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데리 다 Jac qu e Derr ida 알제리 알-비아르에서 출생. 파리 고등 사범 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철학 교수 자격을 획득하였다. 1960 년에서 1964 년까지 소르본 대 학에서 일반 철학 강사로 활동하였다. 1984 년 파리 사회과학 고등연구원 연구 주임으로 발령받았으며, 현재까지 그곳에서 재직중이다. 이 밖에 l ff7 5 년 철학 교육 연구회를 결성하였고, 1983 년 국제 철학 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 l ff7 0 년대 중반부터 예일, 존 홉킨스 대학을 비롯한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교환 교수로 활동중이다. 『 목소리 와 현상 La voix et l e p heomene 』 『 에크리튀르와 차이 L'ecritu r e et l a d iffe rence 』 『 철학의 여 백 Marge s de la p h il oso p h i e 』 『 회 화에 서 의 진 리 Writ¢ en p e i n t ure 』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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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마톨로지 자크 데리다 지음/김성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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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알리는 글 • 7

1 부 문자 이전의 에크리튀르

명구 13

1 책의 종언과 에크리튀르의 개시 20

2 언어학과 문자학 62

3 실증 과학으로서의 문자학(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151

2 부 자연, 문화, 에크리튀르

서론 〈루소 시대〉로 199

1 문자의 폭력 : 레비스트로스에서 루소까지 206

2 이 위험천만한 대리 보충…… 280

3 『인간 언어 기원론』의 발생과 구조 325

l 『인간 언어 기원론』의 위치 325

2 모방 382

3 분절화 443

4 대리 보충으로부터 근원으로 : 문자 언어 이론 518

역자 해제 • 613

찾아보기 • 637

알리는글 1

1) 이 글은 Cri tiq ue 에 출판된 (1965 년 12 월 -1966 년 1 월) 논문이 전개 발 전된 것으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전개 발전의 계기는 세 번의 중요 한 간행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다. M. V. -Davi d, Le debat sur Jes ecritu r es et l'hiero g] yph e aux XV/le et XVI/le Sie c les(l965, 이하 DE로 줄임) . A. Leroi- G ourhan, Le ge ste et la pa role(l965, 이하 GP로 줄임) . L'ecritu r e et la psy c holog ie des pe upl e s(Acte s d'un Colloq u e, 1963, 이하 EP로 줄임).

이 시론의 〈 1 부 문자 이전의 에크리튀르〉 1) 는 어떤 이론적 원형 의 대략적 윤곽을 그리고 있다 .. 그 것은 몇 가지 역사적 지표를 지 적하고 몇 개의 비판적 개념을 제시한다 . 〈 2 부 자연, 문화, 에크리튀르〉에서는 그 개념들을 시험대 위에 올린다. 이를테면, 전범 exem p le2 의 계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 지만 전범 개념을 엄밀하게 따져보면 여기서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편의상 우리가 계속해서 전범이라고 명명하는 것에 대해 좀더 많은 인내심을 갖고 좀더 완만하게 일의 순서를 밟으면서 그 선택을 정당화하고 그 필연성을 증명해야만 했다. 문제의 관건은 아마 루소 시대라고 불릴 수 있는 것에 대한 책 읽기 lec t ure3 이다. 그것은 단지 스케치만 된 책 읽기이다. 실제로 우리는 분석의 필요

성과 제반 문제점들의 어려움과 우리가 그리고자 하는 구도의 본 질을 고려하면서 『 인간 언어 기원론 』 이라는 짧지만 거의 알려지지 않은 4 텍스트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 근거 있다고 생각했다. 루소 의 이 저작에 우리가 부여하는 자리 매김에 대해서는 뒤에 설명할 것이다. 만약 우리의 책 읽기가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이유 때문이다. 비록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할 야심이 없다 고 할지라도 우리는 비판적 독서의 문제점들(자주 그것들에 골치 썩으면서도)을 야기시키려 하고 있다. 그 문제점들은 언제나 이 시 론의 중심 의도와 연결되어 있다 . 루소 텍스트에 대한 우리의 해석 은 1 부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대담하게 제시한 명제들에 밀접하게 의존한다. 그 명제들은 책 읽기가 최소한 그 중심 축을 통해 역사 (사상사, 문학사, 하지만 무엇보다 철학사)의 고전적 범주들로부터 탈피할것을요청한다. 이 중심 축을 둘러싸고, 자명하지만. 우리는 고전적 규범들을 존중 해야 했고 최소한 그렇게 하도록 애썼다. 비록 〈시대 e p o q ue 〉라는 낱 말이 이 규정들 속에서 완전히 규명되지는 않지만 필자는 역사적 총체 성 tot a l ite h is t o r iq u e3 !.} 더 불어 구조적 형 태 figur e s t ruc t urale 5 를 다루어야 했다. 따라서 우리는 텍스트에 관한 한, 그 역사적 위상, 그 고유한 시대와 공간 등의 물음을 반복하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두 가지의 주의 형식 (注意 形式, for mes d'a tt en ti on) 을 결합하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이처럼 지나간 과거 시대는 일관되게, 우리가 규정 하게 될 이 단어들의 6 의미에서, 하나의 텍스트로 성립된다 . 그 시대 가, 있는 그대로, 판독 가능성의 여러 가치들과 모델의 효율성을 간직 하고 있다는 점, 그렇게 해서 직선으로 된 시간 또는 시간이란 직선을 뒤혼들어 놓는다는 점, 바로 이런 점을 우리는 이 책의 중간 부분에서 한 명의 현대 인종학자가 7 공공연하게 선언하는 루소주의를 따져보면 서 또 거기에 호소하면서 시사하려고 했다 .

[역주] 1. 이 글은 이 책의 구성 및 발생 기저에 깔려 있는 데리다 책 읽기의 본질 및 집필 의도 등을 담고 있는 중요한 글이다. 2. exem p le 은 일반적인 예, 범례, 본보기, 전범 등으로 옮기기도 한다. 3. lec t ure 는 동사 li re 의 명사형이며 우리 말로는 책 읽기, 독서, 독해. 독법 동으로 옮길 수 있다. 4. 『인간 언어 기원론 L'essa i sur J'or ig ine des J an gu es』 은 1967 년 데리 다가 이 책을 출간할 당시까지 루소의 저작물 중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 다. 이 저서의 집필 시기와 발생 과정 및 문헌학적 토론과 내용 분석은 2 부 3 장에서 상세히 거론된다. 5. figu re st ru ct urale 은 구조적 형상 또는 구조적 형태로 옮길 수 있다. tot a l it e h i s t or iq ue 는 역사적 총체성 또는 역사적 전체성으로 옮길 수 있 다. 이는 각각 공시적 시각과 통시적 시각을 대변하는 낱말이다. 6. 시대와 텍스트를 지칭한다. 7. 구조주의를 태동시킨 인류학자 레비人뜨쿠 ~Claude Le vi -S t rauss 를 지 칭한다. 레비人뜨쿠人는 주요 저작물에서 자신의 사상적 뿌리가 루소 사상 에 있음울 명시한다.

1 부

문자 이전의 에크리뒤르

명구(銘句, L'exergu e ) I 1 문자 언어의 지식에서 빛을 발휘하는 사람은 태양 처럼 빛날 것이다. ―어떤 필생( 筆 生), EP . 87 쪽 오! 사마스(태양신)여, 당신의 빛으로 온 나라를 마치 퀴네이폼 기호 sig ne s cune ifo rme 급인 것처 럼 자세히 굽어살펴 주소서 . 一위의 책, 같은곳 2 이 세 가지 글 쓰기 방식은 국민으로 모인 사람들의 고찰을 가능하게 하는 세 개의 상이한 단계에 거의 정확히 대응한다. 대상 물체를 소묘하는 그림은 미개 민족에게 aux pe up le s sauvage s, 낱말과 명제들의 기호화는 야만 민족에게 aux pe up le s barbares. 알 파벳은 문명화된 민족에게 각각 안성맞춤이다 .3 ―루소, 『 인간 언어 기원론 』 3 알파벳 문자는 그 자체에서, 또 그 자체로 가장 지 성적인 것이다.— 헤 겔, 『 백과 사전 Ency clo 冠di e 』 이 세 개의 명구는, 도처에서 항상 문자 언어라는 개념을 지배 했음에 틀림 없는 인종 중심주의 e t hnocen t ri sme 에 관심을 끌어모 으기 위한 용도로 쓰인 것만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로고스 중심주의 J o g ocen t ri sme 라고 명명할 것에 대해 주목을 끌기 위한 것만도 아니다. 로고스 중심주의는 표음 문자의(가령 알파벳 문자 의) 형이상학으로 그 핵심에서 (수수께끼 같은 , 하지만 본질적이며,

단순한 역사적 상대주의로는 접근할 수 없는 이유들로 인해) 가장 독 창적이며 가장 강력한 인종 중심주의였으며 오늘날 지구 전체에 부과, 관철되는 중 4 인 동시에 유일하면서도 동일한 질서 ordre 속 에서 5 다음 개념들을 지배한다. 첫째, 문자의 표음화가 발생하는 동시에 고유한 역사를 은폐시키 는 세계 속에서 쓰이는 문자 언어 개념 le concep t de J'ec 1it ure . 둘째, 플라톤에서 헤겔까지뿐만 아니라(라이프니츠를 거쳐) 외관 상의 한계를 벗어나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에서 하이데거에 이르 기까지 일체의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로고스에 진리 일반의 근원을 부여했던 형이상학의 역사 ]'h i s t o ir e de la meta p h y s iq u e. 즉 진리의 역사 또는 진리의 진리의 역사는 (우리가 앞으로 설명하게 될 은유적 전환 d i vers i on me t a p hor iq ue6 을 제외하고) 늘 문자 언어 를 하대했고 〈충만한〉 음성 언어 pa role p le in e7 의 바깥쪽으로 쫓아 냈다. 셋째 , 과학 개념 concep t de la sc ien ce 또는 과학의 과학성 (사 람들은 늘 이를 로고스적 ]og iq ue8 이 라 한다) 개념 . 비록 과학의 실 천이 실제로, 언제나 그랬듯이 점점 더, 비표음적 기호 표기에 호 소하면서 로고스의 제국주의를 끊임없이 통박했는데도 언제나 과 학 게념은 철학적 개념이었다. 아마 이러한 전복 subvers i o 군은, 과학의 기획과 비표음적 기호의 계약 속에서 . 탄생한 담론 체계 sy st e m e allocuto i r e 10 내부에 언제나 포함되 었다 .I) 그러 한 상황은 1) 예컨대, E. Ort igue s, Le dis c ours et le sym b ole(Aubie r , 1962), 62 쪽 과 171 쪽에 나오는 〈이차 형성〉 또는 〈이차 지향의 기호주의 s y mbo li sme 〉 를 참조할 것 〈수학적 기호주의는 기호 표기의 계약이며, 문자로 된 기호주 의이다. 단지 어휘의 남용이나 유사 관계를 통해서만 사람들은 ‘수학 언어'에 대해 언급한다. 실제로 산식(尊式)은 하나의 ‘기호식'이며, 문자로 씌어진 글 자들로 구성된다. 그것은 글자들의 음성적 표현뿐만 아니라 이 글자들의 가 치를 규정해 주는 공리들의 공식화를 제공하는 언어를 매개로 할 때만 말을 한다. 엄밀하게 따지면, 알려지지 않온 글자들을 해독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

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이미 획득된 지식, 음성 언어의 사용에 의해 이미 형성된 사유를 전제로 한다 . 따라서 어떤 가설들에서도 수학적 기호주의는 이차적 형성의 결실이거니와 이차적 형성은 선결 조건으로 담론의 사용과 명 시적 계약들을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수학 산 식은 기호주의의 형식적 법칙들, 특정 표현 수단과 독립된 통사적 구조들을 표현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G-G . Grange r , Pensee for melle et sci en ces de J'ho mme, 38 쪽 이하, 특히 43 쪽과 50 쪽 이하를 참조할 것 (sur le Renversement des rapp o rts de la Jangue orale et de J'ec ritu re ) .

달리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는 문자 언어의 표음화 (과학과 마찬가지로 철학의 역사적 근원이며 구조적 가능성, 죽 에 피스테메 ]'e pi s t em 성의 조건)가 세계의 문화 2) 를 침투, 잠식하려는 마당에 어떤 첨단 과학도 더 이상 그러한 문자 언어의 표음화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것도 시실이다. 이러한 부적절합i nade q ua ti on 은 언제나 이미 tou jou rs dej 硏 운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무엇인가가 그 부적절함을 있는 그대로 노출시키고 일종의 인수 인계 prise en char g e 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새로 운 사태는 돌연변이, 해설, 축적, 혁명 또는 전통과 같은 간략한 개념들로 풀이할 수 없다. 이러한 가치들이 속하는 체계의 와해는 오늘날 있는 그대로 나타나며 그 가치들은 (역사 개념과 마찬가지 로) 로고스 중심주의 시대 내부에서만 의미 있는 역사적 운동 양 식 들 s ty les 을 기술한다• 메타포 meta p h ore, 형이상학, 신학 3) 에 의해 속박된 문자 언어의

2) 문자의 역사를 다루는 모든 저서는 지금까지 음성 문자를 쓰지 않았던 문 화들 속에 음성 문자가 도입되는 문제를 다룬다. 가령, EP. 44 쪽 이하. 또 i는n te r Lnaa tir oenfo a rlm ese ad lea Jlu'em c r ieitr ue r e d u cmhi anro x isi sem , e, LNin° g7,u is19t i5 q8u 년 e,, R5-e6c 월he r참ch조es 3) 우리는 여기서 단지, 식별 가능한 특정 순간과 장소에. 17 세기와 18 세기 에서 기호 이론을 굴절시키거나 억압했던 단호한 〈신학적 편견들〉만을 염 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나중에 데이비드 M. V. -Dav i d 의 책 에서 그 점을 언급할 것이다. 이러한 편견들은, 서구 역사에서, 즉 형이상 학 전부에서 (비록 형이상학이 무신론주의자로 자처할 때도) 구성적이며.

영속적이고 본질적인 전제 조건의 , 역사적으로 규정된, 가장 눈에 띄고 제 한된 표출에 불과할 뿐이다•

과학에 대해 암시하면서, 위에서 인용한 명구는 에크리튀르 ecr it ure 의 과학(그라마톨로지 gr amma t olo gi e 41 )13 이 결정적인 노력에 힘입 어 세계를 통해 자기 해방의 징조들을 나타낸다는 시실만을 알리는 것은 아니다. 이 노력들은 필연적으로 은밀하면서 분산되고 거의 지 각되지 않는다. 이 점은 그 노력들의 의미와 그 조작을 낳는 배경의 본질에 속한다. 특히, 우리가 시사하고 싶은 것은 아무리 그 시도가 필요하고 풍성한 것일지라도, 아울러 최상의 가설 속에서 그 시도가 이제까지 그 한계를 그은 모든 기술적, 인식론적 장애물과 신학적, 형이상학적인 모든 족쇄를 극복한다고 할지라도, 에크리튀르에 관한 그러한 과학이 있는 그대로 이 이름 아래에서는 영원히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 과학의 기획과 대상의 통일성을 영원히 결정할 수 없을지도 모를 위험에 처한 것이다. 죽 그 방법론 서설을 쓸 수도 없고 그 장(場)의 한계들을 기술할 수도 없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본질적인 이유 때문이 다. 과학과 문자에 관한 가장 다양한 개념을 통해 오늘날 겨냥되는 모든 것의 통일성은 원칙상 어느 정도는 비밀리에, 그러나 시종일관 일정한 역사적 형이상학적 시대에 의해 규정되거니와 우리는 단지 그 시대의 울타리 cl6 t ur 려를 엿볼 뿐이다. 우리는 종말fi n 이라는 말 을 사용하지 않는다. 과학이라는 관념과 문자라는 관념(따라서 에크 리튀르의 과학이라는 관념)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오직 기호에

4) 그라마톨로지 : 철자, 알파벳 음질화, 독서 그리고 문자 둥을 다루는 연구 분야 (L itt re 사전). 우리가 알기로는, 이 낱말이 오늘날 현대 과학의 기획 울 지칭하기 위해 · 사용된 것은 겔프I.J. Gelb 에 와서 비로소 가능했다. A stu dy of writing th e fou ndati on s of gram mato l og y( 1952 년, 이 부제 는 1963 년 재판에서 사라진다) 참조 . 체계적인 또는 단순화된 분류에 대 한 고심과 문자의 일원적 기원과 다원적 기원에 관한 논란을 야기시키는 가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문자에 관한 고전적 역사의 모델에 상옹한다.

대한 특정 개념(우리는 나중에 총칭적 기호 개념 le conce pt이라 말할 것이다)과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관계에 대한 특정 개념이 이미 지정되었던 세계의 내부와 근원으로부터이다. 그것의 특권, 그것의 필연성, 그리고 수천 년 동안 특히 서구에서 그것의 와해를 야기시키 고 그것의 한계들을 고발할 수 있을 정도까지 기호 개념이 조정했던 영역의 개방 ouver t ure 에도 불구하고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관계 는 매우 한정된 관계이다. 아마 여전히 잠정적으로 에크리튀르라 명명되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끈기 있는 성찰과 엄밀한 탐구는, 에크리튀르의 과학 저편에 있거나 모종의 애매 모호주의적 obscuranti st e 반발로 조 급하게 그것을 내쫓기는커녕 그것의 과학으로 하여금 가능한 한 그 실증성 p os itivit e 을 발전시키면서 지식의 울타리를 넘어서 현재 에 예고되는 어쩔 도리 없이 앞으로 올 세계에 충실하고 거기에 주의하는 사상의 방황 errance 이다. 미래는 절대적 위험의 형식 속 에서만 예고될 수 있다. 미래는 성립된 규범성 norma lite과 절대적 으로 단절된 무엇이며, 따라서 일종의 괴상 망측함 mons t ruos ite 속에서만 자신을 예고하고 스스로를 현전시킬p resen t er 수 있다. 앞으로 올 이 세상에 대한, 그 세상으로부터 기호, 음성 언어, 문 자 언어 등의 가치들을 뿌리째 혼들어놓을 것에 14 대한 그리고, 우 리들의 전(前)미래를 이끌고 갈 것에 대한 명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역주】 1. 불어 exer gu e 는 라틴어 exer g um 에서 온 말로 원뜻은 〈 작품 밖의 공간 〉 을 의미한다. 금속이나 목각에 글자나 날짜 를 새기기 위한 작은 여백을 지 칭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작품을 제시하거나 설명하기 위해 그림이나 텍스 트에 격언 따위를 붙이는 것을 말한다 . 2. 퀴네이폼 기호는 고대 아시리아 , 메데 Medes, 페르시아에서 사용한 문자 양식으로 창과 못을 다양하게 조합해 만든 기호로 구성되어 있다 . 3. 인류의 진화 단계를 미개 민족, 야만 민족, 문명 민족으로 나누어 각각 여 기에 해당하는 문자 양식을 유추해서 비교하는 루소의 이 명제는 의미 심 장한 것이며 이 책 2 부에서 상세히 분석, 비판된다 . 4. 지금 이 지구상에 팽배하는 가장 뿌리 깊고 강력한 이데올로기 를 인종 중 심주의로 규정한 것은 데리다의 탁견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요즘 귀가 따갑도록 듣는 국제화 , 세계화의 구호 심층에 궁극적으로 몇몇 서구 선진 산업 국가들(특히 미국)의 인종 중심적 질서 체계로 다시 세계 를 편 성하고자 하는 의도가 도사리고 있는지 곰곰이 따져 볼 일이다. 5. 인종 중심주의와 로고스 중심주의의 양축을 이루는 요소 를 각각 알파벳 중심의 문자 개념과 진리의 근원을 로고스에 두는 서구 형이상학이라 규정 하고 이 양자를 동일한 차원에 속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6. 문자와 관련해서 서구 철학사에서 사용된 은유적인 기분 전환이나 기분 풀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7. 충만한 음성 언어라는 표현이 갖는 속뜻은 이 책을 읽으면서 밝혀진다. 데 리다는 형이상학의 역사를 소리와 로고스가 맺은 공범 관계의 역사로 규정 한다. 이때 형이상학적 로고스, 다시 말해 진리는 어떤 외재적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스스로 충만한 소리, 다시 말해 음성 언어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구현할 수 있다고 본다. 자기 마음속의 소리를 스스로 돋는 것이야말로 자 신의 존재에 충만하는 현전이요, 이 현전을 보장하는 것은 바로 음성 언어 라고 보는 것이다. 8. 불어 형용사 lo giq ue 는 논리적이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lo g os 의 형용사로 보아 〈로고스적〉(논리적이며 이성적인)이라 옮긴다. 9. 불어 subvers i on 은 기존 체제나 질서를 뒤엎는다는 의미를 내포하며 여 기서는 근대 과학이 비표음적 기호 체계를 채택하면서 로고스 중심의 제국 주의적 지배를 통박하고 그를 전복하려 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10. sys te m e allocu t o i re 는 언표 의적인 화언 행위 체계를 의미한다.

11. 불어 e pi ste me 는 인식소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어 동 사 e pi s t ema i (=doxa) 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본래는 단순한 경험적 견해 나 진술의 차원을 뛰어넘는 존재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의미했다. 푸코의 정의에 따르면, 에피스테메란 특정 시대에 여러 과학의 발현을 가능하게 하는 담론적 실천들을 결합하는 관계들의 총합이다. 이 개념은 규범적 틀 에서 벗어나 사상사와 그 족보, 사상의 형성사에 속하는 기술적 개념으로 이해된다. 가령, 18 세기 말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근대적 에피스테메 는 인간의 독특한 존재 양식과 인문 과학의 가능성을 성립시킨 바 있다. 12. tou jou rs dej a( 언제나 이미 있음)와 같이 상식적으로 결합될 수 없는 두 개의 부사를 연속적으로 쓰는 표현은 데리다가 즐겨 쓰는 표현법이다. 이 표현은 하이데거 텍스트에 간혹 나타나는 동일한 의미의 독일어 im mer schone 를 데리다가 무의식적으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13. 이 책의 제목 Gramma t olo gi e 란 단어가 처음으로 나오는 곳이다. 데리 다가 쓰는 Gramma t olo gi e 란 단순히 전통적인 의미에서 다양한 문자의 유 형, 구조 , 역사를 연구하는 경험적 학문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문자학〉의 범주로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데리다가 정의하는 에크리튀르를 연구하는 새로운 탐구 영역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데리다는 그라 마톨로지의 방법론 및 연구 대상을 기술할 수 없다고 단정하면서 그 이유 를설명하고 있다. 14. 이 문장에 해당하는 원문은 en lui aura fait t rembler 이며 미래 완료 의 의미로 사용된 전미래 형태를 취하고 있다.

l 책의 종언과 에크리뒤르의 개시 소크라테스, 책울 쓰지 않은 사람 —니체 이 제목 아래 어떤 생각을 품던 간에, 언어의 문제 le pr obleme du J an ga ge 는 단 한 번도 여러 문제들 중 하나는 아니었다 .1 하지 만 오늘날만큼 그 문제가, 있는 그대로 다양한 연구들과 그 의도, 방법, 이데올로기에서 가장 이질적인 담론들의 세계적 지평을 침입 한 적은 없었다 .2 〈언어〉라는 낱말의 평가 절하, 그 낱말에 부여하 는 신용에서 그 어휘의 졸렬함, 헐값에 농락하려는 유혹, 유행에 수동적 으로 방치 되 는 것 , 전위 의 식 consci en ce d)a v ant- ga rde, 즉 무지 따위를 비난하는 모든 것이 이 점을 증언한다. 〈언어〉라는 기호의 인플레이션은 기호 자체의 인플레이션이며 절대적 인플레 이션이자 인플레이션 그 자체이기도 하다 .3 하지만 한 측면 또는 그 측면의 그림자를 통해 그것은 또한 징후를 만들어낸다. 죽 이 위기는 또한 하나의 증상이다. 그 같은 인플레이션은 역사적 형이 상학적 시대가 궁극적으로는 그 불확실한 지평의 총체성을 언어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 유는 단지 욕망이 4 언어 놀이에서 떼어놓으려고 하는 모든 것을 다 시 언어 속에서 취할 뿐만 아니라 언어 그 자체가 자신의 생명을

위협받고 제 갈 길을 상실하고 더 이상 한계점을 갖지 못하는 상 황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 또한 그 한계점이 지어지는 순간조차 언어가 자신의 자리를 확실하게 다지는 것을 중단하고 언어를 넘 어서는 것 같았던 무한한 시니피에 sig n if ie i n fi n i에 의해 포함되고 그 가장 자리에 테두리를 두르는 것을 멈추는 그 순간에도, 언어는 자신의 고유한 유한성 fi n it ude 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처지에 놓이 게 되기 때문이다. 프로그람 그런데, 그 필요성이 겨우 지각된 완만한 운동을 통해, 최소한 약 이천 년 전부터 언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결집되려는 경향이 있었 고 또 그렇게 하는 데 도달한 모든 것은 강제로 옮겨지거나 에크리 튀르란 이름 아래 요약되기 시작한다. 이제 막 지각되는 필연성에 의 해 마치 에크리튀르 개념이 언어 일반의 특수적, 파생적, 보조적 형 태를 지칭하는 것을 멈추면서(사람들은 언어를 커뮤니케이션, 관계, 표현, 의미, 의미의 성립 또는 사고 등으로 이해한다). 또 에크리튀르란 말이 주(主)시니피앙의 일관성 없는 사본 le double inc onsis t a n t d'un sig nifian t ma jeu r,5 죽 시니피앙의 시니피앙을 지칭하는 것을 멈추면서, 매사가 에크리튀르 개념이 언어의 외연을 넘어서기 시작 한 것처럼 진행된다 .6 에크리튀르란 이 단어의 모든 의미에서 언어를 포함할 것이다 comp r endrait ; 〈에크리튀르〉란 낱말은 여전히 시니피 앙의 시니피앙을 지칭하지만 기묘한 빛 속에서 〈시니피앙의 시니피 앙〉은 우연적 복제와 전락한 이차성을 정의하는 것을 멈춘 것으로 나타난다. 반대로 〈시니피앙의 시니피앙〉, 물론 언어의 기원 속에서 그 운동을 기술하지만 그 구조가 이런 식(시니피앙의 시니피앙)으로

이름 붙은 모종의 기원은 자신의 생산 속에서 자신을 잊고 자신을 소거시킨다는 사실을 벌써 감지하게 된다 . 시니피에는 거기에서 언 제나 이미 하나의 시니피앙으로 작동한다 . 7 문자 언어에 보유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이차성은 시니피에 일반에 영향을 미치고, 늘 이미, 죽 놀이에 들어가면서 entr e e de je u8 그것에 영향을 미친다• 언어를 성립시키는 시니피앙의 반사 놀이j eu des renvo i s 에서 벗어나는(경 우에 따라서는 그 놀이 속에 갇혀버린다) 시니피에는 없다. 에크리튀 르의 도래는 놀이의 도래이다• 오늘날 놀이는, 사람들이 기호의 유통 울 통제할 수 있다고생각한 한계점들을 지우면서, 그 모든 안전한 시니피에를 이끌면서, 언어의 영역을 감시했던 모든 요새와 놀이 밖 의 피난처를 축소시키면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간다. 이것은 엄밀 하게 본다면 〈기호〉 개념과 그 논리 일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귀결된 다 . 언어 개념의 의연이 그모든한계점을말소시키는순간에 이러한 범람 debordemen t야 도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앞으로 보게 되 듯이, 이 범람과 말소는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유일하고 동일 한 현상이다. 서구적 언어 개념(그 다의성, 그리고 파롤과 랑그의 밀접 하면서도 문제가 제기되는 대립을 넘어서서 그것을 일반적으로 음소적 또는 언리학적 glo ssemati qu e 생산, 랑그, 목소리, 청각, 소리와 숨소 리, 파롤 등에 연결시키는 것에 관한 한)은 최초의 에크리튀르 10 의 겉 모양 또는 변장으로서 오늘날 그 겉모습을 드러냈다. I) 최초의 에크리 1) 여기서 일차적 문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의 연대기적 우선 권을 단정하는 것으로 통하지 않는다. 이 토론은 다 알고 있는 바이다. 즉 문자는, 메차니노프 Metc h an ino v, 마르 Marr, 루코트카 Louko t ka 가 단정 했듯이, 〈음성 언어에 선행하는 것일까〉? ( 『 대(大)소비에트 백과 사전 』 초 판에서 채택된 결론이지만 곧 스탈린에 의해 반박된다. 이 토론에 대해서 는 V. Istr ine , Lang ue et ecri tur e, Lin guist i qu e, 앞의 책 , 35, 60 쪽 참조. 이 토론은 반 지네컨 van Ginn eken 신부가 제시한 논지를 중심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이 토론에 관해서는 J. Fevri er. Histo i r e d e J'ecr i tur e. Payo t. 1948-1959, 5 쪽 이하 참조) . 우리는 차후에 그 토론의 술어 및

튀르는 전환 이전에 〈음성 언어의 대리 보충 su pp lemen t〉(루소)으 로 통했던 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다. 문자 언어가 단순한 〈대리 보 충〉이 결코 아니라면 〈대리 보충〉의 새로운 논리를 구성하는 것이 시급하다. 바로 이 긴급성이 루소의 책 읽기에서 우리를 더 멀리 이 끌고 갈 것이다. 이 변장들은 경탄하거나 유감스러워 할 수 있는 역사적 우발성 이 아니다. 그 운동은 절대 필연적이었고 이 필연성은 재판받기 위 해 다른 어떤 법정 i ns t ance11 에도 출두할 수 없다. 소리 p hone 의 특권은 회피할 수도 있던 선택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경제 econo mi려 한 계기에 해당된다. (이를테면 〈역사〉의 〈생명〉 또는 〈자기 자신과 맺은 관계로서의 존재〉의 음성 실체를 통해 〈자기가 하 는 말을 스스로 듣는 s'en t endre pa rler> 체 계(이 체계는 비외부적, 비세계적, 따라서 비경험적, 비우발적 시니피앙으로 주어진다)가 한 시대 동안 세계의 역사를 지배해야 했고, 심지어 세계적인 것과 비세 계적인 것, 바깥쪽과 안쪽, 관념성과 비관념성, 보편적인 것과 비보편 적인 것, 초월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사이에 있논 차이로부터 세계에 대한 관념, 세계의 근원에 대한 관념을 만들어냈다 .)2)

2) 전이제것 조은건 들우이리 가의 심『을목 소불리러와일 으현키상는 La 이 유vo를ix 보et여 주le려 p h할 en 것or이n다en.e. a ( P. u. F .. 1967) 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이다.

이 운동은, 불균등하며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성과를- 동반하면서 표면적으로 그 궁극적 목적 tel os ¾ 향한 것처럼, 문자 언어롤 이 차적이면서 도구적인 기능 속에 국한시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 한 이차적 기능은 충만하고 충분히 현전하는p resen t e 음성 언어 (그 자신에, 시니피에에, 바로 현전 일반이라는 주제의 조건인 타자에 현전하는)의 번역자, 언어에 봉사하는 테크닉, 더 이상 다른 통역이 필요 없는 근원적인 음성 언어 자체의 대변인 p o rt e-p arole 이자 통

역자이다. 언어에 봉사하는 테크닉 Techniq u e au servic e du lang a ge . 우 리는 여기서 이미 우리에게 친숙하고, 하나의 전범으로서 우리가 문자에 대한 밀접하면서 역사적으로 규정된 개념을 이해하는 것을 돕게 될 기술의 일반적 본질에 호소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문자의 의미와 기원에 대한 일정한 질문 유형이 기술의 의미와 기 원에 대한 일정한 질문 유형에 선행되거나 그것과 혼합된다고 생 각한다. 바로 그 이유에서 기술 개념은 결코 문자 개념을 간단하게 밝힐 수 없을 것이다 .12 사람들이 언어 lan gu e 라 , 부르는 것이 그 기원과 그 종말에서 에 크리튀르의 한 계기, 본질적이지만 규정된 하나의 방식, 하나의 현 상, 하나의 양상, 하나의 종(種)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처럼 매사 가 진행된다. 아울러 그것은 오직 모험 과정 속에서만(마치 이 모 험처럼) 그 사실을 망각시키고 속일 수 있었다. 요컨대 매우 짧은 모험이다. 그 모험은 거의 삼천 년 전부터 기술과 로고스 중심적인 형이상학을 결합시키는 역사와 뒤섞일 것이며, 아울러 자신의 고갈 esso ufl emen t에 13 엄밀하게 접근할 것이다. 이 경우 그것은 그처 럼 많이 언급되는 책 문명의 죽음, 무엇보다 도서관의 발작적인 증 식에 의해 나타나는 책 문명의 죽음은 많은 예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겉모습은 이렇지만 책의 죽음은 아마(늘 그랬듯 이 일정한 방식으로) 음성 언어의 죽음(소위 말해 충만한 음성 언어) 과 문자 언어의 역사와 문자로서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변환을 예 고할 뿐이다. 수세기 간격으로 나온 이 예고, 매우 이질적인 역사 적 지속의 특성을 무시하는 일을 삼가면서도 그를 가늠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충위에서이다. 가속화와 그 질적인 의미가 그처럼 나 타나는 한, 과거의 리듬에 따라 신중하게 그들을 평가하는 데 있어 혼동을 일으킬 것이다. 〈음성 언어의 죽음 la mort de la pa role>

온 여기서 하나의 은유이다. 소멸을 말하기 전에 음성 언어의 새로 운 상황, 음성 언어가 더 이상 지배자가 되지 않는 구조에서 음성 언어의 종속 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론 이런 식으로 에크리튀르 개념이 언어 개념을 넘어서고 그 를 포괄한다고 확언하는 것은 언어와 에크리튀르에 대한 일정한 정의를 전제로 한다. 만약 그 정의를 정당화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조금 전에 지적한 〈에크리튀르〉 낱말을 잠식(이 잠식은 우 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한 인플레이션 운동에 굴복하고 말 것 이다. 사실 언제부턴가 도처에서 일정한 태도와 근본적으로 필연적 인 동기에 따라(그 기원을 밝히기보다 타락을 고발하는 것이 쉬운 일 이다) 사람들은 행동, 운동, 사고, 반성, 의식, 무의식, 경험, 정서 등에 〈언어〉라는 말을 써왔다. 이 모든 것에, 또 전혀 다른 것에 대해 〈에크리튀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회화 서 법 적 (繪畵書法的, pict o g rap h iq u e) 이 거 나 표의 서 법 적 (表意書法 的, ide og ra p h iq u e) 인 문자 표기 ins crip tion litter ale 등의 신체 동작뿐만 아니라 그를 가능하게 하는 것의 총체성을 지칭하기 위 해서다. 또한 시니피앙 측면을 넘어서서 시니피에 측면을 지칭하 며, 그렇게 해서 표기 일반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칭한 다. 그것이 문자 표기이건 아니건, 또 그것이 공간에서 분배하는 것이 목소리의 질서와 무관하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가령, 영화 서 법 cin e mato g rap h ie , 무용 서법 choreg rap h ie , . 회 화적, 음악적, 조 각적인 〈에크리튀르〉 등이 그러하다. 마찬가지로 운동 선수의 에크 리튀르라는 말도 가능할 것이며, 만약 오늘날 이 영역들을 지배하 는 테크닉을 곰곰이 따져보면 군사적 또는 정치적 에크리튀르 둥 의 표현은 더 확실하게 사용될 수 있다. 모든 것은 이러한 여러 활 동들에 이차적으로 결부된 표기법 체계뿐만 아니라 이 활동들 자 체의 본질과 내용을 기술하기 위해서이다. 또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생물학자는 유기체 세포 속에서 정보의 가장 기본적인 과 정에 대해 에크리튀르와 프로-그람p ro-g r amme 을 언급한다 끄 끝 으로 인공 지능 1 5 프로그램이 포괄하는 모든 영역은, 본질적 한계점 이 있든 없든 간에, 에크리튀르의 영역이 될 것이다. 인공 지능 이 론이 과거에 기계와 인간을 대립시키는 데 사용한 일체의 형이상 학적 개념들(영혼, 생명, 가치, 선택, 기억 따위의 개념까지)을 포함 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 3) 그것은 그 역사적 형이상학적 소속이 고발당할 때까지 에크리튀르, 흔적, 문자gr amme 또는 문자소 grap h eme 등의 개념을 간직해야 할 것이다. 그람(문자) 또는 문 자소(철자)는 (인간에 부여한 변별적 특징 일체와 그것이 함축하는 의미 체계와 더불어) 인간적인 것으로 규정되거나 인간과 상관없는 an-humain 것으로 규정되기 전에 그러한 식으로 고유한 환경 !'elemen t을 지정할 것이다. 단순성 없는 경위, 환경 또는 환원 불 가능한 원자로 이해되 는 그것은 원-종합 l'ar chi- s yn th ese, 형 이상 학적 대립들의 체계 안쪽에서 정의됨이 금지되는 것 , 따라서 경험 일반 또는 의미 일반의 근원으로 불러서는 안 되는 것들의 요소이 다.

3) 주지하다시피 비너 W i ener 는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그가 판단하기에 지 나치게 대략적이고 일반적인 대립을 〈의미론〉에 맡기면서도 계속해서, 기 계의 부분들을 특징짓기 위해, 〈감각 기관〉, 〈운동 기관〉 따위의 표현들을 A 꽝한다 .

이 상황은 언제나 미리 예고되었다. 왜 그 상황은 있는 그대로 일이 끝난 후에 인식되는 중일까? 이 물음은 끝나지 않는 분석을 부를 것이다. 단지 우리의 한정된 논지에 도입하기 위해서 몇 가지 이정표가 되는 점들을 취해 본다. 우리는 이미 이론적 수학을 암시 했다. 수학의 에크리튀르(즉 기호 표기)를 감각적 서법으로 이해하 건(이는 벌써 일종의 자기 정체성, 따라서 그 형태의 관념성을 전제로 하며, 터무니없는 원칙에 〈감각적 시니피앙〉이라는 통상적으로 수용된

개념을 갖다 놓는다), 시니피에들의 관념적 종합 또는 다른 층위의 작동 흔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건, 더 심층적으로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이해하건, 결코 음성적 생산에 절대 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소위 음성 문자를 사용하는 여러 문화들 의 내부에서 수학은 단지 고립된 다른 나라 영토 enclave 인 것만 은 아니다 茂 이 고립된 영토는 더구나 모든 문자사가들이 지적한 것이다 . 동시에 그들은 그처럼 오랫동안 가장 편리하고 〈가장 현명 한 〉 4) 문자로 통했던 알파벳 문자의 불완전성을 상기시킨다. 또한 이 고립된 영토는, 과학 언어의 쓰임이 내부로부터 가장 심층적으 로 음성 문자 언어의 관념성과 그 묵시적 형이상학(그 총칭적인 la 형이상학), 특히 에피스테메의 철학적 관념을 통박한 그 장소이다. 또한 그것은 역사 h i s t or i a 러는 관념도 통박하거니와 그러한 개념 은 그것의 공통된 전진 과정 che mi nernen t의 단계에서 그들을 서 로 연결시킨 분리 또는 대립에도 불구하고 심층적인 연대를 이루 고 있다. 역사와 지식, 히스토리아와 에피스테메는(어원 또는 철학 에서뿐만 아니라) 언제나 현전의 재소유화 rea pp ro p r i a ti on de la p resence 를 위한 우회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이론 수학을 넘어서, 정보 사용과 정보 실천의 발전은 〈메시지〉의 가능성을 대폭적으로 확장시켜, 메시지가 더 이상 언어 의 〈문자로 씌어진〉 번역, 즉 언어의 통합성 속에서 음성 언어로 남을 수 있는 시니피에의 옮김 정도를 넘어서는 데까지 확대된다. 이것은 표음 표기법(녹음 기술법 포함) 및 구어를 보전하고, 말하 는 주체의 현전 밖에서 구어를 조작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의 확장 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문자 언어의 인종학, 역사의 전개 발전과 동일한 고리에 결속된 이러한 전개 과정은 다음 사실을 우리에게 4) EP, 126, 148, 355 쪽 둥 참조. 또 다른 관접에 대해서는 R. Ja kobson, Essais de Jinguist i qu e ge nerale( 불어판), 116 쪽 참조 .

일러준다. 서구의 거대한 형이상학적, 과학적, 기술적, 경제적 모험 의 배경인 표음 문자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한계가 그어졌으며, 음 성 문자가 자신의 문자 양식에서 벗어난 문화적 풍토에 자기의 법 칙을 부과, 관철시키는 그 순간에 바로 스스로의 한계를 긋고 있다 는 사실말이다. 그런데 인공 두뇌학과 에크리튀르의 〈인문 과학〉이 우연치 않게 결합한 것은 좀더 심층적인 혼란으로 귀결된다. 시니피앙과 진리 이 확장되고 철저해진 에크리튀르를 지배하는 〈합리성〉(하지만 이 문장의 끝에 제시된 이유 때문에 이 단어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은 더 이상 로고스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자신의 원천을 로고스의 원천에서 찾는 모든 의미 작용(특히 진리의 의미 작용)의 와해가 아니 라 파괴 에 착수하며 , 탈침전화 d e- sed i men t a ti on 와 탈구성화 decons t ruc ti on 에 착수하는 것이다. 진리 에 관한 모든 형 이상학적 규정과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적 존재 신학 l'on t o- t heolo gi e 을 17 넘 어서서 우리에게 호소하는 진리 규정은, 로고스의 법정이나 로고스 의 계보 속에서 고찰되는 이성의 법정과 어느 정도는 직접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로고스를 어떤 의미에서 받아들이건, 소크라테 스 이전의 의미에서 또는 철학적 의미에서, 신의 무한한 오성의 의미 에서 또는 인류학적 의미에서, 헤겔 이전의 의미에서 또는 헤겔 이후 의 의미에서 이해하건말이다). 그런데 로고스 속에서 소리와 맺은 근원적이며 본질적인 관계는 결코 단절되지 않았다. 그 점을 보여주는 것은 쉬운 일이며 우리는 나중에 그 점을 좀더 정확히 밝힐 것이다. 소리의 본질은, 그것을 어느 정도 묵시적으로 규정한 바대로라면, 쿠 T 人 _구 서의 〈사고〉 속

에서 〈 의미 〉 와 관계를 맺고 그것을 산출하고, 수용하고, 말하고, 〈 하나로 모으는〉 것에 밀접하게 근접되어 있다. 가령, 아리스토텔 레스가 〈목소리가 방출한 소리 盆迎때 rp(,)때는 영혼의 상징이 며 JCa 8fi µa ra 때' 1/!V Xf ir; 문자로 씌어진 낱말들은 목소리가 방출 한 낱말들의 상징이다〉 (De J'int er pr eta t ion l, 16 a 3) 라고 적은 이유는 그 최초의 상징을 산출하는 목소리가 영혼과 본질적이면서 직접적인 근접성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시니피앙을 산출시키는 목소리는 단지 다른 시니피앙들 속에 있는 일개 시니 피앙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적 유사성을 통해 사물들을 반영하거나 반사시키는 〈영혼-상태 e t a t -d' fun e 〉를 의미한다. 존재와 영혼 사이 에, 사물과 마음의 정서 사이에, 번역 관계 또는 자연적 의미 작용 관계가 있을 것이다. 영혼과 로고스 사이에는 계약적 상징화 관계 가 있다. 자연적 보편적인 의미 작용의 질서에 직접적으로 귀결되 는 최초의 계약은 구어 lan gag e p arl ei료서 생성될 것이다. 문자 언 어는 여러 계약들을 고정시키게 될 것이며 이 계약들은 그 사이에 서 다른 계약들과 연계를 맺는다. 문자 언어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지 않은 것처럼, 구어로 된 낱말들 도 똑같지 않다. 반면 이 표현들이 직접 그 기호가 되는 따µ c i a 卯成火 영혼의 상태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으며 이는 그 상태가 이미지가 되는 사물들이 동일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16a. 강조는 필자의 것임 )18 모든 사물을 자연적으로 표현하는 영혼의 정서는 일종의 보편 언어 를 이루며, 그 순간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말소할 수 있다. 그것 온 투명성의 단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때때로 아무런 위험 없이 그 것을 생략할 수 있다 .6) 그 모든 경우에, 목소리는 시니피에와 가장 가 5) 오방크 Pier re Auben q ue 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Le pro bleme

de J'et re chez Aris t o t l e, 106 쪽 이하). 우리에게 영감을 준 탁월한 분석을 진행시키는 가운데, 오방크는 실제로 다음 사실에 주목한다. 〈다른 텍스트에 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상징으로 규정하는 것은 사실이 댜 ‘토론 / 속에서 사물 그 자체를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물 대 신, 우리들은 상징으로써 사물에 해당하는 이름을 사용해야만 한다.’ 영혼의 상태가 성립시킨 중간 단계는 여기에서 제거되거나 최소한 무시된다. 하지만 이러한 제거는 적법하다. 왜냐하면 영혼의 상태가 사물처럼 처신하면서 사물 그 자체는 곧바로 영혼의 상태로 대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어떤 수단 으로도 이름으로 사물을 대체할 수는 없다.……〉 (107-108 쪽)

까이 있다. 시니피에를엄밀하게(사고된또는체험된) 의미로규정하건 아니면 느슨하게 사물로 정의하건말이다• 목소리를 영혼 또는 시니피 에화된 의미의 사고p ensee du sens s ig n ifi e 와 굳게 결합시키는, 게다 가소리를사물에 연결시키는것에 견주어(조금전우리가지적한아리 스토텔레스의 태도에 따라 그렇게 하건, 사물 res 을 그 형상 e i dos 으로부 터, 죽신의 로고스또는무한한오성 속에서 생각되는의미로부터 창조된 사물로서 규정하는 중세 신학의 입장에 따라 그렇게 하건) 모든 시니피 앙, 무엇보다도 문자로 씌어진 시니피앙이 파생된 것이다. 그것은 언 제나 테크닉이며 대리 표상적 re p resen t a ti N길 것이다. 그것은 어떤 구성적 의미를 갖지는 못할 것이다 .19 이러한 파생은 〈시니피앙〉 개념 의 기원 그자체이다. 기호개념은언제나시니피에와시니피앙의 구분 (소쉬르에 따르면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종이의 양면으로 파악되지만)을 함축한댜 따라서 기호개념은음성 중심주의 p honocen t r i sme 이기도 한 로고스 중심주의의 계보 속에 남아 있다. 즉 목소리와 존재의 절대 적 근접성, 목소리와 존재의 의미의 절대적 근접성. 목소리와 의미의 관념성의 절대적 근접성을 전제로 한다. 헤겔은 관념화i dea li sa ti on, 개념 생산, 주체의 자기 자신으로의 현전 la pre sence a soi du su jet 속에서 소리가 누리는 기묘한 특권을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관념적 운동(요컨대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단순한 주관성, 공명

하는 물체의 영혼이 표출된다고 말한다)을 사람의 귀는, 눈이 색깔 또 는 형태를 지각하는 것과 동일한 이론적 방식으로 지각한다. 대상의 내면성은 이렇듯 주체의 내면성이 된다.( 『 미학 Es t he tiq ue .!I III, I. 불 어판, 16 쪽) …… 반대로 귀는 실제로 거의 대상을 향하지 않고 물체의 진동 결 과를 지각하는데, 그 진동에 의해 물질적 형상이 아닌 영혼으로부터 오는 최초의 관념성이 표출되고 개시된다.(위의 책, 296 쪽) 소리 일반에 대해 한 말은 더욱이 말p hon i e 에 대해서도 타당하 다. 소리를 통해 주체는 자기가 한 말을 스스로 들을 수 있는(이것 은 분리 불가능한 체계이다) 까닭에 관념성의 요소 속에서 자기 자 신의 정서를 스스로 느끼고 결국 자기 자신에 귀결된다. 따라서 이미 예감되는 것은 음성 중심주의가 존재 일반의 의미 를 현전으로 보는 역사 내적 규정성 de t er mi na ti on hi s t o ri ale 과 합 치되고, 이러한 일반적 형식에 의존하며, 그 형식 가운데 자기 체 계와 역사 연쇄를 조직화하는 여러 하위 규정들(형상 e i dos 으로서의 사물의 현전, 실체/본질/존재 ous ia로서의 현전, 지금 또는 순간 nun 의 점 s tigm합프료서의 시간적 현전, 코기토 co git o 의 자기 자신으로의 현전, 자기 자신과 의식, 주관성, 타자의 공현전성, 자아의 지향적 현 상 ph enornene i n t en ti onnel 으로서의 상호 주관성 등)과의 합치 이 다. 따라서 로고스 중심주의는 현전으로서의 존재자l' e t an t의 존재 에 대한 규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한 로고스 중심주의 가 하이데거 사상에서 완전히 부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로고스 중 심주의는 하이데거 사상을 존재-신학의 시대 가운데 현전의 철학, 죽 총칭적 철학 la ph il oso p h ie 속에 붙잡아놓을 수 있다. 이 점은 아마 그 울타리의 윤곽을 잡을 수 있는 시대로부터 그 자신이 벗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 시대로 가는 소속 또는 비소속의 운동은 너무 미묘한 것 이며 , 이 점 에서 착 각 에 빠질 위험이 너무 커서 여기서는 섣부르게 잘라 말할 수 없다 . 20 따라서 로고스의 시대는 문자 언어를 매개 med i a ti on 의 매개로, 의미 외면성으로의 실추로 저등화한다. 바로 이 시대에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차이가 속하거나 최소한 그 양자의 〈 병행론 〉 에 보이는 기묘한 편차(아무리 경감되었다고 하지만)와 그 상호 외면성 등이 속할 것이다. 이 소속은 하나의 역사 속에서 조직화되고 서열화된 다 . 시니피에와 시니피앙 사이의 차이는 심오하면서도 암묵적으로 형이상학의 역사가 포괄하는 위대한 시대의 총체성에 속하며, 기독 교의 창조주의와 무한주의가 그리스적 개념성의 뿌리를 자기 것으 로 만들 때, 그 양자가 좀더 밀접한 시대에 좀더 명시적이면서 체 계적으로 분절된 방식으로 속하게 된다 . 이러한 소속은 본질적이며 환원 불가능하다. 스토아 학파와 곧이어 중세의 기호 형식 s ign ans 과 기호 의미 sig na t um 사이에 있는 대립의 편리함 또는 〈 과학적 진리〉를, 그 형이상학적 신학적 뿌리를 자신에게 귀결시키지 않고 붙잡아둘 수 없는 것이다. 감각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 사이의 구분 온, 그것이 지배하는 모든 것, 죽 그 총체성 속의 형이상학과 더불 어 이 뿌리에 속하는 것만은 아니다(물론 이러한 소속은 이미 의미 하는 바가 크다). 그러한 소속과 더불어 이 구분은 가장 주도 면밀 한 21 언어학자, 기호학자, 심지어 형이상학이 끝나는 곳에서 자기 작업의 과학성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일반적으로 자 명한 것으로 수용한다꾸 예컨대 디음 과 같은 진술을 살펴보자. 현대 구조주의 사상은 다음과 같은 것을 명료하게 밝혔다. 그것은 언 어가 기호 체계이며 언어학은 기호론 sem i o tiq ue( 또는 소쉬르의 술어로 기호학 sem i olo gi e). 죽 기호 과학에 통합되는 부분이라는 점이다. 우리

시대가 부활시킨 중세의 기호 정의 (al iq u i d sta t pro a!i qu o, 무엇인가 를 지칭하는 그 무엇 ) 23 는 언제나 타당하고 풍부한 정의로 입증되었다. 이렇듯 기호 일반, 특히 언어 기호의 구성적 표지 mar que consti tut i ve 는 그 이중적 특성에 있다. 모든 언어 단위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두 양상을 함축한다. 하나는 감각적인 것이요, 다른 하나는 지성적인 것, 죽 한편으로는 시그난스(소쉬르의 sig n if ian t) . 다른 한편으로는 시그나 툼(소쉬르의 sign ifi e) 이 그 구조에 해당된다. 언어 기호(아울러 기호 일 반까지)를 성립시키는 이 두 요소는 서로가 서로를 전제로 하고 필연적 으로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부를 수밖에 없다 . 61

6) R. Ja kobson. 앞의 책, 162 쪽. 이 문제를 비롯해 기호 개념의 전통과 아 연속성의 내부에서 소쉬르가 한 공헌의 독창성에 대해서는 Ortig ue s. 앞의 책 54 쪽 이하 참조.

그러나 이러한 형이상학적 신학적 뿌리에는 많은 숨겨진 침전물 들이 밀착되어 있다. 따라서 기호 〈과학〉 또는 좀더 좁게 말해 언 어 과학은 감각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 사이의 구분 없이는, 또 동 시에 좀더 심층적, 묵시적으로 그 〈실추 chu t e 〉에 앞서 감각적 세 속의 의면성 속의 모든 추방 이전에 그 예지성i n t e lligi b ilit e 에서 〈 일어날 수 〉 있는 시니피에에 대한 지시를 견지하지 않고는 시니 피앙과 시니피에의 차이(기호 개념 그 자체)를 고수할 수 없다. 순 수한 예지성의 측면에서 기호는 하나의 절대적 로고스에 귀결되며 그것과 직접 결합된다. 중세 신학에서 이 절대적 로고스는 무한한 창조주의적 주관성이었다. 기호의 지성적 측면은 신의 말씀과 모습 쪽으로향한다. 물론 이 개념들을 〈버리는 것〉이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그들은 필요한 것이며 최소한 오늘날 우리는 그 개념들 없이는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문제의 핵심은, 사람들

이 자주 순진하게 분리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개념들과 사유 태 도의 체계적 역사적 연대를 명증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기호와 신 성은 동일한 출생 장소와 시간을 가지고 있다. 기호의 시대는 본질 적으로 신학적이다. 아마 그 시대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사적 울타리는 윤곽이 잡혀 있다. 이상의 여러 개념들을 포함하는 유산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기 위해서라도 그 개념들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점에서 단념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울타리 내부에서, 비스듬하면서 언제나 위험 천만한 운동을 통해, 그 운동이 탈구성하고자 하는 것의 안쪽에 다시 떨어 지는 위험을 끊임없이 무릅쓰면서, 모종의 신중하면서도 세심한 담 론의 비판적 개념들의 윤곽을 잡고, 그 조건들과 그 효율성의 배경 과 한계점들을 지적하고, 그 개념들이 탈구성하는 것이 가능한 기 구 mach i ne24 에 대한 그 개념들의 소속을 엄밀하게 지칭해야 할 것이다. 또한 동시에, 울타리 바깥의 빛(아직까지는 그 이름을 명명 할 수 없다)을 통해 엿보이는 단층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기호 개 념은 여기에서 표본이 된다. 우리는 조금 전 기호 개념의 형이상학 적 소속을 표시했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거의 한 세기 전부터 기 호라는 주제는 의미, 진리, 현전, 존재 등을 의미 작용의 운동으로 부터 따로 떼어놓기를 주장하는 전통의 뼈아픈 고심이다. 조금 전 우리가 했던 것처럼,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차이 또는 기호 일반 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품으면서 우리가 명확히 해야 할 사실은 이 렇다. 기호에 현전적이며 선행적이고 그 바깥쪽에 있거나 위에 놓 이는 진리의 법정을 설정한 후부터(시니피에와 시니피앙 사이의 소 거된 차이의 장소를 설정한 후부터), 그렇게 하는 것이 문제의 골자 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정반대이다. 우리는 기호 개념 속에서 (현전의 철학사룰 벗어나서는 결코 존재한 적도 없고 작용한 적도 없 는) 체계적, 계보적으로 이 역사가 규정한 채로 남아 있는 것에 대

해 신경쑬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탈구성(해체) 개념, 특히 그 해체 작업, 그 〈 양식 s ty le 〉 등은 본질적으로 오해와 무시에 노출된 채로 남는다. 시니피앙의 외재성(外在性)은 에크리튀르 일반의 외면성이며, 뒤 에서 우리는 에크리튀르 이전에 언어 기호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겠다. 이러한 외면성 없이는 기호 개념 그 자체가 산산 조각 난 다. 우리의 모든 세계와 언어가 그 외면성과 더불어 전개되기 때문 에, 또 그 명증성 e vi dence 과 가치는 일정한 파생 지점에서는 파괴 될 수 없는 견고함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기호의 특정 시대에 소속함에 대해서 〈 다른 것으로 이행해야 하며〉 기호와 그 술어, 그 개념 등을 제거해야 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 될 것 이다. 여기서 우리가 스케치한 태도를 적절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 시대〉, 〈 한 시대의 울타리〉, 〈역사적 계보〉 등의 표현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일체의 상대주의에서 그들 울 떼어놓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 시대 내부에서 책 읽기와 글 쓰기, 즉 기호의 생산 또는 해석, 기호들의 직물망인 텍스트 일반은 이차성 속에 국 한된 채로 남아 있다. 로고스라는 요소에 의해, 또 그 요소 속에서 이미 성립된 진리 또는 의미는 기호에 선행한다. 사물, 죽 〈지시체 r efe ren t〉가, 그것이 언급되고-사고된 의미가 되기 시작한 창조적 신의 로고스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갖지 않을 때도, (유한한 또는 무한한) 시니피에는 로고스 일반과는 직접적 관계를, 시니피앙, 죽 문자의 외재성과는 중계적 관계를 갖는다. 그렇지 않고 사실이 다 르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일 때는 은유적 중계가 그 관계 속에 슬 그머니 끼여들고 직접성을 위장한다. 죽 그것은 『페드로 Phedre 』 (278a) 에 의해, 나쁜 문자(〈고유하고〉 통상적 의미의 문자, 〈공간 속의〉 〈감각적〉 문자)와 대립되는 영혼 속에 새겨진 진리라는 문자

이며, 특히 중세때 나오는 자연이라는 책과 신의 성서라는 은유들 이 그러하다. 이 담론들 속에서 은유로 작동하는 모든 것은 로고스 의 특권을 확인하고 문자 언어에 주어진 〈 고유한 〉 의미의 토대를 세운댜 현전하는 로고스와 근접성 속에서 영원히 생각되고 언급되 는 진리를 의미하는 시니피앙을 뜻하는 기호가 바로 그것이다. 세 심한 주의를 필요로 하는 그 역설은 25 다음과 같다. 자연적 보편적 문자 언어, 즉 지성적 비시간적 문자 언어를 이렇듯 메타포가 명명 하는 꼴이다. 감각적 유한적 등의 성격을 지닌 문자 언어는 고유한 의미의 문자 언어로 지칭된다. 따라서 그것은 문화, 기술 , 인위적 수단의 측면에서, 죽 인간이 만들어낸 책략, 우연히 구현된 존재 또는 유한한 피조물의 술책이란 측면에서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은유는 수수께끼로 남고, 최초의 은유로서 나타나는 문자 언어의 〈고유한〉 의미로 귀결된다. 이 담론의 지지자~ 이 〈 고유한 〉 의 미를 여전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따라서 문제의 관건은 고유한 의미와 비유적 의미를 뒤집는 것이 아니라 문자 언어의 〈 고유한 〉 의미를 은유성 me t a p hor icite 그 자체로 규정하는 것이다. 『유럽 문학과 라틴 중세 La Jittera tw ·e e 따 op ee nne et le Maye n Age la ti n .JJ 의 백미로 손꼽히는 〈책의 상징주의 Le sym boli sm e du li vre 〉라는 장( 章 )에서 쿠르티우스 2 6 는 풍부한 예를 곁들여 『페 드로』에서 칼데론 Calderon27 에 (즉 〈책이 누렸던 새로운 경의(敬 意)〉 (374 쪽)에 의해 〈상황이 역전되는 것〉(불어판, 372 쪽)을 보여줄 정도까지) 이르는 전개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모 가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근본적 연속성을 감추고 있 다. 플라톤에게 영혼 한가운데 있는 진리라는 문자의 경우와 마찬 가지로 그것은 중세까지도 여전히 은유적으로 이해된 문자, 죽 자 연적이며 영원하고 보편적인 문자, 그 존엄성 속에서 재인식된 의 미화한 진리 체계 le sys t e m e de la verit e s ignifi ee 이다. 『페드

로 』 처럼 모종의 타락한 문자 언어가 계속해서 진리의 문자와 대립 한다. 신적, 자연적 문자를 인간의 공이 든, 유한적 인위적 문자 표기와 대립시키는 이러한 은유의 역사를 써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축적하고 있는 지표들에 의해서 표시된 단계들을 엄밀하게 분절시키고 신(자연 또는 법, 실제로 자연법)의 책이러는· 주제를 살 펴보아야 할 것이다. 카비 엘리제 Kabbi E li ezer 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모든 바다 가 잉크로 되어 있고, 모든 연못에 갈대를 심어두었다면, 하늘과 땅이 양피지라면, 모든 인간이 문자 사용 기술을 실천한다 해도 그들은 내 가 터득한 오경(五綠 Thora) 을 다 파헤치지 못할 것이다. 반면 오경 그 자체는 바다 속에 잠긴 봇끝이 바닷물울 흡수하~큰 만큼만(지극히 소량) 줄어들 뿐이다 . 〉 7) 갈릴레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은 수학 언어로 씌어졌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라는 거대한 책을 읽어볼 일이다. …… 흄의 『대화록 Di alo gu es 』 28 에서 클레앙트 Clean t he 는 자연 종교 의 이름으로 말하기를. 자연이라는 이 책은 해독할 수 있는 어떤 담론 또는 합리적 추론이 7) E. Levin a s. Dif ficil e Ji ber 祐, 44 쪽에서 재인용.

라기보다는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수수께끼 를 포함한다. 보네 Bonne t 2 9 는 말하기를• 내게 있어 다음 사실을 추정하는 것은 더욱더 철학적인 것으로 사료 된다. 즉 지구는 위대한 〈 존재 〉 가 우리보다 훨 씬 더 고차원이며 지성 적인 존재들이 해독할 수 있게끔 부여한 한 권의 책이다. 그 책 속에 서 지성적 존재들은 숭배할 만한 지혜의 무한히 다양하면서도 변화 무 쌍한 특징들을 철저히 연구한다. 폰 슈베르트 G. H. Von Schuber t 30 는 말하기를. 최고의 지혜가 인류에 대한 일체의 계시 속에서 사용하는 이미지들 과 상형 문자들로 만든 이 언어는 시에 가까운 언어 속에서 다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언어는 우리 현재 상황 속에서는 깨어 있 울 때의 산문보다는 꿈의 은유적 표현과 더 닮았다. 우리는 이 언어가 지고한 그곳의 진정한 언어가 아닐까 하고 자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 스스로가 깨어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우리가 천 년 동안의 잠 또는 최소한 그 꿈의 메아리 속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 꿈속에서 신 의 언어의 몇 개의 고립된 모호한 낱말들을 지각할 뿐이다. 마치 잠자는 사람이 그 주변에서 사람들의 대화를 지각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야스퍼스는 말하기를. 세계란, 보편적 독서로는 접근되지 않는 오직 실존만이 해독할 수 있는 타자가 준 수고(手稿)이다.

이상의 모든 언급이 동일한 은유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들이 표 시하는 심층적 차이점들을 무시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은유를 다루는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단절은 자연 과학 과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의 현전이, 즉 주체성으로서의 절대적 현 전의 규정이 성립되는 순간에 나타난다 .• 그 단절 계기는 17 세기의 위대한 합리주의에 의해 마련된다. 그때부터 , 타락하고 유한한 문 자에 대한 비난(우리가 아직까지 체험하고 있는)은 또 다른 형식을 취하게 된다. 즉 스스로에게 존재하지 못하는 비현전성이 고발당한 다. 이렇게 해서 나중에 필자가 접근하게 되는 〈루소적〉 계기(=시 기)의 본보기(전범성, exem p lar ite)가 설명되기 시작할 것이다. 루 소는 또 다른 현전의 모델에 준거하면서 플라톤적 태도를 31 반복한 다. 그 모델은 감정과 감성적 코기토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자신 에로의 현전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 속에 신성한 법의 각인을 지니 게 된다. 한쪽에서 보면, 대리적이며 타락한, 이차적이면서 제도화 된 문자 언어, 죽 좁은 의미의 고유한 문자 언어는 『 인간 언어 기 원론』에서 호된 비난을 받는다(그것은 음성 언어를 〈무기력하게 한 다.〉 책을 통해 〈천재성을 판단하는 것은〉, 한 사람을 그 사람의 시체 에 근거해 그림을 그리려는 것이다 등). 통상적 의미에서 문자 언어 는 죽은 문자이며 죽음을 포함한다. 그것은 생명의 숨을 헐떡거리 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동일한 논지의 또 다른 측면에서, 은유적 의미에서 문자 언어, 즉 자연적이며 신성하고 살아 있는 문자 언어 는 숭배의 대상이다. 그것은 존엄성에서, 신법(神法)처럼 가치의 기원과 의식의 목소리에 버금가고, 마음과 감정에 버금가기도 한 다. 성서는 모든 책 중에서 가장 숭고한 책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 권의 책일 뿐이다……. 신의 법을 추구해야 할 곳은 결코 몇 장의 홑

어진 종이 조각이 아니라 사람 마음속이며, 그곳에서 신의 손은 그 법 을 쓰도록 하셨다 .U 베른에게 보내는 편지 Lett re a Vernes 」) 만약 자연법이 인간의 이성 속에서만 씌어졌다면, 그것은 우리 행동 의 대부분을 이끌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마음 속에 지워지지 않은 글자로 새겨진다. 바로 거기서 자연법은 인간에게 소리질러 호소한다…… .U 전쟁 상태 L'eta t de gu erre 」) 자연적 문자 언어는 목소리와 숨결에 직접 결합된다. 그 본질은 문 자학적 gi· arnrna t olo giq ue 인 것이 아니라 영물학적 pn eumato l og iqu e 이다 .3 2 그것은 종교 전통에 따르며 r 신앙 고백 Profe s sio n de foi」 의 거룩한 내적 목소리, 죽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면서 듣는 목소 리에 매우 가까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내적 감정 속에 있는 신의 음성이 충만하고 진실하게 현전한 것이다. 내 속으로 되돌아갈수록 나는 내 자신을 더욱더 깊이 헤아리고, 문 자 언어로 씌어진 낱말들을 내 영혼 속에서 읽는다. 정의로워라, 그러 면 행복할 것이다……. 나는 이 규칙을 결코 고상한 철학의 원칙에서 도출하지 않으며, 자연에 의해 지워지지 않는 글자가 내 마음 깊은 곳 에 새겨진 것을 나는 깨닫는다. 태어날 때부터 생긴 목소리와 에크리튀르의 동일성이 규범 명령 적p rescri pti ve 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원­ 음성 언어 l'arch i-p arole33 는 일종의 법인 까닭에 에크리튀르이다. 그것은 일종의 자연법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음성 언어는 타자의 목소리로서, 또 계명으로서 자기 자신으로의 현전의 필연성 속에서 들린다.

따라서 좋은 문자 언어와 나쁜 문자 언어가 있다. 선하고 자연 적인 문자 언어는 마음-과 영혼 속에 각인된 신의 문자요, 타락하고 인위적인 문자 언어는 육체의 외면성 속에 유배된 기술이다. 이것 은 플라톤적 도식의 내적인 변형이다. 마치 영혼의 목소리와 육체 의 목소리가 있는 것처럼 영혼의 문자 언어와 육체의 문자 언어, 안쪽의 문자 언어와 바깥쪽의 문자 언어, 의식의 문자 언어와 정념 의 문자 언어로 나누어진다. 〈의식은 영혼의 목소리이며, 정념은 육체의 목소리이다. 〉 (r 신앙 고백」) 〈자연의 목소리〉, 〈자연의 신성 한 목소리〉는 신의 각인 ins cri ption , 지시 명령 p rescri ptio n 과 하 나가 되어 끊임없이 그 목소리로 되돌아가야 하며, 그 속에서 자신 을 지켜나가야 하고, 목소리의 기호들 사이에서 대화하고 그 행간 사이로 서로 말하며 대답해야 한다. 자연이 우리 대화에 텍스트를 제공하기 위해 자신의 휘황 찬란함을 우리 눈앞에 펼쳐 보였다고 누군가 말했으리라……. 따라서 나는 모든 책을 덮었다. 오직 우리 눈앞에 열린 책은 자연이 라는 책뿐이다. 이 위대하며 숭고한 책 속에서 나는 그 책의 저자에게 서 봉사하고 찬양하는 법을 배운다. 따라서 좋은 문자는 언제나 포괄되었다 com p ri se. 마치 나는 무 엇에 의해 포괄되어야 할 것처럼, 죽 자연 또는 자연법(창조되었건 그렇지 않건), 무엇보다 영원한 현전 속에서 생각된 자연의 내부에 포괄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나는 하나의 총체성 안쪽에 포 함되며 한 묶음의 책 또는 한 권의 책 속에 포장된다. 책이란 관념 은 유한한 또는 무한한 총체성, 이를테면 시니피앙이라는 관념이 다. 시니피앙의 이러한 총체성이 있는 그대로, 죽 하나의 총체성이

되는 것은 오직 시니피에로부터 성립된 총체성이 시니피앙보다 먼 저 존재하고, 그 문자 표기와 여러 기호들을 감시하며, 지신의 관 념성 속에서 시니피앙과 독립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언제나 하나의 자연적 총체성으로 귀결되는 책이란 관념은 문자 언어의 의미와 근본적으로 무관하다• 그것은 신학과 로고스 중심주의에 대 해서는 백과 사전적으로 옹호하지만, 문자 언어의 회로 차단, 문자 언어의 경종을 울리는 정열 ,34 그리고 (나중에 우리가 더 정확히 밝 히겠지만) 차이 일반 등과는 대립된다. 만약 우리가 텍스트를 구분 한다면, 오늘날 모든 영역에서 예고되는 바 그대로 책의 파괴는 텍 스트의 표면을 노출시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필연적 폭력은 여 전히 필연적이었던 모종의 폭력에 35 상응한다. 씌어진 존재 따라서 서구의 전통이 자신을 조직화했고 오늘날까지 그 속에서 살아나가는 배경이 된 확고한 명증성은 다음과 같이 풀 수 있을 것이다. 시니피에 차원은 결코 시니피앙 차원과 동시대적이지 않으 며, 기껏해야 시니피앙 차원의 이면 또는 미묘하게 자리를 옮긴 평 행선(숨결의 시간)이다. 아울러 기호는 이질성의 단위가 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시니피에(의미 또는 사물, 노에마 36 또는 현실)는 그 자체가 시니피앙이 아니고 하나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시니피에는 그 의미에 있어 가능·한 흔적과 맺은 관계에 의해 성립 되지 않는다. 시니피에의 형식적 본질은 현전이며 소리p hone로 서 의 로고스와 시니피에가 갖는 근접성의 특권은 현전의 특권이다. 그것은 〈기호가 무엇이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순간부터, 죽 기 호를 본질의 문제, 〈그것은 무엇인가ti es ti〉에 갖다 놓는 순간부

터 불가피하게 나오는 답변이다. 기호의 〈 형식적 본질 〉 은 현전으로 부터만 규정할 수 있다. 따라서 그 해답의 윤곽을 잡을 수 있는 것 은 문제의 형식 자체를 거절하고 기호가 잘못 명명된 찻풀이라는 le sig n e est cett e ch~e mal nommee 사실을 생각하기 시작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 37 그것은 곧 최초의 질문이었던 〈무엇이냐 ……? 〉 8) 의 질문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답변이기도 하다 .

8) 이것은 우리가 다른 곳( 『 목소리와 현상 』 )에서 전개시키려 했던 테마이다.

여기에서 해석, 전망, 평가, 차이 등의 개념과 모든 〈경험주의적〉 동기들 또는 비철학적 동기들(이 동기들은 기나긴 서구 역사에서 끊임 없이 철학을 괴롭혔고 철학의 마당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약점만을 가 졌다)을 철저히 심화시키면서 니체는 (헤겔과 더불어 하이데거가 그 러기를 원했던 것처럼) 단순히 형이상학 안에 남아 있는 것을 훨씬 뛰 어넘어, (어떤 의미에서든) 시니피앙이 로고스, 진리 또는 일차적 시 니피에 등의 병합된 개념과 맺은 관계에서 일어나는 종속 또는 파생 으로부터 그것을 해방시키는 일에 공헌했다. 니체에게는 책 읽기, 글 쓰기, 텍스트 등이 음성 부호로 옮기지 못했거나 발견하지 못했을 의 미에 대한 〈 근원적인 orig ina ir e >9 ) 조작들이다(우리는 이 단어를 괄 호에 집어넣었는데 그 이유는 나중에 나타날 것이다). 그 의미는 본원

9) 이 말은 단순한 도치에 의해, 시니피앙이 기본적이라든가 일차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마도 합법적으로 파괴하려고 하는 논리에 서조차 시니피앙의 〈우위성〉 또는 〈우선권〉은 비논리적으로 표명되고, 지 지받을 수 없으며, 터무니없는 표현일 것이다. 권리상 결코 시니피앙은 시 니피에에 선행할 수 없을 것이며, 시니피에 없이는 시니피앙도 없을 것이 다. 또한 〈 시니피앙의〉 시니피앙에는 어떤 가능한 시니피에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불가능한 공식 가운데서 예고되는 사유는, 그 공식에 정착 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채, 다르게 언술되어야 한다 . 그것은 기호, 〈어떤 것의 기호 〉 라는 관념을 회의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 관념은 여기서 문 제시되는 것 자체와 결부된 채 늘 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기호 개념(시니피앙과 시니피에, 표현과 내용 등)을 중심으로 정돈된 모든 개념틀을 파괴하면서 말이다.

적 요소 !'elemen t or igi nel 와 로고스의 현전 속에서 신의 오성이나 선험적 필연성의 구조인 토포스 노에토스 top o s noe t os 로서 의미된 진리는 아닐 것이다. 하이데거 유형의 책 읽기에서 니체를 구출하기 위해서는 덜 소박한 〈 존재론 〉 , 모종의 근원적 진리에 접근하는 심오 한 존재론적 직관들, 경험주의적 또는 형이상학적 텍스트의 겉모습 뒤에 숨은 일체의 근본성 fo ndamen t al it e 을 복원하거나 명시화하는 일을 특히 삼가야 한다. (그런 우를 범한다면) 니체 사상의 신랄함이 그보다 더 철저히 왜곡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와 정반대로 우리가 지향하는 돌파구의 〈소박함〉을 강조해야 할 것 accuse r°]다. 그 소박 함은 형이상학에서 빠져나가는 탈출구를 스케치할 수 있다. 또 그 소 박한 돌파구가 철저하게 형이상학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철학 대전 Le corp u s p h i losop h iq ue 』에서 얽힌 (잘 읽혔건 읽히지 않았건) 여 러 명제들을 일정 방식으로 특정 유형의 텍스트와 특정한 텍스트 문 체 속에서 사용할 때만 가능하다. 니체에 따르면, 그 명제들은 언제나 〈소박함〉 자체요, 절대적 소속 의 수미 일관성이 없는 기호일 뿐이다. 니체와 하이데거 식 책 읽기 를 따로 떼어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반대로 그것을 총체적으로 제공 해야 하고 이러한 해석에 유보 없이 찬성해야 할 것이다. 일정한 방 식으로, 또 니체 담론의 내용이 존재의 물음에서 거의 상실되어, 그 담론의 형식이 절대적 기이함 e t ran g e t e absolue 을 재발견할 때까지 말이다. 거기서 그의 텍스트는 궁극적으로 그의 글 쓰기 유형에 좀더 충실한 또 다른 책 읽기를 부른다. 니체는 자신이 쓴 것을 썼다. 그는 문자 언어(무엇보다도 그의 문자 언어)가 근원적으로 로고스와 진리 에 예속되지 않았다고 썼다. 이러한 예속화는 특정 시대에 일어나며, 우리는 그 시대의 의미를 해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향에서 (단지 이 방향에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니체의 붕괴 작업은 교조적인 채로 남아 있고, 다론 모든 전복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무너뜨리자고 주

장하는 형이상학적 구조물에 사로잡혀 있다. 바로 이 점에서 또 이러한 책 읽기의 질서에서 하이데거와 핑크 E. F i nk 의 붕괴 작업은 반박의 여 지가 없다), 하이데거의 사상은 로고스와 존재가 구성한 진리의 법정 i ns t ance 을 무너뜨리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최초의 의미 pri m um s ig na t um 〉 로 다시 복권시킬 것이다. 최초의 의미는 〈초월 적인 〉 뜻(중세때 초월적인 것 (ens, unum, verum, bonum) 은 〈최초 의 인식 pri m um cognit um 〉이라 말했던 것과 같다)에 의해 함의되 며, 규정된 모든 범주 또는 모든 의미 작용에 의해 함의되며, 모든 어휘와 통사, 즉 모든 언어적 시니피앙에 의해 함의되는데, 이들은 서로 혼동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각각을 통해 미리 이해되고 pre -comp re ndre, 일체의 시대적 규정들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로고스의 역사를 개방시키고 로고스에 의해서만 자기 지신이 된다 . 즉 로고스 이전에는, 또 로고스를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로고스, 즉 〈존재의 목소리에 종속하는 사유〉 10) 는 기 호와 기호 형식 s ign ans 과 기호 의미 s ign a t um 의 차이를 낳는 최초 와최후의 근원이다.

10) 하이데거, r 후기』, 『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Was ist Me t a ph ys ik 』 , 46 쪽. 목소리라는 심급i ns t ance 은 『 존재와 시간 Sein und Ze it 』 속에 나오 는 양심의 분석을 지배한다 (267 쪽 이하).

시니피에와 시니피앙 사이의 차이가 절대적이며 비환원적이기 위해서는 일종의 초월적 시니피에가 있어야 한다. 이 초월적 시니 피에의 사상으로서 개진된 존재의 사상이 바로 목소리에 의해 발 현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죽 낱말들의 언어에서 목소리(그것은 의식이라 부르는 것이다)는 시니피앙의 절대적 말소 e ffa cemen t로 자기 자신의 가장 가까이서 둘린다 s'en t end. 필연적으로 시간의 형식을 통해 자기 자신을 벗어나서 세계 또는 〈현실〉 속에서 어떤 부차적 시니피앙, 자기 자발성과 무관한 어떤 표현 실체도 차용하

지 않는 순수한 자기 정서 au t o-a ff ec ti on 아다. 자신 속에 (하지만 관념성 또는 보편성의 요소에서) 의미된 개념으로서 순간적으로 일 어나는 시니피에의 유일 무이한 경험이 그것이다. 이러한 표현 실 체의 비세계적 특징 le caracte r e non-monda i n 이 그러한 관념성 을 성립시킨다. 목소리 속에서 시니피앙을 소거하는 이러한 경험은 단순히 여러 환상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왜냐하면 그것은 진리라는 관념 그 자체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우리는 다른 곳에서 그 경험이 어떤 미끼에 걸려드는지를 보여주겠다. 이 가짜 미끼는 진 리의 역사이며, 사람들은 그 미끼를 그처럼 빨리 거두어버릴 수 없 울 것이댜 이 경험의 울타리 속에서, 그 단어는 시니피에와 목소 리, 개념과 투명한 표현, 실체의 기초적이며 분해되지 않는 동일체 로 체험된다. 이 경험은 그 순수함 속에서 (동시에 그 가능성의 조 건 속에서) 〈존재〉의 경험으로 고려될 것이다• 〈 존재〉라는 낱말 또 는 각기 다른 언어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지칭하는 단어들은 다른 단들과 더불어 〈근원적 단어 Urwor t〉 ,11 ) 즉 다른 모든 낱말들에 서 존재-단어 l' e t re-mo t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초월적 단어이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모든 언어에 미리 포괄될 것이며(이는 『존재와 시간 』 의 모두(冒頭)이다) 오직 이러한 선이해 pr e-comp r ehensio n 만이 존재 일반의 문제와 일체의 주변적 존재론과 일체의 형이상 학의 설정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 질문은 철학을 개시시키며 en t amer( 가령, 소피스트들의 경우처럼) 철학이 내포하는 질문이며 형이상학의 역사를 거기에 종속시키는 하이데거가 반복하는 물음 이다. 아마 존제의 의미는, 하이데거가 끊임없이 상기시키듯, 〈존 재〉란 단어도 아니고, 존재란 개념도 아니다. 하지만 이 의미가 단 어와 낱말들로 된 언어를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특 11) 『 말의 본질 Das Wesen der Sp r ache 』 과 fj'낱말 Das Wor t 』 ( 『 말로 가는 길 위에서 Un t erwe gs zur Sp rache 』 (1959) 참조 .

정 단어, 특정 언어 체계, 최소한 단어 일반의 가능성에 연결되어 있다• 또한 그것의 환원될 수 없는 단순성의 가능성에 연결된다. 따라서 다음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선택하는 일만 남았다. 첫째, 현대 언어학, 즉 단어라는 단위를 깨고 단어의 환원 불가 능성과 단절된 의미 작용에 관한 과학은 여전히 〈언어 langa g e 〉와 관계 있는가? 하이데거는 십중팔구 희의적으로 답할 것이다. 둘째, 뒤집어서 물어본다면, 사유 또는 존재의 질문이라는 이름 아래 그처럼 심오하게 성찰된 모든 것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 제로 사용하는 한물간 단어 중심의 옛 언어학 속에 갇혀 있지 않 았을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라고 한 이유는 옛 언어학이 (죽홍적 이건 체계적이건) 언제나 형이상학의 전제 조건들과 노선을 같이했 기 때문이다. 위에 열거한 두 언어학은 모두 동일한 지반 위에서 움직인다. 모든 양자 택일이 그처럼 간단하지 않음은 자명하다. 한편으로, 만약 현대 언어학이 고전적 개념톨 속에 완전히 갇혀 있다면, 특히 현대 언어학이 존재란 단어와 그 단어가 전제하는 모 든 것을 소박하게 사용한다면, 이 언어학에서 단어 일반의 단위를 해체시키는 것은 더 이상 『존재와 시간』의 서두부터 (하이데거 식 질문 모델에 따라) 강력하게 작동하는 바 그대로는 존재 과학 또는 지역적 존재론 on t olo gi e reg in ale 으로 윤곽잡힐 수 없다. 존재의 질 문이 어쩔 도리 없이 존재란 단어의 선이해에 결합된다는 점에서 (그것에 환원되지 않고), . 이 단어로 성립된 단어의 해체를 조작하는 언어학은 사실상 또는 권리상 존재의 문제가 그 장과 종속 차원을 정의하기 위해 제기될 것을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 언어학 분야는 단순히 존재적 on tiq ue 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해 당될 수 있는 존재론의 한계점들은 더 이상 지역적인 re gi onale 것 울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언어학, 또 최소한 언어

학 속에서, 또 언어학 덕분에 진행될 수 있는 일정 작업에 대해 말 할 수 있는 바로 그런 것들을(존재론, 특권화된 존재들의 근간이 되 는 개념-단어들을 그 연구가 해체시키는 한,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 서) 모든 탐구에서 일괄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언어학을 벗어나, 이러한 돌파구가 확장될 수 있는 가장 큰 가능성이 있는 곳은 정 신 분석학 연구이다. 이 돌파구의 엄밀하게 한정된 공간에서, 이 〈 과학들 〉 은 더 이상 초월적 현상학 또는 근간이 되는 존재론의 물음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 아마 『 존재와 시간 』 이 착수한 질문들의 질서에 따라서 후 설 현상학의 질문들을 철저하게 심화시키면서 이러한 돌파구는 과 학 그 자체에 속하지 않고, 존재론적 장 또는 지역적 존재론 속에 서 산출되는 것은 권리상 거기에 속하지 않고 존재의 질문 그 자 체와 이미 결부된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에 제기하는 질문이 바로 존재의 물음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존재의 질문과 더불어 진리, 의미, 로고스 들의 질문을 하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끊임없는 심사숙고 는 어떤 보장도 약속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그 물음 들 을 그 가장 심오한 곳까지 몰아내거니와 , 존재의 의미와 관련해 이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존재에 관한 일체의 규정 성의 각성에 물음을 던지면서, 존재론국抄학의 안전성을 동요시키면 서 그러한 성찰은 가장 최근의 언어학에서 존재 의미의 통일성, 즉 궁극적으로 단어라는 단위를 분해한다. 이렇게 〈존재의 목소리〉를 상기시킨 후 하이데거는 목소리가 침묵 적이며 무음이고 무성이며 단어는 말없는 근원적인 무음성 a-ph one (die Gewii hr der Jau tl o sen St imm e verborge ner Qu ellen… …, 온 은하면서 원천적이고 소리 없는 소리의 보증 )38 이라는 사실을 알린다. 원천 sources 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존재의 근원적 의미와 말

사이의 단절, 의미와 목소리, 〈 존재의 목소리 〉 와 〈 소리 ph one>, 〈 존 재의 부름 〉 과 분절된 소리 사이의 단절 . 39 근본적인 비유를 확인하는 동시에 비유의 시차를 비난하면서 의심하는 그러한 단절은 현전의 형이상학이 로고스 중심주의의 형이상학과 맺은 하이데거적 상황의 애매 모호함을 잘 반영한다. 그것은 그 형이상학에 포함되는 동시예 그것을 위반한다. 하지만 그 형이상학을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위반의 운동 자체가 그 한계점 안에서 그것을 견지한다. 위에서 우리 가 시사했던 것과 반대로 하이데거에게는 존재의 의미가 결코 단순 히 그리고 엄밀하게 일종의 〈시니피에〉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시니피에란 술어가 사용되지 않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곧 존재가 기호의 운동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이 명제는 의 미에 관한 형이상학적 또는 기술적 이론에 대한 무시로 이해할 수 있 는 만큼이나 고전적 전통의 반복으로 만족할 수 있는 명제이다. 한편 으로 존재의 의미는 액면 그대로는 물론 스콜라적, 칸트적, 후설적 의미에서도 〈최초의〉 의미도, 〈근본이 되는〉 의미도, 〈초월적〉 의미 도 아니다. 존재자의 범주들을 〈초월하는〉 것으로서의 존재의 해방, 근본적 존재론의 열림은 필연적이지만 잠정적인 계기에 불과할 뿐이 다. 『형이상학 서설』부터 하이데거는 존재론의 기획 및 그런 단어 자체를 포기한다 .1 2) 존재 의미의 필연적이며 근원적이고 비환원적 은폐, 현전의 출현 가운데에서의 그 의미의 은폐, 이 후퇴(그것 없이 는 이곳저곳에서 역사와 존재의 역사도 없고 존재의 역사였던 존재도 없 다), 그리고 존재는 로고스에 의해 역사로 생산되고, 그것을 벗어나 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하이데거의 끈질김, 존재 와 존재자의 차이, 이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그 어느 것도 시니피앙 의 운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궁극적으로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12) G. Kahn 옮김, 50 쪽.

1 책의 종언과 에크리튀르의 개시 49

이러한 위반의 명제 pr op o sit ion de t rans g ress i on 40 ( 로고스 중심 시대의 철학에 대한 위반)는 미리 알리는 담론 속에서 포착되지 않 으므로 퇴보 자체를 정식화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제 기한 대로(그리고 오직 그만이) 존재의 질문을 통해 이 기묘한 의미 의 엄밀한 사상에 접근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규정하기 위해서는 존 재론-신학을 넘어서야 한다. 〈존재〉(서구의 언어 영역과 철학 내부에 서 그 통사적이며 어휘적인 형식에 의해서 고정된 바대로)가 최초의 절대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시니피에가 아니라는 사실, 그것은 여전 히 언어 체계와 규정된 역사적 〈유의미성 s ignifi ance 〉 속에 뿌리박 고 있다는 시실, 비록 가면과 은폐로 그 의미망이 기묘하게 특권화 되었다 할지라도 하이데거는 바로 그 사실을 이따금 상기시킨다. 특히 그가 〈현재 직설법 단수 3 인칭〉과 〈부정법 〉 의 〈특권〉을 성찰 할 것을 권고할 때, 이 점은 분명히 부각된다. 서구 형이상학온 현 전의 장 속에서 존재의 의미의 한계로서 , 언어적 형식의 지배로서 생겨난다 .13) 이 지배의 기원을 묻는 것은 하나의 초월적 의미롤 실 13) 하이데거, 『 형이상학 서설 』 (1935), 불어판, 103 쪽. 〈이 모든 것은 존재 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경험과 해석을 특징짓기 위한 최초의 시도 속에서 우리가 봉착했던 것과 같은 방향에 놓여 있다. 부정법l'infi n itif의 틀에 박 힌 해석에 대한 주의 깊은 검토는 ‘있다 e t re' 란 낱말의 한계선이 ·통일되고 결정된 특징으로부터 그 의미를 얻고 있는데. 그 한계선은 그 낱말의 이해 를 제어한다. 실제로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보자. 우리는 부정법으로부터 ‘e tre' 란 동명사를 이해하며, 부정법은 그 나름대로 ‘es t’와 우리가 설명한 그것의 다양성으로 귀결된다. ‘es t’라고 하는 규정된 특수한 동사 형식, 죽 현재 직설법 단수 3 인칭은 여기서 하나의 특권을 갖는다. 우리는 ‘tu es', 'vous ete s ', 'je su is' 또는 ‘ils seraie n t' 둥(이 모든 동사 형식은 ‘est' 와 같은 명목으로 ‘etr e ' 동사의 형태를 성립시킨다)과 관련해 ‘e t re( 있 다)’를 이해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무의도적으로, 마치 다른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es t’로부터 부정법 ‘et re’ 를 분명하게 하는 데 도달했다. 그 결과 'e tre’ 는 우리가 지적한 이러한 의미를 갖게 되며, 그것은 그리스인들이 존 재의 본질을 이해했던 방식을 상기시키고 , 이렇게 해서 그 낱말은 아무데 서나 우연히 우리에게 떨어진 것이 아니고 오래전부터 우리의 역사적 현존 재를 지배하는 규정된 성격을 띠고 있다. 동시에 ‘et re' 란 낱말의 의미가

규정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분명히 그것의 있는 그대로, 죽 숨어 있는 우리들의 역사의 유래에 대한 심사 숙고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결론 이 나는 모든 분석을 인용해야 할 것이다.〉

체화시키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고, 우리들의 역사를 성립시키는 것 과 초월성 그 자체를 산출시킨 것에 대해 묻는 것으로 귀결된다. 하 이 데거 는 『 존재의 물음에 관해 Zur Se i nsfr a g e 』 에서 똑같은 이유 로, 〈존재〉란 단어를 십자가 표시 Kreuzwe i se Durchs t re i chun 껴룹 통해서만 읽게 할 때 그 점을 상기시킨다. 이 십자가 표시는 〈단순 히 부정적 기호〉는 아니다 (31 쪽). 이 말소 표시 ra t ure 는 한 시대의 마지막 에크리튀르(기호 표기)이다. 그 X 표 지움 표시의 획 아래 초 월적 시니피에의 현전은 판독 가능한 상태로 남아 있으면서 소거된 다. 기호란 관념 자체도 판독 가능한 채로 남으면서 소거되고, 보이 면서 파괴된다. 그것이 존재론국 R 학, 현전의 형이상학, 로고스 중심 주의 등을 한계짓는다는 점에서. 이 마지막 에크리뒤르는 최초의 에크리튀르이기도 하다. 하이데거적 여정의 안쪽이 아니라 그 지평이나 그 속에서 존재 의 의미는 초월적 또는 초시대적 시니피에가 아니라(비록 그것은 시대 속에서 언제나 은폐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전대 미문의 의 미에서 이미 규정된 일종의 시니피앙 흔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곧 존재-존재론적 차이의 결정적 개념 속에서 모든 것이 단 한 번의 획에 의해 생각될 수 없 E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존재자와 존재, 존재적인 onti qu e 것과 존재론적인 onto l og iqu e 것, 〈존재-존 재론적인〉 것 등은 독창적인 문제로서 차이에 견주어 파생된 것이 다. 나중에 우리가 차이/지연이라고 명명할 것에 견주어서말이다. 차이/지연이란 지연시키다란 낱말의 이중적 의미에서 차이/지연시 키는 것의 생산을 지칭하기 위한 경제적 개념이다. 존재-존재론적 차이와 〈거기 있음의 초월성〉 속에서 (Vom Wesen des Grundes,

16 쪽) 그 토대 Grund 가 절대적으로 근원적인 것은 아니다• 간단히 말하면, 차이/지연은 더 〈 근원적 〉 이겠지만 그것울 더 이상 〈 근원 〉 이나 〈토대〉로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이 개념들은 본질적으로 존재 론-신학의 역사, 즉 차이의 소거로서 작동하는 체계에 속한다. 차 이는 다음 조건에서만 그 자체와 가장 가깝게 생각될 수 있다. 즉 이 규정을 지위버리기 전에 그것을 존재-존재론적 차이로서 규정하 기 시작하는 것이다. 소거된 규정에 의한 통과 이행의 필연성, 즉 기호 표기의 회전 tou r d'ecri t ure 은 환원 불가능하다. 그 많은 지각 되지 않은 중계들을 통해 우리의 질문, 우리가 잠정적으로 역사 내 적 h i s t o ri ale 이라고 부르는 질문의 무게를 지탱하는 은밀하면서도 어려운 사고, 그 사고 덕분에 우리는 나중에 차이/지연과 에크리튀 르를 소통시킬 수 있다. 이 사상들의(여기서는 니체와 하이데거의) 망설임은 일종의 〈 비 수미 일관성〉이 아니다• 그것은 하이데거 이후의 모든 시도와 두 시대 사이를 통과하면서 일어나는 고유한 지각 변동이다. 해체의 운동들은 바깥쪽의 구조들을 요청하지 않는다 민 해체의 운동들은 그 구조들 안쪽에 기거할 때만 움직일 수 있고 효과가 있으며, 그 럴 때에만 그 운동이 대상을 올바로 타격할 수 있다. 해체의 운동 들은 일정한 방식으로 구조 속에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그 구조를 의심하지 않을 때 언제나 사람들은 더욱더 그 구조 속에서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내부로부터 작동하면서, 또 기존 구조 의 전복 subvers i on 과 관련된 전략적, 경제적 수단 ressources 일 체를, 구조적으로, 구조에서 차용하면서, 죽 요소들과 원자들을 고 립시키지 않으면서, 해체 시도는 언제나 일정한 방식으로 자체의 작업에 의해 수행된다. 이 점은 동일한 거처의 다른 장소에서 똑같 은 작업을 시작한 사람이 서둘러 지적했다. 어떤 실천도 오늘날처 럼 널리 퍼진 적은 없었고 , 따라서 이제 그 규칙들을 형식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미 헤겔은 이 놀이에 사로잡힌 바 있다. 한편으로, 그는 로고 스 철학의 총체성을 요약했고, 존재론을 절대적 논리로 규정했으 며, 존재의 모든 한계 설정들을 현전으로서 하나로 모았다. 또 그 는 재림과 무한한 주관성이 자기 자신으로 근접하는 종말론을4 2 현 전에 할당했다. 아울러 같은 이유 때문에 그는 문자를· 음성보다 낮 게 취급하거나 음성에 종속시켰을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보편 문 자, 오성의 형식화와 수리적 상징화를· 비판할 때, 사실 헤겔은 라 이프니츠와 같은 태도를 취한다. 그는 감각적이거나 지적인 추상화 속에 있는 로고스 바깥쪽의 존재를 비난한다. 문자는 자기 자신의 망각이요 외재화이며, 정신의 역서를- 개방시키는 내성화한 기억 Eri n nerun g의 정반대 자리에 있다. 이것은 『페드로』가 말했던 것 과 다룰 바가 없다. 헤겔에 따르면, 문자는 기억을 돕는 기술인 동 시에 망각의 힘이기도 하다. 물론 문자에 대한 헤겔의 비판은 알파 벳 문자 앞에서 멈춘다. 음성 문자인 알파벳은 예속적이며 무시되 고 부차적인(알파벳 문자는 소리들을 표현해야 하는데, 소리 자체가 이미 기호이다. 따라서 그것은 기호의 기호로 이루어진다 (aus Zeic h en der Zeic h en, Encyc lop e die , §459)) 동시에 최상의 문 자이자 정신의 문자이기도 하다. 목소리 앞의 말소는 음성 시니피 앙의 관념적 내면성을 존중하며, 공간과 시각을 숭고하게 하는 모 든 것은 역사의 문자, 즉 그 담론과 문화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귀 결되는 무한한 정신의 문자를 만든다. 결과적으로 알파벳 문자의 읽고 쓰기를 배우는 것은 무한한 문화 수 단 unend li ches B il dun g s mitt el 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런대도 사람 들은 이 점을 충분히 평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감각적 구체성으로부 터 멀어지는 정신은 관심을 좀더 형식적인 계기, 공명하는 언어와 그

것의 추상적 요소들로 유도하고, 본질적인 방식으로 주체에게 내면성 의 지반의 토대를 세우고 그것을 순화시키는 데 공헌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알파벳 문자는 다른 문자들, 특히 그 전에 단 한 번 동일한 태도로 비판했던 상형 문자와 라이프니츠의 보편 문자의 지양 Au fh eb 山追이다(지양은 어느 정도 묵시적으로, 오늘날까지도 거 의 모든 문자의 역사를 지배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역사와 신학의 총칭 적 le 개념이다). 실제로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나간다. 후천적 습관은 나중에 알파벳 문자의 특수성, 이를테면 시각의 관점 에서 표상에 도달하기 위해 청각을 통해 우회 Umwe g하게 하는 특수성 울 없애버린다. 그 후천적 습관은 실제로 우리들에게 그것을 상형 문 자로 만들어주는 까닭에 결과적으로 우리가 그것을 쓸 때 의식 속에서 소리의 중계를 현전할 필요가 없다. 바로 이런 조건 아래에서 헤겔은 비음성 문자에 대한 라이프니 츠의 찬양을 그의 관점에 다시 끌어들인다. 라이프니츠는 비음성 문자는 벙어리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적 는다. 알파벳 문자를 상형 문자로 변형시키는 실천을 통해, 그 실천의 과 정 중에 얻은 추상화에 대한 태도가 보존될(필자 강조) 뿐 아니라 상 형 문자를 읽는 것은 그 자체가 소리 없는 독서이며 무성의 문자이다 ein tau bes Lesen und ein stu m mes Schreib e n. 청 각적 이 거 나 시 간 적인 것, 시각적이거나 공간적인 것에는 각각 고유한 토대가 있으며, 그들에게는 일차적으로 동일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알파벳 문자에는 오직 하나의 토대가 있으며, 이 점은 규칙 관계에 따라 이루어진다. 죽

시각적 언어는 하나의 기호로서 오직 음향적 언어와 관련된다. 지성은 직접적인 동시에 무제약적으로 음성 언어에 의해 표현된다.(위의 책, 같은 곳) 문자가 그 비표음적 계기 속에서 배반하는 것은 바로 생명이다. 동시에 그것은 숨결, 정신 및 정신이 자기 자신과 맺은 관계로서의 역사를 위협한다. 숨결을 끊고, 문자의 반복 속에서, 해석 또는 소 수에 국한된 편협한 환경으로 제한된 성서 주해 속에서, 영적 창조 를 불모화시키거나 무력화시킨다. 문자는 죽음의 원리이며, 존재의 생성 속에서 나타나는 차이의 원리이다. 문자 언어가 음성 언어와 맺는 관계는 중국과 유럽이 맺는 관계와 동일하다. 중국 민족의 상형 문자가 적합한 곳은 오직 중국 정신 문화의 주석 주의 14) 속에서이다. 이 유형의 문자는 일개 민족의 가장 작은 분파에 국한된 몫이며, 그 몫은 정신 문화의 독점적 영역을 소유한다• …… 상 형 문자는 중국인들의 문화가 일반적으로 그런 것처럼 주석적 철학을 요청할 것이다.(위의 책, 같은 곳)

14) dem Sta t a r is c hen. 고독일어의 낱말로 이제까지는 〈부동의〉, 〈정적인〉 이란 말로 번역하려 했다. Gibe lin , 255-257 쪽 참조.

만약 비표음적 계기가 역사를, 또 숨결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현전하는 정신의 생명을 위협한다면 그것은 바로 현전과 우시아 ous i a 의 또 다른 형이상학적 이름인 실체성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무엇보다 실체성의 형식 아래서 일어난다. 비표음적 문 자는 명사룰 산산조각 낸다. 그것은 호칭이 아닌 관계들을 기술한 다. 명사와 낱말, 숨결과 개념의 이러한 단위들은 순수 문자 속에 서 상실된다. 이 점에서 라이프니츠는, 유럽에서 중국어가 그런 것

1 책의 종언과 에크리튀르의 개시 55

처랍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러한 상황, 즉 라이프니츠로 하여금 알파벳 문자 대신 그릇되게 상형 문자를 선호하게 유혹한 이 상형 문자 속에 있는 표상의 분석적 표기는 언어 일반, 예컨대 명사 …… 의 근간이 되는 요구와 모순된다. …… 그 분석에서 나타나는 모든 차이 Abwe i chun g는 씌어진 실사를 다르게 형성해 낼 것이다. 절대적 지식의 지평은 로고스 속에서 문자가 말소된 것이며 예 수 재림에서 흔적이 환원되고 차이가 재소유화된 것이며, 우리가 다른 곳에서 15) 고유한 것의 형이상학 Me t a p h ys iq ue du p ro p re 이 라고 명명한 것이 완결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평 속에서 헤겔이 생각했던 모든 것, 즉 종말 론을 제외한 모든 것은 에크리튀르에 대한 성찰로 다시 읽힐 수 있다. 또 헤겔은 환원 불가능한 차이를 생각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는 사유를, 기호의 생산적 기억으로 복권시켰다. 아울러 그는, 우 리가 다론 곳에서 그 점을 증명하겠지만, 언제나 문자의 흔적 없이 지낼 수 있다고 믿어온 철학적 담론(즉 소크라테스적 담론) 속에서 문자의 흔적이 가지는 본질적 필연성을 재도입했다. 말하자면 헤겔 은 책의 마지막 철학자이자 에크리튀르의 첫 사상가이다. 15) La pa role sou fflee , L'ecrit ur e et la dif fere nce(Seuil , 1967).

【역주】 1. 이 말은, 언어의 문제는 서구에서 다른 어떤 규범과 범주의 문제보다 특권 화된 자리에 있다는 말로 풀이된다. 2. 이 책이 씌어진 1960 년대 중반은 구조주의가 인문 과학의 새로운 패러다 임으로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던 시기였으며, 구조주의의 기본 방법론이 소 쉬르 언어학과 기호학의 방법론을 차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학 모델이 여러 인문 사회 과학으로 방법론적 차원에서 외삽 및 이식된 것은 본래 소 쉬르의 의도와 거리가 멀다는 점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3. 이러한 지적 인플레이션은 유행처럼 번진 구조주의 언어학의 패러다임에 현혹되어 야기되었으며, 언어라는 용어의 남용에 그 원인이 있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러한 인플레이션 현상을 지적하고 위기를 나타내는 징표로 판 독한다. 4. 이 욕망은 억압된 현전의 가치와 현전의 형이상학이 품고 있는 욕망울 두 고 하는 말이다. 5. sig nifian t m a.i eur 란 최초의 시니피앙을 지칭한다. 가령, 인간의 목소리 는 인간의 영혼을 표현하는 최초의 시니피앙이다. 그런데 음성 언어라는 시니피앙을 다시 문자 언어라는 매개체로 옮길 경우 문자 언어는 시니피앙 의 또 다른 시니피앙이 된다. 그리고 만약 문자 언어를 영상 언어로 옮기 게 되면 또 다른 시니피앙의 시니피앙의 시니피앙이 나올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시니피앙 놀이는 제 2, 제 3 의…… 시니피앙을 무한정 생산할 수있다 . 6. 에크리튀르란 말이 통상적인 의미 차원, 죽 언어의 보조적 표기 수단 정도 로 인식되는 차원을 뛰어넘어 언어와 관련된 일체의 이질적 개념들과 뒤범 벅되어 혼용되는 상황을 지적하고 있다. 7. 역주 5 에서 설명했듯이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관계는 절대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며 시니피에는 또 다른 수준에서 시니피앙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음성 언어는 문자 언어에 대해서는 시니피에지만 영혼의 상태와의 관계 속 에서는 시니피앙이 된다. 8. 이 놀이는 바로 기호의 놀이를 의미한다. 죽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관계 놀이에서 절대적 이차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A 란 관계에서 일차 적인 것이 B 란 관계에서는 이차적인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시니피앙은 다른 시니피앙을 파생시키면서 끝없는 되돌려보내기 sy s te m e de renvoi 놀이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이렇게 되면 이제까지 확

고 부동하게 여겨오던 절대적 시니피에도 있을 수 없고, 기호 구조의 양면 을 한정하던 경계선마저 지워지고 만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기호 개념과 그 논리 자체가 해체되고 만다. 9. 범람 debordemen t은 한계점이나 틀이 씌워진 영역을 벗어남을 뜻하는 말 로 데리다가 즐겨 사용하는 낱말이다. 아울러 이 어휘는 기존의 질서나 테 두리를 지워버린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말소 e ffa cemen t란 단어와 한 짝을 이룬다. 10.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구분보다 앞서고 그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좀 더 근원적인 언어를 지칭한다. n. 불어 i ns t ance 는 재판 또는 재판의 심급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언어 학에서는 주체가 랑그를 파롤로 현실화하는 환언 행위를 뜻하는 담화 현실 태 ins ta n ce du d i scours 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12. 문자의 기원을 선사 시대 문명의 기술 개발이라는 측면에서 설명하는 것 이 문자사가나 인류학자들의 통상적 견해다. 그런데 데리다의 시각으로는 오히려 문자의 역사는 인간의 기술 발생보다 선행하거나 그것과 하나로 혼 동되기 때문에 문자의 기원을 기술의 기원으로 밝힐 수 없다는 것이다. 13. 고갈에 해당하는 불어 essou ffl emen t는 숨을 헐떡 이며 애쓰는 모습을 묘사할 때 쓰는 동사 s'essou ffl er 의 명사형이다. 이는 책의 문명이 서서히 종말을 고하고 있음을· 빗대어 암시하기 위해 사용된 말이다. 14. 현대 분자 생물학의 연구 성과를 시사하는 부분이다. 현대 유전 공학은 유기체 및 일체의 생명이 보유한 세포 안의 유전 정보를 DNA 분자의 구 조와 화학 물질로 설명한다. 여기서 데리다가 말하는 세포 안의 에크리튀 르는 곧 보통 문자 언어 이전의 문자로서 생물학에서는 생명의 구조를 지 칭한다. 15. 현대 인공 지능의 기본 가설에 관한 이야기이다. 19 세기부터 쓰인 신조 어인 c y berne tiq ue( 인공 지능 또는 인공 두뇌학)란 단어는 1947 년 비너 가 〈동물과 기계에서 일어나는 명령과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는 학문〉을 지칭하기 위해 다시 끌어들였다 (Cy berne ti cs or Contr o l and Communi- cati on in the Anim al and the Machin e , Cambrid g e , 1947, 참조) . 인공 두뇌학의 기본 가설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모든 메커니 즘은 피드 백 과정에 의해 자동 조절된다. 둘째, 그 실현 양상이 무엇이든 (기계, 사회, 생물학적 유기체 등) 자동 조절 과정을 형식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수단이 가능하다. 이 두 가지 기본 가설은 정보를 처리하는 데 기계 개념의 일반화를 상정하며, 동일한 개념으로부터 기계적인 시스템과 유기

체의 시스템을 탐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16. 음성 문자를 쓰는 서양 문화에서 역설적으로 수학 언어는 음성적 생산과 상관없는 비음성 체계이다. 이것은 곧 알파벳 문자의 만능주의 내지 우월 성을 가로막는 하나의 족쇄라고 볼 수 있다. 17. 존재론-신학 l'on t o- t heolo gi e 이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하이데 거이다. 그는 보편적 존재를 탐구하는 존재론-신학을 서구 형이상학의 최 고 경지로 보았다. 18. 이 인용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 사상을 집약시킨 구절이며 서구 기 호학사, 언어학사, 언어 철학사에 이르기까지 가장 폭넓은 영향력을 미친 글이다. 19. 문자 언어로 씌어진 시니피앙은 파생적이며 따라서 하나의 테크닉일 뿐 이다. 그것은 음성 언어를 대리, 표상할 뿐 그 자체로 어떠한 구성적 의미 도 성립하지 못함을 뜻한다. 20. 그런데도 데리다는 이어서 이 소속의 문제를 피력한다. 먼저 기호의 분 화, 죽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로 갈리는 것은 로고스의 시대에 속한다고 보 고 일체의 기호 개념에는 서구의 형이상학적 신학적 뿌리가 박혀 있다는 것이 그의 논지이다. 21. 형이상학적 개념과 철학적 문제틀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던 현대 구조주 의 언어학자와 기호학자들 역시 자신도 모르게 서구 형이상학의 그물망 속 에 갇혀버렸음을 의미한다. 22. 서구 형이상학에서 기정 사실로 받아들인 것들에 대한 의문에서 현대 언 어학과 기호학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23. 이 표현을 영어로 옮기면 someth i n g for some thing으로 중세 스토아 학파의 기호 정의이다. 죽 기호는 반드시 또 다른 무엇인가를 지칭하는 그 무엇이다. 야콥슨의 견해로는, 현대 기호학(소쉬르 기호학)의 기호 정의는 본질적으로 중세의 기호 정의의 부활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중세의 기 호 이분법인 시그난스와 시그나툼을 각각 소쉬르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에 대응시킨다. 하지만 역자의 견해로는, 이러한 유추적 해석은 근본적으로 소 쉬르의 기호 정의를 왜곡할 위험성을 내포한다. 스토아 학파의 기호 정의 가 가진 양면인 시그난스와 시그나툼이 각각 감각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에 대응하는 반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는 모두 심리적인 실재 en tite라고 소 쉬르는 분명히 적고 있다. 또한 유고집 『일반 언어학 강의 E 에서 소쉬르는 영혼과 육체에 비유하여 설명한 중세의 기호 정의를 못마땅하다고 비판하 고있다.

24. 불어에서 mach i ne 이란 구체적인 물질적 실체의 기계가 아닌 추상적 개 념에서 총체적 기구나 체계로 보아야 한다. 25. 여기서 말하는 역설은 에크리튀르(문자)에 대한 자연적이며 보편적인 의 미 그 자체가 은유적으로 명명된다는 사실이다. 죽 현전하는 로고스 속에 영원히 새겨지며, 영원한 진리를 의미하는 에크리튀르가 오히려 본래의 통 상적 문자 언어의 의미에 견주어 은유화된 의미로 쓰인다는 사실이다. 다 시 말해 본래의 의미와 은유가 뒤집힌 상황을 암시한다. 26. 쿠르티우스(E. R. Curti us Ernst- R obert, 1886-1956) : 독일의 로망 언어학자. 독일에 근대 영문학과 불문학을 소개하는 데 공헌을 남겼으며 특히 발자크 연구에 탁월한 성과를 남겼다. 27. 칼데론 (Calderon de la Braca, 1600-1681) : 스페인의 극작가로 백이 십 편의 희곡을썼다. 28. 원제목은

이 의미 를 성립시키는 지각. 기억, 판단 등의 순수한 체험 속에 내재한다. 37. X 란 특수 부호는 이미 하이데거가 사용한 바 있으며, 예컨대 A 는 B 라는 명제가 있을 때 그것을 말소 또는 삭제한다는 상징을 나타낸다. 38. 하이데거의 주저 『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Was ist Me t a p h ys i k ~ 에 나오 는 표현이다. 39. 이 점은 하이데거의 『 존재와 시간 』 에 상세히 기술된다. 40.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차이가 없다고 보는 명제를 지칭한다. 41. 해체 이론의 방법론적 요체를 담고 있는 문장으로서 빈번하게 인용되는 글이다. 즉 해체는 해체해야 할 텍스트의 안쪽에 자리를 잡고 해체 작업을 하며 바깥쪽의 다른 이론이나 이데올로기를 끌어들여 기존의 것을 파괴하 지 않는다. 잘라 말해 해체의 방법은 내적이다. 42. 재림을 뜻하는 불어 p arous i e 는 현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p arous i a 에 서 왔다 . 어디어디 곁에서를 의미하는 접두사 p ara 와 존재하다란 동사의 e imi로 복합된 낱말이다. 플라톤은 현전 일반을 지칭하기 위해, 특히 감각 적인 것 속에서 형상 Forme 의 현전을 지칭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다.

