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웨 . 샤브꾸노프 1930 년 3 월 23 일 모스크바 서쪽의 스몰렌스크에서 출생 레닌그라드 국립대학 동방학부 중국역사학과 졸업. 1953 년 학생 신분으로 극동고고유적 조사에 참여 이를 계기로 발해사를 전공하게 됨. 1955 년 불라디보스똑에 있는 소련과학원 극동역사학 • 고고 학 • 민족학분과에 취직하여 1994 년까지 적을 둠. 1962 년 노보씨바르스끄 국립대학에서 박사후보(준박사) 학위 취득. 1984 년 소련과학원 극동지부에서 박사학위 취득. 1991 년 정교수로 승진. 1994 년 소련과학원 사회과학부 정회원으로 선출됨. 국립극동대학으로 자리를 옮김 송기호 l CJ7 5 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입학 1981 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문학사 1984 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문학석사 1995 년 동 대 학원 문학박사 1984- 88 년한림대학교 재직 1988- 현재 : 서울대학교 재직 현재서울대학교 안문대학 국사학과 부교수

러시아 연해주와 발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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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銅 氏族樹 : 샤이가 성터에서 발견된 12 세기 여진시대의 유물로서, 이 책에서는 이 를

인용하여 발해시대의 씨족수 관념을 설명하고 있다 (1994 년 일본 전시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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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해주와 발해 역사

에.뷔] . 샤브꾸노프 엮음 송기호· 정석배 옮김 aL 묘D 사

한국어판에 부쳐 이 책은 다수의 러시아 학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하였다. 저자들은 최 근에 발굴된 고고자료와 문헌자료에 근거하여 발해의 역사, 연해주 발 해 주민들의 물질문화와 정신문화, 발해 사회의 사회경제적 특성과 민 족문화적 특성 등에 대해 연구해 온 성과를 총괄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책을 한국어로 출판하기로 결정한 사실은 한국에서 渤海라는 中 世國家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渤海史가 韓國史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그러한 관심은 결코 놀라 운 것이 못된다 . 과거 고구려의 통치하에 있었던 현재의 북한 지역 대 부분이 발해국에 포함되었던 사실과 고구려인들이 발해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 그 자체는 발해사에서 韓人들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음을 말해준댜 이와 함께 발해로 한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 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발해는 그 남부지역에 많이 거주하였 던 고구려인들이 인종적 순수성을 보존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 이다. 바로 그로 인해 10 세기 초에 高麗라는 이름의 국가가 재건될 수 있었다. 고려는 본질적으로 고구려의 줄임말이다. 이 모든 사실들은 발 해사와 韓人들의 역사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증명한다. 한편으로 그와 똑같이 발해사가 중국 동북지방 및 러시아 극동 남부 지방에 거주하는 원주민의 역사와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주로 고대 퉁구스어 종족인 昧賜族을 중심으로 하면서 몽골어 종족인 室韋人들도 부분적으로 거주하던 이들 지역도 역시 발해 영역

에 속하였댜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발해의 역사와 문화에 한인뿐 아니라 러시아, 중국 및 몇몇 다른 외국의 학자들도 커다란 관심을 가 지고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포함한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남북한, 러시아, 중국, 일본학자들의 민족문화적 해석이 언제나 모든 면에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은 어쩌면 어이없는 일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학자들 사이에 나타나는 그러한 불일치야말로 문헌자료와 고고자료를 더욱 치밀하고 전면적으로 분석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러 가설과 인식들의 편차를 줄여 나감으로써 발해사를 객관 적으로 조망하게 될 것이고, 아울러 韓民族을 포함한 동아시아 여러 민족들의 역사에서 발해의 역할과 위치를 제대로 해명하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 이 책이 출판됨으로써 한국학자들과 한국사회가 발해의 역 사와 문화에 대해 러시아학자들이 지니고 있는 기본 인식을 파악하고, 이 책에서 다룬 문제들에 대해 공통의 접점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 다. 이와 동시에 불일치점들을 찾아내어 그 원인을 면밀하게 분석함으 로써 창조적 논쟁을 통하여 공통 분모를 마련하거나 적어도 상호 이해 를 촉진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를 통하여 한국과 러시아의 학자들, 그리고 두 나라 국민들 사이에 우정이 돈독해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1994 년 10 월 15 일 아카데미 회원 에휴l l. 샤브꾸노프 군

차례

한국어판에 부쳐 3

머리말 및 연구사 7

제 1 장 발해국(698-926년)

1 건국 전야(5-7세기) 극동의 민족 • 정치적 상황 35

2 정치사 개관 50

3 행정-지방 조직 60

4 사회제도 71

제 2 장 연해주의 발해 문화 유적과 그 특성

1 연해주 발해 유적의 유형 분류 문제 81

2 성터와 취락지 84

3 고분군 106

제 3 장 발해시대 연해주 주민의 물질문화

1 집자리와 종교 건축물 111

2 농업과 수렵 • 어로 138

3 수공업 154

4 교통로와 대의 관계 232

5 무장 도구 238

제 4 장 발해 문화

1 발해 문화의 전반적 특성 245

2 장식-조형 예술 및 신앙 250

맺음말 281

참고문헌 및 문서 287

해제 315

번역을 하고서 329

찾아보기 333

머리말 및 연구사 오늘날의 沿海州와 北韓, 그리고 중국 東北地方(滿洲)의 대부분을 차 지하고 있던 渤海 (698-926 년)는 중국 사료에 勿吉또는 昧輯이라 적혀 있는 퉁구스語 種族“인 무끄리 (約 K p H)2) 가 사회 경 제 적 으로 발전하면서 이 룩한 국가이 다 (200. 60, 61, 68, 69 쪽). 渤海史는 극동과 중부아시 아 3) 의 역주 1) 원문은 <퉁구스語를 사용하는 種族>을 의미한다. 이를 줄여서 <퉁구스語 族>이라 하면 언어의 한 갈래를 뜻하는 <語族>과 혼동할 우려가 있으며, 국 내에서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퉁구스族>이란 말도 종족 하나의 명칭으로 혼 동할 가능성이 있어서 둘 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통구스語 種族>이라고 번역하겠다. 몽골어 종족이란 용어도 역시 이와 동일한 경우이다. 아울러 러시아어의 쁠레먀 (n JJ eMl1) 란 단어는 우리 말의 種族, 部族과 대응되 기 때문에 편의에 따라 두 용어를 혼용하여 번역하였다. 역주 2) 에 . 꿰샤브꾸노프는 突歡語인 Mug lig, 梵語인 M ukri와 M ukuri를 勿吉妹輯 과 동일한 명칭으로 보고 있다(에.부l . 샤브꾸노프, 『발해국과 연해주의 발해 문화 유적』 1968, 나우까출판사, 29 쪽).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고구려를 가리 키는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이 견해는 통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당나라 때에 편찬된 『 梵語雜名』에도 <高麗 敵供理>라고 나온다(盧泰敦, 『高句麗·渤 海人과 內陸아시 아 住民과의 交涉에 관한 -考察』 『大東文化硏究』 23, 1989 참조 바람). 역주 3) 러시아에서는 아시아를 북아시아, 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와 함께 중 부아시 아와 중앙아시 아로 구분하고 있다. 중부아시 아 (UeHTPVlbHIUI AJ IU I, Centr al As i a) 는 대체로 바이칼 호수의 남쪽 지대로서 알타이 산맥, 몽골, 내 몽골, 오르도스 지 방을 포괄하고, 중앙아시 아(Cp e 血JUI AJ IU I, Midd le As ia)는 이보다 서쪽 지대로서 아랄 호수 동쪽 일대와 파미르 고원, 천산 산맥을 아 우론다.

다른 중세국가 및 종족연맹들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고, 이들 상당수의 운명에 실로 중대하고도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 때문에 여러 나라의 학자들이 발해의 역사와 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중국과 일본의 사료에 남아 있는 발해에 대한 정보는 극히 단편적이고 불완전하다. 이 때문에 발해 영역 안에서 일어났던 사회경제적, 정치적, 민족문화적 행위들의 진행 과정, 이웃 민족과 국가에 대한 발해의 영 향, 특히 이들의 후예이며 계승자인 女眞族의 발전에 대한 영향을 밝 히는 데에는 고고학 조사자료들이 더할 나위없이 중요하다. 연해주의 발해 유적에 대한 연구사는 아.뻬.아끌라드니꼬프와 아.빼. 제 례 반코 (137. 7-25 쪽 ; 143. 44 쪽), 에퀘샤브꾸노프 (197. 6-15 쪽), 엘 예 셰메니첸코 (163. 2, 3 쪽)의 저술에 이미 기술되어 있다. 이 시기에 대한 연구나 중세유적의 발굴은 이미 1917 년 10 월 혁명 이전부터 시작되었 다. 초창기 여행가들이나 연구자들은 연해주에서 발견되는 요새, 성벽, 참호, 도로에 관심을 기울였다. 엠.이.벤유꼬프는 <적어도 거대한 도시 들이 토성으로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기록하였다 (45. 154, 155 쪽). 이러한 기록들은 거리가 멀어서 연구가 거의 안된 러 시아 변경지역에 대한 관심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켰다. 19 세기에서도 특히 후반기에 極東考古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 작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에 극동 개척이 집중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 이다 대부분 기술교육을 받고 러시아 중심지에서 이곳으로 파견된 탐 험가들은 고고유적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유적의 위치나 발견 당시 의 유적 상태에 대해 학문적으로 가치 있는 정보를 남겼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중부아시아와 중앙아시아란 번역 용어가 원어와 뒤바뀐 꼴이 되지만, 국내에서 중앙아시아라 하면 일반적으로 후자를 의미하기 때문 에 이렇게 번역하였다. 이 때문에 두 지역을 각기 東中央아시아와 西中央아 시아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를 따르지는 않았다. 근래에는 중앙아시아 지역이 러시아로부터 독립해서 떨어져 나감에 따라 중앙아시아란 말을 사용 하지 않고, 두 지 역 을 통합하여 중부아시 아 (UeHTP aJJ bH BJI A3WI) 로 부르는 경 향 도보인다.

연해주, 아무르강 유역 4 ) 및 사할린의 고고유적을 기술한 광산기사 이아라빠찐의 필사 원고에는 발해 것을 포함한 여러 유적의 위치에 대 한 기 록이 들어 있다 (220. 3-32 쪽).

역주 4) 쁘리모리예 (n p HMO p be) 가 바닷가 연안 지역을 의미하여 沿海州로 번역되듯 이, 쁘리아무리예 (n pH IIMYJl be) 는 아무르강 연안 지역을 의미하여 沿아무르라고 도 번역되지만, 여기서는 <아무르강 유역>이라 부르겠다.

저명한 러시아 동양학자인 빨라지이 까파로프의 지도 아래 러시아 지리학회에서 1870-71 년에 南-우쑤리서 ` I 에 대한 역사 • 민속 학술조사단 울 구성하였다. 이 학술조사단의 주요 성과는 연해주의 중세유적에 대 해 시기구분을 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뻬刀l-파로 프에 따르면, 연해주의 중세유적들은 발해시대 (8-10 세기), 여진시대 (12-13 세 기 초) 및 몽골통치 기 (13-14 세 기 )로 구분할 수 있다 (146. 91, 92, 94-96, 124, 326, 364 쪽). 극동에 대한 뻬까파로프의 조사성과는 실로 소 중한 것이다. 이 지역에 대해 처음으로 계획적인 학술조사룰 수행하였 고, 여기서 발견된 유적들을 구체적인 시대와 연결하였으니, <남一우쑤 리 주에 홑어져 있는 고대의 자취들은 주로 만주의 발해왕조가 지배하 던 시기에 남겨진 것들이다>고 지적하였다 (146. 95 쪽). 게다가 문헌사 료를 광범위하게 인용하였기 때문에 그의 저작은 그 뒤에 극동에서 과 학적인 고고조사를 진행하는 데 훌륭한 지침서가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그가 어떠한 종류의 사료를 인용하였는지 전혀 언급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 사료를 바탕으로 현재의 끄라스끼노 (K pacK 血 o) 마 을에 港口遺蹟이 존재할 것으로 추정하였다 (146. 94 쪽). 그 후에 정말로 이 지역에서 그리 크지 않은 발해 성터가 발견되었는데, 여러 가지 정 황으로 보아서 항구유적임이 분명하였다. 그것은 이 성터가 엑스빼지 찌야 (3Kcne ,ll HUIDI) 만 연안의 쭈까노브까 (U y KaHOBKa) 강 입구 가까이에 위 치하고 있기 때문이 었다 (195. 141-144 쪽 ; 1CJ 7. 94, 95 쪽). 따라서 뻬까파로프는 실제 자료를 근거로 하여 연해주에 발해 문화 유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한 최초의 연구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 다. 그러면서도 그는 퀘고르스끼와 마찬가지로 극동 민족들의 초기 국

가 권력은 고구려와 중국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 이라고 잘못 생각하 였다 (55 . 24 쪽). 러시아 東 洋 學者 들은 극동 연구에 커다란 기여 를 하였다. 이들은 시 베리아, 중부아시아 및 극동의 민족들에 대한 중국, 한국 , 일본의 사료 들을 추출하여 번역하고 종합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 이 자료 들이 반드시 완전하거나 객관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발해와 여진을 연구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였다. 19 세기 중엽에는 엔야비추린 (18-20;81), 뷔 l. 고르스끼 (55) , 퀘뻬.바씰 리예프 (42) 등의 저작들이 나타났다 . 이들은 극동지방과 그 인접지역의 고대사 및 중세사를 사료에 의거하여 서술하였다 . 이들의 저작에는 발 해 에 대 한 단편 적 인 자료들도 인용되 어 있다(1 9. 136 쪽 ; 42. 31 쪽). 러시아 동양학자들의 노고 덕분에 극동 중세유적들의 소속과 연대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고고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사료의 신빙성을 검토할 여지가 없었다. 1884 년에는 아무르州硏究學 會 (011AK) 가 결성되었다. 극동 남부지역을 모든 측면에서 연구하기 위해서 학회의 구성원에는 향토사학자, 지역 학자, 동양학자들이 포함되었다. 에프에프.부쎄가 이 학회를 이끌었는 데, 그는 게대.마르꼬프, 퀘뻬마르가리노프 , 엘아 . 끄라뽀뜨낀과 함께 극동에서 고고조사를 행할 수 있는 조치들을 취하였다. 에프에프.부쎄는 연해주의 고대사와 고고학에 대해 많은 자료를 수 집하였고, 이룰 토대로 하여 이 지역의 고고유적을 분류하고 고대사의 시기를 세분하였다. 그는 중세사를 다음의 4 단계로 구분하였다 : ®발 해국의 존재 시기, ®여진족 금나라의 연해주 통치 시기, ®몽골족의 침입 및 통치 시기, ® 만주족의 원정 시기 (40. 3-5 쪽). 1908 년 엘아.끄라뽀뜨낀은 기존의 자료에 새로운 사실을 추가하여 『아무르 주의 고대 유적』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41). 그는 이 글에서 기존 유적 발견자들의 글을 인용하고 그 유적들에 대해서 간략히 서술 함으로써 연해주의 유적들을 더욱 완전하게 종합하였다. 20 세기 초에 연해주의 중세고고학에 큰 관심을 보인 사람은 뷔].까.아

르쎄니예프였다 . 그는 일련의 지표조사와 발굴을 행하였고, 200 개 이상 의 유적에 대해 글을 썼으며 (12. 13-15 쪽), 극동에 대한 고고조사를 조 직하고 지역사 연구를 발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 『 우쑤리 주의 고대사 연구 자료 』 라는 자신의 책 (12. 15-66 쪽)에서 그는 몇몇 중세유 적의 출현 시기와 기능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13. 269-312쪽). 그러나 다 음 몇 가지 이유로 보건대 그의 시기구분은 에프에프.부쎄의 것보다 한 단계 뒤처진 것이었다. 그는 발해가 668 년부터 12 세기까지 존재하 였고, 여진 제국이 12 세기부터 1386 년까지 존재했다고 생각하였다 (14 . 313-318 쪽). 그리 고 거 란을 말갈족의 하나로 파악하였다 . 그는 극동 민 족들 사이에 중세국가가 형성된 것은 말갈족이 사회경제적으로 발전하 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의 문명국으로부터 의부적으로 영향을 받았 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 발해 문화의 생성과 발전도 바로 이와 같 은 시각에서 검토하였다 (12. 281, 283 쪽 ;l r;r/. 8 쪽). 이처럼 문제점이 있 기는 하지만, 퀘 . 까.아르쎄니예프의 극동 고대사에 대한 연구 활동은 이후 연구의 발전에 극히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퀘까.아르쎄니예프와 나란히 연해주 역사에 큰 관심을 가졌던 연구 자로서 아제표도로프가 있댜 그는 1916 년에 『니꼴스끄-우쑤리스끄 시와 그 주변 지 역의 고대 유적』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183). 이 책에 서 그는 당시에 알려져 있던 우쑤리스끄 구역 5’ 과 그 주변 구역의 모든 중세유적을 서술하고 도면을 작성하였다. 그 후에 대부분의 발해 유적 이 건설사업으로 파괴되었으므로, 지금까지 이들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조사 덕택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다 그가 주도한 니꼴스끄-우쑤리스끄 도심에서의 발굴을 통하여 발해 유적의 존재 사실이 확인되었다 (183. 11-14 쪽). 1915 년에 아무르 주 연구학회 25 주년 기념행사에서 동양학연구소의 아팬그레벤쉬꼬프 교수가 r 고고자료를 통해 본 아무르 주의 역사 연 역주 5) 라이온(p allOH) 은 州 (0 6.n acTb) 아래의 행정 단위로서 地區, 區域으로 직역하 거나 우리의 道 아래 행정 단위에 비겨서 郡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여기서 는 區域으로 번역하였다 .

구』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그는 중국과 일본의 사료를 토대로 하여 극동 민족들의 역사를 검토하고,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연구들을 평가하였는데, 특히 에프에프.부쎄의 업적에 주의를 기울였다 (56. 50- 75 쪽). 이렇게 하여 혁명 이전에 이미 극동의 고고유적들이 알려지게 되었 고, 이 유적들을 기술하고 종합하는 작업이 처음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유적들의 형식 분류와 시기 구분에 대한 문제들도 검토되었다. 동양학 자들의 노력으로 문헌자료들도 인용하게 되었고, 연해주가 발해의 일 부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러면서도 발해의 국가와 문화가 주로 문명국인 이웃의 고구려나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부르주아적 저술들에는 발해의 형성 원인을 이와 유사하게 파악하는 경향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러한 문제는 아더].아끌라드니꼬 프 (140. 158-174 쪽 ; 139. 44-57 쪽), 에퀘샤브꾸노프 (1 CJ7. 13, 14 쪽), 엘예 . 셰메니첸코 (2 2.5)의 글에 잘 다루어져 있다. 소비예트 시기인 1929 년에 불라디보스똑에서 제.엔.마뜨베예프의 『발 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129). 이 책에서 저자는 당시에 알려져 있던 중국, 한국, 일본의 사료들을 검토하여 발해의 지리, 정치사, 사회제도, 문화, 대의관계를 서술하였다. 그리고 결론에서 발해가 독자적이고 독 립적인 왕국이었음을 강조하였다. 당시에 제.엔,마뜨베예프는 연해주의 발해유적과 관련된 문헌자료를 인용하면서, 나중에 밝혀졌듯이 일부 내용을 발해의 것으로 잘못 편년하였다. 에.뭐].샤브꾸노프가 지적하였 듯이 <……고대 문헌자료를 번역하면서 제.엔.마뜨베예프는 기록을 빠 뜨리기도 하였고 사료의 출처를 밝히지 않기도 하였다 >(1 CJ7. 9 쪽). 그 렇기는 하지만 그의 저서는 최근 얼마전까지만 해도 발해의 정치사를 연구하는 데 가장 좋은 자료가 되 었다. 1953 년에 아더.아끌라드니꼬프 지도 아래 極東考古學調査團이 창설 되고 1954 년에는 불라디보스똑에 蘇聯科學院 極東歷史學 • 考古學 • 民 族學分科가 설립됨으로써 소비예트 극동 남부의 중세유적에 대한 계획

적인 고고학 조사가 시작되었다. 이 분과의 연구원이었던 에뷰l . 샤브꾸노프의 지도 아래 몇몇 발해 고 분과 차피고우(니 an 1-1 ro y, 현재의 끄로우노브까 K p o ytt OB l< a 강) 강가에 있는 두 곳의 절터가 조사되었다 (228-230). 이들에 대한 보고를 통하여 기와 처럼 발해시대에 특징적인 유물들이 처음으로 학계에 소개되었다 (192 . 173-186 쪽). 기와는 東京城 유물이 공개된 뒤로부터 발해유적으로 판명 하거나 이를 편년하는 지표가 되어 왔다 (136. 198-214 쪽). 중세 기와에 대한 형식 분류도 이루어졌다. 이와 동시에 발해 성터의 특징을 찾아 내려고 노력하였다 (194 . 105 쪽). 잠정적으로 발해시대로 편년된 중세 성터 들인 니꼴라예브까 (HH l< O Ji aeBKa), 추구예브까 (4 y r y es 1< a), 싸인-바르 (CaHH 一 Ba p), 남-우쑤리스끄(IOJi

퉁구스족이 세운 이 나라의 문화는 인접 국가나 민족들의 문화와 상호 작용하여 이룩되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저자는 이 독립왕국이 그 이 후 극동 남부 주민들의 발전에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였 다 (89. 320 쪽). 1960-70 년 대 에 는 노보고르제 예 브까 (HoBoro p L1eeB 1< a) 성 터 6 ) 와 취 락지 (218 ; 222 ; 223 ; 231 ; 232 ; 235 ; 236), 마리 야노브까 (Ma p b .s! HOB J< a) 성 터 (233), 니꼴라예브까(幽1< 0 J1 aeB 1< a) I, II 성터 (212-214) 와 같은 발해 유적을 조사 하였댜 1970 년대에는 『고고학 발견』이라는 논문 선집에 연해주의 발해 성터 에 대한 글들이 발표되면서 대단히 홍미있는 자료들이 소개되었고, 편 년이 잘된 유명한 유적에서 출토된 도기 자료와 비교시켜 보기도 하였 다 (30 ; 31 ; 158 ; 159 ; 166). 극동의 고고학자들은 니꼴라예브까 I, II 성터, 노보고르제예브까 성 터 및 취락지에서 주거 구역과 생산 공간을 계속적으로 발굴하였다 (26. 17 ― 21 쪽 ; 32. 57-63 쪽). 학계에 소개된 고고자료를 통하여 수공업자, 농 민, 사냥꾼, 어로인들의 생활을 더욱 정확하고 완전하게 재현시키고, 연해주 발해 성터와 취락지 주민들의 기본적인 경제형태를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인접지역의 고고자료들과 폭넓게 비교하고, 주거지들을 서로 대조하 고, 문헌자료를 논리적 근거로 활용함에 따라 연해주 발해 문화의 시 기구분 문제가 논의되었다. 여러 발굴 결과로 발해 문화가 전기와 후 기로 나뉘었고 (32), 지역적 차이가 있음이 밝혀졌는데 (163 . 18-22 쪽), 이 러한 사실은 발해인의 전통적인 가옥구조에 잘 반영되어 있다 (16. 87, 88 쪽). 주지하다시피 陶器가 유물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다. 발 해 도기에 대한 현미경 분석, 물리-기계 분석, 암석 분석이 이루어졌다 (79. 55-67쪽). 엘예세메니첸코의 논문은 발해 陶器製造業의 발전 문제 역주 6) 과거에 끄루글라야 山 (K py r Jia,j( ConKa) 성터라고도 불렀다.

를 다루고 있다 (164. 47-57 쪽) . 여기서 그녀는 도기의 문양을 분석하였 고, 기능에 따라 형식을 분류하였다. 輪製의 도기에 대한 형식 분류도 이루어졌댜 오부l l. 디야꼬바와 퀘이.볼딘은 논문에서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출토된 輪製陶器의 문양을 분석하였고 (72. 114-118 쪽), 연해주 의 다른 발해 유적뿐만 아니라 아무르강 유역의 중세유적에서 출토된 도기들과도 형태나 문양을 비교하였다. 아무르강 유역의 이런 유적에 서는 연해주 女眞의 윤제도기와 다르면서도 발해 도기와는 유사한 것 들이 출토되고 있다. 끄라스끼노 성터에서 출토된 유물을 토대로 발해의 기와 생산을 다 룬 퀘이볼딘과 야엘이불리예프의 논문은 홍미롭다. 이 성터에서는 기와 지붕을 하였던 절터와 함께 기와를 굽던 가마터가 현재로서는 연 해주에서 유일하게 발견되었다. 이들은 거란시대 (11-12 세기)의 기와가 마터까지 인용하여 연구하였고, 9 一 10 세기 초 발해의 기와 생산과정을 복원하고자 시도하였다 (29. 142-151 쪽). 최근의 조사를 통하여 발해 도기 생산에 대한 새로운 자료들이 추가 되 었 댜 꼬르싸꼬브까 (Ko p caKOBKa) 주거 유적 에 서 3 개 의 도기 가마터 가 발견되었다. 여기에서 9-10 세기 연해주 발해인들의 경제활동을 특징짓 는 희귀한 자료들이 수집되었다 (216). 이 도기가마터들은 끄라스끼노 성터에서 발견된 기와가마터와 구조가 홉사하였다. 니꼴라예브까 I, II 성 터 에 서 도 4 개 의 가마터 로 이 루어 진 도기 생 산 복합체 (KO MilJl eKC) 가 발견되었는데, 이 가마터들은 상부 건축평면 7) 에 속하는 것이다 (214. 91, 역주 7) 러시아에서는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建築平面 >(ST p OHTe Jlb!!wl ro p H J OHT) 이 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발굴 현장에서 토충 구분에 더 중점을 두 어서 이를 세분하고 나서 몇 개의 토충을 묶어서 각기 어느 시대에 해당되는 지를 따지고 있다 . 반면에 러시아에서는 시대 설정에 더 큰 비중을 두어서 일단 어느 시대에 해당되는지를 먼저 따지고 나서 그 안에서 토충을 세분하 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발해시대의 충위를 크게 설정하고 나서 그 안에서 토충을 세분하게 되는데, 이럴 경우에 발해시대의 충위 안에 들어 있는 여러 개의 문화충에 대해서 건축평면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발해 충위 안에 다시 하부, 중간, 상부 둥의 건축평면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건축평면은 충위 (C JI OR) 의 하부 단위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우리의 경우로

92 쪽). 물레의 가락에 끼우는 結 鏡車 도 점토로 만든 또 하나의 유물이다 . 발해의 방추차는 거의 모두가 점토로 만들었다. 발해인의 경제에서 방 직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니, 이러한 사실은 문헌자료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엔게.아르쩨미예바(루블렌코)는 방추차의 형식을 분류하고 앞 시 대의 것과 형태상으로 유사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154. 98-106 쪽). 농업 문제에 대해서는 뷔] . 아볼딘과 엘예셰메니첸코가 논문을 썼다 (22-24; 165. 66-70 쪽) . 대부분의 유적에서 농기구들이 발굴되었는데, 이 는 목축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농경이 발전한 사실을 보여주었다. 자료의 축적으로 퀘.아볼딘이 고고학과 민족학 자료를 이용하여 농경 과 목축 체계를 복원할 수 있었다 (23). 이밖에도 출토된 뼈를 분석함으 로써 발해인들이 기르던 가축이나 그들이 사냥하였던 야생동물의 종류 롤 밝혀냈다 (4). 아울러 발해의 경제를 복원하고 주거유적의 지리적 분 포를 연구하는 작업도 시작되었다(업. 84-87 쪽). 금속제품의 생산 문제에도 관심이 집중되었고 (116. 96-103 쪽), 비철금 속제품의 제작과 관련된 기술 문제들도 연구되었다 (10 1. 40, 41 쪽). 다른 민족과의 문화적 교류 관계에 대해서는 에무~ l . 샤브꾸노프와 엘, 예세메니첸코가 다루었다 (197;16 1. 88-98 쪽). 이들은 도기, 기와, 무기, 장신구 둥을 분석하였고, 연해주 발해인의 주거지에 보이는 구조적 특 징을 말갈인의 경우와 비교하였다 . 고고자료의 비교를 통하여 말갈인 과 발해인의 물질문화에 공통적인 요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 고, 고구려 • 위구르 8 ) • 거란과의 문화적 교류 관계도 규명할 수 있게 되 었댜 발해인의 도기 제조에 말갈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오. 퀘디야꼬바가 밝혔다 (70) .

따진다면 발해 문화 1 기충, 2 기충 둥에 대옹될 수 있는 용어인 셈이다 . 역주 8) 중국의 북방과 서북쪽에 살던 종족으로서 문헌에 回 鶴 , 廻訖 둥으로 나타난 다. 隋나라 때인 7 세기 전반에 홍기하여 唐나라 때에 융성하다가 840 년에 키 르키즈에게 멸망당하였다 . 이들의 후손이 현재 중국의 新 疆 위구르自治區를 이루고 있다.

전쟁 기술의 발전도 또한 전문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엘.예.셰메니첸 코는 발해 화살촉의 특징을 규명하여 이와 유사한 것이 5-11 세기 연해 주와 아무르강 유역 주민들의 문화에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162. 98-117 쪽). 그러나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에 대한 최근의 조사 과 정에서 밝혀졌듯이, 그녀는 이 유적의 중간 충위를 발해시기로 잘못 편년하였댜 사실 이 층위는 여진 시기에 속하는 것이다. 그 결과 몇몇 유형의 여진 화살촉이 마치 발해 것인 양 잘못 분류되었다. 바로 이와 똑같은 이유로 해서 엔게.아르쩨미예바도 주거지 문제에서 유사한 실 수를 범하였다. 1982 년에 엘예세메니첸코는 r 발해시기 (8-10 세기) 연해주 주민의 물 질문화」 (163) 라는 주제로 박사후보학위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발해시기에 연해주에서 수공업-농경에 종사하였던 평민들의 물질문화 를 연구하려는 첫 시도였다. 발해 장인들이 만든 유리제품이 연구되기 시작하였고, 극동 중세 주 민들의 유리제품 생산의 발전 수준도 분석되었다 (170. 116-129 쪽 ; 171. 41, 42 쪽). 아울러 연해주 발해인들의 종교적 偶像과 관련된 문제도 검 토되 었다 (14 1. 47-52 쪽 ; 207. 113-119 쪽). 에.퀘샤브꾸노프는 연해주 발해유적에서 중앙아시아에 기원을 둔 유 물들이 출토된다는 분석을 토대로 하여 중세시기에 이 두 지역 사이에 교역 이 활발하였다는 결론을 내 렸다 (203. 146-1 5.5쪽). 그는 연해주 중세 유적 에 대 해 유형 분류와 시 기 구분을 세 밀하게 하였다 (199. • 186-191 쪽). 중세를 4 개의 문화-역사 시기로 세분하여 발해시기인 7키 - 10 세기의 유적을 제 1 기로 삼았다. 연해주에 대한 계획적인 고고조사를 통하여 실물 자료를 대량으로 축적함으로써 발해인들의 경제 및 생산 활동을 각 부문별로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생산력의 발전 문제에도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으 니, 고도의 독자적인 문화와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였던 초기 봉건국가 인 발해가 세워졌던 것은 이러한 생산력 발전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상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해주 중세유적을 정확히 해석하고

발해의 경제 • 문화 및 역사를 제대로 복원하기 위해서는 연구자들이 문헌사료를 지속적으로 참고하고, 고고자료를 문헌사료와 대조하여야 만 한다. 이와 동시에 중국, 일본, 한국의 역사가와 고고학자들이 발해 의 역사와 물질문화 유적에 대해 연구한 내용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 댜 이와 관련하여 다음으로는 발해 역사 및 문화에 관한 중요한 문헌 자료와 의국학자들의 연구를 검토해보겠다. 발해에 관한 기록은 인접국가였던 중국, 일본, 한국측의 사료에만 남 아 있다. 발해에 대해서는 945 년에 劉狗가 편찬한 『舊唐 書 』와 1060 년 에 歐陽條가 편찬한 『新唐 書 』에 가장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들 사료에는 r 渤海傳』이 실려 있다. 『新唐書』 발해전에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 당나라 張建章의 『渤海記』가 이용되었다. 장건장은 溫州司馬의 직책으로 833- 幻 5 년에 걸쳐 발해를 答訪하였다(까 6. 19 쪽) . 이 때문에 『新唐 書 』 발해전에는 13 대 9) 에 걸친 발해 왕들의 年代記 』盆號 • 年號, 발해의 行政地理 • 官制 • 特産物에 대해서 가장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290. 권 19, 24 쪽). 이와 함께 11 세기 초에 王欽若 등이 편찬한 백과사전 인 『冊府元急』에도 발해 기록이 집중되어 있다. 거란의 침공으로 발해 가 멸망한 기록은 1343-1345 년에 원나라 궁정에서 脫脫의 지도 아래 편찬된 것들로서 遼 왕조 (916-1125 년)의 정사인 『遼史』와 宋 왕조 (960-1 '%1 9 년)의 정사인 『宋史』, 이보다 앞서 洪皓가 지은 『松漠紀聞』, 葉隆禮가 편찬한 『契丹國志』에 잘 남아 있다. 비록 중국 것에 비하면 빈약하기는 하지만, 일본의 『續日本紀』, 『日 本後紀』, 『續日本後紀』, 『日本文德天皇實錄』, 『日本三代實錄』, 그리고 892 년에 편찬된 『類衆國史』및 11 세기 초에 편찬된 것으로 여겨지는 『日本紀略』과 같은 사료들은 발해의 초기 근거지, 발해 사신의 일본 방문, 양국의 경제문화적 교류에 대한 독특한 기록들을 담고 있다. 소 련에서는 제.엔.마뜨베예프의 『발해』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일본의 문헌 자료들이 인용되었다 (129. 21-28 쪽). 841 년에 발해 사신이 가지고 갔던 역주 9) 원문에는 11 대까지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13 대왕 大玄錫까지 언급되어 있어서 문구를 수정하였다.

膜이 1950 년에 일본에서 발견되어 발표되었는데, 여기에는 사신의 명 단과 직책이 기록되어 있다. 이 명단에는 이 문서를 작성하고 나중에 왕위 에 오른 大皮晃(8.5 7-872 년)도 들어 있다 (242). 중세시기 한국의 역사서인 『三國史記』 (1145 년)와 『三國遺事』 (13 세기 말)에 실려 있는 발해 기록은 대부분이 그 이전의 중국사료를 인용한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그 어느 문헌에도 없는 기록도 실려 있다. 이 가운데에는 신라와 발해의 관계, 신라와 말갈의 관계, 멸망 후 발해 인들의 고려로의 이주 등과 같이 한반도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있다. 그밖에 중국문헌에 남아 있지 못한 기록들도 있으니, 발해 유학생들이 당나라 궁정에서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유학한 사실과 함께 역사지리 에 관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업 6. 24, 25쪽). 발해에 이웃해 있던 나라들의 문헌기록은 그 당시의 시대적 산물인 中華思想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댜 이 사상에 따르면, 황제가 전세계를 통치하였고, 세계의 중심인 중국을 둘러싸고 있는 <야만인>들은 황제 의 德政에 감화를 받아 궁궐에 朝貢을 바침으로써 복종을 표시하여야 만 하였다 (124. 230-243 쪽). 중국과 일본의 문헌자료들에는 발해와 자기 나라와의 관계가 마치 지방 봉건영주와 중앙권력과의 관계처럼 기록되 어 있댜 孫玉良이 일본의 연대기에 대해서 지적하였듯이 역사가들이 간혹 의 교문서 와 같은 자료를 왜곡하는 경 우도 있다('Zl 6 . 24 쪽). 발해 가 공식적으로는 중국에 봉건적으로 예속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일련의 역사가들이 발해사를 구체적으로 검토하여 증명하였듯이 실제로는 독 립국이 었다 (129. 29 쪽 ; 282. 34 쪽 ; 238. 482, 48.3, 514 쪽 ; 197. 119, 120 쪽). 20 세기에 들어와서는 이상과 같은 문헌사료들에 발해사와 직 • 간접 적으로 연관이 있는 금석학 자료들이 추가되었다. 이 중에는 旅順 黃 金山 기슭에 있는 우물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당나라 郞將 崔析이 714 년에 새긴 石刻이 들어 있다. 이 명문에는 공로를 최상으로 치하하기 위해서 최혼이 말갈에 사신으로 갔던 사실을 기념하고자 두 개의 우물 을 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299. 235 쪽) . 이것은 大祚榮을 발해 왕으로 책봉하기 위해서 당나라가 713 년에 사신을 파견하였음을 중언하는 실

물 자료이다 발해에 파견된 중국 사신과 관련된 또 다른 금석학 자료 들도 있댜 얼마전 중국에서 張光祚의 墓誌 가 발견되었는데, 이 묘지에 는 大曆 연간 (766-779 년)에 幽州節度副使가 그를 발해 에 사신으로 파견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299. 79, 237쪽). 1956 년에 북경에서 발견된 張 建 章의 묘지에는 그의 발해 答 訪과 『渤海記』 저술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 어 있다 (299. 238, 239쪽). 고고학 조사 덕분에 지금까지 두 개의 발해인 기록이 알려져 있다. 한문으로 쓰인 貞惠公主 묘지 (780 년)와 貞孝公主 묘지 (792 년)가 바로 그 것이다. 정혜공주 묘지는 1949 년에 吉林省 敦化縣 六頂山의 발해 고분 군에서 출토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가 閣万章과 金鐘載이 725 자에 달하는 이 비문을 판독하고 해석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소련에서는 예 . 이끄이차노프가 이들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였다 (108. 225-230 쪽). 심하 게 훼손되어 234 자가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40 . 205 쪽), 이 묘지가 발견됨으로써 3 대 왕 大欽茂의 尊號,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寶 曆 이란 年號, 2 대 왕 大武藝가 묻혀 있는 곳이 틀림없는 珍陵의 위치 등 이 밝혀지게 되었고, 이곳에서 5kn 거리에 있는 放東城을 발해의 첫번 째 수도였던 舊國으로 비정할 수 있게 되었다. 1980 년에는 吉林省 和龍縣 龍頭山에서 정효공주 묘지가 발견됨으로 써 정혜공주 묘지에서 훼손되었던 부분을 보충할 수 있게 되었다 (308. 174-180 쪽). 두 묘지 의 내용을 비 교해 본 결과 단지 공주의 이 름과 연 령, 자식의 성별, 매장 장소 둥과 관련된 6 군데의 구절만이 다르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나머지 부분은 모두 동일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어 서 고정된 하나의 격식을 따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묘지는 序文과 銘 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서는 먼저 덕 있는 여자들의 예를 들고 나서 공주가 고귀한 출신임을 밝혔고, 그 다음으로 공주의 성격 • 결혼 생활 • 남편 사후의 수절과 사망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여기에서는 공 주의 무덤에 대해서도 기록하였다. 명문은 운문으로 서술되었다. 成句, 표현, 수식어와 더불어 인물을 중국 고전에서 차용한 것을 보면 묘지 문을 작성한 사람들이 이 방면에 해박하였음이 틀림없다 (24 1. 195-200

쪽) . 이와 같이 이 묘지들은 발해사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동시에 발해 문학의 실상을 보여주는 희귀한 유물이기도 하다 . 발해사에 대한 첫번째 연구서는 20 세기 초에 나왔다. 중국, 일본 및 한국의 역사가들은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발해사료를 수집하고 체계 화하고 비교하는 엄청난 작업을 하였다. 1919 년에 출간된 唐案의 『渤海國志』 4 권은 전통적인 중국 왕조사의 형식을 따라서 紀,志, 表, 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 紀에는 발해 이전 주민들의 역사인 原始, 발해사의 연대기인 紀年, 발해 멸망 이후의 연 대기인 後紀年이 들어 있다. 志는 地理, 職官,輿服, 禮樂, 詞命, 姓氏, 風俗, 物産으로 구성되어 있다. 表는 朝貢과 征戰에 관한 것이 연대순 으로 작성되어 있다. 그리고 발해의 지도가 부록으로 달려 있다 (238. 15-57 쪽). 그러나 이 책에는 많은 자료들이 누락되어 있고, 그의 지리 고증도 비판을 받았다. 바로 이러한 점이 새로운 발해사 책들이 나올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다. 1929 년에는 黃維翰 이 『渤海國記』 3 篇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위의 책과 구성이 다르지만 기본적인 서술 범주는 동일하다. 저자는 발해사 를 서술하면서 자료의 출처를 명시하였고, 동일한 사실에 대한 사료들 마다의 차이점을 지적하였다. 年表에서는 발해, 중국, 일본, 한국, 거란 의 발해 관련 사건들을 대조시켜 놓았다. 발해 주민의 구성에 대해서 도 한 부분을 할애하여 栗末昧賜人들이 주민의 근저를 이루었다고 하 였다 . 이 당시에는 문헌자료가 빈약하고 고고자료도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발해 수공업의 발전에 대해서 과소 평가하였다. 발해 사 신들이 중국과 일본의 궁정으로 가져간 金 • 銀 佛像, 馮瑞杯, 紫姿盆, 珉瓚酒杯 둥을 다른 나라가 아닌 발해에서 생산하였다는 데 대하여 의 혹을 제기하였다 (288. 中篇. 28쪽). 1933 년에는 중국의 유명한 동북지방 연구자인 金鏡載이 황유한의 책 에 校錄을 달아서 그가 범한 실수와 미비점을 지적하였다. 얼마 후에 는 그가 지은 『渤海國志長編』 20 권이 나왔다 . 이 책에서는 중국의 왕 조사에 특징 적 인 편목인 世紀, 表, 列傳으로 관련 자료를 분류하여 정

리하였다. 이와 동시에 처음의 두 권을 전체적인 개관인 總略으로 삼 았고, 열전 다음에는 地理考, 職官考, 族屈考, 食貨考를 실었다. 마지막 권에는 성터, 고분 , 불상 및 다른 유물 등과 같이 당시에 알려져 있던 발해 고고자료들을 정리하였다. 이 책은 지금까지도 발해사 연구자들 에게 기본적인 자료집으로 되어 :. 있다. 연구가 더 이상으로 진전되기 위해서는 이제 새로운 고고차료를 이용함으로써만이 가능하게 되었다. 일본과 한반도에서도 발해사료를 연구하였다. 한국의 학자인 徐相雨 는 1923 년에 『渤海疆域考』를 썼댜 10) 여기서는 『新唐書』와 『舊唐書』의 기록을 토대로 발해의 지리를 고증하고자 하였다. 그의 지리고증은 지 금의 연구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 점이 많이 있지만, 발해와 동일한 명 칭을 가진 遼의 지명을 토대로 발해의 지리를 고증하면 안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은 그의 분명한 업적에 해당한다.II) 그는 잘못되거나 혹은 아 주 애매한 내용이 『遼史』에 실려 있고, 『盛京通志』, 『大淸一統志』 등과 같은 후대의 연구들이 이 책에 근거를 둠으로써 잘못을 초래하였다는 사실을 규명하였다 (238. 457-474 쪽). 일본의 역사학자 鳥山喜一 12) 이 쓴 『渤海史考』도 발해사에 대한 진지 역주 10) 여기에서는 서상우가 집필하였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韓鎭書가 지은 『海東 釋史續』 권 9 의 地理考와 동일하여 이를 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 따라서 이 책에 대한 평가는 한진서의 책에 대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역주 11)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뒤에 유민들을 요동지역으로 강제로 이주시키면서 지명도 함께 옮겼기 때문에 발해와 요의 지명이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지리적 으로는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후대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사실 을 미처 깨닫지 못하여 지리고증에 많은 오류를 범하였다 . 이러한 오류를 시 정하면서 지리고증을 시도한 사람들이 조선시대의 丁若鏞, 韓致b1li, 韓鎭書이 었다(송기호, r 조선시대 史 홈 에 나타난 발해관』 『韓國史硏究』 72, 1991, o/ -75 쪽 참조). 역주 12) 중국에서 간행된 『渤海史考』(商務印書館, 器•北, 1964 ; 『渤海國志』 宋遼金元 四史資料般刊 一, 文海出版社, 臺北, l 切 7 에 재수록)에는 津田左右吉이 저술 하여 陳淸泉이 번역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내용이 鳥山喜一의 저서인 『渤海史考』(奉公般害 第三編, 東京奉公會, 1915) 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 잘못 된 것이다. 이것은 津田左右吉이 쓴 『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1, 東京 帝國大學 文科大學, 1915) 와 혼동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오류가 이 책에도 그대로 수용되어 津田左右吉의 저서로 되어 있어서 이를 수정하였다.

한 연구서이댜 그는 20 세기 초 일본 역사학자들의 많은 연구 결과를 검토하고 대조하였으며, 유럽 여행가들의 메모도 섭렵하였다. 그는 발해사를 4 개의 시기로 구분하여 ®왕국의 건설, ®발전시대 (大武 藝 와 大欽茂의 통치 시기, 죽 720-794 년), ® 極盛時代 (795-ITTl 년), @裵滅時代 (926 년 거란에 의한 발해의 멸망과 유민의 이주까지)를 설정 하였다. 그는 발해의 문화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그 문화가 토착 말 갈 문화, 고구려 문화, 당나라 문화로 구성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그는 독립된 장을 설정하여 발해 문화가 일본, 여진, 고려에 끼친 영향을 서 술하였다. 또한 그는 발해의 멸망 원인이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의 커다 란 괴리에 있다고 정확하게 파악하였다. 상류계층의 사람들이 세련된 삶을 영위하고 호화로운 宮室 樓閣에 살면서 詩와 賊에 도취되어 있을 때, 평민들은 비와 바람을 막지 못하는 魚皮로 만든 옷을 입고 교육도 받지 못하여 거의 노예 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하였다 . 그러나 그는 그 렇게 된 원인을 외부에서만 찾고 있다. 그에 따르면, 중국 문명이 말갈 사회에 침투하여 가치체계에 큰 동요를 일으킴으로써 <尙武的> 기질 이 변질되었고, 동시에 고대 민족 국가의 유지에 필요한 요소들인 義勇,

堅忍, 勤儉 등에 결함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238. 591-593 쪽). 부록으로 「渤海疆域考」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문헌자료와 다른 역사 학자들의 연구 업적 이의에도 고대의 성터들에 대한 초창기의 정보들 을 활용하였다. 黑龍江省 渤海鎭(과거의 東京城鎭)의 발해 上京 유적에 대한 가장 이 른 시기의 기록은 l fi60 -70 년대에 張綴彦이 쓴 『寧古塔山水記』에 실려 있다. 그는 이곳에서 출토되는 宋과 金의 古錢을 기초로 하여 이 도시 가 금나라 (1115-1234 년) 때 에 속하는 것 이 라고 생 각하였다. 비 록 그가 잘못 생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성터에 대한 그의 기록은 아주 커다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중국의 유명한 고고학자 孫秀仁이 확인하였듯이, 성벽 ·궁성 ·내부구조·佛像·石燈과 같은 기록들과 함께 성터의 서 • 북쪽 13) 을 흐르는 杜丹江에 설치된 고대의 다리에 대한 기록들이 최근

수년간에 걸친 고고학 조사 결과 사실임이 입증되었다(?:1 3. 129-132 쪽) . 17-18 세기에 편찬된 張賀의 『白 雲 集』, 吳振臣의 『寧古塔紀略.!I, 楊賓 의 『柳邊紀略묘에서도 이 성터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19 세기 말에 曹 廷杰은 『東三省輿地圖說』에서 발해 최초의 도성인 舊國을 뿔 B 多唯城(지 금의 敷東城)으로 비정하였는데, 현재 대부분의 중국학자들도 그와 일 치된 의견을 갖고 있다 (289. 13 쪽). 1920-40 년대에는 일본학자들과 하얼빈에 살던 러시아 연구자들이 동 북지방의 중세유적을 조사하였다. 일본의 유명한 고고학자인 鳥居龍藏 은 말갈 유적과 유물을 다룬 선구자였다. 이것은 그가 1919 년 아무르 강 유역과 사할린을 답사하는 동안에 이룩한 업적이었다. 그렇지만 그 의 주장은 가설적인 것이었으므로, 이후의 연구자들에 의해 일부는 정 확하지만 일부는 그렇지 못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250. 25 쪽). 鳥山喜 一 , 齋藤起兵衛, 藤田亮策 등과 같은 일본 고고학자들도 발해유적에 대해 서 지표조사와 발굴을 시행하였으며, 상경 유적을 조사하였다(?:1 0;Zll; 280 ; 281 ; 283 ; 284). 이 들의 조사 결과는 『東京城 _渤海國 上京龍泉府址 의 發堀調査_.!I로 발표되어 발해 유적을 찾아내는 기준이 되었다 (136; 256 ; 317). 발해 의 東京龍原府룰 吉林省 理春의 半拉城(八連城)으로 비 정 하고(?:1 0 ; 282), 中京顯德府를 和龍縣의 西古城으로 비 정 한 것 (283) 도 일본 고고학자들의 업적이었다. 고고학 조사의 성과들은 鳥山喜一의 『渤海國小史』에도 실려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발해 수도였던 성터들의 평면도와 여기에서 출토된 기 와 • 벽돌 • 塘佛 등의 발해 유물을 소개하였다. 그는 많은 부분을 발해 와 일본의 관계에 할애하였는데, 일본과 만주의 <우의>가 뿌리 깊었음 울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 책은 또한 발해인의 경제와 종교에 대 한 의미있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특히 동경성 북쪽의 발해 고분 14) 에서 역주 13) 원문에는 북 • 동쪽이라 하였으나 남쪽의 경박호에서 홀러온 목단강이 상경 성의 서쪽으로부터 북쪽으로 휘돌아 흐르고 있기 때문에 서 • 북쪽이 옳다. 역주 14)과 三거靈에屯 이 고무분덤을을 가조리사키할는 때것에으 로무서덤, 위지에금서은 주三춧陵돌屯이 1 발호견묘되라었고다 .부 르고 있다.

건물 흔적이 발견된 것은 발해에 샤머니즘이 존재하였음을 말해준다고 하였댜 이보다 이론 시기의 勿 吉 과 함께 현대의 퉁구스어 종족들에게 도 기독교 1 5) 유입 이전에 봉분 위에 집을 짓는 풍습이 있었다 (282 . 53-56 쪽) . 中 華人民共和國의 성립과 더불어 중국의 渤海 學 은 새로운 단계로 접 어들었댜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1949 년 六頂山 貞 惠 公主 무덤 조사를 시작으로 하여 점차 중국 동북지방의 발해 영역 전체로 탐색을 확대해 나아갔다. 1950 - 60 년대의 교체기에 吐丹江 유역에서 고고조사가 이루어졌는데, 10 개 이상의 성터, 몇 개의 고분군, 세 곳의 중세 다리 유적, 1 열에 8 개씩 3 열로 배열되어 < 24 魂石 > 이라고 불리는 기와 건물의 주춧돌 유 적 들이 발견되 었다 (239 ; 252 ; 261 ; 266 ; 267). 1963 - 64 년에는 < 朝中共同考古學發堀隊>가 東京城에 대해서 지표조 사와 발굴을 실시함으로써 外城 • 皇城 • 宮城의 설계, 道路 • 里坊 • 市 場 • 宮殿 • 官 廳 • 절터의 배치 등이 확인되었다. 궁성 동쪽의 <禁苑>에 서는 여러 시기에 걸친 건물터들이 발견되었다 (298). 1981-84 년에는 黑 龍 江省文物考古硏究所에서 계속적으로 발굴을 실시하였다. 궁성의 남 쪽 정문 ,1 6 ) 궁성 남벽에 설치된 2 • 3 • 4 호 門址와 성벽의 일부, 제 1 궁전 의 석축과 그 양쪽으로 연결된 회랑 등이 발굴되었다. 이에 따라 궁전 과 건물들이 다양한 시기에 축조되었음이 확인되었고, 3 호 문지 부근 에서는 쪽구들(抗)이 있는 집자리가 발견되었다('2fJ7 ; 298). 이 밖에 발해 의 첫 수도로 간주되 는 敷東城 (253) , 率賓府의 소재지 또 는 그 아래 의 建州로 비 정 되 는 東寧縣 大城子古城 (295 ; 'l:/4. 88 쪽), 鏡泊 湖주위 의 산성 들 (268), 北大고분군 (309), 東寧縣 大城子고분군 (248), 海 역주 15) 鳥 山 喜 一은 샤머니즘에서 十자를 표시한 집에 악마가 들어갈 수 없다고 믿 었기 때문에 무덤 위에 이러한 표지를 단 작은 건물이 세워졌을 것이라고 추 측하였다. 이 구절을 보고 에벤.샤브꾸노프가 기독교의 십자가를 연상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역주 16) 원문에는 금원의 남문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궁성의 남쪽 정문인 午門 石築 과 門敬을 잘못 가리킨 것이다.

林縣 山唄子고분군, 二道河子고분군, 北站村고분군 (246 ; 306) 과 같은 발 해 유적들이 발굴 조사되었다. 和龍縣 龍頭山의 貞孝公主 무덤을 발굴 한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무덤에서 처음으로 발해 벽화가 발견 되었다. 벽화에는 武士와 樂師 둥 12 명의 인물상이 그려져 있다 (309). 東寧縣 團結의 발해 취락지에서 발굴된 쪽구들이 달린 반움집도 커다 란 의미를 지닌다 (249. 33 쪽). 상경성에서 15km 떨어진 杏山에서 발굴 된 기와가마터와 벽돌가마터는 발해의 건축재료 생산에 관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300). 발해의 물질문화에서 말갈적 특질을 추출해내는 데에는 1 '57 4 년에 黑 龍江省 緩濱縣 同仁에서 발굴된 6 세기의 말갈 주거유적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303. 9 쪽). 중국에서 말갈과 관련시키고 있는 同仁文化라 는 용어는 이 유적에서 유래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중국에서 말갈 문 화를 연구하는 상황은 干志耿의 논문에 잘 정리되어 있다 (250). 중국의 고고학자들이 말갈과 발해의 문화를 연구하면서 예이제례반코, 퀘예. 메드베제프, 에퀘샤브꾸노프 둥과 같은 소련 연구자들이 발표한 자료 와 견해를 폭넓게 이용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최근 중국에서는 고고자료들이 축적됨에 따라 발해유적을 포함하여 중국 동북지 방의 고고조사 성 과를 평 가하는 글 (243 ; '2:1 2) 을 비 롯하여 , 성터와 건물 (247;249;260;292) 및 고분 (303) 둥 개별적인 발해 유적에 대한 연구들이 발표되었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755 년경 上京 遷都 이 전과 이후의 두 시기로 크게 구분하여 발해 성터와 도기를 편년하는 기 준으로 삼았다 (243. 4 쪽 ; 247). 역사학에서의 연구도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중국의 역사학자들인 魏國忠, 孫玉良, 劉唯東 둥은 발해사에 관해서 수십 편의 논문을 발표 하였다. 이 논문들에서는 발해에 편입된 昧賜族의 역사, 突地稽 17) • 大武 역주 17) 突地稽는 6 • 7 세기 교체기에 활동한 栗末昧腦族의 首領이다. 그는 590 년대 에 고구려와 싸우다가 불리해지자 무리를 이끌고 隋나라에 귀부하여 揚帝를 따라 고구려 공격에 참여하였다. 唐이 들어선 뒤에 太宗으로부터 李씨 성을 받았으니, 그의 아들이 삼국통일 전쟁에서 고구려·신라와 싸운 李羅行

藝 • 大欽茂 등과 같이 발해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의 역할, 발해 문 화, 발해사와 관련된 몇몇 사건들의 연대 확인, 발해 화폐의 유무 문제, 발해의 대외관계 및 지리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피력되었다. 발해 문화의 성격 규정에서 張鈴의 관점이 홍미로운데, 그는 발해 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를 개방성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발해 문화가 중국, 한국, 일본, 契丹, 室韋 등과 같은 주변 문화와의 접촉을 토대로 형성되었고, 반대로 이들 문화에게도 각기 다양하게 영향을 끼 쳤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296). 역사지리는 문헌사료를 고고학 성과와 대비하면서 연구하고 있다. 1983 년에 吉林省 汗淸縣에 대한 유적 조사에서 平地城 7 곳, 堡壘 2 곳, 건물터 10 곳, 고분군 2 곳을 확인하였다. 이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하여 鄭永振과 朴潤武는 상경에서 동경을 거쳐 연해주 끄라스끼노 구역의 바다까지 이어지는 왕청현 관내의 日本道롤 복원하고, 나아가 率賓府 로 이어지는 교통로도 복원하였다. 劉唯東과 祖延芬은 杜丹江市의 古 代 邊城과 南城子古城을 조사한 자료와 사료 해석을 토대로 하여, 발 해의 渤州(德理鎭)는 과거에 당나라가 黑水都督府를 둔 적이 있는 勃利 部 지역에 설치된 것으로서, 그 소재지는 현재의 南城子였으며, 그 북 쪽으로 발해와 혹수말갈의 경계선이 지나간다고 주장하였다 (263;264; 286). 현재까지의 지리고증은 도읍지들의 위치 비정에 있어서는 대체로 정 확하지만, 발해 전체의 강역 설정에는 아직도 많은 문제점이 있다 (24 1. 72-82 쪽 ; 299. 169-172 쪽 ; 301. 78, 79쪽). 孫進己와 劉唯東의 강역 설정은 다른 학자들과 많은 차이 점 을 지 닌다 (262 ; 'l74 ; 'l75 ). 이 러 한 차이 가 발 생하는 것은 발해의 지리에 관해서 문헌자료들이 빈약하고 서로 모순 된 내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철저한 사료 비판과 고고 학 조사의 진전, 새로운 금석학 자료의 발견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620-683) 이다 . 따라서 돌지계는 발해인이 아닌 것이 분명하지만, 러시아학자 들은 중국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속말말갈족이 발해롤 세웠다고 주장하고 있으 므로 속말말갈 출신인 이 사람도 그 연장선상에 놓고 설명하고 있다.

발해의 역사와 고고학 연구에 관심이 층대되고 있다는 사실은 1986 년 8 월에 寧安에서 개최된 <東北三省渤海史學術討論會>가 증명해준다. 이 학술대회에서 <中國渤海史硏究會>가 결성되었다 (291). 중국의 발해사 연구에서 1984 년에 王承禮의 『渤海簡史』와 朱國性 • 魏國忠의 『渤海史稿』가 출간된 것은 중요한 사건이다. 이들은 발해사 에 대해서 최근에 이룩한 중국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의 연구 성과 들을 집대성한 것이다. 왕숭례는 다년간에 컬쳐 자신이 수행하였던 고 고학 조사의 성과들을 발해사료와 결합시켜 집필하였다. 이 두 책에서 는 말갈의 원류, 발해 정치사, 초기 봉건제적인 특징을 지닌 사회제도, 경제, 정치 • 행정 체계, 당 • 일본 및 신라와의 외교관계, 발해 유만의 향방, 문화 둥과 같이 다방면에 걸쳐 발해사룰 다루었다. 게다가 朱國 沈 • 魏國忠의 책은 폭넓은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더욱 상세하고 깊이 있게 사건들을 분석하였다. 이들은 발해로 편입된 주민들의 사회경제 적 발전수준이 동일하지 못하였음을 지적하면서, 발해 편입을 계기로 낙후된 민족들의 사회경제적 발전이 촉진되었고, 그 결과 大仁秀 (818 용 30 년) 시대부터 鐵利,越喜, 佛程, 虛婁 등의 지역에 郡邑을 두어 郡縣制度가 확립되었다고 하였다. 이들은 또한 발해에 官奴碑와 私奴 碑가 대량으로 존재하였지만 거의가 비생산 영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 에 발해의 사회경제에 별로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였다. 발 해 주민은 <編戶>가 근간을 이루었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직접적으로 통제를 받으면서 戶籍에 편입되어 있었고, 국가에 현물을 세금으로 납 부하였으며, 이밖에도 力役과 兵役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저자들은 당 시의 당 • 신라 •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발해에도 토지대장이 만들어졌 고, 이에 따른 국가적 토지분배의 체계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 다 (299. 115-119 쪽). 에.뭐].샤브꾸노프는 이보다 훨씬 전에 이미 이와 같 은 결론에 도달한 바가 있다 (lITT. 71, 72 쪽). 朱國沈 • 魏國忠의 책 에 는 발해와 관련된 모든 금석문들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발해사에 대한 중국학자들의 사료 접근방식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중국 역사학자들이 중세의 전통에 따라서 昧賜을

나중에 抱 婁 勿吉 , 昧賜 로 계승되어 간 肅愼 의 후예로 본다는 점이다 (241. 1-15, 20, 21 쪽) . 둘째는 발해를 < 당나라에 복속된 지방의 소수민 족 정권 > 으로 파악한다는 점 이다 (299. 1 쪽). 발해의 봉건적 예속이 순 전히 명목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위에서 언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연구자들은 중국과 발해의 관계를 두 국가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중앙정부와 지방행정기구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 는데, 이는 소련의 동양학자들이 비판한 바 있는 중국 중심 이론인 中 華 思 想 과 일 치 하는 것 이 다 (15 1. 41-55 쪽). 한국의 역사학자들도 발해사를 연구하고 있다. 발해의 영토가 현재 북한의 일부까지 뻗어 있었고,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에 유입되었으며, 나중에는 많은 발해인들이 거란을 피하여 고려로 망명하였으므로 , 이 들의 연구는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 그러나 이들은 전통적으로 발해 가 北國으로서 南國인 신라와 동일한 시기에 한국사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고 파악하고 있는데 (88. 106-108 쪽 ; 188. 155-160 쪽 ; ll8. 62-65 쪽), 이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전영률은 <고구려 지방민들이 말갈족과 함께 고구려 장수였던 대조영의 지도 아래 고구려 옛 땅에 발해 (698-926 년)를 창건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나라에 거의 230 년 동 안 북쪽의 발해와 남쪽의 신라가 공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8 . 157 쪽)고 썼다. 그렇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고구려 옛 땅은 발해의 남쪽 일부에 불과 하였고, 고구려 <지방민>이 아닌 말갈족이 발해 주민의 근간을 이루었 댜 대조영이 고구려 장수였다는 것은 『 舊 唐 書 』에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高麗別種이었다>('2:1 6. 19 쪽)는 애매한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1 8) 朱國沈 • 魏國忠이 주장하듯이 이 구절은 『新唐 書 』에 <발해는 본래 高 麗에 복속되었던 속말말갈족으로서 성은 大氏였다>는 구절과 상통한 다(업 6. 19 쪽). 따라서 대조영은 고구려인이 아니라 속말말갈인으로서 역주 18) 대조영이 고구려 장수였다는 말은 여기서 지적하듯이 『 舊唐書』 발해말갈전 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 三國遺事 』 에 인용된 新羅古記와 『 帝王韻紀 』 에 대조영이 고구려 舊 將이었다고 전하는 데 근거를 둔 것이다.

한때 고구려에 예속되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아울러 『 舊唐書』 이 전의 사료들과 한국 중세의 역사서들인 『 三國 史記』, 『高麗史 』 , 『東國史 略』에서는 발해인들을 고구려인이 아닌 말갈인들로 부르고 있다 (299 . 짜 29, 34 쪽). 孫玉良이 증명한 바와 같이, 18 세기 말에 편찬된 柳得恭 의 『渤海考』에서 발해가 신라와 나란히 존재하였던 한국의 국가임을 처음으로 지적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의부로의 영토 확장에 근거를 마 련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룰 통하여 조선의 봉건 통치계급들이 당시 에 만연하였던 사회 위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다(업 6 . 25 쪽).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북한의 고고학자들이 1963-64 년에 東京城 발굴 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중국 동북지방에서 확보한 자료들을 토 대로 하여 일련의 조사 내용을 발표하였다. 북한 고고학자들의 연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朱榮憲의 『발해 문화』이다 (304). 전체적으로 ' 볼 때 소련, 중국, 일본, 남북한 학자들의 노력으로 지금 까지 아주 풍부하고 다양한 고고자료들이 확보되었고, 문헌자료의 발 굴과 분석에 관하여 많은 연구들이 발표되었다. 아울러 발해의 문화와 정치를 효과적으로 연구하였으며, 인접국가나 민족들의 역사적 운명을 결정하는 데에서 발해가 행하였던 역할을 규명하였다. 또한 소련과 외 국의 역사학자들이 과거에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그 영토 안 에서 진행된 사회경제적 전개 과정 및 종족간의 문화 교류를 밝혀내는 데 필요한 홍미로운 인식과 가설들이 제시되었다. 신빙성 있는 자료들 덕분에 발해시대의 연해주 연구와 관련된 많은 과제들이 해결될 수 있게 되었다. 연해주 발해인들의 물질문화와 경제, 그들의 장식-조형 예술에 대해서 세부적 특성을 규명하는 일도 이러한 과제 가운데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발해의 인종 구성은 꽤 잡다하였다. 게다가 발해는 고대 퉁구스어 종족 계통의 국 가이지만 중국 동북지방의 서부 • 북서부 • 북부의 발해 영토 안에서는 몽골어 종족이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자연히 현재의 북한지역에 살았 던 고구려인들이 위의 지역 ' 주민들의 경제 형태, 물질문화 및 정신문 화의 영역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리적으로 가까이에 있던

주변국가들이 발해의 일부 지역 주민들의 문화에 영향을 끼쳤던 점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이 때문에 앞으로 이러한 방향으로 연구를 하 게 되면 머지 않아 발해 문화의 구성 요소 및 특성을 지역 단위로 더 욱 명료하게 밝히고, 경제 형태나 경제 수준의 지역적 차이도 더욱 분 명하게 규명할 수 있을 것이며, 다론 문제점들도 해결해 나아갈 수 있 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에 대한 해명 없이는 발해에서 일어났던 민족적 • 사회적 • 정치적 전개 과정들에 대한 객관적 묘사가 불가능할 것이다. 이 책의 필자들 앞에 놓인 또 다른 중요한 과제는 문헌자료의 분석 과 고고학 연구의 성과를 토대로 하여 인접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발해가 수행한 역할과 의의를 밝히고, 극동 퉁구스어 주 민들의 그 후의 진로에 발해가 끼친 영향을 찾아내는 일이다. 이 책에 서는 발해의 사회적 특성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 책은 3 권으로 예정된 『러시아 극동과 이웃 아시아 민족들의 중세 국가사 개설 (8-13 세기)』 중의 첫번째 책이다. 3 권의 책은 각각 러시아 극동 남부 주민의 중세사에서 커다란 문화-역사 시기로 설정되고 있는 발해 (698-926 년), 거란제국 遼 (916-1125 년), 여진제국 金(安春國 油 b qyH b -ryp ytt, 1115-1234 년)에 관한 것이다. 첫번째 책인 『渤海와 러시아 極東의 種族』의 집필자들은 다음과 같다. 머리말 및 연구사 머리말 : 역사학 박사 에.훼·샤브꾸노프 연구사 : 역사학 박사 에.뷔].샤브꾸노프, 역사학 박사후보 아.엘.이블 리예프, 페아.바씰리예프. 제 1 장 1. 건국 전야 (5-7 세기) 극동의 민족 • 정치적 상황 : 역사학 박사 에.¥~.샤브꾸노프 2. 정치사 개관 : 역사학 박사 에퀘샤브꾸노프, 역사학 박사후보 아.엘이블

리예프, 역사학 박사후보 엔 . 엔끄라진 3. 행정-지방 조직 : 역사학 박사 에.뷔].샤브꾸노프, 역사학 박사후보 아.엘이블리 예프 4. 사회제도 : 역사학 박사후보 엔엔.끄라진, 역사학 박사 후 보 아.엘이블리 예프 제 2 장 1. 연해주 발해 유적의 유형 분류 문제 : 역사학 박사 에.부i l. 샤브꾸노프 2. 성터와 취락지 : 역사학 박사후보 퀘.아볼딘 3. 고분군 : 역사학 박사후보 아.엘이불리예프, 역사학 박사후보 뷔]. 이.볼딘. 제 3 장 1. 집자리와 종교 건축물 : 역사학 박사후보 엔게.아르째미예바, 역사학 박사후보 뷔]. 이볼딘, 역사학 박사 에퀘샤브꾸노프 2. 농업과 수렵 • 어로 : 역사학 박사후보 뷔].아볼딘, 엔웨.레쉔코 3. 수공업 : 역사학 박사후보 웨대렌꼬프, 역사학 박사후보 엘퀘 꼰꼬바, 역사학 박사후보 오부계.디야꼬바, 역사학 박사후보 게 . 엘씰란찌예프, 역사학 박사후보 퀘이볼딘, 역사학 박사 후보 야엘이불리예프, 예.이겔만, 엔유l l, 레쉔코 4. 교통로와 대의관계 : 역사학 박사 에.뷔].샤브꾸노프 5. 무장 도구 : 역사학 박사후보 퀘.에.샤브꾸노프. 제 4 장 및 결론 : 역사학 박사 에훼.샤브꾸노프. 창고문헌 목록 작성 : 역사학 박사 에.부I . 샤브꾸노프, 역사학 박사후보 아델.이블리예프, 떼.아바씰리예프

삽화 자료 작성 : 엘까.로젠베르그, 엘엔구쎄바 , 엘빼호드제비치 , 엘 아까라까, 데게또밀로프 『러시아 극동과 이웃 아시아 민족들의 중세국가사 개설 (8 ― 13 세기) 』 첫번째 권의 편집자들은 이 책의 출판 과정에서 값진 조언을 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사의를 표한다.

제 1 장 발해국 (698 선 26) 1 건국 전야 (5-7 세기) 극동의 민족 • 정치적 상황 서기 1 천년기 후반은 극동 먼족들의 역사적 운명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댜 이 무렵온 러시아 극동 남부와 인접 지역의 종족들 사이에 생 산력이 점차 증대됨에 따라 다른 곳에서는 대부분 이미 사라져 버린 낡은 원시공산관계가 비로소 도처에서 와해되기 시작하여 새로운 계급 관계로 이행되던 때였다. 계급관계로 이행하던 정점은 바로 7 세기 말 발해국 (698-926 년)의 건국이 었다. 중국과 일본의 사료에 따르면, 발해는 말갈족이 건국하였다 (19. 136 쪽; 153. 12, 14 쪽 ; 197. 44, 45 쪽). 모든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말갈족은 자 신을 바까리 (6a 1< ap 0) 또는 무끄리(따I< PH) 라고 불렀고, 突歡人에게는 뵤 끌리 (6eKJ 1H ) 라는 이 름으로 알려 져 있 었다 (200. 60, 61, 68, 69 쪽 ; 259. 18.5 쪽).I) 말갈은 7 개의 커다란 종족연맹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중에서 역주 1) 突歡 비문에 Bo kli (Bok-e li)가 동쪽 해뜨는 곳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衍 句麗 또는 括國이란 음을 표기한 것으로서 高句麗를 지칭한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敵供理가 高麗 죽 고구려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미 앞 장의 역주 l) 에서 언급하였다. 이 책에 인용된 小川裕人도 앞의 두 단어가 勿吉보다는 紹句麗를 표기한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昧輯 보다는 高句麗롤 가리키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栗末昧賜과 黑水昧輯이 가장 크고 강력하였다 . 이 두 연맹은 각각 300-400 리, 죽 150-200lun 정도 거리를 두고 자리잡고 있었고, 이에 비 해 나머지 5 개 종족들은 불과 200 리, 죽 100lun 정도 떨어져 있었다 (279. 『 新唐 書 』 黑水昧賜傳 ) . 2) 栗末部는 지금의 松花江 상류에 해당하는 栗末水 연안을 따라 살았 다. 속말부의 남쪽인 長白山 기슭에는 白山部가 살았다. 속말부의 북쪽 에는 聽땝部 3) 가 있었는데, 위에서 언급한 거리를 염두에 둔다면 이 골 돌부는 현재의 拉林河 유역인 하얼빈 남쪽에 거주하였다 . 골돌부의 동 쪽에는 佛淮部가 있었고, 다시 더 동쪽에는 號室部(骨室部 )4) 가 있었다. 골돌부의 동북쪽에 있던 安車骨部(安居骨部 ) 5) 는 송화강 右岸의 지류들 인 阿仕河와 蝶蝶河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197. 32, 33 쪽 ; 204. 54 쪽). 지금의 阿仕河를 만주어로 알추까(阿勒楚略, AJJ.qy1< a) 라 불렀고 (180 . 19 쪽), 한자로 표기된 여진어로는 阿勒楚略(AJJ.四y r3) 또는 接出虎(胡 hWX y )6) 라고 하였으니 (120. 43 쪽 ;208. 47 쪽), 이것은 安車骨部와 발음이 아주 홉사하다. 최근의 조사룰 통하여 黑水部가 興凱湖와 송화강 사이에 있 는 穆核河 유역에 살았음이 밝혀졌고, 어쩌면 우쑤리강 상류에도 살았 을 가능성이 있다 (204. 56-58 쪽).

역주 2) 『新唐書』 黑水昧腦傳 : r 部間遠者三四百里, 近二百里.』 역 주 3) 『隋書』 昧賜傳과 『北史』 勿吉傳에 는 伯晴部라 되 어 있지 만, 나중에 다시 언 급되듯이 저자는 골들부를 현재의 골드족(나나이족)의 조상으로 보기 때문에 골돌이 란 발음이 백돌보다 원음에 가까운 것으로 보고 있다. 역주 4) 『舊唐書』 昧賜傳에 骨室部로 나타난다. 역주 5) 『舊唐書』 말갈전과 『 新唐 書』 흑수말갈전에 安居骨部로 나타난다. 역주 6) 『 金史』에 安出虎, 阿J!t游, 接出游, 安那虎, 案出游, 案出虎 동으로 다양하게 나 타나는데, 본문에서는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는 표기법을 택하였다.

위에 언급된 모든 사실로 판단하건대, 거의 모든 말갈족들이 만주 동부와 동남부에 거주하였으니, 다시 말해서 서쪽으로 송화강 상류와 중류 일부에서부터 동쪽으로 연해주 서쪽 경계까지 걸쳐 있었고, 남쪽 으로 장백산 기슭에서부터 북쪽으로 杜丹江(고대의 忽汗河) 입구까지 걸쳐 있었다. 다만 호실부, 불널부, 일부 혹수부를 포함한 극소수의 말

갈족들은 연해주 서부에 살았다. 말갈의 가까운 이 웃으로서 남쪽에 高句麗 (19. 69 쪽)와 契丹 (177. 163 쪽)이 있었고, 서쪽에 室韋, 서북쪽에 思慕部, 북쪽에 郡利部, 동북쪽에 는 窟說部 (279. 204 쪽)가 있었다. 비록 대략적인 거주지마저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밖에도 大莫盧國(豆莫婁國), 覆鍾國, 莫多 回國, 庫婁國, 素和國,具弗伏國, 四黎爾國,拔大何國,郁羽陵國,庫伏眞國,魯婁國,羽 眞侯國 등이 언급되 어 있다(1 9. 71 쪽 ; 'Z79 . 77쪽). 거란 문서를 판독하여 알 수 있듯이 이들은 고대 몽골어를 사용하였다 (293. 36.5쪽) . 室韋 (mHB38), 원음에 더 가깝게 말해서 쉬베르이 (mH63 p hl) 사람들 (200. 58 쪽)도 거 란과 동일 한 언 어 롤 사용하였다 (177. 1 3.5쪽 ; 19. 76 쪽) . 豆莫婁國(1 77. 136 쪽 ; 19. 76 쪽), 죽 다구르족 또는 다우르족(達幹 爾族)도 고대 몽골어를 사용하였다 (204 . 57, 64쪽). 위에 열거한 대부분 의 말갈 이웃들도 거란이나 실위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였던 듯하다. 다만 혹수부의 동북지역에 있던 窟說部는 예외였다. 이들은 15 세기에 苦夷 ,7) 죽 아이누족이 거주하던 아무르강 하류에 살던 족속이었음이 분 명 하다 (197. 33 쪽).

역주 7) 명나라가 15 세기 초에 아무르강 하류에 세운 永寧寺碑에 苦夷에 대한 언급 이 보인다.

실위의 기본 영역은 아르군 (A p r 酒 b) 강, 거의 모든 黑龍江, 徽江 (Homm) 연 안, 눈강과 합류되 는 송화강의 중 • 하류 일 대 였다 (204. 57 쪽). 다구르 (大莫盧)족은 실위의 동쪽, 말갈의 북쪽 지역에 살았다. 이들의 영역은 동쪽으로 바다에 까지 이 르렀다 (19 . 78 쪽 ; 177. 361 쪽). 사료에 의 하면 실 위의 영역도 역시 동쪽으로 바다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177. 1 3.5쪽). 따라서 명칭만 달랐을 뿐이지 고대 다우르족은 실위와 전혀 구분되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이 때문에 이들을 종종 실위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5-7 세기에 遼河 • 徽江 • 아르군강 유역, 아무르강 상 • 중류에 서 송화강과의 합류 지점까지, 송화강 중 • 하류 동에 거주하던 고대 몽골어 종족들인 거란, 실위, 다구르들이 말갈족을 남쪽, 남서쪽, 서쪽, 북서쪽, 북쪽에서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중국 역사학자 鄭英德

의 연구 결과에 따른다면, 실위의 영역은 동쪽으로 小興安嶺, 북서쪽으 로 야불로노프(5f 6 JI OHOB) 산맥, 남쪽으로 洗兒河 유역, 북쪽으로 스따노 프 (CTaHOB) 산맥까지 달하였다 (302. 83-88 쪽). 여기서 우리는 예 . 이저 1 례 반코가 확신하였듯이 (62-64), 당시 아무르 지역에 말갈족들이 있지도 않았고 있을 수도 없었으며, 또한 이곳의 유적들은 몽골어 종족인 실 위와 다구르족이 남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그 다음에 여진족이 역사 무대에 등장하였을 때도 12 세기 후반까지는 이 지역의 대체적인 民族地圖에 본질적인 변화가 거의 없었음은 홍미로운 일이다 (204. 57-60 쪽). 몽골어 종족에 둘러싸여 있던 말갈족은 처음에는 이들과 동일한 수 준의 사회경제적 발전단계에 있다가 점차 이들 종족들과 다방면으로 접촉하였으니, 이러한 사실은 다른 종족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민 족문화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어떤 사료에서는 실위가 거란의 북쪽 갈래로서 동일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전하고 있고 (177. 136 쪽), 다른 사료에서는 실위와 말갈의 언어가 동일하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 (177. 140 쪽)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일부 의 실위 집단이 그만큼 말갈족과 혼합되었고, 이들이 말갈 언어를 습 득하기까지 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위의 음식물이 말갈과 동일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177. 136 쪽). 동시에 문헌자료에는 거란족의 풍습 이 말갈족 (177. 155 쪽) 및 돌궐족 (177. 163 쪽)과 동일하다고 하였다. 아 마도 이들 종족의 생활방식이 공통적이었고, 그로 인하여 이들의 정신 문화와 물질문화에 일부 공통점이 나타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 한 점은 陶器들에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 각 종족들의 도기가 나름 대로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말갈 유형 도기로 묶일 수 있는 일련의 공통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70. 9, 10 쪽). 어느 사회에서나처럼 말갈 사회에서도 가족이 가장 기본적인 단위였 다 (103. 17-21 쪽). <결혼할 때 여자는 마포 치마를 입었고, 남자는 돼지가죽 옷을 입고 머리에는 호랑이나 표범의 꼬리를 꽂았다• …… 결혼하는 날 저녁에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서 신부의 유방을 잡으면 일이 끝난다. 만일 아 내가 다른 남자와 간음하여 다른 사람이 이 사실을 남편에게 알리면, 남편은 아내를 죽이고 나서 후회하여 알린 사람도 죽인다. 이 때문에 그들에게는 간음한 사실이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81(19. 70, 92 쪽 ; 1C57. 36 쪽).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말갈에서는 이미 家父長制가 존재하였다. 여자가 남자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들이 아버지를 계승하였다는 사실 9) 도 말갈족에 가부장제가 존재하였 음을 말해 준다 (197. 36 쪽). 말갈족 사이에 일부다처제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은 높지만 확실하지 는 않다 예이제례반코는 여진족의 예를 들어서 말갈족에게도 레비레 이트 Oev ir a t e) 婚이 존재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64. '2:1 6 쪽). 그러나 그러한 근거는 의문스러운 것이다. 여진족에 레비레이트혼이 있다고 해서 여러 세기나 격차가 있는 말갈족에게도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료를 통해서는 말갈족 사이에 씨족이 존재하였는지, 아니면 이미 해 체 되 어 그 기 능 이 原始 이 웃共 同體 (ne p ao6bITH a.sl COCe.l lCK a .sl 061D ,HHa ) 1°1 로 이행되었는지 정확한 결론을 내리기가 불가능하다. 예.이.제례반코 는 이 문제에 대해서 상반되는 견해를 보였다. 그녀는 한편으로 <말갈 의 사회구조는 공동체와 씨족에 토대를 두었다. 두 씨족의 대표자들은 공동체에 속하였다. 공동체와 씨족은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고 하였고, 역주 8) 『北史』 물길전 : 「婚隊婦人服布祖, 男子衣猪皮裝, 頭掃虎約尾. …… 初婚之 夕, 男就女家, 執女乳而龍. 其妻外器, 人有告其夫, 夫輕殺妻而後梅, 必殺告者. 由是蔡浮事終不發.』 역주 9) 『舊唐書』 말갈전 : 「父子相承,世爲君長.』 역주 10) 이웃공동체는 農村共同體,農民共同體, 地域共同體 둥으로도 불리는 것으로 서, 광의로는 農業共同體, 遊牧共同體, 漁臘共同體 둥과 같은 여러 공동체를 총칭하고, 협의로는 농업공동체만을 가리킨다. 이것은 혈연에 바탕을 둔 원시 사회가 해체되던 시기에 형성되는 것으로서, 외부적으로는 공동체적인 틀을 유지하면서도 내부적으로 地緣性과 생산수단의 所有라는 특성을 지닌 사회조 직이다.

