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벌린 Isaia h Berlin 1933 년 옥스퍼드 대학 교수로 취임 1971 년 영국 최고의 메릿 훈장 (O . M.) 받음 1975 년 이후 옥스퍼드 대학의 올 소울즈 all souls 칼리지의 명예교수로 재직 1974-1978 년 영국 학술원 의장 역임 주요 저서 The Hedg e hog and the Fox: An Essay on Tolsloy s View of H i st o r y (19 53) Russia n Thin k e rs (I 96 9) 외 다수 이종홉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졸업 동대학원 문학박사 현재 경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주요 논문 「 확실성? 모더니티, 비코 」 「 근대초 유럽의 헤르메스주의와 과학적 담론의 형성」 강성호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졸업 동대학원 문학박사 현재 고려대학교 서양사학과 강사 주요 논문 「 헤르더의 사상에 나타난 〈총체적 역사인식 개체성, 발전, 인간성 사상의 상호관계 를 중심 으로〉 」
비코와 헤르더
VICO AND HERDER by Isai ah Berlin Cop yrigh t © Isai ah Berlin 1976, 1997 All righ ts reserved. Korean Translati on Cop yrigh t © 1997 Minu msa Publi sh ing Co., Ltd. Korean tran slati on edition is pu bli sh ed by arrang em ent with Cu rtis Brown Group Lim ited throu g h Sh inw on Ag en cy 이 책의 한국어 판 저작권은 Sh inw on A g enc y을 통해 Cu rtis Brown Group L imited와 독점 계약한 (주)민음사에 있습니다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비코와 헤르더
감사의 글 이 책을 구성하는 두 논문은 두 차례의 강연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는 1957 - 1958 년 런던의 이탈리아 연구소 I tali an Ins tit u t e 에서 , 다론 하나는 1964 년 존스 홉킨스 대 학 Joh ns Hop kins U ni vers ity에 서 수행된 강연이댜 비코에 관한 강연은 『 18 세기 이탈리아의 예 술과 사상 Art and Ideas in Ei ght e e nth - Centu r y I ta. ly 』 (Rome, Ed i- zio n n i di Sto r i a e Lett er atu r a, 1960) 에 서 이 미 논문으로 수록된 바 있다. 헤르더에 관한 강연은 와서먼 Earl R. Wasserman 이 편집한 『 18 세 기 의 제 측면A s p ec t s of the Ei gtee nth Cen tury』 (Ba ltim o re, Joh ns Hop kins Un ive rsit y Press, 1965) 에 서 처 음 논문화되 었다가 그후 약간의 수정을 거 쳐 < 인카운터 Encoun t er }> (1 965 년 7 월)에 재수록되었댜 그렇지만 이 책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두 논문은 크 게 수정되었으며, 특히 비코에 관한 논문은 상당한 정도로 증보되 었다. 이 기회를 빌어 감사드리고 싶은 분들이 있다. 먼저 폼파 Leon Pomp a 박사와의 비 코에 관한 토론은, 특히 과학과 지 식 에 대 한 비코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 헤르더에 관 해 파스칼 Ro y Pascal 교수께서 내게 편지로 보내 주신 견해도 대 단히 유익했댜 폼파 박사의 비코 연구서가” 내 책이 교정쇄에 들 어간 후에야 출판되었다는 것은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조금만 일
1 ) Leon Pomp a, Vico , A Stu d y of the
찍 출판되었더라도 그의 저서를 이용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 움이 남는댜 이 책의 인용문에서 명백히 드러나겠지만, 비코의 『새로운 과학 Sc ien za nuova 』 에 대 한 나의 안용과 참조는 버 긴 T. G. Bergi n 교 수와 피쉬 M. H. Fis c h 교수의 탁월한 영 역본에 의존했댜 헤르더 에 관한 인용은 펠드먼 B. Feldman 교수, 리 처 드슨 R. D. Ric h ard- son 교수, 파스칼 교수, 바너 드 F. M. Barnard 교수 등의 번 역 물들 에 의존했댜 내가 가장 크게 빚진 바너드 교수의 뛰어난 선집 『 헤 르더 와 사회 정 치 적 문화 Herder on Socia l and Politi ca l Cul t ure 』 에 각별한 감사를 전하고 싶다. 그의 번역에서 일부는 그대로 사용되 었으며 일부는 약간 수정을 가해 사용되었다. 그밖에도 이 책의 교정 에 가치 있는 도움을 준 그레 이 엄 一 해리슨 Franci s Graham- H a rriso n 씨에게 감사드리며, 자상한 배려와 정중함으로, 특히 무한한 인내로 나를 상대 해 준 호가르스 출판사 Hog arth Press 의 브루너 Hug o Brunner 씨에게도 감사를 드리고 싶다. 마지막으로, 궂은 일이 생 킬 때마다 불평없이 인내로 도와 준 나의 비서 유티친 Pa t r ici a Ute c hi n 여사에 게 고마움을 전한다. 1975 년 7 월 이사야 벌린
서문 역사가는 인간이 행하고 겪어 온 것들의 사회적 측면과 영향을 발견하고 기술하며 설명하는 일에 종사한다. 그러나 사실이나 사건 을(혹은 이것들의 특징을) 기술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설명하고 분석 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선택하고 해석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를 뚜렷하게 경계지어 말하기는 힘들다 . 일상언어와 일상적 개념을 수 정 하지 않고는 이 러 한 구획 이 불가능하다. 일찍 이 괴 테 Goe t he 는 사건에 대한 진술이 이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적시한 바 있다. 물론 사실에 근접한 착상은 그렇지 않은 착상보다 이론에 덜 의존할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착상이 사실에 가까운가에 관해 완전한 합의는 불가능하다. 무엇이 사실인가에 대한 판단기준은 지 식의 분야마다, 심지어는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댜 역사학 분야를 예로 들자면, 무엇이 사실인가에 대한 견 해의 차이는 기독교 역사가와 이교도 역사가 사이에서는 물론, 르 네상스 이후의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분명하게 발견된다. 보슈에 Bossue t로서는 이론의 여지없는 증거가 기본 G i bbon 에게도 반드시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역사적 사실의 구성 요건은 랑케 Ranke, 미 슐레 Mich elet, 머콜리 Macaulay, 기조 G ui zo t, 딜타이 Dilth e y 둥에게 저마다 달랐다. 민족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 성직자들과 자 유주의자들도 동일한 과거를 응시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이 같은 차이는 선택과 해석의 문제가 첨가되면 더욱 커진다. 이러한 사실
이 상상적 재구성의 방법에 의존하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댜 이들과 대립적으로 계량화와 통계적 방법에 주로 의존하 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를테면 이런저런 유파의 사회심리학 이나 사회학이나 문화철학의 공리를 추종하는 비록 늘 의식 적이지는 않지만――-저술가들에게도 적용되는 사실이며, 인류학 이나 심리학이나 구조주의 이론을 추종하여 언어나 문학을 기능주 의적으로 해명하는 저술가들에게도 적용되는 사실이라는 말이다.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의 선택과 해석에서 규범의 혁신을 주도한, 그럼으로써 사실 자체에 대한 전망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위대한 두 사상가들의 업적을 검토한 것이다. 비코와 헤르더가 그들이다. 양자는 모두 18 세기에 저술했지만, 그들의 학설은 19 세기에 이르 러서야, 그나마 주로 직계 제자들의 노력에 힙입어 빛을 보았다. 그렇지만 나의 연구가 그들의 모든 저술들에 대한 철저한 검토를 의도한 것은 아니댜 그들의 테제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홍미있 고, 중요하고, 암시가 풍부하다고 여겨졌던 것들만을 검토하려고 한다. 이러한 내 사정 때문에, 이 두 사상가의 정교한 철학 관념들 중 몇 가지는 대단히 중요한 쟁점을 제기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서는 비판적으로 검토되지 못했다. 세 가지만을 예로 들어보겠다 . 우선 <원인에 의한pe r caussas> 설명에 기초하는 비코의 독특한 인식론은, 데카르트며 흄이며 칸트며 현대 실증주의자들이 말하는 인과관계와는 다른 관점을 전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동기 와 원인에 대한 그의 견해는 오늘날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문제들에 매우 적절한 통찰을 제공한다. 둘째로 비코는 <지식 sc i enza> 과 <의식 cosci en za>, <진리 verum> 와 <확실성 cert um > 사이룰 구분했는데, 이러한 구분은 역사방법론과 사회학방법론에 관한 많은 토론과 논쟁, 특히 헤겔파 철학자들과 포스트헤겔파 철
학자들의 ― ― 유물론자 , 마르크스주의자, 프로이트주의자 등의 ―토론과 논쟁에 대해서도 적절한 지침을 제시한다. 셋째로 헤 르더의 목적론적 문화성장론에서는, 편향적이고 철두철미한 유물 론자나 실증주의자나 기계론자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개념들과 심 리학적 방법들이 개척되었거나 적어도 확장되었다 . 실로 많은 작 가들이 마르크스주의나 비트겐슈타인주의나 지식사회학이나 현상 학으로부터 그들이 받은 영향을 헤르더의 풍요로움에 접목시킴으 로써 각자 나름대로 다양한 입장들을 피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철학적 발전에 대한 이 같은 논의는 홍미롭고 생산적인 구석이 전 혀 없지는 않지만 별로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 . 비코의 『새로운 과 학 』 으로부터 현대 언어학적 구조주의의 선구를 추적하는 작업이 그러하듯이, 이런 식의 논의는 비코와 헤르더의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을 미친 주제들에 대한 그들 자신의 논의와는 너무 동떨어 진 것이기 때문이다-그들의 핵심 주제는 넓게 말하자면 인문 적 연구들의 본질과 성장에 관한 것이며, 좁게 말하자면 역사와 문화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나로서는 비코와 헤르더의 이 같은 관념들의 기원을(비록 시론적 으로는 밝히고 있지만) 철저히 추적하겠다는 생각이 없다. 그 관념들 을 수용한 역사적 사회적 환경을 기술하는 것도, 이 관념들이 특정 시 대 의 세 계 관 Welta n schauung 혹은 그들 자신의 세 계 관 속에 서 수행한 역할을 해설하는 것도 나의 의도는 아니다. 실로 비코보다 대담하고 헌신적으로 , 포괄적인 역사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 람은 없다. 특정한 관념이나 전망은 그것이 발생한 사회의 연속적 발전과정에서 특정한 단계의 표현으로서, 오로지 발생론적 역사학 적인 관점에서만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헤르더보다 설득력 있게 논증한 사람도 없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수많은 학자들이 기대 이상의 박식함을 발휘하여 비코와 헤르더의 지적 이데올로기적 원천들을 상세하게 구명해 왔다. 비코에 관해 서 는, 크로체 Benedett o Croce, 코르자노 A. Corsano, 피 쉬 Max H. Fis c h, 바달로니 Nic o la Badalon i, 로시 Paolo Rossi, 제 르비 A. Gerbi, 등이,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니콜리니 Fausto N ic o lini가 탁월한 업 적을 남겼댜 헤르더의 가르침에 관해서는(가장 중요한 인물들만을 선택하자면), 하임 Rudolf Ha yrn을 위시하여 보다 최근의 니스벳 H. B. Ni sb et, 웰즈 G. A. Wells, 루쉐 Max Rouche, 치 르문스키 V. Zhirmu nsky , 클라크 Robe rt Clark 등이 필수불가결한 골격을 제공 해 주었다. 비코와 헤르더의 사상에 관한 그들의 평가가 나의 의견 과 상충하는 대목에서조차도 그들의 노작들은 내게 큰 도움이 되 었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물론 사회사에 대한 지식,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서 작용하는 사회적 힘들의 상호작용과 충돌에 대한 지식, 이것들이 야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지식은 요구되기 마련이다. 어 떤 사상이 진공 속에서 태어나거나 단성생식 part heno g enes i s 으로 발생하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이치는, 순수 기술적인 응용분야롤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의 의미와 목적을 충실히 평가하 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엄밀과학에서의 개념을 올바르게 해석하 기 위해서도 필요하댜 따라서 나로서는, 비코나 헤르더의 매우 중 요하고도 독창적인 관념들이 왜 하필이면 지적 과학적 활동이 맹 렬하게 추진되던 시대의 문화적 후진지역인 나폴리 왕국이나 프로 이센에서 형성되었는지를 고려하는 작업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이러한 역사학적 구명의 문제는 적어도 내가 아 는 한에서는 아직까지 적절하게 해결된 적이 없으며 그것의 적절 한 해결을 위해서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지적 조건들에 대한 지 식이 필수불가결함을 나로서도 인정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 문제
가 이 책의 목적에 어울리는 관심사는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역사학적 배려는 더욱 충실한 이해를 위한 충분조건은 될 수 있어 도 , 역사적으로 영향력 있는 모든 이론이나 개념의 핵심을 파악하 기 위한 필수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플라톤과 플라톤주의자들을 예로 들어보자. 로마제국 말기나 르네상스 시대의 신플라톤주의자 들은, 플라톤 사상의 사회적 역사적 상황에 큰 관심을 기울인 근대 의 더욱 박식하고 꼼꼼한 주석가들만큼은 플라톤의 학설들을 충실 하게 해석하지 못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주요 학설들 안에 그것들을 형성한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면이 없었다면, 신 플라톤주의자들을 위시해 수없는 유능한 학자들과 주석가들이 그 것들에 그토록 열심히 매달렸을 리 만무하다. 그런 면이 없었다면, 플라톤의 사상은 플로티 누스 Plo ti nus 며 피 코 Pic o della Mir andola 며 피 치 노 Marsili o F i c i no 며 미 켈 란젤로 Mi chelan g elo 며 샤프츠베 리 Shaft es bu ry 등을 거 치 면서 장구한 세월 동안 후손들의 상상력 을 자극할 수도 없었을 터요, 우리 시대의 주요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지도 못했을 것이다. 물론, 17 세기 후반 영국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로크 Locke 의 『통치론 두 편 Two Treati es on Governmen t』 제 2 권에서 몇 대 목을, 혹은 로크가 스틸링폴리트 S tillingfl ee t에게 보낸 편지의 몇 구절을 더욱 충실하게 해석하는 데는 분명히 도움이 된다. 그렇지 만 로크의 책을 건성으로 읽은 볼테르라든지 로크의 이념을 혁명 의 초석으로 삼았던 미국의 국부들이 로크의 의도라고 추정했던 것들이 로크의 저작에서 유래했다고만은 보기 힘들다. 그들의 추 정에는 그들 자신의 정신이나 문제의식이 어쩌면 더욱 깊숙히 작 용했다고 할 수 있다 . 어떤 관념의 의미며 힘이며 영향력에 대한 정확한 역사지식의 중요성을 부정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의
중요성은 적어도 영어사용권의 비역사적 사상가들이 인정하는 것 보다는 훨씬 크다. 그러나 정확한 역사지식이 전부는 아니다. 이것 은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파스칼, 뉴턴, 흄, 칸트 등 누구에 게나 해당되는 사실이다. 만일 그들의 관념들과 기본 개념들에 저 마다의 독자적인 생명력이 없었다면, 그리하여(약간의 의미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전혀 이질적인 문화의 언어로 번역되 고 이식되어도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면, 그것들은 지금 쯤은 기껏해야 영예로운 안식처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 이를테면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했던 파도바 Padova 의 아리스토텔레스파 저 술들이나 18 세기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볼프 Ch ri s ti an Wol ff의 저술들에서 행간에 끼어 발견되든지, 혹은 역사박물관의 한 구석 에 처박힌 채 발견되는 것이 고작이리라. 물론 지난날 역사해석학 의 중요성을 너무 과소평가해 온 영국사상가들에게도 문제는 있 다. 이처럼 역사적 감수성을 결여한 탓에, 그들은 시계추가 한쪽으 로 이동하면 그것이 곧 운동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곤 했다. 혹자에게는 진부한 상투어로 들릴지도 모를 이러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지적하는 이유는, 우리가 지난날의 풍요로운 문화적 언어적 역사적 맥락에 깊히 몰두하지 않는다면, 과거의 관념들에 대해 가치 있는 검토가 가능하다는 생각도 점점 더 희박해질 것이 뻔하다는 우려 때문이다. 실제로 비코와 헤르더는 옛 관념들에 대 한 역사적 연구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사용된 실례들로 보아도 좋다. 누구를 막론하고 옛 철학자들의 중요성은 결국 똑같은 사실에 의존한다. 그들이 제기한 쟁점이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혹은 오늘날에 부활한) 주제라는 사실, 따라서 그것이 형 성되었던 사회가 소멸한다고 해서(이를테면 비코의 나폴리 사회 혹은 헤르더의 쾨니히스베르크 Koe nig sber g 내지 바이마르 We im ar 사회가 소
멸한다고 해서) 그것도 사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관념들이 이처럼 시대를 초월한 것들인가? 비코의 경우에는, 내게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는 테제들이 다음 일 곱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1) 인간본성은 오랫동안 가정되어 온 것과는 달리 정태적이지 않댜 그것은 변화할 가능성뿐만 아니라 변화한 경험도 가지고 있 다. 인간본성에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동일성을 유지하는 중핵이나 본질 따위는 없다. 사람들은 그들이 속한 세계를 이해하여 세계를 그들의 육체적 정신적 요구에 맞추고자 노력하는 바, 이러한 노력 은 세계와 그들 자신을 함께 지속적으로 변형시켜 간다. 2) 어떤 것의 단순한 관찰자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을 행하거나 창조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를 만든 것이(비록 이 만든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어쨌 든)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같은 이치에 서, 외부적인 자연세계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므로 단지 관찰되 고 해석될 수 있을 뿐이다 . 사람들이 그들의 경험과 활동을 이해 하듯이 자연세계를 이해할 수는 없다. 자연을 만드신 하느님만이 그것을 완벽하고도 철두철미하게 이해할 수 있다. 3) 따라서 우리가 관찰, 기술(記述), 분류, 반성할 수 있고 시공 간적 규칙성을 기록할 수 있는 외부세계에 대한 지식은, 우리 자 신이 창조하여 우리 스스로 피조물들에 부여한 규칙들에 복종하는 세계에 대한 지식과 원리상 다르다. 대표적인 예가 수학에 대한 지식이다. 수학이 인간의 발명품인 까닭에 우리는 수학에 대해 <내부적> 전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언어에 대한 지식도 그러 하댜 자연력 아닌 인간이 언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인간활동 전체가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활동에서 인간온
바로 창조자이자 행위자이자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월한 < 내부적 > 인식은 결국 역사학의 본성과 통한다. 역사학의 초점은 바로 인간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인간의 노력, 투쟁 , 목적, 동기, 희망, 공포, 태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외부세계에 대한 인식 의 패러다임이 이 같은 내부적 인식에 적용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점에서 자연지식을 모델로 삼는 데카르트주의자들은 오류를 범 한 셈이다. 비코는 이처럼 예리한 구분법에 기초하여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구획했다. 인문학이 자기이해를 추구한다면, 자연과학은 의부세계에 대한 관찰에 머문다. 양자는 목적과 방법에서뿐만 아 니라 인식가능성의 종류와 정도에서도 구별된다. 그의 이원론은 그후로 줄곧 뜨거운 쟁점이 되어왔다. 4) 특정한 사회 내의 모든 행동들을 특징짓는 포괄적인 패턴이 존재한다 즉 어떤 공통의 스타일이 사회 전체에 스며들어, 그 사 회의 사상, 예술, 사회제도, 언어, 생활방식, 행동양식 등 구석구석 에 반영된다. 이러한 착상은 문화의 개념에 해당한다. 더욱이 그것 은 특정한 문화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문화들에 대해서도 적용가능한 개념이다. 비코가 명시한 적은 없지만 , 그의 함축적인 문화 개념을 논리적으로 확장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들을 이끌어 낼 수 있다. 특정 사회나 주민에 고유한 문화가 밟아가는 단계들 의 연속성을 먼저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역사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연속 관계는 이해가능하지만 단순히 인과적이지는 않다 . 다시 말해, 한 문화의 역사적 발전에서 단계들 사이의 관계는 기계적 인과성에 의해 결정된다기보다는 인간의 합 목적적 활동에 의해 결정된다. 필요며 욕망이며 야망을 충족시키 기 위한(충족되어도 거듭 발생하는 필요와 목적올 지속적으로 충족시켜 가는) 인간의 합목적적 활동은 충분한 자의식을 소유한 사람들에
게만 이해가능하다 이 같은 합목적적 활동들의 단계적 연속이 이 루어지는 질서는 우연적이지도 기계적이지도 않다. 그 질서는, 오 직 인간의 목적지향적인 활동의 견지에서만 설명될 수 있는 삶의 요소들과 삶의 형식들로부터 흘러 나온다 . 사회적 과정의 이같은 연속과 질서는 타인들, 죽 후세의 사회성 원들에게도 이해될 수 있다. 그들도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합목적 적 사업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합목적적 견지에서 그들은 선조들의 삶을, 영적 물질적 발전 단계가 비슷하면 비슷한대로 다 르면 다른대로 인식해 간다. 물론 이런 식의 이해에는 시대착오의 위험이 내재한다. 그렇지만 어떤 문명과 생활방식에서의 -특정한 단계에 속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려내는 능력이 전제된다면, 시대착오는 역사를 이해하고 편년할 수 있는 가능성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댜 더욱이 이 같은 차별화의 능력은 다른 사회에 고유 한 전망과 신조에로 침투할 수 있는 능력 곧 상상력에 의존한다 一이러한 능력들은 인간 외부의 세계에 적용된다면 o}- !j!- 의미 도 낳을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가 시대착오를 벗어나기 위해 진 정으로 필요한 것은 발상의 전환이다. 한 사회나 문화나 시대에 고유한 특징은 나머지 문명들이나 시대들과 공유하는 요인들 및 요소들로 구성되지만 각각의 패턴은 나머지 다른 것들과 확연하게 구별될 수 있다는 새로운 관념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문맥 에서 시대착오란 바로 모든 문명이 복종하는 연속적 단계들의 필 연적인 질서에 대한 의식의 결여를 지칭한다. 문화며 역사의 변동 을 이런 뜻에서 그처럼 명석하게 생각한 사람이 비코보다 먼저 있 었을 것 같지는 않다. 5) 법, 제도, 종교, 제식, 예술작품, 언어, 노래, 행동규칙 둥 인간 의 모든 피조물은 작위의 산물이 아니다. 줄기기 위한, 찬양하기
위한, 지혜를 가르치기 위한 의도의 산물이 아니듯이 , 인간을 기만 하거나 지배하기 위해 혹은 사회의 안전이나 안정을 도모하기 위 해 고안된 교묘한 수단도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자기를 표현하는, 혹은 타인이나 신과 의사소통하는 자연스러운 형식들이다. 비코의 시대에 만연되었던 관점에 따르면, 신화와 우화, 고대의 제식과 유 물은 의지할 곳 없었던 원시인의 어리석은 환상이었든지, 아니면 교활하고 무도한 군주가 백성을 기만하여 복종시키기 위해 발명한 책략이었다. 비코는 이러한 견해의 근본적인 오류를 간파했다. 그 에 의하면, 고대 언어에 풍부한 의인법적 은유가 그러하듯이 신화 며 우화며 제식은 원시인들의 세계관, 즉 원시인들이 일관되게 세 계를 파악하고 해석했던 관점을 전해 주는 여러 방식들이다. 비코 는 이러한 입장에서 원시인들과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길을 모 색한댜 그들의 정신에 침투하여 그들의 의도를 발견하는 길이 그 것이며, 신화, 노래, 춤, 언어형식, 상투어, 결혼식, 장례식 등 그들 의 온갖 표현방식들에서 규칙과 의미를 체득하는 길이 그것이다. 그들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떻게 살아갔던지가 먼 저 이해되어야 한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갔던지롤 이해하기 위해 서는 그들의 언어며 예술이며 제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가 먼저 요구된다 . 비코의 『새로운 과학』은 바로 이 러한 열쇠를 제공하고자 했다. 6) 이로부터 새로운 유형의 미학이 등장한다. 이 미학에 따르면, 모든 곳의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원리와 기준에 의해 예술작품이 이해되거나 해석되거나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예술작품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그것이 탄생한 시공간과 사회발전단계에 서 특유하게 사용되었던 상징들의 목적 및 특수한 용법을 정확하 게 인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상징들 중에서도 특히 언어가 중요
하다 . 이러한 인식만이 우리와 전혀 다른 문화들의 신비를 풀 수 있는 길이댜 지금껏 야만적인 혼동으로 혹은 너무 동떨어지고 이 국적이어서 진지한 관심을 쏟을 필요가 없는 것으로 무시되어 온 문화들을 말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비교문화사를 위시한 일련의 새로운 역사학적 분과들, 이를테면 비교인류학, 비교사회 학, 비교법학, 언어학, 민족학, 종교, 문학, 예술사, 사상사, 제도사, 문명사 등의 출발점을 발견한다. 실제로, 오늘날 사회과학들로 불 리워지는 지식분야는 전적으로 역사학적 혹은 발생론적 관점에서 잉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7) 이로써 전통적인 지식범주에는 하나의 새로운 범주가 추가된 다. 감각지 각 sense p erce pti on 이 제 공하는 경 험 적 인 지 식 , 그리 고 계시에 의해 보증되는 선험적이고 연역적인 지식 외에도, 재구성 . 적 상상력 reconstr u cti ve im a gi na ti on 이라는 지식범주가 새롭게 등 장한댜 이 러 한 유형 의 지 식은, 상상력 fa n t as i a 을 통해 다른 문화 의 정신생활에로, 다른 문화의 전망들과 생활방식들에로 <침투> 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비코가 말하는 상상력은 사회가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이와 병행하는 상징의 변화나 발전에 연결함으로써 파악하는 능력이요, 인간의 표현수단인 상징 안에는 사회의 자취가 담기어 있다는 견지에서 사회의 발전을 추적하는 능력이다. 실로 상징구조는 그 자체가 인간이 상징화하는 현실의 일부요 현실과 함께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에 의한 발 견의 방법은 상징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하지만 그 목표는 상징 안에 깃들어 있는 현실전망에 도달하는 일이다. 칸트적 의미에서 말하자면, 이러한 발견의 방법은 역사적 진리에 대한 일종의 선험 적 연역이다. 그러나 비코의 연역법은 종래의 것과는 달리, 변화하 는 외양들로부터 출발하여 불변적인 실재에 도달하는 방법이 아니
댜 오히려 그것은 체계적으로 변화하는 표현양식을 통해 변화하 는 실재, 죽 인류의 역사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위의 일곱 가지 관념들은 하나하나가 사상사에서의 거대한 진전 이며, 어느 하나만으로도 철학자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기에 충분한 것들이다. 비코의 작업은 동향(同 鄕 )의 학자들 사이에서를 제외하 고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그의 사상을 전파하려는 쿠쟁 Vic t o r Cous i n 의 끈질기고도 헌신적인 노력을 통해, 미슐레의 주목 올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비코가 이 위대한 프랑스 역사가에게 미 친 영향은 직접적이었으며 개종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났다. 또한 비코의 명성은 미슐레를 통해서야 처음으로 유럽 전역에 울려 퍼 지기 시작했다. 미슐레는 말년에 자기의 스승은 비코밖에 없었노라고 술회했다. 그렇지만 독창적인 사상가들이 늘 그러하듯이, 그는 미리 그려진 자신의 역사관에 들어맞는 것만을 『새로운 과학』으로부터 이끌어 냈댜 특히 비코로부터 입맛에 맞는 인간상을 발견했다. 여기서의 인간은 모름지기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가는 존재이다. 인 간이란 도덕적 사회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프로메테우스적인 투 쟁에 참여하고, 자연으로부터 인간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단을 힘 써 발견해가며, 이 과정에서 온갖 사회적 장벽과 개인적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영속적인 투쟁을 벌여가면서 제도들을 창조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하며, 그리하여 결국은 모든 인간과 모든 사회의 윤리적 역량과 창조적 재능을 완전히 실현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미슐레의 열렬한 인민주의적 po p u li st 상상력에 어울리지 않는 측 면들은 변형되거나 무시되기 일쑤였다. 섭리의 개념은 그 대표적 인 실례이다. 비코는 개인이나 사회의 목적을 그들 몰래 달성해 가는 신의 섭리를 늘 염두에 두고 있었던 바, 이 같은 그의 섭리관
은 < 보이지 않는 손Hi dden Hand > 이나 < 역사의 간계 > 나 < 편재 적 이성 Immanent Reason > 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미슐레는 이것 을 반쯤은 세속적인 용어로 바꾸어 사용했으며 반쯤은 무시해 버 렸다. 비코의 플라톤주의적 요소들과 역사순환론도 비슷한 운명에 처했댜 특히 미슐레는 인민의 자유에 대한 자신의 열정적인 신념 과는 정반대되는 비코의 측면, 즉 반민주주의적 편견에서 경건하 고 권위주의적이고 준원시적인 사회를 동경한 측면에 관해서는 일 언반구도 남기지 않았다 . 미슐레의 사례는 늘 반복되곤 하는 한 가지 현상을 예시한다. 어떤 관념의 중요성과 영향력이란 그것을 형성한 < 체계>의 타당 성이나 가치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플라 톤이나 스피노자나 라이프니츠나 칸트 등의 체계에서 근본을 이루 고 있는 형이상학을 배척하거나 해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조차도 그 들의 천재성만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상가들이 개진한 관념들은 사상사를 영속적으로 변화시킬 정도로 깊이와 권 위를 두루 갖추었다는 것을 누구나가 인정하기 때문이다. (같은 말 을 반복하는 셈이 되겠지만) 실로 그들이 제기한 쟁점들이 거의 모든 사상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설령 그 쟁점들을 최초로 제기했던 사고체계들 중에서 야심 적이었고 널리 칭송되었던 몇몇 체계들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생 명력을 오래 전에 상실하여 이제는 기껏해야 역사적 홍미거리로 전락해 버렸다 할지라도, 이러한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 책에서 논의되고 있는 두 사상가의 경우에도 그렇다. 확실히 비코는 자신 이 새로운 과학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시말해, 그는 동시대에 승리를 구가하던 자연과학이 물질의 위치와 운동의 규칙 성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었듯이 , 그만큼 완벽한 일반 원리들이 인
류의 역사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믿었던 듯하다. 이 원리들로부터 규칙들을 구성하여 인류사에 올바르게 적용한다면, 적어도 이론적 으로는 역사의 순환적 단계들이 순서대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었 댜 지금의 나로서는 이 같은 비코의 입장을 그 이전이나 이후의 유사한 경쟁 체계들에 비추어 정당하게 바교, 평가하는 데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내가 시도한 것은, 이처럼 방만하고 혼란하며 때로는 환상마저 뒤섞인 바로크 풍 건물에서 몇 개의 주춧돌을 밝 히는 일이 전부이다. 이 주춧돌들은 비코가 사용했을 때보다는 작 아지겠지만, 더욱 든든한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한 토대로 사용될 수만 있다면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에 해당하는 비코의 새로운 착상들을 몇 가지 간추려 보기로 하자. 자연세계는 (인식은 가능하되 이해는 불가능한) 법칙을 따르는 반면에 인간이 만 든 세계는 (이해가능한) 규칙들에 귀속된다는 그의 구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신화며 상징이며 특히 언어가 수행하는 기능에 대한 그 의 이론도 마찬가지이다. 그런가하면 그는 중핵 스타일, 죽 어느 사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활동을 (결정하거나 균일화한 다기보다는) 특징짓고 표현해 주는 핵심적 양식을 착안했던 바, 이 러한 착상은 다시 인류 제 문화의 다양성에 관한 독특한 관념으로 발전해갔댜 끝으로, 미학이며 인류학에 대해서는 물론 역사관련 지식의 모든 영역-인간활동에 역사적으로 접근하는 모든 분 야-에 대해 비코가 제공한 근본적인 함축들도 주목할 만한 가 치를 지닌다. 헤르더에 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 헤르더 역시 동시대 의 모든 지식영역에 대해 총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그는 과학과 예술, 형이상학과 신학, 인식론과 윤리학, 사회학, 역사학, 인류학, 심리학 등 지식영역 전반을 섭렵하여,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비
코보다 훨 씬 힘주어) 미래에도 인간의 가장 깊은 관심사가 될 만한 모든 것들을 포괄하려고 했다.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영 Young , 퍼 시 Percy, 워 튼 형 제 the Wart on s, 스턴 Ste r ne 같은 영 국의 사상 가들이 그러했듯이 (또한 취리히의 라바터 Lava t er 가 그러했듯이), 헤 르더는 성직자이자 인문학자였으며, 전문화가 점증하는 동시대의 추세를 거슬러 보편성을 지향했다. 그는 시인이며 철학자요, 문예 학자이자 역사가요, 아마추어 언어문헌학자이며 미학의 이론가이 자 비평가요, 동시대에 크게 진척된 생물학과 물리학의 열성적인 학도였다 . 그가 염원했던 것은, 인간 자신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인간의 환경이며 기원이며 역사에 대한 모든 지식들을 하나의 통 합된 전체로 엮어 내는 일이었다 . 인간에 관한 지식들을 구획하는 경계선은 현학적이도 작위적인 허구에 불과했다. 철학자는 논리정 연한 범주들을 가지고 인간의 다양한 정신활동을 포괄하려고 헛되 이 시도해왔지만, 그러한 시도는 인간이 무한한 다양성과 영적 능 력 안에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넌더리나는 장애물이 되어 왔을 뿐이었다 그는 이렇듯 방대한 작업의 과정에서, 비록 이에 걸맞는 능력도 지식도 없었지만, 유럽인들의 사고와 감정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온 몇 가지 관념들을 창안했다고, 혹은 그것들에 생명 과 실체를 부여했다고 말할 수 있다. 헤르더가 창안했거나 새로운 생명력을 심어 준 개념들 중에서 적어도 세 가지가 주목할 만한데, 이 세 가지는 그가 착수한 이래 로 강도와 영향력 면에서 성장을 거듭해 왔다. 첫째, 헤르더는 인 간이 천부의 소질을 완벽하게 발휘하여 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으려면, 판명한 정체성을 지닌 ――우두 그 나름의 고 유한 전망이며 스타일이며 전통이며 역사적 기억이며 언어를 지닌 ―공동체 집단에 소속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로, 인간
의 영적 활동은 상품이나 인조물 같은 객체들의 창조에서 수행되 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의사소통 형식들 속에, 이를테면 예술과 문학, 종교와 철학, 법과 과학, 놀이와 일 속에 체현된다. 반면에 객체의 가치는 그것 자체에로 국한되며 그것을 창조한 사람의 개 성이나 목적과는 전혀 무관하다. 인간의 창조적 활동이 효용이나 쾌락이나 교육을 위한 객체들의 생산으로 혹은 외부적인 자연세계 에 대한 확장이나 수정으로 오인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생에 대한 개별적 전망들을 전해 주는 음성들로 받아들여져야 마땅하 다. 인간의 창조행위는 구성요소들을 낱낱히 분해하는 이성적 분 석에 의해서는 물론, 개념들에 입각한 철저한 분류에 의해서도, 일 반원리나 일반법칙에 의한 포괄에 의해서도 , 정합적인 논리체계에 의한 종합에 의해서도 이해될 수 없다. 이와 유사한 기술적 방법 들을 달리 동원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오로지 헤르더 가 <감정이입 E i nf ii hlen> 이라고 부른 능력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 능력은 재판관의 재능도, 종합이나 분석에 능한 사람들의 재능도 아니다. 역사적 통찰력과 역사적 상상력을 타고난 예술가들 만이 지닐 수 있는 재능이다. 헤르더의 스승인 하만J ohann Georg Hamann 은 <법정마다, 학교마다, 직업마다, 종파마다……각자에 게 고유한 언어가 있으니>, 이 각각의 언어는 <연인이나 친구나 친지의 열정>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 로 추상적 공식이며 일반이론이며 과학적 법칙만을 열쇠로 사용해 서 열릴 문은 하나도 없다. 감응력과 상상력이 뒷받침하는 감수성 울 키워 가는 동시에, 이러한 소양을 엄격하고 비판적인 역사연구 의 자세에 접목시키는 것만이 진정한 열쇠가 될 수 있다. 개인이 든 집단이든 문명 전체든, 모든 개체들의 내면적 생활에로, 세계관 에로, 열망이며 가치며 생활방식에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이것밖
에 없댜 마지막으로, 헤르더에게서 주목할 만한 세번째 관념을 검 토해 보자. 그에 의하면, 모든 문명은 저마다 고유한 전망을 지니 며 독특한 방식으로 사고하고 느끼며 행동한다. 이로부터 각 문명 에 고유한 집단적 이상이 창조되는 바, 바로 이 같은 이상의 덕택 으로 한 문명은 문명으로서의 자격을 얻는다. 따라서 어떤 문명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다론 문명 아닌 그 문명에 고유한 가치체계며 사고규칙이며 행동규범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프랑스의 < 계몽철학자들p h i loso p hes > 처럼 보편적이고 초개체적이 며 절대적인 척도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헤르더는 이 프랑스 철 학자들을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던 것 같다. 그 러기에 그들은 그토록 오만하고 분별없는 자세로 과거와 현재의 모든 사회들에게 일일이 점수를 매겼을 것이요, 각 개인이나 문명 이나 시대를 찬양하거나 비난해 가면서 어떤 것은 보편적 모델로 추켜 세우는 반면에 어떤 것은 야만적이다 사악하다 부조리하다는 이유에서 배척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과거를 자기만의 ― ~혹은 자기에게마저 낯선-시각에서 재판하거나 심지어 비웃기까지 한다면 심각한 왜곡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이 고 대 그리스인들의 기준에 의해 평가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볼테르 가 살던 파리라는 기준에 의해 혹은 볼테르가 가상한 중국관료제 라는 기준에 의해 평가되어서는 더욱 곤란하다. 옛 노르웨이인이 나 인도인이나 튜튼인을 아리스토텔레스나 브왈로데스프리오의 색안경을 통해 바라보아서도 곤란하다. 물론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헤르더의 비판은 그의 논적 볼테르의 비판을 닮은 면이 있다. 헤 르더 역시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언제 어디서나 공통적인 특징을 지닌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헤르더가 더 욱 중시한 것은 사람들 사이의 차이였다. 차이야말로 사람들을 지
금의 그들로 만들어 준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개인이든 특정한 문화든 모든 개체의 재능은 차이 속에 구현된다는 것이다. 절대적 보편적 가치에 대한 헤르더의 부정은, 나이가 들면서 점 차 모호해지기는 했지만, 그의 초기 저작들에서의 뚜렷한 특징이 다. 여기에는 인류의 다양한 문화들이 추구하는 목표와 가치는 저 마다 다를 뿐만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루기도 힘들다는 뜻이 함 축되어 있다. 이처럼 갈등에 가까운 다양성은 우연이 아니라 인간 의 필연적 조건이댜 그것은 지워 버릴 수 있는 속성이 아니라 인 간의 본질에 해당하는 속성일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불변적 이고 객관적인 단 한 권의 <교훈집>이라는 이상은 망상에 불과할 수 있댜 이를테면 (서양사상사의 주류가 가정하듯이) 모든 인류가 알 고 원하든 모르고 원하든, 단 하나의 단순하고 조화로운 이상적인 생활방식을 염원한다는 가정은 논리모순으로 귀결될지도 모른다 는 말이다. 실로 엄청나게 많은 전망들이 제 나름대로 타당하고 완강한 <무게중심>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삶과 사고와 느낌을 형 성해 간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같은 전망들의 종합은 당연히 불가능할 것이다. 천의무봉의 전체로 종합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 가능하리라. 이러한 통찰의 혁명적인 결과는 쉽게 추론될 수 있다. 그것은 안류 전체가 (아니면 이성적인 엘리트들만이라도) 윤리적 통일성을 가질 수 있다는 해묵은 관념을 파괴한 결정타였다. 그렇지만 헤르 더의 시대에 비추어 볼 때, 다양성이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본질 적인 가치롤 지닌다는 관념은 그 자체만으로도 신선한 충격이었 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헤르더 의에도 상당수가 있었겠지만,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의 새로운 성격이다. 여기서 다양성은 유일한 정답에 도달하는 데 실패한 대답, 오답이나 불완
전한 해답이 아니다 . 오히려 다양성은 획일성보다 선호할 만한 것 이댜 전통적인 믿음에 따르면, 우주가 이성적 질서인 덕택에 우주 내의 가치있는 모든 것들은 필연적 조화에 귀속된다 . 이 조화가 현상들 배후의 실재라고 믿는 사람도 있었고 그것이 이성과 신앙 에 의해 상정된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말이다. 헤 르더는 정확히 이러한 믿음을 거부했다. 그의 생각은 고대와 중세 로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근대를 향한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이제 비코와 헤르더로부터 운명적으로 출발한 관념들을 간추려 보기로 하자. 우리의 설명과 이해, 나아가 우리의 삶 전체는 우리 의 사회에 특유한 현재와 과거에 의존하여 수행되기 때문에, 어떤 반복적이고 통일적 패턴이 모든 설명과 모든 이해와 모든 생활에 적용될 수는 없다는 관념 , 양적 접근 대 질적 접근의 뚜렷한 대조, 기예는 일종의 의사소통으로서 행위와 존재가 일치하며 만든 자와 만들어진 것이 분리될 수 없는 형식이라는 생각, 변화와 다양성은 인간에게 본질적이라는 견해, 진리며 선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감각과 시공을 초월하여 천상에서 수정처럼 빛나는 보편적이고 불 변적인 단일 형상이 아니라, 복수적이며 변화하는 것이라는 관념, 똑같이 힘 있고 요긴한 주장들이며 목적들끼리의 충돌은 불가피하 며 이성적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선택 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가정 등등. 이 모든 관념들은 다양한 모 습을 띠면서 낭만주의에로, 상대주의에로, 민족주의에로, 인민주의 에로, 개인주의의 여러 갈래에로 발전해 갔다. 이에 상응하여, 그 것들은 오직 검증된 경험적 증거에만 의존하는 자연과학적, 수학 적 방법들에 대한 다양한 비판등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렇듯 훗날 발전한 모든 견해들을 비코와 헤르더 두 사람의 영향 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식의 판단은 오류일 뿐만 아니
라 불공평하댜 자기가 제시한 관념의 발전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그의 관념이 나쁜 방향으로 나아 갔 다고 해도 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 . 비코와 헤르더는 그들의 핵심 테제들을 과장하곤 했다. 그렇지 만 그들의 과장은 별난 것도 아니며 비난받아 마땅한 것 도 아니 댜 새롭고 중요한 진리를 발견한 (혹은 발견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세계를 자기 나름의 시각에서 바라보기 쉬운 탓이다. 독창적인 사 상가들이 새롭게 열린 길로 편향되지 않고 적당한 균형감각을 유 지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지적 절제가 요구되기 마련이다 . 사실상, 그들의 대다수가 지나친 과장을 범했다. (최근의 대가들은 논외로 하 더라도) 플라톤, 스토아학파, 데카르트, 스피노자, 흄, 칸트, 루소, 헤겔, 마르크스, 러셀, 프로이트 등, 너나할 것 없이 터무니없는 자 격을 요구하곤 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았더라면, 그 들의 착상은 · 기성 견해의 높은 벽을 분쇄할 수 없었을지도, 그것 이 받아 마땅한 관심을 얻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아리스토텔 레스나 로크 같은 인물들의 중용은 규칙이라기보다 예외에 가깝 다. 여하튼 비코의 관심은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그는 이전의 사상 가들이 제기한 문제들에 답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인간과 인간의 과거를 새롭게 전망하면서 (그가 고백했듯이) 흥분에 휩싸였 으며 흥분에 떨면서 새로운 범주들과 개념들을 착상했지만, 새로 운 발견의 기본구조를 동시대인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용 어들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탓에 그의 글은 사고의 갑작 스러운 비약과 용어의 뒤틀리고 애매한 사용으로 점철되었던 것이 다. 헤르더의 글도 명석한 반성이나 분명한 표현에는 어울리지 않 는, 광기에 가까운 정열로 작성되곤 했다. 양자 모두 이처럼 격렬 한 열정에 사로잡혀 생각하고 표현했던 탓에, 그들이 통렬히 비난
했던 사상가들의 방법에도 중요한 장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겨 를이 없었댜 바로 이 수준에서 우리는 신념과 방법의 근본적인 갈등을 발견한다. 이 같은 갈등의 분위기에 휩싸인 채, 비코와 해 르더는 신념의 편에서 지나칠 정도로 격렬하게 공격했고 그나마 너무 많은 것을 거부했다. 제 아무리 명민하고 예리한 통찰일지라 도 통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오늘날 없 댜 제 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상상력과 산만한 자료만으로는 모 든 문화들의 흐름을 재구성할 수 없다는 말이다. 결국에는 과거의 증거를 꼼꼼하게 검토하는 동시에 경험적으로 확인가능한 모든 자 료들을 체계적이고도 자기비판적으로 짜집기하는 작업이 요청되 기 마련이댜 오직 이러한 작업만이 하나의 가설을 확증하는 편에 서, 그밖의 다른 가설들을 배제하거나 약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역사학은 경험적 지식을 위해서는 자료에서든 방법에서든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얻어내야만 한다. 앞선 몇 세기에 걸 쳐 유물연구, 고고학, 금석학, 고문서학, 문헌언어학 등이 역사서술 의 혁신을 낳았던 것처럼, 금세기에는 계량적 방법들이 비슷한 역 할을 수행했댜 이를테면 경제학이며 사회학이며 심리학이며 인류 학 등에서의 일반적 법칙들을 뒷받침해 주는 통계적 정보의 축적 과 활용을 통해, 인류의 과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확장과 변모 를 거듭해 왔으며, 이러한 추세는 점점 더 가열차게 추진되고 있 다. 또한 화학과 생물학의 방법론들은 인류의 기원이며 유물들의 연대와 정체를 인식함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던 바, 그렇게 구명 된 지식은 오늘날까지도 지식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실로 자료와 방법은 똑같이 중요하다. 믿을 만한 증거 없이 과거를 복원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제아무리 놀라운 상상력에 의존한다 해도 억측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고작해야 재미있는 소설을 꾸며낼 수
있을 뿐이댜 동시에 , 다른 분과들로부터의 통찰을 빌리지 않는다 면, 축적된 자료는 죽은 것에 불과하다 . 비록 다른 분야들이 역사 학에 미치는 영향을 어느 정도로 제한해야 마땅한가에 대한 해답 은 아직 마련되지 못했지만 , 베이컨적인 귀납적 일반화만으로 충 분하지 못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요컨대 문학과 역사에서 근본적 인 전환은 두 가지 요소의 결합에 의해서만 가능했다고 볼 수 있 다. 하나는 유물연구자와 문헌편찬자의 노력에 대한 반동이며 (볼 테르는 그들을 최초로 조롱한 사람들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계몽주의 의 이데올로기적 도그마에 대한 반동이다. 비코가 미슐레 이후에도 여전히 신비한 인물로 남아 있었다면, 헤르더의 경우는 달랐다. 헤르더의 저작들은 인정되든 거부되든 ,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 광범위하고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 헤르더 이후로, 인류의 역사는 단선적인 전개가 아니라 판명하고 이질적인 문명들의 연속이라는 감각이 점차 증가했다. 바록 문명 들끼리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모든 문명은 각자에 고유한 내 적 통일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되었다. 저마다 개성 있는 사회적 총화로서의 각 문명은 그 자체의 견지에서 이해되어야지, 보다 완 전한 다른 생활방식을 향한 중간단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과 학의 기계적 법칙에 입각한 일반화 작업이 문화에 적용되어서는 곤란하다. 각 문화의 내용들을 조각내서 일반법칙을 구성하기 위 한 자료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한 문화의 구성요소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으려면, 그 요소들 간의 상호관계를 면밀히 검토해야만 한댜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한 사회의 문명이 며 생활방식이며 표현이, 하나의 독특한 패턴 혹은 중핵 스타일에 의해 특징지워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한 사 회의 중핵 스타일은 그 사회의 활동들에 구석구석 주입되어서 그
사회의 내적 긴장이며 차이며 갈등에도 불구하고 느낌과 목적상에 서의 개략적인 통일성을 드러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사 회적 개성을 형성하는 동시에 반영하는 중핵 스타일은 그것의 구 체적 표현들로부터 귀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그러기에 그것 은 부족한 사실들울 채우고 간극들을 메워서 우리의 경험적 지식 을 보다 완벽하게 만들어가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었다 . 반면에 그것은 연역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그것은 인류의 모든 속성과 역사룰 논리적으로 연역가능하게 해주는 어떤 형이상학적 본질을 정의하는 공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신에 의 해 파악되지만 경험적으로 인정가능한 패턴이었다. 중핵 스타일 자체가 인간관계들로 짜여진 그물이요, 인간이 서로에 대해서 그 리고 환경에 대해서 반응한 방식이요, 사고며 느낌이며 행동의 형 식 (혹은 구조)인 탓이다. 이러한 패턴 혹은 중핵 스타일은 오로지 상상력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었다. 여기서 상상력은 한 사회의 모든 활동을 총체적으로 통찰하여 그 구성원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느꼈던 방식에로 < 감정을 이입하는> 능력이요, 그들의 몸짓을 생 생하게 그려내고 그들의 음성을 들으며 변해 가는 분위기들과 태 도들울 추적하여 결국에는 그들의 운명에 동승할 줄 아는 능력이 었댜 비코와 헤르더는 __-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욱 생생하게-그 들의 과제가 이성적 방법들과는 다른 종류의 재능을 요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죽 사건이며 운동이며 상황에 관한 자료 상 의 괴리들과 해석 상의 차이들을 통합하여 그처럼 이질적인 요소 들을 하나의 정합적인 그림으로 종합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가설 들에 대한 정사나 정식화나 검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그들은 꿰뚫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옛 무덤 속의 시체에 생명을 불어 넣
을 수 있는 재능 , 즉 창조적 상상의 재능이 필요했다. 물론 충분한 경험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사회적 경험 전체에 대 한 이런 식의 이야기는 역사소설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 나 우리가 먼저 지난 세계들을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못한다면, 검 증해야 할 구체적인 대상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배우고 싶은 세계에 대해 직관적 전망이 선행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료 들은 무생명체에 불과할 것이다. 개인들에게는 겉모습만이 남을 것이다. 기껏해야 그들은, 옛날 옷을 차려 입은 오페라 주인공들의 화려한 극중 행렬에서처럼 정형화된 인물들로, 혹은 고전극에서처 럼 이상화된 인물들로 분장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성적 방법 예 의해서도, 인류의 과거든, 동물이나 고생인류나 지질구조의 과 거든, 모든 · 과거가 재구성될 수 있다. 이로부터 극단적인 결론들이 도출될 수 있다. 엄밀하지 않으면 애매한, 타당하지 않으면 부당 한, 정확하지 않으면 부정확한, 옳지 않으면 틀린 결론들말이다. 더욱이 이 같은 결론들은 관련분야의 명망 있는 전문가들이 수용 하는 방법에 의해 확증될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 깊이 있 다> 혹은 <표피적이다>, <설득력 있다 > 혹은 < 설득력 없다 > , <생동한다> 혹은 <생기 없다>, <실감난다 > 혹은 < 비현실적이 다>, <우회적이다> 혹은 <직설적이다 > 같은 술어들이 들어 설 여지가 없다. 이 술어들은 논리학이나 인식론이나 과학적 방법의 결론을 수식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다른 학술영역의 기능과 성 과를 특징짓는 데 더욱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는 술어들이다. 말 하자면 그것들은, 인간의 현실과 가능성에 대해, 인간의 내면생활 에 대해 통찰하고 감응하며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인간의 드러난 몸짓둘에 대해 겉모습뿐만 아니라 의미와 함축까지도 꿰뚫을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는 인문학적 영역에 어울리는 술어들이요, 역
사책들 전기물들, 비평서들과 주석서들, 몇몇 철학 분과의 작품들 처럼 이 영역에 고유한 성과들를 지칭하는 데 적합한 술어들이다. 그것들은 더 나아가 과거의 예술작품이며 건물이며 도시 등, 갖가 지 사회적 종교적 문학적 유물들을 보다 엄밀하게 재구성하려는 노력들에 대해서도 적절하게 응용될 수 있다. 실로 새로운 종류의 역사학은 두 가지 능력을 겸비할 것을 요구했다. 우선은 과거의 생활방식을 실제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그럴듯하게 상상적으로 재 구성하기 위한 심리적 재능이 요구되었다 .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상상적인 전망에 따라 사회와 문명을 구현하고 있는 상징 들을 마치 필적학자가 수고본을 읽듯이 해독해 가는 능력이다. 이 런 작업에서 구성된 이야기의 신빙성을 경험적 증거에 비추어 저 울질하는 지적 능력은 그 다음에야 요구되었다 . 뵈크 Boeckh 며 니 부르 N i ebuhr 며 티 에 리 Aug u sti n T hi e rry며 기 조며 랑케 며 , 특히 부 르크하르트와 딜타이 Dil th e y 등 새로운 역사학의 선조들은 바로 이 대목에서 르네상스나 계몽주의 시대의 작가들, 심지어는 최상 급 작가들과도 뚜렷하게 구별된다. 부르크하르트는 1859 년에 한 편지에서 <설령 절반쯤 잘못된 역사적 전망일지라도 전망이 전혀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라고 적었다 .1) 이것은 인간 정신의 실로 엄청난 확장이었다. 우리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비코와 헤르더 는 그 대문을 활짝 연 장본인이었다. 1) Pete r Gay, Sty le in Hi st o r y (Jo nath a n Cape , London, 1975), p. 179 로부터 인용.
차례
감사의귤 5 서문 7 제 1 부 일반 이론 제 1 장 비코의 지적 편력 39 제 2 장 인간이 만든 것의 진리성一―수학 54 제 3 장 인간이 만든 것의 진리성-역사 71 제 4 장 역사주의의 맹아 98 제 5 장 역사인식의 길--상징파 신화 106 제 6 장 역사인식의 길--유물 131 제 7 장 신의 시대 • 영웅의 시대 • 인간의 시대 138 제 8 장 영원한 원형적 역사 147 제 9 장 반주류의 역사관 153 제 10 장 역사와 섭리 163 제 11 장 제 민족의 자연법 183 제 12 장 비코의 선구적 업적들 189 제 13 장 비코의 독자들 194 제 14 장 평가 204 제 2 부 비코의 인식론과 그 원천 제 15 장 비코 인식론의 개요 --<진리> • <만들어진 것> • <확실성> 213 제 16 장 인식론적 함축과 긴장 225 제 17 장 인식론적 원천에 관한 쟁점들 241제 18 장 비코 인식론의 진정한 단서는? 258 제 19 장 비코 인식론의 법사학적 원천과 독창성 262
제 3 부 헤르더와 계몽주의 제 20 장 헤르더의 지적 배경 295 제 21 장 헤르더의 핵심 개념들 —인민주의, 표현주의, 다원주의 309 제 22 장 인민주의 315 제 23 장 표현주의 331 제 24 장 표현주의 • 민족주의 • 인민주의 359 제 25 장 18세기의 신화들 369 제 26 장 〈소속한다〉는 것 385 제 27 장 예술과 표현 394 제 28 장 다원주의 405 제 29 장 내적 긴장 418 제 30 장 결론 422 옮긴이 후기 . 425 찾아보기 . 443 지은이와 옮긴이 소개 • 481비코의 철학 < 저 사람의 기이한 운명이라니! 생전에 그토록 통찰력 있던 그가 무 덤 밖으로 나와 보니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구나.> Pie r re-Sim on Ballanche, Essai de Palin g e nesie Socia le , 1830. < 쓸모있는 역사가라면 단순히 사실을 기술하고 그 사실의 펑퍼짐한 원인들을 설명하는 데 머물지 말고, 사건의 근본 조건들을 포착하여 그 사건에 고유한 원인들을 밝혀 내야 마땅하다 . > Gia m batt ist a Vic o , De Anti qu is s im a lta l orum Sapi en ti a ex Lin g uae Or i- ginib u s Eruenda, Cap. 2(0 pe re, ed. Fausto Nic o lin i, I, L ate r za, Bari, 1914, p. 135.
제 1 부 일반 이론
제 1 장 비코의 지적 편력 유명인들의 생애가 낭만적 소설로 각색되기 십상이라지만, 비코 의 생애와 운명은 지나치게 극적으로 꾸며진 느낌이 든다. 자기 시대보다 너무 앞서 태어나 빈곤과 질병 속에 어렵게 살았고, 평 생토록 오해되고 무시되다가 죽은 뒤에는 (소수의 나폴리 법학자들 사이룰 제외하고는) 거의 완벽하게 잊혀져 버렸다는 한 독창적인 천 재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마침내 그가 재발 견되어 그를 배출한 경이로운 민족에 의해 그 민족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게 되었을 때에도, 그의 이야기는 잘못 전달되고 오해되기 일쑤였다. 오늘날까지도 그는 받아야 마 땅할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가 재발견된 시점이 너무 늦었 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후 한 세기가 지나도록 비코는 기껏해야 불과 몇 개의 독창적이고 가치 있는 관념을 만든 인물로 기억되었 던 반면에 그의 관념과 유사한 관념들이 다른 학자들 사이에서 더 욱 훌륭하게 발전했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된다. 비코의 바로크
적 문체가 난삽하고 모호함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명 석하지 못한 표현은 헛소리와 똑같다고 생각한 18 세기 학자들이 비코롤 무덤에 묻어 버렸다는 것, 그에게 헌신적이던 이탈리아의 주석가들조차 그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데 역부족이었다는 것도 사 실이댜 그러나 비코의 생각은 그의 동시대가 지적으로 매우 풍요 로운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홍미롭고 새로운 것으로 수용되고 있었댜 비록 반쯤은 매장되었고 잘못 해석되기도 했지만, 비코는 동시대의 매력적이고 독특한 관념들을 위한 원천이었다. 자기가 독창적이라는 비코의 주장은 어떠한 각도에서 검토되든 별 문제 없이 유지될 만하다. 인간정신의 본성과 발전에 관한, 문 화에 관한, 사회와 인간사에 관한 그의 이론들은 대담하면서도 심 오하다 . 그의 기발한 인식론은 다른 학자들의 수중에서 훌 륭한 결 실을 이룩했다. 그는 인간의 인식에 어떤 중심 유형 typ e 이 있음을 최초로 부각시켰던 인물인데, 이전의 사상가들은 이러한 측면을 오랫동안 오해하거나 무시했었다 . 그는 자연법과 법학, 미학, 수리 철학 둥의 영역에서도 과감한 혁신자였다. 실제로 수학적 추론에 대한 그의 생각은 너무도 혁명적인 것이어서, 20 세기의 논리학자 들이 일대 전기를 마련할 때까지는 거의 정당하게 평가받은 적이 없었댜 그것은 오늘날에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 다. 더욱이 비코는 사회적 지식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이 영역은 사회인류학뿐만 아니라, 문헌언어학phi lolo gy, 언어학li n guist i cs , 민속학, 법학, 문학, 신화학 등의 비교역사학적 연구들을 망라하며,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넓은 의미의 문명사를 구성한다. 끝으로 그는 순환적 역사관을 제시했다 . 물론 그의 역사관은 플라 톤, 아리스토텔레스, 폴리비우스 둥 고대의 순환적 역사관과도, 고 대를 추종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순환적 역사관과도 뚜렷하
게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 이후의 사상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 쳤댜 그러나 비코의 순환적 역사관은 그의 업적들 중 가장 유명 하지만 가장 별볼일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풍요롭지만 혼동적인, 정말로 맹아적인 한 사상가의 경 우에는 , 즉 이후의 더 유명한 사상가들이 더욱 명백하게 제시한 많은 관념들을 선구한 인물의 경우에는, 너무도 많은 것을 그의 뜻으로 해석하려는 유혹이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특히 주석자 자신 에게나 소중한 착상을 그로부터 감지하고, 맹아적 형식과 어렴풋한 윤곽을 그로부터 발견하려는 유혹이 있다 . 실제로 비코의 후예인 미슐레 딜타이, 크로체, 콜링우드 R. G. Coll ing w ood 등이 그런 시 도를 보여 주었다(헤르더 J. G . Herder 와 헤겔 G. W . F. He g el 이 그러 했 는지는 불분명하다). 특히 미슐레와 크로체는 의식적이든 무의식 적이든 자기들에게나 고유한 관념과 태도를 때때로 시대착오의 위 험까지 무릅써 가면서 비코의 저작들에게로 소급시켰다. 그들은 이 같은 소급을 통해 자기들이 비코에게 진 빚을 값고자 했을지 모른다. 또한 자기들보다 앞선 사상가에게로 자기들의 견해를 귀 인시킨다는 것은 진정한 존경의 표시일 수도 있다. 제각기 다른 정신의 소유자들이 각자의 그림자를 비코로부터 찾아낼 수 있다고 상상했다는 사실은 비코의 지적 심오함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 그러나 이 같은 비코 그림은 비싼 희생을 치루면서 그려진 것이었댜 무엇보다도 이 그림은 비코를 오히려 아무런 도 움도 되지 못하는 인물로 전락시켰다. 미슐레의 불 타오르는 상상 력이 구성한 낭만주의적 인문학자로서의 비코도, 크로체가 보다 그럴듯하게 헤겔에 가까운 형이상학자로 바꾸어 놓고 (크로체의 추 종자 젠틸레 Gio v ann i Gen til e 의 과감한 변형에서는 이런 모습이 약해지 기는 했지만) 예찬한 비코도, 파치 Enzo Paci 교수가 실존주의자들
의 원형이라고 규정한 비코도, 포이어바흐 Ludw ig Feuerbach 의 자 연주의 의 선구자라는 바달로니 Nic o la Badalon i 교수의 비 코도, 그 누가 그린 비코도 비코의 본 모습과 본 빛깔을 드러내 줄 수는 없 었댜 비코의 편집자들과 주석가들 중 가장 꼼꼼하고 학구적이고 헌신적인 니콜리니 Fausto N ic o lini의 방대한 작업은 비코 연구를 위해 이정표가 될 만한 경이로운 업적이기는 하지만, 그 이상이 될 수는 없다.” 위대한 사상가들을 이해하는 일이 늘 그렇듯이, 비 코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원전을 읽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 다. 비코의 원전을 읽는 것은 비록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노력한 만큼 보상이 뒤따른다. 이 보상 또한 독자 나름의 개인적 체험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최고급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사상가를 발견하는 것에 비견될 만한 지적 즐거움이 또다시 있겠는가? · 잠바티스타 비코 Gia m batt ist a Vic o (Gio v ann i Batt ist a V i co) 는 1668 년에 나폴리 서적상의 아들로 태어나 그곳 나폴리에서 1744 년 에 죽었다. 클리엔토 C li en t o 의 바톨라 Va t olla 근교에서 바톨라의 후작 로카 Domeni co Rocca 의 두 아들을 가르치 기 위 해 가정 교사로 지낸 몇 년 동안을 제의하고는, 그는 고향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 는 평생토록 나폴리 대학의 법학 교수직을 원했지만, <수사학> 관련 분야에서 여러 지위를 맴돈 것이 고작이었다. 그는 법학 교 * 이 책에서 각주는 1), 2), 3) ……으로, 옮긴이 주는 CD, ®, ®…… 으로 표시 하며 간단한 옮긴이 주는 ( ' 옮긴이)로 한다 .
1) 코르자노 A. Corsano 와 로시 Paolo Ross i를 필두로 하는 니 콜리 니 이 후의 이탈리아 학자들, 아우어바흐 Eri ch Auerbach 나 뢰비트 Karl Low it h 와 같은 저명한 독일 비평가들, 걸출한 피쉬 Max Harold Fis c h 교수 이래 영어 사 용세계의 비코 연구자들은, 비록 그들의 해석이 제 각각이기는 하지만, 비코 룰 그들 자신에 고유한 사상의 수단으로 변형시키 려는 이 전의 경향으로부터 상당히 벗어난 편이다.
수직 보다 열등한 수사학 교수직 에 1699 년부터 1741 년까지 봉직 했 댜 수사학 교수직이 그에게 제공한 것은 변변치 않은 봉급과 10 여 차례의 학기개시 강의들i nau g ural lec t ures 이 전부였지만, 이 강 의들 중에는 독창적안 관념이 번득이는 것들도 있다. 그는 주요 인사들의 라틴어 비문이나 송덕문이나 전기를 작성해 달라는 부자 들과 고관들의 청탁을 받아들여 적은 수입을 늘리곤 했다. 이 같 은 작품들 가운데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봉사한 나폴리 출 신 용병대장 카라파 An t o ni o Cara ffa의 전기가 유명하다 . 마키아 Macc hi a 가 주도했으나 미수에 그친나폴리 왕국 내란음모 사건에 관한 보고서도 제법 알려진 편이다 . 비코는 카라파의 각종 전투를 기술하는 과정에서 국제관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계 기가 되어 그는 그로티우스를 비롯한 여러 법철학자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법철학 연구는 그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마키나의 이야기는 17 - 18 세기 전환기에 나폴리에서 에스파냐의 통 치를 오스트리아의 정권에 의해 대체하려 한 음모와 관련된 것이 었다. 이 계획이 사전에 들통나서 주모자들은 1701 년에 에스파냐 지배자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 1702 년에 그 음모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비코는 가담자들을 범죄자요 매국노라고 비난했다. 5 년 뒤에는 오스트리아인들이 나폴리를 점령했고 그들의 통치는 27 년 동안 지속되었다 . 비코는 1708 년에 다시 < 추모서>를 출판했는 데, 이번에는 그의 먼저 번 보고서 (1702) 를 무시하고 두 명의 음모 주동자를 애국자요 순교자라고 칭송했다. 1734 년에 나폴리는 재차 에스파냐에 의해 점령되었다. 새로운 군주 부르봉의 카를로스는 나폴리 대학이 선발한 대표단의 앞 머리에 있던 비코로부터 극진 한 축하 인사를 받았다. 다음 해에 카를로스는 그 보답에서인지 비코롤 왕실역사가로 임명했다. 정치적 용기의 결핍이 비코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라이프니츠를 비롯한 동시대의 많은 훌륭 한 인문학자들과 철학자들도 비코와 비슷했다. 정치적 쟁점들도 그 시대 이전이나 이후만큼 분명하지는 않았고 심각하게 고려된 적도 없었던 것 같댜
비코는 1692 년에 인간적 기대의 허망함과 절망에 관한 시( 詩 )를 전통적인 장르로 작성했다. 이 시에 대한 오늘날의 관심은 전기적 인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다. 하지만 「절망을 사랑하기 Af fet t i d'un Di s pe ra t o 」라는 시는 비코가 훗날 떨쳐 내고자 부심한 루크레티우 스적_에피쿠로스적인 정서를 보여 준다. 정통 기독교신앙의 흔적 은 별로 없댜 따라서 이 시는 17 세기의 마지막 10 년 동안 비코와 그의 <자유사상가li be rti ne> 친구들이 무슨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 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다 . 비코와 자유사 상가들의 관계는 비코 자신이 『자서전』에서 진술한 것보다 훨씬 밀접했던 듯하댜 독창적 관념을 담은 첫 작품이 출판된 것은 1709 년이었다. 라틴어로 수행된, 그리고 정기적인 것으로는 마지막인 학기개시 강의를 기초로 하여 집필된 이 작품도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연구방법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이 작품은 향후 비코의 작업을 위해 중요한 윤곽을 이루고 있다? 한 해 뒤에는 라틴어 저작 『이탈리아인들의 태고적 지혜에 관하여』가 뒤따랐다. 이것은 보다 크게 주목받은 작품이었다? 위
2) 『우리 시대의 연구 방법에 관하여 De nostr i tem p o ris stu d io r um ra ti one 』 는 1708 년에 수행된 강의록이며 다음 해에 나폴리에서 모스카 Mosca 에 의 해 출판되 었다. 잔투르코 Eli o G i an tu rco 에 의 한 영 역 본 On the Stu d y Meth o ds of Our Tim e(The Lib r ar y of Lib e ral Arts, Bobbs-Merr ill; New York, 1965) 에는 훌륭한 서문이 포함되어 있다 .
3) 라틴어 원제목은 De Anti qu is s im a Ita lo rum Sapi en ti a ex Lin g u ae Orig i- nib u s Eruenda, 죽 『라틴어의 어원들로부터 되찾을 수 있는 이탈리아인들
의 태고적 지혜에 관하여 』 이다(L. M. Palmer 에 의한 영역본 On the Most Anc ien t Wi sd om of the Ita li an s(Comell Un ive rsit y Press, Ith a ca and London, 1988) 역시 훌륭한 서문을 담고 있으며 , 그외에도 이 책과 관련하 여 Gio m ale de' lett er ati d'J tali a 에 실린 비코와 동시대인들의 논쟁들 (1711-1712) 을 번역 수록하고 있다, 옮긴이).
의 두 작품에서 하나는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제언의 형식을, 다 론 하나는 환상적으로 인식되던 고대 이탈리아인들의 사고전통에 대한 언어학적 • 법적 탐구의 형식을 취한 것이었지만, 양자는 모 두 대담한 역사철학적 가설들을 진척시키고 있었다. 9 년 뒤인 1719 년에 그는 보편법에 관한 강의록을 역시 라틴어로 출판했다. 그는 다음 두 해 동안 이것을 확장하여 『보편법의 단일한 원리와 그것 의 단일한 목적에 관하여』를 출판했다 ? 이 저서의 후반부는 법학 의 특수한 주제들을 다루었는데, 이것은 그가 오랫동안 갈망하던 나폴리 대학의 법학 정교수직에 도전하기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그 러나 그 자리의 임자는 이미 오래 전에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임명될 수는 없었다. 비통한 심정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 실패를 섭리의 변장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 이 실패야말로 자기가 오랫동안 사로 잡혀온 새로운 철학적 관념들에 자유롭게 천착할 기 회를 제공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4 년 뒤인 1724 년에 그는 당시 가 장 추앙받던 사상가들을 일일히 논박한 대작을 완성했다. 여기에는 그로티 우스 Hug o Groti us (H uigh de Groot: 1583-1 646) 나 셀던 Joh n Selden(1584-1654) 이 나 푸펜도르프 Samuel Pufe n dorf (1 632-1694) 같 은 법 학자들, 홉즈 Thomas Hobbes(1588-1679) 나 스피 노자 Baruch S pi noza(1632-1677) 나 로크 Joh n Locke (1 632-1704) 나 베 일 Pier re Bay le 0647-1706) 같은 철 학자들 카조봉 Issac Casaubon(1559-1614)
4) De Univ e rsi Ju ris Uno Pr inc i pio et Fin e Uno, 1720-1722( 이탈리아어로 는 간단히 『보편 법 II Di ritto Un i versale 』 이 라 불리 워 침 ).
이나 소메즈 Claude de Saumais e (Claud ius Salmasiu s : 1588-1653) 나 보스 Gerhard Jan Voss(Vossiu s : 1577-1649) 같은 인문학자들에 대 한 논박이 포함된다. 이 대작은 출판지원금을 약속한 후원자 추기 경 코르시니 Cors ini에게 헌정되었다(코르시니는 홋날 교황 클레멘트 12 세로 부임한다). 그러나 코르시니는 지원을 거절했다 . 절망에 빠 진 비코는 그의 유일하게 값 나가는 재산인 반지를 팔았지만, 이 것으로는 출판 비용의 1/4 정도를 충당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러 한 이유 때문에, 비코는 작품의 <부정적>인 부분을 모두 삭제하 고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주장만을 남겼다. 자연법이론 • 계약론 • 신스토아주의·신에피쿠로스주의·아리스토텔레스주의·데카르트 주의 등 당시에 가장 영향력 있던 학풍들을 낱낱히 비판한 부분이 삭제되었다. 삭제된 부분은 유실되어 없다. 이런 과정을 거쳐 원래 크기의 1/4 로 축소된 이 작품은 다음 해에 출판되었다. 이것이 바 코의 대표작 『새로운 과학』이다. 이 책의 초판은 1725 년에 출판되 었고, 거의 새로 재구성된 수정판(제 2 판)은 1730 년에 출판되었으며, 제 3 판은 제 2 판을 증보하여 그가 죽은 해인 1744 년에 중쇄되었다. 『새로운 과학』의 초판과 같은 해에, 비코는 자기의 지적 편력을 진술한 이야기를 작성했다 . 이것은 베네치아의 부유한 학예후원자 백작 디 포르치아 G i an Artico di Porda 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학자들에게 그들의 지적 발전에서 중요한 단계를 스스로 기록해 두도록 요청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디 포르치아 백작에게 심어 준 인물은 백작의 친구인 주교 콘티 Abbe Con ti로 추정된다. 인문 학자로서도 유명한 콘티는 독일의 여러 학자들 및 지식인들과 친 구로서 서신을 왕래했는데, 이들 중에 위대한 철학자 라이프니츠 가 포함되어 있었다. 라이프니츠는 언젠가 자기의 친구이자 콘티 주교의 친구이기도한 부르게 Lou is Bourg ue t에게, 위대한 업적을
남긴 학자들이 위대한 발견에 도달한 과정을 기록해 두지 않는 당 시의 관행에 대해 유감을 표현한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 어쨌든 디 포르치아는 이탈리아의 여러 학자들과 사상가들에게 각자의 정 신적 발전에 관한 이야기를 각기 한 권씩의 선집으로 출판할 수 있도록 자서전을 작성해 달라고 요청했다 . 지적 자서전이라는 장 르가 탄생한 것은 이처럼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편집자들은 비코의 원고에 대만족을 표시했다. 비코의 원고는 그들이 정립하 려고 한 장르의 완벽한 모델이 될 수 있으리만치 훌륭했기 때문이 댜 실제로 그들은 , 비코로서는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었지만, 비코 의 원고를 다른 기고자들에게 모델로 배포했다. 쉴새없이 바꾸며 고 치 는 사람답게 비코는 훗날 그 원고를 상당량 증보했다. 『 자서전 』 은 온갖 철학적 쟁점들에 몰두하던 한 인물의 생애가 생생하고도 홍미진진하게 기록된 작품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누구 도 밟지 않은 처녀지를 답사한 고독한 여행자라는 비코의 진술은, 비록 진부하기 그지없는 고전적 상투어를 반복한 것이었지만, 이 번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비코는 자기가 전대미문의 발견에 도달했음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발견한 것의 중요성도 자 각하고 있었댜 그의 지적 탐구는 가혹하리만치 열성적이었고, 학 계 내의 열등한 위치에 대한 근심이나 굴욕감으로부터 벗어나서 초연하게 수행되었다. 이러한 자세는 성속( 聖 俗)의 후원자에게 봉 사하는 가신에 가까운 그의 볼품없는 위상을 얼마간 보상해 줄 수 있었댜 그는 찢어지게 가난했고 자기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 다 . 그는 어릴 때 낙상하여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았다. 그의 맏아 들은 범죄자였고 외동딸은 배냇병신이었다. 그래서 비코는 막내아 들에게 유별난 애정을 보였고 그를 자기의 후임자로 앉히고자 노 력하기도 했댜 막내아들을 빼면 그는 서재를 가장 사랑했다. 마키
아벨리가 그러했듯이, 비코는 불행으로부터 도피하여 책의 세계에 탐닉 했댜 그로서 는 플라톤, 바로 Marcus Terenti us Varro(B C 116- 27), 무키 우스 Quint u s Muciu s Scaevo!a(B C 140- 82 ), 루크레 티 우스 Ti tus Lucreti us Carus(B C 97- 5 5), 타키 투스 Publiu s Corneliu s Ta- cit us (55-116), 울피 아누스 Dom itius Ulpi an us(l70- 22 8) 같은 고대 저 자들의 세계가 자기의 동시대보다 현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였다 . 동시대인들 가운데는 그가 존경한 베이컨과 그가 맞서 싸운 데카 르트 정도가 예의였을 뿐이다. 학자의 소중한 특권이라 할수 있는 평정과 여유가 비코에게는 평생토록 주어지지 않았다 . 그는 소심 하고 눈치빠르게 아첨하며 가난과 근심에 찌들린 학자였다. 그는 <그의 친구들의 잡담 사이에서, 그리고 그의 아이들의 울음과 소 란 속에서> 너무도 많이, 그나마 급하게 저술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중요한 발견을 이룩했다는 것, 자기만이 주인이 될 수 있 는 세계를 향해 문을 열었다는 것을 알았다 . 『자서전 』 이 전해 주 듯이, 이러한 자부심은 비코를 행복하고 평온하게 해주었다 . 51
5) 행복했다는 그의 진술은 그가 그러하기를 희망했거나 그러하다고 믿었던 것만큼은 진실이 아니었다 . 그는 말년에 나폴리에서 좀처럼 얻지 못했던 인 정을 받기 위해 분투했다 . 이와 관련하여 한 학술잡지의 편집자에게 보낸 그의 편지는 퍽 시사적이다. 이 편집자는 프랑스의 신교도 인문학자 르클레 르 Jea n Leclerc 였다. 비코는 자기에게 찬사의 편지를 보낸 바 있는 르클레 르크에게 그의 출판에 호의적인 평가를 부탁하고 있다. 그는 르클레르의 호 의적인 한마디가 그의 이름을 유럽 전역에 떨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확 신하고 있다 (F. Nic o li ni, 'Due Lett er e ine d ite di G. B. Vic o a Gio v ann i Leclerc', Revue de Lit ter atu re Comp are e, vol. IX, 1929, p. 737) (이 서 한은 폴 아자르, 『유럽의식의 위기 II 』 , 조한경 옮김(민음사, 1992), 96 쪽에서 인용 되었다, 옮긴이).
비코의 한 수강생은 그롤 <손에 회초리를 돌고 한 쪽 눈을 껌 벅거리는 깡마른> 사람으로 묘사했다. 열정적인 수사로 충만한 그
의 강의는 학생들을 사로잡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당시의 이탈리 아 학자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 위대한 왕실역사가 무라토리 Ludovic o Anto n io Mura t o ri (1672-1750) 는 비코를 < 아소르디티의 아 카데미 Academ ia
학이나 수학적인 자연과학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비코의 지구 물리학적 • 의학적 발견에 환호한 학자들, 이를테면 비코의 세기에 코코 V i ncenzo Cuoco 나 금세기에 니콜리니 같은 학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비코는 동시대의 과학혁명으로부터 동떨어진 인물 이었다. 비코의 물리학은 제논의 물리학이었다. 그나마 그가 충분 히 이해하지 못한 라이프니츠를 통해서 배운 제논의 물리학이었 다. 그는 갈릴레오의 업적에 관해서도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갈 릴레오의 새로운 과학이 실생활에서 갖는 효능을 파악하지도 못했 다. 다만 비코는 지식 전체가 수학이나 물리학이라는 모델에 의해 환원되는 추세에 대해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적대감을 키워간 반면에, 법학이나 고전학이나 사회심리학의 문제에 대해서는 점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비코는 자신이 인문학의 중 심이라 여긴 분야, 곧 역사학의 방법과 권위를 기존의 철학이 바 르게 평가해 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시간이 갈수록 깊히 확신하게 되었댜 그는 역사연구를 가장 폭 넓고 가장 철학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었다. 그에게 역사연구는 과거에 인간이 진정으로 인 간적인 사회를 구성했던 방식, 보다 특수하게는 과거에 인간이 생 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며 살아갔던 방식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러 한 관점을 형성해 준 것은, 초시간적 분석이 아닌 발생론적 • 역사 학적 접근만이 인간경험과 활동의 다양한 측면들 간의 관계를 발 견하고 기술할 수 있다는 비코의 점증하는 확신이었다. 이 같은 관계를 다루기 위한 방법과 진리규준을 제공할 수 없다면, 철학은 더 이상 인간적 지식의 영역에서 권위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이 비 코의 생각이었다. 데카르트에 대한 비코의 반란은 명석판명한 관념이라는 데카르 트의 진리규준이 수학과 자연과학 분야 이외에는 적용될 수 없다
는 확신에서 출발했다 이러한 확신은 1708-1709 년에 명시되었다. 데카르트파에 따르면 참된 지식의 패러다임은, 너무도 명석하고 판명하기 때문에 논리모순에 빠지지 않는 한 결코 반박될 수 없는 진리들로부터 출발하여, 엄밀한 연역규칙에 의해 결론으로 나아가 는 것이었댜 결론의 진리를 보증해 주는 것은 연역과 논리전환에 서 빈틈없는 규칙들이었댜 수학에서 그러하듯이, 결론은 그것의 반박불가능하며 영원히 참된 가정으로부터 일련의 규칙들에 의해 연역될 수 있었다. 이러한 모델이 오늘날 우리가 인문학이라 부르 는 영역에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은, 데카르트 자신에게 그러했듯이 비코에게도 명백한 일이었다. 엄밀한 정의, 엄격한 증명, 최소의 원자적 구성요소들에 이르도록 분해가능한 개념, 증명된 공리, 냉 정한 논리에 의해 반박불가능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 명석하며 자 명한 가정 -이런 것들이 역사학이나 고전학이나 문학의 어느 구석에서 발견될 수 있단 말인가? 이 같은 선험적 • 연역적 체계를 한 편의 이야기에, 예술품이나 역사물이나 법조문에 대한 비판적 분석에, 혹은 한 사회나 한 개인의 윤리적 • 지적 발전에 대한 해 설에 적용하는 것은, 아무런 결실도 기약할 수 없다. 이 점을 이미 완벽하게 간파한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통명스러운 견해를 제시 했다. 역사란 여행처럼 여홍거리로는 별로 해롤 미치지 않겠지만, 한 번 정립되면 다시 증명될 필요가 없는, 그리하여 이성주의자들 이 말하듯 과학적 진보를 가능케 하는 지식의 분과로 정립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기념할 만한 행동은……정신을 살 찌우고> 어쩌면 <판단력의 형성>에도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 외에는 별로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제는 우리의 비이성적인 선조들을 당혹케 했던 문제들에 대해서 이성으로부터 해답을 구할 수 있을 터인데, 우리가 어째서 과거의 잡동사니 이야기들로 뒤범
벅된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칠 혹 처럼 어두운 원시시대의 격정과 범죄를 연구해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다는 말 인가? 가치있는 지식은 오직 과학의 방법에 의해서만 정립될 수 있었다. 데카르트와 데카르트파는 감각지각, 풍문 , 신화, 우화, 여 행담, 소설, 시, 느슨한 사색 등등이 잡탕처럼 뒤섞인 비과학적 자 료들의 덩어리를 과학적 방법과 예리하게 구분했다. 그들이 믿기 에, 이 덩어리는 역사학이나 삶의 지혜를 위해서는 유용할지 몰라 도 과학적 • 수학적으로 처리될 수 있는 대상은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데카르트는 역사학과 인문학을 잡다한 정보의 수준으로 격하시키고 있었댜 역사학과 인문학에 한두 시간쯤을 할애하는 것은 무방하겠지만, 그것들은 신중한 사람이 필생의 연구와 사색 의 대상으로 삼을 만한 영역은 아니었다 . 6 1
6) 인문학에 대한 데카르트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언급들에서 엿 볼 수 있다. <현존하는 최소국( 最 小 國 )인 저지(低地) 브리타니의 역사 를 알기 위해 저 지 브리타니어 Low-Bre t on 가 별로 필요없듯이, 로마 제국의 역사 룰 알기 위해 라틴어나 그리스어가 그다지 크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 (La Re- cherche de (a Verite : Oeuvres, ed. Adam et Tannery , X, p. 503). 더 욱 잘 알려진 구절은 『 방법 서설 』 에서 여행의 부질없음과 역사가의 과장에 관한 언급이다. r 영혼의 격정』에 관한 논문의 서두에서 고전학에 대한 경멸적인 언급도 덧붙일 수 있다 . 비코의 논박은 거의 전적으로 『 방법 서설 』, 특히 모 든 지식을 그것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 책의 근거 없는-비코가 보기에 ―주장을 향한 것이었다.
비코는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법학사나 고전학에 대 한 그의 열정은 차치하고, 가톨릭 신앙만 가지고도 이 같은 실증 주의적 접근을 반대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렇지만 비코가 데카르트 에 대항해서 사용한 논증법은 신학적인 것도 수사학적이거나 주관 적인 것도 아니었다. 시대와 환경을 불문하고 운만 좋 으면 누구나 순간적인 직관의 섬광에 의해 파악할 수 있는, 보편적으로 이해가
능한 상징들로 포장된, 뿐만 아니라 완전해서 수정할 필요가 없는, 초시간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비코가 보기에 (신적 계시의 진리를 제외하고는) 망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비코는 이 같은 < 이성 주의의 독단 > 에 대항해서, 참된 지식의 타당성은 수학이나 논리학 의 경우에조차도 그것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이해함으로써만, 죽 그것의 발생론적 혹은 역사적 발전을 이해함으로써만 입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데카르트파의 한복 판에 뛰어들었다. 그는 데카르트파가 가장 강력하고 가장 완벽하 다고 믿은 급소를 찔렀던 것이다.
제 2 장 인간이 만든 것의 진리성 ―수학 데카르트의 새로운 진리규준에 따르면, 참이라고 주장될 수 있 는 판단은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들>, 죽 더 이상 분해될 수 없 는 <단순한> 근본요소들로 구성되어야만 한다. 인간의 사고에서 이 근본적이고 원자적인 실체들은 <필연적인> 논리관계에 의해 서로 연결되기 때문에, 그것들의 논리적 연관성을 논박하여 그것 들을 서로 떼어 놓으려는 시도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각 원 자는 같은 체계 내의 다른 원자들에만 논리적으로 구속될 뿐, 상 호 관련된 원자들의 다른 체계로부터는 판명하게 구분되는 외딴 섬과도 같다. 더욱이 데카르트의 이론은, 그 같은 체계들의 구조와 그 체계들에 의한 (혹은 그것들 안에서의) 운동의 구조가 명석하게 기술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논리학이나 수학에 의해 그 같은 구조가 기술 가능하다는 것이다 . 이런 식으로 기술될 수 없 는 영역은 기만적인 것으로 자동 규정된다. 시각 • 청각 • 후각 • 미 각에 의해 지각되는 애매하고 주마등처럼 수시로 변하는 불안정한
감각 자료들도 거만적이지만, 이것들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다른 영역도 비슷하게 기만적이다 . 이를테면 < 내면적 > 심리상태 , 육체 적 감각, 감정상태, 꿈, 이미지, 기억, 엄밀하지 않은 사고, 염원, 목 표 등의 영역이 그러하다. 이 같은 견지에서 보면 사료들도 기만 적임이 분명하댜 사료들이란 아무리 사실적 증거가 풍부한 영역 에로 범위를 좁혀 꼼꼼하게 검토한다 하더라도, 엄밀한 양적 견지 에서 정식화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 자연과학이 입증하듯이, 참된 지 적 진보는 자료들이 명석하고 판명한 , 즉 수학적으로 표현가능 한 개념과 판단에 의해 연구될 수 있도록 자료들을 환원시킬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 따라서 로마공화정 몰락기의 사건들 을 재구성하려는 유물연구가와 역사가의 헌신적인 노력은 (데카르 트가 경 멸 적 으로 언급했 듯 이) 우리에게 기껏해야 키케로의 하녀가 가 졌 음직한 정도의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정도의 작업 에 과학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부여할 수 있겠는가? 수학적 지식 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모든 지식의 패러다임이라는 것 . 수학적 지식은 인간의 노력이 지금까지 발견한 명제들 중 가장 명석하고 가장 확실한 명제들의 축적이라는 것. 수학적 지식은 인간이 추구 해 온 무오( 無誤 )의 지식에 가장 근접한 지식이라는 것. 이러한 사 실들을 무식장이나 고집장이가 아니라면 누가 감히 부정하겠는가? 비코는 처음에는 이러한 테제에 대해 공감하고 수용하는 자세를 취했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대담하게 공격했다. 그의 공격은 다음 의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엄밀과학의 찬란한 광휘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이나 타자의 경험, 죽 우리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참 여자로서 특히 저자로서 수행하는 경험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것 은, 우리가 외부로부터만 관찰가능한 자연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많다는 확신이 그것이었다. 바코는 외부세계를 인간에
의해 이해될 수 없는 영역으로 규 정했 다. 반면에 인간 자신의 사 고며 감정이며 목적이며 의지 같은 요소들은 이해가능한 영역이었 다. 이러한 입장은 1700 년 그의 일곱번째 학기개시 강의에서 개진되었 다. 여기서 그는 < 외부적 > 지식과 < 내부적 > 지식을 구분했는데, 이 것은 19 세기에 공고화된 < 자연과학 Na turwi ssenscha ft > 과 < 정신과 학 Ge i s t es wi ssenscha ft > 의 구획을 예비한 것이 었다 . 그의 구분은 이 후로 한 번도 멈춘 적 없는 기나긴 논쟁의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
비코는 수학적 지식이 전적으로 타당하고 수학적 명제들이 확실 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비코는 < 우리가 기하학을 증명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 라고 주장한다 .I ) 그는 16 년 뒤에도 비슷하게 , 기하학자는 < 기하학의 요소들에 의해 양의 세계 를 구성하거나 명상함으로써 스스로 그 세계를 창조한다 > 고 말한 다 .2 ) 이것은 그의 보다 광범위한 원리 , 죽 < 원인에 의한pe r cau- ssas> 지식만이 참된 지식일 수 있다는 원리의 특수한 응용이다. 이 원리에 따르면 어떤 것에 대한 참된 인식이란 , 그것이 무엇이며 어 떤 속성들을 가지고 있는가를 인식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왜 현재의 그것인가, 어떻게 현재의 그것이 되었는가, 어떻게 그것이 현재의 그것으로 만들어졌는가를 인식하는 일이기도 하다. <원인에 의한> 지식이 다른 어떠한 지식보다도 우월하다는 견 해는 스콜라 철학에서도 자주 엿볼 수 있는 해묵은 관념이다 . 이 를테면 하느님은 그만이 아는 방식과 이유에 의해 세계를 만들었
1) De nostr i Temp o ri s Stu d io r wn Rati on e, Secti on IV( 영역본 p. 23, 옮긴 이).
2) 『 새로운 과학 』 에 대한 참조는 이견이 없는 한 버긴 교수와 피쉬 교수의 탁월한 영역본 The New Sc ien ce of Giam batt ista Vic o (Comell Un ive rsit y Press, 1948) 의 단락 구분을 따랐다(이하 N. S. 로 표기함).
기 때문에 세계 를 완전하게 인식한다. 같은 이치에서 우리는 세계 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를 완전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 우리 는 < 이미 만들어진 > 세계와 만날 뿐이고, 세계는 우리에게 < 맹목 적 사실들 bru t e fac t s > 로서 막연하게 주어질 따름이다. 그러나 어 떤 것을 만든 자에게는 원리상 불투명한 것이 없다. 그가 인위물 a rt e fa c t을 만들 때에도 그러하지만, 하느님의 경우처럼 질료를 만 들어 그것으로 사물을 구성하는 경우에도 그러하고, 규칙들을 발 명하여 그것들에 따라 사물을 만드는 경우에도 그러하다 . 어떤 것 을 만든 자는 그것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 그는 자기의 의지에 따라 어떤 것을 만든다면, 그는 (그가 저자이므로) 그만이 아는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창조한 셈이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하 고 작용하는 이치를 충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소 설가는 그가 쓴 소설의 주인공을, 화가는 그가 그린 그림을, 작곡 가는 그가 만든 노래를 충실하게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 만 소설가나 작곡가가 모든 것을 만들지는 못한다 . 소설가가 사용 하는 어휘, 작곡가가 사용하는 소리는 거의 대부분 그들의 발명품 이 아니며, 바로 그만큼 그들에게는 <맹목적 사실>로서 주어진다. 그들은 이 맹목적 사실을 얼마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그 들의 선택은 그것들의 속성들이 <목적하는 이유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죽 그것들을 <원인적으로> 안식하지 못한 채로 수행 되기 때문에, 결국은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일정한 한계 내에서 그 <맹목적 사실>을 단지 변형시킬 수 있을 뿐이다. 말 그대로 무엇인가를 무로부터 만들거나 설계하는 이상적인 상황 에서만, 우리는 우리가 만든 것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 댜 이 상황에서 창조한다는 것은, 창조한 것이 무엇이고 왜 창조 되었는가를 인식한다는 것과 동일한 행위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창조하는 방식이댜 예술가의 창조가 이 극한에 근접하면 할 수록 순수 창조의 요소는 그만큼 커지며, < 외적 > 법칙에 복 속 하는 < 맹 목적 > 사실의 요소는 그만큼 작아진다 < 원인에 의해 > 이해하면 할수록 그만큼 참되게 인식하는 셈이다. 대수와 산수의 경우가 실 제로 그러하다. 물론 우리가 사용하는 숫자와 도형은 청악적이든 시 각적이든 감각가능한 재질로 만들어진댜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 스 스로가 자유롭게 발명한 게임에서 자의적으로 선택되는 계수들이다.
< 우리가 기하학을 증명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만들었기 때문 이다 > . 이 구절은 홉즈의 『정치학 논고 De Corp ore 』 의 서두에서 도 등장한다. 비코는 홉즈의 책을 읽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비 코는 이 구절로부터 더욱 깊은 뜻을 이끌어 낸다. < 만일 우리가 물리학의 명제들을 증명할 수 있다면, 우리가 그것들을 만들었어 야만 할 것이다 >? 물리학의 대상인 물질세계를 우리가 창조했어 야만 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없다. 하느님만 이 그렇게 할 수 있댜 < 그분만이 사물들의 참된 형상들을 가지고 자연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실재를 추구하는 과정 에서 유일한 <진리>이자 유일한 <길 > 안 하느님께로 향할 수밖에 없댜 비코의 이 같은 주장에서 우리는 기독교적 플라톤주의 혹은 신플라톤주의의 한 형식을 엿볼 수 있다. 즉 무엇인가를 인식한다 는 것은 그것과 한 몸을 이룹으로써 그것을 지배하는 일이라는 르 네상스 시대의 신플라톤주의적 교설을 연상하게 된다. 바로 이러 한 맥락에서 캄파넬라 Tommaso Cam p anella 는 인식이란 인식대상 자체로 되는 일이라고 주장했으며 ,41 파트리치 F. Pa tri zz i는 인식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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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 인식대상과의 합일이라고 말했다 . 51 인식한다는 것 cog n oscere 에는 < 합일 coe t us> 이라는 신비한 관념이 작용하고 있다. 합일 혹 은 < 상호인식 co-know i n g >은 인식대상과 한 몸이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관념은 고대의 형이상학적 • 신비주의적인 교설에 유래하 는 듯하다(플라톤의 『 향연 』 은 귀감을 보여 준다). 이 교설에 따르면, 태초에 주체와 객체, 인간과 자연, 감각과 사고는 원래 한 몸이었 으나 거대한 파국에 의해 분리된다. 양자는 분리된 이후로 끊임없 이 재합일 혹은 재결합을 끊임없이 모색하게 되는데, 재결합은 < 상기(想起, re-co gniti on) > 에 의해 달성된댜 이 같은 교설에는, 주체가 객체에로 재침투하고 객체를 주체에게로 동화시킴으로써 객체에 대한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마술적인 믿음이 자리잡고 있댜 이러한 마술적 믿음은 르네상스 자연철학의 핵심이다. 예컨 대 피코가 『변론 A p olo gi a 』에서 <마술이란 지혜와 다르지 않다> 고 말했을 때, 이 유명한 명제는 완전한 인식이란 창조와 똑같다 는 뜻을 지닌 것이었다 61 이 교설은 비코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 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비코는 실재를 그와 같이 인식할 수 있 는 존재는 하느님뿐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외부세계, 즉 자연세 계에 관련된 한에서는 실재를 직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플라톤 적 본질을 명상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해서 비코가 이성이 경험의 필요성을 제거한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eonardo da V i nc i의 믿음 을 추종했던 것도 아니댜 71 그와는 반대로 비코에게는 경험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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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터 인용(원문은 Co clice At lan ti co , fol. 147v).
경험적 지식, 특히 과거의 유물들에 대한 연구가 전부이다. 결국 비코는 야누스처럼 두 세계를 향한다 . 그의 반( 反 )수학적인 성향은 순수한 경험주의와 기묘하게 뒤섞인다 . 이 같은 양면성에 비추어 볼 때, 비코의 핵심 이론들이 근대적 매력을 갖추었음을 인정하면 서도 비코를 < 바로크적 인간 Barockmensch > 으로 자리매검한 마 이네케 Me i necke 의 평가를 부적절한 것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댜 그렇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비코가 동시대를 앞질러 나아가도록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홉즈를 능가하도록 만들어 주었던 비코의 핵심 이론이다. 수학적 지식이란 원리상 실재세계에 대한 지식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심지어 수학적 지식은, 비록 수학적으로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과학이 물리학임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적 지식과도 동일시될 수 없다. 비코가 보기에, 우리는 대수나 기하학의 세계를 창조할 수는 있지만 그 세계와 똑 같은 물리세계를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비코가 활동하던 시대에 수학은 자연에 대한 사실적 지식의 한 형식으로 간주되었다 . 수학은 과학중에서도 가장 심오하고 명석하 고 확실한 과학이요, 조야한 감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어떤 힘 에 대한 형이상학적 통찰이 추구하는 목표요, 때로 불투명하고 항 상 기만적인 사물의 외양에 반하여 사물의 실재적 속성을 드러내 줄 수 있는 인간이성에 고유한 축복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학이 가장 명석하고 엄격하며 논박 불가능한 이유는 단지 수학이 우리 정신의 자유로운 창조물이기 때문이요, 수학적 명제들이 참된 이유는 단지 우리 스스로 그것들을 만들었기 때문 이라는 비코의 착상은 실로 획기적인 전진이었다 . 이러한 착상은
<진리와 만들어진 것은 상호환위될 수 있다>는 비코의 유명한 원 리를 낳은 것이기도 했댜 81 당시의 저명인사들, 이를테면 나폴리
8) Verum et fac tu r n convert un tu r . 이 대담한 진술은 1710 년 고대 이탈리아 인들의 지혜에 관한 논고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이 논고를 지금부터 『 지혜 』 혹은 De An tiq u i ss i ma 로 약칭하기로 한다 . < 진리>와 <만들어진 것>의 상 호환위 가능성에 관한 이론이 중세적 뿌리를 갖는지 여부에 관한 문제는혼} 발하게 논의되어 왔다. 크로체는 At ti dell'Accademi a Fon tani ana 에 수록된 1912 년 3 월 10 일의 한 강연에서, 그 이론이 토미스트들 혹은 스콜라철학 일 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피치노나 카르다노 Gir ol amo Cardano 나 스코투스 Duns Soc t us 나 심 지 어 오캄 Wi lliam Occam 등으로부 터의 유래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 이들을 포함한 많은 작가들이 인간은 그가 충실하게 인식한 것을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은 있지만, 그 역으로 인간이 그가 창조한 것만을 충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이성적인 것이든 신앙에 의존하는 것이든 완전한 지식은 인 간이 스스로 만든 것에 한정된다는 주장은, 정통 스콜라주의적 교설에는 등 장하지 않는다. 크로체가 검토한 저자들 중에서 비코 이전에 이러한 주장을 피력한 유일한 저자는 산체스 F. Sanchez 로 보인다. 크로체가 적시하고 있 듯이 비코가 산체스를 읽었음은 분명하며, 전혀 다른 문맥에서나마 산체스 의 Op e ra Med i ca(l636) 를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산체스의 경우 그 같은 주장은 우연한 관찰의 결과였던 것 같다 . 그는 16 세기와 17 세기 초의 작가 들에게 공통적인 회의론적 입장에서 인간은 별로 창조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실질적 지식도 대단히 빈약하다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 따라서 비 코야말로 진리와 피조물이 상호환위될 수 있다는 혁명적인 명제를 최초로 개진한 인물로 볼 수 있다 . 이 명제를 통해 그는 인간이 창조했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을 그가 창조하지 않아서 인식할 수 없는 것과 구분하고자 노력 했다. <사물의 질서 > 와 <관념의 질서> 간의 관계에 대한 스피노자의 이론, 죽 <관념의 질서는 사물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는 명제와 바코의 이론 간의 연관성 ―一」일부 주석가들이 언급하고 있는_은 훨씬 설득력이 약하다 . 오히려 <생성하는 자연 natu ra na tur ans> 의 축도(縮圖)로서의 인간이라는 르네상스적 교설과의 유사성에 관해 더욱 많은 것이 언급되어야 한다. 하느 님만이 그가 창조한 (대자연과 동일시될 수 있는) 세계를 이해하듯이, 인간 도 이처럼 <신적인> 혹은 완벽한 의미에서 그 자신이 창조한 세계만을 이 해할 수 있다는 교설 말이다 . 인간은 파생적이지만 순수한 창조의 능력, 죽
신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한 문명에서 제 단계의 필연적 연속과, 성장하는 개인의 정신적 속성들 및 힘들의 발전 사이에 비코가 설정하고 있 는 통일성 내지 평행성에서는, 대우주와 소우주 간의 연관성이라는 르네상 스적 관념이 명백히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발상의 가장 완전한 실현 온 헤겔의 『현상학 』 에서 발견된다. 또한 그것은 마르크스 , 콩트, 크로체 둥 의 역사이론에서 토대를 형성한 것이며, 정신분석이론에서는 계통발생과 개 체발생의 유사성과 직접 관련된 것이다 . 비코 사상의 믿을 만한 원천들에 관해서는 이 책의 제 2 부를 참조.
총독이나 추기경 그리마니 Vin c enzo G ri man i처럼 비코의 이야기를 경청한 인사들이 과연 자기들이 들은 원리가 얼마나 혁명적인 것 인지를 알기나 했을까 하는 회의가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 다. 동시대뿐만 아니라 이후의 학자들도 이 점에서는 대체로 예외 가 아니었다. 대수학은 견고한 연역적 구성물이지만 우리에게 사실적 정보를 제공해 주지는 못하는데, 이는 우리가 구성한 게임이나 소설이 우 리에게 세계 자체를 보여 줄 수 없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수학 은 실재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수학은 실재를 닮고자 하지만 실재 외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수학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환 상이나 창조적 상상력이 전부이다. 상상력은 대상을 자기가 좋아 하는 대로 (수학의 경우에는 상징과 규칙에 따라) 주조한다. 예를 들 어 보자. 역학에서 그러하듯이 수학을 세계에 적용하면, 그 결과는 순수 수학적 결과보다 덜 확실해질 수밖에 없다. 역학이 세계를 확실하게 구명하여 제 아무리 과학이 되고자 노력해도, 우리의 자 유로운 창조물이 아닌 요소 곧 외부세계의 <맹목적 > 요소가 우리 의 정신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치에 따라서 비코는 물리학, 심리학, 역사학의 순서로 확실성이 증가한다고 생각했다. 확실성은 우리가 만들지 못하고 단지 발견하기만 한 부분이 적으면 적을수
록 증가한댜 우리 스스로 개입하여 자유롭게 조작할 수 있는 요 소가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의 지식은 그만큼 적은 확실성에 도달 할 수밖에 없다. 수학은 < 만들어 진 과학 sci en ti a op er atr ix> 이 다. 비코는 『지혜』에서, < 진리의 규준은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라고 말한댜 <증명은 조작이며 진리는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는 물리학을 ‘원인에 의해’ 증명할 수 없는 바, 자 연을 구성하는 원소들은 우리 외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IO l 우리 가 무로부터 조약돌 하나 만들 수 없는 것은 우주 전체를 만들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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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견해를 피력하던 시절의 비코는 아직 역사학을 수학이 주도하는 제 과학의 목록에서 열등한 위치에 두고 있었다. 물론 물리학은 격하되었다(물리학의 격하는 데카르트파의 주제넘은 가정을 논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리>의 견지에서 인문학은여전 히 낮은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 비코는 생애의 중반, 대략 1710 년 경까지는 이렇듯 준( 準) 데카르트적 관점에 서 있었다. 우리가 무슨 주제를 연구하든 그것에 대한 참된 인식의 가능성은 그것을 구성 하는 < 원소들>의 안정성과 규칙성에 의해 결정된다. 죽 그 주제 가 얼마나 <명료>하냐 <불투명>하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물리학은 불투명할 뿐만 아니라 인위적이고 유한 한> 과학이었댜II) 여기서 우리는 정신이 관통가능한 정도에 의해 결정되는 제 과학의 서열과 만난다. 물리학은 역학보다, 역학은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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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학과 대수보다 < 불투명 > 하다. 윤리학은 물리학보다도 덜 확실 하다 왜냐하면 윤리학은 불안정한 감정을 다루고, 리비도의 종잡 을 수 없는 파도에, < 격정에 따라 동요하는 영혼 s pirit의 불규칙한 운동 > 에 내맡겨진 영역을 취급하가 때문이다. 역사학도 이처럼 다 소 혼돈스러운 영역에, 윤리학과 비슷한 수준으로 자리매김된다 . 요컨대 1710 년 경까지 비코는 물리학을 데카르트파가 요구하는 권 좌로부터 밀어내기는 했지만 아직 역사학을 추켜 올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1 21 근본적 전희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이때까지 비코는 데카르트적인 입장으로부터 철저하게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8 년전인 1702 년에 수행된 세번째 학기개시 강의에서는 , 거 의 데카르트에 가까운 입장이 피력되기도 했다. 이 강의에서 그는 동료 인문학자들을 다음과 같이 냉소했다. < 문헌언어학자여, 당신 은 로마인들의 가구와 의복에 관해 모든 것을 안다, 로마의 거리 와 부족들과 군대에 관해 누구보다도 훨씬 많이 안다고 , . 뽑낸다 . 왜 자랑하는가? 당신이 로마의 짐꾼, 요리사, 구두쟁이, 법정리( 法 廷 吏 ), 경매인이 알았던 것보다 더 많이 안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 가 ?>1 3) 이 인용문에서 비코는, 로마사 연구자의 지식이란 잘해봐
12) <육체적인 것에로 향하면 향할수록 우리의 과학들은 점점 더 불 확 실해진 다 . 이를테면 역학은 운동을 다루기 때문에 기하학과 대수보다 덜 확실하며 , 물리학은 역학보다 덜 확실하며· … ••윤 리학은 물리학보다 덜 확실하다. Scie n ti ae minu s cert a, pro ut aliae aliis mag is in mate r i a corp u lenta im mergu ntu r: uti minu s cert a mechanic e qu am ge ometr ica et arithme ti ca , quia consid e rat motu m sed mach ina rum ope : minu s cert a ph y s ic e qu am mecha nice ·· ·m inu s cert a moral is qu am ph y si c a .> 그 이유는 윤리학이 다루 는 <깊히 숨어 있는 정신의 운동 motu s anim o rum qui penitiss m i sun t > 은 매우 불안정한 반면에, 물리학은 < 그 본성상 확실한 물체의 내적 운동 motu s int e rn i corp oru m qui sunt a natu ra qu ae cert a es t > 을 다루기 때문 이 다 (De Anti qu is s im a, Op e re, I, p. 132 와 pp. 136- 1 37).
야 키케로 하녀의 지식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데카르트의 조 롱에 공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10 년 뒤인 1712 년에 비코의 태도는 역전된다. 『지혜』(1 710) 에 대한 세간의 비평들에 응답한 r 두번째 답변」에서, 비코는 < 데카르트의 권위에 밀려 > 문헌언어학적 연구 가 무용한 것으로 간주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키케로 하녀에 관 한 데카르트의 언급을 이번에는 정반대로 비관하는 입장에서 반복 하고 있댜 H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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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피쉬와 버긴이 번역 편집한 The Auto b io g r aphy of Gia m batt ista Vico (Great Seal Books, Cornell Un ive rsity Press, 1962) 의 옮긴이 서문 , p. 37 을 참조(이 「두번째 답변』은 『 지혜 』 의 영역본(pp . 150 - 1 8.5)에 부록으로 수록되 어 있다, 옮긴이).
만일 창조자가 피조물에 대해 지닌 지식처럼 < 원인에 의한> 지 식만이 유일하게 참된 것이라면, 명석판명한 관념이라는 데카르트 의 진리규준은 어떤 처지에 놓일까? 비코는 데카르트파를 향해 과 감하게 선전포고한다. 사실적 명제는 확실해 보인다는 점에서는 명석판명할 수 있겠지만 결국은 오류일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주 장이댜 1 51 만일 어떤 명제에 대해 진리나 타당성을 판단하는 유일 한 규준이 그 명제를 < 단순하고 > 더 이상 분해 불가능한 요소들 로 구성하거나 분석할 수 있다는 규준이라면, 이 규준은 일상적 경험의 보다 큰 부분을 일거에 배제해 버릴 것이요, 양적으로 처
15) 비코는 명석판명성이라는 데카르트의 규준이 결국은 논리적이 아니라 심 리적이고 주관적이어서 오류에 빠지기 쉽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접에 관해서는 그가 1726 년에 에스페르티 Es perti에게 보낸 편지 (L'Au t o bio g rafia, if azrt iggio e le po esie vari e, ed. B. Croce, Late r za, Ba ri, 1911, p. 186) 를 참조.
분될 수 없는 모든 요소들을 배제해 버릴 것이다. 사실 이 같은 지 식은 논리적 증명가능성의 견지에서는 < 진리 verum > 가 될 수 없 다 . 그렇지만 그것이 < 확실한 > 지식임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 왜냐하면 그것은 직접적인 세계경험에 기초하는 지식이요, 장소와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지식이요 , 모든 경험적 지식의 기초가 되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 확실한 지식 cerhun > 은 비록 불변적이지는 않지만 인간의 삶에 반드시 필 요하다. 그것을 데카르트처럼 억견의 지위로 격하시킨다는 것은, 인간이 이상적으로는 참지식 혹은 < 진리 > 만 가지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비코는 < 선험적 > 지식에 대한 자기의 견해가 옳 다면 그렇게 이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을 것이라고 생 각했다. 데카르토의 요구에 맞도록 명석판명하게 인식될 수 있는 대상은 우리가 만든 것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수 대수학 을 제외하고는) 공간을 취급하는 기하학마저도 불확정적이고 시험 적인 결론에 머물 수밖에 없다. 물리적 공간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일한 참지식이 필연적 관계에 대한 지식이라 면,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킬 만한 지식은 우리가 만든 규칙에 복 종하는 관계들에 대한 지식밖에 없다. 그외의 다른 관계들이 < 선 험적으로> 인식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 16) 우리는 우리 스스로 고안한 것들에 대해서만 필연적인 타당성을 보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규준은 인간세계와 자연세계 거의 모든 영역을 진리로부터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가 세계를 선 험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면 세계도 우리에게 <진리 > 로 인식될 수 없지 않겠는가. 당연한 말이 되겠지만, 세계는 모든 인간 경험의
16) 아마도 이 같은 주장에 근거하여, 야코비 J acob i와 훗날의 프란츠 폰 바더 Franz van Baader 는 비코를 칸트의 선구자로 간주했을 것이다.
