자 는 마치 비합리주의자처럼 < 우리가 > 특권적인 위치에 처해 있는 까 닭은, 단순히 < 우리이기 >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게다가 진리란 다만 < 우리가 지금 행하고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행하는 결과 > 로 특징지어진다는 발상 속에는, 끔찍스럽게 위험한 어 떤 것이 들어 있지 않은가? 만일에 그 경우 < 우리 > 가 오웰 Geor g e Orwell 이 말한 그러한 [전체주의] 나라에 살고 있다면 어떡할 것인 가? 독재자들이 그들의 거짓말을 < 객관적인 진리 > 로 묘사하기 위해, 레닌의 피맺힌 의미를 담은 < 객관적>이라는 용어를 채용할 경우에, 그 독재자들이 레닌을 옹호하기 위해 퍼스를 인용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5 )
5) 실용주의자들은 이 물음에 대해 답변을 해야만 한다는 점을 내가 간파하게 해 준 데 대해 나는 윌리엄스Mi chael W illi ams 에게 신세를 졌다 .
이러한 비판에 대해 실용주의자가 행할 일차적인 옹호의 논변은 하버마스에 의해 창안되었다 . 그는 그와 같은 진리 정의는 <왜곡됨 이 없는 > 대화의 결과로서만 작동할 수 있는 데 비하여, 오웰이 말 한 바와 같은 나라는 왜곡의 전형에 해당된다고 말해 준다. 하지만, 이것은 < 단지 > 일차적인 옹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 까닭은 과연 무 엇을 < 왜곡됨이 없는> 것으로 간주할 것인지롤 알 필요가 있기 때 문이다 여기에서 하버마스는 선험적인 데로 나아가 원칙들을 제시한 다. 하지만, 실용주의자는 반드시 자문화중심적이어야 하며, 사례들 을 예시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단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왜곡됨이 없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안에 관련된 <우리들의> 규준들을 채용하는 것을 말하며, 여기에서 <우리>란 플라톤, 뉴턴, 칸트, 마르크스, 다윈, 프로이트, 듀이 등을 읽고 또 숙고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밀턴이 말한 <자유롭·고도 개방된 만남> 속에서 진리가 승
리할 것인데, 그러한 만남은 원칙들에 의해 서술되기보디는· 반드시 사례들로 서술되어야 한댜 그것은 대왕의 회의실이라기보다는 아테 네의 시장 바닥과 같고, 12 세기보디는- 20 세기와 같으며, 1935 년보다 는 1925 년의 프러시아 아카데미와 같다 . 실용주의자는 퍼스에 동조해서 진리가 승리하게끔 < 운명지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을 반드시 피해야 한다. 심지어 그는 진리가 승리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반드시 피해야 한다. 실용주의지는· 헤겔 과 더불어, 단지 진리와 정의(正 義 )는 서구의 사고에서 계승되는 각 단계들에 의해 표시된 방향에 놓여 있다고만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 까닭은 그가 어떤 < 필연적인 진리 >를 알고 있으면서 그 앎의 결 과로서 이러한 사례들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렇게 된 까닭은 단순히 실용주의자가, 그의 대화 상대방에게 쌍방이 공히 속해 있는 처지, 즉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출발점의 우연성과 그들 양자가 다 거기에 속한 멤버인 [부평초처럼] 떠 있으면서 근거 없는 대화들을 [수행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 말고는, 그의 확 신을 설명할 더 좋은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한 데에 있다. 이 말은 곧 <서구에 관해 무엇이 그토록 특별한가?>라는 물음에 대해, 실용주 의자는 <당신은 ‘우리들’ 서구인들의 목적에 더 잘 부합되는 바서구 적인 어떤 것을 갖고 있는가?>라는 말을 제외하곤,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용주의자는 < 소크라테스적인 덕목과, 밀턴적인 자유로운 만남과, 왜곡됨이 없는 의사 소통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좋은가?>라는 물음에 대해, <우리가 소크라테스, 밀턴, 하버 마스와 공유하고 있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그 밖의 어떤 것 이 더 좋겠는가?>라고 말하는 것 말고는 달리 대답할 길이 없다. 이렇듯 명백히 순환론적인 응답이 과연 충분한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헤겔과 폴라톤 중에서 누가 사고의 진보에 대해 적절한 그림을 제시하였는가를 결정하는 일과 홉사하다 . 실용주의자들은 헤겔을 좇 아 이렇게 말한다. <철학이란 당대(當代)가 사고 속에 파악된 것이
다. > 반실용주의자들은 대화에서 도피하여, 모든 가능한 대화들의 배경에 놓여 있는 비시간적인 어떤 것을 추구합에 있어서 플라톤을 좇는다 . 시간과 역사로부터 도피하려는 철학적 전통의 과거 노력을 고려에 포함시키지 않고서는, 누구라도 헤겔과 플라톤 가운데 어느 한쪽을 따르기로 작정하지 못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러한 노력들을 혹 자는 가치 있는 것, 더 나아지는 것, 계속할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댜 반면에 혹지는 그것들을 파멸이자 사악한 것으로 여 길 수도 있다. 그 중 어느 쪽이든 그것들을 파악함에서 형이상학적이 든, 인식론적이든, 의미론적이든 간에 무엇이 비순환적인 논변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니는- 그 결정은 단 순히 철학의 역사를 읽고 하나의 교훈을 내림으로써 작심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내가 말했던 것들 중에서 어느 것도 실용주의를 옹호하는 논변은 아니댜 기껏해야 실용주의에 관해 제기된 여러 가지 피상적 인 비판들에 대해 내가 대답을 해본 것에 불과하다. 또, 내가 비합리 주의의 핵심적인 쟁점들을 다루었던 것도 아니다 . 나는 내가 불과 몇 분 전에 언급했던 실용주의에 대한 중대한 비판에 대해서도 아직 옹 답하지를 않았다. 그 비판이란 실천적인 문제로서 소크라테스적인 덕 목들은 플라톤적인 방식에 의하지 않고서는 옹호될 수가 없다는 것, 바꿔 말해서 모종의 형이상학적 위안이 없이는 아무도 소크라테스에 반대하는 죄를 범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윌리엄 제임스 자신은 이 비판이 대답될 수 있는지 없는지에 관해 확신을 갖지 못 하였다. 그 자신의 믿고자 하는 권리를 발동해서 제임스는 이렇게 적 었다: <만일에 이 삶이 성공에 의해 우주에 어떤 것을 영원히 얻게 하는 진정한 싸움이 아니라면, 그것은 우리가 자의로 그만둘 수도 있 는 사적인 연극 놀이보다 더 나을 바가 없다.> 이어서 그는 <이 삶 은 진정한 싸움처럼 ‘느껴진다'>라고 말하였다. 우리들이 스스로를 플라톤의 각주(脚託)라고 여긴다면, 실제로도
그렇게 [플라톤의 각주라고]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에 제임 스의 실용주의가 심각하게 받아 들 여지고 , 실용주의가 우리의 문화와 자화상에서 중심을 차지하게 된다면, 더 이상 그와 같이 느껴지지 않 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느 껴진다는 >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 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은 변화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심지어 서구의 대화가 비틀거리며 죽어갈 것인지 아닌지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 우리는 그저 모르게 될 것이다. 제임스와 듀이는 우리에게 아무런 보 장도 제시한 바가 없다 . 그들은 단순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 즉 이제는 종교의 시대와 계몽주의의 시대 둘 다 더 이상 회복이 불가 능하다는 점을 지적해 주었다. 그들은 우리의 시대를 사고 속에 파악 하였다 .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제시해 주었던 방식대로 대화의 물꼬 를 변화시켜 가지 않았다 .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그렇게 행할 능력이 없는지도 모른다 . 혹은 어쩌면 결코 그렇게 행하지 못하게 될 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극소수의 철 학자들만이 성공적으로 제공해 주었던 것을, 제임스와 듀이가 우리에 게 제시해 준 데 대해 그들을 칭송해마지 않는다 . 그들이 제시해 준 것이란 바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암시이다 .
10 회의론에 대한 카벨의 견해
카벨의 저서 『 이성의 외침 The Claim of Reason 』” 은 사실상 두 권 의 책이 한 권을 이루고 있댜 전반부 (1 부에서 3 부까지)는 약 20 여 년 전 에 씌어 졌 고, 후반부 ( 4 부)는 아주 최근에 씌어졌다 ? 전반부의 대부 분 ( 1 - 2 부)은 인식론에 관한 것인데, 나는 그 부분에 관해 주로 논의 하고자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지면을 전반부에 대해 할에할 것이며, 후반부에 대해서는 말미에서 아주 조금만 언급하기로 하겠다. 이건 참 불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니는 전반부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것만 큼이나 많이 후반부에 대해서는 찬사룰 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 구든지 동의하는 것에 대해서보다는 동의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 항 상 할 말이 더 많을 것이다 .1) Sta n ley Cavel!, The Claim of Reason: Wi ttgen ste i n , Skept icism , Mora-lity , and Trage dy( O x ford : Clarendon Press, 1979). 이하 괄호 안에 표시된 페이지는 그 책의 페이지 를 가리킨다 . 2) 3 부는 20 여 년 전 카벨의 박사 학위 논문의 자료들을 재작성한 것(말하자면 얼마만큼은 1 부 및 2 부와 마찬가지의 것)이다.
그 책의 1-2 부에서는 (가령 데카르트R. Desc art es 의 책상, 버클리 G. Berkele y의 나무, 무어 G . E. Moore 의 손 등과 같이) 인식론에 대
한 개론격의 강좌에서 연구되는 자료가 인간적인 상황, 인간의 유한 성에 대해 무언가 중요한 것을 깨우치게 해준다고 제안하고 있다. 그 부분은 우리를 인식론에 대한 논의에서 낭만적인 것으로 이끌어간다. 그것은 인식론을 소개하는 강의들이 단지 학생들 주위에 먼지 구름 을 일으키지나 않았을까 하고, 우리 철학 교수들이 의구심을 갖기 시 작했던 이래 느껴 왔던 수치심에서 벗어나 안도의 마음을 갖도록 약 속해 준다 . 그래서 학생들이 그들을 먼지 구름에서 꺼내 밝은 곳으로 안내해 준 데 대해 우리에게 감사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오스틴J. L. Austi n, 바우즈마0 . K. Bouwsma, 비트겐슈타인, 위즈 덤Jo hn Wi sd om 그리고 라일 G il be rt Ry le 등은 한결같이 버 클리 와 데카르트와 무어가 제시했던 외침들을 그냥 무시해 버리라고 제안하 였다. 바꿔 말해서 인식론이란 잘못된 관념의 역사라고 가르쳐야 한 다고 그들은 제안하였다. 그런데 카벨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만일 우 리가 그 외침들을 정말로 매우 진지하게 수용하지 않는다면, (특히) 비트겐슈타안과 오스틴이 우리에게 행해 준 혜택을 제대로 누릴 수 없게 될 거라고 한다. 카벨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회의론을 너무 손쉽게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우리는 <회의론에 담긴 진 리>를 간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진리란 <전체로서의 세계 속에 놓인 인간의 토대, 혹은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인간의 관계란 앎의 관 계 즉 우리가 앎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유의] 관계는 아니다>는 것 을 말한다(p. 껴 1). 확신컨대, 우리가 간과하지 말기를 카벨이 바라는 것은 그가 생각 하고 있듯이 퍽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 점을 간 파하기 위해 꼭 버클리와 데카르트를 통해 되돌아 <보아야만> 하는 가? 왜 (카벨의 영웅들의 목록 중 한 가지만 인용하자면) <루소와 서 로우3 ) 와 키 에르케고르와 톨스토이 Leo Tols t o y와 비트겐슈타인>으로 3) Hen ry D. Thoreau, 1817-1862: 미국의 저술가.(역주)
는 충분하지 못한가? 왜 < 의부 세계 > 의 문제 를 또 꺼내는 것일까? 카벨은 때때로 다음과 같이 논 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보게 해주는 데 있어서 비트겐슈타인은 루 소나 서로우나 키에르케고르나 톨스토이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외부 세계를 의심한다고 외쳐댔던 사람들이 제기 한 문제들을 논의하는 데 수없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의심을 진지하게 간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말은 마치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에서 니폴레옹을 연구하는 데에 수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우리가 나폴레옹을· 진지하게 간 주해야 한다는 논변처럼 보인다. 게다가, 만일에 특히 톨스토이가 러 시아인이 아니라 오히려 오스트리아인이었다면, 어쩌면 프레드릭 대 왕이 톨스토이의 목적에 더 부합된 인물이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 지로 외부 세계에 대한 회의론이라는 것도 훨씬더 일반적인 현상, 즉 카벨이 < 인간적인 조건 또는 인간성의 조건을 지적인 난제로 변모시 키려는 시도>라고 불렀던 것이, 낯익고 국지적인 현상이 되어 <영 미>의 철학에 나타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만일에 바트겐슈타인이 중부 유럽에 있었더라면, 그는 선험적인 관점에 대해 더 염려하고 회의론에 대해서는 덜 염려하는 철학 교수들을 만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쩌면 거의 똑같은 책을 썼을 것이며, 우리의 관심을 똑같은 일에 향하게 하였을 것이다 .4)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카벨의 유일한 영웅은 아니다. 의부 세계 4) 바트겐슈타인을 <반-후설론자T he an ti -Husserl> 로 다루고 있는 부버레스 Jac qu e s Bouveresse 의 논문 (Le My the de l'In te r io ri te(Pa ris: Edition s Minu it, 1978) 에 수록됨))을 볼 것
에 관한 문제 를 무시하는 일은 오스틴이나, 무어나 , 루이스C. I. Lew i s 를 읽을 때에도 관련이 <될 것이다>. 하지만 , 아마도 우리는 그들을 더 이상 읽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와는 달리, 그들은 단지 철학 교수에 <불 과하다 > . 혹자는 감각되지 않는 감각 가능한 대상에 대한 무어의 염려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준 점에 대해 오스틴에게 감사해 하거나, 판단을 종결짓는 일에 대한 루이스 의 견해에 감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동료 의사의 오진 때문 에 나중에 온 의사가 경미한 증세를 치료한 데 대한 겉치레의 감사 에 지나지 않는다 . 그것은 사람을 괴물로부터 구해준 낭만적 영웅이 나 심리치료사를 향해 느끼는 그런 유의 감사가 아니다. 하지만, 카 벨은 오스틴을 낭만적인 영웅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하며, 심지어는 루이스나 무어를 단지 교수 이상의 어떤 인물로 여기고 있는 것 같 다. 그래서 그는 <루이스의 가르침에 포함된 철학적 영감의 진실성 > 울 운위한다. 카벨의 모토 가운데 하나는· 리처드스I. A R i chards 가 무어의 <치열함>에 바친 찬사이댜 카벨은 『이성의 외침 』 의 일부분 을 오스틴에게 헌정(獻星)하고 있으며, 일부분은 클라크 Thom p son Clarke 에게 헌정하고 있다 . 클라크는 < 일상 언어의 지배력은 •• …·그 것이 전통적 인식론에 대해 파괴적인 것 못지 않게 지탱력을 지니고 있다>(p. xii)는 점을 자기에게 깨우쳐주었다고 카벨은 말한다 . 더 일 반적으로 카벨은 자신의 집필 동기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 라고말한댜 [그 동기 중 하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저서 『철 학적 탐구 』 에 담긴 철학 과 일상 언어의 철학(그 당시에는 때때로 옥스포드 철학이라고 불리기도 한 것이며 여기서는 주로 오스틴의 저술에 의해 대표되는 것을 말함)을 수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미국의 철학적 삶의 범주 내에서 발생하 는 사건들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마치 철학을 위한 길이 철 학적 삶의 범주 내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에 노출되어 항상 애매성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기라도 하듯이.(p. xiv) 그 이유에 대해 카벨은 이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과 오스틴에 대한 수용은 [미국의] 철학 문화 에 아직도 공적이며 역사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 다. 나는 이것이 나쁜 것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의 저술은 그 자체로 전문화로 이르게 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며 ……만일 오스틴이 전 문화를 원하였다면 그것은 철학다운 것이 아니었다. 또 특정한 것을 수용 하지 않고 있는 점이 놀라운 일이라고 내가 말하는 것도 아니다. 『철학적 탐구』는 적어도 지난 세기의 주요한 모더니스트 저술들과 마찬가지로, 논 리적으로 말해서 내밀(內密)한 것이다. 바꿔 말해서 그러한 저술은 독자 들을 내부인과 의부인으로 가르고자 하며 (그리고 그 속에서도 각각의 멤 버들을 또 가르고자 한다)…… 현재 출판 상황이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여 전히 수용적이라고 내가 말할 때, 물론 그의 저서 하나만을 지칭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저술이 본질적으로 그리고 항상 수용적이지 <않을 수 없 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사상은 반드시 전문화를 거부하지 않을 수 없 는 것처 럼(p. xvi) 그러나 만일에 전문적인 것에 대해 괘념치 않는다면, 우리가 <미 국의 철학적 삶>에 대해 염려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후자와 같은 구절은 다만 유행을 따르는 [대학의] 철학과에서 작금에 나타나는· 몇 몇 경향들을 언급할 뿐이다. 지성인들 일반의 경우, 비트겐슈타인은 사실상 점점 더 많이 읽히고 또 활용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과 <옥 스포드 철학>이 케케묵은 놀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오로지 특정한 철 학과들 내부에 국한될 뿐이다. 카벨이 관심 갖고 있는 것은 그와 같 이 편협한 문제도 아니며, 그 문제가 그로 하여금 <철학을 위한 특 정한 길이 철학적 삶의 범주 내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에 의해 노출되
어 항상 애매성으 로 전락할 위 험 에 처 해 있다 > 고 결론을 내리게 유 도한 것도 아니다 카벨은 <철 학 을 문제의 집합이 아니라 덱 스 트의 집합이라고 이해하기 를> 원한다고 말하며 , 또 <철 학자의 철학에 대 한 기여는 …… < 주어진 > 문제의 집합에 대한 기여 도 로 이해되어서 는 안 된다 > 고 믿는다고 말한다(pp. 3-4).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 미국의 철학적 삶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 을 상기시켜 주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 잊게 해주는 > 데 더 잘 봉사할 것이라고 카 벨이 결론을 내릴 거라는 기대를 갖게 한댜 그가 언급하고 있는 < 사건들>에 대한 카벨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문화에서 차지하는 학술적인 철학의 지위에 대한 마찬가지로 애매모 호한 태도의 일부분에 해당된다 . 어떤 경우 그는 <철 학 > 이란 말을 아주 광의적인 의미로 사용하여, < 한 문화가 그 문화 자체를 산 출 하 는 비평>(p. 175) 이나, < 어른들에 대한 교육 > (p. 125) 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 그는 그것을 협의의 < 전문적인 > 의미로 사용하여, 인식론적 회의론이 철학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듯이 보이기도 하며, 철학과들에서 유행하는 것이 철학의 주요 문젯거리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듯이 보이가도 한다. 그는 < 철학 > 과 <회의론 > 을 거의 동의어로 취급하고 있는 다음 인용 구절처럼 이러한 두 가지 의미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다. 그러나 철학자는 우리들에게 문젯거리를 < 만들어야 > 하며, 어떤 의미 에서 그것이 그토록 문제가 < 되어야 > 하는지를 밝혀야 한다. 비록 지적 인 발전은 그러한 일을 누군가가 해내는 것에 종종 의존하긴 하지만, 철 학자가 이끌어가는 결론은 그의 탐구와 유사한 것처럼 보이는 탐구들에서 우리가 당연히 기대해야 할 것을 훨씬 넘어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일부 철학자들은 그 사실 자체가 철학의 힘과 오묘함을 증명하는 것으로 여기는 반면에, 다른 철학자들은 그 사실이 단지 철학의 지적 경박성을 과시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만일 회의론에
대해 이 두 가지 방식을 모두 느끼는 사람은 이 갈등 자체가, 두 방식 중 어느 쪽도 회의론을 상세히 표현할 수 없으며 또 표현하려 하지 않는, 정 신에 관한 어떤 중요한 사실을 드러내거나 감추는 것이라고 감지할 것이 댜(p. 159) …… 일상 언어의 방법들은 (그것의 명예를 훼손코자 한 많은 사람들 이 아마도 무턱대고 그렇게 하지는 않았겠지만, 일상 언어가 실제로 그렇 다고 보았듯이) 철학예의 충동을 하찮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철학함 자 체의 내부에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 할 철학에 대한 비판이 얼마나 복합 적이고도 진지한 야망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p. 166) 이 두 구절 중 후자에서 <철학에의 충동>이란 <일상언어철학자 들>이 그 분야에 전문적인 (인식론적 회의론) 문제를 제기하는 충동 과 암묵적으로 동일시되고 있다. 어느 누구도 문화의 비판이 경박하 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상 언어의 명예를 훼손코자 한 많 은 사람들은 철학자들이 <외부 세계>에 [관한 문제에만] 매달림으 로 해서 그러한 비판을 제시할 의무를 경박스럽게 외면하였다고 생 각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 불평은 내 생각으로는 카벨이 잘못 뒤섞어버린 두 가지 지적인 현상들을 다음과 같이 구별지음으로써 더 분명히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a) 리드T homas Re i d 가 <관념 이론들>(지각(知登)을 죽각적 이고도 확실히 알려진 감각 소여에 의해 분석하는 이론)이라고 불렀던 이론들에 의해 창안된 <전문적인> 철학자들의 회의론. (b) 우리가 사용하는 낱말들이 과연 세계의 실제 모습과 어떠한 관계 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칸트적인, 낭만적인 염려.
이 두 가지 현상은 다양한 역사적 연관성을 갖고 있긴 하겠지만, 변증론상으로는 상호 독립적이다 가령 누군가가 관념 이론 들 가운데 오스틴적인 방식을 경멸한다고 가정해 보자 . 오스틴과는 달리, 그 사 람은 한편으로는 세계와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에 대한 서술이 구별 되며 그 둘은 비교될 수 없다는 생각, 바꿔 말해서 카벨의 말마따나 <언어 놀이의 HR} > 으로 나가는 길이 없다는 생각에 대해 황당한 느낌을 갖게 될 것 이다 . 또 위의 (a) 와 (b) 양자는 카벨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는 제 3 의 현상인 (c) 와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c) [즉 그 현상이란] 내가 < 마치 전체로서의 세계의 바깥에 우리들이 있는 것처럼> 간주하면서 세계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말했던 경 험으로서, 이것은 마치 한 대상을 여러 위치 중 어느 한 위치에서 바라보 는 것과 같다. 나는 고전적 인식론에서 (그리고 실제로는 도덕철학에서도) 이 경험이 근본적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경험은 때때로 세계를 아는 데 있어서나 혹은 세계에 어떤 행위를 함에 있어서 무력감으로 나타 나기도 하였다. 나는 그 경험이 존재의 불안정성과 임의성에 대한 실존주 의자의 (혹은 예컨대 산타야나 Geor g e San t a y ana 의) 의미, 즉 사물들은 있는 그대로의 것이라는 사실에 담긴 철저한 우연성의 의미 속에서도 작 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자신을 난처하게 히는 물음을 향해 철학자가 그의 토마토를 굴릴 때 존재라는 것은 그 토마토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린다. ……(p. 236) 여기서 문제의 토마토란 프라이스H . R Pri ce 가 그의 저서 『지각론 Percep ti on 』의 서두에서 언급하였던 것으로서, <그것에 관해 내가 의심할 수 있는 것들은 대단히 많다>고 말했던 그 토마토5 ) 를 가리킨 5) 뒤에서 조금씩 암시되지만, 그 토마토는 가령 꼭지 쪽을 보고 있을 때는 그 뒷
쪽이 안 보이는 둥 지각의 문제에 관한 논의에서, 지각 대상의 한 예로 거론된 것이다.(역주)
댜 어조의 차이로 볼 때 피히테의 저서 『 인간의 운명 Vom ti on of Man and Nausea 』 과 프라이스의 그 책을 비교해 말한다면, 아마도 프라이스의 경우에는 (a) 를 전제로 하지만, 피히테는 (b) 를 표현하고 있으며, 사르트르는 (c) 를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프 라이스는 자신의 물음이 난처한 것이라고 보지 않으며, 그의 논의 주 제와 연관된 대부분의 작가들 즉 카벨이 < 영미의 전통 > 이라고 부르 는 것에 속한 대부분의 작가들도 그 물음을 난처한 것으로 보지 않 는다. 하지만, 카벨은 이 작가들을 칸트와 함께 취급하며, 다음과 같 은 구절에서 (a) 와 (b) 를 한 덩어리가 되게 해버린다. 로크는 기분풀이와 특유의 영국적인 센스를 동원해 회의론을 단지 겉 으로만 회피하였다. 버클리는 신을 통해서, 데카르트는 신과 지적인 <지 각(知覺) > 의 특별한 어떤 능력을 통해서 그것을 회피하였다. 칸트는 그 와 같은 특별한 능력을 부정하면서, 세계를 창안해 내는 범주를 통해서 그것을 회피하였다. 흄은 그가 할 수 있는 한 <자연적인 신념>을 통해서 그렇게 하였으며, 무어는 격노(激怒)한 상식을 통해서 그렇게 하였다. 그 리고 그러한 논변을 좇았던 모든 사람들은 그 논변에 응할 때 마치 세계 에 관한 어떤 중요한 발견이라도 되는듯이, 즉 그것이 함축하~큰 바가 대 재앙을 야기시키는 것이며 이제껏 우리가 모두가 믿었던 것들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라도 되는듯이 반응한다.(pp. 222-223) 문제의 그 <논변>이란 통상적인 [인식론] 교과서를 가리키는 것 으로, 그 논변 속에서는 우리가 토마토의 전체 모습을 볼 수가 없고 오직 ……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궁지에 몰리는 프라이 스식의 논변을 말한다. 그러므로 카벨이 <그 논변을 좇았던 모든 이
들은 그 논변에 응할 떄 그것이 마치 대재앙의 발견인 것처럼 반응 한다 > 라고 말할 때, 그는 모호한 아이러니 를 말하고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단순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로크와 흄을 포함해서 그 들 중 대부분은 관념 이론의 회의적인 결과 를 생각할 때, 마치 혁명 적인 과학 이론의 발견자 들 이 그 이론이 야기시킨 (쿤이 말하는· 의미 에서의) < 변칙 사례 들> 을 생각하는 것과 똑 같 이 생각하였다. 그 들 은 그와 같은 것들을 성가시고 또 불행한 것이라고 간주하긴 하였으나, 결코 대재앙이거나 보조 이론을 채용할 빌미 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 기지는 않았다. (만일에 카벨이 < 겉으로만 > 이라는 표현이나 < 그가 할 수 있는 한 > 등의 표현으로써, 로크와 흄이 당연히 난처해 < 했어야 한 다> 는 것을 뜻한다면, 카벨은 자신이 내세우려는 논지를 달성하지 못 한 것이다.) 그 토마토의 나머지 부분을 볼 수 없다는 점에 대해 정말로 실존적이게 될 사람들은, 교실에서의 지루함을 속임수에 의지해 달래 야 하는 인식론 강사들이다. 문제의 그 토마토가 대재앙을 함축하고 있다고 정말로 느끼고 있는 불안한 어떤 대학 신입생과 마주치게 되 면, 강사들은 그 모든 것이 < 다만 철학에 불과하다 > 는 점을 확신시 키기 위해 그 학생보다 더 건장한 동료 학생들과 합세하는 일에 급 급해 한댜 만일 철학의 전문화에 저항하는 비트겐슈타인과 니체와 같은 작가 들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면, (마치 몽테뉴, 스피노자, 포이에르바하 가 종교의 내부에 국한되지 < 않는 > 종교의 비판을 제시했듯이) 철학의 내부에만 국한되지 않는 철학의 비판에 이르게 되리라는 점도 으레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카벨은 단지 문화에 대한 비판은 모두 <철학>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인식론을 <철학>과 동일시하는 협소 하고도 전문화된 관점을 논의하다가, 그와 같은 관점을 바판하는 것 도 [문화 비판이므로] 철학의 테두리에 포함된다는 식의 더 넓은 관 점에 대한 논의로 별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간다. 이런 애매성을 해소 시키기 위해 카벨은 협의의 회의론, 즉 철학 교수들 (가령 그린과 베
인, 브래 들 리 (" 와 무어 그리고 오스틴과 에이어 A J. Ay e r 등) 사이에서 통상적으로 논의된 의미의 희의론이, 더 심오하고도 낭만적인 의미에 서의 회의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웠어야 했다 카벨은 < 회의론 > 이란 것이 어른들의 자기 교육과, 문화의 자 기 비판에 이르게 하는 자극으로서 좋은 것이라는 점을 밝혔어야 했 다. 그러고 나서 카벨은 넓은 의미의 희의론을 협소하고도 전문적인 의미의 회의론과 연관지었어야 했다.
6) F. H. Bradley, 1846-1924: 영국의 관념론 철학자.(역주)
그의 저서에 대한 나의 주된 불만은, 카벨이 그와 같은 연관성을 옹호하는 논변을 펼치지도 않은 채 그것을 당연시하고 있다는 점이 댜 카벨은 무어나 오스틴과 같은 인물들을 중요한 사상가로 보게 도 움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실에 관한 물음을 회피한 채 오 히려 선험적이며 법적인 물음, 즉 어떻게 하면 그들이 겉보기와는 반 대로 중요한 인물들이 될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하고 있 댜 내가 보기에는 그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바와 똑같은 이유 로, 카벨은 <전문적>인 철학자이다 . 우리가 대학 초년생들에게 데카 르트나 브래들리는 꼭 읽어야 될 인물, 즉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인간성과 접촉할 수 있도록 하기 위 해 꼭 읽어야 될 인물이라며 과제를 내어 전염시킨 <철학적 문제 들>을 카벨은 <당연시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a), (b), (c) 간에 연관성을 수립하려고 카벨은 <데카 르트적 프로젝트>의 특징이라고 간주하는 특정한 지식 개념을, <회 의론의 원인>이라고 간주하는 인간의 유한성 탈피의 시도와 연관시 키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데카르트적 전통에서 추구된 바와 같이 지식 전체의 타당성을 평가하 는 프로젝트는 특정한 지식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그래서 우리를 특정한
지식의 < 문제 > 로 이 끌 어 간 다) . 나 로 서 는 전 혀 만 족할 수 없 는 것 이라고 성 격 규명 을 한 바 있지만 , 그 지식 개 념은 지식 이 란 곧 세계의 실 재성 을 드 러내 는 것 이라고 말 한다 . 나 는 그 개 념을 예 컨 대 오 스 틴의 지식 개 념, 즉 지식이란 사 물 에 대 한 식 별이나 안 지 라 는 지 식 개 념 과 대비시켰다 . (p . 224) 이 대비는 실질적이며 중요하다고 생각되나, 내가 보기에는 카벨 의 의도에 봉사하는 것 같지 않다 . 그 대비는 한편으론 칸트가 말한 획득 불가능한 지식, 즉 우리들의 언어가 아니라 사물 < 자체의 > 언 어에 의해 구성된 물자체에 대한 지식과, 다른 한편으론 우리가 실제 사용하고 있는 언어 놀이에서 통상적인 방식에 의해 < 정당화 > 된다 는 의미에서 정당화된, 참된 신념으로서의 지식을 대비한 것이다. 칸 트는 인식론을 낭만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 그래서 도덕적 신앙이 들 어설 자리를 마련하였다. 관념 이론은, 리드 Thomas Re i d 가 그렇게 알고 있었듯이 , 선험적인 것으로 되기 이전에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 았댜 그것은 갈릴레오-뉴턴의 세계관이 부수적으로 초래한 부 산물 로서, 잘 디듬어지지도 않은 것이었다. 반면에 카벨이 논점 (b) 와 (c), 죽 칸트와 사르트르를 연관시키는 일이 <가능하긴 > 할 것이다. 카벨은 우리의 언어 놀이나 우리가 수 행하는 방식의 정당화나 우리의 관념이나 언어에 의한 매개 를 통하 지 않는 불가능한 지식 ――- < (‘우리의’ 세계가 아니라) 세계의 실재성 이 드러남>이라는 의미의 지식 一_ 一 에 대한 칸트적인 희망은, 그와 같이 불가능한 지식만이 사물들의 가날픈 우연성에 대한 우리들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준다는 사르트르적인 의미에 의해 산출된다는 식의 논지를 펴서, 대비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각 현상에 서 비지각(非知 覺 ) 현상으로 옮겨가는 퍼스식의 퍼즐을 카벨이 어떻 게 칸트식의 희망이나, 사르트르식의 두려움과 연관시킬 수 있는지 나는 알수가 없다.
카벨은 그의 표현에서 보듯이, 인식론적 회의론이란 가령 방울새 가 아니라 <물 리적 대상 들> , 나의 누이가 아니라 < 살다가 죽는 덧 없는 인간들 > 처럼 < 일반적인 대상 > 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여, 그와 같은 연관을 이루어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죽 문 제의 대상이 방울새인지 솔새인지, 나의 누이가 실망했는지 기뻐했는 지에 대해서는 상식적인 대답이 있으며 그 대답들은 상식적으로 정 당화되는 것인데 비하여, 대학 초년생에게 인식론을 가르치기 위해서 는 상식에서 출발하여 반드시 일반화를 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데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것이 매우 멋진 것이긴 하나, 카벨이 행하 고자 하는 작업은 아니다. 즉 그런 주장은 우리를 버클리에서 칸트 로, 논점 (a) 에서 (b) 로, 지각상의 착오에서 낭만으로 건너가게 하지 못한다. 그것이 보여주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지각의 문제>를 빼버 리고 감각 소여를 생략한 채 지각에 관한 문제들이 분명하게 설명하 지 < 않는> < 현상>과 <그것 자체>를 대조시켜서, 우리가 대학 초 년생을 토마토에 관한 하찮은 이야기로부터 물자체라는 심각한 이야 기로 이끌어갈 수 있다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토마토를 < 감각 가능한 소여 sens i b i l i a> 로 쪼개는 일에 집 착하는 한, 오스틴이 말했듯이 <그렇게 말할 때가 있는가 하면, 언젠 가 되돌려받는 때가 있는 법이다>. 즉 당신이 토마토를 그렇게 쪼겠 다면 언젠가는 다시 본디 모습으로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 빨강은 < 외부>에 있는가 아니면 <내부>에 있는가라는 로크식의 물음을 벗 어나서, 그 대신에 <우리 판단의 정합성 이외에 믿을 수 있는 게 과 연 있는가?>라는 칸트식의 낭만적인 물음으로 옮겨갈 때라야 대학 초년생들은 비로소 힌트를 얻게 된다. <마음의 내부/의부>라는 대비 와 <현상/그것 자체>라는 대비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 .7) <현 7) 하지만, 최근에 철학자들이 이 두 가지 대비를 다시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가 령 윌리엄스 Bernard W illi ams 는 그의 저서 『 데카르트: 순수 탐구의 프로젝트 』 에서 <절대적 개념으로서의 실재>라는 관념을 통해 데카르트의 프로젝트룰 복
원하려 한다. 거기서 윌리엄스는 그 관 념이 지식의 본질에 대 한 우리의 직관, 지식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직관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 한다. 그가 정식화한 바에 따르자면, 그 관념은 < 사고오H 트 독립적인 세계가 어 떠할 것인지에 대한 확정적인 그림 >(월 리엄스의 책 , p. 65) 인지 ( 즉 칸트가 말 했듯이 우리가 가질 수 없는 유의 것인지) 혹은 <특별 히 우리 것도 아니고 특 별히 우리 경험에 상대적이지도 않는 개념 들을 이용 > 한 세계에 대한 서술(같은 책, p. 244) 인지는 애매하다 이중 후자는 < 유사한 대상 > 이라는 로크의 관념을 윌리엄스가 (내 생각에는 성공적이지 못하게) 변형시킨 것 이다 . 또 다 른 예는 네이글 Thomas Na g el 이 사용하는 <객 관적 대( 對 ) 주관적 > 이라는 구분이다. 그는 이것을 가령 도덕과 관련된 상황의 특징에 대한 < 인격적pe rsonal > 설명 과 < 비인격적> 설명 간의 구분과 , 또 언어적으로 표현 불가능한 경험의 현상적 성격과 일상의 공적인 용어에 의한 그 경험에 대한 성격 규명 간의 구분 등 두 가지 에 모두 사용한다 (T. Nag e l, Morta l Qu esti on s(Cambri dg e : Cambri dg e Un ive rsit y Press, 1978), Chap. 14 「주관적 - 객관적」 참조). 내가 보기에 윌리 엄스와 네이글은 수직적인 것(<간주관적>이리는· 의미에서 <객 관적 > 이라는 것)과 비수직적인 것(<단지 그렇게 드러남>이라는 의미에서 < 주관적>이라는 것) 사이의 대비를, 전혀 다른 유의 대비, 즉 의사 전달이 가능한 것(우리의 개 념이 파악한 것)과 의사 전달이 불가능한 것(우리의 개념이 파악하지 못할 수 있거나, 반드시 파악에 실패하는 것) 사이의 대비와 잘못 뒤섞어버렸다.