다른 한편으로 <촌락은 이웃공동체 이외의 것이 아니다. 이웃공동체는 개별적인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경제는 독자적으로 영위하면서 도 영토나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통합되어 있었고 목장과 채취 지역도 공동소유로 되어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64. 171, 172 쪽). 문제는 초기나 후기 의 氏族共同體와 原農民共同體 (n p OTOK p eCTb~HCKa~ 06111HHa) 라고도 부르는 원시이웃공동체는 사회조직 형태의 발전단계에서 볼 때에 하나 에서 다른 하나로 순차적으로 대체되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점이다. 생산경제, 잉여생산물의 증대와 약탈 전쟁의 확산, 사유재산의 존재, 초기국가들과 인접한 점 둥과 같은 정황들로 보건대 말갈족 사이에 원 농민공동체가 존재하였다고 제안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가설 에 불과하다. 이 시기에 말갈사회는 이미 계급이 분화되어 있었다. <부자는 수백 마리의 돼지를 기론다>고 사료에 전하고 있다(1 97. 35 쪽 ).11) 抱婁에서도 내부적으로 계급이 존재하였다. <(움집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좋아하 였는데, 큰 집은 9 개의 사다리를 놓아야 할 정도로 깊었다 (19. 24 쪽 ).>1 2) 불완전한 권리를 가진 중간층도 존재하였으니, 이러한 사실은 突地稽 의 아들로서 말갈족의 지휘자였던 李謨行이 1 천여 호의 부족을 거느렸 고 <그의 부족에는 가정 일에 종사하는 노예가 천 명에 달하였다 (197 . 37 쪽 )>13) 는 내용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비록 그 수치에 대해서는 조심 스럽게 접근해야 하겠지만, 모든 가족들이 노예를 소유했던 것은 아니 라는 에.뷔].샤브꾸노프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불완전 한 권리를 가진 이러한 중간충들이 기본적으로 사회의 상류층, 특히 軍首領들로부터 착취당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197. 37 쪽). 예이제례반코는 이런 형태의 예속을 奴隸制度로 파악하였다 그녀 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노예들은 가정 일과 여성 일에 이용되었 역주 11) 『舊唐書』 말갈전 : r 其畜宜猪, 富人至數百口.』 역주 12) 『三國志』 魏 書 括婁傳 : 『常穴居, 大家深九樣, 以多爲好.』 역주 13) 『舊唐書』 말갈전 : 『其僧帥突地稽, 隋末率其部千餘家內屬, …… 子談行 …… 其部落家億數千人, 以財力雄邊, 爲夷人所禪.』

다. > <노예가 된 전쟁포로는 일반민으로 쉽게 바뀌었다. …… 만약 포 로가 처신을 잘하는 경우에는 2-3 년 후에 간혹 집으로 보내 주었다 (64. 173 쪽). > 이것이 정말 노예제도였는지 아니면 다른 형태의 예속관계였 는지 아직은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말갈사회에 계급분화가 있었음은 틀림없댜 이들에게는 귀족 , 완전한 권리를 가진 자유민, 상류층으로부 터 착취당하는 불완전한 권리를 가진 주민으로 구성된 세 종류의 계급 이 있었다 . 귀족들은 당시에 이미 사회적 지배권을 상속하고 있었다. 문헌자료 를 예로 들면, 이근행은 자기 아버지 돌지계의 <부족>을 상속받았고 (197. 37, 42쪽), 乞乞仲 象 의 뒤를 이어서는 그의 아들인 大祚 榮 이 통치 하였다 (197. 45 쪽) . 귀족은 비자유민의 착취를 통해서만 부유해진 것은 아니었다. 중국 정부로부터 < 선물 > 을 받는 것과 같은 대외교역도 일정한 수입원 역할 올 하였음이 틀림없다 (197. 42쪽). 그러나 말갈사회의 상류층은 이보다 더 많은 부분을 전쟁에서 획득하였다. 약탈은 보물, 무기, 노예, 가축, 땅과 같은 재산울 빠르고 쉽게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들은 <용맹 하여 東夷 가운데서 가장 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9 . 69 쪽)으 말갈 족은 실제로 거의 모든 이웃들과 싸움을 하였다. 거란 (19. 72, 8.5, 92, 93, 118, 133 쪽), 중국 (57. 231-233 쪽 ; 197. 42, 44 쪽), 고구려 (19. 69, 70, 91 쪽 ; 197. 39, 40, 69, 70 쪽), 돌궐 (197. 39, 40 쪽) 및 기타 종족들과 전쟁을 벌였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軍 首領은 큰 의미를 지녔다. 사료에 보이 는 말갈 수령들은 군사령관이었고, 전쟁의 승패와 그 결과가 대부분 이들에게 달려 있었던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들 수령들의 손 아귀에 행정-통치권, 재판권 등과 같은 나머지 권력도 집중되어 있었 을 것이며, 祭禮儀式도 이들이 주관하였을 것이다. 귀족충의 다양한 집 단 사이에 군사, 행정 , 제례 기능이 분담되어 있었음은 원칙적으로 가 능한 일이며 실제로도 그러하였다.

역주 14) 『北史 』 물길전 : r 其人動悼, 於東 夷最 强 . 』

예이제례반코의 의견에 따르면 군수령 들 에게 는 친위대가 존재하였 는데, 이들은 < 일반 주민인 목축민과 농경민에 비하여 특 권적 위치에 있었댜> 물론 그녀는 < 대부분의 부족민들은 생업에 종사하였고 동시 에 군사 원정에도 참여하였다 > 고 쓰고 있기는 하다 (64 . 163 쪽). 그러나 문헌자료에는 친위대에 대하여 한 마디도 언급이 없다. 단지 보병과 더불어 기병이 존재하였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197. 33, 42 쪽) . 6-7 세기 에 전문화된 군사집단이 말갈족 사이에 형성되었다는 것은 단지 추세 로 보아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일 뿐이지 그 이상의 것은 아니다. 군대의 대부분은 일반 주민들로 구성되었음이 확실하다 . 말갈족의 사회조칙에서 최상위 요소는 부족이었다. 그러한 부족이 사회조직의 진화 단계에서 필연적인 귀결인지에 대한 논쟁은 차치하고 라도, 말갈족은 모톤 프리드 (Mo rt on H. F ri ed) 가 말한 것과 같은 특수 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 틀림없으니, 외부로부터 받는 부단한 전쟁 위협이 자극이 되어 개별적인 공동체들이 부족으로 통합되는 이른바 <部族化 效果>가 나타났다. 부족들은 <가장 큰 것은 직 경 300-400 리 , 가장 작은 것은 직경 200 리>의 영토를 차지하였다 (197 . 32 쪽 ).15) 6-7 세 기 경 말갈족의 대략적인 인구와 인구밀도 추정치를 구할 수 있다. 전 체 인구에서 성인 남자 즉 戰士가 차지할 수 있는 최대 수치가 20% 라 는 사실에 바탕을 둔다면, 말갈 군대가 대략 3-4 만 명이었으므로 전체 말갈족 숫자가 대략 15-20 만 명이었음을 사료로부터 추산해낼 수 있 다. 따라서 말갈 한 부족의 인구 밀도는 lkm2 당 0.5 - 4.7 명 꼴이 었을 것 이다 그러나 이 수치에는 아주 신중해야만 한다. 장차 5-7 세기 말갈족 분포의 범위가 확정된다면, 생태학 자료에 의해 이 수치를 검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말갈족에게는 착취의 맹아와 불평등이 존재하였고, 사 회구조는 귀족, 자유로운 공동체 성원, 불완전한 권리를 지닌 주민의 역주 15) 역주 2) 에 인용된 사료에서 보듯이 이 거리들은 부락 사이의 거리를 의미하 지 부락의 내부 직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 계층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사회조직의 제일 아래에는 가족이 있었 댜 그러나 어떠한 가족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음 단계는 원시이 웃공동체였고, 그 다음으로 중간 단계들을 거쳐서 최상층에 부족이 존 재하였댜 모두 7 개의 씨족연합적 부족이 있었는데, 이들은 무언가 동 맹 내지 대표자회의 비슷한 것을 구성했는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6-7 세기 말갈의 발전수준은 계급형성시대라 불리는 커다 란 역사적 범주에서 볼 때에 그 첫 단계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때 때로 아주 부적절한 용어를 쓰기도 하지만, 다른 연구자들도 말갈의 발전 단계에 대해서 대체로 이와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6. 194 쪽 ; 8. 187-208 쪽 ; 64. 276 쪽 ; 66. 29 쪽 ; 143. 317-319 쪽 ; 197. 37 쪽). 말갈족의 사회경제적 발전이 모두 균등한 성격을 띤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서 다른 말갈족에 비해 남쪽에 위치하여 고구려와 직접 국경 을 접하고 있던 栗末昧輯과 白山昧賜은 비교적 일찍 고구려와 정치적 충돌을 일으켰다. 이들은 심지어 5 세기 말에 고구려로부터 일부 영토 를 빼앗는 데 성공하기도 하였다('2:7 9. 72 쪽). 말갈족은 그 당시 극동에 서 정치적 역량을 형성한 상태였으므로, 이웃 종족과 심지어는 이웃 국가들까지도 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6 세기에 이 들의 힘은 더욱 강성해졌는데, 사료에는 그들의 용맹성과 호전성에 대 해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말갈족은 <지속적으로 고구려>와 그 이웃 을 침략하였고, <東夷에서 가장 강하여 여러 국가들을 계속 괴롭혔다 ('2:79 . 75 쪽)>고 하였다 16)

역주 16) 『魏書』 물길전 : r 其人動恒, 於東夷最張. …… 常輕豆莫婁等國, 諸國亦患之.』

이 모든 것들은 중국 황제의 불안을 야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중 국 황제는 뇌물과 매수를 통하여 말갈 수령과 우의와 동맹을 맺고자 노력하였다. 그런 정책의 선명한 예로서 말갈족 군사령관 突地稽와 그 의 아들 李謨行의 삶을 둘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당나라를 위하여 吐蕃 및 突歡과 싸웠고, 당나라로부터 國公의 爵位와 광대한 토지를 받았다 (1 CJ7. 42 쪽).

말갈족에게는 <엥겔스의 말을 빌리면, 전쟁과 전쟁 준비는 인민 생 활의 일상적인 기능이었다. > 빈번한 전쟁은 성공할 경우에 엄청난 전 리품을 약속하였고, 전리품의 대다수는 군사령관의 재량으로 귀속되었 으니, 이는 군사령관의 영향력과 권한을 강화시켜주었다. 이러한 권한 은 나중에 세습되었는데, 6 세기에 이미 말갈족에게는 < 세습 왕권과 세 습 귀족의 토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122. 164 쪽). 말갈족이 발전함에 따라 수령 권력이 세습 권력으로 이행되던 과정 은 7 세기에 특히 강하게 나타났다. 6 세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말갈 부족 또는 부족 그룹의 우두머리에 수령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 상호간에 종속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통치하였다(1 97. 41 쪽 ) . > 17) 이들의 독립성 은 무엇보다도 먼저 각 부족의 군사 친위대 1 8 ) 의 숫자에 반영되었다. 가 장 큰 부족연맹에서는 군사가 7 천 명, 작은 부족연맹에서는 3 천 명에 달하였다(1CJ7. 41 쪽). 가장 강한 부족연맹은 속말부와 골돌부였다 . 처음 에 친위병의 숫자가 3 천 명을 넘지 않았던 혹수부는 불널부를 포함하 여 여러 작은 부족들을 복속시켜 가장 강한 부족연맹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다. 하나의 말갈족이 강대하게 되자 다른 말갈족들은 이웃 부족이나 이 웃 국가와 군사동맹을 체결하여 자신을 방어하였다. 사료에 따르면, 7 세 기에 일부의 말갈족이 고구려에 <합류>하였고, 일부는 < 돌궐에 신하 가> 되었다 (1 얹 41 쪽 ).19) 그러한 동맹을 체결한 말갈 수령들은 일반적 으로 더 강한 통치자의 家臣이 되었다. 그 통치자는 이들에게 권력 유 지와 영토 보전을 보장하였고, 그 대신에 말갈 수령들은 전쟁시에 자 신의 영주를 도와야만 하였다. 전쟁에서 이길 경우에 말갈 수령들은 많은 전리품을 차지하였고, 영주는 그들에게 높은 관직과 작위를 수여 역주 17) 『 隋 書』 말갈전 : 『邑落供有會長, 不相總一.』 역주 18) 앞에서는 친위대에 관한 기록이 없다고 하면서 여기서는 다시 친위대를 논 하고 있어 모순된다. 후자에서 말하는 친위대는 문헌 기록의 <勝兵>을 가리 키는 말이다. 역주 19) 『舊 唐 書』 말갈전 : 『其國凡爲數十部, 各有音帥, 或附於 高 麗, 或臣於突歡.』

하였는데, 이는 그 부족 성원으로부터 위신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였다. 6 세기 말 -7 세기 초 거란의 침략으로 말갈족은 고구려와 군사동맹을 체결할 필요가 생겼다. 고구려도 말갈과 군사동맹을 맺을 필요성을 느 끼고 있었는데, 그것은 중국 조정이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동북쪽 이웃인 고구려를 약화시키고자 노력하면서 강압정책을 쓰고 있었기 때 문이었댜 다른 한반도의 국가인 신라도 고구려의 약화에 관심을 가지 고 있었으므로 수나라와 군사 동맹을 급히 체결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속말말갈의 경우에는 6 세기 말에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 려 하였다. 여기서 여의치 못하였던 속말말갈은 수나라에 도움을 요청 하였다. 10 세기 말에 송나라의 문인 樂史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7 세 기 초의 『 北 蕃 風俗記 』 의 글을 인용하여 이 사건을 전하였다 . <처음 개 황 연간 (581-600) 에 속말말갈이 고구려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궐계부의 추장 돌지계란 자가 홀사래부 • 골돌시부 • 열계몽부 • 월우부 • 보호뢰부 • 파해부 • 보보괄리부의 8 개 부족과 병사 수천 명을 이끌고 부여성 서북쪽으로부터 와서 중원에 귀순하니, 그를 柳城(현재의 요녕 성 서쪽 朝 陽 : 저자)에 살게 하였다 . >20 )

역주 20) 『太平 寅 宇記』 권 71, 燕州 : r 隋 北蕃風俗記云, 初開皇中, 栗末昧賜與 高麗戰 , 不勝. 有歡稽部渠長突地稽首者 , 率忽賜來部·窟突始部·稅稽 蒙 部·越羽部·步 護 頓 部破溪部·步步括利部, 凡八部勝兵數千人, 自扶餘城西北, 擧 部落向關內附, 處 之 柳城 , 』

隋 文帝는 고구려 嬰陽王이 말갈을 압박하는 상황을 동한시 하지 않 고 고구려 침략의 기회로 삼았다. 하지만 백산말갈과 같은 많은 말갈 족들이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598 년에 시작된 전쟁의 첫번째 전투에서 1 만여 명의 말갈 기병이 고구려에 가 담하여 遼西에서 중국 군대에 큰 타격을 입혔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다음 황제인 揚帝 때에도 전쟁이 계속되었다. 유성에 근거를 확보한 돌지계는 612-614 년 사이 고구려에 대한 군사원정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였다 . 그 대가로 그는 양제로부터 많은 선물과 紫色 끈에 매달린 황 금 도장(金紫光祿大夫) 및 遼西太守의 직위를 받고, 扶餘侯라는 작위도

받았댜 이와 함께 그의 의무는 요동의 국경 수비로 바뀌었다. 모든 사 실들로 미루어 보건대 그는 아주 열성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 이 때문에 그는 나중에 중국 조정의 고관 대작들만이 받을 수 있는 명예 칭호롤 수여받기도 하였다. 많은 경제적 지출과 인명이 소요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수 왕조는 제대로 승리해보지도 못하고 결국에는 심각한 인민 동요가 일어나 멸 망으로 끝나버렸다. 618 년에 당 왕조가 건립되자 돌지계는 황제의 궁정으로 조공 사절을 파견하였는데, 이것은 새 왕조로부터도 황제의 조서를 얻고자 한 것이 었고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스스로 처신을 해야 할지 황제 주변을 정 탐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말갈족들도 새로운 중국 왕조와 평화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622 년과 624 년에 말갈 추장의 하나인 阿固郞이 당나라 조정을 다녀갔다. 628 년에 唐 太宗은 돌지계가 지배하던 지역에 燕州를 설치하고 阿固 郞을 총지휘자로 임명하였다 .2 1) 후에 돌지계는 總管에 임명되었고, 그 다음에는 替國公 죽 耆의 영지와 國公이란 칭호를 받았다. 또 돌궐과 의 싸움에서 이긴 대가로 右衛將軍에 임명되고 당의 황제 성인 李씨 성을 하사받았다.

역주 21) 『舊唐書』 말갈전에 r 武德初, (突地稽)遣間使朝貢, 以其部落置燕州, 切以突地 稽爲總管 . J, 『新唐書』 혹수말갈전에 『武德五年, 渠長阿固郞始來 . 太宗貞觀二 年, 內臣附, 所獻有常, 以其地爲燕州.』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 책의 저자는 거의 같은 시기에 燕f H 가 설치된 사실로부터 두 사건을 동일한 것으로 본 듯 하다 . 그러나 각각의 지배자가 속말말갈 돌지계와 혹수말갈 아고랑으로 서로 다르기 때문에 별개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돌지계가 죽자 그의 아들 이근행이 그 지역을 통치하였다. 그는 吐 蕃과의 싸움에서 이겨 燕國公 즉 燕의 영지와 國公의 칭호를 받았고, 鎭軍大將軍 • 行右衛大將軍이란 군지휘자의 직책에 임명되었다 . 그리고 죽은 뒤에는 幽州都督에 추증되었고, 황제의 무덤 옆에 배장되었다 (1CJ 7. 43 쪽). 이와 같이 7 세기에 말갈족 내부에서 종족관계의 해체가 더욱더 심화

됨에 따라 각각의 종족 수령들은 자신의 부족에서 실질적으로 公侯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강한 이웃에 대한 공포는 부족의 우두머리로 하 여금 군사동맹을 체결하게끔 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작은 부족들은 나 름대로 안전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커다란 종족연맹은 군사력을 추가 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종족 귀족의 영향력과 세 력을 강화시켰으니, 이들의 권력은 실제적으로 國王이나 公侯와 마찬 가지였다. 말갈족의 군사력에 관심을 가진 고구려 통치자들도 높은 작위와 관 직으로 이들의 우두머리를 매수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반대로 말갈 족의 귀족들은 고구려 통치자를 통하여 자신의 내부 정치력을 강화하 기 위한 투쟁에서, 그리고 돌궐 • 거란 나아가서는 당나라의 침략에 대 한 반격에서 믿을만한 보호자를 얻게 되었다. 7 세기 후반기에 당나라는 말갈족과 고구려의 동맹에 대치하게 되었 는데, 얼마 뒤에는 백제도 이 동맹에 가담하였다. 645 년 당나라 황제는 정예의 대군을 고구려 국경으로 파견하였고, 이로 인해 고구려인은 새 로운 동맹세력을 찾으려 하였다. 고구려인은 심지어 말갈족을 중개로 하여 薛延陀 (18. 342 쪽), 죽 돌궐족 계통의 쓰이르따르두쉬 (c 卯 Ta p떠回 )22) 와 군사동맹을 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夷男 可汗은 당시 중국에 적대할 수 없었다. 말갈족과 설연타가 협상한 사실 자체는 말갈족의 폭넓은 대의정치관계를 증명한다.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의 몇 개 성을 함락한 뒤에 중요 요새였던 安 市城(현재의 遼寧省 蓋縣)으로 진격하였다. 안시성을 도와 5 만의 말갈 기병이 출정하였고 ,23) 이에 대항하여 당 황제는 돌궐의 정예 기병을 내 보냈댜 고구려군은 안시성 전투에서 일부 장수들의 배반으로 패배하 역주 22) 독일 학자인 F. Hirth(1 845-19 'l:/)가 돌궐 바문에 보이는 Sir Tardush 를 薛 延陀로 해석하였는데, 이 글에서도 이룰 따랐다 . 그러나 지금은 이 견해를 그 대로 수용하고 있지는 않다 . 역주 23) 『舊唐 書 』와 『新唐 書 』의 고려전에는 고구려 장수였던 高延 壽 와 高惠眞이 고 구려와 말갈 병사 15 만 명을 이끌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고 하여 말갈 병사 의 숫자는 정확히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

였다 이 전투에서 특히 말갈족들이 완강히 저항하였는데, 그에 대한 대가로 중국인들은 포로로 잡힌 고구려인을 집으로 돌려 보내면서도 3 천 명의 말갈 병사는 처형하였다. 당나라 군대는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80 여 일이나 소요된 안시성 전투에서 곧 퇴각을 해야할 정도로 큰 손실을 입었다. 647 년과 648 년 의 두 차례 군사 원정도 실패로 끝났고, 650 년에는 당 태종이 사망함 에 따라 군사행동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이 툼을 이용하여 고구려인은 툭하면 고구려와 그 동맹국인 말갈을 침략하던 거란을 공략하고자 하였다. 654 년 고구려군과 말갈군은 거란 영토로 침입하여 新城을 점령하였으나, 군량과 군수 물자의 조달을 어 렵게 만든 강한 눈보라 때문에 부득이 군사행동을 중지하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거란은 고구려군과 말갈군의 퇴로를 차단하려고 하였으 나 오히려 대패하고 말았다프 동시에 고구려군과 말갈군은 과거에 고 구려가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중국의 동맹국인 신라를 공격 하였다. 고구려군은 신라의 36 개 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리하 여 혼자 힘으로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신라 왕은 중국 에 도움을 요청했다. 마침 새로 즉위한 중국 황제 高宗은 자신의 동북 이웃을 괴멸시키기 위하여 고구려와의 전쟁 구실을 찾고 있었다 그 결과 전쟁이 다시 일어났는데, 이번 전쟁은 전보다 더욱 강력하고 집 요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668 년 고구려의 멸망으로 끝나버렸다. 이에 따라 <골돌부, 안거골부, 호실부 등의 말갈족들도 고구려가 멸망한 뒤 에 또한 패하여 홑어지고 말았다>고 사료에 전한다 (197. 44쪽). 고구려 영토는 당나라와 신라에 의해 분할되었다. 수많은 고구려인 이 전쟁포로로 전락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고구려인들이 일 본, 돌궐, 거란이나 아직도 당나라 군대를 공격하고 있던 북쪽의 말갈 로 도망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696 년에 거란이 중국 북방을 공격 역주 24) 거란과의 전쟁에 대한 설명은 원사료인 『新唐 書 』 고려전과 다르다. : 『永徽 五年,藏以昧腦兵攻契丹,戰新城,大風,矢皆還,激爲契丹所乘,大敗.契丹火野 復戰 人死相羅 積尸而家之,遣使者告捷, 高宗爲露布于朝.』

하였기 때문에 중국은 곧 말갈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 댜 중국 북방에서 생긴 위협으로 則天武后는 거란과의 싸움에 힘을 집중해야만 하였고, 말갈 추장 乞四比羽와 乞乞仲 象 은 서둘러 이러한 정세를 이용하였다. 東牟山에 성을 쌓은 두 추장은 중국에 빼앗긴 말갈 영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힘을 축적하기 시작하였다 . 25 ) 이때에 말갈로 도망한 고구려인들 이 이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거란과의 전투에서 말갈족으로 하 여금 중립을 지키게 하고, 또 가능하다면 이들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 이기 위하여 측천무후는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에게 國公의 작위를 하사 하였댜 그러나 거란의 군사 활동이 어느 정도 약해지자, 측천무후는 자신의 처음 결정을 번복하여 李椿固를 대장으로 하는 군대를 파견하 여 말갈을 공격하였다. 이해고는 걸사비우의 군대를 격파하였고 걸사 비우를 목베었다. 얼마 뒤에 걸걸중상도 죽자 그의 아들 대조영이 권 력을 승계하였다. 대조영이 당나라 군대와 직접 충돌하는 것을 교묘히 회피하자, 산림 지역에서 대조영을 찾아내는 길고도 어려운 행군으로 인하여 당나라 군대의 사기가 급속히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조영은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으로 당나라 군대에 치명타 를 가하였다. 그 후 <대조영은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桂婁의 옛 땅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동모산에 <성을 쌓고 정착하였 댜 대조영은 용감하였고 군대를 능란하게 다룰 줄 알았다. 이에 따라 말갈 무리와 패배한 고구려인들이 점차 모여들었다 .>26) 걸사비우가 이끌던 무리를 합친 대조영은 698 년에 <振國(震國)을 건 국하여 왕이 되었다.> 그리고 돌궐에 사신을 보내 친선관계를 도모하 였다 (l CJl. 45 쪽). 말갈족이 제 2 東突歡 汗國)과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인 역주 25) 동모산에 성을 쌓은 것은 발해 건국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 곳에 성을 쌓은 것도 걸사비우와 걷걸중상이 아니라 이들의 뒤를 계승한 대 조영이었다 . 아마 필자가 『新唐 習 』 발해전의 기록을 잘못 이해한 듯하다. 역 주 26) 『舊唐 書 』 발해 말갈전 : r 祚榮遂率其衆, 東保桂婁之故地, 操東牟山, 築城以居 之 祚榮院勇善用兵, 昧輯之衆及高麗餘情, 稽稽歸之.」 역주 2:7) 後突歐汗國이라고도 부른다 . 骨晴祿이 682 년에 당나라에 반기를 들어 세운

접한 돌궐, 고대 몽골어 종족 및 고대 퉁구스어 종족들의 영토를 빼앗 아 영토를 확장하려던 중국 황제의 팽창정책에 맞설 수 있는 강한 동 맹국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빈약한 문헌사료를 통하여 판단하건대 , 말갈족의 발전은 동 아시아의 인접국가나 인접민족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 말갈족이 고도로 발달한 이웃의 고구려와 중국 및 중부아시아의 다른 민족들과 비교적 일찍부터 정치경제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들 사이에 원시공산 관계가 해체되고 , 계급관계가 형성되고, 고유한 주권국가가 건설되고, 말갈 _ 발해의 물질 • 정신문화가 출현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빠르게 진전 되었다 이와 함께 말갈족이 강력한 정치세력을 이루면서 아시아 동부지역의 전반적인 정치정세의 발전에 언제나 적극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도 강조되어야 한다 . 振國의 성 립과 더불어 극동의 고대 통구스어 주민들의 역사에는 새 로운 단계, 즉 계급적 성격의 사회경제적 관계가 형성되고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2 정치사 개관 유감스럽게도 문헌자료에는 大祚榮이 통치 초기에 내부적으로 정치 적 입지를 공고히 하고, 대외적으로 국경의 안전을 도모한 행위에 대 한 기록이 극히 빈약하다. 돌궐과 친선관계를 맺고, 인접 부족들의 영 토를 병합하여 영토를 확장한 것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대조영은 <扶餘, 沃沮, 弁韓, 朝鮮의 땅과 바다 북쪽 여러 나라의 땅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28 ) 그 결과 진국의 영토는 5 천 리에 뻗쳤고, 인구는 10 만 호가 넘었으며, 병사는 1 만 명 이상이 되었다 (197. 47 쪽).

나라로서 745 년에 위 구르에 게 멸망당하였다 . 역 주 28) 『 新 唐흡』 발해 전 : 『 盡 得扶餘沃沮弁 韓 朝鮮海北 諸 國』

신생국가의 군사력은 급속히 강화되어 당나라가 이들 세력을 인정하 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705 년 황제에 등극한 中宗은 곧 侍御史 張行 炭 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招慰 > 하였는데, 이는 그를 振國( 袁 國)의 왕 으로 공식 인정한 것이었다. 713 년 당 睿 宗은 그를 渤海郡王에 봉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밖에도 左 魏衛大將 軍 , 忽 汗 州都 督 에 임명하였다. 이 와 같은 중국 황제의 조치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으로 중국 황제가 그에게 작위와 관직을 주어 일정한 영토에 대한 독립적인 통치자로서의 권리를 인정해준 듯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그토 록 높은 지위를 얻은 것은 마치 중국 황제의 은총을 각별히 받은 결과 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사실 대조영에게 발해군왕을 내린 것은 특별한 사정에 따른 것이었 댜 그러나 중국 통치자들은 명백한 이유가 있는 그러한 사정에 대해 서 그대로 말하기보다는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왜곡된 형태로 표현하 기를 더 좋아하였다. 문제는 별로 크지 않은 渤海郡 지역이 현재의 北 京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말갈족의 기본 거주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 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한 것은 그에게 이 지역에 대한 특별한 권리를 부득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주 는 것이니,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이 땅은 713 년에 중국으로부터 빼앗 은 것으로 판단된다 . 29 ) 이때 대조영은 고구려 옛 땅에서 중국 군대를 몰아내는 군사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20. 585 쪽). 이 당시 대조영의 군 대가 중국인을 추격하면서 중국 땅의 일부도 장악하였을 것이다 . 이리 하여 하놀의 아들이며 지상의 주권자인 예종 황제는 자신의 명성을 더 럽히지 않기 위하여 대조영이 빼앗은 중국 땅을 공식적으로는 마치 자 신이 하사한 듯이 속임수를 쓸 수밖에 없었다. 후에는 이 군의 명칭이 중국 문헌자료에 海 東 盛國으로 알려진 昧賜國 전체를 부르는 용어로 역주 29) 대조영이 발해군을 점령하였기 때문에 당나라가 발해군왕으로 봉하였다는 설명은 사실에 맞지 않는다 . 당나라가 왜 발해군을 택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 만, 대조영을 발해군왕에 봉한 것은 이 지역을 점령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명 목적인 데 불과한 것으로 생각된다 .

전이되었다. 중국 황제가 대조영을 말갈국의 자주적인 왕으로 인정함으로써 양국 간에는 친선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이로써 713 년부터 양국은 정기 적으로 사신을 교환하였다. 719 년에 대조영이 사망하자 桂婁郡王으로 있던 아들 大武藝가 왕좌 를 계승하였댜 그가 즉위하자 이웃 부족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일련의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친 원정 결 과 <동북쪽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모든 오랑캐들이 그에게 복속 되었다 >30) 고 사료에 전한다. 대무예의 정복정책은 그가 아버지로부터 계승받은 작위와 관직 이의에도 현재의 내몽골 북동쪽 지역에 있던 9 개 위구르 씨족과 燕然의 都督 직함을 가지고 있던 사실에도 반영되어 있 다 .31) 그 뒤 에 국경 이 동쪽으로 만주에 까지 도달한 위 구르 汗國 (745-840 년)이 다시 발해로부터 이 지역을 빼앗아 자신의 영토로 삼았을 것이 다.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위구르족의 일부가 발해에 복속되었던 것은 대무예 시기에 발해가 얼마나 강성했는가를 증명해준다. 대무예 시대에 주권국가로서 발해의 지위는 仁安을 年號로 채택한 정치적 행위에서 증명될 수 있을 만큼 강화되었다. 당시에 이러한 연 호의 채택은 중국 황제와 일본 천황의 특권이었다. 비록 문서로 작성 된 것은 아니었지만 인접국가들이 추종해온 이 규율을 감히 무시한 최 초의 국가가 바로 발해였다. 이것은 당 황제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 었으므로 결과적으로 당나라로 하여금 발해를 약화시켜 마침내 이를 복속시키려는 정책을 추진하도록 만들었다.

역주 30) 『新唐書』 발해전 : r 子武藝立,后大土宇, 東北諸夷長臣之.』 역주 31) 『冊府元龜』 권 967, 外臣部, 繼襲 2 : 『開元七年, 祚榮卒, 玄宗遣使冊立其摘子 桂婁郡王大武藝襲父爲左魏衛大將軍 · 渤海王· 忽汗州都督·九姓燕然都督.』 본문의 설명과는 달리 九姓燕然都督이란 구절은 잘못 들어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같은 책의 권 964( 外臣部, 封冊 2) 에는 左駒衛大將軍 • 渤海 郡王 • 忽汗州都督으로 책봉된 사실만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에서 위구르 지 역에 溶海都督府를 설치한 적이 있는데, 이것이 아마 渤海都督府와 글자가 비슷하여 혼동을 일으켰던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중국 황제들은 이웃 국가들의 상황을 언제나 예의 주 시하였댜 발해의 국력이 강화되는 것을 깨달은 당나라 조정은 발해를 약화시키려는 조치를 취하였다. 전통적인 <以夷制夷> 정책에 따라 당 나라 조정은 발해 통치자와 黑水昧賜의 추장들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 도록 적지않은 노력을 하였다. 723 년에 당 玄宗은 흑수말갈 추장 保屬 利稽에게 그 본거지를 다스리는 勃利州刺史의 직책을 주었다. 동시에 黑水府를 설치하여 모든 추장들을 刺史에 임명하였다. 이밖에도 흑수 말갈 부족을 <감독하기 위하여 長史>를 두었다. 728 년에는 특별 신분 의 표시로 예속리계는 황제의 성인 李씨와 獻誠이란 이름을 받았고, 이 와 함께 雲魔將軍 겸 黑水經略使라는 직 책도 받았다 (197. 48, 49 쪽). 당나라 조정이 혹수말갈 귀족들을 발해 통치자에 대항하게 한 것은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자신의 가신으로 여기고 있던 예속리 계의 이탈 행위를 알게 된 대무예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흑수말갈 이 우리 땅을 경유하여 비로소 당나라와 관계를 맺었다. 과거 돌궐에 吐屯을 요청할 때도 언제나 미리 우리에게 알려 함께 갔었다. 그런데 지금은 당나라 관료를 만나면서 아무런 통고도 하지 않았으니, 이는 당 나라와 함께 앞뒤로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32) 이 말은 발해 통치자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공민으로 간주해 왔던 혹수말갈을 치기 위한 구실이었다. 혹수말갈을 굴복시키기 위해 대무예는 동생 大門藝와 삼촌 任雅를 대장으로 하여 군대를 출정시켰 다. 그러나 대문예는 혹수를 공격할 경우에 잘 무장된 수많은 병사를 가진 당나라 군대가 이들을 도울 것이고, 결국에는 발해의 멸망을 초 래할 수도 있다는 점을 들어서 작전을 취소하도록 대무예를 설득시키 려 하였댜 그러나 동생의 충고는 대무예의 결심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었댜 대문예가 군사활동을 개시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두번째의 서신을 보내자, 대무예는 발해 군대가 이미 포진하고 있는 혹수와의 국경에 從兄 大萱夏를 보내서 대체시키고 그를 수도로 불러들였다. 이 역주 32) 『舊唐 書 』 발해말갈전 : r 黑水道經我境, 始與唐家相通. 酉請突歡吐屯, 皆先告 我同去 今不計會, 卽請漢官, 必是與唐家通謀, 腹背攻我也.』

에 자신을 처벌하려 한다고 의 심 한 대문예가 당나라로 도망가자 당 황 제는 그를 左騎衛 將 軍 으로 임명하였다. 동생의 배신을 알게 된 대무예 는 당 황제에게 表 를 올려 대문예가 행한 범죄 를 알리고 그를 죽이도 록 하였다. 그렇지만 곤란에 처하여 자신의 생명을 황제에게 맡기면서 은신처를 구한 사람을 의리상 죽일 수 없다고 당 황제는 답변하였다 . 당 황제는 답변을 전해야 하는 발해 사신들을 귀국시키지 않고, 그 대 신에 자신의 사신을 파견하여 대문예가 있는 장소를 대무예에게 거짓 으로 알렸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대무예는 당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큰 나라가 어찌 公文을 믿는 사람을 속일 수 있 단 말인가? 이제 진실이 드러났으니 …… 위에 말한 자를 처형하기를 삼가 요청한댜 중국과의 불화가 그로 인하여 일어났기 때문이다 .> 33) 그러나 당 황제는 그의 요청을 무시하였다. 화가 난 대무예는 733 년 중국 해안에 水 軍 을 보내 登 J ' I'I 를 공격하였 다. 동주는 산동반도에 있던 당나라 최대의 항구로서 고려와 발해로 향하는 해로가 시작되던 곳이었다. 당나라 황제는 대문예에게 군대를 모집하여 동주를 구원하도록 명령하였다. 동시에 신라로 대군을 파견 하여 신라군과 함께 발해의 남쪽을 공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역사가 가 전하듯이 <험난한 산과 매섭게 추운 날씨, 한 발 (3m 이상: 저자) 이 상이나 쌓인 눈으로 인해 병사의 절반 이상이 죽자, 마침내 발해에 대 한 공격이 좌절되어 군대를 퇴각시킬 수밖에 없었다 .> 34 ) 후에 대무예는 대문예를 정치범으로 간주하여 자객을 보냈다. 그러 나 대문예는 이에 <저항하여 살해되지 않았다. 곧이어 당나라 조정에 서 자객을 추적하여 이들을 참수하였다 (290. 권 1, la-2a, 66-76 쪽 ; 197. 49-50 쪽 ).>35) 7 '1:1년 대무예는 많은 선물과 함께 사절단을 日本에 보내 외교관계를 역주 33) 윗 책에 보이는 원문은 본문과 조금 다르다 . 『大國示人以 信 , 岩 有敗紙之理. 今聞 r , 藝 不向 嶺 南, 伏 請 依前殺却 . 』 역역주주 3345)) 같같은은 책책 :: 『『 屬門 藝山 格限之 寒, 凍不 死雪. 深 話丈餘河,南 兵府士捕 獲死 者其 過 賊, 半 盡 , 党殺之 無.』功 而 還 .』

맺으려는 첫번째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사절단의 배가 폭풍에 휘말려 北海道로 표류하였다. 그 곳 아이누족이 사절단을 습격하였고 상호간 의 접전에서 8 명만 살아 남았다. 그들은 항해를 계속하여 728 년 초에 京都에 있던 일본 천황의 관저에서 천황과 접견하여 대무예가 보낸 다 음과 같은 내용의 國 書 를 전달하였다. <나, 무예는 비록 서로 멀리 떨 어져 있고 다른 나라에 살지만, 일본 왕에게 경건히 존경을 표하고자 한다. 사람들이 조상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천황의 영토가 영원히 번영 하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내가 고구려의 옛 땅을 확보하여 국가를 일 으킨 것을 알린다. 지금까지 국서를 보내지 못한 데에 용서를 빌고 또 한 이전과 마찬가지로 상호간에 평화를 지키기를 바란다. 존경과 신의 의 표시 로 담비 가죽 300 장울 보낸다 (147).> 3;) 일본 천황은 발해 사신이 온 것을 아주 기뻐하여 그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名뽕 官品올 주었다. 또한 천황은 사신을 발해로 보내 대무예 에게 국서를 전하였다. 국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발 해 왕에게 존경을 표한다. 서로 친목하게 지내자는 제의에 심히 기쁘 댜 나라를 선하게 통치하길 희망한다 비록 바다가 우리를 갈라 놓고 있지만, 우리의 관계를 방해하지는 못할 것이다.>',fl) 국서와 함께 발해 왕에 게 많은 선물도 보냈다(1 29. 21 쪽 ; 147). 발해는 꽤 자주 일본으로 사신을 보냈는데, 보통 그 수가 100 여 명 이었고 300 명이 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동시에 일본에서도 발해로 답례 사신을 보냈다. 게다가 중국으로 가는 일본 사신들이 점차 발해 영토를 지나는 새로운 길을 이용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웃 나라들에 역주 36) 『續日本紀』 권 10, 聖武天皇 神龜 5 년 正月 甲寅 r 武藝啓, 山河異域, 國土不同, 延聽風獸, 但增傾{Q I. 伏惟大王,天朝受命, 日 本 開基, 突葉重光, 本枝百世. 武藝添當列國, 器忽諸蕃, 復高麗之舊居, 有夫餘之遺 俗 但以天崔路限, 海漢悠悠,音純未通,吉凶絶問. 親仁結援, 庶吐前經, 通使萌 隣 始平今 日 . …… 井附紹皮三百張奉送.』 역주 37) 윗 책 권 10, 聖武天皇 神龜 5 년 4 월 壬午 r 天皇敬問渤海郡王, 省啓具知. 俠復舊壤,韋修撲好, 股以嘉之. 宜僞義懷仁, 監撫有境,沿波難姬, 不斷往來.』

대해서 발해의 위상이 높았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738 년 대무예가 죽고 그 아들 大欽茂가 왕좌를 이 어 받았는데 ,381 그 는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려 즉위를 기념하였다. 대홈무 통치기에는 대 무예 시기에 손상된 중국과의 관계가 폭넓게 발전하였고, 양국은 정기 적으로 사신을 교환하였다. 대홈무 시대에 모두 29 회의 사신이 중국으 로 파견되었는데, 이 속에는 유학생도 적지 않았다. 그는 문화와 교육 의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으니, 사망한 뒤에 <文王>이란 시호가 주어진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290. 권 1 ; 197. 51, 52 쪽).

755 년에 대홈무는 수도를 上京으로 옮겼고 마지막 시기에는 다시 東 京으로 옮겼다. 수도를 옮긴 이유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755 년에 당 황제에 대항하여 일어난 安祿山의 난이 그로 하여금 천도를 결심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돌궐-소그드인 출생인 안녹산은 아주 빠르게 돌궐 및 거란의 귀족들

역주 38) 貞孝公主 墓誌가 발견됨으로써 왕위의 교체 시기가 738 년이 아니라 737 년 임이 확인되었다. 이처럼 발해 왕의 재위 연간에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것 이 많아서 자주 혼동을 일으키고 있는데, 이 글도 예외는 아니다. 참고로 역 자가 작성한 왕의 계보와 재위 연간은 다음과 같으니 서로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698 구 19) (719 구 37) 뗄 文王 大欽茂 乞더 ? 一―켈令(: 733.7-§7 福93.3) 象 l i- @大宏臨門꿉成王듦 大華三興 言 野勃―도-스—도®宣福같넒크:新德--c:‘『舊 二® ('스i57王1 -8 9大4玄?) 錫 一 {―)(8스9―4王?― _9大0―6璋?理)― ―스― 처(8王 (55―9 7 스0-大86王_7?皮 1-9」大)晃2— 6陸 . l謨)

과 공감대를 형성하였고, 이들의 도움과 적극적인 지지로 중국의 두 수도인 洛陽과 長安을 점령하여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였다. 그가 일으 킨 난은 763 년까지 계속되었지만, 그는 757 년에 살해되었다. 난을 일으 키기 전에 안녹산은 발해와 이웃한 幽사 'I 와 營 州의 군사령관이었고, 平 盧軍節度副使로서 발해와 혹수말갈을 감시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안녹 산이 난을 일으킨 근거지가 발해 국경과 가까운 지역이었으므로 난의 발발이 발해의 영토뿐 아니라 발해 왕이 거주하던 中京을 직접적으로 위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대홈무는 이 때문에 국경에서 멀리 떨어져 안전한 上京으로 천도하였는지도 모른다. 770 년대에 발해는 당 및 일본과의 관계에 약간의 마찰이 생기는데, 이는 당과 일본이 발해 사신의 파견을 여러 가지로 제한한 사실에 반 영되어 있다. 이러한 제한은 대홈무의 대의정책에 대한 대응조치임이 분명하다 . 왜냐하면 이미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인 796 년에 발해 왕 大 腐琦 이 일본 조정에 보낸 국서에는 이전보다 더 호의적인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본 조정은 국서의 내용을 보고 일본에 대한 발해의 호의적 표시를 인정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신하들이 궁 궐로 들어가 일본 천황에게 축하하였다 (129. 25 쪽 ; 198. 52 쪽 ).>39) 793 년에 대홈무가 사망하였다. 그러나 아들인 왕위 계승자 大宏臨이 이미 죽었으므로 대홈무의 사촌 동생인 大元義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대원의는 근친들에 대한 포악과 의심으로 인하여 그 해에 살해 되었고, 왕위는 대굉림의 아들 大華與에게 넘어 갔다. 그는 수도를 동 경에서 상경으로 옮겼다. 대원의의 살해와 대화여의 즉위는 왕권이 약 화된 반면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고위 관료 및 귀족 집단이 출현 하였음을 입증한다. 이 집단은 모든 영토와 모든 산물의 유일한 주인 인 발해 왕의 권력을 자기 파벌 쪽으로 집중시켜, 당시의 분여체계에 만족하지 못하던 대토지 소유자들을 이제는 명목적이 아니라 실질적으 역주 39) 『日本後紀』 권 5, 桓武天皇 延曆 15 년 10 월 壬申 : 『先是, 渤海國王所上 書 疏, 體元定例, 詞多不遜 今所上之啓, 首尾不失禮, 誠軟見平詞. 훙臣上表, 奉賀 曰, 』

로 보호하고자 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당 • 신라 • 일본에서도 대토 지 소유자들이 이러한 제도에 반발하여 대성공 을 거두었다 (52 . 업 7-280, 302 - 304 쪽 ; 88. 116-119 쪽 ; 197. 53 쪽). 유감스럽게도 사료에는 795 년의 대화여 사망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댜 그도 또한 선임자와 마찬가지로 대흄무의 작은 아들 대숭린을 왕위로 추대한 자신의 정적들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숭린도 또한 발해를 몇 년밖에 다스리지 못했다. 809 년에 그의 아들 大元瑠가 왕위에 올랐지만, 813 년에 왕위는 그의 동생인 大言義 에게, 817 년에는 동생인 大明忠에게 넘어갔다. 대명충은 단 1 년 재위하였을 뿐이다. 대명충을 이어 대조영의 동생 大野勃의 4 世孫인 < 친족> 大 仁 秀가 즉위하였다. 선임자들과는 달리 그는 권력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 하였다. 아마도 그의 성공은 북방 부족들에 대한 군사원정으로 발해 영토를 크게 확장시킨 것이 주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 이 덕분에 그는 사후에 <습격을 감행하는 왕>이 란 칭호를 얻게 되 었다 . 40) 8.3 0 년에 왕 위를 계승한 그의 손자 大 尋震 도 똑같은 칭호를 얻었는데, 그도 또한 이웃 부족들과의 관계에서 자기 할아버지와 유사한 정책을 폈음이 틀 림없다 . 문헌자료에 는 大庚晃 (858-ITTO 년), 大玄錫 (ITT0-892 년), 大 琦 瑞 (892-905 년) 시대의 대외활동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틀림없이 예니세이 키르기즈 (eHHCeACKHe K b!J) rhl3 h! )4“ 가 840 년에 위구르 한국을 멸망시키면 서 수많은 위구르족이 발해로 대거 이동해옴에 따라 , 9 세기 후반에 발 해 내부에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이 발생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을 것 이다 (20 1. 얽 -89 쪽 ). 42) 위구르족이 평화적인 방법만을 통해서 발해 영역 역주 40) 『新 唐書』 발해전에 r 仁秀顔能討伐海北 諸 部, 開大境宇, 有功, 紹檢校 司 空, 襲 王.』이란 구절이 있는데, 마지막의 < 襲 王>을 대인수의 시호로 잘못 이해하였 다. 대인수의 시호는 宣王 이며, 이 구절은 <왕위 를 계승시켰다>는 의미 를 지 닌 서술어이다 . 뒤의 대이진에 대한 설명도 역시 잘못된 것이다 . 역주 41) 키르기즈는 중국 문헌에는 點墓 斯로 나타나는데 , 원래 예니세이강 상류에 거주하다가 일부가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新 疆省 天山 서쪽에까지 내려 오기도 하였다.

으로 넘어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발해인은 질서와 평온을 유지하기 위하여 적지 않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는데, 그로 인해 외부세계와의 관계가 실질적으로 단절되었던 것이다 . 내부를 휩쓴 사건들로 인하여 과거에 발휘하였던 발해의 위력이 근 본적으로 훼손되어 버림으로써, 10 세기 초에는 다시금 내분의 회오리 가 몰아닥쳤댜 당시의 어지러운 상황이 사료에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 만 (77. 363쪽),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내분의 본질과 성격에 대한 구체적 인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발해 남부에서 다수를 차지 하고 있던 고구려인 사이에 분리주의적 기운이 강하게 감돌았다고 생 각할 수 있으니, 다음의 내용들이 그러한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9 세기 말과 10 세기 초에 신라가 쇠퇴하자 한반도에는 조그만 국가들 이 출현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901 년에 건국된 後高句麗였으니 , 건국 자인 弓商는 발해로부터 과거의 고구려 땅을 빼앗아 차지함으로써 후 고구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905 년에 15 대로 왕위에 즉위한 발해의 마지막 왕 大證誤은 궁예에 대응하는 조 치를 취하였음이 분명한데, 이것은 궁예가 건국한 나라의 명칭이 여러 차례에 걸쳐 변경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918 년에 궁예가 王建에게 패하고 나서야 이 나라의 명칭은 高麗로 완전히 굳어졌다. 권좌에 오 른 왕건은 발해에 속했던 한반도 북부의 땅을 빼앗기 위하여 군사적 조치들을 취하였으니 (88 . 136, 137 쪽), 그가 영토를 빼앗는 과정에서 그 곳에 살던 고구려인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이 모든 사건들이 발해의 서쪽과 남서쪽에 인접해 있던 몽골어 종족 인 거란이 홍기하여 정치적인 활동을 전개하던 무렵에 일어났다는 점 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거란 추장 耶律阿保機는 처음에 실위를 복속 시켜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고 (77. 41 쪽), 그 다음에는 발해 남서부지역 을 병합시켰으니, 이것은 915 년에 거란의 동쪽 국경이 이미 압록강에 역주 42) 이 무렵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당나라롤 위시한 주변국가들이 혼 란에 빠져 발해에 대한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위 구르족의 유입과 관련시켜 설명한 것은 지나친 추측으로 생각된다.

까지 다다랐던 사실로서 알 수 있다 (269. 86 쪽 ). 야율아보기가 916 년에 大契 丹 國 (947 년부터 遼帝國 : 저자)을 선언하면 서 발해에 대한 압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 이에 따라 918 년 발해 왕 대 인선은 거란에 사신을 파견하여 친선을 맺고자 하였다. 그러나 거란은 발해의 평화 제의를 거절하고 919 년에는 遼 河 유역의 발해 영토를 점 령하였다. 924 년에 거란이 다시금 발해를 공격하여 땅을 빼앗으려 하 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925 년에 발해 영토를 빼앗으려는 공격이 다 시 감행되었고, 마침내 926 년에 扶餘府에 이어서 상경까지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대인선은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 그를 뒤따라 많은 발해 장군들이 항복하였지만, 절대 다수의 발해 상류층들은 자신들을 믿는 군대를 운명에 내던진 채 고려로 도망하여(1 97. 53, 54 쪽) 결과적으로 발해의 파멸을 초래하였다. 3 행정-지방 조직 발해는 처음에 명확한 국가적 정치 • 행정 구획이 없었다 . < 그 나라 는 남북으로 2 천 리 뻗어 있다. 州와 縣의 館 驛 이 없다. 곳곳에 村落이 있댜 이들은 모두 말갈 부락이다. 말갈인 중에는 평민이 대다수였고 족장이 소수였다. 큰 촌락의 족장들은 都 督 이라 불렀고, 그 아래는 刺 史, 더 아래는 평민들 사이에 首領이라 불렀다 (290. 권 2, 39a 쪽 ).> 43) 이렇게 사료에는 지방에서 왕국의 권력을 공식으로 대표하는 도독이 나 자사가 수령과 나란히 언급되어 있지만, 발전 초기에는 복잡한 관 료 • 행정 기구의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시가 성장하고 수공업이 발전하고 해군을 포함한 많은 수의 군대를 유지할 필요성이 역주 43) 본문의 해석에는 다음의 원문과 조금 다른 곳이 있다 . 『 類衆國史』 권 193, 殊俗部, 渤 海 上 : r 其國 延 柔二 千 里 , 無 州 縣 館 驛 , 處處 有村 里, 皆昧輯部 落 其百姓者 , 昧 賜 多, 土人少, 皆以土人 爲 村 長 . 大村曰都 督 , 次 曰 刺史, 其下百姓皆曰首領.」

증가함에 따라 궁정에는 복잡한 관리기구가 필요하게 되어, 737 년에 대무예를 계승한 대흠무 시기에 이러한 기구들이 설치되었다. 그는 발 해의 영토 전체를 15 府로 나누고 그 가운데 5 개를 京으로 삼았다. 부 는 62 서 1 로, 주는 다시 125 縣으로 세분되었다 . 행정구역은 당연히 주민들의 종족 구성을 감안하여 설치하였다. 발 해의 구성원에는 퉁구스어 종족인 다수의 말갈족 이외에도 고구려인도 포함되었다. 대부분의 고구려인들은 고구려의 옛 땅이면서 거대한 상 업-수공업 중심지를 이루었던 발해의 남부지역에 살았다. 서부지역에 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몽골어 종족인 실위와 거란, 그리고 위구르 및 다른 터어키어 종족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북동쪽 및 동쪽에는 窟說 또는 庫 頁이라 불린 종족이 살았다. 이들은 15 세기에 苦夷라고 하였으 니 지금의 아이누족에 해당한다. 발해 주민의 대다수는 속말부, 혹수부, 불널부, 월희부, 백산부, 골돌 부 또는 姑里御,섞) 그리고 몇몇 다른 부족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지금 극동에 살고 있는 나나이 (HaHaA) 족, 우데게이(y ll3re8) 족, 울치(y llb tI H) 족, 만주족 및 다른 통구스어 종족들의 직접적인 조상이다. 발해인이 현재 극동의 퉁구스 • 만주족의 직계 조상이라는 사실은 발 해의 종족 구성에 관한 자료나 여진족의 형성에 발해인이 직접 동참한 자료에서 뿐만 아니라 문헌에 보이는 발해인의 어휘에서도 증명된다 (197. 58 쪽). 최근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발해의 府와 그 아래 州의 위치를 비정하 는 중요한 작업을 하였다. 그런 면에서 孫進己의 논문('l:/ 4) 이 가장 홍 미로운데, 부의 위치 비정에 대한 그의 결론은 金敏賊 (290. 권 14) 및 에퀘샤브꾸노프(1 97. 59-63 쪽)와 일치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 도 있다. 현재 새로운 학문적 업적이 축적된 상황에서, 1960 년대에 에. 퀘샤브꾸노프가 설정한 발해의 정치 • 행정 지도에는 부분적인 수정이 역주 44) 저자는 말갈 부락인 泊晴部가 『金史 』 권 67 의 烏春傳에 이르러 姑里句으로 표기되고, 근대 문헌에 다시 골드 (rO JJ bllbl) 족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 이 골드족은 현재 러시아에서는 나나이족, 중국에서는 赫哲族으로 불리고 있다.

불가피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국경 문제가 그러하다. 현재의 상황으로 는 발해의 관할이 연해주의 동쪽과 북동쪽 구역에까지 미치지 않았고, 아무르 유역에는 더욱더 그러하였다. 만약 연해주에서 밝혀진 발해 유 적들을 근거로 한다면, 동쪽 국경은 빠르띠잔스끄 (na p rn3aHc 1<) 구역의 빠르띠잔스끄강을 따라 올라갔고, 다음에는 추구예브까(니y r y eBKa) 구역 의 우쑤리강 상류로부터 연안을 따라 비낀 (EHKHH) 강 하구에까지 이어 졌으며, 여기서 남서쪽으로 급히 꺾여서 중국 동북지방의 穆陵河를 따 라 지금의 勃利縣에 다다랐음에 틀림없다. 이 지역은 적어도 8 세기에 는 혹수말갈이 본거지로 삼고 있다가 나중에 발해에 복속된 곳이다. 모든 것을 감안해 볼 때 발해의 국경선은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현재의 三姓 45) 과 鐵力縣으로 나 있었고, 계속해서 呼蘭河룰 따라 松花江과 합 류하는 곳까지 이어지고, 다음에는 송화강을 따라 徽江 입구까지 갔다 가 남쪽으로 長春市를 지나 압록강 하류로 나 있었다 . 다시 이곳에서 동쪽으로 현재의 북한 영토로 계속되었으니, 특히 孫進己의 견해에 따 르면 지금의 南大川에 해당하는 고대의 泥河로 이어졌다고 한다(그림 1). 그리고 초창기에는 遼河 유역과 함께 거의 北京 부근까지의 渤海灣 연 안도 발해 영역에 포함되었음이 틀림없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발해에는 5 京이 있었는데, 각각의 수도는 동시에 해당 지역의 행정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龍泉府의 행정 중심지인 上京은 흑룡강성 鏡泊湖에서 가까운 杜丹江 右岸의 東京城鎭 부근의 東京抵 성터에 자리잡고 있었다. 顯德府의 행정 중심지인 中京은 상경의 남쪽에 위치하는데, 孫進己 는 길림성 和龍縣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현재의 富爾江 연안의 才浪河 성 터 에 비 정 하였다 (274. 82, 83 쪽). 46)

역주 45) 공식적인 행정 명칭은 依蘭縣이다. 『吉林外記』 권 2, 疆域形勝에 의하면 이 곳에 3 姓의 赫哲族이 살았기 때문에 만주어로 依蘭哈拉이라 하였는데, 依蘭 은 三을 의미하고 哈拉은 姓을 의미하기 때문에 한자어로 번역하여 三姓 이라 고도 한 것이다.

역주 46) 이 성은 일반적으로 馬圈子古城으로 불리고 있다 . 孫進己는 현덕부의 위치 를 초기와 후기로 나누어 이곳을 초기 현덕부의 소재지로 보았고, 和龍縣 西 古城을 후기 현덕부의 소재지로 보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현덕부가 서고성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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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압 록.F.n、 \-동 \해 ·~ 국5 경경 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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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지명 그림 1. 발해의 정치 • 행정 지도 47)

龍原府의 중심지로서 발해 이전에 桐城으로 알려져 있던 東 京은 八 連城에 자리잡고 있었다 (299 . 60쪽). 이 유적은 현재의 길림성 郞 春市 에 있는데, 연해주 하싼 (Xaca tt) 구역의 끄라스끼노 (K pac l< HHO) 마을로부터 서쪽에 해당된다. 鴨祿府의 행정 중심지인 西京은 길림성 臨江 鎭 에 위치하였는데, 압 록강이 이곳에서부터 남서쪽으로 급히 꺾여서 흐르고 있다 . 南海府의 행정 중심지인 南京은 북한의 함경북도 淸津 남쪽에 있는 鏡城에 자리잡고 있었다(初 4. 8.3, 84 쪽). 48) 나머지 부들에 대해서 손진기는 다른 연구자들과 의견을 달리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논거를 뒤엎을 수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완 전히 무시하였다. 문헌에 의하면 懷遠府는 越 喜 族의 땅에 세워졌고 9 개의 州가 있었다. 그런데 9 주 가운데 하나인 福 州는 사료에 보이듯이 상경에서 남동쪽으로 780 리(약 4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으니 , 49) 현 재의 연해주 빠르띠잔스끄 구역이 여기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여러 충 위로 된 니꼴라예브까(血 KO JI aeBKa) 성터가 있는데, 경작시에 발해시기 의 유물이 종종 발견되곤 한다. 이 성터에서는 左院衛將 軍 攝 利計라는 글자가 새겨진 물고기 모양의 靑銅符節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206 . 267- 업 0 쪽 ).50) 따라서 발해의 동쪽 국경선이 빠르띠잔스끄강을 따라 이 역주 47) 삽화를 그린 사람과 본문 집필자가 달라서 특히 북쪽과 북동쪽의 국경선이 본문의 설명 내용과 다르다. 본문에서 설명하는 국경선은 이 책의 끝에 해제 와 함께 실은 <연해주지명표>에 표시해두겠다. 역주 48) 이것도 손진기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남경남해부 를 함경남 도 북청의 청해토성으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역주 49) 『遼史 』 권'37 , 地理志 上京道에 r 福 州 •••••• 南征伴涼 漢 民, 居北安 平縣 故地 . 在 原州北二十里, 西北至上京七百八十里, ...... 』라는 구절이 있는데, 저자는 이 룰 근거로 孫進已의 주장에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金敏賊이 이미 고중하였듯이 요나라 때 설치된 복주의 거리 를 말하는 것으로서 발해의 복주 와는 상관이 없는 기록이다. 그렇지만 회원부의 위치룰 발해의 남서쪽 지역 에 비정한 손진기의 견해에도 문제가 있다. 회원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 는 여러 설이 있지만 발해의 동쪽 변방에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 역주 50) 자세한 것은 다음 번역 논문을 참조 바람 . 에세샤브꾸노프 저 • 송기호 역 , r 연해주에서 출 토된 발해의 청동제 符節」

어지고 있었고, 회원부는 연해주의 남쪽 지역인 빠르띠잔스끄 구역과 어쩌면 쉬꼬또보 (lll l< OTOBO) 구역까지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 회원부가 安遠府의 남동쪽에 있었으므로, 자연히 안원부는 興凱湖(러시아의 泣 HKa 호) 의 서쪽과 남서쪽에 자리잡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와 관련하여 안원 부 아래에 廊州와 慕 州가 있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미주의 郡자는 지금의 홍개호에 해당하는 溫泥湖의 첫 글자와 같으며, 모주의 慕 자는 지금의 멜구노브까 (Me Ji br y HOB l< a) 강에 해당하는 연해주 하롤 (Xo­ pOJ Jb ) 구역의 墨河 의 첫 글자와 음성학적으로 동일하다. 孫進己는 발해 시대의 미타호가 홍개호임을 부정하고, 현재의 査干泡에 비정하였다. 중국의 다른 연구자인 劉唯東은 이를 현재의 鏡泊湖로 간주하였다. 그 러나 미타호가 홍개호임을 확고하게 증명한 孫正甲은 이러한 견해들에 동의 하지 않았다('Z7 5. 102-104 쪽) .

率賓府는 수이우빙 (C 맷y 6HHr) 府로도 읽는데 (190. 82-84 쪽),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모두다 중국의 緩芬河 유역이 나 연해주의 라즈돌나야 (Pa3 ,ll O Ji bHasl) 강 유역으로 비정하고 있는 것이 댜 5 1) 솔빈부의 행정 중심지는 현재의 우쑤리스끄 시 남쪽에 있는 南_ 우쑤리스끄(血 Ho-Ycc yp1-1 0c 1<) 성터에 자리잡고 있었다. 연해주에 있었던 나머지 부들은 대략 다음과 같이 분포하였다. 定理 府는 용천부 동쪽의 읍루가 살던 땅에 설치되었다. 그런데 앞에서 보 았듯이 안원부도 용천부의 동쪽에 해당하였다. 따라서 정리부는 이보 다 더 동쪽에 있는 홍개호의 동부 연안 지역에 위치하였음이 들림없 다. 安邊府는 정리부의 남쪽이면서 회원부의 북쪽에 속하였는데, 현재 의 아누치노 (AH Y\I HHO) 구역과 체르니고브까 (4e p HHrOB 1< a) 구역이 그 범 위에 해당되었음이 틀림없다. 東平府는 불널부의 옛 땅에 설치되었으 니, 미타호로 불리던 현재의 홍개호 북쪽에 위치하였다. 동평부에 속하

『韓國古代史論農』 3, 한국고대사회 연구소, 1992 역주 51) 緩芬河는 중국 길림성에서 발원하여 흑룡강성과 연해주 납부를 거쳐 동해 의 아무르 灣 으로 홀러 들어가는데, 러시아에서는 이룰 라즈돌나야강이라고 바꾸어 부르고 있다.

는 주 가운데에는 伊州,比州, 黑州처럼 그 지역의 강 이름과 일치하는 것들 이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伊는 현재 발샤야 우쑤르까 (60 Ji bllla .ll Ycc yp Ka) 강으로 불리는 과거의 伊斐河, 比는 현재 비낀강으로 불리는 比金河, 黑 죽 黑水는 우쑤리강을 포함한 穆陵河에 각각 해당한다 (204 . 54-56 쪽)우 이 사실들은 동평부가 홍개호 북쪽에 위치하였음을 뒷받침 한다. 동평부와 나란히 鐵利府가 있었다. 칠리부에는 海州가 속해 있었으 므로 과거에 생각했던 것처럼 (197. 60, 61 쪽) 아무르강 하류 지역이 아 니라, 동평부의 동쪽인 연해주의 까발레로보 (KaB a.n e p OBO) 구역과 달네 고르스끄 (ll a.n bHero p cK) 구역으로 비정할 수 있다. 철리부를 현재의 鐵 力縣이 있는 흑룡강성 呼蘭河 유역으로 비정하는 연구자들의 견해 (274 . 얽, 88 쪽)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흑룡강성에 鐵力이라는 지명이 생겨난 것은 대무예 시기에 鐵勒 53) 도 포함된 위구르족의 일부가 발해 영역으로 편입된 것과 관련된 것임이 틀림없다 (1 CJ7. 48 쪽). 철록은 처음에 현재의 호란하 유역에 정착하였을 것이 분명하지만, 847 년 예니세이 키르기즈 가 자신이 멸망시킨 위구르 汗國의 도망자들을 추격하여 (20 1. 87-89 쪽) 만주 지역으로 7 만의 기병을 보내자 (107. 94 쪽), 이미 鐵利라는 이름으 로 더 잘 알려진 철록은 동쪽으로 현지 부족들을 복속시키면서 연해주 의 해안지역까지 이동해야만 하였다. 830-858 년 사이에 재위했던 발해 왕 大尋震이 북쪽의 이웃 부족들에 대한 정복으로 얻게 된 <襲王 >54) 이 란 칭호에 바로 이 사건이 반영되어 있음이 확실하다 (1 CJ7. 53 쪽). 키르기즈의 강습으로 칠리족의 일부가 처음에는 연해주의 북쪽으로 역주 52) 에 . 꿰샤브꾸노프는 당시의 水系 認識이 지금과는 달랐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눈강-송화강 중 • 하류-아무르강 하류를 本流로 이해하여 那河라 불렀 고, 그 支流에 해당되든 송화강 상류는 栗末水, 아무르강 상 • 중류는 室建河, 우쑤리강은 黑水라 불렀다고 주장하였다 . 역주 53) 秦 이래로 남북조시대까지는 丁零으로 불리다가 北魏로부터 당나라에 이르 기까지 鐵勒이라 불렸다. 이들이 당나라 때에 9 姓鐵勒을 이루었는데 이 중에 서 주도권을 잡아 마침내 왕국을 세운 부족이 回訖(위구르)이었다. 역주 54) 저자가 襲王올 찰못 해석한 사실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갔다가 나중에 는 하바롭스끄 (Xa6a p oac 1<) 주를 거 쳐 야쿠치 야(月 K y TH1) 지방까지 이동했을 것이다 철 리족의 이동 경로에 대해 한 가지 홍미 로운 사실이 있다. 위구르 한국이 멸망하기 전까지 철록의 근거지였던 남부시베리아에는 아직도 터어키어 계통의 니만 (H 幽 aH) 이라는 강 이름 이 남아 있다 (69. 22, 24 쪽). 이와 동일한 강 이름이 부레야 (B yp e .si)강의 오른쪽 지류로서 하바롭스끄 주의 북서쪽에도 있고, 이만(幽 aH) 이라는 명칭으로 연해주에도 있다 . 마지막으로 에.까.데까르스끼의 견해에 따 른다면, 야쿠치 야의 남쪽 우추르 (Y qyp)강 유역 에 니 이 만 (HbbIMaH) 이 라는 명 칭 을 가진 장소와 강이 있다고 한다 (149). 그리 고 자바이 칼 55 ) 과 하바 롭스끄 주의 남쪽에 각각 끼야(邸 3) 라는 명칭을 가진 강이 있는데, 이 것도 또한 8 - 9 세기 철록의 이동 경로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鄭韻 府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孫進己는 이를 발해의 서쪽에 해당 하는 현재의 長 春 市 지역에 비정하였다('2:1 4. 86 쪽). 그러나 막힐부의 명 칭이 莫 텟皆部라는 종족 명칭과 거의 일치하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막예개부의 땅에 막힐부가 설치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막힐부는 다른 종족들과 함께 발해의 북쪽과 북서쪽 지역 (lCJ? . 57 쪽)에 해당되는 송화강 하류나 우쑤리강 하류에 살았을 것이고, 어쩌면 연해주 쩨르네이 (Te ptt eA) 구역에도 살았을 것이다. 따라서 15 개의 부 가운데 9 개가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연해주의 남부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이 현지 부족이 살던 땅에 설치되었으니, 특히 철리부, 막힐부, 솔빈부는 부족 명칭이 그대로 옮 겨진 것이댜 정리부와 안변부는 읍루의 땅에, 안원부와 회원부는 월희 의 땅에, 동평부는 불널의 땅에 각각 설치되었다. 수도를 포함한 나머지 부들은 지역적 • 종족적 특색에 따라 설치된 것이 아니었고, 사회경제적 및 정치적으로 가장 발달한 과거 고구려의

역주 55) 바이칼 호수 를 기준으로 이쪽 지방과 저쪽 지방울 구분하여 쁘리바이칼 (n p H­ baRK aJJ b) 과 자바이칼 (3abaRK aJJ b) 로 부르고 있다. 이를 영어로 c i sb aik al 과 tran sb aikal로 부른다 . 이것은 러시아의 중심지에서 바라보았을 때의 시각이 므로 쁘리바이칼은 바이칼 호수 서쪽 지방, 자바이칼은 동쪽 지방을 이른다 .

땅과 속말말갈 거주지에 설치되었다. 이 부들이 발해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므로 나머지 부들은 그 주변에 해당하는 셈이다. 바로 이와 같 이 중심적인 부들에 5 경이 설치되었다. 新 羅 , 契 丹, 營 州, 日 本 과 같은 대외세계와 연결되는 간선도로가 5 경에서 시작되었고, 당나라와의 교 류도 이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또한 이 중심 부들은 기본적으로 농경 지역이면서 수공업이 발달하였고, 발해인의 물질문화와 정신문화의 형 성과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한 수많은 고구려 주민들이 정착해 있던 곳이었다. 이밖에도 발해에는 罪州,洙州, 銅州와 같은 세 개의 <獨奏州 > 가 있 었는데, 동주는 현재의 蘇密城에 설치되었다('X1 4 . 84 쪽). 연해주에 설치되었던 부 가운데에서 용원부와 솔빈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발해의 변두리 지역들로서 발해 왕들의 정복으로 약간 늦게 발해 로 편입되었다. 자연히 주변 부의 주민들은 발해의 중심 부보다 열악 한 사회경제적 단계에 있었고, 또한 오랜 기간 씨족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발해 왕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현지인들의 씨족 제도를 이용하였다. 중심 부들이 농업과 수공업에 종사하였던 반면에 주변 부들이 목축, 수렵, 어로에 종사했다는 것은 사료가 증명한다. 예를 들어서 현덕부에 속하였던 鐵州의 位城은 철의 생산과 가공으로, 顯州는 마포 생산으로, 盧州는 벼의 생산으로 각각 이름을 떨쳤다. 남해부의 沃州는 木綿이 기본 농작물이었다. 남해부는 또한 昆布(다시마)를 바치던 곳이기도 하 였다. 압록부에 속한 것이 분명한 丸都와 樂游에서는 오얏과 배가 재 배되었다. 발해의 동경이자 용원부의 중심지였던 桐城온 된장의 생산 지로 유명하였고 ,56) 용천부의 龍州는 명주의 생산지로 명성을 떨쳤다. 발해의 남쪽인 현재의 북한 지역에서는 구리를 채취했다 .SI)

역주 fi6) 『新唐 書』 발해전에 의하면 桐城府의 특산물로 鼓(된장)가 유명하였는데, 이 글자가 鼓(북)자와 비슷하여 저자가 오인한 것이다 . 역주 57) 『冊府元龜』 권 999, 互市에 의하면 開成 元年 (836) 6 월에 신라와 발해가 熟 銅을 당나라 登州에 가져가 교역하였다고 하였는데, 金織載은 후대의 자료를

중심 부에서 볼 때 북쪽과 동쪽에 있던 주변 부들은 목 축 과 수렵_채 취업의 중심지였다. 특 히 솔빈부는 중요한 말 사육 중심지였다. 緩 芬 河 와 라즈돌나야강의 넓은 평원에 인접한 초원지대와 삼림 초원은 말을 사육하기에 적합하였다 . 돼지 사육은 막힐부에서 가장 발달하였다. 부 여부의 주민들에게는 사슴 사냥이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고, 미타호(홍 개호) 주변의 주민들은 어로에 종사하였는데, 미타호의 붕어는 심지어 외국에서도 애용될 정도로 수요가 많았다 (l CJ? . 63 쪽) . 발해의 주변 지역이었던 불널부, 월희부, 칠리부, 혹수부가 당이나 일본과 교역하였던 제품들도 주목된다. 이곳에서는 호랑이, 표범, 담비, 바다 표범, 갈색 곰과 히말라야 곰, 야생 고양이, 흰 토끼, 짧은 주둥이 를 가진 개, 붉은 개, 청색 쥐와 은색 쥐의 가죽들이 생산되었다 우 동 물 가죽 이외에도 이 부족들은 매, 비둘기, 고래 눈동자, 연어, 모래무 지, 말린 잉어 , 붕어, 인삼, 백색 바곳 뿌리, 잣씨, 사향, 벌꿀, 게, 물소, 독수리 깃털과 꿩 깃털도 시장에 공급하였다 .59) 흑수부에서는 가는 마 포, 60 번 접힌 직물, < 노래하는 > 화살촉도 수출하였다 (l CJ?. 63, 64 쪽 ).60) 따라서 발해의 경제는 전체적으로 복합적인 양상을 띠었다 . 발해 경 제의 한 특징은 각각의 城, 州, 府나 일부 구역에서 수공업, 농업, 수렵 -채집업으로 생산이 전문화되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생산면에서 전문 화된 것은 지리적 요인 이외에도 발해 건국 이전에 말갈의 여러 부족 사이에 형성되었던 역사적 조건들도 작용하였다.

토대로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 渤海國志長編 』 권 17), 이를 확증할 만한 근거는 없다. 역주 58) 사료에는 각기 虎皮, 約 皮 , 紹 鼠 皮, 海約皮, 照皮 , 熊皮 , 猫皮, 白英皮, 猫 , 禍, 靑鼠 皮 , 銀 鼠 皮로 나온다 . 그런데 본문의 설명과는 달리 猫 , 禍는 산 채로 일 본에 보내졌다 . 역주 59) 사료에는 각기 臘 , 鷄, 諒規魚晴, 雄魚 , 蛇魚 , 乾文魚, 卿, 人參, 白附子, 松子, 窮香 , 盜 接盟 骨唯角 , 離羽, 維尾로 나온다. 그런데 韻(매)자 를 器(비둘기)자 로 잘못 보았고, 꿩 꼬리를 꿩 깃털로 잘못 설명한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댜 역 주 60) 사료에는 각기 細布, 六十綜布 , 鳴 鎬으로 나온다 . 그런데 黑水部에서 바친 것은 六十綜布 • 魚牙綱 • 朝 霞 網였으며, 細布는 束丹國에서, 鳴 鎬은 定安國에 서 바친 것이었다 .

예를 들어서 속말말갈의 계급 형성은 다 른 말갈족에 비해 훨씬 이른 시기에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이들은 계 급 사회 를 이룬 고구려와 인접 해 있었고, 고구려 • 돌궐 • 거란 그리고 나중에는 중국 당나라와 정치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에 따라 원시공산관계가 해 체되면서 새로운 계급관계의 출현이 촉진되었고, 마침내 振 國 이 건국 되었던 것이댜 속말말갈 지역은 이미 오래전부터 중요한 농업 구역이 었고, 발해시대에는 이곳의 농업이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 속말말갈 지역에서 농업과 수공업이 현저하게 발전한 또 하나의 중요 한 이유는 발해와 외부세계를 연결하는 간선도로가 바로 이곳에서 시 작되었다는 점이다. 발해의 중심 부를 통과하는 이러한 간선도로를 이 용하여 철리, 월희, 불널, 혹수의 부족들이 중국, 신라, 일본, 돌궐 등과 정치경제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이들 지역의 발전을 전반적으로 촉진시켰다. 마지막으로 발해 중심 부의 발전에 적잖은 역 할을 한 것은 668 년 고구려 멸망 이후에 많은 고구려인들이 이 지역으 로 도망해 가서 그곳을 제 2 의 조국으로 삼았다는 점 이 다. 이 곳으로 도 망간 고구려인들은 주로 농경과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 발해의 주변 부들은 조금 늦게 주로 대무예 (719 - 737) 와 대인수 (818-830) 시기의 정복으로 발해에 편입되었다 . 이들을 정복한 것은 피 정복민들로부터 공물을 받아서 국고수입을 늘리려 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상황에 대하여 칼 맑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 모든 정복 에는 세 가지의 결말이 있을 수 있다. 정복민이 피정복민에게 자신의 생산방식을 강요하거나 …… 피정복민의 낡은 생산방식을 그대로 둔 채 공물을 받는 데에 만족하거나 …… 상호 작용을 통하여 새로이 융 합된 새로운 생산방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12 1. 723,· 7 24 쪽).> 발해에 복속된 부족들은 과거에 지녔던 생산방식과 그에 맞는 생산관계 및 고 유한 사회_법률적 권력기구롤 일정 기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 결론적으로 볼 때에, 중심과 주변의 두 구역은 이미 형성되어 있던 정치경제적 조건에 따라 대체로 다른 지역에서는 나지 않는 물품을 생 산하는 곳으로 각기 전문화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자연히 국내시장의

발전을 초래하였고, 결과적으로 두 구역의 점진적인 통합까지 촉진시 키지 않을 수 없었다. 4 사회제도 연구자들은 발해의 사회제도를 각기 다르게 규정한다 (103. 22-36 쪽). 어떤 연구자들은 발해에 봉건제도가 존재하였다고 생각하였고 (66. 290 쪽 ; 67. 85 쪽 ; 129. 16 쪽의 주석 ; 241. 88, 91 쪽), 다른 연구자들은 구체 적 인 사회구성체를 설명하지 않은 채, 봉건적 우클라드와 노예적 우클라 드 6“ 가 존재 했다고 썼다 (137. 200 쪽 ; 143. 342, 343 쪽). 또 다른 연구자들 은 발해의 사회제도가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의 많은 <初期國家>들과 유사하다고 지적하였다 (84. 18 쪽 ; 85. 113 쪽 ; 114. 33, 38 쪽) . 발해사를 다 룬 전문 연구서에서도 동방의 고대 전제국가들과 유사하다고 말하면서 도, 다른 한편으로 착취의 기본형태로 공납이 행해졌으므로 봉건적 요 소가 존재하였다는 사실도 부정하지 않았다 (1 CJ7 . 71, 73 쪽). 일반적으로 발해국의 시작을 대조영이 진국을 선포하고 왕의 칭호를 쓰기 시작한 698 년으로 보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 연대를 부정하는 것 은 아니지만, 왕조를 선포하는 것은 전적으로 법률행위에 속하는 것으 로서,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씨족조직의 권력이 정치권력으로 전환되 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회제도의 진화 과정에서 그러한 질적 도약 은 대조영이 왕을 칭하기 전에 일어날 수도 있고, 그 후에 일어날 수 도 있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발해 촌락에는 다양한 족장들이 있었다. 커다란 부락의 족장은 都督이라 불렸고, 그 다음으로는 刺史가 있었다.