2 언어학과 문자학 문자란 음성 언어의 표상에 불과하다. 정작 대 상물보다 그 이미지를 결정짓는 데 더 많이 배 려한다는 것은 이상하기 짝없는 노릇이다. ―루소의 『 인간 언어 기원론』 중 미간된 부분 문자란 개념은 과학의 장(場)을 규정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장이 조금 전 우리가 매우 무미건조하게 획을 그은 일체의 역 사적 형이상학적 선규정(先規定)들을 벗어나서 학자들에 의해 고정 될 수 있을까? 다음과 같은 점들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일 때, 도 대체 문자 과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과학이란 개념 자체가 문자의 특정 시대에서 탄생한다. 둘째, 문자 과학이란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 사이에 (구조적 또 는 공리적으로 1) 존재하는 일정한 체계의 유형을 함축하는 언어로 서 임무, 관념, 기획 따위로 생각되고 표현되었다. 셋째, 이런 점에서 문자 과학이란 먼저 모든 문자의 목적론으로 가치가 매겨진 음성 문자의 개념과 모험에 연관되었다. 그런데 지 속적인 과학성의 전범적 모델(수학)은 한번도 문자 과학에서 벗어 난적이 없었다. 넷째, 우발적이 아닌 이유들로 인해서 문자의 일반 과학이 갖는 좀더 좁은 의미는 세계사의 특정 시대(대체로 18 세기를 전후로)에 〈살아 있는〉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 표기 사이에 있는 관계들에서

결정된 일정한 체계 속에서 탄생한다. 다섯째, 문자란 단순히 과학에 봉사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경 우에 따라서는 과학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특히 후설이 『기하학의 기원 L'orig ine de la ge ome t ri e 』에저 상기시켰듯이, 관념적인 대 상들, 즉 과학적 객관성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문자란 에피스 테메 e pi st eme 의 대상이기에 앞서 에피스테메의 조건이다. 여섯째, 역사성은 바로 문자의 가능성에 연관되어 있다. 오래전 부터 문자를 소유한 민족과 그렇지 못한 민족을 언급할 때 들먹이 는 개별적인 문자 형식을 넘어서서, 문자 일반의 가능성과 연관되 어 있는 것이다. 일개 역사(하나의 역사 과학)의 대상이기예 앞서 문자는 역사(즉 역사의 생성)의 장을 열고 있다. 아울러 일반 역사 과학(독일어로 Hi s t ori e 라 할 수 있을 것이다)은 역사적 생성 과정 Gesch i ch t e 을 전제 한다. 따라서 문자 과학은 과학성의 뿌리에서부터 그 대상을 찾아야 할 것이다. 문자의 역사는 역사성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과학의 가능성에 대한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3 그렇 다면 더 이상 논리학이 아닌 문자학gr amma tiq u #l 형식을 갖는 과학의 과학인가엿 더 이상 고고학이 아닌 역사의 가능성에 대한 역사, 그렇다면 하나의 역사 철학 아니면 하나의 철학사라고 말할 수있을까? 문자에 대한 실증 과학과 고전적 과학들은 단지 이러한 유형의 물음을 억제할 수 있을 뿐이다 .5 어느 정도까지 이러한 억압은 실 증주의적 연구 조사의 진보에 필연적이다. 여전히 문자가 철학화하 는 논리 log iqu e phi loso p han t e 에서 파악되었을 뿐만 아니 라 본 질, 즉 문자의 기원에 대한 존재-현상학적 물음만으로는 사실들에 대한 역사적 유형론적인 연구를 마비시키거나 불모화시킬 따름이 다 .6

아울러 우리의 의도는 이같이 편견에 찬 질문, 죽 무미 건조하 며 필연적인 권리상의 안이한 물음과 요즘 우리들이 목격하는 실 증주의적 연구의 힘과 효율성에 중심 균형을 맞추려는 것이 아니 다. 이제까지 단 한번도, 여러 문자들의 발생 기원 및 체계에 대해 요즘처럼 심오하고 폭넓고 확실한 연구가 진행된 적은 없었다. 문 제의 관건은 발견들이 갖는 무게와 균형된 보조를 맞추기보다는 헤아릴 수 없고 무게조차 가늠하기 힘든 질문들을 제기하는 데 있 다. 기존의 질문이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아마 그 억제력 이 연구 내용 자체 안에서 실제적인 효과들을 갖기 때문인데, 그러 한 연구는 지금의 경우 특권적으로 언제나 규정과 시초의 문제를 둘러싸고정돈된다. 다른 누구보다도 문자학자는 기원이라는 질문 형식으로 대상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을 회피하기 힘들 것이다. 〈문자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곧 〈어디서, 언제 문자가 시작되었을까?〉를 의미한다. 이에 대한 답변은 일반적으로 즉시 주어진다. 그 답변들 은 거의 비판된 적이 없는 개념들 속에서 소통되며, 옛날부터 늘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중거들 속에 안주한다. 이러한 답변들 주위 에서 매번 여러 문자들의 탄생에 대한 유형론과 그 전망이 자리잡 는다. 문자의 역사룰 다루는 모든 저서는 동일한 유형에 따라 구성 된다. 철학적 목적론적 유형의 분류가 불과 단 몇 페이지로 비판적 문제틀을 모조리 다 취급하며, 곧이어 여러 사실들을 진열하는 단 계로 옮겨간다. 역사적 재구성의 이론적 취약성온 주어진 정보의 역사적 고고학적 인종학적 문헌학적 풍성함과 대조를 이룬다 .7 문자의 기원, 언어의 기원, 이 두 가지 질문은 쉽사리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런데 문자학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교육 과정상 역사학자, 묘비명학자, 고고학자들인데, 이들은 자신 의 연구를 현대 언어 과학과 연결시키는 일이 거의 없다션 더욱더

놀라운 것은 여러 〈인간 과학〉 중 언어학이 노골적이며 고집스러 운 만장 일치에 의해 과학성의 모범을 갖춘 분야로 간주되고 있다 는점이다. 그렇다면 과연 문자학은 실제로 한번도 추구하지 않았던 것, 그 러니까 언어학으로부터 본질적으로 구출될 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 는가? 아니면 언어학이 과학으로 제도화된 움직임 속에서 효과적 으로 그 상황을 꿰뚫어보아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관계에 대한 일종의 형이상학적 전제 조건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전제 조건이 문자에 대한 하나의 일반 과학의 성립을 방해하는 것 은 아닐까? 이러한 전제 조건을 제거하면 언어 과학이 아무 탈없 이 자리잡고 있는 전경(前景)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것은 아닐 까? 최상과 최악을 위해서? 맹목성과 생산성을 위해서? 바로 이 것이 우리가 지금 스케치하려 하는 두번째 유형의 질문이다. 이 질 문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특별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 는 소쉬르의 기획과 텍스트롤 다루어보려고 한다. 이 책의 도처에 서 우리는 소쉬르의 전범이 갖는 특수성이 논지의 일반성을 손상 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순히 추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하려 한다. 따라서 언어학은 언어 과학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기획을 설정하고 있는 일체의 묵시적 결정과 언어 과학의 다산성이 그 기원에서부터 잠들게 했던 모든 물음을 논외로 하자. 단순히 우리의 관심을 끌어들인다는 관점에서, 여기서는 무엇보다 언어 과학의 과학성이 자주 음운론적 토대라는 9 명분으로 인정받는 다는 사실을 고찰해 보자. 오늘날 자주 논의되듯 음운론은 그 과학 성을 언어학에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언어학 자체는 여러 인문 과 학들에 대한 인식론적 모델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 보다도 소쉬르의 의도를 완수한 언어학의 단호하면서 체계적인 음

운론적 방향 전환(투르베츠코이, 야콥슨, 마르티네 10 등)을, 핵심적으 로 아울러 최소한 잠정적으로나마 소쉬르의 언어학에 국한해서 고 찰하려 한다. 소쉬르 언어학에 대한 우리의 주장이 음운주의로 비 판받는 여러 형식들에 대해서도 먹혀들어 갈까? 이 물음이 최소한 문제 제기는 될 것이다. 언어 과학은 궁극적인 심급에서, 또 그 본질이 더 환원될 수 없 는 단순성에서 (그 객관성의 장인) 언어는 소리p hone, 문자gJ ossa, 로고스의 단위로 규정된다. 이러한 규정은 각기 상이한 학파들의 술어 체계에서 경우에 따라 발생한 일체의 이론적 구분에 선행한 다(랑그/파롤, 코드/메시지, 도식/사용, 언어학/논리학, 음운론/음소론/ 음성학/언리학). 비록 감각적이며 우연적인 시니피앙 쪽의 음성적 반향 범위를 제한하기 원한다 하더라도(그러나 이것은 액면 그대로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하나의 감각적인 질량으로 쪼개지는 형식적인 정체들은 이미 순전히 감각적이지 못한 관념성이기 때문이다), 언어 의 의미 작용과 언어 활동의 토대를 이루는 직접적인 동시에 특히 선호되는 단위는 음성의 소리와 의미가 분절되는 단위이다. 이 단 위에 대해서 문자란 언제나 파생적이며, 뜻밖에 일어나는 것, 특수 하고 외재적인 시니피앙, 즉 소리를 다시 반복하는 일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헤겔은 그것을 가리켜 〈기호의 기호〉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점에서 일반 언어학을 과학으로 제도화시키는 의도는 모순에 빠진다. 공식적으로 선언된 하나의 논지는 아무런 언급 없 이 자명한 것을 말하면서, 문자 과학의 종속과 태초에 언급된 충만 한 언어에서 사용된 도구의 틀로 문자의 역사적 형이상학적 의미 를 환원시키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또 다른 제스처(또 따른 논지라고는 말하지 말자. 왜냐하면 여기서 각별한 언급을 필요로 하는 것이 별다른 언급 없이 진행되었고 분명한 발언도 없이 글로 씌

어졌다)는 일반 문자 과학의 미래를 해방시켜 주고 있는데, 음운론 적 언어학은 이러한 일반 문자 과학의 종속되고 제한된 분야가 될 것이다. 그럼 소쉬르 언어학에서 이러한 제스처와 논지의 긴장 관 계를추적해 보자. 밖과안 먼저 이론뿐만 아니라 실제에서(실제의 원리에서)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서구 전통에 따라 소쉬르는 문 자에서 협소하고 표망적인 기능만을 인정한다. 문자가 협소하다고 하는 이유는, 문자는 그 제반 사실들이 일러주듯, 본질상 문자와 맺은 관련 속에서 순수하게 남을 수 있는 언어에 도래할 수 있는 사건의 한 가지 방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문자로부터 독 립된 구두적 전통을 갖고 있다.〉(『일반 언어학 강의』, Clg. , 46 쪽) 문자가 파생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표상적이기 11 때문이다. 즉 최초 의 시니피앙의 시니피앙이며, 자기 자신 속에 존재하는 목소리와 의미(시니피에, 개념, 관념적 객체 또는 다른 어떤 술어라도 좋다)의 일차적이며, 자연적이고 직접적인 의미 작용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소쉬르는 문자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를 다시 취하고 있는데, 그것 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음성 문자와 단어로 이루어진 언 어 모델을 중심으로 편협화되고 있다. 〈언어와 문자는 분명하게 구 분되는 두 개의 기호 체계이다. 후자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전자를 표상하는 데 있다.〉(위의 책, 45 쪽. 강조는 필자의 것임) 이러한 문 자의 표상적인 규정은, 아마 그것이 본질적으로 기호라는 관념과 소통한다는 것만을 반영할 뿐 하나의 선택 또는 평가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며, 소쉬르의 고유한 심리학적 형이상학적 전제 조건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특정한 문자의 유형 구조를 기술 하거나 반영하고 있다. 죽 그것은 우리가 음성 문자로 사용하고, 그 요소 위에서 에피스테메(일반 과학과 철학), 특히 언어학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구조보다는 모델이라고 하 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것은 구성되고 완벽하게 기능을 발휘하는 체계라기보다는 실제로는 한번도 음성적이지 못한 기능을 명시적으 로 유도하는 하나의 관념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 본질과 관련된 이유가 있으며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재론하겠다. 음성 문자라는 기정 시실fa c t um 은 지대한 것이며, 시실 그것은 모든 문화와 과학을 지배하고 있으며, 다른 기정 사실과 견주어볼 때 탁월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정 시실은 결코 어떤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12 본질의 필연성에 부응하지 않는다. 그 기정 사실에 근거해 소쉬르는 일반 언어학의 기획과 대상을 정의한다. 〈언어학의 대상은 씌어진 단어와 소리로 된 단어의 결합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언어학의 대상은 구어 단독으로 성립된다. 〉 (위의 책, 45 쪽. 강조는 필자의 것임) 응답한 질문의 형식은 답변의 여정을 미리 결정짓고 있었다. 문 제의 관건은 곧 어떤 종류의 단어 mo t가 언어학의 대상을 만들고, 문자로 된 낱말과 소리로 된 낱말인 최소의 원자적 단위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무엇인가를 아는 일이었다. 단어 vox 란 이미 의미 와 소리로 이루어진, 개념과 목소리 또는 좀더 엄밀하게 말해 시니 피에와 시니피앙(소쉬르의 술어)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단위이다. 게다가 마지막에 언급한 소쉬르의 술어는 먼저 구어, 즉 엄밀한 의 미에서 기호학이 아닌 언어학의 영역에서만 제안되었다(총체적 단 위를 지칭하기 위해서는 기호라는 술어를 그대로 쓰고 개념과 청각 영상은 각각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위의 책, 99 쪽)) 따라서 낱말은 이미 하나의 구성된 단위이며, 〈‘생각-소

리’의 분화를 함의하는 일종의 신비스러운 사실〉(위의 책, 156 쪽) 의 한 결과이다. 비록 낱말 그 자신이 분절되었고 또 다른 분화를 함의한다 하더라도 〈 생각-소리〉의 쪼갤 수 없는 단위들을 교환하 면서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 사이의 관계 문제를 제기하는 한, 그 답변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문자는 〈음성적〉일 것이다. 문자는 바 깥쪽이며 언어와 〈생각 _ 소리〉의 의재적 표상이다. 문자는 필연적으 로 이미 구성된 의미 작용 단위에서 조작되어야 할 것이며, 애당초 이 단위들의 형성에 문자가 끼여들 자리가 없었다• 아마 어떤 이는 문자가 낱말 언어학과 모순되기는커녕 그것을 확인시켜 주었다고 반박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는 낱말이 라고 부르는 단위에 매료된 나머지 문자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고 찰을 못했다고 생각해 온 것 같다• 그래서 낱말에 대한 일종의 절 대적 특권 부여를 중지하면서 현대 언어학이 더욱더 문자에 관심 울 가질 것이며 결국 문자의 중요성에 대한 일말의 의심을 없앨 것이라고 가정했던 것이다. 마르티네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다. 〈단거〉 1 ) 에 관한 연구에서 그는 오늘날 언어학이 낱말이란 개념 없 1) Dio g e n e 51 호 (1965) . 마르티네는 〈연구 결과 이 용어에 대해 보편적으 로 적용할 수 있는 정의를 부여할 수 없음을 입증한 경우라면 ‘낱말 mo t' 이란 단어를 제거하기 위해〉 진작부터 〈실행했어야 할〉 〈과감성〉을 암시하 고 있다 .(39 쪽) …… 〈최근의 연구가 시사하는 바대로 기호학은 결코 낱말 울 필요로 하지 않는다 . 〉 (40 쪽) …… 〈오래전부터 문법학자와 언어학자들 온 언술 분석이 낱말 수준을 넘어서서 이루어질 수 있으며 , 바로 그런 이 유에서 언술 분석이 음성학에 빠지지 않고도, 죽 음절 또는 음소 등과 같 이 의미와 전혀 상관없는 담화의 마디에 도달하지 않고도 가능하다는 사실 울 깨달았다.〉 (41 쪽) 〈우리들은 여기서 모든 진정한 언어학자에게는 너무 나 의심스러운 낱말이란 개념에 도달한 것이다. 언어학자가, 전통적 문자 표기가 기록하게 되어 있는 언어의 진정한 구조를 충실하게 재생하는가 하 는 질문을 먼저 검증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문자 표기들을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48 쪽) 마르티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언어학적 실천 속에서〉 낱말이란 개념을 〈명사 통합체 s ynt a gm e 〉란 개념으로 대체할 것 을 제안한다. 명사 통합체는 〈최소 의미소 monemes 〉라고 부르는 〈여러 개

의 최소 기호들의 무리〉이다.

이, 아니면 최소한 그 개념의 사용을 완화시키고, 그 개념을 좀더 미세하거나 폭넓은 단위들의 개념(형태소 또는 명사 통합체)과 연 상시키면서 진행될 때, 언어학이 준수해야 할 필연성을 기술하고 있다. 바로 언어학이 몇몇 분야의 내부에서 언어를 낱말로 쪼개는 분절을 철석같이 믿고 또 그 입지를 강화하면서, 문자~ 그렇게 해 서 그 뿌리 깊은 편견 속에서 더욱더 언어학을 고무시켰을 것이다. 문자는 〈낱말의 화면〉을 구성했거나 최소한 그것을 응축시켰을 것 이다. 현대 언어학자가 낱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최근 35 년 동안의 기능주의 및 구조주의 연구가 모든 자연 언어의 관찰과 기술에 대해 하나의 과학적 토대를 부여하기 위해, 전통적인 개념들에 대해 어떠한 수정 작업에 착수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기계 번역과 관련된 연 구 등 언어학의 몇몇 응용 학문들은 언어 문자 형식의 실제적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구두 언술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시실을 망 각하게 했다. 아울러 그 어느 때보다도 당장 눈에 보이는 의관과 연구 자에게 가장 익숙한 구조들을 뛰어넘어 연구 검증을 진행시켜야 할 필 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필수 불가결하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인간 언 어의 특성이 자주 나타나는 곳은 바로 낱말이라는 화면의 배후에서이다. 이러한 경고에 동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경고는 문자의 특정 유형에만 혐의를 둘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죽 이는 일상적 구어에서 경험적으로 결정되고 실천되는 분절에 순응하는 음성 문자라는 유형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앞서 시사한 기계 번역의 절차도 이러한 죽각적 실천에서는 동일한 방식으로 해결된 다. 이러한 모델과 문자 개념을 뛰어넘어 이 모든 증명이 재고찰되

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증명은 우리가 인지하려고 하는 소 쉬르의 한계 안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소쉬르는 실제로 문자 체계의 수를 두 가지로 제한했는데, 그 두 가지 모두 구어의 표상 체계로 정의되었다 . 그 두 가지 문자 체 계의 내용은 각각 종합적이며 전반적인 방식으로 낱말들을 표상하거 나 단어들을 구성하는 소리 요소들을 음성적으로 표상한다. 두 개의 문자 체계만이 있을 뿐이다 . 첫째 , 상형 문자 체계로 이 체 계에서 낱말은 그것을 구성하는 소리와 상관없는 하나의 유일한 기호 로 표상된다 . 이 기호는 낱말 전부와 부합하며 그렇게 해서 간접적으 로 그것이 표현하는 관념과 상응하게 된다. 이 체계의 간접적인 예는 한자( 漢 字)이다. 둘째, 통상적으로 〈음성 〉 체계라 부르는 것은 단어에 서 계속되는 소리들의 연속을 재생하는 데 쓰인다. 음성 문자들은 음 절 문자이거나 알파벳 문자, 죽 구어에서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최 소 요소들에 근거한 알파벳 문자이다. 더욱이 상형 문자들은 기꺼이 혼합형이 된다. 몇몇 상형 문자는 그들의 가치에서 벗어나 고립된 소 리를 표상하는 데 이른다.(위의 책, 47 쪽) 요컨대 소쉬르의 시각에서 보면 이러한 제한은 기호의 자의성 개념에 의해 정당화된다. 문자가 일종의 〈기호 체계〉로 정의되었기 때문에 (소쉬르적 의미에서) 〈상징적〉 문자란 있을 수 없고 구상적 문자도 있을 수 없다. 죽 문자 표기법이 개념화되지 s ignifi e 않고 표상되고 그림으로 그려진 것과 자연적인 형상 내지 모종의 닮은 꼴 관계를 갖는 한 문자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회화 문자 또는 자연 문자란 개념은 소쉬르에게는 모순되는 개념이다. 만약 지금 회화 문자, 상형 문자 동의 개념에서 인지되는 취약성과 소위 회화 문자, 상형 문자, 음성 문자 들 사이에 있는 경계선의 불확실성을

천착해 보면, 소쉬르가 그은 한계는 신중함을 결여했을 뿐만 아니 라(때로 심리학의 중개를 거쳐) 형이상학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자 의성 개념을 중심으로 모이는 일체의 개념을 일반 언어학에서 포 기해야 할 필요성을 알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자연/문화라는 대립 을 통해 자연적 본질 p h ys i s 과 사회적 법칙 nomos, 자연적 본질과 과학 기술t echn 장 사이에서 야기된 대립으로 환원되는데, 이 대립 의 궁극적 기능은 역사성을 파생시키는 데 있다 . 그리고 역설적으 로 이는 역사, 생산, 제도 등에 대한 권리를 자의성의 형식과 자연 주의의 근간에서만 인정할 뿐이다. 하지만 잠정적으로 이 문제는 미해결된 것으로 덮어두자. 아마 진실로 형이상학의 제도를 지배 하는 이러한 제스처는 역사 개념과 시간 개념에 뿌리롤 두고 있을 것이다. 소쉬르는 아울러 또 하나의 커다란 한계를 긋고 있다. 우리는 우리 연구를 음성 체계와 아울러 오늘날 사용하고 있으며 그 원형을 그리스 알파벳에 두는 것에 한정하려고 한다.(위의 책, 48 쪽) 이 두 가지 한계 설정은 여러 요건들 중 가장 적법한 요건에 부 응하기 위해 시의적절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더욱더 확실한 것 이다. 언어학의 과학성을 위해서는 실제로 언어학의 장에 엄밀한 경계선이 있고 그 장에 내적인 필연성이 있으며 어느 정도 그 장 의 구조가 폐쇄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어야 한다. 문자의 표상주 의적 개념은 이 상황의 형성을 쉽게 한다. 만약 문자가 언어의 〈형 상〉(위의 책, 44 쪽)에 불과하다면, 체계 내부에서 그것을 배제시킬 권리가 있으며 (왜냐하면 여기서는 언어의 안쪽 dedans 이 있다고 믿 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이미지가 현실 체계를 손상시키 지 않고 배제될 수 있는 것과 같다. 〈문자에 의한 언어의 표상〉이

란 주제를 제창하면서 소쉬르는 그런 식으로 문자가 〈 그 자체로 언어의 ‘내부 체계'와 무관함 〉 (위의 책, 44 쪽)을 기정 사실화해 버 린댜 외재성/내재성, 이미지/현실, 표상/현전, 이것은 과학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신경써야 할 아주 오래된 울타리이다. 그렇다면 그 것은 어떤 과학의 장을 말함인가? 그것은 더 이상 에피스테메 ep is t eme의 고전적 개념에 부응할 수 없는 과학이다. 왜냐하면 그 장(그것이 만들어낸 독창성)은 〈이미지〉의 개방성이 그것에서 〈현 실 〉 의 조건으로 나타난다는 독창성을 갖는다. 따라서 이 관계는 더 이상 〈 이미지 〉 와 〈 현실〉, 〈 바깥〉과 〈안쪽〉, 〈외관〉과 〈본질〉 등의 타협 없이 단순한 차이와 의재성으로 생각될 수 없고, 반드시 필연 적으로 연쇄 고리를 맺은 대립 체계와 더불어 생각해야 한다. 문자 언어, 음성 언어, 존재(또는 관념)의 체계에 대해 똑같은 말을 했 던 플라톤에게는 최소한 이미지, 회화, 모방에 대해 소쉬르 언어학 의 탄생을 주도한 이론보다 훨씬 더 미세하고 비판적이며 사려 깊 은 이론이 있었다. 음성 문자만을 배타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내적 체계〉의 요건에 부응한다는 사실온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음성 문자는 비록 실제로 는 성공하지 못하지만 바로 언어 〈내적 체계〉의 통합성을 준수하 고 보호해야 할 기능적 원칙을 갖고 있다. 소쉬르가 그은 한계는 일 종의 다행스런 편리함으로써 人멀 〈내적 체계〉의 과학적 요청에 부응 하지 않는다 . 이러한 요청은 일반적인 인식론적 요청으로서 음성 문자 의 가능성 자체와 내적 논리에 대한 〈표기〉의 외재성에 의해 성립된다. 하지만 사실을 단순화시키지 말자. 이 점에는 역시 소쉬르의 근 심거리가 하나 있다. 만약 근심이 없었던들 소쉬르가 왜 이러한 외 재적 현상, 추방당한 형상, 바깥 세계, 복사본에 대해 그토록 관심 올 쏟아부었겠는가? 왜 소쉬르는 언어의 안쪽과 관련해 추상적이라 고 지칭한 것을 〈추상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는가?

비록 문자 그 자체는 내적 체계와 별 상관없지만 구어가 형상화되는 과정을 추상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문자의 쓰임새와 결점과 위험성 등을 인식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위의 책, 44 쪽) 따라서 문자는 사람들이 각종 도구에 부여하는 외재성을 갖는다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불길한 징조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도 할 수 있다. 이를 따져보면, 왜 소쉬르가 이 외래적 형상화를 부록이나 주변부에서 다루는 대신 『일반 언어학 강의』 도입부에서 부터 그처럼 꼼꼼하게 한 장을 할애해 다루고 있는지를 잘 이해하 게 된다. 그 이유는 문제의 책임이 언어의 내적 체계를 대강 스케 치하기보다 가장 심각하고 타락적이며 가장 지속적인 오염에 대항 해 그 개념의 순수함 속에서 언어의 내적 체계를 보호하고 재건한 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오염은 소쉬르가 전력을 다해 외재적 역 사, 언어에 영향을 끼치는 일련의 사건들로 간주했던, 그러나 〈표 기〉(위의 책, 45 쪽)의 순간에는 바깥쪽에서 야기되는 것으로 간주 했던 것으로, 마치 문자가 표기로 시작되고 끝나는 것처럼 언어의 내적 체계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변질시켰다. 문자라는 악은 바깥쪽 에서 ce (J) O 회운다고 이미 『페드로』 (275a) 는 설파하고 있다 .1 4 소쉬 르라는 제네바 출신 언어학자는 문자에 의한 오염과 균형 또는 그 위협을 도덕주의자나 설교자의 어조로 비난한다. 그 어조는 중요한 데, 마치 현대 논리 과학이 자율성과 과학성을 확인하기 위해 이단 을 심판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 어조인 까닭이다. 이 어조는, 에 피스테메의 가능성과 로고스를 연결시키는 순간에 『페드로』가 문자 룰 인위적 조작에 의한 침입, 완전히 독창적인 것에 대한 침입, 원 형 파괴로 호되게 비난할 때부터 이미 들리기 시작했다 . 말하자면 그것은 영혼의 내재성, 참된 진리 속에서 자체에 현전하는 영혼의 살아 있는 현전, 음성 언어 자체가 자신에게 해주는 도움 등에 손

상을 끼치면서 바깥쪽이 안쪽으로 난입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분개하는 소쉬르의 고집스러운 논증은 이론적 오류와 도덕적 결점 을 꼬집기보다는 일종의 오점, 무엇보다도 일종의 원죄롤 염두에 둔 것이다. 원죄란(특히 말브랑슈 15 와 칸트에서) 영혼과 육체의 자 연스러운 관계가 정열 속에서 역전되는 것이라고 정의되었다. 여기 서 소쉬르는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 사이의 자연스러운 관계가 역 전된 것을 비난한다. 이것은 단순히 유사한 비유에 그치지 않는다. 서구 전통에서 문자, 철자, 감각적 기록 등은 언제나 정신, 호홉, 태초의 말씀, 로고스의 바깥에 존재하는 육체와 물질로 간주되어 왔다. 그리고 영혼과 육체의 문제는 아마 문자의 문제에서 파생되 었을 터인데 (반대로) 문자의 문제는 영혼과 육체의 구분에서 그 비유를 찾고 있다. 문자는 감각적 질료와 인위적 의재성, 죽 한 벌의 〈옷〉과 같다. 때때로 사람들은 음성 언어가 사고의 겉에 걸치는 한 벌의 옷이라 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했다. 후설, 소쉬르, 라벨 Lavelle 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문자 언어가 음성 언어의 옷이라는 사실을 회의 해 본 적이 있는가? 소쉬르조차 문자는 정도에서 벗어나는 옷이 고, 타락과 분장의 의류이며, 마귀를 쫓아내야 할, 죽 푸닥거리해 야 할 가면 마스크이다. 〈문자는 구어의 시선을 가리고 있다. 문자 는 한 벌의 옷이 아니라 변장된 옷이다.〉(위의 책, 51 쪽) 이상한 〈이미지〉, 문자가 〈이미지〉와 의재적 〈형상〉이라면 이러한 〈표상〉 이 순수하지 않은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바깥쪽은 안쪽과 하나의 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 관계는 늘 그렇듯이 단순한 의재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바깥의 의미는 늘 바깥쪽을 벗어나서 갇혀 있는 안쪽에 있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언어 과학은 자연적 관계, 그러니까 음성 언어와 문자 언 어 사이의 단순하고 본초적인 관계, 다시 말해 안쪽과 바깥쪽의 관

계를 되찾아야 한다. 언어 과학온 바깥쪽과 안쪽 사이의 관계를 퇴 폐화했던 역사와 그 추락을 넘어서서 그 절대적인 신선함과 근원 의 순수성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 기호와 문자 기호 의 관계에는 일종의 자연성이 있으며, 바로 기호의 자의성을 만든 이론가가 그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위에서 우리가 언급한 역 사적, 형이상학적 전제에 따르면 의미와 의미 들 사이에 자연적 관 계가 있고, 그 관계는 의미에서 소리로 옮겨간다. 〈자연스러운 관 계, 유일하게 진정으로 자연스러운 관계는 소리의 관계이다〉(위의 책, 46 쪽)라고 소쉬르는 말한다. 시니피에(개념 또는 의미)와 음성 적 시니피앙의 자연스러운 관계는 문자 언어(청각 영상이라고 말 하자)를 음성 언어에 종속시키는 자연적 관계를 조건지을 것이다• 이러한 자연적 관계가 문자의 원죄에 의해 뒤집어졌을 것이다. 〈문 자 이미지는 소리를 무시하고, 마침내 강제로 부과되어 자연적 관 계는 뒤집어지고 만다.〉(위의 책, 47 쪽) 말브랑슈는 원죄를 부주의, 안일함fa c il i括과 태만의 유혹, 또 〈신〉의 말씀이 가진 순수함 앞 에서 유일한 죄인인 아담의 〈심심풀이〉였던 무위 ri e n 로 정의했다. 신의 말씀은 어떤 힘도 어떤 효과도 가져오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실제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역시 안일 함에 16 항복하고 말았는데, 그 안일함이란 홍미롭게도 , 하지만 늘 그러하듯, 기술적 인위성 쪽에 있었지 저지당하거나 일탈된 자연적 움직임의 지나친 기울어짐에 있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낱말의 문자 영상이 시간 속에서 영속적이고 견고할 뿐만 아 니라 소리보다 언어 단위를 구성하는 데 더 적절한 대상이란 점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 관계가 피상적이거나 순전히 인위적인 단위 일 리는 만무하 다. 자연적 관계 , 죽 유일하게 진정한 관계인 소리의 관계보다는 파악하기 훨씬 쉬운 것이 문자와 소리의 관계이다 •(46 쪽. 강조는 필자의 것임)

〈 낱말들의 문자 영상이 시간 속에서 영속적이고 견고할 뿐만 아 니라 소리보다 언어 단위를 구성하는 데 더 적절한 대상이란 점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는 것 역시 자연적 현상이 아닌가? 실제로 〈피상적〉이며 〈인위적이고〉 또 〈용이한〉 악의적 본질이 기만적으 로 선의적 본질을 제거한다. 죽 그것은 의미와 소리를 연결시키고, 〈사고-소리〉를 연결시키는 본질, 정치 제도의 치명적 폭력과 더불 어 늘 문자를 파문했던 전통에 대한 충성이다. 가령 루소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자연과 단절되는 것이며 언어의 본질에 대한, 죽 〈제도화된 기호〉와 〈최초의 인간 언어〉 및 〈자연의 부르짖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사이에 있는 자연적 관계에 대한 이론적 맹목성과 한 쌍을 이루는 찬탈 17 이라고 할 수 있다. 소쉬르는 다음 과 같이 말한다. 〈문자로 된 낱말이 음성 언어와 너무 은밀하게 뒤 섞여 음성 언어의 이미지에 불과한 문자 언어가 중심 역할을 찬탈 하게 된다.〉 (45 쪽. 강조는 필자의 것임) 루소는 〈문자는 음성 언어 의 표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대상 자체보다 그 이미지롤 결정하는 데 더 많은 배려를 한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라고 말한다. 소쉬르 는 〈하나의 철자를 이런저런 식으로 발음해야 한다고 할 때 사람 은 이미지롤 모델로 한다. …… 이 기이한 일을 설명하기 위해, 이 경우는 예의적인 발음이라는 점을 덧붙여 말한다〉 (52 쪽 )2) 고 썼다. 2) 이 같은 이론적 명제들의 어조와 정서를 제대로 감지하기 위해 인용문의 참뜻을 새겨보자. 소쉬르는 문자를 바난 s'en pr en~ 만다. 〈또 다른 결과는 문자가 표상해야 하는 것을 덜 표상할수록 문자를 토대로 삼으려는 경향이 더욱더 강화된다는 사실이다. 문법가들은 문어 형태에 대해 끈질기게 관심 을 기울였다. 그러한 상황은 심리학적으로 훌륭하게 설명되지만 유김-스러 운 결과를 낳는다. ‘발음하다'나 ‘발음법’ 둥의 단어를 쓰는 것은 이러한 남 용을 용인하는 것이며 문자와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합법적이며 현실적인 관계를 뒤집는 것이다. 하나의 철자를 이런저런 식으로 발음해야 한다고 말할 때는 이미지롤 그 모델로 삼는다. o i가 /w a/로 발음되기 위해서는 그 자체가 존재해야만 할 것이다. 실제로 o i로 쓰이는 것은 wa 이다.〉 이러한 절묘한 변화에 대해. 그런 텍스트(〈 o i로 쓰이는 것은 wa 이다〉)의 가능성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대신 소쉬르는 다음과 같이 말을 잇는다. 〈이런 이상야 릇한 일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 경우는 o 와 i의 예외적인 발음이 문 제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것은 또 다른 잘못된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 것은 문어 형태에 대한 음성 언어의 종속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마치 문자 표기 기호가 규범이고 발음 체계가 문자에 거역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처럼 말이다.〉(『일반 언어학 강의』, 52 쪽)

감내하기 어려우면서도 매력적인 일은, 이미지와 사물, 철자와 소 리를 뒤범벅하는 거울, 역전, 퇴폐의 결과로, 음성 언어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중심 역할을 찬탈하는〉 문자 언어의 스펙트럼이 될 정도까지 이르게 하는 문자 언어와 음성 언어의 친밀감이다. 표상 은 표상하고자 하는 것과 서로 얽혀 문자로 쓰는 것처럼 말하고 표상된 것이 표상체의 잔영이나 반사에 불과한 것처럼 생각한다. 반영과 자기 도취에 빠져 반영되도록 유혹된 피반영물 사이의 위 험 천만한 뒤죽박죽이며 혐오스러운 공모이다. 이러한 대리 표상 re p resen t a ti on 의 놀이에서 원래의 시발점은 파악 불가능하다. 사 물과 물, 이미지 상호간의 끝없는 되돌려보내기는 있지만 더 이상 근원, 죽 단순 기원은 없다. 왜냐하면 반영된 것은 그 이미지에 자 신을 첨가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도 분해되기 때문이다. 반사, 이 미지, 즉 복사본은 그것이 재분해시킨 것을 다시 분해한다. 사변의 근원은 일종의 차이가 된다. 서로 마주볼 수 있는 것은 하나가 아 니다. 기원과 그 표상을 부가하는 법칙, 시물에 그 이미지를 부가 시키는 법칙은 하나 더하기 하나는 최소한 셋이 된다는 것이다. 그 런데 현실의 모든 권리에 갖다 둔 역사적 찬탈과 이론적 기묘함은 단순 기원에 대한 망각으로 규정된다. 루소뿐만 아니라 소쉬르의 사상에서도 그렇다. 위치 변환은 기껏해야 철자상의 말 숨바꼭질 ana gr amma tiq ue 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끝내 쓰기를 배우기 전 에 말하기를 배운다는 사실을 망각하며, 그래서 자연적 관계가 거 꾸로 뒤집힌다.〉(위의 책, 47 쪽) 망각의 폭력이며 기억술의 수단인

문자는 훌륭한 기억과 죽각적 기억을 대신하는데 , 그 이름은 바로 망각이다. 『 페드로 』 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플 라톤은 문자와 소리를 히포므네시스 h yp omnes i s 와 므네메 mneme, 즉 보조 기억술과 살아 있는 기억에 비유하고 있다. 문지를· 망각이 라 한 이유는 문자가 로고스 자체를 벗어난 것이자 중개이기 때문 이다. 문자 없이도 로고스는 그 자체로 남아 있을 것이다. 문자는 로고스 속에서 영혼에 존재하는 의미가 자연적 일차적으로 현전하 는 것을 은폐한다. 문자의 폭력은 영혼에 무의식으로 다가온다. 또 이러한 전통을 해체하는 것은 그것을 전복하고 문자를 순수하게 하는 것에 주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문자의 폭력 이 일종의 순수한 언어에 도래하지 survi en t 않는다는 이유를 밝히 는 데 있다. 문자 언어의 근원적 폭력이 존재한다. 그 이유는, 언 어란 점증적으로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는 의미에서, 무엇보다도 에크리튀르이기 때문이다 . 〈찬탈〉은 이미 늘 시작되었다. 정당한 권리라는 의미는 되돌아옴이라는 신화적 효과로 나타난다. 〈 과학과 예술 〉 은 이러한 폭력에 그 거처지를 정해 그들의 〈진 보 〉 는 망각을 영속화하고 〈풍속을 타락시켰다.〉 소쉬르는 여전히 루소를 우회적으로 대변한다. 〈문학 언어는 문자에 과분한 중요성 을 두고 그것을 증폭시킨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문학 언어는 자기 의 권리도 아닌 중요성을 부당하게 가로챈다.〉(위의 책, 47 쪽) 언 어학자들이 일종의 이론적 실수로 인해 이 주제를 올바로 다룰 수 없을 때, 그들이 자유 방임적인 입장을 취할 때, 그들은 유죄이며 무엇보다 도덕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들은 상상력, 감수 성, 정념에 양보한 것이며, 문자의 〈술책〉 (46 쪽)에 걸려들어 〈문자 의 특권〉(위의 책, 같은 곳)과 그 전통과 이차적 본질에 매료된 것 이다. 〈언어에는 문자와 독립된 구어적 전통이 있으며, 문자는 고 정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나 문자 형식의 특권은 그 함정을 간파

하는 것을 방해한다. 〉 따라서 우리들은 시각적인 것에 맹목적일 뿐 만 아니라 가시적인 것에 의해 눈멀고 문자 언어에 의해 현혹된다. 〈 제 2 세대 언어학자들은 그 전의 휴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이 점 에 속았던 것이다. 봅 자신이 …… 그의 직접적인 계승자들도 똑같 은 함정에 빠졌댜 〉 루소는 이미 문법가들에 대해 동일한 비난을 퍼붓고 있다. 〈 문법가들에게는 음성 언어의 기술이 거의 문자 언어 의 기술에 불과하다. 〉3 ) 늘 그러하듯이 〈 함정 〉 은 자연 속에 은폐된 인위적 책략이댜 이 점 때문에 『 일반 언어학 강의 』 는 문자 언어라 는 이상한 외적 체계를 먼저 다루고 있다. 필연적인 선결 과제로 자연적인 것 그 자체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함정을 분해해 야 하는 것이다. 바로 밑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읽게 된다.

3) 〈발음 Prononc i a ti on 〉이라는 제목 아래 폴레야드 Ple i ade 총서 속에 채취 된 수고 (T. II, 1248 쪽). 그 집필 시기는 1761 년경으로 추정된다(폴레야 드 총서의 편집자 주를 볼 것). 필자가 방금 인용한 문장은 그 총서 속에 출판된 한 토막의 마지막 문장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 문장은

인위적인 것을 곧바로 자연적인 것으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소리를 연구하지 않는 한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리는 문자 기호를 벗어나서는 모호한 개념만을 가리킬 뿐이며, 사람들은 기 만적이지만 문자라는 보조물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분절된 소리와 관 련된 생리학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최초의 언어학자들 역시 매 번 이 함정에 빠졌다. 그들에게 글자를 버린다는 것은 길을 잃는 것이 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이 진리를 향해 내딛는 첫번 째 발걸음이다.(위의 책, 55 쪽, r 음운론 강의」 서론)

소쉬르에게 있어 〈 문자 언어의 특권 〉 에 양보하는 것은 정념에 양보하는 것이다. 여기서 소쉬르가 오랜 전통을 가진 도덕론자와 심리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은 바로 정념이 다 .18 알다시피 정념이란 폭정이며 굴욕이다. 〈문헌 비평은 한 가지 점에서 오류에 빠졌다. 그것은 문자 언어에 너무 연연한 나머지 살 아 있는 음성 언어를 등한시한다는 것이다.〉(위의 책, 14 쪽) 다른 곳에서 소쉬르는 〈 문자 언어의 전제적 폭정〉(위의 책, 53 쪽)이라고 언급한다. 요컨대 이 폭정은 영혼에 대한 육체의 억압이며, 정념은 일종의 수동성이자 영혼의 병이며, 도덕적 퇴폐는 병리적인 것이 다. 소쉬르는 음성 언어에 대한 문자 언어의 행위는 〈사악한〉 것이 라고 말한다. 〈 그것은 바로 일종의 병리학적 사실이다.〉 (53 쪽) 자 연적 관계의 역전이 문자―이미지의 퇴폐적 우상, 죽 우상 숭배의 죄를 발생시켰을 것이다. 소쉬르는 『 아나그람 연구 』 41 에서 1 9 이룰 〈 문자에 대한 미신〉이라고 부른다. 그는 『 아나그람 연구 』 에서 〈모 든 문자에 선행하는 음소〉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인위적 조작에 의한 타락은 괴물을 만든다. 문자 언어는 자연 언어 의 살아 있는 역사에서 벗어나 그를 고정하기 위해 만든 인공 언 어처럼 괴상 망측하다. 그것은 자연에서 일탈하는 것이다. 라이프 니츠 식 보편 언어 문자와 에스페란토어도 같은 경우에 속할 것이 댜 인공 언어의 가능성에 대한 소쉬르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그로 하여금 아주 사소한 것을 비교하게 한다. 〈불변 언어를 만들어 후 대의 사람들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은 오리알을 품은 암탉과 같다 . 〉(위의 책, 111 쪽) 아울러 소쉬르는 언어의 자연 적 생명력뿐만 아니라 문자 언어의 자연적 타성을 살리기를 원한 다. 언어의 순발력 있는 생명력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4) Mercure de F'I · ance(l964 년 2 월호)에 실린 스타로빈스키 J. Sta r obin s ki 의 텍스트.

공통된 음성 문자 내부에서는 과학적 요청과 부정확한 취향을 도 입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합리성은 여기서 죽음, 황폐함, 괴상 망 측함을 낳는다. 그래서 언어학자의 표기 방식을 피해 공통 철자법 울 고수하고 각종 보조 부호를 늘리는 것을 피해야 한다. 현재 쓰이는 철자법을 음운론적 알파벳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는가? 여기서는 이 홍미진진한 질문을 간략하게 언급할 수밖에 없다. 내 생 각으로는 음운론적 문자는 오직 언어학자들만 사용해야 한다. 우선 어 떻게 영국인, 독일인, 프랑스인 동에게 공통 체계를 채택하게 할 수 있 단 말인가? 더욱이 모든 언어에 적용할 수 있는 알파벳이 있다면, 그 것은 보조 부호로 뒤범벅될 위험이 있다. 그런 문자로 이루어진 텍스 트의 한 페이지가 보여줄 바람직하지 못한 양상은 덮어두더라도, 좀더 정확히 말하려다가 오히려 이 문자가 좀더 분명히 표현하려던 것조차 혼동스럽게 함으로써 독자들을 헛갈리게 할 것이다. 어떤 장점도 이러 한 불편함을 보상해 줄 수 없을 것이다. 과학을 벗어나는 음운론적 정 확성은 실제로는 별로 권할 만한 것이 못 된다.(위의 책, 57 쪽) 내 의도에 대해 한치의 오해도 없기를 바란다. 소쉬르가 제시한 이유등은 타당하며, 따라서 그가 말하는 수준에서는 이러한 어조로 언급된 소쉬르 주장의 진실성 여부를 문제삼지 않겠다. 음성 언어 와 문자 언어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 구성, 죽 비판이 치밀하게 구성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그가 고전적 언어학 또는 공통된 경 험의 맹목적 편견으로 비난하고 있는 것은 피고인과 검사에 공통 된 일반 전제의 심층부에서는 일종의 맹목적 편견으로 남아 있다• 나는 오히려 우리에게 자명해 보이는 동시에 명증성 e vi dence 의 성격과 타당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보여주는 한계와 전제 등을 알리고자 한다. 이미 그 한계는 나타나기 시작했다. 왜 언어 일반의

내적 체계와 관련된 일반 언어학의 기획은 외래성 일반으로서 기능 하는 문자라는 특수 체계(지극히 중요하며 사실은 보편적인 체계)를 배제시키면서 그 영역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는가 ? 5 1 문자 언어는 특수 체계이며 그것에는 구어 체계의 외부에서 일어난다는 원칙 또 는 최소한 선언된 기획이 있다. 원칙의 선언, 경건한 맹세, 그 자신 이 충만한 자기 자신으로 현전하는 것을 꿈꾸며 자신의 고유한 재 개시 resum pti on 로 살아가는 음성 언어에 대한 역사적 폭력 소위 말하는 언어이고, 살아 있으며,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그 자신에 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음성 언어가 스스로를 산출하는 것. 스스 로 자기의 아버지라고 믿는 로고스는 질문을 던졌을 때 답할 수 없는 미숙하고 불구인 문자로 씌어진 말보다 위에 있는 무엇이다. 그래서 로고스는 〈늘 자기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한 TO0 血tp bs 畑t oEL'C UL ~O T] 80u 〉 ( 『 페드로 』 , 275d),20 최초의 단절과 국외 추방에서 태어나 실증, 맹목성, 사별의 슬픔에 이르게 하는 문자로 씌어진 담론을 넘어서 존재한다 . 소위 말하는 언어, 그러나 살아 숨쉰다고 믿는 미끼에 걸려든 음성 언어, 그리고 타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자란 이름 아래 바깥쪽과 아래쪽에서 달려오는 자신의 타자를 몰 아낼 때에만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방어 할 수 있는 8uvat b g µtv dµOvdL tam :§> 폭력적인 음성 언어• 그렇지만 아무리 중요하다고 5) 루소는 발음법에 대한 짤막한 글에서 겉으로 더욱더 신중한 자세롤 취한 다. 〈사고의 분석은 음성 언어에 의해 이루어지고 음성 언어의 분석은 문 자 언어에 의해 이루어진다. 음성 언어는 약정된 기호들을 통해 사고를 표 상하며, 문자 언어 또한 약정된 기호들을 통해 음성 언어를 표상한다. 따라 서 문자를 쓰는 기술은 사고의 중계적 표상에 불과하다. 최소한 우리들이 쓰는 유일한 언어인 음성 언어에서는 그러하다.〉(앞의 책, 1249 쪽. 강조는 필자의 것임) 단지 겉으로만 그렇다. 왜냐하면 소쉬르처럼 루소가 모든 체 계를 일반화해서 언급하는 것을 자제했다면, 그것은 바로 중개성과 〈음성 언어〉 등의 개념이 여전히 수수께끼를 수수께끼로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점을 재론해야 할 것이다.

하더라도, 보편적이거나 그렇게 되도록 소임을 받은 것이라고 하더 라도 음성 문자라는 이러한 특수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실 제도 그 원칙에 순수하게 충실하지 않다. 뒤에 가서 그렇게 하겠지만, 철저하면서 선험적으로 필연적인 불 복종이라고 말하기 이전에 수학적 기호 표기나 구두법, 공간화 espa cement 일반 등에서 단순한 문자 언어의 치장이라고 보기에 는 무리가 따르는 수많은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이른바 살아 있 는 음성 언어가 그 자신의 문자에서 공간화에 부응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바로 이 자리에서 문자 언어는 근원적으로 음성 언어를 자신의 죽음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소쉬르가 말하는 〈찬탈〉, 문자 언어가 본래의 근원을 대체하고 그 근원을 발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서 발생한 것을 대체 할 때 나오는 폭력 등과 같은 힘의 전복은 결코 우연한 착오만은 아니다. 찬탈은 우리를 필연적으로 심오한 본질의 가능성에 되돌려 보낸다. 그 가능성은 음성 언어 자체에 각인되어 있으며 소쉬르는 그 가능성에 의문을 품어야 했을 것이며, 아마도 그 가능성에서 출 발해야 했을 것이다. 소쉬르는 구어 체계를 문자 언어의 목적론과 대질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지어는 알파벳까지도) 음성 문자 체계와 대질시킨다. 목적론적 시각에서 그는 문자 속에 비음성적인 것이 침입하는 것 을 일시적인 위기와 궤도상의 우연으로 해석하는 데에 이른다. 우 리는 그것을 서구의 인종 중심주의, 수학 이전의 원시주의 pr e- math e mati qu e, 선형식주의적 직관주의로 간주할 수 있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론은 어떤 절대적 필연성에 부응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문제화되어야 한다. 〈찬탈〉의 파문은 분명히 절대적 필 연성에 도달하게 하고, 그것도 그 내부로부터 진행된다. 어떻게 그 함정과 찬탈이 가능했을까? 소쉬르는 정념 또는 상상력의 심리학

울 넘어서는 답변을 하지 못한다 . 아울러 가장 상투적인 소쉬르의 도식으로 환원하는 심리학을 넘어서지도 못한다. 소쉬르는 기호학 내부에서 그 영역이 결정된 모든 언어학이 심리학의 권위와 감시 아래에 놓이는 이유를 바로 이 점에서 해명한다. 〈기호학의 정확한 위상은 심리학자가 결정할 일이다.〉(위의 책, 33 쪽) 소리p hone 와 의미의 〈 자연적〉 본질적 관계의 단정(다른 모든 시니피앙의 중심적 시니피에가 되는), 시니피앙 차원에 부여된 특권 등은 분명 소쉬르 담론과 의식의 심리학 및 직관적 의식의 다른 차원들과 모순된다. 소쉬르가 여기서 묻지 않은 것은 비직관의 본질적 가능성이다. 후 설과 마찬가지로 소쉬르는 목적론적 시각에서 이러한 비직관을 위 기로 결정짓는다. 후설의 직관주의에서 문자로 씌어진 표기의 텅 빈 상징성(가령 수학적 기술)은 의미의 명백한 증거, 죽 자기 진리 에 충만한 시니피에의 현전에서 우리를 멀리 떨어뜨려 놓아 위기 의 가능성을 연다• 그것은 곧 로고스의 위기이다. 하지만 후설의 사상에서 이러한 가능성은 진리의 운동과 관념적 객관성의 생산에 연결된 채 남아 있다. 이 관념적 객관성에는 실제로 문자 언어라는 본질적 필요성이 요구된다 .6 ) 그 텍스트의 한 부분에서 후설은 위 기의 부정성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 면 바로 위기 개념 자체에 회의를 품어야 한다. 왜냐하면 위기 개 념은 부정성의 변증법적 목적론적 규정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한편, 〈찬탈〉과 〈정념〉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 문자로 씌어진 것의 견고한 지속에 대해 고전적 피상적으로 논증하는 것은 그릇 된 것일 뿐 아니라 바로 심리학의 소관 사항이 아닌 기술(記述)을 불러낸다. 결코 심리학은 자기 공간에서 지시체의 부재와 마주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서명자의 부재가 성립되는 것과 마주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자란 바로 이 두 가지 부재를 일컫는 이름 6) 후설의 『 기하학의 기원 L'ori gine de la 짧 ome t ri e 』 을 참조할 것.

이다. 문자의 지속력과 문자 실체의 지속성에 기대어 찬탈을 설명 하는 것은 〈문자와 독립해서 다른 방식으로 고정되는〉(위의 책, 46 쪽) 언어의 구어적 전통에 대해 단언한 것과 모순이 아닌가? 만약 이 두 〈고정성 fi x ite〉이 똑같은 본질에 속하고 그중 구어의 고정성 이 좀더 우월하며 독립적이라면, 문자 언어의 기원 및 그것의 〈마 력 p res tig e 〉과 이른바 문자 언어의 해로움 no civit e 은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이다• 따라서 모든 일이 소쉬르가 문자 언어에 의한 음성 언어의 변질을 입증하고, 동시에 문자 언어가 음성 언어에 미 치는 악영향을 비난하며, 언어의 변질되지 않고 자연적인 독립성을 강조하려 했던 것처럼 벌어진다. 〈언어 체계 lan g ue 는 문자와 독립 된다.〉(위의 책, 45 쪽) 그것이 자연의 진리이다. 하지만 자연은 전 도에 의해 (바깥쪽으로부터) 영향받는데, 그 전도는 안쪽에서 언어 를 변경시키고 자연으로부터 탈색시키며 자체에서 일탈하게 한다. 자연은 그 자신을 탈색시키고 자신으로부터 일탈하면서 자기 안쪽 에서 자신의 바깥쪽울 자연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것은 자연 울 전복시키는 자연 사건, 자연 재앙, 또는 괴상 망측함이며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자연적 일탈이다. 앞으로 보게 되듯이, 루소 담론 에서 재앙으로 인정받은 기능이 여기서는 괴상 망측함으로 옮겨간 다. 『일반 언어학 강의』 제 6 장의 결론 부분을 인용해 보자. 그리고 이 부분(문자 언어에 의한 언어의 표상)을 발음에 대한 루소의 텍스 트와비교해 보자. 그러나 한술 더 떠 문자의 횡포는 대중에게 억지로 부과되어 언어 체계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형시킨다. 이러한 일은 문자로 씌어진 문헌이 결정적 역할을 하는 매우 문학적인 고유 언어에서만 일어난다. 그래서 시각적 영상이 그릇된 발음을 야기시키는 꼴이 벌어진다. 이런 현상이야말로 정말 병리학적 현상이다. 이는 프랑스어에서 자주 나타

난다. 예컨대, LeRvre( 라틴어 fa be 전]서 유래됨)란 성(性)에는 두 개 의 서기법( 書 記法)이 있는데, 하나는 대중적이고 단순한 Le fe vre 이고, 다론 하나는 유식한 어원에 근거를 둔 Le fe bVI · e 이다. 고대의 문자 표 가에서 v 와 u 의 혼동으로 인해 Lef e bvre 가 Le fe bure 로 읽혔는데, 이 b 는 실제로는 이 낱말에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고 u 는 모호함에서 비롯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 형태가 실제로 발음되는 것이다.(위의 책, 53-54 쪽) 어디에 악이 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문자 언어의 〈침략〉을 참 지 못하게 만드는 〈살아 있는 음성 언어〉에게 사람들은 어떤 권한 을 부여했는가? 문자 언어의 지속적 작용을 왜곡과 침략으로 몰아 붙이기 시작한 것은 누구인가? 어떤 금기 사항을 위반했는가? 신 성 모독자는 어디 있는가? 무슨 이유로 모국어는 문자 언어의 조 작에서 따로 떼어놓아야 하는가? 왜 이 조작을 폭력으로 규정하 고, 변형은 왜 단지 왜곡이어야만 하는가? 왜 모국어에는 역사가 없는가? 다시 말해 왜 외부로부터 온 어떠한 감염도 없이 완전히 자연적이고 자폐적이고 가족적인 방식으로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 어야 하는가? 왜 문자를 끔찍한 범죄로 처벌해 과학적 처리에서조 차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특별석〉으로 몰아넣으려 하는가? 소쉬 르가 문자에 의한 왜곡 문제를 포함시키고 초점을 맞추고 싶어하 는 곳이 일종의 언어 외적인 나병 환자 수용소 안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방금 제기한 소박한 문제들을 소쉬르가 대단히 못마땅하게 받아들일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 (왜냐하면 Lefe b ure, 그 것은 벌로 나쁜 것도 없고 사실 우리는 이 놀이를 좋아하기 때문에) 인용문 바로 다음 문장을 읽어보자. 그 내용에 따르면, 그것은 〈자 연적인 놀이〉가 아니며 따라서 소쉬르의 어조는 회의적이다. 〈이러 한 왜곡은 더욱 빈번히 일어날 것이며, 사람들은 점점 더 필요 없

는 철자를 발음하게 될 것이다. 〉 루소와 마찬가지로, 또 루소와 같 은 문맥에서, 수도 파리가 피고석에 오른다. 〈 파리에서는 벌써 sep t fe mmes 의 t를 발음하고 있댜 〉 기묘한 예 이댜 역사적 탈선 (왜냐하면 문자 언어에 맞서 언어 체계롤 보호하기 위해 정지시켜야 할 것은 역사이기 때문이다)은 단지 확장될 뿐이다. 언어학자 다르메스테르 Darmes t er 21 는 철자법의 괴상 망측함이라 할 수 있는 v i n gt의 마지막 두 철자까지 발음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당연히 이러한 음의 왜곡도 언어에 속하지만. 그 왜곡은 언어의 자연 스런 놀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와 무관한 요인에서 기인한 댜 언어학은 이를 특벌석에서 관찰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기형적 사 례이기 때문이다.(위의 책, 54 쪽 . 강조는 필자의 것임) 우리는 여기서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관계를 생각하는 데 사 용되는 고정성, 연속성, 지속성 따위의 개념이 너무 졸렬하고 무바 판적안 연구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을 보게 된다. 그 개념들은 좀더 세심하고 면밀한 분석을 요구한다• 소쉬르의 설명 역시 마찬가지이 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대부분의 개인들에게 시각 인상은 청각 인상보다 더 간결하고 더 지속적이다•〉(위의 책, 49 쪽) 〈찬탈〉에 대한 설명은 그 형식에서 경험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서도 문제가 야기된다. 또 그것은 언어 활동 lan g a g e 경험과 동시 에 언어 활동과 같은 고유한 신체 경험이 부인했던 것처럼 과학이 끊임없이 부정했던 감각 능력의 형이상학과 생리학에 근거를 둔다. 소쉬르의 설명은 부주의하게 가시성을 문자 언어의 감각적이고 단 순하고 본질적인 요소로 이해하고 있다. 특히 청각적인 것을, 언어 가 자연스럽게 그 제도화된 기호들을 절단하고 분절해야 하는 자연

적 배경으로 간주하면서, 또 거기에 그 자의성의 영향력을 행사하 면서, 이 설명은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자연적 관계에 대한 가 능성 일체(그것을 단정하는 순간조차)를 제거해 버린다• 소쉬르는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자연과 제도 등의 개념들을 단호하게 몰아내 기는커녕 두리 뭉실 뒤섞어놓고 있는데, 사실 제대로 일을 하려면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설명은 소쉬르의 다음과 같은 진술과도 상충된다. 〈 언어 체계의 본질은 언어 기호의 음성적 특성과 무관하다. 〉 (위의 책, 21 쪽) 특히 이러한 단언은 우리의 관 심을 끄는데, 이 명제에서 〈 문자 언어의 환상들 〉 을 비난하는 소쉬 르 논지의 이면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한계와 전제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언어 학이 그 바깥쪽과 안쪽을 규정된 언어 모델로부터 정의하는 한 일 반적일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언어학은 본질과 사실을 일반성 의 정도에 따라 구별하지 않는다. 문자 체계 일반은 언어 체계 일 반의 바깥쪽에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예외가 있다면, 외부와 내 부의 갈림길이 내부의 내부나 외부의 외부를 거쳐서 언어의 내재 성이 본질적으로 그 체계와 외관상 무관한 힘의 개입에 노출되기 에 이르는 경우이다. 같은 이유로 문자 언어 일반론, 이미지의 본 질, 논리, 기능을 배제하고자 하는 체계 속에서 재검토하지 않는 한 일반적으로 언어 체계의 〈이미지〉나 〈형상화figu ra ti on 〉는 아 니다. 문자 언어는 기호의 기호는 아니다. 단지, 지극히 옳은 일이 지만 모든 기호의 기호라고 하는 것을 제외하면말이다. 만약 모든 기호가 또 다른 기호를 지칭하고 〈기호의 기호〉가 문자 언어를 의 미한다면, 몇 가지 결론은 불가피하며 적절한 순간에 이 점을 고찰 할 것이다 . 소쉬르가 이 점에서 형이상학의 전통 일체를 이어받으 면서 보지 못했으면서도 보았고 깨닫지 못했으면서도 알았던 것은, 일정한 문자 언어 모델은 필연적인 동시에 잠정적으로(원칙의 불성

실함, 사실 부족, 영속적 찬탈은 별개로 하더라도) 언어 체계 표상의 도구와 테크닉으로 부과되었다는 점이다. 양식상 독자적인 이 운동 은 너무 근본적인 것이어서 언어 체계 안에서 기호, 테크닉, 표상, 언어 따위의 개념을 생각하도록 했다. 음성-알파벳 문자와 연상된 언어 체계는 존재 의미를 현전으로 규정짓는 로고스 중심적 형이 상학이 탄생시킨 체계이다. 이러한 로고스 중심주의, 즉 충만한 음 성 언어의 시대 ep o que 는 본질적 이유에서 문자 언어의 근원과 위 상에 대한 일체의 자유로운 성찰과 문자 과학을 괄호에 집어넣고, 그것을 지연시키고 억압했다. 문자 과학은 비록 자연 문자의 신화 와 은유법에 등을 기댄 테크놀로지와 테크닉의 역사가 아니었는데 도말이다. 그릇된 추상화를 통해 로고스 중심주의가 언어 일반의 내적 체계를 한계지으면서 소쉬르와 그 계승자 대부분 “ 이 충분히 그리고 명시적으로 〈언어학의 통합적이며 구체적인 대상 〉 (위의 책, 23 쪽)을 결정하는 것을 방해한다•

7) (언어의 시니피앙 측면은 발화 행위의 음성적 측면을 정돈시키는 규칙들 로만 구성된다.〉 Troubetz k oy, Prin c ipe s de p honolo gi e( 불어본), 2 쪽. 야콥슨과 할레의 Phonolog ie et ph oneti qu e(Essais de lin g uist i qu e gen erale, 103 쪽에 수록되고 번역된 Fundamenta l s of J an g a~ 려 1 부) 에서 소쉬르 기획의 음운론적 노선은 옐름슬레우의 〈대수학적〉 관점에 맞 서 가장 체계적이면서도 엄밀하게 방어된 것 같다.

그러나, 위에서 우리가 지적했듯이, 그가 더 이상 분명하게 문자 언어를 다루지 않는 순간에, 죽 이 문제에 대해 괄호를 닫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비로소 소쉬르는 일반 문자학gr amma t olo gi e g enerale 의 장을 열고 있는 것이다. 일반 문자학은 더 이상 일반 언어학에서 배제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반 언어학을 지배하며, 또 일반 언어학을 자신 속에 포함시킬 것이다. 경계선 밖으로 내쫓 긴, 곧 언어학이 추방한 유령은 끊임없이 언어학의 일차적이며 친 밀한 가능성으로 남아 언어를 괴롭혔다. 소쉬르의 담론에 씌어진

그 무엇은. 비록 한 번도 발설되지 않았지만, 바로 문자 언어 자체 를 언어의 근원으로 보는 것이다. 소쉬르는 『 일반 언어학 강의 』 6 장에서 찬탈과 함정 계략 등을 근본적이지만 간접적으로 설명했다. 그 설명은 질문의 형식까지 송두리째 뒤집어엎온 것이며, 질문에 너무 성급하게 답한 것이기도 했다• 바깥쪽은 안쪽아타 Le dehors est le dedans 기호의 자의성 2 2 논지 (이 명칭은 잘못 명명되었는데. 그것은 소쉬 르 지신이 인정하고 있는 이유들 때문만은 아니다 ) 8 ) 는 언어 기호와 표기 기호 s ign e gr ap h iq ue 를 철저하게 구분짓는 것을 금지해야 했다. 이 원리는 일반적으로 목소리와 의미 일반의 관계, 또 소쉬 르가 음성적 시니피앙의 차원과 시니피에의 내용에서 견지해야 한 다고 끈질기게 고집한 자연적 관계 내부에서만 결정될 수 있는 시 니피앙(자연적 관계, 진정으로. 자연적인 관계는 소리의 관계이다)과 시니피에 관계의 필연성과 관계된다. 자의성은 오직 시니피앙과 시 니피에의 관계만을 규정할 것이다. 음성적 시니피앙과 그 시니피앙 의 시니피에 일반이 맺은 관계 내부에서 각각 규정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의 관계는 〈자의적〉일 것이다.

8) 『 일반 언어학 강의 』 , 101 쪽. 소쉬르 자신이 표명하는 신중함을 넘어 언어 학 내부의 비판 체계 전체는 〈기호의 자의성〉의 논지에 대립될 수 있다. Ja kobson, A la recherche de J'es sence du Janga g,려 51 쪽과 Marti ne t, La Jing uist i qu e sy n chron iq u 팩 34 쪽 참조. 하지 만 이 러 한 비판들은 기호의 기원 또는 그 구조에 고유한 불연속성과 비동기성을 노리 는 소쉬르의 심오한 의도를 손상시키지 못하며. 그러한 의도를 감히 주장 하지도못한다.

그런데, 규정되고 말해지고 나중에 문자로 씌어지는 기호들의 총체성을 비동기적 제도들로 간주하는 순간부터 시니피앙 또는 시

니피앙 차원들 사이에 있는 일체의 자연적 종속 관계와 자연적 서 열화를 배제해야만 할 것이다• 만약 〈 문자 언어 〉 가 기호 표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기호의 지속적인 제도를 의미한다면(그것이 바로 문자 개념의 핵심이다), 문자 언어 일반은 언어 기호의 모든 영역을 포괄할 것이다. 이 영역에서는 곧 이 낱말이 가지고 있는 협의의 파생적 의미에서 일종의 〈 표기되고 〉 제도화된 시니피앙이 나타날 것이며, 비록 그것이 〈 음성적 〉 이기는 하지만 다른 제도화된 , 즉 〈문자로 씌어진〉 시니피앙들과 맺은 일정한 관계에 의해 조정될 것이다. 제도라는 관념 자체(즉 기호의 자의성)는 문자 언어의 가 능성 이전에는, 또 그 지평선 밖에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죽 지 평선 자체를 벗어나서는 기호 표기의 공간과 기호의 발송과 공간 적 분포에 대해서, 또 기호 사이의 차이(그 차이가 음성적이라도)에 서 조정되는 놀이에 대한 개방성 같은 세계를 벗어나서는 제도라는 개념은 생각할 수도 없다. 잠시 동안 자연과 제도, 죽 자연 본질p h y s i s 과 사회 법칙 nomos 의 대립 (바로 법 lo i에 의해 조정되는 분배와 분할을 의미함을 잊지 말자)을 고집스럽게 사용해 보겠다. 그런데 문자 언어의 중개는 어 디서나(특히 언어학의 담론에서) 자명한 것처럼 통하는 것을 송두 리째 뒤흔든다. 따라서 소쉬르와 헤겔이 끄 〈상징〉이라고 부르는 자 연적 기호는 그라마톨로지와 마찬가지로 기호학에서도 벗어난다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자연적 기호들은 나중에 일반 기 호학의 한 부분을 이루지만 언어학의 영역에서는 벗어난다. 따라서 기호의 자의성 원리는 간접적이지만 분명히 소쉬르가 문자 언어를 언어 활동 바깥의 칠혹 같은 어둠 속으로 내쫓으면서 제시한 논지 를 반박한다. 자의성 논지는 음소와 문자소의 계약 관계를 설명하 지만(음성 문자의 경우 음소, 시니피앙-시니피에, 문자소, 순수한 시 니피앙) 그 자체로는 문자소가 음소의 〈이미지〉가 되는 것을 금지

한다. 문자 언어를 〈 외적 체계〉로 배제함으로써 언어 체계 현실의 〈이미지〉, 〈 표상〉, 〈형상〉, 외적 반영에 타격을 가하는 것은 필수 불가결하다. 여기서는 실제로 알파벳의 상형 문자적 연결 계보가 있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문자사가들이 줄기차 게 토의한 문제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시적 구조와 알파벳 문 자의 체계적인 원칙에서는 (그리고 음성 문자 일반에서는) 어떤 〈자연 적〉 표상 관계도, 어떤 닮은꼴 또는 참여 관계도, 헤겔과 소쉬르적 의 미의 〈 상징적〉 관계도, 퍼스적 의미의 〈도상학적 ico nog rap h iq u e>2 4 관계도 연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기호의 자의성이란 이름으로 문자 언어를 언어 체계의 〈 이미지〉(즉 자연적 상징)로 파악한 소쉬르의 정의를 부인해야 한 다. 음소란 그 자체로는 상상될 수 없다는 것, 어떤 가시성도·음소 와 닮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소쉬르가 상징과 기호 사이에 있는 차이점에 대해 했던 말(위의 책, 101 쪽 )2 5 을 참작하는 것만으로도 소쉬르가 문자 언어를 언어 체계의 〈이미지〉 또는 〈형상〉으로 정 의하는 것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자를 〈구분되는 두 기호 체계〉(위 의 책, 45 쪽)로 정의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된다. 왜냐하면 기호의 고유성은 기호가 이미지가 아니라는 사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 꿈의 해석 Traumdeu t un g,』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소 쉬르는 이런 식으로 만족할 만한 결론을 내기 위해 모순되는 논증 들을 축적해 간다. 사실, 이른바 음성 문자에서조차도 〈문자로 표 기된〉 시니피앙은 다차원의 망을 통해 음소를 지시하고, 그 망은 시니피앙과 마찬가지로 음소를 〈총체적〉 체계의 내부에서 문자 및 구두로 된 시니피앙들에 연결한다. 총체적이라는 말은 가능한 의미 의 모든 투자에 개방되어 있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총체적 체계 의 가능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따라서 소쉬르는 문자 언어가 음성 언어의 〈이미지〉, 〈형상〉, 〈표상〉, 즉 일종의 상징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문자 언어의 외 재성을 결정하기 위해 이 부적합한 개념들이 필요했다고 간주하더 라도 소쉬르 담론의 모든 성층과 『일반 언어학 강의』 6 장 r 문자 언어에 의한 언어 체계의 표상」이 의도한 것은 바로 과학적인 것 이라고 결론지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염두에 둔 것은 소쉬르 의 의도나 동기 부여가 아니라 소쉬르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무비 판적 서구 전통 일체이다뿐 이상야릇한 논증의 기능 작동, 모순된 논리를 통해 몽상적으로 산출되는 욕망의 수미 일관성(꿈이 이것을 해명하기보다는 이것이 꿈을 해명해 준다)은 그 담론의 어느 부분에 속한단 말인가? 모든 과학사에서 그 기능 작동이 이론적 담론의 총체와 어떤 식으로 맞물리는가? 좀더 잘 말해 본다면, 그것은 과 학이란 개념 자체를 그 내부에서 어떤 식으로 규정하는가? 이 질 문이 (어느 날엔가) 다듬어질 때, (모든 안간 과학처럼) 모든 심리 학과 일체의 형이상학(오늘날 그것은 마르크스주의나 구조주의일 수 있다)을 벗어나 그 기능 작용이 필요로 하는 여러 개념들을 결정 하고 모든 수준의 일반성과 연결 구조를 존중할 때, 그때 비로소 엄밀하게 하나의 텍스트(이론적이건 아니건) 전체에서 분절된 소속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소쉬르 텍스트의 상 황 문맥이 이러한 기능 작용이 필요로 하는 여러 개념을 구비한다 고 주장하지 않고 그것을 주어진 상황에서 대단한 투시력을 갖는 voy a nt 일종의 색인 정도로 다루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우리의 논리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이 색인과 다른 글들(일반적으로 문자 개념의 처리)은 이미 (로고스 중심주의 형이상학과 에피스테메 개념 등의) 가장 큰 총체성에 대한 해체에 착수할 수 있는 확실한 수단 울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런데 바로 그 총체성 속에서 단 한 번도 문자 언어에 대한 철저한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서구의 분석, 문

자, 독서 또는 해석 등의 방법이 생산되었던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문자 언어가 음성 언어의 〈이미지〉나 〈상징〉이 아 니면서도 음성 언어보다 더 바깥쪽에 있는 동시에 그 자체로 문자 언어의 일종인 음성 언어보다 더 안쪽에 있다고 생각해야 할 때이 댜 홈 파기, 판각 새기기, 그림 또는 철자 등과 연관짓기 전에, 일 반적으로 시니피에에 의해 시니피앙을 지칭하는 시니피앙과 연결 되기 전에 기호 표기 grap h ie 개념은 모든 의미 작용 체계에 공통 된 가능성으로 제도화된 흔적 tra ce i ns tit uee 의 심급을 함축한다. 지금부터 우리는 서서히 고전적 담론에서 두 개념을 27 잘라내는 일 에 주안점을 둘 터인데, 우리는 필연적으로 고전적 담론 속에서 그 두 개념을 차용할 것이다. 이러한 수고는 꼼꼼히 진행될 터이지만 우리는 선험적으로 그 효율성이 결코 순수하거나 절대적이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제도화된 흔적은 〈 비동기적〉이지만 조변석개하듯 변덕스러운 것 은 아니다. 소쉬르에 따르면 〈자의적〉이란 말과 마찬가지로 제도화 된 흔적 역시 〈시니피앙이 언어 주체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 다는 생각을 하게끔 하면 안 된다•〉(위의 책, 101 쪽) 그것은 단지 현실에서 시니피에와 어떠한 〈자연적 관계〉도 없을 뿐이다. 이러한 〈자연적 관계〉의 단절은 우리에게 관계라는 관념보다는 자연성이 라는 관념에 문제를 제기하게끔 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제 도〉라는 낱말은 고전적 대립 체계 안에서 너무 일찍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제도화된 흔적을 생각할 때면, 차이가 있는 그대로 나타나 충만 한 항목 사이에 있는 변이의 자유를 허용하는 지시 구조의 차이가 행하는 과거 파지 re t en ti on 를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또 다른 여기 -지금의 부재, 또 다른 초월적 현재의 부재,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세계에 대한 또 E 連· 근원의 부재, 혼적의 현전 속에서 더 이상 환

원될 수 없는 부재로 나타나는 세계의 근원, 이 모든 것은 문자에 대한 과학적 개념을 대신하는 형이상학적 공식이 아니다. 이 공식 온 형이상학 자체에 대한 통박일 뿐만 아니라 자연과 계약, 상징과 기호 등의 파생된 대립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생각할 때 〈 기호의 자의성〉이 함의하는 구조를 기술한다. 이 대립들은 혼적의 가능성 에서 비로소 그 의미를 갖는다. 기호의 〈비동기화〉는 또 다른 총체 가 있는 그대로 타자 속에서 (어떤 단순성도, 정체성도, 어떤 닮은꼴 이나 연속성도 없이) 고시되는 종합을 요청한다. 있는 그대로 고시 된 E 는 것은 이런 뜻이다. 형이상학이 동물적 유기체의 모든 수준 울 거쳐 〈의식〉에 이르기까지 〈무생물〉이라 규정해 버린 것에는 모두 역사가 있다. 타자 관계가 표시되는 흔적은 존재자 e t an t의 영역 전체에 대한 가능성을 분절시키는데, 형이상학은 그것을 흔적 의 은폐된 운동에 현전하는 존재자et an t-p resen t로 규정했다. 존 재자 이전에 흔적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만 흔적의 ·움직임은 필 연적으로 은폐되고, 또 자기 은폐를 통해 스스로를 산출한다. 타자 가 있는 그대로 고시될 때, 그것은 자신을 숨기는 것으로 나타난 다. 이러한 표현은 몇몇 사람들이 조급하게 미루어 생각할 수도 있 는 신학적 차원의 것이 아니다. 〈신학적〉이란 것은 흔적의 총체적 운동 속에서 결정된 계기이다. 존재자의 장은 현전의 장으로 규정 되기 전에 (발생론적이고 구조적인) 흔적의 다양한 가능성에 따라 구조화된다. 타자를 있는 그대로 현전화하는 것, 죽 〈있는 그대로 의 자신〉을 숨기는 것은 이전부터 늘 있어왔으며 존재자의 어떤 구조도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28 이런 이유로 해서 〈비동기화〉 운동은 〈기호〉가 〈상징〉 단계를 넘어설 때 하나의 구조에서 다른 구조로 옮아간다. 〈있는 그대로〉 란 말의 의미에서, 그것이 규정된 특정한 구조에 따라서 소쉬르가 〈상징〉 29 이라 부른 것 속에는 비동기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게다

가 소쉬르는 최소한 잠정적으로나마 상징은 기호학의 3 0 관심 밖이 라고 말한다. 비동기화된 흔적의 일반 구조는 동일한 가능성에서 타자와 맺은 관계 구조, 시 간화 tem p o rali sa ti on 운동, 문자 언어 로서의 언어 등과 소통한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추상화에 따라서 비로소 분리할 수 있을 뿐이다. 흔적의 비동기화는 〈자연〉으로 귀 결되지 않고 언제나 생성된다. 요컨대 , 비동기화된 혼적은 없다. 혼 적은 무한하고 비동기화된 자기 생성 deven i r- i mmo ti ve 이다. 소쉬 르적 어법으로 말하면(죽 소쉬르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상징과 기호는 없고 상징의 생성-기호 deve ni:r- s ign e du sym bole 만이 있을 뿐이다. 아울러 별다른 언급 없이도 자명하듯 (표시 , 자연적 기호 또는 후 설적 의미의 지표가 아니라) 우리가 말히는· 혼적은 문화적인 동시 에 자연적이고, 심리적인 동시에 물리적이며, 영적인 동시에 생물 학적이다. 그것은 기호의 비동기화된 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자연 세계ph ys i s 와 그 타자 사이에 있는 일체의 궁극적 대립이 나 오는 곳이다. 기호학을 구상하면서 31 퍼스는 이러한 비동기화된 생성의 비환원 성에 대해 소쉬르보다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인 것 같다. 그의 술어 에서 언급해야 할 것은 상징의 비동기화된 생성이며, 퍼스의 상징 개념은 소쉬르가 바로 상징과 대립시켰던 기호의 역할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상징은 성장한다. 상징은 다른 기호, 특히 도상i cons 또는 도상과 상징의 본질을 혼합적으로 취하고 있는 기호의 전개로부터 나타난다. 우리는 오직 기호를 통해서만 생각한다. 이러한 정신적 기호들은 혼합 적 본질이다. 그 상징적 부분은 개념이라고 명명된다. 만약 어떤 사람 이 새로운 상징을 만든다면, 그것은 곧 개념을 불러들이는 사고에 의

해 상징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상징에 의해 비로소 새로운 상징이 성장한다. 모든 상징은 상징으로부터 나온다 . 9) 퍼스는 겉으로는 양립 불가능한 두 요청에 응당한 권리를 부여 한다. 둘 중 어느 하나를 희생시키는 것은 과오가 될 것이다. 먼저 상징 체계(퍼스적 의미에서 〈기호의 자의성〉)가 비상징 세계, 즉 이 미 앞서서 연결되어 있는 의미 작용의 차원에 뿌리박고 있음울 인 정해야 한다. 〈상징은 성장한다. 그것은 다른 기호, 특히 도상 또 는 도상과 상징의 본질을 혼합적으로 취하고 있는 기호의 전개로 부터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뿌리가 상징 세계의 구조적인 독창성, 영역, 생 산, 놀이의 자율성을 해칠 수 없을 것이다 So it is only out of sym b ols th at a new sym b ol can grow . Omne sym bolum de s ym bolo( 새로운 상징이 성장하는 것은 오직 다론 상징들로부터이 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발생적 뿌리는 기호를 다른 기호로 되돌려 보낸다. 비의미 작용(의미 없음)의 어떤 지반(무의미로 이해하건, 현 전하는 진리의 직관으로 이해하건)도 그 성립을 위해 기호 놀이나 생성 안에서 전개되지 않는다. 기호학은 더 이상 일개 논리학에 종 속되지 않는다. 퍼스에 따르면 논리학이야말로 일종의 기호학일 뿐 이다. 〈논리학은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앞에서 이미 증명했듯 이, 기호학 이曲 LLXh, 즉 필연적 형식적 기호 원리의 다른 이름 일 뿐이다.〉 고전적 의미의 논리학, 죽 〈엄밀한 의미의〉 논리학, 진리 가치에 의해 지배되는 비형식적 논리학은 기호학에서 근본적 인 자리가 아니라 일종의 규정된 자리만을 차지할 뿐이다. (그러나 이 유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더라도 여기서 멈추고, 또 그러한 유 9) Peir c e, Elements of log ic, Liv . II, 302 쪽

추는 아주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이는 최하 수준인 논리학(기호 학)의 가능성 토대를 던스 스코터스 Duns Sco t us 의 이론에 32 과도 하게 의존하는 토마스 데르푸르트 Thomas d ' Er fu r t의 33 『 사변 문 법 Gramma ti ca s p ecula ti va 』 계획에 상응한다. 후설과 마찬가지 로 퍼스도 분명 그것을 참조했다. 그 두 경우 모두 하나의 담론이 하나의 의미를 갖기 위해서, 또 비록 그 의미가 거짓이나 모순이라 할지라도 〈의미하는 바 voulo i-r -d i re 〉가 있기 위해서 만족시켜야 할 조건들에 대한 형식적 원리를 구축하는 · 것이 관건이다. 이 의미 하는 바 (Bedeu t un g, mean i n g )10 ) 의 일반 형태론은 진리에 대한 모든 논리와 독립해서 존재한다 .

10) 우리는 『 목소리와 현상 』 에서 Bedeu t en 을 voulo ir- d i re( 말하려는 바)로 번역한 것을 정당화했다•

기호 과학에는 세 분야가 있다 . 첫번째 분야는 던스 스코터스가 사 변 문법이라고 명명했다. 우리는 그것을 순수 문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 임무는 어떤 의미룰 표현하기 위해 모든 과학 정신이 사용 하는 표상체 re p resen t amen 에 대해 참된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두번 째 분야는 엄밀한 의미의 논리학이다. 하나의 대상체 obj e t를 갖기 위해 과학적 지성의 표상체들 re p resen t a mina 에 대해 필연적으로 참된 것 울 연구하는 과학이다. 달리 말해, 엄밀한 의미의 논리학은 여러 표상 들의 진리 조건에 대한 형식적 과학이다. 세번째 분야는 칸트가 새로 운 개념을 위해 일종의 사전 목록체를 설정하면서 낱말들의 오랜 연상 을 복원하는 방식을 모방해 순수 수사학 rhe t o riq ue p ure 이라고 명명하 자. 그 임무는 과학적 지성이 하나의 기호가 다른 기호를 낳을 때의 법칙, 특히 하나의 사고가 또 다른 사고를 낳는 법칙을 규정하는 것이 다 . 11 )

11 ) Peir c e, Phil os op hica l writ ing s , 7 장 , 99 쪽.

퍼스는 우리가 초월적 시니피에의 해체라고 부른 것이 나아가는 방향에서 더욱더 전진하는데, 초월적 시니피에는 어떤 순간에 확실 한 하나의 항목을 기호에서 다른 기호로 돌려보낸다. 우리는 로고스 중심주의와 현전의 형이상학을 그 시니피에가 34 끈기 있게 요구하는 강력하고 체계적이며 억압할 수 없는 욕망이라고 파악했다. 그런데 퍼스는 돌려보내기 renvo i의 무한정성 i nde fi n it e 을 하나의 기호 체 계와 관련되고 있음을 인식하는 기준으로 파악한다. 의미 작용 운동 은 일단 시작하면 중단이 불가능하다. 사물 자체가 일종의 기호이다. 후 설은 이러한 명제를 수용할 수 없었는데. 후설의 현상학은 그렇게 해 서(즉 〈원칙에 대한 현상학의 원칙에서〉 )3 5 현전의 형이상학을 가장 철저하고 비판적으로 복구한다. 후설 현상학과 퍼스 현상학 사이의 차이는 근본적 이다. 그것이 기호와 현전의 발현 man ife st a ti on 이 란 개념과 현전화와 사물 자체(진리)의 근원적 현전화 사이에 있는 관 계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퍼스는 현상학p henomenolo gi e 이란 낱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후설)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다. 랑베르 Lamber t는 36 실제로 〈사물 이론을 기호 이론으로 환원할 것〉 을 제안했다. 퍼스가 주장하는 〈현상 기술학p hanerosco pi e 〉 3 7 이나 〈현상학〉에 따르면, 발현 그 자체는 현전을 계시하지 않고 기호만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현상학 원론』에서 퍼스는 〈발현 개념은 기호를 나타내는 관념〉 12 ) 이라고 쓴 바 있다. 따라서 의미화된 사물 자체를 그 현전의 섬광 속에서 빛나게 하려고 기호나 표상체 re p resen t an t 를 환원시키는 현상성 p henomena lit e 은 없다. 소위 〈사물 그 자체 > 란 직관적 명중성의 단순성에서 분리된 하나의 표상체 38 이다. 표상체 란 해석체i n t erp r e t an t' 9 를 끌어들이면서 비로소 작동하는데, 이때 해석체는 그 자체가 기호가 되며, 이런 식으로 끝없이 계속된다. 시 12) 『 현상학 원론 』 , 93 쪽. 랑베르가 현상학울 진리학 l'ale thiolo gi e 에 대립 시켰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니피에의 자기 정체성은 일탈해 끊임없이 이동한다. 표상체의 고유 함p ro p re 은 자신인 동시에 타자이며 돌려보내기 구조로 생산되고 자기 자신에게서 기쁨을 찾는다. 표상체의 고유성은 고유하지 않은 것, 달리 말해 절대적으로 자신에게 가까운(p ro p e, pro p ri u s )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표상된 것 re p resen t e 은 언제나 이미 일종의 표상 체이다. 기호의 정의 . 하나의 대상체를 지칭하기 위해 무엇인가 다른 것(그 해석체)을 규정하 는로 모지칭든한 다것 ., 이해 대석상체체는를 하 해나석의체 기자호신가이 ’되( 그 고것, 의또 대 이상체러를한) 과동정일은한 끝방없식이으 계속된다……. 만약 계속되는 해석체의 연속이 끝난다면 기호는 불완 전한 것 이 될 것이다 . 131 ( 위의 책, 40 쪽) 따라서 의미가 존재하는 그 순간부터 기호가 존재한다. 우리는 오직 기호를 통해서만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We thi n k only in sig ns . 이것은 곧 니체의 사상에서처럼, 기호의 요청이 기호의 권 리인 절대성 속에서 인정된 그 순간에 기호라는 개념 자체를 송두 리째 무너뜨린다. 그 초월적 시니피에의 부재를 놀이의 무한계, 죽 존재론-신학과 현전의 형이상학을 뒤흔드는 것으로서 놀이j eu 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동요의 조그마한 혼들림이 기원 이래 형이상학을 노리면서 있는 그대로 명명되었는데, 바로 그 시대에 언 어학을 의미론과 연결시키기를 거부하면서(소쉬르에서 옐름슬레우 까지 유럽의 모든 언어학자가 취했던 태도이다 ), 4 0 또 의미 mean ing 문제를 연구 영역에서 몰아내면서, 몇몇 미국 언어학자가 끊임없이 놀이 모델을 참조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못 된다. 여기서 우리는 문자를 언어 놀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페드로 』 (277e) 는 문자 13) Elements of log ic. L. 2. 302 쪽.

언어를 놀이p a i d i a 라고 비난했고, 이 유치한 놀이를 음성 언어라는 진실된 어른들의 진중함 sp o udei1 -t 대립시킨다). 초월적 시니피에의 부재로 생각되는 놀이는 철학 전통이 늘 그렇게 정의했듯이 세계를 포용할 목적으로 놀이 이론가들이 그렇게 생각하듯이(또는 블룸필드 에 이어서, 그를 뛰어넘어 의미론을 심리학 또는 다른 주변 영역으로 귀결시키는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세계 속에 있는 놀이가 아니다. 따 라서 놀이를 철저하게 생각하려면 존재론적, 초월적 문제에 신중하 게 천착해야 하며, 존재의 의미, 존재자의 존재와 세계의 초월적 근 원의 문제(세계의 세계성)를 끈기 있고 꼼꼼하게 거쳐야 할 것이 며, 후설과 하이데거가 던진 질문들의 비판적 운동을 효과적으로 끝까지 추구해야 할 것이며, 그 질문들의 효율성과 판독 가능성을 간직해야 할 것이다. 비록 삭제 또는 말소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 없이는 앞으로 사람들이 필요로 할 놀이와 문자 언어라는 개념들 은 주변적 한계선에서, 경험론적 실증주의적 형이상학적 담론 차원 에 머무를 것이다. 그 담론의 옹호자들이 선비판적 전통과 형이상 학적 사변에 대립시키는 과시는 그들 고유의 활동 조작의 세계적 표상 rep re senta t i on monda i ne 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세계의 놀이j eu du mond 려룹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세계에 있 는 온갖 형식의 놀이들을 이해하기 이전에말이다 .14) 따라서 그 놀이가 개방되자마자 우리들은 상징의 비동기적 생성 속에 있게 된다. 이 생성에서 통시태와 공시태의 대립은 파생적이 다. 그 대립은 설득력 있게 그라마톨·로지를 통제할 수 없을 것이 14) 하이데거 (La chose(1950). Essai s et con fe rences( 불어본), 214 쪽 이하와 Le pr in c i pe de rai so n, 1955-1956( 불어본), 240 쪽 이하 참조), 오이겐 핑크 Fink (Le jeu comme sym b ole du monde, 1960),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악셀로 K. Axelos(Vers la pe nsee pJa neta i r e, 1964 와 E같i은n f ii테hr마un들g은 i n우 e리in를 k니ii체nf ti쪽-g으e s로 D 돌en려k보en낸, 다.19 66) 의 사상에 나타나는 이

다. 흔적의 비동기화는 조작으로 이해해야지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된댜 또한 그것은 능동적 운동과 비동기화로 이해해야지 주어진 구조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 기호의 자의성〉의 과학, 흔적의 비동 기화로 이루어진 과학, 음성 언어 이전에, 또 음성 언어 속에 있는 에크리튀르의 과학인 그라마톨로지는 가장 폭넓은 장을 포괄할 것 이댜 그 장 속에서 언어학은 추상적으로 그 고유한 공간을 소쉬르 가 그 내적 체계에 그어놓은 한계점들과 더불어 그릴 것이며, 우리 는 그 장을 세계와 역사를 통해 각각의 음성 언어/문자 언어 체계 에서 신중하게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바로 언어적 대체를 통해 『 일반 언어학 강의 』 프로그램에서 기 호학을 그라마톨로지로 日尸규어놓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그라마톨로지]라고 명명할 것이다……. 아직까지 존 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이 될 것인지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존재할 권리가 있으며 그 위치는 이미 결정되었다. 언 어학은 이 일반 과학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라마톨로지]가 발견할 법칙들은 언어학에도 적용될 것이다.(『일반 언어학 강의 』 , 33 쪽) 이러한 말 바꾸어 쓰기의 이점이 문자 이론에서 논리 중심주의 적 억압과 언어학에 대한 종속에 맞서서 요구되는 포괄성을 부여 하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폭넓은 이론적 넓 이를 가지고 있는데도 언어학에 의해 통제되고, 그 중심인 동시예 목적으로 언어학에 의해 정돈되는 것으로부터 기호학의 기획 자체 를 해방시킬 것이다. 비록 기호학이 언어학보다 더 일반적이고 포괄 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언어학의 한 부분으로서 특권을 계속 누리며 진행될 것이다. 언어 기호는 기호학에서 본보기로 남을 것이며 기호 학은 핵심 기호인 동시에 발생적 모델, 죽 〈우두머리〉로서 지배한

다 . 소쉬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전적으로 자의적인 기호들이 다른 기호들보다 기호학적 방식 의 4 1 이상을 더 잘 실현하며, 이런 연유로 표현 체계 중에서 가장 복잡 하고 가장 널리 유포된 언어야말로 모든 체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이 다. 이런 의미에서, 비록 언어는 특수한 체계에 불과하지만 언어학은 전체 기호학의 총괄적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다 . (위의 책, 101 쪽. 강조는 필자의 것임) 아울러 바르트는 소쉬르가 지시하는 종속 관계의 차원을 재고찰 하고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외관상 뒤집어놓으면서 『 일반 언어학 강의』의 가장 심오한 의도를 완수하고 있다. 요컨대 지금부터 언젠가 소쉬르의 명제를 뒤집어놓을 수 있는 가능 성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언어학은 일반 기호 과학의 특권화된 부 분이 아니라 기호학이 언어학의 일부분이 된다 .1 5 1 이 수미 일관된 뒤집기는 기호학을 〈초언어학t rans li n gui s tiq ue 에 종속시키며, 논리 중심적 형이상학에 의해 역사적으로 지배받는 언어학을 충분히 완전한 명시화로 이끌 것이다. 논리 중심적 형이 상학에서 의미란 오직 명명될 때만 가능할 것이다.〉(위의 책, 같은 곳) 위에서 언급한 언어학은 우리가 사는 〈문자 문명〉, 즉 음성 문 자의 문명, 그러니까 로고스 문명에 의해 지배되는데, 로고스 문명 에서 존재의 의미는 목적론의 관점에서 재림으로 규정된다• 세계화 자체에서 사라져가는 이 시대와 이 문명의 폐쇄 속에서 의미 작용 이라는 사실과 그 소명 le fait et la vocati on de la sig nifica ti on 15) R. Barth e s, Commun ica ti on s 4. 2 쪽.

을 기술하기 위한 바르트의 뒤집기에는 풍부한 가능성이 있으며 또 필수 불가결한 뒤집기이기도 하다. 그럼 지금부터 이 형식적이며 구성적인 고찰을 넘어서보자. 우 리는 좀더 내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언어 체계(랑그)가 어떤 점 에서 문자 언어 (『일반 언어학 강의』 33 쪽에서 소쉬르는 〈문자 언어 와 비교될 수 있는〉이라고 적은 바 있다)의 일종일 뿐만 아니라 에 크리튀르의 일종 une espe c e de l' ecr it ure 이기도 한가를 자문해야 할 것이다. 또 그 관계가 여기서는 더 이상 의연과 경계선의 문제 가 아니기 때문에 언어 체계가 문자라는 일반적인 가능성에 근거 한 또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 있는 이유를 물어봄직하다. 그 점을 보여준다면 동시에 불행한 사건일 수밖에 없었던 소위 〈찬탈〉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그것은 공통 뿌리를 가정하고 그것 울 통해 〈이미지〉라는 닮은꼴, 파생, 표상적 반영을 배제한다. 아 울러 그런 식으로 해서 소쉬르는 겉으로 순수해 보이면서 교육적 인 비유를 문자 언어의 진정한 의미로, 그 일차적 가능성으로 다시 유도한다. 그 비유는 소쉬르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언급하게 한다. 언어 체계(랑그)는 관념을 표현하는 기호 체계이며, 따라서 문자 언 어, 수화법, 상징적 의식, 예법, 군용 신호 등에 견줄 수 있다. 언어 체 계란 단지 이 체계 중 가장 중요할 따름이다.(위의 책, 33 쪽. 강조는 필자의 것임) 130 쪽 뒤에서 음성적 차이를 언어 가치의 조건으로 설명하려는 순간에(그것의 물질적 양상에서 고찰된다 ),16) 소쉬르가 그가 행한 16) 〈가치의 개념적 부분이 언어의 다른 항목들과 맺은 관계와 그 사이의 차 이에 의해서만 성립된다면, 가치의 물질적 부분 역시 마찬가지이다. 낱말에 서 중요한 것은 소리 그 자체가 아니라 낱말을 그 외의 모든 낱말과 구별 시켜 주는 음적 차이이다. 왜냐하면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그 차이들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한 토막은 궁극적으로 오직 그 나머지와의 불일치에 근거할 뿐이다.〉(『일반 언어학 강의』, 163 쪽)

모든 교육 방법의 근원을 문자 언어라는 예증에서 빌려온다는 사 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문자 언어라는 또 다른 기호 체계 속에서 동일한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까닭에 우리는 이 모든 문제에 답하기 위해 그것을 비교의 잣대 로 사용할 것이다.(위의 책, 165 쪽) 그 도식과 내용에서 문자 언어의 예증을 빌려 쓰는 네 개의 증 명이 뒤를 잇는다 .17) 따라서 결정적으로 소쉬르를 자신에게 대립시켜야 할 것이다. 〈서체 gr a p h i e 〉에서 〈기록되고〉, 〈표상되고〉, 〈형상화〉되기 전에 언어 기호는 근원적 에크리튀르 ecr it ure or igi na i re 를 상정한다.

17) 〈문자 언어라는 또 다른 기호 체계 속에서 동일한 상태를 확인할 수 있 는 까닭에 우리는 이 모든 문제에 답하기 위해 그것을 비교의 잣대로 사용 할것이다. 첫째, 문자 체계의 기호들은 자의적이다. 가령, 철자 t와 아것이 지칭하는 소리 사이에는 아무 관계도 없다. 둘째, 철자들의 가치는 순전히 소극적이며 이화적(異化的)이다. 가령, 한 사람이 t를 쓸 때, t ,t t9} 같은 변이 형태로 쓸 수 있다. 본질적인 것은 오 직 그 필체에서 1, d 동의 부호와 혼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 문자 체계의 가치들은 규정된 체계 안에서 상호간의 대립을 통해서 만 작용하는데, 이 체계는 한정된 수의 철자들로 구성된다. 이 특징은 두번 째 특징과 동일하지 않지만 그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그 두 특 징은 모두 첫번째 특징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문자 표기 기호는 자의적이므 로 그 형태는 거의 중요하지 않거나 그 체계에 의해 부과되는 한계 안에서 만 중요성이 있을 뿐이다. 넷째, 기호의 생산 수단은 전혀 상관없다. 그것은 체계와 아무 관련이 없 기 때문이다(이 점 역시 첫번째 특징에서 비롯된다). 철자들을 흰색으로 쓰 건 검은색으로 쓰건, 음각으로 쓰건 양각으로 쓰건, 펜으로 쓰건 끌로 파건, 그 의미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위의 책, 165-166 쪽)

하지만 지금부터 우리가 직접 호소하려는 것은 기호의 자의성 원 리가 아니라 소쉬르에 의해 필수 불가결한 상관물로 연상되었고, 우리가 보기에는 자의성 원리의 토대를 이루는 것으로 보이는 언 어 기호의 근원으로서의 차이 원리 42 이다 .1 8)

18) 〈자의성과 차이성은 상관 관계를 이루는 두 특성이다.〉(위의 책, 163 쪽)

그라마톨로지 관점에서 보자면, 너무나 잘 알려진 이 주제의 파 급 효과는 무엇인가?(더욱이 이미 플라톤은 『 소피스트 Sop h i s t e 』 에 서 이에 대해 몇 가지 성찰한 바 있다……) 정의상 차이란 결코 자 체로는 감각적인 충만함이 아니며 차이의 필연성은 언어가 자연적 인 음성적 본질이라는 주장과 상충된다. 동시에 그것은 기호 표기 라는 소위 시니피앙의 자연적인 종속도 반박한다. 언어의 내적 체 계를 정의하는 기본 가설에 반격해서 소쉬르가 자기 주장을 벗어 나는 순간 파급 효과가 나타난다. 소쉬르는 바로 그가 문자 언어를 배제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을 배제시켜야 한다. 죽 소리와 소리가 의미와 맺은 〈자연적〉 관계를 배제해야 한다. 예컨대, 앞으로 보겠지만 언어 체계(랑그)의 본질은 언어 기호의 음성적 성 격과 무관하다.(위의 책, 21 쪽) 또 차이에 대해 언급하는 문단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물질적 요소인 소리가 그 자체로 언어 체계(랑그)에 속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댜 언어 체계에서 소리는 부차적인 것이며 언어 체계가 사용 하는 재료일 뿐이다. 모든 계약 가치는, 버팀목 역할을 할 촉지(觸知) 될 수 있는 요소 element t an gi ble 와 혼동되지 않는 특성을 드러낸다. 본질적으로 언어 기호 형식은 결코 음성적이지 않으며, 감지 영역을 벗어난다. 그것은 물질적 실체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청각 영상과 그 외의 모든 청각 영상을 구별하는 차이로 구성된다.(위 의 책, 164 쪽) 하나의 기호 속에 관념 또는 음성 실체가 있다는 것보다 그 기호를 둘러싼 다론 기호들이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위의 책, 166 쪽) 음성적 질료의 환원 없이는 소쉬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랑그 와 파롤의 구분에는 어떤 엄밀성도 없을 것이다. 코드와 메시지, 도식과 사용 등 나중의 대립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다음 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다시 말하건대) 음성학은 부차적 분야 이며 파롤에 속하는 것이다.〉(위의 책, 6 쪽) 표기가 되었건 그렇지 않건 간에 파롤은 랑그라는 에크리튀르의 밑천에서 나온다. 바로 그런 까닭에 두 〈고정성 fixi t e> 사 이의 공범 관계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소리p hone의 환원은 이 공범 관계를 밝혀준다. 가령, 소쉬 르가 기호 일반을 말하고 그것을 문자 언어로 〈확인하는〉 것은 언 어 체계에서도 타당한 것이다. 〈서로 연결된 시간 속의 기호 변질 과 시간 속의 기호 연속성은 일반 기호학의 원리이다. 문자 체계, 수화 동에서 그 확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위의 책, 111 쪽) 따라서 음성 실체의 환원은 음성학(음향학 또는 발성과 음성 기 관의 생리학)과 음운론의 구분만을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그 환원 은 음성학 43 자체를 일종의 〈보조 분야〉로 만든다. 이 점에서 소쉬 르의 지시 방향은 그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음운론주의를 넘어선다. 야콥슨은 표현의 음성 실체에 대한 무관심은 불가능하며 부당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음성 실체의 중성화를 요구하고 실천하는 옐름슬레우의 언리학g lossema tiq ue 을 야콥슨은 비판한 다. 앞에서 인용한 책에서 야콥슨과 할레는 음성 실체를 (경험론적 우발적 내용으로 여겨) 괄호에 넣고 불변하는 요소들을 찾으려는

108 1 부 문자 이전의 에크리튀르

〈 이론적 요구〉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첫째, 실천 불가능하다. 〈요르겐센 E. F. J or g ensen 이 지적하듯 이, …. .. 사람들은 모든 분석 단계에서 음성 실체를 고려하기 때문 이다. 〉 그러나 야콥슨과 할레가 주장하듯 정말로 그것이 〈껄끄러운 모순 〉 일까? 일종의 범례로 사용되는 사실로 고려할 수 없을까? 그 범례를 시선 속에 간직하는, 내용과 권리상 경험과 독립된 본질의 책 읽기에서 본보기가 되는 경험적 내용을 필요로 하는 현상학자 들처럼말이다. 둘째, 당위론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언어에서는 상수와 변수 가 대립하는 것처럼 형식과 실체가 대립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 댜 〉 이 두번째 증명을 하는 동안 소쉬르적 표현들이 문자 그대로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관계에 대해 다시 나타난다. 문자 언어의 차원은 외재성, 그러니까 〈 우연적인 것〉, 〈부차적인 것〉, 〈보조적 인 것〉, 〈 기생적인 것〉 등의 차원이라는 것이다(위의 책, 116-117 쪽. 강조는 필자의 것임). 야콥슨과 할레의 논증은 사실과 관련된 발생에 호소하고 일상에서 나타나는 문자 언어의 이차성을 환기시 킨다. 〈 음성 언어를 터득한 이후에야 비로소 읽기와 쓰기를 배운 다. 〉 이같이 상식에 근거한 명제가 엄밀하게 증명되었다 하더라도 (물론 우리의 견해로는 그러한 증명은 없었다) 그 명제가 갖는 변별 력을 논증 속에서 확실히 보장해야 할 것이다 . 비록 〈나중에〉란 말 이 알기 쉬운 표상이며 말을 배운 다음에 글을 쓴다는 사실을 확 신하면서 그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임을 잘 안다고 하더라도 과 연 〈나중에〉란 말로 문자 언어가 기생적이라고 결론짓기에 충분한 것일까? 도대체 기생물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문자 언어가 기생 논리를 재고찰하게끔 하는 것이라면? 또 야콥슨과 할레는 문자 언어로 된 표상의 불완전성을 상기시 킨다. 이 불완전성은 〈철자와 음소가 근본적으로 다른 구조라는 사

실에〉 기인한다. 철자는 결코 음소 체계가 근거하는 서로 다른 변별적 자질들 ” 을 완 전히 재생할 수 없으며, 변별적 자질들 사이의 구조적 관계를 무시할 수밖에 없다.(앞의 책, 116 쪽) 앞에서 이미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드러낸 바 있다. (문자 표기와 음성이라는) 두 요소의 근본적 차이는 파생을 배제시키지 않느냐고. 문자 표상의 부적합성은 알파벳 문자 언어에만 관련되는 것은 아닐까? 옐름슬레우의 언리학적 형식주의는 공통 알파벳 문 자에 준거를 두지 않는다. 끝으로, 만약 이 런 음운주의적 논증을 받아들인다면 그 논증은 파롤에 대한 〈과학적〉 개념을 문자 언어 에 대한 통속적 개념과 대립시키고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할 것이 다. 우리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변별적 자질들 사이에 있는 구 조적 관계〉라는 일반적 경험에서 문자 언어를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문자 언어라는 개념 자체를 개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야콥슨의 분석이 소쉬르에 충실한 것이라면, 그것은 특히 『일반 언어학 강의』 r 서론」 6 장의 소쉬르가 아닐까? 야콥슨 과 할레가 가장 중요한 논증으로 제시하는(위의 책, 117 쪽) 질료와 형식의 불가분 관계를 과연 소쉬르가 어느 정도 지지했을까? 같은 질문을 마르티네에게도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논쟁에서 마르 티네는 액면 그대로 『일반 언어학 강의』 r 서론」 6 장을 답습하고 있다 .19) 또한 그 6 장은 마르티네가 노골적으로 ex p ress i vemen t 음 19) 소쉬르의 견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르티네의 충실성온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첫째, 옐름슬레우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설명하는 자리에서 마르티네는 이 렇게 쓴 바 있다 (Au s 떠 e t des fon dements de la the ori e ling uist i qu e

de L. l{jelm slev, Bulleti n de la Soc iete de Lin g uist i qu e de Pari s, 42 권 , 40 쪽). 〈 옐름슬레우가, 언어학자에게는 실체의 선택이 중요하지 않 기 때문에 문자 텍스트는 구어 텍스트와 똑같은 가치를 갖는다고 말할 때 자신의 주장과 논리적으로 완전 일치한다 . 심지어 그는 구어로 된 실체는 원시적이고 문자로 된 실체는 파생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지시키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몇 가지 병리 학적 예외를 제의하고, 모든 인간은 말을 하지만 극소수의 사람만이 문자 룰 쓸 줄 알며 더욱이 아이들은 문자를 배우기 훨씬 전부터 말할 줄 안다. 따라서 우리들은 그 자명한 사실을 새삼스레 강조하지 않을 것이다.〉(강조는 필자의 것임) 둘째 , Elements de lin g uist i qu e ge nerale 에 나오는 언어의 구두적 성 격을 다루는 장은 『 일반 언어학 강의』 『서론」 6 장의 논항들과 낱말들을 다 시 취한다. 〈읽기를 배우기 전에 말하는 법을 배운다. 책 읽기가 음성 언어 에 뒤이어 오는 것이지 결코 그 반대는 아니다〉(강조는 필자의 것임. 이 명 제는 논증 가운데서 강제력을 갖는 공통된 경험의 수준에서 벌써 반론의 여지가 충분히 있는 것 같다.) 마르티네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문 자 연구는 언어학의 부속 분야라기보다는 언어학과 구분되는 분과 학문을 대표한다 . 따라서 언어학은 문자 표기gr~phi e 라는 사실을 추상화시킨 다.〉(1 1 쪽) 여기서 우리는 부속과 추상화 따위의 개념이 어떻게 작동하는 지 알게 된다. 문자와 문자를 다루는 과학(언어학)은 서로 무관하지만 독 립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것은 둘 모두 서로 내재적이지만 비본질적인 것으로 남는 것을 가로막지 못한다. 문자는 언어 자체의 통합성, 그 순수하 며 기원적인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정체성 속에서, 그 속성에 영향을 미치 지 않을 정도로 알맞게 바깥쪽이며, 실제적 또는 인식론적 독립에 대해 아 무 권리를 갖지 않을 정도로 알맞게 바깥쪽이다. 그것도 상호적으로말이다. 셋째, (이미 인용된) Le mo t에서, 〈인간 언어의 실제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구두 언술에서 출발해야 한다〉 (53 쪽)고 적고 있다. 넷째, La double arti cu lati on de lang a ge , La Jinguist i qu e syn - chron iqu e, 8 쪽 이하와 18 쪽 이하.

성 실체의 특권을 말소시키는 언어가 나타나는 원리를 『 일반 언어 학 강의 』 에서 추출한 장이기도 하다• 〈완벽한 상형 문자로 이루어 진 사어(死語)〉, 즉 일반화된 문자 언어 체계로 간주되는 커뮤니케 이션에 무슨 이유 때문에 〈어떤 실제적 자율성도 없는가?〉 그런데 도 여전히 neanmoin s 〈그 체계가 너무 특수한 것이어서 언어학자 들이 그것을 언어 과학의 범주에서 배제하고 exclure 싶어하는〉 이

유를 설명한 후에( 『 공시 언어학 La lin g u is t i qu e sy n chron iq ue 』 , 18 쪽. 강조는 필자의 것임) 마르티네는 소쉬르가 제시한 유형에 따라 언어 기호에는 본질적으로 음성적 성격이 있다는 사실을 문제삼는 자들을비판한댜 많은 사람들이 〈언어의 본질은 언어 기호의 음성적 성격과 무관하 다〉고 말하는 소쉬르가 옳다고 인정하고, 더 나아가 소쉬르 선생의 가 르침을 넘어서 〈언어 기호는 반드시 이러한 음성적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언하기 쉬울 것이다.(위의 책, 19 쪽) 여기서 문제의 관건은 대가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것 dep a sser> 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추종하고 그것을 연장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6 장에서 집중적으로 형식적 또는 구조적 연구를 제한하 는 것 그리고 소쉬르 원리 중에서 가장 이론의 여지가 없는 성과 들과 모순되는 것에 매달리는 꼴이 아닐까? 〈넘어서기〉를 회피하 기 위해 다시 문제의 주변으로 빠지는 위험을 범하지는 않을까? 우리의 견해로는 일반 문자는 단지 창안해야 할 체계나 가설적 성격 또는 미래의 가능성이라는 관념만은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구어는 이미 이러한 에크리튀르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 온 문자 개념의 변형을 전제하는 것이며, 지금은 단지 그 변형을 예시만 할 뿐이다. 이 변형된 개념을 세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순 수한 문자 체계를 미래 가설 또는 작업 가설로 간주한다고 가정하 면, 언어학자는 이 가설 앞에서 그것을 생각하고 그 이론적 담론에 서 그 공식을 포괄하는 수단을 거부해야 하지 않을까? 언어학자 대부분이 실제로 그러기를 거부하더라도 그것은 이론적 권리를 창 조하는 것이 아닐까? 마르티네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순전 히 〈타자기적인 dy ct y lo g rap h iq u e> 언 어를 가설로 구축한 후에 그

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타자기 사용법 〉 과 음운론 사이의 평행 관계는 통시태뿐만 아니라 공시태에서도 완결된 것이며, 타자기 사용법을 위해 일상 술어를 음운 론에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인해야 할 터이다. 물론 술어 항목들 이 음성 실체에 준거할 때는 예외이다. 만약 조금 전 우리가 상상한 것 따위의 체계들을 언어학 영역에서 배제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시니 피앙의 분절과 관계된 전통적 술어를 변경시켜 음성 실체에 대한 참조 사항 일체를 제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가령 옐름슬레우는 〈 음소 〉 , 〈 음운론 〉 대신 〈 허음소 ceneme>, 〈 허음소론 cenema tiq ue 〉 이 라는 술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는 언어학자들 대부분이 언어 과학의 영역에 순전히 가설적 체계들을 포합할 수 있 EH 근 이론적 이익만을 위해 전통적 술어 체제를 뿌리째 바꾸는 일을 아직까지도 우려한 E는: 사실을 이 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학자들이 그러한 혁명을 모색하는 데 의견이 일 치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관찰된 언어 체계 속에서 표현 단위의 음성 실체가 직접 그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으로 고려하는 것은 어떠한 명분도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설득시켜야 할 것이다.(위의 책, 20-21 쪽. 강조는 필자의 것임) 여기서도 우리는 앞에서 그 전제 조건을 노출시킨 음운론적 논 증 가치를 의심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제 조건을 받아들일 때부터 파생된 문자 언어를 구어의 영역과 이러한 파생 체계 내부로 혼동 스럽게 다시 도입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 우를 범한다면 인종 차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적법한 그 영역 내 부에서 경계선 일체를 혼란스럽게 하고 말 것이다. 여기서 문제의 관건은 엄밀한 의미에서 문자 언어의 위상을 복권시키는 것도 아 니며 자명해 보이는 종속 관계의 순서를 뒤집어놓는 것도 아니다.

2 언어학과 문자학 113

견고한 논증망을 짜는 통상적안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개념을 고수하는 한 음운론주의는 어떠한 반박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통상 적이고 일상적인 개념(이 점은 모순이 아니다)들은 오랜 역사에 의 해 자리잡고, 비가시적이지만 엄밀한 경계선에 의해 한계가 그어 진다. 아무리 현실적이고 거대할지라도 소위 문자 언어의 파생은 다음 과 같은 조건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리고 싶다. 즉 〈기원적〉 〈자연적〉 등으로 수식되는 언어는 결코 존재한 일이 없 으며, 에크리튀르의 작용 때문에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존재했던 적도 없고, 그 언어가 바로 일종의 에크리튀르였다는 사실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그 필요성울 지적하고 새로운 개념의 획을 그으려 하는 것은 원문자 arch i-e cr it ure 이다. 우리는 앞으로 이것을 에크 리튀르라고 부를 작정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문자에 대한 통속적 개념과 본질적으로 서로 소통하기 때문이다뿌 이 문자 언어에 대 한 통속적 개념은 음성 언어가 그 이면과 사본을 몰아내고 그 차 이를 축소시키려는 욕망에 의해 원문자를 은폐시킴으로써 역사적 으로 부과되었을 뿐이다. 만약 우리가 이 차이를 에크리튀르라고 명명하기를 고집한다면, 그 이유는 역사적 억압의 조작 속에서 에 크리튀르는 상황에 따라 차이 중에서도 가장 가공할 만한 것을 의 미하도록 노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볼 때, 에크리튀르는 살아 있는 음성 언어의 욕망을 위협하는 것이며, 안 쪽과 그 시초부터 음성 언어를 개시하고 음성 언어에 손상을 입히는 J'en ta m a it 것이었다뿌 또 우리가 점차 절실하게 느끼게 된 차이 란 흔적 없이는 생각될 수 없다. 비록 〈기호의 자의성〉과 차이라는 주제들이 원문자라는· 개념을 호명하더라도 원문자는 결코 일개 과학의 대상으로 인지될 수 없고 또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현전p resence 이라는 형

식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다꼬 현전 자체는 대상의 전적인 객관 성과 지식 관계를 요청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r 서론」 6 장의 무비 판적 입장들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 일종의 〈진보〉로 간주하고 싶은 것은 『 일반 언어학 강의 』 의 나머지 부분에서 결코 문자 언어 에 대한 새로운 〈 과학적〉 개념을 탄생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 이 진보가 드러내는 가장 엄밀한 효과를 도출시킨 옐름슬 레우의 대수학주의 al g ebr i sme 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 을까? 『 일반 문법 원리 Pr i n cip es de gram mair e g e nerale 』 (1 928) 는 48 『 일반 언어학 강의 』 의 원리에서 음운론주의 원칙과 차이의 원 칙을 분리시켰다. 이 책에서 옐름슬레우는 형식 개념을 추출했는데 , 그 개념은 형식적 차이와 음성적 차이를 구분시켜 주며 〈구어〉의 안쪽에서 생성된다( 『 일반 문법 원리』, 117 쪽). 또 문법은 의미론과 음운론에서 독립된다(위의 책, 118 쪽). 이 독립은 바로 랑그의 형식 과학인 언리학이 취하는 원리이다. 언리학의 형식성은 〈소리와 언어 사이에는 아무 연계성도 없음〉 20) 울 전제한다. 그런데 이 형식성온 그 자체로 순수한 기능적 분석의 조건이댜 언어 기능과 순수한 언어의 단위라는 개념(언리소 g losseme) 은 표현 실체(물질적 실체)뿐만 아니라 내용의 실체(비물 질적 실체)를 고려하는 것도 배제한다. 〈언어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소쉬르). 정의상 언리소는 비물질적이며 물질적인(음성적, 문자적 등) 실체(또 의미적, 심리적, 논리적인 실체)와 독립되어 있 다.〉 2 1 ) 랑그와 랑그 놀이의 작동을 연구하는 것은 의미의 실체와 다른 가능한 실체들 가운데 소리의 실체를 괄호에 집어넣는 것을 20) On the Pri nc ip le s of Phonemati cs , Proceedin gs of the Second Inte r nati on al Cong i·es s of Phoneti c S c ien ces, 1935, 51 쪽 . 21 ) L. Hielm slev et H. J. 미 dall, Et ud es de Jinguist i qu e str u ctu rale orga nis e es au sein de Cercle Jinguist i qu e de Cop e nhag ue , 11·35 호, 13 쪽 이하.

전제로 한다. 우리가 위에서 제안했듯이, 소리와 의미의 단위는 여 기서 놀이의 확실한 폐쇄이다. 옐름슬레우는 그가 제시한 랑그의 도식 schema 또는 놀이j eu 라는 개념을 소쉬르의 계보에 위치시키 고 있다. 비록 그가 언어 가치를 순수한 논리-수리적 가치보다는 〈경제 과학의 교환 가치〉에 비유하기를 선호하지만 이러한 비유에 한계를긋는다. 정의상 경제적 가치는 양면성이 있는 가치이다. 그것은 돈이라는 구 체적 단위에 대해 상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척도로 사용되는 상품 의 일정한 양에 대해 변수 역할을 한다 . 그러나 언어학에는 척 도에 해 당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경제적 사실이 아닌 체 스 놀이가 소쉬르에게는 문법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는 이미지로 남 아 있다. 랑그라는 도식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놀이이며 그 이상 아무것 도 아니댜 221 『 언어 이론 서설 Prolego menes a une th eorie du J an ga ge 』 (1943) 에서 시니피앙/시니피에의 차이를 대신해 표현 expr essio n/ 내용 con t enu 이라는 대립쌍(이 술어들은 형식 또는 실체라는 관점에 서 고찰될 수 있을 터인데)을 작동시키면서, 옐름슬레우는 음성 표 현의 실체에 자연적으로 연결된 언어 관념을 비판한다. 구어의 표 현 실체가 배타적으로 〈소리〉로만 구성되어야 한다고 가정한 것은 오류이다. 이렇듯 특히 츠비르너 K. Z wi rner 가 주목하게 했듯이, 담화에는 다 른 무엇이 동반되며 이야기의 몇 가지 구성 성분은 몸짓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다. 또 실제로 츠비르너가 말 22) Langu e et pa role, Essais Jinguist i qu es, 1943, 77 쪽.

하듯이, 사람들은 〈 자연 〉 언어의 행위에 참여하는 것은 이른바 구어의 발성 기관(목젖, 입, 귀)만이 아니라 가로무늬근 전체라는 사실을 깨닫 지 못했다. 게다가 몸짓과 소리라는 일상적인 실체를, 다른 의부의 상 황 속에서 다른 적절한 실체로 맞바꾸는 것이 가~쵸}다. 따라서 동일 한 언어 형식이 문자 언어 속에서 표출될 수 있고, 이것은 마치 음성 또는 음소 표기와 이른바 말하는 음성 철자(덴마크어처럼)에서 일어나 는 일이다. 순전히 눈에만 호소하며 파악되거나 이해되기 위해 음성적 〈 실체 〉 로 전환될 필요가 없는 〈문자로 된 〉 실체가 여기에 있다. 그리 고 문자로 씌어진 이러한 〈실체〉는, 실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다 . 23 )

23) Omkri ng spr o g teo ri en s gz·u ndlaegg el se, 91-93 쪽. 이 책의 영어본인 Prolego mena to a the o1y of lang u age , 103-104 쪽. 또 La str a ti fica ti on du lang a ge (l954}, Essais lin g uist i qu es (Travaux du Cercle ling uist iq u e de Cop e nhagu e, XII. 1959) 참조 이 논문에는 문자 표기 표현의 실체를 다루는 문자 표기론gr ap hema tiq ue 의 기획이 상세하게 나타난다 (41 쪽). 형식과 실체 사이의 구분이라는 관접 에서 볼 때 제안된 대수학의 복잡성에는 〈소쉬르 술어가 혼동을 유발할 수 있다〉 (48 쪽)는 사실을 처방할 목적이 있다. 그래서 옐름슬레우는 〈유일하 면서 동일한 표현 형식은 다양한 실체들(음성 신호, 표기 신호, 수기 신호 등)로 표시할 수 있다〉 (49 쪽)고 썼다.