상 > 이란 대체로 < 우리 들 의 언어 놀 이, 규약, 생활 양식, 정당화의 기 준 안에서 >를 의미한다. < 마음의 내부 > 란, 리드가 매우 분명히 간 파했듯이 현금화되지 않은 바유이며 어쩌면 현금화 불가능한 비유일 것이다 . 칸트가 말한 현상 세계란 프라이스가 말한 토마토 를 도매하 는 곳이 아니댜 그것은 논점을 바꿔버 린 것으로서 (a) 보다는 (b) 에 천착하는 방식이다 . 회의론은 오직 일반적 대상 들 에 대해서만 유의미 하다는 카벨의 논점은 , 그가 밝히기 를 원치 않는 것이 무엇인지 를 밝 혀주고 있댜 그것은 우리가 오스틴과 라일에 관심을 갖고서 에이어 나 프라이스를 훌찍 떠나버릴 수도 있으며, 또 진지한 사상가들을 향 해 곧장 가버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카벨은 자신이 <영어권의 철학과에 구현된 영미 전통과는 반대되 는 [의미로서의] 철학하기의 전통이나 관념 > 에 흥미를 갖고 있다고 (불행히도 전문화된 용어로) 말한다 . 그러나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영미의 전통과 대 륙 의 전통을 연계시키려 하였던 일시적이고 아 마추어 같은 젊은 시 절 의 시도 들을 세련되게 하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서로 껄끄러워해 온 두 전통들을 재조사해 보고, 그렇듯 나눠짐 으로 인해 우리가 잃은 게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글을 쓰려는 것이, 여기 언급된 나의 초기 저작들에 영감을 준 배경으로 쭉 작용해 왔다는 점을 그 시도들이 밝혀주기 를 원해서다 . (p. xiii)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도들의 전략은 분명하다. 카벨이 두 전통 을 연계시키는 방식은 대부분의 교량 건설자들이 사용하는 방식, 즉 강의 차안(此 岸 )에서 시작해 다리를 놓아가는 방식과는 반대되는 것 이댜 통상 우리 영미인들은 대륙의 전통이 어떤 훌륭한 논변을 갖고 있다는 점을 밝혀 그 전통을 탈낭만화(脫浪浚化)하려 한다. 반면에 카벨은 영미의 전통이 훌륭한 논변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멀詩i, 그 전통을 낭만화하려 한다. 그가 말하듯이, <감각에만 의존할 경우 대상은 사라지고 미지의 것이 되고 만다>(p. 222) 는 점에 대한 이른 바 <발견>이란 것도, < 감각이라 불리는 것의 창안물, 변증론적 생 산물 , 혹은 역사―철학적 구성물 > 을 일부러 끼워넣고 볼 때라야 비로 소 나타나는 무대 효과에 불과하다. 이 발견이란 것이 가령 골드버그 Rube Goldber g나 썰 Ronald Searle 에게는 전혀 적절한 주제가 아니 었다는 점(오스틴은 그것을 이렇게 생각했다)을 밝히기 위해서라면, 카벨은 그것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던 동기(動機)들이 대륙의 전통에 서 사용된 다양한 장치들의 동기와 똑같다거나, 적어도 마찬가지로 홍미롭다는 점을 밝혔어야 했다. 카벨의 전략은 논점 (c), 즉 사르트르적 의미의 우연성에서 그러한 동기를 찾아내고,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서술에서 보이는 인간성이 나 인간의 유한성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그런 의미의 우연성을 피하 려는 시도라고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카벨은 <일상 언어 [학파]의 철학>을 <근대 철학에 의해 부정 • 간과되었던 인간의 자아에 대한
재천명 >( p . 154) 의 시도라고 평가하고자 하며, 이에 관한 논 의의 역 사는 가히 <철 학과 인간적인 것의 거부 > (p. 2 07) 라는 제목을 붙 이 기 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댜 카벨이 데카 르트적 인 프로젝트를 분석하여, 그것은 인간의 조건을 초극하고자 한 이러한 요구의 표현이라고 한 점은 정말로 옳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카벨이 자신의 이 논점을 지나치게 현학적( 衛學的 )이게 해버렸다고 생각한다. ( 질송 E. Gil so n , 버트 B urtt, 마리탱J. Ma ritain, 랜들 G. Randall, 말콤 N. Malcolm 과 그 밖의 많은 이들도 그렇게 말했듯이) 데카르트주의는 사실상 불가능한 확실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죽 거기서 사용 - 하는 방법론적 유아 론(唯我 論, sol ip s i sm) 은 우리가 모두 따르기 엔 불가능한 요구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데카르트주의에 대한 진단으로선 충분할 것 같 댜 자기가 가진 자연의 빛만을 사용함으로써 스스로 를 신(神)이나 동료 인간들로부터 분리시키는 그와 같은 [하늘에서 쫓겨난 오만한 반역의 천사장] 루시퍼 Luc if er 식의 시도는, 카벨이 명명하였듯이 < 언 어 놀이의 바깥에 있는 ……절대적 단순자( 單純者 ) > (명석 판명한 관 념, 감각 소여, 의심의 여지 없는 제 1 원리, 원초적 용어 등)(p. 226) 의 창안을 설명해 주는 충분한 동기로 늘 간주되어 왔다 . 하지만, 카벨은 <확실성의 추구>는 데카르트식의 프로젝트에 대 한 부적절한 진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프로젝트에 대한 듀이식 의 거부를 <대상의 존재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 고 비판하면서, <이미 확실성의 추구를 향해 앞질러가고 있는 철학 자에게 문제의 관건은 대상의 존재 여부라고 말하기는 이미 때늦은 일이다>(p. 224-225) 라고 말한다. 이 때 아마도 카벨은, 외부 세계에 대한 교과서적 회의론을 <세계 전체의 日 R} 에 있는 자기를 보는 > 경험과 연관시키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데카르트적인 병(病)을 질 송국두이-말콤처럼 통상적으로 취급하는 일에 공감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말은 의심할 바 없이 맞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신경병리학적으로 혼돈 상태에 빠졌다기보다는 온 마음이 정신
착란에 빠진 사람은 심리치료사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 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 은 어떻게 그와 같은 일이 < 가 능 하냐 >는 것 , 어떻게 (a) 와 (c) 를 연관시키는 일이 < 가능 할 수 있 느 냐 > 는 것, 교과서적인 < 영미의 > 인식론을 모든 것의 우 연성이라는 의미와 긴밀히 연관시키는 일이 어떻게 < 가능할 수 있느 냐 > 는 것 이다. 카벨의 회의론 논의에 대한 나의 불만은, 그러한 가능성이 아직 현 실화되지 않은 사람에게 그 가능성이 무엇인지를 카벨이 그의 저서 룰 통해 한번도 분명히 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논점 (b) 를 논점 (c) 와 연관시키기는 비교적 쉽다. 특정한 서술을 전 제로 해야만 세계가 우리에게 알려질 수 있다는 깨달음은 세계가 자 기-서 술 sel f - desc ripti on 을 갖지 않은 채 존재한다는 것 , 즉 어느 날 우리가 배우게 될지 모를 세계 자체의 언어란 없다는 깨달음으로 이 어진댜 의미란 서술에 따라 상대적인 데에 비해 있음 e xi s t ence 은 그 렇지 않으므로,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 아무 의미도 형성 하지 못한다 > . 하지만, (a) 와 (b) 를 연관시킬 방도를 알 수 없듯이, (a) 와 (c) 를 연관시킬 방도도 알 수가 없다 . 그래서 논점 (c) 는, (a) 와 (b) 사이의 연결 고리로서 구실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상에서 나는 카벨의 저서 1 부와 2 부에 담긴 < 의부 세계> 희의 론에 관한 그의 논의를 중심으로 나의 불만들을 토로하였다. 하지만, 이 부분들에 대한 나의 불만이 그의 저서 3 부와 4 부에까지 확산되어 독자들에게 전달되지 않기를 바란다 . 3 부에서 카벨은 희의론에 대한 논의와 < 일상 언어[학파]의 철학 > 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떨쳐버린다. 그 대신 이 부분은 여러 사람들 즉 스티븐슨 Charles Ste v enson, 롤즈J ohn Rawls( 초기 저작인 「규칙의 두 개념」 이란 논문) , 프라이어 A N. Pri or 등의 도덕철학 성격에 대한 논의 가운데 잘못된 점이 무엇인가를 다루는 4 개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 다. 이 논문들은 도덕적 반성이란 원리에 대한 호소와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 즉 도덕성이란 선택에 영향을 주는 어떤 것을 일컫는 게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킨댜 카벨의 말을 인용해 본다. 도덕성은 그 자체가 거절될 수도 있게 개방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갈등 을 해소하는 < 하나의 > 가능성을 제공한다. ……갈등을 해소하거나 내포 하는 다른 방식들은 정치, 종교, 사랑과 용서, 반란, 철 희 등에 의해 제공 된다. 다른 방식들은 자주 가용하지 않거나 노골적이기 때문에 도덕성이 값진 것이다. 하지만, 도덕성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 ……(p. 269) 제 3 부는 그 자체만으로 도덕철학에 관해 최근에 출판된 저서 가운 데 가장 훌륭한 책의 하나이다. 그것은 도덕철학이란 또 다른 < 절대 적 단순자 > , 즉 자명한 원리나 기본적 가치 따위를 추구해야 한디는· 관념을 비판한 점에 있어서, 머독Iri s Murdoch 의 저서 『선의 주권 Sovereig nity of Goo 야에 필적 할 만하댜 머독과 마찬가지로 카벨은, 합리적인 행위란 원리에 입각한 행위라는 벤담-칸트-시즈위크 식의 관념에서 나온 귀결인, 도덕적 반성이란 우리들 각자가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규칙들을 발견해 가는 노력이라는 추 론을 바판한다. 카벨은 이렇게 말한다. 도덕의 맥락에서는 어떠한 규칙이나 원리도 놀이g ames 의 규제 원리 나 규정처럼 기능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우리가 놀이라고 말하는 생활 ·양식에는 그와 같이 인식되는 규칙들이 있는 데 바하여, 도덕이라 불리는 생활 양식에는 그러한 것들이 없다.…… …… [그렇다면] 철학자들은 왜 도덕 이론을 전개할 때 규칙에 호소하 는가 그리고 규칙이란 어떻게 인식되어야 하는가라는 의견이 나올 것이 다. 그 호소는 예컨대 약속은 왜 <구속력을 갖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것 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런 설명이 당신에게 <필요>하며, 또 만일에 개인 적인 결단 이상의 무엇이 요구된다는 의미가 거기에 담겨 있다면, 규칙에
대한 호소는 이미 때 늦은 것 이다. 왜냐하면 규칙이란 것들은 우리의 결단 에 의해서만 구속력을 갖가 때 문 이다. 그래서 카벨은 < 도덕적 의무의 정초(定礎) > 에 대한 추구가 < 지 식의 정초>에 대한 데카르트식의 추구와 흡사하다는 점을 간파하게 해준다. 이 두 가지는 다 언어 놀이의 바깥으로 나가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또 얘기하는 현실 속의 사람들과는 독립된 실재나 선과 접 촉할 수 있는 모종의 < 자연적인 > 길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양자는· 우리가 읽었던 책들을 읽고 함께 얘기를 나누었던 사람들과 얘기함 으로 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며 또 죽게 마련인 존재라는 점을 깨닫는 것을 방해한다 . 그 두 가지는 과거에 종교가 그렇게 해줄 거 라고 한때 생각되었던 일을, 죽 우리를 언어, 역사, 유한성의 바깥으 로 인도하여 비시간적인 것 앞에 데려다주는 일을 이제는 철학이 해 줄 거라고 생각하게끔 권유한다 . 양지는· 철학자로 하여금 자기는 공 동체에 거의 의존하지 않아서, 자기가 말하는 것은 < 사람들에게 마치 실날 같은 광선처럼 불규칙하게 작용할 것 > 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영미의 도덕철학자들이 말하는 [도덕적 반성이라는] 생활 양식에 관한 카벨의 논평은, 그의 저서 1 부와 2 부에서 전개된 영미의 인식론 자들에 대한 논평들보다 훨씬더 의적이며, 따라서 더 분명하고도 유 용하다. 도덕철학자들을 논할 때 카벨은 그들이 그렇게 행하는 이유 롤 알아채고, 한눈에 확실하게 진단하여 우리가 논점을 곧 간파하게 해준다. 인식론자들을 논할 때 카벨은 그들의 처지가 마치 원숙한 지 성에 이르기 위한 필수 과정이라도 되는 양, 우리가 반드시 겪어야 할 병처럼 취급하기를 고집한댜 카벨이 인식론의 페이소스(p a th os, 悲哀感)와 편재성(退在性, ub iquity)을 고집하기 때문에, 내가 앞에 서 주장했듯이, 그는 일시적이며 역사적 조건 안에서 벌어진 자그마 한 열광(가령 17 세기 관념 이론들 혹은 일상 언어의 철학)을, 인간의 조건이라고 혼동한다 . 반면에 3 부에서 그는 더 이상 역사를 회피하지
않는다. 그 는 한편으로 갈릴 레오 적 모 델의 과학 적 설 명과 다 른 한 편 으로 도덕적 반성과 는 달 리 과학은 < 합리 적> 이라는 철 학 적 주 장 간 의 연관성(p . 259 ff.)을 활 발 하고도 영민하게 설 명해 간다. 그래서 카 벨은 이렇게 결론 을 내린다. 어쩌면 해결 불 가능 할 것으로 보이 는 도덕 적 논 변 들 의 특 이성에 봉 착 하여 만일에 여타의 물 음 들 과 그 것 이 얼마나 다 른 지 를 생각하기 시작하 면 , 당신은 과학의 합의 도 출 능력을 설명할 수 있 는 사례 들을 찾 아내려 할 것이며 그러고 나서 과학은 합리적이지만 도덕성은 그렇지 않다 는 점 과 그 이유 를 안다는 생각이나 환상 을 갖게 될 것 이다.(p. 263) 이 부분에서 카벨은 쿤의 저서 『 과학 혁명의 구조 S tru c tu re of Sc ien ti fic Revolu ti ons 』 에서 배워 온 교훈을 적용하여 우리 로 하여 금 최근 수 세기 동안 지성의 영역을 휘감아온 덮개였던 < 과학 > 과 < 비 과학 > , <객관성 > 과 < 주관성 > , < 사실 > 과 < 가치 > , < 이성 > 과 < 감 성 > 간의 구분을 없애게 하려고 심혈을 기울여 작업하고 있다. 제 4 부는 이상하게도 < 회의론과 타자(他 者 )의 문제 > 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그것은 <승인과 취소의 사이 > 라는 더 시사적인 제목을 붙 인 제 8 장과 마찬가지 시기에 씌어진 것이다 . 카벨의 말에 따르면 이 부분은 그의 글 가운데 가장 최근에 씌어진 것이다. 앞서 언급되었듯 이 이 부분은 특히 1 군부에 수록된 것들에 비해 약 20-25 년 후에 집 필된 것이다. 나중에 와서야, 가령 r 코넥티컷의 레오파드」나 「사랑의 회피」 같은 논문에서 카벨은 원기를 회복한 듯이 보인다. 그는 훨 씬 더 강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 그는 경쟁자인 철 학자들에 대한 염려 나 인식론, 회의론, 철학 등을 특별하고도 심오하게 해주는 것이 무 엇인가에 대한 염려에서 자유롭다. 이제 그는 그와 같은 것들이 있다 는 시실을 생각할 따름이다. 4 부에서 카벨은, 타자의 몸에 대한 논리적 구성의 경우 내가 지각
한 감각질( 感싼質 sensory q ual i a) 들 이 사용된다고 가정할 때, 그 사 람의 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구성해 낼 근거를 과연 어떻게 얻 는가라는 <전문적 인 문제>를 조금도 연관시키지 않은 채, < 타자 oth e r mi nds 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문제는 무엇보다도 각자가 명시적으로 배운 심적 언어, 즉 로크식 관념들의 내부 언어로 자기 자신을 서술한 데서 연유한다고 비트겐슈타인은 가르쳤다. 그래서 혹 자는 우리가 로크와 관념 이론을 배제하기만 하면 더 이상은 사적 언어나, 타자의 내부가 공허할 가능성 따위를 가정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를 카벨이 반복할 것으로 기대할지 모른다. 하지만, 카벨은 그러 한 기대들을 일축하고 그 대신에 그와 같은 가정에 담긴 속뜻을 곧 장 정독해 간댜 [사적 언어라는] 이 환상에 깔려 있는 소망은 회의론에 깔려 있는 소망, 즉 나의 지식-주장과 그 주장에 해당되는 대상들 간의 연관은 나의 개입 이나 동의를 받지 않고 발생한다는 소망을 포함하고 있다. 그 소망이 사 라지지 않는 한 그것은 만족될 수가 없다. 나 자신에 대한 탐구는 반드시 성공적이어야 한다는 확신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나 자신에 대한 앎의 경 우 그와 같은 좌절감이 이중으로 가중된다.(pp. 351-352) <타자의 문제>를 이렇게 독해하는 방식은 통상적으로 그 문제가 자라났던 토양, 즉 경험론과 현상주의라는 토양에서 그것을 뽑아내어 대륙철학의 문제로 이식(移植)하는· 일이다. 이제 그 문제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혹은 [사르트르의] 『존 재와 무』를 읽고 난 다음에 갖는 유의 문제가 된다. 이 일은 타자에 관해 무언가 흥미로운 것을 찾고자 원한다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좋은 일로서, 그것은 <전문적>인 영미의 인식론적 물음이 낭만적인 칸트적 물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논점 (a) 가 논점 (b) 와 어떤 관계 가 있는지 등에 대한 물음을 무시해 버리는 일이다.
후기의 카벨이 전기의 카벨에 비해, 즉 4 부가 1-2 부에 비해 갖는 장점 가운데 하나는 카벨이 < 정말로 > 이 물음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그는 < 전문가 >둘 이 행하는 바가 무엇과 연관되어 있는 가를 더 이상 괘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는 앞에서 자신 이 시사했던 문제, 즉 < 인간의 자아 회복 > 과 근대 철학의 < 인간성 에 대한 거부 > 를 마침내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마음에 두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요약될 수 있다. 희의론자는 확실성의 주장이 눈을 감게 될 가능성, 혹은 확실성의 주장 이 감게 해버릴 눈들이 가능하다는 점을 주입시킨다. 그것은 지성적 양심 의 목소리, 아니 그런 목소리의 흉내이댜 비트겐슈타인은, < 그들은 꽉 막 혔다>라고 대답한다. 그 말은 인간적 양심의 소리다. …• •• 지적 한계에 대 한 회의론자의 그림에 반대하여,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그 림을 제시한다.(p. 431)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찾아볼 것인가? 아마 도 인식론 강좌나 <영미> 철학자들이 전공으로 하고 있는 과학에 대한 반성 따위보다는, 오히려 소설과 연극과 <대륙철학>의 저서들 에서 찾게 될 것이다. 과학적 픽션은 애초부터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설 수 있으므로 비극을 담지 못한다 . 이 생각은 , 과학적 상상 혹은 픽션이 회의론을 제기하는 데 충분하다고 간주하는 철학자들의 직관 __- 가령 나의 지식을 총동원해 생각해 볼 때 나는 기껏해야 통(tf fi )속의 뇌(腦)일 것이라는 상상――~과 나의 직관이 다른 까닭을 설명해 준다.(p . 457) 철학이 회피해 왔던 인간의 자아란, 사람들의 행위를 예측하고 통 제하기 위해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모든 어휘들 __- 과학이나 준
-과학이라는 의미의 철학에는 전혀 쓸모없는 어휘들-로 서술된 어떤 것이다. 헤겔과 사르트르도 그렇게 말했듯이, < 문예 > 가 말해 주는 바에 의하면 우리의 동료 인간들에 관해 말하고 거래를 하는 데 쓰일 어떠한 보편적인 종교적, 과학적, 철학적 어휘도 없지만, 우 리는 그러한 것이 반드시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비 극 과 희극은 이 가능성, 즉 나에 대한 수많은 참된 서술들 가운데 하 나는 내가 누구인가를 말해 줄 것이러는 가능성으로 채워진 것에 불과하 다 . (p . 388) 칸트 이전의, 선(先)-낭만적인 철학은 그러한 가능성이 현실화되 었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한 유형의 철학(다론 곳에서는 많이 소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미의 철학과에 남아 있는 그 유형의 철학)에 의해 방해를 받았던, [인간의 자아에 대한] 자기-인식이란 바로 다음과 같은 인식이다. 애초의 제정신 s anity은 외부 세계에 관해서 회의론 없이는 내가 살아 갈 수 없다는 점을 깨닫기를 요구한 반면에, 마지막의 제정신은 타자에 관해서 회의론 없이도 내가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깨닫기를 요구한다. 나는 그렇게 한다.(p. 451) 이렇듯 <마지막 제정신>은, < 전문적>인 철학에 이르려는 충동에 서 벗어나서 <인간의 조건, 즉 인간성의 조건을 지적인 난관으로 전 환하는 것>(p. 493) 이 된다. 4 부는 탁월한 문장들로 가득 차 있는데, 그중 가장 훌륭한 논평 가운데 하나를 통해 카벨은 이렇게 말한다. 유한성이 아니라,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비극의 징표이 다.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죄악의 징표로도 간주되어 왔다. 말하자
면 블레이크 HI 와 니체가 인간적인 것을 생각할 때, 유한성과 무한성의 구 분을 부정하는 일을 감행하였던 것 은 그러한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 는 비 방에서 인간성을 자유롭게 하고자 한 것이다.(p . 455)
8) Wi lliam Blake, 1757-1827: 영국의 시인, 화가.(역주)
< 근대적인> 글쓰기의 목적을 이 구절보다 더 잘 진술하기는 어려 울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 『이성의 외침 』 이라는 책의 여러 부분에 대한 나의 논의를 통해, 후 반부 (3 - 4 부)가 그 책을 중요하게 해주고 있다는 점과, 안목 있는 독 자라면 1 부나 혹은 (때때로 나타나는) 카벨의 고압적인 문체 때문에 기가 꺽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 분명해졌기를 바란다. 그 책의 중요성 을 부각시키는 한 가지 방식은, 비트겐슈타인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지를 그 책이 깨닫게 해준다는 말이다. 오스틴이나 라일과는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관념 이론을 <단순히 > 비난하는 데서 멈추게 하지 않았다. 그는 인식론에 대한 우리의 강의는 물론이고 우 리의 학문 분야, 우리의 생활 양식의 도덕적 가치에 대해 질문을 제 기하였다. 우리 철학 교수들은 금세기 위대한 작가 중 한 사람이 우 리들 가운데 나타나서, 우리 스스로는 결코 못 해냈을 표현을 통해 우리의 습관들을 묘사해 남겨주고 갔다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비트 겐슈타인은 이러한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그가 함께 해야 했던 동료 들 때문에 고통을 겪었으며, 또 그들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했다 . 그 러나 그는 견디어냈으며, 심지어 수많은 주석가들의 각고에 찬 노력 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철학 이론>이나 <철학 문제에 대한 해법> 이라고 평가될 수는 없을 글을 써냈다. 카벨은 (적어도 그의 저서 4 부 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을 그런 식으로 평가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난, 보기 드문 해석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9 ) 또한 카벨은 비트겐슈타인을
9) 이렇게 한 다른 해석자는 에드워즈이다 . 근간될 그의 저서 『 철학 없는 윤리학 Eth ics Wi tho ut Phil o soph y: Wi ttgen ste i n and the Moral L ife 』 (Ga ine -
svil le: Un ive rsit y Press of Flori da , 1982) 을 볼 것. 카벨의 저서와 에드워즈 의 저서룰 함께 놓고 보면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논평이 최근에 전환기를 맞았 다는 시사를 준다 .
그에게 적합한 동료들, 예컨대 루소, 서로우 , 키에르케고르, 톨스 토이 , 블레이크, 니체 등 유한성의 친구들 인간의 친구들과 어울리게 한 보기 드문 해석자이댜 1 0 )
10) 이 논문의 초고에 유익한 논평을 해준 쿠퍼J ohn Coo pe r 에게 감사 룰 드린다.
11 방법, 사회과학, 사회적 희망
l 무방법의 과학 갈릴레오와 그의 추종자들은 사물들을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정령 ( 精盛 )이 있다거나, 목적론적이라거나, 의인화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 미세한 입자들의 맹목적인 충돌이라고 여기는 것이 예측력을 훨씬 높여 준다는 점을 발견하였고, 그 점은 그후 수세기 동안 충분히 확 인되었다. 그들은 또 우주가 유한하고, 편안하며, 계획되었고, 인간사 와 연루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무한하고, 냉정하며, 위 안이 없는 것이라고 간주해야 다루기 쉽다는 점을 발견했다. 게다가 그들은 만일에 혹성이나 미사일이나 미립자들을 질점(質點)으로 간 주하면, 아주 간단한 수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예측의 법칙을 얻게 되리라는 것도 발견하였다. 이와 같은 발견들이 근대 기술 문명의 기 반이며, 우리는 그것에 매우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데카르 트나 칸트의 주장과는 반대로, 그 발견들이 어떤 인식론적 교훈을 적 시(摘示)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 발견들은 과학이나 합리성의 본질 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다. 특히 그 발견들은 이른바 <과 학적 방법>이라고 불리는 것을 활용한 결과도 아니요, 그 구현물도아니댜 우리가 <근 대 철학> 이라 부르는 전통 은 < 어 떻 게 과학은 그토록 성공적인가? 그 성공의 비 결 은 무엇인가? > 라고 묻는 다. 이렇게 잘 못 설정된 물음에 대한 온 갖 잘못된 대답 들 은 매력 적 이긴 하지만 현금 화 불가능한 메타포 , 즉 새로운 과학은 자연 자체가 사용하는 언어를 발견해냈다는 메타포의 여러 변종 들 이었다 . 갈릴레오가 자연의 책은 수학의 언어로 씌어 졌 다고 말했을 때, 그는 자기가 사용한 환원주의 적, 수학적 어휘가 < 우연하게 > 들 어맞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 사물들이 실제로 그렇게 되어 있는 > 방식이기 때문에 들어맞은 것 이라는 점을 의미하였다 . 그가 말한 의미는 마치 열쇠가 자물쇠에 맞 듯이, 그 어휘들은 우주에 맞기 때문에 작동한다는 것을 뜻하였다 . 그 이래로 철학자들은 <… … 때문에 작동한다 > 와, < 사물이 실제로 그렇게 되어 있는 > 이라는 관념들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시도하고, 또 실패를 거듭해 왔다 . 데카르트는 이 관념들을 갈릴레오적인 사고 ― ―쇼어떤 이유로 인 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어리석게도 간과되어 온 그 사고 __ ― 가 갖고 있는, 자연적인 명석성(明哲 性 )과 판명성( 辯 明 性 )을 통해 해명 하고자 하였다. 이 < 명석성 > 이란 관념이 판명하지 못한 점에 놀란 로크는 , 복합 관념들을 단순 관념으로 환원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자 기가 그 일을 더 잘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이 프로그램을 당시의 과학과 연관지우기 위해 로크는, 대상과 흡사한 관념들과 그 렇지 않은 관념들을 구별하는 임시 변통적인 구분을 활용하였다. 이 구분은 아주 의문투성이로, 버클리와 흄을 거쳐 칸트에 와서는 열쇠 가 작동하는 까닭은 자물쇠를 그것에 맞도록 우리 몰래 만들었기 때 문이라는, 차라리 절망적인 제의를 거쳐 우리에게 전해진다. 되돌아 보면 칸트의 제의는 게임을 포기한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왜냐하 면 그의 선험적 관념론은 지성인들이 낡은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인 해 억제하고 있었던, 목적론적이며 애니미즘(animi sm, 精 磁 崇 拜 )적
인 아리스토텔레 스 식의 관념들 에게 뒷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칸 트 를 계승한 사변 적 관 념론 자 들 은 자연의 비밀을 캐낸다는 발상을 포기해 버렸다 . 그 대신에 그 들 은 어휘 를 창안함으로 해서 세계를 만 든다는 관념 , 죽 카시러 E. Cass i rer 와 굿맨 N . Goodman 과 같은 금세 기 과학철학의 독불장군 들 에 의해 되풀이된 발상으로 그것을 대체하 였댜 이와 같은 이른바 < 독일 관념론의 과잉 현상 > 을 피하기 위해, 일군의 철학자들_대체로 < 실증주의자 > 라고 분류될 철학자들 ―― 은 과학을 비과학과 구별하고자 < 객관성 >, < 엄밀성 > , < 방법 > 등과 같은 관념들을 사용하는 노력에 지난 100 년을 소비하였다. 그들 이 그렇게 한 까닭은, 과학의 성공을 자연 자체의 언어를 발견해 냄 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는 발상은 비록 그 메타포가 현금화될 수 < 없 으며 > , 자연의 언어와 현행 과학의 언어 사이에 존재한다고 상정된 < 일치 대응 > 을 실재론이나 관념론이 설명해 낼 수 없다고 할지라도, < 여하튼 > 틀림없이 옳 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과학은 성공의 비밀을 < 갖지 >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견해, 즉 지유·민주주의의 어휘가 왜 그 토록 잘 작동하는지에 대한 설명과 마찬가지로, 갈릴레오의 어휘가 왜 그토록 잘 작동했는지에 대해서는 형이상학적이거나, 인식론적이 거나, 선험적인 어떤 설명도 존재하지 < 않는다>는 견해를 제기한 사 상가들은 극히 소수였다 . < 정신 > 이나 < 이성 > 은 그 자체의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그 본질의 발견은 <방법 > 을 제공할 것이고, 그 방법 을 따르면 현상의 배후를 꿰뚫고 자연 <그 자체의 용어>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발상을 공개적으로 기꺼이 포기하려는 이들은 매 우 드물었다. ” 쿤이 중요한 까닭은 듀이처럼 그가 이러한 극소수의 사상가에 속 1) 나는 A Repl y to Dreyf us and Tay lo r, Revie w of Meta p h ysi c s , XXIV (1980), pp. 39-46 와 잇달아 벌어진 토론(pp. 47 - 5.5)에서 이 논점을 확장한 바 있다 .
