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츠제커 (Carl Frie d rich von Weiz s acker)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수제자로서 독일 베를린, 라이프치히 그리고 괴팅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와 하빌리타치온을 받았다. 이론 핵물리학자이며 이차 대전 당시에는 원자폭탄 제조에 직접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플라톤과 칸트 헤겔 그리고 하이데거 등을 연구한 철학자이기도 한 그는 스트라스부르크와 괴팅겐 대학의 물리학 교수를 거쳐 1970 년 이 후 막스플랑크 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 『 시간과 앎 』 『자연의 통일성 인간적인 정원』 『인간의 역사』 등 많은 저술이 있다. 송병옥 연세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독일 튀빙겐 대학교 철학박사 현재 건국대학교 철학과 교수 역서 『철학 그 문제와 이론들』 논문 「인과 법칙과 자유의 문제」 「바이츠제커의 사상」 「하이데거와 바이츠제커의 자연 개념 연구」 「과학과 신화 」 등이 있음

과학의 한계

The Relevance of Scie n ce by Carl Fr ied rich von Weiz s acker Cop yrigh t © Carl Fri edrich von Weiz s acker 1964 Korean tran slatio n Cop yrigh t © Minu rnsa Publi sh i ng Co., L td. 1996 Korean tran slati on edi tion is pu bli sh ed by arrang em ent with Ha rperC olli ns Publi sh ers UK 이 책의 한국어 판 저작권은 Ha rperC oll ins Publi sh ers UK 와 독점 계약한 (주)민음사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으로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주) 민음사의 허락없이 전재하거나 복제할 수 없습니다.

과학의 한계

창조와 우주 생성, 두 개념의 역사 C.F. v. 바이츠제커 지음 송병욱옮김 딘옵^t

머리말 이 책은 내가 1959 년부터 1961 년까지 글래스고 Glas g ow 대학에 서 행 한 두 차례 의 〈기 포드 강의 Gi fford lectu r es> 시 리 즈 중에 서 그 첫번째 것을 담고 있다. 이것은 동시에 그 몇 해 전에 괴팅겐 Gott ing e n 대 학과 함부르크 Hamburg 대 학에 서 행 한 몇 몇 강의의 내용을 종합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두번째 강의 시리즈의 출판 이 곧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출판에 있어서 독자들에 게 문제들에 대한 생생한 인상을 전달하기 위해 강의가 갖는 의 적 형식을 그대로 보존하였는데, 이것은 또한 이 문제들에 있어 서 독자들에게 나의 견해롤 강요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강의 의 원래의 영어판 텍스트는 영국의 콜린스 출판사R. Coll ins and Co 에서 동시에 출판된다. 나 스스로 완성한 이 독일어 번역에서 나는 원문을 너무나 충실하게 재현하고자 하는 〈영어로부터의 번 역〉의 인상을 피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자유로운 변형을 허용 하였다. 이 독일어판에 나는 근대 자연과학의 입장을 설명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데카르트와 괴테에 관한 두 논문을 추가 하였다. 강의 출판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강의에 저자가 초청될 때 그 저자는 비록 망설이기는 하지만 책을 저술하도록 유혹받는다. 아마도 여기에서 나는 이 강의가 무엇이고자 하고 무엇일 수 없 는지에 대하여 몇 마디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이 강의의 출발 문제의 실로 궁극적인 의도는 실용적인 것이 다. 나는 무엇보다도 우선 개별 학문 분야의 전문가들이 아니라

우리의 현대 과학문명이 지니고 있는 위험스러운 〈 양면성 Amb i valenz 〉을 느끼고 있는 지식인들과 대화하고자 한다. 나는 이러한 양면성을 전단하는 데에 기여하고자 한다. 하나의 진단은 실천적인 최종 목적을 지니고 있는 이론적인 작업이다. 이 이론 적인 작업은 비록 가까이 있지는 않지만 다가울 치료의 희망을 고려하여 이루어전다. 이 첫번째 강의 시리즈는 역사의 영역에서, 좀 더 정확히 말하 자면 바로 그로부터 우리의 과학문명이 나타나게 된 그러한 역사 의 영역에서 이론적 작업을 시도한다. 이러한 시도는 역사철학이 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나는 역사철학적 가정을 제시하고자 할 뿐인데, 물론 이 가정은 그 구성 요소의 거의 대부분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나는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또 여전히 활동하는 · 자 연 과학자로서 여기서 논하고 있는 여러 시대와 인간들에 대한 역사적 연구의 성과를 내게 그것을 소화할 수 있는 힘이 있는 한 고맙게 활용하였다. 이 소화의 엄청난 어려움은 내가 출판을 주 저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었다. 더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있는 전문가에 대해서 느끼게 되는 양심의 가책은 피할 수 없으며, 이 것은 나를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나는 실증적인 역사 연구의 많은 대표자들이 역 사철학 일반에 대해 보여주는 형오에 대해서는 조금도 양심의 가 책을 느끼고 있지 않다. 역사철학에 대한 형오는 철학이 전문가 들에게 자기의 전망을 독단적으로 강요하는 곳에서는 정당화된

다. 그러나 철학은 어떤 한 분야에서의 전문가인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선입견을 명확히 하려고 할 때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따 라서 역사에 있어서 모든 서술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미 모든 방 법적 탐구 기반은 중요하다고 간주되는 사실들의 선택에 근거한 다. 그러나 왜 우리는 바로 이 사실들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 왜 우리는 어떤 다른 것은 믿지 않으면서도 바로 이 보고와 자기해석은 믿는 것인가? 한 학파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대체로 생각이 일치하고, 한 집단에 공 통적인 철학은 일반적으로 더 이상 철학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선입견을 선입견으로 인식하지 않으며 우리의 반 대자의 선입견을 대체로 또 다른 철학적 결정의 결과로 전단하지 않고 오류로 전단한다. 그러나 무의식적인 철학은 일반적으로 좋 지 못한 철학이다. 그러므로 이 강의들에서 나의 관심사는 거꾸 로 나 자신의 철학적인 견해롤 가능한 한 명백히 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견해를 전적으로 참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러나 내가 우리들을 공통적으로 번민하게 만드는 문제들을 설명 하고자 할 때 나는 이 철학적 견해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나롤 주저하게 만드는 새로운 이유가 나타난다. 그것은 철학적 과제의 방대함이다. 철학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 은 우리들 인간의 이해력에 대하여 너무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철학은 필요하다. 자기 스스로를 관찰하는 사람은 그 누구나 하나의 철학적 명제의 성공적인 정식화가 하나의 발판

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이 발판은 그로 하여금 바로 그 발판 자 체를 넘어서 더 나아갈 것을 허락하고 또한 그에 대해 요구한다 는 것을 항상 다시금 체험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나는 내가 이 연속 강의의 철학적 가정을 어떤 사다리의 발판으로 이해하고 자 한다는 것을 최소한 암시하여야 할 것이다. 역사의 사실적 진행에 관한 명제들로 언표되는 역사철학은 역 사, 사실성, 인식가능성 따라서 시간, 존재 그리고 전리에 대한 개념들이 역사철학에 있어서 피상적으로 무반성적으로 사용되었 는지에 관해 반성해 볼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반성에 대해 앞에 서 언급한 명제들은 우선 하나의 원환 운동 혹은 나선형 운동의 부분으로서 나타난다. 그래서 나는 서양 사상의 역사를 하나 하 나 판독해 나가기 위해 나 자신의 천체물리학적 연구가 내게 가 져다 준 문제, 죽 자연의 역사라는 문제를 표본문제로서 선택했 다. 인간의 역사는 자연의 역사로부터 성장해 왔다. 또 다른 한 편으로 자연에 대한 오늘날 우리들의 이해는 인간의 역사로부터 성장해 왔다. 따라서 자연의 역사에 관한 나의 좀더 오래된 강의 둘은 첫 반원을 형성하고 이것을 여기에서 출판되는 강의들이 완 전한 원으로 완성한다. 우리가 출발점으로 되돌아 간다고 할지라 도 우리는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자연사의 역사 Gesch ich te der Geschic h te der Na t ur 〉로서의 두번째 반원은 이미 처음 반원에 대한 반성이다. 그것은 현대 자연과학자들 자신의 소박한 자연 이해를 역사의 산물로 증명하고 우리들로 하여금 두

번째의 비판적 선회를 행할 것을 요구한다. 처음 반원의 두번째 편력, 죽 현대 물리학에 대한 비판적 분석은 두번째 강의 시리즈 에서 뒤따르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이 첫 권의 마지막 강의 에서 좀 더 상세히 다루어졌다. 여기에서 다루지 못한 또다론 부 분은 겉보기에 원환적인 운동의 근거와 본질에 대한 반성일 것이 다. 이러한 반성이야말로 비로소 시간, 존재 그리고 진리에 관한 철학의 부분일 것이다. 실천적으로 우리 시대의 질병을 치료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철학적 사유가 그의 반성의 뒤얽힌 원환을 완성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각기 자신들의 힘닿는 대로 스스로에게 이 두 가지의 과제를 동시에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의 복잡한 세계에 대한 이론적 이해를 촉진 시켜 나가는 데에 소홀히 하는 사람은 바로 실천에 있어서 결국 유익함보다는 피해롤 초래할 것이다. 또 실천의 요구를 피하여 순수한 반성의 탑으로 도피해 들어가는 사람의 반성은 철학적으 로 불모의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과제는 물론 공속적일 지라도 동일한 것은 아니다. 또한 이 두 과제에 그때그때마다 적 합한 기술을 혼동하는 사람은 또 다시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나 는 다론 곳에서 현대의 실천적 과제에 대하여 여러 차례 의견을 표명한 바 있으며, 그것을 계속해서 행하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 서 제시된 강의들은 실천적 지침이 아니라 새로운 이론적 과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실천에 대한 이론적 과제의 기여는 다만 의식

울 개발하는 데에만 놓여 있을 수 있다. 나는 글래스고 대학의 평의원회와 특별히 그 당시의 대학 총장 인 헤 더 링 턴 경 Sir Hecto r He t her i n gt on 에 게 기 포드 강의 를 위 한 초대를 통하여 나에게 베풀어 준 환대에 감사한다. 그리고 나를 그토록 환대해 주고 글래스고의 음산한 겨울철의 생활을 항상 즐 겁게 만들어 준 나의 모든 동료들, 학생들 그리고 친구들에게 뜨 거운 감사룰 드리고 싶다. 특별히 스미스 R. Greg o r Smi th 교수와 그 부인의 끊임없는 조언과 격려에 감사를 드린다. 나는 나를 처 음으로 스코틀랜드로 초대해 주었던, 작고한 애버딘 대학의 총장 데 일러 Thomas. M. Tayl o r 경 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는 이 서 언 을 끝마칠 수 없다. 나는 그와 함께 그의 세계교회 운동의 틀 내 에서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 대한 수많은 아주 유용한 대화를 나 눌 수 있었다. 와병으로 인해 내 강의를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 울 때에 그의 거소는 테일러 여사의 세심한 보호 밀에서 나의 은 신처로 제공되었다. 그의 너무 이른 죽음은 그를 촌경하고 사랑 했던 많은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조언자를 빼앗아 가버렸다. 나는 감히 그를 나의 친구라고 부르고 싶다. 1964 년 6 월 함부르크에서 C. F. v. Weiz s acker

차례

머리말 • 5

제 1 강 과학과 현대 세계 • 13

제 2 강 우주생성론적 신화들 • 35

제 3 강 구약성서에서의 창조 • 61

제 4 강 그리스 철학과 우주론 • 77

제 5 강 기독교와 역사 • 107

제 6 강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 131

제 7 강 데카르트, 뉴턴, 라이프니츠 , 칸트 • 157

제 8 강 생명의 진화 •177

제 9 강 우리 시대의 천문학• 199

제 10 강 세속화란 무엇인가 • 221

데카르트와 근대 자연과학 • 253

괴테의 자연과학에 있어서 몇 개의 개념들 • 277

옮긴이 해제 • 307

찾아보기 • 329

제 l 강 과학과 현대 세계 우리 시대는 과학의 시대이다. 우리 시대에 과학의 의미는 어 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다음의 강의들에서는 이 문제가 다루어 진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사회적, 경제적 또는 정치 적 분석을 시도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은 전문적인 과학자 로서 나와 같은 신분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선입견, 죽 과학의 의미는 그것의 진리에 근거한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이 강의는 과학의 전리에 관하여, 죽 과학의 의미, 한계 그리고 그 과학이 가질 수도 있는 이중성 Zwe i deu tig ke it에 관하여 다룰 것이다. 이 강의논 각각 열 개의 강의들로 이루어지는 두 개의 연속 강 의로 될 것이다 . 그 첫번째 시리즈는 우리들의 문제에 역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두번째 것은 현대 물리학에 대한 철학적 분석 울 통해서 접근한다. 이 두 연속 강의의 각각에서 나는 하나 내 지 두 개의 개별적 문제를 취급할 것이다. 이 개별적 문제들은 마땅히 그 일반성에서 취급할 경우 조망할 수 없게 될 훨씬 더

폭넓은 문제 영역의 예로서 기여해야 할 것이다. 이 첫번째 강의 는 본질적으로 스무 개의 전 강의에 대한 서론이다. 〈 과학과 현대세계 〉 는 우리 세기의 소수의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의 유명한 저서에 붙인 제목이다. 어떠한 의미에서 과학은 현대 세계에 대해서 득칭적인가? 우리의 세계는 기술 세계이다. 이러한 주장은 라디오와 세탁기 의 시대에 있어서, 그리고 정치적 역사가 원자무기의 위협과 스 푸트니크의 위력으로 형성되고 있는 이 시대에 있어서 별다른 해 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 기술은 현대 과학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과학과 기술은 서로 다론 씨앗에서 배태되고 여전히 분리된 뿌리와 가지를 가지고 있으나 그 줄기는 거의 하 나의 줄기로 함께 자라고 그것들의 잎들은 하나의 커다란 왕관을 형성하는 두 개의 이웃한 나무에 비교할 수 있다. 18 세기의 증기 기관은 광산과 수공업의 전통에서 더욱 발전된 것이다. 19 세기의 전동기(電動機)는 먼저 패러데이의 과학적 발견이 없었다면 불가 능하였을 것이며, 우리 세기의 원자로는 원자물리학자 자신이 설 계하고 만들었다. 또한 분명한 것은 그 역의 의존성이다. 확실히 자연과학은 그 초기에 가장 중요한 것을 의견상 무용한 철학자들 의 물음들과 순수 수학의 사유 방법들에서 얻고 있다. 그러나 오 늘날에는 현대 기술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하게 된 실험적 장치가 충분하지 않다면 최선의 자연과학적 이해가 얼마나 적게 이루어 질 것인가를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과학 W i ssenscha ft〉이라고 말할 때에는 종종 이러한 자연과학과 기술 의 쌍둥이 나무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1)

1) 영어 덱스트에서 내가 〈과학 S ci ence 〉에 대하여 말할 때 그것은 독일어 의 〈 Na t urw i ssenscha ft〉보다는 더 많은 것을 그리 고 〈 W i ssenscha ft 〉 보다 는 더 적은 것을 포함한다(예를 들면 사회과학은 포함하지만 언어학은

그러나 과학의 의미는 그것의 기술적 적용을 넘어선다. 과학은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우리 시대의 본질과 운명을 표현하는 것처 럼 보인다. 나는 이 생각을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용어들을 이용 한 두 가지 데제에서 파악해 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나는 분석의 다음 단계에서 다음과 같은 데제들에 대한 설명의 형식을 취할 것이다. 첫째, 과학에 대한 믿음은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종교의 역할 울한다. 둘째, 우리 시대에 있어서 과학의 의미는, 적어도 오늘날에는, 이중성을 나타내는 개념들만으로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종교와 이중성은 다음 숙고의 핵심 술어로 된다. 이 두 데제는 오직 공동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과학에 대한 믿음을 우리 시대의 종교와 같은 무엇이라고 표현함 으로써 이중적인 말을 한 셈이다• 내 생각으로 이 테제는 종교라 는 단어의 한 가지 의미에 있어서는 옳지만, 다른 의미에 있어서 는 분명히 옳지 못하다. 나는 이러한 이중성의 분석을 통하여 우 리 시대를 이해하고자 하며, 따라서 먼저 내가 어떤 의미에서 첫 째 테제가 옳다고 생각하는지를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하겠다. 분명코 우리 시대는 어떤 다른 지배적인 종교를 갖고 있지 않 다. 유럽의 입장에서 볼 때 중세와 19 세기의 경우에는 기독교가 지배적인 종교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이 주장 포함하지 않는다). 이후에 내가 말하는 대부분은 문자 그대로 오직 〈 sc i ence 〉에만 적용되지 우리들이 정신과학 Ge i s t esw i ssenscha ft이라고 부 르는 것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물론 〈실증적〉 정신과학과 19 세기에 확 립된 이것의 과학 개념이 자연과학에 대해서 지니는 유사성을 드러내는 것은 내게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여기서 〈 sc i ence 〉를 〈 W i ssenscha ft〉로 번역한 것을 정당화할 것이다. 그러나 분 명히 이러한 생각이 이 강의의 주제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은 - 두 가지 이유로 더 이상 들어맞지 않는다. 첫째, 물론 기독교 는 여전히 우리 서구 여러 나라들의 대다수 시민의 공식적인 종 교이기는 하지만 이 종교를 지배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과장일 것 이다. 종교적 불가지론은 아마도 우리 시대에 있어서 서구적 의 식의 지배적인 태도이다. 둘째, 유럽의 입장은 우리가 우리의 세 계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될 세계를 서술하기에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오늘날 미국은 유럽의 종교적 전통에 속하는 반면 러시아 는 그 지배 계층에서 이 전통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리고 중국, 인도, 아랍 국가들은 모두 이 전통에 결코 들어오지 않은 국가들 로서 분명코 우리가 함께 살지 않으면 안될 세계의 적국적인 지 체들이다. 생각건대 우리는 두드러지게 무종교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이전에는 종교가 자리를 잡고 있던 평범한 인간의 영혼 속의 한 장소가 오늘날에 이르러 텅 빈 채로 있을 수 있다는 것 은 심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나의 첫번째 데제는 바로 이 곳에 오늘날 과학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또는 더 정확히 말한 다면 과학주의 Szie n ti sm us, 죽 과학에 대 한 믿음이 이 자리 를 채 우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의식과 사회 를 구성하는 한 요소로서 고찰되는 과학은 스스로로 하여금 이러 한 역할을 주목할 만한 성과를 갖고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구 조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우리가 사회 학자에게 당신은 어 떤 요소들을 통하여 종교 의 사회적 기능을 표현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필시 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구성 요소, 죽 공동의 믿음, 조직화된 교회 그리고 행동규범들의 체계 code of beha vi our 를 본질적이라고 여길 것이 다. 과연 과학은 믿음, 교회 그리고 행동체계와 같은 어떤 것을 우리에게 제공하는가?

과학에 대한 많은 예찬자들은 과학이 믿음만을 이성으로 대치 한다는 점에서 종교와 구별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 생각으로 는 바로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그들의 믿음의 표현이다. 우리는 믿음의 개념만을 너무 좁게 파악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종교적 믿음이 참으로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믿음의 주도적 요소는 참이 라고 여 기 는 것 F tir wahrha lt en 이 아니 라 신뢰이다. 참이라고 여기는 것은 하나의 지적 태도이다. 죽 그것은 지식의 토대가 없을 때에도 한 견해에 대하여 동의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신뢰는 의식된 사유에 제한받지 않는 전 인격(全人格)의 속성이다. 우리가 전정으로 신뢰한다면, 마치 우 리가 신뢰하는 것이 전실하고 참된 것일 때 우리가 생활하고 행 위해야만 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생활하고 행위한다. 참이라 고 여기는 것의 지적 보증이 아니라 신뢰의 실존적 보증이 종교 적 믿음에 힘을 준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가 무엇이 과학과 기술 의 샴 쌍둥이 sia m esis c he Zw ili n g e2) 를 우리 시 대 의 우상으로 만들 었는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과학과 기술의 신뢰할 만한 성격과 확증된 신용성이라고 대답하여야 할 것이다.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과학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 벽 촌의 원시적인 청년은 어떻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것이며 어떻 게 자동차가 굴러가는지를 배운다. 유럽의 기독교인과 유럽의 회 의주의자는 그들이 방에 들어갈 때면 언제나 스위치를 누르고 불 이 켜지기를 기대할 때 기술에 대한 그들의 공동적인 무반성적 믿음을 가지고 살아 나간다. 자연과학의 세계상에 반대하는 한 권의 책을 쓴 한 낭만주의 작가는 그가 이 책의 원고 교정을 너무 2) 샴 쌍둥이는 샴지방(현재의 태국)에서 처음 발견된 일란성의 지체가 함께 붙은 쌍둥이로서 과학과 기술의 원천이 이 쌍둥이처럼 나누어질 수 없을 만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늦게 하였기 때문에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는데, 이 작은 행동을 통해 그는 자신의 의식 속에서 부정하고 있는 신에 대하여 이미 굴복한 셈이다. 그리고 자동차나 전등, 전화 등이 작동하지 않으 면 우리는 기술과학을 틀렸다고 탓하지 않고 이 기구들이 〈 고장 났다〉 또는 〈 잘못 만들어졌다 〉 고 탓한다. 우리는 과학에 대한 우 리들의 믿음의 찻대로 이 기구들을 잰다. 우리들 모두의 과학에 대한 믿음은 이 정도로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사소한 신뢰에 믿음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 울까? 종교적 믿음이라는 것은 다른 세계로부터 우리에게 계시 되고 비밀에 의하여 보호되며 기적에 의하여 확증되는 것이 아닌 가.? 그러나 과학에 대한 우리 시대의 평범한 인간의 정신적 상 황은 한 신앙인이 그에게 계시된 믿음에 대하여 갖는 정신적 상 황과 매우 흡사하다• 원자는 저 세상과 , 그리고 수학적 공식은 전문가만 읽을 수 있고 평신도에게는 비밀로 남아 있는 저 종교 적인 텍스트와 비교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기적의 본래적인 의미는 자연법칙을 파괴하는 사건의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러한 정의에서 사용되는 자연법칙의 개념이 이미 현대적이기 때 문이다. 기적은 초인간적 힘의 선언이다. 종교적인 믿음이 알려 주었던 겉으로 가장 뚜렷히 드러난 기적은 배고픈 자의 식사와 병자의 치유이며 알 수 없는 힘에 의한 인간 생활의 파괴였다. 기술화된 국가 경제, 교통 수단, 현대 의학 그리고 오늘날의 전 쟁 기술은 바로 이와 같은 기적을 행한다. 만일 과학종교 Wi ss enschaft sr elig ion - 과학주의 가 이 와 같이 믿음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또한 교회를 갖고 있는가? 아 마 우리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쩌면 공산당은 그러한 교 회와 같은 어떤 것이고자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하 나의 강력한 종파일 뿐이다. 우리 시대의 과학신도들

Wi ss enschaft sg l a ubig e n 대 부분은 과학에 대 한 공산주의 의 견해 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과학이라고 부르는 많 은 것을 일반적으로 과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과학이 교회를 갖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사제 계급과 같은 어 떤 것, 죽 바로 과학자들을 갖고 있다. 나는 그들을 (과학에 봉 헌된) 전문가들이라고 부른 바 있다. 그들은 그들이 동일한 전리 를 인식한다는 점에서 서로를 인정한다. 물리학은 과학이지만 변 증법적 유물론은 과학이 아니라는 사실은 예를 들면 1955 년에 개 최된 핵에너지의 평화적인 이용에 관한 제 1 차 제네바 회의 Ge nfer Kon f erenz 에서 분명해졌다. 거기에서 서구와 옛 -소련의 많은 과 학자들이 처음으로 만났고 그때까지 비밀로 유지된 정보들이 공 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대립된 정치체제와 신앙 고백 하에서 살고 있는 서로 다른 나라들에서 극비리에 측정된 일정한 원자 상수의 수치가 비교되었을 때 소수 이하의 자리까지 동일함이 밝 혀진 것은 예상할 만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또한 놀라운 체험이었 다. 국가와 사회에 관한 쌍방의 이론에 관하여는 그에 상응하는 일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옛 소련과 서구 과학자들은 어떠 한 정치적 이견도 붕괴시킬 수 없는 유대, 죽 공동의 전리를 통 하여 하나로 되었다. 여기서 전리에 대한 사제의 관계에 관해 한마디 하는 것이 내 게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회의주의자들은 때때로 종교공동체의 고위 성직자들이 그들 자신의 교리들이나 기적 사건들을 믿지 않 는다고 주장해 왔다. 고위직의 사제들이 얼마나 현명한가를 알고 있는 회의주의자는 그 자신의 눈으로 보아 무의미한 것을 사제들 이 믿는다고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의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종교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사소한 마술에 관련하 여서는 회의주의자의 견해는 아마도 정당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

의 근거에 대한 그의 견해는 분명히 정당하지 못하다. 성직자란 믿음을 이해하고 믿음울 평신도에게 설명될 수 있는 한에서 그것 울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성직자는 성서의 의미가 하나씩 하 나씩 밝혀지는 오랜 도정을 밟아 왔다. 성직자는 이 길을 걸어 왔고 다른 사람을 이 길로 인도할 수 있다. 같은 종교를 믿는 성 직자들은 개인적인 차이가 무엇이건 간에 그들이 가장 확실하게 진리로 여기는 것을 공동으로 소유함으로써 하나가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전리의 해석에 있어서 나타나는 쟁점은 의부인 에게는 사소한 일로 보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때때로 매우 중요 하다. 그리고 이제 과학자들은 그들 자신의 안목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의 안목에서 그들을 일치시키는 것으로 생각되는 바로 그러 한 전리를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과학자들은 원하 든 원하지 않든 간에 성직자와 같은 역할에 빠져들어갔다. 종교의 세 번째 요소로서 나는 행동체 계 Verhal t enss y s t em 를 지 적했다. 여기에는 도덕이 속한다. 그러나 많은 종교들은 도덕 이 의에도 제식법전을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순수한 윤리의 개념은 종교적 발전의 후기 단계이다. 초기 단계에 있어서는 도 덕 규칙들이 제식규칙에 얽혀 있었다. 제식은 우리 모두의 전체 삶이 의존하고 있는 초인간적 힘에 대한 올바른 행위의 규칙을 제공한다. 이러한 규칙을 현대인은 대부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 다. 현대인은 이 힘의 현실성을 참되게 믿고 사는 사람의 의식상 태를 스스로 생각해 낼 수 없고 유희적인 방법으로조차도 그럴 수 없다. 여기에서 현대인은 자연법칙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각 종의 현대적 기구들과 함께 제공되는 이 기구의 사용설명서를 그 가 기꺼이 따르려는 데서 이 의식상태의 좋은 비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차가 움직이지 않는다. 이때 물론 당신이 브 레이크롤 푸는 것을 잊어버렸다. 만약 당신이 〈브레이크의〉 지레

룰 올바로 사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결코 운전을 배울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올바른 주문을 적절한 순간에 의우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귀신은 당신의 말에 따르지 않을 것이다. 이웃에 대한 올바른 행위가 불가사의한 힘들에 대한 올바른 행 위로부터 나오듯이 윤리는 제식으로부터 자라나온다. 기술세계 역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이러한 이행 과정을 거쳐왔다. 우리 가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매우 중요한 것 이다. 운전대와 액셀러레이터를 조종할 줄 아는 사람은 차를 시 속 100km 의 속도로 몰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시속 100km 의 속 도로 시가지나 마울을 지난다면 그는 교통 법규를 위반한 것이 다. 물론 과오는 그 이상이다. 그는 비양심적으로 행동한 것이며 그도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기술세계의 내재적 윤리가 존재하지 만 우리는 그 윤리를 아직 잘 이해하지 못했다. 기술적으로 가능 한 모든 것을 하는 것은 비기술적 행동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 이 생각하는 것처럼 기술적 전보가 아니라 유아적인 것이다. 어 린아이는 집안 살림이나 부모의 정신적 안정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장난감을 이모저모로 가지고 논다. 어른은 기술적 도구들을 하나 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이러한 생각은 원자력 시대 에서의 무기와 전쟁처럼 대단한 문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 시대가 기술적으로 행하는 모든 것은 악마를 이용하는 마술 보다 더 나은 것 이 아니 다. 우리는 여 전히 기술윤리 tec h nisc he E t h i k 의 시 대 가 아니 라 기 술제 식 (技術祭式 tec hn isc hes Rit ua l) 시 대에 살고 있다. 이제 한걸음 뒤로 물러서 보자. 나는 과학을 종교와 비교함으 로써 현대의 삶에서의 과학의 의미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롤 나타 내 보이고자 했다. 아마 여러분 중 일부는 이러한 비교에 대하여 모순 아니 심지어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이 비교는 신성모독이

아닌가? 나는 여기서 과학은 참되고 종교는 거짓이라고 여기는 까닭에 이런 비교를 거부하는 과학 신도들에 관해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이 있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신성모독이라는 말로 그 반대의 느낌, 즉 참으로 종교적인 인간의 느낌을 표현하고자 한다. 종교적 인간은 과학과 종교의 사회적 영향들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을지라도 과학은 종교가 아니며 결코 종교의 자리에 들어설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견해에 동의한다. 어쨌건 내가 그토록 이중적인 언어를 선택했던 이유는 아마도 이 강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더 분명하 게 될 것이다. 이제 나는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나서서 우리 시대 의 종교인 과학주의에 반대하여 제기될 수 있는 몇 가지 논의를 언급해 보고자 한다. 먼저 나는 과학 신앙의 성과와 실패에 대하 여 그리고 그것의 의미에 대하여 말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과학 신앙의 근원에 대한 물음에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과학주의를 하나의 지배적인 종교라고 말할 때조차 우리는 그 것이 과연 참된 종교인지롤 묻지 않으면 안된다. 과학주의가 파 멸을 낳는 것이든가 인간의 삶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라면 우 리는 과학주의를 참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것의 성과에 대한 물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과학과 그에 대한 믿음의 성과와 실패의 경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내 생각으로는 대답은 오직 이중적일 수밖에 없 다. 과학은 우리에게 양날 선, 이중적인 상태를 초래하였다. 어 떠한 예를 들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그것의 결과를 꿰뚫어 보겠다 는 용기를 갖는다면 위의 내용을 명확히 밝혀 줄 것이다. 의학과 위생학은 수십억 명의 생명을 구했다. 이것은 과학이 자랑할 만한 가장 놀라운 성 과이 다. 물론 죽음은 극복되 지 않았 고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을 구한다는 것은 그것을 잠깐 동

안 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현존재란 그런 것이다. 우리 는 어린아이의 생명을 구하여 그가 장성하도록 하고 성인의 생명 울 구하여 그의 과업을 완수할 수 있게 하며, 마치 아브라함의 삶이 그러했듯이, 나이가 많아 기운이 다하여 죽는 것 이상을 추 구할 수 없다(「창세기」 25, 8). 그러므로 생명을 구한다는 것은 오히려 사람의 평균 수명을 35 세에서 65 세로 끌어 올린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성과의 다른 측면은 세계 인구의 놀랄 만한 증가이 다. 세계 인구는 일세기 동안에 두 배 이상으로 증가되었으며, 이 성장의 자연적 한계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의학에 의하여 늘어나는 생명을 어떻게 먹여 살릴 수 있겠는가? 맬더스 Mal t hus3) 는 정 당하지 않은가 ?

나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 문제에 대한 정확히 두 가지의 해결책을 알고 있다. 그것은 잠정적인 해결책과 최종적인 해결책 이다. 잠정적인 해결책은 전세계에 걷친 자유로운 상품 교환과 결부된 농업의 공업화와 집약화이다. 이 해결책은 말하자면 생필 품 증가책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구 표면온 한정되어 있다. 언젠 가는 인구 증가가 정지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우리가 문명의 파멸을 원치 않는다면 산아조절 이의의 어떤 다른 최종적인 해결 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두 해결책은 일정한 정치적 조건을 전제한다. 우리가 인구 증가 억제를 늦게 하면 할수록 결국 그만큼 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지 않으면 안된다. 인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들을 먹여 살 리는 데 필요한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체계는 복잡해지고 따라서 허약하게 된다. 전쟁 수행의 자유를 포함하고 있는 국가주권의

3) Thomas Robert Malth u s(I766-1s34), 영국의 경제, 사회철학자. an essay on the princ iple of pop ula tio n 에서 인구론을 연구했다.

고전적 개념은 점차적으로 이 체계의 기능 작용과 합치될 수 없 울 것이다. 전쟁이 폐지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더욱 더 분명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평화를 강요해야 할 것인가? 전쟁 장비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과학이 우리로 하 여금 전쟁을 폐지하라고 강요하고 있다면 그것은 마찬가지로 우 리의 발명 자질과 선의를 가장 어려운 시련에 부닥치게 하고 있 다. 인류가 이러한 과제롤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고 감히 믿을 수 있을까? 아마도 강요되는 것은 평화 이상의 것일 것이다. 우리는 자유 로운 산아 조절을 기대할 수 있는가? 나는 언젠가 이 문제가 논 의되는 과학회의에 참석했었다. 공산주의 국가체제인 중국의 한 대표가―~물론 그는 개인적으로 매우 천절한 사람이었다_ 일어서서 말하기를 〈이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해결불가능 한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것은 아무 문 제도 아니다. 지금 중국의 인구는 6 억 1500 만 명이다. 앞으로 15 년 후에는 8 억 명으로 증가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인구 증가 는 멈출 것이다〉라고 말하고 앉았다. 여기에서는 한 과학 신앙의 전체주의적 종파가 과학에 의해 발생된 문제에 대한 자신의 해결 책을 제시하고 있다. 과학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가 인간의 자유 와 결합될 수 있는가? 나는 이 문제에 대답할 수 없지만, 우리 가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과학은 국제정치 문제의 해결을 위해 어떠한 기여를 해왔는가? 과학의 가장 가시적인 기여가 로켓과 원자폭탄이라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나는 이 무기들이 바로 전쟁을 총체적 파멸 로 바꾸어 놓는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의 평화 유지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이중적인 것이 과학의 결 과들이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발명된 의학이 거의 극복 불가능

한 인구 증가 문제를 낳고,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발명된 무기가 평화의 공고화를 돕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결과의 내적 변증법이 혹을 백으로 바꾸어 놓고 있을 때 과연 우리는 이 제 그것이 백을 혹으로 되바꾸어 놓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겠 는가? 우리는 무기를 통하여 유지되는 평화를 무기를 통하지 않 고 조직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강의는 우리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 니라 이 문제의 원인에 대한 탐구에 한 발자국 접근하려는 것이 다. 이 강의에서 문제로 되는 것은 처방이 아니라 진단이다. 나 는 제안된 많은 처방둘이 상황에 대한 불충분한 분석이나 불충분 한 진단에 근거하는 까닭으로 소용이 없게 되거나 소용없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무척이나 두렵다. 전단하는 사람은 탐구에 있어 서 무한한 인내가 필요하며, 눈에 띄지 않는 증상과 커다란 결과 의 은폐된 원인을 찾아내는 데 예리한 안목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미 언급한 것둘의 분석을 통하여 도 달할 수 있는 덜 눈에 띄는 문제들 가운데 몇 가지에 대하여 언 급해 보겠댜 평화 기구를 위한 과학의 기여는 그 대부분이 계획 에 있을 것이다. 계획은 국제관계와 경제, 사회 구조, 국민보건 제도, 교육 그리고 그 밖의 많은 분야에 걸쳐 가능할 뿐만 아니 라 또 요청될 것이다. 계획은 과학의 세계 및 우리들의 세계에서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기계를 설계하는 것은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를 실행하려고 하는 인간의 행위를 설계하는 것보 다 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을 기계인 것처럼 취 급한다면 인간 행위를 설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예속은 자유 보다 설계하기가 쉽다. 만일 우리의 공동의 삶을 과학적 계획의 정신에 개방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물론 혼돈일 것이다. 그러 나 우리의 삶을 과학적 설계의 정신에 개방한다면 우리는 자유를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우리를 예속화하려는 유혹, 다시 말해 그 것이 우리 사회를 불확실하게 끌고 가면 갈수록 더욱 더 위험스 러운 유혹을 견뎌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확고하게 기초 잡힌 예속이 주로 거친 폭력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다. 예속은 영혼의 지배에 근거한다. 나는 12 년 동안 독재 치하에서 살았다. 나는 영웅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그 체계 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연구한 바 있다. 어쩌면 과학을 신봉하 지 않았던 것이 이 특수한 독재의 가장 큰 약점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독재정권은 기술이 자신에게 제공하는 도구를 사용 할 줄 알았다. 이제 이러한 경험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로 하여 금 예를 들어 라디오가 현대적 무기보다 더 심각한 위험을 지니 고 있다고 추측하게 하였다. 무기란 인간이 이를 사용하고자 하 지 않는다면 무용한 것이다. 선전은 인간으로 하여금 기꺼이 무 기를 사용하게끔 만드는 중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어쩌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 다.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는 이 선전에 대항할 수 있다. 그러나 라디오를 듣는 습관은 그 라디오가 의식을 일깨우는 내용 때문에 가 아니 라 배 경 음 Ger 셨 uschku li sse 으로서 , 곧 우리 를 안정시 키 거 나 자극함으로써 무의식적 정신의 구조를 파괴시키는 일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할 것이다 . 우리가 기술을 손에 넣고 자 할 때 그때그때마다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될 성찰을 불가능케 하기 위해 우리의 기술을 조정하고 있는 것은 어떠한 악마들인 가? 인간의 본성에는 자기파괴의 위험이 놓여 있다. 과학이 이 위 험을 초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학은 이 위험을 더욱 분명하 게 밝혀 주었다. 다론 간단한 예를 고찰해 보자. 정확히 시간을 철약할 수 있는 도구들이 발명된 뒤부터 우리 모두는 시간 부족

에 쫓기고 있다. 결과를 안다면 그 원인을 이해하기란 쉬운 것이 다. 우리가 기차나 자동차 또는 바행기나 전화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이전에 교제할 수 있었던 사람의 수보다 훨씬 더 많 아져서 결과적으로 이 증가는 개별적인 모든 인간 접촉에서 기술 적으로 가능한 시간 절약을 훨씬 능가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로부터 나오는 설명이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예측할 수 없 었던 결과를 미리 파악하고 예방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인가? 과학은 양날 선 칼로 보인다. 과학이 우리에게 제공했거나 계 속해서 약속하는 것에 대해서는 낙관론도 비관론도 적합하지 않 은 듯하다. 과학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의 모든 결과들은 미래의 더 커다란 결과에 의해서 압 도될 것이다. 더 커다란 결과가 이제까지의 것보다 더 좋은 것인 지 아니면 더 나쁜 것인지는 예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 는 우리가 이제까지 과학의 성과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을 표현 하기 위해서 〈이중성〉이란 용어를 택했던 것이다. 나에게는 과학의 성과와 마찬가지로 과학 신앙의 의미도 이중 적인 것으로 보인다. 과학이 종교의 역할을 한다면 우리는 다음 과 같은 두 개의 물음울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과학은 신 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과학은 인간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가? 첫번째 물음은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자. 내가 과학주의를 종교 로 표현함으로써 종교는 신 또는 신들을 섬기지만 과학은 어떠한 신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는 반론에 부딪치게 된 것은 사실이 다. 그러나 원시 불교나 유교처럼 무신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종교적 체계가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 과학은 많은 사람들이 이전에 신적이라고 불렀을 법한 힘과 법칙들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강의에서 취급하고자 하는 역사적 종교들에 대한 정확

한 고찰이 대답에 선행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는 달리 두번째 물 음, 죽 과학이 인간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가를 최소한 제기 하는 데는 그러한 준비가 필요하지 않다. 대답을 먼저 잘 알려져 있는 천진난만한 농담의 형태로 하는 것을 허락해 주기 바란다. 한 사람이 밤에 가로등의 불빛 아래서 바닥을 살살이 찾아보고 있었다. 물어 보니 〈내 열쇠를 잃어버렸 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신이 정말 이 가로등 밀에서 잃어버렸습 니까?〉 〈잘 모르겠어요〉 〈그러면 왜 여기서 찾고 있지요? 〉 〈 여 기에서는 적어도 무엇인가를 볼 수 있으니까요 〉 一~ 대상 들을 다루어 나가는 순서를 인간의 삶을 위한 그 대상들의 중요 성에 따라서 찾아낼 수 없다. 행성이 태양 주위를 운동하는 것은 인간의 행복이나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이 운동은 어느 정도 간단한 수학 법칙을 만족시키고 따라서 이 운동 이론은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그리고 뉴턴의 작업에 의하여 근대 과학의 초석이 되었다• 인간의 본질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 다. 우리는 인간의 행위를 아마 결코 수학적으로 정확히 예견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인간의 두뇌와 전자계산기와의 비교를 용 인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가장 커다란 〈전자두뇌〉가 이제까지 다 만 지렁이의 신경 계통의 복잡 정도에 이르렀을 뿐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설명울 약속하는 과학자는 적어도 그 시대의 가능성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사실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잃어버린 열쇠는 바로인간의 본질에 대한 열쇠 다. 종교는 어느 시대에나 이 열쇠를 소유한다고 주장해 왔다. 종교의 주장을 비난하는 회의주의자조차도 인간을 실제로 이해하 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앞에서 언급했던 모든 어려움둘은 물리적 세계의 힘에 대한 불충

분한 지배에서 생건 것이 아니라 인간 행위를 조정할 수 없고 예 측할 수 없는, 또는 심지어 이해할 수조차 없는 우리의 무능력에 기인한 것이다. 물론 인간의 이해롤 위한 과학의 중요한 기여를 부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세계 에 대한 우리의 과학 지식이 지닌 한계를 인정하는 것과 더불어 우리는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그러한 지식이 다시금 열어 놓는 이중적 가능성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적 통찰 들이 괴벨스 Goebbels4) 의 손 안에 있는 것을 상상하게 된다면 우 리는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다. 조건반사에 대한 파블로프의 연 구는 오늘날 우리가 세뇌라고 부르는 행동의 역사적 원천으로 간 주된다. 아는 것은 힘이고 힘은 책임을 의미해야 할 것이다. 그 러나 과학적 인식이 동시에 우리가 이러한 책임을 짊어지기 위하 여 필요로 하는 윤리적 힘을 우리에게 부여했다고 하는 것은 사 실과는 일치하지 않는 하나의 희망일 뿐이다. 나는 이제 우리가 이중적이지 않게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만 한다고 믿는다. 죽 과 학주의가 과학이 그 자신의 본질로부터 인간사에 있어서 필요한 지도를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라는 데에 희망을 건다면 그것은 하 나의 잘못된 종교이다. 과학주의의 믿음이 그 정도까지 나아간다 면 그것은 미신이다. 성직자의 역할은 과학자에게는 어울리지 않 는다. 훌륭한 과학자는 과학의 행위도식이 과학 스스로 우리에게 줄 수 없는 윤리의 배경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확인은 소극적이며 따라서 불충분하다• 우리의 다음 물음은 어떻게 과학이 오늘날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그러한 이중적 역할을 하게 되었는가라는 것이다. 이 질문을 통하여 나는 이 첫번째 연속 강의의 대상에 도달했 4) 독일 국민사회주의 정치가. 나치스의 선전부장으로 언론 탄압과 유대 인 학살 기구를 만듦.

다. 나는 이제 이 연속 강의를 과학주의의 역사적 근원에 관한 일련의 강의들이라고 기술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찾고 있는 진단에 자그마한 기여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철저한 탐구를 위해서는 이 질문은 여전히 너무나 광범위한 것이다. 처음에 언 급한 바와 같이 , 나는 과학주의의 성립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개별 적 문제를 다룰 것이다. 나는 어떠한 기술적 이용과도 거리가 멀 리 떨어져 있지만 근대의 처음 몇 세기의 과학적 관심사에 가까 이 있는 문제를 선택할 것이다. 그것은 창조와 세계 생성 (우주생 성론)이라는 두 개념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나는 이 시간의 나머지를 이 문제를 짧게 소개하는 데에 쓰겠다. * 1692 년, 그 당시에 아직 젊은이였던 유명한 문헌학자 벤틀리 Ric h ard Ben t le y는 신에 대 한 믿음을 옹호하기 위 해 화학자 보일 Robert Bo y le 의 유언에 의 하여 제 정 된 설교 또는 강의 의 제 1 차 시리즈를 런던에서 행하였다.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조금은 거만 하게 보일 지적 명철함을 가지고 벤틀리는 무신론의 반박으로 나 아간다. 그의 논의는 다음과 같은 신존재 증명에서 절정에 도달 한다. 죽 우리의 위대한 자연연구자 뉴턴은 행성들의 궤도 운동 이 자연법칙, 다시 말해서 역학의 공리들과 중력 법칙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 법칙들은 행성체계 가 생겨난 뒤에 그것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반해 이 체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행성체 계의 생성은 다만 예지적 창조자의 계획의 결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벤틀리의 논의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과학적 우주생성론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창조는 존재해야만 했다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아 논의는 고전적 방식으로 창조와 우주생성론 의 두 사상을 서로 대립시키며, 나아가 그것들을 유사하게 대립 된 일반적인 경향들, 죽 종교적 세계 설명과 과학적 세계 설명의 대표자로서 이해할 수 있게끔 해준다. 그의 견해에 경탄하는 자 들은 이 견해가 특별히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왜냐하면 이 견해가 종교적 세계 설명의 범위 안에서 과학에 인정된 자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즉 바로 오늘의 행성운동을 유도해 내는 데서 거둔 뉴턴의 성과가 그것이 체계의 생성을 설 명할 수 없다는 것을 단순한 무지의 표현으로부터 신적 창조자를 증명하는 적극적인 논증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음 강의들에서 종교적인 세계 해석은 두 개의 설명 방법의 대립을 통하여 이미 자신의 패배를 확증했음을 보여 주고자 한다. 죽 벤틀리의 출발접이 틀렸거나 종교가 그 자신의 방법을 이미 상실해버렸거나일 것이다. 벤틀리의 설교 이후 63 년 이 지난 1755 년, 나중에 철학자로서 유명하게 된 젊은 칸트 Immanuel Kan t는 행성 체계의 생성에 대한 납득할 만한 기계론 적 설명이 포함된 자신의 보편적 자연사와 천체 이론을 발표하였 다. 신의 현존재를 증명해야만 했던 과학적 결함은 메워졌다. 그 후 50 년이 지난 뒤 칸트와는 독립적으로 유사한 이론을 생각해 낸 천문학자 라플라스 Pie r re Sim on de La p lace 는 한 일화에 따르 면 나폴레옹이 그에게 당신의 이론에서 신이 차지하는 자리가 어 디냐고 물었을 때 다음과 갇이 대답했다.

칸트 스스로는 그 자신의 이론으로부터 가능한 무신론적 결론 울 보았고 또 이룰 거부했다. . 그럴 수 있기 위해 칸트는 벤틀리 의 논증을 거부해야 했다. 칸트는 자연법칙으로 하여금 행성 체 계의 생성을 필연적인 결과로 갖도록 창조한 신이, 먼저 역학 법 칙을 만들고 그 후 세계를 창조할 수 있기 위해 이 법칙을 깨뜨 려야만 하는 신보다 더욱 경탄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만일 우리 가 기독교인으로서 모든 것을 창조하고 또한 역학의 법칙까지도 창조한 신을 믿는다면 어떻게 맹목적인 기계적 필연성의 작품을 신적 이성의 작품에 대립시킬 수 있겠는가? 칸트가 철학과 신학의 역사룰 정확히 알았다면 신의 작품에 대 한 이러한 두 개의 대립된 해석―—-벤틀리의 해석과 그 자신의 해석 -은 전통적인 기독교적 창조론의 두 뿌리, 곧 풀라톤의 대화편 『 티마이오스』와 구약성서의 두 뿌리로까지 추적될 수 있 음을 알았을 것이다. 플라톤은 천체의 구조와 지구의 제작자인 데미우르고스가 어떻게 이성의 빛을 통하여 이미 혼돈상태로 존 재하는, 그러나 자신의 작품이 아닌 맹목적인 기계적 필연성의 어두운 물질세계를 질서 있는 우주로 바꿔 놓았는가를 기술하고 있다. 그에 반해 구약성서에서는 신이 빛과 어둠, 질서와 필연 성, 영혼과 육체 이 모든 것을 다 만들었다. 비록 칸트와 벤틀리 의 견해가, 풀라톤과 성서에 비교해 보면 단연코 현대적이라 할 수 있지만 아마도 벤틀리보다 칸트가 더 성경에 가까운 견해를 갖고 있을 것이다. 나는 풀라톤적 견해와 성서의 견해 각각이 지 닌 근원적인 의미와 기독교에 있어서 이 둘의 융합 그리고 그것 들의 근대적 변형을 개별적으로 취급해 나가고자 한다. 우리가 이 과정을 추적해 나가려면 먼저 풀라톤과 성서보다 이 전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날의 과학 신도에게는 풀라 돈과 성서적 형태의 창조사는 단순히 신화일 뿐이다. 신화는 그

의 견해에 따르면 이성에 대립된다. 두 개의 희랍어 뮈토스 M yt hos 와 로고스 Lo g os 는 종종 이 러 한 대 립 을 나타내 기 위 해 사 용된다.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적 창조론의 두 뿌리를 실제로 이 해하고자 한다면 한충 더 깊이 둘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그것들이 어느 정도로 이미 이성의 세계에 속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실제적인 신화와 비교해 보아야만 한다. 문제에 대한 이러한 개요는 뒤따를 강의들의 계획을 설명하는 데 충분할 것이다. 한 강의는 본래적인 신화에 대한 것이고 세 강의는 구약성서와 그리스 철학 그리고 기독교 신학에서의 세계 의 근원에 대한 견해를 고찰하게 된다. 거기에서는 이 특수한 문 제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언급될 것이다. 두 강의는 16 세기로 부터 18 세기까지의 근대 자연과학이 이끌어 낸 문제의 생성을 취 급할 것이다. 또 다른 두 개의 강의는 금세기 과학의 우주생성론 을 기술한다• 이 연속 강의의 마지막 강의는 기독교 신앙의 세속 화라는 특별한 견지에서 첫번째 강의의 문제, 죽 현대 세계에 대 한 과학의 관계라는 문제에로 되돌아 올 것이다.

제 2 강 우주생성론적 신화들 우리는 이제 우주생성론적 신화들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이해해 보고자 한다. 우선 〈우주생 성 론적 신화 kosmog o n isc her My tho s> 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코스모스 Kosmos 는 그리스어로 질서와 장식을 의미한다. 피타 고라스 이래 이 말은 질서에 의해 완전히 아름다운 세계를 의미 한다. 기독교적 전통에서 그것은 신과 대립되는 세계를 의미한 다. 어 미 _go nie , -gon i sch 는 태 어 나게 됨 , 일반적으로 존재 하게 됨 그리고 생성을 의미하는 어원 〈g en 〉에서 유래되었다. 우주생 성론 Kosmog o ni e,?:- 세 계 의 생 성 또는 하나의 이 론으로서는 세 계 의 생성에 관한 이론이다. 뮈토스 M yt hos 는 그리스인에게 있어서는 본래 단순히 말 또는 말함을 뜻한다. 그것은 좁은 의미로는 설화적 역사 erzahl t e Gesc hi ch t e 를 뜻한다. 만약 사람들이 누가 우리들의 조상이었는 가? 누가 우리에게 빵과 도구와 무기를 주었는가? 태어남과 죽 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늘과 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물

어본다면 이에 대한 대답으로서 그들에게는 역사가 이야기되는 것이다. 나는 기꺼이 여러분들에게 하나의 참된 우주생성론적 신화를 그 분량 그대로 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읽고 해석하는 데 있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 대신 나 는 이 강의의 전반부에서 세 개의 중요한 우주 생성 신화들의 내 용을 짧게 제시하고 나머지 후반부에서 그것들의 의미를 설명하 겠다. 내가 선택한 것은 바빌로니아 산화, 그리스 신화 ,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신화이다. 바빌로니아의 창조 서사시는 예수가 살았던 시대로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차이만큼 예수 이전에 살았던 인간들에 의해서 서술되었다. 그것은 구약성서의 해석을 위해서 중요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바빌로니아 신화로부터 분명히 의도적으로 자기를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헤시오도스가 이야기하는 그리스의 「신통보(神統 譜 Theo g on i e) 」는 모든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풀라톤은 『 티마이오스』 편을 집 필했을 때 자신의 것이 헤시오도스의 것보다 더 훌륭하다고 믿었 다. 10 세기 이후에서야 아이슬란드의 「에다 Edda 」 1) 에 기록된 게 르만족의 신화는 중세의 우리 조상들이 개종(改宗)을 통해 고대 세계의 전통 속에 들어가기 전 그들의 숨결이 간직된 정신적인 삶의 기류를 예감하게 해준다. 위로는 하늘이 이름지어지지 않고 아래로는 굳은 것이 이름을 갖지 않았을 때 그들을 낳은 자 태초의 아버지 압수 A p su2) 와 1) 고대 아이슬란드의 신화와 영웅 전설 및 詩法을 실온 책으로 新 舊 두 권이 있음.

그 모든 것을 잉 태 한 어 머 니 뭄무 Murnmu 와 티 아마트 T i ama t 3) 가 물 속에서 뒤엉켜 있었을 때 관목숲도 서로 이어지지 않고 갈대숲도 볼 수 없었을 때 어떤 신도, 그 어느 누구도 있지 않고 어떤 신의 이름도 붙여지지 않았으며 그 어떤 운명도 결정되지 않았을 때 바로 그때 그들 가운데에서 신들이 창조되었다네. 라무 Lahmu 와 라하무 Lahamu 가 나타나 이름을 얻었다네. 영접을 살면서 이들은 자라고 성장하여 그때 안사르 Ansar 와 키사르 K i sar 가 창조되 어 그들을 능가했다네 . 안사르와 키사르는 날들을 길게 하고 해들을 덧보태 그때 그들의 아들 아누 Anu 가 그의 어버이와 필적하게 되었네. 안사르는 그의 첫 자식 아누를 자기와 동등케 하고 아누는 그와 갇은 형상으로 누디무드 Nud i mmud 를 낳았다네. 자신의 선조들의 지배자인 누디무드는 지식이 광대하여 현명하고 힘이 세 그의 아버지를 낳은 자인 안사르보다 강했다네. 신들중에도 그의 선조들 중에도 그와 견줄 자는 없었다네. 이렇게 시작되는 송가가 바빌로니아에서는 봄의 신년축제에서 해마다 장엄하게 불렸다. 이 송가는 함무라비 법전과 동일한 위 대한 시대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기념물이다. 그러나 1500 년 뒤 알렉산더 대왕 시대에도 이 송가는 여전히 불리었다. 우리가 소 2) 바빌로니아의 담수대양 Su p wasserozean 의 신. 3) 압수의 부인. 영수 Salzwasser 의 신적 인 의 인화.

유하고 있는 덱스트는 기원전 7 세기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 Ashurban ip al 의 도서 실 에 서 나온 것 이 다. 여기서는 어지러우리만큼 많은 신의 이름들이 장엄하게 소개되 고 있다. 그리고 하나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나는 이 드라마에서 단지 중요하게 된 이름들만을 들추어 보겠다. 압수와 티아마트는 시원의 대양 Ur g ewasser 이다. 압수는 담수 (淡水)의 대양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것은 지구 전체에 퍼져 샘 과 우물로 홀러들어간다. 또한 이 담수의 대양은 페르시아만이기 도 하다. 티아마트는 영수(鹽水)의 대양이다. 여기서 그것들은 서로 남자와 여자, 죽 생겨나야 할 모든 것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마주 서게 된다. 〈그들 가운데에서〉 생겨난 기나긴 신의 세대들 중에서 좀 더 젊은 신들이 바빌로니아의 위대한 신들이었다. 위 에 인용한 시의 끝에서 두번째로 언급되고 있는 아누는 바빌로니 아 종교에 있어서 하늘의 지배자이다. 아누가 〈자기와 같은 형상 으로 낳은 자〉인 누디무드는 바다의 지배자 에아 Ea4) 의 다른 이 름인데, 에아는 그 후 대홍수 때에 인간에게 호의를 베풀어 그를 죽음에서 구하였다. 가장 늙은 신부부(神夫婦)인 압수와 티아마트를 한편으로 하고 다른 한편을 그의 후손들로 하여 그 사이에서 치명적인 결두가 일어났다. 〈형제들과 신들은…… 하늘의 거처 한가운데서 노래로 티아마트의 기분을 어지럽혔다네〉 압수는 티아마트에게 말한다. 그네들의 소행은 불쾌하오, 낮에는 안식할 수 없고 밤에는 참을 찰 수 없도다. 나는 그들을 멸망시켜 그들의 길을 흐뜨려 버리겠소, 4) 마르두크의 아버지, 지하 담수 대양의 신, 총명의 신으로도 통한다. 각주 5) 참조

평온이 것들어야 우리가 잘 수 있으리라 . 그러나 젊은 신들이 첫 전쟁에서 승리한다. 〈 모든 것을 이해하 는 엄청나게 지혜로운 자 〉 인 젊은 신 에아는 압수에게 주문을 걸 어 참들게 한 뒤 그를 살해한다. 그러고 나서 에아는 〈 압수(의 시체 — 옮긴이) 위에 자기의 거처 〉 를 짓는다. 죽은 압수는 그롤 죽인 자의 궁전이 된 것이다. 이제 압수는 바다이고 에아는 바다 의 지배자이다. 이제야 비로소 전체 시문의 영웅인 봄의 신이자 태양과 뇌우 ( 雷 雨)의 신이고 바빌로니아의 도시신(都市神)인 마르두크 Marduk5> 가 태어난다. 그는 에아의 아들이며 〈 현자 중에 가장 지혜로운 자이며, 신들 중에서 가장 영명한 자 〉 이다. 어떤 아이인가? 어떤 아이인가? 태양의 아들! 신들꾸사양의 아들!

그러나 티아마트는 죽은 남편의 원수롤 갚기 위하여 무장한다. 이제 깊음의 어머니인 그녀는 태고 세계의 용 Urwel t drach~ 로 나타난다. 그녀는 거대한 뱀을 낳고 피 대신 독으로 그 몸을 채 운다. 그녀는 격노한 바다의 용들을 공포의 빛으로, 개, 전갈인

5) 마르두크는 바빌로니아의 최고의 신이다. 아침 빛의 신, 봄의 새벽신 이었던 마르두크는 함무라비 왕이 유프라테스 강 지방울 통일하고 바빌 론을 수도로 정한 뒤부터 바빌론의 도시신(神)이 되고 점차 유력해진 다. 점토판에 적힌 바빌로니아의 천지창조 이야기인 〈에누마 엘리쉬〉 (본문 중의 이야기가 실려있는 바빌론의 신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 구약성서의 「예레미아서」 50 장 1 절 이하를 참조하라.

간 Skorpi on menschen, 폭풍우, 인어 그리고 숫양들을 공포의 빛 으로 둘러싼다. 몹시 놀란 젊은 신들은 그들을 구조할 수 있는 유일한 자인 마 르두크에게 지배권을 양도한다. 마르두크는 번개로 무장하고 싸 움에 나선다. 그는 티아마트를 붙잡을 수 있는 그물을 만들었네. 그는 그녀에게서 아무 것도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네 종류의 바 람에게 그물을 움켜쥐도록 했네…… 그는 악한 폭풍우, 회오리 바람, 대폭풍, 네 종류 바람, 일곱 종류 바람, 엉클어뜨리는 바람 그리고 재앙 바람을 만들었네. 엄청난 싸움에서 마르두크는 울부짖는 티아마트를 붙잡는다. 폭풍우들이 티아마트의 몸속으로 둘어간다. 그는 화살을 쏘아 타아마트의 배를 갈기갈기 찢고, 그녀의 내장을 찰게 저미고 심장을 잡아 뜯었네. 이렇게 해서 신들의 전쟁이 끝났을 때 비로소 마르두크는 적 —어머니 -의 시체로부터 세계를 창조한다. 지배자는 휴식을 취하며 티아마트의 시체를 관찰하고, 그 몸통을 나누어 정교한 것을 창조했네. 그는 그녀를 조개처럼 두 부분으로 나누고, 그 철반을 저쪽에 두어 하늘을 덮었네.

맨 마지막에 인간이 창조된다. 아마도 시문의 잃어버린 한 부 분에는 신들에 대한 봉사가 너무 어려워졌다고 써 있홀 것이다. 이제 신 킹우 K i n gu, 죽 티아마트의 총사령관이자 그녀를 전쟁에 나서도록 선동했던 신은 죽임을 당한다. 그의 피로 에아는 인간들을 빚고, 이들을 신돌에게 봉사하게 하여 신들을 자유롭게 하였네. 그러나 인간들은 도시, 죽 마르두크의 거처인 바빌로니아를 세 운다. 마지막에는 모든 신들이 모여 마르두크의 50 개의 이름을 부르 면서 그를 찬미한다. 바빌로니아의 신화는 이 정도로 하고 이제는 간단히 그리스와 아이슬란드 신화에 대해 언급하겠다. 기원전 7 세기, 죽 아슈르바니팔과 거의 동시대에 보이오티아에 서 농부 시인 헤시오도스가 신들의 기원에 대한 신화들을 모았 다. 전실로 멘 처음에 혼돈이 생겨났다. 뒤 이어 울림푸스의 눈 덮인 꼭대기에 사는 모든 신들의 영원한 지속의 터전인, 넓은 가슴을 가 진 땅이 생자났다. 그리고 통행할 수 있는 심연 속에서 저승의 어 둠이 생겨났다. 동시에 에로스 Eros 가 생겨났는데, 그는 영원한 신 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이다. 그는 신들과 인간을 막론하고 감 각혼돈을으 떼로어부내터 가밤슴과 속 에 깊레이보 스억 E제re하bo고s( 암숙흑고의된 신신 의— 옮의긴지 이를) 의제 압어한둠다.이 생겨났지만, 그 밤에서 밝은 낮과 에테르 A ther 가 생겨났는데, 그것

둘은 밤이 에레보스의 사랑의 열매를 맺어 잉태하여 낳은 것이다. 가이아 Ga i a, 죽 땅은 처음으로 별이 총총한 하늘을 낳아 그로 하여 금 자신을 완전히 둘러싸도록 자신과 같게 하고, 영원한 신들의 터 전으로서 영구히 움직일 수 없게 하였다. 우라노스 Uranos,6) 죽 하늘의 열매를 맺어 땅은 힘세고 두려운 많은 신들을 낳는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하나가 태어나자마자, 우라노스는 자기의 흉행 (兒行)을 줄기면서, 모든 것들을 땅의 깊은 곳에 숨겨 빛이 도달하 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거대한 땅은 속에서 신음하고, 수심에 싸여 사악하고 교활한 방어책을 생각했다. 땅은 쇠로 거대한 낫을 만들고, 그녀 (땅)의 가장 어린 아들 크 로노스 Kronos 는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복수를 하였다. 우라노스 가 다시 그녀에게 접근할 때 크로노스는 낫으로 그를 거세하였 다. 이렇게 해서 하늘과 땅은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잘 라 떨어전 지체를 멀리 자기 뒤 땅끝 바다로 던진다. 떨어지는 핏방울에서 복수의 여신들 Er i ny en, 거인족 G ig an t en 그리고 님프 들 N ymp hen” 이 생겨나고 수태한 바다로부터 아프로디데 A p hro dit e8) 가 나타난다 . 더쿠누人一는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크로노스는 자신이 아버 지에게 했던 것같이 그의 아들들이 그롤 괴롭힐지도 모른다는 불 6) 희 랍신화에서 땅 Ga i a 의 아들이자 배우자. 7) 바다, 강, 숲, 산, 목장 따위에 사는 것으로 생각되는 아름다운 여자 정령. 8) 사랑과 미의 여신.

안 때문에 아들둘이 태어나자마자 그들을 삼켜 버린다. 가장 나 이 어린 제우스 Zeus 는 이 간계로부터 구출받아 아버지를 파멸시 킨다. 그는 자신의 무기, 곧 번개를 가지고―—그는 뇌우(雷雨) 의 신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가장 나이 많은 형제들인 거인족 T it anen 과 싸워 승리하여, 이제 오늘날까지 그 권력과 축복이 지 속되고 있는 올림피아 신들의 지배자가 되었다. 인간의 기원에 관해서는 많은 그리스 설화가 있다. 헤시오도스 에 의하면 〈 저 높이 하늘에 살고 있는 영원한 신들 〉 이 다섯 가지 의 인간 종속을 차례로 〈 창조했다 〉 . 그것들은 황금의 종속, 은의 종속, 청동의 종속, 영웅의 종속 그리고 우리들이 속하는 철의 종속이다. 다른 설화에 따르면 거인족인 프로메테우스 Prome th­ eus 는 흙으로 인간을 만들고 하늘에서 제우스의 불을 훔쳐 인간 에게 주었다. 아이슬란드로 이주한 스칸디나비아의 항해자들은 이미 기독교 문화의 시기인 기원 후 약 1200 년경에 게르만족의 신화를 두 권 의 「에다」에 기록하였다. 이미르 Ym i r9) 가 거처할 때인 태곳적에는, 모래도 바다도, 소금물의 파도도 없었고, 밑으로는 땅이 위로는 하늘이 없었다. 바닥없는 심연이 있었으나 어디에도 초목은 없었다. 이미르는 서리 〔 霜 〕 거인 Reif ries en 중 첫째이다. 『 신(新)에다 』 에 따르면 〈땅이 창조되기 전 여러 세대 동안〉 북쪽에는 차가운 안개의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의 샘에서 강이 흘러나왔는데 그 모습은 이러하다. 〈서늘하고 싸움을 좋아하며, ‘F j orm ' 하고 'F i mbul t hul' 하며 , 째 져 있고 발작하는 듯하며 , 협곡처 럼 생 기고

암여우 같으며, 넓고 섬광 같아 째질 듯한 소리를 낸다. 〉 그러나 남쪽에는 〈무스펠 Mus p ell10) 이라 불리는 세계가 있었다. 이 세계 는 밝고 맑은 하늘이 있으며, 이 세계의 모든 지역은 활활 타고 있다. 그리고 낯선 사람은 이곳에 들어갈 수 없다 〉 거기에서 언 젠가 세상 마지막 날에 모두를 태워버리게 될 수르트 Sur t 11) 가 나 타난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깊음의 심연인 기눈가감 G i nnun­ g a g a p 12) 이 있는데, 그것은 〈 고공의 무풍지대처럼 온화한 계곡 〉 이 다. 거기에서 따뜻한 공기가 서리와 부딪쳐서 물방울이 떨어지 고, 이 물방울에서 〈인간 형상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이미르이 다.〉 〈그는 흉악하고 그의 전 종족, 죽 서리거인들도 똑같이 흉 악했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된다. 죽 이미르가 잠잘 때 땀을 홀리기 시작했고, 그의 왼쪽 팔 밀에서 한 남자와 한 여 자가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한 쪽 다리는 다른 쪽 다리와 함께 한 아들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후손, 죽 서리거 인이 생겨났다. 그런데 방울방울 떨어지는 서리에서 암소가 생겨나고 그것의 젖으로 이미르가 자랐다. 이 암소는 〈짠 서리[ 霜 ]돌을 핥았고, 암소가 돌을 핥은 첫째 날 저녁에 암석에서 사람 머리카락이 나 타났다. 둘째 날에는 사람 머리가, 셋째 날에는 완전한 인간이 나타났는데, 이는 부리 Bur i라 불리었고 아름다운 외모와 크고 강 한 체구를 갖고 있었다. 그는 보르 Borr 라는 이름의 아둘을 얻었 9) 북구 신화에 나오는 괴물 거인. 이것의 몸통으로부터 이 세계가 창조 되었다고 전한다. 10) 무스펠은 불의 괴물을 뜻한다. 11) 수르트는 무스펠 나라의 통치자이고 보호신이다. 12) 원초적인 공허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안개로 채워져 있으며 안개 의 나라와 무스펠 나라 사이 에 있다.

다. 이 아들은 거 인 뵐토론 Bol t horn 의 딸 베 스툴라 Bes t la 를 그의 아내로 취했다. 이들은 세 아들, 오딘 Odin , 빌리 W ili 그리고 베 We 를 낳았다. 그리고 오딘과 그의 형제들이 하늘과 땅의 지배자 라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 보르의 아들들은 이미르를 쳐 죽였고, 그 이미르의 피에 모든 서리거인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빠져 죽었다. 그러나 보르의 아둘 들은 이 몸뚱어리로부터 세계를 만든다. 세상은 이미르의 육체로부터 창조되었다. 피에서 파도가 부서지 는 바다가, 뼈로부터 산맥이, 나무들은 머리카락에서, 그리고 두개 골에서 하늘이 생겨났다. 거인의 눈썹으로부터 점장이 Ra t er 는 인간 의 아들에게 인자한 미트가르드 M ittg ard 를 만들고, 거인의 뇌에서 험악한 마음을 품은 모든 구름이 생겨났다. 신화의 다른 절(節)에 따르면 오딘, 회니르 Ho ni r 그리고 로두 르 Lodur 이 세 신들은 바닷가에서 찾아낸 물푸레나무와 느릅나 무에 생명과 영혼을 부여해 남자와 여자를 얻었다. * 이렇게 설화들은 전해지고 있다. 그것들은 무엇울 의미하는 가?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은 더 이상 신화시대의 아이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죽 신화시대의 아이라면―옮긴이) 그에게는 역사 스스로가, 바로 그 역사가 이야기해야 하는 것을 신화시대의 청

중에게 하는 것처럼 어떤 다른 설명을 보태지 않고 이야기할 것 이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는 설화의 작은 자매, 동화 롤 생각해 보자. 동화가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동화의 세계에나 빠질 나이에는 더 이상 걸맞지 않게 커버린 사 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동화를 이해하려는 자는 사람들 이 더 이상 동화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하는 나이에도 더 이 상 어울리지 않게 더 자라지 않으면 안된다. 신화에 대한 우리의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신화란 무엇인가? 신화는 아마도 우리들의 동화와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신화들은 동화보다 더 위대하고 더 무서우며 더 신성 하다. 우리가 신화들을 태고 시대의 위대한 시작(詩作)이라고 부 를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화와 시작의 공통적인 삶의 숨결, 즉 환상의 자유로운 놀이이다. 태고 시대의 인간들은, 비록 그들이 하늘과 땅이 생기기 이전에 설화가 상연되는 설화의 무대를 제시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환경과 비슷한 환경 속에서 인간과 유 사한 신들의 세대를 정연하게 자유로이 꾸며낸다. 한 신화에서 신은 자기의 아들들을 삼켜버렸고, 다른 신화에서 한 교활한 늙 은 농부는 암소가 얼음을 핥아서 인간이 나왔다는 생각을 꾸며낸 다. 맞아 죽은 괴물의 시체로부터 세계가 형성되었으나 이 시체 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어느 누구도 묻지 않는다. 그러나 시작(詩 作)에서와 마찬가지로 신화에서도 설화자(說話者)의 상상력은 형 식의 법칙과 결합되어 있다. 시문 Poes i e 은 산문 Prosa 보다 더 옛 것이다. 가장 오래된 신화 덱스트들은 엄격하게 구성된 시이다. 여기에서는 현대의 주관적 시작(詩作)보다는 교회의 의식문에 비 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엄격한 형태는 수세기 동안에 걷 친 구전(口傳)을 용이하게 하며, 이 형태는 덱스트의 성스러움을

나타낸다. 아직도 우리 아이들은 똑같은 동화를 항상 똑같은 말 로 들으려고 한다. 그러나 또한 내용도 얼른 보기보다는 대단히 엄격하게 규정되 어 있다. 환상의 유희는 자연 그대로의, 훌륭한 덩굴 작품 Rankenwerk 이다. 그러나 앞에서 본 세 설화자의 보고 말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동일하지 않은가?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세 계의 시초 뒤에는 가령 물, 땅, 얼음과 같은 근본적이고 어두운 혹은 차가운 근원적인 힘이 뒤따르고 있다. 여기 이 근원적인 힘 에서 천상의 밝은 힘둘이 나타난다. 이 힘들이 인간적인 모습을 띤 신들로 나타난다. 늙은 신과 젊은 신들은 싸움을 하고 젊은 신이 승리한다. 그리고 우리의 시대를 지배하는 신이 인간을 만 든다. 앞에서 본 두 편의 설화에서 신은 맞아 죽은 적의 시체로 부터 먼저 하늘과 땅을 만든다. 이러한 일치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분명한 것은 신화 가 떠돌아다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화를 받아들이고 이를 참된 것으로서 계속해서 이야기하려는 자세가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다면 어떤 물음들이 기다리며 이미 인간에게 놓여져 있었는 가? 무엇이 바로 이 대답둘울 설득력 있게 만들었는가? 이 대 답둘은 공통적이고 합리적인 구조를, 죽 일종의 철학을 포함하고 있는가? 이리하여 우리는 신화의 내용적 해석의 문제에 도달하였다. 여 기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그러한 해석이 개념적으로 분명할 것이 라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물론 모든 신화적 이미지는 그 안에서 직접 현시되는 통일적인 내용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이 후 시대롤 사는 어린이인 우리는 우선은 이러한 전체를 분석함으 로써만 우리들의 합리성을 매개로 하여 그 전체를 생각할 수 있 울 것이다. 전체는 우리의 범주들에 상옹하는 요소들을 갖고 있

지만, 그 전체가 이 요소의 어떤 것들과도 동일하지는 않다. 신 화는 동화, 시, 의식문, 그리고 철학과 비슷하지만 이것들 중의 어느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범주들은 신화를 일관성이 없는 측면들로 쪼개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에 대한 모든 해석들 은 동시에 여러 개념적 수준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 고 이 측면들이 무리없이 스스로 다시 하나의 전체로서 통일될 때 우리는 신화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나는 우선 사람들이 신화의 철학적 측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철학은 주어진 것의 전제에 대해 반성 한다. 우리가 만일 신화의 본래적인 흐름과는 반대로 이를 잘 알 려져 있는 현재로부터 거꾸로 수수께기 같은 과거로 추적해 간다 면 신화의 철학적 줄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 인간은 여기에 존재해 있고 하늘과 땅으로 둘러싸인 세 계 안에 존재한다. 그런데 무엇이든지 존재하는 것은 어디에서든 지 오지 않으면 안되며, 인간과 세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그토록 정교한 대상들의 생성에 대하여 어떻게 알게 되는 가? 그것은 오로지 누군가가 이들을 만듦으로써만 그러하다. 말 하자면 누군가가 우리들 인간과 어쩌면 하늘과 땅마저도 만들었 다는 것이다. 누군가 이 모든 것을 만들어야 한다면 그는 아마도 인간과 마 찬가지로 손과 눈을 가져야 할 것이고 또한 지혜롭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 인간들보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뛰어나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 형상을 한 그러한 힘들은 오래전부터 고대 민족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죽 그것 은 신들이다. 우리는 우선 당분간은 신이란 원래 무엇을 의미하 는지 또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묻지 말고, 고대인들이 그랬던 것과 갇이 신을 아주 자명하게 현존하는 것으로 생각해 보자.