기초자료이기 때문에, 세계가 없이는 인식이 시작될 수조차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완전한 지식을 구비한 존재는 그 자신을 혹은 자 신과 동일시될 수 있는 대우주를 응시하고 있는, 아니 대우주 <안>을 꿰뚫어보고 있는 창조주뿐이다. 만물의 저자인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한 결실을 명상한다. 물론 자기가 만든 것을 충실히 이해한다는 점에서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따라 창조되었고 따라서 한 계 내에서나마 창조적인)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인간은 신이 아니다. 스스로 만들지 못했기에 충실하게 이해하기 힘든 자료들 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다.
베이컨을 추종한 홉즈도 비슷하게 언급했다. <기예들art s 중에 서 어떤 것은 증명가능하며 어떤 것은 증명불가능하다. 그 주제의 구성이 기예가(技 藝家) 의 수중에 달려 있는 기예는 증명가능한데, 여기서 기예가는 그 자신의 조작 결과들을 연역해 내는 것만으로 도 증명을 수행하는 셈이다 …… 따라서 기하학은 증명가능하다. 우리 자신이 도안하고 그린 선들과 도형들로부터 추론하기 때문이 댜 시민철학ci v il phi loso ph y도 증명가능하다. 우리 자신이 공화국 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화국의) 자연적 요소들에 관 해서는 그 구성을 미리 알지 못하고 다만 결과들로부터 그 구성을 추론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시민철학에서는) 원인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증명은 불가능하고 단지 원인들이 무엇일 수 있는가에 대한 증명만이 가능하다 .>171 비코는 홉즈의 이러한 주장을 한층 심화시 키고 있다. 그는 물리학 상의 가장 완전하고 명석한 지식을, 물리 학적 증명조차도 감당하기 힘든 충실한 증명으로부터 뚜렷하게 구
17) Thomas Hobbes, Eng lish Works, ed. W. Moleswort h, VII, p. 183f. 이 구 에절은 서, 피T h쉬e A교u수to 에b i o g의 r 해ap h 인y 용of되 G 었ia다 m( pba.t t 2is1t1a , nV. ic3o 9, )G. reat Seal editi on 의 서 문
분한댜 우선 < 물리학에서 증명되는 것들은 우리 스스로 비슷한 과정을 수행할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가 흔히 가장 완전하고 명 석하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합의가 도출될 수 있다고 믿는 관념, 즉 자연물에 대한 관념은, 우리가 그 도움으로 실험을 수행하여 실험한 만큼 자연을 모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관념에 불과하다 . > 1 81 그 러나 실험은 창조가 아니다. 우리가 실험을 통해 자연의 과정을 재창조한다는 의미에서만 실험은 지식을 제공한다. 물론 우리가 어떤 자연물을 분석하고 재구성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단지 표피와 외적 변화만을 관찰할 때보다 더욱 참된 의미에서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 . 이를테면 우리는 그것의 <작용 > 도 인식할 수 있다 . 그렇 지만 우리가 물리학의 대상이나 법칙을 창조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물리학은 증명적 과학이 아니요 완전한 지식을 제공하는 과학도 아 니다. 단지 실험에 귀속되고 수학적으로 간편하게 처리될 수 있다는 매우 제한적인 의미에서만, 물리학은 과학이라 불리워질 수 있다.
18) De Anti qu is s im a, op e re, I, p. 136.
바코는 설득력과 명쾌함으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 진리의 규칙이자 규준은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정신의 명 석판명한 관념이라는 데카르트파의 규준은, 다른 진리를 판단하는 규준은 물론 정신 자체를 판단하는 규준도 될 수 없다 . 정신은 자 기 자신을 파악하기는 하지만 자기 자신을 만들지는 못하기 때문 이다. 이처럼 정신은 스스로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앞서 자기 자신을 파악한 양태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다 .>19 1 더 나아가 그 는 과감하게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느님이 존재함을 선험적 으로 증명하고자 노력하는 자는 불경한 호기심의 죄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스스로를 하느님보다 높은 신(神)으로 만드는 짓이요 그럼으로
19) 같은 책(그리고 Vic o , Auto b io g rap h y, 1944 년 판, pp. 38-39 도 참조).
써 그가 찾는 하느님을 도리어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 20,
20) De Anti qu is s im a, ope re, I , p. 150.
만일 내가 한 치의 오류도 없이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나 스스 로 창조했거나 창조할 수 있었던 것으로 한정된다면, 오직 수학만 이 참된 지식이라 불리워질 수 있을 것이다. 비코는 이 문제가 대 단히 역설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식이 이런 식으로 한정된다면, 자연적 혹은 과학적 지식은 더 이상 지식이라 불리울 수 없고 , 형이상학과 신학도 인간이 만든 허구로서만 타당성을 유 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데카르트가 타당하다고 주장한 지식조차도 거의 대부분 배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코 는 회의주의자도 비합리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이 문제를 일종의 < 귀류법 reducti o ad absurdurn> 에 의해 해결하고 있다. 우선 비코 는 데카르트가 제시한 (심리학적) 진리 규준의 부적절성을 논파한 다. 다음으로 바코는 수학이 자의적이기 때문에 엄밀하다는 사실 을 깨닫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데카르트를 비판한다. 게임에서 그러하듯이 수학은 자유롭게 채택된 규약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엄 밀한 지식이 될 수 있다. 여기서 비코는 수학이 본구적( 本 具的)이 고 객관적인 규칙들의 체계라든가 세계의 구조에 대한 발견이라는 통념을 파괴하고 있다. 그렇지만 수학이 계수의 조작이라는 비코 의 수학이론은 불행하게도, 비슷한 이론이 주도권을 장악한 오늘 날까지도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21 1
21)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비코의 수학이론에는 적어도 한 명의 유명한 선 구자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가 바로 쿠자의 니콜라스, 죽 쿠자누스 Cusanus 이다 . 15 세기 중반에 그는 과감하게도 플라톤주의적 정설로부터 벗어나 수 학이란 오직 인간의 창조물이며 우리가 홀로 그것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것 을 인식한다고 주장했다 . 역사 인식론이나 여타의 인문학적 연구들에 대한 그의 통찰력에 대해서도, 마땅히 받아야 할 만큼의 ――-지금까지는 그렇지
못했지만-명예가 주어져야 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Lewi s White Beck, Early German Phil o soph y( The Belknap Press of Havard Unversit y Press, Cambri dge , Mass., 1 969), pp. 67, 69 一70 을 참조. 나는 이 탁월한 저서로부 터, 비코 연구자들이 별로 주목하지 못했던 위와 같은 사실을 어 렴풋이나마 배웠다. 베크 교수는 비코를 언급하지 않은 채 쿠자누스와 칸트와의 유사점 에 주목하고 있다 . 칸트에게 영향을 미친 자료로 그가 인용하고 있는 것은 , Cusanus, De Conie c tu r i s, I, c hap. XIII(Pa ris ed., folio XLVi lln) 이 다 .
비코의 수학이론은 수학적 명제들이 분석적 혹은 동어반복적이 라는 견해와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 동어반복적 명제는 비록 무언 가를 기술할 수는 없지만, 진술임에는 분명하다. 그렇지만 게임에 서의 규칙이나 동작 같은 발명품은 결코 진술되지 않는다. (해묵은 상투어에 따라서) 연역추론이 새로운 정보를 제공한다고 말하는 것 은, 연역추론이 음악과 비슷한 일종의 활동이라고 말하는 것과 전 혀 다른 뜻을 지닌다 마찬가지로, 비코는 어떤 사물의 원인과 그 것의 정의(定義)를 혼동하는 오류 , 죽 (오캄 직전까지 유명론자들이 범했던) 사실과 상징을 혼동하는 오류에 대한 경고에 머물지 않는 댜 비코의 주장은 훨씬 경이롭다 그는 수학이나 논리학 같은 형 식과학을 발견의 형식이 아닌 발명의 형식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형식과학을 참이다 혹은 거짓이다라고 판단할 때, 여 기서 사용되는 참 혹은 거짓이라는 단어는 명제의 판단에서 사용 되는 참 혹은 거짓이라는 단어와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2l
22)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 말( 馬 )이 이성적이라는 명제는 수학적 모순명제에 속한다는 토리첼리 To rri ce lli의 주장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에게는 타당할 것이며, 어쩌면 테카르트주의자에게도 타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코 의 경우 그러한 주장은 판명하게 구별되는 두 가지 진리 유형을 혼동한 것 이며, 따라서 완전히 잘못된 유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제 3 장 인간이 만든 것의 진리성 ―역사 한 걸음 더 나아가 비코는 모든 지식울 세 종류로 나누는 기존 분류법을 파괴했다. 기존 분류법에 따르면, 이성의 직관이나 신앙 이나 계시에 기초하는 형이상학적 • 신학적 지식, 논리학이나 문법 이나 수학에서의 연역적 지식, 경험적 관찰에 -즉 가설이며 실 험이며 귀납 둥 여러 자연과학적 방법들에 의해 정련되고 확장되 는 관찰에 ——-기 초하는 지 각적 perc ept ua l 지 식 이 있을 뿐이 다. 비 코에게는 다른 유형의 지식이 있다. 그것은 경험적이라는 점에서 선험적 지식과 다르다. 사실들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낳는다는 점 에서는 연역과도 다르다. 특정한 시공간적 질서 안에 무엇이 존재 하거나 발생하는가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이 왜 존재하거나 발 생하는가에 관해서도 <원인적으로> 밝혀 준다는 점에서는, 외부 세계에 대한 지각과도 다르다. 바로 이 같은 지식을 가리켜 자기 지식 sel f -knowled g e 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인식주체인 우리 자신이 저자로서 一―-죽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지속적인 사회생
활을 영위하는 주체로서――-행하는 활동에 대한 지식이요, 우리 가 내부로부터 이해하는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의 견지에서만, 우 리는 외부세계를 마치 구경꾼처럼 관찰하는 수동적 관찰자를 넘어 설 수 있다. 수동적 관찰에서 우리는 사건이나 사물의 < 표피 > 를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사물의 내적 생명이나 목적에 관해서는 희미한 사색에 머물 수밖에 없댜 사물이 목적이나 내적 생명을 실제로 가지든 원리상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든, 수동적 관 찰자로서의 우리는 사물을 확실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외부세계의 경우에는 자연주의자들이 옳다. 여기서는 우리가 인 식하는 모든 것이 감각이 전하는 자료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 우 리는 그 감각자료들을 규칙적이고 일률적으로 분류할 수 있고 , 수 학의 방법을 응용하여 그것들을 보다 작은 부분들로 분해했다가 재결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탐구에 의해서는, 어떤 자 료와 뒤이어 발생한 다론 자료 간의 시간적 관계 혹은 어떤 자료 와 공시적인 다른 자료 간의 공간적 관계를 구명한 보고서가 작성 될 수 있을 뿐이댜 이 같은 보고서가 인간존재에 관해 인식할 수 있는 전부라고 말한다면, 혹은 의부세계를 파악하는 방법이 인간 이 서로를 알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의 전부라고 말한다면, 이러한 주장은 우리의 진리파악 능력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요 부 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인간의 행동을 다룰 경우에는 우리는 왜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물을 수 있어야만 한다. 무슨 정신 상태나 정신적 사건, 예컨대 어떤 감정이나 의지에 따라 무슨 행 동이 유발되는가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도 물어야만 한다 . 이런 저런 심적 상태의 사람들이 과연 주어진 방 식대로 움직일 것인지의 여부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그런 방식으 로 움직이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관해서도 물어야 한다. 그들이 어
떻게 행동하는 것이 이성적이거나 바람직하거나 옳은 일인가에 관 해서뿐만 아니라 , 그들이 다양한 행동 대안들 중에서 특정한 대안 울 선택하는 과정과 이유에 관해서도 물어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목적, 동기, 의지의 작용, 결정, 의심, 주저, 생각, 희망, 공포, 욕망 등등에 비추어서 인간의 활동을 판단해야 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야말로 인간존재를 자연의 나머지 존재들로부터 구분해 주기 때문 이다 위와 같은 물음들에 대해 크든 적든 만족스러운 대답울 얻 고자 할 때, 인간 의부의 자연에서 해답을 구하는 것은 비합리적 이댜 이런 해답은 원시시대, 죽 < 신의 시대 > 나 < 영웅 시대 > 을 특징짓는 인성투사(人 性投妹 an t hro p omo rphi sm) 나 애니미즘 같은 < 범주의 오용 > 을 낳든지, 좀더 복잡해진 시대의 시인들처럼 <감 상(感傷)의 허위 pa th e ti c fa llac y > 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입장은 헤르더와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나름대로 개진되 기 전에 이미 비코에 의해 확인된 것이었다 . 비록 어렴폿한 암시 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신플라톤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혹은 16 세 기의 프랑스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발견되지만, 이들은 모두가 암 시 이상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인간존재에 대한 지식은 수학적 지 식이나 하느님의 편재성 만큼 명증한 지식일 수도, 광물이나 동식 물에 대한 지식처럼 감각에 기초하는 지각적 (혹은 자연과학적) 지 식일 수도 없다는 것_이러한 사실을 공표한 사람은 비코 이전 에는 없었다. 우리는 탁자, 나무, 개미를 지각하고 기술할 수 있으 며, 그것들의 움직임에 관한 정보를 축적하여 물리학, 식물학, 곤 충학 등에서의 법칙들울 정립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고작해야 그 탁자나 나무나 개미가 어떻게 보인다거나 움직인다거 나 인과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그것들이 무엇처럼 보이고 행동하는가 뿐만 아니
라 그것들이 왜 인간에게 의미 있는 존재인가를 인식할 필요가 있 다면, 우리는 아직 한 개의 탁자로서, 한 그루 나무로서, 한 마리 개미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해서는 말하 지 않은 셈이다. 데카르트의 엄격한 규칙에 따라 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에 의해 정립될 수 있는 지식만이 참된 것이라면, 우리는 행동주의적 behavio r i st i c 검증에 머물 수밖에 없다. 또한 이것은 원 시 시대의 인성투사와 정반대의 오류로 귀착될 위험이 크다. 원시 인들이 외부세계를 인간세계에로 무비판적으로 동화하는 오류를 범했다면, 이번에는 우리의 지식을 인간이 의부세계와 공유하는 특징들에 대한 지식으로 한정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말이다. 예컨 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단일한 통일적 자연과학에 의해 포괄할 수 있다는 기대 (아니 망상)에 사로잡혀서, 인간행동을 인간 외적인 요소들에 의해 설명하고 환원시키려 한 고대와 현대의 행동주의자 들과 극단적 유물론자들이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 . 물론 이처럼 순수 <논리실증주의적 ph y s ic a li st > 언어에 의해 설명가능한 범위 는 그 반대자들이 가능하다고 추정하는 것보다는 넓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 스스로 부과한 엄격 성은 오히려 우리가 타자에 관해 늘상 말하거나 생각하는 가장 자 연적이고 필수적인 것들을 말하거나 생각하는 데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멀리 있지 않다. 인간은 언제나 타인을 자신 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라는 것이 이유의 전부이다. 우리 자신이 육체적으로는 계측가능한 자연력들에 따라 행동하 는 존재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사고하고 선택하고 규칙에 따르고 결 단하는-죽 자각가능하고 기술가능한 내면생활을 소유하는 —존재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듯이, 우리는 타자도 비슷하게 내면생활을 소유한다는 것을 당연시한다. 정말 그럴까라고 질문하
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단호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우리 와 타자가 내면생활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육체들의 무리라는 개 념과 대립적인 의미에서 의사소통이며 언어며 사회 같은 개념들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성투사는 인간적 특성들을 인간 의적 인 실체들 이를테면 신이며 강이며 행성이며 추상적 관념 등에 부과한다는 점에서는 당연히 오류이다. 그렇지만 인간세계에서만 은 인성투사가 타당하다. 이 세계에서는 인간적 특성들은 오용되 기보다 적절하게 부과된다. 만일 인간마저 이러한 특성들이 없는 것처럼 주장한다든가, 인간적 특성들은 (오늘날 인기 높은 자연과학 의 재료가 되고 있는) 인간 외적 실체들과 공유하는 속성들에로 <환 원가능 > 하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인간존재와 비인간적 자연의 차 별성을 무시하는 일이요, 물질적 대상과 정신적 (혹은 감정적) 활동 의 간극을 무시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부세계에 대한 지식은 의부세계에 대한 지식에 비해 크게 무시되어 왔다. 그 까 닭은 무엇일까? 비코의 대답은 이렇다. 육체는 인류 공통경험의 세계에서 가장 친숙한 실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육체적이 아닌 다 른 견지에서 무언가를 사고하기는 대단히 힘들다는 것이다. 비코 는 정신활동을 부각시키고 차별화하며 기술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 운 것인가를 수시로 강조한다. 이를테면, <인간정신은 그 자신을 마치 의부에서 물체를 보듯이 육체적으로 보려는 자연적인 성향을 지닌댜 따라서 정신이 반성에 의해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은 큰 어려움을 겪은 뒤에라야 가능하다.> 정신현상을 육체적인 견지에 서 기술하려는 강력한 성향이 존재하는 바, 이것은 한편으로는 조 야한 유물론을, 다른 한편으로는 주물숭배나 애니미즘을 낳는다.
l) N S. pa r. 236.
이 같은 구분은 비코의 사상 전체를 관류하는 강조점이다. 그것 은 <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 , 자연과학과 인문학, < 인식 W i ssen > 과 <이해 Verste h en> 사이에 상이한 목적과 방법을 설정하는, 우리에 게 익숙하지만 종종 논박되고 있는 구분법의 원초적인 표현이다 . 인간행동을 해석하는 몇 가지 중추적 범주들이 우리가 동식물이나 사물을 사실적으로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범주들과 원리상 다르다 면, 비코의 이 같은 구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댜 그것은 최소한 몇 가지 측면에서 연역과도 다르고 감각지각 및 이에 기초 하는 일반화와도 다른 유형의 지식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말하자 면 그것은 오늘날 흔히 말하는 과학적 지식이나 감각적 지식과는 다른 유형의 지식을 지향한다. 그 같은 지식은 우리 스스로가 창 조한 것들에 대한 지식이요 우리가 < 원인적으로 > 깊히 파악할 수 있는 지식이라는 점에서, 단순 관찰에 기초하는 어떠한 지식에 비 해서도 우월하다. 태초부터 인간은 이처럼 < 내부로부터 > 인식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이 능력을 의식적으로 발휘하지는 못했다. 산문으로 말하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던 주르댕 Jou rda in 씨 처 럼 말이 댜 비코보다 앞선 이탈리아 사상가들 사이에서 이 같은 구분의 맹 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마네티 Mane tti는 1452 년에 『인간의 존 엄함과 탁월함에 관하여 De Di gnitate et Excellenti a Hom i n i s 』 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 <세상의 온갖 집, 온갖 읍과 도시, 모든 건 물처럼 우리가 지켜 보는 모든 것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 문에 우리 것 곧 인간적인 것이다. 모든 그림과 조각이 우리 것이 며, 모든 기예와 과학……모든 발명품이 우리 것이며, 상이한 언 어들, 다양한 문자들이 우리 것이다 .> 21 우리 것이란 자연적인 것 과 대립적인 의미에서 인간적인 것이다. 피치노 Fi c i no 도 <우리는
2) Gio v ann i Genti le, Concett a dell'Uomo nel R i nasc i men t o 로부터 인용. 이 것은 그의 Gio r dano Bruno ed ii Pensie r o de! Ri na scim ento ( Vallachi , Fir en ze, 1920), pp. lll ff에 재수록되었댜
자연의 노예가 아니라 자연과 경쟁한다>고 천명했으며 , 1’ 피코, 부 엘 Bouelles, 브루노 Bruno 등에게서도 비슷한 주장이 발견된다. l, 자 율적 존재로서의, 그 자신과 세계의 창조자이자 주조자로서의 인 간이라는 개념은 르네상스 시대에 자주 발견되지만, 사실상 그 이 전에도 있었고 16 세기 프랑스에서도 있었다. 비코의 기념비적인 업적은 이 관념을 스콜라주의적인 낡은 관념과 결합하여, 우리는 인간이 창조한 것만을 진정으로 인식할 수 있노라고 선언했다는 데 있다 .4 1 그렇지만 더욱 대담한 업적은 그의 테제가 흔히 초시간
3)
적 방식으로 인식되는 인간의 작품들, 이 를 테면 < 도시 > 나 < 기 예 > 나 < 과학 > 같은 작품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확장되는 집단적 • 사회적 경험으로서의 인간의 역사 전체에 대해서도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인간의 역사는 주입되는 <관념들 > 에 대한 수동적인 수용과정이 아니다(데카르트와 로크는 비록 주장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한결같이 인간의식의 수동적 성격 을 강 조했다) . 비코에게 역사는 영속적인 < 의지적 > 활동이다. 역사는 시간적으로 변화하는 신화적 • 상징적 • 형이상학적 • 논리 적 • 경험 적 개념들이며 범주들이며 해석들의 끊임없는 수행이다 . 끝없는 탐사, 끝없는 질문 , 끝없는 질서 부여와 주조, 끝없는 목표 추구야 말로 정처없이 떠도는 인간 정신의 특징일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비코가 생애의 후반부, 가장 창조적인 시절에 천 착한 문제에 접근하기 위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위대 한 사기꾼이다. 외부세계에 대한 지식이 모든 지식의 패러다임이 라는 그의 주장은 철학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뿐이다. 나는 한 그 루의 나무처럼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지만, 그 나무가 진정 무엇인지를 알 수는 없다 . 그러나 나는 정신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안다. 내가 그것을 소유하고 그것에 의해 창조하기 때문이 댜 <당신이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창조하십시오. 나 역 시 당신이 내게 제안한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 만들' 것입니다. 나 자신이 그것을 만든 장본인이기에 내가 그것을 추호 도 의심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 51 여기서 비코는 수학적 의미에서의 과학적인 관념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 간의 모든 발명에 적용된다 . 인간은 행함이나 인식함 혹은 갈망함
5) Gio m ale de' Lett er ati d'Jt.a li a, vol. 8(Venezia , 1711), Article X 에 대 한 비 코의 답변 On the Stu d y Meth o ds of Our Tim e, p. xxxi로부터 인용.
으로써 < 창조 > 한다. 이 점에서 인간의 기록은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댜 인간은 행동함으로써 < 창조 > 하거나 타자의 창조물들 을 정신적으로 경험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가 단순히 외부에 서 관찰한 자연적 자료들에 대해서보다는 행동에 대해서 훨씬 직 접적이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비코는 인문학의 위대한 영역이야말로 그것의 유일무이한 저자인 인간에 게 이해가능한 영역이라고 믿었다. 인문학은 인간활동의 전 영역 올 망라하는 것이었다. 유물들과 제식( 祭 式)들로 표현되든 , (원시적, 감 정 적 , 구체적 , 집단적인) 상징적 형식으로 표현되든, (보다 진화한, 반성적, 추상적 , 개별적인) 분절적( 分 節的) 형식으로 표현되든, 기예와 과학, 관습과 법률 등 실로 모든 생활방식과 모든 인간관계의 내 용과 형식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 영역에 대한 탐구는 만물의 창 조주가 만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성한 지식을 향해 그의 피조물 이 가장 가까히 접근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
< 진리-만들어진 것 verum- fac tum > 의 원리를 역사연구에 적용 한 것은 실로 혁명적인 사건이다. 비코는 이 원리의 단서를 홉즈 로부터 발견했던 것 같다 . 6 1 그러나 < 시민철학이 증명가능한 이유 는 우리 스스로 공화국을 건설했기 때문이다>라는 홉즈의 진술은, 헌법이나 정책이나 여타의 정신적 구성물들처럼 의식적인 계획과 배려만을 지칭하는 듯하다. 진정으로 발명되었기 때문에 완전하게 이해가능하거나 <증명가능한> 것들, 이를테면 기하학적 도형 같 은 것들로 한정된다는 말이다. 바코는 홉즈의 이 같은 생각을, 비 록 위험스러우리만치 사변적으로 끌고가기는 했지만, 훨씬 광범위
6) 비코가 홉즈를 원전으로 읽었을까? 피쉬 교수는 설득력 있게도 그렇지 않 았을 것 이 라고 추정 하고 있다 (V i co, Auto b io g r aphy, Great Seal edition , p. 40 참조) .
하고 심오한 것으로 변형시켰다 . 말하자면 비코는 그것을 인류의 집단적 혹은 사회적 의식의 시간적 성장에로, 태초부터 인간의 사 고와 감정을 지배해 온 꿈들이며 신화들이며 이미지들에로 확장하 여 적용했던 것이다. 이렇듯 이성적 단계에 앞선 잠재의식적 단계 에 주목하는 과감한 테제의 진정한 아버지는 비코밖에 없다 . 『 새 로운 과학 』 의 유명한 구절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 우리에게 너무 도 낯선 태고의 것들을 칠혹같은 어둠이 감싸고 있는 한밤중에, 온갖 의심을 넘어 영원히 꺼지지 않을 한줄기 진리의 빛이 비치고 있다. 시민세계는 분명히 인간에 의해 만들어져 왔다는 것, 따라서 그 세계의 원리들은 우리 인간정신의 변양( 斐樣 )들 mod ifica ti on s 안에서 발견될 수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에 관해 숙고한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하느님이 만들었기 때문 에 하느님만이 알 수 있는 자연 세계에 대한 연구에만 온갖 정력 을 기울여 왔을 뿐,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이 알 수 있는 제 민족의 세계 곧 사회 세계에 대한 연구에는 얼마나 소홀했던가 하 는 점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7 1 여기서 < 변양들 > 이란 인류의 사고 • 상상 • 의지 • 느낌이 성장하면서 밟아 가는 여러 단 계들을 뜻하는 듯하다. 비코는 충분한 상상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뿐만 아니라 이성적 방법에 의해 획득되는 지식을 갖춘 사람도) 누구나 그 변양들에로 <침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한 에서는, 비코는 타자를 이해하고-죽 <타자의 정신을 인식하 고>-타자의 목표나 전망이나 사고방식이나 느낌이나 행동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을 상세하고도 정확하게 해설한 적이 없다. 감정이입 em p a t h y의 언어에 의존해서도, 유비추리를 사용해서도,
7) N. S. pa r. 331 .
세계영혼의 통일성에 대한 직관이나 분유( 分有 )라는 관념에 의해 서도, (개인이든 집단이든,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타자 인식이라 는 문제는 명쾌하게 해결된 적이 없다. 이 문제는 비코 연구자들 의 몫으로 남았댜 다만 비코는 한 가지 확신을 피력하고 있을 뿐 이다. 말하자면 비코는 타자의 정신도 인간정신이므로, 타자도 우 리가 만든 것에 원리적으로는 언제나 < 침투할 >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8l
8) 이 장의 각주 13) 을 참조 . 이러한 견해는 여러 방향에서 해석될 수 있다. 이중에서 헤겔과 그의 이탈리아 추종자인 크로체와 젠틸레의 (그리고 그들 의 영국 추종자인 콜링우드에 의해 특색 있게 변형된) 절대적 관념론은 유 일하게 형이상학적인 해석이다 .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주는 전거가 비코 의 원전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하가에 그것은 그다지 큰 설 득력이 없다. 독일 철학자 딜타이와 프랑스 역사가 미슐레가, 보다 간접적으 로는 여러 사회인류학자들과 언어문헌학자들과 문화사가들이 비코의 이 핵 심 원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해석은 앞서의 해석보다 훨씬 더 경험적이 며 훨씬 덜 사변적이다 .
이것은 역사연구의 자율성에 대한, 역사연구가 자연연구보다 우 월함에 대한 선언이다. 이 획기적 전진을 향한 윤곽은 1720 년의 『보편법 Di rit to Un i versale 』 에서 처음 발견된다. 여기서 비코의 전 망은 근본적 전회를 보여 준다 . 1709-1710 년의 시절, 『방법 』 과 『지 혜 』 를 집필하던 시절만 해도, 아직 역사학은 지식의 위계에서 비 교적 낮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역사학은 자기 인식의 한 형식으로 간주되면서 자연과학의 위상을 능가하기에 이 른다. 비코가 역사학이 수학의 확실성을 갖는다고 주장한 것은 아 니다. 그러나 < 불투명한 > 사실들에 매달려 갈팡질팡하지만 않는 다면 , 우리는 창조적 학문이 제공하는 <신성한> 쾌락을 역사학 안에서 맛볼 수 있댜 역사학은 실재와 관련된 , 세계 내에 실재하 는 것들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 모든 연구의 여왕이다.
인간정신이 일정한 한계를 갖는다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자신과 타자를 참되게 인식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우리는 인간정신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기 때문에, 자신과 타자의 계획과 목적이 무엇 인지를 알 수 있댜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안다. 개인뿐만 아니라, 엇비슷한 타인들 사이에 섞여 살아가면서 의식 적으로 상호작용하고 협동하는 사회적 인간이 무엇인지도 안다. 이 같은 자기인식은 < 무엇 > 과 < 어떻게 > 에 대한 인식일뿐만 아니 라 <원인에 의한> 인식, 즉 < 왜>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다 . 따라 서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은 하느님의 지식에 가장 가깝 다.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불완전하게 이해할 수도 있고, (어떤 예술작품에 대해 전문비평가가 나보다 많은 것을 파악하고 그것의 < 원 인>을 더 잘 안다면 내가 그로부터 배워야하듯이) 우리 又1-신을 더욱 참되게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가 우 리 자신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외부적 자료들을 단순히 기록하거나 분류하거나 연역하는 수준을 넘어선 셈이다. 훗날 독일 사상가들은 이러한 종류의 인식을 <이 해 Vers t ehen> 라는 이름으로 개념화했댜 단순히 사실들을 인식하 는 작업은, 그것이 아무리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종류의 인식과 구별된다. 타자의 동기나 행동을 이해하는 작업은, 그것이 아무리 불완전하고 수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할 지라도 외부세계에 대한 인식과는 원리상 전혀 다른 정신활동이 댜 우리가 돌맹이나 딱정벌레를 관찰해서 그것들에 관한 사실들 을 배울 수는 있겠지만 그것들을 이해할 수는 없다. 물론 우리의 인격이며 심리적 특성들이며 정신적 내용들을 전적으로 우리가 만 들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 은, 수학을 만든 우리가 수학을 인식하는 것처럼, 혹은 인간을 만
든 창조주가 인간을 인식하는 것처럼 완벽하지는 못하다 . 반면에 수학은 비록 우리가 만든 상징과 계수에 의해 조합되고 우리가 만 든 규칙에 따라 운용되기는 하지만 결코 실재에 대한 지식을 제공 할 수는 없다 . 비록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들지는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자기인식은 수학이나 논리학 (덧붙이자면 서양 장기나 문장 ( 紋章 )이나 소설)보다는 덜 < 투명 > 하겠지만, 우리 자신이든 타자든 모든 인간은 수동적 방관자가 아니라 능동적 행위자로서 인간행동 에서 표현된 정신상태들이나 의식적 목적들을 이해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 그것들에 < 침투 > 할 수 있다 . 이처럼 우리가 정신의 < 변양들 > 로부터 우리 자신울 인식한다는 원리는, 전혀 다른 문화 권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인 간의 자기에 대한 지식은 단순히 자연적 요소들의 연속발생 success i on 과 동시발생 com p resence 을 관찰해서 얻는 지식보다 더 욱 < 투명한 > 지식이요, 수학의 < 원인적 > 지식에 더욱 근접한 지 식이다. 그렇다면 역사인식의 위상은 어디쯤에 자리매김될 수 있 는가? ’ 역사인식은 순수하게 인위적인 것들에 대한 연역적 혹은 형 식적 < 지식 sc i enza > 이라는 한편과, 확실하지만 불투명하게 주어 지는 < 맹목적 > 자연에 대한 과학적 귀납적 실험적 지각적인 <의 식 cosc i enza > 이라는 다른 한편 사이의 중간쯤에 자리매김될 수 있 울 것 같댜 우리가 인간의 과거를 이해한다는 것은, 원리상 돌이 나 나무나 동물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역 사인식은 우리의 사회가 경험한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가 경험 한 것, 이를테면 <알키비아데스가 겪었던 것>을 이해하는 일이다 .9 } 이러한 이치에서, 돌이나 나무나 동물에게도 인식가능한 과거는
9) < 알키비아데스가 겪었던 것>은 역사학의 적합한 제재에 관해 아리스토텔 레스가 든 실례이다 .
있지만 역사는 없다. 역사인식은 단순히 과거 사건들에 대한 인식 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인식이란 인간활동에 속하는 사건들, 따 라서 개인전기나 집단전기를 구성할 수 있는 사건들에 대한 인식 으로 한정된댜 10 i 이러한 사건들은 인간이 무엇일 수 있는가를 인 식한 자에게만 이해가능하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 혹은 감 각적 존재들에 의해 사고되고 의지되고 상상된 것들은, (비록 그것 들의 종국적인 원천은 하느님이겠지만) 그것들이 일정한 규칙에 따르 고 (관명하고 체계화가능한) 일정한 원리에 복종하는 한에서만, 동일 한 규칙과 원리에 따르는 타자의 상상력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는 말이다.
10) 이것은 축자 an s ic h 와 대자 fur s i ch 라는 헤겔의 유명한 구분에서 뿌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장의 각주 13) 도 읽어 볼 것.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의사소통이 가능하겠는가? 어떤 사람에 게 전달된 구문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 의해 이해될 수 있으며, 같 은 구문에 대한 다양한 표현방식들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겠는가? 귀납추론에 의해서는 아니다. 과학적 방법은 타자에 대한 지식을 보충해 주고 더 개연적인 혹은 덜 개연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고 체계화해 주고 교정해 주고 정당화해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획 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비코에 의하면, 타자에 대한 지식은 인 간만이 구비한 상상적 이해력에 의해 가능하다. 상상적 이해력이 없다면 역사가의 과업은 수행될 수 없다. 한 역사가의 성패는 그 가 이런 소양을 얼마나 풍부하게 갖추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잘 활용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 다. 지금 내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만일 내가 상대방의 평소 관점과 사회적 <환경>을 이해하고 있다면, 죽 그가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리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
의 과거를 이해하고 있다면, 상대방이 나에게 전달하는 내용을 더 욱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이치에 의해서 (내가 필요한 재 능을 갖추고 열심히 노력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원시인들의 필연적 조건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원시인들은 조 직화된 사회에 살지 않았다는 사실, 좀더 공들이면 그들에게 언어 가 없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비코는 이러한 작업에 <엄청 난 노력 > 이 요구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현재로부터 뒤돌 아서 현재의 사회와 문명을 모두 지워버리고 사고한다는 것, <대 지의 거대한 숲 > 을 방황하면서 오늘날의 어린이보다도 적은 숫자 의 동작이나 그림언어에 의해 그나마 매우 드물게 의사소통하던 원시적 야만인들이 어떤 상태에 있었으리라고 상상한다는 것. 이 같은 상상은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대단히 고된 작업이다. 물 론 우리가 원시상태의 완벽한 복원을 희망할 수는 없다. <이 태고 적 인간들의 거대한 상상력에 침투한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넘 어서는 일이댜 >11) 그렇지만 비코는 원시시대에로 끈질기게 되돌 아갔댜 역사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결국 다른 사람들 에게도 이해가능한 것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들지 않은 바위며 나무며 동물이 이해불가능하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상상력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관습과 언어와 심성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온 현생 원시인들의 감정과 사고와 행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듯이, 태고적 문화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도 필수적 원천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작업은 실제로 어떻게 수행될 수 있는가? 홉즈가 묘사한 공격적인 야수들, 혹은 <그로티우스가 말하는 구제불능의 백치들 이나 푸펜도르프가 말하는 방랑자들>, 혹은 자연상태의 이론가들
11) N. S. par . '378 , par . 338 역시 참조 . 이에 관해서는 제 1 부 5 장에서도 논할 것이다 .
이 말하는 군처(群核) 무리들――-이 원시적 존재들이 사고하고 의지한 바를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비코는 청년 시절에 인류의 기원에 대한 루크레티우스 Lucre ti us 의 해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댜 ® 청년 시절의 비코는 에피쿠로스주의와 데 카르트주의에 몰두했으며, 그의 가톨릭 신앙은 크게 의심받기도 했댜 그러나 『새로운 과학』을 쓴 비코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는 창조적 성령의 편재를 믿었다. 그를 만들었고 그 안에 살아 있는 하느님을 믿었다. 하느님은 거대한 중심불이요 비코 자신은 하나의 자그만 불똥에 지나지 않았다. 이 같은 기독교 신앙의 견 지에서, 비코는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수행된 영적 활동이 직접 경험에 의하지 않고도 이해가능하다는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믿음 울 피력하기도 했다. 실제로 수많은 주석가들이 언급하듯이, 비코의 언어는 정통 가톨릭교리보다 범신론이나 범신론(t}I.心論, pa np sy -
® 특히 비코는 루크레티우스의 『 자연사 De rerum na t ura 』 로부터 영향을 받 았는데, 이 시는 르네상스 시대에 에피쿠로스파의 부활과 함께 새롭게 수용되 었으며, 17 세기에 특히 가상디의 유물론 철학과 함께 심도 깊게 논의되었다. 비코 동시대의 나폴리 지식인들 사이에서 루크레티우스와 에피쿠로스파와 가 상디의 철학이 한 묶음으로 각광을 받았던 이유는 그것이 다음과 같은 문제 둘의 맥락에서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어떻게 자연적_감각적인 상태로 부터 문명적-이성적인 상태로 전환했던가, 그럼으로써 형성된 < 태고적 지 혜>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 < 태고적 지혜>의 형성과 섭리는 어떤 관계에 있 는가, 섭리의 빛이 조야한 이교민족들의 태고적 지혜를 형성했다면 그들의 지혜는 일종의 <원초적 신학>(태고신학( 太古 神 學 , prisc a t heolo gi a) )이 아 닌가? 동등 기독교 정통교리의 투사들은 < 태고적 지혜 > 나 <태고신학>의 이단적 함축을 경계했으며, 그 추종자를 < 자유사상가li be rti ne > 로 바판했 다. 이 <지혜> 에 관한 동시대인들의 논의는 비코의 초기 작품뿐만 아니라 (비록 그 자신은 부정하려 했지만) 후기 작품에도 깊히 반영되고 있다. 특히 『 새로운 과학 』 의 주제인 <시적 지혜>는 이러한 논의 상황의 산물이라고 말 해도 과언이 아니다.
c hi sm) 의 기미를 줄기차게 보여 준댜 그러나 비코가 범심론자였 든 크로체와 제자들이 주장하듯 절대적 관념론자였든 간에, 또한 비코의 신앙이 어떤 심리적 뿌리를 가진 것이었든 간에, 이 같은 선험적 가정들은 비코의 역사인식론을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 지 못한댜 비코가 가장 강조한 것은 상상적 재구성의 능력이었다. 인간정신의 < 변양들 > 을 인식하기 위한, 그리고 인간존재가 행하 고 사고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며 할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인지 를 인식하기 위한 왕성한 상상력이야말로 비코가 요구한 능력이었 다 . 일례로 로마인들이 최초의 법전 < 12 표법>을 솔론 시대의 아 테네인들로부터 빌어왔다는 로마의 전설은 도저히 진리일 수 없음 을 논증할 때, 비코는 로마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 기가 실증적으로 인식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해서 자 기가 형이상학적 통찰력만으로 과거를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도 아니다 . 다만 비코는 로마인들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 라고 추정할 따름이다 . 여러 증거로 미루어 보건대, 당시 로마인들 은 야만상태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처럼 야만적인 사람들이 아테 네가 어디 있는지를 알았을리 없거니와, 설령 알았다 해도 과연 아테네 문화가 로마의 건설에 적합한 법체계를 구비하고 있는지, 솔론의 업적이 어떤 본성이나 가치를 지니는지를 파악하지는 못했 을 것이다. 그럴리는 전혀 없지만, 선사시대의 로마안들이 이 모든 것을 얼마간 알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아티카 지방의 어휘를 (그리 스어로부터 전혀 영향받지 않은) 라틴어 특유의 어휘로 번역할 수 없 었을 것이다. 예컨대 <12 표법>에 등장하는
된다. 비코는 특정한 시대와 장소로부터 인간행동에 관한 증거들을 경 험적으로 축적하여 이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는 과학적 추론의 통상적인 과정에 매달리지 않는다(물론 비코가 이 과정을 완전히 무 시한 것은 아니다). 비코가 더욱 크게 의존한 것은, 문명화란 무엇을 뜻하며 야만상태와는 어떻게 구별되는가에 대한 직접적인 파악이 요, 개인이나 사회가 겪어가는 자기의식의 성장단계들에 대한 통 찰이다. 이 같은 자기의식의 성장단계들은 다시 인간의 구성요소 들에 대한 파악에 의존하여 재구성된다. 부연하자면, 비코의 논증 은 인간의 자연적 요소와 영적 요소가 상호작용하면서 시대마다 조건마다 다른 다양한 인간능력 , 다양한 감정양태나 표현방식, 다 양한 개념과 범주의 진화, 다양한 제도와 습관, 이것들에 구속되는 다양한 <생활양식 > 을 형성해가는 과정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파 악한다. 물론 실제로 발생한 것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체계적인 ―과학적이든 <상식적>이든-방법이 우리에게 없다면, 이 같은 포괄적 통찰은 내용을 결여할 수도 있고 어쩌면 그 같은 통 찰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 그러나 사실적 정보나 이성적 추 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1 21 정신을 소유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자 극에 반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극에 반응한다는 것은 규칙을
12) 비코는 자료를 검토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연역적 방법이 필수적임을 잘 알고 있었다 . 그러나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그는 스피노자나 시몽 신부 Pere Sim o n 같은 파괴적인 성서 비평가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초래한 회의주의를 우려하고 있었다(스피노자와의 관계에 관해서는 , 모밀리아노 Arnaldo Mo migli ano 의 홍미 로운 논문 , Vi co 's Scie n za Nuova, Hi st o r y and Theory , vol. 5, 1966 을 참조). 비 코는 상상력 곧 상상적 통찰력 이 야말로 그의 시대에 위협적이고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던 이 회의주의라는 지적 유행에 대한 해독제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사 후에 정통 가톨릭 비평가들은 이 죄목으로 그를 비난했다 .
준수하거나 정책을 추진하는 일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또 그것은 사랑이나 증오, 숭배나 권위인정과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상상적 이고 유아적이고 순진하고 종교적임은 무엇을 뜻하며 비판적이고 노년적이고 소유적이고 미학적임은 무엇을 뜻하는가? 주인이 된다 는 것은 무엇이고 종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들에 답할 수 없다면, 경험적 사실들이 아무리 많이 축적되어도 별 쓸 모가 없을 것이댜 오직 감정 있는 존재들만이 이 같은 본원적 이 해력을 갖출 수 있는 바, 그나마 그들은 자기들과 비슷한 피조물 들만을 이해한댜 천사는 천사만을, 인간은 인간만을 이해할 수 있 다는 말이다 . 우리의 출발점은 이 같은 이해의 능력이다. 우리는 이 같은 능력을 얼마 못 갖춘 존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마저 없다면, 우리는 출발조차 할 수 없을 것이요 , 인간존재로 불리울 수도 없을 것이다. 이 같은 이해의 능력을 싹이나마 갖추었다는 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본질에 해당한다 .13 1
13) 그렇지 만 Leon Pomp a , Vic o 's Scie n ce, Hi st o r y and Theory (v ol. 10, no. 1, 1971), pp. 49-84 은 다른 견해 를 보여 준다 . 비록 내게는 부적합해 보이지 만 , 이 잘 정리된 논문에서 폼파는 비코의 < 과학 > 이 진정으로 과학적임을 증명하고자 노력하면서, 비코가 말하는 < 변양들>-논문의 상당 부분이 할애된 주요 용어들의 하나인 ___ 이란 개인적이 아닌 사회적 <목적들과 필요들과 효용들 > , 죽 < 사회 세계의 것들>을 뜻한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는 < 정신 men t e > 역시 법칙들에 의해 지배되는 일반적인 사회의식 으로 취급하면서 , 이 법칙들은 비코의 새로운 과학의 토대가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 이러한 견해는 옳을 수도 있다. 비코는 사회들과 계급들의 목적을 논의하면서 < 세계사적> 개인들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러한 해석은 , 비코가 현재의 인간도 매우 어렵기는 하지만 태고적 야만 시대의 동떨어진 <사회적 목적들과 필요들>에로 <침 투 > 할 수 있다고 상정하게 된 정확한 경로를 얼버무린 채 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진행과 반복 cors i e ri cors i의 연속적인 단계들을 결정하는 법칙들 은 특수한 사회현상이나 문화현상을 재구성해 주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으
며 지나치게 개괄적이다. 자연과학에서 사용되는 과학적 방법은 그것이 < 외부적 > 인 지식을 낳을 뿐이라는 이유에서 배제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행위과 작품에 대한 < 내부적 > 전망을 가지고 있다 . 만일 비코의 방 법이 딜타이의 <이해 Vers t ehen > 처럼 동일한 문화 내에서든 시간적 거리와 문화적 차이들을 관통해서든 사람들이 서로 를 이해 혹은 오해하게 만 들 어 주는 상호소통의 능력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비코는 과연 무엇을 의도하 고 있단 말인가? 물론 그가 말하는 상상력 fan ta s ia , 죽 우리 와는 다른 세 계 혹은 우리의 일상적인 친숙한 경험과는 다른 낯선 경험에 상상적으로 < 침 투>하는 능력은 헛점 많은 개념일 수 있으며, 그것만으로는 역사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역사적 진리는 일상적 연구 방법에 의한 검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상력이 하나의 필요조건일 수 는 있지 않을까? 만일 그것이 없다면, 자료들이나 명제들의 단순한 수집을 떠나, 우리가 발견하려고 하는 세계, 하나의 가능한 세계, 곧 한 사회나 한 시대의 <초상(肖像)>이 무엇인지조차 인식할 수 없지 않을까? 우리가 타 자를 이해하지 않고는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우리가 어디서 어 떻게 왔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는 우리의 현재 상태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 그러나 똑같이 우리는 우리 자신 및 우리 세계와 타자와의 관계에 의존하지 않고는 타자를 이해할 수 없으며, 우리의 현재로 부터 소급하여 추적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과거를 이해할 수도 없다. 이 말 이 옳다면 비코는 오히려 동시대의 의미론적 맥락에서 <과학 > 이라는 용어 를 사용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폼파 박사가 이 용어의 사용을 독접하려는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우리 사이에 의견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토픽 전체에 관해서는 Pete r Wi nc h, The Idea of a Soc ial Sc ien ce(Routl ed g e, London, 1958) 에서의 탁월한 논의를 참조 .
비코의 새롭고도 혁명적인 발견은 이처럼 역사적 통찰의 의미를 강조한 데 있다 물론 경험자료들의 도움없이 역사적 통찰만으로 실제로 발생한 것들을 < 직관 > 할 수는 없다. 역사적 통찰은 발생 할 리 없었던 것들을 배제할 수 있을 뿐이다. 더욱이 역사적 통찰 은 변화· 인과관계 • 성장·문화 유형 • 시간적 연속성 • 시대착오 등 애매하기 그지없는 기초 개념들에 의해 수행된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개념들이 없다면 우리는 경험자료들을 정리할 수도, 특징 들을 추정할 수도, 역전불가능한 관계를 지각할 수도 없다. 예컨대
영국사에서 우리는 13 - 14 세기에 어떤 사건들이 발생하지 않았다 면, 영국의 사회경제 • 종교적 조건이 15 세기에 그리 전개되지는 않았 을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여기에 덧붙여, 12 세기의 역사만 아 는 사람은 그것을 제아무리 상세하게 알더라도 15 세기예 영국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이해하거나 설명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하곤 한 댜 혹은 우리는 『햄릿 』 류의 작품들이 기원 후 3 세기 외몽고 사회 에서는 구성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정반대 가정에 의 존하는 이론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모순이라고 경멸할 것이다. 여 기서 < 않았을 것이다 > 라든가 < 될 수 없었을 것이다 > 와 같은 판 단은 역사감각의 범주에 속한다. 무엇이 무엇과는 통하지만 무엇 과는 통할 수 없는가에 대한 감각의 범주에 속한다. 사회의 수명 에서든 개인의 생애에서든, 유아기며 청년기며 장년기며 노년기며 몰락기 등 역전불가능한 과정이 존재한다는 인식, 언어나 제식이 나 경제관계의 제 유형은 사회적 성장의 매 단계에 상응한다는 인 식 ―― 」 비코는 자기 동시대를 포함한 모든 시대의 철학자들과 법 학자들이 이 같은 인식을 결여해 왔다고 주장한다. 만일 이 같은 인식을 갖추고 있었다면 그들이 어찌 태고적 인간들도 자기들처럼 복잡한 정신상태 속에 살았다고 믿었겠는가 .141 이러한 몰지각은 그
14) 폼파 박사는 앞의 논문에서, 역사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란 현재의 우리 에 관한 모든 사고의 조건이라는 식으로 비코롤 곡해했다는 이유를 들어 필 자 를 비판 했 다 . 현재편에서의 사고는 정합성 혹은 불가능성 같은 개념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만일 비코가 그런 식으로 사고했더라면 그는 동시대 학자 들 의 비역사적 태도와 이로 인한 시대착오와 오해를 그토록 통렬하게 비판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폼파는 주장한다. 그러나 비코뿐만 아니라 필자 도 이러한 오류를 범한 것 같지 않다. 특정 사회 내에서 무엇이 존재하며 무엇은 존재하기 힘들거나 생각하기 힘든가에 대한 인간의 감각이, 그 자신 의 세계에 속하는 것에만 의존할 필요는 없다. 다만 대강의 범주나 펑퍼짐 한 정합성은 필요하다. 한 사회에서의 온갖 활동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자
료들은 통상적인 경험적 탐구 방법, 이를테면 관찰이나 가정이나 확증 같은 것에 의해 발견된다. 그렇지만 이 자료들을 올바르게 해석하려면, 역사가에 게는 다른 원리들의 도움이 필요한 바, 바코의 새로운 과학은 바로 이러한 원리들을 천명한 셈이다. 그의 새로운 과학은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하며 이 해가능한 <법칙들>에 의해, 각 문화가 거쳐가는 필연적 단계들의 연속을 지시하고 있다. 이러한 발견은 유비에 기초하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 삶의 역전불가능한 패턴과의 유비에 기초하거나, 한 인간이 속한 사회가 짧은 기 간 동안 직간접으로 경험해 온 과거사와의 유비에 기초하는 것이다. 역사란 그 일부는 우리 자신의 삶에 의해 형성되며 나머지 부분은 우리를 낳은 사 회 유형에 의해 형성되는 구조화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바, 역사 없이는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해서도, 우리 사회의 직접적 과거에 관해서도, 시공간적 으로 우리의 사회와 가까운 사회들에 관해서도 사고할 수 없을 것이다. 오 히려 시대착오를 범하는 . 학자들의 잘못은 멀리 떨어진 과거에 대해 확실한 순서를 부과하지 않는 데서 발생하곤 한다. 원시 적 단계는 성숙한 단계로, 성숙한 단계는 몰락의 단계로 이어진다는 식의 순서는 꼭 필요하다. 이 순 서는 명백하며 역전불가능한 것이다. 그렇지만 필자가 비코의 테제를 이처 럼 매우 그럴듯하게 해석하게 된 것은 폼파 박사의 덕택이다. 그에게 진심 으로 감사드린다.
들의 직업을 훼손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학 sc i ence of man 을 기초 부터 재구성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비코의 용례에서 인간학 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모든 것들에 대한 연구를 뜻한다. 따라서 인 간의 육체 혹은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육체의 물질적 속성들처럼 인간이 자연세계와 공유하는 요소들은 인간학으로부터 배제된다. 바코가 논적으로 선택한 이론가들 중에는 비역사적인 시대착오 를 범한 자들이 포함된다. 자기들의 <위대한> 시대에나 있을 법 한 문명적 속성을 원시인들에게 부여한 자연법론자들이나 사회계 약론자들이 그러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같은 이성주의자들, 홉 즈와 로크 같은 공리주의자들, 가상디 P. Gassend i 같은 <에피쿠로 스주의자들>도 그러했다. 그들 사이에 견해 차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만인이 고정적 불변적인 인간
본성을 공유한다고 가정한 점에서는 모두가 한결같았다. 그들은 완벽하게 실현가능한 도덕적 심리적 구조가 존재하며 이 구조로부 터 모든 권리며 의무며 법이 논리적으로 연역될 수 있다고 가정했 다. 권리며 의무며 법은 모두 만인이 공유하는 보편적 목표로부터 나온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비코는 그로티우스, 셀던, 푸 펜도르프 등 위대한 법학자들의 재능과 박학을 홈모했고, 그들의 (특히 그로티 우스의 ) 사회 법 soci al laws 관념 에 큰 영 향을 받았음을 인정하기도 했댜 그렇지만 비코는 그들이 발전 develo p men t이나 발생 nasc i men t o 의 관념을 결여했다고 비판했댜 <본성 na t ura> 은 발생에서 형성되며 바로 이 본성에 의해 어떤 세대나 문화는 다른 세대나 다른 문화로 성장하는 바, 그들은 발생의 관념을 깨닫지 못한 탓에 사회적 성장의 특정 단계에 속하는 다양한 활동 영역들 을 묶어 주는 유기적 연관성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발생론적 설명의 타당성을 깨닫지도 못했다. 발생론적 설 명은 환경의 변화에 따르는 인간적 목표의 변화를 파악하는 데에 도 중요하지만, 인간적 목표와 인간 행동의 변화에 따르는 환경의 변화를 파악하는 데에도, 혹은 인간적 목적과 <맹목적> 환경이 주고받는 (종종 인간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곤 하는) 상호작용에 의한 환경의 변화를 파악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비코 사상의 핵심 적인 관념에 따르면, 개인이든 사회든 발전의 제 단계는 에피쿠로 스학파의 주장처럼 우연적인 것도 아니요,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처 럼 기계적인 인과관계로 엮어지는 것도 아니다. 발전의 매 단계는 인간이 이해가능한 목적을 추구하는 연속 과정, 죽 인간이 자기와 세계에 대한 이해롤 통해 자기의 능력을 세계 속에 실현해 가는 일관된 과정의 제 국면이다. 역사란 인간의 능력을 매개삼아 작용 하는 섭리에 의해 인도되는 질서 있는 행진이다. 이 행진 과정에
서 세계이해의 유형 type, 느끼고 행동하고 표현하는 방식의 유형 은 가일층 정교해진댜 하나의 유형이 선조로부터 태어나 선조를 능가하여 발전한다는 말이댜 그런데 매 유형이나 문화마다, 다른 유형이나 문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들이 존재하기 마련이 다. 바로 여기서부터 인간의 경험과 활동에 대한, 인간자신에 의해 결정되는 인간의 역사와 생명에 대한 < 현상학적 > 이해가 시작된 댜 역사과정은 처음에는 무의식적이지만 점차 의식적으로 심화되 는, 자연에 대한 창조적 재단(裁斷)이다. 산 자연과 죽은 자연 모두 에 대한 점진적인 정복인 것이다 . 비코의 이러한 발상은 헤겔과 헤겔주의자들,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정교하게 개 념화되어서 근대세계를 지배해 왔다. 마르크스가 비코를 칭송한 것도 바로 이 대목에서였다. 인간과 역사에 대한 비코의 전망은 그 이후로 더욱 진척된 측면도 있고 더욱 악화된 측면도 있지만, 어쨌 든 비슷한 부류의 근대적 전망에서 선구자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되었고, 왜 지금의 우리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우리가 지금 진정으로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우리 자신이 발전해 온 과정을 연구하는 것만이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길이다. 개인과 사회, 소우 주와 대우주, 개체발생과 집단발생을 유비하는 해묵은 습관은 르 네상스인들의 사고를 지배했던 것만큼 비코의 사고를 사로잡는다. 이러한 유비는, 제 문화가 발생하고 성장하다가 쇠락하게 되는 경 로와 원인을 참된 이야기 안에 담을 것을 목표로 삼는다. 『새로운 과학』도 같은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이 과업이 어떻게 달성될 수 있는가? 수단은 우리의 손 안에 있다. 다만 우리가 지금까지 우리 의 경이로운 잠재력을 깨닫지도 사용하지도 못했을 뿐이다 .1 5 ) 열쇠 는 인류가 과거에 경험한 것들 속에 놓여 있다. 우리는 태초 이래
15) 보댕 Jea n Bo di n 과 베이컨도 우화와 신화가 원시인의 믿음이나 사회 구조 에 대한 증거 를 제공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들의 통찰은 비코의 것만큼 넓 고 깊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을 비롯한 르클레르크, 라피토 P. F. Lafitau , 램지 Ramsay 둥으로부터 비코가 받은 영향은 그 자신이 인정하는 것보다는 훨 씬 크다고 생각된다.
로 인류가 경험해 온 것 을, 인류가 남긴 신화며 언어며 사회 • 종 교적 제도 안에서 읽을 수 있다. 열쇠는 다양한 민족들의 옛 관습 과 제도를 전하는 이야기들 안에 , 태고적 유물들에서 발견되는 옛 생활방식의 증거들 안에 , 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원시사회에서 이 따금 발견되곤 하는 (살아 있거나 화석화된) 과거의 잔재들과 (가장 중요하게는) 이 현생 원시인들의 시( 詩 )며 마술적 제식이며 법체계 안에 놓여 있다. 이 열쇠를 쥐겠다는 생각은 의적 혼돈으로부터 내적인 질서를 파악하겠다는 생각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열쇠 곧 < 아리아드네Ari adne 의 실 > 은 미궁으로부터의 탈출을 도와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미궁의 복잡함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 어쨌 든 비코는 자신이 아리아드네의 실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 실은 인간이라면 마땅히 어떠해야만 하는가에 관한 플라톤적 관념인 것 처럼 -그러나 폴라톤의 정태적이고 관념적인 패턴이라기보다 는 인류의 진화를 지배하는 < 성장 > 의 원리, 곧 불변적인 운동원 리인 것처럼 - ――보이기도 한다. 즉 발전은 상이한 상태들이 연속 적으로 이어지는 변화의 과정이지만, 원형은 언제나 동일하다는 것이다 . 그렇지만 비코는 이 같은 플라톤적 진리를 확장하여, 이해 가능한 <실체>는 하나이되 그것의 발전 <양태들>은 다양하다고 주장한댜 1 61
16) N. S. pa r. 1096. 비코의 플라톤주의에 관한 해설중에서 내가 보기에 가장 훌 륭하고도 믿을 만한 것은 , Werner Sta rk, Gi am batt ista Vic o 's Socio l og y of Knowledg e, in Gia m batt ista Vic o , An Inte r nati on al Sy m p o siu m , eds. G. Tag liac ozzo and H. Whit e( J o hns Hop kins Un ive rsit y Press, Baltim o re,
이 단일하고 불변적이며 중심적인 진리는 그 것 의 다양한 < 양태 들> 혹은 외양들을 통해 파악될 수 있다. 이 양태들의 명석도나 완성도는 국면마다 다르다. 이를테면 미숙한 사회의 < 확실성 ce rttun > 으로부터 고급 문화의 < 진리 verurn > 에 이르기까지, 혹은 감각적 시( 詩 )의 구체적 이미지로부터 형이상학의 추상적 이미지 에 이르기까지 ,1 71 실로 다양한 국면들이 전개된다. 그렇지만 진리 는 각 문화의 < 출발점과 몰락점 > 을 체계적으로 비교함으로써 파 악될 수 있다 . 각 문화가 겪어 가는 국면들을 문화끼리 비교해 보 면 공통적인 요소를 추출할 수 있다(비코는 이러한 과정을 ‘ 귀납'이라 고 부른다) . 이 공통적인 요소는 바로 불변적인 내적 원형 혹은 플 라톤적인 법칙이다. 그것은 현실 세계의 모습을 결정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있음직한 모든 사회들에 대해서도 영원히 타당하다. <발생, 성장, 성숙, 쇠퇴, 몰락 > 은 보편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1 8 1 비 코의 이러한 생각은 훗날 완성된 근대 역사주의의 탄생를 예비한 것이다(역사주의는 그것의 경험적 형식에서는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확장했지만, 그것의 교조적, 형이상학적 형식에서는 역사적 상상력 을 오 히려 억제하고 왜곡했다.). 헤겔의 <이성의 간지(好智) > 를 예비한 비코의 < 섭리 > 는 이러 한 플라톤적 패턴에 따라 혹은 그것에 편승하여 작용한다. 섭리는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오히려 각종 제도들의 창조로 향하게끔 바꾸 어준다. 이 제도들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참된 목적이 지상에서 실 현될 수 있도록 도와 주었지만 , 사람들 특히 이기심과 탐욕으로 가 득 찬 원시인들은 그 같은 결실을 의도한 적도 없었고 그 같은 결
1969), pp. 297-309. 17) N. S. par . 821 . 18) N. S. par . 348.
실이 이루어졌음을 알지도 못했다. 이 플라톤적인 패턴이 바로 섭리 이다. 섭리는 제 민족의 < 영원한 원형적 역사 s t ori a ide ale ete m a> 를 지배하는 법칙이다. 비코가 그러했듯이 우리는 과거를 주의깊 게 성찰함으로써 < 야수인간들f e rini > 의 이기적 욕망이 어떻게 정 의와 진리를 위해 사용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一 ~ < 야수인간 > 이 라는 주제에 있어 최고의 전문가는 < 인간을 있는 그대로 > 적나라 하게 기술한 타키투스이다 . 정의와 진리의 씨앗은 비록 죄로 인해 묻혔지만 가장 타락한 야만인에게조차 명백히 살아 있다 .1 91 그렇지 만 인간본성이 경험의 흐름 안에서 그 흐름을 지배하는 어떤 불변 적이고 정태적인 < 핵심 > 으로 추적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경험 의 흐름 자체, <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방식으로 생성되는 것> 자 체에서만 파악된다 . 20 1 서서히 바뀌며 성장하는 도덕적 • 종교적 • 미 적 전망에 관해, 혹은 사회적 • 경제적 • 언어적 습관에 관해 우리 가 인간 집단들의 과거와 현재로부터 수집할 수 있는 모든 것, 이 를테면 비교신화학이며 철학이며 법학이며 인류학이며 민속학이 며 사회학 등의 제 과학이 충실히 탐구해 온 모든 것은 이 같은 섭리의 작용에 꼭 들어 맞는다. 하지만 볼 줄 아는 눈과 들을 줄 아는 귀가 있어야 한다 . 바코가 동시대인들에게 그처럼 획기적이 고 포괄적인 전망을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은 그리 놀 라운 일이 아니다.
19) Alai n Pons, Natu re et hist o i r e chez Vic o , in Les Et ud es ph ilo soph i- qu es No. 1(1961, P aris) 를 참조
20) N. S. pa r. 1 47.
제 4 장 역사주의의 맹아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만든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 으로든 물리적 환경에 반응하면서, 그들이 의지한 것이 아니라 <섭리가 주관하는> 본성의 변화에 반응하면서, 그들에게 고유한 삶의 모습을 만들어 간다. 그들의 현재조건을 이해한다는 것, 그리 하여 그들이 당면한 정치적 • 도덕적 • 사회적 • 법적 • 종교적 현안 들에 답한다는 것은, 그들이 어째서 이 같은 현안들이 발생한 상 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왜 우 리가 내세운 대표자들에게 복종해야만 하는가? 온갖 종류의 모순 적인 대답이 주어져 왔지만, 모든 대답은 종국적으로는 인간존재 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 나름의 모델에 의존한다. 또한 각 모델은 대체로 각 이론가가 자기만의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세계 안에서 실제로 경험한 특징들로부터 구성되든지, 그가 자신의 이론을 위 해 가정한 특징들로부터 구성되든지, 이 두 가지 모두로부터 구성 된다. 그러나 그로티우스의 자연인이든, 홉즈의 무자비한 이기적
인간이든, 스피노자의 자유롭고 이성적인 정신이든, 이런 식으로 추상화된 인간의 모델들이 모두 현실적 혹은 개연적 측면을 포용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비코에 따르면, 자연법이론가, 사회계약론 자, 공리주의자, 개인주의자, 유물론자 , 이성주의자 등 온갖 부류의 학자들이 절망적인 오류에 빠진 것은 그들이 체계적으로 변화하며 발전하는 인간적 전망들과 동기들의 연속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 문이요, 이러한 전망들과 동기들이 다시 인간본성의 변화하는 요 구들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본성이 < 생성 nas ci men t o > 이요 과정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비 코에 의하면 인간본성은 그것의 요구들이 충족되는 과정에서 변화 하기 마련이고 , 따라서 항상 새로운 특징들, 새로운 요구들, 사고 와 행동의 새로운 범주들을 낳기 마련이다. 비코 동시대의 주도적 이론가들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다 . 그들은 역사와 사회의 본성도, 개인의 본성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 태고적 인간의 비길 데 없는 지혜 > 에 관해 즐겨 말했다 .” 그들은 마치 태고적 선인들이 후손들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았고, 후손들은 단지 태고적 선인들 의 발견과 발명을 이어받았을 뿐인 것처럼 이야기해 왔다. 더욱 불합리한 주장이 개진되기도 했다. 태고인들은 완벽하게 이성적인 존재였다느니, 그들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와 거의 똑같았다느니, 역사적 성장의 현단계에서나 발생함직한 문제에 그들도 똑같이 처 해있었다느니 하는 주장들이 그러하다 . 만일 시원을 연구하지 않 는다면, 우리는 선조들의 사고와 행동이 어떤 문제에 대한 응답이 었는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선조들의 응답은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형성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의
1) N. S. pa r. 128.
모습도 그 뿌리까지 추적되지 않는다면 이해될 수 없 을 것이다. < 이론은 그것이 다루는 소재가 시작된 시점으로부터 출 발해야 한 다. 넛 이렇게 해야만이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현재의 인간으로 되 었으며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문제로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N S. pa rs. 314, 394.
이러한 논의에는 역사주의의 맹아가 엿보인다. 발생심리학과 사 희의식의 역사에 비추어 지난 단계들을 추적하여 우리가 걸어 온 길을 밝힌다는 것 __- 이것만이 독단적인 법학자들과 정치사상가 들의 끊임없는 논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 어떤 문제는 그것이 발 생한 역사사회적인 맥락에서만 이해가능하며 해결가능하다. 역사 적 증거에 비추어 볼 때, 원시 야만사회에서 시인들과 입법가들이 동시대의 원시인들로부터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은 채(마치 아테나 여신이 제우스의 머리로부터 완전무장한 채 태어나듯이) 방대한 지식과 완벽한 지혜를 갖추고 태어났다는 가정은 불합리하다. 오직 그들 만이 지식의 은밀한 출처를 알았고 동시대의 사회는 꿈도 꾸지 못 했던 지적 • 윤리적 속성과 통찰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주민에게 영 원한 법과 시대를 초월한 지혜를 나누어 주었다고 가정하는 것처 럼 우스꽝스러운 일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쿠르고스 L y kur g os 며 드라콘이며 호메로스며 솔론 둥 태고의 모든 신화적 현자들에게 바로 이러한 속성이 부여되고 있지 않은가 ? 31 대지의
3) 물론 비코는 이러한 속성이 유태민족에게는 부여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 그들에게는 하느님이 직접 진리를 계시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비코는 조 심스럽게도 이 성사(聖史)의 사례를 거의 논의하지 않는다. 그의 일차적 관 심은 자연법 원리를 비롯한 여타 신비한 지식들이 원시 이교민족들 사이에 서 발견된다는 주장을 논파하는 데 있었다 . 그는 한편으로는 이교도들이 유 태민족으로부터 자연법을 빌어와 그것을 타락시켰다는 웨 Dan iel Huet, 보
샤르 Samuel Bocha rt, 위트시우스 Hermann Wi tsiu s 동의 가독교 정통교리 를 거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형어 안에 기독교적 진리가 감추어져 있 다는 키 르허 At ha nasiu s Kirch er 등의 주장도 거 부한다. 비 록 이 교도들의 생활방식을 결정한 것은 하느님이지만, 자연주의적인 수단에 의해서만 그들 의 삶을 결정했다는 것이다(이 점에 관해서는, Arnaldo Mom iglian o, La Nuova Sto r i a Romana di G. B. Vic o , Ri vi s t a Sto r i ca Ita l ian a, 제 77 권 4 호, 1965, pp. 779-781 을 참조) .
거대한 숲속을 방황하던 노아의 후손, < 그 최초의 인간들, 그 어 리석고 무감각하며 무서운 거인 야수들 >~I _ _ -우리가 과연 이 피 조물들이 아무 어려움 없이 영원하고 불변적이며 보편적인 원리들 을 인식했다고 가정할 수 있겠는가?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을 구 속하며 인간이 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까지 도 영원히 규정하는 원리들을 그 조야한 원시인들이 알았다고 가 정할 수 있겠는가? 이 같은 원리들이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오늘날 의 가장 심오한 철학자들과 가장 박식한 법학자들 사이에서도 의 견이 분분할진대, 그것들이 태초부터 영원히 인간의 가슴에 새겨 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51 여기에 비코의 위대한 업적이 있다. 불변적인 (또한 그 속성과 목적이 선험적으로 인식가능한) 인간본성의 존재를 부정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세네카로부터 동시대의 권위 자들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흘러 온 서구의 중심적 전통에 도전한 것은 실로 거장의 솜씨가 아닐 수 없다. 비록 불변적 인간본성의 모델은 비록 역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것일 수 있지만, 과학의 정립을 위한 <분석적 허구
4) N. S. par . 374.
5) 비코의 이러한 의문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이 사상가들은 사람들이 언제나 그들이 추종하는 원리를 명시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고―一-비록 이 론적으로는 그럴 수 있겠지만 __· 주장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 코는 야만인이 이 원리를 무의식 적으로 추종했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는 다 .
analyt ic fi c ti on > 로서의 가치는 지닐 수 있다고 혼히 주장되곤 한 다. 원자나 경제인( 經濟 人)이 물리학이나 경제학의 초석으로 작용 하는 것처럼, 불변적 인간본성의 모델도 (비록 환상적 추상적일 수 있지만) 자연 대상의 계측이나 분류를 위한 규범 혹은 모형으로서 꼭 필요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비코의 반응은 자연법이론 및 사회계약론에 대한 비판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인간 모형이 역사성을 간과함으로써 실재로부터 너무 멀어졌으며 아무 쓸모없이 되었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인간의 만 드는 능력 특히 인간이 창조적 활동에 의해 스스로를 바꾸어 가는 능력을 배제하곤 하는데, 이 경우에 그것은 현실에 대한 만화에 불과하댜 현실에 적용되면 오류와 모순을 낳을 뿐이라는 말이다. 비코는 사회계약을 예로 든다. 동시대를 지배한 사회계약론에 의 하면 원래 숲속에서 고립적으로 방황하다가 숲 밖으로 나와 계약 을 이루어 함께 모여 살게 된 원시인들이 계약을 이루기 전에 이 미 계약이 무엇인지를 이해했다고 가정하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댜 규칙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에서 살지 않았던 사람들이 계 약처럼 복잡한 관념을 이해하거나 사용했을 리 없다. 계약과 약속 처럼 사회를 유지하는 정교한 장치나 규약은 규칙에 의해 지배되 는 사회 안에서나 발생하고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이 사회조직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정에서처럼 만인과 만인의 약속에 의 해서가 아니었으며, 군주정에서처럼 한 사람과 만인의 약속에 의 해서도 아니었다. 규칙이며 규약이며 계약 따위의 사회관계가 존 재하지 않았던 시점에서는 약속의 관념이 있었을리 없거니와, 설 령 있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이기 때 문이다. 따라서 국가가 어떤 계약 위에 건설되었다는 것은 논리모 순이다. 그 역이 논리적으로 옳다. 이러한 논증법에 입각한다면,
사회계약이라 불리우는 제도는 훗날의 각종 사회관습에 대해 역사 적 기원이 될 수 없으며, 오늘날 우리가 왜 지금처럼 행동하게 되 었는가를 (혹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게 되었는가를) 설 명하는 분석 도구로서도 아무 쓸모가 없다. 사회계약의 개념으로 는 오늘날 우리가 왜 화합하는가, 왜 권위에 대한 저항을 싫어하 는가, 왜 채무를 지불하는가, 왜 군대에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 는가, 왜 세금내는 것을 당연시하는가 등의 문제가 설명되지 않는 다는 말이댜 61 심지어, 실제로는 계약이 이루어진 적이 없지만 우 리가 마치 계약이 (암시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성립된 듯 행동한다 는 홉즈나 루소의 주장조차도 실상을 곡해하고 있다. 실상은 다르 댜 우리의 믿음, 행동, 특성, 경험이 오늘날처럼 된 것은 계약 따 위의 역사적 허구에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한때 어떠했 었기 때문이요 연속적 진보의 과정에서 일정한 단계에 있었기 때 문이다. 인간이 어떤 단계를 거쳐 현상태로 되었는지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인간이 어떻게 왜 지금처럼 행동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 다 사회계약 같은 정태적 모델은 사회학적 변수나 심리학적 변수 롤 고려하지 않는댜 그것은 현재 속에 살아 숨쉬는 과거의, 전통 의, 전래된 습관들의 영향을 무시한다. 이것들이 새롭게 취하는 모 습을 파악하지도 못한다. 실로 사회란 의식적 • 잠재의식적 • 무의 식적 기억, 개인적 • 집단적 반응과 정서, 사회 생활의 여러 유형 등 다양한 줄기들이 복잡하게 얽혀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큰 흐름
6) 홋날 흄 David Hume 도 정치 제도가 엄숙한 약속, 곧 계약에 의존한다는 견해를 반박하고 있는데, 이것은 비코의 주장과 똑같지는 않지만 유사하다. 흄은 사회적 효용 같은 요소가 약속의 신성함을 설명해 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 그렇지만 그러한 요소가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설득과 정당화 를 위해 약속을 필요로 하는 사회제도들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이다. 정태적 사회모델은 이 같은 진리를 무시하거나 왜곡한다. 우 리는 다양한 변수들을 고려함으로써만 한 가족, 한 종족, 한 민족, 한 역사시대의 특징에 관해 언급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의 뿌리 는 오늘날 거의 사라졌지만 추적 불가능하지는 않다 . 비록 과거는 너무도 불투명하여 우리의 애간장을 태우기는 하지만, 우리는 과 거 속에서 그 같은 뿌리를 찾울 수 있는 것이다. 과거 전체를 뿌리 에 이르기까지 추적하여 재구성할 정도의 상상력과 지식을 갖춘 사람만이 현재 안에서 그 뿌리의 결실들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 의 가치와 미래를 점칠 수 있다. 계약이며 보편적 이성이며 이성 적 이해관계 같은 개념은 홉즈나 스피노자에게는 중요했겠지만 비 코에게는 설득력 없는 신화요 무식자의 피난처에 불과했다. 우리 가 무엇으로부터 생성되었는가를 깊히 이해하면 할수록, 왜 우리 가 지금처럼 되었고 과연 지금의 모습을 지속하는 것이 바람직한 가 하는 난제는 점차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의 특징과 제도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현재적 가치도 설명해 줄 것인 바, 현재의 가치는 인간역사상의 특정 단계에 속한 것으 로 그 안에서만 나타날 수 있고 그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계몽 주의적 전망의 토대에는 절대적인 도덕적 • 미적 • 사회적 기준의 견지에서 인간의 과거 전체를 실수나 죄악이나 기만의 역사로 환 원하려는 태도가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본성이 고정 적이고 근본적이고 불변적이라는 잘못된 믿음으로부터 태어난 기 형의 열매에 불과하다. 그러나 비코의 일차적 관심이 윤리나 가치 판단의 문제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이해에 만족한 듯하다 ―이 점에서 비코는 자기의 논적이던 스피노자와 닮았다 .71 물론
7) Arnaldo Mom iglian o, 앞의 글, 특히 p. 781 ; Vic o 's Scie n za Nuova, 참조.
그는 도덕적 판단을 수행하기도 하며, 동시대의 신앙과 문명 속에 체현된 가치들의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것이 그의 <역사주의적>이고 보수적인 테제와 모순된다고는 보기 힘들다 . 비코는 간혹 기독교적 가치들이 초시간적이고 절대적임을 스스로에게 다짐이나 하듯이 주장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그 점 을 잊고 살아간 것 같다. 대체로 비코는 <시대가 달라지면 풍습도 달라진다 > 는 격언에 충실한 듯하다. 이처럼 과거에 대한 지식이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에서 필수적 이라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사용되어야 하는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해답을 역사가들은 애써 무시해 왔다. 그 래서 역사가들이 저마다 제시하는 이야기들은 서로 모순될 뿐만 아니라, 인간존재의 실제적 발전과정을 파악한 사람들에게 거의 설득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처방은 가까운 곳에 있댜 비코는 인간에 대한 참된 역사지식을 가능케하는 세 가지 오염되지 않은 원천이 있다고 주장한다. 언어와 신화와 유물. 이것 들은 결코 거짓말하지 않는다. 그는 박식과 상상력과 용기를 총동 원하여 이 테제와 씨름하고 있다.
제 5 장 역사 인식의 길 一상징과신화 인간은 느낌이며 태도며 사고를 상징 속에 체현한다 . 상징은 사 람들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자연적 수단이지, 미래의 세대를 속이 거나 즐겁게 하려는 목적에서 꾸며낸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상징을 해독할 수 있는 정확한 길을 알기만 한다면, 상징 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운반하는 정신과 전망을 파악할 수 있도 록 해주는 믿을 만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언어란 먼저 사고하고 나 서 사고된 것의 표현 수단을 찾는 사람들의 의도적인 발명품이 아 니다. 어떤 관념과 그 관념을 표현하는 상징은 사고가 수행되는 순간에조차도 분리되지 않는다. 어휘로든 이미지로든 우리는 상징 에 의해 말하거나 기록하지만, 우리의 사고 또한 상징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사고와 상징은 하나이다.” 어휘로부터, 어휘를 사
1) 메스트르 Jos eph de M ai s tr e 가 비코보다 약 100 년 뒤에 < 사고와 언어는 어엿한 동의어이다>라고 말했을 때에도 이는 매우 새로운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아마도 하만이나 해르더보다는 비코로부터 유래한 것 같다 .
왜냐하면 메스트르는 동시대의 국소수의 비코 독자들 중 한 사람이었지만, 하만이나 헤르더의 견해는 한참 뒤에야 파리에 (그리고 페드몽 Pi edmon t에)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용하는 방식으로부터,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정신적 과 정과 태도와 전망을 추론할 수 있다. 왜냐하면 < 언어가 그것을 말 하는 사람의 소질i n g en ti um 에 의해 형성된다기보다는 소질이 언어 의 특징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 이러한 관찰은 큰 의미를 담고 있다. 인간은 말과 글의 흐름 속에 태어난다 . 말과 글은 정신 에 의해 형성되는 것 이상으로 정신을 형성한다. 이러한 통찰은 아마도 비코 시대의 유명한 논쟁, 즉 이탈리아어 문체에 대한 불 어 문체 의 우위 성 을 주장한 부우르스 Abbe de Bouhours 등에 의 해 촉발된 논쟁의 와중에서 형성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매우 중요한 요점을 전해 준다. 그것은 현실의 기본구조를 반영한다는 불변적이고 논리적으로 완전한 언어의 가능성에 대한 부정이며, 따라서 라이프니츠에 의해 암시되었고 현대에는 러셀 Be rtl and Russell 및 그의 일부 제자들에 의해 개진된 바 있는 저 유명한 보 편언어 이론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인간 세상에는 그 같은 근본구조도, 완전하고 불변적인 본질의 세계도 있을 수 없다 는 것이 비코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들과 세계와의, 그 들 서로 간의, 그들과 그들의 과거와의 관계를 어떤 종류의 언어 들로 표현해 왔는가? 비코는 우선 그가 정신의 <시적(詩的)> 양 태, 곧 시적 언어, 시적 법률, 시적 윤리, 시적 논리 등으로 부른 것에 관해 언급한다. 그에게 <시적>이라는 용어는 인류 초기의 단순소박한 인민대중에 의해 표현되는 양태를 뜻한다(이것은 독일 인들이 주민일반 혹은 <민족 Volk> 에 즐겨 부여하는 성질이기도 하다).
2) De nostr i, Op e re, I, vol. 1, p. 95. Gia n tu rco , 앞의 책. p. 40 과 비교할 것.
이것은 인류의 노년기에서 자의식이 강한 학자나 전문가나 현자에 의해 표현되는 양태와 뚜렷히 대조된다 . 최초의 인간 곧 원시 야 만인들은 의사소통에서 자연적 기호와 제스추어를 사용했다. 비코 는 이룰 <침묵적 동작 mu t e ac t>이라고 부른댜 3) 어떤 실물을 지 시함으로써 그것과 닮은 다른 사물을 의미하거나 표시하는 일, 혹 은 어떤 것에 대한 그림 표상에 의해 그것과 닮은 실체들의 부류 전체를 의미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테면 상형어나 표의어 가 그러하댜 비코는 이러한 언어가 한때는 세계 모든 곳에서 사 용되었으나, 인류 문화의 주류로부터 오랫동안 고립되어 온 이집 트와 중국(그리고 신대륙의 인디안 종족들)에서만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고 추정한다. 같은 이유에서 비코는 글말이 입말에 선행했다 고 믿는다. 이 실물이나 기호나 그림이나 제스추어는 물질적 대상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오늘날 정신적 성질이라 부르는 것도 지시할 수 있다. 원시시대에는 정신적 성질을 표현할 수 있는 분절적 어 휘가 아직 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시언어의 절대적 빈곤이라 는 비코의 (잘못된) 가정에 맞추어 보자면, 추상적 관념은 극소수 의 제스추어나 그림에 의해 지시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말하 자면 그 시대에는 <정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육체와 육체적 속성으로부터 전이된 어휘들이 사용된다 .>4 ) 이 같 은 진화론적 견해는 18 세기 초에 지배적이었던 다른 유명한 이론 들, 이를테면 언어가 합의된 규약에 의존한다는 콩디야크 Con di llac 의 규약주의적 공리주의적 언어이론, 언어의 기원을 자연음의 모 방에로 귀인시킨 정반대의 견해, 혹은 언어의 신적 기원에 관한 쉬스밀히 Suss mil ch 의 이론, 혹은 루소 등이 제창했던 언어의 감정
3) N. S. pa r. 32.
4) N. S. par . 237.
기원론보다 훨씬 풍요로운 결실을 약속해 준 것이었다.
인류의 상승에서 다음 단계는 은유, 직유, 이미지 등의 사용으로 점철된다. 이것들은 우리가 오늘날 (비코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일 상적인 의미에서) < 시적 > 이라 부르는 언어를 특징짓는다. 비코는 원시인이 각각의 사물을 각자에 고유한 < 자연적 > 이름에 의해 지 시하지 않았다고 본다(물론 아담은 각 사물에 각자에 고유한 이름을 부 여했었지만, 대홍수로 인해 아담이 세웠던 고도의 문명은 파괴되어 버렸 다) 〉 원시인은 각 사물을 < 생명이 부여된 물리적 실체>에 의해 지시한다. 우화와 신화, 혹은 우화나 신화의 등장인물들은 <상상 적 보편자들im a gi na ti ve u ni versals > 이다 ? 말하자면 그것들은 어 떤 실체의 부류 전체를 그것에 적합한 보편개념의 도움 없이 개체 에 의해 지시한다 . 원시적 단계에서는 아직 추상화의 능력이 충분 히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편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따라 서 (아직 명석하게 부류로서 인식되지는 못했겠지만) 어떤 부류에서 눈 에 띠는 하나의 실례에 의해 그 부류 전체를 지시할 수밖에 없었 다. 여기서 < 실례>는 그 자체를 지시하는 동시에 그것의 부류 전 체를 지시한다. < 제우스 > 는 하늘의 이름인 동시에 신들의 아버지 이자 우주의 통치자인 존재의 이름이요 천둥과 공포와 의무의 근 원에 대한 이름이다. 죽 제우스는 사람들이 위기에 처할 때 의지 할 수밖에 없는 모든 강제력들의 체현자인 동시에 그것들의 수행
5) N S. pa r. 4 01-402. 비코는 이런 식으로 기독교 정통 교리를 유지하는 동 시에 에피쿠로스적-진화론적 이단설을 피해가고 있다. 17 세기 말에 종교재 판소는 이러한 이단설을 이유로 나폴리의 비코 친구들 몇 명을 포함한 다수 의 동시대인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비코가 이단의 협의를 두려워했을 수 는 있다. 그러나 그가 두려움 때문에 에피쿠로스적-진화론적 이단설이나 여 타의 주장에서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6) N S. par s. 381, 403.
자이댜 <헤라클레스 > 는 인류에게 대단히 유익한 노 동을 수행한 어떤 영웅적 개인의 이름인 동시에, 다양한 신화들에서 등장하는 모든 영웅들의 부류에 대한 이름이기도 하다. 모든 민족이 각자 나름의 헤라클레스를 숭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포세이 돈>은 삼지창을 든 한 신격(神 格 )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바다들도 지시한다. <레아 > 는 대지의 상징인 동시에 한 여 인 곧 거인들의 어머니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 비코 는 이 같은 상징성을 <믿을 만한 불가능성 >8) 이라 부르면서 그것을 < 시 > 에 <적합한 소재>로 간주한다 . 이 이미지들은 세월이 한참 흐르고 나면 논리적 혼동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원시인들에게 그것들은 혼동의 산물이 아니라 사고의 범주이다. 비코는 이 대목에서 주의 를 재삼 환기한다. 만일 이러한 유형의 정신상태에 침투하기 위해 뼈를 깍듯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조상의 낯 선 세계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우리 자신의 세계를 이해하는 열 쇠를 쥘 수도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생각하기에는 < 육체가 정신 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한때는 천둥치는 하늘이 제우스라 고 믿어졌다 .>9) 하늘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인격 , 곧 제 우스이다 . 실로 이것이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 Ver gili us 의 <만물은 제우스로 충만하나니>라는 시구의 의미이다 . 1 0 1 현대인은 추상자로 사고하지만 원시인은 감각에 매몰되어 있었다 . 따라서 <이 최초의 인간들의 거대한 상상력에 침투하는 것은……우리 능 력 밖의 일이다. 그들의 정신은 완전히 감각에 빠져 있었고 격정
7) N. S. pa rs. 402, 549.
8) , N. S. pa r. 383.
9) N. S. pa r. 3 83.
10)
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육체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 그렇지 만 이 광대한 상상력에 < 침투 >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Ill 우리는 인격이 원인이라 상상한 이 < 야만적 괴물들 > 의 정신에로 < 하강 > 하여! ?’ 그것을 < 이해 > 해야만 한다. 이 원시인들은 제우스 같은 신성한 존재를 정말로 보았다고 말하곤 했으며, 제우스가 < 손짓에 의해 명령하고 , 그 몸짓은 진짜 말씀이며, 자연은 제우스 의 언어 > 라고 믿었다 .1 3) 이로부터 점복di v i na ti on 이 발생한다. 점복 은 원래 < 신들의 언어에 대한 학문 > 이었으며 그것을 <그리스인 들은 신학이라 불렀다 > ― __ 그리스인들 뿐만 아니라 훗날의 신비 주의자들 심지어 비코의 젊은 동시대인이었던 버클리 George Berkele y와 하만도 그렇게 생각했다 . 제우스는 하늘인 동시에 <감 정과 욕망을 가진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 > 였고 ,1 4) 자연은 <공감적 자연 > 이라 불리우는 < 여왕 > 으로 의인화되었다 . 이러한 세계가 오늘날 완전하게 파악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원시사 회를 비슷하게나마 파악하고자 한다면 , 그 세계에로 <침투> 혹은 < 하강 > 하여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비코는 이러 한 인류학적 접근을 자신의 가장.중요한 업적으로 자평했다. <이 최초의 인간사고가 이교세계에서 발생했던 양상을 재현함에 있어 우리는 큰 곤경에 처하곤 했으며, 이러한 곤경으로 인해 무려 20 여 년의 연구 기간이 소요되었는데……(이 세월은) 우리 자신의 인간화 되고 문명화된 본성으로부터, 우리가 결코 상상할 수는 없지만 심 혈을 기울인다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매우 난폭하고 야만적인
11) N. S. par s. 378 一 379.
12) N. S. par s. 338, 375.
13) N. S. pa r. 379.
14) N. S. pa r. 377.
본성에로 하강하기 위한 것이었다 > 1 5) 이 어려운 작업은 우리 정신 외부의 증거에 의존하여 수행되기보다는 일종의 자기분석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 < 자신들의 정신의 변양의 내부 > 를 들여다 보는 < 형이상학자들 > 이 그렇게 행하듯이, < 명상하는 자 > 자신의 개인 적 정신의 발전단계들을 유아기로부터 노년기까지 추적해야 한다 는 말이다 .1 61
15) N. S. pa r. 338.
16) N. S. pa r. 374.
우리는 일반적으로 언어의 축어적 ]iter al 사용과 은유적 meta - ph ori ca l 사용을 구분한다. 축어 적 임 은 사물을 그것 에 적 합한 이 름 에 의해 부르는 것이요 사물을 단순소박한 어휘로 기술하는 것이 다. 반면에 은유의 사용은 , 줄거움을 주기 위해서든 생생한 상상적 효과를 낳기 위해서든 말재간을 과시하기 위해서든, 단순한 표현 울 장식하거나 인상 깊게 만드는 세련된 기교를 뜻한다 . 이 점에 서 은유는 의도적인 말 다듬기의 산물이요 일정한 노력에 의해 축 어적 의미로 번역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은유는 축 어적 의 미를 인위적으로 꾸민 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비코 의 경우에는 은유와 직유, 심지어는 알레고리조차도 의도적인 꾸 밈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생활상을 표현하는 자 연적 방식이다 . 그에 의하면 인간은 한때 개념 아닌 이미지로 사 고했으며 <하늘이며 바다며 땅처럼 거대한 육체들에게 감각과 감 정을 부여했다 .>17 1 우리에게는 단순히 수사적 기교로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실제로 감각하고 관찰하고 기억하고 상상하고 희망하 고 경외하고 숭배한 모든 것, 요컨대 그들의 경험 전체를 질서짓 고 연관짓고 전달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아것을 비코
17) N. S. pa r. 402.
는 < 시적 논리학 > 이라고 부른다. 시적 논리학은 영웅시대를 특징 짓는 언어 및 사고의 형식을 뜻한다. 시가 산문에, 노래가 입말에 반드시 선행하는 것처럼, 언어의 은유적 용법은 축어적 용법에 선 행한댜 < 모든 시적 화법에는 두 가지 원천이 있는데, 언어의 빈 곤과 화자를 이해시킬 필요가 그것들이다 . >IHI 애니미즘적이고 인 성투사적이었던 원시인이 오늘날 은유라고 부르는 것의 견지에서 사고했던 것은, 현대인들이 < 축어적 > 구절로 사고하는 것만큼이 나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일이었다. 오늘날 축어적 표현으로 통용 되는 많은 것들에는 죽은 은유, 즉 어원을 잃어버린 은유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기원이 상기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것을 옛날처럼 느낄 수 없다 . 흐릿하게조차 느끼지 못한다. 다만 언어의 변화하는 구조가 < 어휘들에 의해 지시되는 사물들의 역사 를 우리에게 전해 주기 > 때문에 1 91, 우리는 그 구조로부터 선조의 세계관을 얼마간 엿볼 수 있울 따름이다. 옛날에 <은유가 모든 민 족들의 언어에서 대부분을 차지한> 까닭은 원시인에게 추상화의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댜 .~) 비코는 원시인이 직유며 이미지며 은유 를 사용했던 방식은, 현대인이 깃발이나 제복을 사용하고 파시스 트가 경례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 그것은 사물을 직접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이 같은 기호사용에 관해 오늘날 은유적이 니 축어적이니 말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비 코에 의하면, < 나는 화난다>라는 오늘날의 표현을 원시인은 <내 가슴에서 피가 끓는다>라는 식으로 말했는데, 이 <은유적>인 구 절은 원시인이 사고하고 지각하고 느꼈던 방식에 대해 특별히 가
18) N. S. par . 34.
19) N. S. par . 354.
20) N. S. pa r. 444.
치 있는 증거가 될 수 있댜 원시인이 끓는 피에 관해 말하면서 느 낀 것은, 뜨거운 남비의 끓는 물에 대한 지각과 직접 관련된 것이 었댜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분노의 감각이 그러한 지각과는 별로 관계 없다는 사실과 뚜렷히 대조된다 . 비코에 의하면 옛 시인들이 구성했던 경이로운 이미지나 불멸의 금언은 의도적 공상의 산물이 아니라, 그들의 상상력과 직접적인 감각의 소질로부터 나온 것이 댜 그들의 이러한 능력은 우리의 것보다 훨씬 강력했을 뿐만 아 니라 종류에서도 전혀 달랐다 . 그 대신 그들은 엄밀 유추나 과학 적 관찰의 능력에서는 형편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 려면, 우리는 우리와 동떨어진, 우리에게는 너무도 낯선 능력을 구 비한 정신으로 우리 자신을 투사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꽃병 의 입술 쟁기의 이빨 강의 입, 땅의 목, 이것 한 줌 , 저것의 심장, 광물의 핏줄, 대지의 내장, 속삭이는 파도 , 노래하는 바람, 미소짓 는 하늘, 신음하는 탁자, 눈물 홀리는 버드나무(수양버들 ) 2 1 1 사 람들이 이러한 구절들을 자연스럽게 말했던 세계는, 이것들이 이 른바 축어적 표현과는 대조적인 은유적 표현으로 느껴지는 세계와 는 총체적으로 다른 세계였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발견은 비코의 가장 혁명적인 업적들 중 하나이다.
21 ) N. S. pa r. 405. 비코는 이 같은 예들을 인체로부터 취해진 은유들에서 추 려내고 있다.
비코에 의하면 언어는 관념과 마찬가지로 사물들, 죽 사람들이 살아가는 구체적 환경에 의해 직접 결정된다. 이 점에서 언어는 사물들의 가장 믿을 만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도처에 산재한 기발 한 실례들을 통해서, 비코는 매우 독창적이고도 중요한 통찰력을 드러낸다. 일례로 그는 <대지의 거대한 숲> 속에서의 생활이 <오 두막 안>에서의 생활보다, 오두막 생활은 마울이며 도시며 아카데
미 등에서의 문명 생활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앞선다는 사실을 지 적한댜 여기서 그는 라틴어가 숲과 관련된 생활로부터 나온 것이 라고 추정한댜 (그는 라틴어가 태고적 언어라고 생각했댜) 이러한 사 실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한 편의 논고(즉 『 지혜 』 )를 일련의 어휘 들에 대한 어원적 탐구에 할애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22) <' lex' 의 예 를 보자 . 그것은 처음에는 도토리 채집을 뜻했음이 분명하다. 이것으로부터 도토리 나무, 죽 ‘i lex' 라는 단어가 파생한다(실제로 ‘a quil ex' 는 물을 모우는 사람을 뜻한다). 왜냐하면 도토리 열매를 낳는 것은 도토리 나 무이며 이 열매들에 이끌려 굶주린 자들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 J ex' 는 콩의 채집이 되었다. 콩이 ‘le g um i na’ 라 불리우게 된 것은 이 때문이 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그렇지만 아직 법률을 기록하기 위한 속어 문자 vulga r le tt ers 가 발명되지 않았던 시절에, ‘lex' 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필요에 의해 시민들의 모임, 혹은 민회를 뜻하게 되었으며 … … (시민들의) 의사에 권위를 부여해 주는 법이 되었으며…… 끝으로 문자들을 모아…… 단어의 묶음으로 만드는 것은 ‘모운다 혹은 읽는다J e g ere’ 라고 불리워졌다.> N. s. par . 240. 23) N. S. par . 354. 24) N. S. pa r. 2 39. 25) 신학적, 형이상학적, 실증적 단계라는 콩트의 삼 단계 법칙은 명백히 신의
시대, 영웅 시대, 인간의 시대라는 비코의 세 시대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 로 보인다. 비코는 이러한 관념이 <태고적 이집트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 것 이 라고 말한다(N. S. pa r. 173).
대가 처음 등장하는데, 이 시대의 < 시적 > 언어는 < 자연적 상징 어>나 상형어나 표의어였다. 그것은 한마디로 < 침묵 > 기호였다 . 천둥을 비롯한 자연 현상들은 신들의 언어이다. 따라서 전문가, 이 를테면 사제나 점복관( 占 卜 官 )만이 동물의 내장이나 새의 이동 같 은 상징을 해석할 수 있다 . 뒤이은 < 영웅의 > 시대는 영웅들의 과 두제에 의해 통치된다. 이 시대에는 직유와 은유로 충만한 언어가 특징적이댜-아직 은유는 자연과 직접 관련된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 시대가 등장한다. 이 시대는 이성 ra gi one 과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 지배된다. 우리의 의지에 따라 고안되고 변화하는 순수하게 규약적인 언어, 따라서 <인간이 절대 군주로 군림하는 언어 > 가 그것이다 우 비코는 더욱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 노력한다. 처음에는 의성적 단음절어, 다음 에는 복음절어가 출현하며, 그 뒤를 따라 감탄사, 대명사, 전치사, 명사가 차례로 동장하며 , 마지막으로 동사가 등장한다. 이 순서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동사가 전해 주는 < 전과 후>의 개념이나 운 동의 개념은 사물에 대한 단순한 파악에 비해 뒤늦을 수밖에 없으 며, 이처럼 명사에 의해 대상을 지시하는 것보다는 개인 신원에 대한 감각이나 본능적 외침에 의해 전달되는 상태가 앞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무분별한 추정에서 그는 최초의 동사형 이 명령형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적 추정들로 인해 비코의 핵심 관념의 폭 넓 은 함축이 가리워져서는 안 된다. 상징체계는 문화의 중핵이요, 상
26) N. S. pa r. 32(pa r. 935 참조) .
징체계의 형태론적 발전은 문화의 성장과 함께 진행되다는 관념이 그것이다. 더욱이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늘 인간이라는 이유에서 , 비코는 모든 민족에게 공통적인 하나의 < 정신적 언어 menta l lan g ua g e > 를 주장한댜 비록 < 관습과 전망의 유형들이 다양한 만 큼 수많은 언어들이 존재하지만, 사물의 본성이 그러하듯이 모든 민족들에게 공통적인 하나의 정신적 언어가 존재함이 분명하다. 그것은 인간의 사회 생활에서 있음직한 모든 일들의 본질을 균일 하게 유지하면서 그 일들의 다양한 얼굴 만큼이나 많고 다양한 변 양들을 통해 그 본질을 표현한다. >떠 } 하나의 통일적인 요소로서의 정신적 언어는 인류를 동일한 종( 種 )으로 묶어줌으로써 역사를 이 종적( 種 的) 발전의 이야기로 만들어 준다. 비코는 이것이 다양한 언어로 존재하는 속담들의 유사성에 의해 증명된다고 생각했으며, (비록 각각의 문화는 상이한 환경에서 상이한 속도로 발전하겠지만) 모. 든 민족에게 공통적인 근본 어휘들 vo ci men t a li로부터 하나의 <사 전 > 이 구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 . t 이 정신적 사전을 구성하는 핵 심 어휘들 (혹은 관념들) 중에는, < 신>, <가족>, <영웅>, <점조 ( 占 兆, ausp ice )> < 가부장권 > , <희생>, <토지에 대한 권리>,
27) N. S. par . 161. ® 비코가 말하는 < 정신적 언어 > 가 실제 어휘를 지칭하는지 아니면 관념을 지칭하는지는 불분명하다 . 비록 비코는 관념과 언어가 분리될 수 없다고 주 장하지만(벌린은 이 점을 강조한다), 그가 <정신적 언어>를 언급하는 문맥 은 다소 혼란스럽다. 예컨대 그는 < 다양한 분절적 언어들을 기원으로 되돌 려주는 정신적 사전 > 에 관해 언급하는데 (N.S . pa r.145), 여기서 정신적 사 전은 일종의 어원집이라는 인상을 준다. 반면에 그는 『 새로운 과학 』 의 초판 에서는 < 모든 민족들에게 공통적인 하나의 정신적 언어가 존재하는데, 이 언어는 사회생활에서 통용되는 사물들의 실체를 통일적으로 지시하며 그 실 체를 사물들의 다양한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변양들로 표현한다>고 말한다 . 이 문맥에서 정신적 언어는 확실히 관념적이다.
< 명령 > , < 권위 > , < 정복 > , < 용기 > , < 명성 > 같은 것들이 있다. 말하자면 이것들은 어떠한 시대의 어떠한 인간 존재도 인식했고 유지했던 근본 어휘들이자 관념들이다. 비코는 이러한 것들의 발 전을 추적함으로써 모든 사회들이 경험하고 반복한 이야기를 재구 성할 수 있다고 믿었댜 었} 이 계획은 너무 단순하고 무모한 것인지 도 모르지만, 결국은 독일 역사주의의 영향 하에서 역사서술의 혁 명을 야기한 씨앗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의 새로 운 방법론은 혁명의 날을 향해 의미 있는 일보를 내디디고 있었지 만, 동시대에는 그것이 아직 고대인의 지혜와 현대인의 지혜중 어 떤 것이 우월한가에 관한 유명한 논쟁에 적용되어 주목받고 있었 을뿐이다.
28) Enzo Paci, lng e ns Sy lv a(Mondadori , Milan o, 1949) 에서, 파치 교수는 인 간 집단의식의 역사의 심연에서 반복하는 테마들에 대한 바코의 인식과, 셸 링 과 노발리 스 Nova lis 같은 독일 낭만주의 자들 , 특히 바그너 Ric h ard Wa g ner 가 주목했던 위대한 신화들과의 유사성에 주목하고 있다 . 파치 교수 가 지적하듯이, 실제로 파프너 Fa fner 와 파졸트 Fasol t, 지그문트 Sie g m und 와 지글린데 S i e g li nde 는 비코가 말하는 < 야수-인간들 > 과 < 거인들 > 의 태 고적 세계에 속하는 신화적 인물들이다. 비코는 이미 바그너의 우주적 신화 들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비코는 인류사의 심연에서 끊임없이 반복하는 회고적 성향에 주 목한다(이것은 그의 동시대에 베이컨 및 자연법 이론가들에 의해 부활되 었던 태도이다). 이 성향은 먼 옛날 언젠가 경이로운 과학이 존재했 었지만 인간의 죄나 불행 탓에 유실되었다고 가정한다. 이 경이로 운 과학은 그것의 파편들을 담고 있는 태고적 유물들로부터 얼마 간 복원될 수 있을 것이었댜 29 } 이러한 가정은 고대신화에 현재를
29) 한 세기 뒤에 메스트르는 프랑스 계몽철학자들에 반(反)하여, 라틴어가 인류의 축적된 지혜를 담고 있는 비길 데 없는 보고라는 이유에서 교회가 라틴어에 부여했던 특별한 위상을 옹호했다. 그 역시 비코처럼 라틴어를 태
고적 언어라고 생각했다.
위한 심오한 교훈이 비장되어 있다는 확신의 토대를 이룬다. 신화 는 대홍수 이전에 우리 선조들이 소유했던 순수지식의 보고( 寶庫 ) 라는 확신이 그것이댜 엘리트 현자들이 통치한 태고에 그 현명한 선조들이 남긴 시며 신탁이며 격언에는 , 또한 원시 종족의 노래와 전설에는, 타락한 후손들에 의해 유실되거나 잊혀지거나 왜곡된 심오한 진리가 비장되어 있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비코는 거의 보 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던 이러한 믿음을 철저하고도 공개적으로 공 격했는데, 이것은 그의 독창적인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역사에는 황금시대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비코의 생각이다. 이러 한 생각은 그의 정통 기독교 신앙과 모순된다는 난점을 야기할 수 있었지만, 비코는 대홍수가 에덴동산의 문화를 포함한 예전의 모 든 문화를 파괴해 버렸다고 설명함으로써 그 같은 난점을 피해 갈 수 있었댜 30 1 대홍수 이후에 인간은 야수처럼 고독한 야만인으로 변해서 < 대지의 거대한 숲 > 을 방황했다 . 물론 태고적 시가 해석 되기 위해서는 지혜로운 정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태고적 시가 잊 혀진 영원한 진리롤 향한 통로일 수는 없다. 그것은 조야하고 야 만적인 세계를 우리 자신의 것과는 동떨어진 법률과 관습을 들여 다 볼 수 있는 창문일 뿐이다. <고대법은 일종의 엄격시이다 .> 3 1l 오늘날 우리가 운문과 산문으로, 혹은 법률과 역사로 구분하는 < 장르들 > 은 태고적에는 분화되지 않은 하나로 존재했다. 로마법
30) 한 세기 전에 장 보댕이 동일한 이유에서 황금 시대의 관념을 거부했다~ 것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비코는 그의 작품들을 잘 알고 있었다 . 보댕의 Meth o dus ad fac i /e m his t o r iar um co gniti onem 에 서 의 이 러 한 주장에 관해서 는 Pie r re Mesnard, ed., Oeuuers ph i/o soph iq u es de Jea n Bodin ( Pa ris, 1951), p. 2 268 을 참조. 31 ) N. S. par . 1037.
은 <하나의 엄숙한 시이댜 >모 I 비코에게 < 시적 > 이라는 단어는 <원시적인> _그렇지만 정형화된 ――-사회이미지를 뜻한다. 이 사회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그것이 창조된 시점에서 사람들이 그들 자신은 물론 그들의 사회관계를 인지했던 방식을 파악할 수 있다 . 일례로 진화의 특정 단계에서의 <자연적> 언어에 의해 작 성되는 <시적> 법률은 애니미즘과 주물숭배로 충만하다. 이 단계 에서 <정신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모든 것에 대해 스스로를 척도 로 삼기> 때문이다 .33 1 실제로 <어떤 것을 유발하는 자연적 원인에 대해 무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슷한 것과의 유바에 의해서조 차 설명할 수 없을 때, 인간은 그 자신의 본성을 그것에 부여한다. 이를테면 대중이 자석은 철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가 그러하다. >려) 자석이 철을 사랑한다는 표현은 결코 의식적으로 과장되거나 의도 적으로 꾸며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화의 특정 단계에서의 자연 적 표현으로서, 특정한 유형의 미성숙한 이해력을 예시한다. 한편 이 유형은 인간정신의 전개과정 안에서 _그 반복적인 모형 안 에서 _고유하고 불변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32) 같은 곳 . 비코가 <12 표법>을 호메로스의 시편에 상응하는 로마적 시편으 로 보고자 했다는 모밀리아노의 홍미로운 주장 (La Nuova Sto r i a Romana di G. B. V i co )도 참조할 것. 33) N. S. pa r. 181 . 34) N. S. pa r. 180.
언어에 대한, 화행(話行)의 철학적 의미에 대한 비코의 감수성은 대단히 현대식이댜 예컨대 그는 오늘날 학자들이 <언어의 수행적 기 능 perfom ati ve fun cti on of words> 으로 분석 • 분류하는 기 능에 이미 주목하고 있다. 말하자면 언어는 언어 외부의 어떤 것을 기 술하거나 그것으로 주의를 끌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법적 계
약이나 종교의식에서처럼 그 스스로 행위 혹은 행동적인 요소일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 35’ 언어란 기술하거나 명 령하거나 위협하거나 소리 지르거나 이미지와 정서를 운반하기 위 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 하나의 행동방식일 수 있다는 착 상은 매우 새롭고 중요하다. 그러한 착상이 최초로 표명되었을 때 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비코는 동시대의 농부들이 토지권 같 은 그들의 권리가 (어휘들 자체에 구속력이 있으므로) 계약서의 어휘 들 속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듯이, 원시사회에서 노예해방이라든지 사적 재산의 소유라든지 상해에 대한 보복 따위의 중요 행위들은 언어 자체에 의해 수행되었다고 주장한다 . 언어 자체가 원초적인 수행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의 > 시대에 아가멤논 A g a memnon 과 입다J e p h t hah 가 그들의 딸을 제물로 삼았던 것은, 맹세 하는 행위 자체가 자연적 원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맹세는 단 지 그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 현상 > 을 곧바로 바꾸는 (혹은 현상 을 바꿀 수밖에 없는)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언어가 이렇게 기능하는 사회는, 언어를 단지 기술이며 설명이며 표상이며 기도 며 명령이며 말장난 등으로만 사용하는 사회와는 전혀 다르다고 비코는 주장한다. 이 두 사회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고 느끼고 행동하고 사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35) < 언어의 수행적 기능>은 오스틴 J.L . Aus ti n 의 용어이다 . 홈즈나 홋날의 흄도 이러한 종류의 언어관을 어렴풋이 보여 주었지만, 그것의 완전한 의미 는 현대에 와서야 파악되었다.