하기 때문일 것이댜 쿤과 듀이는 과학이 <실 재와의 일치 대응 > 이라 는 목표 를 향해 여행한다는 관념을 포기하라고 제안하며, 그 대신에 주어진 어떤 목적을 위해서 저 어휘보다 이 어휘가 더 잘 작동한다 고 < 그냥 > 말하라고 제안한다. 그 들 의 제안을 받아 들 인다면, 우리 는 < 과학자들은 무슨 방법을 사용하는가? > 라는 식의 물음을 묻지 않을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과학자들은 쿤이 <정 상과학 >, 즉 퍼즐 풀이라고 부른 것의 범위 안에서는 여느 인간 활동 중에 우리 모두가 사용하는 것과 똑같이 , 혼해 빠지고도 명백한 방법을 사용한 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과학자들은 규준을 어기는 사례들을 점검해 서 배제시키고, 새로운 모델의 필요성을 회피하기에 충분할 만큼 반 증 사례들을 임시 변통으로 조작하고, 그렇게 되기 어려운 사례들도 포괄할 수 있을 만한 어떤 것에 이르리라는 희망에서, 현행의 언어로 표현된 온갖 추측들을 시도한다 . 우리는 < 크세노폰X eno p hon 이 잘못 한 무엇을 폴라톤이 올바르게 했는가? > 라든가, < 루이 14 세가 잘못 한 무엇을 미라보Mir abeau 가 올바르게 했는가? > 라는 물음에 대해 인식론적으로 생산적인 대답을 기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잘못한 무엇을 갈릴레오가 올바르게 했는가?>라 는 물음에 대해서도 그러한 대답이 있다거나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 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만 갈릴레오는 좋은 아이디어를 가졌는데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덜 좋은 아이디어를 가졌다고 말하고, 갈릴레 오는 도움을 주는 용어들을 사용했는데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 지 못했다고 말할 것이다. 갈릴레오의 용어는 그가 가졌던 < 유일한> <비밀>이었다. 그는 그것이 <명석>하거나, <자연의 것>이거나, <단순>하거나, 순수 오성의 범주들과 맞기 때문에 그 용어를 택한 게 아니었다. 그냥 운 좋게 해냈던 것이다. 17 세기 철학자들이 갈릴레오의 성공에서 도출<해야 했던> 교훈은 훼웰 Whewell 식이며 쿤식의 것, 즉 과학에서 바약적 발전은 여러 선 택지들 가운데 어느 것이 참인가롤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
다도 가설을 설정함에 있어 어 느 용어가 맞는 것인가 를 찾아내는 문 제라는 교훈이다 하지만, 그 들 은 그렇게 하질 않고 앞에서 말했 듯 이, 새로운 어휘는 자연이 항상 서 술 되기 를 < 원했던 > 바로 그 어휘라는 교훈을 도출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다음 두 가지였다고 생 각된다 . 첫째, 그들은 갈릴레오의 어휘는 형이상학적 위안, 도덕적 의 의 그리고 인간적 이해 관계 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 작 동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갈릴레오식의 과학자는 무한한 공간의 겁니는 심연에 맞설 수 있었기 < 때문에 > 그토록 성공적이라고 막연 히 생각했다 . 그들은 과학자가 상식을 멀리하고 종교적인 느낌을 멀 리한 것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결심과 거리를 두는 것――-이 과학자가 성공하는 비밀의 일부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어휘가 형이상학적 위안이나 도덕적 의의가 없으면 없을수록 우리는 점점 더 < 실재와 접촉 > 하거나 , < 과학적>이거나, 실재를 그것이 원하는 대로 서술함으로 해서 그것을 통제하기에 이 른다고 말했댜 둘째 , 그들은 < 주관적인 > 관념들 즉 자연의 것이 아 니라 우리의 어휘로 표현 가능한 관념들을 제거시키는 유일한 길은, 정의상( 定義上 ) 갈릴레오의 어휘나 뉴턴의 어휘 ___ <제 1 성질>을 지시하는 용어 -에 연계될 수 없는 용어들을 피하는 것이라고 생 각했다 . 이렇듯 서로 얽히고 설킨 잘못――-만일 한 용어가 도덕적 의의를 지니지 않으며 참된 예측에 유용한 일반화에 등장한다면 그 용어는 < 실재를 지시 > 할 가망이 많다는 발상_~ 인해, <과학적 방 법 > 은 그 본질에 있어서 (윌리엄스의 말마따나 ) 21 <실재에 대한 절대 적 개념>의 추구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실재에 대한 절대적 개 념이란 우리의 표상(表 象 )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의 것, 사물이 자체 2) Bernard Wi lliam s, Desa: irtes : The Proje c t of Pure Enq u ir y(L ondon and New York: Peng uin Books, l
룰 바라본 바, 할 수만 있다면 사물이 스스로를 그렇게 묘사할 표상 둘로 표상된 것이라고 상정된 실재를 말한다. 데카르트주의를 진지하 게 간주하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월리엄스는 그 관념이 혼동이 아 니라고 생각할 뿐더러 지식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직관들 가운데 하 나라고 간주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로는, 그 관념은 무엇이 철학적인 가를 헤아리는 직관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 관념은 애초에 플라 톤에서 나온 철학적 환상의 원형(原 形 )이 데카르트식으로 변형된 것 이다 . 그 환상의 원형이란 모든 서술과 모든 표상을 조각조각 잘라 내어 , 언표가 안 된 저쪽의 것이 지닌 최선의 특징들을 언어적 표현 중 최선의 특징들과 결합시켜서, 사실상은 불가능한 의식( 意識 )의 어 떤 상태로 만드는 것을 말한댜 자연 자체의 언어를 발견해 내고 그 것을 발견했다는 것을 <안다>는 이 환상은, 갈릴레오와 뉴턴이 <냉 정하고>, <몰인정한> 수학적인 용어들로 예측에 유용한 일반화의 포괄적인 법칙들을 정형화했을 때 좀더 구체화된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시대부터 현재까지 < 합리성 >, < 방법>, < 과학 > 등은 그러한 일반화의 추구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댜 이러한 모델을 상정하지 않는다면, 근대적 의미에서의 < 과학적 방 법>이라는 관념은 진지하게 수용될 리가 없을 것이다 . 그리고 < 방 법>이란 용어는 새로운 과학 이전에, 라무스3 1 나 베이컨 F . Bacon 과 같은 사람들에게 느껴졌던 의미를 그대로 보유했을 것이다. 그와 같 은 의미에서는, 어떤 방법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해당된 논제나 주 제를 포괄할 훌륭한 목록을 갖는다는 것, 말하자면 효과적인 파일fil e 정리의 시스템을 갖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적 의미에서 방법이란 단순히 생각들을 정리한다는· 점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오직 자연 자체의 생각들은 남겨놓지만 <주관적>이거나, <비인지적>이거나, <혼동된>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 생각들을 3) Pete r Ramus, 1515-1572: 프랑스의 논리학자, 교육개혁자, 저술가.(역주)
< 여과( il 8 過)>한다는 것을 뜻한다. 인식론의 전통에서 인간의 정신을 실재와 대응되는 부분과 그렇지 않는 부분으로 가르는 이 구별은, 합 리적으로 과학을 히는· 방식과 비합리적으로 과학을 하는· 방식 간의 구별과 혼동되어 나온 것이다. 만일에 <과학적 방법 > 이란 것이 단지 주어진 탐구 영역 내에서 합리적이란 것을 뜻한다면, 그것은 < 쿤식 의 > 의미에 전적으로 합당하게 된다. 그래서 과학적 방법이란 곧 해 당 학문 분야의 통상적인 규약들을 준수하며, 데이터들을 < 과도하 게 > 조작하지 않고, 동일한 일에 종사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도 함께 갖고 있는 것이 아닌 한, 당신의 희망과 두려움이 당신의 결론에 영 향을 끼치지 않도록 하고 경험에 의한 반박에 개방적이며 탐구의 길 울 가로막지 않는 것 등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방법>과 <합 리성 > 이란 동료들의 견해를 존중하는 것과, 감각의 고지식함을 존중 하는 것 간의 적절한 균형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인식론 중심의 철학은 < 방법 > 과 <합 리성 > 이란 것이 훌륭한 인식적 태도 이상의 것, 죽 정신이 자연 자체의 언어를 배우도록 자연스럽게 부합되는 어 떤 방식을 가리키는 관념이기를 원하였다. 누구든 나처럼 <실재에 대한 절대적( < 객관적>) 개념>이나, <과 학적 방법>이라는 전통적인 관념이 명확하지도 않고 유용하지도 않 다고 믿는 사람은, < 사회과학의 방법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와 <객 관적인 도덕 이론의 규준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서로 연관된 물음은, 잘못 설정된 것이라고 보게 될 것이다 . 이 논문의 나머지 부 분에서 나는 왜 이러한 물음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지를 상세 히 밝히고, 사회과학과 도덕 양자에 관한 듀이식의 접근 방식을, 죽 법칙과 이론의 객관성보디는· 이야기 말하기 narra ti ves 와 어휘들의 유 용성을 강조하는 접근 방식을 추천하고자 한다.
2 〈가치 중립적〉 사회과학과 〈해석학적〉 사회과학 인간과 사회를 연구하는 사람은 오로지 갈릴레오식의 모델에 충실 할 때에만, 즉 가치 평가는 <정책 결정자>들에게 맡겨둔 채 < 가치 중립적 > 이며, 순수하게 서술적인 용어를 가지고 예측의 일반화 를 진 술할 때 바로소 <과학적> 이라는 생각에 대한 반발이, 최근에 일어났 다. 이 반발은 인간을 < 과학적 > 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갈릴레오식 이 아닌, < 해석학적 > 방법들을 적용해야 한다는 딜타이 W . Dil th e y 의 발상을 되살리는 일로 이어졌다.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관점에서 보면 < 과학적>이라는 관념, <방법들> 간의 선택이라는 관념 등은 완전히 혼동된 것이댜 따라서 사회과학자들은 갈릴레오식의 방향을 좇아 가치 중립성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좀더 친근하고 아리 스토텔레스적이며 < 부드러운> 어떤 것 __- 확연히 구별되는 < 인문 과학의 방법> ――-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도 오도( 誤導 )된 물음이라고 생각된다. 그러한 논쟁이 발생된 한 가지 이유는 인간에 대한 서술에 쓰인 <어떠한> 용어라도 <평가적>인 용어가 <되어버린다>는 점이 명백 해졌기 때문이다. 언어에서 <평가적>안 용어들을 분리해 내고, 평가 적 용어의 부재를 곧 학문 분야나 이론의 <과학성>을 재는 규준으 로 사용하려는 제안이 이뤄질 수 없게 된 것이다. < 어떤> 용어라도 누군가가 <평가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 어 떤 사람에게 <억압>, <원시적>, <노동자 계급> 등의 용어롤 그가 규범적으로 사용중인가, 혹은 서술적으로 사용중인가를 묻는다고 가 정할 때, 그 사람은 주어진 진술과 문맥에 따라 제멋대로 대답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용어를 서술할 때만 사용하는가, 도덕적 반성을 할 때만 사용하는가, 혹은 두 가지 경우 모두 사용하는가를 재차 묻는다면, 대답은 거의 언제나 <둘 다>일 것이다. 게다가 이 점이 중요한 논점인데, 그 대답이 <둘 다> <아니라>고 한다면, 그
용어 는 사회과 학 에 큰 도움 을 주 는 용어가 아닐 것 이다. < 정책 결 정 > 에 좋 디는 예 측 이란 것 이 정 책을 입안할 수 있는 용어로 표현되 지 않는다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댜 가령 < 가치 중립 적> 인 사회과학자가 < 사실 > 과 < 가치 > 가 나누 어진 분기점까지 걸어와서 그가 예측한 것들을 분기점의 저쪽 컨에 있는 정책 결정자들에게 건네준다고 상상해 보자 . 정책 결정자들이 사용중인 용어 를 그 예측이 상당히 포함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별로 쓸모가 없을 것 이다 . 그런 경우에 정책 결정자들이 갖게 될 것은 아 마도 가령 < 기반 산업이 사회화되면 생활 수준은 하향할 것이다[하 향하지 않을 것이다] > , < 언론이 더 확산되면 정직한 사람들이 당선 되는 사례가 증가[감소]할 것이다 > 등과 같이 달콤한 예측들일 것이 댜 그 예 측 들은 문장의 후반부가 도덕적으로 시급한 일을 권고하는 말투로 이루어진 가정문과 홉사할 것이다. < 계량화 > 된 사회과학의 메마른 어투(가령 < 만족의 극대화 >, < 갈등의 증가 > 등)로 이루어진 예측들을 갖게 될 경우, 정책 결정자들은 도덕적 사려 분별을 함에 있어서도 그러한 어투에 맞추거나, 아니면 더 위험하게도 그러한 어 투를 직접 사용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 해석적 > 사회과학을 추구하 려는 욕구는, 도무지 < 도덕적 > 이라고 간주할 수 없을 만큼 엷은 용 어들 < 쾌락 > , < 고통 > , < 권력> 등과 결코 연관시키기 어려운 용어들-로 사회 정책을 표현하려는 유혹에 대한 반발로 이해될 때 , 가장 잘 이해되리라 생각된다. 한편으로 < 객관적 > 이며 <가치 중립적>이고 <진정으로 과학적> 인 사회과학을 갈망하는 사람들과, 다른 한편으로 사회과학은 좀더 해석학적인 무엇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의 쟁 점이, < 방법>에 관한 논쟁이라고 잘못 묘사되고 있다. 방법에 관한 논쟁이란, 공통의 목표를 갖고 있으나 목표에 이르는 수단에 대해서 이견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문제된 논쟁에서의 양측은 특정한 정책이 채택되면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인가를 더 정확히 예측
할 방법에 관해 견해를 달리하고 있는 게 아니다. 어느 쪽도 그러한 예측을 썩 잘하지 못하고 있으며, 만일 예측을 잘하는 방식을 누가 찾아낸다면 양측은 똑같이 그 방식을 자기 편의 견해에 기꺼이 합류 시키려 할 것이다. 그 논쟁의 성격은, 여전히 오해의 소지가 있긴 하 지만, <설명 ex p lana ti on> 과 < 이해 unders tandi n g > 라는 경쟁적인 목 표간의 논쟁이라고 볼 때 더 잘 파악된다. 이 대비가 최근의 문헌에 전개되면서, 한편으로는 갈릴레오식의 일반화와 그러한 일반화를 확 증하거나 반증하는 헴펠식의 구체화를 가능하게 하는 말투와, 다른 한편으로는 대체로 똑같은 어휘를 한 종류의 평가적 어휘(쉽게 말해 서 <목적론적>인 어휘)로 서술하기 위해 그러한 장점을 희생시키는 말투간의 대비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대비는 정말로 실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해소되어야 할 쟁점이 아니라 우리가 껴안고 살아가야 할 차이점이다. 설명과 이해 가 사회과학을 하는 데에서 상반된 방식이라는 관념은, 유기체에 대 한 거시적 서술과 미시적 서술이 생물학에서 상반된 방식이라는 관 념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이다. 당신이 박테리아와 암소에 관해 하 고자 하는 일들 가운데에는 그것들에 대한 생화학적 서술이 매우 유 용한 경우도 많으며, 단지 방해물인 경우도 많댜 마찬가지로 당신이 인간들에 관해 하고자 하는 일들 가운데에는 인간들에 대한 비(非) 평가적이며 <몰인정한> 용어들이 유용한 경우도 많으며, (가령 그들 을 동료 시민으로 생각할 때처럼) 그러한 서술이 유용하지 않은 경우 들도 있다. 그래서 <설명>이란 것은 예측하고 통제하고자 할 때 추 구하는 일종의 이해 방식일 따름이다. 그것은 가령 추상성과 구체성, 인위와 자연, <억압>과 <해방> 등이 서로 대비되는 것처럼, <이 해>와 대비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이 어휘보다는 저 어휘 속 에서 더 잘 <이해>된다는 말은, 더 나은 어휘가 특정한 목적에 더 유용하다는 주장을 줄여서 말한 것에 불과하다. 만일 예측이 목적이 라면 특정한 유의 어휘를 원할 것이다. 반면에 평가가 목적이라면 경
우에 따라 다른 유의 어휘 를 원하거나 혹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가 령 포대의 사격 을 평가하 는 경우에는 탄도학 (5 ff] 道學) 의 어휘가 참 잘 어울릴 것이고, 인간의 성격을 평가하는 경우에는 자극과 반응이란 어 휘는 요점을 놓치게 될 것이다.) 이 논점을 요약해 보자. 사회과학의 어휘에는 다음과 같이 뚜렷이 다른 두 가지 요건들이 있다. (1) 그것은 상황에 대한 예측과 통제를 촉진하는 서술을 포함해야 한다 . (2) 그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줄 서술을 포 함해야 한다. 가치 중립적 사회과학은 엷은 <행동주의적> 어휘가 첫번째 조건 에 부합된다고 가정하였다 . 하지만, 이 가정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회과학에서 지난 50 년 동안의 연구는 우리들의 예측 능력을 괄목 할 만큼 신장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설령 그것이 예측을 제시하는 데 성공 < 했었다고 > 할지라도, 두번째 조건을 충족시키는 데에 <반 드시> 도움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그것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에 반드시 유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치 중립성의 친 구들과 해석학의 친구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논쟁에서는, 위의 두 요건 중 어느 하나가 충족되지 않으면 당연히 두 조건이 모두 충족 되지 않는 것으로 종종 간주된다. 해석학의 친구들은 행동주의는 사 람들이 <정말로> 행하는 바를 파악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사람들을 <이해>하기에는 부적절한 것이라고 항의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행 동주의가 도덕적 반성에서 좋은 어휘가 아니리는· 말을 잘못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동료 시민들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그러 한 용어를 사용하는 정책 결정자가 되기를 원치 않을 따름이다. 반대 로 가치 중립성의 친구들은, 사회과학은 그 분야의 갈릴레오(그 사람
은 바로 행동주의자일 거라고 여하튼 미리 알려졌는데)를 찾아내자마 자 첫번째 조건을 충족하게 될 것이라고 고집하면서, 정책 결정을 적 절히 엷은 용어로 시작하는 것 -그래서 우리의 < 윤리학 > 이 <객 관적>이며 < 과학적 기초 >를 지닌 것이 될 수 있게 하는 것 —――이 우리의 의무라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라야 멀지않아 현실로 드러날 탁월한 모든 예측들을 우리가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댜 양측은 두 요건들 사이에 모종의 내재적 연관 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것은 마 치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회롤 공정하고 영예롭게 대우할 방 법을 안다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나 그 사회를 예측하고 통제할 방법을 알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잘못이며, 예 측하고 통제하는 능력은 그와 같은 대우에서 < 반드시> 도움이 된다 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잘못이다. 오직 특정한 어휘만이 인간이나 인간의 사회에 < 부합되며 >, 오직 <그 어휘>만이 인간이나 사회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말은, 자 연 자체의 어휘라는 17 세기의 신화를 말만 바꿔 되풀이한 것이다. 만 일에 듀이처럼 어휘들이란 사물의 본래적 성질을 표상하는 것이 아 니라 사물들에 대처하기 위한 도구라고 본다면, < 설명>과 < 이해> 사이예 즉 한편으로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예측하고 통제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그들을 동료 시민으로 보아 공감하고 협력하는 것 사이에 본래적 연관성이 있다거나, 혹은 그러한 것이 <없다>고도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사람의 행동을 설명하며, 저것은 사람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쓰이는 두 가지의 <방법>이 존 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3 인식적 특권과 도덕적 특권 사회과학을 갈 릴 레오식이 아니라 < 해석학적 > 으로 만 들 고자 하는 최 근 의 운동은 충분히 듀이적인 논점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일에 그것이 법칙과 이야가 말하기, 예측과 재서술 양쪽 모두 사회 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우리의 목적에 유용한 것이라는 주장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 운동은 자기네들이 과연 < 과학적 > 인 일을 하고 있는가를 염려하는 구식의 < 행동주의> 사회 과학자들이 갖고 있는 맹목성에 대한 쓸모 있는 항거이기도 하다 . 그 러나 그 항거가 철학적인 치장을 하고, 존재론적 차이가 방법론적 차 이 를 압도한다고 공표하여 인간과 자연 사이에 주요한 구분을 내세 우기 시작하면서, 그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가 령 < 해석은 의미의 그물이 인간 존재를 구성한디는· 것을 전제로 해 서 시작된다 > 라고 말할 때, 의미의 그물이 < 없이도> (가령) 화석 (化 石 )이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하지만 <구성>이란 말의 의미가 물리적인 의미(집은 벽돌로 < 구성 > 된다라는 표현처럼)와 구별되고 나면,
해 하나의 < 화석으로 > 구성된다. 만일에 그 관계들 중 상당 부분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당신에게 그 화석은 단지 돌덩어리일 뿐이다. 이 렇듯 탐구의 목적이 되는 < 어 느 것> 이라도 의미의 그물에 의해 < 구 성 > 된다 달리 말하면 이렇게 표현될 것이다: 화석의 기록을 하나의 텍스트 라고 여긴다면, 초기 단계의 고생물학은 < 해석 > 의 방법을 따랐다고 말할 수 있댜 즉 고생물학은 문제의 대상이 이해 가능한 것이 되도 록 좀더 익숙한 다른 대상들과 관계짓는 어떤 어휘를 찾아냄으로써, 과거에 발생했던 일에 의미를 부여할 방도를 모색하였다. 그 학문 분 야가 <정상과학>이 되기 이전에는, 비슷한 화석들의 발견을 예측하 는 일과 연관된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명확한 생각을 갖지 못하였다. <고생물학은 이제 하나의 과학이다 > 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 문제 가 되는 화석과 마주칠 경우 이제는 어떤 물음을 물어야 하며 , 미리 어떤 가설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라고 말 하는 것과 같다 . 내 견해에 따르면, <해석적i n t e rp re ti ve> 이거나 < 해 석학적 hermeneu ti cal> 이라는 것은 특별한 방법을 갖는다는 것이 아 니라, 도움이 될 만한 어휘의 모색일 뿐이다. 갈릴레오가 수학적 어 휘를 들고 나왔을 때 그는 내가 말하는 의미에서 해석학적 탐구를 성공적으로 마쳤던 것이다. 다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들이 행했던 것과 성서 주석가들, 문예비평가들, 혹은 문명사가들이 행하 는 것 간에 아무런 홍미 있는 차이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탐구 분야의 초기 단계를 특징짓는 새로운 용어법을 모색하 기 위한 일종의 어림짐작을 가리켜 <해석학>이란 용어를 쓴다고 해 도 아무런 해( 害 )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이무런 해가 없다고 해도, 실제로 득 (得)이 될 것도 없다. 사람이나 화석을 텍스트의 형태라고 여기는 것 은 텍스트들을 사람의 형태나 화석의 형태로 여기는 것이나 마찬가 지로 그리 유용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텍스트에는 무언가
< 특별한 > 것이 있다고 생각할 때에만 유용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 가령 덱스트 들 은 <지 향적 > 이며 혹은 < 오로지 역사로서 이해될 수 있다 > 고 볼 경우에만 그러나 나는 가령 썰J ohn Searle 의 < 본래적 지향성 > 이라는 관념에 반대하며, < 지향성을 지님 > 이 < 마치 그것이 언어 사용자라도 되는 양 의인화하여 서술되기에 적절함 > 을 뜻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51 내 생각으로는 행위와 운동, 소음과 주장 ;’ 간의 관계는, 이쪽 것을 다른 말투로 서술하면 저쪽 것이 되는 그런 관계 이다. 또, 화석에 대한 설명이 텍스트들에 대한 설명보다 덜 전체론 적이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두 경우 모두에서 애초의 대상에 부합 될 하나의 정합적인 이야기를 말하기 위해, 우리는 그 대상을 많은 다른 종류의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 집어넣는 일을 필요로 한다.
5) 썰과 나의 토론에 대해서는 Joh n Searle, Mind s, Bra in, and Prog ram s, The Behavio r i al and Brain Sc ien ces, 3(1980), pp. 417-457 와, 나의 논문 Rich ard Rort y, Searle and the Secret Powers of the Bra in 중에서 특히 pp. 445- 44 6 그리고 Joh n Searle, Intr ins ic Inte n ti on a lit1 , pp. 450-456 룰 참조할것. 6) 통상적으로 행위나 주장은 < 지향적>인데 바해, 운동이나 소음은 <비지향적> 인 것으로 일컬어진다.(역주)
이러한 태도를 수용한다면, 일부 학자들이 텍스트와 화석은 매우 다른 것이라고 < 실제로 > 생각하는 이유를 내가 설명하는 것은 당연 한 일일 것이다. 나는 다른 곳에서 테일러 Charles Ta y lor 의 견해에 반대하는 논의를 하면서 , 7)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화자 자 신의 어휘가 그 사람의 행위를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어휘라는 잘못 된 가정, 즉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그 사람 자신의 설명 이 바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가정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 잘못은 과학이란, 우주가 자신에게 자신을 설명하기 위 해 사용하는 어휘를 배우려는 것이라는 혼동된 관념의 특이한 형태 라고 생각된다. 두 경우 모두에서 피설명항이 마치 인식상 우리와 같
7) 위의 각주 1) 에서 언급된 문헌을 볼 것.
거나, 우리보다 우월하다고 긴주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의 동료 인간 들 에 관해서는 항상 맞는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자연에 관해서는 갈릴레오 이전에 횡행했던 의인화의 유 물 에 불과하다. 물론 발생되는 사태에 대한 다른 사람의 설명이나, 다른 문화권의 설명이 매우 원시적이며, 대단히 우둔해서 결국에는 우리가 아예 싹 무시해 버릴 그런 케이스들이 있게 마련이다. 또 , 해석학의 유일한 일반적 규칙에 따르면, 우리 자신의 가설들을 세우기에 앞서 [해석의 대상 인] 그 주체가 뭐라고 < 생각하는지 >를 묻는 것이 항상 현명한 일이 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시간의 절약을 위한 것이지 그 행동의 <참 된 의미>를 탐구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만일에 설명의 대상이 되는 주체가 자기의 행동을 잘 설명하는 좋은 어휘를 가져다준다면, 우리 가 스스로 적절한 어휘를 모색하는 수고를 덜어줄 것이다. 이런 관점 에서 볼 때, 문자와 화석 간의 유일한 차이는, 문자의 경우에는 외형 상의 문자와 다론 별개의 문자를 모색하기 위해 우리가 상상을 해야 한다는 데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화석의 경우에는, 이 화석과 저 화석 간의 관계를 똑같이 해명한다고 할지라도, 비지향적인 어휘로 서술해야 한다. 주체 자신의 어휘가 그 사람을 설명하는 데에 항상 연관된다고 생 각하는 잘못을 범한 데 덧붙여서, 인간과 자연 간에 명확한 구분을 고집하는 철학자들은 실증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한 어휘가 다른 어 휘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 존재론적인 의미를 함축한다는 관념에 넋을 잃고 있다. 하지만 , 예컨대 <… …에 관한 > , <… …에 대해 참 인>, <……을 지시하는> 등이라든가 혹은 <믿는다>나, < 의도한 다> 등의 용어들[이른바 지향성을 표현하고 있는 용어들]을 포함하 는 언어를 의연적이며 <경험주의적>인 언어[비지향적인 언어]로 환 원 가능하다거나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다고 해도, 그것은 언어 사용자나 의도한 자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예측하고 어떻게 대우해 야 하는지에 관해 아무것도 밝혀주는 바가 없을 것이다 . 예컨대 콰인
과 같은 학자들은 상이한 지향적 상태를 아무런 차이도 없이 [동일 헌 소립자들에게 귀속시킬 수 있으므로, 지향적 상태에 관한 한 아 무런 <사실>도 없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였는데, 딜타이의 추종 자들은 그 오류를 거꾸로 뒤집어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콰인 은 만일에 어떤 문장이 로크나 보일 8 ’ 이라면 좋아할 그런 유의 어휘 로 부연될 수 없다면, 그 문장은 실재하는 것을 전혀 가리키지 못한 다고 생각한댜 인문[정신]과학과 자연과학 간의 차이룰 과장하는 딜 타이주의자들은, 그러한 문장이 부연될 수 없다는 것은 형이상학적 지위나 인식적 지위가 확연히 다르다는 암시이거나 확연히 다른 방 법론적 전략을 필요로 하는 암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환 원 불가능성이 보여주는 것은 기껏해야, 어떤 특정한 어휘(즉 로크나 보일의 어휘)가 특정한 피설명항(가령 사람들이나 문화)에 관해 어떤 일을 할 때 유용하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 퍼트남Hilary Pu tn am 의 비 유를 써서 말한다면, 이것은 네모난 말뚝은 왜 둥그런 구멍에 맞지 않는가를 알고자 한다면 차라리 그 물음을 말뚝을 구성하는 소립자 들의 위치로 서술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밝혀주지 않는다.
8) Robert Boy le , 16Zl-1691: 보일의 법칙을 발견한 영국의 물리학자, 화학자.(역 주)
정의(定義)에 따른 환원 불가능성이 이렇듯 중요하다는 환상을 주 는 까닭은,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 짐승과 우리들 간에 <도덕적> 구 별을 하는 데 있어서 <정말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구분과 연관 된 뚜렷한 점을 찾아내려고 우리는 전통적으로 앎의 능력을 꼽아왔 다. 수세기 동안 우리는 인식적 행동을 <정신>이나 <의식>이나 <관념>의 소유에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는 오류를 범해 왔고, 그런 바탕 위에서 심리적 표상을 생리적인 대응물로 환원시킬 수 없다고 고집해 왔다. 이것이 낡은 게임이 되어버리자, 우리는 심리적 표상을
언어적 표상으로 전환하였다. 우리 인긴을- 도덕적으로 다른 존재로 만들게 히는 실체나 파워에 준( i (E ) 하는 것의 이름을 정신에서 언어 로 전환하였던 것이댜 그래서 근래에 와서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하 는 사람들은 심리적인 것의 환원 불가능성 대신에, 의미론적인 것의 환원 불가능성을 증명하는 일로 바빴댜 그러나 기계 속의 유령을 반 대하는 라일_비트겐슈타인 유의 논변은 문장들 속의 유령을 반대하 는 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 논변은 인간의 손으로 씌어진 것은 특별한 무엇 텍스투얼리티t ex tu al ity 를 새긴다는 관념, 그 것은 화석이 결코 가질 수 없는 무엇을 새긴다는 관념에 반대하는 일에도 그대로 잘 적용된댜 지식이란 세상사에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표상한다는 생각 을 갖고 있는 한 정신이나 언어는 늘 유령처럼 보일 것이다. 또, <유 물론>이나 <행동주의>와 갈릴레오식의 스타일은 항상 도덕적으로 의문스럽게 보일 것이다. 사물에게 <올바른> (전통적인) 이름을 붙 여 명명하는 것과, 그것을 <올바로> 서술하는 방식 (죽 자연 자체의 방식) 사이에 모종의 유추(類推)가 있다는 생각을 하는 한, 우리는 실재의 <표상>이나 <일치 대응>이라는 관념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 다. 그러나 만일에 (쿤과 듀이가 그게 가능하다고 제안하듯이) 우리가 그 메타포를 포기할 수 있고, 그래서 그것과 함께 하는 표상이라는 어휘를 버릴 수 있다면, 언어나 정신이 신비스럽다고 여기지 않을 것 이며 <유물론>이나 <행동주의>가 특별히 위험하다고 여기지도 않 을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방향이 옳다면 우리는 인간의 뚜렷한 도덕 적 지위가 정신, 언어, 문화, 느낌, 지향성, 텍스투얼리티 혹은 여타의 것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바로 <그것이다>라고 생 각해야 할 것이다. 앞에 열거된 유령 같은 모든 관념들은 단지 우리 가 도덕적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을 표현한 것, 그 앎올 이러쿵저러쿵 사이비 설명적인 말투로 부연해 본 것에 불과하 다. 그 앎온 더 이상 <근거>지어질 수 없는 어떤 것으로서, 단지 동
료 인간들 에게 특정한 관점을 갖는댜 그것이 과연 < 객관적 > 인 관점 일까라는 물음은 아무런 요점도 없는 물음이다. 이상의 논점은 다음과 같이 좀더 구체화될 수 있다. 테일러의 견해 외는 반대로, 나는 누가 자기의 행동이나 문화를 설명하는 것이 인식 상 특권을 지닌다는 생각이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 사람은 자기의 행 동에 대해 좋은 설명을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 하지만, 그 설명이 도덕적으로 특권을 지닌다고 여가는 것은 잘못이 < 아니 다 > . 그 까닭은 그가 자기의 동기를 안다는 특권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 사람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설명을 들어야 할 의무 를 갖고 있댜 사람이나 문화나 텍스트에 대해 < 내부적인 > 설명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는 테일러의 주장은, 이 렇듯 [동료 인간에 대한] 예의바름을 하나의 방법론적 전략이라고 간 취하고 있다 . 그러나 예의바름은 방법이 아니요, 단지 하나의 덕목이 다 . 판결을 내리기 이전에 우둔한 정신병자를 불러와 법원에서 진술 을 하게 하는 까닭은, 전문적인 정신과 의사보다 그가 더 나은 설명 을 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결국 그도 역시 우리 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 그 자신의 말로 하는 설 명을 요구함으로써 우리가 잘못 행할 가능성을 줄이고자 하는 것이 다. 사회과학자들에게 우리가 바라는 것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확 신이 서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해석자가 되어 달라는 것이다. 이 것은 우리가 시인과 극작가와 소설가들에게 바라는 희망과 꼭같은 바람이다. 설명과 이해, 혹은 하나는 자연에 적합하고 다른 것은 인간의 경우 에 적합한 두 가지 방법들 사이에 중요한 구별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라고 앞 소절에서 주장했듯이, 이 소절에서 나는 자연과 인간 이 뚜렷이 다른 대상이라는 점을 선험적으로 알 수 있다는· 관념이 잘못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관념은 존재론과 도덕을 혼동한 것이다. 비인간/인간 혹은 사물/사람 간의 구별을 무시한 유용한 어휘들은
많이 있다. 반면에 그러한 구별이 기본적인 어휘가 적어도 한 가지 ―도덕의 어휘 —~ 있으며, 아마도 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 간 존재가 전자에 비해 후자와 같은 어휘 들 에 의해 더 <실 제로 > 서 술되는 것은 아니다. 대상들이 이쪽보다 저쪽의 어휘에 의해 < 더 객 관적 > 으로 서술되는 것도 아니다 . 어휘들은 쓸모가 있는가 없는가, 좋은가 나쁜가, 도움을 주는가 헷갈리게 하는가, 예민한가 조잡한가 하는 것이지, < 더 객관적 > 인가 < 덜 객관적>인가, 혹은 < 더 과학 적 > 인가 < 덜 과학적 > 인가 하지 않는다. 4 근거성 없는 희망 : 듀이 대 푸코 지금까지 내가 말한 논지는, 만일 우리가 < 객관성 > 과 < 과학적 방 법> 등과 같은 전통적인 관념을 제거한다면 사회과학이란 문예와 연 속적인 것, 즉 다른 사람들을 해석해 주며 그래서 공동체에 관한 우 리의 센스를 확대하고 심오하게 해주는 것으로 보게 될 것이라는 점 이다. 이에 따르자면, 인류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우리들, 교육받고 여가를 지닌 서구의 정책 결정자들로 하여금, 어떠한 이국풍의 인간 성 표본도 역시 <우리들 가운데 하나임 > 을 간파하게 도움을 준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댜 사회학자들은 가난한 사람들(그리고 온갖 다른 유의 소의된 자들)에 대해 마찬가지 일을 행하며, 심리학자들은 괴짜 나 정신병자들에 대해 마찬가지 일을 행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이 사회과학이 행하는 바의 전부는 아니지만, 아마도 가장 중 요한 일이다 . 만일 이 측면에서 사회과학이 성취한 바를 강조한다면, 우리는 사회과학이 소설가나 저널리스트들과 공유하고 있는 이야기 같고 일화 같은 스타일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계량화된 행동과 학>이 본뜨고자 애썼던 <갈릴레오식>의 스타일과 이 스타일이 어 떤 관계를 갖는지 염려하지도 않을 것이다. 어느 스타일이 인간을 연
구하는 데에 더 적절한가 를 따지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본질을 지녔다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듯이, < 인간학 > 이나 < 인 문과학 > 이 본질을 지녔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곧 표상이라는 관념이 사라지면 별도의 논의 주제에 따라 별도의 영 역으로 탐구들이 구별된다는 생각도 사라진다. 소설과 신문 기사와 사회학적 연구 간의 간격이 흐려질 것이다. 논의 주제간의 간격은 잠 정적인 존재론적 위상이 아니라, 현행의 실천적 관심에 따라 그어지 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일단 이와 같은 실용주의적 노선이 채용된다고 해도 여전 히 두 갈래의 길이 남아 있다. 한 가지는 듀이가 그랬듯이 사회과학 의 도덕적 중요성, 즉 그것이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센스와 공동체에 대한 개방적인 센스를 확대하고 심오하게 해주는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다. 다른 한 가지는 푸코가 그랬듯이 사회과학이 <규율 있는 사회>의 도구로서, 즉 지식과 인류의 연대성이 아니라 지식과 권력 사이를 연관지어 주는 것으로써 봉사하는 방식을 강조할 수 있 댜 사회과학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오늘날의 관심 중 많은 부분은 사회과학이 교육받은 계급의 동정심을 확대시킨 일에 덧붙여, 그 계 급이 (말하자면 스스로 자신들을 조정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여타 의 모든 계급들을 조정하는 일도 도와주었다는 깨달음에서 나온 것 이다. 푸코의 설명은 사회과학의 이와 같은 어두운 측면에 대한 최고 의 설명이다. 하버마스를 찬양하는 사람들과 푸코를 찬양하는 사람들 은 사회과학에서 <해석적 전환>이야말로 사회과학을 <지배의 도 구>, 듀이가 말한 <사회공학>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하 나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의견울 함께 한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부자연스러운 <방법론>상의 쟁점이었던 것을 정치 문제와 홉 사한 것으로 여기는 혼동을 야기시켰다. 나는 이 마지막 소절에서 <갈릴레오식 대 해석학> 혹은 <설명 대 이해>의 대비를 마치 <지 배>와 <해방> 간의 대비와 평행한 것으로 간주하여 앞의 대비에 대
해 과도한 중요성 을 부여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 듀이와 푸 코의 차이는 이론적인 쟁 점 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 을 희망 할 수 있느 냐에 달려 있다는 점을 간파해야 한다. 듀이와 푸코는 전통에 대해 아주 · 똑같은 비판을 제기한다. 두 사상 가는 합리성, 객관성, 방법, 진리 등과 같은 전통적인 관념들을 포기 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구구절절이 동의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방 법을 넘어서 > 있다. 그들은 합리성이란 역사와 사회가 만드는 것, 즉 (인간의 본성, 인간 행동의 법칙, 도덕률 , 사회의 본질 등과 같이) 발견 되어야 할 초역사적 구조란 없다는 점에 동의한다 . 그들은 갈릴레오 식의 과학을 훼웰이나 쿤이 보듯이 보는 견해, 즉 그것은 과학적 성 공의 비밀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어휘의 파워를 구현하는 것 이라는 견해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듀이는 < 방법을 넘어서 > 려는 이 움직임은, 상상된 외부의 연원(앞에서 언급된 초역사적 구조 중 어 느 것)에서 나온 방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류가 성장 할 수 있는 기회, 인류가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한다고 강조한다. 듀이의 실험주의는 지식_주장을 다음 기회에 시도 할 행위들에 대한 제안으로 간주할 것을 요구한다. 과학의 정교한 체계는 이성이 아니라 첫눈에 번쩍 떠오른 충격, 즉 사 물들을 다뤄보고, 움직여보고 , 채집하고, 들춰보고, 홑어진 것을 섞고, 합 해진 것을 나누고, 말하고, 돋는 등의 충격에 의해 태동된다. 방법이란 그 러한 일들을 탐구와 발전과 테스트롤 향한 경향성에 연결시키기 위해 결 과적으로 조직화한 산물이다 . ……전통적 태도인 이성이란 결과로서 도출 된 경향성이다. ……9 ) 9) Joh n Dewey, Human Natu r e and Conduct( N ew York: Modem Lib r a ry, 1930), p. 196.