무엇이든 만들어진 모든 것은 어떤 것으로부터 만들어지지 않 으면 안된다. 빵은 밀로부터, 무기는 금속으로부터, 신의 형상들 은 구운 점토나 돌 또는 청동으로부터 만둘어져야 한다. 그러므 로 신들도 우리와 우리의 세계를 그들 세계의 물질들로부터 만둘 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신들도 그들의 세계와 그들의 역사를 갖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함으로써 무한 후퇴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 만일 신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들 세계에 산다면 그 신들과 그들의 세계는 어디에서 왔는가? 젊은 신들은 그들의 주변 세계로부터 구별될 수 있다. 그러나 신 계보의 시초에는 행위하고 말하는 인격으로뿐만 아니라 우주 적 근원 영 역 Urlandschaft 그 자체 의 요소들로 나타나는 존재들이 있다 13). 압수는 세계 바다이다. 신 압수는 그의 후손 에아에 의 해 맞아 죽는다. 그러고 나서 〈 에아는 압수의 시체 위에 그의 거 처를 짓는다 〉 맞아 죽은 신은 그를 죽인 자의 궁전으로 되는 것 이다. 압수가 바다 그 자체였다면 우리는 에아에 대해서 비로소 그가 바다의 지배자이며 지배자로서 바다와는 다른 것이라고 말 할수있다.

자신의 요소와 동일한 신-바다인 신, 하나의 신인 바다 —은 좀 더 이른 단계이다. 젊은 신들은 그들이 지배하는 요 소와 구별될 수 있는 신으로서 더욱 인간과 유사하다. 그리고 바 로 그들이 하늘과 땅을 만든 자들이며 우리의 세계 질서를 창조 했고 이들의 영속을 보장하는 자들이다. 신들의 세대들을 구별하

13)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행위하는 요소와 우주적 영역의 근원적 요소를 제시함으로써 인격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를 대비시키는 것으로 보이며 좀 근원적으로 고찰한다면 정신적 요소와 물질적인 요소 간의 대비와 통일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 하겠다.

는 데에는 세계의 질료 Mate r ia l der Wel t가 이 세계에 내재하는 질서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질서를 부여하는 신은 바로 이 질서를 통해 그의 작품들로부터 구별될 수 있다. 그러나 이 형식이 부여되어 있지 않은 질료는 분명치 않은 통일 속에 서 의 in dump fer Ein h eit 요소이 자 동시 에 신 이 다. 그러나 어떻게 근원적인 무구별성 속에서 구별짓는 질서의 힘 이 생겨나는가? 저 최초의 힘들은 계획적으로 형태를 만들어 가 는 예술가들이 아니다. 그리하여 그 힘들은 형태를 다만 어머니 가 아이룰 낳듯이 낳을 뿐이다. 그 힘들은 그들 자신과 다른 것 울 그들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는 어떤 필연성에 따라 스스로로부 터 나타나게 한다. 단지 신적인 암소의 핥음과 같은 우연의 작품 만이 다른 길을 제공하며, 이것은 훗날에 꾸며낸 이야기인 것처 럼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질서는 그 이전에 있었던 것의 안정과 힘을 깨뜨린다. 죽 늙은 신들은 그의 자녀들을 두려워하고 증오 하는 것이다. 질서는 그가 조상을 살해했을 때 비로소 승리한다. 그때에서야 조상의 죽은 시체는 건설을 위한 질료가 되는 것이 다. 우리는 신들과 그들의 세계의 기원을 이해했는가? 근원적 신 들 Ur g o tt er 은 신들임과 동시에 세계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근원적 신들의 이름이 가리키는 것과 동시에 혹은 불확실한 방 법으로 조금 더 먼저 우리들이 오늘날 즐겨 헤시오도스의 그리스 어로 카오스 Chaos, 혼돈이라 부르는 상태가 나타났다. 그러나 혼돈은 무질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질서라고 하 는 것에는 아직 질서가 부여되어 있지 않은 어떤 것이 있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혼돈은 문자 그대로 입벌립 das Gahnen 을 의미한 다. 똑같은 말이 「에다」에서도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끝 없는

임벌림 Gahnung grun dlos>. 이러한 표현할 수 없는 상태는 오직 부정을 통해서만 묘사될 수 있다. 우리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무 N ic h t s 가 거기 있었다. 하늘도 땅도 풀도 그리고 관목도, 나아가 아무 이름도 어떤 섭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실로 그렇게만 시작 이 정해질 수 있을 뿐이다. 시작은 그 안에 어떤 것, 죽 기원을 가질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면 시작이 아니다. 따라서 시작은 무의 성격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이 어 떤 것의 시작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것에 관여한다. 시초는 어 떤 것 E t was 을 품고 있는 무(無)처럼 나타난다. 덱스트의 최초의 생각은 항상 시간 규정이다. 〈위로는 하늘이 아직 이름지어지지 않았을 때……〉 〈전실로 맨 처음에……생겨났 다…… 〉 〈 태곳적에는…… 〉 . 이러한 시간은 시작의 시간이며, 바 로 그 때문에 그 시간은 순간도 일정한 기간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이미 한계와 형태를 전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초 시간은 혼돈이 존재인 만큼 시간이거나 혼돈이 존재가 아닌 만큼 시간이 아니다. 한 발자국 물러서서 이 사유 전행을 전체적으로 고찰해 보자. 이 사유 진행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후기 철학이 받아들일 수 있 는 사색적인 힘을 인정해야만 하지 않을까? 후기의 모든 우주생 성론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이미 이 사유 과정에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추론의 고리를 스스로 덱스트 속에 집어 넣어 읽어내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말한 대로의 추론의 고리는 텍스트에 들어 있지 않다. 신화가 뒤에,’ 서 부터 추론하지 않고 시 초로부터 설명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마도 우리는 이 추론 의 고리가, 마치 한번도 논리학을 공부해 본 적이 없는 영리한 사람의 생생한 말 속에 논리가 포함되어 있듯이 설화들 속에 둘 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자기의 이야기 방법을 반성해 보

지 않은 설화자(說 話者 )라도 추론의 고리를 해치면 고통스러울 것아다. 우리는 추론의 고리가 신화에 암묵적으로 담겨져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 그런데 신화를 전체적으로 보는 것을 배우기 위 해서는 우리는 그것에 또 무엇이 더 포함되어 있는지 물어야만 한다. 이제까지 언급한 측면들은――동화, 시작( 詩 作) , 의식문, 철 학一一형식적 측면들로 표현될 수 있다. 물론 내용상의 여러 다 양한 측면들도 존재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신화를 다만 우주생성 론으로, 그것도 이 용어의 표면상 분명한 뜻에 있어서 해석해 왔 다. 그러나 우리는 중심 문제, 즉 신들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 는 문제를 다시 묻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물음은 우리에게 우 리가 우주생성론으로 간주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측면들을 열어 보여줄 것이다. 한 가지 사실이 분명히 되어야만 한다. 죽 신들이 무엇을 의미 하는가를 물음으로써 우리는 스스로가 더 이상 동화를 믿지 않는 다고 자부하는 청년만큼이나 절망적으로 단순하다는 사실이다. 신을 믿는 자에게는 신이 존재하며, 그에게는 신이 무엇을 〈 의미 하느냐〉 하는 물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그가 느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적절한 종교 이해 는 신이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아니라 신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 답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오늘날의 오만스러운 산물인 과학 신앙은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능 력을 지나치게 요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잃어버린 믿음을 의 지작용을 통해서 다시 소생시킬 수 없으며, 종교에 대해서 어떻 게 생각하든지 간에 우리는 신화의 신들에 대한 믿음을 이미 잃 어버렸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이해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 놓여 있는 유일한 질문, 죽 신화의 이러한 신들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질문을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우리돌 자신의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나중에 더욱 더 충분한 질 문을 기꺼이 제기하려는 것이다. 많은 신들은 분명히 자연력들을 구현하고 있다. 마르두크와 제 우스신은 번개와 천둥의 신이며, 티아마트는 물이고 이미르는 얼 음이다. 태양신 마르두크가 티아마트의 엄청난 홍수에 대해 거둔 휘몰아치는 듯한 승리는 겨울을 이기는 봄의 영원한 회귀의 승리 이다. 신년축제 찬가가 봄에 불리는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그러 나 이러한 의미에서 이 찬가는 전혀 우주생성론적이지 않은 것처 럼 보인다. 신년축제 찬가는 주기적으로 되돌아오는 사건을 찬미 한다. 이 문제를 나는 곧 다시 다루겠다. 신들은 단지 자연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치적 현실 들을 드러낸다. 그리고 놀랍게도 같은 신이 양쪽을 다 나타낼 수 있다. 마르두크는 바빌론의 도시신이다. 늙은 신들에 대해 거둔 젊은 신들의 승리는 그들이 그들 중에서 가장 젊고 강한 신, 죽 마르두크를 그들의 지배자로 선택한 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다른 신들보다 그를 높인 것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양 강 유 역 Zwe i s t romland 의 다른 도시들보다 바빌론 도시가 천상으로 높 아전 것을 반영한다. 더 오래된 형식에서는 니푸르 N ipp ur 의 신 인 엔릴 En li1 14) 이 설화의 영웅이었다. 또 다른 신들도 짐작건대 다른 곳들과 다른 시대에서는 똑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시문 Poes i e 에서보다는 전투성에서 뛰어난 아시리아인들은 바빌론의 덱스트를 넘겨 받아 어디에서나 마르두크를 그들의 국가신 아슈 14) 기원전 5000 년경에 세워졌고 기원전 2000 년경에 바빌론에 의해서 정 복된 메소포타미아의 남쪽에 있던 나라 수메르의 신이며, 폭풍우의 신, 공기와 공간 그리고 하늘의 신 땅의 지배자로서 죽은 혼돈의 거물 Chaosun g eheuer 에 서 세 계 를 창조했다.

르 Assur 로 대치했다. 아슈르바니팔 왕의 도서관에서 발견된 텍스 트의 대부분은 이러한 형식으로 보존되어 있다• 이런 형태들 가 운데 어떠한 형식을 띠든지 간에 각 시문은 당시의 신정국가 체 제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종교적인 행위가 되는 정치적 행위를 찬 미하였다. 한 도시나 국가의 승리는 그들 신의 승리였다. 많은 구절에서 우리는 신들의 왕조의 교체로부터 인간적 지배의 교체 에 대한 회상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늘날의 무엇보다도 융 C . G. J un g에 의해 구상된 형태의 심층심리학은 신들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롤 우리에게 보 여준다. 심층심리학에서 신의 형상은 깊은 영혼 속의 현실에 대 한 의식 속에서 파악가능한 표칭이다. 우리가 신화를 그렇게 읽 어낸다면 신화의 신통기적 드라마는 사이코고니 Psyc hog o nie , 죽 영혼 생성의 드라마이다. 그렇다면 영혼의 생성을 세계의 생성으 로 서술하는 것은, 자신의 객관화 속에서 자신을 볼 수 있기 위 해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 작용하는 힘을 자신과 다론 것으로서 자신 앞에 설정시키는 하나의 두영 Pro j ek ti on 일 것이다. 그러나 신은 그에 대한 나의 상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이다. 인간은 신들 에 의해 만들어지나 그 반대는 아니다. 이제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죽 나의 의식이 저 깊은 총들의 주인이 아니며, 오히려 나의 의식이 저 심층들에게 근거하고 그들에게서 나오며 나아가 나의 의식의 현존과 행위가 심층들에게 의존한다는 것이 다. 영혼의 깊은 곳에는 신들의 투쟁이 있다. 거기에는 영원한 어둠의 근원적인 힘이 있고, 이 힘의 후손인 빛의 질서는 그의 조상의 시체로부터 앎과 의지의 세계, 죽 가지런히 잘 분화된 중 심의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그 조상을 죽여야만 했다. 물은 무의 식적인 것을 의미하고 또한 우리가 그 위에 서 있는 확고한 토대 주위를 〈깊이 소용돌이치는 오케아노스 Okeanos15) 〉가 흐른다. 자

신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영상으로부터 다시금 자신을 인식하게 되지 않겠는가? 이제까지 열거한 신들에 대한 세 가지 해석 -물리적, 정치 적, 심리적 해석 ——-중에서 심리적 해석이 내 견해로는 신들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것으로 보인다. 이 해석은 신이 인간 에게 항상 행사해 왔던 엄청난 힘의 원천에로 가장 깊이 스며들 어 간다. 물리적인 힘이라는 것은 이 근원적인 힘에 대한 한갖 비유인 것 같으며 정치적 지배의 힘도 이 근원적인 힘에 의존한 다. 왜냐하면 내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힘은 오직 하나이기 때 문이다. 그 힘은 내 안에서 말하는 소리의 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해석도 역시 하나의 관점 혹은 하나 의 접근일 뿐이다. 심리적 해석은 두 가지 근거에서 궁극적인 대 답이 될 수 없다. 첫째로 심리적 해석은 다소간에 무신론적인 언 어로 신들의 현실성을 기술하고 있다. 둘째로 이 해석은 신화적 사유의 통일성을 파괴하고 오로지 하나의 구성 부분만을 취한다. 이 두 가지의 결함은 서로 관련되어 있고 이 두 결함의 공통적인 근거는 너무나 소박한 현대적인 사유 방식에 놓여 있다. 나는 이 두 가지를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심리적 해석은 신들의 현실성을 다소간에 무신론적 언어로 기 술하고 있다. 내가 〈다소간에〉라고 말하는 것은 언어의 의미가 일정한 범위 내에서는 그 언어를 말하는 사람에 의존하기 때문이 다. 어쨌거나 〈심리적〉이라는 표현은 신들과 신화를 단순히 주관 적인 어떤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단순 히〉라는 이 자그마한 말이, 우리가 신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신 이 우리를 창조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에게 의존한다고 말했을 15) 희 랍 신화에 나오는 물의 신. 우라노스의 장남.

때 도달했던 신들에 대한 이해를 파괴할 수 있다. 단순히 주관적 인 것은 다소간에 나 자산의 산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 〈 단순히 〉 의 심리학적 의미를 심리학자 자신의 용어로 설명하 고 싶다. 신의 가시적인 영상 B i ld 이 일종의 투영이라는 것, 즉 나 자신을 그의 거대한 힘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내 앞에 신을 세워 놓는 객관화라는 것은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렇 기 때문에 신에 대한 어떤 형상이나 비유를 만드는 것이 유대인 에게는 금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신울 다만 주관적이라고 기술함으로써 나는 역시 신을 객관화할 뿐이다. 이제 나는 신의 힘을 물리적인 가시성의 차원에서 의부로 투영하지 않고 이른바 심리적인 사실의 차원에서 내부로 두영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신이라 불렀던 이 힘이 심리학으로 해소될 수 있다면 나는 이미 이 힘을 더 이상 다루지 않겠다. 사실 마침내 우리는 의사들과 정신과 의사를 갖고 있지 않은가 ! 이제 그 결과가 제시될 것이 다. 심리적 해석은 아마도 신의 현실성을 과학시대에 있어서의 언 어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나의 첫번째 강 의가 옳았다면 이 과학시대의 언어는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내 가 여기에서 철학적 개념을 도입하고자 · 한다면 나는 이미 객관적 현실과 주관적 현실, 물질과 사유, 그리고 사실과 표상 Vors t ellun g의 구별이 신화적 사고의 해석에 있어서 우리에게 이 중적인 언어롤 강요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 구별 의 철학적 중요성에 대한 나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는 나의 두번 째 강의 시리즈를 참조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말하자면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고 있는 대로의 의식, 주체 성, 심리학과 같은 단순한 개념들은 이미 신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러 차례 의식 Bewu /3t se i n , Mi nd

대신 영혼 Seele, soul 이란 말을 사용했다고 할지라도 아마도 나는 혼란을 줄이지 못했을 것이다. 의식 대신 영혼이란 말을 사용함 으로써 나는 근대적 사유와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의 표현을 중세 적 사유와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이상학의 표현으로 대치시켰다. 그러나 신화는 과학 이전의 것일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 이전의 것이기도 하다. 이제부터는 두번째 문제점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 심리적 해석 은 신화의 통일성을 깨뜨린다. 그것의 상대적 진리는 물리적 해 석과 정치적 해석을 적지 않게 참된 것으로 만든다. 일단 뭔가 복잡한 정치적 측면들을 제의해 본다면 신화는 그것이 영혼의 역 사를 설명하는 것과 똑같은 어조로 자연의 역사룰 설명한다. 신 화는 자연과 영혼의 역사를 전적으로 똑같이 위대한 드라마로 현 시한다. 물리적 해석 내부에 있어서까지도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있어 서는 상이할 수도 있는 측면들의 그와 같은 통일성을 고찰한 바 있다. 죽 동일한 서사시가 세계의 창조라고 하는 일회적 사건을 찬미하면서 동시에 봄이 겨울을 이건 항상 되풀이되는 사건을 찬 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화적 사유에 있어서 이 둘의 사건이 본 질적으로 동일한 것임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현대 과학은 되 풀이되는 사건을 보편적 자연법칙에로 환원한다. 현대 과학은 세 계의 시초와 세계에서 되풀이되는 사건들 사이에, 이제 저 일회 적인 시초의 사건을 항상 되풀이되는 사건과 동일한 자연법칙을 적용하여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하나의 우주생성론을 통하여 다리 롤 놓으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이론의 예들을 우리는 나중의 강 의에서 언급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신화적 사유는 보편적 범주 둘을 가지고 일하지는 않는다. 신화적 사유는 확실히 사건들의 반복에 주목하고 그것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말로 기술한

다. 그러나 신화적 사유는 우리가 보편적인 자연법칙을 통하여 기술하려는 것의 본질을 일회적인 사건의 역사를 이야기함으로써 현시하려고 한다. 신화적 사유는 심지어 인과개념을 우리들의 것 과는 반대로 뒤집어 놓는다.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저 최초의 사 건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에 이미 보편적 법칙이 적용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화에 있어서는 사건이 언젠가 한 번 일어났기 때문에 그것이 매년 되풀이될 수 있다. 마르두크가 티 아마트를 일단 한 번 이겼기 때문에 봄이 매년 겨울을 이길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신이 법칙의 타당성을 나타 내는 것이 아니라 법칙이 신의 위력을 알려 주는 것이다. 우리는 물리적 해석과 심리적 해석의 통일에 대해서도 유사하 게 판단해야 한다. 신화적 사유는 물질과 의식,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여기에서 신화적 사유는 이웃 사람에 대한 우리 고유의 비반성적인 이해와 구별되지 않는다. 자기 아이가 우는 것을 보고 있는 어머니는 눈물 속에 아이의 슬픔이 나타나 있음을 안다. 눈물과 슬픔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나중에 사유 된 확인 Fes t s t ellun g이 다. 가령 여 러 분이 내 가 말하는 것을 듣고 이해했다면 여러분은 내 말 속에 나타난 사상을 듣는 것이다. 말 과 사상이 다르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나중에 사유된 확인이다. 누가 그런 확인들을 한다면 그는 이해의 여지롤 방해할 수 있다. 눈물 속의 슬픔을, 말 속의 사상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주 쉽사 리 그러한 생각(물질과 의식,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키는 생각-옮 긴이)을 하게 된다. 아마도 여러분이 저 전-반성적 정신상태를 의식적으로 견지할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영혼의 커다란 힘들이 동시에 세계의 커다란 힘으로서 경험될 수 있었는지를 이 해하게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겠다. 다음 강의

에서는 신화들에 대립되는 하나의 신화, 반-신화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는 성서의 창조사를 다루게 될 것이다•

제 3 강 구약성서에서의 창조 두번째 강의에서는 신화를 다루었다. 아직도 여러분들에게는 그것의 거칠고도 놀라운 소리가 귀에 쟁쟁하고, 세계를 생성케 한 신들의 살육 드라마가 눈앞에 선하리 라 믿는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 모두에게 잘 알려진 텍스트에 다시 한번 완전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귀기울여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나는 정확성을 추구하여 신성하고도 고풍스러운 음조를 피하고 있는 금세기의 번역판을 선택하고자 한다.1)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땅은 혼돈스럽고 공허하며, 어둠이 태초의 바다 Urmeer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이 물 표면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1) 바이츠제커는 게하르트 폰 라트 Gerhard von Rad 의 독일어판 구약성서 Alte s Testa m ent Deuts c h, Bd. 2. Gt itting en 1949 ff를 사용하고 있다. 이 번역에서는 독일어를 한글 성서 최신판인 대한성서공회의 성경전서 표 준새번역 (1993) 을 참조하여 옮겼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니 빛이 생겼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셔서, 빛을 낮 이라 하시고, 어둠울 밤이라고 하셨다. 이렇게 해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물 한가운데 창공이 생겨, 물과 물 사이 가 갈라져라 하시니 그렇게 되었다. 하나님이 이처럼 창공을 만드 시고서, 물을 창공 아래에 있는 물과 창공 위에 있는 물로 나누었 다. 하나님이 이 창공을 하늘이라고 하셨다. 이렇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튿날이 지났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 곳으로 모이 고, 마른 곳은 드러나거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이 이 마 른 곳을 땅이라 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보시 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여라. 씨를 맺는 식물과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가 그 종류대로 땅 위에서 돋아나게 하여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이렇게 땅은 푸른 움을 돋 아나게 하고, 씨를 맺는 식물을 그 종류대로 나게 하고 씨 있는 열 매를 맺는 나무를 그 종류 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사훔날이 지났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창공에 빛나는 것둘이 생겨서, 낮 과 밤을 가르고, 계철과 날과 해를 나타내는 표가 되어라 하셨다. 하나님이 빛나는 것들을 하늘의 창공에 두시고 땅을 비추게 하시 고, 낮과 밤을 다스리게 하시며, 빛과 어둠을 가르게 하셨다. 하나 님 보시기에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나훔날이 지났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물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고 새들은 땅 위 하늘의 창공으로 날아다녀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이 커다 란 바다 침승들과 물에서 번성하는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 대로 창조하시고 날개 달린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하 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아 이들을 축복하여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여라. 새들도 땅 위에서 번성하여라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닷샛날이 지났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 집짐승 과 기어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은 둘짐승을 그 종류대로, 집짐승도 그 종류대로, 둘에 사는 모든 길짐승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와 비슷하게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 땅 위에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 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 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하나님 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땅 위에 있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있 는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들이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될 것이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에 사는 모든 것, 곧 생명울 지닌 모든 것에게도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것으로 준다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 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 이 지났다. 이리하여 하늘과 땅은 그의 만물과 더불어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이렛날까지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 에서 손을 떼고 쉬며 이 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창조 하시던 일을 마치고 그 날에 쉬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늘과 땅이 만들어질 때의 창조사이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들리는지요? 여기에서도 역시 역사가 이야기되고 있다. 여전히 우리는 신화 의 세계에 있으며, 과학은 아직도 하늘의 축제를 부수지 않았다. 여기서도 여전히 신은 인간이 행동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인간의 말로 인간에 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이제까지 다룬 설화들과는 매우 다 른 것 갇다. 성서의 이야기는 끝없는 서사시가 아니고 짧게 잘 정리된 보고이다. 신들의 살해, 바다용, 쳐죽임을 당한 적으로부 터의 세계 건설과 같은 말이 없다.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항하지 않는 신이 집을 짓듯이 세계를 만들고 정원을 정리하듯이 땅을 정리하였다. 문체는 분명하고 간략하며 밀도가 있다. 이는 또 시 문 Poes i e 이 아니라 간단한 산문 Prosa 이다. 확실히 이 문체는 축 제적이다. 그러나 이 축제성은 사상의 투명한 밝음이 나타내는 축제성이다. 이것이 이 문체의 힘이며, 이 힘으로 인해 그것은 그 이후 2 천년 이상 이성의 사유를 함께 형성 m itp ra g en 하였다. 내용도 문체가 보이는 것과 동일한 특칭을 보여준다. 여기서 세계는 이해할 수 있는 전체로서 파악되고 있다. 설화

의 구상은 완전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6 일은 소박하게 꾸며낸 것이 전혀 아니다. 죽 6 일은 내용상의 구성 수단인 것이다. 확실 히 사람들은 이 6 일을 문자 그대로 믿어 왔다. 그러나 바로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그에 따라 우리가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을 구 분하는 범주들을 신 스스로가 창조했다고 믿었다. 〈 그 종류 대 로 〉 라는 되풀이되는 표현에서 나타나는 분류에 대한 관심은 매우 특칭적인 것이다. 아마도 신화적 세계상의 요소들 또한 여전히 곳곳에서 사용되 고 있다 할 것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이를데면 단지 건축자재로 서만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신화가 맞아 죽은 늙은 신들 의 시체로부터의 세계 건설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 여기에서 는 신화 자체에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성서)설화의 많은 표현 들에서 여러분은 신들이 곧 세계인 그런 신화적 신들에 반한 의 도적인 논쟁을 감지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성경의 이야기에도 다음과 같이 역시 최초의 혼돈이 자리하고 있다. 〈땅은 혼돈스럽 고 공허하였다 〉 그런데 테홈t ehom, 곧 태초의 바다는 언어적으 로 티아마트와 동일하다. 그러나 혼돈이 스스로로부터 신을 만들 어 낸 것이 아니라 〈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신이 최초에 존재하였으며, 우리는 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을 수 없는 것이다 .2) 천체들이 빛이 있은 뒤 한참이 지난 넷째 날 에 창조되었다는 것은 지상의 빛이 태양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순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본질성으 로서의 빛과 다음과 같은 사실, 죽 실제 세계에 있는 또 다른 빛 2) 신들의 신화는 맞아죽은 늙은 신들의 시체로부터 세계가 만들어진 것 처럼 유에서 유를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세계의 건축자료가 이미 신화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신화는 유에서 유가 아니라 더 - 이상-말할-수-없음에서, 죽 무에서 세계가 창조된 것임을 보여준다.

의 원천들과 더불어 가장 거대한 빛의 원천으로서 태양과 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개념적으로 분명하게 구분해 주는 것이다. 여 기에서 바빌로니아의 천체숭배종교 Ges ti rnere ligi on 는 거부된다. 나는 〈 태양 〉 과 〈 달 〉 이라는 명칭이 신둘의 이름이기 때문에 언급 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설명을 받았다. 이 두 〈 빛 〉 은 신들이 아니 고 세계를 비추고 날과 사계절을 나누는데 쓰이는 등불인 것이 다. 다른 신화들과의 이러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이 설화는 모든 신 화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것들보다 더 엄격한 의미에서 성스러운 역사이다. 이 설화가 학문이라면 그것은 신학이다. 설화의 중심 은 세계가 아니고 신이다. 세계의 질서는 오직 세계가 신에 의해 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만 이해하게 된다. 그렇다면 누가 이러한 역사를 기술했을까? 금세기의 성서비판 학은 「창세 기 」의 이 제 1 장을 이 른바 사제 문서 Pr i es t erschr ift에 속 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은 후에 모세 오경이라고 불리게 된 저작 의 세 가지 방대한 문헌자료들 중에 가장 나중의 것이다. 이 글 이 기원 전 6 세기 경 유대인들의 바빌로니아 포로생활 시절에 쓰 였다는 가정은 상당한 근거가 있다. 수세기 동안 이 텍스트가 완 만한 형성을 겪게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보 는 대로의 텍스트는 헤시오도스의 것보다 나중의 것이며 마르두 크와 티아마트의 찬가에 대한 가장 나중의 대대적인 편집보다 뒤 늦은 것이다. 분명히 이 (「창세기」 일장의) 저자들은 마르두크와 티아마트에 대한 찬가를 알았을 것이며, 자신들이 그 찬가에 모 순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네부카드네자르 Nebukadnezar 왕(바빌로니아의 왕 기원전 604?-561?, 성서 「열왕기」 하 24-25 장의 느부갓네살 왕을 가리킨다 ―옮긴이)이 후기 바빌로니아 왕국을 부흥시키던 시기의 지식인

들의 의식은 그들의 사제들이 여전히 예배드리고 있었던 오래되 고 존귀한 찬가의 정신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고 〈 근대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성서의 합리성을 다만 성서가 쓰인 후기 바 빌로니아 문화의 개화된 성격과의 접촉으로만 돌린다면 우리는 성서적 창조사의 축제적 전면목을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나 는 한 민족의 개화는 그들 신의 보호 밀에서 번성하고 또 그 신 들과 함께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의 이 성서 덱스트는 합리적인 세련화의 불안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개념도 들어가지 못하지만 아마도 신들의 형상과 목소리는 스며들 수 있는 영혼의 깊은 힘들과의 여전히 깨어지지 않은 화 평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태인들은 다른 산을 갖고 있 었기 때문에 세계를 바빌로니아 사람들과는 달리 생각할 수 있었 다. 결국 유태인의 신은 기독교도들의 신이 되었고 유태인의 신 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근대 유럽을 이해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신은 누구인가 ? 신들의 보호 밀에서 사는 모든 민족들에게 그 신들이 잘 알려 져 있었던 것처럼 이 성서 설화가 그들을 위해 쓰여졌던 경건한 유태인에게 이 신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태인의 하나님, 곧 야훼는 다른 민족의 신들과는 다르다. 유태 민족은 그들 신을, 그들 자신의 말로 표현한다면, 아브라함의 하 나님, 모세의 하나님, 예언자들의 하나님으로서 알고 있었다. 우 리는 이 세 이름을 해석해 내야만 한다. 아브라함은 믿음, 모세 는 율법, 예언자들은 심판을 말한다. 이 세 가지 모두는 동시에 신이 자신의 민족과 계약한 약속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브라함은 믿음이다. 신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었다. 〈너는 네

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너에게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 (「창세기」 12, 1). 이것은 가족과 친척 그리고 마울이 인간의 유일한 보호소를 의미하는 그 당시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신이 말하는 것 을 여기에서 지금 듣고 행한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그 이후 신앙 Fid e s, 곧 믿음을 의미한다. 신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 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기」 12, 2-3). 약속은 미래에 있다. 나는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서 믿음 생활을 해야만 한다. 나 는 인간에 의해서 묘사된 모든 것 중에서 이삭의 희생만큼이나 믿음이 요구하는 것의 끔찍스러운 예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약 속은 남아 있고, 이삭은 살 수 있었다. 〈 아브라함이 주를 믿으 니, 주께서는 이룰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세기」 15, 6). 모세는 율법이다. 이미 아브라함에게서 다른 여러 민족들 중의 유태 민족의 고독 E i nsamke it이 구현되어 있다. 모세는 이방 민족 중에서 성장한 종족들을 신이 그에게 명령한 율법을 통하여 하나 의 민족으로 만든다. 신은 그가 민족과 맺은 계약에 의해 한 민 족을 창조한 것이다. 앞으로 이 민족은 신과의 계약을 지킬 때, 그리고 오로지 그 때에만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은 분리의 신으로서 밝혀진다. 그는 율법을 가지고 있는 민족을 율 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민족으로부터 떼어 놓는다. 이렇게 해서 선과 악의 분리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첨예한 구별은 인간 이 많은 다양한 신적인 힘들에 봉사할 수 있는 다신교에 있어서 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 구별은 아직 추상적인 윤리성 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선하다는 것은 신과의 계약을 유지하는 것이고 이것은 생명을 의미한다. 악하다는 것은 신과의 계약을 깨뜨리는 것이고 이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예언자들은 심판이다. (이 경우에도) 선하다는 것은 생명을 의 미하고 악하다는 것은 죽음을 뜻한다. 물론 삶에 있어서 의적으 로 드러나는 모습은 다르다. 예언자들은 기꺼이 보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깊은 진리에 대한 눈을 열어 준다. 예언자들은 그러한 일을 모든 것이 어떤 일정한 역사적 순간마다 그 순간을 위해 이 루어져야 할 의미 있는 것인 것처럼 행한다. 그들의 가르침은 국 가의 정치적 몰락이 있을 때에 이루어졌다. 그들은 이 사건을 신 의 칭벌로 이해하도록 민족을 가르친다. 이 사건을 쓸모 없는 참 회 설교자에 있어서와 같이 단순히 의부적 인과관계로 죽 의인적 (擬人的) 징 벌 an t hrop omor p he Z ti ch~ igu n g로 이 해 한다면 그것은 너 무 경솔한 것이다. 그러한 비유적인 말을 예언자들은 사람들이 청종(聽從)하도록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본래 그들은 계명 으로부터의 이탈 그 자체가 죽음이라는 사실을 보고 또 가르친 다. 계명으로부터의 이탈은 우리를 생명의 원천으로부터 떼어 놓 는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 심판이 다음과 같은 약속의 의미를 분명히 해준다. 〈너희가 믿음 안에 거하면 너희에게는 신이 함께 거할 것이다〉 약속은 성취되었다. 모든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유태 나라도 망했다. 그러나 다른 어떠한 민족과도 달리 유태 민 족은 그들의 국가적 형태가 붕괴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살아 남았 다. 창조사는 이런 모든 것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논가? 구약성서 는 이 민족을 위해 기록된 이 민족과 신의 계약의 역사이다. 이 렇게 자기 스스로를 이해하고 있는 민족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계약의 신을 가지고 있는 자는 그밖에 다른 신들을 가질 수 없다. (너는 나 의에는 다 론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라는一옮긴이) 첫째 계명은 유태 민 족의 삶이 그 조건 하에서만 가능하게 되는 조건이다. 따라서 다

른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그 신들이 그들의 민족들 안에서 날마다 활동하고 있음을 본다. 그 들이 활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 모세나 다윗 시대의 민족과 같이 신화적인 세계 속에서 사는 민족은 거의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야훼는 질투하는 신이다. 그러나 다른 민족 과의 실제적인 차단은 불가능한 까닭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배 생활을 통해 그 다른 민족들과 뒤섞여짐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다른 민족들의 신들을 구명하지 않은 채로 놓아둘 수는 없다. 우 리의 신에 대한 관계가 바로 선과 악, 삶과 죽음울 결정하며, 그 래서 오칙 우리의 신만이 참된 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발전은 역사적으로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은 인식의 전보이기 도 하다. 왜냐하면 유태인에게는 자기들과 신과의 계약을 통하여 자기들 유태인에게 주어진 것과 같은 삶과 죽음, 그리고 그와 더 불어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을 다른 민족들이 갖고 있지 않다는 사 실이 잘 알려지기 때문이다. 하나의 신에 대한 믿음이라는 무서 운 요구가 유태 민족을 기형적인 다신교와 같은 상대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이러한 요구는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도달될 수 없는 윤리적 인식을 유태 민족에게 가져다 주었다. 사실이 이렇다면 유태인들은 전세계를 하나의 참된 신으로부터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신은 역사적 계약의 신이다. 그렇다 면 세계의 모든 것은 본래 이 계약의 역사이어야만 한다. 이렇게 해서 유태인들은 처음으로 세계를 역사로 이해하였다. 창세기는 태곳적에 대한 생각해 볼 만한 모든 지식들을 이 역사의 신학 Theolog ie der Gesch ic h t e 으로 짜맞춘다. 아브라함과의 계 약 이 전 에 노아와의 계약, 아담과의 계약이 나타나는데,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단지 유태 민족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울 포괄하는 것이 다. 그리고 이런 모든 계약 체결 이전에 유일하게 참된 신의 상

과 조화되는 우주 생성의 상이 나중에야 나타난다. 창조사는 신 과 인간 사이의 계약의 역사를 위한 무대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를 설명한다. 이로부터 창조사의 간명한 형태와 그 내용이 설명된다. 즉 처 음에 야훼는 혼돈의 폭풍과 천둥의 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제 그에게 있어서는 심지어 판데온에서의 하늘의 지배자의 역할, 마르두크, 제우스 혹은 오딘 Od i n 의 역할마저도 너무 적다. 그는 세계로부터 솟아 나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그 이의 에 다른 신들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그를 빛 의 신 Li ch tg o tt he it e 記 2 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빛이 아니며, 오히려 그가 자신의 첫 작품으로 빛을 창조하는 것 이다. 신화적 신들과는 달리, 그리고 「창세기」 2 장의 더 오래된 좀 더 시적인 보고와도 달리 야훼는 세계와 인간을 장인이 재료 롤 가지고 물건을 만드는 것과는 다르게 창조했다. 그는 오로지 그가 유태인의 생활에서 작용하는 방식 그대로, 죽 그의 말씀을 통하여 창조한다. 〈그리고 신이 말씀하시기를 ·… •• 이 되어라 하 니 그대로 되었다〉 이제 신이 모든 것 위로 높여졌기 때문에 세 계의 모든 것은 동일한 종류의 것으로 된다. 죽 그것은 피조물이 지 신이 아니다. 아렇게 해서 세계는 바로 신으로 인하여 탈신화 (脫神化)되었다. 우리 시대에 사람들은 흔히 탈신화화(脫神話化) 에 대하여 말한다. 만약 신화가 신들 Go tt er 의 지배하에 있는 우 리의 사유라면 바로 신 Go tt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사유를 구약이 쓰여진 시대로부터 탈신화화(脫神話化)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성서적 창조사를 반신화적 신화라고 불렀던 것이다. 우리는 이 과정을 기독교를 통하여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추적해야 할 것이다. 세계의 모든 것은 피조물이다. 그러나 하나의 피조물, 죽 인간

은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나다. 그는 신의 형상울 따라서 창 조되었다. 인간의 형태를 띤 신의 형상이 이러한 사상을 역사상 처음으로 가능하게 하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 사상은 무엇을 말 하고 있는가 ? 물신 (物神, ein Feti sc h) 은 물로서 그것 이 곧 신이 며 또한 신적이다. 동물 형상의 신들에서는 동물적 영혼의 힘이 구현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책임 있는 인격으로 이해할 줄 아는 인간은 인간을 인격으로 만드는 것을 인간의 형상을 한 신 안에서만 직관할 수 있다. 구약의 신은 내게 말을 건넨다. 그는 나에게 너라고 말하며,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당신이라고 말한다. 인격적인 신은 인간을 인격으로 만들었던 신이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다〉(「이사야」 43, 1.) 유태종 교는 결국 신에 대한 우리의 모든 관계를 이 말건넴과 귀기울임 으로 한정했다. 인간과 유사한 신의 조형물 B il dn i s 은 감추어지거 나 금지되어 있다. 죽 신을 보는 자는 죽어야만 한다. 우리가 나, 너, 그리고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들 인간은 바로 그 접에서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 에 신은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룰 조금 덜 신화적으로 생각해 보자. 이를테면 신을 믿는 자는 신들 에게 더 이상 예속되지 않는다. 신들은 우리 안과 바깥 세계의 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을 믿는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자유로 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유태인과 기독교인은 이 자유의 증인들인 순교자를 갖고 있다. 신들로부터의 자유, 믿음을 통한 생각의 탈 신화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의 한가운데서 형성적 지배 ges ta l te n de Herrscha ft를 가능케 해 준다. 나는 오칙 이 배 경 하에 서만 우리가 근세의 세속화와 과학 신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 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나중의 강의들에서 다시 취급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있을 수 있는 위험한 오해에 들어 서 고 있다. 우리가 유태인과 기독교인의 신을 신화의 신들로부터 그렇게 분명히 구분함으로써 우리는 파스칼이 철학자들의 신이라 고 불렀던 그런 개념에 접근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철학자들 의 신은 순수하게 정신적이고, 전지전능하며, 가장 선한 최고의 존재이고, 세계의 제일 원인이다. 우리는 후기 유태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의 신에 대한 철학과 신학을 읽을 때마다 어떤 의 미에서든 바로 위에서 열거한 속성들을 통해 기술될 수 있는 신 의 개념을 발견한다. 그러나 구약의 신이 그러한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은 대 단히 중요하다. 신의 하나의 개 별적 인 속성 인 신의 영 성 (靈性, die Sp iritu- ali tat) 에 대 하여 생 각해 보자. 실로 구약은 하나님 의 영 der Geis t Go tt es 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물질과 대립되는 비물질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서는 물질 개념을 알지 못 한다. 구약에서의 영은 입김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텍스트의 두번째 시행에서의 루아흐 엘로힘 ruach Eloh i m 을 〈하나님의 영〉 대신에 〈하나님의 거센바람 e i n Go tt ess t urm 〉으로 번역할 수 있다. 울리는 단어도 역시 입김 Hauch 이다. 모든 동물과 인간은 숨쉬는 동안에만 산다. 그러므로 내가 말할 수 있게 하는 호흡은 나의 생 명 이 다. 곧 호흡은 나라고 하는 인격 의 육체 성 des S i nnl ic he 인 것이다. 그리고 신의 영은 신적인 생명이며, 이 신적인 생명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을 초월하여 신의 말씀을 말하고 신의 행위를 행하는 것이다. 그 스스로가 영성주의자 S pir it ua i s t둘이었던 후기의 신학자들은 그들의 영성주의를 구약의 해석에 끌어들였다. 그들은 성경이 전 리라고 한다면 자신들에게 진리로 보이는 것을 포함해야만 한다

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역시 좀 더 비판적으로 생각 한다면 구약의 신의 형상에서 모든 신화적 요소를 배제한 뒤에는 형이상학적인 신학이 말하는 가장 완전한 존재가 남게 되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그러한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는 신에 대한 모순 없는 개념이 아니라 하 나의 역설 Paradox 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창조사에서 볼 수 있다. 창조사는 성서 중 에서 합리적으로 가장 완벽한 부분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창조 사가 다른 성서의 이야기들보다 비교적 뒤에 정착되게끔 했던 사 유 과정을 추적하려고 시도해 보았다. 창조사의 이러한 합리적 완결성이, 우리가 나중에 다시 언급해야 하겠지만, 그것을 형이 상학적 신학의 가능한 출발점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바로 이 합 리적 완결성이 창조사를 성서의 단순한 전전 초소로 만들어 놓는 다. 창조사는 계약을 위한 무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묘사하 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뱀이 나타나기 전에는 무대장면은 불완 전하다. 인간의 타락의 역사는 실로 1 장의 창조사보다 더 오래 되었고 또 신학적으로도 더 중요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우리가 만일 단지 창조사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어디에 서 있다는 말인가라는 물음 때문이다. 창조사는 어떻게 모든 사물들이 전능 하고 선한 신에 의하여 만들어졌는가를 알리는 것 갇다. 사람들 은 이 창조사를 적어도 나중에 이미 그 속에서 무로부터의 세계 창조 creati o ex n ihi lo 가 주장되고 있는 것으로 이 해 하게 되 었다. 신이 만든 모든 것은 좋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신의 의지의 실현으로서 단순히 진행하는 세계 역사 이의에 무엇울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어떤 철학자도 실제의 세계 역사를 그렇게 파악할 수는 없었으며 또 분명히 이것이 성서의 의도는 아니다. 성서에서의 신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신이다. 선은 그가 만든

것이며 악은 그가 만든 것이 아니다. 죽 악은 그에 의해서 내쳐 전 것이다. 그러나 악은 실제적인 것이다. 인간은 계속해서 악을 행한다. 세상온 실제로 그렇게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 신화 다음에 타락의 신화가 뒤따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창 세기」 3 장에서 이 신화를 이야기하는 위대한 시인은 어디에서 뱀 의 간지 (好智)가 왔는지를 말하지 않음으로써 깊은 이해를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자신이 말할 수 있는 만큼은 정확하게 말하고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어쨌든 아담과 이브의 타락 과 더불어 비로소 처음부터 인간과 신 사이의 투쟁인 바의 역사, 곧 실제의 세계사가 시작된다. 인간 자신은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며, 날마다 그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있다. 역사룰 움칙이 는 인간과 신의 대화는 오로지 이 이탈의 회복만을 중심 문제로 삼고 있다. 계약은 이 투쟁에 있어서의 한 행위이다. 신으로부터 의 이탈은 죽음이고 신이 나에게 말을 걸 때 그는 나를 생명에로 부른다. 믿음은 이 부름에 대한 신뢰 의에 아무 것도 아니다. 마지막 명제에서 나는 이 문제에 대한 성서의 전정한 의도를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아마도 이 생각은 오늘날까지도 그 어떤 신화의 도움 없이는 결코 표현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생 각이 언젠가 달리 표현될 수 있을 것인지롤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누가 모순의 회피나 조화를 이유로 신과 인 간 사이의 이 투쟁을 그립 B il d 의 중심에서 제거하게 된다면 그는 유태교와 기독교가 근거하고 있는 신에 대한 체험을 그의 생각 속에서 배제하게 될 것이라는 접이다.

제 4 강 그리스 철학과 우주론 그리스인들도 유태인들과 마찬가지로 신화의 집을 떠났다. 그 러나 그들은 다른 문을 통하여 이 집을 떠났고 그 뒤 다른 길을 걸어 갔다. 세계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물음은 그들의 사유에서 세계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전환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결 국 최고의 지혜는 살아 있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존 재자의 불변적 본질을 보는 것이었다. 탈레스 Thales 는 모든 사물의 시초는 물이라 가르쳤다. 그렇게 아리스토텔레스 Ar i s t o t eles 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것은 하나의 우주생성론인가? 밀레토스의 탈레스는 그리스 철학의 역사 및 그리스 수학의 역 사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첫번째 이름이다. 그는 기원 전 6 세기 전반에 살았으므로, 헤시오도스보다 약 백년쯤 후대 사람이고 성 서의 창조사를 기술한 유태인 사제와는 아마도 동시대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학식이 풍부했고 확실히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이었

큰 상사의 상속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내게는 무척 홍미롭다. 이 를데면 19 세기 함부르크의 상인처럼 그를 한 상사의 설립자로서 가 아니라, 세계를 관조할 수 있고 그의 그리스적 성격인 무한한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돈과 여유를 갖고 있는 어쩌면 한 삼 세대쯤 된 상사의 소유자로 생각하는 것은 홍미롭다는 것이다. 그는 사색적이었다. 훗날의 일화에 의하면 한번은 그가 걸으면서 하늘을 관찰했는데 그만 웅덩이에 빠져 버렸다. 이것을 본 아낙 네들은 하늘은 보면서도 자기 발밀에 있는 것은 보지 못한다고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다른 일화에 의하면 그는 현실주의자로서 도 역시 명성을 떨쳤다. 그는 일식을 바르게 예측했을 뿐만 아니 라 날씨도 또한 바르게 예측했던 것 같다. 그래서 가령 그는 기 름 수확이 좋을 것을 미리 알고 채유기(採油器)를 한 계절 먼저 사 모아 큰 이익을 남겼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탈레스에게서 처음 나왔다고 이야기하는 아 르케 arche( 원질)라는 말은 시원 An fa n g을 의미한다. 이 단어의 동 사 아르케인 arche i n 은 모든 관점에서 죽 어떤 것을 시작한 자로 서, 그러나 또한 지배자로서 제일인자 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탈 레스가 이 말을 시간적 시원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 사용했다면 그것은 놀랄 만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시원이 물이라면 탈레스는 바빌로니아의 신화 이상의 별다른 것을 말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압수와 티아마트 역시 물이다. 그리고 학식 있는 소아시아인이었던 탈레스는 그 당시의 가장 거대한 문화국가 가운데 하나의 견해롤 알아야만 하지 않았 을까? 또한 탈레스의 생각에 따르면 전체 땅덩어리가 나뭇조각 과 같이 물 위에 떠 있고 지진이 일어날 때는 그것이 배와 같이 흔들린다고 하는 것 역시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항해에 종사하 는 도시의 시민에게는 분명한 생각이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크

로노스의 형제인, 땅을 포괄하고 있는 거대한 흐름, 오케아노스 에 관한 신화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뉘앙스는 다른데, 추측건대 이 뉘앙스가 의미 하는 바는 바로 신화가 끝나고 새로운 사유가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탈레스의 시원은 신의 이름이나 하늘, 땅 또는 바다와 같은 거대하고 일회적인 세계 사물둘의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또한 생산, 분만, 수공예 또는 살인과 같은 인간의 본원 적 활동들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물은 언젠가 한 번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리고 어디에나 존재한다. 오늘날 우리는 〈 물 〉 이라는 명칭이 보편개념을 나타낸다고 말할 것이다. 확실히 탈레스의 물은 H20 가 아니다. 죽 이 물이 아직도 영혼으로부터 엄격히 분리되지 않은 생동적인 원리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화적 인과성이 전환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자면 세계는 더 이상 신적인 시원으로부터 파악되지 않 고, 오히려 무언가 세계로부터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친숙한 것이 이 세계의 시원을 좀 더 이해할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바 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따라서 시원의 개념 자체의 의미가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탈레스가 세계의 시간적인 근원을 물로부터라고 가르쳤 고, 그래서 언젠가 한번은 물 이외에 다론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한다면―—다론 질료들과 사물들은 어떻게 물로부터 생성되었을 까 ? 그 경우에 모든 사물들은 아마도 본래적으로 물〈일〉 것이 다. 물이 얼음 또는 수증기로 변화될 수 있고 이것들은 다시 물 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경험이 가르쳐 주는 바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얼음과 수증기가 본래 물이기는 하지만 그 것이 다만 고체 상태나 가스 형태의 상태로 있을 뿐이라고 말한 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물로부터 발생했다면 우리의 이해로서는

물이 근원물질 Urs t o ff로 된다. 이런 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달 레스의 이론을 이해했다. 모든 사물의 시원이 물이라는 것은 모 든 사물이 근원적으로 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세계가 어 떻게 생성되었는가라는 물음은 세계가 무엇이냐라는 더욱 심오한 물음의 자극제가 되었다. 말하자면 우주생성론에서 존재론이 나 오게된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음은 모든 사물이 물 혹은 어떤 다른 질료라는 대 답에 머무를 수 없다. 만일에 모든 것이 물이라면 〈 물 〉 은 무엇을 뜻할 것인가? 물로 나타나는 물과 물로 나타나지 않는 물을 무 엇이 구별해 주는가? 우리는 본래적 존재자를 그의 현상 형태들 Erschein u g sf o r men 중의 어 떤 하나와 혼동해 서는 안된다. 〈 모든 사물은 ……이다〉라는 우리 명제의 시작은 〈 ……물…… 〉 이라는 명제의 끝이 부적절하게 특수한, 그리고 아직도 신화적인 대답을 제시하고 있는 데 그치는 아주 심오한 물음인 것이 아닌가? 그 렇다고 하면 물에 대한 표상은 다만 존재자에 대해서 묻는 물음 의 물고기가 스스로 잡힌 낚시 바늘일 뿐이었다.1)

이 물음을 철저하게 견지했던 철학은 대체로 우주생성론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철학이 우주생성론으로 되돌아갔을 경우 철 학의 우주생성론은 이를테면 존재자를 이해하기 위한 자기 나름 의 신화였고 이러한 이해를 설화적 역사 속에서 서술하는 것이었 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 우리는 우주생성론을 그 안에서 해 석된 존재론과의 연관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빠르고 대략적으로 또 이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피상적인 방법으 로 그리스 존재론에로의 도정을 추적해 보아야만 한다. 사물들은 어쩌면 물일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차라리 물이 아 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물들은 어떤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들

1) 옮긴이 해설 참조.

은 무엇인가? 도대체 〈 어떤 것임 〉 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사물들은 어쨌든 있다. 존재자는 있다. 존재자는 무엇인가? 또한 존재는 무엇인가? 이런 물음들이 철학자들에 의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엘레아의 파르메 니 데스 Parmenid e s 단언들 속에 서 더 욱 더 확고해 져 왔다. 나중에 사람들이 문제라고 부르는 것이 종종 처음에는 일정한 긍 정적인 언명둘의 형태로 역사의 빛 안으로 나타난다. 이 언명들 의 진리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후기의 반성은 언명들이 도대체 무 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문제를 발전시킨다. 이것은 특별히 파르메 니데스의 아주 추상적인 명제들에 대해 적용된다. 오늘날에 이르 기까지의 철학은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점차 확대되어 간 해석으 로 파악될 수 있다. 나는 파르메니데스에 관해 명료한 해석을 시도했던 고대 철학 자들이나 현대 문헌학자들보다 더 유능함을 보이려고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파르메니데스 교훈시의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 단편둘로부터 몇 가지를 인용함으로써 어떻게 이 이론이 후기 철 학의 문제로서 계속해서 영향을 주었는지를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제시해 보고자 한다. 번역에 있어서 나는 언명들의 수수 께끼 같은 술어의 축약을 그대로 놓아 둠으로써 너무 성급한 해 석을 통하여 그것들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고자 한다. 자, 그대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어떤 탐구의 길 만을 생각해야 하는지, 하나는 있다(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없는 것 (비존재)은 있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네. 2)

2) 아래에 이 문장을 저자가 독일어로 옮긴 대로 소개함으로써 독자의 이 해를 돕고자 한다.

이 길은 확신의 길이네, 왜냐하면 이 길은 진리를 따르기 때문 이지. 다른 하나의 길은 있지(존재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없는 것(비 존재)이 필연적으로 있다는 것이네 .3) 내가 말하노니 이 길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라네. 그 까닭은 네 가 있지 않은 것 (비 존재 자 Ni ch ts e ie n de) 를 알 수 없 기 때문이네 (그것은 실현불가능하다), 또한 너는 그것을 말할 수도 없다네.

여기에서 결정적인 것은 첫번째의 참된 길의 내용이 언표되고 있는 두 단어, 죽 〈있다는 것 da{J i s t 〉 이다. 이 〈 있다i s t 〉 는 문법 적 주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번역자는 다음과 같이 보충하고 싶 은 유혹에 빠질지도 모른다. 죽 어떤 것이 있다는 것 da{J etw as ist , 존재자가 있다는 것 da{J Seie n de ist , 다만 존재자만이 있다는 것 da /3 nur Seie n de ist , 존재가 있다는 것 da {J Sein ist 등으로 말아 다. 파르메니데스가 무엇인가 이러한 보충의 의미에서 말하려고 했다면 그는 그것을 말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곧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그리고 없는 것(비존재)은 있지 (존재하지) 않다는 것〉• 그러나 비존재자가 있다는 것을 가정하 는 사유의 길들은 오류이다.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존재는 생성 Werden 에 어떻게 관계되는 가? 말할 수 있는 하나의 남은 길은 있다는 것이네. 존재자가 불생, 불멸이라는 정표는 아주 많다네. 존재자는 완전히 짜여져 있고 요동치 않으며 더 채울 것이 아무

3) Der andere, dap nich t ist, und dap notw endig ist Ni ch ts e in .

것도 남아 있지 않다네. 그것은 과거에 있던 것도 아니요 앞으로 있게 될 것도 아니네. 왜냐하면 존재자는 지금 함께 전체이고 하나로 뭉쳐 있기 zusammenhalte n d 때문이지. 그대는 거기에서 어떤 근원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 어떻게 무엇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단 말인가? 그대는 그 것 이 비존재 자 N i ch t se i ende 로부터 생 겨 났다고 말하거 나 생 각해서는 안 되네. 왜냐하면 있지 않은 것은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기 때 문이지. 어떤 불가피함이 존재자를 더 늦게건 더 빨리건 무 N ic h t s 와 함께 시작하여 자라게 했을 것인가? 그러므로 존재자는 온전하게 있거 나 아니면 전혀 없거나 해야 하네. 그리고 비존재자로부터는(확실성의 힘이 그렇게 말하리라) 이것 자체 이의에 다른 어떤 것도 생성될 수 없다네……. 현상의 변화 속에서 동일한 것으로 머무는 물이 상칭적으로 의 미했던 것이 이제는 엄격하게 사유된다. 존재자는 〈있던〉 것도 아니고 〈 있게 될 〉 것도 아니며 (지금一옮긴이) 있다. 그러므로 존재자는 변할 수도, 생성할 수도, 그리고 소멸할 수도 없다. 이 제부터 그리스 철학은 불변적 존재자에 대해서 물음을 던진다. 그러나 일의적으로 사유된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이 철학은 그 안에 들어 있는 수수께끼를 극단으로 몰고 간다. 만일 존재자가 불변적이라면 변하는 것은 존재하지 seie n d4) 않는다. 그러나 우리 세계는 변화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여 4) 〈 se i end 〉를 시간적으로 지금 존재한다는 뜻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핵심 적인 내용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은 현재의 운동, 진행 속에서 현재가 성립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기서 우리는 세계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를 묻는 것에서 출발했 다. 그때에 우리는 세계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런데 이제 도대체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존재자 가 불변적이라면 생성은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감각이 우리 에게 보여주는 생성된 것, 변화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 는가? 비존재자를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단순한 〈 억견 Me i nun g〉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말 하는 대로 말한다. 파르메니데스는 그의 교훈시의 그 대부분이 전해지지 않고 있는 후반부를 독사 Doxa, 죽 억견에 바쳤다. 여 기에서 그는 우주생성론적 물음을 다룬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의미에 있어서 억견은 무엇인가? 억견이 잘못된 생각이라면 왜 그는 그것을 서술하는가 ? 그렇지 않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는 진 리와 억견을 구별하는가? 이 물음이 갖는 긴장이 후기 철학자들의 출발점이다. 그들 모 두는 어떤 형태로든지 존재자의 초시간적 불변성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항상 변화하는 세계의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 게 해야 한다는 과제가 생겨난다. 그들은 어느 정도까지 변화가 있을 수 있는지 아니면 어떤 의미에서 변화의 세계가 참된 것이 아닌지를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말할 수 있기 위하여 먼저 그들은 자신들에 있어서 존재자가 무엇인지를 말해야만 한다. 나 는 이 문제에 대한 아주 상이한 다음의 두 개의 대답에 한정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그것은 레우키포스 Leuk ipp os 와 데모크리토스 Demokr it os 의 원자론, 그리고 플라톤 Pla t on 의 이 데 아론이 다.

*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분할 불가능한 부분들 곧 원자들로 이루어 진다. 사물들의 모든 차이는 사실상 원자들의 형태와 상태 및 운 동의 차이이다. 모든 변화는 원자들의 상태의 변화이다. 원자 이 의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항상 제기되어 온 이론으로서 아마 존재자의 본질에 대 한 가장 단순한 이론일 것이다. 우리는 이 이론의 엄청난 설명력 울 물론 근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주어질 수 있었던 한 가지 예에서 본다. 물의 얼음 또는 수증기에로의 변화는 이제 물 원자들(우리는 H20 분자들이라고 말한다)의 배열과 운동 상태의 단순한 변화이다. 얼음에서 원자들은 자기의 좌석열 에 앉아 있는 학생들과 같이 고정된 자리를 가지고 있다. 물 속 에서는 원자들이 조밀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마치 강의가 끝나고 강의실을 떠나는 학생들과 같이 서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배열에 따라 운동한다. 수증기 상태에서 원자들은 모기때에서와 마찬가 지로 서로 멀리 떨어져 제멋대로 섞이면서 날아간다. 이것은 마 치 학생들이 길에서 (원자로서는) 개별적으로 또는 (분자로서는) 작은 집단들로 집에 가는 것과 같다. 원자론의 창시자인 레우키포스는 파르메니데스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그의 유명한 제자 데모크리토스는 풀라톤의 시대에 속한 다. 헬레 니 즘 시 대 의 사려 에 의 한 만족 die klug e Z uf r i edenhe it의 철학자 에피쿠로스 E pi kuros 는 이 이론을 계속해서 이어받았고, 그는 또 원자론적 견해를 가장 포괄적으로 보존하고 있는 원전, 로마 사람 루크레 티우스 카루스 Lucre ti us Carus 의 〈사물의 본성 에 관하여 De rerum na t ura 〉라는 교훈시 속에서 원자론의 스승으로

추앙되었다. 만일 고대 원자론을 무엇보다도 우선 관찰된 현상의 해석을 위 한 자연과학적 가정으로 생각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원자론을 잘 못 이해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고대인들이 가장 뛰어난 면모를 보여 주었던 엄밀 과학인 수학과 천문학은 무엇보다도 우선 원자 론과 대립되는 학파, 곧 풀라톤 학파와의 접촉에서 발전되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고대 원자론은 하나의 철학이었다. 그것은 존재의 사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였 다. 우리는 여기서 원자론의 철학적 사상을 현대 물리학의 원자 론과의 가교를 너무 성급히 놓지 않으면서 추적해 보아야만 한 다. 이에 대해서는 두번째 강의 시리즈에서 몇 가지 더 언급하게 될 것이다. 원자론은 엘레아 학파의 문제에 어떠한 해결책을 제공하는가? 파르메니데스에게 있어서 존재자는 불변적이고 하나이다. 다수 성은 그에게는 낯선 것이다. 비존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변화 는 비존재적 n ic h t se i end 이다. 원자론은 존재자에 대한 좀 더 상세 한 규정과 함께 시작한다. 존재자는 원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자들은 불변적이다. 분할은 하나의 변화이기 때문에 원자들은 분할될 수 없다. 따라서 원자들의 분할 불가능성은 자의적인 요 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또 단지 그 이상의 실제적인 분할 불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도 분명 아니다. 분할 불가능성은 오히려 엘레아 철학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원자들(존재자들一옮긴이)이 존재한다는 데서 나타난다. 원자들의 분할 불가능성의 명제는 존 재론적 명제이다. 존재론적 사유는 불변성 대신에 단일성(單一性, E i nhe it)에서부 터도 출발할 수 있다. 존재자는 본질적으로 일자이다. 따라서 모 든 원자는,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자이다. 그것은 다수가

아니다. 죽 여러 부분들로부터 원자가 성립된 것이 아니다. 따라 서 원자들은 다시 이차적으로도 분할 불가능하다. 우리는 부분들 울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부분들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이 이론은 변화의 현실성의 문제를 적절히 해결할 수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물은 변할 수 있다. 죽 그것은 때론 얼음이 되고 때론 수증기가 된다. 그러나 물의 원자들은 불변적이며, 그것들 은 물에 있어서 유일한 참된 존재자들이다. 그것들의 형세와 운 동상태는 변한다. 이제 우리는 이 변화를 현실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어쩔지를 선택할 수 있다. 즉 변화는 현실적으로 일어나 지만, 그 변화가 참된 존재자를 변화시키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존재와 변화에 대한 역설이 사라지는 가? 또는 이 역설은 다른 형태로 다시 나타나는 것인가? 원자 론자들은 원자들을 존재자와 동일시함으로써 존재자의 유일성과 비존재자의 비존재라는 엘레아 철학의 두 가지 중심적 사상을 희 생시켰다. 하나의 존재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많은 존재 하는 원자들이 있으며, 나아가 크고 작은 원자들, 흙의 각지고 두꺼운 원자들, 그리고 불의 섬세한 원자들과 영혼의 아주 미세 하고 둥글며 모든 것을 두과하는 원자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설 명 되 어 야 할 존재 의 다수형 태 성 V i el ge s t al tig ke it에 관한 많은 것 이 원자의 다수형태라는 설명되지 않은 전제에로 끼어 들어가 있 다. 더 심각한 것은 두번째 희생이다• 데모크리토스는 분명히 비 존재자의 존재를 허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가령 그는

한 운동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원자가 운동해야 할 공간은 비 어 있어야만 한다. 원자들의 자유 운동은 빈 공간을 전제한다. 그러나 공허는 비존재자인 것처럼 보인다. 공허가 어떤 존재자라 면 원자론의 근본 전제에 따라 그것 자체도 원자들로부터 성립되 지 않으면 안된다. 물리적 성질을 갖고 있고 물리적 작용을 행사 하는 뉴턴의 절대공간 개념은 고대인들에게는 낯선 것이며, 모든 존재자가 원자라고 하는 고대 원자론의 존재론적 전제에 모순된 다. 원자론자들은 원자와 마찬가지로 공허도 존재한다고, 혹은 一좀 더 날 7 澤지만 수미일관하게 말한다면—존재자뿐만 아니라 비존재자도 존재한다고 가르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 다 시 사상의 수미일관한 관철은 역설을 자아낸다. 사람들은 엘레아 철학의 존재 이론을 일견 한 점, 곧 원자에서 보존하면서, 다론 한 점, 죽 공허에서 그 존재 이론에 정확히 모순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 이론의 바탕 자체에 역설이 수용되었다면, 그 이상의 다른 모든 설명들은 겉보기에 완전한 합리성을 수반하여 뒤따라 나온다. 데모크리토스의 저작들이 거의 모두 상실되었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여기서 제기된 문제에 대한 그의 대 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대중적인 시인 루크레티우스로부 터는 그리스 철학의 전성기를 지배했던 사유의 엄격성에 대한 이 해를 기대할 수 없다. 그는 우리의 물음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 이론에 우주생성론이 존재할 수 있는가? 원자들은 변화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은 생성될 수 없다. 그 러므로 원자의 생성으로서의 우주생성론은 배제된다. 원자들은 시초부터 있었고, 그리고 영원히 그대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 주 Kosmos 는 질서를 의미한다. 항상 지속적인 원자들의 세계에서 질서는 무질서에서 생겨날 수 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 Diog en es Lae rti us 는 레우키포스의 우주생 성 론을 아래 와 같이 전

하고있다. 〈세계들은 ·… •• 다음과 같이 생겨났다. 죽 무한자로부터 떨어져 나온 결과로 온갖 종류의 형태를 띤 수많은 물체들이 엄청나게 큰 빈 공간 속에서 움직였다. 이돌은 한데 합쳐져서 하나의 소용 돌이 운동을 일으켰다. 이 결과 그들은 서로 부딪치고 가능한 모 든 방법으로 소용돌이 쳐서 스스로 같은 것은 같은 것끼리 나누 어졌다. 그러나 그것들 스스로의 질량으로 인해서 더 이상 균형 있게 소용돌이 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들 가운데 아주 미세한 부분들은 마치 체로 거론 것처럼 의부의 공허에로 떨어져 나갔 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은 함께 남아 한데 짜 얽혀졌고, 급속히 함께 서로 한 곳으로 모여 최초의 구형 덩어리를 형성했다. 이 최초의 구형 덩어리는 그 자신 안에 온갖 종류의 물체들울 마치 표피처럼 포함하고 있었다. 이 물체들이 중심의 저항 때문에 주 위를 맴돌 때, 서로 인접한 덩어리들이 소용돌이와 접해 있는 결 과로 계속해서 함께 밀려들기 때문에 구형 덩어리를 둘러 싸고 있는 표피는 두꺼워졌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한가운데로 밀린 덩어리들이 함께 머무르므로 지구가 생겨났다. 다른 한편으로 표 피 밖에서 모여드는 물체들의 계속되는 쇄도 때문에 둘러싸고 있 는 표피는 더욱 더 두꺼워졌다. 그리고 소용돌이로 . : 인해 방향이 바뀌어전 그것이 접촉하는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이 덩어리들로 부터 개별적인 덩어리들이 서로 엉키어 처음에는 축축하고 진흙 과 같은 것이었던 구형의 덩어리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 이들이 마르게 되고 전체의 소용돌이와 함께 회전할 때 이들은 빛을 내 면서 천체들을 만들었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Di o g enes Laer- tius IX, 30 ff., 카펠레 W. Ca p elle 의 독역, 소크라테스 이전의 사상가 들Di e Vorsokrati ke r) 그러므로 원자들의 유일한 엄청난 소용돌이로부터 회전하는 천

구와 그 중앙에 정지해 있는 지구가 생겨났다고 한다. 다시 말하 자면 하늘은 표피였고 그 위에서 작렬하는 원자들의 집합체가 별 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선 나는 이러한 설명에서 사용된 천문 학에 대해서 몇 마디하고 싶다. 지구는 회전하는 천구 한가운데에 있는 하나의 구이다. 이것은 하늘의 고정된 반구가 씌워져 있는 옛날의 평평한 원반 모양의 지구 모형보다는 대단한 인식의 발전이다. 그리스인들은 일찍이 지구가 둥근 것임을 수평선 너머로 배가 사라지는 것과 월식 때 지구의 그립자가 원형이러는· 것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다음 두 번째 발전은 별들이 24 시간 동안 고정된 하늘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늘 전체가 24 시간 동안 지구의 둘레를 회전하는 유일한 하나의 구라는 사상이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그렇게 생 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상이 개별 적으로 떠다니는 별들이나 별 모형들의 표상보다 더 높은 추상단 계에 있기 때문에 옳은 방향에로의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지구에 대한 하늘 전체의 상대운동이 인정된 후에는 절대운동에 대한 가정을 전환시켜 하늘을 고정시키고 지구로 하여금 그 주위 룰 회전하게 만드는 것은 좀더 쉬운 일로 되는 것이다. 가령 아 리스타르코스 Ar i s t archos 와 같은 후기 그리스의 천문학자들은 이 러한 방향으로 전전을 이루었다. 왜 그들의 가르침이 지속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여섯번째 강의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내가 방금 위에서 구형의 우주와 지구에 대해 말한 것은 원자 론 철학자들의 시대에서는 이미 그리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아 마도 그들의 고유한 공적은 하늘의 회전운동이 오늘날의 구형의 우주와 지구보다 먼저 있었다는 생각, 죽 원자들의 근원적인 소 용돌이에 관한 이론일 것이다. 이것은 실현성이 많은 사상이었 다. 죽 우리는 이러한 사상을 데카르트와 칸트에서 그리고 금세

기의 천문학에서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또한 원자론자들은 그들 의 숙고를 이 하나의 〈 세계 〉 , 곧 우리의 지구와 그것의 하늘에로 한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한한 우주에서 무한한 수의 원자들이 위에서 기술한 방법으로 생성되고 또 원자들의 새로운 혼합으로 다시금 소멸하는 무한히 많은 세계를 형성한다고 가정히는- 것이 다. 이러한 사상을 또한 근대도 다시 받아들였다. 이러한 접에서 근세의 자연과학자들은 스스로가 레우키포스과 데모크리토스의 세계에서 고향에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전은 또한 그 뒷면을 갖고 있다. 근대 과학은 현상들 에 대한 양적 기술을 근거로 하고 있다. 즉 그것은 수학적 자연 법칙의 개념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 원자론에서 이 개념의 아무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면 위에서 기술한 우주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자. 이 사유 과정의 하나하나의 요소와 그 그림을 그리는 필치는 아주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그 필치를 이러한 그림에 적용하는 것은 그러한 사건의 필연성에 대한 전정한 자연과학적 통찰에 의해 거의 규정되고 있지 않다. 신화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도식은, 안과적으로 판단하면, 다만 〈그것은 그럴 수 있는 것이었다〉는 것이고, 다만 신의 전쟁에 대 한 드라마를 원자의 소용돌이의 드라마로 바꾸어 놓았을 뿐이다. 나는 원자론적 우주생성론을 과학의 신화라고 부르고 싶다. 이 러한 역사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믿고 있는 신은 원자의 압력과 충돌이 나타내는 맹목적인 필연성이다. 고대의 원자론은 그것이 반종교적일 때 자기 자신과 일치한다. 신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또한 단지 원자로부터 된 물체들일 뿐이다. 죽 존재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것을 계획하는 신 자신 도 우선은 원자들의 맹목적인 결합으로부터 발생되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질서의 무계획적인 생성의 가능성이 이미 증명되었던

것이고, 바로 그에 따라서 질서를 세우는 신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이 이론은 신화적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과 같은 신들을 비로소 결과에서가 아니라 이미 그 단초에서 부정한다. 만일 내 가 모든 존재자들이 그것들의 본질에 따라서 어떤 종류의 것이어 야만 하는지를 정확히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신적인 힘에 대한 신화적이거나 미신적인 울타리에서 이미 떠나와 있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이러한 완벽한 객관화는 성스러운 것의 부 정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이것은 원자론이 의도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후기 계몽주의자의 겸양을 가지고 행복한 존재로서 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며, 또한 인간의 삶을 · 신들이 거기에서는 결코 침해하지 않는, 세계들 사이에 있는 빈 공간 In t ermund i en 을 그들의 거처로서 지정해 준다. 루크레티우스는 그의 심성에 대한 종교의 지배를 저지하기 위해서 한 친구를 위하여 그의 시를 쓴 것이다. 죽 신들과 권력욕에 굶주린 사제들이 지어낸 것들인바, 죽은 뒤의 삶에서의 징벌에 대한 두려움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진행하며 죽음은 내 영 혼을 해소시키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는, 이피게네이아 I p h ig en i e5> 가 아울리스 Au li s 에서 사제들의 선임관에 의해 어떻게 희생되었 는가를 묘사한 후에 다음과 같은 유명 한 말이 나타난다.