역주 61) 어느 시대이건간에 단독의 생산관계로만 이루어진 사회구성체 (o6•ecTBeHHo- 3KOHOMll'l eC Ka JI «!>O p Ma l.l lUI) 가 존재할 수 없고, 지배적인 생산관계와 종속적인 생산관계들이 여러 형태로 복합되어 나타난다. 한 시대의 사회구성체룰 구성 하는 이러한 개개의 생산관계 유형을 우클라드(YKJia.n)라고 한다.

작은 촌락의 우두머리로는 首 領이 있었다 . 이 들 은 모두 평민 들을 다스 렀댜 극히 짧은 이 기록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아낼 수 있다 . 첫째, < 부락 > 의 크기가 다양하였다 . 그리고 이 용어에는 방어 시설이 없는 농촌, 방어 시 설 이 딸린 마을, < 작은 도시 > ( 原都市 np o TOrop o .l l? : 물음 표는 저자가 넣은 것임)와 같은 모든 유형의 주거지가 포괄되어 있음이 틀림없댜 둘째, 기본적으로 발해 사회가 두 계층으로 분리되어 있었 다 . 피통치자인 평민과 통치자인 족장이 그것이다 . 셋째, 지배자들은 자신이 통치하는 사회 하부구조의 크기에 따라 서열이 매겨졌다. 이밖에 대조영 시대의 친위대는 평민으로부터 분리해서 만든 독립 기구였다. 사료에 따르면, 전체 가호는 10 여 만 호였고 병사는 1 만 명 이 넘었다 (197. 47 쪽). 바꾸어 말하면 10 호에 1 명의 병사가 배출된 셈이 었댜 물론 이 수치에는 신중을 요한댜 하지만 이 수치가 대체적인 추 세를 반영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에.뷔].샤브꾸노프는 자사와 도독이 <지방에서 왕권을 공식적으로 대 표하는 자들>이라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197 . 58 쪽) . 그러나 이와 약간 달리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한 근거는 혹수말갈 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문헌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 < 가장 큰 부락을 黑水府로 삼아 대표자인 수령을 도독으로 임명하였고, 여러 부족의 자 사들을 그에게 예속시켰다 (48 . 19 쪽 ; 120. 42 쪽 ; 197. 49 쪽 ). >62) 이 구절을 통하여 역사가가 지방의 지도자들을 세력이나 권위 , 그리고 그들에게 예속된 사회조직(하부조직)의 크기에 따라 다양한 등급으로 나누면서 도독이나 자사란 용어를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이러한 결론은 발 해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관료 명칭은 귀족들의 다 양한 동급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국가기관이 존 재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게다가 에부l l. 샤브꾸노프가 지적하였듯이 <복잡한 관료-행정 기구가 초기에는 그렇게 필요하지 않았다 (1 CJ7. 57,

역주 62) 『舊唐書』 발해말갈전 : r 續 更以 最 大部落 爲 黑水府, 切以其 首 領 爲 都 督, 諸 部刺 史隸 屬焉 .』

58 쪽).>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을 정리해보면, 7 세기 말 -8 세기 초에 발해는 노동의 분화, 정치권력의 제도화 경향, 사회적 차별화, 재산의 불균등 화가 이미 현저하게 나타난 사회였다. 직접생산자들이 이미 통치조직 으로부터 소외되었지만, 아직은 안정된 내부 착취나 전문화된 강제기 구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사회였다 .63) 단지 친위대만이 독립된 군사­ 약탈 기구로서 분리되었을 뿐이다.

발해의 경우에 초기국가는 大欽茂 시기에 발생하였음이 틀림없다. 유감스럽게도 국가 형성을 지적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은 없다. 프리 드리히 엥겔스는 국가의 형성을 세금의 출현, 인민들로부터 분리된 공 권력의 등장, 영토적 특성에 따른 주민들의 분할과 연계시켰다 (122. 170-172 쪽).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서 보듯이 열대 아프리카의 많은 국 가들에서는 영토적 분할이 그렇게 강하게 일어나지 않았다. 잉여생산 물의 수직적인 재분배란 의미에서의 세금은 국가가 형성되기 오래전부 터 나타났다 그리고 고대 슈메르의 州들이나 서유럽의 소위 야만국가 들 동아프리카의 原國家 (n p oTOroc y.ll a pcTBo) 와 같은 국가 이전 단계의 수많은 사회에서는 공권력이나 사회적 지배가 이미 직접생산자들로부 터 분리되어 있었다. 국가 이전 단계와는 달리, 초기 계급사회의 통치 기구에는 직접생산자를 착취한다는 또 하나의 기능이 있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바로 여기에 기본적인 차이점 중의 하나가 들어 있 는지도 모른다. I. 셀노우는 정치기구들이 인민대중과 완전히 분리되어 폐쇄된 체제 를 구성하고, 권력조직은 안정화되어 번복될 수 없을 때라야 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315. 39, 40 쪽). 헨리 J.M . 클래슨과 피터 스칼닉 은 초기 국가를 집중화된 사회정치적 조직으로 특징지었다. 이 조직

역주 63) 이 글의 구체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다 . 발해 건국 이전에는 직접생산자들이 사회 운영에 동참하는 주체적인 집단이었지만, 건국 이후에는 이로부터 격리 되어 피지배계충으로 전락하였다. 그렇지만 아직은 국가 내부에 이돌을 착취 하는 전문기구가 형성된 단계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속에서는 사회가 < 통치자 > 와 < 피통치자 > 의 두 계급으로 분리된다. < 통치자는 공물 혹은 세금을 징수하였고, 권위나 권력 그리고 힘에 의 한 위협을 바탕으로 자신의 지배를 유지해 나아갔다. 하나로 통일된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관계를 합법화시키고 신성하게 만들었다 (310. 21 쪽 ; 311 . 639 쪽 ; 312. 490 쪽 ; 또한 44. 40-49 쪽 ; 94. 91 쪽 ; 102. 14-17 쪽 ; 106 도 참조할 것). > 문명의 발생 문제를 연구하는 러시아와 외국의 많은 고고학자둘은 웅대한 숭배 건축물 , 도시, 문자, 고도로 발달된 수공업, 사회적 분화와 같은 요소로 국가와 계급사회를 특징짓는다 (127; 128. 50 쪽 ; 168. 82, 8.3쪽 ; 144 ; 145 ; 186 ; 314. 3-7 쪽). 국가 이 전 단계 와 초기 국 가와의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을 긋는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하다 고 생각하는 엘에쓰바씰리예프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한 과정의 상반된 측면이기 때문이다 (44. 44, 45, 50 쪽). 이것은 발해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 계급과 국가의 형성이 언제 어떻 게 발생하였는지 구체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것으로 보건대 대홈무 시대에 그런 과정이 가장 강하게 일어났고, 8 세 기 말쯤에는 이미 초기 국가기관이 결정적으로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 이에 대해서는 많은 사실들이 증명해준다. 첫째, 도시 집중화, 웅대한 숭배 건축물, 높은 수준의 수공업을 보여주는 고고자료들과 함께 문자 기록을 들 수 있다. 둘째, 직접생산자를 의미하는 용어가 <百姓> 에서 <部曲>으로 변한 점을 들 수 있으니, 이것은 착취를 간접적으로 증명 해주는 것이다. 셋째, 대홈무 시대에 이루어진 행정구시방 조직의 개혁 을 들 수 있다. 넷째,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씨족을 넘어선 행정체제인 국가기관이 성립되었음을 들 수 있다. 발해의 국가기관은 左省과 右省으로 나뉘어 左相과 右相이 각각 담 당하였다. 좌성에는 忠部, 仁部, 義部의 3 개 正司와 爵部, 倉部, 膳部의 3 개 支司가 있었고, 우성에는 智部, 禮部, 信部의 3 개 정사와 戒部, 計 部, 水部의 3 개 지사가 있었다 .64) <좌성에서는 기획을 담당하고 일상 역주 64) 발해 관제의 이해에도 혼동이 있었던 듯하다 . 발해는 宣紹省, 中 臺省, 政堂 省의 3 省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 그리고 선조성의 장관을 左相, 중대성의 장

업무를 처리하였댜 우성에서는 왕의 명령, 역사적 사건, 練 言 등에 대 한 기록을 담당하였다 (55. 72 쪽) .> 틀림없이 이러한 업무들은 각 정사 의 기능에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지사의 업무에는 여러 형태의 잉여 생산물에 대한 징수 • 수집 • 보관 • 재분배, 사회적 노동의 조직, 대의통상, 군사적 기능 등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중앙의 관료기구가 씨족 외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府와 縣 의 지방 행정기구는 씨족관계에 따라 조직되었음이 틀림없다 (197. 60, 62, 65, 71 쪽) . 수령은 자기가 담당한 부족이나 농촌공동체로부 터 공물을 징수하는 책임을 맡았다. 수령은 자사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었고, 자사는 자기가 맡은 주에서 정직하게 공물을 거둘 책임이 있 었댜 다시 자사는 도독에게 예속되었고, 도독은 다른 임무와 함께 < 자기 가 담당한 부에 서 (197. 72 쪽) > 공물을 징 수할 의 무를 지 녔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군대는 인민들로부터 분리된 독립기구였다. 발해 의 군대는 몇 개의 <衛> 로 구성되었다. 문헌자료에는 左 • 右猛貴衛, 左·右熊衛, 左·右照衛, 南左·右衛, 北左·右衛와 같은 일부 명칭이 남아 있댜 각 위는 대장군과 장군이 지휘하였다 (197. 72 쪽). 발해 사회는 분명히 피라미드와 같은 계급구성을 이루고 있었다. 최 상의 계급에는 왕이 있었다. 그의 손에 모든 권력이 집중됨으로써 거 대한 민족 • 정치적 구조에서 유일한 통치자였으며 책임 있는 결정을 최종적으로 내리는 자였다. <임금의 명령은 법과 같았으니 그가 윤허 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실행할 수 없었다 (129 . 17 쪽).> 왕은 분명히 신 성화되었을 것이다. 권력이 어떤 절차에 따라 이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왕위가 아 버지에서 아들로 계승되었지만, 때로는 형제 사이나 삼촌에서 조카로 전해진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물론 왕권의 약화나 궁중에서의 관을 右相이라 하였고, 정당성 아래에는 左 6 司와 右 6 司가 있었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좌우상과 좌우 6 사를 동일시하여 좌성과 우성으로 통칭함으로써 마 치 발해 관제가 기본적으로 좌우 두 개의 관부로 나뉘어 있었던 것처럼 이해 하고 있다.

음모와 관련되었음이 틀림없다 (197. 52, 53 쪽). 그렇지만 가까운 친척들 만이 왕위를 계승할 권리가 있었다는 사실 만큼은 확실하다. < 그들의 왕은 옛부터 성 이 大 氏였다 > 고 사료에 적 혀 있다 (24 1. 88 쪽 ; 다음도 참 고 바람 290. 권 1, 53a 쪽 ; 77. 335 쪽). 왕의 가까운 친족들이 왕국의 가장 높고 책임 있는 직책을 맡았을 것이댜 예를 들어서 대무예의 형제인 大門 藝 가 혹수말갈을 원정한 발 해군을 인솔하였고, 그 다음에 는 大 登夏 가 이 어 받았다 (55 . 49 쪽) . 왕의 아버지를 <老王 > , 어머니를 < 太妃>, 아내를 <貴 妃 > , 맏아들을 < 副 王>이라 불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43 . 343 쪽). 왕의 가까운 친척들을 특별한 칭호로 구분하는 유사한 전통은 고구려에도 있었다 (46. 126-128 쪽). 그 아래에는 귀족의 성을 대표하는 자들이 있었다 . 葉隆禮 는 <高 , 張, 楊, 賓 , 烏, 李와 같은 몇 개의 귀족 성이 있었다 > 고 증언하였다 (77. 335 쪽 ). 65 )

초기에는 모든 주민들이 귀족(족장)과 평민(백성)으로 나뉘었고, 통치 기구는 발달되지 못하였으며 , 관리의 보직은 제한되었다 . 족장에 속하 면서 귀족의 성을 대표하던 자들은 국가조직에 참여하고 통치 활동에 종사하였다. 정복을 통하여 영토가 넓어지고 주민 수가 증가함에 따라 통치기구 의 정비가 필요하게 되었다. 관료귀족이라는 중간층이 새로이 형성되 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6 姓>에 포함되지 않고 그 어떤 지역도 지배 하지 않는 부족 상류층들, 공훈을 세운 친위대원들, 발해인이나 다른 부족 출신으로서 왕의 신임을 받은 자들, 왕의 측근이나 왕에 직속된 자들, 발해에 복속된 다른 종족의 귀족들이 포함될 수 있다. 사료에는 수많은 관료귀족의 성이 기록되어 있다. 王承禮는 49 개의 성을 분리하였는데 대부분이 말갈의 성이고 , 이밖에 중국, 고구려, 신 라의 성들도 있었다 (24 1. 88, 89 쪽).

역주 65) 사실 이 자료의 원래 출전은 洪皓가 지은 『 松漠紀聞』이고, 葉隆 禮 가 지은 『 契丹國志』에 다시 안용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세습귀족과 관료귀족의 상호관계에 대한 기록은 극히 빈약하다. 만약 비교역사학 자료에 의거하여 판단한다면, 그들의 관계 는 대립적이었을 것이고 왕권의 지지 를 받는 관료귀족들은 세습귀족의 경쟁을 물리치고 중앙권력을 공고히 하려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발해 에는 이에 대해서 단 하나의 자료도 없으므로 단지 가설로서만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발해의 최고 귀족이 관료귀족을 뒤로 제치 고 통치기구의 중요한 보직들을 독차지하였다는 인상이 든다 (1 CJ7. 69 쪽 ; 241. 88 쪽). 점차 관료의 계급구조가 8 등급으로 이루어져 갔다. <모든 관리들은 品으로 구분되었다 . 왕을 알현할 때 1, 2, 3 등급의 관리는 자색 옷을 입고 명령을 적기 위한 상아 홀을 잡고 푸른 옥으로 만든 허리띠에 금 색 물고기를 단다. 4, 5 등급의 관리는 짙붉은 옷을 입고 상아 홀을 잡 고 은색 물고기를 단다. 6, 7 등급의 관리는 붉은색 옷을 입고, 8 동급의 관리 는 녹색 옷을 입 고 나무 홀을 잡는다 (197. 72 쪽 ).>66)

세습귀족들은 관료기구의 상류층을 형성하였고, 관료귀족들은 <공직 을 가진 자들 , 계급제도에서 엄격하게 규정된 일정한 위치에 있는 자 들, 형식적인 관직울 가진 자들의 총체 (46. 220 쪽)>를 의미하는 특별한 사회계층인 관료층으로 변해갔다. 관료귀족 이외에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던 지방의 대표자들과 부대표 자들, 귀족 출신이 아닌 자들, 일부 평민들도 관료충을 형성하였다. 비록 예속의 정도와 구체적인 피착취 형태는 분명하지 않지만, 문헌 자료에는 발해에 두 종류의 직접생산자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渤海國志長編』에 의하면, <部曲과 奴碑는 姓이 없고 자기 주인을 따른다>고 하였다 (290. 권 1, 53a쪽). 다른 사료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부곡과 노비는 성이 없고 자기 주인의 성을 통하여 알려진다 (77. 355 쪽 ; 241. 88 쪽)>고 하였다 . <部曲>이라는 말은 중국에서 유래하였다. 부곡은 처음에 고대 중국

역주 66) 『 新 唐書』 발해전 : 『以品爲秩, 三秩以上服紫, 牙勿金魚 . 五秩以上服 섬 t, 牙勿 銀魚 六秩七秩以上凌排衣, 八秩綠衣, 皆木勿 . 』

의 군대 편제를 가리켰다. 그리고 서기 1 천년기 중엽부터는 대귀족의 家兵을 지칭하였다. 이들은 농업에 종사하였고, 귀족 사이의 전쟁에 참 여할 의무가 있었으며, 귀족 가문의 성채를 방어하였다. 당나라 시기에 는 주인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그들의 소유가 된 자들을 부곡이라 불렀 다. 이들은 상속되면서 가족과 재산을 가지고 분여받은 토지를 경작할 수 있었지 만, 사고 파는 대상은 될 수 없었다 (95. 13, 14 쪽 ; 96. 72 쪽). 따라서 王承禮는 <부곡>이란 <봉건적 예속 상태에 있던 농민과 수공업자들을 의미한다>고 지적하였다 (24 1. 90 쪽). 발해에 봉건제도 혹 은 봉건적 우클라드가 존재하였다고 생각하는 다른 연구자들도 그의 의견을 지지하였다 (66. 290 쪽 ; 67. 85 쪽 ; 137. 200 쪽 ; 143. 342, 343 쪽) . 그 러나 에.뭐].샤브꾸노프가 지적하였듯이, <부곡>이라는 용어가 발해 주 민의 실제 지위를 아주 정확하게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발해 의 부곡 계층과 중국의 <부곡> 사이에 단지 어느 정도의 유사성이 있 어서, 중국인들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여 선택한 단어일 뿐이다. 에.뭐].샤브꾸노프가 생각하였듯이, 이 용어의 범주에는 <종족 연맹의 평민들 자유로운 공동체 성원들, 다양한 봉건 예속 관계에 있던 수공 업자들과 농민들도 포함되었음이 틀림없다 (1 CJ7. 70 쪽).> 문제는 발해 왕들이 설치한 州들의 절반 이상이 왕국의 주변 지역에 위치하였다는 점이다(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할 것. 1CJ 7. 58-77 쪽). 이 주들은 大 武藝와 大仁秀의 정복으로 발해에 귀속되었다. 따라서 과거에 어느 <부족> 연맹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던 이러한 주들에서는 초기 계급관 계의 형성이 중심 지역보다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주변 지역에 대 한 기본적인 착취 형태는 공납이었다. 이 때문에 북쪽이나 동쪽에 있 던 주들의 주민을 봉건적으로 예속된 농부로 성격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밖에 董万尙이 생각하듯이, 대인수 시기에 발해로 귀속된 백산말 갈은 어느 개인이 아니라 국가에 전적으로 예속되어 <둥록된 가호(編 戶)가 되었다(25.5. 62 쪽).> 바꾸어 말하면 이들은 봉건적 착취가 아니라 국가적 착취를 당한 것이다.

< 奴牌 > 라는 말은 노예로 번역된다. 王承禮 의 의견에 따르면, < 이들 은 봉건영주들의 소유물로서 어떠한 인간적 권리도 갖지 못한 노예들 이었다 (24 1. 90 쪽). > 에.퀘샤브꾸노프는 발해의 노예제도는 단지 제도 로서 촌재했을 뿐, 생산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였다 (lff1 . 70쪽).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 노예에 대한 정보는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선물로서 열거된 데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l ff1. 70 쪽 ; 241. 90 쪽 ).m ) 그렇지만 앞으로 현존하는 문헌자료를 더욱 철저히 검토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아울러 중세 초기 중국과 한반도 국가에서의 예 속민의 처지와 비교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 모든 형태의 착취를 단지 노예 신분이나 봉건적 예속으로만 귀결짓는 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 노비 > 라는 용어 속에는 불완전한 권리를 지닌 비독립적인 공동체 성원으로부터 노예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부류 의 예속민이 포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노비 > 와 국가 농민인 < 부곡 > 과의 주요한 차이점은 노비들이 국가로부터 착취당한 것이 아 니라, 왕족 • 세습귀족 • 관료귀족 • 부유한 공동체 성원 등과 같은 개인 으로부터 착취당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발해 사회는 처음에 통치자(왕족을 포함한 족장)와 피통 치자(인민)라는 두 개의 기본 그룹으로 분리되었다 . 그러다가 대략 8 세 기부터 왕과 그의 가족들, 관료층, 일반 공동체 성원(부곡)과 다양한 예 속민(노비)으로 이루어진 직접생산자들로 구성됨으로써 더욱 복잡한 양 상을 띠게 되었다.

역주 67) 발해 문왕이 777 년에 일본국 舞 女 11 명을 중국에 바친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

제 2 장 연해주의 발해 문화 유적과 그 특성 1 연해주 발해 유적의 유형 분류 문제 현재 연해주에는 발해시기 (8 - 10 세기)의 층위를 포함하고 있는 유적 이 모두 55 군데가 발견되었다. 또한 발해시기에 해당하는 고고학적 복 합체 및 우연히 발견된 유물들도 10 회에 걸쳐 확인되었다. 연해주의 발해 유적은 북쪽으로 끼롭스끼 (KH p oBCK li A) 에서 남쪽으로 하싼 (XacaH) 구역까지 분포하고, 동쪽으로 동해안에서 서쪽으로 중국과의 국경선까 지 분포한다(그립 2). 발해 유적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최근에 시작되 었고, 그것도 연해주의 모든 지역을 다 조사한 것이 아니므로, 그 숫자 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북쪽과 북동쪽의 구역들은 실제로 거의 조사 되지 않았고, 현재 확인된 연해주 전역의 유적들에 대해 전면적인 학 술조사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각 유적에 대한 연구 정도도 고르지 못하다. 단 하나의 유적도 완전 히 발굴된 것은 없지만, 14 개 유적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발굴이 진행 되었다. 나머지 유적들에 대해서는 시굴갱을 넣고, 노출된 문화충을 정 리하고, 지표의 유물을 채집하였다. 대부분 유적들의 입지와 면적이 밝 혀짐에 따라 이들에 대한 유형 분류가 가능하게 되었다• 발해 유적에 대해서 아직은 유형 분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多 . .-- /·- ( · ` /주해발 해적포분 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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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에부l l . 샤브꾸노프는 연해주 중세유적의 시기 구분과 유형 분류를 시도하여 유적들을 3 개 유형으로 구분하였다. 그는 강 연안을 따라 분 포하는 성터를 제 1 유형, 야산 2) 에 위치하는 성터를 제 2 유형, 방어시설이 없는 조그만 종교적 중심지를 제 3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고고자 료를 분석하여 제 1 유형의 유적을 행정 중심지로, 제 2 유형의 유적을 상 업-수공업 중심지로, 제 3 유형의 유적을 불교 사원으로 간주하였다 (198. 186 쪽). 엘예세메니첸코는 그의 유형 분류를 약간 보완하였다 (163. 9, 17, 19 쪽).

결론적으로 두 사람의 유형 분류는 여러 중세 주거유적들로부터 발 해 유적을 구분해낼 수 있게 해주었지만, 이 당시에는 자료에 제한이 있었으므로 유형 분류를 좀더 상세히 하지 못했다. 그 이후 발해 유적의 연구에는 많은 진전이 있었다 . 산성과 평지성, 방어시설이 없는 주거유적들에 대해서 지속적인 발굴이 행해짐에 따라 더 상세한 유형 분류를 할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이 축적되었다. 유형 분류의 기준으로는 유적의 입지, 방어시설의 유무, 축성의 특 성, 내부 구조물의 배치 상태, 거주 밀도, 주거 면적을 들 수 있다. 그 리고 유적의 사회경제적 중요도와 존속 기간을 규정짓는 부차적인 조 건으로서 수공업 생산 , 옹대한 건축물, 주거나 저장을 위한 건물, 건축 평면, 문화충의 두께 등과 같은 요소와 함께 경제 형태를 밝힐 수 있 는 자연과학 자료들이 이용되고 있다. 따라서 유적을 예비 조사하면서 얻을 수 있는 요소들이 유형 분류의 주된 근거가 되고 있다. 반면에 다수를 차지하는 부차적인 조건들은 많은 유적에 적용될 수가 없는데, 그것은 이 요건들이 유적의 발굴을

역주 1) 달리나(Jl O JIH Ha) 란 말은 원래 <계곡>으로 번역되는 말이지만 , 이럴 경우 양 자가 내포하고 있는 개념은 크게 달라진다 . 우리의 경우 계곡이란 말은 물이 흐르는 산골짜기를 연상시키지만 달리나란 말은 오히려 평지를 의미하기 때 문이다 . 달리나란 말은 주위에 산이 두르고 있는 분지성 평지에 강이 흐르고 있을 때에 그 강 주변의 평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이를 <江 沿 岸> 또는 <沿岸>으로 번역하였다. 역주 2) 쏘프까 (conKa) 는 평지에 원추형으로 솟아 있는 야트막한 野山을 이른다.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 8-10 세기의 연해주 유적들은 기본적으로 성터, 취락지 , 고분군의 세 가지 범주로 분류된다. 2 성터와 취락지 현재 알려진 모든 주거유적 3) 들은 강, 하천, 호수 , 말라버린 河床 부근 이나 해안가에 위치하며 , 전체 발해 유적의 89% 를 차지한다 . 주거유적 은 지형에 따라 기본적으로 두 그룹으로 나뉜다. ® 강 연안의 구릉과 해안가에 위치하는 주거유적으로서 전체 주거 유적에서 약 66% 를 차지한다. ® 강 연안으로 돌출한 곶에 위치하거나, 강 연안에서 떨어져 홀로 서 있는 산 및 동굴에 위치하는 주거유적이다. 두 그룹의 주거유적은 방어시설이 있는 성터와 방어시설이 없는 취 락지로 다시 나뉜댜 4 )

역주 3) 여기서 사용되는 주거와 관련된 용어를 간단히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 먼저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주거유적 (noce JJ eHHe) 이고, 이는 다시 성 벽 시설이 있는 성터 (ro p o l!H風 e) 와 성벽 시설이 없는 취락지(c e J1Hw. e) 로 분류된 다. 그리고 이러한 유적 들 은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집자리(油血風 e) 들로 이루어 져 있다. 역주 4) 이 글에서 주거유적을 복잡하게 분류하고 있는데 , 본문의 내용을 간단히 정 리하면 다음과 같다 . 1, 방어시설이 있는 주거유적 = 성터 1) 평지성 (1) 제 1 유형 평지성 : 5 기 (2) 제 2 유형 평지성 : 8 기 2) 산성 (1) 제 1 유형 산성 = 곶성 ® 제 1 하부유형 곶성 :3 기 ® 제 2 하부유형 곶성 : 3 기 (2) 제 2 유형 산성 : 4 기 3) 山上 堡 壘 :5 기

방어시설이 있는 주거유적은 지형과 규모에 따라 平地城 5), 山城, 산 위의 소형 要塞(堡壘)의 세 가지 유형으로 세분된다. 주거유적의 내부 는 내부 공간의 크기나 겉으로 분명히 드러나는 築城에서 현저한 차이 가 나타나게 된다 .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서 평지성과 산성으로 분류할 수가 있다.

평지성은 강변과 해안을 따라 분포하면서 여러 가지 기하학적인 형 태를 띠고 있는데, 흔히 직사각형이나 정사각형을 하고 있다. 성을 쌓 는 장소로는 자연적인 방어물들인 강, 강의 합류 지점, 하천, 호수, 말 라버린 河床등을 끼고 있는 구릉 지역이 선택되었는데, 이곳은 홍수 에도 범람하지 않고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우며, 방어 효과룰 높이면서 도 토루를 높이 쌓지 않아도 되는 곳에 해당된다. 평지성은 성의 구조와 성벽의 높이에 따라 두 유형으로 분류된다. 제 1 유형의 평지성에는 간단한 방어시설이 있다. 이런 유형으로는 일 리스따야(l1Jrn cTa 只)강 연안에 위치하는 니꼴라예브까 (H0 1< 0 J1 aes 1< a) I • II 및 브이쏘꼬예 (Bb!CO I< oe) 성터, 라즈돌나야 (Pa JJJ. O Ji bH~) 강 연안에 위치 하는 스따로레첸스꼬예 (Crn po p e t1 eHc 1< oe) 성터, 쭈까노브까 (U y1

역주 5) llOJ IHH HOe ro p o 血l!l e 는 <강 연안의 성터>로 직역할 수 있지만, 우리의 개념 으로는 平地城에 해당하므로 앞으로 <평지성>으로 번역하겠다.

림 3. ill). 이와 유사한 광경이 스따로레첸스꼬예 성터에서도 관찰되는 데, 이 성터의 북동 지역은 꽤 넓은 마른 하상으로 보호되고 있다. 니 꼴라예브까 I 성터의 남쪽 모퉁이에는 0.5m 이하의 낮은 토루를 쌓아 늪지화된 침수지롤 막고 있다. 방어에 취약한 위험 지역은 바깥에 추 가로 토루를 쌓아 안전을 도모하였다. 니꼴라예브까 I 성터의 남동쪽 구역(그림 3. I) 과 브이쏘꼬예 성터의 북동쪽 모퉁이(그림 3. m) 에 이와 같은 토루가 추가로 축조되었다. 이와 다른 유형의 추가 방어시설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는데, 브이쏘꼬예 성터에는 북쪽 성벽으로부터 25-35m 길이로 짧게 돌출한 부차적인 토루가 만들어져 있다. 니꼴라예브까 I 과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核字로 보강되었다(그림 3. I). 해자는 거의 메워져 있어서 깊이는 lm 이하이며 너비는 2-3m 이다. 성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은 城門이다. 브이쏘꼬예 성터에는 남문만 있고,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는 남문과 서문이 있고, 스따로레첸스꼬예 성터에는 남문과 북동문이 있으며, 끄라스끼노 성터에는 남문 • 동문 • 서문이 있고, 니꼴라예브까 I 성터에는 4 면에 성문이 각각 있다(그림 3. I, II). 니꼴라예브까 I 성터나 브이쏘꼬예 성터처럼 성문이 성벽에 곧바 로 나 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성문 바깥쪽에 · 다양한 방어용 장애물 이 축조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서 니꼴라예브까 I 성터의 북동문에 는 성벽과 평행하게 보충적인 성벽과 해자가 시설되어 있다. 간혹 성 문의 안팎으로 나지막한 토루가 평행하게 시설되어 좀더 복잡한 형태 롤 띠는 경우도 있다. 스따로레첸스꼬예 성터의 북동문이 바로 이렇다 . 끄라스끼노 성터의 성문들과 니꼴라예브까 I 성터의 남동문은 성벽으 로부터 기자 또는 활 모양으로 뻗어 나와 성문을 감싸고 있는 옹성으 로 보호되고 있다. 성터의 내부구조에 대해서는 비록 기계측량을 한다고 하더라도 대부 분 전반적인 특징만 밝힐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서 끄라스끼노 성 터의 중앙으로 너비 30m 의 낮은 지대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남문에서 북쪽 성벽으로 향하던 도로임에 틀림없다. 이 길을 기준으로 성터는 동쪽과 서쪽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서쪽 부분에는 직사각형에 가까운

0I 5I 0M i[...’.\ · I 江 0I I 4I 'M .......... ... ....홍 9 성 벽 瑟뚜 ....I . ...... ,... .. . . . .I . . . . 芝IEZ 크해l 절강자벽가 단애 연已언겁덕問 ....,... .. . ... .. . i’ . .Y앞 . ” [ . ... . 一... 그림 3. 발해 주거유적들의 평면 약도 : I. 니꼴라예브까 I 성터, II. 끄라스끼노 성터, m. 브이쏘꼬예 성터, IV. 아뜨라드노예 성터, V. 꼰스딴찌노브까 I 취락지

4 개의 臺 地가 있다. 북서쪽은 다른 부분보다 2-3m 가 높다. 이 성터의 내부구조는 만주 동경성 근처의 上京 유적을 연상시키고 있다 (136. 203 쪽). 스따로레첸스꼬예 성터의 잔존 부분 중에서 남동쪽 모퉁이는 lm 정도 솟아 있는데, 정상부는 15 X 30m 크기의 평평한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북쪽 절반 지역에서는 마론 하상의 가장자리에 인접하여 둑을 쌓은 15 X 75m 크기의 구역이 조사되었댜 다른 유적들에서는 전반적인 특징조차도 파악하기 어려운데, 이것은 경작으로 인해서 내부가 심하게 평탄화되었기 때문이다. 니꼴라예브까 I 과 II 성터에서는 성벽 가까이에서 0.6m 이하의 낮은 돌무더가가 확인 되었는데, 이것은 후대에 경작지에서 나온 돌들을 쌓아 놓은 것임에 틀림없다.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와 끄라스끼노 성터는 비교적 광범위하게 발굴 되었지만 , 스따로레첸스꼬예 성터와 니꼴라예브까 I 성터는 약간만 발 굴되었다 . 이러한 발굴 덕분에 이 성터들의 존속 기간을 밝히고 건축 평면을 분리해낼 수 있었으며 , 경우에 따라서는 연해주에 발해 문화가 존속하였던 역사적 시기와 연관지을 수도 있었다.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는 북서, 북동 및 중앙 부분이 발굴되었다 . 이렇게 해서 성터 전체의 3.7% 에 해당하는 1,51lm 2 의 문화충이 조사되 었댜 층위는 단일하였다. 여기서 두 개의 건축평면이 분리되었는데, 하부는 8_9 세기 전반, 상부는 9 세기 후반 -10 세기로 편년되어 각각 발 해 전기와 후기에 해당된다 (32. 58-62 쪽) . 니꼴라예브까 II 성터가 오랜 기간 사용되었던 사실온 두께가 2 - 3m 에 달하는 두꺼운 문화충이 곳곳 에 나타나는 데서 증명된다. 하부 건축평면에서는 반움집, 저장이나 풀 무화덕에 사용되던 구덩이가 발굴되었는데, 유구들이 아주 밀집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상부 건축평면에서는 주거지와 함께 생산용 유구도 조사되었다 . 생산용 유구는 주로 성터의 북동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유구에는 도기가마터와 쇠를 정련하던 풀무화덕 자리가 있다. 고고자료를 분석해본 결과, 이 성터의 주민들은 처음에 기본적으로 농 경과 각종 채취업에 종사하였고, 목축과 사냥에도 종사하였다. 그러다 가 나중에는 이 성이 수공업의 중심지가 되어 주민들은 도기 생산과 금속의 정 련 및 가공에 종사하게 되 었다. 끄라스끼노 성터에 대한 홍미있는 정보가 있다. 이 성터는 이미 1 얽 1 년에 빨라지이 까파로프가 발해 유적으로 꽤 정확하게 편년한 몇

안되는 중세유적 가운데 하나이다 . 그는 < 문헌자료를 토대로 …… 이 성터가 방어시설이 되어 있는 고대 발해시기의 항구 유적이었다는 의 견을 제시하였다 > (1 97. 94쪽). 1960 년에 에.부l . 샤브꾸노프가 끄라스끼노 성터를 답사하였고, 이곳에서 수집된 자료를 근거로 성터의 연대를 확 인하였댜 그는 또한 문헌자료를 분석하여 끄라스끼노 성터가 <발해 鹽 사 1 의 소재지 > 이면서 동시에 일본과 교류하던 항구였다는 의견을 제 시 하였다 (1 '57. 94 쪽) . 1980 년대 초에 이 성터의 북서 지역에서 절터가 발굴되었고, 그 근 처에서 기와가마터도 발굴되었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들은 이보다 앞 서 에꿰샤브꾸노프가 이 성이 9 세기에 축조되었다고 말한 것이 옳다 는 사실을 입증해주었다 (197. 108 쪽). 발굴 결과는 또한 이 성터가 행정 중심지였다는 의견과도 일치하였다. 이 성터는 면적이 13 헥타르에 이 른다는 사실에서도 당시의 다른 성들과는 구분된다. 게다가 성문 앞에 쌓은 壅 城 구조는 上 京 城과 유사하다 (1 언. 108 쪽) . 마지막으로 엑스뻬지 찌야 만의 해안에 위치한 입지 조건에서도 이 성터가 항구 도시였음을 증명해준다. 이 성터 이의에 해안에 자리잡은 성터는 없다. 이 성터는 행정의 중심지였고 항구였을 뿐만 아니라, 수공업의 중심지이기도 하 였다. 발굴 결과에서 증명되듯이 이곳에서는 기와가 대량으로 생산되 었댜 스따로레첸스꼬예 성터는 많은 부분이 라즈돌나야강으로 파괴되었 다. 현재 250m2 정도가 남아 있는데, 여기서 세 지점, 죽 강가에 있는 서쪽 부분, 중심 성벽 부근의 남쪽, 북동문 근처를 선택하여 발굴이 일 부 행해졌다 . 여기서 두 개의 건축평면이 드러났다. 상부 건축평면에서 • 는 돌절구와 쪽구들이 있는 지상가옥의 혼적이 발견되었다 . 하부 건축 평면에서는 동물뼈와 輪製陶器가 들어 있는 구덩이가 발견되었다. 이 성터는 9-10 세기로 편년되었다 (224 . 16 쪽). 성터 경계의 강가에서 12 개 의 돌절구가 발견되었다. 출토된 유물로 보건대 이 성터의 주민들은 농경과 목축에 종사하였다. 니꼴라예브까 I 성터의 남문에서 소규모 발굴을 통하여 두 개의 문

화충을 확인하였다. 북동쪽의 발굴 지역에서는 끄로우노브까(1

브이쏘꼬예 성터는 지표 채집된 유물과 시굴갱 출토 유물을 토대로 8-10 세기로 편년되고 있다. 다른 유적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성터의 문

역주 6) 연해주에서는 과거의 중국식·지명이 러시아식 지명으로 많이 바뀌었는데, 이에 따라 지명에서 따온 고고학 용어도 상당수 바뀌었다. 끄로우노브까 문 화도 과거 에 차삐 고우 (4anHro y, 來皮溝) 문화라고 부르던 것 이 다 . 이 문화는 초기 철기시대 후반에 속하며, 연대로는 대략 2,500-2,000 년 전에 해당한다. 참고로 연해주 일대의 시대 편년과 대표적인 문화는 다음과 같다. 다만 각 문화의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므로 본문에서의 설명과 정확히 일 치하지 않을 수 있다 . 1. 후기 구석기 • 중석기시대 (35,000-7,000 년 전) ® 오시 노브까 (OCHHOBKa) 문화 : 35,000-30,000 년 전 ® 우스찌 노브까 (YCTHHOBKa) 문화 : 22,000-7,000 년 전 2. 신석 기 시 대 (7,000-4,500 년 전) ® 루드나야(Py.IIHaJI) 문화 : 7,000-6,000 년 전 ® 보이 스만 (Bo0CM 8JI) 문화 : 6,000-5,000 년 전 ® 자이사노브까 (3a0C aJI OBKa) 문화 : 4,500-4,000 년 전 3. 청동기 문화 (4,500-3,000 년 전) 4. 초기 철기시대 (3,000-2,000 년 전) ® 얀꼽스끼 (J!H KOBCKHA) 문화 : 3,000-2,500 년 전, 抱婁 문화와 대 응 ® 끄로우노브까 (K poYlf OBKa) 문화 : 2,500 - 2,000 년 전, 沃沮 문화와 대옹 5. 철기시대 (1-8 세기) ® 올가 (Onbra) 문화 : 1-8 세 기 ® 昧輯문화 :3-8 세기 6. 중세 시 대 (8-17 세 기 초) ® 渤海 문화 :8-10 세기 초 ® 女眞 문화 : 12-13 세 기 7. 러시아 편입기 (17 세기 이후)

화층에서도 동물뼈, 물고기뼈, 조개껍질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 호수 가에 노출된 문화충에서는 녹아버린 도기와 쇠똥(슬래그)들이 다수 발 견되었다. 여기에 금속 가공과 관련된 어떤 생산 복합체가 자리잡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렇게 하여 연해주에서 발해시대로 확고하게 편년되는 일련의 성터 들이 밝혀졌다. 이들은 낮은 성벽과 두꺼운 문화충이 특징적인데, 후자 의 경우는 이 유적들이 오랫동안 사용되었음을 증명해준다. 두 개의 건축평면이 있는 주거유적과 9 세기 이후에 생긴 성터들도 특징적이다. 고고학 발굴은 이 성터들의 기능을 정확하게 규명할 수 있도록 해주었 댜 대부분의 성터들은 수공업_농경 주거유적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끄 라스끼노 성터는 동경용원부에 속하였던 鹽州의 행정 중심지였으며, 동시에 항구이면서 거대한 상업-수공업 중심지였다. 제 2 유형의 평지성으로는 라즈돌나야강 연안의 남-우쑤리스끄(IO:tcfl o­ Ycc yp幽 CK) 성터, 쉬꼬또브까(IIII< OTOB l< a) 강 연안의 스쪼끌랴누하 (CTe 回mcyx a) 성터, 빠르띠잔스끄 (na p TH3aHCK) 강 연안의 니꼴라예브까(血 KO JI aeBKa) 성 터, 일리스따야(H.mf CT 끄)강 연안의 가르바뜨까 (ro p 6a T1< a) 성터, 우쑤리 강 연 안의 추구 예 브까(qy r y eBKa) 성 터 • 꼭샤로브까 (KoKD1a pos 1< a) I • II 성터 • 마리야노브까 (Ma pb $1 HOB 1< a) . 성터처럼 강 연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8 기가 된다. 이 유형의 성터가 분포하는 범위는 제 1 유형보다 훨 씬 넓댜 이 유형의 평지성들은 연해주의 남부지역뿐만 아니라 중부 지역에도 분포하고 있다. 모두 발해와 여진의 두 개 층위를 가지고 있 으니, 12 세기에 여진이 이들을 다시 축조하여 훨씬 견고하게 만들면서 축조 형태면에서는 서로 대동소이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성벽은 경사 가 45° 정도로 급하고, 높이는 4-lOrn 로 높으며, 바닥의 너비가 25m 에 달할 정도로 두텁다. 이러한 유형의 특징은 성벽 밖으로 돌출한 維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 치의 숫자는 다양하다. 꼭샤로브까 I 성터에는 서 쪽 성벽에 단 하나가 있을 뿐이고, 꼭샤로브까 II 성터에는 북동쪽 성 벽의 성문 가까이에 두 개가 있다. 니꼴라예브까 성터, 추구예브까 성 터, 마리야노브까 성터에는 12 개에서 14 개까지 있는데, 상호간의 거리

는 60-80m 이 고 때로는 40m 로 거 의 일 정 하다. 니꼴라예브까 성터의 북서쪽은 빠르띠잔스끄강의 험한 벼랑에 면해 있기 때문에 방어시설이 따로 없다(그림 4. 1). 다만 벼 랑이 낮은 북서 면의 중간 부분에만 높이 3.25m 의 토루가 축조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마리야노브까 성터에서도 보인다(그림 4. 2). 이 성터의 남쪽은 넓고 깊은 마른 하상과 접하고 있다. 이러한 하상의 가장자리를 따라 높이 0 .5 -lm 의 토루가 시 설되 어 있댜 마리야노브까 성터, 남-우쑤리스끄 성터, 추구예브까 성터에서는 성 벽의 단면이 조사되어 두 번에 걸쳐 축조되었음이 밝혀졌다. 마리야노 브까 성터의 성벽은 처음에 높이가 2.4m 였다가 나중에 4m 높이로 재 건되었댜 이 성벽은 돌부스러기와 잔돌이 섞인 점토로 축조하였고, 겉 에는 커다란 돌을 쌓았다. 그 아래에 있는 발해시기의 성벽은 모래를 섞은 밝은 회색의 점토로 쌓았는데, 여기에는 발해시기의 도기편들이 섞여 있었다 (235. 63 쪽). 남-우쑤리스끄 성터의 성벽에는 6m 높이의 단 면이 드러나는 곳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두 개의 층위가 명확하게 구 분된다. 높이가 약 4m 되는 이론 시기의 성벽은 黑土 層 으로 되어 있 댜 이보다 늦은 여진시기의 성벽은 황색 점토층을 포함하면서 다른 재료로 더욱 높고 더욱 넓게 축조되었다. 아래충과 위층 사이에는 기 와편으로 된 중간충이 있으니, 이른 시기에 성벽을 기와로 덮었음을 증명해준다 (80. '2'7 5 쪽) . 추구예브까 성터에서도 성벽이 두 번에 걸쳐 축 조되었음이 밝혀졌다 (2Z7. 10 쪽). 성터는 대부분 방어용 核字로 둘러싸여 있다. 니꼴라예브까 성터는 해자의 규모가 너비 20-25m, 깊이 3-4m 이며 (196. '2Kl쪽), 꼭샤로브까 I 성터는 깊이 1-2m, 너비 5-7m 이다. 예외적으로 마리야노브까 성터와 꼭샤로브까 II 성터에서는 성을 둘러싸고 있는 마른 하상, 하천, 소택지 와 같은 자연구조물이 해자를 대신하고 있다. 성문 앞에 축조된 옹성은 제 1 유형 평지성과 동일하게 기자 혹은 활 모양의 토루로 이루어져 있다. 성문 입구는 약간 높여져 있다. 성터의 면적은 아주 다양하다• 추구예브까, 꼭샤로브까 II, 가르바뜨

까, 스쪼끌랴누하, 마리야노브까의 성터들처럼 3 - 9 헥타르로 작은 것이 있는가 하면, 꼭샤로브까 I, 니꼴라예브까, 남 ― 우쑤리스끄의 성터들처럼 16.5一 68 헥타르로 아주 큰 것도 있다 . 이 성터들의 내부구조는 대부분 여진족들에 의해 변경되었고, 게다가 경작으로 지표면이 평탄화되어 버렀다 . 당시의 유적으로 규모가 제일 큰 남-우쑤리스끄 성터에서는 얕은 웅 덩이 형태의 건물 혼적과 푸른색의 벽돌로 만든 건물 기초들이 발견되 었댜 건물 기초에서 많은 기와편들이 발견되어 기와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댜 기초의 크기는 큰 것이 각각 190m2 와 350m 2 이고, 작은 것 은 2m2 를 약간 넘 는다 (183 : 11, 12 쪽). 니꼴라예브까 성터의 동쪽 내부에는 면적이 약 785m 2 가 되는 內城의 자취가 남아 있다. 이 내성은 높이 lm 이하의 토루로 둘러싸여 있고, 직사각형의 모습에다가 남북향에서 약간 기울어진 형태를 띠고 있다 . 이 <禁 苑 > 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남쪽에 있다. 내성 북부에는 낮은 둔 덕 모양으로 된 건물 유구들이 남북을 축으로 하여 2 열로 늘어서 있는 데, 여기에서 다량의 기와편과 벽돌편들이 발견되었다. 입구에서 북쪽 으로 30m 떨어진 가까운 지점에도 또 하나의 건물 기초가 있다. 이 성 터의 성벽 내부를 따라 깊이가 0.2 - l. 7m 이고, 너비가 보통 3-4m 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15m 정도가 되는 깊지 않은 해자가 시설되어 있다 (196. 287, 288 쪽). 꼭샤로브까 I 성터의 북문 근처에도 약간 언덕진 50 X 70m 크기의 직사각형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낮은 토루로 둘러싸여 있는데, 토루 의 동쪽면에는 절단 지점이 있다. 과거에 이 성터에서 가로로 늘어선 5 개의 낮은 토루들이 관찰된 적 이 있었다 (47. 62 쪽). 다른 유적들에서는 건물 흔적이 겉으로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마리야노브까 성터에는 니꼴라예브까 성터처럼 성벽을 쌓을 때 만들어 진 내부 해자의 혼적이 남아 있고, 추구예브까 성터의 북서쪽 모퉁이 에 는 돌로 만든 고대 우물의 혼적 이 남아 있다 (83. '2,g7쪽). 성터에 대한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마리야노브까 성

터, 스쪼끌랴누하 성터, 니꼴라예브까 성터에서는 약간의 발굴이 이루 어졌지만, 다른 성터에서는 시굴갱 조사, 노출되어 있는 문화충 조사, 지표유물 채집만이 행해졌다. 마리야노브까 성터의 남서쪽 부분에 대한 발굴에서 두 개의 문화충 이 확인되었다 . 20-30cm 깊이의 경작충에서는 11 一 12 세기의 여진 유물 이 발견되고, 腐植砂質祐土로 이루어진 100cm 정도 깊이까지의 아래충 에서는 8-10 세기의 발해 유물이 발견되었다. 일부 지점에서는 경작으 로 인해서 아래충에 속하는 사질점톡충이 겉에 드러나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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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II ZJ II I I I I I I t`- fj z 0I !Ul IIM 그립 4. 니꼴라예브까 성터 (1) 와 마리야노브까 성터 (2) 의 평면 약도

사질점토층에는 회, 재, 목탄이 렌즈처럼 끼어 있기도 하다 . 생토충에 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열을 지어 있는 반움집의 유구들이 남아 있다. 여기에서는 3 개의 집자리와 저장구덩이들이 발굴되었다. 발해 문화충 의 상부에서는 재로 된 얼룩이나 불에 탄 회 덩어리가 많이 발견되었 다. 재 근처에서는 도가니 조각 , 쇠똥(슬래그), 녹아버린 도기편들이 발 견되었다. 결과적으로 발해시기 건축평면이 두 개가 드러났는데, 아래 것은 반움집과 저장구덩이들이고 , 위의 것은 생산과 관련된 유구들이 다 (163. 8 쪽) . 이 러 한 발굴로 8-10 세 기 에 마리 야노브까 성 터 의 주민들이 무엇에 종사했는지롤 알 수 있게 되었다 . 이들의 경제는 복합적이어서 농업 , 목축, 사냥, 어로, 수렵 등에 종사하였다. 그러다가 그 후에 이곳 이 도기나 금속제품을 생산하는 수공업 중심지로 바뀌었음을 말해 준다. 스쪼끌랴누하 성터에서는 쪽구들이 있는 집자리 두 개와 저장구덩이 들이 발굴되었다. 이곳에도 역시 여진과 발해 시기에 해당하는 두 개 의 문화층이 있다. 이밖에도 성에서 채집된 지표 유물에는 얀꼽스끼(.si H ­ KOBCKHA) 문화 1) 의 도기편들도 보이는데, 이는 초기 철기시대부터 사람 들이 거주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충위는 전반적으로 마리야노브까 성터와 동일하다. 상부의 경작충에서는 12 세기의 도기편과 화폐 자료 들이 수집되었다 (233. 22 쪽). lm 이상의 깊이룰 가진 8-10 세기의 문화 층에는 도기편, 동물뼈, 새뼈, 물고기뼈, 조개껍질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물질 자료들은 스쪼끌랴누하 성터가 수공업 및 행정 중심지였 음을 말해준다.

추구예브까 성터에도 이와 유사한 문화충이 있다. 상부의 경작충은 두께가 30cm 에 달하고, 윤제도기의 管 모양 구연부, 기와편, 北宋 동전 과 같은 12 세기의 여진 유물이 포함되어 있다. 아래에는 5-lOcm 의 불 에 탄 중간충이 있고, 그 아래에는 발해시기에 해당하는 60cm 이하의

역주 7) 연해주 초기 철기시대의 전반기에 해당하는 문화로서, 연대는 3, -2,500 년 전에 해당된다 . 이 문화의 명칭은 19 세기 후반에 이룰 처음으로 발견한 엠. 이안꼽스끼 (M.H J!H KOBCKHII) 의 이름을 딴 것이다 . 유적이 주로 연해주 납부의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과거에 <貝塚文化>라고 부른 적도 있다.

두꺼운 문화층이 있다. 발해시기 문화층에는 불에 그을린 흙, 다량의 뼈, 도기편들로 채워진 반움집의 윤곽이 남아 있다. 도기는 흔히 바둑 판 모양의 격자문으로 장식되었다 (227. 11 쪽) . 이와 동일한 도기편들이 스쪼끌랴누하 성터와 니꼴라예브까 성터에서도 발견되었다. 니꼴라예브까 성터에서는 내성의 입구에 세웠던 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수집된 자료로 보면, 이 <금원>은 12 세기 말 -13 세기 초에 해당 하는 여진의 불교 사원 복합체였다(1 96. 293쪽). 상부 문화층은 얇고 유 물이 빈약하다. 전체적으로 이 성터는 여러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 아 래에는 발해 유물이 포함된 문화층이 있고, 더 아래에는 초기 철기시 대와 신석기시대 문화충이 있다 (2 '2:1. 20 쪽). 19 세기 후반에 남-우쑤리스끄 성터를 방문한 빨라지이 까파로프는 이 성터를 발해 것이라고 말하였다. 몇몇 고고학자들은 남-우쑤리스끄 성터를 발해 率賓府의 중심지로 비정하였다 (137. 198 쪽 ; 197. 97 쪽). 고고학 조사로 밝혀졌듯이, 평지성들은 8 세기에서 12 세기 초까지 비 교적 오랜 기간 사용되었다. 발해 이후에 이 성들은 많은 변모를 겪게 된다. 다시 건축되거나 성벽이 더 높아졌고 維가 등장하였으며, 내부구 조에서도 새로운 요소들이 나타났다. 이 성들이 계속 사용되는 동안에 기본적인 기능은 바뀌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마리야노브까 성터, 꼭샤로브까 II 성터, 가르바뜨까 성터들 은 수공업 중심지였고, 남-우쑤리스끄 성터, 니꼴라예브까 성터, 꼭샤 로브까 I 성터, 스쪼끌랴누하 성터와 함께 어쩌면 추구예브까 성터까지 도 발해 府 • 縣의 행정 중심지였을 것이다. 연해주에 설치된 발해시대의 縣들은 지형에 따라 분리된 명백한 경 계선을 가지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러한 경계선은 강 연안의 평지들 을 구분해주는 분계선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현 소재지 가 강 연안의 평지에 자리잡게 되는데, 통상 그 중심지는 니꼴라예브 까 성터 • 스쪼끌랴누하 성터 • 추구예브까 성터와 같이 강의 중류에 위 치하게 된다. 평지성들은 도시형 주거유적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들은 규모가 거

대하고 방어시설이 잘된 건축물이자 생산시설이었다. 생산시설은 통상 변두리에 위치하는데, 이것은 아마 수공업 구역이 분리되어 있었던 데 기인하는 듯하다. 산성은 주거유적 전체에서 약 33% 를 차지한다. 산성은 전적으로 지 형에 의존하므로 그 구조가 아주 다양한데, 흔히 곶이나 야산의 능선 올 따라 성벽을 축조함으로써 그곳의 외형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 입 지의 선정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되는 지형이 중대한 영향을 미치 게 된다. 산성들은 산림 지역, 산 속이나 삼림 속, 그리고 좀더 접근하 기 어려운 지역들에 위치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산성들은 전반적 특성과 세부적 특성에 따라 곶에 위치하는 산성과 강 연안에 홀로 솟은 야산에 위치하는 산성의 두 유 형으로 나뉜다 곶성은 강 연안으로 돌출한 곶에 위치하고 산줄기와 일체를 이룬다. 모든 곶성들에는 접근하기 어려운 험한 절벽이 있다. 현재 토루가 남 아 있는 곳은 가장 취약한 부분으로서 곶과 산줄기가 ' 연결된 지역이 댜 절벽이 아무리 가파르다고 하더라도 자연적인 방어물만으로는 충 분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고대에는 곶성의 모든 둘레에 방어물이 구축 되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단지 발굴을 통해서만 그러한 사실 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서 노보고르제예브까 (HoBoro p/l eeB 1< a) 성터에서 서쪽 변두 리를 발굴할 때 가파른 절벽을 따라 평행하게 늘어선 2 열의 기둥 구멍 들을 생토충에서 확인하였는데, 이것은 이곳을 방어하기 위해 세웠던 木桐의 흔적들이다. 많은 곶성들은 3 열의 성벽으로 보호되었다. 이 성 벽들은 일반적으로 활 모양을 이루는데, 제일 안쪽의 성벽이 가장 높 댜 바깥쪽 성벽은 높이가 lm 를 넘지 않고, 중간은 1. 5m 이고, 안쪽은 2-3m 정도이댜 방어시설을 그런 식으로 배치함으로써 주변의 넓은 공 간을 관찰할 수 있게 하였으며, 방어효과를 더 높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아뜨라드노예 성터나 모노마호보 성터처럼 덜 취약한 곳에서는 1 열이나 2 열의 성벽을 쌓았다. 성벽은 돌을 섞은 흙으로 쌓았다. 곶 부

분에서는 성벽이 발견되지 않았다. 곶성에는 1-3 개의 출입구가 있다. 성문은 일반적으로 가장 완만한 부분에 나 있다. 일부 성터에서는 성문이 3 열의 성벽을 거치도록 되어 있댜 아뜨라드노예 성터의 남서쪽 문은 더 복잡한 방어체계를 이루고 있댜 중심 성벽의 앞쪽으로, 성을 드나드는 고대 도로의 양쪽 지점에 토루를 쌓았다(그림 3. IV). 모노마호보 성터에서는 남문으로 나 있는 고대 도로가 중심 성벽에서 나온 0.5m 높이의 토루로 둘러싸여 야산의 완만한 경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 접근이 어려운 곳에서는 성벽에 간단한 출입구 시설만 되어 있다. 이러한 성문은 모노마호보 성터의 동쪽 성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재 모두 6 기의 곶성이 알려져 있다. 이들은 0.2-5 헥타르 정도의 크 기인데, 평지성에 비해 규모가 작다. 이들은 3-5 헥타르의 비교적 큰 유 적과 0.2-0.5 헥타르의 작은 유적으로 크기에 따라 다시 두 개의 하부유 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제 1 하부유형에는 일리스따야(11.Jrn CT aJI)강 상류 의 아뜨라드노예 (OTp a .ll Ho e) 성 터 , 쥬라볼레 브까()I(yp aB Ji eBKa) 강과 우쑤 리 강이 합류하는 지 점 에 있는 싸라또브까 (Ca paTOBKa) 성 터 , 루드나야 (Py .llHaJ1) 강가의 모노마호보 (MoHOMaxOBO) 성 터 가 있다. 아뜨라드노예 성터에서는 곶의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깎아 만든 곳에 수많은 건물 유구들이 있어서 내부구조를 잘 파악할 수 있다. 성문 곁 에는 커다른 돌무더기들이 있고, 성문 밖으로는 고대 도로가 나 있다. 싸라또브까 성터 안에는 직경 3m 이하의 많은 웅덩이들이 있다. 지 표의 유물로 판단하건대 이 성터는 8 ― 10 세기의 단일 문화층으로 이루 어져 있다. 제 2 하부유형의 곶성들은 연해주 남쪽에서 동해로 흘러드는 작은 강 들의 연안에만 있다. 아바꾸모브까 (ABBaK }'M OBKa) 강 연안에 있는 미하일 로브까(血 xa R.n oBKa) 성터와 베뜨까 (BeTKa) 성터, 제르깔나야 (3e p K 탸 bH aJI) 강 연 안에 있는 고르노레 첸스끼 (rop H op e q e HcKHR) II 성 터 가 여 기 에 속 한다. 이 성터들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단지 고르노레첸스끼 II 성터 에서 4 개의 시굴갱을 넣어 충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시굴갱에서는 기

와편과 회색 및 갈색의 윤제도기편들이 발굴되었다 (130. 237 쪽 ; 131. 124 쪽). 또한 부정형의 조그만 웅덩이 모양을 한 건물터도 발견되었다. 미하일로브까 성터에서는 건물 혼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 대신 에 강가로 향하는 고대 도로의 흔적이 가파른 경사면에 남아 있었다. 베뜨까 성터는 심하게 훼손되어 아무런 유구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한 곶성들은 은신처로 사용된 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규모가 작고, 3 열의 성벽과 해자로 둘러싸여 접근하기가 아주 어려운 방어체 계를 하고 있으며, 그러한 복잡한 방어체계임에도 성문이 단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다음으로 제 2 유형의 산성들은 지세가 완전히 다르다. 이들은 접근하 기가 어려우면서 40-lOOm 로 높은 야산에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야산 은 평지에 자리잡고 있어서 山地와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들은 강 연안에서 금방 눈에 띄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사람들 이 거주하였다. 씨니예 스깔르이 (CHHHe C 1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문은 아주 특이하게 축조되었다. 먼저 안쪽 두 성벽의 남동쪽 부분에 출입구가 있고, 다시 제일 바깥쪽과 가운데쪽 성벽의 엄호를 받으면서 북쪽으로 성벽을 따라 길이 나 있다. 이 성밖으로 북쪽과 남동쪽의 완만한 경사 면에는 주거를 위한 많은 수의 계단들이 만들어져 있다. 이 주거용 계 단의 아래쪽에는 또다른 성벽이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고대 도로가 주거 지 역 으로 구불구불하게 나 있다 (39. 183 쪽). 연구가 잘 되어 있는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그림 5. 1) 에서는 발해

문화층이 12-13 세기의 건축평면 아래에 있다. 층위학과 유구 혼적에 따라 이곳은 두 개의 건축평면으로 나뉜다. 하부 건축평면에서는 화덕 자리가 있는 직사각형 평면의 지상가옥 유구들이 발견되었고 , 상부 건 축평면에서는 2-3 개의 굴뚝이 달려 있고 직선 또는 기자형의 쪽구들이 시설되어 있는 집자리들이 발견되었다 (163. 5, 6 쪽). 북쪽에 있는 3-5m 높이의 성벽 단면에는 4 개의 건축평면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가운 데 2m 이하의 높이에 있는 두 건축평면은 발해시기의 것이고, 나머지 둘은 12 - 13 세기에 해당한다. 나무와 흙으로 쌓은 낮은 성벽의 흔적이 서쪽의 험한 경사면을 따라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 유형의 성터들은 규모가 3 헥타르 정도의 중간 크기이다. 이들의 둘레에는 방어시설이 딸리지 않은 주거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위에 언급된 모든 산성들은 세부에서 어느 정도 독특성을 지 니면서 지형적 특성과 축성의 주된 원칙에 부합하도록 축조되었다. 산 위의 주거유적으로는 작은 요새(보루)라는 또 하나의 유형이 있 다. 이들은 규모가 0.076- 1. 3 헥타르 정도가 되고, 높고 험한 곶의 가장 자리나 강 연안의 야산 정상부에 자리잡고 있어서 주변 지역을 아주 잘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보루는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이들은 비교적 최근에 알려지 게 되었다 1968 년에 고르노레첸스끼 I 보루가 부분적으로 조사되었다 (130. '231쪽). 1985 년에는 야웨알렉싼드르 (A.B. AJt e 1< caH .ll P) 가 스쪼끌랴 누하 보루를 일부 발굴하였다. 씨 닐로프 (C IDmJi oB) 보루, 딸로브까 (T a..n: oB- 1

있는 고르노레첸스끼 (ro p Ho p e l! eHc 1<1-1ti) I 보루가 그것이다. 따라서 이들 의 분포 지역은 연해주 남서 지역에서 북동 지역까지 아주 넓은 편이다. 보루들의 형태는 다양하다 . 기본적으로 타원형에 속하지만, 고르노레 첸스끼 I 보루는 장방형에 가깝다. 스쪼끌랴누하 보루, 꼰스딴찌노브까 보루, 고르노레첸스끼 I 보루처럼 주위가 모두 성벽으로 둘러싸인 것도 있고, 딸로브까 보루나 씨닐로프 보루처럼 적당한 지점이나 완만한 경 사면에만 성벽이 있는 것도 있다. 성벽은 l.5- 2m 정도로 높지 않고 주 로 흙으로 축조되었지만, 고르노레첸스끼 I 보루처럼 간혹 돌을 덮은 경우도 있댜 노보게오르기예브까 보루와 고르노레첸스끼 I 보루는 바 깥쪽에 해자가 있다. 성벽에는 출입구가 하나 있는데, 겉으로는 성벽이 낮아진 형태를 띠고 있거나 벽을 잘라낸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산 위에 있는 보루들은 유사시에 강 연안의 주거 지역을 지 키기 위해서 주변의 너론 지역을 경계하던 초소였다는 데는 의심의 여 지가 없댜 모든 보루들은 강 연안과 계곡들을 감시하던 거점이나 신 호 지역으로 연관지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아직 이런 유형의 유적들 이 연구되지 않았지만, 틀림없이 이들은 그와 같은 방어망이 형성된 시기와 그 후의 발전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런 유형의 성터들은 발해의 중심 도시들이 자리잡고 있는 만주 동 부에도 있다 (249. 37 쪽). 다음 그룹의 유적은 방어시설이 없는 주거유적인 취락지이다. 대부 분은 일반적으로 강 연안을 따라 자리잡고 있고 나머지는 해안가에 있 지만, 극히 일부가 자연적인 은신처인 동굴에 위치하고 있다. 먼저, 강 변 가까이 물이 범람하지 않는 장소에 위치하는 유적들은 겉으로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취락지는 강변의 단애에 자연적으로 드러 난 문화충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다. 지대가 낮은 강변 단애에서는 문화충이 잘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건물이 여기서 떨어져 있었음을 증명해준다. 달리 말해서 취락지는 주거용, 저장용, 생산용 유구들이 있는 높은 구릉지에만 위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장소들에서는 간혹 2m 두께의 두터운 문화충이 관찰되기도 한다. 간혹 3-50 핵타르에 이르

는 취락지의 면적을 알아낼 수 있는 경우도 있다 .. 지금까지 18 기의 취락지가 알려져 있다. 6 기는 라즈돌나야강 연안에 있고 , 5 개는 아르쎄니예브까 (A p ceHbeBKa) 강 연안에 있고, 3 기는 일리스 따야강 연안에 있으며, 나머지는 빠블로브까 (naB JI OBKa) 강, 우쑤리강, 뻬 뜨로브까 (neT p OBKa) 강, 말르이 우싸치 (M am,벼 Yca q)강의 연안에 각각 1 기씩 있다 . 이 유적들은 연해주의 남부, 서부 그리고 중부 지역에 위치 하고 있으니, 라즈돌나야강, 쑤호돌 (C yx. O IJ. Oll) 강, 우쑤리강의 유역과 興 凱湖(한까호)의 연안 일대에 해당한다. 취락지는 아직 폭넓게 조사되지 못했다.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 끄루글라야 달리 나 (K py r JI邸 lloJI H Ha) 취 락지 ,8) 꼬르싸꼬브까 (Ko p caKOBKa) I, II 취락지의 4 곳에 대해서는 약간 발굴하였지만, 나머지는 자연적으 로 드러난 문화충을 정리하고 지표 유물을 채집하였을 정도이다.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그림 5. 2) 에는 두 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 댜 옹덩이 자리에 남아 있는 이 유적의 아래층은 청동기시대, 윗층은 발해시기에 각각 속한다. 발해시기의 문화층에서는 다양한 건물 유구 들이 서로 다른 깊이에서 발견되어 3 개의 건축평면을 분리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 하부 건축평면에는 생토충을 약간 파고 들어간 화덕이 딸 린 장방형 집자리와 고래 하나로 된 쪽구들 시설이 된 지상가옥과 같 은 유구들이 있었다. 집자리와 나란히 저장구덩이들과 작은 풀무화덕 의 혼적들도 있었다 . 중간의 건축평면은 발굴 구역의 가운데 지점에 있었는데, 여기서는 생산 기능을 가졌던 2 기의 지상가옥이 조사되었다. 상부 건축평면은 심하게 파괴되어 불에 탄 흙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중간중간 돌무더기들이 있었다. 고대의 지표면으로부터 18-20cm 아래 에서는 용광로의 혼적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내부가 불에 탄 흙으 로 채워져 있고 점토를 둘러바른 구덩이 형태를 띠고 있었다 . 이 취락 지의 문화충은 두께가 1. 5m 에 달한다. 이러한 발해시기의 문화충은 8-10 세기로 편년되고 있다 (163 . 6 쪽).

역주 8)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와 길을 사이에 두면서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밖 의 동쪽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 취락지이다 .

그립 5.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1) 와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 (2) 평면 약도

끄루글라야 달리나 취락지에서는 쪽구들이 있는 지상 집자리의 일부 와 커다란 쇠똥 덩어리들로 채워진 용광로 구덩이가 발굴되었다. 이 취락지는 단일충이며 발해시기에 해당한다 . 끄로우노브까 (K p OYHOBKa) 강변의 꼬르싸꼬브까 I 취락지에서 홍미있 는 자료들이 조사되었다 . 이곳에서 3 기의 도기가마터, 쪽구들이 있는 1 기 의 지상 집자리, 3 개의 저장구덩이가 발굴되었다. 문화충의 깊이는 5.5 -220cm 이다. 유적은 단일충이고 9-10 세기로 편년되고 있다. 이보다 더 상류에 위치하는 부근의 꼬르싸꼬브까 II 취락지에서는

커다란 저장구덩이 하나가 발굴되었는데, 이 속에서 윤제도기편, 동물 빼 철제품의 편린들이 다수 발견되었댜 이 유적은 2 개 층위로 되어 있댜 윗층은 발해시기에 해당하고, 아래층에는 끄로우노브까 문화기의 집자리들이 있다. 일련의 취락지에서 자연적으로 노출된 문화층을 정리하면서 몇 가지 홍미있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었다. 꼰스딴찌노브까 I 취락지(그림 3. V) 에서는 두 개의 문화층이 드러났는데, 윗 문화층은 발해시기의 것으 로 두께 180cm 정도였다. 두 지점에서는 그 아래쪽에서 끄로우노브까 문화층이 발견되었는데 두께가 24cm 이하였댜 몇 군데에서는 발해 문 화충에서 두 개의 건축평면이 조사되었다. 하부 건축평면에는 깊은 건 축용 구덩이와 도기가마터가 있었고, 상부 건축평면에는 기와 건물 유 구가 있었다. 라즈돌나야 강변의 낭떠러지에 있는 우쪼스노예 (YTeCHoe) 취락지에 서는 구덩이 바닥들과 도기가마터의 윤곽들이 관찰되었다. 문화층의 두께는 곳에 따라 1. 5m 에 달하였다. 유적은 단일층이고 8-10 세기에 해 당된다 (226. 99 쪽). 루다노브까 (P y.ll aHOBKa) I, II 의 두 발해 초기 취 락지 는 아르쎄 니 예 브 까강 연안에 위치한다. 문화충은 두께 8.5 cm 이며, 여기에는 도기편, 동 물뼈, 물고기뼈, 강에 사는 연체동물의 껍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 울러 길이 130cm, 깊이 30cm 정도의 건물 구덩이가 조사되었댜 뻬뜨로브까 취락지에서는 생토층 표면으로부터 18-20crn 깊이에서 건축용 구덩이가 발견되었는데, 이 속에 채워져 있는 질은 사질점토에 서 불에 탄 직경 100-150crn 의 오렌지색 반점들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두 줄로 깔려 있었다. 그 주위에서 청동 장신구, 철제 무기, 도기편들 이 수집 되 었다 (222. 35 쪽). 아브리 꼬쓰 (A6 p HKOC) 취 락지 에 서 는 銅錢, 輪製陶器片과 手製陶器片, 금속제품과 뼈제품 둥의 지표채집 유물을 통하여 이 유적지가 2 개의 충위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래 층위는 발해시기에 해당하 고, 경작으로 파괴된 윗 충위는 여진 문화에 속한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자료에 의하면, 평지의 취락지는 평지성과 마찬 가지로 오랜 기간 사용된 주거유적이었다 . 이 중에서 몇 기의 취락지 는 여러 층위의 문화층으로 이루어져, 발해 충위가 보통 그 이전의 층 위 위에 형성되어 있다. 아브리꼬쓰 취락지처럼 경우에 따라서는 발해 층위가 여진시기의 층위로 덮혀 있기도 한다. 유적들은 발해 전기 유 적 (8-9 세기)과 후기 유적 (9_10 세기), 발해 전체 기간에 걸친 유적 (8-10 세기)으로 분류되었다. 몇 기의 취락지에서는 발해 문화층이 꼰스딴찌 노브까 I 취락지처럼 두 개의 건축평면으로 구분되거나, 혹은 노보고르 제예브까 취락지처럼 심지어 세 개의 건축평면으로 명백히 구분된다. 커다란 취락지들은 라즈돌나야강을 따라 분포한다. 그리고 다른 작은 취락지들은 산림 지역에 위치하고,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와 루다노브 까 성터 주변의 취락지 그룹, 니꼴라예브까 II 성터나 마리야노브까 성 터의 취락지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성터와 가깝게 자리잡고 있 댜 이들 취락지에 대한 조사 자료로 보건대, 이곳의 주민들은 농업, 목축, 수렵뿐 아니라 수공업에도 종사하였다.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 의 주민들은 청동 주조업에 전문적으로 종사하였고 (163. 14 쪽), 꼬르싸 꼬브까 I 취락지, 꼰스딴찌노브까 I 취락지, 우쪼스노예 취락지의 주민 들은 도기 생산에 전문적으로 종사하였다. 방어시설이 없는 두번째 그룹의 유적은 동해 바닷가를 따라 분포한 다. 이러한 그룹의 취락지들은 아직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면 적이 밝혀져 있지 않다. 단지 루드나야강 하구에 있는 쓰므이치까(야l,lq­ Ka) 취락지는 면적이 1 헥타르로 밝혀졌는데, 이곳에서 지표 유물이 발 견되고 있다. 이 그룹의 주거유적들은 강 연안에 있는 취락지들에 비 해 규모가 훨씬 작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들은 쓰므이치까 취락지처 럼 모래언덕에 위치하거나, 베레가보예 (Be p erosoe) 취락지나 스빠쎄니 예 (Cnace tt ae) II 취락지처럼 해수면에서 2-4rn 의 높이에 있는 낮은 해 안단구에 위치한다. 유적이 바닷가에 있고, 문화충이 명백히 결여되어 있으며, 도기편, 자갈로 만든 어망추, 바다 연체동물의 껍질처럼 유물이 아주 빈약한

사실로 보건대, 이 유적들은 뭍으로 해산물 을 공급하던 어부들의 계절 용 주거지였을 것이다. 뭍에서 발굴된 주거유적에서 바다 연체동물의 껍질이 발견되는 것은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발해시기의 문화충은 스베르치꼬프 (Cae pt:! KOB) 동굴처 럼 깊은 삼림 지역이나 뽀씨옛 (nocbeT) 동굴처럼 해안의 작은 동굴에서도 발견된다 . 스베르치꼬프 동굴은 제르깔나야강의 지류인 쩨네바야 (TeHeB rui)강의 상류에 있는데, 암벽 기슭으로부터 700m 높이에 있다. 동굴 입구의 안 쪽에서 작은 윤제도기와 그 뚜껑의 조각들, 철제 및 골제 화살촉, 칼과 같이 사냥에 적합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동굴 속에서 돼지, 곰, 늑대, 고릴라의 뼈가 상당수 발견되었다 (225. 152 쪽). 따라서 겨울 사냥 기간 에 월동장소로 쓰였던 곳이 틀림없다. 뽀씨옛 동굴은 엑스빼지찌야 만의 해수면에서 2-3m 높이의 해안에 위치한다. 이 동굴은 길이 9m, 너비 5-6m, 높이 4-5m 로 꽤 커다란 자 연적인 은신처이다. 시굴갱에서 깊이 lm 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위에 서 깊이 25cm 까지에는 작은 돌부스러기를 포함하면서 검은색 충이 있 고, 그 아래로 목탄이 섞인 밝은 회색의 점토충이 20cm 두께가 되고, 더 아래에는 다시마와 느릅나무 間層들을 포함하면서 작은 돌부스러기 와 돌이 섞여 있는 짙은 회색의 사질점토충이 50-60cm 두께가 된다. 유물들은 아래 충에서 발견되었다. 여기서 청동 반지, 조개로 만든 장 신구, 골제 세공품, 토제 어망추, 윤제도기편들이 발견되었다 (178 . 37 쪽). 이 동굴은 어부들의 자연적인 은신처로 생각할 수 있다. 3 고분군 연해주에서 발해 고분군은 거의 조사하지 못했다. 현재 3 곳의 고분 군이 알려져 있는데, 둘은 끄로우노브까강 연안에 있고, 하나는 발샤야 우쑤르까 (Bo JI. Ycc yp Ka) 강 연안에 각각 위 치 한다. 앞의 두 고분군은 까 쁘이또 (KOllLITO) 절터와 아브리꼬쓰 (A6 p HKOC) 절터가 있는 나지막한 두

야산의 경사면과 정상부에 위치한다 . 마지막의 노보빠끄로브까 (Hoso­ nOKp 0B Ka) 고분군은 강변에 붙어 있어서 파괴되었다. 까쁘이또 고분군 과 아브리꼬쓰 고분군은 현무암 덩어리로 쌓은 낮은 쿠르간 9 ) 의 모습을 하고 있댜 노보빠끄로브까 고분군은 겉으로 유구가 보이지 않는 것으 로 보아 토광묘 고분군임에 틀림없다.

까쁘이또 고분군과 아브리꼬쓰 고분군은 발굴되어, 모두 5 기의 쿠르 간이 확인되었다. 까쁘이또 (KomITo) 야산의 동쪽 산기슭에서 고분 1 기가 발굴되었다. 이 고분은 직경 12m, 높이 1. 4m 의 봉분을 가지고 있었댜 봉분에서는 여러 지점에서 수제도기편, 철제 화살촉, 허리띠 고리, 有짧 자귀 조각, 알갱이가 굵은 사암으로 만든 화살대 연마기, 많은 뼈조각들이 발견되 었다. 고분은 도굴되었다. 봉분 가운데에는 검은 부식토로 채워진 길이 3.7m, 너비 lm 의 불규칙한 직사각형 묘광이 있었다. 이 묘광은 세로축 이 남북향이 다 (197. 92 쪽). 아브리꼬쓰 야산 서쪽 경사면의 정상부에서는 4 기의 고분이 발굴되 었다 봉분은 크지 않고 심하게 파괴되었다. 그 중 한 고분에서는 몇 점의 수제도기편, 원통형 또는 납작한 형태로 된 管玉 16 점, 많은 수의 뼈조각들이 발견되었다. 나머지 3 기의 고분에서는 부장품이 거의 발견 되지 않았다. 한 고분에서는 작은 철제 칼 하나와 뼈조각들이 발견되 었고, 다른 한 고분에는 뼈조각 하나가 발견되었고, 마지막 한 고분에 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봉분은 현무암 판석들로 만들었는데, 큰 판석에는 표면을 다듬은 혼 적도 있댜 그러나 묘실을 만들기 위해 따로 바닥을 팠던 혼적은 발견

역주 9) 쿠르간 (K yp raH) 은 원래 러시아 남부지역의 스키타이 무덤이나 우리나라 경 주의 고분처 럼 거 대한 봉분이 있는 高塚古壤을 가리 킨다. 이를 원용하여 연 해주에서는 봉분이 있는 무덤을 쿠르간이라 하고, 토광묘처럼 봉분이 확인되지 않는 것을 마길라 (Mor HJ1 a) 라고 부르고 있다 . 이밖에 빠그레베니예 (nor p e6e­ HHe) 란 용어가 있는데, 이것은 보통 마길라와 동일한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 나 때로는 합장 무덤의 경우에 전체를 하나의 마길라로 부르고, 각각의 묘광 울 하나하나의 빠그레베니예라고 부르기도 한다.