푸코 역시 탐구에 선행하는 제약으로서의 전통적인 방법과 합리성 의 이념을 넘어서는 곳을 지향하고 있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모 든 지식-주장이 권력의 게임 내의 움직임이라는 니체적인 깨달음을 향하고 있다고 본다. < 우리는 마땅히 권력을 통해 진리를 산출하게 되어 있으며, 진리의 산출을 통하지 않고서는 권력을 행사할 수가 없 다 . >IOI 여기서 우리는 두 철학자가 똑같은 것을 말하지만 그것을 전혀 달 리 활용하고 있음을· 본다. 마찬가지 현상을 그들 각각에 앞선 사상가 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댜 (단토Art hur Dan t o 가 지적했듯이 )Il l 제 임스와 니체는 전통적인 진리 개념에 대해 마찬가지 비판을 발전시 키고, 각기 <실용주의적> 또는 <관점주의적pe s pe c ti v i s t>인 대안을 제시하였다. 제임스는 <관념은 우리 경험의 다른 부분들과 만족스런 관계를 갖게 해주가만 하면 곧 참이 된다>고 유쾌한 어조로 말한다. 1 21 듀이는 그 말을 받아서 <합리성이란 다양한 욕구들간에 작동하는 조화를 달성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13 1 니체는 <진리의 규준은 권력 에 대한 느낌의 강화에 놓여 있다>고 말하고 ,1, 1) 또 이렇게 말한다. 철학의 오류는 논리와 이성의 범주들을, 공리주의적인 목적에서 세계 를 고정시키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지 않고 그 대신에 ……실재에 관한 진 리의 규준을 제공한다고 생각하는 데에 있다 .151 10) Mich el Foucault, Power/K nowledg e (B righ to n : Harveste r Books, 1980), p. 93. 11 ) Arthu r Danto , Ni et z s che as Phil o sop h er( N ew York: iVI acm illan , 196 .5), chap. 3. 12) Wi lliam Jam es, Pragm atism (New York: Lon gma ns Green, 1947), p. 58. 13) Dewey, 앞의 책, p. 196. 14) Fri edrich Nie t z s che, The Wi ll to Power, trans. Kau fma nn(New York: Random House, 1967), p. 290. 15) Nie t z s che, Werke, ed. Schlechta , III, p. 318.
푸코는 그 말을 받아서, < 우리는 세계가 판독하기 쉬운 모습을 내 보이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담론이란 우리가 사물들에게 가하는 하나의 폭력이라고 생각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1 61 제임스 와 듀이를 한편으로 하고, 니체와 푸코를 다른 편으로 하는 이 논변 들은 양쪽의 어조가 다른 만큼이나 동일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어 느 쪽도 칸트 이래로 친숙한 <관념론자>의 논변, 즉 진리란 실재와 의 대응이란 관념에 반대하는 반표상주의자의 논변(대응이 아니라 표 상들 간의 정합성이라는 논변) 이상의 것을 갖고 있지 않다. 자연 자 체의 언어라는 갈릴레오의 메타포를 현금화하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 했다고 이 논문의 첫 소절에서 말했을 때, 나는 바로 반표상주의자의 그 논변을 가리키고 있었댜 철학적 결론의 현금 가치가 한 논변의 형태를 좌우한다고 볼 때, 나는 양측의 철학자들을 갈라놓을 만한 어 떠한 <이론적> 차이점도 발견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들간의 차이는 단지 말투의 차이, 죽 솜씨 좋은 앵글로 색슨 사람이 자기 과장적인 대륙 사람에게 반대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정도의 차이란 말인가? 그 차이는 대략 <도덕적 풍모>의 차이 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 더 니을· 것이다 . 이 말에 대해 혹자는 비트 겐슈타인의 유명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마음에 두고 있을지 모른다. 만일 호의(好意)와 악의(惡意)가 세계를 변하게 한다면 그것은 사실 들, 즉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사물들이 아니라 다만 세계의 한계를 변하 게 할 수 있다. 줄여 말해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전혀 딴 것이 된 다. 말하자면 그것은 전체를 커지거나 작아지게 한다. 행복한 자의 세계는 불행한 자의 세계와는 전혀 딴판이다 .I ii 16) Foucault, The Arcraeolog y of Knowledg e (New York: Ha rper and Row, 17) 1L97u2d)w, pig. 2W29i .t tge nste in, Tracta tus Log ico -Phil o sop hicu s, 6.42.
그렇지만 < 호의와 악의 > , < 행복한 자와 불행한 자 > 란 대비는 우 리가 묘사하려는 대비에는 적절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 희망에 찬 > 과 <절 망에 빠진 > 이란 대비가 약간 더 나을 것이다 . 해킹은 푸코에 관한 논의 를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고 있다. < 인간이란 무엇인가? > 칸트가 물었다. < 아무것도 아니다 > 라고 푸코 는 말한다. <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희망하랴? > 라고 칸트가 묻는다. 푸 코는 과연 <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똑같은 대답을 할 것인가? 그럴 것이 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에 관한 푸코의 대답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푸 코는 인간이라는 개념이 가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 , 당신이나 내가 아 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희망이란 개념도 모 두 그릇된 것 이다. 마르크스와 루소에게 귀속되는 희망들은 아마도 바로 인간이란 개념의 일부일 것이며, 낙관론에 대한 그릇된 근거이다. 낙관론, 비관론, 허무론 따위의 것 들 은 죄다 선험적이거나 영속적인 주관이라는 관념의 틀 안에서 의미를 갖는다. 푸코는 이 모든 주장에서 조금이라도 일관성 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 만일에 우리가 불만족스럽다고 해도 그것 이 푸코가 비관론자라는 이유 때문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사 람의 가슴에서 영원히 샘솟는 것을 대리할 어떤 것도 푸코는 제공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I H> 푸코가 우리에게 제공해 주지 않는 것이 바로 듀이가 우리에게 제 시해 주고자 했던 것, 즉 <선험적이거나 영속적인 주관이라는 관념 의 틀 > 로 보강될 < 필요 > 가 없는 일종의 희망이다. 듀이는 <진리>, < 합리성 >, < 진보>, <자유> , <민주주의>, <문화>, <예술> 등과 같은 어휘를 푸코가 <고전적인 시대>라고 명명한 시대에 친숙한 어 18) Ian Hacki ng , revi ew of Foucault's Power/K nowledg e , New York Revie w of Boo/ cs , Ap ril 1981.
휘나, 19 세기 프랑스 지성인들의 어휘( < 인간과 그의 영혼 들> 이란 어 휘) 를 부리는 능력을 전 제로 하지 않고서 사용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 푸코는 사회과학을 생각함에서 < 고전적 > 인 갈릴레오식의 < 행동 과학 > 과 프랑스식의 < 인간과학 > 사이에 중간 영역이 하나도 없다 고 본다 . 듀이가 제안하였고, 사회과학을 < 행동주의적 > 으로 전환하 려는 갖은 노력이 실패하기 이전의 시대에 미국의 사회과학을 고취 시켰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중간 영역이었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서 앞에서 거론했던 해석학적 사회과학을 지향하는 최근의 반발은, 만일 우리가 파슨스 1 9) 의 경우와 유사한 것을 원치 않는다면 반드시 푸코의 경우와 같은 것을 택해야 한다는 점, 즉 베버식의 합목적적 합리성 Zweckra ti onal itiit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진리에의 의 지>를 거부하는 길을 끝까지 고수해야 한다는 점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 하지만, 듀이가 제안했던 것은, 진리에의 의지와 그것 에 병행하는 낙관론을 보유하면서도 그것이 행동주의가 말하는 자연 자체의 언어라는 관념에도 <그리고> 인간이 < 선험적이거나 영속적 인 주관>이라는 관념에도 얽매이지 않게 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듀이의 손을 통해서 진리에의 의지는 이제 지배가 아니라 창조라는 것, <다양한 욕구들간에 작동하는 조화를 달성>하는 것으로 권장되 기 때문이다 .
19) Talcott Parsons, 1902-1979: 미국의 사회학자.(역주)
이 말이 사실이기에는 너무나 안성맞춤이고 또 너무나 좋게 들릴 지도 모른다. 그렇게 들리는 까닭은 자유주의에 요구되는 것은 바로 공통의 인간성이라는 관념, 우리 모두를 묶어주는 공통의 도덕률이라 는 관념, 혹은 인간은 모두 형제라는 기독교적인 관념의 맥을 잇는 어떤 후계 관념이라는 확신을 우리가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 다. 그런 생각 때문에 우리는 자유주의적인 사회적 희망 ___ 듀이의 희망 __ 을 근본에 있어서 자기 기만적이며 철학적으로 유치하다고
보게 된다. 우리는 니체가 진단했던 갖가지 환상들에서 우리가 깨어 나기만 하면 <틀 림없이 > 혼자일 거라고, 즉 자유주의가 요구하는 공 동체라는 느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해킹이 말하듯이 니체와 푸코는 어쩌면 당신과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정말로 말하는 것 은 아닐지 모른댜 하지만, 그 두 사상가는 당신과 내가 함께하는 것, 우리라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다-인간의 연대성은 신과 그 그 림자들이 사라졌을 때 같이 사라졌다-라고 정말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헤겔이 파악했던 인간, 즉 이념의 화신으로서의 인간이라는 관념은 의심할 바 없이 사라져야 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속 죄받은 인간의 형상이라는 관념도 역시 사라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를 버리고 난 후에도 우리가 왜 부르주아 자유주의에 대해 그가 가르쳤던 그 모든 메스꺼운 말들을 되풀이해야 하는지 유별난 이유는 없어 보인댜 선험적 주관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 즉 사회가 억압하거나 이해 가능한 어떤 본질을 <인간>이 가졌다는 관념이 사 라져야 한다는 것과, 인류의 연대성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 사이에는 추론상 아무런 연관성도 없다. 내 생각에는 부르주아 자유주의는 지 금껏 우리가 성취해 온 인류의 연대성에서 최선의 본보기라고 생각 되며, 듀이식의 실용주의는 그것을 가장 잘 풀이한 것이라고 생각된 다 . 201
20) 내가 볼 때 듀이는 20 세기의 밀J ohn Stu a r t Mi ll 이라고 간주될 수 있을 듯하 다. 밀이 콜리지와 벤담[J erem y Benth a m, 1748-1832: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 자)을 종합하려 한 시도는 듀이가 헤겔과 밀을 종합하려 한 시도와 유사하다. 자유주의에 대한 뛰어난 비판의 글에서 던J ohn Dunn 은 밀이 < 자유주의를 정 합성 있는 정치적 대안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두 가지 급진 적 지성의 전략둘 >을 결합시키려 한 인물이라고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 고 있다 . 한 가지 전략은 자유주의를, 정치적 사회적 질서의 제 유형과 정치적 자유 의 향유 사이의 관계에 대한, 다소 실용적이며 사회학적인 교의로 축소하는 것이다. 이 방안을 포함하는 자유주의의 형태는 오늘날 통상 <다원주의>라
는 용어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미국 사회의 공식적인 지적 이데 올로기로 여 전히 효력을 갖고 있는 … ... 개념이다. 두번째로 가능한 급진적인 전략은 사 회학의 주장들을 거부하고, 상당히 과장된 사회학의 지위를 제한된 경멸의 눈초리로 보는 가식 없는 회의 론 에 입각한 인식론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다. (Wes t ern Politz 'm / Values in the Face of the Futu r e(Cambri dg e : Cambri dg e Univ e rsit y Press, 1979), pp. 47-48) 던은 < 그토록 깊고도 공공연히 서로 반목하고 있는 지적 전통들을 통합하려 한> 밀의 시도는 실패하였으며, 근대의 다원주의 역시 실패하였다고 하면서 이 렇게 말한다. 이렇듯 근대의 다원주의는, 자유주의 정치 체제야말로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 형태라는 통찰을 퇴색케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적어도 사회학 적으로는 충분히 깨닫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매우 기꺼이 지불해 왔지 만, 그러한 깨달음의 대가는 인식론, 심리학, 정치학 이론을 통합해서 그와 같은 정치적 관여의 힘을 설명하고 찬양하는 신빙성 있는 지적 구조 전체의 포기를 뜻한다.(같은 책, p. 49) 내가 보기에 듀이는 그렇듯 전반에 걸친 지적 구조를 제공하였으며, 그는 전 략들을 결합한 밀의 방식을 수행함으로 해서 바로 그 일을 해냈다. ([던이 가장 애호하는 근대 다원주의의 본보기 인물인] 롤즈와 듀이의 연관성에 관한 논의 는 롤즈의 듀이 강연인 Kanti an Constr uc ti vism in Moral Theory , Jou rnal of Phil o soph y LXXVII(l980); pp. 515-572 를 참조할 것. 특히 p. 542 에서 <종교적, 철학적 혹은 도덕적 교의>와 일반적인 세계관에 구애받지 않는 정의 의 개념을 볼 것 또, p, 519 에서 롤즈가 <인식론적 문제>를 거부하며, <도덕 적 사실>에 관한 자신의 교의는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을 볼 것.) 자유 주의는 현대의 범세계적인 정치 문제에 관해 쓸 만한 이야기를 할 것이 없다는 던의 말은 맞다고 생각되지만, 그 까닭울 지유주의가 옛날의 칸트적이며 비실용 적인 유의 철학적 종합을 결핍한 탓으로 돌린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된다. 내 견 해에 의하면 한편으로 그것이 지상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대부 분의 문제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부르주아 자 본주의 사회가 지금까지 실현된 최선의 정치 체제라고 훨씬더 기꺼이 찬양해야 한다.
여기서 내 논변의 핵심은 푸코가 여행하고 있는 길을 듀이는 이미 지나갔으며, 푸코가 아직도 도달하고자 애쓰는 지점, 죽 푸코의 표현
에 의하면 < 권력이라는 그물의 미세한 올가미 속 에서 투쟁하고 있는 사 람들> 에게 유용 할 철학적, 역사적 ( < 계보 학적> ) 반성을 할 수 있 는 지점에 듀이는 벌써 도착했 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 이다. 듀이는 그 의 생애 동안 내내 이렇 듯 작은 투쟁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으며, 그 렇 게 하는 과정에서 미국 적 < 다원주의 > 의 어휘와 레토릭을 실현시 키고자 하였다. 이 레토릭은 미국의 제 1 세대 사회과학자로 하여금 자 기들이 새로운 형태의 사회 생활에 대한 전도사라고 생각하게 하였 댜 내가 보는 한에서 푸코는, 사회과학자는 과거에 가끔 그랬듯이 항상 나쁜 녀석들과 어울릴 소지가 있다는 경고를 통해 듀이를 업데 이트 u pd a t e 하는 것, 그 이상의 무엇을 행하지 않는다 . 그래서 푸코를 읽다 보면, < 행동과학 > 을 표방한 사회과학자들이 정부와 손잡고 일 했던 장면들을 보았을 때 미국의 지성인들이 지난 몇십 년 동안 겪 었던 환멸감을 상기시켜 준다 푸코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갖고 있으며 또 듀이에게 무언가를 보 태준다고 보이는 까닭은 , 다른 곳에서 내가 < 텍스투얼리즘 > 이라고 서술했던 , 2” 강력하지만 애매하게 정의된 운동의 꼭대기에 그가 올라 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한 텍스투얼리즘이란, 푸코가 그의 저서 『 사물의 질서 The Order of Th i n gs 』 말미 에서 말했듯이, 2?) < 인간이 란 우리의 지평에 예전보다 더 밝게 빛나는 언어의 존재로 사라지는 과정 속에 놓여 있다 > 고 볼 것을 제안하는 운동이다. 또 다른 이유 는, 대체로 억압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인데, 푸코는 <권 력 > 이 본디 억압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며 그 관점에서 정치적 담론 울 변형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볼 때 듀이는 이미 이 두 논점들을 다 간파하고 있었다 . 담론을 권력 관계의 네트워크로 보는 푸코의 견해는 그것을 도구적인 것, 죽 사람들이 욕구를 충족시키고 종합하며 조화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의 창고 속에 들어 있는 한 21) 앞의 논문 8 『 19 세기 관념론과 20 세기 텍스투얼리즘」을 볼 것. 22) Foucault, The Order of Thin g s ( New York: Random House, 1973), p . 386.
부품이라는 듀이의 견해와 판이하게 다 른 것은 아니다. 듀이는 푸코 가 니체에게서 배운 것을 헤겔에게서 배웠다. 그것은 문화, 즉 권력 의 올가미가 인간 을 조형하기 전까지는, 하나의 동물이라는 것 말고 인간에게 유별난 점이 없다는 것이다. 듀이에 있어서도 루소적인 < 억압 > 되어야 할 것은 전혀 없으며, < 억압 > 과 < 해방 >은 단지 우 리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권력 구조의 어느 한쪽을 가리키는 이름 일 따름이다 . < 권력 > 이 < 억압 > 이라는 내포로부터 자유롭게 되면, 푸코가 말한 < 권력의 구조 > 는 듀이가 말한 < 문화의 구조 > 와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일 것이다 . < 권력 > 과 < 문화 > 는 우리를 동물 이상의 존재로 만들어주며, 만일 나쁜 녀석들이 그것을 차지할 경우에는 우 리를 동물보다 더 못하고 더 비참하게 만드는 사회적인 힘을 가리킨 디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이 논평은 생존해 있는 가장 흥미로운 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되는 푸코 23) 를 폄하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령 < 담론>, <텍스투얼리티>, < 언어 행위 > 등과 같은 것들의 발 견이 철학의 무대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생각에 대해, 우리가 더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 해석학 > 에 대한 요즈음 의 유행은 머지않아 끝날 것이며, 만일 이 새로운 관념이 보기와는 다르다는 것, 즉 그것은 과거의 몇몇 오류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또 하나의 말투라는 점을 우리가 널리 광고한다면 볼썽사납게 끝날 것 이다. 똑같은 목적을 위해 듀이는, 그가 활동할 당시에는 인기를 누 렸으나 지금은 약간 곰팡내나는 , 그 자신의 말투를 갖고 있었다. 그 렇지만 말투의 차이가 공통된 목적을 방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 공통 된 그 목적이란 바로 니체가 말한 <가장 긴 거짓말>, 즉 우리가 법 도대로 한다면 우리를 구원하러 이쪽으로 올 어떤 것(신, 과학, 지식, 23) 그는 1984 년에 타계하였으므로 이 논문과 책이 출 판될 당시에는 생존해 있었 다.(역주)
합리성, 혹은 진리 등)이 우리가 행하는 위험하고도 모험적인 실험의 바깥 피안에 존재한다는 관념으로부터, 인류 를 자유롭게 하려는 것을 말한다 푸코와 듀이는 같은 일을 시도하긴 하지만, 간단히 말해서 듀이의 어휘는 정당화 불가능한 희망과 그리고 근거 설정은 불가능· 하나 꼭 필요한 인류의 연대성에 대한 센스를 허용할 여지를 주기 때문에, 내가 볼 때는 듀이가 더 잘했던 것 같다
12 오늘날 미국에서의 철학
1 분석철학과 철학의 전통 지적인 학문 분야에서 혁명적인 운동은 그 학문 분야의 역사에 관 한 수정주의적 역사관을 요구한다 . 라이헨바하”는 그의 저서 『 과학적 철학의 등장 The Ris e of Sc ien ti fic Ph i losop hy』 에서 분석 철학을 위 해 그런 일을 해냈다. 1951 년에 출판된 그 책은, 사람들은 두 가지 이유 중 하나 때문에 철학을 한다는 콰인의 빈정거림, 즉 혹자는 철 학의 역사에 홍미가 있어서 철학을 하고, 혹자는 철학에 홍미가 있어 서 철학을 한디는 말을 설명해 주는 역사관을 펼치고 있다. 콰인의 경구가 전제하고 있으며 그 책이 주장하고 있는 것은, 철학의 고유한 관심이란 일련의 식별 가능한 문제들의 해결, 즉 자연과학의 활동과 그 결과에서 나온 문제들의 해결이라는 점이다. 그 책에서 라이헨바 하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1) Hans Re ich enbach, 1891-1953: 미국에 귀화하여 활동했던 독일의 과학철학 자.(역주)
본서(本 書 )는 철학적 사변이란, 철학적인 문제가 제기되었을 경우 그
것을 풀 수 있는 논리적 수단 을 갖지 못할 때 발생하는 일시적인 단계라 고 간주한다. 본서는 철학 에 과학 적 인 접근법이 있으며 또 항상 있어 왔 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근 거에서 본서는 우리 시대의 과학에 힘입어서, 종 래까지 는 단지 추측상의 논의 주제에 불과했던 문제를 풀 수 있는 도구 들 을 찾아낸, 과학적 철학 이 태동하였음을 천명하고자 한다. 간략히 말해서 본서는 철학이 사변에서 과학으로 진보했다는 것을 밝히려는 의도 아래 씌어졌다 . ~I
2) Hans Reic h enbach, The Ris e of Sc ien ti fic Phil o soph y(B erkeley: Un i- versity of Ca lifornia Press, 1951), p. vii. 이하 라이헨바하에 대한 논의의 출 전 근거는 모두 이 책의 쪽이나 장을 가리키며, 본문 중에 삽입될 것이다.
라이헨바하는 지난 30 여 년 간에 걸쳐 비트겐슈타인, 콰인, 셀라즈 그리고 쿤에 의해 파괴된 모든 실증주의적 교의들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지금의 시점에서는 누구라도 더 이상 그의 책에서 사용된 말로 역사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탈 - 실증주의적인 분석철학자들은 철학이 최근에 와서 < 사변에서 과학으로 진보 > 했다 는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동의하려고 할 것이다. 그들은 철학이 과거 에는 어색하고 세련되지 못한 방식으로 다뤄졌으나, 이제는 여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정확하고도 엄밀한 방식으로 다뤄지는, 식별 가능하 며 지속적인 일련의 문제들로 정의될 수 있다는 견해를 수용하고자 할 것이다. 다만 그러한 문제들 가운데 해결될 것, 해소될 것, 무시될 것이 어느 것인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을 것이다. 또, 라이헨바하의 생각처럼 해결의 도구들이 과학에 의해 제공될 것인지, 혹은 철학자 둘 스스로 안출해야 할 것인지에 관해 이견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말해져야 할 일종의 역사 이야기에 대한 폭넓은 동의에 비하면, 이러 한 이견들은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라이헨바하는 전반적인 역사의 드라마를 구성하기 위해 사례들을 취할 때 선택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 철학이란 자연과학의 본질을 이
해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해석하고, 자연과학이 발전하면서 철학도 발 전하여 이제 과학의 < 성숙 > 에 따라 철학도 만족스런 결론을 가져올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해석하려면, <철 학의 문제들 > 이란 역시싱 - 최 초로 17 세기와 18 세기, 즉 새로운 과학이라는 현상이 철학자들의 주 요 관심사였던 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명확하게 정형화하였다고 간주 해야 한다. 그와 같은 철학의 문제들이란 과학적 지식의 본질과 가능 성에 관한 기본적인 문제로서, 인식론적인 문제들을 가리킨다. 철학 울 그러한 문제들과 동일시하여, 정치와 시학( 詩學 )에 대한 그리스인 들의 관심과, 신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관심을 비철학적이며 이데올로 기적인 것이라고 한컨으로 제쳐놓고, 1600 년 이전의 과학이 원시적 인 수준에 머물렀다는 것을 근거로 그리스인과 중세인들은 그 문제 를 명확하게 정형화하지 못했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하는 것 은 라이헨바하의 말마따나 칸트를 <사변철학의 절정(絶頂)>으로 보 게 해주며, 19 세기와 20 세기 초엽을 소홀히 취급하고 넘어가게 해준 댜 (이것은 칸트와 프레게 사이의 기간을 불행한 혼돈의 시기라고 간 주하는 분석철학자들에게 아직도 널리 퍼져 있는 버릇이다.) 라이헨바하는 헤겔을 칸트의 계승자로 보는 것은 칸트에 대한 중 대한 오해라고 생각했다 .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헤겔의 체계 는 한 가지 경험적 진리를 목격하고 나서, 그것을 모든 논리 중에서 가장 비과학적인 논리학의 어떤 법칙으로 만들고자 히는· 광신자의 어설픈 구성물이다>(p. 72). 그의 견해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불운한 <심리적인 이유들> 때문에 경험주의를 버리고 헤겔주의를 받아들였 다(p. 71). 또, 19 세기는 역사의 의미를 추구하기 시작한 시기가 아니 라, 철학 교수들보다는 자연과학자들이 데카르트, 흄, 칸트가 설정했 던 문제들을 풀어나갔던 시기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9 세기 를 다루는 부분에서 피히테, 셸링, 헤겔, 쇼펜하우어, 스펜서, 베르그 송 등을 언급하고 그들의 체계를 마치 예전 시대의 체계들과 동질의 철학적 창안물인 양 기록한, 그런 유의 교과서에 대해 라이헨바하는
비난을 퍼붓는다. 그 대신에 , 이렇게 보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체계의 철학은 칸트에서 끝났으며, 그 이후의 체계들을 칸트나 플리톤 의 수준에서 논의한다는 것은 철학 의 역사에 대한 오해다 . 그 낡은 체계 들은 그 시대의 과학을 표현한 것으로서, 더 좋은 대답이 없었기에 사이 비 대답을 했던 것이다. 19 세기의 철학 체계들은 더 나은 철학 이 생성 중 인 때에 구성된 것으로 철학적 발견은 그 시대의 과학에 내재한다는 점 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의 작품이다. 그 사람들은 철학의 이름 아래 유 치한 일반화와 유추의 체계들을 발전시켰다. • •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그 체계들은 비옥한 땅을 거쳐 마침내는 황량한 사막에서 말라 없어진 강 의 끝부분에 비유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pp. 121-122) 철학의 역사에 대한 이 설명은 많은 의미를 준다. 설령 과학이란 것이 한때 우리가 생각했듯이 방법적인 것이 아니라는 쿤의 주장에 의해 설득되었고, 라이헨바하가 찬양해 마지않는 <철학적 발견들 > 은 대부분 도그마라는 콰인의 주장에 의해 우리가 설득되었다고 할 지라도 말이다. 그 도그마를 버리고 난 뒤에도 여전히 라이헨바하가 말하는 역사관을 그대로 보유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사 람은 철학이란 과학 자체에 대한 자연과학의 설명으로 출발하였으며, 자연과학의 범주를 벗어난 지식에 대한 주장의 시도는 자연과학의 테두리 내에서 사용되는 절차에 따라 측정되어야 하고, 철학은 최근 에 와서 비로소 과학적이며 엄밀한 것이 되었다는 철학관을 여전히 밀고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가 거의 대부분의 분석 철학자들에 의해 견지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때 사용된 <철학> 이란 용어에 관한 맥락적인 정의에 대해서 나는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그 용어는 <만약에> <철학>이란 말이 어떤 학문 분야, 일련 의 연구 프로그램, 혹은 문화의 자율적인 어느 부분을 가리키는 이름 이 되게 하려 할 때라면 딱 좋은 그런 정의이다. 라이헨바하가 말하
기를 과학 자체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부여하기 위한 시도에서 연유 한 18 세기와 19 세기의 특정한 철 학적 문제들-대략적으로 말해서 칸트의 문제들一 -― 이 종종 < 진정한 > 철학적 문제라고 간주되어 왔 ‘ 다고 했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또, 나는 그가 많은 철학적 프로그 램들을, 과학의 절차를 본뜨지도 않고 그 결과를 존중하지도 않은 채 < 과학 > 의 지위를 얻고자 주장한 것으로 보고 배격한 점에 있어서도 옳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가령 고전적인 후설식의 현상학,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A N. Whiteh ead, 『 경험과 자연 』 의 듀이, 『 근본적 경험론 』 의 제임스, 네오토미즘 Neo-Tho mi sm 의 인식론적 실재론 그리고 그 밖에도 19 세가 후반과 20 세기 초엽의 여러 가지 체계들을 배격하는 데에서 라 이헨바하와 의견을 같이한댜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 그리고 안 좋은 (<형이상학적>) 측면의 듀이와 제임스는 내가 볼 때 단지 약화된 관 념론의 변종으로 보인다. 즉 그것들은 <주관과 객관의 관계 > 에 대해 < 비과학적 > 으로 표현된 인식론적인 물음을 < 인지>가 아니라, <느 낌>을 강조하는 < 유치한 일반화와 유추>를 통해 대답하려는 시도 로 보인다 현상학과 네오토미즘 역시 라이헨바하의 노선을 따라 진 단되고 배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두 운동은 다 확연히 <철학 적 > 이며 초과학적인 지식이라는 관념에 의미를 부여함으로 해서, 과 학과 동떨어지고 과학의 자기 해명과 확연히 다른 <사실 a Fach> 자 체를 추출하려는 헛된 노력을 시도하였다 . 3 J 그래서 나는 실증주의 일반이 그리고 특히 라이헨바하가, 한편으 로 과학적 지식에 대한 설명이나 과학의 확장으로서의 철학과, 다른 3) 선험적 종합에 대한 시도를 단념하는 것이 바로 과학적 철학의 징표라는 라이 헨바하의 고집스런 주장과, 과학적 철학의 결과를 단지 <과학의 서론으로 삼고 서, 과학적인 탐구와는 아무 관계도 없이 진리에 직접 접근하는 통로를 지닌 독 립적인 철학이 존재한다고 주장>(p . 305) 하기를 원하는 철학자들에 대한 그의 진단에 대해서는 그의 책 18 장을 볼 것.
한편으로 그 밖의 어떤 것으 로 서의 철 학 사이에 명확한 구분 을 지어 줌으로 해서 , 미국의 철 학에 기여 를 하였다고 생 각 한다. 그렇지만 나 는 분석 철 학과 그러한 [ 철 학의] 전통 과의 관계에 대해 다음의 두 가 지 물음을 제기하고자 한댜 (1) 과거에 대한 라이헨바하식의 설명은 철 학이 수행할 의의 를 갖 는 문화적 기능 즉 지속 적 인 과업 을 묘사해 주는 현재나 미래에 관 한 이야기를 제공해 줄 수 있는가? (2) < 그 밖의 어 떤 것으로서 의 철 학 > 은 어 떨까? 가령 <철 학적 문 제들에 대한 해답 > 이나 < 초과학적인 지식 > 따위의 것을 제공한다 고 < 주장하지 않는 > 철 학자들의 저술에 대해 , 예컨대 하이데거와 푸 코와 그들의 19 세기 선배 사상가들과 같은 < 대륙철학자 >들 에 대해, 우리가 그들의 저술을 철학으로 읽는다고 해서 잃는 게 무엇이겠는 가? 이하에서 나는 위의 두 물음 모두에 대해 답해 보고자 한다 . 2 분석철학 그 승리 후 한 세대 라이헨바하의 그 책이 출판되던 때인 1950 년대 초반 무렵에 분석 철학은 미국의 대학에서 철학과들을 석권하기 시작했다. 위대한 이민 철학자들 죽 카르납R. Carnap, 헴펠K. Hemp el , 파이글 E. Feig l, 라이 헨바하, 베르그만 G. Bergm ann, 타르스키A. Tarski 등은 그들에 게 합당한 존경을 받으며 대우받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제자들은 가장 권위 있는 대학의 철학과에 교수로 임명되고 또 압도해 갔다 . 이러한 경향에 보조를 맞추지 못한 학과들은 권위를 잃기 시작하였다. 1960 년경에 이르러서는 일련의 새로운 철학적 패러다임이 자리를 잡았다.