다시 요청했을 때 이러한 반종교적 태도는 원자론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원자론은 그것이 광범위한 사상가들에 의해 다 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17 세기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 〈 그런데 내 생각에는 다음과 같은 것을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 다. 죽 생성 Werden 이 없는 항상 존재하는 존재자는 무엇이며, 항상 생성되는 것이지만 결코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은 무엇인 가? 그 하나는 사유에 의해서 파악된 것으로서 이성적인 언어에 합당한 것이다. 그것은 항상 동일한 방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억견에 의해 생각된 것으로 비이성적인 감각지각에 합당한 것이다.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은 결코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생성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원 인으로부터 생성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원인이 없으면 아무 것 도 생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제작자가 항상 동일하게 지속 하는 것을 하나의 본으로 보고 그것의 형태와 힘을 그대로 · 모방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완성할 것이다. 그러 나 그가 만일 생성되는 것을 바라보고 생성된 본을 사용한다면 그의 작품은 아름답지 않을 것 이다. . 그러나 이제 하늘 전체 혹은 우주에 관해서 -혹은 어떤 이 름이 그것에 가장 적합한 것이든 간에 우리가 그것에 그 이름을 부여하고자 한다一―또한 그것에 관해서도 우리는 사람들이 항 상 그렇게 하는 것처럼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려고 한다. 죽 우주는 그것의 생성의 어떠한 시작없이 영원한 것인가 아니면 처

음에 어떤 하나의 시작을 가지고 생성된 것인가? 우주는 생성되 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물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것에 속한다. 그리고 억견이 감각에 따라서 파악하는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생성되고 산출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생성된 것은 하나의 원인에 의 해서 생성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우주의 창조자와 아버지를 발 견하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작업이다. 그리고 발견된 자를 모든 인간에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다시 세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즉 그것 은 세계의 창조자가 어떤 본을 따라 이 세계를 만들었는가 하는 것인데, 다시 말하자면 언제나 자기 스스로와 동일하게 머무는 것을 따라서 만들었는가 아니면 생성된 것을 따라서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 세계가 아름답고 그 창조자가 유능 하다면 그는 명백히 영원한 것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반 대의 경우는, 이 경우는 말하는 것이 결코 허용되지 않는 것이지 만, 생성된 것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영원한 것을 바라보았을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왜냐하면 생성된 것 중에 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이 세계이고 그는 모든 원인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주는 이성과 사유로 파악되고 항상 자기 자신과 동일하게 지속되는 것의 상에 따라서 생성되었 으며 만들어 졌다〉 (27d-29a) . 역사에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자 풀라톤이 그와 동명의 대화 편에서 우주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언급하도록 했던 피타고라스 학파의 티마이오스는 그의 긴 이야기를 위와 같이 시작하고 있 다. 그것은 어떤 우주론이며 존재자에 대한 어떤 이론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분명히 구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로는 그 유래가 문제로 되고 있는 생성된 세계이다. 두번째 로는 풀라톤이 때로는 신이라고도 하고, 때로는 장인(匠人 Dem i ur g os) 이라고도 하며 시적으로 장중한 구절에서는 드물게 만물의 아버지라고도 부르고 있는 이 세계를 만든 자이다. 셋째 로는 그것을 본으로 해서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불변하는 존재자 이다. 그러므로 풀라톤의 우주론도 역시 파르메니데스의 물음에 대한 대답에 근거하고 있다. 불변하는 존재자가 존재하며, 이성은 오 로지 이것만을 인식한다. 그러나 불변하는 존재자는 변화하는 현 상들의 세계에 대하여 다시 다론 관계를 갖고 있다. 참된 존재자 는 원상이고, 현상들은 모상으로 그와 관계한다. 풀라돈에 있어 서 원상과 모상의 개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자연과학에로 넘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양자의 관계를 나는 수학적 예를 들어 명료히 하고자 한다. 연필과 종이룰 들고 자유로이 하나의 원을 그려 보자. 실제로 이것을 행해 보라. 스 스로 할 수 있는 경험만이 수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여 러분들은 아주 좋은 원을 그리지 못할 것이다. 두번째나 세번째 그립은 좀더 잘 그리겠지만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보 다 좋은 원은 컴퍼스룰 가지고 그릴 수 있다. 원은 주어진 한 점 에서 동거리에 있는 모든 점의 궤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 컴퍼스 는 이 정의에 따라서 원을 그린다. 물론 돋보기나 현미경으로 보 면 말할 것도 없이 이 감각적 가상도 해소된다. 현미경으로 보면 컴퍼스에 의해서 그려진 원은 두텁고 불규칙적으로 서로 엉킨, 마치 달에 있어서 거칠게 둥근 환상방벽(環狀防壁)처럼 종이에 틈을 벌리고 있는 구멍, 곧 고정된 컴퍼스 다리의 꽂은 흔적을 둘러싸고 있는 흑연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결국 여러분들은

우리가 완전한 물질적 원을 산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 험을 통해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에 실제적인 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예를 들어 원이 폐쇄된 동일한 둘레의 도형들 가운데 가장 큰 면적을 갖는다는 것과 같은 원에 관한 많은 훌륭 한 수학적 정리들을 가지고 있다. 이 정리들은 참이다. 죽 우리 는 그것둘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에 세계 내에 원이 없다고 하면 그 정리들은 무엇을 다루는 것인가? 물질적인 소위 원들은 단지 실제적인 원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수학적 명 제들은 감각 대상들이 아니라 그것들이 어떻게 보이는지롤 다룬 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물의 보이는 모습, 의관 Aussehen 은 그리스어로 그것의 에 이 도스 Eid o s, 그것의 이 데 아라 고 불릴 것이다. 수학적 명제들은 에이도스, 이데아를 다룬다. 죽 수학적 명제들은 감각물들이 그것의 불완전한 모상인 바의 원 상에 관계하는 것이다. 수학적 명제들은 우리가 원이라고 부르는 이런 저런 것이 아니라 원 자체를 다룬다. 우리가 원이라고 부르 는 감각적 사물들은 근사적으로 원의 형태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수학적 명제들은 사물이 아니라 형태(형식, 구조)를 다 룬다. 해당되는 형태를 〈갖고 있는 〉 사물은 엄밀하게 그 형태가 속하는 것에 부정확하게 참여 me t ech 여한다. 여러분들이 풀라톤의 용어 〈이 데 아〉를 먼저 항상 〈형 태 Gesta l t> 혹은 〈 의 관〉으로 번 역 한다면 〈이데아〉가 대체로 사상 Gedanke 을 나타내는 현대의 언어 사용에서보다는 풀라돈의 의미에 훨씬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 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이데아〉는 〈머리 속에〉 있다. 죽 그것은 주관적 아 다. 플라톤의 이 데 아는 최고도의 객 관성 Obj ek ti v it셨t을 의미한다. 죽 이데아는 엄밀 과학을 낳는 유일한 원천인 것이다. 이데아라는 용어의 이러한 의미 변천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

는 다음 강의에서 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형태는 현실적인 것인가? 수학은 물론 생각된 대상을 다룬다. 이것은 현대적인 이해로는 수학이 현실적인 사물 들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감각 사물들을 현실적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풀라톤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생각을 우리의 뇌리에서 제 거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나중에 가서 비로소 다시 끌어들여 도 될 것이다. 다음과 같은 논의를 생각해 보자. 곧 수학적 명제 들은 정확하고 그것들의 전리는 시간에 좌우되지 않는다. 감각 사물들에 대한 언명들은 항상 부정확하고 어제 전리였던 것이 오 늘은 오류일 수 있다. 어제 내 차 바퀴는 거의 원형이었다. 그런 데 오늘 아침 나는 교통사고를 당해서 이제 바퀴는 타원형이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말한다. 존재자는 불변적이며 전리는 오 로지 존재자에 대해서만 존재할 뿐이고, 변화하는 사물들에 대해 서는 다만 억견이 있을 뿐이라고. 그러므로 수학은 존재자를 다 루며 물리학은 감각세계에서의 그 존재자의 신뢰할 수 없는 모상 둘을 다룬다. 나는 이것이 왜 풀라톤 학파에서 수학이 번성했으며, 그에 반 해 원자론자들의 학파에서는 그렇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고 생각한다. 두 학파는 참된 지식은 오로지 참으로 존재하 는 것에 대해서만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런데 만약 원자들이 유일하게 참된 존재자라면 어떻게 수학적 원이라든가 삼각형 등과 같은 상상된 대상에 대한 언명들이 참된 지식일 수 있는가? 바로 원자론자들이 철학적으로 엄밀하게 사유했을 때 본래 그들은 엄밀한 수학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 그 경우에는 본 래 〈원〉에 관한 과학은 전혀 있을 수 없고 단지 원자들의 원형의 배치에 관한 과학만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원자론자들에게는

수학적 자연법칙의 개념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 즉 엄밀한 수 학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이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플라돈주의에게는 덜 중요한 전제, 죽 감각적으로 주어 진 자연이 엄밀하게 수학에 따른다는 믿음이 결여되어 있다. 결 국 원자론은 수학적 물리학을 전혀 만들어 내지 못했고, 플라톤 은 『 티마이오스 』 에서 자연에서의 수학의 타당성에 관해 어떠한 엄밀한 과학도 성립될 수 없고 다만 〈 개연적인 역사만이 이야기 〉 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그리스인은 근대 이전에 수 학적 자연과학에 접근한 유일한 민족이지만, 그리고 예를 들어 천문학에서 그와 같은 과학의 몇 가지 놀라운 성과들을 발전시켰 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완전하게 수학적 자연과학에로 파고들지는 못했다. 엄밀한 수학적 자연과학을 그들의 철학적 단초들에서 해 석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들이 동시에 철학적 사유롤 엄밀하게 수행했던 생산적 시기에 하나의 장애 요소였을지도 모른다. 자연 과학의 이러한 철학적 - 신학적 조건들이 근세에 어떻게 변했는지 는 여섯번째 강의에서 논하기로 하겠다. 우리가 『 티마이오스』를 올바르게 평가하고자 한다면 이제 플라 톤 사상의 중심에로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 우 리는 수학만으로의 제한울 지양하여 풀라톤 스스로가 잘 의식하 고 있는 〈이데아론〉의 수수께끼를 적어도 짤막하게나마 암시해야 만한다. 풀라톤은 기하학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 말함으로써 시작한다. 그는 소크라데스를 따라서 처음부터 원 자체를 묻는 것이 아니 라, 마치 참되게 존재하는 원상이 생성되는 모상에 관계하는 것 처럼 다시금 용감한 행동, 아름다움, 선함의 개별적인 경우들에 관계하는 용기 자체, 아름다움 자체, 선 자체에 대해 물음을 던 진다. 아름다운 육체를 바라볼 때 불타오르는 사랑은―-―영혼

윤회의 신화에서 이야기되는 것처럼 一―-과거의, 그러나 지금은 잊혀진 삶에서 아름다움을 직접 직관했던 영혼으로 하여금 아름 다움 자체를 상기하게 한다. 사랑하는 육체에 매여 있는 사람은 그려진 원에서 수학적 진리를 찾는 사람이 수학을 이해하지 못하 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양자는 참된 빛의 기만적인 반영에 만족한다. 사랑받는 자의 영혼을 사 랑하는 자만이 참으로 자신의 사랑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영혼은 진리가 나타나는 장소이고 참된 사랑은 전리에 대한 사랑을 가지 고 있는 영혼에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영역에서도 사 정은 다르지 않다. 국가 역시 전리에 대한 지속적인 관조로부터 만 질서가 잡힐 수 있다. 자기 스스로를 올바르게 이해할 줄 아 는 정치적 정열은 불변적인 질서의 형상을 인간의 삶의 변화하는 매체 속에서 실현하려고 하는 갈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정 치가는 철학자이어야만 한다. 방법적으로도 역시 플라톤에게 있어서 보통의 수학은 참된 존 재자에 대한 인식의 비유일 뿐 그러한 인식의 완전한 예는 아니 다. 왜냐하면 물론 수학자는 주어진 전제들로부터 엄밀하게 추론 하지만, 이 전제는 이미 그에게 주어져 있거나 가정될 뿐 이를 더 이상 증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두번째 시리즈의 두번 째 강의에서 이러한 깊이 있고 사상의 역사에서 고독하게 존재하 고 있는 플라톤의 통찰을 다시 다루게 될 것이다. 근대 수학은 물론 플라돈의 통찰로부터 그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결론들을 끌어낸다• 풀라톤적 의미에서의 참된 인식은 수학의 전제들에 대해서도 역시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설명은 〈이데아〉에 대한 이론의 과제 중의 하나이다. 〈원 자체〉는 참된 존재를 갖고 있지 만 감각세계의 생성되고 소멸되는 〈원〉은 다만 〈원 자체〉의 존재

에 〈참여 〉 함으로써 항상 불완전할 뿐인 존재를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 〈 이 연필로 그려진 원은 원의 형태를 갖 고 있다 〉 라는 간단한 명제가 모든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형태를 〈 갖고 있다 haben> ( 플라돈이 말하는 대로 하자면 형 태 에 참여 한다 an ihr t e il haben) 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 형태란 무엇‘인가' Was 'ist ' ein e Gesta l t ? > 원 상 Urb il d 과 모상 Abb il d 에 대 해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 자체도 상칭적인 표현방법이다. 이데아에 대 해서만 참된 지식이 존재한다면 생성되는 것과 소멸되는 것의 이 데아에의 참여는 그것의 본질상 생성되는 것과 소멸되는 것의 존 제 자체에 속하는 것과 같은 부동적(浮動的)이고 비유적인 방법 으로만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이데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 선의 이데아 Idee des Gu t en 〉에 대해서 묻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은 일차적으 로 우리가 윤리적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플라돈 의 윤리는 그의 선의 개념으로부터 비로소 이해된다. 도식적으로 하자면 우리는 선의 이데아를 이데아의 이데아, 본질의 본질이라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원을 아주 정성들여 그린다면 이 것은 〈좋은 원 ein guter Kre i s 〉이 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이 것은 언제나 결함이 있다. 나는 그것의 좋음울 내가 생각할 수는 있지 만 그릴 수는 없는 〈원 자체〉와 비교해서 판단한다. 오로지 이 원 자체만이 〈참으로 좋다〉 〈 원 자체 〉 〈 좋은 원 〉 그리고 〈 원의 이대아〉는 동일한 것이다. 수학에 있어서 종이 위의 개별적인 원 은 원 자체의 예로서만 우리의 관심을 끈다. 그리고 지금 철학에 있어서 원의 이데아는 이데아 자체에 대한 예로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원의 이데아, 용기의 이데아, 미의 이데아와 같은 다양한 이데아, 다양한 선은 어떤 공통적인 것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 다. 이것들이 모두 이데아이고 모두 좋은 것이라면 그것들은 어

디에 참여하는가? 동굴의 비유에서 감각세계의 소멸되는 사물들 은 단지 그림자일 뿐이다. 동굴에서 벗어나온 사람은 햇빛 가운 데에서 사물들 자체를 본다. 그 빛 가운데에서 그 사람이 사물들 을 보게 되 는 태 양은 도대 체 가 〈 선 〉 〈 자기 존재 Selbs t se i n 〉가 존재 한다는 사실을 산출하는 그러한 것, 죽 선의 이데아이다 .6)

언어의 의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그러한 탐구의 어려움은 플라 톤으로 하여금 항상 새로운 바유적인 서술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데아둘의 영역 Re i ch 에 대한 선의 이데 아의 관계를 감각세계에 대한 개별적 이데아들의 관계를 형식적 으로 반복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풀라톤은 처음으로 정 당하게 이 데 아를 유사사물들 Q uas i d i ng e 의 더 고차적 인 세 계 에 서 의 〈 대 자적 존재 Sein flir s ic h 〉 로 〈소박하게 naiv > 생 각하지 않았 다. 만일 이데아가 그에게 있어서 존재자라면 이제야 비로소 선 의 이데아는 여기서 〈 존재〉라는 말이 사용되는 의미를 규정해 준 다. 풀라톤은 여기서 〈존재〉가 무엇이냐는 물음이 제기된다는 것 울 지적하기 위해서 선의 이데아의 이름을 도입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개략적인 서술이 깊이 둘어갈 수 없는 플라돈 해석의 본래적인 문제가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는 『티마이오스 』 에서 이 문제가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 야 할 것이다. 『 티마이오스 』 에서는 영원한 원상과 생성된 모상 . 이의에도 제삼 의 것, 곧 원상에 따라 모상을 만든 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신은 그리스 종교의 찰 알려져 있는 신들 중의 하나가 아니 다. 플라톤이전의 어떠한그리스사람도세계의 창조자에 관한생각 을 언급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후의 기독교인들이 플라톤을

6 ) Die Sonne, in deren Lich t er sie sie h t, ist das, was macht, dafl es tibe rhaup t Gute s , Selbts e in gibt : die Idee des Gute n .

성경에서 계시된 진리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 이교도의 현인으로 끌어들인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반대로 풀라톤의 사상을 엄밀하게 탐구하려고 했던 철학자둘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신 플라돈주의를 거쳐 현대의 해석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다시금 이 제 작하는 신 Handwerkender Go tt을 추상적 사상의 은유적 은폐로 이해했다. 독자에게 변증법적 수행의 엄밀성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때 풀라톤은 얼마나 자주 신화를 꾸며냈던가 ! 풀라톤의 신화들은 결코 경박하지 않다. 죽 이들은 엄밀한 해석을 허용하 는 예술 작품이 다. 나는 조물주 Dem i ur g라는 인물 Ges t al t을 어 떤 다른 것을 암시하기 위한 예술적 매체로 해석하는 것 이의에 어 떤 다른 엄밀한 해석을 생각할 수 없다. 물론 이 사상은 누군가 가 플라톤의 영감에서 솟아나는 비유들이 그의 의식적인 철학적 의도보다 더 포용적이라고 믿는 것을 결코 막을 수 없다. 내가 추구하는 해석은 플라톤이 사실은 세계의 무시간적 형태 로 보았던 것을 시간계열로서 기술하기 위해 창조의 신화를 선택 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복잡한 기하학적 구조를 작도 를 통해 학생들 앞에 점진적으로 보여중으로써 그 기하학적 구조 롤 분명하게 하는 것처럼 플라톤은 이미 〈국가 〉 에서 이상국가의 구조를 가상적 인 정 초과정 fikt i ve n Gr ti ndung s p roze /3을 통해 묘사 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 티마이오스 』 를 한 과학적 정신 의 의식적인 신화라고 부르고 싶다. 풀라톤이 분명히 생각했던 것은 세계 속의 모든 것이 생성과 소멸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세 계 가 〈항상 생 성 하고 im mer werdend> 있다는 것 이 었다. 그러 나 여기에서 세계 자체가 생성되었다는 사실은 따라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플라돈은 세계가 언젠가 소멸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명확 히 부정한다. 결코 신화를 사용하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 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자처럼 생성되는 것도 소멸되는 것도 아

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왜 우리들이 플라톤에게서 이와 같은 견 해를 부정해야 하는지 그 충분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여하튼 풀 라돈은 조물주를 신적으로 존경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 티마 이오스 』 이의의 어떤 다론 작품에서도 조물주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풀라톤의 우주생성론을 그 자체로 말하고자 한다면 나는 『 티마 이오스 』 의 개별적인 문제에 대해서, 예를 들어 그가 원자론자들 의 원자의 위치에 세워 놓은 주의 깊게 통찰된 수학적 모델에 대 해서 강의 하나를 더 할애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장황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우리의 이후의 연관에서 중요 하다 . 그것은 좋지 않은 것의 근원에 대한 것이다. 신을 선의 현존의 근원으로서 이해하는 것은 플라톤적 창조론 에서도 성서적 창조론에서와 마찬가지로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다. 성서적인 창조사가 무 N ic h t s 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서술로 해 석될 때 악의 원천에 관한 극복할 수 없는 신학적 문제가 발생하 였다• 그러나 풀라톤에게는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조물주는 선하며, 그래서 그의 작품이 좋지 않은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 입 밖에 내지 못할 〉 만큼 오만한 것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세계는 완전치 못하다. 죽 세계는 단지 가능한 범위 에서만 완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조물주는 전능하지 못하고, 세 계를 무로부터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측건대 이러한 두 가지 표상은 플라톤에게 가능한 것으로서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고 생각된다. 사변적으로 엄밀하게 생각한다면 〈선〉 개념의 의미 는 좋지 않은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까지도 함축한다. 그러므 로 선의 이데아를 통해서 존재 자체를 해석한다면 그럼으로써 우 리는 이미 선에 대립된 어떤 것의 현존 Anwesenhe it을 인정하는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현존〉과 〈어떤 것 e t was 〉은 무엇을 의

미하는가? 『 티마이오스 』 는 이 문제에 대해서 신화적인 언어로 대답한다. 신은 〈 모든 가시적인 것을 정지 속에서가 아니라 다양 하고 무질서한 운동 중에서 넘겨받고서는, 질서가 모든 측면에서 무질서보다 좋은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그 모든 가시적인 것을 무 질서로부터 질서로 옮겨 놓았다 〉 (3oa) 〈 왜냐하면 이 우주의 발 생은 필연성과 이성의 공동작용 속에서 뒤섞여졌기 때문이다. 이 성은 필연성으로 하여금 대부분의 생성하는 사물들을 가장 좋은 것에로 이끌도록 설득함으로써 필연성을 지배했다. 그리고 필연 성이 이성의 설득에 따름으로써 이 우주가 처음에 생성되었다 〉 (47e-4sa) 이에 따라 두 개의 원리가 세계 내에서 작용한다. 그것은 신적 인 이성의 질서와 맹목적인 필연성의 우연이다. ” 현대적인 시각 으로는 낯설게 느껴지는 우연과 필연성의 병립을 이해하기 위해 서는 원자론자들을 상기해야만 한다. 플라톤은 필연성을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해하고 있다. 필연성은 정신이 파악할 수 있는 법 칙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공간적 존재자인 원소들 또는 원자들 의 충돌의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근세에 있어서 우리가 필연성 을 수학적 자연법칙을 통해 밝히려고 한다면, 우리는 풀라돈적으 로 말해서, 그러나 풀라톤과는 달리 필연성 자체의 본질은 이데 아로부터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벤틀리가 어느 정도로 플라톤 적으로 생각하는지, 그러나 뉴턴에 의하면 그럼으로써 그가 어느 정도로 수미일관하지 않았는지를 알고 있다. 풀라톤은 필연성을 예측할 수 없는 것으로, 그러나 예측할 수 있는 것은 계획적인 7) 곧 본문에서도 설명이 나오지만 풀라톤의 〈맹목적 필연성의 우연 der Zufa ll der blin d en No t wend ig ke it〉의 개 념 은 혼돈을 일으키 기 쉽 다. 그 에 있어서 맹목적 필연성은 근세의 필연성의 개념이 보편성과 객관성을 함의한 수학적인 데 반해서 비수학적이다. 참고 본문 7 장.

이성의 작품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 세계의 완전성은 세계가 이데아에 참여한 결과이고, 세계의 불완전성은 필연성의 지배의 결과이다. 이러한 풀라톤적인 사상에는 악의 원천에 관한 종종 서로 밀접 하게 결합된 나중의 두 이론이 연결된다. 그 하나는 악에서 비존 재 N ic h t se i n 를 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악을 정신과는 대립하 는 물질에'돌리는 것이다. 악을 비존재로 간주하는 이론은 플라톤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 다. 한 사물은 그것이 자기의 이데아에 참여하는 한 선하다. 오 직 이데아만이 참된 존재를 가지기 때문에 사물 안에서 선하지 않은 것은 존재의 결여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이론이 선과 악에 대한 성서적인 이해와 조화될 수 있었는가? 아마도 그 이론은 선은 삶에로, 악은 죽음에로 이르게 된다는 성서적 사상에 대한 심오한 해석일 것이다. 다시 말해 본래 오로지 선한 것만이 현실 적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철학적 추상을 이용하지 않는 성서에 서 악은 우리에게 결정을 강요하는 현실로 나타난다. 플라톤의 글들은 모두 선으로의 결정을 요구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성서적 인 악은 플라톤 철학의 좋지 않은 것 das Schlech t e 과는 . 좀 다른 것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악을 비존재로 해석하는 것은 무로부터 의 창조의 다음과 같은 역설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 역설은 왜 선의 신이 그리도 끔찍하게 존재를 결여하고 있는 피조물들을 창 조해야 했는가 하는 것이다. 악을 물질로 돌리고 물질을 이미 조물주 앞에 있는 것으로 이 해한다면 이것도 앞의 이론과 동일한 것이다. 형태가 없는 물질 에 대해서는 바로 그것에 형태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앎도 있 울 수 없다. 우리는 물질이 무엇인가를 결코 말할 수 없다. 아리 스토텔레스에 있어서도 제일 질료p ro t e hy le , 곧 어떠한 형상도

없는 물질은 인식불가능하다. 이후의 이원론적 체계들은 물질을 종종 신에 대립된 자립적인 힘으로 이해했다. 종종 대단히 이해 하기 어려운 이 사상적 구축물들을 고찰하는 것은 해볼 만한 가 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포기해야만 한다. 어쨌거 나 그것들은 성서적이지 않은데 , 왜냐하면 성서는 물질 개념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들은 플라톤적이지도 않은데, 왜냐하면 고전 시대의 그리스인은 악에 대한 성서적 이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 5 강 기독교와 역사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그리스도라고 불렀던 예 수가 세운 종교이다. 여기에서 나는 감히 예수라는 인간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지 않 는다. 나는 내가 이 과제를 감당하기 에 충분하지 않다고 느낀다. 그러나 여러분께 내 입장을 밝힐 의무가 있다. 나는 기독교인이 다. 좀 더 겸손하게 말하자면 나는 기독교인이고자 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전통주의자의 입장은 아니다 .• 나 는 기독교 전 통 속에서 삶에 있어서나 사상에 있어서 많은 것을 이해하기 어 려웠는데, 몇 가지는 따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 있 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은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 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 말은 나의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예수의 말은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살아나갈 수도 있었을 삶을 파괴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또한 나의 삶을 가능하 게 만들었다. 이 말이 없었다면 도대체 내가 가능한 삶의 길을 찾을 수 있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내가 예수의 말이라고 할 때

우선 나는 그의 가르침을 말한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삶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말에서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부활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바의 그 신비로운 사건에 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고들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강의는 개인적인 신앙고백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를 위한 것이다. 니는· 사람들이 방법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근거 로부터 나의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연과학을 비교를 위해 끌어들이는 것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과학은 경험 에 근거한다. 과학 이론을 논의하는 사람이 그에 해당하는 실험 울 스스로 직접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는 과학적인 경험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하며, 또한 자신이 어떤 특수한 실험에 관 계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해야만 한다. 종교도 경험에 근거한다. 종교에 있어서 경험은 과학에서와 마찬가지로 항상 특수한 경험 이다. 어떤 특정한 종교에 있어서의 삶의 체험 없이 어떤 한 종 교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유태교나 기독교와 같 은 종교에 있어서 우리는 개인적인 결단 없이는 본질적인 경험을 얻을 수 없다. 결단의 행위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날 때, 그 자 체가 종교적 경험의 본질적인 구성 부분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 스스로가 내렸던 결단 을 내보여야만 할 것이다. 하나의 결단은 하나의 길을 열어 놓고 다른 길들을 닫아 버린 다. 그러므로 결단은 나에게 하나의 경험을 열어 보임으로써 동 시에 나를 다른 경험들로부터 차단한다. 내가 결단을 하게 되면 이로 인해서 나는 종교적 진리의 일정한 영역들로부터 차단되는 데, 왜냐하면 다른 종교들도 자기들의 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러한 결단을 회피하면 그로 인 해 나는 결단 없이 종교를 바라만 봄으로써 우리가 (결단을 했을

경우에 一옮긴이) 획득할 수 있는 전리의 전 영역으로부터 차단된 다. 나는 결단에 의한 일정한 진리들로부터의 자기차단이 궁극적 인 포기를 의미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나는 진리의 영역 에 하나의 내적 구조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결단의 경험을 관통하고 나면 결국 우리는 그에 대한 경험을 포기했던 그러한 진리를 마침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아 마 수 천년이 걸릴 것이다. 기독교 교회는 내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처럼 예수의 말에 감동 울 받아 그의 뜻으로 이해하는 대로의 삶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탄생되었다. 이러한 삶의 체험을 그들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언어로 표현해야만 했다. 이것은 넓게 보면 오늘날 우 리들이 신화적이라고 부르게 되는 언어였다. 여기에 기독교에 대 한 우리 자신의 해석의 문제가 놓여 있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말하는 데 있어서 우리 자신에게 자연스러운 언어로 표현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지적 성실성으로 이해하는 그러한 태도 때문에 신화를 단념하여 신화적 언어로 표현되었던 경험 자 체를 잃어버릴 위험성을 감수해야 하는가? 아니면 신화적 언어 를 간직해야 할 것인가? 이제 그것이 신화적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서 우리는 여전히 신화적 언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 우 리는 도대체 무엇이 신화적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확실히 알고 있는가? 그리고 도대체 우리는 신화에 대해서 말할 때 우 리가 생각하는 것을 충분히 명확하게 알고 있는가? 최소한 이 강의들에서 나는 지금까지 신화적 사유에 대한 어떤 합리적 정의 를 제시하지 않았다. 죽 나는 다만 몇 가지 관점에서 그것을 기 술했을 뿐이다. 우리는 열번째 강의에서 이 물음들에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우선 나는 기독교를 그것이 자기 스스로를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거기에 이제까지의 강의들에서 도입된 개념둘을 적용하 고자한다. 기독교는 유태교의 한가운데에서 성립했다. 나는 유태 종교를 믿음, 율법, 심판의 세 가지 개념을 통해 기술했다. 이 세 개념 은 기독교로 넘어가는데, 물론 그것은 비록 쉽게 서술할 수는 없 지만 감지할 만한 의미변천을 가지고 그렇게 된다. 나는 체계적 인 주장은 아니지만 믿음, 율법, 심판의 삼위성 Dr i he it의 배후에 서 바울적인 믿음, 사랑, 소망의 삼위성이 그 본래적인 의미로서 통찰될 수 있다고 암시적으로 말하고 싶다. 믿음은 여전히 항상 유태인의 신에 대한 믿음이다. 예수는 그 의 제자들에게 그롤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쳤다. 그러 나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동시에 한 인간, 곧 예수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그 당시에도 오늘날에 못지 않게 역설적이었 다. 그것은 「요한복음」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문장에서 표 현되고 있는 역설이다(「요한복음」 1, 14). 말씀 Lo g os 은 여기에 사 용된 언어에서는 그에 의해 세계가 창조된 신의 능력을 의미한 다. 육체는 이 세상에서 살아 나가고 있는 바의 인간을 의미한 다. 내가 이 문장을 자세히 해석하고자 한다면 말씀과 육체라는 두 개념의 영지주의적 의미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 다. 영지주의에 있어서 두 개념은 대립되는 것들인데, 이들은 풀 라톤의 이성과 물질의 구별을 엄격하고도 영원한 형이상학적 대 립으로 고양시킨다. 그리하여 이 문장은 좀 더 정확한 의미에서 역설로 된다. 그러나 우리는 영지 Gnos i s 를 고려하지 않고 유태적 믿음 내에 머무를 때에도 그 문장은 신의 창조적인 힘을 역사 속 에서 언젠가 한번 살았던 피조물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 문장 자체는 창조를 역사인 바의 신과 인간 사이의 두쟁에 관련시킨다. 한 인간이, 죽 신에 대항하지 않고

신의 뜻을 실현시켰던 인간이 역사 속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 은 두번째 창조로 이해된다. 이 두번째 창조의 의미는 율법이 사 랑으로, 심판이 소망으로 전환하는 데에 있다. 유태적 율법은 사랑을 의미했다. 예수가 〈 네 마음울 다하고 목 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 야 한다 〉 라고 말할 때 (「마태복음」 22, 37-39) 이것은 구약에서 인용한 것이다(「신명기」 6. 5 와 「레위기」 19, 18) 그가 〈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이 달려 있다 〉 (「마태복음」 22, 40) 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렇지만 네번째 복음은 그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다.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 라 〉 1)( 「요한복음」 13, 34) 이 겉보기의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 는 의심할 여지 없는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의 차이를 다시 논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라는 말 이 새로운 것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은 어느 시대 에나 예수를 자신의 삶을 통해서 완전한 사랑이 현실적으로 가능 하다는 것을 보여준 한 인간으로 이해하고 있다. 신의 말씀이 육 신이 되었다고 말할 때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산상수 훈은 모세의 율법처럼 명령의 문법적 형태로 말하지 않는다. 산 상수훈은 〈 너는 ·… •• 울 하지 말라〉라고 하지 않고 〈……한 자는 축복을 받을지어다〉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삶은 그의 말씀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나는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다 1) 본 덱스트에서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Ein neues Gebot ge be ich euch, da/3 ihr euch unte r ein a nder lieb et, wi e ich euch ge li eb t h표a현be이, au마f d지a막/3 au부c분h 에ih r e있in어 a 서nd er조 li금eb h다ab르t다. .그 러거 나기 J에e서r us는al em

고 말함으로써 율법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다. 나는 과연 삶, 생 명의 경우에도 도피할 수 있는 것인가? 심판과 소망은 이미 유태의 예언자둘에 있어서 서로 가까이 있 었다. 역사적으로 아칙 유태왕국이 존재하고 있었을 때 나타난 초기의 예언자들은 무엇보다도 임박한 심판에 대해서 말했다. 그 들은 찰못된 소망을 분쇄해야만 했다. 유수 Ex il 시대의 예언자들 은 지금의 심판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희망으로 열려 있는 임박한 구원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하고 있다. 유태인들은 이 희망을 다윗 의 왕국을 다시 세우게 될 메시아의 기대 속에서 해석했다• 기독 교는 이 희망이 이제 성취되었다고 가르치는데, 왜냐하면 예수는 메시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Chr i s t us 라는 이름의 의미 이다. 이것은 앞의 것과 똑같은 역설이다.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그것은 유태인의 희망을 파괴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가시적인 다 윗의 왕국은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 자신은 도래할 왕 국의 사상을 새롭게 해석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 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하지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 20-21). 〈너 희 안에 inw endig in euch 〉라는 말은 아마도 〈너 희 가운데 에 mi tten unte r euch 〉의 물론 의미 깊은 오역일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하 나님의 나라가 여기에 있다, 너희는 그것을 더 이상 기다릴 필요 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메시아에 대한 기대에 관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면 나는 희망이 아니라 성취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야 했을 것이다. 우리는 신약에 있어서 희망과 심판 그리고 성취라는 말 들은 이중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한은 분명하게 그리스도 에 안에서 심판은 이미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누구든지 그를 믿 는 자는 심판 받지 않을 것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이미 심

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러나 그 심판은 이것이니 곧 빛이 이 세 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을 심판하 는 것이니라 〉 (「요한복음」 3, 18-19). 그러나 마찬가지로 분명한 말 로 마태는 다가올 심판과 예수의 재림을 말하고 있다. 아마도 이 이중성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길을 마련했다. 이 길을 걷느냐 아니면 벗어나느냐 하는 것은 바로 저 빛과 어둠의 나눔이요 삶과 죽음의 나눔으로서 이 것이 곧 심판이다. 그러나 인간이 변화된다면 역사는 변하지 않 울 수 없다. 각 개인에게 제공되는 성취는 전 인류에게 열려 있 는 희망이요 역사의 희망이다. 이 희망은 다시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즉 〈 너희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왜냐하면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 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 (「마태복음」 10, 34-35). 이것은 더 이상 한 민족을 다른 민족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아니다. 분리전선 Trennun g s li n i e 은 지금 모든 민족과 모든 가정을 가로 지르고 있다. 사람들이 다른 민족들로부터 유태 민족의 분리가 ―역사적 과정이 어떤 것이었든 간에-시나이산에서의 계 약을 통해 단번에 이루어전 것으로 생각했던 반면에 이 최종적인 분리는 하나의 점진적인 과정이다. 밀밭 속의 잡초(가라지)에 대 한 비유에서 종이 이 잡초를 뽑아 버릴까 하고 질문하자 주인은 〈 잡초를 뽑을 때 같이 밀을 뽑지 않기 위해서〉 이룰 금했다. 〈수 확 때까지 둘이 같이 자라도록 놓아 두라. 수확 때 추수꾼들에게 말하리라• 먼저 잡초를 모아 다발로 묶어 이룰 태워라. 그러나 밀은 창고에 쌓아 두라〉(「마태복음」 1, 29-30). 보고자는 예수 스 스로가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도록 한다. 〈수확은 세상의 종말이다.〉 역사는 종말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대와 함께 기독교는 역사에 나타났다. 기독교인은 항 상 최후의 심판이 바로 임박해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결코 일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는 항상 그리고 끊임없이 다름 아닌 역 사의 종말을 기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변화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의 첫 단계로서 예수가 그의 생애중에 심판 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제자들의 깨진 희망이 그의 부활의 소식과 7 주 후에 성령의 강림을 통해 다시 되살아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 당시에 어떤 일이 일어났든지 간에 그들이 그릇되게도 바로 곧 그리고 밖으로부터 기대했던 것을 이제 그들은 자신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의 압도적인 현실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 은 깨진 한 종파로부터 점점 성장하는 교회가 되었다. 그들은 여전히 종말이 곧 그들 대부분이 살아 있는 동안에 오 기를 기다렸다. 이 희망은 서서히 퇴조하였다. 그 대신 그들은 3 세기 동안에 로마제국을 내면으로부터 정복했다. 이러한 성과는 초대교회가 상상하지 못했고, 현존하는 사료들에 따라 판단하면 예수 자신도 예측하지 못했다고 보이는 기독교인들의 분열을 가 져왔다. 이 분열에는 개념적인 측면과 실천적인 측면이 있다. 우 리는 무엇보다도 우선 개념적인 측면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 러나 이 분열은 실천적인 측면으로부터 좀더 쉽게 서술될 수 있 을 것이므로 나는 먼저 실천적인 면을 서술하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들이 정치적 책임이라고 부르는 것에의 어떤 실천 적 참여를 고찰해 보자. 로마 군대에서의 군복무는 하나의 좋은 예를 보여 줄 수 있다.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로마 군인 으로 복무하는 것은 확실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 수가 갇은 국가에 봉사하는 세리에 대해서 서슴없이 대항하고, 군사적 복종을 그가 로마의 중대장과 대화할 때 믿음의 본질에 대한 한 예로서 별다론 문제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은 사실

이다. 그러나 군인의 직업에 속하는 인명 살해는 기독교적인 사 랑과, 또는 더 엄격하게 말해서 산상수훈과 일치하기 어려운 것 으로 보인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평화주의자 가 아니었다. 죽 그들은 가령 모든 인간을 평화로운 삶으로 유도 함으로써 전쟁을 철폐하는 것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들이 역사를 신과 사탄 사이의 전쟁으로 아해함 으로써, 그런데 이 전쟁이 인간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능력에 의해서 곧 끝나리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나타날 수 없었다. 개별적인 기독교인은 자신의 영혼과 그 친구의 영혼 울 구해야 하지만 세상을 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약의 예 언, 특히 「요한 계시록」에 따라 심지어 그들은 인간 역사의 마지 막 막( 幕 )으로서 인간적 지배자로서의 적그리스도의 도래를 기다 리고 있다. 그는 악의 절대적인 지배인 외면적인 평화 구축을 통 해 그리스도를 흉내낼 것이다. 이러한 구상에서 그들은 평화라는 개념의 이중성을 파악했으며, 오랫동안 그들에게는 로마제국이, 마치 바빌론이 유태인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의 이러한 암담 한 기대가 완성에 점점 접근하면서 성취된 것으로 나타날 수 있 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기독교인이 군인이 되지 않았다면 거꾸로 군인이 기독교인이 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만 했는 가? 무엇보다도 우리는 로마제국의 쇠퇴가 시작되는 3 세기의 혼 란기에 군인들이야말로 야만인에 대항해서 평화와 질서를 유지했 울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이고 평화적인 삶을 이끌 수 있는 유일 한 가능성을 유지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의 복무 역시 이웃 사랑의 행위가 아니었는가? 더 이상 오늘날의 로마제국과 어쩌 면 내일 나타날지도 모르는 하늘의 왕국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 잡힌 로마 세계와 침입하는 게르만족 및 유목 민의 이교도들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것이라면 위의 구상은 실

로 바꾸어져야만 했다. 황제가 기독교인이 된 다음에는 그만큼 더 그러한 일이 이루어져야 했다. 그리하여 최초의 몇 세기 이래로 보수적인 기독교와 진보적인 기독교 사이에는 긴장이 있어 왔다. 우리는 진보적인 견해가 더 오래된 것임을 거의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기존 질서의 유지롤 돕고자 하는 그 어떤 시도도 악령으로 여겨 졌던 이교도의 신들과의 타협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신에 대한 이해는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합리주의의 이해보다 아마 적어 도 더 깊이 들어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보수적인 기독교인은 단순히 협력을 거부함으로써 너무 안일한 방법으로 자기의 양심 을 구하는 것은 아닌지를 스스로에게 묻지 않으면 안되었다. 바 울 사도의 서신에서 말하는 것처럼 참된 최고의 태도는 현실적으 로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좁은 의미에서 보수적인 것도 그리고 좁은 의미에서 급진적인 것도 아닌 적극적인 해결책을 아마도 언 제든지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결단 앞에 서 있었던 사람은 누구든지 이러한 대답을 미리 알거나 쉽게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이와 감은 조망 하에서 기독교의 역사는 다만 이중적인 결과들 만을 가져왔다. 밀과 가라지는 함께 자란다. 먼저 무엇이 우리들 인간의 눈에 밀로 보이는지롤 고찰해 보자. 우리는 후기 로마제 국과 비잔틴 제국이 바로 기독교적이었기 때문에 이전의 제국들 보다 훨씬 나았는지 어떤지를 의심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성베네딕트와 대(大)교황 그레고리에 있어서 기독교적 삶의 가장 철저한 전통인 수도 생활과 확고하고 현명한 통치술의 가장 좋은 로마적 전통이 한데 융화되었을 때 고대가 붕괴하는 한가운데에 서 새시대의 기초가 놓여지게 되었다. 이 시대 이래로 가난한 자 들을 구제하는 것이 교회의 일이 되었다. 이 과제를 정당하게 처

리하기 위해서 그들은 타락한 나라들과 문명화되지 않은 나라들 울 교화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은 야만적인 지배자들을 화 평 한 자들 Fr i ed f er tig ke it로 교육해 야 했다. 주교들은 질서 잡힌 국가적 관계를 수호하는 자들로 되었다. 승려들은 고대 문화의 전승을 암흑의 세기를 통해 보존해 왔다. 우리가 유럽이라고 부 르는 것은 기독교의 작품아다. 그러나 이 성공은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가라지는 밀과 함께 자랐다. 나라를 지배하던 주교들은 과연 그 나라를 개 종시켰는가? 아니면 기독교를 그것의 반대물로 바꾸어 버렸는 가? 이교도의 지배자들이 한때 그러했던 것처럼 기독교의 지배 자들의 속성도 또한 오만과 부, 폭력이 아니었던가? 물론 이 모 든 것들은 인간적일 뿐이다. 종종 그들의 과오는 이웃사랑이 인 간의 모든 행위의 참된 척도가 된다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지식을 통해서, 그리고 왕 스스로는 신적인 것이 아니라 - 一一신의 은총 에 의해 ___ 신 밑에 있다는 지식을 통해서 완화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완화된 인간적인 본성을 인정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인류 에게 열어 놓은 초인간적인 희망에 대한 배반이 아니었던가? 인 간이 폭력을 피할 수 없다는 것과 교회가 부유해야 한다는 것은 실로 참된 것이며 확인된 것이었는가? 오만은 그 어떠한 상황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 있었는가? 복음의 가르침이 실제로 살고 있 는 유럽인의 삶과 일치되는 한 최후의 심판에 대한 기대는 없어 지지 않았다. 참깐 정치적 무대를 떠나서 개념들의 발전, 죽 기독교적 사유 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아마도 매일같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던 최초의 시대에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일관된 자기 해석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복음은 입에서 입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계속 전파되었다. 그러

나 이러한 이미지 자체가 하나의 추상이다. 복음은 복음이 있기 전에 있었던 언어 를 통해 전파되었다. 자기 나름의 암묵적인 철 학을 지니지 않은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최초의 필기 문서인 신약성서는 해석으로 가득차 있다. 아마도 신약성서는 사 람들이 해석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에 쓰여졌을 것이 다. 「마태복음」은 유태적 해석이고, 「요한복음」은 영지적 해석에 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사도행전」과 바울의 서신에 서 우리는 헬레니즘적 해석의 출현을 보게 된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교육받은 상류층에 의해서 논의되고 수용됨으로써 그리스 철학에서 나온 개념들로 해석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고대 후기의 가장 영향력이 컸던 철학파는 종교적 정신으로, 그리고 헬레니즘 적이자 무엇보다도 스토아적 원천에서 나온 개념들을 가지고 플 라톤주의를 새로 해석했다고 할 수 있는 신플라톤주의이다. 그리 하여 기독교 철학 또는 신학은 __― 양자는 아직 서로 분리되지 않았다 그 첫 천년 동안 신폴라톤주의적 정신에 삼두되어 있 었다. 여기에서도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무엇이 밀이었고 무엇이 가라지였는가? 그 당시 사람들은 플라톤의 『 티마이오스 』 를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보기 시작했다. 풀라톤 자신은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의 견해에 따라서 분명한 대답이 가능하 거나 또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중요한 문제들에, 곧 이데아 론과 윤리 그리고 국가의 질서 등과 같은 문제들에 관해서 많은 책을 썼다. 그의 생애에 걸쳐서 그는 단 한번 우주생성론을 썼 고, 이를 그는 단지 하나의 개연적인 이야기라고 불렀다. 그는 이 분야에서 이성을 통한 세계의 설명이 맹목적인 우연을 통해서 설명하려는 원자론보다 어떠한 경우에도 더 적중한다는 것을 보 여주어야 했다. 이제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의 신학적 형태를 성

서 속에서 기독교인들에게 계시된 전리의 전조(前J k) 로 이해했지 만 그의 인식론이 관계되어 있는 과학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었 다. 그리고 그가 설계한 철인에 의해 지배되는 도시국가는 도시 국가로서, 그것이 차안의 국가로서 종말론적인 희망에서 먼 것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정치적 현실에서 멀었다. 이리하여 풀라톤은 중세 초기에 그리스의 모세가 되었는데, 여기서 이 모세는 마찬 가지로 비역사적으로 창조사의 저자로 인정되었다. 적어도 나는 그 당시 기독교의 대사상가 아우구스티누스가 자 신의 〈 고백록 〉 의 마지막 세 권과 다른 곳에서 밝힌 바와 같은 창 조에 대한 견해를 언급하고 싶다.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이 근원적 이고 격정적인 사상가까지도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주어 진 텍스트, 여기에서는 「창세기」 일장의 해석의 형태로 제기하는 것은 기독교 철학의 해석적 성격에 있어서 특칭적이다. 물론 이 러한 해석에는 내가 세번째 강의에서 원용했었던 19 세기 이후 성 서 연구에 두드러진 텍스트의 실제적인 역사에 대한 연구가 결여 되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있어서 「창세기」 텍스트는 신이 모 세에게 받아쓰게 한 신의 말씀이다. 그의 해석의 상당 부분은 비 유적이며, 또 다른 상당 부분은 예를 들면 그의 전적으로 새롭고 도 독특한 시간 개념의 해석과 같은 그의 고유한 철학적 해석에 바쳐졌다. 나는 비유적인 해석의 예로서 그에게 있어서 하늘의 천궁은 성경의 확고한 권위를, 그리고 하늘의 빛은 성자들을 의 미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우리들의 개념으로는 그러한 해석 은 성서 원전의 간명한 의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물론 풀라 톤적으로 말해서 모상이 상징적으로 원상을 대신하는 것처럼 모 든 창조된 사물은 신의 어떤 창조 의지를 상칭적으로 보여준다는 철학에서 이러한 비유는 자연스럽고도 적절한 해석 방법으로 인 정될 수 있다.

신이 세계를 무로부터 창조했다는 것과 세계를 시간 속에서 창 조한 것이 아니라 세계와 함께 시간을 창조했다는 것은 아우구스 티누스의 사변적인 사상에 속한다. 무로부터의 창조론은 내가 구약에 대한 강의에서 서술한 신적 전능에 대한 사상의 발전이 보여주는 마지막 단계이다. 세계의 선재하는 구성 물질은 신의 작품으로서 나타나서는 안 되며, 다 시 말하자면 그의 지배 밀에 들어 설 필요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 야만 한다. 여기에서 풀라돈에 대립하고 성서의 합리적 결론의 편에 서는 분명한 입장이 추론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악 의 근원은 선재하는p raex i s t en t e 물질이 아니라 피조된 영혼의 자 유로운 결단에 있다. 이것이 그의 예정설과 어떻게 조화하는지는 현재 우리의 주제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문제이다. 신이 세계를 시간 속에서 창조하지 않았다는 또 다른 생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유하고도 심오한 사변 중의 하나이다. 그리 스 철학의 지배적인 견해와는 반대로 만일 세계가 시초를 가졌다 면 과연 신은 창조 전에 무엇을 했는가? 왜 신은 세계를 무한한 빈 시간 속의 어떤 다른 시간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선택한 순간 에 창조했는가? 이러한 물음들을 가지고 철학적으로 학식이 있 는 비기독교인은 소박하고 신화론적인 창조사에 대한 믿음을 갖 고 있는 기독교인을 곤궁에 몰아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아우구스 티누스는 그가 비록 인정하지 않았지만 악의에 찬 다음과 갑은 대답을 언급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신은 창조하기 이전에 비밀을 정탐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지옥을 만들었다〉 사실 상 이 물음들에 대한 어떠한 대답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 리는 그 물음들 자체가 잘못 제기되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 다. 신의 본래의 존재는 시간 안에 있지 않고 그의 존재는 과거 나 미래의 개념 적용이 허용되지 않는 절대적 현재이다. 신은 있

었던 것이거나 있을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다. 이와 관련해서 아 우구스티누스는 우리 인간이 알고 있는 흐르는 시간을 더 근본적 으로, 그리고 과거 어떤 철학자보다도 더 매력적인 현대적 방법 으로 분석했다. 두번째 강의 시리즈에서 나는 이 문제를 재론하 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분석을 이용한 것은 시간 개념이 신에게 적용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신은 시간 안에 있지 않고 그가 세계를 창조할 때 시간을 창조했다. 〈 그가 창조 했다 〉 와 〈 그가 창조할 때 〉 등의 표현까지도 창조에 대한 인간적 인 관점만을, 다시 말하자면 흐르는 시간 안에서 제공되는 관점 울 보여주며, 따라서 신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는 풀라톤의 이데아론이 기독교 철학에서 전환되는 것을 고찰해야만 한다. 선의 이데아는 플라톤 사상의 위계질서에 서 최상의 점이었다. 감각물들은 참된 존재를 갖지 않는다. 이데 아들이 참된 존재를 갖는다. 이데아의 이데아는 그가 분명히 말 하는 것처럼 심지어 〈 존재의 피안〉에 있다. 이것이 초월이라는 이후의 개념의 근원이다. 이데아는 조물주가 그에 따라 감각세계 를 만든 원상이다. 이데아는 그가 만들지 않았다. 그는 소멸되는 세계를 만들면서도 현재도 있고, 과거에도 항상 있었고, 미래에 도 있을 이데아를 바라본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의 신은 가장 높 은 단계에 있다. 인격이 비인격적인 선의 이데아의 자리를 차지 하고, 신적인 조물주는 그의 본래적인 의미가 전환되는 가운데 이 인격적인 신과 동일시된다. 그렇다면 이제 이데아는 무엇인 가? 그것은 그에 따라 신이 세계를 만든 신의 창조적 생각 Gedanke 이다. 이데아둘의 영역은 신의 무한한 지성 Vers t and 이 다. 이것이 의미 변환의 시작이고 이 변환의 끝에 이데아(영어로 는 더 주관적이고 의미가 약한 i dea) 라는 용어의 근대적인 주관적

또는 우리가 말하게 될 것처럼 〈 객관적 〉 존재자이다. 아우구스티 누스의 이데아는 신의 생각이다. 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 간은 신의 생각을 뒤따를 수 있지만, 물론 그것은 오로지 유한한 방법으로만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당하게 인간의 의식 내 에서의 이데아, 이념의 현존 Anwesenhe it에 관해서 말할 수 있다. 근세에는 〈 이념 〉 이라는 용어의 다음과 같은 마지막 용법이 유일 한 것으로 남아 있다. 로크에게서 〈 관념 i dea 〉 은 언제나 모종의 방법으로 존재하는 대로의 사물들 D i n g e wi e sie s i nd 울 표현한다. 그러나 이것이 더 이상 신의 생각과의 일치를 통해 보장되지 않 는 것이라면, 사물에 대한 우리 〈 이데아(관념 . Vors t ellun g) ) 의 관 계는 의심스러운 것이 되고, 결국 우리는 이러한 관계에 대해 의 미 깊게 질문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나 는 두번째 시리즈의 세번째 강의에서 이 문제를 다시 논하고자 한다. 이제는 천년대 초반의 기독교 사상에로 관심을 돌려보기로 하 자. 13 세기에 기독교 사상가들은 아랍인과 유태인에 의해 그들에 게 전수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넘겨 받았다. 토마스 아퀴나 스의 신학과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를 조화시키려는 잘 알려진 시도이다. 여기에서 창조에 대한 사상의 경우에는 많은 것이 변한 것 같지 않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언제나 우리가 항상 말하곤 하는 것처럼 시간 속에서의 세계의 창조는 하나의 계시진 리이지 이성의 자연의 빛을 통해 증명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라 는 것을 확실히 하여야만 했다. 이것은 실제로 이성이 아리스토 텔레스 철학에서 구체화될 때 나타난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 스는 세계가 시작과 끝이 없이 지속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확인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그 내용이 아니라 주로 그 확인이 표현되고 있는 언어에 대해서이다. 그것은 이성

의 자연적 빛을 계시의 빛으로부터 구별하고 철학과 신학을 구별 한다. 이러한 구별이 서구의 사유 전통에서 교육받은 사람에게 아무리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일지라도 이 구별이 자명한 것은 아 니다. 하나의 일정한 전통 속에서 발생된 진리를 다른 사유의 전 통을 가진 개념적 도구를 통해 해석해야만 하는 문화권에서 이 구별은 자명하다. 우리가 이 말들이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관찰해 보면 이성은 그리스 철학을, 계시는 성서를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철학은 그리스 사유에서 기독교인들이 전수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신학은 성서적 사유의 해석이다. 아성과 계시의 구별을 아직 고대 세계에 속하는 기독교적 사상가들, 곧 교부(敎父)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신학과 철학의 구별은 중 세 유럽의 상승하는 문화권에서 발전되었다. 이 문화는 아리스토 텔레스와 기독교를 통일시키는데 적합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발홍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라파엘의 아데네의 학원울 보라 ! 풀라톤의 들어울린 집게손가락은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뻗쳐 내민 손은 땅을 가리킨다. 이것 이 그리스의 두 위인의 참된 본질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은 아 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세가 이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상을 제시해 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황홀경의 이성 대신 에 냉정한 이성을 뜻하고 감각에 대해 제한되기는 하지만 적극적 인 평가를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도래는 과학의 시대가 임박했음울 의미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그 다음 17 세기에 이루어전 자연과학에로의 위대한 발걸음의 반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기 이해에 의해 완전히 왜곡되어 버렸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 이 기독교적인 사고는 하나의 해석하는 사고였다. 왜 그렇게 되 었느냐 하는 것은 쉽게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분명히 성서의 독특한 의미에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생 유럽

국가들이 수 백년 동안 마치 국민학교 학생들처럼 위대한 고대 문화의 전통으로부터 배워야만 했다는 데에 있다. 중세에 시도된 고유한 사고의 길에로의 대담한 진전은 그것이 새로운 권위를 도 입했다는 데서 정당화되고 이해되는 것이지 그것이 모든 권위를 배척했다는 데서 이해되거나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 강의에서 내가 제기하고자 하는 마지막 문제는 현실에 대한 이 새로운 관심의 근원과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렇게 말 함으로써 나는 이미 현대인으로서 말하고 있는 셈이다. 더 정확 히 하자면 나는 현실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파악의 근원과 의미 가 무엇이냐고 말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기독교적 신풀라돈주의 에서 신은 하나의 거대한 현실이었다. 성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신과 영혼이 문제였고 다른 어떤 것도 중요치 않았다. 그는 스스 로에게 다른 아무 것도 중요치 않은가라고 물었다. 다론 어떤 것 도 중요치 않다는 것이 대답이다. 사물이 우리에게서 갖는 중요 성과 우리가 그것에 인정할 수 있는 현실성의 척도는 대체로 손 울 맞잡고 간다. 토마스의 온건 개념실재론에 있어서 사물의 형 상, 곧 풀라톤적으로는 이데아, 그리고 근대적으로는 개념을 가 리키는 보편자에의 사물의 참여가 사물의 본래적인 현실성이다. 그러나 사물은 오로지 그가 형상과 질료로 되어 있는 한에서만 구체적이다. 후기 유명론에서는 바로 개별적인 사물이 현실적이 다. 이것이 현실에 대한 근대적 개념이 되었다. 이 개념을 나는 이 강의의 나머지 부분에서 의국어인 〈실재 Rea litat〉라고 표현함 으로써 용어적으로 부각시키려 한다. 근대인에게는 실재가 중요 하다. 죽 근대인은 자신을 실재론자라고 부르면 좋아하는 것이 다. 근대의 통상적인 자기 해석은 이러한 실재개념이 종교적 선입 견에 저항해 얻어내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근대는 중세의 피안

으로 향한 문화와는 대조적 인 하나의 새로운 차안적 문화로 나타 난다. 이 경우 기독교를 포기하는 것은 모두가 견딜 수 있는 일 이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는 하나의 고고한 위치에 있는 윤리로 재해석된다. 이것이 기독교가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실재에 관계 하는 것처럼 보이는 형식이다. 분명히 또한 이러한 해석도 기독 교의 중요한 면을 밝혀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러한 해 석이 기독교적 신앙의 내적 역동성을 오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론적 사유의 영역에서의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강의에서 다 루기로 하겠다. 이 강의의 마지막 고찰에서 나는 그것의 실천적 배경을 밝혀 보고자 한다. 우리는 다시 한번 기독교 역사의 이중성에로 되돌아오게 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역사는 항상 그리고 끊임없이 다름 아닌 역사의 종말을 기다리는 인간에 의해 변화되어 왔다. 우리는 이 러한 전환을 중세와 근대 초기를 통해서 추적해 보고자 한다• 사 제들은 질서 잡힌 국가 상태의 보호자가 되었다. 이것은 제어되 지 않는 자연 본성에 대한 기독교의 공격의 크나큰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통치에 관여함으로써 지배 귀족의 편에 섰다. 오 랫동안 사제들은 오로지 귀족 가문에서만 나울 수 있었다. 사제 들은 질서를 위한 투쟁에서 왕에 봉사했다. 그들은 왕이나 황제 에 의해서 임명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에 속하는 것 이 아닌가? 그들의 성직서임권은 교회의 수장인 ___ 그때는 사 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교황에게 속했다. 귀족 출생이 목수 의 아들 예수가 행했던 것과 같은 자신의 형제를 사랑해야 할 자 의 필수적인 특징인 것인가? 그리하여 한 세기에 허용되고, 또 필연적인 것으로 보였던 것이 다음 세기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되었다. 기독교는 기존의 세계에 대해서 항상 공격적이었 다.

우리는 중세를 클뤼니파와 프란체스코파와 같은 기독교적 개혁 운동들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교황은 몇 세기에 걸친 황제에 대한 투쟁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황제와 같은 교황은-내가 바로 보았다면―一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영성과 다가오는 근대 의 실재성의 동맹에 굴복했다. 중세의 교회는 교회적인 근원과 세속적인 영향력이 있어야 하는 질서를 만들어 내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질서가 거의 세워지자 그것은 근본적인 기독교인이 되고 자 하는 사람들에게 종교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동시 에 그 질서는 소규모의 세속적 지배자들에게도 참을 수 없는 것 으로 되었다. 이미 교황은 유사한 동맹을 통해서 황제를 제압했 었다. 교황은 이 세상에서 기독교적 질서의 성취를 위해 좀 더 높은 성직자적인 전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선량 한 기독교인들의 의식은 독일에서 생성되어가는 군주들과 이탈리 아에서의 근대적 도시국가들의 권력 요구와 결합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왕이 교황을 아비뇽으로 납치했을 때 교황의 커다란 권위 는 백년 전 황제의 권위가 그랬듯이 의문시되었다. 나는 세 권력 사이의 이러한 투쟁을 자연, 기독교, 실재라는 추상적인 세 가지 개념을 적용해서 서술하고자 한다. 나는 여기 에서 이 개념들을 일반적이고도 포괄적인 의미에서 사용하지 않 는다. 역사적으로 영향력 있는 권력을 서술하기 위해서 나는 여 기서 이 세 용어를 이 권력들이 사용하는 어휘에서 선택한다. 내 가 여기에서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을 내가 말하고 있는 시대에 있어서 봉건 남작이 가장 명확히 구현해 보여 준다. 프란체스코 파의 승려는 기독교를 그것의 가장 결정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보 여줄 것이다. 도시의 대상인, 말하자면 피렌체의 옛 메디치가의 상인은 우리에게 실재를 보여 줄 것이다. 내가 이 세 개념을 정 확히 정의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역사를 아는 사람이

라면 아마도 이 개념들에 대한 표상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몇 가지 설명적인 서술을 해보고자 한다. 자연은 기독교가 있기 전에 있었던 현존하는 삶의 형식과 인간 영혼에서의 힘들을 의미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자연이 란 용어는 기독교적 어휘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이는 구원이 필 요한 〈 자연적인 인간 〉 을 지칭한다. 자연 그 자체는 주로 신화적 으로 표현될 것이다. 자연은 신들의 지배 밀에 있는 인간이다. 나는 이러한 개념이 유럽 민족에 있어서 초기의 전봉건적이고 부 분적으로는 봉건적인 사회에 어느 정도 어울리는 개념이라고 믿 는다. 반면에 기독교 이전의 고대의 옛 문화들은 다론 개념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나는 이 강의에서 기독교를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기독교는 자 기 스스로를 초자연적안 힘의 대변자로 이해했고 여기에서 자연 은 이미 정의된 의미에서 이해되었다. 기독교는 자연에 대해서 공격적이었다. 기독교적 사랑이 한 인간 속에서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영혼을 지배하는 힘들이 국복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그 힘들은 마치 신화의 초기의 신들이 죽임을 당한 것처럼 죽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연 본성으로 부터 그가 이웃이기를 원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웃인 그러한 사람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제 4 복음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 알의 밀이 땅 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 24). 신은 우리를 신들의 손에서 해방시 켜 준다. 실재 _—정확하게 말하자면 세속화된 실재라고 해야 할 것이 다——는 내가 사랑의 신(하나님)에 속함이 없이 신들로부터 해 방된 세계를 서술하려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율성의 세계이

다. 내가 여기서 제시하고자 하는 우리의 역사에 대한 한 추측은 이런 의미에서의 실재가 오직 기독교만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 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러한 추측을 세번째 강의에서 신에 의해 서 세계는 탈신화되었다라고 말했을 때 처음으로 언급했던 적이 있다. 우리가 이 추측에 대한 근거 있는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뒤따르는 4 개 강의의 자료를 편력해야만 한다. 그러고 나서 이 시리즈의 마지막 강의에서 나는 다시 이 문제에로 되돌아올 것이 다. 여기서는 다만 그 속에서 처음에는 기독교적 형태로, 그러고 나서는 세속화된 형태로 비슷한 행동과 방법이 나타나는 역사적 발전을 언급하려고 한다. 복종, 통치, 혁명이라는 세 개의 현상 울 짤막하게나마 고찰해 보자. 우리 시대에서 대부분 사람들이 알고 있는 복종의 가장 엄격한 형태는 군대의 규율이다. 아마도 역사 속에 있었던 복종의 가장 엄격한 형태는 승려교단에 있었다. 부드럽고 성스러운 프란체스 코는 많이 인용되는 절대복종 (Kadaver g e horsam= 시체복종)이라 는 말을 그의 교단에 도입했다. 승려는 상급자에게 더 이상 자신 의 운동을 못하는 시체와 마찬가지로 순종하지 않으면 안된다. 기독교인에게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모든 복종은 오로지 신 에게만 해야 한다. 그리고 이 복종은 우리를 세계에 대해 완전히 자유롭게 한다. 그런데 신은 보이지 않지만, 상급자는 보인다. 따라서 승려는 신에 대한 통제불가능한 복종에 스스로 한정됐다 고 주장함으로써 그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기 위 해 상급자에 게 신 의 대변자로서 복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그는 그 자신의 주체적 의지를 없애버리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이것은 참된 자 유의 탄생 시간이며 땅에서의 한 알의 밀알의 죽음이다. 나는 기 사단이 복종의 이러한 엄격성을 봉건시대에서 엄격한 규율과는 전혀 다른 것이 지배했던 군생활로 옮겨 놓았다고 믿는다. 스페

인과 프로이센 군인들은 중세사의 많은 부분이 기사단에 의해 지 배되었던 지방 출신들이다. 승려적이고 군사적인 복종이 얼마나 내적 자유를 현실적으로 가져왔는지는 우리 역사의 이중성에 대 한 많은 문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서는 이 문제를 간단히 지적하고 마지막에 다시 한번 이 문제로 되돌아올 수 있을 것이 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질서 잡힌 통치는 사제들에 의해서 촉구되 었다. 근대의 정치사는 그 대부분이 국가 권력의 성장사이다. 국 가가 억압하는 것은 중세 귀족의 많은 인물들에게서 그토록 거칠 게 나타나는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이다. 16 세기 영국, 17 세기의 프랑스 역사에서 국왕은 이러한 과정을 급속도로 추전하는 일을 떠맡았다. 왕권신수설은 그 당시 봉건적 폭력을 길들이는 근대적 이념이었다. 법 앞의 평등과 기능적인 국가 기구는 절대주의가 민주주의에 넘겨 준 유산이다. 이후에는 추상적인 국가 개념이 왕을 대신했다. 오늘의 민주국가는 시민들에게서 국가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 절대왕정 스스로가 가졌던 것보다 더 많은 실재 적 권력 수단을 갖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권력의 오용에 대 항한 법 적 보장은 오늘날 더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엄격한 통치는 그것이 전립되어 가는 한에서는 급진적(진보적)일지라도 그것이 일단 건립된다면 보수적인 경향 울 갖는 것이다. 내가 보수적 기독교라고 부르는 것은 이제 기독 교와 자연 간의 타협으로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급진적인 기독 교는 그것이 자신을 정치적으로 이해하게 될 때 혁명으로 돌진한 다. 크롬웰의 청교도들은 왕권신수설을 비기독교적이라고 생각했 다. 고전적 기독교의 개념들인 자유, 평등, 박애를 세속적 의미 에서 사용했던 프랑스 혁명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 기독교적 급진주의가 실재성의 급진주의 Rad i ka li smus der Rea li rn t에로 전환

된 것을 함축적인 의미에서 세속화라고 표현하고 싶다. 나는 여기에서는 일단 네 개의 강의를 위해 정치적 역사 문제 를 접어 두고 이 문제는 결론에 가서야 다시 디루-기로 하겠다.