음성 표현의 실체로부터, 다른 실체들의 〈파생〉을 전제로 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옐름슬레우는 이 문제를 구조주의 분석의 엄밀한 언어학의 영역 바깥쪽으로 몰아냈다. 더구나 파생된 것과 파생되지 않은 것을 결코 확실하게 구분할 수 없다. 알파벳 문자가 이미 선사 시대 유적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잊 어서는 안 될 것이며(러셀은 인간 표현의 가장 오래된 형식이 문자였 는지 음성 언어였는지 결정할 수 있는 어떤 수단도 없다는 점을 올바 르게 환기시켰다), 따라서 알파벳 문자가 음성 분석에 근거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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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통시적 가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즉 그것은 언어 구조의 형식적 분석에 근거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현대 언어학 이 인지하듯 통시적 고찰은 공시적 기술에 대해 변별적이지 못하다. (위의 책, 104-105 쪽) 울달 ;9 은 이러한 언리학적 비판이 소쉬르 덕분에 가능했던 동시 에 소쉬르의 견해와 대립된다는 점 , 또 우리가 위에서 암시했듯이 『 일반 언어학 강의』에서 그라마톨로지의 고유한 공간이 개방된 동 시에 폐쇄되었다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소쉬르가 〈 그가 발견한 모든 이론적 파급 효과들을〉 다 전개하지는 못했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 울달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점은 실제 효과들이 이미 폭넓게 도출되었고, 그것도 이미 소쉬 르보다 수천 년 전에 도출되었다는 사실을 고찰하는 것은 무척 홍미진 진한 일이다. 왜냐하면 형식과 실체의 차이라는 개념 덕분에 우리는 언어와 문자가 대체로 유일하고 동일한 언어 표현들로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공기의 유출 또는 잉크의 유출 th e str e am of air or th e str e am of ink , 이 두 가지 실 체 중 하나가 언어 자체의 일부분이라면 언어를 바꾸지 않고 이 둘 중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 24) 24) Sp e ech and writing ( 1938). Acta lin g uist i ca IV, 1944, 11 쪽 이 하. 울달은 바섹 J. Vachek 의 연구를 참조한다. Zurn Problem der ge sch rieb enen Sp ra che, Ti·av aux du Cercle Jing uist i qu e de Pragu e VIII, 1939. 이 논문을 참조하는 목적은 〈음운론적 관점과 언리학적 관점 사이의 차이를〉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또 Eli Fisc her- Jo rge nsen, Remarqu es sur les pr in c ip e s de !'analys e ph onem iqu e, Recherches St ru ctu rales, Travaux du Cercle Jinguist i qu e de Prag ue V. 1949, 231 쪽 이하와 B. Sie r ts e ma, A stu d y of gl ossema ti cs (l 955) 의 6 장과 Hennin g s Sp a ng -H anssen, Glossemati cs , Trends in Europ e an and Americ a n lin g uist i cs.

ll8 1 부 문자 이전의 에크리튀르

1930 -19 60. 1963. 147 쪽 이하 둥을 참조할 것.

코펜하겐 학파5 0 는 이런 식으로 연구의 장을 개방시킨다. 실체와 일체의 〈자연적〉 관계에서 벗어난 형식의 순수함뿐만 아니라 언어 의 성층화에서 문자 표현의 일체에 종속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둔다. 독창적이고 엄밀하게 구획된 기술(記述)이 이런 식으 로 약속될 수 있을 것이다. 옐름슬레우는 〈소리를 염두에 두지 않 는 문자 분석은 아직까지 시도되지 않았다〉(앞의 책, 105 쪽)는 사 실을 시인한다. 〈언어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잉크라는 실체가 공 기라는 실체에 쏟아부은 관심을 차지할 권리가 없었음〉을 유감스 럽게 생각하면서 울달은 이 문제틀을 구획지으며 표현 실체들의 상호 독립을 강조한다. 그는 이 점을 철자법에서는 어떤 문자소 g ra p heme 도 발음의 강세에 해당되지 않으며(루소는 이를 문자의 빈곤이나 위협이라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발음에서는 어떤 음소 도 씌어진 단어 사이에 있는 띄어쓰기 공간 s pa ci n g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계시한다(위의 책, 13-14 쪽). 문자 언어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언리학은 단지 문자 표기 요소를 기술하는 수단을 부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언리학은 문학적 요소에 대한 접근과 문학에서 형식의 놀이j eu de la for me -2t 규정 된 표현 실체를 연결하는 문자로 표기된 텍스트로 통하는 것에 대 한 접근을 지칭한댜 문학에 목소리, 에포스전 또는 시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간파하는 것은 형식의 놀이와 문자 표기 표현 실체의 관계를 엄격하게 따로 떼어놓는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할 것이다(동시에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다는 접에서 존경받아 온 〈순수 문학〉도 이렇게 해서 놀이를 한정짓고 그것을 속박할 위험이 있다. 표현 실체와 놀이를 연결짓고 싶은 욕망은 더더욱 억압할 수 없 는 것이다). 이렇듯 코펜하겐 학파는 분명히 문학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25) 그 관심은 루소와 소쉬르가 문학 예술을 무시했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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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이미 Proleg omenes( 영어본 , 114-115 쪽)에서 그러한 경향의 윤곽이 나 타난다. 아울러 Ad. Ste n der- Pe te r sen. Esqu is s e d'une the orie str u c tur ale de la litte ra t ure 와 S. Jo hansen, La noti on de sig ne dans la glo ssemati qu e et dans l'es th e ti qu e, Travaux du Cercle Jinguist i qu e de Cop e nhagu e 5 호( 1949) 참조 .

실을 무색하게 한다. 그것은 러시아 형식주의, 더 정확히 말하면 오포야즈 O. PO. IAZ 52 의 노력을 더 근본적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그들은 문학의 문학적 본질에 대한 탐구에서 음운론적 심급과, 그 것이 지배하는 문학적 모델을 특권시했다. 특히 시에서 그러했다. 따라서 문학사나 문학 텍스트 일반의 구조에서 이 심급을 벗어나 는 것은 일정한 기술 유형을 필요로 할 가치가 있는데, 언리학이 아마 그 규범과 가능성 조건을 최상으로 도출시켰을 것이다. 아마 이렇게 해서 언리학은 문학 텍스트의 구조와 문학성의 문학적 생 성사에서, 특히 〈근대성〉이라는 개념에서 순전히 문자 표기적인 성 층을 연구하는 데 최상의 준비를 해온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새로운 영역이 독창적이면서 풍성한 연구들에 개방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표현 실체들의 평행성이나 거기서 찾은 동격이 아니다. 음성 실체가 그 특권을 잃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똑같은 실체들에 내맡겨지는 문자 표기 실체를 위해서가 아니다 . 해방적이며 반박할 수 없는 것이 있 다는 점에서 언리학은 통상적인 문자 언어 개념과 더불어 조작된 다. 아무리 독창적이고 환원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문자 표기 적 〈표현 실체〉와 상관적으로 연결된 〈표현 형식 〉 은 분명히 그 한 계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여기서 언급하는 원문자에 견주어서 매 우 종속적이며 파생적이다. 원문자는 문자 표기적 표현 형식과 실 체뿐만 아니라 비문자 표기적인 표현의 형식과 실체에서 작동할 것이다. 그것은 형식을 일체의 문자 표기 또는 다른 실체와 연결시 킬 뿐만 아니라 내용을 문자 표기이건 아니건 간에 표현에 연결시

키는 기호-함수 sig n -fu n cti on 운동을 구성하게 될 것이다. 이 주 제는 옐름슬레우의 체계화에서는 어떤 자리도 차지할 수 없었다. 차이 / 지연 d iffe rence 의 운동, 더는 환원될 수 없는 원종합 arch i­ s y n t hese 으로서, 유일하고 동일한 가능성에서 시간화, 상호 관계, 언어를 개방시키려는 원문자는 모든 언어 체계의 조건인 까닭에 언어 체계의 부분을 이룰 수 없으며, 그 영역 속에서는 하나의 대 상으로 자리 매김할 수 없었다(이것은 원문자가 다른 어떤 곳에서 ai1 1 eurs 실제 장소와 설정 가능한 또 다른 거점을 갖는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 개념은 어떤 점에서도 체계 자체의 과학적이며 실증적 이고 (옐름슬레우가 부여하는 의미의) 〈내재적인 〉 기술을 풍성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언어 체계의 환원될 수 없는 내재성에서 출발하지 않는 모든 비언어적 이론을 일거에 또 합법적으로 저버 렸듯이, 아마 언리학의 창시자는 그 필요성을 통박했을 것이다 . 2 6 ) 그는 이 개념에서 이론이 면제되어야 할 경험에 호소하는 것을 보 았을 것이다 . 27) 그는 문자라는 이름이 〈문자〉라고 사람들이 부른 것과 너무 다른 이 X 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 을것이다.

26) Omkri ng , 9 쪽 (Prole go mena( 영어본), 8 쪽). 27) 위의 책, 14 쪽. 이 점은 옐름슬레우가 그 기본 방향 원칙을 〈경험적 원 칙 〉 이라고 〈명명하는 모험을 무릅쓰는 것을〉 저지하지 못한다 (12 쪽, 영어 본, 11 쪽). 〈 그러나, 만약 인식론적 탐구가 이름이 부적합하다는 점을 보여 준다면, 우리는 그 이름을 포기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원칙의 지속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단순한 술어상의 문제 이다. 〉 그것은 체계를 기술하는 술어상의 계약주의가 보이는 한 예에 불과 하다. 그 체계는 그것이 거리를 두려고 하는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모든 개 념 (형식/실체, 내용/표현 동)을 차용하면서 몇 개의 의도를 담은 선언과 서문 또는 괄호로써 모든 역사적 의미를 중성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미 이 단어를 정당화하기 시작했고 원문자와 원문자가 해체하게끔 되어 있는 문자에 대한 통속적 개념 사이의 커뮤니케 이션 필요성을 정당화했다• 아래에서 우리는 계속 그렇게 할 것이

다. 경험이라는 개념은 대단히 당혹스러운 개념이다. 여기서 우리 가 사용하는 모든 개념처럼 경험이라는 개념은 형이상학의 역사에 속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말소된 형식 아래에서만 sous ratu r e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경험 〉 은 언제나 어떤 현전과 맺은 관계를 지칭하고, 그 관계는 의식이라는 형식을 취사 선택한다. 하지만 그 담론에 반드시 있기 마련인 일종의 왜곡과 긴장에 따라 그 최후의 밑바닥에서 해체를 통해 경험의 밑바닥에 도달하기 이전에, 또 경 험의 밑바닥에 도달하기 위해 경험 개념의 모든 자원을 캐내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경험주의〉와 동시에 경험에 대한 〈 소박한 〉 비판 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따라서 옐름슬레우가 말하는 〈이론이 그것에서 독립해야 하는〉 경험이란 경험의 전부가 아니다. 옐름슬레우가 말하는 경험 개념은 주변적이며, 엄밀하게 보자면 언 어학 밖에 존재하는 과학에서 일어나는 사실적이거나 주변적 경험 유형(역사적, 심리학적, 생리학적, 사회학적 등)에 해당한다. 원문자 와 같은 경험은 전혀 상황이 다르다. 경험의 내적 주변들 또는 자 연적 경험의 총체성을 괄호에 넣는 것은 초월적 경험 영역을 발견 해야 할 것이다. 초월적 경험이 집근 가능한 것은, 옐름슬레우가 그렇게 했듯이, 언어 체계의 특수성을 도출시키고 외래 과학들과 형이상학적 사변 일체를 알맹이에서 빼낸 후 체계 자체의 초월적 기원의 문제를 과학적 대상들의 체계로, 따라서 상관적으로 그것을 연구하는 이론적 체계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을 언리학이 원하는 객관적 〈연역적〉 체계로서 제기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 것이 없으면 그 대상과 〈대상들의 내재적 체계〉에 있는 독창성의 경건한 형식주의가 완결하는 결정적 진보는 과학주의적 객관주의, 죽 지각되지 않거나 고백되지 않은 또 다른 형이상학에 의해 습격 당한다. 이 점은 코펜하겐 학파의 저작에서 자주 인지되는 사실이 다. 우리는 이러한 소박한 객관주의에 다시 빠지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여기서 다론 곳에서는 의문시했던 초월성이라는 것을 참조할 작정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초월적 비판 안쪽에서 또 그 바깥쪽에서 존재한다. 바깥쪽 것이 안쪽 것으로 되돌아오지 않게 눙臣 것은 꼬이고 꼬인 매듭에서 어떤 행로p arcCurs 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노정은 텍스트 속에서 항적을 남기게끔 되어 있다. 그 결론들의 단순한 내용에 내맡긴 항적이 없이는 극근초월적 텍 스트 le tex te ul t ra- t ranscendan t al 는 선비 판적 텍 스트를 무시 하는 것과 유사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 유사 법칙을 형성시키고 그에 대해 심사 숙고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여러 개념들의 말소 또는 삭제 ra t ure 라 부르는 것은 앞으로 해야 할 심사 숙고의 여러 지점을 표시하게 될 것이다• 예컨대 초월적 원형의 arch i-t r a n-scendenta l e 가치는 그 자체가 말소 또는 삭제되기 이전에 그 필 요성을 절감하도록 해야 한다. 원흔적 arch i-t race 이라는 개념은 이 필요성에 부응하는 동시에 말소 또는 삭제에 부응해야만 한다. 실제로 그 개념은 동일률 논리와 모순되며 그 논리에서는 도저히 수용될 수 없다. 흔적은 단순히 근원의 사라짐이 아니다. 그 근원 은 여기서 (우리가 지지하는 담론에서, 또 우리가 추적하는 행로에 따라) 사라지지도 않았으며, 하나의 근원을 제외하고 한번도 근원 이 구성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혼적은 이렇게 해서 근원의 근원 이 된다• 그때부터, 현전 또는 본래의 비흔적으로부터 흔적을 파생 시키며 그것은 흔적을 일종의 경험적 지표로 만드는 고전적인 도 식에서 흔적 개념을 잘라내기 위해 근원적 흔적 또는 원형-흔적이 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개념이 그 이름을 파괴한다는 사실, 만약 모든 것이 흔적으로 시작한다면 근원적 흔적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28) 따라서 단순한 담론의 계기로서, 현상학 28) 기호 일반의 개념에 대한 이러한 비판에 대해(경험적이고/이거나 초월적 인). 우리는 다른 책에서 그 논증의 도식을 지적한 바 있다. Intr o ductio n

a L'orig ine de la 寧 me t ri e de Husserl, 1962, 60 쪽.

적 환원과 후설 스타일의 지시체를 초월적 경험으로 위치시켜야 한 다. 경험 일반이라는 개념(특히 후설의 초월적 경험 개념)이 현전이 라는 주제에 의해 통제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흔적의 환원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현재 lebendig e Ge g enwar t는 우리가 후설에게 귀결시키는 초월적 경험에 해당하는 보편적이며 절대적 인 형식이다. 시간화 운동을 기술하는 데 있어 이 형식의 단순성과 지배에 저촉되지 않는 것은 모두 초월적 현상학의 형이상학에 대 한 귀속을 알려주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소거 또는 삭제의 힘 과 복합되어야 한다. 실제로 후설이 기술하고 있는 바 그대로 본래 의 시간화와 타자가 벌이는 관계 운동에서는 비현전화(또는 탈현전 화)는 현전화만큼이나 〈근원적〉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흔적이 란 사고는 초월적 현상학과 관계를 끊을 수 없을 뿐더러 그것으로 환 원될 수도 없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선택이란 술어로 문제를 제기하고, 〈예〉 또는 〈아니오〉란 말로 답변해야 하거나 그 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초월적 형이상학에 대한) 귀속을 충성으로 또는 비귀속을 솔직한 말투로 수긍하는 것 등은 각각 다 른 높이, 여정, 스타일 등을 혼동하는 것이다. 원형의 해체는 선별 작업 에 착수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원흔적 개념을 통과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한다• 어떻게 해서 이 필요성이 언어 체계 안쪽으로부터 우리를 이끌어 들이는가? 무엇 때문에 소쉬르에서 옐름슬레우까지 이르는 여정에 서 근원적 혼적의 윤곽을 파악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일까? 형식에 의한 통과가 자취 emp rei n t e 에 의한 통과가 된다는 점에 서 그렇다. 만약 이 두 가지 통과의 통일성이 우리에게 좀더 분명 하게 나타난다면, 차이/지연 일반의 의미는 더욱더 우리에게 접근 가능할 것이다. 이 두 경우 모두 음성 실체를 중성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첫째, 음성 요소, 술어 항목, 감각적이라고 부르는 충만함 등은 그들에게 형식을 부여하는 차이 또는 대립 없이는 있는 그대로 나 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음성 실체의 환원과 같이 차이에 호소하 는 가장 명백한 효력이다. 하지만 여기서 차이의 외관과 그 직능은 어떤 절대적 단순성도 앞서지 않는 근원적 종합을 전제한다. 그것 이 바로 근원적 흔적일 것이다. 시간적 경험의 최소 단위 속의 과거 파지 rete n ti on 없이는, 죽 동일자에서 타자처럼 타자를 파지하는 혼적 없이는 어떤 차이도 시행할 수 없고 어떤 의미도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관건은 구성된 차이가 아니라 일체의 내용 규정에 앞서 차이를 생산하는 순수한 운동이 문제인 것이다. (순수한) 흔적은 차이/지연이다. 흔적은 어떠한 청각적, 시각적, 음 성적, 문자 표기적인 감각적 충만함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반대로 조건 자체이다. 비록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 체의 충만함 밖에 있는 현전하는 존재자 e t an t-p resen t가 아니라 할 지라도, 그 가능성은 기호(시니피앙/시니피에, 내용/표현 등), 신경적 이거나 감각적인 개념 또는 조작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앞서 존재한 다. 따라서 이 차이/지연은 지성적으로 파악될 수 없을 뿐더러 감각 적으로도 파악이 안 되며, 동일한 추상적 차원(가령, 음성적 문자 표 기적 · 텍스트) 내부에서 기호 사이의 분절을 허용한다. 그것은 (일상 적 의미에서)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분절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 은 마치 감각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표현과 내용의 형이상학적 대립의 토대를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약 이미 언어가 이런 의미의 에크리튀르가 아니라면 어떤 파생된 〈표 기〉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고,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관계에서 나 오는 전형적인 문제도 발생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의미 작용에 대 한 실증 과학들 s ci ences 은 차이/지 연의 작품 reuvre, 차이/지 연의

사살 규정된 차이들과 그 차이들이 일어나는 규정된 현전들을 기술 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조작에서는 차이/지연 자체의 과학도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현전 자체의 근원, 즉 일정한 비근원도 있을 수없다. 따라서 차이/지연은 형식의 형성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차 이/지연은 자취의 각인된 존재이다. 알다시피 소쉬르는 〈청각 영 상〉과 객관적 소리 (『일반 언어학 강의』, 98 쪽)를 구분한다. 이를 통 해 소쉬르가 언어 과학을 정립하려 할 때, 현상학적 의미에서 음향 학과 생리 과학 등을 환원시킬 권리를 부여받는다. 청각 영상온 겉 으로 나타나는 소리의 외관 구조이다• 그것은 소쉬르가 시니피앙 Si gnifi an t이라고 부르는 청각 영상이며, 시니피에 Si gn ifi e 라는 이 름은 물론 사물(사물은 언어 행위와 언어의 관념성으로 환원된다)이 아니라 〈개념〉에 연결된다. 그런데 이 개념은 불행한 것 같다. 요 컨대 시니피에는 의미의 관념성에 해당한다. 〈총체를 지칭하기 위 해 기호 Si gn e 란 낱말을 간직하고, 개념과 청각 영상은 각각 시니피 에와 시니피앙으로 대체시킬 것을 제안한다.〉 청각 영상이란 들린 것 ]'en t endu 이다. 죽 들린 소리가 아니라 소리의 들린 존재이다. 들린 존재는 구조적으로 현상학적이며, 세계 속에서 들리는 실제 소리와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차원에 속한다. 이같이 섬세하지만 절 대적으로 결정적인 이질성은 현상학적 환원만이 잘라낼 수 있을 것이다. 현상학적 환원은 들린 존재를 분석하는 데 필수 불가결하 며, 언어학, 정신 분석학 또는 다른 관심들로부터 영감을 받는다. 그런데 〈청각 영상〉, 소리의 구조화된 나타남, 차이/지연에 의해 체험되고 정보화된 〈감각적 물질〉, 모든 세계 현실과 구별되는, 후 설이 힐레 h yl e/ 모르페 morp he 구조라고 명명한 것 53 이 모든 것을 소쉬르는 〈심리적 영상〉이라고 명명한다. 〈이것〔청각 영상]은 물질 적 소리가 아니다. 죽 순전히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소리

의 심리적 흔적이며, 우리 감각이 증거로 하는 표상이다. 그것은 감각적이다 . 우리가 ‘물질적'이라고 부론 이유는 단지 이런 의미이 며, 이는 감각과 대립되는 좀더 추상적인 개념과 대립된다.〉(위의 책, 98 쪽) 비록 〈심리적 〉 이란 단어가, 그 주체에 현상학적 단서를 두는 것을 제외하고는 적합한 단어가 아닐지라도, 일정 지점의 독 창성을 잘드러낸다. 그 점을 분명히 하기 전에 주목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여기 서 문제의 핵심이 야콥슨과 다른 언어학자들이 〈정신주의적 관 점 판 이라는 제목 아래 호되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 실이다. 보두엥 드 쿠르티네 Baudouin de Cour t ena y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개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개념에 따르면, 음소는 상상된 소리 또는 내 포적 소리이며 실제로 방출된 소리와 대립한다. 이는 마치 〈심리 음성 학적 〉 현상이 〈생리 음성학적〉 사실과 대립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내 성화된 소리의 심리적 동등 가치이다 . 2 9 ) 29) 앞의 책, 111 쪽 옐름슬레우도 같은 유보 사항들을 표명한다. 〈홍미로운 것은, 오랫동안 일체의 ‘심리주의'적 빛깔을 경계했던 언어학이 (일정 정도, 그리고 그 명제들이 제대로 간수된다면) 소쉬르의 ‘ 청각 영상'이라는 말과 아울러 ‘개념' 자체로 되돌아오는 것 같다. 단 이 단어를 , 우리가 방금 전 에 설명한 원칙과 엄격하게 일치하여 해석하고 또한 (신중해야 할 유보 조 건들이 있는데도) 기호의 양쪽에서 ‘완전히 심리적인 현상 '(Cl g., 28 쪽)에 직면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조건에서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인 유 사 관계보다는 사전 목록체의 부분적인 일치이다. 소쉬르가 도입한 술어와 『 일반 언어학 강의 』 속에서 한 해석들은 애매 모호하기 때문에 포기되었으 며. 그 오류를 다시 범하지 않는 것이 문제의 관건이다. 더구나 우리는 우 리 나름대로, 이제까지 우리가 권장한 연구들이 어떤 점에서 심리적인 차 원에 속하는 것으로 고려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망설인다. 그 이 유는 심리학이라는 학문 분야의 분명한 정의가 아직도 요원하기 때문이다 (La str a ti fica ti on du lang a ge ( l95 4), Essais Jinguist i qu es, 56 쪽). Lang ue et p arole(I943) 에서 옐름슬레우는 같은 문제를 재기하면서. 제

내바의 대가(소쉬르)가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자만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수많은 뉘앙스'들을 상기시켰다. 이 같은 태도를 규정할 수 있었던 동기들은 물론 우리들이 해명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76 쪽)

이렇게(죽 상상에 대한 선 - 현상학적 심리학에 따라) 정의된 〈 심리 적 영상 〉 이란 개념이 정신주의적 느낌을 준다고 하더라도 다음 사 실을 분명히 한다는 조건에서 야콥슨의 비판에 맞서 그 것 을 방어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내적 언어가 구상적 confi gu rati fs 반복 적 자질들을 배제하고 변별적 자질들로 환원된디는· 사실 〉 을 확 언 할 필요 없이 그 개념을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심리적이란 말이 배타적으로 내적이면서 비외재적인 또 다른 자연적 현실을 지 칭한다면, 심리적이란 형용사를 방어하지 않는다. 여기서 후설의 교정을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이며, 이는 토론의 기본 전제까지 변 형시킨다. 체험한 것의 현실적 reell et non rea] 성분인 힐레 hy le / 모르페 morph e 구조는 현실 Real it a t이 아니다. 지 향적 대상, 예 컨 대 이미지의 내용에 관한 한, 그것은 현실적으로 r eell 세계에도 속 하지 않고 체험한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체험한 것의 비-현 실적 성분이다. 소쉬르가 말하는 심리 영상은 외적 현실을 복사하 는 내적 현실이 아니다. 『관념 ]dee I .JJ 에서 〈 자화상 〉 개념을 비판 한 후설은 『 위기 Kii s i s 』 (63 쪽 이하)에서 현상학이 〈내적 경험 〉 과 〈외적 경험〉의 자연주의적 대립을 어떤 식으로 넘어서야 하는가를 보여주며, 심리학과 인간 과학이 그러한 대립을 체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바깥으로 나타나는 소리 le son a pp ara i ssan t와 소리의 나타남l' a pp ar ait re du son 의 구분을 살리는 것은 혼동 중에서도 최악의 혼동인 동시에 가장 통상적인 혼동을 회피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일이다• 그리고 원칙상 〈불변함을 내적 경험에, 변함을 외적 경험에 할애하면서, 이 양자의 상충을 극복하지〉 않고 도 얼마든지 그것이 가능하다(야콥슨, 앞의 책, 112 쪽). 불변성과

변화의 차이는 그 둘의 영역을 구분짓지 않고 자체 안에 그 둘을 공유한다. 이 점은 소리 p hone 의 본질이 직접 읽힐 수 없음을 지적 하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현실적 과학 텍스트와 심리-생리_음성 학적 텍스트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주의 사항울 전제한 다음, 자취와 흔적이 특수한 부문에 서 세계 속에 있지 않고, 〈또 다른 세계〉에도 없는, 소리도 빛도 없는, 시간 안에도 공간 안에도 없는 체험한 것의 시간화에서 차이 는 요소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그것을 생산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 로 드러내고, 텍스트 t ex t es 를 구성한다. 이러한 연결망과 체계들은 혼적 또는 자취의 망 속에서만 그릴 수 있을 뿐이다. 나타나는 것 과 나타남의 놀라운i nou i e 차이(즉 〈세계〉과 〈체험〉의 차이)는 다 른 모든 차이와 흔적들의 조건인 동시에 이미 하나의 흔적이기도 하다. 또 이 후자의 개념은 절대적으로 앙그라메 en gr arnrne55 의 본 질에 대한 생리학적 문제틀 또는 그 흔적을 파악해야 할 절대적 현 전의 의미에 대한 형이상학적 문제틀에 〈선행〉한다. 흔적은 실제로 의미 일반의 절대적 근원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의미 일반의 절대적 근원이 없음을 뜻한다 혼적은 나타남과 의미 작용을 여는 차이/지 연이다. 흔적은 살아 있지 않는 것 일반에 대해서 모든 반복의 근 원이며 관념성의 근원인 살아 있는 것을 분절시키면서 현실적인 것도 관념적인 것도 아니며, 감각적인 것도 관념적인 것도 아니고, 불투명한 에너지도 투명한 의미 작용도 아니다. 어떤 형이상학의 개념도 흔적을 기술할 수 없다. 결고陸!으로 흔적은 여러 감수성 분 야들의 구분은 물론 빛과 소리보다도 선행한다. 그렇다면 청각 자 취와 시각(그래픽) 자취 사이의 〈자연적〉 서열을 정립하는 데 의미 가 있을까? 시각 영상은 보이지 않고 청각 영상은 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목소리의 충만한 단위들 사이에 있는 이제까지 생각지 못 한 것이다. 표기체에 있는 차이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틈과 이음새 La brisu re 생각건대 귀하는 차이와 분절을 지칭하기 위해 적 당한 단어를 찾기를 꿈꿨울 것입니다. 우연히 『 로 베르 불어 사전 』 을 들춰보니 제가 그 단어로 놀이 롤 하거나 이중적 의미를 가리키려 한다면, 그 단 어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서짐이란 단어입니다. 〈부서지고 깨진 부분. 깨진 조각, 마 멸 튬 파편 등 참조. 이은 자라 목수업이나 열쇠 술 등에 의해 두 부분의 경계가 분절되는 것.〉 —로제 라포르트, 『 서간 』 공간과 시간 경험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차이의 에크 리튀르이자 흔적의 직물은 공간과 시간의 차이가 그것을 분절하면 서 (고유한 〈동일한〉 몸이 겪는 〈동일한〉 체험의) 경험이라는 통일 성 속에서 있는 그대로 나타남을 허용한다. 따라서 이러한 분석은 (〈시각적〉 또는 〈촉각적〉 또는 〈공간적인〉) 표기 연쇄체가 경우에 따라서는 직선적으로 하나의 발화 (〈음성적〉, 〈시각적〉) 연쇄체에 적합하게 함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일차적인 분절 가능성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차이는 분절이다. 바로 이 점이 소쉬르가 『일반 언어학 강의』 r 서론」 6 장에서 한 말과 모순되는 내용이다. 따라서 언어 활동의 문제에서 음성 기관의 문제는 부차적이다. 이른 바 분절 언어J an ga ge artic u lec l-부 르는 것에 대한 모종의 정의가 이 생각을 입증한다. 라틴어로 artic u lusc 〈지체(股體), 부분, 사물의 세 분화〉를 의미한다. 언어 활동에서 분절은, 구두 언어의 연쇄를 음절로

세분한 것을 가리킬 수도 있고 의미 작용 둥의 연쇄를 의미 작용적 단 위로 세분한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이 두번째 정의에 따르면, 인간에 게 자연적인 것은 음성 기관에 의한 구두 언어 Jan ga ge pa rl0~ 아니라 언어 체계, 죽 구별되는 관념들에 해당하는 구별되는 기호들의 체계를 구성하는 능력이라 할 것이다.(『일반 언어학 강의』, 26 쪽. 강조는 필자 의 것임) 따라서 〈심적 흔적〉이라는 개념은 본질적으로 분절화란 개념과 통한다. 겉으로 나타나는 감각적 인 것 le sensib l e a pp ara i ssan t과 체험된 나타남 son app a rai tre vecu( 심적 혼적) 사이의 차이 없이는 시간화에 의한 종합은 의미 작용 연쇄체에서 차이들이 나타나는 것 을 가능하게 하면서 그 활동을 진행할 수 없을 것이다. 〈흔적〉이 더 이상 환원될 수 없다는 말은 음성 언어가 근원적으로 수동적임을 의 미하며, 이때 수동성의 의미는 어떠한 세계 내적 int r a -rnonda ine 은유도 왜곡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수동성온 과거, 늘-이미-있는 것 un t o 띠 ours-dej a-la 과 맺은 관계이며, 어떠한 근 원의 재활성화도 충만하게 통제할 수 없고 그 현전에서 잠 깨울 수 없을 것이다. 근원적 현전의 명증성 앞에 절대적으로 그 생명력을 다시 불어넣을 수 없다는 불가능성은 우리들을 절대적 과거로 귀결 시킨다. 그것은 현전하는 것의 단순성으로 요약될 수 없는 것을 흔 적이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한다. 물론 어떤 이는 시간화라는 더 이 상 분해할 수 없는 종합에서는 미 래 파지 p ro t en ti on 가 과거 파지 만 큼 필수 불가결하다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두 가지 차원은 서로 부합되는 것이 아니라 기묘한 방식으로 서로 연루되어 있다. 미래 파지에서 예시되는 것은, 흔적에서 기억되는 것이 그런 것만큼, 자신의 정체성으로부터 현재를 잘라놓는다. 그러나 예기(豫期 an ti c ip a ti on) 를 특권화하면, 언제나-이미-거기의 비환원성과 시간

이라 부르는 기본적 수동성을 지워버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 흔적이 절대적 과거에 귀결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현재­ 과거로 이해될 수 없는 과거를 변형된 현전의 형식으로 생각하게 할 것이다. 그런데 과거가 언제나 현전하는 과거를 의미했듯이, 엄밀하 게 보자면 혼적 속에 기억되는 절대적 과거는 〈 과거 〉 라는 이름에 걸 맞지 않는다. 흔적의 신기한 운동이 그러하듯이 삭제해야 할 또 다 론 이름은 다음 사실을 상기시키고 알려준다 . 차이/지연은 지연된 다. 똑같은 신중함과 동일한 삭제 또는 말소 아래에서 그 수동성은 〈미래〉와 맺은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과거, 미래 등의 개념과 시간과 역사라는 개념에서 고전적 명중성(일반적으로 시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을 가정하는· 모든 것은 흔적의 구조를 적합하 게 기술할 수 없다. 그리고 현전이라는 단순성을 해체한다는 것은 단순히 잠재적 현전의 지평, 게다가 현재를 둘러싸기보다는 그 심장 부에 위치한 미래 파지와 과거 파지의 〈변증법 〉 적 지평을 참작하는 것뿐만은 아니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시간 구조의 기본적 동질성 과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가령, 지나간 현재와 미래의 현재가 본래 시 간 구조를 분화시키면서 살아 있는 현재의 형식을 구성한다는 점을 보 이면서) 시간 구조를 복잡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복잡화 는. 후설처럼 과감하게 현상학적 환원을 행했는데도, 직선적이며 객 관적이고 속세적인 모델의 현전에 집착한다• B 라는 지금은 A 라는 지금의 과거 파지이며 C 라는 지금의 미래 파지에 의해 있는 그대로 구성된다. 놀이가 계속되는데도, 이 세 가지 지금이 각각 자체에서 이러한 구조를 재생산한다는 시실에서 이 계속성의 모델은 X 라는 지금이 A 라는 지금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금지하고, 아울러 의식 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지체 효과에 의해 하나의 경험이 그 현재 자체에서 하나의 현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금지한다. 그런데 그때 의 현재란 의식에 직접 선행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것에 충분히 〈선

행하는 〉 것이다. 이는 프로이토가 언급하는 지체 nach t ra gli ch 의 효 과 문제이다• 그 문제가 귀결되는 시간성이란 의식 또는 현전의 현 상학으로 유도되며 여기서 문제가 되는 모든 것을 여전히 시간, 지 금, 선행적 현재, 지각 등으로 부를 수 있는 권리를 반박할 수 있다 는것이다. 이 엄청난 문제는 최대한의 형식성 속에서 다음과 같이 언술될 수 있을 것이다. 초월적이며 기능·한 한 〈변증법적인〉 현상학에 의 해 기술되는 시간성은, 이를테면 무의식적 시간 구조들이 변형시킬 지반인가? 아니면 현상학적 모델 자체가 언어 , 논리, 명증성, 기본 적 안전 등으로 짜인 틀로 자신의 연쇄체가 아닌 연쇄체에서 구성 되는가? 또한 그 점이 가장 첨예한 어려움인데, 그것에는 전혀 속 세적 요소가 없는가? 왜냐하면 우주적 시간에 대한 내적 의식을 초점으로 하는 초월적 현상학은 의식과 심지어 내적 의식으로서 세계 시간과 공조적 시간을 체험해야 한다. 의식, (내적 또는 외적) 지각, 〈 세계 〉 사이의 단절은 환원이라고 하는 미묘한 형태조차도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놀랄 만한 의미에서, 형이상학이 일반적으로 감수성이라 고 부르는 이러한 수동성에 뿌리 박은 채, 음성 언어는 세계 속에 존재한다. 여기서는 비유법에 대립할 비은유적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하므로, 베르그송이 그러기를 원했던 것처럼, 적대적 비유들을 증식시켜야 한다. 〈감각화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바이런 Ma i ne de B i ran 이 약간 다른 의도로 모음적 소리라 부른 것이다. 로고스는 무엇보다 자취이고, 이 자취가 언어의 각인된 흔적이라는 것은 로 고스는 창조적 행위가 아니며 신성한 음성 언어의 연속적이고 충 만한 요소도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충만함으로 돌아 가기〉, 〈신의 죽음〉 따위의 새로운 동기만을 고수하는 한, 한 발자 국도 형이상학을 벗어났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개념

성과 문제틀을 해체시켜야 할 것이다. 그것들은 여전히 지신들이 통박하는 존재론_신학에 귀속된다. 차이/지연은 충만함과는 다른 것이다. 소쉬르에 따르면, 파롤의 수동성은 먼저 랑그와 맺은 관계에서 나타난다. 수동성과 차이의 관계는 (랑그에 뿌리박은) 언어의 기본 적 무의식과 의미 작용의 기원을 구성하는 (휴지부, 공백, 구두법, 일반적 간격 등인) 공간화 사이의 관계와 구분되지 않는다. 이런 이 유로 해서 〈언어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일반 언어학 강의』, 169 쪽) 역설적으로 말해, 파롤 행위는 랑그에서 추출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랑그가 형식이라면, 그 이유는 〈거기에 는 차이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위의 책, 166 쪽) 공간화(이 단어 는 공간과 시간의 분절을, 시간의 생성 시간(또 공간과 공간의 생성 시간) 등을 의미한다)는 언제나 비지각된 것, 비현재적인 것, 비의 식적인 것이댜 있는 그대로, 죽 비현상학적 방식으로 이 표현을 사용하자면(왜냐하면 우리는 여기서 현상학의 경계를 넘어서기 때문 이다) 공간화로서의 원문자는 현전에 대한 현상학적 경험에서 있는 그대로 주어질 수 없다. 원문자는 살아 있는 지금 현재에서, 일체 의 현전에 대한 형식 일반에서 죽은 시간을 표시한다. 죽은 시간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원문자가 시간에서 모든 담론 적 근원을 차용할 수 있지만 흔적에 대한 사상온 결코 문자에 대 한 현상학과 혼동될 수 없다. 기호 일반의 현상학으로서, 문자 언 어의 현상학은 불가능하다. 어떠한 직관도 〈실제로 ‘공백'이 중요 성을 띠는〉 곳에서는 완수될 수 없다(말라르메, Coup de des 서 문). 이 점에서 우리는 왜 프로이트가 꿈이 언어보다는 ' 문자와 비교 될 만하며, 또 음성 문자보다는 상형 문자에 견줄 만한 것이라고 파악했는지 더 잘 이해하게 된다 .30) 그런 이유에서 소쉬르는 랑그

30)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프로이트에 대한 책 읽기를 시도했다 (Freud et la scene de l'ec ritu re , L'ecritu re et la dif fere nce) . 그것은 흔적 개념 과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시한(時限, a-re t ardemen t)의 구조 사이에서 일 어나는 소통을 명중하게 밝혀주었다.

가 〈언어 주체의 기능이 아니라〉(위의 책, 30 쪽)고 말했다. 현전 또는 의식적인 주관성의 형이상학에 대한 단순한 전복이나 뒤집기 renversements 차원을 넘어서서 이 두 사람의 공모 유무에 상관 없이 그러한 명제들의 뜻을 새겨야만 할 것이다. 그것을 어떤 의미 로 새기건, 구성 요소나 차단 요소로서 에크리튀르는 주체와 다른 것이다 . 그것은 주체라는 범주에서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 을 변경시키거나 의식과 무의식에서 그것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 로는 에크리튀르가 그 역사의 선을 따라 우연적 사건들에서는 도 저히 파악할 수 없는 현전의 실체성 또는 자기 현전에서 고유의 정체성으로 귀결될 수 없다. 또한 주지하다시피 이 역사의 선은 형 이상학의 주변부 경계선에서 이어지지 않는다. X 를 주체로서 결정 한다는 것은 결코 순수 계약에 의한 조작이 아니며, 에크리뒤르에 관한 한 무관심한 제스처가 아니다. 공간화는 에크리튀르로서 주체의 생성_부재 deven ir- absen t이며 생성-무의식 deven i r- i nconsc i en t이다. 그것의 파생 운동으로 도래 하는 기호는 반대 급부로 현전이라는 욕망을 구성한다. 이 생성(또 는 파생)은 그것을 선택하거나 수동적으로 이끌려 가는 주체에 도 래하지는 않는다. 생성은 그 죽음과 주체의 관련으로서 주체성의 성립 자체이다. 생명의 모든 조직화 수준에서, 죽 죽음의 경제 J'ec onom ie de la mar t에 속한 모든 수준에서말이다. 모든 시각 문 자 g ra p heme 에 는 유언적 본질 essence t es t amen t a i re 이 있다 .31)

31) 이 주제가 침투하는 것은 신화 체계 이상의 것이다. 수없이 많은 예 중 『페드로 』 에서 상기된 이집트 문자의 신, 기술적 방편의 창안자이자 헤르메 스 Hermes 와 유사한 신인 토트 Tho t는 장례식에서 본질적 기능을 행사한 다. 그는 기회가 오면 죽은 자들을 이끈다. 그는 최후의 심판 이전에 그들

에 대한 보고서를 글로 새긴다. 또 그는 왕, 아버지, 태양 그들의 눈의 최 초 자리를 찬탈했던 대리 서기의 역할을 맡는다. 가령, 〈일반적으로, 호루 스 Horus 의 눈은 달의 눈이 되었다. 달은 천체 체계에 관련되는 모든 것이 그랬듯이, 이집트인들의 호기심을 수없이 자극했다. 한 전설에 따르자면, 태양신이 밤에 그를 대신하기 위해 달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레 R5 가 이 같은 고차원의 대리 직능을 실행하기 위해 지명한 것은 토트였다 . 호루스 와 세트 Se t h 를 주인공으로 하는 또 다른 신화는 달의 차고 이지러짐을 정 기적인 싸움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싸움이 일어나는 동안 세트는 호루스의 눈을 제거했고, 끝내 패배한 세트는 호루스에게 빼앗은 눈을 되돌려주어야 했다. 다른 판본에 의하면, 눈은 저절로 다시 돌아오거나 토트가 가져다 주 었다고 한다. 어쨌든, 호루스는 기쁨에 젖어 눈을 다시 찾고, 그것을 정화 한 다음 제자리에 놓는다. 이집트인들은 이 눈을 ou di a t(건강 상태가 좋은 사람)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눈이 장례 종교, 오시리의 전설, 봉납 의식 속 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전설은 나중에 태 양의 보완물을 갖게 되었다. 세계의 주인은 세계의 기원에서, 알지 못할 이 유로 눈이 제거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슈 Shou 와 테프누트 Te fn ou t에게 잃 어버린 눈을 가져다 주는 일을 시킨다. 이 두 사신이 너무 오랫동안 부재 해 레는 불충실한 자를 대체시켜야만 했다. 마침내 슈와 테프누트가 눈을 가져왔을 때, 눈은 다른 것이 자기 자리를 차지한 것을 보며 분노하기 시 작한다. 레는 눈을 위안하기 위해 사형 문자(蛇形文字)로 변형시키고, 그것 을 권능의 상징으로서 이마 위에 갖다 놓는다. 또 그는 적에 맞서 권능을 방어하는 임무를 눈에게 맡긴다.〉 눈은 눈물을 쏟고 remy t 그 눈물로부터 사다(람J들 ac이 qu e태s 어V난an다d iee mr ,e tL. a인 r간el의ig io신n 화e적 기원은 간단한 말 장난에 근거한 gyptien ne, PUF, 39-40 쪽) . 이 대 리 신화를 루소에 나오는 눈의 역사와 접맥시킬 수 있을 것이다(『인간 언 어 기원론.!I, 212 쪽 참조).

그리고 문자 주체 본래의 부재는 사물 또는 지시체의 부재이기도 하다. 공간화의 수평성에서 그것은 이제까지 우리가 언급한 것과 다르 지 않으며 심층에 대한 표층으로써 대립되지 않는다. 공간화는 무 의식 속에서 절단되고, 그곳에 떨어지며, 그곳에 떨어뜨리게 한다 고 말할 수조차 없다. 무의식이란 이러한 조작과 중간 휴지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의미 작용은 이렇듯 차이(나타나지 않는 것의 바 연속성과 은밀함), 우회, 유보 등의 텅 빈 구덩이에서만 형성될 뿐

이댜 에크리튀르로서의 언어의 톰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비연 속성은 어떤 순간 언어학에서 연속주의적 편견과 맞부딪칠 수 있었 다. 그 편견을 포기하면 음운론은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 사이의 일체의 근본적 구분을 포기해야 한다. 또한 그 자체, 죽 음운론이 아니라 음운론주의도 포기해야만 한다. 이 점에서 야콥슨이 인식한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물리적으로 연속적인 구두 언어의 흐름은 그 기원에서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엄청나게 더 복잡한 Shannon et Weaver> 상 황으로 몰고 갔 지만, 문자 언어가 나타냈던 이산적인 d i scre t 요소들로 된 한정된 적 합성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언어 분석은 구두 언어를 일련의 기초적 정보들의 계열화로 해결하는 데 이르렀다. 이러한 이산적이며 뉵적인 소위 〈변별적 자질들〉은 음소라고 불리는 동시에 〈다발〉로 묶이는데, 음소란 그 나름으로 순열을 형성하기 위해 연쇄체를 구성한 다. 따라서 이렇듯 언어 속에서 형식은 분명히 알맹이로 이루어진 구 조를 갖추며 일종의 양자적( 量 子的) 기술을 가능하게 한다 .32 ) 톰 br i sure 은 하나의 기호, 하나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단위 가 현재와 절대적 현전의 충만함 속에서는 생산될 수 없음을 나타 낸다. 이런 이유로 정신 분석에 의해 또는 정신 분석에 반대해 그 것을 다시 복구하려는 충만한 음성 언어는 있을 수 없다. 진리라고 불리는 충만한 음성 언어의 의미를 환원시키거나 복구하려는 것을 꿈꾸기 전에 차이 속에서 의미와 그 근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흔적의 문제틀이다. 왜 흔적인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 단어를 선택하게끔 했는 가?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질 32) Lin g uist i qu e et the ori e de la communic a ti on , 앞의 책, 87-88 쪽.

문은 있는 그대로이고 답변의 본질도 있는 그대로이며 이 두 장소는 지속적으로 옮겨다녀야 한다. 만약 낱말과 개념들이 차이의 연쇄체 에서만 의미가 있다면, 그 언어와 술어의 선택은 하나의 논점과 역사 적 전략 내부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정당화는 결코 절대적이거나 규정적일 수 없다. 그것은 상황에 부응하며 역사적 계산을 반영한다. 이렇듯, 우리가 이미 정의한 것 이외에, 그 시대의 담론에 속하는 일 정한 자료들이 우리에게 이러한 선택을 부과했다• 흔적이란 낱말은 자체가 일정 한 수의 동시 대 담론 dis c ours con t em p ora i ns 을 참조할 것이며, 그 담론들의 힘에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담론 전 부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담론들과 더불어 흔적이란 낱 말은 우리에게 가장 확실하게 보이며 그 담론들의 효율성을 입증한 전개 발전들을 절약할 수 있게 해주는 소통 가능성을 마련한다. 이렇 게 해서, 우리는 이러한 흔적 개념을 레비나스 저작과 존재론 비판의 중앙에 있는 흔적 개념과 집맥시킨다 .33) 그것은 결코 현전의 근원적 형식 또는 변형된 형식 속에 없으며, 또 그 속에서는 체험될 수 없는 과거의 변질성과 맺은 관계처럼 3 인칭성 i lle i括과 맺은 관계이다. 레 비나스의 사상이 아니라 하이데거의 의도에 부여된 이 개념은, 때때 로 하이데거 담론을 넘어서 가장 내적인 흐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현전으로, 또 언어의 의미를 음성 언어의 충만한 연속성으로 규정한 존재론을 뒤흔들어놓음을 의미한다. 근접성, 직접성, 현전(현전의 가 까운 것, 고유한 것, 먼저 있는 것) 등의 이름 아래 이해한다고 믿는 것을 수수께끼처럼 만드는 것이 바로 최후의 의도이다. 이러한 현전 의 해체는 의식의 해체, 죽 흔적의 비환원적 개념으로 통하거니와 프 로이트의 담론처럼 니체의 담론에서도 나타나는 바 그대로이다. 끝 33) 특히 E. Lev ina s, La tra ce de l'au tr e , Tjjds chrift voor filos ofi e (1963 년 9 월호)와 필자의 시론인 Vi ol ence et meta p h y si q u e. sur la p e 函 e d'E. Lev ina s, L'ecrit ur e et la differe nce 참조.

으로 모든 과학의 장, 특히 생리학의 장에서 이 개념은 오늘날 주도 적이며, 환원될 수 없는 궁극적 개념이다. 자연과 문화, 동물성과 인간성 등의 대립 이전에 생각해야 할 〈기 억 〉 의 원_현상인 흔적이 의미 작용의 운동 자체에 속한다면, 그것을 기록하건 안하건 의미 작용은 선험적으로 〈외부〉라고 부르는 〈감각 적 〉 〈 공간적 〉 인 요소 내에서 특정 양식으로 씌어진다. 곧이어 구두 언어, 엄밀한 의미의 〈시각 문자〉의 일차적인 가~칸k 이며 플라톤에 서 소쉬르에 이르기까지 줄곧 비난해 온 〈찬탈〉의 탄생지라고 할 수 있는 원문자인 이러한 흔적은 제일차적 의재성 일반의 개방이며 살 아 있는 것과 그 타자, 안쪽과 바깥쪽의 수수께끼 같은 관계이다. 죽 그것은 공간화이다.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친숙한 것으로, 또 친숙성 그 자체로 믿는, 〈 공간적〉 〈객관적〉 외재성이라고 하는 바깥쪽은 철 자 , 시간화로서 작용하는 차이, 현재의 의미에서 기록된 현전의 비현 전, 살아 있는 현재의 구체적 구조로서 죽음과 맺은 관련 등이 없다 면 겉으로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비유는 금지될 것이다. 그 애매 모호함이라고 부르기보다는 그 놀이(왜냐하면 논리에 어긋나더라도 〈 애매 모호함〉이라는 말은 여전히 현전의 논리를 요청하기 때문이다)라 고 불러야 할, 흔적의 현전그수재에는 문자와 정신, 육체와 영혼, 또 우리가 일차적 닮은꼴 a ffi n ite이라고 상기시킨 모든 문제가 있다. 모 든 이원론, 영혼 또는 정신의 불변 이론, 영적 또는 물질적 일원론, 변증법적 또는 통속적 일원론 등은 특정 형이상학의 유일 무이한 테 마로서 그 역사는 혼적의 환원으로 진행되어야 했다. 존재의 시원론 적 (始源論的, archeolog iqu e), 종말론적 의미를 현전, 그리스도의 재림 , 차이 없는 생명 등으로 결정짓는 존재-신학은 쿠 T 人쿠 요약 되는 충만한 현전에 대한 흔적의 종속, 그 충만함을 꿈꾸는 음성 언 어보다 열등한 것으로 문자 언어의 위상 낮추기 등을 요청한다. 그것 은 신이란 이름의 죽음을 경외시하는,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인 환유적

역사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 운동이 플라톤 원리의 형식에서 그 시대를 연다면, 그것은 무한대적 형이상학의 순간에 완수된다. 오 직 무한한 존재만이 차이룰 현전으로 환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이란 이름은, 최소한 고전적 합리주의에서 표현되는 바 로는, 초연함 그 자체의 이름이다. 오직 실증적 무한대만이 흔적을 제거하고 그것을 승화할 수 있다(최근 우리는 헤겔의 Au fh ebun g-을 승화 sub li ma ti on 로 번역할 것을 제안했다. 이 번역은 번역으로서 그 것이 갖는 가치를 의미하며, 이러한 접목은 우리의 관심을 끈다). 따라 서 로고스의 충만함이 문제될 때 도처에서 작용하는 〈 신학적 편견 〉 을 언급해서는 안 된다. 흔적의 승화인 로고스는 신학적이다. 창조주 의자이건 아니건, 무한주의자들의 신학은 언제나 로고스 중심주의이 다 . 스피노자도 오성(또는 로고스)은 신성한 실체의 직접적 무한대 방식 이 라고 했다. 『 짧은 논문 Cour t Tra ite. 』 에서 스피노자는 로고스 를 영원한 아들이라고 불렀다• 헤겔과 더불어, 또 로고스를 지향하는 절대 개념의 신학과 더불어 〈완결되면서〉, 언어학이 신임한 무비판 적 개념 일체가 바로 이 시대에 귀속되는데, 최소한 언어학이 (더욱 이 어떻게 과학이 그것을 회피할 수 있겠는가?) 〈랑그의 내적 체계 〉 의 윤곽을 드러내는 소쉬르의 칙령을 확증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개념들은 정확히 문자 언어의 배제를 가능하게 할 것들 이다. 이미지 또는 표상, 감각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 자연과 문화 , 자연과 기술 등의 개념들은 일체의 형이상학적 개념틀, 특히 자연 주의적 규정, 객관주의적 규정, 바깥쪽과 안쪽의 차이에서 파생된 일정한 규정과 결속되어 있다. 아울러 그것은 〈통속적 시간 개념〉과 결속되어 있다. 〈통속적 시간 개념〉이란 하이데거 철학에서 차용한 개념이다. 이는 『존재와 시간』 끝부분에서 공간적 운동 또는 지금으로부터 생각되는 시간 개념을 지칭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Ph ys iq ue 』에서 헤겔

의 『 논리학 Lo giq ue 』 에 이르는 모든 철학을 지배하고 있다 . 3 4) 일체 의 고전적 존재론을 지배하는 개념은 철학의 오류나 이론적 결함 에서 탄생하지 않았다. 그것은 서구사를 이루는 총체의 내부에 있 는 것이며, 그 형이상학과 테크닉을 연결짓는 무언가의 내부에 있 댜 아울러 그 개념은 문자 언어의 선조화li near i sa ti on, 그리고 음운론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다. 그것은 직선적 문자가 목소 리에 종속될 정도까지, 목소리를 고양시킬 수 있다. 〈 시니피앙의 선조성 〉 에 대한 소쉬르의 이론은 이런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청각적 시니피앙 등은 오직 시간이란 직선을 구비하고 있을 뿐이다. 그 요소는 순서에 따라 나타난다. 죽 그것은 연쇄 고리를 형성 한다. 그것을 문자로 표상시키면 이 성격은 곧 드러난다……. 청취적 본질의 시니피앙은 오직 시간에서만 전개되며 시간에서 다음과 같은 특 성 을 빌려온다. 첫째, 길이룰 갖고, 둘째, 이 길이는 오직 일차원에서 만 측정될 수 있으며, 그것은 직선이다 . 35) 이 점에서 야콥슨은직선의 동질성을음악적 폭의 구조로대치하면 서 결정적으로 소쉬르와 결별한다. 이때 음악적 폭이란 〈음악의 화 음〉 36) 이다. 여기서 문제는 담화의 시간적 본질에 대한 소쉬르의 단언 이 아니라 이러한 단언과 분석을 유도한 시간 개념이다. 즉 직선적인 계속성과 〈연속성〉으로 파악된 시간이다. 이 모델은 『일반 언어학 강 의 』 에서 단독으로 도처 에 작동하지만 『아나그람 Ana gra mmes 』에서 소쉬르는 확신이 약해진 것 같다. 어쨌든 선조성 개념의 가치가 문제 34) (출판 예정인) 다음 논문을 참조할 것. Ousia et Gramme, note sur une note de Sein und Zeit . 35) 야콥슨, 앞의 책, 103 쪽. 또한 〈동질적 시간〉과 관련된 모든 것을 볼 것, 같은 책, 64 쪽 이하. 36) 앞의 책, 165 쪽. 또한 이미 인용된 Dio g e n e91 논문을 참조할 것.

이며 다음과 같은 소중한 단락은 지연된 채로 남아 있는 질문을 다듬 어가고 있다. 하나의 단어를 형성하는 요소들이 순서적으로 이어진 E 庄- 사실은 언 어학에서는 너무 자명해서 별 홍미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 하지만 그것은 단어들에 대한 필수적인 성찰에 핵심적 원리를 부여하는 진리 이다. 우리가 다룰 분야처럼 대단히 특별한 영역에서는 일반적인 인간 단어의 근간을 이루는 법칙에 따라 연속성이냐 비연속성이냐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3;)

37) Mercure de France. 1964 년 2 월호, 254 쪽. 이 텍스트를 소개하면서 스타로빈스키 J. S t arob i ns ki는 음악적 모델울 상기시키고 다음과 같이 결 론짓는다. 〈이 독서는 또 다론 템포(그리고 다른 시간 속에서)로 전개된다. 궁극적으로 통상 언어에 고유한 ‘계기성'의 시간에서 벗어난다.〉 이는 시간 과 언어의 통상적 개념에 고유한이라는 말로 풀어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선조성 시간 개념은 근대적 기호 개념과 그 역사 에 대한 가장 심오한 귀속 중 하나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는 기호 개념 자체가 고전적 존재론의 역사와 (아무리 미묘한 것이라 할지라 도) 시니피앙 쪽과 시니피에 쪽의 구분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측면, 모든 차원의 병행론이나 상응성은 문제를 전혀 변화시 키지 못한다. 스토아 논리학에서 나타난 이러한 구분은 무한주의적 신학이 지배해 온 교부주의적 주제틀의 수미 일관성에 필연적인 것 임이 오늘날 기호에 대한 기호의 차용을 우연 또는 단순한 편리함 으로 다루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우리는 서두에서 그 점을 암시했 는데, 아마 그 이유가 지금 더욱더 분명해졌을 것이다. 시그나툼(기 호 의미)은 지시체로서 언제나 사물 res 에 귀결된다. 죽 창조되거나 생각되고 언급되며, 신성한 로고스, 정확히 말해 그 숨소리에서 영 원한 현재로 생각되고 언급될 수 있는 존재자 un et an t에 귀결된

다. 그러나 시그나툼은 시그난스(기호 형식)의 중개를 통해 유한 정 신의 (창조되었건 그 렇 지 않건, 어쨌든 초우주적 존재자의) 음성 언 어, 그리고 신성한 로고스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다. 로고스는 시 그나툼을 현전 속에서 생각하며 시그나툼은 로고스의 흔적이 아니 었다. 그런데 현대 언어학에서 시니피앙이 흔적이라면. 시니피에는 원칙적으로 직관적 의식의 충만한 현전에서 생각될 수 있는 의미이 다. 본래 시니피앙 쪽과 구별한다는 점에서, 시니피에 쪽은 흔적으 로 고찰되지 않았다. 으레 합법적으로 시니피에 쪽은 있는 바대로 되기 위해 시니피앙 쪽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단언의 심층 부 깊은 곳에서 언어학과 의미론 사이의 관계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이다. 일체의 시니피앙을 떠나 생각할 수 있고 가능한 하나의 시 니피에의 의미를 참조하는 것은 방금 우리가 상기시킨 존재-신학­ 목적론 l'on t o- t heo- t eleolo gi e 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기호라는 개념 자체를 문자에 대한 성찰을 통해 해체시켜야 할 터인데, 문자 는 의당 그렇듯이 총체성 속에서 충실하게 기호 개념을 반복하면 서, 또 가장 확실한 증거 속에서 그 뿌리를 흔들면서 존재-신학의 요청 So llicit a ti on 과 합류된다 .38 ) 또 흔적은 기호의 양면에서 기존 38) 만약 우리가 소쉬르 문헌에 특권을 부여하면서 〈해체〉의 필연성을 증명 할 것을 선택했다면, 그것은 소쉬르가 여전히 현대 언어학과 기호학을 지 배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보다 큰 이유는 소쉬르가 한계점에 처해 있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죽 그는 해체해야 할 형이상학 속에 있는 동시에 그가 사용하는 기호(시니피앙/시니피에) 개념을 넘어선 곳에 있기 때문이 다. 하지만 소쉬르가 얼마나 많은 신중함과 주저 끝에 그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간파하기 위해서는 (특히 기호 양쪽 〈면〉의 차이와 〈자의성〉이 문제가 될 때는 더욱더) 고델 R. Godel 의 Les sources manuscri tes du cours de Jing uist i qu e gen erale(l957), 190 쪽 이하를 꼼꼼히 읽어야 할 것이다 . 지나가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해 본다. 우리가 참조할 수밖 에 없었던 『 일반 언어학 강의 』 에 액면 그대로 나타나는 의미는 현재 출판 울 준비하고 있는 미간 원고 때문에 언젠가는 엄청난 의심을 받게 될 것을 배제할 수 없다 . 우리는 특히 『 아나그람 』 을 염두에 두고 있다• 사후에 편집 되고 출판된 『 일반 언어학 강의 』 에 대해 소쉬르는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가? 그 질문은 새로운 것이 못 된다. 최소한 여기서 우리가 그 문제에 어 떤 변별성도 부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밝힐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한 기획의 본질을 완전히 그릇되게 인식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소쉬르 자신 의 사상 자체는 거의 신경 쓰지 않는 우리가 하나의 텍스트에는 관심이 있 다는 사실을 독자는 깨달았을 것이다. 1915 년 이후 그 텍스트 액면 그대 로의 의미는 모든 독서, 영향, 오해, 차용, 반박의 체계 속에서 작동하면서 잘 알려진 역할을 맡았다. 우리에게는 〈일반 언어학 강의〉라는 제목 아래 에서 사람들이 읽을 수 있었던 것(또 거기서 읽을 수 없었던 것)이 소쉬르 의 숨은, 〈진정한〉 일체의 의도보다 중요했다. 만약 이 텍스트가 또 다른 텍스트를 은폐시켰다는 사실(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텍스트일 뿐이다). 그리고 규정된 의미에서 그것을 은폐시켰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제안한 책 읽기는 최소한 이런 이유만으로 그 힘이 약화되지 않 을 것이다 . 오히려 그 정반대이다. 더구나 이 갇온 상황은 『 일반 언어학 강 의 』 의 편집자들이 최초의 「서문 Pre fa ce 」을 쓰면서 이미 예상했던 바이다.

의 총체성에 영향을 미칠 때부터 필연적으로 그렇게 유도된다. 그 것은 시니피에가 (단지 유한적이며 창조된 정신에서만이 아니라) 본 래 또 본질적으로 혼적이라는 사실, 시니피에가 언제나 시니피앙의 위치에 있 E 는- 점이 소박한 외관으로 나타난 명제이다. 그 명제에서 로고스의, 현전의, 의식의 형이상학은 문자를 형이상학의 죽음과 방편으로성찰한다.

【역주】 l. 가치론 ax i olo gi e 의 부사형. 19 세기 신칸트주의 사상가들이 도입한 용어로 가치 일반과 특수한 윤리적 가치들에 대한 엄밀한 이론을 지칭한다. 그레 마스 기호학에서는 가치의 체계적 존재 방식으로 이해된다. 2. 『 기하학의 기원 』 은 1939 년 후설이 Vom Ursp ru ng der Geome tri e 란 표 제로 Revue int e r nati on ale de ph il o sop h ie J. Ja hrg an gS긱 2 호에 게재 한바있다. 3. 에크리튀르가 과학의 성립을 가능하게 한 주원인이었다면 결국 에크리튀 르를 연구하는 과학은 과학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과학이 된다 . 4. 과학을 탐구하는 과학(이를 메타 사이언스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은 따라서 과학의 알맹이 그 자체이다. 5. 기존의 실중적 문자 과학은 문자에 관한 철학적 질문들을 소홀히 했으며,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질문 자체를 봉쇄했다고 할 수 있다. 6. 문자에 관한 두 가지 사고 패턴에 존재하는 긴장 관계에 유념할 것. 죽 문 자의 기원에 관한 존재론의 현상론적 질문은 다양한 구체적 문자에 관한 역사적 기정 사실들의 탐구를 편협화할 수 있다는 것이 데리다의 생각이다. 7. 기존의 문자학 연구서들이 보여주는 문제점을 적고 있다. 풍부한 증거와 실제적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뒤따르는 이론적 토대와 인식론적 성찰이 미진함을 꼬집고 있다. 8. 이러한 추세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직 현대 언어학의 이론적 성과는 역사학자나 고고학자에게 전달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이 런 현상은 역설적이다 . 왜냐하면 1960 년대 구조주의 발생 이후 언어학은 과학성의 수준에서 인문 과학의 모범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9. 언어학사적 관점에서 현대 언어학이 이룬 최초의 객관적 업적은 통사론이 아니라 음운론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10. 이 세 언어학자는 현대 구조주의 음운론의 삼총사로 비유돈!다. 물론 이 들의 이론적 뿌리는 소쉬르부터이다. 11. 불어의 re p resen t a ti on 은 표상이란 의미와 동시에 대리란 의미를 함축 한다. 죽 이 말은 사물이나 본질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대신해 나타냄을 의미한다. 12. 비록 음성 문자인 알파벳 문자가 오늘날 전세계의 문화와 과학을 제어, 통제하고 있다면 그것은 서구 알파벳 문자의 본질적인 보편적 우월성에 기 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세하도록 만든 역사적, 형이상학적 구조와

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돌려 말해 서양의 알파벳 문자는 소리 중심에 근거 를 두고 있으며, 이것은 다시 서구의 인 종 중심주의와 결속되어 있다. 13. t echne 는 기술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ar t와 동의어이며 어떤 결과 를 산 출 시킬 수 있는 실천 능력이다. 이 실천 능력은 코드화되지 않은 채 순 전히 경험에만 의존할 수 있으며, 따라서 경험과 모방에 의해 전수될 수 있다. 다론 한편, 테크네는 과학 지식과 연결되며 경제적 구조에서 조직화 될 수 있다. 모든 인간 사회에는 테크닉 지식이 있다. 14. 〈 실제로 문자 언어라는 기술은 그것을 터득한 사람들의 영혼 속에 망각 을 야기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기억력을 훈련시키는 일을 멈 출 것이기 때문이다. 문자로 씌어진 것을 신임하면서 안쪽이 아니라 바깥 쪽에 있는 기묘한 흔적의 힘을 빌려 그들은 기억을 되살릴 것이다. 〉 15. De la recherche de la verite , (Eu vres comp le te s I(T. I. Vrin , 1962). 5 장에서 말브랑슈는 영혼과 육체의 관계 전도 문제를 다룬다 . 16. 용이함, 수완 동으로 옮길 수 있다. 여기서는 도덕적 기준에서 부정적 의 미로 사용되어 인간의 죄를 부르는 원인 제공자인 인간의 안이함을 뜻하며 문자 언어와 같이 테크닉에 기초를 둔 인위성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곧 말 의 자연스러운 관계를 타락시키는 발단이다. 17. 여기서 말하는 찬탈은 인위적인 문자 언어가 언어의 진정한 본질인 소리 언어의 자리를 빼앗음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18. 데리다는 문자 언어의 화려함에 현혹되는 것이 곧 정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소쉬르 자신은 정념이란 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 언어학자로서 소 쉬르가 문자 언어의 위상에 대해 언급한 것 중 메타포만을 선별해 소쉬르 에게 서구의 도덕론적 전통의 멍에를 씌우는 것은 무리가 있다. 19. 1900 년을 전후해서 말년에 소쉬르가 심취했던 분야로, 고대 인도 유럽어 (특히 라틴 시조 쪽)의 시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작법을 말한다. 하나의 시에 서 표층적으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 배후에 일정한 통사법, 형태론, 의미 규 칙에 따라 숨어 있는 또 다른 텍스트를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 그 기본 가설 이다. 소쉬르는 일반 언어학과 마찬가지로 아나그람의 연구 성과에 대해서도 생존시 출판을 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아나그람 관계 수고의 일부만이 스 타로빈스키의 해설과 더불어 출간되었을 뿐이다. Je an Sta r obin s ki , Les mots sous Je s mots ( Gall ima rd, 1972) 참조 . 20. 〈문자는 언제나 아버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자가 자 신을 보호할 수도 없고 혼자서 일을 처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2l. 다르메스테르(D armes t er Arsene, 1846-1888) : 프랑스의 언어학자.

불어사와 의미론 연구에 업적을 남겼음. 22. 기호의 자의성은 기호의 구조를 이루는 두 항. 죽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 관계도 없다고 보는 시각으로 비동기성. 무연성이라 고도 불린다. 가령. 언어는 계약 관계에 근거한 사회 제도의 산물이라고 보 는 시각을 말한다. 23. 헤겔의 기호 이론에 대한 데리다의 논의는 다음 글을 참조할 것. Le pu it s et la pyr ami de . Intr o duc tion a la semi ol og ie de Heg el . Margi ne s de la ph il oso p h ie ( Mi nu it . 1972). 헤겔의 언어 철학에 관해 서 는 Danie l J. Cook, Lang u age in the ph il o sop h y of Hege l (Mouto n , 1973) 을 참조할 것. 24. i cone 의 형용사. i one 은 그리스어 e i kon 에서 유래했으며 유사(類似), 상 (像)을 의미한다. 퍼스의 용법에서는 〈도상 기호〉 또는 〈유사 기호〉로도 옮길 수 있다. 그리스 철학에서 e i kon 은 가시적인 것이 출현하는 방식을 지칭한다. 비잔틴 시대부터는 이콘을 종교적 이미지로 받아들였으며 그것 에 조형적 방식, 종교 예식적인 관례 등의 의미를 부여했다. 근대에 이르러 이 용어는 파노프스키 Pano fs k y의 예술 철학과 퍼스의 기호학에서 중심 개념으로 발전한다. 25. 원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상징의 성격은 자의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상징은 텅 빈 것이 아니다 II n'est pa s vide . 죽 상징은 최소한 시니피앙 과 시니피에의 자연적 연계선의 흔적 le rudim ent du lien na t ure! 을 보 여준다. 가령, 정의의 상징인 추를 수레로 대신하기는 힘들 것이다.〉 26. 서구의 전 형이상학을 지칭한다. 27. 제도화된(사회적으로 계약화된) 혼적과 문자 표기 개념을 말한다. 28. 지금까지 제시된 논거에서 미루어보면, 데리다의 사상은 혼적의 사상이 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존재보다도 혼적의 운동이 선행한다. 그러나 그 운 동은 끊임없이 자신을 은폐하며 인간의 역사에서 사라져간다. 29. 기호의 단계가 상징의 단계를 대체한 순간은 바로 인간의 문화가 자연을 대신하는 순간과 맞물려 있다. 30. 소쉬르는 기호학의 영역에서 잠정적으로 상징을 논외로 했으나 결코 기 호학의 대상 자체에서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소쉬르의 자필 노트 를 보면 미래의 기호학의 대상 속에 상징도 한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적 혀 있다. 31. 퍼스의 기호학은 그의 사후에 출간된 유고집에 집 약되어 있다. Charles Harshorne & Paul Weis s 편, The Collecte d Pap e rs of Charles

Sanders Peir c e HV(Cambrid g e , Mass. : Harvard Univ . Press, 1931-1935) 와 Arth ur W. Burksand 편. The Collecte d Pap e rs of Charles Sanders Peir c e VII-VIII (same pu blis h er, 1958) . 퍼스 철학의 근간은 그의 프래그머티즘과 현상학적 범주론에 있다. 퍼스 기호학은 일종의 논리학이다. 따라서 기호의 심리적 근원은 기호 기능의 논리적 본질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구조주의 기호학과 달리 퍼스 기호 학은 삼원적인 모델을 기본 모델로 삼는다. 현상학적 차원에서 퍼스는 사 물의 존재 방식을 일차성, 이차성, 삼차성으로 구분하고, 인식론적 방법론 의 차원에서는 연역, 귀납, 가추법 abduc ti on 으로 구분하고, 기호의 구조 차원에서는 표상체 rep re nta m en, 대상체 obje c t, 해석체 int e r pr e ta n t 등 으로 구분한다. 퍼스의 삼원론은 기호 세계를 이루는 세미오시스를 좀더 역동적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고 기호학을 기호 작용 논리로 성 립시 킨을다 .참 조퍼. 스G . 기D호el학ed과a ll소e, 쉬T르he o기zi호e 학et의 p r인 at식i q론u e적 du대 질sig에 n e .대 I해n서tr o는 d u다ct음i on 책a la sem iot i qu e de Peir ce (Paris : Py o t, 1979) . 그 밖에 퍼스의 기호 사상을 다룬 연구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Thomas A. Goudg e , The Though t of C S Peir c e(Toronto : Univ . of Toronto Press, 1950) . 2) Jo hn Fitzg e rald, Peir ce 's Theory of Sig ns as Foundati on s for Pragm a ti sm (The Hagu e : Mouto n , 1966). 3) Dougl a s Greenlee, Peir c e's Concep t of Sig n( The Hag ue : Mouto n , 1973). 4) Karl-O tto Ap e l, Charles S Peir ce : From Prag ma ti sm to Pragm a -tic ism (Amherst : Univ . of Massachusett s P ress, 1981). 5) Gerard Deledalle, Charles S Peir ce : An Inte l lectu a l Bio g i ·ap h y (Amste r dam : Jo hn Ben. iamins , 1990). 32. 던스 스코터스 (1266-1308) : 예수회 신학자. 신에 대한 믿음을 옹호했 고, 이 믿음을 근거로 감각 세계로부터 신에 도달하는 지식 실재론(리얼리 즘)을 옹호했다. 33. Thomas d'Erfu r t: 14 세기 초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됨. 중세의 문법 및 논리학에서 스콜라 철학에 기초한 보편적인 의미 이론과 언어 이론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14A- l l 기에 씌어진 그의 저서 『사변 문법 gram ati ca spe - cula ti va 』은 하이데거를 비롯한 현대 철학자들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34. 초월적 시니피에를 지칭한다.

35. Jde en, 1 권 24 절 Prin z ip aller Prin z ip le n. 36. 랑베르(J ean Henri Lambert, 1728-1777) : Mulhouse 에서 탄생한 프 랑스 수학자. 광도 측정을 창조한 사람 중의 한 명이다. 37. Phaneroscop ie-P r inc iple s of Phil o sop h y 3 권 Phenomeno]gy 1 절에 서 이러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38. rep re senta m en. 퍼스는 이를 〈토대, 상관물, 해석자로 귀결되는 것〉이 라고 정의한다. 다른 무엇을 대신해서 일어나는 최초의 기호이다. 39. 역주 31 에서 언급했듯이 퍼스의 기호 정의는 삼원적 구조이다. 기호 자 체. 기호에 대립하는 현실적 존재자인 지시 대상, 양자의 관계에 활력을 불 어넣는 해석체이다 . 해석체는 모든 기호의 구성 인자인 동시에 그 자체가 일종의 기호이기도 하다. 40. 구조주의 언어학(미국의 구조주의 언어학 포함)에서 의미 문제는 언제나 중심 테마에서 제외되었음을 상기할 것. 41. 데리다가 옮긴 p roces 는 p rocede 의 오기(誤記). 42. 차이의 원칙 the se de la d iffe rence 은 기호의 자의성 원리와 더불어 소 쉬르 기호학의 이대 원리이다. 43. 소쉬르가 사용하는 p honolo gi e 는 오늘날의 음성학에 해당한다. 44. 변별적 자질 tra it s dis t i nc ti fs : 임의의 언어 요소를 다른 언어 요소로 부터 구별하는 데 필요한 음운, 통사, 의미상의 특징을 일컬음. 변별적 자 질의 이론을 최초로 제안한 사람은 야콥슨이다. 45. 데리다는 문자 언어와 음성 언어의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좀더 근원적 개념을 원-문자란 신조어로 제시하면서도 계속해서 에크리튀르란 명칭을 사용할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아울러 에크리튀르는 통상 의미의 문자 개 념까지 포함한다. 46. 불어 en t amer 에는 〈개시하다〉. 〈손상을 가하다〉라는 이중 의미가 있다. 47. 다분히 역설적 논증이다. 원_문자는 결코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과학적 대상이 되려면 현전을 전제로 하나 원-에크리튀르는 끝없 는 흔적의 운동일 뿐 어떤 현전도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48. Prin c ipe s de {Jl·a m ma ire ge nerale0928). 옐름슬레우의 박사 학위 논 문이며, 일반 문법에 대한 체계적인 가설과 논증을 제시하고 있다. 49. 울달 H. J. Uldall : 덴마크의 언어학자로서 옐름슬레우와 더불어 언어학 이론을 발전시킴으로써 이른바 코펜하겐 학파를 창립하는 데 견인차 역할 을맡았다. 50. 코펜하겐 학파: 옐름술레우와 브뭔달 V. Br0ndal 을 중심으로 1934 년

2 언어학과 문자학 149

창설된 학파로 네오-소쉬리즘이라고도 불린다. 그 특징은 기호 체계 안에 서 기호를 내용과 표현으로 나누고 이중 형식에 주안점을 두고 언어의 형 식적 성충을 정확하게 정의된 범주로 기술하려는 데 있다. 51. epo s : 음성 언어를 뜻하는 그리스어. 52. l'O. P. O. IAZ : 1916 년부터 1917 년까지 쿠르티네 Baudou in de Courte n ay 의 주제 아래 열린 시 언어 연구회로 러시아 형식주의로 발전했다. 53. hyl e /morph e : 질료 H y le 는 후설 현상학에서 의식의 현실적 성분 층위 를 지칭한다. 으레 현상학은 의식의 일차적, 원 1 사재적. 수동적 층위로 귀 결된다. 어원적으로는 질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Hule 에서 파생했다. 철학 에서는 형식 mor p he 에 대립하는 기술적 의미로 변한다. 54. 정신주의 menta l i sm e: 인간의 모든 행위를 정신적인 실제로 귀결해 설 명하는 이론을 지칭한다. 즉 이때 정신적 실제란 외부 관찰자가 지각할 수 도, 관찰할 수도 없는 것이다. 블룸필드 이후 미국의 구조주의자들은 이러 한 정신주의를 거부했다. 그러나 촘스키 언어학은 명시적으로 이러한 정신 주의를 기본 가설로 수용한다. 55. eng ram me : R. Semon 이 제안한 심리학 용어. 기억 현상을 설명하는 데 선행 경험에 잔존하는 이중의 기억 흔적이 남는다고 주장한다 .

3 실증 과학으로서의 문자학(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문자학은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가? 그 근간 조건은 확실히 로고스 중심주의의 간청 및 권유 so llicit a ti on 이다. 하지 만 이 러 한 가능성의 조건은 불가능성의 조건으로 선회한다. 그것은 과학 개념 자체를 뒤 혼들 위험성이 있다. 문자소론(文字素論, grap h emati qu e) 또는 문 자 표기론 gr amma t o gr a p h i e 은 자신을 과학으로 소개하는 것을 멈 추어야 할 것이다. 이 학문들의 목표는 철자-로고스적 지식 savo ir gra mma t o-J o giq ue 에 저촉 위배됨에 틀림없다. 여기서는 이러한 위험 천만한 필연성과 과학성에 대한 전통적 규범의 내부까지 파고드는 모험을 감행하지 말고 그 질문을 다시 반복해 보자. 그라마톨로지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가? 그것은 에크리튀르가 무엇이며 에크리튀르 개념의 다의성과 다 가치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안다는 조건에서 가능하다. 에크 리튀르는 언제 시작되는가? 언제, 어디서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 의 공통 뿌리인 에크리튀르 일반, 죽 혼적이 통상적 의미의 〈문자 언어〉로 좁혀지는가? 언제, 어디서 한 문자에서 다른 문자로, 일반

적 차원의 문자에서 협소한 의미의 문자로, 흔적에서 문자 표기로, 문자 표기 체계에서 또 다른 체계로, 또 시각 코드와 그래픽 담론 에서 다른 담론 등으로 옮겨가는가? 어디서 또 언제 시작되는가……? 그것은 곧 기원의 문제이다. 하 지만 기원, 즉 단순 기원은 없다. 단순 기원에 대한 물음과 더불어 기원의 문제들은 모종의 현전의 형이상학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 이야말로 흔적의 명상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 천만한 필연성으로 모험하지 말고 계속 기원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 속에서 두 가지 높이룰 인지해야 한다. 〈 어 디서〉 그리고 〈언제〉라는 물음은 경험적인 문제들을 개방시킬 수 있다. 역사와 세계에서 최초의 문자 현상들을 결정짓는 장소와 순 간들은 무엇인가? 아러한 질문들에는 역사적 사실 등의 조사, 연 구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이때 역사란 통상적 의미의 역사, 즉 거의 모든 고고학자, 묘비명 학자, 선사학자들이 세계의 여러 문자 들을 탐구하면서 실천한 역사 개념이다. 그러나 기원의 문제는 무엇보다 본질의 문제와 얽혀 있다. 아울 러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존재-현상학적 물음을 전제로 한다. 탐 구하는 대상과 문제의 요건이 무엇인지 알면서 문자가 어디서, 언 제 시작되었는가를 묻기 위해서는 문자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문자란 무엇인가? 어떤 점에서 문자는 문자로 인지되는가? 어떠한 본질적 확실성이 경험적 조사 탐구를 유도하는가? 그 경험적 조사 탐구는 당위론적으로 en droit 유도된다. 그 이유는 경험적 조사 탐 구가 성급하게 본질에 대한 성찰을 풍부하게 한다는 것에는 사실 상의 필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1) 본질에 대한 성찰은 〈범례들〉에 1) 문자의 경험 기원을 연구하는 데 부딪히는 어려움은 M. Cohen, La gran de inv ent ion de J'ec rit ur e(1 9 58). 3 쪽 이하와 J. G. Fevrie r , J'Hist o i r e de J' ecri t ure(1948-1959) 를 참조할 것 이 책은 프랑스에서 문자의 일반 역사 분야를 다룬 책 중 가장 중요한 저서이다. 다비드 M.V . -Da vi d 는

1960 년 6 월 Cri tiq ue 에 위의 저서들에 관한 연구 논문을 실었다.

근거해 작동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초월적 성찰의 논리가 설 정한 권리상의 근원에서 시작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이 어떤 점에 서 (삭제 또는 말소의) 흔적의 기원성 or igi nal ite, 즉 에크리튀르의 뿌리로 귀결되는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흔적의 사상이 이미 우리에게 일러준 것은 흔적이 단지 본질에 대한 존재 현상학적 질 문으로 종속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흔적은 아무것도 아니다 La tra ce n'est rie n . 그것은 현전하는 것이 아니며, 무엇이냐q u'es t -ce q ue 는 질문을 넘어선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사실과 당위의 대 립울 신임할 수 없다. 그러한 대립은 일체의 형이상학적, 존재 초 월적인 형식 안에서, 즉 무엇이냐는 질문 체계 안에서만 작동했을 뿐이다. 〈무엇이냐〉는 원형-질문에 대한 물음의 위험 천만한 필연 성에 모험을 걸지 말고 문자학적 지식의 마당 속에서 자신을 보호 하자. 문자는 도처에서 역사적이었고 문자에 대한 과학적 관심이 언제 나 문자라는 형식을 취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동시에 놀라 운 일이다. 하지만 과학은 문자 이론이 여러 사실들에 대한 순수한 기술 방향을 정립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그 진리 조건은 여러 사 실들에 대한 순수한 기술이라는 표현에 하나의 의미가 있다는 점 이다. 대수학: 비밀과 투명성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은 단절을 드러낸 18 세기가 어떤 점에서 이 두 가지 요청에 권리를 부여하려고 했는가를 너무 자주 무시하거나 과소 평가한다. 심층적인 동시에 체계적인 이유로 19

세기가 엄청난 환상 또는 무지막지한 무지의 유산을 남겨놓았다면, 그것은 바로 17 세기 말부터 18 세기에 걸쳐 씌어진 기호 이론과 관 련된 모든 것이 그러한 환상과 무지로부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 댜 2)

2) 다비드는 이 점에 대한 특별한 설명을 제안한다. 〈 19 세기 사상에서 언어 가 여러 사실들을 지나치게 변호한 데 이어서 (헤르더 Herder 와 더불어 시 작된) 일종의 공백이 생겨난 것은 확실하다 . 역설적으로 말해, 위대한 문자 해독의 세기는 기호 문제에 대한 자신의 불쾌감을 노골화하면서 그러한 해 독을 가능하게 한 기나긴 준비 를 아무것도 없었던 일로 덮어두었다… … 이 렇듯 공백은 채워져야 했고 연속성이 재정립되어야 했다…… 이런 의미에 서 라이프니츠의 텍스트 를 살펴보는 것보다 효율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텍스트들은 중국 관련 사실과 보편 문자의 기획, 문자 언어 와 음성 언어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을 서로 결합해 다루고 있다 …… 그러 나 우리가 고충스럽게 여기는 것은 기호에 대한 19 세기의 맹목성만은 아니 다. 아마 ‘알파벳 필생이라는 우리의 자격이 문자 표기 작업의 본질적 양 상들을 은폐하게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 〉 (In t erven ti on, EP, 352-353 쪽)

따라서 우리들은 이런 식으로 우리 앞에 혼돈스럽게 놓인 것을 다 시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 프랑스에서 온 정성을 다해 문자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조사 탐구해 온 사람 중의 한 명인 다비드 3 ) 는 그 저 서에서 어떤 문서의 주요 단편들을 수집했다. 그 문서는 바로 17 세 기 말에서 18 세기에 걸쳐 유럽의 모든 학자들을 사로잡은 논쟁거리 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유럽 의식의 위기, 맹목적이면서 알려지지 않은 징후이다. 〈문자의 보편사〉(이 표현은 바르부르통 Warbur t on 이 제안했으며, 그 해는 1742 년이다 ) 4) 에 관한 최초의 기획들은, 엄밀한

3) 특히 그는 Les dieu x et le desti n en Babyl o nie ( P.U .F ., 1949) 에서 그러한 작업을 했다(특히 문자의 지배 Le regn e de J' ec rit ure 에 관한 마지 막 장을 참조할 것 ) . Revue philos op h iq u e, Bulleti n de la so ci e 祐 Jinguist i qu e de Paris, Criti qu e, Jo urnal de ps yc ho]og ie, Jo urnal asia ti qu e 둥의 잡지에 실린 많은 논문들 속에서 다비드는 흐로즈니 B. Hrozn y의 제자인 동시에 번역자였다. 4) DE. 34 쪽 sq.

의미의 과학적 작업이 그것에 운동을 부여한 것 자체를 극복하려는, 즉 사변적 편견과 이데올로기적 추측을 끊임없이 극복하려는 사상적 환경에서 탄생되었다. 비판적 작업은 단계적으로 진보하고, 나중에 가서 우리는 그 모든 전략을 재구성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신 학적〉 편견을 가져온다. 그래서 프레레 Frere t는 신이 준 원초적 자 연 문자를 신화로 규정했고 볼레즈 드 비즈네르 Bla i se de Vig e nere 는 그것을 헤브루 문자로 규정했다. 『글 쓰기의 암호 및 비밀 서법 개론 Trait e d es chif fres ou secrete s manie r es d'escri re 』 (1586) 에서 불레즈 드 비즈네르는 헤브루 글자들이 〈문자 중에서 가장 오 래되었으며 최고신(最高神)의 손가락으로 만든 것〉이라고 썼다• 분 명히 표출되건, 암시되건 일체의 형식 속에서, 실상 편견 이상의 것 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신탁주의는 문자학의 정립을 가로막는 주요 방해물이었댜 어떤 문자사도 그것과 더불어 조합될 수 없었다. 그리 고 무엇보다 그것이 맹목화한 것 중 하나인 (헤브루 문자이건, 그리스 문자이건) 알파벳 문자에 대한 어떤 역사도 불가능하게 했다. 문자 과학의 요소는 그 역사에서 비가시적인 채로 남아 있어야 했고, 다른 문자들의 역사를 직시할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특히 그러했다. 아 울러 필연적 탈중심화 decen t remen t가 비서양 문자들의 판독 가능 한 생성에 뒤이어서 왔다는 점에는 전혀 놀랄 것이 없다 .I 알파벳 역 사를 수용한 것은 문자 체계들의 다양성을 인지하고, 과학적으로 결 정짓건 아니건, 거기에 일종의 역사를 설정하고 난 후에야 가능했다. 이 첫번째 탈중심화는 스스로를 제한한다. 유사한 방식으로 탈중 심화는 논리-철학적 관점(논리-철학적인 것의 맹목적인 조건, 죽 음성 문자에 대한)과 신학적 관점을 화해시키는 비역사적 기초 위에서 다 시 중심을 잡는다 .5) 그것이 바로 〈중국에 대한〉 편견이다. 데카르트 5) 속〈에광서동 지서구방(의유 예대수교-회기 교독도교J와e s이 ui집t e트s) d가e C준a n영 t o향n 〉을라 발고 견불하린는 사 데람 들연은연했 한다자.

V. Pino t, La Chin e et la for mati on de J'es pr i t philos op hiqu e en France 164 0- 1740(1932) 와 DE, 59 쪽 이하 참조.

가 보편 언어 pa sil a lie , 만능 서 법 po lyg r ap h ie , 만국 공통 문자 체 계 p as igi ·a p h i e 라고 불렀고, 키르케 P. Ki rche1견 윌킨스 Wi lk in s ,6)3 라이프니츠 4 등이 묘사 기술한 보편 문자 및 언어에 대한 철학적 기 획들은 중국 한자에서 영감을 받아 역사의 틀에서 벗어난 철학적 언 어 모델의 발견을 고무시켰던 것이다. 어쨌든 라이프니츠의 기획들 에서 나타나는 중국어 모델의 기능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가 보 기에 한자를 목소리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자의적이며 인위적인 발명으로 역사에서 그것을 빼앗아 고유한 상태로 철학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기도하다. 라이프니츠를 이끈 철학적 요청은 그 이전에 이미 여러 번 표명된 바 있다. 그에게 영감을 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은 누구보다 데카 르트이다. 보편 언어 5 를 위한 여섯 개의 제안 명제들로 이루어진 체 계를 자랑한(그 기원은 미지수이다) 메르센 Mersenn 강이 보내온 격 문p lacard 에 대한 회신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이 그를 철저하게 무시 하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언급하는 것으로 말문을 연다. ” 데카르트는 비아냥거리면서. 그중 몇 개의 제안 명제들은 〈마약과 같으며〉 〈상 품을 숭배하는 데〉 쓰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비밀 arcanum 〉이란 단어에 대해 〈좋지 못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몇몇 제안 명제에서 비밀이란 단어를 보자마자 나는 곧 거기에 대해서 좋지 못한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데카르트는 앞서 거론한 8) 소쉬르가 내세운 논증 의 기획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6) At ha nase Kirc her, Polyg rap h ia nova et univ e rsalis et combin a - tor ia arte de t ec t a 와 Jo hn Wi lkins . An essay tow ards a real 7 ) chLaerattc rtee ra a Mnder sae npnhe il o, s2o0p hniocva. l J1a6n2g9u. aL g.e C (1ou6t6u 8r )a.t et L. 표 au. Histo i r e de la Jangue univ e rselle. 10 쪽 이하 참조 8) 이 책, 80 쪽.

…. .. 자주 귀에 거 슬 리고 참기 힘든 소리들을 만들어낼 철자들과 불 길하게 만난 것. 왜냐하면 단어들의 굴절에 나타나는 차이는 이 단점 울 피하기 위해 만들었을 뿐인데, 당신의 저자가 모든 민족에게 보편 적인 문법을 만들면서 이러한 결핍을 치유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 모국어에서 듣기 쉽고 기분 좋은 것이 독일인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투박하고 거슬리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보편 언어는 모든 언어의 〈기본어 mot s primitifs> 를 배우라고 요구하게 될 터이고 〈그것은 너무 번거로운 일이다.〉 예의는 기본어를 〈서면〉으로 소통하는 경우뿐이다. 물론 데카르트 는 이 장점을 놓치지 않는다. 만약 모든 사람이 모국어의 기본어를 사용한다면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서면으로 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의 말을 알아듣고자 하는 사람은 사전에 나오는 모든 단어를 찾아봐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할 것이며, 이것은 곧 이 언어 체계가 사용되기를 희망하기에는 너무나 번거로운 일입니다. 내가 이 칭안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보는 공리성은 문자에 관한 것입니다. 죽 소통하려는 모든 언 어로 된 커다란 사전을 인쇄하고 , 기본 단어에 공통된 철자를 만드는 일인데, 이 공통 철자는 음절이 아니라 의미에 부응합니다. 가령, aim er, amare, fPl Acf v 등에 같은 문자가 사용됩니다. 그리고 이 사 전으로 이 언어의 문법을 터득한 사람은 모든 글자를 차례대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며, 씌어진 것을 모국어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 나 그것은 신비와 계시에 유익할 뿐입니다 . 왜냐하면 다른 일에는 사 전에 있는 모든 단어를 찾아보는 수고를 하는 한 실제로 아무도 이 언 어를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이 언어를 써야 할 그리 큰 장점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한 것 이상의 근본적인 아이러니, 심오한 아이 러니로써 데카르트는 비명중성 non-e v id e nce, 주의 부재 또는 의 지의 성급함, 즉 독서 오류fa u t e de lec t ure 가 아닌 또 다른 잠재 적 원인을 가능한 오류로 상정하고 있다. 언어 또는 문자 체계의 가치는 직관, 명증성 또는 관념의 분명함, 증거 속에 있는 대상의 현전 등의 척도로 잴 수 없다. 체계 자체가 해독되어야 d6ch iffr 6 한다. 하지만 제가 착각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단지 저는 당신이 보내준 여섯 개의 제안 명제에 대해 추리할 수 있었던 것을 말해 보려 했던 것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그 문자를 창안했을 때, 내가 그 문자를 제 대로 해독했는가를 당신에게 판단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심오함은 그 문자의 저자를 따라 나가려고 한 것 이상으로 아 이러니를 더 먼 곳까지 몰고 갔다. 아마 데카르트적 확실성의 토대 보다 더 먼 곳까지말이다. 이어서 첨가와 후기 형식으로 데카르트는 단순히 라이프니츠의 기획을 정의할 뿐이다. 요컨대 그는 라이프니츠의 문자에서 철학의 소설을 보고 있다. 오직 철학만이 그것을 쓸 수 있다. 철학은 그 체계에 전적으로 종속된다 .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철학은 결코 그 러한 문자 체계가 〈씌어지는 것을 보기〉를 희망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보편 문자의 창안은 진칭한 철학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한 철학 없이는 인간들이 가진 모든 사고의 수를 세고 그것을 순서에 따 라 배열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요, 인간들의 사고를 명백함과 단순함에 따라 구별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으로 이것은 훌륭한 과학을 얻기 위한 가장 큰 비법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언어가 가능하다고 보며 철학자들보다 농부들이 사물의 진리를 더욱더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으로써 그 언어가 종속되는 과학 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그 보편 언어가 실제로 사용되리라고 기대하지는 맙시다. 그것은 사물의 질서가 크게 변하는 것을 전제하며 전세계가 지상 천국이어야만 가능한 얘기입니다. 소설 속의 나라에서 제안할 때만 그럴 듯해 보이는 것입니다 . 9)

9) 우리는 이 인용문의 문맥을 복원시키는 일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한다. 〈요 컨대, 이 언어의 원시 단어들뿐만 아니라 그 글자를 구성하기 위해 이것에 창안을 덧붙일 수 있다고 봅니다. 그 결과 이 언어는 매우 짧은 시간에 교 육될 수 있으며, 그것은 순서, 죽 인간 정신에 개입할 수 있는 일체의 사유 에 질서를 세우는 수단에 의해 가능합니다. 아울러 숫자들 사이에 자연적 으로 정립된 순서가 있습니다. 마치 하루에 무한대까지 수들을 명명하고 미지의 언어로 그것을 쓰는 법을 배우듯이 말입니다. 인간 정신 속에 들어 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다른 언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 것을 찾는다면, 저는 이 언어가 세계에서 그대로 사용될 것이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 를 사용하기 위해서 대엿새 정도를 기꺼이 할애할 사람들은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저자가 이 점을 생각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가 제시한 명제 중에서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 유만이 아니라 이 같은 보편 문자의 창안은 진정한 철학에 달려 있기 때문 입니다. 그 같은 철학 없이는 인간이 가진 모든 사고의 수를 세어 그것을 순서에 따라 배열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요, 인간의 사고를 명백 함과 단순함에 따라 구별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훌륭한 과학을 얻기 위한 가장 큰 비법입니다. 만약 인간의 상상 속에서 단순 관념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했다면(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단순 관념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그 설명을 모두가 수용한다면, 저는 배우 고 발음하고 쓰기가 대단히 용이한 보편 언어를 희망할 것입니다. 그때 중 요한 것은 판단을 돕고, 판단력에 혼동의 여지가 없게 모든 것을 분명하게 표상체입니다. 우리가 쓰는 낱말들에는 혼동된 의미만이 있으며, 인간의 심 성이 그 개념에 너무 길들어서 인간의 정신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 은 거의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쨌든 제 생각으로는 그러한 보편 언어를 창 안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라이프니츠는 이 데카르트의 편지와 거기서 표명되는 분석

적 원칙을 참조한다. 라이프니츠의 기획은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단 순 관념으로 분해하는 것을 함의한다. 그것은 추론을 수학적 계산 으로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노선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 보편적 특징은 원칙적으로 철학에 종속되지만 철학의 도래를 기다리지 않 고도 그것을 시도할 수 있다. 비록 이 언어가 진정한 철학에 종속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철학의 완 벽성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죽 비록 철학이 완벽하지 못하다고 할 지라도 이 언어는 성립될 수 있다. 그리고 인간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이 언어 역시 발달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 언어는 대단히 도움이 될 것이며, 우리가 아는 것을 사용하고, 우리에게 부족 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또 그러기 위한 수단을 고안하기 위해 합 리적 추론에 달려 있는 분야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논쟁을 일소하기 위 해서말이다. 왜냐하면 이성적으로 추론하는 것과 수리적 계산은 결국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IO) 이것이 데카르트 전통을 수정한 유일한 예는 아니다. 데카르트 의 분석주의는 직관주의적이며, 라이프니츠의 분석주의는 증거를 넘어 질서, 관계, 관점으로 향한다 .II) 보편 기호학 carac te r i s tiq ue 은 정신과 상상력 이 절제되도록 하며 , 또 모든 면에서 정신과 상상력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보편 기호학이라고 부르는 위대한 과학의 주요 목적이며, 우리들이 대 수학 또는 미적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과학의 대단히 미소한 일개 분자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 과학이 구어롤 언어에, 철자를· 구어에, 10) Coutu r at 편, Op u scules et fra g me nts ine d its de Leib n iz. 27-28 쪽. 11) 이에 대해서는 Y. Belaval. Leib n iz criti qu e de Descarte s . 181 쪽 이 하를참조할것

숫자를 산술에, 악보를 음악에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 과학은 합리적으 로 추론하고 심심풀이로 검토하기 위해 작은 크기의 종이에 눈에 보이 는 흔적으로 추론을 남기게 하는 비법을 우리에게 일러줄 것이다. 끝 으로 과학은 상상력을 손쉽게 하기 위해. 사물의 위치에 부호를 갖다 놓으면서 적은 비용으로 우리가 합리적 추론을 하게끔 해준다 . 121 이 시대에 만들어진 보편 언어 또는 보편 문자의 기획들을 가르 는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특히 역사와 언어에 관한 ),13) 그 모든 것에 언제나 단순 절대성 개념이 필연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바로 그 개념이 늘 무한주의적 신학과 로고스 또는 신의 무한한 오성으 로 귀결됨을 보이는 것은 쉬운 일이다 .14) 이런 연유로 그 외관과 개념이 우리 시대까지 합법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체의 유 12) Coutu rat 편. 앞의 책, 98-99 쪽. 13 ) Coutu rat, Histo i r e de la lang ue univ erselle, 1-28 쪽; Y. Belaval. 앞의 책, 181 쪽 이하; DE. 4 장 참조. 14) Monadolog ie 1-3, 51 항 참조. 라이프니츠의 보편 문자와 무한주의적 신학의 관계에 대해 내적 증명을 하는 것은 우리의 논지에 속하지 않으며 그 가능성도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기획 내용 자체를 낱낱이 파헤쳐야 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인용된 저서들을 소개한다. 한 서간문에 서 신의 존재와 보편 문자의 가능성 사이의 관계를 상기시킬 때 라이프니 츠가 한 것처럼.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말하겠다. 〈이것은 오랜 시간 동안 보편 문자의 토대를 설명하지 않고서는 증명할 수 없는 명제이다.〉 〈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나의 보편 문자의 토대가 되는 것은 신의 존재의 중 명에 속한다. 왜냐하면 보편 문자의 요소들은 단순 사고들이며, 단순 형태 는 사물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단순 형태들은 그것과 양 립 가능하다는 의견을 지지한다. 이것은 오랜 시간 동안 보편 문자의 토대 롤 설명하지 않고서는 증명할 수 없는 명제이다. 그러나 만약 그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그 결과 절대적으로 취한 모든 단순 형태들을 포함하는 신 의 본질은 가능하다. 그런데 위에서 우리는 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존명 재해가해야능야만성 과했한 다다보 는. 〉편 ( L사문e실 t자t r을의e a증가 명la능했 p성다r .i n사 c 따이es라에se서는 E 신l본is은질a b 적e존인th재 . 한관1다6계.7가 8)바 있로존다재 .이 론 적점 을논 증증

혹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비음성적인 보편 기호학이라는 라이 프니츠의 기획은 결코 로고스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반대 로 그것은 로고스 중심주의를 확인시키고, 로고스 중심주의 안에 서, 또 로고스 중심주의 덕분에 만들어진다. 이것은 그 보편 언어 에 대한 헤겔의 비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우리가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는 이 두 가지 운동의 공범 관계이다. 무한주의적 신화, 로고스 중심주의, 특정한 기술주의 tec hnic i s m e 사이에는 특정한 역사적 시대 내부에 존재하는 모종의 심오한 통 일성이 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하려고 시도하는 근원적, 음성 이 전의, 메타 음성적 문자는 기계를 통한 음성 언어의 〈초월〉로 유도 된다. 로고스 중심주의는 〈상대적〉 의미가 아니라 본래의 의미에서 인 종 중심주의적 형이상학이다. 그것은 서구의 역사와 연계되어 있 다. 보편 기호학을 가르치기 위해 중국식 모델을 참조할 때, 잠시 겉으로만 라이프니츠는 그러한 인종 중심주의적 형이상학을 정지시킬 뿐이다. 이 모델이 자기 중심적 표상 rep re senta t i on domes tiq ue 으 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15) 거기서 결핍을 지적하고 수정이 필요 한 것들을 정의하기 위해서만 그 모델을 찬양할 뿐이다. 라이프니 츠가 중국의 한자에서 빌려오려 한 것은 그 자의성, 즉 역사에 대 한 한자의 독립성이다. 이 자의성은 라이프니츠가 한자에 해당된다 고 생각한 비쉰 Rj 적 본질과 핵심적 관계가 있다. 한자는 〈벙어리 가 창안〉 (Nouveaux essa i s) 했을 것이다. 말 lo qui이란 분절된 목소리로서 한 사람의 사고 기호를 만들어낸다. 글을 쓴다는 것은 종이 위에 항구적인 모습으로 그것을 남기는 것이다• 중국의 한자에서 보는 것처럼 문자가 반드시 소리로 귀결되는 것은 아 15) DE, 4 장 참조

니 다. ( Op u scules, 497 쪽) 어떤 선택도 가능한 동시에 전적으로 자의적인 몇몇 인공 언어가 있 다. 가령 중국에서 쓰이는 언어 또는 달가르누스 Geor gi us Dalga r nus7 와 체스터 Ches t er 의 고(故) 윌킨스 주교가 쓴 문자 등이 그러한 것들 이다 .161

16) Nouveaux essais . m, II, §1. 달가노는 1661 년 다음과 같은 제목의 저서를 썼다. 윌 킨스에 대해서는 이 책 앞부분과 쿠투라가 편집한 『 라이 프니츠 선집 』 과 DE의 이곳저곳을 참조할 것 . 순수 제도와 순수한 자의성 으로 이루어진 문자나 언어는 하나의 체계로 단번에 창안될 수 있다. 이 점은 두클로 Duclos, 루소 , 레비 AE 쿠 A 이전에(이 책 참조) 라이프니츠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유명한 수학자이며 많은 언어에 통달하였던 골리우스 Go li us 의 생각도 그러했다. 죽 그들의 언어는 인위적이다. 다시 말해 한자는 단번에 몇몇 명석한 사람들이 중국이라 부르는 커다란 나라에 사는 수없이 많은 민족들간에 의사 소통을 위해 창안했다• 비록 이 단어는 지금 오랜 사용 끝에 변질되었지만말이다.〉(ill. I , §1)

「부베 Bouvet 신부 8 에게 보내는 편지」 (1703) 에서 라이프니츠는 이집트의 통속적, 감각적, 알레고리적 문자와 중국의 철학적, 지성 적 문자를 구분하고 있다. ……중국의 한자는 더욱더 철학적이며 더욱더 지적인 성찰에 기초한 것처럼 보이며 그 수와 질서 및 관계가 그 점을 보여준다. 어떤 물체 와도 닮은 점 없는 초연한 고립된 획들이 있을 뿐이다. 이를 통해 라이프니츠는 좀더 우월한 문자를 착안하였으며, 그 에게 있어서 한자는 그것에 비하면 초보 단계에 불과하다. 동시에 이런 수리 계산은 중국 문자보다도 우월한 보편 문자를 만들

3 실증 과학으로서의 문자학(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163

어낸다. 왜냐하면 각자 자기 모국어로 알아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불과 수초 만에 터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자를 능가하며. 사물의 다 양함에 따라 무한대의 글자들을 요구하는 한자를 충분히 익히려면 한 사람의 일생을 바쳐야 하는 대신에 그것은 사물의 질서와 연관성에 따 라 연결된 글자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17)

17) T. Gerhardt 편, Die philos op hisc he Schri ften 7 권, 25 쪽과 DE, 67 쪽. 이 문제에 대해서는, R. F. Merkel. Leib n iz und ,Ch in a , Leib n iz zu sein e m 300 Geburts t a g { l9 52). 한자와 중국 사상에 관해 부베와 교 환한 서간에 대해서는 위의 책 18-20 쪽과 Baruzi, Leib n iz( l909), 156- 165 쪽.

따라서 한자에 대한 개념은 일종의 유럽적 환각 상태로 작동했 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작동은 엄밀한 필연성에 복종 했다. 아울러 환각은 무지보다는 그릇된 지식에서 기인한다. 환각 은 한정되기는 했지만 현실적 지식에 의해 깨지지 않았다. 실제로 유럽인들에게는 한자에 관한 현실적 지식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편견〉, 죽 〈상형 문자에 대한 편견〉은 동일한 맹목성 효과를 발생시켰다. 인종 중심주의적인 무시와 경멸을 받으 며 진행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혹막에 가린 것은 과장된 찬탈의 형식을 띤다. 우리는 이 도식의 필요성을 아직 다 확인하지 못했다. 우리가 사는 20 세기도 거기에서 해방되지 않았다. 인종 중심주의가 급히 또 갑자기 전복될 때마다 그 안쪽은 더욱더 견고하게 구축되며, 그 대단한 볼거리 뒤로 자기 것에 혜택이 될 것들을 추출하기 위한 말없는 노력이 은폐된다. 그래서 존경받을 만한 키르케 신부에게는 서구에 이집트학의 문을 연 천재성이 있다 .18) 하지만 그가 〈숭고한〉 문자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일체의 과학적 해독을 거 부한다• 다비드는 『곱트와 이집트 서설 Prodromus Cop tus siv e

18) DE, 3 장.

ae gyptia cus 』 (1 636) 을 상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쓴다. 부분 부분들을 살펴볼 때 이 책은 이집트 연구의 첫번째 선언서이 다. 왜냐하면 저자는 거기서 고대 이집트 언어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발견 도구가 그에게 제공되었다.) 하지만 이 책 은 상형 문자들을 해독하려는 일체의 기획을 도려낸다.(『복원된 이집 트 언어 Ling u a aeg yptiac a T f! S tit u t a 』 )19) 여기서 동화(同化)에 의한 그릇된 이해 방식은 라이프니츠의 경 우와 같이 합리주의적이며 수리적인 계산 유형은 아니다. 그것은 신비주의적이다. 『서설 Prodromus 』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을 수있다. 상형 문자는 문자의 일종이지만 철자로 구성된 단어, 즉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사용하는 규정된 단어와 품사로 구성된 단어들은 아니다. 상 형 문자는 훨씬 더 훌륭하고 숭고하며 더욱더 추상성에 가까운 상징들 의 천부적 조합 내지 유일 수준으로 단 한번에 uno int ui t o 현자의 머 릿속에 고차원적 개념들의 복잡한 추론과 자연 또는 신성의 한가운데 숨은 작은 신비조차 일깨워준다 .2 0) 따라서 합리주의와 신비주의 사이에는 일정한 공범 관계가 있다. 타자(他者)의 문자는 매번 자기 중심적 도식에 의해 탐구된다. 바 19 ) DE. 43-44 쪽. 20) 드리오통 Dr i o t on 이 인용하고 번역한(DE , 46 쪽 참조) Prodromus. 260 쪽 참조. 키르케의 다원적 문자 표기 기획은 Polyg rap hia nova et univ e rsali s e x combin a to r ia arte de t ec t a(1663) 를 참조할 것 룰레 Lulle. 베셔 Becher, 달가노, 윌킨스, 라이프니츠의 관계에 대해서는 DE. 61 쪽 이하 참조.

슐라르 를 따라 〈인식론적 단절〉 9 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특히 프 레레와 바르부르통 덕분에 조작된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이 각각 한 자와 이집트 문자를 예로 들어 그렇게 조작하려고 결단할 수 있게 했던 세심한 해결 과정 de g a g emen t을 추적할 수 있다. 프레레는 라이프니츠와 보편 문자의 기획울 존경하면서도 거기에 연루된 한 자의 표상을 산산 조각낸다. 〈한자는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는 철 학 언어가 아니다……. 중국인에게는 결코 그러한 문자가 있었던 적이 없다.〉 2 1)

21p) a rRtiec ful elixe i or ns su rs uJers Jfeos n dperm ine cn ipts e sd eg eJ n'eec rrai tuuxr ed ech iJn'ao ri st e (d l'7e c1r 8i r)e. 6e2t 9 쪽e.n 또 Essai sur la chronolog ie ge nerale de J'Ec ri tur e 참조 이 책은 〈성 서에 영감을 준 종교적 측면은 생략하고〉 〈 유대교의 역사〉 를 다룬다(DE , 80 쪽 이하) .

그러나 프레레는 상형 문자에 대한 편견에서 그 정도까지 벗어 나지는 못했다. 키르케 신부를 호되게 비판하면서 바르부르통은 이 편견을 파괴하고 있다 . 22 ) 이 비판에 흐르는 유감조의 논조는 그 효 율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22) Essai sur Jes hie r ogJ yph es des Eg yptien s, ou J'on voit J'O rig ine et le Prog res du La nga g e et de J'Ec rit ure . J'An ti quite des Sc ien ces en Eg ypte, et J'O rig ine de culte des an ima ux, avec des Observati on s sur J'An ti quite des Hiero gJ yph es Sc ien ti fiqu es, et des Remarqu es sur la Chronolog ie et sur la pr em ier e Ecrit ure des Ch ino is ( 1744). 이것은 The dev ine lega ti on of M oses(l737- 1 741) 한 토막의 프랑스 번역 제목이다. 우리는 이 책이 콩디악 Cond ill ac, 루소. 『 백과 사전 Ency c lo pedi e 』 의 공동 집 필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아볼것이다.

이렇게 해방된 이론의 장에서 여러 가지 해독을 위한 과학적 테 크닉들이 바르텔레미 B art hele my 10 와 샹폴리옹 Cham p o lli on 11 에 의 해 정확하게 완수된다. 바로 이때 문자 언어와 음성 언어 사이의 관 계에 대한 체계적 성찰이 탄생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커다란 어 려움은 역사적인 동시에 체계적인 방식으로 동일한 문자 표기 코

드에서 비유적 , 상징적, 추상적, 음성적인 요소들의 유기적인 공존 cohab it a ti on 을 파악하는 일이다 . 23) 과학과 인간이라는 명칭 문자학은 과학으로 가는 확실한 길로 진입했는가? 알다시피 문 자 해독 기술은 가속화된 리듬으로 진보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24) 그러나 문자에 관한 일반적인 역사 속에서 체계적 분류에 대한 배 려는 늘 단순한 기술(記述) 쪽으로 향했다. 그 역사들은 이론적 개 념들에 의해 오랫동안 지배된 채로 남아 있게 될 것이며, 우리는 그 이론적 개념이 아직 커다란 발견에 이르지 못했음을 직감한다. 여기서 말하는 발견이란 로고스와 문자 사이의 관계들이 규정하는 상황 속에서 전적으로 정렬된 , 우리들의 철학적 개념들에 있는 가 장 확실한 토대들을 뒤흔들어놓을 뻔했던 발견들이다. 위대한 문자 언어에 관한 대역사들은 모두 분류적이고 체계적인 기획의 설명으 로 서 두를 연다. 그러나 오늘날 야콥슨이 슐레겔 Schle g el12 의 언어 유형론 시도 이후 여러 언어들에 대해 언급한 것을 문자 언어의 영역으로 옮길 수 있을 것 같다.

23) DE. 126-131 쪽. 24) E. Doblhofe r , Le dechif frem ent des ec rit ures(1959) 와 EP. 352 쪽참조.

유형론의 문제들은 오랫동안 사변적이고 선(先)과학적 성격을 띠어 왔다. 여러 언어들의 발생론적 분류가 큰 폭으로 진보한 반면에 유형 론적 분류는 아직도 미진한 상태이다.(앞의 책, 69 쪽)

문자 사학자들이 사용하는 개념들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특정 이론적 기구의 엄격성 또는 차별성을 심각하게 비판할 수 있는 것 은 무엇보다 그 작업을 유도하는 그릇된 증거들을 식별했을 때에 만 가능하다. 그 증거들은 우리 개념틀의 가장 심오하고 가장 오래 된, 또 외관상 가장 자연적이고, 가장 덜 역사적인 층위에 속한다 는 점에서 더욱더 효율적인 것들이다• 이때 그 층위는 비판에서 가 장 잘 빠져나간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비판을 지탱하고, 비판에 자양분을 공급하며, 비판에 정보를 주기 때문이다 . 그것은 바로 우리의 역사적 토양 그 자체이다. 문자에 대한 모든 역사와 유형론은 도처에서 프랑스어로 된 최 초의 『고대 문자사 Hi st o i r e de J'ec rit ur e dans J' an tiq u it e』 (1 892) 를 쓴 베르제 P. Ber g er 가 표명 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유사 한 양보를 접하게 된다. 〈거의 모든 부분에서 역사적 사실들은 구 분과 일치하지 않으며, 구분은 이론적으로만 적절할 뿐이다.〉 여기 서 말하는 구분들이 란 바로 음성 문자와 상형 문자, 음성 문자와 알파벳 문자 사이, 이미지와 상징 사이의 구분을 말하는 것이다• 음성 모델에서 영감을 받은 문자의 도구주의적, 기술적 개념도 마 찬가지이다. 그것은 목적론적 환상에서만 음성 모델에 상응할 것이 며, 비서구적 문자들과 첫번째 접촉한 것만으로도 그 음성 모델은 무너져야 했다. 그런데 이 도구주의는 도처에서 다른 것과 연루되 었다. 어디에서도 그 파급 효과와 함께 도구주의를 코엔만큼 체계 적으로 표명한 적이 없다. 언어는 일종의 〈도구〉이며 문자는 〈이 도구에 덧붙은 것〉 25) 이다. 음성 언어에 대한 문자 언어의 의재성 , 25) M. Cohen, 앞의 책, 2 쪽. 다비드는 이미 인용된 저서에서 이 같은 도구 주의를 비판한다. 도구주의(형이상학에 대한 종속을 과장할 수 없을 것이 다)는 자주 언어의 본질에 대한 언어학적 정의에 영감을 준다 . 그러한 정 의는 일종의 기능, 더욱더 심각한 것은 그 내용 또는 주체의 바깥쪽에 있 는 기능과 동화된다는 것이다 . 마르티네는 나름대로 언어의 정의를 〈도구〉,

〈연장〉 등으로 파악하는데, 그가 인정하는 이러한 정의의 〈은유적〉 본질은 정의 자체를 문제시하고 도구성의 의미와 작동의 의미, 의미의 작동에 대 한 물음을 새롭게 할 것이다 (Elemen t s de Jing uist i qu e gen erale, 12- 14, 25 쪽 참조).