이전 세대의 영웅 들 이었던 듀이와 화이트헤드는 더 이상 읽히지 않 고 , 철 학사의 비중이 현격히 낮춰지고, 논리학에 대한 공부가 예전의 외국어에 대한 공 부만큼 중요하다고 간주되는 새로운 유의 대학원 교육이 철 학에 도입되었다 . 게다가 2 차 대전 후의 베이비 붐 덕택에 우연히도 1960 년대와 1970 년대의 초엽에는 현재 생존해 있는 대부분 의 미국 철 학 박사들이 교육을 받았던 시기였다. 그 결과 오늘날 미 국의 전문 대학이나 대학교에 재직중인 대부분의 교수들은 대학원 시 절 에 철 학사에 대한 라이헨바하식의 그림이나 그 변형인 그림에 친숙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철학의 시대, 즉 마침내 일이 제대로 되 어갈 < 분석의 시대 A g e of Anal y s i s > 를 시작하는 행운의 참여자로 스스로 믿고 자랐다 . 그들은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기보다는· 철학의 역사나 더 일반적으로 사상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그런 부~의 사람들을 가끔씩 경멸하기도 하였다. 라이헨바하와 마찬가지로 그들 은 이렇게 가정했다. 낡은 사조의 철학자는 대개는 문학과 역사 분야에서 훈련받은 사람으 로서, 수학적인 과학의 정밀한 방법들을 배운 적도 없고, 귀결들의 검증 과정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증명하는 기쁨을 만끽해 본 적도 없었다.(p. 308)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소망에 따르면, 이 새로운 전통의 전위대들은 협동 작업, 팀워크, 획득된 결과에 대한 동의 등 미중유의 새시대를 열어주어야 했다 . 지식의 금자탑에 탄탄한 벽돌들이 차곡차곡 점점 더 쌓아올려져야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실로 지 금 1981 년에 볼 때 그것은 라이 헨바하가 그 책을 썼던 1951 년에 비 해서 철학의 미래에 대한 예측으로서는 훨씬더 개연성이 희박한 것 으로 보인다. 1951 년에 (나 자신처럼) 분석철학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거기에 전향중이었던 대학원 학생은, 해결되어야 하며 명백하고도 구
체화 가능한 철학적 문제들――-진지한 분석철학자라면 누구 든 < 진 정으로 > 중요한 문제라고 동의할 그런 문제 들-~ 이 유한한 숫자 만큼 있다고 믿을 수가 있었댜 가령 반사실적 조건문의 문제, 윤리 적 용어에 대한 <정 의적(情 說 的) > 분석의 적절성 문제, 분석성의 본 질에 대한 콰인의 문제 그리고 그 밖의 몇 가지 등이 그러한 문제들 이었다. 그것들은 실증주의자들의 어휘에 아~느 잘 들어맞는 문제들이 었댜 그것들은 라이프니츠, 흄 칸트 등에 의해 아주· 어렴풋이 파악 되었던 문제들이 최종적으로 그리고 적절하게 정형화된 것으로 보이 기 십상이었댜 게다가 예컨대 확정 서술 de fi n it e desc ripti ons 에 대한 러셀의 이론, 의미와 지시에 대한 프레게의 이론 , 진리 개념에 대한 타르스키의 이론 등과 같이 철학적 문제에 대한 답이 어떤 형태를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해 동의가 있었다 . 내 나이의 세대가 젊었을 때 인 그 시절에는 쿤식으로 말해서 < 정상적 > 인 문제 풀이의 학문 분 과에 필요한 모든 조건들이 충족되었다. 이러한 문제들과 패러다임들의 목록을 열거한다는 것은 단순하고 밝지만 사라져버린 어떤 세계에 대한 추억들을 부추기는 일이다. 오 늘날 분석철학의 상호 중첩된 < 중심 > 영역들 즉 인식론 , 언어철학, 그리고 형이상학에는 중요한 철학과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패러다 임들이 존재한댜 캘리포니아 대학 출신의 철학 박사에게 심각한 문 제로 여겨지는 것이 시카고 대학이나 코넬 대학 출신의 철학 박사에 겐 그렇게 여겨질 필요가 없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 국의 <분석철학적>인 철학과들 가운데 가령 100 중 10 개 남짓의 학 과에서 동시에 유행하는 문제들은 예외적으로 꽤 잘되고 있는 형편 이다. 요즈음.그 분야는 해가 바뀔수록 수명이 더 짧아지는 것으로 보이는, 경쟁하는 연구 프로그램들이 밀림을 이루고 있다. 라이헨바하가 그 책을 쓰고서 15 년이 지나는 동안에 <옥스포드 철학[일상언어학파]>이 등장하였다가 사라졌다. 이른바 <서부 해안 의 의미론>이 동부를 휩쓸어서 옥스포드에서 UCLA- 프린스턴-하버
드 대학을 잇는 축선상에 마치 제국의 통역어마냥 위세를 떨친 이후 15 년 동안에 우리는 철학, 적어도 언어철학의 장래가 매우 밝은 것처 럼 보이는 몇몇의 쾌청한 순간들을 가졌다. 하지만, 이 쾌청한 순간 들은 모조리 흐려지고 말았다. 1920 년대의 독일에서도 그랬듯이 오 늘날 미국의 철학에는 철학적 문제와 방법에 관해 아무런 합의도 없 댜 그 시절에 독일에서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아마도 얼마쯤은 < 신 칸트주의자 >였 을 것이나, 학계의 주도적안 방식은 학위 수여자 각자 가 자신의 체계를 갖고서 그 체계 내의 문제들을 <주요한 철학적 문 제들 > 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을 배출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미 국의 철학과들에서 벌어지는 것과 매우 흡사한 방식이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얼마쯤은 < 분석적>이지만, 철학적 작업에 관해 대학과 대학을 넘어서는 합의된 패러다임이 없으며, <중심 문제들>이 무엇 인지에 관해 합의된 목록도 없다. 미국의 · 철학자에게 최선의 희망은 대략 각자 15 분씩 나누어서 우리 모두가 슈퍼스타가 될 것이라는 [즉 논문을 발표하는 순간에만 각자가 슈퍼스타가 된다는] 워홀A nd y Warhol 의 약속이다. 도덕 및 사회철학에서의 상황은 정녕코 이른바 철학의 <중심> 영 역의 상황과 동일하지 않다. 여기에서 우리는 롤즈의 『사회정의론 A Theory of Ju s ti ce 』을 진정으로 대학과 대학을 넘어서는 패러다임, 그 중요성과 영속성이 모든 쪽의 사람들에 의해 충분히 인정되는 저 서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라이헨바하의 주장들을 보유하고 그 것을 최신판으로 만든 자기-묘사를 본다면 분석철학은 이 사실에서 아무런 위안도 받지 못할 것이다. 롤즈의 『사회정의론』은, 라이헨바 하의 눈으로 볼 때는 철학과 규범적 판단 간에 유일한 연결 고리였 던, 메타윤리적인 문제들을 간단히 우회해 버린다.(라이헨바하의 책 17 장 참조) 그것은 칸트, 밀, 시즈위크 He rny Sid gwick 등으로부터 곧장 내려오는 [내용을 담은] 책이다. 만일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똑같은 책이 씌었을 수도 있다. 그 책은
<분석적 > 으로 철학함이 가져다준 쾌거가 아니라, 단지 우리가 갖고 있는 자유주의 사회 사상을 업데이트한 최선의 것이댜 철학 교수에 의해 그 책이 씌었던 점은 우연한 일로서, 만일에 롤 즈가 철학이 아 니라 법학이나 정치학을 연구했더라도, 그가 매우 다른 어떤 것을 쓰 게 되었을 것인가 혹은 매우 다른 스타일로 논변을 전개하였을 것인 가등은불분명하다. 가령 마르크스, 키에르케고르, 프레게를 19 세기의 위대한 < 철학 자 > 라고 할 만큼 < 철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하기 어렵듯이, 예 컨대 쿤, 크립키, 롤즈가 모두 왜 < 분석적 > 철학자안가는 말할 것도 없고, 왜 현대의 가장 중요한 세 사람의 ( < 사상가 > 나 < 지성인 > 과 같 은 무색무취한 일반적인 용어와 반대되는 의미에서) <철 학자 > 안가를 분명하게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확신컨대 이것이 심각한 문제인 것 은 아니다 . 내 생각에 우리는 그것을 다른 학문 분야들과 초역사적으 로 구별시켜 줄 < 철학 > 에 대한 정의를 구성하려고 애써서는 안 된 다. 그런데 라이헨바하는 그렇게 <해야 한다 > 고 생각했으며 , 분석철 학은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심화시키는 자기 이미지를 지닌 채 성장했다는 점을 제대로 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 라이헨바하는 철학을 철학답게 해주는 것은 비로소 이제 와서 명확히 보이게 된 문제들 과학적 지식의 본성과 가능성에 관한 문제 그리고 과학 적 지식이 문화의 여타 영역과 갖는 관계의 문제 등 의 목록이 라고 말해 주었다 . <일부의 > 문제들은 확연히 < 철학적인 > 문제라 고 믿는 것을 분석철학자들은 지속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라이헨바 하의 목록을 수용할 수도, 새로운 목록을 도출할 원칙을 구성할 수도 없는 처지이다. 대신에 그들은 그 목록이 매년 새롭게 갱신되도록 놔 둘뿐이다. 사람들이 미국철학회 APA 의 지회별 모임 ” 에 나오는 한 가지 이유 4) 미국철학회 산하에는 동부, 중부, 서부, 태평양 등 4 개의 지회가 있으며, 모임
은 지회별로 갖는다.(역주)
는 유행하는 새로운 문제가 무엇인가, < 그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들 이 > 요즈음에는 무엇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를 알아내기 위해서 다. 왜냐하면 이제는 저명한 철학 교수가 그것에 관해 흥미로운 논문 을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철 학적 > 문제를 구성하는 데 충분한 조건 이 되기 때문이다. 제도의 꼬리가 과학이라는 개를 혼들고 있는 셈이 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들의 문제와 과거의 문제들 간의 관계, 가령 라이프니츠나 흄이 이해했던 것보다도 그 문제들을 우리가 얼마나 더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과 같은 문제에 대해 할 이야기가 없다. 그 대신 우리는 번창하는 어떤 일을 갖고 있는 데 그 것은 단지 몇십 년을 되돌아보고, 그 일의 일부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얕은 지성에서 정당화의 주요 근거를 찾아내는 것이다. < 분석철학>이 이제는 단지 스타일에 따른 사교적인 통일체만 갖 고 있다고 말할 때 나는 분석철학이 나쁜 것이라거나 나쁜 모습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할 때 분석철학은 하나의 좋은 스타일이다. 분석철학자들 내의 단체 정신은 건강하고도 유용한 것이댜 내가 말하려는 요점은 분석철학의 호 • 불호와는 상관 없이 분석철학이 여타의 <인문학>의 학과들, 즉 <엄밀하고> <과학 적인 > 위상에 대한 허풍이 덜 분명한 학과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 과 같은 종류의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인문학의 학과들에서 통상적 인 생활 양식은 예술이나 문학에서의 그것과 동일하다. 죽 어떤 천재 가 새롭고도 홍미로우며 설득력 있는 무엇을 해내고 그 사람을 찬양 하는 자들이 학파를 이루거나 어떤 운동을 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가 령 연보(年譜)식의 역사 편찬이 미국의 많은 역사학과에서 현재 유 행중이며, 해체주의 비평이 많은 비교문학과에서 유행중이고, <가능 세계 의미론po ss i ble world seman ti cs> 이 많은 철학과에서 유행 중 이다. 이러한 운동들이 유행중이라는 말은 브라우들 Femand Braudel
이나, 데리다J ac que s D e nida 나 , 몬태규 R i chard Mon t a g ue 가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으며 많은 독자와 추종자 를 갖고 있다 는 뜻이다 . 그 이 상의 어떤 것을 하려는 것, 가령 라이헨바하의 방식처럼 , 해묵은 < 과 학적 철학의 문제 > 중 일부나 < 분석 철 학의 중요한 문제 들> 중 일부 를 명확히 진술하거나 해결하는 일을 몬태규가 마침내 성공했다는 등의 방식으로 그것을 설명하려 드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가 구성하는 어떠한 계보( 系譜 )도 , 마치 데리다 는 닥터 존슨 D r. J ohnson 의 진정한 계승자이며 브라우들은 랑케 Leop old von Ranke 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점을 밝히기 위한 계보처 럼 , 얼토당토 않고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속이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차라리 우리는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서 역사학이나 문학을 하는 동료들과 더불어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 우리 인문학도들은 우리 가 디룰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미리 알지 < 못한다 > 는 점에서 그리고 우리의 문제가 앞 세대인들의 문제와 같은 것인지 여부를 말해 줄 동일성의 규준을 < 필요로 하지 > 않는다는 점에서 자연과학자들과 다르다고. 이처럼 느긋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제도의 꼬리가 사이비 과학적인 개를 혼들게 <놔둔다>는 것이다 . 이것은 우리의 문제나 프 로그램들이 논의의 대상물이나 <현재까지의 연구 > 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천재들에 의해 참신하게 창안된 것임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새로운 것을 옛날 것으로 환원시키려 노력하지 <않고>, 전거가 될 문제나 방법들의 목록을 고집하지도 < 않으며>, 문제들이 진술될 표준적인 어휘를 고집하지도 <않는 > 것이 인문학 적 문화의 특징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마찬가지 논점을 표현할 수 있 을 것이다. 이렇듯 가다머 H.G. Gadamer 식으로 표현된 이 논점은, 쿤 식의 용어로 말한다면 <과학적>이고자 애쓰지 말고 진행중인 작업 에서 <표준>과 개방성 사이에 합당한 균형을 견지히는- 매트릭스(母 型)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며, 하버마스식의
용어 로 말한다면 담론이 지속되어야 하고 왜곡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 중요한 것 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3 분석철학과 〈 철학적 능력 〉 및 개념적 해명 내가 권하는 느긋한 태도에 따르자면 논리실증주의에 관해 라이헨 바하가 주장했던 바와 같은 < 과학적 > 지위를 분석철학이 보유하고 있는지 염려하지 말아야 하며, 우리나 다른 사람들이 과연 < 진정한 철학 > 을 하고 있는지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 우리는 백화제방( 百 花 齊放 )의 태도를 취하여 그 꽃들이 지속되는 동안에 찬양을 하는 한 편 그 것 들을 채집해 연구하는 일은 후대의 지성사가들· 몫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 .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대부분의 분석철학자들의 태도와 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은 철 학을 < 인문학 > 에서 빼내어 < 과학> 속에 넣으려는 라이헨바하식의 시도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자기들 분석철학자들은 < 인문학도들 > 과는 다른 특별히 구별되는 무엇을 갖 고 있다고 고집하려 할 것이다. 그렇듯 구별되는 점이란, 라이헨바하 가 생각했듯이 나열될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아니라, 통상적 으로 문학이나 역사학 교수들에게는 없으나 수학자나 물리학자들은 갖고 있는 특별한 지적인 덕목을 분석철학자들이 구비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견해에 의하면 철학에서 잘한다는 것은 (무엇을 <문 제 > 로 간주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암묵적으로 인정되고 있 으므로) < 철학의 문제들 > 중 일부를 실제로 풀어서 그 해답을 얻음 이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지성의 문제 혹은 순전히 문제 풀이 능력 상의 문제이다. 거기에 담겨 있는 발상은 철학자들이 전형적으로 많 이 갖추고 있는 특정한 범위의 재능, 정신적 태도 , 혹은 그것과 유사 한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 철학적 능력 > 이라 불리는 그러한 지적 덕목이 무엇으로 이루어
졌는가 를 더 상세히 묻 는다면, 그 대답은 아마도 대략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유능한 철 학자는 그가 듣는 어떠한 논 변에서도 결 함 을 꼬 집어낼 수 있어야 한다 . 게다가 유 능 한 철 학자 는 < 특 별히 철 학 적 인 > 쟁점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통상의 철 학 강좌에서 논의되는 것 이외 의 논제들에 대해서도 그런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 그 당연한 귀 결 로서 , 유능한 철학자는 < 어떠한 > 견해에 대해서 도 그 것 이 제아무리 엉뚱한 길로 접어들건 말건 상관없이, < 가능한 > 한 훌 륭한 논변을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 철학적 능력에 대한 이 이념은 가 능 한 주장 들의 세계를 죄다 추론적인 관계들에 의해 서로 얽혀 있는 것 으로 간주하여, 어떠한 논변이라도 구성될 수 있으며 또 바판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나는 분석철학자들이 전형적으로 이런 유의 능력을 정말로 많이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떻든 간에 차츰차츰 나중에 라야 그 타당성이 입증되는 자기-묘사이다. 특히 이러한 지적 덕목 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미국의 권위 있는 대학원의 철 학과에 입학하는 것을 권유해선 안 될 것이다. 심지어 그가 플라톤, 이우-구 스티누스 , 스피노자 , 칸트 , 헤겔 등을 공부하길 좋 아한다고 해도 만일 이러한 논변의 재주가 모자라면 , 그에게 철학으로 밥벌이 할 것을 권 유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신에 그 사람은 학과를 바꿔서 비교문학 과, 정치학과 , 혹은 역사학과로 가서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 이런 일 들의 결과로, 분석철학자들은 과학적 탐구의 특정한 영역에 국한된 전문가가 아니라 하나의 엘리트 집단――군념撲된 문제나 선행된 결 과의 목록 때문이라기보다는 재능에 의해 통합된 엘리트 집단 이라는, 자기들이 언필칭 학계의 감찰관이라는 자기 이미지를 점점 강화하였다. 그래서 하나의 정합된 메타-철학적 설명을 갖는다는- 것 혹은 <무엇을 ‘특별히 철학적인’ 문제로 간주할 것인가>와 같은 물 음에 대답하는 것이 분석철학에서는 점점 덜 중요하게 되었다. 쿤 , 크립키, 롤즈 동에 의해 논의된 쟁점들 간의 연계성을 찾는 일은 점
점 덜 중요하게 되었댜 또한, 라이헨바하가 실증주의에 부여했던 것, 즉 그것과 과거의 관계도 역시 분석철학에서는 덜 중요하게 되었다. 관건이 되는 것은 공통의 문제나 공통의 계보가 아니라 공통의 재주 였기 때문이댜 이 말은 < 철학은 이제 사변적이기보다는 과학적인 것이 되었다 > 라는 주장이 현대의 분석철학에서는 라이헨바하가 의미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과 학적 > 이란 말은 이제 <논 변적 > 이란 것과 홉사한 어떤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옛 것과 새 로운 것 사이의 대비는 더 이상 공통된 일련의 문제들에 관한 논의 에서 전(前)과학적인 미성숙의 단계와 성숙된 과학적 단계 간의 대 비가 아니라, 스타일 상의 대비 즉 < 과학적 > 스타일과 < 문예적 > 스 타일 간의 대바가 되었댜 < 과학적 > 스타일은 추론의 전제가 짐작이 아니라 명확한 표현에 의해 제시되기를 요구하며, 용어의 도입이 암 시가 아니라 정의에 의해 이루어지기를 요구한다. <문예적> 스타일 은 논변을 포함할 경우도 있으나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그 스타일에 서 본질적인 것은 새로운 형태의 지적 생활에 대한 희망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말하는 것, 새로운 언어 놀이를 제안하는 것이다 . 내가 앞 소절에서 말한 바가 옳다면, 이렇듯 [분석철학자 간의] 동 일성의 규준이 논의 주제에서 스타일로 전환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 이며 예견 가능한 것이다. 한 학문 분야가 잘 정의된 논의 주제를 갖 지 못하고 또 대학과 대학을 넘어서는 성취의 패러다임들을 갖지 못 하면 , 그런 학문 분야는 스타일상의 패러다임들을 가져야만 할 것이 다 . 내 생각으로는 이것이 바로 지난 30 년 동안 분석철학이 실증주의 적 단계에서 탈실증주의적 단계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일이 댜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이것을 퇴행의 징표라고 여기지 않는댜 해서는 안 될 어떤 일을 철학자들이 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 이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내가 실제로 그렇게 믿듯이 철학 이란 것이 역사적 본질이나 사명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기에, 나는
분석철학이 참된 길에서 벗어나 방황했다고 말하는 것이 < 아니다>. 협의의 전문적인 의미에서 <철 학 > 은 무엇이 되었든 바로 우리들 철 학 교수들이 행하는 것을 말한다. 공통된 스타일을 갖고서 대학의 학 과로서 통상적인 조직표 상에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우리의 학문 분야를 여타의 학문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식별하게 해주며 또 존경 받게 하가에 실로 충분한 것이다 실제로 문제의 스타일이 내가 묘사 했던 바와 같은 논변의 재주일 경우, 그것은 사회적으로 소중한 것이 되기에 충분하다. 논변들을 갖다붙이고 또 떼어내는 일에 뛰어난 수 천 명에 달하는 상당히 여유 있고 상당히 비전문화된 지성인들을 갖 는다는 것은 한 나라로서는 행운이댜 그러한 집단은 귀중한 문화적 자원이댜 우리들의 연구바 신청을 두고 말한다면, 국가는 분석철학 자들이 공공의 프로젝트들에 대해 충고를 하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다론 여느 전문가 집단만큼이나 훌륭하게, 혹은 어쩌 면 대부분의 다른 집단들보다 더 낫게 훈수를 할 것이다. 하지만 분석철학이 갖고 있는 현재의 자기 이미지에는 의심스러운 < 어떤 구석>이 있다. 그것을 나는 우리가 영리할 뿐만 아니라 지혜 롭다고 자임하는 경향이 있는 한, 우리는 그릇된 믿음에 사로잡힌다 는 말로 표현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이중의 자부심을 누릴 자격이 없다. 철학 교수들은 지혜롭다고 전통적으로 간주되어 왔는 데, 그 까닭은 그들이 많이 읽고, 많이 경험하였으며, 사상의 영역에 서 멀리 여행하였고, 인간의 영혼을 항상 괴롭게 하는 커다란 문제들 과 씨름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 이미지는 철학에 대한 연구 가 (1950 년 이전에 미국의 철학과에서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가령 프 랑스나 독일에서 그러하듯이) 철학사(哲學史)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 로 전개되는 한 얼마간 신빙성이 있었다. 그러나 실증주의 혁명은 철 학자의 이미지를 학자에서 과학자로 변모시켰다. 그래서 최고의 철학 도는 지성사에 대해 정통한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수학이나 물리학 에 정통한 인물이라고 암시하였다. 탈실증주의적인 분석철학으로 전
환하는 과정에서, 과학자라는 그 이미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주 분 명하지는 않으나 다 른 어떤 것으로 대체되었다. 어쩌면 분석철학자에 게 가장 잘 어울리는 모델은 이제 학자나 과학자가 아니라 < 변호 사 > 일 것이다 훌륭한 브리핑을 해내고, 상대를 압도하는· 반대 심문 을 행하며, 유관한 전제 조건들을 찾아내는 등의 능력은 분석철학자 들이 < 뚜렷히 철학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능력과 거의 같다. 갈피를 못 잡게 많은 일련의 명제들 속에서 명제들 사이의 추론 관계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면, 당신은 훌륭한 변호사나 훌륭한 분석철학자 가 되 기 에 충분하다 . 5 1 철학자들이 스스로를 지혜와 결부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여전히 있 는 까닭은, 교훈적인 개념들―――문화의 나머지 영역들을 분류하고, 이해하며 , 비판하게 해주는 범주들-울 보장하는 매트릭스(母型) 를 갖고 있다는 우쭙한 자부심을, 현대의 분석철학이 30 년 전의 논리 실증주의로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다. 탈실증주의적인 분석철학자들 가운데서는 실증주의자의 개념 체계를 5) Jan i ce Moulto n , A Paradi gm of Ph ilos op h y: The Adversar y Meth o d, Dis c overing Reality , ed. S. Hardi ng and M. Hi n ti kka (l 983) 을 볼 것. 그 논 문은 분석철학자들이 그들의 학문 분야를 그렇게 생각해곤 해왔던 법률적인 방 식에 대한 매우 훌륭한 설명이다. 몰튼은 온당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 < 논적 (論敵)의 패러다임 속에서 우리는 이전의 철학자들이 과학적 추론의 기초를 수 립하거나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고자 애쓰는 것이 아니라 마치 논적들을 향해 연설을 행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논적의 형태로 개작될 수 없는 철학자들 은 아마도 무시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재해석은 그릇된 해석일 수도 있으며 , 위대한 철학자들에 대한 우리의 선택은 그들이 말한 바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 그들이 말했던 것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근거할 수도 있다.> 또、 < 일반적으로 공공의 토론에서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 한 신념을 포기할 좋은 이 유는 아니다 > 라고 말함으로써 몰튼은 노직 Robe rt No zi ck 의 입장과 같은 입장 울 취 하고 있다(R obe rt Nozic k , Ph ilo sop h ic a l Exp la nati on s(Cambri dge, Mass.: Harvard Un ive rsity Press, 1981) 의 여론」을 참조) . 몰튼과 노직은 분 석철학자의 통상적인 생활 방식에 대한 모종의 불편을 증거하며, 어쩌면 새로운 어떤 방식의 시작을 증거하는지도 모른다.
잇는 후계의 개념 체계에 대한 합의는 고사하고, 그러한 개념 체계와 홉사한 포괄성을 추구하려 는 시 도조 차도 없다 . 그러나 연구비 를 따내 기 위해 우리가 가끔 사용하 는 레토릭과, 다른 영역의 교수들에게 가 끔씩 내비치는 겸양에 의하자면, < 개념적 물음 들> 에 관해 통달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여전히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댜 그러한 것 들은 그 유명한 우리의 논변 능력에 덧붙여 우리에게 특권적인 지위 룰 주는 개념들에 관해 특별하고도 특권적인 지식을 우리가 갖고 있 다는 암시를 준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지식이나 높은 지위를 전 혀 갖고 있지 않댜 우리는 라이헨바하의 교훈적인 처형대(處刑 磁 )를 거부하였으며, < 과학적 철학의 문제들 > 에 관한 그의 목록도 동시에 거절해 버렸다. 우리는 그 자리에 어떤 것도 대체시키지 않았으며, 대체시키려고 애쓰지도 말아야 한다. 최근 몇십 년 동안에 우리가 개 념들에 관해 배웠던 바가 있다면, 그것은 한 개념을 갖는다는 것은 한 낱말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이며, 한 개념에 통달한다는 것은 한 언어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이고, 언어는 발견되기보다는 창안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역사상 특정한 시대의 것도, 특정한 직업의 것도, 문 화의 특정한 부분에 속한 것도 아닌 개념이면서 , 모든 하위개념들을 그 안에 필연적으로 포함하고 있고, 하위 개념들을 <분석>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어떤 초개념(超槪念)들에 접근할 수 있다는 발상을 단념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플라톤과 라이헨바하가 공유하였으나 바트겐슈타인이 우리를 거기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던 그 오래된 꿈, 즉 철학은 과학적 지식의 본질에 대한 지식이요 그리고 모든 가능한 탐구의 본질에 대한 성공적인 탐구라는, 바로 과학들의 과학이라는 꿈을 포기해야한다. 불행히도 <개념적 쟁점들>에 관한 논의가 혼히 벌어지는, <응용 철학>이라고 하는 영역에 대한 간단한 여담을 통해 이 마지막 논점 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만일에 우리가 현자라는 레토릭을 포기한다면, 의료( 醫療 )와 도덕 사이의 딜레마에 처한 의사가 그를
위해 철학자가 < 분석해 주고 명확히 해준 > < 사람 > 이나 < 최선의 이익 > 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거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껏, 우리가 읽었던 여러 사람들이 (가령 밀, 흄, 스피노자, 칸트, 헤겔 등이) 그 용어롤 사용하는 방식과, 그 용어를 써 서 그들이 말했던 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다. 이런 일이 어쩌면 앞으로 의사가 그 용어를 사용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그래서 장차 의사가 결심을 하는 데에 도움을 줄는지도 모른다 . 그렇지만 그것이 의사가 의미한 바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 고, 전제 조건은 무엇이며, 정말로 문제되는 것은 무엇인지를 의사에 게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문학의 문화에서 증식된 여느 것들처럼 새로운 대안, 새로운 맥락, 새로운 언어에 어떤 의미를 부 여하는 일을 해낼 뿐이댜 동일한 상황에서 가령 문학 교수나 역사학 교수가 행할 것 혹은 행할 수 있는 것과 판이하게 다른 종류의 일을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언어적이고 논변적인 레퍼토리를 늘려서 상상력을 증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전통적 인 인문학도로서의 과업을 넘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변 호사가 하는 일, 즉 결론과는 상관없이 고객이 결심한 日 H 를 위해 논 변을 제공하며 선택된 그 결심이 더 나아 보이도록 하는 일에 불과 숭}다 . 내 생각으로는 이 점에 대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그렇게 된 까닭은 이미 죽은 위대한 철학자들 중 누구에게서 연유하였거나, 그에 의해 분석되었던 낱말이나 슬로건을 우리가 앵무새처럼 지껄이 면서 의사, 심리학자, 역사학자, 문예비평가 혹은 길거리의 시민들을 자주 만났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용어나 구절의 계보를 모르는 사람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철학자들은 사태를 파악한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불합리한 추론이다. 만약에 환자의 존 엄성을 존중할 것인가와 그 환자의 고통을 최소화할 필요성 사이에 서 의사가 고민을 하고 있다면, 목적론적이며 공리주의적인 윤리학의
장점과 단점을 논할 수 있는 철학자가 명확히 알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그 의사도 혼동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상세히 논의를 한다 는 것은 하나의 덕목이긴 하나 그것이 혼동의 제거, 명확성의 획득과 동일한 것은 아니댜 우리는 소설가, 문예사가, 사회사가, 신학자 등 에 의해 짜여진 낱말들의 그물을 채용함으로 해서 대안을 더 상세히 논의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도덕철학자들의 그물과 마찬가지로, 이중 어느 경우도 더 많이 말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정말로 의미히는 바나 항상 실제로 전제하고 있는 바에 대한 발견인 것은 아니다. 라이헨바하의 주장을 물리치게 해준 교훈으로서 비트겐슈타인이 가르쳐준 것들 가운데 하나는, 어떤 주장을 도출해 낼 신빙성 있는 전제들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 주장자가 <정말로 마음속에 두고 있는 것>을 찾아낸 것은 아니라는 점이댜 비트겐슈타인이 가르쳐준 또 다른 교훈은, 누구의 행위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심지어는 통상적으로, 그 사람의 애초 문제나 동기나 의도 등을 찾아 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학적 스타일에 의해 논변을, 혹은 문예 적 스타일에 의해 이야기를 구성하는 일은 둘 다 좋은 일이다. 그러 나 그런 것들이 <분석>이나 <반성>에 의해 캐내어지기를 기다렸던 추정된 실재의 발견은 아니다. 지난 30 년 동안 분석철학에서 발생했 던 모든 것들은 한편으로 그러한 구성물들과, 다른 한편으로 라이헨 바하가 철학적 탐구와 동일한 것으로 여기고자 하였던 유의 과학적 발견 사이의 차이점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4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의 분열 지금까지 나는 분석철학이 그 자체 내부의 반(反)一실증주의적 변 증법에 의해서 결과를 달성하는 과학이라는· 자기 이미지에서 벗어나, 순전히 논변의 재주를 자유롭게 부리는 (그리고 거의 <투기적>이라
고 말해도 좋을 듯 한) 것이라는 이미지로 옮겨왔다고 말했다. 여기서 < 투기적 s pe cula ti ve > 이란 말은 < 앞선 어떠한 구별이나 문제의 목록 에도 구애 를 받지 않는 > 것을 의미한다 ? 라이헨바하가 다시 태어난 다면 현대 미국의 철 학에서 말이 혼란스럽고, 문제와 프로그램들이 난립하는 등 이렇듯 제약이 없는 것을 보고 대경실색할 것이다. 그렇 지만 그는 스타일과, 논변의 일관성과, 변증의 엄밀성에 대해선 아마 도 칭찬할 것이다. 그는 자기가 말했던 < 수학적 과학의 정밀한 방법 을 결코 배운 적이 없이 문학과 역사학에서 훈련받은 > 사람들에 대 해 철학자들 사이에 폭넓은 불신이 깔려 있는 점에 대해서도 동의를 표할 것이다. 그는 < 지적인 건강 > 을 위해서는 데리다와 푸코의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좋다고 권유하는 저명한 분석철학자의 견해에 동조 할 것이다 .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미국의 대학 생활에서 실제적인 문제들, < 누가 헤겔을 가르칠 것인가? > 라는 물음으로 축약되는 문 제들을 야기시켰다. 이제부터는 이 문제에 관해 논의하고자 한다 .
6) 저자는 란 단어가 <사변적>과 <투기적>이란 이중의 의미룰 갖고 있는 점을 활용해서, 철학이 사변에서 과학으로 변했다는 주장을 일부러 거스르는 아이러니를 만들어 표현하고 있다.(역주)
이 물음에 대한 라이헨바하의 대답은 < 가능하다면 아무도 가르치 지 말아야 한다 > 는 것이었다. 만일에 헤겔은 로크, 라이프니츠, 흄, 칸트 등이 하고자 했던 그런 유의 것, 죽 자연과학의 본질, 가능성, 성취의 범위 등을 이해하고자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던 사람이라고 본 다면, 그 대답은 아주 적절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확실히 헤겔은 그런 일을 썩 잘하지는 못하였다 . 또, 헤겔의 저서 『논리학』과 <체 계 > 나 < 과학 Wi ssensc haft> 등에 관한 그의 레토릭을 강조할 경우 에도, 그 대답은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들은 헤겔의 저술 가운데 마르크스나 더 일반적으로 19 세기의 역사 사상 이나 정치 사상에서 중요시된 부분이 아니다. 중요시되었던 부분은 자연에 관한 지식이나 새로운 과학의 현상 등을 외면한 채 역사주의
자의 자기 이해와 인간 존재의 자기 결정에 관해 논의한 부분, 즉 『 정신현상학 』 , 『법철학 』 , 『 역사철학 』 등이었다. 이러한 저술들로 말 미암아 헤겔은 인간의 역사 과정에 대한 중첩되는 이야기들의 시리 츠 죽 마르크스, 니체, 후기 하이데거, 푸코 등이 포함되는 시리즈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 이야기들은 <철학적 체계>가 아니다. 그것들 은 주관과 객관에 관한 문제나, 라이헨바하가 19 세기 과학이 해결했 다고 믿었던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도 해답을 제공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장르의 글쓰기는, 근대 과학의 시대에서 철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라이헨바하의 대답과는 다른 주요한 대안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댜 <누가 헤겔울 가르칠 것인가?>라는 물음은 < 누가 이 장르, 이른 바 ‘대륙철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가르칠 것인가?>라는 물음을 축약한 것이다 . 이 물음에 대해 명백한 대답은 <누구든 그들을 연구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옳은 대 답이긴 하지만, 일련의 작위적인 물음들을 깨끗이 배제하고 난 다음 에라야 비로소 우리가 진심으로 수용할 수 있는 대답이다. 그렇듯 작 위적인 물음들 가운데 하나는 <대륙철학자들은 과연 진정한 ‘철학자 들’인가?>라는 물음이댜 분석철학자들은 철학적 능력을 논변의 재 주와 동일시하며, 하이데거나 푸코의 엄청나게 많은 저술들 가운데에 서 그들이 논변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이 들어 있지 않다고 보기 때 문에, 이 사람들은 철학자가 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실패한 사람들, 즉 무능한 철학자들이라고 암시한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폴라톤은 무능한 소피스트였다고 말하고 고슴도치는 무능한 여우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멍청한 짓이다. 헤겔은 수학의 방법과 스타일을 모 방하는 철학자들에 대해 자기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헤겔은 <그들이야말로> 무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상호간에 무능하다는 비방은 이무에게도 좋을 것이 없댜 진정한 철 학은 무엇이며, 누가 진정한 철학자로 간주되어야 하는지 등에 관한
물음을 우리는 그냥 내다버려야 한댜 <철학>이란 낱말을 포함시켜 자기를 묘사하는 지식인들이 서로 갈라져 때를 이루고, 영토 다툼을 하는 시대는 우리 시대가 최초의 것도 아니요 마지막의 것도 아닐 것이다. 19 세기 후반의 미국에서 우 리가 오늘날 <철학>이라 부르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 호교론(護敎 論)>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딴 살림을 차려 나왔는데, 이때 상호간에 상대편은 <진정한 철학자가 전혀 아니다>라는 비방도 함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심리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자체의 사업을 꾸려가기 시작했을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요즈음 우리는 수리 논리학자에게 대학이 지불해야 할 돈을 어느 쪽의 예산에서 빼내야 할 것인지를 두고 철학과와 수학과 간에 논란하는 것을 목격한다. 예 산과 권력이 달린 그러한 논쟁들은 <학문 분야의 본질>에 관한 임 시 변통적인 수많은 레토릭, 경험 많은 학장이라면 지동적으로 상관 치 않을 레토릭을 산출한다. 그러한 논쟁들은 상대편이 가르치는 학 습 재료는 <아예> 가르쳐서는 안 될 것이라고 어느 한쪽이 말하고 싶을 정도가 되면 위험스럽게 된다. 정말이지 서글프게도 이런 말들이 실제로 오간다. 비교문학과들이 니체와 데리다를 가르침으로 해서 철학의 잔디밭을 무단 침입하였다 고 분석철학자들이 격노했으며, 비교문학과에서 자기네가 그것을 가 르칠 수도 있다고 제안하자 두 배로 화를 냈다는 이야기를 니는· 들 은 적이 있댜 그것과는 반대로, 분석철학과의 동료 교수들이 <그저 논리학의 말씨름>을 가지고서 학생들의 시간을 허비시키고 정신을 메마르게 한다고, 대륙철학의 애호가들이 불쾌해 한다는 이야기를 들 은 적이 있다. 상호간의 무능력 비방처럼 이런 유의 레토릭도 무의미 하댜 이것 역시 위험스러운 것인데 그 까닭은 관심을 갖고 있는 학 생들에게 특정한 책들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전문 대학이나 대학교의 교수 요원으로 갖지 못하는 결과를 실제로 초래할 수도 있 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주의 교육 제도의 존재가 정당화될 수 있
는 유일한 길은 학생들이 실제로 도서관에 있는 어떠한 책, 가령 가 다며, 크립키, 썰 데리다 등을 다 찾아볼 수 있으며 그것에 관해 더 불어 얘기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 느 학과의 예산에서 비용을 지불할 것인지를 결심하기 위한 조정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결과가 학생들에게 열려진 가능성들을 제한하는 것은 아니었는지를 꼭 확인해야 한댜 내가 말했던 바에서 귀결되는 것은 분석철학과 대륙철학 간의 <다리 놓기>에 대해 우리는 안달복달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 러한 프로젝트는, 종종 그렇게 말해지듯이, 양쪽이 공통의 문제들을 상이한 <방법들>로 공략중일 때에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첫 째로 그와 같은 공통의 문제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의 이야기를 추구하는 것은 <분석적>인 철학 잡지들에서 논의되는 유의 문제들 과는 마주치지도 않는다. 둘째로, <방법들>이라는 관념이 어느 쪽에 도 명확히 적용되지 않는다. 라이헨바하가 호소했던 <강력한 분석의 도구들>이라는 관념은 분석철학자들이 실제로 행하는 바와는 더 이 상 아무 연관성도 없댜 문제의 그 도구들은 단지 라이헨바하 시절에 있었던 실증주의적인 구분일 따름이다. 우리가 획득한 새로운 도구들 도 단지 약간 나중에 나타난 과도기적인 구분일 따름이다. 탈-후설 적인 <대륙철학>의 일격도 역시 <방법>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 현상학적 방법에 대한 후설의 추구는 논리실증주의에 대한 라이헨바 하의 추구와 마찬가지로 <과학의 안전한 길>을 호소하는 한 표현이 었다 하지만, 후설은 자기가 <역사주의자>라고 저주했으며 내가 전 형적인 <대륙철학>으로 간주하고 있는, 헤겔-마르크스-니체-하이 데거-푸코를 잇는 시리즈에서 짧고도 시시한 중단에 불과하였다. 이 시리즈에서 니체와 하이데거와 푸코를, 헤겔과 마르크스에게서 구별 하게 해주는 것은 전자가 점점 더 마음 터놓고 <체계>, <방법>, <과학> 등의 관념들을 포기했디는· 점, 학문 분야들 간의 경계선을 점점 더 기꺼이 애매하게 했다는 점, 철학이 하나의 자율적인 학문
분야라 는 고집 을 거 절 했다 는 점이다 . 만일에 다리 놓 기나 연합 군 등 아쉬워하는 말을 제쳐놓는다면 , 우 리는 분 석 철 학/ 대륙 철 학의 분열을 영속적이고도 무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그 것 이 철 학을 찢어놓는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철 학 > 이라 불리는 어떤 단위체, 과거에는 하나의 전체였다가 지금 은 쪼개진 그런 단위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 <철 학 > 은 자연종( 自然 種 )에 대한 이름이 아니라 인문학의 문화가 행정적이며 문헌적인 목 적 등을 위해 구분된, 정리( 整理 )하는 함( 函 )의 이름에 불과하다. 무 엇을 < 과학적 철학 > 으로 간주할 것인가에 대한 라이헨바하식의 설 명은, 무엇을 < 존재적 on ti c > 인 것이 아니라 < 존재론적 on t olo gical > 인 것 으로 간주할 것인가에 대한 하이데거식의 설명과 마찬가지로, 논의코자 하는 토픽들에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그와같이 눈감고 아웅하는 식의 속임수를 버리고 특정의 연구 프로 그램이나 스 타일이 아닌 중립적인 의미의 < 철학 > 이란 용어를 채택 한다면, 우리는 셀라즈의 무심한 정의와 흡사한 어떤 것을 얻게 될 것 이다: < [철학이란]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사물들이 가장 넓은 의 미에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 . 그러나 이렇듯 중립적인 의미는 어떠한 < 전문적 > 의미의 < 철학 > 과도 거의 아무 상관도 없다 탈실증주의적 분석철학과 , 탈현상학적 대륙철학은 둘 다 모든 사고와 언어가 부합되어야 할 영원히 중립적인 개념의 모형 ( 母型 )이라는 라이헨바하식의 관념을 포기[선언]하였으므로, 그 두 학파는 현자로서의 역할이나 유의미성에 대해 혹은 주장이나 행위의 합리성에 대해 최종적인 권위로서의 역할을 포기하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 이렇듯 포기하는 일에 동참하고 난 다음에라야, 두 학파는 논 변할 새로운 홍밋거리를 찾아내는 일을 할 것인가 아니면 전반적인 역사의 이야기를 할 것인가의 차이점에 대해 동의할 수 있을 것이며 , 그때라야 남은 일이 더 유익할 것이다 .