제 6 강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1543 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Ni co laus Ko pern i kus 는 그의 책 『천구의 회 전에 관하여 De revoluti on ib u s orbiu m coeles ti um 』를 출판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오늘날 우리가 코페르니쿠스 체계라 고 부르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 체계에 따르면 태양은 우주의 중심 가까이에 정지해 있다. 그에 반하여 지구는 이중적 운동을 한다. 죽 지구는 그 자신의 축을 24 시간에 한번씩 회전하고 태양 가까이의 한 점을 일년에 한 번씩 일주한다. 이러한 체계를 이미 그리스 천문학자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알고 있었지만 거부했다. 기원전 3 세기에 사모~ 의 아리스타르코스 Ar i s t archos 는 후에 코페르니쿠스가 선택한 형 태와 거의 비슷한 형태로 그것을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 약 일백년 뒤의 인물이자 고대 천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관찰자로 통하기도 하는 히파르코스 H ipp archos 는 이를 배척했다. 그는 천 체운동에 대해서 후에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로 불리는 것의 다른 해석을 제안했다. 이 체계는 기원 후 150 년에 그리스 천문학의

고전적 교과서를 쓴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 P t olema i os von Alexandr i a 에 따른 것이었다. 우리가 근세 천문학을 이해하 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체계를 그리스인 들이 그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 서 거부했는지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지구가 정지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으로부터 본다면 분명히 가장 자연스런 견해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하 늘도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지구는 편평한 원반처럼 보인 다. 이미 원자론자들에 관하여 말할 때 나는 그리스인들이 이 소 박하고 자연스런 견해를 일찍이 포기하였다고 말한 바 있다. 사 람들은 지구를 이 지구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구(球)인 하늘이 둘러싸고 있는 구로 인식했던 것이다. 태양을 (그리고 더 부정확 하게는 달도) 포함해서 별들은 날마다 똑같은 운동을 하늘에서의 그것들의 상대적인 위치의 지적할 만한 변화없이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별들을 천구에 고정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좋은 출발점 으로 된다 . 이런 식으로 가정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한 가지는 분명하다. 죽 지구에 상대적인 하늘의 운동이 존재한다는 것과 일주가 24 시간에 수행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늘이 지구를 회전하는 동안에 지구가 정지하고 있는지 아니면 지구가 천구의 중앙에서 반대 방향으로 도는 반면에 하늘이 정지하고 있 는지를 물어 볼 수 있다• 아니면 둘 모두가 회전하고 있는 것인 가? 그것들의 상대운동이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 렇다면 절대운동은 무엇인가? 그리스 천문학자와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잘 깨닫고 있었다. 많은 견해들이 주장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가 일치한 최종 결정은 지구가 정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결정 의 주된 근거는 물리학에서 왔다. 그리스인들은 지구가 얼마나

큰지를 매우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만일 하늘이 정지하고 있다면 지표면이 지구의 회전 결과로 그리스 땅의 지리 적 넓이 안에서 일 초에 약 300 미터씩 움직여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물체가 그보다 훨씬 더 느리게 움직인 다고 해도 이 물체는 진동하기 시작할 것이고 사람들은 반대 방 향에서 오는 공기를 강한 바람처럼 느낄 것이다. 그리고 지구가 앞에서 말한 속도로 움직인다면 지구는 공기 속을 무서운 폭풍 속에서와 같이 빠르게 지나가게 될 것이다. 나아가 더 민감한 질 문아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죽 예를 들면 만약 우리가 돌멩이 를 높은 탑에서 떨어뜨린다면 그 돌멩이는 수직선 1) 으로부터 서 쪽으로 지구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 런데 이것이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로 되는 것은, 만약 지구가 회전한 다면—옮긴이) 왜냐하면 돌멩이가 떨어전 동안 그 밀에 있는 지 구는 동쪽으로 회전했겠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입장에서 보면 지 구가 공기와 함께, 그리고 돌이나 그밖에 다른 것과 함께 회전한 다고 쉽게 답할 수 있다. 이 대답은 물론 그리스인에게도 떠올랐 었다. 그러나 그들은 관성법칙을 아직 알지 못했고, 도대체 자연 법칙의 추상적인 개념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운동 원 인이 작용하지 않는 물체는 정지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구의 회전을 주장하려면—옮긴이) 공기와 자유롭게 낙 하하는 돌을 지구와 함께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힘을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기서 힘이라는 것은 언제나 힘을 행사하는 움직이는 물체를 의미했던바, 어쩌면 그것은 운동하는 물체와 계 속해서 접촉되어 있는 그러한 물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기원 후 17 세기와 20 세기의 물리학자들처럼 그리스인들도 원격 작용을 1) 여기에서 말하는 수직선은 돌을 지상으로 떨어뜨릴 때 떨어뜨리는 위 치에서 지상으로 내린 수직선을 의미한다.

믿지 않았다). 여러분들은 (여기 지구가 움직인다는 가정을 포기한 데서 -옮긴이) 근대의 (특히 영어권의) 경험주의자들이 오캄의 면도날 Occams Ras i ermesser 이 라고 즐겨 부르는 유명 한 원리 , 곧 더 이상 실체들 En titat en 을 필요한 것으로 도입하지 않는 원리가 날마다 이루어지는 지구의 일주 운동에 대한 가정과 이에 의해서 강요된 모든 복잡한 보조가정 H ilfs h yp o t hesen 을 버 린 그리 스인들 에 의해서 매우 합리적으로 적용되었음을 본다. 그렇다면(지구가 움직인다는 가정을 포기한다면—옮긴이) 확실히 그들은 어떻게 하 늘이 그것의 훨씬 더 빠른 운동의 역학적 하중을 견디어 낼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그러나 결국 하늘은 분명히 우리 모두에게 알려진 지구의 물질과는 아주 다른 어떤 물질로 되어 있다. 죽 하늘의 빠른 운동은 그것의 별들의 광력(光力), 그것의 명백한 가벼움 그리고 그것의 완벽한 구형태 (球形態)와 더불어 있는 아름답고 놀라운 성질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천문학적 문제는 일년간의 운동에서 발생했 다. 하늘이 전체로서 움직인다는 명제는 다만 일차적인 근사치에 서만 올바르다. 물론 대부분의 별들은 하늘에 고정되어 있고 . 따 라서 항성 (恒星 Fix s te r n) 이 라고 불리 운다. 그러 나 항성들의 정 원 에서 자기들의 고유한 길을 따라 움직이는 7 개의 별들이 있다. 이 길들은 예측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7 개의 별들은 당연히 행성 Planet, 곧 길 잃은 별이라고 불리운다. 이들 중 5 개의 별들, 곧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은 비록 이상하게 빛나고 또 항상 빛나긴 하나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은 아닐지라도 일반적인 별들처 럼 보인다. 여러분들은 이 별들이 신의 이름인 머큐리, 비너스, 마르스, 주피터, 새턴으로 불리고 있음을 알 것이다. 여기에 또 한달을 주기로 천구를 회전하는 달을 첨가해야만 한다. 태양도 역시 행성이다. 물론 우리는 그 태양의 밝기 때문에 태양 주위의

별들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밤에 어느 별들이 하늘의 태 양과는 다른 쪽에 있는지를 알게 되는바, 이것들은 계절에 따라 서 변화한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바로 일년이 태양이 일주 (Umlauf, 전문 용어 로는 Revoluti on ) 하는 주기 임 을 쉽 게 추론하는 것이다. 이미 말한 것처럼 행성들의 운동은 좀 길 잃은 듯하다. 행성들 은 천구에서 사람들이 수대 ( 獸 帶) 또는 황도라고 부르는 가장 커 다란 원을 상당히 정확하게 지키기는 한다. 이 원에서 그들은 평 균적으로 갈은 방향(동쪽에서 서쪽으로)으로, 그러나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가령 달은 하늘을 한달에 한 번 회전하고 토성 은 29 년에 한 번 회전한다. 그러나 그 이의에 항성과 유사한 다 섯 행성들은 이따금 무희와 같이 행동한다. 그들은 멈추어서 뒤 로 방향을 바꾸고 호(張 Schle ife)를 완성하고는 다시 앞으로 나 아간다 . 이렇게 수성과 금성은 항상 태양 주위에서 춤을 춘다. 그렇기 때문에 금성은 샛별처럼 보이는가 하면 저녁별처럼 보이 지만 결코 한밤중에는 보이지 않는다. 화성, 목성, 토성은 자립 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그들은 일년에 한 번 그들이 정확히 태 양의 반대편 하늘에 있을 때 호를 그리면서 춤춘다. 이렇게 해서 태양이 어쨌든 행성운동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스 천문학자들은 현상을 정확히 서술하는, 또는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현상을 구 해 낼 수 있는 re tt en 수학적으로 정밀한 이론을 추구하였다. 나 는 여기에서 유독소스 Eudoxos2) 가 발견한 27 개의 구가 서로 구르 2) Eudoxos( 기원 전 408(391 ? )- 3 55(338 ? )). 회랍의 수학, 자연과학자, Arch yt as 의 제자, 신학 철학(윤리), 의학, 자연과학, 옹용수학에 능통 했으며 원추의 단면 이론과 수학적 동력학을 매개로 하여 동십원적 구 의 체계로 표현한 행성의 주기운동을 발견했다.

고 있는 지극히 예리한 고대의 모형을 다루지 않겠다. 아리스타 르코스는 코페르니쿠스적 해결을 제시한다. 태양은 체계의 중앙 에 정지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태양은 행성이 아니고 세계를 지배하는 물체이다. 그것의 가상적인 일년간의 운동은 태양을 일 년에 일주하는 지구의 참된 운동의 반영이다. 지구는 다른 행성 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행성이다. 달은 더 이상 복잡하지 않게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지구의 위성이다. 항성과 같이 한 곳에 머물러 있는 . 다섯 개의 행성들은 태양 주위를 돈다. 수성과 금성 은 태양에 지구보다 더 가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 들을 지구에서는 결코 원일점(遠日點)에서 볼 수 없다. 세 개의 다른 행성들은 태양에서 지구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일년에 한 번 지구가 태양과 해당 행성 사이에 있는 순간이 온다. 이 경우 지구에서 보면 이 행성은 하늘에 있는 태 양을 마주보고 있다• 그런데 지구는 이러한 〈 밖의 〉 행성들보다 더 빨리 움직인다. 그러므로 행성이 태양과 마주보고 있는 시간 에 그 행성온 지구 뒤에 처쳐 있어야만 하며 , 따라서 지구상의 관찰자에게는 겉보기에 뒤로 움칙이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어릴 적 처음 자동차에 랐을 때 도로에 있는 나무들이 우리 옆울 지나 빠르게 차 뒤로 달려가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 는지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실제로 밖의 행성들의 겉보기 운 동의 선로 Schle ife,: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연주운동에 반대되 는 선로이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선로에 중복되는 느린 전진은 동일한 점을 중심으로 여러 다른 속도로 회전하는 물체들 사이의 분명한 상대운동이다. 이렇게 해서 이 이론은 관찰된 사실을 가 장 찰 설명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참된 이론이라고 근대에 말해 왔던 것보다 더 잘 설명한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는 내가 지금까지 기술해 온 걷

보기 운동의 설명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 체계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 사람들이 근대적 사유에게 그것을 가장 쉽게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상대적 운동의 개념에 의해서이다. 첫째로 태양과 지 구의 상대 적 운동만을 관찰해 보자. 아리스타르코스와 코페르니 쿠스는 태양을 정지시키고 지구를 그 주위의 찰 규정된 원을 따 라 회전하게 한다. 이와는 반대되는 가정, 곧 지구가 정지해 있 고 태양이 미리 가정된 것에 정확히 상응하는 원으로 지구 주위 를 회전한다는 가정을 채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둘째 ’ 로 그 밖의 다섯 행성들이 태양에 상대적으로 항상 코페르니쿠스 의 체계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움직인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이제는 태양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다섯 행성들은 태 양 주위의 그들` 운동에 덧붙여 태양과 더불어 지구 주위를 돌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이중적인 운동을 갖는다. 죽 태양 주위 와 태양과 함께하는 운동.이다. 지구 위 관찰자들에 대한 그것들 의 겉보기 궤도는 이 변화된 서술 방식에 의해서 전혀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태양과 함께 하는 운동은 밖의 행성들에 대해서는 일년간의 선로이며, 태양 주위를 도는 운동은 그것들이 그 주위를 선회하고 있는 점의 전진이다. 우리에게 절대적 관계 체계가 없는 한 우리들이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상대운동일 뿐이 며 이 운동은 두 체계에서 동일한 것이다. 그런데 방금 나는 아주 근대적인 서술 방식을 선택한 셈이다. 나는, 전문가를 위해 말해두겠는데, 티코 브라헤 3) 의 체계를 상 대주의적으로 해석했고, 그와 더불어 그것을 합리적으로 구성된 지구 중심적인 체계를 동력학적으로 반박할 수 없다는 논증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리스와 근세 초기의 천문학자들은 다른 개념 3) Ty c ho Brache(l546-1601). 덴마크의 천문학자, 그로부터 케플러가 행성운동의 법칙들을 유도해내었다.

을 사용했으며, 따라서 그들은 이 두 체계 사이에 실제적인 차이 가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프톨레마이오스는 물론 코페 르니쿠스적인 체계를 출발점으로 선택하지 않았고, 그로부터 관 계 체계의 변환을 통해 자신의 체계를 얻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 는 처음에 지구가 정지해 있다고 확정했다. 밖의 한 행성의 이중 적인 운동은 지구 주위의 원에서 이상적인 한 점이 움직인다고 생각함으로써 설명되었다. 이 움직이는 점은 두번째 원의 중앙, 말하자면 행성이 운동하는 주전원(周轉圓)의 중앙이다. 그러므로 행 성 의 운동은 이 심 적 으로 exzen t r i sch 회 전하는 큰 바퀴 에 고정 되 어 회전하는 작은 바퀴의 테 위의 한 점의 운동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원에 대해서 언급해 왔다. 오늘날의 지식에 의하면 이것은 근사적으로만 올바르다. 좀더 나은 근사치 에 있어서는 너무 이심적이지 않은 타원에 대해 언급해야만 한 다. 그러나 고대 천문학자 및 그와 마찬가지로 코페르니쿠스에게 있어서는 천체들이 정확하게 원 위를 운동한다는 것이 하나의 성 스러운 전리였다. 원은 가장 완전한 곡선이었고 천체들은 가장 완전한 물체들이었다. 많은 세계상에 있어서는 이 천체들 자체가 신적인 또는 천사적인 힘이었다. 이 완전한 물체가 불완전한 운 동을 수행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신성 모독만큼이나 불가능한 일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 시대에는 아무도 없다. 이것이 천 문학자들에게 그들 체계를 그렇지 않았으면 필요했을 것보다도 덜 유연하게 만들도록 제한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온갖 타협을 다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자기의 궤도를 두 개의 중첩된 원으로 구성했다. 더욱이 그는 여러 행성들의 중심이 태양에 놓 여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양 가까이 여러 곳에 있다는 것을 허용해 야 했다. 결국 그는 행성의 원에 있어서 그것의 일정한 각속도에 관한 생각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이 현상을 구하기 위해

일어났다. 이것은 모든 과학자들에게 찰 알려진 일로서, 근본적 인 잘못이 놓여 있는 이론을 주의 깊게 관찰된 사실에 일치시키 려고 할 때 나타나는 어려움이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오류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오류와 동일한 것이었다. 오류는 원으로의 제 한에 놓여 있었다. 이것은 우리를 다시 다음 문제로 되돌아가게 한다. 왜 그리스 인은 결국 프톨레마이오스를 선호했으며, 어찌해서 근대인들은 코페르니쿠스를 선호했는가? 프톨레마이오스에 유리한 두 가지의 논의가 있다. 그 하나는 태양 주위의 지구의 운동이 자신의 축을 둘러싼 지구의 회전과 마찬가지로 물리학과 합치시키기가 비슷하게 어려웠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지구가 운동한다면 그것의 전정한 운동은 행성의 겉보 기 운동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선로〉-항성의 겉보기 운 동에서도 나타나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와 같은 것은 관찰에 있어서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거리를 자동차로 빨리 달리 는 사람에게는 가까이 있는 나무가 반대방향으로 빠르게 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산맥은 오랫동안 겉보기 장소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항성들이 지구의 운동을 그것들이 일년 동안에 가시적으로 달리 는 작은 선로를 통해서 반영하지 않는다면, 이 항성들은 멀리 떨 어져 있어야만 한다.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항 성이 태양에서 그것까지의 거리가 태양에서 지구까지의 거리인 1 억 5000 만 킬로미터보다 30 만 배나 더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시 오캄의 면도날 Occams Razo r>을 상기 할 수 있 4) W ilh elm von Occam(l285-1349). 영국의 철학자. 프란체스코 신학자 및 교회정치작가. 오캄의 면도날은 방법적 경제성의 원리를 말한다. 이 것은 학에 있어서 보편적 방법적 규정으로서, 그의 형이상학과 인식론

다. 필요치 않다면 왜 측량할 수 없는 거리를 가정해야 하는가? 지구가 정지되어 있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서는 물론 항성의 선로에 있어서 지구의 운동의 반영을 기대할 수 없다. 항성의 가 상적인 선로 궤적의 존재에 대한 경험적 증명은 19 세기 중엽에서 야 이루어졌다. 프톨레마이오스를 지지하는 이러한 매우 훌륭한 과학적 근거를 이해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근세의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단지 느린 속도로만 이루어졌다는 것에 대해서 놀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왜 이것이 도대체 이루어지게 됐을까 하는 것에 놀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정확한 관찰과 새로운 물리 학적 이론에 근거한 훌륭한 천문학적 이유들이 있었다. 이에 대 해서는 곧 언급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이유들은 이미 그 이 유들의 발견 이전에 코페르니쿠스를 믿었던 사람들에 의해서 발 견되었다. 왜 그러했던가? 케플러 Ke p ler, 갈릴레이 그리고 데카 르트와 같은 사람들이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 매력을 느낀 것은 처음에는 심리적인 사실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추측건대 그리 스 천문학자들이 서로 나누었던 논의는 잊혀져 버렸을 것이다. 알려진 것은 다만 프톨레마이오스뿐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 문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와 히파르 코스 자신이 열정적인 탐구를 수행했던 정신과는 매우 다론, 경 직된 도그마적 사상적 체계가 생성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 는 하나의 전혀 새로운 독창적인 구상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먼 지투성이의 전승의 창고를 청소하려는 시도였다. 죽 누구든지 이 에서 이성에서 분명한 개념이나 경험에 근거를 갖는 실체만이 허용된다 는 것, 죽 이 개념이나 실체들은 직관적으로 접할 수 있지 않으면 안된 다는 것. 따라서 영혼밖에 보편적 실체 univ e rsale Real itlit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우리가 이제 자연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 까지도 자유롭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관찰 울 시도했다. 이 새로운 관찰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잘 맞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관찰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에 마 찬가지로 맞아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를 언제나 전지하게 추구하 지는 않았다. (티코 브라헤는 바로 이러한 일을 행했다) 프톨레마이 오스 체계는 그것의 기본 생각 때문이 아니라 다만 사람들이 수 백년 동안 그것을 전실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경직되어 있었 다. 수 백년 동안의 공식적인 승인은 심지어 전리에 대해서도 자 주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것은 반박할 여지가 있는 가정에 대해서는 훨씬 더 그러하다. 그리하여 태양 주위의 행성 들의 조용한 운행 Revolu ti onen 은 근대 에 게 , 비 록 전혀 다른 의 미 로 사용되기는 했어도, 그의 슬로건, 곧 혁명 Revolu ti on 이라는 말을 제공했다. 우리는 근세의 이론 천문학의 진정한 혁명적 발견은 코페르니 쿠스의 체계가 아니라 케플러의 제일 법칙 (J. Kep le r 1604) 이라는 것을 옹호할 수 있을 것이다 .5) 케플러는 행성들이 타원의 한 초 점에 위치하는 태양을 중심으로 이 타원을 운행한다고 확신했다. 이 발견은 티코 브라헤의 끈질간 관찰을 통해서 가능했다. 이 덴 마크의 위대한 관측자가 20 년 동안 쉴사이 없이 모아둔 긴 숫자 목록의 보물이 과학적인 천재, 곧 창조적 환상과 세세한 부분까 지도 빈틈 없는 정확성을 지닌 케플러의 손에 넘어간 것은 자연 과학사에서 하나의 행운이었다. 케플러는 어느 시대의 누구보다 도 하늘의 영역들의 수학적 완전성을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5) Joh annes Kep le r(l571-1630). 독일의 근세 천문학의 창시자. 케플러의 제일 법칙은 행성의 궤도는 타원이고 그 초점의 하나에 태양이 위치한 다는것.

는 화성의 계산된 운동과 관측된 운동 사이의 8 분보다 더 작은 오차를 참을 수 없었다. 8 분은 달의 겉보기 직경의 4 분의 1 에 해 당된다. 미리 계산된 곳으로부터 관측된 행성의 위치까지의 거리 는 그만큼이나 작았다. 그런데 이 거리가 설명되어야 했다. 케플 러는 40 번 이상이나 각기 상이하게 가정된 화성 궤도가 모두 관 측치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궤도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였 다. 그는 작업 가설로서 타원을 시도해 보았는데 이것이 관측을 정확히 서술하는 것을 보고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에 그는 이제부터는 타원도 원과 마찬가지로 천체 운동의 완전한 체계의 한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학적 표상 능력을 갖게 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천구의 화음에 대한 케플러의 복잡한 체계에 관 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그것은 아마도 바흐의 푸가 Fu g e 예술 에 비견할 만한 예술적인 수학의 작품이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 적인 의미에서의 자연과학이 아니며 따라서 당연히 그 체계의 아 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과학에 의해서 잊혀지게 되었다. 나는 다음과 같은 다른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이제까지 말한 모든 것은 우주생성론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천문학은 이 세계의 공간적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구조롤 기 술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것은 우주생성의 이론을 제기하는 것이 예정되어 있는 과학으로서 보일 것이다. 실제로는 고대나 근세 초기의 천문학은 그 어느 것이나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주생성론 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고대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나는 우주생 성론을 도입하기 위해 철학에 관해서 언급해야만 했다. 우리는 심지어 근세에 있어서도 내용이 풍부한 우주생성론의 사상을 두 개의 철학, 곧 데카르트와 칸트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행성의 정확한 관측은 발전에 대

한 어떠한 암시 없이, 그리고 생성과 소멸 혹은 체계의 어떤 비 가역적인 변화에 대한 암시 없이 단지 주기적인 운동만을 보여 주었다. 기계적인 인과율은 천체에게는 생물학적 성장과 노쇠만 큼이나 낯선 것이다. 하늘은 정확한 관측에 대해서 마치 하나의 거대한 완성된 예술작품처럼 나타난다. 하늘을 불변적인 수학적 법칙으로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지상에서 알 수 있는 모 든 것에 대해서 단지 첨예한 대립만을 이룰 뿐인데, 그것은 왜냐 하면 달 밑에 있는 모든 것은 나날이 변하고 더욱이 급변하기 때 문이다. 케플러에게 천문학은 수학의 매체를 통한 창조자에 대한 예배였다.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수학적 법칙 속에서 신의 창조사상을 뒤따라 사유한다. 이것은 데모크리토스의 세계 가 아니라 『 티마이오스 』 의 세계이다. 사람들이 자연과학적 우주생성론을 시도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하늘과 땅을 공통의 물리학적 법칙의 지배하에 가져와야만 했다. 수학은 지상으로 내려오고 역학은 하늘로 울라가야만 했 다. 결국 천체역학이라고 불리는 이 새로운 과학의 성립은 세 단 계로 이루어졌다. 우선은 천체의 운동 그 자체가 수학적으로 정 확하게 기술되어야 했다. 이것은 케플러가 완수했다. 그리고 역 학이 수학적 과학으로 정초되어야 했다. 여기에는 갈릴레이가 가 장 중요한 공헌을 했다. 마지막으로 역학이 천체 운동에 적용되 어야 했다. 이것은 뉴턴의 찬란한 업적이었다. 이제 나는 갈릴레이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두 개의 주제를 논의 하고자 한다. 그것은 역학에 있어서 그의 발견과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위한 그의 투쟁에 관한 것이다. 나는 여기 이 두 분야에 서 과학사에서 주의 깊게 연구되고,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독자 에게 접근 가능한 개별적인 문제보다는 원리적인 문제에 더 관심 을 갖고 있다.

갈릴레이는 역학의 과학을 정초함으로써 수학을 땅으로 끌어 내렸다. 여기에서 그는 그에 의해서 높은 찬사를 받은 그리스의 다른 사상가 아르키메데스를 뒤따랐다. 아르키메데스가 정력학에 서 이루어 놓은 것을 그는 동력학, 운동론에서 완수하려고 했다. 그는 이론을 후대에 완전한 형태로 남겨놓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우선 호이겐스 Hu yg ens 와 뉴턴과 같은 이후의 물리학자들이, 그 리고 나아가서는 18 세기의 위대한 수학자들이 많은 것을 보완하 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사상적인 노력 은 갈릴레이에 의해서 이뤄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노력 울 뒤쫓아 보기로 하자. 근대의 자연과학은 그 나름의 역사적 신화를 가지고 있다. 그 것은 갈릴레이에 관한 신화이다. 이 신화는 사람들이 암흑의 중 세에서는 관찰에 관심을 갖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변을 높 이 평가했지만, 갈릴레이는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대로 그것을 서술함으로써 과학의 길을 닦았다는 것이다. 다른 신화들과 마찬 가지로 이것도 일말의 전리를 표현하고 있다. 이 신화가 갈릴레 이를 높이 평가한 것은 옳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갈릴레이의 참 된 업적의 본질을 완전히 깎아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모든 점에서 신화와 정확히 반대되는 것을 말함으로써 갈릴레이 의 업적을 특칭지우고자 한다. 그러므로 나는 후기 중세가 결코 암혹 시대가 아니었다고 선언한다. 후기 중세는 사상적 에너지가 번뜩이는 높은 문화의 시대였다. 그 시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 학을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왜냐하면 그가 누구보다도 감각적인 현실을 다루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된 약 점은 그는 너무나 경험적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연에 대한 수학적 이론에 다다룰 수 없었다. 갈릴레이는 세계 를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술하고자 함으로써

커다란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그가 표현하는 형식으로는 결코 실제적인 경험에서 성립될 수 없는, 따라서 개별적인 관찰을 통 해서는 결코 확인될 수 없지만 바로 그 때문에 수학적으로는 간 단한 그러한 법칙을 설정했다. 그리하여 그는 현실적인 현상들의 복잡성을 개별적인 요소로 쪼개는 수학적 분석에 길을 열었다. 과학적 실험은 질문을 제기하고 또 대답을 줄 수 있는 수학적 이 론에 의해 유도된다는 점에서 일상적인 경험과 구별된다. 이렇게 해서 주어진 〈 자연 〉 은 조종 가능한 〈 실재 Rea litat 〉 로 전환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보존하고 현상을 구하려고 했지만, 그 의 실수는 건강한 인간 오성에 너무 자주 정당성을 인정했던 것 이다. 갈릴레이는 자연을 분해하며, 우리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새로운 현상을 끌어내도록 하며 수학을 통해서 상식을 반박하게 끔하였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무거운 물체는 빨리 떨 어지고 가벼운 물체는 천천히 떨어지며 아주 가벼운 물체는 심지 어 위로 올라간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로 일상적 경험이 우리에 게 가르치는 바이다. 돌멩이는 빨리 떨어지고 종이는 천천히 떨 어지며 불꽃은 위로 울라가는 것이다. 갈릴레이는 모든 물체는 동일한 가속도로 떨어지며, 그렇기 때문에 같은 시간 후에는 같 은 속도에 도달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일상적인 경험에서 보면 이것은 확실히 들린 것이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계속해서 전공 속에서는 물체들이 사실상 그러한 모습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그 리하여 그는 진공, 곧 빈 공간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내세우는데, 이리하여 또다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뿐만 아니라 일상적 인 경험에 모순되게 된다. 그 스스로는 진공을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제자인 토리첼리 Torr ic e lli와 같은 17 세기 후반 의 물리학자들에게 진공 제작에 대한 강한 자극을 주었다. 실제

로 거의 충분한 진공이 만들어졌을 때 물체 낙하에 대한 그의 예 견이 전공 속에서는 옳은 것으로 증명되었다. 나아가 그는 여러 형태의 무게를 가진 물체와 다양한 크기와 형태를 지닌 물체가 각기 다른 속도로 낙하하는 원인이 되는 두개의 힘, 곧 양력과 마찰에 대한 수학적 분석의 길을 열어 놓았다. 사람들이 이러한 힘이 없이도 얼마나 빨리 물체가 낙하하는지를 알고만 있다면 그 들은 이러한 힘 자체를 낙하를 지연시키는 영향을 고려함으로써 측정할 수 있다. 동일한 생각이 관성법칙에도 적용된다. 이 법칙은 의부의 힘이 미치지 않는 물체는 그것의 정지상태 또는 직선운동의 상태를 등 속도로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나는 여기에서 갈릴레이가 이 법칙을 결코 이러한 형식으로 표현하지 않고 겉보기로는 직선의 궤도인 것을 실제에 있어서는 큰 원의 한 부분인 것으로 보았던 착오를 더 언급하지 않겠다. 이 착각은 곧 바로 그의 제자들이 버렸다). 그 당시에는 누구도 물체가 등속도로 직선 운동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것은 물론 항상 무언가의 힘이 물체에 작용 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관성법칙은 힘이라는 것에서 우리가 무엇을 이해하는가를 명확히 정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한다. 뉴턴에 의하면 힘은 그 힘이 작용하는 물체의 가속도에 비 례한다. 가속도는 단위시간 당의 속도 변화이다(시간에 따른 속 도 벡터의 유도). 그러므로 힘은 정의에 의해 관성궤도로부터 물 체의 이탈에 비례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떤 현상 속에서도 직접 밝혀질 수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전통적인 인과적 표 상에 모순되는 이러한 법칙을 갈릴레이가 언표할 수 있기 위해서 는 어떠한 세심한 분석과 사상적인 용기가 필요했던가 !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없이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것 으로 간주되었다. 한 물체의 운동은 그의 장소의 변화이다. 그러

므로 원인, 죽 운동을 일으키고 보존하는 힘이 없다면 운동은 존 재할 수 없게 된다. 이제 운동은 그것을 유지하는 원인이 존재하 지 않더라도 지속되어야 한다. 후기 사상가들, 예를 들어 데카르 트는 오로지 상태의 변화만을 위한 원인을 요구하고, 물체의 상 태를 속도를 가지고서 정의함으로써 만족하였다. 이것은 교묘한 속임수이다. 왜 그들은 속도 대신에 장소나 가속도 또는 등속 원 운동의 각속도 Geschwi nd ig ke it sbe t ra g를 통해 정 의 하지 않았는 가? 관성법칙은 그것의 유일한 정당성을 경험 속에서 갖는다. 그러나 바로 이 경험이 하나의 개별적인 경우에서 엄격하게 증명 될 수 없고 더구나 일상적인 많은 경험에서는 물론 그렇지 아니 하다. 법칙의 경험적 증명은 단지 전체로서의 역학 이론을 전체 로서의 역학적 실험의 영역과 비교하는 데서만 이루어전다. 나는 이러한 인식론적 문제를 두번째 강의 시리즈의 세번째 강 의에서 다시 디루게 될 것이다. 지금은 이 모든 문제들이 어떻게 플라톤주의와 연결되는지롤 지적하고 싶다. 그 당시의 자연과학 자들은 수학적 법칙들에 대한 믿음을 옹호하기 위해, 아리스토텔 레스에 대항하는 반격에 플라톤을 즐겨 끌어들였다. 나는 그들이 최소한 부분적으로 옳다고 믿는다. 내가 네번째 강의에서 보여 주려고 했던 플라톤적 개념들에 있어서의 수학의 분석을 비교해 보라. 거기에서 우리는 참된 원은 감각세계에서 발견될 수 없다 고 말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도 참된 관성운동은 감 각세계에서 발견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참된 과학은 그의 본질에 따라 감각세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을 넘어 서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엄격한 비유는 끝난다. 풀 라돈에게서는 순수한 수학만이 참된 인식으로 간주될 권리가 있 는데, 이러한 본래적인 권리는 이데아에 대한 철학적 인식에 조 차도 보류됨으로써 그렇게 된다. 감각 세계에 대해서는 수학의

도움을 통해서도 개연적인 역사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갈릴레이에 있어서 수학적 법칙은 자연 안에서 엄 격하게 성립하고 인간의 사유를 통해서 발견될 수 있으며, 또한 이 사유에 따라서 실험이 이루어진다. 자연은 복잡하며 그 스스 로 우리가 탐구하고자 하는 법칙이 다른 영향 때문에 장애를 받 지 않고 작용하는 단순한 경우를 항상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러 나 이 장애는 자신의 법칙을 따르는 힘에 의해서 일어나며 이것 도 역시 수학적 접근이 가능하다. 여러분이 자연을 꾸준히 분석 한다면 자연의 대가 Me i s t er 가 될 것이다. 근대 물리학의 실재론 은 소박하게 감각을 믿는 것도 아니고 유심론적 오만으로 아를 멸시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자세는 하나의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감각의 세계는 그 말의 기독교적 의미에서 자연의 세계이다. 플라톤주의 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자연의 피안을 믿는다. 그러나 그들 사 이에는 구별이 있다. 플라톤의 신은 물질을 만들지 않았고 오로 지 세계 내에 있는 정신적 요소만이 신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 의 선물로서의 과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물질세계에 관여할 수 없 다. 기독교인들에 있어서는 신이 모든 것을 다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창조된 사물, 곧 모든 물질적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생각, 성육신의 도그마는 신에 의해서 인정받기 위해 물질적 세계가 너 무 비천하지 않으며, 따라서 신이 우리에게 준 이성의 빛에 의해 이해되기 위해서도 너무 비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코페 르니쿠스 체계의 편에 서있는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 대항한 투 쟁에서 힘주어 말하기를 우리는 신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준 말씀의 책만이 아니라 신이 창조 속에서 우리에게 준 자연의 책 도 읽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 유명한 투쟁을 상세히 논하고자 한다. 그것은 또다른 하나의 갈릴레이 신화의 부분으로 되었다. 이 신화는 대략 다음 과 같다. 〈 갈릴레이는 중세의 미신에 대립된 과학적 진리의 순교 자였다 〉 다시금 신화는 전리를 한 모서리에서 움켜쥔다. 그리고 또다시 신화는 당연하게도 갈릴레이의 중심적인 역할을 강조한 다. 그러나 다시 신화는 사람둘이 내가 방금 표현한 문장의 단어 하나하나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이 사실들을 기술하고 싶은 충 동에 빠질 만큼 역사적 사실들을 왜곡시키고 있다. 그러나 여기 서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다. 우리는 화살을 여러 차례 뒤집을 근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갈릴레이는 순교자였던가? 순교자 Mar ty rer 는 증인을 의미한 다. 여기까지 우리는 인정할 수 있다. 그는 한 공적인 증인이었 다. 그는 대단한 열기와 위대한 필설의 재능을 갖고 공개적으로 자연과학의 편에 섰으며, 또한 우리가 참이라고 여기는 이론의 편에 섰다. 우리가 과학과 교회가 서로 적이라고 전제한다면 우 리는 갈릴레이가 증인이었다고 함은 아마도 어떤 개별적인 행위 도 그에 대한 재판보다 더 교회에-단지 가톨릭뿐만 아니라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그러했다고 덧붙일 수 있 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는 반기독교적인 선전의 주된 지주인 것이다. 그러나 순교자란 말은 죽음의 위협에 직면했을 경우에도 자기 의 믿음을 고백하고, 또한 이 경우에 그 신앙의 결정적인 증거가 그의 믿음을 위한 죽음에 있는 그런 증인의 의미를 지녀 왔다. 갈릴레이는 죽음의 위협을 받지 않았다. 물론 70 세인 그가 고문 대에서 위협을 받은 것은 사실이라고 보인다. 그는 이러한 위협 속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부인했다. 만일 우리가 순교자란 용어를 완전한 의미에서 사용한다면 갈릴레이는 순교자가 아니

었다. 역사적 사실은 갈릴레이가 결코 순교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교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후기 르네상스의 인간 으로서 삶을 줄기고 향유하고자 했으며 과학과 과학적 명예를 향 유하고 즐기려 했다. 또한 그는 충실하고 신실한 가톨릭 신자로 서 교회와의 충돌을 결코 시도한 적이 없었다. 그는 신앙이 돈독 한 가톨릭 신자이며 동시에 훌륭한 과학자였기 때문에 순교자는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신념을 위한 증인이지 과학적 진리를 위한 증인이 아니라는 것을 아마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신념은 인간의 행위에 관계하고 다만 인간의 행위를 통 해서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과학적 신념은 사실에 관계하고 사 람들이 이 사실을 관찰함으로써 증명된다. 그가 원한 것은 그의 교회를 하나의 사실에 대해 확신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교회가 코페르니쿠스의 견해가 옳고 중요한 것이며, 결코 가톨릭적 믿음 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기를 바랐다. 이렇게 하기 위해 그는 책을 썼고 사람들이 망원경을 통해서 보게 했으며 주 교 및 교황과 대화하였다. 그의 책이 유죄 판결을 받았을 때 그 는 책을 〈개선〉하려고 했으며, 아니라고 맹세하도록 강요받았을 때 그는 자신을 이러한 상황으로 몰아온 사람들을 증오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 대하여 차가운 경멸 의에 다른 말을 하지 않 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의교적 수단이 그롤 구할 수 없었을 때 불가피하게 굴복하여 코페르니쿠스에 반대하는 맹세를 하게 되리 라는 것을 의심했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그가 이런 순간에 〈그래도 지구는 돈다 e pp ur si muove 〉를 생각했다는 것은 분명하 다. 그리고 그가 그런 말을 발언하지 않은 것도 확실하다. 왜냐 하면 그는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그는 교회를 확신시키는 데 실패했는가? 나는 다음

과 같은 대답을 두려워한다. 즉 그것은 그가 바로 중세의 진부함 에 대항한 명확히 인식할 수 있는 과학적 전리를 옹호할 수 없었 기 때문이다. 상황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그는 그가 주장한 것을 증명할 수 없었다. 또한 그 당시의 교회는 이미 중세적인 교회가 아니었다. 두번째 점을 먼저 고찰해 보자. 근세의 전기작가 산틸 라나 G . de San till ana 가 17 세기 초기의 로마의 교회는 이미 전체 주의 국가에의 단계에서 상당히 전전되어 있어서, 르네상스시대 에는 말할 것도 없고, 중세의 수백년 동안 가능했던 사상의 자유 롤 허용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 것은 전적으로 옳다고 여겨진다. 갈릴레이는 교회의 교권을 구원에 중요한 것에 이르기까지 확장 시켜야 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자연에 대한 견해에까지 확 장시켜서는 안 된다는, 그 당시에 이미 낡아버린 이론을 옹호했 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재판 기록들을 읽으면서 교회의 극히 소 수만이 그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느꼈다. 교회는 종교개혁의 충격에서 막 회복되었다. 많은 문제 있는 교리적 문제들이 트리엔트 Tr i en t의 종교회의에서 결정되었 다. 예수회는 교회에 보다 엄격한 복종에 대한 견해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어떤 힘이 교리에 대한 통일적인 결속을 교회에 부여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게 되었다. 독일은 30 년 전쟁을 치뤘다. 성서 는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코페르니쿠스와 화해하기가 쉽지 않았 다. 사람들이 그때 이단론자들에 대항하는 그 위험한, 아마 완결 지어가는 투쟁 속에서의 교회의 위치를 어째서 지구의 운동에 대 한 새로이 터전 싸움으로 약화시켜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해석 한다면 갈릴레이와 종교재판소 간의 무쟁은 과학과 전체주의라는 근세의 최고의 두 힘 간의 투쟁이었다. 양측 모두 그리스도를 믿 었으며, 각각 모두 자기네가 밀이고 다론 편은 가라지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이렇게 이중적인 측면을 갖는 것이 역사이다.

이 양측의 각각은 또한 자기 자체 내에서 이중적이었다. 반대 편은 총명한 적의 예리한 눈으로 최소한 일정한 범위 안에서 서 로의 약접을 보았다. 갈릴레이가 과학을 대표하는 데 있어서 약 점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자기의 주장을 전혀 과학적으로 증 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이 강 의의 초두에서 언급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갈릴레이의 손에 있는 망원경은 분명히 태양의 흑점과 달 표면의 산 그리고 태양 주위의 행성들의 체계로 이해되고, 코 페르니쿠스 체계의 축소된 모델처럼 보이는 목성 주위의 위성체 계를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천체에 대한 몇 가지 낡은 견해, 특 별히 천체들은 지구와는 달리 홈 없는 것이라는 견해가 동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코페르니쿠스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과학적 증명은 나오지 않는다. 케플러의 법칙을 프톨레마이오스 의 체계로 해석하는 것은 극히 복잡하였던 데 반해, 이것이 코페 르니쿠스의 체계에서는 아주 뚜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논의가 그 당시예는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이 논의를 결코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케플러가 그에게 책을 보 냈지만 케플러의 이 주제에 대한 읽기 어려운 책을 연구하지 않 은 것으로 보인다. 벨라민 Bellarmi n 추기경과 같은 우수한 교회 신학자와 예수회의 천문학자들(이들의 상당수는 내면적으로는 코페 르니쿠스 학파였을 것이다)에게는 물론 이러한 사실이 분명하였 다. 아직도 갈릴레이가 매우 정중하게 다루어지고 있었던 이른바 1615 년의 첫번째 재판에서 벨라민 추기경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 는 천체운동의 간단한 서술에 대한 수학적 가설로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단지 사람들이 그것의 전리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증명될 수 없고 성서가 그것이 톨리다는 결론을 내리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

이었다. 가설은 여기에서 분명히 믿을 수 없는 것이지만, 계산울 간단하게 해주는 가정을 의미하였다. 갈릴레이는 이 형식을 따랐 지만, 그것은 미사여구였다. 그는 이러한 형식으로 그의 진정한 생각을 너무나 분명히 은폐하려고 시도했던 두 개의 주요한 우주 체계에 대한 그의 유명한 대화를 실은 책을 저술함으로써 1633 년 에 두번째의 실제적인 그리고 이제 정말로 위험한 __- 재판 의 최종적인 패배를 겪었다. 우리는 종교재판소가 갈릴레이에 대해 그가 증명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말 것 이의에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 다고 말할 수 있을 것아다. 그는 이 논쟁에서,광신자였다. 그러 나 이제 우리는 화살을 다시 한번 돌려야 한다. 그가 광신자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위대한 과학의 발전은 증명할 수 있는 것에 불안하게 매달림으로써 이루어지지 않는다. 발전은 자기 자신의 확증이나 반박에 비로소 길을 열어 주는 대담한 주장에 의해서 이루어전다. 내가 물체의 낙하와 관성법칙에 관해 언급했던 모든 것은 이 명제를 설명해 주며, 갈릴레이가 이 방법론적 상황을 의 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할 수 없다. 과학은 종교와 마 찬가지로 믿음을 필요로 한다. 이 두 가지 믿음의 양식은 그것들 이 자기 스스로를 이해할 때 각각 그들에게 고유한 증거에 굴복 한다. 종교적 믿음은 인간적인 삶의 증거에, 과학적인 믿음은 계 속적인 탐구라는 증거에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과학의 본질을 종교재판소의 그것보다 더 잘 이해하였다고 할지라도 과연 그는 역사에서의 과학의 역할을 이해하였는가? 그는 내가 앞의 강의에서 실재성의 역사적 위치 라고 지칭했던 것을 대변했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진리를 탐구 함에 있어서 자유롭다. 이 자유는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그 러나 자유로운 탐구는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가? 우리는 교회

의 취지를 정당하게 해석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갈릴레 이가 성서와 1500 년 간의 기독교적 전통의 권위를 위태롭게 하였 다면 지상의 왕국의 파괴는 어디에서 끝날 것인가? 권위는 아마 도 많은 불미한 사건을 감싸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유럽을 탄생시켰다. 내가 만일 벨라민 주교의 투시력을 그가 가 졌던 것보다 더 신뢰한다면 다가오고 있는 통제되지 않은 탐구의 시대가 낳는 결과에 관한 생각에서 그는 섬뜩할 수밖에 없지 않 았는가? 300 년의 과정은 곧장 고전역학으로부터 원자의 역학에 로 나아갔다. 20 년에 걸친 과정은 곧 바로 원자의 역학으로부터 원자탄으로 나아갔다. 이 원자탄이 과연 그것을 탄생케한 유럽 문명을 파괴할 것인지는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우리 중의 한 사람이 1615 년에 주교였고 그가 1964 년까지의 미래를 내다보았지 만, 그러나 그 이상은 내다보지 못했다면 그는 이런 발전을 아직 막을 수 있는 전망이 있었다면, 이런 발전의 위험을 과감하게 책 임지려 했겠는가? 교회가 알지 못한 것은 이러한 발전을 막을 수 있는 어떠한 전 망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에 교회의 입장의 이중성이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위험한 발전을 저지하게 될 교회의 권위체계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가 인간을 위한 순수한 책임의식 에서 나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는다. 위험을 가장 찰 아는 사람들이 우리가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이 시대 에 그의 형제들을 현명한 예측의 수단으로 악에서 보호할 때보다 과연 더 훌륭한 봉사를 그 형제들에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신 은 그의 창조 비밀을 그 스스로 새로운 세상에서 우리에게 알리 기 전에 우리가 그 비밀을 밝혀내는 것을 원했던가? 이것이 바로 내가 바로 앞의 강의에서 보수적 기독교라고 지칭 한 것이다. 스토아적 신앙을 가전 로마의 황제들은 그들이 그 시

대 사람들에 의해 황제에게 바쳐진 회생을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그들의 지배가 가능한 악 중에서 최소한의 것이라고 간주할 때 비슷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교회의 정치적 지배는 로마제국을 교 회적인 기반으로 옮겼다. 그러나 기독교적 근본주의는 초기 수 세기 동안 신적인 황제에게 절하는 것을 주저하였다. 참된 신만 울 섬기려고 하는, 겉으로 보기에 바보 같은 고집으로 인해 그 기독교적 근본주의는 자기에 대한 박해롤 불러일으켰고, 세계를 정복했다. 이제 근대 과학의 근본주의는 신적인 책임을 그들의 인간적인 손에 쥐고 있는 사제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주저한다. 과학자들이 기독교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전리보다도 인간적 인 관심 Vors ic h t에 봉사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자세라는 것을 믿 지 않는다. 우리들의 진리 탐구의 결과는 신의 손에 놓여 있지 않은가? 나는 초기 기독교인들과 근대의 과학자들이 비록 전리 의 개념을 다르게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그 전리를 주장한다는 점 에서 어떤 공통점을 갖는다고 믿는다. 어떻든 간에 교회는 과학의 세계가 비록 가라지일지라도 가라 지롤 추수 전에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제 7 강 데카르트, 뉴턴, 라이프니츠, 칸트 이 강의들은 순환 운동을 한다. 과학 신앙에 대한 처음 물음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신앙의 역사적 유래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 도록 하였다. 이 좀더 좁혀진 물음을 위하여 나는 벤틀리의 설교 와 행성의 생성에 관한 칸트의 이론을 첫번째 모델로 선택했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신화와 과학의 관계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도 록 하였는데, 이 물음은 또한 참된 신화들의 초기 시대들을 강의 의 역사적 출발점으로 삼도록 유도하였다. 우리들은 함께 역사적 발전의 도정을 추적해 왔던바, 지금의 강의에서 우리는 벤틀리와 칸트롤 두번째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첫번째의 좀더 큰 원환(圓環)은 오늘 완결된다. 그러나 나는 이 교차점을 넘어갈 것이며 이후의 강의들에서는 우리 시대의 과학적 우주생성론에 관한 두번째의 좀더 작은 원환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두번째의 원환은 우리를 현대의 과학 신앙에로 이끌어 갈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거쳐온 길에 8 아라는 숫자의 이중고리 모양과 비교될 수 있는 형태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만약 과학적 우주생성론이 가능해야 했다면 먼저 하늘과 지구 가 하나의 공통적인 자연법칙을 따라야만 했다. 이것을 뉴턴이 성취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이 물음은 무엇보다도 먼저 성급한 대답에 의해 지식충 사회의 완벽한 의식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르네 데카르트 Rene Descar t es 의 체계 속에 들어 있는 이 러한 대답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데카르트는 그의 유명한 소용돌이 이론의 형태로 행성운동에 대한 설명을 제시했다. 행성들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극히 미 세한 물질로 이루어진 거대한 소용돌이 속을 떠돌고 있다. 행성 들은 소용돌이 치는 물 속의 코르크 조각처럼 소용돌이에 의해 이끌려 움직여진다. 이 이론은 케플러의 법칙이 대답하지 못한 채 남겨둔 행성 체 계에 관한 문제들에 정확히 대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강점을 갖 는다. 케플러의 제 1 법칙에 의하면 행성들은 타원형으로 운동하고 있으며 그들의 한 초점에 태양이 위치한다. 이 경우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물음이 제기된다. 첫째, 타원은 거의 원형이나 아주 길게 늘어전 형태를, 아니면 이 양 극단들 사이의 어느 중간 형태를 가질 수 있다. 물론 행성 의 궤도들은 정확한 원형은 아니지만, 원형에 아주 가깝다. 죽 그것들의 이 심률 Exzen t r i z it셨t은 매 우 작다. 그렇다면 이 에 대 한 근거는 있는가? 둘째, 타원은 평면 곡선이기 때문에 모든 행성들의 궤도는 태 양이 놓여 있는 평 면을 정 의 de fi n i eren 한다. 케플러 의 법 칙은 상 이한 행성들에 속하는 평면들이 공간에서 아주 상이한 방향을 갖 는 것을 금지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것들은 모두 대략 하나 의 평면에 속한다. 모든 행성들은 거의 동일한 평면을 운행하며 더욱이 그 평면 안에서 태양 주위를 동일한 회전방향으로 운행한

다. 혹은 그것들이 태양을 관통하는 공통의 축 둘레를 같은 방향 으로 움직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고안된 천구에 있어서 행 성 궤도들의 공통적인 평면의 절단원 Schn itt kre i s 은 우리에게 수 대 ( 獸 帶 T i erkre i s) 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왜 행성들은 그 렇게 정돈된 방식으로 운행하는가? 데카르트의 모델에 있어서 이 두 사실들에 대한 설명은 거의 자명하다.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거대한 소용돌이는 하나의 통 일적인 회전축을 갖고 있다. 죽 소용돌이는 이 축을 중심으로 모 든 행성들을 이끌어 간다. 따라서 공통의 한 평면에서의 원궤도 는 다만 행성들을 이끌어 가는 소용돌이의 규칙적인 형태를 반영 할 뿐이다. 다론 한편으로 소용돌이 속의 흐름 운동 S t romun g ­ sbewe gu n g은 결코 전적으로 규칙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공통의 평면과 원형에서의 작은 이탈은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 이 모델은 데카르트보다 2000 년 전의 그리스 원자론자들이 구 상한 세계상과 그리 많이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원자론자들의 고정된 구면의 하늘(네번째 강의에서 인용된 〈표피 Hau t〉) 자리에 대신 태양과 행성들 사이의 잘 알려진 간격을 메울 수 있기 위해 공간을 채우는 미세한 물질이 들어 섰다. 사실 원자론이 후기 그 리스 천문학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이미 이와 유사한 모델이 필요 했을 것이다. 나아가 여기에서는 지구 대신에 태양이 중심점을 차지하고 있다. 죽 데카르트는 (기략으로 조심스러운 정식화에도 불구하고) 코페르니쿠스 학파인 것이다 . 그러나 소용돌이가 거기 에 있고, 공간은 또 다시 무한한 것으로 여겨지며, 항성들은 우 리 자신의 태양과 유사하게 태양들로 이해되고 그들 자신의 소용 돌이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다. 따라서 무한 수의 체계, 혹은 그 들이 말했던 것과 같은 〈세계들〉에 대한 고대 원자론이 다시 받 아들여졌던 것이다. 이제 원자론적 우주생성론은 다시 쉽게 살아

날 수 있게 된다. 소용돌이는 우리가 모든 흐르는 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쇠멸될 수 있고 새로이 생성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 리들의 체계는 언젠가 새로 형성된 소용돌이로부터 생성되었고, 데카르트는 이 현상을 우리가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 상세한 과정을 통해서 서술하고자 시도했다. 이 과정이 제한 없이 계속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분명히 주장된 한 법 칙, 곧 세계에 있어서 운동의 양은 일정하다는 법칙에 의해서 보 증된다. 이 법칙은 우리가 에너지 보존 법칙이라고 부르는 법칙 의 정식화를 위한 첫 출발점이다. 물론 뉴턴이나 호이겐스가 발 견한 것과 같은 정확한 역학의 법칙을 소유하고 있지 못했던 그 는 우리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으로 그 법칙을 표현했 다. 따라서 모든 자료들은 우주생성론이 우리의 행성 체계와 같은 질서 잡힌 부분 세계의 발생 이의에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 무한한 지속의 세계를 위해 준비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시간의 저편에 있는 신이 세계와 함께 무한한 시간을 창조 〈 했다 ha t〉고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적 창조 개념은 불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신이 세계를 시간 속에서 창조했다는 것과, 그 창조시에 신이 세계에 오늘날 우리가 아직도 세계 속에 서 발견하는 바로 그 운동량을 도입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다. 그는 심지어 신이 하늘과 땅 그리고 모든 식물과 인간울 포 함한 동물을 6 일 동안에 창조했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기꺼이 따 론다고까지 말한다. 다른 종류의 우주생성론에 대한 데카르트 자 신의 기술은, 신이 성서가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는 대로 세계를 창조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할 수 있 었을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쉽사리 갈 릴레이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결심한 사람의 기략을 감지하게

된다. 우리에게 있어 단 한 가지 어려움은 그의 실제적안 견해와 기략적인 견해 사이의 경계를 알아채는 것이다. 나는 그가 솔직 하게 신을 믿었다고 믿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철학에 서 신의 개념을 빼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가 교회를 필수적이고 유용한 것으로 보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 회를 공격하지 않고 설득하려 하였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그는 그리스도와 믿음, 사랑 그리고 희망에 관해서는 진 지한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내가 보 기에는 기독교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스토아 철학자 S t o i ker 이다. 나는 그가 전실로 우주의 무한한 지속을 믿었는지 그렇지 않았는 지를 감히 말하고 싶지 않다. 확실히 그는 그의 체계의 다른 측면에서 솔직했으며, 이 측면 이 본래적인 방식으로 근대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수학적 엄밀성 과 명료성을 갖는 완전히 일관된 사상 체계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모든 선행자들을 능가했다고 믿었다. 나는 이 체계의 개요를 몇 마디로 최소한 개략적으로나마 언급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나는 그의 완성된 우주론에서 출발하여 거꾸로 그의 전제를 분석하고 자한다. 비록 그의 우주생성론이 원자론적 모형을 따른다고 할지라도 그는 원자들의 존재뿐만 아니라 허공의 존재도 부정한다. 그에게 있어서 물질은 연속적으로 확산되어 있다. 바로 그 사실로부터 그는 소용돌이의 존재를 이론의 여지 없게 이끌어 낼 것을 요구 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가 오늘날 우리들이 압축할 수 없는 액체 를 묘사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이 연속적인 물질이 운동을 해야 한다면, 무한히 확장될 수 없는, 폐쇄된 곡선의 유일한 흐 름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곧 소용돌이다. 그러나 물질이 연속적 이어야만 한다는 것으로부터 그에게는 공간과 물질 사이의 모든

구별을 부정하는 결과가 따르게 된다. 즉 그의 견해에 따르면 공 간과 물질은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다시 자연은 수학적 개념들 에 의해 완벽하게 서술될 수 있다는 그의 견해로부터도 역시 따 라 나온다. 연장된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순수 수학의 유일한 분과는 기하학이다. 그러므로 물질은 기하학적 성질 이의의 다론 성질을 가질 수 없다. 죽 물질은 연장이며 그밖에 다른 아무 것 도 아닌 것이다. 자연이 수학을 통해서 완벽하게 인식 가능하다 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모든 참된 인식은 명석 판명하다는 확신 에서 나온다. 그러나 물론 수학은 명석 판명하지만, 감각 지각은 그렇지 않다. 오칙 명석 판명한 인식만이 인식인데, 왜냐하면 오 직 그러한 인식만이 우리를 창조한 전지전능하고 전적으로 선한 신의 신뢰성을 통해 우리에게 보장되기 때문이다. 명석 판명하지 않은 가상적인 인식에 동의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의 오 용이다. 가장 완전하고 그렇기 때문에 전지전능하며 전적으로 선 한 존재, 곧 신의 존재는 나의 의식 속에 이 존재의 표상이 현존 Anwesenhe it하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엄밀하게 증명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증명은 회의 자체를 통해서 나에게 실증되는 나 자신 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제의하고는 모든 억견을 지배하에 둘 수 있는 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나는 여기서 증명의 고리가 지닌 결함들을 자세하게 찾지는 않 울 것이다. 이것들은 그 뒤 3 . 00 년 간의 비판을 통해서 분명히 드 러났다. 두번째 강의 시리즈의 세번째 강의에서 나는 이 기본적 출발점에 대해 좀 더 정확한 비판적 고찰을 하게 될 것이다. 데 카르트의 체계는, 유의미한 방법으로 〈자아〉를 말할 수 있는 능 력 이의의 다른 확실성을 가지고 시작할 수 없고 모든 존재자에 대한 자신의 자율성을 확신하고자 시도하는 근대적 인간의 상칭 적인 자기서술로서 언제나 중요한 것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는 자연과학이 신뢰를 받을 만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 해서 여전히 전능한 신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자연과학 안에서 는 신은 그에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자연은 기하학에 의해서 적절히 기술된다. 이제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개별적인 문제에 들어 가게 되면 한 인간의 삶 속에서 근세 자연과학의 작업 전체를 수 행하려는 거대한 시도는 비참하게도 거부된다. 데카르트는 그의 체계의 진리를 수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 당시에 행성에 관해서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사실, 즉 케플러 의 법칙을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소용돌이는 왜 행성 궤도들이 거의 원형인 것인지를 설명하지만, 그것은 왜 이 궤도 들이 정확히 타원이어야 하는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뉴턴은 바 로 이것을 설명할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데카르트의 소 용돌이를 완전히 버렸다. 나는 여기에서 행성운동에 대한 뉴턴의 설명을 자세하게 반복 하지는 않겠다. 대체적으로 이 설명은 찰 알려져 있으며, 또한 수학적 엄밀성에 있어서도 이 설명은 오늘날의 물리학도들에게조 차도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나는 뉴턴 물리학 의 개념적 구조를 설명하고 싶은데, 또한 두번째 강의 시리즈의 초두에서 이것을 실마리로 삼게 될 것이다. 우리가 물체들, 예를 들어 행성들의 어떤 하나의 운동을 설명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뉴턴을 따라서 다음 세 가지를 알지 않으 면 안된다. ® 보편적 운동 법 칙들 d i e allge mein e n Bewegu ngsg e stz e ® 특수한 힘 의 법 칙 ein spe zie l les Kraft ge setz ® 개 별적 인 초기 조건들 d i e besonderen An fan g sb ed ing unge n

뉴턴은 보편적인 운동 법칙들을 자신의 『 프린키피아 』 ( 『 자연철 학의 수학적 원리 』 )의 첫 부분에서 제시했다. 첫번째 법칙은 관성 법칙이다. 아무런 힘이 작용하지 않는 물체가 그것의 정지상태나 직선의 등속운동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두 번째 법칙은 뉴턴 자신의 가장 중요한 공헌으로서, 운동량의 변 화는 작용하는 힘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이 법 칙 은 해석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이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 기로 한다. 이 법칙은 오늘날의 수학적인 용어로 힘은 그에 비례 하는 가속도를 산출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 가속도는 시간에 의한 장소의 이차 미분계수로 정의된다 .. 관성법칙은 장소 의 변화를 위해서는 힘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보여 주었기 때문 에 힘이 속도의 변화를, 혹은 뉴턴이 말한 대로 하자면 운동량의 변화를 야기시킨다고 가정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분명히 이 보편적인 법칙은 우리가 주어진 물체에 작용하는 힘 울 알고 있을 경우에만 유용한 어떤 것이다. 여기에 뉴턴의 두번 째의 위대한 공헌, 죽 중력법칙이 놓여 있다. 중력은 자연에 있 어서의 유일한 힘은 아니지만 보편적인 것이다. 죽 그것은, 우리 가 알고 있는 한, 우주의 모든 쌍의 물체 사이에서 작용하는 것 이다. 중력법칙으로부터 그리고 보편적 운동법칙을 사용하여 뉴 턴은 케플러의 법칙을 유도할 수 있었다. 그가 유도한 방법의 핵 심은 상식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서술될 수 있다. 즉 관성만이 작 용한다면(죽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행성은 등속도로 직선적 으로 계속 전전할 것이고, 따라서 태양의 주위를 떠날 것이다. 그리고 중력만이 작용한다면(죽 행성이 초기에 자신의 고유한 운동 을 갖지 않았더라면), 행성은 태양에 떨어졌을 것이다. 행성의 실 제적인 궤도는 관성과 중력의 두 가지 작용의 타협이며, 이 경우 중력은 행성을 태양과 결합시키고 관성은 행성이 태양으로 떨어

지는 것을 막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턴은 케플러의 법칙 울 단순히 설명할 뿐만 아니라 개량하기도 했다. 케플러의 법칙 둘은 태양이 오직 하나만의 행성을 갖고 있을 경우에 뉴턴 역학 으로부터 엄밀하게 따라 나올 것이다. 다수의 행성들이 있다면 각각의 행성들의 궤도는 다른 행성들의 중력 영향에 의해서 교란 될 것이다. 이 교란 역시 뉴턴은 관찰과 일치하게 필요한 정도의 정확성을 가지고 예측할 수 있었다. 뉴턴의 체계는 당연히 자연과학의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서 그 뒤 수세기 동안의 공공의 견해에 전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제서 야 처음으로 자연과학은 그리스인이 수학에서 이루어 놓았던 성 과에 도달했다. 즉 자연과학은 모든 개별성에 있어서 전리로 증 명된 명제를 몇 개의 분명하고 단순한 공리들로부터 이끌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200 년 동안 자연에 대한 설명을 관찰된 현상을 뉴턴에 의해 발견된 원리에로 환원시키는 것과 같은 것으 로 이해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뉴턴은 관찰된 행성운동을 한 번도 완 전히 그 자신의 원리에로 환원시킬 수 없었으며, 그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뉴턴은 케플러를 따랐다. 그는 데카르트 가 할 수 없었던 것이지만 케플러의 법칙을 이해하고 개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뉴턴은 데카르트의 소용돌이 (이론 一옮긴이)가 만족스럽게 설명했던 사실들, 곧 궤도들의 거의 원 형에 가까운 형태와 그 궤도들의 공통적인 평면에서의 통일적인 방향에 대하여 어떠한 설명도 제시할 수 없었다. 이미 앞에서 언 급한 대로 뉴턴 역학은 개별적인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세 가 지의 것을 필요로 하는데, 그 중 세번째 것이 해당 경우에 성립 되는 특별한 초기 조건들이다. 수학적으로 그러한 사실은 뉴턴의 법칙들이 시간에 의한 미분방정식들을 의미한다는 것에 달려 있

는 것이다. 힘은 오직 운동의 시간적 변화를 규정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후 순간의 운동은 이전 순간의 운동 및 힘에 의존한다. 행성 궤도는 단지 행성의 장소와 속도가 어떤 일정한 시간에 주 어질 때에만 확정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그의 소용돌이 이론의 지극히 자연스런 결과로 보였던 체계의 고도의 규칙성을 설명하 기 위해서 개별적인 행성의 속도가 지닌 초기값과 초기 방향을 가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예를 들어서 한 행성의 초기 속도가 다른 행성들이 움직이고 있는 평면에 수직으로 서 있었더라면 그 것은 지속적으로 이 공통적인 평면에 수직으로 서 있는 평면 내 에서 운동했을 것이다. 혹은 그의 초기 속도가 지나치게 크거나 작든지 혹은 태양을 둘러싼 원의 접선으로 향하지 않았더라면 행 성은 다소간 이심적인 타원이나 포물선 혹은 쌍곡선으로 움직여 야만 했을 것이다. 뉴턴은 이에 대한 다른 경우의 실례들을 제시 할 수 있었다. 죽 혜성들은 행성과 동일한 공간을 통해서 움직이 지만, 모든 가능한 공간의 방향으로 모든 가능한 이심적인 타원 의 그리고 쌍곡선의 궤도들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데카르트에 대립하는 그의 강제적인 논증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만약 운동이 이 공간에서 관련된 물질의 유일한 커다란 소용돌이 에 의해서 이끌어졌다면 어떻게 그토록 다양한 천체의 운동이 동 일한 공간에 있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태양계 내에서 행성이나 혜성의 운동에 관련하여 어떤 지적할 만한 영향 울 미칠 수 있는 매체가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체계의 규칙성은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우리는 다만 행성의 초기 운동을 행성들이 이러한 최고로 규칙적 이고 원에 유사한 행성들에 공동의 궤도를 따르도록 정하는 것이 신의 마음에 들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뉴턴은 이것을 실

제로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벤틀리는 그의 설교에서 이러한 생 각을 신존재 증명, 곧 자연과학의 결함으로부터의 신존재 증명으 로 전환시켰다. 자연과학은 케플러의 법칙을 설명하나 초기 조건 들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조건들은 고도 의 규칙성을 보여 준다. 따라서 우리는 우주의 지혜로운 창조자 에 대 한 사상, 데미우르고스의 사상에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 다. 확실히 뉴턴과 벤툴리는 자연법칙을 신이 제정한 것으로 생 각했고, 그에 못지 않게 초기조건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회의론 자들은 법칙들의 본래적인 신적 근원에 대해서 믿지 않았다. 죽 자연은 그것에 법칙을 주었을 신 없이도 그 자신의 법칙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연법칙이 자연의 질서를 설 명할 수 없는 곳에서 결국 신은 그 자신의 작품들에서 회의론자 돌에게 의심할 나위 없이 보여져야만 한다. 나는 첫번째 강의에서 종교가 논의의 이러한 전환과 더불어 이 미 자신의 길을 상실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나는 거기서 과학의 결함들이 일정한 시간 뒤에 메워지곤 했던 역사적 사실을 지적했 었다. 우리는 이 계속적인 발전을 곧 상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 다. 이에 앞서 나는 기독교에 대한 강의에서 도입한 언어로 기꺼 이 사태를 기술하고 싶다. 신의 그 어떠한 현존에도 의존하지 않 고 자기 자신의 법칙을 따르는 자연의 - 개념은 그 강의에서 내가 자연과 기독교 이후에 제삼의 요소로서 도입한, 정확히 기독교 이후의 세속화된 실재 Rea litat를 서술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서 우리는 더 이상 오늘날의 것이 아닌 용어 사용으로 인해 혼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 당시에 나는 자연이란 말로 기독교가 그것을 이해한 것처럼 인간적인 본성을 의미했던바, 다시 말하면 신화 자체에서 해석되는 자연적인 충동의 세계 및 전통적인 삶의 질서의 세계를 의미했던 것이다. 그리고 갈릴레이에 관해 말할

때 나는 그리스 사상에 있어서는 불분명했던 자연법칙의 개념이 기독교적 창조개념을 통해서 훨씬 더 커다란 설득력을 얻게 되었 다고 말했다. 따라서 나는 이 자연법칙의 개념을 근대 사상에 준 기독교의 선물로서 표현하고 싶다. 이제 우리는 이 상속된 선물 이 어떻게 그것이 감사해야 할 종교에 대립하게 되었는지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이렇듯 선조로부터 상속받은 무기를 가지고 자기의 선조를 살해하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우직한 방법으로 일어난다. 케플러는 신을 세계의 수학적 질서 속에서 숭배하였던 정직한 신자였다. 또한 갈릴레이와 더 나아가 종교적인 인간이었 던 뉴턴도 신의 작품을 창조 속에서 연구한 확신이 있는 기독교 인들이었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신의 위대함을 자연의 책 속에서 도 읽을 수 있는 자신의 권리를 옹호해야만 했던 반면, 뉴턴은 이미 자연이 결국 신에 의해서 기록된 책이라는 자기의 견해를 옹호해야만 했다.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자연법칙의 종교적 해석 울 기껏해야 자기 사유의 사적 견해, 곧 확실히 자연법칙의 개념 과 그 어떤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연관이 전혀 없는 신화적 성격 의 그저 부가된 사적 견해만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 떤 선한 의지도 그 어떤 종교적 열정도 이러한 변화를 되돌려 놓 울 수는 없다. 사람들은 근대의 세속화된 실재를 사실상 종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개념들로 기술할 수 있다. 과학은 신의 존재 롤 증명하지 못한다. 근대 세계를 종교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다론 한편으로는 근대 과학의 이 성숙한 열매를 가져온 나무가 기독교였다는 사실과, 자연을 신들의 집에서 법칙의 영역으로 변형시킨 것이 기독교적 급전주의의 행동방법 S pi elar t이었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 다. 나는 칸트의 우주생성론을 단지 중간 단계를 넘어서 다루고자

한다.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가장 위대한 동시대인이면서 많은 점 에서 그의 적대자였다. 우주생성론을 주장한 청년 칸트는 그의 철학적인 사유방식에 있어서 라이프니츠의 발자국을 따랐다. 뉴 턴과 라이프니츠의 차이는 아마도 라이프니츠의 만년에 그와 사 무엘 클라크 Samuel Clarke - 여 기 서 그는 단순히 뉴턴의 대 변 자라고 생각하자-사이에 서로 교환된 서신 속에서 가장 분명 하게 보여진다. 여기에서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절대공간 개념을 논박한다. 이 개념은 그 자체로 긴 전사를 갖고 있다. 내가 네번째 강의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의 철학과 수학은 뉴턴적 공간과 같은 양식의 자립적 실재성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풀라돈의 코라 (chora, 공간)는 후기 사상가들의 공간보다는 오히려 물질과 비 슷하고, 원자론자들의 케논 (kenon, 공허)은 일정한 의미에서 비 존재자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토포스(t o p os, 위치, 자리, 장소, 공간)를 의도적으로 물체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의 복잡한 문제를 제거하기 위해서 주위에 있는 물체들에 대해 상대적인 한 물체의 위치로 정의하였다. 우리는 유한한 세계에서의 모든 운동 울 세계 자체의 고정된 틀에 관계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근세에 부각된 무한한 세계의 사상은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 기하였다. 죽 장소와 운동은 단지 물체들 사이의 관계를 기술하 는 관계 개념들일 뿐인가 아니면 과연 물체의 절대적 장소와 절 대적 운동과 감은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인가? 이 문제가 대답 되지 않는 한 관성법칙은 어떤 일정한 의미를 갖지 않는데, 왜냐 하면 우리가 운동이 그것에 상대적임을 의미하는 그러한 관계 체 계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직선운동과 등속도운동에서 표상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로 되겠기 때문이다. 뉴턴은 절대적 운동과 함께 관성운동 개념의 명확한

정의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의해서 이 문제에 대답했다. 나는 물리학적 관점에서 나 중에 마하 Mach 와 아인슈타인에 의해 비판된 이 문제를 두번째 강의 시리즈에서 다시 거론하게 될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철학적인 근거에서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을 반 박하였다. 우리는 그의 논의를 우리의 현실적인 세계와, 모든 사 물을 예를 들어 그의 상대적인 상태롤 변화시키지 않고 10 마일을 옮길 때 나타나는 세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 것인가 하는 것 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혹은 우리의 실제적인 세계와 사건들 사 이의 모든 시간적인 관계에 있어서 실제적인 세계와 동일하지만 신이 실제적으로 세계를 창조한 것보다 한 시간 빨리 창조된 세 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 것인가 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세계는 구별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라이프 니츠는 근대 실증주의자들의 마음에 들었을 논의를 가지고 두 세 계가 동일한 세계라고 말한다. 따라서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의 개념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의 구별 불가능자의 동일성의 원리 Prin z ip der Identi tat des Unun t ersche i dbaren 는 우리 가 실제적으로 두 사물을 구별할 수 없는 경우에 성립되지 않는 다. 그는 단지 엄밀하게 동일한 속성들을 가지고 있는 사물들만 울 동일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클라크는 아이작 뉴턴 경이 절 대 공간과 절대 시간의 존재를 증명했기 때문에 두 세계는 상이 한 속성, 곧 절대 공간 내에서의 상이한 위치들 내지는 절대 시 간 내에서의 상이한 초기 시간들을 가지고 있다고 대답할 수 있 다. 라이프니츠는 신이 세계를 저기가 아닌 여기, 저 시간이 아 닌 이 시간에 창조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뉴턴이 주장하는 증명이 정당하다면 창조에 있어 서 충족 이 유율

이라고 반박한다. 클라크는 신이 저기가 아니고 여기서, 저 시간 이 아닌 이 시간에 세계를 창조했다는 데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죽 신의 의지가 있다고 말한다. 라이프니츠는 클라크가 자의적 행위를 인간에게와 마찬가지로 신에게 돌린다면 그가 너 무 저급한 신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죽 신의 의지는 항상 신의 이성에 의해서 안도된다는 것이다. 클라크의 입장에서 는 라이프니츠가 그의 인간적인 이성을 가지고 신적 결정의 근거 들의 깊이를 측정하려고 한다면 라이프니츠가 너무 저급한 신 개 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라이프니츠는 그의 마지막 대답을 하기 전에 죽었다. 라이프니츠는 여기에서 그의 변신론적 의미에서 논증하고 있 다. 신은 창조자로서 무한한 수의 가능한 세계 중에서 한 세계를 선택했다. 신은 이 세계가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에 이를 창조하였다. 이것이 그의 선택의 충분한 근 거였다. 이 세계는 그 안에 지배하는 질서 때문에 가장 좋은 것 이며, 근본적으로 이 세계의 모든 것은 가장 좋은 가능한 세계라 는 그것의 속성, 곧 가장 선한 것 O pti ma lit셨t이라는 것으로부터 이해될 수 있어야만 한다. 수학적 자연 법칙은 이러한 질서를 보 편성의 어느 일정한 단계에서 표현하고, 행성체계의 구조도 하나 의 거대한 개체적인 실례에서 동일한 것을 행하지만, 동일한 숙 고들이 근본적으로 양자 모두를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 이 칸트 청년시절의 철학적 배경이다. 칸트가 그의 우주생성론적 이론에서 시도한 것은 데카르트의 우주론의 장점과 뉴턴 역학의 장점을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뉴턴 은 우리가 보는 그대로의 행성체계 내에는 물질과 관련되어 운동 울 유발하는 소용돌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와 는 반대로 데카르트는 행성들이 소용돌이의 존재를 가정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는 운동의 규칙성을 보인다고 밝혔다. 뉴턴은 이 규 칙성을 설명할 수 없었고, 신이 오래전에 체계를 그렇게 창조했 다고 말했다. 이것이 부정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우리는 아마도 신이 어떻게 체계를 처음에 그렇게 창조하였는지를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를 위해 그는 데카르트의 소용돌이를 이 용했었던가? 칸트가 그의 문제를 이런 용어로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나는 그가 정확히 이 문제에 착안하고 있다고 믿는다. 칸트에 의하면 태양계의 시초에는 회전하는 거대한 성운 Nebel 이 존재했다. 중력은 그것의 중심질량 Hau pt masse 을 중앙에 집중시 켜서 태양을 형성시키고, 성운의 더 작은 부분들을 바깥쪽에 응 집되도록 해서 여기서 행성들이 그들의 위성들과 함께 만들어졌 다. 초기의 이 성운의 근원에 대해서 칸트는 그 이전의 원자론자 들과 데카르트와 유사한 관념을 가졌으며, · 다만 그는 이제 뉴턴 의 법칙들을 수미일관하게 적용하였다. 그는 은하계가 하나의 거 대한 원반이고 우리의 태양계가 그에 속하는 항성계라는 것을 울 바로 인식했으며, 또한 그는 은하계의 발전을 이전과 마찬가지의 성찰을 더 고차적인 단계에서 반복함으로써 설명했다. 그는 몇 개의 타원형의 성운들(그것은 오늘날의 우리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 이 대부분 나선형을 가지고 있다)을 우리들의 은하계 밖에 있는 은 하계와 유사한 항성계라고 정확히 밝혀 냈다. 그는 자신의 관찰 을 무한한 시간 속에서 무한한 공간을 통해 전전하며 언제나 새 로운 물질을 포착하는 항성계의 발전 과정에 대한 사변과, 또한 —그를 결국 18 세기의 사유방식에 매력적으로 접근시키고 있 는一—다론 별들 안에 살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들과 그들의 덕 과 부덕에 관한 사변으로 끝맺고 있다. 수학적으로는 칸트의 이론이 데카르트의 그것보다 더 정교하게 다듬어전 것은 아니다. 40 년 후에 라플라스 La p lace 는 다시 더 간

단하고 잘 짜여진 형태로 이와 비슷한 가정을 내놓았으나 실제로 는 매우 어려웠던 계산을 역시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때서야 비 로소 칸트의 이론은 망각으로부터 벗어났고, 19 세기 전체를 통해 서 칸트-라플라스의 이론은 세계의 생성에 관한 기계론적 설명으 로서 간주되었다. 19 세기 말경에야 비로소 이 문제를 수량적으로 다루는 데 충분할 정도의 과학적 방법이 발전되었다. 아홉번째 강의에서 나는 이 계산을 도입한 행성 생성에 관한 견해를 아주 간략하게 언급할 것이다. 어쨌든 지금 나는 오늘날의 천문학자들 이 칸트의 이론이 본질적으로 옳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말할 수 있다. 칸트의 신학은 그의 책 『보편적 자연사와 천체 이론』의 서언에 서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또한 라이프니츠적 노선에 접근하고 있 다. 물론 그는 이제 라이프니츠와는 달리 뉴턴의 역학을 제한 없 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는 신이 그 자신이 제정한 자연법칙을 이용함으로써 세계를 창조하였다고 믿는다. 〈맹목적 필연성〉이 우리가 태양계에서 보는 질서를 산출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견해 는 그의 마음에 둘지 않는 것이다. 칸트는 신학적으로 신에 의해 제정된 법칙에 따른 필연성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시 할 수 있다. 가령 성운과 같은 물질적 대상 그 자체는 필연성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를 알지 못하겠지만, 신은 이를 알 고 또 그렇게 하려고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는 맹목 적 필연성의 개념이 자연에 대한 비수학적인 이론에서 그 근원을 가지며, 혹은 플라돈에 있어서는 명백히 수학과 대립되는 반면 에, 근대 과학의 자연법칙은 바로 수학적이며 그러한 한에서 이 성에 합당한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칸트가 기독교적 창조 개념에 적절하게 논증할 수 있다고 믿을 때 그가 올바르다고 믿 는다.