바코의 이러한 가정이 옳으냐 그르냐는 문제는, 그의 독창적인 다른 가정들의 경우에도 그러하듯이, 비코의 실제 업적에 비하면 그다지 중요한 것이 못된다. 물론 그의 발생론적 어원학과 언어학 에는 명백한 오류도 있고, 지극히 소박하거나 환상적인 측면들도
많이 있다 . 그렇지만 필자가 아는 한에서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비 코가 맹아적이되 혁명적인 한 가지 진리를 파악한 최초의 인물이 라는 점이다 언어의 형식은 그 언어를 사용한 사람들의 정신에 접근하기 위한, 실로 한 사회의 정신적 • 사회적 • 문화적 삶에 총 체적으로 접근하기 위한 열쇠라는 진리가 그것이다 . 그에 선행한 누구보다도 명석하게, 심지어는 한 세기 반 전의 발라 Lorenzo Valla 며 발라의 제자들보다도 훨씬 명석하게, 비코는 특정한 유형 의 화법이 (혹은 언어의 특정한 용법과 구조가) 특정 유형의 정치 • 사 회 구조와 필연적인 < 유기적 > 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언어의 형식은 종교 • 법률 • 경제 활동 • 도덕 • 신학 • 군대조직 등 둥과 유기적으로 연관된다는 것이다 . 비코는 이 < 유기적 > 관계가 동일한 본성에서 수행되는 인간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추적가능하 다고 믿었댜 그는 특정한 생활방식이나 문화를 총체적으로 형성 하는 이 상호관계들이 우연적 순서에 따라서가 아니라 필연적 패 턴에 따라서 진행된다고 믿었다. 매 단계는 앞선 단계로부터 태어 나는 바, 앞선 선조의 계승인 동시에 거역이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이 필연적 패턴은 인간본성이라는 <싹 nasc im en t o> 으로부터 전개 되기 때문에 이해가능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변화의 패턴은 변화 하는 인간의 정신적 기능들로부터 형성되는 바, 이 기능들은 개인 이나 사회가 일정한 수명 내에서 밟아가는 객관적 • 보편적인 순서 를 따라 발전하면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간다. 이 과정은 기 록가능하며 이해가능하다. 그것이 이해가능한 까닭은 사람들이 자 신들의 힘들과 동기와 반응과 사회관계의 다양한 유형들을, 구경 꾼 아닌 참여자로서 의식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내부>로 부터 의식하기 때문이다(비코가 이러한 사실을 파악한 최초의 사상가 는 아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들의 체험 속에서 자기들에게 고유
한 목적들의 작용뿐만 아니라 그 목적들을 < 만드신 분 Maker > 의 작용을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섭리는 우리의 의식적 목적과는 다 르게 우리 삶의 모습을 만들어 가곤 한다. 그러나 섭리는 우리의 갈망, 우리의 목표, 우리의 동기,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만 자기의 의지를 전개한다. 이러한 견해는 < 이성의 간지 > 가 인간의 격정을 역사의 동력으로 이용한다는 헤겔의 견해와도 유사하며, 계급적 이해관계를 진보의 엔진으로 파악한 마르크스의 관점과도 유사하 댜 361 인간 연구에 고유한 영역은 인간이 전개해 가는 인간적 특징 이요 인간적 특징이 체현되는 문화의 패턴이다. 인간이 스스로 창 조한 것을 이해하는 방식은, 환경이나 단순 자료 등 < 외적인> 자 연을 이해하는 방식과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깊이 있댜 언어연구는 이러한 종류의 자기지식을 향한 여러 경로들 중 하나이댜 이상과 같은 비코의 생각은 매우 독창적일뿐만 아니라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36) 이 점에 관해서는 이 책 제 2 부 16 장의 끝부분을 참조할 것. ® 기원전 300 년 경의 그리스인 유헤메로스 Euhemerus 의 신화해석 방식을 추종하는 경향이 유해메리즘이다 . 유해메리즘은 신화의 <상징적> 기록으로
과거의 복원을 향한 두번째 대문은 신화학이다. 비코의 신화학 에서 신화란 르네상스 시대의 신고전주의 이론가들이 주장한 식으 로 고대 시인들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고안한 멋진 발 명품이 아니요 , 이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식으로 무지한 대중을 기만하거나 안심시키기 위해 무책임한 사제들이나 허풍쟁이들이 퍼뜨린 거짓 우화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 신화는 유해메리즘적 신 화학자들 Euheme ri s t s 이 주장하듯이 대중의 상상의 덕택에 영웅적 혹은 신적 위상으로까지 격상되었던 비범한 인간들에 대한 부정확 한 기록 (혹은 기억)도 아니다 ? 비코에 따르면 신화는 인간이 세
부터 그 상징이 포장하거나 왜곡한 사건이나 사실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 죽 신화는 자연사나 인간사의 재구성을 위한 일종의 < 사료 > 로 취 급된다 . 그러 나 비코는 신화가 무엇을 포장하며 왜곡하고 있는가의 문제뿐만 아니라 신 화를 만든 원시인들에게 그것이 어떻게 진리로 통용될 수 있었는가의 문제 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 따라서 비코에게는 신화가 < 역사의 변형이 아 니라 본질적으로 역사 자체>라는 크로체의 지적은 타당하다고 하겠다 .
계를 보고 이해하며 반응하는 체계적인 방식이다. 아마도 신화는 그것의 창조자이자 사용자인 원시인들에게만 완전하게 이해될 것 이었다. < 제 민족은 우화 안에 온갖 과학들의 싹을 감각적 언어에 의해 개략적으로 기술해 놓았는데, 훗 날 학자들의 전문화된 연구 는 그 싹울 이성적 추론과 일반화에 의해 해명하고자 노력했던 것 이댜 > 3 7 1 신화는 < 시인이던 최초 민족의 문명사이댜 >381 그것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느끼고 사고하고 말했던 사람 들 의 자연적 표현 양태로서, 오늘날의 우리는 그것을 최대한의 상상력 을 동원해서야 겨우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 떻게 하늘을 육화된 제우스로, 자연을 거대한 여인으로 보는 것이 정상이던 세계로 침투할 수 있는가? < 만물이 제우스로 충만하다 > 는 구절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어떻게 제우스는 신들의 아 버지인 동시에 하늘 전체일 수 있는가 ? 391 자연이 어떻게 < 감정과 애정을 느끼는 거대한 생명체>일 수 있는가 ? 401 이 대목에서 우리 는 <이 최초의 인간의 거대한 상상물들로 침투한다는 것 >, 그것 들을 <구체적> 범주로 사고하고 느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 이라는 비코의 지적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한다 . 4 1) 고대 그리스인
37) N S. pa r. 779. 38) N. S. pa r. 3 52. 39) N. S. pa r. 379. 40) N. S. pa rs. 377, '379 . 41 ) N. S. pa r. 378.
이나 로마인이 섬긴 신들은 초대 기독교 신학자들의 가르침과는 달리 악마들이 아니댜 그 신들에 부여된 속성들이나 이야기들은 시적 허구도, 미학적 명상을 위해 오랫동안 공들여 고안된 의도적 산물도 아니댜 신들과 신들의 이야기들은 태고적 인간의식의 < 시 적 > 창조물이댜 고대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 같은 < 민족의 정신 > 이 창조한 것이다. 신화는 이미 사멸하여 화석화되어 버렸지 만, 여전히 전문가의 참된 해부와 분석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신화 는 태고적 인류의 집단적 상상력의 구체적 표현 양태로서, 오늘날 의 비평가들에게는 신화 창조자들의 육체적 • 정신적 습관과 사회 생활 방식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가장 풍부한 원천이기 때문이 댜 이 점에서 < 우화는 관습의 참된 역사이댜 > 42 1 특히 호메로스 는 태고적 그리스 세계에 대한 정보의 보고이다 .431 <우화는 이교 민족들의 최초의 역사 > 요, 섞 l 따라서 < 신화학은 가장 먼저 배워야 할 학문이다. > 신화는 그것이 태어난 시대의 현실을 반영한다. 일 례로 신들의 관계는 그것이 원시사회의 특징을 상징한다는 견지에 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스나 로마의 시안들이며 철학자들이며
42) N. S. pa r. 7. 43) 같은 곳 . 44) N. S. pa r. 5 1. 오직 < 여러 이교민족들>의 역사일 수 있을 뿐이다. 유태민 족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이미 이성적이 되어 있었으며 (N. S. 초판, p.iii, pa r.18), 하나님에 의해 성서 속에 직접 계시된 그들의 역사는 고고학적 재 구성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 비코는 유태민족의 <신성한 역사>로부 터 실례들을 직접 취하여 그의 테제를 중명하는 방식을 피하려고 애썼다. 그가 성서라는 신화와 사실의 풍요로운 보고로부터 둥을 돌린 데는 이단의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라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그의 시선은 이따 금 성서 쪽으로 분산되기도 한다. 우화와 전설이 옛 <풍습>의 중거이며 <최초의 역사가는 시인이었다>는 생각은 베이컨뿐만 아니라 보댕이나 포 플리니에르 La Pop elinier e 둥의 16 세기 프랑스 역사학에서도 발견된다(이 책 제 2 부 19 장 참조).
비평가들처럼 신들의 < 불멸성 > 에 놀라거나 홍겨워한다는 것, 혹 은 신들을 단지 시작( 詩 作)을 위한 자료로 간주한다는 것은 올림포 스 종교를 오해한 탓이다 . 과도하게 세련된 훗날의 작가들은 역사 감각을 잃어버린 나머지, 자기들의 사회적 • 도덕적 범주들을 그들 과는 동떨어진 세계에 투사함으로써 과거를 오해했던 것이다. 훗 날의 작가들이 꾸며낸 알레고리적 우화도 순수 신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댜 오히려 알레고리적 우화는 태고적 신화와 가장 동떨 어진 것이댜 발전의 법칙이 있는 곳에는 체계적인 과학의 가능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 이제 비코는 새로운 원리로 무장하고서 오랫동안 망각 된 세계를 그 세계의 신화에 입각해서 재구성하고자 한다. 문법학 자들은 신화를 보존해 왔지만 신화의 < 참된 > 의미를 조금도 파악 하지 못했다. 그들에 대항해서 비코가 거듭 제기한 문제는, 이런저 런 우화나 이미지를 낳을 수 있었던 사회는 과연 어떤 종류의 사 회였을까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비코는 고대 전설에 대한 경제 적 해석의 아버지가 된다. 그의 경제적 해석은 당시에도 놀라운 것이었겠지만, 현대의 인류학적 해석들, 특히 마르크스주의적 해석 을 예비한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테세우스 Theseus 와 아리아드 네 Ari adne 의 이야기는 고대의 해상활동과 관련된 것이다. 황소머 리의 미노타우르 Mi no ta ur 는 아테네인들의 배를 약탈한 해적단을 표상한다. 황소는 고대에 뱃머리에 달려 있던 특징적인 문장(紋 章 ) 이며 그리스인들에서든 고(古)게르만인들에서든 약탈은 대단히 명 예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아드네는 항해기술을 표상한다. 그 녀의 실은 항해술이요 미궁은 에게 해(海)이다. 혹시 미노타우르가 약탈의 표상이 아닐 경우에는, 그는 혼혈아 혹은 크레타 섬에 도 래한 외래인을 뜻한다――_이것은 그 시대에 내륙으로부터의 이
주가 빈번했음을 보여 준다. 비코의 야심은 어떠한 신화도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 그의 사회경제적 해석에 보탬이 되지 않는 전설은 없댜 카드모스 Cadmus 는 원시인으로서, 그가 뱀을 죽였다는 것은 거대한 삼림의 개간이라는 관념을 전해 준다. 카드모스는 뱀의 이 빨로 밭울 가는데, 뱀의 이빨은 사실상 쟁기의 이빨이다. 카드모스 가 뱀에게 던진 돌은 딱딱한 흙 덩어리로서, 토지가 딱딱하다는 것은 농노들은 농토에 굶주려 있었고 귀족 혹은 영웅의 과두정이 토지롤 보유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밭고랑은 봉건사회의 신분이다. 이빨 사이로 튀어 나오는, 무장한 사람들은 영웅들을 뜻한다. 그렇 지만 영웅들은 카드모스의 신화가 전하듯 자기들끼리 싸웠던 것이 아니다(이 대목에서 비코는 증거가 <교정>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이러한 태도는 역사학적 • 비판적인 연구를 수행하되 자구에만 매달 리지는 않는 프로이트나 융의 추종자들의 자세와도 상통한다). 영웅. 들이 맞서 싸운 적은 약탈자들, 죽 여전히 숲속을 방황하면서 정착농경 민의 생존을 위협한 떠돌이들이다 . 미네르바Mi nerva 가 마르스 Mars 를 상해한 것은 귀족층이 평민층에 승리한다는 것을 뜻한다. 주피터에 대해 음모를 꾸민 미네르바는, 참주에 대항해 연합한 귀 족충을 뜻한댜 등등 비코는 고대의 계급투쟁에 큰 관심이 있었 댜 반 C.E.Vau ghan 교수는 귀족 지배에 대항한 평민층의 권리 투 쟁에 관해 비코가 해석했던 상징들의 목록을 작성한 바 있다 .45) 이 유용한 목록에는 세이레네스 S ir ens, 스핑크스, 마르시아스 Marsya s , 키 르케 Cir ce , 익 시 오누스 Ixion , 탄탈로스 Tanta lus , 미 다 스 Mida s, 파에 톤 Phaeto n , 안테우스 Anth a eus, 바쿠스의 시 녀 인 메
45) C. E . Vaug h an, Stu d ie s in the His t o r y of Politi ca l Ph ilo soph y Be for e and After Rousseau, vol. !(Mancheste r Un ive rsity Press, 1925) 에서 비코에 관 한 논고를 참조할 것.
나드들 Maenads 에 의해 사지를 껏긴 오르페우스, 주피터의 저주를 받은 불카누스 Vulcan, 페넬로페 Penelo p e 에 대한 구혼자들 등이 포함된다. 비코는 이 모든 것들이 정신적 외상에 가까운 집단적 체험에 대한 기억이요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들은 시간이 지 나면서 합리화되어 간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원래는 사회생활 전 체의 결정적 전환점을 표상하는 것들이었고, 전환의 과정에서 점 철된 상혼을 표상하는 것들이었다. 한편 메두사의 피에서 태어난 비마(飛馬) 페가수스 Peg asus 에 대한 비코의 해석방식은 대단히 이 채로우며 논리적으로도 홍미롭다. 이 신화는 언뜻 보기에 승마법 의 발명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비코는 더욱 심 층적인 탐색을 권유한다. 원시시대에는 아직 보편 개념이 결여되 어 있었기 때문에, 복합적 관념들은 그 관념들 각각을 특징적으로 지시하는 대상들의 공간적 결합에 의해 표상되었는데, 이것이 페 가수스 같은 육체적 기형을 낳았다는 것이다. 페가수스의 경우에, 날개는 하늘을 표상하며 하늘은 새를 표상한다. 새의 바행 궤적은 중요한 점조(占兆)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말에게 날개가 첨가되었 다는 것은 말 타는 귀족에게 점치는 권리가 주어졌고 이 권리의 힘으로 평민에 대한 권위를 유지했음을 뜻한다. 이렇듯 신화는 사 회질서 내의 권력이며 제도며 급진적 변화를 표상한다. 입법가 드 라콘, 권위를 나타내는 각종 상징물들, 그리스에서는 물론 중국과 이집트에서도 발견되는 뱀, 미노스나 헤라클레스나 이네아스 Aeneas 둥 갖가지 신화들의 내용을 실제 역사연대기에 끼워 맞추 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비코는 주장한다. 신이며 영웅이 며 범인은 모두가 신화이며 상징이다. 이네아스가 아베르누스 Avernus 호숫가로 하강한 것은 파종(播種)의 상징 이 다. 피 타고라 스며 솔론도 순수 신화임이 증명된다. 이를테면 솔론은 평등한 권
리에 대한 아테네 하층민의 열망을 표상할 따름이다. 아폴로 :,; ’ 는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개인적 • 사회적 기능을 상징한다. 아폴로는 처음에는 사냥꾼이고 다음에는 나무줄기( 權杖 )를 휘두르는 지배자 이며 그 다음에는 발명가이자 말 탄 사람으로 등장한다 . 그렇지만 그는 항상 늙지 않는 장발의 청춘이다. 이 모든 것들은 역사적 단 계에 따라 변화하는 사회적 습관이나 사회적 이상을 상징한다. 독 일 고전학자 볼프 F. A. Wol f와 그의 학파보다 대략 3/4 세기 앞서 서, 비코는 호메로스로부터 『일리아드 』 와 『 오디세이 』 를 저술한 개 인을 발견하기보다는 그리스인 전체의 민족적 기질g e ni us 을 발견 한다 말하자면 이 작품들은 그리스 민족의 수세기에 걸친 경험을 그 민족의 전망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4 7 ’ 그리스 7 대 도 시들은 저마다 호메로스의 출생지로 추앙받기 위해 경합을 벌이곤 했는데 , 그 진정한 원인은 호메르스가 그중 한 도시에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어느 도시에서도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리스 민족 자체가 호메로스였다 . >481 호메로스는 그리스 민족 전체의 창조적인 시적 상상력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요, 그리스 민족의 < 수많은 세기들>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물론 이 기나긴 세월은 『일리아드』를 『오디세이』로부터 구분해 주는 것이기도 하 다. 『일리아드』는 <자부심, 격분, 복수를 향한 갈망을…… 폭력의 영웅 아킬레스 > 를 노래한 북동 그리스의 어떤 시인에 의해 작성된 것인 반면에 , 49 1 『오디세이』 50’ 는 <페니키아 왕 알키노오스 Alc in ous 의 사치…… 칼립소 Cal yp so 의 유혹…… 세이레네스의 노래>, 그리
46) N. S. pa rs. 533-538. 47) N. S. pa r. 873. . 48) N. S. pa r. 얽 5. 49) N. S. pa r. 879. 50) N. S. pa rs. 879-880.
고 < 지혜의 영웅 율리시 스> 를 노래한 남서 그리스의 어떤 시인에 의해 작성된 것이었다 . 5 1 ) 그렇지만 호메로스의 시편들은 한결같이 , 20 세기 초의 일부 고전학자들이 < 구전으로 떠돌아 다닌 다수의 서사시들 > 이라고 부른 것들에 해당한다.
51) N. S. pa rs. 879-881, 789, 904.
제 6 장 역사 인식의 길 유물 비코의 사상은 때로 엉뚱한 구석도 있지만 대단히 풍요로운 함 축을 담고 있다. 상상의 과정, 곧 서로 다른 템포로 발전하는 개인 이나 집단의 잠재의식적 과정에는, 끊임없이 상징이 작용한다는 것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구원과 부활 대홍수와 재생 같은 이미 지들의 지속적인 반복으로 점철된다는 것. 신화며 마술이며 제식 이란 일정한 언어적 • 사회적 • 심리적 발전 단계에서 사람들이 그 들의 경험을 기술하는 자연적인 사실상 유일하게 가능한 방식이라는 것 인간의 태도와 믿음, 나아가 문화 전체는 사 회 변동과정에서 일정한 한 단계의 산물로서, 특히 이 단계의 계 급구조와 계급투쟁의 산물로서, 다른 단계들에서는 결코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이러한 가정은 헤겔과 마르크스를 경유하여 오늘날까지도 지식사회학과 문화사회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와 같은 비코의 관념들은 대체로 앞선 시대의 다른 저자들과 학파들로부터 태어난 것들이지만, 다시 현대의 인간관과 역사관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
고 있다 비코의 고대 연구방법은 그 이후로, 비교신화학이며 문헌 언어학이며 인류학이며 고고학이며 예술사 등 상호연관된 연구분 야들에서, 헤겔, 마르크스, 콩트, 뒤르켈 베버, 프로이트 등 경쟁적 인 이론들의 영향을 받아서 꾸준히 추진되어 왔다. 뿐만 아니라 경험적 방법을 사용해서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다양한 사회적 경험 의 심연으로부터 질서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관념, 그리고 현대와 고대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혹은 너무 큰) 간극이 가로 놓 여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이 동떨어진 세계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강력한 상상적 도약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관념 ―__이 획기적 인 발상들은 모두 미슐레가 홈모의 심정으로 < 『새로운 과학 』 의 작은 복마전>이라 명명했던 것 안에 용트림하고 있다. 비코를 원조로 삼는 착상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비코는 언어며 신화며 유물 속에, 우리 조상들이 사회적 • 경제적 • 영적 문제들을 다룬 다양한 양상들이 반영되어 있다는 착상의 원조이 다. 이와 연관해서 비코는 기계론적 사고를 타파한 원조이기도 하 다. 죽 우리에게 심각한 신학적 모순처럼 혹은 허용불가능한 터부 처럼 보이는 것은 기계론 성향의 사상가들이 흔히 주장하듯이 생 물적 심리적 경제적 과정, 곧 물질적 과정의 부산물이라기보다는 (전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사회적 사실 을 인식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왜곡된> 혹은 원시적 방식이라는 관념을 처음 제시한 인물이 바로 비코였다. 비코는 주물숭배로부 터 근대 민족주의에 이르는 모든 숭배 형식들에서 제식이나 상징 이나 숭배물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길을 처음 제시한 인물이기 도 하다. 말하자면 제식이나 상징이나 숭배물은 사회적 압력에 대 한 저항의 표현으로, 출산의 환희에 대한 표현으로, 혹은 권력에 대한 경외의 표현으로, 혹은 경쟁집단을 홉수하거나 방어하거나
승리하려는 갈망의 표현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의 이론가들이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 이러한 표현들은 신화적이든 형이상학적이든 미학적이든 다양한 형식을 취할 수 있지만, 어떠 한 경우에든 현실을 파악하고 현실에 작용하는 형식이다 . 비코는 바로 이런 길을 따라서 과거를 파악할 수 있는 창문을 낼 수 있다 고 믿은 최초의 인물이다. 여기서 창문은 일종의 <내적> 전망에 의해 과거를 총체적으로 구성하기 위한 통로이다. 이 창문을 통해 서 본 과거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혹은 엄청난 고통을 극복하고 그럴 만한 품격을 갖춘 유명 인사들의 질서정연한 승리행렬만이 아니댜 오히려 과거는 우리에게 낯설고 완전하게 이해하기는 힘 든 방식으로 느꼈고 믿었고 창조했던, 싸웠고 사고했고 숭배했고 정당화했던, 스스로 속아 마술적 수단과 신비한 힘을 믿었던 유형 의 사회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토대였다. 바코가 이렇듯 놀라울만치 과감한 가설을 구상하던 응용하던 당시에, 세상은 매 우 오랫동안 비코 식의 반(反)데카르트적이고도 <심리주의적>이 며 반(反)물리주의적인 접근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비코가 이처럼 적대적인 사회, 고루하고 소심하고 편협하기 그지없는 사회를, 지 적 고립과 비열한 눈치보기로 피해 가면서 그만큼 위대한 작업을 구상할 수 있었다는 것은 실로 믿기 어려우리만치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비코는 자기에게 적대적인 사회를 아무 거 부감없이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 사회적으로 억압되고 별로 존 경받지 못한 삶을 거의 평생동안 감래했다.
1) 이 책의 제 2 부 15 장 참조.
비코의 새로운 방법의 원리들은 오늘날 좀더 완벽하게 재구성될 수 있다. 진리의 탐구는 거의 발생론적이고 자기분석적인 연구로
진행된다 . 인간이 단순한 구경꾼 이상일 수 있다면, 즉 자연과학의 영역 밖에서, 인간 자신은 관찰자에 지나지 않는 객관적 법칙들의 영역 밖에서, 인간 스스로 고안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자체 로는 실재 세계에 대한 지식을 낳을 수 없는 수학의 영역 밖에서, 인간이 어떤 행동자로서 참여할 수 있다면, 그는 외부세계와 상호 작용하는 그 자신의 영적 활동을 탐색하는 셈이다. 이 영적 활동 의 확실한 증거는 인간 제도들 속에 각인되어 있다. 언어며 관습 이며 종교의식이며 전설이며 신화며 도덕이며 법률이며 문학이며 기예 동 온갖 제도들 속에는――-한마디로 말해 어떤 문화나 생활 방식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 속에는一_-영혼의 활동이 자리잡고 있다. 살아 있는 유물을 직접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인류의 과거를 해명하기 위한 직통문이다. 유물연구는 인류가 어떤 방식으로 존 재했고 무엇을 행했던가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그랬던 이유와 동 기에 관해서도, 훗날 연대기작가들이나 역사가들이 구성한 이야기 보다 더욱 견실한 빛을 던져 준다. 연대기작가들이나 역사가들은 지식을, 무엇보다도 역사적 상상력을 결여함으로써 자주 오류를 범해 왔을 뿐이다. 그들은 시대착오, 조잡하고 천박한 심리분석, 무절제한 환상, 순진한 탓이든 타락한 탓이든 개인적 편견 등으로 인해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비판적 원리의 견지에서 역사서술을 거듭나 게 해야만 한댜 우리는 비록 오랫동안 친숙해진 자료들을 이용할 수밖에 없겠지만, 자료들을 향해 새로운 종류의 질문을 던져야 한 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말하고 기록하고 숭배하고 자제하고 창조했던가? 그들의 본성과 삶은 실제로 어떠했던가? 어 떤 종류의 사회적 경험이 그들을 조건지웠고 향후 그들이 밟아간 연속적 단계들의 시발점이 되었던가 ?21 그들의 ――一어쩌면 모든
2) 대략 반 세기 뒤에 독일 형이상학자 야코비는 칸트의 선험적 방법을 예비 하면서 비코와 유사한 물음을 제기했다 . 비코와 야코비의 비교가 전혀 불합 리한 것은 아니다 .
인간과 모든 사회의 ― —냐선화하는 본성을 인과관계에 의해 혹은 형이상학적 필연관계에 의해 추적한다면, 그 같은 단계들의 영속 적인 질서나 패턴이 발견될 수 있을까? 만일 이러한 패턴이 존재 한다면, 그것은 직선적이어서 비반복적일까, 아니면 순환적이어서 반복적일까? < 진리의 토대 > 는 온갖 < 민간 > 전승들 속에 자리잡 고 있댜 그것들 속에는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전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댜 다양한 민족들이 오랜 세월 동안 제나름대로 유지한 전 승들은 진리를 담은 몸이다. 비코의 < 새로운 과학 > 은 바로 이 같 은 진리의 토대를 재발견하기 위한 것이었다 . 3 ) 이것은 장기적인 계획이었지만, 그는 특히 1730 년에 개작된 『새로운 과학』의 제 2 판 에서 이 계획의 실현을 도모했다. 비코에 의하면 동시대를 풍미한 각종 이론들은 <발전>의 문제 에 대해 각자 나름대로는 얼마나 깊히 천착했던 간에, 한결같이 명백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홉즈가 전하듯 음란하고 폭력적인 인 간의 < 야수적 방황 > 으로부터, 혹은 그로티우스가 말한 <고독하고 연약하고 단순하고 궁핍한 얼간이들>로부터, 혹은 푸펜도르프가 말한 < 신적 배려나 도움 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방랑자들>로부터 출발했던 인간이, 개인적 혹은 집단적 의지 행위의 결과로 지금같 은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I 스피노자의 심 리학은 인간의 현재며 과거며 미래에 관해 아무런 설명을 제공하 지 못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이기심이란 현재에 행동의 원천이
3) N. S. pa rs. 149, 150. 4) N. S. pa r. 3 38.
아니듯이 과거에도 아니었기 때문이댜 격정이며 의무감이며 전통 이며 인간적 혹은 민족적 연대감 같은 요소들, 그리고 수치심이며 양심이며 경외감이며 신적 현전의 감각 같은 요소들을, 오늘날의 <상인 민족 na ti on . o f sho p keep ers> 에게서나 엿볼 수 있는 이성적 이고 계산적인 이기심의 <변양들>로 환원하는 것은 무리이다. 계 산적 이기심도 비이성적 감정 탓에 손해를 보거나 무지 탓에 좌절 하는 경우는 허다하지만 말이다. 비코는 스피노자의 인간상이 이 러한 환원의 오류를 범했다고 주장한다. 로크도 나을 것이 없다. 과거를 향한 참된 길은 <공적 진리의 토대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 한 민간전승들>로 통한다. 물론 이 증거들은 여러 원인에 의해 어 쩔 수 없이 왜곡되어 왔다. 단순한 시간경과도, 이야기를 꾸몄다가 쉽게 잊어 버리는 인간 본연의 성향도, 민족들과 학자들의 허세 bo ri a 도 왜곡의 원인이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심각한 왜곡의 원인 은 언어 자체의 변화이다. 언어의 변화로 인해, 한 시대에는 어떤 것을 의미했던 단어가 다른 시대에는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되기 때 문이다. 이러한 왜곡을 벗어나기 위해서, 『새로운 과학』은 사회적 발전의 법칙을 상정하고 그것에 의존한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집 단기억들이 지속되고 있으며, 어떤 기억은 손상되지 않은 채 고스 란히 남아 있지 않은가? 만일 우리가 이 같은 기억들에게로 올바 르게-비코가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듯이 최대한의 상상력 을 발휘해서 ――접근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낯선 현존 야만인들, 혹은 더욱 낯선 태고적 원시인들의 세계관을 어렴풋하게나마 파악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요, 인간으로서의 우리 모두에게는 일종의 영적 근친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세 대는 다른 세대가 행했거나 겪었던 것들에로 <침투>할 수 있고 그것들 을 마치 자기 세대의 자서전의 일부처럼 이해할 수 있다). 비코에 의하
면 오늘날 남아 있는 태고적 인간의 유물은 인류의 기원이 조야하 고 야만적이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 < 빛 나는 문명시대 > 의 학자들은 유물을 잘못 해석해 왔다 . 그들은 헛 되게도 < 고대인들의 비길 데 없는 지혜 > 를 외우면서 , 5) 그들 자신 의 지식을 과거로 소급시켜 문화적이며 민족적인 무례와 이기심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 자기들에게나 관심 있는 것, 자기들에게나 인식될 수 있는 것이 마치 태초부터 존재했고 인식되었던 듯이 믿 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5) N. S. pa r. 3 84.
”
제 7 장 신의 시대 • 영웅의 시대 • 인간의 시대
만물의 본성이 그러하듯이 인간의 본성은, < 어떤 시간에 어떤 양태로 무엇이 생성되는가? > 라는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발견될 수 있다.” 인간은 루소가 말하는 순진무구의 상테 제도들에 의해 타 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했던 것이 아니라, < 거의 야수에 가까 운 거 인들 sem i-b estia l gi an t s > 로서 출발했댜 21 공포와 육욕과 소 름끼치는 미신에 사로잡힌, 어리석고 잔인하며 무서운 짐승들로 출발했다. 하늘의 천둥소리는 그들에게 분노나 경고나 명령을 전 해 주는 음성이었다. 그들은 이 같은 자연의 위협에 놀란 나머지 숨을 장소를 찾았다. 도망한 동굴 안으로 여인을 끌어들이기 시작 한 것은 수치심과 초인간적 힘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이처럼 사생활과 결혼생활은 수치심 p udore 과 육욕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었다. 비코가 태고적 덕성 v irtu의 여러 형식들로 간주했던 것들은,
1) N. S. pa r. 147. 2) N. S. pars. 243, 338, 547, 644.
실로 끔찍한 제식과 야수적 잔인성으로 점철된다. 그는 『 오디세 이 』 에 등장하는 폴리페모스 Pol yp hemus 같은 외눈 거인들을 Cy cl op s 이 같은 인간의 전형 으로 파악한다. 그들은 포악하고 야만 적이고 폭력적이고 사나운 원시가부장들로서, 가혹한 처벌을 가하 고 절대복종을 강요함으로써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자 연은 무서운 힘들로 충만한 경외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각종 제도 들은 처음부터 거의 제사에 가까운 엄격한 형식을 취했다. 그것들 은 일종의 자기보호 장치였다 . 일례로 (페니키아의 몰로크 Moloch 처 럼) 보이지 않는 통치자를 달래기 위해 , 자식들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 곤 했다 - 一― 로마의 시 인 에 니 우스 Quint u s En ni us 는 두려 움 에 떨면서 < 이교도들 > 의 이 같은 관행에 관해 언급했다 . 3 ’ 그러나 비록 가부장들에 의한 절대권력의 행사는 비록 야수적이기는 했지 만, 일종의 맹아적인 수치감과 경의감을 수반한 것이었고 , 바로 이 같은 감각들에 의해 수정되었다. 수치감과 경의감은 종교적 감정 의 뿌리로서, 섭리가 인류를 야수적 기원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었다. 인류가 야수적 기원으로부터 상승할 수 있었 던 것은 결코 이기적인 이해타산 덕택이 아니었다. 이해타산만으 로는 야수적 이기심을 충분히 제어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치감과 경외감이 없었다면 원시가부장들은 결코 인간답게 될 수 없었을 것이댜 그러한 감각이 없었다면 그들에게 자제나 자성의 심성이 형성되었을 리 없으며, 따라서 최소한의 문명도 형성될 수 없었을 것이댜 훗날 후손들이 누린 법적 자유는 싹톨 수조차 없 었을 것이다 . 4) 이 야수적 가부장들은 아직 아름다움도 · 알지 못했
3) <또한 페니키아인들에게는 그들의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관습이 있었다 . 4)E t< P이oe런n ei식 s으ol로i te i 최 so초s 의s ac신ru학fi 적ca re시 p인u e들llo은s .> 처, 음N.이 S자. p가a r.장 5 1위7. 대한 신화, 죽 제
우스의 신화를 창조했다. > 이로써 최선자( 最善者 )이자 최대자( 最大者 )인 제우스 Jup iter Op timu s M axi mus 가 탄생한다 . 그는 가장 강하고 가장 위대 한 자일 뿐만 아니라 , 사람들을 파멸시키기 않았다는 점에서는 구원자 So t er 이 며, 그들에게 제식과 제도와 사회 구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는 국부 S tat or 이 다(N. S. par . 379).
다_비코는 미 개념이 오늘날의 농부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낯 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가부장들은 최초 농지의 소유주이기도 했는데, 그들의 농토 는 불법무도한 < 자연인들 > , 죽 여전히 대지롤 방황하던 야만적 방랑자 무리에 의해 공격을 받곤 했다. 가부장들은 연대하여 이 약탈자 무리에 저항했던 바, 그리하여 최초로 조직된 집단이 최초 의 맹아적인 공동정착지를 창조했다. 방랑자 무리 사이에서도 힘 센 자의 폭력을 두려워한 연약한 자들은, < 파렴치한 난혼 >5) 을 행 하는 난폭한 방랑자들을 피해 가부장들의 원시적 울타리 안에 들 어와 보호를 구했다. 여기서 최초의 노예계급이 발생했고, 이와 함 께 계급구조가, 나아가서는 계급 투쟁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 이다. 최초의 정체가 왕정이라는 (이를테면 비코보다 한 세기 전에 보댕이 제시했던) 가정은 참이 아니다. 비코는 이러한 가정이 비역사적 어 원학에서 비롯된 전형적인 실수에 속한다고 추정한다 . 호메로스를 위시한 태고적 저자들 사이에서, < 왕 > 이라는 단어는 개인이 아닌 지배집단을 뜻했기 때문이다. 최초의 사회는 소규모의 과두제적 <공화국>이었다. 죽 다 함께 엄격한 법에 결박되어 살아간 가부 장들의 집단이었다. 또한 그들은 똑같이 엄격한 법으로 여자, 아이 들, 종과 노예를 다스렸다. 법은 생존의 필수조건이었다. 이것이 바로 신의 시대요, <침묵> 기호와 상형어의 시대이다. 가부장 통 치자들은 처음에는 신중하고 중용적이었다 . 6) 그러나 점차 그들이
5) N. S. par . 1099.
6) 같은 곳 .
법을 남용하자 노예들은 인정투쟁을 시작했고 타협을 강요했다 . 7 , 그리하여 최초의 사회적 신분이 형성되었다. 귀족과 평민 양계급 에게 공히 적용되는 권리들이 규정되었다(비코의 상상력은 철저히 로마사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이 영웅시대이다 .
7) N. S. par . 1100.
시대마다 각자에 고유한 믿음들이 있다. 헤르더는 이러한 믿음 들을 묶어 민족혼 Volksseele 이 라 불렀지 만, 그보다 앞서 비 코는 한 사회의 < 공통의미 common sense> 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 1 공통의 미는 < 어떠한 인간, 어떠한 신분, 어떠한 민족에 의해, 혹은 인류 전체에 의해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 반성이 개입되지 않은 판단이 댜 >81 이러한 믿음들은 동시대의 문헌자료들에 가장 생생하게 체 현된다. 고대의 시에는 < 영웅 > 시대의 < 자부심과 탐욕과 잔인 함 >91 이 충실하게 반영되는 바, 이러한 성질들은 모든 귀족정과 귀 족정 치하의 문화에서 전형적이다. 법률은 잔인했다. 인간 발전과 정의 < 영웅적> 단계에서는 그밖의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다스 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비코는 영웅시대의 유사한 실례들로서 호메로
CD 는 흔히 < 상식 > 으로 번역된다. 이 번역어는 데카르트적 인 용어 bon sens 에 대해서나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 폼파 교수는 그것의 비코적 인 용례 를 <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의 성원들이 공유하는 일련의 믿음들>이라고 해석한다 어떤 집단의 성원들은 이러한 믿음들을 공유함으로써 그 집단의 성원 이 된다. 이런 믿음이 반성이나 추론에 의해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은 . 분명하지만, 비코는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관해 명쾌한 해설을 제공하지 않는다. 어떤 때는 sensus commun is 자체가 공통의 믿음을 형성을 형성하는 기능처럼 이야 기되기도 한다. 따라서 역자는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믿음이라는 견지에서는 <공 통의미 > 로, 그러한 믿음을 형성하는 기능이라는 견지에서는 <공통감각>으로 번 역했다. 8) N. S. par . 142. 9) N. S. par . 38.
스의 시대와 서유럽 봉건제의 초기를 든다). 또한 이러한 법률을 체현 한 사회질서가 형성된 것은, 이 단계의 사람들이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일 법률이 단지 개인적 의지에서 제정된 것으로 보였더라면, 법률은 그토록 절대적인 권위를 누릴 수도, 무도한 야만인들을 굴복시킬 힘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원시인들은 문명인들에 비해 훨씬 엄격한 규율에 구속된다. 어 째서 그럴 수 있는가? 원시인들에게 엄격한 규율은 그들 자신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기에 규 율은, 자연이나 신처럼 혹은 너무도 신바하고 무서워서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존재처럼 초인적인 힘을 지니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절 대적이었다. 이 같은 엄격한 규율은 사회적 성장의 특정한 단계에 서 불가피한 인간정신의 무의식적 창조물이다 . 또한 정신적 발전 의 그 단계에서는, 엄격한 규율이 절대복종을 강요하는 외적 실체 처럼 보인다는 것도 불가피한 일이다. 이 무서운 실체는 처벌을 조건으로 규율을 선물하는 듯이 보였던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 유명한 물상화 re ifi ca ti on 이론이 최초로 표명되고 있다. 물상화 는 <소의 En tfr emdun g>의 한 형식으로, 훗날 헤겔의 역사철학과 마르크스의 사회학에서 초석이 된 개념이다 . 이 개념에 의하면, 여 러 시대에 걸쳐 오랫동안 지배적이던 경직된 믿음들, 안 보이는 신 들, 법률들, 제도들은 실제로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지만, 사람들은 마치 그것들이 자연의 물리적 법칙처럼 객관적이고 초시 간적이고 불변적이라고 상상하여 그것들의 권위를 이끌어낸다. 비 코는 포이어바흐보다 훨씬 먼저 이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온 힘을 모아 죽음보다 강한 신들을 발 명한다. 인간은 법을 갈망하여 법률이나 정의나 신의 의지라 불리 우는 객관적 실체를 발명하며, 그럼으로써 그들의 생활방식을 유
지하고 보호한댜 공포를 야기하는 제식은, 종족을 내외부의 적과 위험으로부터 보존하려는 무의식적 노력의 산물이다. 그렇지만 이 모두는 인간 자신의 창조물이다. 우리가 불완전하게나마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은 인간 스스로 그것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스스로의 계획이 아닌 신의 계획을 실현하고 있을 뿐이다). 같은 이치에서 자연은 인간에게 항상 불투명한 채로 남아 있는 반 면에 역사는 인간에게 이해가능한 것일 수 있다. 영웅시대의 제도들, 특히 <신성>하고 절대적인 법체제와 통치 자가 법 테두리 안에서 백성에게 부과하는 잔인한 규율은, 사회진 화의 두번째 단계를 지배한다.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영웅 시대에 사람들이 추구하여 싸웠던 자유는, 약탈자와 독재자로부터 의 자유, 자신들을 위한 자유였지, 결코 그들의 종이나 예속민을 위한 자유는 아니었다 . 그들은 예속민을 오히려 무자비하게 처벌 하고 학살했다. 비코는 <영웅적> 기록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자유>나 <인민> 같은 용어가 훗날 엉뚱하게 오해되었음을 지적 한댜 후세는 이 같은 용어를 민주주의적 의미로 해석함으로써 역 사감각의 부재를 드러냈을 뿐이다. 일정한 시점에 이르면 평민은 이전의 열등한 지위에 불만하게 된다. 그들의 열등한 지위는 그들 의 본성이 태생부터 열등하다는 형이상학적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 었던 바, 동일한 가정에서 그들은 재산상속권, 토지소유권, 정식 결혼권, 법적 계승권 같은 주인의 권리를 가질 수 없었다. 이에 대 한 불만으로 사회적 압력이 점증했고, 때로는 민권이나 종교권을 쟁취하기 위한 폭력투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금권정치와 각종 포 상제도가 귀족과두정을 대체했으나, 다시 금권정치는 특권 없는 다수의 인민주권 요구 앞에서 분쇄되었다. 부유충은 너무 안심했 다가 인민에게 패배했던 셈이다. 민주적 정의의 규칙이 자리잡으
면서 자유토론, 법정의 변론, 산문, 합리주의, 과학 등도 함께 발전 했다. 표현의 자유는 기존 가치들에 대한 성역 없는 의문을 수반 하기 마련이댜 그것은 철학과 비평을 고무하며 결국에는 기존 사 회구조를 파괴한다 .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초자연적인 비정한 법 의 공포 앞에서 결속할 필요가 없다. 개인주의가 극도로 성장하며 인민을 묶어 주던 매듭은 완전히 풀어진다. 여기서 회의주의가 발 생하고, 신앙심과 통일적인 믿음이 파괴되며, 긴밀하게 접속된 <유기체적> 국가는 와해된다. 이 과정은 무정부상태로 귀결되든 가, 혹은 <최악의 폭군인 인민의 무제한한 자유 > J O I 로 귀결된다(이 점에서 비코는 지극히 반민주적 사상가이다). 시민적 미덕을 < 가치혼 란 ano mi e> 과 자의적 폭력이 대체한다. 물론 이런 질병은 극약에 의해 치료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질병은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에서 시도했던 것처럼) 어떤 강력한 개인이 사회 전체를 장악하여 질서와 윤리를 회복함으로써 진정될 수도 있고, 보다 신선하고 원기왕성 한 사회에 의해 (즉 발전의 선행단계에 있는 보다 원시적인 사회에 의 해) 정복됨으로써 치료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질병이 회복불능의 상태로 깊숙히 진행되었을 때, 그 타락한 사회의 성원들은 두번째 야만상태로 빠져 버린다. 첫번째가 원시적인, <감각>의 야만상태 라면, 두번째는 노년의, <반성>의 야만상태이다 . 이 노쇠와 무기 력의 야만상태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세계 속에 살아간 다. 친구와도 대화하거나 협동할 수 없는, 불안으로 가득 찬 세계 속에 살아간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은 <비록 육체적으로는 여전히 무리를 이루고 있지만, 각자 자기만의 쾌락이나 변덕을 따름으로 써 둘 사이에서도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영혼과 의지의 깊은 고
10) N. S. pa r. 1102.
독 속에 마치 야수처럼 살아간다 .> l 비코는 이 상태를 경탄스럽 게 도 <반 성 의 바바리 즘 la barbarie della refl es sio n e> 이 라고 부른 다. 반성의 바바리즘 혹은 이성의 바바리즘에 빠져 비인간화된 인 간존재들, 죽 < 부드러운 말과 포옹을 행하는 야비한 야만인들 > 1 2 l 은 결국 그들의 허약과 타락에 굴종하고 만다. 사회는 조각난다. 내외부 적들과의 무서운 싸움이 모든 성원의 파멸을 초래한다 . 문 명은 붕괴하고 사람들은 흩어지며 도시는 몰락한다. 그 폐허 위로 다시 숲이 자란다 이런 식으로 한 번의 순환이 완결되고 새로운 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11) N S. pa r. 1 106. 12) 같은 곳.
다시 한 번 외눈거인 같은 < 가부장들 > 의 단순하고 야수적인 통 치가 시작된다. 이제 사람들은 새로운 처녀림에 의해 뒤덮혀 버린 죽은 문화의 잔해들을 바라보면서, < 다시 한 번 경건하고 진실되 고 독실해진댜 > 1 31 종교는 사회의 유일하게 참된 구심력로서의 고 유한 역할을 되찾는다. 게르만족에 의해 정복된 뒤 로마에서 그러 했듯이 . 말이다 . 그리하여 새로운 순환이 시작된다. 새로운 순환도 문명의 삼단계 발전이라는 연속적 과정을 겪기는 마찬가지이다. 우선 외눈거인 같은 프랑크 < 왕들>이 출현하여 부랑하던 야만인 무리를 막을 원시 성채를 건설했고, 무지막지한 권위를 행사했으 며, 강자로부터의 보호를 구하는 약자를 보호해 주었다. 이것이 봉 건제도의 시작이다. 다음에는 두번째 <영웅시대>가 도래했다. 이 시대는 갑옷과 투구의 문장(紋 章 )들에 의해 상징화된다. 후세는 이 문장들을 의도적 도안이라고 오해했지만, 사실상 그것들은 그 단 계의 문화에서 자연적 상징들이었다. 두번째 순환이 첫번째 것의
13) 같은 곳 .
정확한 복사판은 아니댜 그 것 은 앞선 순환의 기억울 간직하고 한 다는 점에서 다르댜 게다가 그것은 기독교적이다 . 1 』 ) 말하자면 두 번째 순환은 첫번째 순환의 복사판이라기보다 첫번째 순환과 나선 처럼 중첩된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 중세사 회는 고전고대의 영웅시대처럼 사제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중세 역시 그나름의 위대한 시인을 낳았다. < 영웅적 > 인 새로운 이탈리 아어를 휘둘렀던 시인 단테는 인류문화의 두번째 순환에서의 호메 로스이다. 올림포스 신들 대신에 기독교 성자들이 자리잡는다 . 심 지어는 공공의 관습조차도 반복된다. 일례로 호메로스 시대에 어 떤 도시가 포위되면 그 도시의 신들은 그곳이 약탈되고 파괴되기 전에 떠나도록 엄숙하게 요구되었는데, 중세의 성자들도 마을이 약탈적인 군대에 의해 비슷한 운명에 처하면 그곳을 먼저 떠나도 록 권유받았다는 것이다. 이 과두제적 질서는 (비코 시대에) 금권정 치로 이행되었으며, 다시 민주주의, 개인주의, 회의주의로, 결 국은 독재나 정복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 그리하여 고도의 문명시대는 한 번 더 쇠퇴와 몰락의 시대로, 마침내는 원시적 삼림으로 이어 질 것이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진행들과 반복들 cors i e rico rsi> 이다. 문명의 연속을 설명하는 이 순환적 모형은 홍미 면에서나 설득력 면에서나 독창성 면에서나 비코의 이론들 중 가장 별볼일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장 유명한 이론이 되었다. 실제로 훗날 비코는 순환론 덕택에 유명해졌다 . 그러나 기이하리만치 불운 했던 그 작가에게 이것이 불행이라고 잘라 말할 수만은 없으리라.
14) 그렇지만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이전의 유태인들과는 달리, 이교민족의 <영원한 원형적 역사 s t o ri a ide ale e t ema > 의 제 단계 를 겪어야 할 운명이 었던 것 같다. 이것은 기독교 작가에게는 매우 이상한 변칙이다. 그렇지만 비코는 이 점에 관해 아무런 설명도 제공하지 않는다.
제 8 장 영원한 원형적 역사
비코의 시대에, 인간의 역사가 순환적으로 진행한다는 해묵은 관념은 여전히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폴 리비우스뿐만 아니라 그들의 추종자들,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추 종자들도J I 비슷한 가설에 입각하여 작업했다 . 그렇지만 비코의 관 념에는 새로운 요소가 있다. 홋날 정신현상학으로 불리워지게 된 요소가 그것이다. 비코는 인류의 역사를 <모든 민족이 발생과 성 장과 쇠퇴와 몰락에서 시간적으로 밟아가는 하나의 영원한 원형적 역사>로 파악한댜 2 1 이것은 그의 사상 전체를 관류하는 핵심관념 이다 비코가 이 관념에 의해 의도한 것은, 어디에 세워진 인간사
1) 르네상스 시대의 추종자들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마키아벨리이다. 2) N. S. par . 349, cp. par s. 245, 393. 인용문은 원어로
회든지 따를 수밖에 없는 발전의 패턴이다. 이 패턴은 풀라톤의 이데아처럼 인간본성을 인간답게 완성시켜 준다. 말하자면 그것은 외부로부터 ―_―신에 의해 위로부터 혹은 물질적 본성에 의해 아 래로부터 ―-—인간의 정신이나 육체에 각인되는 어떤 필연성이 아니라, 내재적인 발생과 성장의 원리이다. 본성, 죽 < 싹으로서의 본성 > 은 바로 이 발생과 성장의 원리에 의해 정의된다. 인간본성 은 < 조야한 기원 > 으로부터 오늘날의 < 찬란한 시대 > 를 향한 상승 이라는 견지에서, 나아가서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절정을 향한 상 승이라는 견지에서 역동적으로 정의된다. 비코에게 인간존재는 데 카르트적인 실체가 아니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엔텔레키 ente l e- chy, 즉 본질의 견지에서 정의될 수 있는 정태적 존재도 아니다. 이 같은 정태적 존재의 발전이란 처음부터 영원히 숨겨진 속성들 이 마치 책장이나 공작새의 꼬리처럼 하나하나 차례로 < 펼쳐져 > 드러나게 되는 계기적 출현의 과정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비코에 있어 인간은 실제적인 발전과정, 죽 육체적 • 도덕적 • 지적 • 영적 인 동시에 사회적 • 정치적 • 예술적인 전포괄적 과정으로부터 따 로 떼어내서 고려되지 않는다. 비코에게 인간본성이란 오직 인간 과 외부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 또한 인간끼리의 상호작용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 이 같은 상호작용은 사람들이 합심하여 성취하고 자 애쓰는 (그리고 개인 아닌 전체로서의 사회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 는) 목적의 구현을 통해 인류의 역사가 된다 . 비코의 < 영원한 원 형적 역사>는 단일하고도 보편적인 패턴이다. 어떠한 사회든지 발 생부터 몰락까지 이 패턴을 실현하게끔 되어 있다는 말이다. 보편 적 경로를 밟아가는 양상이나 속도는 사회마다 다를 수 있다. 어 떤 사회의 진보는 다른 사회의 붕괴와 동시적일 수도 있고, 다론 사회의 붕괴에 의해 촉진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여행의 순서는 불
변적이고 고정적이댜 선행단계에 내재해 있던 가능성들의 실현은 다시 새로운 필요를 자극함으로써 다음 단계를 형성한다 . 실현되 는 가능성들도 단계마다 다르다. 한 단계의 발전가능성은 선행단 계의 실현을 전제조건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 단계들 사 이에는 객관적인 순서가 있다. 특정한 기능, 능력 , 전망, 혹은 느끼 고 행동하는 특정한 방식은, 선행자가 야기한 변화들이 그것의 출 현을 요구하기 전까지는 결코 발생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순서 는 개안적 정신활동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사회의 제도 적 활동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사회는 젊고 활기차고 엄격할 때에는 < 시적 > 이고 < 영웅적 > 이다. 신화와 맹목적 독단이 사회를 지배한다. 반면에 사회가 비판적 합리주의에 의해 침식될 때에는, 철학과 민주주의와 제 과학이 사회체계를 변형한다. 이 순 서는 < 정신 > 구조에 의해 고정되는 바, 모든 개인들과 모든 적어도 < 이교적인 > 사회들에서 동일하다 .3 ) 인간이든 사회든 이 길을 따라야만 인간답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코는 헤겔과 생시몽에 앞서 인간본성을 하나의 활동으로 규정했다. 이것은 인 간본성이 사회적인 것으로 파악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절차 였다 .
3) 『새로운 과학 』 에서 ' <정신 men t e > 은 명석한 개념이 아니다 . 그것은 대체 로 개인의 정신을 지칭하지만, 때로는 집단적 실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후자 의 경우에는 독일관념론에서의 비슷하게 애매한 <정신 Ge i s t>이라는 용어 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된다. 이러한 애매함로 인해, 비코의 형이상학적 견해 에 관해 상충하는 해석들 __- 헤겔주의적, 가톨릭적 , 마르크스주의적, 실존 주의적 , 경험론적 해석들, 혹은 이 모든 해석들의 절충적 해석 _이 난무 하게 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 논쟁은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다.
비코는 역사의 진행을 기계론 식의 인과적 과정으로 파악하지 않는댜 그는 아우구스티누스나 보쉬에 못지 않은 기독교적 목적
론자이다 . 그에 의하면 인류는 하느님이 그들에게 단호하게 제시 한 목적을 추구한다 . 그렇지만 비코는 보쉬에와는 달리, 이 목적이 모든 인류에게 직접 계시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목적은 < 철학적 > 민족, 죽 모세와 선지자들이 목표를 계시한 유태민족에 게만 직접 계시된다. 따라서 유태민족만이 역사의 수레바퀴로부터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 영원한 원형적 역사 > 라는 불변의 패 턴은 <이교민족들 > 의 역사이다. 물론 영원한 원형적 역사의 일반 적 골격이나 시간적 순서와는 달리, 그것의 내용은 (형이상학적으로 필연화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사실들보다 먼저 인식될 수 없을 것 이다. 그렇지만 <영원한 원형적 역사 > 는 단순히 추정이 아닌 만 큼 경험에 입각한 가설도 아니다. 그것은 영원히 참된 것, 사건들 에 의해 반증될 수 없는 어떤 것이댜 라이프니츠의 표현을 빌리 자면 그것은 <사실적 진리 veri te de fait > 가 아닌 < 이성적 진리 veri te de la r ai son> 이다 .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가? 비코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동시대 의 사상가들 대부분과 비슷하게 가정했으리라는 것은 거의 분명하 다. 대체로 동시대인들은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나 뉴턴 이 자연법칙을 파악한 방식으로 제 과학의 핵심원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가정했다. 마찬가지로 비코도 우리가 구체적인 역사적 증 거에 정통하다면, 선험적 진리인 역사의 패턴을 < 원인에 의해 > 과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가정했던 것이다 . 비록 비코는 사회 적 발전법칙이 외부세계의 법칙보다 훨씬 확실하다고 믿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에 대한 확실한 인식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았 다. 확실한 세계인식은 인간에게 열려 있었다. 일례로 그는 그로티 우스를 <필연적>이 아니라 단지 <개연적이고 그럴듯해 보이는 >~ I 원리를 제시했다는 이유에서 비판한다-같은 이유에서 보댕을
4)
비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비코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 역사의 참된 원소들 veri elementi della sto ria > , 죽 역사의 참된 성분들이 (베이컨보다는 플라톤의 방식으로) 정립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 서 < 원소들 > 은 범주들을 뜻하는가? 다시 말해 그것들은 역사적 사고에 선행하는 근본관계이며 야코비의 지적처럼 칸트의 선험논 리학의 선구적 응용인가 ? 51 비코가 말하는 확실성이 형이상학적 • 라이프니츠적인 종류의 것인지 비판적 • 칸트적인 종류의 것인지 는 분명하지 않다. 그렇지만 이 확실한 <원소들>을 발견했다는 믿음에서, 비코가 자신의 발견을 새로운 < 과학 > 이라 부를 수 있 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그의 확실성은 최종적으로 발견된, 교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역사의 예정된 시간표 이댜 < 그것은 그러할 수 있을 뿐 그러하지 않을 수는 없다 .>61 물 론 우주의 저자만이 소유할 수 있는 완전한 지식에 인간이 도달할 수는 없댜 그러나 이 필연적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역사지식은 인 간의 여타의 어떤 지식보다 우월하다. 자신의 행위에 의해 창조한 것에 대한 행위자의 지식은, 그가 사회변동의 방식과 목적을 규칙 적이고 반복적인 구조의 견지에서 이해할 수만 있다면, 구경꾼이 아무리 예리한 통찰력을 갖춘 구경꾼일지라도__」얻을 수 있는 지식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 학에서는 행위자이지만 자연과학에서는 구경꾼에 불과하다 .71 이 같은 차별화로부터, 비코 스스로 불멸적이라고 주장한 이론이 정립된
5) 내가 오해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폼파 교수(앞의 책)의 견해이기도 하다 . 6)
다. <정 신 과학 Geist e s w iss enscha ft> 과 <자 연 과학 Natu rwiss enscha ft> 간의 결정적인 구분이 바로 그것이다. 1) 이러한 구분에 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활발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 저자는 이 책의 도처에서, 비코의 지적 위상을 19 세기 유럽, 특히 독일의 인문학를 예비한 선구자로 자리매김한다. 비록 비코는 딜타이처럼 명료하게 <이해의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으며, 리케르트 H. R i cke rt와 빈델반트 W. W i ndelband 처럼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을 구분하는 방법적 규준을 엄 격하게 정립하지도 않았지만, 이 모두를 <예비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벌린은 <휘그적 Whiggish > 역사학의 편에 서 있으며, 비코가 그토록 비판 한 <학자들의 허세> 一-_ 학자가 연구주제를 가능한 한 오래 전까지 소급 하여 정당화하는 경향-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실제로 저자는 비코의 선구를 다시 16 세기 프랑스의 법사학에로 소급해 간다). 이런 식의 비코 이 해는 그의 풍요로움을 훼손할 수 있다. 과연 동시대의 상황 <안>에서 비코 가 자신의 작업을 <새로운 과학>이라 불렀던 근본 동기는 무엇인가? 그것 은 <방법>의 문제라기보다 <담론>의 문제, 의사소통 commun i ca ti on 의 문 제였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비코는 <과학혁명의 시대>의 중요한 발 견이나 발명에 관해서는 무식했을지 몰라도, 과학적 담론이 생활세계에 미 치는 영향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 이러한 현재인식은 인류 의 시원으로부터 과학의 시대에 이르는 역사 전체를 언어적 차이에 의해, 담론형식의 차이에 의해 차별화하는 동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코는 자연과학에 <반(反)>한 인문학의 방법론을 구상했다기보다, 자연과학을 포 함한 모든 인간의 <활동>를 거시적 안목으로 전망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 었다. 따라서 그의 <새로운 과학>은 메타과학적인 성격도 포함한다고 보아 야 한다. 비코를 <자연과학적> 방법에 대립적인 인문학적 혹은 <정신과학 적> 방법의 선구자로 간주하는 태도는, 방법론적 구획에 의한 인문학의 정 당화가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었던 19 세기의 유산이다.
제 9 장 반주류의 역사관
비코를 읽으면서 항상 요구되는 것은 쌀과 겨를 가려내는 일이 댜 이 작업은 쉽지 않다. 그의 모든 철학적 저작들, 특히 『새로운 과학』은 의미와 무의미가 혼합된 덩어리이다. 뒤범벅된 덩어리에 서 어떤 관념은 투명하고 매력적이지만 어떤 관념은 희미하고 모 호하댜 과감하고 새로운 사색들 사이에는 이미 죽어 버린 스콜라 주의적 전통의 잔해들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다. 놀랍도록 풍요롭 지만 정돈되지 않은, 의욕이 너무 앞선 그의 혼란한 정신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은 불협화음을 발한다. 그는 한편으로는 그가 최초로 발견한 사회적 발전법칙에 엄격하게 복총하는 인류와 인류역사에 대한 단일한 전망을 제시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핵심 테제가 설명해야 할 크고 작은 세목들과 함축 들이 너무나 많다는 데 기가 질려 있다. 그는 모든 것을 핵심 패턴 의 골격에 끼워 맞추려고 처절하리만치 · 노력하지만, 그의 새로운 관념들은 그것들을 위해 구상된 틀에 맞추어지기에는 너무 이질적
이고 너무 풍요로우며 너무도 제각각이다. 그의 새로운 관념들은 흩어져 날아다니면서 각자 나름의 길을 간다 . 그것들은 피상적이 며 때로는 거의 무관한 자료를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난점은 저자의 산만하지만 직관적인 정신을 파악하는 데 항상 장 애가 된댜 비록 그의 새로운 관념들은 막강한 힘과 개성으로 이 러한 장애를 뚫고 솟아 오르지만 말이다. 이밖에도 많은 문제가 있댜 비코의 문학적 재능도 문제이댜 그는 동시대가 이해하기 힘 든 새로운 관념을 전달하기에 적합한 용어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의 노력은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의 방만한 상상도 문제이다 . 이것은 이후의 많은 작가들로 하여금 그의 정신 의 울창한 밀림에서 각자 나름의 사고를 제멋대로 발견하도록 유 혹했댜 그의 대작은 나쁜 건강과 천박한 매필( 賣筆 )의 와중에서 성급하고도 모양 사납게 급조되었다가(어쩌면 보다 방대한 미발표 원 고로부터 각고의 노력을 통해 발췌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지속적으로 교정되었으며 예시나 인용이나 비교나 부연이 필요할 때마다 끊임 없이 덧붙여지고 수정되었는데, 이 모든 것들은 체계화되지 못한 채 그를 사로잡은 핵심 관념들의 주변을 맴돌고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결점이 들추어진다면, 『새로운 과학』 자체의 결함뿐만 아니 라, 그 책의 독자가 드물 수밖에 없는 까닭도 어렵지 않게 설명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천재의 작품이다. 나는 비코의 특유한 문명사관이 지니는 설득력을 상세히 평가하 지는 않겠다. 그를 사로잡은 케케묵은 삼분법은 이후의 일부 사상 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문명에서의 발생유형과 절정유형과 몰락 유형 을 비 교한 그의 작품은, 생 시 몽 Sa int - S im o n, 푸리 에 Charles Fou ri~r , 콩트, 발랑슈 P. S. Ballanche, 슈펭글러 Oswald Sp en g le r, 소로킨 P. A. Sorok in, 토인비 Arnold Toy n bee 등에 의한 역사유형
학에서 절정에 도달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일련의 작품들 중 첫 번째 것이다 그리스와 로마, 특히 로마의 역사학과 (그 자신의 패러 다임인) 문헌언어학에 대한 비코의 특유한 해석은, 같은 종류의 그 의 많은 다른 작업들이 그러하듯이 오늘날 별로 홍미를 주지 못한 댜 그가 더욱 심혈을 기울여 재구성한 과거조차도 장차의 연구에 서는 이용될 것이 별로 없다. 비코의 장점은 새로운 사실의 발견 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 새로운 제안, 새로운 범주의 정 립에 있댜 특히 그가 정립한 새로운 범주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파악하기만 한다면, 어떤 종류의 사실들이 왜 역사의 이해를 위해 중요한가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뒤바꿀 수 있는 것들이었다. 물론 야만인의 어휘체계에서 명사의 숫자가 우리의 체계에서보다 훨씬 부족하다는 그의 주장은 오류일 수 있으며, 언어가 변화하거나 진 화한다는 주장도 그의 시대에는 이미 진부한 진리로 통용되던 것 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회형식은 저마다 고유한 신화구조(혹은 언어, 예술품, 경제관습 등)을 가지며, 이 신화구조가 각 사회의 고유 한 전망을 표현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착상이다. 비록 모든 사회가 로마 사회와 똑같이 과두제, 노예제, 농노제, 소작제, <시 민 적 Q백it a ri an> 토지 소유제 등의 단계를 반드시 밟아간다는 주 장은 참이 아니지만, 사회제도가 계급투쟁의 압력 하에서 진보하 며 계급투쟁이 소유관계로부터 발생한다는 그의 관념은 우리 시대 까지도 위대하고 획기적인 가설들 중 하나로 지속되고 있다. 사회 변화의 각 단계에는 각자에 상응하는 법률, 통치, 종교, 예술, 신화, 언어, 풍속 동이 존재한다는 것 우화, 서사시, 법전, 역사서 둥은 제도적 과정들과 구조들을 표현하는 바, 이 과정들과 구조들은 (마 르크스가 주장하듯이) 단순한 <상부구조>가 아니라 전체 구조의 부 분들이라는 것 이 과정들과 구조들이 합쳐져 하나의 독특한 패턴
을 형성하며 이 패턴의 각 요소는 다른 요소들을 제한하고 반영한 다는 것 이 패턴이 한 사회의 생활 방식이라는 것.” 이와 같은 혁 명적인 진리들을 비코는 헤르더나 헤겔이나 마르크스보다 훨씬 먼 저 개진했다.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사회사는 < 무산자들 > 의 권리와 권력을 향한 투쟁에 의해 < 거의 > __군 훗 날 마르크스 주의적 독단론이 주장하듯이 < 전부 > 가 아니라一_ - 설명될 수 있 다는 그의 주장이다 . 실제로 토지소유의 경제적 권리와 법적 권리, 특히 결혼권과 상속권 같은 도덕적 권리는 원래 귀족에게 한정되 었다가 일련의 유혈폭동 이후에 평민들에게로 점차 확장되었다 . 국가통치에 참여할 수 있는 정치적 권리, 이를테면 국가의 운명을 주도할 권리에 해당하는 점치는 권리도 마찬가지였다 . 더욱이 비 코는 당시까지 정치사회 문제로부터 벗어난 유물연구 an tiq u ri a ni sm 의 영역으로 인식되었던 곳에서, 그 같은 사회갈등의 증거와 잔해를 새롭게 발굴했다. 이를테면 올림포스 신들 중에서 절대적 우위에 있던 로마 중심부족들의 신들(즉 주신( 主 神)들 D i majo r um) 만이 누리던 완전한 시만권을 얻기 위해, 주변 부족들의 보다 열 등한 신들 (죽 부신(副神)들Di mino rum g en ti um) 이 투쟁하여 성공 을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그러하다. 인간행동의 모든 영역은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지만 실제로는 <유기체적으로> 결속되어 있다.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에피 쿠로스나 에피쿠로스주의자인 홉즈나 마키아벨리가 주장했듯이 우연이 아니며, 스토아학파나 제논이나 스피노자가 믿었듯이 운명 도 아니기 때문이다. ” 우연이나 운명은 역사의 진정한 이해를 방
1) 그렇지만 비코는, 관습이 천천히 변하며(N. S. par . 249) 따라서 새로운 생 활 방식에도 얼마 동안은 옛 관습의 흔적이 유지된다는 점(N. S. par . 1004) ,· 을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있다 .
2) N. S. pa r. 342. <그러므로 아티쿠스가 그의 에피쿠로스주의를 포기하고 비로소 섭리가 인간사를 지배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키 케로는 아티쿠스와 법률에 관해 논의하는 것을 거부했을 것이다.> N. s. pa r. 335. 그로티우스와 푸펜도르프는 그들의 가설에서 섭리를 무시했으며, 셀던은 섭리를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로마 법학자들은 섭리 를 실제로 입증했다. N. S. pa rs. 310, 350, 394-3ITT 참조.
해할 뿐이다 .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자기 내면의 신성한 불 꽃이다. 말하자면 야수적 본성을 벗어나 <인간성>이나 <문명>으 로 향하려는 인간의 노력이다. 인간다운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권리에 대한 감각은 양심, 수치심, 신적 권위며 법에 대한 감각, 책 임감 등으로부터 발생하며, 이처럼 최소한의 권리가 충족된 삶을 통해 인간의 능력은 적당한 활동영역을 얻을 수 있다. 이 보편적 목표를 향하도록 인간을 충동하는 것은 (섭리의 은밀한 충동을 받아 서) 자기를 실현하려는 인간 자신의 <신성한> 염원이다 . 법과 관 습은 변화하는 사회적 필요가 낳는 사회적 산물이다. 법과 관습은 역사의 흐름으로부터 초월한 소수의 현자들이 완벽하게 인식해서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인간들에게 불변적인 규약으로 제정 한 오점 없는 규칙이 아니다. 문명은 <조야한 싹 > , <엉뚱한 상상>, <끔찍한 미신>으로부터 출발한다 . 인류는 어둡고 혼란한 기원으로부터 각고의 노력을 통 해 서서히 진보하며, 대개는 혼란이며 투쟁이며 잔인한 억압이며 극심한 갈등을 겪은 뒤에야 성숙기에 도달한다. 이러한 희생은 예 외없이 치루어져야 하는가? 비코의 체계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는 긍정이 지배적이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사상가들 을 비코가 비판적으로 인용한 대목들에서, 이 점은 확인된다. 에피 쿠로스의 수제자 루크레티우스는 종교가 인류의 범죄와 재앙의 대 부분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고, 그보다 앞서 폴리비우스는 <만일
(태고적에) 철학자들이 있었더라면 종교에 대한 요구는 없었을 것 > 이라고 주장했다 . 31 그러나 이런 주장은 다음과 같은 뜻을 함축한 다. 만일 현명하고 이성적인 스승들이 존재했더라면 그들은 언제 든지 인류를 무지와 죄와 고통으로부터 구원했을 터인즉, 그 중요 한 순간에 현자들이 탄생하지 않았거나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은 인류의 불행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__- 이 같은 함축 은 불가사의한 신의(神 意) 에 의존해서 맹목적 신앙을 찬양하던 유 신론자들을 비판한 볼테르 Vol tai re 와 계몽주의자들에게서도 발견 된다. 물론 비코는 루크레티우스의 시편들을 홈모의 감정으로 읽 었고 그것들로부터 많은 것을 차용했다(특히 비코는 루크레티우스의 시집 제 5 권을 거의 표절하다시피 했는데, 훗날 스스로는 이러한 사실을 부인했다). 폴리비우스에게 비코가 진 빚은 더욱 컸다. 스토아학파, 특히 로마의 스토아학자들은 비코의 존경 대상이었다. 게다가 바 코는 제한적인 의미에서나마 경건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비코는 이 모든 견해들을 싸잡아서 격렬하게 비판했다. 인 간이 출발부터 합리적이고 고결하고 현명할 수 있었다는 둥, 초인 간적 힘이 개입했더라면 원시적인 야만상태를 피할 수 있었을 것 이라는 둥, 종교의 몽매화 기능과 이룰 가능하게 만드는 인간의 공포심과 무지는 발생할 필요가 없었던 우연이거나 이해불가능한 신비라는 둥 __- 이 같은 추정들은 인간본성이 역사적으로 발전 하는 실체임을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오류요, 인간다움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오류이다. 비코는 인간이 지금 의 인간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은 일련의 단계들을 거쳐서 발전한 덕택이라고 믿는댜 서로 인과적으로 연결된-따라서 이해가능
3) N. S. par . 1043.
한― ― 」일련의 단계들를 거쳐 발전한 덕택이라고 믿는다. 인간은 결코 제우스의 머리로부터 완전무장한 채 태어난 아테나 여신과 같을 수 없댜 합리성은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개인이 일정한 수준의 성숙기에 도달할 때까지는 충분히 합리적일 수 없 는 것처럼, 사회도 일정한 단계를 겪기 전까지는 사회적 평등이나 유일신론이나 공화주의적 미덕에 도달할 수 없다. 개인이 미숙한 경험양태, 유아와 야만인의 전망, 직접적인 감각과 상상의 세계를 겪은 뒤에야 그것들로부터 벗어나 성장해 가듯이, (인류란 수천 년 을 살아온 노인과 같다고 묘사했던 파스칼 Pascal 처럼) 비코는 사회도 필연적으로 선행하는 단계들을 거쳐서야 절정에 도달한다고 주장 한댜 사회는 권위주의적이고도 마술적이며 애니미즘적인 다신론 적 생활방식에 지쳐버린 뒤에야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이러한 의 미에서 어떤 문화가 개화한다는 것은, 선행하는 문화의 완성인 동 시에 파괴이댜 이러한 맥락에서 비코는 폴리비우스의 치명적인 오류를 지적한다. 폴리비우스는 역사를 하나의 본질적 범주로 파 악하지 못했댜 그리하여 폴리비우스는 철학적 지혜가 어떠한 시 대 어떠한 사회환경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고 잘못 가정했고, 철학 이 너무 늦게 발생한 탓에 자기의 치명적 경쟁자인 종교가 판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은 우연에 불과하다고 잘못 판단했던 것이 댜 이런 가정을 끌고 간다면, 철학적 혹은 과학적 진리들은 정작 공표되었을 때에도 별로 추종되지 않다가 뒤이은 중세의 길고 황 량한 암흑 속에서 잊혀져 버렸다는 것도 우연일 수밖에 없지 않겠 는가. 비코는 주로 폴리비우스를 참된 역사감각을 결여한 실례로 삼고 있지만, 데카르트九)나 그로티우스나 스피노자나 볼테르도 같
4) 데카르트는 <스파르타의 힘>을 <그것의 법들을 하나의 목표로 향하게 만든 한 개인에 의해 촉발된 환경>에로 귀인시켰다 (Desc art es, Dis c ourse
은 맥락에서 인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 개인과 사회, 소우주와 대우주 간의 유비는 플 라톤 만큼이나 오 래된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다움 hurnan it as > 을 향한 운동이라는 관념은 스토아주의와 르네상스 인문주의로부터 더욱 많이 빚진 것 이다. 이를테면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피치노는 소 년이 성인보다 , 우둔한 자가 총명한 자보다, 광인이 정상인보다 잔인한 이유를 해 설하면서, 그 이유는 소년이나 우둔한 자나 광인이 < 인간다움 > 을 덜 갖추어 아직 인간답게 되지 못한 탓이라고 주장한다. 야수성은 일종의 미성숙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비코와 계몽주의에 공 통적이다. 그러나 ,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들phi loso p hes 에게 야수 의 단계는 초월되어야 마땅한 미성숙 상태에 불과하 지 만, 비코에 게 그것은 문명의 진행과정에서 잊혀져 버린, 경이로운 < 시적 > 속성들로 잘 갖춘 단계이다. 『 일리아드 』 며 『 신곡 』 은 < 오늘날 처 럼 찬란한 시대>에는 결코 창조될 수 없다. 이 같은 작품들의 창조는 통치자의 탐욕이며 잔인함이며 무례함으로 점철된 < 영웅적 > 단계 에서만 가능하댜 이것이 바로 비코의 현상학이다. 동시대의 진보 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지배적이던 사상과 비코의 사상을 이어 줄 만한 실질적인 고리는 없다. 동시대 지식인들에게는 이성에 의한 해방의 출발점처럼 보였던 것이 , 바코에게는 그 이성적 사회체계 의 와해를 예고하는 서곡처럼 보였던 것이다. 비코는 자기의 동시대로부터 두 세기 동안 지속된 계몽주의의 핵심을 공격했다. 데카르트마저도 조심스럽게 암시했던 것을 , 18 세
on Meth o d, Every m an Ed ition , p. 11). 데카르트보다 한 세기 전에 마키아 벨리는 비슷한 방식으로 스파르타 왕 리쿠르고스 L y cur g u s 를 찬양했다. 그 러나 비코에 있어, 리쿠르고스는 하나의 사회적 신화로서, 데카르트의 개인 주의적 해석은 인간과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취급된다 .
기의 급진주의자들은 과감하고도 명료하게 공표하고 있었다. 그들 에 의하면, 종교적 • 비이성적 • 주관적 사고나 감정 같이 이성적 토대 위에 정립되지 않은 모든 믿음과 모든 실천은 유일하고 영원 한 진리로부터의 불필요한 탈선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관점에 서 보면, 온갖 우행이며 악덕이며 범죄며 인류의 재난은 (대체로 제 시되기 힘든) 스승의 부재에 기인한다. 즉 충분한 지식과 덕성은 물 론 사람들에 대한 카리스마까지 갖춘 스승이 가장 긴요할 때 등장 해서, 인류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동시에 인간의 삶을 지금껏 황 폐하게 만들어 온 바보들과 협잡꾼들을 철저하게 제거했더라면, 인류가 그 같은 재난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비코는 이 같은 가능성울 단호하게 부정했다. 이를 위해 비코는 인간본성이 인간과 환경을 동시에 변형해 가는 <영원한 원형적 역사>의 이론을 제시했다. 엘베티우스 C. A. Helve ti us 나 돌바크 Baron d'Holbach 나 콩도르세 Marqu is de Condorcet 같은 낙관주의 적 개혁가들이 비코의 작품을 읽었더라면, 그들은 그의 작품 안에 서 자기들이 가장 열정적으로 거부했던 것들의 거의 전부를 발견 했을 것이다. 이 전부를 한마디로 줄이자면 <역사주의>이다. 비코 의 역사주의는 많은 것을 함축한다. 인류가 이제껏 걸어왔고 앞으 로도 걸어갈 일련의 발전단계에서 각 단계에는 그 나름의 개성과 필연성 특히 정당성이 존재한다는 믿음. 스스로의 내적 성장법칙 에 따라 발전하되 외적 요인들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는, 그러나 기계적 인과관계에 귀속되지는 않는 비물질적 영혼에 대한 믿음. 외부세계를 인식한다는 것곽 전혀 다르고 우월한 의미에서, 인간 은 자기자신과 자신이 행한 일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 물리학은 인간학일 수 없다는 의미에서 역사학은 인간학 humane s tu d y이라는 믿음. 마지막으로, 섭리는 인간의 목표를 결정하고 인
간의 과거와 미래를 엄격하게 지배한다는 믿음. 이 모든 믿음들이 엘베티우스나 돌바크나 콩도르세에게는 지극히 혐오스러웠을 것 이다 . 똑같은 의미에서 비코는 계몽주의 주류를 거역한 반동적이 고 반혁명적인 인물이었댜 데카르트나 스피노자나 로크에 대한, 자연과학의 방법과 개념을 인간사에 응용함으로써 인간의 비인간 화를 초래한 온갖 시도들에 대한 비코의 적대감은, 하만이며 헤르 더며 버크 같은 인물들의 입장과 상통하며, 나아가서는 낭만주의 운동을 예비한 것이었다. 니콜리니의 말처럼 , < 만일 비코의 수강 생들 사이에 상티스 Francesco de Sanc ti s 나 헤겔이나 니부르가 끼 어있었더라면, 그들은 비코로부터 시작된 비평과 철학과 역사학을 계속 혁신해 갔을 것이다 .> 51 니콜리니의 이런 언급은 , 자연과학의 진보에 물든 세대들이 어째서 그토록 거의 본능적으로 비코의 작 품을 무시했던가 하는 문제에 얼마간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5) F. Nic o lin i, 비코 『 전집 Op ere 』 의 서문 (R i cc i ar di, Milan o-Napo li, 1952), pp. lX-x.
제 10 장 역사와 섭리
그렇지만 보다 심층적인 의미에서 비코는 몽테스키의에 더욱 가 까운 경험론자였다 . 비코는 그의 유물론적 혹은 공리주의적 논적 들보다도 더 경험론적이었다. 물론 인간본성이며 인간의 가능성이 며 인간을 지배하는 법칙은 인간 자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 니라 창조주가 인간으로 하여금 선택된 목적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선물로 준 것이라는 믿음이 비코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비코는 창 조주의 종국적인 목적은 창조주만이 알지 우리가 알 수는 없다고 믿었댜 인간본성이며 안간의 가능성이며 인간을 지배하는 법칙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역사적 재구성밖에 없다 고 믿었다. 우리는 역사적 사실에 -죽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인 간의 일상적 생활과 활동에 관한 이야기에 ――-세심한 주의를 기 울여야 한다 . 이것만이 인간이 무엇이었고 무엇일 수 있었으며 어 떻게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패턴을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라이프 니츠의 입장은 달랐다. 라이프니츠는,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지성
인이라면 인간영혼이나 < 시대정신 > 의 구조 (즉 본 질 )에 대한 단순 한 직관만으로도 인간의 존재양식과 행동양식을 연역해 낼 수 있 다고 믿었다. 전 인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원리상 경험적 증 거에 의존하지 않고도 계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비코는 (비록 라이 프니츠의 발전이론을 모방하는 듯 보일 때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주장 한 적이 없다. 비코는 17 세기 법학자들과 18 세기 계몽주의 철 학자 들 대다수처럼 간단한 몇 개의 심리법칙만으로 인간의 다양한 특 징과 행동을 충분히 분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비코는 정반대의 가정 위에서 작업했다. 때로 파악하기 힘들고 기괴하지 만 실제로 발생한 것들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기초로 삼되 그 위 에 비범한 상상력을 덧붙인다면, 그때 비로소 인간존재의 특징들 울 모양짓는 <영원한> 패턴의 작용이 드러날 것이다. 그때 비로 소 시공간적으로나 인종과 전망에 있어서나 서로 동떨어진 개인들 혹은 사회들 사이의 심리구조적이며 사회구조적인 유사성과 상응 성을 낳은 법칙들이 드러날 것이다. 다양한 사회들이 서로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나선계단의 어디엔가 위치함을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상응성의 덕택이다. 이 나선구조 혹은 순 환구조에서 한 단계로부터 다음 단계로의 이행은 이해가능한 방식 으로 진행된다. 매 단계는 창조적 인간정신이 발전해가면서 필연 적으로 취하는 얼굴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정신은 섭리가 인도하는 역사의 유일한 실체이다 . 여기서 <정신>은 단지 일반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처럼 보일 때도 있다. 저마다의 필요와 효용을 추구 하면서 상호작용하는 동시에 섭리에 의해 인도되는 보통사람들 말 이다. 그렇지만 그 뜻이 무엇이든 간에, <정신>은 기억이며 상상 이며 지성을 총동원하고 여기에 비코의 과학적 역사학에 기초하는 새로운 방법을 결합해서, 정신 스스로 밟아온 과거의 상태들을 (완
전하게는 실현될 수 없는) 단일한 최종목표를 향한 일련의 단계들로 이해할 수 있다 매 단계는 선행단계의 작용에 의해 창출된 요구 에 부응하여 적당한 시점에 출현하는 정신적 능력들의 점진적인 실현으로 볼 수 있댜 이런 식으로 매 단계는 각자에 고유한 전망 , 제도, 생활방식, 문화를 창출한다. 이를테면 공포나 이기심이 자극 하는, 혹은 사랑이나 수치감이 자극하는, 혹은 신분이나 지식이나 자유나 명성이나 권력이나 쾌락에 대한 갈망이 자극하는, 다양한 ―육체적이며 영적인, 종교적이고도 법적인, 정치적이고도 경제 적인, 무의식적이면서도 의식적인-――활동들과 다양한 정신 (혹 은 감정) 상태들의 < 유기체적 > 조직을 창출한다. 인류의 역사란 바로 이러한 활동들과 상태들의 총체를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비코는 과거의 활동을 현재의 도덕적 견지에서 비난하는 행위를 무례하고도 천박한 짓으로 평가한다. 지금의 눈 으로 보면 소름끼칠만치 잔인한 원시종교도 한때는 필수적인 기능 울 수행했댜 이를테면 무질서한 다수를 규율잡힌 전체로 묶어 주 는 역할을 수행했다_비코는 <종교>라는 단어 자체가 바로 이런 기능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라고 추정한다. 더욱이 비코는 인 간이 의도하지 않았으나 훨씬 유용하고 중요한 결과를 낳는 행위 들도 많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비코에 의하면, 이것은 인간의 눈에는 감추어진 지고한 목적이 존재함을 증거한다. 개인적 목적 을 초월한 보다 지고한 목적이 없다면, 신적 섭리라는 보이지 않 는 손이 없다면, 역사의 운동은 파악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서구의 지적 전통에는 비슷한 견해를 개진한 사상가들이 여럿 있 댜 이를테면 헤겔의 <이성의 간지>가 그러하다. <인간의 분별이 나 의도와는 무관하게, 심지어는 인간의 계획과도 종종 모순되게, 섭리가 인류의 거대제국에 부여해 온 질서의 형식들이 있다.> 입
1) N. S. par . 342.
법은 < 사나움과 무례함과 야망 > 으로부터 < 군인과 상인과 통치 자 > 를 배출하며, 그럼으로써 < 국가의 힘과 부와 지혜 >를 형성한 다 . 말하자면 입법은 < 인류 모두를 파멸시킬 수도 있었을 이 세 가지의 악덕들로부터 > 시민들의 행복을 일구어내는 것이다 ? 비슷 한 주장이 바코 이 전에는 홉즈며 망드빌 Bernard Mandevil le 등에 의해 개진된 적이 있었고, 비코 이후에는 엘베티우스 , 애덤 스미스 Adam Sm ith, 벤담J. Benth a m 등에 의해 반복되었다. 입법은 인간 에게 보상과 처벌을 적절하게 부여함으로써 사적인 악덕을 공적인 미덕으로 바꿀 수 있다. 인간의 이기적인 본능은 교육과 법률에 의해 공공선을 행하도록 고양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비코가 의도했던 전부는 아니다. 성본능과 공포는 결혼과 가족을 낳 는다. 피보호자들에 대한 보호자들의 폭력은 피보호자들의 폭동을 야기 하여 결국 도시국가를 낳는다. 평민들에 대한 억압은 정반대로 법 치와 자유 같은 결과를 낳는다. 인민의 성장은 도리어 왕정을 초 래한다. 독재자는 백성을 타락시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지 만, 그 결과 독재자는 축출되고 만다. 타락한 민족은 외부의 보다 강력하고 순수한 민족에 의해 정복되기 때문이다. 자기파괴적인 퇴폐가 고독의 야만상태를 낳지만 31 인류는 이 폐허로부터 불사조 처럼 기적적으로 부활하여 역사의 새로운 순환을 시작한다. 이 모 든 것들을 해설하는 과정에서, 비코는 헤르더와 유사한, 혹은 헤겔 및 셸링 Fri ed rich von Sche lli n g과 비슷한 의도를 드러낸다. 이들처
2) N. S. par . 132. 3) 고독하고 야만적인 상태의 일차적 원인은 종교의 파괴이다 . 비코에 있어 서 종교는 사회의 접착제로서 , 그것이 없이는 < 군주들의 방패도 …… 몸을 보호할 방패도 •• … · 지지 기반도 , 심지어는 사람들이 세계 내에 존재할 수 있 게 해주는 어떠한 방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 N. S. pa r. 1109.
럼 비코도 무절제한 인간의 격정과 욕망을 합목적적인 사회제도와 생활방식으로 바꾸어 주는 보편적 경향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렇지만 이 보편적 경향은 공리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인간의 결점을 사회적 공익이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전환시켜 사용할 줄 아는 뛰 어난 전문가들의 의식적 통제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 41
4) 이러한 주장은 『새로 운 과학 』 2 판의 실질적인 결론에 해당하는 다음과 같 은 장엄한 웅변에서 개진된다 <실 로 제 만족의 세계를 만들어 온 것은 인 간이었다(나는 이것을 기존 철학자들과 문헌언어학자들의 작품에서는 발견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본 과학에서 첫번째의 자명한 진리로 삼았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 의도한 특수한 목적과는 다를 때가 많고 완전히 모순될 때도 있는, 그것보다 항상 우월한 어떤 정신으로부터 이 세계가 발생할 수 있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 정신은 언제나 인간의 좁은 목적을 보 다 넓은 목적에 봉사하는 수단으로, 지상에 인류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 왔다. 사람들은 그들의 동물적 성욕을 채우고 그들의 자식을 내버릴 것을 의도하지만 결혼에 의해 정숙함을 지키게 되는데, 이로부터 가족을 발 생한다 가부장들은 피보호자들에 대해 그들의 가부장권을 무제한적으로 행 사하고자 의도하지만 결국은 사회적 권력에 복속되는데, 이로부터 도시국가 가 출현한다. 지배적인 귀족 신분은 평민에 대해 그들의 주인적 자유를 남 용하고자 의도하지만 법에 복속되는데, 이로부터 민주적 자유가 정립된다. 이처럼 자유롭게 된 인민은 법의 구속을 떨쳐 버리고자 의도하지만 결국은 왕정에 귀속된다. 왕조는 백성을 방탕하기 그지 없는 온갖 악덕에 빠지도록 타락시킴으로써 자기의 입지 를 강화하고자 의도하지만 , 결국은 백성을 보다 힘 있는 민족의 수중에서 노예로 연명하도록 만들 뿐이다. 제 민족은 스스 로 와해되는 경향이 있지만, 일부는 안전을 위해 황야로 도망하여 마치 불 사조처럼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 . 이 모든 것을 주관한 것은 정신이다. 인간이 지성에 의해 그 모두를 행했던 것이다 . 이 모두가 운명이 아닌 이유는 인간이 선택에 의해 그것들을 행했기 때문이며, 이 모두가 우연이 아닌 이유는 인간 이 그렇게 행한 결과가 항상 동일하기 때문이다.> N. S. pa r. ll08. 하만과 보다 유명한 그의 제자 헤르더가 비코의 역사철학을 수박겉핥기 식으로, 그나마 그들 자신의 작품을 완성한 뒤에야 비로소 살펴보았다는 주 장이 있다 . 혹은 비코와 청년 헤르더 -그의 핵심 견해들이 『 새로운 과 학.!l의 그것들과 믿기 힘들 정도로 유사한-사이에 유일한 고리는 비코 의 제자 체사로티 Cesaro tti로서, 헤르더는 호메로스에 관한 체사로티의 주
석을 토마시우스 Thomas i us 의 피상적인 언급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주장 도 있다. 이러한 주장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겠지만, 어느 정도 사실일 수도 있다. 반증의 중거로서 거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직 없 기 때문이다. 한 사상가가 다른 사상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직접적이 아닐 때도 있다. 어쨌든 (독일 역사주의에서 절정에 도달했던) 사회와 사회진화 에 관한 이 새로운 관점의 기원과 발생의 문제는 마이네케와 그의 제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이 문제에 천착할 역사 가를 여 전히 기다리고 있다 . . 5)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이야기와도 같다. 그는 죽기 얼마 전 우리 시대의 <핵> 기술이 낳을 결과에 대한 그의 의견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섭리가 윤곽을 정한다. 인간은 자유롭지만 엄격하게 제한된다 .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격정을 미덕으로 바꿀 수 있지만, 그들이 속 한 특정 단계가 그들로 하여금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는 미덕만을 만들 수 있다. 사람들은 성장과 몰락 의 보편적 과정에 의해, 즉 그들로서는 통제할 수 없는 순환과 반 복의 과정에 의해 결정되는 바로 그만큼 자유롭지 못하다. 문화들 도 서로 격리되지 않는다. 한 문화는 다른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한 문화가 외부로부터 받는 영향은 그것이 처해 있는 사다 리의 한 계단 혹은 순환주기의 한 단계에서 가능한 만큼으로 제한 된다. 물론 한 문화가 스스로 순환주기를 완결하기 전에 침략이나 여타의 재앙에 의해 파괴될 수도 있다-이교민족들의 < 영원한 원형적 역사>는 외부의 간섭이 없는 경우에만 스스로 완결된다. 이것은 섭리의 결과인 바, 섭리의 작용방식은 종국적으로는 수수께 끼이댜 그렇지만 비코는 다음과 같이 확신한 듯하다. 인간이란 원 래가 자기파괴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더욱 근본적인 면에서 인간사회는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실러 Fr ied rich von Sc hi ller 의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항상 <폐허로부터 새로 운 생명이 태어난다 .>5 } 이것은 인간이 의도한 계획의 결과가 아니
<활과 화살>이라고 답했다.
라 주어진 인간본성에 복종하는 인간영혼의 작품이다. 초월적인 하느님은 인간본성을 그리 되도록 창조했다. 인간본성은 사건을 미리 예견할 수는 없으나 지난 뒤에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 한다. 비코의 이런 신조에는 콩도르세나 생시몽이나 마르크스의 확신이 엿보이지 않는다. 인간이 스스로 순환의 굴레를 벗어나서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는, 법을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 수 있다는, 확고한 토대 위에 설 수 있다는, 영원히 자유롭고 현명하 고 이성적일 수 있다는 믿음이 비코에게는 엿보이지 않는다. 비코는 명백히 상대주의자이지만 · 독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하다. 그는 이 같은 모순의 조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가톨릭 정통교리의 수호자로서의 비코의 입장은 여러 대목에서 발견된다. 문명의 필 연적 파멸에 관한 그의 해설에서 설정된 타락상태는 그 명백한 실 례로 볼 수 있댜 또한 그는 그로티우스의 작품을 존중하면서도, 그것이 신교도 이단자에 의해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주석하지 않 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더욱이 비코는 바코는 구약성서에 대한 몇 차례의 인용 의에는 성서로부터의 참조를 피한다. 비코의 관심은 거의 인류학적 증거들로 국한된다. 이를테면 그리스와 로마의 고 전적 저자들 자기 동시대인들이 원시 스키티아족이나 원시 게르 만족이나 켈트족의 유산으로 믿고 있던 파편적이고도 환상적인 이 야기들 아직도 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아메리카 인디안들에 관한 보고서들 샴족처럼 멀리 떨어진 이교도 사회에 관한 이야기들이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비코는 시종일관해서 자신의 모형이 <이교 민족들>에게만 적용되지 하느님이 성서를 통해 직접 계시한 유태 민족에게는 적용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유태민족이 계시된 도덕
적이며 영적인 진리들을 무시했던 것은, 이교민족 들 의 경우처럼 적당한 시기에 진리가 인식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 아니 라, 유태민족 자신의 외고집이나 사악한 무지 때문이었다 . < 인류 가 스스로 제 민족의 세계를 만들었다 > 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르 크스의 주장처럼 < 머리부터 발끝까지 > 는 아니다. 유한한 인간이 자기가 복종할 법들을 창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 그럴 수 있으 려면 인간이 그 법보다 먼저 존재했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인간이 법을 만들었다면, 법을 만드는 동안에는 어떤 법에 복종했단 말인 가? 섭리가 이 모든 것을 행했다 . 섭리는 반복함에 싫증내는 법이 없으니까 . 그렇지만 많은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비코의 이교적( 異敎的 ) 입 장도 똑같이 명백하다. 언어의 자연적 기원에 관한 비코의 주장은 기독교 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순환적 역사관도 유태 기독교적 신학과는 명백히 대립된다. 순환론에서는 일회적 사건 __- 이를테 면 <재림>처럼 창조된 세계가 전체적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사건 ―을 역사의 절정에 자리매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이 아니 다 . 비코는 <반복들ri cors i > 이 < 이교민족 > 에 한정된다고 주장하 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기독교시대를 반복의 과정에 명백 히 편입시키고 있댜 지방의 성자들에 대한 중세인들의 태도는, 지 역 신들에 대한 고대인들의 태도와 유사하지 않은가? 단테는 단테 동시대의 호메로스이지 않은가? 그로티우스의 자연법 이론에 대한 비코의 공격은, 만일 비코가 화살을 돌려 그로티우스의 가톨릭적 선조들 죽 아퀴나스나 아퀴나스의 선배들이나 에스파냐의 토미스 트들을 직접 공격했다 하더라도, 똑같이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요컨대 『새로운 과학』은 절대적이며 초시간적 가치라는 관념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바, 이 같은 역사주의는 자연법이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도 치명타를 가할 수 있 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더욱이, 비코 주석가들이 예의없이 지적했 듯이, 인류가 대홍수 이후에 지상에서 방황하던 < 야수인간들 > 로 부터 진화했다는 비코의 이론은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로부 터 빌어온 것이다. 그것은 유리피데스 E uripi des, 키케로 C i cero, 호 라티 우스 Horati us , 디 오도루스 시 쿨루스 Dio d orus Sic u lus 등 여 러 고대 작가들에게서 발견되는 이론이요, 18 세기 이래의 악명높은 자연주의자들과 무신론자들의 대다수가 취한 이론이다. 반면에 이 같은 이론을 가톨릭 교의와 연결해 · 줄 만한 고리는 거의 없다 . 비 코의 야수인간 테제에 대한 동시대의 논쟁은 좋은 증거가 될 수 있댜 1768 년에 박식한 도미니크파 수도사 피네티 Francesco Fi ne tt i 는 비코의 테제를 비난하고 나섰다. 피네티의 입장은 충분한 자료 에 의해 뒷받침된 지극히 정당한 것이었다 . 61 반면에 (크로체조차도 결국은 인정 했 듯이) 비코가 표방한 정통성에 대한 두니 Du ni의 옹호 는 별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같은 이치에서, 금세기의 가장 위 대한 비코 편집자 니콜리니는, 비코를 정통 가톨릭이론가들 사이 에 자리매김해 온 다수의 현대 작가들 이들 중 가장 박식하고 홍미 있는 인물은 아메리오 F . Ame ri o 인데 을 손쉽게 공격할
6) 피 네 티 는 Ap o log ia de/ ge nere umano accusato di essere sta to una volta una bestia (V enezia , 1768) 에서 비코 를 공격했는데, 크로체는 이 논고 를 그 의 Di fesa dell'au to r ita de/la Sacra Scritt ur a contr o G. Vico (Late r za, Ba ri, 1936) 에 수록했다 . 이와 비슷한 공격이, 1736 년에는 다미아노 로마노 Dam ian o Romano, 1754 년에는 코시모 메이 Cosim o Mei, 1780 년에는 도나토 로가데오 Donato Rog a deo 둥에 의해 가해졌다. 반(反)비코적 사조의 참고 문헌목록으로는, B. Corce and F. Nic o li ni, eds., Bi bl io g rafia Vich ian a (Ricc ia r di, Napo li, 1947-1948), 2 vv; Paolo Rossi, Lin e amenti di Sto r i a della Cri tica Vic h i an a, in I Classic i Jtali an a de/la Sto r i a d e/la C riti따 vol. II, eel. Walte r Bin i La Nuova Ita l ia ( Fir en ze, 1962) 를 참조.
수 있었다? 물론 비코는 자기가 말하는 <야수들 bes ti o ni>이 <그 로티우스가 말하는 백치들이나 바보들>, <푸펜도르프가 말하는 유기(造棄)된 절망적 존재들>, <홉즈가 말하는 난폭하고 방종한 존재들> 등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것이라는 점을 애써 강변했다. 그렇지만 이 같은 존재들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 코르자노 Corsano 가 추정하듯이 비코는 나폴리주재 로마종교재판소를 두려 워했을 것이다 . 이 재판소는 비록 나폴리에 ·앞서 주재했던 에스파 냐 종교재판소만큼 야만적이지는 않았지만, 자유사상을 적극적으 로 피력한 비코의 친구 몇 명을 처벌했고, 심지어는 침묵하던 친 구를 처벌하기도 했다. 비코가 자기의 순수한 신암심에도 불구하 고 이단의 혐의를 두려워할 만한 이유는 충분했던 셈이다 . L` 데카 르트가 1619 년에 바니니 Va nini의 끔직한 처형에 두려워 떨었던 것 처럼 말이다. 니콜리니는 나폴리 종교재판소의 희생자가 극소수였
7) Nic o lin i, La Re/ig ios ia di Gia m batt ista Vico (Late r za, Ba ri, 1949) 의 첫 번 째 논문에서, 특히 서론과 제 2 장을 참조 . CD Anto n io Corsano, _Um anesim o e relig ion e in G. B. Vico (Ba ri: Late r za), 1935. 코르자노의 고전적 주장은 특히 G. Costa , Vi co e ii Sett ec ento , Forum Jtali ac um, vol. 10(1976), pp. i 0-30 에서 보다 세련되게 반복되었다 . 1692-1693 년에 종교재판소에 의해 · 투옥된 비코의 두 친구는 Gia c in t a de C ri s t o faro 와 Nic o la G ali z i a 이다. 그외에도 동시대의 일급학자 G i annone 가 이단의 협의로 기소되었다. 동시대 자유사상가들 l i be rti nes 은 루크레티우스, 에피쿠로스, 가상디 둥을 추종하여 원시인이 <야수인간>이라는 테제를 선 호했으며, 그러한 이유 때문에 처벌되기도 했다 . 심지어 나폴리의 한 사제는 <야수에게는 불완전한 이성만이 있다>, <인간은 이성적이 아닐 수도 있 다>는 주장_<야수인간>의 테제를 함축하는_만으로도 이단으로 구속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단의 혐의를 피하려는 비코의 노력이 그의 저서에서 실제로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는 불분명하다. 로시 Paolo Rossi 는 『새로운 과학』의 엄밀한 분석을 통해 비코에게 성사와 이교사가 각기 무 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새로운 재구성을 시도했다. 그에 의하면 비코의 연 대기에서 중심축은 여전히 성사적 전통이 차지하고 있다.
고 기소이유가 애매 했 으며 그나마 사형당한 자는 없었다는 이유를 들어 이 같은 추정이 과장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크로체 가 그린 비코의 모습이 더욱 옳은 듯하다. 인기 없음이나 검열을 피하려 안절부절하던, 정통 가톨릭신자가 아니라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가톨릭교회의 독실한 신자로 보 이기 위해 고심하던 , 가난에 찌들어 살던 대학 선생이라는 비코의 모습이 그 것 이다 미슐레는 1854 년에 < 비코는 자신이 여전히 신자 임을 스스로에게 확인하려 애쓰고 있다 > 라고 적었다 . 81 이것은 1831 년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반복한 것이다. 비코의 사상은 <저 자 자신이 믿었던 것보다 훨씬 대담하다. 비코의 책이 교황 클레 멘트 12 세에게 헌정된 것은 천만다행스러운 일이다 . > 91 더욱이 비
8) G. Monad, Jul es M ich e le t: etud es sur sa uie ses reuures, auec des fra g me nts ine dit s(P ari s, 1905), pp. 15 一 16 참조 . 9) Mi ch elet, Hi st o i r e Romain e , p. 13(0. A. Haac, 앞의 책으로부터 인용) . 미슐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 비코는 신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만들어 지지 않는가 를 …… 신들의 창조자는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그는 그의 자아 를 끊임 없이 주조하면서 자신의 땅 자신의 하늘 을 만들어 간댜 이런 식의 전개는 비코 자신이 두려워할 정도로 대담하며 충격적이어서 그는 자신이 여전히 신자임을 스스로에게 확인하려 애쓰고 있 다 > (미슐레의 1 8.54년 미발표 노트의 일절 Alai n Pons, Vi co and French Thoug h t, in Gia m batt ista Vico , p. 182 로부터 인용.) @
강력한 조류가 있었다. 이 조류는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의 원전에 대 한 카조봉 Issac CasaubonU559 - 1614) 의 언어문헌학작 비판을 필두로 워버 튼 Wi lliam Warb urt on 의 『 모세의 신성한 입법 The Di vi n e Leg a ti on of Moses 』 (London, 1741) 까지 강력하게 지속되었다. 비코는 이 양편에 대한 비판적 종합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그는 이교적 기록의 태고성과 심오함에 관한 일련의 주장들이 < 민족의 허세>와 < 학자의 허세 > 에서 비 릇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교적 기록은 비록 태고의 것도 심오한 것도 아니지만, <시적 지혜>라는 소중한 유산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고 비 코는 주장한다. 그의 『새로운 과학 』 은 이 원시적이고 이교적이고 시적인 지 혜에 관한 해설서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에게는 <성서비판Hig her C ritici sm > 의 원조격안 스피노자와 시 몽 Pere Sim on 이 처음 사용한 비판적 방법의 영향이 뚜렷히 드러 난다 . ® 비코는 스피노자를 혐오했지만 그의 방법까지 멀리하지는 않았댜 비코는 스피노자의 방법을 이교민족의 태고에로 한정해서 나마 차용했댜 비코와 비슷한 심리적 모순을 드러내는 실례는 많 다. 마키아벨리가 반기독교적인 방향으로 멀리 나아갔다고 해서, 참회기도서를 작성할 때의 혹은 임종고해할 때의 그가 위선적이었 다고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다. 동시대인들로부터 무신론자로 비난 받았던 홉즈도 스스로는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비코의 사후에 비코를 아베로이즘적 논증법으로 변호하려는 시도가 있었 댜 비코의 철학적 견해는 그의 종교적이며 신학적인 신조와는 전 혀 무관하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는 모순가능성이 없다는 논지의 변론이 그것이었다. 실로 인간이란 정신적으로는 독실한 신자로 남아 교회나 당파나 국가의 충직한 성원이 되고자 열열히 갈망하 면서도 이와는 정반대의 견해를 공표할 수 있음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실제로 비코는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생애 의 후반부 동안 여러 성직자들 및 수도사들과 매우 가깝게 지내면 서 그들로부터 동정과 도움과 충고와 후원을 구했다. 더욱이 비코
가 유물론이며 무신론이며 자연과학을 혐오했던 면은 그가 동세기 의 중요한 과학적 발명들에 대해 무지했던 면만큼이나 분명하게 드러난댜 비코는 < 영성주의 s pirit ual i sm > 와 종교의 충직하고 독 실한 수호자였댜 사실상 원시인의 생활에 대한 그의 재구성은, 아 무리 원시적이고 기만적일지라도 종교만이 사회적 유대를 창조하 고 유지할 수 있으며 종교만이 야만인을 교화하여 인간답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 섭리 없이는 진보도 없다. 물론 섭리는 인간의 능력을 통해 작용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우리가 섭리의 방식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 그러나 신의 계획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태고적의 < 거대한 숲 > 속에서 방랑하고 있을 것이댜 하늘의 천둥으로 명령하는 신 앞에서의 수치감으로 서든, 진정한 하느님이 심어 준 경외감으로서든, 종교적 감각은 섭 리가 사용하는 첫번째이자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섭리는 우리의 유치한 본능을 바꾸어서 인류를 보존하고 개선하는 수단으로 사용 한다. 경외감이나 신앙심이나 종교적 권위에 대한 느낌이 약화되 면 사회 전 체계의 운명도 바뀌며 결국은 두번째 야만상태에 진입 하게 된다. 『새로운 과학 』 의 유명한 구절에서 묘사되고 있듯이, 이 야만상태에서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여전히 거대한 무리를 이루 고 있지만, 각자가 자기만의 쾌락과 변덕에 따름으로써 둘 사이에 서도 합의를 이루기 힘든, 정신과 의지의 깊은 고독 속에서 마치 야수처럼 살게 될 것이다 . >IO) 이 점에서 비코는 콩트나 생시몽과 다르다 . 비코는 종교가 사회적 접착제로서의 유용함이라는 가치만 을 갖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종교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 는 것이기도 하다. 종교의 상실은 타락이며 비인간화이다. 비코는
10) N. S. pa r. 1106.
정통교리를 따르지도 않았고 어쩌면 이단에 가까 웠 지만 , 분명히 종교적이었다. 이 같은 탈선과 모순이 바코의 중심 체계 를 가리우지는 못한다. 비코 체계의 본질에 해당하는 이론들은 손상없이 유지된다. 내적 목적에 따라 전개되는 인간본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통찰에 기초하 는 그의 역사이론이 그러하며, 기독교인과 무신론자가 함께 열심 으로 주장할 만한 그의 생기론적 사회학이 그러하다. 이 체계의 요체는 무엇보다도 < 인간사회의 세계는 확실히 인간에 의해 만들 어져 왔기 때문에 그것의 원리들은 인간 정신의 변양들 속에서 발 견될 수 있다>는 테제이댜 Ill 그렇지만 기계론적이지도 결정론적 이도 선험적이지도 않은, 이 인문주의적 주장은 비코가 죽은지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일종의 < 반동적 > 테제로 수용되었다 . 프랑스 와 이탈리아의 현실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은, 보쉬에나 메스트르나 버크 Edmund Burke 식으로 신정정치론이나 권위주의 이론을 피력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 대신 비코 테제의 반동성을 부각시켰 던 것이다 사실상, 역사에 작용하는 하느님의 손에 대한 비코의 논증은, 결국 인간의 태도나 목적이나 세력이 전적으로 인간에 의 해 만들어지고 계획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었댜 가장 유익하고 영속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제도들은 인간의 의식적 의도의 결과는 아니라는 주장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비코의 논증은 다른 뜻을 지닌 것이었다. 그의 진정으로 의도한 바는, 비록 인간이 인간의 역사를 거의 대부분 만들지만 인간의 힘만으로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혹시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인간과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이 공동의 저자는
11) N. s. p ar. 331.
목적도 생명도 없는 비인격적 자연-즉 물질적 과학들에 의해 발견되는 법칙들에 따라 운행하는 자연一_크이라고 제멋대로 상 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비코가 이 같은 입장을 거부했음 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의 삶을 윤곽짓는 것은 섭리이다. 인 간이 섭리의 모든 작용방식들을 낱낱히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은 주제넘은 것이다. 인간은 섭리의, 섭리하는 유일한 영적 존재의, 도구일 따름이댜 그 스스로 창조한 것만을 인간은 이해할 수 있다. <영원한 원형적 역사>, <발생 • 발전 • 성숙 • 쇠퇴 • 몰락의 과 정을 겪는 모든 민족의 역사를 지배하는 법칙>은 일종의 다성음 악적 유비에 기초하는 것 같다. 각각의 연주집단은(죽 각 민족, 각 문화는) 자기의 곡만을 연주하지만, 이 곡은 다른 연주집단이(죽 다 론 민족, 다른 문화가) 다른 시간에 상이한 음계와 템포로 연주하는 곡과 구성 면에서는 동일하거나 적어도 유사하다는 말이다 .121 애매 하고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코의 주장을 그 대로 따른다면, 사람들이 <발생 • 발전 • 성숙 • 쇠퇴 • 몰락>의 순 환주기를 추적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그 주기를 만들었기 때문이 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역사의 순환주기는 지성과 상상력의 충 실한 발휘를 통해서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재 구성이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이 그럴 수 있는 것은, 그가 <모든 인간을 관류하고 모든 인간에게 현전하는 영원하고 무한한 정신 >131
12) 이것은 라이프니츠적인 이미지이지 교향곡 같은 이미지는 아니다. 후자는 이를테면 헤겔의 유기체론을 지배한 이미지처럼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파 악될 수 있었던 것이다. 헤겔의 유기체론에서 음(音)들, 죽 세계사의 발전을 구성하는 개별 요소들은 각기 다른 <음>과 접속되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 다. 음들은 그것들 하나 하나로는 시끄러울 수도 있고 무의미할 수도 있지 만, 유기체적 전체라는 관점에서 그것의 요소들로 <들려>질 때 비로소 의 미와 가치를 획득한다.