되지 않았댜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서 杜丹江 연안의 발해 고분과 마 찬가지로 지상에 현무암 판석으로 묘곽을 짜고 여기에 시신을 매장하 였을 것이다 뼈조각들에 불에 탄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화장을 했 움이 틀림 없다 (197. 92, 93 쪽). 노보빠끄로브까 고분군은 깊이 lm 의 묘광에서 직사각형의 청동 패 식, 철제 화살촉, 칼, 유리 구슬, 수제도기들이 발견되었다. 만주지역의 발해 고분군들은 훨씬 잘 연구되었다. 중국의 고고학자 들은 만주의 발해 고분군을 세밀히 검토하여 3 가지 기본 그룹으로 나 누고, 이를 다시 몇 개의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이리하여 발해 전 • 후 기에 속하는 고분들을 모두 9 가지 유형으로 세분하였다 (303. 4-14 쪽). 중국 고고학자들이 행한 발해 고분의 유형 분류는 장차 연해주의 발해 고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연해주에 분포하는 발해 유적들을 개관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몇 가 지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첫째, 토양이 가장 비옥한 강 연안의 중간 지점에 유적들이 집중되 어 있댜 게다가 각각의 유적 그룹에는 면적이 다른 유적들보다 더 크 고 행정 중심지의 역할을 하였음이 분명한 성터가 들어 있다. 둘째, 발해 솔빈부의 중심지에서 가까운 지역들인 라즈돌나야강 중 류와 그 지류들에는 방어시설이 없는 커다란 주거유적들이 밀집되어 분포한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성터, 취락지, 고분군과 같이 모든 범주 의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 지역이 발해 수도에 속한 다른 州들에 더 가까이 위치한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곳은 사람 들의 경제생활에서 가장 풍요한 지역이었으니, 연해주에서 토양이 가 장 비옥하고 기후가 좋은 곳에 해당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풍요한 생 산조건을 만들어 주어 특히 농업과 목축을 발전시킬 수 있게 하였다 . 이런 까닭으로 라즈돌나야강 유역을 적극적으로 개척하게 되었던 것이다 . 셋째, 연해주 동쪽에서는 평지성이나 방어시설이 없는 취락지가 발 견되지 않는데, 이곳이 산성이나 산 위의 보루를 쌓아 방어하던 국경 지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지역에 사람들이 별로 거주하지 않았던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넷째, 가본적으로 연해주의 남부 해안에는 또 다른 유적 그룹이 있 댜 이들은 대부분이 어로와 관련된 유적이고, 끄라스끼노 성터만이 이 와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다섯째, 인구가 밀집되는 원인의 하나는 각각의 경제 구역에서 주민 들이 전문화되면서 형성된 다양한 경제적 잠재력으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 마지막으로, 연해주의 북부와 북동부 지역에서는 발해 유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이 지역들에 대한 고고학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꽤 많은 중세유적들이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실물 자료가 없어서 아직까지는 발해시기로 연결시키 기가 곤란하다.

제 3 장 발해시대 연해주 주민의 물질문화 1 집자리와 종교 건축물 일부 연구자들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71. 51, 64 쪽), 최근 20 여 년간 연해주에서 이루어진 발굴에서 발해인의 집자리와 관련된 폭넓고 홍미 있는 자료들이 확보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연 해주 주민들이 영위하였던 물질문화의 한 요소를 학문적으로 검토할 수 있도록 해줄 뿐만 아니라, 고대 퉁구스어 종족들이 극동 민족들의 집 건축 발전에 기여한 역할을 평가할 수 있게 해준다. 발해 집자리는 구조적 특징에 따라 반움집 1) 과 지상가옥이라는 두 유 형으로 분류된다. 첫째 유형인 반움집들은 니꼴라예브까(血 KO Ji aeBKa) I 성터와 마리야 노브까 (Ma p b .sI HOBKa) 성 터 에 서 발견되 었고, 까쁘이 또 (Komrro) 절터 와 나 란히 발견되기도 하였다. 니꼴라예브까 I 성터에서는 2 기의 반움집이 발굴되었다 (214). 이들은 장방형 구덩이 모양을 하고 있고, 의부의 측면을 따라서 기둥구멍과 역주 1) 움집(堅穴)과 반움집(半堅穴)의 구분은 구덩이의 깊이보다는 地上骨組의 존 재 여부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죽 움집은 구덩이 위에 간단한 덮개 시설 만 되어 있는 경우이고, 반움집은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 시설을 한 경 우를 이른다.

벽에서 떨어져 나온 썩은 나무들이 확인되었다. 그 중 1 기에서는 타원 형 화덕자리 2) 가 거의 중앙에서 조사되었다(그림 6. 1).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는 두 개의 건축평면이 조사되었다. 하부 건축평면에서 32 기의 반움집이 발견되었는데, 대부분이 파괴되어 모두 8 기만 복원할 수 있었다 (212-214) . 이 집자리들의 특징은 입구가 마치 곁방처럼 만들어졌다는 점이다(그림 6. 4). 입구인 곁방의 크기는 다양 하였다. 입구가 집자리와 연결되는 부분에서는 흙으로 만든 계단이 조 사되었는데, 때로는 흙이 집 안쪽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서 아래쪽에 돌을 약간 깔았다. 화덕자리는 입구 가까이에 위치하며, 몇 개는 돌로 둘러싸여 있다. 상부 건축평면의 집자리들은 하부 건축평면의 것들을 연상시킨다. 평면은 모두 사각형이지만 입구인 곁방은 확인되지 않았다. 마리야노브까 성터에서는 발해시기에 속하는 두 개의 건축평면이 조 사되었다. 하부 건축평면은 반움집들이고, 상부 건축평면은 생산 기능 의 유구들이 다 (233. 45-47 쪽 ; 234. 47-53 쪽 ; 235. 60-68 쪽). 집 자리 의 보존 상태는 좋지 않다. 집자리는 모서리가 아주 둥글게 되어 있는 직사각 형이고, 바닥은 생토충에서 0.3-0.4m 아래로 파들어갔고, 세로의 벽이 정방향을 하고 있다 .3) 까쁘이또 절터를 발굴할 때에 북서쪽 담장 바깥에서 화덕자리가 있 는 작은 반움집 하나가 발견되었다. 바닥에는 현무암 판석을 깔았고, 에.뷔].샤브꾸노프의 의견에 따르면 지상 부분은 겉에 흙반죽을 바른 갈 대 엮음으로 만들었다 (1 CJ7. 76-78 쪽 ; 228).

역주 2) 화덕과 관련된 용어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oqa r : 화덕(움집), ne'l b : 가마(도자기 窟), rop H : 풀무화덕(대장간) 역주 3) 정방향 (CTO poHl,I CBeTa) 이란 4 개의 벽면이 각기 방위와 정확하게 일치할 때 에 사용되는 용어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식으로 따진다면 남북향과 동서향 을 아우르는 말로서 약간 모호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 。 드jM0j~00-1, 0 ,A 。f _iI ' \5»다.' A A_ __ / \4 ‘ O:0;::-!_\00f二 0三二ooo• 'ooQ 31 : ___ ; 락취6.,5 ;까브제예고 II르노보 8.터성2,- 4 ;까브I 예꼴니 성까브예라꼴1:도면 단 와도면6. 의들리자집 발해 그립 돌.r,리자화덕,B ,멍구6. ,선계경 이덩 구리자집a. 설 호기 7.터성 브예제르고보노

라둥기 터의니. :명평까

발해 유적에서 발견된 반움집들은 공통적인 특징을 지닌다. 이들은 평면이 妹角長方形을 하고 있고, 면적은 평균 10m 이댜 바닥은 가장 낮은 것이 0.4m 이고 가장 깊은 것은 1. 35m 로서, 평균 lm 정도 생토층 을 파고 들어갔다 . 돌로 쌓은 화덕자리는 입구 가까이에 위치한다. 집 구덩이의 외부 측면을 따라서는 흔히 기둥구멍들이 있다. 발해 반움집은 입구의 구조를 기준으로 하여 입구가 벽에 시설된 것 (77. 321 쪽)과 곁방 형태로 되어 있는 두 개의 유형으로 다시 분류할 수 있댜 곁방 형태의 입구는 현재로서는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만 발견되었다. 이 입구들은 강 쪽으로 나 있다. 발굴된 구역을 볼 때 집 들이 열을 지어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유형의 집 자리 가 처 음에 는 알레 니 (OJ ieH HA) I 주거 유적 과 같은 얀꼽스끼 문화유 적에서도 발견되었다 (37. 73 쪽). 웨이 . 볼딘은 홍미있는 형태의 발해 반움집터를 연해주 악짜브리 (O I<­ T.l l6 p b ) 구역의 꼰스딴찌노브까 취락지에서 발견하였다 (219. 26-30 쪽) . 이곳에서 발굴할 때 7.9 X 6.2m 크기에 깊이가 lm 정도인 직사각형 평면의 반움집 구덩이가 발견되었다. 이 구덩이의 세로축은 남북향이 고, 입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동쪽 부분은 라즈돌나야 (Pa3 }l 0 Jl bHa .ll) 강에 깎여 나갔다. 구덩이의 벽을 따라 반움집의 骨組를 이루었던 직 경 25-50cm, 깊이 40-65cm 의 기둥구멍들이 14 개 발견되 었댜 기둥구 멍의 밑 부분으로 보건대 기둥 직경은 20cm 를 넘지 않았다. 기둥 사이 의 간격은 보통 0.8- l. 2m 인데, 간혹 0.4m 인 경우도 있댜 집자리의 가 운데 바닥에서 직경 15-28cm, 깊이 15-20cm 의 또 다른 구멍 6 개가 조 사되었는데, 이들도 틀림없이 지붕을 지탱하던 기둥을 박았던 것들이 다. 사실 기둥구멍의 배열에서 일정한 질서를 찾지는 못했지만, 전체적 으로 이 반움집이 기둥을 박아 골조를 만든 구조를 하고 있었던 사실 만큼은 지적할 수 있다. 집 구덩이의 북측에서 부식된 나무 조각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기둥에 구멍을 내서 그 속에 나무를 끼워 벽을 만들었음이 틀림없다. 집자리의 사방 둘레를 따라 기둥선 밖에서 기와편들이 대량으로 발견

되는 것으로 보아 기와 지붕을 하고 있었고, 특히 4 면으로 경사진 지 붕을 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 4) 기와는 거칠어서 손으로 빚은 것이 분명하다. 수키와와 암키와의 두 종류가 발견되었다. 수키와는 길이 44cm, 너비 17.5 -1 9.Scm, 두께 0.7- l. 2cm 이다. 암키와는 길이 44-46cm, 너비 업 -29cm, 두께 2-2.2crn 이댜 집자리의 북쪽 절반에는 외고래인 기자형의 쪽구들 5) 이 잘 남아 있 댜 여기에는 아궁이와 굴뚝도 달려 있었다 . 쪽구들의 너비는 1- l. 2m 이 다. 아궁이는 동쪽 벽에서 가운데쯤에 위치하고, 아궁이 입구가 집자리 내부에 있다. 아궁이는 돌로 문처럼 만들었는데, 발굴 당시에는 측면의 벽에 붙였던 높이 40cm 의 판석 두 개만이 남아 있었다. 아궁이 위를 덮었던 돌을 포함하여 다른 돌들은 많은 수의 점토혼합물과 함께 아궁 이 내부와 주위에 흩어져 있었다 . 아궁이 바닥은 오렌지색으로 달구어 져 있었고, 0.8Xl .8m 크기에 깊이 25cm 인 부정형 구덩이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 구덩이는 재로 채워져 있었는데, 재 속에서 바닥이 위로 향 하게 뒤집힌 도기가 1 점 발견되었다. 아궁이에서 쪽구들의 고래가 시작되었다. 고래는 동쪽 벽을 따라 2.8m 나 이어지다가 집자리의 북동쪽 모퉁이에서 서쪽으로 꺾어져 북서 쪽 모퉁이까지 이어졌다. 여기서 고래가 밖으로 연결되면서 위쪽으로 완만하게 경사져 있었다. 2m 거리에 굴뚝이 있는데, 커다란 사암 판석 을 몇 충으로 쌓아 만든 60 X 60cm 크기 에 깊이 85cm 의 상자 모양을 하고 있었다 집자리 내부에서 볼 때 고래는 벽으로부터 20cm 떨어져 역주 4) 본문은 4 면이 경사진 지붕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맞배지붕이 아니라 우진각 지붕이나 팔작지붕이었음을 의미한다 . 예를 들어서 아브리꼬쓰 불당의 복원 도는 지붕이 2 충으로 되어 있는데, 위충은 팔작지붕이고 아래충은 우진각지 붕으로 되어 있다(에꿰 샤브꾸노프 저 • 송기호 역, r 沿海州의 발해 문화 유 적」 『白山學報』 30 • 31 합 , 1985, 452 쪽) 역주 5) 지금처 럼 방 안에 온돌장치를 전면적으로 하지 않고 두 개 내지 세 개의 벽면을 따라 일부에만 시설한 것을 중국어 발음을 따라 일반적으로 캉(抗)이 라고 부르고 있고, 러시아에서도 역시 깐 (KaH) 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이 글에 서 는 <쪽구들>로 번역 하겠다.

있었다. 고래의 벽은 5-lOcm 두께의 납작한 사암 판석들을 15-20cm 깊이로 묻으면서 수직으로 세워 만들었다. 고래의 벽 내부는 심하게 그을어 있었다. 고래 너비는 평균 50cm 이고, 깊이는 30-35cm 이다. 집 안쪽으 로 향한 벽은 그 바깥쪽에 짚여물을 섞은 점토와 자갈을 3-4 줄로 쌓아 보강하였는데, 높이는 바닥으로부터 40-fun가 되고, 너바는 20-30cm 가 된 다. 이렇게 짚여물을 섞은 흙반죽으로 자갈벽의 표면과 구들 위에도 세밀하게 발랐다. 고래 안쪽을 따라 0.7-l. 4rn 간격으로 늘어선 5 개의 기둥구멍이 발견 되었다. 고래 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기둥을 세우고 나무판을 벽에 둘 렀던 것임이 틀림없다. 집자리의 북쪽 부분에서는 쪽구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다. 크기는 직경 85cm , 깊이 30cm 이고, 바닥은 심하게 그을었다. 연해주 중세유적에서 의고래의 쪽구들이 있는 집자리가 이전에는 발 견된 적이 없었다. 다만 이런 유형의 집자리는 초기 철기시대 유적에 서 만 발견되 었을 뿐이 다 (37. 74- 7. 8 쪽 ; 51. 60, 6 i쪽). 아울라 이 와 유사한 쪽구들이 고구려에서도 널리 사용되었으니 (254. 17 쪽), 발해인이 고구려 인으로부터 이러한 쪽구들을 차용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 유형 인 지 상가옥은 끄루글라야 (K py rn aJI) 야산의 노보고르제 예 브까 (HOBorop neeBKa) 성터, 스따로레첸스꼬예 (CTa po p e t.1 eHc 1< oe) 성터, 보 리 쏘브까 (6o p 0COB I< a•) 취 락지 , 꼬르싸꼬브까 (Ko p ca 1< 0B 1< a) 취 락지 , 노보고 르제예브까 취락지에서 발견되었다.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에서는 발해시기에 해당하는 두 개의 건축평 면이 조사되었다 (28;218;221-223). 두 건축평면의 집자리들은 야산 경 사면에 만들어진 계단형의 조그만 공간들에 자리잡고 있다. 이 때문에 집의 출입구는 지형에 따라 나 있다. 하부 건축평면의 발굴 과정에서 6 기의 집자리를 찾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들 모두의 보존 상태는 아 주 나빴는데, 나중에 다시 집을 지으면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상부 건축평면에서는 8 기의 건축 유구가 발견되었다.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의 집자리들은 모두 평면이 사각형인 지상가 옥으로서, 기둥을 세워 골조를 만든 구조를 하고 있고, 벽은 정방향을 하고 있으며 , 서쪽에서 동쪽으로 열을 지어 있었다. 하부와 상부의 건 축평면에 있는 집자리들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하부 건축평면의 집 자리들은 생토 속으로 5-lOcm 정도로 약간 들어갔고, 면적은 12-30m2 이며 , 화덕자리는 입구 가까이에 있다. 상부 건축평면의 집자리들은 평 평한 땅 위에 건축되었고, 면적은 30m2 이상이며, 집자리 내부에 쪽구 들 형태의 난방장치가 있다. 이들 난방장치의 평면은 여러 가지로서, 亡자형, 기자형, 일직선형이 있는데, 고래는 1 개나 2 개씩 있다(그림 6. 6, 7). 상부 건축평면의 집자리 근처에서는 저장구덩이들이 발견되었다. 끄루글라야 야산에서 북쪽으로 떨어져 있는 주거유적을 발굴하면서 집자리 1 기를 발견하였는데, 고래가 두 개인 기자형의 쪽구들이 시설 되어 있었다 (223). 이 집자리는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의 상부 건축평 면 집자리와 유사하여 지상식을 하고 있었고 벽은 정방향을 하고 있었다. 성터와 나란히 위치하는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에서는 3 개의 건축 평면이 발견되었고, 중간 건축평면에서는 집자리들이 발견되었다. 골조 -기둥 구조를 하고 있는 집자리 5 기가 발굴되었는데, 평면은 모두 직 사각형이다. 어떤 것은 생토 속으로 7-15cm 정도로 약간 들어갔고 내 부에 화덕자리가 있었으며(그림 6. 5), 다른 것은 지상에 바닥이 있고 내부에 쪽구들이 있었다(그림 6. 6). 스따로레첸스꼬예 성터에서는 발해시기에 해당하는 두 개의 건축평 면이 발견되었다 (224). 상부 건축평면에서는 지상식 집자리 1 기가 발견 되었댜 기둥구멍이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정확한 형태를 알 수는 없 지만, 평면은 직사각형에 가까웠을 것이다. 집자리 내부에서 동서로 뻗 어서 한 구역을 이루고 있는 6 ) 두 고래 쪽구들이 발견되었다. 꼬르싸꼬브까 취락지에서도 강물로 파괴된 집자리 1 기가 발견되었다

역주 6) 바로 뒤에 설명이 나오겠지만, 쪽구들이 집자리의 벽 하나를 따라 곧게 뻗 어 있는 것을 한 구역, 기자형으로 꺾여 두 벽에 걸쳐 있는 것을 두 구역, 亡 자형으로 다시 꺾여 세 벽에 걸쳐 있는 것을 세 구역으로 부르고 있다.

(216. 16). 남아 있는 부분을 통해 판단하건대, 집자리는 평면이 직사각 형이었댜 북서쪽 벽의 집자리 내부에서 두 고래 쪽구들의 한 구역이 발견되었다 , 발해시기의 지상식 집자리들은 모두 골조_기둥의 구조이고, 평면이 사각형이며, 가로와 세로가 정방향을 하고 있다. 지상식 집자리들은 난 방장치를 기준으로 하여 화덕자리가 있는 것과 쪽구들이 있는 것의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화덕자리가 있는 지상식 집자리는 5-lOcm 정도 생토 속으로 파들어 갔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쪽구들 장치는 고래가 걸쳐 있는 구 역의 숫자에 따라, 외고래 • 두 고래 • 세 고래의 한 구역(일직선형) 쪽 구들, 두 고래 • 세 고래의 두 구역(기자형) 쪽구들, 외고래 • 두 고래의 세 구역 (c 자형) 쪽구들로 구분된다.?)

니꼴라예브까 11 성터의 상부 건축평면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기초를 쌓고 세운 건축물도 지상식 집자리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163 . 7 쪽; 212. 67 쪽). 이 건축물들은 평면이 사각형을 이루고, 건물 둘레를 따라 높이 50cm, 너비 20-35cm 가 되게 자갈을 3_4 줄로 빽빽히 쌓아 기초를 만들었다(그림 6. 8). 이 건축물들의 장축은 남서-북동향이고, 면적은 35-70m2 이다 이 건축물들은 다른 집자리들과 규모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출토 유물로 보건대 이들은 생산과 관련된 건물이었다. 따라서 연해주의 발해 집자리는 반움집과 지상가옥의 두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각 유형마다 집자리 숫자가 아주 많아서, 엘.예.셰메니 첸코는 발해 문화에 지역적인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163. 20, 21 쪽). 만약 그녀의 의견에 동의한다면, 반움집이 있는 첫번째 그룹의 유적 에 미하일로브까 (Mmca 助 OBKa) 구역의 니꼴라예브까 I, II 성터, 끼롭스 • 끼 구역의 마리야노브까 성터, 까쁘이또 야산에 반움집터가 있는 우쑤 리스끄 구역의 불교 사원이 해당된다• 지상가옥이 있는 두번째 그룹의

역주 7) 원문에 r 자형, n 자형으로 되어 있던 것을 기자형, 亡자형으로 번역하였다.

유적에는 아누치노 (AH yl! HHO) 구역의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및 취락지, 우쑤리스끄 구역의 끄로우노브까 (K po ytt OBKa) 취락지와 보리쏘브까 취 락지, 악짜브리 구역의 스따로레첸스꼬예 성터가 해당된다 . 어떤 경우 에는 끄로우노브까강 연안의 까쁘이또 야산과 끄로우노브까 취락지 및 보리쏘브까 취락지처럼 두 그룹의 유적이 나란히 위치하기도 하고, 아 누치노 구역에 있는 첫번째 그룹의 유적들이 두번째 그룹의 유적들을 북쪽의 끼롭스끼 구역과 남쪽의 미하일로브까 구역으로 갈라놓기도 한 다. 여기서 우리는 두 그룹의 유적들이 발해 문화의 지역적 변종이 아 니라, 각각 다른 시기인 전기와 후기에 존재하였던 유적임을 알 수 있 다 이러한 결론은 연해주 발해 유적을 편년한 엘예셰메니첸코의 의 견과도 일치한다 (163. 18, 19 쪽). 결국 첫번째 그룹은 전기에 속하고, 두 번째 그룹은 후기에 속하는 것이다 . 이에 덧붙여서 첫번째 그룹에 특징적인 반움집터가 발견된 까쁘이또 야 산의 절터는 8 세기로 편년되고 있음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1 CJ7. 78, 91 쪽). 발해인의 반움집터가 그 이전 시기의 연해주 집자리와 많은 유사점 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8. 39 - 46 쪽 ; 37. 65, 79 쪽 ; 138. 7-9, 20, 21, 157, 158 쪽)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예를 들어서 얀꼽스끼 문화(기원전 7-5 세 기) 유적에서 내부에 화덕자리가 있고 평면이 직사각형인 골조 구조의 반움집터들이 발견된 바 있다. 집자리의 방향은 지형에 따랐다. 니꼴라 예브까 II 성터에서처럼 골조 구조를 한 일부 반움집터에서 입구인 곁 방이 발견된다는 점은 홍미로운 일이다. 발해 집자리와 끄로우노브까 문화(기원전 1 세기-기원후 3 세기) 집자리도 구조에서 많은 유사점이 있 다. 두 시기의 반움집터는 면적이 7-32m 2 이고, 생토를 0.6 - lm 정도 파 서 지었으며, 평면이 직사각형이고, 입구가 언제나 강 쪽으로 나 있다. 끄로우노브까 문화의 집자리에서도 입구인 곁방이 발견되곤 한다• 이 웃 지역과 비교해보더라도 이들 유적은 말갈 문화로 불리고 있는 아무 르강 중류의 집자리들과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62. 42 용 7 쪽). 아무르강 유역에서는 반움집이 신석기 초기부터 중세 말까지 알려져 있다 (64. 75, 93 쪽). 기원전 1 천년기의 뿔째 (no Ji b J..t e) 문화 8) 에서부터 시작

하여 아무르 중류와 하류 지역에는 두 가지 유형의 집자리가 나타났으 니, 하나는 입구가 굴뚝을 통해 나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입구가 좁고 길다란 도랑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6 1. 130 쪽). 뿔쩨 문화는 말갈 문화로 교체되었댜 집자리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사각형 반움집으로 면적은 12m 러고, 생토를 0.6-0.7 m 파고 내려갔댜 화덕은 기본적으로 집자리 중앙에 위치한다 . 예.이.제례반코는 말갈 집자리를 두 유형으로 분류하였으니, 하나는 굴뚝울 통해서 입구가 나 있는 것이고, 다른 하 나는 벽장 형태나 곁방 형태의 입구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발해 초기의 집자리가 그 이전의 일부 말갈 집자리들과 구조 적으로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두번째 그룹의 유적에는 스따로레첸스꼬예 성터,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와 취락지, 끄로우노브까 취락지, 보리쏘브까 취락지가 있다. 이들 유적에서는 지상식 집자리가 특징적이고, 전기에 화덕이 사용되다가 후기에는 쪽구들이 동장한다.

역주 8) 아무르강 연안의 고고학 편년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후기 구석기 • 중석기시대 꾸마르이 (Ky Ma p1 ,1) ill 유적 : 30,000-25,000 년 전 2. 신석기시대 1) 아무르강 하류 지역 ®말르이쉐보 (M aJlhllll eBO) 문화 : 기원전 4 천년기 ®꼰돈 (KOHllOH) 문화 : 기원전 3 천년기 전반기 ®보즈네쎄노브까 (Bo J HeceHOBKa) 문화: 기원전 3 천년기 말 ― 2 천년기 전반기 2) 아무르강 중류 지역 ®노보빼뜨로브까 (HosoneT p osKa) 문화: 기원전 5 천년기 초 _4 천년기 ®그로마뚜하 (r p oMaT yx a) 문화: 기원전 4 천년기 - 3 천년기 초 ®오씨노보예 (OcHHOBoe) 호수 문화 : 기원전 3 천년기 ®아무르강 하류 문화 : 아무르강 하류의 주민 유입 기 3. 청동기시대(기원전 2 천년기) 4. 철기시대 O 우릴 (Y pHJJ) 문화 : 기원전 2 천년기 말-기원전 8 • 7 세기 ®뿔째 (nonb ij e) 문화 : 기원전 1 천년기 후반구기원 초기 ®昧腦 (Mox3) 문화 : 기원후 4 세기一 9 세기 중엽 5. 아무르 여진시대 빠끄로브까 (noK po BKa) 문화 : 9-12 세 기

연해주에서는 쪽구들이 끄로우노브까 문화(기원전 1- 기원후 3 세기)에 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데.엘브로쟌스끼는 쪽구들을 모두 조사하여 돌 로 둘러싸인 화덕에서 어떻게 쪽구들이 나타나게 되었는지롤 증명해 보였다 (35. 98-104 쪽 ; 37. 75-77 쪽). 바로 상자형 의 화덕 이 야말로 쪽구들 의 원형이었다. 홍미로운 것은 끄로우노브까 문화의 반움집터에서 쪽 구들 흔적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36 . 117-119 쪽). 何奴가 쪽구들을 발명하였고 그 후에 남아시아와 동아시아 전역으로 보급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59. 263- '2:1 2 쪽). 기원전 2-1 세기에 해당하는 이볼가 (HBO Ji ra) 성터에서 발견된 흉노의 집자리에서는 쪽구들이 벽을 따라 나 있었고, 판석을 세로로 세워 고래를 만들었다. 고래의 한쪽 벽 이 집자리의 생토 벽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다 . 집자리 자체는 면적 이 8-36m 까 되는 반움집으로서, 사각형 평면의 골조-기둥 구조를 하 고 있댜 일부 집자리에는 회랑과 같은 입구가 있었다. 아봅l l. 다브이도 바는 극동 민족들에게서 차용한 일부의 구조적 특성만 제의하면 이볼 가 성터의 집자리들이 모두 독자적인 기반 위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생 각하였다 (59. 262-300 쪽 ; 60. 14-22 쪽). 흉노 문화는 동쪽의 아무르강 유역 (60. 65 쪽) 및 연해주 (38. 46-50 쪽) 부족들의 문화를 포함하여 여러 문화들의 접촉으로 형성된 것이므로, 흉노 문화와 끄로우노브까 문화에서 집 건축의 유사한 요소들이 발견 되는 원인은 바로 그러한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끄로 우노브까 문화는 연해주의 남부 이와에도 중국의 인접 지역과 북한의 북부에 도 분포하고 있다 (38. 46-50 쪽). 끄로우노브까 문화는 중부아시 아 의 흉노와 동일한 시대에 존재하였다. 데.엘·브로쟌스끼는 끄로우노브 까 문화와 흉노 문화의 유물을 분석하여 쪽구들이 극동 지역의 끄로우 노브까 문화, 북한의 토성리 9) 문화, 만주의 夏家店 上層文化 지역에서 출현하여 일찍이 자바이칼로 전래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38. 49 쪽).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쪽구들이 달린 발해 집자리들은 언제나 지상식

역주 9) 원래 태성리 (TX3COH p ll) 라고 되어 있지만 아마 토성리의 잘못으로 여겨진다.

혹은 생토층으로 약간 들어간 상태이다. 거란의 쪽구들은 발해의 영향으 로 나타났다고 여겨지고 있는데(1 79. 259, 260쪽), 이는 옳은 생각이다. 한국 연구자들은 발해 문화가 고구려로부터 계승된 것이라고 얘기하 면서 그 근거로 고구려와 발해의 집자리가 서로 유사함을 들고 있고, 게다가 길고 따뜻한 구들 바닥이 고구려의 발명품이라고 확신하고 있 다 (254. 15-24 쪽). 중국 연구자들은 쪽구들이 漢 나라 때 중국 동북지 방 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237. 98 쪽). 따라서 쪽구들이 적어도 초기 철기시대에 극동 민족들이 발명한 것임에는 틀 림없는 것 이 다 (1 5.5. 51-53 쪽). 개량된 난방장치에 걸맞게 집 건축에서도 새로운 방식이 나타났다. 집은 골조 5 기둥 구조가 되었다. 집의 벽은 길다란 나무 막대기 를 엮어 만들고 그 위에 점토를 발라서 방의 온기를 유지하는 데 충분하도록 만들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발해에 쪽구들이 널리 보급된 원인으로서 지역적으로 겨울이 길고 춥기 때문이라고 파악한다 (249 . 39 쪽). 아무르강 유역의 씨까치_알랸 (CHKa 'i_幻퍄 H) 성터 JO) 에서도 쪽구들이 있 는 중세의 집자리들이 발굴되었다 (76. 159-162 쪽 ; 235. 2 - 8 쪽) . 조사자들 은 이 성터를 말갈 후기시대로 편년하며, 집자리는 쪽구들이 있는 반 움집터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이러한 오판은 야산 경사면에 있는 계단형 공간의 움푹 파인 부분을 집의 벽으로 간주한 데에서 기인하였다. 집을 짓기 위해서 계단형 공간의 한 면은 야산 경 사면을 깎아 만들었는데, 혼히 야산의 경사면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집 울 짓게 마련이다. 따라서 집자리는 실제로 지상식이었다 . 출토 유물로 보아서 씨까치-알랸 성터는 중세 초기로 편년해야 할 것이다. 예.이쩌 1 례반코는 말갈 주거지에서는 심지어 후기에도 쪽구들은 없었다고 말하 였다 (64. 93 쪽). 여진시대에는 연해주와 아무르강 유역에 쪽구들이 달린 집이 널리 여주 10) 하바롭스끄 시에서 북동쪽으로 75km 떨어진 곳으로 아무르강 지류의 남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언덕 아래의 강가에는 유명한 씨까치 - 알랸 岩刻 盡 가 널려 있고, 부근에는 나나이족 마을이 있는 곳이다.

보급되었다 (65. 152-161 쪽 ; 135. 229-301 쪽 ; 199. 72-89 쪽). 이때에는 쪽구 들의 구조가 복잡해지고 집 건축에 일정한 규칙이 어렴풋이 보인다. 모든 집자리들은 지상식 골조-기둥 구조가 되고, 내부에는 쪽구들이 있댜 달리 말하면, 발해시기에 이루어진 건축방법이 여진시대에 완전 히 보존되었고, 심지어 20 세기까지도 계속 살아 남았다. 지금까지 연해주에서 종교 건축물인 절터가 4 군데에서 발견되었다. 이 절터들, 더 정확히 말해서 佛堂들은 列柱式 건축물에 속한다.11) 셋은 까쁘이또 (KonbITO), 아브리꼬쓰 (A6p HKOC), 보리쏘브까 (Bo p HCOBKa) 에 있는 데, 이들은 率賓府의 중심지였던 우쑤리스끄 구역에 위치한다 (lITT. 60 쪽). 네번째는 龍原府 아래의 鹽州가 자리잡고 있던 하싼 (Xaca tt) 구역 의 끄라스끼노 (K p aCKHHO) 성터에서 발견되었다 (197. 59 쪽). 절터는 에체.샤브꾸노프가 1958-59 년에 처음으로 조사하였다 (192. 173-186 쪽 ; 197. 74-80 쪽 ; 228-230). 그 중 하나는 끄로우노브까강(과거 의 차피고우강) 연안에 솟아 있는 까쁘이또 야산의 평탄한 정상부에서 발 견되어서 까쁘이또 절터 또는 불당 자리라고 불리고 있다. 이 불당 자리는 거의 정사각형이고 면적은 30rn 2 (6X5m) 이며, 벽은 정방향을 하고 있다. 불당의 기초를 돌아가면서 무너져 내린 돌로 이 루어진 너비 1.5m , 높이 0.6m 정도의 사각형 유구가 있었는데, 처음에 는 외부에서 벽을 둘러싼 장식용 벽이라고 해석하였다 (lITT. 75 쪽). 그러나불당의 평면도와 충위도를 세밀하게 분석해보니, 이 유구를 약간 달리 해석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는 암반 위에 입구를 내기 위 한 곳만 제외하고 현무암 판석을 하나하나 촘촘히 짜맞추어서 사각형 평면의 벽 기초를 만들었다. 다음에 이 사각형 기초의 내부에 약 0.4m 정도의 두께로 붉은 점토를 채웠다. 그 다음에는 내부에 같은 높이로 역주 11) 종래에는 모든 불교 건축물을 불교 사원 (6 y꼬 HACKHA x p떠)으로 일괄해서 불 렀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사원의 내부구조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불상이 안 치되었던 건물을 偶像堂 (K yMH P HJI)이라 부르고 있고, 이러한 중심 건물과 부속 건물을 합친 복합체를 불교 사원이라 부르고 있다. 이 책에서는 앞의 것을 <佛堂>, 뒤의 것을 <절터>로 번역하겠다.

돌을 평평하게 깔아서 9X-9 m 규모의 豪 地를 만들었다. 이 대지의 바깥 쪽에는 돌을 쌓아 보강하고 납작한 陶製板으로 덮었다 . 대지의 북동쪽 부분은 판석으로 평탄하게 만들었다. 대지 위에서는 l.5- 2m 간격으로 배열된 기둥을 받쳤던 납작한 주춧돌둘이 3 개씩 3 열이 발견되었다. 불당 입구는 북쪽에 있다. 입구에는 길이 1.2m , 너비 0.45m 의 현무 암 판석 3 개가 계단 형태로 남아 있다. 계단 양쪽에는 둥그런 현무암 을 쌓아 보강하였다. · 남쪽、에. - ~는 돌이 없이 대지의 기초가 절단되어 있 는 곳이 있어서 다른 입구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 홍미있는 것은 돌로 쌓은 기초를 덮었던 도제 판 가운데 덧무늬가 있다는 점이다 (197. 도판 XVII-1) . 불당 자리 곳곳에서 지붕에 사용되었던 기와편이 대량으로 발견되었 는데, 여기에는 암키와 • 수키와 • 착고 1 2) 의 세 종류가 있다. 기와들은 다 양한 크기의 둥그런 홈통 모양을 하고 있고, 기와 안쪽 면에는 거친 천 자국이 남아 있다. 암키 와는 길 이 40-43cm, 너 비 14.5-15cm, 두께 l. 5-2cm 이 다. 암막새 기와는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197. 도판 VI). 반원통형의 홈통 모양을 하고 있는 수키와는 길이 40-43cm, 너비 26-2& m , 두께 2-2.5cm 이다 그리고 수막새기와는 양식화된 연꽃무늬 로 장식한 원판으로 마감되어 있다 (197. 도판 X). 착고는 길쭉한 숫돌 모양을 하고 있는데, 한 면에 안쪽으로 약간 굽 은 半圓板形의 돌출부가 나와 있다. 따라서 이곳에 세운 건물은 대지 위에 기둥들을 열지어 세우고 기와 로 지붕을 덮은 형태를 · 하고 있었다 . 불당에서 13-18m 거리를 둔 북쪽과 동쪽 지역에는 돌담을 쌓았다.

역주 12) 着固 (KO Jl>IJ) bKOB 8JI 'l e p enH Q a) 는 마루기와의 일종으로서 적새 밑에 있는 기와 골을 막는 수키와이다. 처음에는 이 기와의 구체적인 용도를 알 수 없었고 형태가 마치 모자의 차양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으나, 지 금은 이 기와가 쓰이는 위치를 알게 되어 <마루 아래의 기와 >(nonr p e f5 Heeu 'l e p enHQ a) 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 이 글에서는 옛날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 고 있다 .

남쪽과 서쪽에는 돌담이 없는데, 그 대신에 야산이 아래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댜 불당에는 면적 약 0 .1 2 헥타르의 마당도 있지만, 대부분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마당 입구는 북쪽에 있으며 단순히 돌담을 절 단한 정도에 불과하였다. 절단부의 양쪽 가장자리를 따라 15m 거리에 현무암 판석들이 깔려 있는데, 기와로 지붕을 인 문을 세우기 위한 기 초석임이 틀림없다. 기와편 무더기는 입구 앞과 마당 돌담을 따라서 발견되었다 따라서 돌담 위에 목책을 세우고 그 위를 기와로 덮었음 이 틀림없댜 마당 입구에서 서쪽으로 2m 거리에 반움집 형태의 집작리 1 기가 발 견되었댜 집자리의 남쪽 벽은 돌담 바깥에 딱 붙어 있었다. 집자리는 약 4rn2(2X2m) 크기이댜 집자리 구덩이의 깊이는 남쪽 바닥이 약 0.6m 이고, 북쪽 바닥이 약 0.2m 이댜 구덩이의 벽은 현 `무 암 판석을 쌓 아 만들었다. 반움집터의 북동쪽 모퉁이에는 숯과 불에 탄 뼈들이 섞 여 있는 탄화물들이 있었다. 이 반움집터는 불당 문지기가 살던 곳일 가능성이 높다. 1960 년에 까쁘이또 불당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아브리꼬쓰 불당 자리가 발굴되었다. 이 불당은 끄로우노브까강 건너에 있는 나지막한 아브리 꼬쓰 야산의 완만한 북쪽 경 사면 에 위 치 한다 (194. 105 쪽 ; le.r t. 81-91 쪽 ; 230 쪽). 아브리꼬쓰 불당은 정사각형으로 면적은 49rn2(7X7m) 이고 정방향을 하고 있다. 건축물은 인공으로 쌓은 95m2(10x9.5m) 면적의 대지 위에 세웠댜 대지의 측면 전체에는 잘 다듬은 현무암 판석을 쌓았다. 판석 울 쌓기 위해 대지 둘레를 따라 너비 약 0.6m 의 도랑을 팠다. 대지는 사질점토를 다져서 0.5 -0 .8m 높이로 만들었다. 불당의 가운데 입구는 북서쪽에 있는데, 길이 0.6-lm, 너비 0.4 - 0.6m 이고 , 현무암을 판석으로 다듬어서 3 층 계단을 쌓았다. 두번째 입구는 맞은편인 남동쪽에 있었음이 틀림없댜 여기서도 계단 모양으로 쌓은 돌들이 확인되었다. 대지에는 나무기둥을 세웠던 주춧돌들이 있다. 모두 15 개가 발견되

었지만, 처음에는 5 개씩 5 줄로 25 개였을 것이다. 대지의 사방 둘레에서 기와 무더기들이 발견되었는데 , 불당 자리 내 부에는 없었댜 이것은 4 면으로 경사진 지붕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 에 . 퀘샤브꾸노프의 의견에 따르면, 지붕은 2 층으로 되어 있었댜 화재 가 났을 때 천정의 들보가 다른 골조 부분보다 먼저 타서 위충의 기와 가 용마루 끝을 장식하였던 邸尾와 함께 아래충으로 무너져 내렸다 . 이 때문에 치미 조각들이 기와 더미에서 제일 아래에 놓여 있었다 (197 . 84 쪽) . 불당 자리에서는 불에 달구어진 흙덩어리들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는 갈대로 엮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들은 벽에서 떨어져 나온 것임 에 틀림없다. 주춧돌에 나무기둥을 세워 건물 지붕을 지탱하면서 벽의 지주 역할도 하게 하였다. 벽은 갈대로 엮었고, 그 양쪽에는 짚여물을 섞은 흙반죽을 발랐다. 그 다음에는 입자가 고운 회반죽을 얇게 바르 고, 겉에 다시 상아색 물감을 칠하고 번개무늬로 장식하였다. 번개무늬 아래쪽으로는 붉은색 띠가 지나간다 (l

역주 13) 이 책에서 쓰인 러시아식 기와 명칭은 다음과 같이 우리가 부르는 명칭으 로 각각 대옹시켜 번역하였다. ® 암키 와 (H Hll

부고 M I 는 납작한 숫돌을 연상시킨다 (197. 도관 XXI). 하단과 상단의 너비는 각각 11cm 와 9cm 이고, 두께는 1. 5-2cm 이댜 길이는 알 수 없 댜 이 기와는 지붕마루를 덮는 데 사용되었다 . 착고는 까쁘이또 불당에서 발견된 것과 모양이 홉사하다 . 길이는 20-23.8cm 이고 너비는 10 . 5-12 . 5cm 이댜 이 기와는 지붕마루 아래를 따라 덮은 기와인데, 둥글게 돌출되어 있는 부분이 암키와의 오목한 부분에 맞닿았다. 수키 와 (197. 도판 XXIV, XXV) 는 반원통의 홈통 모양을 하고 있댜 수키와는 오목한 부분으로 밑에 놓인 두 암키와 사이의 톰울 덮는 기 와이댜 수막새기와 하단에는 장식이 되어 있는 원판이 붙어 있다. 수 키 와의 길 이 는 37-41cm 이 고, 상단 너 비 는 9-1 0 .5 c m, 하단 너 비 는 12-16.5cm 이댜 수키와 하단의 너비는 막새의 직경과 일치한댜 수키와의 변종으로 곱새기와가 있는데, 몸통이 굽어 있고 하단에 막 새가 붙어 있다 (197. 도판 XXV). 곱새기와의 크기는 일반적인 수키와와 동일하다. 이 기와는 두 방향의 지붕이 만나는 곳에 만들어진 지붕마 루 끝 부분을 덮는 데 사용되었다. 수막새 에 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양이 있다 (l

적에서도 발견된다고 지적하였다고 한다 . 역주 14) 러시아 학자들이 기와 건물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부족하여 부고와 적새를 혼동하여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의 부고는 실제로는 적새를 가리킨다 .

암키와 (197. 도판 XXII) 는 길이 40-45cm, 하단 너비 25-32cm, 상단 너비 2 1. 5-25cm 로서 홈통 모양을 하고 있댜 하단부가 각이 지도록 잘라낸 모서리기와도 암키와의 일종이다 . 모 서리기와는 장방형의 사다리꼴이거나 한 변을 자른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크기는 하단 너비가 23cm 이고, 측면 길이는 각각 37cm 와 16cm 이다. 암키와와 동일한 기능을 가졌지만, 지붕의 두 면이 만나는 지점에 사용되었다. 곱새기와와 함께 모서리기와가 존재하는 것은 지 붕 경사면이 두 개가 아니라 넷이었음을 입증한다. 암키와 하단부는 까쁘이또 불당에서 출토된 암키와와 동일한 문양으 로 장식되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꼬챙이를 비스듬하게 눌러서 눈 금을 낸 전나무문양도 발견되었다. 일부 기와에는 홈으로 파인 2 열의 평행한 줄무늬가 가로로 장식되고, 그 사이에는 눌러 찍은 작은 고리 형태의 圓圈文이 배열되어 있다. 원권문은 3 개의 고리가 삼각형으로 한 셋트를 이루면서 반복되고 있는데, 2 개는 아래 위로 찍고 나머지 하나는 그 옆으로 가운데에 찍었다. 일부 기와에는 작은 원들이 일직 선으로 배열되어 있다. 기와의 양쪽 바깥 부분에는 눈금들을 비스듬하 게 새 겼 다 (l

동쪽과 북동쪽 벽 근처에서 치문 편린들이 발견되었다. 치문 하나만이 부분적으로 수집되었는데, 속이 비어 있고 벽이 두터운 陶製品으로 용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높이 0.8m, 너비 0.3m, 길이 0.75m 이며 벽의 두께는 l. 5-3cm 이댜 머리는 반원통형으로 만들었댜 머리 앞 부분은 직각으로 떨어져 나갔는데, 절단부는 납작한 도제 덧장식으로 덮혀 있 댜 치문 머리의 세부는 대부분 덧무늬로 표현되어 있다. 불당 자리 안에서 塘佛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높이가 5cm 인 가장 작 은 불상은 양 손을 가슴에 대고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있는 부처의 모 습이댜 불상의 뒷면에는 작은 광배가 달려 있지만 일부만이 남아 있 다 (197. 도판 XXVII-1). 이와 유사한 것이 동경성 발해 상경 유적에서 다량으로 발굴된 적 이 있다 (317 . 도판 CV 田). 두번째 불상은 높이 4.5cm 로 얼굴 일부만이 남아 있다 (197. 도판 XXVII-2). 이의에도 일부 불상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이 더 있다. 커다란 귓 불을 가진 오른쪽과 왼쪽의 귀, 턱 부분, 오른손 새끼손가락, 오른발 발가락 일부분이 그것 이 다 (197. 도판 XXV 田 -2). 아브리꼬쓰 불당에서는 흙으로 빚은 塾造의 守護神像도 발견되었는 데, 높이는 8.5cm 이댜 입을 크게 벌려 드문드문 새긴 커다란 이빨을 드러내고 있고, 코는 넓직하고 눈은 사팔뜨기이다. 홍미로운 것은 눈동 자 자리에 흑갈색의 작은 돌을 끼워 박았다. 이마에는 장미빛 돌을 박 아 현명함의 표지인 이른바 <白 豪 >를 표현하였다. 백호 양쪽으로 깊 은 주름살이 나 있다 (l CJ?. 도판 XXVIII-1). 아브리꼬쓰 불당은 사방이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약 0 .1 2 핵타르 정도의 마당이 있다. 마당 둘레를 따라 담장 자리에 너비 약 lm 의 돌 무더기가 있었다. 마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포착되지 않았다. 아마도 마당 입구는 불당의 가운데 입구와 마주보고 있는 북서쪽에 있었을 것 이댜 돌담을 발굴하던 도중에 그 위에서 기와 조각들이 발견되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 사실은 돌담 위에 목책을 세우고 그 위에 기 와로 덮었음을 말해준다.

아브리꼬쓰 불당 근처에 있는 야산의 경사면과 정상부에서 현무암으 로 나지막한 봉분을 이루고 있던 고분들이 심하게 훼손된 채 발견되었 댜 이 중에서 5 기를 발굴하였는데, 모두 심하게 도굴된 것이었다(1 00. 100, 101 쪽 ; 194). 이 고분들은 아브리꼬쓰 및 까쁘이또 불당과 직접적 으로 관련되어 있었음이 틀림없다. 세번째는 우쑤리스끄 구역에서 발견되어 보리쏘브까 불당이라고 명 명되었댜 이 유적은 1971 년에 꿰예메드베제프가 발굴하였다 (14 1. 50 쪽). 이 유적에 대해서는 그 어느 곳에도 발표되지 않았다. 단지 발해 유형의 막새기와로 장식하고 기와 지붕을 한 열주식 건물이었다는 사 실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14 1. 49 쪽, 그림 1). 보리쏘브까 불당 자리에서 2 개의 靑銅小像이 발견되었다 . 첫번째 소 상은 두 손을 교차하여 배에 대고 있는 사람을 표현한 것으로, 머리에 서 다리까지 완전하게 남아 있다 (14 1. 51 쪽, 그림 2 ; 143. 352 쪽). 높이는 1 1. 3cm 이다 두번째 소상은 높이 7.&m 로 첫번째보다 약간 작댜 머리는 보존되 지 않았댜 남아 있는 부분은 몸통인데, 역시 양 손을 교차하여 배에 대고 있다 소상에는 라마승들이 입는 망토 유형의 의복 표현이 잘 남 아 있다 (14 1. 52 쪽, 그림 3). 두 소상은 모두 한쪽 면에만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앞에서만 보기 위한 것이다. 아래 쪽에는 제단에 꽂기 위해서 작은 막대가 달려 있다. 아뻬 . 아끌라드니꼬프는 두 소상이 가족이나 씨족의 조상숭배와 관련된 신성화된 官吏나 祖上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4 1. 52 쪽 ).16) 네번째 불당은 뷔].아볼딘이 끄라스끼노 성터의 북서 지역에서 발굴 하였다 (25. lffi , 190 쪽 ; 215 ; 216). 불당은 높이 약 1m, 면적 약 132rn2(12 X llm) 의 대지 위에 축조하였다 대지는 砂質土를 다져서 만들었댜 그 둘레에는 0.85X0.6m 크기에 너비 약 0 . 35m 인 현무암 판석을 2 열 돌렸 다. 판석 바깥면에는 두께 O.l m 정도의 점토를 발랐다. 대지 윗면은 대 역주 16) 그러나 사진으로 보건대 이들은 일반인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제단에 꽂아 두었던 불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부분 자갈로 다졌는데, 중앙은 작은 돌로 다졌고 중간에 모래층이 있 댜 바닥에 돌을 깔아서 불당 마루의 토대 를 만들었다. 이 대지 위에서 나무기둥을 세웠던 주춧돌 25 개와 주춧돌을 놓았던 5 개의 구덩이가 발견되었다. 따라서 기둥을 6 개씩 5 열로 30 개를 세워 지붕을 지탱하였다 . 기둥 사이의 간격은 약 lm 이다. 불당 면적은 72m 2 (9 X 8m) 이고, 귀퉁이가 정방향을 하고 있었다. 불당 입구는 남서쪽에 위치하는데, 여기에 l.3X 1 .3m 크기의 작은 계단이 있 었다 이 계단은 3 면이 2 열의 石列로 둘러싸여 있다. 대지 주변에 기와 더미들이 있고 그 사이에서 쇠못들이 발견되었다. 기와편이 가장 많이 발견된 곳은 대지의 남동쪽과 북서쪽이었다. 기와편이 배열된 상태와 모서리기와의 존재로 보아 불당 지붕은 4 면 이 경사져 있었다. 지붕 끝은 불당 벽에서 lm 이어져 대지 가장자리까 지 나와 있었다. 지붕 용마루는 건물 중앙을 따라 북서_남동쪽으로 나 있었음이 틀림없다. 대지의 입구 앞에서 발견된 기와편 사이에서 손으 로 빚은 테라코타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이 테라코타 제품은 지붕 용 마루에 놓았던 장식품의 흔적이다. 이 장식품은 올빼미 꼬리 모양을 하고 있댜 17)

입구에서 맞은 편인 두번째와 세번째 열의 셋째와 넷째 주춧돌 사이 에서 높이 O.l -0 .2m, 면적 약 1. 5m 떡 둔덕이 조사되었다. 이 둔덕에서 청동 불상이 1 개 발견되었다. 바로 이 장소에 불상을 안치한 제단이 위치하였을 것이다. 지붕은 기와로 덮었다. 끄라스끼노 불당 자리에서 발견된 기와는 암 키와, 수키와, 모서리기와, 착고의 네 가지로 분류된다. 암키와는 크기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뉜다. 첫번째 암키와는 길이 41. 5- 46cm, 앞면 너비 28_35cm, 뒷면 너비 24-2& m , 두께 2-2.2cm 이 댜 두번째 암키와는 길이 36_3 &m , 앞면 너비 15.2-24cm, 뒷면 너비 14.6-l&m, 두께 1. 6- 1. &m 이댜 암키와는 홈통 모양을 하고 있는데,

역주 17) 아마 賜尾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단부는 좁아지며, 屈曲度는 900 이다 1 8) 지붕 아래쪽 가장자리에 있던 막새기와만이 문양으로 장식되었다. 여기서는 네 종류의 문양이 발견되었다. 첫째는 막새 가장자리를 따라 손가락 자국들이 넓직하고 비스듬하게 찍혀 있다. 둘째, 셋째, 넷째 종 류의 문양은 서로 비슷하다 . 평행하게 두 줄을 긋고, 그 사이에 조그만 고리 모양이나 그 반쪽 모양으로 원을 눌러 찍어서 사슬처럼 배열하였 으며, 가장자리에는 가는 빗금을 눈금처럼 장식하였다. 수키와도 홈통 모양을 하고 있고, 굴곡도는 180° 이다. 수키와는 뒷면 가장자리의 형태에 따라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경우에는 수 키와가 뒤쪽으로 가면서 유연하게 좁아진 것이고, 두번째 경우에는 길 이 1. 7cm 의 미구가 달린 것이댜 후자의 경우에는 기와 뒷면 중앙에 못구멍 이 나 있다. 수키 와는 길 이 32.5-37.5cm, 하단 너 비 48-51cm, 상 단 너 비 30cm, 상단부 두께 1.5- 2cm, 하단부 두께 1 .l-1. 4cm 이 다 수막새기와에는 양식화된 연꽃으로 장식된 원판이 끝에 달려 있다 . 여기에서는 연꽃의 변종이 일부가 발견되었다. 첫번째 종류는 중앙에 볼록 튀어 나온 자방이 있고, 그 둘레에 5 개 의 連珠가 돌려져 있다. 다시 그 주위를 突 線 으로 된 원이 감싸고 있 다. 그 밖으로는 길다란 마름모꼴 꽃잎이 5 개가 浮 影되어 있고, 그 사 이 사이에 다시 5 개의 꽃잎이 간단히 부조되어 있다(그림 7). 제일 바 깥에는 테두리안 周緣을 돌려 이 모든 문양을 에워싸고 있다 (197. 도판 IX). 두번째 종류는 중앙에 자방이 있는데, 6 각형 浮影가 이룰 에워싸고 있다. 볼록 튀어나온 6 개의 연꽃잎은 이 6 각형의 角 쪽에서 조금 떨어 져 배치되어 있다. 연꽃잎들은 주연으로 둘러싸여 있다 . 꽃잎 사이에는 突線으로 만들어진 세 개의 잎무늬가 배열되어 있다. 이 모든 문양들 은 주연으로 둘러싸여 있다.

역주 18)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지만, 굴곡도가 90· 라는 것은 점토 원통의 1/4 울 이용 한 것을 의미하고, 굴곡도가 180 · 라는 것은 1/ 2 을 이용한 것을 의미하는 듯 하다.

수막새기와에 새겨 진 다 른 형태의 연 꽃 표현 들 은 편린 상태로 발견 되었기에 복원할 수가 없었다. 끄라스끼 노 불당 자리에서 모서리기와 조각도 발견되었다. 이 기와 의 두께는 1. 8cm 이고, 못구멍이 있다 기와편 이외에도 끄라스끼노 불당 자리에서 목조건축과 관련된 16 개 의 못이 발견되었다. 못은 길이가 10-14cm 이고, 단면은 흔히 직사각형 이지만 정사각형도 있다. 또한 단면이 직사각형인 4 개의 막대(軸)도 발 견되었다 . 제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불당 마루의 중앙 부분에서 불상들이 발견되었댜 한 불상은 금동 제품이다. 부처가 양 손을 교차하여 배에 대고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대좌 아래쪽에는 길이 4.5cm 의 막대가 달려 있는데 , 제단에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다(그림 8; 그림 9. 9) 바로 이 곳 에서 광배가 달려 있는 坐佛像을 입자가 고운 회황색 砂岩 에 浮影한 것도 발견되었다(그림 9. 8). 부처의 양 손은 배 위에서 교차 하고 있댜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높이가 9.5cm 이댜 이와 함께 판석 에 부처를 부조한 것도 몇 개가 조각으로 발견되었다(그림 9. 10-12). 아주 흥미로운 유물로는 방울꽃을 연상시키는 3 개의 鑄鐵製 風擇이 있다(그림 9. 5, 6). 그 중에서 하나는 6 면체로서 높이 14.5 c m , 직경 9.5cm 이다. 그리고 3 면에 반달형 구멍이 나 있댜 위에도 풍탁을 매달 기 위해서 끈을 꿰었던 구멍이 있다. 다른 두 개도 6 면체이고, 위에 구멍이 있다. 하나는 높이 12.3cm , 직 경 11.9cm 이고, 다른 하나는 높이 13cm, 직경 11.5cm 이다. 극동의 국가들에서는 불교 사원과 불당의 지붕 모서리에 방울을 달 아 장식하였는데 (53. 354 쪽, 그림 16), 고대 신앙에 따르면 그 소리농 악령을 놀라게 하여 쫓아내는 역할을 하였다. 발해시대 것으로서 완전하게 발굴된 3 기의 불당 자료를 검토해 보면 일련의 공통된 요소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불당은 돌로 축대를 쌓은 인공 대지 위에 건축하였다. 불당 입구에는 계단을 만들었고, 이 계단은 일반적으로 대지의 장축에서 가운데에 위치한다(얽. 그림 33,

그립 7. 끄라스끼노 성터(1)와 보리쏘브까 절터 (2) 에서 출 토된 수막새

35, 43). 이 대지 위에 열주식 건물을 축조하였다. 기둥은 목재였고, 그 아래에는 주춧돌을 깔았다. 주춧돌은 대부분 일부를 땅에 묻었지만, 경 우에 따라서는 단순히 열지어 땅 위에 올려 놓았다. 주춧돌 사이의 간 격은 약 lm 이다. 불당 평면은 직사각형이었다. 지붕 용마루는 건물 장 축을 따라 나 있고, 입체적 표현물인 치문으로 장식되었다. 지붕은 4 면 으로 경사져 있었고, 기와를 덮었으며, 일부 지붕의 모서리에는 풍탁을 매달았다. 일본 연구자는 에퀘샤브꾸노프의 발굴 자료를 토대로 아브리꼬쓰 불당을 복원하려 시도하면서 일부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것 은 건물이 정사각형이라는 것 19) 과 치문이 건물의 가장 윗쪽이 아니라

'i. 緊iitr。.. , .'. t尸U·」?i답초 .J `. [.< f

II'- /.’ \' ’ ,' oL. ,_ 一f‘ Jt 그림 8. 끄라스끼노 성터에서 출토된 금동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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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인 내림마루에 위치하였다는 것이다 (258 . 128-132 쪽). 실제로 불당 은 정사각형 (7X7m) 이었다 . 하지만 주춧돌이 심하게 교란된 상태였기 때문에 오판했을 가능성이 많다. 치문은 지붕 용마루에만 설치할 수 있는 것 이 다 (17. 그림 57).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불당 입구의 맞은편 쪽에는 佛菩薩들을 안치 한 제단이 자리잡고 있다 (86 . 160 쪽). 이곳에서 의식에 사용되었던 그릇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연해주 비짜지 (BHU3b) 灣 에서 발견된 불당 모양의 靑銅 佛板은 불당 을 복원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벽은 높이 7.5cm, 너비 약 역주 19) 江谷寬은 평면이 정방형이고 계단이 양쪽으로 나 있는 것을 근거로 塔자 리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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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부처가 안치된 불 당이 표현된 청동 불판 .

4.3cm 이댜 기와 를 얹은 불당 지붕은 처마가 옆으 로 심하게 뻗으면서 위로 약간 들려져 있다. 지붕 위에 는 용으로 표현된 치문이 두 개가 있는데, 이들은 입을 크게 벌려 마치 용마루 를 물고 있 는 듯 한 형상을 하고 있댜 불당 한가운데에는 배 위에서 양 손을 마주잡고 연 꽃 대좌 에 앉아 있는 부처가 표현되어 있다(그림 10). 까쁘이또 불당과 아브리꼬쓰 불당에는 담장으로 둘러싸인 마당이 있 었고, 둘 다 마을 변두리의 한적한 곳에 위치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 가 있다 게다가 에퀘샤브꾸노프의 의견에 따르면 까쁘이또 불당은 아브리꼬쓰 불당보다 더 이론 시기의 것이었다 (197. 91 쪽) . 보리쏘브까 불당도 위의 두 불당과 유사하게 자리잡고 있다. 끄라스끼노 불당은 성 안에 위치하였다. 아마도 끄라스끼노 불당은 위의 다른 불당들보다 사회적으로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불교 건축물들이 비록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모되기는 하였지만, 기 본틀은 수백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일본 연구자들은 연해주의 발해 불당은 형태상 인도나 중부아시아에서 발견되는 것과 아주 많은 공통 성을 지니고 있고, 발해 문화는 고구려 문화의 전통을 아주 많이 계승 하였다고 여기고 있다. 또한 중국은 당시에 동아시아 문화의 한가운데 에 서 있었던 주요 원천이었다 (258. 1'l7 , 132 쪽) . 2 농업과 수렵 • 어로 문헌자료는 현재의 연해주를 포함하여 발해의 북동지역 주민들이 목 축, 사냥, 어로에 종사했다고 전하고 있다 (197. 63 - 65 쪽). 그렇지만 발굴 자료는 문헌자료에 나타난 것보다 더 복잡하고 더 다양하였던 연해주 발해인의 경제활동을 좀더 완전하게 복원할 수 있게 해준다 . 8-10 세기 연해주 주민들의 경제에서 주된 역할을 한 것은 그 이전 시기에 시작되었던 경작농업이었다 (142 . 3-13 쪽). 확고한 정착을 보여주 는 유적들의 특성이나 입지와 더불어서 이러한 유적들에서 발견되는

농기구, 농업 생산물 및 목축 생산물이 이 를 증명한다. 주거유적이 위 치하는 장소는 일반적으로 부식 - 충적토로서 토양이 아주 부드럽고 풀 이 잘 자라며 과도한 습기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러한 토양은 농경에 가장 적합하다 . 발해인이 주거공간을 선정할 때에는 부드러운 충적토가 쟁기로 경작하기에 가장 적합하타는 점을 염두에 두었을 것 이다 (168. 216, 217 쪽) . 이밖에도 부드러운 충적토는 비옥한 이점도 있었다.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콩과 모밀의 탄화물이 발견되었고, 노보고 르제예브까 성터의 발해 층위에서 보리나 수수의 파종에 공반되는 강 아지풀 씨앗과 명아주 씨앗이 발견되었지만, 이것만으로는 8-10 세기 연해주에서 재배한 농작물의 종류에 대해서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 댜 하지만 이보다 이른 시기 유적에서 조, 수수 및 보리의 씨앗이 발 견되었는데 (7 . 224, 267 쪽 ;119. 148 쪽), 발해인도 틀림없이 이를 재배하 였을 것이다. 문헌자료는 발해에서 재배된 농작물의 종류가 아주 다양 하였음을 증명해준다 . 밭벼, 몇몇 종류의 수수, 조, 보리, 모밀이 여기에 언급되어 있다 (48 . 84쪽). 원예의 발달과 가공용 농작물의 재배 사실에 대하여는 발해 주거유 적에서 발견되는 야생화된 살구나무, 우쑤리스끄 자두나무, 일본 벚나 무, 뽕나무, 삼나무를 통해 판단할 수 있는데, 8-10 세기에 그 장소에서 재배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가공용 농작물 재배에 대한 간접적인 중거 품으로 土製 結鏡車와 흔히 내부에 거친 천자국이 남아 있는 기와가 있댜 연해주의 발해 유적에서 발견된 농기구들은 경작농업을 증명해주고 있는데, 유적에서 발굴된 일련의 농업용구들은 땅의 개간에서 수확물 의 저장에 이르는 농업생산의 전체 과정을 실제적으로 복원할 수 · 있게 해준댜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와 마리야노브까 성터 및 노보고르제예브까 취 락지에서 鑄鐵製 보습 조각과 벗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꼬르싸꼬브까 취락지의 저장구덩이에서 발견된 완형 보습은 코가 날카로운 짧은 구 두에 뒷축이 사라진 형태를 연상시키며, 평면이 거의 이등변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그림 11. 4). 보습 윗면은 편평하다. 바닥 부분에는 부정형 삼각형 구멍이 나 있는데, 이 구멍을 이용해서 보습을 쟁기 끝에 고정 시켰댜 고랑 바닥에 닿는 아랫면은 볼록하고, 아랫부분에 커다란 타원 형 홈이 있다 보습은 길이 32.5cm, 바닥 너비 27cm, 무게 3 .4 k g이댜 보습 형태는 女眞의 것과 아주 홉사하고, 구조는 고구려, 신라 및 중세 일본의 것과 가깝다 (23 . 9 쪽). 이와 유사한 보습들이 만주의 발해 유적 에서도 발견되었다 (24 1. 97 쪽 , 그림 25). 주철로 만든 벗은 원래 모습을 복원할 수 없는 상태이다. 망가진 상 태로 남아 있는 돌출한 고리 를 이용하여 벗을 쟁기 앞에 있는 버팀목 에 고정시켰을 것이다. 벗은 고구려인과 여진족도 사용하였다. 쟁기로는 초보적인 경작만 할 수 있다. 경작지에 파종을 하기 위해 서는 보완적인 농기구를 이용하여 일련의 다른 작업을 할 필요가 있었 다. 씨니예 스깔르이 (CHHHe CK 탸1,1) 주거유적의 중세 초기 층위에서 날 ’ 이 약간 오목하고 넓으며 투겁이 있는 철제 삽의 편린이 발견되었다 (6. 161 쪽). 이와 유사한 삽이 연해주 여진족에게도 있었다 (33. 128, 129 쪽). 꼰스딴찌노브까 취락지에서 지랫대 쇠촉 20) 이 발견되었는데, 역시 땅 울 경작하는 보완적인 농기구 그룹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지렛 대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부위인 쇠촉 부분은 피라미드 모양이고 횡단 면은 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지렛대 길이는 17 . 5cm 이고, 쇠촉 길이는 8.2cm, 너비 2.4cm, 두께 l. &m 이며, 투겁 직경은 3.&m 이다. 씨니예 스깔르이에서 이러한 지렛대 쇠촉 5 점이 수집되었다 (8. 163 쪽) . 이러한 지렛대는 여진족에게도 있었다. 쟁기를 사용한 농경민은 써레와 같은 보조적인 농기구도 알고 있었 댜 써레는 쟁기로 토양을 갈아 엎은 후에 흙덩이룰 잘게 부수고 잡초 와 수확한 농작물의 그루터기를 골라내는 데 사용하였다. 발해인이 써 레를 알고 있었겠지만 아직 단 하나의 부품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 역주 20) 지렛대 (ne lDHJI)는 길다란 자루 끝에 뾰족한 쇠촉(鐵鐵)을 끼운 것이다 . 쇠촉 은 뾰족한 쪽의 횡단면이 사각형 각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지렛대는 주로 얼 음을 깨거나 찍는 데 사용하고, 돌을 들어 올리는 데도 사용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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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실은 최근까지도 만주 농민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써레를 나무로만 만들었음을 추측하게 한다(1 74. 146 쪽).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 씨니예 스깔르이 성터, 마리야노브까 성 터,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수확용 도구인 철제 낫이 발견되었다 (8 . 163 쪽 ; 165. 66 쪽) .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는 완형 낫이 1 점 발견되었 다(그림 11. 3). 아 낫은 끝 부분을 조금 굽히고 나서 날 부분에서는 부 드럽게 폈으며, 날끝은 부리 모양으로 날카롭게 되어 있다. 낫의 길이 는 직선 거리로 19cm 이고, 최대 너비는 손잡이 부근에서 3.5cm 이댜 날의 단면은 쐐기형이다. 낫에는 슴베가 없었다. 자루는 낫의 편평한 뒷면을 이용하여 날에 직각으로 고정시켰다. 이와 유사한 유형의 낫이 여진시대까지 존재하였다 (23. 10 쪽). 곡물과 콩 종류를 탈곡하고 도정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도구들이 발 해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예를 들어서 곡물류의 껍질을 벗기고 알곡으 로 가공하는 데 쓰인 절구둘이 스따로레첸스꼬예 성터, 니꼴라예브까 II 성터 및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에서 발견되었다. 절구는 현무암이나 사암 덩어리를 파내서 · 만들었다. 절구통은 단면이 원추형이고, 절구 구 멍 은 직 경 18-20cm, 깊 이 20cm 이 댜 발해인은 절구 이외에도 손으로 돌리는 맷돌을 사용하였다 . 맷돌이 마리야노브까 성터와 아브리꼬쓰 취락지에서 발견되었다. 아브리꼬쓰 취락지에서 발견된 현무암으로 만든 윗 맷돌은 직경 30cm , 높이 11cm 로 커 다란 腕 모양을 하고 있다(그림 11. 1). 안쪽에 있는 완 모양의 구멍 은 직경이 12cm 이댜 중앙에 직경 4cm 의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여기 에 회전축을 끼워 윗돌을 아랫돌에 고정시켰다. 윗돌 가장자리에 돌출 부가 있는데, 여기에 자루를 끼우는 작은 홈을 파 놓았다. 맷돌의 출현 은 발해 경제에서 농업의 역할이 증대되었음을 증명한다. 니꼴라예브까 II 성터를 발굴하면서 곡식창고가 발견되었다. 평면이 직사각형인 구덩이로서 50Xl00cm 크기에 깊이는 50cm 이었댜 바닥은 불에 그울린 콩 종류로 덮혀 있었다. 구덩이의 나머지 부분은 재와 숯 으로 채워졌는데, 아마도 구덩이에 넣었던 나무상자와 곡물이 불에 탄

흔적일 것이다 연해주의 여진족들도 이와 같이 곡물을 저장하였다 (33 . 118-124 쪽). 거의 모든 발해 유적에서 다량의 가축뼈가 발견된다. 이러한 骨學 資料들은 대부분 제대로 연구되지 못한 상태이다. 단지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출토된 골학 자료만이 어느 정도 연구되었을 뿐이다. 이곳 에서 출토된 가축뼈를 가지고 가축 종류와 연령에 따라 각각의 개체수 룰 조사하였고, 8 세기 -9 세기 전반기 문화층과 9 세기 후반기 -10 세기 문 화층에서 출토되는 가축의 구성 비율을 파악하였다. 마리야노브까 성 터,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및 취락지에서 발견된 뼈들은 단지 가축 종류를 파악하고, 어느 정도 선에서 가축 연령표가 작성되었을 뿐이다. 문헌자료에는 연해주 발해인이 소를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에서 발견된 소뼈는 가축뼈에서 1 1. 8% 를 차지 하고,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는 아래 층위에서 16% 를 차지하고 윗 층위에서 19.6% 를 차지하며,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의 발해 층위에서 는 29.3% 에 달하고, 마리 야노브까 성 터 에 서 는 37.5% 까지 이 른다 (4. 81 쪽). 젊거나 미성년의 것이 많기는 하지만, 성년 및 늙은 소가 압도적 이다 8 세기 -9 세기 전반기에 해당하는 전기 단계에서는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의 경우에 젊은 소의 뼈가 42.3% 를 차지하였지만, 9 세기 후반부 -l0 세기에 해당하는 후기 단계에서는 그 양이 32.2% 로 줄어든다. 식용 으로 도살되는 동물에서 젊거나 미성년인 소의 비중이 줄어든다는 것 은, 소에 대한 관리가 나아지고 경제면에서 소의 이용 범위가 확대되 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골학 자료는 가축들에서 소가 증가하는 것을 말해주는데, 이것은 소가 고기로서보다는 사역에 더 필요하였기 때문 이었다. 주철로 만든 쟁기 부속품과 더불어 역시 주철로 만든 비녀못 이나 축받이통과 같은 수레 부속품들이 이러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 명 한다(그림 12. 17, 18). 문헌자료에는 말 사육에 대한 홍미있는 기록이 있다 . 발해시기에 현 재의 한까 (XaHKa) -우쑤리스끄 평원에 말 사육의 중심지로 알려진 率賓 府가 위치하였다 (197. 63 쪽). 발해인은 당나라와 말 무역을 하였고,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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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凰鷄爲 o II 덜~ I I I I I I 麟鬪昌 0L l I I I. 」IU 싸 그림 12 도제, 석제 및 금속제 제품 들 : 1-4 , 7-10, J2, 13, 17, 18, Z2, Z3, a}, 31- 34 . 니 꼴 라예브까 II 성터 ; 5, 6, 11, 14, 15, 파21, %-꼬 & 42.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 ; 41.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 16. 쓰므이치까(O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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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U ' 一 巳 。 3CM L-·-J -I 7 乙 그림 14, 철제 띠고리와 띠꾸미개 : 1, 2, 9. 니꼴라예브까 1I 성터 ;3, 4, 6. 노보고르제예 브까 취락지 ;5, 7, 8.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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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거란인에게 1 천 필의 말을 공물로 바치기도 하였다 (l CJ? . 55 쪽). 문 헌자료와 고고자료는 말이 전쟁에 널리 이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말타 고 활쏘기 시합을 하거나 말타고 공놀이를 하던 발해인의 풍습은 전쟁 연습과 관련되어 있다 (197. 111 쪽). 말을 타기 위한 馬具 에는 骨製 재갈 멈추개(그림 13. 4), 鐵 製 말굴레 고리, 철제 띠고리(그림 14. 5-9) 가 있 댜 말갈족과 마찬가지로 발해인도 경작시에 말을 이용하였을 것이다. 말뼈는 모든 발해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에 서 발 견된 가축뼈 전체에서 말뼈가 6.5% 를 차지한다. 노보고르제예브 까 성터에서는 10.2%,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의 아랫 층위에서는 13.7%, 윗 층 위에서는 15.6% , 마리야노브까 성터에서는 22.5% 를 각각 차지한 댜 이 들 자료는 말고기가 식용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일 반 적 으로 성년이나 늙은 말을 도살하였는데, 이것은 경제생활과 전쟁 에 말이 널리 이용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5. 75, 78 쪽). 돼지 사육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 돼지 사육은 연해주에 위치 하였던 鄭頓 府에서 특히 유명하였다 (197. 163 쪽). 따라서 연해주의 발해 유적에서 돼지뼈가 항상 다량으로 발견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 및 성터와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출토된 가축뼈에는 돼지뼈가 압도적이다.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에서는 돼 지뼈가 67.9%,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에서는 63.3%,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는 평균 42 .4%에 달하였다. 연해주 북쪽에 위치하는 발해유적 인 마리야노브까 성터에서는 약간 다른 상황을 보여준다. 이곳에서는 돼지뼈가 단지 'Z7 .5% 를 차지할 뿐이었다 (4. 81 쪽). 골학 자료는 8-10 세기 연해주 주민들의 축산업에 돼지 사육이 큰 비 중을 차지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돼지 사육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경비를 들이지 않고 주로 산록의 목초지에 돼지떼룰 대규모로 방목할 수 있었던 좋은 자연 기후 조건 때문이었다 . 발해의 일부 집자리에서 돼지 두개골이 매장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 데, 이것은 틀림없이 숭배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고구려인과 마찬가지 로 (68 . 166 쪽) 발해인에게도 돼지가 풍요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희생 동

물로 이용하였음은 역시 예외가 아니다 . 골학 자료에는 개뼈도 많다. 특히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개뼈가 많이 발견되었다 . 하부 건축평면과 상부 건축평면에서 246 마리 분의 개뼈 860 점이 발견되었는데, 전체 가축뼈의 25.8% 를 차지하는 것이었 다 . 마리야노브까 성터에서는 12.5%,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에서는 13.8%, 노보고르제 예 브까 성 터 의 발해 충위 에 서 는 7 .1%를 각각 차지 하 였다 개뼈는 대개의 경우 미성년과 성년의 것이었다. 늙은 개뼈는 발 견되지 않았다 (4. 81 쪽). 개는 생물학적 특성이나 관리면에서 돼지와 별 로 차이가 나지 않으므로 경제적으로 아주 유익하였다. 작은 뿔이 달린 가축의 뼈가 후기 철기시대 말기 2” 의 연해주 유적에 서 보인다 (7. 239, 241 쪽) . 이러한 동물뼈와 유사한 조각들이 니꼴라예브 까 II 성터의 문화층에서 발견되었다 . 이 동물뼈는 전체 가축뼈에서 단 지 0.04% 를 차지할 뿐이다 . 양이 존재하였다는 것은 무거운 방추차와 같은 일부 고고자료를 통하여 증명할 수 있다 (154. 100, 101, 105 쪽). 이 러한 방추차를 이용하여 털을 방적하였다. 꼬르싸꼬브까 취락지에서 양털을 깎는 데 사용된 용수철 가위 22 ) 가 발견되었다(그림 11. 2). 기후 조 건 때문에 연해주에서는 양 사육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발해 유적에서 비록 소수가 출토되었지만 의미가 있는 이상과 같은 농기구들은 8-10 세기에 연해주에서 경작농업이 고도로 발전하였던 사 정을 증언해주고 있다. 맷돌의 출현은 농업의 역할이 증대된 것을 보 여주는데, 특히 곡물류 재배의 비중이 커졌음을 말해준다. 이와 함께 경작농업은 돼지 사육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축산과 긴밀히 상호작 용하면서 발전하였다. 농업과 축산을 제외하고도 연해주 발해인은 그 이전 시기와 마찬가 지로 사냥, 어로, 삼림 채취, 바다 채취에도 종사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발해인이 의국에 수출하였던 다음과 같은 생산물들이 말해준다. 호랑 역주 21 ) 여기서 지칭하는 후기 철기시대 말기는 말갈시대를 엽두에 둔 말이다. 역주 22) 용수철이 따로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가위 뒤쪽이 둥글게 휘어 있어서 이 곳의 탄력을 이용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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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죽, 표범 가죽, 담비 가죽, 바다 표범 가죽, 히말라야 곰 가죽, 갈 색 곰 가죽, 야생 고양이 가죽, 흰토끼 가죽, 짧은 주둥이를 가진 개,

붉은 개, 청색 쥐 가죽, 은색 쥐 가죽, 고래 눈동자, 매, 비둘기, 연어, 모래무지, 말린 잉어, 붕어, 인삼, 백색 바곳 뿌리, 잣씨, 사향, 벌꿀, 게, 독수리 깃털, 꿩 깃털이 그것이다 (1 얽. 63, 64 쪽 ).Z3)

역주 23) 제 1 장 제 3 절의 역주에서 이 물품들을 문헌기록과 대옹시켰으므로 이를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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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7.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에서 출토된 철제 화살촉

연해주 발해 주민의 경제생활에서 사냥도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였음 은 고고학 발굴에서 나타난 골학 자료들이 증명한다. 골학 자료의 분 석은 늑대, 여우, 미국 너구리, 흑곰, 갈색 곰, 너구리, 오소리, 黃標 담 비, 호랑이, 멧돼지, 야생 염소, 반점 사슴, 만주 사슴, 큰 사슴, 영양, 토끼, 해리, 극동 두더지, 쥐 21) 및 다른 설치류 동물, 새와 같은 야생 동 물의 뼈가 비교적 높은 비율을 점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 중에서 굽을 가진 커다란 동물과 맹수류의 포유동물이 우세하였다 (4. 78 쪽; 165. 69 쪽).