그러나 칸트 자신의 발전에 있어서 이것이 최종적인 단계는 아 니었다. 그의 후기 철학에서 그는 자연과학의 수학적 구조를 더 이상 신적 창조 작품에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직관과 사유의 선험적 형식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 〈 오성 자신이 자연에 대해서 법칙을 규정한다 〉 ……우리가 신의 형상에 따라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신의 창조적 질서를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한한 인식 능력의 본성에 따라서 이 질서 가 대상 일반에 대한 경험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기 때문에 신의 창조적 질서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론적 신존재 층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바, 순수한 형이상학 내에도 없고 자연과학의 결함 에서도 그 성과에서도 신존재 증명은 나올 수 없다. 결함은 학문 의 발전에 따라서 메워질 것이며, 성과를 파악하는 것은 순수이 성 비판의 과제이다. 이런 점에서 이제 세속화는 이성 자체의 빛 에 도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신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 울 중지하지 않았으며, 그와 반대로 우리는 이 질문을 그의 철학 전체를 추진시키는 원동력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의 중심은 윤리적인 분야로 옮겨 간다. 이론 형이상학에 서 신의 사상은 오로지 규제적 이념으로서만 허용된다. 그리고 신의 사상 자체는 더 이상 물리학에서 아니라 생물학에서 여전히 자연과학에 영향을 미친다. 죽 우리는 물리학적으로 설명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 생명체의 경이로운 합목적성을 방법적으로 마치 목적을 설정하는 신적 이성의 작품인 것처럼 취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칸트는 내가 다음 강의에서 다루려고 하는 주 제를 제안하고 있다. • 그 도움으로 청년 칸트가 행성들의 생성을 설명했던 특수한 자 연 법칙의 원천에 관하여 물론 칸트는 그의 미완성의 유고에 이 르기까지 다루었다. 우리는 그가 이 · 문제를 그의 새로운 단초로

부터 해결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두번째 강의 시 리즈에서 경험에 관한 칸트의 이론을 다시 취급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청년 칸트가 벤틀리의 전도된 풀라톤주의의 논증 에 대항하여 기독교적 창조 개념을 구출해 낸 것이 그 자체에서 이중적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그 이론을 언급해야 했던 것 뿐이다. 칸트의 행성이론은 그것이 창시자의 희망에 따라서는 어 떻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실제로는 세속화의 보다 진전 된 단계이다.

제 8 강 생명의 전화 우리는 하늘과 땅, 현대적으로 말하면 태양과 그의 행성들의 원천에 관해서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내가 구약에 대해 말했던 것을 상기해 보라. 하늘과 땅은 단지 무대일 뿐이다. 풀과 야채 그리고 과실수는 무대 배경으로서 필요하고, 물고기와 새, 가축 과 들짐승은 조역으로서 필요하며 연출되는 작품 S ti.i ck 은 인간의 역사이다. 신은 이둘 모두를 그 종류대로 만들었다. 자연법칙에 따라서 땅과 별들의 연원을 설명하고자 하는 과학은 이제 어떻게 해서 땅 위에 생명이 나타났는가라는 물음 앞에 대면해 있다. 나는 생물학의 역사에 관해서 스스로 연구를 해본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강의의 주제에 관하여 사려 깊은 생물학자와 함께 논하고자 할 때 항상 나타나는 근본 문제에 한정하는 것이 나에게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의 진화의 문제는 다음의 세 개 또는 네 개의 부분 문제로 나누어질 수 있다. 첫째, 도대체 전화라는 것이 존재했는가?

둘째, 우리는 전화의 원인들을 제시할 수 있는가? 셋째, 식물과 동물은 자연의 고유한 영역을 형성하고 있는가 아니면 진화가 ® 무기 물질과 유기적 생명 사이의, ® 동물과 인간 사이의 경계를 중재하는가? 이 문제들은 종교적 사유와 과학적 사유와의 관계에 대한 우리 의 물음에 대해서 점증하는 중요성의 대열에 속하는 것들이다. 고대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나는 고대의 언어를, 나의 표현 방법 이 근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부분적으로 이해될 수 없을 지도 모를 정도로 전수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나는, 만약 우리 가 저 시대들로부터 물려받은 문제들이 유래한 의식상태에로 옮 겨갈 수 없을 때, 우리가 그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 지롤 알지 못한다. 이것이 근대 과학자들 앞에서의 나의 변명이 다. 이제 나는 그들의 사유가 저 물려받은 형식들을 여전히 생생 하게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비슷한 변명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지금 근대 과학에 관해서 말하려고 하며 그것의 사 유방식을 가능하면 명확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자연과학적 사고 가 적극적으로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통찰하지 못한다면 우 리는 금세기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통찰을 배우기 위해서 우 리는 주의 깊게 그러나 단호하게 자연과학적 사고의 품 속에 뛰 어들어야 한다. 나는 고대의 유태인이나 풀라톤적 철학자들처럼 이야기하려고 시도해 왔다. 이제 나는 초자연과학자 Ul t ra -Na t urw i ssenscha ftl er 처럼 말할 것이다. 그리고 매우 기이한 것 이지만 세 가지 모든 경우에 내가 실제로 믿지 않는 것을 주장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유기체의 전화가 도대체 과연 존재했느냐 하는 첫번째 문제는 19 세기 이래로 결정되었고, 그 대답은 아주 명확하게 〈 예 〉 이다. 이러한 통찰에 이르게 한 사다리의 단계는 아주 간단하였다. 첫 번째 단계 는 분류 Klass ifi z i erun g이 다. 이 미 성 서 의 창조 보고 Scho p hun g sber i ch t가 분명 한 분류적 관심 을 보여 준다. 이 러 한 점에서 성서의 첫째 장은 신화라기보디는- 오히려 초기의 과학이 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놀랄 만큼 세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가 포함되어 있는 그리스의 생물학은 매우 주의 깊은 작업을 수행하였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종류의 생명체들이 생겨나게 되 었는가라는 물음이 두번째 단계를 형성한다. 그것들은 아리스토 텔레스가 생각한 것처럼 옛날부터 존재하였는가? 신이 첫째 주 에 그것들 모두를 그 종류에 따라서 만들었는가? 18 세기에 사람 둘은 오늘날의 것과는 다론 생명의 초기 형식들에 관한 많은 자 료들을 알기 시작했고, 지구가 서서히 형성되었다는 생각이 천문 학으로부터 지질학을 거쳐 생물학에 이르기까지의 과학적 사유를 점차적으로 침투해 갔다. 그리하여 세번째 단계로서 자연의 역사 에 대한 생각이 생겨나게 되었다. 19 세기 초에 퀴비에 Cuv i er 는 그 각 시기마다 새로운 종류의 생물들의 직접적인 창조가 뒤따랐 던 일련의 지구역사적 대재앙들을 믿고 있었다. 이러한 견해는 행성 체계에 대한 뉴턴과 벤틀리의 견해에 대한 생물학적 유사체 이다. 이러한 견해는 유기체적 형태들의 다소간의 연속적인 변환 에 대한 점증하는 많은 증거들 앞에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 다. 모든 생명체는 단 하나의 계통수(系統樹, S t ammbaum) 를 갖 는다고 하는 전화론은 최종적인 네번째 단계였다. 아마도 이 이 론에 대해 가장 커다란 공헌을 한 이는 라마르크 Lamarck 일 것이 다. 다윈 Darw i n 과 헉슬리 Huxle y의 강력 한 공개 효과도 이제 이 러한 점에서 일반 의식이 이 문제에 주목하게 되었음을 의미했을

뿐이다. 오늘날 진화론은 전지한 생물학자들에 의해서 더 이상 의심받지 않는다. 그리고 종교적인 사상은 초기의 저항 이후에 내가 칸트의 이론에 관련하여 인용한 다음과 같은 종류의 생각을 가지고 새로운 과학적인 인식에 자신을 적응시킬 수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즉 왜 신은 생물의 창조에 있어서 성장과 변환의 자연적 법칙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해야만 하였는가? 우리는 두번째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진화의 사실이 인정된다 면 우리는 그의 원인들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식물 과 동물이 그들과 같은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왔다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또한 우리는 말하자면 우리가 이 사실도 역시 설 명할 수 없다는 것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나 원인문제는 익숙하 지 않은 과정에 부딪혀서 더 날카롭게 부각된다. 익숙해전 것은 그것의 신비한 본성이 우리에게 결국 의식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현대적인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물음을 결 합해야만 한다. 그것은 정상적인 유전성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 는가 하는 문제와, 아마도 생명의 훨씬 커다란 업적, 곧 더 고차 적인 전화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여기에서 나는 먼저 근본문제에 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오늘 날에도 여전히 대하게 되는 유기체적 생명에 대한 고전적 견해는 그러한 종류의 물음을 자연과학적으로 제기하는 소박한 시도에 부정적인 대답을 가져왔을 것이다. 사람들은 생명이 기계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말해 왔다. 생명은 고유한 종류의 현실성 ein e Wi rk li ch keit eig e ner A rt이 다. 이 것은 인과적 개 념 들이 아니 라 목 적론적 개념들로 이해될 수 있다. 사람들은 독수리의 눈과 개의 코, 그리고 사자의 이빨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를 결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이 런 기관들이 있는지를 아주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죽 눈은 보기

위해서 코는 냄새를 맡기 위해서 그리고 이빨은 깨물기 위해서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살아 있는 것의 영역에서의 설명은 우리 에게 다만 무엇을 위해서만을 가르칠 수 있지, 어디서 또는 왜는 결코 가르쳐 줄 수 없다. 이러한 견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커다 란 권위에 의해서 보증되는 것처럼 보이며, 또 아주 자연스런 방 법으로 종교에 대해 빈 툼을 허락한다. 죽 생물들이 지금 있는 대로 있는 것은 신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아라는 것이다. 나는 이 견해가 오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견해 가 어느 정도까지 틀렸는지를 정확히 말하고자 시도할 때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 견해에 완전히 대립 된, 오늘날의 많은 생물학자들이 지니고 있는 통속 철학의 견해 도 또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견해에서 잘못된 것은 그것이 목적론적 개념을 사용하는 것 이 아니라 목적론적 개념을 인과적 설명에 반대 명제로서 대립시 켜 놓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견해는 단지 매우 제한된 의 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할 수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서 다시 다론 후기의 어느 사상가보다도 더 건전한 상식에 접근해 있다. 나는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원인들에 관해 몇 가지 언급하고 싶다. 이 여론(餘論)은 겉보기에는 쓸데 없는 시간을 소바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것이 개념들을 설명하고자 하기 때문에 나중에 많은 시간을 절약시켜 줄 것이 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물에 그 스스로 이 사물들의 네 개의 시원 archai 혹은 원인 a iti a i이라고 부르는 네 개의 개념을 적용한 다. 이것은 라틴어로 4 원인, 곧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 causa mate r ia l i s, for mali s, eff icien s, fi na li s 을 의 미 한다. 그리 고 카 우사 causa 는 독일어로 원인 Ursache 으로 번역된다. 한 예로서 이

물 컵과 사과 씨를 보기 바란다. 이 둘은 모두 질료인, 다시 말 하자면 이 둘이 그로부터 만들어지거나 그것으로 이루어지는 물 질, 질료를 갖는다. 죽 물 컵은 우리가 유리라고 부르는 규산염 의 화합으로 이루어지고, 사과 씨는 유기적 결합물의 복잡한 화 합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둘은 형상인, 곧 형식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풀라톤 철학의 이데아 또는 형상이 의 미했던 것을 상기해 보기 바란다. 형상온 〈 이 사물이 무엇이 냐? 〉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상을 일정 한 방식으로 유 (S p ez i es, 독일어로 Ar t)와 동일시할 수 있다. 실 제로 유 s p e ci es 라는 말은 그리 스어 의 에 이 도스 eid o s 또는 이 데 아 i dea 의 라틴어 번역이며, 일상어로는 먼저 그리스어들과 마찬가 지고 보이는 것, 외양을 의미한다. 이 물 컵의 형상온 그것이 물 컵이라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정의를 요구한다면 나는 물 컵은 컵 모양의 사물로서 유리로 되어 있고, 여기에 액체를 담을 수 있으며 아것으로 그 액체물 마실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과 씨의 형상은 그것이 사과 씨라는 것이다. 사과 씨의 구어적 정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여러분이 이 두 개의 근원이나 원인을 사소한 것으로 받아들인 다면 아마도 여러분이 옳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어전 사 물이 어떤 것인지를 제시하는 가장 단순한 언명을 정식화하려고 하였는데, 사실 단순한 언명들은 사소한 것으로 들린다. 방법적 자기조종의 아주 높은 단계에 서 있는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위에서 사유하고 있는 것으로서, 우리가 일상어의 의관상 사 소한 언명들에서 현실적으로 말하는 것, 곧 우리가 일상어의 언 명들에서 언제나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경험하려고 하는 데서 항 상 시작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개의 물음울 허락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형식 Form,

종류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또는 그것은 무엇으로부터 만들어졌는가? ―—二 1 대답은 그것의 물질, 그것 의 질료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에서 물질은 최종적 인 실체 가 아니 라 관계 개 념 Rela ti onsbe griff울 나타낸다. 물컵 의 질료, 곧 화학적 실체로서의 유리는 그 자체가 다시 형식과 물질 을 갖는다. 예를 들어서 화학자에 있어서 그것의 형상은 화학식 을 통해서 제시될 것이며, 우리는 그것의 질료로서 규소와 산소 그리고 다른 원소들의 원자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원자는 그 자신 원자물리학이 기술하는 형상과 소립자라고 하는 질료를 지 닌다. 그러면 소립자의 형식과 질료는 어떠한가? 우리는 이 문 제를 두번째 강의 시리즈를 위해 남겨 두고자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물은 그 밖에 또 다론 두 개의 물음을 허락 한다. 이 사물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가? 이 물 컵은 아마도 유리 직공이 불어〔 PX 入〕 만들었을 것이다. 이 경우에 유리 직공은 물 컵의 작용인이다. 사과 씨는 인간의 기술에 의해서 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과 나무에서 자라난다. 사과나무가 그것의 작용인이다. 이 물 컵은 여러분들의 초빙교수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이 것은 그것의 목적인이다. 이 사과 씨는 거기에서 새로운 나무가 / 자라기 위해서 자라난 것이다. 이것이 그것의 목적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비판적인 점에 이른다. 이제 현대의 생물학자 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결국 우리가 그를 항상 생각해 온 대로, 형 이 상학자로 나타났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에 굴복할 것 이다• 사 과 씨는 전혀 어떤 목적을 위해 자라지 않았다. 죽 그것은 단순 히 자연법칙을 근거로 하여 생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비판 은 다만 절반만 옳다. 나는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마저도 〈형이 상학〉을 완전히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우리가

보는 사물을 우리가 보지 못하는 본질을 가정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었다. 마치 근대의 자연과학자들이 어느 누구도 본 적이 없 고 이제까지 한 번도 엄밀하게 증명할 수 없는 자연법칙과 같은 것을 믿는 것과 똑같이 아리스토텔레스도 세계의 최종적인 목적 성 Z i el g er i ch t e t he it을 믿는다. 그러나 가시적인 과정들이 우리가 가설적으로 세운 자연법칙을 매우 정확히 따르는 수많은 예를 제 시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도 사물들이 가설 적으로 세운 목적성에 따라 정확히 행동한다는 예를 제시할 수 있다. 우리의 단순한 예들은 물리학과 천문학에서 나오고, 이와 는 달리 그의 예들은 생물학에서-이것이 차이다——-나온다. 사과 씨가 없다면 사과나무는 이내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독 수리가 눈이 없다면, 개가 코가 없다면, 그리고 사자가 이빨이 없다면 그들은 살아 남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목적론적 개념 울 이 모든 기관들이 어떻게 사실적으로 작용하는지롤 기술하기 위해서만 사용한다면 이것은 순전히 하나의 현상학, 곧 유기적 생명체의 주의 깊은 서술 안에서만 유지된다. 근대의 생물학자들 은 목적성의 용어를 회피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목적 설 정을 의도하는 형이상학적 가정을 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 고 이러한 생각은 확실히 옳다. 그러나 생물학자들이 기관의 〈 기 능〉 또는 〈사용〉에 관해 언급한다면 그들은 정확히 아리스토텔레 스의 목적인 개념이 의도했던 현상을 기술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순수한 현상학에 관심을 제한할 수 있다면 인과 적 설명과 목적론적 설명 사이에는 아무런 충돌도 촌재하지 않을 것이다. 죽 이것들을 서로 대립시키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네 개의 원인 중에서 선택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모든 사물에 있어서 4 원인 모두에 대 해서 물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특히 목적인, 죽 목적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물은 또한 작용인을 가지고 있는데, 왜냐하 면 그것이 무에서 나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바로 초빙교수가 물 을 마시기를 원하기 때문에 유리 직공이 물 컵을 만들기 위해 필 요했던 것이다. 독수리가 눈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생리학자에게 는 어떻게 이러한 필수적인 기관이 알의 배(旺)에서 화학의 법칙 에 따라 자랄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이 과정 은 지극히 신비적이지만, 어떻게 해서든 이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많은 목적론자들이 바라는 생각, 죽 이러한 성장 과정에서 물리학과 화학의 법칙이 훼손될 것이라는 생각은 내가 이해하는 한에서는 독수리의 눈의 유용성을 더 찰 이해하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라이프니츠는 시계가 기계적 법칙을 훼손함으로써 시계 제작자의 의도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와는 정반대로 시계의 태영과 톱니가 이러한 법칙을 정확히 따르 기 때문에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럼에도 나는 암암리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작용인의 자리에 근 대적인 엄밀한 자연법칙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인과성과 목적성 사이의 균형을 교란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작용인은 목적의 가능성을 위하여 사물이 생산되는 그러한 목적의 가능성에 의해 인도된다. 유리 직공은 유리잔이 사용되는 것을 안다. 그는 이 목적을 위해서 그리고 유리공이 이미 그의 정신 속에 가지고 있 는 표상에 따라서 유리컵을 만든다. 사과나무는 물론 합리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따라서 주관적으로 그것의 객관적인 목적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유기적인 생명의 사실들울 서술하고자 할 때 가능태 d y nam i s 인 참재태 Pote n z, 죽 사물이 그의 본성에 따라 생성되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개념을 사 용했다. 네 개의 원인 중 어느 하나도 단독으로 사물을 완벽하게 결정하지는 못한다. 작용인은 그 자신 구체적인 사물(유리 직공,

사과나무)이며, 그것이 산출할 수 있는 것은 목적인에 의해서 더 자세히 규정되는 넓은 활동 영역을 가지고 있다. 근세의 자연법 칙의 개념에 의해서 이 활동 영역은 소멸된다. 만일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사건이 선행하는 상태에 근거하여 엄밀한 자연법칙에 따라서 명확히 결정된다면 의도나 어떤 다른 원리에 의한 추가적 결정을 위한 공간은 남지 않는다. 이 구별은 목적론을 보충적으 로 물리학에 첨가하려는 철학자들에 의해서 종종 분명하지 않게 된다. 민법들은 단지 인간 행위의 일부분만을 규정하며, 다만 허 용된 행위의 활동 공간만을 제한한다. 근대인이 이해하는 바대로 의 물리적 법칙은 초기 상태가 주어지면 사건을 완벽하게 규정하 기에 충분하다. 그렇기 때문에 민법은 모순 없이 새로운 법칙에 의해 대치될 수 있다. 고전적 물리법칙들은 관찰된 현상들이 그 것들로부터 엄밀하게 따라나오지 않는다면 어딘가에 반드시 찰못 이 있을 것이다. 나는 양자역학적인 불확정성이 과연 이러한 측 면에서 많은 것을 변화시키게 될 것인지를 의심하고 있다. 그러 므로 근대 자연과학은 다음과 같은 양자택 일 앞에 서 있는 것처 럼 보인다. 죽 생물학적 합목적성이 단지 물리학의 법칙으로부터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에 대한 다른 표현일 뿐이거나, 아니면 물 리학의 법칙은 살아 있는 유기체 내에서는 성립하지 않는, 적어 도 예의 없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중에서 택일해야 할 것 으로보인다. 여기에서 우리논 뉴턴의 상속자로서의 칸트가 발견했던 것에 정확히 일치하는 상황을 만나게 된다. 물리학과 화학이 유기체의 기적과도 같은 합목적성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한 번도 제공할 수 없는 한, 자연과학에는 정신적인 힘의 직접적인 작용, 결국 신적 창조의 여지롤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빈 틈이 존재 한다. 그런데 유기체의 복잡도는 행성체계의 그것보다 훨씬 크

다. 물론 행성들의 체계는 아름답고 무척 질서정연하지만, 이것 은 생명체의 기관이나 생명체의 본능과 갇이 인간이 계획한 작품 이나 이 계획 자체와 직접 비교를 할 만한 특징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이 런 점 에 서 〈 작은 풀줄기 의 뉴턴 New ton des Gra-shalms> ( 곧 작은 풀줄기를 창조하는 자) 의 과제는 역 학적 행 성 이 론의 창조자의 그것보다 더 어렵다. 19 세기는 다윈에서 이런 뉴 턴을, 더 정확히 그리고 더 겸손하게 말해야 한다면 이러한 작은 풀줄기를 본 칸트를 갖는다. 우리가 문제의 복잡성을 통해서 가 려진 그의 데제에 대한 증명 가능성의 한계를 고려한다면 이런 비교는 부적당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생존을 위한 두쟁에 있어 서 우연과 자연 도태가 생명에서 나타나는 합목적성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다윈의 천재적인 생각이었다. 그는 전정한 역 사적 사고 방법을 자연의 역사를 취급하는 학문에로 끌어들였다. 살아 남을 수 있는 형태의 생명체들만이 발견되는 것은 단지 그 들만이 살아 남았기 때문이라고 그가 말하는 데에 우리는 놀라서 는 안될 것이다. 물론 다윈은 자기의 이론을 실제로 증명할 수는 없었다. 그 이 론에 대한 엄밀한 증명은 오늘날까지도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어떻게 이제까지 이 증명이 부정적이 아니라, 죽 다른 모든 가능 성의 배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달리 수행되어야만 했는지를 질문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다시 실험적으로 되풀이할 수 없는 지나 간 사건에 대한 이론을 세우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 칸트의 행성 이론조차도 그후 200 년 동안의 천문학적 발견에 따 라 완벽하게, 적어도 개별적인 부분에서 설명될 수 없다(다음 강 의를 참조하시오). 더욱이 다윈의 경우에는 그것을 넘어서서 오직 그의 이론이 옳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만이라도 실질적으로 양 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논의를 제공하는 것은 역시 어렵다. 오늘

날 우리가 약 40 억 년 내지 50 억 년으로 추정하는 지구의 나이로 보아 우연을 충분히 소유하고 있다고 하면 이 우연은 고차적인 유기 화 hohere Or gan i sa ti on 의 방향에 로 나아가는 충분한 수의 단 계들을 제공할 수 있는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러한 것이 가능 함을 완전히 부정하는 생물학자들이 있는 반면에, 내가 생각하기 로는 다수인 다른 사람들은 그의 이론이 돌연변이의 근대적 개념 에 의해 보완되기만 한다면 다윈이 생각하는 대로 이것을 보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에서 확률계산울 언급하지 않겠다. 그대신 나는 오히 려 그러한 설명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종류의 논의에 대한 개 별적인 실례를 끌어들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인간적인 행복추 구에 대한 그것의 실존적 의미 때문에 나를 감동시키는 한 예이 다. 생명체의 대부분의 기관들과 특성들은 영양 섭취나 자기방어 와 관계되는 모든 것과 같이 개체의 자기보존에 봉사한다. 그리 고 그 밖의 기관들은 성과 포육(晴育)의 기관이나 본능처럼 종족 보존에 이바지한다. 그러나 나는 계속적 발전의 촉진에 기여하는 특성들도 역시 있다고 믿는다. 다윈이 생각하는 대로 우연에 의 해 한 종(種)이 그의 경쟁자보다 더 급속하게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성질을 획득했을 경우 이 종은 그로 인해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유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성질들은 그것들이 유전적 인 경우에 살아 남을 것이며, 따라서 아마도 오랜 발전의 뒤에 여전히 살아 있는 모든 종들에 속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특성의 하나가 사멸성(死滅性)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단명 성(短命性)이라고 본다. 시간 단위 내에서 한 종의 세대를 많이 낳으면 낳을수록 그만큼 더 다양한 돌연변이와 돌연변이의 조합 이 실험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을 도태이론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어린 개체의 생명의 보호에 유리한 강한 도태

압력(海洙壓力)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식에 대한 어미 의 애정은 고등동물에 있어서 매우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어미가 많은 아이들을 낳아 기론 뒤에는 늙은 개체의 생명 이 살아 남는 데에 유리한 도태 압력은 없다. 반대로 그들은 쓸 모 없는 식객(食客)이 된다. 그리하여 동물에게서 성장한 자식들 의 어미에 대한 사랑은 전적으로 비정상적이다. 노인돌에 대한 보살핌울 다만 책무로서 이해하는 것은 인간화에 속하는 엄청난 깊이와 폭을 지닌 안목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식물과 동물 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 관점을 두면 늙은 것들의 짧은 생존기간 이 그들의 종을 위해서 유리하다. 아마도 이런 도태 압력이 없이 는 자연적인 노쇠 과정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 는 이런 개체들이 강압적으로 죽지 않을 페 백만년 또는 수억년 동안 줄지 않는 생명력을 가지고 무한정으로 사는 것이 왜 불가 능한지 그 생화학적 근거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좀더 깊은 숙고를 위해 다윈의 도태 이론을 옳은 것으로 취급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적극적인 증명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그 이론의 불가능성에 대한 나를 확신시킬 만큼의 적극적인 논의 를 전혀 둘은 적이 없다는 것에 근거해서이다. 나는 여기에서 다 시 〈오캄의 원리 Occams Pr i nz ip〉를 이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 리가 다윈이 제공한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 왜 진화의 추가적인 근거를 찾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의 천문학과 코페르니쿠스의 이론과 관련해서 나는 이 방 법적 경제성의 원리 Prin z ip meth o dis c her S p arsamke it가 얼마나 찰못되었는가를 지적한 바 있다. 우리는 이것을 결코 독단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내가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오로 지, 만약 우리가 근대 생물학을 그것이 당연히 받을 만큼 전지하 게 취급하기 시작한다면 어떤 결과가 생겨날 것인지롤 내가 서술

하고자 시도할 때 그 언어를 단순화시키기 위해서일 뿐이다. 다 윈의 이론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근대 자연과학의 개념적 테두리 안에 있는 또 다른 이론이 발견된다 해도 그것은 아마도 다음에 뒤따를 나의 논의를 크게 바꾸지 못할 것이다. 이제 나는 그 자체가 이중적인 다음과 같은 세번째 문제에 도 달하게 되었다. 그 문제는 식물적 생명과 동물적 생명의 상한과 하한에 있어서의 전화론의 가능한 경계에 관한 것이다. 생명은 무기 물질로부터 진화되었는가? 인간은 고등동물, 가령 원숭이 의 후손인가? 내가 아는 한 현대 생물학자들은 이 두 질문에 대해서 아주 높 은 개연성을 가지고 대답한다. 사람들은 아미노산의 발생을 지구 상에서 언젠가 있었을 법한 것과 비슷한 실험실의 조건 밀에서 관찰해 보았다. 어떻게 단백질이 아미노산에서 그리고 생물들이 이 단백질에서 혹은 이 단백질과 함께 형성되었는지는 아직도 전 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누가 그러한 발생의 가능성을 부정 하겠는가? 그리고 지구가 가스와 먼지로부터 형성된 뒤에 어떻 게 그밖에 달리 생명이 시작되었겠는가?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하게 말한다. 지질학적 사실 둘은 인간이 지구상에서 늦게 태어난 생물체임을 밝혔다. 사람들 은 인간이 지상에 나타난 지가 백만년인지 아니면 천만년인지에 관해서 논쟁할 수 있다. 만일 지구의 전체 나이를 하루의 24 시간 으로 압축시킨다면 이것은 인간이 자정 30 초 전에 나타났느냐 혹 은 5 분 전에 나타났느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는 것과 같다. 만일 인간이 고등동물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그는 어디에서 나와야 할 것인가? 아마도 사람들은 원숭이나 심지어 유인원을 인간의 조 상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나는 신문 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인간이 원숭이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을 개

연적으로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좀더 상세히 읽 어보면 새로운 이론이 인간을 의후아목 (Halba ff en, 반원숭이)의 후손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아마도 현대 과학의 이러한 적극적인 견해보다도 이 견해를 믿 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방금 사용할 수 있었던 논증 방식이 근본 적으로 더 홍미로울 것이다. 무기 물질 이의에 다른 어디에서 생 명이 그 근원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동물 이의의 어디에서 인 간의 조상이 찾아질 수 있겠는가? 우리는 가능한 다른 전사 Vor g esch ic h t e 를 알지 못한다. 그러 나 이 전 세 기들에 서 도 역 시 다론 가능한 전사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전 세기들에서는 우리와는 다르게 추론하였다. 그들은 인간이 보지 못하는 영역에 서 생명과 인간의 근원을 찾았던 것이다. 현대 과학은 그것의 추 론의 결과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방법적 출발점 때문에 이미 직 접적인 창조를 배제한다. 우리들의 방법론이 이 사실을 부정하려 고 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생명의 근원이 무기 질로부터이고 인간의 조상이 동물로부터라는 데 대한 긍정적인 증명을 갖고 있지 못하며, 좀더 꼼꼼하게 말한다면 진화론 자체 에 대해서도 아무런 긍정적 증명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 나 나는 이러한 확인으로부터 진화론에 대한 어떤 회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전혀 무용한 것임을 인정한다. 과학은 그러한 보편화 를 가지고, 내가 만일 원자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통일적인 발전 노선에 대한 이러한 극히 자연스러운 가정에 의심을 한다면 벨라민과 벤툴리의 과오를 반복하는 것이 아닌지 두려워해야 할 만큼, 자주큰 성공을 거두었다. 나는 전혀 다른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가정이 본디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고 있는가? 놀랍게도 과학적 견해를 정식화하고 심지어 증명하 는 것은 이러한 정식화에 사용된 용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명확한 개념으로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두번째 강의 시리 즈에서는 과학적인 명제에 대한 그와 같은 추가적인 의미분석에 충실하게 될 것이다. 만약 생명이 무기 물질에서 발생하였다면, 그리고 진화를 설명 하기 위해 자연 도태로 충분하다면, 물리학과 화학의 잘 알려진 법칙들이 유기적 물체들에 예의 없이 적용되리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가정이다. 내가 방금 자연스럽다고 말한 이러한 가정 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개 별적인 원자들에 관찰될 수 없는 작용을 가하면서도 살아 있는 세포나 유기체와 갇이 구성된 큰 물체들에서의 결정적인 작용을 조건짓는 힘이나 법칙이 존재할 수 있다. 생명 현상들을 물리 화 학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이유로 보어 N. Bohr, 하이 젠베르크 He i senber g, 파울리 Pauli 등등과 같은 몇몇의 현대의 지 도적인 물리학자들은 명백히 이러한 물리 화학적 설명을 단념하 였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결정되지 않은 문제에서의 논의를 간략히 하기 위해 그들을 추적하지는 않을 것 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후의 사유과정을 위해서 나는 그 자체로 는 대단히 홍미로운 이러한 탐구자들의 견해를 방법적 절약의 원 리 때문에 우리의 숙고로부터 배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이 바로 하나의 물 리 화학적 기계라고 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나는 이러한 견해 속에 들어 있는 도전을 어떤 형이상학적 가정으로 회피하지 않고 유지하고자 한다. 나의 유일한 무기는 도전하는 주제의 의 미를 분석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테제를 시험적으로 가정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 시기 바란다. 이것이 허락된다면 나는 글래스고 대학의 이 강당 에 모여 있는 살아 있고 사유하는 우리들이 물리적인 기계 이의

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단어 하나 하 나를 검증해 보자. 〈 이의에 아무 것도 아닌 Ni ch ts als 〉 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한다. 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음파 이의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음파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 것이 내가 최소한 기대하는 것이다. 〈 의미 〉 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지만 정의하기는 어렵다. 나의 청중 여 러분은 음파 때문에 여기에 온 것이 아니고 그것의 의미 때문에 왔다. 그러나 음이 의미를 지닐 수 있기 위해서 음향학의 법칙이 어딘가에서 손상되어야 한다는 결과가 나오는 것인가? 나는 그 반대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더 나아가 무엇이 음파 내에서 또는 음파에서 의미를 〈 지니는지 〉 를 물어 볼 수 있다. 확실히 의미는 어떻게든 파의 특 수한 구조 속에 현재해 있다. 정보 이론은 음파의 정보 내용을 객관적인 척도로 측정하려고 한다. 나는 더 자세히 둘어가지는 않을 것이지만, 어쨌든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음파의 들을 수 있는 성질, 곧 음파 내의 형식 요소나 구조 요소이어야만 한다. 추측건대 여러분들은 의미란 단지 인간의 의식 안에서만 현재 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강연을 듣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현존해야만 한다. 내가 빈 벽을 향해 장황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의미를 담지하는 음파의 구조는 어떻게 여러분의 의식 안에 들어서는가? 우리는 이 과정을 셋 혹은 네 단계로 추 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음파는 고막을 진동하게 한다. 이 기계적 인 진동은 청각신경을 자극하여 그것이 전자화학적인 신호를 뇌 에 전달한다. 여기에서 이 신호는 자연과학으로는 거의 알 수 없 는 방법으로 다른 많은 신호들과 집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그의

신체가 반응을 보인다. 죽 말하는 자에게 시선을 집중하기도 하 고 알아들은 것을 적기도 할 것이며, 어쩌면 참도 잘 것이다. 이 서술 속의 어디에 의식이 둘어 있는가? 나는 내가 자연과학적인 지식의 도움으로 보거나 추측할 수 있 는 것을 서술했다. 그러나 이 강의실 내의 모든 사람들 중에는 이 과정을 전혀 다로게 체험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고유한 체 험을 하는 것은 그 자신이다. 그리고 나는 그 자신과 다른 사람 들도 이 과정을 다르게 체험한다고 덧붙여 말하고 싶다. 여러분 이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않았을지라도 여러분은 나의 육체적인 행동만을 보고 있는 것아 아니다. 여러분은 나의 말을 둘음으로 써 무엇이 나의 〈의식〉 속에서 진행되는지를 다소나마 알게 된 다. 나는 여러분을 바라봄으로써 무엇이 여러분의 〈의식〉 속에서 전행되는지를 조금은_추측건대 아주 조금―—-안다. 비록 이 앎이 제한적이고 또 언제나 어떻게 나타난다 할지라도 인간은 다 른 인간을 알며, 의식은 다른 의식을 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기술을 제시하면서, 이것이 하나의 형이상학적 가정으로 변환되지 않도록 주의하고자 한다. 소위 〈몸 마음의 문제〉는 내가 오늘 다루는 많은 문제와 함께 두번째 강의 시리즈에 속한다. 나는 여기에서는 나의 출발 문제에 머물 러, 만일 물리학의 법칙이 우리의 뇌속에서 엄밀하게 성립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이 문제가 어떤 관점에서 보다 더 잘 이해 될 수 있을 것인지롤 묻고자 한다. 나는 이에 대한 아무런 근거 롤 알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물리적인 기계 〈이의에 다른 것 이 아니다〉라는 문장은 여전히 분명한 의미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물리학의 관점에서 물리적인 기계 처럼 서술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에 이어 우리 분석의 다음 단계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물

리적인 기계 〉 라는 말에서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가? 자동차를 예 로 들자. 과연 우리는 자동차와 같은 것인가? 어떤 차이가 나타난다. 기계는 인간의 계획에 의하여 제한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인간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 어지지 않는다. 생명은 보어 Bohr 가 즐겨 말하는 바대로 우리의 실험물이 아니다. 인간은 그의 고유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기계 는 인간의 역사에 속한다. 그러나 이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 차이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기계가 생명체의 본질적인 특징들을 결코 흉내낼 수 없다는 데 있는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사이버네틱스 (Ky b erneti k, 인공두뇌학)라고 불리는 탐구 영역에 들어서게 된 다. 우리는 자동차를 살아 있는 유기체가 아니라 유기체의 기관, 예를 들어 그것의 발과 비교해야만 한다. 인간은 인간에 의해서 태어난다. 그러나 자동차는 자동차에 의해서 태어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발은 발에 의해서 태어나지 않는다. 자동차는 생명체 의 특별한 활동, 곧 전전운동을 모방한 것이다. 레이더 기술도 다론 활동, 죽 보는 것을 모방한 것이다. 계산기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비교를 보여 준다. 죽 그것은 어떤 일정한 사고 활동들을 모방한 것이다. 인간은 실천에 있어서 그의 모든 기능을 한꺼번 에 모방하는 기계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고 어떤 제한된 활동 영역에서 인간을 능가하는 기계에 관심을 갖는다. 따라서 전자계산기를 통한 사유의 모방이라는 가장 중요한 예 를 들어 보자. 첫번째 강의에서 말한 대로 그것의 복잡도는 먼저 지렁이의 중앙신경계의 그것에 비견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자 계산기가 인간을 아주 훌륭하게 모방한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수적 계산에 있어서 인간을 결정적으

로 능가하였고, 나 자신은 계산기가 실연해 보인 최초의 서양장 기 놀이를 뒤따라서 해본 적이 있다. 이 계산기는 아직도 그 놀 이에서 그 고안자보다 못하다. 그러나 아마도 계산기는 인간의 두뇌보다 더 빠르게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한계는 어디에 있는가? 기계는 기계를 만들 수 없다고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하지 않다. 단순한 기계는 분명히 다른 기계를 만들 지 못한다. 그러나 점증하는 복잡도가 이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 노이만J. V. Neumann 은 몇 개의 단순한 요소들을 결합하여 자신 과 동일한 기계를 만둘 수 있는 기계를 설계하였다. 더욱 복잡한 기계는 아마도 수행 능력에 있어서 자신을 능가하는 다른 기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한계는 어디에 있는가? 기계는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이것은 확실하지 않다. 한 전문가가 내게 설명하기를 장기를 두 는 전자계산기가 그의 처음 놀이에서 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마지막 수에서 속임수를 쓰더라는 것이다. 내가 계산기 전문가와 함께 한 자리에서 이 사실을 문의한들에게 설명할 때 그 전문가 는 태연히 〈그것은 물론 단순한 계산착오〉라고 설명한다. 물론 그것은 계산착오였는데, 왜냐하면 기계가 우리의 계획에 따라서 행해야 할 것과는 다르게 행동했다는 것이 바로 계산착오의 정의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프로그램에 대치되는 계산 착오를 배제할 때조차도 계산기가 이 프로그램을 따라 계산할 때 무엇이 나타날지를 미리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그 모든 것을 미리 안다면 우리는 기계를 만들어야 하는 수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계산기의 비교 적 간단한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결과에 대한 확실한 일반적인 기 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기계는 하나의 현실

적인 사물이며, 그것이 일단 만들어졌을 때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그것에 기대하는 것과 일치할 필요는 없다. 그 한계 는 어디에 있는가? 계산기는 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고 여러분은 말할 것이다. 여 러분은 무엇으로부터 그것을 아는가? 나는 물론 이 주장을 인정 한다. 그러나 내가 그 주장을 인정하는 것은 동물과 인간의 뇌와 비교해 보면 현대의 계산기에서 전행되는 과정이 신경 체계 내에 서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과 연관된 과정과 어떤 밀접한 유사성을 갖는다는 것이 매우 불확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과 의식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풀지 못하는 한 계산 기가 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 것 인가? 인간을 만들고자 한 것은 인간의 오래된 꿈이다. 나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오늘날의 우리의 지식이 증명한다고 보지 않 는다. 어느 날인가 인간을 만든다면 그것은 아마도 끔찍한 일일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신에 대한 마지막 모독이고 또한 파멸적 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실로 우리들이 이를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며, 아마도 이 두려움은 그것이 불가능하리라는 형태 를 취하고 있다 할 것이다. 우리의 확신 가운데 많은 것은 아마 도 은폐된 불안이다. 사실상 나는 여기에서 다시 이것이 가능하 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근거는 단지 사 람들이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역사를, 그것도 아마 40 억 년이 라는 역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일 뿐이다. 그 한계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반복된 물음을 올바로 이해하기 바란다. 나는 우리가 이런 일에 관해서 이제까지 얼마나 적게 알 고 있는지 그리고 부정적 확인마저도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를 말하고 싶다. 이 문제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의미 분석을 계속해 나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물리학적 관점 에서 사람들은 우리를 물리적 기계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말하였다. 〈 물리학의 관점 〉 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육체에 도 성립된다고 전제한 물리학의 법칙들 밀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을 과연 우리는 알고 있는가? 이렇게 해서 우리는 비로소 핵심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이 강의의 두번째 시리즈에서 중심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제 9 강 우리 시대의 천문학 이 강의에서는 간단하게 우주생성론적 문제의 현대적 상황을 서술하되, 먼저 사실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철학적인 성찰로 끝맺 고자한다. 우리는 지난 시간의 생물학적 이론들을 실마리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전화의 원인을 아직도 정확히 이해하고 있 지 못하지만, 진화의 사실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죽 우리들은 심 지어 상당히 일반적으로 유기적인 생명체가 지구 역사의 초기 단 계에 우리가 무기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부터 발전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통적인 견해는 어떤 근거를 갖고 있 는가? 나는 이 근거를 지난 강의에서 부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즉 우리는 그와 다른 어떤 길을 통해서 생명이 오늘날의 형태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다. 이미 거기에서 말한 대로 이 대답은 생명의 초자연적인 근원 을 암암리에 무시하고 있다. 우리의 자연과학에 대한 믿음은 이 만큼이나 크다. 그러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기 위하여 우리의 전

화에 대한 믿음은 최소한 자연 법칙의 울타리 안에 있는 가능한 대안에 대한 연구를 전제해야만 한다. 우리는 생명체가 오직 그와 상당히 유사한 생명체로부터만 유 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면 원숭이나 떡갈나무가 지구의 포유동물이나 식물에서 유래하지 않았다면 기껏해야 지구 밖의 포유동물이나 나무들이 그것들의 조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정을 위한 어떠한 논증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와는 반대로 약 오십년 전에 적어도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 가 우주 공간에서의 물리적 조건을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이론이 논의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생명은 어떻게 해서든 한 별 에서 다른 별로 옮겨다닐 수 있고, 따라서 그 당시의 견해에 따 르면 생명은 우주와 마찬가지로 영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에 있어서 이 이론은 두 가지 이유에서 더 이상 큰 매력을 갖지 못한다. 첫째로 지금까지 결국 우주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우리 주위의 대기의 성분들이나 운석들로부터 하등의 생명의 흔적이 발견되지 못했다. 둘째로 지구뿐만 아니라 아마도 전체로서의 우 주도 영원한 것이 아니고 시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오늘날 천 문학자들 사이의 지배적인 견해이다. 이 견해가 오늘 내 강의의 주요 대상이다. 우리는 지구의 나이를 대략 사십억 년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것은 이보다 십억 년이 적거나 많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추정을 근거지을 수 있는가? 이것과 또다른 사실 문제들의 자세한 것에 대해서는 아마도 자 연의 역사에 관한 나의 강의가 참조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는 단지 논증의 주요 줄거리만을 끌어둘이고자 한다. 방사성 원자들은 고정된 붕괴율을 가지고 붕괴한다. 예를 들면 주어전 양의 폴로늄 Polon i um 은 137 일 내에 그 반이 납 Ble i으로

변할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시간 간격, 이른바 반감기는 그것이 2000 년인 라듐이나 50 억 년인 우라늄 Uran 보다 짧다. 그런데 지 각에는 1 퍼센트의 납을 포함하고 있는 전형적인 우라늄광이 존재 하며, 그 비율은 우리가 그 우라늄광을 발견하는 지질충이 오래 된 것이면 오래된 것일수록 더 크다. 우라늄광은 광물이 형성될 때 움직이기 시작해 광물의 현재의 나이를 우리에게 알려 주는 일종의 시계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라늄의 평균적인 함 량과 납의 동위원소를 사용하게 되면 일반적으로 지상의 광물의 나이도 비슷하게 측정할 수 있다. 지구가 우라늄의 반감기보다 훨씬 더 많이 나이룰 먹을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지는데, 왜냐하면 지구에는 아직도 많은 우라늄이 존재하고 있고, 지구가 행성으로 서 존재한 이래 우라늄이 재생될 수 있었던 방법을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추론 방법은 우리가 우라늄 시계를 가지고 측정하는 전체의 시간에 있어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자연법칙들이 엄밀 하게 적용돼 왔다는 것을 전제한다. 우라늄의 붕괴 비율이 지구 의 전 역사를 통해서 일정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오늘 날의 우리의 대답은 그것이 결코 선험적으로 확실한 것은 아니지 만, 매우 신빙할 만한 것으로서 적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인데, 왜 냐하면 실제로 전혀 다른 다양한 우주 연령 측정 방법들이 서로 일치하여 동일한 결과를 낳기 때문아다. 여기서도 자세한 것은 젖혀 놓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연 법칙을 경험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는 것과, 여기서 경험적인 조정은 많은 경우에 ―예를 들면 우리가 아주 멀리 떨어진 우주의 과거에 관심을 가질 때 _~ 실험에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 히려 관련된 사실에 대한 점점 더 많은 수의 일관된 예견과 해석 울 가져오는 가설들의 체계의 개연성을 체계적으로 증대시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 중요한 것은 사실들을 저 멀 리 떨어전 과거의 자료들로서 파악해야만 하는 것들이다• 지구가 유한한 나이를 갖는다면 그것은 어쨌든 생성되지 않으 면 안된다. 이러한 생성의 방식에 관한 현대 천문학의 견해는 얼 마간의 방황 뒤에 거의 칸트의 견해로 되돌아갔다. 행성들이 태 양을 둘러싸고 있는 성운으로부터 생성되었다는 것은 오늘날 가 장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문제에 대한 현대의 가장 활동적인 연구가 중의 한 사람인 퀴이퍼 G. Ku ip er 는 성운의 밀도 가 큰 부분은 그 자신의 중력에 의해서 더욱 밀도가 증대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은 정확히 칸트의 전해이다. 나는 이와는 좀 다른 이론을 제기하였다. 여기에서는 행성의 물체 Kar p er 둘이 성운 속의 무거운 원소들의 화학적 응축에 의해 생성된 먼지들로 부터 형성되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의 지식 수준에서 어떤 이론을 선택해야 할지 나 자신도 알지 못한다. 어쨌든 가능한 논 쟁의 분야가 단지 행성들의 형성 메커니즘에 관한 개별적인 문제 일 뿐이지 이론의 토대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파악된 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있어서 그러한 종류의 이론은 여전히 단지 우주생성론적 문제-사다리의 개별적인 단계에 불과하다. 성운은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의 행성계는 어떤 커다란 체계의 부분인 가? 칸트가 단지 매우 사변적인 해석만을 알고 있었던 이 물음 들에 대해서 오늘날 우리들은 부분적으로 행성 생성 자체의 최선 의 모델에 관한 문제보다도 부분적으로 더 정확히 대답할 수 있 울것이다. 우리는 먼저 오늘날의 천체들의 공간적 배치에 관해서 눈을 돌 리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에서 태양은 보통의 별이라는 것이 밝 혀진다. 그것의 물리적인 성질들은 우리가 밤하늘에서 보는 항성

둘의 성질과 같다. 대략 천억 (1011) 개의 이런 종류의 별들이 은 하계를 형성하는데 이것의 주질량 Hau pt masse 을 우리는 개별적인 별들에서가 아니라 하늘을 덮고 있는 은하수의 구름 같은 고리에 서 안다. 이 은하계는 칸트가 행성 체계의 원형(原形)으로 가정 했던 성운의 거대한 모상과도 같이 원반 형태를 하고 있다. 우리 둘은 마치 우리들이 우리의 행성체계 내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은하계의 내부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은하계는 수대 (獸帶)와 마찬가지로 가장 거대한 원으로서 하늘에 투영된다. 형태의 유사 성은 근원의 유사성을 추론케 한다. 은하계는 또한 가스 또는 먼 지로 된 엄청난 양의 성간물질(星間物質)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것은 성간물질이 언젠가 생성 초기에 공간에 널리 흩어져 있는 가스로부터 생성되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그렇다면 가스의 한 부분이 별들로 응집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런 응집의 중간 단계에서 서로 떨어전 작은 성운의 형성이 있었을 것이고, 이것 중의 하나가 우리의 행성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다론 별 들도 행성 체계를 갖고 있는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의 현재의 지식에 의하면 이것은 그럴 수 있는 것으로서 여겨져 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천문학은 오늘날 다른 별들에 있어서 의 생명체와 이성적 존재에 관한 그렇게 관심 높은 사변들에 대 해서 어떤 의혹을 제기할 수 없다. 단지 우리 자신의 행성 체계 중의 다른 별들은 고등한 형태의 유기체적 생명체를 간직하기에 지구보다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적인 존재가 다른 별들로부터 우리를 방문하게 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확정적인 예측은 감히 시도 하지 않겠다. 망원경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우주의 부분은 우리의 은하계와 유사한 은하계를 약 일억 개나 가지고 있다. 전파 천문학의 거대

한 수신기는 이제 공간의 더 깊숙한 곳으로 침투해 들어가기 시 작하고 있다. 이 거대한 별들의 체계들은 일반적으로 나선형 성 운이라고 불리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은하계는 말할 것도 없고 거의 모든 은하계가 나선형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 기에서 이들을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나는 잠시 동 안 우리 지식의 한계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의 문제를 다루어야만 할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대답이 아니라 그것의 방법적 구조이다. 이 문제는 어던가 그 자체로 엉켜 있다. 물론 우리는 우리 지식의 한계 저편에 무 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것이 지식의 한계라는 말의 의미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한계의 저편에 무엇이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신념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우리의 지식을 넘어서서 지식을 가지는가? 어쨌든 우리는 우리에게 알려진 공 간의 부분 밖에 공간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가 이것을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로부터 50 억 광년이나 떨어진 우주 공간에 관해서 선험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 는가? 금세기에 아인슈타인은 우리의 공간에 대해 선험적으로 가지는 기대가 틀릴 수 있다는 가정으로 학문의 세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공간이 휘어 있다는 표현 방식을 통해서 우리가 부 정확하게 직관할 수밖에 없는 수학적 성질을 공간 자체가 가지고 있다는 가정을 세웠다• 휘어진 공간에서는 직선으로 우주 공간에 로 날아가는 물체가 그것의 비행 방향을 변경시키지 않고도 출발 접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우주 공간에 대한 특수 한 가정은 증명되지도 반박되지도 않았다. 어쨌든 우리가 이 가 정이 어떤 다른 이론과 마찬가지로 믿을 만한 이론이 아니라고 말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만일 이 가정이 참되다면 〈우리 지식

의 한계 저편에 무엇이 있는가? 〉 라는 물음은 어느날 놀랄 만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일정한 한계의 저편에 새로운 나선형 성 운도 빈 공간도 있지 않고, 한계의 이편과 정확히 동일한 나선형 성운이 있다는 것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지리학의 역사로부 터의 역사적 사실의 얼마간의 단순화는 이에 대한 예를 제시해 줄 수 있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여행한 후 그리고 미국이 발 견된 후 태평양은 우리의 지리학적 지식의 동쪽 한계이자 서쪽 한계였다. 마젤란이 이 대양을 횡단했을 때 이 〈 두 〉 한계들의 각 각의 저편에 〈 다론 〉 한계의 이편과 동일한 대륙이 놓여 있음이 증명되었다. 아인슈타인의 가설 뒤에 놓여 있는 공간에 대한 철학적 견해도 마찬가지로 두번째 강의 시리즈를 위한 대상이다. 나는 여기에서 이 가설을 두 가지 이유에서 언급해야만 한다. 내용적으로 보면 이는 우주 공간에서의 천체의 배치라는 나의 현재의 고찰 주제에 속한다. 지금은 이 주제가, 흔히 그러하듯이, 하나의 증명되지 않은 가설로 끝나기 때문에 다루지 않겠다. 이밖에 형식적으로는 아인슈타인의 제안은 우리가 낡은 문제들에 대해서 어떤 종류의 예기치 않은 대답을 얻을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 그래서 우리의 중심 주제가 우주적 공간이 아니라 우주적 시간에 향하게 될 때 그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나는 지구 나이에 대한 추정을 제시했었다. 그렇다면 태양은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가? 일반적으로 별들의 나이는 얼마나 되 었는가? 우리의 은하계는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정확히 정의된 우주의 나이와 같은 것이 과연 있는 것인가? 관찰의 결과들은 내가 하나는 주의 깊게, 다른 하나는 덜 주의 깊게 두 개의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일반적 언명의 방향으로 수령된다. 주의 깊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주의 대부분의 대상들

의 발전에 있어서 공통의 시간척도 Ze it skala 가 존재한다는 가정 의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것으로서, 이 시간척도는 50 억 년 혹은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100 억 년 내지 150 억 년―—-의 시간 상수로 표현된다. 우리가 덜 주의 깊다면 우리는 우주가 50 억 년 내지 100 억 년 또는 150 억 년 사이의 어느 곳에 놓여 있는 유한 한 나이룰 가지고 있다고 말하려는 유혹을 단념할 수 있을 것이 다. 주의 깊은 표현 방법과 주의 깊지 않은 표현 방법의 차이점 은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특징적인 시간 길이의 수적 제시에 있지 않다. 이 시간 길이는 최근까지 대략 50 억 년으로 확정되는 것으로 보였다. 이와는 반대로 지금은 우리가 그것울 지금까지 정확한 관측 기술적인 기본 상수가 완전하게 확정되지 않았기 때 문에 그 수치에 있어서 크기의 지수를 10 의 제곱만큼 낮추어 평 가해 온 것으로 보인다. 이 덜 주의 깊은 것과 더 주의 깊은 것 의 차이점은 이러한 시간을 감히 우주의 나이로 간주하려고 하는 데에 있다. 나는 다시 아주 간략하게 경험적인 성과를 언급하고자 한다. 태양은 지속적으로 거대한 양의 에너지를 방출한다. 우리는 오늘 날 이 방출의 원천을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 태양의 에너지는 태 양의 깊숙한 내부에서의 원자핵의 변환, 곧 수소폭탄에서 일어나 는 것과 유사한 과정에서 유래한다. 역사적으로 태양에서의 핵과 정 (核過程, Kemp ro ze/3 e ) 에 관한 천체물리 학적 이론은 사실상 수 소폭탄의 발견에 기여하였다. 그런데 태양은 단지 유한량의 수소 만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의 방출은 무한히 계속될 수 없 다. 태양은 오늘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유한 한 시간 이전에 빛을 발하기를 시작했음에 틀림없다. 이 시작은 오늘날의 지식에 의하면 아마도 50 억 년 전이었을 것이다. 이 시 간 길이는 아마도 두 배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길지는 않았을 것인데 예를 들면 분명히 10 배는 넘지 않을 것 O] 다. 이와 비슷한 생각이 오늘날 우리들이 볼 수 있는 모든 별들에 적용된다. 최근에는 지금도 성간(星間)가스로부터 별들이 형성되 고 있다는 것이 거의 확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별들은 태양의 나이에 비슷한 나이를 가전 것으로 보이며, 이 텍스트가 저술된 시대에는 완벽하게 설명된 것으로 간주할 수 없을 소수의 경우에만 더 많은 나이를 가진 것에 대한 실증적인 증거가 존재 하는바, 그것도 어느 경우에나 가장 크게 추정된 〈우주의 나이〉 안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나선형 성운의 -그러므로 폭넓게 확산되어 있는 별들의 덩 어리와 성간물질의 내적 동력학은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 다.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체계들 역시 유사한 시간척도로 발전 하고 있다는 것은 믿울 만한 것 같다. 이를 보여 주는 가장 강력 한 논의는 나선형 성운의 의적 동력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 로서, 그들의 운동이 서로에 대해서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그것 둘의 스펙 트럼 선의 유명 한 적 색 변 이 Ro t versc hi ebun g 1) 는 그러 한 체계들 모두가 폭발물의 파편들에 그리 다르지 않게 서로 멀어져 간다는 가정에 의해서 가장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만일 우주 공 간이 휘어져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가정이 정당하다면 이것은 곡 1) 도플러 (C. Dop ple r, 1so3~ 1 853) 효과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파원과 관 찰자가 서로 빠른 속도로 멀어질 때, 파원의 소리나 빛의 진동수가 관 찰자에게 작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따라서 소리 혹은 빛의 파장이 길어지는 현상이 나타나며 이 원리에 따라서 행성간의 거리가 서로 멀 어질 때 행성의 빛의 파장이 길어지므로 행성이 발하는 빛은 적색 쪽으 로 변하게 된다• 이 원리를 응용해서 천문학에서 행성 체계의 반지름 속도 Rad i al g eschw i nd ig ke it나 회 전 속도 Umlau fg eschw i nd ig ke it를 알아낼 수있다.