13)
과 교류하면서 그 속에 살기 때문인가? 비코가 범신론자는 아니지 만 절대적 관념론자임은 분명하다는 크로체의 주장을 따르자면 , 인간이 한 보편적 정신의 일부이기 때문인가? 만일 그 렇 다면 , 가 톨릭 정통교리에 입각한 비코의 주장 , 즉 초월적인 인격신에 대한 비코의 주장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크로체의 주장이 오 류라고 치자. 그렇다면 재구성은 < 인간이 만든 것을 인간이 이해 할 수 있다는 원리>에 의해서만 가능할 뿐, 모순이나 불경을 무릅 쓰지 않고는 접근할 수 없는 < 신적 정신 > 의 변양들 속에서는 결 코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러나 우리가 < 진리란 만들어진 것 > 이 라는 진리규준을 사용해서 우리의 과거를 완전히 인식할 수 있다 고 주장한다면 , 초월적인 신의 간섭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비코가 <우리 인간정신 > , < 우리의 의도 > , < 제 민족의 인간정 신>, <우리의 인간적 사고 > , < 우리의 영혼 > 등으로 언급할 때 , 1 4 ) 이 같은 어구들은 만인에게 공통적인 무엇인가롤 지칭하는가, 아 니면 융의 <집단무의식 > 에서처럼 < 집단적 > 이지만 범신론적인 함축을 지닌 어떤 정신을 지칭하는가? < 우리의 nos tr o > 라는 어법 은 단지 은유인가 아니면 논리적 확충인가? <이교도들이 스스로 에게 법을 부과하는 자연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 1 51 는 비코의 언급 은, 이교도들이 < 법 > 을 창조한다는 뜻인가? 따라서 불가사의한
14)
섭리가 이교도들에게 법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법을 스 스로 창조하고 이해할 정도로 이성적이었다는 말인가? 비코는 풍 요롭고 함축적이며 독창적인 사상가이지만 결코 명석하거나 논리 적으로 정합적인 사상가는 아니다 . 음악가 베를리오즈 Hec t or Berlio z 에게는 < 그의 천재성에 어울리는 재간이 없다 > 는 하이네 Hein lich He i ne 의 비평은 비코에게도 어울릴지 모르겠다 . 『새로운 과학 』 의 도처에서, 유신론과 인문주의적 역사주의, 섭리의 간지(好智)와 인 간의 창조적이고 변신하는 노력은 긴장을 형성하고 있다. 긴장은 해소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그것이 변증법적 긴장이라는 해석은, 짐짓 무게 실린 용어를 빌어서 근본적인 간극을 은폐하는 일에 지 나지 않는댜 또한 이 긴장에서 가톨릭편 해석자들은 섭리를 강조 하고, 미슐레를 비롯한 인문주의편 해석자들은 인간의 노력을 강 조하지만, 비코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대목을 대변하는 편은 인문 주의적 관점임이 분명하다. 인간에게는 < 거대하고 조화로운 관념 들의 형성을 보면서 느끼는 신적 쾌락 > 이 있다 .1 6 ) 이 쾌락은 인간 이 자기자신의 창조적 활동을 명상하면서 느끼는 것이기에 신적이 다. < 어떤 것의 창조자가 그것을 기술할 때보다 확실한 역사는 있 을 수 없다 . > 1 71 여기에 비코는 기이하고 애매하지만 대단히 매력 적인 한 구절을 덧붙인다. <안간은 논리학에 의해 언어를 발명하 고, 윤리학에 의해서는 영웅올 창조하며, 경제학에 의해서는 가족 을 정립하며, 정치학에 의해서는 도시국가를 창조하며, 물리학에 의해서는 어떤 의미에서 그 자신을 창조한다 .>1 8 ) 이 구절에서 <어 떤 의미 > 가 무엇인지에 관한 해설은 없다. 사람들은 그들이 행하
16) N. S. pa r. 345. 17) N. S. pa r. 349. 18) N. S. pa r. 367.
고 믿는 모든 것을 개인적 혹은 집단적으로 만들어 왔다 . 만일 인 류 전체가 마치 한 사람처럼 말할 수만 있다면 , 인류는 모든 것 을 기억하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이야기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댜 그러나 인류역사 전체가 개인적으로 창조되 지는 않기 때문에, 역사적 진리는 수학자가 스스로 고안한 것들에 대해 진리를 인식하는 식으로는 인식될 수 없을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의 제재는 허구적이 아니라 실재적이다 . 『 새로운 과학 』 은 비록 수학보다 덜 투명하지만, 기하학이나 산수나 대수로 서는 말해 줄 수 없는 현실세계에 관해 진리를 말해줄 수 있다. 역사학이며 신화학이며 문학이며 법학은 인간에게 실로 많은 것 을 가르쳐 준댜 이를테면 인간이란 과거에 무엇이었고 지금은 무 엇인지, 왜 인간이 지금의 모습으로 되지 않을 수 없는지 , 인간이 다르게 될 수도 있었는지, < 제 민족의 본성이 처음에는 조야하다 가 다음에는 엄격해지고 다음에는 대범해지며 다음에는 섬세해져 서 결국에는 방탕해지는> 까닭은 무엇인지 , 191 이 순환에서 우리는 어떤 단계에 도달해 있는지, 역사라는 거대한 계단에서 우리는 어 디쯤에 있는지, 따라서 우리가 따르기에 가장 적합한 길은 무엇인 지 등등을 가르쳐 준다. 『새로운 과학 』 은 그만큼 풍요로운 작품이 다. 그것의 현상학은 헤겔주의, 마르크스주의, 콩트적인 실증주의 , 가톨릭교적인 <부활> 이론을 통해 , 또 어느 정도는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들의 영향을 받은 사회심리학을 통해, 정교화되어 왔고 다양한 방향으로 응용되어 왔다. 일례로 우리는 비코의 방식으로
19) N S. pa r. 2 42. 파치 교수는 바코가 인간의 상승을 < 야수적 인 것>과 < 영 웅적인 것>과의 투쟁으로 파악했다고 주장한다(In g ens Sy lv a). 비코가 태고 적 과거 를 이상화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 어쩌면 모든 시대에 대해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
우리 자신의 유아기와 청춘기에 대한 정신분석을 시도하여, 그 증 거 위에서 예측을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비코는 자기가 만든 새로운 관념의 신선함과 강렬함에 스스로 사로잡힌 나머지, 결론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수집하는 일에는 소홀했다 . 이미 17 세기 말에는 이교민족들에 관한 여행가들의 각 종 이야기들과 보고서들이 범람하고 있었고, 몽테스키외를 비롯한 18 세기 대다수의 사회 윤리 이론가들은 그것들을 극성스러울 정도 로 이용했댜 비코도 그것들을 도처에서 언급하기는 했지만, 그것 들에 의존한 경우는 거의 없다. 자기의 세계관을 뒤바꿔 버릴 정 도로 강렬하고 혁명적인 전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때로 경험적 사 실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기 싫어하는 법이다 . 비코의 전망과 방 법은 귀납과학의 그것과는 달랐다.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비코는 보편적 관념을 특수한 실례에 의해 증명하는 식으로 사고했다. 가 설을 신중하게 검증하기 위해 상세한 증거를 찾은 경우는 거의 없 었댜 201 그는 자연과학이 서구문화에 미친 결정적 충격에 무지했던 것 같다. 이 같은 측면 역시 비코의 작품이 사후에 그토록 쉽게 잊 혀진 이유를 어느 정도는 설명해 줄 수 있다. 물리과학들이 전대 미문의 진보를 이룩해가던 시대에, 비코는 『지혜』에서 대담하게도 < 물리학은 사물을 참되게 정의할 수 없으며> 역사학이야말로 진 리에 더욱 근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원자론이며 <에피쿠로 스주의>이며 공리주의 등 당시의 사회 정치 사상을 지배하던 온
20) 독자는 피쉬 교수의 견해가 필자의 것과는 다르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 피쉬는 『 새로운 과학 』 이 귀납과 신중한 가설에 의해 진행된다고 본다 (Gi am batt ista Vico , p. 423). 나는 원전에서 그 같은 증거를 별로 발견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피쉬의 주장은 비코의 중심 테제들 중 하나, 죽 자연과 학의 방법과 역사학분야의 방법 간의 메울 수 없는 간극에 대한 비코의 주 장과도 모순된다.
갖 기계론적 모델들을 가혹하게 공격했다 . 이것은 실로 독창성과 독립성의(혹은 외고집의) 기념비적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제 11 장 제 민족의 자연법
비코는 스스로가 철학과 역사학의 핵심적 진리를 발견했음을 믿 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무엇보다 법학자로 자임했으며, 법학의 영역에서 데카르트나 그로티우스의 오류를 공격하는 데 가 장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그로티우스며 셀던이며 푸펜도르프 같 은 17 세기의 유명한 대가들을 향해서 (비록 그가 교회의 눈총을 피할 요량에서 직접 언급한 적은 없지만 중세의 기독교 이론가들을 향해서도) 퍼부은 비난의 요체는, 그들이 인간본성의 불변성과 보편성을 가 정한다는 점이었댜 그들은 이러한 가정 하에서, 시간과 장소를 불 문하고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일련의 행동 원리들을 연역할 수 있 다고 믿었으며, 인류의 · 모든 법들의 영원한 토대를 구성할 수 있 다고 믿었다. 그들은 시간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요구되는 특수한 변양과 특수한 적응방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비코는 이 같은 종류 의 정태적인 핵심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처럼 불변적인 원자는 존재할 수 없다. <본성은 ‘발생’이다.> 죽 <본성은 어떤
사물이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본성 은 변화요 성장이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서로를 변형시켜 주는 힘 들의 상호작용이댜 변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흐름의 내용이 아니 라 형식이댜 흐름을 지배하는 법칙의 가장 일반적 형식만이 불변 적이고, 그 내용은 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본성의 참된 법칙 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자연법 > 도 , 일련의 보편적 규칙들도 아니 댜 이 규칙들이 아무리 일반적이고 아무리 극소수이며 아무리 오 래되었다 할지라도 그러하다. 참된 법이란 특정한 사회환경에서 새로운 생활방식의 표현으로 새로운 법이 발생한다는 사실 그 자 체밖에는 없댜 예컨대 < 사회적 형평 > 은 만인의 영혼에 초시간적 이며 보편적으로 잠재한 원리가 아니라, 울피아누스 Ul pi anus 가 <사회를 유지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깨닫게 되었던 소수>라 고 부른 자들에 의해 정립된 원리이댜 2) 물론 사회마다 사회를 지 배하는 일련의 규칙들이 존재하며 사회성원들의 대부분은 그 규칙 들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 규칙들은 결코 천재적 입법가에 의해 고안되어 모든 인간 모든 민족에 의해 <수용되기>만을 기다리는, 따라서 그 천재의 세계관에로 귀인될 수 있는, 객관적 진리들이 아니다 . 그 규칙들을 낳은 것은, 주어진 특정한 환경에서 인간존재 들은 공통적인 방식으로 믿고 표현하고 살아가고 생각하고 행동하 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 <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의 예를 모방하지> 않아도 서로 일치하는 법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모든 민족에게 <공통감각>이 있기 때문이다_ 비코가 말하는 <공통감각>은 한 사회의 집단적 전망과 유사한 뜻 을 지닌댜 3) <매 민족마다 공통감각이 있어 사회생활 전반과 모든
1) N S. pa r. 147. 2) N. S. par . 320.
3) N. S. par . 311 .
인간행위를 통제하며, 그럼으로써 이 모든 활동이 그 민족 전체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바에 따르도록 만든다 > 는 것이다. 이것이 비코 가 말하는 자연법의 참뜻이다 . 그것은 철학자들의 자연법이 아니 라 < 제 민족의 자연법 > 이댜 4) 물론 만인에게 공통적인 것도 있다. 종교며 결혼이며 장례 같은 제도들이 그러하다. 비코는 이 세 가 지 제도들이 어느 사회에서든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코 가 그것들이 정태적 보편법의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댜 그것들의 형식은 민족마다, 시대마다 현저히 다르기 때문이다. 지속적이고 역동적인 변화과정에서 모든 단계에 공통적 인 것을 추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모든 도형, 모든 색채, 인간의 모든 얼굴이나 모든 인생으로부터 하나의 공통요소를 추출하여, 하나의 표준적인 혹은 자연적인 도형이나 색채나 얼굴이나 인생을 공표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어떤 공통적이고 불변적인 믿음을 추출하여 그것을 자연법이라 부르려는 시도는 쓸 모없는 짓이다.
4) N. S. par . 332. par . 135 참조.
그렇다면 < 제 민족의 자연법 ius natu rale g en ti um> 이란 무엇인 가? 비코의 설명은 독특하다. <자연>(혹은 본성)이 단조로운 인과 적 반복을 뜻한다면, 이러한 의미에서의 자연은 바로 인간이 저항 하고 극복해야만 하는 대상이다. 새들의 세대교체에서는 새로운 것이 더해지지 않는다. 어미가 새끼 앞에서 행한 것이 영원히 반 복학습될 뿐이댜 인간이라면 이런 기계적 <자연>을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피해야만 한다. 인간에게 <자연적>이란 고정적 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사회에로 성장하는>이라는 뜻이댜 마찬가지로 <제 민족>은 인간 사회들이 각기 나름대로 형
성해가는 무엇을 뜻한다(각 세대는 다음 세대 를 어깨 위에 무동태운다) . 제 민족은 위로부터 명령하는 현자들에 의해 형성되지 않는다. 옛 시대의 이론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제 민족은 < 객관적 질서의 이름으로 명령하는ip s i s rebus dict a n ti bu s> <엘리트 > 집단에 의해 형성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회마다 각자 의 문화적 발전단계에 고유한 < 민법 > 이 있다. 물론, 어떤 민족이 < 시적 > 혹은 < 영웅적 > 단계에 속해 있어서 아직 보편적 관념을 구비하지도 점진적 진보를 파악하지도 못할 때, 그 민족은 과거에 대한 감각을 신화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 이를테면 리쿠르고스 나 드라콘이나 솔론 같은 전설적 입법가들이 마치 신처럼 단번의 창조행위로 모든 법을 만들어 주민 전체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신 화가 그러하다 . 그리하여 그들은 각기 자기 민족의 위대한 시조이 자 사회 전체의 상징으로 신격화된다 . 그러나 이런 신화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배후의 진리에로 접근해야만 한다 .51 법은 사회 전체의 점진적이고 집단적인 반응을 담고 있기 때문이 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태고적 시편들 특히 호메로스의 시편들 은 그리스인들의 법이며 관습이며 생활방식을 전해 주는 < 가장 위대한 보고( 寶庫 )>가 될 수 있다. 실제로 그리스인들은 비록 허황 된 상상력으로 호메로스 시편들의 기원을 소급시키기는 했지만, 그것들 속에 자민족의 전통적 가치가 체현되어 있다는 것만은 정 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그들은 다만 그 전통적 가치를 역사적으로 정
5) 그렇지만 만일 이런 식으로 호메로스나 리쿠르고스가 설명될 수 있었다 면, 가톨릭 비판자들이 비코에게 정당하게 의문을 제기했듯이, 모세 를 비롯 한 기독교 선지자들, 심지어는 교회를 만든 하느님까지도 비슷한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책 1 부 10 장의 각주 10); Auto b io g rap h y, Great Seal edition , p. 63, p. 213, n. 65 참조.
확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자의식을 갖추지 못했을 뿐이 다). 어쨌든 이 같은 전통적 지혜는 자의식과 자기비판이 성장함에 따라 의문시되는 경향이 있다. 원래 평민들이 열등한 지위를 감래 했던 것은, 그들의 본성이 <우월한> 귀족의 본성에 비해 객관적 으로-태어날 때부터-열등하다는 형이상학적 토대를 아직 의심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일단 비판이성이 이러한 형이 상학적 독단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자극하자, 평민들은 그것을 의 심하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거부하기에 이른다. 거부는 반란으로 귀결되고, 반란은 다시 신화로 포장된다. 이 같은 신화적 상징화의 귀감적 실례로는, 로마의 평민분리 운동 Secess i on 이나 호민관 제 도를 들 수 있다. 신화는 은유에게, 은유는 다시 규약적 화법에게 자리를 내준댜 언어의 규약적 사용에 상응하는 것은 철학이며 민 주주의며 산문체의 성장이다. 뿐만 아니라 언어의 규약적 사용은, 시가 이제는 의도적인 심미적 활동이 되기 시작했음을 뜻하는 것 이기도 하댜 이제 시는 자기의식과 인위성의 증가를 드러낸다. 자 연법과 실증법도 더 이상 고대 로마의 법조문처럼 <엄숙한 시>로 표현되지 않는다. 인류의 진보과정 전체가 그러하듯이, 법의 진화 도 <문헌언어학에 의해> 가장 적절하게 추적될 수 있다. 이런저 런 법전들을 표상한 언어의 연속적 변화과정을 검토하는 작업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비코의 지적 용기는 실로 대단하다. 그에게 유일한 용기가 지적 인 것밖에는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그렇다. 자연법이란 보편적 이고 절대적이고 객관적 법이라는, 유럽세계가 2 천 년이 넘도록 한결같이 진리로 유지해온 관념을 공격하겠다는 결심은 실로 대담 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비코의 결심은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더욱 돋보인다. 당시는 위대한 법학자들이 판치던 시절로, 그들
은 한 목소리로 자연법이란 수학적 법칙만큼 확실하기 때문에 하 느님마저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못박고 있었다 . 이런 상황에서 비코는 그들의 자연법을 전혀 다른 종류의 자연법으로 대체하고자 했다. 비코의 자연법은 사회적 경험의 풍요로운 다양성을 모두 포 괄하는 일련의 규칙들로 구성된다. 여기서 사회적 경험은 초시간 적 공리들로부터의 연역가능성에 의해 체계화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존재가 실제로 생각하고 행위한 근본적 一~ 변화가 능한-범주들에 비추어서 체계화된다. 진실과 오류, 소유와 정 의, 평등과 자유, 주인과 종의 관계, 권위와 처벌 이 모든 개 념들은 단계에 따라 진화해 간다. 이 개념들의 변화를 구성하는 계기적 단계들 사이에는 일종의 가족유사성 family resemblance 이 존재할 뿐이다. 이 계기적 단계들은 마치 근대 사회를 만들어온 선조들의 초상들처럼 줄지어 늘어서 있다. 다양한 조상들로부터 그만큼 다양하게 분기(分枝)된 다양한 가족들 사이에서 온갖 차이 들을 제거하고 나면 하나의 원초적 중핵이 발견될 수 있다는 믿음 은 덧없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원초적 가족을 발견해서 이 개성없는 실체가 인류의 영원한 얼굴이라 주장하는 것 역시 의 미 없는 일이다.
제 12 장 비코의 선구적 업적들
자연법 이론가들이 추상적이라면 비코는 구체적이다. 그들이 자 연인이나 자연상태 같은 허구를 고안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을, 비 코는 한 치의 혼들림 없이 자기가 <역사>라고 명명한 것을 위해 쏟는다. 그가 기술한 역사는 부정확할지언정 시간구속적 time - bound 인 측면에서는 철저하다. 자연법이론가들은 윤리학과 정치학 을 구분한 반면에, 비코는 윤리학과 정치학이 동일한 유기체의 진 화과정에 속할 뿐만 아니라 개인들이 사회 내에서 수행하는 그밖 의 모든 자기표현들과도 연관된다고 주장한다. 자연법이론가들이 개인주의적이라면, 비코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강조한다. 그는 만일 인간활동이 로빈슨 크루소의 고립된 삶처럼 기술된다면 그 대부분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 로든 행동하는 까닭은 그들이 사회 집단의 성원이기 때문이다. 그 들의 사회적 소속감은 음식이나 집이나 생식에 대한 그들의 욕망 만큼이나, 그들의 성욕이나 수치심만큼이나,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
는 권위나 진리 같은 것들에 대한 그들의 추구만큼이나, 근본적이 며 결정적이다 끝으로, 법학자들이 엄밀하고 명석하고 형식적이고 이성적이고 공리주의적이라면, 비코는 종교적이고 불명료하고 직 관적이고 혼란하고 지극히 애매하다.
진리와 확실성에 대한 그의 이론도 똑같이 < 독창적이다 > 비코 는 테카르트의 수학적 모델이 인간경험의 가장 풍요롭고 가장 중 요한 부분을 무시한다는 이유에서 비난한다 . 데카르트적 모델은 일상생활이며 역사며 법이며 제도며 인간의 자기표현양태 등 자연 과학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무시한다. 더욱이 비코는 오늘날에 와서야 당연시되고 있는 견해를 이미 2 백 년 전에 피력하 고 있다. 수학이란 실재에 대한 기술(記 述 )이나 동어반복의 체계가 아니라, 인간의 허구적 발명품이요 장기와 유사한 게임이라는 견 해가 그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비코가 <시학 > 이라 부른 그의 미 학은 줄거움을 주거나 진리를 꾸미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 2) 인간 의 원초적 활동으로서의 세계관울 표현하는 활동이다. 이 점에서 미학적 활동은 법이나 정치와 동일한 수준에서 연구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비코는 언어와 신화란 인간정신의 자유로운 창조물 들로서 의도적 기록들보다 더욱 필수불가결한 사료(史 料 )가 될 수 있다고 믿는댜 그의 역사학은 동시대인들이 생각하던, 헤로도토스 이래로 2 천 년 동안 거의 모든 사람들이 생각해 온 역사학이 아니
1) 그의 독창성은 이 책 제 2 부의 주제이다 . 2) 비코는 <시란 꾸미는 것 아니면 즐거움을 주는 것 > 이라는 호라티우스의 거의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금언을 부정한다. 헤르더도 비슷한 생각을 보여 준다. 예술가의 창조는 그와 무관한 가치를 지닌 아름다운 대상을 운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표현이라는_―-죽 대상의 제작이 아니라 의사소통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비코는 헤르더 를 비롯한 낭만주의적 비평가들의 직 접적 선구자이다.
댜 말하자면 < 실례에 의해 가르치는 철학 > 도 아니요, 옛 영광의 재현도,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인과관계의 발견도, 특수한 순간에 실제로 발생한 것의 발견에만 국한되는 작업도, 죽은 자를 정당화 하는 작업도, 즐거움을 주는 작업도 아니다. 비코의 역사학은 사회 체계와 사회의식을 계기적 발전단계에 따라 해설하는 이야기이다. 비코는 칸트에 앞서 공리주의의 부적합성을 폭로한 인물이요, 루 소며 헤겔보다 먼저 원자론적 사회관의 오류를 지적한 인물이다. 그는 확실성과 판단 같은 범주를 타당성과 증명적 진리 같은 범주 로부터 구분한댜 발견을 발명으로부터, 만드는 것을 기록하는 것 으로부터, 원리며 규칙이며 법칙의 본성을 명제의 본성으로부터, 인식의 범주를 의지의 범주로부터 구분한다 . 이런 식으로 비코는 19 세기와 20 세기의 수많은 법철학자, 윤리학자, 철학적 사회학자에 의해 발전된 관념들을 예비하고 있다. 자연법을 거부하고 인간이 만든 세계를 강조하며 사회생활의 모든 측면들을 해석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비코는 독일 역사학파의 진정한 선구자이다. 한 사회의 방향은 사회성원들의 전체 의지, 죽 의지들의 총합과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따라서 사회는 이런저런 목적을 추 구하지만 개인으로서의 그 성원들 전체나 대다수는 의식적으로 전 혀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점에서, 비코는 헤겔과 사회심리학자들의 선구이다. 하만, 셸링, 니 체, 뒤르켈 정신분석학의 선구자들 등에 앞서, 비코는 신화나 원 형이미지나 상징구조가 인간정신을 형성해 가는 측면을 파악했다. 요컨대 그는 신화학, 인류학, 역사고고학, 언어문헌학, 언어학, 역 사학적 예술비평, 특히 문화의 발전에 관한 학문으로서의 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의 비교연구들을 망라하는 거대한 영역의 창조자이 댜 그는 생시몽에 앞서 계급투쟁이 역사에서 수행하는 중심적 역
할에 관해 언급하고 있댜 문명상태를 뒤이을 새로운 야만상태라 는 비코의 이론은 헤르첸 Alexander Herzen 과 소렐 George s Sorel 의 이론을 예비하고 있다. 영웅적 가치에 대한 비코의 생각은 니 체의 사상을 선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비코는 자연과학과 인문 학,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을 그은 인물이다. 이것은 비코 이후로 오늘날까지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자 연과학은 가설과 검증에 의해 연역적이자 귀납적으로 진행된다. 즉 현상들의 동시발생과 연속발생의 규칙성으로부터 일반화되는 이상적 모델을 논증하는 동시에 이 모델에 따라 논증한다. 반면에 인문학은 인간경험을 가능한한 구체적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 따라 서 인문학은 통일성이며 시간적 무차별성이며 불변적 반복적인 패 턴 따위보다는, 다양성이며 차별성이며 변화며 동기와 목적이며 개체성을 강조한댜 이 점에서 비코는 과학적 분석과 역사적 분석 의, X 선 사진과 초상화의 근본적인 차이를 파악한 최초의 근대 사 상가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다수의 차별적 사례들로부터 동일하 거나 유사한 것을 추출하여 법칙이나 모델을 정립한 뒤에 이 법칙 이나 모델을 미지의 미래나 과거에 적용하여 새로운 지식을 획득 하는 방법이다 대조적으로 후자의 방법은 상이한 사례들의 공통 적 핵심이 아닌 각 사례의 개성을 해명하고자 한다. 개별적 행동 이나 사건이나 인물을, 각각의 사회나 예술유파나 문학작품을 지 금의 모습으로 독특하게 만들어 준 개성을 해명하고자 한다. 이 방법은 인간존재들을 그들의 특수한 시간과 환경에 비추어 다름으 로써, 그들을 그들에게 고유한 도덕적 • 지적 • 역사적 • 사회적 <맥락> 속에 자리매김한다. 또한 이 방법은 보통사람들의 일상적 인 삶에서 사용되는 기준과 원칙적으로는 다르지 않은 물론 좀더 세련되었겠지만-기준을 사용하고 참조한다. 비코가 바람
칙하게 여긴 역사가는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역사가이지, 철학자처럼 사실들을 개략적 일반화의 관점에서 다루는 역사가가 아니다 이것은 베이컨의 주장과 유사하다. 그렇지만 비코는 훨씬 심오하댜 비코는 역사와 삶을 취급하는 방법이 자연과학적 방법 에로 동화될 수 있는 가능성 혹은 그 반대의 가능성을 모두 회의 하고 결국에는 부정한 최초의 사상가이다. 물론 이 주제에 관한 논쟁은 비코의 시대보다는 우리의 시대에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댜
제 13 장 비코의 독자들
과거에 누가 비코를 읽었던가? 오늘날에는 누가 읽고 있는가? 비코의 자서전-그의 시대에 비교적 새로운 <장르 > 로서 비코 자신은 그것을
라고 불렀는데 ――-을 계획한 저명한 문학후원자 베네치아의 백작 포르치아와 주교 콘티는, 비 코가 나폴리에서나 통하는 수재의 수준은 훨씬 넘어서는 인물임을 잘 알고 있었다 . 비코의 후원자였었던 추기경 코르시니는 홋날 교 황으로 선출되었을 때에도 비코를 잊지 않았다 . 그러나 바코는 거 의 이해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그는 기껏해야 반짝이는 재능 을 지닌 괴짜 정도로 알려졌고, 특수 분야의 전문가들에게나 홍미 있는 인물이었다. 주교 콘티는 몽테스키외가 베네치아를 방문했을 때 『새로운 과학』의 일독을 권했다고 전해진다. 그렇지만 이 사실 에 대한 크로체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몽테스키외가 이 책을 읽었 다든가 서재에 소장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 르클레르크J ean Leclerc 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비 코의 명 성 은 거 의 나폴리 에 국한
1) 몽테스키외와 비코에 관해서는, Robert Shackleto n , Mon t es q u i eu(Claren 一 don Press, Oxfo rd , 1961) 에서의 해설을 참조 .
되었댜 그의 명성은 주목할 만한 시골학자로서의 명성, 혹은 그라 비나 Grav i na 나 무라토리 Murato r i 같은 당대의 일급학자들의 친구 로서의 명성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학문적 전통을 연구하 는 학자들 외에는 비코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었다. 비코 가 죽은 뒤에 파가노 N. Pag a no, 체사로티 Melch ior re Cesarott i, 제 노베 시 Anto n io Genovesi, 갈리 아니 Ferdi na ndo Gali an i 등이 그의 업적을 부분적으로나마 이용했다. 특히 주교 갈리아니는 가톨릭교 회의 비코 후원자들 중 한 명의 조카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걸출하고 독창적인 작가이자 외교관이자 경제학자였고, 돌바크와 엘베티우스의 친구이자 지적 동지였다. 갈리아니는 비코를 몽테스 키외의 선구자로 삼는 것이야말로 그 괴짜 동포를 추켜 세우는 데 가장 유용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 이런 생각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댜 < 비코는 형이상학이라는 늪지를 걸어서 건너려고 노력했던 바, 바록 그 자신은 진흙에 빠지곤 했지만, 제 민족의 법 의 정신에 관해 사색한 더욱 운좋은 사상가를 위해 디딤돌을 마련 해 주었댜 >2 ' 나폴리의 법학자 필랑제리 G. F i lan gi e ri는 1787 년에 괴테 J. W. Goe t he 에게 『새로운 과학 』 의 사본을 증정했는데, 괴테 는 그것을 대충 훑어보고 나서 야코비에게 보냈다고 전해진다. 홋 날 괴테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필랑제리가 나에게 옛 작가의
2) P. Maug r as, Galia n i, ses ami s et son tem p s (Pa ris, 1881), p. xxx vi으로부 터 인용. 갈리아니의 의도는 적어도 한 명의 프랑스 작가(몽테스키의)가 비 코의 관념을 차용했으면서도 인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만 한 세기 뒤에 『 새로운 과학 』 을 편집했던 프레다리 Pred ari는 그의 서문 (pp. xxx- xxxi)에서 흄 불랑제 N. A. Boulang e r, 드 브로스 Charles de Brosses, 달랑베르, 엘베티우스 , 벤담 둥 모두가 비코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고 주장한다 . 그의 주장은 거의 몽상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작품 한 권을 소개했는데, 그의 심오한 지혜는 정의를 편드는 이 시대의 모든 이탈리아인들에게 신선하고 유익한 것이 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잠바티스타 비코로서, 이탈리아인들은 그를 몽테스키 외의 앞자리에 둔댜 마치 성경을 전하듯이 나에게 증정된 이 책 을 대강 읽어 본 인상으로는, 그 속에는 미래에 실현될 선과 정의 에 관한 예언자적 전망이, 삶과 전통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에 기 초한 예언들이 담겨 있는 듯하다. 한 민족에게 그 같은 영적 선조 Al t erva t er 가 존재한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댜 독일인 들 사이에서는 언젠가 하만이 비슷한 성경으로 여겨질 날이 올 것 이다 .>31 『새로운 과학』을 조금이라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 할 수 있듯이, 괴테의 이 같은 언급은 원전과는 거의 무관하다. 괴 테는 그 <예언서>를 읽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 41 그렇지만 이 점에서는 비코의 작품을 정독했다고 알려진 여타의 독일인들도 다를 바 없었다. 괴테가 미래의 <선조>로 거명한 하만은 1773 년 에 『새로운 과학』을 주문했는데, 당시에 하만은 그 책이 새로운 경제학을 다루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만 이 원한 새로운 과학이 그 책에 있었을까? 하만은 자기보다 어린 친구 헤르더에게 보낸 편지에, 『새로운 과학』의 서문은 알레고리 적 인 표지화(表紙畵 fr on ti s pi ece) 에 대한 <너무도 장황한> 해설로 서, 이 그림에서 <중심 그림은 형이상학과 헤르메스의 기둥이고
3) Goeth e , Di e Ita l ie n is c he Reis e , 17 'ol년 3 월 5 일 W. H. Auden 과 Eli - sabeth Ma y er 의 영 역 본 (Pan th eon Books, Random House, New York, 1962), pp. 182-183 으로부터 인용. 4) Fri edrich Me i necke 는 그의 Di e Ents t e h ung des Hi st o r ism us(tr an s. J. G. Anderson, Hi sto rism , Routl ed g e , 1921) 에서 불성실하게도 괴테가 진정으로 비코를 읽었던가의 문제를 얼버무린 채 넘어가고 있다. 이것은 괴테에 대한 그의 지나친 존경심에 기인하는 태도라고 생각된다.
나머지는 상형어들 > 이라고 썼다 .5' 20 년 뒤에 헤르더는 Ii'새로운 과 학 』 을 직접 독파할 기회를 가졌다 . 헤르더는 비코를 <베이컨 , 몽테 스키 외 , 밀 턴 Mi lto n , 해 링 턴 Harr ing ton , 시 드니 Sid n ey, 로크, 애 덤 스미 스, 퍼 거 슨 Fergu rson, 밀 러 Milla r> 등과 비 교한 뒤 에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 비코는 < 물리학 , 윤리학, 법학에서 근본적인 사 회 적 원 리 들 Gemein s chaft lich e Grundsatz e , 즉 제 민족의 법 >을 탐 색했고, < 그것을 섭리와 지혜에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 6’ 이러한 언급은 괴테를 계승한 것이지만 훨씬 적절한 듯하다 .
5) 1773 년 12 월 22 일의 편지 (ed . Roth , vol. 5, p. 267). 6) Herder, Werke, ed. B. Suph an, lett er 115, vol. 18, 17CJ 7, pp. 245-246.
물론 비코와 헤르더는 대단히 유사한 관념들을 보여 준다. 헤르 더가 비코의 테제들을 의식적으로 피해갔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 로 양자는 유사하다. 그렇지만 헤르더가 1797 년 이전에 『새로운 과학 』 을 읽었다는 증거는 없다. 헤르더는 핵심관념들을 세상에 공 표한 훨씬 뒤에야 비코에 접했던 것이다. 20 년 전에 하만이 헤르 더에게 비코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는 추정이 전혀 불가능 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그것은 빨라야 헤르더의 가장 비코다운 견해들이 출판된지 몇 년 뒤의 일이었다. 한편 야코비는 그 책을 괴테로부터 받아 5 년 뒤에 읽었다. 야코바 는 바더 Franz von Baader 와 함께 그 책 이 칸트의 선험 적 방법을 예비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칸트와 비코의 공통점에 관해서보다는 역사주의자로서의 칸트에 관해 더욱 많은 것을 전해 줄 뿐이다. 1795 년에 저명한 고전학자 볼프 F. A. Wolf 는 호메로스에 대한 혁명적 <해체>를 시도했다. 호메로스는 개인 이 아니라 일군(一群)의 음유시인들이었다는 주장이었다. 10 년쯤
지나서 볼프는 비코가 거의 한 ` 세기 전에 비슷한 가설을 표명했었 다는 사실을 알았댜 이룰달갑지 않게 여긴 볼프는 1807 년에 비코 의 이론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애써 낮춰 평가하려 했다. 볼프의 태도는 무관심을 가장한 조바심을 보여 준다. 위대한 역사가 니부 르 Ba rt hold N i ebuhr 도 마찬가지였다. 니부르는 로마사 서술에서 자기가 이룩한 획기적 전환이 이탈리아의 시골뜨기 법학자 비코에 의해 먼저 훌륭하고도 명석하게 정립되어 있었다는 의견을 결코 반기지 않았댜 니부르는 아마도 다음 둘중 하나의 기회에 이 같 은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즉 오렐리 J. C. von Orel li가 눈치 없게도 니부르에게 진언했든지, 아니면(라니에리 Ra ni e ri의 전언에 따르자면) 몇 년 후 1816 년에 니부르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시인 레오파르디 Gia c omo Leo p ar di가 니부르의 주의를 환기시켰을 것이다 법을 역사적 산물로서 연구한 독일 < 법사학파 > 의 거장 자비니 Fri edrich Karl von Sav ig n y는 좀더 너그러운 자세를 취 했댜 그렇 지만 자비니는 동족이자 동료인 니부르를 표절의 혐의로부터 벗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서 나온 주장은 다음과 같았 다. <비코는 심오한 천재성 탓에 동시대인들 사이에서는 고독했 다. 비록 지금은 비코를 민족의 위대한 자산으로 평가하려는 시도 가 진행되고 있지만, 조국에서조차도 그는 낯선 이방인으로 무시 당하거나 조롱당하기 일쑤였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비코의 영혼은 완전한 결실을 이룰 수 없었다. 비코에게서 니부르의 것을 닮은 로마사에 관한 단상들이 발견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 만 이 단상들은 한밤중에 여기저기 흩어져 반짝이는 불빛들과도 같아서 여행자를 제 길로 안내하기보다는 더욱 헤메게 만들 뿐이 다. 그 나름대로 먼저 진리를 발견한 사람만이 그 같은 단상들로 부터 유익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니부르는 비코를 뒤늦
게, 그나마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 >n 비코의 운세가 진정한 상승기로 접어든 것은 나폴리의 애국자 코코 V i cenzo Cuoco 덕택이었댜 코코는 프랑스의 침략에 대항해 나폴리에서 발생했다가 실패로 끝난 1799 년의 자유주의 혁명을 옹 호하는 관점에서, 비코를 반( 反 )자코뱅적 • 점진주의적 • 중도적 민 족주의의 원조로 삼았다. 코코는 『새로운 과학』을 인용해서 프랑 스인들에게 충고했는데, 모든 사회는 각자에 고유한 < 유기체적>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특정한 사회의 제도를 다른 사회로 이식하 는 것은 어렵다는 충고가 그것이었다. 코코의 선동은 대성공을 거 두었댜 샤토브리앙 Cha t eaub ri and, 메스트르, 발랑슈 P i erre Sim o n Ballanche 같은 프랑스의 반혁명 작가들은 비코로부터 이탈리아의 버크를 발견했다. 이렇듯 비코를 사후 60 년만에 부활하여 추앙한 세력은 반동시대의 정치선동가들이었다. 바코는 마르실리오 Marsili o dei M aina rdi ni(M arsili us of Padua) 와 마키 아벨리 로부터 시 작된 이탈리아 세속적 정치사상의 거대한 사슬에서 중요한 고리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조베르티 Vi nc enzo G i obe rti와 만초니 Ales- ~anclro Manzo ni는 비코의 명성을 해의로 전파했댜 자넬리 Basili o G i anel li는 대단히 훌륭한 비코 연구서를 남겼지만, 애석하게도 별 로 읽혀지지는 않았다 .81 로모나코 Francesco Lomonaco, 사피 F. Salfi, 프라티 G. Pra ti는 비코의 명성을 프랑스로 전파하기 위해 노 력했다. 데 안젤리스 P i e tr o de An g e li s 는 정열적인 대중철학자 쿠
7) Savig n y, Vermi sc hte Schrift en , vol. 4, p. 217. 필자의 이러한 해설은 피쉬 교수의 논의에 크게 빚졌다 . 비코의 『 자서전 』 의 영어 편집 번역판에 수록된 그의 서문은 대단히 높은 가치 를 지닌 것이다 . 자비니에 관한 언급은 번역 본 (The Great Seal Ed ition ), p. 70 을 참조. 8) Paolo Rossi, 앞의 책의 해설을 참조 .
쟁 Vic t o r Cous i n 에게 비코의 중요성을 납득시켰다. 마침내 쿠쟁은 데 안젤리스를 자기 동료인 역사가 미슐레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미슐레는 천재의 작품과 만났음을 한 눈에 알았다. 이렇게 깨달은 인물은 미슐레가 첫번째이다. 미슐레는 『새로운 과학 』 에 전율하듯 이 홍분했으며, 마치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에게 이끌렀던 단테 처럼 비코의 경이로운 세계에 빨려 들었다. 그는 1824 년에 <비코. 그 엄청난 노력 그 마력적인 음영 찬란한 광휘 황금가지>라고 적었다. 미슐레는 비코가 자기의 생각을 완전히 뒤바꿔 버렸다고 토로했댜 비코를 통해서 미슐레는 역사란 자연과 끊임없는 투쟁 하면서 스스로를 창조해가는 제 민족의 정신에 관한 이야기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미슐레는 헌신적인 비코 전도사로서 파리의 예 술계와 지성계에 평생토록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824-1825 년에 비코의 원전을 부분 발췌한 번역본을 출판했다 . 이 번역본은 비코 를 낭만주의적으로 개작하기는 했지만 대단히 홍미로운 작품이다. 미슐레는 당시에 헤르더의 불어번역을 준비하고 있던 그의 친구 퀴네 Edg a r Qui ne t에게 비코의 일독을 권하기도 했다. 훨씬 꼼꼼하 고 정확한 불어번역판이 10 년 뒤에 등장했는데, 이 번역판은 저 유 명한 공주 벨지오조소 Bel gi o j oso 의 이름으로 출판되었지만 퀴네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미슐레는 비코의 진정한 재발견자였을 뿐만 아니라 비코의 후예들 중 유일하게 천재적인 인물이었다. 1869 년 까지도 미슐레는 <내게는 비코 이외의 스승이 없다>고 잘라 말하 고 있었댜 <스스로를 창조해 가는 인류의 생명력에 관한 비코의 원리들야말로 내가 쓴 책과 내가 받은 교육의 전부였다>는 것이 다 .9’ 미슐레의 열열한 선전에 힘입어, 낭만주의와 인문주의적 민족
9) 미슐레의 유명한 프랑스사에 붙인 서문을 참조.
주의의 선구자라는 새로운 비코상이 정립되었고 , 비코의 이름은 얼마 동안 파리의 인구에 회자되었다 . 파리지성계의 기둥들, 이룰 테면 발자크 Balzac 와 플로베르 Flauber t가 비코롤 유명한 사상가 대열에서 거명했댜 급류처럼 몰아치는 미슐레의 수사학에 떠밀려, 비코에 대한 예전의 평가들, 이를테면 샤스텔뤽스 F. J. de Chas- tel lux, J. M. 데 제 란도 J. M. Deg e rando, 포르 엘 Claude Fau ri el 의 비 교적 과장없는 비코 평가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렀다. 미슐레 는 이렇게 평했다. <이 역사형이상학을 창시한 인물의 광대한 체 계 속에는 현대의 학계가 애써 작업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이미 들어 있댜 적어도 맹아적으로는 존재한다. 비코는 볼프처럼 『일리 아드 』 가 한 민족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수세기 동안 영감으로만 노래되던 시에 대한 그 민족의 박식한 정리요 마지막 표현이라고 주장했던 것 이 다 또한 크로이 처 G. F. Creuzer 와 괴 레스 J. J. von Gorres 처럼, 비코는 원시시대의 영웅상이나 신상이 관념이자 상징 이라고 해석했댜 몽테스키의와 간스 Eduard Gans 에 앞서, 비코는 법이 어떻게 한 민족의 관습으로부터 형성되며 어떻게 그 민족의 역사의 모든 단계를 충실하게 표상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비 코는 니부르가 엄청난 연구에 의해 발견한 것을 예비했다. 비코는 귀 족정 하의 로마를, 로마의 부족들 g en t es 과 쿠리 아회 c uri ae 을 부 활시켰던 것이다. 전생(前生)에 트로이 성벽 밑에서 싸운 자신을 상기해 낸 피타고라스처럼, 이 뛰어난 독일 학자들도 전생에 비코 안에 살던 자기들을 상기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새로운 과 학』의 작은 복마전에는 비평의 대가들이 이미 입추의 여지없이 들 어 차 있다.>J OI 그렇지만 미슐레의 이처럼 정성스러운 평가에도
10) 이 인용문은 원래는 로마사의 서문에 수록되었으나, Mich elet, Oeuuers chois i e s de Vico (Pa ris, Flarnrna rion , 1835) 의 서문에서도 반복되었다 (M. H.
불구하고, 미슐레보다는 냉정하지만 흄모의 심정에서는 똑같았던 콩트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비코에 대한 관심은 식어만 갔다. 『새 로운 과학』은 이제 미슐레의 번역본을 통해서도 읽혀지지 않게 되 었다. 텐 T ai ne 의 경우에는 비코에 홍미를 느꼈지만 그를 활용하지 는 않았다. 각종 백과사전들과 점차 부피를 키워가던 철학사 서적 들 속에서, 비코는 이름으로만 명맥을 유지해 갔다 . 영국에서 바코의 명성은 이탈리아 출신의 망명객 들 에 의해 전파 되었다 . 망명객들 중에서도 가장 걸출한 포스콜로 U g o Foscolo 와 마치니 Giu s epp e Mazz ini는 비코의 헌신적 추종자였다. 1816 년에 코울리지 S. T. Cole ri d g e 는 비코를 헌신적으로 인용했다. 하지만 비코의 영향력은 대체로 빈약했다. 각별한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 니다 . 비코에게 큰 관심을 가진 모리스 F. D. Ma uri ce 가 있었고, 비 코를 진정으로 이해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은 아놀드 Thomas Arnold 가 있었다 . 실증주의자 캘린더 Calendar 는 비코를 헤르더 다 음으로 중시 했으며 , 브리 지 즈 J. H. B ri d g es 와 그로트 G. Gro t e 를 비 롯한 영국의 콩트주의자들도 비코를 찬양했다. 플린트 Rober t Fli nt 는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비코 연구서를 완성하기도 했다. 비 코가 역사철학의 진정한 창시자가 된 것은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서였다. 그러나 영국에서 비코는 다른 지적 선구자들과 마찬가지 로 전문가들에게나 홍미 있는 인물이었다. 독일에서의 관심은 좀 더 심각했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과학』은 1822 년에 독일어로 번 역되었고 1854 년에는 편집되었다. 헤겔 좌파의 간스는 1837 년에 비 코롤 헤겔의 선구자들 중 한 명으로 거명했다. 마르크스는 비코를 인류 기술사의 선조로 간주했고, 라살 Fer di nand Lassalle 에게 비코
Fis c h, 앞의 책 . p. 79 로부터 인용).
의 일독을 권하기도 했댜 독일어로 쓰여진 비코 전문서는 1881 년 에 처음 출판되었는데, 이것은 플린트의 저서에 비해 열등한 것으 로 평가된댜 서남독일학파의 빈델반트W i ndelband 를 비롯한 여러 철학 유파들의 대변자들도 어렴풋하게나마 비코에 대한 관심을 표 명했댜
그러나 비코가 진가를 발휘하게 된 것은 동족인 크로체와 니콜 리니의 작업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크로체는 정열적인 주창과 걸 출한 저술을 통해 비코 연구를 자극했으며, 이에 영향받은 니콜리 니는 나폴리에서 비코 편집자로 평생을 헌신했다. 이 두 학자의 노 력은 영국과 특히 미국에서 관심을 자극했다 .Ill 그렇지만 미로처럼 혼란하게 엉킨 비코의 생각이며 문체가 야기한 난점은 너무도 커 서 세월의 흐름만으로 치료될 수는 없었다. 비록 젠틸레와 콜링우 드가 비코의 이론을 계승했고, 파레토 V i l fr edo Pare t o 와 소렐, 조이 스 Jam es J o y ce 와 예 이 츠 Wi lliam B. Yeats , 윌슨 Edmund Wi ls on 등 이 비코의 천재성을 증명했지만, 지금까지도 달라진 것은 거의 값 댜 과거에 언제나 그러했듯이 오늘날에도 비코는 지적 전통의 중 심으로부터 밀려난 채 끊임없이 재발견되고 있다. 여전히 그는 읽 기도 힘들지만 별로 읽혀지지도 않는 인물로 남아 있다.
11) 버건과 피쉬의 노작, 특히 『새로운 과학 』 과 『자서전 』 의 영역본에 수록된 <서문들>은 미국의 높은 비코 연구수준을 예시한다. 필자도 그들의 서문들 에 많은 것을 빚졌다.
제 14 장 평가
풍요롭고 심오하지만 부정확하고 애매한 사상가에게는 특별한 위험이 운명처럼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추종자들은 그로부터 너무 도 많은 것을 찾아내서 결국은 그의 의도를 자기들 멋대로 뒤바꾸 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미슐레는 비코에게서 자기의 역사 관을 위해 필요한 것만을 편취했던 바, 그의 유명한 비코 번역판 에는 비코보다 미슐레 자신이 더욱 강렬하게 표현되었다. 플린트 의 경우는 바코에게 자기의 개성을 덧칠했다는 비난을 받지는 않 겠지만, 실제 이유는 플린트가 남에게 강요할 만한 철학적 개성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비코 추종자들도 거의 예의없이 미슐레 식의 유혹을 느꼈다. 크로체나 콜링우드는 그런 유혹을 뿌리치려고 노력했는지는 몰라도 결국은 뿌리치지 못했다. 크로체의 철학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크로체의 비코 연구서는 비 코를 헤겔의 선구자로 만드는 데 주력했다(그렇지만 헤겔이 실제로 비코를 알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크로체가 비코의 사상에 보탠 것
은 빼낸 것보다 훨씬 많았다. 그는 비코에게 진 빚을 너무 후하게 값았던 셈이댜 뿐만 아니라, 비코만의 고유한 특징들은 크로체가 자기의 필요에서 가한 왜곡 탓에 더욱 깊숙히 숨겨지기도 했다. 크로체는 불후의 비코 연구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비코를 < 절대 적 관념론자 > 로 변신시켰던 것이다. 크로체의 사례는 다론 독창적 사상가들 사이에서도 엿볼 수 있다. 소렐은(어쩌면 트로츠키 Tro t s ky와 그람시 Gramsc i도 마찬가지 로) 비 코를 원형 마르크스주의 자로 만들 었다. 비코는 미국식 프래그머티스트로 그려지기도 했고 , 가톨릭편 호교론자로 , 나폴리의 애국자로, 파시즘의 선구자로, 실존주의자로 묘사되기도 했다. 젠틸레의 비코도 엉뚱하기는 마찬가지이다 . 그의 비코는 신헤겔주의적 사색에 비추어서만 이해가능하다. 영국에서 가장 걸출한 비코 추종자는 콜링우드였다. 문화의 <절대적 전제들 absolute p resu pp os iti ons > 이라는 콜링우드의 훌륭한 착상은 비코 로부터 비롯된 착상이요, 아마 비코 의의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빌 려쓸 수 없는 착상일 것이다-<절대적 전제들>이란 한 문화 (혹은 한 시대)의 정신활동의 양상을 결정하며 그 문화가 처한 문제 들을 다론 문화가 처한 문제들과 확실하게 차별화해 주는 그 문화 의 근본 범주들과 개념들을 뜻한다. 그러나 콜링우드는 이러한 착 상 위에 매우 문제 있는 관념을 덧칠한다 . 콜링우드에 의하면, 우 리는 우리의 정신을 우리와 역사적으로 동떨어진 인간정신이나 시 대에게로 전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한다. 우리가 선험적 이고 초시간적인 비행에 의해 시간의 장벽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 할 때, 우리가 이 형이상학적인 비행에 의해 케사르의 정신에로, 혹은 고딕양식의 부활이나 청교도혁명에로 재침투할 수 있다고 말 할 때, 콜링우드는 명백히 자기의 스승 비코로부터 탈선하고 있다. 물론 비코도 우리가 고대세계를 이해하려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
다는 것, 우리에게 철처히 낯선 시각으로 고대세계를 주시할 필요 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비코의 이 같은 주장은, 다른 정신이나 시대와의 진정한 합일(혹은 감정이입) 따위의 신비한 행위가 가능하다는 콜링우드의 주장과는 거의 무관하다. 19 세나 20 세기에야 완벽하게 정립된 많은 것들을 비코에게로 소 급시키려 한다는 점에서는, 필자도 비슷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꼭 그렇다고 잘라 말하기는 힘들다. 앞 시대의 관념이 뒷 시대를 위한 미성숙한 맹아로서 발생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떠한 시대에든 새로운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사상가의 가장 독창적인 관념이 동 시대인들에 의해 오해되거나 무시당한다는 것을 어찌 낭만적 신화 라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낡은 스콜라주의의 마지막 보루가 새로 운 계몽주의에 의해 거의 대체되어 가던 시절, 과학의 시대가 활 짝 개화하던 시절에, 비코는 스콜라주의와 계몽주의라는 양편 누 구로서도 완전히 이해하기 힘든 독창적 생각을 설파했다. 비코는 관찰 • 계측 • 연역적 추론에 의해 이상적 모델이라는 허구를 구성 해서 이것을 실재세계라는 애매한 구성체에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과학의 방식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자연과학이 체 계화하는 지식은 <외부적> 지식에 불과했다. 대신에 비코가 주목 한 것은, 인간이 · 만든 패턴들 안에서 요소들끼라 주고받는 상호관 계요, 모든 요소들을 합친 전체와 각각의 요소들이 주고받는 상호 관계였다. 이를테면 수단과 목적의 관계가 그러했고, 개인적 목표 나 전망이 집단적 활동이나 세대의 활동과 형성하는 관계가 그러 했다. 특히 비코는 다양한 제스추어들 • 어휘들 • 행동들 • 의식(儀 式)들 • 규칙들 등으로 구성된 거대한 복합체란 실제로는 단 한 가 지 양식의 표현에 불과하며 바로 이 같은 양식이 한 계급이나 한
민족이나 한 시대나 한 문명에 고유한 특징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더욱이 비코는 이 같은 사실을 과학적 방법의 도움으로 이해하고 탐색하고 추적하는 작업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도 통찰하고 있었 댜 비코는 인간의 자기탐색이라 할 수 있는 이 같은 연구가 인간 의 근본적 믿음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파악했던 것이다. 이 방 식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비코는 질적 차이와 양적 차이를, 뉘앙스 와 분해가능한 형식을 구별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개인이나 집단 이나 제도가 시간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작용하는 요인들에 대 한 지식을, 공시적이든 통시적이든 인과적이며 반복적인 규칙성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구별했다. 한마디로 말해 비코는 이해의 감각 을, 귀납이나 실험이나 연역의 과정에서 사용되는 방법들로부터 차별화했던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이해의 감각 덕분에, 어떤 원전 을 이해한 학자는 그것을 제대로 교정할 수 있으며, 우리는 친구 나 예술사조나 정치환경을 이해할 수는 것이다. 이 같은 감각은 엄격한 분석에 귀속될 수 없다 . 물론 이해의 감각도 그 나름의 규 칙과 법칙을 사용할 것이요, 이런저런 기교들에 의해 단련되면 그 만큼 더욱 예리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해의 감각은 결코 과학처럼 체계화될 수 없거니와,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감수성이 부족 하고 천부적 재능이 없다면 그것을 배우기 힘들다. 반면에 귀납이 나 연역이나 실험의 과정에서 사용되는 방법들은 이성적인 존재 누구에게나 전달되고 교육될 수 있다. 비코는 비록 이해의 감각과 과학적 방법의 차이를 딜타이만큼 범주적으로 체계화하지는 못했 지만, 양자를 대조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지식과 외부적 대상에 대 한 지식을 비교하는 데는 성공했다. 비코는 인간이란 자기자신을, 따라서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과 타자가 어디쯤에 와있는지, 자신과 타자에게 세계
가 어떻게 보이고 느껴지는지, 자기가 사물이나 동식물을 진정으 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단지 그 행동을 지각할 수 있을 뿐 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같은 문제들에 답할 수 있다. 무엇보 다도 인간은 다양한 요소들이 사회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결합하 는지를 알 수 있다(이 같은 방식을 정식화하려는 시도는 비코만이 아니 라 버크와 헤르더, 셸링과 헤겔, 토크빌 Alex is de Toc q uev ill e 과 부르크 하르트J acob Burckhardt, 딜타이와 베버에 의해서도 수행되었다). 이것 은 역사에서 <알 수 없는 요인>이 의식적 동기와 상호작용해서 인간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은 방식을 인식하는 능력이요, 역 사가나 비평가나 소설가에게 요구되는 바 관념들을 차별화하고 통 합하고 연관짓는 능력이다. 거의 미학적 소양에 가까운 이 능력은, 자연과학이 독창적 발견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고 여기는 능력, 죽 관념들을 추상화하고 일반화하고 분해하는 능력과 구별된다. 지난 100 여 년에 걸쳐, 비코의 비평가들과 주석가들은 이처럼 거 대한 경계선을 발견하고 정식화한 것을 비코의 최대 업적으로 평 가해왔다. 비코는 분명히 과장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적 홍분과 창조적 열망으로 충만한 시절에 살아간 선구자들, 특히 비코처럼 독학하 면서 자기 스스로 만든 세계에서 홀로 살아간 사람들은 누구나 자 기 과장의 함정에 빠지기 마련이다. 이 같은 허풍없이 새로운 진 리가 기존 관념의 저항을 분쇄하는 데 성공을 거둔 예는 거의 없 다. 플라톤, 스토아학파, 데카르트, 스피노자, 흄, 칸트, 헤겔 등 누 구나 한결같이 자기들의 대의를 과장했던 바,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그토록 풍부한 독자나 청중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비 코도 이 같은 부류에 속한다. 비코가 이 부류의 중심 인물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비코의 관념은 그들 누구에 못지않게 독창적
인 천재의 것이다. 당연히 비코도 명쾌한 전달을 원했으리라 생각 된댜 비코가 자기의 지적 영웅으로 거명한 네 인물들 즉 플라톤 과 타키투스와 베이컨과 그로티우스는 모두 이 바람직한 재능을 갖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코만은 성공하 지 못했다 그의 관념은 안타까울 정도로 모호할 때가 많다. 뿐만 이 아니댜 그 자신으로서는 모든 사회 활동을 관류하는 순환주기 의 발견에 기초하여 새로운 과학을 구성했다고 믿었을지 모르지 만, 순환의 관념 자체는 비코의 발명품이 아니었다. 이 관념은 비 코를 전후로 수많은 상상력 풍부한 사상가들에게서 마치 도깨바불 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던 관념이다. 바코는 마치 콜럼버스 처럼, 어쩌면 그 자신이 말한 < 야수인간 > 처럼, 자기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인간의 과거를 집단적인 자기이해의 한 형식 으로서 탐구하는 전대미문의 영역을 개척한 것은, 그로서도 우연 이었을지 모른댜 다른 독창적 사상가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미래의 비코 학도들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비코 연구가 현재의 경험에 의해 너 무 제한되었다는 불평을 토로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제임스 조이스가 후기 소설들을 바코에 대한 인용으로 채웠듯이, 비코의 작품에서 지성사학도들의 주의를 끌 만한 다른 측면들을 찾아나설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제 2 부 비코의 인식론과 그 원천
제 15 장 비코 인식론의 개요 ―〈전리〉 • 〈만들어전 것〉 • 〈확실성〉
1708 년의 『방법』과 1710 년의 『지혜』로까지 소급되는, 『새로운 과학 』 의 중요한 테제는 진리 verum 와 확실성 ce rtum의 구분이다. 그렇지만 위의 세 작품들에서는 물론 그밖의 다른 작품에서도, 비 코는 이 근본적 구분을 충실하게 해명한 적이 없다. 그의 모든 논 고들에서 자주 그러하듯이, 참신하고 미성숙한 관념들은 너무 많 은 반면에 그것들을 표현하는 언어는 늘 부족하다. 각고의 노력으 로 적합한 표현을 추구하지만 목표에는 항상 미치지 못한다. 그렇 지만 명석한 통찰과 혼란한 통찰, 고대와 현대를 오가는 기억, 끊 임없는 우회-이러한 요소들은 비코의 문체 특히 『새로운 과 학』의 문체에 힘을 주기도 한다. 그의 문체에는 광시곡 같은 힘이 있다. 이 힘은 때로 화산처럼 폭발적이다. 명쾌한 해설과는 거리가 먼 문체임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이고 새로운 이론이 그 문체 위로 솟아 오르곤 한다. 모든 학자들이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아 니다. 이해부족에서든 민족적 편견에서든 이데올로기적 반감에서
든 다론 사상가의 명성에 대한 질투에서든, 일부 학자들은 비코의 이론의 독창성을 낮추 평가해 왔다” 그러나 역사적 이해의 개념 을 구획해서 그 미답의 영역에 새로운 빛을 던진 업적만으로도 비 코는 철학사의 일등석을 차지해야 마땅하다.
1) George Hupp e rt , The Idea of Perf ect Hi st o r y (U n ive rsit y of Illin o is Press, 1970) 는 가장 최근의 예가 될 수 있다 . 휴퍼트 교수는 비코가 < 헤겔울 예비하기는 커녕 보댕에 조옹한 사상사에서의 낙오자 > 라고 주장한다(p . 166). 이러한 주장은 비코의 실질적인 업적뿐만 아니라 바코의 역사관과 보댕의 역사관 간의 중요한 차이를 파악하지 못한 데 기인하는 오류이다(이 점에 관해서는 이 책의 제 2 부 19 장을 참조). 다행스럽게도 이 빗나간 냉소는 휴 퍼트 교수의 주요 논지에 대한 각주로 처리되었으며, 따라서 그의 홍미롭고 도 유익한 노작의 가치를 크게 손상시키지는 않았다 .
비코에 의하면 우리는 < 확실성 > 으로부터 출발한다. 특정 사실 에 대한 인식과 믿음을 뜻하는 확실성은 모든 사고와 행동의 전제 조건이댜 확실성을 통하지 않고는 < 진리 > 곧 보편적 진리를 인 식할 수 없다. 물론 확실성으로부터 진리에로의 이행이 과연 가능 한 일인지, 혹은 그 같은 이행이 실제로 어떻게 시도될 수 있는지 에 관해서 비코는 원리적인 해설조차 제공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보편적 진리 없이는 과학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하기로 하 자. 『 새로운 과학』에서 < 과학 > 이라는 어휘가 정당화될 수 있으려 면, 비코의 <과학 > 은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실들이나 사건들에 관 한 일반적 진리 명제들을 논리적으로 엮은 체계이어야만 할 것이 다. 이러한 체계의 정립이 어떻게 가능한가? 비코가 말하는 < 진 리>는 일종의 <선험적 > 진리이다. 이를테면 공리로부터 출발한 수학적 추론이 증명가능하고도 논박불가능한 모든 단계를 거친 뒤 에 도달하는 진리가 그러하다. 그러나 이 같은 추론 과정이 (인간 의 사고에서) 수행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과정은 외부세계와 아무
필연적 관계도 없는 인위적 구성물들, 즉 순수한 논리적 허구들로 구성되어야만 할 것이댜 이러한 맥락에서 비코는 1710 년에 < 진리 는 그 자체 가 만들어 진 것 verum ips um fac tu m > 이 라는 규준을 제 시했댜 이 규준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든 것만을 논리 적으로 보증할 수 있댜 우리가 만든 것만이 진리이다 . 보다 엄밀 한 의미에서는 우리가 만든 것에 대해서만 < 과학 > 이 존재할 수 있댜 그러나 이처럼 < 진리 > 의 구조가 우리에 의해 설계된다면, 어떻게 그것이 외부의 어떤 것, 외부세계의 특징을 < 과학적으로> 一—즉 증명가능하고도 논박불가능한 식으로 반영하거나 기 술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비코는 놀랍게도 < 진리는 만들어진 것>이라는 명제를 결론으 로 취한댜 < 수학은 만들어진 지식 Math e sis est scie n ti a op e ra- tri x > 이기 때문에 과학일 수 있다 . 공간상의 사물을 창조한 것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물리학은 인간에게 < 진리>일 수 없다. 물 리학은 하느님에게만 ,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을 빌리면 만물의 < 첫번째 제작자로서의 하느님 > 에게만 진리일 수 있다. 이렇듯 무 로부터 창조된 사물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리스적인 것이 아니라 유태 기독교적인 것이다 .2 1 피타고라스의 경우에, 자연의 조 화며 대칭성이며 수학적 구조는 이미 사물의 본성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플라톤 경우에도 비슷하게 객체로서 존재 한다. 『티마이오스』에서 데미우르고스 De mi our g os 는 어떤 계획에 따라 세계를 창조하지만, 그 계획의 저자는 아니다. 창조의 계획은 창조 이전부터 영원히 주어진 것이다. 우주의 조화라는 관념은 그
2) 이 점 에 관해 서 는, Karl Lowit h, Geschic h te und Natu r in Vico 's 'Sc ieT 12a Nuova,' Qu adem i Conte m p o ranei, vol. 2, 1968(Instit uto Un ive rsita rio di Salemo, Lib r er ia Sc ien ti fica ed itrice , Napo ll ), pp. 137-139 를 참조.
리스 황금시대의 사상가 들 과 예술가 들 사이에서 적어도 부분적으 로는 인식되었고, 르네상스 시대에 재발견되었다. 세계는 그것에 내재하는 조화에 의해 아름답고도 이성적으로 만들어 졌 다는 생각 은 르네상스의 핵심적인 전망이었다. 이 전망은 신비주의적 형식 이 제거되면서 계몽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다. 특히 중농 주의자들, 그리고 < 보이지 않는 손 > 이나 < 이성의 간지 > 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댜 그들은 비가시적인 계획이 결국에는 승리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뢰비트 Karl Low it h 가 적시하듯이 , 31 이 러한 믿음은 비코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그는 < 무로부터의 > 신 성한 창조를 믿었기 때문이다.
3) 같은 곳.
비코는 1708-1710 년에 첫걸음을 내디몄다. 이 시기의 그는 인간 이 창조하지 않은 자연물을 다룬다는 이유로 물리학을 격하했다. 데카르트가 물리학에 부여한 우월한 위치는, 인간이 발견하기는 했지만 만들지는 못한 다른 분야들의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 물리 학은 비록 아직까지는 역사학이나 문학보다 조금 우월한 위치에 있지만, <지식 scie n ti a> 아닌 <의식 consc i en ti a > 에 머문다는 점에 서는 물리학도 역사학이나 문학과 다를 바 없었다. 역사학이나 문 학처럼 물리학도 <확실성>밖에는 얻을 수 없다. 이 같은 분야들 은 모두 일상의 이성적 행동이 의촌하는 지식 곧 < 사실적 > 진리 너머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의 사고가 의적이고 독립적인 실재를 향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진리>를 넘볼 수 없다 . 그 이 유는 명백하댜 진리라면 전적으로 우리의 통제하에 있어야만 하 는데, 우리는 기껏해야 우리에게나 자명한 확실성을 얻을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확실성온 오늘날 현실에 대
한 감각이라 불리우는 것으로서, 비코는 정확하게도 그것을 논리 적으로 증명되는 진리와는 다른 것으로 간주했다 ? 비코가 비록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형이상학이나 논리학에서 의 진리를 일상적 관찰이나 지각(혹은 내성(內省))에서의 진리로부 터 구분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 그는 확실성을 때로는 < 권위 au t ho rity>라 부르기도 한댜 어쨌거나 그것은 우리의 실질 적인 삶을 인도하는 빛이다 . 그것은 베이컨적인 의미에서의 귀납 적 지식이 아니다(물론 비코는 확실성을 베이컨의 귀납적 지식과 혼동 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그것은 오히려 가설연역을 가능하게 하 는 직접경험의 기초자료들에 대한 파악에 가깝다. 이 기초자료들 에 대한 확실한 파악에서 과학적 가설이 출발하며, 그 가설은 검 증을 위해 다시 그 자료들에로 회부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비코는 확실성을 감각지각의 대상인 외부세계로부터 예시하기보 다는, 자기의 주된 관심영역인 사회적 관계들, 즉 <사회 생활에서 의 인간적 필요들이나 효용들 > 41 로부터 예시한다. 우리는 어떤 문 화, 어떤 사회적 과정 속에 태어나는 바, 이 문화를 마치 그물처럼
® 비코는 <지식>을 < 진리 > 에 , < 의식>을 <확실성>에 각각 연결시킨다. 그에게 진리 (라틴어로는 verurn, 이탈리아어로는 il vero) 는 <참인 어떤 것> 혹은 < 완전히 증명가능한 명제에 의해 진술될 수 있는 어떤 것>을 뜻 한다. 그것은 어떤 명제 자체의 진리가를 뜻하지 않는다 . 반면에 확실성(라 틴어로는 cert um , 이탈리아어로는 il ce rt o) 은 <특수한 어떤 것>이라는 뜻 울 지닌다. 진리에 대한 인식이 과학 혹은 참지식이라면, 확실성에 대한 인 식은 의식이다. 여기서 확실성과 진리, 참지식과 의식을 상호연결하는 두 가지 동사가 파생한다. 하나는 <확인하다 acce rtar e>( 죽 asce rtai n) 이며, 다 른 하나는 < 검증하다 ve rifi care>( 죽 ve rify)이다 . 비코의 고유한 용법에서 < 확인한다>는 것은 진리 를 <특수한 것>에 의해 확증한다는 뜻이며, <검 중한다 > 는 것은 진리를 확실한 것에로, 보편적인 것을 특수한 것에로 옹용 한다는 뜻이다 .
4) N. S. par . 347.
엮어 주고 있는 제도들은 바로 인간적 필요며 효용으로부터 나온 다는 것이댜 인간은 시간적으로 변화하는 그 같은 필요와 효용의 요구들 속에서, 죽 공동생활의 형식들 속에서, 살아가며 사고하고 실존한다. 언어가 바로 그 같은 제도이다. 비코는 『 방법 』 에서 < 언 어가 정신을 창조하지 정신이 언어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 라고 말한다 . 이 구절은 상상력 풍부한 이탈리아어 전통이 그보다 건조 하고 사변적이고 반(反)은유적인 불어 문체에 비해 우월하다고 주 장하는 문맥에서 등장한다. 그럼에도 그것은 오늘날 비코의 사회 언어학적 접근이라 불리우는 방법의 특징을 보여 준다. 우리의 착 상이나 표현은 우리의 특수한 문화가 허용하는 한에서만 가능하고 우리 문화의 사회구조가 제공하는 수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 착 상이나 표현의 수단은 사회구조의 속성들을 분유하기 때문이요 사 회적 성장의 특정 단계에 구속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는 < 침 묵기호> 곧 <신의 시대>에 사용된 표의어 및 상형어로부터, 시적 은유와 직유로 충만한 <영웅적> 언어로 이행하며, 이로부터 점차 더욱 축어적이고 정확한 산문적 언어로 나아간다. 민주주의에 걸 맞는 법정의 언어, 철학적 비판의 언어로 나아간다는 말이다. 초시 간적인 보편적 상징체계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은 초시간적인 보편 적 생활방식을 고안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성적인 존재라면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나 추구해야만 마땅한 생활방식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든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 주어진 현존 재일 뿐이댜 필연적 발전의 법칙에 따라 주어진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한 모습으로 형성되는 사회적 • 심리적 • 정신적 • 정서적 범주 들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연 곧 본성은 성장이다. 여기 서 성장하는 것은 한 사회의 <공통감각 sensus commu ni s> 이다. <계급 전체, 주민 전체, 민족 전체, 혹은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반
성 없는 판단 > 으로서의 공통감각 말이다 . 5 )
5) N S. pa r. 142.
공통감각에 입각한 판단은 필연적 진리 아닌 우연적 진리를 운 반한댜 그러한 판단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우연이다. 만일 우리가 세계를 창조주 하느님처럼 인식 할 수 있다면, 그 우연적인 < 확실성 > 은 필연적이고 선험적인 < 진 리 > 로 변형될 것이기 때문이댜 6)
6) 라이프니츠도 필연적(이성적) 진리와 우연적(사실적) 진리의 관계에 관해 비슷하게 주장했다 . 모든 진리는 하느님에 대해서만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분법에는 비코의 특유한 원리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비코의 경우에 인간행동을 결정하는 제도들, 관계들 , 목적들, 전망들에 대한 이해는 전적으로 우연적인 것도, 선험적으로 연역가능한 것도 아니다 .
그렇지만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모든 관념과 의지에 대한, 과 거의 모든 경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에게 맹목적 사실로 주 어지지 않는다 .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가 가축이나 암석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물론 인간은 유한하고 쉽게 오류에 빠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의 정 신적 과정조차도 완전하게는 이해하지 못한다 . 더군다나 우리가 타자의 현재와 과거를, 타자가 < 창조한 >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 우리 의식의 가능성들 안에서 타자의 경험을 인식하거나 상상하는 일에 불과하댜 타자의 경험을 < 우리 자신의 인간적 정신의 변양 들 안에서 > 파악하는 일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로서는 타자에 대 한 완전한 이해를 희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리 될 수밖에 없는 어떤 것, 혹은 우리가 가능하다고 여 기는 어떤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와 매우 다르고 동떨어진 존
7) <… …d entr o le mod ifica zio n i della medesim a nostr a mente umana… …>, N. S. pa r. 331.
재들의 전망에로, 그들의 사고며 감정이며 공포며 희망이며 탐욕 이며 상상적 체험에로 침투하는 작업이 힘들가는 해도 불가능하지 는 않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가능성 안에서 , 우리는 동굴의 외눈거인 폴리페모스 같은 < 끔찍한 > 야수인간들 곧 인류 최초의 조상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 동기와 의도를 파악한다 는 것, 다시 말해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하며 살아가는지를 불완 전하게나마 이해한다는 것은 < 원인적 > 지식을 소유한다는 뜻이 다. 원인적 지식은 < 대상적 지식 knowi ng tha t> __- 죽 자연과학 의 자료인 < 외부로부터의> 지식 혹은 외부세계에 대한 일상적 지 식 -에 비해 훨씬 우월하며 < 신성 > 하다 . 그것은 < 방법적 지 식 knowledg e how> , 죽 어떤 기술이나 방법을 습득하거나 소유하 는 것에 비해서도 똑같이 우월하다. 홉즈가 지적하듯이 실험이 자 연의 이해에 도움을 준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사물을 분해했다가 다시 결합하는 것만으로 그것을 철저하게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비코에 따르면 실험에서 우리 마음대로 재배열하 는 물질의 근본 성질들은 우리의 것 아니라 < 우리 외부의 것 extr a nos> 이다? 때문에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은 정신의 <내적>인 운동이다. <원인적> 지식은 창조자가 피조물을 이해할 때 소유하는 지식이다. 이것은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이해할 때, 혹은 그 자신의 창조적 활동을 이해할 때 소유하는 지식과도 같
8) <하느님은 만물의 모든 요소들, 외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내적인 원소도 결합한다. 그는 그것들을 내포함으로써 그것들의 모양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인간의 정신은 제한적이어서 그 자신에게만 내적이며 그외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외부에 존재하기 때문에…… 사물들에 관해 사고할 수는 있어도 그것들을 이해할 수는 없다.> Vic o , De Anti qu is s im a; A. Ch ild , Makin g and Knowi ng in Hobbes, Vico and Dewey (U n ive rsit y of Califo rnia Public a ti on s in Ph ilo soph y, vol. XIV, Berkeley, 1953) 으로부터 인용.
다. 피치노며 피코며 란디노 C ri s t o fo ro Land ino 등 르네상스 신플 라톤주의자들도 비슷하게 주장했지만, 그들의 주장은 시인이 창조 한 세계가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에 필적한다는 정도에 머물렀다. 뒤 를 이 은 타소, 시 드니 , 던 Joh n Donne, 데 니 스 Joh n Denn is, 샤프 츠베리 Shaft es bury , 18 세기의 낭만주의 선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비코는 그들을 훨씬 넘어선다. 비코는 시인이 허구의 세계를 창조 한다는 주장에 머물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초기 단계의 <시적> 문화에서는 모든 인간은 현실세계를 오직 <시적인 방식으로만> 인식할 수 있다 . 이 단계의 정상적 의식에서는 창조적 상상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 따라서 노래는 담론에, 시는 산문에, 문자상징은 음성상징에 선행하는 자연적 표현방식이다. 하지만 비 코는 이 정도의 주장에도 만족하지 않는다. 고대의 시적 전망은 그 뒤를 이은 전망에 비해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양자의 우열을 가늠하기는 힘들다는 주장이 뒤따른다. 앞선 단계는 보다 문명화 된 계승자에 비해 야만적이지만 그보다 가치가 적다고 말할 수는 없다(영적인 면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미학적으로는 대등한 가치를 지닌다). 오히려 강건함과 생동력에서는 더욱 우월했을 것이다. 비코의 이러한 입장은 동시대의 주류를 거스른 것이었다. 17 세 기에 은유의 사용은 도처에서 의심받고 있었다. 특히 진보적 사고 의 중심지인 프랑스며 영국이며 네덜란드에서 그러했다. 은유 따 위의 현란한 이미지는 전(前)과학적 혹은 반(反)과학적인 정신의 소산으로 간주되었댜 한 저명한 권위자에 의하면 이 시기에 은유 는 <소름끼치는 야만적 상상으로 점철되었던, 그리고 오류와 바이 성주의와 가혹한 박해를 낳았을 뿐인, 해묵은 미신이며 몽상이며 신화며 공포의 거짓 세계>와 연관지워졌다고 한다? 실제로 영국 왕립학회 Roy al So ci e ty의 창립 멤버인 스프랫 Thomas S p ra t은
9) M. H. Abrams, The Mi rr or and the Lamp , p. 285.
<번지르르한 수사와 비유 > 는 < 평화와 미풍양속에 치명적이기 때 문에 모든 문명사회로부터 > 제거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왕 립학회는 < 신화 따위의 불확실한 것들 > 을 피하여 < 가능한 한 수 학적 평이함에 가까운……정밀하고 소박하며 자연적인 표현방식 > 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I OI 마찬가지로 홉즈도 < 진리에 대 한 엄격한 탐구 > 를 목표하는 저술이라면 은유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111 로크며 흄이며 애덤 스미스도 비슷하게 말했 댜 흄이 < 기하학적 진리 > 에 대한 집착은 < 독자에게 딱딱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 는 점을 인정한 정도가 예외였을 뿐이다 .121 이 러한 분위기에서, 프랑스 양식의 투사들과 이탈리아 양식의 투사 들 사이에 유명한 논쟁이 불붙었다 . 17 세기 말에 발발한 이 논쟁 은 18 세기에 프랑스에서(특히 오페라 양식에서 프랑스풍과 이탈리아풍 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 < 고대파와 현대파 의 논쟁>만큼이나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 라신 Rac i ne 이며 몰리
10) 같은 곳. Sp ing ar n, Criti ro l Essays of the Sevente e nth Centu r y , vol. 2 에 발췌 수록된 스프랫의 The Hi st o r y of Roya l Soc i e ty으로부터 인용되 었음 . 11) Thomas Hobbes, Levia t h a n(Cambri dg e , 1904), pp. 14-15. 12) 아브람스(앞의 책)는 이렇듯 거의 지배적이던 < 데카르트적 > 태도에 관해 , 이밖에도 많은 실례들과 인용문들을 제공한다. ® < 고대인과 현대인의 논쟁 > 은 the Batt les betw een Ancie n ts and Modems 의 번역어이다 . 이것은 단일한 주제에 관한 하나의 논쟁이 아니라, 여러 주 제에 관한 여러 논쟁들로 구성된다 . 이 대논쟁에 관한 20 세기의 연구는 주 로 근대적 <진보관념 > 의 출현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 이러한 맥락에서 , 프 랑스의 경우에는 17 세기에 데카르트와 그 추종자들로부터 촉발되었고 1680 년대에 페로 Charles Perraul t에 의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으며 1711-1716 년의 <호메로스에 관한 논쟁 > 에서 절정에 도달했던 과정이 주목을 받았으 며 , 영 국의 경 우에 는 베 이 컨 Francis Bacon 과 헤 이 크윌 George Hakew ill에 의해 시작되어 영국 왕립학회의 성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으며 스위프트J ona th an S wift의 <책들의 전쟁>에서 절정에 도달했던 과정이 주
목을 받았댜 이 책에서 언급된 이탈리아의 복고적 양식에 대한 프랑스학자 들의 비판(그리고 이탈리아학자들의 반비판)은 이 대전쟁의 와중에서 전개 된 < 국지적 전투>로 볼 수 있다. 비록 주제도 다양했고 논쟁의 시공간적인 조건도 다양했지만, 이 모두를 하나의 단일한 논쟁으로 묶어 준 공통요소는 <현재의 입장에서 고대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현대의 우월성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고대의 학자들과 그들의 현대 추종자들을 모 두 < 고대인>이라고 불렀으며, 고대의 우월성을 지지한 사람들은 그들의 비 판자를 <현대인>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고대의 학자들과 현재의 학자들이 비교 논의되는 맥락에서는 <고대인과 현대인>이라는 번역이, 현대의 고대 추종자들과 그들에 대한 현대 편의 비판자들이 비교 논의되는 맥락에서는 <고대파와 현대파>라는 번역이 각각 적합할 것이다.
에르 Mol i ere 며 브왈로데스프리오 Bo i leau-Des p reaux 등 프랑스의 대가들은 은유며 과장이며 환상적 유희로부터 벗어난 인물들로서 높은 칭송을 받았댜 18 세기 프랑스 비평학계의 거장 부우르스는 허구나 은유나 직유란 마치 투명한 베일처럼 < 그것이 가리우고자 하는 것을 실제로는 은폐하지 않을 > 때에만 허용될 수 있다고 생 각했댜 < 수사 > 의 유일한 존재이유는 이처럼 <허용가능한 거짓> 이 제공하는 즐거움이었댜 그러나 비코에게 은유는 특정한 발전 단계에서 사람들이 실재를 전망하는 데 반드시 필요로 했던 근본 적인 범주이다 . 그들에게 은유는 실재 그 자체였지, 단순한 장식 도, 비밀스러운 지혜의 보고( 寶庫 )도, 현실세계에 필적하는 세계의 창조도 아니었다. 그것은 무해하든 유해하든, 의도적이든 비의도적 이든, 실재에 대한 부가나 왜곡이 아니었다. 은유는 자연적이고 일 시적이지만, 그것이 발생한 시점에서는 유일하게 가능한 인식의 방식이요 해석의 방식이요 설명의 방식이었다. 요컨대 온유는 한 문화의 특정한 단계에서, 그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모든 인간에 게 열려 있었던 것이댜 비코에 의하면 이 같은 표현방식은 세월 이 지나면서 점차 인위적 혹은 장식적인 것으로 간주된다고 한다.
일정한 시간이 흐르고 나면, 사람들은 은유가 원래 어떻게 생성되 었는지, 은유가 원래 어떤 목적에서 사용되었는지를 망각해 버리 기 때문이다. 신화며 신화적 표현양태들은 비록 문명화된 현대의 (그리고 고전고대의) 신학자나 철학자에게는 큰 결함을 지닌 것들로 보이겠지만, 그것들이 형성되던 시점에서는 적절하며 필연적이었 다 . 발라드며 시가( 詩歌 )며 서사시로 충만한 < 영웅 > 시대의 은유 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학문적 배려와 통찰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은유가 그 일부를 이루는 어떤 유기체적이고 불가분적인 전체에 대한 전망울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18 세기는 인간, 사회, 역사에 대한 비코의 생각에 호의적이 아니 었다. 17 세기보다도 덜 우호적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코의 역 사주의는 퍽 오랜 전통에 뿌리박은 것이었지만, 그것이 유럽인들 의 사고룰 통채로 장악하기 시작한 것은 헤르더에 이르러서였다. 비코는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국내외의 박식하고 영향력 있는 비 평가들에게 증정하는 부지런함을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들로부터 그가 원한 만큼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너무도 거센 조류가 비코의 독창성을 무시한 채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제 16 장 인식론적 함축과 긴장
이쯤에서 비코 인식론의 주요 특징들을 제시해도 좋울 것 같다. 그는 지식을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는 듯하다. 첫째는 과 학 혹은 <참지식 sc i enza> 이다. 이것은 선험적 진리 verum 을 낳는 지식이요, 우리 자신이 만든 인공물들 곧 논리적이며 수학적이고 시적이며 예술적인 허구들에 대해서만 가능한 지식이다. 같은 이치 에서 하느님만이 자기가 창조한 세계를 완전히 인식할 수 있다. 둘 째는 <의식 cos ci enza> 이다. 이것은 만인에게 공통적인 사실적 문 제들에 대한 <외부적> 지식으로서, 달리 표현하자면 <확실성 ce rt um>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떠한 실체들이 외부세계를 구성하 든 간에, 그 실체들이 사건이든 사람이든 사물이든 간에, 그 모두 의 <외부적> 행동에 대해 우리는 <확실성>을 얻을 수 있다. 셋 째는 패턴에 대한 지식 곧 영원한 진리와 원리에 대한 지식이다. 비코의 위대한 스승 폴라톤이 갖추었다고 자처한 지식이 바로 이 런 종류의 것이다(바코는 언제나 섭리를 지식의 원천으로 간주했는데,
특히 유태인들과 교부들의 지식에서 그러했다). 추정컨대, 우리는 이 같은 지식에 의해 이교민족의 역사에서 불변적인 패턴, 죽 < 영원 한 원형적 역사>를 파악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과연 은총이나 섭리 없이도 이렇듯 불경한 형이상학적 통찰이 획득될 수 있는지, 획득 될 수 있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지에 관해서 비코는 명쾌하게 답하 지 않는댜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영원한 진리에 대한 지식은 보댕 이나 베이컨적 의미에서 귀납적(혹은 개연적) 지식이 아니라는 점 이다. 이를테면 비코는 영원한 진리가 귀납적 지식이라고 가정한 다는 이유를 들어서 그로티우스를 비난한다. 넷째는 < 내부적 > 혹 은 역사적 지식이댜 비코가 특별한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이 것은 인간이 외적 관찰자가 아닌 행위자로서 소유하는 < 지향적 int e n ti on al> 지식이댜 현재의 것이든 과거의 것이든 친숙한 것이 든 낯선 것이든 인간의 모든 활동에서, 인간의 모든 노력이며 목 적이며 방향이며 전망이며 가치며 태도에서, 이 모두를 운반하면 서 결국에는 결정하는 각종 제도들에서, 인간이 행위의 주체로서 소유하는 지식이 바로 그것이다. 비코가 말하는 <원인적> 지식이 바로 이런 지식에 해당한다. 그것은 우리 < 정신>의 < 변양들 > 에 천착함으로써 획득되며, 사람들이나 사회들이나 문화들이 어디쯤 에 도달해 있는지에 관한 지식을 제공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 원 인적> 지식은 개인이며 사회며 문화에게서 무엇이 발생하는지, 혹 은 그들이 인과관계의 대행자나 <수동자p a ti en t>로서 어떻게 반 옹하고 행동하는지에 관한 지식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동이며 관 찰이며 이론이며 동기며 실천이 그들의 사고와 맺는 내적 연관성 에 관한 지식도 제공한다. 외부세계의 동시발생과 연속발생에 대 한 단순한 관찰만으로는 이 같은 내적 연관성이 파악될 수 없다. 사물의 세계에서는 기껏해야, 사물들 사이에 유사성, 연관성, 규칙
성 , 연속성 같은 관계들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롤 파악할 수 있을 뿐이댜 이러한 관계들은 데카르트나 뉴튼의 체계에서 법 칙과 필연이라고 말하는 관계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물들과 사건들이 왜 현재의 방식으로 존재하는지에 대 한 지식이 없다. 이 세계의 창조자가 아니라면 누구도 세계가 어 디쯤에 도달해 있으며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없 다 . 이렇듯 비코는 <내부적> 전망과 <외부적> 전망을 확실하게 구분했고, 그럼으로써 목적 대 기계적 원인, 이해 대 지식, 인문과 학 대 자연과학을 차별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구분은 훗날 헤르 더, 브리앙 M ai ne de Br ian , 피히테, 셸링, 딜타이, 크로체, (어느 정 도는) 막스 베버 등을 거치면서 더욱 공고하게 정립되었다. 그렇지만 경계선이 확실해질수록, 그러한 구분에는 반경험주의적이고 반과학 적이며 반계몽주의적인 함축이 있다는 비판도 그만큼 고조되었다. 비코는 물론 형이상학적인 사상가이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기 에 비코의 형이상학적 측면은 어떤 사물에 대한 능동적 참여와 수 동적 관찰의 차이를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행한 다는 것_비코는 이것을
규칙적 관계를 뜻한다기보다는, 누군가가 어떤 일을 능동적이고 의도적으로 만들거나 행한다는 것을 뜻한다(여기서 행함이나 만듦의 주체는 집단일 수도 개인일 수도 있지만 , 제도의 작용은 명백히 집단적이 다).” 비코에 있어 < 원인이 된다 > 혹은 <만든다 > 는 것은, 어떤 인간이나 어떤 계급이나 어떤 운동이나 어떤 관념이 한 개인 (혹은 한 집단)의 정신적 변화의 원인이 된다는 뜻이요, 전환의 원인이 되거나 전환을 야기한다는 뜻이다 . 이렇듯 비코는 경험에서 능동 성과 수동성의 차이를 강조하며, 역사에서 < 동기 있는 > 요소와 <동기 없는> 요소의 차이를 강조한다. 이 같은 비코의 입장은, 인 간의 행동이며 역사며 정신이며 윤리며 사회생활 등을 다루는 다 양한 철학이론들에서 대단히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1) <행함>과 <만듦>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구분이 바코에게는 없다. 그에게는 이러한 구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
물론 비코는 시간적으로 발생한 사건들이 우리가 그것들을 어떤 모습으로 구성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그는 학문적 탐구에서, 특히 사실을 허구와 차별화하는 과학적 역사가들 의 작업에서, 귀납법과 연역법의 역할을 주저없이 인정한다. 그렇 지만 과학적 역사학이 상상적 이해 fan ta s ia 만큼 쓸모있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이를테면 비코의 친구이자 위대한 학자 무라토리가 수 행한 비판적이고 과학적 방법의 능력은, 비록 필수불가결한 것이기 는 하지만, <확실성>을 더욱 엄밀하고 확고하게 정립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댜 원리상 비판적 역사학은 자연과학과 다르지 않다. 반 면에 탁월한 비코 연구자 아우어바흐 E ri ch Auerbach 가 지적하듯이, 자료의 선택과 분류, 특히 자료의 해석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선 택이며 분류며 해석은 근본적으로 주관적이고, 우리 자신의 경험에 의존하며, 우리 정신의 <변양들>에 대한 우리의 탐구에 의존한다.
음악의 예를 들어보자. 음정은 감상자들의 주관과는 무관하다. 그 러나 감상자가 어떤 문화에 속하느냐에 따라, 같은 음정도 상이한 곡조나 화성이나 리듬으로 들릴 것이요, 따라서 다른 양상으로 재 구성될 것이댜 그렇지만 이런 방식으로 재구성된 모든 곡조들, 모 든 화성들 모든 리듬들은 음정에 못지않게 참되고 실재적인 것들 이다 비코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해>의 개념을 창안한 인물이었다 (훗날 딜타이를 위시한 많은 학자들은 이 개념을 < Vers t ehen > 이라는 이 름으로 체계화했다). 비코 이전에도 여러 문헌언어학자들과 역사가 들과 법학자들이 비슷한 개념을 희미하게 암시하기는 했지만, 그 것을 완벽한 모습으로 드러낸 주인공은 단연코 비코였다. 우리는 비코를 읽으면서 완전히 새로운 자각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어떤 감정이나 제스추어, 어떤 예술작품, 어떤 인간형을 이해한다고 말 한다 크게는 문명 전체, 적게는 농담 한마디를 이해한다고 털한 댜 혹은 가난하다, 질투한다, 사랑한다, 개종한다, 반역한다, 은행 가가 된다, 혁명가나 망명객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안 다고 말한다. 비코는 이러한 이해가 이 나무가 저 나무보다 크다 는 지식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파악했다. 그것은 히틀러가 『나 의 투쟁』을 저술했다는 단순한 사실에 관한, 혹은 이 원전이 저 원 전과 얼마나 다른가에 관한, 혹은 중성자가 무엇인가에 관한 지식 과도 다르다. 그것은 미분방정식이나 주문외는 법이나 바이얼린 연주법이나 화성 착륙방법을 인식하는 것과도 다르다. 허수가 무 엇인지, 인간은 왜 빛보다 빨리 움직일 수 없는지를 인식하는 것 과도 다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지식과 비슷하다. 그것은 상황이 달라지면 사물을 보는 눈도 얼마나 달라지는지에 관한, 사회적 조 건이나 정서적 조건이 다르면 그 조건들하의 개인이나 집단이 세
계를 보는 개념과 범주도 얼마나 다른지에 관한 , 우리의 다양한 경험에 의해 성숙해가는 지식에 가깝다. 이러한 종류의 지식에 대 해 판단할 때, 우리는 설득력이 있다 혹은 없다, 현실주의적이다 혹은 이상주의적이다, 예리하다 혹은 무분별하다 등의 어휘들을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같은 지식의 덕택으로 , 어떤 역 사가나 사회이론가의 작품은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 , 기교적이다, 명료하다,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무식하다는 따위의 단순한 판단을 넘어서서 일보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 이를테면 우리는 그 작품 이 현명하다 혹은 어리석다, 홍미롭다 혹은 지루하다 , 천박하다 혹 은 심오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지식은 라일 Gil b ert R y le 이 분류하는 두 유형의 지식 , 즉 < 대상적 지식 > 과 <방법적 지식> 중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코가 <상상적 이해 > 라고 부른 제 3 의 지식이다. 그것은 상상적 통찰과 재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에게 고유한 능력이다. 비코의 이 같은 지식분류법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길을 택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사실들을 인식하고 취급할 때, 그 사실적 영역을 지배하는 것은 < 확실성>이다. 인간존재에게 < 진리 > 는 규 칙이며 규범이며 기준이며 법처럼 인간아 만든 것들의 영역 안에 서만 가능하다. 이것들은 인간의 의지며 행동이며 창조적 상상 같 은 범주들에 속하며, <사실들> 자체의 모습을 결정한다 . 인간이 개인적 혹은 집단적으로 산출하는 것들은 < 경험적으로는 > ___ 이를테면 심리학자들이나 인류학자들의 방식에 의해서는 __- 발 견되지 않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대상들끼리 상호작용하여 그것들 을 만든 자들의 의도와는 무관한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 다 . 그러나 인간이 만든 것들 중에서 만든 자들이 미리 인식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의도적 목적의 산물들만을 고려하자면) 결정, 합의
된 약속, 법전처럼 인간이 만들어서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들 이 그러하댜 이러한 것들조차 사물의 < 외부적 > 구조에 < 상응 > 한다고 주장할 만한 논리적 근거는 없다 . 따라서 헤겔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 물상화 > 라고 부른 관념의 실체화 h yp os tati za ti on 는 명백히 잘못된 개념이다. 그 것 은 인간의 결정이며 약속이며 법전 같은 것들을 , 자연물이나 자연법칙으로 환원함으로써 발생하 는 오류에 불과하다. < 허위의식 > 이니, 인간이 스스로 창조한 세계 로부터 자기소외를 경험한다느니 하는 주장도 같은 이치에서 발생 하는 오류이다. 실로 < 사실 > 과 < 개념 > 의 구분은 절대적일 수 없 댜 < 사실 > 은 < 개념 > 으로부터 독립된 경험의 최소단위가 아니라, 개념에 의해 차별화되고 분류되고 지각되고 해석되고 실제로 결정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를 절대적으로 구 분하는 태도는 칸트나 제 임 스 William J ames 나 그들의 추종자들에 의해, 헤겔과 마르크스에 의해, 금세기의 심리학자나 언어학자나 인류학자로부터 영향받은 사상가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굳건히 유 지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제기한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서 인식 하고 행위한다. 비록 질문 자체는 제도적 사회적 삶에 의해 조건 지워지겠지만, 우리의 질문으로부터 자유롭게, <완전히 꾸며져서> 이루어지는 대답은 있을 수 없다 .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제멋대로 고안될 수 없다 . 대답의 대강은 이미 질문의 본성에 의해 결정된 다. 질문의 행위 곧 선택은 창조의 기예(技 藝 )인 셈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비코는 낭만주의적 주의론( 主意 論, volun tari sm) 의, 관념 론의, 실용주의의, 실존주의의 선구자가 되고 있다. 이 같은 사조 에 속하는 사상가들은, 인간이 개인적 혹은 집단적으로든 수행하 는 변혁적 행동이 인간의 경험에 미치는 중요한 영향을 강조한다. 그들 중에서 좀더 형이상학적으로 경도된 사상가들은, 비코를 넘
어서서 인간활동 자체가 바로 세계라는 주장을 피력하기조차 한 댜 반면에 엄격한 결정론자나 실증주의자나 철학적 실재론자와 유물론자나 기계론 성향의 심리학자나 사회학자나 과학철학자 등 은 비코와 대립적인 위치에 있다. 비코는 이미 1700 년의 3 차 학기개시강의에서 < 인간은 의지적 존재로서 그가 원하는 대로 된다 homo est qu od vult, fit qu od Iube t>라고 선언했다 . 인간이 원하는 대로 모습을 취할 수 있다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비코의 자신만만한 믿음은(비록 『 새로운 과학 』 에서는 크게 수정되었지만), 피코의 『인간 존엄성론』을 대표로 하는 르네상스 시대의 주의론( 主意 論)에 화답한 것이다. 비코는 인류의 문화적 발전에 대한 객관적 과학이 가능하다는 생각에 머물지 않 았다. 말하자면 비코는 <정신적 어휘들 voc i men tali > 의 통일성에 기초하는 과학, 즉 모든 민족에게 공통적인 상징들 (혹은 관념들)에 기초하는 과학, <자연적>이고 비자의적이며 제도적인 규칙성을 제시하는 과학,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인간집단들이 비슷한 조건과 비슷한 필요로부터 비슷하게 반응하는 방식을 제시하는 과 학을 정립하는 데만 헌신한 인물은 아니었다. 물론 비코는 신의 관념이나 결혼식이나 장례식처럼,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점복이나 제사나 가부장권처럼 모든 민족에게 공통적인 관념이나 제도를 예 시한댜 어쩌면 인류의 이 같은 반응들을 가능하게 하는 <세속적 지혜의 원칙들>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고 언제나 유사하다는 근 거에서, 문화의 성장에 대한 일반화가 모색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 이처럼 제도들이나 관념들을 일반화하여 보편개념을 정립 하는 작업보다 필수적인 것은, 그것들을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장 소에서의 구체적 현상으로 인식하는 작업이다. 비코가 말하는 문 화사는, 인류가 비조직적이고 야만적이고 <야수적인> 감각으로부
터 비판적 자의식과 조직화의 단초에로 __ _즉 대상에 대한 육체 적이고 < 본능적인 > 지각으로부터 < 복잡한 정신에 의한 > 경험에 로―― 」 발전하여 결국은 평정한 사고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또한 이 과정은 매 단계에 고유한 이미지들이나 상징들이나 신화들에 의해 진행된댜 이 같은 발상은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이고 사회적 인 나머지 심리적 요인뿐만 아니라 자연적 물리적 혹은 생리 적 ― 一 ―요인들도 완전히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이 같은 비코의 편견은 데카르트파의 기계론적이며 원자론적인 관념에 대 한 지나친 반작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쨌든 < 확실 성 > 으로부터 < 진리 > 에로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나아가려는, 맹목 적 사실로부터 이해가능한 합목적적 행위에로 접근하려는 욕망이 비코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과연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이 < 확실성 > 과 < 진리> 사이의 간 극을 메울 수 있는가? 우리는 과연 우리가 만들지 않은 것들에 대 한 지식으로부터, 우리가 수학에서 얻는 < 선험적 > 지식에로, 혹은 하느님이 존재하거나 존재가능한 모든 것들에 대해 소유한 지식에 로 상승할 수 있는가? 이러한 상승이 적어도 원리상으로는 가능한 가? 비코는 명쾌하게 답하지 않는다. 다만 비코는 우리가 물리학 에서의 단순한 의적 관찰을 넘어서서, 실험실에서 자연과정과 자 연물을 인공 복제하는 차원으로 상승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할 뿐이다. 홉즈도 비슷한 주장을 피력한 적이 있지만, 베이컨은 실제 로 그렇게 생각했다 . 2 1
2) 폰 바이츠체커 C. F. R. von Weiz s acker 교수는 비코의 『 방법 』 에 관한 그 의 주석에서 We Nostr i Temp o ris Stu d io r um Ra ti one 의 라틴어-독일어 대 역판, Wi ss enscha ftlic h e Buchg e sellscM /t, Darmsta d t, 1963); 비코가 외부로 부터의 관찰적 지식과 우리 자신의 인공물에 대한 지식 사이룰 결정적으로
구분했던 방식이 과연 현대 기술공 학 의 엄 청 난 성취에 대해서도 적 용 될 수 있는지에 관해 희의하고 있다 . 변형 , 복제 , 새로운 실체의 창조에서 인간의 능력이 고도로 발전한 오늘날의 시점에서 , 비코의 구분이 어떤 의미 를 지 닐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 이러한 희의 를 통해 그는 새롭게 발견된 힘 들 에 대 한 우리의 남용을 우울하게 반성한다. 물론 비코의 시대 이래로 과학기 술 의 모습은 크게 변화했기 때문에 폰 바이츠체커 교수의 사회 윤리 적 관심사에 공감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 그렇지만 그의 이론적 요점은 평범한 오 류 에 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여전히 < 무로부터 > 창조할 수 없는 한 , 비코의 구분은 유지된다 . 여전히 기술공학의 가능성이 불변적인 자연의 규칙 성에 의존하며 이 규칙성이 우리를 제한하는 한 , 비코의 구분은 여 전 히 유용 하다는 말이다. 물론 오늘날 경험적 지식과 기 술 의 다양한 종류들과 수준 들 사이에서는 차이가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그렇지만 이 같은 차이의 소멸이 비코의 구분을 무력화하지 않는다. 양자의 동일시는 혼동에 불과하다 . 경험 적 지식이 의존하는 <주어진 것들>이란 인간이 만들 수 없는 , 기껏해야 변 형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점에서 경험적 지식은 여전히 < 외부적 > 이다 . 비 코의 용어를 빌리면 그것은 < 이해 i n t e llig en ti a> 가 아니라 < 관찰 co gitati o > 이다. 폰 바이츠체커 교수의 견해와 비슷한 관점이 아렌트 Ha nn a h Arendt 여사에게서도 발견된다 . 내가 보기에는 그녀도 똑같이 잘못된 논거에서 출 발하고 있다(그녀의 Betw e en Past and Futu r e(New York, 1961), pp. 57-58 을 참조) .
그렇지만 안류의 역사적 발전을 구성하는 전부가 인간에 의해 창조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관념이나 관계나 느낌 같은 우리의 활동에서, <우리 자신의 외부적인 자연적 요소들 >, 예컨대 우리의 육체는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가? 사실상 물리학적이며 생물학적인 자연은 인간에게 심대한 영향울 미치지 않는가? 인간 이 자연은 물론 그 자신의 정신상태조차 < 만들 > 수 없는 유한한 존재라면, 더욱이 비코가 인간의 원래 의도와 어긋나는 결과 를 강 조하면서 이를 역사의 < 섭리적 > 본성의 증거로 삼는다는 점을 감 안한다면, 비코의 새로운 연구를 < 과학 > 의 이름으로 존중해야 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비코에게 < 과학 > 이라는 이름은 < 진리 > 의 영역 혹은 선험적 지식의 영역에만, 수학처럼 < 만들어진 과
학 > 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 이 아닌가? 나는 비코 자신이 < 폴라톤적인 것 > 과 < 타키투스적인 것 > 으로 대별한 두 가지 요소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댜 이 두 가지 요소는 각기 보편성과 특수성,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필연성과 우연성,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을 상징 한댜 양자의 관계를 < 변증법적 > 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나로 서는 과연 비코가 양자의 관계를 헤겔적 의미에서 이해했는지, 아 니면 헤겔을 뛰어 넘은 의미에서 이해했는지를 판단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비코의 역사인식론에서 경험적, 즉 < 타키투스적 > 요 소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에게 역사인식이란 특정 인간의 특수 한 행동에 대한 < 상상적 > 이해를 뜻한다. 여기서 특수한 행동은 여러 가지를 포괄한다. 특정한 인간집단들이 과거에 의도했고 원 했고 느꼈던 것들, 대체로 그들이 만들지 않은 것들로 구성된 세 계에 그들이 반응했던 방식, 그들이 두뇌에서 형성된 관념에 따라 의식적 목적을 추구하고 의도적으로 행동했던 방식 , 뿐만 아니라 그들이 무의식적으로든 본능적으로든 습관적으로든 의도를 가지 지 않고 행동했던 방식, 혹은 그들이 행동을 반성할 때에는 자기 들에게(혹은 타자에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행동 하던 중에는 충분히(혹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방식 등등 . 비코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성을 전망한 진정한 원조이다(물론 ,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한, 대상과의 합일을 도모한 <마술> 이론들은 그의 전망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 비코의 통찰은 훗날 헤겔과 헤겔주의자 들에 의해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했고, 마르크스며 니체며 프로이 트에 의해 가일층 새로운 방향으로 심화되었다. 비코에 의하면, 우 리는 계급이든 사회든 개인이든 특정한 인간 단위들이 과거에 처 했던 상태를 우리의 정신 안에 재현 re_:enac t할 수 있다. 계급이나
사회나 개인이 원하고 노력하고 추구했던 것, 긴급한 필요를 채우 려는 그들의 노력을 도와주기도 좌절시키기도 했던 것 , 이런저런 상황에서 요청되었던 사회적 필요와 효용,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문화적이며 역사적인 창조물에 의해 영향받는 방식 ___ 우리는 공감적 상상에 의해 이러한 것들에로 < 침투 > 할 수 있다는 것이 다 . 비코는 우리가 상상적 통찰에 의해 < 죽자 an s ic h > 를 < 대자 fur s i ch > 로 바꿀 수 있다고 가정한다. 부연하자면, 한 행위자가 의부로부터 관찰한 어떤 실체 곧 < 죽자 > 는-사실상 이것은 행위자의 정신적 혹은 육체적 상태에 불과하겠지만-그의 합 목적적이고 <영적인 > 활동에 속하는 어떤 요소 곧 대자로 전환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비코가 지름길을 제시한 뒤에도 우리가 이 같은 전환에 성공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충분한 상상 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전부이다. 자기들의 민족주의적 관념 이나 철학적 관념을 발굴하기 위해 과거를 읽는 작가들은 시대착 오적 유비를 부채질하며, 이 같은 시대착오는 역사의 참된 재구성 에 필수적인 <상상적 이해>를 왜곡하기 마련이다. 더욱이 루크레 티우스며 타키투스며 베이컨처럼 상상적 이해의 능력을 남들보다 많이 갖춘 인물들은 있었어도, 그것을 완벽하게 갖춘 인물은 역사 상 존재한 적이 없다. 그러나 원리상 이런 결함들이 장애가 될 수 는 없댜 그것들은 논리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장애가 아니라 사실 의 <맹목성>이 야기하는 경험적 장애일 따름이다. 실제로 인류의 체계적인 진화로부터, 사회로서든 계급으로서든 인간의 과거 전체 로부터, 지속적인 인간적 필요들을 상상적으로 재구성한 천재들은 얼마나 많은가?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적당한 <상상력>이 주어지 고 여기에다가 비코가 말하는 <제 민족의 영원한 원형적 역사> 같은 <법칙>이 더해진다면, 인류 역사의 모든 단계는 우리의 정
신 안에 재현될 수 있다. <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간 것 > 은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상상을 통해 그 과정을 재경험할 수 있 는 것이다 < 상상력 > 은 한때 각종 신화들과 제식( 祭 式)들을 창조 해서 원시적 세계관의 뿌리로 작용했지만, 이제는 과거에 대한 우 리의 감수성을 키우는 능력이 된다. 여기에는 (비록 그가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위험하리만치 과감한 뜻이 숨어 있다 . 우리의 복잡하고 자의식적인 문명적 조건 하에서도 우리의 역사의식은 우리가 처한 특수한 단계의 전망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 그것이다. 결국 이 것은 우리의 역사의식 자체가 우리 문명적 단계의 신화요, 결국은 모든 역사학이 신화라는 뜻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사학은 그 것으로부터 독립된 사실적 구조를 객관적으로 기술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 인간의 실천적 필요, 즉 세계에 적응하려는 인간의 필요에 부응하여 상상력이 일종의 실천 모델로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 이러한 관점을 논리적 극단까지 밀고 나간다면, 적어도 원 리적으로는 이성적 분과로서의 역사학과 신화적 사고로서의 역사 학 사이에 어떠한 경계선도 그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코는 현대의 비이성주의 사상가들과는 달리 , 3 1 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 지 않는댜 < 영원한 원형적 역사>의 비이성주의적 함축이 셸링이 나 니체에게는 중요했을지 몰라도, 그 같은 함축을 인류 역사발전 의 실재성에 대한 비코의 감각에 대해서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 바코는 역사의 실재성을 애국주의적 역사관 따위의 온갖 환상들로 부터 뚜렷하게 구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험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는 『새로운 과학』에서, 인
3) 브라운 N. 0. Brown 교수의 말년의 작품들, 혹은 조이스 Jam es J o y ce 의 여러 작품들 , 특히 조이스의 Fi nn eg a n's Wake 는 비코의 관념을 비합리주의 적으로 응용한 사례들이다.