발해 사냥꾼의 기본 무기는 활과 화살이었는데, 다량으로 발견된 골 제 및 철제 화살촉과 복잡한 조립식 활의 부품이 이를 뒷받침한다(그 림 15-17). 이 경우 발해 유적에서 발견된 화살촉에서 많은 수가 사냥 용으로 사용되 었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162. 98-111 쪽). 사냥과 더불어 어로도 발해인의 경제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는 데, 이에 대하여는 낚시 도구와 어망에 사용되었던 부품들이 말해준다. 마리야노브까 성터,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발굴된 낚시 바늘이 그 좋은 예 이 다(그림 12. 5-10). 모든 낚시 바늘은 쇠 로 만들었고, 길이는 4-7.2cm 가량이댜 낚시바늘은 몸통 단면이 둥그 스름하며, 끝은 날카롭고, 한 개 혹은 두 개의 미늘이 달려 있다. 낚시 바늘의 목에는 낚섯줄을 묶기 위한 홈이 있거나 홈이 없이 끝을 납작 하게 만들었다. 낚시바늘 목에 납을 끼워놓은 것도 있다(그림 12. 8-9). 이러한 ' 납덩어리는 부정형 삼각형이나 원추형을 이루고 있다. 이런 종 류의 낚시바늘은 목이 가늘고 홈이 있으며, 끝의 고리는 작으면서 목 쪽으로 향하고 있다. 漁網短는 유물에서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그림 12. 11-16). 이들은

조바람. 역주 24) 이상의 동물들은 우리 말로 정확히 번역하기가 어려우므로 각기 대옹되는 러시아어를 적어두겠다. BOJ IK , JIH CHl .la, eHOTOBH. QH cUI co6oKa, '!ep H 1 ,1A Mense.Q b 6 yp멕 Me.ll Be .Q b, 6ap c y K , poc oMaxa, xap Ja , THrp, Kall 책, KOCYJ IJI, lUITHHCTI 떠 OJ Je Hb, H3106p , JIO Cb, rop aJ1, 3aR 叫, 6o6p , ll8..l lb HeBOCTO'!Hl ,IR KPOT, Kp 1,1c a

스따로레첸 스 꼬예 성터 , 끄라 스 끼 노 성터, 노 보고 르 제예브까 성터, 마리 야노브까 성터 , 꼰 스 딴찌 노 브까 취락지 ,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 우쪼 스 노 예 (YTeCHoe) 취 락 지에서 발 견 되었다 . 발해 어망추에는 4 가지 유형이 있다 . 첫 번째 유형은 단면이 직사각 형 이 고, 양쪽 측면을 따라 끈으로 묶을 수 있도록 너 비 0 . 2 - 0 . 5cm 의 홈 줄이 나 있다(그림 12. 12- 14 ). 어망추는 길이 3-4cm, 너비 l.7- 3cm, 두 께 0.6-l. 5c m, 무게 12-3 1. 4 g이다 이 유형의 어망추는 점토나 사암으 로 만들었다. 두번째 유형은 단면이 직사각형이고, 모퉁이에 직경 0 . 3 - 0.5cm 인 2 개 혹 은 4 개 의 구멍 이 나 있다 . 어 망추는 길 이 3-6.?cm, 너 비 2 군 . 6cm, 두 께 0.75- 2c m, 무게 16 .4 -70 .4g이댜 모두 사암으로 만들었댜 세번째 유형은 단면이 활 모양이고 사암으로 만들었으며, 너비 0 . 35cm 의 끈을 묶기 위한 세로와 가로의 홈줄이 있다 . 이 유형의 어망 추는 1 점의 완형과 일부 파편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완형은 길이 8.3cm, 두께 1. 7 - 3 .l cm 이며, 무게는 75 .lg이다. 한 면은 평평하고 다른 한 면 은 볼록하게 되어 있다. 네번째 유형은 자그마한 타원형의 점토제 어망추로서, 양쪽 측면을 따라 깊은 홈줄이 나 있다(그림 12. 11). 두께 0.6cm, 길이 3.& m, 무게 7.6 g이댜 어망추는 그물 크기에 상관없이 사용할 수가 있었다. 이 때문에 어 망추의 크기는 다양하였다. 한 예를 들자면 얼음 밑의 물고기를 잡는 데 쓰이는 것으로서 미끼가 필요없는 예인망에는 무게가 적게 나가는 어망추가 필요하였다 (174. 195 쪽). 물고기잡이에서는 계절뿐만 아니라, 낭떠러지인가 완만한 경사면인가 하는 해안의 특성, 산 속의 하천인가 호수인가 아니면 간조의 차이가 심한 간석지인가 하는 물의 위치 따위 의 자연지리적 요인에 따라 도구 선택이 달랐다. 물 흐름의 속도, 물의 깊이, 얼음의 상태 등도 고려되어야만 했다 삼림 채취와 관련된 도구가 꼰스딴찌노브까 취락지와 노보고르제예 브까 취락지에서 발견되었는데, 산삼 뿌리를 캐내기 위한 골제 채굴

도구가 그것이다(그림 13. 9-11). 이 채굴 도구는 동물의 늑골로 만들었 고, 편평하며 약간 휘어 있다 . 일부에는 윗부분에 직경 0.3cm 의 구멍이 있댜 이 도구에서 직접 사용되는 부분은 날카로우면서 외형이 타원형 을 띠고 있댜 이 도구는 길이 13-34cm, 너비 0.9 - l. 7c m, 두께 0.5cm 이상이다. 우데게이(y.ll 3reA) 족들이 산삼 뿌리를 캐기 위해서 이와 유사 한 채굴 도구를 비교적 최근까지 널리 사용하였고 (15. 238-245 쪽 ; 34. 8.5쪽 ; 110. 141 쪽), 연해주에 이웃해 있는 중국 동북지방의 주민들도 이 와 유사한 도구를 사용하였다 (173. 42 쪽). 3 수공업 1) 철제품 25) 연해주 발해 유적에서 수집된 고고자료에서 철제품 생산과 직접적으 로 관련된 유물들은 특히 흥미롭다. 그것은 철제품의 생산 상태가 경 제발전의 수준을 나타내는 주요 지표이기 때문이다 (122. 163 쪽 ; 123. 383 쪽). 발해 유적에서 발견된 선철 26) 조각, 주철 덩어리, 쇠똥(슬래그), 주 철제품 조각, 잘라낸 쇠 조각과 같은 생산 페품들은 발해인이 철금속 을 용해하고 가공하였음을 증명해준다. 생산시설로는 현재 니꼴라예브 까 II 성터와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에 풀무화덕과 용광로의 유구, 이 와 관련된 작업 과정의 유구, 쇠똥 구덩이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또 한 철광석을 용해하였던 혼적도 포착되었다.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의 성벽 밖에서 쇠똥으로 가득찬 풀무화덕 구덩이가 발견되었다. 이 구덩 역주 25) 이 절은 상당히 길기 때문에 역자가 세부 제목을 넣었다. 역주 26) 金屬組織學上으로 탄소 함유량이 2.0% 이하인 것을 鋼鐵 (cT a.n b, s tee l) 이라 하고, 그 이상인 것을 鑄鐵 (-qy r ya, cast ir on) 이라 한다 . 銃鐵 (K pHQ a, pig iron ) 과 鑄鐵 은 성분이 같으나, 선철은 일반적으로 高這에서 철광석을 제련한 것 을 의미하거나 이것이 製鋼用으로 쓰일 때를 의미하며, 주철은 선철 중에서 주물용으로 쓰이는 것을 가리킨다.

이의 벽과 바닥은 불 에 탔고 , 고온으로 달구어진 돌 들 로 빽빽이 쌓여 있었다. 유감스럽게 도 이 생산 유구의 구 조 를 완전히 복원할 수 는 없 었다 하지만 불에 탄 벽토, 'ZI) 달구어진 돌 , 쇠똥이 다량으로 발견된 것 은 이 유구 를 풀무화덕으로 파악하기에 충분하다 . 금속가공과 관련된 발해의 기본적인 수공업 지역은 중앙의 州들에 자리잡고 있었다. 예를 들어서 鐵 州 位城縣이 철로 유명하였다 (197. 63, 125 쪽) . 그렇지만 이미 초기의 연해주 조사자들이 금속가공과 관련된 흔적들을 발해의 주변 주들에서도 포착하였다. 예를 들어서 에.아네르 뜨는 연해주에서 지질학 탐사를 하면서 고대의 채굴 장소와 용해의 혼 적에 주목하였고, 이들을 발해 유적으로 간주하였다. <…… 발해인은 이미 …… 철광석, 동광석, 은 • 납광석을 용해하였고 금을 채취하였다. 게다가 聖 올가 (CB. O JJ bra) 灣 연안에서 발견된 발해의 주철제 솥은 훌륭 하기 그지없다 > (9. 11 쪽). 유감스럽게도 현재는 발해시대의 채굴 장소 에 대한 신빙성 있는 고고자료가 없다. 그렇지만 발해 성터에서 발굴 된 광석을 분석하여 알 수 있듯이, 당시의 광석은 현재의 광산에서 캔 것과 유사하다.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출토된 광석은 이 성터에서 60km 거 리 에 있는 노보구야로슬랍스끼 (HoBo-J! po cJJ a BcKH8) 고대 광산에 서 채굴한 것과 地球化學的 특성에서 가깝다 (117. 199 쪽). 게다가 이들 지역의 地質學的 구성도 서로 유사하다. 따라서 니꼴라예브까 II 성터 부근에는 노보一야로슬랍스끼 광산과 유사하면서도, 가까이에 있어서 발해 장인들이 이용하기에 아주 편리하였던 작은 채광지들이 존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댜 발해의 야금 기술자들이 楊鐵과 磁鐵 28) 이 주된 성 분인 스카론 29 ) 을 이용하였음에 틀림없다.

역주 27) 壁 土는 점토와 모래, 안료, 짚여물 둥을 혼합하여 흙반죽으로 만들어서 목 조 외벽에 바르는 흙을 가리킨다. 역주 28) 천연산 철광으로 제철용에 많이 이용되는 것에는 酸化 鐵鑛에 속하는 磁 鐵 鑛 (m agn e tite)과 赤鐵鑛 (hema tite), 水酸化 鐵鑛에 속하는 楊鐵鑛類(lirn o nite grou p ), 炭酸化 鐵鑛에 속하는 菱 鐵鑛 (s i d erite) 둥이 있다. 역 주 29) 스카론 (cKap H, skam) 은 接觸交代鑛床이 나 高 溫交代鑛床에 서 脈石鑛物로 산 출되는 특유의 珪酸鹽 鑛物의 집합체로서, 石權石, 珪灰石, 珪灰鐵 鑛 둥이 여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발견된 풀무화덕 형태의 生産複合 體는 많 은 관심을 불러일으킨댜 이 유구에는 생토층을 파고 들어간 0.0 6 -0.23m:i 용량의 구덩이, 천정에서 떨어진 돌 무더기, 벽토들만 남아 있었다(1 63. 13 쪽).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는 모두 7 개의 풀무화덕 구덩이가 발견 되었다. 일부 구덩이는 쇠똥으로 채워져 있었고, 또 다른 구덩이 옆에 서는 청동이 묻은 도가니, 送風管 조각, 변형된 도기, 광석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214). 구덩이 근처에서 발견된 광석 조각, 선철, 돌모루들은 풀무화덕이 선철을 가열하는 데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가열한 선철 은 쇠똥을 제거하기 위해 돌모루에 대고 단련하였다.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조사된 용광로는 풀무화덕보다 더 잘 보 존되어 있었다. 평면이 직사각형인 용광로의 크기는 l. 3 X 3m 였다. 벽은 돌을 가로로 쌓아 만들었다. 불에 탄 벽토층이 벽과 무너져 내린 천정, 용광로 바닥을 덮고 있었다. 그 위에는 목탄과 벽토가 섞인 재로 가득 차 있었다 유구의 동쪽 벽에는 너비 2& m 의 파열 부분이 있다 . 이 파 열 부분은 아궁이 구멍일 가능성이 많은데, 이 근처에서 선철이 뒤어 생긴 것, 도가니 조각, 주물용 국자, 커다란 돌덩이들이 발견되었다 . 용 광로의 남쪽 벽에서 발견된 두 개의 구멍은 분명히 용광로에 送風울 하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송풍이 없이는 야금 작 업 이 불가능하다 (97. 32 쪽). 용광로 동쪽 부분으로서 아궁이 바로 근처에 회색 사질점토, 벽토 및 다량의 쇠똥으로 채워진 넓은 구덩이가 하나 있었다. 이 구덩이 안 에서 輪製陶器片과 手製陶器片, 도가니 조각, 선철 조각 및 선철이 튀 어 생긴 물체, 다양한 철제품들이 발견되었다. 그 내용물로 판단하건대 용광로 앞에 있는 이 구덩이는 쇠똥 구덩이이다. 용해에서 나온 찌꺼 기들을 이 쇠똥 구덩이에 밀어 넣었던 것이다. 용광로 바로 앞에 쇠똥 구덩이가 있는 것은 연해주 여전시대의 샤이가 (WaAra) 성터, 라조(Ji a30) 성터, 스깔리스또예 (CK aJIH CToe) 성터의 용광로 축조에서 보이는 기술적 기에 속한다.

특징이었다 (112. 81 쪽 ; 114. 79 쪽) . 이것은 금속가공과 관련된 생산시설 을 축조하는 데에서 계승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는 기단이 있는 건물에 설치되었던 대장간 유구도 발견되었다. 대장간 면적은 70rn2 이었다. 대장간의 생산시설로는 직선으로 배열된 9 개의 풀무화덕 구덩이가 있었다 . 이 구덩이들은 깊 이 40 - 60cm 에 직경 60 - 90cm 이며, 안에는 잔뜩 눌린 재로 채워졌고 그 위에 벽토 조각으로 덮혀 있었다 풀무화덕의 구덩이에는 쇠똥과 귀금 속 덩어리가 섞여 있지 않은 재가 채워져 있었고, 여기서 'Z7개의 숫돌 과 연마기, 철광석 조각, 화살촉, 칼, 꺾쇠가 발견되었으며, 주변에서 화 살촉 예비품, 칼 예비품이 발견되었고, 특히 줄이 발견된 것은 이 구덩 이를 대장간용 화덕으로 여기기에 충분하다 . 이 풀무화덕에서 예비품 울 가열하고 다시 부수적인 작업을 하였던 것이다. 니꼴라예브까 II 성터를 발굴할 때 조사자들이 두 개의 건축평면을 확인하였댜 하부 건축평면은 발해 건국기에 해당되고, 상부는 발해 융 성기에 해당된다 (214. 90쪽). 금속가공과 관련된 생산시설들은 대부분의 경우 상부 건축평면에 속한다. 따라서 그 당시에 이 성터가 야금술이 발전한 수공업의 중심지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발해의 장인-금속가공업자의 전문적인 공구는 아직 그렇게 많이 수 집되지 않았다 . 공구에는 먼저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에서 발견된 주 물용 집게(그림 12. 41) 가 있다. 이 집게에는 선철을 집기 위해 크고 둥 그스름한 입과 긴 손잡이가 달려 있다. 집게 길이는 50cm 이고, 입 길 이는 10cm 이댜 발해 대장장이들은 작업과정에서 이와 다른 대장간용 집게들도 사용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재로서는 그 편린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식힌 금속을 가공하는 데 쓰인 정은 크기가 작은 것이 특징적이다.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에서 발견된 길이 5cm 인 정(그림 12. 42) 에는 너비 1cm 의 날이 달려 있었다. 정의 머리가 심하게 뭉개진 것은 아주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 대부분의 발해 철제품에는 여러 가지 크기와 형태로 된 관통 구멍이 나 있는데, 이들 구멍은 천공기나 펀치와 같은 특별한 공구로서만 뚫

을 수 있었댜 발해 장인은 끄라스끼노 성터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길 이 4 .4 -11cm 에 단면이 원형 혹은 장방형 인 펀치를 자신의 공구함에 넣 어두고 사용하였음이 틀림없다. 금속가공에서 가장 복잡한 전문 공구의 하나는 줄이다. 노보고르제 예브까 성터에서 줄 조각 1 점이 발견되었고,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완형 줄 1 점이 발견되었다. 완형 줄은 킬이 17cm 이며 줄 몸은 단면이 장방형이고 손잡이를 끼울 수 있는 짧은 숨베가 달려 있다. 장축에서 수직 방향으로 직선의 눈금들이 줄에 나 있다. 눈금은 손으로 낸 것이 고, 눈금 간격은 0.3-0.4mm 이다. 발굴 조사를 한 발해시기 거의 대부분의 성터와 주거유적에서 철제 또는 주철제 도구, 무장 도구, 생활 용기, 마구, 장신구, 의례용품들이 다양하고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 풀무화덕과 용광로의 유구, 장인-금속 가공업자의 공구가 발견되는 사실은 발해 유적에서 출토되는 모든 철 금속 제품들이 이 지역의 장안들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확고히 증명 한다.

발해 수공업자들의 금속제품 생산수준을 알아보기 위해서 많은 제품 을 분석하였댜 분석 대상이 된 철제품에서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칼 14 점, 부싯쇠,3)) 낫, 다양한 유형의 화살촉 16 점이다. 주철제품으로는 끄라스끼노 성터에서 출토된 11 점의 솥 조각 및 작은 그릇 조각, 수레 바퀴의 축받이통 조각 4 점, 보습 조각, 벗 조각, 주철 덩어리를 분석하 였다. 분석 결과 발해 대장장이들은 선철과 함께 풀무화덕에서 얻은 탄소 할당이 불균등한 저탄소 및 중탄소 함유의 강철을 이용하였음이 밝혀 졌다. 철금속 제품들은 화학성분이 거의 동일하다고 할 정도로 서로

역주 30) 연해주의 발해 및 여진시대 유적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서, 대체로 꺾쇠 모양으로 된 것이 있는가 하면, 양쪽 끝이 둥글게 고리 모양으로 말린 형태 를 한 것도 있다 . 부싯돌처럼 불을 일으키는 데 사용하지만, 쇠로 만들어서 이룰 나무나 뼈에 붙여서 사용하였으므로, 이룰 <부싯쇠 (K p ec 끄 0) >로 번역하 였다. 형 태는 그림 12-2, 3, 4 를 참조 바람.

구분이 가지 않았다 . 인의 함유량은 0.07-0.02% 를 넘지 않고, 유황과 규소의 함유량도 낮아서 철을 얻는 공정에서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샘플 분석에서 망간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은 철을 추출하는 원광에 망간이 함유되어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극소량의 쇠똥을 함유하고 있는 잘 단련된 금속은 발해 대장장이들이 크기가 아주 작은 단야 제 품을 만들면서도 온도를 적절히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보여준다. 단련 과정에서 예비품을 과열시켰을 때 생기는 위 드먼스태텐 조칙 3 “ 이 있는 샘플이 여기서는 아직 단 1 점도 발견되지 않 았다 . 이 모든 사실들은 당시에 대장간에서의 생산기술 수준이 아주 높았음을 말한다. 상당수의 칼이 분석되었다. 칼은 등과 슴베가 연결되는 방법에 따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71% 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첫째 유형 은 슴베와 등이 곧바로 연결된 칼이다. 두번째 유형은 날과 슴베 사이 에 단이 져 있다. 칼날 부위에 대해서 조직을 분석한 바에 의하면 절대 다수의 칼이 중탄소 및 저탄소 함유 강철로 제작되었다. 단 2 점의 칼에서 쇠똥이 포함된 페라이트 조직 32) 이 밝혀졌는데, 이는 이 칼들이 단순한 가공용 철로 제작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2 점의 칼은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의 하부 건축평면에서 발견된 것들이다. 담금질하기에 적합한 강철로 되어 있는 분석 대상의 칼들은 대부분 열처리된 것이었다. 굳은 상태의 담금질(마텐사이트 조직)과 그 뒤로 이 어지는 고온으로 가열된 상태의 담금질(소르바이트 조직과 트루스타이트 조직 )33 ) 이 이용되었다. 이 방법들은 칼날이 유연성을 유지하면서도 장차 역주 31) 위드먼스태텐 (sH /lM aHmTeTT, widm ansta tten ) 조직은 탄소강 또는 합금강을 섭씨 1100 도 이상으로 가열하였을 때 결정 입자가 크고 거칠게 되는 것으로 서 이러한 과열 조직은 취약하고 인성이 약화된다 . 역주 32) 탄소강의 조직과 성질은 탄소량이나 열처리 가공에 따라서 달라진다. 페라 이트(lJ) e pp HT, f e rrite)는 강철의 금속 조칙학상의 명칭인데, 부드럽고도 퍼집성 이 크며 강한 磁性올 띠고 있다 . 역주 33) 탄소강의 냉각속도에 따라 여러 가지 조직이 형성된다 .. 마 텐사이트 (wa p TeHCHT'

사용시에 극히 중요한 요소인 견고성과 내구성을 높일 수 있게 하였 댜 분석 결과는 발해 대장장이들의 열처리 기 술 이 꽤 높은 수준에 이 르렀음을 증명한다. 열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금속이 과열되었던 사실 을 증명하는 조직은 아직 포착되지 않았다. 제품 종류에 따라 담금질 방법이 달랐을 것이고, 그에 따라 담금질 매체도 물, 지방질, 기름, 혹 은 단순히 차가운 공기와 같이 다양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출토된 칼을 분석한 결과에서 보듯이, 칼 제작에서 고도의 경험과 장인 정신이 요구되는 가장 복잡한 작업은 탄 소 함량이 다른 다양한 예비품들을 녹여서 붙이는 일이다. 이 를 용접 한 후에 마지막으로 열을 가하여 담금질을 함으로써 칼을 만 들 게 되는 데, 열에 의한 담금질 사실은 강철 부위에 나타나는 소르바이트 조직 이 말해준다. 농기구와 생활용구의 생산기술은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출토된 낫(그림 11. 3), 부싯쇠 2 점 (그림 12. 2, 4), 몇 점 의 못과 쇠 줄을 분석 하 여 검토하였다. 낫온 강철 예비품을 단련하여 만들었다.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출토된 꺾쇠형과 고리형 부싯쇠는 역시 탄소가 함유된 강 철로 만들었는데, 꺾쇠형 부싯쇠의 탄소 힘유-량은 0 . 63% 로 아주 높은 편이다. 두 개의 부싯쇠 모두 열처리-담금질한 것이다. 못, 자물통 걸쇠, 고리, 모퉁이 장식과 같이 생활에 꼭 필요하기는 하지만 제품을 사용할 때의 효능과는 무관한 단순한 철제품을 생산하 는 데는 대장장이들어 가공용 철을 간단히 단련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미세구조에 대한 성분 분석은 발해 화살촉을 기술적 속성에 따라 기 본적으로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게 한다. 62.2% 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첫번째 그룹에는 철이나 저탄소 marten sit e) 조직은 현미경으로 보면 針狀 조직으로 되어 있는데 강철 조직 에서 가장 단단하다 . 트루스타이트 (T p OCTHT, troo sti te) 조직은 철강을 기름이 나 온수에 넣어 어느 정도 느린 속도로 냉각시켰을 때 나타나는 微 粒 狀의 조 직으로서 단단하면서도 잘 부서지지 않는다. 마텐사이트 다음으로 단단하다. 소르바이트 (co p 6HT, sorbit e) 조직은 담금질의 냉각 속도가 트루스타이트 조직 보다 느릴 때 얻을 수 있는데, 이 조직보다 유연하고 祐性이 강하다 .

함유 강철을 단련하여 만든 화살촉들이 속하는데, 열처리를 추가로 하 지 않았댜 이 화살촉들에는 일반적인 페라이트 조직이나 펄라이트어 ) 가 포함된 미세 경도 119 - 180k g /m 面 범위의 페라이트 조직이 특징적이 댜 37.5% 를 차지하는 두번째 그룹의 샘플은 중탄소 함유의 자연강으로 만든 화살촉들인데, 화살촉을 만들 때 대장장이들은 제품의 효능을 향 상시키기 위해 특별한 기술을 사용하였다. 4 점 샘플의 미세구조 분석 에서 밝혀진 미세 경도 320-380k g /mm 떡 소르바이트 조직은 이 그룹 의 화살촉을 제작할 때 마지막 공정에서 온도를 500-700°C 로 높여서 담금질하였음을 증명 해준다 (97. 13 쪽).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에서 출토된 화살촉의 사다리꼴 머리 부위 에 있는 용접 봉합선이 현미경 분석으로 밝혀진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샘플은 소르바이트형 펄라이트가 포함된 페라이트 조직을 하 고 있댜 이런 종류의 조직은 예비품을 공기 중에서 냉각시켰을 때 형 성되는데, 이런 공정으로 기계적 특성이 좋은 부드러운 입자 조직이 생성된다 철과 강철의 두 예비품을 붙인 뒤에 대장장이는 화살촉을 단련하였고, 이른바 노멀라이징 35) 으로 다시 공기에 서서히 냉각시켜 담 금질을 하였는데, 이것은 제품 가공에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용 집의 질이 높지 않고, 용집 봉합선이 넓고, 곳곳에 쇠똥이 포함되어 있 는 점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결함은 일반적으로 용접 부위가 갈라지게 하여 전혀 쓸모없는 제품이 되게 한다. 분석한 자료가 적기 때문에 발해 대장장이들이 얼마나 폭넓게 강철과 철을 용접하였는지 역주 34) 펄라이트 (ne pJIH T, pearlite)는 앞에서 설명한 연약한 조직을 지닌 페라이트와 아주 강한 조직을 지닌 세멘타이트 (cemen tite)가 層狀으로 배열된 것으로서,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진주색과 같은 색상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이다. 펄라이트는 경도와 강도가 그다지 높지 않지만 강한 磁性을 띠고 있다. 역주 35) 노멀라이징 (Ho p M 탸 H3au 血, nonn alizing)이란 강철을 높은 온도로 가열하였다 가 공기 중에서 放冷시키는 조작을 말한다 . 이렇게 함으로써 그 전의 가공으 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결정 입자를 미세화하여 기계적 성질을 개선할 수 있다.

알기 어렵지만, 그들이 여러 가지 성질을 가진 금속들을 서로 붙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화살촉이 1 회용품이라는 것을 간주한다면, 좀더 양질의 금속을 사용하거나 복잡한 단조 기술을 채택 하는 것은 화살촉 생산에 비합리적이라 간주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해 대장장이들은 일부 종류의 화살촉을 만 들기 위해서 철이나 아직 가공되지 않은 강철을 간단히 단련시키거나, 심지어 화살촉의 효능을 향상시키는 특별한 용접과 같은 전문적인 기 술을 사용하기도 했다. 금속을 자유롭게 단련하는 공정을 알고 있던 발해 대장장이들은 壓印機나 壓押機와 같은 여러 가지 공구를 이용하 여 아주 다양한 화살촉을 생산하였다 (162. 98-112 쪽). 압인기와 압착기 없이는 화살촉의 횡단면이 고르도록 정밀하게 단련할 수 없다. 발해 장인들은 여러 형태의 띠고리와 부싯쇠를 만들기 위한 예술적 인 단련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발해인의 鑄鐵鑄造業을 증언해주는 것은 여러 기능을 가진 유물들, 기술적으로 제작이 복잡한 주철제품들이다 . 현재까지 솥, 용량이 적은 磁 風錄(그림 9. 5, 6), 보습(그림 11. 4) 과 벗, 바퀴의 비녀못과 축받이 통(그림 12. 17, 18) 의 주철제품들이 알려져 있다. 발해 장인은 구연부가 곧고 목에 홈줄이 있으며 다리가 달려 있는 주철제 솥을 만들었다. 이와 유사한 솥둘이 12-13 세기의 여진시대에 널리 보급되었다 그렇지만 여진과는 달리 발해 솔은 일반적으로 바닥 이 둥글지 않고 납작하다. 끄라스끼노 성터에서 출토된 자그마한 鑄鐵製 腕들은 크기와 형태가 서로 유사하다 완은 높이 4.1 - 4. 8crn, 입 직경 8.9 선 .2cm, 벽 두께 0.6cm 이다. 발해인의 농기구에는 주철제 보습과 벗이 있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보습과 벗이 12 세기까지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홍미롭다. 꼬르싸꼬브까 취락지에서 발견된 완형 보습을 통해 본다면, 발해 보습은 연해주 여 진의 보습과 동일하고 중국 것과는 아주 다르며, 고구려 보습과 아주 흡사하다 (2 1. 129-135 쪽).

끄라스끼노 성터에서 출토된 육면체의 피라미드형 풍탁 주조품들에 도 주목해야 한다. 풍탁 하나에는 3 면에 반달 모양의 구멍이 있고, 윗 부분에도 매다는 끈을 꿰었던 구멍 이 하나 더 있다(그림 9. 5). 바퀴를 수레의 축에 고정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던 비녀못도 주조하였 댜 길이 9cm 에 반원형의 끝 장식이 달린 비녀못이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발견되었다. 이와 유사한 유물들이 씨니예 스깔르이 주거유 적 (8 . 168 쪽, 그림 19) 과 연해주 여진족 (114. 183 쪽, 그림 1. 7-9) 에서도 알려져 있다. 수레바퀴의 축받이통은 원통형의 고리 모양에 직경 &m 이하, 너비 5cm, 두께 0.6cm 이댜 의면에는 톱날이 돌출되어 있다 주철로 주조한 것으로서 이와 유사한 유물이 씨니예 스깔르이 주거유적(8. 168 쪽, 그림 8) 과 동경성 (136. 205 쪽, 그림 6-6) 에서 발견된 바 있다. 연해주 여진족 도 수레바퀴에 축받이통을 널리 이용하였다 (112. 133, 134 쪽). 발해 장인이 생산한 주철 주조품의 종류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 댜 현재 우리들은 발해에서 가장 폭넓게 이용된 물품들밖에 알지 못 한댜 그러나 비교적 적게 발견된 유물조차도 상당히 발전된 발해 수 공업자들의 주철 주조업을 증명하고 있다. 주철 주조품이 화학성분에서 대부분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데, 이는 그 성분이 동일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 주조품의 탄소 함유량 은 4.1_4.4% 정도이댜 합금의 특성에 영향을 끼치는 합금성분들은 발 견되지 않았댜 규소 함유량은 단지 몇 경우에만 0.20-0. '2:7%이고, 나머 지 는 모두 규소의 혼적 만 보일 뿐이 다. 유황 함유량은 0.04-0.009% 이 고 , 인 함유량은 0.09-0.19% 인데, 이렇게 낮은 함유량은 갈철광 계통의 광석에서 주철을 얻었고, 유황이 적게 함유된 목탄을 연료로 사용하였 음을 보여준댜 주철의 화학성분은 당시의 기술 수준에서 가능하였던 1150-1250°C 의 온도에서 액체 상태의 용해물로부터 주철을 얻었음을 증명한댜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의 하부 건축평면에서 발견된 주철제 유물의 일 부는 화학성분에서 약간 특이하다. 이들은 화학성분과 주조의 질에서

다른 다수의 유물과 많은 차이점을 지닌다. 이 유물들의 탄소 함유량은 2.3%-3.6% 인데, 이것은 기술 과정이 불완전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보다 늦은 시기의 주조품에 비해 이 유물들에는 유황이나 인과 같은 불순물 들이 더 많았다 이 유물들의 주조 수준은 아주 낮았다. 불량하게 준비 가 되어 제대로 가열되지도 않은 토제 거푸집에서 제품을 주조할 때에 생기는 많은 양의 氣孔과 氣泡가 샘플 분석에서 발견되었다. 이렇게 주 조 수준이 낮은 것은 발해 건국 초기에 금속가공 수준이 낮은 데 기인 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발해 경제에서 금 속과 금속제품이 아주 많이 필요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금 속제품의 부족은 어느 정도까지는 骨製品등으로 보완되었다. 발해 장인이 생산한 , 주철제품에 대한 미세구조 분석을 통하여 백색 주철과 더불어 반은 회색이고 반은 흰색인 주철을 주로 사용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일부 샘플에서는 회색 주철 조직도 발견되었다. 형태가 복잡하지 않은 제품들은 급속히 냉각되는 토제 거푸집에서 만들었는 데, 이것은 한편으로 주철의 표백작용을 일으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 조품에 기공과 기포를 발생시켰다 . 솥이나 보습과 같이 생산과정이 복 잡한 제품들은 분리가 가능한 거푸집에서 주조하였을 것이고, 그런 다 음에 다양한 도구를 이용하여 몇 단계에 걸쳐 성형하였다. 이상과 같이 발해인의 철제품 분석을 통해서 주조공들이 주철 주조, 강철과 철제품의 단련, 용접, 열처리, 가열이나 냉각 상태에서 자르기, 예술적인 단련, 줄과 숫돌로 마무리 하기와 같은 일련의 가술적 공정 을 알고 있었고, 또한 철 • 주철 • 강철을 이용하여 복잡하거나 단순한 여러 종류의 제품을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다양한 기 술 공정과 다양한 형태의 제품들은 철 가공업이 굉장히 발전하였음을 중명해준댜 그리고 일정한 규격을 가진 제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였 던 사실은 대장장이들 사이에 전문가들이 세분되어 있었음을 의미한 댜 수공업자들이 근처의 州에 살고 있던 주민들에게 봉사하면서 그들 의 주문에 따라 제품을 생산하였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발해에서는 야금술 발전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발해의 풍요는

발해에 있던 철의 양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 (48. 92 쪽)는 것은 알려 진 사실이다 이것은 아마도 발해 전성기에 철금속 제품의 급속한 증 가와 금속가공 수준의 향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 당나라에 의 해 멸망된 뒤에 발해에 은신처를 구한 고구려인들이 발해의 야금술 발 전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197. 65쪽). 이렇게 하여 발해 수공업자 들의 금속가공업이 그 당시에 비교적 높은 수준으로 향상될 수가 있었 으니, 심지어는 현재의 연해주에 위치하였던 주변 지역에서도 그러하 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의 유적에 대한 고고조사에서도 간접적으 로 증명된다 . 2) 청동제품 다른 모든 중세의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발해에서도 청동 주조업이 아주 발달하였다. 구리 합금인 청동으로는 여러 가지의 장신구, 허리띠 부품, 마구, 그릇, 작은 가정용 용기, 기타 의식 용품들을 주로 만들었 댜 다른 극동의 나라들과는 달리 발해에서는 상품-화폐 관계가 제대 로 발전하지 못하여 화폐를 주조하기 위한 청동의 사용이 제대로 이루 어지지 못하였다 (197. 67 쪽). 발해에 당나라 화폐와 같은 일부 화폐들이 통용되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러한 화폐는 부적, 장신구 혹은 단 순히 이국적 물품으로 이용되었으며 경제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구리의 채취, 구리의 가격, 청동 주조업의 조직에 대한 상세한 기록 이 문헌자료에 결핍되어 있어서 이를 복원하는 것은 아주 복잡한 일이 된다. 문헌자료에 보이는 단편적인 기록은 구리 채취가 발해의 남쪽인 현재의 북한 지역에서 행해졌고 (197. 63 쪽), 구리와 수은이 일본으로부 터 수입되었음 (129. 25 쪽 ;197. 66 쪽)을 보여준다. 발해의 남쪽에 있던 광산이 누구에게 속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당시에는 국가 소유와 개인 소유가 모두 가능하였으니, 이것은 7 세기 일본의 구리 광산을 예 로 들 수 있다 <大寶令 >36) 에 따르면 당시에 국가가 관여하지 않는 지 역에서는 자유롭게 구리를 채취할 수 있었다. 정부는 광부와 용광로

기술자에 대해서 적극적인 보호정책 을 취하였다 . 그 들 에게 융자 를 주 거나 세금을 줄이기도 하였고 , 금속의 매장지 를 발견한 행정 책임자에 게는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50 . 44쪽). 연해주를 포함한 발해의 동북쪽 변방 가운데 懷遠 府(연해주 빠르띠잔 스끄 구역)에서 금과 은이 채취되었다는 기록을 제외한다면, '51) 광산업의 발전에 대한 단 하나의 문헌자료도 없다 (197 . 66 쪽). 광산이나 구리 채 굴지는 지금까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연해주 중심 지역에 있는 커 다란 鑛石 露 頭 주변에 많은 유적이 자리잡고 있는 정황이나 금속성분 을 분석한 결과와 같은 간접적인 자료를 보면 ‘그곳에서 광석을 채취하 였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것은 아주 원시적이어서 수량도 많지 않았 고 표면에서의 채취에 불과하였다. 발해에서 가장 발전된 수공업 중심 지인 중앙의 府들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관계로 연해주의 광산업은 그렇게 발전하지 못했다. 변두리 도시들은 이러 저러한 부족연맹의 영 역에서 인기가 있는 물품과 장신구를 제작하여 자신들과 주변에 딸린 지역에 공급하였다. 유적에서 발견된 다양한 장신구 세트는 이와 같은 결론을 뒷받침한다. 연해주 일대에 살았던 주민들의 본업에 대해서는 문헌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고고자료가 유일하다. 발해의 청동 유물에 대한 스펙트럼 분석과 금속조직학 분석 (100. 51-55 쪽)으로 일련의 예비적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 무엇보다도 이러 한 결론은 합금 방법과 금속가공 기술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 역주 36) 일본 奈良시대 초기에 편찬된 법령이다. 文武天 皇 의 명령에 따라 700 년 6 월 에 刑部親王, 藤原不比 둥 19 인이 편찬을 시작하여 701 년(大 寶 원년) 6 월에 공포되었다 . 현재는 전해지지 않지만, 이 율령의 주석서로서 740-741 년에 작 성된 것으로 보이는 『 古記 』 및 『古令釋 』 둥이 『 續 日本紀 』 와 『 令 菓 解 』 에 산견 되고 있으므로, 이를 토대로 어느 정도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 . 역주 37) 『 遼史 』 권 38 , 東京道에 『銀州 …… 本渤海 富 州 , 太祖以銀治更名. …… 新興縣. 本故越 喜 國地, 渤海置銀治, 常置 銀州.』라는 구절이 있어서 金敏賊은 발해 懷 遠府 아래의 富 州가 銀 산지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渤海國志長編』 권 17). 그런데 이 설명이 金 • 銀 항목 아래에 들어 있어서 필자가 富 }11 에서 은과 함 께 금도 산출된 것으로 잘못 이해한 듯하다 .

럽게도 현재 확보된 자료 들 로는 청동 주조업의 조직에 대해서 말하기 어렵다 연해주에서 발견된 개개의 유물들은 발전 수준이나 생산 가능 량을 판단할 수 있게 하지만, 완전한 역사적 복원은 아직 불가능한 상 태이다 . 주지하다시피 동광석 가공기술의 발전을 보여 주는 한 지표는 금속 에 함유된 미세 혼합물의 비율이다 . 중세와 고대의 장인은 대부분 이 러한 혼합물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 혼합물은 주조할 때 유동성을 높 이고 용해할 때는 온도를 낮추어 줌으로써 금속의 질에 영향을 미쳤 댜 아주 순수한 금속은 광석의 특별한 선별과 고도의 용해 기술에 따 른 것이다. 그러한 금속에는 나중에 필요한 특성을 부여할 수 있다. 그 러나 흔히 <꽃다발 (6 y KeT)> 혼합물이 있는 금속이 발견된다. 발해의 청동도 바로 그러한 것이다 . 발해 청동에서 안티몬, 비소, 비스무트, 코 발트 및 다른 요소들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금속은 연해주, 한반도, 일 본을 포함하는 모든 태평양 연안에 특징적인 多鑛物 鑛石에서 얻은 것 이다 이 금속은 본래부터 약간 낮은 용해 온도를 지니고 있고, 안티몬 과 비소로 인해서 어느 정도 녹슬지 않는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청동을 만들기 위해 구리에 납이나 주석을 첨가하였다. 합금에서의 차이점은 발해시기의 청동 주조소에서 발견된 도가니에 묻은 금속 방 울을 연구함으로써 밝혀졌다. 중세에는 흔히 혼합된 합금성분을 이용 하였는데, 그것은 모든 장인이 육안으로 주석과 납을 구분하기 어려웠 기 때문이었다. 합금성분에 다른 요소들도 포함될 수 있었다. <순수한> 구리, 주석 청동, 주석-납 청동, 납 청동, 비소 청동, 주석 -납-비소 청동, 납-비소 청동과 같은 일곱 가지 유형의 합금이 밝혀졌 댜 합금에 많은 양의 비소가 어떻게 들어갔는지 아직 명확하지 않다. 7 세기 말부터 일본에서 朱砂와 鷄冠石이 채취되었던 사실이나 伊勢에 서 안티몬, 비소, 비스무트가 함유된 특수한 광물이 채취되었던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50. 22 쪽). 발해인의 손에 비소 합금이 어떤 형태로 전해졌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것은 합금된 상태로나 합금성분의 물질 로나 다 가능하였댜 이미 언급하였듯이 금속들이 일본을 포함한 여러

장소로부터 발해로 유입되었다. 그 외에도 용해물에 간혹 낡은 물건도 집어 넣었는데, 그 중에는 외국 생산품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합금들은 많은 면에서 주조에 편리하였다 . 합금된 것은 거푸집에 잘 채워지고, 구리보다 용해온도가 낮다. 그러나 이미 밝혀졌 듯이 발해 장인은 주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양한 단계의 단 련을 하였고, 표면을 절단하거나 금 • 은 도금을 하는 가공을 하였으며, 어쩌면 주석 도금까지 했을지도 모론다. 주조는 석제와 토제의 거푸집 에서 했을 뿐만 아니라 밀랍 모형도 이용했다. 수많은 기술적 방법이 존재하고 그러한 기술적 방법들이 특정한 범주의 유물에 각기 고정되 어 있지 않은 사실은 다양한 기술 전통이 융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 또한 발해가 의부 세계와 고립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만 한댜 발해가 당, 신라, 일본 및 돌궐과 관계를 맺었던 것은 외국에 서 생산된 청동제품들이 발해로 흘러들 수 있게 하였다. 의국 산물이 발해로 유입되는 경로는 다양하였다. <조공 형식의 교역>일 수도 있 고, 그와 함께 이어지는 모피나 다른 가치 있는 물건과의 교역일 수도 있었댜 또한 전쟁에서 약탈한 것일 수도 있다. 기원후 1 천년기 후반기에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에 보급되었던 돌궐 허리띠 부품들도 그와 같이 발해로 유입된 물품임에 틀림없다. 가운데 에 구멍이 뚫려 있고 사각형이나 다각형의 판 모양으로 되어 있는 띠 꾸미개는 거의 모든 연해주 발해 유적에서 발견된다. 이들은 모두 양 면 거푸집에서 주조한 것이지만, 생산 장소는 알아내지 못하였다. 그것 은 이와 유사한 띠꾸미개가 스텝 지역 전체에서 발견될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형태가 똑같은 것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9 세기에는 다른 장소에서 발견되지 않는 독특한 형태의 허리띠가 연 해주와 아무르강 유역에 출현하여 보급된다. 이 허리띠는 커다란 장방 형으로 구멍이 많이 뚫린 띠꾸미개들(그림 12. 36-40) 로 구성되어 있는 데, 간혹 원형인 것(그림 12. 35) 도 있다 . 부수적으로 허리띠에 방울도 장식하였을 것이다 (132. 147 쪽). 허리띠 꾸미개들은 석제나 토제의 거푸집에서 만들었다(그림 12. 24-

27). 그런 주조 기술은 아무르강 유역에서도 발견된다. 허리띠 꾸미개 의 표면에는 주석 도금이나 은 도금을 하였다 . 연해주에서는 허리띠 꾸미개를 만들기 위해 밀람 모형을 이용한 주조기술도 이용한 것이 특 징적이다. 이 모든 허리띠 꾸미개들이 연해주 지역 어딘가에서 제작된 것은 틀 림없지만, 지금까지 단 하나의 거푸집도 발견되지 않아서 주조의 중심 지에 대해서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원인은 밀랍 모형을 이 용하여 주조를 하면 거푸집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만약 특별히 구운 것이 아닌 경우에는 토제 거푸집도 또한 잘 보존되지 않는다. 장차 시 간이 지남에 따라 석제 거푸집이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허리띠 부품 이의에도 반지, 귀고리(그림 12. 30-34), 팔찌와 같은 작 은 장신구류가 각지에서 만들어졌다. 반지는 구리줄이나 구리판으로 된 것을 단련하거나 주조하여 만들었다. 귀고리는 두드리거나 늘여서 줄로 만든 다음에 둥글게 굽혀서 제작 하여 한 쪽이 끊어진 고리 형태를 이루고 있다. 고리에는 작은 軟玉이 나 紅玉隨로 된 원판을 달았다(그림 12. 30). 발해 장인이 주조한 팔찌는 단면이 납작한 것, 원형 혹은 렌즈형인 것으로 다양하다. 청동으로 구슬, 단추, 방울과 같은 다른 작은 장신구류도 만들었다. 이들은 모두 주조되었다. 이 작은 장신구들은 그냥 주위에 있는 재료 로 만들었음이 틀림없다. 장인이 이런 장신구에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 하지 않았기에 금속성분이 아주 다양하다. 청동으로 만든 홍미있는 범주로는 그릇이 있다. 청동 그릇들은 아주 · 귀하게 여겨졌던 것 같은데, 발견된 조각 하나에서는 깨진 청동 그릇 을 기웠던 구멍이 나 있다. 이것은 단지 突帶가 있는 器壁의 조각이기 때문에 완형을 복원할 수는 없었다 . 이 그릇은 약간의 주석 (2% )과 납 (2% )이 함유된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두번째 청동 그릇 조각은 기벽이 달린 구연부이다. 벽에는 평행하는 두 줄의 새김선이 나 있다. 이 그릇의 제작 기술은 홍미롭다. 이 그릇

은 가열하여 단련한 것인데, 합금성분에 납이 들 어 있어서 균열을 초 래하였댜 이것은 분명한 기술적 오산이었지만 , 장인이 즉각 알아겠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그릇의 표면에 금이 도금되어 있기 때문이다. 금 도금 사실은 합금에 금 성분이 증가되어 있어서 알 수 있다. 이 두 그릇 조각의 유래를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형태를 복원하기 에는 너무나 작은 조각이고, 기술 전통이 있는지 여부도 판단하기에 수량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와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에서 발견된 자료를 보면, 장신구 이용에는 분명한 전통이 보인 댜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발견된 청동 유물에는 아무르강 유역에 서 다량으로 발견되는 구리줄로 만든 귀고리가 있다. 이 귀고리들에는 연옥으로 만든 원판 모양의 드리개가 달려 있다. 발해시기 청동 주조 생산의 흔적이 마리야노브까 성터, 노보고르제 예브까 성터 및 취락지에서 발견되었는데, 특히 노보고르제예브까 취 락지는 고고조사에서 밝혀졌듯이 소그드인 38) 의 수공업자-청동 주조공 들의 주거 유적 이 었다 (205. 100-105 쪽).

마리야노브까 성터와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에서 금속 혼적이 묻어 있는 동일한 유형의 계란형 도가니(그림 12. 20, 21) 가 발견되었다 (160. 116, 123 쪽). 이들 유물은 각 성터에 개별적인 제작소들이 존재하였음울 증명한다. 불이나 물과 관련된 금속가공 생산소는 일반적으로 성 안이 아니라 근처의 하천에 자리잡았다. 그런 류의 수공업 지역으로 노보고 르제예브까 취락지가 있다. 이 취락지는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에서 북동쪽으로 300-400m 거리에 있는 아르쎄니예브까 (A p ceHbeB 1< a) 강변에 위치한다. 유감스럽게도 주거유적의 상부가 배수구와 경작으로 모두

역주 38) 소그드 (Cor .a)인은 중앙아시아의 소그디아나 (Cor .!IH aHa) 에 살던 이란 계통의 주민으로서 고대 페르시아 시대부터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제랍샨 (3e paa■ aH) 강 유역에서 농업과 목축에 종사하면서, 이곳이 동서 교통의 요지 인 점을 이용하여 상인으로서 사방으로 활약하여 멀리까지 영향을 끼쳤다 . 당나라 長安에도 다수가 거주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괴되었다 016. 96 쪽). 이 때문에 취락지와 제작소의 구조를 밝힐 수가 없었다 그 대신에 금속가공이 주거유적 주민들의 활동에 주된 역할을 하였음을 입증하는 홍미있는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길이 155mm, 전 단과 후단의 직 경 이 각각 15mm 와 40mm 인 원추형 토제 송 풍관(그림 12. 19) 이 발견되었는데, 강제적으로 송풍을 한 용광로가 존 재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116. 98 쪽, 그림 2). 송풍관 내부에서 목탄 과 재, 쇠똥 조각이 포함된 불에 탄 붉은 흙이 조사되었다. 이밖에도 바닥이 평 평 한 주물용 소형 국자(그림 12. 21) 와 토제 거 푸집 들(그림 12. 24-27) 이 발견되 었댜 모두 많이 사용한 혼적 이 있었다. 주물용 국 자 39 1 는 용량이 7c 쿄로 적은데, 같은 장소에서 발견된 거푸집을 이용하 여 작은 장신구를 생산하였다. 거푸집은 점토 태토에 모래를 많이 섞 어 잘 구위 만들었고, 세밀하게 광택을 냈다 (116. 96-103 쪽, 그림 4). 거 푸집에는 단면과 양면의 두 가지 유형이 발견되었다. 단면 거푸집에 덮는 뚜껑도 발견되었다. 단면 거푸집으로는 납작한 투공 장신구를 주 조하였고, 양면 거푸집으로는 고리가 있는 단추 모양의 半球形 裝飾(그 림 12. 24) 을 주조하였다. 양면 거푸집의 한 면에는 장식의 앞 면에 일 치하게 파져 있고, 다른 한 면에는 고리를 만들 수 있도록 파져 있다. 이와 유사한 장식이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도 발견되었다. 비록 유 물 자체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태양 모양의 牌飾을 만드는 거푸집도 있었다(그림 12. 26). 거푸집과 그 뚜껑에는 서로 정확히 붙일 수 있게 끔 눈금을 특별히 만들어 두었다. 주거유적에서 발견된 주조품의 양을 근거로 하면,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의 청동 주조공을 만족시킬 수 있는 시장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주조 중심지에서 용해한 금속은 화학적 지표가 아주 홉사하지만 합금성분은 다양하댜 이것은 이 지역에서 다양한 성분의 합금체를 직 집 생산하였음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역주 39) 저자는 그림 12-21 을 앞에서는 주물용 국자(Ji b $1'4 Ka) 라 하였다가 여기서는 도가니 (THre Ji b) 라고 하여 혼용하고 있다.

川 브,二까 Il 2성。 터1 ; I5 IB, 9, 를 10i.r¢,『0\ i?'二 21. 끄라')」스끼 노 성 터 ; 2, —6 , 125. 』노t보 빠끄 로。1브8 까 고 분 ; 11. 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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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립 18. 청동제품 :1, 3, 7 , 19.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 ;4, 8, 12, 14, 16, 18. 니꼴라예 꼴라예브까 성 터 ; 13, 17. 뻬뜨로브까 취 락지 ; 20. 스따로레 첸스꼬예 성 터

유물의 유형 연구를 통하여 다른 생산 중심지를 밝히는 것이 아직은 어려운데, 그것은 유물이 비교적 적기 때문에 이룰 바탕으로 각 유형 의 유물이 분포하는 양상을 유적별로 파악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확보된 금속제 유물의 분포 범위를 관찰하 는 것은 홍미롭다 . 예를 들어서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는 非 鐵 金屬 製 品이 비교적 풍부하지만,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에서 주조한 태양무 늬 패식이나 드리개 제품은 없고, 그 대신에 말갈 문화에서 전형적인 귀고리 - 반지(그림 12. 31-33) 가 많다. 이러한 관찰은 이들 주거유적의 민족적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205. 100 - 105 쪽). 그것은 장신구가 확고한 민족지표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의 주민에 말갈족 요소가 포함되어 있던 사실이 금속에 반영되어 나타난 것 같 댜 이 결론은 이 성터에서 출토된 도기의 기술적 연구를 통해서도 뒷 받침된다 (70. 118 쪽). 많은 유적에서 돌궐식 띠꾸미개(그림 14. 1-4; 그림 18. 7, 10, 14-17) 와 아무르 유형의 透孔式 띠꾸미개(그림 12. 35-40) 가 발견되고, 그것이 대부분의 청동 유물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것은 일 정한 기간에 아무르강 유역과 연해주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증명한댜 유물의 유형, 유물의 제작 기술, 합금의 성분을 통하여 상호관계를 밝히려고 노력하였지만 그 관계는 명확하지 않았다 . , 일반적으로 이러 한 양상은 다양한 그룹 주민들 사이에 금속가공 전통이 서로 융합하는 시기에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단일한 기술의 형성은 오랜 시간을 필요 로 하였고 , 단일한 기술이 완성되는 것은 아마도 그 다음의 역사적 단 계에 와서야 가능하였던 것 같다. 3) 기와 철금속과 비철금속의 생산 및 가공과 함께 발해에서는 궁전, 관청, 사원의 지붕을 덮었던 기와의 생산도 크게 발달하였다. 연해주에서 아 직은 절터 발굴에서만 기와가 발견되고 있다. 기와는 기본적으로 수키

와와 암키와의 두 종류가 있다. 아주 드물게는 착고, 부고 , 적새, 곱새 기와도 발견된다 (29. 142 쪽 ; 197. 86쪽). 기와 색깔은 흔히 회청색이지만 간혹 갈색이나 오렌지색도 있는데, 이것은 구운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이댜 오목한 쪽에는 흔히 포목무늬가 있고, 볼록한 쪽에는 삿 자리무늬가 있는 방망이로 두드린 흔적이 남아 있다. 수키와와 암키와 는 앞쪽이 넓고 뒤쪽이 상대적으로 좁은데, 지붕에 기와를 얹울 때 넓 은 쪽으로 아래 기와의 좁은 쪽을 덮기 위한 것이다 이상에서 열거한 여러 종류의 기와들이 끄라스끼노 성터의 북서쪽 불당 가까이에 있던 기와가마터에서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이 기와가 마터는 모래층의 완만한 경사면을 파고 들어간 장방형의 구덩이 형태 이고, 세로축이 북서-남동향이면서 약간 북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그림 19). 가마의 세로벽 아래쪽은 기와를 쌓아 만들었고, 위쪽으로는 모래 생토가 10cm 두께의 딱딱한 껍질을 이룰 정도로 달구어져 있었다. 기 와 및 불에 달구어진 모래층 위로 4-&m 두께의 벽토층이 덮여 있었 댜 가마의 가로벽은 커다란 돌덩이를 쌓아 만들었고, 안쪽에는 짚여물 을 섞은 흙반죽을 발랐다. 가마 안에는 천정에서 떨어진 두께 6-lOcm 의 점토 덩어리들이 있었다. 가마는 연소실, 소성실, 굴뚝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40 ) 연소실 은 가마 북서쪽에 위치하며, 용적은 66 x 100 x 160cm 이다 생토층 위 에는 목탄과 그을음으로 이루어진 충 (6-&m) 이 연소실 바닥에 형성되어 있었다. 가마 북서쪽의 가로벽에서 가운데에 만들어져 있는 작은 아궁 이룰 통하여 연소실로 연료를 집어 넣었다. 남아 있는 아궁이 벽 아래 부분은 깊이 36cm, 너비 85cm 로서 마치 장방형으로 잘라낸 모습을 하 고 있었다. 가마의 가운데와 남동쪽 부분에는 소성실이 있다. 소성실은 높이가 역주 40) 기와 가마의 부분 명칭은 아궁이(y cTbe), 燃燒室 (TOnKa), 燒成室 (K 叫 e p a of'. mlra ), 굴뚝 (T py 6a) 으로 번역하였다. 뜨루바는 煙道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발해 가마터의 경우에는 소성실과 굴뚝이 연기 구멍을 통해 거의 곧바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라서 굴뚝이라고 번역하였다.

평 균 65cm 이 고, 길 이 는 220cm 이 며 , 너 비 는 150cm 이 다. 소성 실 바닥은 불합격품 기와로 채워져 있었다. 그 아래에는 작은 기와편을 빽빽히 다진 층 (2-4cm) 이 있었댜 이렇게 기와를 깔아 놓은 것은 소성실 온도 룰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독특한 절연체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온도 보존을 위하여 소성실 천정도 모래층으로 덮었는데, 이 모래충은 점토 천정과 함께 고온으로 심하게 달구어져 굳어 있었다. 소성실과 연소실 사이에는 두께 10cm 의 점토벽이 있었댜 천정 아래의 벽에는 30X 50cm 크기의 장방형 구멍이 나 있는데, 이 구멍을 통하여 연소실에서 소성실로 열기가 들어갔다. 굴뚝은 가마의 남동쪽 가로벽과 붙어 있는 데, 이 가로벽 가운데에는 38X52cm 의 장방형 구멍이 나 있다. 이 구 멍을 통하여 소성실의 연기가 굴뚝을 따라 밖으로 빠져 나갔다. 굴뚝 은 돌을 쌓아 만들고 벽토를 발랐다. 굴뚝 크기는 35X50cm 이고, 남아 있는 부분의 높이는 90cm 이다 굴뚝 자체는 가마 천정보다 약간 높게 되어 있댜 아마 틀림없이 이 굴뚝울 통하여 소성실의 기와를 넣고 빼 고 하였을 것이다. 깊이 30cm, 직경 142cm 인 구덩이가 연소실 아궁이에 붙어 있는데, 이것은 가마롤 돌보던 화부가 일하던 장소임이 분명하다. 이 누덩이는 목탄이나 그을음과 같이 불에 탄 연료 찌꺼기로 채워져 있었다. 이밖 에도 구덩이 근처에서 불에 탄 갈탄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이것도 연 료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전 체 적 으로 볼 때 이 가마는 길 이 390cm, 너 비 140-160crn 로 꽤 커 다란 유구이다. 가마 바닥이 북서쪽으로 경사져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세로 축의 양쪽 끝 지점에서 낙차가 55cm 나 된다. 이렇게 바닥이 경사 진 것은 가마에 통풍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 지 역에서 자주 부는 북서풍은 그러한 통풍이 잘 이루어지도록 하였을 것 이댜 모든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아 기와가마터는 장기간 이용되었다. 가 마가 완전히 다시 만들어졌던 혼적이 보이고 벽이 강하게 달구어져 있 는 점이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밖에도 가마 주변에서 많은 양

의 연료가 연소되어 생긴 폐기물, 붉게 달구어진 벽토 조각들, 불합격 된 기와들이 발견되었다. 끄라스끼노 성터에서 발견된 중세 가마터는 아직까지 연해주에서 발 견된 유일한 기와가마터이다. 이 기와가마터를 제외하고는 중국 遼寧 省의 賊房村에서 11-12 세기 초에 해당되는 2 기의 遼나라 기와가마터가 알려져 있댜 아방촌의 가마터와 끄라스끼노 성터의 가마터는 전체적 으로 구조가 유사하지만, 아방촌 것이 좀더 개량된 세부구조를 하고 있다 (256. 19-21 쪽). 이와 구조가 유사한 기와가마터는 당나라에도 있었 다 (277. 57, 59 쪽) . 끄라스끼노 성터에서 발견된 기와가마터는 가까이에 있는 佛 堂 과 직 접적인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이 불당 자리에서 발견된 기와는 기와 가마터나 그 근처에서 발견된 것과 꼭 같다. 그러나 가마 벽에 쌓은 기와는 크기와 질에서 불당 기와와 많은 차이가 있다. 가마를 만들 때 다른 가마에서 구운 불합격품 기와를 가져다 썼음이 틀림없다. 이곳에서 발견된 기와와 가마는 9-10 세기 발해의 기와 생산과정울 어느 정도 복원할 수 있게 해주었다. ® 기와 만들기 : 암키와는 마포가 덮히고 네 개의 分割突帶 41 ) 가 수직 으로 끼워진 원추형 模骨로 성형하였다. 기와에 남은 혼적으로 보아 분할돌대는 높이 0.3-0.4cm, 두께 약 0 . 2cm 였댜 모골에는 점토판을 덧 씌웠다. 이 점토판이 굳으면 너비가 2.5-4cm 가 된다. 점토판을 접합했 던 혼적이나 모골에 덮혀 있던 포목 자국은 암키와의 오목한 쪽 표면 에 잘 남아 있다. 점토판을 모골에 덮은 다음에 방망이로 쳐서 단단하 게 하였다. 수키와도 이와 유사한 모골로 만들었으나, 수키와는 모골 하나에서 네 장이 아니라 두 장을 만들어 냈다. 수키와를 성형하는 모골에는 두 역주 41) 기와 제작 도구의 명칭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模骨 (mar5110H) 은 암키와 와 수키와를 만드는 제작들을 가리키고, 分割突帶(p er5 p o) 는 기와를 잘라내는 경계선을 만들기 위해 모골 바깥에 끼워 놓는 좁고 긴 막대기를 가리키며, 방망이(I( O JI O TYJII Ka) 는 접토판을 두드리는 막대로서 印板이나 拍子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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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분할돌대를 끼운 것이다. 수키와에서는 방망이 자국을 수직 방향 으로 다듬었고, 암키와에서는 모골 둘레를 따라 수평으로 다듬었다. 모 서리기와를 생산할 때에는 모골에 분할돌대를 수직으로뿐만 아니라 원 하는 형태를 얻기 위해서 대각선 방향으로도 끼웠다 . 분할돌대를 이용하여 원통형 점토를 모골에서 곧장 잘라낸 사실은 모골 쪽에서부터 점토를 잘라낸 흔적이 기와 측면에 남아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 흔적을 통해 분할돌대의 높이도 알 수 있다. 모골에서 점토판을 떼어낸 뒤에도 부분 부분으로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자주 있 었다. 이 경우에는 점토판을 분할돌대의 혼적을 따라 안쪽에서 잘라냈 다. 이 때문에 칼로 잘라낸 자국이 간혹 기와의 측면에 남아 있는 경 우도 있댜 ® 문양 넣기 : 암막새기와에 문양을 넣는 것은 모골에서 벗겨내기 전에 하였던 듯하댜 42) 이것은 시문된 암막새기와끼리 접합되어 있던 측면 모서리가 손상되지 않은 사실로 알 수 있다. 만약 모골에서 떼어 낸 후에 시문을 하였으면 측면 모서리가 손상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 이댜 암막새기와도 모골에서 가공하였음이 틀림없다. 이를 위해서 점 토 원통의 상단, 때로는 하단을 모골 밖으로 구부려서 안팎울 세밀하 게 다듬었다. 그런 다음에 막새 부분을 손가락으로 눌러 문양을 냈던 것 같다. 틀에서 떼어낸 수막새기와에는 추가적인 손질을 하였다. 문양을 넣 은 토제 원판을 수키와의 넓은 쪽에 붙였고, 좁은 쪽 가운데에는 지붕 에 못으로 박기 위해서 구멍을 냈다. 측면의 수키와 분리선은 세밀하 게 다듬었다. 이 손질은 수막새기와에만 하였다. 수막새는 특별히 만든 도장을 찍어서 시문하였다. 기와를 말린 후에는 가마에 넣어 구웠다.

역주 42) 연해주에서 발견되는 암막새기와는 암막새가 따로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암키와 아래쪽 가장자리에 문양을 넣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따라서 원판 형의 수막새(瓦當)처럼 암막새를 만들기 위한 瓦范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4) 도기 발해에서 사회분화가 급진전되면서 관료, 승려, 군인 등과 같은 주민 들은 이미 생산활동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게 되었고, 이제 이들 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다양한 종류의 수공업 제품이 더욱더 필 요하게 되었다. 게다가 수공업 생산에서도 세분된 전문분야의 출현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문화는 특히 도기 생산에 명백히 반영되 어 나타났고, 그 다음으로는 이를 바탕으로 기와 생산, 벽돌 생산, 건 축-의식용 테라코타 제품 생산 등과 같은 각 분야에 파생되어 나타났다. 도기 생산울 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윤제도기, 유약 바론 도기, 자기의 생산에 전문화의 추세가 감지된다. 발해 유적에서 다량으로 발 견되는 수제도기는 수공업 생산을 통한 것이 아니라 주로 가정에서 만 든 것이었다. 최근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구체적인 증거가 부족하여 연해주의 발해 시대 도기 생산의 발전에 대해 잠정적으로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러 다가 퀘이볼딘이 꼬르싸꼬브까 I 취락지에서 도기 제작소를 발굴하면 서 이를 증빙할 수 있게 되었다. 꼬르싸꼬브까 I 취락지는 우쓰리스끄 구역 꼬르싸꼬브까 마을의 북 쪽 변두리에서 1km 거리에 있는 보리쏘브까강 좌안에 위치한다. 경작 층에서 채집되는 유물로 보건대 이 취락지는 물에 잠기지 않은 고지대 에서 수백 평방 미터를 차지하고 있었다. 취락지의 일부는 정기적인 강의 범람으로 파괴되었다. 강변 기슭에서 도기편, 동물뼈와 같은 유물 과 3 개의 도기가마터를 포함한 다양한 유구가 발견된 것을 볼 때 지표 면에서 0.5-lm 의 두께를 가진 문화충이 600m 에 걸쳐 존재하고 있다. ® 도기가마터 1 : 가마터는 지표면에서 0.95-lm 깊이의 楊色 砂質土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가마 구덩이의 깊이는 0.6m 이다. 장축은 북서_남 동향이댜 구조로 볼 때에 이 가마는 單層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소실 아궁이는 북서쪽에 위치하며, 너비는 0.34cm 이지만 높이는 파괴되어서 알 수 없댜 연소실은 높이 0.4 2 m, 길이 0.7m, 너 비 0.34-0.73m 이 다. 가

마의 남동 부분은 강물로 파괴되었다. 소성실의 남아 있는 부분은 길 이 1.3m , 너 비 0.8-l. 55 m, 높이 0.7m 이 댜 가마는 갈색 사질토로 메워져 있었는데, 여기서 크기가 다양한 돌들 과 천정에서 떨어진 커다란 회청색 벽토 조각 들 이 발견되었다. 가마의 북서 부분에는 사질토와 목탄이 섞여 있고, 남서 부분에는 불에 탄 흙 이 사질토 안에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 가마 천정은 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윗부분이 아래로 내려앉았다. 천 정은 풀여물을 섞은 점토로 만들었다. 가마 벽에는 두께 3-7cm 의 흙반 죽을 발랐는데, 고열로 달구어져 회청색 빛을 띤다. 점토막 뒤에 있는 흙은 5-IOcm 정도가 붉은색으로 달구어져 있댜 연소실 벽은 납작한 돌을 쌓아 만들었다. 가마 바닥은 점토를 발라 만들었다. 점토층 두께는 5-7cm 이다 . 역시 달구어진 혼적이 있다. 바닥을 따라 연소실과 소성실의 경계를 찾았는 데, 연소실 바닥은 그을음으로 덮혀 있었고 여기서 연료가 불에 탄 혼 적인 숯 무더기가 확인되었다. ® 도기가마터 2: 비록 원형 천정의 북쪽 절반이 가마로 내려앉고 남쪽 절반은 약간 찌그러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원래 모습을 간직하 고 있댜 이 가마터는 지표면에서 0.7-l. 3m 깊이에서 발견되었고, 가마 터 l 에서 북동쪽으로 Im 떨어져 있댜 평면이 타원형인 가마 구덩이는 충적토를 Im 파고 들어갔으며, 장축은 북남향이다. 가마는 단충으로 되어 있다. 연소실 아궁이는 너비 0.3m 이고 북서쪽에 위치한다. 연소실 은 길이 0.6m, 너비 0 . 3-0 . 85m 이고, 남아 있는 부분의 높이는 0.7m 이 다. 연소실은 숯 조각들이 섞인 갈색 사질토로 채워져 있었다 . 그 사이 에서는 풀여물이 섞인 점토 덩어리들이 불에 달구어진 상태로 천정에 서 떨어진 채 발견되었다 바닥 근처에서는 숯으로 된 間層이 확인되 었다. 소성실은 높이 Im, 길이 2.2 8 m, 너비 0.9- l. 65m 이다. 소성실은 숯과 붉게 탄 흙이 섞인 갈색 사질토로 메워졌다. 굴뚝온 0.29X0.33m 크기에 높이 1. 45m 로서 가마의 남쪽 벽에 붙어

서 소성실 내부에 위치하고 있다. 굴뚝 흔적은 가마에서 위쪽으로 0.34m 높이까지 남아 있다. 굴뚝의 위쪽 절반은 모래와 작은 자갈로 메워지고, 아래쪽 절반은 갈색 사질토로 메워져 있었다. 굴뚝은 천정과 마찬가지로 흙반죽을 발라 만들었다. 굴뚝 벽의 두께는 &m 를 넘지 않 았다. lOXl&m 크기의 장방형 연기 구멍은 소성실과 연결되어 있다. 연기 구멍은 굴뚝의 북쪽 벽에서 바닥 부분에 나 있다. 굴뚝 내부의 표면은 불로 용해되어 유리처럼 되어 있었다. 가마의 바닥과 벽은 두께 5-&m 의 점토로 덮혀 있다. 고온으로 달 구어져 벽은 회청색을 띠고 있고, 바닥은 진한 회색을 띠고 있다. 바닥 은 연소실 쪽으로 경사졌다. 연소실 바닥에는 그을음이 배어 있었다. ® 도기가마터 3: 가마터 2 에서 북동쪽으로 2.4m 떨어져 있고, 0.7m 깊이에서 발견되었다. 가마의 남동쪽 절반은 강물로 파괴되었다. 가마 구덩이는 불에 탄 흙이 드문드문 눈에 뜨이는 갈색 사질토로 채워졌 댜 북서 부분에서는 숯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천정은 다른 가마터와 마찬가지로 안쪽으로 함몰되어 부서져 있었다. 연소실 아궁이, 연소실과 함께 소성실 일부가 남아 있었다. 아궁이는 돌로 만들었고 너비 0.4m, 높이 0.24m 이다. 연소실은 상부가 파괴되었 는데, 길이 0.6m, 너비 0.4m, 높이 0.5m 이하이댜 소성실의 남아 있는 부분은 길이 lrn, 너비 0.7- l. 15m 이댜 높이는 0.5m 를 넘지 않는다. 연소실과 소성실의 경계선은 다론 가마터와 마찬가지로 바닥에 난 흔적을 통하여 추적하였다. 풀여물이 섞인 점토를 다져 만든 바닥은 두께가 5-lOcrn 이고, 회청색으로 달구어져 있었다. 가마터에서 완형의 윤제도기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가마터 3 의 소성 실에서 윤제도기편 2 점이 발견되었다. 가마터 2 에서는 윤제도기편 5 점 이 발견되었고, 아궁이 근처에서 低登 형태의 도기 1 점이 깨진 채 발 견되었댜 이 완형 도기는 윤제이고 흑색을 띠고 있다. 소성 상태가 불 량하여 조각의 단면에 회색 간충이 있다. 조각은 무겁고 두드리면 특 징없는 소리가 난다. 이 도기는 높이 20.3cm, 바닥 직경 29cm , 입 직경 19cm, 벽 두께 1.2c m 이 하, 바닥 두께 0.5cm 이 다.

가마의 아궁이 근처에 깊이 1.5m 정도의 넓은 구덩이가 있었다 . 바 닥으로부터 0.8m 높이로 구덩이 를 메우고 있는 사질토에서 벽토, 숯, 도기편, 정선된 점토로 이루어진 간총이 확인되었다. 채워진 내용물로 보아서 이 구덩이는 타고난 연료, 가마를 떼어낸 쓸모없는 부품들, 불합격품 도기들을 폐기하던 장소였다 . 43)

이 구덩이에서 발견된 도기는 모두 불합격품 조각으로서 과열되거나 터지거나 변형된 것들이며, 제대로 구워지지 않은 것도 있다 . 제대로 구워지지 않은 것은 일반적으로 몸체가 크고 벽이 두터운 것들이다. 구덩이에서 436 점의 윤제도기편과 4 점의 수제도기편이 수습되었다. 수 제도기편은 直壁登 모양을 하고 있고 탄화된 음식물 혼적이 보였다. 윤제도기편은 회색과 흑색으로 대별된다. 회색 도기가 훨씬 많은데, 두 께가 1-2cm 이고, 태토는 치밀하고 모래가 섞였으며 회색이다. 흑색 도 기는 단면에 회색과 갈색 빛이 감돌고 두께는 0.6- 1. 4cm 이댜 이 도기 편들에는 大壅 조각도 있다. 윤제도기에는 低壅, 腕, 球形煙가 있고, 넓 은 가로띠 손잡이가 달린 것도 있다. 이 취락지에서 발견된 소성실과 구덩이는 하나의 생산 복합체, 죽 도기 제작소를 이루고 있다. 땅을 파고 설치한 가마는 열의 상실을 방 지하였고 점토제품을 굽는 데 최상의 조건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크고 두터운 도기는 질이 좋지 않았다. 이런 도기를 구울 수 있을 정도로 온도를 높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불합격품 도기편에서 거 의 1/3 은 벽이 두터운 것들이다. 이 가마터들은 끄라스끼노 성터에서 발굴된 기와가마터와 구조가 바 슷하고 (29. 145, 146 쪽), 중국 동북지방의 동경성 근처에서 발견된 기와 • 벽 돌가마터 와도 유사하다 (300. 34-36 쪽). 이 들도 구덩 이 를 파고 만들었 고 단충이었다. 그리고 연소실 • 소성실 • 굴뚝의 세 부분으로 구성하여

역주 43) 가마에서 꺼낸 재, 불합격 제품, 불에 탄 흙, 가마 벽체 조각들을 폐기하던 장소가 아궁이 앞이나 옆에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 룰 灰丘部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퇴적층으로 제품을 구운 회수를 확인할 수가 있어서, 가마의 사용 회수나 제품의 형식 변화를 알아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직선상에 배치하였다. 이와 유사한 구조를 가진 도기가마터는 고려 (10-14 세기)에도 알려져 있었고, 한반도에서는 20 세기까지 사용되었다. 이 도기가마터들은 언덕 의 경사면에 위치하는데, 이것은 연소실 아궁이가 굴뚝보다 낮게 위치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은 대나무 줄기를 세로로 쪼깬 모습을 하고 있고, 칸막이로 막아서 여러 개의 방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105. 60, 61 쪽). 단층 소성실은 전반적으로 극동 민족들에 특징적이었다는 점을 지적 할 필요가 있댜 이 러 한 가마는 중세 에 송나라 (305. 그림 8), 요나라 (256. 19-21 쪽), 금나라 (115. 23, 24 쪽)에 도 알려 져 있었다. 고려 가마는 발해 가마보다 구조가 약간 복잡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특히 고 려 가마에는 바닥과 벽에 생토충과 분리시키는 단열충이 있었다. 이제 도기의 특징을 설명하기에 앞서서, 도기가 주로 편린들이기는 하지만, 발해시기 연해주의 거의 모든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고, 종류도 다양하다는 점을 지적해두도록 하겠다(그림 20). 발해 도기는 제작 기술면에서 수제, 반윤제, 윤제의 세 범주로 나뉜다. 섞 ) (1) 手製陶器 수제도기의 약 80% 는 高壅, 低壅 , 直壁壅이며, 구연부 아래쪽으로 덧 띠가 달린 것이 특징적이다 . 나머지 20% 는 뚜껑과 小腕이고, 간혹 전 통 양식 에 서 벗 어 난 것 도 있다 (62. 186 쪽 ; 70. 39 쪽 ; 73. 61-70 쪽 ). 45 )

역주 44) 제작 방법에 따라 손으로 빚은 手製陶器 (nenH 8JI Kep 8.M11K a), 손으로 빚은 다 음에 물레로 손질을 한 半 輪 製陶器 (Ke p aMHKa, llOp a6 oTaHH8 JI Ha Kp yre ), 물레 로 빚은 輪 製陶器 (cTaHKOB 표 Kep a.MHK a 또는 rOH 'l a pH 끄 Ke p aMHKa) 로 분류된다. 역주 45) 이 책에서 언급된 도기 명칭은 러시아 그릇 명칭을 원용한 것어서 우리와 분류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정확히 번역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서 高 登, 低 甄 直 壁뾰 에는 오히려 深鉢에 가까운 것이 많지만 단지에 속하는 것들은 일 단 뾰 로 통일하여 번역하였다. 그리고 필자에 따라서도 도기 명칭이 제각각 쓰이기 때문에 현지에서도 용어가 통일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일단 여기에 제시한 번역어는 본문에서 설명된 특징에 따라서 만든 용어임을 밝혀 둔댜

® 高登(그림 21. 2, 4 ; 그림 22. 1, 3 ; 그림 23. 3, 6) 바닥이 편평하댜 461 몸통은 측면에서 볼 때 굴곡이 심하지 않고, 아래 쪽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넓어지다가 서서히 줄어들어 목을 이룬다. 목 으로부터 약간 外反하면서 입술을 이루고 있고, 입술 바깥으로 덧띠가 1. 단지 종류 ® 高登 (6a3a) : 원래는 키가 큰 러시아 꽃병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여기 서는 높이가 몸통 직경보다 2 배 이상인 단지를 의미한다 . ® 低登 (ro p moK) : 원래는 작은 단지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과 비슷하지만 몸통 직경이 높이보다 2 배 이상인 납작한 단지를 의미한다 . ® 直壁 뾰 (6aHKa) : 몸통이 곧게 되어 있어서 전체가 거의 원통형을 이루 어 목이 없는 단지이다 . ® 直頭 登 (K y BmHH): 원래는 물을 따르는 주둥이와 손잡이가 달려 있는 러시아 물병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의 파생물로서 목이 곧게 달 려 있는 단지롤 의미한다. ® 球形 登 (ma p oBHlIH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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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I I Il J 0나 나니u 7 二\느갱二) 퀄\다?선 ’ I4 ’J’ 15 17 0' 5' ’g 그림 20. 발해 도기의 기본 형태들 :1, 5. 빼뜨로브까 취락지 ;2.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 지 ;3, 4, 15, 16. 마리야노브까 성터 ;6-14, 17, 18. 니꼴라예브까 11 성터

돌아가고 있다. 바닥 직경은 입의 직경보다 두 배나 작고, 몸통 직경은 전체 높이의 반을 넘지 않는다. 15 개 샘플에 대해서 성분을 분석한 결과, 고호의 제작에 含 水 雲 母, 白色陶土, 백색도토-함수운모 점토와 같이 다양한 점토를 이용하였음 울 알게 되 었다 . 이 분석 은 엔퀘옵싼니 꼬프 (H.B. 0BC .s! HHHKOB) 와 엘 베 잘리샤크(JI .B. 3 a.,rnm. aK) 가 행하였다. 모든 샘플에 과산화철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러시아 극동의 점토에 나타나는 지역적인 특성이다. 철 성분을 함유하는 점토는 좀더 유연하다. 태토의 첨가물로는 모래, 石 英 가루 및 長石이 발견되는데, 드물게는 尉火光占土와 碧玉이 포함된 경우 도 있댜 첨가물 크기는 일정하지 않아서 0.5 - 2rnm 정도이댜 혼합물이 고르게 섞여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태토의 반죽에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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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二懿; '.. 、? . :` ' : · 尸 그림 22. 발해의 수제도기 :1 . 마리야노브까 성터 ;2, 5. 꼰스딴찌노브까 I 취락지 ;3. 노 보빠끄로브까 고분 ;4 . 니꼴라예브까 I 성터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태토 첨가물의 비율은 아주 표준적이고 일정한데, 이것은 분명히 전통을 따른 것이고 역시 시간을 들인 것이다. 점토와 첨가물 비율은 동일하지 않다 . 예를 들어서 14 개 샘플에는 점토가 70-80% 를 차지하고 있지만 , 1 개 샘플에는 60% 를 차 지하였다. 따라서 첨가물은 전체 태토의 20-30% 와 40% 를 각각 차지한 다. 제품의 여러 부분에서 le 굽 당 포함된 혼합물을 산출해보더라도 반죽을 빨리 했음을 중명한다 . 이들의 양은 다양하였다 . 고호는 고리형 점토판으로 테쌓기(輪積法)를 하여 제작하였는데, 이 사실은 도기 조각과 완형 도기에 있는 점토판의 흔적들로 알 수 있다. 테쌓기 방법을 이용하였다는 것은 도기의 안쪽 표면을 보아도 알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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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그림 23, 발해의 수제도기 : 1-3, 6-9. 끄라스끼노 성터 ;4. 니꼴라예브까 I1 성터 ;5. 노보 있다. 여기에는 점토판의 아래쪽' 가 장자리가 납작한 평행선을 이루면 서만 들점원 토래때판의에 양점이쪽토러 판한가 장형경자태사리롤가는 보 안특여쪽별주울히고11 향 있비하다스도.듬 록하 하게였 다경.사 져일 반있적는으데로, 그이릇러을한 경사면은 점토판의 바깥쪽 가장자리에서만 보인다. 판의 너비는 보통 3-4cm 이며, 간혹 5cm 인 경우도 있다. 입술에서는 이러한 경사를 특별

히 아래쪽에 붙인 점토판으로 보정하였는데, 흔히 결합 부분이 벗겨지 거나 노 출 되어 있다(그림 24). 그릇 하나는 4-5 개의 점토판으로 만들었 고, 드물게는 6 개나 8 개 롤 사용하였다. 그릇의 성형은 목, 몸통, 바닥의 부위별로 이루어졌으니, 이러한 부위들이 각기 개별적으로 발견되는 데에서 알 수 있다. 각 부위의 가장자리가 처음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꽤 마른 상태에서 성형하였던 것 같다 . 바닥은 전통적으로 반죽 덩어리를 가지고 부침개 모양으로 둥글게 만들었다 . 그러나 고호의 15-20% 는 나선형으로 감아서 만든 흔적이 바닥 조각에 남아 있다 . 바닥과 몸통을 연결하는 방법에는 다음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 , 바 깥쪽 변두리를 따라 손가락으로 눌러 붙임으로써 모가 나게 하는 접합 방법으로서, 가장자리가 특별한 형태를 띠게 된다 . 둘째, 몸통의 제일 아래쪽 점토판을 안쪽으로 약간 밀어 넣어서 바닥과 접합하는 방법이 댜 셋째, 바깥쪽을 손가락으로 눌러 붙이지 않고 단순히 모가 나게 접 합하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바닥과 몸통이 연결된 안쪽 부분에 빗처럼 생긴 도구나 주걱칼로 고르게 다듬어서 주름이나 넓적한 홈과 같은 흔적 이 나타나 있다. 혼히는 세번째 접합 방법이 이용되었다. 목과 몸통은 따로 만들었다. 게다가 목은 입술에서부터 만들기도 하 고 아래쪽에서부터 만들기도 하였다. 입술에서부터 만든 경우에는 입 술 가장자리가 납작해졌는데, 다듬은 뒤에도 이런 혼적이 남아 있다. 고호의 성형은 打接로 마무리하였다. 타날은 각 부분이 합쳐져 하나 의 그릇을 이룰 때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닥 위쪽 으로 1-3mrn 높이에서 포착되는 타날 흔적에서 알 수 있는데, 드물게 는 이러한 흔적이 몸통이나 목까지 나타난다. 타날할 때 받쳤던 모루 의 흔적이 그릇 내부에 사슬 형태의 홈으로 남아 있는데, 이를 보면 수평으로 두드렸음을 알 수 있다 . 일반적으로 이러한 홈이 점토판의 접합 부위를 수평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자연히 이러한 타날은 점토판의 처음 크기와 원래의 형태를 크게 변모시켰다. 점토판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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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 24.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에서 출토된 발해 수제도기

길고 넓게 되었다. 타날 도구의 표면에는 사각형이나 작은 구멍으로 된 조그만 눈금들이 있어서 그릇 표면에 格子文 죽 類似織物무늬 47) 가 남아 있다. 그물 크기는 0.2-0.5crn 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보다 큰 타날혼이 있는 고호는 아주 드물다. 바닥을 나선형으로 감아서 만든 고호는 목과 몸통의 두 부분을 접합 하여 만들었다. 바로 이 접합선을 따라 도기가 깨지곤 한다. 어떤 경우에는 도기 전체를 완전히 짜맞춘 뒤에 타날을 하였다. 이 경우 바닥이 둥글게 되어서 나중에 납작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몸통 역주 47) 도기 표면에 난 격자문이 실제 칙물을 가지고 낸 것이 아니라 방망이 문양 이기 때문에 격자문을 유사직물무늬라고도 부르고 있다 .