5 숨겨진 속셈둘 지금까지 내가 말해 왔던 이야기 들 은 디옴꾀- 같이 요약될 수 있겠다. (1) 분석 철 학은 사변에서 과학으로 , 역사에 기반을 둔 학문 분야로 서의 철학에서 < 논리적 분석 > 을 중심으로 한 학문 분야로서의 철 학 으로 옮겨가기 위한 한 방식으로 출 발하였다. (2) < 논리적 분석 > 이라는 관념이 그 관념 자체에 적용되었으며 예컨대 라이헨바하가 당연시하였던 언필칭 < 과학적 > 인 어휘는 비트 겐슈타인, < 일상 언어 [학파] > , 콰인, 쿤, 셀라즈 등의 비판에 의해 천천히 자살을 하게 되었다. (3) 따라서 분석철학은 계보, 사명감 , 메타철학 등이 없이 남게 되 었댜 철학에서의 훈련은 법과대학에서 볼 수 있는 종류 같은 일종의 <판례집(判例 集 ) > 의 과정으로 변모하였다. 현재 유행하는 인물들의 논문을 인쇄되기도 전에 입수해 읽고, 그것에 관해 반론을 제기함으 로 해서 학생들의 재치는 더 예리해졌다. 그렇게 훈련된 학생들은 자 기네가 전통을 이어간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과학의 최전방에 있 는 <주요 문제들>의 해답을 찾는 데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 오히려 그들은 스타일과 논변의 질에서 자기 이미지를 찾았 다. 그들은 과학자 같기보다는 홍미로운 새로운 사례가 발생하기를 바라는 변호사같이 되었다 . . (4) 이러한 발전은 헤겔, 니체, 하이데거 등에 관한 연구를 대학의 철학과에서 축출함으로 해서 <분석철학>과 <대륙철학 > 간의 분열 을 경화(硬化)시켰다. 대륙철학의 이 전통은 미국의 대학들에서는 예 컨대 역사학과, 정치학과, 비교문학과 등 철학과 이외의 다른 여러 학과들에서 논의되고 있다 . (5) 그 결과로써 미국의 철학과들은 (그 조상들의 고향인) 인문학, (한때 그곳으로 들어가고자 희망하였으나 결코 온전히 수용되지 않았
던) 자연과학, (그쪽 을 향해 이제 촉 수 를 내 밀 고 있 는 ) 사회과학의 사 이 어디쯤에서 좌 초 되었다 . 역사가이거나 문예비평가 를 겸하기도 하 였던 옛날식의 철 학 교 수 는 씨 도 찾기 어렵게 되었다 . 새로운 유의 철 학 교수는 스스로 전범위에 걸친 분석적인 지성으로서 당면한 어 떤 사안에 대해서도 <철 학적 전문성 > 을 내보일 수 있다고 간주하며, 동시에 자기가 특별한 지식을 다루는 본연의 영역을 갖고 있는 인물 이라고 간주하려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견지되기 어려운 이미지이 댜 철 학적 문제와 프로그램의 수명이 점점 더 짧아져서 그 본연의 영역이란 것이 터전을 자주 日尸규게 된다. 대학의 타 분야들은 <철학 적 전문성 > 이란 것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 (충분히 합당한 일인데) 당혹해 하게 되었다. 내 이야기는 유형이 서로 다른 교수들, 상이한 성향과 그로 말미암 아 상이한 패러다임과 관심을 가진 교수들 간의 투쟁에 관한 것이었 댜 그것은 학문끼리의 정치 acade mi c politi cs 에 관한 이야기, 즉 결 국에는 어느 유형의 교수들이 어느 학과의 예산을 쑬 것인가라는 문 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일에 관한 이야기이다. 학문끼리의 정치에 의 해 야기된 문제들은 학문끼리의 정치가 더 많음으로 해서 해결될 수 있다 . 금세기 말엽까지 가면, 미국의 철학과는 지난 30 여 년 동안의 특징인 애매성을 벗어나 다시 한번 명확한 자기 이미지를 발전시킬 것으로 기대해 봄직하다 . 그렇게 될 한 가지 가능성은 < 새로운> 학 문 분야라는 이 이미지는 그때에도 50 년의 연륜을 못 채운 것으로서, (그때까지 가는 도중의 어느 시기에 대륙의 대학들에서도 분석철학이 승리를 하지 못한다면) 세계의 다른 곳에서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 실천되고 있는 것과 연계성을 이루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더불어 논 변을 벌이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토픽에 대한 이러한 취급은 무엇인가를 빠뜨려놓아 미 진하다. 교수들간의 투쟁이 더 큰 싸움과 완전히 무관한 경우란 결코
없댜 옛날 방식의 (듀이 - 화이트헤 드 유의) < 인문학 > 으로서의 철학 과 실증주의자들 간의 분열의 배후에는 숨겨진 속셈들 이 있으며, 오 늘날 < 분석철학>과 < 대 륙철학> 에 각기 헌신하는 사람 들간의 분열 의 배후에도 비슷하게 숨겨진 속셈들이 있다. 반대편을 부도덕성이나 우둔성으로 매도하는 양측의 거친 호홉은, 단순히 학문끼리의 권력 투쟁이라는 말로는 충분히 설명해 낼 수 없는 어떤 열정들이 거기에 있디는 신호이다 철학이란 것이 과거 한때는 전체였다가 지금은 쪼개진 무엇은 아 니지만, 그것은 적어도 다른 어떤 것, 즉 세속적인 지식인들의 자기 개념이댜 칸트에 이르기까지 세속적 지식인들은 발전하는 자연과학 에 의해 획득된 지식을 자기 삶의 요점으로 간주하였다. 19 세기 를 통 해 헉슬리 Thomas Huxley, 클리포드\ 퍼스 C. S. Peir c e 같은 사람들 은 여전히 과학적 진리를 최고의 인간적 덕목으로 , 죽 신에 대한 기 독교인들의 사랑과 두려움에 비견되는 도덕성으로 촌중하였다. 이러 한 19 세기식의 인물들이 라이헨바하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19 세기에 는 < 새로운> 유형의 세속적인 지식인들이 등장한 시대이기도 하였 는데, 그들은 계몽주의가 신에 대한 신앙을 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철 저하게 과학에 대한 믿음을· 버린 사람들이었다. 카알라일 Thomas Carl y le 과 아담스 He nry Adams 는 이 렇듯 새로운 유형 의 지 식 인, 즉 역사의 우연성에 대한 감각이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그런 지식인 의 본보기였다. 여기서 그 감각이란 자연이나 과학적 지식은 대체로 요점을 벗어난 것이며, 역사야말로 중요한 것이라고 보는 것을 말한 다. 이런 유의 지식인들은 철저하게 세속적인데, 그 까닭은 < 과학 의> 종교나 <인간성의> 종교도8 1 옛날의 종교[중세 시대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자기 기만적이라고 그들이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학이 7) W. K Cli ffor d, 1845 述 79: 영국의 수학자 및 철학자.(역주) 8) 과학에 대한 믿음이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종교화하여 표현한 것으로 문맥 상 각각 실증주의와 계몽주의를 가리킨다.(역주)
란 신학을 확장시킨 것 에 불과하며 과학과 신학 둘 다 < 가장 긴 거 짓말> 의 형태에 속한 다고 보는 니체의 견해에 기우는 사고 경향을 나타내 보인댜 그러한 지식인들이 < 과학적 > 혹은 < 언어적 > 철학 에 대해 갖는 태도는 니체의 다음과 같은 빈정거림으로 요약될 수 있다: < 나는 우리가 신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염려하는데, 그 까닭은 우리가 여전히 문법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 이런 두 유형의 지식인들간의 분열은 금세기에 들어와서 더 심화 되었다. 실로 그것은 단지 학문끼리의 정치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스노의 < 과학의 문화 > 와 < 문예의 문화 > 사이의 대비에 의 해 부정확하게 스케치되었던 분열이다. 그것은 분석철학지들이 <비 합리주의 > 운운하며 투덜거리자, 문학과에 있는 사람들이 격노했을 때 그리고 분석철학자들의 작업에는 < 인간적인 의의 > 가 없다고 대 륙철학자들이 앙칼진 소리를 했을 때, 공공연히 드러나기 시작한 적 개심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과학적 방법의 적용>과 홉사한 어떤 것 이 인간의 자유에 대한 최선의 희망이라고 믿는 지식인들과, 다른 한 편으로 푸코나 하이데거 등과 더불어 < 과학적 방법>이라는 관념은 허무주의 시대의 잔인성과 실망감을 이면에 감추고 있는 가면이라고 여기는 지식인들간의 차이다. 그것은 하이데거는 나치스에 협력했으 나 카르납은 [나치즘에 반대하여] 이민을 왔다거나, 러셀은 스탈린주 의의 본질을 꿰뚫어보았지만 사르트르는 그렇지 못하였다거나, 혹은 롤즈는 법의 규칙에 대해 평범한 시민들의 희망을 공유하지만 푸코 는 그렇지 못하다고 분석철학자들이 언급할 때 비로소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각자의 관심들이 전혀 중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왜 크립키와 쿤과 롤즈는 모두 같은 편에서 작업중이라고 일컬어지 는 반면에, 각자가 판이하게 다른 토픽을 논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왜 하이데거와 푸코와 데리다는 저쪽 편에서 작업중이라고 여겨 지는가를 설명하게 해준댜 쌍방이 모두 자기들이야말로 시대의 위험을 동료 시민들에게 반드
시 해명해야 하는 지도자로서, 지구라는 국가의 이해가 달린 문제 를 모색하고 있다고 여기는 까 닭 에 , 혹자 는 이것을 < 정치적인 > 분열이 라고 부 를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 과학적 > 인 지식인과 < 비과학 적인 > 지식인 간의 이 구분은 더 협소하며 더 친숙한 의미의 < 정치 적 > 이라는 말과 온갖 이슈에서 갖가지 방식으로 관계 를 맺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 문제를 더 추적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는 가 능한 한 실용적인 관용 , 즉 쌍방이 상대편을 가리켜 어두운 시대에 빛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설령 그릇된 길을 가고는 있지 만 , 정직한 동료라고 보는 관용을 견지하자고 단순히 제안하고자 한 다. 그리고 학문끼리의 정치와 현실의 정치 간에 관련성이 < 있다고 > 는 해도, 그것은 후자에 관한 정열이 전자에 관한 정열로 전이되는 것을 정당화 해줄 만큼 그토록 밀접한 관계는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특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옮긴이 해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해제의 1 절에서는 로티의 주요 저 술과 그의 사상의 전반적인 특징을 알아보고, 2 절에서는 이 책에 실 린 각 논문의 핵심 주장들을 간추려 이 책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고, 3 절에서는 이 책이 우리에게 던져준 도전의 성격과 문예 비평으로서 의 철학의 성격을 살펴보고, 문화사적인 의의를 정리하기로 하겠다. 끝으로 4 절에는 독자들의 참고를 위해 로티의 주요 저술과 국내의 주요 문헌들의 목록을 수록하기로 한다. 1 로티의 주요 저술과 그의 사상의 전반적 특징 저자인 리처드 로티 교수는 1931 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시 카고 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바이스 Paul We i ss 의 지도 아래 예일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에 관한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 그는 웨슬리 칼리지 Wellesle y Colle g e 를 거쳐, 1961 년 경에는 프린스턴 대학 철학과로 옮겨 그곳에서 철학과장을 역임하였 고, 1979 년에는 미국철학회(동부지회) 회장을 지냈다. 1982 년에 그는버지니아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철학과 교수가 아니라 인문학 교수 가 되었으며, 그 대학의 로 대우받으면서 현 재까지 재직중이다. 그는 철학은 물론, 문학 비평, 법철학 등 다방면 에 걸친 관심을 보여 현재까지 5 권의 저서와 사실상 4 권의 편저, 약 100 여 편의 논문, 30 여 편의 서평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전개 하고 있댜 이러한 폭넓은 활동과 그의 독특한 주장들 때문에 그는 오늘날 미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도 명성 있는 철학자로 손꼽히고 있다. 로티의 사상은 2-3 회의 변화를 겪었다고 보인다. 그중 가장 큰 변 화는 로티가 대체로 친분석철학의 입장에서 주로 < 심신의 문제t he mind -body p roblem> 를 집중적으로 논의해 오다가, 1970 년대 중반 이후 분석철학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자기 나름의 새로운 철학을 주 장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로티 자신이 이러한 입장 변화를· 획 기적으로 천명한 책이 그의 대표적 저술이라고 일컬어지는 『철학과 자연의 거울P h i losop hy and the Mi rr or of Na tu re 』 (P ri nce t on Un i- versit y Press, 1979) 이댜 그 책에서 로티는 분석철학은 물론 데카르 트 이래 근대철학의 주류를 이루어 왔던 인식론 중심의 철학이 종말 을 고했다고 선언하고, 새로운 철학의 도래를 역설하였다. 철학자들 이 당연시하고 있던 핵심적인 가정들을 근본부터 부정하고 나선 매 우 논쟁적인 주장들을 담은 그 책으로 인해, 로티는 한편으로는 < 악 명 높고도> 유명한 철학자가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동료들과의 마찰로 인해 프린스턴을 떠나 버지니아로 자리를 옮기게 되기도 하 였다. 『철학과 자연의 거울』은 그 제목이 시사해 주듯이 <철학>이 <자 연>이나 <실재>를 있는 그대로 비추어주는 거울, 죽 <진리>를 찾 아내는 학문 분야라는 의미의 전통철학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를 함 의하고 있다. 철학은 자연의 거울이 아니며 또 아니어야 한다는 이야 기다. 이른바 반정초주의(反定礎主義, anti -fou ndati on alism ; 혹은 反
基礎主義 , 反七臨主義 ) 를 들 고 나온 것이다 총 3 부로 구성된 그 책 에서 로티는 정초주의의 주요 근거로 보이는 것 들 을 비판하고 새로 운 철학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제 1 부는 정초주의의 존재론에 대한 비판으로서 진리 발견의 담당자인 <정신mi nd > 이란 것이 근대철학 자들이 지어낸 형이상학적 허구이며, 그것 없이도 정신적 • 심리적 현 상들이 설명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 제 2 부는 정초주의적 인식론에 대 한 비판으로서 지식이란 실재와 언어의 비교나 대응을 통해 성립하 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언어적인 것으로, 사회적 실행을 통해 정당화 된다라고 주장하고 선언어적(先 言語 的) 지식의 성립을 부정한다. 제 3 부는 탈정초주의 시대의 철학은 체계적인 철학이 아니라 해석학 hermeneuti cs , 즉 <인류의 대화>를 위한 교화적 철학 e difyi ng phi- loso p h y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을 위해 그 책에서 주로 거론된 소재들은 대부분 분석철학 주변의 것들이었으나, 로티의 주장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전통철학 전반에 관한 것이었다. 『 철학과 자연의 거울 』 은 비록 사회적 실행, 교화적 철학, 인류의 대화 등을 강조하여 역사주의적인 견지를 짙게 풍기기는 하였으나, 그 책에서 로티는 자신의 입장을 <실용주의p ra g ma ti sm> 라고 천명 하지는 않았댜 오히려 반정초주의적인 장래의 철학은 <해석학>으 로 명명되었다. 그가 자신의 사상을 실용주의로 공식 천명한 것은 바 로 이 책 『실용주의의 결과 』 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책에 수록된 논문 9 『실용주의, 상대주의, 비합리주의」 이후부터 로 티는 실용주의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그 논문 온 1979 년에 그가 미국철학회 동부지회장으로서 행한 연설문인 것을 감안하면, 그것이 갖고 있는 공식적인 의미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용주의자가 된 로티의 철학관이 좀더 구체적으로 표 명된 것이 이 책의 서론인 r 실용주의와 철학」이다. 따라서 이 책은 로티의 사사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문헌이며, 그의 실용주의 사상의 여러 면모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총 13 편의 논문으로 구성된 『 실용주의의 결과 』 는 『 철학과 자연의 거울 』 의 출간을 전후하여 1972 년부터 1980 년까지 로티가 쓴 논문들 을 모아 편집한 것으로, 그의 실용주의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데에 가장 도움이 되는 책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논의 주제의 범위가 매 우 넓고, 다루어지는 인물들의 폭이 넓으며, 특히 근대와 현대의 철 학사에 대한 로티의 안목이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각 논문들의 세부 내용은 후술될 것이므로, 이 책에서 다루어진 주요 사상가나 학 파들의 이름만 열거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 현대의 실재론자들, 비트 겐슈타인,하이데거,듀이,산타야나, 데리다, 썰,푸코,카벨, 라이헨 바하, 후기 분석철학자들 등 따라서 이 책은 전체로서 어떤 사상이 나 주장을 체계적으로 논구한 저서는 아니지만, 로티의 사상이 지닌 함축을 제 방면에 투사한 결과를 보여준다는 큰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로티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위 한 저서로 그의 다른 책들에 비해 최적의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이다. 특히 집요한 철학적 논변보다는 그의 실용주의가 함축하는 바 와 그 의의를 파악하려는 일반 독자들을 위해서는 이 책이 가장 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체적인 테마는 실용주의 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지만 각 장의 논의 주제가 거의 독립적이 므로,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을 필요 없이 홍미와 관심에 따라 어느 장부터 읽어도 이해가 가능한 책이다. 『실용주의의 결과』 이후에 로티가 그의 원숙한 사상들을 담아 세 상에 내놓은 저서들은 현재까지 3 권이다. 이를 발간의 순서로 보면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Con ti n g e ncy, Irony, Sol i dar ity』 (Cam bri dge Un ive rsit y Press, 1989) 과 두 권의 철학 논문집 이 댜 철학 논 문집 1 권은 『객관성, 상대주의, 진리 Obj ec ti v ity, Relati vis m and Truth · Ph ilo soph ica l Pape rs volume 1 』 (Cambri dge Un ive rsit y Press, 1991) 이며, 철학 논문집 2 권은 『하이데거 등에 대한 논문집 Essay s on Heid e g ge r and Oth e rs: Philo soph ica l Pape rs volume
2 』 (Camb ri d g e Univ e rsity Press, 1991) 이다. 그런데 그의 철학 논문 집 두 권은 이전에 여러 잡지에 기고했던 논문들을 모아 편찬한 것 이므로 내용에서는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 이 더 나중의 것이라 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객관성, 상대주의, 진리』는 15 편의 논문이 3 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서론을 제외하고는 모두 19 8.5 -1988 년 사이에 발표된 것들이다. 제 1 부는 실재론과 반(反)실재론 간의 논쟁이 의미 없는 것이라는 주 장을 담고 있다. 제 2 부는 데이비슨 Donald Dav i dson 의 견해를 활용한 로티의 실용주의적인 언어관과 진리관을 피력한 논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제 3 부는 로티가 실용주의를 사회철학에 적용시켜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논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책에서 로티는 전통적 의미의 진리 개념을 쓸모 없는 것으로 단정하고, 자문화중심주의 e thn ocen 一 tri sm 를 주창하며, 메타포의 역할을 강조하여 자신의 실용주의는 <방법론이 없는> 실용주의라고 말하고, 철학에 대한 민주주의의 우 선성을 역설하여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스트 부르주아 자유주의>를 자신의 사회 사상으로 천명한다. 그 책의 의의는 로티의 사상이 종래에 비해 구성적인 방향으로 바 뀌었다는 점이다. 바꿔 말해 로티는 이제 반정초주의의 내용을 보충 하여, 전통철학에 대한 반론 이외에 자신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해명 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이때 핵심 개념은 자문화중심주의와 메타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자문화중심주의란 역사주의의 견지를 보충 • 해명한 것으로서, 객관성을 부정하면서도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는 견 지라고 천명된 입장이다. 객관성보다는 <강제되지 않은 합의>를 통 해 도달된 연대성이 더 중요하며, 그것은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해 석의 틀에서 출발해서 세상사에 잘 대처하게 해주는 참신한 아이디 어, 참신한 어휘, 참신한 메타포를 채택해 가는 과정이다. 이것이 자 문화중심주의의 요체이다. 이때 참신한 메타포란 언어화될 수 있는 모든 것 가운데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롭게 창안된 모든 것
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로티가 볼 때 언어나 문화는 참신한 메타포의 도입으로 늘 새롭게 짜여가는 죽은 메타포의 그물이다. 지문회중수심주 의와 메타포 이외에 그 책에서 주목되는 점은 로티의 사회 사상에 대한 견해가 비교적 상세히 표명된 몇 편의 논문들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하이데거 등에 대한 논문집』은 13 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서론 이외의 것들은 사실상 1984-1989 년 사이에 이미 발표된 것들이댜 3 부로 구성된 그 책의 제 1 부는 하이데거에 대한 로티의 해 석과 응용에서 나온 실용주의의 철학관을 담고 있다. 제 2 부는 데리다 의 견해에 대한 해석과 응용에서 비롯된 로티의 견해를 담고 있으며, 제 3 부는 그 밖의 여러 인물들에 대한 로티의 견해가 피력되어 있다. 3 부에서 다루어진 인물들로는 프로이트, 하버마스, 리오타르, 푸코, 웅거 Robe rt o Ung er , 카스토리아디스 Cornel i us Casto r i ad i s 등이댜 그 책은 대륙철학에 대한 로티의 견해를 집약해 한자리에 보여준 것 으로서 특히 두 가지 의도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정초주의에 대한 대륙철학자들의 논의를 로티가 어떻게 보는가와, 로티 자신의 사상이 대륙철학자들의 견해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해명이다. 그 책이 갖고 있는 전반적인 의의는 대략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로티 자신이 대륙철학자들과 직접 대화에 나서서 나름대로 인류의 대화를 실천해 보이고 있다는 점, 그의 실용주의의 많은 아이 디어들이 하이데거와 데리다에게서 따온 것이라는 점, 로티와 대륙철 학자들 간의 가장 큰 차이점은 로티는 반정초주의를 바탕으로 하면 서도 과학 기술과 낭만주의 그리고 자유주의 등을 동시에 강조한다 는 점 등이다. 이런 점들을 통해 그 책은 로티의 실용주의가 대륙철 학자들의 견해와 어떤 점에서 유사하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잘 보 여주고 있다.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은 철학 논문집들과는 달리 비록 이미 발표된 3 편의 논문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본격적인 저서로 씌어진 것
으로 보인댜 그 책은 두 논문집에 수록된 논문들의 내용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특히 로티의 사회 사상과 문예 비평론이 본격적으로 피 력되어 있다. 각각 3 개의 장들으로 이루어진 3 개의 부로 구성된 그 책의 제 1 부는 우연성을 강조하여 우리의 언어, 자아 그리고 자유주의 공동체가 모두 어떠한 존재론적 토대나 기반도 없는 것이라고 강조 한다 . 제 2 부는 사회, 정치, 도덕의 영역을 사적(私的) 영역과 공적(公 的) 영역으로 가르고, 후자를 최소화하는 반면에 전자를 극대화하고 문제 해결의 방식으로서 아이러니의 역할을 강조한다. 제 3 부는 공적 도덕에 있어서의 한계를 두 측면에서 강조한다. 최소한 잔인성을 배 제할 것과 비록 우연성에 바탕을 둔 것이지만 자유주의 공동체를 지 켜가기 위한 연대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책이 갖고 있는 의의는 이른바 연대성을 지향하는 <자유~의 아이러니스트의 사회>를 이상으로 내세우는 로티의 사회 사상이 본 격적으로 피력된 저서라는 점이다. 즉 역사주의, 명목론, 반정초주의 를 견지하는 아이러니스트의 입장과 반마르크시즘, 반공동체주의를 견지하는 자유주의자의 입장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포섭하는 <사회민 주주의>가 로티의 사회 사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게다가 그 책은 그러한 사상을 문예 비평론과 결부시켜 해명하고 있다. 자유주의에 대한 자문화중심적 옹호의 견지를 참신한 메타포, 즉 아이러니를 통 해 이루어가겠다는 발상이다. 그러한 아이러니는 자연히 문예 비평을 중요한 수단으로 여기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로티의 관심이 철학 자들에 의해 씌어진 텍스트를 벗어나 문인들에 의해 씌어진 것들로 확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이러한 점들을 종합할 때 그 책에서 전 개된 로티의 사회 사상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우연 성 위에 떠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가치 있는 것을 찾자면, 그것은 타인에게 잔인하지 말고 인류의 연대성을 지향하는 동시에 사적 도 덕의 영역을 넓혀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된 사회이며, 그것을 정 당화해 주고 지탱하게 해주는 것은 아이러니, 죽 메타포의 힘뿐이다.
참신한 메타포의 창안은 자아의 창조이며 지유-의 확대이자 삶의 의 미이다 . 이런 일을 통해 자문화중심주의에서 출발하여 점진적인 개혁 을 거쳐 이상적인 사회 를 만 들 어가자는 것이 실용주의자의 사회 사 상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로티의 경력과 주요 저서의 내용 그리고 그중에 서 『 실용주의의 결과』가 차지하는· 위치와 의의 등을 살펴보았다. 다 음에는 로티의 주요 사상 경향을 몇 가지로 요약해 소개하고자 한다. 로티의 사상은 논자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보일 수가 있겠으 나, 대체로 < 신실용주의 (Neo-Pra g ma ti sm 혹은 New Prag m ati sm )> 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로티 자신은 < 실용주의 > 라는 용어를 고집하고 있지만, 그의 사상은 전통적 의미의 실용주의 와 매우 다른 면모를 갖고 있다 우선 그것은 형이상학적 탐구나 과 학적 방법울 전면적으로 부정 • 거부한다 . < 방법론이 없는 실용주 의>이며, 반정초주의적 실용주의이고, 역사주의적 실용주의이다. 따 라서 전통적 실용주의에서도 특정한 측면만을 계승하여 선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 그런 이유 때문에 로티는 퍼스가 실용주의에서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고 보며, 제임스나 듀이의 < 나쁜 측면>, 즉 형 이상학적 측면을 배제한다(이 책 논문 5 참조) . 구체적으로 제임스의 『근본적 경험론』이나 듀이의 『 경험과 자연』은 < 약화된 관념론의 변 종>(이 책 논문 12 의 1 절)이며, <실재에 대한 절대적 관념 > 이나 < 자 연 자체의 언어>(이 책 논문 11 의 1 절)를 추구하려는 생각을 벗어나 지 못한 것들로 본다. 그는 실재론자나 정초주의에서 전제되는 세계 나 실재를 <잘 잃어버린 세계>(이 책의 서론 및 논문 1) 로 본다. 따 라서 본 해제에서 로티의 사상, 특히 그의 후기 사상을 가리키는 <실용주의>란 용어는 모두 이런 의미의 <신실용주의>로 이해되어 야 할 것이다. 로티의 신실용주의는 문화사에 대한 매우 거시적인 해석을 함축하 고 있다. 그것은 인류의 문화가 대체로 신화의 시대, 철학의 시대, 종
교의 시대, 과학의 시대를 차례로 지나 19 세기 후반부터는 문예의 시 대로 진입했다는 시각이댜 그래서 로티는 반정초주의적인 철학, 반 전통적이며 반실재론적인 탈철학의 문화는 문예 비평이 되어야 한다 고 주장한다(이 책의 서론 5 절). 헤겔이나 니체 이후의 사상에서 문예 의 시대를 수용하는 방식은 니체-하이데거-푸코를 잇는 비관론적인 시각과 듀이-로티 • 블룸을 잇는 낙관론적인 시각이 있는데, 로티는 비록 근거성이 없는 희망이긴 하지만 인간의 자유를 향한 희망을 주 는 후자가 더 낫다고 본다(이 책 논문 8 의 4 절; 논문 11 의 4 절). 이러 한 관점과 시각에서 로티의 신실용주의는 자연의 거울로 자연 자체 의 언어를 추구하려는 실재론적, 정초주의적안 모든 발상들을 초점을 잃은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때 로티가 말하는 문예란 단지 문학 비평만을 지칭한 것이 아니 라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언어>를 총칭한다. 가령 이론, 기호, 아이디어 등이 모두 언어이며 문예의 범주에 속한다. 이런 견해와 해 석에는 로티의 독특한 언어관, 즉 <언어 편재성의 논제>라고 불릴 만한 주장이 도사리고 있다. 그는 모든 경험을 언어의 기능이나 함수 로 본다. 우리는 마치 피부의 바깥으로 나갈 수 없듯이 언어의 바깥 으로 나갈 수 없다. 언어는 편재(通在)한다(이 책의 서론 2 절). 이른 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되는 대상들도 모두 언어적 해석을 거친 것들이댜 따라서 해석의 해석의 해석의 …… 해석은 끝없이 열 려진 세계이댜 우리의 경험은 그렇듯 해석된 언어의 꾸러미 혹은 그 물이다. 따라서 그것들 가운데 본질적인 구분은 없으며 언어의 그물 은 매우 퍼지fuz z y한, 애매모호하고 흐릿흐릿한 구조를 갖고 있다. 다만 우리의 언어적, 사회적 규약에 따른 통상적 담론과 비통상적 담 론 간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언어의 그물 전체는 우연한 기 회에 의해 창안된 메타포들에 의해 늘 변화한다. 로티의 신실용주의 가 전체론자 hol i s t와 역사주의자hi s t o ri c i s t의 관점을 견지하는 근거 나 바탕이 여기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로티의 사상은 주로 철학에 대한 철학이라는 의미로서 메타-철학 자의 입장을 견지한다. 이것은 체계적인 철학을 반대하고 탈철학의 철학, 문예 비평으로서의 철학을 강조하는 그로서는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로티의 목소리는 철학의 문화를 과학 중심에서 문예 중심으로 바꾸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신실용주의는 전통철학을 비판 할 때 반정초주의, 반인식론, 반표상주의, 반형이상학, 반방법론, 반사 회철학, 반체계적 철학의 입장울 취한다. 반면에 새로운 철학을 구축 하는 견지에 설 때는 인류의 대화, 교화적인 철학, 해석학, 강제되지 않은 합의에 바탕을 둔 연대성, 심미적인 문화, 탈철학의 문화, 대담 한 시인들 문화 비판, 문예 비평, 정치로서의 철학 등을 강조한다. 로티가 논의하는 모든 맥락은 결국에는 전자의 입장에서 전통철학을 비판하는 동시에 후자를 강조하여 자신의 견지를 천명하는 것이며 이것이 신실용주의의 외견상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신실용주의는 좁은 의미에서의 <실용주의>를 포함하고 있다. 협 의의 실용주의란 우리가 봉착한 문제 상황을 잘 타개해 주는 것이야 말로 좋은 것이라는 관점이다. 로티는 이것을 <세상사에 잘 대처함 cop ing well with the world> 이라고 표현한다. 전통적인 진리 개념, 즉 세계나 실재와 일치 • 대응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견지에 서 있으므로 로티는 세상사에 잘 대처하게 해주는 것, 즉 현금 가치를 지닌 사회적 실행을 진리나 지식으로 본다 이것은 결국 언어나 이론 을 우리의 욕구 충족을 위한 도구로 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 지만 이미 언급되었듯이 그것은 방법론이 없는 실용주의이며, 역사주 의로 해석된 실용주의요, 자문화중심주의이다. 자문화중심주의란 객관성을 부정하면서도 상대주의를 거부하는 입 장으로서, 우리가 갖고 있는 언어나 우리의 사회적 실행을 출발점으 로 삼되 그것이 문제를 노정하면 점차적으로 개선해 가자는 보수적 인 개혁주의 노선을 말한다. 또, 이것은 반정초주의의 입장에서 계몽 주의의 유산을 지켜가는 것을 함축하고 있으며, 자유주의에 대한 로
티의 옹 호론을 담 고 있다 그는 서 구 문화 , 특 히 미 국 의 문화로 대표 되 는 자유주의가 인 류 의 역 사상 최선의 사회 제도라고 믿 는 다. 그것 을 로 티 는 < 포 스트 모더니 스 트 부 르 주아 자유 주 의 > 혹은 < 사회민주 주 의 > 라는 이 름 으로 옹호하며, 그 정당화 를 어떤 진리 주장이나 철 학적 사변이나 체계적인 이론에서 도출하려는 것이 아니라 메타포나 아이러니 를 통한 설득으로 이루고자 한다. 그러므로 로티가 애써 강 조한 인류의 대화나 연대성의 중요한 의미도 자유주의 공동체에 대 한 옹호의 견지인 자문화중심주의를 이면에 깔고 있다고 해야 할 것 이다 . 로티의 자문화중심주의는 다분히 낙관적인 전망을 특색으로 한 낭 만주의의 색조를 갖고 있다. 이때 낭만주의란 개인의 창의성 존중, 인류의 장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의 태도, 유희적인 반주지주의, 반 체계주의, 반방법론 등이 혼융된 태도를 의미한다. 이것을 로티는 아 이러니스트의 견지라고도 말한다. 정초주의적 근거 설정을 부정하고 우연성을 수용하면서도, 천재적인 발상을 통해 창안된 메타포(어휘 , 아이러니)의 힘이 문화를 창조하거나 개선하기에 충분하다고 보는 것 이다. 개인에게 있어서는 참신한 메타포의 창안이 우연성의 세계를 살아가는 삶의 의의이자 자유의 확대이다 . 따라서 반정초주의적인 입 장을 공유하고 있지만 다분히 비관적인 전망을 갖고 있는 니체나 하 이데거나 푸코나 데리다 등의 대륙철학자들을 로티가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철 학자나 그 밖의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행해야 할 것은 참신한 메 타포의 창안이다. 참신한 메타포란 문자 그대로 낯선 소리로서 통상 적인 언어 규약을 벗어난 비통상적 담론에 속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 이 새로운 안목을 주는 재서술 re-desc ripti on 을 통해 세상사에 잘 대 처하게 해준다면 곧장 통상적 담론의 일부가 되는 것을 말한다. 새로 운 이론, 신기술 등도 모두 참신한 메타포의 일종이다. 안류의 문화 나 언어는 모두 메타포들의 그물이며 끊임없이 새롭게 짜여져 간다.