간은 마땅히 어떠해야만 한다는 폴라톤적 전망과, 현실의 인간은 불완전한 피조물이라는 타키투스의 견해가 적 절 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대목을 발견하지 못한다 . < 진리 > 와 < 확실성 > 의 관계는 조 금 다른 방식으로 취급된다. 비코가 거의 모든 인간사회에 불변적 인 성장의 패턴이나 질서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의문의 여지없는 사실이다_이 패턴은 이론적으로는 < 이교민족들 > 에로 한정되 지만, 그는 종종 이 같은 한정을 잊은 채 < 진행과 반복 > 이라는 순환이 인류 전체를 지배하는 듯이 말하기도 한다. 조야한 출발로 부터 청춘, 성숙, 노쇠, 파멸로 이어지는 연속의 과정 , 이 과정이 끝없이 반복되는 순환의 이야기에서, < 영원한 원형적 역사 > 라는 골격은 플라톤적인 이데아에 가깝다. 그것은 < 진리 > 요, 원리상 <선험적으로만> 인식가능하다. 그것은 반증되거나 약화될 수 있 는 가설도 아니요,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는 개연적 증거에 기초하 는 귀납적 일반화도 아니다. 섭리가 만들고 인도하는 < 영원한 역 사>라는 구조는 영원한 진리이다. 비코는 이 같은 자기의 발견을 스스로 대단한 것으로 여겼다. 그는 하느님의 참 의지를 파악하여 새로운 과학을 정립한 원조로 자처하면서, 자기의 발견은 불멸적 인 업적이라고 주장했다 . 그렇지만 우리가 < 영원한 역사 > 를 진정 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 명백히 아니다. 그 역사의 구조를 만든 것은 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화를 만들어 갈 뿐이지, 우리의 문화나 우리 자신이 복종하는 법칙울 만들지는 못한다. 법칙은 하느님의 작품이다. 법칙은 그것의 신성한 창조자 에게는 단순한 규칙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철칙이다. 인간은 잠재의식적 혹은 <시적> 수준에서조차 법칙을 계획하지 못한다. 법칙은 <진리>이다. 그것은 물리학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만든 것fa c tum>이 아니다. 법칙의 작용은 신의 섭리에 기인하는
바, 이 같은 배려가 없었다면 인간은 야수상태를 극복할 수 없었 을 것이다 실제로 원시적 경외감은 섭리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이를테면 천둥에 놀란 < 야수인간들 > 이 청천하늘 아래에서 난교를 벌이는 데 수치심을 느껴 동굴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은, 섭리의 작용이댜 이렇 듯 섭리는 인간을 통해 작용하지만 인간에 의해 촉 발되지는 않는다. 마치 신비한 기계처럼 인간의 악덕을 사회적 연 대며 도덕이며 문명의 형성에서 꼭 필요한 힘으로 바꾸어 주는 장 치는 인간의 창조물이 아니다 . 인류역사의 매 단계에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영구순환의 특징이 존재한다는 주장, 역사에 어떤 <원 형 > 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 피타고라스주의, 플라톤주의, 신플라톤 주의, 르네상스 시대의 여러 사조들 등 다양한 뿌리들을 가지고 있다 어느 뿌리에서든 역사의 < 원형 > 은 < 진리>로서 주장된다. 그러나 역사의 < 원형 > 은 신비로 남아 있을 뿐, 그것이 어떻게 인 간에 의해 진리로서 파악될 수 있는지는 알기 힘들다. 역사의 원 형은 인간적 목표처럼 인식가능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비코는 그것을 인식하고 있다. 자기가 그것을 인식 했음을 인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중요한 발견이 라고 주장하기조차 한다 . 이 대목에서 비코의 생각은 폴라톤적 긴 장을 드러내는 동시에, 헤겔적 범신론적 교의들과의 관련성을 보 여 준다 비코는 결코 인간이 <만든> 것과 인간사룰 지배하는 법 칙 간의 관계를 명료하게 정립하지 못했는데, 이는 비슷한 문제로 씨름한 칸트 이후의 관념론자들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러지 못한 것과 비슷하다. 이 두 항의 관계는 긴장을 형성한다. 가치와 사실, 인간적 목적과 사물의 본성, 자유와 필연, 행동과 주어진 상 황 등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긴장을 형성한다. 나로서는 비코의 위 대한 형이상학 체계 안에서 이 해묵은 숙제의 최종적 해답을 발견
했노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행복이 부러울 따름이다 .
비코에 따르면 전 우주적 드라마의 저자는 섭리요, 행위자들, 죽 섭리의 대행자들은 그들의 몫만을 이해할 수 있다 . 바꾸어 말하자 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이 그들의 몫이다 .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자기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코는 하느님의 창조와 인간의 자기창조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죽 인간적 통제나 이해 를 넘어선 힘 에 의해 주어지고 결정되는 것과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 사이의 관계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가 지나치게 신중했던 탓이든 아니면 그 관계를 파악할 수 없었던 탓이든, 그 관계에 대한 언급은 어디 에도 없다. 그렇지만 비코는 다음과 같은 믿음만은 분명하게 드러 낸다. 인간과 사회는 자연적 요인들에 반응해서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의 목적추구적 활동과 자기이해의 능력에 따라서도 성장하고 변화한다는 믿음, 따라서 불변적 인간본성이란 있을 수 없고 인간 본성에서 항구적이고 초역사적인 목표를 발견할 수도 없다는 믿음 이 그것이다. 피쉬 교수의 탁월한 표현을 빌리자면, <비코는 진정 본질적이라고 할 만한 인간본질이 개인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 는 부정적 견해를 마르크스주의자들 및 실존주의자들과 공유하며,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인간성의 본질이 사회관계들의 총체요 제 도들의 변화해 가는 체계라는 긍정적 전망을 공유한다 . > 4 1 비코의 테제가 과연 이런 식으로 유지될 수 있는지, 그럴 수 있다면 얼마 나 유지될 수 있는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 하지만 그것의 경이로 운 독창성에 대해서만은 의심이 있을 수 없다.
4) Intr od ucti on , to The New Sc ien ce of Gia m batt ista Vic o (Anchor Books, Doubleday, New York, 1961), J4, p. xiv.
제 17 장 인식론적 원천에 관한 쟁점들
사상사에서 실로 대담하고 권위 있는 관념과 만날 때마다, 역사 학자들은 그 원천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떠올리곤 한다 . 해답을 구하는 작업에는 늘 위험이 붙어다니기 마련이다 . 완전히 독창적 인 관념은 있을 수 없다는 가정, 죽 어떠한 관념에서든 선구자는 있는 법이기 때문에 비록 그 관념이 선구적 관념들의 기계적 합성 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들의 계승이나 특수한 종합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따라서 그것을 형성해 준 원래의 요소들로 분해가능 하다는 가정이 그것이다. 이러한 가정은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라 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세상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발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기이한 명제를 수반한다. 실로 용인하기 힘든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이 역설은 원자론의 속류인 질량보 전의 법칙과 유사한 이론을 예술과 사상의 영역에 무분별하게 적 용한 데 기인하는 것 같다 . 그 이론에 따르면 모든 사고는 데카르 트적 혹은 로크적인 <단순 관념들>에서 출발하며, 자연적 • 생래
적으로 존재하는 그 주어진――-창조되지 않은-기초단위들의 조합이나 변형 혹은 기껏해야 그것들의 < 발전 > 으로부터 다른 모 든 관념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역사학(특히 문화사) 자체 가 문명의 빈틈없는 연속성이라는 개념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듯 이 보일 수도 있댜 역사학은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인격적 요인 과 비인격적 요인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연속적 변화과정 안에서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어떤 예술작품 이나 사상은 그것이 아무리 대담한 천재적 도약일지라도 그것의 맥락이나 뿌리나 환경을 구현한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떤 예술작품이나 사상은 오로지 선구자들의 덕택으로 출현하며, 그것의 맥락이나 뿌리나 환경과의 관련 하에서만― __ 즉 그것을 출현시켰고 그것의 경로를 결정한 < 추세 > 와 < 흐름 > 속에서만-이해될 수 있다는 주장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렇 지만 이 방법이 엄격하게 적용되면 인간적 산물의 모든 개성을 비 인격적 요인에로 환원시키는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 이를테면 역 사주의적 hist o r i cist 비인격화의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어떤 의미에서는 비코만큼 이 같은 방법에 철저한 학자도 없다. 사실상 그는 인간의 <본질>이며 본성을 그것들이 발생한 역사적 과정에 로 용해시켰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을 그것의 원천(혹은 창조시점)으로 소급해 가면서 분 석하는 스킬라 Sc y lla 의 방법이 있다면, 꽃의 아름다움 혹은 열매 의 맛처럼 결과만이 중요하지 그 뿌리에 대한 지식은 중요하지 않 다고 믿는 카리브디스 Ch ary b di s 의 방법도 있다. 물론 이 양극단을 피하여 중간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하여 꽃의 가치와 개화의 과 정을 구분하되, 개화의 원인에 대한 지식이 꽃의 본성에 대한 완 전한 이해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아마도 이러한 주장은
어떤 학문을 학문으로 정당화하는 유일하고도 결정적인 요소일 것이다) . 그렇지만 이 같은 이치를 비코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다른 주요 사상가들 대다수에게 적용할 때보다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다. 실 로 많은 비코 주석가들은 바코의 주요한 발견들을 선구자 없이 창 조된 것들로 보았고, 오직 영감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하는 행위의 뛰어난 귀감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특히 역사주 의마저 가증스러운 고전주의와 모방Mim es i s 이론의 답습이라고 비난한 극단적 낭만주의의 투사들 사이에서 만연했다. 그러나 영 감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하는 행위가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일인 가? 바코에게는 지적 계보도 참된 선구자도 없었던 것일까? 그의 가장 혁명적인 관념은 정말 <무로부터> 나왔을까?
1) Vi co and the Aesth e tic Hist o r i ci s m . in Scenes from the Drama of Europ e an Lit er atu r e(New York, 1954).
20 여 년 전에 작고한 아우어바흐는 헤르더를 비코와 비교한 논 문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헤르더의 사상은 샤프츠베리와 루소, 아션 Oss i an 과 독일 애국주의, 볼테르에 대한 반동적 조류, 새로운 생물학 등으로부터 영향받았다고 단언할 수 있지만, 비코 의 경우는 이런 식의 해설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비코의 지적 계보를 추적하려는 많은 노력이 있었다. 피쉬 교수는 21 종교 개혁이 역사학에 미친 광범위한 영향을 강조한다. 종교개혁 자체 가 수도원에 비장되었던 서적들과 수고본들의 개방에서 비롯된 결 과였거니와, 그것은 다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편에서 종교개혁파의 역사학적 공격에 역사학적으로 대항할 필요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 었다는 것이다. 그외에도 피쉬는 새로운 민족국가들의 민족적 긍
2) 피쉬가 비코의 『자서전 』 에 붙인 서문을 참조. 이 서문은 비코의 지적 계보 를 밝힌 영어권의 글로서는 최상급의 해설이다.
지 ―—비코가 허세 bo ri a 라고 불렀던 一―-가 역사학에 가한 자극 이라든가, 구체적 경험자료의 편에서 추상화에 반대했던 베이컨의 선전이 미친 영향을 거론하기도 한다. 피쉬의 분석은 그 자체로서 참되고 중요하기도 하지만, 17 세기의 역사학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준다 . 실제로 17 세기는 역사학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증가하고 문헌비판의 기술도 급성장한 시기였다. 볼랑드학파나 모 르학파 같은 종교적 성향의 학자들뿐 아니라 세속적인 학자들, 특 히 영국학자들도 문헌비판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분석만으로는 비코의 가장 독창적인 테제들의 뿌리가 설명되지 않 는댜 동서양 도처의 신세계 발견으로부터 자극받은 탐험문학의 영향을 첨가한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비코가 탐험담을 인용하는 빈도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낮 기 때문이다. 비코는 그의 각종 테제들을 예시하기 위해 이따금씩 신세계 야만적 주민들의 관습에 관해 언급하고 있지만 , 31 예시로서 나마 그 같은 언급은 그의 작품에서 낮은 비중을 차지한다. 물론 많은 사상사가들이 매우 독창적이고 유용한 작업을 수행해 왔다. 특히 금세기의 진정한 비코 재발견자인 크로체, 끈기 있고 근면한 비코 편집자 니콜리니 동이 주도한 이탈리아의 학자들은, 비코의 다양한 테제들의 기원을 주제별로 추적해 왔다. 크로체에 대한 뢰비트의 반박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뢰비트는 아퀴 나스와 토미즘이 <진리-만들어진 것 > 의 이론에 지배적인 영향을
3) G. Gia rizz o, La Poli tica di Vi co , in Qu ademi Conte m p o ranei, no. 2(Isti - tuto Un ive rsita rio di Salerno, Libr eri a Scie n ti fica editrice , 1966), pp. 114-177 울 참조. 이 논문에는 비코가 < 영웅적 > 문화로부터 < 인간적> 문화로의 이 행을 예시하기 위해 고대의 게르만족과 스키티아족, 현대의 헝가리족과 색 슨족에 관해 언급한 사례들이 수록되어 있다.
미쳤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은 인식함과 동시에 창조하기 때문에 그에게 인식과 창조는 하나라는 아우구스티누스적 교의가 그 이론 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교의는 다시 <신성한 로 고스 D i v i ne Log o s> 개념에로 소급된다. 말하자면 만물을 창조한 하느님은 그 홀로 만물을 인식한다는 것, 하느님의 이미지로 만들 어진 인간은 유한한 창조력을 소유하며 따라서 그 자신이 창조한 것들만을 완전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코의 견해가 가톨 릭 정통교리로부터 파생되었다는 뢰비트의 주장을 수용하든 이에 대한 크로체의 반론을 수용하든(필자로서는 뢰비트의 주장이 더욱 믿 을 만한 것으로 보이지만), <진리 一 만들어진 것>의 원리가 중세적이 고 기독교적인 것이요 비코의 시대에 일종의 신학적 상투어로 통 용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 I 비코가 이 원리를 실제 로 어떻게 응용했던가 하는 문제는 훨씬 흥미롭지만 별도로 논의를 필요로 한다. 니콜리니는 평생 동안 바코의 작품들을 편찬하여 전 집을 간행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비코의 생애와 업적을 다양 한 측면에서 해석한 몇 편의 저작들을 출판했다. 그의 업적은 오늘 날에도 여전히 <문화사적> 해설의 귀감이 되고 있다. 니콜리니의 업적에다가, 코르자노와 파소 L uigi Fasso, 로시 Paolo Ross i와 파치, 바달로니 Badalon i와 잔투르코 Eli o Gia n tu rco , 아메 리 오와 칸텔리 G. Cante l li, 반 C. E. Vau g han 과 피 쉬 , 휘 태 커 Thomas W 血t aker 와 애 덤스 H. P. Adams 등이 출판한 금세기의 대표적 연구서들을 더하 면, 비코에게 영향을 미친 고대 및 동시대 작가들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폴리비우스와 루크레티우스, 캄파넬
4) Lowit h, 앞의 책, Croce, 앞의 책 . 필자는 뢰비트의 견해가 더욱 믿을 만하 다고 생각한다 . 한편 크로체는 뢰비트에 대한 자신의 반론을 보강하기 위해 19 세기의 에스파냐 신학자 바메즈 Jaime Balmes 를 인용하고 있다.
라, 피치노와 신플라톤주의 학파, 산체스 F. Sanches 와 보댕, 베이 컨과 홉즈, 그로티우스와 푸펜도르프와 셀던, 데카르트와 베일과 르클레르크, 비코의 고향 나폴리 출신의 코르넬리오 Tommaso Cornel i o 나 아울리 시 오 Domenic o Aul i s i o 나 카푸아 Leonardo di Cap u a 등등-이들이 비코에게 미친 영향에 관한 갖가지 정보 들이 모두 가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들의 도움으로 비코 의 많은 관념들이 해명될 수 있다 . 이를테면 인간의 < 야수적 > 기 원과 상승에 대한 그의 관념, 신화와 의식(儀式)은 인간이 환경을 정복하려는 노력에서 실천적 도구라는 그의 견해, 정치가 법이나 도덕과 형성하는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 그외에도 미슐레가 말하 는 『새로운 과학』의 <작은 복마전> 여기저기에 산재한 그의 수많 은 암시들과 착상들과 원리들이 해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만으로는 비코의 핵심 주제들의 진정한 원천 이나 선구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의 핵심 테 제들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진리-만들어진 것>의 원리가 광의의 역사, 즉 인간이 행하고 만들고 겪은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이다 __- 이것은 『지혜』(1 710) 와 『보편법』 (1719-1720) 사이의 <침묵기>에 성숙했음이 분명하다. 이 러한 확신으로부터 형성된 두번째 주제는 역사적 사고를 위한 범 주로서의, 더 나아가서는 사고 일반을 위한 범주로서의 문화라는 관념이댜 비코는 이 두 가지 원리들을 묶어서 하나의 획기적인 관념을 제시하는 바, 이것만이 불멸적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비코 의 가장 위대하고 유일한 업적이다. 이 관념은 어디서 왔는가? <진리-만들어진 것>의 원리가 역사의 이해를 위한 열쇠라는 생 각을 비코 이외에도 제시한 사람이 있는가? 문화는 모든 생활방식 들의 총체이자 핵심이라는 것, 다양한 문화들은 각기 자율적이며
저마다 고유한 전망과 가치 를 지닌다는 것, 각 문화는 나름대로의 성공을 거두면서 이 문화로부터 저 문화로 흘 러가지만 이 흐름이 기계적인 연속은 아니라는 것, 이러한 흐름에서 결국은 모든 인간 공동체들의 감정 , 사고 , 행동의 전 영역에 동일한 보편적 목적이 형성된다는 것 _――이 모 든 것을 한꺼번에 주장한 사람이 비코 의 에 또 있는가? 물론 비코가 존경한 작가들 중에는, 중요한 사건들, 뛰어난 개인들의 행적 들 을 단순히 시간적 연속의 관점에서 구성하 기보다는 훨씬 넓고 깊 은 관점에서 천착한 인물들도 있다 . 문화는 한 사회의 총체적 표현으로서, 그 사회의 모든 성원의 다양한 활 동 들 이를테면 문학과 종교, 정치와 예술, 언어, 법적 • 군사적 • 경 제 적 제도들 계급구조와 < 관습 > 등에 골고루 스며들어 그 모두 를 하나로 묶어 주는 핵심양식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파악한 인 물 들 도 있다 . 그러나 마이네케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체적인 동시 에 연속적인 > 통일적 패턴을 제시한 사람은 없었다. 폴리비우스나 플 라톤도, 바로 Varro 도, 비코의 <4 대 스승들> 플라톤, 타키 투스, 베이컨 그로티우스 _ 어느 누구도 제시하지 못했다. 오직 비코의 체계에서만 이 통일적 패턴은 특정한 사회구조의 중핵을 이루는 동시에, 그것을 비슷하게 발전하는 다른 사회구조들 혹은 문화들로부터 구별가능하고 이해가능한 하나의 총체로 만들어 준 댜 한 사회의 구성요소들이 서로 연관되고 서로를 반영하는 방식 을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인류의 역사를 구성하는 다양한 문화들 에서 공통성과 차별성을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패턴의 덕택 이다. 비코가 닥치는대로 읽었던 고대와 동시대의 잡다한 원전들 속에서, 이러한 견해와 방법의 기원이 추적될 수 있을까? 아니면 비코의 전망은 그만의 왕성한 상상력에서 자생한 것인가? 해답을 바코의 사회적 지적 <환경>, 특히 17 세기의 나폴리왕국
의 상황에서 구하려 는 시도가 있었다는 것 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른댜 니콜리니 ;;) 와 코 르 자노 (“ 가 이 길을 따랐다. 나폴리왕 국의 사회 • 정치 • 종교적 생활에 대한 그들의 재구성은 지금도 박 식함과 상상력을 겸비한 연구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 노선에서 최 근의 가장 야심 적 인 시 도는 바달로니 Ni ch ola Badalon i 교수의 것으로 보인댜 7’ 그는 나폴리인들의 과학활동, 특히 주교 카라무엘 Caramuel 과 < 탐구자들의 아카데미 Accadem ia dei Inves tig an ti > 의 활동에 주목한다. 그의 저서는 그밖에도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신피타고라스주의가 언급된다. 세베리노 Marco Aulelio Serv i no 와 델라 포르타 Gio v ann i Bap tist a Della Po rt a 가 인 간과 동물 사이에는 결국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견지에서 제시한 만물의 단일한 운동원리가 언급되기도 한다. 정신과 자연의 통일성을 믿은 바르톨리 Sebasti an o B art o li와 코르넬리오 Corne li o 가 다루어지기도 한댜 자연, 죽 살아 있는 거대한 < 영혼 S pirit us > 이 낳은 가장 풍요로운 결실이 인간이라는 포르치오L. A. Porz i o 의 주장도 다루어진다 . 데카르트주의의 강력한 영향력 덕택으로 과학 의 전 영역을 장악한 수학적으로 증명가능한 < 선험성 > 과 대립적 인 의미에서, 경험적 <개연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가설과 실험의 역할을 강조한 보렐리 G. A. Borel li와 카라무엘도 논의된댜 특히 바달로니 교수는 17 세기 생기론적 자연철학의 핵심 개념들에 해당 하는, 보렐리의 <충격에 의한 운동>이며 <능동자 cona t us> 같은
5) 특히 La Gio v in e zza di G. B. Vico (Late rz a, Bari , 1932); Uomi ni di spa d a, di chie s a, di tog a , di stu d io a tem p o di G. B. Vico (Hoepl i, Milan o, 1942) 를 참조.
6) Umanesim o e relig ion e in G. Vico (Late r za, Ba ri, 1935); G. B. Vico (Late r za, Ba ri, 1956)
7) Intr od 112io n e a G. B. Vico (Feltri ne lli , Milan o, 1961 ).
개념들을 강조한다. 비코가 이 모두와 상당히 관련된다는 것은 부 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실제로 비코의 물리이론에서 < 능동자 > 의 속성을 가진 < 형이상학적 점( 点 ) > 은 하느님과 물질 사이 를 < 매 개 > 한댜 같은 맥락에서 비코는 자신의 이론을 제논 Zeno 에 귀인시 키기도 한다(제논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명의 그리스 철학자 중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 그의 『지혜 』 에서는 < 불꽃을 타오르게 하고 식물을 성장시키고 동물을 풀밭에서 뛰놀게 하는 운동 mo t us quo flam ma ardet, pla nta adolescit , besti a per pra ta lasci vi t > 이 언 급되기도 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운동 mo t us> 과 <능 동자 > 이다. 비코의 이 같은 전망에서 바달로니 교수가 엄 청난 박식함으로 추적한 다양한 사상가들의 영향이 발견된다는 것 은 당연한 일이댜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의 신플라톤주의적이고 생기론적인 형이 상학에 연원하는 이 이론은 라이프니츠에게도 영향을 주었던 것으 로, 비코의 가장 독창적이며 중요한 측면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바달로니가 인용한 작품들을 비코가 실제로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 지, 읽었다면 얼마나 읽었는지의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보 다 중요한 문제는 < 능동자 > 와 <운동>이 보렐리나 라이프니츠나 델라 포르타, 그 누구에 연원하든 간에 인간이 완전히 인식할 수 는 없는 요소들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그것들의 작용을 <원인적으 로 >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비코가 외부세계라 부른 영역에 속한댜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의식>의 수준에서 수행되 며 따라서 <확실성>을 넘어설 수 없다. 인간적 의지며 사고며 행 동은 우리의 지성이 파악할 수 있는 결코 애매하지 않은 인식대상 이라는 의미에서, <능동자>와 <운동> 같은 요소들은 우리의 지 성이 파악할 수 없는 애매한 인식대상이다. 내가 아는 한, 비코는
< 형이상학적 점 > 이며 그것의 <능 동성 > 이 인간활동에 적용가능 하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그는 그 같은 외적 요소들과 인간 활동 의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같은 연속성은 비코 이전에는 파라셀수스 Paracelsus 와 캄파넬라 같은 자연철학자 들 에 의해 특징 적으로 표현되었고, 비코 이후에는 데카르트며 칸트에 반발한 헤 르더나 셸링이나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핵심 테제로 반복되었다 . 하만이며 괴테며 코울리지도 비슷한 견해를 나름대로 피력했다. 따라서 바달로니 교수가 언급한 나폴리 과학자들은 비코의 지적 선조로서보다는 19 세기 낭만주의자들의 지적 선조로 거명되는 것 이 바람직할 듯하다. 비코의 독창성은 이해불가능한 자연과정으로 부터 <침투>가능한 인간활동을 구분한 데 있지, 둘을 동일시한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비코는 양자의 동일시에 기초한 일원론의 선구자들을 계승하지 않았다. 그들의 영향은 오히려 셸링이며 라베 송 F. Rav ai sson 이며 베르그송 H. Ber g son 이며 샤르댕 Teil h ard de Chardi n, 그밖에도 다양한 현대의 < 자연철학 Na turp h i loso phi e > 의 신봉자들 사이에서 엿볼 수 있는 바, 비코는 정확히 그들의 반대 편에 서 있었다 . 물론 바달로니 교수가 인용하고 있는 카라무엘 등 초기 과학저술가들이 반(反)아리스토텔레스적인 동시에 반(反) 데카르트적이었고 베이컨을 추종했다는 것, 비코 역시 비슷한 태 도를 취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탐구자들의 아카데미>가 존중한 실험정신과 구체성, (베이컨은 물론) 캄파넬라가 강조한 감각과 상 상력, 추상성과 선험성에 대해 그들이 공유한 반감一—-이러한 요 소들이 비코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더욱이 비코 의 물리학은 데카르트의 물리학이나 칸트의 인종론이 그러하듯이, 비록 비코의 사상에서 주변적 요소이기는 해도 전혀 홍미 없는 것 이라고는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천재에게 쓸모없는 구석이란 없는
법이니까 . 실 로 바달로니 교수는 우리의 비코 지식에 새롭고 유용 하고 홍미로운 내용을 더해 주고 있다 . 그는 우리에게 ―一-(스피 노자와 페르 시몽의 영향을 받아 모세와 헤르메스 트리스메기 스 토 스 Herme s T ri s m e gis t os 를 동일시했던) ――-아울리시오의 성서신 화학이라든지 그리말디 Gr i mal di의 < 진리 > 와 < 확실성 > 에 대한 견 해 등을 이에 상응하는 비코의 이론들과 비교하라고 권한다. 카푸 아가 제시한 신화이론이며 이론과 실천 관계의 원리에 대해서 우 리의 관심을 촉구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우리의 비코 이 해에 새롭고도 유용하고도 흥미로운 차원을 더해 주고 있다. 그렇 다고 해서 비코의 핵심이론들이 카라무엘과 < 탐구자들의 아카데 미 > 에로 소급된다는 그의 주장이 구제받을 수는 없다 ? 카라무엘 과 추종자들의 관심은 < 선험적 > 추론 아닌 경험을 통해서만 (신 학 을 제외한) 모든 자연적이고 사실적인 지식에 도달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지식에서 최상의 목표는 최대의 개연 성이었고, < 선험적 > 확실성은 기만이나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었댜 이 점에서 그들은 베이컨에 가까웠다. 반면에 비코의 핵심은
8) 이 문제는 비코가 실제로 주교 카라무엘과 < 탐구자들의 아카데미>의 활 동에 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었느냐의 문제와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 파 올로 로시가 적시 했 듯이, 비코의 우주론은 플라톤의 『 티마이오스 』 에로까지 소급되는 헤르메스적-신플라톤주의적 신비주의 전통에 연원하는 것이었고 , 따라서 < 법학적인 동시에 카발리즘적 > 이었다 . 동시대의 위대한 지적 혁명 을 알지 못했던 비코에게, 자연과학사의 중요한 자리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빗나간 존경의 표시로 보인다 . H. P. Adams, The Li fe and Wr iting s of Gia m batt ista Vico (George Allen & Unwi n, London, 1935) 에 서 지 적 된 더 욱 홍 미로운 비코의 업적이 있다. 비코는 신화란 자연 아닌 사회생활에 대한 인간적 상상의 산물이라고 _. ~즉 일종의 신화화된 정치학이라고_전망 함으로써 , 사회학사의 중요한 인물이 되고 있다. 이러한 전망은 계급투쟁이 역사의 결정적 동인이라는 견해와 함께 , 비코 를 생시몽과 마르크스의 선구 자로 만들어 준다.
역사지식이 이 같은 종류의 지식과 다르다는 주장에 있다. 이것이 그가 천재라고 불릴 만한 진정한 이유이다. 역사지식은 자연과학 의 지식보다 더욱 위대한 진리를 갖는다고는 할 수 없어도 , 자연 과학으로서는 희망하기조차 힘든 판이하고도 우월한 성격의 진리 룰 소유한댜 바달로니 교수에 의하면, < 비코의 철학은 전적으로 탐구자들의 아카데미'의 실험방법과 정신형이상학을 시민철학(즉 사회-정치 철학) 쪽으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해석되어야 한다 . >91 당 시 자연세계의 연구에서는 이미 페용된 것들을 < 옛날에 소크라테 스가 그렇게 했듯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옮겨 놓았다 > 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옳다면, 비코는 역사학이나 사회과학이 개 연성에 만족해야 한다고 말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같은 주장은 비코 이전에는 거의 의문시되지 않고 통용된 상투어였다. 물론 자 연과학이 방법과 결론에 있어 <선험적 > 영역이 아니라는 주장은, 혁명적이라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동시대를 풍미하던 데카르트 파에 대한 거부이자,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아니지만) 아리스토텔레 스주의적인 스콜라주의의 강력한 전통에 대한 저항이었다 . 그렇지 만 만일 비코가 역사학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했다면, 비코는 데카 르트를 포함한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옛날부터 주장해왔고 상식에 의해 뒷받침되어 온 명제, 즉 인간사(人間 事 )에서는 확실성을 얻을 수 없다는 명제를 반복하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
9) Badalon i, 앞의 책, p, 291 .
그러나 이 같은 진부한 명제를 바코에게 부여하는 것은 비코를 열등한 경험론자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일이다. 야 비코는 한때 일
CD Intr od uzio n e a Vi co(1961) 에서의 바달로니의 입장은 Intr o duzio n e a G. 13. Vi co(1984) 에서도 별 수정없이 지속되고 있다. 원래부터 그는 특히 갈릴 레오의 과학이 비코에게 미친 영향을 강조해 왔다. 비코는 에피쿠로스주의
와 플라톤주의에 대한 갈릴레오의 제설절충적 종합을 추종했는데, 비코의 < 풀라톤주의>에서 드러나는 제설절충성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신판은 구판에서는 거의 논의되지 않았던 허버트 Edward Lord Herbert of Cherbu ry의 영향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기도 하지만, 비코 의 철학이 <갈릴레오적 티마이오스주의 tim a ism o galiei a n o>, 죽 갈릴레오 를 경유한 신플라톤주의적 자연철학의 응용이라는 바달로니의 주장에는 변 함이 없다. 반면에 비코가 인간정신과 자연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했다는 벌 린의 반론은 피오바니 Pie t r o P i ova ni나 로시 Paolo Ross i의 입장을 따른 것 이댜 이들은 비코의 철학이 철저히 <자연을 배제한> 것으로 평가한다. 특 히 이 문제는 바달로니와 로시 사이예서 쟁점으로 부각되었는데 (Ross i, The Dark Aby s s of Tim e, Eng . tran s. L. G. Cochrane, Un iv. of Ch ica g o Press, 1984, p. 105; Badalon i, Intr od 112io n e a G. B. Vico , 1984, p. 41), 해결이나 종 합은 비코롤 17-18 세기의 지적 상황 안에 얼마나 정확하게 자리매김하느냐 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비코의 <자연-정신> 이원론에 관한 벌 린의 평가는 이 이탈리아 학자들 간의 논쟁이 보여 주는 <사실적 엄밀성> 으로부터 벗어난, 지극히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특히 16 세기 이래의 법사학적 발전과 비코의 체계를 연관지우려는 벌린의 시도는 아주 빈약한 사실적 근거 위에 수행되고 있다.
원론적 입장을 취하기도 했지만 결코 카라무엘이나 그의 동료들만 큼 확고한 일원론자인 적은 없었고, 결국에는 이원론으로 향했다. 비코의 이원론적 입장은 실로 획기적인 전기였다. 데카르트의 이 원론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한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실재 세계에 대한 <선험적> 지식을, 믿을 수 없는 이차적 성질들로 구성되는 감각세계에 대한 <경험적> 지식과 예리하게 구분했다. 비코도 데 카르트적인 구분법을 채택했지만, 경계선은 다른 곳에 그어졌다. 그것은 능동성과 수동성 사이에, 인간사에서의 <정신 mens> 과 자 연에서의 <정신> 사이에 그어졌던 것이다 . 인간사에서 정신은 인 간존재들을 통해 구현되는 바, 그들은 비록 하느님과 섭리에 의해 인도되고 통치되지만, 그들 스스로 시민세계 혹은 정치세계를 형 성하는 창조적 대행자들 a g en t s 이다. 반면에 자연세계에서의 정신
은 하느님의 도구로서, 하느님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을 만들지 않은 인간들에게는 불투명하고 불가사의한 채로 남는다 . 이 점에서 비코는 테카르트가 설정했던 만큼이나 넓은 간극을 설 정했지만, 비코가 형이상학적 지도 위에 그은 경계선은 데카르트 의 것과 전혀 다른 곳에 위치한다. 비코의 전망에서 핵심적 요소 인 < 정신현상학 > 은 이 간극을 메우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 으로부터 정신에로 이동하지도, 라이프니츠 식으로 우연으로부터 논리적 필연에로 이동하지도, 훗날의 관념론에서처럼 물적 < 즉자 an s ic h > 로부터 인격적 < 대자flir s i ch > 로 이동하지도 않는다 . 비코의 < 진리-만들어진 것 > 의 원리에 대한 바달로니 교수의 해석은 그의 일반적인 테제의 일부이다(나로서는 그의 일반적인 테제 조차 수긍하기 힘들다). 바달로니는 비코의 원리가 < 정신 > 의 독점 적 지배권을 박탈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말하자 면 비코는 인간정신이 < 만들어진 것 fa c t um > 으로서의 자연을 설 명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정신과 자연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있다 고 믿었다는 것이다. 추정컨대 정신과 < 진리 verum> 사이에는 그 러한 상호작용이 있을 수 없다. 진리 자체가 정신의 산물이며 정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비코가 < 정신 > 과 <만들어진 것> 사이에서조차도 < 상호작용 > 을 가정하지 않았 다고 생각한다. 바코는 < 만들어진 것 > 과 < 진리 > 가 말 그대로 상 호교환이 가능하다고 명시하기 때문이다 . 하느님이 인간을 대행자 로 삼아 만든 것은 이미 인간 자신의 것이다. 인간적 대행 없이 하 느님 홀로 만든 것은 인간으로서는 이해불가능하다 . 비코는 이미 1710 년에 <진리의 규칙이자 규준은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 라 고 말했다. 이것은 <진리와 만들어진 것이 상호환위될 수 있다 > 는 뜻이다. 경계선은 인간정신이 <만든> 것과 인간정신이 만들지
않고 단지 발견하거나 영향을 미친 것 사이에 그어진다 . 전자는 정신에 대해 투명하거나 투명할 수 있지만, 후자는 정신에 저항한 댜 비코에게 자연은 불투명한 것으로 남아 있다. 이 요점은 아무 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비코가 새로운 과학의 이념을 공격한 이유는, < 의부적인 것 > 만을 다룰 수 있는 과학적 방법을 새로운 과학은 마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칭송 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파올로 로시 교수가 정곡을 찌르고 있댜 로시는 비코가 반동사상가는 아닐지라도 사적으로나 지적으 로나 예수희에 가까운 보수사상가라고 주장한다 .10 ) 일례로 비코는 반( 反 )기계론적 자세와 자유의지에 대한 이중적 태도에서 그 같은 면모를 드러낸다. 비록 비코가 문명성장의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체계는 대체로 보수적 성향을 띤다. 특히 < 영원한 원형적 역사 > 의 반복적 순환을 지배하는 영원한 법칙 같 은 객관적 질서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다 . 왜냐하면 여기 에는 비코 동시대의 러시아 황제 피요트르가 추진한 식으로 개혁 의 속도를 가속화하여 재빨리 과거와 단절하고 항구적인 합리적 질서를 창출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담겨 있기 때문이 댜 이것은 후커 Rich ard Hooker 며 헤일 Matt he w Hale 이며 몽테스 키외며 버크며 헤겔이, 어쩌면 메스트르 11 ) 가 공유한 정신이기도 하 댜 아직 비코의 입장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무엇이라고 꼬집어 말할 단계는 아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신학적인 역사주의의 선구자라는 비코의 모습을, 과학적 이성주의의 투사로, 전투적인 사회 진보주의자로, 영국왕립학회의 동지로, 볼테르 같은 프랑스
10) P. Rossi, 앞의 책, p. 331 .
11) Eli o Gia n tu rco , Jos ep h de Mais t r e and Gia m batt ista Vico (Columbia Univ e rsity , Docto r al Diss ert ation , New York, 1937) 참조 .
계몽주의자들의 친구로, 심지어는 엥겔스 및 자연변증법의 선구자 로 뒤바꾸어 놓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들을 거역하는 일이다. 비 코가 자연을 실존주의자의 눈으로 바라보았다는 파치 교수 口) 의 주 장은, 지나친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 대체로 옳다. 파치에 의 하면 자연에 대한 비코의 전망은 공포에 사로잡힌 원시 야수인간 들의 황량하고 끔찍한 원시림이었다고 한다. 또한 비코의 정교한 바로크적 세계관에 이 같은 전망이 침투한 것은, 비코가 전기를 써준 바 있던 거칠고 야만적인 용병대장 카라파 An t o ni o Cara ff a 의 이미 지를 통해서였다고 한댜 어쨌든 파치는 비코 사상의 핵심에서 두 개의 세계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고 주장했는데, 이 점에서는 전 적으로 옳다 . 섭리가 정한 한계들 내에서만 조작될 수 있는 , 우리 가 접근하기 힘든 외부세계는, 창조적 인간정신이 < 만 든> 인간세 · 계와 뚜렷히 대조된다. 반복적 이미지들이며 비의( 秘儀 )들이며 상 징들이 인간의 집단의식을 장악하고 있는, 저 인간이 만든 세계 man-made world 안에서만, 인간은 진정한 시민이 될 수 있댜 인 간만이 이 세계의 역사적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다.
12) Enzo Pac i의 lng e ns S y lva 은 비코에 대한 매우 독창적인 연구이다 .
바달로니 교수의 저서는 17 세기 나폴리의 과학에 대해 박식하고 도 풍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해설서이다. 그러나 대단한 업적에 도 불구하고 , 바달로니의 저서는 『새로운 과학 』 을 저술한 장본인 으로서의 비코가 자신의 핵심이론들을 어떤 원천에서 형성했는지 에 관해서는 믿을 만한 대답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 새로 운 과학』은 그 이전의 어떠한 사상으로부터도 영향받지 않은 채, 전통과의 근본적 단절을 이룩한 것일까? 역사주의는 아무 선구자 도 없이 바코라는 고독한 이탈리아 고전학자의 머리에서 완벽하게
고안되어, 뉴턴이며 로크며 볼테르가 판치던 세계에로 흘러들어 갔을까? 어느 정도는 그러했다는 점이 인정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비코의 독창성을 인정하기 전에, 먼저 대단히 박식한 학자들 조차 만족할 만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 비코 사상의 원천이라는 난제에 답하고자 한다. 나의 대답도 부분적이며 시험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제 18 장 비코 인식론의 진정한 단서는?
비코의 명성은 주로 역사지식의 본성과 방법에 관한, 역사지식 의 방법이 자연과학의 방법과 유관하냐 무관하냐에 관한, 그의 견 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코의 명성은 이렇듯 이론과 방법론의 영 역에 의존하지, 역사가나 법학자로서의 업적에 의존하지는 않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비코 사상의 원천을 철학적이며 신학적이 고 과학적인 이론의 영역에서 구해 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도 모른다. 그렇지만 비코는 무엇보다도 법학사에 몰두한 법학자 였다. 특히 그는 로마법의 역사에 심취했다. 로마법의 역사는 실제 로 <영원한 원형적 역사>의 핵심 패러다임으로 작용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참조되었다. 그는 형이상학보다, 심지어는 신학보다도 고대의 법제도 연구에 훨씬 깊히 천착했던 바, 이 분야보다 비코 에게 더욱 친숙한 학문이나 논쟁의 분야는 없었다. 비코는 바로 이 분야에서의 명성을 위해 땀흘렸고, 이 분야의 교수직을 얻기 위해 절치부심하다가 불공정한 심사로 인해 거부되는 불명예를 경
험했댜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사학자로서의 비코 는 아직 충분히는 연구되지 못한 주제이다 . 무엇이 비코의 정신에 처음으로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착상을 심어 주었던가? 지금까지 비코 연구자들은 대체로, 관습의 다양성이며 가치의 상대성이라는 그리스 소피스트 들의 유명한 주장들 위에, 신대륙에서 새롭게 발견된 낯선 사회들 에 대한 보고서들이 새로운 증거로 더해졌다는 사실에 주목해 왔 댜 그러나 이 상투적인 추정은 조심스러운 검토를 필요로 한다 . 물론 비코의 시대에, 아메리카 인디안들이나 극동의 주민들에 대 한 탐험 기록들은 자연법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다양한 학설들 一—고전고대의 것 이든 중세적인 것이든, 가톨릭적인 것이든 프 로테스탄트적인 것이든―一-을 뒷받침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고 있었댜 자연법이라는 인류의 보편법은 유럽인의 타락한 윤리에 오염되지 않은 원시사회나 멀리 떨어진 사회에서 손상되지 않은 채 보존되어 왔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믿 음은 이미 르네상스 시대부터 유행되어 온 것이었다. 죽 중세의 긴긴 암흑시대 동안 망각되거나 왜곡된 통일성과 보편성을 추구하 던, 그리하여 도덕적이고 사회적인(뿐만 아니라 물리적이고 형이상학 적인) 실재의 근본구조를 재발견하려고 노력하던 르네상스 인문주 의적 경향의 일부였다는 말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다양한 태도들 과 가치들의 상대성을 강조하고자 할 때, 신대륙에서의 새로운 발 견이 그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근대 문명에서의 실례 들이 손쉽게 사용될 수 있었다. 이를테면 파스칼은 유럽적 범위를 넘어서지 않고도 유명한 교훈을 예증할 수 있었다.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윗쪽에서는 정통교리로 취급되는 것이 아랫쪽에서는 이단 으로 취급된다는 것이었다 . 바코가 에스파냐령 아메리카며 태국이 며 켈트족 등 낯선 사회들로부터 실례들을 보충했다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례들을 꼼꼼히 검토한 반 교수가 지 적하듯이,” 실례들의 수효는 한 다스를 넘지 않는다. 비코의 이 같 은 자세는, 바슷한 자료들을 훨씬 폭넓고 풍부하게 이용한 몽테스 키의며 라피토 P. F. La fita u 며 볼테르며 보댕 등의 자세와 날카롭 게 대비된댜 비코의 생각을 온통 사로잡은 것은 고대 로마였고, 로마 다음으로는 그리스였다(실제로 고대 로마와 그리스는 자연법 이 론가들의 가장 중요한 사냥터였다). 그렇지만 여기서 비코는 기존 자 연법 이론가들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교훈을 포착한다. 인간본성은 개인이 아닌 사회의 견지에서, 부동(不動)과 정체가 아닌 운동과 변화의 견지에서 인식되어야 하며, 초시간적 형이상학이 아닌 역 사학에 의해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교훈이 그것이다. 여기서 비코 의 생각은 피쉬 교수에 의해 상세하게 구명된, 역사의식의 발생이 나 부활이라는 단순한 문제를 훨씬 넘어선 것이다 ? 더욱이 바코 는 역사지식이 과학적 지식과 다르다는 주장에 머물지도 않는다. 역사지식이 과학적 지식보다 굳건한 기반 위에 정립된다는 비코의 테제는 이와는 다른 차원의, 훨씬 과감한 주장이다.
1) C. E. Vaug ha n, Stu d ie s in the Hi st o r y of Politi ail P hil os oph y Be fore and After Rousseau(Mancheste r Un ive rsity Press, 1925).
2) Harold Fis c h, Intr od uctio n to Auto b io graphy of Gia mb att ista Vico .
이미 역사적 기원에 대한 관심, 실례의 보고( 寶 庫)로서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볼랑드학파나 모르학파의 종파적 입장울 통해, 혹은 마비용J ean Mab illi on 이나 몽포콩 Bernard de Montf au con, 라이프 니츠나 무라토리 같은 전문가돌의 노력을 통해, 널리 증폭되는 추 세에 있었다. 후세에게 교훈이 될 만한 미덕이나 악덕, 성공이나 실패의 유용한 실례들로서든, 성서적이며 계시적 진리에 대한 증 거로서든, 어떤 민족이나 교회나 운동이 이룬 업적을 예증하는 유
물로서 든, 한 전통(특히 로마 교회 의 전통)의 정 당성 이 나 타락에 대 한 증거로서든-그 어떤 동기에서든지 실례로서의 역사에 대 한 관심은 증가하고 있었다. 교황파와 종교개혁파, 예수희와 얀센 파J anse ni s t s 는 이렇듯 예증에 편리한 역사의 영역 안에서 싸움을 벌였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대에 역사연구를 자극한 이러한 동기들은, 왜 역사연구가 인문주의자와 성직자의 편에서는 새로운 매력으로 부상한 반면에, 과학지향적이고 데카르트적인 실증주의 자의 편에서는 경멸의 대상으로 폄하되었던가를 설명해 준다. 그 러나 이런 식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비코가 제시한 < 진리-만들어 진 것 > 의 원리, 죽 인간이 만든 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력은 하느 님이 만들었기에 그분만이 완전하게 인식할 수 있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력과 날카롭게 대조된다는 원리와 거리가 멀다. 근대초 법학의 역사야말로 비코의 지배적인 관심사에 더욱 까깝 댜 우리가 이제까지 오랫동안 찾아 해맨 단서는, 마침내 법학의 영역에서 발견될 수 있을지 모른다.
제 19 장 비코 인식론의 법사학적 원천과 독창성
로마법 학자들과 그 비판자들 사이에 일대 논쟁이 있었다. 16 세 기에 절정에 도달한 이 논쟁은 이후의 법학사에서도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들 중 하나가 되었다. 순수 학구적인 고려 못지 않게 정 치적인 관심이 논쟁을 자극했는데, 르네상스 시대에 특히 프랑스 법학자들과 그 계승자들의 작업을 자극한 논쟁의 핵심 동기는 다 음과 같은 확신이었다 .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만인에게 지침이 될 만한 영원하고 보편 적이고 무한히 가치 있는 진리들을 발견했던 바, 이 진리들은 각 고의 노력을 통해 재발견될 수 있다는 확신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재 발견, 죽 <부홍 resta u rati o> 의 작업 은 중세 와 비 잔틴 세 계 의 편 집자들과 주석가들이 자행한 왜곡이며 혼동이며 개찬이며 의삽(外 播) 같은 요소들이 우선 제거되어야만 가능하다고 믿어졌다. 이 같 온 믿음을 가지고, 르네상스 시대의 프랑스 법학자들은 실제로 그 러한 요소들을 제거해 갔다. 말하자면 유스타니우스 시대의 비잔틴
법 학자 트리 보니 아누스 T ri bon i anus 로부터, 중세의 아쿠르시우스 법 학파 Accurs i ans(Accurs i us: 1183 - 1263) 와 바르톨루스 법학파 Ba rt o list s ( B a rto l us de Sassofe r rato : 1314-1357) 를 경유하여, 불행하게도 가톨릭교회의 반( 反 )이교적 편견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전통에서, 그 같은 요소들을 확인하고 제거해 갔던 것이다. 그 와중에서 원 본들이 발굴 복원되고 정확하게 해석되기 시작했다 . 이 같은 부흥의 작업을 자극한 요소들 중에는, 단순한 학문적 열정과 지적 호기심도 있었을 것이요, 무지며 오류며 고의적 왜곡 으로부터 진리를 구하겠다는 단순한 염원도 있었을 것이다. 공리 적 혹은 도덕적 목적을 완전히 배제한 채, 고전고대에 대한 순수 한 존경심만 가지고도 부홍의 작업은 추진되었을 수 있다. 그밖에 도 신학적이며 정치적인 감정들이 작용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프로테스탄트적이자 반교황적이자 반중세적인 감정들, 특히 프랑 스에서는 갈리카니즘 (Gal li ca ni sm: 프랑스 교회독립주의)과 민족주의 의 감정이 작용하고 있었다 .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자극제는 플라 톤주의적인 인문주의적 믿음이었다. 폴라톤주의적 인문주의는 이 상적 진리와 미라는 새로운 기준을 발견했다. 이 기준에 입각해서, 재능 있고 정열적인 사람들, <염세가들tri s t es doc tur es> 의 현실비 관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 미신과 우민을 조장하는 사제의 폭정으 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이라면, 인간본성의 풍요로운 잠재성을 다시 발현시킬 수 있을 것이요, 자기들이 새롭게 발견한 지식과 창조적 재능에 걸맞는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형성되었다. 자연법으로서든 민족법으로서든 민법으로서든 로마법 체계를 정 립해 준 초시간적 원리들은, 수세기 동안 누적된 쓰레기들로부터 그 토대가 정화되기만 하면, 사회와 개인의 새로운 삶을 위한 바 탕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형성되었다. 이성적 인간은 중세적 오류
로부터 벗어나서 자연의 불변적 법칙들에 따라 새로운 삶을 정립 할 터인즉, 이 법칙들은 위대한 고대 철학자들과 법학자들이 정식 화한 대로 인간 이성의 법칙들과 일치할 것이었다 . 그러나 고전 원전들의 복원을 향한 이 같은 염원은 두 가지의 예기치 않은 결 과들을 낳았댜 이 결과들은 홍미롭지만 동시에 역설적이댜“
1) 이 주제에 관한 필자의 주요 출 전은 J. G. A. Pocock, The Ancie n t Consti tut i on and the Feudal Law(Cambri dg e, 1957) 에서, 특히 서장( 序· 章 ) 이다 . 이 장은 이 주제에 관해 오늘날 참조가능한 자료 들 중에서 최상의 작 품이지만 동시에 매우 독창적이며 시사적인 것 이기도 하다 . 파콕 교수는 비 코를 가볍게 언급하기는 했지만, 그가 분석 기술한 논쟁 들 의 놀 라운 함축과 비코의 이론들을 특 별히 연결시키고자 노력하지는 않았다 . 그 이외에도, 16 세기에 특히 프랑스에서 형성되고 있었던 새로운 역사의식의 원천에 관해서 는 매우 가치 있어 보이는 다른 논의 들 도 있다(그것 들을 알파벳 순으로 인 용하면 다음과 같다) . Auth u r B. Fergu son, Bi sh op Pecock(Stu d ie s in the Renais s ance, vol. 13(New York, 1966), pp. 147-166: Jul i an H. Frank lin, Jea n Bodin and the Six tee nth Centu r y Revoluti on in the Meth o dolog y of Law and Hi st o r y (C olumbia Un ive rsit y Press, New York, 1963); Eug e nio Gr in, Ita li an Humanis m , tran s. P. Munz , Blackw e ll, Ox fo r d: George Hupp ert, The Idea of Perf ect Hi st o r y (Un ive rsit y of Illin o is Press, 1970): Donald R. Kelly, (a) His t o r i a Inte g ra: Franc;o is Baudo 떠 n and His Concep - tion of Hist o r y , (Jou rnal of the Hi st o r y of Ideas, vol. 25, 1964, pp. 35-57) : (b) Bude and the Fir st Hist o r i ca l School of Law (Ameria z n Hi st o r i az l Revie w , vol. 72, 1967, pp. 807-834): (c) Fid e s Hi st o r ia e : Charles Dumou lin and the Gallica n Vie w of Hist o r y (Tradit io, New York, pp. 347-402): (d) Lega l Humanis m and the Sense of Hi st o r y (Stu d ie s in the Renais s ance, vol. 13, New York, 1966): (e) Foundati on s of Modem Hi st o r ia z l Scholarship (C olumbia Univ e rsit y Press, New York, 1970). 특히 이 마지막 것 (e) 가 중요하다. 이 작품은 앞서 열거된 작품들 전부는 아니더 라도 대부분을 요약 인용 논의하면서도, 다른 작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역 사적-문화적 역사학의 기원에 관해 새로운 빛을 제공하고 있다. 그밖에도 Frank E. Manuel, S/- ape s of Phil os op h ia z l Hi st o r y (S ta n fo r d Un ive rsit y Press, 1965, Chapt er 3): A. Mom iglian o, (a) Anci en t Hist o r y and the Antiq u a rian (]ouma/ of the Warburg and Courta u /d Insti tut e s , vol. 13,
1950, pp. 285-315); (b) La Nuova Sto r i a Romana di G. B. Vic o , (c) Vic o 's Sc ien za Nuova, ; Franco Sim one, (a) Intr od uzio n e ad una Sto r i a della Sto r i og r afi a Lett er ar ia Francese(Stu d i Froncesi, vol. 8, 1964, p. 455); (b) La Coscie n za Sto r i ca de! Rina scirn e nto Francese e il •s uo Sig nifica to Cultu ral e(Conviv i u m , vol. 22, 1954, pp. 156-167).
첫째로, 인간 의사소통의 형식을 충실하게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된 것의 의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요구된다. 의미의 정확 한 이해를 위해서는, 말한 사람들의 특징과 의도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같은 의사소통이 발생한 사회구조에 대한 지식이 요구된다. 이를테면 언어와 언어 활동을 공히 지배하는 환 경과 시대, 특히 특수한 규약들에 대한 지식이 요구된다. 법적 • 도 덕적 • 종교적 • 문학적 용어들의 의미와 용법은, 그것들이 통용되 는 특정한 사회의 맥락 속에서만, 그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의 특 정한 단계 속에서만 이해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인류문명 의 어떠한 측면을 연구하든지 간에, 모든 연구자들은 각자가 연구 하는 특정한 대상을 넘어설 수밖에 없다. 법조문에 머물기보다 그 법이 통제하는 사람들의 관습과 목표에로 나아가기 마련이요, 기 도문에 머물기보다 종교적인 제식이며 믿음이며 우주론으로 나아 가기 마련이다. 어휘들이나 어휘들로 구성되는 문헌들의 기능은 이처럼 보다 넓은 맥락 안에서만 바르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 다. 올바른 해석은 다시 기원에 대한 탐구를 자극할 것이다. 죽 관 습이며 법이며 관념이며 제도 같은 것들의 발생과 진화에 관한, 그리고 그것들 안에서 법적 혹은 신학적 언어가 수행하는 역할의 발생과 진화에 관한 탐구를 자극할 것이다. 이 같은 이치로 인해, 어떤 연구자가 비록 과거의 보다 넓은 맥락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태도로 고대유물의 복원작업을 수행한다 할지라도, 그는 사회사나
역사사회학이나 인류학에 연루될 수밖에 없다 . 따라서 고대의 재 구성에 대한 요구는, 단순히 역사연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일종 의 역사주의적 자세의 정립을 위해서도 강력한 자극제로 작용해 왔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역사주의적 관점은, 법적이며 신학적인 정 치적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사회의 성장이나 다양한 사회적 요인 들의 상호작용에서 구하며, 그럼으로써 일정한 상징이나 법령이나 제도가 특정한 인간집단의 활동에서 수행한 역할을 결정한다. 이 러한 관점을 취할 때에만, (『새로운 학문』을 인용하자면) 비로소 우 리는 특정한 인간집단의 목적과 생활방식이 < 저런 종류보다는 이 런 종류의 것으로>, <다른 방식 아닌 이런 방식으로 생성되었다> 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댜 1 1
2) N. S. pa r. 147.
유물들과 제도들의 연구에 대한 열정이 점증하던 와중에서, 이 야기식 narrati ve 역사학의 신빙성온 심각한 회의주의에 직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일례로 16 세기 초에 아그리파 Corne li us Ag ri p pa 나 16 세 기 중반의 파트리 치 Pa tri zz i는 이 야기 식 역 사학의 신 빙 성 에 대해 심각한 비판을 가했는데, 이들의 비판은 플루타크 Plu t arch 가 헤로도토스를 비판한 이래로 가장 맹렬한 것이었다. 역사가들과 연대기작가들은 열등한 정신의 소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 ~I 그들
3) Julian H. Frank lin, Jea n Bodin and the Six t e e nth Centu r y Revoluti on in the Meth o dolog y of Law and H i s t o ry은 < 역사회의주의 > 및 그것에 반한 <역사주의적> 대옹을, 영어로는 가장 훌륭하게 해설한 모노그라프이다 . 특 히 이 책은 각 지역의 다양한 관습이며 전통이며 이해관계 를 중시하는 지역 주의 투사들이 자연법 관념에 관한 공격을 통해 어떤 정치적 목적을 추구했 는지를 찰 보여 주고 있다 . 몽테스키의와 버크 이 전의 반보편주의와 반합리 주의에 관한 이 가치 있는 연구는, 16 세기의 정치 사상에 대한 기존의 설명 들에 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
4) 이 러 한 비 난은 3 세 기 뒤 에 버 클 Thomas Henry Buckle 에 의 해 부활했다 .
그는 역사학이 과학으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를, 역사가들이 과학자들만큼 정신적으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태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근대에 최상의 지성인들은 자연과학의 추구만을 매력적으로 간주해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유능한 사람들이 몇 명만이라도 역사학에 심취한다면 , 역사학은 오래지 않아 제대로 체계화된 자연과학으로 변형될 것이다.
은 허영과 환상, 개인적인 정치와 종교적 질투와 증오, 애국심에 입각한 과장, 금전욕, 일관된 목적이나 방법의 결핍 등, 비이성적 이고 타락한 동기들로부터 출발하는 데다가, 무식하기까지 하다는 것이었댜 타락한 동기와 무식함 탓에 역사학은 출발시부터 줄곧 극심한 불화와 반목만을 일삼아 왔던 바, 이 질병은 앞으로도 치 유될 가망이 없어 보였다 . 이보다 심한 공격이 가해질 때도 있었 댜 일부 비판자들은 역사학이란 원리상 진리는 물론 개연성에도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주장했다. 역사학은 전적으로 목격자 들의 증거라든가 기껏해야 동시대인들의 증거에 의존하는데, 이들 이 사건에 직접 참여한 경우든 그렇지 않은 경우든 그들의 증거는 항상 불확실하다는 것이었다. 사건에 직접 참여한 경우에는 편파 적이 되기 쉽고, 참여하지 않은 경우에는 남의 이야기에 의존할 뿐 가장 비밀스럽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정보에는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여자들의 경우는 사건에 연루된 자들의 진정한 동기 룰 알 수 있지만, 자기들만이 알고있는 정보를 역사가에게는 왜곡 해서 전한다 . 아니면 그들은 사적인 야망을 위해, 목적을 위해, 보 복을 위해, 명예나 돈을 위해, 역사가를 매수하기도 한다. 이 같은 비판의 요점은, 결국 역사가는 정보를 제대로 얻으면 편향적으로 되기 쉽고, 불편부당하고자 노력하면 무지나 오류에 빠지기 쉽다 는 것이었다. 전자의 형식으로든 후자의 형식으로든 역사가는 항 상 심각한 진퇴유곡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역사학에 대한
공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 세기 뒤에는 데카르트와 데카르 트주의자들이 역사학의 또 다른 측면을 공격 했다 . 역사학은 공리 도, 정의( 定義 )도, 연역적 규칙도, 지적인 엄밀성도 없기 때문에, 체 계적 지식의 원천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5)
5) 이 책의 제 1 부 1 장, 각주 6) 을 참조.
만일 <문헌언어학phi lolo gy>의 새로운 대가들이 이 같은 회의 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새로운 무기들을 공급하지 않았더라 면, 이야기식 역사학, 실로 역사학 전체는 회의주의자들의 협공에 걸린 나머지 정당한 권리를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문학이며 유물연구며 법학에서의 유능한 학자들과 비평가들은, 회의주의에 맞서서 신중한 과학적 방법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옛날 역 사책에 수록된 자료나 방법 대신에 유물들에 정초하여 결론을 이 끌어 냈댜 문헌자료 , 비문, 동전 , 메달, 예술품과 건축물 , 6) 법조문, 제식, 전승 등의 <객관적 > 유물들은 타락한 것 도 , 엉터리도 아니 요 거짓도 아니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오랫동안 망 각되거나 왜곡된 초시간적인 진리들을 회복하려는 갈망이야말로 역사이해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 준 요인으로 평가될 수 있다. 이 새로운 역사이해의 토대로 작용한 유물연구의 부활은 , 고대의 가 장 위대한 이야기식 역사가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되 테렌티우스 바로나 무키우스 스케볼라에 대해서는 새로운 존경을 표한 학풍의 산물이었댜 이 학풍은 고대유물들에 의해 재구성되는 진리가 이 야기식 역사가들이 주장한 진리보다 훨씬 보편적이고 견실한 토대 위에 구축된,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간주했다. 물론, 유물들도 이야기처럼 어떤 (허구적인) 틀에 끼워 맞추어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유물들이라는 단편적 재료들만으로는 과거를 재구성
6) A. Mom iglian o, Ancie n t Histo r y and the Anti qu ar ian .
하기 힘들다는 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 파트리치의 주장이 그 러했댜 그렇지만 파트리치의 주장은 모순까지는 아니더라도 명백 히 과장된 것이었다 . 예컨대 페리클레스 치하의 아테네 정체(政體) 혹은 울피아누스나 가이우스 치하의 로마 사법을 재구성하는 작업 에서, 이 작업의 내적 정합성에 대한 검증은,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의학이나 지리학의 방법 못지않게 엄격한 방법에 의해 수행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헌언어학자들과 <문법학자들>은 한결같이 경험적 증거를 강조하고 있었다 . 이 같은 태도는 새로운 역사학 방법의 초석이 되었던 바, 그들이야말로 베이컨과 캄파넬라가 그 토록 힘주어 강조한 (경험론적) 일반규칙들을 실제로 응용한 구체 적 귀감들이었다 . 그들은 과거를 고스란히 복원할 수 있는 지름길 이 < 문헌언어학 > 에 있다고 믿었다. 이 지름길을 따라서, 로렌초 발라는(그리고 뒤이어서 뒤물랭 Charles Dumou li n 과 쿠자누스 N ic olaus Cusanus 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진장이 날조된 것임을 폭로했다. 뷔 데 Gu illa ume Bude 며 쿠자스 Jac q u es Cu j as 며 알치 아토 Andrea Alc iat o 등 위대한 법사학자들과 제자들도 이 새로운 방법을 이용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로마시대의 위대한 법학자들이 기록한 원 문을 망쳐 버린 중세인들의 첨삭과 비잔틴인들의 부주의함을 제거 했댜 가장 격렬한 전선은 교황청 권위를 지지하는 진영과 그것을 갈리카니즘이나 프로테스탄티즘의 견지에서 비판하는 진양 사이 에서 형성되었다. 양 진영은 한결같이 전통에 의존해서 싸움을 벌 였댜 피쉬 교수가 지적하듯이, 이처럼 전통에 의존해서 논쟁을 벌 였다는 자체가 역사연구의 촉진제로 작용했음은 분명하다 .7) 그렇
7) M. H. Fis c h, 앞의 책
지만 비코와 관련해서, 그보다 더욱 중요한 함축이 있다. 양 진영 은 한결같이 어원연구와 유물탐구의 형식으로 과거를 천착했던 것 이다. 로렌초 발라의 제자이자 한때 캘빈의 친구이던 위대한 논쟁 가 뒤물랭은, 로마교회의 보편주의에 대한 프랑스 왕정의 반론을 갈리카니즘의 견지에 옹호했다. 여기서 그는 언어적 용례의 분석 에 의존하여 어느 전통이 더 참된지를 판단했다. 똑같이 언어학적 인 정신에서 로마교회의 정통성을 옹호한 르 루 Ra y mond Le Roux 는, 뒤물랭이 지나치게 자구에만 매달린다고 비판했다. 단어의 의 미는 시간과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인 바 , 8 ) 더욱이 단어보다 사 실에 천착해야 할 법학도로서는 단어에 불변적 의미를 부여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로마교회의 적편도 같은 원리에 입각해서 로마교회를 공격할 수 있었다. 언어와 유물 은 가톨릭 교회의 시대착오와 위조를 폭로하는 데 뿐만 아니라, 유스타니아누스 법전이나 울피아누스 법전이 작성된 사회구조를 재구성하여 법조문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는 데도 유용한 것이었 기 때문이다 .9)
8) D. R. Kelly, Fid e s Histo r i ae . 이 장의 각주 2) 에 열거된 켈리 교수의 다 론 작품들도 이 사조의 이해를 위해 대단히 가치 있는 역사학적 통찰을 제 공하고 있다. 9) Kelly, Lega l Humanis m and the Sense of Hist o r y , pass im . 참조 .
이 러 한 상황에 서 보두앵 Franc; o is Baudo ui n 은 오로지 참된 법 연 구의 필요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편에서 보편사적 지식을 요구했 댜 <교회는 왕국의 품 안에서 양육되었기> 때문에, 교회의 전통 울 이해하기 위해서는 왕국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상적 으로는 역사 전체와 법 전체가 한 권의 큰 책 안에 통합되어야만 했다 .10) 법과 역사는 하나요 불가분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11 ) 뷔데며
10) Baudoui n, De Jns ti tut io n e Hi st o r i ae Univ e rsae. Fra nklin, 앞의 책, pp. 44- 46 으로부터 인용 .
11 ) Kelly, 앞의 글 , pp, 129- 14 1 참조 . 보두앵의 제목, 『 보편사 및 이 와 한 몸을 이 루는 법 학의 방법 에 관하여 De Instit ution e Hi st o r i ae Univ e rsae et eju s cum Jur isp r udenti a Co ,if unct i one 』 만으로도 뜻이 충분히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쿠자스며 알치 아토며 르 두아랑 Franr; o is Le Douaren 과 이 들의 제 자들은, 바로 이러한 원리에 입각해서 로마법 원문들로부터 중세 < 야만인들 > 에 의해, 바르톨루스 법학파와 아쿠르시우스 법학파에 의해 왜곡되고 혼동된 부분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이 새로운 프 랑 스 법학파는 문언언어학적 방법을 사용해서, 유스타니우스 법전 올 편집한 문제아 트리보니아누스가 서로 다른 연대에 작성된 로 마법조문들을 비역사적으로 뒤죽박죽 섞어 버렸다는 사실을 폭로 할 수 있었고 , 로마법조문들의 정확한 연표뿐만 아니라 의미와 관 계들도 제대로 정립할 수 있었다. 일찍이 로렌체 발라는 주요 용 어들의 역사적 의미가 < 방법에 의해서만 > , < 기술(技術)에 의해서 만 > 드러난다는 것을 천명하지 않았던가 ?1 21 바로 이것은 오트망의 주장이기도 했고, 오트망의 스승 쿠자스의 주장이기도 했다. 심지 어는 교황파인 르 르와 Lo ui s Le Ro y조차도 모든 언어들은 여타의 인공물과 마찬가지로 예의없이 < 발생, 진보 , 타락, 종말>을 겪는 다고 주장했다 .1 31
12) Kelly, 같은 곳. 13) 같은 곳.
이것은 < 영원한 원형적 역사 > 의 견지에서 언어롤 바라보는 관 점이댜 중세와 비잔틴 세계의 각종 편찬물들에 만연된 시대착오 가 사냥되기 시작한 것은 15 세기부터였지만 ,14’ 사냥은 16 세기 특히
14) 이 러 한 사냥은 Arthu r B. Fergu son, Bis h op Pecock, 앞의 책 에 훌륭히
기술되어 있다.
프랑스에서 법적이고 종교적인 논쟁을 거치면서 더욱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댜 이로써 기독교 서방세계는 문체의 변화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이 반영하는 역사적 흐름 혹은 생활양식의 진화에 대 해서도 예민한 감수성을 갖추게 되었다. 이것은 과거로 향하는 새 로운 창문이었음이 분명하다 . 특히 < 갈리아 법 Mos Ga lli cus > 에 대한 연구는 < 문헌언어학 > 과 법학을 결합시킴으로써 새로운 역사 이해에 기여했다. 예컨대 비코보다 한 세기 먼저 보댕은 신화와 민간전설을 사회적 믿음과 사회구조에 대한 증거로 간주했다. 물 론 비코의 생각은 이보다 넓고 깊었다. 바코는 단순히 특정한 어 법이나 법조문에서 양립가능한 것과 양립불가능한 것을 구분하는 작업에 머물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문화 전체의 진화과정에서 매 단계에 양립가능한 것과 양립불가능한 것을 차별화하는 데 있었 다. 비코에게 어법이나 법조문은 한 문명의 모든 표현들을 지배하 는 단일한 통일적 원형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코의 접근방법은 오트망이나 보두앵 같은 법사학자들 의 접근방법과 대단히 유사한 것이었다. 유사성은 근본적이고도 세부적이다. 양자는 이야기식 역사에 대한 불신을 공유하고, 자연 법적이든 데카르주의적이든 초시간적인 원리들에 대한 반감을 공 유하며, 맹아적 형식의 인류학이자 사회심리학으로서의 < 문헌언 어학>에 대한 믿음을 공유한다. 양자는 한결같이 아우구스티누스 와 아퀴나스뿐만 아니라(혼히 비코의 선구자로 거명되곤 하는) 산체스 같은 스콜라주의자들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1 5} 물론 비코
15) 비코의 각종 이론을 예비한 여타의 선구적 업적들이 있다. 뷔데와 르 르와 는 문명의 생명 순환에 관해 언급하면서, 문명은 유아기에서의 시와 원시적 믿음들로부터 청년기에서의 학문과 수사를 거쳐 쇠락과 타락에로 귀결된다
고 주장했다 (Kell y, Foundati on s of Modem Hi st o r i ca l Scholarship , pp. 64, 83 을 참조). 비슷한 주장이 16 세기의 프랑스 역사가 라 포플리니에르에게서도 발견되는데, 그는 최초의 역사가들을 시인들이라고 말했다(같은 책, p.1 40). 신화와 전설의 진리성에 관한 지속적인 논의는 크리스토프 밀리외 Ch ris- top h e Mi lie u , 르 르와, 폴리도레 베르질 Polyd ore Vergi l, 그리네우스 Gr y- naeus 등등에게서 발견된다(같은 책, p.3 04). 파스퀴에는 문화적 현상들의 상관성 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같은 책, p. 309; Hup pert, The Idea of Per- fee t H is t o 巧, pp. 65, 158). 내가 알기로 켈리 교수는 이 중요한 연관성들에 관해 인식한 최초의 학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비코는 ‘새로운 과학’의 창조자라기보다는 해묵은 과학 곧 언어문헌학의 계승자였다. 이 점 에서 그는 역사주의를 창시했다기보다는 그것을 물려받았다>(앞의 책, p. 8).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비코의 업적을 과소평가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상 상력을 총동원하여 낯설고 야만적인 과거에 대한 완전한 재창조를 도모하 는 계획. <이 원시인들의 광대한 상상력 la vasta im ag ina ti va di qu ei primi uo mi n i>에로 침투하려는 노력 그 <조야한 야수 인간들g ross i bes ti o ni>과 그들의 <영웅적> 계승자들이 세계를 제식들과 시와 법률로 포장해 갔던 방식 그대로, 그 세계에 총체적으로 접근하는 길을 발견하려는 시도. 우리 자신의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의 견지에서 그들의 세계를 원시적인 형태나 맹아적인 단계로 전망하기보다는, 비록 잔인하고 무섭기는 하지만 힘차고 자족적인 문명, 우리와 견줄 수 없는 호메로스의 시편들이 예시하듯이 그 나름의 내적 정합성을 지니며 그 나름의 고유한 가치와 창조를 지닌 문명으 로 전망하려는 태도一―-이러한 것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대담한 문헌 언어학자나\ 법학자나 문필가의 전망을 훨씬 넘어서는 관접을 보여 준다. 내 가 생각하기에 바코의 독창성온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종류의 차이에 속한 다. 문화적 상징들에 대한 그의 탁월한 경제적 해석은 물론이려니와 인류학 적 어원학에서의 그의 가장 거치른 비약-도토리, 물, 서적, 법률을 어원 적으로 연관짓고 있는――-조차도, 발라나 뷔데처럼 문헌언어학적 환상이 나 법적 오류를 해명하거나 바로 잡았던 식의 지적 작업을 훨씬 능가한 것 으로 보인다.
가 이 같은 맥락에서 뷔데나 뒤물랭이나 오트망을 거론한 적은 없 다. 그러나 비코의 저작들은 도처에서 <쿠자치오 Cu j ac ci o 며 보디 노 Bo di no 며 오트마노 O t manno 며 사마시 오 Salmasio > 등을 심 심 치 않게 거명한댜 거의 전 생애를 법사학의 연구에 헌신한 비코가
이들 법학자들의 대논쟁에 전혀 무지했다든가 전혀 주의를 기울이 지 않았다는 가정은 불가능한 것으로 사료된다. 비코는 고대로 향 한 새로운 문이 역사가들보다는 < 문헌언어학자 들> 에 의해 , 특히 고대 학문과 로마법에 정통한 대가들에 의해 비로소 열렸다는 사 실을 뚜렷하게 감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 새로운 역사학 , 어쩌면 새로운 문화개념 자체가 16 세기 특히 프 랑스에서 전개된 대논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빈말이 아 니다. 원전이나 전승의 신빙성에 관한 이 논쟁은, 바록 태도와 방 법 면에서는 학계 내부의 사건이었지만, 사회 적 • 정치적 • 경제적 갈등의 산물이기도 했다 . 갈등하는 세력들은 저마다 정치적 행동 의 진정한 권위를 찾기 위해 부심하는 와중에서 논쟁을 벌였고, 논쟁울 위해(또한 논쟁에 의해) 여러 가지 방법들을 고안했다. 비코 는 이렇게 고안된 방법들을 과감하고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댜 그렇지만 이 논쟁과 비코와의 관련성이 지나치게 강 조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비코의 저작들 어디 에서도 이 논쟁에 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 그의 철 저한 침묵에 대해서는 약간의 해설이 필요하다. 비코 시대의 나폴 리 왕국에서 반교황주의자는 당연히 분파주의자나 이단으로 몰렸 댜 혹시 반교황주의로부터 받은 영향을 인정하거나 반교황주의를 우호적으로 언급하기만 해도 , 비코로서는 자신의 안전을 위협당할 수도, 친구들이나 후원자들로부터 호감을 잃을 수도 있었다 . 특히 평생동안 교류하면서 호흡을 맞추어온 성직자 사회로부터 호감을 잃을 수 있었다. 비코는 비록 그로티우스며 셀던이며 푸펜도르프 며 베이컨 등 프로테스탄트 편의 인물들에 관해 우호적으로 언급 하기도 했지만, 결국 베이컨을 제외한 나머지 세 법학자들의 핵심 이론들을 거부했다. 사실상 이 법학자들은 16 세기 프랑스의 종교
동란기에 전개되었던 것만큼 격렬하게 바티칸의 권위를 정치적으 로나 신학적으로 공격하지 않은 인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 했다 더욱이 비코는 원초적 진리를 발견한 위인들이 대체로 그러 하듯이, 자기의 지적 채무를 솔직히 인정하는 데 무척 인색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들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우리의 지식으로는 비코의 핵심 관념들 중 일부가 법사학자들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할 만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다만 그들로부터 전혀 영향받지 않았을 리 없다는 추정이 가능할 뿐이다. 법사학은 비코가 가장 정통한 분야였기 때문이다. 고대문헌의 복원을 향한 염원이 낳은 예기치 못한 결과, 그 두 번째 역설은 앞서 잠시 언급된 바 있다. 가이우스 G ai us 법전이나 파피니아누스 Pa pi n i anus 법전을 복원하려는 노력의 근본 동기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확신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원전들은 비록 야만화되고 크게 왜곡되기는 했지만, 만인이 본성적으로 염원하는 보편적 행동규칙들을 가장 명료하게 진술하고 있다는 확신, 따라 서 로마법의 원리들을 확실하게 파악한 사람은 고향으로 되돌아온 느낄 즉 중세의 기나긴 암혹에서 벗어나 이성과 광명의 지배를 되찾은 느낌을 가질 것이라는 확신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유일하 게 참된 전통을 추적한 학자들은, 결국 자신들과 전혀 다르고 낯 선 생활방식을 발견했을 뿐이다. 그들이 경멸스러운 중세의 퇴적 층을 철저하게 제거하면 할수록, 고전고대의 세게는 점점 더 낯설 어졌만 갔댜 오히려 중세 수도원의 왜곡이야말로 고대가 뒷시대 와 유사한 관념을 가진 시대였던 것처럼 보이게끔 만든 장본인이 라는 사실이 인식되었다.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신스토아학파와 신아리스토텔레스학파도, 플라톤학파와 신폴라톤학파도 예상치 못 한 결과였댜 그렇지만 교황권이나 국왕권 같은 중앙집권적 권력
의 침해로부터 지방이나 조합의 자유와 특 권을 보호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편에서는, 이 같은 인식은 중요한 소득이었다. 오늘날의 법사학자들이 대체로 지적하듯이, 일견 오트망은 로마법의 참 의 미를 정립하기 위해 단지 학구적으로만 천착한 인물로 보일지 몰 라도, 실제로는 로마법 원리와 자연법 원리 사이의 메우기 힘든 간극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고 대 관습은 순수하고 생래적인 < 프랑크 - 갈리아적 > 전통을 따른 것이요, 따라서 국내법으로서든 국제법으로서든 로마법은 프랑스 왕국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트망과 그의 동료들이 생 래적이고 <불멸적안> 프랑크적-게르만적 전통을 로마법으로부터 차별화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은 통일과 중앙집권화의 옹호자들에 대항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초시간적이며 보편적 진리들에 의존하 여 절대권력의 정당성을 지지한 학자들에 대항해서 , 그들은 봉건 적, 지역적, 혹은 민족적 권리를 지키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이 위대한 논증법의 원천은 다양하다. 때 이른 민족적 각성이 있었고, 로마교회의 보편적 위계에 반대한 종교개혁가들, 갈리카니 즘의 신봉자들 여타 분파운동가들의 노력이 있었다. 중앙정부에 저항한 영주들, 지방 고등법원들p arlemen t s, 각종 조합들의 요구가 있었다. 시간, 장소, 생활방식 상의 차이들을 강조하는 편이 유리 한 온갖 운동들과 견해들은 한결같이 이 같은 논증법을 채택했던 것이다. 지역적인 오랜 관습들과 특수한 전통들을 옹호한 학자들 은, 그것들이 장소마다 다르고 그것들의 뿌리들은 이질적인 채 서 로 얽혀 있기 때문에 어떠한 보편적 체계에 의해서도 짜맞추어지 거나 합리화되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이 대논쟁은 단지 법학적 논쟁의 형식으로 지속되기보다는, 정 치적이며 신학적 문제들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논쟁에
직접 참여한 법학자들과 문법학자 들 에 의해 정립된 노선들은, 이 노선 들 을 따른 다양한 분야의 선구자들과 역사적 제도들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원천으로 지속되고 있다. 오트망은 로마법의 권위를 줄이기 위해, 죽 로마의 민법은 자연법을 특정 상황에 응용한 것이라는 관념을 파괴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 한 민족의 풍습들과 조건들이 겪는 사계절과 변화들 > 에 관해 언급한다 . 16’ 이것은 그 민족을 다 론 민족들과 구분해 줄 뿐만 아니라 자기의 과거와도 구분해 준 댜 프랑스 민족은 자기에 고유한 < 기질과 체질 humour> 을 가지 고 있댜 1 7’ 이미 오래 전에 사멸해버린 사회의 법 , 원래 다른 나라 에서 발생한 법이 프랑스인들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바티 칸의 주구( 走狗 ) 그라티안 Gra ti anus Gra ti an(l2 세기에 활동한 교회법 사 가)과 그의 선배들이 열거한, 혹은 멀리 아테네에서 태동하여 로 마에서 꽃 핀 고대문명의 대변자들이 열거한 <자연법> 원칙들의 목록이, 프랑크적인, 나아가서는 게르만적 혹은 <프랑크-갈리아적 인 > 개성이나 < 기질 > 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오트망의 『 트 리보니아누스 반론 An ti -Tr i bon i anus 』 은 이 같은 역사적 연속성을 설득력 있게 사용해서 국왕의 이런 저런 요구들에 저항했다(비코는 이 책 을 엉뚱한 문맥에서 인용하고 있다.’ ' ) 이를테면, 갈리아를 정복한
16)
17) KelJy , 같은 글, p, 194 로부터 인용 . 켈리는 르 카롱 Le Caron, 뒤물랭 , 피 에르 에이로 Pie r re Ay ra ult 등 영방주의와 민족적 자율성의 여타 신봉자들 에 관 해서도 비슷하게 언급하고 있다.
18) B. Croce and F. Nic o lin i, eds., Bib l io g r afia Vich ia n a(R icc ia r di , Nap oli, 1948), vol. 1, p. 51 을 참조. 이 논쟁이 기본과 흄에게서 반영되고 있는 양상 에 관해 서 는 같은 책 , pp, 377, 789 를 참조 .
프랑크족 선조들의 관습법에 위배되는 국왕의 요구에, 혹은 왕국 울 구성하는 다양한 단체들이 저마다 필요와 전통에 따라 정립한 규약들에 위배되는 국왕의 요구에 저항했던 것이다. 로마인들은 왕정 아닌 < 공화정 res p ubl i ca > 을 실시하지 않았던가? 같은 맥락 에서 파스퀴에 Eti en ne Pas q u i er 도 < 우리의 통치는 그들과 아무 관 계도 없다 > 고 주장했다 1 9’ 이처럼 자기들의 상황과 로마적 상황이 < 무관함 > 에 기초한 논증법은, 봉건적 특권의 옹호자들 사이에서 강력한 무기로 채택되었다. 훗 날 몽테스키외는 시대에 따라 가치 도 달라지는 다양한 정치 체제들을 날카롭게 비교 검토함으로써, <중간 규모 집단 co rp s int e r med iai r e s> 옹호론이며 반중앙집권적 다원론을 개진할 수 있었다 . 비슷한 방식으로 상대주의며 역사주 의며 정치적 다원주의가 만개했다. 그 와중에서 추상자나 말쑥한 보편적 도식은 의심을 샀다. 추상성과 보편성은 선험적이든 자연 주의적이든,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든, 세네카, 울피아누스, 유스티 니아누스 법전, 아퀴나스, 데카르트, 로크, 프랑스 계몽철학자들, 그 누구의 것이든 의심을 받게 되었다. 반면에, 특히 발라와 새로 운 <문헌언어학> 이래로, 특정한 시공간에 구속되는 특수하고 구 체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19) 같은 식의 표현의 많은 유용한 실례들과, 그러한 표현이 16 세기 프랑스의 오트망. 파스퀴에, 라 포플리니에르 등등에게서 함축하는 의미에 관해서는, Hup pert, 앞의 책 , 참조 .
과거를 이해하는 새로운 길이 법사학자들에게만 열린 것은 아니 었댜 <갈리아 법>은 역사학의 고유 영역에도 깊히 침투했다. 파 스퀴에는 법이 문자로 기록된 관습이라는 입장에서, 사회는 언어 며 관습과 함께 계속 변해 가기 때문에 지속적인 법개정이 필요함 을 역설했다. 과거의 재구성은 이야기식 역사학에 의해서가 아니
라, < 고등법원 > 의 명령, 재판기록, 교황청 교서, 시, 동전, 법규 들 에 대한 새로운 연구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그는 확신했다. 그런데 역사가들은 특히 종교 문제 를 다루는 경우에 편견에 빠지는 경향 이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 나는 열정적일 수밖에 없노라 > 는 감 정에 쉽게 매몰되곤 했댜 '.~)I 심지어 파스퀴에는 로마법과 로마 건 축물들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피력함으로써 로마적 과거와 프랑스 적 전통의 불일치를 명암의 대바로 뚜렷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이 러한 태도는 남프랑스 및 북이탈리아 지역들, 이를테면 보르주, 발 렝스, 툴루즈, 토리노 등지의 학원에서 교육되던 교설들의 직접적 인 결과로 보인댜 한편 바니에 Ni co las V ig n i er 는 호메로스 시편들 과 성서에 대해, 마치 동전이나 비문을 취급할 때의 초연하고 냉 정한 자세로 접근했다. 그에게서 이른바 < 고대인들의 태고적 지 혜 > 에 대한 존경심은 찾아보기 힘들다. 라 포플리니에르 2” 는 다른 민족들의 <풍 습이며 행동양식이며 생활방식 > 을 검토할 때와 똑같 은 자세로, < 그리스인들의 풍습과 정치 >, 나아가서는 고대인들의 생활방식 전체를 이해하고자 했다. 이러한 이해를 위해, 그는 노 래 , 춤, 전설, 어법 같은 것들을 지름길로 취급했다. <언어는 일반 적으로 우리의 풍습에 대한 상징 > 이기 때문이었다 . :!!I 같은 맥락에 서 그는 당시에 일반적으로 믿을 만하다고 여겨지던 고대 역사가 들의 기록들에 회의했다. 이 기록들은 우리의 지식에 의해 여과과 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들을 기록한 역사가들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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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Hup pe rt , 앞의 책, pp. 13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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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종교, 자료, 후원자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의해, 그들이 어떤 책무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는지 , 그 들 이 얼마나 일관성을 보여 주었 는지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의해 여과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 그러나 포플리니에르는 보댕과 마찬가지로 , 고대 역사가가들의 기록들은 우리의 지식에 의해 여과과정을 거친다고 해도 개연적인 것들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고대 역사가들 사이에서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는 간단한 사실에 의해 쉽게 입증된다. 물론, 비코는 개연성 너머를 겨냥한다. 바코는 상상력에 의한 역사의 재구성이 확실성에 도달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문학 특히 < 문헌언어학 > 은 자연과학에 대한 우위성을 주장할 만한 자격이 있다. 인간이 창조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불투명한 의부세계를 탐구하는 자연과학의 법칙들에 의해 지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비코의 이런 생각이 오류 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여기서 비코의 입장이 보댕이나 나폴리 <개연성론자들>의 입장과 원리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다(양자를 연결지으려는 바달로니 교수의 노력은 다시 한 번 헛됨이 입증된다). 비 코에게 <과학 s ci enza> 은 영원히 참된 것이다. 실제로 비코는 그 로티우스가 역사학적 명제들을 단지 개연적이라 가정했음을 비판 하면서, 자기의 『새로운 과학 』 은 역사학적 명제들로 구성된 < 과 학>임을 강조한다 물론, 비코의 역사학 방법과 역사발전 도식이 16 세기 프랑스에 서 활동한 법학자들이며 <문법학자들>이며 역사가들의 이론과 전 혀 무관하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양자가 일치하는 부분이 그리 크 다고 말하기도 힘들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코에게만 독창적인 생각이 있다. 역사란 인류가 인간적 장애와 자연적 장애 룰 극복해 가면서 형성한 인간다움과 제도들의 지속적인 자기변형
과정이라는 것, 이 과정은 그 자체가 인간의 활동이요 인간적 구 조들의 결과이기 때문에 인간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 이런 식의 이해가 자연에 대해서는 불가능하다는 것. 이렇듯 위대 한 역사관은 오직 비코만의 것이다. 끄’ 이 독창적 관점은 훗날 미슐 레와 크로체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 것이었고, 딜타이뿐 아니라 마 르크스도 기꺼히 존중한 것이었다. 2-1 ,
23) 물론 Baudouin , De Insti tut i on e Hi st o r ia e Univ e rsae, pp. 599, 742 에서도, 인간은 자연에 대해서는 < 관찰자 > 나 < 재판관 > 이나 < 해석자>일 수 있을 뿐이지만 역사에서는 그뿐만이 아니라 행위자로서의 잇점을 갖는다는 사실 이 지 적 되 었다 (Kell y , Foundati on s, p. 303 으로부터 인용). 켈리 교수는 이 것 과 비코와의 유사성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크로체와 트뢸치 Troel t sch 의 이름도 덧붙이고 있다 . 충분히 주목할 만한 주장이다. 그렇지만 비코에 대한 보드앵의 관계는 , 인간이 만든 것(<우리들의 것 > )과 만들지 않은 것에 대 한 마네티 Mane tti의 단순 바교와 비코의 과감하고도 새로운 이론 사이의 관계처럼, 지극히 단순한 맹아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24) 휴퍼트 교수는 미슐레며 독일 학자들이 비코 사상의 원천들을 알았더라면 비코 아닌 (15-16 세기의) 그 원천들에 대해 경의 를 표했을 것이라고 주장하 는데 , 이것은 바코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주장이다. 비록 15 세기 역사학에 대한 나의 지식이 휴퍼트 교수의 이 대단히 유익한 저서 같은 이차 자료들 에 의존한 것이기는 하지만, 나는 인간의 자기변형적 본성이라는 관념, 혹은 현실에 대한 경험과 해석의 양태들로서의 언어며 신화며 상징적 제식들이 라는 관념 같이 혁명적인 관념들이 파스퀴에나 라 포플리니에르나 보두앵 둥의 저술 속에도 (눈치채기 힘들게) 숨어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
영국에서도 프랑스에서와 비슷한 운동이 있었다. < 관습법 Common Law> 전통을 강조한 코크 Edmund Coke, 법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진다기보다 자생적으로 형성된다고 주장한 헤일 그밖에도 흄이며 볼링 브로크 Henry St. Joh n Boli ng b roke 같은 버 크의 선구자들이 운동을 주도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획일적 이성의 냉혹하고 건조 한 < 경직성 > 을 거부하고, < 관습적인 것 • 생래적인 것 • 봉건적인 것 • 야만적인 것 > , 그리고 < 원초적인 것 • 총체적인 것 • 불변적인
것>을 지향했댜 1;1 17 세기에는 이러한 운동이 영국을 넘어, 스웨덴, 네덜란드, 시칠리아 등지로 확산되었고, 18 세기에는 버크나 헤르더 를 통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되었으며, 결국 19 세기에는 자비 니와 독일 법사학파의 낭만주의 법학으로 발전했다 .
25)· J . G . A. Pocock, 앞의 책, Intr o ducti on . 메이트랜드 Ma it land 가 말하는 법 학에서의 <고딕 문명의 부활>은 바로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이상의 개관이 옳다면, 르네상스 말은 두 가지의 맹아적 관념들 을 낳은 시기로 볼 수 있다. 첫째, 역사학 곧 과거의 복원이란 단 지 일련의 사건들이나 행적들을 보고하는 작업만도, 위대한 개인 들의 초상이나 전기를 작성하는 작업만도 아니다. 심지어는 (볼테 르가 최초로 시도했듯이) 사회적 • 경제적 • 인구학적 • <문 화적 > 사 실들과 관계들을, 예술양식들에 관한 언급까지 곁들여 가면서 해 명하는 작업인 것만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역사학은 역사의 흐름 을 전체로서 이해하는 작업이다. 법, 종교, 정책, 개인 혹은 국가의 행적과 운명, 그 무엇에 대한 연구이든, 역사학적 연구는 이처럼 총체적 이해라는 견지에서만 의미를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총체적 이해의 지름길은 <문헌언어학>으로 통한다. 전승된 역사책들과는 달리, 언어며 관습이며 법이며 동전이며 기예며 민간신앙 같은 유 물들 및 제도들은, 비록 오해될 수는 있지만 거짓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댜 둘째, 고대의 찬란한 문명은 자연법 제창자들이 가정하는 것만 큼은 우리 자신의 <위대한 시대>를 능가하지 못한다. 오히려 고 대 문명은 그 나름의 독립적 구조와 발전유형을 지닌 사회의 산물 로 보아야 한다. 고대 사회는 우리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만큼 다 른 것도 아니지만, 우리에게 귀감이 될 정도로 유사한 것도 아니 다. 고대 문명이 후세에 그토록 매력을 발휘한 이유는, 단지 그것
이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요, 우리와는 전혀 다른 비록 우월할 수는 있지만 양립할 수는 없는―~ 체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관념은 자기완결적 생 활패턴으로서의 문화라는 개념을 향한 견실한 첫걸음이다. 문화를 자기완결적 생활패턴으로 연구한다는 말은, 한 공동체의 기예들이 며 관념들을 다른 공동체의 그것들과 완전히 독립적으로 탐구한다 는 뜻만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 3“ 그 말의 진정한 뜻은 한 공동체의 중핵양식을 연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핵양식이란, 법률과 시, 신화와 가족생활형식, 경제구조와 정신활동 등, 한 사회나 한 시대 의 다양한 행동영역들 모두를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서 묶어 주는 양식을 말한다. 이 양식은 자기의 고유한 발전 패턴에 따라 전개 되는 바, 비록 우리가 그 패턴을 엄밀하게 정의하는 것은 아예 불 가능하고 기술하는 것마저 힘겹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 패턴이 다 른 가능한 패턴들과 양립할 수 없음을 인식할 수는 있다. 이를테 면 그것이 바그리스적, 비로마적, 비프랑스적 혹은 비중세적 패턴 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는 있는 것이다. 라 포플리니에르가 한 사 회의 < 행동양식 > 이라 명명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특정 행동양식을 저 사회 아닌 이 사회에로 귀속시킬 수 있 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한 시대, 한 전망, 한 문명의 고유성과 개체성이라는 개념이 출현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러한 개념의 극단에는 전횡적인 <시대정신 Ze itg e i s t>에 대한 믿음이 있다 <시대정신>이 어떤 시대나 어떤 문화의 모든 측면 들을 예외없이 결정한다는 믿음은, 관념론적인 것이든 유물론적인 것이든, 과거를 <선험적> 틀에 과거를 무자비하게 끼워 맞추는
26) 이러한 측면에 한정된 연구의 예는 볼테르에서 찾을 수 있다 . 볼테르 자신 과 일부 주석가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독단을 낳았댜 틀에 들어맞지 않는 불편한 사실들은 제거되거나 견 강부회되기 일쑤였다. 슈펭글러나 포크로프스키 M. N. Pokrovsky 같 은 방만한 체계론자들은 물론이요, 때로는 베버 Max Weber 나 호 이 징 가 J. H ui z i n g a 처 럼 꼼꼼한 작가들조차도 이 같은 독단을 범 했 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의 구석구석을 관류하는 특유한 중 핵양식이라는 개념은, 인간활동의 모든 영역들에서 겉보기에는 무 관한 현상들 사이의 연관성과 유사성을 찾아 내는 좌표로 기능할 수 있었댜 그리하여 그 개념은 현상들을 짝짓는 방법에서 일대 혁신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사라는 새로운 분과를 창 출하기도 했댜 아시아나 아메리카 토착 문화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관습과 태 도의 다양성을 자각하는 기회로 작용했음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로마 문화란 사람들이 대체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낯선 문화임이 폭로되었다는 사실이 다. 유럽 문명의 원시적 단계는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샴족의 사회 만큼이나 낯선 것으로 취급되었다. 이 단계를 타락 이전의 참된 인간본성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동경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미성 숙하고 조야하고 야만적인 것으로 경멸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를 테면 중국사회를 극진하게 동경한 볼테르조차도 중국사회의 정체 성을 인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로마는 이와는 전혀 다른 소재였다. 로마 사회야말로 완벽하게 만개한 문명의 패러다임이었기 때문이 다. 그것은 우리의 문명을 향한 맹아도, 우리 문명으로부터의 타락 도 아니었다 혹자는 로마 공화정을 선호하기도 했고, 혹자는 아우 구스투스 시대나 안토니우스시대 (the Anto n ine s: AD 96-192, 죽 안 토니우스 피우스 황제로부터 코모두스 180-192 의 치세에 이르는 시대)를 선호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든 로마 시대는 문명화의
절정으로 표현되었댜 볼테르 를 위시한 계몽주의자들에 의하면, 페 리클레스의 아테네며 아우구스투스의 로마며 르네상스 시대의 피 렌체며 루이 14 세의 프랑스는 한결같이 인류의 단선적 진보에서 상승한계들이었으며 절정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서구와 현재의(여기서는 르네상 스 이후의) 서구가 전혀 다르다는 관점은, 고대에 필적하는 문화가 현재에도 다시 정립될 수 있다는 주장을 수반한 것이었고, 고대문 화와 현대문화는 이질적이어서 비교할 만한 공통의 척도가 없다는 주장을 수반한 것이었다 . 바로 이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다원론이 출 현했다 말하자면 안간은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본성을 소유한 다는 믿음에 대한, 인간본성은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동일한 목적 을 추구하며 바로 이것이 인간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믿음에 대한 명시적 반론이 비로소 출현했던 것이다. 상이한 문화들은 저마다 다른 이상과 환원불가능한 개성을 지닐진대, 어떻게 동일한 인간 본성과 본질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14 세기의 인문주의자 부르니 Leonardo Bru ni는 <그리스어로 이야기된 것들 중에서 라틴 어로 이야기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말했었다. 떠 I 비코는 이 같은 생각을 부정하고 논박하려 했다 프 만사는 제 각기 일회적이고 특 수하다는 것, 비록 유사관계나 영향관계나 상응관계는 존재하지만 어떤 < 환경 mili eu> 으로부터 다른 환경에로의 완벽한 번역은 불가 능하다는 (아니면 훗날 헤르더가 조금 완화시켜서 주장했듯이, 기대할
27)
28) 바록 강조는 덜했지만, 라이프니츠 역시 비슷하게 시도했다 . Leib n iz, Ermahnung an die Teuts c he, ihr en Versta n d und Sp ra che besser zu Oben, ed. P. Pie t s c h, pp. 307 ff; Nouveawc Essais , III, p. 9 를 참조 .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 비코의 생각이었다. 자연법이나 영원한 인 간본성 따위의 개념은 보다 더욱 유연하고 탄력적인 것이 되어야 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이 같은 수정은 엄격한 토미즘과 도, 테카르트나 스피노자나 볼테르의 교시와도 양립할 수 없는 것 이었댜 계몽주의의 핵심에는 영원하고 불변적인 진리며 법이며 행동규칙이 존재한다는 원리가 있었다 . 이 원리에 따르면, 이론상 인간이라면 누구나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은 채 인류의 목표 롤 인식할 수 있을 것이요, 인류의 목표를 인식하여 추구하는 일 이야말로 모든 인간행동의 유일하고 충족적인 목적일 것이다. 이 같은 계몽주의적 원리에 대한 거부는, 더욱 풍요로운 정신적 상상 력의 영역에 대한 전망을 수반한 것이었던 바, 이것은 서구사상사 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표시한다.
시험적이기는 하지만 필자는 다음과 같은 테제를 제시하고 싶 다. <문헌언어학>에 의한 이해라는 개념, 그리고 모두 믿을 만하 지만 서로 독립적이기 때문에 동화될 수 없는 이질적 문화들의 연 속이라는 개념 _나는 이 두 개념들이 비코 사상의 기원을 탐구 해 온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주목해 온 철학적 • 신학적 • 과학적 관 념들보다 많은 것을 설명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특히 문화란 무 엇이고 어떻게 인식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 그러하다. 물론 법학, 역사학, 문학이 비코의 평생의 관심사에 가장 근접한 영역들 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별로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
29) 비코의 법학 연구의 너비에 관해서는 Giu s epp e Gia rizz o, 앞의 책을 참조. 자리초에 의하면 그 너비는 <불테이우스 Vul t e i us 로부터 가드프르와 Godefr oi de Bo uill on 까지, 쿠자스로부터 오트망까지> 포괄하는 것이었다(p. 113). 더 나아가 휴퍼트는 16 세기 프랑스 역사가들이 폭 넓게 읽혀졌다고 주장한다 (Hu pp ert, 앞의 책, p, 167).
코의 독창성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 < 진리一만들어진 것 > 의 원리를 역사에 응용한 것은 여전히 그의 독창적 업적으로 남는다. 비코는 이 유서깊은 기독교 원리를, 서로 이질적인 사회들의 정신적 활동 들에서 상리한 측면들이 상호작용하는 관계에 주목한 르네상스적 입장과 융합한다. 이 같은 융합에 기초해서 비코는 문화와 자연, 사건과 행동을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은 다시 역사에 속하는 것과 속하지 않는 것, 인간정신이 < 침투>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 이의 차별화를 가능하게 만든다. 인간정신은 한편으로는 제도들과 전통들에로, 민족 전체나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공통의미 sensus comrnun i s> 에로 육화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다양한 얼굴들 정신이 그 자신과 외부세계를 이해하고 지배하기 위해 끊임 없이 시도하는 과정에서 매 단계마다 취해온 변양( 變樣 )들-안 에서 섭리의 도움으로 자기 자신과 자기의 과거를 이해하고자 노 력한댜
이 같은 비코의 종합 덕분에, 법학자들과 유물연구가들, 혹은 이 들로부터 영향받은 역사가들의 파편적인 통찰들은 하나의 강력하 고도 결실 있는 역사학 방법론으로 변형될 수 있었다우’ 바코의 작
30) 물론 비코의 작품들에는 이 파편적인 통찰을 제공한 작가들에 대한 칙접 적인 언급이 없다. 그렇지만 이탈리아 주석가들은(마치 이름을 거명하지 않 고는 관념도 유통될 수 없기나 한 듯이, 이를테면 마르크스나 프로이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는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없기나 한 듯이) 비코 가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조차 타진하지 않는다. 두니와 코코로 부터 크로체와 코르자노에 이르는 연구자들은 물론, 심지어 비코의 생애와 사상 및 지적 계보를 세밀하게 재구성하는 데 영예로운 일생을 바쳤던 니콜 리니조차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왜 비코의 선구자가 이탈리 아와 로마 제국 밖에서는 발견될 수 없다고 가정되는가? 다수의 아류 스콜 라 철학자들과 지방 수준의 나폴리 작가들에 관해서는 비코 사상의 가능한 원천으로 거명될 만하다고 생각하면서(이런 생각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비코의 관심에 매우 근접한 분야의 대가들, 전유럽적인 명성과 영향력을 가 졌던 인물들에 관해서는 그 같은 연관성을 상정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프랑스인들이기 때문인가? 비코 자신도 참여한 바 있었던, 사고 및 문체 상의 위대한 두 양식(즉 프랑스 양식과 이탈리아 양식) 간의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은 때문인가? 이것이야말로 비코가 역사적 진리의 발견에서 장애물이라고 비난한 민족주의적 < 허세 bo ri a> 가 아닐까? 어떤 답변이 주 어지든 간에, 이러한 현상은 그 자체로서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품에서 부조리하고 주변적이고 혼란하고 현학적이고 군더더기에 가까운 모든 것들이 잊혀진다 해도,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새로운 관점은 변함없이 지속될 것이다. 비코는 정태적 인간본성 의 관념, 죽 인간 본성이 <언제 어디서나 단일한 > 불변적인 핵심 을 유지한다는 관념을 파괴했다. 이 개념 대신에 그는 체계적 변 화의 패턴을 제시했다 . 비코에게 역사적 통찰이란 목적추구적인 존재인 인간이 스스로를 자각하는 하나의 형식이었던 바, 인간의 사고며 느낌이며 행동의 양식은 새로운 필요와 활동에 부응해서 변화하며, 변화를 통해 새로운 제도, 완전히 새로운 문명을 형성한 다. 인간본성은 이같이 변화하는 문명들 속에 구현된다. 이 낯선 문명들을 이해하는 방식은 외부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전혀 다르 댜 그것들은 거의 전적으로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 이 러한 착상으로부터 문화양식의 관념이 출현하고, 문화양식이라는 관념은 다시 <시대정신>과 <민족정신 Volks g e i s t > 을 위시한 일련 의 유사 개념들을 낳는다 . 물론 이 같은 개념들은 애매하고 정확 한 의미파악이 어려운 탓에, 형이상학자들에 의해 오용되곤 한다. 이를테면 그것들은 초월적 요인 비슷한 어떤 강력한 힘으로 오인 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그 개념들은 흔히 망각되기 쉬운 한 가지 진리를 지시한다 . 인간의 모든 분류 , 선택, 해석은 결국 주관 적이어서 , 3 ” 위대한 수학적 실재론자들이 가정하듯이 외부세계의
31) 이 점은 Eri ch Auerbach, Vic o and Aesth e ti c Hist o r i ci s m , 앞의 책에서 훌 륭하게 구명되었다 .
< 객관적 > 과정에 상응하거나 부합하지는 않는다는 진리가 그것이 댜 (비록 비코 자신은 그의 체계가 객관적 타당성을 갖는다고 주장했지 만) 부르크하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 어떤 문화 시대와 그 심성 적 윤곽은 보는 사람의 각도에 따라 제각기 다른 상으로 비칠 수 있는 > 것이댜 모) 비코의 체계를 통채로 관류하는 핵심관념은 어떤 사물의 본성은 그것의 역사라는 생각이다. < 사물들의 본성은 특정 한 시간에 특정한 모습으로 이루어지는 그것들의 발생과 다르지 않댜 >1.1 1 부자의 세계가 빈자의 세계와, 혹은 신자의 세계가 비신 자의 세계와 다르듯이 , 원시인의 세계는 현대인의 세계와 다르다. 이처럼 상이한 두 세계를 빈틈없이 완전하게 번역해 줄 단일한 언 어는 있을 수 없다 . 각 세계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실재를 범주 화하기 때문이다 . 이러한 관념은 그리스인들로부터 시작되어 계몽 주의에서 완성된 전통으로부터의 결별이요, 인류의 전망을 근본적 으로 뒤바꾼 것이었다 .
32) Burckhardt, The Civ i li z a ti on of the Renais s ance in I ta ly 의 첫 머 리 .
33 ) N. S. pa r. 147.
이것은 획기적인 전환이었다 우리가 비코적 전환을 편들 때, 다 음의 두 가지 관점은 더 이상_버틸 수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 겠지만__가거티기 힘들어진다. 하나는 데카르트나 스피노자나 볼 테르나 기본 Edward G i bbon 이, 오늘날에는 러셀 B. Russell 이나 카 르납 Rudol p h Carna p이 피력한 바 있는 인간본성과 실재세계의 개 념이댜 다른 하나는 역사학의 기능에 대한 전통적 관점이다. 라이 프니츠가 예시하는 이 전통적 관점에서는, 역사학이란 기원에 대 한 호기심을 채워 주는 것, 인간본성의 통일성을 드러내는 것, 소
수의 가치 있는 인간을 정당화하는 것, 하느님의 계시를 뒷받침해 주는 것, 실례에 의해 교훈을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비코는 평 생을 이러한 관점들에 맞서 싸웠다. 그의 공격들은 애매하고 혼란 하지만 언제나 격렬했댜 그의 통찰들은 파편적이지만 다양하며, 풍부한 가치와 번득이는 천재로 충만하다. 비코가 깊히 참여한 논 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전선은 훨씬 분명해졌다.
헤르더와 계몽주의
제 3 부 헤르더와 계몽주의
제 20 장 헤르더의 지적 배경
헤르더는 민족주의며 역사주의며 <민족정신> 등 상호연관된 개 념들의 창시자로서 유명하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의 명성은 그가 고전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과학적 방법이 전능하다는 믿음에 대 한 낭만주의적 반동의 주역이요, 프랑스 <계몽철학자들 philo so- p hes> 과 독일판 추종자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논적이라는 사실에 의존한댜 대체로 독일과 프랑스의 계몽철학자들은 실재란 보편적, 초시간적, 객관적, 불변적인 법칙들에 따라 질서 있게 배열되며 이 같은 질서는 이성적 탐구에 의해 발견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 중 유명인들만을 꼽아서 말하자면, 달랑베르 d'Alembe rt, 엘베티우스 Helveti us , 돌바크 d'Holbach 등은 그러한 믿음에 철저했으며, 볼테 르 Volta ire, 디 드로 Dide rot, 볼프 Wolff, 라이 마루스 Re irna rus 둥은 조건부로 그렇게 믿었다. 반면에 헤르더는 모든 행동, 모든 상황, 모든 역사시대, 모든 문명에는 각자마다 고유한 특징이 있다고 주 장했다. 따라서 이 러 한 현상들을 몇 가지 공통 요소들의 결합으로
환원시키거나 그것들을 보편적 법칙의 견지에서 기술하고 분석하 려는 시도는, 역사에 속한 대상이든 자연에 속한 대상이든 연구대 상의 독특한 성질을 만들어 준 결정적인 차이들을 거세하는 일에 불과할 터였다 헤르더는 윤리학이나 미학에서든, 물리학이나 수학 에서든 보편법칙이며 절대원리며 최종진리며 영원한 모델이며 불 변적인 기준이 있다는 관점을 거부했으며, 이 같은 입장에서 변화 하고 발전하는 인간정신에 어울리는 방법을 물리적 자연에 대한 연구에나 적합한 방법과 철저히 구분했다. 혹자는 헤르더가 사회적 패턴이며 사회적 성장 같은 관념에 새로운 생명을 주었다는 이유 에서, 혹은 그가 양적 요인뿐만 아니라 질적 요인까지도 ――- 즉 자연과학의 개념들에서는 무시되거나 거부되기 마련인 감각불가능 한 요소며 셀 수 없는 요소까지도 ___ 대단히 중시했다는 이유에 서, 그에게 후한 점수를 매기기도 한다. 혹자는 헤르더가 개별적인 혹은 집단적인 창조 과정의 신비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성주의에 대한 전면전에 나섰다고 전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는 차이들을 일반화하고 추상화하며 융합하려는, 분리된 것들을 통합하려는 이 성주의의 경향에 반기를 들었으며, 특히 이해가능한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든지 원리상 답해 줄 수 있을 만큼 완벽한 지식체계를 구성 하겠다는 이성주의의 허풍스러운 목표, 죽 만사에 대해 하나의 통 합과학이 가능하다는 발상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에서 는, 헤르더는 이성주의이며 과학적 방법이며 명석한 법칙의 보편적 권위에 도전한 선동가요, 선동의 과정에서 지방주의며 민족주의며 문학적, 종교적, 정치적 비합리주의를 부추겼던, 그리하여 후세의 사고와 행동을 뒤바꾸는 데 주역을 담당했던 인물로 그려진다. 헤르더의 사상에 관한 최상급 연구서들에서마저 쉽게 발견되곤 하는 이런 식의 해설은, 대체로는 옳지만 지나치게 단순화된 감이
없지 않댜 그의 견해들이 후세의 사고와 행동에 깊고도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분명하다. 혹자는 헤르더가 이성에 반대하 여 신앙을, 규칙의 기계적 적용에 반대하여 생명을 옹호한 인물이 라는 근거에서 그를 찬양하기도 했다. 혹자는 그를 혼란스러운 사 상가로, 혹은 퇴행적이거나 비이성주의적인 사상사로 분류하기도 했다 . 자기들로서는 배울 점이 많은 계몽주의를 곡해하여 독일의 국수주의며 반( 反 )계몽주의의 흐름을 부채질한 인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댜 혹자는 헤르더로부터 콩트나 다윈이나 바그너나 현대 사 희학자들과의 공통점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보여 주기도 했다. 나 의 연구가 이 모든 문제의 직접적인 해명을 목표로 삼은 것은 아 니다 동시대의 자연과학에 대한 헤르더의 통찰과 헌신이 지금까 지 너무 과소평가되어 온 듯하다는 느낌을 감추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댜 실로 헤르더는 괴테 못지않게 과학의 성과들로부터 매력 을 느꼈고 영향을 받았다. 그가 과학의 성과들이 일반의 잘못된 추정 탓에 자주 왜곡된다고 생각했던 점에서도 괴테와 같았다. 헤 르더는 평생을 < 백과사전파>에 대한 예리하고도 무자비한 비평가 로 살았지만, < 백과사전파 > 의 사회적 • 윤리적 입장의 토대가 되 었던 과학이론들에 대해서만은 주저없이 수용하고 환영하는 태도 를 보였다. 다만 그는 사회적 • 윤리적 결론들이 물리학이나 생물 학에서 새롭게 정립된 법칙들로부터 직접 나올 수는 없다고 생각 했댜 이런 결론들은, 사회적 자의식이 발전하기 시작한 이래로 예 민한 관찰자라면 누구나가 인간의 경험과 행위에 대해 참이라고 여겨 온 것들과 명백히 모순되기 때문이었다 . ” 그러나 내가 논의
1) (별도의 언급이 없으면, 제 3 부의 모든 인용은 J. G. Herder, Samt lic h e Werke, ed. B. Suph an(Berlin , l 'o7 7-1913) 에 의존했다 . ) 이 접에 관해서는 다 음의 탁월한 연구서를 참조할 것 . H. B. Nis b et, Herder and the Ph ilo soph y
and Hi st o r y of Sc ien ce(Modem Humanit ies Research Associa t i on , Carn-bri dg e , 1970); G. A, Wells, Herder and Aft er (The Hag u e, 1959).