률도가 시간의 함수라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우주 공간의 전 체 부피는 시간과 함께 증가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들이 종종 〈팽창하는 우주〉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그 러나 관찰의 자연스러운 해석을 아인슈타인의 가설의 개념들을 가지고 표현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공간을 유클리드적이라고 가 정하면 공간 내의 알려진 모든 물질의 폭발 운동에 관하여 간단 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동일한 관찰을 서술한 것으로 될 것이다. 물론 운동 자체는 지각되지 않는다는 것이 인정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스펙트럼 선의 적색 변이이다. 오늘날 알려져 있는 물리학은 이 적색변이에 대해서 이제까지 설명한 방식의 운동을 통하지 않고는 별다른 자연스러 운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폭발 이론을 인정하지 못하 는 사람은 오늘날의 지식 수준에서 볼 때 여전히 적색변이를 그 자신의 맘에 드는 방식으로 설명하게 될 새로운 자연법칙을 생각 해 낼 자유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폭발 운동을 실제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부가적인 논의 가 있으며, 내게는 이 논의가 상당히 강력한 것으로 보인다. 만 일 이 운동이 실제적이라면 그것은 시간척도 Ze it skala 를 정의해 준다. 우리는 이 논의를 폭발과 비교하여 분명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폭발 파편의 속도와 일정한 시간에 폭파점으로부터의 그 파편의 거리를 잴 수 있다면 우리는 폭발이 발생한 시점을 계산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비록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나선형 성운 의 거리를 알고 있으며, 적색변이는 광학 법칙을 근거로 하여 그 적색변이 설명을 위해 가정된 속도의 수치를 제공한다. 죽 그로 부터 우리는 폭발의 시점을 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에서 말한 수치인데, 최근의 계산에 의하면 그것은 50 억 년에 서 그 두 배로 증가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혀 새로운 방법으

로 우주의 가정적인 나이에 접근한 것인데, 이 나이는 앞에서 달 리 산정한 지구, 태양, 그리고 모든 항성들의 나이에 가장 잘 들 어 맞는다. 만일 적색변이가 현실적인 운동에 의해서 야기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결과는 지극히 희귀한 우연일 것이다. 나는 이 논의를 대부분의 천체물리학자들이 믿고 있으며, 또한 이 논의가 그들로 하여금 오늘날 〈 세계의 나이 〉 〈 우주의 나이 〉 라는 개념을 아주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만들었다고 믿는다. 이러한 시간척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대략 백 억 년 전에 일어났을 사건에 대한 종합적 이론을 갖기에는 우리 는 여전히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얼마나 폭넓게 가능한 해석 의 여지가 남아 있는지를 나는 그 각각에 모두 지지자들을 가지 고 있는 두 개의 극단적인 견해를 언급함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 ― 호 형이상학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가설은 이른바 연속 창조 con ti nous creati on 이론이다. 그것은 다 음과 같이 가르친다. 죽 우리의 은하계는 50 억 년 내지 100 억 년 이 되었을 것이며, 어쨌든 이 나이는 우주적인 사건들의 특칭적 인 시간척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우주에는 전체로서 관찰해 보면 100 억 년 전에 혹은 다른 어떤 시점에서도 언급할 만한 가치를 지닌 그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우주는 통계적인 수 단을 이용해서 관찰한다면 어느 시대나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지 녀왔다는 것이다. 아마도 가장 급진적인 가설은 이와 반대로 우 주는 약 100 억 년 전에 존재하기 시작했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시간도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세계의 이전에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두 가지 견해롤 좀더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연속적인 창조〉(호일레 Ho y le, 본디 Bond i, 골드 Gold) 이론 울 살펴보자. 우리 시대의 과학적 상황에 있어서 만일 누가 새로

운 경험 자료들을 세계는 시간에 있어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고 하는 근대 과학의 전통적인 견해와 조화시키려고 시도한다면 나는 그러한 시도를 형이상학적으로 보수적이라고 말하고자 한 다. 이 이론은 모든 시간에서 그리고 모든 (충분히 큰) 공간에서 몇몇 물질이 무로부터 생성 (혹은 저자들이 아마도 단지 바유로서만 생각하는 〈 창조 〉 )된다고 가정함으로써 그러한 결과에 도달한다. 이 물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나선형 성운으로 응축된다. 한 장소에서 생성되는 물질로부터 본다면 물질은 다른 모든 장소에 서, 시간과 함께 모든 방향을 향해 무한한 공간으로 확산되는 초 기 속도를 가지고 생성되며, 이 확산에 의하여 무로부터 생성된 새로운 물질을 위한 공간이 만들어진다. 이른바 우주의 팽창은 물질의 이러한 연속적인 확산 Abs t romen 이의에 다른 것이 아니 다. 이 이론에서 무한한 공간의 가정은 항상 뒤따라 생성되는 새 로운 물질에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저자 둘은 이 과정이 무한한 과거에 시작됐고 무한한 미래로 계속될 것이며, 따라서 통계적인 방법으로 거대한 공간이나 거대한 시간 울 관찰한다면 우주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리하게 생각해 낸 이론이다. 나는 이 이론보다 다른 경쟁 이론들에 더 유리한 특별한 경험 사실들을 알지 못한다. 오 히려 근래에 몇몇 전파 천문학자둘은 이 이론에 반하는 결정적인 경험적 논의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논의는 아직 전행중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이론을 참된 것이라거나 신뢰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를 꺼려해 왔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나의 근거둘은 방법적 취향에 의한 근거들로서, 이들 때문에 논의가 결정될 수는 없는 것들이다. 나 자신의 보수성은 형이상학의 영 역에 있다기보다는 과학적인 방법의 영역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우주적 시간의 유한한 크기를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 나를

그렇게 놀라게 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나는 가능한 한 경험적 으로 근거 있는 자연법칙을 가능한 한 오랫 동안 기꺼이 신뢰한 다. 그러나 이러한 신뢰의 이유는 내가 그 자연법칙을 다른 생각 함직한 법칙들보다 더 훌륭한 것으로 여겨서가 아니라, 순수한 〈 사변적인 〉 논의에 근거해서 바론 착상을 갖고자 하는 우리의 일 체의 과학적인 환상을 쉽게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서는 적어도 지금까지 누군가가 우리의 이런 문제를 위해서 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엄격한 논리적 가능성의 분석이 필요 하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물리학에서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동일 한 물질 보존의 법 칙 Gesetz der Erhalt un g der Ma t er i e 은 나의 확 신으로는 물리학의 일반적인 구조와 매우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무로부터의 물질의 계속적인 생성에 관한 가 정 때문에 물질 보존법칙을 희생시킨다면 얼마나 많이 우리들 자 선이 변해야만 될는지 알지 못한다. 과학사에는 경험적으로 충분 히 근거 있는 전래적인 견해가 이론과 사실의 새롭고도 포괄적인 조화를 향한 도약을 위해서 그러한 희생이 필요한 순간이 존재한 다. 나는 그러한 도약을 이루고 싶다. 그러나 나는 나를 그러한 도약에로 강요하는 경험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간의 무한의 길이에 관한 견해는 분명히 경험적으로 근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극단도 역시 경험적인 증명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단지 준비하고 있어야 할 가능성을 설명할 뿐이다. 우리 가 방법적으로 전적으로 보수적이라면 그리고 물질의 새로운 생 성을 가정하지 않는다면 지금 우주의 가시적인 부분에 포함된 물 질은 이미 100 억 년 전에 존재했어야 했겠지만, 그러나 훨씬 더 작은 공간 영역에 존재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모든 물질이 하 나의 수학적인 점에서 통합되었다는 우리의 단순한 선형적 팽창

도식이 이르게 될 결과로서 그 시점을 넘어서서 더 먼 과거로까 지 극단적으로 확대될 수 없다. 사람들은 처음에 무엇이 있었는 가에 대한 많은 모델을 제시하여 왔다. 몇몇의 것은 오늘날 볼 수 있는 팽창이 시작되기 전의 무한한 시간을 가정한다. 예를 둘 면 휘어진 공간을 갖고 있는 거의 정체 s t a ti onare 되고 조밀한 아 인슈타인의 우주 같은 것이다. 다른 모델들은 세계의 다소간의 급작스러운 시작을 제시한다. 내 견해로는 이제까지 논의되어 온 대로 시간적으로 엄격하게 주기적이라는 우주론적 문제에 관한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데는 상당한 이유들이 있다. 이 이유들은 나의 책 『 자연의 역사 』 에서 상세히 논구한 열역학의 제 2 법칙과 관련이 있다. 아마도 이것은 참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매우 일반적인 확정 밖에는 적어도 오늘날의 지식에 근거 해서는 수십억 년 전의 그러한 사건에 대해서 아무런 실증적인 것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다론 극단에 관해서 말 할 때 분명히 하고자 했던 것은 현대 이론 물리학자들이 자기 자 신들의 개념들에 대해 확실히,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세계의 시작 이전에 경과했던 그러한 시간 개념을 전적으로 내용 없는 개념으로 보았던 것보다 더 무비판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이었다. 근대의 실증주의자는 다르게 논증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나는 세계가 시작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시작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 가 시작을 가졌다면 시간도 역시 시작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시작이 어떻게 생각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이제까지 우리가 생각해 온 것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억제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아인슈타인의 공간 이론을 예견되지 않은 개념적 가능성의 예로서 지적하고 싶다. 이 강의의 결론으로서 나는 이제까지 묘사한 과학의 수준이 우

주 생성과 창조에 관한 우리의 일반적인 견해에 끼칠 수 있는 영 향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먼저 나는 내 자신이 체험한 가장 단순한 역사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역사란, 내가 올바로 회상 했다면, 나로 하여금 여러분들과 함께 오랫 동안 씨름해 온 문제 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만든 역사를 말한다. 내가 젊은 이론 물리 학자로서 베를린에 있을 때인 1938 년, 나는 베를린 대학 세미나 에서 태양의 원소 변환에 관한 보고강연을 하였다. 그때 나는 바 로 태양의 에너지원으로 이바지할 수 있을 원자핵의 연쇄 반응 Reak ti onske tt e 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또한 베테 Be t he 도 같은 해에 독립적으로 발견하여, 철저성에 있어서 나의 것을 능가하는 작업 으로 완성 해 낸 이 른바 탄소원소 주기 Kohlens t o ff -Z y klus 였 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의 지식에 따르면 올바론 반응 유형이 지만, 바로 태양에서 (뜨거운 별들과는 반대로) 주요 역할을 담당 하는 것과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내 발견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고, 내 발견의 신빙성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것이 나선형 성운의 적색변이로부터 결정되는 세계의 나이와 매우 잘 일치하는 나이를 태양이 보증해 준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 세 계의 나이는 그 당시에는 매우 새로운 사상이었다. 그러나 여기 에서 나는 이미 지난 세대에 속하는, 그 당시 베를린 대학의 물 리학 정교수인 유명한 물리화학자 발터 네론스트 Wal t er Nerns t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는 우주의 나이에 대한 생각 은 자연과학이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 처음에 그를 이해하지 못 했다. 그는 시간의 무한한 지속이 모든 과학적 사고의 기본요소 라고 설명했다. 죽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과학의 기초를 배반하 는 것이라고 설명했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생각에 대해 놀랐고, 경험에서 제시되는 표지에 근거해서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새로 운 경험에서 검증하는 것이 자연과학적이며, 세계의 나이에 대한

생각은 그러한 종류의 가설이라고 반론을 시도했다. 그는 과학의 기초에 모순되는 가설을 세울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대뜸 화 를 냈고, 그의 연구실에서 계속된 토론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 다. 내 가 그 당시 에 연구하였던 연구소의 디 바이 P. Deby e 교수가 우리를 네론스트의 방으로 안내했었는데, 그는 솔로몬의 지혜와 같은 대화로 끝을 맺었다. 〈 보시오, 추밀고문관 ! 바이츠제커 씨 는 태양의 에너지원에 관한 특수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당신은 전체로서의 우주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 러분들 사이에는 직접적인 모순은 없습니다. 그에게 시간을 허락 하십시오. 그는 너무 젊고, 만일 당신이 옳다면 그는 결국 당신 의 의견으로 될 것입니다 〉 우리는 곧바로 식사를 위해 집으로 돌 아갔다. 내가 네른스트로부터 인상을 받은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어 떤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그의 논증이 아니라 그의 분노였 다. 왜 그는 분노하게 되었는가? 19 세기 말에 태어나 20 세기에 죽으리라 확신했던 발터 네른스트의 생동적인 관심 중의 어떤 것 이 세계는 옛날부터 있는 것이 아니고 아마도 50 억 년 전에 생성 되었다는 사실에 의해서 침해되었을까? 내가 열역학의 제 2 법칙 이 세계의 모든 유한한 부분에 대하여 본래 단지 유한한 사건의 여분만을 보장하며, 따라서 오늘날도 여전히 변하고 있는 세계는 무한한 시간 전부터 있어 온 것이 아니라고 덧붙였을 때 아마도 그는 더 격분했던 것을 느꼈다. 그는 제 2 법칙으로부터의 이러한 추론을 한마디로 부정하였다. 제 2 법칙을 세계 전체에 적용한다면 어려운 문제를 가져오게 되고 따라서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 다는 것을 나는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나는 그를 불안하게 한 것이 이러한 과학적인 난점이 아니라 세계가 종말을 가질 수 있 다는 사상에 직면해서 생기는 그런 종류의 두려움이라는 것을 쉽

게 알았다. 우주는 거기에 나이의 개념이 적용될 수 있는 사물이 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 나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했고, 풀라톤주의자 들이나 중세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과학적인 이론에 어떻게 대응 했을지를 자문해 보았다. 답은 분명한 것처럼 보였다. 영혼의 불 멸을 믿는 풀라톤주의자들도 , 새 땅과 새 하늘 밑에서의 부활을 믿고 있는 기독교인도 우리의 이 물질세계가 이미 그 내재적인 근거들로부터 단지 유한한 기간 만큼만 존재할 수 있다는 발견에 불안해하지 않았을 것아다. 네른스트가 그 세대의 대부분의 과학 자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가정 은 아마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느낌 속에는 영원한 우주가 영원한 신의 자리뿐만 아니라 불멸하는 영혼의 자리에도 대신 들어서 있다는 추론은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였고 또 여전히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나는 변신론적 신학자의 역할을 떠맡으려는 유혹을 느끼지는 않았다. 인격의 불멸성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나는 단연코 불가 지론자이다. 나에게는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철학적 개념과 육신 의 부활에 관한 신약의 믿음 사이에 심원한 차이가 있음이 분명 하게 되었다. 나는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이 두 개념이 융합되어 있는 이유를 기독교 신학의 대부분이 그리스 철학의 개념을 통한 복음의 해석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몇몇 종교적 직관들의 역사적 근원에 대한 이러한 통찰은 나로 하여금 종교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에 대해서 자연과학이 홀로 이룰 수 있는 것보다 더 회의적이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내가 네른스트의 견해에서 당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불멸이 소원할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성적인 영혼의 불멸성도

감각적인 자아의 부활도 믿지 않고 그 대신에 영원히 끝이 없는 자연 과정을 참된 것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의문이었다. 별들과 원자둘이 거역할 수 없는 한 인격 의 죽음 뒤에 과연 그를 느끼고 생각할 것인가? 나는 그의 견해 가 과학신앙의 매우 불합리한 특칭을 드러냈다고 믿는다. 즉 그 에게 있어서는 세계가 신의 왕위를 탈취했던 것이며 세계에서 신 의 속성을 거부하는 것은 신성모독이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비로소 나는 과학주의가 내가 지금 기독교 신앙의 세속화라고 부 르게 될 특징을 지닌다는 것을 언급한 셈이다. 이것은 다음 강의 의 주제이다. 여기에서 나는 과학주의에 있어서나 기독교에 있어서 도그마적 인 견지에서 우주의 나이에 관한 문제가 지니고 있는 특별한 의 미에 대한 몇 개의 소견을 첨가하고자 한다. 내 생각으로는 이 문제의 합리적인 의미가 양편에서 과대평가되었다는 것과 관심의 결정적이고 근거 있는 동기가 방금 언급했던 불합리한 동기라는 것이 파악될 수 있다. 먼저 과학신앙에 대하여 고찰해 보자. 서구의 과학주의는 오늘 날 더 이상 세계의 무한성에 관한 도그마에 집착하지 않는다 .• 19 세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서구의 과학자들은 경험주의의 교훈을 철저하게 배웠으며, 그들의 오늘날의 독단주의는 실증적 이고 내용 있는 이론들이 문제가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차라리 과학적 방법의 독단주의이다. 오늘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이 이데올로기는 실증적인 특수한 과학적 견해를 교조화하는 유혹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에 대하여 아주 잘 알려 져 있는 것은 이제는 영원한 과거에 속했으면 하는, 국가 권력으 로 관철된 반멘델적인 발생학의 에피소드이다. 그러나 내 정보가 미치는 한에서, 세계의 무한한 지속은 여전히 변증법적 유물론의

떼어낼 수 없는 구성 부분이다. 합리적으로 고찰한다면 마르크스 주의자에게 있어서 이 교설을 견지하는 것이 내적인 필연성은 아 닐 것이다. 이 교설은 인간 역사에 있어서 물질적인 죽 경제적인 요소의 의미에 관한 마르크스의 깊은 통찰에 의해서도,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로 관념론이라고 불리는 철학적 교설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도 논리적으로 강요되지 않는다. 심지어 나는 마르 크스주의 철학의 본질적인 특칭들이, 만일 그것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현대적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더 이 상 그렇지 않은 자연과학적인 도그마로부터 분명히 결별했더라면 현대 정신에 대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의 현대화를 그토록 어렵게 한 이유들에 대 해서 고찰해 보고자 했으며 , 나에게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세 개의 이유둘이 떠올랐다. 첫째로 마르크스주의가 종교적 인 도그마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바, 종교들은 그둘이 오류를 저 지를 수 있다는 것을 언제나 인정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즉 마르크스주의 가 자기 스스로를 과학으로 해 석 하고 있는 것이 아 마도 이 심리적인 문제를 쉽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로 전 통적인 견해가, 네른스트의 경우에서 추측했던 것과 유사하게, 마르크스주의의 사고에 결정적인 매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 다. 세계의 무한성은 자연주의적 신앙의 한 상칭이다. 셋째로 계 급투쟁의 교설하에 통일되어 있는 투쟁적 공동체로서의 공산주의 는 이데올로기적 논쟁에서의 당파성을 정치적인 필연성으로 간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사람들이 기독교 교회가 시간에서의 세계의 창조를 종교적 전리로 여긴다는 .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 자들은 어느 정도 당연히 교회가 이 문제에 있어서 단지 맹신의 보루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승인하는 데서 나올 수 있는 치명적인 정치적 결과를 두려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 신학에로 관심을 돌려보면, 반대로 나는 기독교인들에 있어서도 세계의 시간의 시작을 믿을 아무런 합리 적인 필연성을 알지 못한다. 성경을 심지어 과학적인 문제들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로 간주했던 한에서 그것은 달랐다. 그러나 이러한 싸움은 갈릴레이의 시대 이후 결정되었으며, 이제 오늘날 에는 성서의 해당 부분들을 과학적인 교과서로 읽는 사람은 아주 소수일 뿐이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비록 그것이 성경의 연대 표적인 계산에서 나왔을지라도 우주가 육천년의 나이룰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그렇 다고 하면 나는 우주가 영원부터 있어 왔다고 가정하는 것보다 100 억 년이 되었다고 믿는 것이 왜 더 성서적이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창조는 시간 속에서의 사건이 아니라 그에 의해 비로소 시간이 구성되는 행위라고 가르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 학적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신이 무한한 시간이 아니라 유한한 시간을 창조했어야 할 그 어떤 필연성도 성립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자연과학이 세계가 시간적인 시작을 가질 수 있었다는 생각으로 최초의 원인의 필연성에 근거한 고전 적 신증명에 무엇인가 기여했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만약 시간 개념을 세계의 가설적인 시작을 넘어서 사용할 수 있는 철 학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나의 견해가 옳다면, 적어도 원 인의 개념도 역시 세계 안에서의 적용으로 제한하는 것이, 어떤 확고한 신학에 의해서 아직 규정되지 않은 철학 안에서조차 마찬 가지로 정초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나이가 유한하다는 전제 밀에서 우주가 시작되기 전의 시간에 무엇이 발생했는가라는 물 음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안다면, 어떤 선재하는 원인 Praexis t e n te Ursache 이 세계를, 곧 그 존재가 아마도 인과개념의 의미 있는 사용을 위한 가능성의 조건이 되는 그러한 세계를 현

존하게 했느냐고 묻는 것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자연과학은 종 교적 회 의 주의 뿐만 아니 라 창조 교리 Scho pfu ng sdo g ma 와도 통합 가능한 것이다. 만일 내가 무엇이 다수의 신실한 기독교인들에게 세계의 시간 적 시작의 사상을 그토록 매력적으로 만들었느냐고 다시 자문하 게 된다면, 나는 정반대로 생각하는 견해둘을 마르크스주의가 선 호하는 것에 대한 대등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로 기독교 인들도 그들의 종교를 적어도 몇 가지 면에서, 무엇보다도 자연 과학과의 충돌 속에서의 수많은 부정적 사건 이후에, 무오류적인 것으로 보고 싶어 한다. 둘째로 세계의 유한한 지속은 인간 역사 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의 상징으로 기여한다. 나는 이러한 이해 룰 극히 진지하게 취급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지막 강 의에서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실천적 정치에서 나 오는 세번째 이유는 아마도 종교와 정치의 분리에 대한 자유주의 적 요구에 적응한 이 시대의 많은 신교도들에 있어서 덜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숙고들이 전혀 낯설 지 않은 다른 전통이 여전히 살아 있다. 만일 내가 이러한 평행주의를 올바로 파악했다면, 내가 어떤 확신할 만한 자연과학적 논의를 알지 못하는 한, 나는 무한한 시 간의 실제 문제에 있어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것을 당연히 주저 할 것이다. 세계의 유한한 나이에 대한 표상은 오늘날 나에게, 자연과학적으로 본다면, 올바름 R ic h tig ke it의 더 나은 기회를 가 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마도 진리 Wahrhe it는 지금 까지 우리에게 나타난 것과는 다르게 보일 것이다. 우리가 계속 해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가 이 문제 자체에 대해서 어떻 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견해에로의 경 향에서 어떤 인간적 태도가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이다.

제 10 강 세속화란 무엇인가 우리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우리를 출발점, 곧 우리 시대의 문제와 염려에로 되돌아오게 하였다. 첫번째 강의 시리즈의 마지 막인 오늘의 강의는 역사를 관통해 온 우리의 도정에서 우리가 배웠던 것에 대한 반성에 바쳐져야 할 것이다. 먼저 나는 이 강의가 원치 않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 강의는 첫째로 현대 세계의 치명적인 고통에 대한 어떤 치 료책을 제공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 강의는 전단에 기여 · 하고 자 한다. 이러한 의학적인 비유를 좀더 사용해 보자. 치료와 전 단은 본래적으로 서로 상보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치료에 있어 서 의사는 자주 신속히 결정을 내려야 하고 그 결정을 확고하게 수행해야 한다. 죽 전행되고 있는 병세는 기다려 주지 않으며, 환자는 대체로 의지할 곳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인간인 것이다. 이에 반해 전단은 거의 결코 완결되지 않는다. 진단은 항상 거듭 해서 관찰과 환상, 자기비판과 엄청난 인내를 필요로 한다. 왜냐 하면 인간의 유기체는 무한히 복잡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좋

은 · 가능한 전단을 하지 않고 치료를 시작하는 것은 성실하지 못 한 것이다. 그러나 종종 한 순간에 있어서 가장 좋은 가능한 전 단이 최종적인 전단인 것은 아니다. 죽 전단을 위한 작업은 치료 중에 계속되어야 하고 더러는 치료에 대한 환자의 반응에서 결정 적인 것을 배우기도 하는 것이다. 만약 인류가 환자이고 그의 병이 한 세대의 생명의 위기에 관 련된 것이라면 일 개인이 의사일 수 없다. 많은 사람이 치료를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치료에 개인으로든 집단으로든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든 지 치료가 오로지 단호하고 분명하며 이해될 수 있는 행동을 통 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것은 그 행동이 개인 의 교육에 관한 것이든 유익한 사회관계를 만드는 것이든 또는 거대한 정치에 관한 것이든 한결같이 적용된다. 내가 여기에서 다시 한번 아마도 대학의 강의에서 일반적인 것보다 더 개인적으 로 말해도 된다면, 나는 그러한 행동이 전적으로 필수적인 것이 라고 생각하며, 또한 나는 뜻을 같이하고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이미 이러한 행동에 기꺼이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을 위한 어떤 방 안을 제안하는 것이 이 강의들의 목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강의들은 순수하게 이론적인 관심에 의 해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전단이란 말에 의해서 표현된 저 실제 적인 관심에 의해 인도되었다. 자주 그런 것처럼 나는 서로 격렬 하게 싸우는 교육적, 사회적, 정치적 집단들과 이론들의 양 편에 서-불가피한 인간적 약점들과 더불어_순수하고 선한 의 지와 우리 모두의 미래에 대한 깊은 염려, 그리고 적국적으로 헌 신하고자 하는 태도를 발견해 왔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선입견 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에게는 이러한 고찰에 의해 다음과

같은 무서운 문제가 제기된다. 죽 누가 도대체 본래 진단에 있어 서 옳으냐는 것이다. 좀더 자세하게 고찰해 보면 서로 대립하고 있는 진단들은 실은 정식에 있어서 그러할 뿐 구조에 있어서는 그만큼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서로 대립하고 있는 당파들 각각은 상대 당파뿐만 아니 라 자기 자신도 정 확하게 이해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렇게 보면 대결하고 있는 당파들은 자칭 의사에서 그 스스로가 환자들로 된다. 물론 그들 자신의 형편에 대한 진단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왜 이 시대의 의사들은 그토록 자주 자위책을 마련할 수 없는 것인가? 왜 그 둘은 그들 자신의 병을 알지 못하는가? 이러한 종류의 생각이 나로 하여금 이 마지막 강의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물음들을 제기 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둘째로 이 강의는 우리 시대에 올바론 전단을 제시한다 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 강의의 직접적인 영향은 오히려 이와 정 확히 반대되는 것이어야 한다. 죽 이 강의가 올바론 전단을 내려 야 했다면, 이는 먼저 단지 진단들의 제시를 어렵게 만들 수 있 울 뿐이다. 이 강의는 반성의 새로운 지평 위에서 오늘날 대체로 전지하게 받아질 만한 전단상의 사고 방식들, 곧 슬로건을 사용 해 표현한다면 교회적 사고방식, 자유주의적 사고방식,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적 사고 방식의 공통적인 강점과 공통적인 약점을 인식하려고 한다. 아마도 이런 인식의 지평이 존재할 수 있다는 암시가 오늘 우리의 목표로 충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인식의 실천적 의미는 결국 올바론 전단을 틀린 전단의 자리에 대치하는 데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실천적인 의미는 오 히려 우리의 치료 노력이 일방적인 전단 이론에 의존하는 것을 경감시키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행동이 독단 적으로 고정된 교설들에 의존하는 것을 누그러뜨리는 것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강의를 통해 무엇보다도 실천을 위해서 불가결한 것이 아니라 보다 엄격한 형태의 이론을 위해서 불가결 한 것을 준비할 수 있는 전환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이 강의의 두번째 시리즈에서는 근대 과학의 기본 개념들을 더 이상 역사적 으로가 아니라 체계적으로 검토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의의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겠다. 반성 에 의해서 단지 홍미를 더하게 된 역사설화식의 일률적인 필법은 이제 더 추상적인 사고과정에 자리를 내어 주게 되기 때문에 나 는 이 강의와 이후 계속되는 강의의 체제를 부제목과 내용 개요 롤 통해서 좀더 분명히 하고자 한다. 오늘 강의의 중심 개념은 세속화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a) 항에서 소개되어 b) 항에서 는 가장 중요한 예로서의 근대의 정치적 혁명들에 적용될 것이 다. c) 항에서는 우리가 이미 첫번째 강의에서 우리의 과학 신앙 시 대 의 징 표로 발견했던 이중성 (Ambiv a lenz, 이중적 반대 측면의 양립)이 세속화 일반의 성격적 특칭으로서 제시된다. 나는 이 특 칭을 초기 기독교 역사에까지 거슬러 추적할 것이며, 특히 천년 기설(千年期說), 곧 이 지상에서의 다가울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에 대한 신앙과 같은 기독교적 개념에서 그 특칭을 다시 발견하 게 될 것이다. d) 항에서는 근세의 전보 신념에서 천년기설적인 특칭을 찾을 것이다. 특히 마르크스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역사적 이해 일반의 기본 도식을 기획한 헤겔에로 우리를 데려갈 것이다. e) 항에서 말하게 되는 이 도식은 우리에게 있어서 특히 이중적이다. 죽 그것은 한편으로 우리들 자신의 분석도 전혀 포 기할 수 없는 사상을 포함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우 리 시대의 과학신앙이 거의 단지 그것의 무해한 후예일 뿐인 바 의 그러한 근세의 거인주의의 정점인 것처럼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 밑에서 나는 f) 항에서 마르크스를 이해하고자 하

며, g) 항에서 다시 한번 근대의 성과의 이중성에로 되돌아 오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h) 항에서 세속화에 대한 이러한 서술을 한편 으로는 기독교 신학의 도구를 가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날의 과학의 입장에서 그 세속화의 의미를 최종적으로 성찰하는 계기 로 삼고자 한다. 이러한 성찰은 아마도 자연과학의 체계적인 문 제에로의 이행이 어떤 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분명히 해 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성찰은 우리 스스로가 믿고 있는 그러한 과학의 입장이든 간에 한 역사적 입장을 모든 반성의 확고한 출 발점으로 삼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a) 세속화의 개념 우리는 먼저 이 강의둘의 이제까지의 과정의 주요 단계들을 생 각해 보고자 한다. 나는 과학이 우리 시대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문제로부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나는 지금 다시 검증을 위 해 반복하고자 하는 다음과 같은 두 개의 테제를 정식화했다. 첫째, 과학에 대한 믿음 __- 과학주의_은 우리 시대의 지 배적인 종교의 역할을 담당한다. 둘째, 우리는 이 시대의 과학의 의미를 적어도 오늘날에는 ―단지 이중성을 표현하는 개념들로만 설명할 수 있다. 그때 나는 이 시대의 전단을 위한 제한된 기여로서 과학주의의 역사적인 근원에 대한 연구를 제안했다. 이것은 특수한 예에서 이루어졌어야 했는데, 나는 그 예로서 창조와 우주생성론의 개념 의 역사를 선택했다. 먼저 나는 내용에 있어서 동시에 신통기〈 Theo g on i e 〉라고 할 수

있는 신화적 우주생성론들에 관해서 언급했다. 나는 그것들이 우 리에게 무언가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요소, 즉 모든 사물의 물리적인 근원에 대한 심사숙고한 설화와 인간 현존 재에 대한 이해의 표현을 어떻게 통합시키는지를 보이고자 했다. 신들이 변화한 것처럼 우주생성론의 두 측면도 변화하였다. 유태 인의 신은 그의 민족에게 생명과 죽음인 바의 선과 악을 날카롭 게 구별하도록 가르쳤다. 그리스 철학은 진리와 오류를 구별하 여, 전자는 존재이고 후자는 무라고 하였다. 나는 세계의 시원에 관한 유태인과 그리스인의 사상이 어떻게 생명과 진리에 대한 두 민족의 이해에 상응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기독교는 전기독교적 자연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기독교가 구축한 세계는 근대적인 실재성에 의해서 새롭게 변화되었다. 근대에 있어서 과 학적 탐구는 전래된 상칭에 의한 세계 해석의 자리에 대신 들어 섰다. 나는 과학적 우주생성론의 발전을 추적했다. 이 우주생성 론은 과학적 신중함으로 언표되게 되면 열린 물음들로 끝나게 된 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먼저 〈 생명은 무엇인가? 〉 〈 물리학은 무엇인가?〉라는 두 가지 물음에 대해서 더 훌륭하게 대답할 수 있게 되기 전에는 현실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생명의 발전에서 드 러났다. 그리고 이것은 공간과 시간 자체의 무한성이 해결되지 않은 물음으로 된 천문학적 영역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열린 물음들에 대해서 아 주 확고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또한 이러한 그들의 확신은 인간 현존재에 대한 그때그때마다의 이해에 그 뿌 리를 두고 있다고 가정할 동기를 갖게 되었다. 바로 그것의 해결 되지 않은 물음들 속에서 우주생성론은 분명히 오늘날에도 여전 히 우리가 인간 생명의 근본 문제를 이해하고 있는 방식의 상징 이다. 이런 해석 중의 하나가 과학주의이다. 우리는 이 과학주의

를 우리의 도정의 끝에서 그 전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되었는가? 나는 첫번째 강의에서 문제 영역을 좀더 다루기 쉽게 하기 위 해 그것을 축소시켰다. 이제 나는 그와 반대로 이를 일반화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우주생성론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에 대한 표시일 뿐인가에 대해서 물 음을 던진다. 나는 이러한 일반화를 부득이하게 증명을 시도하지 않고서 시도해야만 한다. 역사는 일반적 주장의 엄밀한 증명을 허락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다. 나는 감히 진단상의 가설로서의 일반화를 시도하고자 한다. 다시 초기의 두 테제로 돌아가 이를 좀더 특수한 것으로 대치 해 보자• 첫째, 근대 세계는 더 나아가 기독교의 세속화의 결과로서 이 해될 수 있다. 둘 째 , 세속화는 이중적 인 ambiv a lent 과정 을 기 술하는 이 의 적 zwe i deu tig e 인 용어 이 다. 나는 먼저 이 명제들에서 사용된 용어들을 설명해야만 한다. 〈 세속화 Sakular i s i erun g 〉 란 말은 백년, 세기를 의미하는 라틴어 사에쿨룸 saeculum 에서 유래한다. 전통적인 기독교 용어로 사에쿨 룸은 신의 영원성에 대립된, 우리가 오늘 실제로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이 세계에 속하는, 그리고 그런 한에서 직접 신에게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세속화는 오랫 동안 교회 재산이 세속인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가리키는 법률 개념이었다. 그래서 세속화된 수도원이란 말이 있는 것이 다. 금세기에 많은 저술가들은 세속화란 、 말을 더 일반적으로 근 대 세계가 형성되어 온 과정을 기술하는 것으로서 사용하기 시작 했다. 이런 용어 사용은 내가 명백히 언표하고자 하는 일정한 견 해둘을 제약한다. 나는 몇 개의 부정적인 확인으로부터 시작하고

자한다. 만일 근대 세계가 세속화의 산물이라면 근대 세계는 용어의 엄 격한 의미에서 종교적 세계가 아니다. 근대 세계는 본래적으로 기독교적인 세계도, 기독교를 대체한 새로운 종교의 세계도 아니 다. 그러나 근대 세계를 종교적인 세계와의 어떠한 유사성도 없 는 세계라고 정확히 서술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세속 화된 수도원은 그 전과 똑같은 건물이다. 죽 그것이 비록 지금은 다론 목적으로 사용될지라도 거기에는 여전히 승려방이 있고, 식 당이 있으며, 예배당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근대 세계는 여전히 기독교적인 세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밑바탕 그림은 마치 사전의 네거티브 필름에서처럼 검은색이 백색이 되 고 백색이 검은색으로 모든 색깔이 변했다 할지라도 여전히 항상 기독교적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그 과정은 이중적일 수 있을 뿐이며, 나 아가 이 과정을 표현하는 개념들은 당연히 이의적으로 들릴 수밖 에 없다. 왜냐하면 과연 우리가 기독교적 구조 혹은 이것의 비기 독교적 사용을 두드러지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다. 이러한 용어 설명에 따라 나는 새로운 데제들에 대한 실례를 제시하고자 한다. 한 예는 우리가 예를 들어 갈릴레이에게서 발견한 것과 같은 근대 과학의 근원이다. 여섯번째 강의에서 나는 엄밀하고 보편적 인 자연법칙의 개념이 기독교적 창조 개념 없이는 나타날 수 없 었음을 주장하였다. 이성에 의해서 〈설득〉되어야만 하는 폴라톤 적 의미에서의 물질은 수학적 법칙들에 정확히 순종하지 않을 것 이다. 그러나 신이 무에서 창조한 물질은 창조주가 어쩌면 엄밀 하게 물질에 부여한 규칙에 따를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의미에 서 근대 과학을 기독교의 선물이라고 불렀으며, 또한 기독교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과학이 어떻게 해서 기독교와의 접촉을 상실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야 했다.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의 죽음을 체험할 수 있다. 갈릴레이의 교회와의 충돌에서 우리는 이미 이러한 세속화의 과정을 기술하는 모든 개념의 이중적인 의미를 본 바 있다. 갈릴 레이가 신의 위대함을 자연의 책에서 읽을 때 이 책을 읽어야 한 다는 신의 의지를 그가 성취하는 것이라는 갈릴레이의 생각은 과 연 옳은 것이었던가? 자연의 책을 읽는 것이 구원의 책(성경― 옮긴이)에 써 있는 신의 의지로부터 인간을 떼어 놓게 될 것이라 는 교회의 생각은 정당한 것이었던가? 우리는 그 과정도 금세기 의 범주들을 가지고 마찬가지로 이중적인 것으로서 기술할 수 있 다. 교회가 부당하게 , 따라서 멀게 보면 아마도 효과 없이 사용 한 무력적 수단을 도의시한다면_과연 교회는 지식의 전보를 방해하고자 했으며, 혹은 과연 교회는 광신적인 전문가의 그것보 다 더 폭넓은 시야를 요구했던 것인가? 무한성의 개념은 다른 예를 제공한다. 대부분의 기독교 이전의 세계관둘은 단지 유한한 세계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 기독교 철학에 있어서도 세계는 마찬가지로 유한했으나 신은 무한하였 다. 근대에 세계는 이러한 신의 속성을 이어받는다. 죽 무한성이 세속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금세기에 들어서 세계의 무 한성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 나는 이 시대 에 세속화가 이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견고함을 얻은 것과 정 확히 동시에 세속화에 대한 비판적인 검증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b) 정치적 혁명들 그러나 세속화의 완전한 비중을 알기 위해서는 이론적인 분야 에로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그 대신에 우리는 예를 들면 정치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나는 다섯번째 강의의 마 지막에서 언급한 것을 실마리로 삼고자 한다. 거기에서 나는 세 가지의 근대적 현상, 곧 군사적 복종, 질서 잡힌 정부, 정치적 혁명에 대해서 지적한 바 있다. 이 세 가지 주제 중의 마지막 것 울 여기에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첫눈에 보기에 유럽의 정치 혁명들은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데, 왜냐하면 역사는 결코 반복하지 않 기 때문이다. 나는 17 세기의 영국 청교도 혁명과 18 세기의 프랑 스 대혁명에 대해서 언급했다. 이 혁명들 간의 차이점은 영국의 혁명이 그것의 목표를 엄밀하게 기독교적인 개념으로 해석한 데 반해서 프랑스의 혁명은 심지어 전투적인 반기독교적 단계를 거 쳐 갔다는 것이다. 이 두 혁명은 명백히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 다. 죽 혁명정부들은 다시 붕괴되었고 그때마다 왕정 복고의 시 기가 뒤따랐다. 눈이 띄게 성공적인 유사한 것들로 둘 수 있는 것은 18 세기의 미국혁명과 20 세기의 러시아혁명이다. 죽 양자는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통치 체계를 성립시켰던 것이다. 이 정부 체계들은 다시 서로 상이하다. 만일 누군가가 그것들이 어떤 본 질적 특징에 있어서 서로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오늘날 그는 사실상 동구에서나 서구에서 커다란 정치적 공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모든 혁명들과, 이 혁 명들이 직접적으로나 겉보기에 헛된 많은 격랑을 통해서 이룩한 모든 정치 체제가 서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역사 적 진리라고 여기고 있으며, 따라서 나는 그것들 속에서 이 공통

적인 근대적 요소를 찾아보고자 한다. 바로 근대 문명에 내재하 는 이중성이 내 견해로는 이 체계들로 하여금 쉽사리 서로 상이 한 것으로 여기게끔 한다. 즉 이 체계들의 각각은 그 각각이 대 체로 전리를 지니고 있는 대립된 해석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이 말한다면 나는 나 자신의 고유한 입장을 완 전히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서구 세계에 속한다. 나는 정치적 자유와 인권에 대한 서구적인 견해를 함께 하고 있 다. 만약 사람들이 나의 언급들에서 정의와 불의가 문제로 되는 이 문제들에 대한 파악에서의 구별을 말소시키려는 경향을 발견 하게 된다면 그것은 내 견해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무엇이 우리 편에서 잘못된 것이고 무엇이 상대 편에서 훌륭한 것인지를 알고 있을 때조차도 하나의 결단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만일 수행된 필연적인 결정이 우리로 하여금 현대의 모든 체제들이 지 니는 공통의 본질적 특칭을 알 수 없게 한다면 우리가 그러한 결 단의 좋은 결과들을 놓쳐 버리지나 않을까 두렵다. 우리는 서로 함께 하나의 세계에서 살아가게끔 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정당 성과 정열을 가지고서, 우리의 체제에 적대적인 체제들이 우리가 유일하게 허용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인간성의 척도들로 발전 되는 것을 희망한다면, 우리는 이 척도들을 우리 자신의 역사적 편견들이나 우리 자신의 지극히 이중적인 행위들과 동치시켜서는 안 된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자기 제어가 모든 질서 잡힌 행위 의 전제 조건이라면, 적어도 필요한 이해력과 사실 인식을 소유 하고 있는 사람들은 오늘날의 역사적인 전두에서 그들이 자기 것 이라고 선택한 그 입장들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 그러한 지적인 자기제어롤 행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멋진 취향의 명 령만은 아니다. 죽 우리의 생존이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에 의해서 결정될 순간이 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혁명이 매우 많은 공통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고 추론한다. 프랑스 혁명의 슬로건, 곧 자유, 평등, 박애를 이야기 의 출발점으로 삼아 보자. 이것들은 올바로 이해되는 한 이러한 모든 다양한 혁명운동의 공통적인 바람을 표현하고 있다. 이 중 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하는 것은 변화될 수 있다. 아마도 크롬웰의 철기병들은 그의 동포들에게 무엇보다도 박애정신의 이 해를 강요하고자 했을 것이며, 로베스피에르의 자코닌성당은 자유 의 이해를, 레닌의 볼셰비키당은 그들의 평등의 이해를 강요하고 자 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 개념이 마땅히 그래야 할 만큼 진 지하게 생각하자마자 그것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자유가 사 회의 한 부분의 예속에 토대하는 한 우리는 전정한 자유에 대해 서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자유는 역시 평등을 요구한 다. 평등이 단적인 폭력에 의해서 유지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 다면 평등은 박애에 근거한다. 내가 내 이웃에게 나 자신에 대해 요구하는 자유를 보장해 주지 않을 때 나는 그를 정 당하게 내 형 제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박애는 이웃에게 자유를 허용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c) 근대적인 이중성의 기독교적 배경 방금 내가 제시한 세 개의 혁명적 기본 개념들에 대한 간소한 분석은 아마도 기독교적인 분석이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 대의 모든 혁명들은 기독교적인 요구들을 실현하고자 시도하였 다. 그러나 왜 그 혁명들은 기독교적인 배경을 망각하게 되어, 결국 이 혁명들 가운데 최근의 것에서는 동일한 사람이 공산주의 자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인인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

었는가? 내가 바로보았다면 혁명의 편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점차적인 건망증은 공식적인 기독교의 편에서 보여 주는 그에 완전히 상응 하는 망각과 일치한다• 다섯번째 강의에서 나는 기독교의 역사 자체의 내재적 이중성에 관해서 언급한 바 있으며, 이를 급진적 기독교와 보수적 기독교라는 개념을 통해서 묘사하고자 하였다. 초대 기독교는 급진적이었지만 정치적인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 니었다. 기독교의 성과로서 정치적인 삶이 기독교인의 관심사로 되었을 때 점차적으로 급전적인 요소와 보수적인 요소를 하나의 포괄적인, 곧 가톨릭적인 방식으로 포함하는 중세의 교회가 형성 되었다. 이러한 가톨릭주의는 평화를 의미하지 않았다. 죽 그것 은 교회 안에서의 대립된 경향둘의 끊임없는 투쟁을 의미했던 것 이고, 이 투쟁은 곧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근세에 그 투쟁은 가 톨릭적 통일성을 파괴하였다. 종교개혁은 교회를 투쟁하는 교회 둘로 분열시켰고, 세속화는 세계를 순수 보수주의를 지향하는 공 식적인 기독교와 복음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극 단적인 비기독교적 세계로 분열시켰다. 여기에까지 다다른 단계들을 개별적으로 고찰하게 되면 이러한 오늘날의 상황은 틀림없이 필연적 발전의 자연스런 결과인 것처 럼 보인다.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나는 그토록 많은 강의들 울 지극히 특수한 문제에 적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입 장에서 다시 기독교의 초창기로 돌아가보면 결과는 역설적으로, 아니 오히려 황당무계할 정도로 자기모순적인 것으로 보일 수밖 에 없다. 이 자기모순을 분석해 보기로 하자. 교회는 인간 역사의 다음과 갇은 가장 혁명적인 기록, 곧 그것 의 진리가 근대 세계의 시민의 의식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복음을 보존하고 있다. 교회는 자기가 간직하고 있는 것이 진리라고 알

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귀중한 재물을 날마다 변하는 조류에 대 항하여 유지하는 모든 이가 취하는 태도에로 유혹받을 수 있다. 말하자면 교회는 보수주의로 유혹받을 수 있는 것이다. 최소한 우리가 위탁받은 보배(복음)를 미래의 세대에 순수하게 그대로 넘겨 줍시다 ! 그러나 이러한 보수주의적 자세가 존경할 만한 것 이라 할지라도, 삶의 사실들은 교회를 마찬가지로 존경할 만한 것이면서 마찬가지로 불충분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의 입장과 구 별되지 않는 입장으로 몰고 간다. 그리고 항상 그런 것처럼 우리 는 이것을 내부보다는 의부로부터 훨씬 더 쉽게 알게 된다. 교회 자체에 적용된 바리새인의 기독교적 개념이 근대 세계가 망각해 버린 마지막 기독교적 개념일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교회의 내부로부터 알아보는 사람 조차도 이를 변화시킬 수 없다. 전세계에서의 기독교인들의 여전 히 놀랄 만한 수많은 업적들과 행위들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근 대와 발맞추려는 몇몇 교회 지도자의 열성적인 노력에도 불구하 고, 교회는 수백년 전 이래로 더 이상 역사의 과정을 주도하지 못하며 이를 따라가지도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보수주 의 내부에서 가능한 가장 깊은 생각은 교회가 역사의 과정을 결 코 인도해서도 안 되며, 더 나아가 그것을 따라가서도 안 된다는 생각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과정은 자기파멸적이거나 적어 도 복음에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하게 울려나는 이러한 목 소리를 우리가 가볍게 흘려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목소리가 완전한 전리가 아니라 진리의 한 측면만을 표현 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 그 역시도 내 견해로 는 이중성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태도 의 이중성을 철저히 간파하지 못한 결과는 사실에 대한 맹목성

이다. 그러나 근대 세계도 못지 않게 맹목적이다. 다시 한번 혁명들 을 살펴보자. 혁명은 자기의 자식을 먹어 치운다 La revoluti on devore ses enfa n ts . 폭력적인 전복둘이 자기들이 실제로 성취하 는 것에 대해 얼마나 맹목적인가를 우리는 잘 안다. 과연 철기병 은 박애를, 자코뱅당은 자유를, 그리고 볼셰비키는 평등을 가져 왔는가? 나는 이에 대해서 대답할 수 없으며, 부정적으로도 대 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명백한 것조차도 보다 넓은 역사 의 흐름 속에서 본다면 과장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혁 명의 이 이중성의 근거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이 문제는 어 쩌면 아주 오래된, 기독교의 역사로부터 알려진 딜레마, 곧 폭력 과 비폭력의 딜레마와 관련되는 것인가? 방금 언급한 세 혁명의 목표는 사람들이 제 5 왕정, 이성의 시 대, 혹은 무계급 사회라고 부르는, 이제 더 이상 폭력 수단이 통 치에 필요하지 않는 사회 상태였다. 그러나 폭력을 극복하기 위 한 혁명의 길은 폭력이다. 물론 사려 깊은 혁명 지도자는 폭력적 지배는 항상 오로지 폭력에 의해서 와해될 수 있다고 반박할 것 이다. 그것으로 혁명의 지도자는 인간적 본성에 대한 잘 알려져 있는 보수적인 견해를 나타내는 셈이다. 이제까지의 역사에서는 그의 권력을 폭력으로 방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고 또 그런 능력이 있는 자들이 지배하여 왔다. 그러나 이것이 항상 그럴 필 요가 없다는 생각은 어쩌면 혁명들의 가장 혁명적인 사상일 것이 다. 이러한 사상은 기독교의 종말론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이러 한 사상을 옹호하는 혁명은 역사에 있어서 유일한 힘으로서 폭력 을 당연히 사용해도 되는가? 아니면 그러한 혁명은 그것이 필요 하다고 여기는 수단의 위험성에 자기의 목표를 제물로 바치는 것 인가?

혁명의 이러한 딜레마는 기독교와 근대 세계의 상호적인 맹목 성을 특별히 명백하게 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는 혁명에 있어서 자기의 고유한 관심사를 인식하지 못하며 성과 없는 방어 자세로 빠진다. 그러나 혁명은 기독교에 있어서 다만 소멸해야만 하는 것의 보존자를 볼 뿐이다. 그리하여 혁명은 그 스스로가 제 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심오한 개념들의 도움으로 그 자신의 관 심사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놓쳐 버린다. 그러므로 나는 여 기에서 딜레마를 다시 한번 그것이 -근대의 혁명들에 대한 전 역사로 간주되어야 하는―-―기독교의 역사에서 어떻게 나타났는 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기독교에서 목적과 수단의 관계는 그것의 이교도적 선구자들에 있어서보다 간단하지 않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이방교 das He i den t um 는 인간 본성을 신격화 ver g o tt ern 하였으며, 또한 그 본 성과 함께 이에 내재하는 폭력을 행사하려는 성향 역시 신격화하 였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플라돈의 이상국가와 같은 아주 정 신적인 구성물에서, 그리고 2 세기의 스토아적인 황제의 지배 형 태와 같은 대단히 윤리적으로 규정된 지배 형태에서조차 보게 된 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자연적인 습성들을 신격화하는 것을 완전 히 배척했다. 다가올 천국에서는 이러한 마귀의 지배가 분쇄될 것이다. 그러나 뒤따라올 기독교의 시대에서는 어떻게 신국이 올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그것은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죽 그것은 그 자신의 힘에 의해서 오는 것이다. 이 러한 사상에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적용되고 있는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은 통찰이 놓여 있다• 마귀들이 정복된다면 그것들은 우 리의 의지적 노력이 아니라 우리가 단지 은총의 선물로서만 체험 할 수 있는 과정에 굴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우리 의지의 어떤 가능한 최소한의 노력을 면제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은총은 은총을 향한 우리의 바람에 대한 응답이다. 그리고 이러 한 바람은 그것이 엄청난 자신의 노력으로 이어지지 않을 경우 전지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은총을 줄 수 없지만 제공 된 은총을 놓쳐 버릴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론이다. 심판 이 현세에서 이루어진다는 네번째 복음서의 가르침은 그것에 일 치한다. 과연 세계사의 거대한 과정 속에서 심판은 다르게 진행 되어야 할 것인가? 그러나 도대체 심판이란 세계사에 있어서 무 엇을 뜻하는가? 폭력적 지배의 최종적 극복은 최후의 심판, 곧 그리스도의 재 립이다. 정통 기독교의 가르침은 어떠한 인간 행위도 그의 재림 의 시간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대 속에 사는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가울 그의 왕국의 시민으로서 살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실천에 있어서 어떻게 이 루어져야 할 것인지가 급전적 기독교와 보수적 기독교 간의 긴장 울 불러일으키는 문제였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러한 긴장이 기 독교 시대의 세계 역사를 추진해 왔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이 긴장은 때때로 기독교 역사신학의 민감한 논쟁점에서 나타 났다. 「요한 계시록」은 마지막 날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 기 전에 그리스도와 그의 성자들의 천년왕국에 관해서 말하고 있 다. 이 천년제 M ill en i um 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것은 현재 의 기독교회의 시기인가? 과연 이러한 혼란된 시기가 그리스도 와 그의 성자들의 지배로서 여겨질 수 있는가? 혹은 천년왕국은 아마도 곧, 죽 바로 지금 이 세대의 생애중에 와야 할 것인가? 그의 도래는 어쩌면 우리가 의를 행하는 것에 달려 있는가? 그 가 곧 울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에 맞추어서 행위해야 한다는 믿음을 천년기설 (Ch ili asmus, ch ilia e t e= 천년)이라고 한다. 이 믿 음은 교회에게는 이단으로 여겨졌으나, 중세 후기와 근세 초기의

많은 사회혁명가들은 이를 추종했다. 그러나 천년기설 자체에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가 나타났다. 즉 이 왕국의 도래를 돕기 위해 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비폭력의 지배는 비폭력 에 의해서 나타날 것인가 아니면 폭력에 의해서 나타날 것인가? 어느 시대에나 극히 적은 사람들만이 실제로 산상수훈에 따라 서 살고자 하였다. 오랫 동안 인정된 이러한 삶의 형태는 승려 생활이었다. 특칭적인 방법으로 13 세기 초의 천년기설의 예언자, 요아힘 폰 피오레 Joa chim von F i ore 는 연속되는 세 교회가 있다 고 가르쳤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을 기반으로 해서 세워진 부족장 들의 교회, 그리스도의 초립 후에 베드로가 세운 사제들의 교회, 그리고 요한을 기반으로 해서 세운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승려 둘의 교회가 그것이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이 언어가 매우 낯 설게 들리지만 바로 이것이 유럽의 혁명들이 그 속에 여전히 살 고 있는 정신적 전통이다. 요아힘은 역사에 대한 신의 지배를 통 해서 새로운 왕국의 도래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목소리와 모범으로 감동시켰던 그의 형제들과 함께 이 왕국에 참 여하여 저주받지 않기 위해서 이 왕국에 맞추어서 살아야 했다. 이룰 위해서 예를 들면 요아힘에 의해서 깊이 영향을 받은 프란 체스코 교단의 〈심 령들 S pi r it ualen 〉은 생 명 의 희 생 에 이 르는 모든 희생을 바쳤다. 이후에 프로테스탄트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명령 에 따라 엄격하게 살고자 하는 시도의 자연스러운 형태는 종파였 다. 엄격한 산상수훈의 영향을 받은 삶이 야기할 수 있는 것의, 근대인들의 눈에 가장 명확하고 가장 아름다운 예는 퀘이커 교도 Q uaker 였다. 교회는 확실히 〈광신자 Schw 셨 rmer 〉의 흥분된 기대 와 환상적인 성서 해석에 반대할 때에 실질적으로 많은 경우에 정당하였다 .• 그러나 〈광신자〉라는 . 것이 기독교를 전지하게 대하 려고 하는 사람들을 배제시키기에 매우 안일한 표현이라는 것은

과거와 현대를 보면 명백하다. 유럽의 혁명들이 여전히 천년기설의 정신적 전통 속에 살고 있 었다고 말했을 때 거기서 나는 일차적으로 이 왕국의 도래에의 폭력적인 협동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천년기설적인 사회혁 명가들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구별이 아무리 중 요하다고 할지라도 세계 역사의 임박한 급진적인 변혁에 대한 믿 음은 양쪽 모두에 공통적이다. 이 믿음의 세속화된 형태가 근대 의 격렬한 역사 진행을 결정하였다. d) 전보신앙 오늘날 서구 세계가 공산세계와-그리고 그 밖에 비유럽 나 라들의 만족운동들과_~ 가지고 있는 첫번째 교의는 전보에 대한 신앙이다. 이것은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방식의 생 각이다. 유럽의 고대도 동양의 위대한 문명들도 역사를 진보의 공간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기독교회에 있어서는 이미 발생하였 던 단 하나의 역사의 전보, 죽 예수의 초림이 있었고, 미래에 두 번째의 진보, 죽 그의 재림에서의 역사의 종말이 존재한다. 그러 나 천년기설은 이러한 피안적 구원사를 그 한가운데에 우리가 살 고 있는 역사에로 옮기는 것을 허용한다. 나는 진보신앙이 역사 적으로 보면 세속화된 천년기설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근대인은 역으로 천년기설을 진보신앙의 신화적으로 장식된 여명으로 이해 할 것이다. 어쨌든 아마도 오직 유태 기독교적 전통의 종교만이 이러한 우리 세계의 반복 불가능한 역사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나는 근대의 역사 개념이 기독교 문화에서 발생되었다는 것을 우 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철학적인 문제들에로 되돌아가고자

한다면 여기에서 나는 기독교적 시간 개념과 근대적 시간 개념을 연구해야만 할 것이다. 나는 우리의 역사 개념이 우리의 자연법 칙 개념에 못지 않게, 아니 오히려 그보다 좀더 고차적인 정도로 기독교가 근대 세계에 준 선물이라는 것을 신뢰할 만한 것으로 제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의 우리 주제로부 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나는 이제 다양한 근대적 정치 체제 에서의 진보에 대한 특수한 이해에 관해서 질문하고자 한다. 서구 세계는 그의 고유한 가치척도를 기독교적 전통의 유산울 보존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 세계는 자신의 전보신앙을 기독교적 관념과 결합시키는 데서 거의 아무런 어려 움도 느끼지 않는다. 서방의 중심적 정치 사상은 개인의 자유이 며, 의심할 나위 없이 기독교는 모든 살아 있는 인간을 그가 어 느 계층에, 어느 인종이나 국가에 속하든 간에 한결 같이 인격 Perso 記브로 전지하게 대할 것을 가르쳤다. 자유주의는 아마도 그 것이 인격에 대한 이러한 존중을 종종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저항 에 반하여 정치적인 장에서도 실천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기독교 적 신념을 전지하게 실천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을 것이 다. 심지어 기술적 진보까지도, 최소한 이 강의에서 묘사된 자연 과학을 거치는 과정에서, 기독교와 연결될 수 있다. 즉 기술은 그의 행위를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의 이행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첫번째 강의에서 내가 출발했던 근대 세계의 문 제는 세속화된 기독교 세계의 이중성의 결과로 이해될 수 있다. 물론 이 사상 자체도 마지막에서 내가 분명히 다루지 않으면 안 될 이중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먼저 나는 분명히 반종교적 으로 보이는 마르크스주의의 교설들에 관심을 기울이고자 한다. 이 교설들을 정당하게 평가하려면 우리논 역사 이해의 새로운 단 계를 살펴 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새로운 것은 아니지만-마르크스가 몇 가지 아주 중요한 점에서 마르크스가 공격했던, 자기 신앙을 고백하는 기독 교인보다 더 기독교에 가까웠다는 견해를 표명하고 이를 옹호하 고 싶다. 나는 이 견해를 오로지 두 단계로만 전개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헤겔이 열어 놓은 길을 밟아 나간 사람으로서만 이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헤겔 자신의 중요성 때문만이 아니라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그가 지니는 중요성 때문에 먼 저 헤겔을 고찰하고자 한다. e) 헤겔 여기에서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어쩌면 지나치게 억지로 짜맞 추어 놓은, 근거가 없는 헤겔의 개별적인 데제들이 아니다. 우리 들 __- 자연과학자, 철학자, 신학자들__一이 헤겔의 영향으로부 터 자유로우려고 싸워야만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나는 철 학의 문제들을 제기하는 헤겔의 방식을 통해서 어떤 사유방식이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싶다. 헤겔은 역사를 철학의 문제로 파악한 최초의 철학자라고 이야 기될 수 있다. 이론적인 핵심 문제는 이 강의를 되돌아봄으로써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세계의 근원에 관한 견해둘을 이야기할 때 나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생각하고 있었 다. 왜 인간은 인간사의 이 국면 또는 저 국면에서 이것 또는 저 것을 믿었는가? 그리고 이 견해 중위 어떤 것이 참된 것으로 밝 혀졌는가? 이 두 문제를 동시에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우리 자신이 역사의 특수한 국면에서 살고 있다. 나의 지금의 주제인 세속화는 왜 우

리 자신의 시대는 이 시대가 사실상 지니고 있는 견해들을 가지 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기술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렇 게 우리들 고유의 견해를 역사적으로 이해될 수 있게 한다면 이 견해의 전리에 대한 우리의 소박한 믿음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 가? 그러나 만일 내가 진리를 근본적으로 역사적 상대성에로 환 원시킨다면, 나는 내가 나 자신의 견해를, 예를 들자면 바로 이 러한 역사적 상대주의를 참된 것으로 설명할 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역사적 상대주의가 이 시대의 사유 도식에 얼마나 잘 들어 맞는지를 제시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적 상대주의 자체를 역사적으로 상대화시키는 것은 쉬운 일 인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제약성의 이러한 늪 어디에서 한 걸음 이라도 확실하게 디딜 수 있는가? 헤겔은 이 문제를 이해한 최초의 철학자이며, 이에 대한 대답 울 설계하였다. 나는 이 대답을, 절대자라는 헤겔의 중심개념을 명시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포기한 단순화하는 표현으로 제시하고 자 한다. 헤겔에 의하면 전리는 다름 아닌 연속해서 일어나는 역 사적 입장들의 형태에서 현실적이다. 죽 이러한 입장들의 각각이 일정한 방식으로 진리이다. 그것은 오직 어떤 제한된 방식으로만 전리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모든 입장이, 만약 그것이 승리를 거뒀울 경우, 일면적인 것으로 증명되는 역사의 변증법적 과정을 진행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 자체는 이제, 과거의 것을 극복 하는 새롭고 모순적인 입장을, 그것 자신의 승리 뒤에 동일한 운 명을 겪기 위해서만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끝없는 교체 속에 서 이전 단계에 현재적이었던 진리는 동시에 극복되고 보존된다. 죽 진리는, 헤겔의 의식적으로 이중적인 표현을 사용한다면, 나 중 단계들에서 〈지양 au fg ehoben 〉되는 것이다. 우리가 헤겔에 대 한 이러한 전적으로 일반적인 이해를 견지하고, 그의 (개별적으

로 가르쳐 주는 바가 많은) 역사에 대한 인위적인 체계화를 그대 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우리도 역시 뒤따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의 특칭을 나타낸 셈이다. 사실상 나는 이제까지의 강의들에서 이러 한 사유방식을 언제나 사용해 왔다. 나는 이 사유방식이 역사 속 에서의 우리들 자신의 입장에도 일관되게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 다. 여기에서 나는 이 적용도 역시 단지 표면적인, 우선 실제적 으로 어쩌면 충분한 방식으로만 암시하고 있다. 죽 우리의 진리 에 대한 솔직하고 자기비판적인 충동에 어떤 사상들이 불가피하 게 참된 것으로 나타나는 한, 우리가 그러한 사상들을 우리의 판 단의 기초로 삼는 것은 정당화되리라는 것이다. 미래에 이것들이 지양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그에 반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상들 속에 들어 있는 전리의 요소가 보존 되리라고 기대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역사의 한복판에 있음을 인식한 인간이 자기 자신의 사상에 대하여 판단 하기는 어렵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언급은 우리들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_ 마찬가지로 찰 알려져 있는 한 지점에서 _헤겔에 대한 비판의 입장을, 적어도 그의 철학이 그의 시대에 제공했고 아마도 제공 할 수밖에 없었던 이미지에 대한 비판의 입장을 취하게 한다. 그 의 고유한 사상은 체계일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만약 그것이 절 대자를 명확히 사유하고자 한다면 그의 사상은 이러한 요구를 제 기해야만 한다. 그러나 〈절대자는 결과이다〉. 죽 헤겔은 정신의 역사의 이 절대적 결과가 헤겔의 철학이라는 인상을 적어도 방해 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그의 철학은 언제나 있 어 왔던 거대한 천년기설로 보인다. 천년기설이라는 용어가 여기 에서 제자리에 들어서 있다. 헤겔은 그의 철학을 기독교에 대한 본래적인 이해로 이해했다. 죽 기독교를 이해하는 것이 그의 청

년 시절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결정적인 이해는 천년제 M ill en i um 이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의 정치 철학에 서 19 세기 초의 국가는 천년제와 완전히 엄밀하게 나누어질 수 없었다. (그러나 특별히 헤겔이 그의 마지막 생의 수십년을 보낸 프 로이센 국가와 관련하여 이러한 견해를 그에게 돌리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그는 표현에 있어서 주의했을지라도 이 국가에 무비판적인 것 은 아니었다. 우리들은 아마도 그를 더 정확하게는 프랑스 혁명의 철 학자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f) 마르크스 여기에서 우리는 마르크스가 헤겔울 비판했던 점에 이르른다. 마르크스는 진정한 헤겔학파였다. 그는 역사의 종말을 아마도 헤 겔 자신보다 더 글자 그대로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종말 상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초창기의 산업혁명이 초래한 가공 할 만한 사회적 조건을 생각했을 때 이 상태를 어떻게 현재적이 라고 주장해도 되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종말 상태는 더 깊은 사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헤 겔에게 있어서 역사란 이념이라고 불리는 유령들의 가장행렬 속 으로 용해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철학을 위해서 필요한 사유 의 완전한 전도를 표현하기 위해서 철학자는 머리로 걷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뭔가 매우 비밀스러운 명제를 주조해 냈다. 마르 크스는 헤겔에 있어서 머리로 서 있었던 철학을 다시 발로 걷도 록 하였다고 자부심을 가졌다. 발은 경제에 관한 마르크스의 사 상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에 개별적인 문제에 있어서 성급하거나 틀린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여기에서 그는 극히 중

요한, 말하자면 극히 기독교적인 진리를 부각시켰다. 그리스도의 무서운 말씀들 가운데 하나는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 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것이다(「마가복 음」 10, 25). 마르크스가 이해했던 전리는 그로부터 그러한 말이 나올 수 있는 진리이다. 그는 이러한 전리를 세속화된 형태로 이 해했으며, 그것을 과장했다고 할지라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 너희의 보화가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 (「누가복음」 12, 34) 는 것은 역사가 경제적인 조건에 의해서 결정되며, 인간의 삶 울 바꾸고자 하는 사람은 경제적 조건을 바꾸어야만 한다는 마르 크스의 신념 배후에 있는 굽힐 수 없는 전리이다. 자기 신앙을 고백하는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진리를 이해하고 있는 가? 그러나 어떤 수단이 경제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기에 적합한가 라는 물음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이중성을 피하지 못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마르크스 자신이 이 접에서 이 중적이었다. 한편으로 그는 역사의 필연성을 믿었다. 죽 그는 마 치 기독교인들이 최후의 심판의 필연적인 도래를 믿는 것처럼 무 계급사회의 필연적인 도래를 믿었던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기독 교인들이 더 이상 확고하게 그 자신의 종말 기대를 믿지 않게 되 고 그리하여 그들의 믿음의 토대가 의심에 시달리게 된 인상을 주게 된 시대에 적극적인-그러나 세속화된_―-종말론을 제 공하였기 때문에 그의 교설이 많은 추종자를 얻게 되었다고도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론 한편으로 그는 행동을 설교하였다. 죽 그는 역사가 인간 이의의 다른 것에 의해서 전보한다는 것을 기 대하지 않았다. 행동의 올바른 수단에 대한 문제는 국제 사회주 의 운동을 의회 민주주의의 톨 안에서 개혁을 믿는 운동과, 이미 기존의 사회질서를 폭력으로 전복시키는 것을 필수적이라고 생각

하는 운동으로 분열시켰다. 수단에 관한 결정은 목적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공산주의는 순수한 자본주의로부터 와 마찬가지로 서구 사회주의로부터도 매우 깊이 분열되어 있다. 과연 모든 측의 현재의 태도 속에 있는 이중성이 더 잘 간파될 때, 이 두 톰이 메워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결정할 수없다. g) 성과의 이중성 이제 나는 혁명의 목표와 수단의 이중성을 떠나서 다시 한번 그 성과의 이중성에 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앞에서 나는 직접 적으로 성공적이었던 혁명들을 그렇지 못한 혁명들과 구별하였 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것은 표면적인 구별임이 드러 난다. 어떤 의미에서는 일어난 모든 혁명들이 자기의 목적을 달 성했다. 스튜어트가와 부르봉가의 왕정복고 시기는 지나간 것은 결코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는데 충분할 만큼 의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다론 의미에서는 어떠한 혁명도 그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영국 혁명의 • 마지막 성과는 신의 지배 가 아니라 대의 민주주의였다.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에서 자 라 나온 것은 루소의 자연에의 회귀도 이성의 시대도 아닌, 산업 화 시대의 비합리적인 문명동력학이었다. 지금까지 공산주의가 실현한 것은 계급 없는 사회가 아니라 지극히 효율적인 관료와 전문가들의 위계질서이다. 현대의 서로 경쟁하는 사회들은 그것 둘의 강령에 있어서보다는 실제적인 행동에 있어서 훨씬 더 가깝 다. 사회적 문제의 해결은 생산의 증대에 있다는 헨리 포드의 유 명한 견해는 오늘날 러시아 공산당의 실천적 구원론으로 보이며,

이에 반해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경영자 계층이 암묵적으로 독립적인 기업가들을 몰아내고 있다. 인간의 삶은 이전에는 결코 알려지지 않은 척도에서 계획된다. 완전 고용, 자유로운 주말, 기술적 기기(機器) 그리고 모두를 위한 쾌락이 도처에서 추구되 고 있는 이상이며, 산업화와 산아제한은 긴박한 문제이고, 핵전 쟁, 〈 1984 년 〉 그리고 〈 멋진 신세계 〉 는 이 사회의 악몽이다. 그리 고 이 사회의 지배적인 공통의 믿음은 첫번째 강의에서 언급한 대로 과학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매우 이중적이다. 만약 이 믿음이 그 자신의 고유한 기본 교설에 따라서 행사해야 하는 대로 진리를 고수한다면 그 믿음은 자기가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과 이 전보가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갈 것 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h) 세속화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의 원을 완성하고 이제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이제까지의 성과에 대해서 완결짓는 반성을 시도해 보자. 교회가 근대의 참된 본성에 대해서 맹목적이고 근대 세계가 그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맹목적이라고 말함으로써 나는 이 시대의 이중성들에 대한 하나의 강력한 표현을 선택한 셈이 다. 이 이중성들은 세속화의 의미에 대해서 맹목적이다. 나는 근 대 세계가 기독교의 세속화의 결과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자면 근대 세계가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적인 세계이지만, 다른 의미 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과 모든 세속화된 사람들이 믿는 것과는 반대로 나는 근대 세계의 놀랄 만한 성과 의 상당 부분이 기독교적 배경에 의거한다는 견해에로 기울어져

있다. 만일 기독교가 이제까지의 역사에서 드러난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옳다면 이 러한 견해는 우리를 그리 놀라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초기 기독교의 용어로 되풀이한다면, 자연의 신들은 기독교인들이 우 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신에 의해서 극복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아들로서의 인간은 자연에 대한 권력을 넘겨받았다. 인간은 아들이지 노예가 아니기 때문에 자유로우며, 인간의 자유는 그의 아버지, 곧 사랑의 신의 의지에 반해서 행동할 자유를 포함한다. 이제 그는 세계를 정복할 수 있고, 바로 이러한 일을 세속화가 이루는 것이다. (이 마지막 명제들에서 나는 고가르텐 Frie d ric h Go g ar t en 의 세속화의 신학에 가능한 한 충실히 따랐다. )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확대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이 생각 둘의 기독교 해석에 있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시 그것을 현 대적인 측면으로부터 고찰해야만 하는 것이다. 세속주의를 기독교적 이단 Hares i e 으로 생각해 보는 것은 기독 교 신학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단 ha i res i s 은 신학적 정의 에 따르면 기독교적 전리의 전체로부터 부분 전리를 끄집어 내서 hair e in 이 부분을 절대화시키는 것이다. 이단자 H 셨 re ti ker 는 기독 교인이지만 잘못된 기독교인이다• 세속주의의 다양한 변종들은 기독교에 대한 상이한 관점들을 취한다. 나는 더 이상 이 관점들 의 세부적인 것으로 들어가지 않으련다. 이 모든 관점들은 이 세 계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진리, 곧 예수가 나무로 자라나는 겨자 씨의 예와 모든 것을 살라버리는 불의 예와 같은 다양한 예들을 통한 비유들에서 설명한 전리를 취한다. 현대 세계는 그 속에 많 은 새들이 둥지를 툴 수 있는 나무이며, 모든 것을 살라버리는 불이다. 현대 세계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중적이다. 그러나 현 대 세계는 이단적인바, 다시 말하면 전리의 다론 한 면에 대해서

맹목적인데, 왜냐하면 세상은 그 자신의 이중성에 대해서 무지하 기 때문이다. 진보신앙은 반쪽 진리이다• 예수는 서로 함께 자라 서 마지막에 가서야 분리되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이중성의 불가피성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나는 가라지가 저항없이 밀과 함 께 자라는 밀밭보다도 근대에 대해 더 분명하게 기술한 것을 보 지 못했다. 그러나 이중성의 사실을 보는 사람은 여기에서 한 발 자국 빠져나온 사람이다. 죽 그는 자신을 이교도로 만드는 오류 를 내던지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이 이중성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여기에 절망적으로 빠져들어 간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한번 화살의 방향을 바꾸어 야 한다. 세속주 의를 기독교적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람들 은 이단을 대체로 전리의 인정된 전체의 한 부분을 파악하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 이단에 관해서 언급하는 신학자들은 일반적으 로 교회가 〈 포용적인 ka t hol i sche 〉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확신한 다. 아마도 이러한 관념은 과거의 유명한 이단둘을 결코 정확히 기술하지 못할 것이다. 대체로 이단론자들은 교회가 충분히 진지 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기독교의 한 측면을 강조했다. 교회의 많 은 교리적 결정들은 이단에 의해서 도전받아 왔다. 그리고 나는 고대 시대의 최선의 교리적 결정들은 분명히 역설적인 성격을 가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이 교리적 결정들은 이단에 의해서 밝혀진 전리를, 그 이단에 의형상 모순되는 언어를 사용 하는 하나의 사유체계 속으로 구축해 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 떻든지 간에, 어쨌든 우리에게 세속화는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해석을 강요한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은 몇 세기 전부터 진행되 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종결되지 않았다. 나는 이 모든 강의를 통해서 이러한 새로운 해석을 참작하고자 노력해 왔다. 물론 나는 고대에 대해서 고대의 언어로 이야기하

고자 해왔지만, 또한 언제나 이것이 오래전에 지나가 버린 시대 의 언어리는 것도 명확히 하고자 시도했다. 즉 이 언어는 우리들 대부분이 이마 잊어버렸거나 결코 배워본 적이 없는 진리들을 아 마도 표현할 수 있었던 언어지만, 우리 현대인들이 솔직히 우리 자신의 것으로서는 말할 수 없는 언어인 것이다. 나는 오래되고 존귀한 많은 종교적 견해둘을 신화나 전설들로서 다루었으며, 다 른 것들과 관련하여 나의 불가지론을 은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관심사는 오늘날의 신학에서 탈신화화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었다. 나 자신은 내 삶의 대부분을 교회적으로 규정된 세계보다는 자연과학적으로 규정된 세계에서 보냈기 때문에 탈신 화화의 전투가 이미 오래전에, 아마도 갈릴레이의 시대에 결정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는 그 탈신화화의 결 과들 속에서 솔직해야 하는 것만이 남아 있다. 과학은 성립했고 인간의 판단에 따라 계속될 것이다. 그에 반해 기독교를 과학적 으로 훈련받은 사유에 믿을 만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과제만은 남 아 있다. 이것을 나는 신학 내부와 그 의부의 다른 수많은 근대 의 사상가들이 시도했던 것처럼 시도해 왔다. 나롤 실제로 사로 잡는 것은 오히려 다른 문제이다. 이 문제를 나는 헤겔에 대한 고찰에서 언급한 바 있으며 이제 그것을 좀더 정확히 설명하고자 한다. 현대의 사고는 과학에서 가장 응집적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 자체를 절대적 전리로 생각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갖지 않는다. 이것은 어떠한 개별적인 문제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모든 순간에 일반적으로 받 아들여전 과학 이론들까지 기꺼이 새롭게 검증할 것을 그의 신봉 자에 대해서 요구하는 것은 과학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참된 과학의 삶은 끊임 없는 자기 교정의 삶이다. 이것은 오늘날 인간적인 삶의 넓은 분야들에 대한 과학적인 견해와 관련하여 적

용되어야 하는데, 이 분야들에서 과학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갇 이, 적어도 오늘날 격렬한 문제들에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리고 과학의 보편적인 철학적 근거에 대해서 우리가 어느 정도 확신하겠는가? 이제 세속화에 관하여 여기에서 제시된 견해들이 옳다면 이 견 해들은 언뜻 보아 우리의 당혹을 줄일 수 없는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이 견해가 옳다면 근대 과학은 아마도 기독교 없이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순환운동을 하고 있는 셈 이다. 우리는 기독교를 과학적인 사유가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 로 설명한다. 이 때 사유는 그 자체가 기독교의 산물로서 증명되 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중요성을 의식하게 된 모든 사유는 이 러한 순환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그 자신의 관점 울 절대 전리와 동치시키려는 자의 역사적 순진성이 불식되어야 한다는 의식 단계에 접근하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일단 이해하 였다면 우리는 그 점에서 더 나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닌데, 왜 냐하면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가 자신의 판단을 스스로 가 알고 있는 것 이의의 다른 것에 근거두기를 기대하지 않을 것 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끊임 없는 자기 교정의 과제만을 전 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철학자라면 과연 우리가 이 의식단계에 상응하는 전리개념을 가지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 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 의식단계가 요구하는 것을 수행하고자 하는 철학은 아마도 우리 개념들의 상호적인 의존성의 원환을 여러 차례 편력해야만 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내가 자연의 역사에 관한 이전의 강의들 에서 이 운동의 반원을 편력하려고 시도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나는 거기에서 자연과학의 개념들을 꾸밈없이 적용하여, 어떻게 인간의 역사가 자연의 역사로부터 자라 나오는 것인지를 보이려

고 시도했다. 지금 마감되고 있는 강의 시리즈에서 나는 두번째 반원을 밟아 왔다. 여기에서 나는 인간 역사의 개념들을 그대로 수용하여, 어떻게 근대 자연과학이 인간의 역사에서 성장해 나왔 는지를 밝히려고 시도했다. 다음 강의 시리즈에서 나는 두번째로 처음 반원을 밟아 나가고자 한다. 거기에서는 다시 자연에 대한 과학의 전술들이 주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 진술들 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들의 의미를 우리가 처음 반원 에서 배운 것에 비추어서 분석하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가 매우 추상적인 문제들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물론 여러분도 느끼는 바대로 그토록 자주 거론되는 인간적인 문제들이 시급한 문제들 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분석을 등한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먼저 우리의 과학의 개념들, 곧 근대 합리성의 공장에 있는 도구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고서는 이 시대의 역사에 대한 더 이상의 분석을 할 수 없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와 근대 자연과학 — 1957 년 11 월 13 일 함부르크 대학 총장 취임강연 시장님, 신사 숙녀 그리고 대학의 동료 여러분 ! 르네 데카르트는 1596 년 투렌느의 라하예에서 태어났다. 그는 라플레슈의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이후 그는 독립 된 귀족으로서 때로는 프랑스에서 살고 때로는 여행으로 보냈으 며, 마지막 2 년은 스스로 선택한 고독 속에서 네덜란드에서 지냈 다. 그는 1650 년 스톡홀름에서 스웨덴의 크리스틴 여왕의 손님으 로 머물다 생애를 마쳤다. 나는 왜 그를 오늘 강의의 대상으로 삼았는가? 그가 근대 철 학의 창시자로 여겨지고 있는 것은 근거 없는 일이 아니다. 헤겔 은 데카르트와 함께 철학이 처음으로 확실한 근거를 갖게 되었다 고 말한다. 이 근거 라는 것은 코기토 에 르고 숨 Cog ito ergo sum, 죽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 제로 표현되는 인간 정신의 자기 자신에 관한 앎이다. 데카르트 는 인간적 주관으로 하여금 자신의 확실성의 궁극적인 근거를 자

기 자신 안에서 발견됨을 가르쳤다. 그러나 나는 데카르트와 근대 자연과학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자연과학은 바로 인간적 주관에 관해서 묻지 않는다. 자연 과학은 의계의 대상들, 자연의 객관들에 대해서 질문을 던전다. 주관성과 대립되어 있는 객관성이 주관성에 대해서 참된 인식의 표지(標識)이다. 말할 것도 없이 데카르트가 위대한 수학자이고 극히 중요한 자 연연구자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나는 그의 철학의 본래적 인 목표가 수학적 자연과학의 확고한 기초를 다지려는 것이었다 는 데제에 동의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에 있어서 주관과 객관 은 무언가 서로 함께 관계되어 있어야만 한다. 죽 인간의 사유가 자기 자신을 아는 확실성과 인간의 사유가 자연을 수학적으로 인 식하는 확실성은 서로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철학 은 일면적으로 정신에로 향해져 있지 않을 뿐더러 또한 일면적으 로 물질에로 향하고 있지 않다. 물론 그는 물질과 정신을 날카롭 게 구분하였고, 아마도 그 구분은 철학사에서 이전에 볼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날카로운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돌 을 구분한 것은 그것들의 상호관계 방식을 마찬가지로 분명히 표 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역사적으로 정신 철학의 원조에 속하면서 또한 자연과학의 방법 의식의 원조에 속하는 것 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의 철학의 상황뿐만 아니라 대학의 전체 적인 상황을, 그리고 과학의 상태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의식의 상태를 관찰하게 되면, 그것이 정신과 물질 사이의 분열 및 소원 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울 보게 된다. 정신과학과 자연과학 사 이에는 그들 서로간에 대화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가 거의 없으 며, 심지어 양자는 종종 이러한 소원성을 자랑하기까지 한다. 인