과 바닥의 접합 부분이 둥그렇게 되어 있거나, 또는 <격자>무늬 혼적 이 남아 있다(그림 22. 4 ; 그림 23. 2, 6 ; 그림 33. 8). 타날로 성형한 고호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바깥 쪽에는 < 격자>무늬 혼적을 거의 없앴다. 이를 위해서 작은 구멍을 메 우는 데 사용하는 점토 반죽을 이용하였다. 고르지 않은 표면을 다듬 을 때에도 이와 유사한 작업을 하였다. 70% 에 이르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점토로 문지르고 나서 器 壁 을 마연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니꼴 라예브까 II 성터와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에서 출토된 도기에서 일반 적으로 나타난다 . 마연 도구에서 직접 사용되는 부위는 2-3cm 정도로 좁았댜 마연은 도기의 부위에 따라 사선, 수직, 수평 방향으로 각기 달리 하였다 . 다시 말해서 입술과 바닥은 수평으로 마연하고, 목은 수 직으로 하고, 몸통은 사선으로 하였다. 그러나 <격자>를 세심하게 지 우지 않아서 바닥, 목 부근, 때로는 입술 아래에 그 혼적이 남아 있다. 타날 흔적을 지우는 것은 아무르강 유역의 뜨로이쯔꼬예 (T p O 血 Koe) 그 룹 481 과 빠끄로브까 (noKp OBKa) 문화 49 1 에 서 특징 적 이 다 . 마리야노브까 성터, 니꼴라예브까 II 성터,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꼬르싸꼬브까 취락지, 꼰스딴찌노브까 취락지에서 발견된 도기에서는 격자문을 어깨 약간 아래에 좁은 띠 (2-3cm) 형태로 일부러 남긴 경우 도 드물게 발견된다. 틀림없이 처음에는 도기 표면 전체가 작은 구멍 으로 덮혀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점토를 바르고 마연을 하여 그 흔적 을 지웠댜 어느 부분에서는 표면을 고르게 하면서 격자문의 가장자리 가 지워져 다시 고치기도 하였으니, 중복되어 타날된 흔적이 이 사실 역주 48) 아무르강 연안의 昧賜 文化는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구분된다 . ® 초기 문화 (4-5 세기) : 꾸르꾸니하 (K ypK)'H IDCa) 골짜기 주거유적, 나이펠드 (H 대­ !J)e JJ b D .) 고분군, 블라고슬로벤노예 (BnarocnoBeHHoe) II 주거유적 ® 중기 문화 (6-8 세기) : 뜨로이쯔꼬예 (T po HQ KOe) 고분군, 노보뻬뜨로브까 (HoBo­ neTp O BKa) 고분군 ® 후기 문화 (8-9 세기 중엽) : 오씨노보예 (0CHHOBOe) 호수 유적 역주 49) 유엠바씰리예프 (IO . M. BaC HJi beB) 가 l%5 년경에 명명한 것으로서, 종전에는 9-12 세기에 아무르강 유역에 살던 주민을 단지 <아무르 여진인>이라 부르던 것을 이때부터 독자적인 문화 유형으로 파악한 것이다.

二\ 6 그림 25. 꼰스딴찌노브까 I 취락지에서 출토된 발해 수제도기

을 증명해준다. 이것은 발해 수제도기가 회색 점토로 만든 윤제도기의 성형, 특히 施文의 전통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와 홉사한 모티브의 가장자리 문양이 어깨 약간 아래에서 발견되는 것이 후자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 발해 수제도기에 이런 문양이 나타나는 것은 이질 적인 것이다. 덧띠 50) 는 두 군데에서 나타나는데, 첫째 구역은 입술 아래쪽이고(그 역주 50) 隆起文과 관련된 용어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突帶(p e JJ b 멕 HIDI Ba .JJHK ) : 몸통의 연장 형태로 튀어나오게 돋을 새김된 것 덧띠 (H aJJ e 血멕 Ba .JJHK ) : 단면이 둥그런 점토띠를 덧붙인 것 납작 덧띠 (H 끄 e 血 JJe HTa) : 단면이 납작한 점토띠를 덧붙인 것 아울러 기와나 도기를 만들기 위해서 접토를 납작하고 길쭉하게 만든 것을 점 토판 (r .11HHJ1 H a.J1 JJ eHTa) 으로 번 역 하였다.

§ `l \ .----\ .. :. '\i· ·:• •• I /J ``<글/ 二 4a ·사 그림 26. 꼰스딴찌노브까 I 취락지에서 출 토된 발해 수제도기

림 21. 3) 둘째 구역은 어깨(그림 21. 2) 이다. 이것은 둥근 띠를 덧붙인 것이다. 첫째 구역인 입술 아래의 덧띠는 발해 수제도기의 불가결한 요소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다 . 첫째, 끝이 곧게 위나 아래로 향한 차양 형태의 덧띠(그림 26. 1, 3, 7). 둘째, 단면이 삼각형인 덧띠(그림 'l7. 10). 셋째, 가운데 부분을 따라 수평의 홈줄이 나 있는 덧 띠(그림 26. 5, 6). 넷째, 단면이 B 자형인 덧띠(그림 26. 2, 4). 이것은 아 래와 위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래쪽은 점토띠를 붙여 굵 직하게 되어 있고, 위쪽은 입술 쪽의 점토판 가장자리를 밖으로 구부 려서 만든 것이다. 다섯째, 늘어뜨려서 만든 혹이 달린 차양 형태의 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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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 이 가운데에서 첫째, 둘째의 것이 많은 수를 차지한댜 나머지 종 류는 전체의 약 40% 를 차지한다. 80% 를 차지하는 대부분의 경우에 입술 아래의 점토띠에 문양이 없 댜 그러나 일부에는 문양이 있다 그것은 둥근 도구의 측면으로 눌러 찍은 것으로서 여러 종류가 있다. 여기에는 주걱 칼로 낸 좁거나 넓은 눈금, 점토띠 가운데를 따라 타원형으로 움푹 들어가게 만든 것, 수평 으로 사슬을 이루는 삼각형과 능형의 도장무늬가 있다.

역주 51 ) 므라모르나야강은 연해주 동해안에 있는 루드나야(Py血llJI)강의 지류인데, 이곳에 자리잡고 있는 성터를 과거에는 쩨쭈혜 (TeTIOxe , 野猪河) 성터라고 부 르다가 중국식 지명이 러시아식 지명으로 개명되면서 이 명칭도 바뀌었다.

덧띠의 방향과 함께 입술이 납작한 사실이나 문양을 낼 때 위쪽을 도구로 더 강하게 누른 사실로 보건대, 도기 를 뒤집어서 입술이 아래 로 된 상태에서 문양을 만들었다. 이런 경우는 30% 이하로서, 이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도기 제작의 한 방법이었다 . 꼬르싸꼬브까 취락지와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출토된 일부 고호 에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전통적인 둥그런 점토띠 대신에 0.3-0.4 c m 너비로 좁고 납작한 덧띠를 입술 아래에 붙였는데, 납작 덧띠의 표면 에는 모두 다 곧은 날을 가진 도구를 사용하여 오른쪽으로 경사지게 押印하였다. 압인 길이는 0 . 5-0 . 6cm 이다. 이와 유사한 현상이 昧輯 文化에 속하는 나이펠드 (HaA¢e JI bn) 그룹의 도기에서도 관찰된다 (70 . 45 쪽). 두번째 구역에 덧띠가 있는 예는 첫째 구역의 경우보다 드물다(그림 21. 2). 몸통은 흔히 유사직물무늬가 찍혀 있거나 그 혼적으로 덮혀 있 댜 둘째 구역의 점토띠는 입술 아래 것과 형태가 동일하다. 단면이 원 형 또는 삼각형인 점토띠가 우세하다. 보통 어깨에는 점토띠를 단 한 번 돌렸다 어깨의 점토띠에는 수평으로 연결된 것, 점토띠의 두 끝이 엇갈리게 위치하여 연결되지 않은 것, 두 끝이 <콧수염>처럼 아래로 처져 연결되지 않은 것(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수평으로 연결되면서도 6cm 간격을 두고 아래로 짧게 난 <콧수염>이 있는 것(그림 21. 2) 이 있다. 두번째 구역의 덧띠에는 대부분 문양이 없다. 2-3% 는 예의인데, 점 토띠에 斜線 또는 마름모꼴의 압인이 있다(그림 26. 1). 꼰스딴찌노브까 취락지에서 출토된 고호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 이 도 기의 점토띠는 매끄러운 표면에 덧붙인 것이 아니라, 미리 홈줄을 파 고 여기에 끼워넣어 象候하였다. 다음 단계로는 도기를 흐릿하게 마연하였다. 마연 도구에서 실제 사 용되는 부위가 좁아서 마연한 뒤에는 서로 가까이 배열된 얕은 고랑들 울남기고 있다. 따라서 도기 표면이 이랑과 고랑이 난 형태와 흡사하였 댜 도기가 덜 말랐을 때 마연한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몇 군데에서 작은 <薄皮>를 이루면서 마연된 껍질이 벗겨져 있다. 도기 제작의 마지막 단계는 굽는 것이다. 발해 고호에는 흑색, 혹갈

색, 회흑색이 압도적이고, 드물게는 적색과 적갈색도 있다. 도기 전체 가 잘 구워진 경우에는 색조가 단일하고 고르며, 그렇지 못한 경우에 는 겉과 속의 색깔이 다르다. 도기 성분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소성 온도는 800°C 를 넘지 않았 다 이것은 석영 입자가 원래의 형태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알 수 있 댜 주로 환원 상태에서 도기를 구웠다 . 이를 위해서 가마와 같은 어떤 특별한 소성 구조물을 이용하였다. 일부 고호는 산소가 자유로이 공급 되는 상태에서 酸化 燒成되었다. 이와 유사한 예가 아무르강 유역의 말갈 문화인 뜨로이쯔꼬예 그룹과 빠끄로브까 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수제도기에서도 보인다. 실제로 모든 도기의 안팎에 식물성 음식물 찌꺼기가 붙어 있는데, 흔히 탄화된 둥근 알곡이 발견된다. 이런 도기는 부엌용으로 이용된 것들이다. 부엌용이라는 사실은 도기의 안쪽 표면을 마연하거나 매끈 하게 다듬어 음식물과의 접촉을 염두에 둔 사실로도 확인된다. ® 低登(그림 21. 1 ; 그림 22. 1, 4) 저호는 몸통 직경과 전체 높이의 비율에서 고호와 다르다. 저호의 몸통 직경은 전체 높이의 1/2 이상이다. 따라서 고호는 저호에 비해 더 좁다. 기술적 특성에서 볼 때 양자는 동일하기 때문에 새로이 언급할 필요 가 없다. 단지 저호의 안쪽 표면을 흔히 빗과 같은 도구로 다듬어서 경사진 고랑이 남아 있다는 점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방법 은 흉노의 주거유적과 고분군에서 출토된 도기에서 특징적인 것이다 (74. 23 쪽). ® 直壁萱(그 림 25. 4-7 ; 그 림 23. 7, 8) 벽이 약간 굽어 있거나 때로는 곧게 벌어져 있다. 어깨는 따로 없고 바닥이 좁다 입술은 특별히 두텁게 하거나 바깥에 덧띠를 돌렸다. 꼬 르싸꼬브까 취락지와 꼰스딴찌노브까 취락지에서는 이러한 도기가 전

체 수제도기의 30% 를 점하여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 직벽호의 제작 기 술은 저호나 고호와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이러한 도기의 성형에서는 전통적인 것과는 다른 요소가 종종 보인다. 무엇보다도 먼저 입술 아 래의 점토띠 형태가 기자형으로 변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 게다가 점 토띠가 더 두터워진다. 간혹 점토띠가 아주 없는 경우도 있다. 직벽호형 도기는 대부분 표면이 매끈하고 문양이 없다. 저호나 고호 보다 더 많은 숫자가 산화 소성되었다. 이와 꼭 같은 현상이 뜨로이쯔꼬예 그룹의 유적에서 출토된 직벽호 에서도 포착된다 (70. 67-70 쪽). ® 小i苑 소완은 연해주의 거의 모든 발해 유적에서 발견된다. 바닥은 편평한 데, 간혹 2-3rnm 로 조그만 고리형 굽이 있는 경우도 있다. 벽은 곧게 바깥쪽으로 벌어지거나 안쪽으로 약간 오므라들어 있다. 입술 가장자 리는 둥글거나 곧게 잘려 있다. 표면에 문양이 있는 제품은 단 1 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 소완의 높이는 5.-7 c m 정도이댜 소성은 환원 상태에 서도 했고, 산화 상태에서도 했다. 이와 유사한 제품들이 아무르강 연 안의 말갈 문화와 빠끄로브까 문화 (133 . 189 쪽, 그림 5), 만주의 발해 유 적(28.5. 24 쪽, 그림 6) 에서도 발견된다. 소완은 개인용 그릇이었다. 이것 은 뚜껑으로도 이용되었다 . ® 뚜껑(그림 23. 4, 5) 소완과 같은 형태이지만, 납작한 바닥쪽에 고리 모양이나 그루터기 모양의 꼭지가 달려 있는 점이 다르다.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니꼴라 예브까 II 성터, 꼰스딴찌노브까 취락지에서 발견되었다. 이와 유사한 것이 빠끄로브까 문화에서도 알려져 있다 (133. 139 쪽, 그림 5; 146 쪽, 그 림 13 ; 150 쪽, 그림 5 ; 198 쪽,. 그림 11). 이상으로 보건대 연해주 발해 문화의 토착 유물을 이루고 있는 수제 ’ 도기는 모든 유적과 모든 건축평면에서 발견된다. 직벽호는 주로 상부

그림 28. 꼰스딴찌노브까 I 취락지에서 출토된 반윤제 발해 도기

건축평면에서 발견되고, 고호와 저호는 일반적으로 중간 및 하부 건축 평면에서 발견되지만 상부 건축평면에서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2) 물레에서 마무리 손질을 한 도기(半輪製陶器) 반윤제도기는 연해주의 모든 발해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전 체 도기 의 약 30-40% 룰 차지 한다. 반윤제도기에는 高煙形 • 低登形 • 直壁壅形 도기들 및 약간 변형된 低登의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번째 유형의 반윤제도기는 위에서 검토한 수제도기와 형태가 같 다. 하지만 수량에서 수제도기의 10% 미만에 불과하다. 반윤제도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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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토 성분은 수제도기와 차이가 없다(그림 28 ; 그림 29. 1, 5). 도기 표면을 손질하거나 시문할 때에 물레나 그 어떤 돌림판을 사용 하였으니, 그 중거는 다음과 같다. 많은 점토띠들은 돌림판을 이용하여 입술 아래에 붙였는데, 이로 인해서 평행하게 연속적으로 배열된 가느 다란 고랑들이 생겼다. 물레를 사용하면서 일정한 모티브의 문양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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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JC M I l 1 I I l J J 7 그림 30락. 지발 해 도기 : 1, 3, 5, 7.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 2, 4, 6, 8. 꼰스딴찌노브까 I 취

문외브룹예어였까하 측던브낼유 에까 기 취전때적 도락 성통과모 지편터적하 래))하였빠인로나를도다끄 .록빗방만로두 과식들브른이하 으어까 러기같로것진 한 은문서이 위 작 문화도한지고있양에장 다금 것으도으.둥도이로 로다근보 이서 .이 인찍밖 空다용沈은이에洞.하線 와도 이수고으 중 평유 이로국있있 사 에는지다유된한데서그 (형 , 3재는 C물현의 J7그 .결이상 고무8무것이14대늬08늬은 --부(8(나1 55터노꼰도2이% 쪽보 스기는)펠.사고딴 를 드르용그바찌 제리하떼닥노그

고 바닥과 몸통을 나선형으로 꼰 띠로 만든 도기도 있는데, 이것은 틀 림없이 물레 기술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그룹에 속하는 일부 도 기는 물레에서 떼어낼 때 실로 잘라 냈기 때문에 평행하는 고리 모양 의 고랑을 남기고 있다. 이렇게 도기의 제작과 마무리 손질에 물레를 사용함으로써 겉모양에 서 변화들이 나타났다. 차양 형태의 점토띠가 더 밋밋해져서 도드라진 모습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沈線의 물결무늬처럼 문양에서 새로운 모 티브가 나타났다. 아울러 도기 제작기술 자체가 변하는데, 특히 나선형 으로 꼰 띠의 사용이 줄어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발해 문화의 도기에 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와 유사한 예가 빠끄로브까 문화의 도기 에도 보인다 . 低 盛 (그림 29. 5, 6 ; 그림 30) 는 넓고 땅딸막한 도기로서 혹갈색을 띤 다 . 바닥은 평평하고 몸통은 볼록하다 어깨는 완만하게 되어 거의 표 현되어 있지 않고, 목은 심하게 밖으로 휘어져 점토띠 모양의 입술로 마무리된다. 저호는 높이 16-l&r n, 바닥 직경 11cm , 입술 직경 12-13.5 c m 이다. 저호는 연해주의 거의 모든 발해 유적에서 발견된다. 이 유형의 저호는 주로 입술 형태와 관련하여 6 개 종류로 나뉜다. @ 입이 外反하는 저호형 도기. 입술 가장자리가 오목하게 되거나, 입술쪽 점토판이 직접 확장되어 점토띠가 만들어졌다(그림 29. 6). © 입술 쪽 점토판을 바깥쪽으로 꺾어서 만든 점토띠가 달린 저호형 도기(그림 27. 1-4). 일부 도기에서는 꺾인 점토판을 벽에 완전하게 붙 였다. 이 경우 물레 위에서 점토판 가운데를 따라 수평의 홈줄을 내어 점토띠가 두 부분으로 나뉜다. 대부분의 도기에서는 꺾인 점토판의 일 부만을 벽에 붙였다. 이럴 경우에는 점토판 아랫부분이 차양 모양을 이루게 된댜 간혹 이런 입술에는 평행하는 두 줄의 고랑으로 이루어 진 수평-침선무늬가 시문된 경우도 있다. © 목 부분의 점토판을 튀어나오게 해서 突帶로 만든 띠가 달린 저 호형 도기(그림 30. 2). 입술 외형은 수제도기와 제작기술면에서 완전히

다르다 . 수제도기에서는 점토띠 를 덧 붙 여서 만 들 었지만, 물레에서 마무 리 손질을 한 도기에서는 목 부분을 구성하는 점토판을 볼 록하게 튀어 나오게 하여 만들었다. 유사한 예가 아무르강 유역의 나이펠드 그룹 유적에서 출토된 반윤제도기에서도 발견된다. ® 물레를 회전시키면서 안쪽을 눌러서 점토띠를 만든 저호형 도기 (그림 30. 4, 7). 입 술 안쪽이 오목하고, 단면은 각이 진 형 태 이 다. 그런 장식은 비록 물레에서 했지만, 입술 바깥쪽의 형태는 수제도기를 연상 시킨댜 이와 유사한 요소가 어깨에도 보인다. 덧띠는 물레에서 안쪽을 누르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러시아 극동의 선행하였던 문화들에서는 이와 같은 식으로 점토띠를 만든 예가 없다는 점을 여기서 지적해둘 필요가 있댜 이것은 발해에만 보이는 것으로서, 새롭고 좀더 빠른 도 기 제작 방법에 전통적 특성이 잔존해 있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 바깥쪽에 덧띠가 있고 안쪽에 수평-침선무늬가 있는 저호형 도기 (그림 없 2). 이런 입술은 말갈 문화에는 보이지 않지만, 빠끄로브까 문화에 속하는 꼬르싸꼬브까 (Ko p caKOBKa) 고분군과 나자이체브까 (Ha3 떠'l eB­ Ka) 고분군, 연해주 여진시기의 라조(Ji a30) 성터에서 출토된 도기에 보 인다. ® 몸통 가운데에 수평의 손잡이가 있는 저호형 도기(그림 31. 4). 이 저호형 도기는 입술 형태가 아닌 다른 기준으로 분류되었다. 일반적으 로 손잡이에는 수직으로 마연한 무늬가 있다. 입은 부드럽게 외반하였 댜 입술에는 수평-침선무늬의 고랑이 나 있다. 이런 도기는 연해주의 발해 문화 이의에 아무르강 유역의 빠끄로브까 문화에서도 발견된다. 성분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반윤제도기는 두 가지 혼합물로 구성 된 태토로 만들었다. 첫째, 한 가지 점토(백색도토, 간혹 함수운모) 30-40%, 정선된 석영 입자 10-20%. 여기에 간혹 식물을 첨가하였는데 도기 안쪽에 식물이 타서 생긴 흔적이 있다. 둘째, 두 가지(백색도토와 함수운모) 점토 30-40%, 정선된 석영 입자. 보통 후자의 배합은 @, @, ®의 저호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저호형 도기는 바닥부터 물레에서 성형하였다. 게다가 바닥을 한 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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販 .습., . . 투 .=:= · - 1 c CM ’ 그림 31. 발해 윤제도기 : 1. 니 꼴 라예브까 II 성터 ;2- 4.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어리의 반죽으로 만든 경우와 나선형으로 감아서 만든 경우(®, @, ®)가 있댜 대부분의 도기에서는 물레에서 잘라낸 흔적이 포착된다. 바닥과 몸통의 결합부는 측 면에서 볼 때 각이 진 형태인데, 물레를 회 전시키면서 몸통의 가장 아래쪽 점토판을 바닥에 붙였기 때문이다소 목 은 따로 성형하여 몸통에 붙였다. 이 때문에 봉합선은 목과 몸통이 결 합된 곳에서만 나타난다. 목과 몸통을 약간 마른 상태에서 결합했음이 틀림없다. 몸통을 테쌓기로 만들었다는 것은 안쪽에 남아 있는 혼적을 만져보 아 알 수 있는데, 점토판을 언제나 잘 문지르고 다듬은 것이 아니어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점토판 주위를 따라 수평으로 두툼함이 특징적으 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 몸통의 성형은 물레에서 하였다. 일부에서는 바닥에서 입술 전까지 의 표면에 물레에서 돌린 흔적인 동심원 형태의 가느다란 고랑이 남아 있댜 대부분의 저호에서는 물레 흔적이 입술과 어깨에서만 확인되는 데, 표면을 다듬을 때 물레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런 도기의 몸통 아랫 부분은 나무 조각이나 헝겁으로 비스듬하게 문질렀다. 일부 저호(@, @)는 바닥에서 입술까지 나선형으로 감아서 서리기 (卷上法)로 만들었다. 陰刻文과 陽刻文의 두 가지 문양을 시문하였다 . 문양은 입술과 어깨 두 곳에 나타난다. 음각문은 물레에서 생긴 2-6 개의 수평으로 된 침선 과 고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간혹 이빨이 하나이고 금속제가 틀림없는 도구로 문양을 낸 경우도 있는데, 가늘고 깊은 고랑을 남겼다. 일부에 서는 고랑이 나선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경우는 이빨이 많은 도구 로 문양을 냈기에 고랑들이 평행하게 되어 있다. 저호는 가마에서 환원 상태로 소성하였는데, 도기 색깔과 함께 조각 에 남아 있는 단일한 색조가 이룰 증명한다. 소성 온도는 800°C 이상 이었다. 반윤제 저호의 대부분에 식물 성분의 음식물 혼적이 남아 있으므로, 부엌용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유형의 반윤제도기는 양과 질에서 발해 문화에 대단히 의미 있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도기야말로 연해주와 만주의 발해 문화 에 특징적인 것이다. 이런 도기는 아무르강 유역의 빠끄로브까 문화에 서도 발견되는데, 발해 도기의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 반윤제도기가 여러 유적에서 출토되는 상황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할 필요가 있다.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에서는 이 범주의 도기가 세 개의 건축평면에서 발견되었다. @, (9, ©의 저호는 주로 하부 건축평면과 중간 건축평면에서 출토되었고, @의 저호는 상부 건축평면에서 우세 하였다. 하부 건축평면에서는 기본적으로 저호와 고호가 발견되고, 상

부 건축평면에서는 직벽호가 주로 발견된다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댜 따라서 @의 저호는 좀더 늦은 시기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웨이볼딘이 3 개 건축평면의 발해 집자리를 조사한 바 있는 꼰스딴 찌노브까 취락지에서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되풀이되었다.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모든 종류의 반윤제도기가 출토되었지만, 층위와 출토 상황이 언제나 명료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문화충의 윗 부분에서 @, @의 저호 조각이 다수 발견되었다는 것만 지적할 수 있 을 뿐이다. (3) 輪製陶器 발해 유적에서 출토되는 이러한 범주의 도기들은 주로 회색이지만, 드물게는 황색과 붉은색도 있다. 윤제도기에는 형태에 따라 低登, 高壅, 直頭壅, 大壅과 小壅, 腕 小盤, 뚜껑, 鼎, 球形登가 있다. ®低登 이것은 볼록한 몸통으로 부드럽게 연결된 납작한 바닥, 점차 외반하 여 입술로 마무리되는 넓고 짧은 목이 특징적이다(그림 32. 1-3). 저호 몸통의 직경은 전체 높이보다 언제나 크다. 저호 높이는 15-20cm 부터 50cm 까지 다양하댜 입술 형태에 몇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가장자리를 타원형으로 말 아서 만든 단순한 형 태(그림 32. 1). 둘째, 바깥에 덧띠를 댄 것(그림 32. 3). 셋째, 도기 벽을 튀어나오게 해서 突帶로 만든 것(그림 32. 2). 저호의 문양은 구도가 꽤 일정하며, 입술 • 목 • 어깨의 세 부분에 나 타난다. 문양은 시문 기술면에서 陰刻文,陽刻文, 平面文의 세 가지 유 형으로 분류된다 .52)

역주 52) 이 책에서 언급되는 문양의 명칭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陰刻文 (e pe J Ho l! op H 叫 eHT) ® 沈線文 (n p o q e p'l eH HW! OPHaMeHT) : 孤線文 (a po때때 op H aM8HT), 물결무늬 (eo JIH 006 p a3 백 O p H 띠 eHT)

二_

I ·- --- - …一 -JJ 二— —/ 口 'I 그림 32. 발해 윤제도기 :1-4.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5. 니꼴라예브까 II 성터

@陰刻文 여기에는 沈線文과 押印文이 있다. 침선문은 두 개 구역에서 나타 나는데, 하나는 입술의 점토띠이고, 다른 하나는 어깨이다. 침선문은 언제나 물레에서 시문하여 서로 평행하게 수평으로 만들어진 고랑 형 태를 띠고 있다(그림 'l7. 12, 17, 18). 고랑 직경은 0.3cm 를 넘지 않는댜 고랑은 입술 바깥쪽 변두리와 어깨를 따라 돌려져 있다. 어깨에서는 고랑이 하나로 된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동심원 형태를 이루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이빨이 1-4 개가 있는 도구로 시문하였다. 가운데에 물결무늬가 있는 직선 형태의 침선문으로 구성된 띠도 있고, ® 押印文 (mTaMnOBaH Hl,I II op Ha MeHT) : 格子文 (sa ljl e J1 b H1,1 II o pH 패 eHT) = 類似織 物무늬 (JIOl l< HO TeKCTH Jlb H l,III op Ha MeHT), 빗 살무늬 (rpe 6 eH' laT hlll op Ha MeHT) 2. 陽刻文 (B 血y K JOO! op Ha MeHT) ® 突帶(p e Jl be ljl llhlll Ba JIHK ) ® 덧무늬 (Ha .ne nHoll op H 떠 eHT) : 덧 띠 (Ha .ne nllhlll Ba JIHK ), 납작 덧 띠 (Ha .ne nHa JI JleH Ta) 3. 平面文(l1.II OCKHII OpH 떠 eHT)

직선무늬와 孤線文이 나란히 배치된 경우(그림 33. 1, 9) 도 있다. 음각문이 있는 저호는 발해 유적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다. 이들은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와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의 중간 및 상부 건축평 면, 집자리가 순차적으로 3 개의 층위를 이루고 있는 꼰스딴찌노브까 취락지, 꼬르싸꼬브까 성터 등에서 발견되었다. 음각문이 있는 저호는 중간과 상부 건축평면에서 발견되어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의 층위에 집중되어 있다. 押印文은 대개의 경우 도장 一壓 延機나 납작한 도장으로 시문하였다. 도기 표면의 압인문은 조사 결과 대부분이 나무에 새겨서 찍었음이 밝 혀졌댜 압인문은 직선-기하학무늬 유형에 속하는데, 그 구조에 따라 테두리문과 꽃무늬로 세분된다 . 모티브 자체는 엄격한 대칭을 이룬다. 현재 발해 유적에서 발견되는 구체적인 모티브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 이 밝혀져 있다. 첫째, 동일한 높이의 좁은 사각형들이 수직으로 또는 비스듬하게 배열되어 띠를 형성한 것. 사각형 사이의 간격은 2一 3mm 이 고 , 압인할 때 상하 가장자리를 따라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문양 의 테두리를 이루고 있다. 둘째, 위의 문양과 유사하지만, 상하 가장자 리를 따라 사각형들이 직선상으로 배열되어 있고, 가운데를 따라서는 사각형들이 여러 가지 물결무늬를 이루면서 배열되어 있다는 점이 다 르다 셋째, 가운데가 오목하고 비스듬하게 기운 그물 모양의 띠. 넷째, 뾰족한 면이 위로 향한 톱니무늬의 띠. 다섯째, 지그재그가 대칭으로 배열된 따 이 경우에 지그재그가 겹치는 곳은 능형과 직사각형을 이 루고 있댜 여섯째, 뾰족한 면이 위로 향하면서 陰影의 선으로 비스돔 히 만든 톱니무늬의 띠. 일곱째, 음영의 선으로 된 삼각형들이 대칭으 로 배열된 따 여덟째, 대각선으로 분리된 능형들로 구성된 띠. 압인문의 모티브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모두 지그재그, 삼각형, 정 사각형, 직사각형, 수직 고랑, 수평 고랑, 비스듬한 고랑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시문의 기본형은 고랑, 톱니, 삼각형이다.

기도

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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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서

I취

딴스찌노브다보인 . 3. 3꼰 에도 그립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곰 발자국, 사람 발 바닥, 葉脈이 있는 잎사귀, 8 개의 방사선으로 된 꽃무늬와 같은 것들로 장식된 도기 조각들도 저호형 도기에 속하는 것 같다. 에.부l . 샤브꾸노 프의 의견에 따르면, 이러한 도기는 중앙아시아 출신, 특히 소그드인들 에 의 해 제 작된 것 이 다 (205. 100-105 쪽). 압인문의 모티브는 언제나 도기 어깨와 몸통에서 나타난다. 압인문 은 전체 문양에서 20% 미만을 차지한다. 이러한 문양으로 장식된 저호 들은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니꼴라예브까 II 성터, 꼰스딴찌노브까 취 락지와 같은 발해 유적의 중간 건축평면 및 상부 건축평면에서 주로 발견된다. 압인문의 일부 모티브는 아무르강 유역의 빠끄로브까 문화 도기에도 보인댜 러시아 극동 남부에서는 이전 시기의 중세유적 자료에서 압인문의 원형이나 압인문 자체를 찾아 볼 수 없다. 압인문은 앞 시기에는 없었 던 새로운 형태의 윤제도기가 출현하면서 형성되었다. 아울러 이와 유 사한 모티브가 고구려 유적에서 보인다('X/ 8. 826- 8.34쪽, 그림 6. 8-10). ©陽刻文 둥글거나 납작한 점토띠를 덧붙이기도 하고, 도기 벽을 튀어나오게 하거나 누르기도 해서 만든 덧띠가 여기에 속한다(그림 33. 6). 양각문 은 저호의 입술과 어깨 바깥의 두 구역에서 나타난다. 이 가운데 40-50% 는 수평 고랑, 지그재그, X 자형(니꼴라예브까 II 성터, 노보고르 제예브까 성터, 꼰스딴찌노브까 취락지)의 침선문으로 보완하였다. ©平面文 여기에는 磨硏과 黑塗가 포함된다. 磨硏文은 주로 저호의 목에 나타난다. 이 무늬는 1-3cm 간격으로 배열된 직경 0.3-0.4cm 의 수직 마연띠로 구성 되어 있다. 간혹 마연띠가 왼쪽으로 조그맣고 비스듬하게 난 경우도 있고, 수직의 마연띠 가운데에 가로띠가 횡단하는 경우도 있다(그림 32. 2, 3).

도기 표면을 흑색의 얇은 막으로 덮은 黑塗 저호 는 꽤 드물다. 흑색 도기의 내면은 여전히 회색이다. 혹 도는 환원 상태에서 소성한 도기에 풀을 태워 얻은 재를 문질러 발라서 만들었다 . 검붉은색, 붉은색, 오렌지색(니꼴라예브까 II 성터)으로 칠해진 발해 도기도 더러 있댜 끄라스끼노 성터에서 출토된 도기 1 점에는 점토를 발라 붉은 색조를 띠게 하였다. 도기 표면의 점토 두께 는 2mm 이며 쉽 게 벗겨진다. ® 리본형 손잡이 판) 가 달린 저호(그림 31. 2, 3 ; 그림 34. 1, 2) 이런 도기는 니꼴라예브까 II 성터,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꼬르싸 꼬브까 취락지, 꼰스딴찌노브까 취락지에서 발견되었다 . 손잡이가 달린 저호에는 납작한 바닥(바닥에는 간혹 관통된 구멍 들 이 있는 경우도 있 다), 어깨가 명확히 표현되지 않는 계란형 몸통, 넓고 짧은 목, 단지 둥 그스름하게 되거나 점토띠 형태로 마무리되는 입술이 특 징적이다. 이 런 저호의 크기는 다양하지만, 몸통 직경이 언제나 전체 높이보다 큰 데, 때로는 2 배 정도가 된다 . 특이한 것은 몸통 중간에 리본형 손잡이 가 달려 있다는 점이다. 손잡이는 쌍으로 존재하며 서로 대칭으로 붙 어 있다. 니꼴라예브까 II 성터나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에서처럼 손잡 이가 4 개인 경우도 드물게 있다 . 손잡이는 너바 2-5crn , 두께 0.6-l. 5c rn, 길 이 3 . 5-6crn 이 다 일반적으로 리본형 손잡이가 있는 저호의 표면은 편평하고 문양이 없지만, 약 15% 의 경우에는 문양이 있다. 시문 구역은 모두 손잡이를 포함한 몸통 중앙이다. 이 구역에는 수평 띠가 하나 돌아가는데, 이 띠 는 마연으로 만든 1-4 개의 고랑, X 자형, 角形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직 과 나선으로 구성된 마연띠는 손잡이 표면에도 시문되었다. 띠에 보이 는 고랑의 배열 상태는 이것이 손잡이를 붙이기 위해 몸통에 표시를 한 혼적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

역주 53) 帶狀 抱 手 또는 가로띠 손잡이로도 번역할 수 있으나 , 여 기 서는 원어 를 따랐 다.

발해 유적에서는 형태와 크기가 이와 유사하면서도 손잡이가 없는 저호들도 발견된다(그림 34. 5). 전체적으로 보아서 리본형 손잡이가 달린 저호는 아무르강 유역의 빠끄로브까 문화 (133. 니 .206, 그림 15 ; 134. 75 쪽)와 만주의 발해 유적 (285. 24 쪽, 그림 3) 에 보편 적 으로 나타난다. 발견 빈도로 보아 이 런 저 호는 발해 문화의 <얼굴> 역할을 하는 의미 있는 유물이다. ® 高豊(그림 35) 바닥은 편평하고 몸통은 볼록하거나 약간 길쭉하다. 어깨는 경사져 서 짧으면서도 아주 좁아지는 목으로 이어진다. 목이 다시 외반되면서 단순하거나 둥그스름하거나 또는 차양을 이루는 입술로 마무리되고 있 댜 고호의 기본 구조는 몸통 직경과 전체 높이가 거의 동일하고, 목과 바닥의 직경이 비슷하거나 똑같다는 데 특칭이 있다. 거의 대부분이 조각으로 발견되므로 크기를 알기가 힘들지만, 도면에서의 계산과 복 원을 통하여 전체 높이가 27-50cm 정도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연해주 발해 유적에서 발견된 약 30% 의 고호는 입술 안쪽으로 오목 하게 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그림 36). 이런 입술은 腕과 닮았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오목한 정도가 심하다. 간혹 오목한 정도가 덜한 경우에는 테가 달린 접시의 입술을 연상시킨다. 오목한 것이 수평으로 이어지는 고랑으로 되어 있는 저호도 어느 정도 발견된다(그림 ~G. X). 고랑 직경은 3mm 를 넘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 입술 안쪽이 오목하다는 것은 물론 뚜껑으로 덮었던 것과 관련이 있 댜 그렇지만 이 고랑은 뚜껑같은 것을 덮는 데 사용된 것은 아니었고, 단지 오목한 형태를 모방하였을 뿐이니, 이런 유형 도기의 마지막 발 전 단계를 보여주는 표지이다. 고호의 표면은 보통 편평하고 반들거릴 정도로 마연되었으며 문양은 없다 하지만 10% 정도에는 문양이 있다. 고호와 저호의 시문 구역은 서로 다르다. 저호는 어깨에 혼히 시문하였다. 반면에 고호는 몸통의 중간 부위와 아래 부위에 시문하고 혼히 바닥에도 하였다. 문양에는

-I MI I I l 1 그림 34. 니꼴라예브까 II 성터 출토의 윤제도기그립

음각문과 평면문 두 가지가 있다. 음각문은 문양의 일부로 수평 고랑 을 이루면서, 시문된 곳과 시문되지 않은 곳의 경계선 역할을 한다. 그 나머지 부분에는 평면문들로 채워져 있다. 첫째, 능형과 사각형으로 구 성된 1-l.5 c rn 크기의 작은 구멍으로 된 망사 형태의 무늬. 둘째, 수평 으로 이어지는 1-4 개의 띠. 여기에는 0.4 - 0.6crn 간격으로 마연된 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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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 ... 0 JC M I l l 1 그림 35. 발 해의 윤제도기 : 1, 3. 니 꼴 라예브까 II 성터 ;2.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이 아래쪽으로 죽죽 그어져 있다 . 셋째, 마연무늬나 침선의 고랑이 상 하로 감싸고 있는 길게 늘어진 나선. 넷째, 瓜紋울 모방하여 4-6cm 간 격으로 배열된 수직 마연띠 . 꼰스딴찌노브까 취락지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호선문이 시문된 몸통 조각도 아마 고호였던 것 같다. 고호는 양과 질에서 발해 유적의 표지 유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 다. 이와 홉사한 유물이 같은 시기에 속하는 빠끄로브까 문화(1 34. 75 쪽) 고분 및 가까이에 있는 거란 유적 (294 . 153-156 쪽)에서도 발견된다. ® 直頭煙(그림 37. 2) 이것은 발해 유적에서 수가 많지 않다. 모든 직경호들이 조각으로 발견되었다 이런 도기는 바닥이 편평하고, 몸통은 볼록하거나 간혹 球 形을 이룬다. 목은 거의 곧게 되어 있고, 여기서 물통 주둥이처럼 생긴 입술로 마무리된다. 목의 직경은 언제나 바닥 직경보다 짧다. 직경호 높이는 Z1-50cm 정도의 고호와 비슷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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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二 \:J ':’ I ~,'’ \ :II I' 『 0: ,5, \---’. - I I I I JI e M 5 7 !l 그립 36. 발해 윤제도기 : 1. 꼰스딴찌노브까 I 취락지 ; 2, 4, 6. 니꼴라예브까 II 성터 ; 3, 5, 7, 9. 끄라스끼노 성터 ;8.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직경호의 문양은 고호와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대개 직경호의 구연 부 형태가 완, 접시, 고호의 모습을 띠고 있다. 직경호에만 있는 예외 적인 요소는 2 중의 腕을 이루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측면에서 볼 때 마치 오목한 면 두 개가 결합된 것처럼 보인다. 직경호는 목, 어깨, 몸통 구역이 문양으로 장식되었다. 목은 흔히 간 격을 두고 마연한 수직 띠들로 장식되었다. 어깨는 간격이 벌어진 침 선이 있고 수평으로 이어지는 고랑들로 장식되었고, 때로는 마연된 빗 금 그물이나 띠로 장식되었다. 몸통은 꼰스딴찌노브까 취락지, 노보고 르제예브까 성터,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의 예에서 보이듯이, 瓜形 陶器 롤 모방하여 3-4cm 간격으로 마연된 띠를 만들어 놓았으니, 이 경우 직선 또는 물결선으로 된 마연띠를 수직으로 장식하였다. 그러나 50%

I

그림 'Jl. 니 꼴 라예브까 II 성터二에서 출 토된 발해 윤제도기

이상의 직경호에는 문양이 없다. 문양이 없는 직경호의 표면은 거의 거울처럼 잘 마연되어 있다. 직경호는 고호에서 파생된 것이 틀림없지만, 연해주 발해 유적에서 고호와 同時代的으로 발견된다. 이러한 사실은 두 유형의 도기가 이보 다 이른 시기에 어느 한 접경 지역에서 발생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 다 . 고호와 직경호는 연해주에서 이미 완성된 형태로 출현하였으므로, 동일 계열에 속하는 개별적인 두 그룹의 공존을 확인할 수 있다• 발해 유적에서 출토된 직경호와 거의 동일한 형태들이 빠끄로브까 문화 고분들에서도 발견된다 (134 . 74, 76 쪽) .

二 .r ,,r,r,r

二二 Ii 7 \ ll 트! f0 J 二/Jl J, c M 그립 381. 1발. 노해보의고 윤르제제도 예기브 :까1 - 7취, 락9.지 니 꼴라예브까 11 성터 ;8.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10 ,

® 腕(그림 38. 8) 이것은 모든 발해 유적에서 발견된다. 완은 小腕과 형태가 거의 동 일하다. 바닥에 0.3-0.6crn 의 낮은 굽이 달려 있고, 벽은 약간 굽기는 하지만 거의 직선으로 크게 벌어지고, 입술은 단순하게 둥그스름하거 나 안쪽에 홈이 있다. 이것은 식기로만 아니라 뚜껑으로도 사용하였음

그림 39. 꼰스딴찌노브까 I 취락지 출토의 발해 윤제도기

이 틀림없다. 뚜껑으로도 사용했던 사실은 완의 직경이 고호와 직경호 의 입 직경과 흔히 일치한다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통상 소완에는 문 양이 없다 .54)

역주 54) 이 글에서는 小腕과 腕 용어를 각기 사용하면서도 실제는 거의 동일시하고 있다 .

® 球形登(그림 39) 이것은 꼰스딴찌노브까 취락지에서 특히 특 징적인데, 이 곳 에서 11 점 이 발견되었댜 이와 유사한 도기편들이 끄라스끼노 성터 , 노보고르제 예브까 성터, 마리야노브까 성터에서도 발견되었다. 구형호는 바닥이 편평하거나 약간 오목하고, 몸통이 구형이나 주철제 그릇같은 모양을 이루고, 어깨는 약간 경사지거나 높여져 입술로 마무리되고 있다. 구형호에는 4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어깨는 완만하고 목이 수직으 로 올라가다가 곧바로 단절되어 입술을 이루고 있는 도기(그림 39. 1). 이 종류에는 혹 모양의 손잡이가 양쪽에 붙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손잡이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손잡이는 직경 2.6 c m, 높이 1.5c m 이고, 구멍은 직경 0 . 4cm 이다. 둘째, 어깨가 높여져 곧바로 입술로 마 무리되는 도기로서, 안쪽으로 향한 입술이 어깨보다 더 낮게 되어 있 다(그림 39. 4). 셋째, 입술과 어깨가 명료하게 구분된 도기로서 , 입술은

Jz 二 三

그립 40. 발해의 윤제도기 : 1, 2. 꼰스딴찌노브까 I 취락지 ;3. 끄라스끼노 성터

I

2 0I I l l 1 .1fC N 그림 41. 발해 윤제도기의 조각들 : 1-3. 꼰스만찌노브까 I 취락지 ;4-8. 노보고르제예브 까 성터

안쪽을 향하고 있다(그림 39. 3) 넷째, 평평하면서 곧바로 단절된 입술 이 있는 도기 (그림 39. 2). 구형호는 일반적으로 시문되지 않았고 표면이 매끈하다. 그러나 20-25% 는 음각문이 시문되었는데, 이것은 나머지 표면과 구별하기 위 해서 수평 고랑을 내고 그 안을 빗과 같은 도장으로 오른쪽으로 비스 듬히 가득 찍은 띠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간혹 끝까지 이어지지 않는

몇 개의 고랑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구형호는 높이 13-20cm, 입 직 경 11-13cm, 몸통 직 경 18-22cm 이 댜 ® 大壅(그림 40 ; 그림 41 ; 그림 42) 이것은 커다란 도기로서 몇 가지 종류로 나뉜다. 첫째, 벽이 약간 굽 었지만 거의 곧은 상태이고 입술은 단순하게 외반된 도기(그림 41. 1, 2). 둘째, 바닥이 넓고 몸통은 볼록하며, 입술이 차양 모양으로 된 도기 (그림 42). 셋째, 벽은 약간 굽었고 입술이 둥글게 말린 管 모양을 이루 는 도기(그림 41. 3-8 ) . 첫번째 종류는 꼰스딴찌노브까 취락지에서 특징 적인데, 이곳에서 발견된 2 점은 형태를 복원할 수 있었다. 첫번째 종류 는 표면에 시문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대개 매끈하고 물레에서 세심 하게 다듬었다. 수평 고랑으로 된 두 개의 띠 사이에 단번에 손으로 그 린 별이 있는 경우도 1 점 있었음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 이 별(그림 41. l) 은 문양의 모티브라기보다는 식별하기 위한 낙인에 가까울 것이다. 두번째 종류는 형태와 문양에서 다른 것들과 구분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런 종류에서는 문양이 어깨에 나타나고, 문양 자체도 압연과 침선으로 만든 다양한 종류의 압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각형의 작 은 구멍으로 이루어진 띠로 장식된 조각들이 꼰스딴찌노브까 취락지와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에서 발견된 적이 있다. 세번째 종류는 대부분 니꼴라예브까 II 성터,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끄라스끼노 성터, 꼬르싸꼬브까 취락지의 상부 건축평면들에서 발견되 었다 이런 종류는 문양이 없고, 표면이 매끈하게 마연되어 있다. 여기 서 마연 방식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단순하게 수평으 로 빽빽하게 마연된 것이 아니라, 그릇 표면에 마치 줄무늬나 움푹 패 인 선이 있는 것처럼 느낄 정도로 선으로 된 띠를 이루면서 마연되어 있다. 관 모양의 입술은 여러 방법으로 만들었다. 입술 가장자리를 단순히 밖으로 집되 벽에 붙이지는 않는 방법(옷깃 방법)으로 만들거나, 중간 부위를 벽에 눌러 붙이고 다시 아래 부분을 의반시켜 차양 모양을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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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2 :/X /一\ 1\~CM J _ _ __ —— - -- 그림 42. 꼰스딴찌노브까 I 취락지에서 출토된 발해 윤제도기

들거나, 벽에 완전히 눌러 붙여 점토띠처럼 만들거나, 입술 가장자리를 비틀어 감아서 관을 만들기도 하였다(그림 41. 3-8). 입술이 관 모양을 이루는 것에서 약 70% 가 단 하나의 문양도 없다. 나머지에서는 입술 바깥 표면을 따라 1-4 줄의 고랑으로 시문한 수평 침선문이 특징적이다. 첫번째와 두번째 종류는 극동의 다른 중세유적에서 보이지 않지만, 형태와 문양이 유사한 것이 빠끄로브까 문화에서 발견된다. 세번째 종 류는 여진 문화에서 발견되는 것과 아주 닮았으며 (75. 131 쪽, 그림 1. 4), 요나라 시대의 거란 유적에서 출토된 것들과도 유사점이 있다 (244. 14 쪽 ; 245. 32 쪽). ® 鼎(그림 9. 1, 2) 이것은 많은 발해 유적에서 조각으로 발견된다. 정은 단면이 포물선 을 이루고, 주철제 솥과 형태가 동일하다. 입술 아래를 둘러싸고 있고

끝이 날카롭거나 타원형인 덧띠가 특징적인데, 이것은 간혹 덧붙이지 않고 벽을 튀어나오게 해서 만들기도 하였다. 덧띠의 숫자는 1 - 6 개 정 도이다 정은 빠끄로브까 문화에서도 발견된다 (134. 79 쪽). ® 뚜껑 (그림 20. 11-13 ; 그림 29. 3, 4) 토제 뚜껑에는 腕-小腕 모양의 뚜껑, 위쪽에 손잡이를 단 완 모양 뚜껑 , 양파 모양의 손잡이 가 달린 원추형 또는 투구형 뚜껑 (그림 29. 3) 의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완-소완 모양 뚜껑의 특-성에 대하여는 위에 서 이미 언급하였다. 완-소완을 여러 도기의 뚜껑으로 사용한 것은 아 주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위쪽에 손잡이가 달린 완 모양 뚜껑에는 그릇에 덮기 위한 테두리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두 종류가 있다(그림 23. 4, 5). 테두리 높이는 0.5-2cm 로 일정하지 않다. 손잡이는 측면에서 볼 때 부정형 직사각형 을 이루거나 아래가 좁고 위가 넓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위쪽은 일반 적으로 편평하다. 이런 종류의 손잡이는 흔히 위쪽의 가장자리를 따라 指押文 55’ 이 나 있다 간혹 뚜껑의 바깥 표면에 수평 고랑을 내기도 하 였다.

역주 55) 대체로 가장자리를 따라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눌러서 물결 모양을 이루도록 만든 것으로서 指壓文, 指頭文, 손가락무늬로도 불린다. 특히 발해 암키와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무늬이다.

양파형 손잡이가 달린 투구형 뚜껑은 니꼴라예브까 II 성터, 노보고 르제예브까 성터, 마리야노브까 성터, 끄라스끼노 성터, 꼰스딴찌노브까 취락지에서 몇 점 발견되었을 뿐이다. 뚜껑의 높이와 직경은 5cm 에서 32cm 까지 다양하다. 대부분 뚜껑에는 문양이 없다. 그러나 그물 모양 마연무늬, 수평 고랑무늬, X 자형 낙인으로 장식된 것들도 있다. 뚜껑의 아래쪽 가장자리는 둥글거나 편평하거나 각이 져 있는데, 여기에 덮고 자 하는 도기의 입술 형태에 따른 것이다. 이와 유사한 뚜껑들이 아무 르강 유역의 빠끄로브까 문화에서도 보이는데, 특히 꼬르싸꼬브까 고 분군에서 많이 발견된다 (133. 201 쪽, 그림 41). 이런 뚜껑들이 동경성에

서도 발견된 바 있다 (317. 그림 67. 1-7). 이런 유형의 유물은 형태의 독 특성과 출 토 빈도로 보아 발해 문화의 표지 유물로 간주될 수 있을 것 이댜 ® 小盤파 大盤(그림 38. 2, 6, 7, 9) 이들은 목이 넓은 도기로서 바닥은 편평하고, 몸통은 볼록하고, 어깨 는 경사지고, 목은 짧게 좁아지며, 입술은 외반한다. 몸통의 최대 직경 은 언제나 도기의 가운데 부분을 지나고, 도기의 전체 높이는 바닥 직 경보다 1. 5-2 배 가량 작고, 입의 직경은 바닥 직경보다 언제나 크다. 소반과 대 반의 주된 차이 는 크기 에 있다. 소반은 입 의 직 경 이 ll. 8- 24crn 이고, 대반은 30-51crn 이다 소반은 대부분 문양이 없지만, 그 대신에 입술 안쪽에 뚜껑을 덮을 수 있도록 홈줄이 나 있다. 입술은 일반적으 로 매끈하게 만든 점토띠-차양 모양을 하고 있지만, 입술 부분을 단순 히 외반시킨 것도 있다. 약 40% 의 대반에는 문양이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기술적인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것 같다. 그것은 대반의 어깨, 바닥 근처, 입술에 유사 직물무늬가 찍힌 혼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출토된 일부 대반에는 늘어진 나선형으로 마연된 손잡이가 양쪽에 달 려 있다 이런 종류의 도기는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니꼴라예브까 II 성터, 끄라스끼노 성터의 상부 건축평면에서 발견된다. 이와 비슷한 형 태의 도기들이 연해주 여진 유적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11 1. 195 쪽, 그림 1-3 ; 181. 69 쪽). @ 小壅(그림 37. 3, 5 ; 그림 43. 1, 3, 4) 이 그릇은 바닥이 편평하고, 몸통은 약간 굽었고, 어깨는 높으면서 뚜렷이 구분되어 있고, 목은 짧게 수직으로 나 있거나 아예 없으며, 입 술은 단순하게 둥그스름하다. 소옹의 전체 높이는 바닥 직경보다 크고, 입의 직경은 바닥 직경과 같거나 비슷하다. 어깨 부위의 몸통 직경은 언제나 바닥 직경이나 입술 직경보다 크다. 소옹은 연해주의 발해 유

적 대부분에서 발견되고, 만주와 아무르강 유역에도 이와 유사한 것이 있다(28.5. 그림 2 ; 133. 207 쪽 , 그림 17, 162 쪽 , 그림 2). 대체로 소옹의 표 면에는 문양이 없지만, 어깨 아래에 두 줄의 사선이 그어진 것이 니꼴 라예브까 II 성터에서 1 점 발견되었다(그림 37. 5쪽). 연해주 발해 유적에서는 0.5cm 에서부터 2-3cm 정도까지의 구멍이 뚫린 바닥 조각들도 발견되었다. 이 구멍은 반죽이 채 마르지 않은 상 태에서 뚫은 것으로서 절단 부위가 매끈하다. 이들은 모두 깨진 상태 로 발견되고, 심지어 몸통의 하부조차도 붙어 있지 않으므로 형태를 복원할 수는 없다. 이와 동시에 다른 유형의 도기에 속하는 바닥 조각 들도 발견되었다. 이들은 대옹, 저호, 대반처럼 바닥이 넓은 도기에서 나온 것이다. 구멍이 뚫린 바닥 조각들은 주로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의 상부 건축평면에서 발견된다. 이와 유사한 제 품들이 아무르州의 그랴즈누쉬까 (r p거 3 ey m 1< a) 주거유적, 아무르강 유역 의 빠끄로브까 문화(유 . 엠바씰리예프가 발굴한 나자이체브까 고분군) 및 이웃 지역의 다른 문화들에서도 발견된다. 발해의 회색 도기를 제작하는 데에는 태토의 정선에서 소성까지 단 일한 생산방식이 적용되었다. 태토의 첨가물로는 모래, 石英가루 및 長石이 발견되는데, 드물게는 兩火祐土와 碧玉이 포함된 경우도 있다. 첨가물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 아서 0.5-2mm 정 도이 댜 엘베잘리샤크와 엔퀘옵싼니꼬프가 도기 성분을 분석한 자료에 따 르면, 고호, 저호 일부 , 직경호, 소반, 정, 구형호의 태토 성분은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함수운모와 백색도토로 된 두 가지 의 점토가 30-40%, 정선된 석영입자가 10-20% 이고, 여기에 식물 성분 이 첨가되어 있다 . 그리고 대옹, 소옹, 저호에는 두 가지의 점토가 30-40%, 정선된 석영입자가 20% 이고, 간혹 내화점토나 식물성 혼합물 이 첨가되어 있다. 윤제도기는 모두 나선형으로 띠를 감는 서리기 기법으로 만들었다. 커다란 도기는 바닥과 몸통, 입과 목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만들었다 .

그러나 몸통의 하부와 바닥, 몸통의 중간 부위, 입과 목의 세 부분으로 제작한 것도 보인댜 고호 , 직경호, 저호의 목과 입술 부분은 일반적으 로 물레에서 만 들 지 않고 손으로 빚어 만들었다. 도기 안팎은 반드시 물레에서 다듬었다. 안쪽에는 손으로 빚은 흔적과 성형 흔적, 헝겁이나 다른 도구로 찍은 흔적이 남아 있지만, 바깥쪽은 말끔하게 다듬었다.

I

l 그립 43. 발해의 윤제도기 : 1. 스따로레첸스꼬예 성터 ; 2.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3, 4. 니꼴라예브까 I1 성터 ;5. 마리야노브까 성터 ;6.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

이밖에도 도기가 건조된 상태나 반건조된 상태에서 추가적으로 마연을 했댜 온도 800-900°C 의 환원 상태에서 구웠는데, 이때에 도기 가마에 서만 아니라 풀무화덕에서도 구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팎의 표면은 대개 불순물 없이 깨끗하다 . 이상과 같이 발해 도기에는 수제, 반윤제 , 윤제의 세 범주가 있다. 수제도기의 주요 유형에는 고호, 저호 및 직벽호가 있는데, 이들은 모 두 아무르강 연안의 昧輯 文化인 뜨로이쯔꼬예 그룹과 빠끄로브까 문 화의 유적들에서 출토된 수제도기와 성격면에서 아주 닮았다 . 반윤제도기의 주요 유형에는 여러 종류의 저호가 있는데, 아무르강 연안의 빠끄로브까 문화와 만주의 발해 유적에서 이와 유사하거나 동 일한 것들이 발견되었다. 회색 윤제도기의 주요 유형에는 저호, 고호, 대옹, 소옹, 소반, 뚜껑, 구형호가 있는데 , 여러 가지 기본 요소에서 만주의 발해 유적 출토품 과 유사하고 , 거란 유적이나 아무르강 연안의 빠끄로브까 문화 유적에 서 출토된 것과도 부분적으로 유사하다. 많은 종류의 발해 도기가 3-7 세기 고구려 도기와 아주 홉사하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가 도기 생산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수 백년에 걸쳐 러시아 극동 남부와 만주에 거주하던 고대 종족들의 도기 생산에 강한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준다. 회색 윤제도기와 더불어 연해주 발해 유적에는 施柚陶器와 磁器도 발견되는데 ,56) 수량은 적지만 유약 색깔은 다양하다 . m’ 그렇지만 유감스 역주 56) 용기를 흡수율 , 태토, 태토 색깔 , 유약, 소성 온도, 투명도 둥을 기준으로 察 業 工 學 的으로 분류하면 土器 (cla y ware), 陶器 (e arth enware, potter y ), ¼i 器 (sto n eware), 磁器(po rcel ai n) 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분류체계가 제대 로 확립되어 있지 않지만, 석기란 용어는 별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 이 책에 서는 대체로 요업공학적인 분류체계를 따르고 있다. 발해시대의 용기에는 無 柚陶器 (Ke p aMHKa) 가 가장 일 반적 이 고, 이 밖에 도 施柚陶器 (no JJH BH 8.JI Kep a.MHK a) 와 磁器(ljl a plJ> o p)가 있다 . 참고로 우리나라 도자기의 분류안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할 수 있다. 梨花女子大 學 校博物館, 『統一新羅 • 高麗 질그릇』 19fJ 7, 117-118 쪽. 역주 57) 발해의 시유도기와 자기에 대한 본문 설명은 다음 논문을 그대로 옮긴 것

럽게도 이들은 모두 께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모두 70 점 이상의 조각 이 알려져 있댜 이들은 대부분 입 직경이 9-l&m 인 腕에 해당한다. 나머지에는 접시, 뚜껑, 덧무늬가 있는 커다란 球形 容器, 둥그런 소형 盆 58) 의 아랫부분, 주물용 국자 1 점이 있다. 국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물 레에서 만든 것이다. 자기를 제외하고는 유약을 바르기 전후에 각기 한 번씩 두 번에 걸쳐 구웠다. 일반 파양스도기 田) 와 연질 파양스도기는 약 950°c 에서, 얇은 石質陶器는 1100°c 이상에서, 경질 파양스와 자기 는 1200°c 이 상에 서 각각 구웠다(1. 214, 234 쪽 ; 164. 55 쪽). 유약은 물리화학적 특성에서 두 종류로 분류되는데, 軟質 鉛柚와 高 火度 柚藥인 長石柚 가 그것이다 .OO) 연질 연유는 부드러운 점토질 파양 스 조각이나 일반 도기에 칠해져 있었고, 장석유는 경질 파양스, 얇은 石 質陶器 ,61) 半磁器, 磁器에 속하는 조각들에 칠해져 있다 (164 . 54, 55 쪽). 연질 연유에는 單色 과 多色이 있다. 끄라스끼노 성터에서 발견된 것 으로서 입 직경 약 9cm, 기벽 두께 1cm 이하, 뚜껑 두께 8mm의 크기 에 둥글게 고리 모양의 턱 이 돌아가는 腕 조각은 녹색 연유로 덮여 있 었다 . 짙은 綠柚는 불투명하면서 가는 균열이 나 있었고, 보존 상태가 불량하여 쉽게 벗겨진다. 뚜껑은 겉에만 유약이 칠해졌지만, 완 자체에 이니, 이 논문에 실려 있는 도면과 사진을 참조바란다. reJJ b MaH E.11., noJJ HB Ha JI Kep a.MHK a H ~a 凶먀 Eox 표 /1/ MaTe pH 입!bl no Cp /lHe BeKOBOA ap x eoJJ O rHH H HCTOPHH lla.JJ b Hero BOCTOKa CCCP. C6op H HK Ha y마1{1,1)( TPYllOB, BJ Ja / lHB OCTOK, 199( } : 겔만 예이 . , 『발해의 施柚 陶器와 磁器」 『 소련 극동의 중 세 고고 및 역사 자료』 연구논문집, 블라디보스똑, 1990 역주 58) 까로버치까 (Ko p o6o 니 Ka) 는 원래 소형 상자를 의미하지만, 여기서 지칭하는 것은 운두가 낮은 腕에 뚜껑이 달린 형태를 띠고 있어서 盆으로 번역하겠다. 역주 59) 파양스((!JaJ1 Hc, fai ence) 는 주석을 함유하는 불투명 유약을 바른 도기를 가리 킨다. 역 주 60) 柚藥은 800-900°C 의 낮은 온도에 서 녹는 低火度의 軟質 柚藥과 1200- 1300°c 의 높은 온도에서 녹는 高 火度의 硬 質 柚藥으로 분류된다. 질은 녹색 의 구리를 사용한 綠柚가 전자에 속하고, 청자나 백자의 유약은 후자에 속 한다. 역주 61) 얇은 石質 陶器 (TOHKOKaMeHH aJI Ke p叫 HKa) 는 1200-1300°C 정도에서 굽는 炳 器를 가리킨다 .

는 아브리꼬쓰 불당에서 출토된 그릇처럼 안팎 모두 칠해졌다. 아브리 꼬쓰 불당에서 출토된 그릇은 동물 또는 새의 형상을 덧붙여 장식하였 는데, 이 형상들은 작은 조각으로만 남아 있다 . 그릇 아래에는 호랑이 또는 사자 모양으로 된 높은 굽다리가 달려 있다 . 굽다리는 현재 2 개 만 남아 있지만, 처음에는 3 개 내지 4 개였을 것이다 (197. 8.5쪽). 마리야노브까 성터의 발해 충위에서 발견된 주물용 국자 조각은 바 깥에 밝은 녹유가 칠해져 있는데, 반투명하고 균열이 있었다. 이러한 유약이 칠해진 것으로서 腕, 直 甄 豊, 뚜껑, 연꽃으로 浮影된 기와가 한반도 평양 북쪽의 上京에 있는 궁전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 댜 62) 기와에는 이밖에도 황색이나 자주색의 유약도 사용되었다 (304. 90, 106 쪽, 그림 98).

중국 東京城에 있는 발해 수도를 발굴할 때 궁전터 및 절터, 폐기물 구덩이에서 녹유를 입힌 그릇 조각들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그 당시 에는 이 옹대한 사원과 궁전의 지붕에 커다랗고 볼록 튀어나온 눈이 달린 거대한 龍頭 모양의 鬼面瓦와 다른 기와들로 덮혀서 에머럴드빛 으로 번쩍거렸을 것이다. 주춧돌은 녹유가 칠해진 柱礎裝飾瓦로 단장 되었는데, 이런 기와에는 간혹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기도 하였다 (136. 204, 2CJ7 , 208, 211 쪽). 多色 鉛柚에는 황색, 녹색, 갈색으로 구성된 三彩柚란 것이 있다. 삼 채유를 사용한 도공들은 밝은 황색과 갈색 유약을 얻기 위해 무색 유 약에 산화철을 첨가하였고, 진한 녹색을 얻기 위해서는 무색 유약에 산화 구리를 첨가하였다. 이런 유약이 칠해진 그릇의 조각들이 끄로우 노브까강 연안의 불당, 끄라스끼노 성터, 니꼴라예브까 II 성터를 발굴 할 때 에 출토되 었다 (1 CJ7. 8.5쪽). 끄라스끼 노 성 터 에 서 출토된 일부 조각

역주 62) 주영헌의 『발해 문화』 (1 CJ7 1) 에는 발해 수도였던 上京 궁전터에서 출토된 施 柚陶器와 기와에 대해 설명되어 있는데, 필자가 이를 잘못 이해하여 마치 <평양 북쪽에 있는 上京 (CaH'! i! H) 궁전 유적에서 출토>된 것처럼 서술한 듯 하다. 이에 따라 뒤에서도 上京 유적과 東京城 유적을 각기 다른 유적으로 서술하고 있어서 이를 시정하여 번역하였다 .

을 통하여 그릇의 대략적안 형태를 복원할 수 있었다. 조각 하나는 직 경 약 14cm 인 뚜껑에 해당되고, 20 점의 다른 조각들은 입의 직경이 약 14cm 로서 벽이 두텁고 덧무늬로 장식한 흔적이 있는 커다란 球形 陶 器에 해당된다. 鉛柚를 바른 그릇들은 중국에서 6 세기 말에 널리 생산되었는데, 漢 나라(기원전 206 년-기원후 220 년)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었다. 다 색 유약은 중국에서 唐 나라 전성기 (7 세기 말 -8 세기 전반)에만 사용되었 댜 국가 경제를 파탄으로 이끈 755 년 安祿山의 난 이후에 다색 유약 의 사용이 급격히 줄어 들었다. 이 때문에 이웃 지역에서도 이런 제품 의 생산이 계속 줄게 되었다 . 당나라 초기의 다색 유약을 대신하여 경 질의 고화도 유약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유약은 고온에서 구운 치밀한 灰色陶土에 칠하였다 (54 . 55 쪽 ; 104. 5 쪽 ; 318. 47, 50 쪽). 唐三彩 를 생산하던 가마터가 河南省 堂縣 과 密縣, 河北省 間磁村, 四

川 省 邱練縣 근교에서 발견되 었다 (318. 47 쪽). 발해 도공들은 중국 장인의 경험을 이용하여 施柚 제품의 생산기술 을 개 량하였다. 발해 도공들은 특히 녹유를 자주 사용하였다. 많은 발 해 그릇들이 전형적인 당나라 그릇들을 닮았지만 이들을 모두 중국에 서 수입했던 것은 아니었다. 上京의 궁전과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 주 초장식와 동의 녹유 장식품들은 현지에서 제작된 것이 틀림없는데, 이 것은 이와 유사한 제품으로서 유약을 바르지 않은 것들도 발견되는 사 실로 알 수 있다 (304 . 96, 116 쪽). 게다가 에뷰l l. 샤브꾸노프가 인용하였고 일본 고고학자들도 동경성 발굴 보고서에서 인용한 바 있는 중국 사료 (1C J7. 112 쪽 ; 317. 30 쪽)에 는 발해 인 이 아주 수준 높은 그릇을 당나라로 가져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던 사실이 보인다. 연해주 발해 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 이 반투명 녹유를 바른 마리 야노브까 성 터 출토의 주물용 국자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이 국자는 불에 탄 혼적이 있는 거친 태토를 손으로 빚어 만들었는데, 동일한 태토를 사용하였지만 유약을 바르지 않은 다 양한 크기의 여러 국자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이 국자들은 모두 직접

사용하기 위해 현지에서 만든 것임 이 틀림없 다 . 마리야노브까 성터에서는 아주 단단한 石質 陶土 제품으로 단면에 회색과 갈색이 보이는 4 점의 그릇 조각들도 발견되었다. 이들은 모두 건조현상이라고 불리는 유약의 결함을 보이고 있어서, 표면이 꺼칠꺼 칠하고 어렴풋이 흰색이 나타난다. 이런 현상은 유약의 온도를 높일 때에 발생한다 (2. 159 쪽) . 그 중 하나는 입술이 의반한 조그만 腕으로 단면에 회색이 드러난다. 안에는 4 줄의 검은색 원을 붓으로 그려 놓았다. 다른 두 개는 둥근 굽 조각으로 단면에 갈색이 나타난다. 마지막 하 나는 물을 담는 당나라 그릇과 유사한 입을 가진 구형 도기의 조각이 다 (319. 7'2:7 , 728쪽). 마지막 조각은 고온으로 심하게 변형되어 절단면이 녹아 있었다. 화재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石質의 얇은 조각으로서 이를 굽기 위해서는 온도를 1000 • C 이상으로 올릴 수 있 는 특별한 가마가 필요하였다. 이런 가마가 마리야노브까 성터에 있었 을 가능성이 있다. 연유룰 바른 그릇은 당나라에서 기본적으로 의례용 으로만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318. 46 쪽). 발해에서 도 역시 그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발해인은 이와 같은 훌륭 한 제품 을 사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질이 낮은 제품도 사용하였던 것이다.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도 마리야노브까 성터와 같은 것들이 발견 되었다. 이것은 높이 5.7cm, 입 직경 15.9cm 의 완으로서, : 치밀한 회색 석질 도토로 만들었고, 표면에는 건조현상이 보이는 회백색 유약을 발 랐다 굽 안팎에 작은 점토 덩어리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 구울 때 동일한 형태의 다른 완 위에 포개어 놓았음이 틀림없다. 이 점토 덩어리는 굽는 과정에서 제품들이 서로 엉겨붙는 것을 방지하였다. 꽃 모양으로 만든 소형 접시임에 분명한 그릇 조각도 주목된다. 이 것은 석질 조각으로서 불투명하고 광택이 없는 백색 유약으로 덮혀 있 다. 꽃잎들은 입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뿐만 아니라 그릇 양쪽 표면에 도 浮影되어서 깨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함을 자아낸다.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발견된 높이 2.9cm, 입 직경 13.&m 인 조 각도 지금 언급한 소형 접시와 비슷하다. 이 그릇은 길게 옆으로 벌어

진 형태로서 물레에서 아주 잘 다듬은 다음에 거울에 가까울 정도로 표면을 마연하였다. 그러나 이 접시에는 유약이 칠해져 있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 니꼴라예브까 II 성터 출토의 모든 제품들은 현지에서 생산되었음이 분명한데, 그것은 이 성터에서 白土가 저장된 도기 제작 소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64. 47 쪽). 니꼴라예브까 11 성터, 마리야노브까 성터,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에서도 그릇 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완에 해 당되는 1 점을 제외하고는 크기가 작아서 그릇 형태를 알 수 없다. 이 들은 다양한 색조를 띤 갈색이나 회색의 조각들로서, 이러한 색깔은 태토 성분과 소성 조건에 따른 것이다. 모두 보존 상태가 아주 좋은 고화도 유약의 얇은 막으로 덮혀 있으니, 균열은 없고 간혹 작은 기포 가 나 있는 정도이다. 유약은 대부분 갈색으로서 간혹 회색 색조를 띠 기도 하지만, 그외에 회청색도 보인다. 이 그룹의 그릇들은 도토나 유 약의 질에서 앞에서 언급한 것들보다 뛰어나다. 벽 두께는 3-5mrn 를 넘지 않는다. 표면은 보통 매끄럽고 문양이 없다. 이 중에는 瓜形 陶器 조각도 1 점 이 들어 있다. 이와 유사한 그릇을 당나라 때 중국에서 만들어 이웃 나라로 수출하 였다. 문헌에서는 이 그릇을 간혹 갈색 자기라고 부르곤 하였다 (54 . 55 쪽). 갈색의 치밀한 도토와 갈색 유약을 이용한 이런 종류의 그릇은 만주 의 遼나라 (907-1125 년) 도시들에서 제작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극소수가 발견된 다른 조각 그룹은 회백색이나 황갈색의 磁器 태토 로 만든 腕 조각들로서, 회백색 유약으로 칠해져 표면이 매끄럽고 빛 난댜 대부분은 구연부 바깥쪽이 두터운 당나라 때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댜 끄라스끼노 성터에서 발견된 조각 하나는 양식화된 꽃 모양으로 만든 접시였는데, 이것도 당나라 그릇에 특징적인 것이다. 이 와 유사한 제품들이 사천성, 섬서성, 하북성, 하남성 둥의 중국 도기가 마에서 생산되었으니 (318. 57 쪽), 이들은 당나라 磁器의 변종에 해당한 다. 끄라스끼노 성터, 마리야노브까 성터,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고

품질의 새하얀 자기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우유빛 같은 흰색 유약이 칠해져 반들거리지만 불투명하다 . 기본적으로 이들은 구연부쪽 이 두터운 완 조각들이다. 그 중에서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출토된 1 점은 원형을 복원할 수 있는데, 높이 2.5cm, 입 직경 8.6cm 인 작은 盆 이었다. 직경 5.9cm 인 둥근 굽에는 구울 때 뿌린 모래 가루가 묻어 있 다. 입술에서 4mm 아래쪽에는 뚜껑받이 턱이 특별히 만들어져 있다. 이런 그릇은 여러 가지 약재, 향료, 화장품을 보관하는 데 사용하였을 것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런 제품을 河北省邪州窟 이외에도 현재의 江西 省 景德鎭을 포함한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생산하였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 경덕진은 南宋과 元나라 떄 자기 생산의 주요 중심지의 하나였 던 곳이다 (318. 57 쪽). 결론적으로 연해주 발해 유적에서 출토된 그릇들은 당시에 도기 제 조업의 수준이 높았음울 증명해준다. 발해 도공들은 새로운 기술과 기 교를 습득하여 자신의 기술을 개량하였다. 이들이 중국 영향을 받았음 에 틀림없지만, 상당히 발전된 도기 생산기술이 발해에 존재했기 때문 에 이룰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상과 같은 자료들은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경제 교류가 밀접하였 음을 증명해주고 있고, 이러한 사실은 문헌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4 교통로와 대의관계 수공업의 발전은 잘 정비된 교통체계 월이는 생각할 수 없다. 교통 로가 있어야 발해의 여러 지역과 거주지들이 연결되고, 수공업 중심지 가 원료 공급지 또는 대내의 시장과 연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와 관련하여 발해 건국 이전에 말갈 장군이었던 李謨行이 중국과 교역­ 경제 및 사절 교류를 부단히 지속시키기 위해서 <石道>을 축조하였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l 이. 37 쪽 ).63) 발해시기에도 이와 유사한 도

로를 축조하였을 것이다. 문헌자료에는 新羅道, 契丹道, 營 州道, 日本道, 朝貢道와 같은 일부 교통로가 언급되어 있다(1CJ7. 62쪽). 발해에서 여러 방향으로 뻗은 이 길들은 발해 안에서 가장 궁벽진 지역들을 묶어 주 었을 뿐 아니라 외국과의 교역-경제 교류 및 정치 교류를 실현시켜 주 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웃 종족들도 발해의 허락을 받아서 이 길 을 동일한 목적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197. 49, 64쪽). 현존 자료에 따르면 각 지역간의 교류나 이웃 나라들과의 교류를 위 해서 陸路뿐만 아니라 水路와 海路도 이용하였다. 사료에는 발해에 육로가 존재하였다고 직접 언급되어 있다 (1 CJ7. 69 쪽). 발해 유적을 발굴할 때에 자주 발견되는 수레바퀴용 주철제 비녀 못이나 축받이통(그림 12. 17, 18) 도 육로를 이용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준댜 이와 함께 여러 가지 화물을 수송하기 위해서 짐마차가 발해에서 널리 이용되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료에 보이듯이 가장 편리한 천연 도로로서 발해인이 널리 이용하 였던 길은 강이었다 (197. 69 쪽). 이와 관련하여 거의 모든 발해 취락지 들이 보트나 작은 배로 항해하기에 편리한 강가에 위치한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 게다가 동일한 강을 따라 몇 개 취락지가 발견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은데, 자연히 이들 사이에 다양한 교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발해 전역에 뻗어 있는 강 덕분에 발해인은 아무르강 유역, 東몽골, 자바이칼 지역으로 난 출구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많 은 사료를 분석해 본 결과, 발해가 중앙아시아의 민족들과도 교역-경 제 교류를 활발히 진행하였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중앙아시아 소 그드인과의 교류는 서기 1 천년기 중엽 또는 1 천년기 전반기에 난 <담 비길>을 따라 이루어졌댜이) 이 길은 동쪽 부분이 아무르강을 따라 이 역주 63) 『짧唐 書 』 昧綿{섬에 「(突地稽)子談行偉統武力絶人, 麟德中 …… 累拜右領軍大 將軍, 爲積石道經略大使.』란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 마지막 구절은 <積石道 의 經略大使가 되었다>는 뜻으로서 石道룰 만들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역주 64) 담비길(紹道)은 문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에체.샤브꾸노프 교수가 발 해와 중앙아시아 지역을 잇는 교통로를 상정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에 대해 서는 다음 논문을 참조 바란다.