하고자 하는 것은 당대의 자연과학에 대한 헤르더의 태도가 아니 댜 나로서는 가능한 한 헤르더의 견해에서 진정으로 독창적인 측 면들에, 그나마 몇 가지 측면들에 나의 논의를(가끔은 벗어날 때도 있겠지만) 한정하고 싶다. 나는 마치 미로처럼 혼란한 헤르더의 생 각과 관념들 중에서, 특히 지난 200 년 동안 큰 영향력을 행사해 왔 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도 새롭고 중요하며 홍미로운 세 가지 의 핵심 관념들을 가려내고자 한다. 그의 동시대의 사상적 주류에 역행하고 있었던 이 세 가지를, 언젠가 나는 <인민주의 pop ul is m >, <표현주의 exp re ssio n ism >, <다원주의 p lura li sm> 라고 명 명 한 적 이 있다 .21 우선 헤르더가 많은 사상가들에게 큰 신세를 졌다는 사실을 인
2) 이와 관련된 그밖의 많은 홍미로운 주제들은 생략될 수밖에 없다. 이를테 면 헤르더가 낭만주의, 생기론, 실존주의, 사회심리학 등에 미친 지배적인 영향이 그러하다. 특히 사회심리학은 그에 의해 거의 정립되었다 해도 과언 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부정확함과 모순으로 점철되지만 늘 풍부한 함축과 자극을 제공하는 헤르더의 사상을 이런 저런 방식으로 이용했던 많은 작가 들도 생략될 수밖에 없다. 슐레겔 형제와 야콥 그림 Jak ob G ri mm 은 무엇보 다도 문헌언어학적 관심에서 헤르더의 사상을 편취했다. 자비니는 민족의 유기체적 성장이라는 헤르더의 개념을 법학에 적용했다. 괴레스의 민족주의 는 비록 왜곡적이기는 했지만 헤르더의 민족주의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헤 겔이 제시한 생성의 개념, 성장의 개념, 비인격적 제도들의 인격성이라는 개 념은, 헤르더의 저술들로부터 생명을 얻기 시작한 것들이다. 이들을 바롯하 여 19 세기와 20 세기의 수많은 역사지리학자들, 사회인류학자들, 언어철학자 들, 역사철학자들, 역사저술가들을 생략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나로서는 유감 이다. 그렇지만 내가 이 세 가지 관념들을 선별하여 집중적으로 논의하고자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들은 최상급의 독창성과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착상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의 기원과 속성은 지금까지 충분히 주목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글은 헤르더의 영향력보다는 독창성에 대한 정 당한 평가에 주안점을 두었다 .
정하면서 논의를 시작해 보기로 하겠다 . 3) 역사관련 과학들의 고유한 주제란 공동체의 생활이지 개인의 위 업이 아니라는 헤르더의 테제를 새롭다고는 말할 수 없다 . 정치가 며 군인이며 왕이며 왕조며 모험가며 여타의 유명인사들이 역사학 에 고유한 주제가 아니라는 테제는 이미 볼테르며 흄이며 몽테스 키 외 에 의 해 서 도, 슐뢰 처 Schlozer 와 가터 러 Ga tt erer 에 의 해서 도, 이들보다 앞선 16 세기와 17 세기 초 프랑스의 역사물 작가들에 의 해서도 개진된 바 있다. 비코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독창성과 상 상력으로 비슷한 테제를 제시했다 .•내 가 아는 바로는 , 헤르더가 그 나름의 역사이론을 정립한지 적어도 20 년이 지나도록 비코의 『새 로운 과학 』 을 읽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 그렇지만, 그가 설 령 비코롤 직접 읽지는 않았다해도 비코의 소문에는 접했을 것이 댜 특히 베 겔린 J. R. We g el li n 을 통해, 체사로티 Cesaro tti의 호머 주석서들을 통해 비코를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헤르더의 사상이 골격을 갖추던 시절에는, 위대한 시인이야말로 그가 속한 사회의 정신과 경험을 표현하는, 사회의 진정한 대변인이라는 생각 이 널리 퍼져 있었댜 샤프츠베리는 예술가란 모름지기 그의 동시대 를 향한 영 혼의 목소리 라고 찬양했다. 무랄트 Beat Ludw ig von Muralt 며 보드머 Bo din er 며 스위 스의 브라이 팅 거 Bre iting er 는, 셰 익스피어와 밀턴은 물론 중세 독일의 음유시인들을 프랑스 계몽주 의의 어리석은 추종자들보다 훨씬 높히 평가했다. 이러한 논제에 관해 보드머와 비코의 열열한 찬미자였던 칼레피오 백작 Coun t Pie t r o Cale pi o 은 서신을 주고받기도 했다.~, 또한 헤르더의 청년 시
3) 내가 아는 한, 이 주제에 대한 가장 훌륭한 논의는, 헤르더의 Auch ein e Phil oso p h ie der Gesch i ch t e 를 편집하고 번역한 루쉐 교수의 불역본 (Aub i er, Ed ition s Monta ign e, Pa ris, n . d.) 의 탁월한 번역자 서문에 들어 있다.
4) 이 사실에 관한 최상의 논의는, Carlo Anto n i o, Lo sto r ic ism o(Tu rin, 1957) 에서 구할 수 있다.
절에는, 문학적 역사주의와 파리의 신고전주의 및 그것의 독일판 추종자들과의 싸움이 가열차게 진행중이었다. 이 하나의 사실만으 로도 비코와 헤르더가 놀람도록 닮은 전망을 가졌던 이유를 설명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터인즉, 이것은 양자의 보다 직접적인 연 관성을 찾으려고 시간과 정열을 낭비하는 어리석음을 미연에 방지 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문화적 패턴이라는 개념은, 청년 헤 르더의 『또 다른 역사철학 Auch ein e Phil o sohie der Gesch i ch t 』 이 라는 아이러니한 제목이 강조하고자 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시대 에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헤르더의 천적이었던 볼테르는 이 미 그의 명저 『제 민족의 풍습과 정신에 관한 시론 Essa i sur !es moeurs et !'espr it des na ti ons 』 외에도 몇몇 저술들을 통해, 문화 적 패턴의 개념의 대강을 개괄적이지만 효과적으로 개진한 바 있 었다.
마찬가지로 몽테스키외 이후로는, 문명의 다양성이란 거의 물리 적이며 지리적 요인들의 차이에 의해_한마디의 상용어로 줄 이자면 <풍토 c fun a t e> 의 차이에 의해 _결정된다는 생각까지 도 상투적인 것이 되었댜 이 관념은 몽테스키의 이전에도 보댕, 생이브레몽 Sa int - E vremond, 주교 뒤 보 Abbe Du Bos, 그리고 이 들의 추종자들에게서 엿볼 수 있다 .
그런가 하면, 현재적 가치의 편에서 고대 사회를 재판하는 문화 적 오만의 위험성은 해르더의 동시대인 레싱 Less i n g에 의해서야 뜨거운 쟁점이 될 수 있었다(헤르더는 연장자인 레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 쟁점을 부각시키는 못했다). 낯선 문명을 열등한 문명으로 비웃는 유럽인의 습관을 신랄하게 풍자한 점에서
는 볼테르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볼테르가 중국 문화를 그토록 찬양했던 것은, 자기의 가치 외에는 어떠한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 < 야만스러운> 유태 기독교적 전망의 꼴불견스러운 허세며 배타성 이며 광신성을 폭로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헤르더는 볼테르의 무 기를 채택하여 그를 공격했고 그의 편협하리만치 <18 세기적이고 파리적인> 관점을 비난했지만, 이러한 사실이 볼테르야말로 유럽 중심주의에 대한 전면적 반격의 우두머리이자 원천이었다는 사실 울 바꾸지는 못한댜 볼테르는 고대 이집트롤 찬양했고 빙켈만 W i nckelmann 은 그리스인들을 찬양했댜 불랭빌리에 Henri de Boul ai nv illi ers 가 북유럽 민족들의 우월성에 관해 이야기했듯이, 말 레 P. H. Malle t는 덴마크 역사에 서 비 슷하게 말했댜 무랄트는 이 미 1725 년의 『영국인과 프랑스인의 비교 고찰 Le tt ers on the Eng li sc h and the French 』 에서, 스위스인이며 영국인의(특히 영국 작가들의) 독립적인 정신에 비추어 프랑스인의 전통적인 매너리즘 울 대조했다. 중세가 <암혹시대>라는 볼테르와 백과사전파의 경 멸이 절정에 도달했던 시점에서, 허드 R i chrad Hurd 와 밀러 Joh n M ill ar 는 물론 이들을 뒤이은 뫼저 Jus tu s Moser 도 중세 유럽에 대 한 찬양가를 지었다. 특히 뫼저는 샤를마뉴 대제가 야만적으로 봉 건화하기 이전의 고 색슨족의 자유분망한 생활을 찬미했던 바, 이 것은 헤르더의 영향을 받은 것일 수는 있어도 헤르더가 창조한 것 이라고는 말할 수 없댜 그러나 동시대의 주류에 비추어볼 때, 이 들 모두를 합해도 열세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문화적 차이에 대한 새로운 강조며, 초시간적 일반법칙과 일반 규칙에 대한 저항도 한 줄기 흐름을 이루고 있었다. 라신이며 코 르네이유 Corne ill e 가 루이 14 세의 궁신들의 의복과 예절에 따라 고 대인이나 동방인을 묘사했을 때, 뒤 보는 그들의 역사의식의 결여
를 악평했고, 생이브레몽은 그것을 풍자하여 인기 를 얻었다. 이러 한 추세의 다른 극단에는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아르놀트 Go ttfri ed Arnold 와 진첸도르프 Gra f von Zin z endorf 는 종교마다 고유한 독자적 통찰을 지닌다는 명제를 힘써 강조했 다. 아르놀트는 이러한 신념에 기초하여, 루터교의 정통교리로부터 의 이탈이나 심지어 이단이며 불신앙조차도 관용해 줄 것을 대담 하고 열정적으로 호소했다. 민족의 정신 또는 문화의 정신이라는 관념은 비코와 몽테스키외 에게 중요했을 뿐만 아니라, 보드머와 브라이팅거에게도, 하만이며 짐머만J. G. Ritter von Z i mmermann 에게도, 헤르더가 익히 알고 있 었던 저명한 정치평론가 모저 Karl Fri edrich von Moser 에게도 중요 했다. 볼링브로크는 사람들이 여러 민족들로 갈라진 것이 자연스러 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민족성은 <자연> 깊숙한 곳에 뿌리박은 것 이러는 말이다. 18 세기 중엽에 이르면, 켈트문화 애호가 Cel t oma ni ac 며 고트문화 애호가 Go t oma ni ac 가 도처에서 발견된다. 특히 아일랜드 인들과 스코틀랜드인들 사이에서 열풍이 불었다. 그들은 아션 Oss i an 의 전설적인 무용담을 참조하지 않고도 게일족이나 게르만 족의 덕을 찬양했으며, 이 종족들이 윤리적 사회적으로 고대의 그 리스인이나 로마인에 비해 우월하고 현대의 라틴인과 지중해인의 퇴폐한 문명에 비해서는 훨씬 더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루소는 폴 란드인들에게 러시아의 강제합병에 저항할 것을 권면한 유명한 서 한에서 비슷한 정신을 보여 주었다. 당시의 세계시민주의에는 어 울리지 않더라도 그들에 고유한 풍습과 특성을 고집하라는 것이 루소의 권고였다. 버크며 헤르더가 즐겨 이용했던 유기체로서의 사회라는 관념도 그들의 시대에는 이미 낡아 빠진 생각이었다. 유기체적인 은유의
용례는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소급된다. 중세의 작가들도 그 러한 은유를 남달리 풍부하게 활용했다. 예컨대 살즈베리의 존 Joh n of Sa li sbu ry에게서, 유기체적 은유는 그의 정치적 논고들의 심장이자 핵심이었다. 후커 Hooker 와 파스칼 Pascal 이 새로운 과학 적 기계론적 발상에 반대하여 고의로 사용했던 무기도 그것이었 댜 이렇듯 해묵은 관념에 새로운 면이 있었을 리 없다. 있었다면, 사회생활에 대한 구식의 관점으로 되돌아가겠다는 의도를 드러 낸 것이 고작이리라. 바로 버크가 그러했다. 그는 새로운 생물학으로 부터의 유비를 행하면서도 비슷한 성향을 보여 주었다. 그렇지만 나는 버크가 뫼저나 헤르더의 견해를 읽었거나 들었다는 증거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
퍼거슨 Adam Fer guson 은 <시민사회의 역사>에 관한 그의 대단 히 독창적인 논문에서, 헤르더가 시민사회에 관해 상정했던 다양 한 이상들, 즉 인간과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방안들을 차 별적으로 구분해가면서 생생하게 묘사해 주었다 .51
5) 라스키 Harold Las ki는 퍼거슨을 <겉만 몽테스키외를 닮은 사람>으로 묘 사했는데, 이러한 묘사는 라스키씨의 빈약한 비판능력을 드러내고 있을 뿐 이다 . 아마도 그의 비판은 스티븐 Leslie S t e p hen 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받아 들인 듯하다.
우선 헤르더는 지리학적이든 생물학적이든 자연연구의 방식으로, 사건들에 대한 일반적 설명을 추진해갔다. 여기서의 그는 로크며 엘베티우스며 <백과사전파>의 L 추종자들에 의해, 실로 계몽주의 일 반의 추종자들에 의해 통상적으로 채택되던 접근법을 그대로 따랐 다. 이 점에서 그의 스승 하만과는 달리, 헤르더는 자연과학의 성과 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과학의 성과에 대한 그의 생기론적 해석도, 헴스터회스 Hems t erh ui s 며 라바터 Lava t er 를
위시한 < 직관론자들 > 이 선호했던 신비주의적 • 접신론적 해석과 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자연이란 거대하고 조화로운 단일의 힘으로서 이 힘은 유한수의 역동적 중심들 속에 구현된다는 헤르더의 관념은, 고대부터 줄곧 지속되다가 라이프니츠에 의해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하여 그의 모 든 제자들에게로 전파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 어떤 신성한 계획이 인류의 역사를 통해 실현된다 는 헤르더의 관념도 , 구약성서와 유대교 주석가들로부터 기독교 교부들을 거쳐 보쉬에의 고전적 정식화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계 승된 것이었다. 시공간적으로 동떨어진 원시인들을 상호비교했던 헤르더 작업 도 이미 퐁트넬 Fon t enelle 이며 프랑스의 예수회 신부 라피토에 의 해 수행된 바 있었다.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인과 원시 로마인을 비교한다든지, 이들과 북아메리카 원주민 혹은 게르만 종족들을 비교한다든지 하는 작업 말이다. 18 세기 초반에 이러한 작업을 수 행했던 사람들, 특히 블랙웰이나 워튼 형제 같은 영국의 저술가들 은 모두가 퐁트넬이며 라피토의 사색으로부터 크게 신세를 졌다. 하지만 이러한 비교 방법은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성행했던 호메로 스 연구에서도 이미 본질적인 요소로 자리잡고 있었던 바, 특히 이 탈리아에서는 비코의 영향이 컸다 . 실제로 비코의 추종자 체사로 티는, 문학에서의 이러한 접근법이 비교문헌언어학과 비교인류학 에 대해 제공할 수 있는 폭 넓은 암시들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 와는 반대의 맥락에서이기는 하지만 『백과사전』 역시 호메로스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었다. 이 사전의 <그리스인들>에 관한 일반 항목에서는, 호메로스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이자 시인> 이지만 미래에는 별로 읽혀질 것 같지 않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
이러한 태도 는 데카르트며 베일 P i erre Ba y le 의 편에서 케케묵고 지리한 박학에 대한 존경을 비난하는 당파적 < 변덕 > 에 지나지 않 는 것이지만, < 고대파와 현대파의 논쟁 > 의 지속적인 영향을 반영 하는 것 이기도 하다. 이러한 와중에서, 비코로서는 감히 건드릴 수 없었던 성서마저도 평온할 리 없었다. 비록 가톨릭 편이든 프로테 스탄트 편이든 기독교 정통교리로부터의 탄압으로 인해 조심스럽게 진행되기는 했지만, 앞 세기에 스피노자며 시몽 신부와 함께 시작된 철 학 적 • 역사학적 텍스트 비판은 세속적 학풍의 규칙들을 엄격하 게 지켜가면서 크게 진 척 되었다 . 프랑스에서는 아스트뤼크J ean As t ruc 가 , 영국에서는 로우드 Robe rt Low t h 가, 조금 뒤에 독일과 덴마아크에서는 미카일리스J. D. i\! I i chae li s 가 < 성서 > 를 다양한 시 기에 작성된 동방의 고전들 중 하나로 취급했다. 오늘날 누구나가 인정하듯이, 기본처럼 숙련된 역사가조차도 초대 기독교 교회사를 세속적 시각에서 냉정하게 다루었던 모스하임 J. L. von Mosheim 에게 큰 신세를 졌 다 . 더군다나 능숙한 연구자가 아니었던 헤르더 로서는 남에게 더욱 크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겠다. 헤르더의 언어학적 애국심에 관해서도 똑같은 이야기가 가능하 댜 이미 17 세기 초에 오피츠 Ma rti n O pit z 는 독일어를 지켜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그후로 독일어의 고수는 수많은 신학자들이 며 인문학자들이며 철학자들에게서 의식적인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의 영 어사용권 독자에 게는 멩 케 J. B. Mencke 며 호 네크 Ph ilipp Wi lh elm von Homeck 며 모쉐로쉬 J. M. Moscherosch 며 로가우 F ri e dri ch von Lo g au 며 우덴 Uden 같은 이름들이 별볼일 없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개혁 이후 대략 두 세기에 걸쳐서, 루터의 기치를 내걸고 라틴어와 프랑스어에 대 항한 장본인들이었다. 그들의 싸움은 집요하고도 성공적이었다. 이
렇듯 몇 세기 전에 출발한 투쟁에 뒤늦게 합류한 보다 유명한 인 물들로는, 푸펜도르프와 라이 프니 츠, 토마시 우스 Thomas i us 와 볼 프, 하만과 레싱 등을 꼽을 수 있다. 언어학적 애국심 역시 헤르더 의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에 이미 독일안들의 전통적 태도 로 정립되어 있었던 어떤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헤르더는 여러 가지 가치들의 역전을 주도한 인물로 유명하다. 이를테면 추상성에 대한 구체성의 승리, 직접적이고 소여적이며 경험적인 것에로의 근본적인 전회, 무엇보다도 추상화며 이론이며 일반화며 기계적 유형화로부터의 탈피, 양보다 우월했던 질의 옛 지위를 회복하려는 시도, 물리학의 일차적 성질들보다 우위에 있 었던 직접적인 감각자료들의 옛 지위를 회복하려는 시도 등이 그 러하다. 그러나 정작 이 같은 역전으로 인해 명성을 누린 인물은 하만이었다. 라바터의 <골상학> 연구도 이 같은 역전에 힘입은 것이었댜 이 같은 반전의 움직임은 최소한 샤프츠베리까지 소급 되며, 청년 버크의 작업에서도 발견된다. 이성주의적이고 과학적인 원리들을 응용해서 지식과 사회를 재 편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반발은, 헤르더가 무대에 등장한 시기에 는 상당히 진척된 상태였다. 이미 루소는 1750 년에 『학예론 D i s cours sur !es sci en ces et !es ar t s 』에서 그 같은 반발을 시도한 바 있었고, 7 년 뒤에 달랑베르에게 보낸 훈계조의 반감 어린 편지에 서는 비난의 목소리를 더욱 높히면서 <계몽철학자 당파>와의 완 전한 결별을――」양편 모두에게 재빨리 감지되었듯이 -보여 주었다. 독일에서는 이러한 분위기가 <경건파 Pie t i st > 운동의 내 향적 전통에 의해 크게 강화되었다. 불타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의해 고취된 이 전통 내의 소집단들은 인류애적 연대와 상호존중 을 강조했고, 장식되지 않은 진리며 선의 권능이며 내면의 불빛을
믿었고, 온갖 외양적 형식들을 경멸했으며, 의무와 규율에 대한 엄 격한 감각을 공유했다. 또한 그들은 악의 존재에 대해 심한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것은 때로 집단 히스테리나 가학증 의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형식에 치우친 위선을 야기하기도 했댜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은 영적인 삶을 갈구했고 영적인 삶 만이 인간을 육신과 자연의 구속으로부터 벗기울 수 있다고 믿었 댜 이 같은 종교성향은 특히 동프러시아의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크누첸 Knu t zen 이며 하만이며 헤르더며 칸토 같은 인물들 에게서 강력하게 작용한다. 이 점에서 비록 칸트와 헤르더 사이에 는 커다란 지적 간극이 있지만, 양자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신학적 독단이든 과학적 독단이든 무비판 적인 독단의 흐름에 어정쩡하게 휩쓸리기보다는 영적인 자기결정 을 염원하고,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도덕적 독립성을 갈망하며, 특히 도덕적 구원을 갈망하는 것이다. 헤르더가 한 일은 단지 이러한 태도들과 교리들을 종합해서 홋 날 조국의 문학과 사상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매우 정합적인 <세계관>을 구축한 데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업적 한가 지만으로도 헤르더는 서구 문명사에서 독특한 자리를 얻기에 충분 하다. 발명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로크나 루소에게서, 벤담이나 마르크스에게서, 아퀴나스에게서, 심지어는 헤겔에게서 진정으로 독창적이라 할 만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 우리는 어렵지 않게 각 학설의 선구적 <원천들>을 추적할 수 있 지만, 그런다고 해서 이 사상가들의 독창성이나 천재성이 훼손되 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속담에 이르듯이 <나폴레옹 금화 를 바꾼 거스름돈은 더 이상 나폴레옹 금화가 아니다.> 그러나 나 의 목적은 헤르더의 업적을 전체적으로 평가하는 일이 아니라, 단
지 헤르더가 정말 혼자만의 힘으로 창안한 독자적 학설들을 검토 하는 일이댜 그리고 내가 그 학설들을 논의하는 것은 그것들을 역사적으로 정당하게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 그것들을 우리 시대에 대해 풍부한 관련성과 홍미를 제공하는 견해들로 평 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만일 내가 옳다면, 헤르더의 최종적 주 장이 그의 사상 중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독창적이었던 업적에 의 존해서 재구성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헤르더의 엄청난 영향력으 로 인해, 그가 혼자만의 힘으로 세상에 내놓은 독창적인 업적은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그늘에 가리워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제 21 장 헤르더의 핵심 개념들 인민주의,표현주의,다원주의
이 연구의 세 가지 주제들로 되돌아가 보자. 그것들은 다음과 같댜 l 인민주의 pop u l is m . 인민주의란 어떤 집단이나 문화에 속하는 가치에 대한 믿음으로서, 적어도 헤르더에게는 정치적 개념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민주의는 거의 반(反)정치적 개념으로 서, 민족주의와는 구별될 뿐만 아니라 대립되기까지 한다. 2 표현주의 exp re ssio n i sm . 표현주의란 넓게는 인간의 모든 활 동, 좁게는 인간의 기예 art가 개인적 혹은 집단적 개성의 표현이 요 그 같은 표현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좀더 구체 적으로 말하면, 표현주의는 인간이 만든 모든 작품들은 무엇보다 도 말하는 목소리로서, 그것들을 만든 자들로부터 분리된 대상들 이 아니요 사람들끼리의 생생한 의사소통 과정에서 일부를 이루는
1) 나는 이 용어를 20 세기 초 10 년 간의 표현주의 화가, 작가, 작곡가들을 특 별히 참고하지 않은 채,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것이라고 주장한다 . 인간이 만든 것들은, 아름답든 추 하든, 흥미롭 든 진부하든,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실체들이 아니다. 그 것들 은 마 치 과학자가-혹은 범신론이나 신비주의에 물 들 지 않은 누구 든지 -자연적 대상을 관찰하듯이, 외부적 관 찰 자가 냉정하고 감정없이 관찰할 수 있는 대상들이 아니다. 이 같은 견해는 다음 과 같은 더욱 심원한 착상으로 이어진다. 인간이 자기 를 표현하는 온갖 형식들은 어떤 의미에서 예술적이라는 것, 자기표현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부분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러한 착상은 다시 통일 적인 삶과 분열된 삶, 혹은 참여적인 삶과 비참여적인( 즉 비성취적 안) 삶을 구분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 따라서 그것은 인간적이며 비 인간적인 다양한 장애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며, 결국은 자아의 실현이 자기 표현의 가장 풍부하고 가장 조화로운 형식이라는 결 론으로 귀결된다. 3 다원주의 plu ralism . 다원주의 란 다양한 문화들과 사회 들의 가 치는 복수적이어서 동일한 기준에 의해 판단될 수 없다는 믿음이 댜 여기에는 똑같이 가치 있는 이상들은 불가공약적이라는 믿음 이 첨가된다. 이러한 믿음들은 이상적 인간이니 이상적 사회니 하는 개념들이 본질적으로 모순이요 무의미라는 혁명적 결론을 낳는다 . 이 세 가지 테제들은 하나 하나가 새로운 것들로서 , 계몽주의의 핵심적인 도덕적 • 역사적 • 미학적 입장들과는 양립할 수 없다. 또 한 이 테제들은 서로 관련된다 . 헤르더의 저작들이 전개하는 무한 하고 다양하고 풍요로운 파노라마에서는 서로 관련되지 않는 것이 없댜 그렇지만 헤르더를 마치 강박관념처럼 짓누르고 있는 주제 가 있는데, 그것은 차이 속의 통일성과 통일성 속의 차이라는 개 념이다. 한마디로 일자 One 와 다자 Man y 사이의 긴장은 헤르더의 모든 논의를 관류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헤르더의 전 체계에서
다음과 같은 불변적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개성은 그것이 이끄는 삶의 형식과 함께 < 유기체적 > 단일성을 갖는다는 것, 즉 육체적 요소들과 정신적 요소들 , 이 를 테면 지성이며 의지며 느낌이 며 상상이며 언어며 행동 등은 모두 경험적으로나 형이상학적으로 나 통일되어 있다는 것 반면에 구분이며 분류는 잘 해봐야 피상적 인 것이요 최악의 경우에는 오류에 불과하다는 것. 사고와 감정의, 이론과 실천의,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통일성에 대한 강조. 우주 를 단일한 과정으로 전망하려는 평생에 걸친 외골수의 영웅적인 노 력 헤르더의 가장 널리 알려진 야심작 『 인류의 역사철학을 위한 시 론 ldeen zur Phil o sop h ie der Geschic h te der Menschhe it 』 은, <지 구는 여러 별들 중의 한 별 > 이라는 대단히 이채로운 구절로 시작된댜 뒤이어서 지질, 기후, 광물, 동식물 등을 다룬 장들이 등 장하고, 자연지리학에서의 교훈들이 등장하며 , 마지막으로 마침내 인간이 등장한다 이 과정에 상응하여, 모든 기예들과 모든 과학들 을 연결지우려는, 죽 종교적 • 예술적 • 사회적 • 정치적 • 경제적 • 생물학적 • 철학적 경험들을 단일한 활동의 여러 측면들로 묶으려 는 노력이 뒤따른다. 이처럼 패턴은 단일하기 때문에, (헤르더로서 도 정통했지만 별로 영향받지는 않은 흄과 칸트에게는 실례의 말이 될른 지는 몰라도) 사실과 가치는 분리되지 않는다. 헤르더에 의하면, 한 사물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이 주어진 상황 속에서 특수한 문화 나 전통에 의해 관찰되고 평가된 그대로 그것을 관찰하고 평가하 는 법을 안다는 뜻이댜 다시 말해,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인에 게, 혹은 리보니아의 농민에게, 혹은 고대 히브리인에게, 혹은 아 메리카 인디언에게, 믿음이며 제식이며 신화며 시며 관용어가 무 엇을 의미했고 삶에서 무슨 역할을 했는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바 단 과학적 혹은 상식적 설명을 제공하는 일일뿐만 아니라, 그 같
은 활동의 이유나 정당화를 제공하는 (적어도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 는) 일이기도 하댜 인간의 경험과 태도를 설명한다는 것은, 바로 설명자가 공감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피설명자들 > 의 상황에로 자 기를 옮겨 놓을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수한 방식 의 생활이며 느낌이며 행동을 정합적으로 이해하고 전달하는 일이 요, 그렇게 함으로써 그 상황에서는 <자연스럽게 > 받아들여지던 삶과 전망에서 그 같은 행동이나 행위가 수행한 역할을 이해하고 전달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헤르더는 설명과 정당화를 하 나로 묶는다. 죽 원인들이며 가시적 요소들에 대한 설명은, 목적들 이며 비가시적인 요소들에 대한 이해와 융합된다. 헤르더는 사실 적 명제들이 그것들에 어울리는 역사적 가치기준에 의한 판단적 명제들과 함께 단일한 유형의 사고에 속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요 컨대 헤르더는 사실과 가치의, 이론과 실천의, <현존재 > 와 < 당 위>의, 지적 판단과 정서적 참여의, 생각과 행동의 통일성이라는 불후의 관점을 창조한 인물들 중 하나이다. 헤르더를 매우 가혹하게 평가하는 비평가들차도, 헤르더의 상상 력이 지니는 힘과 너비에 관해서만은 늘 용인하는 편이다. 헤르더 는 놀라운 능력으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실재해 왔고 실재가능해 온 다양한 사회들을 상상했을 뿐만 아니라, 그 사회들 하나하나에 대해 비길 데 없는 따뜻함으로 공감했다 . 삶의 형식들을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에 고무된 그는, 다양한 삶의 형식들 속에 체현된 충실한 인간경험을 개별적 삶의 형식으로부터 이끌어내는 일에 즐 거워했다. 어떤 문화나 어떤 개인이 기묘하고 특이하면 할수록, 그 의 즐거움은 더욱 커졌다. 그로서는 특색이나 개성을 자랑하는 것 울 비난할 이유가 없었다. 그에게는 인도인과 아메리카인과 페르 시아인이 똑같이 매력적이었듯이, 그리스와 팔레스타인도, 아르미
니 우스 Jac obus Armi n i us0560 - 1609) 와 마키 아벨리 도, 셰 익 스피 어 와 사보나롤라 Savonarola 도 똑같이 매력적이었다. 헤르더는 삶에 서든 역사책에서든, 어떤 생활방식이나 문화를 다른 생활방식이나 문화로 획일화하는, 혹은 동화시키는 강제력들을 지극히 증오했다. 그는 신중한 자세로 통일성을 추구해갔지만, 그롤 매료시킨 것은 차이였다 비록 그는 한 속(屬, g enus) 과 다른 속 사이에 벽을 세우 는 것을 비난했지만, 그는 속 내에서는 종( 種, s p ec i es) 들을, 종 내 에서는 개체들을 최대한 많이 구분해내기 위해 노력했댜 특수한 역사현상과 문화현상들에 대한 감수성을 계속 유지할 필요가 있음 을 헤르더에게 설파한 인물은 하만이었다 . 하만에 의하면, 논리정 연한 개념체계에 따르는 분류와 일반화는 개체에 대한 감수성을 둔화시키는 경향이 있는 바, 이 치명적 경향은 자연과학과 자연과 학의 노예인 프랑스인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프랑스인들은 과 학적 방법을 만사에 응용하여 만사를 뒤바꾸려 했다는 것이다. 하 만처럼 헤르더도 어린아이 같은 감수성을 유지했다. 이것은 감각 이며 상상력이며 종교적 계시며 역사며 예술이 제공하는 들쭉날쭉 하고 비규칙적인 자료들, 따라서 언제나 엄밀하게는 기술되기 힘 든 자료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능력이기도 했다. 그는 자 료를 서둘러 개념에 끼워 맞추지 않았다. 말하자면 개념들의 박물 관에서 적절한 개념을 잽싸게 찾아내서 자료들에 적용하는 것을 멀리했댜 오히려 그는 사실을 거의 신성시하는 새로운 경험주의 정신으로 충만해 있었댜 비록 하만만큼은 아니지만, 레싱이나 디 드로보다는 좀더 크게, 콩디야크나 엘베티우스 같은 형식적 유물 론자나 <감각론자>보다는 훨씬 더 크게, 헤르더는 이질적이고 다 양한 경험들을 동질적 단위들에 의해 환원시키려는 유혹을 벗어나 있었다. 경험들에 대한 예측과 통제가 가능하도록 경험들을 분류
하고 이론적 틀에 끼워 맞추려는 유혹을 그는 단호하게 물리쳤다 . 헤르더의 관념들이 현란하기만 할 뿐 일정한 형식을 제대로 갖추 지 못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열정적이고 혼란한 정신을 타고 태어났다는 이유 못지 않게, 사실들 자체의 복잡성에 대한 그의 뛰어난 감수성도 이유가 된다. 헤르더의 문체는 현란하고 난 삽할지언정 불명료하거나 모호하지는 않았다. 그의 열정이 최고조 에 달했을 때조차도, 몽유병이나 자아도취증의 증세는 없었다. 그 는 가장 감상적인 경우에도, 자기 동시대 독일의 형이상학적 시인 들인 글라임 Gle i m 이나 우즈 Uz 나 클롭스톡 Klo p s t ock 처럼, 혹은 괴 테가 이따금 그랬던 것처럼, 현실로부터 이상적인 천국에로 비약 하지 않았다. 위대한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 중에는 , 자기들의 독 창적인 통찰력을 극단적으로 과장함으로써 영향력을 얻는 사례가 허다하다. 그러나 헤르더는 자기가 보고 느끼고 듣고 배운 것을 결코 벗어나지 않았댜 그의 분석력은 빈약했을지 몰라도 , 현실구 조에 대한 감각은 구체적이다. 이 점은 우리가 앞으로 논의할 헤 르더의 세 가지 독창적인 테제들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을 것이 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독창적인 테제들은, 더욱 논리정연하고 명 석한, 더욱 많은 논리적 재능을 타고 태어난 사상가들을 자극하기 에 충분한 원천이 될 수 있었다.
제 22 장 인민주의
헤르더의 인민주의, 즉 한 집단에 속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 한 헤르더의 대답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기로 하자. 헤르더가 18 세기 계몽주의의 위대한 이상들을 옹호한 전형적인 거의 판에 박힌―一 」 안물로서 경력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 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인도주의자이자 세계시민주의자이자 평화 주의자로서의 그의 초기 경력은 대체로 동의를 얻고 있다. 마찬가 지로 그의 후기 경력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는 그가 보다 반동적 인 입 장으로 나아갔다는 가정 이 수용되는 것 같다. 말하자면 후기 의 헤르더는 이성과 지성을 민족주의에, 프랑스 공포증 Gallo p hob i a 에, 직관에, 전통에 대한 무비판적 신앙과 믿음에, 종속시킨 인물 로 평가된다. 그렇지만 결국 헤르더 세대는 물론 뒤이은 세대의 독일 사상가들 사이에서 이 같은 추세는 어느 정도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독일 사상가들은 처음에는 거의 예의 없이 프랑스혁 명을 열광적으로 환영했고, 자유의 나무를 옮겨 심기 위해 노력했
으며, 300 여 독일제후들의 통치를 시대에 뒤진, 잔인하고도 억압적 인 체제로 비난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공포정치에 의해 억압되고 독일이 프랑스혁명군, 특히 나폴레옹의 군대에 의해 군사적 굴욕 울 당하면서부터, 그들의 태도는 돌변했댜 이후로 그들은 애국자 로, 반동주의자로, 낭만주의적 비이성주의자로 변신해 버렸던 것이 다. 그 누구보다도 피히테가 이 길을 따르지 않았던가? 괴레스며 노발리스 Noval i s 며 슐레겔 형제며 슐라이에르마허며 티크 T i eck 며 겐츠 Gen t z 며 셸링이 이 길을 따랐고, 심지어는 위대한 자유주의자 실러마저도 상당한 정도로 이 길을 추종하지 않았던가? 오히려 괴 테와 훔볼트를(그리고 반동이 제 모습을 갖추기 전에 죽기는 했지만 포 스터 Georg Fors t er 도) 예 의 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오직 이 들만 이 민족주의로부터 벗어나, 이성이며 관용이며 인류의 통일성에 확실하게 충성하고, 칸트며 헤겔처럼 온갖 형식의 집단적 • 정서적 영감을 혐오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헤르더 역시 이성으로부터의 일반적인 후퇴라는 당시의 상황에 속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바록 헤르더는 독일 군대와 제후들이 나폴레옹에게 재기 불능의 참패를 겪기 전에 죽었지만, 헤르더가 세계시민주의자로서 출발했다가 민족주의자로 끝났다는 것 또한 사실이 아닌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헤르더의 경우에도, 상처받은 민족적 자부심이라든 가 어쩌면 젊은 날의 유토피아주의가 나이들면서 식어갔다는 점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 그러나 나로서는 이 러한 견해를 지지할 수 없다. 피히테나 슐레겔이 입장을 어떻게 뒤바꾸었든지 간에, 헤르더의 민족주의는 일생 동안 불변적 형식 으로 유지되었다. 그의 민족주의적 감정은 원래부터 정치적이지 않았을 뿐더러 뒤에 정치적으로 바뀐 적도 없었다 . 동시에 그는 출발부터 지녔던 보편주의라는 특수한 상표를 끝까지 떼버리거나
수정하지도 않았다. 민족주의와 보편주의라는 양대 경향이 조화를 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간에, 헤르더는 평생에 걸친 방대한 지적 활동에서 이 두 가지 경향을 끝내 유지했다. 헤르더는 21 살에, 공식적으로는 러시아에 속한 도시인 리가Rig a 에서 루터교회의 목사직을 맡았다. 그는 이미 1765 년의 한 설교문 에서 < 우리는 여전히 고대인들처럼 공화국과 조국을 유지하고 있 는가? > 라고 질문하고는,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고 못박았 댜 그리스에서는 폴리스의 힘이며 영광이야말로 모든 자유 시민 들의 지고한 목표였다. 종교, 도덕, 전통 등 인간활동의 모든 측면 들이 도시를 유지하는 데서 유래했고,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 되었다 도시를 위협한다는 것은 모든 자유민들의 존재와 생계에 대한 위협이었다 . 도시가 무너진다면, 모든 것이 도시와 함께 무너 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출현과 함께 인류의 지평은 가늠 하기 힘들 만큼 넓어진다. 헤르더에 의하면 기독교는 보편적 종교 이댜 기독교는 보편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21 숭배하는 편에서, 지 역적이고 일시적인 충성들을 모두 초월한다는 것이다.
ll I, 13-28.
2) 같은 곳 .
이러한 테제는 독일 계몽사조의 기독교적 인문주의에 고유한 특 징이었던 바, 헤르더는 이 같은 관점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 댜 포기했다는 주장이 여러 각도에서 제기되어 왔지만 말이다. 실 제로 헤르더가 말년에 자기의 핵심 신조를 피력한 구절들은, 초기 저작들에서 등장하는 다음의 구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기의 조국을 자랑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허세는 없다. 국가란 독초와 약 초가 뒤섞인, 악덕이며 어리석음이 미덕이며 장점과 뒤섞인, 야생 의 정원이다. 돈키호테라면 이 둘시네아 Dulc in ea 아가씨를 위해
무슨 싸움을 벌일 것인가 ? >3 1 애국주의는 민 족 주의와 다르다. < 가 족, 언어, 태어난 도시, 태어난 나라, 태어난 나라의 전통 같은 것 들에 대한 순수한 집착은 비난받지 말아야 한다 .> 그러나 < 도발 적 민족주의 > 는 어떠한 변장한 모습으로 표현되든 비난받아 마땅 하다. 전쟁은 범죄일 뿐이다. < 모든 대전쟁은 본질적으로 시민들 끼리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 만인은 형제요 전쟁은 끔찍하기 짝 이없는 근친상잔이다 > 4l 1 년 후에 헤르더는 < 우리에게는 아킬레 스 Ac hi lles 보다 고귀한 영웅들이, 코클레스 Hora ti us Cocles 보다 고 결한 애국자들이 있어야만 한다 >5) 라고 덧붙인다 . 이 같은 초기의 어조는 말년인 1794 년에도 다음과 같이 되풀이된다 . < 서로 다른 조국이 전투에서 피흘리며 싸운다면, 조국이라는 단어는 인간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최악의 야만을 뜻할 것이다. > 혹자는 독일처 럼 수백 명의 세습 제후들이 나누어 통치하던 취약하고 분열된 나 라에서 정치적 민족주의를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 비현실주의적인 전망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헤르더의 이 같은 견해를 해설하곤 한 댜 18 세기의 독일에서 정치적 민족주의를 기대한다는 것은 역사 적 감각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이 런 해설을 수긍할 수 없댜 독일 못지않게 분열되고 정치적으로 무기력하던 이탈리아인들은, 일반적인 사회 • 정치적 상황이 18 세 기 독일과 대동소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마키아벨리 이후로 는 정치적 통일에 대한 열망을 뚜렷하게 발전시켜가지 않았던가. 헤르더는 당시의 계몽주의에서 전형적인 태도를 취했음이 분명 하다. 그러나 요점은 그가 이러한 태도를 끝까지 내버린 적이 없다
3J xvn, 211 .
4) XVII, 319.
5) XVIII, 86.
는 점이댜 비록 그는 친족관계며 사회적 연대며 민족성 Volkstu m 이며 민족자존을 신뢰했지만, 국가에 의해 자행된 온갖 형식의 중 앙집권화와 강압과 정복을 혐오하고 비난하는 자세를 말년에 이르 기까지 유지했다. 그는 하만과 함께, 이 같은 짓을 자행하고 신화 화하는 국가를 저주스러운 것으로 바난했다 . 자연은 민족을 창조 했지 국가를 창조하지는 않았다 . 6’ <국가는 집단을 위한 행복의 도 구이지 >\ 사람들 자신을 위한 도구는 아니다. 헤르더가 무엇보다 도 설득력 있게 탄핵한 대상은 제국주의이다. 제국주의는 한 공동 체가 다른 공동체에 의해 분쇄되는 것이요, 정복자의 군화발에 짓 밟혀서 지역 문화들이 말살되는 것이다. 그는 긴 세월 동안 지속 된 전통들과 제도들에 대해, 뫼저에 못지않게 우호감을 보여 준다. 장구한 전통들과 제도들은, 인간공동체 내에 통일성과 연속성을 유지해 온 특색 있는 다양한 생활방식들을 낱낱히 체현한 것들이 기 때문이다 헤르더는 결코 르네상스적 의미에서의 <덕성 virtu> 울 염두에 두지 않는다. 더 이상 알렉산더 대왕이며 케사르며 샤 를마뉴 대제는 각기 자기 시대의 <덕성>을 체현한 영웅으로 간주 되지 않는댜 국가의 토대는 정복이요, 국가의 역사는 폭력의 역 사, 피로 점철된 침략의 역사일 뿐이다. 국가란 익시온의 수레바퀴 Ixion 's Wheel 와도 같아서, 무의미한 자기 희생을 요구한다 <어째 서 온 백성이 왕관 쓴 광인의 변덕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 혹은 계
6l XIII, 340, 375. <지구상의 '수백만'의 사람들이 국가 없이도 잘 살고 있거 니와·…·아버지와 어머니, 남편과 아내, 아이와 형제, 친구와 부하 같은 것 들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자연적 관계들이다 . 반면에 '국가’는 우리에게 인위적 책략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불행하게도 국가는 우리로부터 훨씬 더 중요한 어떤 것을 빼앗아 간다. 죽 우리로부터 우리 자신을 약탈해 가는 것이다 >(XIII, 340-341).
7) X 田, 333 ff.
몽철학자phi loso p he 의 공상이 낳은 꿈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 기아 와 추위로 고통받아야 한단 말인가? > 이 구절은 프리드리히 대왕 과 프랑스 출신 왕실고문들을 특별히 겨냥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 의미는 보편적이다.
사람이 사람을 통치한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든 자연스럽지 못 한 일이다. 진정한 인간적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남편과 부인 의, 자식들끼리의, 형제들끼리의, 친구들끼리의, 사람들끼리의 관계 이다 이 같은 어휘들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자연스러운 관계 룰 표현해 준댜 국가는 우리에게 반목과 정복 , H) 가장 나쁘게는 인 간성의 말살을 선물할 뿐이다( < 기계 톱니바퀴의 이빨 하나로서 살아 간다는 것에 무슨 기쁨이 있겠는가 ? > 9 ) ). 하느님은 특이 한 사냥꾼 니므 롯 N imr od 이 세계를 통채로 정복하지 못하도록 산맥들과 대양들으 로 나누었댜 헤르더의 『인류의 역사철학을 위한 시론』은 정복의 역사를 인간 사냥꾼의 역사로 묘사한 점에서, 사회주의 역사가들 을 앞질렀댜 헤르더는 모든 문화들이나 민족들을 공감적인 자세 로 공평하게 보겠다는 스스로의 맹세에도 불구하고, 피정복 민족 들의 문화를 짓밟은 로마를 용서하지는 않았다. 로마의 정복은 효 율성과 통일성 면에서 장점이 있을지 몰라도, 그 같은 장점이 파 괴의 비극을 상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로마는 인류가 스스로를 표현한, 자발적이고도 자연적인 다양한 표현 형식들을 통채로 말 살하는 야만적 범죄를 저질렀을 뿐이다. <자연이 언어며 관습이며 특성에 의해 갈라 놓은 사람들을, 누군가가 화학에 의해 인위적으 로 통합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 >101 이 같은 인위적 통일이야말
8) XXX, 333 ff
9) 같은 곳.
10) XVIII, 206.
로 로마인돌이 원했던 것 이요 , 로마제국을 전체로서 유지해 주었 던 수단이다 로마의 < 신성한 > 계승자 곧 신성로마제국도 더 나 을 것이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이질적 문화들을 얼기설기 끼워 맞춘 기형에 지나지 않는댜 그것은 국가라는 아무 애국심도 불어 일으키지 못하는 상징 하에, 사자의 머리, 용의 꼬리, 독수리의 날 개, 곰의 발톱을 끼워 맞춘 괴물에 불과하댜 Il l 오늘날 <기생충 같 은 고리대금업자 >12 ’ 로 불리우는 유태인들조차도 결코 자기 숭배자 들은 아니었댜 오히려 그들은 팔레스타안 지방울 세계의 근원지 이자 중심지라고 우기지도, 자기들의 조상을 이상화하지도, 자신들 의 족보를 신이나 반신반인(半神 半人 )으로부터 시작하지도 않았던 바 (특히 이 마지막 태도는 산개된 유태민족의 생존을 가능하게 해준 것 이었는데),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칭찬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13 1 모
11) X 血 38. 5.
12) XIV , 65.
13) 헤르더는 유태민족의 생존에 매료되었다. 그는 유태민족을 그 나름의 고 유한 특징을 지닌 민족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례>로 간주했다 (X , 139) . < 모세는 자기 민족의 마음을 그들의 고향 땅에 묶어 두었다 >(XXX, 115). 영토 , 공통어, 전통, 친족감, 공통의 전통, 자유롭게 수용된 <성약(聖約)>으 로서의 공통법_이 상호연관된 요소들은 , 유태인들의 성서에서 바롯된 유대감과 더불어, 유대인들로 하여금 분산된 가운데서도 자기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특히 유태인들로 하여금 본래의 지리학적 고향 에 관심을 모우도록 만들어 주었다 (XII, 115; vm, 355; XVII, 312). 여기서 요점은 인종이 아니라 역사적 연속성이다 (XII, 107). 이것이 역사적 개별성 울 창출하는 것이다 (XII, 123; XXXII, 207). 이 주제를 일반적으로 다루되 특히 종교적 관점보다는 민족적 • 정치적 관접에서 <유대인 문제>_홋 날 시온주의적 해결책이라 불리우는 것에 의해 해결된 __- 에 집중한 논고 로는, 바너 드 교수가 Jew i sh Soc ial S tu d i es 에 기 고한, Herder and Israel 이라는 홍미 있는 논문이 있다. 바너드 교수는 친절하게도 필자가 이 논문 을 출판 전에 읽도록 배려해 주었다. 바너드의 다른 논고, The Hebrews and Herder's Poli tica l Creed, Modem Lang ua g e Revie w , vol, UV, 1959 도
든 제국들, 특히 다민족적 제국은 강제력에 의존해서 다양한 종족 들과 민족들을 단일한 주권 밑에 마구잡이로 뒤섞는다 . 따라서 제 국은 발이 약해지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 오히려 정신적 힘이나 종교적 힘 같은 비정치적 원리에 의해 통치하는 신정정치국들 , 이 를테면 중국이나 이집트는 비기독교적 신앙을 채택했음에도 불구 하고, 더욱 오래 지속되었음이 입증되었다 . 비기독교적인 신이더라 도 신의 말씀은 단지 잔인한 무력보다 좋다 . 권력에 대한 야망과 사랑 때문에 폭력에 의존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겠지만, 아무리 빈곤하고 아무리 불쾌한 경우에도 폭력의 사용은 정당화될 수 없 다. 뫼저가 그러했듯이 헤르더도 독일인들이 가난에 굶주리고 멸 시당하는 현실을 한탄했다. 뿐만 아니라, 케플러가 굶어 죽었다는 사실, 독일말하는 사람들이 영국이며 러시아며 트란실바니아 등지 로 분산되거나 추방당했다는 사실, 천재적인 예술가들과 발명가들 이 조국으로부터 쫓겨나 자기들의 재능을 외국인들에게 쏟고 있다 는 사실, 헤쎄 지방민들이 가족들의 생존을 위해 < 흑인노예 > 처럼 사고 팔린다는 사실一~이 모든 사실들에 헤르더는 개탄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답이 아니었다 . 헤르더는 평생동안 제국 주의의 어리석음과 잔인함을 강조했다.
헤르더는 역사철학에 대한 처녀작(『인간성의 형성을 위한 또 하나 의 역사철학 Auch ein e Phil os oph ie der Geschic h te zur Bi /d ung der Menschhe it 』 , 1774) 에서, 로마정복자들을 < 피와 탐욕과 사악함으로 어울어진, 핏자국만을 남긴 집단>으로 언급했다 . 20 년, 30 년이 지 나고 말년에 이르도록, 그는 고대와 현대의 잔학한 식민지 통치를 줄기차게 비난했다. 로마는 <외국인들을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관
참조.
습에 의해 재판했댜 > 로마는 자기의 관습을 폭력에 의해 강요하 여 , < 로마의 독수리가 피정복민들의 눈을 쪼아내고, 내장을 먹어 치우고, 그들의 비참한 시체를 자기의 연약한 두 날개로 덮을 > 때 까지 , < 피정복민들의 고유한 특성을 왜곡했다. > < 로마의 피로 얼 룩진 전제정치가 기독교와 결합한 시기는 결코 행복한 시절이 아 니었다 > .
로마가 그리스를 파괴했다면, 독일기사단과 최근에 개종한 폴랜 드인들은 프로이센인들을 학살했으며 < 가난한 발트인들과 화평한 슬라브인들 > 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는 『인류의 진보를 위한 서한 Brief e zur Befo d erung der Human it a t 』 (1 793-7) 에서 이렇게 물었 댜 < 무방비 상태로 신뢰하던 인류 앞에, 과연 유럽인들이 거짓이 며 탐욕스러운 사기며 폭력적 탄압이며 질병 등 치명적 선물만을 골라 제공하는, 타락한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지구 위에 우리 편은, 최상급 현자들은 커녕 가장 무 례하고 공격적이고 돈만 아는 자들밖에 없습니다. 유럽은 인류에 게 문명을 선물하지 않았습니다. 인류가 이룩한 문화들을 파괴할 수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파괴한 것이, 유럽이 인류에게 선물 한 전부입니다.> 이를테면 영국인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북부 고지에서, 유럽인들은 식민지에서마다 이런 파괴를 자행했다. 식민 지 원주민들은 <독한에 길든 나머지, 우리의 신앙으로 개종할 자 세를 갖춘 것으로 판단되었댜 >HI 헤르더는 1802 년에 『아드라스티 Adras t ea 』라는 시리즈물에서, 아시아인과 유럽인 사이의 대화를 상상하고 있다. 아시아인 (인도인)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네에게 약탈당하고 노예되고 살해당하고 땅과 나라를 빼앗긴 나머지 당신
14) V.M. Zhirm unsky, Jog n a nn Gotf ried Gerder(Gi kh l, Moscow/ Len ingrad , 1959, p. xli x) 에서 재인용.
네를 증오하는 사람들을 , 당신네 신앙으로 개종시키려는 습관은 여전하지 않습니까? 이 들 중 한 사람이 당신네 나라에 와서 거만 하게도, 당신네가 가장 신성시하는 것들 , 이 를 테면 당신들의 법이 나 종교나 지식이나 제도가 황당무계하다고 선언한다면, 당신 들 은 그 사람을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 유럽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 아니지요. 그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힘 , 선박, 돈, 대포, ‘ 문화’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 > 1 :;, 이 주제에 대한 헤르더의 태 도는 언제나 바타협적이고도 열정적이었다. 다른 예 들 을 들어 보 자. < 어떤 기독교 선교사가 죽어가는 노예의 머리에 물을 부었다 . 노예는 꽤 당신은 내 머리 위에 물을 봇습니까?'라고 물었다. 선 교사는 대가 천국에 갈 수 있도록’이라고 답했다. 노예는 ‘백안이 사는 천국에는 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대꾸하면서, 몸을 뒤집은 채 죽었다 .> J GI 뿐만이 아니댜 < 우리 유럽인들은 지금 이런 식으로 족쇄를 만들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들이 우리가 만든 족쇄로 우리 를 묶을 것이댜> 이 역설적인 결과를 헤르더는 마르크스 못지 않 게 확신하고 있었다. 타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들, 자기들의 제도를 남들에게 강요하는 자들은 결국 자기들의 무덤을 파고 있 는 셈이었다. 언젠가는 < 희생자들이 들고 일어나, 우리들의 슬로 건, 우리들의 방법과 이념을 사용해서 우리들을 짓밟울 것이다. > ' 독일인의 사명은 정복이 아니다 . 독일인의 사명은 사상가들과 교육자들의 민족이 되는 일이다 . 이것이 독일민족의 진정한 영광 이다.J ~t 인간에게 어울리는 목표는 지배가 아니라 희생 곧 자기희
15) 같은 책 . 16) Br iefe zur Befo r derung der Humanit at (l 793-1797), Lett er 114. 17) V, 576, 579. Barnard, Herder on So cial and Politi ca l Cu/tu re (Cambri dg e Un ive rsity Press, 1969), pp .13-15 를 참조. 18) 독일민족의 세속적 불행과 정신적 과제에 대한 헤르더의 생각이 가장 설
득력 있게 서술된 것은, 『독일민족의 영광 German Nati on al Glo ry』이라는 헤르더의 서한집에 수록된 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는 1792 년에 작성되 었으나, 얀 Jah n, 아른트 Arndt, 쾨 르너 Komer, 괴 레 스 둥의 부추김 에 의 해 독일인들이 민족주의에 열광하게 된,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1812 년에 사후 출판되 었다 (XVIIl, 214-216).
생이댜 헤르더는 온갖 종류의 약탈에 반대한다 . 자기방어 이외의 다른 목적을 위해 힘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다. 십자군은 설령 그 정신이 기독교적인 것이었을지라도, 헤르더로서는 가증스러운 군대에 불과하다. 십자군은 결국 인류의 다른 공동체들을 정복하 고 짓밟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헤르더는 합의 역시 사회의 잘못 된 토대로 본댜 합의라는 형식은 제 아무리 이성적이거나 자발적 일지라도 결국은 힘에 굴복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의 진정한 초석은 존경이며 사랑이며 가족애며 형평감이며 두려움 없 음이며 신중함이며 이타적 계산 같은 것들이 되어야 한다. 종교가 난해한 신비화의 원흉으로 발전해가고, 종교의식이 죽은 신앙고백 문을 암송하는 것으로 부패해가는 시기는, 바로 종교가 인간적 목 적을 망각한 채 공허한 기계적 예배로 변질해가는 시기이다. 이 때에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다른 세력, 특히 특히 국가와 국가지배자들의 도구로 화한다 . 니체가 그렇게 보듯이, 헤르더는 국가를 더할 나위없이 냉혹한 괴물로 본다. 헤르 더에게, 정치권력의 도구로 화한 교회와 성직자들은 인류사를 통 틀어 가장 혐오스러운 대상이다. 그는 볼테르며 돌바크와 한 목소 리로 이 타락한 교회와 성직자들을 성토한다. 국가에 대해 말하자 면, 국가는 인간으로부터 인간 자신을 약탈한다 .19) (이것은 루소의 말로 바꾸어도 차이가 없는 말이다). 국가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잊어 버리고 싶을 때 기댈 수 있는 일종의 마약이다. 말하자면 국
19) XIII, 341 .
가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창조하고 선택할 필요로부터 도망해서 자 기 충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하나의 방편이다. 뿐만 아니 라, 관료제의 완벽한 운용도 따지고 보면 마약중독의 일종이다. 관 료제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기계적 직능인들로 변모시키는 일종의 아편이라는 것이다. 물론 헤르더는 인간적인 면에서나 문학적인 면에서나 괴테며 실러와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괴테와 실러가 공동 집필한 『크세니 엔 Xen i en 』 (1 796) 의 구절들은 헤르더를 대변하 고 있댜 이를테면, 독일?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 나로서는 이 나라를 좀처럼 찾을 수 없다. 학문적인 것이 시작하는 곳에서, 정치적인 것은 멈춘다 . 『독일 제국 Das Deuts c he Re i ch 』 다론 예를 들자면, 당신들, 독일인들은 헛되 이도 국민 Na ti on 이 되고자 꿈꾼다 . 당신들은 그보다 먼저, 더욱 자유로운 인간으로 되는 법을 배워 라
『독일국민의 성 격 Deuts c her Nati on al Charak t er 』 요컨대 국가는 삶이며 전망이며 현실을 기계로 환원시키는 것이 었으니, 바로 이 점이야말로 루소 못지 않게 헤르더를 경악시킨 것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올바른 삶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자연적 단 위, 즉 공통의 문화로 결속된 사회 속에서 살아야 한다. 자연은 국가 아닌 민족을 만드는 바 ,꼬 l 그렇다고 해서 어떤 민족을 다른 민 족들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한 민족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고대 게 르만인들이 무슨 성품을 지니고 있었든지 간에, <그들을 유럽 내 하느님의 선민으로 추앙하는 것, 그리고 그들의 천부적 능력에 알 맞게 하느님이 그들에게 전 세계를 소유하고 다른 민족들로부터 섬김받을 권리를 부여했다고 믿는 것은, 야만인들의 천박한 허영 심에 불과하댜 > 2” 선민은 있을 수 없댜 2 I 한 민족을 형성하는 것 은 < 풍토>며 교육이며 주변 민족들과의 관계처럼 가변적이고 경 험적인 요소들이지, 인지하기 어려운 내적 본질도, 인종이나 피부 색 따위의 불변적 요소들도 아니다. 헤르더가 말년에 이야기한 이 모두는 순전히 계몽주의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 점에 서 헤르더는 칸트와 입장을 달리한다. 위대한 자유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인류학 An t hro p olo gi e 』에서 인종과 피부색을 크 게 강조하는데, 이에 대해 헤르더는 일종의 악의적 만족감을 느껴 가면서 이의를 제기한다(마찬가지로 하만도 칸트에 대한 공격에서 아 이러니한 쾌락을 맛보았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주인이 필요하다는 칸트의 주장에 대해서도 분개한다. <동물이나 주인을 필요로 하 지, 인간은 그렇지 않다.> '모) 이러한 관점에서 헤르더는 칸토의 역 사철학에로 비판을 확장해간다. 칸트의 역사철학은 개개인의 고통 이 인간의 종적(種的) 발전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추론에 기초하여, 인류의 악덕들, 이를테면 지구의 불충분한 자원들을 지배하려는
20) Xlll, 340, 375, 21) Zhir m unsky, 앞의 책, XVII, 212. 22) XVIll, 247, 248 . <서열이 있어서는 안 된다…… 백인이 흑인을 검은 짐승 이라고 생각한다면, 흑인도 백인을 타락한 인종으로 생각할 권리가 있다.> 이 구절은 Barnard, 앞의 책으로부터 재인용된 것이다. 23) Xlll, 383.
욕망은 경쟁과 투쟁을 자극하고 그럼으로써 진보를 자극하는 원동 력이라고 주장한다(이 같은 칸트의 주장은 헤겔에게서 가장 풍요로운 결실을 맺었고, 스펜서의 진화론을 위시한 각종 사회진화론 Soc i al Dar- w ini sm 을 통해 또 다른 형식으로 발전해갔다). 헤르더는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견지에서, 그리고 바이마르풍의 순수 세계시민주의 정 신에서, 칸트의 이 같은 입장을 반박한다. 이로부터 새로운 자각이 싹튼다. 종(種)으로서의 인간이니 사회니 문명이니 진보니 하는 것 들은 (훗날 사상가들이 말한 인류, 국가, 계급, 선택된 엘리트 등을 포함 해서) 추상자들에 불과한 바, 이 거대한 추상자들을 위해 개개인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설파하는 입장들은 한결같이 잔인하고 사악 한 뜻을 은폐하고 있다는 자각이 그것이다. 칸트는 헤르더의 일방 적이고도 부정확한 일반화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하면서, 헤르더의 일반화가 적절한 증거나 엄격한 논증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했음을 불평한다. 그러나 칸트의 불평은 헤르더가 어떤 의도에서 칸트를 · 논적으로 선택했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비록 칸트는 냉정하리만치 철저한 의무감, 인간의 도덕적 평등, 개인의 무한한 가치를 위해 노력한 투사였지만, 헤르더는 자기의 열정적 인 반인종주의와 반제국주의를 피력하기 위해서, 또한 스스로가 택한 길을 따라 발전해가는 모든 사람과 민족들의 권리를 방어하 기 위해서, 일부러 그 유명한 투사를 과녁으로 삼았던 것이다. 헤 르더는 다양성이 갈등을 수반한다고 보지 않았다. 그로서는, 어떤 공동체가 자기의 타고난 재능을 구현하가 위해 열심히 노력하면서 도 왜 다른 공동체들의 비슷한 헌신에 대해서는 존중하지 않는지 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 같은 헤르더의 입장에 대해, 『도덕의 형 이상학적 기초 Grundlegu n g zur Meta p h ysi k der S itt en .!I (1785) 나 『영구평화론 Zurn ewi gen Fr i eden 』 (1795) 에서의 칸트라면 동의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 인류학 』 과 보편사 논고들에서의 칸트는 동의하 지 않았을 것라고 단언할 수 있다. 칸트는 보편적이고도 절대적인 개인윤리를, 자연과정의 부조화로부터 예리하게 구분했다 . 개인윤 리는 자연이며 역사며 경험적 현상들과 전혀 무관한 초월적 합리 성에 토대를 두기 때문에 내면의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운 반면에, 자연과정은 종(種)의 유지며 경쟁과 투쟁에 의한 진보를 목표로 삼기 때문이었다.
헤르더는 칸트의 이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거부했다. 그로서는 칸트의 이원론이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경험을 등급별로 나누 고 , 정신기능로부터 육체기능을, 이성으로부터 상상력을, 이해며 도덕적 의지며 선험적 지식의 세계로부터 감각의 세계를 엄격하고 도 고정적으로 구획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인위적인 분할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구획은 철학자들이 쌓아 올린 <모래성>에 불 과한 바, 실재와는 결코 상응할 수 없는 것이었다. 헤르더의 세계 는 유기적이고 역동적이고 일원론적이었다. 헤르더의 세계는 저마 다 개성을 가진 모든 구성요소들이 무한히 다양한 관계들에 의해 상호연관된 세계였던 바, 이 무한한 다양성은 결국 분석불가능하 고 완전한 기술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1775 년에 이렇게 기록 했다. <유사성들, 유개념들, 순서들 단계들은 단지……아이들이 놀이에서 카드로 지온 집에 불과하다. 만물의 창조주는 사람들이 보듯이 사물을 보지 않는다. 창조주에게는 유개념이 필요 없기 때 문이댜 만물은 각기 스스로롤 닮을 따름이다.>있 I 또한 <나는 소 위 ‘물질적인 것’, ‘비물질적인 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 나는 자연이 이 두 항들 사이에 벽을 세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24) VIII, 315.
……나는 그것들을 어떤 곳에서도 보지 못한다.> ' 됴 ) 헤르더는 현실 의 어느 구석도 부분도 놓치지 않기 위해 부심했고, 불규칙적인 것들을 체계화하기 위해 지워 버리거나 생략하거나 마치 규칙적인 것들처럼 꾸미려 하지 않았다 . 말하자면 불규칙한 것들을 일반공 식에 의해 말끔하게 포괄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25) VIII, 177 .
헤르더가 전체를 충실하게 파악하려는 욕망, 즉 특수하고 복잡 하고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양상들을 남김없이 파악하려는 욕망을 물려받은 것은 그의 스승 하만으로부터였다(1 770 년 헤르더와 괴테와 의 만남을 통해, 이 같은 헤르더의 정신은 청년 괴테에게 매력을 주었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를 위한 헤르더의 노력은, <위대한 환원 주의자들 les gra nds s irnplifi ca t eur> 에 대해 반란의 기치를 높힌 몽 테스키외를 훨씬 능가한 것이기도 했다. 생명의 원천들은 아무나 엿볼 수 없는 신비이다. 한 사회나 시대나 운동의 내적 정신에 대 한 감각을 결여한 자들은 생명의 신비롤 엿볼 수 없다――-이 같 은 감수성은 프랑스 계몽주의자들과 이들을 흉내낸 독일의 모방자 들이 강조하는 해부에 의해 말살되고 있다. 하만이 그러했듯이 헤 르더도 명석함, 엄격함, 분석의 예리함, 이성적이고 질서정연한 정 돈 같은 것들은 이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지나치게 값비싼 희생 울 치루고야 얻어질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의미에서 헤르더는 버크나 메스트르에 못지않게 철저한 계몽주의의 비판자 였지만, 평동과 형제애에 대한 이들의 반동적 편견과 혐오를 공유 하지는 않았다.
제 23 장 표현주의
헤르더의 표현주의 이론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들과 깊히 연 관된댜 무엇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 <자연적인> 단위들을 결정하는가? 헤르더는 비록 가족과 가부장제를 인간결합의 근본 형식들로 간주하기는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나 루소의 입장을 터 놓고 지지하지는 않는다. 이들에 의하면, <자연적> 혹은 만족할 만한 인간사회는 사람들끼리 얼굴을 맞대고서 알 수 있는, (아리스 토텔레스의 표현을 빌리면) 한 사람의 목소리를 나머지 사람들이 모 두 들을 수 있는, 소집단들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크든 적든 인간 집단은 기후, 지리, 육체적 • 생물적 필요들, 그밖 의 유사한 요인들의 산물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집단은 전통과 기 억을 공유하는 덕택에 한몸으로 엮어지는 바, 이 공통의 기억과 전통을 매개하는 ___ 단순히 매개한다기보다 구현한다고 할 수 있는 ___ 주요한 고리가 바로 언어이다. <어떤 민족에게 조상의 언어보다도 귀중한 무엇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언어 속에
서, 전통이며 역사며 종교며 생존원리 등 그 민족의 모든 세계가 살아 숨쉰다.> 생각한다는 것은 곧 상징을 사용하는 것이요, 따 라서 사람들은 언어를 비롯한 상징들 없이는 사고할 수 없기 때문 이다. 여기서 헤르더는(앞서 비코가 그렇게 주장했듯이), 삶에 대한 사람들의 느낌들과 태도들이 숭배, 시, 제사 같은 상징 형식들 속 에 구현된다고 주장한댜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이 쾌락을 추구하 는 경우에든 필요를 채우려고 노력하는 경우에든 변하지 않는다. 춤이나 사냥처럼 신화며 정형화된 표상에 의해 표현되고 유지되는 사회적 결속의 원시적 형식들, 나아가서는 사람들을 서로 묶어 주 는 믿음과 행동의 관계망 전체는 공통의 상징, 특히 언어의 견지 에서만 설명될 수 있댜 헤르더는 언어가 바로 관념이라는 생각을 하만으로부터 배웠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관념에 의해 먼저 사고 하고 나서, 마치 다 자란 손에 장갑을 끼워 맞추듯이 그 관념에 <어울리는> 단어를 찾는 것이 아니다. 하만은 사고한다는 것이 곧 상징을 사용하는 것이라는 견지에서, 이룰 부정한다는 것은 불 합리한 일이라기보다 오류를 범하는 일이라고 가르쳤다. 만일 상 징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단일한 경험의 측면들을 서로 분리된 실체들로 오인하는 오류를 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데카 르트가 범한 치명적인 오류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데카르트는 마치 정신과 육체, 사고와 사고대상, 물질과 정신이 각기 독립적으 로 존재하는 실체들인 것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적어도 우리가 이 해하는) 하만에 따르면, 사고와 느낌, 사고의 대상과 느낌의 대상 사이를 구분하고 육체적 감각과 지적 • 도덕적 • 미적 깨달음 사이 를 구분한다는 것은, 어떤 때는 단일한 경험의 이런 측면에 주목
1l XVII, 58.
하고 다른 때는 저런 측면에 주목하는 갈팡질팡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이 같은 구분을 끝가지 밀고 나아간다면, 우리는 우리가 발 명한 가상적 추상자들 (혹은 이상화된 실체들)에 의해 실재를 일련 의 인공적 허구들로 변형시킬 것이다. 이 같은 결과는 논리정연한 과학적 분류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결국은 사실 들을 왜곡하고, 자연과 하느님에 대한 생생한 감각의 간단없는 흐 름을 죽은 파편들로 응결시키며, 참된 현실감각의 원천들을 압살 한다 . 상상력, 신성한 계시에 대한 의식 , 감각을 통한 현실과의 직 접 접촉 이 같은 현실감각의 원천들은 이성주의 논리학과 형 이상학에 의해 망가지지 않은 사람들만이 유지할 수 있는 것들이 다. 하만은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세계를 자연과 역사를 하느님이 인간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보았 댜 하느님의 말씀은 고문에 가까우리만치 시험하는 애매한 상형 어나 알레고리였다. 죽 하느님의 말씀은 상징이요 상징은 진리를 향한 입문인 바, 오직 바르게 보고 듣는 사람들만이 이 입문을 통 과하여 그들의 가슴과 머리에 쌓인 온갖 의문들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었다 . 21 하만 자신은 결코 환상을 좇는 사람이 아니었 다. 그는 특별한 계시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극심한 정 신적 위기의 와중에서 성서에로 관심을 돌렸을 때, 그는 유태민족 의 역사가 보편적이고도 초역사적인 진리를 구현한 것이라는 깨달 음에 압도되었다. 유태민족의 역사는 하느님에 대한 하만 자신의 ――나아가서는 만인의 -고통스러운 추구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댜 인간은 하느님의 이미지로 창조되었지만, 하만의 경건
2) 이 같은 견해와 여타 철학 체계들, 이를테면 버클리의 철학체계에 대해, 기독교적 신비주의와 신플라톤주의가 미친 영향은 아직 충분히 탐구되지 못 한 주제이다.
파 선조들이 가르쳐 주었듯이 죄많고 연약한 존재였다 . 인간은 비 틀거리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자기의 아버지이자 주인이신 예수의 음성을 들으려 노력할 때 다시 일어나는 존재였다. 인간의 안팎에 두루 거처하는 예수만이 인간을 온전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인간이 치유받으려면, 그 스스로 생명의 통일성에 굴종해야만 하며, 그 자 신의 영혼과 육신은 물론 정신이며 의지며 (특히) 감각까지 통채로 바쳐서 하느님의 뜻을 이해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하느님 이 성경을 통해서 직접 말씀하신, 그리고 자연의 작용과 인류사의 패턴을 통해서도 의도하신 바를, 전 존재를 바쳐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자연과 역사는 <말씀 Lo g os> 의 상징이요 암호 로서, 이를 읽을 수 있는 자격은 형이상학적 불가사의에 의해 왜 곡되지 않은 사람들만으로 제한되었다 . 하느님이 인간에게 선물하 신 모든 것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서, 그 어느 하나라도 부정한다 는 것은 곧 죄악이었댜 이를테면 격정도, 욕망도, 삶의 구석구석 에서 느끼는 환희의 감각도, 감각적 본성에 대한 감각도, 온갖 형 태의 창조와 생식에 대한 감각도 부정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물 론 이 같은 현실이 실재한다는 것이 증명될 수는 없었다. 흄이 옳 게 말했듯이, 어떠한 사실이나 사건도 이성에 의해 그 존재가 증 명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실이나 사 건을 받아들인댜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고나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감각지각에 주어지는 외부세계에 대한 동물적 믿음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 감각의 세계, 말의 의미 -이 모든 것들은 누군가가 자기 자신을 보이 고 들리고 존재하도록 만들려 할 때면 언제나 그에게 직접 주어져 서 가까히 존재하는 것들이다. 헤르더는 이런 신비주의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헤르더가 하만의
영향을 받은 대목은 이성주의적 분석에 대한 거부, 소박한 기독교 신앙, 거리낌없는 감각주의와 경험주의 같은 것들이었지, 성서의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단어들로부터 신비한 의미를 낱낱히 해석하 여 하느님의 숨은 목적을 이해하려고 하는, 하만의 특이한 신비주 의적 유명론 m y s ti cal no mi na li sm 은 아니었댜 무엇보다도 하만의 언어이론은 헤르더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즉 오직 언어만이 모든 이해와 모든 합목적적 행동에서 중추기관이라는 것,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활동은 타자에게(타인이나 하느님이나 자기 자신에게) 말하 는 활동이라는 것, 오직 언어를 통해서만, 개인이나 집단을 이해할 수 있으며, 개인이나 집단이 시나 제사 속에, 혹은 인간적 제도들 과 생활 방식들의 그물망 전체 속에 구현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 다는 것――一이 같은 하만의 위대한 계도는 헤르더에게 금과옥조 처럼 받아들여졌다.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인간이 의미했 고 의도했던 것, 혹은 전달하기 원했던 것을 이해하는 일이었다. 이 점에서 창조는 곧 의사소통이었다. 18 세기에 벌어진 인간언어 의 기원에 관한 대논쟁은 헤르더가 전 유럽적 명성을 얻는 기회로 작용했다. 이 논쟁에서 헤르더는 양극단을 피해가는 입장을 취했 다. 언어는 쉬스밀히를 위시한 정통 기독교 작가들의 주장처럼 하 느님의 돌연한 기적의 선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언어는 모 페르튀며 콩디야크 같은 프랑스 과학자들이 암시하고 몬보도 Monboddo 가 명시적으로 주장하듯이 마치 수레나 나침반처럼 삶의 개선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사람들 이 의도적으로 만든 발명품도 아니었다. 헤르더에 의하면 언어는 일종의 자연적 성장체로서, 자연적으로 성장하는 다론 형식들에 비해 더 신비하지도 덜 신비하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창조의 하느님을 믿는다면, 언어의 자연적 성장은 실로 신
성한 것이라 할 만하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인간에게 정신적 활동 울 수행할 수 있는 본성을 선물했는 바, 이 같은 인간본성이 성장 하기 위해서는 상징을 만들어 의사소통하고 의도를 전하는 능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바이마르 대공 휘하의 최고 성직자이 던 헤르더는, 이따금 루터교 목사로서의 본연의 신앙에로 되돌아 가기도 했다―~아마도 이러한 회귀는 하만에 의해 자극되었을 것이댜 다시 말해 그는 자기의 입장을 번복하여, 언어는 하느님의 순간적 창조 행위에 의해 인간에게로 이식되었거나 교시되었다는 주장을 인정하는 편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로서는 이런 믿음에 안주할 수 없었다. 언어를 사용할 수 있으리만치 영적으로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피조물이 어떻게 갑자기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된 다는 말인가? 더욱이 사고하는 일(그림이든 제스추어든 단어든 상징 울 사용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에게 어떻게 영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의문에서, 말년의 헤르더는 엄격 한 루터파 입장을 무시하고 원래의 신념에도 되돌아갔다 . 인간적 유대는 사람들끼리의 의사소통에 의존하는 바, 언어는 인간적 유 대감의 성장에 상응하는 자연적 과정이라는 신념이 그것이었다. 진정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는 것은 사고한다는 뜻이요, 사고한다 는 것은 의사소통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 사회와 인간은 하나 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생각할 수 없는 관계이다. 따라서 <언어적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순수 지성이란 지상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3 1 이 구절은, 순수 지성이 증명불가능 하다는 뜻이라기보다, 인간정신에 떠오를 수조차 없다는 뜻이다. 언어는 감정을 사물에, 현재를 과거에 연결지움으로써, 그리고 기
3l xn, 357.
억과 상상을 가능하게 만듦으로써, 가족이며 사회며 문학이며 역 사룰 창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헤르더는 언어로 말하고 사고하는 것이 < 유습된 이미지들이며 단어들의 강물에서 헤엄치는 일 > 과도 같다고 선언한다 < 우리는 이 매개자들을 믿고 따라야 할 뿐 창조 할 수는 없댜 > 아리스토텔레스나 현대의 언어철학자들에게 그러 하듯이 헤르더로서는 언어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된 인간이라는 관 념은——인위적인 자기고립을 제외하고는 ___. 이해하기 힘든 것 이댜 단순한 명상만으로 진리를 얻을 수는 없는 일이다. 오직 삶 만이, 즉 타자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면서 수행하는 행동만이 진리 를 낳을 수 있댜 헤르더가 보기에,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형성될 뿐만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라는 견지에서 정의되어야만 한 댜 우리는 비록 언어를 정화하고 개혁할 수는 있어도, 무로부터 언어를 창조하지는 못한다. 언어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사고가 필 요한데, 이미 사고는 언어롤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순 환관계는 깨어질 수 없다. 특정한 단어들이나 단어군들이 특정한 사물들과 맺는 관계는 논리학적으로나 형이상학적으로 필연적이 지 않다 . 단어와 사물의 관계는 인과적 혹은 규약적이다. 특정한 단어들은 온갖 부류의 특수한 경험들을 전달하는 데 사용된다. 경 험이 자연적 영향들이나 환경적 요인들-몽테스키외 이후로 모두 합쳐 < 풍토 c lim a t e> 라고 불리우게 된-에서 비롯된 것이 든, 심리적 요인들에서 비롯된 것이든, 단순한 우연에서 비롯된 것 이든, (이성을 결여한 상태에서) <자연적> 수단에 의해 몇몇 용어들 울 획득한 뒤에 자기들 내키는 대로 다른 용어들을 고안한 인간존 재들의 결정에서 비롯된 것이든, 경험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 가 반드시 사용된다. 이런 이치에 따를 때, 참 본질을 추구하는 입 장, 예컨대 개념적 분석에 의해 진리를 발견하려는 볼프 C hri s ti an
Wolf 류의 계획은 망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댜 오히려 < 본질 > 에 대한 파악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점에서는 로크가 옳았다. 실 제로 어떤 원문에서
4) XI, 225 뿐만 아니 라 XVII, 59; XVIII, 346; XXX, 8 둥도 참조.
<한 민족이 이보다 값진 무엇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시대들과 국민들을 더욱 깊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사나 전쟁 사의 가슴저리고도 실망스러운 경로를 추적하기보다 토착 문학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 정치사나 전쟁사에서는 어떤 국민이 통치되 었던 방식이나 학살되었던 방식밖에는 배울 수 없다. 우리가 토착 문학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훨씬 많다. 이를테면 그들이 어 떻게 사고했던가, 그들이 무엇을 염원했던가, 그들이 어디서 즐거 움을 찾았던가, 그들이 스승이나 그들 자신의 성향에 의해 어떤
방향으로 인도되었던가 등에 관해 배울 수 있는 것이다 . > 31 이런 맥락에서 헤르더는 발생론적 연구며 언어사적 연구의 중요성을 강 조한 한편, 비교언어학적 • 비교인류학적 • 비교민족학적 연구를 크 게 자극했댜 무엇보다도 헤르더는 문헌언어학 운동을 향해 큰 충 격을 가했는데, 이 운동은 그의 생애 말년쯤부터 다음 세기에 이 르도록 독일학계가 자랑거리로 삼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비코가 그러했듯이, 이 방향으로 헤르더 자신이 쏟아 부은 노력은 암시와 사색에 그칠 때가 많았다. 이를테면 헤르더는 라바터의 말을 인용 해서 < 언어의 외모에 대한 연구p h y s i o g nom y가 대단히 중요하다> 고 말한 뒤에, (그가 리가에 살면서 배운 러시아어처럼) 성(性)을 유지 하는 언어는 < 성 구별이 없는 > 언어와 전혀 다른 세계관을 함축 한다고 주장했다. 대명사의 특수한 용법도 동일한 함축을 지닌 것 이었다. 그밖에도 행동에 관련된 동사는 사물의 명명에 관련된 명 사보다 먼저 출현한다느니, 능동적 민족은 수동적 민족과 전혀 다 른 양식의 언어를 사용한다느니, 언어의 상이한 뉘앙스는 상이한 경험양식 (세계관)을 지시한다는 등의 주장이 개진되기도 했다. 헤 르더에게 논리는 산 언어나 죽은 언어로부터의 추상화에 지나지 않는다. 온갖 유형의 이성적 사고들이 가정하는, <심층적> 논리구 조는 어디에도 실재하지 않는다. 헤르더의 <언어철학>에 의하면, 구조적으로 동일한 언어들은 각 언어 사용자들의 경험 상 상당한 수준의 유사성을 지니는 바, 논리는 이 언어들 사이에 공통적인 그 무엇에 해당한댜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든 라이프니츠의 것이 든 칸트의 것이든 형이상학이나 논리학은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될 수 없다. 헤르더에 있어 이 열쇠는 인류학이다. 또
5) XVIll, 137.
한 언어의 역사는 개인들과 민족들에 공통적인 사회적 성장과정, 즉 유아기에서 청년기, 성년기, 노쇠기로 반복되는 순환과정 같은 현상들을 가장 명료하고도 연속적으로 드러내 준다. 언어와 사고 의 관계는 비록 양자가 한 몸을 이루고는 있지만 , 양면적 관계이 댜 사고를 영구적으로 가시화하는 기록술은 사회적 자의식의 지 속가능성을 보증해 주면서, 한편으로는 한 개인이 자기의 세계와 타자들의 세계들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같은 세계들을 사로잡아 강압하기도 한다. 기록된 것 들 은 , 늘 적응해가고 변해가는 생생한 과정을 겪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현실 경험이라는 분석불가능하고 파악불가능한 흐름을 지속적으 로 표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완전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려면 언어가 이 같은 표현력을 갖 추어야 하겠지만 ,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 요컨대 언어는 경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동시에 경험을 제한한다. 하만은 바짝 마른 사람들만 사는 계곡에 관해 언급하면서, 소크라테스며 성 바울이며 루터며 어쩌면 하만 자신 같은 < 선지자들 > 만이 그들 을 살찌울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헤르더는 시체들에 관해 언급한다. 시체 들 이란 화석화된 언어 형식들로서, 사람들은 때가 되면 기존의 언어 형식에 반발하여 다른 언어 형식 울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실로 언어 혁명들의 역사는, 인류사의 진 정한 혁명인 문화계승의 역사이다. 만인에게 공통적인 언어가 언 제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헤르더는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을 원하 지 않는다. 한편으로 그는 단일한 세계, 단일한 근본적 인간 개성, 만물의 <유기체적> 상호작용 같은 관념을 고수한다 . 이런 관점에 서 그는 볼프와 칸트가 범한 추상화며 파편화의 어리석음과 위험 성을 강조한다 . 그들은 심리학에서, 그리고 정신과 육체를, 영혼과 자연을,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을, 역사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과정에서, 단일한 인간 개성을 별개의 기능들 로 쪼개는 파편화와 추상화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헤르더는 기독교인이기도 하다 . 기독교인으로서의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성서에서 한결같이 피력된 자연 종(種)의 교의에 헌신한다 . 자연 종으로서의 인간은 독특한 개성을 타고 태 어난다. 이 점에서 몬보도와 자연학자들은 오류를 범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인간이 원래부터 인간다운 개성을 지닌 존재이려면, 언 어는 이성이 결핍된 자연상태로부터(즉 동물이나 유인원적 지각형식 으로부터, 심지어는 무지각의 형식으로부터) 이성적 존재들이 점진적 으로 출현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선 물하신 것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6) 요컨대, 헤르더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언어와 하느님이 선물한 언어라는 모순을 조화 롭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
6) G. A. Wells 씨는 Herder and 사t er 에서 이러한 견해를 개진하고 있는 바, 필자가 보기에 그의 견해는 대단히 유익하다.
그렇지만 헤르더는 사고와 행동, 언어와 활동을 동일시하는 자 세만은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 그에게 시, 특히 고대 서사시는 순수한 활동이다. 그는 많은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아션에게 이끌리고 있다. 아마도 헤르더가 활동으로서의 시라는 착상을 이 끌어낸 것은, (비록 호메로스의 시가 <죽은 장식품>이 아니라 즉흥시라 고 언급하기도 하지만), 호메로스의 시편들보다는 아션의 시편들이 었던 듯하다. 어쨌든 고대 민족들의 시는 마술적이라는 특징울 갖 는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들의 시는 자연이나 그밖의 것들을 냉정 하게 기술(記述)한 것이 아니라, 행동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영웅을 향하도록, 사냥꾼이 되도록, 연인이 되도록 자극 한다. 시는 북돋우고 지도한다.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학자들로서
는 시를 음미할 수 없는 바, 시의 어휘들이 생겨난 조건과 유사한 상황에로 자기들을 옮겨 놓을 줄 아는 사람들만이 시를 이해할 수 있댜 헤르더는 리가로부터 낭트로 항해하던 중에, 선원들이 거친 바다를 견디어내는 모습을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자기들이 지배 하려 하지만 두렵기 그지없는 요소들과 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 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혹독한 훈련을 받은 이 강인한 선원들을 관찰하면서, 헤르더는 스칸다나비아의 태고적 음유시인들 Skalds 이 며 바이킹들이 활동했고 아이슬란드의 고대 신화들 Eddas 이 작성 되던 세계를 되돌아볼 수 있었댜 7 ) 평정한 문헌언어학자들이나 초 연한 문학적 탐미주의자들로서는 이 미지의 암흑세계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댜 그들은 이 작품들 속에서 음성과 전망을 드러내고 있는 세계를 재창조하는 데 필요한 힘을 결여한 채, 한가롭게 책 장이나 넘기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단어며 리듬이며 행동 온 단일한 경험의 여러 얼굴들이었다. 헤르더의 이 같은 생각은 오늘날에는 진부한 상투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코를 제외하면) 헤르더의 생각은 그의 동시대에는 결코 진부한 상투어가 아니었댜
7) 이 책의 제 25 장 서두를 참조.
헤르더는 1773 년에 이렇게 적었다. <더욱 야만적이어서 거칠고 자유분방한 민족일수록, 만일 그 민족에게 노래가 있다면, 노래는 더욱 야만적인 것, 죽 더욱 자유롭고 감각적이고 서정적으로 생생 한 것이 되기 마련이다 . > 이어서 그는 이 같은 노래에 생동하는 <이미지들의 생생함>을 <종이에 기록된 노래>에 비교한다. <야 만인 아폴로의 이 화살들은 마음을 꿰뚫고, 영혼과 생각을 나른 다.> <모든 세련되지 못한 민족들은 노래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모든 것에 대해 노래하고, 그리하여 역사를 노래 한댜 그들의 노래는 자민족의 기록보관소요 과학과 종교의 보고 ( 寶庫 )요…… 결혼 첫날 밤의 환희며 장례의 슬픔 같은 그들의 일 상사에 대한 그림이다 .> 따라서 그들의 노래를 통해 < 모든 이들 은 각기 자기를 묘사하며, 각자를 있는 구대로 드러낸다 . >8) 언어 며 내용이며 어조는, 이런 저런 민족들의 사고방식, 신념, 기원, 역 사, 혼합 동에 관해, 여행담들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전해 준다. 이 러한 단계를 넘어서면서 인위적 조작이 시작된다. 우선 단어들이 음악으로부터 분리된다 . 즉 < 점차 시인은 읽혀질 수 있도록……기 록에 매달리기 시작하는데 >, 이때부터 비록 기예는 획득될 수 있 을지 몰라도 , < 기적 같은 힘 곧 마술은 잃고 만다 . >9l 오늘날의 비 평가들 < 음절 수를 계산하는 자들 > , < 음율 분석의 전문가들>, 한마디로 죽은 학문의 대가들이 이 모든 것에 관해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 가슴! 따뜻함! 피! 인류애! 생명 !>IO J <나는 느낀 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 헤르더의 모토는 이런 것들이다. 질풍 노도 시대의 시인들이 헤르더의 저술들 속에서 자기들 자신을 발 견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8) Correspo ndence on Ossia n and the Song s of Anc ien t Peop le s. 본문의 인 용은 Bu rton Feldman 과 Robert D. Rich ardson, J r. 이 번역한 The Ris e of Modem My tho log y(l nd ian a Un ive rsit y Press, Bloom ing ton /Lo ndon, 1972), pp. 229-230 참조 . 9) Uber die Wi rk ung der Di ch tk u nst au f die Sit ten der Volker in a/te n und neuen Zeit en , 1778, pu bli sh ed 1781. 10) V, 538. 11) VIII, 96.
헤르더는 < 유달 U t al 과 니네투마 N i ne tum a 의 이야기를, 그 이야 기의 본고장인 섬을 바라보면서> 북해를 여행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영국의 해안 들 을 거쳐 프랑 스에 도착한 항해는 그를 매료시켰다. < 이곳은 바다의 심저와 하 늘의 천정을 잇는, 살아 있는 창조적 대자연 > 으로, 헤르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였다 . 현대의 < 우리는 거의 보거나 느끼지 못한 채, 단지 반성과 추론을 수행할 따름이다. > 현대의 시인들은 다른 사람들은 물론 자기들도 알지 못하는 거짓 정열들과 영혼의 성질들을 발명하여, <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상 상할 수도 없는 대상들에 대해 시구들을 짜맞추고 있을 뿐이다. > 헤르더는 손에 호메로스의 책을 들고 트로이의 폐허를 응시한 영 국학자 우드 Robe rt Wood 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 1 3) 그처럼 헤르더 자신도 위대한 아션이 묘사한 현장을 보기 위해서는, 그리고 < 살 아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노래를 듣기 위해서는 > 스코틀랜드 고 지대로 가야만 했다 . 결국 헤르더는 다음과 같은 생각에 도달했다. <그리스인들 역시… ••• 야만적이었다……그리스의 최고 전성기에조 차도, 그들 사이에는 고전학자의 편협한 시각에 의해 묘사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자연이 남아 있었다. > 이런 관점에서, 호 메로스는 태고적 전설로, 티르타이우스 T yrt aeus 는 발라드로 되돌 아간다 . 아리온Ari on 과 오르페우스 O rp heus 는 <그리스의 귀족 주 술사>로 환원되고, 사포 Sa ppho 의 노래는 <우리 시대에 리보니아 의 소녀들이 부르는 노래>와 유사한 것으로 환원된다 . 13) 그러나 오늘날 우리 학자들과 번역가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별볼일없는 시인 클라이스트 Ch riti an Ewald Kle i s t가 번역한
12) Von deutc h er Art und KunstU 775). 아션에 대한 그의 논문은 이 책에 실 려 있다. 13) On the Sim i la ri ty of Medie v al Eng li sh and German Poetr y, in Deuts c hes Museum, 1777.
랩랜드 La p land 지방의 노래를 예로 들어보자 . 헤르더는 자기의 신 부( 新婦 ) 카롤리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 나는 이 노래에 대한 클라이스트의 모조품들을 기꺼이 내던져 버리고자 합 니댜 학교도 글쓰기도 알지 못하고 하느님에 대해서마저 거의 모 르는 랩랜드의 젊은이가 원숙한 클라이스트보다 더 훌륭한 노래를 부른다는 데 놀라지 말길 바랍니다 . 결국 랩랜드의 사람들은 순록 을 끌고 눈 위로 활주하는 동안에, 혹은 애인이 사는 오라 Orra 호 수로 가는 길에 시간이 지체될 때마다, 즉흥적으로 노래를 지었을 테지요 . > 1 4 i 이와 비슷하게 스위스와 영국의 학자들은 호메로스, 단 테, 셰익스피어, 밀턴 등을 찬양했다. 허드 Hurd 며 영 Youn g이며 퍼시 Perc y며 로우드며 블랙웰 등은 고대 시 연구의 부활을 주도 했다. 이처럼 원시사회의 집단적 재능에 의해 이룩된 업적들에 환 호하는 분위기는, 루소의 자극으로 촉발된 것이었지만 , 헤르더의 열정적인 옹호를 통해 전 유럽적인 운동으로 전환되었다.
14) Lett er to Caroli ne Flachsland in 1771.
경험에 대한 순수한 표현들은 무엇이든 타당하다. 이 표현들이 서로 다른 까닭은 삶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요, 아마도 지구 축 이 24 도 정도 기울어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이치에서, 지역 마다 다론 < 풍토 > , 다른 경험, 다른 사회가 형성된다. 헤르더는 자기에게 믿을 만해 보이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즐거워한다. 물론 편애의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그는 로마인 들 고대 이집트인들, (동시대나 바로 앞선 세기의) 프랑스인들에 비 해, 그리스인들이며 독일인들이며 히브리인들을 편애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헤르더는 이 모든 민족들을 옹호하려는 자세 를 갖춘댜 그는 이 모든 민족들의 본질을 꿰뚫어 통찰할 수 있기
를 원할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그럴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헤르 더가 립스 L ipp s 나 딜타이나 크로체보다 100 년 앞서 발명한 < 감정 이입 E i n fii hlen > 의 방법이 그것이댜 이 방법에 의해 헤르더는, 환 경이 지시하는 독특한 방식에 따라서 생활하고 계획하고 행동하고 반응하고 사고하고 상상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댜 더 나아가서는 민족들의 생활 패턴들을 파악하여 각 패턴의 견지에서 각 민족을 정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대목 에서 핵심은 자연성장이라는 개념이다. 생물학적 • 정서적 • 지성적 측면에서, 자연은 <곧> 성장이댜 이것은 보드머와 브라이팅거가 아마도 비코의 <생성 nascim ento > 개념에서 힌트를 얻어 착상한 <자연성장성 Na t urw ii chs ig ke it > 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 자연성장은 자연발생적인 자연적 성장을 뜻하는 것이지, 브왈로데스프리오의 미학에서 말하는 정태적 <참 자연>이나 바퇴 Charles Ba t eux 가 말 하는 <선한 자연 la belle na tur e> 을 뜻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예술 가라면 단순 경험이라는 혼란으로부터 자연성장을 분별하고 드러 내는 법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자연적인 것들은 무엇이든 가치 있다. 그러나 악덕이나 타락이 나 침해 같은 것들조차도 안류의 다양한 잠재력을 풍요롭고도 조 화롭게 발전시키는 일에 못지 않게 자연적이라고 보는 관점(이롤테 면 사드 Mar qui s de Sade 의 관점)은 허용될 수 없다. 이 점에서 헤르 더는 계몽주의의 진정한 아들이다. 계몽주의의 풍부한 상상력과 통찰력에서뿐만 아니라 소박함에서도 그러하다. 이와 관련해서 고 (故) 러브조이 Arthu r Lovejo y 교수가 헤르더에 대해 내린 평가는 실로 정확한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헤르더는 사물들을 존재하게 끔 만들고 세계를 철통같이 지배하는 자연법칙들의 <필연>을, 똑 같이 자연으로부터 파생된 규범적 규칙들-이것들을 준수함으
로써만 인류는 행복이며 덕성이며 지혜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의 < 당위 > 와 동일시한 (아마도 서구의 대부분의) 사상가들 사이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합의를 도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헤르더는 프랑스 계몽주의의 핵심 사조로부터 크게 벗어난 인물이 기 때문이다 더욱이 헤르더와 프랑스 계몽주의의 차이는, 그의 주 석가들이라면 누구나 주목해 온 측면들로 국한되지 않는다. 대체 로 주석가들은 그의 상대주의를 강조한다. 그는 현존하는 모든 믿 을 만한 문화들을 경의했고, 다양한 전망들과 문명들은 각자 나름 의 고유한 발전단계며 목적이며 전망이라는 내적 견지에서 이해되 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석가들이 다음으로 강조하는 것은, 데카 르트적 이성주의의 핵심적 모순에 대한 헤르더의 예리한 반박이 댜 데카르트적 이성주의는 보편적이고 영원하고 불변적인 것들, 엄밀한 논리관계에 의해 지배되는 것들만을 참된 지식으로 간주하 는데, 이 경우에 참된 지식의 소재는 수학, 논리학, 물리학 , 여타 자연과학들로 국한된다.
그러나 헤르더는 더욱 심층적인 의미에서 < 계몽주의>에 반기 를 들었다 그는 자연이나 경험을 판명하게 구획하는 장벽들을 거 부했댜 의식의 유형들 사이에, 기능들 사이에, 관념들 사이에, 자 연물들 사이에 세워진 온갖 장벽들을 거부했다 . 헤르더가 데카르 트며 칸트며 프랑스 계몽철학자들 등 크게 이질적인 사상가들을 싸잡아서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한결같이 <기능들>과 경험 유형들 사이의 엄격한 구분을 주장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 기 때문이다 헤르더가 보기에, 이 같은 엄격한 구획은 오직 분류 와 일반화를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도입된 것에 불과했다. 헤르더 는 칸트보다 라이프니츠를 더 홈모했다. 그는 라이프니츠처럼 수 학적 진리와 사실적 진리 사이에 논리적 간극을 인정하되, (아마도
흄을 추종하여) 수학적 진리를 동어반복으로, 즉 자연과 무관한 진 술로 평가했다 .1 5 1 인식론 상에서 헤르더는 철저한 경험론자였다 . 경험을 < 선험적으로 > 결정할 것을 요구하는 칸트의 초월적 범주 들은, 분석 범주들와 종합 범주들의 기형적인 혼합에 지나지 않는 댜 말하자면 < 선험적 종합 > 이란 끔찍한 자기모순에 불과하다 .1 61 현실은 선험적 법칙을 허용하지 않는다. 헤르더는 경험에 대한 우 연적 판단과 필연적 판단을 구분하려는 칸트의 시도를 오류로 평 가한다. 이 대목에서 칸트가 범한 오류는, 스피노자며 라이프니츠 의 체계에 초석이 되었던 구분, 곧 직관되는 필연과 관찰되는 우 연 사이의 구분보다도 심각한 오류이다 . 범주들이란 현실의 본성 을 여러 종류의 진리로 구획해 주는 것들로서, 단어와 개념이 엄 격하게 분리되는 경우에 그러하듯이, 인식론과 논리학에서는 물론 정치학이며 윤리학이며 예술 등 모든 경험영역들에서 판단을 왜곡 한다 . 헤르더는 모든 활동들이 제각기 총체적이고 분할되지 않은 인간을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데카르트와 칸트는 인간을 다양한 방식으로 분할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를테면 <이성 > 이며 <상상>이며 <직관>이며 < 느낌>이며 <의지 > 를 철저하게 구획 한 그들의 기능심리학이 그러했댜 1 71 이에 대해 헤르더는 칸트가
15) XXI, 36. 16) XXI, 38. 17) 헤르더에 따르면, 영혼은 자기를 둘러싼 혼돈으로부터 일정한 패턴으로 발전한다. 그리하여 영혼은 <자기 내면의 힘에 의해 다자로부터 일자 를 창 조하는 바, 일자는 오직 영혼 자신에게만 소속된다 > (v i de XIII, 182; XV, 532. 또한 H. B. Nis b et, Herder and the Phil o soph y and Hi st o r y of Sc ien ce, p. 63 과 비교할 것) . 차별적인 자료들을 통합해서 총체를 창조하는 것이 인간본성의 근본적인 조직화 활동이라는 믿음은, 헤르더의 사회적 • 도 · 덕적 전망 전체에서 핵심을 이룬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모든 창조활 동은 각자의 고유한 <형태 Ges talt>를 형성하는 동시에 그것에 의해 결정되
는 바 , 개인마다 집단마다 자가의 고유한 < 형태>에 의해 지각하고 이해하 고 행동하고 창조하고 살아가기 위해 애쓴다 . 이러한 관념은, 사회구조와 사 회발전에 대한 , 인식가능한 문명의 본성에 대한, 나아가서는 인간이 무엇으 로 살아가는가에 대한 헤르더의 입장을 온통 지배하고 있다 (v i de V, 104). 헤르더가 < 형태 > 심리학의 선구자라는 니스벳 교수의 평가에 대해 필자로 서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 이 점에 관해서는, Ma rtin Sch i.itz e 의 논문 두 편, 죽 Herder's Psyc h olog y, in The Monis t ( v ol. 35, 1925), pp. 507-554 와 The Fundamenta l Ideas of Herder's Thoug h t, in Modem Phil olo g y(v ols. 18, 19, 21 ), 1 920-1924 역 시 참조할 것
무슨 기준을 사용해서 인식이며 감각이며 의지 같은 기능들을 구 분했는지 도대체 모를 일이라고 토로한다 . 헤르더에게는 이것들은 살아가는 사람들의 유기체적 개성으로 통합되는, 나뉠 수 없는 기 능들이었기 때문이다 . 1799 년의 『메타 비평 Me ta lcr iti lc .!l 에서 칸트에게 가한 공격은 , 평 생의 자세를 요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데카르트와 칸트 같은 신스콜라주의자들이 인간이라는 한없이 복잡한 유기체를 묘사하 기 위해 사용한 흑백논리는, 헤르더에게는 자의적이고 의고집적으 로나 절대적인 것으로 보였다. 이 사상가들은 인간이 어떻게 자유 로울 수 있는지 ,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고 무엇을 향해 자유로운지, 언제 어디 어떤 점에서 자유로운지, 인간을 더 자유롭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고 덜 자유롭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를 묻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인간은 마땅히 자유로워야 한다 , 인간이 동물처럼 기 계적으로만 움직인다든지 최소한 자유를 결핍해서는 안 된다는 절 대적 의미에서 인간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독단론을 피력했을 뿐이 다 . 그들은 인간의 특질이 이성의 완전한 소유에 있다는 견지에서, 인간이 더 이성적이거나 덜 이성적일 수 있음을 부정했다 . 죽 그 들은 인간이 이성적 속성들을 완벽하게 소유하든지 아니면 전혀 소유하지 못하든지 둘중 하나라는 선택적 관점에서 인간을 정의했
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리한 이분법에 입각해서 인간을 기술하 는 바, 그들의 자의적인 이분법은 뒤얽히고 연속적인 , 때로는 비규 칙적이고 유동적이고 무정형적인, 심지어 분석 불가능할 때마저 많은 , 그러나 늘 인지가능하고 역동적이고 풍요롭고 무한하고 영 원한, 자연의 복수성을 파괴하는 것이었으며 , 그리하여 철 학자들과 역사가들 모두에게 왜곡된 시각을 제공한 것이었다. J dl 대단히 복잡 하고 다양한 현상들을 일반법칙에 복속시키려는 시도는, 헤르더에 게는 최소공약수-사람들의 생활에 최소로 특징적이고 중요한 요소――에 대한 추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그 러한 시도는 이론적으로는 피상화를 추구하는 일이요 , 실천적으로 는 절름발이 획일성을 부과하는 일로 여겨졌다. 헤르더는 획일성 을 생명과 자유의 적이라는 이름으로 거부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플라톤 이래로 서구의 전통에서, 선은 하나의 얼굴이지만 악은 여 러 얼굴들을 갖는다는 관점은 변함없이 큰 줄기를 유지해왔다. 어 떠한 질문이 제기되든 정답은 하나지만 오답은 여럿이라는 것이 다. 완벽하게 통합된, 불변하는 사회라는 플라톤의 이상을 너무 엄 격하다는 이유에서, 즉 인간적 특징들과 염원들의 다양성을 허용 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거부한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이것은 비 록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임을 인정했다. 수학, 신학, 과학뿐만 아니라 윤리학과 정치학에서도 서구의 중심적 전 통은 늘 일원론이었다. 이 전통은 복수성을 정합적이고 체계적인 통일성으로 환원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 헤르더는 이 같은 전통 을 거슬러 다양성을 열정적으로 옹호한 때 이른 귀감이다. 획일성 은 다양성을 불구로 만들고 죽인다는 것이다. 그는 1774 년에 이렇
18) XIII, 194 참조.
게 적고 있댜 최소한 중세까지만 해도 < 격정 > 은 < 만사를 죽음의 획일성으로 뭉개 버리는 > 경향이 있는 < 전제주의의 게걸스러운 아가리를 봉하고 있었다. > < 인류를 위해 더욱 바람직하고 유익하 고 건전한 일은, 생명도 생각도 없는 거대한 기계의 톱니들만을 생산하는 것일까, 아니면 생생한 활력을 일깨우고 활성화하는 것 일까? 제도들이 완벽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늘 정직하지 는 않다 할지라도, 상당한 무질서와 거대한 불협화음이 따른다 할 지라도, 사람들이 평생을 썩어 타락한 채 머물도록 강요당하는 조 건보다는 형편이 훨씬 나을 것이댜 > 1 91 몽테스키의는 비록 사회마 다의 차이를 강조하고 각 사회의 법이며 제도에 생명을 주는 <정 신 > 을 감지한 공로로 널리 칭송되는 인물이지만, 그 역시 인간생 활과 문화의 풍요로운 다양성을 세 가지 기본형식으로 강제 분할 하려고 시도했다. < 세 가지의 가증스러운 일반형식들이라니!…… 모든 시대들과 모든 민족들의 역사가 면면히 이어져 하느님의 위 대한 산 작품을 이룰진대, 이 역사 전체를 세 꾸러미로 매끈하게 분할된 잔허들로 바꾸어 버리다니!……오, 몽테스키의여!> 3) 1
19) 바너드 교수가 Herder on Soc ial and Politi rol Cultu re( 1969), p. 191 에서 번 역한 구절을 재인용. 20) 같은 책 , p, 217.
헤르더로부터 빚진 사람들은 많다. 보편적 요소에 비해 국지적 요소를 옹호한 지역주의자들이 그러하고, 반동적 형식이든 진보적 형식이든 삶 속에 깊히 뿌리내린 모든 형식들을 위해 싸운 투사들 이 그러하며, 순수 인문주의자들은 물론 과학적 진보에 대한 반 (反)계몽주의 계열의 반대자들도 그러하다. 이들이 인정하든 인정 하지 않든 간에, 이들 모두는 헤르더가 유럽의 사고 전통에 소개 한 관점들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헤르더는 뫼저나 버크나 퍼거
슨 보다 훨씬 넓고 깊은 영향을 미쳤다). 아마도 비코 정도가 이에 필 적하는 업적을 남겼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르더는 과거에 그러했듯이 오늘날에도 별로 읽혀지지 않는다 . 자비니가 지적한 바 있듯이, 헤르더는 자기 입장을 너무 늦게 정리했기 때 문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던 것이다.