간을 인간으로, 영적이고 정신적이며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로 이해하는 사람은 자주 인간의 고유한 육체와 그가 서 있는 땅에 대하여, 혹은 오늘날 기계들이 물질을 운동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거의 아무 것도 모른다. 그러나 기계를 가지고 물질을 운동시킬 수 있는 사람은 인간과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에 대하여 너무 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파멸적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단순한 사유 롤 통해서 바꿀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사유는 항상 얼마 안 되는 것일지라도 얼마간의 기여를 할 수는 있다. 오늘의 강의 에서도 역시 이러한 기여에 관한 것이 다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여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만일 사람들이 이룰 시도한 다고 하면, 오늘날의 과학의 문제와 인간의 공동생활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철저히 숙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문제들은 때 때로 그 뿌리가 과거에 놓여 있다. 만일 우리가 현재를 이해하고 자 한다면 과거의 사유도 역시 새롭게 철저히 반성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반성의 일부가 오늘 이 시간의 주제가 되는 것이 다. 만일 사람들이 대학의 강의시간에 한 철학자의 상을 그려 보고 자 한다면 그의 사상에서 잘라낸 작은 단편에 제한하여, 거기에 서 그의 사유하는 방법을 이를테면 실행해 내보일 수 있다. 이 때 전체의 연관은 불분명해진다. 나는 그대신에 바로 데카르트 철학의 전체적인 연관을 언표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 리는 개별적인 정류장들을 적절한 이해를 위해서 빠르게 지나치 지 않으면 안될 것인데, 그것은 마치 우리가 한 그립을 일견할 때 개별적 부분들을 그것들이 전체의 구성에 기여하는 한에서만 파악하지, 그것들의 고유한 구조에서는 파악하지 않는 것과 마찬 가지의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철학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내가 아마 도 바로 전체의 배열과 유일한 내용적인 문제, 곧 수학에 대한 그의 견해의 문제 이의에는 어떤 새로운 것을 거의 말해 줄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나는 아직 이 철학에 접해 보지 못한 사람 에게는 단지 많은 것을 암시만 할 뿐 그것을 완벽히 분명하게는 제시하지 못한다. 양자 모두 내가 모두를 올바르게 평가하지 못 한다 하더라도 양해해 주기를 바란다. 그립과 비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말은 시간 속에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순서에 따 라서 훑어 보아야만 한다. 여기에서 내게 중요해 보이는 것은 우 리가 데카르트 자신의 사유의 운동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 는 이것을 두 개의 선회하는 길로 시도할 것인데, 이들 각각은 동일한 지점을 통과한다. 첫번째 선회는 서술적이다. 이것은 데 카르트가 생각한 것을 묘사한다• 두번째 길은 비판적이다. 비판 은 우리가 위대한 철학자에게 당연히 돌려야 하는 존경 속에서 이루어전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시도가 지나친 불손이 아니라 면, 그가 생각하고자 했던 것을 그가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훌 륭하게 사유함을 배울 정도로 잘 이해하고자 시도한다. 철학은 아마도 이런 점에서 항상 선인에 대한 존경에 가득찬 비판일 것 이다. 이 선회의 길은 12 개의 정류장들을 포함하고 거기에다 시간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나는 이 정류장들을 일단 개별적으로 지적하 고자 한다. 이것은 나중에 우리가 그때그때마다 어디에 처해 있 는지 상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제목을 여 러분에게 제시하고자 한다. 1 17 세기 초의 자연과학

2 데카르트 자신의 자연과학적 업적들 3 연역적인 수학적 자연과학에 대한 시도 4 데카르트 자신의 수학적 업적들 5 수학의 본질 6 수학에로 정향된 전리개념 일반 7 사유하는 존재 res co git ans 로서 의 〈 나 〉 에 도달하는 회 의 의 사 유과정 8 신존재 증명 9 신의 신뢰성에 의해 보장되는 인간의 인식 10 연장적 실체 res ex t ensa 에 관한 학문으로서 의 자연과학의 정 초 11 자연과학에서의 응용 12 몸과 마음의 관계 첫번째 선회 1 17 세기 초의 자연과학 젊은 데카르트가 매우 열정적으로 내밀한 관심을 기울인 자연 과학은 죽은 지 150 년 이상이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 명성이 높이 상승된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시작되었고 케플러에 의해 깊 이 영향받았으며, 그리고 다시 갈릴레이에 의해 톨이 잡혔다. 자 연과학은 수학적 정식으로 쓰여져 두명하게 되고 실험에서 검증 가능하게 되는 양적 개념들로 자연을 기술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스콜라주의적인 목적론적 해석은 기계론적 원리들에 따른 순수 하게 인과적인 자연 설명의 사상에 길을 연 풀라톤주의적 수학자

에 의해서 압도되었다. 기계적 작용은 그 당시에는 주로 물질의 불가입성에 기인하는 압력과 충돌 Druck und S t a /3에 의한 작용으 로 이해되었다. 2 데카르트 자신의 자연과학적 업적들 데카르트는 그 스스로가 생산적인 자연과학자였다. 이 시간 전 체를 기울여 이 분야에서의 그의 업적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만, 여기에서는 그것을 다만 간추려 보고자 한다. 아마도 가장 의미 있는 것은 광학에 대한 그의 기여일 것이다. 그는 굴절법칙을 비록 처음은 아니지만 자립적으로 발견했고 필 시 그 근거도 자립적으로 밝혀냈다. 그는 광학적 도구에 대한 이 론을 본질적으로 촉진시켰다. 물리학적 분석 가운데 탁월한 것은 물로 채운 유리공의 실험적 기초에서 무지개를 만들어 내는 빗방 울 내 에서 의 방사과정 S t rahlen g an g을 수학적으로 연구한 것 이 다. 그의 행성체계 이론은 그가 이론을 제시한 형식에 있어서는 오 류를 범했지만, 내용적으로 의미 있고 당연히 역사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것이었다. 그는 태양 주위를 운행하고 있는 행성들을 마치 액성(液性)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을 떠다니는 코르크 조각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원궤도에서 거의 이탈하지 않는 행 성들의 하나 같은 궤도 운행을 에테르의 소용돌이의 기계적 결과 로서 설명했다. 뉴턴은 후에 케플러의 행성운동 법칙을 중력과 관성의 공동작용으로부터 연역해 내는 올바른 이론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뉴턴은 데카르트가 성공하지 못한 것인 행성 궤도의 일 반적인 형식을 양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체계의 생성 과 함께 궤도의 개별적인 형태는 뉴턴에 있어서 역학적으로 불명 확하게 남아 있었다. 다시 몇십 년이 지난 후 칸트는 데카르트

이론의 정당성을 오늘날에는 존재하지 않는 소용돌이를 태양계가 형성되었던 과거로 옮겨 놓음으로써 다시 살려냈다. 이렇게 해서 칸트는 뉴턴에게 여전히 남아 있었던 공백을 메웠다. 오늘날 우 리는 칸트의 이론울 근본에 있어서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오늘날의 행성생성 이론의 선구자아다. 3 연역적 자연과학에 대한 시도 데카르트는 자연과학에 있어서 이런 저런 훌륭한 발견만을 하 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보다 위대한 자연과학자인 갇 릴레이가 단지 개별적인 가정을 세우고 경험에서 이를 확증하려 했다고 갈릴레이룰 비판했다. 참된 과학은 의심할 수 없는 최초 의 원리로부터의 확실한 연역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갈망 에는 정당한 동기가 정당하지 못한 동기와 서로 얽혀 있는 것으 로 보인다. 이 얽혀져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은 두번째 선회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 연역적 과학의 표준은 수학이다. 데카르트가 수학을 한갓 모범 으로나 연역적 자연과학의 도구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의 가 장 고유한 사상은 자연과학이 그 본래적인 본질에 따라서 도대체 수학 이의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서 우리는 그의 수학의 개념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4 데카르트 자신의 수학적 업적들 데카르트는 중대한 오류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지만 자연과학 자로서 의미 있는 학자였고 수학자로서의 그는 천재적이었다. 그 의 업적 가운데서 나는 오늘날에도 모든 고등학생이 배워야만 하

는 것인 해석 기하학을 들고 싶다. 간단하게 하기 위해 이야기를 평면 기하학, 따라서 곡선에 의 한 함수적인 관계에 대한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설명으로 제한해 보자. 그러한 도식은 이미 데카르트 이전에도 있었다. 반대로 그 는 오늘날 수학자들이 〈 데 카르트적 car t es i sch 〉 이 라고 부르는 미 리 제시된 직교좌표를 아직 사용하지 않았다. 그 자신의 생각은 다 분히 원리적인 종류의 것이다. 직선, 원, 타원 그리고 다른 곡선 들 및 그것들의 특이한 점들에 관한 이론으로서의 평면 기하학은 고대로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 방정식과 그 해결에 관한 이론으 로서의 대수학은 바로 그 당시에 데카르트 스스로가 중요한 기여 롤 했던 새로운 활기찬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해석 기하학은 곡 선과 방정식을 동일한 사태의 상이한 표현방법으로 읽음으로써 이들 간의 관계를 설정한다. 방정식은 이 방정식에 의해 〈 정의 된〉 곡선 상의 점들의 좌표값을 규정하는 법칙을 제공한다. 그리 고 곡선은 〈이 법칙을 표현한다 dars t ellen 〉 . 수학자들에게는 예를 들어 페르마트 Ferma t와 같은 데카르트의 동시대인들도 이미 이 갇은 표현을 사용하였다는 것이 주목될 수 있을 것이다. 데카르 트는 단위거리에 대한 임의적인 정의를 통해서, 표현된 방정식은 〈차원적으로 맞지 dim ensio n sm~/3 ig ric h tig > 않으면 안된다는 요구 로부터 최초로 벗어남으로써 완전한 자유를 획득했다. 바로 이것 이 표현된 방정식을 미리 사유된 기하학적 사태를 단순히 전달하 는 것으로 여기는 견해로부터 기하학과 대수학을 대비 Kon- fr ont i erun g시키는 것의 완전한 보편성에로 나아가는 전보이다. 5 수학의 본질 이렇게 이해된 해석기하학은 수학의 본질에 대한 파악의 한 전

형인데, 이러한 파악을 데카르트는 그의 생존시에 공개되지 않은 청년기의 저술인 〈 정신지도 규칙 Reg ula e ad dir e cti on em ing en ii > 에서 설명하고 있다. 거기에서 (규칙 4) 그는 산술이나 기하학 또는 역학이나 음악, 그러므로 그 당시의 교육방법인 〈 4 학〉 (Quadr i v i um 一음악, 산술, 기하, 천문) 가운데 어느 것도 본래적 인 수학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들은 모두 그 밀에 수학이 몸을 숨기고 있는 걷치레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수학 자신은 질서와 척 도 ordo et mensura 의 이 론이 다. 수, 도형 , 운동, 음악적 조화 는 단지 이 질서와 척도의 〈 가장(假裝)〉일 뿐이라는 것이다. 질 서와 척도 ordo et mensura 의 개념은 신성한 중세적 유래를 가지 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개념들이 여기에서 데카르트의 시 대에도 아직 완전하게 사유될 수 없었지만 지금 우리 세기에는 잘 들어맞는 새로운 특별히 근대적인 사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 인다. 오늘날의 수학자들은 이 두 가지 개념에서 수학이란 추상 적 구조에 관한 과학이라는 근대적인 견해를 상기하게 된다. 나 는 데카르트가 여기에서 이를테면 수학의 추상적 파악에 대한 전 망울 가지고 있었다고 보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해석 기하학의 핵심은 미 리 주어진 방정식에 대한 기하학적 칙관화도 아니며 또한 반대로 기하학적 문제의 해결에 대수학을 광범위하게 이용하는 것도 아 니었다. 해석 기하학의 핵심은 오히려 이 직관화와 이 이용을 비 로소 가능하게 만드는 것, 죽 추상적 구조의 존재, 곧 방정식의 구조이자 곡선의 구조이며 이 양자의 상호 모사를 비로소 허락해 주는 질서의 존재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동형성 개념 Isomor p h i ebe griff을 통해서 파악하려고 한다. 만일 내가 데카르 트의 이 사상을 올바로 이해하였다면 이 사상은 그의 철학의 발 전에 대한 이제까지의 이해에 중요한 한 부분으로서 덧붙여질 수

있을 것이다. 6 수학으로 정향된 진리개념 일반 질서와 척도는 수학의 대상을 표시한다. 수학적 인식방식을 그 는 직관i n t u it us 이라고 부른다. 직관의 개념은 인식된 것의 항변 할 여지없는 명석함을 포함한다. 2 곱하기 2 가 4 라는 것을 파악 하는 사람은 이것을 의심할 수 없다. 죽 그가 이것을 의심한다고 주장할지라도 또는 이것을 진지하게 의심하고자 할지라도 그는 이것을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수학적 전리에 대한 생각, 곧 직관에 논리적 연역보다도 더 높은 확실성을 부여한 생 각은 아주 특이하다. 나는 직접적으로 통찰할 수 없는 경우에 논 리적으로 연역해야만 한다. 물론 나는 학교에서 삼단논법이 강제 적이라는 것을 배웠고 또 스스로도 그렇게 파악하였다. 그러나' 내가 삼단논법을 구체적인 경우에 적용할 때에 오류를 저질렀는 지 어떤지는 직관이 가르쳐 주지 않는 곳에서는 나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판단의 개념이 논리학에 속하는 한 데카르트의 진리개 념을 〈판단전리 U rt e il swahrhe it〉라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 울 것이다. 생산적인 수학자는 구조에 대한 저 통찰을 매우 잘 알고 있는데, 이 통찰에 비해 그것을 언어적으로 정식화하는 판 단은 항상 무언가 이차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 다. 수학적 직관이 제공하는 이러한 확실성을 데카르트는 인식이라 는 이름에 합당한 모든 인식에 대해서 요구한다. 그는 단순한 개 연성을 인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의 반대가 참일 수도 있는 그러한 것은 인식하는 자에게 확실한 오류만큼이 나무용하다는것이다.

7 회의와 사유하는 자아 위와 같은 전리개념을 만족시킬 수 있는 철학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이제까지의 철학은 이 전리개념을 만족시키지 못한 다. 우리가 더 나은 철학을 세울 수 있겠는가? 데 카르트가 〈 제 일 철 학에 관한 성 찰 Medit at i on es de pri m a p h il oso p h i a 〉 의 첫머 리 에서 아우구스티 누스적 독백 의 형 식으로 자 기 자신과의 대결과 어쩌면 신과의 대결 속에서 제기하고 있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내 생애에 있어 서 한 번은 내가 이제까지 믿어 왔던 모든 것을 의심해야만 한 다. 생애에 있어서 한 번은 이러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오늘 나 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 나는 오늘 시작하고자 한다. 나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자 한다. 나는 감각이 나에게 가르쳐 주는 것을 의심하고자 한다. 감각은 심지어 나를 속일 수 있다. 꿈에 나는 감각적인 그림을 보았으나 깨어나 보니 어떠한 현실적 인 것도 여기에 일치하는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적인 인식은 확실하다. 2 곱하기 2 가 5 라는 것을 나는 아무리 믿고자 하여도 믿을 수 없다. 이것은 확 실히 그렇다. 그러나 대단히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악마가 기 만하는 자로서 처음부터 나롤 2 곱하기 2 가 4 라는 것을 참으로는 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의심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면 어찌 될 것인가? 표상을 솔직하게 잘못된 것으로 간주할 수 없는 나의 무능력이 그 표상의 진리에 대한 증명일 것인가? 이러한 물음의 의미에서 나는 수학적 진리들에 대해서도 의심할 수 있다 .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가? 내가 의심한다는 것은 확 실하다. 내가 의심한다는 것을 나는 의심할 수 없다. 의심한다는

것은 사유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아니면 이것 역시 사기꾼이 나로 하여금 믿게 할 수 있 는 것인가? 사기꾼이 그렇게 믿게 한 것이라면 그것은 그가 나 를 그렇게 생각하도록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내가 생 각한다는 것은 그가 나로 하여금 어떤 것을 믿게 할 수 있는 전 제이다• 내가 생각하는 다론 모든 것은 잘못일 수 있지만 내가 생각한다는 것, 그것을 나는 전리에 합당하게 사유하는 것이다. 내가 사유함으로써 내가 존재한다 Co git o sum 는 것은 확실하다. 존재하는 것은 하나의 실체, 곧 res 이다. 나는 사유하는 실체, 죽 res co git ans 이 다. 사람들은 Cog ito ergo sum 이 라는 정 식 을 가령 다음과 같은 형 식의 논리적 추론으로 오해하였다. 죽 〈사유하는 모든 것은 존재 한다. 나는 사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형식으로 오해하였 던 것이다. 데카르트 자신은 이러한 해석을 거부했다. 논리는 의 심될 수 있다. 죽 삼단논법 도식은 만약 강력한 사기꾼이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나를 속일 수 있는 것이다. Cog ito sum 은 내가 나 룰 사유하는 자로 안다는 것을 뜻한다. 회의 속에서 나는 나를 의심하는 자로서 확신하게 되었다. 이 확신이 회의 자체의 가능 성의 조건이다. 사람들은 데카르트의 방법을 방법적 회의라고 표현해 왔다. 그 가 의심을 방법적으로 제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아마 이 방 법적 설명도 또한 의심이 극복될 경우에야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 던 듯하다. 그러나 나는 이 의심이 단순한 방법적 방책만은 아니 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 의심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의 심이었다고 믿는다. 스스로가 의심해 보지 않았다면 의심의 방법 울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8 신존재 증명 이제 나는 나 자신을 확신한다. 그러나 다른 사물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어떻게 나는 〈 모래언덕 〉 (Sandbank ―야스퍼스)에 서 자유로운 인식의 바다로 나아갈 것인가? 데카르트는 증명된 신의 현존에로 나 있는 길을 걷는다. 그의 신존재 증명을 여기에서 설명하는 것은 단념해야 할 것이다. 그 것은 미묘하고 복잡하다. 나는 단지 데카르트에 관한 질송의 중 요한 저술들에 의존해서 방법적인 언명에 그치고자 한다. 스콜라 철학의 전통적인 신존재 증명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발견되는 것처럼 현존하는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세계의 최종적인 원인으로 서의 신을 묻는다. 데카르트는 그렇게 물을 수 없다. 그는 심지 어 곧바로 세계 자체를 회의한다. 세계의 존재가 그를 신에 대한 확신에로 인도하지 않는다. 반대로 신의 존재가 그로 하여금 세 계의 존재를 확신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가 이전에 이미 가 지고 있는 것은 다만 자신의 존재에 대한 앎뿐이다. 따라서 그는 자아를 거쳐가는 도상에서만 신을 확신하게 될 수 있다. 이것은 특이하게 근대적인 사태이다. 내가 놓여 있는 세계가 나의 현존 재를 보증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보증은 이미 내게서 사라졌 으며, 내가 세계를 다시 발견하게 되면 나는 그것을 나의 자기 스스로를 아는 사유의 대상으로서, 그러므로 내가 조종할 수 있 는 객체로서 발견하는 것아다. 데카르트는 이후의 많은 사람들처럼 자아에서 세계에로 이르는 이러한 도상에서 신을 건너뛰어 빠뜨릴 수 없었다. 그는 자신 속 에서 발견하는 신의 관념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이 관념이 오 로지 그것이 표상하는 것인 신이 존재한다고 할 때에만 가능하다 고 추론한다. 그는 이것을 부분적으로는 가장 완전한 존재라는

단순한 개념을 이용하는 안셀무스의 사유 과정을 가지고,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인과적 논증을 가지고 추론하고 있다. 9 신의 신뢰성에 의해 보장되는 인간의 인식 데카르트가 그의 존재를 증명한 신은 가장 완전한 존재이다. 가장 완전한 존재는 완전하게 선하며 완전하게 선한 존재는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다. 강력한 사기꾼이라는 회의의 근거는 제거되 었다. 이 제 부터 는 내 가 명 석 판명 하게 dare et dis t i nc te ——-나 는 (독일어로—옮긴이) 이것을 자유롭게 명확하고 구별되는 hell und un t ersch i eden 이라고 번역한다_~ 것을 신뢰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신이 나를 속이지 않으려 한다면 오류는 어디에서 오는 가? 오류는 다만 내가 명석 판명하게 알지 못하는 생각을 승인하는 곳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 문에 명석 판명하지 않은 것을 승인할 수 있다. 오류의 가능성은 인간의 본성의 완전성, 곧 그의 자유의 결과이다. 오류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데카르트가 여기에서나 다른 곳에서 그의 선구자 를 지칭하고 있지는 않지만 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과 연결된다. 10 연장적 실체에 관한 학문으로서의 자연과학의 정초 이제 자연과학은 내가 그것을 명석 판명하게 인식하는 한 확실 하게 된다• 그러나 사유 그 자체 이의에 나는 무엇을 명석 판명 하게 인식하는가? 그것은 수학이다. 죽 자연과학이 학이 되기

위해서는 수학이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종종 이러한 사상을 그 이후의 역사적 발전에 따라 자연과학은 수학의 응용 분야이어야 한다라는 정도로 약화시켜 왔다. 그러나 내가 데카르트를 그 자신의 의미에서 엄밀하게 사 유하려고 시도하여, 이룰 위해 다시 〈규칙 Re gu lae 〉을 인용한다면 나는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의 사유의 결론에 따르면 자연 과학은 수학을 응용하는 것아 아니라 수학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 경우에만 자연과학은 명석 판명하며, 또 그 경우에만 자연과 학은 순수한 직관일 수 있다. 데카르트는 자연과학이 순수한 칙 관일 것을 바란다. 그러나 어떻게 자연과학이 수학일 수 있는가? 자연과학은 그 것이 기하학일 때 수학일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은 공간적으로 연장(延長)된 것이요 물체 Ka rp er 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체들을 취급하는 수학의 분과는 기하학이다. 자연과학이 기하 학을 포함한다거나 응용한다는 것은 그리스 시대 이후로 잘 알려 전 것이다. 그러나 자연이 철저히 명석 판명하게 인식되고, 자연 과학 자체가 수학이어야 한다면, 자연과학은 기하학적 속성들과 는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는 대상에 기하학을 단순히 응용해서는 안 된다. 자연과학은 오히려 기하학과는 다른 어떤 것이어서는 안된다. 그에 따라서 자연의 실체, 곧 물질은 연장의 속성 이의 에 다른 속성을 가져서는 안 된다. 물질은 연장적 실체, 곧 res ex t ensa 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연은 연장을 통해 정의된 실체로 서 그 이의에는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 연장 이의에 다른 속성울 갖지 않은 것을 공간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하학을 공간에 관한 학이라고 부르며 공간 안에 있는 물질을 공간과 구 별한다. 우리는 데카르트가 공간과 물질의 구별을 분명하게 부정

한다는 것을 명확히 하게 될 때에만 그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의식적으로 그는 연장 ex t ens i o 과 연장적 실체 res ex t ensa 라는 표 현을 구별하지 않고 동일한 사태에 사용했다. 공간은 물질이고 물질은 공간안데, 왜냐하면 물질은 연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렇기 때문에 데카르트에게는 원자도 공허한 공간도 존재하지 않 는다. 11 자연과학에서의 응용 이제 데카르트는 그의 자연과학적 직관들의 체계적 정초를 시 도할 수 있다. 우리는 새로운 단계에서 우리의 두번째 정류장의 대상을 만나 보게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달려온 것은 하나의 원이기 때문이다. 연장되어 있을 뿐 그 이의에 아무 것도 아닌 물질에 관한 데카 르트의 이론은 현대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압축이 불가능한 매체 의 유체동력학 H y drod y nam i k 으로 된다. 그는 예를 들면 그의 천 문학적 소용돌이 이론을 그렇게 정립한다. 빈 틈이 없이 연장된 압축이 불가능한 연속체가 운동하는 것, 그러므로 하나의 공간 부분에서 다른 공간 부분으로 이행해 가는 것은 이전에 공간의 이 다른 부분에 있는 물질을 다론 곳에로 밀어냄으로써만 이루어 질 수 있다. 이 밀쳐내진 물질은 다시 다른 물질을 옆으로 밀어 내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적은 공간들에서의 어떠한 운동도 더 큰 공간에서의 운동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무한이 계 속되든가 아니면 순환한다. 만일 운동이 순환하는 것이라면 그것 은 소용돌이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한한 모든 운동은 소용돌이 운동이다. 태 양계의 운동도 또한 소용돌이 운동이다. 물론 우리가 만약 고체의 존재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유체동력

학을 가지고서는 곤란하다. 데카르트가 여기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의 견지에서 보면 환상적이다. 뉴턴 이전의 그는 아 직 역학의 올바른 법칙을 알지 못했다. 그는 큰 물체는 모든 작 은 물체를 전혀 방해받지 않고서 앞지론다는 (잘못된) 충돌 법칙 울 가정하였다. 여기에서 〈 물체 Kor p er 〉 는 통일적인 운동 방향을 가진 모여 있는 물질덩어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미세한 입 자로 된 매체가 방해받지 않고 분할되지 않은 채 통과할 수 있는 좀더 거친 물체를 가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사실상 원자론 울 도입하였으며 물체의 속성을 설명하는 데 이를 사용한다. 12 육체와 영혼의 관계 영혼과 사유――_이 두 개념은 데카르트에게는 동의어이다 一—는 사유하는 실체 res co git ans 로서, 물질은 연장적 실체로서 규정된다. 이 둘은 어떻게 관계하는가?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 문제에서 그의 철학이 난파된다. 데카르트는 동물들이 자동기계라고 가르친다. 그는 사유와 영 혼을 동치시킴으로써 자기 운동의 원리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인 영혼 개념을 내던져 버렸다. 그러나 그는 동물에 대해서는 사 유를 부정한다. 우리가 동물의 운동을 영혼의 체험으로 돌린다면 동물을 오해하는 것이다. 동물은 압력과 충돌의 기계적 인과법칙 이의에는 아무 것도 작용하지 않는 정교한 물질적 기계이다. 이 러한 사상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 사상은 자연과학적 생리 학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오늘날의 의학분과가 다루고 있는 것의 대부분의 출발점이다. 그밖에 데카르트 자신은 아마도 수학적 문 제를 푸는 것보다는 동물을 해부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듯하며, 그 자신의 증언에 따르면 형이상학보다도 수학 문제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나는 나를 사유하는 존재로 안다. 동시에 나의 육체와 동물의 그것과의 가까운 유사성을 오해해서는 안된 다. 이둘은 어떻게 관계되는가? 데카르트는 이 문제에 대한 대답과 씨름하다 죽어버렸다. 이것 을 포함하고 있는 책은 미완성된 채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대답의 기본 사상을 알고 있다. 인간의 육체는 동물의 그것과 같이 자동기계이다. 오직 한 곳 에서 육체는 영혼의 명령을 받아들이고 인상둘을 영혼에 전달한 다. 데카르트는 이 장소로서 뇌에서 유일하게 짝이 없는 기관인 송과선을 선정한다. 여기로부터 체액은 영혼의 명령을 전달하며 , 또한 체액은 여기에서 조정하는 영혼의 영향을 받아서 움직인다. 두번째 선회 두번째 선회에서 우리는 결과들의 비판으로부터 기초의 비판으 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역순으로 각 정류장들을 고찰하고자 한 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지 결정적인 다섯번째의 정류장, 곧 전리 개념까지만 되돌아 갈 것이다. 12 육체와 영혼 송과선에 관한 이론은 여러 가지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며, 그것 도 정당한 근거에 의해서 그러했다. 이 이론은 궁여지책이다. 우 리는 데카르트가 영혼과 육체가 어떻게 연관 Zusammenh 섰 n g en 되 어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고 인정해야만 한다. 심지어 우리는 〈연

관 h 섰 n g en 〉 이라는 것이 그것들의 〈 함께 속함 Zusammen g ehoren 〉 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동사인지 어떤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송 과선에 관한 이론은 동물은 지각이 없다는 이론과 마찬가지로 불 합리하다. 그러나 근본 단초의 빈 톰이 전혀 가려지지 않은 채 나타나도록 만드는 불합리한 결론을 그가 끌어내는 것은 위대하 고도 강철 같은 그의 사유의 일관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렇게 무언가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위대한 사상가이지 않으면 안된 다. 11 (그리고 3) 연역적 자연과학 그가 철저한 일관성을 가진 구조로서 구상했던 것은 인과적 자 연과학이다. 여기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인식이 다. 바로 그 때문에 그에게는 힘이 중요하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통찰된 사물에 대한 사유의 지적인 힘과 정신들에 대한 보이지 않게 생동하고 있는 사상가들의 힘에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그러 나 그는 인과적 자연지식이 얼마나 엄청나게 의학과 기술을 풍요 롭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자연을 완전히 통찰하는 까닭에 자연울 정복하게 될 시대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물리학자들에 있어서는 데카르트의 학문에 있 어서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 죽 엄밀한 연역이 가장 의문스러 운 것이다. 그의 개별적인 착상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관심을 끌지만, 이미 말한 바 있듯이 그의 물리학의 연역적 구축 은 갈릴레이와 뉴턴의 업적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저 급한 수준의 순수한 공상으로서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그 는 수학적인 엄밀성을 요구하였고 정량적인 공식화에도 거의 이 르지 못한다. 그가 한 인간의 삶 속에서 자신의 머리로부터 300

년 전부터 서양 문명권 전체의 노도와 같은 끈질간 협동적인 연 구가 아직도 완성시키지 못한 건물을 구축하려고 했던 것은 그의 커다란 과오였다. 물론 여기서는 아마도 명백한 한 개인의 영웅 주의가 그가 그 입구에 서 있는 시대의 통찰하기 어려운 영웅주 의를 미리 보여 준다 할 것이다. 10 연장적 실체 이 불충분한 연역의 근거는 무엇인가? 무엇이 이 근거에 잘못 된 신뢰를 제공하는가? 우리는 이 근거의 한 단계를 자연을 연 장적 실체 res ex t ensa 로서 파악하는 불충분한 자연 개 념 에 서 발견 할수 있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연장적 실체의 개념을 삼중적으로 비판할 수 있다. 첫째, 연장 ex t ens i o 은 연장된 것 ex t ensurn 에 어떠한 관계를 맺 고 있는가? 여기에는 어떤 속임수가 있다. 첫번째 선회에서 나 는 이 속임수를 내 정식화를 통해 드러내지 않고 덮어 두었다. 이제 나는 여기에서 이 속임수를 먼저 소용돌이 치는 급류의 구 체적인 상을 통해 마치 내가 보고 있는 것처럼 여러분에게 보이 겠다. 데카르트는 분명히 공간과 물질을 동일시한다. 그렇다면 물질이 움직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움직임에 따라서 물질은 장소를 바꾼다. 그러 면 공간적 인 어 떤 것 인 장소는, 그것 자체가 물질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데카르트는 이런 난점을 느 끼고는 이 난점을 교묘한 정의를 통해서 피하려고 시도한다• 나 는 그가 단지 이 난점을 은폐하였고 물질의 운동에 관한 그의 이 론이 물질과 순수 연장의 동일시 Gle ic hse t zun g에 모순된다고 생 각 한다. 내게는 여기에서 그가 엄격한 연역을 통해서 정교하게 비

약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연장의 개념은 수학의 본질에 대한 데카르트 자신의 통 찰로부터 판단하면 너무 협소한 것이다. 자연과학이 수학이어야 만 한다고 요구함으로써 그는 자연과학이 기하학이어야 한다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 규칙 Re gu lae 〉 에서 그는 기하학이 본래적인 수학의 한 의복일 뿐이라고 가르쳤다. 질서와 척도에 대한 추상적인 해석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것의 수학적 무기가 추상적 대수학인 오늘날의 물리학에 훨씬 더 가까이 서게 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물체의 연장성은 훨씬 심오 하고 직관할 수 없는 구조의 전경관점 Vorder gru ndas p ek t보다도 훨씬 더 분명하게 중시된다. 물론 17 세기의 사상가에게 오늘날의 물리학 개념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할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연장성이 자연의 수학화에 있어서 첫번째 대상으로 나타났다. 그 러나 우리는 그러한 일에서 그가 얼마만큼이나 연역하지 못하고 소박하게 받아들였는지를 그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분명히 알 고 있다. 우리가 오늘날 자연의 통일 수학에 관한 그의 위대한 사상을 정 당하게 평가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수학의 추상적 본질 에 대한 그 자신의 깊은 통찰에 그가 했던 것보다 더 가까이 다 가가야만 한다. 셋째, 존재, 실체 res 의 개념이 논의되지 않고 남아 있다. 데카 르트는 그의 실체들을 각각 그가 찰 알고 있는 성질을 가지고 특 칭짓고 있다. 물질은 연장되어 있는 이의에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사유하는 것이고 그 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1) 이것이 허용 된 방법인지는 우리가 실체라는 개념 자체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 하는지를 물을 때 비로소 판단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데카르트 1) !ch bin denkend und sonst nic h ts .

비판을 가지고 말한다면 이것은 더 이상 어떤 탁월한 존재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다. 그것은 그 리스 철학에서 이미 싹이 튼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문 제는 어쩌면 대답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데카르 트의 구상은 이미 이 문제의 가능성마저 시야에서 제거하였던 것 이다. 9 명석 판명한 인식 데카르트는 연장적 존재에 대한 이해가 명석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많은 모호성을 발견했다. 그는 단지 이 러한 개별적인 내용에서만 잘못을 저질렀던가, 아니면 인식이 ―자연에 대한 인식이든 정신에 대한 인식이든 아니면 그 어 떤 대상에 대한 인식이든 간에 -수학적 직관의 두명성을 가져 야만 하고 또 가질 수 있다는 그의 계획 자체가 잘못된 것인가? 그의 확실성 개념은 신앙인가-죽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확신할 만한 증명에 의해서 정당화된 신앙인가 아니면 오만 H y br i s 인가? 사유나 경험의 다른 방식들에게 열려 있는 현실이든지 아니면 은폐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든지 간에 어쨌든 통찰 가능한 확실성 의 형식 속에서 인식에 대해 폐쇄된 현실성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과연 있을 수 없는 것일까? 갈릴레이와 뉴턴의 실천과 감각주의 자들의 이론은 데카르트의 선험적 구성에 경험적 자연과학과 대 립시킨다. 파스칼은 기하학적 정신 espr i t g eome t riq ue 과 섬세함의 정신 es prit de fi nese 을 구별하고 있으며, 비코 V ic o 는 수학적 분석 과 정당하게 개연성을 가지고 작업하는 종합적 직관을 구별한다. 데카르트는 영혼에 대한 자기의 정의를 구출하기 위해서 영혼은

참 속에서도 끊임없이 사유한다고 주장해야 했던 반면 , 라이프니 츠는 무한소를 거쳐서 무의식의 현실성에 도달한다. 데카르트의 철학적 비판자들의 대부분은 오늘날까지, 그들이 그로부터 그의 엄밀과학의 개념을 소박하게 받아들이고 그 이의 에 단지 사유의 다른 방법만을 확립 하고자 하는 한 데 카르트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극복되어야 할 분열을 새로운 차원에서 반복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데카르트의 방법론에 대 한 비판은 엄밀과학 자체에로 파고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이 세기의 이론 물리학의 생성을 함께 체험한 사람이라면 물리학 에 있어서도 우리가 전적으로 분명한 개념을 가지고 시작할 수 없고 개념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잘 사용하는 정도에 따라서 그만 큼 날카로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탐구의 선봉에는 항상 두 종 류가 존재해 왔다. 그 하나는 새로운 실증적인 지식이 모아져 이 미 준비된 개념들로 표현되는 선봉이고, 다론 하나는 기초가 더 깊이 놓여져 개념들 자체가 비판되는 선봉이다. 나는 기꺼이 닐 스 보어 N. Bohr 의 표현을 안용하고자 한다. 그는 스키장의 숙소 의 그리 깨끗하지 못한 상태에서 컵을 닦고는 말하기를 〈더러운 물과 더러운 수건을 가지고 더러운 유리컵을 깨끗하게 닦을 수 있다는 것을 철학자에게 말한다면 그는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이 다. 〉 그러나 실제로는 과학이 이러하며, 이것을 믿지 않는 철학 자는 데카르트이다. 8 신존재 증명들 데카르트의 신존재 증명들은 우리가 그에 대하여 곰곰이 하나 씩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을 제의해 보면 기본적으로 순환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들은 신에 대한 직관을 말하지 않는다. 데카

르트는 신비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신적인 것에 대한 직관이 아 니 라 신의 관념 Vors t ellun g으로부터 출발한다. 데 카르트는 루터 가 신에 대해 내가 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신의 손 안에 있다 고 하는 것처럼 신을 알지 못한다. 데카르트는 신을 명석 판명하 게 증명한다. 그러나 그가 명석 판명하게 파악하는 것이 참되다 는 것을 그는 무엇으로부터 아는가? 그것은 증명된 신의 신뢰성 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순환이다. 이러한, 이미 그 당시에 이루어전 비판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잘못된 구성의 근거는 무엇인가? 데카르트는 확실성에 이르는 다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는 오로지 신 안 에만 확실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웠고 또 그 스스로 경험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확실성 자체가 확실성을 가지고 증명될 수 있 는 것은 아니다. 하인리히 숄츠 He i nr ic h Scholz 는 언젠가 다음과 같이 매우 훌륭하게 말한 바 있다. 〈 안셀무스에게 있어서 신증명 은 신의 부름에 깊이 파묻혀 있다. 죽 당신인 신이 당신이 존재 한다는 것을 내가 알도록 나를 비추어 주소서 ! 그러나 데카르트 는 신을 수학적인 전리와 같이 증명한다 〉 단지 안셀무스의 단초 만이, 또한 방법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오직 그만이 기독교인이 말하는 것처럼 신을 살아 있는 신으로 이해한다. 7 의심 데카르트는 충분히 의심하였는가?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 다. 물론 나는 첫번째 선회에서 그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 장 깊은 의심을 하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만족할 만 큼 의심을 견지하였는가? 그는 자기 자신의 의심을 개념적으로 적절히 사유할 수 있었는가? 나는 나를 의심하는 자로 안다. 의

심한다는 것은 사유한다는 것이다. 나는 사유하고 있다. 나는 사 유하는 실체이다. 데카르트는 사유가 실체라는 것을 어디로부터 알며, 실체가 무엇인지를 무엇으로부터 아는가? 그는 자기의 개 념들이 표현하는 것의 실존을 의심한다. 그는 이러한 개념들의 의미에 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의심, 사유, 존재 그리 고 실체가 본래 무엇을 뜻하는지롤 적절하게 알고 있는가? 그는 이 질문이 더 이상 제기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즉 이러한 개 념들은 그것들에 그의 정신을 향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 하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주장이다. 이 주장은 틀릴 수 있다. 어쩌면 여기에서 그는 자신이 서 있는 철학적 전통을 한번 도 파헤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기의 개념들의 의미에 대해 의심했더라면 그는 개념들 전반 의 의미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을 것이며, 이는 그의 확실성 개념 에 대한 의심을 초래했을 것이다. 5 수학의 본질 그러나 적어도 수학에는 확실성이 존재하지 않는가? 문제는 어떤 대가를 치루느냐는 것이다. 수학의 대상이 질서와 척도 혹은 구조라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 의 구조냐고 질문한다. 구조는 존재하며,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 도 존재한다. 이것들은 서로 어떻게 관계하는가? 이 문제는 철 학적 전통에서 말한다면 보편문제 Unversa li enp roblem 에 속한다. 이 문제는 보편과 특수의, 본질과 사물의 관계에 대한 문제들 가 운데 한 경우이다. 데카르트는 이 문제를 불안정한 방법으로 회피한다. 바로 이러 한 회피가 그의 물질개념, 다시 말하면 연장과 연장된 것과의 비

구별 N i ch t un t ersche i dun g의 가능 조건 이 다. 구조를 구조를 가지 고 있는 것으로부터 구별하지 않을 경우에만 물리학이 수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보편문제에 대한 전통적 이해를 가지고서 근대 물리학의 논리적 구조를 정당하게 다룰 수 없다는 것은 사 실일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데카르트는 이 문제에 침묵함으로써 근대 물리 학의 논리 적 구조를 올바르게 평가하지 못한다. 그러나 먼저 이 문제가 논구될 때 비로소 우리는 확실성이 물리학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수학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롤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으로 나는 비판적인 선회를 마치고자 한다. 이제 뒤따라 와야만 하는 것은 오늘 강의의 과제일 수 없다. 데카르트가 근대 에 있어서 전형적으로 시도했고 우리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 없 는 것으로 수행한 것은 세번째의 건 완결 짓는 선회에서 개별적 으로 수행되어야만 할 것이다. 여러분들, 특히 젊은이들 가운데 몇 사람은 어쩌면 다음 학술년에 나와 함께 이 문제를 생각할 기 회를 갖게 될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준비되어 있으며 또한 이 를 반긴다.

괴테의 자연과학에 있어서 몇 개의 개념들 ―로버트 뵈링거, 우정의 선물에서 괴테의 근대의 자연과학 너 자신을 전체에 있어서 고양시키고자 한다면, 너는 그 전체를 가장 작은 것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 언어 전달의 가장 작은 단위는 단어이다. 과학에서 그 단어는 개념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괴테의 자연과학이라고 하는 전체 중 의 어떤 것을 그의 개념들 가운데 몇 가지에서 읽어내고자 한다. 그렇다면 괴테의 자연과학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우선 한 인간인 괴테라는 시인의 작품 이다. 한 인간의 본질이 각각 사람의 손금에서 고유하게 표현되 는 것처럼 우리는 괴테의 과학의 모든 개념들 속에서 괴테롤 다 시금 발견한다. 어쩌면 (나라고 하는) 한 물리학자를 어렸을 때 부터 인간을 바라볼 수 있도록 가르쳤고 무엇보다도 인간이 어떤 것일 수 있는가가 특히 시인 속에 구현되어 있다고 알았던 사람

에게 (나라고 하는) 이 물리학자가 이 과학에 대한 고찰을 선물 로 드려도 좋을 것아다. 물론 괴데는, 만약 우리가 그의 과학을 괴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사용한다면, 우리를 꾸짖울 것이다. 그는 그 의 인격과 시적인 작품에 대한 어떠한 관계도 넘어서서 그 자체 로 타당해야 할 인식을 추구했다. 그는 자기의 과학을 근대의 객 관적 자연 인식의 사슬 속에 분리할 수 없는 부분으로 끼워놓고 자하였다. 그가 이러한 것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장소들, 곧 주관적인 색 채에 대한 탐구나 인간의 사이턱뼈 (捕間骨, Zwi sc henkie f e rk no-chen) 의 생 성 에 대 한 연구, 그리 고 그의 변 형 Meta m orph ose 개 념 안에서의 전화론의 전조(前兆)에 관해서는 여기에서 자세히 언급 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들의 간단하고 임시적인 관찰의 출발점은 실패의 장소여야 할 것이다. 종종 그런 것처럼 실패는 논쟁을 통해 드러난다. 괴데는 지배 적인 색채론에 대한 그의 비판에서 뉴턴의 용어와 시도의 분명한 의미를 사십 년간이나 오해하고 있었고 리히텐베르크 L ic h t enber g 1> 와 같은 그토록 현명하고 사리에 밝은 대화 상대자의 말을 들으 려고 하지 않았다.

도대체 그토록 거대하고 포괄적인 정신의 소유자가 어떻게 그 러한 잘못을 저지를 수 있었는가? 나는 단지 하나의 대답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죽 그는 잘못을 저지르려고 하였기 때문에 잘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결정적인 진리를 단지 분노-이것의 표현이 바로 이러한 오류인바-를 가지고서만 방어할 수 있었

1) Lic h te n berg, Georg Chris t o p h( 1742-1799). 괴테와 동시대의 수학자, 천문학자이며 실험물리학자이기도 하다. 괴팅겐에서 수학, 천문학, 자 연과학사를공부했다 .

기 때문에 찰못을 범하고자 했던 것이다. 괴테의 보고 생각하는 방법은 하나의 전체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방법은 근세의 자 연과학에서 더 포괄적인 전체와 만나게 되었다. 괴테는 그의 과 학을 기꺼이 이 커다란 전체에 끼워 맞추려고 하였으나, 뉴턴과 갈등하는 가운데 그가 그에게 결정적인 것을 희생시키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과학을 전체에 끼워 맞출 수 없고 또 그렇 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괴테의 논쟁이 성과롤 거두지 못했다는 것은 자연과학을 그 고 유의 본질에 대한 더 나은 이해에로 전향시키고자 하는 그의 희 망이 환상에 근거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뉴턴은 근대 과학의 본 질을 괴테보다 더 찰 이해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물리학자는 자 신의 전공 분야에서 괴테의 제자가 아니라 뉴턴의 제자이다. 그 러나 우리는 이 과학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일정한 방법적 수 행 방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 수행 방식의 위험과 한계에 관해서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괴테의 과학에서 지배적인 자연과학에서와는 다른 것에 대해서 물어 볼 동기를 갖는 것이다. 우리는 아래에서 괴테의 과학의 몇 가지 가장 중요한 일련의 개념들을 한번 두루 살펴보고자 한다. 이렇게 해서 이것들의 어 떤 관계가 나타날 수 있게 되겠지만, 물론 그것은 하나의 관점에 서만 그러할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다음의 명제들에서 미리 암시하고자 한다. 우리는 근대의 방법적 의식이 가령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 릴레이, 뉴턴이라는 이름에 의해 표현되는 계열에서 점점 더 분 명하게 발전시켰고, 오늘날에도 비록 형이상학적으로는 아니지만 아마도 방법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사유 방법을 근대의 자연과학 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유 방법을 우리는 더 상세하게 기술하

지는 않지만, 그것을 이미 그 윤곽에 있어서 잘 알려져 있는 것 으로 전제한다. 우리는 괴테의 과학을 이를 테면 내적으로 연관 된 사유방식으로서 근대의 자연과학과 구별함으로써 기술하고자 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죽 괴테와 근대 과학은 그것들 간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공 통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근거를 풀라돈과 감각이 라는 정식을 통해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대화는 양자가 이 근 거 위에서 상이한 건물을 세우게 되면 난파하게 된다. 풀라본적 이데아는 자연과학에서는 보편개념으로, 괴테에서는 형태 Gesta l t 로 된다. 다시 말하면 감각세계의 이데아에의 참여는 자연과학에 서는 법칙들의 타당성으로, 괴테에서는 상칭의 현실성 W irk li ch - keit des S ym bols 으로 되는 것 이 다. 물론 이 러 한 단순한 도식은 양편 모두에 무리를 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도식을, 어쩌면 나중 단계에서 극복할 수 있기 위해 일단 실 행해 보기로 하자 . . 감각들 감각들이 너로 하여금 잘못된 것을 보게 하지 않는다고, 네가 감각들을 믿을 수 있는 것은, 너의 지성이 너를 깨어 있게 할 때이다. 이것은 괴테와 근대 과학을 결합시켜 주는 경험에 대한 고백인 가? 그것은 그러면서도 그렇지 않다. 시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 다.

산선한 눈빛으로 기쁘게 바라보고, 풍성한 세상의 목초지를 확실히 그리고 유연하게 살아가시오. 근대 과학에 있어서는 과학자가 감각적 경험을 한다는 것과 그 와 다른 모든 것은 이 경험을 원칙적으로 반복할 수 있다는 것으 로 충분하다. 결정적인 것은 경험의 행위가 아니라 그 경험의 행 위 가 우리 에 게 가르쳐 주는 사태 Sachverhal t이 다. 그리 고 사태 자체는 개별적인 경우로서가 아니라 그 유형 T yp us 이 중요하다. 죽 〈 경험 〉 은 과학에 있어서 바로 그것이 반복된다는 사실에 의해 서 감각인상으로 된다. 그런데 반복가능한 것은 대치 가능한 것 이다. 괴테의 과학이 뿌리 박고 있는 감각경험은 그의 고유한 것이고 대치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자기의 성과를 기술할 때 그에게는 독자들을 자신의 고유하고 대치할 수 없는 봄 Sehe 맙브로 인도하 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물론 훌륭한 과학자 는 누구나 봄과 보며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롤 잘 알 고 있다. 생동하는 인간들 사이의 어떠한 대립도 우리가 진리에 머무르고자 한다면 무조건적으로 파악되어서는 안 된다. 다른 한 편으로 차이점이 분명히 파악되는 것이 모든 참된 이해의 조건이 다. 괴테에게는 감각적 경험 그 자체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어떻게 감각적 경험을 하였고 경험하고자 했는지를 구체화해야 할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위에서 인용한 구절이 말 해 주고 있다. 괴테의 본질에서 가장 유동적인 것과 가장 견고한 것, 순간의 매혹적인 느낌, 수집하고 정리하려는 성향, 이것들은 확실하고 유연한 삶 속에서 그리고 감각적 경험의 보고를 매일같이 중대시

키려는 줄거운 관찰 속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 애쓴다. 그가 얼마 나 많은 꽃과 나무를 여행 중에 관찰하였으며 집에서 가꾸었던 가 ! 얼마나 많은 뼈 구조를 관찰하고 만져 보았던가 ! 자연에 대한 모든 관찰에서 색채의 현상들이 어떻게 그 자체로 그에게 나타났으며, 전쟁의 소란 속에서이든 디반에 대한 사랑의 시 속 에서이든 그것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관찰되고 기술되었던가 ! 단 지 행복한 눈만이 이 풍요로운 모든 것을 얻는 것은 아니다. 다 시 말해 거닐면서, 말을 타면서, 엎드려 기면서 그리고 수영하면 서 그의 육체는 자연을 체험했던 것이다. 감각적인 모든 것이 얼 마나 사랑 가까이에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괴테를 이 해할 수 있겠는가? 구별과결합 무한 속에서 너를 발견하기 위해 분별해야 하고 그러고는 결합해 야 한다. 그러한 까닭에 나의 날개 달린 노래는 구름을 분별하는 사람에게 감사한다. 이 구철은 영국의 기상학자 하워드에게 적용된다• 이 구절은 구별과 결합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구별이 먼저 나타난다. 감각적 세계의 원천은 무전장하고 무제한적이다. 우리는 어떻 게 이러한 세계에서 우리를 발견해야 ( 할 것인가? 우리는 이 세 계를 나누어야만 한다. 이 나눔은 표제를 붙이는 것과 분류 Klassif izie r en, 곧 괴테가 그 공헌을 높이 평가할 수 있었던 활동 으로부터 시작한다. 올바로 이루어전 표제는 자의적인 것이 아니 다. 그것은 실제적인 것의 어떤 질서를 반영한다. 그리고 또한

여기에서 무리한 견강부회의 잔재가 아직도 붙어 있을지라도, 그 표제는 만일 우리가 무한 속에서 우리를 발견해야 한다면 유한한 존재로서의 우리가 가야만 하는 도정의 첫번째 단계이다. 그러나 구별 다음에는 결합이 뒤따라야만 한다. 그렇다, 구별 자체가 항상 이미 하나의 결합이다. 내가 수많은 구름의 형태들, 광물들, 식물들, 동물들_이것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다론 것과 같지 않은 것들_울 구분하고자 한다면 나는 유사한 것 울 결합시켜야 하며, 그것을 유사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구별해야 만 한다. 오직 결합할 수 있기 때문에만 나는 구별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가? 형태와 법칙 내가 결합하는 것의 유사성은 형태에 있다. 괴테의 자연과학은 그 대 부분이 비 교하는 형 태 학 Mor p holo gi e 이 다. 그러 나 이 형 태 라 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감각적으로 대하는 모든 개별적인 실제들을 나는 하나의 형태라고 부를 수 있다. 곧 그것들은 오늘 피고 내일 시들게 될 이 하나의 꽃이며, 생각할 수 없는 시간 이래로 그 자리에 서 있 는 이 하나의 산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일 두 개의 사물을, 그것들이 동일한 형태 —·— 가령 나선의 형태, 혹은 수정의 형태, 혹은 인간의 형태 -~롤 가지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비교한다면 그 형태라는 것은 개별적 인 사물과는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이 형태들의 비교를 가능 하게 하는 형태란 무엇인가? 근대 자연과학의 통속철학은 이 문제에 대해서 아마도 〈형태

자체 〉 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죽 형태 자체는 사물 이 아니고 한 사태, 다시 말하자면 상이한 사물들이 일정한 관점 하에서 유사한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는 것의 이름이라는 것이 다. 그러나 이와 같이 〈 존재한다 〉 와 같은 말의 다의성에 대한 관 심의 정당한 환기는 자연과학의 본래적인 대상에 대한 안목을 바 꾸게 한다. 모든 자연과학은 본래 우리가 다양한 사물을 정당하 게 유사한 것으로 판단하게 하는 것의 근거를 밝히려고 한다. 근대의 지배적인 자연과학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즉 탐구의 본래적인 대상은 개별적인 경우가 아니라 법칙이라는 것 이다. 유사한 개별적인 형태들은 항상 동일한 법칙이 성립되기 때문에 발전된다. 〈 유사한 〉 을 〈 동일한 〉 으로 첨예화할 가능성은 이 과학의 사유 방식에 있어서 법칙의 인식이 형태에 대한 인식 보다 더 깊이 파고들어간다는 것을 보여 준다. 형태와 관련하여 서 다양한 사물들은 기껏해야 서로 유사할 뿐인데, 왜냐하면 시 초와 주변 세계의 상이한 조건들이 완전히 동일한 발전을 배제하 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칙은 그것의 본성상 항상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의 개별적인 명제로서 표현될 수 있으며, 그 렇기 때문에 법칙의 수많은 적용에 있어서 언제나 같은 종류의 것일 뿐만 아니라 동일하게 똑같은 것이다. 죽 그것은 본질적으 로 하나 E i nes 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비교하는 형태학은 근본학이 될 수 없 다. 그것은 단지 보편적 법칙에 따른 인과 분석에서 정점에 다다 르는 발생적 연관들에 대한 탐구의 전 단계일 뿐이다. 물론 17 세 기에서 19 세기까지의 과학은 법칙 자체를 오늘날과는 달리 설명 하고자 시도했다. 그 당시에는 법칙을 가령 압력과 충돌을 통한 기계적 필연성의 표현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다시 말하자면 법칙 자체의 언명에 머무르고자 하지 않고 물질의 본질에 대한 다소간

의 분명한 표상으로부터 이 법칙에 대한 언명을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이를 단념했으며, 이룰 테면 모든 사 전의 형태가 갖는 보편적인 규칙을 부여하는 법칙을 넘어서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최근의 물리학의 이러한 도상에서 괴테에 접근하게 될지 어떨지를 열어 놓아야만 한다. 먼저 우리는 괴테의 과학과 지금까지의 모든 과학과의 차 이를 파악해야만 한다. 괴테에 있어서는 형태가 법칙에 뿌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법칙이 형태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형태와 이념 「이탈리아 여행」은 1787 년 4 월 17 일 팔레르모로부터 다음과 같 이 보고하고 있다. 〈 내가 이전에는 단지 큰 통나무 화분이나 작 은 화분에서, 그것도 일년의 대부분을 유리창 뒤에서 볼 수 있었 던 수많은 식물들이 여기에서는 기쁘고 성성하게 자유로운 하늘 밀에 서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명을 완전하게 성취함으로써 그것들은 우리에게 더 분명해진다. 그렇게 여러모로 새롭고 새로 워진 형성물을 대하면서 내게는 내가 이 무리들 가운데서 원식물 U rpfl anze 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낡은 망상이 다시 떠올 랐다. 물론 그러한 원식물은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 고 만약 식물들이 모두 하나의 표본 Mus t er 에 따라서 형성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디에서 이런 저런 형성물이 식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인가?〉 과학이 결국 기꺼이 〈식물의 형태〉 〈식물의 개념〉 〈식물의 본 질〉이라는 제목 가운데 하나로 추상적으로 사유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여기에서는 실제적인 식물로서 표상된다. 두 개념 영역의 혼돈 속에——이 혼돈이 여기에서는 소박하게 혹은 나중에 그때 그때마다 역설적으로 표현될 수 있을지라도-괴테의 자연과학 의 근원적인 직관이 숨어 있다 . 그가 자신이 본 것에 관하여 분 명하게 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것, 그리고 그가 많은 것을 우리에 게 생각하도록 남겨 놓았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괴테가 쉴러에게 원식물의 사상을 설명했을 때 쉴러는 〈 그것은 경험이 아니고 하나의 이념이다 〉 라고 말했다. 이 대답에서 괴데 의 소박성은 깨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칸트학파인 쉴러는 그에게 겉보기에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양자택일을, 그러나 괴테의 자연과학의 정신 전체가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되 었던 양자택 일을 강요하였다. 괴테는 원식물이 과학적 경험의 대상이 아님을 인정해야만 했 다. 식물학자들이 제시할 수 있는 식물 가운데는 이 원식물은 존 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언젠가 한번 발견될 수 있을지라도, 그리 고 진화론적 의미에서 먼 지질학적 선사시대에 있을 수 있다 할 지라도, 그것은 오늘날 경험이 아니라 가정이다. 그러나 쉴러는 식물학자가 괴테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보다 그를 더 잘 이해하 였다. 쉴러는 원식물을 가정이 아니라 하나의 이념이라고 불렀 다. 이 말을 우리는 괴테가 쉴러에게 동의할 수 있었을 때 그것 을 이해해야 했던 것처럼 이해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 말의 이해 를 위해 그리스어에 있어서 이 말의 원천적인 의미에 가능한 한 가까이 접근해야만 한다. 이념은 봄 Sehen , 이데인i 8ccv 에서 나온 것 이 고 형 상 Bil d 혹은 형 태 Gesta l t 또는 직 관 Anschuun g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괴테는 원식물을 현실적인 것으로 보았다. 만일 우리가 그가 원식물을 내적인 눈으로 보았다고 말한다면 이는 이 원론에로의 도피이다. 오히려 나는 그가 원식물을 사유하는 눈으

로 보았다고 말하고자 한다. 죽 그는 이룰 육체를 갖춘 살아 있 는 눈으로 보았던 것인데, 왜냐하면 그는 사유하면서 볼 수 있었 기 때문이다. 원식물은 그에게 있어서 모든 개별적인 식물들에 아주 생생하게 나타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마치 수정을 수정으 로 만드는 것이 수정의 모든 조각에서 파악될 수 있는 것과 마찬 가지였고, 혹은 시인과의 비유가 허용될 수 있다면, 사랑하는 자 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그의 일거수 일투족과 모든 필적에서 아주 생생하게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렇기 때문에 괴테는 디 반Di van 에서 사랑받는 사람의 이미지로 자연 자체를 그리고 있 다. 수천 가지 모양으로 너를 숨길지라도, 가장 사랑하는 너를, 나는 죽시 알아차린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시적인 어조로 말해서는 안될 것 이다. 이념에 관해서 말할 때 쉴러는 겉으로 보기는 시적으로 말 했지만, 전실로는 어떤 다른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그에게 원식 물은 하나의 이념적인 것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실세계에서 결코 적절하게 실현될 수 없는 전리이다. 경험적 현실 속에서 어 떤 것도 이에 해당되는 것이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념의 가치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괴테는 그에 있어서 통일적인 것 울 분열시키는 이 구별을 반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칸트의 인 식론적 의미의 이념은 인간 주관성의 기획, 물론 필연적인 기획 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인식을 그리고 과학이 말하는 의미 에서의 〈자연〉을 비로소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쉴 러의 인간적인 자유의 정열이 불붙을 수 있었다. 그러나 괴테는

이러한 의미에서 전혀 자유롭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을 ·창 조하거나 극복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자연의 피조물로 서 알고 자연을 이해하고 이에 순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마지막 결정에 있어서 인간은 아마도 그의 본질에 결합되고 있을 것이고 이 본질을 더 이상 충실히 펼칠 수 없을 것이다. 그 러나 이 순간에 우리는 어떻게 괴테의 본질이 그의 자연과학을 규정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그의 본질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통 해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이 거의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 도록 했는지를 묻고 있다. 이룰 위해 다시 한번 쉴러의 대답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대답은 쉴러가 이념을 칸트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풀라톤 적인 의미에서 이해하였더라면 더 적절했을 것이다. 〈 만약 식물 둘이 모두 하나의 표본 Mus t er 에 따라서 형성되지 않았더라면 나 는 어디에서 이런 저런 형성물이 식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인 가?〉라는 괴테의 결론은 풀라톤적인 결론이다. 괴데를 플라톤과 결합시키고 칸트로부터 분리시킨 것은 아마도 그 스스로가 객관 적인 것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념은 괴테에게 있어서 우리의 인식 능력의 최고의 규제적인 표상이 아니라 그에 따라 현실적인 식물들이 실제적으로 형성된 현실적인 표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테는 플라톤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 철학자는 생성과 변화 속에 있는 감각적으 로 지각 가능한 것은 참된 존재자가 아니라 단지 정신만이 파악 할 수 있는 이념의 존재에 단순히 〈어떤 방식으로i r g endw i e〉 참 여할 뿐이라고 얼마나 자주 우리를 확신시키는가? 플라톤의 입 장에서 본다면 괴테는 그의 자연의 감각성에 붙들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시인은 가상적인 모상들을 원상들로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괴테가 모든 식물의 원상을 시칠리아의 땅에서 눈

으로 보기를 바랄 때 원상들을 이전의 현존재에서 파악했다는 것 은 원상들에 대한 영혼의 상기에 관한 플라톤의 신화를 소박하게 오해한 것은 아닌가? 이러한 긴장을 우리는 풀라톤과 감각이라는 정식으로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괴테가 단지 풀라돈주의자만은 아니라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조야한 플라톤주의자인가? 플라본은 이데아론과 함께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우 리에게 남겨 놓았다. 논리학, 형이상학 그리고 수학적 자연과학 의 전통은 이데아론에서 그것들의 원천을 갖는다. 논리학에서 이 데아는 보편개념으로 되며 이념에 참여하는 사물은 개념에 속하 는 특수자로 된다. 특수자가 〈 외계 〉 에 속한다면 그것은 감각적으 로 경험될 수 있지만 보편은 〈 단지 사유 〉 될 뿐이다. 그러나 이것 은 이데아와 봄 Sehen 과의 관계가 완전히 소멸되어 버린 이데아 에 대한 일면적인 해석이 아닌가? 이데아가 아주 엄밀한 의미에 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되는 위의 것과는 대립된, 그러나 마찬가지로 일면적인 해석은 생각될 수 없는가? 결코 사 유에 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주장했던 예술가인 괴테는 아 마도 바로 논리학과 그에 따르는 과학들이 알 수 없는 것을 〈이 념의 봄 〉 으로부터 알았었던가? 보편개념에 관한 이론에 당면하여 괴테는 이를 역설을 통해 자 신을 방어한다. 보편은 무엇인가? 그것은 개별적인 경우이다. 특수는 무엇인가? 그것은 수백만 번의 경우이다.

어떤 경우도 다론 경우와 같지 않다는 것이 자명한 진리만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논리학이 보편으로서 이해하는 것, 다 시 말하자면 본질 혹은 이념이 모든 개별적인 경우에서 우리 앞 에 감각적인 것으로 있다는 것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하 나의 식물을 식물로서 본다면 나는 이로서 그 식물을 본다• 그러면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몇 개의 다른 개념들을 살펴보고 자한다. 연관 다시 한번 구별과 결합에로 되돌아가 보자. 실로 형태들의 세 계는 측량할 수 없이 무한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도처에서 연계 되어 있다. 먼저 구별된 것의 결합은 단지 실제적인 연관의 선들 을 흉내낼 nachzeic h nen 뿐이다. 분리는 인간의 정신에 있어서 필 연적인 조작이지만, 모든 단순한 분리는 인위적이다. 불연속 D i skre t e 은 단지 생각될 뿐이며, 연속은 현실성의 칭표이다. 그러므로 비교형태학은 현실적인 것의 통일성을 형태들의 연속 속에서 증명한다. 이러한 증명이 괴테의 전적인 사랑을 받는다. 그 당시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위턱의 사이턱뼈가 없다는 사실 에 의해 원숭이와 근본적으로 구별되어야만 했다. 이 얼마나 고 유하게 인간적인 것에 대한 믿음을, 그리고 생동하는 정신의 이 러한 사태를 그토록 사소한 곳에서의 물리적인 것의 연속성이 단 절된다는 것에 의해 고유하게 유물론적인 불신앙으로부터 보호하 려는 결실없는 경향인 것인가 ! 인간이 어떤 점에서 원숭인가 아 닌가를 괴테에게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 에 자연에서의 연속성에 대한 그의 믿음은 뼈에 있어서 그러한

구별이 이차적일 뿐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인간의 두개골을 어떤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서 관찰하였고, 두 개골에서 사이턱을 의부의 위덕으로부터 세밀한 접합을 발견하 였다. 변형 이념이 개별적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현상의 변화에 참여한 다. 피조물을 변형시키고, 경직되게 무장되지 않도록, 영원히 생동하는 행위가 작용한다. 참된 존재자의 엘레아 학파적인 비운동성의 깊은 의미는 헤라 클레이토스에서 연원하는 변화의 이론에 의해 그 의미가 변증법 적으로 전달됨 ti bers pi ele~ 포료써 확정된다. 그리하여 〈일자와 전 체〉 그리고 〈유언 〉 의 두 시를 연결하는 푸가 Fu g e 속에서 이렇게 나타난다. 영원한 것은 모든 것 속에서 계속해 활동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그것이 존재에서 머무르고자 하면, 무로 와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도 무로 와해될 수 없다.

영원한 것은 모든 것 속에서 계속해 활동한다. 존재에서 너를 행복하게 하라. 존재는 영원하다. 왜냐하면 법칙들은 생동하는 보물들을 보존하며, 이것들로 일체가 장식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일한 사상을 제삼의 형식으로 술레이카 Sule i ka 의 말 에서 듣게 된다. 거울이 내게 말하기를, 나는 아름답다! 너희는 말한다. 늙는 것도 나의 운명이라고. 모든 것은 신 앞에 영원히 서 있어야 하며, 내 안에서 그를 사랑한다, 지금 이 순간에. 변치 않는 것은 본질이다. 본질은 그의 모든 현상 가운데에 나 타난다. 그러나 현상이 계속해서 존재에 머무르고자 하면 현상은 본질의 현상이기를 중지한다. 바로 그 때 현상은 무로 와해된다. 덧없이 지나가는 것은 단지 바유일 뿐인데, 왜냐하면 지나가는 속에서 나타나는 본질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로지 덧없 이 지나가는 것의 불충분성 Unzurnng lich keit 속에 서만 본질은 우 리에게 나타난다. 곧 우리 존재의 충족은 이 불충분한 것이 사건 Ere igni s 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형태는 끝없는 변형 Um g es t al t un g 속에서 단지 사건이 된다. 비교형태학은 변형 Me t amor phose 에 관한 이론으로 되어야 한다. 이러한 형태의 변화는 유의미하게 되고 규칙적으로 되며 형태둘의 연속성으로 인해 스스로 시간적 형태 zeit lich e Ges t al t가 된다. 〈 법칙들은 생동하는 보물들을 보존한다.〉 형태 변화는 단 순히 생성과 소멸이 아니다. 그것은 일련의 친근한 형태들을 통 한 변화이자 상승과 하강이며 펼침과 생명을 내어줌 Darleben 이 다. 하나의 원식물, 하나의 원유기체 (原有機體), 그리고 잎은 자 신을 무수한 개별적 형태들 속에서 표출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무수한 형태들은 그것으로부터의 실제적인 변화를 통해 산출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괴데는 노년에 생물학적 진화론의 서막을 맞이하였다. 물론 괴테는 아마도 유기체의 전화에 대한 다윈의 인과적 통계적 해석을 저급한 것의 법칙을 고차적인 것에로 전이시킨 것으로 보 고 거부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그의 뉴턴에 대한 비판에 서와 마찬가지로 이에 대해서도 그는 옳기도 하고 또한 동시에 부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극성 Polar it겼t과 상승 괴테도 역시 무엇이 변형을 촉발시키는지에 대해서 묻는다. 그 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 〈자연〉에 관해 그는 만년에 이렇게 쓰 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의 충족은 모든 자연의 거대 한 두 생 장륜 (生長稽 Trie b rader) , 곧 극성 과 상승의 개 념 에 대 한 직관이다. 극성은 우리가 그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한에서 물질에 속하고, 그에 반해 상승은 우리가 그것을 정신적 인 것으로 생각하는 한에서 정신에 속한다. 죽 극성은 항존적인 견인과 반발이고 상승은 항존적인 성장이다. 그러나 물질은 정신 이 없이, 그리고 정신도 물질이 없이 존재할 수도 활동적일 수도 없기 때문에 물질도 상승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정신도 견인 과 반발이 없을 수가 없다. 그것은 결합하기 위해서 충분히 분리 하고, 다시 분리하기 위해서 충분히 결합한 사람만이 사유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글을 포함한 수많은 사상적 형태들에서 우리는 몇 가지만을 다루어보자. 극성은 인간적 파악의 오래된 도식이다. 우리가 이제 좀더 언 급하고자 하는 정신과 물질은 그 자체가 하나의 극성을 형성한 다. 괴테가 물질에 극성을 특별히 귀속시키는 경우 그는 동일한 종류의, 종종 거울에 비치는 쌍(雙)과 같은 것, 곧 전기의 양극 과 음극, 자석의 N 극과 S 극을 생각한다. 그러나 덜 대칭적인 것, 곧 남성과 여성, 빛과 어둠, 들숨과 날숨과 같은 것도 생각 하고 있다. 분명히 이 쌍둘은 인간의 고안물들이 아니다. 그러므 로 그것들의 현존 속에 수의 본질과 현실성을 우리에게 부과하는 수수께끼의 단초가 숨어 있다. 이것은 물론 괴테에게 은폐되어 있다. 물질이 그것의 호흡의 무한한 변환 속에서 순환하고 있는 것처 럼 보인다면 정신은 노력 S t reben 을 알고 있다. 정신은 본래적인 시간을 알고 있으며, 미래와 과거의 차이를 알고 있다. 초감각적 인 것의 관조에 대한 동경에 의해 정신을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이 풀라톤적인 전통이라면 괴테는 상승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 으며, 그에 따라서 정신도 자연 속에 포괄한다. 그러나 자연 속 의 정신이란 무엇이고 상승이란 무엇인가?