그러므로 영웅적인 인간은 훌륭한 아이러니스트로서 자신의 궁극적 어휘도 포기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는 남이 창안한 어휘를 사용하는 것을 죽는 것보다도 더 싫어하는 대담한 시인 s tr on g poe t 이댜 문예 바평으로서의 철학이 지향하는 세계란 바로 대담한 시인 의 세계이며, 심미적인 문화이다. 이와 같은 메타포의 역할 강조는 신실용주의의 문화사 진단과 일맥상통한 것으로서, 역사~ 해석 된 실용주의에서 일종의 방법론이라고 할 역할을 해준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을 지닌 로티의 신실용주의는 여러 관점에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댜 로티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자면 그것은 정초 주의, 표상주의, 실재론 등을 부정하는 반정초주의, 반표상주의, 반실 재론의 입장에서 방법론이 없는 실용주의를 표방하고 지문·화중심적 인 낭만주의자의 태도로 아이러니스트가 되어 문예 비평으로서의 철 학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로티의 자기 주장과는 달리 그것은 여러 얼굴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그것을 특히 듀이의 유 산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실용주의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자 는 그것을 분석철학 내부의 자기 비판의 한 형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실용주의라는 이름을 통해 대륙철학과 분석철학 을 잇는 대화의 다리를 놓는 작업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그것은 해체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에 자극받은 미국의 한 지성인의 몸부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며, 이때 로티는 미국판 데리다로 읽 힐 수도 있을 것이다. 혹자는 로티가 철학의 유다이며, 철학을 문학 이나 문예에 팔아넘긴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그것은 늙은 사자로 전락해 가는 미국 정신을 새롭게 조형하기 위한 팍스 아메리카나의 한 표현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안락한 부르 주아의 자문화중심적인 관념의 유희라고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새로운 문명의 힘을 부각시킨 문화의 철학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티의 신실용주의에 대해 어떤 관점에서 어떤 해석이나 평가를 내리든 간에 분명히 인정해야 할 것들이 있어 보인다. 그중 중요한 점들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신실용 주의는 분석철학 그리고 인식론 중심의 근대철학이 행하고 있는 것 을 파악할 수 있는 논의의 틀을 정초주의 대 반정초주의의 구도로 압축해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철학의 전통적인 한 의미는 인류의 역사에 대한 자기 성찰이란 점을 부각시켜, 과학 중심의 철학 이외에 다른 형태의 대안을 실용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제시하고 있댜 셋째, 로티 자신의 실천이나 이론을 통해 분석철학과 대륙철학 간의 벽을 허물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 즉 인류의 대화나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넷째, 우리 시대나 다가올 시대에서 문예나 문예 파워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으며, 특히 상상력을 통한 새로 운 해석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주고 있다. 다섯째, 우리의 시대에서 모든 것들의 근본적 우연성을 수용할 경우에 어떠한 태도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한 가지 대안을 보여주고 있다. 여섯째, 개인 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주의 공동체에 대한 옹호론의 한 형태를 제 시해 주고 있댜 이렇게 볼 때 로티의 신실용주의는 그 독특성과 아 울러 상당히 설득력 있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매우 모험적인 사싱이 며, 전통적인 관념에서 볼 때에는 극히 도전적인 사상으로 볼 수 있 겠댜 2 이 책의 주요 내용 이 책은 앞에서 설명된 신실용주의자의 입장을 택할 때 기존의 철 학이나 철학자들이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다각도에서 논의한 논문들 로 짜여져 있다. 로티는 자신의 사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다론 사상가들의 견해를 검토하고 재해석하는 기생(寄生)의 방식을
활용하여 신실용주의가 함축하는 바 를 해명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그가 말하는 문예 비평의 형식을 띠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 서론인 < 실용주의와 철학>은 이 책에 포함된 논문 중 가장 나중 에 쓰인 것이며 신실용주의가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해명한 논문이 다 . 실용주의자는 플라톤주의나 실증주의가 공통의 그릇된 전제, 즉 진리란 실재와의 대응이라는 그릇된 전제를 가정한 것이라고 양자를 모두 배격하고, 특히 분석철학은 콰인, 후기 비트겐슈타인, 셀라즈, 데이비슨에 이르러 스스로를 초월해 소멸해 버렸다고 주장한다. 분석 철학을 소멸시킨 핵심적인 안목을 로티는 < 언어의 편재성 > 에 대한 고집이라고 갈파하고, 그것은 니체-하이데거-데리디를· 잇는 대륙철 학의 전통에서 파악된 안목과 공통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최근의 실재론자들이 반발한 것을 로티는 재반박한다. 그는 실 재론자를 테크니컬한 실재론자와 직관적 실재론자로 가르지만 , 전자 가 진정한 철학적 문제의 발단이라고 여기는 테크니컬한 이유들을 살펴본 결과 그것은 궁극적으로 세계나 실재의 존재를 가정하고 있 는 후자의 견지로 통합된다고 결론짓는다. 후자에 대해 로티는 비언 어적 지식이란 관념은 공허한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배격한다. 이렇 듯 실재론을 배격한 후의 철학의 모습에 대해 로티는 탈철학의 문화 라고 명명하고 그 핵심은 문예 비평이라고 천명한다. 논문 1 <잘 잃어버린 세계>는 개념 체계에 대한 논변을 검토하여 실재론자가 전제로 하는 실재나 세계에 대한 가정이 의미 없는 것이 라는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 개념 체계란 우리가 세계나 실재를 해석 하는 틀을 가리키며, 그것이 다르면 실로 다론 세계에서 산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칸트식의 물자체와 현상이라는 구분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로티는 본다. 하지만 그는 대안적인 개념 체계라는 관념 자체 가 개념 체계라는 관념을 무의미하게 한다는 주장을 펴는데, 이때 데 이비슨의 이론을 빌려온다. 가령 어떤 언어 행위자의 언어 행위를 해 석할 때 개념 체계가 다르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 사람의 의도를 파
악할 수 없을 것이지만 , 실제로는 개념 체계를 모른다고 할지라도 의 사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 의사 소통의 가능성과 현실은 개념 체계 의 존재를 무색하게 하고 있다는 논변이다. 그 사람의 언어 행위를 해석하고 의사 소통을 할 때 우리는 세계를 넘나드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항들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개념 체계가 다르면 다른 세계에 산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은 주장이다. 이런 관 점에서 볼 때 세계란 탐구에서 아직 문제시되지 않는 것의 총체를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의해 묘사되는 대상으로서의 세계 나 실재라는 실재론자들의 관념은 강박 관념에서 나온 허구적인 것 이다. 그들은 개념 체계를 넘어선 어떤 것을 참된 세계로 설정하고 있는데, 개념 체계라는 관념 자체가 잘못된 전제이기 때문이다. 대안 적 개념 체계라는 관념은 비트겐슈타인, 콰인, 듀이, 셀라즈의 공격의 표적이었으며, 그들의 입장을 수용하고 볼 때 실재론자가 말하는 세 계나 실재는 잘 잃어버린 세계이다. 논문 2 <철학의 순수화: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에세이>는 주로 비 트겐슈타인의 저서 『철학적 탐구』의 의의에 대한 로티의 해석을 담 고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페어스 Da vi d Pears 의 해석을 논의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이때 논의의 핵심은 『철학적 탐 구』가 철학에 대해 제시한 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이다. 로티의 표현에 의하면 <철학자들은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칸트식의 순수성에 대한 이념, 죽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과 다른 한편으로 는 비트겐슈타인이 그 가능성을 제시한 것처럼 보였던 탈전문적, 속 죄적, 사적인 감정의 순수성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상황에 처 해 있다. 이에 대해 페어스는 자신이 말하는 <인간중심주의>라는 개 념을 통한 해석을 시도하여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한계를 말하려 하였다고 보고 그 해석을 뒷바침할 여러 논변들을 전개한다. 하지만 로티는 그러한 해석은 전기 비트겐슈타인을 후기 비트겐슈타인에게 투영시킨 것이라고 비판하고, 비트겐슈타인의 저서가 갖고 있는 의의
는 철 학의 순수화 혹은 종 언 가 능 성 을 전 혀 다 르 게 표 현 한 방식에서 찾 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 그 책 은 데카 르 트 적 전통 에 반대하 여 대카르트 이래로 철 학자 들 은 한 결같 이 인간과 세계의 관계란 이 러이러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제 니는 당신 들 에게 그 관계란 저러 저러한 것임을 보여준다’와 같 은 형식 을 취하지 않은 최초의 위대한 저술 > 이라는 것이댜 철 학이 무엇인가란 물음에 대한 비 트 겐슈타인 의 풍자적인 대답들은 글 쓰기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준 점 에서 의의 가 있다고 주장된다 논문 3 < 전통의 극복: 하이데거와 듀이 > 는 하이데거와 듀이의 철 학에 대한 로티의 비교론을 담고 있다 . 로티의 기본 주장은 하이데거 와 듀이가 전통을 극복하려 한 사상가라는 점에서는 일치하나 그 방 식에서는 판이하게 다른 면모를 보인다는 점이다 . 그는 하이데거의 철학이 새로운 존재론을 제시한 것이라기보다는 서양의 지성사에 대 한 해석이라고 보며, 특히 종래까지의 철학적 문제 들 을 해소하기 위 한 새로운 어휘의 창안이라고 본다. 이어서 로티는 하이데거와 듀이 의 사상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한다 . 두 사상가는 관조에 반대하 고 행위를 찬양하는· 데서 일치한다. 다만 하이데거는 그 구분의 시원 울 의식의 강제 분리에서 찾 고 듀이는 자유인과 노예의 격차에서 찾 는다. 두 사상가는 인식론적인 문제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단지 듀이는 그것을 낡은 형이상학적 가정들이 새로운 여건에 적응된 형 태라고 보는 반면에 하이데거는 그것을 그러한 가정들의 내재적이며 변증론적인 작용 결과로 본댜 두 사상가는 철학을 과학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을 재앙으로 보고 철 학의 목표를 순진성의 재회복과 우 리 시대 문화의 탈각이라고 보는 역사주의자다운 견해를 공통으로 갖고 있다 . 또, 두 사상가는 사실과 가치의 구분을 위험한 것으로 본 다. 두 사상가의 차이점은 헤겔의 사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극명 하게 드러난다. 듀이는 절대 정신을 배제한 헤겔을 원하고 인간의 역 사를 인간에 의한 것으로 보고자 하는 반면에, 하이데거는 시대와 문
화와 국가와 백성 들 이 철학 자 들 의 요구에 맞춰서 살아야 할 것이라 는 견지를 택하고 있다. 이런 유사점과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상이 갖고 있는 의의는 전통을 극복하려는 공통된 목표에서 찾아 야 할 것이며, 그 방식에 대한 차이를 통해 비교되어야 할 것이다. 전통을 극복할 방도로서 듀이는 전통의 구분들을 흐트러뜨리는 방식 을 취하는 데 비해 하이데거는 존재가 존재론적 차이의 의미를 보장 해서 전통을 극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하이데거는 여전히 철학이라는 관념에 집착하여 과학 기술이 주는 유용성을 외면하고 신성한 것을 추구한 반면에 듀이는 인간의 문제들에 민감하였다. 이 점에서 하이데거는 플라톤 이래의 철학적 전통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논문 4 <전문화된 철학과 초월주의 문화>는 산타야나가 미국의 철학에 대해 논의한 글을 검토하는 방식을 빌려, 전문화된 철학을 비 판하고 초월주의 문화를 칭송하는 로티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여 기서 전문화된 철학이란 1930 년대 듀이의 시대가 지난 후 철학의 자 율성을 고집하고, 전문적 주제로서 논증의 엄밀성을 강조하는 경향을 말하며 대체로 분석철학을 가리킨다. 초월주의 문화란 문화 비평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스스로 과학자나 전문가가 되기를 원치 않으며 지식인의 정직성은 분야 매트릭스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지 식인의 문화를 일컫는다. 로티는 그러한 태도를 산타야나, 듀이, 에머 슨, 블룸 등에게서 찾고 있댜 로티가 이런 인물들을 추켜세우고 초 월주의 문화를 칭송하는 주된 이유는 오늘날 과거의 현존성을 가르 치는 일은 역사, 철학, 종교가 아니라 문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에 의 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전문화된 철학은 위대한 옛 철인들을 무시하고 초월주의 문화로부터 학생들을 멀어지 게 한다. 그러므로 로티는 전문화된 철학이 초월주의 문화를 타도하 려 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짓고, 어디에나 다 중심이 있고 어디에도 그 둘레가 없는 철두철미한 초월주의 문화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
한댜 논문 5 < 듀이의 형이상학>은 로티가 듀이의 사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밝힌 것으로서 이른바 <좋 은 > 측면의 듀이의 입장에서 <나쁜> 측면의 듀이를 비판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구체적으로 이 논문은 듀이의 저서 『 경험과 자연 』 에서 전개된 자연주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듀이룰 순전히 헤겔주의자로 읽어야 한다는 로티 의 관점을 피력하고 있다. 로티는 듀이의 그 책을 형이상학 체계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이라는 문화 현상에 대한 역사적 ― 사회 학적 연구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듀이 자신은 그걸 원 치 않았고 오히려 형이상학적 체계를 저술하길 원하였는데, 그가 펼 쳐 보인 자연주의 형이상학은 전통철학이나 논리실증주의를 비판하 지만, 여전히 <경험의 형이상학>을 포기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듀이가 젊었을 때 <심리학으로서의 철학>을 주장한 뒤 그것을 철회 하고서, 헤겔에게도 충실하고 자연주의에도 충실하려는 생각을 배경 으로 해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은 자기 시대의 변증법적 상황일 수밖에 없다는 헤겔의 관점에 철저하지 못 한 생각이었다. 로크와 같은 자연주의자이면서 동시에 헤겔과 같은 역사주의자가 되기를 바라는 듀이는 가령 심신의 관계에 관해 상호 교섭 이론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진화론자들의 어휘를 실험실에서 꺼 내와서 어떠한 지식의 서술에 대해서도 적용해 버리는 꼴이었다. 듀 이는 전통적인 이원론이 끼치는 해악을 밝혀내기 위해 하나의 형이 상학이 필요하다고 보았으나, 그 점보다는 그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 서 문화 비판이란 자연이나 경험에 대한 재서술의 형태를 띠어야 한 다는 통찰을 밝혀주어 문화 발전의 새 길을 여는 큰 공헌을 하였다. 듀이는 전통적인 관람자적 진리 개념을 비판하고, 제반의 이원론적 구분들을 비판하였으며, 그리하여 낡은 문제들의 새로운 형태들이 지 속적으로 발생되지 않게 하는 안목의 툴을 제공해 주었다. 논문 6 <글쓰기로서의 철학: 데리다에 관한 에세이>는 데리다의
철학관에 대한 로티의 해석을 담고 있다. 로티는 철학을 칸트적 전통 과 헤겔적 전통으로 대비시켜, 전자는 진리를 표상과 그 대상 간의 수직적 관계로 보는 데 비해 후자는 진리를 옛사람들의 재해석에 대 한 재해석의 ·…·재해석이라고 보는 것이라고 구별한 다움에, 후자의 입장에서 전지를 비판하는 데리다를 옹호하는 해석을 제시한다. 로티 는 데리다가 철학을 일종의 글쓰기라고 보고 있으며, 이때 글쓰기란 다분히 반표상주의자의 입장에서 본 글쓰기로서, <우리의 지적 생활 이 칸트적인 철학에 의해 직조되지 않았더라면 사물들이 어떻게 보 일 것인지를 제시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데리다가 텍스트 바깥이란 없다고 말하며 온갖 유희적인 해체의 언어나 기법 등을 사용하는 것 을 로티는 이렇게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로티는 이런 해체적인 측면 과는 달리 데리다에게는 구성적이며 나쁜 측면도 있다고 비판한다. 가령 데리다가 강조하는 흔적(康述)이나 차연(差延)과 같은 것이 대 표적인 예인데, 표상주의자들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데리다가 언어란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한 데 서 나온 잘못이라고 로티는 주장한다. 즉 데리다는 기호나 표상이나 보충해 주는 것 등의 관념을 담고 있지 않는 언어에 관한 이야기를 흔적이나 차연 등을 통해 전개하여, 비록 그것을 신격화하지는 않지 만 언어의 바탕에 있는 무엇을 여전히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 만 데리다는 단지 기호와 기의의 관계가 왜 철학의 출발점이었는지 룰 물어 철학에 관한 물음을 해명하고 있는 것이지, 그가 언어에 관 한 물음을 해명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로티는 주장한 다. 이렇게 해석될 때 데리다의 메시지는 철학이란 표상주의자들의 견해와는 달리 일종의 글쓰기라고 하는 것이다. 논문 7 <픽션의 담론에 문제가 있는가?>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언급하는 문장에 대한 여러 이론들에 대한 비판과 그 문제에 대한 로티 자신의 해석을 담고 있다. 우선 로티는 이 문제의 중요성을 그 문제에 대해 어떤 해결책을 취하느냐에 따라 진리 일반에 관한 논의
가 결정된다고 본댜 그러나 진리에 대한 어떤 이 론을 내세우기 위해 로티가 이 문제를 논구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 그의 의도는 진리 개 념에 집착한 여러 이론 들 이 내놓은 픽션의 담론에 관한 이론 들 이 모 두 부적절한 것임을 보이고, 오히려 픽션의 담론을 활용하는 문예비 평가들의 입장을 두둔하려는 것이다. 로티의 비판을 받고 있는 철 학 자는 러셀, 썰 도넬란K. Donnellan, 파슨스T. Parsons 등이며, 그들 이 공유하고 있는 견해를 로티는 파르메니데스식의 그림이라고 보고 그것이 사실성을 강조하는 현대의 물리주의자들에게도 전제되고 있 다고본댜 각각에 대한 로티의 주요 비판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러셀은 지시 관계를 기초로 하는 의미론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이유에서, 존 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진술은 반드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진술로 분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나, 피지시체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그 의 기본 가정을 부정하면 그의 분석은 흥미로운 철학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썰은 언어행위론을 통해 픽션의 담론을 가장(假 裝) 된 발화 수반 행위로 보지만, 이 견해는 픽션 속에서 우리는 가장을 하는 것 이 아니라 실제로 지시한다는 직관을 만족시키지 못하며, 러셀의 기 본 가정을 단지 지연시킨 것에 불과하여 러셀의 경우와 마찬가지의 비판을 면치 못한댜 도넬란은 인과의미론의 입장에서 러셀이 인식론 적이라고 본 세계와 언어와의 관계를 물리적인 인과 관계를 통해 해 명하나, 그것은 이상적인 인과적 설명을 미리 알지 못하는 한 효용이 없는 부정합한 이론이다. 파슨스는 마이농주의의 견지에서 픽션의 담 론에 있는 대상을 불완전한 대상으로 보나, 불완전한 대상이라는 개 념 자체는 여러 측면에서 난점을 안고 있다. 특히 완전한 대상을 확 정시킬 방도를 해명하기 어렵다. 로티는 앞의 네 가지 이론들이 전제 로 하는 진리 개념은 물리주의와 분리될 수 없다고 보며, 그것은 눈 으로 보는 것을 진리의 표본으로 삼는 파르메니데스식의 그림으로서 물리주의 사실성에 대한 강조와 마찬가지 것으로 본다. 그래서 로티
는 대응이나 지시의 개념이 물리주 의와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아 , 그때 의 대안은 픽션의 담론에 진리치 부여를 거부하는 인과의미 론을 취 하거나 아니면 순수한 언어 놀 이의 방식을 통해 픽션의 담론을 해석 하는 길 둘뿐이라고 주장하고, 후자가 문예의 문화에서는 매우 중요 한 것이라고 그 의의 를 강조한다 . 결국 로티는 픽션의 담론에 관한 심오한 철학적 문제란 없으며 우리는 단지 그것을 언어 놀 이의 한 형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논문 8 < 19 세기 관념론과 20 세기 텍스투얼리즘>은 두 사조를 비 교 하고 덱스투얼리즘 가운데에서도 강한 텍스투얼리즘으로 분류되는 실용주의가 더 나은 대안이라는 로티의 주장을 담고 있다 . 따라서 이 논 문은 최근의 두 세기에 걸친 사상사를 로티가 어떻게 해석하고 있 는지를 잘 보여준다. 로티는 두 사조를 비교하여 자연과학에 적대적 이라는 점, 언어의 매개 없는 실재라는 관념을 부정한다는 점 등을 공유한다고 본다 그리고 칸트 이후의 관념론은 과학적이고 논변 가 능한 논제로서는 설득력을 잃었으며, 남아 있는 것은 낭만주의뿐인데 그것에 의해 20 세기의 텍스투얼리즘과 연계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낭만주의는 헤겔울 거쳐 니체와 제임스로 이어지며, 현대에 와서는 대륙철학과 미국의 텍스투얼리스트에게로 계승되었다고 로티는 해석 한다. 텍스투얼리즘이란 문예 바평의 개념으로 텍스트를 마치 암호 해독을 하듯이 저자와는 독립적인 것이며 내적 정합성의 원리를 지 닌 텍스트 자체로 보고 해석하거나, 혹은 강한 오독을 통해 텍스트를 순전히 비평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두들겨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전 자는 약한 텍스투얼리스트의 견지요, 후자는 강한 텍스투얼리스트의 견지이다. 로티는 약한 텍스투얼리스트는 과학자와 비평가들이 행하 는 것 간의 차이룰 강조하는 우를 범한 것이라고 보아 비판하고 강 한 텍스투얼리스트의 견지를 옹호한다. 강한 텍스투얼리스트에 대한 반론의 핵심은 과연 그것이 도덕적 근거나 힘을 부여해 줄 수 있는 가라는 도덕적 반론으로 본 로티는, 그 반론에 대해 니체-푸코처럼
각자의 유한성에 대한 경멸과 거대한 어떤 힘 을 추구하는 것으로 대 답하기보다는 제임 스-블룸처럼 유한한 인간의 투쟁을 통한 정체성의 확인이 더 나은 쪽이라고 주장한다. 논문 9 < 실용주의, 상대주의 , 비합리주의 >는 로티가 자신의 입장 을 실용주의로 천명하고 자신에게 쏟아진 상대주의와 비합리주의라 는 비판에 대해 반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논문에서 로티는 실 용주의를 세 가지 특징으로 요약한다. 첫째, < 진리 >, < 지식 > , < 언 어 >, < 도덕성 > 등 철학적 이론의 대상들에 적용될 때 실용주의는 반(反)본질주의이다. 둘째 , 전체론적 관점으로서, 당위와 사실에 관한 진리 사이에 아무런 인식론적 차이도 없고, 사실과 가치 간에 아무런 형이상학적 차이도 없으며, 도덕과 과학 사이에 아무런 방법론적 차 이도 없다고 본다. 셋째, 대화주의라고 불릴 만한 것으로서 , < 실용주 의는 대화의 제약을 제외하고는 탐구에 있어서 아무런 제약도 없다 > 는 교의이다 . 즉 대상들의 본성이나 정신의 본질이나 언어의 본질에 서 파생된 어떠한 제약도 없고 단지 동료 탐구자들이 행한 논평만이 제약이라는 교의이다 . 이와 같은 입장을 상대주의라고 비판한 데 대 해서, 로티는 일단 어떠한 신념이나 논제든 다 좋다는 식의 상대주의 란 진지한 입장일 수 없다고 거부하고, 그와 같은 혐의를 실용주의자 들이 받는 까닭은 그들이 철학 이론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를 실재 이론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로 오인한 혼동의 결과라고 응답한다. 비 합리주의를 논의하기 전에 로티는 실용주의가 반대하는 전문화의 문 제는 비합리주의의 문제와 다르다는 점을 확인시킨다. 전문화를 고집 하는 사람들은 대화의 목적이 동의와 합리적인 합의 도출이라고 전 제하나, 그러한 형태의 대화를 부정한다고 해서 비합리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로티는 암시한다. 합리주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철학 이 자기 기만적인 레토릭에 가담한 역사적 경험 때문에 비합리주의 를 공박하고, 올바른 개념이나 본질을 표현하는 개념에 대한 설명을 얻음으로써 비합리주의에 대항하는 방패를 갖고자 한다. 그러나 실용
주의자는 그것이 헛된 희망에 불과하다고 보며 비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은 우리의 도덕적 의무인 대호擇t 통해 이루어지는 길밖에 없다 고 믿는댜 하지만 그것은 논증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느껴질 뿐이라고 로티는 말한댜 합리주의에 대한 옹호론의 잘못을 지적한 실용주의자는 비합리주의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 없이 대 화와 실천을 통해 비합리주의의 배제나 거부를 느껴가는 것이 더 중 요하다고 본다는 주장이댜 논문 10 < 회의론에 대한 카벨의 견해>는 저명한 비트겐슈타인 연 구자인 카벨 S t anle y Cavell 의 저서 『이성의 외침 』 에 대한 로티의 비 판적인 견해를 담고 있다. 로티는 인식론적 회의론이 인간적인 상황 즉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라고 보는 카벨의 견해가 좁 고도 전문적인 의미의 회의론과 넓고도 문화 비판적인 의미의 회의 론 간에 연관성을 잘 밝히지 못한 채 그것을 당연시하고 있다고 비 판한댜 하지만 이것은 카벨의 저서 전반부에 대한 비판이다. 그 저 서의 후반부는 회의론에 대한 논의와 일상 언어 철학의 중요성에 대 한 논의를 벗어나서 현대의 도덕철학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데, 로티는 그 비판이 매우 훌륭한 통찰이라고 본다. 카벨은 도덕적 반성이란 <우리들 각자가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규칙들을 발견해 가는 노력이라는 추론>을 비판한다. 그는 <도덕의 맥락에서는 어떠한 규칙이나 원리도 놀이의 규제 원리나 규정처럼 기능하지 않는다>고 보며, 도덕의 문제에서 <규칙이란 것들은 우리 의 결단에 의해서만 구속력을 갖는다>고 본다. 로티는 카벨의 이 견 해가 역사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인간 존재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어 서 전반부와는 완연히 다른 입장을 보여준다고 칭송한다. 그래서 카 벨은 그의 저서 후반부를 통해 전문가들이 행한 바가 우리에게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무시하고 <인간의 자아 회복>과 근대철학의 <인간성에 대한 거부>의 문제에 답하게 되었다고 로티 는 평가한다. 결국 로티는 카벨의 저서가 저자 자신의 주장과는 달리
일관성을 갖지 못한 것으로 보지만 , 후반부의 견지는 우리의 학문 분 야나 생활 양식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물음을 재기한 비 트 겐슈타인 의 통찰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고 본다. 논문 11 < 방법 , 사회과학, 사회적 희망 > 은 반방법 론을 견지하는 로티가 사회과학을 어떻게 보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구체적으로 로티는 사회과학에서 최근 발전하고 있는 < 해석학적인 > 접근 방식 을 가치 중립적인 사회과학 방법론과 비교하여 양자 를 모두 비판하 는 견지에서 실용주의적인 접근법을 추천하고 있다. 먼저 로티는 방 법이나 방법론에 관한 논의를 통해 갈릴레오적인 과학이 자연 자체 의 언어를 판독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것은 표상주의를 전제로 한 해석으로서 절대적 실재라는 하나의 환상을 가정한 해석이라는 것이다 가치 중립적인 사회과학과 해석학 적 사회과학은 대체로 각각 설명과 이해라는 개념을 중시하여 각기 경쟁적인 방법론으로 해석되지만, 로티는 그것들이 해소되어야 할 쟁 점이 아니라 우리가 껴안고 살아가야 할 차이점이라고 본다. 특히 해 석학적 방법을 강조한 학자들은 화자의 인식론적 특권을 당연시하여,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판이하게 다른 성격을 지닌 상이한 방법론에 의해 탐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로티는 이것이 잘못된 발 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비판하고, 양자는 모두 의미의 그물을 통해 적 절한 어휘를 찾아내는 탐구라는 점에서 공통된 것이고, 다만 사회과 학은 화자의 도덕적 특권을 인정해야 하는 점에서만 다르다고 반박 한다. 결국 로티는 사회과학을 볼 때 <객관성>, <과학적 방법 > 등 의 관념을 제거하고 그것이 문예와 연결된 것이라고 보는 실용주의 적인 해석을 권장한다. 로티는 이렇듯 전통적인 해석을 비판한 철학 자 중에서 푸코와 듀이의 견지를 비교한다. 그에 의하면 양자는 다 같이 방법을 넘어서 있으며 초역사적인 구조란 없다고 보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하지만, 두 사상가는 이론적인 쟁점이 아니라 우리가 무 엇을 희망할 수 있느냐를 달리 보는 점에서 대비된다 . 푸코는 행동과
학과 인간과학의 사이에 중간 영역이 없다고 보나 듀이는 바로 그 중간 영역의 추구를 고취하였다. 푸코는 권력 관계의 해명을 통해 사 회과학의 오용을 경계하는 메시지 를 주지만 그런 점들은 문화의 구 조에 대한 듀이의 통찰에서도 해명될 수 있는 것이다 . 반면에 푸코의 견해는 듀이가 제공하는 것, 즉 <근 거 설정은 불가능하나 꼭 필요한 인류의 연대성에 대한 센스 >를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로 티는 듀이의 편을 들어 푸코를 비판하고 있다. 논문 12 < 오늘날 미국에서의 철학 > 은 분석철학의 여러 면모에 대 한 로티의 비판을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 이 논문은 라이헨바하의 저 서 『 과학적 철학의 등장 』 에서 제안된 핵심 이념이 무엇이며, 그후 분 석철학의 실상은 어떠하며, 분석철학의 패러다임은 무엇이고, 분석철 학과 대륙철학의 분열 현상과 그 이면의 속셈이 무엇인지를 논의하 고 있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로티는 분석철학은 문화에 대한 특정한 태도를 견지한 과학적 지식인의 태도로서, 철학의 역사에 대한 특정 한 해석을 전제로 한 것인데, 그 전제가 철학사에 대한 부적절한 해 석이라고 비판한댜 라이헨바하의 저서는 철학이 사변에서 과학으로 닙며었으며 또 그래야 한다는 역사관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로 티는 철학사에 대한 그러한 해석이 과연 생산적이며 과학과 무관한 철학자들의 경우를 어떻게 취급할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우선 분석철학의 발전 과정에서 볼 때에도 논리적 분석을 통해 과학 적 문제들을 해결해 간다는 라이헨바하의 생각은 그대로 실현되지 않았댜 분석철학이 진행되면서 논리적 분석이란 것은 스스로 소멸해 사라져 갔으며, 분석철학은 과학적 학문 분야로서 공통의 문제를 갖 기는커녕 잦은 패러다임의 변화를 겪으면서 합의된 규칙도 못 가지 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분석철학은 단지 스타일상의 공통성을 갖고 있을 뿐인데 그것은 마치 변호사들의 경우와 흡사하게 논변을 잘하는 것이며, 이 철학적 능력은 지혜를 갖는다는 것과는 엄연히 다 르다. 분석철학은 대륙철학을 미국의 대학에서 축출하였는데, 이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님은 물론 미국에서의 철학을 변모시켜 철학자의 이미지를 인문학, 자연과학, 사회과학의 중간쯤 어디에 좌초시켰다 . 분석철학과 대륙철학 양측의 대립은 학문끼리의 정치에 의해 야기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문화를 보는 시각의 차이 에서 비롯된 것이댜 전자는 과학적인 지식인의 문화를 동경하고 있 으나 후자는 문예적인 지식인의 문화를 동경하고 있다. 여기서 로티 는 양측을 배척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어느 한쪽만을 고집하 지 말아야 한다는 암시를 주는 한편, 양측간에 관용의 태도를 취할 것을 권유하고 있댜 전반적으로 이 책은 로티가 자신의 사상을 <실용주의>로 재천명 하여 그것이 무엇인지를 밝혀주고 있디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 책 이다. 그것은 논문 9 에서 저자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반본질주의, 전체론, 대화주의를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문예의 문화를 지향하는 반실재론, 반표상주의, 반정초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물론 여기에 포 함된 논문들이 근 10 년 간에 씌어진 것들이어서 행간을 잘 들여다보 면 서로 약간씩 논조가 다른 점을 발견할 수도 있다. 저자의 서문에 서도 인정되고 있듯이 1970 년대의 초기에 씌어진 논문들의 내용에 대해서는 로티 자신도 상당히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우리가 볼 때에도 가령 맨 나중의 논문에서는 분석철학과 대륙철학 간의 <관용>을 주창하지만, 맨 처음의 논문에 담긴 논조는 분석철학에 대 해서 관용이기보다는 매도에 가까운 태도를 담고 있다. 또, 논문 8 에 서는 강한 오독을 행하는 강한 텍스투얼리스트의 입장을 권장하고 있지만, 이 책에 수록된 대다수의 논문들은 그렇게 강한 오독을 실천 해 보인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런 부분적인 불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철학과 자연의 거울』에서 찾아보기 힘든 로티 사상의 여러 면모를 잘 드러 내주고 있다. 가령 철학사에 대한 해석들(논문 4, 8, 12) 을 통해 로티 는 그가 <순전히 역사주의자>인 헤겔식의 견해라고 부른 철학사 해
석을 잘 보여 준 다. 또, 초월주의 문화를 다룬 논문 4 와, 듀이의 문화 비판적 접근 방식 을 칭송한 논문 5, 사회과학에 대한 방법론자의 견 지를 해명한 논문 11,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의 분열의 이면에 담긴 속 셈을 갈파한 논문 12 에서는 로티가 문화나 문명을 어떻게 보고 있는 지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그 내용들은 탈철학의 문화는 곧 문예 비 평이 되어야 한다는 서론의 주장을 부연하고 뒷바침해 주고 있다. 그리고 정초주의, 표상주의, 절대적 개념의 실재에 대한 추구를 지향 하는 전통적인 형이상학들을 비판하는 논문들(논문 2, 5, 7) 에서는 『 철학과 자연의 거울 』 에서 다루지 않았던 반정초주의의 함축을 부연 하고 그것을 철학사나 철학의 문제에 투영시킨 결과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에는 아쉬운 것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가령 문예 비평을 외치면서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본격적으로 펼쳐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로티의 저서로 보자 면 이러한 불만의 일부는 1989 년에 출판된 『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성 』 에 와서나 부분적으로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철학사의 흐름 에 대한 해석의 문제도 곳곳의 논문에 산발적인 암시로 끝나고 있어 서 좀더 본격적인 논의를 제공하는 논문이 한편이라도 있었으면 하 는 아쉬움을 갖게 한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경우에 로티 자신의 목 소리가 직설적으로 표현되기보다는, 대체로 제 3 의 사싱·가를 보는 해 석상의 차이룰 통해 요점을 밝히는 일종의 간접화법의 형태를 취하 고 있어서, 독자들에게 많은 집중력을 요구하는 부담을 주고 있다 . 이것은 로티 자신의 문체가 갖는 스타일상의 문제이기도 하겠고 문 예 비평이라는 형태를 빌린 철학 논의 방식의 문젯거리일 수도 있겠 으나, 여하간 직접적인 메시지롤 원하는 독자들의 불만을 살 우려가 없지 않다. 심한 경우에 이것은 로티의 사상은 고유한 목소리를 갖지 못한 채 거명주의나 기생주의를 영원히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 닌가 하는 우려를 낳을 수도 있다고 보이기도 한다.