사고에 대한 음성 언어의 외재성, 일반적으로 시니피에에 대한 시 니피앙의 외재성을 이것보다 더 잘 기술할 수 없을 것이다 . 이렇듯 형이상학적 전통 안에서 고찰하는 경우, 마르크스주의적 노선을 취하는 언어학(또는 문자학)이 지불해야 할 대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똑같은 속성이 도처에서 인지된다. 로고스 중심적 목적론(중복적 표현), 자연과 제 도의 대립 , 상징 기호 이미지 등이 벌이는 차이들의 놀이, 표상에 대한 소박한 개념, 감각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 영혼과 육체 사이 의 무비판적 대립, 고유한 육체와 감각적 기능의 다양성 등에 대한 객관주의적 개념(말하는 사람이나 기록하는 사람들이 구비한 기구로 간주된 〈 오감 〉 ), 페브리에 J. Fevr i er 나 코엔이 제안한 분류와 그 분류에 대립하는 토론에서 결정적 역할을 맡은 분석과 종합, 추상 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의 대립, 가장 고전적인 철학적 성찰이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개념에 대한 개념, 필연적으로 이 개념들을 좀 더 꼼꼼하게 사용하는 것과 그것을 주제로 삼는 연구들을 위해 일 정한 고찰을 요청하게 될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참조 , 26 ) 철학, 언 어학, 기호학이 희박하고 미약하게 밝혀주는 기호 개념 등이다• 때 때로 문자사와 언어 과학 사이의 경쟁은 공조 체제보다는 적대적 인 관계로 체험된다. 그러한 경쟁이 기정 사실이라고 가정하자. 이 렇듯 문자 언어의 구분에서 중심 역할을 맡는 〈단어〉 개념과 마찬 가지로 〈종합적 문자〉와 〈분석적 언어〉 사이에서 페브리에가 조작 하는 커다란 구분에 대해서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그 문 제는 언어학 차원의 것이며 여기서 우리는 그 문제를 다루지 않을

26) M. Cohen, 앞의 책, 6 쪽 참조.

것이다.〉(앞의 책, 49 쪽) 더욱이 페브리에는 언어학과 소통이 단절 된 것도 다음과 같은 말로 정당화한다. 그것은 특수한 언어[수학]로 자연 언어와 어떤 관계도 없다. 또한 우리는 일종의 보편 언어, 죽 수학을 통해 언어(나는 언어학자들에 일 격을 가한다)가 현대 사상의 몇몇 형식을 설명하기에는 절대적으로 역 부족이라는 점을 직시한다. 바로 이 순간에, 그처럼 잘못 이해된 문자 는 언어 활동 lan g a g e 의 종노릇을 한 후에야 언어의 한자리를 차지한 다. (EP . 349 쪽) 신임을 받아온 이러한 모든 전제 조건과 대립이 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유일하고 동일한 구조의 내부에서 그 조건과 대립을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순환시킨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부분을 건드리지 않고) 문자 이론에 따라서 프레레와 바르부르통이 조작하고 있는 것과 유사한 초과학적이며 인식론적 해방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실증적 발견〉과 형이상학 적 〈해체〉가 (그 모든 개념 안에서) 서로를 세심하게 꾸준히 통제 하는 일정한 성찰울 시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성찰 없이는 일체 의 인식론적 해방은 단지 실질적 편리함에 불과하거나 비판이 손 도 못 대는 토대들에 대해서 개념적 단순화만을 제안하는, 환상적 이거나 한계가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겔프I.J. Gelb 의 탁월한 시도가 노출시키는 한계이다(앞의 책). 엄청난 진보를 이루 어내고, 일정한 문자학적 과학성을 정립하고 단순하며 융통성 있고 다루기 쉬운 개념들에 대한 통합 체계를 창조하려는 기획(가령, 상 형 문자 같은)과 부적합한 개념들을 배제했는데도 조금 전 우리가 상기한 개념적 대립들 대부분은 무사히 계속해서 작동된다. 하지만 우리는 최근의 연구 업적들을 통해 언젠가 더 이상 다른

인문 과학의 개념들이나 (거의 같은 것을 의미하지만) 전통적 형이 상학의 주개념들을 수용하지 않게 될 문자학의 의연이 무엇이 될 것인가를 예상한다. 또 비록 이러한 통로를 열어주는 저서 속에서 그 개념 과정이 과감하고 확실하며 신랄한 비판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 정보와 정보 처리의 풍성함과 참신함을 통해서 그 점 을 예상한다. 여기에서 예시되는 것은 그라마톨로지가 인문 과학들 가운데 하 나여서도 안 되고 다른 과학들의 틈바구니 속에 끼는 주변 과학이 어서도 안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인간 과학 중 하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라마 톨로지의 고유한 질문으로 인간이란 명칭에 대한 물음이 우선적으로 제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 인간 개념의 단일성을 이끌어낸다 는 것은 소위 〈문자가 없는〉, 〈역사가 없는〉 민족에 대한 옛 관념을 포기해야 함을 뜻할 것이다. 르루아구르한A. Lero i -Gourhan13 은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공동체를 넘어서서 인간이란 명칭 과 문자의 힘을 부정한다는 것은 곧 유일 무이하면서도 동일한 입 장이다. 사실 〈문자 없는〉 민족들은 특정한 문자 유형만이 결여되 었을 뿐이다. 이 런저 런 특정 한 기술 양식 tec hniq u e de consig - na ti on 에 근거해 문자라는 이름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인간에 대 한 선과학적 비전을 가장 잘 정의해 주는〉 동시에 〈많은 인간 무리 가운데 그 구성원들이 자신의 인종 무리를 지칭하는 유일한 단어가 ‘인간'이란 단어이도록 강제하는 인종 차별주의이다.〉 (GP, 11, 32 쪽과 그 밖의 여러 쪽) 그러나 인종 차별주의를 비난하고, 문자 언어의 사용 유무에 따 라 인간학적 통일성을 정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구르 한은 더 이상 이렇게 일방적으로 문자 표기의 단순한 가능성에 따 라 인간과 인간 모험의 통일성을 정의하지 않는다. 문자보다는, 또

생명의 역사에서 하나의 단계 또는 하나의 분절(우리가 차이/지연 이라고 부르는 것)로서 습관적으로 인간과 다른 유기체들을 구별하 는 데 사용하는 개념들(본능과 지적 두뇌, 음성 언어, 사회, 경제 등 의 유무)의 힘을 빌리기보다는 구르한은 차라리 프로그램 개념 자 체에 호소한다. 프로그램이란 말은 인공 두뇌학적 의미에서 이해해 야 할 터인데, 인공 두뇌학 자체가 긴장과 이완이라는 이중 운동의 통일성으로서 흔적의 여러 가능성이 전개하는 역사로부터 지각될 수 있다. 이 운동은 〈지향적 의식 consci en ce i n t en ti onnelle 〉의 가능성을 훨씬 능가한다. 지향적 의식은 문자를 있는 그대로(죽 비­ 현전의 새로운 구조에 따라서) 나타나게 하는 일종의 발현이며, 엄 밀한 의미에서 문자 체계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아메바 나 아네리드 annel i de 의 행동 방식을 규정하는 프로그램화된 〈 유 전자 기록〉과 〈짧은 연쇄체〉에서부터 알파벳 문자를 넘어 로고스 와 호모 사피엔스의 차원으로 옮겨갈 때까지 문자의 가능성온 엄격 하게 독창적인 시각 문자 수준, 유형 등에 따라 그 역사의 운동을 구조화한다 .27) 그러나 에크리튀르라는 일반 개념을 생각지 않고서 는 그런 것들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문자에 대한 일반 개념은 비 환원적이며 손으로 취할 수 없다. 만약 구르한의 위험 천만한 표현 을 받아들인다면, 〈기억의 해방〉, 이미 시작된 흔적의 좀더 커다란 외면화에 대해 언급할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은 소위 〈본능적〉 행동 양식들의 초보적 프로그램부터 전기 공학의 컴퓨터 파일과 자동 판독기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차이/지연은 물론 예비로 보관할 m i se en reserve 가능성을 확대시킨다. 이 가능성은 동일한 운동에서 , 소위 의식적인 주관성과 그 로고스와 그 신학적 속성 등을 성립시 키는 동시에 지워버린다. 문자 언어의 역사는 얼굴과 손 14 사이의 관계들 속에서 우연히 27) GP . II, 12 쪽 이하, 23 쪽 이하, 262 쪽 이하 참조.

나타난 문자를 토대로 대두된다. 여기서는 끊임없이 그 도식을 반 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인정하는 동시에 우리가 얼굴과 손, 시선, 말과 제스처 등에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는 문자사가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자. 문제의 요건은 이러한 일 상적 지식을 깨뜨리고 문자의 역사 속에 손과 얼굴의 의미를 각성 시키는 일이다. 구르한은 음성 언어에서 청각-음성적 체계를, 문자 언어에서 손을 해방시키는 손의 중추인 경수축성의 완만한 변혁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 28) 이 모든 기술 묘사에서 문제의 핵심이 그 운동의 기원과 가능성, 테크네, 방향성 일반의 기원과 가능성을 되 찾으려는 것일 때, 기계적, 기술적, 목적론적 언어를 피하기는 힘 들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본질상 불가능 하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담론에서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하나의 담론과 다른 담론의 차이는 파산이 예고되거나 이미 그것에 예속 된 개념들 내부의 주거 방식일 뿐이다. 그 개념틀에서, 그리고 이 미 그것 없이도, 제스처와 음성 언어, 실체와 언어, 도구와 사고 등의 통일성을 다시 간파하려 해야 하거니와, 위에서 열거한 것들 의 기원이 분절되기 이전에, 또 그러한 심오한 통일성이 혼동 상태 에서 일어나기 이전에 그 포착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본래의 의미 작용을, 그것들이 서로 대립되는 체계의 궤도 속에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체계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궤도에서 벗어나 exorb it an t 어느 정도는 그 의미와 가치를 초과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인간 an t hro p os 의 표상에 접근한다. 손으로 쓰는 시각 문자와 연결된 언제 깨질지 모르는 균형 ,29) 이 균형은 서서히 위협받는다. 최소한 〈더 이상 ‘인간'이라 할 수 없는 ‘미래의 인간' 을 탄생시키는 ‘어떤 커다란 변화'도 손과 치아의 유실 없이, 따라 28) I. 119 쪽 이하. 29) 위의 책, 161 쪽 이하.

서 직립의 유실 없이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치아 없이 걸어다 니면서 버튼을 누르기 위해 앞쪽의 수족에 남아 있는 것을 사용하 는 인류의 모습이 전혀 상상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30)

30) 위의 책, 183 쪽. 또한 우리는 포실롱 H. Foc ill on 의 Elog e de la ma in 과 장 브롱 Je an Brun 의 La main et J' es p ri t를 참조했다. 다른 맥 락에 서 우리는 다른 곳에서 문자의 시대 ep o qu 혀룹 직립 존재 e tr e-debou t의 지 연 susp ensi o n 으로 지 칭 했다 (Force et sig nifica ti on et La pa role sou fflee , L'ecrit ure et la dif fere nce) .

이 균형을 위협하는 것은 늘 상징의 선조성에 손상을 주는 것과 혼동된다. 전통적 시간 개념, 세계와 언어의 조직 동이 서로 연결 되어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특히 음성 문자는) 비선조적 문자 언 어의 과거에 뿌리박고 있다. 그 과거를 무너뜨려야 했고, 이를테면 여기서는 그것을 테크닉의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성 공은 위험하고 초조한 세계에서 가장 큰 안전과 자본화의 가능성 을 확보하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 한번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이 늘 있어 왔고, 선조화를 지향하는 모든 것을 억입히는· 일이 있었다. 무엇보다 르루아구르한이 〈신화 문자 rn yt ho- gr amme 〉라고 부르는, 그것의 상징을 다차원성에서 열거하는 문자에 대한 억압이 다. 거기서 의미는 논리적 시간의 영속성과 순서 또는 소리의 돌이 킬 수 없는 시간성에 종속되지 않는다. 이러한 다차원성은 역사룰 동시성에서 마비시키지 않는, 역사적 경험의 또 다른 층위에 해당 하며, 반대로 직선적 사상을 역사의 환원으로 간주할 수 있다. 또 다른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란 단어는 늘 현전 의 전개에 대한 직선적인 도식과 연결되었고, 현전의 선은 직선 또 는 원을 그리며 본래의 현전에 궁극적 현전을 가져다준다. 같은 이 유로 다차원적 상징 구조는 동시성의 범주에서는 주어지지 않는다. 동시성은 두 개의 절대적 현전, 두 개의 현전하는 점 또는 순간을 정리 정돈하며, 따라서 그것은 직선적 개념으로 남아 있다.

선조성화li neari sa ti on 란 개념은 여러 문자를 분류하고 그 역사 를 분류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개념들(회화 문자, 상형 문 자, 철자 등)보다 더욱더 효과적이며 충실하고 내적이다. 르루아구 르한은, 특히 상형 문자와 희화 문자 사이의 관계에서, 소위 시각 문자의 〈리얼리즘〉에 대한 편견 이상의 것들을 강력히 비난하면서, 신화 문자에서 직선적 문자가 그 회로의 차단을 표시하는 모든 것, 즉 기술(특히 시각 문자 기술), 예술, 종교, 경제의 통일성을 상기 시킨다. 이러한 통일성과, 통일성의 또 다론 구조에 다시 접근하기 위해서는 〈직선적 문자로 점철된 사천 년 동안의 시간〉 31) 의 침전 물을 제거시켜야 한다.

31) T. I. 4 장. 저자는 거기서 특히 다음 사실을 보여준다. 〈농업의 도래가 그 전단계의 개입 없이 이루어질 수 없듯이 문자의 도래는 문자의 전무(全 無) 상태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위의 책, 278 쪽) 〈상형 문자는 회화 문 자에 앞선다.〉(위의 책, 280 쪽)

내부로부터 문자 표기의 음성주의를 제한했던 이유 때문에 직선 적 규범은 결코 부과될 수 없었다. 우리들은 지금 그 이유를 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제한하는 것의 가~칸j과 동시에 출현했고, 그 것들이 끝냈던 것을 열고, 그것들을 이미 명명했다. 은밀성, 차이, 공간화. 따라서 직선적, 규범의 생산은 이 한계들을 강조했고, 상 징과 언어 개념들을 표시했다. 르루아구르한이 대단히 폭넓은 역사 적 층위로 기술한 바대로 선조화의 진행 과정과 소쉬르의 선조성 개념에 대한 야콥슨의 비판을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특권이 무엇이든 간에 〈선〉이란 일종의 특수 모델을 표상하는 데 불과하 다. 이 모델은 모델로 생성되었고 모델로는 접근 불가능하다. 만약 언어의 선조성이 (지금이라는 형식과 연속적, 직선적 또는 원을 그리 는 운동의 이상형이 지배하는, 동질적인) 시간성에 대한 통속적, 세 속적 개념(하이데거는 이 개념이 내부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헤 겔에 이르기까지 존재론 전부를 지배함을 보여주고 있다)과 함께 한

다는 사실을 기정 사실로 인정한다면, 문자에 대한 성찰과 철학사 의 해체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선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모델은 철학이 고유한 자기 역 사의 안쪽에 대해 눈을 크게 뜨고도 볼 수 없었던 것 자체이다. 선 조성(다차원적인 상징적 사고의 손실 또는 부재가 아니라 억압이다 ) 32) 이 그 억압을 완화시키는 순간에 이러한 어둠은 약간 빛을 머금는 다. 왜냐하면 선조성은 오랫동안 선호해 온 테크닉과 과학적 경제 룰 불모화시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래전부터 그 가능성 은 경제, 기술, 이데올로기의 가능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이러 한 연대성은 문자 기록지들을 소유한 계층에 의한 축재, 자본화, 침전 과정, 사회 계층 형성화, 이데올로기 형성 과정에서 나타난 다 .33 ) 비선조적 문자의 실질적 재출현은 이러한 구조적 연대성을 단절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것은 그 본질을 심오하게 변형시킨댜

32) 아마도 〈다차원의 상징적 사고의 상실 〉 과 〈 선조화된 언어에서 벗어나는 〉 사고에 대해 르루아구르한의 몇 가지 주목을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 다(I, 293-299 쪽) . 33) EP. 138-139 쪽과 GP. I, 238-250 쪽 참조. 〈 최초의 도시가 전개 발전 된 것은 단지 불을 다루는 기술자의 출현에 해당하지만은 않는다 …… . 문 자는 금속술과 동시에 태어난다. 그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 …. 〉 (I, 252 쪽) 〈농업 자본주의가 성립되는 순간에 바로 그 자본을 문자로 된 회 계에 고정시키는 수단이 나타나고, 아울러 사회적 서열화가 확고 부동하게 되는 그 순간에 문자는 최초의 족보를 구성한다.〉(위의 책, 253 쪽) 〈 문자 의 출현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다 . 신화적 표상 체계 속에서 수천 년간 성 숙한 후에, 금속과 노예 제도와 더불어 사고의 선적 표기가 도래한다 (6 장 참조). 그 내용은 우발적이지 않다.〉(II, 67쪽, 또한 161-162 쪽 참조) 특히, 자본화와 문자 사이의 구조적 연대성이 오늘날에는 더 많이 알려지 고 기술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지되었다. 특히 루소, 가볼렝 Court de Gabelin , 엥겔스 En g els 둥은 이미 그것을 인지했다.

직선적 문자의 종말은 바로 책의 종말이다 . 34) 비록 오늘날까지

34) 따라서 직선적 문자는 〈수천 년 동안 집단 기억을 보존하는 자기 역할에 서 독립해 일차원에서 전개됨으로써 철학과 과학 사상이 나오는 분석 도구

를 성립시켰다. 사고의 보존은, 짧은 시간에 신속한 처리 능력의 장점을 간 직하는 책 속에서와 다르게 생각될 수 있다. 전기 선별에 의한 거대한 ‘녹 음 도서관'은 가까운 미래에 미리 선별되고 순간적으로 복원되는 정보를 인도할 것이다. 수세기 동안 계속해서 점차적으로 축소되어 왔지만 독서는 그 중요성을 계속 간직할 것이다. 그러나 십중괄구 문자[우리는 그것을 직 선적 표기라는 의미에서 쓴다]는 자동 인상으로 이루어진 청취 전화 기구 로 대체되어 곧바로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이 같은 상황을 손의 음성적 복종i n fe oda ti on 의 이전 단계로 복원된 것으로 보아야 할까? 나는 차라리 손의 퇴보 (60 쪽)라는 일반적 현상의 한 양상이며 새로운 ‘해방'이라고 보 고 싶다. 합리적 추론, 이상적이며 다차원적 사고로 복귀하는 것이 나타낼 장기적인 파급 효과에 관한 한 그 결과는 현재로서는 예측 불허이다. 과학 적 사고는 인쇄 절차에서 뻗어나가야 하는 필연성에 의해서 제약받는다 . 만약 어떤 방법이 서로 다른 장(章)들의 주제가 그 일체의 파급 효과를 동 시에 제공하게끔 책을 소개한다면, 저자와 사용자들은 엄청난 이점을 갖게 될 것이다. 어쨌든 과학적 추론이 문자의 소멸과 더불어 아무것도 상실할 것이 없다면, 철학, 문학은 자신의 형태가 진화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별로 유감스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쇄는 홍미로운 원형의 사고 형태를 보존할 것이며, 알파벳 문자 시기 동안에 사람들은 그 형태를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형태들은, 톱이 부싯돌에 대해 갖는 위치 처럼, 오래된 형태와 비교된다. 톱은 부싯돌에 비해 절단력이 더 강한 것이 아니라 보다 다루기 쉬운 연장이다. 수천 년간 우위를 갖게 될 전환으로서 문자는 두뇌 작동은 변질시키지 않고 하부 구조 속에서 통하게 될 것이 다.〉(GP , 2 권, 261-262 쪽; EP, 결론 참조)

책이라는 형식 속에서 그럭저럭, 문학적이건 이론적이건 새로운 글 쓰기가 새겨지기는 하지만. 문제의 관건은 책의 겉표지에 새로운 글씨체를 새기기보다는 이미 책 속에서 행간에 씌어진 것을 극적 으로 읽는 것이다. 바로 이런 연유로 선 없이 글 쓰기를 시작하면 서 또 다른 공간 조직에 따라 기나긴 문자를 다시 읽는다. 만약 요 즘 책 읽기 문제가 과학의 전면을 차지한다면, 그것은 바로 문자의 두 시대 사이에 놓인 지연 때문이다• 우리들은 쓰기를, 즉 다르게 쓰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다른 식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 한 세기 훨씬 전부터 철학, 과학, 문학의 이러한 초조함을 직시 할 수 있었거니와 그 모든 혁명은 점차적으로 직선적 모델을 파괴

시키는 동요로 해석되어야 한다. 서사적 모델 15 의 의미를 분명히 해보자. 오늘날 생각되는 것은 주판기 도움으로 현대 수학을 가르 치려는 조작을 모방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직선과 책으 로는 씌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적합성은 근대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비난받고 있다. 다차원성 과 비선조화된 시간성에 접근하는 것은 단순히 〈신화 문자〉로 후 퇴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직선적 모델에 종속된 일체의 합리성을 신화론의 또 다론 형식 또는 다른 시대로 나타나게 할 뿐이다. 따라서 문자의 성찰에서 예지되는 초합리성 또는 초과학성 은 과학에 대한 전통적 관념에 부응할 수 없을 만큼 인간 과학에 더 이상 갇힐 수 없다. 그것들은 유일 무이하며 동일한 입장으로 인간, 과학, 직선을 넘어선다. 더욱이 이 명상은 하나의 주변 과학의 한계들 속에서 지속되기 에는 더 요원한 일이다. 기원들의 수수께끼와 연계성 그것이 필상학gr a p holo gi e16 이라고 가정하자. 심지어 사회학, 역 사학, 인종학, 정신 분석학 등에 의해 참신하고 풍성하게 되는 필 상학말이다. 개인적 글씨체는 글 쓰는 이의 정신적 특성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민족적 필체는 어느 정도까지는 민족들의 집단적인 정신의 특수성을 연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35) 35) XXlle Semain e de syn the se, 이 세미나의 보고문들은 L'ecri tur e et la ps yc h olog ie des pe up le s 속에 수록되었는데, 그것들은 코엔 Marcel Cohen(La gran de inv enti on de l'ecr it ure et son evolu ti on) 이 말한

이러한 언급의 지배 아래 놓인다. 그러나 이 학회가 진행되는 동안 순간 순간마다 제안된 풍성한 발표 논문은 필상학적 논지를 넘어서서 더 큰 목 표물을 조준한다. 코엔 자신은 그러한 임무의 어려움과 또 그러한 임무가 시기 상조임을 인정한다. 〈분명, 우리는 여러 민족들의 필상학이 전개되는 노선 속에 들어갈 수는 없다. 그것은 너무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다. 죽 차이가 있다는 것은 기술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342 쪽)

아무리 그 기획이 합법적이라 하더라도 좀더 일반적이며 핵심적 인 문제들이 명료히 밝혀질 때 비로소 그러한 문화적 필상학은 세 상에 빛을 볼 것이요, 확실하게 착수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 필 상과 집단적 필상의 분절에 관한 한, 〈담론〉과 이른바 문자 표기 〈코드〉의 분절에 관한 한 말이다. 이 양자는 의미 작용의 지향이나 외 연의 관점 이 아니 라 스타일과 공시 conno t a ti on 의 관점 에서 고 려된댜 문자 표기 형식과 다양한 실체들, 문자 표기 실체들의 다 양한 형식(질료. 나무, 밀랍, 가죽, 돌, 잉크, 금속, 식물성) 또는 수 단(점, 붓 등)의 분절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기술, 경제 또는 역 사적 수준의 분절에 관한 한(예컨대, 문자 표기 체계가 성립된 순간 (이는 똑같은 것이 아니다)에, 그리고 문자 표기 스타일이 고정된 순 간에), 체계 내부에서 스타일의 여러 가지 변형의 한계와 의미에 관한 한, 하나의 서법이 그 형식과 실체에서 종속되는 모든 투자에 관한 한그러하다. 이 마지막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정신 분석 유형의 연구에 일정한 특권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대상의 객관성과 가치의 근 원적 성립(이 성립은 이론적, 형식적 존재론과 일반적 대상의 객관성 의 과학에서 파생되지 않은 범주들로 좋고 나쁜 대상들의 성립을 적 중한다)을 적중시키는 한, 정신 분석은 (비록 그 이름이 그렇게 생 각하게 할지는 몰라도) 심리학이라는 명칭 아래 소개되지만 단순한 주변 과학이 아니다. 정신 분석이 이 명칭을 고집하는 것은, 물론

무심하게 그런 것이 아니라 일정한 비판과 인식론의 상태를 일러 주고 있댜 어쨌든, 비록 정신 분석학이 원흔적 arch i-t race 인 초월 성(말소 또는 삭제 아래)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심지어 그것 이 세속적 과학으로 남아 있다 할지라도, 그 일반성은 모든 주변 과학에게 집정관적인 의미를 가질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기에서 멜라니 클라인 Melanie Kle i n 의 연구에 따라 진행된 연구들을 염 두에 두고 있다. 『어린이의 리비도 전개 발전에서 나타난 학교의 역 할 Le role de J'ec ole dans le develop pe ment lib i n a l de l' en fan t』 36) 에 대한 시론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병원 36) 1923 년 텍스트, Essais de p s y chanal ys e( 불어본), 95 쪽 이하에 수록 됨. 그중 몇 줄을 인용해 본다. 〈프리츠 Fi·it z 가 글을 썼을 때 ecriv a it , 그 선들은 길을 표상했고, 철자는 오토바이 위에 올라, 죽 붓 위에 올라타 그 위를 달렸다. 가령 ‘i'와 ‘e’ 는 통상적으로 ‘i'가 운전하는 오토바이 위에서 함께 달리며 실제 세계에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감미로움과 더불어 서로 사랑한다. 그것들은 언제나 함께 달리기 때문에 너무나 닮은 꼴이 되어 그 사이에는 거의 어떤 차이도 없었다. 왜냐하면 ‘i'와 ‘e’ 의 처음과 끝은 똑같 기 때문이다(그는 라틴 알파벳의 소문자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i'에 작은 선이 있고 ‘e’ 에 작은 구멍이 있었던 것은 오직 가운데에서이다. 그는 고트어 알파벳의 철자 ‘i'와 ‘e' 도 역시 오토바이 위에서 굴러간다고 설명했 다. 고트어 철자와 라틴 철자를 구분지었던 것은 또 다른 오토바이 표시 같은 그 무엇이었으며, ‘e’ 와 라틴 철자 ‘e’ 의 구멍 자리에 작은 상자가 있 었다는 사실이다. ‘i' 철자는 능수 능란함과 명석함과 탁월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많은 뾰족한 무기를 갖고 있었고, 동굴 속에 살았으며, 그 동굴 사 이에는 산도 있고 정원도 있고 문도 있었다. 그것들은 남자 성기를 표상했 고, 그 길은 성교를 표상했다. 한편, ‘I' 철자는 우둔하고 서투르며 게으르 ·고r 도더시러의운 것거으리에로는 기 술먼되지었와다 .휴 지그가것 들가은득 땅쌓였 속다.의 ‘동불굴쾌한 속' 에작 은살 고집 에있서었 다그. 들은 ‘i' 나라에서 구입한 물감과 물을 범벅시켰다. 그들은 이 혼합물을 마 시고 그것을 술이라는 이름으로 팔았다. 그들은 걷기 힘들었고 삽온 뒤로 재끼고 머리를 아래로 늘어뜨렸기 때문에 땅을 팔 수 없었다. ‘I' 가 똥울 나타낸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많은 환각 역시 다른 철자들에 관련된다. 이렇듯 이중 ‘s’ 의 위치에 오직 하나의 ‘s’ 를 썼는데, 하나의 환각이 이러한 억제를 설명하고 제거할 때까지 그러했다. ‘s’ 는 자신이었고 다른 ‘s’ 는 그 의 아버지였다. 그들은 모터 보트에 함께 승선해야 했다. 그 이유는 펜이

배였고, 노트는 호수였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었던 ' s ’ 는 다른 ‘s’ 에 속하는 배에 승선했고 신속하게 호수에서 떠났다. 바로 그런 연유에서 그는 두 개 의 's’ 를 함께 쓰지 않았다. 긴 's' 자리에 그가 간단히 's’ 를 빈번하게 사 용한 것은 다음 사실에 기인한다. 긴 ‘s’ 의 일부분이 누락되었고, 그에게 그것은 ‘마치 한 사람에게서 그 코를 베어간 것과 같다.’ 이 실수는 아버지 를 거세하려는 욕망에 의해서 야기되었다. 그 오류는 이러한 설명이 있은 후 에 사라졌다. 〉 우리는 여기서 멜라니 클라인이 분석하는 유사한 모든 예 들 을 인용할 수 없다. 좀더 일반적인 가치가 있는 다음 단락을 읽어보자. 〈 프리츠처럼 에른스트에게도 학교 활동의 최종 기초가 되는 문자와 독서에 대한 억제는 철자 'l ’ 로부터 왔는데 그 철자는 그 ‘상승 ' 과 ‘하강 ’ 의 단순 운 동과 더불어 실제로 모든 문자의 토대를 구성한다(주: 베를린 정신 분석 학회 회의 중에 헤어 로르 Herr Rohr 는 중국 문자와 그 정신 분석학적 해 석의 몇 가지 예를 검토했다. 뒤에 다루게 될 토론에서 나는 우리 문자의 토대가 되는 고대 회화 문자가 특히 아이들의 환상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는 사실을 지적했다). 현재 우리 문자의 다양한 획, 선 등은 꿈과 신경 질 환이 익숙하게 만든 고대 회화 문자의 단순화, 각 개인에게 그 흔적이 남 아 있는 축약, 이동, 메커니즘 등에서 나온 단순화일 뿐이다. 펜의 성적인 상징적 의미는 이러한 예에서 나타난다. 펜의 성적인 상징적 의미는 글을 쓰는 행위 속에서(그 행위로부터 면제되면서) 유포됨을 관찰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독서의 리비도적 의미는 책과 눈의 정신력 집중에서 온다. 성 적 자극을 주는 복합 요소가 제공하는 다른 요소 역시 물론 작동한다. 독 서에서 몰래 엿보는 사실, 문자에서 노출적, 폭력적, 성도착적 경향과 같은 요소들이 그것이다. 펜의 상징적인 성적 의미의 기원에는 십중팔구 무기와 손의 기원이 있다. 책 읽기는 좀더 수동적이고 글 쓰기가 좀더 능동적이라 고 말해 두자. 생식 이전의 조직 단계에서 나타나는 여러 다양한 고정은 그 두 행위에 타격을 가하는 억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고 해야 할 것 이다.〉(불어본, 98 쪽) 또 Aiuriague rra, Cournes, Denner. Lavonde - Monad, Perron, Sta m bak. L'ecritu re de J'en fan t( l 964) 참조 .

학적 관점에서 독서, 문자, 숫자 생산과 처리 등의 조작이 담당하· 는 의미 부여 작업을 상기시킨다. 본질적으로 문자로 씌어진 시니 피앙과 통한다는 점에서 , 37) 또한 관념적 객관성의 성립에 대한 어 떤 이론도 문자의 의미 부여를 무시할 권리가 없다. 이 의미 부여 들은 대상의 관념성에서 불투명성을 고수할 뿐만 아니라 이 관념 성의 해방을 가능하게 한다. 그 의미 부여들은 이러한 힘을 주며,

37) Husserl, L'odg ine de la 짧 ome t ri e 참조.

그 힘 없이는 일반적인 객관성이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단언의 심각성과 정신 분석학뿐만 아니라 객관성 이론에 할당된 그러한 임무의 엄청난 어려움을 은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필연성은 어려움에 비례한다. 그 작업 자체에서 문자사가는 이러한 필연성을 만난다. 그 문제 들은 모든 과학의 뿌리에서만 다시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수학, 정치, 경제, 종교, 기술, 법률 등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가장 내적 인 방식으로 문자의 역사에 대한 성찰 및 정보와 함께 소통시킨다. 모든 성찰의 장을 순환하고 핵심적 통일성을 구성하는 혈맥은 문 자를 음성화하는 과정의 문제이다. 이 음성화 과정에는 하나의 역 사가 있고, 어떤 문자도 절대 그것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알다시피 역사 개념 자체가 문자를 음성화하는 과정의 규정된 순간에 나타 나며, 또 그것은 본질적으로 음성화 과정을 전제로 한다. 이 주제에 대한, 가장 파생적이며 가장 최근의, 또 반박의 여지 가 적은 정보가 우리에게 무엇을 일러줄 수 있을까? 무엇보다 구 조적 본질적인 이유들로 인해 순전히 음성적인 문자는 불가능하며 비음성적인 것을 환원시키는 일을 끝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무리 필수 불가결하고 합법적이라 할지라도 음성 문자와 비음성 문자의 구 분은 생물의 핵심적 공동 작용 s yn er gi e 과 공감각 s ynes t hes i e17 이 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파생적인 상태로 남아 있다. 그 결과 음성주의는 결코 전지 전능한 것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무성(無聲)의 시니피앙에 대해서 작동했다. 따라서 〈음성적〉 그리 고 〈비음성적〉이라는 말은 몇몇 문자 언어 체계의 순수한 성질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 작용 체계의 내부에 있는 어느 정도 수 많 고 지배적인 전형적 요소들의 추상적 성격이다 .18 또 그 중요성은 양적인 분포보다는 구조적 조직에 기인한다. 가령 큐네이폼 문자는 상형 문자인 동시에 음성 문자이다. 아울러 각각의 문자 표기 시니

피앙이 이런저런 충위에 속한다고 말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큐네 이폼 문자가 서로 교체하면서 두 개의 부호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각각의 문자 표기 형식(상형 문자와 음성 문자)에는 이중적 가 치가 있다. 그리고 그 음성적 가치는 단순하거나 복잡할 수 있다. 하나의 시니피앙은 한 개 또는 다수의 음성적 가치를 가질 수 있 고, 그것은 동음 이철 homop hone 이거나 E 음가p oly p hone 일 수 있다. 이러한 체계의 일반적 복잡성에 범주적 한정사, 독서에서 불 필요한 음성적 보충 요소, 대단히 불규칙적인 구두법에 대한 미묘 한 참조 의뢰가 부가된다. 아울러 라바 R. Laba t는 역사를 통하지 않고 그 체계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38) 이 점은 모든 문자 체계에서 참되며, 때로 성급하게 문자 완성 정도의 수준으로 간주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가령 회화적 이야기의 구조에서 사물의 표상, 가령 토템적 문장에는 고유 명사의 상징적 가치가 있다. 이 순간부터 그것은 명칭으로, 음성적 가치와 이어진 다른 연쇄망 속에서 작동될 수 있을 것이다 .39) 그 성층화는 이렇듯 38) L'ecritu r e cuneifo rm e et l;:i. civilisa ti on mesop o ta m ien ne, EP, 74 쪽 이하. 39) A. Me tra ux, Les pr im itifs, sig na ux et sym b oles, picto g r am mes et pro to - --- ec ritu re . 메트로가 〈음성주의의 초벌 ebauche de ph oneti sm e> 이라고 부른 것의 한 예이다. 〈이렇듯 '자기와 암컷을 따르는 거북이’라 불 리는 우두머리 Che y enne 는 거북이 두 마리에 올라탄 어떤 인물에 의해 표 상된 것이다 . '작은-사람'은 그의 머리 위에 그려진 그립자와 동일시될 것 이다. 고유 명사에 관한 이러한 표현은 구체적인 사물일 경우에는 거의 어 려운 점이 없지만, 필생이 회화 문자를 통해 추상적 관념을 나타내야 할 때에는 상상력에 곤욕스러운 시련을 안겨준다. ‘커다란 길'이라 불리는 한 개인의 이름을 베끼기 위해 오글라글라 O g la g la 의 인디언은 다음과 같은 상징적 조합의 힘을 빌렸다. 발자국의 혼적과 평행을 이루는 획들은 ‘길'을 상기하게 했고, 그 길 근처에 그려진 한 마리 새는 신속함을 상기시키는데 그 신속함은 ‘좋은 길'의 속성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이 상징에 해당하 는 이름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만 그것을 해독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 하다. 따라서 이런 명목에서 이 그림들은 기억을 돕는 가치를 갖게 될 것 이다. 또 좋은 족제비'라는 고유 명사를 예로 들어보자 . 사실적으로 그려

진 동물의 입에서 파동치는 두 개의 획이 나오는데, 그 획은 일상적으로 말의 분출을 상징화한다. ‘훌륭한 이야기’를 위해 이 기호가 사용되기 때문 에 독자는 형용사만을 기억하고 이야기라는 개념은 잊어버릴 것을 전제로 한다 . 〉 (EP, 1 0- 11 쪽)

대단히 복잡해지며, 그것의 직접적 사용에 연결된 경험적 의식을 넘어설 수 있다. 시니피앙의 구조는 현재의 의식을 벗어나면서, 단 순히 잠재 의식의 가장자리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인과율에 따라 계속해서 조장될 수 있다. 명사, 특히 고유 명사는 언제나 차이들의 연쇄 또는 그 체계 속 에서 포착된다• 이름은 은유화 figu rati on 속에 자리잡을 때만 비 로소 명칭이 된다. 명사의 고유성은 , 그 기원에 의해 공간의 사물 의 표상들에 연결되거나 음성 체계 또는 통상적 공간에서 외관만 으로 나타나는 대단히 섬세한 사회적 분류 체계에서 포착된다는 점에서, 공간화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고유한 의미에서 〈 의관 〉 은 차이와 온유 체계 속에서 작용하는 필연적 기능이다(아울러 그것을 있는 그대로 분석해야 한다). 로고스의 목소리에서, 그리고 절대적 인 〈스스로 말한 것을 스스로 듣기〉에서 로고스의 자기 자신으로 의 현전으로서, 고유한 의미의 절대적 재림은 파괴될 수 없는, 하 지만 상대적 필연성으로서 그 기능을 포괄하는 체계의 내부에 부 응하는 기능으로 위치해야 한다. 이것은 곧 로고스의 형이상학 또 는 존재론국發학의 위치에 자리 매김한 E 는· 것으로 풀이된다• 숨은 그림 rebus 검 tra nsfe r t 문제는 모든 어 려움을 요약해 준 다. 사물의 표상온 회화 문자로서 음성적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 다. 음성 가치는 결코 단순히 〈현실적인〉 적이 없었던 〈상형 문자 적〉 참조를 지우지는 않는다. 시니피앙은 시스템으로 파편화되거나 성좌를 이룬다. 최소한 그것은 하나의 사물과 하나의 소리로 귀결 된다. 사물 자체는 〈공간 속에서〉 사물들의 집합이거나 차이들의 연쇄체이다. 하나의 연쇄체에 새겨진 소리는 단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문자 기록은 상형 문자이거나 종합적이며 분해되도록 방치 되지 않는다. 그러나 소리는 자신이 성분 조합에 들어가는 일종의 원자적 요소이다. 즉 외관상 상형 문자이지만 실상 알파벳과 동일 한 유형의 음성-분석적인 문자가 대두된다. 멕시코의 아즈텍 문자 에 대해 지금 우리가 아는 것은 그 문자가 이 모든 가능성을 포괄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테오칼티트란 Teocal titl an 이라는 고유 명사는 다음과 같은 이미지로 표시되는 여러 개의 음절로 쪼개진다. 입술 ten tl i, 길 otli m , 집 ca lli, 치아 tlan ti . 이 방식은 한 인물의 이름을, 그 이름의 성분에 들어 있는 여러 존재나 사물의 이미지로 암시하는 절차와 결부된다. 아즈텍인들은 음성주의 노선에서 더욱더 진보했다. 그들은 진정한 음 성 분석의 도움을 빌리면서 이미지로써 분리된 소리들을 적는 데 성공 했다 . 40) 마야 문자 gly p h es rna ya 에 관한 바르텔 Bar t hel 과 크누 쿠 수立 Knorosov 의 연구 업적은 일치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야 문자의 진보는 매우 완만한 상태로 진행했으며 음성 요소들 이 있디는 점은 오늘날 거의 기정 사실로 수용된다. 파크 Pa q ues 섬 문자도 마찬가지이다 .4 1 ) 그 문자는 회화(상형) 음성 문자일 뿐 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터무니없는 표현을 쓰면, 애매함 equi vo cite 과 초규정 surde t er mina ti on 이 진정 한 문자 표기 수사학 rheto r iq u e gra p h iq ue 이 담당하는 은유에서 일어난다. 이 구조의 복잡성온 , 오늘날 소위 〈원시적〉 문자 속에서, 그리고 40) EP . 12 쪽. 41) EP, 16 쪽. 여기서 메트로는 바르텔이 Grundlag en zur Entz i f feru ng der Os t e ri nselschri ft에서 행한 연구 결과를 도식적으로 요약한다.

〈문자가 없다〉고 생각했던 문화들 속에서 발견된다. 주지하듯이 대 체로 비음성적이었던 중국 또는 일본어 문자는 일찍이 음성적 요 소들을 동반했다. 이러한 음성적 요소들은 구조적으로 상형 문자 또는 대수학에 의해 지배된 채로 남아 있었으며, 로고스 중심주의 를 벗어나 전개 발전한 강력한 문명 운동의 증거가 된다. 문자는 목 소리를 자체로 환원시키지 않았고 체계로 그것을 정돈했다. 이 문자(=한자)는 어느 정도는 음성적 차용을 했으며, 몇몇 기호는 그 본래의 의미와 독립해서 소리를 적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러한 기호들의 음성적 사용이 원칙적으로 한지롤- 변질시켜 음성적 기 록으로 가는 길을 갖다 놓을 만큼 충분히 확산되어 본 적은 없었다……. 중국에서 문자는 언어의 음성적 분석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음성 언어 의 충실한 옮김 decal q ue 으로 느껴질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문자 표 기 기호는 유일하고 신기한 현실의 상징으로서 언제나 본초적인 명예 를 대부분 간직했다. 고대 중국에서 음성 언어가 문자 언어와 똑같은 효율성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할 여지는 없으며, 음성 언어의 힘이 문 자 언어의 힘에 의해 부분적으로 가릴 수 있었던 것뿐이다. 반대로 문 자 언어가 일찍부터 음절 또는 알파벳 문자로 진화했던 문명에서는 바 로 음성 언어가 종교적이며 주술적 창조의 모든 힘을 알파벳 문자에 결정적으로 집중시켰다. 아울러 중국에서는 실제로 지중해 유역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위대한 고대 문명에서 목격되는 음성 언어, 말, 음절 또는 모음에 대한 놀랄 만한 가치 매김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42) 42l)' ecJr . i tGure ern, eEt,P . L3a2 쪽C과hi n 3e 8, 쪽A s강p e조 ct는s e필t 자 fo의n c것ti o입n s 또p한s y c Mh o. loGgr iaqnue ets, Ldae pe nsee chi no is e (1950), 1 장 참조.

전체적으로 이러한 분석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위의 분석은 〈 언어의 음성 분석〉과 음성 문자를 정상적 〈귀결〉, 역사적 목적론으로 고찰하고 있으며, 그러한 목적론적 관점에서 항구를 향 해서 가는 항해 선박처럼 한자는 어디에서인가 난파(실패)한 것이 다. 하지만 한자 체계를 미완결된 알파벳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까? 한편, 제르네 J. Gerne t는 한자의 시각주의 gr a p h i sme 의 〈원 천적 특권〉을 〈독보적이며 특수한 현실〉과 맺은 〈상징적 관계〉로 설명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실체와 형식이 무엇이든, 어떤 시 니피앙에도 〈독보적이고 특수한 현실〉이 없음은 자명하지 않은가? 시니피앙은 단번에 그 자신의 반복 가능성이며 자신의 놀이 또는 닮은꼴의 가능성이다• 시니피앙은 자기 관념성의 조건이며, 이 사 실은 시니피앙을 시니피앙으로 인지시키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작 동시킨다. 같은 이유로 그것은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을 연결시킬 뿐 결코 〈독보적이며 특수한 현실〉이 될 수 없다. 기호가 바깥으로 나 타나자마자, 즉 늘 언제, 어디서든 〈현실〉, 〈단일성〉, 〈특수성〉 등 의 순수함을 만날 기회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끝으로 무슨 권리 로 음성 언어가 〈고대에는〉, 죽 한자 탄생 이전에는, 서구에서 알 고 있는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었다고 가정하는가? 왜 음성 언 어는 문자 언어에 의해 〈그 빛이 가리게〉 될 운명에 처했다고 보 는가? 만약 문자라는 이름 아래, 표기 테크닉보다 훨씬 더 잘 구 분짓는 것을 고찰하고 꿰뚫어보기를 시도한다면, 다른 인종 중심주 의적 전제 가정들 가운데에서도, 모든 차이를 편차, 후진성, 우연 또는 일탈 등으로 변형시키는 일종의 문자 표기의 단일 발생론 mono g ene ti sme 을 파헤쳐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음성 언어의 태 양 중심적 개념을 깊이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아울러 로고스와 태양의 닮은꼴(정면에서 쳐다볼 수 없는 선 또는 악), 왕 또는 가부 장(선 또는 지각되는 태양은 Rep ubl iq ue(508c) 에서, 아버지에 비유

된다)과 로고스의 닮은꼴에 대해서도 통찰해야 할 것이다. 그 취약 하고 비밀스런 중심부에서 이러한 유사한 체계를 위협하기 위해서 문자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선한 것과 가부장적인 것의 일식 ecl ip se 을 의미하기 위해서 문자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말씀(구 어)의 명예를 놀라게 하고 그 기분을 거슬리게 하는 일식으로서 문지를 고찰하는 것을 정지해야만 하지 않을까? 더욱이 모종의 일 식의 필연성, 어둠과 빛, 문자 언어와 음성 언어 등의 관계가 있다 면, 그 자체가 다르게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 달리 말하면, 필연적 탈중심화는 있는 그대로는 철학적 또는 과 학적 행동일 수 없다•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를 연결하는 또 다른 체계에 접근함으로써 언어와 에피스테메의 문법의 토대를 이루는 범주들을 무너뜨리는 것이 문제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이론(철학과 과학을 에피스테메 안에서 통합시키는 것)의 자연적 경향은 완전한 폐쇄를 강요하기보다는 톰이 난 구멍들을 메우기에 신경을 곤두세 울 것이다. 그 돌파구가 문학과 시적인 글 쓰기 쪽에서 더 확실했 으며 정곡을 꿰뚫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당연한 일이다. 니체처럼, 초월적 권위와 에피스테메라는 핵심적 범주를 먼저 간청하고 이어 서 그것을 뒤흔들어놓았다는 점 또한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바로 페놀로자 Fenollosa 의 연구 업적이 갖는 의미이다 .43) 그가 에즈라 43) 페놀로자는 서구의 논리, 죽 문법적 구조를 차례로 심문하는 동시에 (먼 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 목록이) 한자에 대해 정확히 기술한다면 결코 그러한 구조들을 수용할 수 없음을 보여주면서, 한시(漢詩)는 본질적으로 문자 언어였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가령,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목 했다. 〈만약 우리가 한시에 대해 세밀하게 연구하려고 한다면, 서양 문법, 그 언어 범주, 명사와 형용사에 중심을 부여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이다. 각각의 명사에서 동사의 공명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최소한 마음 속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괄시당하는 동사들의 보배를 도입하기 위 해 우리는 ‘es t(있다)’라는 말을 피할 것이다. 대부분의 번역은 모든 규칙 울 위반한다. 정상적인 타동사 구분은 자연에서는 하나의 행동이며 또 다 른 행동을 규정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렇듯 원인과 대상은 사실 동사

이다. 가령, ‘독서는 문자 언어를 규정한다’는 문장은 중국어에서는 명시적 으로 세 개의 동사로 표현될 것이다. 그러한 형식은 발달된 세 개의 명제 의 동등가이다. 그 세 개의 명제는 형용사, 분사, 부정법 또는 조건법 등의 숙어로 표시될 수 있다. 그 한 가지 예는, ‘만약 누군가 글을 읽으면. 그것 은 그에게 글 쓰는 것을 가르쳐준다. ’ 또 다른 예는, ‘글을 읽는 사람은 글 을 쓰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응축된 첫번째 형식에서, 중국인은 다음과 같이 쓸 것이다. 젝 읽기는 글 쓰기를 규정한다.'〉 L'ecri tur e chi no is e consid e ree comme art p oe tiq ue (봉기본), Mesures 4 호(1 937 년 10 월), 135 쪽.

파운드 Ezra Pound 와 1 9 그의 시학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 가는 주지하는 바와 같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던 그의 세계는 말라 르메 Mallarme 의 세계와 더불어 서구 전통에 대한 가장 심오한 첫 번째 단절이었다. 중국의 상형 문자가 파운드의 글 쓰기에 끼친 매 력은 그 역사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음성화가 그 기원, 역사, 그리고 여러 모험들 속에서 탐구될 때, 그 움직임은 과학, 종교, 정치, 경제, 기술, 법, 예술 등의 움직임 과 뒤섞인댜 이러한 역사적 움직임과 주변부의 기원은 각각의 개 별 과학에 대한 엄밀한 한계 설정을 위해 그렇게 해야 했던 것처 럼, 우리가 의식해야 하며 성실하게 인내를 갖고 실천해야 할 추상 화에 의해서 비로소 분리될 수 있다. 이러한 근원들의 공범 관계를 원문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원문자에서 유실되는 것은 근원의 단순성에 대한 신화이다. 이 신화는 근원 개념 자체와 연결된다. 근원을 이야기하는 음성 언어, 여러 근원들에 대한 신화 뿐만 아니라 근원 신화 일반과 연결된다. 문자 기호에 대한 접근이 혼적에서 존재를 끈질기게 고수하고, 우주의 일반 구조를 인식하려는 신성한 힘을 보장하는 것이다. 정 치 권력을 시행하거나 그렇지 않은 모든 사제 집단은 문자 언어와 동일한 순간에, 또 문자 표기의 힘을 갖춤에 따라서 성립될 수 있 었다. 전략, 발사술, 외교, 농업, 세무, 형법 등은 그 역사와 구조

에서 문자 언어의 성립과 연결되어 있다. 문자에 할당된 기원은 가 장 다양한 문화에서 언제나 유사한 신화소 m yt heme 들의 도식 또 는 연쇄체에 따라서 늘 그래 왔고, 가족 구조처럼 복잡하고 통제된 방식으로 정치 권력의 분배와 소통했다• 자본 축적과 정치-행정 조 직의 가능성온 언제나 필생들의 손에 맡겨졌으며, 그들은 많은 전 쟁의 모험을 일으켰고 그 기능이 시행되는 것을 보는 대표단의 행 렬이 무엇이든 간에, 그 기능은 언제나 더 이상 축소되지 않는다. 발전의 시차, 불평등, 영속성, 후진성, 분포 등의 놀이를 통해 이데 올로기적, 종교적, 과학一기술의 체계와 〈커뮤니케이션 수단〉 또는 시니피에의 전달 기구 이상인 문자 체계들 사이의 연대성은 파괴 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소위 말하는 〈상징적〉 힘에 의해서 비로소 의미와 (관념성에 의한) 지배권으로 나타나는, 권력과 효율 성 일반의 의미 자체는 언제나 문자의 구비(具備)와 연결되었다• 화폐 또는 화폐 이전의 경제와 문자 표기 계산이 공동 기원을 이 루고 있고, 흔적의 가능성 없이는(레비브륄 Lev y-Bruhl 이 20 보여준 것처럼, 좁은 의미의 표기 없이는) 법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이 어떤 결정된 과학도, 어떤 추상적인 분과 학문도, 있는 그대로 생각할 수 없는 공통적 근원적인 가능성으로 귀결된다 . 44) 44) 물론 우리는 이 단락에서 명명한 사실적 내용의 무한한 덩어리를 기술할 엄 두를 낼 수 없다. 지시적 선결적인 명목으로 다음 저작을 우리는 참조하거니와 그 모두에는 중요한 문헌 목록이 있다. J. Fevrie r , M. Granet, M. Cohen, M.V. -Dav id, 앞의 책 및 A.Metr a ux, 앞의 논문, EP, 19 쪽 (G. Di er te r len, 앞의 논문, 19 쪽과 M. Cohen, 앞의 논문, 27 쪽의 의견 개입을 볼 것) 참조. J. Gernet, 앞의 논문, 29, 33, 37, 38, 39, 43 쪽. J. Sain t e Fare Garnot, Les Hiero gl y p h es, !'evoluti on des ecri tur es eg yptien nes, EP, 57, 68. eL17g00ae 쪽r5 eo.-n1c nhR1ee1. ,,L . a1LLb1e'3aAs t쪽 ,s . ie 앞ec M r의mi.t i uRn논roe 문e dus, ri ne s,7c or7lene, t,s o7 i8H Ls ,e ei 8stst 2 is,tee em8ts 3 ,i m쪽tpe.eys ucOee pt.n l Me ! ie' aaan lsn pdsehoo s aunbb,, eletLE , eaPLc ,rec is it v9uei9rcl eir쪽si .a,t u tEir oEePns.. sud-arabiq u es et eth iop ien nes, EP, 136-145 쪽. J. Fillioz at, Les

ecrit ur es ind ie n nes : Le monde ind ie n et son sys t e m e grap h iqu e, EP, 148 쪽. H. Levy -B ruhl, L'ecri tur e et le droit , EP, 325-333 쪽과 Con fron ta t i on s et conclusio n s, EP, 335 쪽 이하 참조.

철학의 무기력이기도 한 과학의 무기력, 곧 에피스테메의 폐쇄성 이라는 의미를 여기서 분명히 새겨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과학 이전 또는 담론의 하부 철학적 형식으로 되돌아갈 것을 호소하지 않는 댜 반대로 이 공통된 뿌리, 그것은 하나의 뿌리가 아니라 근원으 로부터의 일탈이며 공통된 것도 아니다 . 왜냐하면 결코 단조롭지 않은 차이의 고립과 함께 비로소 똑같은 것으로 귀결되며, 우리가 전략적으로 흔적, 예비 저장 또는 차이/지연 등으로 별명을 지은 것들의 명명될 수 없는 운동은 역사적 울타리, 즉 과학과 철학의 한계에서만 문자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자에 대한 과학 또는 철학의 성립은 필연적이면서도 어려운 임무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 이르러 느슨함 없이 그것들을 반 복하면서, 흔적, 차이/지연 또는 예비 저장에 대한 사상은 에피스 테메의 장을 넘어 그 지향점을 향해야 한다. 하이데거가 오늘날 모 든 철학 요소p h il oso p heme 와 유사하지만 동일하지 않은 위반에 부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을 발판으로 하는 경제적, 전략적 레 퍼런스를 벗어나, 사상은 여기서 우리에게 완전히 중립적 이름이 며, 텍스트적 공백이며 앞으로 올 차이/지연의 시대에서 필연적으 로 미결정된 색인이다. 어떤 점에서, 〈사상〉은 아무것도 의미하는 바 가 없다. 모든 개방처럼, 이 색인은 보이는 그 자신의 얼굴을 통해 서 지나간 시대의 안쪽에 속한다. 이 사상은 억압하지 않는다. 그 것은 체계의 놀이에서 결코 그 어떤 것도 억압하지 않는 것 자체 이다. 생각한다는 것, 그것을 우리는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미 안다. 그것은 에크리튀르의 키로 재며, 단지 에피스테메에서만 개시 되는 것이다.

그라마톨로지 gram mato l og ie, 이에 대한 사상은 여전히 현전이 라는 벽에 갇혀 있을 것이다.

【역주】 1. 비서구 문자를 발견함으로써 유럽 중심의 인종 중심주의적 문자관에서 벗 어났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알파벳 문자에 대한 과거의 신학적 맹목적 편 견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2. 키르케 (At ha nas P. Kirc her. 1601 一 1680) : 스위스의 자연 과학자, 수학 자, 고고학자였으며 이집트 기념비 및 상형 문자 판독 등 고대 이집트 연 구에 공헌을 남김. 3. 윌킨스J ohn Wi lkins : 17 세기 영국의 성직자로 보편 문자 기획을 체계 적으로 제시한 저서를 남겼다. Essay tow ards a Real Characte r and a Phil o sQp h ic a l Lang ua ge (London, 1668) 가 가장 유명한 저서이다 . 그의 기획은 모든 국가의 민족들이 소통할 수 있는 구어, 문어 겸용의 보편 원 칙을 갖는 언어를 만드는 일이었다. 4. 라이프니츠가 한자로부터 받은 지적 영향은 주지의 사실이다. 5. 보편 언어란 테마는 17 세기 유럽에서 나타났으며, 당시 유럽은 다양한 자 연 언어, 수학의 팽창, 새로운 지식의 발전 및 지식을 각 나라마다 고유한 언어로 표현하는 데서 오는 어려움 등을 겪었다. 거기에다 보편 언어의 토 론을 부추기는 것은 중국 한자의 소개였다. 보편 언어는 다음 조건을 충족 시켜야 했다. 첫째, 모든 시대는 물론 특정 시점에서 모든 인간의 의사 소 통 수단이 될 것. 둘째, 배우기 쉬워야 하며 자연 언어가 갖는 애매 모호함 이 없는 표현 수단이 될 것. 셋째, 지식의 발전을 용이하게 해야 하며 현실 의 구조를 진실하게 표상할 것. 이 기획은 영국 왕립 학회가 추진한 프로 그램 중 하나였으며 그 설립자 중 한 명이었던 윌킨스는 이 문제에 관한 가장 유명한 저서를 출간했다 (An Essay tow ards a Real Characte r and a Ph ilos op hica l La ngua g e (l668) 참조). 이 책은 데카르트나 라이 프니츠 같은 당대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6. 메르센 (P. Marin Mersenne, 1588-1648) : 외제 Oiz e 근방 마인 Ma ine 에서 출생한 프랑스의 학자이며 데카르트롤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과 서신 교환으로토론했다. 7. 달가노 Geor gi nus Dalga rno: 윌킨스와 동시대의 영국 학자로서 보편 언 어의 가능성에 관한 글을 남겼다. 8. 부베 (Pere Bouvet, 1656-1730) : 프랑스 국왕의 특사로 중국에 파견되 어 강희제 앞에서 수학, 의학, 천문학, 역학 둥을 특강했다. 9. 인식론적 단절 coup u re epi ste m olog iqu e: 이 용어는 알튀세르 Al t husser

와 그 학파가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마르크스의 저작 속에서 역사 이전의 이데올로기와 과학적 담론의 생산 사이의 이동 장소 및 그 조작을 말한다. 그 개념은 바슐라르 Ba~helard 의 저작으로부터 수용되었는데, 바슐라르는 ru pt ure 란 단어를 사용했다. 인식론적 단절이란 말은 1845 년 마르크스의 저작에 대해 쓰이고 있으며 역사에 대한 과학적 담론의 생산을 동반하는 근본적인 이론적 변천을 표시한다 . 이러한 개념은 이미 바슐라르의 생각에 근접하고 있다. 바슐라르에게 인식론적 단절은 한 학문 분야가 선행했던 오류들을 벗어나 하나의 과학으로 성립되는 계기를 말한다. 10. 바르텔레미 (Je an-Ja cqu es Barth e lemy , 1716-1795) : 카시 Cass i s 에서 탄생. 프랑스의 박학으로 아카데미 학술회원이었으며 Voy a g e du je une Anacharsis en Grece 등의 저서가 있다. 11. 샹폴리옹(J ean-Fran<;o i s Champ o ll ion , 1790-1832) : 피지악Fig eac 에 서 탄생. 이집트학의 대가이며 최초로 이집트 상형 문자를 해독했다. 저서 麟is du sys r eme hi ero g]yp h iq ue(1824) 는 불후의 명저이다. 12. 슐레겔 (Fr i edr i ch Schlege l. 1722-1829) : 독일의 작가이자 오리엔탈 문화 전문가. 최초의 언어 유형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13. 르루아구르한(A. Leroi- G ourhan. 1911-) : 파리에서 출생. 프랑스의 인종학자이자 선사학자. 그의 연구는 선사 시대 예술과 문자 없는 민족들 에 대한 것이며 고고학적 연구 성과롤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선사 시대의 정신 구조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정의했다. 14. 포실롱은 손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손은 모든 창조의 근원 그 자체 다: ‘그것은 눈도 목소리도 없는 얼굴이지만 보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오직 말하는 존재, 죽 생각하는 존재만이 손을 가질 수 있고 작업을 통해 손의 업적을 완수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업적이 란 곧 예술가의 작업을 말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손의 모든 운동은 사고 에 근거를둔다. 손은 중개적이다. 한편으로는 몸을 연장시키며 다른 한편으로 손 없이는 기하학도 없다. 손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예술가의 지배력을 확보한다. 15. 서사적 모델 modele epi qu e: 무미건조한 단순한 직선적 모델이 아닌 융 통적이고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모델을 시사함. 16. 필상학gr a p holo gi e: 그리스어 gr aphe i n( 쓰다)과 lo gi e( 學)의 합성어. 개인의 글씨체를 검토함으로써 인격을 해명하려는 연구이다. 17. 공감각은 상이한 감각 기관에 속하는 감각 및 성질 사이의 연상 작용을 말한다. 예를 들어, 부드러운 목소리나 귀에 울리는 색깔 등과 같은 표현,

모든 지각 동사들은 이러한 의미론적 확장을 수용한다. 이 점은 다음과 같 은 두 가지 사실을 일러준다. 첫째, 동일한 환경 현상에 관련된 정보들을 상이한 감각은 지각하고 전달할 수 있다. 둘째, 상이한 지각의 기능 사이에 는 유사한 관계가 있다. 18. 이 말은 문자 언어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인 고정 관념을 뒤집어놓는다. 결국. 순수한 음성 문자란 있을 수 없다. 19. 에즈라 파운드 (Ezra L. Pound, 1885-1972) : 아이다호의 헤일리에서 출 생한 미국 시인 문화와 언어의 결합에서 근대가 인간에게 강요한 마멸과 해 체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추구했다. 주저로 L'espr i t des litt era tu r es romanes0910) 와 Can t os(1919-1960) 가 있다. 20. 레비브륄 (Luc i en I...evi-B ruhl, 1857-1939) : 파리 태생의 프랑스 철학 자. 사회학적 도덕에 관한 연구에 종사했다. 주저로 Menta l ite pri m i- ti ve (l 922) 가 있다.

나는 마치 내가 —모종의루소 .근 친『 고 상백간록을 C o법n f한e s s것 i o n같s았 』다에.서

서론 〈루소 시대〉로 우리에게는 청각에 부응하는 기관 , 죽 목소리라는 기관이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 시각에 부응하는 기관이 없으며, 소리를 만드는 것처럼 색깔을 만들 지 못한다. 시각은 능동적 기관과 수동적 기관을 서 로 활용하면서 청각을 키우기 위한 잉여 수단이다. —루소, 『에밀 Em il e 』 에서 만약 고전적 책 읽기의 유기적 · 구조에 근거해 판단한다면 어떤 이는 아마 우리가 방금 이중적 해독의 잣대를 제안했다고 말할 것 이다. 죽 역사적이며 체계적인 해독말이다. 이러한 양분화된 대립을 우리가 믿는 것처럼 행세해 보자. 편의상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 왜 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혹의 명분들이 지금 충분히 명료해졌 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는 동일한 언어를 사 용하면서, 또 그에 따르는 경계심을 가지고, 우리가 〈전범 exemp le 〉 이라 부르는 것을 다룰 채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부터 우리의 선택을 정당화해야 할 것이다. 어떤 연유에서 〈루소 시대〉에 〈전범적인〉 가치를 부여하는가? 로고스 중심주의의 역사에서 루소가 누리는 특권은 무엇인가 ?1 루 소라는 고유 명사가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더욱이 이 고유 명 사와 이 이름이 매달린 텍스트들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러한 물음에 대해 그 답변의 서두 이외에 어떤 것을 행할 수 있 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아마 이는 그 물음의 예비 조직에 한정되는

문제 다듬기의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이 작업은 점증적으로 제시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작업을 미리부터 머리말로 정당화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의 통로를 열도록 시도해 보자. 형이상학의 역사가 존재를 현전으로 규정한 역사라면, 형이상학 의 역사가 행한 모험이 로고스 중심주의의 모험과 하나로 뒤섞인 다면, 그것이 전적으로, 또 흔적의 환원으로 만들어진 것이 사실이 라면, 우리가 보기에 루소의 저작은 플라톤의 『페드로』와 헤겔의 『백과 사전 Ency clo冠 d i e 』 사이의 독특한 상황에 놓인 것 같다. 이 세 가지 이정표(플라톤, 루소, 헤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소리 중심주의(또는 로고스 중심주의)의 개방과 그 철학적 완결 사 이에서 현전성의 동기는 결정적으로 분절되었다. 그 동기는 내적 변 형을 감수했거니와 그 색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데카르트의 인식 주체 le cog ito ca rte s i en 에서 나오는 확실성이라는 계기이다. 반복의 지배에 제공된 현전의 정체성은 과거에는 에이도스 (e i dos, 형상 )2 라는 관념성 또는 우시아 ousi a3 라는 실체성의 〈객관적〉 형식 아래에서 성 립되었다. 이 객관성은 그때부터 자기 자신에 현전하고, 자기 자신과 관계 맺는 순간에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확신하는 실체의 변형으로서 재현전화 re p resen t a ti on, 죽 관념 i dee 이라는 형식을 취한다. 그 가장 일반적인 형식 내부에서 현전의 지배는 일종의 무한한 확신을 획득한 다. 에이도스와 우시아가 구비하는 반복력은 절대적 독립을 획득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관념성과 실체성은 생각하는 실체 res cog it ans 라는 요소에서 순수한 자기 정서 au t o-a ffe c tion 의 운동에 의해 그 자체로 귀결된다. 의식은 순수한 자기 정서의 경험이다. 의식은 어떤 오류도 법하지 않는 것으로 언급되며, 만약 자연적 빛의 공리들이 확실성을 주고 사악한 유령 Mali n Ge ni e 의 도전을 넘어설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고와 자기 자신에 대한 현전의 요소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무 한한 현전은 이 공리들의 신성한 기원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다. 신성

한 실체의 끝없는 변화는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의 투명성과 자기 정 서의 순수성 안에 일종의 중계 또는 불투명성의 요소로 끼여들 여지 가 없댜 신은 절대적으로 순수하고 자기 자신에 현전하며 자기 자신 에 대한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에 붙은 이름이며 그 구성 요소이다. 데카르트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비록 이 시대의 구조에서 서로 다 른 장소와 순간을 구별하는 차이점들이 있지만, 신의 무한한 오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현전으로서 로고스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로고 스는 목소리를 통해서만 비로소 무한해지고 자기 자신에게 현전할 수 있고 자기 정서로서 탄생될 수 있다. 즉 그것은 목소리라는 주체가 자 기 자신에서 나와 자신에게 되돌아가는 수단인 시니피앙 차원으로서, 주체가 발송하는 동시에 자기 존재를 느끼게 하는 시니피앙을 자기 자신을 벗어나서 빌려오지 않는다. 목소리 (s'en t endre p arler: 자기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의 경험(또는 의식)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 경험은 문자 언어의 배제로서, · 죽 자기 자신으로의 현전을 중단시 키는 〈외부적〉, 〈감각적〉, 〈공간적〉 시니피앙에 도움을 청하는 일체 의 것을 배제할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데카르트와 헤겔 사이에서 루소는 아마 이러한 형이상학 시대의 내부에서 문자 언어의 환원을 주제로 삼고 그 체계를 파악한 유일 한 인물이거나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 그는 플라톤의 『페드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론 De in t erp re t a ti one 』에서 개시되는 운 동을 반복하지만 새로운 현전 모델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의식 또는 감정 속에서 주체가 자기 자신으로 현전하는 것이다. 그가 그 것을 누구보다도 과감하게 배제했지만 또한 그것은 다른 누구보다 도 그를 사로잡았으며 번뇌하게 만들었다. 데카르트는 코기토와 명 료하고 분명한 명중성 밖으로 기호(특히 문자 기호)를 내쫓았다. 이 명료하고 분명한 명중성은 영혼에 대한 관념의 현전이며 기호 는 거기서 부차적인 것으로 낙인찍혀 감각과 상상의 지대로 추방

된다. 헤겔은 관념의 운동 속에 감각적 기호를 끼워넣는다. 그는 라이프니츠를 비판하면서 절대적으로 스스로에게 현전하며 자기 자신에 머무르는 로고스의 지평을 찬양하며 음성 언어와 그 개념 의 단일성을 이유로 음성 문자를 찬양한다. 그러나 데카르트나 헤 겔은 문자의 문제와 맞붙어 싸우지 않았다. 문자 언어와 전투가 시 작되고 그로 인한 위기가 촉발된 장소는 바로 18 세기라 부르는 곳 이다. 18 세기는 감수성, 상상력, 기호 등의 권리를 복권시켰을 뿐 만 아니라 라이프니츠 유형의 시도들을 행해 로고스 중심주의의 보루에 갈라진 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편 문자의 시도 속에서 애초부터 그 돌파구의 힘과 넓이에 한계를 그온 것을 분명 히 밝혀야만 할 것이다. 헤겔 이전에 이미 루소는 명시적인 술어로 보편 문자를 비난했다. 그 이유는 무한한 오성 또는 신의 로고스에 대한 가능성을 지시했던 신학적 토대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목소 리를 지연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난을 〈통해〉, 우리는 18 세기에 소리 중심주의와 로고스 중심적 형이상학의 방어를 조직 화하는 가장 힘이 넘치는 반작용 r6ac ti on 을 읽을 수 있다. 위협적 인 것, 그것은 바로 문자 언어이다. 이 위협은 우발적인 것도 아니며 뒤죽박죽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만국 공통 문자 체제 p as igr a p h i e 라 는 기획, 비유럽식 문자들의 발견, 문자 해독 기술의 지대한 진보, 언어와 문자에 대한 일반 과학이란 생각을 하나의 역사적 체계로 구 성하게 한다. 이러한 모든 압력에 반격해서 모종의 전쟁이 발발한 다. 〈헤겔주의〉는 그중에서 가장 고귀한 전쟁의 상혼이다. 작가 또는 학설 doc tri nes 의 이름은 여기서는 어떤 실질 가치도 없다. 그것들은 정체도, 원인도 일러주는 바가 없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루소〉, 〈헤겔〉 등이 작가 이름이라 생각한다면, 즉 우리가 그렇게 지칭하는 운동 또는 이동의 장본인들의 이름이라고 생각한다면 경솔한 짓이다. 우리가 그 이름들에 부여하는 지시적

가치는 무엇보다 문제에 대한 이름이다. 만약 우리의 관심을 철학 적 또는 문학적 유형의 텍스트에 고정시키면서, 잠정적으로 이러한 역사적 구조를 다루는 것을 스스로에게 허용하는 것은 거기서 구 조의 기원 , 원인 또는 균형을 인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효과라는 낱말이 품은 어떤 의미에서든, 우리는 이러한 텍스트들이 구조의 단순한 효고潛 effe t s 이라 ·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기서 담 론과 역人肉 총체성의 분절을 생각하기 위해서 제안된 모든 개념이 형이상학적 울타리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형이상학의 울타리에 물음을 던질 것이다. 우리는 울타리예서 벗어나는 다른 개념을 알지 못하며, 이러한 울타리가 우리 담론을 종결짓는 만큼 다른 어떤 개념도 생산하지 못할 것이 다. 사실상, 또 당위론적으로 이러한 문제틀의 전개 발전에서 중추 적이며 필수 불가결한 단계는 이러한 텍스트의 내적 구조를 증후 군으로 탐색하는 데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 텍스트들이 그 형이상학적 소속의 총체성 속에서 그 자체를 규정하 기 위한 유일한 조건인 까닭에 우리는 바로 그 점으로부터 논증을 이끌어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루소를 따로 분리시키고 아울러 루 소주의에서 문자 이론만을 떼어놓을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이러한 추상화는 부분적인 것이며, 우리의 시각으로는 잠정적인 것으로 남 아 있다. 나중에 우리는 〈방법론 문제〉에서 그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실질적 선결적 정당화를 넘어서, 다른 급박한 문제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서구 사상의 장, 특히 프랑스에서 지배적인 담론(그것을 〈구조주의〉라고 부르자)은 오늘날 너무 성급히 자신이 뛰어넘었다고 주장하는 형이상학(로고스 중심주의)에서 그 성충의 단층에 의해, 때로 가장 풍성한 형이상학의 성충에 의해 사로잡혀 있다. 우리가 레비人뜨己 A 텍스트의 예를 택해 거기로부터 출발해

서 루소를 읽기 위한 자극제로 이용하려 하는 데는 하나의 명분 이상의 것이 있다. 레비AE 쿠 A 의 텍스트들이 가지는 풍부함과 이 론적 관심, ' 지금 그 텍스트들이 맡고 있는 활성제 역할뿐만 아니라 문자 이론과 루소에 대한 충실함의 주제가 지니는 위치 때문이기 도 하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명구 이상의 그 무엇일 것이다 .

[역주】 1. 로고스 중심주의 안에서 루소가 누리는 특권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이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데리다의 루소 읽기와 깊게 관련된 의미 심장 한 질문이 다. Paul de Man. La rheto r iq u e de la cec ite, Cri tiqu e. 1972. 455-475 쪽 참조. 2. 에이도스(독일어로는 Wesen) : 후설 현상학에서 이는 어떤 대상의 본질 essence 또는 에이도스는 상상적 변이를 통해 실현되는 대상의 술어 p red i ca t둘 가운데 불변한 채 남아 있는 것에 의해 성립된다. 가령, 직각 삼각형이 있다 하자. 이 삼각형의 가능한 형태들을 무한대로 변화시킨다 하더라도 직각 삼각형 각각의 개별적 특성과 독립된 그것의 본질 일반을 추려낼 수 있다. 이 본질은 모든 술어들의 합이며 그것의 상상적인 삭제 또는 제거는 삼각형 자체의 소실을 가져올 것이다. 삼각형에는 관념적 객 관성이 있다. 죽 삼각형이란 파기될 수 없는 술어들의 합의 주체이다. 에이 도스는 대상의 근원적 이해이며 모든 경험적 지식이 전제로 하는 것이다. 예컨대, 심리학은 무엇보다 심리적인 것의 본질을 인정해야 하며 물리적인 것과 혼동을 피해야 한다. 3. 실체 subs t ance 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원시 인도 유럽어에서 ous i a 는 소유물, 특히 토지와 가옥을 지칭했다. 존재하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동사 e i na i는 인도 유럽어형 as mi에서 파생. 어근 as 는 〈숨쉬다〉, 〈생존하다〉를 의미한다. 이 기본 의미에 계사적 또는 술부적인 의미가 첨가된다. 술어 on 은 e i na i의 현재 부사이며 ous i a 는 e i na i의 도리아어 분사 형태 (essa. en t es) 에서 파생되었다.

1 문자의 폭력 : 레비스트로스에서 루소까지 지금 여기서 문자에 관해 말할 것인가? 아니다. 한 권의 교육론 저서에서 이 바보 같은 짓거리로 노닥거린다는 것은 창피한 노릇이다. —루소. 『 에밀 .!I 에서 그것[문자]은 인간을 각성시키기에 앞서. 인간의 착취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 같다……. 문자와 파렴치한 배신은 하나가 되어 인간을 파고들었다. —레비人뜨쿠人, 『 슬픈 열대 』 에서 형이상학은 문자의 위협에 맞서 전범적 방어 체계를 성립시켰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자를 폭력과 연결짓는가? 문자 안의 그 무엇이 혼적의 조작에 버금가기 위해, 폭력은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그리고 왜 어떤 이유로 루소에서 레비 AE 쿠 A 까지 연쇄적으로 묶어주는 친밀성 또는 계보 속에서 이러한 물음을 문제삼아야 하 는가? 이 역사적 수축 re t re ci ssemen t을 정당화해야 하는 어려움 에 또 다른 어려움이 부과된다 . 담론과 텍스트의 차원에서 혈통이 란 무엇인가? 만약 어느 정도 재래 방식으로 글을 쓰고 읽는 사람 들의 경험 속에서 한 텍스트에 대한 현재의 살아 있는 의식적 표 상(재현, 전화)을 1 담론이라 부른다면, 아울러 텍스트가 끊임없이 그 근원과 고유 법칙으로 이루어진 체계로 이러한 표상을 넘어서 는 것이라면, 계보와 관련된 질문은 우리에게 주어진 물음을 견고

하게 쌓을 수 있는 가능성을 훨씬 초과하게 된다• 우리는 한 텍스 트의 계보를 완전히 기술할 수 있는 은유가 여전히 금지되었음을 안다. 그 통사법과 어휘론에서 그 공간 배치(띄어쓰기), 구두법, 공 백, 여분 등으로 해서 텍스트의 역사적 귀속은 결코 일직선이 아니 다. 또 전염성의 인과율도 아니며, 여러 층의 단순한 축적도 아니 다. 그렇다고 꿰어맞춘 조각들의 순수한 병렬도 아니다• 만약 한 텍스트가 언제나 그 자신의 고유한 근원에 대한 일정한 표상이라 면, 그 근원은 오직 이러한 표상에 근거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 이다. 달리 말하면 그 지반 자체를 촉지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사 실은 그 근원적 본질 essence radi cale 을 파괴하는 것이지 그 뿌리 박현 기능fo nc ti on enraci na nt ~ 필연성을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뿌리들은 서로 끝없이 얽혀 있으며 뿌리 속에 다시 뿌리들이 박히 도록 해 똑같은 지점으로 다시 통하게 하고 오래된 이 결속을 이 중화하고 그것들의 차이에서 소통하게 하며 그 자신에서 휘감기게 하거나 서로 감싸게 한다고 말하는 것, 죽 텍스트는 뿌리들의 체계 sys te m e de raci ne s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곧 체계의 개념과 동시에 뿌리의 도식에 모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러한 모순이 순전히 외관상의 모순이 아니려면, 그것이 의미를 가 지고 〈비논리성〉이 수용되는 것은 유한한 구상(형이상학의 역사) 속에서 생각될 때 가능하다. 여기에서 그 구상은 아직 종결되지 않 고 그 이름 없는 근원의 내부에서 파악된다. 그렇다면 텍스트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 계보적인 표상이 분 절되는 주도 면밀하게 완성된 담론(가령, 레비 AE 쿠 A 가 〈 18 세기〉 에 대해 자기 자신이 이미 거기에 속함을 자처하면서 성립시키는 것) 은 계보 자체와 혼동되지 않고, 바로 이러한 편차 ecar t에 의해 텍 스트의 구조에서 조직적 역할을 맡는다. 만약 우리가 과거 지향적 착각이라고 말할 권리가 있다 하더라도 이 착각은 우연이나 이론

적 찌꺼기가 아닐 것이다. 즉 그 필연성과 실증적 효과들을 간파해 야만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계보적 표상은 이미 자기 자 신의 표상에 대한 표상이다. 가령 〈프랑스의 18 세기〉가, 그리고 그 러한 텍스트가 존재한다면, 자기 자신의 고유한 유래와 현전으로서 이미 건설했던 것이 바로 그 텍스트가 될 것이다. 이러한 귀속 놀이가 인류학과 〈인문 과학〉의 텍스트에서 그처럼 분명히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 놀이 전체가 〈형이상학의 역사 〉 내 부에서 생산되는 것일까? 어디에서든 그 놀이는 형이상학의 울타 리를 강요하는 것일까? 몇 가지 예에 기초해 나오는 물음에 답하 기 위한 가장 폭 넓은 시야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한 예에 대해 몇몇 고유 명사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담론의 옹호자 들, 콩디악, 루소, 레비人뜨쿠 A 또는 보통 명사. 분석, 발생, 기원, 자연, 문화, 기호, 음성 언어, 문자 언어 등의 개념. 끝으로 고유 명사라는 보통 명사. 음운론주의 p hono]og i sme 는 형 이상학의 내부에서와 마찬가지로 언어학 내부에서 문자의 배제나 그 저하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 은 소위 여러 인문 과학의 모델로 간주되기를 원하는 과학에 부여 된 권위이기도 하다. 이 두 의미에서 볼 때, 레비 AE 쿠 A 의 구조 주의는 음운론주의이다 .2 따라서 언어학과 음운론의 〈모델〉에 관한 한 우리가 이미 접근했던 것은 구조주의 인류학의 윤곽을 파악하 는 것을 가로막는다. 구조주의 인류학에서 음운 과학은 공공연히 선언된 d6clar6 매력을 과시한다. 그 점은 r 언어와 친족』 1) 이라는 글에서 엿보인다. 그것을 한 줄 한 줄 따져가며 읽어야 할 것이다. 1) d이uc ti중 on요 a한 1 'r논e u 문vr은e dAe nMth ar uosps o, ]oxgx xiev 쪽st r 참u 조ct.u rale 속에 있다. 또 Intr o -

음운론의 탄생은 이 상황을 전복시켰다. 그것은 단순히 언어학적 시 야만을 새롭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폭의 변형은 개별 분야에 국 한되지 않는다. 음운론은 마치 핵 물리학이 정밀 과학 전체에서 맡았 던 혁신적 역할을 여러 사회 과학에서 동일하게 떠맡게 된다 .U 언어와 친족」, 39 쪽) 만약 여기서 우리가 모델 문제를 심도 있게 구성하기를 원한다 면, 음운론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음소(音素)와 친족 술어들 사이 의 유사 관계를 해결하고 또 그것을 허락하면서, 그 증명의 마디마 디를 이루는 〈같은 〉 이라는 표현 모두와 〈동일하게〉라는 표현 전부 를 추출해야 할 것이다 . 또 레비AE 쿠 A 는 〈놀랄 만한 유사 관계〉 라는 표현을 쓴다. 〈……같은〉이라는 표현의 작동은 곧바로 고찰되 는 체계들과 다른 체계들, 아무 특권 없이 지배하는 구조적 법칙에 대한 대단히 확실한 동시에 빈곤한 일반성에 그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죽 그것은 조정자적 모델 modele re gu la t eur 이 아니라 계열 속의 전범으로서 본보기가 되는 음운론이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 에서 여러 물음이 제기되었고 온갖 반론이 분절되었다. 하나의 과 학을 최고 우두머리 자리에 놓으려는 인식론적 음운주의가 목소리 를 문자 언어 위로 고양시키는 언어학적 형이상학적 음운론주의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보다 이러한 음운론주의를 인지하 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레비AE 쿠 A 는 문자에 대해 글을 썼기 때문이다. 물 론 얼마 안 되는 양이기는 하지만2 ) 여러모로 주목할 만한 것이다. 2) 그것은 무엇보다 『 슬픈 열대 Tris t e s t ro piques 』 와 특히 18 장 r 문자론 ~on d ' ecr it ure 』에 두루 걸쳐 있는데 레비스트로스와의 대담 (G. Char-bonnie r, Prim itifs et ci v ili ses )에서 그 이론적 실체를 찾을 수 있다. 또 『 구조 인류학』 (Problemes de meth o de et d'enseig ne ment , 특히

sauv age 에서는 덜 직접적인 방식으로

매우 수려한 글이거니와 역설과 근대성의 형식에서 서구가 끈질기 게 되씹어온 파문, 즉 『 페드로 』 에서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 』 까지 기정 사실로 성립되고 견고히 자리잡은, 문자 언어의 배제를 언술하면서 독자를 놀라게 한다. 레비AE 쿠 A 를 다시 읽는 또 다른 이유는 이런 것이다. 만약 (우 리는 그 점을 이미 피부로 느꼈다) 자명한 증거로서, 물리 세계와 그 타자(〈타자들〉의 계열 : 예술, 기술, 법률, 제도, 사회, 비동기화, 자의성 등)의 차이들로 된 체계와 그를 기초로 정리 정돈된 모든 개념틀에 대한 믿음을 정지시키지 않고서 문자를 생각할 수 없다면, 최대한 주 의를 기울이면서 성찰의 특정 단계에서 때로는 이러한 차이에 근간 을 두고, 또 때로는 차이의 말소점 p o i n t · d'e ffa cemen t으로 우리를 유도하는 학자 레비 AE 쿠 A 의 불안한 수순을 밟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옛부터 강조해 온 자연과 문화의 대립은 특히 방법론적 가 치를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을 것 같다.〉 3) 레비 AE 쿠 A 는 한 소거 점에서 다른 소거점으로 옮겨갔을 뿐이다. 근친 상간의 금기라는 문 제에 의해 제어되는 『친족의 기초 구조』에서 이미 그는 하나의 이음 점만을 중심으로 차이를 인정했다. 따라서 그 두 가지 모두 더 수수 께끼 같아졌을 뿐이다. 하지만 이음점(근친 상간의 금기)이 차이의 투명한 체계에서 만나려 하는 이상한 예외, 죽 레비AE 쿠 A 가 〈따 라서 우리가 맞부닥치는〉 하나의 〈사실〉(『친족의 기초 구조 』 , 9 쪽)인 가, 아니면 자연과 문화 사이에 놓인 차이의 기원, 체계를 벗어난 차 이 체계의 조건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 천만한 일이다. 그 것이 바로 조건으로 성립되는 체계 안에서 그것을 이해하기를 원할 때만 그 조건은 하나의 〈파문〉이 될 것이다.

3) La pe nsee sauvag e, 327, 169 쪽 참조.

따라서 인간에게 보편적인 모든 것은 자연의 차원에 속하며, 그 자 연 발생적 자발성으로 특징지어지고, 하나의 규범에 국한되는 것은 모 두 문화에 속하며 상대적인 것과 특수한 것의 속성들을 나타낸다고 가 정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하나의 사실, 아니 차라리 여러 사실들의 집 합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러한 사실들을 위의 정의로 조명한다면 하나 의 파문으로 나타나게 된다. …… 왜냐하면 근친 상간의 금기는, 한치 의 애매 모호함도 없이, 도저히 떼어놓을 수 없이 하나로 맺어진 두 개의 특징을 나타내고, 그 특칭들 속에서 우리는 두 개의 배타적인 질 서로 이루어진 모순되는 속성들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규칙을 성립시키는데, 그 규칙에는 사회적 규칙들 가운데 유일하고 보 편적인 성격이 있다.(위의 책, 9 쪽) 그러나 그 〈파문〉은 특정한 분석의 계기에서만 그 모습이 드러 났댜 즉 자연과 문화 사이의 차이를 결코 밝힐 수 없는 〈실제적 분석〉을 포기하면서 〈규범과 보편성의 이중성〉의 정의를 가능하게 하는 〈관념적 분석〉으로 옮겨갈 때말이다. 따라서 .그 두 가지 분석 들 사이의 차이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비로소 파문은 파문으로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신뢰는 무엇을 의미했는가? 그것은 인류학자 레비人뜨쿠人가 〈방법론의 도구〉를 사용할 권리로서 스 스로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 〈로고스적 가치〉는 〈대상〉, 〈진리〉 등, 과학이 작동될 수 있는 것에 대한 시각에서 다급한 상태로 예 고되었다. 그것은 『친족의 기초 구조』 서두를 (또는 전체 대부분을) 장식하는말이다. …… 수용 가능한 역사적 정의가 없는 경우, 자연 상태와 사회 상태 사이의 구분(오늘날에는 자연 상태와 문화 상태라고 말할 것이다)에는 현대 사회학이 그것을 방법론적 도구로서 사용할 수 있음을· 십분 정당

화하는 가치가 있음을 사람들은 깨닫기 시작했다.(위의 책, 1 쪽)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는다• 자연이나 문화 같은 개념 들의 〈특히 방법론적 가치〉에 관한 한, 『 친족의 기초 구조 』 에서 『 야만적 사고 』 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진전이 없으며, 수정 흔적은 더더욱 없다. 방법론적 도구라는 개념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친족의 기초 구조』에서 이미 레비 AE 쿠 A 는 그후 십 년 동안 〈자질구레한 작업 bri co lage >, 3 〈언제라도 사용될 수 있다 〉 는 원칙 아래 보존된 〈임시 변통 수단 mo y ens du bord 〉들로서 도구에 대 해 언급하리라는 것을 예고했다. 〈테크닉 차원의 자질구레한 작업 처럼, 신화적 성찰은 지적인 차원에서 탁월하면서도 예측을 불허하 는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자질구레한 작업의 신화적 시학적 특징에 자주 주목했다.〉(위의 책, 26 쪽 이하) 물론 인종학자가 자신을 〈엔지니어〉로 생각하느냐, 〈자질구레한 일을 처 리하는 사람 br i coleur 〉으로 생각하느냐를 물어보는 일이 남아 있 을 것이다. 〈날 것과 익힌 것〉은 〈신화학의 신화〉(위의 책, 서문, 20 쪽)로 제시된다. 어쨌든 자연과 문화 사이의 경계선 지우기는 『친족의 기초 구 조』에서 『야만적 사고』에 이르기까지 항상 동일한 제스처를 취하 지 않는다. 『 친족의 기초 구조』에서는 파렴치한 이 두 면의 봉합부 d'une sutu r e scandaleuse 각각의 독창성을 존중하는 것이 문제 의 관건이었다. 『야만적 사고』에서는 분석 대상의 특수성을 〈용해 d i ssoudre 〉시키지 않으려고 노심 초사하더라도 모종의 환원이 문 제의 관건이 된다. …… 개별적 인간성을 보편적 인간성으로 흡수하는 것으로는 족하지 않을 것이다. 첫번째 시도는 [레비人뜨쿠人가 〈그 으레적인 선견지명〉

을 찬양한] 루소가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며, 또 정밀 자연 과학에 속하는 다른 시도들의 단서를 제공한다. 그 시도들이란 문화를 자연 속에 재통합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생명을 그 물리-화학적 조건 전체에 재통합시키는 일이다.(『야만적 사고 』 , 327 쪽) 이 사상은, 과거 유산으로 물려받은 개념적 대립들을 보존하는 동시에 폐기시키면서 소쉬르 사상과 마찬가지로 한계점들 속에 근 거한다. 그것은 때로는 비판받지 않은 개념들 내부에서, 때로는 울 타리에 착지하면서 해체를 향해 작동한다. 끝으로, 위에 적은 마지막 인용문은 필연적으로, 왜 하필이면 레 비 AE 쿠 A 와 루소인가라는 질문으로 우리를 유도한다• 이 두 사상 가의 접속은 점증적으로 그 내부에서 정당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 러나 주지하다시피, 레비AE 쿠 A 는 마음속에서 자신을 루소의 후 계인자와 일치시켰을 accorde 뿐만 아니라 이론적 정서 l'affect t heor iq ue 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서도 루소와 연대성을 느꼈다. 그 는 자주 자신을 루소의 현대적 제자라고 소개하며, 루소를 현대 인 종학의 예언자일 뿐만 아니라 그 토대를 세운 사람으로 섬기며 그를 읽었다• 우리는 레비AE 己 A 가 루소를 찬양하는 수백 편의 텍스트 를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날의 토테미즘 To t e mi sme awourd'hu i』 말미 에 있는 〈안쪽의 토테미즘〉에 대한 장을 상기해 보자. 〈베르그송보다 더 신중하며〉 〈토테미즘의 발견 이전에 이미〉 〈토테미즘 일반의 가능성을 여는 것을 꿰뚫어보았던〉 〈투사적 열정〉, 〈놀라운 선견지명〉 둥(『오늘날의 토테미즘』, 147 쪽). 죽, 첫째,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원초적이며 우리를 자연스럽게 타자와 연결짓는 것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살아 있는 모든 유기체 와 연결시키는 기본 감정인 연민의 정 pitie. 둘째, 루소는 말한다. 우리 언어 lan g a g e 의 본질은 근원적으로

은유적 orig ina ir em ent me t a p hori q ue 이댜 왜냐하면 그 본질이 정념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레비 AE 쿠 A 의 해석은 『인간 언어 기원론』에 근거하는데, 나중에 우리는 이 텍스트에 대해 끈기 있는 독서를 시도할 것이다. 〈인간이 말하게 된 최초의 동기가 [필요 욕 구가 아니라] 정념이었듯이, 그 첫번째 표현은 비유적인 것 tro p e s 이었다. 최초로 탄생된 것은 비유적 언어였다•〉 4 r 안쪽의 토테미 즘」에서 레비AE 쿠 A 는 여전히 루소의 두번째 논문인 『인간 불평 등 기원론』이 〈프랑스어로 된 문헌에 국한하자면, 최초의 일반 인 류학 저서이다. 거의 현대적 술어로 말하면, 루소는 거기에서 자연 에서 문화로 이행한다는 인류학의 중심 문제를 제기한다〉(위의 책, 142 쪽)고 말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가장 체계적인 찬양은 주시 할 만하다. 〈루소는 인류학을 예견하는 데 국한하지 않는다. 그는 그 기초를 세웠다. 무엇보다도 실제적인 방식으로 자연과 문화의 관계 문제를 제기한, 아울러 일반 인종학의 최초의 틀을 볼 수 있 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쓰면서말이다. 곧이어 이론적 차원에서 찬탄할 만큼 명료하고 간결하게 인종학자의 고유한 연구 대상과 도덕론자와 역사학자의 연구 대상을 구분하면서말이다. ‘인간을 연 구하기 원한다면, 자기 자신 가까이에서 그들을 쳐다보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 l'hornme 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자기 시선을 멀찌감치 두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속성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차이점을 관찰해야 한다.’(『인간 언어 기원론』, 7 장)〉 4) 따라서 레비人뜨쿠 A 인류학에는 공공연히 선언된 투사적인 루 소주의가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는 우리의 독서 방향을 잡아줄) 일반적인 질문을 부과한다. 로고스 중심적 형이상학과 현 4) 『장 자크 루소, 인간 과학의 설립자』, 240 쪽. Je an-Ja cqu es Rousseau -- La Baconn ie re(I962) 에 수록된 발표문아다. 우리는 여기에서 메롤로퐁티 철학에 나타났던 친숙한 주제를 인지할 수 있다. 죽 인종학적 작업은 본질 적인 불변 요소의 추구에 있어서 상상적인 변화를 실현한다.

전 철학에 대한 루소의 귀속(우리는 그 귀속을 이미 인지했고, 그 본보기가 되는 양상들의 윤곽을 스케치할 것이다)은 어떤 점에서 과 학적 담론에 한계를 부과하는가? 그 귀속은 필연적으로 그 폐쇄된 영역에서 인종학자와 현대 인종학 이론가의 루소주의적 연구 분야 와 충실성을 간직하는가? 만약 이 물음이 서두에 피력한 우리의 논점에 뒤따르는 논지 전 개의 연결 고리를 맺어주는 데 충분하지 않다면, 다음과 같은 점을 다시 주지해야 할 것 같다. 첫째, 폭력에 대한 이탈. 그 폭력은 문자 언어의 침략을 악, 타 락, 실패의 우발 사건으로 감수하는 순진 무구한 언어 바깥으로부 터 도래하지 않는다 ne survie n t pa s.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이미 에크리튀르라 할 수 있는 어떤 언어의 근원적 폭력이다. 루소와 레 비 AE 쿠 A 가 문자 언어의 힘과 폭력 행사를 연결시킬 때 그 어떤 순간에도, 그 누구도 그들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주 제를 철저화하면서 자연적으로 순수한 음성 언어에 견주어서 이 폭력을 파생된 것으로 간주하기를 멈추면서, 폭력과 문자의 통일이 라는 명제의 의미 변화를 가져와 명제를 추상화하는 고립화는 삼 가야한다. 둘째, 메타포를 의미의 절대적 재림으로 환원시키면서 그 부재를 제어하기 위한 무기력하며 환각적인 노력으로서 (헤겔적 계기에서) 로고스의 형이상학 또는 존재-신학에 대한 또 다른 생략을 재론해야 한다. 메타포의 비환원성으로 기능하는 언어에서 근원적 문자에 대 한 생략으로서 그 가능성에서 또 수사학적 반복을 넘어서서 그것을 생각해야 한다. 고유 명사의 돌이킬 수 없는 부재. 루소는 은유 속에 서 시작된 언어를 믿었지만 차후에 보듯이 고유한 의미로 향하는 진 보도 믿었다. 루소는 〈최초로 탄생한 것은 비유적인 언어이다〉라고 말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본래의 고유한 의미는 마지막

에 왔다•〉( 『 인간 언어 기원론』 ) 5) 이 본래의 것(p ro p e, pro p r iu s : 자 기 자신에 근접합 자기 자신에 대한 현전, 속성, 청결)의 묵시론에서 우리는 그라페인 (YPa¢Elv: 글 쓰기) 문제를 제기한다.

5) 근원적으로 비유적인 언어라는 관념은 이 시대에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특 히 바르부르통과 콩디악에서 그런 생각을 찾아볼 수 있으며, 그들은 루소에 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비코와 루소의 관계에 대해 가뉴뱅 B. Gag ne bin 과 레이몽 M. Ra ym ond 은 루소가 베니스에서 몽테 Mon t a igu의 비서였을 때, 비코의 『신과학 Sc ien ce nouvelle 』을 읽지 않았을까 자문해 보았다. 하 지만 만약 루소와 비코가 모두 원시 언어의 은유적인 본질을 확언하고 있다 하더라도 비코만이 원시 언어에 신적인 기원을 부여한다. 콩디악과 루소 사 이에도 이러한 의견 불일치는 생긴다. 그리고 비코는 문자 언어와 음성 언어 의 동시 기원을 믿는 유일한 사람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중 하나이다. 〈철학자 들은 언어가 먼저 태어나고 나중에 문자가 탄생했다고 믿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 정반대이다. 언어와 문자는 쌍둥이로 태어나 나란히 자기 길을 걸 어왔다.〉 (Sc i ence nouvelle 3, I) 카시러 Cass i rer 는 루소가 『인간 언어 기 원론.!I에서 언어에 대한 비코의 이론을 〈다시 채택했다〉고 단정하는 데 주저 하지 않는다 (Ph il oso phi e der sym b olisc hen Formen. I, I. 4) .

고유 명사들의 전쟁 그러면 어떻게 명명하는 사람과 호명하는 사람 을 문자 언어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 호출 부 호를 통해서 이러한 애매 모호함이 제거된다. —루소의 『 인간 언어 기원론 』 에서 『슬픈 열대』에서 『인간 언어 기원론』까지 한 권의 교육 저서 (『에 밀』)에서 문자의 〈어리석음〉을 〈즐기는 수치〉를 느꼈던 루소에 의 해 거부된 「문자의 교훈」 5 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질문을 한계 짓는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것이리라. 그들(루소와 레비 AE 쿠~) 은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가? 그들은 동일한 일을 하고 있는가?

『 고백록』 인 동시에 『 부겐빌 항해기 부기 Sup ple ment au voy a ge de Bou ga i nv ill 감 에 대한 추기라 할 수 있는 『 슬픈 열대 』 에서 「문자의 교훈」은 여러 민족과 문화 사이의 커뮤니케이션(비록 커뮤 니케이션이 식민지 또는 선교적 억압의 형태로 실천되지 않더라도)을 여는 인종학적 전쟁, 본질적 대립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짧은 에피소드들을 표시한다. 「문자의 교훈」은 전부 자제되거나 지연된 폭력의 어투로 이야기되었거니와 그 폭력이란 때때로 말이 없지만 언제나 억압적이며 짓누르는 폭력이다• 아울러 레비AE 쿠 A 의 이 야기 속에서는 그것이 형성하는 여러 관계들이 위치하는 여러 다 론 장소와 순간에서 그 무게가 느껴지거니와 그것은 개인과 무리 사이, 여러 문화 또는 한 공동체 내부의 관계로 느껴진다. 이러한 폭력의 다양한 심급들 속에서 그것과 문자의 관계는 무엇을 의미 하는 7}? 남비크와라 Namb i kwara 족을 파헤쳐 들어감. 주지하다시피 레비 AE 쿠 A 는 종족학의 차원에서 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학위 논 문 중 하나인 「남비크와라족의 가족 및 사회 생활 La vie familial e et soci al e des Indie n s Namb i kwara 」 (1948) 을 썼다. 따라서 남비크 와라족의 〈잃어버린 세계〉로 관통해 들어감. 〈프랑스만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원시적인 종족 가운데 하나인 소수의 유목 원주민 무리〉인 남비크와라족. 그들의 영토에는 피카다pi cada 가 지나가고 있다(피카다는 투박한 선으로, 그 〈흔적〉은 〈가시덤불이 무성한 토지에서는 거의 식별되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길(도로)과 차이의 가능성은 문자로서, 죽 문자와 역사, 길, 단절, 비아 룹타 via rup ta, 끊기고 깨진 길 frac ta , 개방성에 의해 혼적이 남은 환원성 과 반복의 공간, 자연적이며 원시적인 삼림의 편차와 극심한 공간 울 성찰해야 할 것이다. 삼림 s il va 은 원시적이며, 비아 룹타는 차 이, 질료 h yJ천]서 부과된 형식 등으로 숲속에서는 물질로, 나무에

서는 되는 대로 씌어지고 식별되고 기록된다. 남비크와라족의 영토 에는 원주민들의 피카다가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외부에 서 수입된 또 다른 선이 지나간다. 전화선은 설치되자마자 〈쓸모없게 된다.〉 〈다 썩은 전신주 위에 축 늘어져 있다. 이 전신주는 흰 개미 또는 인디언들의 희생양이거니와 그들은 전화선의 윙윙거리는 소리를 열심히 일하는 야생벌 등의 벌통 에서 나는 소리로 착각한다.〉 그 공격성과 잔인성(추측이든 아니든)으로 전화선 직원들을 공포 로 몰아넣은 남비크와라족은 〈관찰자를 인류의 유년기로 파악(그 러나 이는 그릇된 것이다)하게끔 한다.〉 레비,J-.. E 己人는 이 원주민 들의 생물학적 문화적 유형을 기술한다. 그 종족의 기술, 경제, 제 반 제도와 친족 구조들은 아무리 원시적이라 하더라도 그들에게 엄연히 인간적인 사회와 〈문화적 상태〉의 한 자리를 내준다. 그들 은 말할 줄 알며 근친 상간의 금기를 실천한다. 〈그들 모두 서로 친족이며, 남비크와라족은 인종학자들이 말하는 교차된 crois e 종의 조카와 결혼하는 것을 선호한다. 즉 아버지의 누이나 여동생 또는 어머니의 오빠(또는 남동생)의 딸과말이다.〉 외관에 현혹되지 않고, 그들에게 〈인류의 유년기〉를 목격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게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언어의 구조이다. 특히 그 언어의 사용법 usa g e ·이다. 남비크와라족은 상황에 따라 여러 방언과 여러 종류의 체계 를 사용한다. 바로 여기서 대충 〈언어학적〉이라고 명명되는 현상이 개입되며, 바로 그 점이 가장 많은 관심을 끈다. 그 일반적인 가능 성의 조건, 또 선험성을 넘어서면 해석할 방도가 없는 기정 사실이 문제의 관건인 것이다. 그 사실적이며 경험적 원인들은 (이러한 결 정적 상황에서 그것이 작용하는 바 그대로) 우리 영역에서 벗어날

것이며, 여기서는 단지 그 사실을 직시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 점은 레비 AE 己 A 쪽에서도 결코 탐구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러 한 사실은 우리가 본질 또는 그라페인의 에너지나 고유 명사의 원 천적 소거로 내세운 것에 견주어볼 때 홍미 있는 일이다. 고유 명 사가 한 체계에서 지워진 순간부터 문자 언어가 생겼고, 이러한 고 유 명사의 말소가 야기된 순간부터, 즉 고유 명사의 도래와 언어가 맞은 최초의 아침부터 〈주체〉가 생겨난다. · 이러한 명제는 보편적 본질에 속하며 선험적으로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어떻게 이러한 선험성에서 여러 경험적 사실을 결정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는 말인가? 여기서는 이 물음에 일반적으로 답할 수 없다. 무엇보 다 정의 그 자체로 인해 이런 형식의 물음에 일반적인 답변은 있 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정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질에 도달한다. 문제의 관건은 우리가 고유 명사라고 믿는 것을 구조적 으로 소거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삭제한 것 자체의 원 천적 판독성을 성립시키는 소거가 문제의 관건이 아니라 몇몇 사 회에서 고유 명사의 사용에 대해 이중적으로 en surim p re ssio n 가 해지는 금기가 문제인 것이다. 〈그들에게 고유 명사의 사용은 금기 시된다〉고 레비 AE 쿠 A 는 적는다. 그 점에 접근하기 전에, 이러한 금기는 우리가 원-문자라고 부 른 것에서, 즉 차이의 놀이에서, 고유 명사의 구성적 삭제에 견주 어 필연적으로 파생되었음울 주지하자. 왜냐하면 고유 명사는 이미 더 이상 고유 명사가 아니며 그것의 생산은 곧 그것의 말소이기 때문이다. 또 문자의 삭제와 부과는 근원적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고유한 표기 기록에 야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 고유 명사 는 결코 유일한 존재의 현전에 할애된 유일한 호칭으로서, 말소 아 래 투명하게 현전하는 판독 가능성의 기원 신화에 불과했던 것이

다. 고유 명사는 분류 체계에서, 즉 차이들의 체계에서 차이들의 작용으로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며, 앞으로 보듯이, 금기는 그 체계 속에서 가능했고 그 역할을 맡을 수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위 반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위반이라는 것은 곧 근원의 말소와 기원의 비고유성을 복권시킴을 뜻한다. 더구나 이 점은 레비스트로스의 의도와 엄밀하게 일치된다. 「보 편화와 특수화」 (『야만적 사고』, 6 장)에서 〈결코 타자를 명명하지 않고 분류하거나…… 자기 자신을 분류한다〉 6) 는 사실이 증명된다. 6) 〈따라서 우리는 고유 명사의 두 가지 극단적 유형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 두 유형 사이에는 일련의 중간 단계가 존재한다. 어떤 경우에는 명사가 정체 파악의 표시이다. 그 표시는 규칙을 적용함으로써 사람들이 명명하는 개인이 미리 명령된 계층에 소속되었음을 확인한다(무리의 체계 속에서 사 회적 무리, 모든 위상의 체계 속에서 탄생할 때의 위상). 다른 경우에 명사 는 명명하고 표현하는 개인의 자유로운 창조이며, 그가 명명하는 사람을 수 단으로 해서 그의 고유한 주체성의 전이 상태를 표현한다. 하지만 그 두 경우에 사람이 진정으로 명명(호명)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선택은 타 자를 한 계층에 소속시키면서 그 정체를 파악하거나 그에게 이름을 주는 구실로 그를 통해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는 갈림길에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는 결코 명명(호명)하지 않는다. 만약 그에게 부여하는 명사가 그에게 있는 성격들의 기능이라면 타자를 분류하는 것이요, 또 규칙을 따르는 일 에서 자신은 면제되었다고 생각하면서 타인을 ‘자유롭게' 명명하는 것이라 면, 즉 그에게 있는 성격에 따라 자기 자신을 분류하는 것이다. 아울러 자 주 그 둘을 모두 실천한다.〉(『야만적 사고』, 240 쪽) 또 r 종으로서의 개체」 와 r 다시 찾은 시간」 (『야만적 사고,!), 7 장과 8 장)을 참조할 것. 〈따라서 각 각의 체계에서 고유 명사는 의미 작용 qu anta de si gnifi ca ti on 을 표상하 며, 그 아래로는 오직 보여줄 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퍼스와 루셀이 범한 오류의 뿌리에 다다른다. 전자는 고유 명사를 ‘색인 i ndex' 으로 정의하고 후자는 지시 대명사 속에서 고유 명사의 논리적 모델을 발견했다고 믿는다. 실제로 이것은 명명 (호명) 행위가 의미를 만드는 행동에서 보여주는 행동 으로 이행함이 쥐도 새도 모르게 이루어지는 연속체에 위치한다. 반대로, 비록 각각의 문화가 그 문턱을 다르게 고정시킨다 하더라도 이행 과정은 불연속적이라는 사실을 확층했기를 우리는 바란다. 자연 과학은 경우에 따 라서 그 문턱을 종, 변종, 또는 하위 변종의 수준에 위치시킨다. 따라서 그 것들은 매번 상이한 일반성의 술어들을 고유 명사로 지각할 것이다.〉

(285-286 쪽) 이러한 의도를 철저히 하면서 순수한 〈보여주기〉의 명사 이전 속성을 참 조하는 것이 합법적이냐를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며, 언어의 영도( 零 度)로 서 〈감각적 확실성〉으로 나타나는 순수한 지시가 차이의 놀이에 의해 이미 지워진 신화가 아니겠느냐고 자문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고유한〉 지시에 대해서는 레비스트로스가 다른 곳에서 고유 명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을 살펴야 할 것이다 .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그 체계는 더 이상 외적 한계점 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적인 종의 질적 다양성을 하나의 질 서의 상징적 질료로 디루는 데 성공하기 때문이며, 구체적인 것, 특~한 것, 개별적인 것으로 향하는 그것의 행진은 개인적 호칭의 방해물에 의해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 심지어 고유 명사까지 분류를 위한 항목으로 사용 될 수 있다.〉 (288 쪽) 또 『 야만적 사고 』 . 242 쪽 참조 鼻

이곳저곳에서 고유 명사의 사용에 영향을 주는 몇몇 금기들로부터 착안한 증명이다 . 여기서 조심스럽게 고유 명사 소멸의 본질적 필 연성과 경우에 따라 또 궁극적으로 거기에 부과되거나 분절될 수 있는 결정적 금기를 구분해야 할 것이다. 금기만큼이나 비금기 non p roh i b iti on 도 근본적인 소거 또는 삭 제를 전제로 한다. 고유 명사의 비금기 , 제시 또는 의식은 본질적이며 복구 불가능한 비고 유성을 복원시키거나 발견하게 할 뿐이다. 의식 속에서 이름(명사) 은 고유하게 언급되고 이미 분류되며, 자신을 부르면서 소거된다. 그러면 그것은 이른바 고유 명사에 불과하다. 문자 언어를 칙선적 음성적인 표기라는 협소한 의미로 이해하기 를 그친다면, 고유 명사를 생산, 즉 소거할 수 있고 그것에 분류적 차이를 줄 수 있는 모든 사회는 일반적으로 문자 언어를 실천함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 문자 없는 사회〉라는 표현에는 어떤·현실 도, 어떤 개념도 부합될 수 없을 것이다. 이 표현은 문자 언어에 대한 통속적, 죽 인종 중심주의적 개념을 남용하는 인종 중심주의 적 몽상에 속한다. 문자 언어에 대한 무시와 무지는 바로 이러한 인종 중심주의와 하나를 이룬다. 거기에는 의관적인 역설, 즉 완벽 하게 수미 일관된 욕망이 선언되고 현실화되는 모순 중 하나가 있

울 뿐이다. 유일하고 동일한 몸짓으로, 자기 자신의 충만함과 자기 자신에 대한 현전을 꿈꾸는 음성 언어에 쓰이는 도구인 (알파벳) 문자 언어를 무시하며 알파벳이 아닌 기호들에 대해서는 문자 언 어라는 명분을 주기를 거절한다. 우리는 루소와 소쉬르에게서 이러 한제스처를 간파했다. 남비크와라족(「문자의 교훈」의 주체)은 따라서 문자 없는 민족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통상적 의미에서 문자라고 부 르는 것을 구비하지 못하고 있다. 하여튼 레비 AE 쿠 A 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비크와라족은 문자를 사용할 줄 모르는 것 으로 추정된다.〉 조금 지나서 이러한 무능함은 인종 정치적 차원에 서 서구의 침입과 「문자의 교훈」에 의해 단절된 순수함과 비폭력 으로생각된다. 도대체 하나의 모델을 기준으로 문자의 본질을 결정지으면서, 남비크와라족이 문자 언어 일반에 접근하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차후에 우리는 레비스트로스의 여러 텍스트를 대질시키면서 『슬픈 열대』에서 매우 간단하게 상기된, 호리병에 새 긴 〈점자〉와 〈지그재그식 문자〉를 문자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어 느 정도 합당한가를 따져볼 것이다. 그러나 특히 고유 명사를 말소 시킬 수 있는 사회, 즉 폭력적인 사회에서 문자 언어 일반의 실천 울 어떻게 부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왜냐하면 차이의 놀이 속에 분류된 고유 명사의 말소는 근원적인 폭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호칭 표시 부호〉의 순수한 불가능성 , 호칭 표시 부호의 불가능한 순수성, 〈호칭 표시 부호〉가 제거할 것으로 희망되는 이러한 〈애매 모호함〉을 제거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구두법의 어떤 코드에서도 그 점의 존재가 전혀 문제의 양상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언 어에서 타자를 순수한 다론 것으로 인지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상기시키는 절대적인 고유한 명칭의 죽음은 독보적인 것에 할애된

순수한 언어의 죽음이다. r 문자의 교훈」에서 언급된 통상적이면서 도 파생된 의미의 폭력의 잠재성에 선행해서, 그 가능성의 공간인 원-문자(原文字)의 폭력, 차이와 분류의 폭력, 명칭 체계들의 폭력 이 존재한다. 이러한 연계 구조를 그리기 전에 고유 명사들의 장면 을 판독해 보자. 조금 후에 읽게 될 또 다른 장면과 더불어 그것은 r 문자의 교훈」에 필수 불가결한 준비이다. 그것은 r 가족 생활 En fami lle 」이라는 다른 장과 또 다른 장면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 아 울러 26 장 『직선에 대해서」에서 기술되었다. (인종학자의 출현이나 그의 기록 수첩과 사진기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남비크와라족의 연구가 아무리 쉽다 하더라도 언어상의 이유로 그 작업은 복잡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고유 명사의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 직계 사람들의 관례를 따 라야만 했다. 즉 그들을 지칭하는 데 쓰이는 차용 명사로 원주민들과 맞 닥뜨려야 했다. 줄리오J u li o, 호세마리아J ose- Ma ri a, 루이자 L ui za 따 위의 포르투갈 이름이 있다고 하자. 또 Lebre( 토끼), Assucar( 설탕) 같은 별명이 있다고 치자. 나는 롱동 Rondon 장군이나 그 친구들 중 한 명이 대체로 잔털이 없이 매끄러운 피부를 가진 인디언들 사이에서 는 희귀한 턱수염 때문에 카베낙 Cava ign ac 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안댜 내가 어린이들과 놀던 어느 날 그중 한 계집애가 자기 친구에게 얻어맞고는 내 곁으로 도망쳐왔다. 그러고는 아주 이상야릇하게 알아 듣지 못할 말을 내 귀에다 대고 중얼거리기 시작해서 나는 여러 번 이 야기를 반복했는데, 그러는 동안 그 계집아이의 맞수가 잔꾀를 부려서 화난 얼굴로 비장의 비밀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발설하기 위해 다가왔 다. 그 아이의 망설임과 나의 몇 가지 물음이 오고가는 사이에 그 일 의 진상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처음 내게 온 계집애는 복수를 하기 위해, 적의 이름을 내게 말하기 위해 온 것이고, 이 계집애는 때린 아

이가 그것을 알아차린 후에는 보복이라는 명목으로 그 계집애의 이름 을 발설했다. 이 순간부터, 비록 약간 경박한 일이지만, 아이들을 서로 자극시켜서 그 아이들의 이름을 쉽게 알아내었다. 그런 후에 아이들은 자기네들끼리 수근대더니 별 어려움 없이 나에게 어른들의 이름을 일 러주었다. 어른들이 우리의 비밀스런 모임을 알아차리자 아이들은 호 되게 야단맞았고 나는 더 이상 정보를 알아낼 수 없었다. ?)