정신과물질 이제 우리는 위에서 인용된 문장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제한에 주목해야만 한다. 〈 우리가 그것을 물질적이라고 생각하는 한에서 의 물질…… 우리가 그것을 정신적이라고 생각하는 한에서……〉 그렇다면 정신과 물질은 두 개의 현실성들인가 아니면 하나인 가? 그러한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 나는 아마도 올바른 의미를 발견하였다. 너는 나의 노래에서 내가 하나이자 둘인 것을 느끼지 않는가? 이 시구는 디반의 시작(詩作)에 있어서 마리아네 Mar i anne 의 관 여를 드러내며 또 숨기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정당한 것이 다. 술레이카는 동시에 자연이다. 물질은, 자연이 정신과 구별되 어 생각되는 한, 자연 이의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물질에 대한 정신의 관계는 예부터 남편과 부인의 관계의 비유로 서술되 어 왔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우리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을 얻을 수 없거나 아니면 단지 역설적인 대답만을 얻을 뿐인가? 분리와 결 합이 한 문장에서 언명되어야 한다면 아마도 그 표현은 다만 모 순일 수밖에 없다. 아마도 우리는 괴테의 유희를 설명하면서 더 유회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극성과 상승은 둘 다 동적 이중성이다. 극성이 물질의 고유한 것이라면, 그리고 정신과 물질 자체가 하나의 극성이라면 정신은 물질로부터 출현한다. 그러나 상승이 정신적 운동의 방법이라면

이러한 출현 자체가 물질의 상승이다. 그런데 상승은 자기소의가 아니 라 자기 화 E ig en tli chwerden 이 고 본질 에 의 접 근이 다. 본질에 대한 접근은 덧없이 없어질 것과의 구별을 통해 생겨 난다_ 〈우리를 영원화하기 위해 우리는 거기에 있다 uns zu verewi ge n sin d wir ja da.> 저차적인 단계에서 직접적으로 현실적으로나 참 되게 드러나는 것은 더 고차적인 단계에서 비유가 된다. 이와 유사한 철학적 사유들이 괴테의 더 젊은 동시대인들의 철 학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쉘링에게서 그는 유사한 움직임을 감지 하였으며, 헤겔의 구성적인 전지함 속에서 그것의 경직화를 경계 하면서 적지 않은 조소와 함께 이를 멀리하였다. 실제로 그는 근 대 형이상학과 자연과학이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생각했던 모든 개념을 단지 시적으로만 암시하면서 단지 비유로서만 사용하고자 했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을 사유하는 존재와 연장된 존재로서 생각한다. 물질은 그에 있어서 연장되어 있을 뿐 그 밖의 아무 것도 아닌데, 왜냐하면 그에게는 연장의 기하학적 성질이 물체를 수학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유일한 속성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 고, 진리에 대한 그의 개념은 오직 수학적 확실성만을 인식으로 허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질은 그것의 사유가능성 Denkbar­ ke it에 의해서, 정신은 사유에 의해서 정의된다. 죽 정신과 물질 은 그 말의 전정한 의미에서 주체와 객체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 둘은 분리된 실체들로서 생각됨으로써 동시에 바로 그에 의해 주 체와 객체의 극성이 분리와 결합의 과정에서 비로소 그것의 정당 한 의미를 갖게 되는 관계가 박탈되었다. 단초 Ansa t z 의 결과를 끝까지 검증해 보고 그 단초를, 잘 된다 고 한다면, 결국 사람들에게 손쉽게 만들고 바로 그를 통해 상대 화해야만 하는 시기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근대 사상가는 데카르

트적 도식으로부터 거의 벗어날 수 없었다. 죽 이 도식과 투쟁했 던 사람들은 바로 그 스스로가 그 도식에 결합되어 있음을 증명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주관의 측면을 전적으로 잊고 있었 던 자연과학은 그로 말미암아 그의 생각의 균열을 단지 위험한 곳으로_무의식 속으로 이끌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정 신의 재발견은 종종 이미 유물론의 극복으로――-비록 이 극복이 단지 유물론의 원인, 곧 현실의 균열을 재산출했을 뿐이지만 一여겨졌다. 그러나 괴테에 있어서 정신은, 개별적인 형태 속 에서의 이념과 같이 아주 자명하게, 물질 속에서 현재하는 것이 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시대에 낯설게 서 있으며, 이 낯섭 하 에서 괴로워하고 이 낯삶과 고통 속에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전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만이 참되다. 이것은 괴테의 대담하고도 노여움에 가득찬 명제 중의 하나이 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사상이 어떻게 근세의 지 난 이백 년 동안 오용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오용에 괴테 가 과연 책임이 없는 것인지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다루어 온 연관에서 이 명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논리학에서 〈참〉은 판단에 속하는 술어이다. 그러나 괴테논 아 마도 참된 인간에 관해서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참됨, 전리는 진실성과는 뭔가 다른 것이다. 가령 어떤 신앙고백에 있 어서는 참되지 않은 전실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참〉은 괴테에 있어서 종종 〈자연스럽다〉로 대치될 수 있다. 그가 건강한 것 혹

은 쓸모 있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종종 그의 참된 것의 개념과 함께 나타난다. 진리는 현상 속에서의 본질의 현현이다. 그러나 이것이 인식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열매를 맺을 수 있 다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괴테 자신은 고전적 상응 개념을 가지고 자신의 통찰을 해명하 고 있다. 오직 태양과 같은 눈만이 태양을 바라볼 수 있다. 눈이 빛에 친근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 눈은 그의 현존재를 빛에 의 지한다. 빛은 무관심한 동물의 보조 기관들에서 자신과 동일하게 될 한 기관을 불러낸다. 이렇게 해서 눈은 내면의 빛이 의부의 빛에 대응하기 위해 빛 가운데서 빛을 위하여 형성된다. 〉 전체 속에 내재하는 본질이 나에게 있어서도 이 전체의 부분으 로 현재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부분인 내가 전체롤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판단, 나의 성향, 나의 행위와 자세가 이러한 의미에서 참되다면 이것들은 필연적으로 열매 맺을 수 있는 것으로 된다. 왜냐하면 전체의 본질이 그 속 에 현재하는 개별자로부터 이러한 전체의 충만함이 암시적으로 읽힐 수 있고 현실적으로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 매 맺을 수 있다는 것이 전리의 술어와 검증으로 될 수 있는 것 이다. 논리적 판단전리는 전리에 대한 이러한 개념에 하나의 특수한 경우로 포함된다. 죽 하나의 언명된 명제에서도 본질은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전리의 이러한 한 종류가 역사적으로 부 각되었다는 것은 아마도 비진리의 가능성, 즉 불신과 관련이 있 울 것이다. 비전리가 존재한다는 것, 본질이 숨겨진 것이든, 오 류이든 허구이든 현상할 수 없다는 것은 전리가 존재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비로운 것이며, 또 그만큼이나 잘 알려져 있다. 논 리학은 참된 명제뿐만 아니라 거짓된 명제도 존재하기 때문에 존

재한다. 그리고 진리는 판단들의 정합과 등치될 수도 있을 것인 데, 왜냐하면 판단은 가장 조정 가능하고 검증 가능한 진리를 제 공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근대 과학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한다면 더 질 문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것은 이 탐구와 연관된 테두리 롤 훨씬 넘어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언급한 것만 으로도 왜 괴테가 이 근대 과학에 동참할 수 없었는지를 알기에 충분할 것이다. 죽 내가 전리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내가 그것을 신뢰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신뢰할 수 있음은 결정이나 생각 의 일 Sache 이 아니라 인간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불신은 오류를 방지할 수 있으나 또한 인식의 원천을 봉쇄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관찰하고자 시도하는 것은 괴테가 신뢰했던 곳에서 우 리가 신뢰할 수 있을 때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현상 이따금 언어는 한 단어 앞에 근원 Ur 이라는 철자를 붙인다. 학 문적 언어에 있어서 원인(근원 사태 Ursache) 개념은 일상화되었 다. 한 사태는 고립화된 대상이며, 사유는 원인, 근원 사태 속에 서 대상들의 국면들을 자기 내에 확고히 한다. 괴테는 근원 현상 Ur ph 셨 nomen 의 개념을 주조해 냈다. 현상이 란 나타나는 어떤 것, 자신을 보이는 어떤 것 etw as, was sic h ze igt이다. 어떤 것은 자신을 누군가에게 보인다. 한 현상이 일 어나면 주관과 객관은 이미 결합되어 있다. 데카르트적 분리는 모든 현상을 이차적 서열, 죽 단지 주관적인 것의 서열의 것으로 지시한다. 현상은 객관적 과정의 주관의 의식 속에서의 작용 혹

은 상관물 Korrela t이다. 그러나 근원 현상은 어떤 궁극적인 것, 더 이상 근원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이 말이 괴테의 사상 이 데카르트적 도식 속에서는 생각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 준다. 근본적으로 근원 현상의 개념은 〈 보다 Sehen 〉 의 영역과 괴테적 신념의 입문에 속한다. 우리는 이러한 선물을 받아들이고 근원현 상들을 〈그것들의 신비한 장엄함 〉 속에 머무르게 해야 할 것이 다. 근원 현상들의 배후에 현상하지 않는, 더욱이 기계적인 사실 을 묻는 것은 불신의 호기심이다. 그러나 이러한 더이상 질문할 수 없음이 한 번은 체념으로서, 물론 〈 인간의 한계에서 〉 나타난 다면, 그것은 다른 경우, 적어도 뮐러 수상이 심술 궂고 재치 있 게 표현한 대화에 있어서는, 〈 뱀이 들어 있는 희미한 유리병을 가지고 자아내는 괴테적인 마술 〉 을 뜻한다. 뮐러 수상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으려 해야 하는 근원 현상이다. 신조차도 이에 관해서 나보다 더 많이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자들에 의해서 항상 이념에 대한 적 절한 파악이 서술되어 왔다. 이제 다시 결국 근원 현상은 현상하 는 이념이다. 상칭 이념이 현상할 수 있다면 개별적인 현상들은 이념을 대신할 수 있다. 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을 대신하여 나타낼 수 있다. 저차 적인 단계에서 직접적으로 있는 것이 고차적인 단계에서 비유로 된다. 실제로 직접적인 감각적 경험이 이미 이념을 지각하는데, 왜냐하면 이념은 바로 현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감각 적 경험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지 못하며 또 분명히 알 필요

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동화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 무엇 이 제일 중요한 비밀이냐? 그것은 분명한 것이다. 〉 이같은 사상으로 괴테는 수천년 동안의 신플라톤주의적 전통 속에 서 있다. 감각이 괴테에게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 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괴테라는 인간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같 이 , 그에 있어서 상징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시인으로서의 그에게로 되돌아 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인간적인 표정 Gebarden 을 이해한다. 이 표정 속 에서 우리가 방금 말했던 것은 일상적인 현실이다. 즉 단순히 감 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과정이 동시에 의미의 담지자인 것이 다. 그리고 바로 이 의미가 그 과정의 본질인데, 왜냐하면 이것 없이는 과정이 전혀 일어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감각적으 로 지각할 수 있는 것에 의해서,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나아가 이 가운데에서 우리는 비감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지각한 다 . 표정으로 영혼은 말한다. 죽 표정은 현상하는 영혼이다. 물 론 영혼은 표정 속에서 은폐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은폐는 마 치 논리학자의 판단이 오직 참일 수 있기 때문에 거짓일 가능성 울 갖는 것처럼 동일한 표정 역시 현상일 수도 지시(指示 Ze ig en) 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은폐이다. 나무토막은 아무 것도 보 여줄 수 없기 때문에 은폐할 것이 없다. 이웃 사람의 육체는 연 장적 존재 가 res exte n sa 아니 라 생 동적 인 상대 물 Lebendig e s Ge g en il ber 이 다. 예술가에게는 표정이 삶의 요소이다. 그러나 괴테에 있어서는 표정으로부터 직접 자연의 상징으로 들어간다. 그에게는 인간뿐 만 아니라 동물, 식물, 돌멩이 등이 생동적인 상대물이다. 사랑 에 있어서 육체의 모든 행동이 사랑의 언어로 되는 것처럼, 그의 최초의 위대한 시작품이 터져 나울 때 인간에 대한 사랑은 겉으

로 보기에 인간에게 가장 멀리 있는 것, 죽 자연의 표정 속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 벌써 안개 옷을 입고 떡갈나무가 서 있었네, 마치 치쌓인 괴물처럼, 거기 덤불 숲 어둠이 수백 개의 검은 눈으로 쳐다 보는 곳에. 어둠이 본다-밤의 이러한 응시를 이미 느끼지 못한 사람이 있었을까? 그러나 자연의 표정은 단순히 시적인 환상의 예술적 수단이 아 닌가? 시인은 그 자체로는 전혀 아무 것도 이해될 수 없는 여기 에서 자기 자신의 영혼의 운동으로부터 어떤 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 합리적인 시대의 인간은 틀림없이 그렇게 물어 볼 것이다. 다 만 그는 대답을 서서히 시도해야 할 것이다. 시인은 여기에서 오 래된 바위에 부딪친다. 그가 또 한번 자유 속에서 그리고 유희적 으로 해명하고 있는 원천은 신화적 시대의 위대한 제한 속에서 인류를 적셨다. 그 당시에는 내면과 의면의 구별이 아직 표명되 어 있지 않았다. 표정과 영혼, 표지 (標識)와 의미는 아직 우리가 그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하나였다. 그 당시에는 과연 그리고 어떻게 이념이 보여질 수 있게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불가능하였을 것인데,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 반대를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성적 사유는 의미 S i nn 와 표지 Ze ic hen 를 구별해야만 할 것이 다. 그러나 모든 언표와 이해는 표지 속에서 의미가 직접 파악된 다는 것에 기인한다• 사유는 언어를 자유롭고 움칙이게 만들었

다. 그러나 사유의 반성은 항상 단순한 말 Wor t이 언표 sa g en 하는 것을 더 이상 둘을 수 없는 불신으로 될 위험에 놓여 있다. 시작 (詩作)은 우리가 여기서 괴테의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면 상승된 언어이다. 언어가 단순하게 말하는 것이 시작(詩作)에서 형식이 부여된 표정, 의식된 상칭으로 된다. 바로 그와 더불어 말해전 것은 일상적 표현의 자기망각으로부터 일깨워지며, 바로 그 자신 인 바의 것으로 다시 생명이 부여된다. 시작(詩作)은 그것이 표 지를 의미로부터 좀 더 분명하게 구별함으로써 표지 속에서 의미 를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긴장 속에서 산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은 일상적 언어가 진지한 곳에서 하나의 유희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유희는 일상적 언어의 전지함이 도달하지 못하는 진지함 이다. 표지와 의미의 구별은 시작에 그것으로 하여금 움직이는 사유의 세계 속에서 신화의 재보들을 보존할 수 있게 하는 그러 한 운동성을 부여해 준다. 그러나 시작은 그것이 모든 예술과 마 찬가지로 성사(聖 事 )일 수 없고 종교의 자리를 대신해서는 안 된 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우리는 무엇을 파악했는가? 괴테의 자연과학은 시적인 전제를 가지고 있다. 상칭의 현실성에 대한 물음은 시작의 전리에 대한 물음에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시작에 대해서 과학에 대해서와 같은 엄밀한 의미에서 전리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진리들 은 다르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더 이상 진리 자체에서의 그것들 의 연관에 대해 물어 볼 수 없다. 우리는 다시 한번 동시에 시인 이고 자연연구자였던 괴테에 있어서 그것들의 연관에 관해 살펴 보고자 한다. 우리는 그의 도정에서의 단계들을 구별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괴테의 청년기 작품들에서 의미와 표지는 위대한 시작에서 언 제나 그런 것처럼 하나이다. 매개되지 않은 전리의 이러한 힘에

그는 결코 다시 도달하지 못했다. 성숙한 장년기에 쉴러와의 인 생 대화, 곧 거의 참을 수 없는 의식화 작업에서 그것들은 서로 떨어졌다가는 동시에 양식 개념을 통해 결합된다. 괴테와 쉴러의 고전은 참됨과 동시에 인위적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교양 이상 B il dung s i deal 으로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내적 작업의 한 조각이 시작하고 있는 자연과학이다. 죽 청년기에 느껴졌던 것이 이제 파악되고 사유될 것이다. 노년기에 의미는 의미로서 인식된다. 죽 표지와 의미는 자명하게 구별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것들 사이에는 가장 자유로운 상호작용, 가장 다면적인 유희가 존재하 는 것이다• 이제 과학적으로 이해된 자연도 과학 이상인 의미의 표지이다. 디반에서 술레이카는 마리안네를 의미하며 , 사랑받는 자는 자연을 의미하고, 색채는 사랑을, 사랑하는 자들의 분리는 세계의 창조를 그리고 종국적인 만남은 영원한 재회를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은 참되지만, 그것이 참된 까닭은 그것이 고정되어 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작에서 진리의 손으로부터 베 일을 얻어, 이 베일 뒤에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숨긴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은 인간에게 도대체 언표가 불허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자기의 한계에 도달했거나 스스로에게 한계를 그은 한 인간이 그에 관해 침묵하고자 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 시대의 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근대의 일면적으로 무제약적인 것 이 신앙에서건 과학에서건 정치에서건 그에게 현실로서 다가온 곳에서 그는 그 무제약적인 것으로부터 몸을 피했다. 그는 이러 한 역사적 운동의 외관상의 단순성 속에서 이중성을 통찰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함께 겪었지만 그것은 참여에서가 아니라 고독 속에서 그러하였다. 그 흐름은 그것이 여전히 뿌리내릴 수도 있을 대륙에서는 우리 롤 지나쳐 멀리 흘러가버렸다. 그 흐름은 우리가 그 위에 서 있

울 수 있는 지반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비유를 변화시켜 본다면 우리는 먼 곳으로부터 비로소, 그 흐름의 빛이 항구를 알 려 주는 등대의 빛이 아니라 모든 여행마다 우리를 안내하게 될 별빛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옮긴이 해제 바이츠제커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하이첸베르크의 수제자이고 이론 핵물리학자이다. 그는 철학 분야에서도 지도적인 위치에서 현재 활약하고 있는 학자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본 역서 이의에도 『자연의 통일성』 『물리학의 구조』 『인간의 정원』 『시간 과 앎』 『 역사 안에서의 인간 』 『세계관과 물리학』 그리고 그 밖에 수많은 저서와 논문이 있다. 통상적으로 철학자는 현대 문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과학에 어둡고 반대로 자연과학자는 자 연의 탐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논리와 합리성의 본질과 근원을 탐구하는 철학에 어두워서 이 둘을 한 눈으로 보는 학자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이에 반하여 그는 이 양자를 관통하는 원리와 비전을 가지고 전통적 서양철학 속에서 현대 과학의 본질과 현대 문명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전공 분야인 양 자역학뿐만 아니라 인간과 종교, 자연의 이해에 있어서도 자신의 독창적인 해석방법을 제시함으로써 탁월한 업적을 남긴 학자로 * 원저 자와 저 서 명 은 C.F. v. Weiz s acker. D i e Trag we ite d er Wis sen s- chaft. (ScMp fun g und Welte n ts t e h ung . Die Geschic h te zweie r Beg riffe) Hirz el Verlag. Stu t t ga rt . I 964. 번역본의 쪽수는 괄호 안의 숫자로 표시하고 원문의 쪽수는 각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그의 세속화 이론은 신학계에서 널리 알 려진 이론 중의 하나이다. 바이츠제커는 〈 창조와 우주생성 〉 의 부제가 보여주듯이 이 책을 통해서 자연과 우주의 역사를 서양의 기독교와 희랍 문명의 유산 에 현대인이 발견한 지식을 더한 지평 위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특히 인간 지성의 작품인 과학과 이것을 주관하는 주체로서의 인 간의 내면적 본성 사이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한편으로는 신화적 인, 심층 심리학적인 측면에서부터 관찰하는가 하면 다론 한편으 로는 과학의 본질적인 구조로부터 그것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 이 르기까지 포괄적으로 탐구하면서도 과학과 인간 본성 간의 관계 와 성격을 근원적으로 밝히려고 한 점이 이 책의 특칭이라고 할 것이다. 현대인이 이해하고 있는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세계 그리고 특히 인간은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스러운 존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한편으로 엄밀한 논리적 사 유를 하는 존재로서 이에 근거해서 과학을 발전시키고 자연을 변 화시키는 존재인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는 반대 극이라 할 수 있는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세계를 그의 본성으로서 지니고 있 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성적, 논리적 논술들은 신화적, 종교적 세계를 배제함으로써 서술이 가능하고 반대로 신화적, 종 교적 사상은 논리적, 과학적 사실들을 멀리함으로써 서술될 수 있다. 그러나 바이츠제커의 경우에는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주제가 한 무대 위에서 같이 연출되고 있다. 바이츠제커는 신 화와 이성을 대립시키지만 이것을 대립으로만 보지 않고 본질적 으로는 세계가 진행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원 동력으로 본다. 이러한 시각에서 나온 그의 사상의 핵심적인 내 용이 그가 이중성 혹은 양면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I) 그는 자신의 사상적인 관점에서 이 양면성을 배제시킬 수 없는

조화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혜와 생명의 저편에 있는 신의 비밀로 본다 .2) 거기에서 인간과 자연의 모든 역사가 시작 한다. 여기에는 사랑, 성스러움, 거룩함이 있는가 하면 간교하고 잔악한 신들의 음모와 두쟁도 있다. 이 투쟁은 신들의 역사이고 신화 속에서 신들의 투쟁은 중심적인 주제가 된다. 바빌로니아 신화에서 나오는 〈 압수 〉 라는 신은 그의 아둘 〈 에아 〉 에 의해서 죽 임을 당하고 에아는 그 시체 위에 그의 거처와 궁전을 짓는다. 이 위에 그는 인간을 창조한다. 저자의 의도는 이 사실을 서술하 는 데 있지 않고 이 신화에 비추어 인간의 내면의 세계를 이해하 려는 데 있다. 그러면 신화란 무엇인가? 이 시대는 신화를 버린 시대이다. 마치 성장한 청년이 그가 소년기에 즐겨 읽던 동화를 더 이상 믿지 않는 것과 같이 이 시대는 신화를 믿지 않는다. 그 리고 이 청년이 이것을 믿지 않게 된 것을 그가 성숙했다는 표징 으로 보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처럼 이 시대는 안간의 성숙함 울 자랑한다. 그런데 신화 속에서 신은 무엇인가? 저자는 신들 이 무엇 을 의 미 하느냐 was bedeute n Go tt er 를 문제 삼지 않고 〈지 금 〉 〈 여기〉에서 신들이 무엇이냐 was Got ter s i nd 의 중요성을 지적 한다. 이러한 지적은 매우 예리한 통찰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1) 바이츠제 커는 이것을 심 리 학의 전용어 인 혹은

왜냐하면 인간의 삶 그 자체는 의미보다 선행하는 것이며 신화는 삶 자체에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 자체에 관한 신화를 가 지고 있다는 것은 프란츠 M . L. v. Franz 가 지적했듯이 3) 〈 영혼의 깊이에서 해답이 나올 때까지 한 문제를 가지고 전지하게 싸웠다 는 것이며 이것은 최종적인 전리가 아니라 지금 나에게 맞는 그 러한 전리이고 그리고 내가 이룰 믿으면 나는 건강한 것이다 〉 라 는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신화는 이와 같이 건전하고 유익 한 면뿐만 아니라 삶의 실질적 전제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신화 는 다른 한편으로 〈 허구적인 〉 〈틀린 이야기 〉 라는 부정적인 의미 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보면 신화도 〈 좋다 〉 혹은 〈 나쁘다 〉 는 의 미에서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신화는 또 다른 의미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동화를 신화적이라고 생각하여 동화를 믿지 않고 과학주의자가 된 청년은 신화를 완전 히 버린 것인가 아니면 그 청년이 과학주의자가 됨으로써 또 다 른 신화를 갖게 된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또 다른 신화라면 과 학은 하나의 신화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저자는 나름대로 그것의 근원적인 출처와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어쨌든 만일 신 화가 인간의 생명, 삶과 관계하고 이를 지배한다면 신화를 잃어 버린 현대인에게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또한 〈틀린 이야기〉를 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신화라면 이것 또 한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여기에서 특별히 관심 이 가는 것은 신화가 이성적으로는 결코 설명될 수 없으면서도 그것이 생명을 지배할 만큼 강한 힘, 단순히 원시인들 사이에서 만 이야기되는 역사가 아니라 말리노브스키 B.Ma li nowsk i의 말대 로 〈살아 있는 현실〉로서 인간의 운명과 세계를 지배하는 힘이라 3) Marie - Louis e von Franz. ScMp fun g sm y the n. Kosel Mi lnc hen, 1990. 16 쪽.

고 생각된다는 점이다 .4) 2 제목이 보여주듯이 〈 과학의 한계 〉 란 그것이 어떤 제한성을 나 타낸다. 이 제한성은 과학의 한계 밖에 있는 어떤 것과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면 과학과 신화가 겉보기에 무관한 것처럼 과학과 종교의 관계도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과학을 수행함에 있어서 종교나 신화가 어떤 역할을 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또 한 과학은 종교나 신화 때문에 그 자신의 한계가 정해진다고 생 각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가? 과학은, 저자가 지적한 대로, 오늘날의 종교, 다시 말하면 과학주의가 되었다 .5) 우리의 일상적인 상식으로 본다면 과학은 종교가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것이고 인간에게 자연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며 과학에 대한 인간의 이러한 태도 야말로 가장 성실한 태도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그리고 이 점에 서 과학이 종교나 신화와 구별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과학이란 신비한 것을 - 믿는 것이 아니라, 마치 논리실증주의가 프로토콜 명제 Pro t okollsa t z 를 확신하듯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서 출발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과학은 어떠한 의심도 떨쳐 버 린 스스로 자명한 학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과 학은 결코 종교가 아니라 종교와 신화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으 로 보인다. 그런데 왜 저자는 오늘날의 과학을 종교로 보는가? 이 물음은 다시 필연적으로 과학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음을 제기 4) B. Mali no wski, Die Rolle des My tho s im Leben. in 卯 Eroffn u ng des Zu gan gs zum My tho s K. Kereny i (엮음) Darmsta d t. 1962. 177 쪽이하 5) 본문 121 쪽 참조.

한다. 3 과학은 자신의 이상(理想)으로서 그리고 필수 조건으로서 전제 하는 것이 있는데, 바이츠제커에 있어서 이것은 정신적 측면에서 보면 플라톤적인 이데아이며, 현실적인 측면에서 보면 실재(實 在)이다. 이데아는 바이츠제커의 말대로 엄밀과학을 낳는 원천이 다. 이것을 기반으로 실재 곧 대상적인 세계를 보편화하고 객관 화하는 작업이 시작된다. 과학의 대상이 되는 자연을 저자는 실 재(實在, Rea litat)라고 말한다. 현대인은 자기를 실재론자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이것은 과학적인 근거를 가진 건전한 상식 위에 자기의 지식이나 사상이 기초하고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에 있어서 실재의 의미는 다르다. 바이츠제커에 있어 서 실재는 세속화된 실재를 말하는 것인데, 세속화란 인간이 사 랑의 신 (하나님 , Gott ) 에 속하지 않고 신들 Go tt er 로부터 해 방된 세계를 서술하려고 하는 개념이다 .6) 다시 말하면 실재는 사랑의 신에 의해서 신화에서 나오는 신들로부터 해방된 자연을 의미한 다.” 여기에서 해방은 자연을 신화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속박으 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 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재가 어떻게 이해되든 자연으로부터 나온 6) 여기에서 G5 tt er 는 창조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력이나 잡신을 의미한다. 7) 〈만약 신화가 신들 G litt er 의 지배 하에 있는 우리 의 사유라면 바로 신 Go tt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사유를 구약이 쓰여진 시대로부터 탈신화화 (脫神話化) 해 왔다. > 제 3 장 참조. 또한 <:< lu rch Gott wurde die Welt entg 5 tt ert .> 93 쪽.

개념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층 더 나아가서 저 자는 기독교적 사랑이 한 인간에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서는 자연 스럽게 영혼을 지배하는 힘들이 극복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지적 한다. 마치 신화의 초기의 산들이 죽임을 당한 것과 같이 이들이 자연스럽게 배제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127) 인간이 무엇 에 예속된다는 것은 영혼이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사랑의 신 은 자연에 의해서 지배받는 신이 아니라 이 자연을 창조한 신이 며 인간은 신의 노예가 아니라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인 간도 자연의 노예가 아니라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것은 또한 인간의 영혼이 자연에 예속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달 리 말하면 인간의 영혼은 자연법칙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사랑의 신과 신화 속의 신들은 구별되고 있다는 것과 인간을 해방시킨 것은 〈신들〉이 아니라 세계를 창조 한 사랑의 신이라는 점이다. 인간이 신의 아들로서 자연을 정복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을 정복하는 현대 과학도 사랑의 신의 선 물이라고 바이츠제커는 말한다. 그러나 인간이 사랑의 신에 속하 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사랑의 신과 그에 대한 신화를 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세계에 대한 완벽한 객관화는 성스러운 것 의 부정과 같다고 바이츠제커는 지적한다. (92) 이렇게 완벽한 객 관화를 목표로 하는 정신은 자연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엄밀성을 주장하는 원자론의 근본 의도라고 그는 말한다. 즉 인간이 사랑 의 신, 성스러운 신으로부터 이탈하면서 객관성과 보편성을 표방 하는 실재란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현대 를 세속화된 세계로 본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 바이츠제커가 지적하고자 하는 심각한 문제는 이제 우리는 이 상속된 선물이 어떻게 그것이 감사해야 할 종교

에 대립하게 되었는지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이렇듯 선조로부터 상 속받은 무기를 가지고 자기의 선조를 살해하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 록 점점 더 우직한 방법으로 일어난다 (168). 라고 하는 점이다. 인간이 세계를 창조한 신의 아들이라면 이것 은 그의 은총이자 선물로 보아야 하겠지만, 그러나 감사해야 할 신을 현대인이 우칙한 방법으로 죽이고 있다면 이것은 무서운 일 이 아닐 수 없다. 이 사실을 좀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서 저자 가 자연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4 그렇다면 저자가 보는 본래의 자연이란 무엇인가? 자연은 세 속화된 실재 바로 그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엄격한갑논리적 사유의 틀 속에서 조작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해서 그 는 이 시대의 거대한 실재론적 흐름 앞에서 현대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랑의 신, 성스러운 신, 그리고 역사적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서 신화적인 자연관을 감히 주장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 는 자연과 인간의 근원을 이 신화적인 세계에서 찾고 있다. 분명 히 저자는 본래의 자연을 신의 성스러움과 사랑이 담겨 있는 것, 실재라고 하기보다는 신화적인 것으로 본다. 만일 그렇다면 인간 의 이성은 이러한 신화적인 근원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가 있고, 과학은 신화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신화 중심의 자연 관이나 인간관을 현대인은 분명히 버렸다. 이것은 정당한 것인 가? 바이츠제커에 있어서 본래의 자연이란 신들의 지배 밀에 있 는 인간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이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음을 전 제한 말이다. 그리고 자연 그 자체는 신화적으로 표현되었다. 자

연은 바이츠제커에 의하면 기독교가 있기 전에 현존하는 삶의 형 식과 인간 영혼에서의 일종의 〈 힘 〉 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이전의 고대의 옛 문화에서는 이 자연이 다론 개념 죽 유 일신이 아닌 신들 혹은 자연력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 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현대의 자연과학은 어떠한가? 저자 가 본래의 자연을 실재로 보기보다는 신화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 로 현대의 자연과학도 원리적으로는 그러한 신화의 속성을 벗어 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근대 과학은 우리가 잘 알듯이 갈릴레 이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갈릴레이가 우리들이 가장 확신할 수 있는 실재로부터 현대 과학의 기초를 다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이츠제커는 갈릴레이의 과학이 신화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근대의 자연과학은 그 나름의 역사적 신화롤 가지고 있다. 그것 은 갈릴레이에 관한 신화이다. 이 신화는 사람들이 암흑의 중세에 서는 관찰에 관심을 갖지 않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변을 높이 평가 했지만, 갈릴레이는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대로 그것을 서술함으 로써 과학의 길을 닦았다는 것이다. …… 다른 신화들과 마찬가지 로 이것도 일말의 전리를 표현하고 있다. …… 갈릴레이는 세계를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술하고자 함으로써 커다 란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법칙을 실제적인 경험 속에서 그것이 경험을 표현하는 형식으로는 결코 성립될 수 없는, 따라서 개별적 인 관찰을 통해서는 결코 확인될 수 없지만 바로 그 때문에 수학적 으로는 간단한 그러한 법칙을 설정했다. 그리하여 그는 현실적인 현상들의 복잡성을 개별적인 요소로 쪼개는 수학적 분석에 길을 열 었다. 과학적 실험은 그것이 질문을 제기하고 또 대답을 줄 수 있 는 수학적 이론에 의해 수행되어 진다는 접에서 일상적인 경험과

구별된다. 이렇게 해서 주어진 〈 자연 〉 은 조정 가능한 〈 실재 〉 로 전 환되 었다. >( 144) S)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첫째, 과학의 길을 닦은 것 자체가 신 화라고 하는 것이고, 둘째로 이러한 방법으로 파악된 자연이 개 별적인 관찰을 통해서는 결코 확인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수학적으로는 간단한 법칙을 설정했고 그리하여 갈릴 레이는 현실적인 현상들의 복잡성을 개별적인 요소로 쪼개는 수 학적 분석에 길을 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실재론자가 믿고 있 는 대상이 논리적으로 분명히 조작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 준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개별적인 경험과 조정 가능한 실재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칸트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면, 실재가 직관의 형식에 의한 현상 차원의 인식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개별적인 경험이 란 그것이 현상 차원과 무관하지 않지만 동시에 현상 차원의 피 안적인, 생동적인 것 자체, 혹은 〈직접성〉을 의미한다 할 것이 다. 더욱 분명히 표현한다면 실재는 그것이 정신과 영혼으로부터 분리되는 경우에만 조정 가능하다는 것이다 .9) 그러나 이와 반대 로 개별적인 경험이란 그러한 분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다. 개별적인 경험에 있어서 조정 가능한 실재가 경험의 중심이 될 수 없다. 예를 들면 슬피 우는 어린아이의 어머니는 실재가 아닌 그 아이의 〈슬픔〉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눈에서 나오는 물 방울이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 8) 107 쪽 9) 바이츠제커는 그의 여러 저서를 통해서 이 점을 강조한다. 역자는 〈바 이츠제거에 있어서 물질과 정신〉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인지과학과 철학의 만남』 한국인지과학회. 1994. 171-176 쪽.

재에 중심을 둔다면 눈물은 눈물이 아니고 물 (H20) 로 취급되어 야 한다. 한 개인의 삶이 나타나고 실현되는 구체적인 장소와 시 간은 하이데거적인 표현을 빌리면 〈 실존적 〉 이며 〈 자람 Gewachse 〉 의 과정이지 〈 만듦 Gemach t e 〉 의 과정은 아니다 .10) 그것은 수학적 으로 쪼개고 분석할 수 없는 것이다. 바이츠제커에 있어서 참된 것은 바로 영혼과 실재가 분리되기 전의 상태 곧 〈 슬픔〉일 것이 다. 그러나 슬픔을 배제하고 실재만을 다루는 것을 참되다고 믿 는 것, 바로 이러한 믿음이 갈릴레이의 신화란 것이며 따라서 앞 에서 지적했듯이 갈릴레이의 과학이 신화의 속성을 벗어나지 못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화의 이중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내용이 다. 하나의 신화를 버린 곳에 참된 것이 나타나지 않고 다시 다 른 형태의 신화가 그 자리를 채운다는 것이다. 물론 신화는 정서 적인 면과 관련시켜서 생각할 수 있는 좁은 의미로 이해되는 것 만은 아니다. 시간이나 공간 그리고 물질에 관한 갈릴레이의 생 각은 역시 신화적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신화는 이렇게 정서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경우 〈 어떤 특정한 종교에 있어서의 삶의 체험 없이 어떤 한 종교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라는 저 자의 주장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저자는 유태교나 기독교와 같은 종교에 있어서 개인적인 결심 없이는 본질적인 경 험을 누구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결심의 행위는, 그것이 실 제로 일어날 때, 그 자체가 종교적 경험의 불가결한 구성 부분이 기 때문에 종교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 스 스로가 체험한 결심을 내보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인 간 자신 밖의 물질 혹은 자연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바이츠제커에 있어서 영혼 10) M. Heid e gg e r. Vom Wesen und Beg riff der 硏函 in Bd. 9. s. no

이란 신비적인 세계를 소개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단 지 인간이 진솔한 경험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11) 진솔하다 는 것은 앞에서 든 예에서 어머니의 영혼과 아이의 슬픔이 구체 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칙접 교감하는 생동적이고 본능적인 〈 칙접 성〉이다. 그것은 각 개체에 고유한 것이고 일회적인 것이다. 이 렇게 신화는 영혼의 직접성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사건으 로 이해된다. 따라서 종교적 결단이라든가 삶의 체험 등은 실재 적인 것으로보다는 신화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러한 삶의 체험을 이미 알고 있는 언어로 표현해야만 한다면 이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신화적이라고 부르게 될 언어였다는 것이 다. (109)

5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각 개체에 고유하고 유일한 직접성이 드러나는 그러한 언어가 아니라 그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초개인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신 화도 보편적 개념을 사용하여 표현될 수밖에 없다. 신화적인 언 어가 이렇게 보편적 언어라면 직접성으로서의 각 개체의 삶 그 자체를 표현하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직접성은 이 경우에 배 제된다고 생각된다• 직접성이 배제되면 실재와 영혼은 분리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영혼과 실재가 분리된 상태에서 신화를 나 타내는 언어는 직접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단지 상칭적인 것일 뿐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성으로 표현될 수 없는 신화가 인 간의 삶을 지배한다면, 이 상칭적인 것이 삶을 지배하는 것으로

11) C. F. v. Weiz s ~cker. Zeit und Wis se n. Mi lnc hen. C. Hanser Verlag. 1992. 582 쪽. 바이츠제커는 정신을 영혼과 구별한다.

보아야 하는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만일 신화가 삶을 지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일회성만으로 끝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삶은 직접성과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 이 아니고 동시에 지속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 화가 삶의 근원적 힘이라면 그것은 일회적이며 동시에 반복적이 고 지속적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결국 실재가 보편성을 지니 고 있듯이 신화도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둘은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서로 일치한다. 그러면 실재는 칙점성 을 가질 수 없는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우리는 실재가, 갈릴레 이의 시각에서, 신화적 기능을 갖고 있음을 보았다. 앞에 인용한 글에서 실재가 직접성과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살펴보면, 〈실제적 인 경험 속에서 법칙이 경험을 표현하는 형식으로는 결코 성립될 수 없는, 따라서 개별적인 관찰을 통해서는 결코 확인될 수 없지 만 〉 은 관찰과 이론적 표현 밖에 있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실재 개념은 자연 자체가 아니라 자연의 추상화 속에서 나오는 개념임 울 알 수 있다. 실로 자연을 추상화할 수 있고 보편화할 수 있다 고 믿으며 이에 따라서 수학적으로 간단히 처리할 수 있다고 믿 는 것이 현대인의 자연에 대한 신화이며 여기에 우리가 자연을 오해하게 되는 함정이 있다. 어쨌든 모순되는 현상이지만 실재의 근원으로서의 자연은 보편성보다는 일회성과 직접성이 그 본성이 며 보편성은 근대 과학의 신화가 만든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화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의 대상이 되는 실재도 똑같이 보편성과 직 접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신화이고 무엇 이 실재인가롤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저자는 근세에 있어서 까지 타당하다고 본 우주론을 예로 들면서 신화와 과학이 구별되 기 어렵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그는 비유적으로 말하기를 〈이 사 유 과정의 하나 하나의 요소와 그 그립을 그리는 필치는 아주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그 필치를 이러한 그립에 적용하는 것은 그러한 사건의 필연성에 대한 진정한 자연과학적 통찰에 의해 거 의 규정되고 있지 않다. 신화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도식은, 인과 적으로 판단하면, 다만 그것은 그럴 수 있는 것이었다는 것이고, 다만 신의 전쟁에 대한 드라마를 원자의 소용돌이의 드라마로 바 꾸어 놓았을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91) 이같이 신화와 실재는 쉽게 구별될 수 없다고 하지만 많은 사 람은 실재란 논리적으로 조정 가능한, 실제적으로 검증 가능한 자연과학의 대상이 되는 반면에 신화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것 이다. 그리고 우리는 실재에 근거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이 허구 적인 것, 죽 신화를 포기하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하다고 생 각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의 말대로 〈 우리는 우리가 지적 성실성으로 이해하는 그러한 태도 때문에 신화를 단념해야 할 것 인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신화를 단념한다면 〈 신 화적 언어로 표현된 경험 자체 〉 즉 삶의 체험 자체를 잃어버릴 위험성이 있지 않는가? 〈아니면 지적 성실성을 잃지 않으면서 신화적 언어를 간직해야 할 것인가? 〉 청년이 믿는 과학주의는 신화를 동화와 같은 것으로 간주해서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는 다시 과학주의라는 신화가 자리잡게 되었다. 그렇다면 〈 이제 종 교가 신화적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우리가 여전히 신화적 언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 그리고 실재는 이 개념들의 보다 깊은 탐 구를 통해서 이 개념 가운데에 있다고 생각되는 신화적 요소를 실재 개념에 의해서 완전히 대치할 수 있는가? 또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은 신화적인 것이 아니고 오직 실재만이 전정한 사실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살펴본 대 로 〈무엇이 신화적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확실히 알고 있

는가? 〉 다시 말하면 신화의 존재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가? 아 니면 〈 우리는 무엇이 신화적이고 그렇지 않은지를 처음부터 혼돈 하고 있는 것인가? 〉 그리고 도대체 〈 우리는 신화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충분히 명확하게 알고 있는가? 〉 바이 츠제커는 이렇게 계속되는 물음을 던전다 .12) 이러한 물음에 대해 서 저자는 어떤 합리적 정의도 제시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말한 다. 어떤 합리적 정의도 제시하지 않았다는 표현 속에 역자가 보 기에는 어떤 깊은 의미가 내재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정확하 고 합리적인 정의는 이미 신화적 요소, 죽 〈근원현상〉에서 현현 하는 〈 직접성 〉 이 존재할 수 있는 기저 자체를 배제할 것이기 때 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적 배경을 바이츠제커의 괴테 해석에 서도 엿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참되지만, 그것이 참된 까닭은 그것이 확정되어서 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작( 詩 作)에서 진리의 손으로부터 베일을 얻어, 이 베일 뒤에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숨긴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은 인간에게 도대체 언표가 불허되는 것만이 아니다. 그 것은 또한 자기의 한계에 도달했거나 스스로에게 한계를 그은 한 인간이 그에 관해 침묵하고자 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 시대 의 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근대의 일면적으로 무제약적인 것이 신 앙에서건 과학에서건 정치에서건 그에게 현실로서 다가온 곳에서 그는 그 무제약적인 것으로부터 몸울 피했다. 그는 이러한 역사적 운동의 의관상의 단순성 속에서 이중성을 통찰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함께 겪었지만 그것은 참여에서가 아니라 고독 속에서 그러 하였다. 그 흐름은 그것이 여전히 뿌리 내릴 수도 있을 대륙에서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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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 지나쳐 멀리 흘러가버렸다. 그 흐름은 우리가 그 위에 서 있을 수 있는 지반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달리 비유로 말한다면 우리는 먼 곳으로부터 비로소, 그 흐름의 빛이 피난처를 알려 주는 등대의 빛이 아니라 모든 여행마다 우리를 안내하게 될 별빛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304) 이것은 신화를 버린 곳에 실재개념이 자리잡는 것이 아니고 다 시 다른 형태의 신화가 자리잡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되며 따라서 실재에 의한 설명은 그 한계가 있음이 밝혀진다 하겠다. 6 바이츠제커는 이들 문제와 관련해서 4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실 재의 근간이 되는 물질에 대해서 한충 더 깊이 논의한다. 물질은 그것이 어떠한 형상도 가지지 않을 경우에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105) 형상 그 자체는 물질이 아니며 형상 을 말할 수 없는 물질에 관해서 시간성과 공간성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실재는 물질 적인 기초 위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지만 물질이 무엇인지, 그 것이 이성에 의해서 조정될 수 있는 것인지는 매우 회의적이다. 물질이 이성에 의해서 다루어질 수 있는 조건은 데카르트에 있어 서 연장적 실체 res ex t ensa 였다. 이것은 물질과 공간이 동일하다 는 데카르트의 주장에 근거한 것이다. 물질과 자연 그 자체가 수 학이라는 데카르트의 주장은 바로 이 가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 러나 바이츠제커는 물질과 공간의 동일성에 대한 데카르트의 가 정을 아래 인용문에서와 같이 반박한다.

데카르트는 분명히 공간과 물질을 동일시한다. 그렇다면 물질이 움직인다는 것은 무엇울 의미하는가? 움직임에 따라서 물질은 장 소를 바꾼다. 그러면 공간적인 어떤 것인 장소는, 그것 자체가 물 질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데카르트는 이런 난점을 느끼고는 이 난점을 교묘한 정의를 통해서 피하려고 시도한다. 나는 그가 단지 이 난점을 은폐하였고 물질의 운동에 관한 그의 이론이 물질과 순 수 연장의 동일시 Gle i chse t zun g에 모순된다고 생각한다. (272) 앞에서 말한 〈 근원현상 〉 은 우리가 다룰 수 있다. 실재의 배후 에 존재하는 현상이라고 바이츠제커는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것 이 괴테적 믿음의 입문에 속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계속해서 이 러한 선물 곧 믿음을 받아들이고 근원현상들을 〈그것들의 ‘신비 한 장엄함' 속에 머무르게 해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물질의 본성이 이러하다면 갈릴레이가 믿고 있는 과학이 신화 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셈이다. 우리가 그렇게 확신하고 있는 실재의 기반이 되는 물질에 대해서 기독교와 풀라돈이 이미 물질의 본성을 꿰뚫어 보고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실제로 기독교나 풀라톤은 물질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우리에게 여전히 분명한 것이 남아 있 는데 그것은 우리의 의식 곧 정신과 영혼이다. 이성적인 것이 의 식의 전부는 아니다. 신화가 이성적으로 분해될 수 있는 영역 안 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앞에서 밝힌 〈직접성〉에서 읽 어낼 수 있다. 바이츠제커는 실재를 조정하는 이성의 한계성을 플라톤을 인용하여 지적한다.

풀라톤은 필연성을 예측할 수 없는 것으로, 그러나 예측할 수 있 는 것은 계획적인 이성의 작품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플 라돈에게 세계의 완전성은 세계가 이데아에 참여한 결과이고, 세계 의 불완전성은 필연성의 지배의 결과이다. (104)13> 여기에서 불완전성이 필연성의 지배의 결과라고 할 때의 필연 성은 플라돈에 있어서 이성과 대립되며 근세의 수학적 법칙과도 대립되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 맹목적 필연성 bli nd e No t wend ig ke it이 우리 가 태 양계 에서 보는 질서 를 산출하지 못했 을 것이라는 견해는 그(칸트―옮긴이)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다〉 (173) 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맹목적 필연성이 세계 를 형성하는 데 질료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14) 여기에서 이성 의 질료에 대한 한계가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풀라톤의 신은 세계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148) 칸트가 그의 후기 철학에서 〈자연과학의 수학적 구조를 더 이상 신적 창조 작품 〉 에로 환원시 키지 않고 〈우리의 직관과 사유의 선험적 형식 〉 으로 환원시킴으 로써 〈오성 자신이 자연에 대해서 법칙을 규정한다 〉 로 변환시킨 것은 칸트도 풀라톤과 마찬가지로 맹목적 필연성을 인정한 것이 며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실천적 영역〉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풀라톤이 공간성에 관계하는 기하학을 문제삼지 않고 실천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 말함으로써 참된 존재에 관 한 물음을 시작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폴라톤은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원(圓) 자체를 묻는 것이 아 니라, 마치 참되게 존재하는 원상(原象)이 생성되는 모상(模象) 13) 72 쪽 참조 14) Plato n . Tim aio s , in P lato n s S~mt lich e Di al og e Bd. VI . 0. Ape lt (hrsg) Feli x Mein e r verlag . 1988. 71 쪽 이 하

에 관계하는 것처럼 다시금 용감한 행동, 아름다움, 선함의 개별 적인 경우들에 관계하는 용기 자체, 아름다움 자체, 선 자체에 대해 물음울 던진다. 아름다운 육체를 바라볼 때 불타오르는 사랑은-――영혼 윤회의 신화에서 이야기되는 것처럼 __― 과거의, 그러나 지금은 잊혀진 삶 에서 아름다움을 직접 직관했던 영혼으로 하여금 아름다움 자체를 상기하게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친숙한 불변적인 이데아의 세계와 〈 현실적〉인 세계와의 관계를 묘사한 아름다운 글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울 고 있는 아이와 슬픔 자체가 분리되지 않을 때 참된 슬픔을 안다 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신화 속에서도 잘 발견된다. 신의 형상이란 저자에 의하면 심층 심리학적으로 깊은 영혼의 현실을 의식 속에서 파악 가능한 표칭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신은 자신의 영혼 속의 힘을 객관화할 때 나타난다. 이러 한 도식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 속의 전리를 파악한다. 신화의 신 통보 (神統譜 Theog o nie ) 적 드라마는 이 와 같은 맥 락에서 영혼 생성의 드라마로 이해된다. 저자는 영혼의 생성을 2 장부터 4 장을 통해서 세계 생성의 신화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의 객 관화 속에서 자신을 볼 수 있기 위해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 작 용하는 힘을 자신과 다론 것으로서 자신 앞에 설정하는 하나의 두영 Pro j ek ti on 이라고 봄으로써 자기 자신과 객관화된 자신이 대 면하고 있다 .15) 자기 자신과 객관화된 자신은 거칠지만 각각 직 집성과 이데아, 생동적인 것과 전리, 믿음과 앎, 신화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들의 부류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도식은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의 직접성이 성립하는 죽

생동적이고 본능적인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이해할 수 있는 도식 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객관화된 자신을 통해서 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도식으로 이해된다. 전자가 삶의 전제라면 후자는 대상 을 실재적인 것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이것은 믿음이 삶의 전제 라고 하는 저자의 말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16) 그는 플라톤 의 이데아론을 원용하여 자기의 생각을 이렇게 펼친다. 〈사랑하 는 육체에 매여 있는 사람은 그려진 원에서 수학적 전리를 찾는 사람이 수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양자는 참된 빛의 기만적인 반영에 만족한 다. 사랑받는 자의 영혼을 사랑하는 자만이 참으로 자신의 사랑 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영혼은 진리가 나타나는 장소이고 참된 사랑은 전리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영혼에게만 가능하기 때 문이다.〉 이것은 직접성과 객관화가 만나는, 그것들이 하나로 통 일되는 곳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찰 보여준 글이다. 그렇기 때문 에 신화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 앎과 믿음은 궁극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배하는 것도 아 니다. 〈믿음이라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에 대한 상위 개념〉과 〈아무 것도 믿지 않는 것에 대한 상위 개념인 앎〉이 여기에서 일 치를 보는 것이다 .17) 이들은 항상 대립되면서도 사실은 하나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이 전리가 신적인 위치에 있지 않음을 곧바 로 지적한다. 왜냐하면 신은 신에 대한 나의 상보다 훨씬 더 〈현 15) 33 쪽 : 두영은 영혼 속의 작용하는 힘의 객관화이지만 이것은 이미 작 용하는 힘 자체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전 것이다. Marie Franz. 갇은 책 . 9 쪽 참조. 16) 〈주어지지 않은 것을 실제적 사실로 전제하는 것이 삶의 전제이다.〉 C. F. v. Weiz s :ic k er. Zeit und Wis se n. Mi lnc hen. C. Hanser. Verlag . 1992. 58 쪽. 17) Weiz s :ic k er, 갇은 책 . 1144 쪽 참조.

실적 〉 이기 때문이라고 바이츠제커는 말한다. 이 〈 현실적 〉 인 것은 인간의 영혼 속에서 작용하는 힘이며 그것이 한편으로는 생명과 삶 그리고 믿음의 원천일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믿음의 근 거 위에서 대상의 객관화가 이루질 것이다. 이 힘은 또한 〈 근원 현상 〉 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신들에 의해 만들어지지 만 그 반대는 아니라는 것이다. (54)18) 그렇기 때문에 창조신은 신적인 이성과 구별되는 인간 이성의 산물인 형이상학의 신이 아 니라고 말한다. 인간이 신의 아들로서 신의 영상을 따라 만들어 졌고 자연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정복할 수 있지만 이 〈훨씬 더 한 현실성 〉 은 실재 개념의 탐구를 통해서 신화가 실재 개념으로 대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부터 배제한다. 오히려 이성적인 힘보다 신화적인 요소가 근원적으로 실재를 조정한다는 것이 더 욱 분명해진다 . 또한 신의 전쟁에 대한 드라마 곧 신들의 신화가 원자의 소용돌이의 드라마로 바뀌어질 수 있다는 것은 신들의 신 화와 과학이 범주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화 에서는 원자론이 그러하듯이 세계의 건축 자료가 이미 신화 자체 안에 들어 있으나 이것은 언제나 질문을 제기하는 형식 안에 더 이상 넘어갈 수 없는 한정된 대답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앞에서 지적한 〈 자연과학의 수학적 구조가 더 이상 신적 창조작품〉이 아니라 제한된 〈우리의 직관과 사유의 선험적 형식〉 으로 될 수밖에 없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것을 저자는 달리 〈물 에 대한 표상이 존재자에 대해서 묻는 물음의 물고기가 스스로 잡힌 낚시 바늘 〉 19) 이라고 표한다. 이에 비하여 창조적 신화는 신 둘의 전쟁의 드라마와 원자의 소용돌이의 드라마처럼 바꿔치기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는 무에서 그리고 인격의 신에서 출발 18) 33 쪽 이하 참조 19) 52 쪽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은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로 서 두려움과 생명의 주인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물론 이것이 과학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배제하는 것은 아니며 이 현실성의 제 한 밀에서 폐쇄된 것이 아니라 열려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의 가능성은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역사적 상대주의를 원리 적으로 극복할 만큼 그렇게 확고한 위치에 있지 못한 것이다. 바 이츠제커가 〈 왜 인간은 인간사의 이 국면 혹은 저 국면에서 이것 또는 저것을 믿었는가? 그리고 이 견해 중의 어떤 것이 참된 것 으로 밝혀졌는가? ·… .. 역사적 상대주의를 참된 것으로 설명할 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역사적 상대주의가 이 시 대의 사유 도식에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를 제시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적 상대주의 자체를 역사적으로 상대화시키는 것은 쉬운 일인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제약성의 이러한 늪 어디에서 한 걸음이라도 확실하게 디딜 수 있는가 〉 (241) 라고 물음을 제기하는 이유를 우리는 여기에서 발견한다. 그런데 이 물음은 그것이 자연과학에 관한 것이건 종교에 관한 것이건, 또는 사회적 개혁이나 혁명에 관한 것이건 예의없이 성 립되는 물음이다. 이러한 물음이 도대체 어째서, 어디에서 나오 는 것인가? 이것의 발원지가 이제까지 우리가 논의해 온 이중성 이다. 그런데 이 이중성을 좀더 고찰하면 그것의 근원은 궁극적 으로 앞에서 지적한 신화적 요소와 이성적 요소 사이에서 나타나 는 〈이중성〉에 있다고 할 것이며 그리고 더 깊게는 인간이 존재 하는 한 결코 벗어버릴 수 없는 근원현상에서 나오는 것으로 해 석할 수 있을 것이다.

A A. Aug us ti ne 119- 1 21, 124, 265, 266 Adam 70, 75 A. Ein s te i n 110, 204, 205, 207 Alexander 37 Ansar 37 Anselmus 266, 276 Anu 37 Ap h rodit e 42 Ap s u 36, 38, 39, 49, 78 Aris t a r chos 90, 131, 136 Aris t o t e l es 77, 78, 102, 122, 123, 132, 140, 144, 145, 147, 169, 179, 181-185, 257, 269, 315 Arkim edes 144 Ashurbanip a l 38, 41, 54 아브라함 67, 68, 70 B Bellarmi n 152, 154, 191 Bestl a 45 Beth e 213 B. Mali no wski 310 Bolt ho n 45 Borr 44 B. Pascal 73, 275 Buri 44

c C. Dop ple r 207 C. F. v. Weiz s acker 307, 308, 312-315, 317, 321-324, 327 C. G. Jun g 54 Cuvie r 179 D Darwi n 179, 187-189, 293 데미우르고스 167 Demokli tos 84, 87, 88, 91, 143 Diog e nes Laert ius 88 D. Laerit us 88, 89 E Ea 38, 39, 49 Enli l 53 Erebos 41 Erin y e n 42 Eudoxos 135 Eve 75 F F. Eng e ls 217 Fermat 260

G G. de Santi llan a 151 G. Gali lei 140, 143, 144, 148-150, 152, 153, 168, 228, 229, 279, 315, 317 G. G. Smi th 10 Gig a nta n 42, 43 Gil so n 265 G. Kuip e r 202 Goebbels 29 Gold 209 G. v. Rad 61 G. W. F. Hege l 224, 241-244, 250, 296 G. W. Leib n iz 169-171, 173, 175, 185, 275 H 하워드 282 Hahamu 37 Hesio d os 41, 43, 50, 77 Herakleit os 291 Hi ppa rchos 131, 140 H5nir 45 Hoy le 209 H. Scholz 276 Huxley 179 Huyg e ns 144

I I. Kant. 31, 32, 90, 142, 157, 169- 174, 180, 186, 187, 202, 280, 287, 324 Iph ig e nie 92 I. P. Pawlow 29 이삭 68 J Jes us 36, 107-114 J. J. Rousseau 246 J. Kep le r 28, 140-143, 152, 158, 165, 168, 257, 258, 279 J. Locke 122 J. V. Neumann 196 J. W. Goeth e 277-281, 285-290, 293, 294, 296, 297, 300, 301, 303, 304 I. Kant 31, 142, 169-174, 180, 186, 187, 202, 280, 287, 324 K Kin g u 41 Kis a r 37 K. Jas pe rs 265 K. Marx 211, 224, 241, 244, 245 크롬웰 232

Kronos 42 L Lahmu 37 Lamarck 179 L. Carus 85, 88 Leukip po s 84, 88, 91 L. Nap o leon 31 Lodur 45 M Mach 170 Marduk 39-41, 53, 58, 66 M. Heid e gg e r 274 Mi ttag a rd 45 M. Luth e r 276 M. L. v. Franz 310 마르코 폴로 205 모세 67, 68 Mummu 37 N N. Bohr 192, 19:;, 275 Nebukadnezar 66 New ton 28, 30, 31, 104, 144, 158, 163 ~ 172, 179, 187, 258, 259, 269, 272, 278, 279, 293 Ni ppu r 53

N. Kop e rnik u s 28, 131, 136-141, 143, 148-152, 189, 257, 279 노아 70 Nudim mud 37 Ny mph 42 느부갓네살왕 66 。 Odin 45 P 패러데이 14 Parmenid e s 81, 84, 86, 95, 97, 102 Pauli 192 P. Deby e 213 Plato n 32, 84, 95, 96-99, 101-104, 106, 118, 120, 121, 123, 124, 147, 169, 173, 182, 236, 279, 288, 289, 323, 324 Prometh e us 43 P. S. de Lap la ce 31, 172 Pto lemaio s 132, 136, 138-140, 152 R R. Bentl e y 30-32, 104, 157, 167 175, 179, 191

R. Boy le . 30 R. Descarte s 57, 90, 142, 147, 158 -160, 163, 165, 171, 172, 253-278, 296, 322, 323 s 쉴러 286- 2 88, 296, 304 S. Clarke 169-171 Sir Heit or Heth e rin g ton 10 Socrate s 98, 324 성 베네딕트 116 S. Freud 29 T T. Aq u in a s 122, 124, 265 T. Brache 137 Thales 77, 78, 79 Ti am at 37, 38, 39, 40, 53, 59, 78 T. M. Tayl o r 10 Torric e ll i 145

R. t 2 3 U Uranos 42 V Vi co 275 w We 45 W. Heis e nberg 192, 307 W. I. Lenin 232 W ili 45 W. Nernst 213-215, 217 Z Zeus 43, 53

【기】 가능태 185 감각적 경험 289 감각적인 자아 215 객관성 96 객관화 56, 92 경험주의 216 공산주의 19, 216, 217 과학 14-17, 19, 21, 22, 24, 27, 275, 311, 312 과학신도 19 과학의 시대 13, 56 과학종교 (과학주의 ) 16, 18, 22, 27, 29, 30, 216, 320 관성 법 칙 133, 146, 147, 164, 169 광학법칙 208 공허 87, 88 그리스도 111-113, 117 극성 293, 294, 295, 296 근원물질 80 근원영역 49 근원적 신들 so 근원현상 299, 300 급진주의 129 기독교 15, 16, 33, 73, 75, 107-110, 117, 125-127, 167, 168, 224, 226, 227, 233, 235, 238, 239, 241, 243 -247, 244, 247, 249, 250, 251, 308, 315, 317 기술과학 18

기술윤리 시대 21 기술제식 시대 21 다수 형태성 87 당파성 217 도태압력 189 돌연변이 188 동일성의 원리 170 동형성 261 [미 로고스 (Lo g os) 33, 110 【이 모상 (Abbil d) 90 목적 인 184, 1864 무 (N ic h t s) 51, 83, 87, 103, 105, 120 무한성 226, 229 물신(物神) 72

물질 105 물질의 보존법칙 211 뮈토스 (M yt hos) 33, 35 믿음 17-19, 326 【미 바빌로니아 36, 37, 38, 41, 66, 78, 115 방법적 경제성의 원리 189 범주 57, 229 변증법적 유물론 216 보존가정 134 보편 278 보편개념 289 보편성 319 본질 292 비교 형태학 290, 293 비기독교 129 비존재 105 비존재자 82, 83, 84, 86, 105 비판적 분석 9 빈공간 92 빛의 신 71 【人】 4 원인 181 사이버네틱스 (K yb erne ti k) 195 사이코고니 (Psyc h og o n ie) 54 사제문서 66

30 년 전쟁 151 상승 293, 294, 295 상징의 현실성 280 샴 쌍둥이 (sia m esis c he Zwi ling e ) 17 생성 82, 84 선의 이데아 100, 101, 103, 121 선험적 지식 204 세속화 174, 224, 225, 227, 228, 230, 233, 241, 245, 247, 248, 312, 314 세속화된 실재 127, 167 스토아 철학자 161 수대 (獸帶) 159 수신론(적) 55 시 간 척 도 (Zeit sk ala) 206, 201, 208, 209 시 원 (Anfa n g ) 78 신 존 재 증 명 30, 167, 174, 257, 265, 276 신통보 Theog o nie 36 신풀라톤주의 124 신화(적) 32, 35, 36, 41, 45-49, 51, 55, 57, 65, 78, 80, 109, 309-311, 314-321, 324, 327 신화적 사유 57, 58, 실재 124, 126-128, 145, 312, 313, 315, 317, 319, 320, 322, 327 실체 134, 264, 267, 269, 272, 273, 274, 277 심층 심리학 54

아르케 (Arche) 78 야훼 67, 70, 71 양면성 6, 13 억 견 (Doxa) 84, 97 에너지 보존법칙 160, 211 에 다 Edda 36, 50 에 로스 (Eros) 41 엘레 아 (Elea) 학파 86, 291 엘로힘 (하나님의 영) 73 역사철학 6, 8 역설 74, 105 연장적 실체 322 영상 56 영성 (靈性) 73 영성주의자 73 영 지 (Gnosis ) 110 영혼 54, 57, 99, 127, 215, 269, 270, 271, 275, 289, 301, 313, 317, 318, 323, 325 영혼불멸 215 영혼지배 26 오캄의 면도날 134, 139 오캄의 원리 189 왕권 신수설 129 우연 187, 188 우주생성론 31, 35, 36, 57, 80, 88, 91, 118, 142, 157, 160, 161, 168, 169, -19 9, 225, 226, 227

원상 (Urb il d) 90 원자 86, 87, 88, 97 원자론 84~86, 88, 91, 92, 159 원자론자 88, 91, 97, io4 , 159, 169, 172 원자물리학 183 유체 동력 학 268, 269 이념의 현존 122 이 데 아 96, 98, 99, 100, 105, 118, 121, 122, 147, 182, 280, 289, 312 이심률 158 이중성 (Ambiv a lenz) 126, 224 이중성 (Zweid e uti gk eit ) 13, 15 입김 (Hauch) 73 [ 大 > 자기존재 101 자립적 실재성 169 자연 도태 192 자연법 칙 20, 27, 57, 58, 104, 167, 168, 211 자연의 역사 7 작용인 183, 185 참재태 185 적그리스도 115 절대공간 169, 170 절대시간 170 절대왕정 129 제네바 희의 19 제일 질료 105

조물주 102 존재 101 존재 자 82, 83, 84, 86, _87 , 88, 95, 97 종교 15, 22, 28, 52, 92, 108 중력법칙 30, 164 직관 204, 215 적집성 318, 319, 321, 324, 326 진리 97, 99, 109, 219, 262, 264, 270, 296-299, 326 진화 177, 178, 179, 180, 189, 190, 199 질료 183 질료인 182 <*> 참여 (mete c hei) 96, 100, 101 창조 74, 75 천년기 설(千年期說) 237, 238, 239, 243 천체숭배종교 66 초자연과학자 178 충족 이유율 170 【키 카오스 (Chaos) 50 케 논 (Kenon 공허 ) 169 케플러의 법칙 165, 167 코라 (Chora 공간) 169, 204, 210,

226, 239 코스모스 (Kosmos) 35, 88 탈신화화(脫神話化) 71, 72 데홈(t ehom) 65 토포스 (To p os) 169 트리엔트 종교회의 151 투영 54, 56, 325 티마이오 스 32, 98, 101-104, 118, 142 【프】 표상 263 필연성 50, 104, 105, 173, 284, 320, 323, 324 【중] 해석 기하학 260, 261 행동체계 20 현대 물리학 13 현상 292, 299, 300 현상학 184 현존 103, 162 형상 (E i dos) 96, 182, 286, 322 형상인 182 형성적 지배 72 형이상학 183

형 태 (Gesta l t) 96, 97, 100, 105, 280, 283, 284, 286 형태학 283, 284

확실성 262, 274, 276, 277 회의주의론자 19, 167

C.F.v. 바이 츠제 커 (Carl Fr ied ric h van Weiz s acker) 독일의 북부지방 킬에서 1912 년에 출생한 바이츠제커는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수제자로서 독일 베를린, 라이프치히 그리고 괴팅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 (1933) 와 하빌리타치온 (1936) 을 받았다. 이론 핵물리학자이며 이차대전 당시에는 원자폭탄 제조에 직접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트라스부르크와 괴팅겐 대학교의 물리학 교수를 역임하였고 1970 년 이후 막스플랑크 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그는 풀라돈, 칸트, 헤겔 그리고 하이데거 등을 중심으로 연구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 시간과 앎 』 『 자연의 통일성 』 『 인간적인 정원 』 『 인간의 역사 』 『 물리학의 건축 』 『 물리학의 세계상 』 등의 많은 저서와 논문이 있다. 송병옥 연세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독일 튀빙겐 대학교 철학박사 현재 건국대학교 철학과 교수 역서 『 철학 그 문제와 이론들 』 논문 「인과 법칙과 자유의 문제」 「바이츠제커의 사상」 「하이데거와 바이츠제커의 자연 개념 연구」 「과학과 신화」 등이 있음.

과학의 한계 대우학술총서 번역 96 1 판 1 쇄 펴냄 • 1996 년 9 월 10 일 지은이 • C.F.v. 바이츠제 커 옮긴이 • 송병옥 펴낸이 • 朴孟浩

펴낸곳 • (주)민음사 출판등록 1966. 5. 19. 제 16-490 호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506 대표전화 515-2000, 팩시밀리 515-2007 값 12,000 원 ©(주)민음사, 1996 서 양철학 KDC/160 Prin t e d in Seoul, Korea ISBN 89-374-4096-2 • 94160 89-374-3000-2 (세트)

대우학술총서門] O! i I 1 유목민족제국사 관텐/송기중 37 수학적 발견의 논리 71 폭정론과 저항권 헬라 만트/심재우 2 수학의 확실성 클라인/박세희 라카토스/우정호 72 생명과학철학 3 중세철학사 와인버그/강영계 38 텍스트 사회학 지마/허창운 데이비드 헐/하두봉 • 구혜영 4 日本語의 起源 밀러/김방한 39 현대물리학의 철학적 테두리 73 사랑의 역사 쥴리아 크리스테바/김영 5 古代漠語音韻學槪要 보음/전일동 74 大地의 노모스 칼 슈미트/최재훈 칼그렌/최영애 40 과학과 가치관의 우선순위 75 일반 공법학 강의 레옹 뒤기/이광윤 6 말과 사물 푸코/이광래 스페리/이남표 76 텍스트학 반 다이크/정시호 7 수리철학과 과학철학 와일/김상문 41 신화의 진실 휘브너/이규영 77 문명의 발생 찰스 레드만/최몽룡 8 기후와 진화 피어슨/김준민 42 대폭발 실크/홍승수 78 근대국가의 발전 G 폿지/박상섭 9 이상진리·역사 파트남/김효명 43 大同書 康有爲/이성애 79 과학적 발견의 패턴 10 사회과학에서의 場理論 44 표상 포더/이영옥 정성호 N. R 핸슨/송진옹 • 조숙경 레빈/박재호 45 과정과 실재 화아트헤드/오영환 80 아랍 문학사 R A 니콜슨/사희만 11 영국의 산업혁명 46 그리스 국가 에렌버그/김진경 81 18 세가 중국의 관료제도와 딘/나경수·이정우 47 거대한 변환 폴라니/박현수 자연재해 P. E. 빌/정철옹 12 현대과학철학논쟁 48 법인류학 포스피실/이문옹 82 역사비교언어학개론 쿤 外/조승옥 김동식 49 언어철학 올스튼/곽강제 R. 안틸라/박기덕 • 남성우 13 있음에서 됨으로 프리고진/이철수 50 중세 이슬람 국가와 정부론 83 계몽주의 철학 E 카시러/박완규 14 비교종교학 바하/김종서 램톤/김정위 84 토양 미생물학과 생화학 15 동물행동학 하인드/장현갑 51 전통 쉴즈/김병서 신현순 폴·클라크/이도원·조병철 16 현대우주론 시아마/양종만 52 몽골문어문법 뽀뻬/유원수 85 수학, 과학 그리고 인식론 17 시베리아의 샤머니즘 53 중국신화전설 l 袁jiiJ/ 전인초김선자 1 라카토시 / 이영애 디오세지 ·호팔/최길성 54 중국신화전설 Il 〈근간〉 86 봉건제의 이해 러쉬튼 쿨본/김동순 18 조형미술의 형식 55 사회생물학 ] 윌슨/이병훈 박시룡 87 그라마톨로지 자크 데리다/김성도 힐데브란트/조창섭 56 사회생물학 Il 윌슨/이병훈·박시룡 88 殷代貞 卜人物通考 l 라오쫑이/손예철 2109 원힐시버국트가 리의드 /진 이일화해 하 스/ 최몽룡 57 밴일볘반니언 스어 트학 / 황의경 자제 문제 l 8990 殷殷 代代 貞貞 卜卜人人物物通通考考 'll 라라오 오쫑쫑이 이 // 손손예예철철 21 商文明 張光直 /윤 내현 58 일반언어학의 제문제 l 91 순수경제학 레옹 왈 라 스/심 상 필 22 □ f%의 생태학 베 이츤/ 서 석봉 밴베니 스 트 / 황경자 92 문화유물론 마빈 해리스 / 유명 기 23 혼돈 속의 질서 59 폭력과 성스러움 93 포유동물의 가축화 역사 프리고진·스텐저스 / 유 기풍 지라르 / 김진식·박무호 클루톤 브 록 / 김 준 민 24 생명의 기원 밀라오르겔 / 박 인원 60 갑골학 60 년 董作 賓/ 이 형구 94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 25 일반언어학이론 야콥슨1 권 재일 61 현대수학의 여행자 E . 카시러 / 박지형 26 국가권력의 이념사 피터슨 /김 인수·주형 관 95 화학적 진화 SF . 메이 슨 / 고 문주 마이 네케 / 이 광주 62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 27 역사학 논고 브 로델 / 이정옥 모르 네 /주 명철 28 유럽의 식 의 위기 l 63 해석학과 과학 아 자르/ 조 한경 커 널 리· 코이 트 너 / 이유 선 29 유럽의식의 위기 l 64 서양고대경제 핀리 /지 동식 아자르 / 조한경 65 옴악사회학 베버 / 이 건용 30 일반국가학 켈젠 / 민준기 66 앙띠 오이디푸스 31 일반언어학강의 소쉬르/ 최승언 들 뢰 즈 · 가따리 / 최명관 32 일반체계이론 버 틀란피 / 현승일 67 과학커뮤니케이선론 33 현대문명의 위기와 기술철학 프 라 이스 / 남 태우·정준민 애거시 / 이군현 68 교양교육의 개혁 다 니엘 벨/송미섭 34 언어에 대한 지식 촘스 키 / 이 선우 69 과학과 가치 래 리 라 우든/ 이 유 선 35 음운학원론 트루베쯔코이 / 한문희 70 초기제국에 있어서의 교역과 시장 36 우주의 발견 하위트/ 강 용희 칼 풀 라니 /이 종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