<자연 종>에 관한 헤르더의 언급은 입에 발린 말에 지나지 않 았을지 몰라도, 자연이 여러 < 힘들 Kra ft e > 의 통일체라는 그의 생 각은 거의 혼들림 없이 유지되었다 . 자연은 신비하고 역동적이고 목적추구적인 힘들이 서로에게 흘러 들어가 충돌하가도 결합하기 도 유착하기도 하는 상호작용을 통해 온갖 운동과 성장을 일으키 는 통일체이다 . 이 힘들은 데카르트의 경우처럼 인과적이고 기계 적이지도, 라이프니츠의 < 모나드들 > 처럼 상호 격리되지도 않는다. 헤르더의 힘 개념은 당시의 과학에서보다는 르네상스 시대의 심플 라톤주의적 신비주의에서 , 더 소급하자면 에리게나 E rig ena 의 < 능 산적 자연 Natu r a Natu r ans> 에 서 더 욱 많은 영 향을 받은 것 이 다. 헤르더에 의하면, 현실이란 이 같은 역동적 < 힘들 > 이 ――-비록 그 성격이 명료하게 규정되지는 않지만_얼마간 정태적인 견 지에서 파악되는 환경과 더불어 형성하는 일종의 공생관계이다. 따라서, 환경이 돌변하면 엄청난 파국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헤르 더는 이에 관련된 증거를 도처에서 발견한다. 옮겨 심은 화초는 풍토가 맞지 않아 시들기 마련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 그린랜 드 사람은 덴마크에서 번창하지 못한다. 아프리카인이 유럽에서 비참하고 쇠약해지듯이, 유럽인은 아메리카에서 쇠약해진다. 정복 은 파멸로 이어진댜 이민은 사람들을 약하게 만들기 쉽다_이 를테면 활력의 결핍, 낙담, 서글픈 획일성을 야기하기 쉽다 . 211 이 같은 예들은 『인류의 역사철학을 위한 시론 』 도처에서 찾을 수 있
다 . 훗날 푸리에가 그렇게 믿었 듯 이, 헤르더는 모든 잠재력들이 언 젠가는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라고 믿었다. 만물은 저마다 어울리 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 <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실현될 것이다. > 다만 인위적인 것은 예술에서든 삶에서든 파괴적일 뿐이 댜 냉정하게 계산된 정략결혼은 자식들을 망치고, 자식들에게 철 저하게 동물적인 결합보다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가부장들은 때 로 가혹하고 잔인한 권위를 행사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권위는 철 학자들의 인위적 추론법보다는 < 자연스러운 > __- 따라서 덜 해 로운-것이다. 헤르더는 < 추론법 > 을 루소 못지않게 회의한다. 볼테르의 말라빠진 원칙들이나 볼프의 삼단논법이 원시인의 거칠 되 자연스러운 행동보다 아이들을 위해 더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는 없다. 어떤 문화의 이상을 다른 문화에까지 부과해서 획 일적 < 관상학 > 을 강요하는 체계보다 나쁜 것은 세상에 없다. 획 일적 < 관상학 > 은 개체성과 자유만이 생동하고 성장하는 <창조적 무질서 > 상태에서의 < 자연적 > 조건에 위배된다. 이 대목에서 헤 르더는 인간에 대한 과도한 범주화를 조장하는, 이를테면 인간을 인종 유형이나 사회적 신분에 따라 구획하는 , 모든 이론들을 싸잡 아 비 난한댜 중앙집 권화며 통제 경 제 dirigi sme 는 적 이 다. 상당한 정도의 비능률조차도 < 사람들이 평생을 썩어 타락한 채 머물도록 강요당하는 조건 > 보다는 낫다. 이와 동일한 정신에서, 헤르더는 <정치개혁은 밑으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 간은 자기의 자유를 가장 비열하게 남용하는 경우에도 여전히 왕 이요, 최악을 선택하는 경우에도 여전히 선택의 주체요, 심지어 법 적으로 스스로를 동물로 규정하는 경우에조차도 스스로를 통치하
21 ) 이 책의 제 26 장을 참조 .
는 주인이기 때문이댜 >브 ) 이 점에서 헤르더는 프랑스 계몽주의에 반대한 그의 동료들 예컨대 뫼저며 칸트며 루소며 버크 같은 인 물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여 준다. 헤르더는 인간을 일반화하고 개인으로부터 차별적 특성들을 제 거하는 갖가지 형식의 인류학들을 싸잡아 바난한다. 전통은 원래 인간집단의 가장 긴요한 특성들을 보존하는 보루로서 작용하는 것 이지만, 만일 전통이 너무 기계적이 된다든지 일종의 마취제처럼 작용한다면 그 전통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헤르더는 이 같은 위 험의 예를 아시아 지역에서 전통이 수행해 온 역할에서 발견한다. 아시아에서는 전통이라는 한 가지 요소가 건강한 삶의 나머지 많 은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삶과 활동에 필수적인 나머지 많은 <힘들>을 잠재워 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착상은 엄밀하게 정식 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못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르더에게 그것은 언제나 풍부한 함축으로, 뚜렷한 일반적 지침으로 작용한 다. <자기 자신과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고……그 자신의 유익 못 지않게 종족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야만인은……내가 보기에, 세 계 시민이라는 유령, 죽 자기의 동료 유령들을 향한 불타는 사랑 으로 일종의 괴물을 사랑하는 인간 유령보다 훨씬 순수하다. 야만 인은 자기의 오두막집에 낯선 방문객을 위해 방을 마련해 두지만 ……유령들로 배부른, 게으른 세계시민의 마음은 누구를 위해서도 푸근한 집이 되지 못한다 .> 23 1 『역사철학을 위한 시론』의 도처에서 헤르더는 선택과 창조의 자유, 그리고 독창성이야말로 인간의 신 성한 요소임을 되풀이해 언급한다. 활기차고 꼼꼼하게 말할 때의 야만인은 <다른 사람들이 세운 토대 위에 안주하는 문명인>보다
22) 같은 책, p. 20; Herder, X 血 146-147. 23> xm, 339.
우월하댜 『 시론 』 에는 타인의 덕택에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많 은 이야기가 있다(이 이야기는 훗날 피히테에 의해 되풀이된다) . 이런 사람들은 < 죽은 세계시민들>로 간주된다. 죽은 세계시민이란 감 정이 메말라 버린 자이며, 비인간화된 피조물이며 , 자연이나 역사 의 제물이며, 도덕적 또는 육체적 불구자이며, 기생충이며, 족쇄로 묶인 노예이다.
인간은 어찌해서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는가? 타인에 의지해서, 그리고 타자의 노동과 생각에 의지해서 살아감으로써 그렇게 된 댜 헤르더는 원시주의자들과는 반대의 입장에서 각종 발명들을 환영했댜 예술과 과학은 인간의 창조적 열매이며, 인간은 예술과 과학을 통해 자기의 합목적적 본성을 최대한 발휘하게 된다는 것 이댜 발명은 그 자체로서는 타락하지 않는다(이 점에서 헤르더의 입 장은 루소가 『 학예론 D i scours sur !es sci en ces et !es ar t s 』 과 『인간 불 평 등 기 원 론 Dis c ours sur !'ori g ine et !es fon dements de l'ine ga lite pa rmi !es hommes 』 에서 피력한 입장과 구별된다). 그러나 사람이 타 인의 발명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경우에는 기계적이 되고 활기를 잃는댜 외) 이 대목에서 영원히 잃어버린 인류의 청춘기에 대한, 즉 인류사 초기의 보다 활력적안 단계에서의 덕들을 상실한 데 대한 개탄이 시작된다. 비슷한 개탄은 헤르더 동시대의 마블리며 루소 며 모저 Karl Fri ed r ich Moser 의 저 술들에 서 도 등장했지 만 ,251 19 세
24) 헤르더는 아션에 관한 논고에서, 이것이 노동분화라는 , 그리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분화라는 치명적인 장벽의 원흉이라고 말한다. 노동분화는 사람들 사이에, 계급들 사이에 , 신분들 사이에 파괴적인 장벽을 창출하며, 정 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는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빼앗는다 . 따라서 물질의 진보는 문화의 쇠퇴와 나란히 진행하는 것일 수 있다. 이 주제는 괴테와 실 러에 의해 채택되었고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나 는 파스칼 Roy Passcal 교수로부터 이 문제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다.
25) 특히 17 6.5 -1766 년에 출판된 Von dem Deuts c hen Na ti onal g e i s t에서, 모저 는 독일인들을, 모든 민족이 멸시하고 무시하고 조롱하고 약탈하는 민족으 로 묘사하고 있다.
기에는 더욱 강렬한 특징으로 부상 했 고 오늘날까지도 자주 들을 수 있는 것이댜 헤르더는 원기왕성하고 용감하고 독립적인 원시 인들을――-죽 그 이름은 모르지만 보다 건강한 시대에 위대한 서 사시와 노래를 창조한 장본인들―一-예찬하는 대신에, 현대인과 현대적 기예에 대해서는 하찮움과 무생명을 개탄한다. 여기서 헤 르더의 입장은 밀 Mi ll 이며 칼라일 Carl y le 이며 러스킨 Rus ki n 이 취 한 입장과 유사하다. 또한 문명사에서 창조력이 넘친 시대를 창조 력이 빈곤한 시대와 대비한 점에서 헤르더는 생시몽의 선구이기도 하다. 더욱이 헤르더는 거듭남의 가능성을 점치는 낙관론자로 등 장하기도 한다 만일 인간이 < 그 자신과의 모순을 멈추고 > < 그 자신에게로 되돌아갈 > 수만 있다면, 만일 만족들이 < 자기들 자신 을 회복하고 > <타민족의 사고를 빌어서 사고하지 않는 법을 배 울> 수만 있다면, 3i l 현대에도 과거에 창조된 것들 못지 않게 고상 하고 인간의 참 본성을 표현하는 새로운 예술 작품들을 되찾고 창 조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 그러나 헤르더는 한 가지 경로에 대해서만은 단연코 거부한다. 과거로 되돌아가는 경로를 취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안 된다는 것이다 . 이 경로를 통한 구원은 있을 수 없다. 그리스인들에 그리움으로 탄식하면서 그들에게로 되돌아가 기를 희망하는 것은 어리석고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이 점에서 빙켈만 W i nckelmann 을 의심한다. 빙켈만은 그리스인들을 이집트인 들조차도 도달한 적이 없는 높은 경지에 도달한 예술의 창시자들
26) 하만의 구절들을 거의 똑같이 반복한 이 구절들은, 먼 훗 날 < 소의 > 의 문 제로 불리게 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로 이상화하는데, 이것은 완전히 비역사적이요 < 끔직한 망상 > 에 불과하다는 것 이 댜 T/ 1
27) Joh ann Gott fried Herder, Werke in Zwei Banden, ed. Karl Custa r Gerold (Mt inc hen, 1953), II, pp. 117, 128( 또한 pp. 658, 663 역시 참조). Auch Eine Ph i losop h i e 에서 등장하는 다음의 구절과 비교할 것. <되돌아갈 수 있는, 그 래서 다시 한 번 예전에 존재했던 대로 반복될 수 있는 문명은 존재하지 않 는다 . 운명의 길은 강철만큼이나 확고하다. 오늘이 어제가 될 수 있는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집트를 복원할 수 없었듯이, 로마의 하드리안 왕 조 the Ha dri ans 도 그리스를 재건하지 못했고, 율리우스 왕가도 예루살렘을 다시 창조할 수는 없었다.> 이 문화들은 제나름의 시대를 가지고 있었다. <칼 이 닳아 빠지게 되면, 빈 칼집은 조각나기 마련이다 . > F. M. Barnard, 앞의 책, pp. 216-217 로부터 재인용.
자유로운 발전을 위협하는 위험들은 많이 있다. 무엇보다도 중 앙집권화된 국가가 있다. 국가는 우리로부터 우리의 본질 곧 우리 자신을 약탈해갈 수 있다 . < 독일 민요를 마치 암세포처럼 잡아먹 는 > 외래 문화 역시 위험한 요소이다―_-민요란 인간의 가장 깊 숙한 열망에 대한 반응이요, 볼테르의 철학으로는 꿈도 꿀 수 없 는 상징적 형식으로 인간의 공동 체험을 표현하려는 집단적 욕망 에 대한 반응이다 . 더욱 특별한 위험은 외국어이다. <나는 엄청난 노력을 들여서야 외국어로 더듬거리며 말할 수 있지만, 의국어의 정신은 나를 피해간댜 > 그럼에도 <우리 인생의 황금기를 이 따 위 외국어에나 투자해야 한단 말인가! >~ I 우리는 그리스인들도, 로 마인들도 아니며, 그들처럼 될 수도 없다. 되돌아가기를 염원한다 는 것은 거짓 망상에, 불구자들이나 꿈꾸는 환상에 사로잡히는 일 이다 . 이 병은 어떤 병에 비해서도 치명적이다. 모방은 끔찍한 저 주이다 . 사물의 세계와 발음의 세계가 다르듯이……인간본성은 세 계의 다른 부분들과 동일시될 수 없다…… 291 그렇다면 우리는 무
28) N, 388.
29) Kr itish e Walder, No. 4 . 이 작품은 헤르더 사후에 출판되 었다.
엇을 해야만 하는가? 우리들은 우리 자신이 되는 길을 추구해야만 한다. < 우리의 민족 , 우리의 언어, 우리의 경관이 우리의 특징이 되도록 하자. 우리가 고전고대를 닮았는지 닮지 않았는지는 후세 가 판단할 일이다. > 헤르더의 저술들과 비교할 때, 클롭스톡의 < 메 시아 Mess i a ~ 가 기대 이하의 성공에 머물렀던 이유는 아마도 이 작품이 충분히 < 민족적 > 이지는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 301 바로 클 롭스톡이 실패한 대목에서, 헤르더는 민족주의적 감정을 가장 열 렬하게 표현한다. < 나의 독일인 형제들에게 고하나니 .. …·지금 순 수 민요들의 모든 자취들은 망각의 심연 속에 굴러다닐 뿐이요…… 이른바 문화에 대한 무지가 문화에 관련된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댜 >3 11 지금 < 우리는 이방인들의 언어로 말하는 바, 그들의 언 어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내버리도록 만든다 . >321 하만이 < 꾸민 코 > 에 대해서 그러했듯이, 헤르더는 < 가발 쓴 농민들 > 에 대해 아 무런 장점도 찾지 못한다. 헤르더는 독일인들에게 당신네들 자신 을 알라고 호소한다. 당신네들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고, 우주 내에 서, 시공간 내에서 당신네들 자신의 역할을 존중하라고 호소한다.
30) 루쉐 교수는 기독교의 핵심 주제가 독일 시의 주제로는 너무 이국적 인 것 이라고 불평하는 헤르더의 기독교 성직자적 시각에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 는데, 그의 놀라움을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다 . 31) XXV, 11. 32) IV, 389.
제 24 장 표현주의 • 민족주의 • 인민주의
이것이 민족주의인가? 명백하게 그렇다. 헤르더의 민족주의는 반(反)프랑스적이다 그는 낭트와 파리를 여행하면서(훗날 로마 를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로) 심각하리만치 기가 죽었다. 그는 저명한 <계몽철학자들> 몇 사람을 만나기는 했지만, 그들과 교감을 이루 는 데는 명백히 실패했다. 그는 후진국민이 선진국민에 대해 느끼 는, 낮은 사회 적 신분의 성 원들이 높은 신분에 속한 사람들에 대 해 느끼는, 질투심이며 굴욕감이며 경외감이며 분노며 비뚤어진 자존심에 시달렸다. 상처받은 민족감정이 민족주의를 부추긴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해 르더의 민족주의가 결코 정치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헤르더는 개인주의를 비난하는 만큼, 국가에 대해서도 혐오감을 표현한다. 국가는 자유로운 인간 개성을 억압하여 불구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의 사회관은 정부며 권력이며 지배에 대해 적대적이다. 루이 14 세와 프리드리히 대왕은(옛날의 케사르와 샤를마뉴처럼) 가증스러운
이상을 대변한댜 더욱이 헤르더는 권력을 요구하지 않을 뿐만 아 니라 자기가 속한 계급이나 문화나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가 만들기 원하는 사회는, 인간이면 누구든지 완전한 삶을 영위하고 자유롭게 자기를 표현하며 <무슨 사람이든 될 수 있는> 사회이다. 그래서 그는 정부가 작을수록 사람들에게 는 더욱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리스 시대의 도시국 가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뒷 시대에 공격적 의미에서 민족주의적이고 쇼비니즘적으로 변질되는 발전 의 첫 단계일 수도 있댜 그러나, 이 같은 발전이 역사학적 • 사회 학적으로 진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헤르더는 결코 이런 감정에 휩 싸이지 않았다. 그가 <민족주의 Na ti ona li smus> 라는 용어를 만든 장본인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좋은 사회에 대한 헤르더의 전망은 피히테나 헤겔이나 정치적 사회주의자들의 이념보다는, 토로 Thoreau 나 프루동 Proudhon 이 나 크로포트킨 Kro po tki n 의 아나키 즘 에, 그리고 괴테와 훔볼트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주창한 문화나 교 양 B il dun g 같은 개념에 더 가깝다. 국민은 헤르더에게 정치적 실 체가 아니다. 그는 고대 아일랜드의 게일족 Gaels 이나 고대 북유럽 종족들에 열광하는 동시대의 켈트족 광신자들이나 튜튼족 광신자 돌의 주장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하고 있다.
그가 게르만족의 시원을 찬양한 것은, 게르만 문명이 전 세계라 는 수준에서 다른 문명들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 원이 게르만 문명의 일부로서 게르만 문명을 조명해 주기 때문이 다. <한 민족의 영혼은 상상력과 감정의 활동 속에서 가장 명백하 게 통채로 드러난다.> 이것은 시스몽디 S i smon di며 미슐레며 마
1) XVIII, 58.
치니 Mazzin i 등을 경유하여 거창한 정치 문화적 노선으로 발전했 댜 그러나 헤르더의 입장은 러스킨이나 라므네 Lamenn ai나 모리 스 W illi am Mo rri s 의 견해에, 혹은 인민주의자와 기독교사회주의자 의 견해에 더 가깝다. 그것은 오늘날 신분이나 권력의 위계질서에 반대하는, 심지어 갖가지 조작의 영향력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 들의 견해에 더 가깝다. 헤르더의 친구들은 지난 백 년 동안 활개 친-온건하든 폭력적이든――一민족주의자들이라기보다, 기계 화와 세속화에 저항한 사람들이다. 헤르더는 자급자족을 선호하지 만, 이것은 오직 개인의 활동에로 국한된다. 이를테면 예술가의 창 조며 자연스러운 자기 표현의 권리들로 한정된다. 비록 그는 (칼 프리드리히 폰 모저가 만든 용어로 보이는) 국민정신 Na ti onal g e i s t뿐만 아니라, < 민족정신 Geis t des Volkes>, <민족혼 Seele des Volkes>, <국민정신 Geis t der Nati on >, <민족의 재능 Gen ius des Volkes>, 더욱 경험적인 <국민성 Nati on alcharakte r > 등 유사한 용어들을 다 채롭게 사용하고 있지만 ,21 헤르더의 의도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헤르더의 의도는, 타인들 것이 아닌 우리 것을 강조하는 일이다. 비록 타인들 것이 더욱 큰 가치가 있고 훨씬 넓은 기준에서 고찰 될 수 있다 할지라도, 우리 것만큼 중요하지는 못하다. 헤르더는 그처럼 방대한 범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문화들끼리의 비교는 가 능하지만, 문화들 사이에 공통의 척도를 들이댈 수는 없기 때문이 댜 각 문화는 각자 나름의 사회에 대해, 결과적으로는 인류전체에 대해 비길 데 없이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2) I, 263; II, 160; III, 30; V, 1&5 , 217; VIII, 392; XIII, 364; XIV, 38, 84; XXV, 10 and pass is m
따라서 헤르더는 계몽주의자들처럼 소크라테스가 시대를 초월 한 세계시민적 현자라고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하만의 주장
처럼 소크라테스는 아이러니와 무지의 고백을 통해 겉치레 지식을 파괴하고 신앙과 구원의 길을 열어 준 장본인도 아니다 . 소크라테 스는 무엇보다도 기원전 5 세기의 아테네인이요, 그 시대는 지나갔 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라이프니츠보다 더 많은 재능을 타고 태어 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우리 시대의 인물이지만 아 리스토텔레스는 그렇지 못하다. 셰익스피어는 우리 시대의 천재이 지만 호메로스나 모세 같은 다른 천재들은 그렇지 못하다. 개체성 이 전부다. 옛 것과 새 것 , 토착의 것과 외국의 것을 인위적으로 결합하면, 거짓 관념과 파멸적 실천을 초래할 뿐이댜 31 < 우리 자 신의 길을 걷도록 하자… ••• 사람들이 우리 민족, 우리 문학, 우리 언어에 대해서 좋게든 나쁘게든 말하도록 만들자 . 이것들은 바로 우리 것들이요 우리네 자신이니,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하 자 .> 4 1 가짜 그리스인이나 프랑스인이나 영국인이 되기보다는, 어 떤 모습이든 독일인으로 남는 것이 더 좋다 .51 그러나 헤르더는 <깨어나라, 독일 국민이여! 저들이 당신들의 수호신을 강탈해 가 도록 내버려 두지 마라 ! >61 라고 강렬하게 의치기도 한다. 여기서 그는 사람들에게 무시무시한 폭풍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하면서 요나J onah 처럼 폭풍우 속에 잠들지 말 것을 경고한다. 심지어 그 는 폴란드의 분할이라는 끔찍한 사례를 들어서 분열된 조국을 질 타하기도 한다 .71 <비참하게 찢기고 짓밟힌 독일인이여, 희망을 가
3) VIII, 207, 314, 315; XIV, 2'2: 1; XV, 321; XVIII, 248( 필자는 이 참조들과 그 밖의 여러 참조들을 바너드 교수로부터 빌어왔다). 4) H. Levy Bru h!, L' Allemagn e dep u is Leib n iz ( P a ris, n. d .), pp. 168-169 에 서 재인용. 5) I, 366, 367. 6) XVII, 309. 7) XXIX, 309.
져라! > 혹은 < 독일인이여, 독일어로 말하라! 센 Se i ne 강의 추한 진흙을 게워내라 ! >81 이 같은 구호들은 확실히 괴레스와 얀J ohann J ahn 에게, 아른트와 트라이치케에게, 나아가서는 이들의 끔찍한 현 대판 계승자들에게, 사악한 민족주의를 부추겼을 수 있다는 생각 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구절들을 통해, 헤르더 자신은 오직 문화적인 자기결정에 관해서만 언급한다. 이른바 < 질서잡힌 국민 들p o li c irt e Na ti onen > 은 헤르더의 혐오 대상이다. 그에게 민족성은 엄밀하고 순수한 의미에서 문화적 속성이다 . 그는 사람들이 문화 적 전통을 고수할 수 있고, 고수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그들이 지 레 포기할 필요는 없다. 그는 유태인들의 고대를 열정적으로 연구 하면서도, 그들을 비난한다 . 유태인들은 집단적 명예에 필요한 감 각을 유지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 자기들이 다시 한 <국민>으 로 번영할 수 있는 유일한 터전인 팔레스타인의 고향으로 되돌아 가려고 시도한 적이 없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헤르더에게 흥미의 초점이 된 것은 민족성이 아니라, 문화들이요 세계들이요 사람들 의 총체적 경험이댜 그가 찬양한 이 경험적 측면들 중에는, 개인 적인 관계, 친교와 반목, 자연에 대한 태도, 전쟁과 평화, 기예와 과학, 진리며 자유며 행복이 추구되는 방식, 특히 문명화의 위대한 주역들과 은혜 모르는 · 폭도들 간의 관계 등이 포함된다. 헤르더는 조직 자체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는 영, 헨리 Hern y, 워튼J ose p h Wa rton 등 영국의 초기 낭만주의자들처럼, 생과 예술에서 비규칙 적이고 독특한 것, 죽 어떠한 체계로도 완전히 담아낼 수 없는 것 울 유지하고자 한다.
8) XXVII, 129.
이와 동일한 근거에서 헤르더는 정치적 중앙집권화며 지적 양극
화를 공격한다. 그는 세계를 다채로운 꽃들이 만발한 정원으로 상 상하고, 온갖 민족 문화들 사이의 가능하고도 바람직한 조화에 관 해 언급하지만, 결코 국민국가의 공격적 본능을 무시해 버린다든 지 다양한 민족주의들끼리 갈등할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얼버무린 다든지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헤르더는 정치적 • 경제적 • 군사적 중앙집권화의 성장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다. 다만 자율적인 문화 공동체들끼리 충돌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종 류의 자율적 공동체가 보다 위험한 종류의 자율적 공동체로 나아 갈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가정은 바현실주의적이고 비역사 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바현실주의는 헤르더와 계몽주의가 일 반적으로 비난받는 종류의 비현실주의와는 다르다. 헤르더는 민족 주의며 집단주의며 튜튼족 광신이며 낭만주의적 국가숭배를 신봉 하지 않는다. 그는 이 같은 이념들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어떤 것 을 신봉한다. 그는 <생동하고 유기체적인 > 신비한 < 힘들 > 의 옹 호자인 바, 이 <힘들>은 결국 유일의 위대한 < 창조력 > 에로 귀결 된다――여기서 헤르더는 샤프츠베리와 비슷한 입장울 취하는데, 샤프츠베리는 영과 칼라일처럼 동포안 영국민들보다는 독일인들 에게 더욱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이다. 즉 < 창조 속에 생동하는 모든 것들은 어떤 형식, 어떤 모양, 어떤 경로를 취하든, 단일한 정 신이요 단일한 불꽃이다 .>91 이것은 경험적 관념도 과학적 개념도 아니댜 헤르더는 라이프니츠가 말한 <생명력 vis v i va > 을 사회적 으로 확장하여 <민족혼 Seele des Volkes> 으로 구체화한다. 민족 혼은 <독특하고 경이롭고 형언할 수 없고 지울 수 없는 것이요, ‘민족'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IO) 또한 민족정신의 가장 생생한 표
9) VIII, 178. 10) XIV, 38.
현은 당연히 국가가 아니라 < 그 민족어의 특색 > 이다 .Il l
l1) X 田, 364.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요점은 , 이 같은 입장의 진정한 계 승자는 권력정치학이 아니라 훗날 인민주의로 불리우게 된 그 무 엇이라는 사실이댜 인민주의는 동유럽의 억눌린 민중 사이에서 처음 계기를 마련하여 점차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널리 확산된 이 념이댜 이 이념에 고무된 편은 < 국가관리론자들 e t a ti s t es > 이 아 니라 < 민초 > 신봉자들이었다 . 이를테면 러시아의 슬라브주의자들 Slavo ph i les 과 인민주의자들 Narod ni ks, 기독교 사회주의자들, (오늘 날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심각하기도 하고 엉뚱하기도 한 열정을 지닌) 민속예술과 민중전통의 찬미자들이 그러했다. 물론 인민주의는 반 동적 형식을 취할 때도 많았고, 공격적 민족주의의 흐름을 부추키 가도 했댜 그러나 헤르더가 주장한 형식은, 민주적이며 평화적인 것 이었고, 반( 反 )왕조적이고 반(反)엘리트적일 뿐만 아니라 심하게 반( 反 )정치적인 것이었으며 ,1 21 국민이든 계급이든 인종이든 정당이 든 온갖 조직화된 권력에 반대한 것이었다 . 나는 헤르더의 이 같 은 입장을 일컬어 인민주의 p o pu li sm 라고 불렀다. 유럽 내에서 전 개되었든 유럽 밖에서 전개되었든 인민주의 운동이야말로 헤르더 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대체로 다원주의를 규칙으로 삼고, 정부를 악으로 간주하며, 루소 를 추종하여 부유함이나 도시생활에 물들지 않은 자들을 <인민> 으로 규정한다 . 이를테면 빈자들, 농민들, 서민들, 평민 대중들이 < 인민>에 속한다 .1 3 1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부류들이 이 운동으로부
12) · 19 세기 초에 파리에 체류하던 헤르더는 괴테에게 보낸 편지에서 , <당신이 잘 알고 있듯이 , 나는 정치적 문제에 관심이 없다>라고 적었는데, 이것은 헤르더의 진심이었다 .
13) 이러한 경향은 특히 초기의 헤르더에게서 강하다 . 일례로 그는 이렇게 말 한다 . <철학자든 평민이든 읽혀지기 위해서 글을 쓴다>(Zhinn unsk y, 앞의 책, p. v iii에서 재인용. 치르문스키는 이 구절이 헤르더가 21 세이던 1765 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또한 헤르더는 정치적 개혁이 늘 <믿으로부 터> 추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바너드 , 앞의 책, 5, etc . ).
터 영감을 받고 있다 . 민속연구자들, 문화적 광신자들, 인류평등주 의자들 지방자치 선동가들, 기예의 투사들 단순한 삶의 옹호자들, 다양한 노선의 유토피아주의자들이 그러하다. 이 운동은 느슨한 조직, 자발적 연합, 자연적 유대에 대한 믿음에 기초해서, 군대며 관료조직 등 온갖 종류의 <닫힌 > 사회들을 가혹하게 공격한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인민주의는 진짜 민족주의와 밀접하게 연 관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맹목적인 외국인 혐오증과 비합리 주의를 위험한 수위에 이르도록 키워 주는 토양을 제공한 적이 많 았다. 민족주의가 19 세기 동안 때로는 민주주의와, 때로는 낭만주 의와, 때로는 자유주의와 결합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민족주 의와 인민주의의 결합도 우연은 아니댜 그렇지만 한 시대의 이데 올로기를 다른 시대의 결과에 비추어 판단한다든지, 다른 상황에 서 다른 요인들과 결합되어 이루어진 그 이데올로기의 변형에 비 추어 판단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잘못이다. 이러 한 잘못은 영미의 헤르더 추종자들 사이에서 자주 발견된다. 고대 문화나 이색적인 문화, 죽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혹은 유럽과 아메 리카 <후진> 지역들의 생활방식들에 몰두하는 아마추어 연구자들 이 그러하고, 고대의 노래와 시를 직업적으로 수집하는 아마추어 수집가들이 그러하다. 때로 낭만주의적 감정에서 발칸인들이나 아 랍인들의 보다 원시적인 생활방식에 열광하는 헌신자들이 그러하 다. 버 튼 Rich ard B urt on 이 나 도티 Dou gh ty나 허 른 Lacadi o Hearn 처
럼 향수병에 걸린 여행가들과 망명자들이 그러하고, 간디나 사우 드 Ibn Saud 의 영국인 친구들이 그러하다. 언어와 사회를 연구하는 진지한 학생들과 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문화적 자치론자들과 바 정치적 청년운동가들이 그러하다. 가장 인상적인 헤르더의 후예들은 그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한 러시아로부터 배출되었던 것 같다. 러시아에서 ·헤르더의 이념은 일련의 비평가들과 창조적 예술가들을 사로잡았다. 이들은 민족적 혹은 유사민족적 형식의 토착예술을 발전시켰음은 물론, 자기들이 나설 수 있는 어느 곳에서든지 자연적이고 자연발생적이고 전통적 인 형식으로 예술과 자기표현을 추구해갔다. 민족적 특색과 다양 성 을 찬미 한 무소르크스키 Mussor g s ky며 스타소프 S t assov 를 위 시 하여 이들로부터 영향받은 일련의 음악가들과 화가들은, 권위와 압제를 지지하기는 커녕 정치적으로 좌익 편에 섰으며, 모든 문화 적 자기표현 형식들에 공감했다 . 특히 그들은 박해받던 소수민족 들 예컨대 그루지아인, 폴란드인, 유태인, 핀란드인, 에스파냐인, 헝가리인 등 <재건을 이루지 못한> 여러 민족들의 문화적 자기표 현 형식들에 공감했다. 비록 불공평하고 점잖치 못한 비난이기는 했지 만, 그들은 로시 니 Ross ini와 베 르디 Ver di처 럼 <오르간만 혹사 시 키 는 자들 orga n grind ers> 이 나 희 화의 신고전주의 유파들을 여 러 측면에서 비난했다. 세계시민주의라는 허울좋은 이름을 비난했고, 상업만능주의를 비난했으며, 균일하고 기계적인 생활방식의 편에서 지방적인 것과 민족적인 것의 차이룰 파괴하는 경향을 비난했다. 비 난의 요점은 뿌리가 없다는 것이요(이 같은 비난은 홋날 반(反)계몽주 의자들과 국수주의자들 사이에서 사악하고도 불길한 의미를 내포하게 된 다), 비정하다는 것이요, 억압적이라는 것이요, 인간성을 말살한다는 것이었다. 이 바난들은 한결같이 헤르더주의의 전형을 보여 준다.
비슷한 종류의 영향은 < 청춘의 이탈리아 > 라는 마치니의 이상 에도 침투했던 것 같다. 마치니의 이상은 < 청춘의 독일 > , 나아가 서는 모든 국민들의 < 청춘>과도 조화를 이루고 서로 공명한 것이 었다. 제국주의적 압제 , 왕조적 독재, < 자연적 > 인간 공동체들의 제 권리에 대한 부정 一―_이 같은 질곡으로 벗어나기만 한다면, 모든 국민들은 <청춘>을 구가할 것이었다. 이것은 철저하게 유토 피아적인 전망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전망은 비록 민족주 의적이기는 하지만 훗날 타락한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민 족주의적이다. 물론 인민주의는 고립주의, 지역주의, 부드럽고 대 도시적이고 우아하고 사회적으로 우월한 모든 것들에 대한 의심, <상류사회>의 다양한 형식들에 대한 증오 등에 대해 어느 정도는 책임이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인민주의는 중 앙집권화며 독단주의며 군국주의며 주제넘음 등 19 세기에 완전히 성장한 민족주의와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인민 주의는 군중에 대한 혐오감을 보여 주기도 했다(헤르더는 천민 Pobel auf die Gassen 을 <국가의 신체 > 인 민족 Das Volk 으로부터 조심 스럽게 구분해 내고 있다 ).H J 뿐만 아니라 인민주의는 온갖 형태의 폭 력과 정복을 증오했던 바, 이 증오감은 괴테며 빌란트 W i eland 며 실러 같은 바이마르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증오감 못지 않게 강렬한 것이었다. 헤르더의 충실한 추종자들은 대체로 혼란 하고 감상적이고 비현실적이고 무능하고 때로는 엉뚱하기까지 한 자들이지만 결코 관료적이거나 타산적이거나 잔인한 자들은 아니 다. 그렇지만 추종자들 누구도 이 같은 양면성을 헤르더 자신만큼 극적으로 보여 주지는 못했다.
14) XXV, 323.
제 25 장 18 세기의 선화들
이러한 맥락에서 , 19 세기 민족주의의 흐름을 부양한 18 세기의 3 대 신화들에 대한 헤르더의 입장을 고려해 보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첫번째는 특정한 종족문화의 우월성이라는 신화이다. < 선민설 Favori tvol k> 따위의 애국적 허풍에 대한 헤르더의 비난 은 앞서 언급된 바 있댜 『 또 다른 역사철학 』 에서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구절이 전하듯이, <천구( 天 球)마다 고유한 중력 중심이 있듯이, 모든 민족들은 각기 나름대로 내적인 행복 중심을 지니고 있댜 > 역사가들, 비평가들 철학자들이 파악해야만 하는 것은 바 로 이것이다. 한 문화의 중심을 다른 문화의 중심과 융합하는 시 도보다 치명적인 것은 없다. < 우리는 (한 민족의) 시대와 장소, 나 아가서는 역사 전체에로 침투해야만 한다 . 2’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을 만물에로 몰입시켜야만' 한댜 3’ 바로 이 점에서 우리 시대
ll V, 509. 2) V, 502.
3) V, 502.
의 역사가들은 명백히 실패하고 있다 >4 1 ( 헤 르 더가 특 별히 겨냥한 역 사가는 슐뢰처였다). 헤르더는 히브리어 성서를 예로 든다 . 히브리어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옥스퍼드 대학의 로우드가 사용한 방 식을 따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성서를 숭고한 예술작품으로 간주하여 성서의 읽을 만한 구절들을 호메로스의 읽을 만한 구절 들과 비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동떨어진 장소와 원시 시대에로 몰입시킬 수 있어야 만 하며, 히브리어 성서를 < 철학적 추상적이지 않고 단순소박한 고대의 시적 언어로 기록된 > , 유목과 농경을 겸한 유태인들의 민 족 시로 읽을 수 있어야만 한다 .> 따라서 < 만일 당신들이 이 창 조물(성서)을 그것이 태어난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즐기기를 원한 다면, 양치기들 속의 양치기가 , 농경민 중의 농민이 , 동방의 원시 적 토착민들 사이의 동방인이 되어야 한다 >.51 독일인은 고대 히브 리인이 아니다 . 성서가 전하는 이미지들은 독일인에게 낯선 세계 로부터 태어난 것들이다. < 성경 속의 시인이 눈덮힌 레바논이나 카르멜 산의 즐거운 포도밭에 대해 이야기할 때……이런 것들은 독일 시인에게는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 < 바다로부터 그들의 땅 을 지나 아라비아로 나아가는 무시무시한 태풍은 그들에게는 구름 사이로 여호아의 전차를 우뢰같은 소리를 내면서 끌고가는 말들이
4) V, 43 6-438. 5) 이것은 로스에 대한 정당한 평가로 볼 수 없다. 로스는 헤르더보다 훨씬 먼저 , 성경의 시가 < 예리하고 성실하고 조급하고 끔찍한 구절들로 표현된 >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 우리들은 모든 것울 그들의 눈으로 보아야만 하며…… 유태인들이 읽은 식으로 히브리어 를 읽어야 한다 > We sacra po esi Hebraeorum pra e/ecti on es, 1753, Lectu re 5. Burt on Feldman and Robert D. Ric h radson, p. 169 로부터 재인용).
었다 . >6 ) 헤르더는 오늘날의 시인들로서는 유태인들의 이 같은 이 미지들을 모방하기보다 전기 스파크에 관해 담론하는 편이 더 나 을 것이라고 말한댜 무지개는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집을 떠받치 는 주춧돌이지만, 옛 스칸디나비아의 음유시인들 사이에서는 거인 족이 하늘을 습격하기 위해 건넌 불의 다리이다 . 7) 우리는 이 같은 사실들을 잘해야 절반 정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독일인은 성 경의 유태인도 아니고 , 고전고대의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도 아니다 . H ) 경험이 바로 현실이댜 경험을 이해한다는 것은 , 우리가 경험을 파 악하기 위해 해독하고자 하는 유물들 속에서, 그 경험이 그 경험 을 표현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했던가를 파악하는 일이다. 따 라서 역사적 이해만이 진정한 이해일 수 있다 . 고토쉐트 Go tt sched 며 레 싱 이 며 멘 델스존 Moses Mendelssohn 같은 계몽주의 자들은 역사적 관점을 결여했울 뿐 아니라, 도덕적 우수성을 등급별로 평 가하는 경향까지 있었다. 헤르더는 이러한 분위기를 스피노자주의
6) X, 14 (1 7 8 0-1781 년 사이에 집 필 된 작품). 7) Ober die neuen deutc h e Lit ra tu r , Fragm e nte ( pt . Ill), 1767. 8) 같은 책 , < 오, ‘고전적'이라는 진저리나는 단어여! 그것은 우리에게 키케로 를 고전적인 학원 수사학자로 , 베르길리우스와 호메로스를 고전적인 시인으 로, 케자르 를 현학자로, 리비우스를 다변가로 변모시켰다. 그것은 표현을 사 고로부터 분리했고, 사고 를 그것을 낳은 사건으로부터 분리했다… ••• 이 단어 는 고대인들을 살아 있는 실례들로 보려는 참된 교육과 우리 사이에 장애가 되었다…… 이 단어는 수 많은 천재들을 헛된 단어들 밑에 매장시켜 버렸고 …… 죽은 언어의 이정표 아래 짓밟아 버렸다 … … 어떤 독일 시인이 제 2 의 호라티우스로……부활한 루크레티우스로…… 제 2 의 리비우스로 묘사될 때 , 이것은 결코 자랑할 만한 찬사가 못된다 . 오히려 우리로서는 이 고대 작가 들 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편이 유례없는 큰 찬양이 될 것이다. ‘이 주 제에 관해 만일 호라티우스며 키케로며 루크레티우스며 리비우스가 문화발 전의 특수한 단계에서, 특수한 시대에,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특정한 사람 들을 위해 , 자기들의 특수한 전망과 언어를 가지고, 이 주제에 관해 저술했 더라면 , 그들은 이런 식으로 썼을 것이다 . '>
적이라고 부르는데, 어쨌든 그는 1774 년의 『 또 다른 역사철학 』 에 서 이 같은 도덕적 평가에 관해 경고하면서 (비록 그 자신은 당시뿐 만 아니라 이후까지도 도덕적 평가 를 내리는 경향이 있었지만) , 바난이 나 찬양은 공감적 통찰력, 즉 < 감정이입 > 의 능력을 발휘한 뒤에 야 수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라고 특히 비평가들에게 권고 한다.
『 또 다른 역사철학 』 은 새롭게 발견된 역사감각에 대한 매우 유 려한 묘사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 대목은 헤르더가 20 년 뒤에나 읽 었다고 전해지는 비코의 구절과 기분 나쁠 정도로 유사하다. < 어 떤 개인의 개성을 전달한다는 것은 얼마나 형언하기 어려울만치 힘든 일인가 . 어떤 개인을, 어떤 개인이 느끼고 살아가는 방식을 특징짓는 것이 무엇인지를 엄밀하게 말하기는 또 얼마나 불가능하 리만치 어려운 일인가. 누군가가 일단 눈으로 보고 나면, 영혼으로 파악하고 나면, 가슴으로 느끼고 나면 , 만물은 또 얼마나 달라지고 개성적이 되는가 . 한 민족의 특징은 얼마나 깊은 심연을 가지고 있는가 . 이 특성은 아무리 자주 관찰된다 하더라도 (심지어는 호기 심과 놀라움으로 응시된다 하더라도), 말에 의해 포획될 수는 없다 . 설령 말에 의해 포획된다 하더라도, 그 특성이 보편적으로 이해되 고 느껴질 만큼 식별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 사실이 그럴진대, 다 양한 민족들, 시대들 문화들, 나라들 전체를 단번의 개관으로, 한 번의 느낌으로, 단일한 단어로 정복하고자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 지겠는가! 말! 창백한 그림자놀이! 여기에는 생활방식, 습관, 염원, 땅과 하늘의 특징 등 모든 것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보충되든지 미리 마련되어야만 한다. 한 민족의 기질들이나 행위들 중 한 가 지를 혹은 이것들 모두를 느끼고자 한다면, 그 민족에 대해 공감 을 느끼는 것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 91
9) V, 502.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는 아테네로 국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테네인들뿐만 아니라 비오티아인들 Boeo ti ans, 스파르타인들 , 코 린트인들도 그리스에 살았고 통치했다 . 이집트인들은 페네키아인 들 못지않은 무역상이었다. 마케도니아인들은 로마인들처럼 정복 자였댜 위대한 그리스 사상가들은 현대인들 못지않게 예리한 통 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 모두는 이집트나 로마나 그리 스나 마케도니아 출신이었지 , 현대 세계의 주민들은 아니다(헤르더 는 『 또 다른 역사 철 학 』 뿐만 아니라 다른 저술들에서도 이 점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라이프니츠는 우리 시대에 속하지만 폴라톤은 그렇지 않댜 유사성은 동일성이 아니댜 비록 하느님만이 완벽하게 할 수 있겠지만 숲과 나무를 모두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역사는 일반 관념들과 특수 관념들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이다. 일반 관념들은 위험하고 오도하기 쉽지만 불가피한 추상자들이다. 전체를 본다는 것은 비록 달성하기 힘든 목표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추구해야만 할 목표이다 . 현실의 다양한 얼굴들에 대해 이상화된 하나의 이미 지롤 강요할 것을 주장하는 자들만이 예외며 일탈에 집하여 경악 할 것이댜 흄과 볼테르 , 로버트슨 Robe rt son 과 슐뢰처는 자기들 시 대의 척도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비난받는다. 문명들 사이에는 공 통의 척도가 있을 수 없다 .IO I 비평가는 자기가 다루는 저자에게 최 대한으로 항복해야만 하며, 저자의 눈으로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 댜 헤르더는 디드로의 유명한 행위자 이론, 죽 행위자가 어떤 역 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의 내면이 그 역할로부터 초연해져야만 한다는 이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 ”’ 진정한 해석자라면 원래의 대상
10) V, 509. 11)
neux, vru, 170-171).
에 침투하기 위해, 즉 원래의 대상에로 스스로를 몰입시키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댜 이런 식으로 그는 원래의 대상을 완전하게 복원 할 수는 없어도 재창조할 수는 있는 것이다. 물론 진정으로 한 언 어, 죽 하나의 생활방식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진정한 고유어를 글자 그대로 번역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카 데미아 주변에서 성장한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던 올리브나무를 아 테네 국경 너머로 옮겨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 스파르타가 아 테네를 약탈했을 때조차도, 여신은 그녀의 작은 숲을 보호했다. 마 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언어의 미덕들을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 댜 서로 짜여져서 우리의 언어를 구성하는 미덕들은, 마치 비단 베일로 드리워진 프리네 P hry ne 의 젖가슴처럼 희미하게 빛나고 있 다 .>1 21 번역은 개선이든 개악이든 창조이다. 따라서 번역은 창조적 천재에 의한 독창적 작업이 되어야만 한다 .1 31 물론 , 창조자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곳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의 과정에서 많은 것이 상실되고, 상실될 수밖에 없겠지만 말 이댜 이집트가 그리스적 기준이나 샤프츠베리의 현대적 기준에 의해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 학생들이 성인 오락에서 기쁨을 얻을 수 없다고 해서, 그들에게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중세가 볼테르에게 기쁨을 주지 못한다고 해서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오 히려 암혹시대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는, 리푸아리안Rip ua ri an 프랑크족이나 살리안 Sa li an 프랑크족의 모순 가득한 법률들보다 중요한 무엇인가가 용트림하고 있다. 서구의 중세문화는 로마의 질식시킬 듯한 중앙집권화에 대항한 위대한 반란으로 간주되어야
12) II, 44. 13) I, 173; I, 178.
한다. 중세문화는 < 태엽이 모두 풀린 거대한 시계의 태엽을 다시 감아준 것>으로 평가되어야만 한다. 중세문화를 비난하는 것과 이 상화하는 것은 똑같이 불합리한 일이다. < 내가 끊임없는 이주와 유린, 봉건적 전쟁, 수도사의 무리, 순례여행, 십자군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댜 나로서는 단지 이것들을 설명하고자 할 뿐이다. 말하 자면 나는 이 모든 것들을 관류하면서 약동하던 정신, 즉 인간적 힘들의 분출을 보여 주려고 한다. > 이 같은 생각은 1774 년에만 해 도 매우 독창적인 것이었다 . 중세는 르네상스로 나아가기 위한 회 랑이 아니요 , 이교 신앙은 기독교를 기다리는 대기실이 아니다. 한 문화는 결코 다른 문화를 위한 단순한 수단이 될 수 없다 . 한 전체 로서의 인류가 진보한다는 감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141 매 단계 는 그 스스로를 목적으로 삼는다. 특정한 단계의 사람들은 그들을 초월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닌 것이다. 헤르더는 논적인 칸트에 못지않게, 오로지 인격들과 사회들만이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입장 울 열열하게 피력한다. 우리가 아는 세계에서 선한 것, 전적으로 선한 것은 인격과 사회밖에 없다 . 오늘날의 시각에서 이 같은 격 률들은 (적어도 서구에서는) 퍽 진부한 것들일 수 있지만, 18 세기 중 엽의 파리와 파리의 지적 영향권들에서는 모든 도덕율을 폐기하자 는 이단적 주장들로 비추어졌다.
14) 헤르더는 인류의 진보 Fo rtug an g라는 자신의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해 명 백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상대주의는 표면상에서는 객관적 진보에 . 대한 믿음과 모순된다. 그러나 필자가 이 장의 남은 부분에서 서술한 내용 을 참조할 것
지배적 모델이라는 신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헤르더는 당 시의 역사신화들에 대해서는 더욱 과감한 공격을 퍼부었다 .151 이룰
15) 이 점에 대한 루쉐(앞의 책)의 해설은 그보다 더 저명한 독일의 헤르더 주 석가들의 해설에 비해 훨씬 충실하다 .
테면 그는 갈리아의 로마인들 Gallo-Romans 이 프랑스의 고전문화 를 창조했고 프랑스인들의 진정한 영혼이 배어 있는 이 고전문화 를 야만인들이 파괴했다는 신화를 공격한다. 반대로 프랑크족 정 복자들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신화―――몽테스키의, 말레 Mallet, 불랭빌리에 등이 지지한-도 배격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헤르 더는 밝디밝은 이교세계가 음울하고 쾌락부정적인 기독교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르네상스시대의 신화 역시 일축한다. 그는 비록 고 (古) 게르만족의 민요들을 억압한 중세의 수도사들을 비난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동시대의 볼테르나 기본이나 흄처럼, 혹은 하이네를 위시한 19 세기의 새로운 이교예찬자들처럼, 중세를 < 악 마들 노예들 마성적 성직자들, 폭군들 > 의 어두운 소굴로 매도하 지는 않는다. 뿐만이 아니다 . 헤르더는 독일 프로테스탄트파 사이 에서 날로 강화되던, 고(古) 게르만의 헤루스케르족 Cheruscan 전 사 헤르만 Hermann 의 전설도 지지하지 않는다 __- 헤르만은 클롭 스톡에 의해 독일의 아르미니우스Armini us 로 전형화되었다가, 결 국은 바그너에 의해 청년 지그프리트의 모습으로 독일 민족주의 신전(神殿)에 안치되었다. 이 같은 환상들은 진정한 탈출구가 될 수 없다. 헤르더는 현대적인 파리로 도망하든 태고적 독일의 어두 운 숲속으로 도망하든, 현실로부터 도망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기 만이라고 비난한다. 무슨 구실에서든 현실에 맞서려 하지 않는 자 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 18 세기의 세번째 거대한 신화는 점진적 진보라는 신화이다. 진 보는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 확실한 것임은 분명 하다. 결국 진보의 신화는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 는 바, 앞선 모든 세기들은 현재의 더욱 우월한 삶과 미래의 더더 욱 경이로운 삶을 향한 단계들로 간주된다. 헤르더는 이 같은 견
해를 철저히 배격한다. < 각 문화는 저마다 하나씩의 조화로운 칠 현금이니, 사람들이 귀를 가진 것은 오직 칠현금의 가락을 듣기 위해서이댜> 이해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아브라함이나 레오니 다스 Leon ida s(?-4 80 B . C.) 나 케사르를 현대인으로 볼 수 없는 측 면들을 파악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변화를 발생한 그대로 파악 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변화는 파편들의 병렬이 아니다. 그래서 변화는 분할될 수도, 비교될 수도, 계몽주의의 기준에 근접하는 정 도에 따라 우수성의 등급이 매겨질 수도 없다. 그렇다면 진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인가? 문화들은 모두가 똑같이 가치 있다는 말 인가? 이것은 헤르더의 견해가 아니다. 진보 Fo rtg an g는 분명히 존 재한다. 다만 헤르더의 진보 개념은 튀르고나 콩도르세나 특히 볼 테르가 (예컨대 『고(故) 바쟁 주교의 역사철학 La Phil o sop h ie d'his t o i r e pa rfe u l'Ab b'e Baz i n .i 에서) 해설한 진보 개념과 같지 않을 뿐이다. 특히 이들에 대해, 헤르더는 스위스 역사철학자인 이젤린 Ise li n 과 함께 맹공을 퍼 부었댜 이들의 견해는 피상적이고 비역사적인 기 만이댜 다양성이 모든 것이다. 이 테제는 거의 모든 초기 저작들 에서뿐만 아니라 『또 다론 역사철학』까지도 관류하고 있는 헤르더 의 핵심 테제이다. <우리 시대의 보편적이고 철학적이며 박애적 경향은 덕과 행복이라는 ‘우리 자신의 이상’을, 멀리 떨어진 민족 들에게까지, 심지어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시대에까지 확장시키려 고 한다……이런 식으로 진보의 세기들을 설명해야겠다고 마음먹 은 자들은 대체로 행복이란 반드시 증진되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소중히 여겨왔다. 그들은 이 같은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사실 들을 윤색하거나 날조해 왔고, 자기들의 생각과 모순되는 사실들 을 경시하거나 감추어 왔으며……말을 일로, 계몽을 행복으로 착 각해왔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계의 전반적인 진보와 개선이라는
허구를 꾸며냈다. >
반면에 이것이 위험한 기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다른 사람들은 절망적인 희의주의로 빠져 들었다. 몽테뉴며 베일이며 흄이 그러 했고, 결국은 볼테르며 디드로조차 그러했다 . 이것은 진보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댜 진보는 다양한 문화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바, 문 화들을 서로 비교하는 공통의 척도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문화 들은 진보 혹은 퇴보 같은 단일한 척도에 따라 배열될 수 없다. 사 회마다 문화마다 제 나름의 방식으로 발전한다. < 각 시대는 저마 다 다르며, 제 나름의 행복의 중심을 지닌다. 청년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만은 없듯이, 화평한 노인이 한창 나이의 혈기방장한 청년보다 덜 행복하다고만은 말할 수 없 다.> 마찬가지로, 중세는 <혐오스러운 것들, 오류들, 모순들 > 로 점철된 시대였지만, <무기력한 냉정함과 인간적 불행 > 의 시대인 우리시대로서는 거의 이해하기 힘든 <견실하고 일관되고 장엄한 어떤 것>을 간직한 시대였다. <빛이 인간을 양육할 수는 없다. > 질서와 풍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생각할 줄 아는 한 사람이 나 소수 사람들의 수중에서> 이룩되는 기술적 성취가 만인을 충 족시킨다는 것은 더더욱이 힘든 일이다. 다양한 생활방식들과 다 양한 진리들이 존재한다. <만사가 진리 아니면 거짓 > 이라는 우리 시대의 믿음은, 진보의 신화가 낳은 <비참한 환상>에 불과하다. 진정한 진보는 각 개인이 저마다 전인적 총체로서 이룩하는 발전 이요, 좀더 특수하게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이룩하는 발전이다. 부족들, 문화들, 공동체들 같은 인간 집단들은 언어와 관습에 의해 결정되지만, 동시에 <집단적 경험의 총체 >16) 에 의해 스스로를 창
16) XI, 225; XVII, 59; XVllI, 346; XXX, 8.
조하며 스스로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이를테면 인간 집단 은 만인에게 이해가능한 예술 작품들 속에서 스스로를 표현할 뿐 만 아니라, 의식적이며 무의식적인 욕구들을 충족시키고 특정한 사회의 다양한 기능들을 (바꿀 수는 있지만 크게 바꿀 수는 없는) 자 연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시키는 과학들, 기술들, 사회적 • 정치적 • 문화적 생활방식들 속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민족성이라 불리우는 이 프로테우스 Pro t eus 는, 한 민 족의 저술들에서만이 아니라 관습들과 행동들에서도 그의 자태를 드러낸다. 이 프로테우스를 사로잡아 심문한다는 것一_―이것이 바로 고상하고 아름다운 철학의 과제이다. 이 과제는 시에서 가장 확실하게 실천되었다. 모든 민족들을 관류하는 영혼은 상상과 감정 의 활동 속에서 가장 자유롭게 발현되기 때문이다 .>171 고전고대의 그리스인들은 바로 이 같은 과제에서 경이로운 성공을 거두었다.
17) XVIII, 57-58.
헤르더는 하만의 가혹한 저주에도 불구하고 아테네 문화에 대해 열열한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 같은 감정은 괴테, 헤겔, 횔덜린 Hi: ild eri n, 실러만 아니라, 사실상 개화된 독일인들 거의 모두가 ―낭만주의자들과 반낭만주의자들이 똑같이 ――-공유한 것이 었댜 어쨌든 헤르더는 그리스인들의 업적이 어느 정도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리스의 운 좋은 주민들이 객관적 보편적으로 타당하다고 (실수로, 그러나 눈감 아 줄 만하게) 믿은 원리들을 고무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 민은 있을 수 없다. 그는 서둘러 캐시미르인들, 페르시아인들, 코 가서스인들을 명단에 추가한다. (미적 감각을 결여한 유태민족과는 달 리) 이 민족들 역시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 살면서 훌륭하게 성
장했고 아름다운 문화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 그리스인들이 진보를 거듭하면서 그들의 능력을 조화롭고도 성공적으로 구현할 수 있었 던 것은, 자연형편이 유리했고 진보를 저해할 만한 자연적 대재해 가 없었기 때문이다 . 그렇다고해서 그리스인들이 로마인들로 통하 는 복도가 될 수는 없다. 로마 문명은 그 나름의 내적 기준에서, 즉 그것에 고유한 <중력중심>이라는 견지에서 판단되어야만 한 댜 헤르더가 말한 <진보>는, 이렇듯 한 문화가 고유한 < 생태환 경 habit us > 안에서 그 나름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뜻한 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얼마간 보편성이 있기 때문에, 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배우고 이해하고 경외하는 일이 가능하다. 다만 한 문화가 다른 문화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문화로 되 돌아 가려는 시도는, 그 문화를 바보로 만들 뿐이다. 헤르더는 때로 보쉬에와 비슷하게 말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 는 역사란 에피소드식 이야기가 아니라 방대한 드라마요, 하느님 의 손가락이 인류의 운명을 어떤 목적론적 방향으로 이끄는 것처 럼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헤르더는 이러한 생각을 더 이상 발 전시키지 않는다. 섭리의 관점에서 매 행위를 선행자와 후속자 사 이의 연결고리로 보았던 보쉬에와는 달리, 헤르더는 역사란 비록 드라마이기는 하지만 <대단원>이 없는 드라마라고 말한다. 마치 역사는 우주가 연주하는 심포니와도 같다. 역사 속의 운동들은 하 나하나가 그 나름대로 중요하지만, 그것들을 전체로서 감상할 수 는 없다. 하느님만이 전체를 들을 수 있다. 뒤늦게 발생한 운동이 라고해서 반드시 최종 목표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니요, 그러므로 먼저 발생한 운동보다 더 우월한 것도 아니다. 삶은 그림짜맞추기 가 아니다. 그림짜맞추기에서는, 조각그림들이 하나의 단일한 패턴 으로 모두 끼워 맞추어져야만 한다. 이 패턴 전체의 견지에서만,
낱개로는 기괴해 보이는 조각들이 이해가능한 것들로, 조화로운 거대한 전체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들로 간주될 수 있다-헤겔 의 유명한 이미지를 빌리자면, 세계영혼은 바로 이처럼 그림짜맞 추기가 완성된 순간에 자기자신를 완전하게 의식할 수 있게 된다. 반면에 헤르더는 심포니를 구성하는 운동마다(혹은 드라마를 구성하 는 막( 幕) 마다) 그 나름의 목적과 가치룰 가지고 전개된다고 믿는 댜 더욱이 한 운동의 도덕적 가치는 다른 운동에 의해 극복되거 나 파괴되거나 계승된다고 할지라도, 결코 손상되지 않는다. 지상 에서 인간 삶은 하나의 보편적 목적을 성취하는데, 헤르더는 이 목적 을 < 인간다움 Human itat > 이 라고 부른다. 이 모호하기 로 악명 높은 용어는 헤르더와 계몽주의 일반에서, 모든 불멸의 영혼들이 보편적으로 가치있는 목표들을 향해 조화스럽게 발전해 나가감을 뜻한댜 이 목표들에 포함되는 덕목으로는, 이성, 자유, 관용, 개인 끼리 혹은 사회끼리의 사랑과 상호존중, 육체적이자 정신적인 건 강, 보다 예리한 지각, 지구에 대한 지배력, 하느님이 가장 숭고한 작업을 통해 심어 두었고 자기의 이미지에 따라 만든 모든 것들의 조화로운 실현 등이 있댜 181 이것은 바이마르 인문주의를 특징짓 는, 포괄적이고 일반적이고 낙관주의적인 정식화 방식이다. 실제로 헤르더는 이 방식을 특히 후기 저작들에서 채택하나, 보편적 설명 범주나 가치기준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왜냐하면 그것의 함축이 엄밀하게 규정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헤르더는 무엇보다도 포 괄적이고 공평하기를 원한다. 일례로 그는 스트라스부르에 체류하 면서 고딕 건축에 관한 멋진 연설을 통해 괴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고딕 건축양식에 대한 혐오감을 감추지 않
18) XIII, 154 에서 <인간다움 Human it a t>에 관한 언급을 참조.
는다. 그런가하면 그는 기사도를 비롯한 중세적 가치들 전반에 대 해 반발하면서도, 볼테르를 위시한 중세 풍자가들에 대해서는 중 세적 가치들을 옹호한댜 특히 말년의 그는 원시상태를 그 자체로 서는 크게 가치있다고 여기지 않았으며, 이 점에서 원시상태를 진 정으로 동경한 18 세기의 원시주의자들과 구별된다. 그렇지만 그는 고대에든 현대에든, 유럽의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토착민을 식민 지 주민으로 정복하는 데 대해서는 늘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식 민지 정복은 도덕적으로도 가증스러운 일이지만 결국은 인간다움 을 거역하는 범죄이다. 이교신앙이 기독교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 을 필요가 있듯이, 혹은 호메로스가 클로츠 Klo t z 며 백과사전파로 부터 보호받을 필요가 있듯이, 기독교는 돌바크와 볼테르 같은 유 럽의 <중국애호가들 S i no phi les> 로부터 보호받아야만 하며, 다시 중국인들과 몽고인들은 유럽인들의 무지로부터 보호받야만 한다 . 이러한 맥락에서 헤르더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중앙 아시아의 무당은 결코 사기꾼이 아니다. 베일이나 볼테르의 영향력 있는 주 장과는 달리, 신화란 꾀많은 성직자들이 대중을 속여서 권력을 잡 울 요량으로 현실을 날조한 거짓 진술인 것만은 아니다. 태고적 시인들의 시는 단순히 즐거움을 주거나 가르치려는 의도에서 작성 된 것만은 아니다. 여기서 헤르더의 입장은 그가 비코를 읽기 얼 마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코와 입장과 대단히 유사하다. 과연 헤르더가 비코의 저작들을 대충 훑어 보는 데 그쳤을까 하는 의심 마저 들 정도이다. 어쨌든 무당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소망하는 대 상들을, 신화나 미신의 형식으로 표현한다. 시는 이 같은 세계관으 로부터 나온 자연스러운 산물인 동시에 그 세계관에 대한 표현이 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과 인간의 창조력에 어울리는 세계들은 모 두가 시에 의해 창조된다. 이 세계들은 다른 세계들과 공통의 척
도에 의해 비교될 수 없다. 이 세계들은 모두 인간에 의해 만들어 졌기 때문에, 똑같이 우리의 관심을 끌 만한 가치가 있고 똑같이 우리의 성찰을 요구한다. 우리로서도 이 같은 성찰의 댓가로, 우리 가 어떤 존재가 될 수 있고 무엇을 창조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 이러한 파악은 과거의 교훈을 배우는 것에 의 해 얻어지지 않는다(헤르더는 역사의 반복성에 관해 언급하기도 하지 만, 흄 이나 볼테르와는 대립적으로 역사의 일회성을 강조하는 것이 그의 기본 입장이다) . 오히려 과거에 창조된 것들에 대한 통찰은, 우리 각자의 무게중심이나 우리가 속한 집단_민족, 지역, 공동체 一 의 무게중심을 발견하도록 우리를 고무한다.
이 같은 소속감이 없이는, 진정한 창조도 인간적 목적의 진정한 실현도 있을 수 없댜 동일한 이유에서, 낯선 가치들을 다른 <민 족>에게 강요하는 행위는 (예컨대 선교사들이 과거에 발틱해 연안에 서 자행했고 오늘날에는 인도에서 자행하고 있는 것처럼) 비효율적이고 도 해롭다 19 1 아무 집단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제일 나쁘다. 이 들은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헤르더에 있어 이 두 가지 는 크게 구별되지 않는데 _집단이나 자기로부터 추방된 존재 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국 쓸모없는 존재로 귀결될 운명이다. 당 시 독일의 상황에서, 이 같은 분열은 헤르더에게 가장 큰 위협으 로 보였을 것이다. 현대의 헤르더 비평가들 중에는, 헤르더가 프랑 스―― 18 세기와 19 세기의 프랑스!――{롭 기력이 거의 소진된 사 회라고 비난한 데 분개하는 자들도 없지 않다. 물론 헤르더는 예 언가로서는 실패했을지 모른다(그의 예언자적 음성은 명료하지 못할 때도 있었고, 대체로 모순적 감정을 토로하는 데 그쳤다). 시-회심리학지·
19) VII, 210, 303.
로서도 실패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르더는 같은 세 대의 세계 위로 우뚝 솟아 올랐다. 그는 다른 어떤 작가보다도 명 료하게, <소속>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파악하여 부 각시켰다. 어떤 집단, 어떤 문화, 어떤 운동, 어떤 생활방식에 소속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헤르더의 통찰은 대단히 독창적인 업적이었다.
제 26 장 〈소속한다〉는 것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작곡가의 의무는 바로 동료 구성원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위해 , 이야기하는 일입니다 . 제가 믿는 것은 뿌리요, 친분이요, 배경이요, 개인적 관계입니다…… 제 음악은 제가 살아가며 일하는 곳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벤자민 브리튼 Ben jami n B ritt en 의 제 1 회 백양상 The firs t Aspe n Award 수상 답사 중에 서 , 1964
< 소속 belon gi n g>은 헤르더의 핵심 관념에 해당한다. 그의 인민 주의론이 그러하듯이, 이론과 실천의 통일성에 관한 그의 주장도 소속이라는 관념에 비추어서만이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소속한 다는 것은, 수동적 귀속이 아니라 적극적 협동이요 사회적 노동이 댜 <완전한 진리는 언제나 행동뿐이다.> 최후작인 『역사철학 시
1)
테나 헤겔보다 훨씬 앞선, 1774 년에 제시한 명제이다 (Uber Erkennen und Emp find en in der Menschlich en Seele, VIII).
론 』 , < 히브리 시 > 에 관한 초기 논고, 셰익스피어며 아션이며 호메 로스에 관한 에세이들 , 「작은 숲 Waldern 」이라는 바평, 말년의 『 아 드라스티아 Adras t ea 』 와 『 칼리고네 Kal ig one 』 - 이 모든 헤르더 의 작품들은 온통 한 가지 관념으로 채색되고 있다 . 각각의 진정 한 문화와 각 문화를 구성하는 안간들은 어떤 중심 패턴의 견지에 서 파악될 수 있으며 사실상 그러한 견지에서 인식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그것이댜 헤르더에 있어, 특정 집단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 은 특정한 목적이며 가치며 세계관에 비추어 특정한 방식으로 생 각하고 행동한다는 뜻이다. 거꾸로 말해,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 고 행동한다는 것은 특정 집단에 속한다는 뜻이다. 이 두 의미는 정확하게 같댜 독일인이 된다는 것은, 독일의 고유한 흐름에 합류 한다는 뜻이다(이 흐름에서 언어는 지배적 요소이지만 여전하 여러 요 소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독일인들이 말하거나 움직이는 방식, 먹거나 마시는 방식 , 그들의 필체, 그들의 법, 그들의 음악 , 그들의 사회관, 그들의 춤 형식, 그들의 신학 등에는 일정한 패턴 과 성질이 있는 바, 프랑스인들이나 아이슬란드인들이나 아랍인들 이나 고대 그리스인들의 비슷한 활동들에서는 그 같은 패턴과 성 질이 전혀 없거나 아주 적다는 것이다.
이 같은 활동들은 저마다 하나씩의 별로서, 전체적으로만 볼 수 있는 성운(星 雲 )에 소속된다. 그리하여 별들이 서로를 조명하듯이, 이 활동들도 서로를 조명한다. 이를테면 독일인의 어조나 역사나 건축이나 신체적 특징을 연구하는 사람은 그 덕택으로 독일의 입 법이며 음악이며 옷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것이 다. 이 같은 다양한 행동들이 합류하여 하나의 고유한 특성을 드
러내는 바, 이 특성에 대한 추상화나 명석한 전달은 불가능하다. 물론 시공간적으로 전혀 동떨어진 집단들 사이에서도, 사냥이나 그림이나 숭배 같은 공통의 활동들이 이루어진다. 이 공통의 활동 들은 사냥이나 그림이나 숭배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은 서로를 닮 았을 것이댜 그러나 하나의 활동유형(예컨대 사냥)이 드러내는 특 수한 성질은, 다른 문화에서의 비슷한 활동(사냥)보다는 같은 문화 에서의 다른 활동유형들(그림, 숭배 등)과 더욱 많은 공통점을 공유 할 것이댜 적어도, 동일한 문화의 다양한 활동들이 공유하는 것, 즉 공통의 지배적 패턴이 더욱 중요하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 다——모든 활동들은 그 덕택에 동일 문화 내의 요소들로 파악될 수 있댜 한 문화를 지배하는 공통의 패턴은 그 문화 내의 모든 활 동들의 특징들을 깊이 있게 설명해 주는 반면에, 다론 문화나 다 른 집단의 상응하는 활동들과 그것들과의 유사성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독일 서사시가 독일 가족생 활이나 독일 입법이나 독문법과 공유하는 너비는, 독일 시가 힌두 어 시나 히브리어 시와 공유하는 너비보다 훨씬 넓다. 이 같은 공 통성은 결코 신비한 속성이 아니다. 공통성을 탐지하기 위해 초경 험적인 능력이 각별히 요구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자 연적 속성으로서, 경험적 탐구에 개방되어 있다.
실로 헤르더는 평생을 철두철미한 경험론자로 살았다. 그의 신 학을 감안해도, 종교의 우선성에 대한 그의 믿음을 감안해도, 집단 <영혼>이나 <정신>같은 형이상학적 개념들의 빈번한 사용을 감 안해도, 그의 신비한 <힘들>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이따금 곁길로 빠져 자연 종의 도그마를 수용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헤르더는 라 이프니츠나 칸트, 심지어는 엘베티우스보다도 경험주의적이었다. 이 요점은, 헤르더의 영향을 받은 차세대의 독일 형이상학자들이
선험적 정식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는 사실로 인해 가리워지곤 했다 그렇지만 헤르더는 동시대의 매우 엄격한 성직자 동료들로 부터는, 위험스러울 만큼 유물론적 이단으로 경도되었다는 의심을 받기까지 했댜 그의 경험론에서 핵심은 역사와 자연에 작용하는 패턴을 발견한 점이었댜 이 패턴은 직접적으로 지각될 수 있으나 분석될 수는 없는 성질의 것인 바, 이 패턴적 성질의 덕택으로 독 일인이 사고하거나 행동하거나 말하는 것은 철저하게 독일적인 특 징을 띠게 된다. 달리 말해, 이것은 일종의 < 형태적 성질 Gesta l t q ual ity > 로서 , 21 우리는 이 성질에 비추어서 그 행위자와 행위, 그 사상가와 사고를, 독일 문화의 발전에서 특수한 단계에 속한 것으 로 파악할 수 있다. 소속한다는 것은 바로 이 같은 패턴과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댜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동족의 환경으로부터 추방된 어떤 독일인 , 혹은 강제로 다른 곳에 살게 된 어떤 영국인 이나 프러시아인은 그곳에서 실향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실향 감에 빠진 사람들이 자연스럽고 자유롭고 너그럽고 거리낌없이 창 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그들은 실러가 < 단순소박 함>이라 부른 방식으로, 혹은 헤르더가(스스로 인정하든 안정하지 않 든 간에) 가장 열망하고 확신한 방식으로 창조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요점이다 . 국민성, 국민적 재능, 민족정신, 인민 정신 등에 관한 헤르더의 모든 이야기들은 결국 이 요점으로 귀결된다. 어떤 가족, 어떤 종파, 어떤 장소, 어떤 시대, 어떤 스타일에 소 속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헤르더의 생각은, 그의 인
2) 필자는 <형태>라는 용어를 독자적으로 사용했으나, 그것이 니스벳 교수 에 의해 강력하게 확증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대단히 기랬다. Nis b et, Herder, Goeth e and the Nati on al Ty pe (Publi ca ti on s of the Eng lish Goeth e Socie t y , 1967), pp. 267-283 을 참조 .
민주의를 지탱하는 토대였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이후로도 지속 적으로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분열이나 추방이나 소외를 경험한 사람들이 개인적 자아통일이나 집단적 재통합을 추구한 의식적 프 로그램의 기초가 되었다. 헤르더는 불행한 동포들에 관해 자주 언 급했다. 가난 때문이든 주인의 폭정과 변덕 때문이든 러시아나 트 랜실바니아나 미국으로 강제 이주되어 <흑인과 노예>로 전락한 자들에 관한 헤르더의 이야기는, 추방의 물질적 • 도덕적 참혹함에 대한 한탄에 머물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는 더욱 심층적인 전망에 기초한 것이었다. 사람들울 <생활중심>으로부터, 그들이 자연스 럽게 소속된 구조로부터 강제로 때어내서 저 멀리 떨어진 바빌론 강가로 이주시키는 일, 그리하여 그들의 창조력을 이방인에게 유 리하도록 팔아 넘기는 일――-이것은 그들을 타락시키고 비인간 화할 뿐만 아니라 철저히 파괴하는 일이다 .3 ’ 인간 존재들이 그들 의 절대적 조건들로부터 강제로 분리되면 엄청난 상처를 받는다는 것, 그들의 역사는 이 같은 조건들 하에서만 그들의 충실한 삶을 보장해 줄 수 있다는 것을 헤르더 만큼 생생하게 그려낸 작가는 없다 헤르더는 필연적으로 우월한 환경이나 집단이나 생활방식은 있을 수 없음을 되풀이하여 강조한다.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이 선 호하듯이 법이나 언어나 사회구조를 단일한 보편적 패턴에로 동화 시키는 것은, 삶과 기예에서 가장 생생하고 가치 있는 것을 파괴 하는 일이다.
3) 그는 1775 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튀르티오스 T yrt aeus 같은 시인도 아메리카에 병사로 팔려간 우리 형제들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요, 호메로스 역시 이 슬픈 원정을 노래하지는 못할 것이다. 종교, 백성, 나라가 무너진 탓 에 이 같은 개념들 자체가 퇴색할 때, 시인의 칠현금은 짓눌린 신음 소리만 을 낼 수 있을 뿐이다 >W i e Ursachen des ge sunkenen Geschmacks bei den verschie d enen Volker da er g eb lii he t으로부터 인용).
바로 이 대목에서 볼테르에 대한 격렬한 논박이 등장한다. 볼테 르는 『여러 민족들의 풍습과 정신에 관하여 』 에서 < 일반적으로 말 하자면 인간은 늘 지금의 모습 그대로였다 >~ I, 혹은 < 모든 문명화 된 민족들 사이에서 도덕성은 언제나 동일하다>라고 주장했다. 이 러한 주장을 확장하면, 나머지는 당연히 야만적이든지 우매한 민 족들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갈리아인들은 자연의 망신거리 > 라 고 해야 옳지 않겠는갸 51 더 나아가 헤르더는 철학적인 보편문법 울 요구한 슐처 Sulzer 역시 공격한다. 슐처에 의하면, 어떤 민족의 언어 완성도는 철학적인 보편문법의 규칙들에 따라 판단될 수 있 고, 필요하다면 보편적 규칙들에 비추어 그 언어의 규칙들을 수정 할 수 있다. 헤르더에게 이 같은 주장이 원리상 오류일 뿐만 아니 라 시와 창조력의 원천들을 죽이는 짓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모든 집단은 각자 나름대로의 행복권을 갖는다. 만인이 행복해지 기 위해서 모두가 유럽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만큼 끔찍한 오만 은 없댜 6) 그 이유는 볼테르의 주장처럼 다른 문화가 우리 문화보 다 우월할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문화들 사이의 비교가 불가 능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그만의’ 느낌을 특징 그대로 전달 하거나, 나의 존재를 그의 존재로 전환시킬 수는 없다 .>7 ) <백인이 흑인을 검은 짐승이라고 생각할 자격이 있다면, 흑인은 백인을 탕 아라고 생각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인류 문명은 유럽인인들의 것만은 아니다. 문명은 민족마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르게 나타 난다 .>d i 특별한 선민은 있을 수 없댜 헤르더는 한 가지 사실만을
4) Essai sur [es Moeurs et ['Espr it des Nati on s(Pa ris, 1785), p. 32. 5) 같은 책, p. 53(J er ome Rosenth a l, 'Volta i r e 's Ph ilo soph y of Hist o r y ,' Jom a[ of the Hi st o r y of Ideas, XVI, 1955, no. 2, pp. 151 - 179 로부터 인용) , 6) Ideen zur Phil o sop h ie der Geschic h te der Menschheit, Vil l. ch. 5. 7) 같은 곳.
가정한다 우리가 충실하게 인간다워지고 충분한 창조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어떤 집단이나 어떤 역사적 흐름에 소속해야 한다는 가 정이 그것이댜 이 집단이나 역사적 흐름은, 전통과 환경과 문화가 자연력에 의해 형성된다는 발생론적 관점에서만 정의될 수 있다. 다시 말해 <풍토>(외부세계)며 신체구조며 생물적 욕구는 모든 개 개인의 정신 및 의지와 상호작용하면서, 사회라고 불리우는 역동 적이고 집단적인 과정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 이론은 결코 신화를 수반하지 않는다 . 헤르더는 집단이란 종 국적으로 개인들의 집합이라고 본다. 그는 <유기체적> 혹은 <유 기체 > 라는 용어를 철저히 은유적으로만 사용하는데, 이 점에서 절 반쯤만 은유적으로 사용한 19 세기 형이상학자들과 구별된다. 헤르 더가 집단을 형이상학적이고 <초개인적인> 실체나 가치로 간주했 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 집단은 역사의 불가사의도, 개개인의 희생 울 요구하는 종류의 것도 아니지만, 특별한 인종이나 특별난 만족 이나 인류 전체의 우월한 지혜는 더더욱이 아니다 . 그럼에도 불구 하고, 사람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을 발생론적 관점에서 이해 한다는 뜻이댜 그들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그들에게 자유와 귀향 감을 주는 정신적이며 육체적인 <힘들>의 복합체라는 견지에서,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이해이다. 귀향감의 건너 편에는 고향상실감이라는 개념이 자리한다(헤르 더는 ‘향수의 고통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고통’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 향상실감은 일련의 성찰들에서 핵심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세계시 민주의의 공허함에 대한 성찰은 물론이지만, 사회적 장벽이며 이 민족의 억압이며 분열이며 전문화 등이 인간에게 입히는 손상에
8l xvm, 247-249. F.M. Barnard, 같은 책, p. 24 참조. 인용문은 바너드의 번 역을 이용한 것이다.
대한 성찰도-그리고 이와 관련된, 착취, 사람들 사이의 소외, 종국적으로는 진정한 자아로부터의 소외 같은 개념들도-고향 상실감이라는 헤르더의 핵심 개념으로부터 파생된 것들이다. 따라 서 빈곤이나 질병이나 어리석음이나 무지 탓에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부적응자들이나 아웃사이더들이나 말솜씨 없는 자들도 비참하게 살아간다는 생각, 형제애를 결여한 자유와 평등 은 공허할 뿐이라는 생각, 진정으로 인간다운 결사에서는 구성원 들이 지도자를 기꺼이 따르되 주인처럼 섬기지는 않는다는 생각 ―이 같은 생각을 헤르더로부터 파악해 낸다면, 그의 핵심 관념 들 중 하나를 획득한 셈이다 .91
9) <주인을 필요로 하는 자는 동물이다. 그가 인간다워지는 순간, 주인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XII, 383). 이 구절은 <인간은 동물처럼 주인을 필요로 한다>는 칸트의 주장을 겨냥한 것이다. Kant, Ideaf or a Univ e rsal Hi st o r y from a Cosmop o lita n Poin t of View (Prussia n Academy edition , 1923), Vil l, 23 참조. 그러나 칸트의 논문 <계몽이란 무엇인가 ?Was ist Aufk lar ung ?>, 그리고 헤르더가 하만에게 보낸 편지 (1775 년 2 월 14 일자)도 참조할 필요가 있다.
헤르더의 저작들은 사람들 사이의 상호관계에 관한 생각을 근본 적으로 뒤바꾸었다. 헤겔은 <인정론(認定論)> -사람들 사이의 상호인정 Anerkennun g-에서뿐만 아니라 자유란 <자아에 의한 자아의 실현 be y sic h selbst se y n> 이라는 유명한 정의에서도, 헤르 더의 가르침에 큰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사회적이라는 명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로 언급한 이 래 키케로, 아퀴나스, 후커, 그로티우스, 로크 등등에 의해 수없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헤르더는 이들의 진부한 논법들을 모조리 빈 약한 추상화로 보이게 만들었고 나아가서는 영원히 폐기처리해 버 렸다. 그만큼 헤르더의 저술들은 인간관계와 그것의 변화무쌍함을
깊이 있고 폭 넓게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학적 • 심 리학적 관찰을 풍부하게 동원해가면서 인간이 공동체에 소속한다 는 것이 무슨 뜻인지에 대한 개념을 진척시켰다. 헤르더 이후로, 진지한 사회 이론가라면 어느 누구도 이 같은 기계적 상투어를 감 히 머리 밖으로 내놓을 수 없게 되었다. 그만큼 헤르더의 사회관 은 서구의 사상을 지배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영향력의 정 도가 늘 인정되어 온 것은 아니다 . 아마도 그의 견해가 일상적 사 고구조에 너무 깊히 길들여진 탓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괴테가 언 급했고 밀도 입증했듯이, 헤르더의 대한 영향은 주로 그의 핵심 테제, 죽 함께 살아가고 함께 행동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그의 해설에 기인한댜 이 핵심 테제는 그의 나머지 모든 생각이 흘러나왔다가 끊임없이 되돌아가곤 하는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인민주의의 핵심 이념으로서, 사회를 참되게 인식하려는 모든 후속 시도들 속에 깊숙히 스며들었다.
제 27 장 예술과 표현 헤르더의 각별한 공헌은 인간과 인간의 역사에 대한 이해에서 찾을 수 있댜 그의 인간관에는 대다수의 주석가들이 주목하지 못 한 두 가지 함축이 숨어 있는데, 첫째는 인격의 불가분성이라는 관념이다. 이 관념으로부터 예술가와 사회 내에서 예술가의 표현 적 역할에 대한 그의 관점이 형성된다 . 둘째는 그의 다원주의론과, 사람들의 종국적 목적들 사이의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그의 관념이 다. 헤르더가 미학적 문제에 천착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온갖 예술적 표현들을 가능한 한 풍부하고 충실하게 탐구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그는 예술의 가장 풍부하고도 충실한 표현 형식을 특히 원시 단계의 창조물들 속에서 발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 었다. 헤르더에게 예술이란 사회 내의 인간들에 대한 가장 충실한 표현이었다. 예술이 표현이라는 말은, 예술울 어떤 대상물을 생산 하는 행위로 보기보다는 말하는 음성으로 본다는 뜻이다. 다시 말 해 예술은 창조하는 인간의 목적과 성격 그리고 <환경>과는 무관
하게, 시며, 그림이며, 황금그릇이며, 교향곡 같은 것들을 자연물들 과 비슷한 속성을 가진 대상물들로서 생산하는 행위가 아니다.” 헤르더는 명쾌한 논증과 < 민요들에 깃든 민족의 음성>이라 불리 는 원리를 동원해서, 인간이 행하고 말하고 창조하는 모든 것은 그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그 자신의 인격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것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더욱이 인간은 집단을 떠나서는 아무 생각도 떠올릴 수 없다는 점에서 일종의 <집단적 개성 collecti ve i n di v i dual ity > 을 전달한다―一-그가 어떤 집단에 계속 소속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운명에 달려 있겠지만, 설령 집단으로 부터 축출된다 할지라도 단절된 상황 속에서나마 집단의 특성들을 유지해간다 ? 이 < 집단적 개성 > 은 사고, 감정, 행동, 표현의 지속 적 흐름으로서의 문화에 해당한다 .
이런 관점에서, 헤르더는 당시부터 우리 시대까지 줄곧 영향력 을 행사해 온 견해와 격렬하게 대립한다. 예술가는 그 자신의 개 성이나 의식적이고도 무의식적인 의도, 혹은 그의 사회적 처지와 무관하게 아름다운 대상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 견해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테제가 명료 하게 정식화되기 오래 전부터 군림해 온 미학적 입장이다. 이 입 장에 따르면, 황금그릇을 만든 장인은 그의 창조물을 획득하거나 예찬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진지한 사람인지 계산적인 사람인지, 독실한 신앙인인지 무신론자인지, 성실한 남편인지, 건전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인지, 마음맞는 동료인지, 도덕적으로 순수한 사
1) 헤르더가 보기에, 이 같은 주장은 예술적 아름다움에 대한 파리의 폭군들 에 의해 개진된 것이었다 . 이 를 테면 주교 뒤 보나 바퇴 Bate u x 같은 브왈로 데스프리오의 제자들이 그러했다.
2) V, 502.
람인지 묻는 것은 당신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 라고 말할 자격이 있다고 하겠댜 헤르더는 정반대로 예술가의 사명을 정의한다. 예 술가는 무엇보다도 자기의 작품들 속에서 내적 체험의 0 진리를 검 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입장에서 헤르더는 진정한 아 버지이댜 3 ) 따라서 예술가가 자기의 내적 체험을 의식적으로 왜곡하는 행위 는 어떤 동기에서 수행된 것이든 예술가의 소명을 배신하는 일이 다. 고객의 취향을 만족시키기거나 고객의 감각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든, 자기의 내적 체험과는 무관하게 기술과 기교만을 부려가 면서 자기의 솜씨를 과시하거나 그 솜씨 자체가 주는 쾌락을 즐기 기 위한 것이든, 예술가의 소명에 대한 배신이다 . 이것은 < 질풍노 도 S turm und Dran g>로 불리우는 예술운동에 함축된 입장인 바, 헤르더는 이 운동의 지도자들 중 한 명이었다 . <질풍노도> 의 작 가들에 의하면, 누군가가 자기의 특수한 재능을 따로 떼어내 예술 작품들의 창조를 수행하는 동안 그의 나머지 재능이 그 같은 수행 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전문가를 자처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이다. 한 남자로서의―—f이를테면 한 아버지로서 의, 한 프랑스인으로서의, 한 정치 테러리스트로서의 ―― -행위가 목수, 의사, 예술가 같은 전문적 행위와 전적으로 분리될 수 있다 고 주장한다는 것은, 볼테르로서는 별로 문제삼을 일이 아니었울 지 몰라도, <질풍노도>의 작가들에게는 인간본성과 인간관계에 대한 치명적 오해이자 왜곡이다. 인간은 전인적인 단수이지 분열 된 복수가 아니기 때문이다(정말 다중인격으로 분열된 자라면 말 그대 로 정신분열자로 불려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로서든 정치가로
3) 그렇지만 이 책의 1 부, 12 장의 각주 2) 와 비교할 것.
서든 법률가로서든 군인으로서든 그가 행하 는 모든 것은 그 자신 에 대한 총체적 표현이다 물론 <질 풍노도 > 의 작가들 중에는, 하 인제 He i nse 나 클링거 K li ng er 처럼 개인주의자들도 상당수가 있었 댜 그러나 헤르더는 그들의 자아편집증을 완강하게 거부한다. 개 인은 불가피하게 어떤 집단의 구성원이므로, 개인이 의식적 무의 식적으로 행하는 모든 것은 결국 그가 소속한 집단의 열망을 표현 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그가 자신의 행위를 의식하고 있 는 경우라면, 그의 자기의식은 모든 참된 비판들이 그러하듯이 높 은 수준의 사회적 비판이 될 것이다(사실상 자기의식은 일종의 맹아 적 사회 평가로서, 사회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자기를 사회 속에서 자각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표현은 곧 의사소통이다. 헤르더는 이것이 역사에 의해 증명될 수 있는 사실이라고 믿는댜 육체로부터 영혼을, 과학으로부터 기술이나 예 술을, 사회로부터 개인을, 기술( 記述) 로부터 평가를, 철학적 • 과학 적 평가로부터 역사학적 평가를, 경험적 진술로부터 형이상학적 진술을 (같은 실체의 두 얼굴로 구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서로가 무관한듯이 완전히 분리한다는 것은, 거짓이요 피상이요 현혹이다. 육체는 영혼의 이미지이고 표현이지, 영혼의 무덤도 영혼의 도구 도 아니다. 영혼의 적(敵)은 더더욱 아니다. <육체와 영혼을 가로 막는 철벽>은 있을 수 없다? 라이프니츠가 『인간오성 신론 Nouveaux essais sur !'ente n dement huma i n .JJ 에서 말했듯이, 만물은 감각 불가 능한 전환에 의해 무엇으로도 변화할 수 있다. <옛날에 인간은 무 엇으로든 될 수 있었다. 시인이자 사상가이자 입법가이자 토지측 량사이자 음악가이자 군인일 수 있었다.> 이런 시절에는 이론과 4) VIII, 256-262.
실천이, 개인과 시민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댜 이 통일성을 파괴 한 것이 노동분화이다. 노동이 분화되면서부터, < 인간은 반쪽으로 는 생각하고 나머지 반쪽으로는 느끼는 존재가 되었다 . > 5 ) 헤르더 는 행동하지 않는 윤리이론가, 영웅적이지 않은 서사시인, 정치가 가 아닌 웅변가, 창작하지 않는 문예비평가 따위로부터는 배울 것 이 없다고 말한다. 아무런 비판도 없이 이론들이 교조적이고 불변 적이고 영원한 진리로 수용된다면, 그것들은 죽은 공식으로 타락 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의미마저도 지독하게 왜곡되고 만다. 이 같은 부패와 쇠락은 사고에서는 무의미를, 실천에서는 기괴한 행 동을 야기할 뿐이다
5) 같은 곳. 정말로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일 수 있는지를 해설한 마르크스의 『 독일 이데올로기 』 서문은 헤르더의 이러한 입장을 직접 반영한 것이다.
헤르더의 이 같은 입장이 다음 세가에 활짝 꽃 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청년 마르크스와 헤겔 좌파 단계에 속한 마르크스의 친 구들 그리고 이들의 이념을 계승한 오늘날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소외의 개념이 널리 응용되어 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특별한 영 향은, 마르크스 아전의 러시아 급진주의자들과 혁명가들 사이에서 찾을 수 있댜 19 세기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층은 누구보다도 헌신 적이고 열정적으로 인간의 통일성을 신봉했다一―-이 계층은 처 음에는 귀족과 지주 출신의 불만자들로 구성되었지만, 점차 모든 계급 출신을 망라하게 된다. 이들은 한 가지 불타는 신념에 의해 뭉칠 수 있었다. 만인은 각자가 타고난 이성과 윤리적 통찰력에 비추어서, 자기 나름대로 (육체적 • 정신적 • 지적 • 예술적) 창조의 잠 재력들을 실현할 권리와 의무를 소유한다는 신념이 그것이었다. 이런 신념에서 그들은 프랑스 계몽주의자들과 독일 낭만주의자들 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했다. 서구로부터 빛을 받아들인 셈이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은 커녕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조차도, 무지며 정신적 고통이며 절망적인 기아와 빈곤 속에 헤메는 사람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숫자였다. 따라서 지체높은 사 람의 첫번째 임무는, 당연히 자기의 형제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 할 수 있도록 수준을 높혀 주는 일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 이, 역사가 요구하는 신성한 신분으로서의 인텔리겐치아라는 개념 이다. 인텔리겐치아는 전심전력으로 진리를 발견해서 자기들의 삶 속에 진리를 구현하며 나아가서는 진리의 빛으로 <굶주리고 헐벗 은 사람들 > 을 구원하기 위해 헌신해야만 한다 . 그리하여 이들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인간답게 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지적, 도덕적, 예술적, 기술적, 과학적, 교육적 ―수단들을 개발하고 활용하는 일에 평생을 바쳐야만 한다. 인 간은 분할 불가능한 통일체로서, 그의 모든 모습들과 모든 행동들 은 단일한 중심으로부터 흘러나온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그 자 신을 구성요소로서 포함하는, 사회라는 거미집 내에 존재한다. 이 점을 무시한다는 것은 인간본성을 왜곡하는 일이다. 인간의 통일 성이라는 헤르더의 주장으로부터 하나의 유명한 예술론이 파생된 댜 예술가, 특히 작가는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의 본성을 표현해야 할 사회적 의무를 떠맡는다는 것, 그래서 예술가는 윤리적 중립성 의 필요라는 명분으로, 전문화의 필요라는 명분으로, 혹은 예술의 순수성 특히 미적 기능의 순수성이라는 명분으로(죽 성직자처럼 예 술가는 특히 정치에 오염되지 않은 채 순수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으 로), 자기 자신을 사회로부터 고립시킬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예술론이 그것이다― __ 19 세기에는 이러한 예술관을 놓고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인간이 착수하는 모든 것은, 행동이나 말이나 그밖의 다른 무
엇으로 산출되든지 간에 인간의 전체적이고 통일적인 힘들로부터 흘러나와야만 한댜 힘들을 분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부되어야 한다 .>6 1 괴테의 경탄을 자아낸 하만의 이러한 언급은 헤르더를 만 들었고, (실러와 슐레겔을 경유하여) 러시아 급진주의 비평가들의 신 조가 되었다. 누군가가 무엇을 행하든지 간에, 만일 그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자세를 갖추고 있다면 그의 본성을 총체적으로 표현 할 것이다 자기 자신을 분열시키는 것은 최악의 죄이다. 미학적이 든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어떤 거짓 이념에 봉사하기 위해 자신 의 이런 저런 측면을 억누르는 것보다 나쁜 죄는 없다. 이 대목은 <간결하게 정돈된> 18 세기 프랑스풍 정원에 대한 반발의 핵심에 해당한다. 이러한 신념의 열정적 대변자들로는 하만이나 헤르더나 슐라이에르마허 외에도 시인 볼레이크가 있다. 어떤 창조자, 이를 테면 어떤 시인을 이해한다는 것, 창조에 관한 한 조금도 지칠 줄 모르는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시대며 민족을 이해하는 일이요, 그의 생활방식을 이해하는 일이요, 결국은 < 그의 내면에 스며들어 사고하는> 사회를-샤프츠베리의 경우에는 자연을 ―이해하는 일이댜 헤르더가 반복하여 강조하듯이, 진정한 예 술가는 사회 전체에 대한 충실한 경험을 통해서만, 특히 그 사회 의 <집단적 개성>을 형성하는 기억들과 유물들을 통해서만 창조 한다 . 그는 계속해서 초서 Chaucer 며 셰익스피어며 스펜서 등을, 자민족의 민속에 몰두한 인물들로 거명한다. 이 같은 언급은 오류 일 수도 있지만, 그 사고의 방향만은 매우 뚜렷하다. 시만이 아니
6) 파스칼 교수가 The German Stu rm und Drang ( Mencheste r • Un ive rsit y Press, 1953) 에서, Goeth e , Di ch tu n g und Wahrheit , Bk. 6, Ch.12 로부터 인 용한 구절. 파스칼 교수는 이 책에서 질풍노도 운동 전반을 훌륭하게 해설 하고 있는데, 그의 해설은 영어권에서는 최상급의 것이다.
라 모든 문학과 예술은 억제되지 않은 삶의 직접적 표현이다 . 혹 시 삶의 표현은 규율되어도 좋을지 몰라도, 삶 자체가 규율되어서 는 안 된다. 원시의 시는 마술적이었고, < 영웅, 사냥꾼, 연인> 등 행동하는 인간들의 자극제였으며, 경험의 연장이었다. 그리하여 그 것은 필요한 만큼의 변화를 야기할 수 있었던 바, 오늘날에도 그 렇게 되어야만 한다. 슬프게도 원시 시대 이후 사회는 분열되어 왔다. 심지어 오늘날에는 클롭스톡처럼 광포한 시인조차도 공동체 적 삶보다는 자기 개인적 삶만을 충실하게 표현할 수 있을 뿐이 댜 헤르더는 이 같은 상황을 인정하면서도, 시인이라면 마땅히 자 기 내면의 모든 것을 표현해야만 하며, 그가 속한 사회의 경험을 동료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인은 민족의 창조자이다 . 시인은 민족에게 명상할 세계를 선물하여, 민족혼을 사로잡는다 .>7 1 물론 시인이 민족을 창조하는 정도로 시인은 민족에 의해 창조된 다 . H I 한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는, 그가 타인들과 더불어 만든 세계 이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산다.> 헤르더의 이 말은 피히테, 셸링, 헤겔을 위시한 관념주의 철학운동에 의해 지나 치게 형이상학적인 형식으로 과장될 운명의 것이었다. 그러나 동 시에 그것은 마르크스의 심오한 사회학적 통찰력에서, 뿐만 아니 라 마르크스가 착수한 역사관의 혁명에서, 원천으로 작용한 것이 기도 했다 .91 7) VIII, 33.
8) II, 61.
9) 하만은 리가와 미타우 근교의 시골에 거주하는 리보니아 농민들의 시가 일상 노동의 리듬과 연관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이 대단히 중요한 관찰이 그의 제자 헤르더에게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헤르더는 원시언어에서 (그가 상상하기에) 동사가 명사보다 선행하 는 이유를 해설하는 과정에서 행동과 언어의 친밀한 관계에 매료되기는 했
지만, 노동의 영향력을 무시했다. 이 과제는 한참 뒤에 생시몽주의자들과 마 르크스주의자들의 영 향 하에서 달성되 었다.
헤르더는 참여예술론의 창시자로 간주될 만하다 . 어 쩌 면 그는 하만과 더불어, 오로지 < 참여 작가 > 견지에서 이야기한 최초의 사상가로 거명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물 론 그가 인민주의의 창시자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술가가 스스로의 분열을 꾀하는 것은-실제로는 발생하겠지만_결코 허용되지 않는 댜 예술가는 영혼과 육체,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특히 삶과 예 술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든 인간은 예 술가요, 예술가는 인간이라는 믿음을, 헤르더는 평생토록 간직했 다 . 예술가 아닌 인간이 없듯이, 예술가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인 간이댜 그들은 아버지, 아들 친구, 시민, 동료 종교인 등처럼, 공 통의 행위에 의해 결속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예술 자체 를 목적으로 삼을 수 없다(헤르더는 말년의 『 아드라스티아 』 와 『칼 리고 네 』 같은 작품들에서 이 같은 입장을 가장 모질게 공격하는데 , 칸트와 괴 테는 그 원흉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이 공리나 선전이나 <사회적 사실주의 socia l rea li sm > 을 추구해서도 안 된다 . 예술이 단지 삶을 치장하거나 쾌락의 형식을 창조하거나 시장에 내놓을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되어서는 더더욱 곤란하다. 예술가 는 그가 속한 시대와 장소와 사회의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신성한 그릇이요, 그 정신의 가장 고도한 표현이다. 따라서 예술가는 인간 의 총체적 경험, 즉 세계 전체를 가장 멀리까지 운반하는 사람이다. 이 예술론은 독일 낭만주의와 프랑스 사회주의의 충격에 편승해 서, 예술가란 무엇이고 예술가과 사회는 무슨 관계인지에 대한 사 람들의 생각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쳤다. 적어도 러시아에서는 18 세기 후반부터 Ii'닥터 지바고』에 이르기까지 많은 비평가들과 작가
들이 그 영향을 받았다 특히 19 세기의 위대한 러시아 문호들 사 이에서, 심지어는 투르게네프와 안톤 체홉 같은 < 순수 > 작가들 사이에서도, 예술이란 총체적 표현이요 , 예술가란 진리를 증거하는 사람이라는 이론은 큰 호응을 얻었다 이와 대립적인 이론에 서는 예술가는 제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헌신적이라 해도 배달원 에 불과하든지, 비교(秘敎)의 사제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헤르더 의 예술론은 러시아 문호들의 작품들을 문학과 비평뿐만 아니라, 서양과 전 세계의 윤리적 • 정치적 이념과 행동에 거대하고 결정적 인 영향을 미쳤댜 결론적으로 말해서, 헤르더는 장차의 세상에서 예술가가 수행해야 할 일정한 역할을 과감하게 선언한 셈이었는 데, 그의 선언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미학 비평가일 때든, 역사철학자일 때든, 소외되지 않은 인간이 라는 개념의 창시자일 때든, 분류며 분할을 가장 모질게 비판한 비평가일 때든, 헤르더는 (하만과 함께) 한결같이 예술과 삶, 이론 과 실천의 통일을 주창한다 . 헤르더는 문명의 발전에 의해 파괴되 지 않은 인간의 복원, 즉 <인간다움>의 회복을 누구보다도 설득 력 있게 설파한 인물이다. 인간다움은 이미 끊겨버린 참 인문주의 의 전통을 되찾아서 이어 줄 일종의 정신적 수맥찾기에 의해 회복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아니면 루소가 요구했듯이, 사람들을 묶어 서 가둔 족쇄를 파괴하는 사회변혁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이 서로를 조직하고 지배 하려는 유혹에 굴복하면서부터 잃어버린 에덴 동산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하는 장벽들, 이를테면 국가, 계급, 인종, 종교 따위의 온갖 장벽들이 허물어진다면, 그들 은 <그들 자신을 되찾아> 인간다워질 것이요,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창조적이 될 것이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헤르더는 그보다 훨
씬 명료한 표현력과 거대한 정치력을 갖춘 다른 사람들에게 대단 히 큰 영향을 미쳤다 .1 0 1
10) 열정적인 선동자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헤르더는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선동하곤 했다 . 때로 예언자 헤르더의 눈 앞에 보인 것은 자기의 보상심리 에서 나온 거대한 환상이었다. 일례로 인격의 통일성에 대한 전망, 혹은 인 격이 < 자연적 수단 > 에 의해 사회 유기체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전망은 헤 르더 자신의 성격이나 행동과는 정반대의 것 이었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해 르더는 지극히 분열적이고 까다롭고 성마르고 신랄하고 불행한, 늘 후원이 나 찬사를 필요로 하는 , 신경이 예민하고 현학적이고 완고하고 의심많고 조 급한 인물이었다 . 그가 < 살아 있다는 ,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느낌 > (X 田, 337) 을 토로하면서 이러한 느낌을 비평가 슐처의 세심하게 계산되고 지나치 게 정돈된 세계와 비교할 때 , 그는 자신이 늘 열망하건만 대체로 달성하지 못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자주 지적되어 왔듯이, 분열되고 불안 정한 인격의 소유자들은――-이를테면 루소나 니체나 로렌스 D. H. Lawrence 같은 인물들은-육체미며 힘이며 관대함이며 자발성을, 특히 파괴되지 않은 통일성과 조화와 평정을 열정적으로 찬양하는 경향이 있다 . 그들은 이 같은 성질들을 갈망했지만 결국은 갈증만 더해 갔을 뿐이다. 프 리드리히 대왕 시절의 프러시아, 혹은 괴테며 빌란트며 실러 시절의 계몽된 바이마르를 통틀어, 헤르더보다 더 불행해 한 사람은 없었다 . 가장 친절하고 관대한 빈란트마저도 헤르더를 미친 사람으로 여겼다 . 괴테는 헤르더의 내 면이 어찌할 수 없는 사악한 욕망 , 마치 미친 말처럼 마구 물어 뜯어 상처 내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 헤르더가 추구한 이상들은 그 자 신의 좌절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이미지로 보이곤 한다 .
제 28 장 디원주의 마지막으로, 이제부터 나는 헤르더의 입장에 함축된 내용들 중 에서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한 것을 다루려고 한다. 절대적 가치 를 배격한 것으로 유명한 그의 다원주의 p lura li sm 가 그것이다. 헤 르더에 의하면 인간은 적절한 조건, 죽 인간 집단이 환경과 성공 적인 관계를 이루는 조건 하에서만 번영을 구가할 수 있다. 환경 이 인간 집단의 모습을 결정하기도 하지만, 인간 집단이 환경의 모습을 결정하기도 한다. 이 상호관계가 원할하게 수행되는 곳에 서, 개인들은 <자연 공동체>로 행복하게 결속된다.” <자연 공동
1) 이 자연 공동체는 홋날(퇴니스 Ton ni es 보다도 먼저) <사회>라는 인위적 공동체와 대비되었다. 일례로 피히테는 <원래 전체적인 것 To tum>를 <인 위적으로 함께 모인 것 Com p os itu m> 과 대조했다. 그러나 아직 헤르더에게 는 형이상학적인 함축이 엿보이지 않는다. 공동체 생활에서 구현되는 힘들, 죽 헤르더가 아마도 라이프니츠로부터 이끌어낸 듯한 역동적 힘들은 결코 선험적이거나 초월적인 방식으로 발견되지도 작용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힘들은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들로 묘사되지도 않는다. 이
힘들의 본성온 오늘날 헤르더 주석가들에게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 헤 르더 자신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
체 > 는 풀처럼 자발적으로 성장한다. 그것은 인위적 조임틀에 의해 강제로 결합되거나 단순히 무력에 의해 공고해지는 공동체가 아니 댜 이를테면 전제정 하의 군주나 관료들이 (비교적 자비로운 형식으 로든 그렇지 못한 형식으로든) 만든 법이며 규정들에 의해 통제되는 공동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 또 다른 역사철학 』 의 표현을 빌리자 면, 이처럼 자연적으로 결속된 사회들은 제각가 나름대로 < 완성의 이상 > 을 추구하는 바, 한 사회의 이상온 < 나머지 다른 사회들의 이상들과 비교될 수 없는, 완전히 구별되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인간에게 최상의 삶은 무엇인가? 좀더 좁혀서 묻자면, 어떤 사회가 가장 완전한 사회인가? 이 물음은 역사 속에 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지만, 18 세기 < 계몽주의자들 > 에 이르러 가장 명료하고도 권위 있게 해결되었다 . 그렇지만 해답이 부족한 적은 결코 없었댜 시대마다 각자 나름의 처방책이 있었다. 혹자는 신성한 책들이나 계시나 예언자의 묵시록에서, 혹은 체계화된 성 직자층의 전통에서 처방울 발견했댜 숙련 형이상학자의 이성적 통찰력에서, 과학적 관찰과 실험의 결합에서, 혹은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에 의해 <제멋대로 휘갈겨지지 않은 >_ 즉 < 불순한 오류>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一 一-< 자연적 > 상식에서 처방을 발 견한 사람들도 있었다. 아예 단순하고 선량한 사람의 때묻지 않은 가슴 속에서만 해결책을 발견한 사람들도 있었다. 뿐만이 아니다. 일부는 숙련된 전문가들만이 위대한 예외적 진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나머지는 건전한 상식을 가진 누구에게나 가치 문제를 판단할 자격이 있다고 가정했다. 혹자는 이 같은 진리들이 언제 어디서나 발견될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 가장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든지 진리들이 너무 쉽게 잊 혀졌다든지 하는 것은 단지 운이 나빴던 탓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에, 인류는 성장의 법칙에 종속되기 때문에 진리는 인류가 충분히 성숙한 이성의 시대에 도달할 때까지 완전하게 드러날 수 없다고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것조차 의심하여 인류는 지상에서는 완전한 지식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 사람들도 있었다. 혹시 완전한 지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울 실천하기에는 인간이 너무도 나약한 존재라고 회의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처럼 완전한 상태는 천사들만이, 혹은 저승에서의 삶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 모든 견해들은 한 가지 가정을 공유한다. 적어도 원 리적으로는 완전한 사회나 완전한 개인의 윤곽을 그려낼 수 있고, 그 이상에 비추어서 특정 사회나 특정 개인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평가할 수 있다는 가정이 그것이다. 불완전한 정도들을 서로 비교 할 수 있으려면, 이상적 모델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종국적으로는 객관적인 정답이 존재한다는 이 같은 믿음이 절대적, 보편적으로 통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상대주의자들은 환경과 기질이 다르면 정치도 다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 그러나 상대주의자들조차도, 소망의 충족과 행복이라는 인간의 종국적 목적은 추구하는 길은 다를지언정 언제나 동일하다고 가정을 유지했다. 물론 카르네아데 즈 Cameades 를 위시한 고대의 일부 회의론자들은 종국적 가치들 은 서로 양립불가능하고 따라서 모든 가치들을 논리적으로 묶어 줄만한 해답은 있을 수 없다는 불안한 입장을 취했다. 완전한 사 회라는 개념의 논리성을 회의하는 이 입장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의 폰타노 Pon t ano 며 몽테뉴며 마키아 벨리 등에게서도 발견되며, 라이프니츠며 루소에게로 이어졌다. 이
들은 한결같이, 이익이 있으면 손실도 있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유 지했댜 2 1 이와 비슷한 생각이 소포클레스며 유리피데스며 셰익스 피어의 비극에서도 핵심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 나 이 같은 근본적 회의론은 서구 전통의 중추적 흐름에 별로 영 향을 미치지 못했다. 가치의 문제가 원리상 해결 가능할 뿐만 아 니라 실제로도 결국은 해결된다는 근본 가정은 변함없이 유지되어 왔댜 불완전한 인간에게 과연 해결할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별 개의 문제요, 우주의 합리성에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는 문제였 다. 바로 이것이, 헤르더가 등장하면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고전 적 모델의 초석이었다.
2) Rouche, 앞의 책, Intr od ucti on .