어지고, 다음에는 송화강과 우쑤리강을 따라 계속되었다 . 소그드인들은 이 길을 따라 발해의 가장 깊숙한 지역에까지 도달할 수가 있었다 (203. 146-1 5.5쪽). 소그드인은 발해 영토 안에 특별한 거류지롤 만들었으며, 이곳에서 현지 주민들로부터 구입한 상품을 분류하고, 보관하고, 조국 으로 보낼 준비를 하였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수공업 제작소도 발견되 었는데, 소그드인들은 여기서 제품을 생산하여 자기들의 수요를 충족 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지의 발해 주민들과도 교역하였다. 이러한 거류지의 하나가 연해주 아누치노 구역에서 발견되었다. 노보고르제예 브까 취락지가 바로 그것으로서 끄루글라야 (K py rn aJI) 야산에 있는 노 보고르제예브까 성터와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205. 100-105 쪽). 소그드 인의 거류지가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나 란히 있는 사실은 이들이 발해인으로부터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머나 먼 조국의 법과 풍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생활하였음을 보여준다. 담비길 덕분에 발해인은 남부시베리아의 민족들, 특히 위구르 汗國 과도 교역-경제 교류를 유지할 수 있었다. 840 년에 예니세이 키르기즈 가 위구르 한국을 멸망시킨 이후에 많은 위구르족이 정복자를 피해서 담비길을 따라 발해를 비롯한 극동 여러 지역으로 도망하였다. 이리하 여 그들은 현지의 종족 및 민족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58. 146 쪽; 201 . ITT-89 쪽). 사료를 통하여 발해가 웅대한 군함과 상선을 보유한 거대한 해양제 국이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발해가 건국된 지 35 년밖에 되지 않은 733 년에 이미 발해 왕 大武藝가 굉장한 규모의 함대를 파견하여 당시 에 당나라의 가장 큰 항구였던 山東半島의 登州를 과감히 공격함으로 써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나중에는 바로 이 동주로부터 당나라와 발 maBK YJIO B 3.B., Co6oJ lbR ,llop or a cor 血 Rues // PoccHR H ATP. No.l , HH-T HCTOPHH, ap x eoJJ O rHH H 3THOr p퍄 HH Hap o ,l lO B llaJJ b Hero BoCTOKa llBO PAH, BJJ a .ll HB OCTOK, 1992: 샤브꾸노프 에퀘., r 소그드인들의 ‘담비길'』 『러시아와 아시아 태평양 지역』 1992-1, 러시아과학원 극동지부 극동민족 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 블라디보스똑

해 사이의 해양 교역로인 朝 貢 道 가 시작되었다(1 97. 50 쪽). 이 길은 < 登 州 西港 에서 출발 하여 동북쪽으로 大謝島(현재 의 長山島) , 鑑欽島(현 재의 陀磯島)를 지 났 고, 북쪽으로 烏 湖海( 烏 湖島 북쪽 바다) 를 거쳐 都里 鎭( 여순 근처)과 馬石山( 현재의 老鐵山 )으로 향하였다 . 65) 이곳에서 동쪽 으로 항해하여 靑泥浦 (현재의 大連灣 부근), 桃花浦, 杏花浦(대련만 동쪽 로부터 碧流 河 입구 사이에 있는 灣 에서 제일 마지막에 있는 것)를 거치 고, 다시 石人注( 현재의 石城島 북쪽에 있는 해협), 案院쩐 (현재의 鹿島 북쪽에 있는 大洋河 입구), 烏骨江 (현재의 丹東 부근)의 남쪽 바다룰 따 라 항해하여 마침내 鴨祿 江 입구에 도달하였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갈 린댜 하나는 압록강 상류로 향한 뒤에 다시 육로를 따라 발해의 王城 (현재의 黑龍江省 寧安 에서 남서쪽으로 70 리에 위치)으로 나 있어서 발해 로 가는 길이 었고, 다른 하나는 신라로 가는 길이 었다 >(187. 41, 42 쪽) . 그 다음으로 중요한 < 日本道>는 본질적으로 담비길이 바다로 연장 된 것으로서, 이 길은 적어도 6 세기부터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던 것 같댜 일본의 중세 사료에 따르면, 당시에 이미 말갈족들이 배를 타 고 일본 본토와 北海 道 로 항해하였다. 7 세기에 일본인들이 말갈족으로 부터 곰 가죽 또는 산 곰을 구하거나 때로는 강제로 빼앗으려고 연해 주로 특별히 항해하곤 하였다 (153 . 10, 11 쪽).

발해시대에 들어와 담비길에서 바다 부분을 따로 떼어서 일본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길은 연해주 남부 해안에서 시작되는데, 연해주 남 부에서도 특히 라즈돌나야 (Pa J llO Jl bH aJI, 과거의 수이푼 C 演¢邪) 강변에는 수많은 발해 주거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연해주 남부에 분포하고 있는 주거유적에는 과거 率賓府의 중심지로서 현재 우쑤리스끄 시 남쪽에 남아 있는 남-우쑤리스끄 성터가 있다. 그리고 항구이자 鹽州의 소재지 였던 유적 도 포함되 어 있다. 이 항구 유적 은 끄라스끼 노 (K p aCKHHO) 성 터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 성터는 엑스빼지찌야 (3Kcne 血血JI) 만에 있 는 끄라스끼노 마을 근처, 쭈까노브까 (U y KaHOBKa, 과거의 얀치헤 .Hli b 백-

역주 65) 원래의 사료에는 都里鎭과 馬 石山이 따로따로 나오지 않고 <마석산에 있는 도리진(馬石山之都里鎭)>로 나온다( 『 新唐 喜 』 권 43 하, 지리지 참조).

X3) 강 입구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건대 이 성 에는 당시에 중요한 조선소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으니, 778 년에 일본 으로 귀국한 일본 사신 高麗殿嗣의 보고에 간접적인 중거가 나타난다. 그가 발해로 가다가 습격을 받아 배가 심하게 손상되자 발해에서 두 척의 배를 새로 건조해준 사실이 보이기 때문이다 (129. 25 쪽). ”) 염주(끄라스끼노 성터)에서 발해 선박은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 내려 갔고, 동남단에 이르러 對馬島와 熹岐島로 항로를 바꾸었다 . 여기서 일 본은 그야말로 손닿는 거리에 있었다. 일본으로 파견된 발해 사절단은 수백 명에 달하였고, 300 명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사신뿐 아니라 이들을 시종하거나 호위하는 수많은 사 람들을 수송하기 위해서는 아주 커다란 선박이나 아니면 작은 배로 구 성된 일련의 선단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798 년에 일본 천황이 발해 왕에게 보낸 國書에서 작은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여 빈번히 재난을 당하니 일본에 파견하는 발해 사절단의 숫자를 대폭 줄여 달라 고 요청한 점으로 보면 (129. 25쪽), 발해 선단은 주로 연안 항해에 이용 되던 작은 선박들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관련하여 776 년에 일본으로 파견된 발해 사절단에 一 대해 몇 가 지 자세히 언급하는 것도 홍미로울 것이댜 당시에 발해 선박인 對馬 島를 향하여 항해하다가 폭풍우를 만나 노가 부러지고 돛이 떨어져 나 갔다 (129. 25 쪽 ).68) 여기서 우리는 특히 무풍 상태에서 연안 항해를 할 역주 66) 『續日本紀』 권%, 光仁天皇: 『(寶龜)十年春正月 .... . . 丙午, 渤海使張仙흡等獻 方物 奏曰,渤海國王言, 聖朝之使高麗朝臣殿嗣等失路, 源着遠夷之境 , 乘船破 損, 歸去無由 是以造船二般, 差仙壽等隨殿嗣令入朝. 井載荷獻物, 拜奉天朝.J 역주 67) 『日本逸史』 권 7, 桓武天皇 :『(延曆十七年)五月, …… 戊戌, 遣渤海國使內藏宿 彌賀茂等辭見. 因賜其王里 書 曰, 天皇敬問渤海國王, ...... 但顧巨海之無際, 非一 蓋 之可航, 驚風踊浪,動羅患害, 若以每年爲期, 殿處巨測,間以六歲, 遠近合宜.」 사료를 보면 사절단의 숫자를 줄이라고 한 것이 아니고 파견 회수를 줄이라 고 하였다. 그리고 사절단의 배를 <一 蓋 >라고 표현한 것은 <巨海>에 대구 롤 맞추기 위한 것으로서, 이를 근거로 발해 사신들이 작은 배를 탔다고 주 역주 68)장 『하續는日 本것紀은』 무권리 34이, 다光.仁 天皇: r( 寶龜七年)十二月, •••••• 乙已, 渤海國 遣獻 可大夫

때에 필수적인 돛과 노가 발해 선박에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일본으로 파견된 발해 사절단의 기본 임무는 선물 교환이나 일반적 인 매매를 통하여 왕궁에 소용되는 이국적이거나 희귀한 상품을 구하 는 것이었다 문헌자료에 따르면, 발해인은 일본에서 야생 삼으로 만든 직물, 비단, 半 비단 직물, 흰색무늬 비단, 坡泊殿, 무늬 있는 비단, 흰색 사라사, 비단 실과 끈 (129 . 21-23 쪽 ) el) 및 구리, 수은, 칠, 석류 목재, 수 정, 호도나무로 만든 부채 (129. 22 쪽 )70 ) 를 수입하였다. 발해인은 일본에 곰 가죽, 담비 가죽, 도끼 , 꿀을 수출하였다 (129. 22 쪽 ) .7 1 ) 여러 종류의 발해 생산품들이 중국에도 알려진 사실이 그쪽 사료에 보이는데, 이것도 역시 양국 사이에 교역이 이루어졌던 결과임이 분명 하다. 중국에 알려진 것으로는 鐵, 銅, 布,쌀, 輯 오얏, 배, 다시마, 북 ,72) 비 단, 말, 사슴, 물소 , 73) 호랑이 가죽 ,7 4 ) 표범 가죽, 바다 표범 가죽, 곰 가죽, 야생 고양이 가죽, 흰 토끼 가죽, 짧은 주둥이를 가진 개, 붉은 개, 청색 쥐 가죽, 은색 쥐 가죽, 매, 비둘기, 고래 눈동자, 연어, 모래무 지, 말린 잉어, 붕어, 인삼, 흰색 바곳 뿌리, 잣씨, 사향, 벌꿀, 게, 독수 리 깃털 꿩 깃털이 있댜 나중에 발해에 속하게 되었던 혹수말갈은 가 는 마포, 60 번 접힌 직물, <노래하는> 화살촉의 생산으로 유명하였다 (197. 63, 64 쪽). 지금까지 인용된 사실들은 발해가 가까운 이웃뿐만 아니라 아주 먼 司賓少令 • 開國男史都蒙等一百八十七人, 賀我卽位, 井卦彼國王妃之喪. 比着我 岸, 忽造惡風, 抱折机落, 標沒者多 .』 사료에서 알 수 있듯이 노가 부러진 것이 아니라 키(施)가 부러진 것이다 . 역주 69) 발해가 일본에서 들여온 직물로는 布,錦,組, 綿, 絲,緖, 綾, 彩用, 掛羅, 白 羅 가 있지만 본문과 하나씩 정확히 대옹시키기는 어렵다 . 역주 70) 발해가 일본에서 들여온 黃金, 水銀, 漆, 海石楠油, 水晶念珠, 積廊扇올 지적 한 것으로서 상당수가 러시아어로 잘못 번역되어 있다. 역주 71) 발해에서 일본에 보낸 물품으로 熊皮, 照皮, 紹皮, 大虫皮, 堂, 人 좋 둥이 있 지만, 도끼는 없다. 역주 72) 사료에는 북(鼓)이 아니라 된장(鼓)으로 나온다 . 역주 73) 사료에는 骨晴角 으로 나온다 . 역주 74) 호랑이 가죽으로부터 <노래하는> 화살촉에 이르는 물품들에 대해서는 1 장 3 절의 역주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참조 바람.

지역의 나라들과도 정치적, 교역 - 경제 적 , 문화적 교 류를 긴밀히 유지하 였음을 증명해준다. 이와 같은 교류 는 결과적으로 발해의 경제와 문화 가 발전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5 무장도구 이웃과의 빈번한 군사적 충돌로 인하여 군사 행위와 무장은 발해인 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외부로부터의 침략을 격퇴시키고, 한 편으로 大武 藝 와 그 후계자들이 복속시킨 호전적인 흑 수말갈을 비롯한 주변의 여러 종족들을 지속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발해 통치자들은 강하고 잘 무장된 군대와 군함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발해 군대 는 左右猛質衛, 左右熊衛, 左 右 照衛, 南 左右 衛, 北 左右 衛와 같은 몇 개 의 커다란 衛로 구성되었다. 각 위는 대장군과 장군이 지휘하였다 (197 . 72 쪽). 이밖에 연해주 빠르띠잔스끄 (na p TH3aHCK) 구역의 니꼴라예브까 성터에서 발견된 靑銅 符節에 새겨진 글자에 따른다면, 발해에는 左 右 院衛도 있었을 것 이 다 (206. 267- 업 0 쪽 ) .75)

발해 함대의 존재는 문헌에 남아 있는 한 사건으로 증명된다. 당시 에 발해인들이 당나라의 거대한 해군기지이며 항구였던 산동반도의 登 州룰 점령하기 위하여 군함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197 . 50 쪽) . 군대의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발해 왕들은 장래의 병사들을 교 육하고 전투기술을 가르치는 데 각별히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 이룰 위해서 발해에는 특별법마저 시행되었다. 이 법에 따르면 성년이 된 청년들은 문장과 활쏘기를 익히지 · 못할 경우에 결혼을 할 수 없었다

역주 75) 에 . 퀘.샤브꾸노프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고, 중국에 조공하러 왔던 말갈 인에게 수여한 직책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서 아직 단정하기는 어렵다 . 姚玉成, 『假 羅 斯尼古拉耶夫斯克遺址出土 魚 形 靑鉛關 符 考實 』 『 北方文物 』 1993-3 아울러 이 부절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 바람. 샤프꾸노프 저 • 송기호 역, r 연해주에서 출토된 발해의 청동제 符節』 『韓 國古 代史 論殺』 3, 한국고대사회 연구소, 1992

(19 7. 110, 111 쪽 ).7 6) 騎射를 포함하여 활쏘기 시합은 가장 인기 있는 종 목으로서, 발해 사신이 일본 천황을 알현할 때 이런 시합에 참가하였 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29. 22, 23, 26, 初쪽). 발해에 널리 보급되 어 있던 폴로 경기를 통하여 말타는 습관을 익혔다 (1 CJ7. 55 쪽 ).71 ) 발해인 의 용맹성과 전술에 대해서는 중국에 잘 알려져 있었으니, <세 명의 발해인이 한 마리의 호랑이룰 당해낸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1 CJ7. 111 쪽). 따라서 발해 유적을 발굴할 때 여러 무장 도구들이 왜 그렇게 자주 발견되는지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발해인에게 가장 중요하면서 가장 널리 보급된 무기는 활과 화살이 었다 적어도 발해 유적을 발굴할 때에는 화살촉이 다론 어떤 무장 도 구보다 훨씬 자주 발견된다. 발해인에게 활과 화살이 중요하였던 사실 은 또한 다양한 형태의 화살촉들이 증명해준다. 현재 鐵鎖에는 20 가지 형식이 있고, 骨鐵에는 9 가지 형식이 있는데, 각 형식에는 다시 여러 가지 변종이 포함되 어 있다 .78 )

역주 76) 에퀘샤브꾸노프 교수가 『맑스 엥겔스 전집』 제 21 권(모스끄바, 1961) 8 쪽을 그 전거로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보건대 일반론으로 다루고 있는 듯하다. 발해 에 이러한 법령이 있었음을 직접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 역 주 77) 여 기 서 말하는 폴로(po lo) 경 기 는 사료에 馬球, 擊f!E, 擊器, 打秘 등으로 나 오는 것으로서, 당나라 때 페르시아에서 들어왔다고 하여 波羅球 또는 波斯 球라고도 하였다. 발해 때의 馬球 경기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조 바람 . 魏國忠, r 渤海馬球考略』 『黑龍江文物鼓刊』 1983-4 曹殿擧 『古代東北少數民族的馬球運動』 『體育文史』 1984-2 역주 78) 발해 화살촉에 대해서는 뒤의 참고문헌 162 번 외에 다음 논문도 참조 바람. JleH bKOB B.ll:IDaeKyHO B B. 3 . , ll(e J ie3 Hble HaKOHe'I HH KH CTp e J I 6oxal! Qe e npH MOp b ll // BoeHHoe .lleJ io Hace JieH IDI ior a CH6HPH H llaJi bH ero BocToKa. 幽 CT HTYf ap x eoJ IO- rHH H 3THOrp a it> H H CHl5Hp C KOe OT,l le J ieH He PAH, BO HAYKA, HoeOCHOHPCK, 1993 : 렌 꼬프 꿰대·샤브꾸노프 퀘에 . , 『연해주 발해인의 철제 화살촉』 『남부시베리 아와 극동지방 주민의 무기』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 지부 고고학·민족학 연 구소, BO 나우까출판사, 노보씨 비 르스끄, 1993 아울러 이 글에서 언급되고 있는 유형을 우리 용어와 대옹시키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삽날형 (cp e 3eHb-Jio n aTO' IKa ) : 도끼 날형

鐵錄(그림 16. 1-9 ; 17) 들은 모두 슴베가 있는 有 莖 式이다. 철촉은 대 부분 단면이 아주 편평한 장방형, 菱 形, 한 면 또는 양면 렌즈형을 이 루고 있댜 가장 널리 이용된 철촉은 삽날형(그림 16. 8) 과 彈道形인데, 전자는 중간 정도의 짐승을 사냥하거나 전투에서 갑옷을 입지 않은 적 과 적의 말을 살상하는 데 사용했으며, 후자는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 되었던 것 같다. 발해 화살촉에는 납작한 날개 부위에 구멍이 뚫려 있 는 경우(그림 17. 5) 가 드물게 있는데, 화살이 날아갈 때 휘파람 소리를 내게 하거나 적의 진영을 불사르기 위해 불타는 심지를 매다는 역할을 하였다. 편평 화살촉보다는 수량이 훨씬 적지만 단면이 작고 예리한 破甲用 철촉(그림 16. 1-3)791 도 발견되 었다. 이 런 화살촉은 갑옷을 입 은 적을 살상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화살촉이 적게 발견된다는 것은 발해시대에는 아직 금속제 갑옷이 널리 보급되지 않아서 귀족이나 재 력 있는 군인들만 입었음을 의미한다. 편평 화살촉과 파갑용 화살촉에 는 단면이 계단식인 것이 일부가 있는데(그림 16. 4, 7), 데 . 엔.아누친 (ll.H. Afiy'I HH) 의 의견에 따르면 날아갈 때 화살의 회전에 영향을 주었음 에 틀림없다 (10. 378 쪽). 발해 화살촉에는 三稷形(그림 16. 5) 이 아주 드 물댜 이들은 예의없이 戰利品에 섞여서 서쪽 지역으로부터 연해주로 유입되었거나, 아니면 隊商路에서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몸에 지녔 던 상인들을 통하여 유입되었을 것이다. 骨織(그림 15. 1-6, 8-13) 은 수량에서 철촉보다 약 3 배 가량 적고, 단 1 점(그림 15. 2) 만 투겁 이 달린 有裂式이다. 나머지는 모두 슴베가 달린 有莖式이다. 단면이 능형인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2 점만이 단면이 삼 각형이고, 다른 2 점은 원형으로서 그 중 1 점은 유공식이다. 가장 일반 彈道形 (na pa lio noe11 血백) : 兩翼形 破甲用 (15 p oHe lio A 幽 A) : 끌형 三稷形 (T p exnonac 血 A) : 三稷形 lance t형 (naHUeTOBII 血백) : 좁은 창날형 나뭇잎형(JIH CTOBII 朗 HA) : 柳葉形 역 주 79) 원문에 는 파갑용으로 설명 되 어 있으나 탄도형 이 옳은 듯하다 . 오히 려 그립 16-9 가 파갑용에 가깝다.

적인 골촉은 란셋형과 나뭇잎형이다 . 골촉의 깃 아래쪽에는 흔히 피리 구멍이 파져 있다(그림 15. 13). 화 살의 반대편 끝에는 활 시위에 걸 수 있도록 홈이 있는 골제, 철제 또 는 청동제의 오늬가 달려 있다(그림 15. 7; 16. 12). 이런 오늬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서 화살대 끝에 끼우도록 되어 있었다. 발해의 활에 대하여는 훨씬 조금밖에 언급할 것이 없는데, 그것은 단지 뼈로 만든 활덮개판만이 개별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이다(그림 15. 14, 15, 18). 마리야노브까 성터에서 발견된 활덮개판 1 점은 길이가 18.3cm 인데, 상당히 좁고 휘었으며, 양끝이 넓어져 삽날 모양을 이루고 있다 (162. 111 쪽, 그림 4. 51) . 이것은 아마도 중간의 정면 덮개였던 것 같다 1 점이 발견된 데다가 그것도 성터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이 활에 다른 덮개가 있었는지 여부는 현재로서 판단할 수 없다. 다만 그런 덮 개를 가진 활이 9-10 세기에 남부시베리아와 중부아시아에 널리 유행하 였고, 몽골시대까지도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만은 지적할 수 있다 (156. 159, 161 쪽). 노보고르제 예 브까 취 락지 에 서 발견된 골제 의 중 간 정면 덮개는 이보다 크고 길이가 24.6cm 에 이르지만, 완성품은 아 닌 것 같댜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는 끝이 삽날 모양으로 된 것 이 외에도 작고 장방형인 끝부분 정면 덮개가 1 점 발견되었는데, 한쪽 끝 에는 활시위를 맬 수 있도록 홈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 덮개의 길이는 10cm 이댜 이런 덮개를 가진 활은 6-7 세기에 남부시베리아에서 사용되 었다 (156. 152 쪽). 활덮개판 이외에도 뼈로 만든 7Xl .6c m 크기의 쐐기 가 연해주에서 발견되었다. 세로 방향에서 볼 때 한쪽 끝은 3mm 정도 로 꽤 두텁고, 다른쪽은 단면이 길쭉하게 늘어진 삼각형이 될 정도로 날카롭다 이와 유사한 쐐기가 기원전 1 천년기 말에 남부시베리아 활 에 사용되었다(1 56. 151 쪽). 따라서 연해주 발해 유적에서 발견된 활덮 개판과 쐐기는 당시 남부시베리아에서 사용되던 다양한 활 구조와 비 교되는 것으로서, 발해인에게도 여러 구조의 활이 존재하였음을 알게 해준댜 발해 병사의 공격용 무기에는 槍과 大刀가 있다. 창은 단 1 점이 발견

되었다(그림 16. 11). 이것은 철 제품으로 有짧 式이며 날이 꽤 좁다 . 전체 길이는 40.5cm 이고, 날 길이는 24cm 이다 창 날은 중간 부분에서 뚜렷 이 안쪽으로 좁혀져 있다. 창 끝으로부터 아래쪽으로 3cm 떨어진 지점 에서 너비가 2.4cm 로 최대 너비를 이루고 있댜 중간 부분은 너비가 2cm 에 불과하며, 투겁 가까이에 이르러서 다시 2.3cm 까지 넓어진댜 날 부분과 투겁 부분은 꽤 명료하게 구분된다. 날 부분이 아래쪽에서 심하 게 좁아져 길이 16.5cm 의 투겁 부분으로 이행한다. 투겁 직경은 바닥에 서 2.5cm 이댜 이런 창은 금속 갑옷을 뚫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댜 연해주 뻬뜨로브까 (neT p OBKa) 취락지에서 한 면에만 날이 있는 大刀 3 점 이 발견되 었다(그림 16. 10). 이 들의 보존 상태 는 다양하지 만, 모두 동일한 유형에 속하는 것 같다.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것은 길이가 75cm 인데, 이 대도의 슴베 끝이 떨어져 나간 상태이므로 아마도 전체 길이는 77cm 일 것이댜 刀身의 컬이는 66cm 이댜 도신은 곧고 너비가 2 . 7-3.2cm 이 댜 둥도 곧으며 두께 0.6-0.&m 이 댜 도신의 단면은 길 다 랗게 늘어진 이등변 삼각형을 이룬다. 칼 끝은 등에서 날 쪽으로 곧고 비스듬하게 경사져 있다. 경사면의 길이는 3.6cm 이다. 이 경사면은 날 처럼 갈았던 것 같다. 발해 대도의 슴베는 도신에 비해 약간 좁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도신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다. 두번째 대 도는 도신 일부가 떨어져 나갔지만, 그 대신에 슴베는 완전하다. 슴베 는 길이 10.5cm 이고, 끝이 약간 좁다. 슴베 끝에는 작은 구멍이 있는 데, 이 구멍을 통해 손잡이 덮개를 고정시켰다. 도신은 2.8-3.7cm 로 약 간 넓다. 세번째 대도의 슴베에는 철제 수직 테가 남아 있다. 발해 대 도에는 손을 보호하는 코(鉛)가 없었던 것 같다. 발해인은 갑옷과 투구를 사용하여 신체를 방어하였다. 투구 하나가 東京城 발해 上京 유적에서 출토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퀘부~ l. 뽀노쏘 프 (B.B. noHOCOB) 가 자세히 서술하였다. 이 투구는 半球形이며 4 개의 넓 은 철판으로 만들었다 이 철판들은 좁은 철제 띠의 가장자리에 리벳 을 박아 연결하였는데, 이 가장자리는 불꽃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아래쪽에는 또 하나의 철제 띠가 투구를 감싸면서 돌아가고 있다. 투

구 꼭대기에는 끝이 위로 향한 편자 모양의 철제 부속품이 고정되어 있었다 이 투구가 발견될 때에는 이미 사라져 버렸지만, 여기에는 어 떤 장식이 달려 있었을 것이다 (317. 9, 68 쪽, 그림 65). 다른 투구 하나는 대체로 위와 흡사하다. 두번째 투구는 球 4 대維形 이며, 리벳의 배열로 보건대 4 개의 넓은 철판을 4 개의 좁은 철제 띠로 연결하여 만들었다. 투구 아래의 가장자리는 위쪽이 물결 모양을 이루 고 있는 또 하나의 철제 띠가 감싸고 있다. 이 투구 꼭대기에는 球形 끝장식 같은 것이 달려 있다. 투구의 모든 부품들은 리벳으로 연결하 였 던 것 같다 (24 1. 그 림 13). 발해인의 갑옷에 대해서는 훨씬 적게 알려져 있다. 비록 갑옷 혼적 은 투구보다 자주 발견되지만, 이들은 모두 토막난 채 발견되는 소형 의 철제 판들이다(그림 16, 13-15). 이들은 갑옷 비늘과 홉사하다. 소형 판은 크기와 구멍 배치가 아주 다양하다. 전체 형태는 부정형 직사각 형을 이루고, 여기에는 언제나 짧은 측면이 달려 있는데 이곳은 둥그 스름하거나 크게 각이 져 있다. 각이 진 것은 평면이 마치 끝이 뭉툭 한 포탄과 홉사하다. 발해 갑옷 비늘의 너비와 길이의 비율은 1:2 와 1:3 사이로 유동적이다. 이 모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발해인에게 비늘 형 갑옷이 존재하였던 것 같은데, 여기에는 반드시 가죽, 펠트천 혹은 직물로 된 바탕이 필요하였다. 발해인은 철제 갑옷과 더불어 가죽이나 펠트천으로 만든 갑옷도 입었을 것이다. 발해 갑옷의 크기와 형태를 현 단계에서는 알 수가 없다. 발해인의 무장 도구에 대해 언급하면서, 연해주 발해 유적에서 아직 단 1 점의 전투용 도끼도 발견되지 않은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 댜 전투용 도끼는 기본적으로 발해 이후에 여진 (189. 109-111 쪽)을 포 함한 유라시아 여러 민족들 (184. 63 쪽)에게 가장 대중적인 무기의 하나 였다. 여진족에게 널리 이용되었던 投石機나 성벽 파괴용 衝車와 같은 전술 무기도 발해 유적에서는 전혀 포착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발해인과 후대의 여진족이 군사력과 전술 면에서 성격이 서로 달랐음 을 의미한다.

제 4 장 발해 문화 1 발해 문화의 전반적 특성 이미 19 세기 중엽에 러시아 동방학자 퀘. 고르스끼 (B. rop cKHA) 가 <발해는 동해안에서 가장 번성하였던 국가의 하나로서 교육과 학문의 나라였다>고 지 적 하였다 (55. 23 쪽). 이 러 한 특징 묘사는 사료만이 아니 라 고고학 연구 자료와도 전적으로 부합된다. 고대 역사가들이 발해를 海東盛國 (290. 권 1), 즉 <동해안의 번영하는 국가>라고 불렀던 것은 결 코 우연이 아니었으며, 실제로도 그럴 만하였다. 문헌자료에 따르면, 발해에서 성년이 된 청년들은 문장과 활쏘기를 익히지 못할 경우에는 결혼할 수 없다는 왕의 명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122. 8 쪽). 이것은 특 권층 청년들에 한해서만 적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령이 발 효된 사실은 글을 아는 사람들이 꽤 널리 확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많은 유학생을 당나라에 보냈던 사실도 한 증거가 된다(!Cf/. 51, 52 쪽). 문헌자료와 고고자료에 따르면, 발해인은 적어도 세 종류의 문자를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그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문자는 중국의 漢字였 다. 현재 한자로 쓰인 몇몇 발해 유물이 있다 . 특히 발해 貞惠公主의 墓誌는 전문이 당 왕조 때 유행하였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 용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780 년에 공주의 아버지인 大欽茂가 세웠 댜 묘지의 내용과 양식 및 일련의 비유 문장들은 이미 8 세기에 발해

가 중국의 고전, 역사 및 신화 를 아주 잘 알고 있었음 을 보여준다 (108. 225-230 쪽) . 연해주 빠르띠잔스끄 (na pTH J aHCK) 구역 니꼴라예브까 (HHKO Ji aeBKa) 성 터에서는 한자가 새겨진 물고기 반쪽 모양의 靑銅 符節(그림 19. 11) 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206. 267-270 쪽) . 19 세기에 연해주에서 발견된 것으로 한자가 새겨진 청동 도장과 원 판도 발해 유물로 간주된 적이 있지만 (19 1. 114-120 쪽 ; 197. 109 쪽), 실제 로는 女 眞 장군이었던 蒲鮮萬 奴가 세운 東夏에서 13 세기에 제작된 것 이었다. 발해에 보급된 두번째 문자는 8-9 세기에 이웃의 위구르 汗國에서 사 용되었던 突歡의 룬(pyttb!) 문자였다. 19 세기에 남-우쑤리스끄 성터에서 발견된 深岩에는 돌궐의 룬 문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현재 블라디 보스똑의 <뷔 1. 까.아르쎄니예프 (B.K.A p ceHbeB) 紀念 國立沿海州聯合地域學 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서 수이우빙 (C y昞 oHHr), 죽 중국어로 率 賓府라는 발해시대 부의 명칭을 판독하는 데 성공했다 (190 . 82 - 84 쪽).J) 발해에 돌궐 문자가 사용되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10-12 세기 중국인 의 <李白, 神仙>이라는 구전 문학에 들어 있다 . 2) 이 작품에는 玄宗이 발해 왕으로부터 동물과 새의 발자국을 연상시키는 편지를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182. 238-267 쪽). 이 편지에 열거된 사건과 인물은 문헌자 료의 내용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실제의 역사적 사 실을 바탕으로 하였던 것이다 (1 '51. 109 쪽). 돌궐 문자가 실제로 새의 발 자국을 연상시킨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渤海 國書가 바로 돌궐 문자로 역주 1) 에뭐. 샤브꾸노프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서 회의적인 견해도 있으니, 이 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바람 . l

쓰였음이 틀림없다. 중국 동북지방의 동경성 근처에 있는 발해 상경 유적을 발굴할 때 기와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는데, 여기에는 漢字 나 契丹 大字를 연상시 키는 기호들이 찍혀 있었다 (317. 45 쪽, 그림 46). 그러나 사실은 이들이 한자나 거란 대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이 밝혀졌다. 이것은 6 세기 말 신라에서 발명된 <吏讀> 문자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것이 틀림없는 제 3 의 발해 문자일 수도 있댜 3) <이두>는 한자의 윤곽을 약간 변형시 킨 것으로서, 이두 자체의 발음과 의미로서 신라어를 표기할 수가 있 었댜 신라의 북방 이웃인 발해인도 바로 이와 같은 원칙으로 고유 문 자를 창조하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나중에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거란과 여진이 <大字>라고 불리는 문자를 창조하였으니, 이것은 틀림 없이 발해 영향을 받은 것이다 . 연구 결과 여진 <대자>는 형태-음절 문자였다 (148. 4 쪽). 따라서 발해 고유 문자도 형 태-음절 문자였음이 틀 림없다 .

중국 한자에 비해서 어법과 발음이 발해인의 언어에 더 적합하였던 두 문자들은 발해 도시 주민들 사이에 여러 가지 계약이나 의무 혹은 이와 유사한 성격의 문서를 작성할 때에 널리 이용되었음이 분명하다. 반면에 중국어와 한자는 궁중의 귀족과 관료라는 한정된 계층에서만 사용되었다 . 한자는 외교문서를 포함한 공문서, 법률, 왕의 명령에 사 용되었고, 상류사회에서 詩語와 文學語의 역할도 하였다(1 97. 110 쪽). 전통 종교와 함께 발해 특권층에는 고구려 영향을 받아 불교가 널리 보급되었다. 중국 동북지방의 상경 유적과 연해주에서 발굴된 수많은 절터와 佛堂 자리가 이를 중명해준다. 홍미로운 것은 끄로우노브까강 좌안에 있는 우쑤리스끄 구역의 아브리꼬쓰 (A6 p HKoc) 야산 기슭에서 불당 자리를 발굴할 때 景敎 십자가가 표현된 길쭉한 타원형 점토판이

역주 3) 과거에는 기와 문자를 근거로 발해에 고유 문자가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 였으나, 이것만 가지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바람. 한국고대사회 연구소 편, 『譯託 韓國古 代金石文 』 m, 1992, 473-480 쪽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197 . 111 쪽, 도판 XXX- 2 ). 물론 유물 하나만을 가지고 어떤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발해에 불교와 함께 경교도 스며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경교가 7 - 8 세기에 발 해의 이웃인 당나라와 위구르 汗國을 포함하여 중부아시아와 극동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와 경교가 유입됨에 따라 자연히 이와 관련된 이웃 나라의 종교 문학이 보급되었고, 그와 관련하여 건축 및 장식 표현에서도 기본틀이 확립되었다. 이 모든 것은 다른 민족 문화나 국가 문화들과 상호 교류 롤 하면서 발해 문화가 형성되고 발전되었음을 증명해준다 . 다시 그러한 증거의 하나로 당시에 발해인과 중국인들 사이에 인기 가 있었던 馬球를 들 수 있다. 이 경기는 이란 지역에서 극동 지방으 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205. 103 쪽) . 이번에는 거꾸로 발해도 이웃 나라 및 민족들에게 문화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니, 일본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예컨대 822 년 에 일본을 방문한 발해인이 馬球 경기에 참가한 적이 있다. 이 경기는 일본 천황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이에 따라 그는 <이른 봄에 타구 경기를 구경하고>라는 시를 썼다 .4) 이 시에는 경기 장면과 관중들의 반응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화창한 봄날 이른 아침에 자욱한 안개 사라졌는데 때를 어길세라 사신들 앞마당에 나섰네

역주 4) 이 시는 『經國集』 권 11 에 실려 있는데 원문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 번역문 은 원문과 다른 부분이 있어서 이 책에서는 원래의 시를 기초로 번역하였다. 七 言 早春觀打템. 一首. 芳春炳景早朝晴, 使客乘時出前庭. 廻杖飛空疑初月, 拜遂轉地似流星. 左擬右承當門競, 分行莘踏亂 雷 聲. 大呼伐鼓備 壽 急, 觀者猶嫌都易成.

초숭달 닮은 막대기 공중에서 휘두르니 땅에 구르는 공 유성과도 같아라 골문 앞에서 왼쪽으로 막고 오른쪽으로 공격하니 관중들 발 구르며 뇌성처럼 소란하네 환호소리 북소리 급하기도 한데 관중들 경기 빨리 끝나 아쉬 워 하네 (296. 149 쪽). 발해인의 영향으로 일본에는 <渤海樂>이라는 특별한 쟝르의 劇이 확립되어 금세기까지도 공연되었다 (9 8. 30 쪽). 일본인은 발해로부터 네 쯔께(根付)도 차용하였다. 이것은 동물, 사람, 새, 물고기, 꽃을 조각한 소형 장식물로서, 문서, 약, 부싯돌 및 기타 다론 일용품을 넣는 지갑 이 나 담배 쌈지 를 허 리 띠 에 매 다는 데 사용하였다 (316. 26 - 36 쪽). 발해에는 시와 음악이 크게 발달하였다 . 예를 들어서 일본에 간 발 해 사신들은 자신을 위해서 특별히 마련된 일본 궁중 시인 및 악사들 과의 시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l S? . 114 쪽). 이런 시합은 양국의 문화를 서로 살찌우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결론적으로 소수의 단편적인 문헌사료와 함께 고고학 연구 결과로 복원된 연해주 주민의 물질문화의 전반적 수준으로 보건대, 비록 완전 히 연구된 것은 아니지만 발해가 당시에 고도의 독자적 문화를 영위하 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2 장식-조형 예술 및 신앙 이미 지적하였듯이 발해는 多 民 族國家 였다. 발해의 영토에는 퉁구스 어 종족과 함께 고구려인, 위구르인, 실위인, 소그드인 등과 같은 종족 들이 살았댜 이에 따라 이와 관련된 흔적이 발해 문화에 남지 않을 수 없었으니, 연해주를 포함한 발해의 장식-조형 예술에 반영되어 있다. 중세 유라시아의 민족들 대부분이 그러하였듯이, 연해주 발해인의 의복에서 조합식 허리띠가 중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다. 조합식 허리띠 는 청동, 철, 뼈로 만든 띠꾸미개와 띠고리로 발견되며 ? 형태 면에서 볼 때 突歡式 허리띠(그림 18. 2, 8, 14-19) 와 極 東 式 허리띠(그림 12. 35 - 40) 로 구분된다. 후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室 韋 式 허리띠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허리띠는 대부분 아주 오밀조밀한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와 함께 뼈로 만든 띠덮개판도 발견되었는데 , 여기에는 발해 밖에 서는 발견되지 않는 주제로 그림이 장식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주제 는 발해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부류에 속한다. 바로 이러한 것이 마리 야노브까 (Ma p b JI HOB l< a) 성터에서 발견되었으니, 뼈로 만든 두 개의 장방 형 판으로 되어 있다. 이들 양쪽 가장자리에는 리벳을 박을 수 있도록 각기 구멍 하나씩이 뚫려 있는데, 쇠로 만든 리벳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 중 하나에는 봉황도 아니고 꿩도 아닌 새 다섯 마리가 떨기나무의 열매를 쪼아 먹는 그림을 날카로운 도구로 새겨 놓았다 . 다른 하나는 한가운데를 기준으로 좌우로 양분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세 개씩의 삼 각형이 아래 위 대칭으로 새겨져 있고, 그 가운데를 따라서 수직으로 선이 그어져 있다. 양분된 각각에는 아래쪽으로 굴에서 밖으로 내민

역주 5) 허리띠의 부품 명칭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n pJIJl(J( a( 띠고리, 帶釣) ; 6JIJl mKa( 띠꾸미개, 鎔板) ; Ha KJia.a Ka( 띠덮개판) ; OKOHe 니H l! K (띠끝, 蛇尾) 띠덮개판은 띠꾸미개와 동일한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馬 具의 일종으로 말띠에 장식으로 붙인 덮개판을 가리키기도 한다 .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뼈 제품은 후자의 용도로 사용된 것들이다.

뱀의 머리 같은 것이 두 쌍씩 나타나 있고, 그 사이 사이에는 뾰족한 부분이 아래를 향하도록 하면서 삼각형들이 몇 겹으로 새겨져 있다(그 림 44. 15). 이 그림도 앞의 판과 같은 방식으로 새겼다. 두 개 모두 가 장자리를 따라 가는 선을 넣어 테두리를 만들었다.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발견된 골제 띠덮개판(그림 44. 13) 도 장방 형이다. 문양이 제대로 만들어져 있지 않고 리벳을 박을 구멍도 없는 것으로 보아서 이 덮개판은 미완성품인 것 같다. 마리야노브까 성터에 서 발견된 두번째 덮개판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중간에 있는 대칭 문양 을 기준으로 양분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문양이 아래쪽에 있는 하나의 삼각형과 위쪽에 있는 세 개의 半圓또는 孤線으로 이루어져 있고, 가 운데를 따라서는 수직으로 선이 그어져 있다. 그 오른쪽에는 십자무늬 가 두 겹으로 표현되어 있다. 오른편의 나머지 부분에는 장식이 없다. 왼쪽 부분의 끝에는 자형의 기호가 있다. 기호 내부에는 평행한 선이 희미하게 그어져 있다. 그 나머지 부분에는 장식이 없다. 덮개판 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가는 선을 넣어 테두리를 만들었다. 문양은 마 리야노브까의 경우와 동일한 기술로 새겼다. 세번째의 띠덮개판(그림 44. 22) 도 골제품으로서 역시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른쪽 절반만이 남아 있다. 앞에서 다룬 덮 개판들처럼 가운데에 <兩分>하는 문양이 있었는데, 이곳을 따라 부러 져 있어서 삼각형들이 위쪽만 보이고 아래쪽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남아 있는 반쪽에는 리벳 구멍이 가운데와 끝에 하나씩 만들어져 있 다. 가장자리를 따라 가는 선을 넣어 테두리를 만들었다. 덮개판 자체 에는 <해독>할 수 없는 복잡한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고, 역시 앞의 덮개판들과 동일한 기술로 새겼다. 이상 세 가지의 덮개판은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장소에서 발견되긴 했지만, 삼각형 또는 호선들이 대칭을 이루면서 덮개판을 중간에서 <양분>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러한 요소는 발 해에서 발생된 특징 가운데 하나에 속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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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소I5: :—二츠一―' ―〔챌;껍 느 =·r - _ 二一 8 도독 一一_= _ 국fI l I 2I c 사 Z2 _-一-:?切 그림 44I. I 골성제터품 ;8 :,1 -93, ,1 77,. 1꼰8, 스21딴, 찌22노. 브노까보 고I 르취제락예지브 ;까4- 6취, 락10지-1 4;, 151.6 , 마19리, 야20노. 브니 까꼴 라성예터브 까

니꼴라예브까 Il 성터에서는 장방형의 골제 띠덮개판 조각이 두 개 더 발견되었다. 그 중 하나는 반쪽만 남아 있는데, 가운데에 세로로 난 깊은 홈을 따라 부러졌다. 남아 있는 반쪽은 바깥쪽에 세로로 가는 선 이 그어져 있고, 여기에는 연속적으로 평행하게 삼각형이 배치되어 있 다. 양쪽 끝에는 리벳 구멍이 뚫려 있다. 그 다음 것은 끝 부분만 남았 는데, 리벳 구멍을 따라 부러졌다. 남아 있는 부분을 통해 판단하건대, 이 덮개판도 3 면의 가장자리를 따라 가는 선으로 테두리를 냈다. 덮개 판에는 거의 똑같이 두 부분으로 나뉜 직사각형으로 장식되어 있다. 니꼴라예브까 Il 성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한쪽 끝이 뾰족하게 된 부

정형 장방형의 골제 띠끝(그림 44. 14) 도 허리띠 구성품이다. 이곳에는 리벳을 허리띠에 박을 수 있도록 2 개의 구멍이 만들어져 있다. 상하 대칭으로 된 세 쌍의 삼각형들로 장식되어 있으며, 이 삼각형들은 바 닥이 가장자리를 향하고 있다. 삼각형들은 뼈의 표피충을 깎아서 만들 었다 삼각형들 사이에는 6 개의 구멍을 둥글게 배치하여 꽃무늬를 만 들어 놓았다. 니꼴라예브까 11 성터와 노보고르제예브까 (Hoaoro pJl eeaKa) 취락지에 서 는 용도를 알 수 없는 圓點文 6) 骨板이 다수 발견되 었다(그림 44. 10, 11, 17).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는 8-10 세기 소그드인 거류지였다 (205. 100-105 쪽). 따라서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소그드인 것이 틀 림없을 것이다. 이 원점문은 발해 이전에는 러시아 극동의 남부지역에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반면에 8 세기에 중앙아시아, 특히 뺀쥐켄트 (neH ,ll)I( HKeHT) 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205. 103 쪽) . 니꼴라예브까 11 성 터에서 원점문 골제품이 발견된 사실은 소그드인의 영향을 받아 발해 인 사이에도 이 문양이 보급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노보고르제예브까 취락지에서 발견된 골제품 중에서 납작한 장방형 판으로 되어 있는 소형 네쯔께 장식품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장식품에는 끈으로 매달기 위한 두 개의 구멍이 나 ' 있다(그림 44. 9). 한 면에는 점들을 둥글게 배열하여 6 개의 꽃무늬가 만들어져 있는데, 이 꽃무늬는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출토된 띠끝과 동일하다. 다만 이번 것은 꽃무늬 가운데에 점이 하나 더 있어 후자와 구별된다. 얼마 전까지 만 해도 이 장식 품을 발해 것 이 라고 생 각했지 만 (316. 3.5쪽), 노보 고르제예브까 취락지에 소그드인이 산 것이 확실하므로 이들이 만든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장식품과 니꼴라예브까 11 성터의 띠끝이 문양에서 서로 일치하는 사실은 이것이 발해에서 발생한 것임 을 어느 정도 증명해주고 있다. 꼰스딴찌노브까 I 취락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뼈를 새겨 만든 동물 역주 6) 마치 제도용 콤파스로 원을 그린 것처 럼 가운데에 점 이 찍혀 있는 원무늬 로서 , 원문에 서 는 콤파스무늬 (UHPKYJ ibH l ,18 op HaMeHT) 라고 부르고 있다.

조각 2 점은 커다란 홍미를 불러일으킨다 . 하나(그림 44. 1) 는 거북이룰 형상화한 듯한 납작한 조각품이다 . 유감스럽게도 이 조각품에서 꼬리 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어떤 동물인지 좀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힘들다. 등에는 마름모꼴 그물무늬를 이루도록 沈線이 비스듬히 교차 되어 있어서, 마치 거북등을 모방한 듯하다. 머리는 작고 부정형 삼각 형을 이루고 있다. 다른 하나(그림 44. 7) 는 다리가 없는 도마뱀을 연상 시킨다. 둥은 앞과 동일한 방식으로 장식되었다. 물론 이 조각품에는 일부 마름모 안에 앞의 것과는 달리 작은 구멍이 파져 있다. 꼬리는 길고 송곳 모양이다. 머리는 부정형 삼각형을 이루고, 구멍 하나가 관 통되어 있다. 이 구멍은 끈을 끼우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두번째 조 각은 도마뱀 모양을 하고 있는 드리개 형태의 송곳임이 틀림없다. 문 양이 없는 골제 장신구로는 半球形 띠덮개판, 곰 • 멧돼지의 송곳니나 마랄 (Ma pa.JI) 사슴의 이빨로 만든 드리개 형태의 부적이 있다. 이밖에도 -l꼴라예브까 Il 성터에서는 點線文으로 장식되고 아래쪽 가장자리가 이빨 모양으로 되어 있는 부정형 삼각형의 貝穀 드리개(그림 44. 12), 의복이나 허리띠에 매달 수 있게끔 보배조개(p aKOBHHa Ka yp H) 를 포함 한 바다 연체동물의 껍질로 만든 장신구가 발견되었다. 발해인은 의복과 허리띠를 간혹 도금한 반구형의 청동 띠꾸미개로 장식하였다. 이 띠꾸미개의 맞은편에는 실제로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 만 현재의 단추와 유사한 고리가 있다. 여기에는 뼈를 갈아 만든 물림 쇠 모양의 단추도 있다(그림 44. 6). 연해주 발해인의 장식-조형 예술은 기와를 필두로 하여 다양한 점토 제품에 가장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다. 기와에는 지붕의 정면 가장자리를 덮는 수키와와 암키와에만 문양이 있다. 암키와에서는 기와의 앞쪽 가장자리를 따라 연속적으로 배열된 指押文이 가장 많다. 지압문은 배열이나 방향이 제멋대로이다. 어떤 경 우에는 바깥쪽 가장자리를 따라 문양이 나 있고, 다른 경우에는 안쪽 을 따라 나 있으며, 또 다른 경우에는 안팎을 따라 동시에 나 있다. 두번째 종류의 문양은 정면 가운데를 따라 갈대 줄기를 눌러 찍은

陰刻 圓圈文 내지 押印 圓圈文이다. 이것은 일직선으로 배열된 작은 고리들의 상하 가장자리에 어떤 문양이 만들어져 있는가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뉜댜 여기에는 양쪽에 선이 그어진 것, 선이 그어지고 그 밖 으로 비스듬히 눈금이 그어진 것, 눈금만 있고 선은 없는 것이 있다. 또한 원권문이 일직선으로 배열된 것이 아니라 세 개의 고리가 삼각형 을 이루면서 이어지는 것도 있다. 일부 암키와에는 고리 대신에 둥글 게 구멍 이 파져 있는 경 우도 있다 (l CJ?. 도판 VI, VII).7>

까쁘이또 불당과 아브리꼬쓰 불당에서 출토된 암키와의 문양에는 홍 미있는 변종이 있다. 이 암키와의 정면 가운데에는 두번째 종류의 문 양이 시문되었지만, 기와의 曲面 바깥쪽에도 문양 띠가 있어서 여기에 두 줄의 圓圈文과 함께 이들을 연결시켜 주면서 서로 교차하기도 하는 빗금이 나타난다 (197. 80 쪽, 도판 XIX). 세번째 종류의 문양은 깊게 파인 X 자형 선이 연속적으로 배열된 것 이 다 (197. 80 쪽, 도판 VI, XVIII-1 ) . 네번째 종류의 문양은 깊게 파인 선이 <전나무> 형태로 배열된 것 이 다 (197. 도판 XVIII-2). 제작기술 면에서 좀더 복잡한 문양은 수막새기와에서 보인다. 이 문 양은 꽃무늬를 이루고 있는데, 마르지 않은 점토에 특별히 만든 도장 을 찍어서 양식화된 연꽃을 표현한 것이 기본이다. 막새는 따로 제작 하여 수키와 몸통에 덧붙여져 있는 둥근 테두리 안에 부착하였다. 수막새 문양은 연꽃잎의 특징에 따라 4 개의 기본형이 있다. 4 개 유 형에는 공통적으로 가운데에 반구형 돌출부인 子房이 있는데, 막새 테 두리인 周緣과 더불어 마치 청동 거울의 복사판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 킨다. 가장 이른 유형의 꽃무늬는 까쁘이또 불당 자리에서 발견된 수막새 에 보인다 이 꽃무늬는 가운데에 작은 자방이 있고, 突線으로 된 2 열

역주 7)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圓文은 다음 두 가지가 있다 . KP} 'll(O ' IK a: 圓圈文 또는 고리무늬(작은 고리처럽 되어 있는 원) JI MKa: 구멍(구멍처럼 안에도 비어 있는 원)

의 동심원이 그 둘레를 감싸고 있다. 바깥쪽 원으로부터 8 개의 연꽃잎 이 밖으로 뻗어 있는데, 이 중 4 개는 자작나무 잎처럼 보이는 나뭇잎 형태의 윤곽선이 浮影되어 각각 둘러싸고 있다 . 8 개의 연꽃잎 밖으로 는 25 개의 連珠가 돌려져 있고, 연주 양쪽으로는 突線이 하나씩 지나 고 있다 (197. 도판 X-1). 이런 유형의 변형으로는 암막새처럼 수막새 주연에 갈대 줄기로 찍 은 무늬가 있다. 이와 같은 문양을 추가로 찍은 수막새는 발해 이웃 나라들에서 단 하나도 발견된 적이 없다. 이 유형의 또다론 변형이 아브리꼬쓰 불당에서 출토된 막새에 보인 다. 이 변종은 위의 두 경우와는 달리 가운데의 자방을 감싸고 있는 두 줄의 동심원 사이에 8 개의 연주가 배열되어 있고, 꽃무늬 밖의 연 주도 28 개 에 달한다 (197. 도판 X-2). 두번째 유형은 아브리꼬쓰 불당 출토의 수막새에 표현되어 있다. 이 것은 중앙의 자방이 첫째 유형보다 훨씬 크고, 그 둘레에 돌선으로 된 4 개의 연꽃잎이 돌려져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연꽃잎은 각기 서로 떨 어져 있고, 자방과도 이어져 있지 않다. 각 꽃잎에는 안쪽 아래에 화살 표처럼 생긴 줄기가 나 있다. 꽃잎 사이에는 孤線이 있어서 마치 한 송이 의 꽃이 피 어 있는 듯하다 (197. 도판 XI-1). 아브리꼬쓰 불당에서는 이 유형의 변종도 발견되었다. 여기서는 호 선마다 양쪽 바깥에 珠狀 突起가 부조되어 있어서 앞의 것과 구분된 다. 원형 돌기는 모두 8 개이다 (1 '57. 도판 XI-2). 세번째 유형은 끄라스끼노 성터에서 발견되었다. 이 유형은 중간 크 기의 자방이 가운데에 있고, 그 둘레에 5 개의 작은 連珠가 배열되어 있으며, 그 주위는 다시 돌선으로 된 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원 밖으로 는 꽃봉오리도 아니고 꽃잎도 아닌 자작나무 잎사귀 같은 것이 5 개가 줄기에 달린 채 배치되어 있다. 꽃봉오리 내부는 세로로 난 엽맥에 의 해 좌우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각각에는 안쪽에 길쭉한 타원형 돌 출부가 있다. 꽃봉오리들 사이사이에도 능형에 가까운 타원형 돌출부 가 있다(그림 7• 1).

그립 45. 꼬르싸꼬브까 I 취 락지 출토의 막새 기 와

세번째 유형의 변종은 보리쏘브까 (6o pHCOBKa) 불당에서 출토된 수막 새에 보인댜 여기서는 꽃봉오리가 5 개가 아니라 6 개이고, 꽃봉오리들 사이에는 원형 돌기가 각기 하나씩 배치되어 있다(그림 7. 2). 아울러 여기에는 자방 둘레에 연주가 없다 (14 1. 49-60 쪽, 그림 1). 네번째 유형은 꼬르싸꼬브까 (Ko p caKOBKa) 취락지에서 발견되었다(그 림 45) 전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세번째 유형과 구분이 된다• 첫 역주 8) 이 글에서는 취락지라고 하였으나 1993 년에 한· 러 학자들이 합동으로 발굴 하여 절터로 확인되었다. 이때 다수의 완형 수막새들이 출토되었다. 자세한 것은 다음 보고서를 참조 바람. 문명대, 『코르사코프카 불교사원지 발굴』 『러시아 연해주 발해유적』 대륙 연구소, 1994 아울러 수막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 바람. 에.부-l1. 샤브꾸노프 저 ·송기호 역, 『不死鳥문양이 있는 발해의 막새기와』 『美 術資料』 50, 국 립 중앙박물관, 1992

째, 커다란 자방이 있고, 그 주위는 연주가 없이 돌선으로만 둘러싸여 있댜 둘째, 꽃봉오리가 5 개가 아니라 4 개이댜 셋째, 꽃봉오리들 사이 에 鳳凰이 부조되어 있다. 봉황이 표현된 것은 연해주의 발해 수막새 에서만 발견되었고, 기타 다른 지역의 발해 유적이나 발해 외의 유적 에서는 아직 발견된 바가 없다. 봉황은 모두 4 마리인데, 두 마리씩 쌍 을 이루어 가운데의 꽃봉오리를 향해 머리를 마주하고 있다. 새들이 꽃봉오리를 쪼는 모습도 서로 비슷하다. 봉황 머리에는 굴곡이 별로 없는 작은 벗이 보이고, 부리는 아주 힘이 있으며, 목은 비교적 길고, 꼬리는 곧고 위로 약간 치켜 올려져 있다. 길다란 다리는 넓게 벌리고 있으며, 서너 개의 발가락이 달려 있다. 날개는 편 채 둥 위로 들어 올 려서 마치 춤추는 봉황을 연상시킨다 (209. 269-271 쪽). 이와 관련하여 다음 사실을 지적하는 것도 홍미로울 것이다. 기원전 1 천년기 후반기에 『山海經 』 에 기록된 중국의 고대 전설에 의하면, 옛 날에 마르지 않는 영원한 강이라고 여겼던 丹水가 渤海 競 으로 흘러들 었는데, 이 강 연안에 봉황이 살았다고 한다. 참고로 말갈족이 세운 국 가 이름은 이 발해만의 명칭에서 유래한 것이다 (197. 47, 48 쪽). <이 새 는 여느 새처럼 먹고 마신다. 절로 노래하고 절로 춤춘다. 이 새가 나 타나면 천하가 평 안해진다 >(92. 32, 149 쪽 주 103 ; 140 쪽 주 57).9) 봉황의 기원은 태양이나 불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으니, 이 새는 南方, 熱, 여 름, 豊作의 화신이며(1 69, 44 쪽), 생명, 안녕, 평온의 상징이기도 하다 (92. 140 쪽 주 59). 이밖에 이 새는 德治 시기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여 겨졌댜 또한 암수의 금슬이 아주 좋다고 하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 부간의 애정과 신뢰의 상징으로도 되었으며 (43. 408쪽), 황후와 신부의 상징물이 되었다. 봉황은 대나무 씨를 먹었으므로 (169. 44 쪽), 발해 막새에 표현된 꽃봉 역주 9) 여기에 인용된 내용은 『山海經』 南山經에서 『丹水出焉, 而南流注于渤海 . 有 鳥焉 (중략), 名曰鳳皇,(중략), 飮食自然, 自歌自舞, 見則天下安寧 . 』이라는 구 절을 인용한 것이다. 이룰 근거로 원문에서 不死鳥(t!J eHHKC) 라고 한 것을 鳳凰 으로 번역하였다.

오리가 이제 막 땅에서 솟아난 대나무의 싱싱한 새싹임을 알 수 있다. 대나무는 인격이 고매한 사람, 즉 < 굳세고 도량이 넓은 굳건한 사람 > 을 상징 한다 (3. 22 쪽 ; 175. 126 쪽). 꼬르싸꼬브까 취락지 출토의 봉황무늬 막새로 되돌아 가보자. 앞에 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청동 거울을 모방한 이러한 막새들이 불교 신앙 의 신성성과 순수성을 지키는 부적 , 그리고 불당 자체와 불탑 및 신도 들을 지키는 부적의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11-12 세기 거란 과 여진의 풍습에 청동 거울 모조품을 佛 塔 2 층에 붙였던 사실이 있는 것도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한다 (49. 186 쪽) . 진짜 거울과 비슷하게 생 긴 이 모조품은 온갖 종류의 귀신들이 두려워 하는 빛을 반사했을 것 이댜 가정의 재앙을 예방하기 위해서 최근 얼마전까지도 중국 동북지 방의 주민들 사이에 이와 유사한 풍습이 있었으니, 이들은 지붕 위에 특별히 만들어 놓은 神堂에 청동 거울을 걸어 놓았다 (174. 58 쪽, 그림 20). 게다가 그 뒷면에 기원하는 그림이나 상징을 그려넣으면 거울의 신비스런 특성이 더욱 강화된다고 생각하였다. 발해 막새도 이와 동일 한 기능을 가졌을 것이다. 꼬르싸꼬브까 취락지에서 출토된 막새의 문 양을 분석해보면, 이들이 평화, 안녕, 애정 그리고 부처에 대한 확고한 믿음 따위의 소망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연해주 발해 도기에서 발견되는 문양은 형태가 꽤 단조롭고 그것도 드물게 발견된댜 문양은 기법에 따라 沈線文, 磨硏文, 押印文, 四白文 (n p o ip H JI HPOBaHHb 벼 }leK op ), 덧무늬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침선문에는 도기의 몸통에 평행으로 배치되어 있는 1-8 줄의 직선문, 물결무늬, 여러 종류의 선-물결무늬, 孤線文, 짧은 사선이 연속적으로 배열되어 있거나 서로 교차되어 배열되어 있는 띠무늬가 특히 대표적 인 것들이다. 마연문에는 선-물결무늬로 구성된 띠가 대표적이고, 이와 함께 지그 재그 형태나 늘어진 용수철 모양의 것들이 있으며, 짧은 선을 수직으 로 또는 비스듬하게 나타내거나 서로 교차시켜 마름모꼴의 그물무늬를 만들어 놓은 것도 있다 .

압인문에는 무엇보다도 빗살무늬와 格 子文 울 들 수 있다. 빗살무늬 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띠로 이루어져 있다. 격자문으로는 몸통 전체 를 장식하거나 띠 형태로 일부만을 장식하였는데, 격자 형태로는 능형, 사각형, 삼각형이 있다. 아주 드물게는 가운데에 점이나 홈이 찍혀 있 는 작은 圓圈文의 도장무늬도 발견되는데, 이것은 본질적으로 圓點 文 이나 꽃무늬 따위에 해당되는 것이다. 더 드물게는 로울러형 도장으로 눌러서 만든 문양 띠가 있는 도기도 발견된다. 요철문은 일반적으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수평 帖土帶와 같은 수의 고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점토대는 간혹 단절되어 있기도 하다. 점토 대와 고랑이 다양한 갯수로 복합되어 있는 것도 있다. 일부는 몸통에 수직으로 고랑이 나 있어서 瓜形陶器를 이루고 있다. 덧무늬는 아브리꼬쓰 불당에서 발견된 磁器에 보인다. 깨진 조각들 로 판단하건대 여기에는 아마 봉황일지도 모르는 그 어떤 새가 덧무늬 로 표현되어 있었을 것이다 (197. 85 쪽) . 끄라스끼노 성터에서 출토된 陶 製 火遠의 몸통에서도 꽃무늬 형태의 원형 덧무늬가 확인되었다 (205. 102 쪽, 그림 15).10) 끄라스끼 노 성 터 와 꼰스딴찌 노브까 I 취 락지 에 서 출 토된 도기들에도 홍미있는 덧무늬 변종이 보인다. 이 도기들의 몸통에 는 비교적 넓은 수평 띠가 덧붙여져 있는데, 여기에 陰刻線이 비스듬 히 장식되어 있거나 아니면 비스듬히 서로 교차시켜 장식되어 있기도 하다.

연해주 발해인은 陶製 佛 臺 座, 도제 의장용 타일, 불당 벽에 좀더 복 잡한 문양으로 장식하였으니, 까쁘이또 불당과 아브리꼬쓰 불당에서 출토된 자료들이 이룰 증명해준다. 까쁘이또 불당을 발굴할 때 벽 주 위를 따라 도제 타일 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斜線 양쪽에 소용돌이무늬가 있는 덧무늬로 장식되어 있었다 (197. 75 쪽, 도판 XVII-1). 아브리꼬쓰 불당에서는 화재가 났을 때 불에 타 굳어진 灰壁

역주 10) 이 그립은 이 책의 그립 9-7 과 동일한 것이다. 그런데 원문에서는 <火遠에 딸린 陶管>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그림을 보면 그렇지 않아서 <陶製 火遠의 몸통>으로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그 표면에 벽화 일부가 남아 있었다. 이 조각으 로 보건대 불당 벽은 상아색 물감으로 칠하였고, 처마 바로 아래와 같 은 곳에는 번개무늬로 장식하였다. 번개무늬 아래쪽으로는 짙붉은색의 가는 띠 가 지 나간다(1 97. 82 쪽, 도판 XXXI). 아브리꼬쓰 불당 자리에서는 도제 불대좌에 장식되어 있던 많은 수 의 덧장식들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들 장식은 작게 조 각난 채 제각기 발견되었다. 이 덧장식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반구형 돌기 주위를 감싸고 있는 둥근 꽃무늬가 있는데, 이것은 끄라스끼노 성터에서 출토된 화로 몸통에 있는 덧무늬와 동일하다. 이러한 장식은 기원전 1 천년기 전반기-후반기 초에 중앙아시아와 東투르케스탄에서 널리 유행하던 것으로서 (205. 103, 104 쪽), 나중에 이곳에서 발해로 전파 되었음이 분명하다. 아브리꼬쓰 불당 경내에서는 구슬 형태를 포함한 다른 도제 덧장식 조각들도 발견되 었다 (197. 도판 XXIX-1). 발해인의 장신구는 숫자가 많지 않지만 종류는 다양하다. 그 중에서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유리 구슬, 도제 구슬, 돌 구슬이다. 아브리 꼬쓰 불당 근처의 발해 고분(제 2 호 고분)을 발굴할 때 목걸이에서 떨어 져 나온 돌 구슬이 무더기로 발견된 적이 있다. 이들은 형태가 독특하 여 이 른바 戰芹形 구슬 l” 로 구분된다 (197. 92 쪽, 도판 XXXIV). 이 와 동 일한 형태의 구슬들이 연해주 올가 (O Ji bra) 구역에 있는 씨니예 스깔르 이 (CHHHe CKa JThl) 주거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퀘뷔 l. 안드레예바는 이 유 적의 상층을 8-9 세기, 죽 발해시기로 편년하였다 (8. 169, 174, 204, 205 쪽). 따라서 좀더 이른 시기의 연해주 유적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는 이러한 전부형 구슬이 발해 문화에서 민족적 특성을 나타내는 한 요소 임이 분명하다 . 연해주 발해 유적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으로는 드리개 장식, 귀고리 역주 11) 戰芹形 구슬 (ceKH p oo6 p a3HlUI IS y cHHa) 은 평면이 장방형에 가깝고, 단면은 단 축 방향으로 쐐기형에 가까운 구슬을 가리킨다. 구멍은 쐐기형 단면의 두터 운 쪽에서 장축 방향으로 뚫려 있다.

에 매다는 뼈 고리(그림 44. 18), 흔히 고리가 납작하도록 연마한 보배 조개(그림 44. 16) 가 있다. 드리개 장식은 뼈로 만들거나(그림 44. 2, 3) 동물 송곳니로 만들었는데(그림 44. 20, 21), 이것은 아마 독특한 부적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보배조개는 특별히 도려낸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현재 아무르강 유역에 살고 있는 퉁구스어 종족들이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처럼 겉옷 옷자락에 매달았을 것이다. 수량에서 그 다음으로 많은 장신구는 금속제 허리띠 장식품이다. 사 각형이나 타원형으로 된 철제 또는 청동제 띠꾸미개들로서, 아랫부분 에 구멍 이 있는 突嚴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그림 14. 1-4 ; 그림 18. 2, 8, 10, 14-17). 씨니예 스깔르이 주거유적 가운데 발해시대에 속하는 상층 에서 출토된 청동 띠꾸미개 2 점 (8 . 160 쪽, 그림 14) 을 제외하면 다른 것 들은 모두 문양이 없다.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특이한 형태의 띠꾸미 개도 눈에 뜨인다(그림 18. 3, 4, 6, 19). 흔히 도금되 어 있는 반구형 청 동 단추도 발해 유적 에 꽤 널리 분포하고 있다(그림 18. 9). 일부 유적 에서는 띠꾸미개로 사용된 장방형 또는 원형의 透孔 金屬板이 발견되 는데, 여기에는 당시로서 꽤 복잡한 투공문양이 새겨져 있다(그림 12. 35-40). 이러한 것은 아무르 여진문화라고도 불리는 아무르강 유역의 빠끄로브까 (noKp OBKa) 문화 유적에서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134. 112-123 쪽, 그림 47-49, 그림 54-55). 하지만 발해 유적에는 이러한 것이 비교적 드물게 발견된다. 따라서 이러한 금속판은 몽골어 종족인 室韋가 주체 였던 빠끄로브까 문화 주민들의 종족적 특색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 각해볼 수 있다. 이들은 교역을 통하여 발해인의 수중에 들어갔을 것 이댜 청동 방울은 발해인에게 꽤 인기 있는 장신구였다. 방울은 주로 球 形으로 되어 있고, 정면 가운데를 따라서는 빗금이 있는 突帶가 돌아 가고 있으며, 그 아래에 밖으로 튀어나온 두 개의 <눈>이 달려 있다. 이 <눈> 때문에 청동 방울이 올챙이와 약간 비슷하게 보인다. 끄라스끼노 성터와 씨니예 스깔르이 주거유적에서 <눈>이 있는 십 자가 형태의 청동 드리개(그림 18. 21) 두 개가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양식화된 새 머리를 연상시킨다 (197. 94 쪽, 도판 XXXV-3;78. 도판 2, 그 림 5). 이와 유사한 드리개가 우쑤리강 하류의 꼬르싸꼬브까 (Ko p caKOBKa) 고분군에서도 발견되었다 (134. 그림 50, '2:7). 약간 무리는 있지만, 아무 르州의 뜨로이쯔꼬예 (T p OHUKOe) 고분군에서 발견된 드리개도 동일한 유형 으로 볼 수 있을 것 이 다 (63. 도판 XXIII-15, 도판 XXIV-22, 도판 XXVI-15). 연해주 발해 유적에서 발견된 팔찌는 대부분이 부서져 있는데, 이 가운데 청동 팔찌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쇠팔찌는 소수에 불과하다. 괄 찌는 대부분이 납작하고 끝이 이어져 있지 않다 . 양쪽 끝은 둥그스름 한데, 간혹 다른 반쪽과 연결하기 위해서 둥근 구멍이 나 있는 경우도 있댜 문양이 있는 팔찌는 아주 드물다.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 출토 된 팔찌는 좁은 고랑이 두 줄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것은 여진인 팔찌 에 아주 특징적이다.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에서 출토된 팔찌에는 陶 器에서 보이는 것처럼 斜線을 서로 교차시켜 음각하였다. 단면이 둥근 청동 철사로 만든 팔찌도 있다. 귀고리에는 3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청동 철사룰 고리 모양으로 구 부리거나 휘어 만든 고리형 귀고리(그림 12. 31-33). 둘째, 첫째 것보다 직경이 약간 큰 청동 고리나 은 고리에 軟玉이나 紅玉傾로 만든 원판 을 매달아 만든 복합형 귀고리(그림 12. 30). 셋째, 측면에 돌기나 가지 가 달린 鑄造 귀 고리 (그림 12. 34). 다론 종류의 개인 장신구로는 뻬뜨로브까 취락지에서 발견된 청동 목걸이가 있는데, 단면은 타원형이고, 양쪽 끝이 서로 이어지지 않은 채 각기 구멍이 뚫려 있다(그림 18. 13). 니꼴라예브까 II 성터에서는 청 동 철사를 반으로 꺾어서 만든 보편적인 형태의 청동 머리핀이 발견되 었댜 높은 미적-예술적 수준을 보여주는 주조 머리핀도 그 윗부분이 끄라스끼노 성터에서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선인장 줄기 같은 것이 3 개가 솟아 있고, 각 줄기에는 꽃잎이 한 충마다 6 개씩 2 층으로 나 있 어서, 마치 꽃 위에 다른 꽃이 겹쳐 있는 것처럼 보인다(그림 18. 5). 스따로레첸스꼬예 (CTa p o p e tf eHCKOe) 성터에서 발견된 장식물은 가운

데에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주위에 6 개의 꽃잎이 만들어져 있어 높은 미적-예술적 수준을 보여주지만 구체적인 용도는 알 수 없다(그림 18. 20). 꽃의 수술과 꽃잎의 줄기는 금으로 상감되어 있다 . 현재 연해주에서는 발해의 조형 예술품에 속하는 꽤 인상적인 유물 들이 발견되었다. 기본적으로 테라코타제품이 주류를 이루지만, 극히 일부는 청동으로 만들었고, 또 아주 적게는 구리와 돌로 만들었다. 대 부분은 아브리꼬쓰 불당에서 발굴되었다. 특히 이곳에서는 불당이나 사원의 용마루 끝을 장식하였던 용머리 모양의 테라코타제품이 아쉽게 도 심하게 부서진 채 발견되었다 . 이 장식품을 중국에서는 츠원 (Ch iw en, t:JH B3Hb, 鷄物)이 라고 부르고, 일 본에 서 는 시 비 ( L 硏 my bH , 鷄 尾)라고 부른다. 아브리꼬쓰 邸物의 모든 조각들을 다 복원한 것은 아 니지만, 용머리 위로 솟아 있는 부리 모양의 주름잡힌 꼬리를 포함하 여 일부를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l c;JT. 87 쪽, 도판 XXVI). 아브리꼬쓰 치문과 가까운 유물이 끄라스끼노 성터에서 동쪽으로 약 70lan 떨어진 하싼 (Xaca tt) 구역 비짜지 (BHT513b) 灣 의 슐짜 (Ill yJi b Q a) 곶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 유물이 바로 靑桐 佛板으로서 현재 불라디보스 똑의 <부계.까.아르쎄니예프 기념 국립 연해주 연합 지역학박물관>에 소 장되어 있다. 처음에는 불판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현재 남 아 있는 것은 가운데 부분으로서, 불당 안에 불상이 안치되어 있는 모 습이 납작한 浮影로 표현되어 있다(그림 10). 불판의 전체 높이는 10.2cm 이고, 최대 너비는 4.6cm 로 아래쪽에 나타난다. 불판의 측면과 아래에는 0.3cm 높이의 좁은 테두리가 돌려져 있댜 아랫쪽 양측면과 여기에 각기 대응되는 처마쪽에는 앞으로 튀어 나온 곳에 돌쩌귀용 구 멍이 하나씩 만들어져 있다. 아랫쪽 가운데에는 1.2 cm 길이의 막대가 달려 있는데, 이 막대기를 이용하여 불판을 땅에 꽂거나 어느 제단에 끼워 놓았을 것이다. 불상은 주조 기법으로 만들어져 있고 부조는 약하다. 부처는 정좌하 고 연꽃 위에 앉아 있다. 손바닥은 서로 포개서 발바닥 위에 올려 놓 았다. 얼굴은 둥글고 명백히 몽골족의 특징을 보이고 있으니, 눈은 넓

으면서 약간 비스듬하게 치켜져 있고, 코는 넓고 납작하며, 입술은 두 텁댜 귓불은 심하게 아래로 처져 있다. 머리카락은 더부룩한데, 낮은 모자 같은 것을 쓰고 있다 . 부처는 넓은 소매가 달린 두루마기 같은 옷을 입고 있는데, 가장자리에는 너비가 넓은 싶이 달려 있다 . 가슴에 는 뭔가 띠 같은 것이 보인다. 이상으로 보건대 이 불판은 집 안의 제단에 세워 두었던 불교 聖 像 이었다 이와 유사한 것들이 중세 한국에도 유포되어 있었으니, 이들은 특별히 만든 구멍이나 작은 홈에 회전축을 끼워 넣어 만든 쌍바라지 문을 앞에 달고 있다 (313 . 그림 232; 18.5 . 86 쪽에 있는 그림). 이러한 문 이 이 불판에도 달려 있었던 사실은 아래쪽과 처마 밑에 작은 홈이 나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아래쪽에 달린 막대와 그밖의 여러 사항을 고려해보건대, 이 板佛의 圖像 은 끄라스끼노 성터에서 출토된 청동 불상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 고 있다(그림 8 ; 9. 9 쪽) . 연해주 우쑤리스끄 구역 보리쏘브까 마을 근처 의 불당 자리에서 출토된 발해 불상 2 점에도 이와 같은 막대가 달려 있다 (14 1. 50-52 쪽, 그림 2, 3). 따라서 이러한 막대는 아마 발해 불상에 만 보이는 독특한 요소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불판에서 가장 홍미로운 부분은 지붕이다. 지붕에는 기와를 이었 으니, 타원형 고랑과 볼록한 이랑이 번갈아 나타나는 것은 기왓골과 기왓등을 표현한 것이다. 지붕 양쪽 끝에는 극동과 중부아시아의 중세 불교 건축물에 특징적인 장식물이 표현되어 있으니, 이것은 용머리로 조각되어 서로 마주보게 설치되어 있다 . 유감스럽게도 용마루 왼쪽에 있는 것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파손되어버렸다. 반면에 오른쪽 용머리 는 완전하게 남아 있고, 더구나 세부적인 여러 형태를 아주 명확히 관 찰할 수 있다. 두 마리의 용은 입을 크게 벌려 커다란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지붕의 용마루 양 끝을 물고 있다. 입 바로 뒤에는 수염이 보이는데, 수염의 털들은 주름을 새겨서 표현하였다. 눈은 크게 뜨고, 코는 뭉툭하다. 머 리 위에는 심하게 휘어진 부리 모양의 꼬리가 달려 있는데, 그 뒤쪽으

로는 표면에 선이 그어진 것으로 둘러싸여 있다 . 중세 중국에는 이러한 지붕 장식물에 기본적으로 두 가지 형태가 있 었댜 첫번째 것은 邸尾 즉 <올빼미 꼬리>이고, 다른 하나는 그 변형 물로서 隨物 죽 <올빼미 부리>이다. 치문이 치미와 다른 것은 치문 아랫부분에 용머리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 이 불판의 용머리 장식물은 치문에 틀림없지만, 그 외형은 발해나 당나라 때의 치미와 홉사하다. 주목할 것은 불판 치문에 표현된 깃이 부리 모양으로 된 꼬리의 끝에 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것은 돈황 148 호 및 172 호 동굴 벽 화에 그려 진 당나라 치 미 (265. 390 쪽, 그림 4, 5), 평 양의 고구려 안학궁터에서 발견된 치미 (185. 30 • 69 • 71 쪽의 그림들 ; 87. 그림 180, 200), 동경성 발해 상경 유적에서 발견된 치미 (249. 42, 43 쪽)에 특징적 으로 나타난다. 이 불판의 치문이 당, 고구려, 발해의 치미와 유사하다 는 것은 이들이 연대적으로 서로 가깝다는 것을 증명한다. 불판에는 이른 형태의 치문이 표현되어 있으니, 1l_19 세기의 치문에 이르면 이 미 이런 종류의 것이 사라지고 그대신에 종종 다른 양식이 나타나게 되는데, 머리 위에는 둘로 갈라진 물고기 꼬리가 등장하고 것에는 지 느러 미 가 그려 지 게 된다 (W. 49 쪽, 그림 6 ; 251. 68, 69 쪽). 墓其一에 따르면 가장 이른 치문은 당나라 중기에 등장하였다. 그는 그 증거로 『舊唐書』 明皇紀의 문구를 인용하였는데, 여기에는 726 년에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지붕에 치문을 설치하였던 도성의 端門과 기타 여러 문들, 사원과 道觀 건물들이 훼손되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251. 69 쪽). 따라서 ’ 이 불판에 표현된 것과 같은 초기 형태의 치문이 이미 8-10 세기에 존재하였던 것이다. 9-10 세기에 속하는 아브리꼬쓰 불당에서 출토된 치문은 이 불판의 치문과 圖像에서 아주 흡사한데, 이러한 사실은 이 치문을 발해 것으 로 편년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런 종류의 불교 성상으로서 발해시기로 편년되는 것은 이 불판이 현재로서는 처음이면서 유일하다. 이 불판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발해 때에 시골에 세워졌던 작은 불당의 건물 양식이 일목요연하게 묘사되

어 있다는 점에 있다. 이와 함께 이 불판은 발해 장인의 고도로 전문 화된 예술적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비록 세부 묘사에서 일부 도식적 인 면이 보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하여 자기 주위의 세계를 · 사실 적으로 묘사하고자 하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 현재까지 불상에는 테라코타, 돌, 청동 제품들이 있다. 테라코타 불상 죽 地佛은 아브리꼬쓰 불당 자리에서 부서진 채 출토 되었댜 이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은 菩薩像이다. 소성 상태가 불량하여 세부 묘사들이 심하게 뭉개져 있다. 이 보살은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있고, 손을 마주 잡아서 다리에 얹어 놓았다. 뒤에는 잎사귀 모양의 광 배가 일부만 남아 있다(1 97. 86 쪽, 도판 XXVII-1). 이와 유사한 불상이 중국 동북지방의 발해 상경 유적에서 다량으로 출토된 바 있다 (317. 도 판 CV 田 -CX). 비교적 작은 두번째 불상은 얼굴 왼쪽 일부만이 남아 있지만, 보존 상태 는 아주 양호하다 (l

것이 틀림없다(그림 9, 8). 부처는 삼각형의 광배 를 배경으로 앉아 있 댜 양 손은 맞대서 배에 얹었댜 몸에는 헐렁한 옷을 걸치고 있는데, 옷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천을 덧붙였다. 머리는 약간 길쭉한 타원형 이고, 귓불은 심하게 아래로 처져 있으며, 입은 반쯤 벌리고 눈은 살짝 감았다 . 머리카락은 상부가 잘린 피리미드형으로 꽉 조여랬다 . 무아지 경의 평온한 얼굴과 고요한 자세는 부처가 내면 세계의 성찰에 깊이 몰두해 있음을 말해준다. 수준 높은 전문기술과 꼼꼼한 세부 묘사를 통하여 내면 상태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는 아직 이 불상 이 유일한 것으로서, 발해의 걸작품이면서 나아가 극동 여러 나라를 대표하는 걸작품이기도 하다 . 끄라스끼노 불당에서는 회황색 사암을 깎아 만든 板佛 조각들도 발 견되었다(그림 9. 10-12). 이 가운데 1 점은 왼쪽이 넓은 테두리와 連珠 로 둘러싸여 있는데, 부조로 표현된 부처가 상하로 하나씩 남아 있다 (그림 9. 10). 위의 부처는 머리가 떨어져 나갔고, 아래 부처는 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이렇게 조각이 난 상태로는 이 불판에 새겨진 부처가 모두 몇이나 되는지, 그리고 어떠한 주제를 어떠한 구도로 표현하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가 없다. 두번째 판불은 역시 앉아 있는 부처를 좀더 비사실적이고 도식적으 로 표현하고 있다(그림 9. 11). 이렇게 조각난 상태로는 여기에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어디에 사용되었는지롤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연해주 발해 유적에서 청동 불상은 끄라스끼노 불당 자리에서 1 점, 보리쏘브까 불당 자리에서 2 점이 발견되어 모두 3 점이 된다. 끄라스끼노 불당에서 출토된 청동 불상(그림 8;9. 9 쪽)에는 도금한 혼적이 부식된 표면에 지금도 남아 있다. 이 불상의 도상은 슐짜 곶에 서 출토된 청동 판불과 아주 홉사하다. 연꽃에 앉아 있는 자세라든가 동일한 형태의 머리 묶음 \ , 북부 몽골족에 특징적인 둥근 얼굴, 좁다랗 고 비스듬히 치켜진 채 널찍하게 배치된 눈, 눈 위에 축 내려뜨려진 윗 눈꺼풀에 보이는 주름, 넓고 납작한 코가 바로 그렇다. 이런 얼굴 표현은 중국이 나 인도-티 벳의 불상에 는 없는 것 으로서 (1CJ 7. 101 쪽 ; 296.