7) 우리는 이 텍스트의 투명함 속에서 루소를 읽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러한 장면에 Promenade(IX) 에서 잘라낼 수 있는 다른 장면을 슬며시 집 어넣으면 안 되는가? 하나씩 하나씩 철자를 열거하고 세심하게 모든 요소 를 검토하면서 그 항목들의 대립보다는 그러한 대립의 엄밀한 균형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마치 루소가 확실한 양화p os itif로 현상한 것 처럼 모든 일이 전개된다(레비人뜨쿠人는 음화로 그 인상을 우리에게 전달 한다). 가령, 다음과 같다. 〈사람들을 압도하기 위해서 호주머니를 비우는 일에 싫증 난 나는 좋은 무리들을 거기에 내버려두고. 마을장을 혼자 둘러 보았다. 각양 각색의 물품들은 오랫동안 나를 신나게 했다. 판매대에 두 개 의 변변치 않은 사과(그녀는 그것을 팔아치우려고 했다)를 갖고 있던 아담 한 소녀 주위에서 나는 대여섯 명의 사보아 사람들을 알아보았다 . 그 사보 아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그 사과들을 사버리려고 했지만 그들에게는 다 합쳐서 겨우 두세 푼 정도만 있었고, 그것은 사과에 커다란 구멍 breche 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에게 이 상품 목록은 에스페리드 Hespe rid e s 사람들의 정원이었고 그 소녀는 그것을 지키는 용이었다. 이 코미디는 나 를 오랫동안 즐겁게 해주었다. 나는 그 소녀에게 사과값을 치르고 소년들 에게 나누어주면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나는 마음이 순한 사람을 줄 겁게 해줄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구경거리들 중의 하나를 본 것이며, 그 나이의 순진함과 더불어 하나가 된 즐거움이 내 주위의 다른 이들까지 퍼 져나가는 광경을 보았다. 왜냐하면 그 소녀를 보는 구경꾼들은 그 즐거움 울 함께 나누었고, 그처럼 싼 값에 이 즐거움을 함께 나눈 나는 덤으로 그 녀가 내 행동의 결과라는 점을 느끼는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금기와 관련된 경험적 연역에서 오는 단 점들을 언급할 여유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레비스트로스가 여기서 그 금기와 계시를 기술하는 〈고유 명사들〉이 고유 명사가 아님을 선험적으로 안다. 『야만적 사고』가 상기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고유 명사〉란 표현 자체가 부적합하다. 금기에서 놀라운 사실은 고유 명사로 작동하는 것을 발언하는 행위이다. 바로 이 기능이 의 식 자체인 것이다. 통상적인 의미에서(즉 의식이란 의미에서) 고유 명사는(〈진실로 en verite >,이 단어를 무시해야 하는지 여부를 말할 것이다 ) 8) 소속의 지칭과 언어 사회적 분류에 불과할 뿐이다. 금기 의 제거 및 비난이라는 놀이와 〈고유한 이름〉의 노출은(문제의 관 건은 일종의 전쟁 행위이며, 이러한 놀이와 싸움에 계집아이들이 참여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을 수 있음을 상기하자) 고유 명 사를 제시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분류와 소속을 감 추고 있는 가면을 벗기고 언어 사회적인 차이들의 체계에 속하는 것을 파헤치는 데 그 주안점이 있다.

8) 우리가 처음부터 암시했듯이, 이 단어와 개념은 로고스 중심주의적 폐쇄 영 역과 현전의 형이상학 안에서만 그 의미가 있다. 그것이 직관적 또는 사법적 적합성의 가능성을 함축하지 않을 때도, 그것은 계속해서 진리 l' ale t he i a 에 서 현전에 의해 메워지고 채워지는 비전의 한 요인을 특권화한다. 똑같은 이 유로 해서 문자 사상은 단순히 과학, 더욱이 인식론적 회로의 내부에 포함되 는 것을 방해받는다. 문자 사상에는 야심도 겸손함도 없다.

남비크와라족이 감추었던 것, 어린 소녀들이 규칙 위반을 통해 노출시킨 것 등은 더 이상 절대적인 언어 표현이 아니라 권한을 부여받은 일종의 보통 명사일 뿐이다. 『야만적 사고』 (242 쪽)에서 읽을 수 있는 〈‘추상 명사’ 역시 명칭 체계 속에 포함된다는 점〉이 사실이라면말이다. 따라서 『슬픈 열대』에서 심층적인 문제 제기 없이 사용한 고유 명사란 개념은 단순하지도 않으며 쉽게 다룰 수도 없는 것이다. 결 과적으로 나중에 r 문자의 교훈」의 세부 항목을 이루는 폭력, 속임 수, 타락 또는 대립 등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확인되었듯이, 여기 서 폭력은 단번에 본래의 순수함에서 도래하는 것이 아니며 그 순 수성의 적나라함은 이른바 so i -di san t 고유 명사의 비밀이 폭로되

어 불의의 습격을 당하는 순간에 놀라움으로 변한다. 폭력의 구조 는 복잡하며 그 가능성(문자) 역시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명명해야 할 최초의 폭력이 실제로 존재했다. 명명한다는 것, 경 우에 따라서 발설이 금지된 이름을 말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언어 의 근원적 폭력이며 그 폭력은 차이 속에다 절대적 호칭 부호를 집어넣고 분류하고 지연시키는 것이다. 독자적인 것을 체계 속에서 생각하고 거기에 끼워넣는 것, 그것이 바로 원-에크리튀르의 제스 처이다. 원-폭력, 고유성과 절대적 근접성의 상실, 자기 자신에 현 전함의 상실,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것의 상실, 이미 두 겹으로 나 누어져서 반복되고 자신의 소멸 속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 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현전의 상실이다. 금기되고, 따라서 다시 나 타나는, 방어적이며 문자를 감추고 이미 고유한 것을 분화시킨, 이 른바 고유 명사를 지우고 삭제 또는 소거할 것을 지시하는 〈도덕 원리〉를 세우려는 두번째 폭력에 의해 확인된 이러한 원형의 폭력 으로부터 세번째 폭력(통상적으로 악, 전쟁, 철면피, 강간 등으로 부 르는 것 속에서)이 경우에 따라 도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도 있다. 그것은 이른바 고유 명사, 죽 고유한 것을 그 소유와 그 고유성으로부터 빼앗아간 근원적 폭력을 침입에 의해 계시하는 데 있다. 주도 면밀한 세번째 폭력, 그것은 말하자면 원래의 비자기 정체성 la non-id e nti te na ti ve 과 분류 동을 고유한 것의 탈자연화 로, 또 자기 정체를 그 개념의 추상적 계기로 노출시킨다. 바로 이 세번째 수준, 죽 경험적 의식 수준에서 폭력에 대한 공통 개념(도 덕률과 위반 체계)이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개념의 가능성은 여전히 생각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이 수준에서 고유 명사들의 장면이 씌어졌다. 그리고 나중에 문자론이 씌어진다. 이 마지막 폭력은 원형 폭력과 법의 하위 층위로 동시예 귀결되 는 만큼 그 구조가 복잡하다. 실제로 그것은 이미 일종의 탈고유화

인 첫번째 명명을 계시하지만 그때부터 고유한 것으로 기능하는 것, 지연된 고유성의 대체물, 사회적이며 도덕적인 의식에 의해 고 유한 것으로 지각된 고유함의 대행자인 이른바 고유한 것, 자기 자 신의 정체를 확실히 보장하는 도장, 즉 비밀을 노출시킨다. 경험적 폭력, 통상적 의미의 전쟁(소녀들의 속임수와 배반, 소녀 들의 겉으로 나타난 속임수와 배반• 왜냐하면 인종학자는 자신을 진정 한, 그리고 유일한 범인으로 간주하면서 그 아이들을 순수하게 받아들 이기 때문이다. 문자의 코미디를 연기하는 인디언 추장의 속임수와 배 반, 서양의 침입자에게 그 모든 근원을 차용하는 인디언 추장의 외관 상의 속임수와 배반), 레비人뜨쿠人는 언제나 그러한 폭력을 우발적 사건으로 생각한다. 그 폭력은 순진함의 영역에서, 그 자연적 선의 가 아직도 퇴색되지 않은 하나의 〈문화 상태〉에서 야기될 것이다 .9)

9) 루소의 술어로는 기술하기 힘든 상황이며, 소위 말하는 문자의 부재는 상 황을 더욱더 복잡하게 만든다. 『인간 언어 기원론 』 은 아마 레비 AE 쿠 A 가 기술하는 사회와 문자의 단계를 〈야만성〉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세 가지 문자 방식은 민족으로 모인 사람들을 고려할 수 있는 세 가지 단계에 정확 히 해당된다. 대상을 그리는 것은 야만 민족에게 적당하다. 단어와 명제 기 호는 원시 민족에게 적합하며, 알파벳 문자는 문명화된 민족에게 적당하 다.〉

r 문자의 교훈」이 확인하게 될 이러한 가설은 일화(逸話)의 모습 을 띠는 두 가지 지표에 의해 지지된다. 그 두 가지 지표란 앞으로 올 대리 또는 표상 re p resen t a ti on 의 장식에 속한다. 그것은 r 문자 언어의 교훈」의 커다란 장면 배치를 예고하고, 레비人뜨쿠人의 기 행문에서 이야기의 구성 묘사를 빛나게 한다. 17 세기의 전통에 따 라 일화, 고백록, 일기의 단편 등은 자연과 사회 , 이상적 사회와 현실적 사회, 즉 다른 사회와 우리 사회 사이에 있는 관계에 대한 철학적 증명을 염두에 두고, 현명하게 그 구도가 배치되고 고려되 었다. 첫번째 지표는 무엇인가? 고유 명사들의 전쟁은 외국인의 도착

이후에 일어난 일이며 그 점은 놀랄 일이 못 된다. 그것은 질서와 자연적인 평화를 어지럽히는 인종학자와 좋은 사회를 평화적으로 자신의 놀이에서 자신에게 결부시키는 공범 관계 속에서 탄생한다. 전화선을 놓는 사람들이 인디언들에게 그 안쪽에서 그들에게 이름 을 자기 것으로 쓰도록 강요하면서 그 우스꽝스러운 별명을 부과 시켰을 뿐만 아니라(토끼, 설탕, 카베낙) 인종학적 침입이 고유 명 사들의 비밀과 소녀들의 놀이를 조정하는 순진한 공범 관계를 깨 뜨리는 것이다. 놀이 장면과 어린 소녀들의 놀이 장면에 의해 그처 럼 확실히 내포적 의미를 가지는 모종의 처녀성 공간을 범하는 사 람은 다름 아닌 인종학자이다. 외부인이 단지 존재한다는 것, 그의 눈이 열려 있다는 시실만으로도 강간하지 않을 수 없다. 측면 구석 J'a pa rte, 귀에 소곤대는 비밀, 〈계략〉의 계속되는 이동, 가속화, 성급함, 〈그 근원이〉 메말랐을 때, 그 실수의 여파 이전에 운동 속 의 증폭되는 어떤 희열감, 이 모든 것은 춤이나 전쟁만큼이나 어떤 축제를생각나게 한다• 따라서 단지 훔쳐보는 자 voy eur 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침입 이다 . 무엇보다 순수한 침입이다. 말없는 한 이방인이 부동의 자세 로 어린 소녀들의 놀이를 목격한다. 그 소녀들 중 한 명이 한 〈친 구〉를 〈때렸다〉는 것은 아직 진정한 폭력은 아니다. 어떤 통합성도 손상되지 않았다. 폭력은 침입에 부응하여 고유 명사들의 은밀성을 열어주는 순간부터 나타난다. 아울러 그 공간이 이방인의 시선에 의해 조작되고, 그 방향이 재정립되는 순간에 비로소 그렇게 된다. 타자의 눈은 고유 명사룰 부르고, 그 감추어진 철자를 드러나게 하 며 그 이름들을 둘러싸는 금기를 깬다. 인종학자는 먼저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지속적 시각과 침묵의 존재, 그리고 그가 그 단절의 놀이에 관심을 가지고 귀기울여 속임 수를 쓴 장본인이며 그 희생자인 아이와 첫번째 공범을 시작했을

때, 일은 더 복잡해지며 더 꼬이고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궁극적 으로 중요한 것은 어른들의 이름이며(그것은 이름의 시조라고도 말 할 수 있을 것이며 그 비밀은 이름이 부여되는 바로 그 장소에서 침 입받는다) 궁극적 비난은 이방인의 능동적 개입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 더구나 바로 그 자신이 그 비난을 자처하고 자기 자신을 참 회한다. 그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지만, 그가 이미 야기시킬 수 있는 일 앞에서는 수동적이며 여전히 대가들의 이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진한 어린 소녀들을 범죄시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할 수 도 없기 때문에, 그 침입은 그때부터 이방인의 능동적이며 자기 배 반적이며 교활한 침투에 의해 완수되거니와 그 이방인은 보고 듣 고 난 후에 그 소녀들을 〈자극〉시켜 발설하게 하여 귀중한 이름을 불게 한다. 이때 귀중한 이름이란 어른들의 이름이다(인디언들의 논리에 따르면 오직 〈성인만이 고유한 이름을 소유한다.〉(『야만적 사 고 』 , 39 쪽)) 물론 허위 의식과 연민의 정과 더불어말이다. 루소는 그 연민의 정이 이방인 중의 이방인을 우리와 연결시킨다고 말했 다. 이제 그 인종학자의 고백록인 『참회록 mea culp a 』을 다시 읽 어보자. 이 책은 그를 만족시켰던 침범 행위에 따르는 책임을 전적 으로 떠맡는다. 그 계집아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발설한 후에 어른 들의 이름을 일러주었다. 처음 내게 온 계집애는 복수를 하기 위해, 적의 이름을 내게 말하러 온 것이고, 이 계집애를 때린 아이는 그것을 알아차린 후에 보복이라 는 명목으로 그 계집애의 이름을 발설했다. 이 순간부터, 비록 약간 경 박한 일이지만, 아이들을 서로 자극시켜서 그 아이들의 이름을 쉽게 알아내었다. 그런 후에 아이들은 자기네들끼리 수근대더니 별 어려움 없이 나에게 어론들의 이름을 일러주었다.

진정한 범인은 벌을 받지 않으며, 이 점은 그의 실수에 회복 불 능이라는 도장을 찍는다. 〈어른들이 우리의 비밀스런 모임을 알아 차리자 아이들은 호되게 야단맞았고 나는 더 이상 정보를 알아낼 수 없었다.〉 이미 우리는 (레비 AE 쿠 A의 모든 텍스트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슬픈 열대』의 저자에게 대단히 소중한 테마인 인종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근원적이며 자연적 선의의 틀에 따라 타 자를 성립시키고, 스스로 뉘우치고, 창피스럽게 여기며, 반인종 중 심주의적 거울 속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자기 존재를 노출시키는 기능을 맡는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한다. 자기 지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스스로 깨닫는 것에 대한 수치, 인종학을 만들어 낸 후회와 회한 ,10) 이런 것들을 루소는 현대 인종학자 레비스트로 스에게 가르쳐주었을 것이다. 최소한 제네바 학회 7 에서 언급된 바 대로라면 그러한 추측은 맞다.

10) ….. . 서구가 인종학자들을 배출시켰다면, 그 이유는 어떤 강렬한 회한이 서 구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Un pe ti t verre de rhum, Trist e s tro p iqu es, 38 장).

진정 나는 〈내 자신〉이 아니며, 〈타자〉 가운데 가장 연약하고 비천 한 존재이다. 그 점이 바로 루소의 『고백록』이 발견한 것이다• 인종학 자는 고백 말고 다른 무엇을 적었는가? 먼저 그의 이름을 고백한다• 내가 증명했듯이 그것은 그의 소명과 업적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아 울러 이 업적 자체에서 그 사회의 이름으로 그러하거니와 그 특사인 인종학자의 봉사로 다론 사회들, 다른 문명들, 좀더 분명히 말하면, 연 약하고 비천한 사회와 문명들 가운데서 자신의 사회를 선택한다. 그것 은 그 사회가 스스로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가를 확 인하기 위해서이다 .(245 쪽)

자신의 영역에서 이러한 조작을 이행하는 사람이 얻은 제어 지 점은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18 세기, 어쨌든 18 세기의 특정한 유 형으로부터 물려받은 제스처를 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도처 에서 이러한 실행을 무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유럽 민족이 아 닌 민족들은 단지 잃어버린 좋은 천성의 지표, 순수하게 남아 있는 토양의 지표로서, 또 우리 유럽 사회와 문화의 구조, 생성, 특히 타락을 보여주는 기준점이 되는 〈영도( 零 度, deg re zero)> 지 표로 연구될 것이다. 늘 그렇듯이, 이러한 계보 파악은 일종의 목적론이 자 종말론이다. 역사를 종료하는 충만하고 직접적인 현전에 대한 꿈, 예수 재림의 투명성과 비분할, 모순과 차이의 제거. 루소가 인 종학자에게 명시한 임무란 이러한 것들의 도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단독적으로〉 〈나와 타자〉의 〈대립〉을 〈자극〉하기 위해 모색했을 철학에 맞서서 .11) 말과 사물을 억지 춘향식으로 뜯 어 맞춘다고 비난할 일은 못 된다. 차라리 원문을 읽어 보자. 제네바 학회 발표문에서 여전히 그와 유사한 많은 텍스트들을 읽게 된다.

11) 다음 글은 루소의 두번째 논문 『인간 불평등 기원론』 의 이중 인화로 읽 울 수 있다. 〈자존심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성이며. 그것을 강성하게 하는 것은 반성이다. 바로 그 반성이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며 사람을 그를 방해하고 괴롭히는 모든 것과 떼어놓는다. 그것을 고립화시키는 것은 철학 이다. 철학을 통해서 인간은 비밀리에 고통받는 인간의 모습으로 말한다. ‘ 네가 원한다면 사라져라. 나는 확실하다.’〉

인종학의 혁명을 미리 형성시키고 그 틀을 짠 루소의 혁명은 강요된 어떤 정체 파악도 거부하는 데 있다. 죽 한 문화와 다론 문화 또는 동 일 문화가 그에게 부과시키려 하는 문화의 구성원인 한 개인과 한 인 물 또는 사회적인 직능 따위의 동일시된 정체 파악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 두 경우, 문화 또는 개인은 자유로운 자기 파악을 요구하며, 이러한 자유로운 정체 파악은 인간을 벗어날 때만 실현될 수 있다. 죽 체험하

고, 따라서 고통을 겪는 모든 것과 더불어 실현될 수 있다. 또 개인의 직능 또는 그 인물을 벗어난 저쪽 편에서 실현될 수 있다. 나와 타자 는 이미 조작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어진 존재와 더불어 철학만이 유일하게 자극시키려 하는 모종의 적대 관계를 넘어 나와 타자의 통일 성을 되찾는다. 근원적이며 마침내 새롭게 태어난 결합은 그 제삼자 lui. 즉 인간의 적인 사회에 맞서 그들이 함께 우리라는 토대를 세우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가령 루소가 문명화된 삶이 내포하는 참 을 수 없는 모순들을 어떻게 모면할 것인가를 그에게 일러주었다는 점 에서, 인간은 그의 적인 사회를 거부할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있다. 왜 냐하면 자연이 인간을 추방하고 사회가 그를 억압한 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최소한 자기 이득을 위해 그 딜레마의 축을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이며, 사회의 본질에 대해 성찰하기 위해 자연에 근거한 사회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 점이 『 사회 계약론 』 , 『식물학에 대한 시각 』 , 『 몽상록』 동의 저서가 우리에게 전하는 파기할 수 없는 메시지 인 것이다 .12) r 작은 럼 술잔」 8 에서 레비人뜨쿠人는 디드로를 가혹하게 비판하 는 동시에 그와 대조적으로 루소에 대한 찬미(철학자들 가운데 가 장 인종학자의 모습을 띠는…… 우리의 스승…… 우리의 형제, 우리는 그에게 너무나 많은 배은 망덕함을 저질렀고, 이 책의 모든 부분은……, 만약 그 헌사가 그를 추모하는 데 손색이 없다면, 그에게 헌정되었을 것이다)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는다. <…… 이 악들이 과연 [사 회] 내부에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아는 것이 관건이다. 온갖 남용과 범죄의 배후에서 우리는 인간 사회의 무너지지 않는 토대 를 추구할 것이다.〉 13) 12) 245 쪽. 강조는 저자의 것입 13) Tris t e s Trop iqu es, 18 장. 디드로에 대해서는 단지 지나가면서 다음 사

실을 주목하자. 문자와 책에 대한 디드로의 판단이 가지는 신랄함은 어떤 면에서도 루소의 신랄함에 뒤지지 않는다. Enc yc lop t.었i e 에서 그가 집필한 책 li vre 이란 항목은 엄청난 폭력을 동반한 종교 재판이다.

만약 여기서 이러한 루소에 대한 찬양이 노리는 것과 그 동기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레비스트 로스의 다양한 사상을 축소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한 루소 찬미가 겨냥하는 동기는 과학적 작업에 대해 암암리에 의미 부여하려는 것 이상이며, 그 작업 내용 자체에서 그것을 심화시킨다. 우리는 두번째 지표를 예고했다. r 문자의 교훈」이 장면을 진열시키는 남비 크와라족의 경우 악이 바깥에서 온 문자의 침투와 함께 (c 也따 CV 이라 고 『 페드로 』 가 말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슬그머니 파고들었으며 글 을 쓸 줄 모르는 남비크와라족은 좋은 사람들이라고 누군가 우리에 게 알려준댜 남비크와라족에게서 폭력 또는 증오를 지각했다고 믿 는 예수회 선교사들, 개신교의 선교사들, 미국인 인종학자들, 전기 회사의 기술 참여자들은 혼동했을 뿐만 아니라 십중 팔구 그들에 게 자신의 고유한 사악함을 투사시켰을 것이다. 아울러 니~ 그 들이 깨달았다고 믿거나 원했던 ’ 악 그 자체를 야기시켰다. 똑같은 묘사 기술로 씌어진 〈가족 생활〉이리는 · 제목을 단 장의 끝부분을 읽어보자. 이 구절은 바로 r 문자 언어의 교훈」 뒤에 나오는데, 어 떤 의미에서는 r 문자 언어의 교훈」에 꼭 필요한 것이다. 먼저 자명 한 사실을 확인해 보자. 만약 남비크와라족의 순진성과 선의, 그들 의 〈지극한 친절함〉, 〈인간적인 부드러움의 최고로 진정한 표현〉 등에 대해, 레비AE 쿠 A 의 선언 등에 대해 파생적이고 상대적인 따라서 전적으로 경험적인 합법성의 장소를 할당하고 이 장의 주 제에 대한 경험적인 정서의 묘사로서 그러한 표현들을 다룰 때만 (남비크와라족뿐만 아니라 작가 역시) 그러한 선언들에 동조한다면, 죽 이러한 선언들에 경험상의 관계라는 명목으로만 동조한다면, 그

반대로 인디언 원주민들의 증오, 역정, 비문명성 등을 개탄하는 미 국인 인종학자의 도덕주의적 묘사에 대한 믿음을 부과시키지 않아 도 된다. 현실적으로 이 두 가지 관계는 대칭적으로 대립하며, 똑 같은 폭을 지니며, 유일하고 동일한 축에 따라 정렬된다. 남비크와 라족에 대해, 병, 더러움, 빈곤함 앞에서 그들이 보인 만족감, 무례 함, 증오와 무시하는 성격에 대해 매우 가혹한 한 외국인 인종학자 의 출판물을 인용한 후에 레비 AE 쿠 A 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백인이 가져온 병 때문에 그들이 무참히 죽어갔던 시대에 그들을 알 았던 나로서는, (롱동 Rondon 의 인간적인 시도 이후로) 아무도 다시 그러한 시도를 하지 않았던 시대에 그들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비통한 묘사를 잊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내 노트에 남아 있는 그림을 제의하고는 아무것도 기억에 간직하고픈 마음이 없다. 나는 새벽에 초 롱에서 나오는 빛으로 밤새 갈겨 썼다 . 〈어두컴컴한 대초원에 캠프 촌의 불이 빛나고 있다. 마을 집 주위에는 오직 추위를 막기 위한 보 호가 있을 뿐이다. 그 추위는 종려나무와 나무 가지로 조급하게 만든 부서질 듯한 바람막이 뒤로 스며들어왔다. 그 병풍을 세운 땅에서 바 람과 비가 올까 사람들온 걱정했다. 그리고 빈곤한 물건들로 가득 찬 초가집에도 추위가 밀려왔다. 그 물건들은 지상의 모든 풍요로움을 만 든다. 다른 적대적인 부족에 대해 노심 초사하는 결혼한 사내들은 서 로 가깝게 누워서 서로에게 힘과 위안이 되었으며 일상의 어려움과 때 때로 남비크와라족에 밀려오는 향수에 유일한 구원이었다. 처음으로 원주민들과 관목 숲에서 야영한 그 방문객은 완전 무방비 상태의 이러 한 인간적인 광경 앞에서 번민과 연민에 사로잡혔다. 적대적인 땅의 지반에 맞서 어쩔 도리 없는 대재앙의 공포에 질린 인류의 원초적 모 습을 보는 것 같았다. 혼들거리는 불에서 발가벗은 채 추위와 공포에

떠는 인류의 모습 방문객은 손, 팔, 가슴을 대지 않고 (불빛으로 뜨거 운 반사를 예측한다) 덤불을 더듬으면서 돌아다닌다. 그러나 이러한 비천함은 속삭이는 말과 웃음소리로 누그러졌다 . 부부들은 마치 잃어 버린 하나됨에 대한 향수 속에 젖어 있는 것처럼 서로 꼭 껴안았다. 의부인이 지나가는데도 애무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 모두에게 지극한 친절함, 심오한 초탈, 거의 동물적인 순박하고 매혹적인 만족을 엿볼 수 있다. 그러한 만족은 이런 다양한 감정을 마치 인간적인 부드러움 의 가장 감동적이며 진실된 표현으로 묶어놓고 있다.〉 위의 묘사 뒤에 『문자의 교훈』이 나온다 . 휴대용 램프 불빛으 로 한밤중에 갈겨쓴 〈노트 수첩〉의 한 쪽. 만약 이러한 감동어린 정경이 인종학적 담론에 속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반박의 여지 없이, 폭력과 문자가 결탁된 침투에 이어서 오 는 감정의 발로에 필수 불가결한 전제(남비크와라족의 선의 또는 순 진 무구함)를 함축한다. 바로 거기서 인종학자의 인종학적 고백과 이론적 담론 사이에 놓인 엄밀한 경계선을 목격해야 한다. 경험적 인 것과 본질적인 것의 차이는 그 권리를 계속해서 자리매김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레비 AE 쿠 A 는 이러한 차이에 사고를 열어주었으 며 의식의 철학들 또는 데카르트나 후설적 의미의 코기토 철학을 매우 신랄하게 공격한다. 또 그는 베르그송의 『의식의 직접적 소여 에 대한 시론 Essa i sur Jes donnees im med iat es de la con- s ci ence 』을 혹독하게 공격할 뿐만 아니라 그의 옛 스승들이 소쉬 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를 연구하기보다는 너무 사변적으로 성찰 했음을 비난한다 .14) 그런 식으로 고발당하거나 조소당하는 철학들 의 핵심을 어떻게 생각하든(더구나 그 철학들이 때때로 교과서, 선 14) Tris t e s Tropiq ues 의 6 장 Comment on dev ien t eth n olog ue .

택된 단편들 또는 공공연한 소문 등에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바와 같 이 허깨비처럼 상기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경험적 정서와 본 질적 구조가 일반적 규칙으로 사용된다. 데카르트도, 후설도 세계 또는 타자의 관계에 대한 경험적 변형 을 과학의 진리로 여긴다고 암시한 적이 없으며, 감정상의 성질을 삼단 논법의 전제 조건으로 삼는다고 암시한 적도 없었다. 『진리 탐구로서의 정신 방향을 위 한 규칙 Re g ulae ad dir ec tr o nem ing en il .!I에서는 결코 〈나는 노랗게 본다〉는 현상학적으로 홈잡을 수 없는 진리로부터 〈세계는 노랗다〉는 판단으로 옮겨가지 않는다. 더 이상 이런 바탕에서 논증을 펴지 말자• 어쨌든 의식을 엄밀하게 다루는 철학자라면, 결코 그처럼 섣불리 경험 관계에 대한 믿음으 로 남비크와라족의 근원적 선의와 처녀성의 순수함을 결론짓지 않 았을 것이다. 인종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관계는 그 못된 미국인 인종 학자가 〈비통해 하는 만큼〉(레비人뜨쿠人의 표현이다) 놀라운 일이 다. 왜냐하면 의식과 직관에 몰두한 철학자들의 핏기 없는 유령들 과 그의 유일한 스승인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슬픈 열대 』 초반부에 나타난 고백을 믿자면)를 대립시키는 한 인종학자의 붓 끝에서 남 비크와라족의 근원적 선의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이 엿보이기 때 문이다. 형이상학, 현상학, 실존주의라는 명목으로 이 책(『슬픈 열대』) 서두에 성급하게 '분류된 사상가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특성으로는 인지되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은 자명하다. 그러나 그들의 기호 아 래 기록된 담론들이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장들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만족시키리라고 결론짓는다면 오산일 것이다. 누군가 〈무한한 친절〉, 〈매우 태평스러움〉, 〈순진하고 매력적인 동물 같은 만족감〉, 〈인간적인 부드러움의 가장 감동적이고 진실된 표현과 같

은 무엇〉 등이라고 말할 때, 그들(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은 대체로 이를 검증해 보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검증해 보라고 요 구했고 , 〈 타인에 맞서 우리의 전체적인 토대를 세우는 것을〉(이미 인용했음)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이며, 마침내 새롭게 태어나는 결 합 〉 이란 이름 아래 또는 〈 크리스탈같이 규칙적인 구조(‘가장 잘 보 존된 원시 사회는 우리에게 그 구조가 인류에 모순되는 것이 아님을 일러준다 ' ) 〉 (r 콜레주 드 프랑스 취임 강연」)라는 이름 아래 무엇을 암시하려 하는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계보와 족보적으로 요청된 체계에서 그 모든 사 람 가운데 가장 덜 놀란 사람이 루소는 아니었을 것이다. 루소는 의식과 내적 감정의 철학자들과 이 감성적 코기토 15) 와 (알다시피 루소 생각에) 결코 거짓말하지 않는 이 속마음의 목소리와 더불어 평화롭게 살게 내버려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을까? 루소, 마르크스, 프로이트를 자체로 일치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개념의 체 계적 엄밀성 속에서 그들끼리 서로 일치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15) Confe r ence de Geneve 에서 레비 AE 쿠 A 는 〈코기토에서 출발〉 (242 쪽)하고 있는 철학자들과 루소를 간단하게 대립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문자, 그리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결코 자기 계획을 완수하지 못한 채 자질구레한 일을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 무엇인가 를 그 계획에 가져다 놓는다 . —레비人뜨쿠人의 『 야만적 사고 』 에서 그(문자의) 체계는 그릇된 것이다. 그러나 문자는

그 체계를 발전시키면서 자기 자신을 진실된 것으 로화장했다. —루소 의 『 대화록 』 에서 이제 『문자의 교훈」을 펴보자. 이 장에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여행 일기와 한 사상의 가장 덜 과학적인 표현으로 간주할 수 있는 부분을 남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글을 다름으로써 한 편으로는 다른 글 속에서 16 ) 산발적으로 다루어지고 『슬픈 열대 』 에 서 처음으로 제시된 문자에 대한 체계적 이론에 관련된 모든 테마 를 일정한 형식으로 전할 수 있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이 저서에 서는 이론적 내용 자체가 다른 어느 곳보다 어떤 〈놀라운 사건〉에 대한 주석으로 장황하게 설명된다. 이 사건은 『슬픈 열대』보다 칠 년 앞서 나온 남비크와라족에 관한 학위 논문의 서두에서 똑같은 술어로 보고된다. 끝으로 『슬픈 열대』에 와서야 비로소 그 체계는 가장 엄밀하고 완결된 방식으로 분절된다. 필수 불가결한 전제 조 건들, 즉 문자의 침입에 종속되는 유기체의 본질은 그 어느 곳보다 명시적이다. 그런 연유에서 우리는 긴 시간에 걸쳐 남비크와라족의 순수성에 대한 묘사를 추적했던 것이다. 유일한 순수 공동체, 축소 된 차원들로 이루어진 유일한 공동체(곧이어 자세히 밝혀질 루소의 테마), 그 구성원 모두가 자기 말 안에서 자신에게 충만한 직접적 이며 투명한 〈크리스탈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비폭력과 솔직성으 로 이루어진 소(小)사회가 바로 그것이다. 오직 그러한 공동체만이 바깥에서 du den. o rs 오는 침입의 놀라움으로 문자의 침투, 그 〈간 교함〉과 〈배반〉의 침입을 감수할 수 있다. 오직 그러한 공동체만이 이방인으로부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8 를 수입할 수 있다. 『문 16) 특히 샤르보니예와 한 대담 En t re ti ens. 이 책은 r 문자 언어의 교훈」에 나타난 이론적 실체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는다.

자의 교훈」은 곧 완결된다. 나중에 올 텍스트에서 그 사건의 이론 적 결론들은 구체적 전제 조건 없이 소개되고, 근원적 순진함은 함 의될 뿐이며 노출되지는 않는다 ma i s non exp o se. 앞서 언급된 남 비크와라족에 관한 학위 논문의 텍스트에서 그 사건은 보고되지만 『슬픈 열대』처럼 문자 언어의 의미, 기원, 역사적 기능에 대한 상 세한 성찰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 논문에서 『슬픈 열대』의 여백에 소중하게 적힌 정보들을 추출해 낼 것이다. 문자,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우리는 이 언어롤 레비AE 쿠 A 에게 부과시키지 않는다. 조심스레 그 『대담』을 상기해 보자. <…… 내가 보기에 문자 자체는 그 기원부터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에 토 대를 둔 사회와 끊임없이 관계맺고 있는 것 같다.〉 (36 쪽) 『슬픈 열 대』에서 문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제안하고 있음을 레비스 트로스는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그는 <신비평 Nouvelle Critiq ue)> 에 실린 1955 년의 한 편지에서 그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마르크스 주의의 이름으로 로뎅손 Rod i nson 의 비판을 받자 그는 다음과 같이 불만을토로한다. 만약 그(로뎅손)가 몇 달 전에 출판된 몇 개의 단편적 인용문에 만 족하지 않고 내 책을 통독했더라면, 문자의 기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적 가설을 포함하여 브라질의 부족인 카두베오 cadoveo 족과 보로로 bororo 족에 관한 두 편의 연구를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두 편의 연구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토대를 두면서 인디오들의 상충 구조에 대 한 해석을 시도한 것이며 서구 인종학의 모험에서 그 연구의 참신함은 좀더 많은 배려와 우호적인 대우를 받아야 마땅한 것이었다 .17) 17S) tr 이u c편tu 지r a는le, <3 신65비 쪽평에 >서 에 읽단을 한 수번 도있다 게. 재되지 않았다. 이는 Anth r opo ]og ie

따라서 나의 질문은 단지 〈 어떻게 루소와 마르크스를 화해시킬 것이냐〉가 아니라 〈 이러한 가설에 마르크스적 변별성을 부여하기 위해 상부 구조를 언급하고, 하나의 가설 속에서 인간에 의한 인간 의 착취를 비난하는 것으로 족하냐 〉 로 귀결된다. 마르크스적 비판 이 가지는 본래의 엄밀성을 염두에 두고 빈곤, 폭력, 착취 등에 대 한 일체의 다른 비판, 가령 불교적 비판과 구분할 때만 위의 질문 은 비로소 의미가 있다. 가령 우리가 던지는 질문은 〈마르크스적 비판과 불교적 바판 사이에는 대립도 모순도 없다 〉 1 8) 고 말하는 한 어떤 의미도 없다.

18) Tris t e s tro p iqu es, 40 장 . 〈자기 방식대로 자기 복안에 따라 각자 진리 에 조응한다. 인간을 최초의 연쇄 고리에서 넘어서게 하는 마르크스적 비 판과 (인간에게 인간 조건의 외관적 의미는 그가 고려하는 대상의 확장을 수용할 때부터 공중으로 사라진다는 사실을 일러주면서) 해방을 완결짓는 불교적 비판 사이에는 대립도 모순도 없다 . 이 양자는 다른 수준에서 똑같 온 것을 한다.〉

r 문자의 교훈」을 읽기 전에 또 한 가지 조심해야 할 사항이 있 다. 앞에서 우리는 소쉬르의 문자 배제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모호성을 강조한 바 있다. 음성 문자 모델을 선호하는 뿌리 깊은 인종 중심주의가 그것으로, 그 모델은 문자 표기 gr ap h i e 의 배제를 더 용이하게 하고 합법화시킨다. 반대로 인종 중심주의는 자신을 반인종 중심주의로 생각하면서 자유주의적 진보주의 의식 속의 인 종 중심주의로 나타난다. 근본적으로 언어 lan g ue 와 문자를 분리하 고 문자를 아래쪽과 바깥쪽에 놓으면서(최소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또 언어학을 문자 언어라는 증거의 통로로부터 해방시 킬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면서, 실제로 진정한 언어, 안간적 이며 충만한 의미가 있는 언어의 위상을 지금까지 계속해서 〈문자 없는 민족〉이라고 불린 민족들이 실천한 모든 언어에 부여할 수 있 다고 생각한다. 이 애매 모호한 경향이 레비 ;,....E 쿠;,....의 의도를 감

싸고 있으며 이 점은 우연이 아니다. 다른 한편, 사람들은 언어와 문자의 통상적 차이, 언어에 대한 문 자의 외재성을 수용하는데, 이는 문자 있는 종족과 문자 없는 종족을 지속적으로 구분하게 한다. 레비AE 쿠 A 는 결코 그러한 구분의 가 치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특히 음성 언어에서 문자 언어 로 이행하는 것을 도약 sau t 내지 불연속선 위에서 일어나는 순간적 인 건너뛰기로 파악한다. 순전히 음성적이며 문자로부터 순수하게 남아 있는 언어(즉 순수하고 순진한 언어)에서 그 문자적 〈표상〉을, 억압 기술을 제공하는 새로운 유형에 대한 부차적인 시니피앙으로 결합시키는 언어로 이행됨을 말한다. 레비스트로스에게는 문자에 대 한 이러한 〈후성적 ep ige neti st e > 개 념이 필요했는데, 그렇게 함으로 써 문자 요소와 더불어 도래하는 악과 착취의 테마는 바깥에서 와 소박한 언어의 순수성을 감염시키는 놀라움과 사건의 테마가 된다. 마치 우연처럼 그것을 감염시키는 것이다 .19) 어쨌든 후성적 논지는 그보다 오 년 전 『마르셀 모스 저작 입문 Intr o id u cti on a 1'reuvre de Marcel Mauss 』 (xlv ii쪽)에서 문자라는 주제로 집할 수 있었던 단언들을 되풀이한다. 〈언어는 단숨에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19) Race et h is t o ir e(256-271 쪽)와 La pe nsee sauva g e 에 나오는 우연이 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특히 En t re ti ens(28-29 쪽)롤 참조. 레비AE 쿠 A 는 러시안 룰렛 놀이룰 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장황하게 이야기하면서, 서구 문 명을 성립시키는 복잡한 조합은 문자의 사용이 규정하는 그것의 역사성 및 유형과 더불어 인류의 태초부터 이루어질 수도 있었고(사실 훨씬 더 나중에 가서야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 실제로는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졌다고 설명 한다. 〈이유는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하지만 당신들은 나에게 다 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이것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 우연은 곧이어 〈문 자의 획득〉으로 규정된다. 바로 그것이 레비AE 쿠 A 가 지지할 수 없다고 못 박는 가설이지만 그는 〈먼저 그 가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연 에 대한 믿음을 함의하지는 않지만 (La pe nsee sauvag e, 22 쪽과 291 쪽 참 조), 특정 구조주의는 구조적 총체성의 절대적 특수성을 가져오기 위해서 그 것을 내세워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필연성이 어떻게 루소에게 부과되었는지 보게 될 것이다.

도 의미와 의미 작용을, 그리고 좀더 엄밀하게 따져서 구두 언어 lang a g e p ar] 쩍 의미 작용을 연결짓는 단락에 대해서는 하나 이상 의 물음이 있을 수 있다• 단지 다음 몇 줄만을 읽어보자• 동물 생활의 단계에서 그것(언어)의 출현 동기와 상황 맥락이 무엇 이든간에 언어는 단숨에 갑자기 탄생할 수 있었을 뿐이다. 사물들은 점증적으로 의미를 발휘할 수 없었다. 하나의 변형 과정을 통해서(그 연구는 사회 과학이 아니라 생물학과 심리학에 속한다) 아무것도 의미 가 없던 단계에서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지는 단계로 이행되는 일이 벌 어졌다• (생물학과 심리학이 이 단절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 이상이다• 그 결과, 의미가 있는 담론 과 인식하는 담론 사이에 구분이 생기거니와 약 오십 년 전에 다른 어 떤 철학자들보다도 무시된 의식 철학자는 논리 연구를 통해서 엄밀하 게 그것을 분절시킬 줄 알았다.) 이러한 후성주의 e pig ene ti sme9 는 『 인간 언어 기원론』과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레비AE 쿠 A 사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루소적 모습은 아니다. 열거한 두 문장에서는 〈모든 언 어의 최초의 창안에 소요된 무한한 시간〉이 문제시되었다. 따라서 음성 문자 모델에서 영감을 받아, 칼로 두부 자르듯, 문 자 언어와 음성 언어를 분리하는 전통적이며 근본적인 인종 차별 주의는 반인종 중심주의로 다루어지고 또 당연히 그렇게 생각되었 다. 그것은 인종 정치적 비난을 지지한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 취는 서구 유형의 글 쓰기 문화들이 받아들이는 기정 사실이다. 이 러한 비난으로부터 순수하며 억압받지 않는 음성 언어만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들은 구원된다. 다른 한편, (그것은 동일한 제스처의 역방향이다) 인종 중심주의가

여러 문화의 역사와 그 각각의 가치에 대한 성찰에서 일정한 역할 울 맡기를 바라는 순간부터 문자 있는 종족과 문자 없는 종족의 경계선은, 만약 레비人뜨쿠人가 끊임없이 그 변별성을 인지한다면, 레비人뜨쿠人 자신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 사람들은 문자 있는 종 족과 문자 없는 종족 사이의 차이를 받아들이지만 문자를 역사성 또는 문화적 가치의 조건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별다른 언급 없이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에 대한 통상적 개념을 부과하면서 심층 조 작하는 순간 외관상으로는 인종 중심주의를 재빨리 회피한다. 그것 온 정확히 소쉬르가 취한 제스처의 도식이었다. 달리 말하면, 레비 人뜨쿠人가 역사적 사회와 역사 없는 사회 사이의 편견에 찬 구분 에 대해 끊임없이 공격한 모든 자유주의적 비판과 이러한 일체의 합법적 비난은 여기서 우리가 문제 제기하려 히는· 문자 개념과 관 계된 것이다. 〈문자의 교훈 Le~on d'ecr it ure 〉은 무엇인가? 학습 le~on 이란 말은 이중적으로 쓰인 것이며 이를 문자란 말과 함께 묶어놓으면 멋진 제목이 된다. 학습하는 문자란 의미에서 문 자 교훈인 것이다. 남비크와라족의 추장은 인종학자의 문자를 배우 지만 처음에는 이해하지 않고 그것을 무작정 배운다. 말하자면, 그 언어의 기능을 이해하기보다는 글 쓰기를 흉내내는 것이다. 돌려 말하면, 문자의 기능인 커뮤니케이션, 의미 작용, 시니피에의 전통 등을 이해하기 이전에 그 심층적인 예속화 기능을 먼저 이해한다. 하지만 문자 학습은 또한 문자에 대한 교훈을 준다. 인종학자 레비 人뜨쿠人가 불면증과 싸워가며 문자의 기원, 기능과 의미에 대해 성찰할 때, 오랜 심사 숙고 끝에 그 사건에서 도출시킬 수 있다고 믿은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그 인종학자는 이해 못 한 채 무작정 배우는 한 남비크와라족 추장에게 글 쓰는 제스처를 가르쳐준 후 그가 자신에게 일러준 것을 이해하고 거기서 문자의 교훈을 이끌

어낸다. 이렇게 해서 두 계기가 드러난다. A) 지각에 대한 경험적인 관계, 즉 〈 기상 천외의 사건 〉 장면. B) 올빼미 우는 시간에 불면증 상태에서 겪은 뜻밖의 돌발적 사건들이 생긴 후 문자의 장면과 그 사건, 죽 문자의 닫힌 역 사에 대한 심층적 의미에 대한 역사 철학적 성찰. A) 기상 천외한 사건. 첫 줄부터 그 표현 장식은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인종학적 폭력을 상기시킨다. 두 부분이 거기에 관련된다. 이것은 〈무한한 친절〉, 〈순진하고 매력적인 동물적 만족 〉 , 〈 매우 태평스러움〉, 〈인간적인 부드러움의 가장 감동적이며 진실된 표현 〉 등을 진정한 의미로 복원시킨다. 가령 디옴-과 같은 글을 읽어보자. …… 우리는 안심할 수 없었고, 그것은 인디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날 밤은 싸늘했다. 나무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남비크와라족이 하는 대로 땅바닥에 누워 잠을 잤다. 아무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예의를 지 키면서 서로를 감시하느라 밤을 지새웠다. 모험을 계속했더라면 소란 스러운 사람으로 낙인 찍혔울 것이다. 나는 추장에게 지체없이 물건 교환에 착수할 것을 재촉했다. 그런데 그때 기상 천외한 일이 벌어졌 는데, 그것을 지금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 혼히 사람들은 남비크와라족 이 문자를 쓸 줄 모른다고 짐작한다. 그들은 호리병 위에 몇 개의 점 자나 지그재그식의 그림을 제의하고는 그림도 그리지 않는다. 카두베 오족에게 한 것처럼 나는 종이와 연필을 나누어주었지만 그들은 처음 에는 그것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자 나는 모 두 종이 위에 파동형의 수평선을 긋는 데 몰두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렇다면 그들온 도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가? 나는 분명한 증거를

제시해야 했다. 그들은 글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 면 , 내가 하는 것과 똑같이 연필을 쓰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것이 그들 이 파악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용법인 것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림 으로 그들의 관심을 끌려고 애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 에게는 그런 노력이 거기에서 멈추고 말았다. 하지만 추장은 더 멀리 보았다. 아마 그 추장만이 문자의 기능을 이해했던 모양이다. 여기서 일단 첫번째 휴지부를 찍자. 이 짧은 단락은 남비크와라 족에 대한 논문의 한 부분에서 다시 나타난다. 이 사건은 이미 거 기에 언급되어 있는데, 그 논문을 참조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아 니다. 특히 『슬픈 열대』에서 누락된 세 가지 사항을 얻어낼 수 있 댜 그 사항들은 그런 대로 홍미가 있다. 첫째, 이 소규모의 남비크와라족 무리는 2 0) 문자를 쓰는 행동을 지칭하기 위해 어쨌든 이러한 목적에 적용되는 단어 하나를 구비 하고 있다. 새로운 세력의 가정된 침투 앞에서 언어와 관련된 놀라 움은 없다. 『 슬픈 열대』에서 누락된 이 세부 사항은 그 논문에서 언급되 었다 (40 쪽, n. 1) . 호리병에 새긴 몇 개의 기하학적인 선을 제외하고 남비크와라족 무 리 (a) 는 그림을 전혀 모른다. 며칠 동안 우리가 그들에게 나누어준 종 20) 그것은 단지 소수의 하위 무리일 뿐이며, 이 무리는 유목 생활 기간에만 인종학자의 추적을 받았다. 이 무리는 또한 정착 생활도 한다. 그 논문의 서설에서 다음 글을 읽을 수 있다. 〈여기에서 남비크와라족의 생활과 사회 에 대한 정밀한 연구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잔소리가 될 것이다. 우리는 오직 유목 생활 동안만 원주민들의 존재를 공유할 수 있었 고, 우리 조사를 위해서는 이것으로 족할 것이다. 정착 기간 동안 시도된 여행은 아마 핵심적인 정보를 가져다 줄 것이며 전반적인 전망을 수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3 쪽) 결정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한계접은 문자 문제와 관련지어 볼 때 특히 의미 심장하지 않을까?(여기서 문자는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본질적으로 정착성이라는 현상과 연결되어 있다)

이와 연필로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 줄 몰랐다. 잠시 후에야 물결 모 양의 선을 그리는 데 여념이 없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우리가 기록 수첩을 가지고 하는 유일한 사용법을 흉내낸 것이다. 즉 글의 목적과 효력을 이해하지 않고 그저 글을 그리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글 쓰는 행동을 iek ariu k ed iut u , 죽 〈선 긋는 것……〉이라 불렀다. 문자 있는 종족들의 여러 언어에서 〈글 쓰기〉를 뜻하는 단어들 의 어의적인 번역은 이 단어를 대단히 빈약한 제스처의 의미로 축 소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언어는 문자를 지칭하는 어떤 단 어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며(따라서 문자를 쓰는 사람 들은 글을 쓸 줄 모른다고 말했다), 그 구실은 그들이 〈새겨놓다〉, 〈나무에 표지를 새기다〉, 〈나무에 무엇인가를 새겨놓다〉, 〈나무 껍 질에 홈울 새기다〉, 〈혼적을 새기다〉, 〈인쇄하다〉 등을 의미하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마치 〈문자를· 쓰는 것〉이 그것의 은유 적 핵심에서 다른 무엇을 의미하는 것처럼말이다. 몇몇 번역 또는 몇 개의 구두 언어의 동일 가치를 가지는 단어들로 만족해 버리는 성급함 때문에 인종 중심주의가 항상 왜곡되는 것은 아닐까? 기록 행위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를 〈선을 그리다〉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기 때문에 한 민족이 글을 쓸 줄 모른다고 말하는 것 은 마치 〈음성 언어〉에 해당하는 단어를 〈소리 지르다〉, 〈노래 부 르다〉, 〈휘파람 불다〉 등으로 번역하면서 그 민족에게는 〈음성 언 어〉가 없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원리가 아닐까? 〈입속으로 중얼거 리다〉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인종 중심주의적인 동화/배제라는 메커니즘 안에서 단순한 유사(類似)로 표현된 르낭 Renan10 의 다 음 글을 상기해 보자. 〈가장 오래된 고대 언어에서 타민족을 지칭 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에는 두 개의 근원이 있다. 입속에서 중얼거 리다 beg a ye r, 옹아리를 시작하다 balbu ti er 등을 의미하는 동사나

말없음 mue t을 의미하는 단어가 그것이다.〉 21) 그렇다면 문자를 뜻 는 한자의 文이란 글자가 엄격한 의미의 문자가 아니라 좀더 많은 것을 지칭한다는 구실로 중국인들은 문자 없는 민족이라고 결론지 어야 한단 말인가? 실제로 제르네 J. Gerne t는 그 점에 대해 다음 과 같이 적는다. 文 wen 이란 글자는 획수의 종합, 한자의 개별 글자를 의미한다. 그 단어는 돌과 나무의 결, 별들을 연결짓는 선에 의해 표상되는 성좌, 땅 위에 있는 조류와 네 발 달린 짐승의 발자국 흔적(중국 전통은 이 혼 적의 관찰에서 한자가 창조되었다고 본다), 각종 문신 또는 가령, 거북 이의 등가죽을 장식하는 그림들 따위에 적용된.다(어떤 고서적에 따르 면 거북이는 현자, 즉 마술과 종교적 능력을 부여받은 동물이다. 그 이 유는 등에 그림이 있기 때문이다.). 문(文)이란 술어는 가령, 모든 풍 속에 관한 문헌과 그 예의를 지칭했다• 문의 반의어로는 무(武, wu: 무사, 군인)와 질(質, zhi: 아직까지 연마되지 않고 치장도 없는 투박 한 질료) 동의 단어가 있다 . 22 )

21) De l'or ig ine du langa ge , (Eu vres Comp le te s 8 권, 90쪽. 이 텍스 트의 나머지 (여기서 우리가 인용할 수는 없지만)는 〈야만적 barbare 〉이라 는 단어와 인접한 단어들의 기원과 작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22시) 사L하a는 C바h가 in크e , 다a.sp e c ts et fon c tion s ps yc h olog iqu es de l'ecr i tur e, EP, 33 쪽.

둘째, 〈선을 그리는〉 데 주안점을 둔다. 이렇듯 이 하위 무리 (a) 의 방언에서 채취한 이 조작 속에서 레비人뜨쿠人는 오직 〈미학적인〉 의미만을 인정한다. 〈그들(남비크와라족)은 더구나 글 쓰는 행위를 iek ariu k ed iut u , 죽 ‘선을 그리는' 것이라 불렀으며 이 점은 그들의 어떤 미학적 관심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러한 결론이 지향하는 바

가 무엇이며, 여기서 미학적 범주의 특수성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 지 자문해 본다. 레비 AE 쿠 A 는 미학적 가치를 따로 고립시킬 수 있 다고 추정했을 뿐만 아니라(알다시피 이러한 추정은 큰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인종학자들은 이러한 추상화를 경계하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남 비크와라족이 접근하지 못하는 〈엄밀한 의미의〉 문자에서의 미학적 성격은 외재적이라고 가정한다. 여기서는 단지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해 보자. 더구나 그러한 결론의 의미를 의심하려 들지 않는 다 하더라도 그러한 결론을 이끄는 노선은 여전히 마음에 걸리지 않 을 수 없다. 인종학자 레비AE 쿠 A 는 다른 무리에서 기록한 한 문장 에서 그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제가 된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결정적인 현상이다. 확실하면서도 엄청난 양의 정보에 의거해 (통상적 의미의) 문자의 생성은 도처에 서 그 계보에 대한 배려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흔히 한 세 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기억 및 구두 전통을 손꼽고 있는데, 그 구두 전통은 이른바 〈문자 없는〉 종족에서는 매우 오래된 시대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레비AE 쿠人두 『대담록』 (29 쪽)에서 그 점 을 밝히고 있다. 나는 우리가 원시적이라 부르는 종족들에게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설 만큼 놀라운 기억력이 있음을 잘 안다. 어떤 이는 수십 세대까지 거슬 러 올라가는 족보들을 주저없이 암송할 수 있는 폴리네시아의 주민들 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이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 이러한 한계는 (통상적 의미에서) 문자가 나타나면서 어느 정도 극복되었으며 문자의 기능은 또 다른 차원에서 기억을 보존하고 보충적 객관화를 부여하는 일이다. 그 결과 족보적 그림에 접근하 는 종족은 통상적 의미에서 문자에 접근하는 것이요, 그 기능을 이 해하며 『슬픈 열대』가 암시하는 것(그 노력은 거기서 멈춘다)보다 더 진일보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원-문자로부터 통상적 의미의 문 자로 옮겨간다. 이 이행(그에 따르는 어려움을 과소 평가할 의도는 없다)은 음성 언어에서 문자 언어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에크리 튀르 일반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족보적 관계와 사회적 분류는 소위 말하는 언어와 상식적 의미의 문자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원-문자의 봉합점이다. 〈그러나 추장은 더 멀리 보았다…….〉 학위 논문에서 레비스트 로스는 이 추장에 대해 〈대단히 명석하며, 자신의 책임을 의식하고 있으며, 능동적으로 일을 시도하고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났다〉라고

적었다. 〈세 여자와 결혼한 서른다섯 살 가량의 남자.〉 <…… 문자 에 대한 그의 태도는 시사하는 바 크다. 그는 곧 문자의 기호 역할 과 그것이 부여하는 사회적 우월성을 이해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논문에서 『슬픈 열대』와 거의 같은 술어로 다시 씌어진 이야기 를 통해 논증을 펴나간다. 이제 『슬픈 열대』에 나오는 이야기를 읽 어보자. 아마도 그만이 문자의 기능을 이해했던 것 같았다. 아울러 그는 나 에게 노트를 보여달라고 했고, 우리가 함께 일할 때면 똑같은 필기 도 구를 갖추게 되었다. 그는 내가 요구한 정보들을 구두로 전달하지 않 고, 종이 위에 굴곡이 심한 선을 그려넣고는 나에게 보여주었다. 마치 나더러 그 답변을 읽어야 한다는 것처럼말이다• 자신이 자기 코미디에 반쯤 속고 있는 것이다. 그의 손이 하나의 선을 완결할 때마다 거기서 의미가 샘 솟기라도 하는지 그는 초조하게 그것을 검토하는 동시에 그 의 얼굴에는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는 그의 마법서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 암암리에 약속되었고, 니는 그것을 해독하는 척했다. 곧이어 구두로 주 석이 가해지고 나는 필요한 해설을 물어보지 않아도 되었다. 그 다음 구절은, 학위 논문에서는 위 인용문과 사십여 쪽 떨어 져서 나오는데, 이는 지시 명령 commandemen t의 기능과 관계되 • 는 중요한 사실로 뒤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모든 사람을 불러모으더니, 둥에 지는 채롱에서 곡선이 잔뜩 그려진 종이를 바로 끄집어내 그것을 읽는 시능을 하고 주저하면 서 내가 그에게 선물로 줄 물건의 리스트롤 찾고 있었다. 자기 목걸이 를 줄 테니 자기한테는 활과 화살, 벌목용 검을, 다른 사람에게는 진주

를 달라는 것이었다. 이런 코미디는 두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그는 무 엇을 바라고 있었는가? 아마도 자기 꾀에 자기가 속았을 것이다. 하지 만 그는 자기 동족을 놀라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중계를 통해서만 물 건이 들어올 수 있고, 이는 백인과 연대함으로써 획득한 것이며 자신 만이 백인과 은밀히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득시켰다. 우리는 서둘 러 길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가장 두려운 순간은 물론 내가 가져온 모든 신기한 것이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때였다. 하지만 나 는 그 사건을 더 이상 따지지 않았고, 우리 일행은 인디언들의 안내를 받으며 다시 길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매우 훌륭하다. 실상 우리는 이 이야기를 각각의 요소, 각각의 의미 요소 seman te me 가 계급 서열, 중개와 자본주의 의 경제적 기능, 준종교적인 비밀에 대한 참여 등으로 귀결되는 참 언으로 읽으려는 충동이 일어날 것이다. 이 모든 점은 일체의 문자 언어의 현상에서 확인되며, 그것이 사례가 되는 사건이나 여러 사 실들과 제스처로 구성된 짧은 연쇄 구조에서 집합되고 집중되고 조작되었음을 본다. 문자의 일체의 유기체적 복잡성은 잠언이라는 틀에서 채취된다. B) 장면의 재기억 지금부터는 그 문자론의 교훈으로 이야기를 옮겨보자. 그것은 그 사건의 관계보다 더 길고 촘촘하게 세 쪽에 걸쳐 씌어 있다. 그 내용을 다시 반복하는 『대담록』의 텍스트는 눈 에 뛸 정도로 짧다. 따라서 이론적 주석 없이 그 사건을 보고하는 것은 학위 논문이다. 이론이 가장 풍성하게 전개되는 곳은 그 인종 학자의 고백록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면서 레비AE 쿠 A 가 제시한 증명의 흐름을 추적해 보자. 그것은 사실적 확실성 cert itud e fa c t uelle 과 무엇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그 해

석적 되풀이 사이에 존재하는 톰이다. 가장 큰 톰은 먼저 〈 기상 천 외의 사건〉이러는 얄팍한 사실과 문자에 대한 일반적인 철학 사이 에서 나타난다. 그 사건의 첨단은 실제로 커다란 이론적 건축물을 지탱해 준다. 〈기상 천외의 사건〉 이후에 인종학자 레비 AE 쿠 A 의 상황은 무 척 가변적이며 불안한 상태였다. 몇몇 단어가 그 상황을 지배한다. 〈결실 없는 체류〉, 〈신비화〉, 〈짜증 나게 만드는 날씨〉 등. 그 인 종학자는 〈[그] 방향을 잃어버린 후 갑자기 홀로 되고 ‘절망에 빠 져’, ‘사기가 저하된' 것을 느끼고〉, 〈적대 구역〉에서 더 이상 아무 〈무기〉도 없이 〈어두운 상념에 빠져〉 동요한다. 그러고 나서 그 위 협은 가라앉고 적대감은 사라진다• 때는 밤이고 사건은 종료되었으 며 여러 가지 물물 교환이 있었다. 역사를 성찰할 시간이며 두 눈 을 말똥말똥 뜬 채 다시 과거를 기억하는 순간이다. 〈이 우스운 사 건으로 인해 고통받은 나는 아직도 잠을 이루지 못했고, 그 교환 장면을 다시 기억하면서 불면증과 싸웠다.〉 곧바로 그 사건에서 두 개의 의미가 추출된다• 첫째, 문자의 출현은 순간적 i ns t an t anee 이다. 그것은 준비되지 않았다. 그러한 비약은 문자 언어의 가능성이 음성 언어에 기인하 는 것이 아니라 음성 언어 밖에 있음을 증명해 줄 것이다. 〈혼히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문자는 남비크와라족에게 결코 수고스러운 학습 끝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음성 언어에 대한 문자 언어의 의재성을 고수하기를 원하는 순간부터 레비 AE 쿠 A 는 무엇에 근 거해 후성주의를 결론짓는가? 그 자그마한 사건에 근거해서? 하지 만 그 장면은 기원의 장면이 아니었고 문장을 모방한 장면에 불과 했다. 그런데도 문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갑 작스런 순간성 souda i ne te의 성격이 있으며, 그것은 문자로의 이 행, 죽 문자 창조가 아니라 이미 성립된 문자의 유입일 뿐이다. 그

것은 차용, 그것도 그릇된 차용이다. 레비스트로스 자신도 적었듯 이 〈 문자의 상징은 차용되었지만 그 상징의 현실은 그들에게 생소 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 더구나 이러한 문자의 순간적 성격은 문 자의 분포와 전파 등 일체의 문자 현상에 속한다 . 반대로 레비스트 로스는 그 발생 단계에서 세심하게 배려되고 점증적이며 차이화된 문자의 출현에 대한 본질을 규명할 수 없었다. 차용이 발생했을 때, 그 속도는 그 차용을 가능하게 한 구조들이 이전에 존재했음을 전제로 한다. 둘째, 그 장면에서 레비人뜨쿠人가 읽을 수 있다고 믿는 두번째 의미는 첫번째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그들(남비크와라족)은 이해 없이 배웠고, 그 추장은 문자의 기능과 문자가 의미하는 내용도 알 지 못한 채, 문자의 훌륭한 사용법만을 터득했기 때문에 문자의 궁 극적 목적은 이론적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며 〈지적이라기보 E 片근 사회학적인 것〉이다. 이 점은 레비人뜨쿠人가 이제부터 문자를 천 착해 들어가는 공간을 열어주고 또 그것을 메워준다. 문자의 상징은 차용되었지만 그 상징의 현실은 그들에게 생소한 채 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문자의 차용은 지적인 면보다는 사회학적 목 적에 쓰였다. 즉 지식을 넓히고 기억하거나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일보 다는 타자를 희생시키면서 특정 개인(또는 특정 기능)의 명예와 권위 를 증폭시키는 일이 관건이었다. 석기 시대 인디언은 이해라는 엄청난 수단이, 비록 그 수단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다른 목적 에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감지했다 . 이렇듯 〈사회학적 목적〉과 〈지적인 목적〉을 구분하고, 문자에 후자가 아닌 전자의 목적을 부여하면서, 레비AE 쿠 A 는 상호 주관 적 관계와 지식 사이에 있는 그 양자의 차이를 수용한다• 그런데

이 차이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믿듯이 문자 가 상호 폭력의 지평을 넘어서서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 면 거기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것(심지어 과학조차 그렇지 않다)이 있단 말인가? 문자와 함께, 폭력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 지식과 언어(과학적이든 아니든)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아니라고 답한다면 우리가 하고 있는 것, 죽 문자의 과학적 성격을 식별하기 위해 이러한 개념들을 사용하는 것은 변별성을 잃고 만다. 결과적 으로 레비스트로스가 곧이어 이러한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 는 모든 예는 23) 사실에 가깝고 개연성도 높지만 역설적으로 너무 사실적이며 개연적이다. 그러한 예의 결론은 여기서 문자라고 명명 된 것(즉 상식적 의미의 문자)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 그 결론은 또한 문자 언어로 씌어지지 않은 음성 언어의 범위를 포괄한다. 이 는 폭력과 문자를 연결짓는다면 에크리튀르는 협소한 의미의 문자 보다도 먼저 나타났고 음성 언어를 여는 차이 또는 원-문자에서 이미 나타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23) 〈어쨌든, 수천 년 동안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전세계 많은 나라에서 문 자는, 그 구성원들이 대부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사회에서도 제도로서 존재한다. 서파키스탄 치타공 Ch ittag o n g 구릉의 내가 거주했던 마을은 문 맹자들로 득실거렸다. 하지만 그들 각자에게는 개인들과 단체에서 그의 기 능을 완수하는 필생이 있었다. 그들 모두는 문자를 알았고, 필요에 따라 그 것을 썼지만, 바깥에서 마치 구두적 방법으로 그들이 소통하는 이방의 중 개자처럼 썼다. 그런데 필생은 그 무리의 공무원이나 고용인이 되는 법은 거의 없다. 그의 영지력은 힘이 동반되고, 그 결과 한 사람이 필생과 고리 대금 업자의 기능을 결합한다. 그러나 그의 일자리를 꾸려가기 위해 읽고 쓸 필요가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 이유는 읽고 쓰는 것이 동료들에 대해 이중적 지배를 행사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확인하겠지만 이렇듯 레비AE 쿠 A 는 문자의 본질적 기 능이 〈공평 무사한〉 과학의 탄생을 손쉽게 했다기보다는 타인을 예속화하는 힘을 손쉽게 했음을 시사함으로써, 두번째 성찰의 와중 에서 이제 문자 없는 종족과 문자 없는 종족 사이의 경계선을 약

화할 수 있게 된다. 문자의 구비에 관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추 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죽 그들의 역사성 또는 비역사성에 관 련해서말이다. 이러한 약화는 대단히 값진 것이다. 그것은 다음 세 가지 테마를 가능하게 한다. 첫째, 역사적 운동의 지각 속에서 본 질적이며 환원 불가능한 상대성 (r 인종과 역사」 참조), 둘째, 여러 사회의 〈역사적 온도〉에서 〈따뜻한〉 것과 〈찬〉 것 사이에 있는 차 이점들( 『 대담록 』 , 43 쪽과 그 밖의 여러 곳), 셋째, 인종학과 역사학 의 관계 . 24)

24) Histo i r e e t eth n olog ie( R .M .M .. 1949) 와 Anth r op o log ie str u ctu rale, 33 쪽. 〈인종학은 특히 문자로 씌어지지 않은 것에 관심이 있다. 그 이유는 인종학자가 연구하는 민족들이 글을 쓸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관 심을 끄는 것이 인간들이 습관적으로 돌 또는 종이에 고정시키려고 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과학과 권력 사이에 있다고 추정되는 차 이룰 수용하면서 문자가 역사적 리듬과 유형들을 평가하는 데 어 떤 변별성도 제공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삶의 근거가 되는 사회, 경제, 기술, 정치 등의 구조들이 엄청나게 창조된 시대 (즉 신석기 시대)에는 문자를 알지 못했다 .25) 도대체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앞으로 나올 텍스트에서 우리는 통박을 가할 수 있는 세 개의 명제들을 따로 떼어놓을 것이다. 레비 AE 己 A 와 관련된 증명을 좀 더 신속하게 종료시키고 거기에 토론의 초점을 맞추려는 의도에서 우리는 이 명제들을 끌어들이지 않을 것이다.

25) 레비人뜨쿠人는 Un pe ti t verre de rhum 에서 〈신석기 시대의 인간 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발명품 대부분을 이미 만들어냈다. 그라므로 왜 문자를 배제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고 상기하면서 그 당시 의 인간은 물론 〈오늘날만큼 자유롭지 않았음〉에 주목한다 . 〈그러나 오직 인류만이 그를 노예로 만들었다. 자연에 대한 권위가 매우 축소되었기 때 문에 그는 보호받고 어떤 점에서는 꿈의 제동 쿠션에 의해 해방된다.〉 또 La pe nsee sauvage , 22 쪽 pa radoxe neo lithiq ue” 의 주제를 참조할 것.

첫번째 명제. 야만성과 문명을 갈라놓기 위해 제안된 기준들을 제거하고 나면 최 소한 다음 사실을 숙지하고 싶을 것이다. 문자 언어가 있든 없든 간에, 어떤 종족은 획득된 지식을 축적할 능력이 있고, 그 들 이 정한 목표에 진일보할 수 있는 반면에 , 다른 종족은 개인적인 기억으로 족한 작은 영역을 벗어나는 과거 를 담기에는 무기력하다. 이런 종족은 표류하는 역사의 노예가 될 것이며 이 부평초 같은 역사에서는 언제나 기원과 기획에 대한 지속적인 의식이 결여될 것이다. 하지만 문자와 인류의 진화에서 하는 문자의 역할에 대해 우리가 아는 그 어떤 것도 이 개념 을정당화하지 못한다. 이 명제는 디움 두 가지 조건에서만 의미가 있다 . 첫째, 과학에 대한 관념이나 그 기획, 즉 그 권리상 무한한 전달 가능성으로서 기능하는 진리라는 관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경우. 무한한 전달 가능성이 실제로 역사적 가능성이 되는 것은 문자가 있을 때만 비로소 가능하다. 이러한 증거를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후설의 분석 앞에서 (『유럽 학문의 위기와 초월적 현상학 』 과 『기하학 의 기원 』 ) 레비AE 쿠 A 의 논지는 과학적 기획과 일반적 진리의 가 치에 대해 일체의 특수성을 부정할 때만 지지할 수 있다. 이 마지 막 입장은 그 힘이 없지 않지만 그것에 이러한 힘과 수미 일관성 이 있는 것은 스스로 과학적 담론으로 파악하는 것을 포기할 때만 가능하다. 그것은 익히 알려진 도식이다. 그런데 사실상 그러한 일 이 여기에서 벌어진다. 둘째,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근거를 마련한 심층 구조들이 창 조되었다고 생각되는 신석기 시대는 문자 같은 것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이 현대 인종학자가 쓴 문자 개념은 이상하게 협소하다. 인

종학은 알파벳, 음성 문자로 된 체계, 또 막 음성화되려 하는 체계 보다 먼저 존재했던 여러 문자에 폭 넓은 정보를 제공한다. 이 정 보의 양이 엄청나다는 것은 더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 이댜 두번째 명제. 레비스트로스는 모든 것이 문자 이전에 획득되었다고 가정하면 서 그 명제를 증명하기 위한 논리를 구성하는 일만 남겨놓았다. 그와 정반대로 서구에서는 문자의 창안에서 근대 과학의 탄생까지 약 오천 년의 세월이 흘렀으며 이 시간 동안 서구의 지식은 성장보 E 臣근 표류를 거듭했다. 이러한 진술에 어떤 사람은 충격받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 렇지 않댜 우리는 그것이 그릇된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참이라고는 더더욱 생각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명 분의 필요상 아무 의미도 없는 어떤 질문에 답한 것뿐이다 .26) 지식 의 양이라는 개념은 의심스럽지 않은가? 지식의 양이란 도대체 무 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변형되는가? 질서 또는 성질을 연구하는 과학을 언급하지 않고도, 순수한 양을 다루는 여러 과학들의 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볼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을 양으로 평가한 다는 말인가? 지식이 자본적으로 축적되는 지극히 복잡한 법칙들 을 존중하지 않는 한, 순수한 경험성의 스타일에서만 그러한 질문 에 답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더 조심스럽게 문자를` 고찰할 때만 이 법칙을 파악할 수 있다. 레비 AE 쿠 A 와 정반대로 말할 수도 있 으며, 그것은 사실도 거짓도 아닐 것이다• 〈근대 과학〉 이전의 어 26) 하지만 레비人뜨쿠人는 말한다. 〈현명한 이는 참된 답을 제공하는 사람 이 아니고, 참된 물음을 던지는 사람이다.〉 (Le cru et le cui t)

떤 특정 세기에, 그리고 오늘날 매분마다 증가하는 지식은 수천 년 동안 있어 왔던 것을 무한히 초월했다. 이 점은 지식의 증식이라는 면에서 그렇다. 표류하는 개념은 완전히 경험적인 것으로 주어진 다. 어쨌든 그것은 한 층위에 근거해 본질에 속하는 명제들을 유념 하지 않을것이다. 세번째 명제• 이것은 이 단락의 논리적 연쇄들 중에서 우리를 가장 대경 실색 하게 하는 명제이다. 3000-4000 년 전부터 문자의 도래가 지식의 영역에서 어떤 결정적인 공헌을 하지 못했다고 가정해 보자. 하여 튼 레비 AE 쿠 A 는 두 세기 전부터 상황이 같지 않다는 사실을 인 정한다. 그가 설정한 층위에 따르면, 무엇이 이러한 단절을 정당화 하는가를 쉽게 납득할 수 없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작동시킨다. 〈 19 세기의 과학 부홍은 문자 없이는 생각하기조차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필요 조건은 과학의 부홍울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레비 AE 쿠 A 가 주장한 그 단절에 놀랄 뿐만 아니라 여 기서 우리가 제시한 반박 가운데 그가 어떤 것을 부인할 것인가를 자문해 본다. 그 누구도 문자(문자로 씌어진 표기,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문자 표기이기 때문이다)가 과학의 충분 조건이라 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리고 학자가 되기 위해 문자를 쓸 줄 아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만약 우리가 그런 착각을 했더라도 많은 독서를 통해 충분히 그 런 착각이 말끔히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문자는 과학의 〈필요 조 건〉이며 문자 없이는 과학도 없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중요하며, 레 비人뜨쿠人는 그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과학 을 19 세기에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에 그의 모든 논증은 와해되거나 경험적인 대략적 추측에 불과하다는 멍에를 지

게 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서둘러 이 논증에 대해 언급했던 것이 다) 이 점은 사실 레비人뜨쿠 A 가 이 영역을 포기하고, 재빨리 과 학의 문제가 문자의 기원과 기능에 대한 온전한 접근이 될 수 없 다는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과 관계를 맺는다. 〈만약 문자의 출현과 문명의 몇몇 특징들이 상관 관계를 맺으려 한다면 다른 방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를 당황하게 한 구분에 따라 문자 의 기원은 〈 지적인 것 〉 보다 〈사회학적〉 필요성을 나타내야 할 뿐 만 아니라(이것은 너무 빈곤하고 진부하기 짝없는 언급이며 문자의 사회학적 특수성과 거의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 사회적 필연성이 〈지배〉, 〈 착취〉, 〈 예속화〉, 〈배반〉 등의 필연성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 인용문을 온전하게 읽으려면, 그 층위를 나누어 차이를 두어 야 한다• 저자는 여기서 그가 〈가설〉이라 부르는 것을 소개한다. 〈만약 내 가설이 정확하다면, 문자로 씌어진 커뮤니케이션의 일차 적 기능은 예속화를 용이하게 하는 27) 것이다.〉 일차적 수준에서 이 가설은 너무 일찍 확증되어 거의 그 이름이 언급될 가치조차 없다. 이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주지하다시피, 오래전부터 소수의, 일 개 카스트 또는 일개 계층이 손아귀에 쥔 문자의 힘은 계층 서열 화와 같은 시간에 존재했으며, 우리는 그것을 정치적 차이 dif fer- ence p o litiq ue 라고 말하고자 한다. 무리들, 계층들, 경제-기술-정 치력의 여러 수준의 구분, 권위의 양도 dele ga ti on de l'au th o ri te, 자본 축적 기구에 내맡겨진 지연된 힘이 그것이다. 이 현상은 동물 사회의 기원에서부터 농경제 사회에서 식량 저장의 성립과 더불어 27) 〈용이하게 하다〉, 〈유리하게 하다〉, 〈강화하다〉는 문자의 조작을 기술하 기 위해 선택된 낱말들이다. 일체의 본질적이고 원칙적이며 엄밀한 규정이 금지되고 있지 않은가?

정착화가 이루어지는 문턱에서 발생된다. 정황은 너무 명백해서 2 8) 레비人뜨쿠,.)-..가 스케치하는 경험적 해설을 무한정 풍부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가 사회로서 생존할 때부터, 즉 일반적인 생 명의 기원에서부터 조직과 복잡성의 대단히 이질적인 수준에서 그 현전, 즉 그 지출 또는 소비를 지연시키고 생산, 달리 말해 예비 저 장 reserve 일반을 조직화하는 것이 가능할 때 이러한 구조는 겉으 로 드러난다. 이러한 구조는 협의의 문자가 출현하기에 앞서 일어 나지만 3000-4000 년 전 몇몇 문자 체계의 출현은 생명의 역사에 서 놀라운 비약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차이/지연의 힘은 놀 랄 만한 속도로 증가했지만 최소한 수천 년 동안 그 조직체에 눈 에 뛸 만한 어떤 변형도 동반하지 않았다. 차이/지연의 힘의 고유 성이 확장됨에 따라 점차 생명은 그것을 변형시킨다. 만약 그것이 무한하다면 (그 존재가 선험적으로 배제하는) 생명 자체는 동요가 없고 촉각으로 느낄 수도 없으며, 영원한 현전이 되어버린다. 죽 무한한 차이/지연, 신 또는 죽음이다.

28) Lero i -Gourhan 의 저서 Le ge ste et la p arol eJ.斗 L'ecritu re et la ps yc holog ie des p eu p le 遷 참조할 것

이것은 우리를 두번째 수준의 독서로 유도한다. 그것은 레비스 트로스의 궁극적 의도와 정치적 의도를 나타낸다. 그 의도를 향한 그의 증명은 사실적 증거들의 방향을 정립시키며, 정치적 이데올로 7 는 마르크스주의 가설의 명목 아래 우리가 〈현전의 형이상학〉이 간-고 부론 것의 가장 훌륭한 예와 더불어 분절이 된다. 위에서 과학의 위상과 여러 지식들의 축적과 관련된 분석들의 경험적 성격은 제시된 명제들 각각에 대해 일체의 엄밀성을 제거 했으며, 참 또는 거짓의 구분과 동일한 변별성과 더불어 그것을 고 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 문제의 변별성이 의심스럽게 보였 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또 일어난다. 예속이라고 불리는 것은 합

법적으로 해방]i bera ti on 이라고 명명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망 설임이 예속화의 의미에서 멈출 때 비로소 그 담론은 규정된 이데 올로기로 마비된다. 만약 우리의 일차적 관심이 그런 것이라면 우 리는 그것이 우려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 텍스트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서열화와 지배, 정치적 권위와 착취 사이에 어떤 차이도 두지 않는다. 이러한 성찰을 지배하는 어 조는, 단호하게 법과 억 압을 혼동하는 무정부주의 바로 그것이다. 레비 .,)-..E 쿠.,)-..는 법률과 실층법에 대한 개념을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그 형식성, 일반성 안에서 문자의 가능성에 앞서서 생각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 구속과 예속화로 결정한다. 정치 권력은 부 단한 힘을 손아귀에 거머쥔 자일 뿐이다. 이것은 전형적이고 수미 일관된 논지이다. 하지만 다른 논지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최소한의 비판적 대화도 착수하지 않은 채 자명한 것처럼 여기는 논지이다. 그 논지에 따르면 법의 일반성은 공동체 사회에서는 정반대로 자 유의 조건이 된다. 가령 루소와는 어떤 대화도 가능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법을 다움과 같이 정의하는 제자가 자기의 계승자임 을 자처하는 꼴을 보면 아마도 루소는 전율을 느낄 것이다. 지식을 견고하게 하는 데 충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문자는 지배를 확고하게 하는 데 필수 불가결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자. 19 세기에 진행된 유럽 국가가 취한 의무 교육 체계는 군 복무 및 무산 계급의 확장과 짝을 이룬다. 그런 식으로 문 맹 퇴치는 권력에 의한 시민의 통제 강화와 하나가 된다. 그 이유는 그 누구도 법을 몰라서는 안 된다고 국가가 말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 람이 글을 읽을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291 29) 발레리도 이런 유형의 명제들을 수없이 제시한 바 있다.

이러한 심각한 선언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특히 그것들을 전복시켜 반대로 반격을 가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주어진 일정한 역사적 구조(가령 레비스트로스가 언급하는 시대)에 형식적인 합법성, 문맹 퇴치 등이 한 계층 또는 한 국가의 권략을 공고하게 하는 모종의 신바적인 힘과 도구로 작동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반박의 여지가 없지만, 그 형식적 보편적 의미는 특수한 경험 적 힘에 의해 위조되었다. 아마도 이러한 필요성온 본질적이며 넘 어설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법과 국가를 단순하고 일률적으로 정 의하기 위해 이를 내세우는 것, 윤리적 관점에서 그것을 비난하고 그것과 더불어 의무 군 복무나 무산 계급의 확장, 정치적 의무의 일반성, 〈그 누구도 법에 무지해서는 안 된다〉는 서실을 비난하는 것 등은 이러한 가설들로부터 엄밀하게 추론되지 않는 결과들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추론한다면(레비 AE 쿠 A 가 바로 그렇게 했다), 비 착취, 자유 등은 비문명화, 병역 의무, 의무 교육 또는 법 일반의 비강제적 성격과 〈짝을 이룬다〉(이 애매 모호한 개념을 사용하자 면). 그 점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있는가? 고전적 논증 체계를 레비AE 쿠 A 와 대립시키거나 그를 또 다른 그 자신과 대립시키는 것을 삼가도록 하자(앞에서 그는 실제로 문 자의 폭력을, 문자가 카스트에 봉사하기 위해 기록관(필생)에 의해 위 조된 채 소수의 무리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을 연관지었다. 지금은 총체 적 문맹 퇴치에 다인을 예속화하는 폭력이 귀속되었다). 그 수미 일 관하지 않은 성격은 표면적일 뿐이다. 보편성은 규정된 경험적 힘 에 의해 경험적 힘으로서 언제나 중심을 독차지하며, 바로 그것이 이 두 개의 명제들을 관통하는 유일한 진술이다. 이 문제에 접근해서 보편적 형식 법칙에 대한 예속화의 의미가 무엇일 수 있는가롤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인가? 물론 그렇 게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적인 노선은 포기하는

262 2 부 자연, 문화, 에크리튀르

것이 나울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노선은 아마도 약간 성급하게 문자에 대한 접근이 그 고유한 삭제와 연쇄의 폭력적 운동 속에서 일종의 자유로운 주제를 성립시킨다는 사실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 이다. 이는 고전적 윤리학, 심리학, 정치 철학, 형이상학의 개념들 속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운동이다. 이 는지를 허공 속에 내 버려 두자. 아직 우리는 「문자의 교훈」을 다 읽지 못했다. 왜냐하면 레비AE 쿠 A 는 이러한 무정부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기 치 아래 더욱더 앞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그 무정부주의적 이데올 로기의 반식민주의적, 반인종 중심적 색채는 매우 특이하다. 그러한 시도는 민족 차원에서 국제적 차원으로 옮겨갔고 그것을 가 능하게 한 것은 신생 국가(그들은 우리가 한두 세기 전에 봉착했던 문 제들에 처한다)와 부유한 국제 사회 사이에 형성된 이러한 공범 관계 였다. 국제 사회를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마음다: 로 변경될 수 있는 표 현 방식으로 생각하고, 국제 사회의 재건 노력에 구실을 줄 수 있기에 는 훈련이 덜 된 그리고 제멋대로 아직도 문자 언어가 없는 종족들의 반응이 국제 사회의 안정에 가져올 위협을 걱정하고 있다. 도서관 속 에 축적된 enta s se 지식에 집하면서 이 민족들은 인쇄된 문헌 자료들이 더욱더 큰 비율로 유포시키는 거짓말 앞에서 더욱더 취약해진다.(강조 는 필자의 것임) 이러한 진술의 진리 여부에 대해 각별히 주의하면서 이 텍스트의 실마리롤 풀어보자. 그것은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된 민족들의 자유 리는 이름 아래 방금 전에 비난받은 기존 국가의 비판들과 연대한 신생 국가에 대한 비판이다(〈신생 국가와 부유한 국제 사회 사이에 형성된 공범 관계〉). 모종의 〈시도〉에 대한 비판이다. 문자 보급의 확충은 의지론적 심리학 11 의 개념들로 소개되었고, 그것으로 성립된

l 문자의 폭력 : 레비人뜨쿠人에서 루소까지 263

국제적 정치 현상은 단순하고도 의식적으로 조직화된 공범이라는 용어들로 기술된다. 이것은 곧 국가 일반과 신생 국가들에 대한 공 격이댜 이들은 선전 목적으로 문자를 유포시키고 그들의 선전용 삐라들의 판독과 효율성을 확실히 하고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마 음대로 변경할 수 있는 표현 방식으로 생각하는 훈련이 덜 된 종족 들의 반응〉에 대해 경계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곧 구어적 표현 방 식은 변형될 수 없으며, 문어 표현 방식보다 의지에 따른 변형 폭이 적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결코 역설이 아니다. 다시 한번 언급하거 니와 우리는 문자 언어가 이 역할을 맡을 수 없고 실제로 그런 역 할을 맡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것으로부터 문자 언어에 특수성을 부여하고 음성 언어는 안전하며, 그처럼 가볍게 건너서는 안 될 깊은 골이 있다고 결론지으려 한다. 〈인쇄된 문헌 자료〉가 유포시키는 거짓말 앞의 취약함 때문에 획일적으로 규정 된, 〈도서관에 쌓인 지식〉에 접근하는 것에 관한 언급에 우리는 주 석을 달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그러한 표현이 숨쉬는 이데올로기적 분위기를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따 라서 모든 과학 저서를 내팽개치고…… 인간 정신에 가장 일차적이면 서도 단순한 조작들에 대해 명상하면서…….〉 〈오, 인간이여……. 거짓 말쟁이인 네 닮은꼴 인간들의 저서가 아니라 결코 거짓말하지 않는 자 연 속에서 내가 읽는다고 생각하는 너의 이야기가 있다〉)과 『에밀』 (〈책의 남용은 과학을 죽인다…….〉 〈……읽어서는 안 된다. 보아야 한 다. 백문이 불여일견〉 〈나는 그들의 가장 비천한 도구인 책을 치운다. 독서는 유년 시절의 재앙이다〉 〈책 읽는 아이는 생각하지 않는다〉 등)과 『사보야 지방의 보좌 신부 V ic a i re savo y ard 』 12( 〈나는 모든 책을 덮 었다…….〉), 『크리스토프 드 보몽에게 보내는 편지 Lett re a Chris t o p h e de Beaumon t.!l 13( 〈나는 책 속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애 썼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거짓과 오류만을 접했을 뿐이다〉)의 유산

을 인지하는 것으로 그치자. 레비스트로스는 한밤의 성찰 후에 〈 기상 천외한 사건 〉 을 재론한 댜 그 이야기는 남비크와라족에 대한 찬탄을 정당화한다. 그것은 문자와 추장의 신비화에 저항할 용기를 가졌던 남비크와라족의 현 자들에 대해 찬탄하기 위해서 재론된다. 진화의 운명적 흐름을 애 석하게도 잠시나마 단절시킬 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찬탄. 이 점 과 또 남비크와라 사회와 관련해 그 인종학자는 무척 보수적이라 고 할 수 있다. 십여 쪽 후에 레비 AE쿠人 자신이 그 점을 언급하 듯이, 〈 자기 동반지들 가운데 전복적이며 전통적인 관례에 반기를 든 인종학자는 그가 연구하고자 하는 사회와 그가 속한 사회가 다 르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보수주의조차 존중한다.〉 결론부에서 두 개의 동기 부여가 존재한다. 하나는 루소와 마찬 가지로 필연적인, 아니 차라리 숙명적인 타락이 진보라는 형식으로 존재한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타락 이전에 있었던 것에 대한 향 수, 여러 가지 저항의 군도(郡島)들에 대한 정서적 비약, 타락의 은신처에 잠정적으로 도사리고 있던 소규모 공동체들(이 점에 대해 서는 『 대담록』, 49 쪽 참조), 루소의 책에서처럼 획일적이며, 자기 말의 현전 속에 집약된 민족의 문자 및 그 붕괴와 연결된 타락 등 에 대해서는 차후에 다시 언급하겠다. 원문을 읽어보자. 아마 주사위는 던져진 것 같다[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숙명적 진화이며 그 진화 속에서 이미 문자의 은신처에 도사리던 민족들이 길 들었댜 결정주의보다는 숙명적인 직시이다. 역사적 동시 발생은 놀이 와 우연이라는 개념 아래서 생각된다. 레비AE 꾸 A 의 텍스트에 매우 빈번하게 나타나는 메타포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L 그러나 내가 말한 남비크와라족의 마을에서는 가장 강한 사람들이 가장 현명했다.(강조 는 필자의 것임)

여기서 말하는 가장 강한 사람들은 저항하는 자들이며, 우두머 리가 속일 수 없었던 사람이며, 섬세함보다는 기개가 있고, 정신의 개방보다는 전통적인 마음과 그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우두머리가 문명의 카드 놀이를 시도한 후 그와 맺은 연대 관계를 깨버린 사람들은(나의 방문에 이어서 그 추장은 자기 수하 대부분에게 버림을 받았다) 문자와 타락이, 조화롭게 사는 그들 세계에 침투했다 고 막연히 이해했다. 그들은 더욱더 깊은 숲속으로 은신해 문명의 이 기가 들어오는 것을 지연시키려고 발버둥쳤다.(이 저항의 에피소드는 레비人뜨쿠 A 의 논문 89 쪽에도 이야기된다) 첫째, 만약 인용문에 의미가 있다면, 그리고 〈문자와 타락이 조 화롭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침투한다면,〉 타락과 이와 연결된 모든 가치들 또는 비가치들은 소위 말하는 문자 없는 사회에서는 부재 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점에 의심을 품는 데는 기나긴 여 정이 필요 없다. 사실의 상기를 통한 경험적 우회, 도입부에서 우 리가 밝혀본 선험적 또는 초월적 역류를 쓰면 된다. 이 도입부에서 폭력은 협소한 의미에서 문자의 출현을 기다리지 않았으며, 문자는 이미 언어에서 시작되었디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우리는 레비스트 로스처럼 폭력은 문자였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이 명제에는 또 다른 길의 출구가 되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가 있다• 그 명제는 신화의 신화에, 근원적으로 선한 음성 언어의 신화에, 음성 언어에 운명적 사건, 역사 그 자체일 수밖에 없는 숙명적 사건으로 용해되 는 폭력의 신화에 근거하기를 멈춘다. 레비AE 쿠 A 는 말의 순수성 이후에 악 속에서 타락이라는 관념에 따라 어느 정도까지 노골적 으로 선언된 진리 체계 re fe rence 를 통해 이러한 고전적이고 묵시 적인 신화를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인종학적

담론은 단순히 이러한 신탁과 형이상학과 체계적 족보학적으로 공 범 관계가 있는 개념들, 도식들, 가치들을 통해 생산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경험적 또는 선험적인 우회를 하지 않겠 다. 우리는 남비크와라 사회의 기술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다른 계기들을 비교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r 문자 언어의 교훈」을 믿자면, 남비크와라족은 문자 이전에는 폭력을 알지 못했다. 심지 어 계급 서열도 알지 못했다. 계급 서열은 매우 빨리 착취와 동화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반대의 경우가 명백히 나타나는 것은, 「문자 언어의 교훈」을 중심으로 『슬픈 열대』와 학위 논문의 어떤 부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고도로 서열화된 사회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에 놀랄 만한 폭력의 흔적이 있는 사회가 대두된다는 말이다. r 문자 언어의 교훈」 서두에서 상기한 순진하기 짝없는 비약만큼이 나 놀라운 폭력이다. 아울러 우리는 그 비약을, 방향이 있는 증명 의 계산된 전제 조건으로 간주하는 것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일일이 인용할 수 없는 다론 유사한 글월 가운데 학위 논문 87 쪽을 펴보자. 거기에는 문자 이전의 남비크와라족이 묘사 되어 있는데, 이 점은 자명한 사실로 나타난다 . 추장은 어떤 부단한 천부적 자질을 구비해야 하는데 그 자질은 그 종족을 지속시키고 가능하다면 새로운 결합에 의해 종족을 증가시키기 위해 권력 행사 이상으로 선거 정책에 관계되는 것이다. 방랑하는 종 족 무리는 취약한 통일성을 나타낸다. 만약 추장의 권위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거나 너무 많은 여자들을 독차지하는 데 쓰이거나 흉년이 들었을 때 식량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없으면, 불만이 야기되고 개인들 또는 가족들은 분열되고 서로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는 무리들로 다시 뭉친다 . 사냥 또는 열매 채취의 장소들을 발견하거나 이웃 무리들과 물물 교환을 해서 더 풍성해지거나 승리한 전쟁 이후 좀더 강해지거나

해서말이다. 따라서 추장은 상당히 제한된 수의 무리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일상의 여러 어려움에 대처할 수 없게 되며 그 부족의 여자들을 좀더 힘센 이웃 부족이 노리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되므로 지배권을 포 기하고 남은 추종자들과 좀더 행복하게 사는 부족과 연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남비크와라 사회는 이렇게 영속적인 생성 과정을 거친다. 여러 무리가 형성되고 해체되며 불어나고 사라지게 되어 때때로 불과 몇 달 사이에 종족 무리들의 구성, 수, 분포에서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하게 된다. 이 모든 변화는 투쟁, 승리, 타락 등을 동반하며, 이 모든 것이 지극히 빠른 리듬으로 일어난다. 아울러 〈전쟁과 상업〉, 〈탄생에서 죽음까지〉 등의 제목울 단 논 문의 모든 장을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논문』과 『슬픈 열대』 등 에서는 독약의 사용과 관련된 모든 것을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고유 명사를 둘러싼 전쟁이 있고, 인종학자 자신이 연루되 는 독약의 전쟁이 있다. 네 명의 대표단이 나를 찾아와서 위협적인 어조로 A6 에게 줄 식사 에 독약을 섞으라고 했다(동시에 그 독약을 주었다). 그들은 그를 꼭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내게 그는 〈성질이 고약하며 kakore>,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a i do ti ene 〉고 귀펌했던 것이다 .(124 쪽) 우리는 여기서 어떤 목가적 묘사를 충분히 보충해 줄 수 있는 한 구절만을 인용해 보겠다. 우리는 남녀 관계를 지배하는 부드러운 동료애와 그 무리들 속에 존 재하는 전반적 조화를 묘사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무리들이 변질되면 서부터 그것은 극악 처방에 자리를 내주고 만다. 독약을 먹이거나 살

해하는 행위 등…… 내가 알기로는 남아메리카의 어떤 무리도 그처럼 솔직하고도 즉각적으로…… 폭력적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없다. 개인 적 표현은 감정을 속이지 않는 사회적 스타일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 (126 쪽. 이 마지막 표현은 일반적인 모든 사회의 구성 원에게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둘째, 우리는 다시 루소로 돌아온다. 따라서 이 문자 철학을 심 층적으로 떠받치는 이상형은 차이/지연 없이 직접 자기 자신에 현 전하는 공동체이다. 즉 모든 구성원이 음성 언어로 의사 소통하는 공동체이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슬픈 열대』나 그 이론 적 반향인 『 대담록 』 을 참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구조주의 인 류학 An t hro p olo gi e s t ruc t urale 』에서 채록한, 『슬픈 열대』에 대 한 암시가 엿보이는 1958 년에 완결된 텍스트를 인용할 것이다. 거 기 에서 문자는 사회적 비진정성 ina uth e nti cite soc ia l~ 조건으로 정의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결여적 성격 caracte re p r i va tif에 의해 정의 해야 하는 것은 근대인의 사회 쪽이다. 우리가 타인과 맺는 관계는 우 연적이고 단편적인 것을 제의하고는 포괄적 경험, 즉 한 주체가 다른 주 체를 구체적으로 포용하는· 데 근거를 두지 않는다. 우리 인간 관계는 대 부분 기록된 자료를 통한 간접적 재구성에서 연유한다. 우리는 사람들 (이야기꾼, 사제, 현자 또는 고대인)과의 체험적 교섭을 함축하는 구두 전승이 아니라 도서관에 가득한 책을 통해 과거와 연결된다. 또 비평은 책을 통해서 그 저자의 표정을 재구성하려고 애쓴다• 현재의 국면에서 우리는 동시대인들 대부분과 온갖 매개체들(서류, 행정 기구)을 통해 소통하고 있는데, 이 매개체들은 분명 교섭을 엄청나게 증폭시키는 동 시에 교섭에 비진정성을 부여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비진정성은 시

민과 권력 사이의 관계 를 특징짓는 것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역설에 탐닉할 의도도 없으며 문자 발명으로 도입된 엄청난 혁명을 부정적 시 각으로 규정할 뜻도 없다. 하지만 문자는 인간에게 많은 복리 를 가져 다 주는 동시에 본질적인 것을 앗아간다는 엄연한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은 필수 불가결하다 .(400-402 쪽 . 강조는 필자의 것임) 그때부터 인종학자의 임무는 윤리적 의미를 함축한다. 그것은 현장에서 〈진정성의 수준들〉을 식별하는 일이다. 진정성의 기준은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아는〉 소규모 사회에서 〈 이웃 〉 관계가 되는 것이다. 만약 인류학적 조사의 접합점p o i n t d' i nser ti on 을 주의 깊게 고려한 다면, 인류학이 점차 근대 사회 연구에 관심을 두면서 근대 사회에서 진정성의 수준二 을 인지하고 그것을 따로 떼어놓으려고 노력했음을 직 시하게 된다. 인종학자가 어떤 촌락, 기업 또는 대도시의 〈 이웃 관계 〉 (영미인들이 ne igh bourhoo 混杓고 부르는 것)를 조사 할 때 낯익은 마당 에 있음을 깨닫게 만드는 것은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아니면 거의 다) 알고 지낸다는 사실이다. 〈아마 인류학이 사회 과학에 공헌한 가 장 큰 업적은 사회적 존재의 두 가지 방식을 (더구나 무의식적으로) 도입한 것이라고 미래의 후손들은 판단할 것이다. 죽 한쪽은 태초부터 전통적이고 고대적인 것이라고 파악된 생활 양식이다. 그것은 진정한 사회의 생활 유형이다. 다른 쪽은 좀더 후에 나타난 것으로 진정성이 불완전하고 미완결된 무리들이 가일층 광범위하고, 그 자체가 비진정 성이라는 낙인이 찍힌 거대한 체계 속에서 조직화된다. 물론 첫번째 유형도 그 속에 전혀 부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402-403 쪽) 이 텍스트의 명확성은 그 자체로 족하다. 〈인류학이 사회 과학

에 공헌한 가장 큰 업적이 〉 실제로 그런 것인지는 〈미래의 후손 들 〉 이 〈 판단할 것이다. 〉 〈 수정 같은 〉 구조로 된, 자신에게 현전하며 그 이웃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 모델은 다분히 루소적인 모델이다. 우리는 일개 텍스트를 넘어서서 세밀하게 그 사실을 확인할 것 이댜 지금은 『 인간 언어 기원론 』 쪽으로 방향을 돌려보쟈 루소는 이 저서에서 사회적 거리, 이웃의 홑어짐은 억압, 자유 방임, 악의 조건임을 보여준다. 억압의 정부들은 모두 한결같이 똑같은 제스처 롤 쓴다. 그것은 현전, 시민들의 공존, 〈함께 사는 민족〉의 만장 일치를 끊어 어수선한 상황을 야기시키고 주체들을 분산시켜 유일 하고 동일한 음성 언어 공간, 즉 유일하고 동일한 설득적 교환 공 간 속에서 서로 하나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도록 한다. 이 현상온 『인간 언어 기원론 』 의 마지막 장에 기술되어 있다 . 즉 이러한 구조 에서 알려진 애매 모호함은 그 의미를 전복시킬 수 있고, 이러한 공존은 사기적 권모 술수의 장광설에 종속된 군중의 것임을 볼 수 있다. 루소는 그 전복 앞에서, 즉 해독해야 할 기호들 앞에서 끈기 있게 경계심을 잃지 않았다. 어쨌든 『 인간 언어 기원론』은 사회 생 활과 현대의 정치적 기구의 정보 구조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것은 웅변, 아니 오히려 충만한 음성 언어의 말투에 대한 찬탄이 며 돈, 선전 책자(소책자), 무장하고 제복을 입은 군인과 같은 무 언의 비개성적인 기호들에 대한 비난이다. 모든 언어는 인간의 필요 욕구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성된다. 또 여 러 언어는 필요 욕구에 따라 변화하고 변질된다. 간접적 설득이 정치 적 힘으로 존재하던 고대에는 옹변술이 필요했다. 공권력이 설득을 대 신하는 오늘날 옹변술이 도대체 어떤 쓸모가 있다는 말인가? 말하는 데 더 이상 기교도 , 수사법도 필요 없게 되었으며 그렇게 된 것은 나의 기쁨이다. 그렇다면 함께 모인 민족에게 남아 있는 담론은 무엇인가?

종교적 강론이다. 민족을 설득하기 위해 그러한 강론을 하는 사람에게 는 어떤 담론이건 문제가 안 된다. 왜냐하면 교회의 성직을 임명하는 것은 국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중 언어들은 웅변술과 마찬가지로 완 전히 무용 지물이 되어버렸다. 여러 사회는 마지막 형식을 취했다. 사 회에서는 대포와 돈이 없다면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민중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기에 그들은 〈돈을 달라〉는 선전용 플래카드를 들 거나 병사들을 동원해서 거리 모퉁이에서 〈돈을 달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그 누구도 모이게 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각 주체를 분산시켜야 한다. 그것은 근대 정치의 으뜸이 되는 잠언이다. …… 고대인의 경우 에는 공공 장소에서 쉽게 민중에게 자기 의사를 경청하도록 했다. 아 무 불편 없이 하루 종일 말할 수 있었다……. 방돔 Vendome 광장에서 파리 시민에게 불어로 권모 술수의 장광설을 늘어놓는 사람을 가정해 보자. 목소리를 다해 고함 지르면, 그가 소리 지르는 것을 들을 뿐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보다 프랑스에 허풍쟁 이 횡설수설꾼이 적은 이유는 그들의 말이 덜 경청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여 있 는 민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모든 언어는 노예 언어일 뿐이라고 나는 말하겠다. 즉 민중은 자유롭게 있는 것이 불가능하며, 이 언어로 말하 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20 장 r 언어와 정부의 관계 Rap po rt des lang ue s aux g ouvernemen t s 』 ) 자기 자신에 대한 현전, 얼굴을 서로 맞댄 가운데 존재하는 투 명한 근접성과 목소리의 직접적인 도달점, 이들은 사회적 진정성의 규정에 따라서 고전적인 것이다. 다시 한번 상기시키거니와 루소적 이면서 이미 플라톤주의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그것은 법, 권력, 국가 둥에 맞서 무정부적이며 자유 방임적인 항의와 짝을 이루며 19 세기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의 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푸리

에주의 fou rie r ism e14 사회주의와 일맥 상통하고 있다. 연구소나 작 업장에서 인종학자는 조작 또는 도구로 이 꿈을 소유한다. 이 도구 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 속하는 그 무엇을 가져다 놓으려는〉 고집 스러운 인종학자의 욕망을 이용하면서 다른 〈손에 닿는 수단들〉과 타협해야 한다• 인종학자 레비AE 쿠 A 는 아울러 프로이트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어떤 특정 〈마르크스주의〉이다. 상기해 보면, 이 마 르크스주의의 바판적 작업은 〈불교적 비판〉과 〈대립〉도 〈모순〉도 되 지 않는 것이었다)이기를 원하고, 심지어 〈통속적 유물론〉에 유혹 되었다고 스스럼없이 말하기 때문이다 .30)

30) Esp1 i t 1963 년 11 월호, 652쪽. 또 Le cru et le cuit , 35 쪽 참조.

자질구레한 작업의 유일한 약점(하지만 그것은 이 명목으로 치료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은 그 자체의 담론에서 완전히 정당화될 수 없다. 도구들과 개념들의 이미 존재함 le dej a-la 은 풀어해칠 수도 재창조 r e-i nven t e 될 수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에서 담론으로 이행하는 것은 늘 자질구레한 작업에서 그 길을 잃고, 부스러기로 남은 폐물로 그의 궁전을 건설한다(〈신화적 사고는…… 오랜 지반을 가진 담론의 부스러기 폐물로 그의 이데올로기 궁전을 건설한다〉(『야 만적 사고』, 32 쪽)). 최상의 경우에 자질구레한 작업의 담론은 자 신을 시인할 수 있다. 즉 그 자신의 욕망과 실패를 시인하고, 이미 있음의 본질과 필연성을 생각하게 하며, 가장 근본적인 담론과 가 장 창조적이며 체계적인 엔지니어는 역사, 언어 동 한 세계에 의해 놀라고 농락당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 세계에서 그들은 자신의 조각 부품을 빌려온다. 설령 오래된 기계를 파괴하는 한이 있더라 도말이다(자질구레한 작업은 파괴하기 ' 위해 건설된 전쟁 또는 사냥 기구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누가 자질구레한 작업을 하는 평온한 사 람의 이미지롤 믿는단 말인가?). 일체의 자질구레한 작업과 단절하 는 엔지니어라는 개념은 창조주의적인 신학에 속한다. 오직 그러한

신학만이 엔지니어와 수작업하는 사람 사이의 본질적이며 엄밀한 차이를 신임할 수 있다. 그러나 엔지니어가 언제나 일종의 수작업 하는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이 점은 일체의 자질구레한 작업 비판 을 무너뜨려서는 안 되며 오히려 정반대여야 한다. 어떤 의미의 비 판인가? 무엇보다도 수작업하는 사람과 엔지니어 사이의 차이가 그 신학적 토대에 있다면. 수작업 하는 사람이라는 개념 자체는 우 연적인 효력 상실과 유한성을 함의한다. 그렇다면 욕망의 담론에 근원적으로 귀속하는 것과 담론의 세계사로 귀속하는 것과 욕망에 희망을 품는 언어가 이미-존재함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 술적 신학적 의미를 포기해야만 한다. 그러고 나서 자질구레한 작 업으로 자질구레한 작업 관념을 간직한다고 가정하면, 모든 자질구 레한 작업은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질구레한 작업 은자신을비판한다. 끝으로 〈사회적 진정성〉이라는 가치는 일반적인 도덕성의 구조 에 필수 불가결한 두 가지 축 가운데 하나이다. 살아 있는 음성 언 어의 윤리학은 완벽하게 존중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유토피아 적이든 비유토피아적이든(죽 공간화와 문자로서의 차이에서 해방된), 그 존경 자체로 존중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헛된 미끼와 자신의 근원 조건에 대한 비존경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음 성 언어에서 문자 언어에 부정된 현전, 또 문자에 의해 부정된 현 전을 꿈꾸지 않는다면말이다. 음성 언어의 윤리는 제어된 현전의 미끼이다. 자질구레한 작업처럼, 그 미끼(술책)는 무엇보다 사냥꾼 의 전술을 지칭한다. 그 단어는 매 사냥에 쓰이는 단어이며, 『 리트 레 사전』에 따르면 〈맹금이 곧바로 손에 돌아오지 않을 때, 이를 다시 부르기 위해 사용하는 새 모양의 빨간 가죽 뭉치〉이다. 예를 들어보자. 〈주인은 다시 부르고 소리 지르며 걱정되어 그에게 먹이 미끼와 주먹을 내보이지만 헛된 일이다.〉(라 퐁텐)

음성 언어에서 문자 언어를 인지하는 것, 즉 음성 언어의 차이 와 부재를 인지하는 것, 그것이 곧 먹이 미끼를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댜 타자의 존재 없이 윤리는 없으며, 따라서 또한 부재, 감추 기, 우회, 차이/지연, 문자 등이 없이 윤리는 없다. 원-문자는 비도 덕성으로서 도덕성의 근원이다. 윤리의 비윤리적 개방성, 폭력적 개방성, 문자에 대한 통속적 개념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도덕의 족보를 반복하기 위해 아마도 폭력의 윤리적 심판을 엄격하게 지 연시켜야 할 것이다. 문자를 무시하는 것과 연결된, 목소리의 범위에 대한 찬양은 루 소와 레비AE 쿠 A 에게 공통된다. 어쨌든 우리가 지금 읽어야 할 텍스트 속에서 루소는 충만하고 현전하는 음성 언어의 환상, 사람 들이 투명하고 순진하다고 믿는 음성 언어 속에서 현전의 환상을 경계한다. 말의 차이와 폭력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충만한 현전의 신화가 빗나가는 것은 침묵에 대한 찬양에서이다. 언제나, 일정한 방식으로, 〈공권력〉은 이미 〈설득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제 『 인간 언어 기원론 』 을 다시 읽을 시간이 온 것이다.

【역주】 1. 불어 re p resen t a ti on 은 문맥에 따라 재현전화 . 표상, 대표, 대리, 재현. 상 (像)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 일반 인식론에서 re p resen t a ti on 은 정신에 무엇인가가 현전하는 것을 가 능하게 하는 것이며, 사고 대상의 구체적 내용을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 『 사물론 D ie Fi·ag e nach dem D i n g,. !) 에서 하이데거는 rep re senta t i on 행 위를 다음과 같이 규정 한다. 〈 re p resen t er 란 자신 앞에 무엇인가를 가져 다 놓고 자신 앞에서 그것을 소유하며 주체로서 현전하는 무엇인가를 가지는 것〉이다. 인간 지식은 바로 대상을 re p resen t er 하면서 자신에게 귀결시키 는 것이기도 하다. 수학에서 re p resen t a ti on 이라는 개념은 상(像)의 직관 적 관념에 해당하는 의미에서 생겨난다. 이 밖에도 미학에서는 미의 반영 을 표상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2. 레비人뜨쿠人가 초기 저작에서 후기의 신화 연구에 이르기까지 투르베츠 코이와 야콥슨의 음운론, 특히 이원 체계 모델을 적용했음을 상기 할 것. 주 지하다시피 1940 년대부터 야콥슨과 지적 교류를 하던 그는 언어학 방법론 을 사회 과학으로 옹용할 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피력했다. 물론 이러한 방 법론적 외치 ex t ra p ola ti on 에는 인식론적 문제가 있다. 레비 ,,._E 쿠人의 방 법론이 내포하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다음 책을 참조할 것. Mire il le Marc-Lip a nsky, Le str u ctu ralism e de Lev i-S tr a uss(Payo t, 1973). 3. 불어 br i cola g e 의 의미를 온전하게 살릴 수 있는 만족할 만한 우리말은 없다(영어 번역본 역시 이 말에 해당되는 영어 단어가 없다는 이유로 불어 원어를 그대로 옮기고 있다). 이 용어는 자질구레한 수리, 뜯어 맞추기 등 잡다한 일에 손대는 행동을 말한다. 이 말은 레비人뜨쿠人의 작업에 힘입 어 (특히, 『 야만적 사고』 1 장) 철학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구체성의 과학 scie n ce du concre t으로 특징지울 수 있는 야만적 사고에 대한 성찰의 틀 속에서 레비스트로스는 bri co lage 이론을 구축한다. 구체적 과학은 감각적 세계를 그 자체가 감각적인 것들을 수단으로 조직한다. 〈원시 태고적〉 사 회와 결부된 이 과학온 〈합리적〉 사상의 도래와 더불어 은폐된다. 구체적 인 것의 과학은 옛날에는 사변적이었으며, 오늘날의 문명 시대에는 bri- cola g e 의 〈테크닉〉 형식 속에서 남아 있다. b ri coler 란 동사는 우회 노선을 취하는 것이며 경험적 원칙에 준거해서 아주 미세한 것을 간직하려는 행위 를 말한다.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연장을 사용하는 것은 규정된 사용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사한 유형의 다른 전체 속에 통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손으로 촉지할 수 있고 변형될 수 있는 도구 br i cole 은 언제라도 가능한 창조의 도구이며 일반화될 수 있는 구체성이다 . 이런 의미에서 bric o lage 행위는 신화적 사고와 유사하다. 개념, 즉 투명성과 객관성에 근 거해서 작업하는 엔지니어와 과학자는 신화적 사고의 인간형인 bri co leur 와 서로 대립한다 . 4. 1755 년에 집필된 논문으로, 원래 제목은

교 근원의 역사 Hi s t o ir e des orig ine s du chz i s ti an i sme 』 (1 863-1881) 가 있다. 특히 이 저서의 1 권 『 예수의 생애 Vie de Je sus 』 는 종교계 및 학 계에 지대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1. 불어로는 la ps yc holog ie volonta ris t e . 의지주의 volon t ar i sme 는 형이 상학적 차원에서, 사물의 근본을 지성의 관념과의 유추가 아닌 의지의 비 합리적 경향에 의해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원리이다. 심리학적 관점 에서 의지주의는 주체의 행위와 책임에 초점을 둔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일체의 심리학에 대해 의지주의란 말을 사용한다. 행위란 지성보다 본질적 인 정신의 심적 생명 속에, 죽 정서적 기능 속에 있다고 상정하는 분트 Wundt 심리학이 그 예이다. 분트는 의지론적 심리학에 대해 주저 『 심리학 원론 Grundri ss der p s yc holo gi e 』(『서문」, 17-18 쪽)에서 다음과 같이 적 었다. 〈의지론적 심리학은 의지가 감정 또는 감성과 밀접하게 결부된 정서 적 상태와 더불어 감성이나 표상만큼 필수 불가결한 심리적 경험의 구성적 인 부분이라는 사실을 지지한다. 그리고 다른 모든 심리적 과정의 파악은 그것과 의지의 유추를 통해서이다.〉 12. 원제목은 . 루소는 『 에 밀 』 의 4 권에 이 에세이를 삽입한다. 그는 거기서 종교적 신앙과 감정의 본 질 및 기초에 대해 가장 완전하게 진술하고 있다. 신의 본질 및 신과 피조 물의 관계, 종교적 믿음과 도덕의 관계 등이 주요 골자이다. 그는 종교에서 기적과 계시에 부여된 의미에 대해 매우 비판적 견해를 내놓는다 . 특히, 종 파간의 갈등 및 관용의 부재를 힐난한다. 루소 종교 사상의 진수를 담고 있는 가장 중요한 글이다. 13. 이 글은 1763 년 간행되었으며 당시 파리의 대주교인 보몽 Chr i s t o p he de Beaumon t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에밀』의 출간 이후 루소는 사면 초 가에 처하게 된다. 특히 La pr ofe s sio n de Foi du vica ir e savo y ard 를 실었던 『에밀』은 1762 년 소르본의 신학 교수회로부터 고발당하는 동시에 루소의 체포를 허락하는 영장이 발급된다. 그리고 이 책의 사본은 파리와 제네바에서 분서 갱유의 운명에 처한다. 보몽은 루소의 종교 사상을 조목 조목 따져묻는 비난성 문헌을 발표한다. 이 문헌을 접한 루소는 자신의 사 상과 견해에 대한 공격에 분노하며 곧바로 응답한다. 1762 년 11 월에 완성 돼 1763 년 3 월에 출간된 이 글은 제네바에서 금서 목록에 오르고 만다. 루소는 그때까지 거의 맹목적으로 찬양했고 자신이 시민의 한 사람이라고 자부심을 느꼈던 도시인 제네바에 대한 모멸감과 혐오감에서 그해 5 월 시 민권을 포기하는 동시에 반납한다.

14. 푸리에주의는 하나의 사회 질서가 구성원 존재들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 해서는 욕구와 정념에 근거 를 두어야 한다는 원리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정념의 과학이 근간을 이루며, 푸리에는 이 정념의 목록을 상세히 제시했 다. 그는 결합으로 이끄는 사랑의 정념과 경쟁으로 치닫는 투쟁적 정념을 구분한다. 온전하게 파악된 사회 체계는 바로 이러한 모든 정념이 사회적 결합에 따라 꽃피우는 곳이다. 1830 년부터 1860 년대에 걸쳐 프랑스, 알제 리, 미국, 브라질 등지에서 푸리에가 주창한 소규모의 공동체 사회의 건립 이 시도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성공한 경우는 전무했으며 다양한 경험 및 공동체 사회로부터 영감을 받은 출간물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을 뿐이다. 사상사 차원에서 푸리에의 영향은 그 제자의 틀을 뛰어넘어 19 세기 프랑스 사회학 전체에 영향을 미쳤으며 마르크스, 엥겔스 역시 그 영향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 20 세기의 초현실주의와 공동체 운동 역시 푸리에로부터 영 감을 받고 있다.