인류에 대한 헤르더의 견해가 옳다면, 그래서 19 세기 독일인이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나 고대 히브리인이나 단순한 유목민이 되 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이 모든 사람들로 동시에 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면, 게다가 헤르더 자신이 공감적 감정이입을 통해 생 명을 불어 넣은 문명들은 서로 크게 달라서 결코 결합될 수 없는 것들이라면-만일 그렇다면, 모든 인간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대해 가치 있는 하나의 보편적 이상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인 가? 원리적으로도 그 같은 이상은 존재할 수 없다. 문화마다 독특 한 <특질>이 있다. 각 문화는 각자의 시대와 장소와 환경에 맞추 어서 인간의 잠재력을 제 나름의 방식으로 경이롭게 구현하는 것 이다. 가치의 비교우우 l 를 판단한다는 것은 금기롤 범하는 일이다 이것은 공통의 판단 기준이 없는 가치들을 서로 비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헤르더 자신이 이러한 태도를 늘 일관되게 유지한 것은 아니다. 그는 여러 문명들을 통채로 싸잡아 비난하거나 찬양
하는 태도를 보여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그의 가장 독창적인 작품들에서는 이 같은 태도가 허용되지 않는다 . 헤 르더가 청년 시절의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굳건하게 노력했다는 사실은 결코 의심할 필요가 없다. 일례로, 그는 엄격하게 중앙집권 화된 이집트의 체제 , 로마의 제국주의, 중세의 잔인한 기사제도, 가톨릭 교단의 독단론과 불관용 등을 혐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명들을 모두 공평하게 대우하려고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그 하 나 하나가 지울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이상을 실현한 것으로 보았 다. 각 문명의 이상은 인간 정신의 특수한 얼굴을 표현한 것이요, 저마다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기에 더 높은 이상을 향한 중간 단계 로 취급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헤르더의 방대한 파노라마식 탐사에 현실감과 설득력과 무게를 실어 주는 것은, 그가 계몽주의의 핵심 도그마를 거부한 점이다. 한 문명을 더 높은 문명으로 진보하기 위한 단계로 혹은 더 낮은 선행 문명에로 퇴보하는 단계로 취급하는 계몽주의적 태도를, 헤 르더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물론 『인류의 역사철학을 위한 시론 』 에서 헤르더는 인류가 < 인간다움>이라는 보편적 이상을 향해 나 아간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일부 주석가들은 초기 헤르더의 상대주의를 후기에는 <극복된> 잠정적 단계로 묘 사하기도 했고, 그것을 < 인간다움>을 향한 단선적 진보라는 개념 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일례로 루쉐 교수는 헤르더는 역사를 독립적인 막들과 장들로 구성된 일종의 드라마로 보았다고 생각한다. 헤르더는 역사라는 드라마의 막들과 장들이 하나하나 독자적으로 이해되고 평가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이해되 고 평가되어야만 한다고 믿었으며, 이 같은 이해와 평가로 인해 우리가 그 에피소드들이 함께 엮어져서 단일한 진보적인 상승을
이룬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고 믿었다는 것 이다 .3) 어쩌면 헤르더가 실제로 그렇게 믿게 되었을 수도 있고, 자 기가 그렇게 믿는다고 믿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헤르더가 정말로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지를 파악하기는 여전히 힘들 댜 그의 『인류의 역사철학을 위한 시론』조차도 예외는 아니다. 이 성숙한 작품에서 그는 온갖 기교와 상상력을 동원해서 개별 문화 들을 환기시키는 데 주력할 뿐, 개별 문화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적시하지는 않는댜 『또 다른 역사철학』에서의 역사적 상대주의에 대한 고전적 진술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인류사의 태고적 기 원 Alte s te Urkunde des Menscheng e schlecht es .!I , 『독일 의 기 예 에 관하여 Von deuts c her Art und Kunst.!I , 『히브리 시의 정신에 관하 여 Vom Geis t der Ebrais c hen Poesie .!I , 『 비 평 집 Krits ch e Walder 』 등 초기 작품들로부터, 보다 유연하게 표현된 『인간다움의 형성을 위한 서한(書翰) Br iefe zu Befo r derung der Hum 따it a t』과 『인류의 역사철학을 위한 시론』에 이르기까지, 헤르더는 자신이 심혈을 기 울여 기술하고 옹호한 문명들이 저마다 고유한 특성과 개체성을 지닌다는 것, 무엇보다도 그 문명들 사이의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제고한다 .4) 그러나 이렇듯 삶의 모든 형식들 각각 이 각자에 고유한 관점(존재하는 유일한 관점)에서만 이해가능한 것 이라면, 그래서 매 형식이 <유기체적> 전체요, 반복될 수도 뒤섞
3) 같은 곳. 4) 이러한 사실을 마이네케는 Die Ents teh ung des His t o r i sm us(IT, 438) 에서 논의하고 있다. G. A. Wells 는 마이네케의 결론을, The Jou rnal of the His t o r y of Ideas(vol. 21, no. 4, 1960, 535-536) 에서 날카롭게 비판했다. Wells 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헤르더의 모든 주장들이 체계적인 상대주의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마이네케의 핵심 테제는 위에서 언급한 이유 때문에 나에게는 여전히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 수도 없는 목적과 수단을 지닌 패턴이라면-만일 그렇다면, 그 삶의 형식들을 객관적으로 인식가능한 전우주적 진보 속의 연 결고리들로 차등화한다는 일도 불가능해진다 . 말하자면 인간성이 불확실하게나마 전진해가는 최종목표와 근접한 정도에 따라, 혹은 그 최종목표를 반영하는 정도에 따라, 진보의 어떤 단계를 다른 단계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차등화하는 일은 불가능해지는 것 이다. 이 같은 입장을 시종일관 견지한 점에서, 헤르더의 < 세계 관 > 은 근대의 < 완벽주의 적 pe rf ec ti bi l ian > 철학들과 비록 공통점 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뚜렷하게 구별된다. 헤르더의 세계관은 보 쉬에나 버크의 신정론과 동떨어진 만큼, 레싱이나 콩도르세가 설 파하듯 이성의 성장에 의해 결정되는 진보론과도, 볼테르의 < 상식 론 bon sens> 과도 동떨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헤겔주의 자들이 말하는 정신의 점진적인 자기이해라는 이상과도, 마르크스 주의자들이 말하는 사회의 점진적인 자기해방이라는 이상과도 동 떨어진 것이댜 만일 우리가 비교불가능한 문화들 사이의 대등한 가치라는 헤르 더의 생각을 수용한다면, 이상적 국가라느니 이상적 인간이라느니 하는 것들은 부정합적 개념으로 전락할 것이다. 이것은 흄의 주장 보다도 훨씬 더 급진적으로 서구의 전통적 윤리관을 뿌리채 부정 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헤르더의 윤리 상대주의는 그리스의 소피 스트들이나 몽테스키외나 버크의 상대주의와 구별된다. 이 사상가 들은 인간이면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대체로 일치했다. 물론 이들도 문명의 차이룰 인정했다. 주변 조건의 차 이, 그리고 생태환경(즉 풍토)과 인간본성의 상호작용은, 서로 다른 개성과 전망, 특히 서로 다른 필요를 창출하며, 서로 다른 필요를 충족시켜 줄 상이한 제도적 수단들을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그러
나 그들은 인간본성은 언제나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들 은 기존의 모든 활동 형식들에는 거의 동일하거나 유사한 목적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 만인이 저마다 추구하는 목표 들 은 모두가 보 편적이고도 초시간적인 것들로서 인류를 단일한 종이나 < 하나의 거대한 사회 > 로 엮어 준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적 어도 이론상으로는 전세계에 한 사람의 전제군주만 있어도 될 것 이댜 왜냐하면, 풍부한 사회적 상상력과 경륜을 구비한 전제군주 한 사람만으로도 __」 만일 그가 충분히 계몽된 인물이라면 각 사회의 개별적 요구를 충분히 고려해 가면서 모든 사회들을 통 치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요, 그리하여 모든 사회들이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행복이며 지혜로운 통치며 덕이며 정의 등 동일한 목적 을 추구해가면서 결국은 보편적 조화를 이루도록해 줄 것이기 때 문이다. 이것은 레싱이 『현자 나단 Na t han the W i se 』 에서 세 개의 반지에 관한 유명한 우화를 통해 전하고자 한 생각이기도 하다 . 5 1 헤르더는 계몽주의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러기에 그 는 <인간다움>이라는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상승을 낙관 주의적인 입장에서 유려하게 표현했다. 그가 토로한 감정은 괴테 는 물론 레싱도 사로잡을 만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일부 뛰어난 학자들의 권위에 의해 뒷받침되는 다음의 견해를 받아들이 기 힘들다 . 61 헤르더가 요구했고 훌륭하게 묘사한 < 감정이입 > 의 능력을 가지고 헤르더의 작품들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이 같은
5) 뜻밖에도 이 우화는 얼마전 모택동의 유명한 꽃밭 이미지 속에서 부활되 었다.
6) 예컨대, Roudolf Sta d elrnann, Der his t o r isc he Sin n bei Herder(Halle, 1928); RA . Fri tzsc he, Herder und die Humanit at, Der Morga n, Bk . III (Halle, 1928); H. Verste r lin g , (Herders) Human it a t sp r i따ip (Halle , 1890).
바이마르 계몽주의의 이상이 헤르더의 정신을 송두리채 사로잡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헤르더는 풍부하 고 함 축 적이고 장황하고 불가사의하리만치 풍부한 상상력을 구비 한 작가이기는 하지만 , 명료하거나 엄밀하거나 뚜렷한 결론을 제 시하는 작가는 아니다. 칸트가 신랄하게 비난했듯이, 헤르더의 관 념들은 뒤엉힌 실타래처럼 혼란할 뿐만 아니라 때로 자기모순에 빠지기도 한다. 그것들이 상세하거나 정확하게 표현된 적은 한 번 도 없다 그만큼 구구한 해석이 그의 작품들에 대해 시도될 수 있 고 , 실제로 시도되어 왔다. 그러나 헤르더의 사상 전체에서 핵심에 해당하는 주제, 후대의 사상가들(특히 독일 낭만주의자들) 사이에서 널리 수용되었고 이들을 경유하여 인민주의며 민족주의며 개인주 의의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주제, 헤르더 자신이 늘 되돌아 간 주제는 다음과 같댜 특정한 문화의 기준에 의해 다른 문화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 문명이 다르면 성장하는 방식도 추구하 는 목표도 생활하는 방식도 삶을 바라보는 태도도 다르다는 것, 따라서 다른 문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 감정이입>이라는 상상적 행위를 통해 그 문명의 본질에 침투해야 하고, 그 문명을 가능한 한 < 내부로부터 > 이해해야 하며, 그 문명의 시각으로 세계를 바 라보아야만 한다는 것 이를테면 고대 유태민족처럼 <양치 기 > 가 되어야 하고, < 사나운 비바람 속에 북해를 항해해 보아야> 하며, < 스카게락 Ska g errak 해협을 헤치고 나아가는 배 위에서> 에더 Edda( 아이슬란드의 고대 신화)를 다시 읽어야 한다는 것. 이렇듯 엄연히 다른 사회들과 사회적 이상들을 비교할 수 있는 공통의 척도는 있을 수 없다. 어떤 사회가 최상의 것인가라는 질 문은 물론이려니와, 어떤 사회가 더 좋은지, 어떤 사회를 인류의 보편적 이상 곧 <인간다움>에 보다 근접한 것으로 판단해야 하는
지 따위의 질문도, 헤르더 유형의 사상가에게는 결국 무의미한 질 문이 되고 만댜 요컨대 인간을 마땅히 그리 되어야만 하는 방향 으로 , 마땅히 그리 생각해야만 하는 방향으로 이끌고가는 패턴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댜 < 비슷한 사람들, 비슷한 나라들, 비슷한 민족들, 바슷한 자연사들, 바슷한 국가들이란 있을 수 없 다. 따라서 그들 사이에서 진선미( 眞善美 ) 역시 비슷하지 않다 .>71 이 구절은 <1769 년의 여행 > 도중에 작성된 것이다 . 헤르더가 보 편적 이상들을 가장 정면으로 다룬 시점에서조차도 상대주의 내지 다원주의는 그 갈라진 발톱을 보여 주고 있는 셈이다 . 이 시점까 지도 그는 <인간다움 > 의 이미지들이 저마다 독특하고 < 개성적인 것>이라는 믿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댜 81 헤르더가 계몽주의자 들과 칸트주의자들을 위시한 당대의 진보적 사상가들에게 충격적 일 만큼 깊은 인상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사고에 드리워진 이 같은 긴장 때문이었지, 그가 동시대와 공유한 진부한 보편주의의 언어 때문은 아니었다 . 요컨대 헤르더는 인류 전체의 점진적 진보 라는 관념을 정면으로 반박한 탓에 충격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인류는 각종 장애와 일시적인 퇴보에도 불구하고 전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 적어도 전진할 수 있고 전진해야만 한다는 것 ―이것은 독일 계몽주의가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계몽주의에 못 지 않게 헌신한 명제였다 .91
7) IV, 472. 8) XIV, 210, 217, 230.
9) 현대 사상가들 중에서 헤르더의 상대주의와 가장 유사한 실례로는 루이스 Wy n dham Lew i s 의 것을 들 수 있다 . 이 외고집이지만 예리한 작가는 <예 술의 진보라는 악마>라는 제목의 소논문에서, 격한 감정과 통렬한 수사룰 동원하여 보편주의적 관념을 비난했다. 루이스에 의하면, (비록 필자로서는 그가 제시한 구체적인 실례들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보편 타당한 규준
에 의해 어떤 시대의 예술작품이 전혀 다른 전통에 속한 예술작품에 비해 전적으로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 과연 피디아스의 조각이 미켈란젤로나 마욜 A. M aill ol 의 조각품에 비해 우월하거나 열등하 다는 주장에, 혹은 괴테나 톨스토이가 호메로스나 아이스퀼로스나 단테나 구약의 < 욥기 > 로부터 진보를 보여 주는가 아니면 퇴보를 보여 주는가라는 질문에, 무슨 의미가 부여될 수 있겠는가?
헤르더는 주관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객관적 판단기준들을 신뢰 한댜 이 기준들은 개별 사회들의 생생한 삶과 목적을 이해함으로 써만 얻을 수 있는, 역사의 객관적 구조들이다. 이것들을 얻기 원 하는 학생들에게는 공감적 상상력뿐만 아니라 폭 넓고도 꼼꼼한 연구도 요구된다. 다만 헤르더는 전 포괄적인 단일한 가치기준을 거부할 뿐이요, 단일한 가치 기준에 의해 모든 문화들, 특징들, 행 위들이 평가될 수 있다는 입장을 거부할 뿐이다. 탐사중인 낱낱의 현상들은 각자 나름의 척도를 드러내는 바, <사실들>은 이 내면 적 가치기준의 견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헤르더의 자각은 대단히 철저한 면을 보여 주는데, 이를테면(빙켈만은 인정하고 1 01 루 소는 개탄하고 칸트는 수용한) 완전무결한 인간이라는 가정이 실현불 가능한 것이라는 자각보다도 철저하며, 얻은 것이 있으면 잃은 것 도 있다는 입장보다도 철저하다 .Ill 왜냐하면, 이 대목은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얻기 위해 분투해 온 최고의 목적들은 서로 조화 를 이루기 힘들다는 뜻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스나 로마 의 영웅적 미덕으로 회귀할 것을 권고한 마키아벨리나 마블리 등
10) 예 컨 대 Wi nk elmann, Di e Geschic h te der Kunst des Al ter tu m s, ed. ]. Lessin g ( Berlin , 1869-1870) 이 그러하다 . 11) Leib n iz, ed. Gerha rt, II, 589; Boulai nv il lier s, His t o i r e de /'anc ien go u-vemement de la France(17 까), I, 322; 루소가 미라보 Mira beau 에게 보낸 편지(1 767 년 7 월 26 일자) 둥을 참조 헤르더는 비슷한 내용을 베겔린 We g e li n 이 역사철학에 관해 집필한 논고(1 770) 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주의 이전의 사상가들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듯이, 과거의 명예들을 되살리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날의 명예들을 모두 되살려서 하나로 통합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인을 모방하려고 마음먹는다면, 히브리인 울 모방하지는 못하게 될 것이다. 혹시 우리가 실제 중국인이든 볼테르가 착각한 중국인이든 중국인을 우리의 귀감으로 삼는다면,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인을 귀감으로 삼는다든지, 18 세기가 상상 한 순수하고 평화롭고 친절한 원시인을 귀감으로 삼는다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설령 우리가 이 이상형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 할 수 있다 할지라도, 무엇을 선택해야 한단 말인가? 이 이상형들 올 등급매길 만한 공통의 척도가 존재하지 않는 탓에, 과연 인간 이라면 무슨 목표를 추구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정답도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원리면에서는 이 같은 질문에 대한 정답이 가능하다는 명제는 플라톤이 당연시한 이후로 거의 의심받지 않은 채 유지되다가, 이제 헤르더에 이르러 심각하게 타격을 받게 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헤르더는 고대의 이상을 부활하려는 희망 그 자체를 비난한다. 이상은 삶의 형식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상을 낳 는 것은 삶의 형식인 바, 삶에 포섭되지 않은 이상은 단지 역사적 기념물에 불과하다. 가치나 목표는 사회 전체의 본질적인 일부로 서, 사회 전체와 생사를 같이 한다는 말이다. <집단적 개체성>은 그 어느 것이든 독특하며 그 나름의 목적과 기준을 지닌다. 이 목 적과 기준도 언젠가는 윤리적, 사회적, 미학적으로 상이한 목적이 며 가치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이처럼 <자연의 긴 세월>이 이런 저런 체계들을 생성해가는 과정에서, 각 체계는 각자가 속한 시대 에서만 객관적 가치를 갖는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문화들은 모 두가 평등하다. 문화마다 시간과 장소가 다를 뿐이다. 이것은 랑케
에 이르러서야 정교하게 표현된 입장이다-랑케의 신정론 t heo di c y은, 헤 겔뿐만 아니 라 도덕 적 회 의 론자들과도 대 립 적 인 헤 르더의 테제들을 적절히 변형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르 더에 이르면, 이상적 인간이 자기의 잠재력들을 모두 실현할 수 있 는 완전한 문명이라는 관념은 모순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 같은 관 념은 정식화하기 힘들고 실제로 실현될 수 없는 것일뿐만 아니라, 앞뒤가 맞지도, 이해될 수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서구의 고전철학 은 완성의 관념, 죽 가치의 문제에 대한 보편적이고 초시간적인 해 결이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관념을 유지해 왔다 . 헤르더 는 바로 이러한 관념에 대해 가장 통렬한 일격을 가한 셈이다. 헤르더의 주장들이 즉각 결실을 . 맺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비록 대담하고 독창적인 사상가로 간주되기는 했어도, 기존에 통용되던 윤리적 가정들을 전복한 인물로 평가되지는 않았다. 헤르더 자신 도 그런 인물을 자임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헤르더의 영향은 낭 만주의 운동이 구질서를 지탱해 온 이성적이자 독단적인 권위를 대단히 격렬하게 뒤짚어 엎으려고 했던 시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감지되었다. 그 영향력의 폭발적인 잠재력은 최근의 반이성주의 운동들, 이를테면 민족주의며 파시즘이며 실존주의며 감성주의 같 은 운동들에서도, 심지어는 민족주의와 파시즘이라는 이름으로 진 행된 금세기의 전쟁들과 혁명들에서도 충분히 실현되지는 못했다. 말하자면 우리의 시대까지도, 어쩌면 오늘까지도 완전히 실현되지 는 못한 것이다.
제 29 장 내적 긴장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헤르더의 저작들은 갖가지 모순 들로 충만하다. <내 안에서 사고하고 활동하는 힘은 그 본성상 태 양과 별들을 함께 엮어 주는 힘만큼이나 영원하다. 내가 어디에 있고 무엇이 되든 간에, 나는 지금의 나일 것이요, 무한히 다양한 힘들이 측량할 길 없는 조화를 이루는 하느님의 세계에서 하나의 힘으로 존재할 것이다.>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언젠가 존재하 리라. 잠재력들을 언젠가 모두 실현되리라. 헤르더는 충만을, 존재 의 거대한 연쇄를, 장벽 없는 자연을 믿는다. 리터 R itt er 며 할러 von Haller 같은 자연주의자들의 영 향을 받아서, 그는 인간을 동물 들 중의 동물로 대우한다. 인간이 인간인 까닭은 자연적 수단들을 점진적으로 이용해 왔기 때문이요, 직립보행하기 때문이요, 두개골 내의 공동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모순되게도, u xru, 16.
헤르더는 아리스토텔레스나 성경에서처럼 자연 종( 種 )들을 믿고, 창조라는 특별한 행위를 믿는다. 그는 인간의 종적 본질 , 인간의 핵심적 본성을 믿는댜 이 본질 내지 본성은 라이프니츠가 『 인간 오성 신론』에서 가르쳤듯이, 마치 결대로 다듬어지는 대리석처럼 이성과 상상력에 의해 다듬어진다. 인간은 욥의 막내동이 베냐민 처럼 < 자연이 노년에 낳은 사랑스러운 자식 > 이요 , 창조 과정의 정점이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간 본질은 언제나 동일하기보 다는 모순적인 형식들을 취하기도 한다. 유형들이 서로 다르거니 와, 이 차이들은 결코 연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시에 헤르더는 모든 현실적 실체들이 논리적으로 엄격하게 연결된다는 일원론적 입장을 환기시키려는 어긋난 노력을 보여 주기도 한다. 이것은 라 이프니츠의 역동적이고 자가발전적인 개별화된 단자들이 스피노 자의 필연적 세계 안에서 연결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2 1( 물론 헤르더 의 경우에, 실체들의 연관관계는 스피노자의 경우보다 훨씬 유연하고 경 험적인 형식울 취한다) . 우리는 이 대목에서 긴장을 엿볼 수 있다. 헤르더의 자연주의는 목적론과, 그의 크리스트교 신앙은 자연과학의 성과들에 대한 열 정적 수용과 긴장을 형성한다. 긴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한편 으로 그는 계량적 방법과 엄밀함과 통일적 지식체계를 신봉한 프 랑스 백과전서파들의 업적들 중에서 적어도 일부를 존중한다. 그 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괴테며 셸링을 위시한 생기론자들의 질 적 접근법을 선호하기도 한댜 여기서 다시 한 번, 그의 강력한 자 연주의적 결정론은 인간이 자연적 충동과 자연력에 저항할 수 있
2) 이러한 측면은 God: Some Conversa tz· on 에서 길게 개진된다. 여기서 헤르 더는 스피노자가 무신론자요 범신론자라는 야코비의 비난에 대해 스피노자 룰 옹호한다.
고 저항해야만 한다는 그의 입장과 긴장을 형성한다 .”• 저항하지 않는 자는 지배당하기 마련이다. 유태민족은 로마민족에게 짓밟히 지 않았던가. 물론 유태민족의 비참한 운명은 자연적 요인 탓으로 돌려지기도 한댜 그렇지만 헤르더는 유태민족이 비참한 운명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 마찬가지로 로마인들도 성 공적으로 저항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을 악에 물들고 말았다고 이 야기된다. 그렇다고 해서 헤르더가 자유의지 문제에 대해 칸트만 큼 민감했던 것은 아니댜 그에게서 엿볼 수 있는 긴장들은 너무 도 많다 헤르더는 자기 결정론자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인간은 자기가 선택한 것을 행할 때만은 자유롭다고 믿었을지 모른다 . 이 것은 미봉책이기는 하지만 서구의 전통이 이어 온 < 해답 > 이었다. 그러나 헤르더가 이 같은 해답에서 도망갈 구석을 발견했다는 증 거는 그의 저술들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4 l 다시 이 대목에 서도, 전 인류가 추구하는(그렇지만 내세에 가서야 완전하게 실현될) 인간다움이라는 이상은, < 자연을 초월한 하느님의 길 > 이라는 헤 겔이 홋날 변형시켜 사용한 개념과 더불어, 더욱 반번하게 특징적 으로 등장하는 다원론 및 상대주의와 긴장을 형성한다. 실제든 환 상이든 그에게는 자율적이고 창조적이고 자유로워 보인 고( 古 ) 게 르만족의 부족생활에 대한 열정은, 로마 특히 로마 교회의 보편주 의며 위계질서며 이성적 조직능력을 주저하면서도 찬양하는 태도 와 긴장을 형성한다 . 더욱 극적인 대조도 발견된다. 한편에는, 넘 쳐 흐르는 자연, 죽 <능산적 자연 natu r a na t urans> 의 지 속성 이 라
3) 인간의 자유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저항력을 노래한 장엄한 찬가는 , XII, 142-1?<) 을 참조.
4) Herder and Aft er, 앞의 책에서 이러한 해석을 강력하게 제시한 G. A. Wells 씨에게는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다.
는 관념이 있댜 자연의 에너지는 자기와 전기에서, 동식물과 인간 에게서, 언어와 예술에서 동일하다. 말하자면 자연의 에너지는 일 종의 보편적 • 지속적인 생명력으로서, 만물은 하나하나가 이 생명 력의 표현이댜 이 생명력의 법칙들은 당시를 풍미한 물리과학들 에서뿐만 아니라, 생물학과 심리학에서도, 그가 특히 편애한 역사 지리학과 인류학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계산 불가능한 천재적 도약, 기적 같은 사건들, 단순한 우연, 진정 한 창조의 분석 불가능한 과정 등에 중요한 역할이 부과된다. 따 라서 결국 기술의 응용만으로는 위업을 달성하기도 유지하기도 힘 들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하나의 중요한 개념이 등장 한댜 죽 문화들(혹은 사람들)을 서로 다른 개체들로 만들면서 각 문화(개인)에게 그 나름의 색깔이며 힘이며 가치를 선물하는 어떤 것의 중핵은 전달 불가능하다는 개념이 그것이다. 이 중핵은 상상 적 직관의 눈으로만 포착될 수 있을 뿐, 전달 가능하고 교육 가능 한 과학적 방법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헤르더는 도덕 적 교화를 금기로 여기지만, 동시에 인간 실존의 위대한 순간들에 열정적으로 환호하는가 하면, 인류의 통일성과 창조성의 적들에 대해서는 끔찍한 저주를 퍼붓는다. 유혈 정복자들, 바정한 중앙집 권주의자들 편협하고 피상적인 체계화에 의해 영혼을 망가트린 자들 이들 모두의 첫 머리에는 가증스러운 볼테르가 자리한 댜 무기력한 아이러니와 편협한 마음울 드러냈을 뿐, 인간이란 진 정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을 제시하지는 못한 볼테르 말이다. 어쨌 든 볼품없고 펑퍼짐하지만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암시하는 헤르더 의 저작들은, 동시대의 온갖 혼란들을 풍부하게 반영하고 있는 듯 하다.
제 30 장 결론 어떤 의미에서 헤르더는 일종의 예고적 징조요, 다가올 폭풍을 예고하는 새( 鳥 ) 신천옹이다 . 프랑스 혁명은 만인이 타고 태어난 이성의 능력에 의해 초시간적 진리들이 파악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안정되고 조화로운 사회를 창조 하거나 복원하기 위해 헌신했는데, 이 사회는 불변적 원리들에 기 초하는 사회요, 고전문화를 완성하겠다는 꿈; 아니면 적어도 고전 문화에 가장 근접한 사회를 지상에 실현하겠다는 계획에 기초하는 사회였다. 이런 맥락에서 프랑스 혁명은 화평한 보편주의와 이성 적 박애주의를 고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 오히 려 인간사의 불안정함은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거역하기 힘 든 변화의 난맥상은 깊어만 갔다. 화해하기 힘든 가치들과 관념들 온 반복하고 충돌했다. 일정한 공식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 그 만큼 인간과 사회는 복잡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행동이며 파괴며 영웅적 행위며 전쟁을 예찬하는 시는 늘어만 갔다. 폭도들과 주요
인물들의 영향력은 커져만 갔다 . 우연이 수행하는 결정적인 역할 은 늘어만 갔다 그런데도 과학자들과 프랑스 혁명 이데올로그들 은, 안간이라는 거대한 빙산에서 물 밑에 잠긴 2/3 의 작용을 무시 한 채, 눈에 보이는 1 / 3 만을 연구하고 참작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가능하다 . 러시아 혁 명의 이상은 되풀이해서 언급할 필요가 없으리만치 우리에게 친숙 하댜 그 결과 역시 프랑스 혁명의 결과가 그러했듯이, 의심을 던 진 것 이었댜 19 세기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이 갈구한 민주 주의가 과연 효과적인 종류의 것인지, 이성적 인간에게 과연 비이 성의 힘들을 허용하기도 하고 억제하기도 하는 통제력이 있는지, 과연 혁명은 자유의 증진을 위한, 보다 폭 넓은 문화와 사회적 정 의 를 위한 도구인지 등 여러 가지 의문이(정당하든 그렇지 못하든 간 에)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러시아 혁명을 통해, 잘 정비 된 당에 의한 결연한 음모가 대단히 효과적이라는 것, 대중은 비 합리적이라는 것,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는 제도적으로 취약하다는 것, 민족주의적 열정이 큰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 등 많은 것을 깨 닫게 되었다. 이 점에서 뒤르켈 파레토, 프로이트 등은 러시아 혁 명을 지켜준 파수꾼들이었다. 그들은 민주주의며 자유 같은 보편 개념들이 무비판적으로 사용되는 세태를 전망하면서, 사회적 응집 과 해체는 이성적 요인과 비이성적 요인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진행된다는 이론들을 제시했다 . 그들의 이념은 오늘날까지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 그들이 러시아 혁명의 파수꾼이라면, 헤르더는 1789 년의 대사건을 지켜준 인물이었다. 형 제애와 자기표현에 대한 열망, 그리고 가치를 결정하는 이성의 능 력에 대한 불신은, 19 세기를 지배했거니와 우리 시대에는 가일층 지배적이 되어가는 추세이다.
헤르더는 1803 년까지 살았다. 생시몽이나 헤겔이나 메스트르는 각자의 신조를 독일이나 유럽의 운명과 관련지어 도덕적으로 정당 화하려 했지만, 헤르더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죽거에는 19 세기 초가 너무 일렀다는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르 더는 동시대를 풍미하던 계몽주의에 대한 믿음이 불안정한 토대 위에 구축되었음을 어느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파악했다. 비록 그 자신도 계몽주의를 반쯤은 수용했지만 말이다. 헤르더를 특별난 능력의 소유자로 믿은 사람들은 많았다. 그가 마술사로 불렸다, <파우스트>의 모델이었다는 이야기마저 전해진다.” 그러나 계몽 주의에 대한 믿음의 불안정한 토대를 누구보다 예리하게 파악했다 는 의미에서라면, 이러한 평가가 부당한 것만은 아니다.
1) 괴테의 파우스트가 헤르더를 모델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이를테면 Gti n te r Jac obi, Herder als Faust( L e ipz ig , 1911) 에서 동장한다. 그러나 괴테 자신은 이 같은 동일시를 싫어했다(이 문제에 관해서는, R. T. Clark, Jr., Herder: Hi s Lif e a nd Thoug h t, Un ive rsit y of Ca lifor nia Press, 1955, pp. 127 ff를 참 조).
옮긴이 후기 오늘날, 역사학을 포함한 인문학 전반의 사회적 가치에 관한 무 수한 논쟁은 그 자체가 인문학의 정체성 위기를 반영한다. 위기의 근원은 데카르트의 시절로 소급될 수 있다. 30 년 전쟁이라는 전대 미문의 대재앙에 직면하여 지적, 종교적 좌표를 잃고 우왕좌왕하 던 17 세기 초반의 지식인들에게, 데카르트의 칼날 같은 <확실성> 과 <이성>은 따라가야 할 등불이요 도달해야 할 목표로서 부각되 었다. 온갖 종파나 당파나 학파를 초월하여 <보편>과 <객관>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믿음은 적 어도 엘리트 세계 내의 지배 여론으로 자리잡았다. 반면에 후기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 특히 베이컨까지만 해도 절대 우위를 점했던 <경험>은, 이성적 방법의 간극을 메워 주거나 그것의 색인 을 채워 주거나 그것의 확실성을 뒷받침해 주는 열등한 지위로 전 락해 갔댜 17 세기가 추구했던 이성과 경험의 결합이란 사실상 경
험세계 전체를 이성화하겠다는, 이성적으로 확실한 것들만을 정당 화하고 체계화하겠다는 결단을 지칭한다고 보아도 별 무리가 없다. < 이성 > 과 < 방법 > 의 승리를 확정한 것은 과학이었다. < 하느님 이 가라사대 뉴턴아 있어라 하시니 / 모든 것이 밝아 졌 구나 > 라고 경탄하는 알렉산더 포프 Alexander Po p e 의 싯귀에서, 우리는 뉴턴 의 동시대인들에게 있어서의 감수성의 결정적인 변화를 읽는다 . 에라스무스며 라불레며 몽테뉴며 베이컨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 책 읽듯이 꼼꼼히 읽어서 진리의 빛을 영혼에 담도록 > 권 했다면, 뉴턴의 시대는 < 먼저 이성에 진리를 새긴 뒤에 그 빛에 비추어 경험세계를 재단할 것 > 을 권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 이성 의 빛 > 에 대한 예찬은 18 세기의 상투어였다. 그것은 < 안정적인 > 세계관을 구축하여 17 세기 중반의 < 위기 > 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준 데카르트며 뉴턴 등 과학운동의 주역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에 다름아니었다. 실로 18 세기 계몽주의자들은 자연세계로부터 방출 된 <이성의 빛>을, 인간이 만들어 왔고 만들어 가는 세계로 확장 하려고 시도했댜 인류의 과거가 이 빛을 알지 못했던 < 어둠 > 이 었다면, 미래는 이 빛으로 충만한 <밝음 > 이어야만 했다. 데카르트로부터 금세기까지 약 3 세기 동안 꾸준히 추진된 계몽 주의의 프로그램에서 , 비록 그것의 잔 가지들은 수정을 거듭해 왔 지만 그 밑줄기만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 확실성 > , < 이성 > , 어 둠으로부터 밝음에로의 <진보 > 는 아직껏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인 문학에서도 지적, 실천적 활동의 보편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 인문 학에 <고유한 방법론>을 정립했던 19 세기는 이 골격의 수명울 연 장시켰을 뿐이다. 자연세계 대 역사세계(혹은 문화세계나 정신세계) 로 연구영역을 구획하고, <설명> 대 <이해>로 연구방법을 구분하 며, 법칙정립 대 개성기술로 연구목표를 차별화한 과정은 인문학
의 편에서 실로 양면적 의미를 지닌다 . 한편으로 그것은 자연과학 적 모델의 전횡, 즉 방법론적 환원주의를 거부하면서 인간의 다양 한 정신적 활동의 산물인 < 사실들 > 을 개성에 따라 이해하고 기술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줌으로써, 인문학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 립한 계기였댜 그렇지만 다론 한편으로, 이해의 < 방법 > 은 여전히 인간의 이성적, 합목적적 활동에 대한 가정에 의존했으며 그것에 대한 < 확실한 > 파악의 가능성을 믿었다 . 이러한 가정과 믿음은, < 상상 > 이며 < 감정 > 이며 < 감정이입 > 의 능력을 강조했던 낭만주 의의 분위기에서조차 포기되지 않았다 여전히 이성과 확실성은 一그것들의 점진적 < 진보 > 와 함께 ― 19 세기 이래의 인문학 에서 일종의 형이상학적 원리로 작용해왔다. 오히려 인문학은 자 율성을 확보한 댓가로 중요한 경험영역을 상실했다고도 볼 수 있 댜 금세기의 후반에 이르도록, 자연에 대한 관점이나 경험이 사회 에 대한 관점이나 경험과 얼마나 깊이 관련되는지, 양자의 상호작 용이 생활세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묻는 것은 인문학 에 고유한 주제가 아니라는 편견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비코 Gia m batt ista V i co (1 668-1744) 와 헤르더 Joh ann Gott fried Herder(l744-1803) 는, 정확히 계몽주의의 활기찬 진군이 시작되었 던 시점과 인문학의 자율성이 확고하게 정립된 시점 사이에 자리 한다 이러한 역사적 위상 탓에 , 그들은 18 세기적 맥락에서는 <이 방인>으로, 19 세기적 맥락에서는 <선구자>로 간주되기 일쑤였다. 이를테면, < 보편 > 과 <백지상태로부터의 출발>에 사로잡힌 계몽 주의의 주류에 거역하여 <개체성>과 <연속성>의 관념을 잉태했 던, 그리하여 19 세기에 역사주의라는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사상가들로 취급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같은 함축-완성의 도식은 한때 설득력을 가진 적도 있었지만, 이
제는 빛 바렌 오히려 비코와 헤르더의 풍요로움을 깎아내리는 <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 로 변해 버렸다. 이 말이 역사주의가 이 미 한물 간 사조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역사주의의 정 신은 < 문화의 시학p oe ti cs of cul t ure > 으로 부 활 하는 추세에 있다 . 우리로서는 마이네케를 위시한 많은 < 역사주의자 들> 이 역사주의 의 핵심 개념들을 소급적으로 정당화할 목적에서 , 르네상 스 이래 인문주의의 풍요로운 유산을 지나치게 추상화하고 경직시켜 왔다 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2 이 같은 추상화의 길을 따르기보다, 어떤 주제의 본성은 그것이 발생한 시점에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는 비코의 가르침을 따르 는 편이 더욱 바람직한 결실을 기약할 수 있다. 실제로 바코는 자 연연구의 획일적 모델이 생활세계를 장악해 간 과정을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체험했던 인물이며, 헤르더는 이 모델이 < 국가 > 의 이념 으로 더욱 획일화되고 공고화되던 과정을 직접 경험했던 인물이 다. 그들이 목격 했던 것은, 스티븐 툴민 Ste p h en Tou lmi n 을 빌어 간단히 말하자면, 근대적인 <우주론>과 < 정치학 > 의 결합체, 곧 근대적 <코스모폴리스 cosmo p o li s > 의 형성과정이었다. 하지만 그 들은 이것에 대한 비판에 머물지 않았다. 이 같은 코스모폴리스에 기초한 모더니티가 영원하고 불변적으로 지속될 수 없음을 예리하 게 파악했던 그들은, 가능한 대안을 인문학의 편에서 왕성하게 모 색했다. 우리 인문학도들이 오늘의 상황을 근대적 삶에 지친 피곤 한 눈으로 응시하면서 <포스트모더니티>의 이름으로든 < 새로운
모더니티 > 의 이름으로든 대안을 구하려 할 때, 우리가 비코와 헤 르더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풍요로운 유산은 아마도 그들의 . 동 시대적 성찰일 것이다. 비코와 헤르더에 관한 이사야 벌린의 해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유감스럽게 느낀 대목이 있다면, 그것은 < 시대를 초월한 관념의 비상 > 에 대한 그의 믿음이다. 비코와 헤르더의 < 독창적인 > 관념 에는, 나폴리와 쾨니히스베르크를 넘어, 18 세기를 넘어, 어떠한 시 공간적 구속도 초월하여 < 자유롭게 > 비행할 자격이 주어진다 . 그 렇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사실상 벌린 자신의 < 자유>를 이 야기하기 위한 빌미일 뿐이다. 실제로 벌린은 비코와 헤르더를 18 세기의 동시대에 자리매김하려는 학자들의 노력을 평가하는 데는 인색하지만, 그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관념들을 선택할 그 자신 의 권리에 대해서는 지나칠 만큼 관대하다. 심지어 그는 비코나 헤르더를 누구의 후예라느니 누구의 선구자라느니 하는 틀에 맞추 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기도 하며, 그로서는 그들의 관념들의 지 적 근원이며 지적 수용을 계보적으로 추적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 기도 한다. 그렇다면 벌린의 비코나 헤르더는 정말로 자유롭게 여 행하고 있는가? 그의 두 주인공은 유럽 전역과 북아메리카롤 넘나 들면서 16 세로 소급되기도 하고 19 세기 20 세기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종횡무진의 운동은 일정한 경로에 구속된다. 이를테면 비코는 16 세기 법사학파의 후예이자 19 세기 역사주의의 선구자로 그려지며, 바코에 이은 헤르더는 거의 전적으로 역사주의의 견지 에서 一一_혹은 벌린 자신이 이상화한 역사주의의 견지에서 - 묘사된다 . 어떤 저자의 관념을 이해하려면 그것이 발생한 상황으로 되돌아 가라는 것이 비코와 헤르더의 권고였다. 심지어 그것은 역사주의
본연의 정신이기도 하다. 벌린은 그들의 권고를 무시한 채 그들의 <독창성>을 재단하고, 역사주의의 정신을 무시한 채 그것의 가치 를 제고하는 아이러니를 보여 준다. 우리로서는 그가 독창적이라 고 규정한 관념들 중에서 <산 것>과 <죽은 것 > 을 철저히 가려내 려는 의도는 없다. 그렇지만 그가 바코로부터 추출한 핵심 관념들, 이를테면 인간본성의 가변성,
같이 일원론과 다원론 사이의 <긴 장 >을 드러내는 바, 이것은 사 실상 벌린 자신의 이념이 투사된 결과이다. 이제는 자유주의 정치 철학의 고전으로 읽혀지는 『자유의 두 개념 Two Concep ts of L i ber ty 』 (1 958) 에서 그는 부정적 , 소극적 자유와 긍정적, 적극적 자 유를 구분한 바 있다. 전자가 < 강압의 부재 > 로 인해 주어지는 혼 란에 가까운 자유라면, 후자는 < 자율 > 에 의해 뒷받침되는 조화로 운 자유이댜 자유는 복합성이며 차이이며 다원성이라는 한편과 통일성이며 균일이며 획일성이라는 다른 한편 사이에서 긴장을 지 혜롭게 조절할 줄 아는 자율적 존재만의 특권이다. 벌린이 비코로 부터 < 타키투스 > 와 < 플라톤 > 사이의 긴장을, 헤르더로부터 <무 한한 다양성 > 과 < 차이들 속의 통일성 > 간의 긴장을 통찰했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닌 셈이다. 실로 벌린의 자유주의적 해석의 덕택에, 사실들에 천착하는 타키 투스적 관심과 사실들을 체계화하여 < 영원한 관념사i deal ete r nal hi s t ory >를 정 립하려는 관심 사이에서 번민하는 비코의 모습이 그 려질 수 있었으며, 이러한 비코상은 지금까지도 비코연구의 출발 점들 중 하나로 존중되고 있다. 또한 그 덕택에, 헤르더의 <역사 주의 >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점차 극단적 민족주의며 전체주의 며 유토피아주의로 경직되어간 과정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주의 본연의 정신이 획일성과 통일성 보다는 차이와 복합성에 있다는 각성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오늘 날 문예비평 일각에서 일고 있는 <새로운 역사주의 New Hist o r i - ci sm > 의 운동은 이러한 각성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비코와 헤르더』의 텍스트 안에서도 똑같은 긴장을 발견 하면서 보람을 느꼈다면 역설일까? <시대를 초월한 관념들의 비 상>에 대한 그의 발상에서 실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발상이 낳은 그 나름의 가치 있는 결실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자유주의 정신은 바코와 헤르더를 역사주의의 편에 서 전망하면서도, 그것을 그들에게 기계처럼 적용하지 않았다. 도리 어 그들을 통해 <경직된> 역사주의를 느슨하고 풍요로운 모습으로 그려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비코와 헤르더에 대한 사실적 호기 심과 그들의 <의미>를 규범화하려는 관심 사이에서, 벌린이 긴장감 과 함께 드러낸 균형감은 거장만이 발휘할 수 있는 미덕이다. 3 비코와 헤르더는, 특히 비코는 밀림에 가깝다. 호기심에서 그들 을 읽기 시작한 독자는 얼마 못가 되돌아 오거나, 끝없이 헤메거 나, 몇 차례의 인상적인 기억만을 간직한 채 빠져나와서는 다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곤 한다. 벌린은 평범한 학자로서는 따르 기 힘든 명석함으로 그 밀림을 조감했다. 더욱이 그의 조감도에서 원근과 명암을 조절해 주는 역사주의는, 베네데토 크로체 Benedett o Croce 가 그의 대 작 『 비 코의 철 학 La F ilo sofi a di G iam - batt ist: a Vico 』 (1911) 에서 비코 위에 덧칠한 헤겔주의에 비해, 혹은 루돌프 하임 Rudolf Ha y m 이 『헤르더 Herder.!l( 2 Bde., 1880-1885) 에 서 헤르더에게 덮어 씌운 극단적 민족주의에 비해, 훨씬 유연한 퍼스펙티브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에 유보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벌린이 비코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했던 소위 <비코의 인식론>은 역사주의적 선입견의 역기능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실례이다. 그는 비코의 인식론에서 선험적이지도 경험적이지도, 연역적이지도 귀납적이지도 않은 제
3 의 길, 즉 < 재구성적 상상력 > 에 의해 다른 문화의 생활방식에 침투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발견은 비코의 < 상상력 > 을 헤르더의 < 감정이입 > 과 혼동한 탓이요, 어쩌면 콜링 우드 Co lli n g wood 의 < 상상적 이해의 방법 > 과 혼동한 탓으로 보인 댜 비코는 상상력에 의한 < 이해 > 를 권고한 적이 없다. 오히려 비 코는 상상으로 충만한 < 고대인들의 세계 > 를, 상상 아닌 이성으로 충만한 < 현대인들 > 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에 고심했던 인물이다. 선험적인 동시에 경험적인 < 상상적 보편자 im ag ina ti ve u ni versal> 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은 고대인에게로 한정된다. 만일 상상에 의 해 과거로 침투하는 < 방법>을 비코에게 들이민다면, 비코는 그것을 소박한 < 시대착오 > 라고 혹은 < 학자들의 허세 conceit of scholars> 라고 일축할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린의 조감도는 어느 누구의 것보다도 훌륭 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 비코와 헤르더의 난해한 개념들을 명료 하게 풀어간 분석의 재능은 차치하더라도, 그의 자유로운 사색은 심지어 그가 의도하지 않은 구석에서마저 번쩍이는 통찰들을 드러 낸댜 인간의 모든 경험영역에 <총체적으로> 접근해 갔던 비코와 헤르더 앞에서, 파편화된 개별 지식분과의 전문가로 자처하는 오 늘날의 학자들은 위축과 당혹을 느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이 헤르더와 비코에 대한 접근의 출발점을 종교학, 역사학, 미학, 언 어학, 인류학, 철학, 문예학, 과학학 등 어디에서 택하든, 벌린은 경청할 만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그의 이야기 중에서, 비코와 헤 르더에게도 핵심이었고 벌린 자신도 중시했으며 우리로서도 각별 히 귀기울 만하다고 여겨지는 공통의 요목을 한 가지만 선택하라 면, 그것은 벌린이 비코의 <상징주의>와 헤르더의 <표현주의>로 개념화하고 있는 맥락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 같다.
비코가 < 인간은 인간이 만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 혹은 헤르 더가 < 우리는 우리가 창조한 세계 속에 산다 > 고 말했을 때, 실로 양자는 한결같이 < 인간이 만든 것 fa c t um > 이 인간 삶의 근본적인 조건임을 천명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심각한 난점이 발생한다는 것 또한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지식과 기술, 교육과 종교, 법과 정치, 윤리와 행동규범, 삶과 죽음에 관한 생각과 의식 (儀式 ), 언어 며 노래며 제스추어 등, 인간이 만들어왔고 만들어가는 모든 것들, 한마디로 < 문화 > 와 < 역사 > 는 인간 삶의 근본적인 조건임에도 불 구하고 인간의 의도대로 만들어지거나 작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비코와 헤르더는 만드는 주체와 만들어진 대상 사이의 이 같은 괴리를 중세인들처럼 숨은 < 섭리 > 나 운명에 의해 메우 지도 않았으며, 계몽주의자들이나 합리주의자들처럼 < 이성 > 에 의 해 해소하려 하지도 않았으며, 마르크스나 프로이트처럼 혹은 금 세기의 구조주의자들처럼 어떤 < 핵심 구조 > 에 의해 환원하려 하 지도 않았다. 양자는 인간의 사고, 나아가서는 삶 자체의 < 불확실 성>을 출발점으로 삼았댜 인간은 태초부터 무지, 탐심, 욕망, 공 포에 따라 세계를 경험하면서 그 유한한 경험에 따라 문화를 형성 했던 바, 이 같은 <유한성>은 상상적인 고대인뿐 아니라 이성적 인 현대인도 귀속되는, 실로 어떠한 시공간의 어떠한 인간도 벗어 날 수 없는, 본질이요 굴레였다 . 결국 인간의 사고와 경험은 출발 부터, 그 자체의 유한성과 그에게 불투명하게 주어지는 역사와 문 화라는 이중적 불확실성에 의해 장악되는 셈이었다. 이처럼 중첩된 불확실성을 전제하면서, 비코와 헤르더는 인간이 만든 것들의 <상징성>에 주목했다 . 제우스를 상상하여 그를 위해 제단을 만들고 사람들이 필요와 효용을 충족하기 위해 수행하는 모든 노동의 산물을 그의 배려 덕택으로 돌리는 것이 상징의 행위
이듯이, 오로지 이성의 추론과 계산만으로 < 인간의 완성 > 이 가능 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런저런 제도들을 만들어가는 것도 상징의 행위일 터였다 이렇듯 인간의 삶은 상징에 의해 포위된 채 자기 편의 상징화를 추구하는 일종의 < 상징적 상호작용 > 이다. 그렇다 면 < 이해 > 란 무엇인가? 상징으로부터 < 확실한 > 혹은 <축어적인 liter al> 의미를 캐내는 작업인가?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고 아니 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한편으로 < 이해 > 는 인간의 선택을 결정하 는 조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선택의 유한성이 폭로되는 지 점이기 때문이다 . 만일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한 < 이해 > 가 없다면, 우리의 사고와 행동, 나아가 우리의 삶 자체는 방향을 결여할 수밖에 없다 . 그렇지만 시공간에 따라, 혹은 사람에 따라 , 우리의 사고며 행동이며 생활이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면, 그 이유도 역시 우리의 < 이해 > 에, 그것의 유한성에 있다. 비코와 헤르더의 통찰은 이 정도에 머물지 않았다 . 인식론적 측 면에서 < 이해 > 에는 두 수준이 있다. 하나는 확실성에 대한 <믿 음 > 의 수준이며, 다른 하나는 그 믿음의 불확실성에 대한 <반성> 의 수준이다. 전자가 < 생활세계 > 내에서 작용한다면, 후자는 <학 문세계 > 내에서 작용한다 . 인간은 그의 이해가 진실하다는 <믿 음 > 하에서 사고며 행동이며 삶을 결정하며 선택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상징 > 의 작용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요즘의 유행어로 말하자면 인간의 선택은 <신화화 m y s tifi ca ti on> 의 과정 내에서 수 행된댜 이 같은 상징의 작용 혹은 신화화를 파악하여 <탈신화화 demy s tifi ca ti on> 를 추구하는 것은, 신화화의 영향권을 벗어나 <반 성>과 <이성적 추론>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들, 특히 학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이 같은 탈신화화의 과정마저도, 또 다른 신화화 혹은 <재신화화 rem y s tifi ca ti on> 가 아닐까? 이 문제로 씨름했던
비코의 고민은 지금도 여전히 경청할 만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이 칠혹 같은 어 둠 수많은 위험한 암초가 널려 있는 이 거친 바다, 이 무자비한 폭풍 우 속을 계속 항해하면서……암흑시대의 그림자들과 영웅시대의 우 화들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인간의 (이성적인) 추론을 모두 전복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제멋대로 해석되어 온 우화들에 대해 우리 의 이성을 적용하고 그것들에 대해 이성이 요구하는 의미들을 부여 하여 그 먼 과거사의 주인이 됨으로써 … …이 칠혹 같은 어둠에 빛을 비추고 폭풍우를 진정시키며 위험한 암초를 피해가야 할 것인가? (Vi co , S ci e 따a nuova pr im a(l725); Leon Pomp a ed. & tra ns., Vic o : Selecte d Writ ing s (Cambri dg e , 1982), pp. 125-126). 신화화된 과거를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이를테면 < 고대인은 누 구도 따를 수 없는 탁월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고 계속 주장하 도록 놔둘 것인가, 아니면 <이성적인> 탈신화화에 의해 과거사의 주인이 되어야 할 것인가? 물론 비코와 헤르더는 신화화되어 낯설게만 느껴지는 과거, 즉 타자의 <주인됨>을 선택했다 그랬기에 그들은. <역사가>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댜 그렇지만 그들은 주인됨의 자격을 꼼꼼히 따졌다. <무자비한> 주인이 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특히 두 가지 자격이 요구된다. 첫째, 지금의 우리에게는 <상징>에 불과한 것이, 어찌하여 다른 때, 다른 장소, 다른 사람들에게는 <진리로 통용되었던가>를 인식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상징의 <축어 적> 의미보다는 상징의 <수사적>(혹은 의사소통적 혹은 기능적) 의 미가 훨씬 중요하다. 둘째, 특정한 수사적 조건 하에서의 상징의
진리기능을 파악하는 현재, 즉 < 지금 여기 > 도 마찬가지로 현재의 수사적 조건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 지금 여기에서 진리로 통 용되고 있는 상징 > 에 대한 성찰, 즉 < 자기반성 > 이 요구된다. 첫번째가 상대적 혹은 다원성에 입각한 진리의 탈신화화 요구 라면, 두번째는 이렇게 탈신화화된 진리의 재신화화 요구이다. 물 론, 비코의 경우에는 상대성의 시공간적 단위들이 개인인지 공동 체인지 국가인지 인류인지 불분명할 때가 많았던 반면에, 헤르더 의 경우에는 거의 < 국민국가 > 로 통일되는 양상을 보여 준다. 이 시공간적 단위들의 연속에 관한(심지어 진보에 관한) 감각도 비코보 다는 헤르더에게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같은 차이에도 불 구하고 비코와 헤르더는 한결같이 < 탈신화화와 동시에 재신화 화 >를 추구했던 바, 그들의 가장 뛰어난 동시대적 성찰은 바로 이 대목에서 발견된다. 그들은 이성의 빛에 비추어 타자를 이해하 는 동시에, 이러한 이성적 이해의 신화적 본성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댜 4 이러한 견지에서 비코와 헤르더는 동시대의 진리주장들을 상대 화할 수 있었으며, 그 주장들이 진리로서 통용되는 수사의 권역을 상대화할 수 있었다(우리는 아 권역을 <모더니티>라고 불러도 좋을 것 이다). 그들은 이처럼 타자뿐만 아니라 자기까지도 철저히 상대화 함으로써, 모든 종류의 <획일성>을 거부할 수 있었으며, 획일적 잣대에 의한 <추상화>는 물론 어설픈 <종합>마저도 경계할 수 있었댜
모든 개체를 각자에 고유한 척 도로 재는 성가심을 감내해야 한 다는 것, 나아가서 우리가 설정한 그 각각의 척도까지도 우리의 산물로서 상대화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강조한 덕목이었다. 16 세기까지도 인문주의자들은 에라스무스며 라블레며 몽테뉴며 아그리파며 베이컨 등 너나할 것 없이, < 불확 실성>을 심각한 고민거리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한한 인간 으로서는 < 불확실성 > 이 당연한 귀결일 터였다. 대신에 그들은 경 험의 편에서 < 개연성 > 과 < 효용 > 에 만족했다. 우주와 전통이라는 <두 권의 책 > 을 읽어가면서, < 그럴 수 있는 것들 > , < 쓰임새 있 는 것들 > 을 발견하여 저 나름대로 주장하고 사용하면 족했다. 모 든 개연적인 주장과 용도는 진, 선, 미를 목표로 삼았지만, 절대 진 리, 절대 선 , 절대 미는 < 인간적인 > 인식의 영역이 아니었다. 우리가 데카르트와 뉴턴 이래로 < 확실성 > 혹은 절대적 진리주 장이 자연세계뿐만 아니라 < 안간이 만든 > 세계까지도 장악해갔던 과정의 영향을 평가할 때, 무엇보다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은 이 인문주의적 전통의 행방이다. < 확실한 > 물리학적 법칙이 자연현 상을 재단하는 동안, 인문주의자들이 < 자연이라는 책 > 에서 읽어 냈던 < 그럴 수 있는 > 의미들은 사라져 버렸다. 이를테면 에라스 무스가 <여우>로부터 읽었던 생존의 지혜 혹은 게스너 Conrad Gesner 가 <개구리>에게서 읽었던 일기예보의 재능은 넌센스로 되 어 버렸다. 우리로서는 미셀 푸코가 자연의 <탈원전화 > 라고 부른 이러한 변화를 향수(鄕慈)의 눈으로 희고하겠다는 의도가 없다. 다 만 우리는 많은 학자들의 주장처럼 이 변화의 결정적인 조건이 <과학적 경험과 관찰>의 증가였다기보다는 < 확실성 > 을 추구하 겠다는 결단이었음을 강조하고 싶을 따름이다. 비코는 이 같은 확실성의 원리가 삶의 공동체에 침투하여 사람
이 개별적인 실례들로부터 읽어가며 배워가는 지혜, 곧 < 신중( 愼 重 p rudence) > 의 지혜를 파괴한다는 것을 파악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수학적인) 일반법칙의 확실성이란 사람들이 그것을 만들었기 에 (그것을 확실한 것으로 삼자고 약속했기에) 확실한 것으로 < 보일 > 뿐이라는 심원한 통찰을 보여 주었다. 그의 통찰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 같은 < 자기 확실성 > 을 자연, 타인, 다른 공동체, 다른 문화 등 온갖 종류의 < 타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 삶의 방식 을 가리 켜 <반 성 의 바바리 즘 barba rism of refl ex i on > 이 라고 불렀댜 자기의 확실성, 자기의 이성, 자기의 언어, 자기의 그 림자로 타자들의 세계를 뒤덮는 만용은 결국 <이성의 종말>을 예 고하는 것이었다. 헤르더 역시, 프랑스의 < 철학자들phi loso p hes> 로부터 칸트에 이르는 계몽주의의 계획에서 < 차이들에 대한 전횡>을 예리하게 파악했다. 특히 계몽주의적인 < 국가 이성>의 잣대는 다양한 <민 족들 > 저마다의 고유한 재능을 진위와 우열의 관점에서 획일적으 로 평가하는 우를 범했다 . 한 <민족>에 내부에서도 통일성의 원 리는 다양한 공동체들, 집단들, 개인들 저마다의 재능의 실현에 아 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터였다. 사실상 근대 <국민국가 nati on - s tat e > 는 계급적, 성적(性的), 지역적, 문화적, 종국적으로는 개인적 <차이들>에 대한 리바이어던적 역할을 자임해왔다. 차이들을 탄 압하고 통제하는 < 성난> 리바이어던의 얼굴로든, 차이들을 조정 하거나 종합하는 <웃는> 리바이어던의 얼굴로든 말이다. 국가가 차이를 강조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거의가 <갈등>의 측면에서 였댜 그래야만이 갈등의 해결사로서의 국가의 <정체성>이 부각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국가가 이런 모습으로 정립되어 가던 시 점에서, 헤르더는 차이들에 대한 배려의 필요성을 통찰했다. 비록
그가 민족 간의 차이들에 열을 올렸던 만큼은 < 민족주의자 > 로 평 가될 수 있을지 모르지 만, 그는 국민국가와 사회 적 다양성 간의 긴장을 파악했던 만큼은 동시대의 하만J ohann Georg Hamann 이나 가터러 Jo hann Chri st o p h Ga tt erer 처럼 진정한 < 다원주의자 > 로 평 가되어야 마땅하다. 물리학의 획일성 모델이 자연세계와 생활세계를 두루 장악해가 던 시점에서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전통을 시의적절하게 응용하고 있었던 비코와 헤르더는 우리에게 참으로 풍요로운 유산을 남겨 주었다. 물론 하이젠버그 이후로는 물리학에서마저 불확실성에 대 한 감수성이 급속히 증가해 왔다 . 이성의 이름으로 자연에게, 타인 에게, 다른 계급에게, 다른 지역에게, 다른 성에게, 다른 문화에게 가해왔던 폭력은, 생태학이며 문화인류학이며 민족학이며 페미니 즘이며 지역언어학 등에 의해 생생하게 폭로되는 추세에 있다 . 그 렇지만 새로운 장르들을 개척하고 추진하는 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것들은 자칫 우리 시대의 < 확실한 > 대안을 자처할 수도, 그런 덕택에 새로운 <권력 > 이 될 수도, 그리하여 < 차이들 > 에 관심을 우리에게 강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먼저, 우 리는 <확실성>이 우리 시대에 특유한 < 진리형식 > 이요 < 지배적 수사>요, <강요하는 권력>임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불확실성 속 에서도 살아갈 줄 아는 지혜를 먼저 배울 필요가 있다. 차이에 불 안해하고 추상화된 조화나 종합에서 위안을 찾기보다는, 차이 자 체로부터 <줄거움>을 느끼는 감수성을 먼저 키울 필요가 있다. 실례는 항상 이론에 선행하며, 경험은 언제나 추상에 선행하기 때 문이다. 바로 이것이 비코와 헤르더가 르네상스로부터 물려받아 이 시대 의 우리에게 다시 전해 주고 있는 인문학의 본성일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사야 벌린이 비코와 헤르더를 통해 우리에게 짐지우고 싶어했던 역사주의 본연의 정신이 들어 있을 것이다. 이들이 제시 한 길을 따라 차이에 대한 감수성을 연단하는 것은 모더니티를 인 문학에 길들이는 걸음마에 해당한다. 96 년 12 월 이종홉, 강성호 . 2l
2) 번 역 텍 스트는 Isai ah Berlin , Vic o and Herder. Two Stu d ie s in the Hi st o r y of Ideas(The Hog arth Press; London, 1976) 이 다. 비 코에 관한 논고 는 이종흡이, 헤르더에 관한 논고는 강성호가 번역을 전담했으며, 번역된 원 고를 서로 돌려가며 읽었다. 명문장가로도 유명한 이사야 벌린의 유려한 필 치가 번역자들의 미숙함 탓에 훼손되거나 위축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다. 비코와 헤르더에 관한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우리의 번역이 그들의 개념에 대한 조악한 국산화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불안도 있다. 독자의 애정 어린 채찍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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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l 가상디 Pie r re Gassend i 92 가이 우스 Ga ius 법 전 275 가터 러 ]. C. Gatt er er 299 간스 Eduard Gans 201 갈리 아니 Ferdi na ndo Gali an i 195 갈릴레오 Gali leo 50 감정 이 입 emp a th y (d as Ein f ii hlen ) 가치 E 년성파 감정이입 408, 413 비코의 비슷한 언급 372 인간적 전망의 다양성파 감정이입 415-417, 421 헤르더의 견해 312-313, 341-347, 369-374 겐츠 Fri ed r ich von Gentz 316 고대인과 현대인의 논쟁 222( 역주 2)) 고트쉐 트 J. C. Gott sc hed 371 공감 감정이입을 보시오. 공통의미(혹은 공통감각) sensus commun is 141( 역주 1)), 184, 218-219, 287 괴 레스 ]. ]. von Gorres 201, 298( 각주 2)), 316, 324( 각주 18)), 363 괴 테 ]. W. von Goeth e 문화 개념 360
물질적 진보 355 ( 각주 24) ) 비코에 대한 해석 195-196 사실파 이론의 관계 7 , 250 사회적 이상 412 생기론 419 아테네 예찬 379 예술의 역할 402 인간의 총체성 400 자연파학의 영향 297 폭력에 대한 증오 368 프랑스 혁명에 대한 태도 316 헤르더와의 관계 326, 330, 368, 381, 424 헤르더의 영향에 대한 평가 393 헤르더의 인격에 대한 평가 404( 각주 10)), 424 그라비 나 G. V. Gravin a 49, 195 그라티 안 Grati an us Grati an 277 그람시 Anto n io Gramsci 205 그로트 George Grote 202 그로티우스 Hug o Groti us 바코가 비판한 측면 170, 172, 183, 274, 280 비코가 추종한 측면 45 , 49 , 246 역사의 발전 85-86, 93, 98, 135, 147, 157( 각주 2)), 159 인간의 사회적 본성 392 인식론 226 그리네우스 Sim o n Gr yn aeus 272( 각주 15)) 그리 마니 추기 경 Vin ce nzo Gri ma n i 62 그리 말디 Costa n ti no Gr ima ldi 251 그림 Jak ob Gr imm 298( 각주 2))
글라임 J. W. L. Gleim 314 기 본 Edward Gib b on 277( 각주 18)), 289, 305, 376 기 조 Fran<;ois Guiz o t 7, 31 L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 leon Bonapa rte 316 노발리스 Novali s 118( 각주 28)), 316 논리실증주의 ph y si c a li sm 74 뉴턴 Issac Newt on 12, 150, 257 니부르 Barth o ld Nie b uhr 31, 162, 198, 201 니스벳 H. B. Nis b et 10, 348( 각주 17)), 388( 각주 2)) 니 체 Fr ied rich Ni et z s che 191, 192, 235, 237, 325, 404( 각주 10)) 니 콜리 니 Fausto Nic o li ni 10, 42, 171; 203, 244-245, 287( 각주 30)) E: 다원주의 plu ral ism 고전적 일원론 406-407 몽테스키외에 대한 [.년!주의적 비관 문학적 표현에서의 다원주의 338-340 삶파 사끄에서의 [.尼!주의 349-351 상대주의적 형식 405 , 407-410 이성주의를 파피하는 측면 417-417
주관주의와 다른 점 415 차별적인 가치들 413-414 차별적인 목표들 408- 41 7 헤르더의 E 변론 310, 312-313 획 일성 대 E 변주의 353, 365-366, 371-374 다윈 Charles Darwin 297 단테 Alighier i Dante 146, 170, 345 달랑베르 Jea n Le Rond d'Alembert 195( 각주 2)), 295, 306 던 Joh n Donne 221 데 니 스 Joh n Denn is 221 데 안젤리스 Pietr o de Ang e li s 199 데 제 란도 J. M. Deg e rando 201 데 카르트 Rene Desca rtes 계몽주의의 선구자로서의 위상 162 파장된 주장 26, 208 물리학을 이상화한 측면 216 반통일적 분할 332, 348 비코에게 미친 영향 246 비코의 비판 48-53, 65( 각주 15)), 68-70, 160-162, 181-182, 190 수학적 선험성파 자연파학 121 , 248 역사 회의주의 268 옛 지혜에 대한 태도 159( 각주 4)), 305 이단의 혐의에 대한 두려움 172 인간본성론파 자연법론 92-93, 148, 190, 278, 286, 289, 352 인간 의식의 수동적 성격 78 인파관계 8 인문학적 지식에 대한 견해 51-52, 55, 64-65 인식론 51-53. 68-69
진리 규준 51-53, 190-191 헤르더의 데카르트 비판 347-350, 352 델라 포르타 Gio v ann i Bap tista D~lla Port a 248-249 도티 Charles M. Doug h ty 366 돌바크 남작 Baron d'Holbach 161, 195, 325, 382 두니 E. Dun i 171, 287( 각주 30)) 둔스 스코투스 Duns Scotu s 61( 각주 8)) 뒤르켐 Em ile Durkheim 132, 191, 423 뒤물랭 Charles Dumouli n 269, 273, 277( 각주 17)) 뒤 보 주교 Jea n Bap tist e Du Bos 300, 302, 395 드라콘 Dracon 100, 128, 186 디 드로 Denus Did e rot 295, 313, 373, 378 디 오도루스 시 쿨루스 Diod orus Sic u lus 171 딜 타이 Wi lh elm Dil th e y 감정이입 346 비코가 미친 영향 41, 81( 각주 8)), 281 역사적 사실 7, 31 역사적 이해 89 ( 각주 13)) . 207-208, 227. 229 2 라니 에 리 Anto n io Ra nier i 198 라므네 H. F. Robert de Lamenna is 361 라바터 J. C. Lavate r 21, 304, 306, 339 라베송 F. Rava iss on 250
라살 Ferdi na nd Lassalle 202 라스키 Harold Laski 303 라신 Jea n Racin e 222, 301 라이마루스 H. S. Reim arus 295 라이프니츠 G. W. von Leib n iz 경험주의 387 공동체 405 ( 각주 1 )) 독일 문화 373 독일어 예찬 305 독창성 19 라이프니츠에 대한 비코의 지식 50 모나드 352. 419 보펀 언어 107 사실적 진리와 이성적 진리 156, 219 ( 각주 6)) . 254 사회적 이상 407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249 역사관 163-164. 260, 285( 각주 28)). 289- 2 90 인간의 총체성 397 자서전에 대한 생각 8 자연력 304 정치 성항 44 헤르더가 받은 영향 347-348 라일 Gil be rt Ry le 230 라 포폴리니에르 A. J. J. Le Rich e de la Pop elinier e 125( 각주 44)), 272 (각주 15)), 278( 각주 19)), 279-280, 281( 각주 24)) 라피토 P. F. La fitau 95( 각주 15)), 260, 304 란디 노 Cri sto f o ro Land ino 221 랑케 Leopo ld von Ranke 7, 31, 416-417
램지 A. M. Ramsay 95( 각 주 15)) 러 브조이 .Ar thu r Lovejo y 346 러 셀 Bert ra nd Russell 26, 289 러 스킨 Joh n Ruski n 356, 361 러시아 혁명 422-423 레 싱 G. E. Lessin g 300, 306, 313, 371, 411, 412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 c i 59 레 오파르디 Gia c omo Leop a rdi 198 로가데오 Donato Rog a deo 171( 각주 6)) 로가우 Fri ed rich von Log a u 305 로렌스 D. H. Lawrence 404( 각주 10)) 로마노 Da mian o Romano 171( 각주 6)) 로모나코 Francesco Lomonaco 199 로버 트슨 Wi lli a m Robert so n 373 로시 Paolo Rossi 10, 245, 251( 각주 8)), 255 로시 니 Gio a cch ino Rossin i 367 로우드 Robert Lowt h 305, 345, 370 로크 Joh n Locke 독창성 11, 307 본질의 인식불가능성 338 비코와의 차이 257 비코의 반론 45, 162 역사주의 303 인간의 사회적 본성 392 인간의식의 수동적 성격 78 자연법 92, 136, 278 지적 절제 26
뢰비트 Karl Lowi th 216, 244-245 루소 Jea n-Ja c q u es Rousseau 국가에 대한 견해 325 독창성 307 반계몽주의 354 사회 계약 103 사회관 191. 331 언어의 기원 109 원시 사회 345. 355 이상 사회에 대한 회의론 407 이성주의 비판 306 인간[潛의 회복 403 인간 본성 138. 403, 415 인격 404( 각주 10)) 폴란드 문제 302 헤르더에게 미친 영향 243, 306 루쉐 Max Rouche 10, 299( 각주 3)), 358( 각주 30)), 375( 각주 15)), 409 루이 Lou is 14 세 359 루이스 Wy nd ham Lewi s 414( 각주 9)) 루크레티우스 86, 157, 171, 236, 245, 371( 각주 8)) 르 두아랑 Franc;o is Le Douaren 271 르 루 Raym o nd Le Roux 270 르 르와 Lou is Le Roy 271 르 카롱 Lou is Le Caron 277( 각주 17)) 르클레르크 Jea n Leclerc 48( 각주 5)), 194, 246 르클레르크 Jea n Leclerc 48( 각주 5)), 95( 각주 15)) 리비우스 Liv ius 371( 각주 8))
리 쿠르고스 Ly k urgo s 100, 186 리 터 Karl Rit ter 418 립 스 Theodor Lip ps 346 □ 마네티 Gia n ozzo Manett i 76, 281( 각주 23)) 마르실 리 오 Marsili o dei Ma ina rdi ni 199 마르크스 Karl Marx 독창성 307 물질적 진보 355 ( 각주 24)) 비코에 대한 관심 202-203, 291 비코의 선구적 업적 251 (각주 8)) 사실파 개념의 구분 231 역사이론 61( 각주 8 )) , 94, 123, 131, 142, 169 이론파 실천의 통일성 235 지적 파장 26 착취론 324 헤르더로부터 받은 영향 398, 401 마블리 G. B. de Mably 355, 415 마비용 Jea n Mabil lon 260 마이 네 케 Fri edrich Mein e cke 60, 167( 각주 4)), 196( 각주 4)), 247, 410( 각 주 4)) 마치 니 Giu s epp e Mazzin i . 202, 360-361, 368 마키 아 Macch ia 내 란음모 사건 43 마키 아벨리 N. Mach iav ell i 147( 각주 1)), 156, 159( 각주 4)), 174, 199, 318,
407, 415 만초니 Alessandro Manzoni 199 말레 P. H. Mallet 301, 376 망드빌 Bernard Mandevil le 166 머콜리 T. B. Macaulay 7 메스트르 Jos eph de Ma ist r e 106( 각주 1)), 118( 각주 29)), 176, 199, 255, 330, 424 메이 Cosim o Mei 171( 각주 6)) 메이트랜드 F. W. Ma itlan d 282( 각주 25)) 멘 델스존 Moses Mendelssohn 371 뎅 케 ]. B. Mencke 305 모리스 F. D. Mauri ce 202 모리 스 Wi lliam Morr is 361 모밀리아노 Arnaldo Mom iglian o 88( 각주 12)), 120( 각주 32)) 모쉐로쉬 ]. M. Moscherosch 305 모스하임 J. L. von Mosheim 305 모저 Karl Fri ed rich von Moser 302, 355, 361 모택동 412( 각주 5)) 모페 르튀 P. L. M. de Maup er t uis 335 몬보도 Jam es Burnet Mondoddo 335, 341 몰리 에 르 J. B. P. Molie r e 222-223 몽테 뉴 Mich el de Monta ign e 378, 407 몽테스키외 남작 Charles de Secondat Monte s qu ieu 경험주의 163 법의 기원 201 보수주의 255
비코의 독자 194 여행담의 이용 181, 260 역사주의 299-300, 376 정치체제의 다양성 135 환원주의에 대한 거부 330 몽포콩 Bernard de Montf au con 260 뫼 저 Jus tu s Moser 301- 30 3, 319, 322, 351 무라토리 L. A. Murato r i 49, 195, 228, 260 무랄트 Beat Ludwig von Muralt 299, 301 무소르크스키 M. P. Mussorgs ky 367 문화 인민주의를 보시오, 미 슐 레 Jul es Mi ch elet 민족주의 360 비코에 대한 인문주의적 해석 179 비코에 대한 존경 18-19. 41. 81 (각 주 8)) . 132. 200-204 비코의 신앙심에 대한 언급 173 역사적 사실 7 미 카일 리 스 J. D. Mich aelis 305 미 켈 란젤로 Mi ch elang e lo 11 미학이론 비코의 예술관 57, 78 一 79, 113-114, 128-129, 133-134, 154-156, 190-191 예술가적 창조에 의한 구원 403-406 절대적인 미적 기준의 부재 415 참여예술론 402 헤르더의 예술관 337-344, 369-375, 385-393, 394-404 민족주의 모저의 민족주의 356( 각주 25)
문화 유형으로서의 민족주의 385-393 민족주의와 인민주의 365-3'6 8 언어와 민족주의 305-306, 361 잘못된 민족적 자부심 368, 376. 380 초기 형식둘 300-301 헤르더의 민족주의 316. 322. 358-366 밀 J. S. M 비 356, 393 밀 러 Joh n M 비 ar 301 밀리외 Ch risto ph e Milieu 272( 각주 15)) 밀 턴 Joh n Milton 173 닌 바그너 Rich ard Wag n er 118( 각주 28)), 297, 376 바너드 F. M. Barnard 6, 321( 각주 13)) 바니 니 Lucil io Va nini 172 바달로니 Nic o la Badalon i 10, 42, 248-256, 280 바더 Franz von Baader 66( 각주 16)), 197 바로 M. Terenti us Varro 247, 268 바르톨리 Sebastia n o Ba rtol i 248 바메즈 Jaime Balmes 245( 각주 4)) 바이츠체커 C. F. R. von Weiz s acker 233( 각주 2)) 바퇴 Charles Batte u x 346, 395( 각주 1)) 반 C. E. Vaug h an 1'2: 7, 245, 260 발라 Lorenzo Valla 122, 269, 271, '2:1 2( 각주 15)), '2:18
발랑슈 Pie r re Sim on Ballanche 154, 199 발생 ( 생 성 , 싹) nascim e nto 93, 99, 122, 148, 183- 1 84, 346 발자크 Honore de Balzac 201 버 긴 T. G. Bergi n 6, 203( 각주 11)) 버 크 Edmund Burke 국지성파 직접성에 대한 강조 306. 351 권위주의 176 반계몽주의 282. 330.3 5 4 비코와 유사한 특징 162 생물학으로부터의 유비 303 역사감각 208. 255. 306. 351 , 411 유 기 체로서의 사회 302 버클 Thomas Hern y Buckle 266( 각주 4)) 버 클리 George Berkeley 111, 333( 각주 2)) 버 튼 Rich ard Bu rton 366 베겔린 J. R. Wege l in 299, 415( 각주 11)) 베 르그송 Hen ri Bergs on 250 베르디 G. Verdi 367 베르질 Polyd ore Vergi l 엄 2( 각주 15)) 베를리오즈 Hecto r Berlio z 179 베 버 Max Weber 132, 208, 2'Z 7, 284 베 이 컨 Francis Bacon 비코에게 미친 영향 48, 209. 246, 250-251. 274 신화론 125( 각주 44)) 역사이론 95( 각주 15)). 193. 269 인식론 67.2 1 7. 226. 233 추상화에 대한 거부 244
태고적 파 학 에 대 한 태도 118 통찰력 112 베 일 Pie r re Bayl e 45, 246, 305, 378, 382 베크 Lewis W 血 e Beck 69( 각주 21)) 벤담 Jer emy Benth a m 166, 195( 각주 2)), 307 벨지오조소 공주 Cri st i na di Belgi oj o s o 200 보댕 Jea n Bod in 낯선 사회와 자연법 259, 2 66 ( 각주 3)) 문명의 다양성 300 비코에게 미친 영향 246 신화 및 우화에 대한 견해 95 ( 각 주 15)) . 125 ( 각주 44)) . 27 2 역사가들에 대한 태도 279-280 역사관 150. 214 ( 각주 1 )) , 226 왕권에 대한 주장 140 황금시대론 119( 각주 30) ) 보두앵 Fran~ois Baudou in 270, 272, 281( 각주 23)) 보드머 ]. ]. Bodmer 299, 302, 346 보렐리 G. A. Borelli 248 보샤르 Samuel Bocha rt 100( 각주 3)) 보쉬 에 Jac q u es Ben ign e Bossuet 149, 176, 304, 380, 411 보스 Gerhard Jan Voss 46 볼링브로크 자작 Hern y St- Joh n Boli ng b roke 281, 302 볼테르 Volta ire 국가론 325 낯선 사회들에 대한 관심 260, 285, 301. 416 로크와의 관계 11 반기독교적 태도 382
불변 적 인간본성 289 , 390 비유럽 문화의 우월성에 대한 주 장 390 비코와의 관계 257 역사관 2 83 ( 각주 26)) , 285, 286, 299- 30 1, 373, 382 역사속의지혜 158, 159 이성주의 295, 353 중세에 대한 경멸 301 , 375, 376, 382 , 390 진보관 377 헤르더 와 의 관계 23, 243 , 301, 353, 382, 390, 421 회의주의 378 볼프 Ch rist i an Wolff 12, 295, 306, 337-340, 353 볼프 F. A. Wolf 129, 197, 201 뵈 크 Aug u st Boeckh 31 부르게 Lou is Bourgu et 47 부르봉의 카를로스 Charles de Bourbon 43 부르크하르트 Jak ob Burckhardt 31, 208, 289 부엘 Charles de Bouelles 77 부우르스 Dom iniqu e Bouhours 107, 223 불랑제 Nic o las Anto i n e Boulang e r 195( 각주 2)) 불 랭 빌 리 에 Hen ri de Boulai nv ill ier s 301, 376 뷔 데 Gu illau me Bude 269-273 브라운 N. 0. Brown 237( 각주 3)) 브라이 팅 거 J. J. Breit ing e r 299, 302, 346 브로스 Charles de Brasses 195( 각주 2)) 브루노 Gio r dano Bruno 77 브루니 Leonardo Brun i 285 브리 앙 M. F. P. G. Ma ine de Bri an 22: 7
브리지즈 Joh n Hen ry Br idg es 202 브리 튼 Ben jamin Br itten 385 브왈로데스프레오 Nico las Boil e au-Desp re aux 23, 223, 346 , 395( 각주 1)) 블 랙 웰 Thomas Blackwell 304, 345 블레이크 Wi lliam Blake 400 비 니 에 Ni co las Vig n ier 279 비 코 Gi am batt ista Vic o . 16 세기 역 사 학의 영향 282-283 계몽주의 비판 160-162, 286 끔통감각 ( 꿍통의미 ) 141 (역주 1)) 낭만주의를 선구한 촉면 162, 190 ( 각주 2)) 데카르트파 이성주의에 대한 반란 50-56 동시대의 역사주의 260-261 르네상스 사조와의 관계 76-78, 262-282 문화 94, 232-233 바달로니 교수의 비코 해석 248-257. 252 ( 역 주 1) ) , 280 법학자들의 영향 277- 28 3 법학자로서의 비코 180-181 , 258-261 , 286 보수주의 255 비역사적 사고에 대한 비판 91- 9 2,·1 5 9-161 비코의 신앙심 86, 158, 169, 174- 1 76 비코 주석가둘 10, 41-42 사회계약론 비판 101-103 사회 성장의 세단계 115-116, 138-152 상대주의 165, 169 상상적 이해 fan ta s ia 87-89, 221. 228-237. 240. 280-281 생애와 작품들 42-49 섭리 96-97, 123
소외와 물상화 142 수학에 대한 해설 58 一 70, 78-79, 190 신화론 109-111, 123-130, 187, 191, 382 애매한 문체 26-27, 39-40, 49, 178 언어론 106-118, 120-122, 132, 190, 218, 232 역사 순환론파 인간 정신 141-151, 164, 168-170, 238 역사적 이해 79-97, 104-105, 115-119, 131-161. 192,207-208, 237-239 영향력 194-209 원시인파 사회 진화 138-146, 155-162, 172. 175, 184-191. 232-233 유태인에 대한 입장 100( 각주 3)) , 125( 각주 44)) , 169-170, 225-226 은유 113-114, 221-224 이단 혐의에 대한 공포 109( 각주 5)), 172( 역주 1)), 172-174 인간의 합목적성 232-240, 245, 286-289 인파관계 8, 56 인문학 52, 63-64, 76, 179-180, 191 인성투사 73-74 자연파학에 대한 태도 50, 55-56, 64-76, 181, 192. 214-215, 254- 256 자연법 이론가들에 대한 공격 92-93, 98-105. 135-137. 148-149, 185-188, 259, 286 . 정신과학 대 자연파학 152( 역주 1)) 정신적 언어 117( 역주 1 )) 정신 활동 75 지식파 진리 54-84, 213-216, 217( 역주 1)): 225-239 지식의 분류(진리 대 확실성) 213-215, 225-233, 238 지연된 영향력 18, 39-41, 198-200. 204-205, 352 지적 파장 26, 208 지적 원천 241-290
청년 비코의 관심사 86 태고적 지혜 118-121. 138 一 139 플라톤주의적 입장 95 핵심 관념들 13-18, 20, 25-26, 28-29 헤르더와의 관계 243, 299, 342, 382 혁신자로서의 비코 40 호메로스에 대한 해석 129-130, 304 흡즈와의 관계 67. 79-80, 135 비코의 예술관 57, 78-79, 113-114, 128-129, 133-134, 154-156, 190-191 비 트겐슈타인 Ludwig Wi ttge nste in 9 빈델반트 W. Wi nd elband 203 빌란트 C. M. Wi ela nd 368, 404( 각주 10)) 빙 켈만 J. J. Wi nc kelmann 301, 356, 415 人 사드 Marqu is de Sade 346 사포 Sapp h o 344 사피 F. Sa lfi 199 사회 계 약론 102-103 사회진화론 328 산체스 F. Sanchez 61( 각주 8)), 246 살즈베 리 의 존 Joh n of Sa lisb u ry 303 상티 스 Francesco de Sanctis 162 생시몽 Henr i de Sa int-S im o n 154, 169, 175, 191, 251( 각주 8)), 356, 424 생이브레몽 C. M. Sa int-E vremond de Sa int - D eni s 300-302
샤르댕 Pie r re Teilh ard de Chardi n 250 샤를마뉴 대제 Charlemag n e 301, 359 샤스텔뤽스 F. J. de Chaste ll ux 201 샤토브리 앙 Franc;o is - Rene Chate a ubri an d 199 샤프츠베리 백작 Anth o ny Ashley Coop e r Shaft es bu ry 11, 221, 243, 299, 306, 364, 374, 400
섭 리 96-97, 123, 157, 163-170, 177-178, 240, 253, 256 성서 비판 High er Cri tici s m 173( 역주 2)) 세 네 카 Seneca 101, 278 세 베 리 노 Marco Aurelio Severi no 248 셀던 Joh n Selden 45, 93, 157( 각주 2)), 183, 246, 274 셰 익 스피 어 Wi lliam Shakespe a re 345, 386, 400, 408 셸 링 Fri ed rich von Schelli ng 개인파 사회 166, 208, 250 낭만주의 316, 419 신화론 118( 각주 28)), 191 역사주의 237 , 250 이해의 방법 227 형이상학적 파장’ 401 소렐 George s Sorel 192, 203 소로킨 P. A. Soroki n 154 소메 즈 Claude de Sauma ise 46 소크라테스 Socrate s 252, 361 소포클레스 Soph ocles 408 솔론 Solon 87, 100, 128, 186 순환적 역사이론비코의 경우 147- 15 2. 164. 168-17 0. 238 -239 헤르더의 경우 340 쉬스밀히 P. Si.i ss m ilch 109, 335 슈펭글러 Oswald Sp en g le r 154, 284 슐라이에르마허 F. D. E. Schleie n nacher 316, 400 슐레겔 C. W. Fri ed r ich von Schleg el 316, 400 슐레 겔 형 제 298( 각주 2)), 316 슐뢰 처 A. L. von Schlozer 299, 370, 373 슐처 J. G. Sulzer 390, 404( 각주 10)) 스미 스 Adam Sm ith 166, 222 스케볼라 Quintus Muciu s Scaevola 268 스타소프 V. V. Sta s sov 367 스턴 Laurence Ste rn e 21 스티븐 Leslie Ste ph en 303( 각주 5)) 스틸링플리트 Edward Sti llingflee t 11 스펜서 Hebert Spe n cer 328 스프랫 Thomas Sp ra t 221 스피 노자 Bene dictu s de Sp ino za 비코에게 미친 영향 174 비코의 비판 45. 104, 159, 162, 17 4 바판적 방법 174 성서 해석 88( 각주 12)) . 305 역사감각의 결여 159 인식론 61 (각주 8)). 348 일원론적 입장 419 자연법파 인간 92. 99, 104. 135, 156. 286, 289 지적 파장 26. 208
천재성 19 시 대 착오 anachron ism 비코의 비판 90-91, 102, 143, 158~1 6 0 헤르더의 언급 373-375 시드니 Ph ilip Sid n ey 221 시몽 신부 Rich ard Sim o n 88( 각주 12)), 174, 305 시스몽디 J. C . L. de Sis m ond i 360 시적 논리학 113 신화 바코의 신화론 95. 109- 1 12. 123-130. 186. 239 헤르더의 언급 382 실 러 Fri ed rich von Sch iller 러시아 급진주의에 미친 영향 400 물질적 타락 355( 각주 24)) 민족 감정 316, 326. 368. 388 아테네 예찬 379 인류의 부활 168 。 아그리 파 Corneliu s Ag rippa 266 아놀드 Thomas Arnold 202 아렌트 Hannah Arendt 110( 각주 2)) 아르놀트 Gott fried Arnold 302 아론트 Joh ann Arndt 324( 각주 18)), 363 아리스토텔레스
보편주의 278 사회관 303. 331,337, 350. 392 순환적 역사이론 40 역사관 23. 147 역사학의 제재(題材) 83( 각주 9)) 자연파학 252. 419 지적 영향 12. 49. 101 지적 절제 26 행함파 만듦 228( 각주 1)) 아메리오 F. Ameri o 171, 245 아션 Ossia n 243, 302, 341-344, 355( 각주 24)), 386 아스트뤼크 Jea n Astru c 305 아우구스티 누스 149, 215, 245, 272 아우어 바흐 Eri ch Auerbach 42( 각주 1)), 228, 243, 289( 각주 31 )) 아울리시오 Domeni co Au lisio 246, 251 아인슈타인 Albert Ein s te i n 168( 각주 5)) 아퀴 나스 St Thomas A q떠 nas 244-245, 'Z72 , 278, 307 아티 쿠스 At ticu s 156( 각주 2)) 알치 아토 Andrea Alcia t o 269, 'Z71 애덤스 H. P. Adams 245, 251( 각주 8)) 야코비 F. H. Jac obi 66( 각주 16)), 135( 각주 2)), 195; 197, 419( 각주 2)) 야코비 Gt inter Jac obi 424( 각주 1)) 얀 Joh ann Jah n 324( 각주 18)) 언어 95, 106-117 독일 민족주의와 언어 151 번역불가능성 373-374 비코의 삼분법 115-116
사회적 의사소통파 언어에 대한 헤르더의 견해 331-340 아담의 언어 119 어원에 대한 해설 114- 11 6, 122, 170, 223-224 언어와 사.Il의 관계 340-343 언어와 사물의 관계 114-117, 121-122 언어의 법적 의미 265 언어의 수행적 기능 120-121 외국어의 위험 358, 362-365 헤르더의 언어 기원론 335-337 에 니 우스 Quint u s Enn ius 139 에이로 Pie r re Ay rau lt 업 7( 각주 17)) 에 피 쿠로스 Ep icu rus 156, 157, 171 엘베티우스 Claude Ad rien Helveti us 161, 166, 195, 295, 303, 313, '2K/ 엥 겔스 Fri ed r ich Eng e ls 256 역사주의 르네상스 시대의 뿌리 266, 281-282 비코의 역사주의 81, 96-100, 105, 149-162, 170, 232-235, 258— 2 61 헤르더의 역사주의 336-339, 366-384 영 Edward Young 21, 363 영국왕립학회 Roy al Socie t y 221, 255 영원한 원형적 역사 ide al ete rn al histo ry 147-150, 177, 236-239, 258 예술(기예) 미학이론을 보시오. 예 이 츠 W. B. Yeats 203 오렐리 J. C. von Orelli 198 오캄 Wi lliam Occam 61( 각주 8)), 70, 338 오트망 Fran~ois Rotm an '2:11 , '2:13 , '2:16 , '2:17 오피츠 Ma rtin Op itz 305
우덴 Uden 305 우드 Robert Wood 344 우즈 J. P. Uz 314 울피 아누스 Ulpia n us 184, 'l78 위 튼 Jos eph Wa rton 363 위튼 형제 Hen ry and Jos eph W arton 21, 304 웨 Da niel Huet 100( 각주 3)) 웰즈 G. A. Wells 10, 341( 각주 6)), 410( 각주 4)), 420( 각주 4)) 위트시우스 Hermann Wi tsiu s 100( 각주 3)) 윈치 Pete r Wi nc h 89( 각주 13)) 윌슨 Edmund Wi lso n 203 유스타니 우스 Jus ta nius 262, 'l71 유헤메리즘 Euhemeri sm 123, 124( 역주 1)) 융 C. G. Jun g 1'l7 , 178 은유 112-114 이젤린 J. C. Iselin 190 인간다움 Hurna nitat 381, 403, 409, 413, 414, 420 인민주의 populism 문화의 형태적 Gesta l t 성질파 인민주의 383-393 예술파 인민주의 338-343, 353 헤르더의 인민주의 309. 315-330, 359-368 인성투사 anth rop o m orp hism 72-79, 233-234 안텔리겐치아 399
大 자 넬 리 Basili o Gia n elli 199 자리 초 Giu s epp e Gia rizz o 286( 각주 29)) 자비 니 Fri ed r ich Karl von Savig n y 198, 282, 298( 각주 2)), 352 자연법 이론에 대한 비코의 비판 93, 99-100, 101-172,1 8 5-191, 264, 285 잔투르코 Eli o Gia n tr uc o 245 제노베시 Anto n io Genovesi 195 제 논 Zeno 50, 156, 249 제르비 A Gerbi 10 제 임 스 Wi lliam Jam es 231 젠틸레 Gio v ann i Genti le 41, 81( 각주 8)), 205 조베르티 Vin c enzo Gio b ert i 199 조이스 Jam es Joy c e 203, 209, 237( 각주 3)) 종교 .95, 139-142, 232- 23 3, 333-335 지식 데카르트의 인식론 50-55 데카르트 인식론에 대한 비코의 비판 56-70 비코의 인식론 71-84 비코 인식론의 역사학적 응용 79-84, 220-221 선험적이지 않은 지식 81-87, 142, 164-1 6 5, 180 수학적 지식 347-348 잘못된 심리학에 의한 인식의 왜곡 347-349 진리 대 확실성 96, 213-240 헤르더의 경험적 접근 338-340 진보 비코의 진보관 90-93, 96-97, 138-156, 157-158, 163-170, 177-
182, 236-24 0, 255 인간 E 達의 회복으로서의 진보 403 진보의 상대성 377-380 헤르더의 진보관 327-328, 346, 356, 372-375 진첸도르프 Graf von Zin z endorf 302 진 행 과 반복 corsi e rico rsi 146, 168, 170, 238 질풍노도 운동 343, 396 짐 머 만 J. G. Rit ter von Zim me rmann 302 天: 체사로티 Melchi or re Cesarott i 167( 각주 4)), 195, 299, 304 체 홉 Anto n Chekhov 403 치 르문스키 V. Zhirrnu nsky 10 = 카라무엘 주교 G. Caramuel 248- 2 52 카라파 Anto n i o Caraf fa 43, 256 카르납 Rudolph Carnap 289 카르네아데즈 Carneades 407 카르다노 Gir ol amo Cardano 61( 각주 8)) 카조봉 Issac Casaubon 45 카푸아 Leonardo di Capu a 246, 251
칸 텔 리 G. Cante l li 245 칸트 Immanuel Kant 경건주의 307 경험주의 387 독창성 12. 19 비코의 선구적 역할 66 ( 각주 16) ). 135 ( 각주 2) ), 151. 191. 197 사실파 개념 231 사회적 선 189 선험적 경험 348 예술의 역할 402 이성 예찬 156 인간은 주인을 필요로 한다는 주장 392 ( 각주 9)) 인간의 불완전성 415 인파관계 8 자유의지 420 지적 고땅 26. 208 추상적 통일과 분할 311. 340. 348 칸트의 헤르더 비판 413 프랑스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 354 헤르더의 칸트 비판 327-330, 347-350. 375 형이상학 비판 250 칼라일 Thomas Calyle 356, 364 칼레피오 백작 Pie t r o Calep io 299 캄파넬라 Tommaso Camp a nella 58, 245, 250, 269 케자르 Julius Caesar 205, 371( 각주 8)) 켈리 Donald R. Kelly 264( 각주 1)), 270( 각주 8)), '27 2( 각주 15)), 281( 각주 23)) 코르네이유 Pie r re Corne ille 301
코르넬리오 Tommaso Cornelio 248 코르시니 추기경 Cors ini(교 황 클레멘트 12 세) 46, 194 코르자노 A. Corsano 10, 42( 각주 1)), 172, 245, 248, 287( 각주 30)) 코울리지 S. T. Coleri dg e 202, 250 코코 Vin c enzo Cuoco 50, 199, 287( 각주 30)) 코크 Edmund Coke 281 콘티 주교 Anto n io Conti 46, 49, 194 콜링우드 R. G. Coll ing w ood 41, 81( 각주 8)) 콩도르세 Marqu is de Condorcet 161, 169, 377, 411 콩디 야크 Eti en ne Bonnet de Cond illa c 108, 313, 335 콩트 Aug u ste Comt e 61( 각주 8)), 116( 각주 25)), 132, 154, 175, 202, 297 쾨르너 C. T. Korner 324( 각주 18)) 쿠자누스 Nic o laus Cusanus(Ni ch olas of Cusa) 69( 각주 21)), 269, 쿠자스 Jac q u es Cuja s 269-273 쿠쟁 Vic t o r Cousin 18, 199-200 퀴 네 Edg a r Quine t 200 크누첸 M. Knutz e n 307 크로이처 G. F. Creuzer 201 크로체 Benedett o Croce 감정이입의 방법 346 몽테스키외와 비코의 관계에 대한 논의 194 비코에 관한 논의 10, 173, 178, 204-205, 244-245, 281, 287( 각주 30)) 비코 인식론의 영향 227 역사이론 61 (각주 8)) 절대적 관념론 81 (각주 8)), 87, 205 중세적 진리 61 (각주 8))
크로포트킨 Pete r A. Krop o tk in 360 클라이스트 Chri st ia n Ewald Kleis t 344 클라크 Robert Clark 10 클로츠 C. A. Klotz 382 클롭스톡 F. G. Klop s to c k 314, 358, 376, 401 클 링 거 F. M. von Kling e r 397 키르허 At ha nasiu s Kirch er 100( 각주 3)) 키 케로 Cic e ro 157( 각주 2)), 171, 371( 각주 8)) E 타소 Torqu ato Tasso 221 타키 투스 Tacit us 97, 209, 235-236 태고 신학 prisc a the olog ia 86( 역주 2)) 텐 Hippoly t e Ta ine 202 토로 David Thoreau 360 토리 첼리 E. Torr ice ll i 70( 각주 22)) 토마시 우스 C. Thomasiu s 306 토인비 Arnold Toy n bee 154 토크빌 Alexi s de Tocq u evil le 208 퇴니스 F. Tonn ies 405( 각주 1)) 투르게 네프 Ivan Turge nev 403 트라이 치 케 Hein rich von Treit sc hke 363 트로츠키 Leon Trots k y 205 트뢸치 E. Troelts c h 281( 각주 23))
트리보니아누스 Tr ibo n ian us 263, 271 티 에 리 Aug u sti n Thie r r y 31 티 크 Ludwi g Tie c k 156 고: 파가노 N. Pag a no 195 파라셀수스 Paracelsus 250 파레토 Vil fred o Pareto 203, 423 파소 Lu igi Fasso 245 파스칼 Blai se Pascal 12, 159, 259, 303 파스칼 Roy Pascal 6, 355( 각주 24)), 400( 각주 6)) 파스퀴 에 Eti en ne Pasqu ier 272( 각주 15)), 278, 279, 137( 각주 24)) 파치 Enzo Paci 41, 118( 각주 28)), 180( 각주 19)), 245, 256 파콕 J. G. A. Pop o ck 264( 각주 1)) 파트리 치 F. Patr izz i 58, 266-269 파피 니 아누스 Papi nian us 법 전 275 파피 니 아누스 Papi nian us 법 전 275 퍼거슨 Adam Fergu son 303, 351-352 퍼 시 Thomas Percy 21, 345 포르 엘 Claude de Fau riel 201 포르치 아 백 작 Gia n Artice di Porda 46, 194 포르치 오 L. A. Porzio 248 포스콜로 Ug o Foscolo 202 포스터 Georg Forste r 316
포이어바흐 Ludwi g Feuerbach 42, 142 포크로프스키 M. N. Pokrovsky 138 폰타노 J. J. Panta n o 407 폴리비우스 Polyb iu s 40, 147, 158-159, 245, 247 폼파 Leon Pomp a 5, 89( 각주 13)), 91( 각주 14)) 퐁트넬 Bernard de Fonte n elle 304 표현주의 exp re ssio n ism 309-310, 331-345 모든 표현형식들으 l 타당성 345 문화 유형둘파 표현 385-393 삶의 충실성파 표현 353, 372-375 예술의 본성파 표현 394-404 헤르더의 표현주의적 시론(詩論) 338-346 푸리 에 Charles Fou rier 154, 353 푸펜도르프 Samuel Pufe n dorf 독일어 예찬 306 비코에게 미친 영향 246. 274 비코의 비판 45, 86, 93, 135, 157( 각주 2)), 172, 183 프라티 G. Prati 199 프랑스 혁 명 315-316, 422-423 프랭클린 Jul i an H. Fran klin 266( 각주 3)) 프레다리 F. Preda ri 195 프로이트 Sig m und Freud 26, 127, 132, 180, 423 프루동 P. J. Proudhon 360 프리 드리 히 대 왕 Frederi ck II of Prussia 320, 359 폴라톤 Plato n 비코의 스승 225, 247 역사관 40, 147-148
외국인 풀라톤 373 인간관 95, 238, 416 인식론 58-59, 215, 225 지적 파장 26, 208 천재성 19 통합된 사회 350 플라톤파 신플라톤주의자들 11 풀로베르 Gusta v e Flaubert 201 플로티 누스 Ploti nu s 11 플루타크 Pluta r ch 266 플린트 Robert Fli nt 202, 204 피 네 티 Francesco Fin e tt i 171 피쉬 Max H. Fis c h 6, 10, · 42( 각주 1)), 79( 각주 6)), 181( 각주 20)), 199( 각 주 7)), 203( 각주 11)), 240, 243, 245, 260, 269 피요트르 (러시아) 황제 255 피치노 Marsili o Fic in o 11, 61( 각주 6)), 76, 77( 역주 1)), 160, 221, 245 피코 Gio v ann i Pic o della Miran dola 11, 59, 77, 221, 232 피 타고라스 Pytha go ras 215 피히테 Joh ann Gott lieb Fic h te 227, 316, 355, 360, 401, 405( 각주 1)) . 필 랑제 리 G. Fil a ng ier i 195 궁 하만 Joh ann Georg Hamann 경건주의 307, 333-334 과학적 방법에 대한 반론 162
피테의 평가 196 낭만주의 306 모국어 예찬 306 문화의 정신 302 비코로부터 받은 영향 167( 각주 4)) 사고와 언어 106( 각주 1 )) , 332 상상적 이해 22 소크라테스에 대한 생각 361 신화해석 191 아테네 문화에 대한 저주 379 언어관 331-335, 340 이성주의 비판 (신비주의적 유명론) 335 인간에게는 주인이 필요없다는 생각 392( 각주 9)) 인간의 총체성 400 점복 111 참여예술론 402-403 헤로더의 스승 303, 313. 319, 330, 334-335, 356( 각주 26)), 358 형이상학 250 하이 네 Hein lich Hein e 179, 376 하인제 J. J. W. Hein se 397 하임 Rudolf Haym 10 할러 남작 Albrecht von Haller 418 행 동주의 behavio u r ism 73-74 향수감 391 허 드 Rich ard Hurd 301, 345 허 른 Lacadi o Hearn 366 헤 겔 G. W. F. Heg el 개인의 고통에 대한 견해 328
독창성 문제 207 랑케의 헤겔 비판 416-417 물상화 reif ica ti on 142 민족주의와의 관계 360, 424 비코로부터 받은 영향 41 비코와 헤겔 162, 202, 208, 214( 각주 1)), 255 사회관 191, 208 아테네 문화에 대한 예찬 379 역사의 발전 94, 96, 132, 165, 166, 208, 328, 381 유기체론 177( 각주 12)) 이성욜 펀든 태도 316 인간의 격정 122, 136 자유 392 절대적 관념론 81 (각주 8)) , 401 즉자와 대자 84( 각주 10)) 지적 고망 26 헤르더로부터 받은 영향 298( 각주 2)), 392, 401 헤로도토스 Herod itus 266 헤 르더 Joh ann Gott fried Herder 〈고전적〉이라는 단어에 대한 풍자 371 (각주 8)) 〈질풍노도〉 운동파 헤르더 343, 396 감정이입 369-372 . 경건주의 306-307, 경험주의 387 계몽주의 비판 330 , 346-347 계몽철학자둘의 중세관에 대한 비판 374-375 고전적 이성주의 비판 419 파거에 대한 태도 355-357, 374-375 교회와 국가의 관계 325
국가적 ( 제국주의적) 억압 319, 323 전 26 기독교적인문주의 317 다른 문화들에 대한 태도 369-375 독일어에 대한 애착 305 동시대 내에서의 위치 20-21 • 로크에 대한 언급 338 루터교 목사로서의 신앙심 336, 341 명성 295 문체 26-27, 314 민족감정 316-328, 357-363, 369, 376, 383 전 92 민족혼 141 만주주의적 전망 353 발명 예찬 355 법에 대한 견해 282 볼테르에 대한 비판 23 , 300 , 353 비코와의 관계 41. 167( 각주 4)), 196, 202. 208. 243, 299, .30 0, 372, 382 비코의 『 새로운 파학 』 을 읽었는지에 관한 문제 196-197 사고와 행동의 통일성 398 人밀파 가치의 통일성 ~11-312. 329-330 사회적 이상 406-409 상대주의 407-414 선민론 비판 369 성서 해석 370-371 세계시민주의 비판 355, 367 언어와 의사소통 331-332. 335-342 역사주의 156, 166. 167( 각주 4)), 224. 250. 286, 372-380. 388-390, 408-4 10 영향력 26 一 28. 106( 각주 1)). 296-297. 307-308, 366-368, 392-
393, 396. 398-399. 417 예술가의 역할 394-.39 8 예술가적 창조 190( 각주 2)), 296 유태인에 대한 입장 321 (각주 13)). 363. 370, 379, 420 이성주의 비판 296-297, 316. 347-348. 353 인간의 사회적 본성 391-393 인격의 불가분성 394-401 인류 문화의 다양성 ( E 尼주의) 23, 24. 296. 300-303. 310. 313-314. 324, 327-329. 347-368. 373-383, 389-391. 405-417 인문주의 162, 299, 304-305. 381. 403. 409. 413~414. 419-421 인민주의 309. 315-330. 365-368. 388-389, 393 인성투사 73 인식론 227 인종차별주의 326-329 자연파학에 대한 태도 297. 303-304 자연성장성 346 제 문화의 불가공약성 413 제 민족의 평등 328 주관주의자가 아닌 헤르더 415 진보관 375-380. 411~412. 414 집단 문화(소속감) 383-388 초월적 법주들에 대한 거부 348 칸트 비판 327-330, 348-350. 375 표현론(표현주의) 309. 331-358. 353, 369-375. 394-404 프랑스 혁명파 헤르더 422-423 하만이 미친 영향 334-335 핵심 관념들 9-10. 20-29. 309-314, 380 행동으로서의 시 341-344. 382. 400-401 헤르더가 받은 영향둘 243, 298-307
헤르더에 관한 주석들 10 헤르더와 다른 철학자들의 비교 411 헤르더와 유럽 민족주의자들 365:... 3 68 헤르더의 내적 긴장파 모순 418-421 헤르더의 성품 404 ( 각 주 10)) 활기찬 발전을 가로막는 것들 357-358 획일성 비판 353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 Hennes Tr ism eg isto s 77( 역주 1)) 헤르첸 Alexander Herzen 192 헤 일 Matt he w Hale 255, 281 햄 스터 회 스 Tib e ri us Hemste r hu is 304 호네 크 Ph ilipp Wi lh elm von Homeck 305 호라티 우스 Horati us 171, 190( 각주 2)), 371( 각주 8)) 호메로스 100, 130, 140, 186( 각주 5)), 304, 341-345, 371( 각주 8)), 382, 386 횔 덜 린 Fri ed rich Hi: ild erlin 379 후커 Rich ard Hooker 255, 303, 392 훔볼트 Wi lhel m von Humboldt 316, 360 휘 태 커 Thomas Whittake r 245 휴퍼트 George Hup pert 214( 각주 1)), 272( 각주 15)), 281( 각주 24)), 286 (각주 29)) 흉 David Hume 독창성 12 비코로부터 받은 영향 195( 각주 2)) 사실파 가치의 분리 311 사회 윤리 411 수학적 진리 347-348
언어관 121 ( 각주 35) ), 222 역사주의 299, 373, 037 8, 383 이성의 한계 334 인파관계 8 자연법 277( 각주 18) ), 281 중세에 대한 태도 376 지적 파장 26 회의주의 378 히 틀러 Adolf Hitler 229 힘 들 Kraft e 352-354, 364, 387
지은이와 옮긴이 소개 이사야 벌린 Isay a Berlin 이사야 벌린은 1909 년에 헤르더의 고향이기도 한 라트비아의 리가 Riga 에서 태어 났다. 1920 년에 영국으로 이주하여 옥스포드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1933 년에 동대학 교수로 취임했으며, 1 CJ7 5 년 이후 동대학 올 소울즈 All Souls 칼리지의 명예 교수였다. 그의 명성은 국제적 활동에 힘입은 바 크다. 전쟁 기간 동안 잠시 미국 및 소련의 영국대사관에서 일등서기관으로 근무하기도 했고, 그후로는 20 여 개에 달하는 국내외 대학들의 초빙교수로 활동했다. 그 덕택에 1957 년에는 약관의 나이에 영국 학 술원 회원자격과 기사작위를 취득했고, 1 CJ7 1 년에는 영국 최고의 메릿 훈장 (O . M) 을 받았으며, 1974-1 CJ7 8 년에는 영국 학술원 의장직을 수행했다. 이 화려한 경력에 어울리게 그는 수십 편의 탁월한 저서들을 출판했다. 대표작들 만을 추려보면 이번에 우리가 번역한 Vico and Herder( lC J7 8 ) 의에도, Karl Marx: Hi s Lif e and Envir o nment( l9 39), The Hedg e hog and the Fox: An Essa y on Tolsto y's Vie w of Hi stor y (l 953), Two Concep ts of Lib e rt y(l96 9), Four Essa ys on Lib e rt y(l 969), The Di vo rce Betw e en the Sc ien ces and the Humanit ies (lCJ7 4 ), Russia n Think ers(lCJ7 8 ), Concept s and Categ o ri es , Ph i.lo soph i.m l Essa ys (lC J79 ), Ag a in s t the Currents : Essa ys in the Hi st o r y of Jde as(l 98 0), Personal Jm p r es - sio n s(l981) 둥의 책으로 우리 학계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이종홀(李宗治)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로 근대초 지성사와 과학사, 포스트모던 문화운동에 관한 논문툐요 발표해 왔다. 주요 논문으로는 『확실성, 모더니티, 비코」, 『근대초 유럽의 헤르메스주의와 과학적 담론의 형성』 이 있다. 현재 경남대학교 사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강성호(姜聲湖)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는 『헤르더의 사상에 나타난 <총체적 역사인식 : 개체성, 발전, 인간성 사상 의 상호관계를 중심으로>』, 『월러스틴의 자본주의 세계체제론과 제국주의론」이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서양사학과에 출강하고 있다.
비코와헤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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