152 쪽), 이 불상이 발해에서 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끄라스끼노 성터 에서 출토된 청동 불상이나 다른 발해 청동 불상들이 이후 시기의 것 들과 다른 점은 불상 아래쪽에 제단에 꽂는 데 사용되었던 길다란 막 대가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보리쏘브까 불당에서 출토된 불상들은 길다란 옷을 입고 양 손을 서 로 맞잡고 서 있는 전체 모습이 다 표현되어 있다. 불상들의 보존 상 태는 좋지 않으며, 표면은 심하게 부식되어 있다. 첫째 불상은 머리를 묶은 모습이 위에서 언급한 불상과 꼭 같다. 아래쪽에는 막대가 일부 만 남아 있다. 가슴에 있는 끈 부근에는 뭔가 술 같은 것이 표현되어 있다 (14 1. 50, 51 쪽, 그림 2). 두번째 불상은 맨발인데, 머리와 막대는 떨 어 져 나갔다 (14 1. 51, 52 쪽, 그림 3). 발해 것이 분명한 小像 1 점이 12 세기 후반 -13 세기 초로 편년되는 샤 이가 (ma ti ra) 성터의 154 호 집자리에서 발견되었다(그림 46. 3). 이 소상 은 심하게 부식되었지만 도상에서 보리쏘브까 불당에서 출토된 불상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소상에는 차이점들도 보인다. 예를 들어서 이 소상의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세 가닥으로 묶여서 이마 위로 드리워져 있고, 다시 정수리에는 조그만 고리 모양으로 엮여서 올려져 있다. 이 고리를 이용하여 가슴이나 허리띠에 매달 수 있었다. 눈은 불룩하고 약간 길쭉한 타원형으로 표현되어 있고, 가운데를 따라 좁다랗게 선이 그어져 있댜 입은 약간 길쭉한 타원형으로 새겨져 있는데, 그 가장자 리를 따라 입술이 약간 돌출되어 있다. 가슴에는 술이 3 개가 달린 목 걸이가 보인다. 손으로는 무언가 원추형으로 생긴 물체를 잡고 있다. 이 소상은 매달고 다니기 위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아래쪽에 막대가 달 려 있지 않고, 그대신에 발이 드러나 있다. 도상의 측면에서나 심하게 부식되어 있는 사실에서 보건대, 샤이가 성터에서 출토된 12-13 세기의 소상 가운데는 이와 같은 종류가 보이지 않는다. 아울러 이 소상은 위에서 언급한 보리쏘브까 불당 출토의 불 상과 아주 홉사하다. 이러한 사실은 이 소상을 발해시기로 편년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소상이 어떻게 여진 성터에서 발견될 수 있었는가 하

는 문제는 극히 간단하다 . 앞 시기에 만들어진 유물과 샤이가 성터에 서 만들어진 유물이 동일한 충위에서 발견되는 것 은 여진인들이 우연 히 발견한 앞 시기의 제품을 자주 몸에 지니고 다녔음을 반영하는 것 이댜 특히 청동제품인 경우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시 녹여서 사 용하였다 . 과거에 끄라스끼노 마을 부근에서 靑 銅 官吏像 1 점이 발견되었다(그 림 46. 1, 2). 당시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중세유적으로 알려져 있던 끄 라스끼노 성터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이 관리상은 발해시기로 편년 되었다 (197. 97 쪽, 도판 XXXVI). 그러나 그때는 청동제 발해 유물이 단 1 점도 알려져 있지 않았으므로 비교할 대상이 없었다 . 현재로서는 다 른 발해 청동제품들과 달리 이 관리상은 보존 상태가 아주 양호하다는 사실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이러한 보존 상태는 여전과 같은 그 이 후의 청동제품들에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청동 관리상이 발 해 것인지는 아직 확실히 규명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연해주 빠르띠잔스끄 구역의 니꼴라예브까 성터늪 여러 層 位로 이루 어져 있는데, 여기에서 우연히 발견된 물고기 모양의 符節 (그림 19. 11) 은 발해인의 예술품임에 틀림없다. 이 부절은 정부로부터 중요한 일을 위임받아 전권을 쥔 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206. 267- '2:7 0 쪽). 앞에서 검 토한 대부분의 청동 유물과는 달리 이 부절은 보존 상태가 아주 양호 하다. 동일한 형태의 반쪽이 또 있으므로, 이 부절의 물고기는 한 면만 볼록하게 되어 있다. 다른 한 면은 납작하게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당 사자의 이름과 직책이 한자로 새겨져 있다. 볼록한 쪽에는 가운데에 눈동자가 표현된 둥그런 눈, 2 개의 커다란 孤線으로 표현된 아가미 구 멍, 반원형의 조그만 비늘들을 새겼다 . 둥지느러미와 꼬리지느러미는 직선을 그어 표현하였다. 입술은 도톰하게 만들었다. 비록 일부에서 도 식적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물고기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발해인의 조형 예술에 특징적인 것이다. 하바롭스끄州 지역학박물관에 홍미있는 銅製 騎馬人物像이 소장되어 있는데, 10 월 혁명 이전에 니꼴스끄-우쑤리스끄(지금의 우쑤리스끄市)의

드따

그립 46. 끄라스끼노 마을 부근에서 발견된 청동 관리상 (1- 뒷면, 2- 앞면), 샤이가 성터 에서 출토된 청동 관리상 (2)

벽돌공장 근처에서 발견된 것이다 (202 . 136 쪽, 그림 3. 3). 길이는 13.5cm 이댜 말에는 갈기가 전혀 표현되지 않았고, 앞뒤의 다리는 모두 함께 주조되었으며, 커다란 꼬리는 거의 절반이 떨어져 나갔다. 기사는 목 가까이에 있는 장방형 안장에 앉아 있다 . 이 사람은 마치 곧은 막 대기처럼 표현되어 있고, 그 양 옆으로 손이 간단히 묘사되어 있으며 , 머리에는 끝이 날카로운 투구나 고깔 같은 것이 보인다. 기마인물상은 비사실적이고 도식적이다 . 이 상은 동경성 발해 상경 유적에서 발견된 기마인물상 (317 . 도판 CXIX, 그림 2) 과 거의 동일하다. 한편으로 같은 종류의 여진 기마인물상 (202 . 132 쪽 , 그림 1) 과 圖像 에서 전혀 일치하지 않는 점은 이 기마인물상을 발해시기로 편년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아브리꼬쓰 불당 근처의 발해 취락지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역시 도 식적으로 만들어진 높이 4cm 의 陶製 人物像(그림 9. 13) 은 위에 언급한 동제 기마인물상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이 틀림없다. 유감스럽게도 머리와 오른손이 떨어져 나갔지만, 구부리고 있는 왼손이나 벌리고 있 는 것이 특징적인 짧은 다리는 여진의 동제 기마인물상과 홉사하다. 이 인물상은 따로 만든 도제 말 위에 위엄 있게 앉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다른 유물들과 마찬가지로 이 인물상도 의례용임이 분 명 하다 (202. 131-143 쪽). 샤이가 성터에서 발견된 여진 동제 기마인물상들을 분석한 결과, 이 들이 샤만의 신통력에 널리 이용되었던 突歡의 울겐 (Y Ji breH, Ul g en) 神, 나나이 (HaHa8) 족의 엔두리 (3H 따 PH) 神과 같은 종류의 태 양신을 상징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202. 136-139 쪽). 발해의 기마인물상들도 틀림없이 이와 같은 기능을 가졌을 것이므로, 발해 평민들 사이에 샤머니즘이 퍼져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라조(Jl a30) 구역의 끼쉬뇨브까 (KHIIIHH~BKa) 마을 부근에서 • 우연히 발 견된 것으로서 회청색 활석으로 만든 가면-두개골 조각품(그림 47) 도 샤만 의 례 에 사용되 었 던 것 이 다 (2 (]7 . 113-119 쪽). 지 금은 거 의 전 체 가 회갈색으로 변해 있다. 앞면은 절반 이상이 거무스름하고 부분적으로 는 새까만데, 이런 색은 일반적으로 불과 그을음을 장기간 받아서 생

긴 것이댜 가면은 8.5cm 높이로 사다리꼴을 뒤집어 놓은 모습이다. 한 쪽 면에는 두개골이 새겨져 있고, 눈 자리에는 둥근 구멍이 두 개 뚫 려 있댜 구멍 주위에는 둥근 홈이 깊게 새겨져 있다. 눈 위에는 孤線 을 넓게 새겨서 커다란 눈썹울 표현하였다. 코는 길쭉하고 아래로 넓 어진댜 코 아랫부분은 약간 파손되어 있다. 그렇지만 작게 뚫린 두 개 의 콧구멍은 잘 드러나 있다. 윗니는 잘 보이지만, 아랫니와 턱 부분이 약간 파손되어 가랫니는 확인되지 않는다. 오른쪽 광대뼈에는 十자 모 양을 두 개 겹쳐서 방사상의 꽃무늬가 만들어져 있다. 왼쪽 관자놀이 뒤쪽의 젖꼭지 모양 돌기가 있는 곳에는 X 자형 기호가 새겨져 있다. 뒷머리에는 두 개의 구멍 주위에 둥근 홈울 약하게 새겼다. 고대 조 각가가 뒷면에도 두개골을 표현하려고 눈 주위에 테를 둘렀거나, 아니 면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뒷면에도 눈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 해서 테를 둘렀다는 인상이 든다 . 후자의 생각은 두 눈의 조금 아래쪽 가운데에 새 부리 비슷하게 밑으로 예각을 이루면서 두 줄의 선이 약 하게 그어져 있는 것으로 뒷받침된다. 자세히 주시해보면 뒷면은 사람 머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새 두개골도 아닌 것 같다. 아울러 눈 사이의 돌 표면에 적갈색 물감 혼적이 분명히 남아 있는 사실만 지적하면서 뒷면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자 한다. 여기에는 수직으로 관통하는 구멍도 있다. 이 구멍은 두 눈을 손상 시키지 않으면서 그 사이룰 지나고 있다. 구멍 입구는 아래쪽이 위쪽 보다 더 크다. 따라서 수직 구멍은 위가 잘린 원추형 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아마 막대기나 지팡이 끝에 꽂기 위해 만든 것 같다. 이 두개골 모양의 가면에 정결한 빛을 발산하는 태양이나 불을 상징 한다고 알려진 꽃무늬나 X 자무늬를 새기고, 뒷면에 희생의 피를 의미 하는 붉은색 물감을 칠한 것은 이 가면이 어떤 의례에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눈 위에 그을은 자국이 보이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데, 주변의 귀신이나 악령을 쫓아 버리기 위해 기름을 바른 두 터운 심지를 눈에 꽂아서 불을 붙였음이 틀림없다. 이 모든 것으로 보건대, 이 가면은 독특한 두개골 승배를 반영하는

그림 47. 끼쉬뇨브까 마을 부근에서 발견된 가면 - 두개 골 모양의 끝장식

것으로서, 이러한 것은 근래까지도 나나이족 사이에 남아 있었다. 나나 이족은 사망자의 영혼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부니(eiy HH) 즉 지하 저승 세계로 찾아가지 못할 경우에 그 영혼이 두개골에 깃든다고 생각하였 댜 그럴 경우 나나이족은 커다란 도기 바닥에 띠(茅 草 )로 엮은 둥지를 특별히 만들어 놓고 거기에 가장 존경받는 사람의 두개골을 안치하여 놓았다 (82 . 180 쪽). 이와 유사한 풍습이 인도네시아, 폴리네시아, 멜라네 시아의 종족들 사이에서도 보이는데, 이들도 두개골을 고인의 영혼이 깃드는 장소이자 신비한 寂 力이 감추어진 곳으로 여겼으므로, 이를 특 별한 장소에 보관하였다가 일부 의식을 치를 때만 꺼내 사용하였다. 게다가 의식을 행할 때 두개골 대신에 여러 가지 형태의 두개골 모형 을 사용하였던 사례도 알려져 있다. 끼쉬뇨브까의 석제 가면-두개골도 이런 종류의 모형이 틀림없으며, 아울러 연해주 발해 유적에서 흔히 발견되는 도제 끝장식(그림 48) 도 역시 그러한 것으로 생각된다. 후자 는 끼쉬뇨브까의 가면-두개골과 여러 가지 공통된 특성을 가지고 있다 (207. 114, 115 쪽). 아르쎄 니 예 브까 (A p ceHbeBKa) 강 연 안의 끄루글라야 (K py r JIaJ1) 야산에 자리잡고 있는 노보고르제예브까 (Hoaoro p11. eeBKa) 성터에서 발견된 것 으로서 두개골 모양으로 된 도제 네쯔께 장식품도 발해인들 사이에 두 개골 숭배가 행해졌음을 증명해준다 (316. 35 쪽, 그림 25). 가면-두개골의 뒷면에 새 머리나 새 두개골을 표현한 점에 대해 몇 마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들이 존경하는 사람의 두개골을 도기 속의 둥지에 안치시키는 나나이족의 풍습을 상기한다면, 두개골 숭배 와 새의 형상 사이에 상호 연관이 있음이 틀림없다. 사실 과거 전세계 민족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관념에 따르면, 인간 영혼을 새의 형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72. 107-111 쪽). 나나이족 이 생각했던 것처럼 영혼은 죽음과 동시에 육체를 떠나 영혼의 세계로 날아간 뒤에 그곳에 자라고 있는 거대한 氏族樹에 안착하였다. 그리고 이 새-영혼은 나중에 지상으로 내려가 여성의 품속으로 들어가서 다시 새롭게 사람으로 탄생하였다 (82. 164, 165 쪽). 이와 유사한 관념이 12 세

z

, I Z I I , 그림 48. 도제 끝장식 : 1. 니 꼴 라예브까 I1 성터 ; 2. 마리야노브까 성터

기 여진족에게도 존재하였으니, 샤이가 성터에서 발견된 청동 주조 제 품에 새들이 씨족수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모습이 있는 사실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208. 164 쪽, 도판 48, 그림 22).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을 통하여 인간 영혼이 담겨 있다는 신화적 대

상물들로서 두개골과 새를 숭배하는 데는 인과관계가 있음을 확신할 수 있으며, 이로써 발해인의 종교 관념에 또 하나의 새로운 자료를 찾 아냈다고 할 수 있다. 발해의 후예인 여진인들처럼 발해인도 인간의 영혼을 신화적인 새의 형태로 생각하고 있었고,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뒤에도 얼마 동안은 영혼이 계속 두개골에 안식하고 있다고 여겼음이 분명하댜 이러한 사실은 존경받는 사람의 두개골을 위해 둥지 비슷한 것을 왜 만들어 두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사람이 죽으면 영 혼이 새의 모습으로 두개골에서 빠져나와 영혼의 세계로 날아갔으며, 그곳에서 일정 기간 자신의 씨족수에서 살았다. 게다가 새-영혼은 힘 든 여행으로 힘이 빠져서 처음에는 씨족수 아랫가지에 깃들었다가 점차 힘이 축적됨에 따라 윗가지로 날아간다고 생각하였다. 이곳에서 다시 자 기 씨족이 살고 있는 지상으로 내려가 여자 품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마 침내 인간 육체를 새로이 얻게 되었다. 발해인의 관념에 따르면, 이와 같은 인간 영혼의 순환은 사계절의 교체처럼 끊임없이 반복될 수 있었 댜 이러한 관념은 씨족 구성원들에게 부패한 육신으로부터 다시금 지 상의 자기 씨족과 부족의 구성원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 주 었댜 이로부터 발해인들이 고인의 영혼에 대해 과도하게 신경을 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으니, 이것은 바로 씨족 자체의 유지에 대한 배려 이기도 하였다. 마침 이와 유사한 관념이 불교에도 나타나므로, 고고자 료에서 보듯이 발해인들 사이에는 불교와 샤머니즘이 평화롭게 공존하 고 있었다. 지금까지 다루었듯이 발해인의 종교로는 현재까지 적어도 불교, 경 교, 샤머니즘의 세 종류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의 국가 체제 안에 이 와 같이 여러 종류의 종교가 공존하는 것은 발해가 여러 민족으로 구 성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우클라드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보여 준다 발해의 일부 주민은 이미 계급사회에 도달하여 적대관계를 이루 고 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대다수 주민들은 아직 원시공산관계나 계 급형성 단계에 있었던 것이다. 전자의 경우, 발해 봉건귀족 상류층은 자신들의 협소한 계급 이익을

보호해줄 수 있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는 점을 절 실히 느끼 게 되었다 불교와 경교는 바로 이런 욕구에 적합한 것이었다 . 후자의 경우, 일반 대중들 사이에는 계급관계가 발 달 하지 못하였으 므로 이들은 외래적인 종교라고 하여 경교뿐 아니라 불교마저도 거부 하고 전통적인 신앙인 샤머니즘을 계속 추종하였다. 한편으로 발해사회의 상류층뿐만 아니라 발해 내부의 고구려인 공동 체나 소그드 거류민 공동체 둥에서 숭상되고 있던 불교나 또는 계급사 회의 다른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샤머니즘에 영향을 전혀 끼치지 못했 다거나, 반대로 샤머니즘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오산일 것이다. 원칙적으로 발해 문화도 바로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다. 발해 문화 의 특징은 그 사회가 여러 우클라드와 여러 만족으로 구성되어 있던 조건 아래에서 생성되었다. 예를 들어서 발해가 국가기구나 이와 관련된 의례들을 만들어 가면 서 高 句麗 東 突歡, 위구르 汗國, 唐나라와 같은 이웃의 계급사회에 이 미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것들을 많이 모방하였다. 이러한 모방은 다음 과 같은 측면들에 반영되어 있다. 첫째, 발해 지배층 안에 불교나 계급 사회의 다른 종교적 이데올로기들이 보급되었다. 둘째 , 궁전이나 사원 건축을 거의 그대로 모방하였다. 셋째, 중국의 한자와 문학, 그리고 돌 궐 룬 문자, 신라의 음절어 이두가 정착되었다. 넷째, 고구려와 중국으 로부터 궁중 의식이나 최상류 계층의 의례를 차용하였다 . 다섯째, 발해 상경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성을 본떠서 만들었다 (317 . 4 쪽). 발해인은 특히 고구려 것을 많이 차용하였다. 고구려인은 한반도 북 부를 중심으로 한 발해 남부지역에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의 영 향은 무엇보다도 먼저 기와 생산에 나타나는데, 기와 문양은 고구려 것과 아주 유사하다 (l S?. 103, 113, 114 쪽). 도기 제조업에서도 고구려 영향이 보인다. 특히 입술 단면이 半圓 簡形이고 리본형 손잡이가 달린 大壅은 고구려 것과 형태가 동일하다. 또 물결무늬나 선 _ 물결무늬도 역시 동일하다. 고구려인은 화살촉 생산 (162. 104, 106, 108 쪽)과 더불어,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농업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와 함께 발해 고고자료들은 돌궐과 위구르 (16 1. 88-98 쪽 ; 162. 100 ~ 110 쪽), 소그드와 이 란 (205. 100 - 105 쪽), 거 란과 실 위 (19 6. 148 쪽)에 특징적인 문화 요소들도 적지 않음을 증명해준다. 중국학자인 張鈴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은 바로 다른 나라나 다른 민족의 고유문화 요소 들을 섭취할 수 있는 발해 문화의 <개방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296. 146 쪽) . 한편으로 문화의 접촉과 차용에서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잘 알다시 피 발해 음악이 당나라와 일본에서 높이 평가되어 폭넓게 보급되었다. 게다가 일본인은 발해 음악을 배우기 위해 특별히 방문하기도 하였으 니 (296. 149, 150 쪽), 그 결과 지금까지도 <渤海樂>이라는 특별한 연극 이 전해져 오고 있다 (98 . 30 쪽 ; 99. 43 쪽) .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일 본에는 또한 발해의 영향으로 네쯔께라고 하는 특별한 장식품이 보급 되었다. 862 년에는 당나라 달력인 <長慶宣明曆>이 발해인의 중개로 일 본에 전해져 德川 家 康시대까지 800 여 년 간 사용되었다 (296. 150 쪽). 일본 사료에는 발해인의 禮佛에 관한 詩가 보이는데 (296 . 15 쪽), 발해 불교도들이 일본에서 포교 활동을 하였던 증거이다 .12)

지금으로서는 발해인이 실위, 거란, 그리고 발해와 친족 관계에 있던 여진의 문화 발전에 얼마나 공헌하였고, 나아가 이들을 통해서 현재 극동과 중부아시 아에 살고 있는 몽골어 종족 및 퉁구스어 종족들의 문 화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룰 충분히 평가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실물 자료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이들의 공헌은 아주 대단하였고 또 한 유익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서 처음에는 거란, 그 다음에는 여진이 발해의 五 京 制度, 音節文字,농업기술, 도기 제조업 및 기타 여러 종류 의 수공업 생산 방식들을 차용하였다. 이와 같은 영향은 동일한 형태 를 지닌 노동 도구나 무장 도구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역주 12) 일본 『經 國 菓.11 (8 'n년)에는 어느 발해 사신이 일본에서 禮 佛한 것을 듣고 安 倍吉人, 島田猪田이 지은 7 言詩 가 남아 있는데, 본문은 아마 이룰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된다.

맺음말 통구스어 종족인 무끄리(昧輯)族이 唐나라, 高句麗, 제 2 東突歡 汗國 과 맺은 정치적 • 경제적 교류는 기원전 1 천년기 후반기에 그들 사회의 원시공산관계의 해체와 초기계급관계의 형성을 크게 촉진시켰다. 당나 라가 말갈과 동맹관계에 있던 고구려를 공격하고, 이후에는 말갈족 자 체를 공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말갈이 강력한 군사-정치적 동맹체를 이루어 마침내 중국 동북지방·연해주·북한 지역을 포괄하는 통일국 가인 발해를 건국하도록 만들었다. 발해는 초기계급사회에 속하였고, 공동체 성원에 대한 조세 수취가 주요한 착취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연해주 주민돌에는 발해시대가 전면적인 사회-경제적, 정치적, 문화 적 성장기였으며, 장차 현지 종족들이 문화-역사적으로 발전하기 위한 준비기였다. 발해국이 없었더라면 그와 혈족관계인 女眞族의 大金帝國 도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더구나 당시 극동의 정치무대에 발해 주권국가가 출현함으로써 동아시아 전체의 정 치 적 상황을 안정 시 켰고, 그 결과 한반도의 統一新羅 (676-936 년)와 高

麗 (918-1392 년), 중부아시아의 위구르 汗國 (745-840 년)과 예니세이 키르 기즈 汗國 (9 세기 초 -12 세기), 동투르케스탄의 위구르國 (847-1369 년), 甘 肅省의 위 구르國 (847-1036 년), 탕구트족의 西夏國 (962-1 '2Zl년), 거 란족의 遼帝國 (907-1125 년)의 건국이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퉁구스어 종족인 무끄리족들이 주민의 기본을 이루기는 하였지만, 발해는 多民族國家였다. 이 덕분에 발해는 국내에 거주하던 고구려, 돌

궐, 위구르, 거란, 실위, 소그드, 중국 민족들의 문화를 홉수할 수 있었 댜 이러한 다민족적 성격과 더불어 계급사회에 필수적안 최상류층 계 급의 의례를 도입하여야 하는 필연성은 발해가 다른 국가와 민족들의 문화-역사적 성과와 가치를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촉진시켰다. 그 결과 발해 문화는 전반적으로 종합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발해인은 다른 민족들의 일부 문화를 차용하면서 흔히 이를 크게 수정하거나 변형시켰다. 그러나 모든 민족들로부터 동등한 비율로 차용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서 발해 영역으로 들어온 고 구려인들이 가장 많은 문화적 영향을 끼쳤는데, 이를 근거로 일부 한 국학자들은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라고 잘못 판단하고 있다. 반면에 다 른 민족들의 영향은 이에 비해서 훨씬 빈약하였다 . 전체적으로 볼 때 에 다른 문화에서 차용한 요소들은 발해 문화가 나름대로의 독자성과 특수성을 지닐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로서는 고도의 문화를 영위한 발해가 일본, 한국, 심지어는 중국 의 문화 발전에 기여를 하였음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발해인은 유라 시아 민족의 역사적 운명에 현저한 족적을 남긴 거란과 여진의 문화 및 정치체제롤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런 의미에서 적지 않은 공적이 당연히 발해로 돌려져야 할 것이다. 발해인이 장기간에 걸쳐 소그드안이나, 어쩌면 이란족과도 다방면에 걸쳐 교류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자연히 극동과 중앙아 시아 민족들의 문화를 발전시켰고, 그 내용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고고자료의 분석을 통하여 발해가 복잡하고 다방면에 걸쳐 경제를 영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발해 주민들은 기본적인 양육 산업인 농업, 목축과 더불어 사냥, 어로, 바다 채취, 산림 채취에도 종사하였다. 이로 써 음식 종류를 늘려서 다양화시켰을 뿐 아니라, 동식물성 의약품을 비롯하여 의복 • 신발 • 허리띠 • 마구 • 갑옷 동을 만드는 데 쓰이는 동 물 및 물고기 가죽이나 털과 같은 필수품들을 확보할 수 있게 하였다. 자작나무 껍질, 뿔, 동물 힘줄과 뼈도 널리 이용되었다. 동물 기름으로 는 여러 가지 연고를 만들고 등잔 기름으로도 사용하였으며, 동물 굽

과 물고기 비늘로는 특 히 접착력이 강한 풀을 만들었다 . 쐐기풀이나 야생 삼에서 뽑은 섬유로는 마포 를 만들었다 . 발해인이 일용 필수품들을 대부분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생산하였음 을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와 동시에 계급사회에서 궁중, 수많은 관료-통치기구, 사원, 군대와 함대 등을 유지하고 운영하기 위해서 무 기를 포함한 여러 제품들을 대량으로 생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 여 러 방면의 수공업 생산이 크게 발전하게 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 이 야금술과 금속 가공업, 기와 - 테라코타제품 생산, 大小의 木工 생산, 조선업, 도기 제조업이다 . 유감스럽지만 발해의 수공업 생산에 대한 현 재까지의 연구 상황으로는 여러 부류의 발해 수공업자들이 처해 있던 사회적 위치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들 사이에 동업조합이 존재했는 지 여부를 말하기는 곤란하다. 또한 수공업 작업장을 특정 개인이 운 영하였는지 , 아니면 국가에 귀속되어 있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발해의 대외관계사에서도 불명확한 점이 많다 . 특히 신라와의 관계 에 대해서는 사료가 결핍되어 있다. 만약 <일본도>가 한반도 해안을 따라 나 있었다면, 발해 선박들이 신라 항구를 들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연안 항해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 이것은 발해와 신라 사이에 우호 관계, 즉 정치적, 교역-경제 적, 문화적으로 밀접한 교류가 이루어졌을 때만 가능한 것인데, 장차 고고자료를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여야 할 것이다. 이밖에 최근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일본 정부가 770 년대에 발해의 반 발을 불러일으키면서 사신 숫자를 줄이는 결정을 내렸던 원인을 추측 만 하는 데 그쳤다 (197. 52 쪽) . ” 현재 밝혀져 있듯이 일본 정부의 그러 한 조치는 당시 일본의 수도였던 奈良에 大佛을 세운 사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댜 대불을 세우는 데는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였고, 결국은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역주 1) 사신 파견을 둘러싸고 발해와 일본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던 시기는 790 년 대에 해당되며, 이때에도 사신 숫자가 아니라 몇 년마다 파견하느냐 하는 職 期가 문제가 되었다 . 따라서 그 원인에 대한 설명도 적절하지 않다.

일본 정부가 그와 같은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일본 지도층이 수도에 형성된 긴장 상황과 奈良에서의 발해 사절단의 안전 문제에 크게 불안 해 하였음이 확실하다. 어지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내정을 간섭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794 년에 수도를 平安으로 옮긴 다음에야 안정을 되찾았고, 796 년에 발 해 사신이 우호적인 國書를 휴대하고 방문하자 일본은 이들을 관례에 맞게 정중히 맞이하였다. 발해와 위구르 汗國의 상호관계에 대한 문제는 아직 시작 단계이다. 다만 현재로서는 이들 사이에 기본적으로 우호관계가 존재하였다고 말 할 수 있댜 예컨대 840 년에 예니세이 키르기즈가 위구르 한국을 멸망 시키자 많은 위구르인들이 발해 영토로 피신해 들어왔다 (20 1. 87-89 쪽 ; 208. 41, 42, 165-168, 187 쪽). 위구르인들이 항상 평화적으로 발해에 이 주해온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이주 숫자는 아주 많았다. 이것은 9 세기 후반 _10 세기 초로 편년되는 발해 유적에서 남부시베리아와 중부아시아 계통의 유물이 풍부하게 발견되는 사실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755 년에 玄宗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당나라 장군 安祿山에 대해 서 발해가 취한 태도도 많은 홍미를 불러일으킨다. 여러 상황으로 보 건대 이 상황에서 발해는 중립을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문제 는 과연 누구를 지치하였는가 하는 점이댜 반란이 일어난 그 해에 발해 왕 大欽茂가 上京에서 東京으로 궁궐을 옮긴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안녹산이 발해와 이 웃한 幽州와 營州의 군사령관이었고, 平盧軍節度副使로서 발해와 흑수 말갈의 국경을 감시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197. 52 쪽), 궁전을 동경으로 옮긴 것은 반란의 진원지가 발해의 서쪽 국경과 아주 가까이 있었음을 역주 2)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顯서i에서 上京으로 천도하였으며, 그 시기 도 난이 일어난 직후인 756 년 초쯤으로 추정된다 . 그리고 다시 上京에서 東 京으로 천도한 것은 780 년대 후반에 해당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바람. 송기호, r 발해의 초기 도읍지와 천도과정』 『民族文化의 諸問題』 于江權免遠 敎授定年紀念論般, 1994

간접적으로 증명해준다. 이 때문에 대흄무는 안녹산 반란군이 침략할 것에 대비해서 발해의 안전을 도모하는 일부 조치를 취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발해가 안녹산을 편들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763 년 안녹산의 반란이 진압된 뒤에(안녹 산은 757 년에 살해됨)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이것은 안녹산 반란 시기에 발해가 취한 행동에 대한 당나라의 대웅 조치였음이 틀림없다. 당나라가 왜 발해롤 비난하였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안녹산이 중세 중국인들이 소그드인을 가리키던 胡人으로서, <사마르칸드 (CaMa p KaH 11.) 출신 루스땀 (P y CTaM) > 이라는 의미를 지닌 康 胤榮山이라는 이름도 가 지고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반란을 일으키고 나서 자연히 그 는 잘 훈련된 다수의 당나라 군대에 대항하여 그에 상응하는 군사력을 유지해야만 하였다. 더구나 군사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보급로를 제대로 확보하여야만 하였다. 大비단길의 동쪽을 중국이 통제하고 있 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러한 보급로로는 <담비길>만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안녹산은 이 길을 통하여 중앙아시아에서 무기, 군량, 말과 사 료, 운송 수단을 지속적으로 보급받았고, 아마 군사까지도 공급받았을 것이댜 그런데 이 길의 동쪽은 송화강과 우쑤리강 및 그 지류를 따라 발해 영토를 통과하고 있었다. 여기서 발해가 이 보급로를 차단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고, 이 때문에 당나라 정부의 불만을 사 게 되었을 것이다. 장차 연구를 통하여 이 문제에 최종적인 해답을 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내용들은 발해가 유라시아 여러 민족들의 역사적 운명과 전인류 문명의 발전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음을 증명해준다. 바로 이 때문에 발해라는 중세국가의 문화 유적과 역사를 좀더 심도 있게 다방면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현재 발해의 역사와 문화에 대 해 러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북한, 남한에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연구하고 있는 사실은 이 문제가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외국 연구자 들 의 최신 발견 과 인식들을 수용하고 고려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어쩌면 발해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 • 중국 동북지방 • 북한에 거주하였 던 주민들을 자세히 연구하기 위해서 장차 외국의 연구자 들 을 끌어 들 여 공동작업을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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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이 책은 러시아학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한 『渤海國과 러시아 極東의 種族들, rocy. llap cT BO 60X Afl(6 98-926 rr.) H WieM eHa lla.Ji b Hero BocTOKa POCCHH.!] (Ha y Ka 출판사, 모스크바, 1994) 을 번 역 한 것 이 다. 번 역 원고가 원 고지로 1700 매가 넘는 상당한 분량의 책이다. 이런 분량만 보더라도 발해사 연구는 한 • 중 • 일 3 국만의 전유물이 아니요, 러시아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발해 영토가 지금의 중국 滿洲 및 韓半島 北部地方과 더불어 러시아 沿海州에도 걸쳐 있었으므 로, 그들이 연구에 동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러시아에서의 발해사 연구는 19 세기 중반에 시작되었다. 물론 그 이 전에 이미 발해의 존재가 러시아 동양학자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나, 이 때는 중국 문헌을 아주 개괄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에 불과하였다. 그러 다가 연해주가 러시아 영토로 편입되어 이곳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고 조되면서 발해사 연구도 개시되었다• 그로부터 1950 년대 이전까지를 발해사 연구의 開拓期라고 부를 수 있다. 빨라지이 까파로프 (n aJIJl책떄 Kacfl a p o a), 에 프에 프.부쎄 (41.41,p yc ce), 퀘까.아르쎄 니 예 프 (B.K.A p ceHbeB)' 야제표도로프 (A.3.41e .ll o p oB) 둥이 이 시기에 활동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특히 당시에 여기저기 홑어져 있던 발해 유적들을 조사하여 기록을 남 김으로써 발해사 연구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여기에는 현재 남아 있지 않은 유적들에 대한 정보가 상당수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渤海考古學이 본격적으로 개시된 것은 1950 년대부터이다. 야뻬.아끌라드니꼬프 (A.n.O I를 떠나 지금 은 불라디보스똑 소재의 國立極東大學校에 적을 두고 있다. 그는 지금 까지 연해주 중세사에 대해 3 권의 단독 저서와 여러 권의 공동 저서, 160 여 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발해사에 관한 것만도 50 편 정도 나된다.

그 아래로는 50 대까지의 연령층이 제 3 세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30 명 정도인데, 퀘.아볼딘 (B.11.50 .JJJlH H), 엘예세메니첸코(JI .E.CeMeHH­ qe HKO), 야엘이 볼리 예프 (A. Jl , 11B JI HeB), 뷔]대렌꼬프 (B.ll, Jl eHbKOB), 오.부l . 디 야꼬바 (0.B.llb .ll KOBa) 등이 조사 보고서와 연구 논문을 다수 발표한 사 람들이다. 이들은 거의가 러시아과학원 극동학센터 극동민족 역사학· 고고학·민족학연구소에 속해 있고, 또한 에부]].샤브꾸노프의 지도를 받 았댜 지금까지 러시아에서 발표된 발해사 저서와 논문, 유적조사 보고서 등은 필자가 파악한 것만 해도 157 편이 되고, 1990 년부터 발표된 것만 따져도 34 편이 되므로, 결코 만만치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책 은 에웨샤브꾸노프를 중심으로 하면서, 이러한 제 3 세대 연구자들이 참여하여 13 명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한 것이다. 각자의 분담 내용 은 이 책의 머리말 말미에 밝혀져 있는데, 현재 활동하고 있는 발해사 연구자들이 거의 다 망라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에 가 장 최근의 연구 성과들이 집대성되어 있다. 이전에도 연구 성과들을 정리한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에부l 1. 샤 브꾸노프의 1968 년 저서도 당시까지의 연구 성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 한 것이지만, 이때에는 발해고고학 자료가 지극히 미미하였기 때문에 지금에서 본다면 그만큼 한계성도 많다. 그리고 沿海州 通史의 일부로 서 발해사가 정리된 것도 있는데, 『연해주의 먼 과거, 池aJJ eKoe np oIDJio e TT p HMOPb .ll』(연해주서적출판사, 불라디보스똑, 1959) 와 『소련 극동사, HcTo- p1-1.s1 llaJJ b Hero BocToKa CCCP 』 (나우까출판사, 모스크바, 1989) 가 대 표적 인 것들이다. 그러나 서술 분량이 한정되어 있어서 깊이 있게 다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한다면, 이 책이 최신의 자료와 연구 성 과들을 가장 광범위하고 심도 있게 다룬 유일한 서적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러시아에서의 발해사 연구 동향을 파악하는 데 아주 중요한 지침서임에 틀림없다. 이 책의 내용을 검토하기에 앞서서 우선 러시아학자들이 渤海史를

기본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발 해사가 과연 어느 나라의 역사에 속하는가 하는 歸屈 問題는 발해사 연구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왔고, 또한 각국의 연구자들 사이에 가장 첨예 하게 대립되어 온 분야이기도 하다. 남북한 학자들과 일본학자 들 은 高 句麗系 國家로 여기고 있는 반면에, 중국과 러시아 학자들은 昧賜系 국가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말갈계 국가라고 하더라도 중국학자들 은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러시아학자들은 러시아 연해 주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 따라서 한국과 중국, 러시아가 모 두 자기 역사의 한 부분으로서 발해사를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은 러시아학자들의 인식은 이 책에도 잘 나타나 있다 . 머리 말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중국 연구자들은 중국과 발해의 관계를 두 국가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중앙정부와 지방행정기구의 관계로 묘사하 고 있는데, 이는 소련의 동양학자들이 비판한 바 있는 중국 중심 이론 인 中華思想과 일치하는 것이다>고 하여 중국측의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 아울러 한국학자들이 <발해는 北國으로서 南國인 신라와 동일한 시기에 한국사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고 파악하고 있는데,> 이것도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 그러면서 발해는 어디까지나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왕국>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중국측의 <당나라 地方政權說>, 한국측의 <南北國時代論>을 동시에 비판하면서 발해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국임을 내세운다. 그러나 사실은 러 시아 연해주 남부지방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내세워, 러시 아 역사에 편입시키고 있는 것을 발견해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곳 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뒤에 언급하는 민족 구성 문제에서도 여실 히 드러난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발해사가 外國史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들의 自國史로서 취급되고 있다. 이에 따라 高句麗 遺民들의 역할에서도 어느 정도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고구려인들이 발해 문화에 영향을 많이 끼쳤던 사실은 중국학자 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사의 전개 과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은 어디까지나 말갈인들일 뿐이지 고구려인

들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 이에 따라 <발해 영역으로 들어온 고구려인 들이 가장 많은 문화적 영향을 끼쳤는데, 이를 근거로 일부 한국학자 들은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라고 잘못 판단하고 있다>(맺음말)고 주장 한댜 다음으로 시대구분에서 발해가 차지하는 위치 문제이다. 우리가 발 해를 주로 古 代國 家 로 다루고 있지만, 러시아에서는 初期 中世國 家 로 부르고 있다. 奴 隸 制社 會 를 거치지 않고 原始社 會 해체기에 속하는 昧 賜 단계에서 곧바로 중세국가로 이행하였다고 한다. 이 책에서도 <서 기 1 천년기 후반부는 …… 낡은 원시공산관계가 비로소 도처에서 와해 되기 시작하여 새로운 계급관계로 이행되던 때였다. 계급관계로 이행 하던 정점은 바로 7 세기 말 渤海 國의 건국이었다 > (1 장 1 절)고 설명하 고 있댜 러시아 진출 이전인 전근대 시기에 연해주까지 영역을 확장 하였던 나라로는 渤海와 金나라가 대표적이었다. 따라서 발해 이전의 말갈사회는 원시사회 단계로 설정하고, 발해와 금나라는 중세 단계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발해는 연해주 최초의 국가로서 중세 초기에 비정하고, 그 다음에 일어난 금나라는 발해의 후예이며 계승자인 女 眞

族 들이 세운 나라라고 보고 있다. 현지에서의 전근대사 연구는 선사시 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이들 두 나라에 집중되어 있다. 한편으로 민족 구성에 대해서도 우리와 견해가 다르다. 우리는 소수 의 고구려인들이 지배계층을 이루고 다수의 말갈인들이 피지배계층을 이룬 2 원적인 구조를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多民族(種 族)國 家 로 보고 있다. 발해는 고대 퉁구스語 종족인 말갈족이 건립한 나라였다고 한다 . <발해 주민의 대다수는 栗末部,黑水部, 佛理部, 越 喜 部, 白 山部, i B 唯部 또는 姑里句, 그리고 몇몇 다른 부족들로 구성되었 댜 이들은 지금 극동에 살고 있는 나나이 (H 책패)족, 우데게이(y ll3reA) 족, 울치 (yJJ h q H) 족, 만주족 및 다른 퉁구스어 종족들의 직 접 적 인 조상 이다 발해인이 현재 극동의 퉁구스 • 만주족의 직계 조상이라는 사실 은 발해의 종족 구성에 관한 자료나 여진족의 형성에 발해인이 직접 동참한 자료에서 뿐만 아니라 문헌에 보이는 발해인의 어휘에서도 중

명 된다 >(1 장 3 절)고 주장한다. 따라서 말갈-발해-여진(금나라)-현재의 연해주 소수민족으로 이어지 는 계승관계를 중심축으로 하면서 발해사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런 시 각에서는 발해사가 러시아 연해주의 역사에 포함되게 된다. 그렇기 때 문에 이 책의 체제나 서술 내용에서 우리에게는 생소한 대목도 목격된 댜 말갈족의 역사를 발해의 건국 前夜로 설정하면서 건국 이전의 말 갈족 관계 기록을 그대로 끌어다가 발해사에서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발해의 조형예술이나 신앙을 언급하면서 그 뒷 시기인 여진족 유물들 까지 끌어다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 태도는 발해 전후의 계승관 계에 대해서 우리와 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서 발해 영토 안에는 말갈족 이외에 <고구려인, 위구르인, 室 韋人, 소그드인 둥 >(4 장 2 절)도 다수 포함되어 있던 다민족국가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고구려인들은 고구려의 옛 땅이면서 거대한 상업-수 공업 중심지를 이루었던 발해의 남부지역에 살았다. 서부지역에는 대 부분의 주민들이 몽골어 종족인 실위와 거란, 그리고 위구르 및 다른 터어키어 종족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북동쪽 및 동쪽에는 窟說 또는 庫頁이라 불린 종족이 살았다. 이들은 15 세기에 苦夷라고 하였으니 지 금의 아이 누족에 해 당한다 >(1 장 3 절)고 한다. 이상으로 발해사의 성격에 대한 기본인식들을 살펴보았다. 러시아학 자들은 분명히 자기 역사의 일부로 발해사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인 식이 발생하게 된 배경에는 현재의 영토적 연고권을 주장하는 정치적 의도를 제외하더라도 순수한 학문적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제기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역사관의 문제이다. 우리는 발해를 이끌어 가던 주체세력의 성격에 따라 발해사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지만, 중국 이나 러시아는 주민의 대다수가 누구인가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느낌 이댜 물론 이들은 지배자들도 말갈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다고 주장하 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맑스주의 입장을 취하면서 다수의 피착취 민중 을 역사의 주체로 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인식을 따른다면 다수를 차지하는 말갈인들이 발해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다.

다음은 연구 자료의 문제이다 . 주지하다시피 발해 영토가 지금의 중 • 한 • 러 3 국에 걸쳐 있었으므로, 考古資料도 자연히 이들 3 국에 퍼져 있댜 문헌기록이 극히 적은 발해사로서는 고고자료에 크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그 동안에 3 국 사이에 자료의 교환이 순 조롭지 못하였다.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언어의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 기 때문이었다. 상호간의 답사도 근래에 와서야 조금씩 이루어지는 실 정에 있지만, 아직은 서로에 대해서 폐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리 하여 중국에서는 만주 지역, 북한에서는 咸鏡道 지역, 러시아에서는 연 해주 남부지역의 조사 자료를 기본으로 삼아 발해사를 바라봄으로써 모두가 종합적인 시야를 갖추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책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러시아에서의 발해사 연구는 자신들이 조사한 고고자 료들에 크게 의촌하고 있다 . 발해의 변방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연해주 자료를 통하여 발해 全體像이 그려지고 있는 만큼, 그에 따른 문제점 도 발견된다. 연해주만 놓고 볼 때에는 러시아학자들처럼 발해 문화가 곧 말갈 문화를 계승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발해 전체에서 본다면 그러한 등식을 그대로 대입시키기가 어려운 것이다 . 그런 까닭 으로 발해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얻기 위해서는 상호간의 자료 교환 이 절실하다고 할 것이다. 이 책의 번역 소개에는 그러한 의미도 담겨 져 있다 . 지금까지 러시아학자들이 발해사를 바라보는 기본 인식과 그러한 시 각이 형성되었던 원인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이제는 내용을 검토해보 도록 하겠댜 그런데 이 책에서는 문헌자료보다는 고고자료의 이용이 주목되므로, 이를 먼저 살피도록 하겠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고고자료는 자신들이 칙집 조사하고 발굴한 연해주 지역의 자료들이 주축이 되고 있고, 여타 지역의 고고자료는 극히 한정적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을 통하여 연해주에 서 그간에 전개되어 왔던 발해고고학을 체계적으로 더듬어 볼 수 있 댜 여기서 다루어진 유적들은 성터 28 기(平地城 13 기, 山城 10 기, 山上

堡壘 5 기), 취락지 23 기, 집자리 다수, 절터 4 곳, 고분군 3 곳이다. 발해 시대의 성터와 절터, 거주지 둥이 상당수가 확인된 점에 비추어 볼 때 고분들이 상대적으로 거의 밝혀져 있지 않은 것은 수수께끼의 하나이 다. 유물로는 농기구와 무기를 포함한 철제품, 장신구와 조형예술품들 이 대부분인 청동제품과 골제품, 그리고 기와와 도자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연해주가 발해 영토에 속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지역에 대한 당시의 기록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따라서 러시아학자들이 이 지역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노력은 가히 감탄할 만하다. 단순히 연해주의 유적 과 유물들의 현상과 조사내용을 기술하는 데 그쳤다면 이 책의 가치는 반감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러한 고고자료들을 활용하여 연해주 지역의 발해 역사를 복원하려 하였다는 점이 돋보인다. 그러한 점은 특히 제 3 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농업과 관련된 도구들을 그 쓰임새에 따라 분류하여 농업 생산 과정 을 복원해본 것이라든가, 발해 유적에서 흔히 발견되는 뼈들을 분석하 여 발해의 축산업이나 수렵업을 복원하려 한 것은 이 방면에 접근하려 는 우리에게도 소중한 자료들이다. 철제품과 청동제품의 조직이나 성 분을 분석하여 생산기술과 그 수준을 규명하려 한 점도 주목된다. 기 와가마터와 도기가마터를 찾아낸 것도 중요한 성과로 손꼽을 수 있으 며, 조형예술품들을 통하여 신앙 문제까지 다룬 것도 역시 주목된다. 비록 이러한 유물 분석을 통하여 물질문화와 정신문화까지 복원해보려 는 노력에는 무리가 따르는 점도 없지 않겠지만, 적어도 그러한 노력 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들이다. 아무튼 이러한 성과들은 인접과학의 도움을 받으면서 연구해 온 각 방면의 전문가들이 집필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예를 들어 서 퀘이볼딘 (B.H.60 .11.llH H) 은 성터, 오.뷔].디야꼬바 (O.B . llb .llI< OBa) 는 도자기, 에.뷔 1. 샤브꾸노프의 아들인 뷔]에.샤브꾸노프 (B.3. ill aB I

우리측에서도 참고하여 배워야만 하겠다. 한편으로 고고자료 를 통하여 발해와 중앙아시아와의 연계성을 밝힌 것도 중요한 성과이다. 이 방면의 연구는 에 . 부l l. 샤브꾸노프가 주도하고 있다. 특히 그는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부근에 소그드인들의 집단 거 류지가 존재하였다고 주장하였고, 중앙아시아와 극동지방을 잇는 도로 룰 상정하여 < 담비길( 창召 道)>이라고 명명하기도 하였다. 잘 알려진 그 남부의 비단길에서 연상된 용어인 것이다. 문헌기록에는 발해에서 와 국으로 연결되는 간선도로가 5 개가 제시되어 있지만, 중앙아시아와 연 계되는 것은 없다. 따라서 그가 상정한 담비길을 인정할 수 있는지, 인 정한다고 하더라도 문헌에 보이는 5 개의 도로와 똑같은 비중으로 다루 어질 수 있을지는 앞으로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 중국학자들이 발해 를 당나라와의 연계성 속에서 살펴보고, 한국학자들이 고구려나 신라 와의 연계성 속에서 살펴보고, 일본학자들이 역시 자신들과의 왕래 속 에서 살펴보고 있듯이, 러시아학자들은 중앙아시아와 연계시켜 발해사 룰 바라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중앙아시아와의 교류를 밝혀보려 한 것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시야를 열어준 것이다 . 그런 점에서 1995 년 10 월에 국립극동대학교를 방문하였을 때에 에.퀘. 샤브꾸노프 교수가 보여준 소그드인의 銀貨 한 님은 시사하는 바가 많 았댜 노보고르제예브까 성터 부근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아직 학계에 정식으로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이를 통하여 소그드인들의 활동이 이 곳까지 미쳤다는 것이 어느 정도 확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고고자료의 다양한 활용에 비해서 문헌자료의 이용에는 문제점이 적지 않다. 그것은 전적으로 한자 기록의 이해가 불충분하다 는 데서 기인한다. 러시아학자들이 활용하는 문헌자료들은 19 세기에서 20 세기 전반에 러시아어로 번역 소개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 당시의 번역에는 오역이 많았음에도 그것이 지금까지도 시정되지 않은 채 러 시아학자들의 발해사 인식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어 왔던 것이다. 그렇 기 때문에 곳곳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번 번 역에는 이를 하나하나 모두 지적하기가 어려워서 중요한 대목만 역주

형식으로 밝혀놓았다 . 러시아학자 들 이 거꾸로 이 역주 들을 참고한다면 시정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예로 들면 다움과 같다. 大祚榮 이 渤海灣 연안에 있던 당나라의 渤 海 郡을 점령하였기 때문에 당나라가 그를 渤海郡王 으 로 책봉하였다고 한 점, 大武 藝 가 9 개의 위구르 씨족과 燕然 의 都督 이 었다고 한 점, 왕위를 계승시켰다는 의미의 級 王이란 구절을 大仁秀 와 大 휴袁 의 盆號로 이해한 점 등은 발해사의 기본틀을 설정하는 데 영향 을 주었던 것들이지만, 이들은 문헌을 잘못 이해한 대표적인 것이다. 다음으로 발해 문자에 대한 언급도 재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에부l l. 샤브꾸노프는 발해에서 漢 字 이외에도 吏 讀 式 글자와 突 跋 文 字 를 병용 하였다고 하였다 . 그러나 발해에서 이두식 글자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기와에 찍힌 단편적인 글자들을 이러한 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 돌궐문자의 사용 여부도 불투명하다. 우쑤리스끄에서 발견된 石刻이 과연 돌궐문자인지에 대해서 회의적인 학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밖에 필자간에 불일치를 보이는 점도 옥의 티로 지적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연해주에 국한해볼 때 어디까지 발해 영역에 속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본문에서는 동쪽 국경이 <빠르띠잔스끄강을 따라 올라갔 고, 다음에는 추구예브까 구역의 우쑤리강 상류로부터 연안을 따라 비 낀강 하구에까지 이어졌으며, 여기서 남서쪽으로 급히 꺾여서 중국 동 북지방의 穆稷河 >(1 장 3 절) 쪽으로 이어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림 1> 의 지도에는 우쑤리강 하류 지역을 포함한 연해주 대부분이 발해 영토에 편입되어 있었던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불일치는 근래 에 에.부l . 샤브꾸노프의 견해가 바뀌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종래에 는 지도에 보이는 것처럼 발해 영역을 상정하였는데, 근래에 빠르띠잔 스끄 구역의 니꼴라예브까 성터에서 將 軍 이름이 새겨진 靑 銅符節이 발견되면서, 이곳을 발해의 최전선으로 상정하게 되어 이보다 동쪽은 발해 영역에 속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사소한 변화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국경선 부근

에서 발견되는 유적들을 발해 유적에 넣어야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문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유적들은 최근 의 견해보다는 종래의 견해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모노마호보 성터, 베뜨까 성터, 미하일로브까 성터, 고르노레첸스끼 성터 동은 빠르띠잔 스끄강보다 훨씬 동쪽에 떨어져 있으므로, 최근의 견해를 따르면 분명 히 발해 국경 바깥에 속하지만 본문에서는 발해 성터로 다루어지고 있 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의 불일치는 앞으로 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으로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비록 일부에서 문제점이 발견 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이 책의 가치를 결코 감소시키지는 않을 것이 다. 적어도 러시아학자들의 최근 연구 성과를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지대한 것이다. 역자 머리말에서도 밝혔듯이 연해주 지역은 근래에 문호가 개방되었기 때문에, 아직도 이 지역에 대한 이해는 극히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발해 사 분야는 다른 분야에 비해서 현지의 연구 성과가 그래도 간헐적으로 소개되어 왔기는 하지만, 아직도 체계적인 이해 기반은 마련되지 않았 다. 그런 까닭으로 이 번역서가 현지의 연구자들을 이해하고 현지의 유적들에 접근할 수 있는 기초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앞으로도 이러한 번역 소개가 발해사뿐만 아니라 다방면 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아울러 밝혀둔다.(宋基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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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하고서 지금은 沿海州가 러시아의 영토로 되어 있지만, 豆滿江 건너 바로 붙어 있는 땅이기에 고래로 우리 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 왔 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선사시대 유적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반도와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시대가 열리면서 東扶餘나 沃沮, 高句麗 渤海 사람들이 말 달리던 활동무대가 되었고, 근대에 이르러서 는 피로 얼룩진 獨立運動의 본거지이기도 하였다. 블라디보스똑에는 지금도 <서울거리>가 있으니, 과거에 한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였던 新 韓 村의 혼적이 지금도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중앙아시아로 부터 高麗人들이 이주해와 속속 정착하고 있고, 1990 년대에는 우리나 라 경제인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 따라서 선사시대 이래의 교류가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 그렇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 지역은 빗장이 꽁꽁 질러져 있었 다. 연해주에 대한 학문적 교류는 꿈도 꾸지 못하였고, 일본이나 중국 둥지에서 번역 소개되는 자료들만이 고작 갈증을 풀어줄 뿐이었다. 그 러니 현재까지도 체계적인 조사는 고사하고 전반적인 학문 현황마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래에 비교적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발해사 분야만 하더라도 역시 그러하다. 그 동안 발해사에 대한 국내학자들의 연구를 되돌아 보면, 1910 년대 에 張道斌이 블라디보스똑에 망명하여 우쑤리스끄 지역의 성터를 답사 한 것이 선구적이었다. 그러다가 수십 년을 뛰어 넘어 1992 년부터 비

로소 한국학자들이 현지를 방문하여 조사와 발굴을 시작하게 되었지 만, 아직은 겨우 걸음마 단계일 뿐이다 ‘ 그 사이에 역자가 현지의 발해 사 논문들을 일부 국내에 번역하여 소개하기는 하였지만 역시 산발적 인 것으로 그쳐버렸다 . 따라서 이 책은 러시아학자들이 지금까지 진행해 온 연구 성과를 종 합적이고 깊이 있게 접근할 수 있는 최초의 번역서임을 자부할 수 있 댜 그런 까닭에 역자 나름대로 꽤 심혈을 기울였다. 이 책은 宋基豪 , 鄭燁培 두 사람이 공동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책을 쪼개서 분담하여 번역하지 않고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작업하여 전체를 두 차례 번역한 셈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1 차 번역은 모스크바에 유학중인 정석배가 담당하였고, 그 후에 송기호가 이 원고를 토대로 처음부터 본문과 대 조하면서 다시 2 차로 번역해나갔다. 러시아고고학 전반을 잘 알고 있 는 정석배와 발해사룰 전공하고 있는 송기호가 공동으로 번역함으로써 서로의 강점을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2 차 번역을 하는 도중 에 연해주를 두 번 방문할 기회가 있어서 그때마다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을 현지의 필자에게 문의하여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과 정을 거침으로써 잘못된 번역을 최소로 줄이고자 노력하였다. 2 차 번역시에는 잘못된 부분이나 우리와 의견을 달리 하는 부분에 대해서 譯柱를 일일이 달았고, 고고학 전문용어에 대한 번역 시안도 역주에 제시해보았다. 아직 전문분야에 대한 辭典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사람들과 추후의 번역자들에게 도움 을 주기 위해서이다. 물론 이 시안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음 번역자들이 이를 참고하여 수정해나감으로써 한 단계 진전될 수 있는 기초는 제공하였다고 생각한다. 역주를 제외하고도 몇 가지를 덧붙임 으로써 이 번역서에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먼저, 이 책에 실린 地圖는 상세하지가 않아서 연해주의 지리를 제대로 파악하 기 어려우므로 유적 위치도를 따로 만들어 앞에 실었고, 마지막에는 解題를 부록으로 달아 놓았다. 아울러 역자가 현지롤 답사하면서 찍거 나 수집한 寫眞도 앞에 수록해두었다.

이 책의 번역을 마치면서 꼭 감사를 드려야 할 분이 있다. 역자는 92 년 이후 지금까지 8 차례 정도 연해주를 방문하여 주로 발해 유적의 답사와 발굴에 참여하였다. 그 중에서 두 차례는 공동 번역자인 정석 배와 함께 발굴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 책도 94 년 8 월에 두 사람이 에무l l. 샤브꾸노프 교수 등과 함께 까쁘이또 절터 주변지역을 답사할 때 에 건네받아 번역에 합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몇 년 동안 진행 되었던 현지 조사는 모두가 고합그룹의 張致赫 회장님과 이화여대 박 물관의 羅善華 님, 高麗學術文化財團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가능하였다. 이러한 지원으로 연해주의 발해사 연구자들과 교류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이 방면에 대한 현지의 연구 성과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 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바탕이 있었기에 이 책의 번역에 감히 도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책의 출간에 즈음하여 이 두 분과 재단을 바롯하여 현지에서 편의를 제공해준 고합그룹 支社員 들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함께 이 번역판 에 즈음하여 기꺼이 서문을 써주신 에부l l. 샤브꾸노프 교수께도 감사드 린댜 두 사람이 도합 1 년 이상을 번역에 매달리면서 열심히 공들여 번역 해보려고 노력하였다. 역자의 경우도 몇 달간 매달리다보니 이 서문을 쓸 무렵에는 정말 눈이 침침해져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번역문을 다 시 윤문해보니 부자연스런 문장이 여간 많은 것이 아니었다. 두 나라 의 언어에 모두 익숙해야만 자연스럽고 능숙한 번역이 나올 터인데, 이 모두가 역자에게는 부족한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잘 못된 내용이나 부자연스런 문장들은 전적으로 역자의 능력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니, 독자 여러분의 너그러운 양해를 바란다. 비록 부족한 점이 많기는 하지만,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발해고고 학이 한국고고학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하였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 다. 발해사가 우리 역사라고는 하지만 문헌사나 고고학 모두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발해사뿐만 아니라 연해주에서 연구되고 있는 다방면에 걸친 각 시대의 연구서들

도 체계적으로 국내에 번역되었으면 하는 소망도 가져본다 . 마지막으 로 우리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연해주의 선사시대, 역사시대를 전공하는 학자들이 하루바삐 양성되어 우리 역사의 시야가 더욱 확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해본다. 이 모든 것들은 장차 우리에게 꼭 필요 할 것이고, 앞으로 통일이 된다면 더더욱 절실한 과제가 될 것이므로, 지금부터 차근히 준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1995 년 11 월 13 일 관악산 기슭 연구실에서 송기호 씀

_1 꼬르싸꼬브까 15, 102-105, 116, 117, 가르바뜨까 91-96 139, 148, 162, 179-182, 191, 195, 干志耿 26 196, 寒, '2ff7, 210, 220, 257-259, 거란 59, 60 263 建築平面 15 꼭샤로브까 91- 96 乞乞仲象 41, 49 꼰스딴찌노브까 100, 101, lffi , 114-116, 乞四比羽 49 140, 153, 191, 195-1 언, 200, 2ffi, 景 敎 247, 248 '2ff1, 책, 210, 213, 214 , 218, 220, 鏡泊湖 2.5 2'22, 25.3, 260 鏡城 64 끄라뽀뜨낀 엘아. 10 『契丹國志』 18 끄라스끼 노 9, 13, 15, 8.5- 91, 100, 123, 契丹道 따 3 130- 13 3, 138, 153, 158, 162, 163, 桂婁郡王 52 174-176, 182, 210, 218, 220, 2'22, 『高麗史』 30 223, 'Zll, 228, 231, 23.5, 2.36, 256, 姑里1iU 61 260- 2 62, 264, 265, '251, 268, 'Z/0 苦夷 61 끄로우노브까 13, 119, 120 高麗 59 끄로우노브까 문화 00, 99, 104 , 119, 고구려 43-48, 70, 116, 122, 209, 226 121 '2'78 끄루글라야 14 고르노레 첸스끼 98, 100, 101 끄루글라야 달리 나 102-103 고르스끼 퀘 9, 10, 245 끼 쉬 뇨브까 'Z/2, 刃 5 i 8 唯部 36, 44, 48, 61 골드족 61 L 『舊唐 書 』 18, 22, 29, 30, 200 군사 친위대 44 나나이족 61, 'l72, Z75 窟說部 얽 나이펠드 1%, 있 n 弓商 59 나자이체브까 202, 224 그랴즈누쉬까 224 남구尸수리스끄 13, ffi, 91-96, 幻 5 그레벤쉬꼬프 아.퀘 11 南京 64 極東考古學調査團 12 南城子古城 刃 極東式 허리띠 250 南海府 64, 68 金敏載 20, 21, 61 네쯔께 249, 幻 3, 刃 5 까쁘이 또 100, l

盧州 68 大言義 58 노보-야로슬랍스끼 15.5 大元諭 58 노보게오르기예브까 100, 101 大元義 57 노보고르제예브까 14, 17, 안, 00, 大琦階 58 102-105, 116, 117, 119, 120, 大祿露 58 139-154 , 157, 158, 161, 170, 173, 大仁秀 58, 78, 70 191, 1~, l<:r l, 200, '2ffl, 209, 210, 大萱夏 53, 76 214, 218, 2'20, 222-224, 231, 234, 大祚榮 29, 41, 49-52, 71, 72 241, 253, 2.63, 275 『大淸 一統志』 22 노보빠끄로브까 lW, 108 大玄錫 58 니꼴라예브까 13, 64, 91-96, 238, 246, 大華與 57, 58 'lJO 大欽茂 56, 57, 73, 74, 245, 2.84 니꼴라예브까 L II 14, 15, 85-00, 105, 大證讚 59 111, 112, 114, 118, 119, 139-152, 獨奏州 ® 154-160, 163, 170, 171, 173, 191, 突歡 3.5, 49, 50, 53, 1(38 , 173, Z79, l%, 1W, 없 6, '2ffl, 209, 210, 214, 246, 262, Z72 2'20, 222-2 24, 22.8, 230-232, 241, 突原式 허리띠 幻 0 251-2 54, 2.63 突地稽 %, 40, 41, 43, 45, 46 『東國史略』 30 드 『東三省輿地圖說』 24 同仁 % 다구르족 얽, 38 東京 56, 64 다브이도바 아 . 퀘 121 東牟山 49 團結 26 東平府 6.5, 66 담비 길 233, 23.5, 28.5 董万福 78 唐~ 21 두개골 숭배 Z13, Z75 大度晃 58 登州 54, 234, 2.3.5, 238 大宏臨 57 藤田亮策 24 大明忠 58 디 야꼬바 오.꿰 15, 16 大武藝 52, 54, 55, 70, 78, Z34, 238 딸로브까 100, 101 大門藝 53, 54, 76 뜨로이쪼꼬예 191, 196, lf17 , 끄 6, 263 大寶令 16.5 大城子古城 25 2 大城子고분군 25 大尙璃 ol, 58 라빠찐 이.아. 9

라조 156, 202, 업 2 勃利部 刃 라즈돌나야강 65 『渤海簡史』 28 루다노브까 99, 104 『渤海疆域考』 22 『渤海考』 30 □ 『渤海國記』 21 『渤海國 小史 』 24 馬球 248- 24 9 『渤海國志』 21 馬圈子古城 63 『渤海國志長編』 21, 71 마길라 lW 渤海郡王 51 마뜨베예프 제 . 엔. 12, 18 『渤海記』 18, 20 마르가리노프 퀘빼 10 『발해 문화』 30 마르꼬프 게대. 10 『渤海史稿』 28 마리 야노브까 14, 91-00, 105, 111, 112, 『渤海史考』 22 118, 139-15. 3, 170, 191, 218, 222, 渤海樂 249, 업 9 228, 230, 231, 241, 250, 251 白山部 36, 61 鄭領府 f!l, 69, 147 『白雲渠』 24 昧賜 26, 28, 3.5- 50 베뜨까 98 昧賜文化 191 베레가보예 lff i 메드베제프 퀘예. 26, 130 벤유꼬프 엠이 . 8 杜丹江 25, 36, 108 보리쏘브까 116, 119, 12J, lZ3, 13> , 모노마호보 '5/, 98 138, 251, 26!5, 268, 269 모톤 프리드 42 볼딘 벤 이 . 15, 16, 114 , 130, 179, 었 E 무끄리 7, 13, 3.5, 281 뵤끌리 조 므라모르나야강 194 部曲 71, 78 淵花湖 6.5, 69 부니 刃 5 미하일로브까 98, 99 부섯쇠 158 부쎄 에프에프 10, 11, 12 1::1 부여부 69 挑混部 36, 44, 61, 69 바까리 35 北大고분군 25 바씰리예프 퀘터. 10 『北蕃風俗記』 45 바씰리예프 엘에쓰 74 北站村고분군 26 바씰리 예프 유.엠 191, 224 브로쟌스끼 데.엘. 121 朴潤武 刃 브이쏘꼬예 85-91 半拉城(八連城) 24 비 짜지 1'5/ , 264

비추린 엔.야. 10 薛延 µ ' E 47 빠그레베니예 107 葉隆禮 76 빠끄로브까 문화 191, 196, !ITT, 200- 面利 : t 64 202, 204, 209, 211, 213, 215, 221, 『盛京通志』 22 22'2, 224, 塗, 262 셀노우 I. 73 빠르띠잔스끄 64 셰메니첸코 엘예. 8, 12, 14, 16, 17, 빨라지 이 까파로프 9, 13, 813, 96 83, 118, 119 뻬까르스끼 에까. 衍 蘇聯科學院 極東歷史學·考古學·民族 빼 뜨로브까 104, 242, 26:3 學分科 12 뺀쥐켄트 丕 3 蘇密城 68 뽀노쏘프 퀘꿰. 242 소그드인 170, 20C J, 233, 234, 253, 뽀씨옛 lOO Zl9, 282 뿔째 문화 119, 120 『 紹日本紀』 18 쁘리모리예 9 『組日本後紀』 18 쁘리바이칼 히 栗末部 36, 44, 45, 61, 70 쁘리아무리예 9 孫秀仁 23 孫玉良 19, 26, 30 人 孫正甲 65 孫進己 Zl, 61-65, 衍 山明子고분군 26 率賓府 Zl, 65, 69, 96, 143, 246 『山海經』 幻 8 『宋史』 18 『三國史記』 19, 30 『 松漠紀聞』 18 『三國遺事』 19, 29 스깔리스또예 lfi6 三露屯 24 스따로레첸스꼬예 ffi, 89, 116, 117, 119, 上京(東京城) 23-2.5 , 30, 56, 57, 00, 120, 142, 153, 263 62, 'ol, 89, 129, 163, 182, 22'2, 2'28, 스베르치꼬프 lOO 229, 242, 247, 2.66, '2fil 스빠쎄니예 105 샤머니즘 刃 2, 刃 7 스쪼끌랴누하 91-96, 100, 101 샤브꾸노프 에.꿰 8, 12, 13, 16, 17, 『新唐 書 』 18, 22, 29 26, 2.8, 61, 72, 78, 79, 83, 89, 112, 新羅古記 29 123, 13.5 , 138, 209, 229 新羅道 233 샤이 가 156, 269, 'Z/2 신라 54 徐相雨 2'2 室韋 었, 38, 262, Zl9 西京 64 室韋式 허리띠 2.50 西古城 24 싸라또브까 98

싸인-바르 13 야만국가 73 쓰므이치까 105 얀꼽스끼 문화 95, 99, 114, 119 쓰이르따르두쉬 47 楊賓 24 씨까치-알랸 122 엑스빼지찌야 9 씨 니 예 스깔르이 언, 140, 142, 163, 261, 엔두리 刃 2 262 閣万章 20 씨 닐로프 100, 101 鹽州 89, 123, 23.5, 236 氏族共同體 40 『寧古塔紀略』 24 氏 族樹 V5, 刃 7 『寧古塔山水記』 23 永寧寺碑 얽 。 營 서뭡i 233 예니세이 키르기즈 58, 66, 234 阿固郞 46 保屬利稽 53 鷄房村 176 放東城 20, 24, 2.5 아끌라드니꼬프 아뻬 . 8, 12 吳振臣 24 아네르뜨 에 . 15.5 沃州 68 아누친 데 . 엔 240 옵싼니꼬프 엔퀘 186, 2'2A 아뜨라드노예 <.Jl, 98 王建 59 아르쎄니예프 뷔].까. 10 王承禮 2.8, 76, 78, 79 아르쩨미예바(루블렌코) 엔게. 16, 17 江淸縣 'Z7 아무르州硏究學會 10 『遼史』 18, 22 아브리꼬쓰 104-1(J 7, 123, 125-1~. 135, 龍頭 山 20 138, 142, 228, 247, 255, 256, 260, 龍原府 64 261, 264, 266, '251, T/2 龍州 68 樂史 45 龍泉府 62 樂游 68 우데게이 61, 154 安車骨部 36, 48 우쑤리스끄 11, 'Z70 安祿山 56, 57, 284-2.8 5 우쪼스노예 104, la5, 153 안드레 예바 퀘.부t 261 울겐 'Z72 安邊府 6.5 울치족 61 安遠府 6.5 原國家 73 알레니 114 原農民共同體 40 알렉싼드르 아.뷔]. 100 原始이웃共同體 39 鴨祿府 64 월희부 61, 69 耶律阿保機 59, 60 位城 68, 155

魏國忠 %, 28, 29 張綴彦 23 위 구르 16, 52, 58, fi6, 234, 246, 2A8, 張行炭 51 'l19 , 2.84 齋藤莊兵衛 24 柳맘恭 30 才浪河 62 『柳邊紀略』 24 전영률 29 類似織物무늬 190 鄭英德 37 『 類衆國史 』 18 鄭永振 刃 劉腕東 %, 'll, 65 定理府 65 六頂山 20, 25 貞惠公主 20, 25, 245 抱婁 40 貞孝公主 20, 26 二道 河子고분군 % 제례반코 야뻬 8 이두 247 제례반코 예 . 이. %, 38-40, 42, 1~, 122 李謨行 40, 41, 43, 46, 232 帝王韻紀 29 이란 282 鳥 居 龍藏 24 이볼가 121 朝貢道 233, 23.5 이불리예프 아 . 엘 15 祖延若 刃 이즈베스뜨꼬프 99 鳥 山 喜一 22, 24 李指固 49 曹廷杰 24 『日本紀 略 』 18 朱國沈 28, 29 日 本道 업, 233, 235, 283 中京 57, 62 『 日 本文德天皇實錄』 18 중부아시아 7 『日本三 代 實錄』 18 중앙아시아 17 『日本後紀』 18 朱榮憲 30 臨江鎭 64 振國(震國) 51 任雅 53 津 田 左右吉 22 쩨쭈헤 194 大 쪽구들 115 쭈까노브까 9 자바이칼 히 잘리샤크 엘베. 186, 224 云 張建章 18, 20 長宣明曆 'Z19 차피고우 13 張光祚 20 『冊府元龜』 18 張鈴 刃 桐城 64, 68 張貢 24 鐵利府 00, 69

初期國家 71, 73 피터 스칼닉 73 崔析 19 추구예브까 13, 91-96 근 則天武后 49 韓鎭 書 22 =! 海東盛國 51, 245 杏山 26 콤파스무늬 253 헨리 J.M 클래슨 73 쿠르간 1m 赫哲族 61 顯德府 62 E 顯 1 ii 68 號室部 36, 48 통구스語 種族 7 丸都 68 활덮개판 241 II 黃維翰 21 懷遠府 64, 65, 166 파양스 끄 7 後高句麗 59 八連城 64 何奴 121, 100 貝塚文化 95 黑水部 36, 44, 53, 61, 72 표도로프 아제. 11 興凱湖 65

약력 소개 에른스트 불라지미로비치 샤브꾸노프 (3.B. fil aBK ytt OB) …… 엮은이 러시아 沿海州 중세고고학 전공자로서 특히 渤海史와 金史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 기고 있다. 지금까지 연해주 중세사에 대해서 3 권의 단독 저서와 여러 권의 공동 저 서, l fiO여 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발해사에 관한 것만도 50 편 정도나 된다. 1930 년 3 월 23 일 모스크바 서쪽의 스몰렌스크에서 출생. 레닌그라드 국립대학 동방학부 중국역사학과 졸업. 1 !£3년 학생 신분으로 극동고고유적 조사에 참여. 이를 계기로 발해사를 전공하게 됨. 1955 년 볼라디보스똑에 있는 소련과학원 극동역사학· 고고학· 민족학분과에 취직 하여 1994 년까지 적을 둠 1962 년 노보씨비르스끄 국립대학에서 박사후보(준박사) 학위 취득. 1984 년 소련과학원 극동지부에서 박사학위 취득. 1991 년 정교수로 승진. 1994 년 소련과학원 사회과학부 정회원으로 선출됨. 국립극동대학으로 자리를 옮김 . 송기호……옮긴이 1956 년 대전에서 출생 1975 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입학 1981 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문학사 1984 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문학석사 1995 년 동 대학원 문학박사 1984-88 년 : 한림 대학 재직 1988- 현재 : 서울대학교 재직 현재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부교수

주요저서 『 발해 정치사 연구』(일조각, 1995) 『 발해 를 찾아서 -만주 , 연해주 답사기-』( 솔출 판사 , 1993) 『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 I, m( 공저, 1992) 『 강원도의 선사문화』 (공저, 한림대학, 1986) 『 발해의 역사』 (역서, 한림대학 , 1987) 정석배……옮긴이 l%5 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 1992 년 한양대학교 사학과 졸업 1994 년 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 고고학분과 석사 현재 : 동 박사과정 주요저서 『 몽고의 선사시대』(역서, 학연문화사, 1995) 『 소련 고고학 개설』(역서, 학연문화사, 1994)

러시아 연해주와 발해 역사 대우학술총서 ·번역 얽 1 판 1 쇄 찍음 1~ 년 9 월 25 일 1 판 1 쇄 펴냄 1 9!:沿년 9 월 印일 엮은이 에세.샤브꾸노프 옮긴이 송기호·정석배 만든이 朴孟浩 펴낸곳 (주)인읍사 출판등록 1~ 沿 . 5 .1 9. 제 16-4~ 호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강남출판문화센터 5 층 515- 었 H) (대표전화);5 14-32A9( 팩시밀리) 값 13, (XX)원 Printed in Seoul, Korea ®던尸 l 寒 역사, 아시아 • 한국/KIX: 911 ISBN 89-'574 -4007-0 94910 ISBN 89- 打4 -4007_o (세트)

대우학술총서 (번역) 1 유목민족제국사 관텐/송기 중 54 중국신화전설 ll 〈근간〉 2 수학의 확실성 클 라인 /박세희 55 사회생물학 l 윌슨/이병훈·박시룡 3 중세철학사 와인버그 / 강영계 56 사회생물학 ll 윌슨 / 이병훈·박시룡 4 日本語의 起 源 밀러 / 김방한 57 일반언어학의 제문제 l 5 古代漢語音韻學槪要 칼그렌 / 최영애 밴베니스트 / 황경자 6 말과 사물 푸코/이광래 58 일반언어학의 제문제 ll 7 수리철학과 과학철학 와일/김상문 밴베니스트 / 황경자 8 가후와 진화 피어슨/김준민 59 폭력과 성스러움 지라르/김진식·박무호 9 이성진리·역사 파트남 / 김효명 60 갑골학 60 년 派作賓 / 이형구 10 사회과학에서의 場理論 레빈 / 박재호 61 현대수학의 여행자 11 영국의 산업혁명 딘 / 나경수·이정우 피터슨 / 김인수·주형관 12 현대과학철학논쟁 쿤 外 / 조승옥김동식 62 프랑스 혁 명의 지적 기원 13 있음에서 됨으로 프리고진/이철수 모르 네 /주명철 14 비교종교학 바하/김종서 63 해석학과 과학 커널리·코이트너/이유선 15 동물행동학 하인드 / 장현갑 64 서양고대경제 핀리 / 지동식 16 현대우주론 시아마 / 양종만 65 음악사회학 베버 / 이건용 17 시베리아의 샤머니즘 66 앙띠 오이디푸스 들뢰즈가따리 / 최명관 디오세지 호팔 / 최질성 67 과 학 커뮤니케이선론 18 조형미술의 형식 힐데브란트/조장 섭 프라이스/남 태우정 준민 19 힐 버트 리드/이일해 68 교양교육의 개혁 다니엘 벨/송미섭 20 원시국가의 진화 하스 / 최몽룡 69 과학과 가치 래리 라우 든/ 이유선 21 商文明 張光直윤내현 70 초기제국에 있어서의 교역과 시장 22 마음의 생태학 베이 츤 / 서석봉 칼 풀라니 / 이종욱 23 혼 돈 속의 질서 프리고진 스텐저스 / 유기풍 71 폭 정론 과 저항권 헬라 만트 / 심재우 24 생명의 기원 밀라오르겔/박인원 72 생명과학철학 25 일반언어학이론 야콥슨 1 권재일 데이비 드 헐/하두봉 • 구혜영 26 국가권력의 이념사 마이네케/이광주 73 사랑의 역사 쥴리아 크리스테바 / 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