2 이 위험천만한 대리 보충…… 내게 반대하는 소리들이 목놓아 외치리라! 나는 멀리서 우리를 끊임없이 우리 자신 밖으로 내쫓는 이 그릇된 지혜의 아우성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늘 현재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긴다 . 그리고 쉼 없이 앞으로 나아가 달아나는 미래를 좇으면서, 우 리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우리 를 몰 아내면서, 앞으로도 우리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곳으로 억지로 우리를 옮긴다 . 一 루소의 『 에밀 또는 교육론 』 에서 내 기억울 대신하기 위해. 그리고 그 시도로 나를 유도하기 위해. 내가 모았던 모든 종이는 다른 사 람들의 손에 넘겨져 더 이상 내 손아귀로 돌아오 지 않을 것이다. ―루소의 『 고백록 』 에서 • 우리는 여러 번 다음의 사실을 시사한 바 있다. 레비 AE 쿠 A 의 담론이 몰두하는 대로라면, 살아 있는 음성 언어에 대한 그의 찬탄 은 루소 사상의 일정한 모티브만을 충실하게 반영한다. 이 동기는 정반대의 경우라 할 수 있는, 충만한 음성 언어에 대한 끊임없는 경계심과 더불어 구성되고 조직화된다. 발화 행위 allocu ti on 에서 현전은 약속되는 동시에 거부된다. 루소가 문자 언어의 위에 올려

놓은 음성 언어는 현재 있는 바 그대로 또는 과거에 있던 바 aura it du etre 그대로의 음성 언어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양식과 살 아 있는 대화에서 우리를 현전으로 귀결시키는 시간에 주의를 기 울여야 한다. 실제로 루소는 음성 언어 자체와 그 직접성 im medi- a t e te이라는 신기루 속에서 그 은닉 derobemen t을 실감했다. 그는 비할 데 없는 섬세한 통찰력으로 그것을 인지하고 분석했다. 우리 는 언어라는 제스처에서 그토록 갈망하던 현전성을 박탈당했으면 서도 다시 언어를 통해 그것을 거머쥐려고 시도한다. 스타로빈스키 Je an S t arob i nsk i가 『살아 있는 눈 L'rei l vi van t』에서 잘 기술하 고 있는 〈도둑 맞은 도둑〉의 경험을 고찰하면서 루소는 〈자신의 반사(反射)를 사로잡고 자기 현전을 고발하는〉 (109 쪽) 거울 이미 지 놀이에 몰두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경험은 첫 마디부터 우리 를 시종 따라다닌다. 나를 구성시키는 동시에 해체하는 반사적 박 탈 le dessais i s s ement s p ecula i re 은 또 언어의 법칙이기도 하다. 그것은 살아 있는 음성 언어의 · 심장부에서 죽음의 힘으로 작동한 다. 그것이 여는, 음성 언어의 가능성을 위협할 만큼 가공할 힘으 로말이다• 애초에 음성 언어의 길을 열면서 음성 언어가 구성하는 주체를 해체시키고, 그 주체가 그에 대한 기호에 현전하는 것을 방해하며, 주체의 언어 활동을 문자 언어를 통해 괴롭히는 이러한 힘을 인지 한 후에 루소는 그 힘의 필요성을 수용하기보다는 추방하는 데 몰 두한다. 이 점은 이미 우리가 앞서 언급한 사실이다. 이런 연유에 서 루소는 현전의 재성립 쪽으로 기울면서 문자 언어의 가치를 인 정하는 동시에 그 자격을 박탈한다• 그것은 같이 일어난다. 즉 둘 로 갈리지만 수미 일관된 운동 속에서 일어난다. 그 기묘한 통합 과정에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루소는 문자 언어를 현전의 파괴이며 음성 언어를 병들게 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또

그는 음성 언어에서 박탈된 것의 재소유화를 문자 언어가 약속한 다는 점에서 문자 언어를 복권시킨다. 그러나 음성 언어보다 더 오 래되고 이미 그 자리에 있던 에크리튀르가 아니라면 다른 그 무엇 으로 그 복권을 가능하게 하겠는가? 이 욕망의 첫번째 운동은 언어 이론으로 표명된다. 다른 운동은 그 작가의 경험을 지배한다. 『고백록』에서 어떻게 자신이 작가가 되었는가를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순간 루소는 글 쓰기로 옮겨간 것을 모종의 부재와 계산된 소실(消失 eff ac ement calcule) 을 빌 려서 음성 언어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현전의 부홍으로 기 술한다. 문자 언어롤 쓴다는 것은 곧 음성 언어를 간직하거나 다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 이유는 음성 언어는 자신을 내 놓으면서 자신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죽 기호의 경제 econo mi e des si gn es 가 조직화된다. 이 기호의 경제 역시 기만적이며 기만성의 본질 자체와 필연성에 좀더 가깝다. 우리는 그 부재를 억제하지 않 을 수 없지만 일이 돼가는 대로 놔둘 수밖에 없다. 스타로빈스키는 루소가 이동하게 될 공간을 지배하는 심오한 법칙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자신의 진정한 가치에 따라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가로막는 이 오해 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즉흥적 음성 언어의 위험성을 어떻게 회피 할 것인가? 다른 어떤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취해야 할 것인가? 다른 어떤 수단으로 자기 자신을 표출할 것인가? 루소는 부재할 것과 글 쓰 기를 선택한다. 역설적으로, 그는 자신을 더 잘 나타내기 위해 자기를 숨기며 글로 씌어진 음성 언어에 자신을 맡긴다. 〈만약 내 단점뿐만 아니라 내 자신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내 자신에게 보여주는 것을 확 신한다면, 나는 나의 타자로서 사회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글을 써 나 룰 숨기려고 한 결단은 최상의 결단이었다. 여기 현전하는 나, 그 누구

도 결코 내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 몰랐으리라. 〉 ( 『 고백록 』 ) 그 고백은 생경한 것이며, 강조할 만한 가치가 있다. 루소는 타인들과 관계를 끊 지만 그것은 문자로 씌어진 음성 언어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는 고독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문장들을 마음대로 몇 번이고 뒤집고 또 뒤집는다 .I )

1) La tra nspa rence et J'ob sta c le, 154 쪽. 우리가 루소의 해석가들을 인용하 는 것은 차용을 지적하거나 토의를 경계짓기 위해서일 뿐이다 . 독자들은 플레 야드 Bib l i oth e q u e de la Ple i ade 에서 진행중인 『 전집 (Eu vres Com pl e t es 』 판본과 부샤르디 Bouchardy, 부르켈랭 Bur g e li n. 캉도 Candaux, 데라테 Derath e , 파브르 Fabre , 푸코 Foucaul t, 가뉴뱅 Ga gne bin , 구이에 Gou hier . 그로에토이생 Groeth u y se n, 기요 Guy ot . 오스몽 Osmont. 풀레 Poulet, 레이몽 Raym o nd, 스텔링미쇼 S telling-Mi chaud. 그리고 특히 스타로빈스키의 주요 작업에 의해 안내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제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점에서 주목된다. 음성 언어를 문자 언어로 대치시키는 작업은 또 그 가치에 의해 현전성을 교체 한다. 즉 나는 존재한다 또는 이렇게 희생된 나는 현전한 E 는· 것 대 신 내가 나일 수 있는 것 또는 나라는 가치를 선호한다. 〈내가 현전 했다면 사람들은 결코 내 가치를 알 수 없었으리 라 Moi pre sent. on n'aurait jam ais su ce qu e je valais . > 나는 진리와 가치의 관념성 속에서 니를· 인지시키기 위해 현전하는 나의 생명, 실제적 이고 구체적인 나의 존재를 포기한다. 이것은 잘 알려진 도식이다. 싸움은 나의 자아에서 일어나며 싸움을 통해 나는 내 생명을 넘어 서서 (하지만 자아의 인지를 즐기기 위해 그 생명을 간직하면서) 나 를 고양시키기를 원한다. 문자는 바로 이 싸움의 현상이다. 루소의 실존에서 문자의 교훈은 그런 것이었다. 문자를 쓰는 행 위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여기에 본보기가 되는 방식으로) 현전의 재소유화 rea pp ro p r i a ti on 를 노리는 가장 큰 희생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루소는 죽음이 단순히 생명의 바깥쪽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 문자에 의한 죽음은 또한 생명을 개시한다. 〈나 는 나 자신을 죽은 인간으로 쳐다보았을 때 비로소 생존하기 시작 했다.〉(『고백록』, 46 장) 이러한 경제 체계에서 그롤 규정하는 순간 부터 그 희생(죽 〈문화적 자살〉)은 눈에 보이는 외관 a pp arence 속 에서 무산되지 않을까? 그것은 상징적 재소유화가 아닌 다른 무엇 인가? 그것이 현재와 고유한 것을 포기하는 것은 그 의미와 진리, 현재와 근접성 또는 고유한 것의 고유성 pro p ri e t e du p ro p re 의 현전이라는 관념적인 형식 속에서 제어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만 약 실제로 여기에서 진리와 외관이라는 술어로, 또 현전과 부재하 는 대립으로부터 우리가 경제라고 부르는 것을 결정하는 이러한 개념들(희생, 소모, 포기, 상징, 외관, 진리 동)에 국한한다면, 책략 과 의관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에크리튀르의 작업과 차이/지연의 경제는 이러한 고전적 개념성, 죽 이러한 존재론 또는 인식론에 의해 지배되도록 방치되 지 않는다. 존재론과 인식론은 오히려 에크리튀르에 숨겨진 전제 조건들을 제공한다. 차이/지연은 소유화에 저항하지 resis t e 않으며 그것에 의적 한계를 부과하지 않는다. 차이/지연은 소외를 개시하 면서 enta m er 동시에 마침내 재소유화가 개시되도록 방치한다. 죽 음까지. 죽음은 필연적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차이/지연의 운동이 다. 죽 차이/지연은 현전과 부재의 대립을 가능하게 한다. 차이/지 연의 가능성 없이는 현전의 욕망은 있는 바 그대로 자신의 호흡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이 욕망이 자신에게 불만족 i nassou vi ssemen t이라는 운명이 있음을 의미한다. 차이/지연은 그것이 금기하는 것을 생산하며, 그것이 불가능하게 하는 것 자체 를가능하게 한다. 만약 차이/지연을 존재자 e t an t의 사라짐과 나타남의 주요 형식 인 부재와 현전의 말소된 근원 orig ine ob lite ree 으로 인지한다면,

존재 l'etr e 부재 또는 현전으로 그것을 규정하기에 앞서 그것이 차 이/지연의 사상에 이미 연루되었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일이 남아 있다. 아울러 존재자를 제어하려는 기획으로서의 차이/지연이 존재 의 의미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지 여부도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는 생각할 수 없을까? 존재의 의미가 현전의 규정을 벗어난 역사로서 발생된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존재의 의미 는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언제나 현전의 시대로 파악되지 않았는 가 ? 아마도 이 점이 니체가 쓰려했던 바이며 하이데거의 독법에 맞서는 것이다. 즉 그것은 능동적 운동의 차이 d iffe rence( 이는 그 의미를 면밀히 분석하지 않고, 차이/지연 dif fera nce 개념에서 이해된 다)는 형이상학에 선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존재의 사상을 넘어서 는 것이다. 비록 존재의 사상이 형이상학을 초과하고 형이상학을 그 울타리에 갇혀 있는 것으로 생각하더라도 존재의 사상은 형이 상학이 아닌 다른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맹목화로부터 대리 보충으로 이러한 문제틀의 도식으로부터 문자 언어와 관련된 루소의 경험 과 이론, 그리고 문자라는 제목 아래 루소라는 고유 명사를 결합시 키고 나누면서 루소를 루소로 귀결시키는 일치와 불일치를 생각해 야 한다. 경험이란 측면에서 현전, 즉 자연의 재소유화인 문학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이론이란 측면에서는 문자 언어의 부정성 neg a ti v it e 에 대한 종교 재판이 이루어진다. 문자 언어의 부정성 에서 문화의 타락과 공동체의 붕괴를 읽어야 한다. 만약 대리 보충과 체계를 이루는 여러 개념의 성좌들로 그것을 에워싸려 한다면, 대리 보충 sup pl emen t이란 단어는 이 두 가지

제스처의 생소한 통일성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 두 가지 경우에서 루소는 문자를 위험한 수단, 위협 적인 구출로 간주하고 곤경에 처한 상황에 대한 비판적 대응으로 파악한다. 자신에 대한 근접성으로서의 자연이 금지되거나 단절될 때, 음성 언어가 현전을 보호하는 데에 실패할 때, 문자 언어는 필 연적이다. 문자 언어는 긴급히 말 verbe 에 첨가되어야 s' 척. ou t er 한 다. 우리는 이미 처음부터 이러한 첨가 add iti on 형태 가운데 하나 룰 인식했다. 음성 언어는 자연적이거나 최소한 사고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며, 사고를 의미하기 위한 가장 자연스러운 제도 또는 계약 형태이며, 문자 언어는 거기에 첨가되며, 게다가 이미지 또는 대리 로서 첨가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자 언어는 자연적이지 않다. 그것은 표상과 상상력 속에서 사고에 대한 음성 언어의 직접적 현 전을 파생시킨다• 이러한 문자 언어의 힘을 빌리는 것은 〈이상할 biz a rre> 뿐 만 아니라 위험 천만하다. 그것은 테크닉의 첨가이다. 음성 언어가 실제로 부재할 때, 문자 언어는 음성 언어를 현전시키 기 위해 도입하는 인위적이며 교활한 속임수인 것이다. 그것은 언 어의 자연스러운 운명에 가하는 일종의 폭력이다. 언어란 말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문자 언어는 음성 언어에 대해서 대리 보충일 뿐이다. …… 음성 언어는 계약 기호들을 통해서 사고를 표상하며, 같은 이치로 문자 언어는 음성 언어를 표상한다. 이런 식으 로 해서 문자를 쓰는 기술이란 사고의 간접적 대리 표상이 된다 . 대리 표상이 현전으로 자처하고 기호가 사물 그 자체로 행세할 때 문자 언어는 위험하다. 아울러 기호의 작동 자체에 애초부터 스 며 있는 숙명적인 필연성이 있다. 그것은 대체물 subs tit u t이 자기 의 대리 vica ria n ce 기능을 망각하고, 실제로는 음성 언어의 무능

과 불구를 보충하는 것 su pp leer 일 뿐이면서도 음성 언어의 충만함 으로 자처한댜 왜냐하면 대리 보충이라는 개념(그것은 여기서 표상 적 이미지 개념을 규정한다)은 자기 안에 두 의미를 간직하고 있기 떄문이다. 그 의미의 공존은 필연적인 것만큼이나 생소한 것이다 . 보충은 첨가이고 잉여이고 또 다른 충만함을 풍부하게 하는 충만 함이고 현전의 과잉 comble 이다. 그것은 현전을 겸하는 동시에 현 전을 축적한다. 이런 식으로 예술, 테크네 t echn 삼 이미지, 대리 표상, 계약 등은 자연을 보충하고 이러한 일체의 겸직 기능으로부 터 풍부해진다. 이런 유의 대리 보충성 su pp lemen t ar it e 은 일체의 개념적 대립을 일정한 방식으로 규정한다. 그 개념적 대립 속에서 루소는 자연 개념을 그 자체로 충족해야만 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대 리 보충은 부족함을 보충한다 le sup ple ment Sup ple e. 그것은 다른 무엇을 대체하기 위해서만 첨가될 뿐이다. 그것은 개입하거나 다른 어 떤 자리를 대신하여 a-la-p l a ce-de 술며 시 끼 여 든다. 죽 그 것이 무엇인가를 메운다는 것은 어떤 빈 곳을 메운다는 것이다. 만 약 그것이 영상을 표상하고 그것을 만든다면 그것은 그에 앞서 존 재하는 현전의 결함 때문이다. 부족함을 메우고 보좌하는 이 대리 보충은 추가 지점 a dj o i n t이며, 어떤 것을 대신하는ti en t -l i eu 하위 심급이다. 대체물로서 대리 보충은 단지 현전의 실증성에 첨가되는 것이 아니며, 어떠한 두각도 나타내지 않으며, 그 위치는 빈 곳의 표지에 의해 구조 속에 할당된다. 그 어딘가, 그 무엇인가는 자신 으로는 de soi- m eme 채울 수 없으며, 기호와 대리로 메울 때만 완 수될 수 있다. 기호는 늘 언제나 사물 자체의 대리 보충이다. 대리 보충의 이러한 두번째 의미는 첫번째 의미와 따로 떼어 생 각할 수 없다. 그 두 가지 의미 모두 루소의 텍스트 속에서 완성되 는데, 나는 그 점을 지속적으로 검토해 볼 작정이다. 그러나 그 의 미의 굴절은 매순간마다 변한다. 그 두 가지 의미 각각은 차례대로

지워지거나 다른 의미 앞에서는 은밀하고도 몽롱하게 호려진다. 하 지만 그 두 가지 의미의 공통 기능은 다음 시실로 인지된다. 그것 이 첨가되는 것이든 대신하는 것이든, 대리 보충은 바깥쪽에 있는 것 ex te ri eu z-0]며 첨가되는 것에 대한 실증성의 의부에 있으며 그 에 의해 대체되기 위해서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이어야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 로베르 사전 .!) 에 따르면, 대리 보충 su pp lemen t은 보충 com p lemen t과 달리 일종의 〈외부적 첨가 〉 이다 . 그런데 루소에 따르면, 악의 부정성은 언제나 대리 보충성의 형 식을 갖게 될 것이다. 악은 자연의 바깥쪽에 있으며 , 본질적으로 순진하고 좋은 것의 바깥쪽에 있다. 악은 자연에 불쑥 도래한다 Il survi en t a la natu r e. 그러나 악은 언제나 하나도 부족한 것 이 있어서는 안 될 존재를 보충하는 꼴로 나타난다. 이렇듯, 언제나 자연적인, 죽 다른 누구보다도 루소에게 자연스 러운 모성적 현전은 자기 자신에게 충족되어야만 한다. 현전의 또 다른 이름인 그 본질은 이러한 조건법의 선택 폭을 통해 해독된다• 자연처럼 〈모성적인 정성은 그 어떤 부족함도 없다 〉 고 『 에밀 』 은 말한다 .2 ) 그것은 결코 부족함이 없다. 이것은 곧 보충될 것이 없음 울 말한다. 그것은 충분하고 스스로에게 충분하다. 하지만 이 말은 또한 어머니의 정성을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음을 말한다. 즉 그것을 대신하기 바라는 것은 결코 똑같은 것을 줄 수 없고, 일 종의 범속한 임시 변통에 불과할 뿐이다. 궁극적으로 자연은 결코 대신 메울 수 없고 그 대리 보충은 그 자신에게서 진행될 수도 없 으며 단지 본래의 것에 비해 열동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별개의 2) 『 에밀 .1 (Ed iti on Ga rnier ). 17 쪽. 우리는 텍스토가 현재 나온 세 권의 책 중 한 권에서 출 판되었을 경우에만 『 전집 Ed ition s de la Plei ade 』 을 참조 할 것이다. 다른 저작들은 가르니예 판에서 인용될 것이다. 벨랭 Beli n 판 (1817) 에 따라 우리가 인용하는 Essai sur l'ori g ine des J an gu es 에 대 해서는 편의상 장 번호를 지적하겠다.

것임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루소 사상의 주요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일체의 교육론 은 자연이란 전당을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재구성하는 데 쓰이는 대리 보충 체계로 기술되거나 규범화된다. 『 에밀 』 1 장은 이러한 교육론의 기능을 알리고 있다. 비록 어머니의 정성은 결코 부족함 이 없지만 〈아이는 몸이 약한 엄마보다는 건강한 유모의 젖을 먹 는 것이 나울 것이다. 만약 그 아이가 자신을 낳아~든 모친의 피를 두려워한다면말이다.〉(『에밀 』 , 17 쪽) 결함 있는 자연, 이것은 사건 또는 자연에서 이탈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결함 있는 자연을 메워주는 것은 문화이다. 문화란 여기서 습관 hab it ude 이 라 불린다. 문화는 필요하지만 어머니들의 대체 substi tut i on des meres 가 더 이상 〈신체적 측면에서만〉 참작되지 않게 되는 순간부 터는 불충분하게 된다. 어머니가 어린 아이에게 젖 주는 일을 거절할 때 다른 여성은 물론 동물조차도 아이에게 젖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성애는 결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자기 자식 대신 남의 아이에게 젖을 주는 어머니는 잘못된 어머니이다. 그런 어머니가 어떻게 좋은 유모가 될 수 있겠는가?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 주 서서히 이루어질 것이다. 습관이 천성을 바꾸어놓아야 하기 때문이 다…….(위의 책, 같은 곳) 자연법 문제와 자연과 사회 사이의 관계 등의 문제, 소외, 이타 성, 변질 등의 개념들은 어머니와 아이의 대체에서 오는 교육적 문 제에 매우 즉각적으로 적용된다. 이 일이 잘되었다 하더라도 거기서 파생되는 단점은 여전히 남는다.

그 단점만 생각하더라도 분별 있는 여자라면 자기 자식에게 다 른 여자 의 젖을 먹이는 용기를성실할 것이다. 즉 그 단점이란 어머니의 권리 룰 젖 먹이는 유모와 함께 나누거나 그 권리를 애초부터 양보해야 한 다는 것이다. 이 를 테면, 자신이 낳은 자식이 자기를 사랑하는 만큼, 또 그 이상으로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꼴을 감수해야 한다…… . (위의 책, 같은곳) 문자라는 테마를 미리 염두에 두면서 우리가 어머니의 대체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논지를 시작한 이유는, 루소 자신이 그 점을 밝히고 있듯이, 〈그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에 기인 하기〉 때문이다. 유익한 주제에 대해서 헛되이 반복하는 일이 조금이라도 덜 실망을 준다면, 내가 이 점에 대해 얼마나 많은 강조를 하겠는가! 이 점은 혼 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에 기인한다. 당신은 모든 사람이 본연 의 임무를 다하기를 바라는가? 먼저 어머니들부터 시작하라. 그러면 그에 따라 생기는 변화에 당신은 놀랄 것이다. 모든 것은 점중적으로 이러한 최초의 타락으로부터 온다 . 모든 도덕 질서가 변질된다 . 자연적 인 것은 마음속에서 소멸된다…….(1 8 쪽) 유년기는 자연에서 부여받은 천성 상태에서 보충을 요구히는· 결 함의 첫번째 발현이다. 교육은 아마도 더욱더 원색적으로 대리 보 충의 역설을 밝혀준다. 어떻게 자연에 약점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 가? 어떻게 자연은 그것이 제공하지 않는 힘을 요구할 수 있는가? 어떻게 아이 일반이 가능한가? 자연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아이들에게는 잉여적인

힘은커녕 최소한의 충분한 힘조차 없다. 따라서 자연이 그들에게 허락 하는 모든 것을 사용하도록 해야 하며, 그래도 아이들은 그것을 남용 하지는 않을 것이다. 첫번째 교훈. 아이들을 도와야 하며, 그들의 두뇌 또는 힘, 죽 물리적 필요 욕구에 속하는 모든 것 속에서 결핍된 것을 메워주어야 한다. 두번째 교훈.(위의 책, 50 쪽) 교육의 조직화와 시간은 이러한 필연적인 악에 의해 조정된다. 〈결여된 것을 메우며〉 자연을 대신하는 것이 바로 그 교육이다. 교 육은 가능한 한 가장 적게, 그리고 가장 나중에 해야 하는 것이기 도 하다. 〈바람직한 문화의 비결 중 하나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지연시키는 reta r der 것이다.〉(위의 책, 274 쪽) 〈천성의 자리를 대신 하여 당신이 간섭해서 행동하기 전에 오랫동안 천성에 따라 움직 이도록 놓아두어라.〉(위의 책, 102 쪽. 강조는 필자의 것임) 유년 시 절이 없다면 어떤 대리 보충도 자연 속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대리 보충이란 인간성의 기회이자 퇴폐, 타락의 기원이 다.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는 것 salut de la race hum ai ne 과 관 련된다. 초목은 재배를 통해 길러지고, 인간은 교육을 통해 만들어진다. 만 약 인간이 큰 몸집과 강한 힘을 가지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가 이용 하는 법을 터득하기 전까지는 그 힘은 쓸모없을 것이다. 그러한 힘은 그에게 오히려 편견을 자초하여 다른 사람이 그를 돕는 것을 방해할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홀로 내버려진 채, 자신의 필요 욕구가 무 엇인지도 알기 전에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우리는 유년기 상태를 못 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유년기를 • 거치지 않았다면, 인류는 벌써 멸종했을 것이라는 사실을말이다.(위의 책, 67 쪽)

퇴페, 타락의 위협과 관련해 이렇게 적는다. 자연의 조물주는 어린 아이들에게 활동 원리를 부여하는 동시에 어 린 아이가 제멋대로 활동할 수 없게 그들에게 작은 힘만을 부여함근로 ­ 써 별로 해가 없도록 배려한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자기 주위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도구쯤으로 생각하자마자 사람을 자기 뜻대로 부리려 하고 자기 약점을 보충하는 데 사용한다. 그것이 어린이 들이 통제 불능의 독재자, 버르장머리 없는 고집쟁이가 되는 이유이다. 이것은 천성적인 지배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그런 지 배욕을 조장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남의 손을 통해 행동하고 우주를 움직이기 위해 단지 혀만 놀리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를 느끼기 위해서는 긴 경험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위의 책, 49쪽. 강조 는 필자의 것임) 대리 보충은 언제나 혀를 놀리거나 타인의 손을 통해 행동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여기서 한곳으로 모인다. 타락의 가~칸j으로서 어떤 악을 향한 퇴보, 그 악이란 우리 자신의 부재를 허용하고 대 리, 표상, 타인의 손에 의한 행동 등 자연이 아닌 대리 보충의 힘 에 근거한댜 문자를 써서 행동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대 리 보충은 언제나 기호의 형식을 띠고 있다. 기호, 이미지 또는 표 상 형식이 힘을 발휘하여 〈우주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바로 파문 이다. 이 파문은 그런 것이며, 그 피해는 때때로 수습 불능이어서 세 계는 거꾸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그리고 우리는 이후에 루소에 게 그러한 재앙 ca t as t ro p he 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보게 될 것이 다). 죽 자연이 예술과 사회의 대리 보충이 되는 꼴이 된다. 그때 가 바로 악이 더 이상 치유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다.

〈아이가 스스로의 병을 치유할 수 없으니 아이에게 아픔을 표현하 는 법을 터득하도록 해보자. 이 기술은 다른 사람을 대신하며 때때 로 더욱더 훌륭하고 성공적이다. 그것이 바로 자연의 기술이다.〉 (위의 책, 31 쪽) 그때가 또한 모성적 자연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직접적인 근접성에서 사랑받는 것을 멈추고 (그렇게 해야만 하돗 이) 〈오 자연이여! 오 나의 어머니여! 유일한 당신의 보호 아래 있는 나! 어떤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도 당신과 나 사이에 끼어들 지 못한다.〉(『고백록』, L. XII) 또 다른 사랑과 또 다른 애착의 대 체물이 된다. 자연의 명상온 언제나 그의 마음에 커다란 매력을 일으킨다. 그는 거기에서 자기가 필요로 했던 애착을 대신하는 대리 보충을 찾았다• 그러나 만약 그가 스스로 선택했다면, 사물 자체를 위해 대리 보충을 내팽개쳤을 것이다. 그는 인간과 대화하기 위해 부질없이 수고한 후에 야 초목과 대화하는 것으로 만족하게 된다. (『대화록』, 794 쪽) 식물학이 사회의 대리 보충이 되는 것은 재앙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재앙의 재앙이다. 왜냐하면 자연 속에서 초목은 더더욱 자 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적인 생명이다. 광물은 생명 이 없고 인간의 산업에 유용-하게 쓰인다는 점에서 식물과 구분된 다. 인간이 진정한 자연의 풍요로움, (죽 식물들의) 감각과 멋을 잃 어버렸을 때 그는 어머니의 탯줄을 파헤치고, 건강을 해치는 모험 울무릅쓴다. 광물계는 그 자체로 사랑스럽거나 매력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땅 속에 박헌 그것의 풍성함은 인간의 욕심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그 시 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그 풍성함은, 인간의 손 안에 잡히

기 쉬운, 그리고 그가 타락함에 따라 그 취향을 상실하는 진정한 풍성 함에 대한 대리 보충으로 사용되기 위해 여분으로 존재한다. 자기 반곤 함을 벗어나기 위해 그는 산업, 수고, 노동에 호소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지구의 창지롤 파헤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생명에 모험을 걸고 자신의 건강을 해치며 지구가 제공하는 현실적 재화의 자리에 상상의 재화를 추구한다, 인간은 그때부터 태양과 대낮을 피해 다닌다. 그것을 쳐 다볼 자격이 없어진 것이다 .3)( 강조는 필자의 것임)

3) Reveri es. 일곱번째 산책 (Plei ade, T. I), 1066-1067 쪽. 어떤 이는 동물 이 식물보다 더 살아 있는 자연적 생명을 대표한다고 반박할 수 있을 테지 만 동물을 죽음으로만 다룰 것이다. 〈동물의 연구는 해부학 없이는 아무것 도 아니다.〉 (1068 쪽)

인간은 이런 식으로 눈이 멀어 구석구석까지 파헤쳐보려는 욕망 에 맹목적이 된다. 그 실수에 뒤따르는 엄벌 cha ti men t의 끔찍한 광경이 엿보인다. 죽 단순한 대체가 그것이다. 인간은 산 채로 땅속에 묻혀 더 이상 대낮의 빛 속에서 살아갈 자격 이 없어진다. 그때부터 전원 노동의 부드러운 이미지에 뒤 이어 채석 장, 굴착기, 대장간, 철기구, 망치, 연기와 불 등이 나온다. 탄광 갱 안 의 유독 증기 속에서 몸이 쇠약해져 비참한 모습을 한 얼굴들, 검은 얼굴의 철공소 노동자, 지저분한 모습의 견습 철공들의 광경들이 속출 하며, 이것은 지구에서 초목과 꽃, 창공의 하늘, 사랑스러운 목동들과 건강한 농부들의 광경을 대신하게 된다 .4)

4) 위의 책, 같은 곳. 여기서 독서 원칙을 모색하지 않고 우리는 호기심으로 여러 예 중에서 아브라함 Karl Abraham 이 외눈 거인, 눈머는 것에 대한 두려움, 눈, 태양, 자위 행위 등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참조한다 . Ilse Barande 옮김, (Eu vres Comp le te s , T. II, 18 쪽 이하. 이집트 신화의 시 퀀스에서 토트 Tho t(오시리스 Os iri ;.: 의 형으로 간주되는 문자의 신)의 도 움을 받은 세트 Se t h 는 속임수로 오시리스를 살해한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Vaudie r , 앞의 책, 46 쪽). 단 한번거 몸짓으로 아버지와 빛을 죽이는 보

충적이며 대리적인 문자(이 책, 135 쪽 참조).

그것은 바로 파문 scandale 이며 재앙이다. 대리 보충은 자연도, 이성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자연, 즉 우리의 〈공통된 어머니〉 ( 『 몽상록 』 , 1066 쪽)도, 합리적이며 온당한 이성도 참을 수 없는 것 이다( 『 자연의 상태에 대해서 De J'et a t de na t ure 』 , 478 쪽). 이러한 폭력으로부터 지신을 보호하고 이러한 치명적인 실수로부터 우리 를 보호하기 위해, 또 그 재앙을 피하기 위해 자연과 이성은 모든 노력을 다했는가?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은 그렇다고 답하며, 정확 히 탄광에 대해서 〈자연이 이러한 숙명적 비밀을 우리에게서 멀리 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경계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위의 책, 172 쪽). 아울러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땅 속 창자까지 우리를 치닫게 하는 폭력, 광물을 추구하는 맹목성, 죽 금속 제조술의 계기가 곧 사회의 기원이라는 사실이다. 루소에 따르면, 그 이유는 문명 사회 의 조직화를 표시하는 농업은 금속 제조술의 시작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뒤에 우리는 그 점을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맹목성은, 사 회와 동시에 탄생하는 것을 생산한다. 인간 언어, 사물을 대신하여 • 기호에 의해 규칙화된 대체, 대리 보충의 질서 등이 그것이다. 사 람들은 맹목성에서 대리 보충으로 옮겨간다. 그러나 맹인은 그의 시 력을 보충하려고 자기가 만들어내는 것조차도 그 근원에서 볼 수 없다. 대리 보충에 대한 맹목성 ]'aveugl e ment au sup p lemen t은 법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개념에 대해서 눈멀고 만다. 더구 나 그 의미를 보기 vo i r 위해 그 작동을 식별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대리 보충은 의미가 없고 어떤 직관으로도 파악이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그 기묘한 희미함函 nombre 으로부터 대리 보충을 빠져나오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여분을 말할 뿐이다. 이성은 자연에 대한 이러한 이중 침해롤 생각할 능력이 없다. 죽 자연에 결핍이 있고, 그렇게 해서 무엇인가 자연에 첨가된다. 하

지만 이성이 그것을 생각하기에는 무기력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성이란 이러한 무기력에 의해 성립된다. 그것은 자기 정체성의 원칙이다. 그것은 자연적인 존재의, 자신에 대한 자기 정체의 사상 이다. 이성온 대리 보충을 그 타자로, 비합리적인 것으로, 또 비자 연적인 것으로 규정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대리 보충은 자연의 위 치에 자연스럽게 자리잡기 때문이다. 대리 보충은 자연의 이미지이 며 대리 표상이다. 그런데 이미지는 자연 안에도, 자연 밖에도 없 다. 따라서 대리 보충은 이성이나 이성의 자연적 건강을 위해서는 위험하다. 위 험 한 대 리 보충 sup ple ment dange r eux. 이 말은 루소 자신 이 『고백록』에서 사용한 말이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문맥 에서 그 말을 쓰는데, 정확히 〈이성에서는 거의 생각조차 할 수 없 는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한마디로, 나 자신으로부터 가 장 정열적인 연인에 이르기까지 오직 유일무이하며 본질적인 차이 밖에 없으며, 그것은 나의 상태를 이성에서는 거의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만든다.〉(플레야드 판 『전집』 1 권, 108 쪽) 우리가 수직 계열적 가치 valeur p arad igm a tiq ue 를 추구하는 텍 스트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잠정적인 명목에서이며, 그것이 탄 생할 독서 분과가 엄밀하게 규정할 수 있는 것에 일종의 편견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어떠한 독서 모델도 이 텍스트(우리 는 자료 documen t가 아니라 텍스트로 읽기를 원한다)에서 측정될 준 비가 되어 있는 것 같지 않다. 우리가 말하려는 바는, 이 텍스트를 판 7 능하게 하고 이제까지 사람들이 생각한 것보다 판독 가능성 이 훨씬 더 높이는 것을 넘어서 이 텍스트 속에서 어떤 독서 모델도 충만하고 엄밀하게 측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바람은 우리가 통상 책 읽기라 부르는 것이 어떤 경우에도 그 경제를 터득 할 수 없는 의미 작용을 도출하자는 것이다. 다른 텍스트들을 통해

유통되며 끊임없이 그곳으로 되돌아가고 한 언어 요소와 조정된 기 능 작용에 일치하는 문자 텍스트의 경제 econom ie d'un tex te ecrit 말이다. 요컨대 〈대리 보충〉이란 단어와 그 개념을 연결하는 것은 루 소가 창안한 것은 아니며, 그 기능 작용의 독창성을 루소가 완전히 제어하지도 못했으며, 역사, 언어, 언어사를 통해 단순히 부과된 것 도 아니다. 루소가 말하는 문자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곧 이 수동 성과 능동성, 맹목성과 책임 등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을 인지하려 는 시도이다. 아울러 문자 텍스트가 의미하려는 바 voudrait di ~ e 의 시니피에로 성급히 달려가기 위해서는 그 시니피에가 여기서는 바로 문자 자체라는 점에서, 문자 텍스트를 추상화하는 일은 그만큼 줄어 들 수 있다. 이러한 글(형이상학적 진리 또는 심리학적 진리, 즉 작품 배후에 있는 루소의 인생)이 의미하는 진리 verite s ig nifie ~ 찾고자 하는 일은 거의 홍미가 없으며 그 결과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텍스 트가 무엇인가를 의미하려 한다면 , 그것은 바로 똑같은 그물 ti ssu 에 서, 죽 똑같은 텍스트 속에서 존재와 글 쓰기를 감싸는 참여와 소속 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동일하다는 것은 차이/지연의 다른 이 름인 대리 보충이라 불린다. 자연과 자연 사이에서, 처녀성 vi rginiteS.녁瑟匡의 자연적 순진성과 동정성p ucela g e 으로서의 자연적 순진성 사이에서 위험한 대리 보 충의 침투가 자연 안에서 이루어진다. 〈한마디로 내 자신으로부터 가장 정열적인 연인에 이르기까지 오직 유일무이하며 본질적인 차 이밖에 없으며, 그것은 나의 상태를 이성에서는 거의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만든다.〉 여기서 위의 인용문은 그 다음에 오는 단락이 〈유 일무이한 차이〉와 〈이성에서는 거의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은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루소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짜나간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왔고, 내 심정은 그곳에 갈 때와는 사뭇 달 랐다. 아마 내 나이 또래의 그 누구도 영원히 그곳에서 되돌아오고 싶 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나의 처녀성이 아닌 나의 동정성을 가지고 왔다 . 나는 세월의 흐름을 실감했다. 내 노심 초사하는 기질은 끝내 노출되었고, 아울러 무의도적인 그 기질의 첫번째 분출로 내 건 강과 그때까지 내가 체험한 순수성을 그 어느 것보다도 상세히 살펴야 한다는 경각심이 생겨났다. 곧 안심한 나는 이 위험한 대리 보충을 배 웠다. 그것은 자연을 속이고, 나와 같은 기질을 지닌 젊은 사람들을 건 강, 원기, 때로는 생명을 해치는 많은 무절제로부터 지켜준다 . (플레야 드 판 『 전집』 1 권, 108-109 쪽) 『에밀』 (L.IV) 에서는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을 수 있다. 〈한번 이 위험한 대리 보충을 알고 나면 길을 잃고 만다.〉 같은 책에서 〈속 도를 내면서 경험을 보충하는 것〉( 『 에밀 』 , 437 쪽), 그리고 〈물리적 힘〉을 〈보충 강화하는〉 〈정신〉(위의 책, 183 쪽)이 문제시된다. 자기 에로티시즘 2 경험은 강박감 속에서 체험된다. 자위 행위는, 기존 전통이 그 책임을 아이들에게 주지시키고 그 실수에 동반되 는 거세 위협을 내면화하면서 이 행위에 결부되는 죄의식을 통해 서만 보장된다(〈곧 안심한다 b i en tot rassure>) . 따라서 자위 행위 의 쾌락은 원기력적 실체의 돌이킬 수 없는 손실로, 또 광기와 죽 음에 노출된 것으로 체험된다. 그것은 〈그들의 건강, 원기, 때로는 그들의 생명까지 희생하면서〉 일어난다. 동일한 방식으로, 『 몽상 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땅의 창자를 파헤치는 인간은 땅의 한 복판게서 자신의 생명과 건강을 희생하면서, 땅이 그에게 제공했을 현실적인 재화의 자리에 상상의 재화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문제의 관건은 상상적i ma gi na i re 이라는 말이다. 모성적이며 〈자 연을 속이는〉 대리 보충은 문자 언어처럼 작동하며, 그 대리 보충

은 문자 언어처럼 생명에 위험한 것이다. 이 위험은 이미지의 위험 이다. 문자가 그 〈 이미지 〉 , 회화 또는 그 표상으로부터 살아 있는 음성 언어에 위기를 고조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위 행위는 상 상적인 유혹으로부터 살아 있는 생명력의 마멸을 예고한다. 그처럼 수치심과 소심함을 쉽사리 동반하는 이 사악함vi ce 은 한술 더 떠, 생동하는 상상력에 큰 매력을 불러일으킨다. 말하자면. 모든 여 성과 남성이 마음대로 쾌락에 그들을 유혹하는 미를 이용하되 결코 동 의를 얻을 필요성을 못 느낀다. 루소가 〈죽음을 동반하는 만족 fun este avan t a g e 〉이라고 부르 는 그 위험한 대리 보충은 엄밀한 의미에서 유혹적 sedu i san t이다. 그것은 욕망을 바람직한 길에서 탈선시키고 자연적인 노선들에서 멀리 벗어나 방황하게 하며, 그 욕망의 손실 또는 실추로 유도하 며,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일종의 착각이나 파문 om 짜아 0 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것은 자연을 파괴한다. 그러나 이성의 파문, 그것은 곧 이러한 자연의 파괴보다도 더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는 사실이 다. 자연이 나에게 부여한 힘을 스스로 단념하는 것도 나 자신이 다. 〈이 죽음을 동반하는 만족의 유혹에 빠져 나는 자연이 나에게 회복시켜 주고, 내가 더욱 강하게 단련하느라 시간을 썼던 내 좋은 체질을 파괴하는 데 골몰했다.〉 『에밀』이 시간과 자연적인 힘의 완 만한 성숙에 얼마만큼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가는 주지하는 바와 같다. 모든 교육술은 자연이란 작품이 스스로 완결될 시간을 주면서 그 리듬과 단계들의 질서를 존중하면서 이루어지는 인내의 헤아림이다. 그 위험한 대리 보충은 전속력으로 자연이 서서히 설 립하고 축적시킨 힘을 파괴한다. 자연적 경험을 〈멀리하면서〉 그것 은 단번에 그 단계를 불사르고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정력을 소

비한다. (우리가 그 점을 검증하거니와) 기호와 마찬가지로 사물의 현전과 존재의 지속을 생략해 버린다. 위험한 대리 보충은 자연과 단절한다. 이렇게 자연에서 멀어지 는 것에 관한 모든 기술은 연극 마당 t h 쑬t re 을 이룬다.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닌 멀어짐을 가시화하는 것이 문제의 관건인 순간에, 『 고백록 』 은 위험한 대리 보충의 환기를 무대에 상연한다. 자연은 어머니와 동시에 또는 이미 진정한 어머니의 사라짐을 의미했고, 알다시피 애매 모호한 방식으로 진정한 어머니를 대신한 〈 엄마 maman 〉처럼 멀어진다. 따라서 문제의 관건은 엄마와 〈 아가 Pe tit〉라고 불리는 사람 사이의 간극이다 .5 ) 『 에밀 』 이 말하는 것처 럼, 모든 악은 〈여자들이 어머니가 되기를 멈추고, 더 이상 어머니 가 되지 않으려 하며, 더 이상 그렇게 되기도 원하지 않는 〉 ( 『 에 밀 』 , 18 쪽) 것에서 온다. 이는 일정한 어머니 상( 像 )의 부재 현상 을 의미한다.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경험은 이 부재를 지속시키기 위한 것만큼 그 부재를 축소하기 위해서도 만들어진다. 그것은 은 5) 〈아가는 나의 이름이었고, 엄마는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 는 아가와 엄마로 남아 있었다. 심지어 기나긴 세월이 우리들 사이의 차이 를 지워버렸을 때도 말이다. 나는 이 두 이름이 우리들의 어조에 대한 생 각, 우리들의 행동 방식의 단순성, 특히 우리들 마옴의 관계 를 멋지게 한다 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의 줄거움은 추구하지 않고 언제나 내 행복만을 추구한 어머니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부드러운 어머니였다 . 그리고 만약 감각이 그녀에 대해 집착한다면 , 그것은 그 본질을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 라 단지 그것을 더욱더 우아하게 하고, 나를 달콤하게 쓰다듬어주었던 젊 고 귀여운 엄마가 있다는 매력에 취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애무한다 caresser 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결코 키스도, 모성 애에 찬 가장 부드러운 쓰다듬음도 아끼지 않았으며, 결코 그 마음에서 그 것을 남용하지도 않았다 . 하지만 우리가 끝내 다른 관계도 가졌다고 말할 것이다. 좋다. 하지만 기다려야 한다. 나는 한꺼번에 다 말할 수는 없다. 〉 (『에밀 ,/J , 106 쪽) 바타이유 G. Ba t a ill e 의 이 문장에 대한 첨삭을 참고할 것.〈J e suis moi- m eme le 'pe ti t', je n'ai de pla ce qu e cache.> ( L e pe ti t)

밀한 fu rti ve 경험, 이를테면 비가시성을 필요로 하는 도둑놈의 경 험이다. 그것은 어머니 눈에 보이지 않는 동시에 또 그녀가 보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음 단락을 자주 인용했다. 〈 엄마 3 의 눈에 안 뛸 때, 이 사랑스런 엄마의 기억이 내게 불러일으 킨 온갖 광기의 상세한 부분까지 들먹이면 끝도 없을 것이다. 몇 번이 나 나는 거기서 그녀가 잤다고 상상하면서 침대에 키스를 했으며 내 방의 커튼과 가구들이 그녀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키스룰 퍼부었고, 또 그녀의 아름다운 손이 그것들을 만졌다고 상상하고 그녀가 걸어다녔다 고 상상하는 마루에서 무릎 꿇곤 했다. 때때로 그녀가 정작 내 눈에 보일 때는 가장 정열적인 사랑이 영감을 줄 법도 했던 터무니없는 짓 도 사라졌다. 언젠가는 식탁에서 그녀가 입에 빵조각을 넣을 때 나는 머리카락을 보았다고 소리쳤다. 그녀는 곧 그것을 집시에 뱉어내었고, 나는 그것을 게걸스럽게 손에 쥐고 삼켰다.〉° 〈한마디로, 나와 가장 정 6) 이 단락은 자주 인용되지만 아무도 그 자체로 분석한 적이 없다. 플레야드의 『 고백록 Co nfe ss io ns 』 편집자인 가뉴뱅과 레이몽은, 그들이 정신 치료라고 부르는 것을 경계하는데, 언제나 체계적으로 그렇게 하듯이 그것은 옳은 일 이다(1 281 쪽의 주석, 이 주석은 루소와 〈광기〉 또는 〈기상 천의함〉을 상기 시켰던 모든 텍스트를 매우 유용하게 모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이 의심은 오직, 그것이 정신 분석학적 독법의 예로 남용(지금까지 사용과 혼동 되었다)될 때만, 그리고 이런 유형의 텍스트를 해독 불가능하게 만드는 타성 적 주석의 이중화를 명령하지 않을 경우에만 합법적이다. 간결한 분석과 신 중하지 못하지만 때로 시사하는 바가 큰 분석과 라포르그 Dr Rene La fo r gu e 의 Etu d e sur J. -J . Rousseau(Revue fra n9a ise de ps yc h - analys e , T.I. 1927), 370 쪽 이하와 Psyc h op a th o ]og ie de J'ec hec(l944), 114 쪽 이하는 우리가 방금 전에 인용한 텍스트에 어떤 자리 매김도 하지 않 는다. 최소한 정신 분석학의 원칙이나 가르침과 보다 엄밀한 풀이를 하는 해 석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바로 거기에 스타로빈스키의 탁월하면서도 신중한 분석이 참여한 방향 중 하나가 있다. 이렇듯 L'cei l vi van t에서 우리를 멈추 게 한 문장은 대부분 Nouvelle Helo is e 에서 차용된 일련의 유사한 예종과 대체 속에 다시 각인된다. 다른 〈관능적 물신주의〉 중에서 가령 Nouvelle Helo i s 蟲 손꼽는다. 〈네 복장의 어수선한 부분은 내 끈질긴 상상력에 은닉

된 너의 부분들을 드러내준다. 이 가벼운 머리 모양은 그녀가 숨기는 척하는 커다란 금발머리와 닮았다. 이 행복한 옷차림에 대해 나는 단 한번도 투덜대 지 않았다. 옷을 걸친 여인의 취향을 그처럼 잘 표시해 주는 세련되고 단순한 실내복 너무 귀엽고 부드러운 발이 아무 고통 없이 신을 수 있는 슬리퍼. 만 지고 포옹하는 해방된 육체 .. …• . 얼마나 매혹적인 키인가? 앞쪽에는 두 개의 가벼운 테두리 장식 , 오, 관능미의 광경이여 ! 고래는 그 인상의 힘에 압도당 했다… … . 천만 번 당신에게 입맞춘 달콤한 흔적들! 〉 (115-116 쪽) 그러나 이 대체의 특수성과 이 이동의 분절은 해석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 우리는 환원적, 인과론적, 연상적 정신 분석학에 반격하고자 고 민한 끝에 스타로빈스키가 현상학적 실존적 스타일의 총체적 정신 분석에 일반적으로 너무 지나친 믿음을 부여하지 않는가 하고 지문해 본다. 총체 적 정신 분석은 성을 행동 양식의 총체성에서 분산시키면서 이 총체성을 구조화시키고 있는 구분, 차이, 이동, 고정 등을 속일 위험이 있다. 성의 장소 또는 장소들은 전반적 행동 양식의 분석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스타 로빈스키가 다음과 같이 권고하듯이 말이다. 〈관능적 행동 양식은 파편적 자료가 아니다. 그것은 총체적 개인의 발현이며, 있는 그대로 분석되어야 한다. 무시하기 위한 것이건 또는 특권화된 연구 주제로 삼기 위해서건, 노 출중을 성적인 ‘ 영역’으로 제한시킬 수는 없다. 그것은 전 인격이 근간이 되는 ‘실존적 선택' 몇몇과 더불어 계시된다 . 〉 (La tra nspa rence et J'ob sta c le, 21 0- 211쪽. 주 하나가 메를로퐁티의 Phenomenolog ie de la pe rcep tion 울 참조한다) 그렇다면 병리적인 것을, 매우 고전적으로 〈실존적〉 범주 속 에서 생각되는 〈지나침〉으로 규정짓는 위험에 빠지지 않을까 . 〈전반적인 분석 전망에서 의식의 몇몇 일차적 소여는 루소의 사변적 사상의 근원과 동시에 그 광기의 근원을 이룬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여군젓 l 은 그 자체로 병든 것이 아니다. 병이 선언되고 전개되는 것은 그 소여들이 지나친 방식으로 체험되기 때문일 뿐이다. 병든 전개는 의식 이 지배할 수 없었던, 근원적인 ‘실존적' 물음의 해학적 명중성을 실현할 것이다.〉 (253 쪽)

열적인 연인 사이에는 유일 무이한 본질적 차이밖에는 없었는데, 그 차이는 내 정신 상태를 거의 이성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 다 〉 등 .... ... 조금 앞에서는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을 수 있다. 〈 그녀를 보지 못할 때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녀에 대한 애착심을 가졌다. 〉 ( 『 에 밀 』 , 107 쪽)

대리 보충둘의 연결망 위험한 대리 보충의 발견은 곧 이러한 〈광기〉들 가운데p arm i 끼여 인용되지만 여전히 하나의 특권을 간직한다. 루소는 그것을 다른 광기들에 이어서 상기시키거니와 그 내용은 이성에서는 생각 조차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의 핵심은 특수한 대체물에 총체적 환희를 표류시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느끼거나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총체성 속에서 흉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 제의 핵심은 더 이상 침대, 마루, 커튼, 가구 동에 입맞춤하는 것도 아니며, 〈그녀가 자기 입 속에 넣은 빵 조각〉을 〈삼키는〉 것도 아니 며, 〈자기가 바라는 대로 이성(異性)을 차지하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이 연극 장면은 흔히 일상적으로 의미하는 일종 의 장식, 즉 장식물들의 총합만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경험의 지형학적 배치 la dis p o sit ion t o p o gr a p h iq ue 는 서로 무관하지 않 다. 루소는 바렌스 부인 집에 있었다. 루소는 엄마 Maman 가까이 에서 그녀를 보고 그녀에 대해 상상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장벽이 있을 수 있다. 바로 어머니가 사라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대 리 보충은 가능하고 또 필연적이게 된다. 모성적 현전 또는 부재의 놀이, 지각과 상상력의 이러한 교체는 공간의 조직화에 상응해야 한다. 그 텍스트는 다음과 같이 짜나간다. 이러한 지형 조건에 덧붙일 것은 예쁜 여인의 집에 기거하는 내 현 재의 상황이다. 그때 나는 마음속 깊이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고 또 낮 에는 그녀를 계속 볼 수 있었다. 밤이 되면 그녀의 모습을 상기시키는 물건들에 휩싸이고 그녀가 잤던 침대에서 잠을 잤다. 얼마나 흥분을 자아내는 일인가! 이런 모습들을 그려보는 독자는 벌써부터 나를 반은 죽은 놈처럼 쳐다본다. 그러나 정반대이다. 내 정신을 빼앗아간 것은

바로 최소한 한때 나롤 구원해 준 것이다. 그녀 곁에서 산다는 매혹과 홍분, 그리고 나날을 거기서 보내려는 끈질긴 욕망에 도취하여 나는 그녀가 눈앞에 있든 없든 그녀에게서 부드러운 어머니, 사랑스러운 누 나, 멋있는 친구의 모습을 보았다.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는 내게 세상의 유일한 여자였고 그녀가 내게 영감을 불러일으킨 감정들 의 달콤함은 오직 그녀와 그녀의 모든 성에 대해서만 전념하고 다른 여자들에게 눈뜰 시간을 허락지 않았다. 이 경험은 태고적 시대 또는 청춘 시대를 표시하는 사건은 아니 었다. 그 경험은 단순히, 그처럼 날아가버린 토대를, 죽 의미의 건 축물을 건설했거나 지지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능동적 강박 관 념으로 남아 있었고, 그 〈현재〉는 루소의 〈생명 〉 과 〈텍스트〉의 종 말까지 끝없이 재활성화하고 재성립시켰다. 조금 후 『고백록』 4 권 7) 텍스트의 하단에서 〈말하기 매우 힘든 조그마한 일화가〉 이야기된 다. 〈사악함에 탐닉한 어떤 사람과〉 마주치자 루소는 마치 스스로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이 기억이 나를 치유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랜 시간? 루소는 스스로에게 현전을 부여하고, 부재하는 아름 다움을 상기하면서 자기 감정을 유발시키는 이러한 자위 행위로 끝없이 치닫고, 그런 자신울 비난한다. 그의 눈에 그러한 자위 행 위 란 사악함과 타락의 모델로 남아 있게 된다. 또 다른 현전으로부 터 자신의 감정을 유발시키면서 사람들은 자신을 변질시킨다. 그런 데 루소는 이러한 변질이 자신에게 도래한 것이 아니며 내 자신의 근원 그 자체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며, 또 그럴 능력도 없었다. 그는 그러한 변질은 주체의 통합을 저해하기 위해 의부에 서 오는 나쁜 우발적 사건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바 7) 『 고백록 』, 165 쪽.

로 그가 갈망하게 될 또 다른 현전의 복원을 포기할 수 없었다. 마 치 사람들이 언어를 포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이런 점에서 ( 『 대화록 』 에서 말하고 있듯이) 〈생의 종말까지, 그는 끊임없 이 늙은 아이로 남아 있게 된다.〉 (800 쪽) 언어에 의한 현전의 복원 resti tut i on , 상징적인 동시에 직접적인 복원. 바로 이러한 모순을 곰곰이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상징적 복 원 경험이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경험과 의식으로 통하고 se pa sser, 세계로 통하기 de pa sser pa r le monde 때문이다. 만지는 사람은 만 짐을 당하고, 자기 정서 유발l' au t o-a ffe c ti o 군은 순수한 자립으로 주어진다. 만약 그것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현전이 또 다른 현전의 대 체적인 상징이라면, 다른 현전은 이 대체 놀이와 자기 정서 유발의 상징적 경 험 이전에는 결코 〈본인 자신 en personne 〉에게 갈망될 수 없다. 그것은 자기 정서 유발의 가능성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상 징적 체계를 떠나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직접적 복원 경험이라는 이 유는 그것이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즉석에서 순간적으로 만족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기다린다면, 그것은 다른 것이 기다 리게 하기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그 환희는 더 이상 지연되는 것 같 지가 않다. 〈그처럼 보잘것없고, 불확실한 성공에서 멀리 달아난 희 망 속에서, 왜 그처럼 많은 수고를 들여야 하나, …… 바로 그 순간부 터 …… 할 수 있는데…….〉(『대화록.!l) 그러나 더 이상 지연되지 않은 것은 또한 절대적으로 지연되기 도 한다 Mais ce qui n'est plu s dif fere est aussi absolurnent dif fere .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현전은 일종의 몽상일 뿐이다. 자기 정서 유발은 순수한 사변이다. 부재하는 현전을 대리 보충하기 위 해 가져온 기호, 이미지, 표상 등은 남을 속이는 환상일 뿐이다. 죄책감, 그리고 죽음과 거세에 대한 강박감에 좌절감이라는 경험이 부과되거나 동화된다. 속인 E 는· 것 Donner le cha nge. 아무 의미

로나 쓰이는 이 표현은 대리 보충에 대한 호소를 잘 묘사해 준다. 우리에게 〈 창녀들에 대한 혐오감 〉 을 설명하기 위해, 루소는 베니스 에서 서른한 살에 겪은, 〈 모든 격정을 변형시킨 경도된 애정 〉 ( 『 고 백록 』 , 41 쪽 ) 8) 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밝힌다. 〈 나는 내 필요 욕구를 속이는, 그 불행스러운 버릇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 (위의 책, 316 쪽)

8) 『 고백록 』 1 권에 나오는 이 유명한 일화에서 루소는 최초의 책 읽기 실천 (〈숨은 독서들 〉 )을 최초의 자기 에로티즘 발견과 접맥하고 있다 . 〈 음란하 고 외설적인 책들〉이 그를 자극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와 정반대이다 . 〈 우 연히 나의 순진한 기질을 촉진시켜 이 위험한 책들 어느 것에도 눈독을 들 이기 전에 나는 서론 살이 넘었다. 정숙한 숙녀라면 그 책이 불편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그 책 들 을 오직 한 손으로만 읽을 수 있기 때문이 다.〉 (40 쪽) 이 〈위험한 책들〉 없이 루소는 스스로 다른 위험을 무릅쓴다. 다음과 같이 종결되는 그 단락의 계속되는 부분은 잘 알려져 있다. 〈 현재 로서는 내 모든 정념을 변형시킨 모종의 기 질 적 기원과 최초의 원인을 지 적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며 그 기질은 내 정념들을 그 자체로 포함하면서. 내 행동에 있어 언제나 엉거주춤하게 만들었다 . 그 이유는 바로 욕망에 대 한 갈구 때문이다.〉 (41 쪽) 이 단락의 의도와 액면 그대로의 의미는 『 고백 록 』 의 또 다른 일화와 집맥될 수 있다 (444 쪽, 또 편집자 주를 참조할 것) . 아울러 같은 쪽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잘라낸다. 〈왜냐하면 마주할 사람이 없는 가운데 밥을 먹으면서 책을 읽는 것은 언제나 내 환상적인 꿈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결핍된 것은 사회라는 대리 보충이다. 나는 책 한 쪽와 빵 한 조각을 번갈아가며 게걸스럽게 탐욕하는데, 마치 책이 나와 함께 식 사하는 것 같았다.〉 (269 쪽)

이렇듯 그 행위와 본질에서 사물 자체 la chose in eme 의 환희는 허망함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 환희에 본질 또는 행위가 있다 고 할 수 없다(에이도스, 우시아, 에네르기아 energ e ia 등). 그것은 거기서부터 벗어나면서 그 무엇인가를 약속받고, 거기서 다른 곳으 로 자신을 옮기면서 그 무엇인가를 지신에게 부여한다. 그러나 그 무엇인가는 엄밀한 의미에서 현전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대리 보 충의 구속이란 바로 그런 것이고, 일체의 형이상학 언어를 넘어선 〈이성에서는 거의 생각할 수조차 없는〉 구조가 바로 그런 것이다•

거의p res q ue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 죽 단순한 비합리성, 이성 의 반대 등은 고전적인 논리에서는 덜 짜증나고 덜 당혹스러운 것 이다. 대리 보충은 미쳐버린다. 그것은 현전도 아니고 부재도 아니 며 , 그때부터 우리의 쾌락과 순결성에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다. 〈 ……고행과 향락, 쾌락과 지혜 등이 모두 내게서 사라졌다.〉( 『 고 백록 』 , 12 쪽) 문제가 대단히 복잡하지 않은가? 상징적인 것은 직접적인 것이 고, 현전은 부재이며, 비자연적인 것은 지연되고, 환희는 죽음을 위협한다. 더구나 이 체계, 대리 보충의 생소한 경제에 하나의 특 성을 덧붙여야만 한다. 그 특성은 이미 판독할 수 있다. 끔찍한 위 협, 대리 보충은 또한 가장 우선적이고 확실한 보호이다. 그 위협 자체에 대해서말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불 가능하다. 성적인 자기 정서 유발, 즉 자기 정서 유발 일반은 자위 행위라는 이름 아래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더불어 시작 되지도 않으며 종결되지도 않는다. 대리 보충에는 단지 부재하는 현전을 그 이미지를 통해서 대리할 수 있는 능력만 있는 것은 아니 다. 기호라는 대리 수단을 통해 우리에게 부재하는 현전을 대리시 키면서, 대리 보충은 부재하는 현전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취하고 그것을 제어한다 . 왜냐하면 이러한 현전은 갈망되는 동시에 두려워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대리 보충은 금기된 것을 위반하는 동시 에 존중한다 . 그것은 음성 언어의 대리 보충으로서 문자 언어를 허 락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작부터 음성 언어를 문자 일반으로서 허 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경제는 힘과 동시에 힘의 차이 놀이에 우리를 노출시키고 보호한다. 이렇듯 대리 보충은 우리의 죽음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위험 천만한 것이지만, 결코 루소가 생각하는 것처럼 〈여자들과 관계하는 것 habit at i on des fe mmes 〉만큼 위험 한 것은 아니다. 향락 자체는 상징도, 대리 보충도 없이, 순수한 현

전 자체를 우리에게 부여하는 향락이며 (비록 그런 것이 가능하더 라도) 그것은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루소는 그 점을 언급 하고있다. 쾌락을 만끽한다는 것! 이것은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진 운명인가 ? 아! 만약 내가 내 생애에 한번만이라도 사랑의 쾌락을 충만함 속에서 맛보았더라면! 상상하건대 내 연약한 존재는 그런 즐거움을 느끼기에 는 충분하지 못했으리라 . 나는 아마 그런 행각을 벌이는 도중에 sur le fait 죽었을 것이다.( 『 고백록 .!I , 8 장) 만약 보편적 증거, 필연적 가치와 한탄이라는 형식으로 된 이러 한 명제의 선험성 a pri o r i 등에 착안한다면, 〈여자들과 관계하는 것〉, 이성간의 에로티시즘은 자신 안에 대리 보충적 보호를 수용할 수 있을 때만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듯이, 실제로 현실적 으로) 체험될 수 있다. 즉 자기 에로티시즘과 이성간의 에로티시즘 사이에는 경계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경제적 분배가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일반적 규칙 내부로부터 그 차이들이 드러난다. 이렇게 해서 루소의 경제적 분배도 드러난다. 루소의 경제 또는 루 소 글 쓰기의 순수한 특수성을 파악하려 하기 전에(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서 다양한 일반성의 높이에서 일체의 구조적 또는 본질적 필연성 등을 신중하게 수집 하고 분절시켜야한다. 〈여자들과 관계하는 것〉에 대해 규정한 일정한 표상으로부터 루 소는 평생 동안 사람들이 자위 행위라 부르는 위험한 대리 보충에 호소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루소의 작가 행위와 따로 분리시킬 수 없다. 그의 종말까지. 테레즈 Therese5( 우리가 언급하는 테레즈, 텍스트 속의 테레즈, 그 이름과 〈인생〉은 우리가 읽는 글 쓰기에 속한

다)는 그 비용을 치르며, 그것을 체험했다. 『고백록 』 12 권에서 〈모 든 것을 털어놓고 말해야 하는〉 순간에 몇몇 〈 결단들〉을 행한 〈두 가지 이유 〉 를 우리에게 고백한다. 모든 것을 다 털어놓아야 한다. 나는 불쌍한 내 엄마의 사악함과 나 자신의 사악함을 은폐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테레즈에게 호의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 내게 그처럼 소중했던 한 사람에게 존경심을 보 내는 즐거움이 어떠하던 간에, 마음에 일어난 무의도적 심경의 변화가 참으로 잘못이라면 그녀의 잘못된 점도 숨기고 싶지 않다. 오래전부터 나는 나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식었음을 직시했다……. 그 결과 엄마 의 집에서 내가 이전에 느낀 불편함 속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테레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을 벗어나서는 어떤 완벽함도 찾지 말자. 어떤 여자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 상황은 마찬가지였고, 오직 내 결점만을 보려 하는 내 적들의 증오심에 의해 서 더 악화되었다. 나는 똑같은 죄악의 반복을 두려워했다. 그러한 위 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테레즈를 똑같은 죄의식에 빠뜨리 기보다는 차라리 내 자신이 금욕하기로 결심했다. 더구나 여성들과 성 관계를 갖는 것은 내 건강을 크게 해쳤다. 이러한 두 가지 이유로 나 는 과거에는 작심 삼일로 끝난 결심들을 이번에는 더욱더 단호하게 지 켰다 . 그 결심을 나는 삼, 사 년간 굳건하게 지켰다.(『고백록 .!I , 595 쪽) 『 파리 수고 Le manuscrit de Pari s 』에서는 〈내 건강을 크게 해 쳤다〉란 글 다음에 다음 글을 읽을 수 있다. 〈내가 결코 치유할 수 없었던 버금가는 사악함은 나에게 덜 해로운 것 같아 보였다. 이 두 가지 이유는9 ) …….〉 이러한 타락은 기호롤 선호하는 데 있으며, 나 자신을 치명적 9) 편집자 주를 볼 것 1569 쪽.

소비로부터 벗어난 은신처에 옮겨놓는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겉 으로 이기적으로 보이는 이 경제는 또한 도덕적 표상 체계 안에서 작동한다. 이기주의는 죄책감에 의해 속죄된다. 죄책감은 자기 에 로티시즘을 치명적 소모 dep erd iti on fat ale 와 자신에 의한 자신 의 상처로 규정한다. 하지만 자신에게만 해를 끼치는 한 이 타락은 진정으로 비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루소는 몇 장의 편지를 할 애해 그 점을 설명한다. 〈자신에게만 해를 끼치는 사악함을 제외하 면 저는 만인의 눈앞에 제 마음의 비밀을 구석구석까지 다 털어놔 도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인생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r 생 제르맹 씨에게」, 1770 년 2 월 26 일) 〈커다란 사악함을 저질렀습니다만 그 것은 저 자신에게만 해를 끼쳤을 뿐입니다.〉 (r 르 느와르 씨에게」, 1772 년 1 월 15 일) 10) 루소는 이렇듯 어떤 조건에서만 테레즈에게서 대리 보충을 추구 할 수 있었다. 죽 대리 보충성 일반의 체계는 그 가능성이 이미 열 렀고 대체 놀이 le jeu des subs tit u ti ons 에 오래전부터 참여했고, 일정한 방식으로 테레즈 자신은 이미 대리 보충이 되어버렸c. Pc 조건 에서말이다. 엄마가 이미 알 수 없는 어머니의 대리모였듯이, 또 루소를 분석하는 〈정신 분석학자들〉이 주시하는 〈진짜 어머니〉가 그런 것처럼, 최초의 흔적에서 탄생한 엄마란 이름은 비록 그녀가 〈진정으로〉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또 다른 이름을 지칭한다. 아, 테레즈여! 나는 지혜롭고 성스러운 그대를 소유하는 것이 너무 도 행복하며, 내가 원하지 않은 것을 그대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너 무 행복하다.[테레즈가 순진하게 또 우연히 잃어버렸다고 고백한 〈동 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처음에는 단지 쾌락을 추구했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더 많은 것을 얻었고 친구도 얻었음을 깨달았다. 이 훌륭 10) 또 『 고백록 』 , 109 쪽의 편집자 주를 볼 것.

한 소녀와 교제하고 내 상황에 대해 성찰해 보니 나는 오직 자신의 쾌 락만을 염두에 두고 내 행복을 위해서만 많은 일을 했다고 느끼게 되 었다. 죽어버린 야심의 자리에다 내 마음을 채워주는 생동하는 감정을 가져다 놓아야 했다. 단도 직입적으로 말해 엄마의 계승자가 필요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와 살 수 없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녀의 제자와 살았 던 다른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 사람에게서 그녀가 내게서 찾았던 청 순함과 순종을 찾는다 . 가정 사생활의 부드러움이 · 내가 포기했던 그녀 의 멋있는 운명을 보상해야 se dedommag e r 했다. 내가 정말로 혼자였 을 때, 내 마음은 공허했고 그 빈 마음을 채워줄 마음이 필요했다• 그 운명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자연이 내게 만들어준 운명을 앗아갔고 소외시켰다. 그때부터 나는 홀로였다. 왜냐하면 전부와 전무 사이의 어떤 중개적인 것도 내겐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테레즈에게서 필요로 하 는 대리 보충을 찾았다 •11 )

11) 331-332 쪽(강조는 필자의 것임). 스타로빈스키의 La tra nspa rence et J'ob sta c le, 221 쪽과 『 고백록 』 편집자들의 『 고백록 』 , 332 쪽 각주 1) 에서 는 『 고백록』, 109 쪽에서 〈위험한 대리 보충〉으로 쓰인 단어의 용법과 대리 보충 su pp lemen t이라고 쓰인 단어의 용법을 접맥시킨다.

이러한 대리 보충의 연쇄를 통해 어떤 필연성이 예시된다. 불가 피하게 대리 보충적 중개들을 증식시키는 무한한 연쇄 고리의 필 연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 중개들은 그것이 지연시키는 것에 있는 의미를 생산한다 . 사물 자체, 직접적 현전, 근원적 지각 등의 환상. 직접성 l' i rnrned i a t e te은 파생된다. 모든 것은 중개로 시작하고, 〈이성에서는 생각조차 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궤도의 이탈 : 방법론의 문제 내게는 〈 전부와 전무 사이에 결코 중개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 .〉 중개적인 것, 그것은 곧 중간이며, 중개성이며, 총체적 부재와 현 전의 절대적 충만함 사이의 중간 단계이다 . 주지하다시피 중개성은 루소가 끈질기게 소거시키고 싶었던 모든 것을 대변하는 이름이다. 이 의지는 단호하고, 냉철하고, 주제적으로 표명되었다. 그 의지는 무너지지 않았다. 어머니 또는 자연을 대체하기 위해 연쇄 고리를 맺는 대리 보충들을 일일히 열거하는 순간에 루소는 비로소 그 의 지를 상기시킨다. 대리 보충은 여기서 총체적 부재와 현전 사이의 중간을 지탱한다. 대체 놀이는 규정된 결여를 메워 주고 표시해 준 다. 하지만 루소는 마치 대리 보충에 호소하는 것(여기서는 테레즈 에 대해 호소하는 것)이 중개적인 것 앞에서 초조함을 덜어주는 것 인 양 논리를 짜나간다. 〈내가 혼자일 때부터(왜냐하면 내게는 전부 와 전무 사이의 어떤 중개적인 것도 내겐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나 는 테레즈에게서 필요로 하는 대리 보충을 찾았다.〉 이 개념의 신 랄함은, 마치 그것을 이성화하고, 복종시키고 길들일 수 있었던 것 처럼 누그러진다 . 이 점은 〈대리 보충〉이란 단어의 용법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곧 언어와 논리 내부에서 루소의 위치가 어디인가라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 언어와 논리는, 이 낱말과 개념에 술책을 보존하며 그 술 책은 놀라운 것이다. 그 결과 문장의 주체로 추정되는 자는 자신이 의미하려고 하는 바와 다른 것을 말하기 위해 〈대리 보충 〉 이란 말 울 사용한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이 문제는 따라서 단지 루소 의 글 쓰기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책 읽기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러한 파악p ri se 또는 초파악 surp ri se( 놀라움)을 엄밀하 게 고려함으로써 시작해야만 한다 . 죽 작가는 하나의 언어 속에서

그리고 하나의 논리 속에서 글을 쓰는데. 그 담론은 본질상 그 체 계와 고유한 법칙들과 생명력을 절대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 작가 는 일정한 방식으로 또 어느 정도까지 체계에 의해 지배되도록 자 신을 방치할 때만 비로소 자기 담론울 사용할 수 있다. 아울러 책 읽기는 늘 작가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 죽 그가 사용하는 언어 도 식들을 지배하는 것과 지배하지 못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일정 한 관계를 겨냥해야 한다. 이 관계는 어두움과 빛, 약함과 강함의 일정한 양적 분배가 아니라 비판적 책 읽기가 생산해야p rodu i re 하는 의미의 형식 구조 str u ctu re s ignifi an t e 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산한다는 것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을 설 명하면서 우리의 독서 원칙들에 대한 정당화에 착수할 것이다. 앞 으로 보게 되듯이 정당화j us tifi ca ti on 란 여기서 우리가 배타적으 로 채우지 않은 독서 공간을 두고 하는 이름이다. 즉 독서 임무를 소묘하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정당화이다. 물론 의미를 만들어내는 구조를 생산한다는 것은 주석이라는 소 거되고 공손한 중복을 통해 작가가 언어라는 요소 덕분에 그가 속 한 역사와 공유하는 교환들 속에서 설정하는 의식적, 자발적, 의도 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데 있지 않다. 아마도 중복적인 주석 com- menta ir e redoublan t이라는 계기는 비평적 책 읽기에서 그 나름 대로 위치가 있다. 비평적 책 읽기를 인지하지 못하고, 그 일체의 고전적인 요구들을 준수하지 못한다면-그 같은 작업은 쉽지 않을 것이며 전통적 비평의 모든 도구를 요청한다一一비평적 생 산은 모든 방향에서 제멋대로 말하게 될 위험에 처할 것이다. 하지 만 이 필수불가결한 난간g arde- fo u 은 오로지 책 읽기롤 보호했을 pro te g e r 뿐이다. 그것은 결코 책 읽기의 지평을 개방시키지 않았 다. 그렇지만 책 읽기가 텍스트를 중복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면, 그것은 합법적으로 자기 아닌 다른 것, 죽 (형이상학적, 역 사적, 심리-전기적 둥의) 지시체나 텍스트를 벗어난 시니피에를 향 해 vers un sig nifie hors tex te 텍스트를 위 반할 수 있다 . 그 시 니피에의 내용은 언어를 벗어나서, 죽 문자 일반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일어날 수 있고 또 과거에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런 이유에서 여기서 하나의 전범을 통해 성급하게 다루는 방법론 적 고찰들은 우리가 앞에서 지시체 또는 초월적 시니피에의 부재 와 관련해서 구축한 일반적 명제들에 긴밀하게 종속되어 있다. 텍 스트를 벗어나 존재하는 것은 없다 11 n'y a pa s de hors-te x te . 그 이유는 루소의 인생이나 엄마나 테레즈 자신의 존재가 우리의 관 심을 끌지 못하기 때문도 아니며, 그들의 〈현실적〉 존재를 텍스트 속에서만 접근할 수 있고 달리 취할 방법이 없기 때문도 아니며, 이러한 한계 설정을 무시할 당위 때문도 아니다. 이 모든 이유는 진작부터 충분히 제시되었을 것이다. 그보다 좀더 근원적 이유가 있다. 〈위험한 대리 보충〉의 논리적 선을 추적하면서 우리가 증명 하려고 했던 것은 루소의 작품을 통해 포착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울 넘어서서는, 또 그 배후에 〈살과 뼈로 된〉 이 존재들의 현실적 생명이라고 부르는 자리에는 에크리튀르밖에 없다는 점이다. 죽 대 리 보충과 대체적 의미 작용만 있었을 뿐이며, 그것들은 시차적 반 사(示差的 反射, renvois dif fere nti els ) 의 연쇄 에서 만 도래 할 수 있다 . 죽 〈현실적인 것 le reel 〉은 혼적과 대리 보충에 호소함으로 써 의미를 취할 때만 도래하고 첨가된다. 그런 식으로 무한히 진행 된다. 그 이유는 텍스트 속에는 dans le tex te , 절대적 현전, 자연, 〈현실적 어머니〉 등의 단어들이 명명하는 것이 언제나 이미 중심 에서 벗어났으며, 결코 존재하지 않았음울 읽어냈기 때문이다. 즉 의미와 언어를 개방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전의 소실인 이러한 에 크리튀르인 것이다.

우리의 책 읽기가 주석은 아닐지라도, 그것은 내적이어야 하고 텍스트 안에 남아 있어야 한다. 바로 그런 이유로 겉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에도 불구하고 대리 보충이란 단어의 식별 작업은 정신 분 석학적이다. 이때 정신 분석학은 글 쓰기를 벗어나 심리적, 전기적 시니피에 sig n if ie 또는 시니피앙과 분리시킬 수 있는 일반적인 심 리적 구조로 우리를 운반하는 해석을 의미한다. 후자의 방법론은 도처 에서 중복적 인 redoublant 전통적 주석과 대 립 할 수 있다• 그 방법은 실상 주석과 쉽게 조합한다는 시실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 이다 . 주석이 텍스트 자체의 자기 정체성을 존중하는 확신과 그 외곽 을 드러낼 수 있는 신임 등은 텍스트를 넘어 순수한 시니피에 쪽에서 가정된 내용으로 텍스트를 도약시키는 안도감과 한짝을 이룬다 La securite avec laq u elle le commenta i r e consid e re J'i den ti底 a soi du tex te , la confi an ce avec Jaq u elle ii en decoup e le conto u r, va de pa ir avec la tra nq u il le assurance qui saute pa r- de ssus le tex te vers son conte n u pre sume, du cote du pu r sig nifie. 루소의 경우 라포르그식 연구 유형의 정신 분석학적 연구들은 가장 혼하게 통용되는 방법론에 따라 루소를 읽고 난 후 에야 비로소 텍스트를 위반한다. 문학적 〈층상〉과 같은 독서는 가 장 진부하면서 가장 교과서적이며 가장 소박한 것이다. 그리고 이 는 일단 한번 〈증상〉이라는 그물 속에서, 그 자체의 텍스트 구성에 맹목적이 되면, 민첩하게 그 증상을 심리적, 전기적 시니피에로 초 과시키는 꼴이다. 그런데 심리적 전기적 시니피에와 문학적 시니피 앙의 관계는 곧 완전히 의재적이면서 우발적이게 된다. 루소에 관 한 저서들 속에서, 주석과 주제들의 모음집으로 루소의 저작과 사 상의 전반을 충실하게 복원, 종합하려는 고전적 형식 전체 속에서. 부록 형식으로 작가의 의학 기록 서류를 참조하는 동시에 〈루소의 성 문제〉에 대한 전기적 정신 분석학적 양상을 띤 장(章)을 만날

때 동일한 제스처의 다른 면을 인지하게 된다. 만약 원칙적으로 해석 또는 주석을 통해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책 읽기라는 글 쓰기를 통해 글 쓰기를 파괴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하더라도, 어쨌든 우리는 이러한 불 가능성은 역사적으로 그 마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똑 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정도로, 똑같은 규칙에 따라 암호 해독의 시 도들t en t a ti ves de dech iffr emen t을 한계 긋는 것은 아니다. 여기 서 우리는 텍스트의 역사 일반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작가와 그 작가가 귀속되는 언어의 독특함을 언급할 때, 우리는 단지 문학 속의 작가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철학자, 연대기 작성자, 이론가 일 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글쓴이 ecr i van t가 이렇게 사로잡힌 다. 하지만 각각의 경우 글쓴이는 하나의 규정된 텍스트 체계에 속한 다. 순수한 시니피에란 결코 있을 수 없다 하더라도, 시니피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시니피에의 층위로 주어지는 se donner 것에 관한 한, 서로 다른 관계들이 존재한다. 비록 늘 실제로 글로 씌어지지만, 철학 텍스트는 그 철학적 특수성처럼, 그것이 운반하고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의미 내용 앞에서 자신을 지우려는 기획을 담고 있다. 궁극 적으로는 그 기획의 실패를 노출시키려 하더라도 책 읽기는 이 논점 을 참작해야 할 것이다. 텍스트의 모든 역사와 그 속에 있는 서구의 문학적 형식들의 역사는 이런 관점에서 연구되어야만 할 것이다. 나 중에 가서 있는 그대로 인지되는 저항의 절정 po in t e 또는 저항 지점 po in t de res i s t ance 을 제외 하고, 문학적 글 쓰기 는 거의 언제 어 디 서나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시대를 통해, 자신으로부터 이러한 다 양한 초월적t ranscendan t 독서, 우리가 여기서 문제 삼는 시니피에 의 추구 등에 호소하고 있다. 문학적 글 쓰기의 목적은 초월적 독서 롤 말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맹목적이게 하는 체계 속에서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철학 문헌은 이 역사에서 한 예에 불과하지만

가장 의미 심장한 예 중 하나다. 이 점 때문에 루소의 경우가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끈다. 루소는 심층적인 이유에서 『 사회 계약론 』6 과 『 누벨 엘로이즈 』 7 를 포함하는 철학 문헌을 생산하는 동시에 문학적 글 쓰기를 통해 존재하기를 선택했다. 흔히 말하듯, 그것이 전달하는 메시지(철학적이든 또는 다른 것이든)에는 전부 헤아릴 수 없는 글 쓰 기가 있다. 루소가 철학자 또는 심리학자로서 문자 일반에 대해 언급 한 것은 자신의 고유한 글 쓰기 체계와 분리될 수 없다. 그 점을 고 려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가공할 만한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재단(裁斷, decou- p a g e) 의 문제들을. 예를 셋만 들어보자. 첫째, 〈대리 보충〉의 독서에서 우리가 밟아온 여정이 단순히 정 신 분석학적인 것이 아닌 이유는 아마도 문학의 상투적 정신 분석 은 있는 그대로 문학적 시니피앙을 괄호 속에 집어넣는 것으로 시 작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정신 분석 이론 자체가 우리에게 는 우리 역사와 문화에 속하는 텍스트들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만 약 그것이 우리의 책 읽기와 해석의 글 쓰기를 표시한다 하더라도 이런 점에서 완전한 중립성 속에서 그것을 밝혀주기 위해, 우리가 살고 있는 텍스트 체계에 귀속시킬 수 있는 원칙 또는 진리로 그 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루소의 텍스트 안에 있는 것처럼 우리는 정신 분석학의 역사 속에 있다. 루소가 당시의 언어(어떤 점에서는, 바로 우리 자신의 언어이며 프랑스 문학의 최소한의 판독 가능성을 확보해 주는 언어이다)로부터 그 근원을 파고 있듯이 우리 는 오늘날 정신 분석학적 이론이 표시하는 일정한 의미 작용의 연 결망에서 순환한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완전히 통달하지 못하고, 비록 완전하게 그것을 제어할 수 없음을 확신한다 하더라도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초보적 단계라 하더라도 또 다른 이유로 인해 문 제의 관건은 루소의 정신 분석학이 아니다. 그러한 정신 분석학은 진

작부터 루소 텍스트의 모든 소속 구조 str u ctu r es d'ap pa rte n ance 룰 식별해야 했다. 또 그 언어나 문화의 특성과 이미 거기에 있음 으로 인해 굴 쓰기에 의해 생산되기보다는 글 쓰기에 의해 포용되 기 위해 자신에게 고유하지 않은 모든 것을 식별해야만 한다. 이러 한 글 쓰기의 비환원적인 독창성을 둘러싸고 거대한 일련의 구조 들, 온갖 차원의 역사적 총체 등이 조직화되고, 전개 발전되며, 다 시 재단된다. 정신 분석학이 당위론적으로 그 재단과 해석의 끝까 지 갈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또 루소의 글 쓰기와 포용 관계를 맺 는 일체의 서구 형이상학시를· 참작한다고 가정한다면, 정신 분석학 은 그 자체의 형이상학과 서구 문화로의 귀속 법칙을 해명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향으로 문제를 몰고가지 말자. 우리는 이미 그 작업의 어려움과 우리의 대리 보충 해석에서 실패의 몫을 측량했다. 더 이상 환원될 수 없는 루소적인 그 무엇이 거기서 포 착되었음을 확신하는 동시에 우리는 뿌리, 온갖 부식토와 침전물로 이루어진 형태 없는 덩어리를 가져왔다. 둘째, 루소의 저작을 엄밀하게 따로 분리시키고, 역사 일반 속에 서 곧이어 〈대리 보충〉이라는 기호의 역사 속에서 분절시킬 수 있 다고 가정한다면, 아울러 다른 많은 가능성도 참작해야만 할 것이 다. 〈대리 보충〉이라는 단어와 그에 상응하는 개념 또는 개념의 출 현을 검토하면서 루소 텍스트 내부에서 일정한 여정을 추적하게 된다. 이 여정은 확실히 우리에게 요람표의 경제를 확보해 줄 것이 다. 그러나 다른 여정들은 가능하지 않은가? 또한 여정들의 총체 성을 실제로 다 헤아릴 수 없는 만큼, 어떻게 그 여정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셋째, 루소 텍스트에서 예기(豫期 an ticip a ti on) 와 서막p relude 형식으로 〈대리 보충〉이라는 기호의 기능을 지적한 후, 우리는 몇 몇은 궤도에서 이탈했다고 판단하는 방식으로 성급히 『인간 언어

기원론 』 8 과 언어와 문자 이론에 대한 몇몇 텍스트에 특권을 부여한 다. 어떤 권리로? 저자의 사후에 출판되었고 분류하기 어려우며 그 연대기와 작품의 영감이 불확실한 이 짧은 텍스트들을 왜 택했 는 7}? 이 모든 질문에 대해, 또 그 질문의 논리 내부에, 만족할 만한 답변은 없댜 일정한 측면에서, 또 우리가 이론적 신중함을 표명했 는데도 우리의 선택은 실제로 궤도에서 이탈한 exorb it an t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궤도에서 이탈했다는 말은 무엇인가? 우리는 논리 중심주의 시대의 총체성과 관련해 일정한 바깥쪽 지 점에 도달하기를 원했다. 이 바깥쪽 지점으로부터 전체에 대해 일정 한 해체 작업을 열어젖힐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총체성은 흔적 을 남긴 길이기도 하다. 아울러 해체는 기본 축 orb it a 이기도 한 이 궤도 orb i s 로부터 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일정한 역사적 필연 성에 종속된다 하더라도 이러한 벗어남 sor ti e 과 해체의 첫번째 제스 처는 방법론적 또는 초궤도적인 논리적 확실성을 주지는 못할 것이 다. 울타리 영역의 내부에서는 기존의 대립들 속에서만 그 스타일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스타일은 경험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어 느 정도 그 말은 옳다. 벗어남 so rti~ 근본적으로 경험적이다. 벗어 남이란 이정표와 방법론의 가능성에 대해 방황하는 사고p ensee erran t e 의 방식으로 일에 착수한다. 벗어남은 그것의 미래와 마찬가 지로 비지식 non-savo i r 으로부터 영향받고 단호하게 모험을 감행한 다 s'aven t urer. 우리는 스스로 이 경험주의의 형식과 취 약성을 정의 했다. 그러나 여기서 경험주의란 개념은 스스로 파괴된다. 형이상학 적 궤도를 벗어난다는 것은 구습 or ni ere(orbi t a) 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고전적인 개념적 대립들의 총합을 생 각하기 위해서이며, 특히 경험주의라는 가치가 포착되는 대립을 생 각하기 위해서이다. 경험주의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는 철학과 비

2 이 위험 천만한 대리 보충…… 319

철학의 대립, 끝까지 그 자신의 담론의 수미 일관성을 지지할 수 없 는 무능함 등. 진리의 가치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순간에 진리로써 생 산하고, 회의주의의 내적인 모순들에서 벗어나려는 것 등. 철학과 경 험주의 사이의 이러한 역사적 대립에 대한 사상은 단지 경험적인 것이 아니며 남용과 무지와 무시 없이는 그것을 특징지을 수 없다. 이러한 도식의 특수성을 명시화 하자. 루소를 읽는 데 있어서 궤도에서 벗어남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아마 (우리가 이미 암시했 듯이) 루소는 우리의 관심을 끄는 역사 속에서는 매우 상대적인 특권만이 있을 뿐이다. 만약 우리가 단순히 루소를 이러한 역사에 위치시킬 것을 원했다면, 우리가 거기에 부여한 관심은 균형을 잃 온 터무니없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문제 의 핵심은 논리 중심적 시대의 결정적인 분절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루소는 우리에게 매우 좋은 계시자로 보였다. 이 점은 분명히 우리가 이미 그 벗어남에 착수했고, 문자 언어가 행하는 억 압을 그 시대의 근간을 이루는 조작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가정한 다. 이는 우리가 모든 텍스트가 아니라 일정한 텍스트를, 그리고 루소의 모든 텍스트가 아니라 일정한 텍스트만을 읽었음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경험주의의 승인은 그 질문의 장점에 의해서만 지지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의 개방성, 증거의 울타리, 바깥쪽으로의 탈출, 이 모든 운동은 필연적으로 경험주의와 방황의 형식을 가지 고 있다. 지나간 규범에 관한 한, 그 운동들은 디옴꾀- 같은 형식 아 래에서만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다른 흔적도 취할 수 없다. 이 방황하는 질문들이 어느 특정 장소의 절대적 시작이 아니기 때 문에, 일종의 비평인 이러한 기술에 의해 실제로 그 물음들의 표층 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있는 그 어딘가에서 qu elqu e pa rt ou nous sommes 시작해 야 하며 그 감식 력 fl a i r 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흔적의 사상은 이미 우리에게 하나의 출발점을 절대

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일러주었다. 우리가 있는 그 어딘가에서, 즉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곳, 바로 어떤 텍스트에서 시작해야 한다. 다시 우리의 논증을 좁혀보자• 대리 보충성이라는 주제는 아마 몇몇 점에서 여러 주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은 연쇄 고리 속에 있으며 그것에 의해 지탱된다. 아마도 그것에 다른 무엇 을 대체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연쇄 고리 자체를, 텍 스트 고리의 존재 연쇄, 대체의 구조, 욕망과 언어의 분절, 루소가 인 수 인계하는 모든 개념적 대립의 논리, 그 체계 속에서 특히 자연이라 는 개념의 역할과 작동 작용을 기술한다. 그 주제는 텍스트 속에서 텍스트가 무엇인지, 또 글 쓰기 속에서 글 쓰기가 무엇인지를 일러 준다. 또 루소의 글 쓰기에서 루소의 욕망 등에 대해 일러준다. 만 약 우리가 『 인간 언어 기원론』의 주축이 되는 논리에 따라서 텍스 트를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간주한다면 우리의 궁극적인 정 당화는 다음과 같다. 대리 보충이라는 개념과 문자 이론은, 오늘날 흔히 말하듯 , 심연에서 en abym e 루소 텍스트의 텍스트성 자체를 지칭한다. 아울러 우리는 (다행이든 불행이든 간에) 그 심연이 우연 한 사건이 아님을 보게 될 것이다. 심연의 구조적 필연성에 대한 일체의 이론은 점차 우리의 독서에서 성립될 것이다. 대리 보충의 결정되지 않은 과정은 언제나 이미 그 현전을 개시했고 en t amer, 거기서 반복과 자기 이중성 등의 공간울 기록한다. 현전의 심연 en ab ym e 에 대한 표상온 현전의 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다. 현전의 욕망은 반대로 표상의 심연, 그리고 표상의 표상 등에서 태어난다. 대리 보충 자체는 이 단어의 모든 의미에서 궤도에서 벗어나는 것 이다. 따라서 루소는 텍스토 속에 텍스트성 la t ex t ua lite울 위치시킨 다. 그러나 그 조작은 간단하지 않다. 그 조작은 하나의 지우기 제

스처 es t e d'e ffa cemen t로써 술수를 쓴다. 그 두 가지 운동 사이의 역학 관계처럼, 전략적 관계들은 복잡한 구도를 형성한다. 이 구도 는 대리 보충이라는 개념의 처리 속에서 피표상체으로 보인다. 루 소는 그 의미의 모든 잠재성 속에서 그것을 사용할 수 없다. 그가 그 개념을 규정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배제하는 것 자체에 의 해 규정되도록 방치되는 의미, 그 의미 속에서 그는 그것을 굴절시 킨다. 여기서는 첨가로서, 또 저기서는 대체물로서, 어떤 때는 악 의 실증성과 외재성으로서, 때로는 다행스러운 보조물로서 이 모든 것은 수동성도, 능동성도, 무의식도 작가의 명철함도 반영하지 않 는다. 책 읽기는 단지 이러한 범주들(지나가면서 상기하거니와 형이 상학의 토대를 세우는 범주들이다)을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대리 보충이라는 개념과 이러한 관계 법칙을 생산해야만 한다. 문제의 핵심은 일종의 생산이다. 왜냐하면 루소가 이 관계에 대해 생각했 던 것을 단순히 되풀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리 보충이라는 개념 은 루소 텍스트 속에서 일종의 맹목적인 오점이며, 가시성을 열고 한계를 긋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le non-vu 이다. 하지만 생산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시도한다 하더라도 여기서는 텍스 트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더구나 단지 환상을 통해서만 그렇 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지칭하는 언어의 표현 속에서 루 소와 역사 사이에 있는 조정된 교환들 속에 그것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교환들은 언어와 텍스트를 통해서만, 이 단어에서 우리가 인정하는 하부 구조적 의미에서 나타날 뿐이다. 우리가 생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텍스트이며, 우리가 선험적으로 알고 있는 글 쓰기 및 독서 체계이다. 단지 지금은 하나가 아닌 어떤 지식 체계이며, 그 러한 글 쓰기와 책 읽기는 그 맹목적 오점을 중심으로 정리 정돈 된다.

【역주】 1. 고대 그리스어로 ar t와 동의어이며 주어진 결과 를 획득할 수 있게 해주는 전통적인 능력과 수완을 지칭한다. 이 능력은 구두 언어나 문자 언어가 코 드화되지 않은 경험에 근거할 수도 있고 명시적인 성문화 를 이룰 수도 있 다. 2. 자기 에로티즘 : 1899 년 프로이트는 하벨록이 구축한 개념을 이론에 도입 하면서 관점의 차이 를 분명히 한다. 프로이트는 이 개념을 광의의 의미 (상 대자가 없는 에로티즘, 자위 행위, 히스테리 . 나르시즘)가 아니라 어린아이 의 성 생 활 에서 근원적 상황으로의 귀결로 나타나는 특수한 의미로 사용한 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어린아이의 성 생활의 특징은 본질적으로 자기 에 로티즘이라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는 부분적인 성적 자극이 서로 잘 연결 되지 않았으며 쾌락의 추구에서도 각각의 자극이 개별적으로 독립한다는 논지이댜 3. 여기서 말하는 엄마는 스위스의 바렌스 Warens 부인을 가리킨다. 1728 년 제네바를 떠나 한 카 톨 릭 사제의 도움으로 루소는 바렌스의 집에서 기거한 다 . 루소는 곧 사랑에 빠져 그녀를 Mamam 이라 불렀고 그녀는 루소를 Pe tit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녀는 루소를 유혹해 루소 생애에서 최초로 성적 쾌락의 경험을 터득하게 한다. 4. 자기 정서 유발 : 다른 존재가 촉발하는 정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촉발 한 정서를 말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말하는 사람이 자신을 청취하는 음성 언어의 구조에 이러한 자기 정서 유발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초월 철 학에서도 역시 순수한 자기 정서 유발이라는 말을 빈번히 쓴다. 하이데거 는 이를 자신을 만지고 자기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순수한 정서로서 다른 경험적 대상으로부터 연유하지 않는 순수한 정서라고 말한다. 5. 1745 년 루소가 만난 하녀 테레즈 Therese Levasseu 쳐t 가리킨다. 그녀 는 곧 루소의 정부가 되고 아이까지 낳는다. 6. 원제는 Du contr a t soc ial ( 17 62). 1750 년대에 초에 씌어진 제 1 논문에 이어서 루소가 베니스의 프랑스 대사관에서 비서로 봉직할 때, 그는 정치 이론에 대한 저서의 집필을 구상한다. 그러나 그의 원대한 계획은 포기되 고 소규모의 저서 『 사회 계약론 』 으로 그친다. 이 책은 • 1761 년에 집필이 완료되어 1762 년 4 월에 출간된다. 정치 이론의 고전 중 백미로 손꼽힌다. 루소가 구상한 정치 제도론의 실현이며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요구를 일치 시키는 정치적 이상을 갈망하고 있다.

7. 원제는 Ju li e, ou La Nouvelle Helois e . 1756 년 루소는 그의 정부. 테 레즈 . 그리고 모친과 함께 몽트모랑시 Mont m orency 숲에서 은둔 생활에 들어간다. 그해 겨울 루소는 성적인 환희의 열병 속에서 연인 줄리 J u li e 와 그녀의 친구이자 사촌인 생프레 Sain t - P reux 사이에 오고간 상상의 편지 를 소설화한다. 그리고 이 편지는 그의 서간 소설의 앞부분을 이룬다 . 당시 프랑스 문학에서 볼 수 없었던 자연 묘사와 감성 및 연애의 이상주의가 낭 만주의를 예고했다. 8. fl' 인간 언어 기원론』 : 이 글은 루소 생존시 완결된 형태로 집필되지 못했 다. 1765 년 그는 다른 단편들과 함께 출간을 계획했으나 1781 년에 나온 루소의 사후집에도 실리지 않았다. 이 논문의 집필 시기 및 다른 작품들과 의 연관성. 루소의 지성사적 변모 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는 논 란의 여지가 많으며 데리다 역시 이 점을 상술하고 있다.

3 『인간 언어 기원론』의 발생과 구조 l 『인간 언어 기원론』의 위치 대리 보충의 논리에서 목소리는 어떠한가? 대리 보충의 〈문자 표기 gr a p h iq ue 〉라고 명명해야 하는 것은 또 어떠한가? 대리 보충의 연쇄 속에서 문자를· 자위 행위로부터 분리하기는 어려웠다. 이 두 가지 대리 보충은 최소한 위험하다는 공통점이 있 다. 그들은 금지된 것을 위반하고 죄책감 속에서 체험된다. 하지만 차이/지연의 경제에 따라서 둘 모두 자신들이 위반하는 금지된 것 을 견고히 하고, 그 위험성을 교묘히 회피하며 소비의 여분을 남긴 다. 그것에도 불구하고 또 그것들 덕분에 우리가 태양을 보는 것이 허락되었고 광산의 표충에서 우리를 붙잡아두는 빛에 버금가는 가 치를 갖게 되었다. 이 두 가지 경험에 어떠한 죄책감이 결속되는가? 어떤 근본적 죄책감이 거기서 고정되거나 다른 곳으로 강제 이동되는가? 이 물 음은 먼저 두 경험의 구조적이며 〈현상학적〉 표층을, 이어서 그들 의 공통 공간을 기술할 때만 비로소 그들 . 고유의 장소에서 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두 가지 경우에 자기 정서 유발의 가능성은 있는 그대로 표

출된다. 그것은 세계 속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시니피앙의 세계 속에 있는 거주지는 난공 불락이 되어버린다. 문자로 씌어진 것은 남아 있고, 만지고-만져지는 경험은 제 3 의 세계를 수용한다. 거기 서 공간의 외재성은 환원 불가능·하다. 자기 정서 유발의 일반적 구 조에서, 현전 또는 환희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에서, 만지고-만 져지는 조작은 행동하는 것을 고뇌하는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협 소한 차이에서 타자를 맞이한다. 아울러 바깥쪽, 죽 육체의 노출된 표면은 자기 정서 유발을 작동시키는 분화를 의미하고 영원히 그 분화를표시한다. 자기 정서 유발은 경험의 보편적 구조이다. 모든 살아 있는 유 기체는 잠재적으로 스스로 자기 정서를 유발한다. 아울러 상징화시 킬 수 있는 존재, 죽 스스로 자기 정서를 유발시킬 수 있는 존재만 이 일반적으로 타자가 감정을 유발하도록 방치할 수 있다• 자기 정 서 유발은 일반적인 경험의 조건이다. 이 가능성(〈생명〉의 다른 이 름)은 생명의 역사에 의해 분절되고, 복잡하고 서열화된 조작 속에 서 생기는 일반적 구조이다. 자기 정서 유발, 자기 자신에 관한 것 또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 주관성 동은 잠재력을 얻고, 그 반복력 이 관념화됨 i deal i se 전] 따라 타자로부터 그것을 능수 능란하게 조 정한다. 관념화는 여기서 나의 정서를 유발시키거나 시니피앙으로 사용하는 감각것 외재성이 반복 능력에 종속되는 운동이며, 그때부 터 그것은 나의 순발력으로 내게 나타나고 조금씩 내게서 벗어나 는 것에 종속된 운동이다. 이러한 도식으로부터 목소리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목소리의 체계는 목소리가 그것을 발설하는 사람에게 곧바로 들린다는 점을 요구한다. 목소리는 일종의 시니피앙을 산출한다. '그 시니피앙은 시니피에의 관념성을 벗어나서 세계 속에 떨어지지 않을 것으로 사료되며, 그것이 타자의 청취 음선 체계에 도달하는 순간 자기 정

서 유발의 순수한 내재성 속에서 보호받는 상태로 남아 있다. 그것 은 공간의 의재성과 목소리의 바깥쪽이라 할 수 있는 것, 죽 사람 들이 세계라고 부르는 것 속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살아 있는〉 음성에서 시니피앙의 공간적 외재성은 전적으로 축소 된 것처럼 나타난다 . 1) 이러한 가능성으로부터 소리 지르기 문제(언 제나 비분절된 소리의 신화로서 야수성과 광기 쪽에서 배제시킨 것), 생명의 역사에서 목소리의 문제 등을 제기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대화란 두 개의 절대적 기원 사이의 상호 소통이며, 두 개의 기원은 (다음 표현을 무리해서 쓰자면) 직접적인 반향과 타자 가 생산하는 자기 정서를 반복하면서 상호적으로 자기 정서를 유 발한다. 직집성은 여기서 의식의 신화이다. 목소리와 목소리의 의 식은 (간단히 말해 자기 자신에 현전하는 것처럼) 차이/지연의 삭제 제거로서 체험되는 자기 정서 유발 현상이다. 이 현상, 차이/지연 의 추정된 삭제 제거 supp r essio n pre sumee, 시니피앙의 불투명 성에서 체험되는 환원 등은 현전이라고 부르는 것의 근원이다. 차 이/지연의 과정에 종속되지 않는 것은 현전한다. 현재란 그것을 기 준으로 반대의 필연성을 지우면서 시간을 생각할 수 있다고 믿는 그 무엇이다. 이는 현재를 차이/지연으로서의 시간으로부터 생각하 는것이다. 이 형식적 구조는 구술성 ora lite의 체계, 일반적인 청취 체계 및 음성 체계 등의 투자에 대한 모든 분석에 연루된다. 아무리 그것이 풍부하고 다양하다 하더라도말이다. 비현전을 목소리 자체에서 느끼고(그것은 최소한 분절과 구분의 벽두에서부터 예감된다) 문자 언어는 그 가치 속에서 모종의 균열 현상을 보인다. 한편, 그것은 현전을 상징적으로 재소유하려는 노 력이다. 다른 한편, 그것은 벌써 음성 언어를 해체시킨 박탈을 영 1 ) La voix et le ph enomene 참조 .

속적으로 확립한다. 그 두 가지 의미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그것은 이미 〈살아 있는〉 음성 언어를 조작하기 시작했고, 기호 속에서 그 것을 죽음에 노출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리 보충적 기호 는 이미 자기 자신에 현전하도록 유도하면서 죽음에 노출되지 않 는다. 자기 정서 유발은 동일자(자기)를 분화시키면서 그것을 성립 시칸다. 현전의 탈취 la pr iv a ti on de la p resence 는 경험, 즉 현 전의 조건이다. 현재의 현전성과 유기체의 생명을 움직이게 하는 한 me t en Jeu 언어 운동은 단지 〈성적〉 자기 정서 유발과 유사 관계만 있는 것 은 아니다. 비록 그 총체성이 강력하게 분절되고 시차화된다 하더 라도 그 운동은 총체성 속에서 성적인 자기 정서 유발과 합치된다. 그것들을 구분하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전형적인 논리 중심주의적 맹세이다. 그것의 궁극적 근원은 성을 〈만지고 _ 만져지는〉 구조(특 정 현상학이 기술하는 바대로)의 초월적 일반성 속에서 와해시키는 데 있다. 이러한 분리는 문자 언어로부터 음성 언어를 식별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 성적 자기 정서 유발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만족〉 이, 자위 행위(몇몇 어린이 또는 성인에 해당되는 소위 병리학적이며 그릇된 제스처)라는 이름 아래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 것보다 먼저 시작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자 언어라는 대리 보충적 위협은 음 성 언어라는 이름 아래 고양할 수 있다고 믿는 것보다 훨씬 더 오 래되었다. 그때부터 형이상학은 대리 보충을 단순한 외재성, 순수한 첨가 또는 부재로서 규정하면서 비현전을 배제한다. 대리 보충성의 구조 내부에서 배타 작업이 작동한다. 역설적으로 그것은 첨가를 순수한 첨가로 고려하면서 그것을 취소한다는 사실이다. 첨가되는 것은 무 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 밖에 있는 충만한 현전성에 첨가되 기 때문이다. 음성 언어는 직관적 현전(존재함, 본질, 에이도스, 우시

아 등)에 첨가된다. 문자는 살아 있으며 자기 자신에게 현전하는 음성 언어에 첨가된다. 자위 행위는 소위 말하는 성적 경험에 첨가 될 뿐이다. 문화는 자연에 첨가되며, 악은 순수함에 , 역사는 기원 에 첨가된다. 기원 또는 자연이라는 개념은 따라서 첨가의 신화, 순수하게 첨 가적인 폐기된 대리 보충성의 신화일 뿐이다. 그것은 흔적 지우기, 즉 부재도 현전도 아니며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은 근원적 차이/지연의 신화일 뿐이다. 근원적 차이/지연은 구조로서의 대리 보충성이댜 구조란 여기서 더 · 이상 환원할 수 없는 복잡성을 뜻하 며 그 복잡성 내부에서 단지 현전 또는 부재의 놀이를 굴절시키거 나 이동시킬 수 있을 뿐이다. 바로 이 놀이에서 형이상학이 생산될 수 있지만 형이상학온 그 구조를 생각할 수 없다. 플라톤에서 루소를 거쳐 헤겔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혼적의 소실 을 좁은 의미의 문자 언어에 부과했다. 그러한 이동의 필요성은 이 제 명백하게 지각된다. 에크리튀르는 혼적 일반의 표상체이지 흔적 자체는 아니댜 흔적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존재한디는 것은 있다 는 것이요 , 있다는 것은 존재자이며 현전하는 존재자t o on 이다). 따 라서 이 이동은 일정한 방식으로 결단의 장소를 숨기는 동시에 매 우 확실하게 그곳을 지칭한다. 문자 , 정치적 악과 언어적 악 욕망은 현전과 비현전의 외재성을 갈망한다. 이때 외재성은 일 종의 원형이다. 그 모든 표상체 가운데(자연과 그 타자들, 선과 악, 순수함과 타락함, 의식과 비의식, 생명과 죽음 등의 외재성) 지금 유 난히 각별히 관심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를 『인간 언

어 기원론』으로 인도한다. 그것은 제어와 예속 또는 지유와- 비자유 의 외재성이다. 이 모든 표상체 가운데 자유와 비자유의 외재성은 일종의 특권을 부여받고 있다. 그것은 역사적인 것(정치적인 것, 경 제적인 것, 기술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을 하나로 집합시킨다. 하이데거는 자유를 현전, 즉 진리의 조건으로 삼는 것으로 형이상 학의 역사를 요약했다 . 2) 이때 목소리는 언제나 자유를 최상으로 표현한 것으로 나타난다. 목소리는 자체로 자유를 구가하는 언어이 고, 언어의 자유이고, 타인의 시니피앙을 세계의 외재성에 차용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그것은 소유를 박탈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진솔한 언어이다 . 가장 속박받고 가진 것이 없는 존재들도 목소리 라는 내적 자발성을 구비하고 있지 않은가? 일반 시민에게 사실인 것은 타자의 힘에 노출되고 그 제물이 되는 이 존재들, 즉 신생아 들에게도 사실이다. 〈그들에게 당신들이 첫번째로 부여하는 것은 얽매임 ch fil nes 이다. 아기들이 겪는 첫번째 대우는 고통이다. 목소 리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자유로운 것도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아기들이 자기 불만을 털어놓기 위해 어떻게 자기 목소리 를 사용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에밀』, 15 쪽. 강조는 필자의 것임)

2) 여기서 De J'es sence du fo ndemen 따 De J'es sence de la verite , 그 리고 Poli s, Aga to n , 그리고 Aleth e ia 동의 개념을 소통시키는 일체의 문 헌을 확장시켜 인용해야 할 것이다.

현전을 부재에, 자유를 예속에 대립시키는 것처럼 『인간 언어 거 원론』은 목소리를 문자에 대립시킨다. 다음 글은 아마도 『인간 불 평등 기원론』의 최후 메시지일 것이다. 〈하나로 뭉친 민족끼리 서 로 소통할 수 없는 모든 언어를 나는 예속적 인 언어 lang ue servi le 라 부른다. 한 민족이 자유롭게 남아 이 언어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20 장) 이 문장을 통해서 이제 막 루소의 땅을 떠나왔던 우

리는 그의 다른 땅에 발을 내디렸다. 이제 비로소 이웃 ne ig h­ bourhood, 즉 〈모든 사람이 서로 잘 알며〉 모든 구성원이 목소리의 소통 범위에서 활동하는 〈조그마한 공동체들〉 등의 표현을 쓰는 레 비 AE 쿠 A 의 이데올로기로 회귀한다• 이 고전적 이데올로기 속에 서 문자 언어는 자연적 순진함에 스며들며 현전하고 충만한 음성 언어의 황금 시대를 단절시키는 슬픈 숙명 tri s t e fat al ite울 부여받 는다. 루소는 다음과 같이 결론맺는다. 나는 이러한 피상적 고찰을 끝맺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고찰은 내가 그런 고찰을 하도록 시사한 이동을 통해 좀더 심오한 성찰들을 낳게 할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 속에서 관찰하고, 예를 통해 한 민족의 성격, 풍습과 관심거리가 그 언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일은 철학적 검토 분야에 속할 것이다.〉(뒤클로의 일반 • 합리 문법에 대한 언급」, 2 쪽 )1 콩디악의 『인간 지식의 기원에 대한 시론』 (1746) 과 더불어 뒤클 로의 『주석』 3) 은 『인간 언어 기원론』의 기본 〈자료〉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루소의 『인간 언어 기원론』을 뒤클로가 규정한 〈철학적〉 프로그램의 완결로 파악할 수 있다. 뒤클로는 다 음과 같이 유감을 표명한다. 우리는 언어를 부드럽고 여성적이며 단조롭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 3) 우리는 여기서 다음 판본을 참조할 것이다. 아르노와 랑슬로의 Grarrr mair e gen erale et rais o nnee de Por t -Ro ya l 과 프티토의 R&&& d'un Essa i sur J'or ig ine et Jes p ro gr던 s de la La ngue fra n~a ise , 뒤 이어 뒤클로의 Commen tair e 가 오며 거기에 주석을 첨부했다. Perlet An XI.-1803.

발음에서 투박함을 피하려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 내 생각에 우리에게 는 그 정반대의 결점이 있다고 본다. 옛날에 우리는 오늘날보다 훨씬 더 많이 이중 모음을 발음했다. 이중 모음들은 j'avo is . j'a u rois 등과 같은 동사의 시제에서, Fran<;ois , Ang lo is , Polonois 동과 같은 명사 에서 발음되었는데, 오늘날에는 j'ave s, j'au res, Frani;e s , Ang le s, Polones 등으로 발음한다. 이 이중 모음들은 발음에 힘과 변화 무쌍함 을 가져다 주었고, 부분적으로는 e 묵음의 증가에서 오는 단순함으로 부터 불어를 구제할 수 있었다 . 4)

4) 위의 책, 396 쪽. 이 텍스트에서 가장 정확한 반응은 Prononc iat i on (T. II, 1248 쪽)이라는 제목으로 묶인 플레야드 판과 Fragm e nt d'un Essai sur les lan gu es 라는 제목으로 묶인 스트라이카이센-몰토 S t re ic ke i sen­ Moulto u 판의 주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루소는 그 비판에서 풍속의 타 락. 발음의 타락, 문자의 진보를 연결시키고 있다. 심지어 그는 자신만이 목격했던 변질의 예를 들고 있다. 그것은 〈기관 또는 억양 또는 습관에서 나타나는 발음의 사악함〉에 기인한다. 〈내가 본 발음이 변하고 있는 단어 들 Charolois - Charoles, secret- s eg ret , pe rsecute r - pe rzecute r 둥.〉 이 모든 테마는 두 보스 Du Bos 신부의 Refl ex i on s criti qu es sur la po esie et sur la p e i n t ure (l 719) 를 참조할 것

언어의 타락은 사회 정치적 타락의 증후이다(이 문제는 18 세기 후반에 매우 빈번하게 나타나는 테마이다). 그 타락의 근원은 귀족 정치와 동시에 수도에 있다. 뒤클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함으로써 나중에 루소의 주제가 될 것들을 예고하고 있다. 〈우리끼리 사회라 고 부르는 것(고대인들은 그것을 당파 co t eri e 라고 불렀다 )2 이 오늘 날의 언어와 풍습을 결정한다. 한 단어가 어느 시점에 한 민족 공 동체에서 사용될 때, 그 발음은 퇴색된다.〉 5) 또한 뒤클로는 단어들 에 가하는 절단 삭제 muti lat i on , 변질, 특히 축약화 등을 참을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는 특히 낱말을 절단 coup er시 켜서는 안된다고주장한다.

5) 위의 책, 397 쪽.

자기 자신을 표현하려는 성급함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은 발음에 대 한 이러한 무관심은 단어의 본질에 이르기까지 우리 언어를 변질시켜 그 의미를 더 이상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낱말들을 잘라놓는다. 가령 오늘날 속어로 ses a i dans 이란 표현 대신 ses dens 이라고 말한다. 관 례에 따라 축소되거나 변질된 이러한 단어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많다. 우리 언어는 쥐도 새도 모르게 법정보다 일상 회 화에 더 적당한 언어가 될 것이며, 대화는 설교석, 변호사석. 극장에서 부각될 것이다. 반대로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법정은 대화에 예속되지 않았다. 정중한 발음과 고정되고 분명한 운율은, 특히 모든 청자에게 관심을 끄는 문제들을 공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민족에게는 각별히 고 수되어야 할 것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조건이 동등한 가운데 그 발음 이 단호하고 변화 무쌍한 연설가는 다른 사람보다도 더 멀리서 청취되 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와 발음의 변질은 정치적 타락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뒤클로에게 영감을 준 정치적 모델은 아테네 또는 로마 스타일의 민주주의였다. 언어는 민족의 소유이다. 각각은 타자로부터 자신의 통일성 을 취 한다. 만약 언어 라는 자료체 corpu s de la lan gu e 와 체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 민족이 〈한 덩어리로〉 모여 서 로 맺어진다는 점에서이다. 〈하나의 언어를 만드는 것은 한 덩어리 로 뭉친 민족이다……. 따라서 민족은 구두 언어의 절대적 우두머 리 ma itre absolu 이며, 부지 불식 간에 언어에 영향을 미치는 일 종의 제국이다.〉 6) 따라서 민족에서 언어의 제어력과 자기 자신의 6) 위의 책, 421 쪽. 〈하나의 언어를 만드는 것은 조직을 갖춘 민족이다. 수 세기가 계속되는 동안 수없이 많은 필요, 관념, 물리적이며 도덕적인 다양 하고 복합적인 원인들의 힘을 얻어 비로소 언어는 생성된다. 변화, 변질 또 는 진보의 시대를 인지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빈번히 변덕이 결단을 내 린다. 그것은 때때로 작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성찰과 지식에서 벗어나

는 가장 섬세한 형이상학이다… … . 문자는(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문자는 소리 문자이다) 언어처럼 완만하고 감각되지 않는 진보에 의해 탄생되지 않는다. 문자 언어는 빛처럼 단번에 태어났다.〉

제어력을 빼앗기 위해서는 그 언어의 입말p arle 을 지연시켜야 한 다. 문자는 한 덩어리로 모인 민족의 해산 과정이며 그 예속화의 시작이다. 〈한 민족 국가의 골격은 구어에 대해서만 권리가 있다. 그리고 작가는 문자로 씌어진 언어에 대해서만 권리가 있다. 바롱 3 이 말했듯이, 민족은 음성 언어의 주인은 될 수 있지만 문자 언어의 주인은 될 수 없다.〉(위의 책, 420 쪽) 따라서 정치적 악과 언어적 악의 이러한 통일성은 〈철학적 검 토〉를 호소한다. 루소는 이미 『 인간 언어 기원론 』 에서 이 호소에 답변하고 있다. 그러나 나중에 좀더 섬세한 형식 속에서 뒤클로가 세운 문제틀을 인지하게 될 것이다. 『에밀』에 나타나듯이 언어 교 육과 외국어 교육의 어려움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구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아울러 모국어와 의국어의 단어를 바꾸면서 상응하 는 관념도 바꾸게 되어 결과적으로 한 언어의 교육은 동시에 그 민족 문화를 전달하게 된다. 그 민족 문화에 대해서 교육자는 어떤 통제력도 없다, 민족 문화는 교육적 형성에 선행하는 이미 거기 있 음으로서, 또 교육에 앞서는 제도로서 저항한다. 어떤 사람은 내가 교육할 필요가 없는 것 중 하나로 어학 공부를 꼽 는다는 사실에 의아해 할 것이다. …… 단 어학 공부가 낱말 공부, 죽 그것을 표시하는 형상이라든가 소리들의 공부에 불과하다면 이러한 공 부는 아이들에게 적당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언어란 기호를 바꾸면, 동 시에 그것이 표현하는 관념까지 바뀌기 마련이다. 어린이의 두뇌는 언 어에 의해 형성되고 사고는 관용어의 색채로 물든다. 만인은 이성만을 공유하며 언어의 정신마다 특이한 형식이 있다. 여기서 야기되는 차이 점은 부분적으로는 민족성의 원인이나 결과가 될 수 있다. 아울러 이

러한 나의 가설을 확 인시켜 주는 것으로 보이는 사실은 세계의 모든 민족에서 언어는 풍속의 영고 성쇠와 같은 길을 밟고 있으며 풍속처럼 ‘ 보존되거나 변질된다는 것이다.(위의 책 , 105 쪽) 아울러 언어 교육과 관련된 이러한 일체의 이론은 사물, 의미(또 는 관념)와 기호 사이의 엄밀한 구분에 근거한다. 이 세 가지는 오 늘날 지시체, 시니피에, 시니피앙 사이의 구분에 견줄 수 있을 것 이댜 만약 표상체 re p resen t an t이 피표상체 re p resen te에 대해 효 력(때로는 불길한 효력)이 있다면, 그리고 만약 아이가 〈하나의 언 어만을 배워야만 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면〉, 그 이유는 바로 〈 각각의 사물은 그에 들어맞는 수천 가지 기호들이 있을 수 있지 만 각각의 관념은 오직 하나의 형태만이 있기 때문이다.〉(위의 책, 같은 곳) 뒤클로가 주창한 이 문제를 〈철학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루소이다. 그것은 1754 년 『주석』에서 표명되었다. 또 그것은 『인 간 언어 기원론 』 의 결론부에서 인용되었다. 또 『주석』의 다른 곳, 특히 7 장에서 상기되었다. 1754 년에 씌어진 것으로 알려진, 『인간 불평등 기원론』 ( 『 인간 언어 기원론』)의 출판에 앞설 수 없었던 이 러한 인용문들은 『 인간 언어 기원론』의 집필 연대에 관한 모종의 확실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어떤 점에서 이 연대기적 문제를, 사람들이 작가의 사상 상태라고 부른 것의 체계적 문제와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 루소의 저서에 우리가 부여하 는 중요성예 비추어 이 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루소의 사후에야 출판된 이 텍스트의 구 성 연대에 대해서는 가장 권위 있는 해석가들과 사가들이 의견 일 치를 거의 보지 못했다. 또 의견 일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서로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이 문제의 최종적 핵심은 분명하다.