3 실용주의의 도전과 문예 바평으로서의 철학 필자는 졸저 『 로티의 신실용주의 』 (칠학과현실사, 1994) 에서 로티의 사상 전반을 체계화하여 소개하고 나름대로의 바핀을- 전개한 바 있 으므로 이 소절에서는 다만 이 책이 우리에게 던져준 도전의 성격을 부연해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바를 살펴보고, 문예 비평으로서의 철 학이 무엇을 말하는지, 로티의 사상이 갖는 문화사적 의의가 무엇인 지를 논의함으로써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이 책의 핵심적인 주장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절 대적 개념의 실재를 추구하는 표상주의, 정초주의, 실재론은 허구의 관념에 기초한 것으로서 이제 설득력을 잃었다. (2) 그러한 관념을 떨쳐버릴 때 우리는 언어와 해석의 편재성을 수용하고, 강한 오독(誤 訥)을 통해 참신한 어휘의 창안을 지향하는 문예 비평으로서의 철학 을 해야 한다. (3) 그러한 철학관은 전문화된 철학이 아니라 문화 비 판이며, 그것은 우연성 속에 살아가는 유한한 인간에게 근거성은 없 지만 그래도 희망을 주는 철학이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책이 우리에게 도전적안 것으로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전문화된 철학의 부정도, 유한성의 인정도, 희망의 강조도 아니라 모든 형태의 근거성을 부정하고 우연성을 액면 그대로 수용 하자는 제안이다. 그러나 그러한 제안을 함에 있어서 로티는 가령 인 간 존재의 구조를 파헤친다거나, 서구의 존재론의 역사를 해명한다거 나, 경험의 형이상학을 시도하는 등 어떠한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논 의도 거치지 않고서, 다만 표상주의 내지는 정초주의에 기초를 둔 전 통철학의 시도를 비판함으로써 그 제안의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그 는 존재론이나 형이상학의 이론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라는 학문 분야 내지는 문예에 대한 비평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 고 있는 것이다. 로티의 주된 관심사는· 이 시대 지식인의 자기 인식 이며, 그는 순전히 역시주의자인 관점에서 근대와 현대 사상사의 흐
름을 해석하고 비판한다. 물론 로티가 본 사상사에는 어떠한 원리나 법칙도 없다. 거기에 있 는 것은 시대마다 특정한 어휘나 메타포를 둘러싼 언어의 그물들뿐 이다 . 자율적이며 전문화된 하나의 학문 분야로서의 철학을 지향하던 어휘와 메타포는 이제 과학의 시대를 지나 문예의 시대로 넘어오면 서 그 설득력을 다했다고 로티는 본다. 과학이나 과학적 지식을 지향 하는 철학은 단지 인류의 대화에서 한 구석을 차지할 뿐 다른 문화 영역에 대해 어떠한 특권도 갖지 못한다. 그것은 타문화 영역에 철학 적 정초를 수립해 주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의 추구라는 강박 관념에 떠밀린 지식인들의 공허한 몸짓이며, 특히 이 시대의 젊은이 와 지식인들에게 도덕적인 메시지를 주지 못하고 있다. 문예의 시대 에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철학을 철학의 체계나 철학적 문제 풀이의 학문 분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문예의 일종으로 여겨 비 평하는 문예 비평이다. 이제 철학자들의 텍스트를 진리의 보고( 寶庫 ) 가 아니라 당대의 시대적 고민을 토로한 문예의 텍스트로 읽어야 한 다고 로티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문예 비평으로서의 철학은 우연성을 수용한 현대인들에 게 어떠한 메시지를 줄 수 있는가? 모든 것이 우연성 위에 떠 있는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은 벼랑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아 찔하고도 오싹한 일이다. 하지만 로티는 그것을 비극적인 삶으로 보 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것을 영원한 유희의 가능성, 창조의 가능 성으로 받아들인댜 우연성의 솔직한 수용은 니체가 말하는 <가장 긴 거짓말>보다 더 나으며, 우리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을 바 탕으로 하여 개인의 자유와 자유주의 공동체의 연대성을 확보하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고 로티는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로티가 우리에게 보내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자유이다. 그 자유는 상상력 울 통해 창안되는 새로운 어휘의 창안이며, 자아의 확대이다. 그리고 이것은 텍스트에 대한 강한 오독으로써 구현된다. 이렇게 보면 로티
의 반정초주의가 함축한 의도는 자유의 확대 를 위해 진리라는 이름 의 강박 관념을 해체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도 있다. 로티에게서는 진 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통해 참신 한 메타포를 창안하며 강제되지 않은 합의를 통해 진리를 만들어가 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가 진리에 우선한다. 연대성이 객관성에 우선 하며, 민주주의가 철학에 우선한다. 철학이란 인류의 대화이자 문화 의 제 분야에 대한 정치이다. 그것은 논증이 아니라 설득을 행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로티의 이와 같은 낙관적이며 낭만주의적인 태도는 어디에 서 나온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메타포의 힘에 대한 그의 확신이다. 개방적인 자세로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수 용한다면 우리는 세상사에 잘 대처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메타포의 힘은 질곡의 사회 제도들을 무너뜨렸으며, 공산주의 체제를 붕괴시켰 고 문화의 패러다임들을 바꿔왔댜 참신한 어휘는 재서술을 통해 이 제껏 보지 못하였던 것들을 보게 해주며, 점진적인 개선의 킬을 열어 간다. 때로는 사르트르가 말하는 <못된 믿음>에 사로잡힐 수도 있지 만, 언젠가 그것을 타도하는 메타포가 우리를 거기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이라고 로티는 믿는다 로티의 낙관론을 떠받치고 있는 다른 하 나의 기둥은 자유주의 공동체에 대한 희망이다. 그는 자유주의가 인 류 역사상 최선의 정치 체제요 사회 제도라고 믿으며, 그것이 갖는 문제점들은 늘 개선되어야 할 것이나 그 테두리는 지속되기를 희망 한다. 구체적으로 자유주의 사회란 학문의 자유가 있는 대학, 사법권 이 독립된 권력 분립의 정치 제도, 언론의 견제 등이 그 뼈대를 이루 며, 무엇보다도 개인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기초로 한 사회이다. 그 런 사회의 우월성은 인간의 본성이나 사회철학적 탐구를 통해 증명 되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이라고 로티는 말한다. 인간의 유한성 을 넘어선 어떤 것에 대한 탐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 와 우연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자유주의 공동체의 희망을 지켜가는
것, 그것이 더 소중하다고 로티는 본댜 우연한 것이지만 그것이 우 리의 것이므로 소중하다는 발상이다 . 그렇지만 곧바로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 우리들의 존재가 그토 록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것인가? 우연성을 수용한 뿌리 없는 어휘들 이 과연 길을 제대로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인 7 ? 우리는 우리 시대 의 메타포의 포로는 아니겠는가? 지구의 저쪽에서 헐벗고 어둠 속에 서 떨고 있는 동료 인간들에게 자유주의의 연대성은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과학과 기술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시대에 문예 비평 은 과연 관심을 끌 수 있으며 또 설득력을 행사할 수 있겠는가? 등 이런 의문들에 대한 로티의 응답을 모두 논의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 상 전반에 대한 검토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이 책에 국한해서 말하자 면 로티의 응답은 자신의 실용주의는 우연성을 긍정하는 반본질주의 이긴 하지만 결코 상대주의나 비합리주의는 아니라는 대답이다. 바꿔 말해서 실용주의는 모든 것이 옳다는 상대주의를 인정할 수 없으므 로 아무 메타포나 다 수용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용주 의는 단지 철학 이론들에 대해 상대적인 견지를 취할 뿐이며 실질적 인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즉 과학자나 사회학자에 대해서는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전문가들의 판단을 존중한 다는 것이댜 따라서 이 주장은 실용주의가 지문회중심의 메타포에 포로가 되어 있는 문화상대주의도 아니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비 합리주의의 문제는 어휘나 메타포가 자유주의 공동체에 역기능을 할 우려와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로티는 본다. 가령 나치즘이나 공산주 의의 경우처럼 하지만 그것은 어떤 개념이나 어휘에 대해서도 중립 적인 실천의 문제이지 어휘나 메타포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 로티의 답변이다. 따라서 근거성이 있고 없고의 차이에 따른 합리/비 합리의 구별은 무의미하며, 문제의 관건은 실천인데 합의 도출을 위 한 것이라면 실용주의의 방식이 오히려 효과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대답이 얼마나 시원스럽고 또 설득력이 있으며, 문예의 문
화가 과연 로티가 제안하는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판 단은 독자들에게 맡긴다. 다만 한 가지, 로티의 제안을 수용할 경우 철학이 갖게 될 변모에 대해서만 간략히 언급하기로 하겠다. 로티가 제안하는 문예 비평으로서의 철학은 전문적인 철학의 문제, 철학에만 속하는 고유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철학자들의 텍스트를 문학 작품을 읽듯이 읽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철학이 곧장 문학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 니다. 이것은 가령 우리의 조상들이 늘 해왔던 방식, 즉 이른바 경전 과 역사와 시나 문장이 한데 어우러진 어떤 것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았던 일에 비견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일로 비유될 수도 있다 . 따 라서 문예 비평으로서의 철학은 다분히 학제적(學際的)인 것이고, 위 대한 죽은 철학자들의 텍스트에 대한 비평의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그것은 체계를 지향하기보다는 남의 아이디어를 수선하거나 거기에 기생하는 방식을 택하기 쉬울 것이나, 때로는 전혀 다른 텍스트를 그 냥 써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논조는 원리의 증명이나 논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신한 안목의 제시, 즉 재서술에 주어질 것이다. 그래서 철학은 문예의 일부로 편입된 철학 텍스트들에 대한 비평을 통해 자기 시대를 이해하고 문화에 대해 비판을 행하는 기능에 주안 을 두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문명의 전환기에 서 있다고 흔히들 말한다. 혹지는 제 3 의 물결 사회의 도래를 말하고, 혹자는 문명간의 충돌이 예상되는 시대라고 말하고, 혹자는 정보화 시대를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 면 로티는 과학 중심의 시대가 가고 이제는 문예의 시대가 도래하였 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로티의 이 주장이 과학이나 기술에 대한 폄하를 함축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는 결코 과학 자체 를 바판한 적이 없다. 그는 다만 과학을 절대적 실재, 자연 자체의 언어를 발견해 낸 것으로 보고 그 방법을 철학이나 다른 문화 영역 이 따라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만 비판한다. 이 점에서 오해가 있어
서는 안 될 것이댜 로티가 볼 때 과학과 기술은 우리의 삶에 도움을 주고 세상사에 잘 대처하게 도오戶구는 매우 유용한 메타포이다. 따라 서 그가 과학의 시대가 지났다고 말할 때 그것은 과학이나 기술의 종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나 지식이 과학을 모범으로 삼아 야 하는 시대가 지났다는 것을 의미한댜 그리고 문예의 시대가 도래 하였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문예 파워의 비중이 높아진 시대가 왔으며 철학이나 지식이 문예적인 것을 지향해야 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 다. 오늘날 이른바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이 부각되며, 저널리즘의 위력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문화의 영향력이 세계의 구석구석에 침투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로티의 이런 통찰에 공감하지 않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로티의 이러한 예언자적 통찰이 적중한 것인지, 그가 주 장하는 실용주의가 문예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지혜를 주기에 적 절한 것인지, 철학이 정초주의를 거부하고 반정초주의적인 문예 비평 으로 탈바꿈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아직은 유보적인 견지에서 더 지켜보아야 할 것 같댜 그러한 면들이 상당 부분 보이는 것도 사실 이지만 압도적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편 으로는 시대의 변화와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의 문화를 변화시키려는 로티와 문예비평가들의 노력을 더 지켜본 다음에 결론짓는 것이 현 명한 일일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리 고자 한다. 로티 교수는 번역의 판권 교섭을 위해 직접 다리를 놓아 주었고,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긴 서문을 새롭게 써주었다. 대전 대학교의 최신한 교수와 연세대학교의 이승종 교수는 각각 하이데거 와 데리다에 관한 논문의 번역문을 검토해 주었다. 이분들은 물론이 고 그 밖에도 번역 용어의 선택에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께도 감사 드린다. 그리고 이 책의 번역을 위해 작업하는 2 여 년 동안에도 조용 한 연구실을 제공해 준 육군사관학교와, 무던한 인내로 참아주며 나
에게 시간을 갖게 해준 사랑하 는 아내 승 혜와 두 딸 지원, 혜원에게 도 감사한다. 4 로티의 주요 저술 및 국내 문헌 목록 로티의 저술은 현재까지 저서 5 권, 편저 3 권, 논문 약 100 편, 서평 약 30 편이 있다. 그의 저술 목록에 대해서는 Herman J. Saatk a mp , Jr.( ed.), Rort y & Pragm atism : The Phil o sop h er Respo nds to Hi s Cri tics (Vanderbil t Un ive rsit y Press, 1995), pp. 231-244 ; 김동 식, 『 로티의 신실용주의』(철학과현실사, 1994), pp. 513- 52 0 ; Alan Malachowski (e d.), Readin g Rort y: Cri tica l Respo nses to Phil o - soph y and the M irr or of Natu re (and Beyo nd)(Basil Blackwell, 1990), pp. 371-378 를 참조할 것. 여기에서는 로티의 서평들은 제외 하고 저서와 편저 및 논문 그리고 그의 사상을 다룬 단행본 및 논문 집과 국내의 문헌 목록을 수록한다. 저서 Phil oso ph y and the M irr or of Natu re , Pri nc eto n : Prince to n Un ive rsit y Press, 1979.( 약 호 : PMN ) Conseq u ences of Pragm a,tism (Essays : 1972-1982), Minn eapo lis: Un i- versity of Minnes ota Press, 1982. (약호 : CP) Conti ng en cy , iro ny, and soli da rity , Cambri dg e : Cambri dge Un ive rsity Press, 1989. ( 약호: CIS) Obje c tiv it y , rel야 i v i sm, and trut h · Phil o soph ic a l pape rs volume l, Cambri dge: Cambri dge Un ive rsity Press, 1991. (약호 : ORT ) Essa ys on Heid e g ge r and oth e rs: Phil o soph ic a l pape rs volume 2,
Cambri dg e: Cambri dg e Un ive rsit y Press, 1991. (약호: EHO) 편저 Rort y, Rich ard(ed.), The Lin g uist i c Tum: Recent Essay s in Ph ilo so- ph ic a l Meth o d, Ch ica g o: The Un ive rsit y of Ch ica go Press, 1967. Rort y, Rich ard, Edward N. Lee and Alexander P. 0. Mourelato s (eds.), Exergi s and Argu me nt: Essay s in Greek Ph ilo soph y Presente d to Greg o ry Vlasto s , Amste r dam: Van Gorcum, 1CJ 73 . Rort y, Rich ard, J. B. Schneew ind and Quint e n Sk inn er(eds.), Ph ilo - soph y in Hi st o r y , New York Cambri dg e Un ive rsity Press, 1984. 논문 1961a Prag m ati sm , Cate g o ri es , and Lang u ag e , Ph i.lo sop h ia z l Re- vie w , V. 70, 197-223 쪽 1961b Recent Meta philos oph y , The Revie w ot M eta physi c s , V. 15, 299-318 쪽. 1961c The Lii nits of Reducti on i sm , Exp e ri en ce, Ex iste n ce and The Good: Essays in Honor of Paul Weis s , ed. Irwin C. Lieb , Carbondale, Illinoi s : South e rn Illinoi s Un ive rsit y Press. 1962 Real ism , Cate g o r i es , and the 'Lin guisti c Turn', Inte r nati on al Ph il osop hi떠 Qu arte r ly, V. 2, 3ITT-332 쪽 1963a Comments on Profe s sor Ha rtsh orne's Pape r, The Jou rnal of Phil o soph y, V. 60, 606-608 쪽. 1963b The Subje c ti vist Principle and the Lin guisti c Turn, Al fred North Whit eh ead: Essa ys on Hi s Ph i.lo soph y, ed. George L. Kline , Eng le wood Cli ffs, N.J .: Prenti ce -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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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색인
기 가다머 12, 33-34, 36, 324, 430, 442 간디 70 갈릴레오 6-7, 25, 306, 312, 3Z7, 337, 372, 3 얽 -392, 394, 396- 397, 399-400, 402, 404, 406, 408, 410, 412, 472 거비치 177 골드버그 375 공자 12 괴델 121 괴 테 155, 179, 3.52 굿맨 38, 68, 130, 183, 389 그라프 328-330, 333 그린 25, 202, 204, 206, 209, 314- 315, 370 L 나보코프 155, '2ffl, 318, 330, 333 나폴레옹 178 네이글 5-6, 8-10, 12, 37, 54, 56-64
뉴먼 lITT 뉴턴 1, 121, 309, 313-314, m, 347, 357, 391- 39 2 니이버 186 니체 12, 28-29, 35-36, 74, 138-139, 152-155, 1 磁 167, 169, 196, - 297, 319-320, 322-323, 328, 330, 333-334, 337, 343, 345, 370, 384-38 .5, 409-410, 413, 416, 440-442, 444, 447, 457, 459, 462, 469, 477 니하마스 290 C 다윈 206, 306, 337, 3.57 , 400 닥터 존슨 18.5 , 430 단테 15.5 , 309, 330 단토 181, 196, 409 더글라스 70 덤 밋 '57, 46-47, 49 데네트 5-7, 10-11, 59-60 데 리 다 17, 29, 32, 34-36, 53, 175,
182, 196, 214, 220 - 22 4, 227 - 233, 235, 237- 23 9, 241, 243 , 245 一 247, 249, 297, 301 , 303 , 324- 32 5, 331, 430, 439, 441- 442, 447, 452, 454, 459-460, 462 데모크리토스 7, 25, 296, 327 데이비슨 6, 30, 32, 41_, 4 5, 81-82, 84-8.5 , 87-88, 92-93, 95-96, 106, 222, 453, 462 데카르트 30, 34, 54; 59, 61, 64, 106-107, 116, 118, 123- 1' 27 , 129, 138-139, 147, 149, 162, 165, 177, 194-195, 220, '273 , 283, 309, 345, 361-362, 369, 371, 376, ?Zl-3 88, 392, 421, 450, 464 도넬란 253, 256-257, 267-'27 3 , 280- 281, 294, 296, 299, 468 도스토예프스키 318 • 듀앙 118 듀이 6-7, 15-17, 28- 30 ,· 39, 41, 53, 74, 95-96, 100-101, 103, 112, 118-121, 129, 139-144, 147- 15 6, 158-160, 162-165, 168, 174-176, 178 드라이든 90 드망 301
들 뢰 즈 29 디오니소 스 121 딜 타이 196 , 324, 394 , 403 2 라무스 392 라부아지 에 52, 309 라이프니츠 207, 309, 426, 429, 439 라이 헨바하 177, 419- 42 8, 430- 43 1, 433, 436, 438-440, 442-444, 446, 452, 473 라일 59, 211, 362, 374, 384, 404 라 투르 281 랑케 121, 430 랜들 376 러브조이 190, 351-353 러 셀 12, 26, 113, 177, 183, 194-195, 220, 254- 26 0, 264-268, 初 l 길 75, '2:18 , 284, 286 겁얽, 290, 292, 299, 336, 343, 351, 426, 447, 468 레닌 178, 357 레싱 318 레인보우 301 로이스 95, 174-175, 190, 314-315 로크 138, 178, 194, 205, 2CY7, 210- 211, 309-310, 313-314, 369-370,
388, 403, 439, 466 로티 449- 46 2, 464- 47 4, 476- 48 2 롤즈 221, 377, 427- 42 8, 432, 447 루소 238, 244, 249, 312, 332, 362 - 363, 385, 416 루이스 277, 336 , 364 루터 166 르콩트 드뉘이 309 리 드 367, 372, 374 리오타르 454 리즈 41 리처드스 364 D 마르크스 25, 70, 121, 153-154, 314, 319, 339, 357, 413, 421, 428, 439-440, 442 마리탱 376 마이농 274-275 마키아벨리 339 마하 25 만델바움 308 말라르메 90, 2 언 말로 180 말콤 376 매콜리 15.5 , 179
매킨타이어 18 머 독 56 一 58, 62, 130, 378 매이클존 176 멘델 41 몬태규 106, 430 몰리에르 40 몽테뉴 121, 370 무어 180, 195, 361-362, 364, 371 미라보 390 밀 25, 341, 427, 437 밀러 301 밀턴 90, 178, 357-358 닌 바르트 166 바우즈마 208, 362 바울 166 바이스 449 바이힝어 180 발레리 180, 297 버 클리 54, 228, 업 5, 302, 310-313, 326, 361-362, 369, 373, 388 버트 376 벌린 317 베르그만 34, 424 베르그송 421-423
베르메르 21, 281 베르셰니 157 베버 412 배블렌 187 베이컨 27, 392 베 인 201-202, 315, 370 벤담 378 벤틀리 189 벨라 17 보들레르 318, 330 보르헤스 297, 299 보이드 37 보일 403 부처 52 분트 105 브라우들 429-430 브래들리 371 블랙 194 불레이크 24, 384-38 .5 블룸 184, 301, 318, 321- 32 2, 325- 326, 331, 333-334, 457, 465, 470 비트겐슈타인 6, 16, 30, 32-34, 36, 38, 57, 59-61, 100-101, 103- 110, 113-115, 117-120, 123, l 업 -130, 139, 154, 163, 181, 195, 211, 213, 218, 233, 238, 252, 256-258, 263, 업 9
人 사르트르 57, 73, 128, 153, 181, 214, 230, 246, 249, 318, 369, 372, 375, 381, 淡 B, 447, 478 사무엘 존슨 121 산타야나 140, 159, 171, 173- 1 75, 179, 181-18. 5, 191, 197, 200, 205, 368, 452, 465 서로우 362-363, 38.5 셀라즈 24, 30, 32-34, 38, 63, 65, 78, 100-101, 121, 194, 209, 211, 233, 281, 420, 443 一 444, 462-463 셰익스피어 181 셸리 90 셸링 421 소쉬르 232 소크라테스 73, 346, 3!50 , 353-35 .5, 358 소포클레스 70, 15.5 쇼펜하우어 421 슈츠 177 스노 70, 182, 214, 302, 317, 447 스윈번 90 스칼리제 315 스키너 124, 309 스탕달 121
스트라우드 37, 81, 84, 87, 92, 95 스트로슨 221, 229, 254- 25 5, 28.3 스티 븐스 187, 297, 331 스티븐슨 377 스펜서 124, 315, 337, 421 스피노자 121, 190, 204, 370, 432, 437 시즈위크 378, 4Z7 실러 182, 313 썰 229, 253, 255, 258-264, 266-Zll, 273, 283-284, 286, 292, 375, 401, 442, 452, 468 。 아낙사고라스 310 아놀드 150, 318 아담스 24, 446 아리스토텔레스 7, 12, 86, 99, 117, 136-137, 152, 162, 178, 190, 209, 212-213, 235, 288, 309, 331, 337, 347, 387-388, 390, 394, 449 아벨라르드 121 아브람스 320, 322, 331-333 아우구스티누스 107, 158, 166, 204, 220, 235, 432
아운 16 아인슈타인 347 아퀴 나스 149, 160, 165, 235, 309, 337 아킬레 스 52 알키비아데스 178, 353, 356 액턴 155 에드먼드 윌슨 122 에드워드 사이드 321 에드워즈 l 얽 에라스무스 315 에 머 슨 177, 179, 183, 465 에이어 138, 194-195, 371 엘리엇 183 예이츠 122, 331 오스틴 114, 121, 195, 211, 228, 258, 362, 364-365, 368, 371-375, 384 오웰 357 오토 176 올더스 헉슬리 124 웅거 454 워즈워스 178 워홀 427 위 121 위즈덤 362 윌리엄 제임스 1 얽, 298, 359 윌리 엄스 391-392
윌슨 183 유리피데스 121 , 178 것 제 임 스 6, 28-29, 43- 44 , 74, 105, 149, 152, 175, 229, 319, 322- 323, 328, 330, 334-339, 341, 343, 345, 347, 351, 360, 409 一 410, 456, 469- 47 0 제퍼슨 187 조이스 297 질송 376 大 초서 123 촘스키 124 치좀 283 = 카르납 12, 26, 80, 113, 135, 138- 139, 152, 175, 177, 194, 196, 243, 304, 424, 447 카벨 17, '51, 54, 68, 106, 196, 361-384, 452, 471
카스 16 카스토리아디스 454 카시러 196, 389 카알라일 179, 317 , 446 칸 17 칸트 12, 24-25, 30, 34, 38, 43, 54, 56-58, 61-62, 64, 77- 79 , 92, 98- 10 0, 103- 10 5, 107, 116-118, 128, 135, 147, 165, 178- 17 9, 182, 190, 194, 196- 19 7, 202, 204, 207, 209, 210-214, 220-221 칼렌 176 코난 도일 253, 265, 업 0, 277 잡 78 콜리지 317 콩트 25, 126, 128, 152 콰인 12, 30, 32, 38, 80-81, 8.3, 100, 118, 152, 194, 247, 294, 402, 419-420, 422, 426, 444, 462-463 쿤 11, 70, 78, 106, 118, 182, 214, 242, 317, 325, 343, 370, 380, 389-390, 393, 404, 408, 422, 426, 428, 430, 432, 444, 447 크로너 104 크롬웰 178 크립키 37, 260, 267, 'Z72 -'Z7 3 , 296, 428, 432, 442, 447 크세노폰 390
클라크 37, 53, 364 큘리포드 446 키에르케고르 103, 121, 157- 15 8, 166, 178, 314, 362, 363, 385, 428 키츠 181 E 타르스키 40, 44, 46, 175, 424, 426 테일러 401, 405 토마스 헉슬리 124 톨스토이 362-363, 38.5 트릴링 18:3 , 318, 330, 332-333 틸리히 95, 157, 166 IZ 파라셀수스 339 파르메니데스 106, 220, 286, 288, 290-291, 468 파머 174 파스퇴르 339 파슨스 253, 257, 274-'l7 9, 286, 292, 412, 468 파이글 424 파이어아벤트 78 퍼 스 32, 34, 152, 1 얽, 'l76 -'l7 8, 336,
:¾4, 357- 35 8, 446, 456 퍼트납 37, 39, 41, 221, 243, 257, 260, 267, 업 2 - T73, 293, 403 페리클레스 24 페어스 106, 108- 11 0, 112, 114-115, 117- 12 0, 124, 1 업, 130, 463 포스터 180 포이에르바하 370 포프 218 푈스달 294-295 푸코 29, 33, 36, 53, 70, 74, 182, 190, 196, 214, 297, 299,· 301, 321-322, 326, 331, 333-334, 406-417, 424, 439-440, 442, 447, 452, 454, 457, 459, 469, 472-473 프라이스 368-369 프라이어 377 프레 게 12, 24, 38, 113, 121, 220, 222, 243, 256-257, 292, 421, 426, 428 프로이트 7, 57, 230, 246, 357, 454 프로타고라스 346 프루스트 70, 15.5 , 178 플라톤 12, 22, 24, 31, 43, 53-54, 98, 116, 118, 136-138, 146-147, 151-152, 154-15. 5, 100, 165, 169,
178- 17 9, 181, 18.5 , 193 , 219 - 22 0 , 222, 238, 249, 287- 29 0, 310 , 337, 341-342, 344, 352 - 懿, 357, 358-390, 422, 432, 436 피스크 16 피아제 124 피타고라스 337 피히테 24, 176, 235, 314- 31 5, 319, 369, 421 팔亡 37, 40, 49, 257, 267 핏처 310 근 하르만 80, 106 하르트만 301 하버마스 196, 357-358, 4W, 430, 454 하안 17 하이네 318 하이 데거 12, 15-16, 29, 33-36, 53, 101, 128, 134, 136-144, 146- 153, 15.5 - 169, 175, 181, 211, 214, 221, 223 핫지슨 199-203 해킹 411, 413 헉슬리 121, 446 헤 겔 7, 12, 25, 69-70, 76-78, 100,
116, 119, 138 , 152 -15 4, 160, 166, 168, 176, 190, 193- 19 4, 196- 19 7, 204-207 , 211-213, 218, 220, 223-224, 227, 238, 240, 313-314, 316 一 319, 323, 325, 328, 332, 337, 358 헤라클레이토스 121, 135, 146 헤밍웨이 70 헨리 제임스 lITT, 'Z76 , 'Z18 , 299 헴펠 396, 424 호라티우스 15.5 호메로스 90 호프슈타터 197 홉스 25- 'Z l, 138, 180, 330 화이트 289, 301 화이트헤드 31, 423, 425, 446 횔덜린 354 후설 12, 25, 128, 135, 139, 149, 152, 177, 196, 222, 336, 343, 351, 423, 442 후크 176, 186, 192-193, 195 훼웰 390, 408 휘트먼 183 흄 5.5, 114, 116, 195, 201-202, 2ITT, 309-311, 369-370, 388, 421, 426, 429, 437, 439 히틀러 70
김동식은 육군사관학교 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서 철학을 수학하였다 . 그리고 미국 에모리 대학교에서 로티의 사상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 1982 년 이래 육군사관학교에서 철학 교수로 재직중인 그는 분석철학과 과학철학 및 로티의 사상에 관한 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다 . 저서 『 로티의 신실용주의 』 (1 994), 역서 『현대과학철학논쟁 』 (1 987) 이 있으며, 「자연주의 인식론의 철학적 의의」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실용주의의 결과 대우학술총서 · 번역 100 1 판 1 쇄 찍음 - 1996 년 11 월 30 일 1 판 1 쇄 펴 냄 - 1996 년 12 월 5 일 지은이 리처드 로티 옮긴이 김동식 펴낸이 朴孟浩 펴낸곳 (주)던옵^t 출판등록 1966. 5 . 1 9. 제 16 -4 90 호 135-120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06 강남출판문화센터 5 층 대표전화 515-2000 팩시밀리 515-2007 © 김동식, 1996. 총류 KDC /10 0 Pri nt e d in Seoul, Korea 값 21,000 원 ISBN 89-37 4-4야 9-7 94160 ISBN 89-37 4-3 000- 2( 세트)
| 대우학술총서(번역) |
1 유목민족제국사 관텐/송기중 2 수학의 확실성 클라인/박세희 3 중세철학사 와인버그/강영계 4 日本語의 起源 밀러/김방한 5 古代漠語音韻學板要 칼그렌/최영애 6 말과 사물 푸코/이광래 7 수리철학과 과학철학 와일/검상문 8 기후와 진화 피어슨/김준민 9 이성 진리 역사 파트남/김효명 10 사회과학에서의 場理論 레빈/박재호 11 영국의 산업혁명 딘 / 나경수 이정우 12 현대과학철학논쟁 쿤 外/조승옥 김동식 13 있음에서 됨으로 프리고진/이철수 14 비교종교학 바하 /김종서 15 동물행동학 하인드/장현갑 16 현대우주론 시아마/양종만 17 시베리아의 샤머니즘 디오세지 호팔/최길성 18 조형마술의 형식 데 ―브란 - 트 / 조장섭 19 힐 버트 리드 / 이일해 20 원 시국가의 진화 하!::./최몽룡 21 商文明 張 光直 / 윤내현 22 0 虐의 생태학 베 이츤 / 서석봉 2 3 흔 돈 속의 질 서 프리고진·스텐저스 / 유기풍 24 생명 의 가 원 밀라오르겔 / 박인원 25 일반언어 학 이론 야콥슨1 권재일 26 국 가 권력의 이념사 마이네케 /이 광주 27 역사 학 논고 브로텔 / 이정옥 28 유럽의식의 위기 I °봐르 / 조한경 29 유럽의 식 의 위기 l O 짜르 / 조한경 30 일 반반언국가어 학학 강켈 의 젠 /소 민쉬준르t기.》 / 최 3 1 일 승언 32 일반체계이른 바를란피 / 현승일 33 현대문명의 위기와 기술 철학 애거시 / 이군현 34 언 어에 0대 한 지 식 촘스키 / 이선우 35 음운학원 론 트루베쓰코이 / 한문희 36 우주 의 발견 하위트 / 강용희
37 수학적 발견의 논리 라카토스/우정호 38 텍스트 사회학 지마/허창운 39 현대물리학의 철학적 테두리 보음/전일동 40 과학과 가치관의 우선순위 스페리/이남표 41 신화의 진실 휘브너 / 이규영 42 대폭발 실크/홍승수 43 大同書 康有爲/이성에 44 표상 포더/이영옥 정성호 45 과정과 실재 화이트헤드/오영환 46 그리스 국가 에렌버그/김진경 47 거대한 변환 폴라니/박현수 48 법인류학 포스피실/아문웅 49 언어철학 올스튼/곽강제 50 중세 이슬람 국가와 정부론 램톤/김정위 51 전통 쉴즈/김병서 신현순 52 몽골문어문법 뽀뻬/유원수 53 중국신화전설 [ 袁fii)/전인초 김선자54 중국신화전설 Il 〈근간〉 55 사회생물학 ] 윌슨/이병훈 박시룡 5 6 -, ( f~ 쟁물학 57 일반언어 학 의 제문제 I 밴베니스트 / 황경자 58 일반언어학의 제문제 l 밴베니스트 / 황경자 59 폭력과 성스러움 지 라 르 / 김진식·박무호 60 갑골학 60 년 董 作賓 / 이형구 61 현대 수 학의 여행자 피터슨 / 김인수 · 주형관 62 프랑스 혁 명의 지적 기 원 모르네 / 주명철 63 해석학과 과학 커널리 ·코이트너 / 이유선 64 서 양고대경제 핀리 / 지동식 65 음악사회학 베 버 / 이건용 66 앙띠 오이디푸스 들뢰즈·가따리 / 최명관 67 과 학 커뮤니케이선론 프 라 이스/ 남태우·정준민 68 교양교육의 개 혁 다 니 엘 벨 / 송미섭 69 과학과 가치 래리 라우든 /이 유선 70 초기제국에 있어서의 교역과 시장 칼 폴라니 / 이 종욱
71 폭정론과 저항권 헬라 만트/심재우 72 생명과학철학 데이비드 헐/하두봉 • 구혜영 73 사랑의 역사 쥴리아 크리스테바/김영 74 大地의 노모스 칼 슈미트/최재훈 75 일반 공법학 강의 레옹 뒤기/이광윤 76 텍스트학 반 다이크/정시호 77 문명의 발생 찰스 레드만/최몽룡 78 근대국가의 발전 G 폿지/박상섭 79 과학적 발견의 패턴 N R 핸슨/송진옹 • 조숙경 80 아랍 문학사 R A 니콜슨/사희만 8118 세기 중국의 관료제도와 자연재해 P. E. 빌/정철웅 82 역사비교언어학개론 R 안틸라/박기덕 • 남성우 83 계몽주의 철학 E. 카시러/박완규 84 토양 미생물학과 생화학 폴 클라크/이도원 조병철 85 수학, 과학 그리고 인식론 l 라카 토 시 /이영애 86 봉건제의 이해 러쉬튼 쿨본/김동순 87 그라마톨로지 자크 데리다 /김성도 89 殷代貞 卜 人物通考 1 라오쏭이 / 손예철 90 殷代貞 卜人物 通 考 , 라오쫑이 / 손예철 91 순수경제 학 레옹 왈 라 스 / 심상필 92 문화유물론 마빈 해리스 / 유명기 93 포유동물의 가축화 역사 줄리엣 클루톤브록 / 김준민 94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채와 우주 E.카시러 / 박지형 95 화학적 진화 SF . 메이슨 / 고 문주 96 과학의 한 계 바이 츠제커 / 송병옥 97 러시아 연해주와 발해 역사 예 퀘샤브꾸노프 / 송기호 • 정석 배 98 경제정책의 원리 발 터 오이켄 / 안병직 • 황신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