루소의 이 저서가 루소 사상이 성숙한 단계에 접어든 시기의 작품 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 내용은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과 나중에 나온 저작들의 내용과 일치하는가? 이 토론에서는 늘 외적 논증들과 내적 논증들이 뒤범벅된다. 토 론은 칠십 년 이상 지속되었고 두 단계를 거쳤다. 만약 우리가 가 장 최근의 것을 상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보다 도 그 선행 단계가 우리 생각으로는 이 문제의 외적 양상에 어떤 종지부를 찍지 않았던 것처럼 일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는, 일정한 방식으로 그것은 내적 문제의 형식을 새롭 게 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논쟁 : 연민의 정의 경제 뒤클로의 인용문들만 보고 현대의 주석가들이 『인간 언어 기원 론』이 『인간 불평등 기원론』보다 뒤에 씌어진 것이거나 기껏해야 동시대에 씌어진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아니다. 가뉴뱅과 레이몽 은 『고백록』 7) 을 출판하면서, 『인간 언어 기원론』은 처음에는 뒤 페루 Du Pe yr ou 가 소유하다가 뉴샤텔 도서 관 Bib l i ot h e q u e de Neucha t el(N°7835) 에 기증한 수고(手稿)에 근거해서 1781 년 제 네바에서 출판한 『음악론 Trait es sur la musi q ue 』 중 한 권에서 첫선을 보였음을 주지시킨다. 『고백록』의 출판자는 〈탁월하면서도 거의 읽히지 않는 이 소책자〉에 주목했고, 뒤클로의 인용문에 근거 해서 그것을 『인간 불평등 기원론』 뒤에 위치시키고 있다. 〈그들은 덧붙이기를 『인간 언어 기원론』의 기본 자료 자체는, 루소가 1750 년까지는 가지고 있지 못한 지식과 사상의 완숙함을 전제로 한다〉 7) Pleia d e(T. I. 560 쪽. n°3).

고 한다. 가장 중요한 장인 9 장과 10 장(최소한 데라테 R. Derath e 의 견해 역시 그러하거니와 ) 8 ) 은 〈 남부 지방의 언어 형성 〉 과 〈북부 지방의 언어 형성 〉 을 설명하고,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의 테마와 유 사한 관계의 테마들을 전개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루소가 이 텍스트를 수년에 걸쳐 집필했을 개연성이 대단히 높지 않은가? 또 그렇게 상상할 여지가 있지 않은가? 그렇 다면 루소의 성찰의 다양한 성층들을 추출할 수 있지 않을까? 뒤 클로의 인용문은 나중에 가서 도입된 것은 아닐까? 몇몇 주요 장 들은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과 같은 시대나 나중에 작성. 완결 또는 수정될 수 없었을까? 이것은 모든 해석울 화해시키고 『인간 언어 기원론 』 의 기획 또는 그 집필 연도를 1754 년 이전에 위치시키려는 사람들의 가설에 권위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보강 Vau g han 은 외 적인 이유로 『 인간 언어 기원론』이 『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나 심 지어 제 1 논문인 『 과학 및 예술론』 (1750) 이전에 기획되었다고 간 주한다 • 9) 실제로 그것은 음악에 관한 글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 댜 완결된 제목이 그 점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멜로디와 음악적 모방이 언급된 인간 언어 기원론.〉 그런데 알다시피 음악에 관한 글들은 매우 조숙한 영감에 부응하고 있다. 1742 년 루소는 학술원 에서 『 새로운 음악 부호와 관련된 기획 Proje t concernant de nouveaux sig ne s po ur la mus iq ue 』을 발표한다. 또 같은 해에 『 근대 음악 논고 Dis s erta t i on sur la musiq u e moderne 』가 나온 다. 첫번째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 작성된 1749 년 루소는 달랑베 르의 부탁으로 『백과 사전 Enc yc lop e di e .!l에 음악 항목들에 대한 논문들을 쓴다. 그때 〈음악 사전 Dict i on na ire de mus iq ue 〉을 작 8) Le rati on ali sm e de Rousseau(1 9 48), 17-18 쪽. Rousseau et la sci en ce po liti qu e de son tem p s ( 1950) , 146 쪽. 9) Politi cal writ ings , I. 10 이나 Hendel. J. -J. Rousseau moralist . T. I. 66 쪽 이하 참조.

성하는데, 『 인간 언어 기원론 』 은, 첫번째로 출판될 때에 이 사전에 삽입되었다. 그렇다면 비록 집필이 몇 년간 지연되면서 루소가 1754 년까지 뜻과 내용을 조금 변형시켜 『 인간 언어 기원론 』 을 (r 서론」 10 ) 에서 밝히고 있듯이)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의 한 부분으로 만들 것을 염두에 두었다 하더라도 『인간 언어 기원론 』 은 이미 당 시에 시도되었다고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러한 화해 가설은 편리하고 그럴싸하지만, 즉 내적인 동시에 체계적인 이유로 각각의 가설에 그 시기 p er i ode 와 진리의 몫을 분배하지만 여전히 의견 일치가 어려운 한 가지 문제가 남는 다. 여기서는 단호히 그 결단을 내려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9 장 〈남부 지방의 언어 형성〉의 철학적 내용이 다. 이 장의 주제에 대한 논의에서 데라테와 스타로빈스키의 주장 은 갈라선다. 그들은 확실히 이 점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대립하지 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 문제에 하나의 주만을 할애하고 있는 데 ,11) 이 양자의 대질은 우리의 문제를 밝히는 데 도움을 줄 것이 다. 데라테에 따르면, 『인간 언어 기원론』이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을 위해 씌어진 한 개의 단편이라는 것은 〈『인간 불평등 기원론 』 과 같은 관심을 보여주는 9 장과 10 장에 관한 한 가장 개연성이 높 은〉 가설이다. 그런데, 바로 9 장에서 스타로빈스키는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의 의도와는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확언 하나를 도출한다. 그 는 루소의 사상이 진화되었다고 결론짓는다. 아울러 그 사상은 『인 간 언어 기원론 』 에서 『인간 불평등 기원론』으로 진화되었다고 단 10) 이 책, 378-379 쪽 참조‘ 11) 우리는 이미 데라테의 주를 인용했다. 또한 J. Sta r obin s ki , 플레야드 판 에 있는 『 인간 불평동 기원론 』 , 154 쪽, 주 2).

정한다. 그 이유는 1754 년 이후에는 루소의 학설이 더 이상 변하 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 인간 언어 기원론 』 은 체계적으로 또 역 사적으로 『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선행될 것이다. 이 점은, 연민의 정이라는 기본 감정을 통해, 도처에서 그가 감지하는 위상을 검토 할 때 나타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연 민이란' / 감정을 반성의 사용에 앞선 정서 또는 자연적인 덕성으로 삼는다. 반면에 『 인간 언어 기원론』에서 루소는 연민이란 감정이 판단력에 의해 먼저 각성되어야 한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이 각성 되다는 말에 대해 여기서는 불확실한 대로 남겨두자• 먼저 『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학설을 상기해 보자. 왜냐하면 그 점에 관한 한 어떤 이견도 없기 때문이다. 루소는 거기서 한치의 애매 모호함도 없이, 연민의 정이 이성이나 반성보다 더 오래된 것 이라고 확언한다. 그것이 바로 보편성의 조건이다. 그리고 그 논증 은 홉스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인간에게 유일한 자연적 미덕을 부여하는 데 어떤 모순이 있다 고 생각지 않는다. 인간의 미덕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바방자도 이러 한 미덕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 1 2 ) 여기서 나는 연약하며 우리보다 더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기 쉬운 존재들에 알맞는 기질인 연민의 정에 대 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모든 반성에 앞서 사용한 E 는 · 점에서 보 편적이며 필요한 미덕이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적인 것이어서 동물들 조차 때때로 감지할 수 있는 징후들을 보여준다. 루소는 인간 차원과 동물 차원에서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로 귀 12) 그 사람은 망드빌 Mande vi lle 이다. 플레야드 판 『 인간 불평등 기원론 .!I 에 있는 스타로빈스키의 주를 보라. 우리는 여기에서 그 주를 참조한다 (T. ID, 154 쪽 . 강조는 필자의 것임).

결되는 몇 가지 예를 보여준 후,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일체의 반성에 선행하는. 자연의 순수한 운동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 것이 바로 자연적인 연민의 힘으로서, 가장 퇴폐한 풍속도 그것을 파 괴하는 데 고충이 따른다……. 망드빌은 〈자연이 인간들에게 도덕과 더불어 이성을 받쳐주는 연민의 정을 주지 않았더라면 인간들은 괴물 에 불과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연민의 정은 자연적인 감정이며, 각 개인마다 자신을 사랑하는 행위의 정도를 조정하면서 모 든 존재의 상호 대화에 기여한다. 바로 그것이 어떤 반성 없이, 우리 앞 에 있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해 주도록 우리를 부추기는 것이다. 그 것이야말로 자연 상태에서 법, 풍속, 미덕 등을 대신하거니와 그 장점 은 그 누구도 그것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복종하지 않을 엄두를 못낸다 는 것이다.〉 13) 토론의 노선을 다시 잡기 위해 여기서 잠시 휴지부를 찍어보자. 13) 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루소가 선택한 예들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배푸는 지상함과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무릅쓰는 위 험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 살아 있는 육체를 밟아뭉개는 것을 꺼리는 것 울 우리는 매일 본다. 동물들은 자기와 같은 종의 시체를 보면 언제나 초 조한 모습을 드러낸다. 심지어 매장을 해주는 동물까지 있다. 도살장에 들어가는 가금(家萬)의 슬픈 울음소리는 자기에게 닥칠 끔찍한 광경에서 받을 인상을 예고한다. 우리는 Fable des abe jjj es 의 저자가 인간이 동 정심 많고 감수성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 한다. 우리는 그 저자가 자신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바깥에서 맹수를 알 아보는 닫힌 인간의 비장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공하면서 냉혹하고도 섬 세한 스타일에서 벗어나는 것을 즐겁게 생각한다. 그 맹수는 아이를 어머 니의 가슴에서 떨쳐버리고, 치명적인 이빨로 연약한 수족을 산산조각내 고, 발톱으로 창자를 발기발기 찢는다. 그가 어떤 관심도 가지지 않는 이 사건의 목격자는 어떤 끔찍한 동요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까? 이 광경 을 보고 기절한 어머니나 숨이 넘어가는 아이를 도울 수 · 없다는 고통으로 인해 어떤 번민을 갖지 않겠는가? 어떤 반성 이전에, 자연의 순수한 운동 은 바로 그런 것이다…….〉

다시 은유의 체계를 고찰해 보자. 어머니와 아이, 그리고 생명 일 반과 죽음의 관계 속에서 원형적으로 계시되는 자연적인 연민의 정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물을 지배한다. 이 부드러운 목소리의 은유로 어머니의 현전과 동시에 자연의 현전이 운반된다. 이 부드 러운 목소리가 자연과 어머니의 목소리라는 사실은. 있는 바 그대 로 일종의 법칙으로 인지되거니와 루소에게 목소리의 은유는 그 점을 늘 상기시킨다• 〈그 누구도 거기에 복종하지 않을 엄두를 못 낸댜 〉 왜냐하면 그것은 부드럽기 때문이며, 자연적인 동시에 절대 적으로 근원적이기 때문이며, 또 준엄하기 때문이다. 이 모성적 법 칙은 목소리이다. 연민의 정은 목소리이다. 목소리는 언제나 본질 적으로 미덕과 바람직한 정념의 통로이다• 한치의 연민의 정도 없는 문자와는 대립된다. 연민의 정의 질서는 〈법을 대신하고〉 법을 대 리 보충한다• 이때 법이란 제도화된 법을 말한다 . 그러나 제도법은 또한 자연법의 대리 보충이기 때문에, 자연법이 결여되면 오직 대 리 보충이라는 개념만이 자연과 법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을 허용한다. 이 두 개의 술어는 대리 보충성이란 구조의 내부에서만 그 의미가 있다. 비모성적 법칙의 권위는 자연법의 권리 , 〈복~하 지 않아야 할〉 〈부드러운 목소리〉에 대체될 때만 의미를 가진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서로 통하는 것을 멈추며, 다가가야 할 연민의 정 이 없는 차원은 단순히 문자의 차원인가? 답은 그렇다와 아니 다, 둘 다 맞다. 철자에서 문자를 읽거나 문자를 철자와 연결시킨 다는 점에서 긍정이며, 문자를 그 은유 차원에서 의미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답은 부정이다. 자연법, 즉 연민의 정의 부드러운 목소리 가 단순히 모성적 심급에 의해 발설되는 것이 아닌 반면, 그것은 신에 의해 우리 마음속에 각인된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자연적 문자, 마음의 문자로서, 루소는 그것을 이성의 문자와 대립시킨다. 오직 이성의 문자만이 연민의 정이 없으며, 오직 그것만이 자연적

인 정서 유발이라는 이름 아래 아이를 어머니에게 연결시키고, 죽 음에 맞서 생명을 보호하는 금기 사항을 위반한다. 법과 연민의 정 의 목소리를 위반한다는 것은, 곧 자연적 정서 유발을 타락한 정념 으로 바꾸어놓음을 뜻한다. 그런데 첫번째 언급한 문자는 좋다. 왜 냐하면 그것은 신에 의해 우리의 마음에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여 기서 우리는 위에서 은유적 이동으로 위치시킨 신성하거나 자연적 인 문자를 만난다. 『에밀』에서 루소는 그가 〈제 2 의 탄생〉이라고 부르는 것을 기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는다. 우리의 정념은 자기 보존을 위한 주요 수단이다. 따라서 그 정념을 파괴하려고 하는 것은 헛된 시도일 뿐만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자연을 제어하려는 것이요, 신의 작품을 개혁하려는 것이다. 만 약 신이 인간에게 그가 인간에게 부여한 정념들을 절멸시키라고 말한 다면, 신은 스스로의 뜻에 모순이 된다. 결코 신은 그런 몰지각한 명령 을 내린 적이 없으며 그 같은 것은 전혀 인간의 마음에 각인되지 않았 다. 신께서 인간이 하도록 허락한 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당신 스스로 인간에게 말한다• 신은 인간의 마음속에 그것을 새긴 다. (246-247 쪽) 절대적으로 원시적인 정념, 신이 자신과 모순되지 않고는 우리 에게 소멸시키라는 명령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은 자기 지신에 대한 사량이다. 주지하다시피, 루소는 사랑을 그것의 타락한 형태인 이 기심 5 과 구별한다. 그런데 정념의 근원이 자연적이라 하더라도 모 든 정념이 자연적인 것은 아니다. 〈수없이 많은 생소한 수로들이 그것을 살찌게 했다.〉(위의 책, 같은 곳) 여기서 애티심의 뿌리인 연민의 정의 위상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근원 그 자체도 아니며 표류하는 정념적 유출도 아닌 여러 정념들 가운데 하나인 후천적

정념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애타심의 첫번째 파생이다. 그것은 거 의 원시적이며 연민의 정에 관한 일체의 문제가 위치하는 절대적 근접성과 자기 정체성 사이의 차이 속에 있다. 〈어린아이의 첫번째 감정은 자기 지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리고 첫번째 감정에서 파 생하는 두번째 감정은 자기에게 접근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다.〉(위의 책, 248 쪽) 이러한 파생은 곧이어 증명된다. 그것은 자 기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부터의 멀어짐이나 단절이라기보다는, 그 감정의 여파 중에서 가장 일차적이면서 가장 필연적인 것이다 . 만 약 연민의 정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행위〉(『인간 불평등 기원 론 』 , 156 쪽)의 정도를 적절히 누그러뜨린다면, 아마 그것에 대립하 면서보다는 1 4) 우회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표현하고 지연시키면서이 다. 왜냐하면 이러한 적절한 수위 조절은 〈인간이란 종의 상호 보 존에 기여하기〉 때문이다(위의 책, 같은 곳 ).6

14) 우리는 여기에서 데라테처럼, 『 에밀 』 의 원리와 『 인간 불평동 기원론 』 의 원리를 대립시킬 수 있는지 자문해 본다(〈 『 에밀 』 속에서 연민의 정은 자 기애가 결여된 감정인 반면에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은 이 두 가지 원칙을 서로 대립시켰다.〉 (Le rati on alism e de J.-J. Rousseau, 9 9- 100 쪽)

또 법과 사회에 의해 대리 보충되는 연민의 정 자체가 어떻게 해서, 그리고 왜 대리 보충자의 역할을 맡는가를 이해해야 할 것이 다. 왜 그것은 어떤 한 순간에, 또 늘 언제부터인가 문화의 대리자 가 되었는가? (즉 그것은 〈자연 상태에서 법, 풍속과 미덕을 대신 하게 된다〉) 그 연민의 정에 매우 유사한, 하지만 대체가 이루어지 기 위해서는 충분히 다른 것이어야 하는 그 자체의 어떤 유사 대 리물에 맞서, 어떤 타락에 맞서, 그것은 우리를 보호하는가? 그러한 다른 대리 보충처럼, 〈인간이란 종의 상호 보존에 기여 하는〉 연민의 정이라는 자연적이며 선(先)반성적인 감정이, 죽음의 다른 위협들 가운데에서, 사랑으로써 · 우리를 보호하는 것은 우연인 가? 만약 연민의 정이, 사랑의 열정으로 인한 파괴로부터 인간을

보호한다면(그것이 여자에 대한 열정으로 인한 파괴로부터 남자를 보호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우연인가? 신의 각인이 의미하는 것 은 연민의 정(그것은 아이룰 어머니에, 생명을 자연에 연결시킨다) 이 아이의 어른됨 (〈제 2 의 탄생〉)을 어머니의 여자됨과 연결시키는 정념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생성은 커다란 대체이다. 연민의 정은, 앞으로 보듯이, 남자의 남성다움과 수컷의 수컷다움을 구해 준다는 점에서, 인간의 인륜과 유기체의 생명을 간직한다. 만약 연민의 정이 자연적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타자의 정체를 파악하도록 하는 것이 생득적 운동이라면, 연애나 연애의 정념에 자연적인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이는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다. 인간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정념들 가운데, 이성을 갈구하는 끈질기 고 격렬한 정념이 하나 있다.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모든 장애물을 뒤 엎는, 아울러 그 열정에서 인류를 파괴할 것만 같은 끔찍한 정념으로 서, 그 정념은 간직되도록 운명지어졌다. 수치심도, 자제력도 없이, 흉 폭하고 투박한 광기의 재물이 되어 매일 다른 이의 피를 대가로 지신 의 이기심을 다투는 인간들의 꼴은 어떻게 될까?(『인간 불평등 기원 론』, 157 쪽) 이 피비린내 나는 구도의 배후에서, 이중 영상 형식으로 또 다른 장면을 읽어야 한다. 그것은, 똑같은 색채의 힘을 빌려, 죽은 말과 맹수, 그리고 어머니의 가슴에서 떨어져 나간 아이들의 세계를 노 출하고 있었다. 따라서 연애의 정념은 자연적인 연민의 정의 타락이다. 연민의 정과는 달리, 그것은 우리들의 애착을 유일한 하나의 존재로 국한 시킨다. 늘 루소에게서 그런 것처럼, 악은 거기서 규정, 비교, 편애

라는 형식을 취한다. 죽 차이라는 형식이다. 문화의 발명은 연민의 정을 퇴색시키고, 그 자발적 운동을 왜곡 전도한다• 그 자발적 운 동은, 인간과 성이 무엇이든, 본능적으로 또 무분별적으로 모든 살 아 있는 생명체에 연민의 정을 가져다 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연민의 정과 연애 사이의 톰울 표시하는 질투심은 단순히 문화의 창조물만은 아니다. 비교의 교활한 술책으로서, 질투는 여성다움의 전술이자 여자에 의한 자연의 설득(이성화)이다. 사랑 속에 있는 문화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은 여성다움에 봉사한다. 죽 그것은 남 성을 여성에게 예속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허위 감 정이댜 즉 그것은 사회의 관습으로부터 생겨났으며, 여성들의 제 국을 설립하고 복종해야만 하는 여성의 지배를 확립하기 위해 능 수 능란함과 세심한 주의를 토대로 여성들에 의해 탄생된다.〉(위의 책, 158 쪽) 아울러 『 에밀 』 은 〈여성이 남성에게 복종하는 것은 자 연의 순리〉 (517 쪽)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루소는 주인과 노예 의 변증법이라는 헤겔의 도식과 그 술어에 따라서 남성과 여성의 투쟁을 기술하는데, 이 점은 단지 그의 텍스트뿐만 아니라 (헤겔 의) 『 정신 현상학』까지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따라서 남성이 여성을 자기보다 열등한 차원으로 간주하면 자연적 질서와 문명의 질서는 일치하고 모든 것은 순조롭게 된다. 반대로 여 성이 남성 위에 서면서, 남자가 자기 권리나 인지에 손상을 입거나 아 니면 배은 망덕한 대우를 받거나 무시되는 양자 택일에 놓이게 되면 모든 것은 거꾸로 뒤집어진다 . 죽 권위를 주장하면서 여성이 자신이 섬겨야 할 우두머리의 폭군으로서 군림하는 꼴이다. 노예가 된 주인은 피조물 중에서 가장 우스꽝스럽고도 가장 비천한 것이다. 아시아의 왕 들은 그러한 불행한 애첩들을 명예롭게 떠받드는 동시에 그들과의 결 별을 괴로워한다. 그들은 자기 아내와 자기 위해 침대의 끝머리부터

들어간다고 한다.(위의 책, 같은 곳) 역사적 타락 15) 은 이중 대체에 의해 도입된다. 정치적 통치에 의 해 가족적 지배를 대체하는 것과 도덕적 사랑으로 육체적 사랑을 대체하는 것이 그것이다. 여성이 집안일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루소는 이 점에서 여성의 〈자연적인 천부적 재능〉을 인정 한다. 하지만 〈마치 한 국가의 장관처럼, 그녀가 하고 싶은 것을 남편으로부터 명령받으면서〉 그녀는 남편의 권위 아래에서만 그렇 게 해야한다.

15) 알다시피 루소에게는 역사 속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 한 권의 책을 쓸 계획이 있었다. 그에게 그것은 〈여성이 지배하도록 방치된 위대한 남성들 을 몇 가지로 관찰〉하면서, 이 역할의 때때로 메스꺼운 특징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역사적 진리(남성들의 역사가 결정적으로 은폐시킨 여성의 역할의 중요성)를 복원시키는 일이었다.

내가 남성을 지배하는 천부적 재능을 여자에게 부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독자들은 내가 모순에 빠진다고 비난할 것이다. 하지만 독 자들은 혼동하고 있다. 명령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과 명령하는 사람을 지배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여자가 지배하는 세계는 감미로움 과 예의와 아침의 세계이다. 여성들의 차원은 부드러운 애무이며, 그녀들 의 위협은 눈물이다. 그녀는 마치 국가에서 신하가 하는 것처럼 자기 가 하고 싶은 것을 명령받기를 원하면서 가정에서 군림한다. 이런 의 미에서 최고의 가정은 여자가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가정이다. 하지만 그녀가 가장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자신의 권리를 남용해서 혼 자서 명령한다면 그 무질서에서 야기되는 것은 오직 비천함, 파국, 불

명예뿐이다.(위의 책, 같은 곳. 강조는 필자의 것임) 현대 사회에서 그 질서는 여성에 의해 전복되었고, 찬탈의 형태 는 바로 그런 것이다. 이 대체는 여러 다른 남용 가운데 하나가 아 니다. 그것은 폭력과 정치적 이변의 패러다임이다. 위에서 언급한 언어의 악처럼(잠시 후에 그것들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 대체는 정치적 악이다.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 7 는 그 점을 말해 주고 있다. …… 남녀 차별을 없애기를 원하면서도 남자가 될 수 없는 여자들은 우리를 여자로 만든다. 인간을 타락시키는 이 결점은 도처에 깔려 있 다. 그러나 특히 프랑스와 같은 국가 속에서 그러한 상황을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명의 군주가 남성들이나 여성들을 지배할 때 .• 군주 가 복종받기 위해서는 여자나 남자 모두에게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공화국에서는 남성들을 필요로 한다 .161

16) Gami er 편, 204 쪽. 주 1) 전체를 읽어보자. 저자는 거기서 다음과 같 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러한 농담은 (지금은 자주 사용된다) 지성인들 에 의해 프랑스에서는 액면 그대로 새겨졌다.〉

이 논지의 도덕률은 곧, 공화국이 자연의 질서를 회복한다면 여 성들 지신이 이득을 볼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타락한 사회에 서 남성온 지신이 복종해야 할 여성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호해야지 섬겨서는 안 될 여성의 의지에 비열하게 헌신한 우리 는 여성에게 복종하는 동시에 무시하는 법을 터득했으며, 빈정거리 는 배려로서 여성을 능멸하는 법을 배웠다.〉 아울러 언어의 온갖 타락의 용의자인 파리는 다시 고발당한다. 〈파리의 모든 여성은 자 기 아파트에 자기보다 더 여성적인 남창들을 모아놓았다. 이 남창

들은 여성의 미에 걸맞는 진정한 마음도 없으면서, 온갖 찬미와 찬 탄을 여성의 아름다움에 바치는 수완을 발휘한다• 〉 (위의 책, 같은 곳) 루소가 재구성한 바대로 여성의 〈자연적〉 이미지는 조금씩 그 윤곽을 드러낸다. 여성은 남성에 의해 고양되면서도 그에게 복종하 며, 남성의 정부가 되지 말고 그를 지배해야 한다. 사람들은 여성 울 존중해야 한다. 즉 그 힘(우리의 힘과 정치적 조직체의 힘)을 손 상하지 않기 위해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녀를 사랑해야 한다• 왜 냐하면 우리는 우리 〈정체(政體) 〉 를 단지 〈여자들을 주거시키는 데〉 모험을 거는 것이 아니라(가족적 지배에서 그들을 포용하는 대 신) 그들의 사회에 근거해 우리 사회를 조정하는 데 두고 있다. 〈그들(남성들)은 여자들만큼, 또 그 이상으로 은밀한 성적 관계를 느낀다. 여성들은 거기서 그들의 미풍 양속만을 잃어버릴 뿐이다. 우리의 풍속과 동시에 우리의 정체를 잃어버린다.〉 (204 쪽) 따라서 그 몫온 평등한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 점이 대리 보충성 놀이의 심오한의미일 것이다. 이 점은 직접적으로 대체적 타락의 또 다른 형식으로 우리를 유 도한다. 즉 육체적 사랑에 도덕적 사랑을 덧붙이는 형식이다. 사랑 에는 어떤 자연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종의 생식과 보존에 사용된 다. 루소가 〈사랑의 육체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이름이 가리키듯, 자연스럽다. 이렇게 해서 연민의 정의 운동에 용집된다. 욕망은 연민의 정이 아니다. 하지만 루소에 따르면, 그것은 연민의 정과 마찬가지로 선반성적이다 . 요컨대 〈사랑에서 도덕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을 구별해야만 할 것이다.〉(『인간 불평동 기원론』, 157 쪽) 제도, 역사, 문화에서 자연적인 것을 대체하는 〈도덕적인 것〉 속에서, 사회적 관습 덕분에 여성의 파렴치함은 자연적 욕망을 설 득하는 데 사용되며, 유일한 존재와 관계를 맺기 위해 정력을 사로

잡는 데 사용된다. 이 유일한 존재는 이렇게 해서 찬탈당한 지배를 확보한다. 육체적인 것은 하나의 성을 다른 이성에 합치시키려는 일반적인 욕 망이댜 도덕적인 것은 이 욕망을 결정짓고, 배타적으로 하나의 유일한 대상에 그 욕망을 고정시키거나 최소한 이 선호하는 대상에 대해서 최 대한의 에너지 를 주는 그 무엇이다.(위의 책, 158 쪽) 여성다움(아울러 이 여성다움, 죽 여성적 원칙은 사회가 남성아라 고 부르는 사람들과 여성들 사이에서 조작되며 , 루소는 그 남자들을 가리켜 〈 여성들이 여성스럽게〉 만든 사람들이라고 말했다)의 조작은 따라서 유일한 테마와 표상에 그것을 결부시키면서 정열을 사로잡 는데 있다• 그것이 바로 연애의 역사이다. 이 내력에서 역사는 비자연화로 서 반영된댜 즉 자연에 첨가되는 것이며, 도덕적 대리 보충은 대 체를 통해 자연의 힘을 이동시킨다. 이 점에서 대리 보충이란 무 (無)이며, 어떤 고유한 에너지도, 어떤 자발적 운동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기생적 유기체이며, 욕망의 힘을 한정하고 그 방향을 결정하는 상상력 또는 표상이다. 우리는 자연과 자연의 힘으로부 터, 편애의 차이 같은 그 무엇인가가 자기의 힘 없이 힘을 강제로 쓰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설명 불가능성은, 루소 사상에 모든 비약과 형식을 부여한다. 이 도식은 이미 루소에 의한 역사의 해석이다. 그러나 이 해석 은 두번째 해석에 길을 내주는데, 거기서는 어떤 망설임이 드러난 다. 루소는 이 역사의 두 가지 판독 사이에서 주저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주저함의 의미가 여기서 인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 의미 는 다시 한번 우리의 분석을 투명하게 할 것이다. 타락된 대체는

때로는 역사의 근원, 역사성 그 자체, 그리고 자연적 욕망과 관련 된 첫번째 이탈로 기술된다. 또 때로는 그것은 역사 속에서 일종의 역사적 타락, 단순히 대리 보충성의 형식 속의 타락이 아닌, 대리 보충적 타락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해서, 여성이 자기 위치를 차지 하고, 자기 위치에 남아 있고, 타락되지 않은 사랑의 대상으로서 자기의 자연적 장소를 차지하는, 역사적 사회에 대한 기술을 읽을 수있다• 고대인들은 거의 집 바깥에서 생활했다. 때로는 일에 종사하거나 때 로는 공적 장소에서 국가의 일을 조정하거나 때로는 시골에서, 정원에 서. 바닷가에서 비를 맞으며, 태양 아래에서 거의 나체로 산책했다. 이 모든 것에 여자는 한 명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자들·도 그런 것 이 필요함을 알고 있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고대인의 글과 대화록 견본을 통해서, 우리는 정신도. 취향도. 연애 자체도 이 유보 조건에서 무언가 벗어났다고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보지 못한다.(『달랑베르 에게 보내는 편지』, 204 쪽. 강조는 필자의 것임) 그렇지만 대리 보충이라는 형식 속의 타락과 대리 보충적 타락 사이에 차이가 있을까? 대리 보충이라는 개념은 아마도 두 가지 해석을 생각하게 한다. 자연을 벗어난 첫번째 탈출부터 역사적 놀 이는 (대리 보충성으로서) 그 자체에 자기 자신의 타락과 대리 보 충적 타락, 타락의 타락 등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 역사 속에서 타 락의 가속화와 다급함은 애초부터 역사적 타락 자체에 의해 함의 되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그렇게 했듯이, 경제적 개념으로 고려된 대 리 보충 개념은 동시에 모순 없이, 그 반대의 것을 말하는 것을 허 락해야만 한다. 대리 보충의 논리(그것은 동일율의 논리가 아니다)

는 동시 발생적으로, 악의 가속화가 자신의 역사적 보상과 난간을 찾는 것을 허락한다. 역사는 역사를 촉진시키고, 사회는 사회를 타 락시키지만, 그들을 서로 해치는 악 또한 그것의 자연적 대리 보충 을 가진다. 역사와 사회는 그 심연에 대한 스스로의 저항력을 만들 어낸다. 이렇게 해서, 가령 연애의 〈정신적인 것〉은 비도덕적이다. 그것 은 사취자이자 파괴자이다. 현전을 지연시키면서 그 현전을 고수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에로티시즘이라는 죽음의 또 다른 힘에 의해 소비를 지연시킬 수도 있고 여성과 벌이는 치명적인 〈성 관계〉를 연기시킬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명 또는 죽음의 경제에 따라, 사회는 〈정신적 사랑〉의 심연에 도덕적 난간을 가져 다 놓을 수 있다. 사회 도덕은 실제로 여성에게 성적 수치심(순결) 이라는 미덕을 강요하면서 정력의 유출을 지연시키거나 약화시킬 수 있다. 사회적 세련화의 산물인 이러한 성적 수치심 속에서 자연 적 현명함, 죽 생명의 경제는 문화에 의해 문화를 조정한다(지나가 면서 주지하거니와 루소의 모든 담론은 여기서 그 자기 실천의 장을 찾는다). 여지들이 육체적 욕망이라는 자연적 도덕을 배반하기 때 문에(그러나 그 배반은 자연의 술수이다) 사회는 부도덕성의 한계를 긋는 성적 수치심이라는 도덕적 강제 조항을 만든다. 즉 도덕성이 만들어진다. 왜냐하면 〈정신적 사랑〉은,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을 제의하고는 결코 부도덕하지 않기 때문이다. 순결이라는 테마 는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혼히 생각하는 것 이상의 중요성이 있다. 하지만 『에밀』에서는, 특히 지금부터 한줄 한줄 읽 어야 할 5 권에서는 한결 중대한 테마이다. 거기서 성적 수치심은 자연적 미덕의 대리 보충으로 정의된다. 문제의 관건은, 남성들이 성 관계를 맺는 여성들의 수와 무절제에 의해 〈죽음으로 이끌려 갈〉 (447 쪽) 것인가를 알아보는 일이다. 그들의 〈무한정한 욕망〉에

는 실제로 동물의 암컷에서 볼 수 있는 자연적인 제동력이 있다• 이 후자(동물의 암컷)의 경우에는, 필요 욕구가 만족되면 욕망은 그친다. 그래서 암컷은 거짓 꾸밈으로 수컷을 자극하는 따위의 짓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진정한 욕망이 일 어날 때만 접근하는 것이다. 동물의 암컷은 아우구스투스의 딸과는 정 반대의 짓을 한다. 동물의 암컷들은 선박의 적재물이 다 차면 더 이상 승객을 받지 않는 것과 같다. 즉 본능이 그들을 자극하고, 본능이 그들 을 멈추기도 한다. 여성들에게서 수치심을 빼앗아버린다면 여자들의 이러 한 부정적인 본능에 대한 대리 보충은 무엇인가? 여성이 더 이상 남성에 게 신경을 쓰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은 남성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기 를 기대하는 꼴이다.(강조는 필자의 것임) 그리고 이러한 대리 보충은 남성들의 생명의 경제이다. 〈여성들의 자연적인 무절제는 남성들을 죽 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무절제는 남성들의 욕망을 포함하기 때문에 수치심만이 여자들의 진정한 도덕이다.〉 자연이라는 개념과 그것이 지배하는 모든 체계가 더 이상 환원 될 수 없는 대리 보충의 범주 아래에서만 생각될 수 있다는 사실 이 확증되었댜 비록 성적 수치심이 본능적이며 자연적인 제동력의 결여를 대리 보충하기 위해서 생겨났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리 보 충으로서, 또 아무리 그것이 도덕적이라 해도, 여전히 자연적이다. 이 문화적 산물에는 자연적인 기원과 종말이 있다. 피조물에 그것 울 각인시킨 것은 신이다. 〈지고의 존재자는 인간이란 종에게 아주 명예롭게 처신하기를 원했다. 그분은 인간에게 끝없는 격정을 부여 하는 동시에 그가 자유롭게 자기를 절제할 수 있도록 그 격정을 조정하는 법칙도 내렸다. 신은 도를 넘어선 지나친 정념에 인간을 내맡기면서도, 이 정념에 그것을 지배할 수 있는 이성을 결합시킨

다. 여성을 무한대의 욕망에 내맡기면서도, 신은 이 욕망에다 그것 들을 제어하기 위한 성적 수치심을 결합시킨다.〉 따라서 신은 자연 적인 격정들의 대리 보충으로서 이성을 부여한다• 따라서 이성은 자연 속에 있는 동시에 자연을 대리 보충한다. 즉 그것은 일종의 대리 보충적인 몫이다. 이 점은 곧 자연이 때로는 그 스스로에게 결여되는 것을 가정하거나 자기 자신을 초과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 둘의 뜻은 다른 것이 아니다. 아울러 신은 특별 할당과 보상 형 식으로 대리 보충에 또 하나의 대리 보충을 첨가시킨다. (루소는 계속 말하기를) 〈더구나 신은 또한 그 힘의 올바른 사용에 현실적 보상을 부여한다. 이를테면 자기 행동의 규범으로 삼을 때 사람들 이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는 취향이다• 이 모든 것은 내가 보기엔 야수의 본능을 훨씬 능가한다.〉 이 도식에 의해 유도되면서 우리는 문화를 자연의 변질로 기술 하는 모든 텍스트를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과학, 예술, 구경거리, 가면, 문학, 문자 속에서말이다. 그것을 〈정신적 사랑〉이라는 구조 의 망 속에서 성(性)의 전쟁, 여성적 원리에 의한 욕망의 힘의 연 쇄 고리 등으로 다시 취해야 할 것이다. 단지 남성들을 여성들과 대립시킬 뿐만 아니라 남성을 남성에게 대립시키면서, 이 전쟁은 역사적인 것이 된다. 그 전쟁은 자연적 또는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 다. 헤겔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자연적 필요 욕구 또는 욕망이 아닌 의식과 욕망의 전쟁이다. 어떤 점에서 그 점을 인지하는가? 그 전쟁은 암컷의 희귀성 또는 〈암컷이 지속적으로 수컷의 접근을 거부하는 배타적인 간극〉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점에서 특히 인지된다. 루소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그것은, 첫번째 원인으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만약 모든 암컷이 일 년 중 두 달만 수컷을 허용한다면, 그것은 암컷의 수가 수컷의 5/6 정도인 것과

관련되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든 인간 종에는 해당 되지 않는다 . 인간의 경우 암컷의 수가 수컷의 수를 초과하고 있으며, 야만족조차도 다른 동물종처럼 발정기나 격리기와 같은 시간이 없다 .1 7)

17)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 159 쪽. 이 주제와 볼테르, 뷔퐁 또는 푸펜도르프 의 대립되는, 또는 친족 관계를 이루는 주제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플레야 드 판의 노트, 158-159 쪽을 보라 .8

따라서 어떤 생물학적 토대도 없는 〈정신적 사랑〉은 상상력으로 부터 탄생한다. 차이와 편애의 운동인 모든 문화의 타락은 여자들 을 소유하는 것과 관계를 맺는다. 문제의 핵심은 언제나 누가 여자 들을 차지하냐는 것뿐만 아니라 여자들이 무엇을 갖게 되는가를 아는 일이다• 아울러 이 힘들의 관계 파악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는 가를 간파하는 일이다. 그런데 앞에서 우리가 인지한 가속화 또는 자본 축적의 원칙에 따라, 악의 시초를 여는 것은 또한 최악으로 곤두박질하는 것이기도 하다. 루소는 몽테뉴처럼 〈우리의 풍속은 악화의 길로 치닫는 놀라운 성향으로 기울어진다〉(『수상록』, I. 82) 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문자, 즉 여기서는 문학적인 것 은 정신적 사랑과 체계를 이룬다. 그것은 정신적 사랑과 동시에 나 타난다. 하지만 정신적 사랑은 여전히 문장 표현을 타락시킨다. 그 것은 인간을 무기력하게 하듯이, 문장 표현을 무기력하게 한다. 그 것은, 오직 여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힘도 깊이도 없이 날마다 태어나 는 수없이 많은 조변석개식의 책들은 모두 화장실에서 신발장으로 떠 돌아다닌다. 그것은 끊임없이 똑같은 것을 다시 쓰면서도, 그것들을 늘 새롭게 하는 수단이다. 어떤 사람은 예의로 쓰일 수 있는 두세 개 정 도를 나에게 인용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말한 그 규칙을 확인할 수 있는 십만 개의 예를 인용할 것이다. 이런 연유에서 우리 시대의

작품 대부분은 그런 수단과 더불어 나올 것이다. 그리고 후대 사람들 은 그처럼 많은 작품을 낸 이 세기 (18 세기)에 거의 책을 만들지 않았 다고 믿을 것이다 . 18 )

18) Lett re a M. d'Alembert, 206-207 쪽 . 또 206 쪽의 주 를 볼 것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 〈 여자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예술도 좋아하지 않고, 어떤 예술도 알지 못하며 어떤 천부적 재능도 없다…….〉 〈성의 결합에 있 어서 하나는 능동적이고 강하며, 다른 하나는 수동적이고 연약하다.〉( 『 에 밀 』 , 446 쪽) 요컨대 여성다움 , 문화의 타락, 그리고 노예로 예속화하는 도덕의 족보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공유하면서도 니체가 루소를 증오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닌가? 그가 루소를 노예 둥의 도덕을 대표하는 표본으로 고려 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지 않은가? 좀더 정확히 말해, 문화의 진정한 전 복과 주민들의 예속화 형식을 연민의 정 속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놀 라운 일이 아닌가? 이러한 노선에서 보자면 할 말이 더 많을 것이다. 그 노선은 특히 여성다 움에 대한 루소와 니체의 모델을 비교하게끔 유도한다 . 지배 또는 유도는 똑같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그것들은 싫증나고, 나약하게 만드는 부드러 움의 형식, 또는 파괴적이거나 게걸스러운 격분의 형식을 교대로 또는 동 시에 취한다. 이 모델들을 남성다움의 단순한 확언으로 해석한다면 그릇된 일일 것이다 . 노발리스는 아마도 좀더 심오하게 또 루소 자신이 명명한 것 울 넘어서서 , Confe ssi o ns(12 쪽) 서두에서 〈그 여성적인 모습〉을 보았다. 〈루소의 철학 요소는 절대적으로 말해 여성 철학 또는 여성다움에 대한 이 론이다.〉 Encyc lope d ie , tr. M. de Gand illa c(ed. de Minu it), 361 쪽.

이러한 우회적 노선은 우리의 처음 관심에서 멀리 떨어진 것인 가? 어떤 점에서 그것은 우리가 『인간 언어 기원론 』 이 씌어진 상 황을 정확히 규명하는 데 도움을 주는가? 우리는 방금 전, 그것이 지지하는 모든 대립 체계와 더불어 이 해되는 자연적인 연민의 정이라는 개념이 근본적인 것임을 확인했 다. 그렇지만, 스타로빈스키에 따르면, 그 개념은 『인간 언어 기원 론 』 에서 부재할 뿐만 아니라 배제되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루 소 사상의 역사와 건축 구조 속에서 그 개념에 하나의 위치를 자

리잡게 하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도덕의 비합리적 토대인, 연민의 정의 자연 발생적 비약의 중요성은,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의 서문에서부터 지적되었다(1 26 쪽과 주 i) 참 조).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의 이 부분과 『 에밀 』 에서 루소는, 연민의 정 은 〈일체의 반성에 앞서는〉 미덕이라고 끊임없이 확언했다. 이 주제에 관한 루소 사상의 핵심은 그것이다. 그런데 『 인간 언어 기원론 』 9 장에 서 루소는 이 점에 대해 매우 색다른 생각을 표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이 텍스트(아니면 최소한 9 장)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의 최종 단계보다도 앞서 씌어졌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 인간 언어 기원론 』 에 서 루소는 반성 없는 연민의 정의 비약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 히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사상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 지는 것 같아 보인다. 〈그들은 박애러~ 어떤 공통된 관념으로도 연결 되지 않았다. 또한 힘 이의의 어떤 심판도 없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 의 적이라고 믿었다……. 땅 위에 혼자 내팽개쳐진 인간은 인간이란 유(類)에 좌지우지되어 한 마리의 광폭한 동물이 되어야 했다……. 사 회적 정서는 우리의 빛과 더불어서만 우리 안에서 전개된다. 연민의 정이란, 아무리 인간의 마음에 자연적이라 하더라도 상상력에 의해 조 종되지 않으면, 영원히 부동의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 게 연민의 정이 우리 자신을 감동시키도록 할 수 있을가? 우리를 우리 자신 밖으로 옮겨놓아야 가능하다• 우리와 고통받는 존재를 동일시하 면서이다. 우리는 그가 고통받는다고 판단하는 만큼, 고통을 받는다……. 한번도 반성해 보지 않은 사람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도 될 수 없으며, 온전한 사람도, 가련함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그런 사람이 못되는 것 은 물론이고, 복수심이 있는 사람도 될 수 없다.〉 연민의 정에 대한 가 장 지성적인 개념은 월라스톤의 사상에 가깝다…….

『 인간 언어 기원론 』 에서 추출되고 스타로빈스키가 인용하는 이 진술들은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이나 『 에밀 』 의 논지들과 양립 불가 능한가 ? 그런 것 같지 않다. 최소한 세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루소는 『 인간 언어 기원론 』 에서, 연민의 정에 대한 소위 〈 최종적인 〉 이론에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하나를 양보하고 있다. 그는 〈 아무리 인간의 마음에 자연적이라 하더라도 ... … 〉 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렇듯 그는, 연민의 정이 생득적, 자발적, 선반성적인 미덕이라고 인식한다. 이것이 곧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과 『 에밀 』 의 논지이다. 둘 째, 〈인간의 마음에 자연적인〉 이 연민의 정이 잠들어 〈부동〉 상태로 남아 있게 하는 것은 이성의 부재가 아니라 연민의 정을 움직이는 상상력의 부재이다. •『 인간 불평등 기원론』 에 따르면, 이 성과 반성은 자연적인 연민의 정을 은폐시키고 변질시킬 위험성이 있댜 반성적인 이성온 연민의 정과 동시대의 것이 아니다. 『인간 언어 기원론』 역시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한다. 연민의 정은 이성 과 더불어 각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의 수면 상태에 빠진 부동성 으로부터 그 연민의 정을 떼어놓은 것은 상상력과 더불어서이다. 루소는 (자명하게도) 상상력과 이성을 구분할 뿐만 아니라 그 차이 를 자기 사상의 핵심으로 삼는다. 상상력은 그의 사상에서 확실히, 하나의 가치를 가지며 그 가치 의 애매 모호함은 자주 인지되었다. 만약 그것이 우리를 타락시킬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진보의 가능성을 열고 있기 때문 이다. 그것은 역사의 길을 터준다 그것이 없다면 완성 가능성 9 은 불가능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루소의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인 류에게 있는 절대적이며 유일 무이한 · 탁월한 속성이다. 비록, 루소 가 보는 이성이 문제될 때 문제는 더 복잡해지지만 ,19 ) 확실히 말할 19) R. Derath e , Le rati on alism e de Rousseau, 특히 30 쪽 이하 참조.

수 있는 것은 몇 가지 점에서 오성과 관념들을 형성시키는 능력인 이성은 상상력과 완성 가능성보다는 인간에게 덜 고유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의미에서 이성이 자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에 주 목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아무리 지성을 갖춘 동물일지라 도, 그것들이 완성 가능하지 못함을 주시했다. 동물들은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현전하는 감각 소여를 지각되지 않는 것으로 초 월시키는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모든 동물은 관념을 가진다. 감각 기관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모 든 동물은 어느 정도까지 자기의 관념을 조합시킨다. 인간은 단지 정 도에서만 야수와 차이가 날 뿐이다. 어떤 철학자들은 인간과 동물 사 이에 있는 차이보다도 특정 인간과 인간 사이에 더 큰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동물들 속에서 인간의 특수성을 구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인간의 오성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스스로의 자유로운 행동의 주체가 된다는 점이다:(『인간 불평등 기원론』, 141 쪽) 자유는 곧 완성 가능성이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매우 특 수한 또 다른 성질이 있다. 그 점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자신을 완벽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다.〉 (142 쪽) 상상력은 완성 가능성의 조건(자유)인 동시에 연민의 정을 각성 시키고 인간 차원에서 행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잠재력 을심화하고자극한다. 1) 상상력은 자유와 완성 가능성의 발단을 마련해 준다. 그 이 유는, 감각과 지적인 이성이 지각된 것의 현전성에 의해 채워지고 포화되어, 고정주의적 개념에 의해 고갈되기 때문이다.’ 동물성에는 역사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의 뿌리에 있서 감각과 오성은 수동적 기능들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거의 힘이 없기 때문에, 이성에 관

심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힘을 갖지 못한 다. 상상력만이 능동적이며 사람들은 상상력에 의해서만 정념을 자 극한다.〉( 『 뷔르템베르크 왕자에게 보내는 편지』, 1763. 11. 10) 따 라서 다음과 같은 결과가 파급된다. 관심과 필요 욕구의 기능이며, 기술과 계산 능력인 이성은 언어의 기원이 아니다. 언어는 인간의 고유성이며, 그것 없이는 완성 가능성도 없을 것이다. 언어는 감정 또는 격정을 야기시키거나 그것을 자극하는 상상력에서 탄생한다. 끊임없이 반복될 이러한 진술은 이미 『 인간 언어 기원론 』 의 서론 부분을 열고 있다. 〈 음성 언어는 동물과 인간을 구분한다.〉 2 장의 첫 단어들, 〈따라서 필요 욕구가 최초의 몸짓을 명령했고, 최초의 정념이 최초의 목소리를 끄집어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개의 계열이 그 윤곽을 드러냄울 보게 된다. 첫째, 동물성, 필요 욕구, 관심, 몸짓, 감각, 오성, 이성 등. 둘째, 인간성, 정념, 상상력, 음성 언어, ·자유, 완성 가능성 등 점차 이 항목들 사이에서 루소 텍스트 속에서 서로 연결된(이것 은 좀더 주도면밀하고 신중한 분석을 요청한다) 관계들의 복잡성 속 에서 이 두 개의 계열은 대리 보충성의 구조에 따라 상호 연관되 어 있다. 두번째 계열의 모든 이름은 대리 보충적 차이/지연의 형이 상학적 규정들이다. 따라서 그 규정들은 세심하고도 상대적인 수미 일관성과 더불어 정비되고 과거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들이다. 물론 그것은 위험한 차이/지연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리 보충 적 계열의 핵심 명사, 죽 죽음을 빠뜨렸기 때문이다. 또 죽음은 무 (無)이기 때문에 죽음과 관련된 것, 죽음에 대한 고뇌에 찬 예기 (豫期)를 생략했기 때문이다. 서로 중유적 대체 관계를 가지는 대 리 보충적인 일체의 가능성들은 위험 그 자체, 규정된 모든 위험의 지평 및 근원이자 모든 위협들이 예기되는 심연을 간접적으로 지 명한다. 따라서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완성 가능성 또는 자유

라는 개념이 죽음에 대한 지식과 동시에 설명되더라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인간의 고유함은 자유와 죽음의 긴박한 예기의 이중적 가 능성으로부터 선언된다. 인간적 욕망과 동물적 필요 욕구 사이의 차이와 여자에 대한 관계와 암컷에 대한 관계의 차이는 죽음에 대 한공포이다. 동물이 우주 속에서 알고 있는 유일한 선( 善 )은 먹는 것, 암컷, 그 리고 휴식이다 . 그것이 두려워하는 악은 고통과 배고픔이다. 나는 고통 이라고 말했지, 죽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동물이란 결코 죽 음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며 , 죽음과 그 공포에 대한 앎은 인간이 동 물의 조건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면서 터득한 최초의 획득물 중 하나였 기 때문이다.( 『 인간 불평등 기원론』, 143 쪽) 또한 아이는 〈죽음의 감정〉에 눈뜨면서 성인이 된다.( 『 에밀 .JI , 20 쪽) 만약 대리 보충적 계열을 따라 이동한다면, 상상은 죽음의 예기 와 동일한 의미망 체계에 속함을 알게 된다. 상상온 그 핵심에 있 어 죽음과 맺는 관계이다. 이미지는 죽음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거나 비규정의 상태로 남길 수 있다. 이미지는 하나의 죽음 또는 죽음은 하나의 이미지이다. 상상온 생명을 위해서, 그 지신의 고유한 재현전화로부터 스스로 감동을 유발시킬 수 있는 힘이다. 이미지는, 피표상체 현전성이 세계 속에서 스스로에게 굽힐 때, 또 생명이 자기 스스로의 결여로 귀결되듯이, 스스로에게 지신의 고유 한 대리 보충의 요구로 되돌려보낸다는 점에서만 재현전화할 수 있고, 피표상체에 표상체를 덧붙일 수 있다. 피표상체의 현전성은, 이미지라는 무(無) 자체에 첨가함으로써 성립되며, 그것의 고유한 표상체와 죽음 속의 박탈로부터 이미지를 예고한다. 그 주체의 고

유함은 이러한 표상적인 탈취 운동일 뿐이다 . 이런 의미에서 상상 력은 죽음처럼 표상적, 대리 보충적이다• 루소가 문자에서 노골적으 로 그런 특성들을 인지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상상력, 자유 , 음성 언어는 모두 죽음과 맺는 관계와 동일한 구 조에 속한다(예기보다는 차라리 관계라고 말해 두자. 죽 죽음 앞의 존재가 있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시간의 직선이나 지평에서 어느 정도 멀어진 미래의 관계가 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현전성의 구조이다). 어떻게 연민의 정과 타자의 고통을 자기 것으 로 동화시키는 것이 거기에 개입하는가? 2) 이를테면 상상력은, 그것 없이는 자연적 연민의 정이 자극받 을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루소는 『 인간 언어 기원론 』 에서 그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으며 , 스타로빈스키의 매우 신중한 표명이 함축하 는 것과는 반대로 변함 없이 다른 곳에서도 그 점을 말하고 있다. 루소의 시각으로는 자연적인 연민의 정은 끊임없이 오직 상상력만 이 잠깨우고 계시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자연적 감정이거나 생득적 미덕이다. 지나가면서 잠시 그 점을 주목해 보자. 루소의 연극 이 론은 표상 속에서, 상상이라는 직능과 더불어 자기 동화 능력(연민 의 정)을 소통시킨다. 만약 지금 루소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대 해서 공포라는 단어를 부여한다는(『인간 불평등 기원론 』 , 143 쪽) 점 울 염두에 둔다면, 한편으로는 공포와 연민의 정이라는 개념, 다른 한편으로는 비극적 장면, 표상, 상상력과 죽음이라는 개념들을 조 직화하는 모든 체계를 전체로서 취하게 된다. 따라서, 이 예에 관 해서는 상상력의 다의성을 이해하게 된다. 상상력은 연극적 표상의 장면과 공간을 개방시킬 때에만 비로소 동물성을 극복하고 인간적 정념을 야기시킨다. 상상력은, 그 가능성 자체가 완성 가능성의 개 념 속에 새긴 타락의 발단을 연다. 루소의 사상에서 결코 변하지 않은 도식은 따라서 다음과 같다.

연민의 정은 타고나는 것이지만, 그 순수함 속에서는 인간에게 고 유한 것은 아니며 살아 있는 유기체 일반에 속한다. 그것은 〈 너무 나 자연적이어서 동물들조차도 몇 개의 감지될 만한 징표들을 보 여준다.〉 이 연민의 정은 상상력과 더불어 인류에게 스스로 각성되 고, 정념, 언어, 표상에 접근하며, 다른 자아로서 타자를 동일시하 는 것을 만들어낸다. 상상력은 연민의 정의 인간적 생성이다• 그것이 바로 『 인간 언어 기원론 』 의 논지이다. 〈연민의 정이 아 무리 인간의 마음에 자연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움직이는 상상력 없이는 영원히 부동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상상력에 의한 활 성화 또는 현실화에 대한 호소는, 루소의 저작물의 도처에서 추적 할 수 있는 다른 텍스트들과 거의 모순이 되지 않는다. 죽 잠재성 으로서의 생득성 또는 잠재우는 잠재력으로서의 자연성에 관한 이 론이다 . 2 0 ) 루소의 시각으로는 물론 별로 독창적이지 못한 이론이지 만, 그것의 조직적 역할은 여기에서 필수 불가결하다. 그것은 자연 울 소여, 죽 실제적 현전이 아니라 예비 저장으로 생각할 것을 명 령한다. 이 개념 자체가 어리둥절하다. 그것은 숨겨진 활동성, 은 폐된 보관뿐만 아니라 미규정된 힘의 예비 저장으로도 규정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그 여분으로부터 힘을 끌어내는 상상은 다행스 러운 동시에 불길한 것이다 . 〈우리에게서 상상의 제국은 그런 것이 20) 데라테는 다음 사실을 상기시킨다. 〈뒤르켐은 …… 루소에게 있어서 잠재 적 기능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에 청신호를 울린 최초의 사람이다.〉 Le rati on alism e de R.ou sseau, 13 쪽. Durkheim , Le contr a t soc ial , hlsto i r e du livre , R. M. M. , Ja nv.- fe v . 1918 참조 루소의 상투적인 모순점들 대부분은, 모든 단절접들과 무엇보다 사회가 신과 관계를 끊는 (또 분절하는) 점들에서 하나의 이음새로 조작하는 잠재적 기능이라는 개 념에 호소함으로써 소거될 것이다. Derath e , R.ou sseau et la sci en ce po liti qu e de son tem p s , 148 쪽 참조 잠재성이라는 이 테마가 어디에서 나타나건, 너무 자주 곡해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오해는 생 득적 관념, 로크와 라이프니츠 또는 라이프니츠와 데카르트의 관계의 문제 한복판에 있다.

며, 그것의 영향도 그러하다. 그 상상으로부터, 미덕과 사악함뿐만 아니라 선과 악이 탄생한다 … …. 〉 ( 『 대화록 』 , 815-816 쪽) 만약 〈몇 몇 사람들이 마음에 위안을 주는 이러한 직능의 사용을 타락시킨 다면 〉 (위의 책, 같은 곳), 그것은 여전히 상상력 때문이다. 기호들 과 외관들의 직능인 상상력은 일체의 실제적이며 외부적인 영향에 서 벗어나면서 자기 자신을 타락시킨다. 그것은 타락의 주체이다. 그것은 잠재적 능력을 각성시키고 , 곧이어 그것을 위반한다. 그것 온 예비 저장되었던 힘을 세상에 드러내지만 그 힘을 넘어서는 것 울 보여주고, 그것을 〈초월하면서〉 그 무기력함을 의미한다. 그것 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활성시키지만 욕망과 힘 사이의 차이를 각인시킨다. 만약 우리의 만족 한도 능력을 넘어서기를 갈 망한다면, 이 잉여와 차이의 기원은 상상이라고 명명된다. 이 점은 우리에게 자연 또는 원시성의 기능을 규정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 것은 예비 저장과 욕망 사이의 균형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균형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균형을 깨는 상상력에 의해서만 각성될 수 있고 그 예비 저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불가 능함(자연의 다른 이름)은 따라서 일종의 한계로 남아 있다. 따라 서 루소에 따르면 윤리, 〈인간의 지혜〉, 〈진정한 행복의 길〉은 이 한계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데 있으며, 〈모든 능력에서 욕망의 과잉을 줄이는 데〉 있다. 최고의 선을 얻기 위해 모든 수고를 다하는 자연은 먼저 이러한 방 식으로 인간을 만들었다. 처음에 자연이 안간에게 부여한 것은 자기 보전을 위해 필요한 욕망과 그 욕망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능력뿐 이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필요 욕구에 따라 발달되도록 영혼의 깊숙 한 곳에 예비 저장으로 가져다 놓았다. 인간의 능력과 욕망이 균형을 유지하며 그가 불행하지 않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원시 상태이다.

이러한 잠재 능력이 활동을 개시하자마자 모든 능력 중에서도 가장 활발한 상상력이 각성하여 다른 능력을 앞질러간다. 이 상상력은 그것이 선이 되 건 악이 되건 우리 가능성의 한계를 넓혀주고, 그 결과 욕망을 충족시 킬 수 있다는 희망에 의해 욕망이 자극되고 조장된다. 하지만 바로 눈 앞에 보이는 물건도 그것을 잡기가 무섭게 달아나버린다……. 인간은 이런 식으로 해서 목표한 지점에 도달도 하기 전에 기진맥진한다. 그 리고 우리가 쾌락을 더 얻으면 얻을수록 행복은 그만큼 우리로부터 멀 어져 간다. 반대로 인간이 자연적인 조건 속에서 머무를수록, 그의 능 력과 욕망 사이의 차이가 줄어들어 결과적으로 더욱더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다… ••. 현실 세계는 한계점이 있지만 상상의 세계는 무한대이다. 현실 세계를 확대시킬 수 없으므로, 상상의 세계를 줄이자. 왜냐하면 우리를 진정으로 불행하게 하는 모든 고통은 바로 이 두 세계의 차이 에서 오기 때문이다.(『에밀.!J, 64 쪽. 강조는 필자의 것임) 이 인용문에서 다음 사실을 주지했을 것이다. 첫째, 힘과 욕망 사이의 차이의 기원인 상상력은 현전 또는 환 희 속에서 (또는 그것의) 차이/지연으로 규정된다. 둘째, 자연과의 관계는 부정적인 거리라는 말로 정의된다. 문제 의 관건은 자연으로부터 떠나는 것도, 다시 결합하는 것도 아니며 〈그것의 멀어짐〉을 줄이는 데 있다. 셋째, 다른 잠재적인 능력을 자극하는 상상력은 그 자체가 일종 의 잠재적 능력이다. 〈능력들 가운데 가장 활동적인〉, 결과적으로 자연을 위반할 능력 자체가 자연 속에 있다. 그것은 자연적인 핵심 에 속한다. 더욱더 그것은 예비 저장을 예비 저장으로 남긴다는 사 실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자연-속의-존재는 대리 보충과는 생 소한 존재 방식을 가진다. 자연 속에서 자연의 과잉과 동시에 그 결여를 지칭하면서말이다. 바로 안에 있는 존재의 의미에 관해서,

우리는 여기서, 많은 예들 가운데 하나로서, 고전 논리의 지각 변 동을식별한다. 〈 모든 〉 능력들 〈 가운데 가장 활동적인 능력 〉 인 상상력은 다른 어 떤 능력에 의해서도 각성될 수 없다. 루소가 〈 그것이 각성된다〉고 할 때, 그것은 심사 숙고된 의미에서이다. 상상은 홀로 자신을 탄생 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한다• 왜냐 하면 그것은 상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상은 자기에게 생소하거 나 앞서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실제적인 것〉 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순수한 자기 정서 유발이 다. 그것은 자기 정서 유발로서 차이/지연의 다른 이름이다 .2 1)

21) 물론 그 장소는 도덕성에 대한 장( 章 )에서와는 다르게 칸트 또는 루소를 연상시키게 하는 성찰로부터 부각된다. 시간화의 운동과 상상력의 도식성 울 소통시키는 연쇄 고리, 순수한 감수성과 자기 자신에 의한 현재의 자기 정서 유발, 하이데거의 책 읽기가 K 타it et le pro bleme de la mete r ph ys i q ue 에서 강한 어조로 반복한 모든 것은 신중하게 인지된 노선에 따 라 루소의 땅으로 다시 유도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능성으로부터 루소는 인간을 지칭한다. 상상력은 동물을 인간 사회에 등록시킨다. 그것은 동물을 인간종에 접근시킨다. 우 리가 출발했던 『 인간 언어 기원론』의 문단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 는다. 〈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는 이는 자기 자신만을 느낄 뿐이다. 그는 인간종 가운데 혼자 남아 있다.〉 이 고독 또는 인간종에 대한 무소속은, 고통은 말이 없으며 스스로에게 닫혀 있다는 점에 기인 한다. 이 점은 한편으로는 고독이, 연민의 정의 각성에 의해 타자 로서 타자의 고통에 열릴 수 없음을 뜻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것은 자신을 죽음으로 향하게 할 수 없음을 뜻한다. 동물도 연민의 정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타자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그 고통이 죽음으로 이행하는 것도 상상하지 못한다. 바로 거기에 유일하면서 도 동일한 한계가 있다. 타자 관계와 죽음에 대한 관계는 유일하고

동일한 개방성이다. 루소가 동물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결여된 것 은, 자기의 고통을 타자의 고통과 죽음의 위협으로서 체험할 수 있 는 능력이다. 대리 보충의 논리 속에 숨은 관계에서 생각된 잠재성 개념(모든 힘과 행동의 문제 설정처럼)은, 아마 특히 루소에게서, 그리고 형이 상학 일반에서 생성을 체계적으로 생산과 발전, 진화 또는 역사로 미리 규정하는 동시에 혼적의 대체에 잠재적 힘의 완수를, 순수한 놀이 대신에 순수한 역사를, 그리고 위에서 지적했듯이, 단절 대신 봉합으로 대신한다. 바로 대리 보충성의 운동은 이러한 양자 택일 에서 벗어나 그것을 사유하게 할 수 있다• • 셋째, 루소는 상상력에 의해, 죽 표상과 반성에 의해 연민의 정 의 각성을 상기시킨다. 이때 그것은 그 단어들의 이중적 의미에서, 사실은 유일한 의미에서 이루어진다. 똑같은 장에서, 루소는 상상 력에 의한 연민의 정의 현실화에 앞서서, 인간이 악의에 차 있고 호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금한다. 스타로빈스키의 해석을 상기 해 보자. 『인간 언어 기원론』에서, 루소는 반성 없는 동정심의 비 약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만인에 의한 만인의 전쟁이라는 홉스 의 생각을 지지하는 것 같다. 그들은 박애라는 어떤 공통된 관념으로도 연결되지 않았다. 또한 힘 이외에는 어떤 심판도 없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적이라고 믿었다. 땅 위에 내팽개쳐진 인간은 인간이란 유에 좌지우지되어 한 마리 광폭 한동물이 되어야했다. 루소는 〈그들이 서로가 서로의 적이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는 〈그들이 서로가 서로의 적이라고 믿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뉘앙스를 고려해야 할 것이며, 의당 그렇게 해야 할 권리가 있다고

본댜 원시적 적대성은 원시적 착각에서 탄생한다. 이 최초의 견해 는 고립, 취약함, 완전한 고독으로부터 탄생하는 방황하는 믿음에 기인한다. 그것이 단순한 견해이며 환상이라는 것은 다음 세 개의 문장에서 바로 나타나거니와 우리는 그것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러한 견해를 갖게 된 것은 연약함과 무지 때문이었다 . 아무것도 알지 못한 그둘 은 모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둘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공격하고 있었다. 혼자 내팽개쳐진 사람 •• ….(강조는 필자의 것임) 따라서 광폭함은 호전적인 것이 아니라 공포에 질리는 것이다. 특히 그것은 전쟁을 선포할 능력이 없다. 그것은 동물(맹수)이며, 상상력에 의해 연민의 정을 통해 각성될 수 없었기 때문에 사회성 과 인간종에 참여할 수 없는 고립된 유기체의 성격이다. 강조하거 니와 이 동물은 〈자기가 두려워하는 다른 동물들에 대해 해를 끼 칠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공포와 연약함은 잔인 무도함의 근 원이다.〉 잔인 무도함은 긍정적인 악의는 아니다. 해를 끼칠 준비 는 그 효시를 타자에게서만, 죽 타자가 나에게 해를 끼칠 준비가 된 것 같은 착각적인 표상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점은 상상력과 이성은 공격성의 경제에서 조직화될 따름이라는 자연 전쟁에 대한 홉스 이론과 닮은꼴을 배제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아닌가? 그러나 루소의 텍스트는 더욱더 명쾌하다. 『인간 언어 기원론』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문단은 또 다른 문단 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잠자고 있는 연민의 정의 계기를, 호 전적인 악의의 계기, 즉 〈홉스적〉 계기로 파악하는 것을 금기시한 다. 어떻게 루소는 실제 잠자고 있는 연민의 정의 계기(현실적이든 신화적이든 최소한 여기서는 문제가 안 된다)와 구조적 요인을 기술

하는가? 그에 따르면, 언어, 상상, 죽음과의 관계 등이 여전히 예 비 저장으로 남는 순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는 말하기를, 이 순간에는 〈 깊은 반성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자비를 베풀지 못하며, 정당한 사람도, 정이 있는 사람도 될 수 없 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부당하거나 인정 사정 없 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단순히 이러한 가치 대립을 넘어 서 자기를 지킬 뿐이다. 왜냐하면 곧 이어 루소는 다음과 같이 이 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악의에 찬 존재도, 앙심을 품은 사람도 아니다.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만 을 느낄 뿐이다. 인간종 가운데 그는 홀로 있을 뿐이다.〉 이 〈상태〉에서, 홉스에게서 보이는 대립들은 의미도 가치도 없 다. 정치 철학을 좌우하는 평가 체계는 결코 작동될 가망이 없다. 곧 우리는 어떤 요소 속에서(중립적이고, 노골적이며, 벌거숭이로) 그 체계가 작동되는가를‘ 더욱더 잘 파악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선의 또는 악의, 평화 또는 전쟁 등을 언급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언급은 매번 참인 동시에 거짓이 될 수 있는, 즉 변별 성 없는 이야기이다. 루소가 까발리고 있는 것은, 모든 인종켓}치 적 개념들, 그 객관성의 장 또는 가치적 체계의 중립적 기원이다. 따라서 역사, 문화, 사회 등에 대한 고전 철학을 종횡하는 모든 대 립을 중립화시켜야 한다. 이러한 중립화 또는 환원에 앞서서, 정치 철학은 나중에 얻거나 새롭게 가세된 증거의 소박함 속에서 진행 된다. 따라서 그것은 끝없이 〈자연 상태에 대해서 추론하고, 거기 에 사회에서 파악된 여러 관념들을 이식시키려는 사람들의 실수를 범할〉(『인간 불평등 기원론』, 146 쪽) 위험이 있다. 『인간 언어 기원론』이 조작하는 환원에는 특수한 스타일이 있다. 루소는 여러 대립을 말살시키면서 그것을 중립화시킨다. 그러는 동 시에, 그 모순적인 가치들을 확인하면서 그것을 말살시킨다. 이 절

차 방식은 수미 일관적이고, 단호하고 정확하게 9 장에서 사용된다 . 바로 거기서 여러 국가의 선조들 가운데에서 볼 수 있는 모순들이 나타난다 . 그처럼 자연적인 것과 그처럼 비인간적인 것, 그처럼 광폭한 풍습과 그처럼 부드러운 마음…… 이 야만성의 시간들은 황금 시대였 는데, 그 이유는 인간들이 단결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떨어져 있 었기 때문이다…… . 말하자면. 인간들은 만남 속에서 서로 공격했지만 매우 드물게 만났다. 도처에서 전쟁 상태가 지배했지만 모든 땅은 평 화로웠다. 〉 2 2 )

22) 따라서 『인간 언어 기원론 』 은 황금 시대뿐만 아니라 태초의 전쟁도 믿게 만들지 않는다 . 이 두 가지 관점에서 『 인간 언어 기원론 』 은 루소의 주요 논지와 일치한다. 제네바의 수고에서 (1756 년으로 소급될 『 사회 계약론』 의 최초 판본) 루소는 〈황금 시대는 언제나 인간이란 종과 무관한 상태였다〉 고 적고 있다.

두 가지 술어 가운데 어느 하나를 특권시하는 것, 가령 전쟁 상 태만이 진정으로 지배적이었다고 믿는 것이 바로 홉스의 실수였다. 홉스는 이상하게도 〈서로가 서로의 적이라고 생각했던〉 최초의 〈 인간들 〉 에 대한 환상적 〈견해〉를 반복한다. 여기서도 역시 『인간 언어 기원론 』 과 『 인간 불평등 기원론』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다. 『 인간 언어 기원론 』 에서 조작된 환원 작업은 『인간 불평등 기원 론 』 속에서 정확히 홉스를 비판하는 가운데 확인된다. 홉스를 비판 하는 이유는, 그가 너무 성급히, 인간이 자연스럽게 연민의 정에 의해 각성하지 못하며 〈박애란 어떤 공통된 관념에 의해서도 연결 되지 않으며〉, 따라서 인간은 애초부터 사악하고 호전적이라고 결 론을 내렸다는 점이다. 우리는 홉스가 해석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인간 언어 기원론』을 읽을 수 없다. 우리는 악의에서 비호의를 결 론지울 수 없다. 『인간 언어 기원론』은 그 점을 밝히고 있고 , 『인

간 불평등 기원론 』 은 그 점을 확인한다• 후자가 전자 뒤에 왔다고 가정한다면말이다. 홉스처럼, 인간은 어떤 호의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선천적으로 악 질이며, 덕을 모르기 때문에 사악하다고 결론짓지 말자. 홉스는 야만인 들에게 (법률가들이 주장하듯·) 그들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 (그 자신이 주장하듯) 동시에 그들의 능력의 남용을 막아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따라서 야만인들은 호의적이라는 것이 무엇인 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악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야 만인들이 악한 짓을 못하게 하는 것은 계몽의 발달도 아니고 법의 제 동도 아니며 정념의 평정과 사악에 대한 무지이기 때문이다 . 2 3 )

23) 153-154 쪽. 또한 152 쪽과 쟈견 상태에 대한 토막글을 참조할 것. 〈인간 들이 최초의 순진함을 간직하는 한, 그들은 자연의 목소리 이외에는 다른 안내자가 필요 없었다. 그들이 악하게 되지 않는 만큼, 그들은 선하게 되는 것이 면제되었다•〉 (476 쪽)

우리는 다른 지표들 가운데서도 연민의 정의 경제는 『인간 언어 기원론』에서 시작해 루소의 다른 대작들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 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 연민의 정이 상상력과 반성에 의해 각 성될 때, 감각적 현전이 그 이미지에 의해 초과될 때, 우리는 타자 가 느끼고 고통받는다고 상상하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 고 단순히 타자의 고통 자체를 느낄 수는 없다. 또 그래서도 안 된 다. 루소가 정의하는 연민의 정은 자기 정체 파악 운동이 단순하며 전적이라는 점을 배제한다. 표면상으로 두 가지 이유로, 실제로는 동일한 심층적 이유 때문에 그렇다. 문제의 핵심은 모종의 경제이 다. 첫째, 우리는 직접적으로 타자의 고통을 느낄 수도 없으며, 그래 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기 동일화 또는 내성화는 위험하

고도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연민의 정을 각성시키는 상상력, 반성, 판단은 그 힘을 한계짓는 것이며, 타자의 고통에 일 정한 거리를 둔다. 이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며 타자를 동정하 지만 자신을 보호하며 자기의 능력 내에서만 위험을 감수한다. (연 극 표상 이론과 소통시킬 수 있는) 이 원리는 『 인간 언어 기원론 』 과 『 에밀 』 에서 분절되었다. 타자 관계의 역설은 거기에서 분명히 언술 된다. 타자와 자기를 동일시할수록 타자의 고통을 더욱더 잘 느낄 수 있다. 우리의 고통은 곧 타자의 고통이다. 타자의 고통은, 있는 그대로, 타자의 고통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일정한 비동화(非同 化) 속에서만 진정한 동화가 있을 수 있다. 『인간 언어 기원론』은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우리는 연민의 정에 감동되도록 우리를 유도할 것인가? 우 리를 우리 밖으로 이동시켜 고통받는 존재와 동화시키면서부터이다. 우리는 그가 고통받는다고 판단하는 만큼 고통받을 뿐이다. 우리가 고 통받는 것은 우리에게서가 아니라 그 존재 속에서이다• 『에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에밀은 다론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분담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 분담은 자발적이면서도 차분한 것이다. 에밀은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서 가지는 연민의 정과 동시에 그런 아픔에서 자신이 면제되었다 는 행복을 만끽한다. 그는 우리를 우리 자신 너머로 확장시키고, 또 우 리 행복에 필요 이상의 활동을 하게끔 하는 이러한 원기 왕성한 상태 에서 자신을 느낀다. 타자의 아픔을 동정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그것을 알아야 하겠지만 그것을 느낄 필요는 없다 .(270 쪽)

따라서 우리는 타자의 동화에 의해 우리 자신이 파괴되도록 방 치해서는 안 된다. 연민의 정과 도덕성의 경제는 언제나 자기 한계 속에 담겨져야 하며, 이 후자만이 타안의 선을 우리에게 밝혀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천성적인 선함을 말하는 다음 잠언, 〈남 이 너에게 시키기를 원하는 것처럼, 남들에게도 그렇게 해라 〉 는 또 다른 잠언에 의해 완화된다. 그 잠언은 덜 완벽하지만 앞의 것보다 는 유익하다. 〈가능한 한, 타자에게 최소한의 피해를 주면서 네 선을 행하라.〉(『인간 불평등 기원론』, 156 쪽) 전자 〈대신〉 후자가 제기 된다. 둘째, 내면화에 의한 동화는 도덕적이지 못한 것이다. 우선, 그것은 고통을 타자의 고통으로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따 라서 도덕성, 타인에 대한 존경은 일정한 비동화를 전제로 한다• 타자의 관계로서 연민의 정의 역설, 루소는 그것을 상상력과 시간, 즉 비교의 역설로 나타나게 한다• 루소의 사상에서 대단히 중요한 그 개념은 『인간 언어 기원론』 9 장의 중심에 놓이며, 연민의 정을 설명하는 데 개입한다. 타자의 고통으로 고통을 경험할 때, 상상력은 우리를 현전 속에 서 일정한 비현전으로 개방시킨다는 점에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타자의 고통은 비교에 의해, 지나간 또는 앞으로 올 우리의 비현전 적 고통으로 체험된다. 아울러 연민의 정은 상상력, 시간, 타자를· 연결짓는 이 구조 밖에서는 비현전을 향한 유일하면서도 동일한 개방으로서 불가능해질 것이다. 타자의 아픔을 측은하게 여기기 위해서는 그 아픔이 무엇인지 알아 야지 그것을 느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고통받을 때, 또는 고통받음 을 두려워할 때, 사람들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측은하게 여긴다• 하지만 고통받을 때 그들은 자신만을 측은하게 여길 뿐이다.(『에밀』, 270 쪽)

약간 위에서, 루소는 기억 또는 예고 , 상상력, 비지각 일반에서 연민의 정과 시간 경험의 통일성을 밝혔다. 우리의 불행에 대한 육체적 감각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제한되어 있다 . 그러나 기억울 통해 우리는 그 연속성을 느끼고 상상 력을 통해 그 아픔을 미래까지 확장시키며, 참으로 그것을 두려워한다. 이런 이유에서 인간의 고통보다 동물의 고통에 대해 우리는 더 가혹한 것이다. 비록 공통 감각이 우리와 동물을 동화시킨다 하더라도말이다. 아무도 마구간에 있는 수레 끄는 말을 측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 냐하면 그 말이 건초를 뜯어먹으면서, 얻어맞았던 채찍질이나 앞으로 올 고1 곤함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짐작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264 쪽) 다음, 순수하고도 단순한 동화는 비도덕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험적인 채로 남아 있으며 개념, 보편성, 형식성의 요소에 서 야기되지 않기 때문이다. 도덕성의 조건은 유일한 존재의 유일 한 고통을 통해서, 그 경험적 현전과 존재를 통해서, 인류에게 측 은지심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연민의 정은 부당하게 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상상력과 시간성은 개념과 법의 왕국을 연다 . 루소에게 개념(그는 그것을 비교라고도 부른다) 은 시간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성싶다. 시간은, 헤겔이 말 하듯이, 거기 있음이다. 연민의 정은 음성 언어나 표상과 동시에 오는 것이다. 연민의 정이 연약함으로 퇴색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그것을 일반 화하고 인류 전체로 확장시켜야 한다. 곧 그것이 정의와 합치되는 만 큼 사람들은 연민의 정의 힘을 빌린다. 왜냐하면 모든 미덕 중에서 정 의는 인간 모두의 선(행복)에 가장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이성과 우

리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서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보다는 인류 모두에 게 연민의 정이 있어야 한다. 악질적인 인간들에 대해 연민의 정을 품 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극도의 잔혹함이다 .(303-304 쪽 )2 4) 24) 연민의 정에 대한 이러한 원칙의 통일성은 다음 네 단락을 통해 다시 확 인된다. 〈연민의 정이란, 아무리 인간의 마음에 자연적이라 하더라도 상상 력에 의해 조종되지 않으면, 영원히 부동의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 는 어떻게 연민의 정이 우리 자신을 감동시키도록 할 수 있을까? 우리를 우리 자신 밖으로 옮겨놓아야 가능하다 . 우리와 고통받는 존재를 동일시하 면서, 우리는 그가 고통받는다고 판단하는 만큼 고통받는다… … . 우리가 고통받 는 것은 우리에게서가 아니라 그 존재 속에서이다 .〉 (『인간 언어 기원론 』 ) 〈이렇게 해서, 자연 질서에 따라 심금을 울리는 최초의 감정인 연민의 정 이 탄생한다. 감수성이 있고 정이 있기 위해서는, 아이는 그가 고통받았던 것으로 고통받고, 그가 느낀 괴로움을 느끼는 그와 닮은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또한 그가 생각할 수 있는 다른 고통을 느끼는 사람에 대해서 마치 그것들을 자신도 느낄 수 있는 것처 럼 말이다. 실제로 만약 우리를 우리 자신 밖으로 이동시키면서, 그리고 고통받는 동물과 우 리를 동화시키면서, 이를테면 그롤 위해 우리 존재를 떠나는 것이 우리 자 신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연민의 정으로 감동될 것인가? 우리 는 그가 고통받고 있다고 판단하는 만큼 고통받는다. 우리가 고통받는 것 은 우리들에게서가 아니라 그에게 있어서이다. 이렇듯 그의 상상력이 활성 화되고 그를 자기 자신 밖으로 옮기기 시작할 때만 감수성이 일어난다.〉 ( 『 에밀.!I, 261 쪽) 〈이 이동이 획득된 지식을 전제로 함은 염두에 둘 일이다. 내가 어떤 관 념도 갖지 못하는 아픔들을 어떻게 상상한단 말인가? 타인이 고통받는 것 을 보면서, 만약 그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그와 나 사이에 공통된 것이 있다는 점을 모른다면, 어떻게 내가 고통스러워할 수 있을까? 한 번도 성찰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자비로 울 수도 없고, 정의로울 수도 없고, 정조차 가질 수 없다. 그는 악질적일 수도 없고 앙심을 품을 수도 없 다.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느낄 뿐이다. 그는 인간 이란 유(類)에서 홀로 떨어진 존재이다.〉( 『 인간 언어 기원론』) 〈자연 질서 속에서 지속시켜 나갈 적당한 수단을 설명한다는 것은, 인간 이 자연 질서 속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를 충분히 일러주는 것이다. 그의 감수성이 개체에 국한된 채로 남아 있는 한, 그의 행동에는 도덕적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자기 자신을 벗어나서 그 감수성이 확장되기 시작할 때에만 버로소 가능하다. 그는 먼저 감정을 취하고, 곧이어 그를 진 정으로 인간으로서 종의 통합적인 부분으로서 성립시키는 선과 악의 개념 들을 취한다.〉( 『 에밀 』 , 257 쪽)

따라서 이 점에서는 루소 사상의 변화 발전은 없다. 『인간 언어 기원론』의 조숙함 또는 철학적 선행성을 결론짓기 위해 내적인 논 증을 끌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외적 가설들의 연역이 그만큼 해방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때가 되면 다른 내적 문제들을 제기할 가능성을 남겨둔다 하더라도말이다. 최초의 토론과 『인간 언어 기원론』의 구성 10 외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 우리는 뒤클로의 인용문뿐만· 아니라 루소 자신이 한 몇몇 선언을 제시하고 있다. 그 예로 무엇보다도 『고백록』의 중심 단락을 손꼽을 수 . 있다. 그 단락에서 우리는 최소 한 다음과 같이 결론지울 수 있을 것 같다. 루소의 원래 구상 속에 서는 본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일개 부록이었던 『인간 언어 기원론』은 어떤 경우든 음악에 대한 최초의 글과는 결정적으로 분 리된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1761 년에 씌어진 글을 보자. 이 두 권의 책과 때때로 집필했던 『음악 사전』뿐만 아니라 그 중요 성이 덜한 다른 글들도 썼다. 그것들은 모두 따로 분리되거나 내가 언 젠가 시도한다면, 앞으로 나올 일반 총론과 더불어 출판될 것이다. 그 대부분이 뒤 페루의 손아귀에 수고 상태로 있는 이 글들의 핵심은 『인 간 언어 기원론』이다. 나는 그것을 말레르브 씨와 로렌지 기사에게 읽 게 했으며 그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이 모든 저작물이 하나로 모이면 최소한 팔천에서 만 프랑 정도의 값어치가 있을 것이며, 내 몸뿐만 아 니라 테레즈의 몸까지 종신 연금으로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시골 깊숙한 곳에 가서 함께 살 것이다…… (560 쪽)

말레르브는 『 인간 언어 기원론 』 을 개별적으로 출판할 것을 루소 에게 권고했다 . 25) 이 모든 일이 1761 년 『 에밀 』 출판 당시에 일어 난다•

25) 플레야드 판에 실린 Co nfe ss i ons 의 편집지들이 단 주 3) 과 4) 및 560 쪽을 참조할 것 11

따라서 외적인 관점에서 보면, 문제는 간단해 보인다. 거의 반세 기 전, 마송이 쓴 1913 년의 한 논문 26) 에서 그 문제는 끝났다고 생 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논쟁은 에스피나스가 쓴 논문을 통해 다 시 제기된다 . 27) 그는 루소 사상의 내부에 있는 모순점의 파악에 집 착하면서 이미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을 『 인간 언어 기원론 』 , 심지 어 『 백과 사전 』 의 정치, 경제 기사 항목(그 기사 항목은 연대 측정 및 그것과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의 내적 관계 등 ·유사한 문제들을 제 기한다)과 대립시킬 것을 강조했다. 이렇게 해서, 예컨대 관념적 구조 또는 발생을 기술하기 위해 〈모든 기정 시실을 논의함으로 써〉 시작되는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은 『인간 언어 기원론 』 과 양립 불가능하게 된다. 그것은 r 창세기」에 호소하며, 아담, 카인, 노아를 명명하고, 역사뿐만 아니라 신화의 내용과 같은 특정한 사실적 내 용을 다루고 있다. 물론 루소가 이 사실적 내용을 다루는 방법을 조심스럽게 연구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 같은 시실적 내용을 독 서 색인 또는 유도적인 예증으로 사용하면서 루소가 이 예증들을 기정 사실로서 중립화시키고 있지 않는가의 여부를 조심스럽게 연 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특히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노트에서) 수행하는 바이기도 하다. 아마도 『 인간 언어 기원론 』 은 앞서 언급한 노트 중에서 자기 자리를 잡도 록 계획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26) Masson, Qu esti on s de chronolog ie rousseau ist e , Annales Je an- Ja cqu es Rousseau IX(1913). 37 쪽. 27) Espi na s, Revue de J'en seig ne ment su 접ri eur(1895).

이러한 모순이 무엇이든 간에, 에스피나스는 스타로빈스키처럼, 『인간 언어 기원론 』 의 선행성을 결론짓지는 않았다. 그는 뒤클로의 인용문을 참작하면서, 정반대의 결론을 이끌어냈다. 즉 『인간 언어 기 원론 』 이 『인간 불평등 기원론』보다 나중에 나왔다는 것이다 .2 8) 28) 그것은 또한 보두엥 H. Baudou i n 의 결론이었다 (La vie et Jes reuvres de Je an-Ja cqu es Rousseau, Paris , 1891). 우리는 『 인간 언어 기원론』 에 할애된 부분에서 루소에 대한 그의 책 읽기. 특히 『인간 언어 기원론 』 에 대한 독법이 어떤 것이었나를 볼 수 있으며, 거쳐야 할 여정을 가늠할 수 있댜

할 만한 예이다.〉 (T. I. 323-324 쪽)

그런데 랑송은 이 해석을 반박한다 . 29) 하지만 똑같은 가설에서 출발한다. 즉 『 인간 언어 기원론 』 과 주요 작품 사이의 불일치이다• 이 토론의 진정한 핵심을 구성하고, 그것을 활성화하는 철학적 이 유들로 인해, 랑송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성숙성〉 30) 을 가진 루소 사상의 통일성을 구하고자 원한다. 따라서 그는 유년기의 작품들 가운데 『 인간 언어 기원론 』 을 넣 는 것을 거부한다.

29) Lanson, L'un ite de la pe nsee de Je an-Ja cq u es Rousseau, Annales VIII(l912), 1 쪽 . 30) 〈자, 루소의 저작은 나에게 이렇게 보인다. 매우 다양하고, 소란스럽고, 온갖 종류의 파동으로 소용돌이친다. 하지만 어떤 순간부터, 연속적 방향 속에서 그의 정신은 연속적이고 지속적이다 … ….〉 랑송은 〈몽상가이며 수 줍어하는〉 작가 또는 인간과, 〈그의 인생과 독립되어 있고〉 〈그의 내적인 속성들〉과 〈혁명적인 폭발물의 장치로〉 소용돌이치면서, 〈사회적 전제주 의〉뿐만 아니라 〈무정부 상태〉까지 치닫는 루소의 저작을 대립시킨다. 〈이 러한 저작과 인간의 대조(원한다면 모순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를 굳이 감 추려 해서는 안 된다 . 왜냐하면 이것은 루소 자신이기 때문이다.〉 다~ 사 실을 분명히 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랑송의 논의에서 관심을 끄 는 것은, 인간과 저작 사이의 〈모순〉에 대한 〈비평적〉 폭로가 고집스럽게 감추려고 하는 것이다. 마음속의 분화를 양보하면서, 〈루소 자신〉이라는 말 로 감추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서, 언제 〈이것은 루소 자신이다〉라 는 명제에 대답하는 무엇인가가 있음에 틀림없다고 확신하는가?

『 인간 언어 기원론 』 은 확실히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과 모순된다. 그 러나 어떤 증거에 근거해서, 에스피나스는 전자를 연대기적으로 후자 뒤로, 또 그것과 가깝게 위치시키는 것인가? 1754 년에 나온 뒤클로의 책에서 루소는 어떤 인용문을 뽑고 있는가? 더구나 『 인간 언어 기원 론 』 이라는 텍스트는 최소한 루소에 의해 두세 번 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마당에, 그의 논증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뒤클로의 인용들은 단 지 이러한 반복들 중의 하나로 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내 입장에서는

몇 가지 실증적인 지표에 근거에서 『 인간 언어 기원론 』 은 루소의 체계 적 시 각 이 형성되지 않았던 시절에 나온 것이며, 그것의 본래의 제목 ( 『 멜로디 원칙에 대한 시론 』 ) 아래 『 하모니 원칙의 증명 .!l 이라고 명명 된 라모의 책에 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질료와 폭에서 『 인간 언어 기원론 』 은 콩디악의 『 인간 지식의 기원에 대한 시론 』 (1746) 과 『 귀머 거리와 벙어리에 대한 디드로의 편지 .!l (1750-1751) 에서 찾 아볼 수 있 는 것 과 동일한 사상 적 조류에서 나온다. 따라서 나는 기꺼이 루소의 『 인간 언어 기원론 』 의 집 필을 늦어도 1750 년, 첫번째 『 인간 불평등 기 원 론 』 의 집필과 그 성공 사이로 위치시킬 것이다. 뒤클로의 인용문을 나중에 삽입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비록 실제로 그것이 그렇다 하더라도, 『 일반 문법에 대한 주석 』 의 독서 는 『 인간 언어 기원론 』 의 전 무분에 상당히 깊은 흔적을 남겼고 , 또 큰 영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콩디악과 디드로의 관계에 대해 서는이 책 한 권으로는 한계가 있다 . 그런 이유로 해서, 외적 양상의 한계 긋기가 어려운 연대기 문 제에 대해서, 마송이 마련한 랑송에 대한 답변은 설득력이 있어 보 인다 .31 ) 우리는 긴 단락 하나를 뽑아내야 할 것 같다.

31) 그것은 랑송의 견해였는데. 나중에 그는 마송의 의견에 합류하고 만다.

랑송의 논증을 상기하면서, 마송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이러한 논증은 매우 능수 능란하며 대체로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랑송은 그것을 루소 자신과 〈모순되게〉 보이지 않으려는 의도 속에서 만 제시할 뿐이다. 만약 『 인간 언어 기원론 』 이 『 인간 불평둥 기원론』 과 〈모순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처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것을 알겠는가? 나는 여기서 『 인간 언어 기원론』과 『 인간 불평동 기원론 』 의 내적인 관계를 검토할 의향이 없다. 내 견해로는, 그 〈모순〉은 랑송이

그 두 권의 저서를 비교해 판단하는 것만큼 〈 확실하지 〉 않다. 나는 두 가지 외적인 언급으로 국한하겠지만 그것들은 나에게 결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첫째, 『 인간 언어 기원론 』 의 수고는 일련 번호 N° 7835 로서 여 전히 뉴샤텔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규격 150 X 230mm 의 가제본된 다섯 권의 노트로 청색의 가는 비단끈으로 묶여 있다). 명필의 글씨체 로, 분명히 인쇄를 목적으로 씌어졌으며, 그 첫 쪽에는 〈 제네바 시민 루소 씀〉아라고 적혀 있다. 그것은 아마도 1761 년 루소가 베낀 사본일 것이다. 그때 그는 한순간 〈교활하게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는 라모 〉 (1761 년 9 월 25 일의 r 말레르브에게 보내는 편지」)에게 응답하기 위해 이 책을 사용할 것을 고려했다. 앞으로 보듯이, 십중팔구 모티에에서 그는 이 필사본을 다시 취해서 그것을 수정하고, 첨가 또는 교정하고 있었음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잉크와 글씨체가 전혀 다르 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 언어 기원론 』 을 연구한다면, 이 이본들은 지 적될 가치가 있을 것이다 .3 2 ) 하지만 나는 우리에게 연대기적 정보를 알 려주는 교정들만을 취할 것이다. 1761 년 필사본에서, 그 텍스트는 일 종의 총체를 형성한다. 그것은 한 편의 주제 논문일 뿐이다. 장별로 나 뉜 것은 모티에의 수정본에서 도입되었다. 따라서 그 책의 마지막 줄 은 20 장뿐만 아니라 『인간 언어 기원론』 전체에 적용된다. 〈나는 이 피상적 성찰들을 끝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나에게 그것을 암시한 과정에 의해 좀더 심오한 성찰을 탄생시킬 것이다. 한 민족의 성격. 풍 32) 특히 7 장에 매우 긴 주석이 첨가되었다는 점과 6 장 (S' il est pro bable qu' Homere ait SU ecrir e ) 전체가 상당 부분 개작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첫번째 집필에서 루소는 호머가 문자를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간 주했다 (2 9- 30 쪽 du mss). 그의 텍스트를 다시 읽으면서 그는 이 문장을 지웠고 여백에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주의할 것 . 이러한 언급은 바보 같 은 생각이며 제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리아드 』 속의 벨레로폰 이야기는 이미 작가가 살았던 시대에 문자를 사용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호머의 이 책이 문자로 씌었다기보다는 노래로 불렀다는 사 실을 배제하지 못한다.〉(마송의 노트 및 수고 검토는 마송이 암시하려 했 던 것보다 덜 풍성한 것처럼 보인다)

속, 관심거리가 그 민족의 언어에 대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역사적 사 실 속에서 관찰하고 예증을 보여주는 것은 지극히 철학적인 검토 자료가 될 것이다… ••. > 이 문장은 뒤클로의 『 일반 합리적 문법에 대한 언급 들』 11 쪽의 발췌문이며, 그 책은 1754 년 상반기에 출판되었다. 둘째, 우리는 또 루소 자신이 보여주는 좀더 형식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다. 1763 년경, 그는 자신이 수첩 형태로 가지고 있던 세 개의 소책자를 작 은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으려는 생각을 품었다. 그 세 가지 소책자는 『 연극의 모방 .!I , 『 인간 언어 기원론 .!I , 『 에프라임의 수도사 』 였다. 이 묶 음집은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지만, 그 노트들 가운데 하나에 서문 계 획이 남아 있다(뉴샤텔 원고 소장 번호 N°7887 Fos104-105). 이 서 문에 대해서 나는 『 연극의 모방 』 과 『 수도사 』 에 관한 것은 무시하고, 『 인간 언어 기원론 』 에 관련된 단락만 출판한다 .33 ) 〈두번째 토막은 『인 간 불평등 기원론』의 한 토막일 뿐이고, 너무 길어 그것은 잘라내었다. 나는 『 음악에 대한 라모의 오류 .!I (이 제목[루소는 처음에는 그것을 〈완 결했다 〉 고 썼다]을 달고 있는 책은 내가 [『백과 사전.!I에서] 잘라낸 두 단어로 완벽하게 완결되었다)란 책을 기회로 이를 다시 취했다. 하지 만 겨우 한 개의 언어도 제대로 알까 말까 한데, 여러 언어에 대한 주 제 논문을 쓴다는 우스꽝스러움 때문에, 또 이 토막이 결코 마음에 들 지 않는 연유로, 나는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단호히 그것을 제거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지식을 가꾸고 보호하는 현명한 한 법관[말레르브]이 나보다 훨씬 더 우호적으로 그것을 생각 했고 , 기꺼이 나의 판단을 그의 판단에 맡겼다. 다른 글들을 위해서, 33) 나는 루소가 일시적으로 멈추었던 것으로 보이는 마지막 텍스트를 출판 한다. 왜냐하면 그 서문은 미완성된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 이 서문은 얀센 A. J ansens 의 저서 J.-J. Rousseau als Musik e r(Berlin , 1884), 472-473 쪽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판본은 너무 많은 빈틈과 판독상의 오류로 점철되어 있다. 더구나 이러한 오류는 그가 출판한 대부분의 덱스 트에서 나타난다.

혼자서는 감히 위험 부담을 무릅쓰지 못했을 것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 다.〉 내적 비판의 어떤 증거도 루소의 이 증거에 반대되는 것 같지는 않다. 『 인간 언어 기원론 』 은 애초에 1754 년 『 인간 불평동 기원론 』 의 매우 긴 주석이었고, 1701 년 그것은 라모에 일격을 가하기 위해 양이 늘어나고 수정되어 독립된 주제 논문이 되었다. 끝으로 1763 년, 다시 수정한 이 논문은 각각의 장들로 나누어졌다. 2 모방 자! 이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간 언어 기원론』의 구성 문제로 유도된다. 집필 시기가 아니라 구조 공간 문제로말이다. 루소는 나 중에 뒤늦게야 텍스트를 장별로 나누었다. 그렇다면 어떤 도식이 그를 인도했을까? 루소 저작의 건축은 『인간 언어 기원론』의 심오 한 의도 속에서 명분을 찾아야만 한다. 바로 그 문제가 우리의 관 심을 끈다. 또한 건축의 의미와 그 저작에서 명시적으로 선언된 의 도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인간 언어 기원론』은 길이가 매우 다른 스무 개의 장으로 구성 되어 있다. 모종의 초조함이 루소의 성찰을 감싸고 있으며 그 성찰 이 그에게 맹렬성을 부여하는 것 같다 그 초조함은 무엇보다도 음 악의 기원과 타락에 관계될 것이다 . 그런데 음악의 퇴락과 관련된 장들은 12 장 〈음악의 기원과 그것의 관계들〉과 19 장 〈음악은 어떻 게 타락되었는가〉 사이에 놓인다. 음악의 여정이 『인간 언어 기원 론』의 주요한 관심사라는 점을 수용하려 한다면, 음악과 직접적으 로 관련된 장들은 겨우 그 책의 1/3 정도며(장들의 수를 고려하면 그보다 조금 더 되고, 쪽 수를 고려하면 그보다 조금 덜 된다), 다른

곳에서는 문제 제기조차 안 된다는 사실을 설명해야만 할 것이다. 집필의 역사가 어떠하든 간에 , 구성의 통일성은 명백한 것이며, 그 작품을 벗어난 어떤 내용 전개도 여기서는 없다. 음정과 대리 보충 첫 장부터 11 장까지는 언어의 발생과 타락,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관계, 북방 언어와 남방 언어의 형성의 차이 등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하나의 음악 이론을 제안하기 전에 왜 이러한 문제들 을 다루어야 할까? 다양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언어 활동 이전에 음악은 없다. 음악은 목소리에서 탄생하 는 것이지 소리에서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루소에 따르면, 언어 이전의 어떠한 음향성도 음악의 시대를 열지는 못한다. 태초에 노 래가있다. 이 명제는 루소의 체계적 틀에서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다. 만약 음악이 노래에서 각성된다면, 그것이 먼저 발음되고, 고함으로 소리 를 지른 것이라면, 그것은 말처럼 정념에서 탄생한다. 죽 상상력에 의한 욕망과 연민의 정의 각성에 의해 필요 욕구를 위반하는 가운 데 생겨난다. 모든 절차는 시초의 구분에서 나온다. 〈따라서 필요 욕구가 최초의 몸짓을 지시했고, 정념이 최초의 목소리를 이끌어냈 다.〉 만약 음악이 목소리를 전제로 한다면, 그것은 인간 사회와 동시 에 형성된다. 음성 언어는 타자가 타자로서 공감 속에서 나에게 현 전함을 요구한다. 연민의 정이 상상력에 의해 각성되지 않은 동물 들은 타자 관계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동물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 다. 따라서 사람들은 동물 음악에 대해서 오직 졸렬한 어휘와 의인

화된 투영으로만 언급할 뿐이다. 시선과 목소리의 차이는 동물성과 인간성의 차이이다. 공간을 위반하면서 , 바깥쪽을 제어하면서, 영 혼과 영혼을 소통시키면서, 목소리는 자연적 동물성을 초월한다. 즉 공간에 의해 의미되는 모종의 죽음을 초월한다. 외재성은 생명 이 없다. 공간 예술들은 그것들에서 죽음을 수반하고 동물성온 생 명의 무생명적 측면이다. 노래는 생명을 그 생명 자체에 현전하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노래는 인간에게는 자연스럽지만 그 자체로 죽은 물체인 자연에는 생소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내적인 동시 에 의적인) 어떤 차이가 자연, 생명, 동물성, 인간성, 예술, 음성 언 어, 노래 들의 의미들을 갈라놓고 있는지 알게 된다. 앞에서 우리 가 보았듯이, 죽음과 관계를 갖지 못하는 동물은 죽음 쪽에 속한 다. 반면 음성 언어는 살아 있는 말이며 그것은 죽음과 관계를 세 운다. 현전 일반은 이렇게 분화가 된다. 〈 그것을 통해서 회화는 자 연에 더욱더 가깝고, 음악은 인간적 예술에 더욱더 가까움을 보게 된다. 또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관심을 끄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인간과 인간을 더 가깝게 하며,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동반자라는 관념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회화는 대개 죽은 것이며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막의 한복판으로 당신을 데려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음성 기호들은 당신의 고막을 때리자마자 당신에게 당신과 닮은 존재를 알려준다. 말하자면 그 기호들은 영혼의 기관들이다. 아울러 그 기호들이 당신에게 고독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당신이 혼자가 아님을 당신에게 말해 준다. 새들은 지저귈 뿐이며 인간만이 노래를 부른다. 순간마다 자기 자신에게 말하지 않고는 노래도 심포니도 들을 수 없다 . 또 다른 감각적 존재가 여기에 있 다.〉 (26 장) 목소리가 소음으로 요약될 수 없는 것처럼 노래는 음악의 씨앗 이지만 목소리로 요약되지는 않는다. 『음악 사전』에서 루소는 노래

란 항목에서 당혹감을 털어놓는다. 만약 노래가 〈 인간 목소리의 변 형이라면 〉 그것에 절대적으로 고유한 방식을 할당하기는 어려울 것이댜 〈 음정 계산 〉 을 제안한 후에, 루소는 음의 〈 지속성 〉 , 곧이어 〈 정념에 찬 목소리의 악센트(룰)…… 모방 〉 하는 멜로디 따위 등 대 단히 애매한 기준을 내세운다. 문제의 어려움은 여기서 내적 체계 적 기술의 개념들을 찾아야만 한다는 데 있다. 목소리와 마찬가지 로 34) 노래 역시 그 본질은 해부적 묘사에 있지 않다. 하지만 음성 기관의 음정들은 음악의 음정 체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따라 서 루소는 『 인간 언어 기원론』뿐만 아니라 『 음악 사전 』 에서 두 개 의 필요성 사이에서 망설인다• 인간 음성의 음정 체계와 음악의 음 정 체계 사이의 차이를 기록하는 일, 그리고 본래 노래의 모든 기 원을 근원적인 목소리에 보조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모방이라는 개 념은 애매 모호함 속에서 이 두 가지 요구를 화해시킨다. 『인간 언 어 기원론』의 12 장은 부분적으로 노래라는 항목의 다음 구절에 해 당한다.

34) 『 인간 언어 기원론 』 이 비완성과 완성 가능성 사이의 구분과 같은 위치에 두는 동물 언어와 인간 언어 사이의 구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글을 읽 을 수 있다. 〈이 구분만으로도 더 멀리 나갈 수 있다. 죽 기관의 차이로써 그 점을 설명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이 설명이 어떤 것인지 사뭇 궁금하다 . 〉 (1 장의 끝)

음성 언어를 형성하는 목소리가 노래를 형성하는 목소리와 어떤 점 에서 다른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차이는 느껴지 지만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명료하게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기를 원할 때는 그것을 찾지 못한다. 도다르는 그것을 해부학적으로 관찰했다. 그 관찰에 근거해서 그는 서로 다른 후두(候 頭)에서 이 두 소리의 원인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관찰 또는 거기서 끌어내는 결과가 확실한지 모르겠다. 음성 언어를

형성하는 소리들은 진정한 노래를 형성하기 위한 지속성이 결여되어 있 을 뿐이다. 또 말할 때 목소리에 부여하는 다양한 굴절들은 결코 하모 니를 이루지 못하는 음정들을 형성하는데, 그것은 음악 체계의 한 부분 을 이루지 않으며, 따라서 악보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에, 엄밀히 보면 노래가 아니다. 노래는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 같지는 않다. 말하기 때 문에 아메리카의 야만인들이 노래 부른다고 하지만 진정한 야만인은 결 코 노래 부르지 못할 것이다. 벙어리는 결코 노래 부르지 못한다. 그들 온 필요 욕구에 따라 지속성이 없는 귀머거리 목소리와 응응거리는 소 리만을 낼 수 있을 뿐이다. 페레르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 하더라 도, 귀머거리 목소리로부터 어떤 음악적 노래를 이끌어낼리는 없을 것 이다. 자연의 최초 표현들은 그 자체로는 멜로디와 음향성이 전혀 없 으며, 예가 보여주듯이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노래를 배우 기 시작한다. 멜로디가 있고 감상할 만한 노래는, 말을 하고 정념에 찬 목소리의 평온하면서도 인위적인 모방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노래 부르 지 않고도 소리 지르며 불만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노래 부르면서 소리 지 르기와 한탄 털어놓기를 모방할 수 있다. 모든 모방 가운데 가장 홍미 있 는 모방이 인간의 정념을 모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방하는 방식 가운 데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은 노래이다.〉(노래라는 낱말만이 루소에 의해 강조되었음) 이러한 루소의 예증에 근거해서 자연과 모방이라는 개념들의 미 묘한 작동을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층위에서, 자연은 지반 이며, 낮은 곳에 있다. 그 지반을 넘어서고 초과해야 하지만 또한 그것과 결속되어야 한다. 그곳으로 되돌아가야 하지만 그 차이를 취소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 차이는 거의 제로여야 한다. 즉 모방 과 그것이 모방하는 것을 갈라놓는 차이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소리를 통해서 동물적, 야만적, 벙어리적, 유아적인, 소리 지르는

자연을 위반해야 한다. 노래로 목소리를 위반하거나 변형시켜야 한 다. 하지만 노래를 통해서 소리 지르기와 한탄을 모방해야 한다. 거기서 자연의 두번째 축의 규정이 대두된다. 자연은 모방과 모방 되는 것, 목소리와 노래의 통일성이다. 관념적인 한계로써 이러한 통일성이 완수된다면, 모방은 쓸모없게 될 것이다. 즉 통일성과 차 이의 단일성은 직접성 속에서 체험될 것이다. 루소는 이렇게 자연 을 고고학적, 목적론적으로 정의한다. 다른 곳은 이름이며 장소이 고, 있지도 않은 자연의 장소의 이름일 뿐이다. 다른 곳은 시간 속 의 다른 곳이다. 공간 속의 다른 곳은 알리바이이다. 소리 지르기, 목소리, 노래의 자연적인 통일성은, 고대 그리스인 또는 중국인의 경험이다. 목소리란 항목 기사는 도다르와 뒤클로의 논지들을 둘러 싸고 제기된 똑같은 토론을 분석하고 증폭시킨다(『백과 사전』의 〈 고대인들의 낭독〉이란 항목에서). 언어간의 차이점들은 일정한 간 극을 두고 측정되는데, 그 간극은 각각의 언어 체계 속에서, 음성 언어의 목소리와 노래의 목소리를 갈라놓고 있다. 〈그 이유는 악센 트가 어느 정도 음악적인 하모니를 이루는 언어가 있으며, 이 언어 들에서는 음성 언어와 노래의 목소리가 동일한 비율로 접근되거나 멀어짐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탈리아어는 불어보다 더 음 악적이기 때문에, 노랫소리에 좀더 가깝다. 따라서 이탈리아어에서 는, 말하는 것을 들을 때보다 노래를 부르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더 용이하다. 태초에 그리스어가 그랬듯이, 매우 조화로운 언어에 서, 음성 언어의 목소리와 노래의 목소리의 차이는 제로가 될 것이 다. 즉 말할 때와 노래 부를 때 똑같은 목소리를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이 아마 오늘날 중국인들의 경우가 아닐지 모르겠다.〉 둘째, 방금전 우리는 두 개의 증거에 착안했다. 자연의 통일성 또 는 기원의 동일성은, 그것을 개시하면서 그것을 성립시키는 기묘한 차이에 의해 형성되고 규정된다. 음성 언어의 목소리의 가능성을 음

악에, 즉 노래 목소리에 할당하기 전에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음성 언어의 기원(죽 사회의 기원)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전적 으로 조화로운 목소리의 시초에서, 음성 언어와 노래는 동화되었고, 앞서 말한 전과 후에 법률적, 방법론적 의미가 있을 뿐 구조적 가치 도 발생론적 가치도 없다. 음성 언어와 노래의 차이에 구조적 가치 를 부여하고자 시도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루소는 노래가 음성 언 어를 〈변형시켰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에 대 한 고고학적, 목적론적 개념은 아울러 구조적 관점을 취소시킨다. 완전히 자유로운 목소리의 시초에서, 또는 그 이상형에서 변형은 그것이 변형시키는 실체와 혼동된다(이 도식은 일반적 가치가 있으 며 모든 담론을 지배한다. 그때부터 그 가치가 무엇이든 이 개념들 중 의 하나에 최소한의 호소를 할 뿐이다. 자연과 그 타자, 고고학과 종말 론, 실체와 방식, 기원 또는 발생 등의 개념이 그것이다). 물론 방법론적 또는 법률적 관점은 구조적 관점과 발생론적 관 점 사이의 가치 차이를 지워버리는 순간부터 더 이상 엄밀한 가치 를 갖지 않는댜 루소는 그 파급 효과를 참작하지 않지만 그 결과 는 일개 담론 이상을 초토화시킬 것이라는 시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그것을 추적해야 한다. 문제의 관건은 언어와 사회 의 기원에 관해서, 음성 언어와 노래의 가능성을 동시에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개념 대립들의 수를 일정하게 이끌어내는 일이 다. 특히 음악과 같이 언어 속에서, 개방과 동시에 위협으로서 생 명의 원칙과 죽음의 원칙을 조작하는 긴장 또는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개념들을 추출해야 한다. 최초의 음성 언어는 좋은 것이기 때문에, 또 언어의 본질과 자연이란 언어의 고고학/목적론 은 〈자연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그렇게 하는 것처럼. 음성 언어 본 래의 관념적 본질은 노래 그 자체였디는 것을 일러주기 때문에 개 별적으로 두 개의 기원을 디룰 수 없다 . 그러나 그 담론의 방법론

이 돌아온 길을 되돌아가서 역사적 후퇴 또는 퇴조를 고려해야 하 기 때문에, 그 방법론은 잠정적으로 두 개의 질문을 분리해야 하 고, 일정한 방식으로 끝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역사이다. 왜냐하면 기원을 추적하고 기원에 덧붙 이는 역사란 노래와 음성 언어의 분리의 역사일 따름이기 때문이 다. 만약 그 기원을 완전히 분별시키는 차이를 고려한다면, 도처에 서 퇴폐와 타락으로 얼룩진 이 역사는 선사 시대가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음성 언어와 노래의 젖때기인 분리로서의 타락은 언제 나 이미 시작되었다. 앞으로 보게 되듯이, 루소의 텍스트는 종말의 시작으로서 태초의 데카당스로서 기원을 묘사한다. 그러나 이렇게 묘사하는데도 그 텍스트는 마치 타락이 창세기 속에서 명령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마치 좋은 기원에 악이 갑자기 야기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일종의 비스듬한 작업 속에서 비틀려 꼬여 있다. 탄생 때부터 동일한 행동과 동일한 정념을 가지고 있는 노래와 음 성 언어가 언제나 늘 분리되지 않은 것처럼말이다. 여기서 대리 보충 개념의 장점과 위험성을 다시 말하게 된다. 그 개념과 〈죽음에 이르는 만족〉 〈위험스러운 대리 보충〉 등을 다 시 찾게 된다. 음악의 생성, 노래와 음성 언어의 유감스러운 분리는 〈위험 천 만한 대리 보충〉으로서 문자의 형식을 취한다. 셈과 문법성, 에너 지의 상실과 대체. 음악사는 언어사와 평행선을 달리며, 그 악은 문 자 표기적 본질이다. 어떻게 음악이 타락되어 갔는가 (19 장)를 설명 하려고 할 때, 루소는 언어와 그 끔찍한 〈완벽성〉의 불행했던 역사 룰 상기시킨다. 〈언어가 완벽해짐에 따라 선율은 새로운 규칙을 스 스로에게 부과시키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옛 정열을 잃어버렸고, 음정을 세는 것이 억양의 세련됨으로 대체되었다.〉(강조는 필자의 것 임)

대체는 탄생, 자연적 또는 모성적 기원에서 멀어져 간다. 시작을 망각하는 것은 하모니를 멜로디 위치에 놓고, 억양의 열정 대신 음 정 과학을 놓는 계산이다. 이렇게 음성 언어가 목소리로부터 젖을 떼는 가운데 〈새로운 대상〉이 〈모성적 특성들〉을 찬탈하는 동시에 그것을 대리한다• 그것으로부터 고통받는 것은 바로 〈 음성 언어의 억양〉이다. 음악은 이렇게 〈그 자체의 고유한〉, 즉 자연적이며 도 덕적인 효과가 박탈당하는 꼴이 된다• 〈멜로디가 망각된 상태에서, 음악의 관심은 전적으로 하모니로 집중되고, 모든 것은 조금씩 이 새로운 대상으로 귀결된다• 장르, 조음계, 이 모든 것은 새로운 모 습을 취했다. 악보의 진행을 조정한 것은 하모니의 연속성이었다. 멜로디라는 이름을 찬탈한 이러한 음악 진행에서, 이러한 새로운 멜로디에서, 그 모태의 특성들을 알아볼 수 없게 된다. 즉 우리의 음악 체계는 음정에 따라 순전히 하모니적 체계가 되었기 때문에, 음성 언어의 억양이 그것으로부터 고통받고, 음악이 우리에게서 거 의 그 모든 정열을 상실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못 된다. 어떻게 노래가 음정에 따라서 자신의 기원인 음성 언어로부터 완전히 분 리된 예술이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죽 소리들의 하모니가 어떻 게 목소리의 억양을 잊게 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끝으로 성대 진동의 도움이라는 순전히 물리적 효과에 국한되어 음악이, 이중적 으로 자연의 목스리일 때 만들었던 도덕적 효과들을 어떻게 박탈당 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준다.〉(강조는 필자의 것임) 밑줄 친 통과점들은 이 텍스트와 다른 유사한 텍스트의 또 다른 심층적 독서를 유도해야 할 것이다. 거기서 매번 다음과 같은 사실 들을 간파하게 될 것이다. 첫째, 루소는 이질적인 논리의 실을 빌려서 그의 텍스트를 짜고 있다. 대체적인 대리 보충을 설정하는 〈새로운 대상〉을 대체하는 순 간적인 이동은 하나의 역사, 죽 음정에 따라 자연의 목소리의 망각

을 산출시키는 점증적인 생성을 성립시킨다. 찬탈하고, 분리시키고, 박탈하는 폭력적이고 침입적인 운동은 동시에 점증적인 함의, 기원 으로부터의 점증적인 멀어짐, 언어병(言語病)의 완만한 악화로 기 술된다. 대리 보충성의 두 가지 의미인 대체와 증가를 함께 짜면 서, 루소는 대상의 교체를 에너지의 손실로, 대리자의 생산울 망각 속의 소실로 기술한다. 둘째, 〈이중적〉이란 부사는 그 자신의 가능성 조건에 자연의 목 소리라는 메타포를 모은다• 모성의 〈부드러운 목소리〉, 본래의 목 소리로서의 노래, 자연 법칙의 규칙과 일치하는 노래로 된 목소리. 이 단어의 모든 의미에서, 자연은 말을 한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 에 의해 형성된 법칙들을 듣기 위해서말이다. 기억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 누구도 감히 거역할 엄두를 못 내 지만〉 그것에 불복종해야 했다. 노래로 된 〈음성 언어의 억양〉을 되찾아야 하고, 잃어버린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회복해야 한다. 잃 어버린 우리 자신의 목소리 그것은 바로, 말하고 듣고 하나의 선율 울 서로에게 의미하는, 〈이중적인 자연의 목소리였다.〉 판화와 형식주의의 애매 모호함 어떤 연유에서 이러한 대리 보충적 대체는 숙명적이었나? 어떤• 점에서 그것은 숙명적인가? 어떤 점에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지금의 그것이 되어야만 했는가? 그 본질적 시간이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그것을 출현시킨 균열은 어떤 것인가? 이 균열은 여러 균열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총칭적 균 열인 것이다. 음정의 필연성, 공간 띄우기의 엄격한 법칙 등. 노래 의 탄생부터 본질적으로 그 법칙 속에 있을 때만 그 균열은 노래

를 위태롭게 할 수 있었다. 공간 띄우기는 노래에서 우발적으로 나 타난 것이 아니다. 또 우연하고 부수적인 실추와 대리 보충으로서 공간 띄우기는 액면 그대로 그것 없이 노래가 생길 수 없었던 것 이다. 『 음악 사전 』 에서 음정은 노래 정의의 부분을 이룬다. 이를테 면, 그것은 근원적 부속물이며 본질적인 우연한 사건이다. 마치 문 자 언어처럼. 루소는 그 점을 말하려는 의도 없이 말하고 있다• 그가 말하려 고 하는 바는 부차적인 부속물 , 우발적인 우연한 사건, 의부의 바 깥쪽, 대리 보충적인 악, 또는 부차적인 대리 보충이다. 아울러 시 간 밖에 있는 공간이다. 멜로디의 시간과는 무관한 공간화이다. 앞 으로 보듯이, 공간 띄우기가 말과 노래의 가능성을 확보해 준다고 하면서 루소는 공간을 단순히 바깥쪽으로 생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바깥쪽을 통해서, 악 일반과 죽음, 특히 노래로 된 말의 악과 죽음이 도래한다. 마치 루소는 〈억양의 세밀함 〉 , 〈구어의 엑센트 〉 의 세련됨이 이미 늘 공간화, 기하학화, 문법 규칙화, 규칙 세련화, 규범화 등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싶어한다. 이성에 적합 하지 않은 것처럼, 이러한 〈늘 벌써 있음〉을 소거하고 싶어하기 때 문에, 그는 공간 띄우기를 하나의 사건, 죽 끔찍한 사건으로 규정 짓는다. 우리는 나중에 이 끔찍한 재앙이란 개념에 대해서 재론할 것이다. 여기서 이 재앙이 철학적 이성의 형식을 취한다는 점을 숙 지하자. 바로 그런 연유로 그리스 비극 시대에 철학의 탄생은 그러 한 재앙의 가장 좋은 예이다. 연극이 규칙적인 형식을 취할 때, 사람들은 오로지 규정된 방식에 따라서만 노래 불렀다. 또 모방 규칙을 늘려나감에 따라 모방적 언어 는 취약해졌다. 철학 연구와 이성의 진보는 문법을 완벽하게 다듬은 후에, 언어를 노래 부르듯 부드럽게 만든 이 생동감 있고 정열에 찬

어조 를 언어에서 제거시켰다. 메나리피드와 필로세네 시대에 이르러서 는, 먼저 시인들의 품안에 있었고 그 통제 아래에서만 , 이를테면 그들 의 지시에 따라서만 연주한 작곡가들·은 비로소 그렇게 독립되었다. 플 루타르크가 남긴 페레크라트의 희극에서 음악이 혹독하게 불만을 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독립 허가증에 대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더 이상 화 법에 결속되지 않기 시작한 멜로디는 쥐도 새도 모르게 별개의 존재 양식을 취했고, 음악은 말에서 더욱더 독립이 되었다. 또한 음악이 단 지 시의 악센트와 하모니에 그쳤을 때, 그리고 정념에 대해 그 후로 음성 언어가 이성에만 영향을 미치는 세계를 만들었을 때, 음악이 만 들어낸 신묘한 것들은 조금씩 사라졌다. 또한 그리스가 소피스트들과 철학지들로 가득하게 되었을 때, 그곳에서는 더 이상 유명한 시인도, 음악가도 볼 수 없게 되었다 . 남을 설득하는 법을 터득하면서 남을 감 동시키는 기법을 잃은 것이다. 호머와 에우리피데스를 시샘한 플라톤 자신도 그중 누구에게 악평을 했지만 다른 어느 누구를 모방할 수는 없었다 . 곧이어 위에서 우리가 알게 된, 또 우리가 기하학적 퇴보 법칙이 라 불렀던 대리 보충적 가속화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다른 재앙 이 첫번째 재앙에 첨가된다. 거기서는 악의 모습과 타락 퇴조의 과 정을 지속적으로 정의하는 거의 모든 의미를 다 취할 수 있다. 정 치적 자유로부터 폭력적인 동시에 점증적인 예속으로 대치하는 것, 민주적이며 자급 자족적인 소도시의 와해, 억양화에 대한 분절의 우월, 모음에 대한 자음의 우월, 남방 언어에 대한 북방 언어의 우 월, 시골에 대한 도시의 우월 필연적으로 최초의 재앙 쪽으로 가 면서 대리 보충적 재앙은 실제적이며 보상적인 결과들을 파괴시킨 댜 그점을강조해 보자.

곧이어 예속이 그 영향력을 철학이 미친 영향력에 첨가했다. 철창 속 에 잡혀 있는 몸으로. 그리스는 오직 자유로운 영혼만을 홍분시킨 이 불꽃을 잃었고, 과거에 영웅을 노래 부르기 위해 썼던 어조를 폭군을 찬양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찾지 못했다. 로마인들의 혼잡함은 하모니 와 악센트 언어에 남아 있던 것을 취약하게 만들었다. 더욱더 둔감하고 덜 음악적인 라틴어는 음악을 채택하면서 음악에 해를 끼쳤다. 도시에 서 쓰인 노래는 조금씩 시골 지방의 노래를 변질시켰다. 로마의 연극 은 아테네의 연극을 손상시켰다. 네롱이 상을 탔을 때 그리스는 이미 그러한 값어치에 버금가지 못했다. 두 언어가 공유하는 똑같은 멜로디 는 더욱더 그 두 언어에 걸맞지 않게 되었다. 끝내는 인간 정신의 진보 를 파괴시킨 재앙이 도래했다. 그것의 산물안 악덕함은 제거하지 못하고 말이다. 야만인에 의해 침략당하고 무지한 인간들에 의해 예속화된 유 럽은 동시에 학문, 예술 상호간의 보편적 도구, 죽 완벽하게 E 頃어진 조화로운 언어를 잃어버렸다. 북쪽이 파생시킨 이 무례한 인간들은 자 기 음성 기관의 조악함에 모든 귀를 익숙하게 했다. 그 거칠고, 악센트 가 결여된 목소리는 울립 없이 소음만을 내었다. 줄리엥 폐하는 그 목 소리를 개구리 울음 소리에 견주었다• 그 분절은 콧소리이며, 둔탁한 (무성음) 것만큼 귀에 거슬리는 소리였으며, 그들의 노래에 일종의 독 특함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들의 노래는 자음의 범람과 거친 음을 포괄 하기 위해 모음의 음색을 강화했다 .(19 장) 『인간 언어 기원론』을 지배하는 이러한 대립 체계(예속/정치 및 언어적 자유, 북방/남방, 분절/억양, 자음/모음, 도시/시골/자급 자족 적이며 민주적인 도시) 속에서 우리는 루소가 파악하는 역사 과정 의 모습이 이상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죽 자기를 분할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근원 또는 중심으로 부터 역사적 원(圓)이 묘시된다. 그것은 타락의 뜻이 있으면서도

진보와 보상적 효과들을 동반한다. 이 원의 원주 위에는 새로운 원 을 위한 새로운 근원이 있다. 그 새로운 원은 앞선 원의 보상적 효 과들을 말살시키면서 타락을 가속화하며, 그를 통해 그 진리와 이 득이 나타나게 한다. 이렇게 해서 북방 야만인들의 침입은 그 이전 의 주기가 만들어낸 〈 인간 정신의 진보〉를 파괴하면서 새로운 주 기의 역사적 타락을 개시했다. 철학에 있는 해로우면서도 붕괴적인 파급 효과들은 실제로 그들 자신에 의해 제한되었다. 그 체계는 일 종의 자기 제어 장치를 수반하고 있었다. 이러한 체계 또는 그 다 음 주기에서, 이 제어 장치는 사라지게 된다• 뒤이어 악의 가속화 가 뒤따르게 되는데, 그것은 어쨌든 새로운 내적 조정, 새로운 균 형 기관, 새로운 대리 보충적 보상을 찾게 된다(가령, 그것은 〈자음 의 범람과 투박함을 포괄하기 위해 모음의 소리를 강화하는 데 있 다 〉 ). 이런 식으로 끝없이 나간다. 더욱이 이 무한성은 수평 또는 심연 , 진보 또는 실추의 무한성이 아니다. 그것은 기묘한 행로에 따른 반복의 무한성이다. 따라서 앞서 말한 도식을 더욱더 복잡하 게 해야 한다. 각각의 새로운 주기는 진보와 퇴보를 반복하는데, 그것은 전자의 효과들을 파괴하면서 좀더 은닉되고, 오래되고, 원 형에 가까운 본질로 우리를 유도한다. 그 진보는 언제나 우리가 동 물성을 넘어서게끔 한 진보를 지우면서 우리를 동물성에 더 가깝 게 접근시킨다. 우리는 자주 그 점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어떤 경 우든 이 운동의 〈그런 식으로 무한으로 흐르는 것은〉 아무리 복잡하 다 할지라도 직선의 흔적에 의해서는 거의 표상될 수 없을 것이다. 직선으로 표상할 수 없는 것이 재현전화의 양상을 떨 때, 그것 은 재회전의 회전이다. 표상할 수 없는 것은 표상과 소위 근원적 현전의 관계이다. 재현전화는 또한 탈현전화이다 . 그것은 공간 띄 우기의 결과와 연결된다. 공간 띄우기는 현전 속에서 하나의 음정을 암시하는데, 그 음정

은 단지 목소리와 노래의 상이한 시간을 분리할 뿐만 아니라 표상 체와 피표상체를 분리시킨다. 바로 그러한 음정은 루소가 규정하는 바대로 예술의 근원에 의해 지시된다. 여기서는 도저히 파헤칠 수 없는 전통에 따라서 , 루소는 예술의 본질이 모방이라고 확신한다. 모방은 현전을 되풀이하고, 그것을 대리 보충하면서 현전에 첨가된 다. 따라서 모방은 현전하는 것을 그 바깥쪽으로 내 쫓 는다. 생명이 없는 예술에서는 바깥쪽은 자신을 이중으로 만들고, 그것은 바깥쪽 에서 바깥쪽을 재생하는 꼴이다. 사물 자체의 현전은 이미 의부에 노출되고, 따라서 그것은 바깥쪽의 바깥쪽에서 탈현전화되고 재현 전화되어야 한다. 생명이 있는 예술, 가령 노래에서는 닙 R} 쪽은 안 쪽을 모방한다. 그것은 묘사적이다. 그것은 정념을 〈 묘사한다. 〉 노 래를 하나의 회화로 삼는 메타포는 모방이라는 개념의 공통된 권 위에서만 가능하며 , 그때에만 자기 효력의 내밀성을 자신에게서 빼 앗아 HR 陸f으로 내쫓는 것이 가능하다. 회화와 노래는, 그 둘의 차이가 어찌되었든, 복제일 뿐이다. 안쪽과 바깥쪽은 그것을 똑같 이 공유하고, 표현은 이미 그 정념을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게 하기 시작했고, 정념을 표현하고 묘사하기 시작했다. 이 점은 위에서 우리가 전개시킨 것을 확인시켜 준다. 모방은 단순한 행동으로 평가될 수 없다. 루소는 모방이 필요하고, 그것을 노래의 가능성과 동물성을 벗어나는 것으로 고양시키고 있다• 하지 만 피표상체에 첨가되지만 다른 아무것도 첨가시키지 않는 복제로 서만, 즉 단순히 대리 보충으로서만 모방을 앙양시키고 있을 뿐이 댜 이런 의미에서 그는 예술 또는 미메시스를 일종의 대리 보충으 로 찬양한다. 하지만 그 찬양은 동시에 비판으로 급선회한다. 대리 보충적인 모방은 아무것도 첨가를 시키지 않기 때문에 불필요하지 않은가? 그리고 피표상체에 덧붙여 무(無)가 아니라면, 이 모방적 대리 보충은 피표상체의 통합성을 위해서는 위험하지 않은가? 자

연의 근원적 순수함을 위해서는 위태롭지 않은가? 이런 이유로 해서 맹목적인 무류성( 無誘 性)과 몽유병 환자의 확 실함과 더불어 대리 보충성의 체계를 통해 이동하면서 , 루소는 미 메시스와 예술을 대리 보충(그것은 무익하지 않을 때는 위험하고, 해 가 되지 않을 때는 필요 이상의 것이다 . 그리고 실제로는 둘 다이기도 하다)으로 비난하는 동시에 그것에서 인간의 행운, 정념의 표현, 무생명으로부터의 탈출을 인정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기호의 위상이 애매 모호하게 된다. 시니피앙 은 시니피에를 모방한다. 예술은 기호들로 짜여진다. 어쨌든 처음 보기에는 의미 작용이 일종의 모방이라는 점에 근거해 『 인간 언어 기원론 』 을 따라 모종의 우회 노선을 취해 보자. 모방울 다룰 때 나 타나는 애매 모호함은 『인간 언어 기원론 』 에 있는 기호, 예술, 모 방에 대한 구절들을 좀더 명백하게 해줄 것이다. 교육론도 모방의 문제와 부닥치지 않을 수 없다. 그 예는 무엇 인가? 예증으로써 가르칠 것인가, 설명으로 가르칠 것인가? 선생 은 모범을 보이는 자유 방임형으로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매번 교 훈과 훈계에 정성을 보이는 것이 미덕인가? 이 모든 질문이 『 에 밀』 2 권에서 제기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무엇보다 아이에게 친절과 〈관대함〉을 어떻게 가 르칠 것인가를 아는 일이다. 모방이란 단어와 주제가 그 전면을 차 지하기 전에 기호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아이에게 진정한 친절함을 가르치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모방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 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하는 일이다. 친절함을 모방한다는 것은 무 엇인가? 그것은 사물 대신 기호를 쓰는 것이며, 감정의 자리에 말 을 늘어놓는 것이며, 돈을 실제적인 부의 대체물로 가져다 놓는 것 이다. 따라서 아이에게 관대함을 모방하지 않는 법을 가르쳐야 하 며, 이 가르침은 저항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아이는 즉각적으로

자기 물건을 간직하고 남을 속이려고 한다. 〈 사람들은 아이를 통해 아이가 그 가치를 모르는 것, 가령 호주머니 속에 있는 금속 조각 만을 줄 뿐이며 , 그 가치는 오로지 이런 경우에만 쓰일 뿐이다. 아 이는 과자보다 100 루이를 내줄 것이다.〉 사람들이 쉽게 내주는 것 은 시니피에 또는 사물과 불가분의 시니피앙이 아니라 평가 절하 된 시니피앙이다. 아이는 돈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할 수 있거나 할 줄 알면, 그처럼 쉽게 돈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아껄 줄 모르는 분배자에게 소중한 것, 즉 장난감, 사탕, 간식을 주어보라. 그러면 당신이 진정으로 그 아이룰 관대한 아이로 키웠는지 알게 될 것 이 다. >(9 7-99 쪽) 아이들이 천성적으로 구두쇠인 것은 결코 아니다. 아이는 천성 적으로 그가 갈망하는 것을 간직하기를 바란다. 이것은 정상적이며 자연스러운 일이다 . 여기서 악덕함 또는 타락은 천성적으로 갈망하 는 사물에 연연해 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래서 그것의 대체적인 시 니피앙에 연연하게 하는 데 있다. 만약 어떤 아이가 돈 그 자체를 위해 돈을 좋아한다면, 그 아이는 타락한 아이일 것이다. 그 아이 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닐 것이다. 유년 시절이라는 개념은 루소에게 언제나 기호와 관련을 맺는다. 더 정확히 말해, 유년 시절이란 있는 그대로의 기호와 관계 맺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기 호란 무엇인가? 있는 그대로의 기호는 없다. 기호가 사물 그 자체 라면, 그것은 더 이상 기호가 아니다. 기호는 일종의 돌려보내기, 죽 기호는 그 자체가 아닌 다른 무엇이다. 루소에 따르면 어린아이 란, 분리된 시니피앙, 곧 일종의 물신 숭배처럼 자기 지신을 위해 사랑받는 시니피앙과 어떤 관계도 맺어서는 안 되는 것의 이름이 다. 시니피앙의 이러한 타락한 사용은 모방 구조에 의해서 금지되 는 동시에 용서된다. 하나의 시니피앙이 더 이상 모방적이지 않는 순간부터 타락의 위협은 첨예화된다. 그러나 이미 모방 속에서, 사

물 그 자체와 그 복제본 사이의 시차, 더욱이 의미와 그 영상 사이 의 시차는 거짓말, 위조, 사악함의 여지를 확보해 준다• 거기에서 『 에밀 』 의 망설임이 나온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은 모 방으로 시작되며, 아이는 개별적인 예증을 통해 학습한다• 여기서 모방은 좋은 것이며 더 인간적이며, 위선 및 허식과 전혀 상관이 없다. 거짓으로 꾸미는 것은, 로크가 원하듯, 관대함의 구체적 본 보기 대신 관대함의 장점들에 대한 추론을 아이들에게 늘어놓는 사람들의 짓거리이다. 결코 이러한 〈폭리를 탐하는 관대함〉으로부 터 진정한 관대함으로 옮겨가지 않을 것이며, 진정한 관대함은 본 보기와 좋은 모방에 의해서만 전수된다. 〈선생들이여, 허위 의식을 버려라! 그리고 미덕을 가지고 선(善)할지어다. 당신이 보이는 모 범들은 아이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고 이어서 그들의 마음속에 들 어갈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좋은 모방은 벌써 그 안에 그것의 변질의 전제 조건을 함축하고 있다. 『 에밀 』 에서 교육론의 문제는 그 점으로 요 약될 수 있다. 아이는 수동적이며, 어른의 모범은 먼저 기억 속에 각인되고, 〈 그러고 나서〉 마음속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 모범은 마음울 감동시키지 않고 기억 속에만 머무를 수 있다. 반대로 마음 과 기억이 서로 닮았기에 아이가 기억에 따라 모방하는 것으로 만 족할 때도 마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서 행동하는 것처럼 할 수 있 다. 아이는 언제나 기호를 주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 처음에는 좋은 모방은 불가능할 수 있고, 다음에는 좋은 사용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다. 〈내 아이에게 자비로운 행동을 서둘러 요청하는 대신 나는 몸소 내 아이가 보는 앞에서 자비롭게 행하기를 좋아하고, 내 아이가 그렇게 모방하는 수단마저 제거하고 싶다. 마치 아이 나이 에 걸맞지 않는 명예처럼말이다.〉 〈나는 모방에 의한 모든 미덕이 원숭이의 미덕이며, 어떤 좋은 행동도 남들이 그렇게 하기 때문아

아니라 있는 바 그대로 그렇게 할 때만 도덕적으로 좋은 것이다 . 그러나 아직 마음으로 느낄 수 없는 나이의 아이들에게는, 행동을 모방하게 해서 그것이 습관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이 분별력과 선에 대한 사랑으로써 그런 행동울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35)

35) 『 순수 이성 비판 』 에서 동일한 문제에 대한 동일한 표현을 찾아볼 수 있 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일이 필요할까? 특히 Elements meta p h y s iq u es de la doctr i n e de la ver t u(I797) 와 Peda go g i e 에 관한 노트 (1803) 에 서도 마찬가지이다. 앞의 칸트 책은 실천적 규칙의 경우로서의 전법 예 Exem p el 와 〈특정 개념에 대한 순전히 이론적인 노출〉 (§61) 속의 특수한 경우인 예를 구분짓고 있다.

따라서 모방 가능성은 자연의 단순성을 방해하는 것 같다. 모방 과 더불어, 현전 속에서 암시되는 것은 위선이 아닌가? 하지만 이 미 알고 있는 도식에 따라서 , 루소는 좋은 모방이 자연적 인 모방에 서 해결될 것을 원했다. 모방에 대한 취향과 모방의 힘은 자연 속 에 새겨졌다. 사악함 자체인 위선이 거짓 꾸밈처럼 모방의 변질이 라면, 그것은 모방의 소산이 아니라 모방의 병이며 그 자연적인 결 과가 아니라 괴물적 기형이다. 악은 모방의 타락, 즉 모방의 모방 에 기인한다. 아울러 이 악은 사회적 기원에 속한다. 인간은 모방하고 동물조차 모방한다. 모방이란 취향은 질서 정연한 자연에 속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 속에서 사악함으로 타락한다. 원숭 이는 두려워하는 인간울 모방하지, 그가 깔보는 다른 동물들을 모방하 지 않는다. 원숭이는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가 하는 짓은 좋은 일이라 고 판단한다. 반대로 인간 가운데 온갖 광대는 아름다운 것을 모방하 지만 그 결과는 그 아름다움을 타락시키고 우스꽝스럽게 한다. 광대들 은 열등감 속에서 자신들보다 월등한 것과 대등해지려고 애쓴다. 그들 이 자신들이 홈모하는 것을 모방한다면, 그 대상들의 선택 속에서 모

방하는 이들의 그릇된 취향을 보게 된다. 그들은 더 우월해지고 현명 해지기보다는 자기 재능을 다론 사람에게 부과시키거나 박수 갈채를 받기를 원할 뿐이다. 여기서 유년 시대, 동물성, 사회 사이에 있는 여러 관계는, 우리 가 연민의 정을 분석하는 데 애썼던 구조와 문제틀에 따라서 정리 된다. 또한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동일한 역설(정체성의 변질과 타 자 동화(同化)의 역설)이 그 결과로 나타난다. 모방과 연민의 정에 는 동일한 토대가 있다. 일종의 은유적인 환희가 그것이다. 모방의 토대는 자기를 자신 바깥으로 옮기려는 우리의 욕망에서 나 온다.(위의 책, 같은 곳) 다시 『인간 언어 기원론 』 으로 돌아와 보자. 은유의 교묘함은 모 든 예술의 흉내내기에서 나타난다. 예술이 모방이라면, 그 속의 모 든 것은 시니피앙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미적 경험 에서 우리의 감정은 사물이 아닌 기호에 의해서 유발된다. 인간은 감각에 의해서 변형되며, 어느 누구도 그 점을 의심하지 않 는다. 그러나 온갖 변형을 구분할 수단이 없어 우리는 그 원인을 혼동 한다. 우리는 감각에 너무 많은, 또 너무 적은 영향력을 부여한다. 그 것이 단지 감각으로서가 아니라 기호 또는 이미지로서 감정을 유발시 킨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며, 그 도덕적 효과 또한 도덕적 원인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회화가 자극시키는 감정들이 결코 색에서 오지 않는 것처럼, 음악이 영혼에 미치는 지배력은 결코 소리의 결과 가 아니다. 조화가 잘된 아름다운 색깔들온 시각에 줄거움을 주지만 이 줄거움은 순전히 감각에서 오는 것뿐이다. 그림, 죽 모방이 이 색깔

들에게 생명과 영혼을 불어넣는 것이다. 영혼을 감동시키는 것은 그 색깔들이 표현하는 정념들이다.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그것들이 표상하는 대상물이다. 그 관심과 감정은 결코 색깔에 기인하지 않는다. 감동을 주는 한 폭의 그림의 선들은 역시 판화 속에서도 우리를 감동 시킨다. 그 그림에서 이 선을 제거하면, 색깔이란 아무 짝에도 쓸모없 을 것이다.(1 3 장) 만약 예술이란 조작이 기호로 통하고 그 효율성은 모방으로 통 한다면, 예술이란 하나의 문화 체계에만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예술 이론은 풍속 이론이 된다. 〈감각적〉 인상과 대립된 〈정신적 인상〉은, 그 힘을 하나의 기호에 맡겨둔다는 점에서 인지된다. 미 학온 기호학, 심지어 인종학으로 통한다. 미학적 기호의 효과는 문 화적 체계 내부에서만 규정될 뿐이다. 〈만약 감성이 우리 자신에게 미치는 커다란 지배력이 도덕적 원인에 기인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는 야만인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인상에 그처럼 예민하단 말인가? 왜 가장 감동적인 음악이 카리브인의 귀에는 한낱 투박한 공허함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의 신경 체계는 우리와 다른 본질을 갖고 있는가?〉 (15 장) 의학 역시 그것이 진료해야 히는· 기호학적 문화를 염두에 두어 야 한다. 치료법 기술처럼 의술의 치료법적 효과들은 기호로 발휘 될 때부터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만약 치료가 하나의 언어라면, 처방은 환자의 문화 코드를 통해 환자에게 소통이 되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소리가 갖는 물리적 힘의 증거로 독거미에 물린 것을 치료 하는 사례를 인용한다. 이 예는 정반대의 것을 증명한다. 이 곤충에게 물린 모든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 절대적 소리도 똑같은 공기도 있어 서는 안 된다. 그들 각자에게 그 자신에게만 알려진 멜로디의 공기와

그 사람만이 이해하는 문장들이 필요하다. 이탈리아인에게는 이탈리아 공기가 필요하다. 터키에서는 터키 공기가 필요할 것이다. 각자는 그에 게 친숙한 악센트에 의해서만 영향받는다. 그의 신경 조직은 그의 정 신이 그것을 구비하는 만큼만 작동된다. 누군가 그에게 말하는 것이 그를 움직이게 하려면 그에게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이는 베르니에의 칸타타가 한 프랑스 음악가의 열병을 치료했다고 말 한다. 그러나 그 칸타타는 다른 민족의 음악가에게는 오히려 열병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15 장) 루소는 증상 그 자체가 문화에 속하고, 독거미에 물린 것이 장 소에 따라 상이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이르 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원칙은 그의 설명에서 분명한 지침이 된 다. 이러한 인종 기호학에서 기묘한 것 그 이상의 유일한 예외는 음식 또는 미각이다• 루소는 가차없이 식도락의 사악함을 비난하는 데 주력한다. 그 이유를 자문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정서 중에 서 전혀 정신적인 것이 배어 있지 않은 감각을 나는 오직 하나 알 고 있다• 그것은 미각이다. 식도락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 들의 지배적인 사악함이다.〉(위의 책, 같은 곳)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란 여기에서, 물론 〈오직 피동적으로만 느끼는〉, 즉 오직 무식하고 미개한 감각만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잠재성의 가치가 여기서도 이행과 혼동, 점진성과 진보성의 요소 를 여러 구분들의 엄밀성과 여러 개념들의 조작 속에 도입시키기 때문에 (동물성, 유년 시기, 야만성 등의 한계) 기호와 차이들의 체 계에 의한 〈정신적 인상〉은 아무리 혼란된 상태라고 하지만 이미 동물에게서 예고가 된다. 〈동물에서까지 이러한 정신적 효과의 무 엇인가를 알아볼 수 있다.〉 우리는 연민의 정, 바로 그 순간에, 모 방에 대해서 이러한 망설임의 필연성을 인식했다.

신경이 자극받는 진동에 의해서만 소리 를 고찰하기 원하는 한, 결코 음악의 진정한 원칙과 심성에 대한 음악의 힘을 터득하지 못할 것이다. 멜로디 속에서 소리는 단지 소리만이 아니라 정서, 감정 등의 기호로 서 영향을 끼친다. 그렇게 해서 소리는 그것들이 표현하는 운동들을 자극시키며, 우리는 거기서 그 이미지를 인지한다. 동물도 이러한 정신 적 효과를 알아볼 수 있다. 개 짖는 소리는 다른 개의 주의를 끈다. 만 약 고양이 소리를 흉내내는 것을 들는 순간 고양이는 주의를 기울이고, 초조해 하며, 동요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고양이는 동족의 목소 리를 흉내내는 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다시 자리에서 휴 식을 취한다. 왜 이러한 인상의 차이가 있을까? 감각 기관의 진동에는 차이가 없으며 처음에 고양이가 감각 기관에 혼동을 일으켰기 때문이 다.(위의 책, 같은 곳) 이러한 기호학적 차원의 환원 불가능성에서 루소는 그 시대의 감각론과 유물론에 반대하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색깔과 소리는 표상과 기호 같은 것이지 단순한 감각 대상 같은 것들은 아니다. 〉 예술을, 의미를 만드는 텍스트로 보는 논거는 형이상학과 유심론적 윤리학에 봉사한다. 〈이러한 관념을 더 발전시키면서 고대 음악에 대한 어리석은 추론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 혼의 모든 조작을 물질화하고 모든 감정에서 일체의 정신성을 제 거하려고 하는 금세기에 만약 새로운 철학이 미덕과 마찬가지로 좋은 취향에 대해서도 해가 되지 않는다면 내가 혼동한 것이다 . 〉 (위의 책, 같은 곳) 여기에서 우리는 기호에 대한 고찰의 최종 목적에 주목할 필요 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일반 규칙에 따라서, 시니피앙 에 대한 관심온 오히려 그것을 축소시키는 역설적 결과를 낳는다. 물론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고 단지 결핍을 메워주는 대리 보충 개

념과는 달리 시니피앙은 그 단어의 문법적 형식과 그 개념의 논리 적 형식에서 지적된 바대로 하나의 시니피에를 의미한다. 시니피앙 과 연결된 시니피에로부터 그 효력을 분리할 수 없다. 움직이는 것 은 기호의 물체가 아니라(왜나햐면 그것은 순수한 감각이기 때문에) 그것이 표현하고 모방하거나 또는 옮겨놓는 시니피에이다. 루소의 감각론 비판에 대해서, 예술의 조작을 완전히 충족시키는 것은 기 호 그 자체라고 결론짓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우리들이 〈홍분되는 것은 〉 , 표상체가 아니라 피표상체, 표현이 아니라 표현되는 것, 노 출의 바깥쪽이 아니라 노출된 안쪽에 의해서이다. 심지어 회화에서 도 표상이라는 것은 대상을 모방하고 정념을 표현할 때만 살아 있 는 것이며 우리를 감동시킨다. 〈이 색깔에 생명과 영혼을 불어넣는 것은 그림, 즉 모방이다. 영혼을 감동시키는 것은 색깔이 표현하는 정념이며, 감동적인 한 폭의 그림에 있는 선들은 또 판화에서도 우 리를 감동시킨다.〉 판화. 모방에 의해 탄생한 판화 예술은 엄밀한 의미에서 작품에 속하며 그것은 모방이 판화에서 윤곽의 재생적 인상에서 기억된다 는 점에서이다. 만약 아름다움이 재생되면서 아무것도 손상되지 않 는다면, 그 기호, 일종의 복사인 기호의 기호에서 그 아름다움을 인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생산의 〈최초에〉 이미 재생적 본질이었다. 예술의 모델들을 복사하는 판화는 여전히 예술의 모델 이다. 만약 예술의 기원이 판화의 가능성이라면, 예술의 죽음과 죽 음으로서의 예술은 예술 작품의 탄생부터 정해진 것이다. 더욱 이 생명의 원리는 죽음의 원리와 합치된다. 한번 더, 루소는 그것을 구분하기를 갈망하지만, 그의 기술(記述)과 텍스트에서는 그 욕망 울 한계짓거나 그 반대되는 것에 권한을 부여한다. 한편으로, 루소는 모방과 형태의 윤곽이 예술의 고유함이라는 시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명한 것인 양 루소는 미메시스

의 전통적 개념에서 그 유산을 물려받고 있다. 그러나 그 개념은, 루소가 비난했던, 노래를 죽인 철학자들의 개념이었다. 이 비난은 철학에서 물려받은 개념틀과 예술의 형이상학적 개념성 내부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철저할 수 없었다. 판화에서 사용되는 윤곽, 자기 를 모방하는 선은 시간적 지속에 의한 예술만큼 공간 예술에 속하 며, 또 회화만큼 음악에 속하고, 모든 예술에 속한다. 이 모든 예 술에서, 선은 모방의 공간과 공간의 모방을 소묘한다. 따라서 회화가 시각을 즐겁게 해주는 방식으로 색깔을 조합하는 예 술이 아닌 것처럼, 음악은 귀를 기분 좋게 해주는 방식으로 소리들을 조합하는 예술이 아니다. 만약 그런 사실만 있다면, 그것들은 예술이 아니라 자연 과학에 속하게 될 것이다. 희화와 음악을 이 수준까지 끌 어올리는 것은 오직 모방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회화를 모방 예술로 만드는가? 그것은 그림이다. 무엇이 음악을 모방 예술로 만드는가? 그 것은 멜로디이다 .(13 장) 선 t ra it(데생 또는 멜로디선)은 단지 표상체 속에서 피표상체의 모방과 인지를 허락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내용(색채적 또는 음향적 실체)이 모습을 드러내는 형식적 차이의 요소이다, 모방 테 크닉으로 성립되지 않고서는 그것은 미메시스로서 예술 tec hneOII 여 지를 줄 수 없다. 만약 예술이 근원적 재생을 근거로 해서 생명을 얻는다면, 이러한 재생을 가능하게 하는 윤곽은 계산, 문법적 규칙 성, 음정 등 에너지에 치명적인 〈모방 규칙들〉에 대한 합리적 과학 의 공간을 열어주고 있다. 다음 사실은 기억할 만하다. 〈모방 규칙 을 증가시킴에 따라 모방적 언어는 약해져 갔다.〉 따라서 모방은 예술의 생명인 동시에 예술의 죽음이다. 예술과 죽음, 예술과 예술 의 죽음은 근원적 반복의 변질(타자화) 공간에서 이해된다 U t erum

은 타자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it ara 에서 오지 않았을까). 반복, 복 제, 표상의 공간 또는 반복의 가능성과 생명이 자기 지신을 벗어나 는 공간에서말이다• 왜냐하면 윤곽은 음형을 기록하는 공간 띄우기 그 자체이고, 움 악의 시간만큼 회화의 표층들을 작용시킨다. 멜로디가 음악에서 하는 일은 회화에서 데생이 하는 일과 같다. 멜 로디는 선들과 음행을 기록하고, 화음과 음색은 그 색깔에 불과하다. 그러나 멜로디는 단지 음의 연속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 하지만 아마도 데생 역시 색채들의 배열일 뿐이다. 웅변가는 그의 글을 선으로 옮기 기 위해 잉크롤 사용한다. 이것은 잉크가 강한 옹변적 액체임을 뜻하 는 것일까 ?(13 장) 이렇게 형식적 차이의 개념을 추출하고 형식적 구성보다는 감각 적 내용에 더욱더 관심을 갖는, 유물론적이라기보다는 실체론적이 라고 부를 수 있는 미학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루소는 예술(여기서 는 음악)의 몫을 선에 맡긴다. 죽 냉철한 계산과 모방 규칙에 여지 를 줄 수 있는 것에 예술의 몫을 맡긴다. 지금은 우리에게 친숙해 진 논리에 따라서, 루소는 좋은 형식과 그릇된 형식을, 생명의 형식 과 죽음의 형식을, 멜로디 형식과 하모니 형식을, 모방적 내용으로 된 형식과 내용 없는 형식을, 의미로 충만한 형식과 텅빈 추상성을 대립시키면서 이 위험의 전면으로 향한다. 루소는 곧 형식주의에 반 기를 둘면서 반응한다 형식주의는 그의 시각으로는 유물론이자 감각 론 01 다. 13 장 〈멜로디에 대해서〉와 14 장 〈하모니에 대해서〉의 핵심은, 그 직접적인 문맥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이해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 장들은 『음악 사전』과 Ii'〈음악에 대한 오류〉라고 불린

소책자에서 라모 씨가 전개한 두 원칙의 검토 』 에서, 또 『 백과 사 전 』 (1 755) 에서, 해당되는 항목들에서 전개된 토의를 하나로 모아 서 집약시키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전후 관계는 체계적이며 영 속적인 필연성을 계시하는 것으로 사용될 뿐이다. 멜로디 형식과 하모니 형식의 차이는 루소의 시각에서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다. 그 둘을 서로 구분짓는 특징을 통해서, 그 둘은 노래의 생명과 죽음으로 대립된다. 만약 그 말의 기원( 〈 근원적으로 고유 명사라는 표현〉)과 〈우리에게 남아 있는 고대 서적들 〉 에 국한 하면, 하모니는 멜로디에 리듬과 박자라는 개념을 덧붙이지 않는 한 멜로디와 구별되기가 곤란할 것이다. 하모니가 그 자체로, 모든 다른 수량과 독립해서 자기 특성을 갖는 대신 리듬과 박자 없이는 어떤 멜로디도 규정된 성질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하모니에 고 유한 차이는 근대인들 가운데서 추적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에 따 르면 차이는 〈변조 법칙에 따른 음정의 연속〉이다. 이 하모니의 원 칙들은 근대인에 의해서만 체계로 집약되었다. 라모의 체계를 검토 하면서, 루소는 순전히 계약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했다고 라모를 비난한다. 〈어쨌든 분명히 할 것은, 이 체계가 아무­ 리 기발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가 그 점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듯 이, 자연에 토대를 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떤 창조 적 인간이 내일이라도 당장 좀더 자연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유사와 합목적성에 근거하여 세워졌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고자 한 다.〉(『백과 사전』) 라모의 오류는 두 가지이다. 인위적인 과잉과 자 연에 대한 기만적이거나 남용된 의존, 오직 소리의 물리로부터 영 감받는다고 주장하는 자의성의 과도함이다. 하지만 연쇄와 음정의 과학을 물리적인 것으로부터 단순히 연역할 수 없을 것이다. 루소 의 논증은 여러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공명의 물리적 원칙은 고립되고 고독한 화음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것은 화음의 연속을 확립시킬 뿐이다. 하지만 규칙적인 연속은 필요 하다. 선택된 단어들로 된 사전은 연설문도 아니고 좋은 화음울 묶어 놓은 악곡도 아니다. 거기에는 의미가 필요하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음악 에서도 관계가 필요하다. 앞선 것이 뒤따르는 것에 전달되어야만, 전부 하 나의 집합을 이루고 진정으로 하나라고 불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완전한 협화음에서 나오는 복합적 감각은 그 화음을 구성하는 소리들 각각이 절대적 감각과 그 동일한 소리들이 그들끼리 형성하는 음정들 각각에 서 비교된 감각에서 분해된다. 이 화음에서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거기서 나오는 결론은 바로 이렇다. 문제가 되는 관계를 설 정할 수 있는 것은 소리둘의 관계와 음정둘의 유사 관계에 의해서만 가능 하며, 바로 그것이 하모니와 변조의 모든 법칙이 전개되는 진정으로 유일 한 원칙이다. 만약 모든 하모니가 장조의 완벽한 협화음의 연속으로만 형성되었다면, 그러한 화음을 구성하는 것과 닮은 음정들로 처리하면 족할 것이다. 왜냐하면 앞선 화음의 어떤 소리가 다음 화음에서 필연 적으로 지속되면서 모든 화음이 충분히 연결되며 하모니는 이런 의미 에서 하나로 결합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연속이, 멜로디의 기저를 이루는 전음계를 배제하면서 모든 멜로디를 배제할 것이다. 그 것은 예술의 진정한 목적으로 향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담 론인 음악은 담론처럼 그 자신의 종합문, 문장, 중단, 휴지, 온갖 종류의 구 두법이 있어야 하며, 하모니 진행의 획일성은 위의 것 중 아무것도 제 공하지 못할 것이다. 전음계적 진행 방식은 장조와 단조가 뒤범벅되는 것을 요구하며, 악절과 휴지를 표시하기 위해 불협화~ 필요성을 느 꼈다. 바로 장조의 완벽한 협화음으로 결속된 연속체는 단조의 완전 협화음도, 불협화음도, 어떤 종류의 악절도 주지 못한다. 그리고 거기 서는 구두법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자기 체계에서 자연으로부터 완 전한 우리의 하모니를 화음을 통해 도출시키기를 원했던 라모는 그 결

과 발명물의 또 다른 경험에 호소한다…….(위의 책, 같은 곳. 필자는 오직 하모니만 강조함) 라모의 오류는 모든 실수와 역사적 타락의 모델에 부응한다. 그 리고 그 실수와 역사적 타락은 루소의 관점에 따라 있는 그대로 형태를 잡는다. 순환에 따라, 역사적 운동의 생략 또는 비표상적 형 상, 추상적 합리성과 냉철한 계약은 거기서 죽은 자연, 물리적 지 배와 결부되고, 합리주의는 유물론 또는 감각론과 하나가 되거나 경험주의와 합치된다. 허위적 경험주의, 경험의 직접적인 소여들을 위조시키는 경험주의이다. 이성을 미로에 빠지게 하는 이러한 위조 는 무엇보다 마음의 오류이다. 만약 라모가 혼동했다면 ,36) 그것은 역사적 오류이기 이전에 도덕적 실수이다. 『검토 Examen.!! 에서 다 음과 같은 글을 읽을 수 있다. 〈‘음악에 대한 오류 Erreurs sur la mus iq ue’ 라는 제목이 붙은 글은 오류로 가득한 것 같아 보이며 나는 그 제목보다 더 적절한 것이 없어 보인다고 고백하는 척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오류들은 결코 라모의 이성 가운데 있지 않다. 그 오류의 근원은 마음속에 있을 뿐이다. 정념이 그를 맹목 적으로 만들지 않을 때, 그는 그 누구보다도 예술의 좋은 규칙들을 제대로 판단할 것이다.〉 그로 하여금 루소를 비난하게 37) 이끄는 마 36) 〈라모는 체계 속에서 자연으로부터 일체의 하모니를 도출시키기를 절대 적으로 원하면서 그 결과 하모니의 창안을 또 다른 경험에 호소했다. …… 하지만 첫째, 그 경험은 그릇된 것이다. …… 이 경험의 진리를 전제로 할 때면, 이것은 그 난점들을 제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만약 라모가 주장하듯이, 모든 하모니가 소리가 울리는 덩어리의 공명으로부터 파생되었 다고 하더라도 공명하지 않는 반향하는 물체의 진동만으로는 파생되지 않 는다. 실제로 그것은 하모니의 원칙을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이끌 어낸 납득하기 어려운 이론이다. 아울러 마치 소리 그 자체가 진동에 의해 파동되는 공기가 아닌 것처럼, 소리가 반향하는 물체를 진동시키면서도 공 명시키지 않게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물리학이다. ……> 37) Confe s sio n s, 334 쪽 참조.

음의 착오는 음악의 영혼에 귀멀게 할 때만 논리적 오류가 된다. 음악의 영혼은 멜로디이며 하모니가 아니다. 더욱더 심각한 비난은 음악학자만큼이나 음악가를 귀먹게 하면서이다. 〈나는 『 음악에 대 한 오류 』 에서 이 원칙들 중 두 가지에 주목한다. 그의 모든 글에서 라모를 인도한 첫번째 것, 그리고 그의 모든 음악에서 제일 나쁜 것은 하모니가 예술의 유일한 토대이며, 멜로디는 거기서 파생되 고, 음악의 위대한 효과들은 오직 하모니에서만 탄생한다는 것이 댜 〉 (위의 책, 같은 곳) 라모의 착오는 하나의 증상이다• 그는 서구 역사가 걸린 병과 유 럽의 인종 중심주의를 폭로한다. 왜냐하면 루소에 의하면 하모니는 오직 유럽(북유럽)만을 지배하는 음악적 타락이며 인종 중심주의는 그것을 음악의 자연적 보편적인 원칙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 음악 의 에너지를 파괴하고 그 모방적인 힘(멜로디)에 족쇄를 채우는 하 모니는 음악의 태초에는, 그리고 비유럽권 음악에는 부재한다 . 그 렇다면 루소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종의 도식과 일치하며, 대 칭을 이루는 반인종 중심주의와 심층적인 서구 인종 중심주의를 통 해 인종 중심주의를 비판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특히 하모니를 유럽에 고유한 악과 과학으로 주장하면서말이다 . 3 8) 38) 〈 음악과 노래 를 갖고 있는 지구의 모든 민족들 중에서 유럽인들만이 오 직 하모니와 악보 를 갖고, 오직 그들만이 이 하모니의 혼합이 부드럽다고 생각할 줄 안다고 하는 점을 고려할 때, 세계는 수십 세기 동안 지속되었 지만 미술을 가꾼 모든 민족 가운데 그 어느 민족도 이 하모니를 알지 못 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어떤 동물도 어떤 새도 자연 속의 어떤 존재도 동음 아의에는 어떤 박자도, 멜로디 이외에는 어떤 음악도 산출하지 못한 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너무나 울림이 좋고 음악적인 동방의 언어, 너무 나 섬세하고 감각적이며 수없이 많은 기술과 더불어 단련된 그리스인의 귀 는 이 관능적이며 정념에 찬 민족들을 결코 우리의 하모니로 유도하지 못 했다. 하모니 없이도 그들의 음악에는 너무나 비법한 효과들이 있었다. 하 모니와 더불어 음악은 너무 약한 효과들을 갖고 있다. 끝으로, 이 엄청난 발견을 하고 그것을 예술에서 모든 규칙의 토대로 삼는 것이 북쪽의 나라

들에 국한되었다면 말이다. 그들의 거칠고 투박한 기관은, 악센트의 부드러 움과 억양의 멜로디는 목소리의 파열음과 소음에 더 가깝다. 이 모든 것에 주의한다면, 우리들의 모든 하모니가 고트 문화의 야만적인 발명에 불과하 다는 서실을 뒤집기는 힘들 것이다 . 만약 우리가 예술의 참된 미와 진정으 로 자연적인 음악에 예민했더라면 우리는 결코 그런 창안을 금지하지 않았 을 것이다. 그렇지만 라모는 하모니가 음악의 가장 커다란 미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감정은 기정 사실과 이성에 배치된다. 기정 사실이라 고 하는 이유는, 음악의 모든 커다란 효과가 멈추기 때문이며, 음악은 대위 법의 발명 이후로 자기 에너지와 힘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다 나는 순전히 하모니적인 아름다움은 예술에 능통한 사람들만을 움직이는 숙련된 아름디움이라는 사실을 덧붙인다. 음악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자연 속에 속 하는 대신, 그것은 유식하고 무식한 사람들에 똑같이 예민하며 또 그래야 만한다. 이성이라고 한 이유는 하모니가 어떤 모방 원칙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 다. 그 원칙을 통해서, 음악은 이미지를 형성하면서 또는 감정을 표현하면 서 드라마적인 또는 모방적인 장르로까지 고양될 수 있으며, 그 장르만이 가장 고상한 예술의 부분이며 유일하게 에너지가 담겨 있다. 소리의 물리 적인 것에 기인하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 주는 쾌락 속에 국한되며 사람의 심금을 울리기에는 역부족이다.〉( 『 백과 사전 』 ) 루소가 다른 곳에서는 부인하는 두 가지를 여기에서는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가면서 적어본다. 첫째, 음악의 아름다움은 자연에 속한다. 둘 째, 동물의 노래가 존재한다. 이것은 오직 멜로디만 가지고 있는 노래이며, 따라서 절대적으로 순수한 노래이다. 이렇듯 자연과 동물성의 개념을 처리 하는 것 속에서 모순의 의미와 기능이 확인된다. 가령, 음악은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인간적인 것)이 되며 죽음으로써 하모니 음악을 위협하는 것 에 의해서만 동물성을 위반한다.

표상적인 모방울 통하여 모든 의미를 초과하면서 의미를 생산하 는 음악의 바람직한 형식은 따라서 멜로디일 것이다. 끝없이 반복 되는 동일한 이분법적 원칙에 따라서 멜로디 그 자체에서 생명의 원칙과 죽음의 원칙을 구별해야만 한다. 아울러 조심스럽게 그 둘 을 분리해야 한댜 좋은 음악 형식(멜로디)과 나쁜 음악 형식(하모 니)이 있는 것처럼 멜로디에도 좋은 형식과 나쁜 형식이 있다. 루 소는 지칠 줄 모르게 다시 시작하고 언제나 더 나중으로 연기시키 는 이분법적 조작을 통해, 두 개의 의적이고 이질적안 힘으로서 긍

정적인 원칙과 부정적인 원칙을 숨가쁘게 구분하고 있다. 물론, 멜 로디에서 사악한 요소는 음악 일반의 사악한 요소, 즉 하모니와 소 통한댜 좋은 멜로디와 나쁜 멜로디를 가르는 이 두번째 분리는 따 라서 첫번째 외재성을 문제시한다. 멜로디에는 이미 하모니가 있다• 멜로디는 그것을 고려하는 방식에 따라 두 개의 상이한 원칙에 부합 한다. 소리 관계와 조 구성 방식에서 보면, 멜로디는 하모니에 원칙을 두고 있다. 왜냐하면 음계의 음정과 조의 선, 노래에 독특한 요소들인 전조의 여러 법칙들을 부여하는 것은 하모니 분석이기 때문이다. 이 원칙에 따라, 멜로디의 모든 힘은 기분 좋은 소리들로써 귀를 즐겁게 하는 데 국한되며, 이것은 마치 색채의 쾌적한 조화로 시각을 기분 좋 게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다양한 영상으로 정신에 영향을 주 고, 다양한 감정으로 마음을 감동시키며, 정념을 자극하고 진정시키는, 한마디로 말해 감각의 직접적 지배권을 넘어서는 도덕적 효과들을 조 작시킬 수 있는 모방 예술이라는 시각에서 파악하면, 거기서 또 다른 원칙을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모니만으로, 그리고 하모니에서 오는 모든 것도, 우리의 정서를 유발시킬 수 있는 어떤 실마리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두번째 원칙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 그 원칙은 아마 도 모방을 가능하게 해야 할 것이다. 오직 모방만이 예술에서 관심 을 끌고 자연을 표상하면서, 또 정념을 표현하면서 우리와 상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멜로디에서 무엇이 모방울 하고 표현을 하는 가? 그것은 악센트다. 우리가 라모와 루소의 토론에서 오랫동안 머 물렀던 이유는 바로 이 악센트 개념의 경계를 좀더 원만하게 설정 하기 위해서이다. 그 개념은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 사이의 관계 이론에 도달했을 때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될 것이다.

이 두번째 원칙은 무엇인가 ? 그것은 첫번째 원칙처럼 자연 속에 있 다. [우리는 강조한다. 루소는 자연에 맞선 원칙, 죽음과 야만의 원칙, 죽 하모니 또한 자연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서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단순하다 할지라도 좀더 세련된 관찰과 좀 더 예민한 감수성을 필요로 한다. 이 원칙은 동일한 것이며, 사람은 말 하는 사물과 그것을 말하면서 느끼는 운동에 따라서 목소리를 조절한 다. 각 나라 민족의 멜로디를 결정하는 것은 여러 언어들의 악센트이다. 노래를 부르듯이 말하게 하는 것은 악센트이며, 그 언어가 어느 정도 악센트를 갖고 있음에 따라 어느 정도의 에너지를 갖고 말하게 하는 것 이 바로 악센트이다. 악센트가 더 두드러진 언어는 좀더 살아 있고 좀 더 정열적인 멜로디를 줄 수 있게 된다 . 거의 또는 전혀 악센트가 없는 언어는 맥빠지고 싸늘한, 특징도 없고 표현력도 없는 멜로디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 바로 이것이 진정한 원칙이다. 〉 (강조는 필자의 것임) 『인간 언어 기원론』, 특히 생성 순서를 밟는 음악의 기원, 멜로 디와 하모니에 대한 세 개의 장들은 똑같은 틀로 읽을 수 있다. 그 러나 이번에는 대리 보충 개념은 텍스트에서 나타나고 명명되지만 결코 어디서도 노출되지 않는다. 묵시적 함의, 명시적 현전과 주제 적 제시의 차이가 여기서 우리의 홍미를 끈다. 멜로디에 대한 장은 똑같은 정의를 제안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정의를 도입하는 교육적 논증이 공간 예술인 회화에서 유사 관계 를 빌리고 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예를 통해서 관계를 다루는 과학은 (하모니에서 음정을 계산할 때처럼) 냉엄하며 모방적 에너지가 없는 반면에 의미(정념과 우리의 홍미를 끄는 정 념)의 모방적 표현은 예술 작품의 진정으로 살아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보이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데생을 예술 쪽에, 색채를 과학과 관계 계산 쪽에 배열하는 것에 놀라지 말자. 그 패러독스는

불을 보듯 뻔하댜 데생이란 말은 모방의 조건을 뜻한다. 반면 색 깔은 자연적 실체를 뜻한다. 그리고 그 놀이가 물리적 원인으로 설 명될 수 있으며, 관계의 수량적 과학, 공간 과학, 음정의 유사한 배열을 연구하는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두 예술(음악과 회화) 사이의 유사 관계는 이런 식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유사 관계 자체 이다. 두 예술은 묘하게도 자연의 타락 원칙을 수반하고 있으며, 두 경우 모두 타락 원칙은 공간 띄우기, 음정의 계산 가능하며 유 사한 규칙성과 연결되어 있다• 또 두 경우 모두, 색채의 종류이든, 음계이든, 가시적인 뉘앙스인 하모니이든, 청취 가능한 뉘앙스이 든, 하모니의 합리적 계산은 크로마티크, 죽 음악에서 음계와 저음 부로 사용되는 특수한 의미를 넘어 넓은 의미에서 사용할 때의 음 채학이다. 루소는 『 인간 언어 기원론』에서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 지만 유사 관계는 『백과 사전』에서 간과되지 않는다• 〈크로마티크 는 때때로 실체적으로 쓰이는 형용사이자 다수의 연속적인 반음으 로 진행되는 음악 장르이다. 이 단어는 색깔을 뜻하는 그리스어 江 w µn. (Kroma) 에서 왔다. 그 이유는 그리스인이 이 크로마티크 장르 를 빨간색 또는 여러 가지 색깔로 된 글자로 표시했기 때문이거나 저자들의 말처럼 음채학적 장르가, 마치 그 색깔이 백과 혹의 사이 에 있는 것처럼 둘 사이의 가운데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저자 들에 따르면, 이 장르는 다양하게 변화하고 다수의 연속적인 반음 으로 반음 변화를 아름답게 해주기 때문이다. 회화에서 색깔의 다 양함이 내는 효과처럼 그 반음계 양식은 음악에서 동일한 효과를 낸다.〉 음채학, 음계가 예술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문자 언어가 음성 언어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과 같다(g amme 이란 말이 음악의 기호 표기 체계에 도입된 그리스 문자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깊게 성찰할 것이다). 루소는 음채, 하모니, 음정을 몰랐던 시기의 자연스러운 예술을 복구하려 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 인정한 것을

지워버리려 한다. 가령, 멜로디에는 하모니가 있다는 사실. 그러나 기원은 순수한 멜로디로 남아 있어야 한다(기원과 관계된 문법과 어 휘는 그런 것이다). 〈최초의 이야기, 연설, 법률은 시로 이루어졌다. 시는 산문에 앞서 존재했다. 이것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념이 이 성에 앞서서 말을 했기 때문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애초에는 멜 로디를 제의한 어떤 음악도 없었고, 음성 언어의 변화된 소리 이의 의 다른 멜로디도 없었다. 악센트가 노래를 형성했다……. 〉 (강조는 필자의 것임) 회화에서 데생을 색채의 물리적 양상으로 대체했을 때, 데생 예 술이 타락한 것처럼 ,39) 노래에서도 멜로디는 하모니에 의해 근원적 39) 13 장 〈멜로디에 대하여〉는 거의 전적으로 회화에 할애되고 있다. 우리 는 이 주목할 만한 부분을 확장해서 인용해야 할 것이다. 그 역설은 오늘 날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 〈가령 그림에 대한 어떤 관념도 없는 나 라가 있다고 가정해 보라 . 그 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색채 를 조합하고, 혼합시키고, 빛깔을 어울리게 하는 데 나날을 보내면서 그들이 뛰어난 그 림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인들의 음 악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회화에 대해서 추론할 것이다. 그 들에게 아름다운 그림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과 비장한 주체 앞에 서 측은지심이 드는 황홀감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 나라 현자들은 곧 그 질료를 심층화시킬 것이며, 색채를 우리 색채와 비교할 것이며, 우리가 쓰 는 초록색이 더 부드럽거나 우리가 쓰는 빨간색이 더 자극적인지를 검토할 것아다. 그들은 어떤 색의 조화가 눈물을 홀리게 하고, 다른 어떤 색깔이 분노를 야기시킬 것인가를 모색할 것이다. 이 나라의 부레트 Bure tt e 는 누 더기에 우리 그림의 흉칙한 모습이 찍힌 헝깊을 모아놓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 채색법이 매우 훌륭한 것에 대해서 깜짝 놀라 자문해 볼 것이다. 만약 이웃 나라에서 어떤 선, 그림의 초벌, 아직도 불완전한 형상을 형성 하기 시작한다면, 이 모든 것은 낙서, 조변 석개식의 바로크적인 회화로 간 주될 것이다. 그리고 그 취향을 간직하기 위해서, 이 단순한 아름다움에 집 착할 것이다. 그 아름다움은 진정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고, 아름다운 뉘앙 스, 색채가 있는 커다란 나무판, 아무 선도 없는 빛깔의 오래된 풍화 작용 을 빛나게 한다. 끝으로 진보 덕택으로 프리즘의 경험에 다다를 것이다. 곧이어 유명한 예 술가는 거기에 아름다운 체계를 세울 것이다. 그는 말할 것이다. ‘여러분! 철학을 잘 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자! 여

기에 색채의 분해가 있다 . 자! 여기에 모든 원시적 색채가 있다. 자! 여기 에 그 관계와 비율이 있다 . 자! 여기에 회화가 당신에게 주는 줄거움의 진 정한 원칙이 있다. 그림, 표상, 형상 등의 신비한 낱말들은 프랑스 회화의 순수한 바람잡이 협잡꾼이다. 프랑스 회화는 그들의 모방을 통해서 내가 모르는 어떤 운동을 영혼에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는 오직 감각 만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 사람들은 그들의 그림에 대해서 당 신에게 훌륭한 말을 한다. 하지만 나의 색깔을 보라.'〉 루소는 이 이방인의 상상적인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요컨대 그 이방인은 프랑스 음악가와 음악 연구가에 해당하는 사람(이방인이자 회화 이론가), 죽 라모와 유사한 인물일 뿐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프랑스 화가들 은 아마도 무지개를 관찰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연으로부터 뉘앙스에 대한 취향과 채색법에 대한 본능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나는 당신들에게 예술 의 위대하고 참된 원칙을 보여주었다. 내가 예술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 던가! 모든 예술과 과학에 대해서 말이다. 색채의 분석, 프리즘의 굴절 계 산만이 자연 속에 있는 정확한 관계와 모든 관계의 규칙을 당신에게 일러 줄 것이다 . 우주 속에 있는 모든 것은 관계일 뿐이다. 따라서 그림을 그릴 줄 알 때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색깔을 어울리게 할 줄 알면 모 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이다.' 감정과 이성에 대한 취향이 결여된 상태에서 바보처럼 회화가 우리에게 주는 줄거움을 오직 예술의 물리적인 양상으로 국한시키는 화가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와 유사한 편견에 가득 차서 하모니에서만 음 악의 위대한 효과의 근원을 보려는 음악가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 할 것인가? 우리는 전자의 화가가 판자를 색깔로 채색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후자의 음악가는 프랑스 오페라를 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40) 1 권의 이 단락에서 〈어떻게 내가 침묵 속에서 염탐하고. 나를 감추고. 은폐하고, 거짓말하고, 슬쩍 훔치는 것들을 배웠는가〉 (32 쪽)를 설명하고 있다. 조금 위에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여기에서 다시 읽어야 할 단락이 나온다. 〈그 일은 그 자체로는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나는 그림에 대한 강렬한 취향이 있었다. 끌과 조각의 놀이는 나를 매우 신나게 했고.

으로 타락했다. 하모니는 멜로디의 근원적 대리 보충이다. 그러나 루소는 보충의 첨가를 필연적으로 만드는 결핍의 근원성을 설명하 지 않는다. 가령, 이미 멜로디를 조작하는 음과 음의 길이 차이가 그것이다. 그는 그것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거나 자신도 모르게, 비스듬하게, 밀수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읽 으면서 『고백록 』 의 〈밀수 작업 〉 40 ) 이 란 표현을 덧붙이면 놀라게 된

시계술 조작의 재능이 매우 편협한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완벽에 도달할 희망을 갖고 있었다. 만약 내 선생의 투박함과 지나친 방해가 내가 그 일 을 안 내키게 했다면 아마도 나는 거기에 도달했을 것이다. 나는 그 작업 에서 내 시간을 빼내서 똑같은 장르의 직업에 시간을 투자했다. 그러나 그 작업은 내게 자유의 매력을 안겨주었다. 니는· 나 자신과 기사도의 동지들 에게 쓰이게 할 목적으로 금속류를 조각했다. 내 선생은 이러한 작업을 밀 수 작업이라며 나를 겁주었고, 위조 지폐 만드는 연습울 한다고 하면서 나 를 사정없이 때렸다. 그 이유는 우리 직업은 공화국의 군대 생활이었기 때 문이다. 나는 결코 위조 지폐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도 없고, 진짜 화폐에 대해서도 욕심을 안 부린다고 맹세할 수 있었다. 나는 서푼짜리 프랑스 동 전보다 로마 화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더 잘 알고 있었다.〉

다. 방금 전 우리가 인용한 『 인간 언어 기원론 』 의 한 구절에서, 음 악의 기원에 대한 정의는, 모순 또는 불순함이 그 테마가 되지 않 고, 다음과 같은 식으로 계속된다. 〈……악센트는 노래를 형성했 고. 음의 장단은 박자를 형성했으며, 분절과 목소리만큼이나 소리 와 리듬으로 말을 했다. 스트라봉은 옛날에는 말하는 것과 노래 부 르는 것이 같은 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것은 곧 시가 웅변술의 기원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둘은 서로 똑같은 기원을 갖고 있었고 무엇보다 똑같은 것이었을 뿐이라고 말해야 했다• 최초 의 무리 사회가 연결되는 방식에 대해서, 최초의 이야기(역사)를 시로 적었고, 최초의 법률을 노래로 불렀다는 서실이 놀랄 일인 가? 최초의 문법가들이 그 기술을 음악에 종속시켰고, 동시에 그 두 분야 모두의 선생들이었다는 사실이 놀라운가?〉 우리는 이러한 명제들을 다른 유사한 명제, 가령 비코의 명제들 에 접근시킬 것이다. 지금으로선, 루소 담론의 논리 그 자체에 관 심을 가져본다. 이러한 동시성으로부터 노래는 문법에서 개시되었 고, 차이는 이미 멜로디를 퇴폐시키기 시작해서 그 규칙과 동시에 멜로디를 가능하게 했다는 결론을 내리는 대신, 루소는 문법이 애 매한 의미에서 멜로디에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결핍 이 아닌 충만감, 차이 없는 현전이 있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위험한 대리 보충이라 할 수 있는 음계 또는 하모니는 다행 스 러움과 순진한 충만함에 악과 결핍으로서 외부로부터 첨가된 다 그것은 바깥쪽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 바깥쪽은 단순히 바깥 쪽일 따름이다. 이것은 동일률 논리와 고전적인 존재론 원칙(바깥 쪽은 바깥쪽, 존재는 있는 것 등)과는 일치되지만 대리 보충성 논리 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대리 보충성은 바깥쪽이 안쪽이기를 원하며 타자와 결핍이 결핍된 것을 대체하는 잉여로서 첨가되기를 원하지 만, 무엇인가에 첨가된 것은 없는 것을 대신해서 있으며 , 안쪽의 바깥쪽인 결핍은 이미 안쪽의 안쪽에 있기를 원한다. 루소가 기술 하고 있는 것은 잉여에 잉여로서 첨가되면서 손대지 못한 채 완전 하게 남아 있을 에너지에 결핍이 손상을 끼친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위험한 대리 보충으로서 약하게 만들고, 예속화하며, 말살하 고, 분리시키며, 왜곡시키는 대체물로서 그 에너지롤 손상시킨다. 〈 천 년 동안 소리와 소리의 관계를 하모니 법칙으로 계산할 때, 어 떻게 이 예술을 언젠가 모방 예술로 만들 것인가? 소위 말하는 이 모방의 원리는 어디에 있으며 그 하모니는 무엇의 기호인가? 또한 화음과 정념 사이에 공통점은 무엇인가? …… 멜로디에 족쇄를 걸 면서 하모니는 멜로디에서 에너지와 표현을 제거한다. 하모니는 정 념이 스며든 악센트를 말살시키고 그 자리에 하모니에 의한 음정을 갖다 놓는다. 하모니는 웅변의 어조만큼이나 다양한 노래 방식을 두 개의 유일한 방식으로 예속시킨다. 하모니는 체계 안에 들어오 지 않는 다수의 소리 또는 음정을 말살하고 파괴한다. 한마디로 말 해, 하모니는 음성 언어에서 노래를 분리시키고 , 이 두 언어는 서 로 싸우고 모순되어 상호간에 진실의 특징을 제거하여, 비장한 주제 속으로, 통일될 때는 반드시 터무니없음의 결과를 초래한다.〉(강조 는 필자의 것임. 특히 소거와 대체 가치들의 기묘한 연상 결합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루소가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으면서도 말한 것, 구체적으로 보 지 않으면서도 본 것은 무엇인가? 대리 보충 작용은 이미 언제나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예술의 원리인 모방은 이미 자연적 충만성을 단절시켰다는 것이다• 하나의 담론이 되면서 그것은 차이/지~ 속 에서 현전성을 손상시켰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언제나 자연 속에서 결핍을 대리 보충하는 것이며, 자연의 목소리를 대리 보충 하는 목소리라는 점 등이다. 그러나 루소는 그 파급 효과를 도출시 키지 않은 채 그 점을 말하고 있다. 유일하게 하모니에만 종속되는 것으로 보이는 표현들에 하모니만으 로는 불충분하다. 천둥 소리, 물 흐르는 소리, 바람, 뇌우 동은 간단한 화음만으로는 제대로 살릴 수가 없다. 무엇이든 소음만으로는 정신에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서로 듣기 위해서는 물체들이 말을 해야 한 다. 모든 모방에서 언제나 담론이 자연의 목소리를 대리 보충해야만 한다. 소음을 소음으로써 되살리려고 하는 음악가는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 예술의 단점도 장점도 알지 못한다. 그는 아무 취향도 , 지식의 빛도 없이 그것에 대해 판단한다. 소음을 노래로써 되살려야 한다는 사실을 그에게 일깨워주어라. 개구리 우는 소리를 내게 하려면, 그들이 노래 부르게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모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 지 않으며. 감동을 주고 기분에 맞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는 그 무뚝뚝한 모방은 아무것도 아니며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고 어떤 인상도 주지 못한다.(강조는 필자의 것임) 문자 언어의 회전 이렇게 해서 우리는 대리 보충으로서의 담론으로 다시 인도된다.

아울러 『 인간 언어 기원론 』 의 구조(언어의 기원, 음악의 기원과 타 락, 언어의 타락)로 다시 인도되거니와 『 인간 언어 기원론 』 은 언어 의 구조를 단지 그 생성뿐만 아니라 그 공간, 배열, 액면 그대로 그 지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서 반사시키고 있다. 언어는 구조(장소와 가치들의 대립 체계)인데 방향성욜 띤 구조이 다. 차라리 그것의 방향성(동방화)을 탈방향성(탈동방화)이라고 말 해 보자. 집중 작용 또는 분극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방향 성은 운동을 초기의 서광뿐만 아니라 그 기원에 귀결시키면서 운 동 방향을 잡아준다. 아울러 서방, 종말과 실추, 종지(終止) 또는 만기, 죽음 또는 밤을 생각하는 것은 기원의 광명 이후부터이다. 그런데 여기서 17 세기의 대단히 진부한 대립을 자기 것으로 만들 고 있는 루소에 따르면 ,41 ) 언어는 지구처럼 회전한다는 것이다. 여 기서는 동방과 서방을 특권시하지 않는다. 기준점은 지구 회전 祐初g, 1tO炫 wn 의 양극단이며, 그것을 이성적 축이라 부른다. 북극 과 남극이 그것이다.

41 ) 가장 가까운 참고 문헌은 콩디 악의 글이다. De I'ori g ine de la po esie dans J'E ssai sur J'or ig ine des connais s ances humain e s 참조.

모든 언어에는 역사적 직선도 없고 부동의 도식도 없다. 언어의 회전이 있을 뿐이다. 문화의 운동은 가장 자연스러운 자연에 따라 정돈되는 동시에 리듬을 띠게 될 것이다. 지구와 계절이 그것이다. 모든 언어는 산포되어 있다. 아울러 언어 그 자체는 한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 옮겨간다. 모든 언어의 분화, 모든 언어의 형성에서 북극으로 회전하는 체계와 남극으로 회전하는 체계 사이의 분할, 이러한 내적인 한계는 이미 일반적인 언어와 개별적인 언어의 혼 적울 새겨넣는다. 최소한 우리의 해석은 그러하다. 루소는 남극과 북극의 대립이 모든 언어 유형의 자연적인 경계선을 설정할 것을 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기술하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허

락지 않는다. 이 기술은 북/남의 대립이 합리적이며 비자연적이고, 구조적이며 사실이 아니며, 관계적이며 바실체적이므로, 각각의 언 어 내부에서 기준축을 따라 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어떤 언 어도 남쪽 또는 북쪽에서 온 것이 아니며, 언어의 어떤 실제 요소 도 절대적 상황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시차적인 상황만이 있을 뿐이댜 그런 이유로 해서, 양극의 대립은 기존 언어 전체를 분할 시키지 못한다. 그 대립은, 루소에 의하면, 비록 명시적으로 선언 되지 않았지만 여러 언어의 기원으로 묘사된다. 우리는 기술과 선 언 사이의 간극을 측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거리낌없이 여러 언어의 분극화라고 명명한 것은, 각각 의 언어 체계 내부에서 비언어로부터 언어의 출현을 생각할 수 있 게 하는 대립을 반복한다. 즉 정념과 필요 욕구의 대립, 일체의 내 포적 의미의 대립이 그것이다. 북극에서 왔든 님극에서 왔든, 모든 언어 일반은 정념에 찬 욕망이 물리적 필요 욕구를 초과할 때, 연 민의 정을 각성시킨다. 그리고 대리 보충적인 연쇄 고리에 운동을 주는 상상력이 각성될 때 비로소 분출된다. 하지만 일단 여러 언어 들이 성립되고 나면, 필요 욕구/정념의 분극과 대리 보충적 구조는 각각의 언어 체계의 내부에서 조작된다. 여러 언어는 순수한 정념 에 어느 정도 가까이 있다. 즉 어느 정도 순수한 필요 욕구에서 동 떨어져 있으며, 순수한 언어 또는 순수한 비언어에 어느 정도 가까 운 언어들이다. 이 근접성의 측량은 여러 언어의 분류에 대한 구조 적 원칙을 제공한다. 이렇듯, 북극의 여러 언어들이 필요 욕구의 언어들 편이라면, 그 기술에서 루소가 열 배나 많은 자리를 할애하 고 있는 남극의 언어들은 정념의 언어들 쪽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 한 기술은 루소가 어떤 . 언어는 정념에서 탄생되었고,' 다른 언어는 필요 욕구에서 나왔다고 선언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어떤 언어는 먼저 정념을 표현하고, 다른 언어는 먼저 필요 욕구를 표현한다.

남쪽 땅에서는, 최초의 대화로서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먼저였다 면, 북쪽 땅에서는 〈최초의 낱말은 나를 사랑해 주세요가 아니라 나 를 도와주세요란 말이었다•〉 만약 액면 그대로 이러한 선언들을 취 한다면. 다른 기술들과 다른 선언들에 견주어서 모순된 것이라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특히, 한 언어가 순수한 필요 욕구에서 탄생 된다는 사실을 배제하는 선언과 모순된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외관적으로만 보는 것에 그치면, 이러한 모순둘은 기능적 또는 분극적 기원을 현실적이며 자연적인 기원으로 간주하려는 욕 망에 의해 조정된다. 기원이란 개념은 그 자체에다 다수의 기원들 을 위치시키는 체계 속에서 단지 상대적 기능만을 차지한다는 사 실을 받아들일 수 없고, 각각의 기원이 또 다른 기원의 결과 또는 새싹일 수 있으며, 북쪽은 좀더 북쪽에 있는 거점에 견주어 남쪽이 될 수 있다는 점 등으로 해서 루소는 절대적 기원은 절대적 남쪽 이기를 원한다• 이러한 도식으로부터 다시 한번 사실과 권리, 현실 적 기원과 관념적인 기원, 발생과 구조 등의 문제를 루소 담론에서 제기해야 한다. 이 도식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필연성들을 주지하고 있어야 한다. 남쪽 지방은 기원점 또는 여러 언어의 요람이다. 그때부터 여러 남방 언 어들은 유년기, 비언어, 그리고 자연에 더 가깝다. 하지만 동시에 기원에 더 가까운 이 언어들은 더 순수하고 더 생동감 있고 활력 있는 언어들이다. 반면, 북방 언어들은 기원에서 동떨어져 덜 순수 하고, 덜 생동감 있고, 덜 열기 있는 언어들이다. 북방의 언어들에 서는 죽음과 냉각의 진보롤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여전히 표상되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멀어침이 기원에 접근된다는 사실이다. 북방의 여러 언어들은 이러한 필요 욕구로, 이러한 육체 적인 것으로, 이러한 자연으로 다시 인도된다. 그 자연에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남방 언어들은 가능한 한 그 자연에 가까웠다. 그것은 언제나 불가능한 그림이며, 대리 보충적 구조에서는 생각조 차 할 수 없는 구도이다. 비록 남쪽과 북쪽, 정념과 필요 욕구의 차이가 여러 언어의 기원을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그 차이는 기존에 성립된 언어들에서도 계속되며, 북쪽은 남쪽의 남쪽 으로 되돌아오며, 이것은 남쪽을 북쪽릭 북쪽으로 갖다 놓는다. 정 념은 어느 정도, 또 안쪽에서 필요 욕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필요 욕구는 어느 정도, 또 안쪽에서 정념을 구속한다• 이러한 분 극적 차이는 단순히 서로 바깥쪽에 있는 두 계열을 구분하는 것을 엄연히 저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루소가 이러한 불가능한 외재 성을 지속시키기를 고집하는 이유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의 텍스 트는 우리가 기술과 선언이라고 부른 것 사이에서 이동하며, 그것 들은 자연적이며 고정된 식별점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인 축둘이다. 정념의 집요한 필요 욕구의 압력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의 정념, 죽 여러 가지 유형의 언어들을 갖게 된다• 그런데 필요 욕구의 압 력은 장소에 따라서 변한다. 장소는 지리적 상황인 동시에 계절의 절기이다. 욕구들의 압력에서 생기는 차이가 지리적 차이에 기인한 다는 점에서, 언어 형식에 대한 필요 욕구 효과들을 고려하는, 여 러 언어들의 형태론적 분류라는 문제와 언어의 기원 장소의 문제 를, 즉 유형론과 지세학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언어의 기 원과 언어 사이의 차이를 함께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되 면, 『인간 언어 기원론』의 조직에 대해서 계속해서 성찰하기 위해 서, 루소가 이러한 이중적인 질문을 하나의 동일한 질문으로 접근 시키고 있음울 보게 될 것이다. 바로 언어 일반의 문제 또는 원시 언어들 일반의 정의를 다룬 후에 그 문제에 접근한다. 8 장 〈여러 언어 기원에서 일반적이며 지리적인 차이〉는 다음과 같이 소개된 다. 〈이제까지 내가 말한 것은 원시 언어 일반과 그것이 지속되는

데서 나타나는 진보에 들어맞지만 원시 언어들의 기원도, 그 차이 도 설명하지 못한다• 〉 어떤 점에서 한 언어의 기원 장소가 곧바로 언어의 고유한 차이 를 표시하는가? 여기서 지리적인 요소의 특권은 무엇인가? 지리적 인 것은 먼저 토양과 기후의 본질을 의미한다. 〈언어를 구분하는 주된 원인은 지리적이며, 그것은 여러 언어들이 탄생하는 기후와 그것들이 형성되는 방식에서 오는 것이다. 남방 언어와 북방 언어 사이에서 주목하는 일반적이며 특징적인 차이룰 파악하기 위해서 는 바로 이러한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명제는 『 인간 언어 기원론』을 여는 약속과 일치되는 명제이다. 여러 언어의 기원 에 대해 형이상학적이지 않고 신학적이지도 않은 자연적 설명을 제 공해야 한다. 음성 언어는 동물과 인간을 구분해 준다. 언어는 민족들을 구분짓는 다. 한 사람이 어디 출신인가 아는 것은 그 사람이 말을 한 후에야 가 능하다. 사용과 필요 욕구는 각자 자기 나라의 언어를 배우게 한다. 그 런데 무엇이 그 언어를 그 나라말이게 하며, 다른 나라말이 아니게 하 는가?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풍속에 선행하는 지리적인 요소에 기인 하는 모종의 이유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최초의 시회적 제도인 말 의 형식은 오직 자연적인 원인에 기인한다. 이러한 자연적인 원인들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신학적-도덕적인 논점 선취의 오류, 가령 콩디악의 논점을 회피하는 일이다. 알다시 피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루소는 그에게 진 빚을 시인하면서 도 , 콩디악이 언어들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온갖 풍속과 사회 를 들먹인다고 비난한다. 루소가 보기에 콩디악은 신의 선물로 남 아 있는 것(죽 언어)을 순전히 자연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

한다. 루소는 콩디악이 언어의 기원에서 문제시하는 것, 즉 〈언어 의 창조자 사이에 이미 설정된 일종의 사회〉를 가정하고 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것은 〈자연 상태를 성찰하면서 사회에서 취한 관념들을 끌어들이는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이다. 역시 이 점 에서 『 인간 언어 기원론 』 은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과 일치한다. 언 어 이전에 사회 제도는 없었고, 언어는 문화의 일개 요소가 아니라 제도 일반의 요소라는 것이다. 언어는 모든 사회 구조를 포함하고 건설한다• 사회의 그 어느 것도 언어에 선행하지 않으며, 그 원인 은 문화보다 선행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즉 자연적일 수밖에 없 다. 비록 언어가 정념적인 본질에 속하지만, 본질이 아니라 그것의 원인은 자연, 죽 필요 욕구에 속한다. 만약 여기서 『인간 불평등 기원론 』 과 언어의 기원과 차이를 다루는 『 인간 언어 기원론 』 의 네 개의 장의 결속점을 (특히 논증을 도출한 사실적 내용에서) 찾기를 원한다면, 『인간 불평등 기원론 』 1 부에서 본능과 사회, 정념과 필 요 욕구, 북방과 남방의 관계에 관한 부분을 다시 읽어야 할 것이 다. 거기서 다음과 같은 점을 보게 된다. 첫째, 대리 보충성은 구 조적 규칙이다. 〈자연이 오직 본능에 내맡긴 야만인, 또는 먼저 대 리 보충으로 자연을 훨씬 넘어서 그를 고양시킬 수 있는 능력이 아마 도 그에게 결핍되는 것을 배상받게 할 야만인은 순전히 동물적인 기 능으로 시작할 것이다 . 〉(강조는 필자의 것임) 둘째, 정념과 필요 욕 구 사이에는 본질적 이질성이 있지만 정념은 어떤 원인에 대한 결 과로서, 어떤 기원에 대한 생산물로서 필요 욕구에 첨가된다. 〈도 덕론자들이 무어라 말하든, 인간 오성은 정념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 다. …… 정념은 그 기원을 필요 욕구에서 도출시킨다.〉 셋째, 루 소는 지리적 설명에 자리를 내준다. 여러 사실을 통해서 지지할 수 있다고 말하는 구조적 설명이 그것이다. 이 설명은 북방 민족들과 남방 민족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로 귀결되며, 북방 민족들은 남

방 민족들이 어려움을 겪지 않는 결핍에 부응하기 위해 대리 보충 을 수용한다. 『인간 언어 기원론 』 8 장이 여러 언어의 차이들에 대 한 루소의 성찰을 보여줄 때 그 점이 드러난다. 〈우리 연구에서는 자연적 순서를 밟기로 하자. 나는 너무나도 자주 토론의 대상이 되 어 이제는 진부해져 버린 그 주제에 대해서 본론으로부터 오랫동 안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그 주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무리 많 은 토론을 했다 하더라도, 인간 사회 제도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언제나 다시 재론해야만 한다.〉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의 다음 구절 에서 장문의 주( 姓 )라고 불린 것을 둘러싼 상황을 상상해야만 한 다(루소는 〈정념은 그 기원을 필요 욕구에서 도출시킨다〉라고 설명했 다). 그것이 나에게 필요하다면, 이러한 감정을 기정 사실로 지지하는 것, 또 모든 민족에게 정신의 진보는 바로 여러 민족이 자연으로부터 부여 받은 필요 욕구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보이는 것은 쉬운 일일 것이다. 그러 한 필요 욕구에 덧붙여 여 러 상황이 그 민족들을 무릎 꿇게 만들 었고, 따라서 그들을 이러한 필요 욕구로 이끄는 정념에 무릎 꿇게 만 든다. 나는 이집트에서 나일강의 범람과 더불어 예술이 탄생했고 널리 알려졌음을 보여줄 것이다 . 나는 그리스인들에게서 예술의 진보를 추 적할 것이다. 그리스에서 그들은 신선한 싹으로부터 성장하여 아티카 의 암벽과 모래 가운데서 하늘까지 치솟지만, 유로타스의 풍성한 다산 성의 강둑에 그 뿌리를 둘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북방 민족은 부지런 하지 않고서는 생활할 수 없기 때문에 남방 민족보다 부지런하다. 마치 자연이 세인에게. 대지에게 부인하는 E 난성을 부여하면서 사물들을 평등 하게 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 〉(1 43-144 쪽. 강조는 필자의 것임) 따라서 거기에는 자연의 경제가 존재하며, 그것은 필요 요구에

대해서 모든 능력을 조정하는 것에 주의하고, 대리 보충과 배상들 을 분배한다. 이 점은 필요 욕구의 영역 자체가 복잡하고 서열화되 어 있으며 시차화되었음을 가정한다. 이런 의미에서 『 사회 계약론 』 3 권 8 장과 이 텍스트들을 연결해야 할 것이다. 거기서 어떤 이는 (헤겔의) 『 법의 정신 』 에 미친 영향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필요 욕 구에 대한 노동 생산 일체의 초과 이론은 정부 형태의 유형론과 (국민과 정부의 거리에 따라서) 기후에 의한 설명(〈직선에서, 멀어지 거나 접근됨에 따라서 〉 )과 체계를 이룬다. 〈각각의 기후에는 정부 형태를 할당할 수 있는 자연적 원인이 있으며, 기후의 힘이 그러한 정부 형태로 이끌며, 정부가 어떤 주만들을 찾는지 말할 수 있 다.〉 (T. III, 415 쪽) 그러나 『인간 언어 기원론 』 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필요 욕구 이 론은 다른 어떤 곳보다 다섯 쪽으로 된 한 단락에서 제시되고 있 다. 그 영감은 반박할 여지 없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장들과 『 정치 제도론』의 기획에 대한 영감일 것이다 . 4 2) 필요 욕구는 세 가지 종 류로 구분된다. 〈‘호구지책’과 ‘자기 보존(먹을 것, 수면)에 근거하 는' 필요 욕구, ‘안락함'에 근거하는 필요 욕구로서 엄밀하게 말하 면 여러 가지 욕망들은 때로는 너무 격정적이어서 진정한 필요 욕 구보다 더 고통을 준다.〉(관능성과 나태함에 대한 사치, 성의 결합과 감각에 아첨 떠는 모든 것) 〈다른 필요 욕구보다 나중에 탄생해서, 다른 필요 욕구들이 능가하게끔 방임하지 않는 세번째 차원의 필 요 욕구들은 여론으로부터 오는 필요 욕구들이다.〉 마지막 필요 욕 구들이 나타나려면 처음 필요 욕구들이 만족되어야 한다고 루소는 적고 있다. 하지만 두번째 또는 이차적 필요 욕구가 매번, 긴금함과 42) 그 수고가 유실된 이 글은 1861 년 S t re ic ke i sen-Moul t ou 에 의해 출판 되었다. 그것은

무력으로, 일차적 필요 욕구를 대신한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이미 필 요 욕구들의 타락, 그것들의 자연적인 질서의 도치가 있게 된다. 아울· 러 우리는 필요 욕구들의 명목으로, 다른 곳에서 정념으로 명명된 것을 인용하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필요 욕구는 영속적으로 정념 속에 현전한다. 그러나 정념, 사회, 언어의 일차적 기원을 설명하 려면, 일차원적 필요 욕구의 심층을 다시 재론해야 한다. 우리가 선택한 단락은 『인간 언어 기원론』의 프로그램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더구나 루소는 단 몇 쪽으로 그 프로그램을 완결짓기 시작한 다. 이렇듯 모든 것은 먼저 생존으로 환원되고, 그렇게 해서 인간은 환 경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집착한다. 그는 모든 것에 종속되고, 그 가 종속되는 모든 것이 그를 강요시키는 꼴이 된다. 기후, 토양, 공기, 물, 땅과 바다의 생산물들은 기질, 성격을 형성하고, 취향, 온갖 노동, 행동 등을 규정한다. 자연적 설명은 문화의 원지들이 아닌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에 대해 가치가 있다. 비록 이 점이 개인들에게는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여러 민족들에게는 반박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인간종의 역사를 개시하기 전에, 먼저 그것의 체류와 거기서 발견되는 온갖 다양함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530 쪽) 자연적인 장소에 의한 설명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 연적 혁명을 고려한다. 계절과 인구 이동 등. 루소의 역동성은 기 묘한 체계로서, 그 속에서 인종 중심주의 비판은 유기적으로 유럽 중심주의와 배합된다. 조심스럽게 『에밀』의 한마디와 『인간 언어 기원론』의 한마디를 함께 엮으면서 우리는 그 점을 더욱더 잘 이 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에는 매우 희귀했던 용법에서 문화란 개 념이 어떻게 그 은유적인 힘 속에서 자연과 사회를 결합시키는가

를 보게 될 것이다. 『 에밀 』 과 마찬가지로 『인간 언어 기원론』에서 도, 장소와 계절의 변화, 사람들의 이동, 대지의 혁명 등이 자연적 인 설명의 임무를 맡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담에는 『인간 언어 기원론』에서는 유럽적 편견에 맞선 통박이 뒤따르는 반면, 『에밀』 에서는 유럽 중심주의적 신앙 고백이 그 뒤를 따른다. 통박과 신앙 고백에는 동일한 기능도, 동일한 수준도 없기 때문에(왜냐하면 그 것들은 모순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체계를 다시 구성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먼저 그 텍스트들을 나란히 놓아보자. 『인간 언어 기원론』· 유럽인의 커다란 결점은 언제나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것을 척도 로 사물의 근원을 사색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반드시 최초의 인간들이 척박한 땅에 살면서 추위와 기근으로 숨져가면서 주거와 의복을 만드 는 데 서툴렀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도처에서 유럽의 눈과 얼음을 볼 뿐이며, 다른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더운 나라에서도 탄생하 고 지구의 2/3 에만 겨울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인간 을 연구하려 한다면 자기 주위를 쳐다보는 것으로 그만이다. 그러나 인간 일반을 연구하려면 시야를 멀리까지 넓힐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속성을 발견하려면 먼저 차이점을 관찰해야 한다. 더운 나라에서 태어난 인류는 거기로부터 추운 나라로 확장된다• 바로 추운 나라에서 그 인류는 불어나고 이어서 더운 나라로 역류한다• 이 행동과 반동에 서 대지의 격동과 주민들의 영속적인 동요가 뒤따른다 .(8 장) 『에밀.IJ, 토지는 인간의 문화 형성과 무관하지 않다. 인간은 온화한 기후 속에

서만 본래의 능력을 발휘한다. 극지방의 기후에서 오는 불리한 점은 너 무나 명백하다. 인간은 수목고는· 달리 한 곳에서만 머물러 있도록 생겨나 지 않았다. 그리고 양극단의 어느 지방에서 다른 극 쪽으로 가려고 하 는 자는 중간 지역에서 출발한 사람보다 두 배의 힘을 소비해야 한다. …… 프랑스 사람은 기니아나 라포니에서도 살 수 있겠지만 혹인은 토 르네아에서 살기 힘들 것이고, 사모이에드인은 베닝에서 살기 어려울 것이다. 양극단에 사는 사람들의 두뇌 조직은 상대적으로 그 완성도가 낮댜 혹인도, 라포니인도 유럽인들만한 감각이 없다. 따라서 만약 내 가 제자를 이 지상에 살게 한다면, 온대 지방에서 키울 것이다. 가령 다른 곳보다도 프랑스에서말이다. 북쪽에는 사람들이 불모의 땅에서 너무 지나친 소비롤 하고 있고, 남쪽에서는 비옥한 땅에서 별로 소모를 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북 방 사람들을 근면하게 하고, 남방 사람들을 사색적이게 만드는 차이가 발생한다 .(27 쪽 .12 강조는 필자의 것임) 외관상으로 모순되는 이 두 개의 텍스트는 어떤 점에서 서로 완 결되는가? 우리는 나중에 문화가 어떻게 농업에 연결되는가를 보 게 될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특정 토양과 기후에 종속된다는 점에 서 경작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성장하고 사회를 형성하며 〈토 지는 인간의 문화 형성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 문화는 또한 토지를 바꾸고 또 다른 문화로 문을 열 수 있는 힘이다. 인간은 멀 찌감치 쳐다볼 수 있고, 〈한 그루의 나무처럼 생겨난 것은 아니 며〉, 위의 두 텍스트가 말하는 바대로, 인구의 이동과 변화 혁명에 참여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부터 우리를 지역성과 경험적인 문화에 가둔다는 점에서 인종 중심주의는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를 수 있다. 유럽인은 자신을 이동시키지 않고, 지구의 부동의 중심부에서 꼼짝 않고 마치 한 그루 나무처럼 자기 나라에 머무는 오류를 범한다.

하지만 경험적인 유럽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루소가 생각하고 있 듯이, 유럽인이 그의 자연적인 지역성의 극단 사이에서 한가운데를 차지하면서, 자기를 움직이거나 보편적인 문화의 지평과 다양성에 개방하기 위한 더 많은 용이함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저지시킬 수는 없다. 세계의 중심에서 유럽인은 유럽인인 동시에 다른 사람 이 될 수 있는 기회 또는 힘을 갖고 있다. 〈그들[인간들]은 온화한 기후 속에서만 능력을 발휘한다. 유럽인은 이러한 보편적인 통로를 실제로 이용 못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을 뿐이다.〉 이 모든 논증은 두 개의 유럽 사이에서 돌고 돈다. 그것은 고전 적인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 우리는 그 논쟁 자체를 여기서 검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그 논증은 루소의 모든 담론의 조건이라 는 사실만 고려하자. 만약 루소의 시각에서 규정된 문화의 빗장 풀 기, 일반적인 다른 문화로 열린 통로, 상상적인 가변성과 가능성이 없다면, 모든 질문은 폐쇄된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차이 의 규정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차이는 특정 환경, 북방과 남방, 필요 욕구와 정념, 자음과 악센트 등의 사이에서 중간적, 동적, 온 화한 선으로부터 나타난다. 인종학자 루소와 세계 시민의 출생지인 온대 기후 지역에 관한 서실 규정에는 (유럽, 〈가령 다른 곳보다는 프랑스에서〉) 본질적 필연성이 숨어 있다. 차이룰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차이점 사이에서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이에서 차이는 두 가 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 다른 차이로서, 또는 비차이에 대 한 접근인 이 점을 루소는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온화한 지 역의 거주민은 차이를 소거하면서 또는 관심을 끄는 비차이에서 그것을 극복하면서, 차이를 보편적 인류로 가는 통로로 삼아야 한 다. 교육적 성공과 인종학적 휴머니즘이 유럽에서, 〈그것도 바로 프랑스에서〉, 덥지도 춥지도 않은 지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행운이 있었을것이다.

이러한 특권화된 관찰 장소로부터 여러 대립들의 놀이, 사람들 은 양극단의 질서와 우월을 더욱더 확실히 지배하게 될 것이다. 문 화의 자연적인 원인들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언어는 문화의 일개 요소가 아니라 그것의 총칭적 요소이기 때문에 언어와 자연 속에서 상응하는 가치들의 대립들, 서로가 서로에 분절되는 가치들 을 식별해야 한다. 언어에서, 필요 욕구의 우월, 죽 북방의 우월에 상응하는 것은 무엇인가? 정념, 즉 남방의 우월인가? 악센트 또는 억양. 만약 여러 언어가 정념에서 탄생했다는 단순한 명제에 집착한다 면, 우월성의 놀이는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3 장). 북쪽에서 필요 욕구가 정념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도치 또는 타락이 일반적인 필 요 욕구와 특정 필요 욕구의 질서 가운데서 이미 가능해야 한다. 그 질서는 정념과 관계를 맺고, 그것을 자극하고, 그것에 파고 들 어가서 그것에 복종하거나 그것을 통제한다. 따라서 기후에 대한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단락』에 호소하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 언어 기원론』의 다음과 같은 진술을 설명 해 준다. 〈장기적으로 모든 인간은 닮게 되었지만 진보 순서는 서 로 다르다. 풍요한 자연이 있는 남쪽 날씨에서는 필요 욕구가 정념 에서 탄생했고, 자연이 빈곤한 추운 나라에서는 정념이 필요 욕구 에서 탄생한다. 필요 욕구의 슬픈 딸인 언어는 그 엄격한 기원을 자각한다.〉(1 0 장) 만약 남극에 대한 북극의 우월, 정념에 대한 필요 욕구의 우월, 악센트에 대한 분절의 우월이 실제로 점증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에 는 여전히 대체의 뜻이 있다. 우리가 여러 번 그것을 도출했듯이, 점층적인 소거는 대리 보충적인 대체물로 자리 잡는다. 북방 사람 은 〈나를 사랑해 주세요〉를 〈나를 도와주세요〉란 말로 대체했고, 에 너지를 명중성으로, 악센트를 분절로, 마음을 이성으로 대체시켰

다. 형식적인 대체는 아마도 에너지, 열기, 생명 , 정념 등의 취약함 울 반영하지만, 형식에 있어서는 변형, 혁명이지 단지 힘의 감소가 아니다. 이러한 대체는 단순한 타락으로는 잘 설명되기 어려울 것 이다. 이 점에서 그것은 이동과 도치를 함의하며, 또 다른 필요 욕 구 기능으로 그것을 되돌려보낸다. (남방에서) 기원에 대한 정상적 인 순서에서 2 장의 명제(말의 창안은 필요 욕구가 아니라 정념에서 왔고, 〈최초의 필요 욕구들의 자연적 결과는 인간들을 이간시켰으며 그들을 합치시키지 못했다〉)는 절대적 가치를 갖는다. 하지만 기원 에 대한 정상적인 순서는 북방에서는 역전된다. 북방은 단순히 남 방에서 동떨어진 곳이 아니다. 그곳은 독보적인 남쪽의 기원에서 출발해서 도달하는 한계점이 아니다 . 루소는 북방 역시 또 E 澄· 기 원이라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바로 이 위상을 죽 음에 부여한다. 왜냐하면 절대적 북방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정상 적으로 볼 때, 필요 욕구는 인간을 합치시키기보다는 이간시킨다. 북방에서 필요 욕구는 사회의 기원이다. 정념에 자양분을 주는 한가로움은 정념을 억압하는 노동에 자리를 내 준다. 행복하게 살기를 꿈꾸기 전에 먼저 살아남을 것을 궁리해야 한 댜 인간들을 감정보다 더욱더 잘 결합시키는 상호간의 필요 욕구가 있다고 할 때, 사회는 근면성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있었다. 언제라도 멸종될 수 있다는 계속되는 위험은 몸짓 언어에 국한하는 것을 허락하 지 않았고, 그들의 첫번째 말은 〈나를 사랑해 주세요〉가 아니라 〈 나를 도와주세요〉란 말이었다. 이 두 개의 술어는 비록 대단히 닮기는 했지만, 다른 어조로 발음된 다. 느끼게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알아듣게 할 것만이 있었다. 즉 문제의 요건은 에너지가 아니라 명증성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악센트 대신 강하고 감각적인 분절들을 대체시켰다. 그리고 언어 형식에

서 모종의 자연적인 인상이 있었다면, 이러한 인상은 여전히 그 통명 함을 낳는다.(강조는 필자의 것임) 북방에서는 정념들이 사라지지 않는다. 대체가 있을 뿐이지 소 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정념들은 기진맥진해진 것이 아니라 욕망 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 즉 노동에 의해 억압된다. 노동은 욕망의 힘을 줄이는 것 이상으로 정념을 억제한다. 노동은 욕망의 힘을 다 른 곳으로 이동시킨다. 이런 이유에서 〈북방 사람들은 정념이 없진 않으며, 단지 다른 유형의 것이 있을 뿐이다.〉 분노, 노여움, 진노, 초조감 등은 남쪽 지방의 정념이 전위된 것들이다. 남쪽에서는 그 정념이 억압되지 않으며, 그것에서 일정한 유약함, 부절제 등이 나 온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온화한 지역 사람은 무조건적 관대함을 보이지 않는다. 열대 지방의 [정념]은 관능적인 정념들로서 사랑과 연약함에 집착한 다. 자연은 그 거주민들에게 많은 것을 선사했고 , 그들은 거의 할 일이 없다. 아시아 사람은 여자와 휴식을 취하면 만족한다. 그러나 주민들이 척박한 땅에서 많은 소모를 하는 북방에서 많은 필요 욕구에 종속되는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주위에서 하는 모든 일들이 그들을 초조하게 한다. 그들은 오직 고통스럽게 생존을 영위함으로써,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더욱더 얼마되지 않는 소유물에 집착한다• 그들 에게 접근하는 것은 그들 목숨을 살해하려고 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런 점으로부터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그들은 민 첩하고 난폭하게 돌변하는 기질이 나타난다. 그들의 가장 자연스러운 목소리는 분노와 위협의 목소리이다. 그리고 이 목소리들은 언제나 강 한 분절음들이 동반되고 그들을 거칠고 소란스럽게 한다. …… 나의 견해로는 원시 언어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차이의 물리적 원인들이

그런 것들이다. 남방 언어는 생동감 있고, 울림이 있으며, 악센트가 있고, 웅변적이며, 에너지의 힘에 의해서 애매해진다 . 북방 언어는 무성음이며, 투박하고, 분절되며, 소리 지르는 것 같고, 단조롭고, 좋은 구성보다는 낱말 의 힘에 의해 명료해진다. 수백 번 뒤범벅되고 다시 재용해된 근대 언어 들은 아직도 이 차이점들의 정화를 간직하고 있다…… .(11 장. 강조는 필자의 것임) 언어 분절의 축은 북방에 있다. 따라서 분절(언어에서 차이)은 단순한 말소가 아니다. 차이는 욕망 또는 악센트의 에너지를 희미 하게 만들지 못한다. 그것은 노동을 통해 욕망을 이동시키고 억압 한다. 그것은 힘의 약화 징조가 아니다. 비록 루소가 그렇게 만들 지만말이다. 그것은 반대로 적대적인 힘의 투쟁과 힘 속에서 발생 하는 차이룰 반영한다. 필요 욕구의 힘, 노동을 필연성으로 만드는 고유한 경제는 욕망의 힘에 맞서서 그것을 억압하고 분절 속에서 욕망의 노래를 파괴한다. 이 힘의 상충은 단순히 필요 욕구의 경제가 아니라 욕망과 필요 욕구 사이의 역학 관계 체계라고 할 수 있는 경제에 해당한다. 무 차별적으로 생명의 힘 또는 죽음의 힘이라고 고려할 수 있는 두 개의 힘이 여기서 대립된다. 북방의 인간은 필요 욕구의 긴박함에 부응하면서 단지 기근에 맞설 뿐만 아니라 남방적 욕망의 방종스 런 자유 뒤에 오는 죽음에 맞서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한다. 그는 관능성의 위협에 맞서 지신을 지킨다. 하지만 반대로, 그는 또 다 른 죽음의 힘으로서 이러한 죽음의 힘에 맞서서 투쟁한다. 이런 점 에서 생명, 에너지, 욕망 등은 남방에 속한다. 북방 언어는 생명력 이 덜하고, 덜 활성화되었으며, 노래에 덜 가깝고, 더 차갑다. 북방 의 인간은 죽음에 맞서 투쟁하다 일찍 사망하며 〈그 민족은 …… 북방 사람들이, 백조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노래 부르면서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14 장) 그런데 문자는 북방에서 태어났다. 문자는 냉혹하고, 빈약하고, 추론적이며, 죽음을 향하고, 힘의 회전에 의해 생명을 간직하려 하 는 힘의 우회를 통한다. 실제로 한 언어가 분절되면 분절될수록, 분절은 거기서 영역을 더 넓혀가고 엄밀하고 원기왕성하게 획득하 며, 문자에 적합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것을 요구한다. 『 인간 언어 기원론 』 의 중심 논지는 바로 그것이다. 역사적 진보, 대리 보충성 의 이상한 서법에 따라 결합되는 타락, 그것은 북방과 죽음을 향한 다. 역사는 구두 악센트를 소거하고, 억압하며, 분절을 더욱더 깊 게 하고, 문자의 힘을 확장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문자가 범하는 황폐화는 근대 언어에서 좀더 피부로 느껴진다. 수백 번 뒤범벅되고 용해된 근대 언어들은 아직도 이러한 차이점들 의 정화를 간직하고 있다. 불어, 영어, 독일어는 서로 돕고,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생활하는 사람들 또는 쉽게 화를 내는 사람들의 사적인 언 어이다. 그러나 신성한 교리를 알리는 사제들과 인민에게 법을 부여하 는 현자들, 군중을 통솔하는 우두머리들은 아랍어 또는 페르시아어를 말해야 한다 .4 3) 우리의 언어는 음성 언어로 말할 때보다는 문자 언어로 쑬 때 가치가 더 빛나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보다는 글을 읽을 때 더 많은 즐거움을 즐 것이다. 반대로, 문자로 씌어진 동방의 언어들은 그 생명 력과 열기를 상실한다. 그 의미는 낱말들 속에 겨우 절반 가량이 있으 며, 그 힘은 악센트 속에 있다. 동방 사람들의 천재성을 그 책으로 평 가하는 것은, 한 사람을 시체에 근거해서 묘사하는 것이다 .(11 장. 강조 는 필자의 것임) 동방의 시체는 책 속에 있다. 우리의 시체는 이미 음성 언어 속 43) 루소는 주에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터키어는 북방 언어이다.〉

에 있다• 우리 언어는, 말하는 것으로 우리가 만족할 때도, 이미 너무 많은 악센트를 많은 분절로 대체했다. 그것은 생명력과 열기 를 상실했고, 이미 문자에 의해 잡아먹혔다. 악센트로 이루어진 특 성들은 자음이 갑아먹었다. 루소에게 언어가 낱말로 절단되는 것이 분절의 유일한 단계는 아니지만, 그것은 벌써 악센트의 에너지를 지웠다(이 단어(〈지우 다〉)로 우리는 소거와 말소, 기진맥진과 억압과 같은 가치들을 그 애 매 모호함 속에 방치시킬 것이며, 그 가치는 루소가 제안하고 있는 바 그대로이다). 북방 언어는 〈낱말들 덕분에 분명하고〉, 남방 언어에 서는 〈그 의미가 단어들 속에는 절반밖에 없고, 그 모든 힘은 악센 트에 있다.〉 지운다는 것은 대리 보충을 산출시킨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대 리 보충은 미완결된 것이고, 그 임무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결핍울 완전히 메우지 못하고 무언가 빠져 있다. 대리 보충은 자신이 바로 잡아야 할 악에 참여한다. 악센트의 상실은 분절에 의해 그릇 대치 된다. 분절은 〈강하고〉, 〈딱딱하며〉, 〈소란스럽고〉, 경쾌하게 노래 부르지 않는다. 아울러 문자 언어가 악센트 부호로써 악센트를 대 리 보충하려고 시도할 때, 거기에는 악센트의 시체를 은폐하려는 겉치레만이 있을 뿐이다. 문자 언어(여기서는 악센트의 기록)는 인 위적인 부호로 언어를 감출 뿐만 아니라 이미 분해된 언어 덩어리 에 가면을 씌운다. 〈우리[우리 근대인들]는 소리뿐만 아니라 목소 리로 말하는 울림이 있으며, 조화로운 언어에 대한 어떤 관념도 없 다. 악센트 부호로 악센트를 대리 보충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 이다. 악센트가 이미 상실되었을 때만 비로소 악센트 부호를 고안 한다.〉 44)(7 장. 강조는 필자의 것임) 구두점과 마찬가지로 악센트 부 호는 문자 언어의 악이다. 그것은 필생(筆生)들의 발명일 뿐만 아 44) 〈대리 보충하다〉라는 말은 악센트에 대한 발음 관련 텍스트에도 나온다.

니라 그들이 전사( 轉寫 )하는 언어에 대한 지식이 없는 필생들의 발 명이다. 필생 또는 그 독자는 본질적으로 언어의 살아 있는 관습에 대해서는 지식이 없다. 그들은 병들어 죽어가는 음성 언어를 중심 으로 그것을 치장하기에 분주하다. <…… 로마인들이 그리스어를 연구할 때, 필생들은 로마인들에게 발음울 표기해 주기 위해 악센 트, 유/무성음, 운율 등의 부호들을 창안했다. 그러나 이 부호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쓰였을리 만무하다. 그들은 결코 그런 것들이 필요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유로 해서, 필생이라는 인물은 루소를 매료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단지 그것만은 아니지 만) 음악적 차원에서 필사의 순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전사라고 할 수 있는 문자의 위험한 순간처럼, 모종의 위험한 순간이며, 다른 기호들을 모방하는 것이다• 필생은 부호들을 재생시키며, 부호의 부호들을 산출시키면서 언제나 원본의 복원을 개선하기 위해 대리 보충적인 부호들을 첨가하려 한다• 훌륭한 필생은 대리 보충적 부 호의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 그는 반대로 부호들의 사용에 인색해 야 한다. 『음악 사전』에 나오는 〈필생〉이란 찬양할 만한 항목에서 자신의 직업을 수련생에게 설명하는 장인의 꼼꼼함과 능수 능란함 을 갖추고 루소는 〈결코 불필요한 주석을 쓰지 말 것〉과 〈불필요 하게 부호들을 늘려놓지 말 것〉을 권고한다 . 4 5 ) 구두법은 문자 언어의 내부에서 비음성적 표시의 최고 예라고 할 수 있댜 악센트와 억양을 전사할 수 없는 구두법의 무기력함 은, 그 자체의 고유한 수단으로 축소된 문자 언어의 빈곤을 고립시 45) 또 Proje t concernant de nouveaux sig ne s po ur la musiq u e (1742), Dis s erta t i on sur la musiq u e modeme(l743), Em ile, 162 쪽 (모든 전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그에게 읽기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 서두를 필요가 없었으므로 나는 또한 그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도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J. Sta r obin s ki , La tra nspa rence et J'ob sta c le, 177 쪽 이하 1 3 참조.

키거나 분석할 뿐이다. 루소에게 영감을 준 뒤클로와는 달리 , 46) 루 소 자신은 구두법의 본질보다는 구두법을 방치한 불완전의 상태를 비난한다. 〈사람들이 명명하는 사람과 호출하는 사람을 문자로 구 분하기 위해서는〉 호격점(呼格點)을 창안해야 할 것이다 . 심지어 아이러니를 나타내기 위한 점도 창안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루 소는 이런 정도까지 문자를 경계하면서 획일성, 명증성, 정확성의 근원들울 모두 도출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 가치들은 정념의 표현을 냉각시킴으로써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흐릿 한 것, 모호한 것, 위선, 본래의 음성 언어 또는 노래를 은폐시키 는 것울 회피할 때는 긍정적이다. 『음악 사전 』 은 〈여러 관계의 정 확성〉과 〈부호의 간결성〉을 권장한다(「필생」 항목).

46) 〈운율적 악센트를 눈에 띄게 변질시키지 않고 담화의 실체 그 자체를 변 형시키는〉 웅변가의 악센트에 대해서 뒤클로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문자 언어에서 우리는 질문과 놀라움을 표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영혼의 운동을 갖고 있는가! 따라서 결코 문자 부호를 갖지 못하는 옹변적 억양, 죽 지성과 감성만이 포착할 수 있는 수많은 억양들을 갖고 있지 않은가! 분노, 경멸. 아이러니 등을 표시하는 억양은 그런 것들이 다.〉 (416 쪽)

따라서 악센트와 악센트 부호들 사이에 있는 차이는 음성 언어 와 문자 언어를 질과 양, 힘과 공간 띄우기로 분리시킨다. 〈이른바 우리들이 주장하는 악센트 부호들은 모음 또는 수량을 나타내는 부호에 불과하다. 그 부호는 소리의 어떤 변화 무쌍함도 표시하지 못한다.〉 수량은 분절에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는 소리로 된 분절 에 연결되었지 낱말들로 된 분절에 연결된 것은 아니다. 루소는 마 르티네가 언어의 이중 분절이라고 부른 것을 파악하고 있다. 죽 소 리와 낱말로 된 분절이 그것이다. 〈모음들〉 또는 〈목소리〉를 악센 트 또는 〈소리의 다양성〉에 대립시키는 것은 물론 모음이 순수한 목소리가 아니고 이미 분절의 시차적 조작에 종속된 목소리라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여기서는 목소리 또는 모음이 다른 문맥에서

처럼 자음에 대립되지 않는다. 프랑스 문법가들을 비판하고 『 인간 언어 기원론 』 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7 장 〈근대 정음법에 대해서〉는 뒤클로에게서 엄 청난 영감을 받고 있다• 차용은 명시적으로 선언되었고, 양도 많으 며 결정적이다. 이 장의 구성적인 중요성을 고려하건대 뒤클로에게 빌려온 차용들이 나중에 삽입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더구나 그것이 차용이라고 할 수 있을까? 늘 그렇듯이, 루소는 차용한 조각들을 완전히 독창적인 구조 속에서 조직한다. 루소는 이곳저곳에서 『 주석』 (14 장)의 단락들을 인용하거나 재인용한다. 그가 인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단락 속에서 루소 는 다른 많은 단락들과 더불어 소쉬르적 이론 전개를 예고하는 글 을 이끌어낸다(이 책, 80 쪽). 가령 다음과 같은 글을 인용해 보자. 어원론이란 미신은 자신의 자그마한 영역에서 고유한 의미의 미신이 더욱더 심각한 영역에서 하는 것만큼 역효과를 내고 있다. 우리들이 쓰는 철자법은 기괴함과 모순들의 결합체이다. …… 하지만 우리들의 운율(정음)을 기록하기 위해 어떤 배려를 하든 각종 부호로 가득한 표 현을 보는 불유쾌함은 차치하고라도 이것이 큰 쓸모가 있을지는 대단 히 회의적이다. 관습을 통해서만 학습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 은 순전히 유기체적인 것이고, 인간 이성에 거의 어떤 실마리도 주지 못하며 그것을 오직 이론을 통해서 포착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더구나 그 이론조차 그것을 지나치게 다룬 저자들에서는 틀리기 십상 이다. 지금 여기서 쓰는 것을 남들에게 들리게 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며, 만약 목소리로 나 자신을 표현하면, 생동감 넘치고 명료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감지한다 .(414-415 쪽) 그러나 루소는 차용한 것들을 조심스럽게 감독하고, 재해석하고,

거기에 본래 이상의 더 많은 가치 를 부여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그 작업의 의미는 우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가령, 루소는 악센트가 부호에 의해서 지워졌고 음성 언어의 사용은 문자 언어라는 인위물 에 의해 소실됐다는 점에 집착한다. 즉 말소와 교체 작업에 의해 지워졌고, 망각되었다기보다는 말소되고, 속이고 , 평가절하된 것이 다. 〈뒤클로는 말하기를 고대인들이 쓴 모든 정음법 부호들은 아직 까지 관습의 가치를 갖지 못했 E 는: 것이다. 나는 한발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겠다. 그 부호들은 음성 언어 대신 대체되었다고. 〉 또 한 루소는 원시 헤브루어에 덤으로 첨가된 악센트 표기 또는 구두 법의 역사를검토한다• 따라서 그 상충 단계는 악센트 표기의 힘과 분절의 힘 사이에 있다. 분절이란 개념은 여기서 우리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다. 그 것은 이미 음성 언어에서 조작된 바대로 원문자(原文字)를 정의하 는 데 이용되었다. 아울러 기억하고 있듯이 소쉬르는 음운론주의적 논지와는 모순되게 (구두 언어가 아니라) 분절이란 힘만이 유일하 게 〈인간에게 자연적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음성 언어의 조건 인 분절은 그 자체가 무음성적인 채로 남아 있지 않은가? 루소는 분절이란 개념을 4 장 〈최초의 언어의 두드러진 특징과 그것이 겪어야 했던 변화들〉에서 도입한다 . 처음 세 장은 여러 언 어의 기원을 다루었다. 5 장은 〈문자에 관하여〉란 제목이 붙게 된 다. 분절은 언어의 생성-문자이다. 바로 이러한 생성국곤자가 기원에 도래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려는 루소는 그것을 기본 전제로 삼으면 서 이 생성국존자가 기원에 도래하고, 기원부터 그렇게 되는 방식을 人벌상 기술한다 생성국곤자는 곧 언어의 생성-언어이다. 루소는 그 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명시적으로 선언한다. 죽 분절과 문자 언어 는 언어의 기원 이후에 오는 병이라는 것이다. 그는 말하고자 하지 않았던 것을 말하커나 기술한다. 분절, 따라서 문자의 공간은 언어

의 기원에서 작동한다. 모방의 가치와 조작처럼 (동일한 심층적인 이유들로 인해서) 분절 의 가치와 조작은 애매 모호하다. 생명의 원칙과 죽음의 원칙, 죽 루 소가 진보라는 단어에 부여하는 의미에서 작용하는 진보의 원동력이 그것이다. 루소가 말하려고 하는 바는 진보란 것이 아무리 다의적이 라도 최악을 향하거나 최상을 향해 치닫거나 선의 방향에서나 악의 방향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 인간 언어 기원론』 의 1 장은 몇몇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집착하는 동물 언어라는 개념에 따라 동 물들의 자연적 언어에는 진보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계약 언어는 인간에게만 속한다. 이런 이유에서 인간은 선의 방향 에서든, 악의 방향에서든 진보하며, 동물은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루소는 그가 말하려는 바가 아니었던 것을 기술하고 있다. 〈진보〉는 분명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최상과 동시에 최악을 항해 진행된다는 것이다. 죽 동시 방향에서. 이것은 차이(또는 근원적 분 절)가 시원론을 무효로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말론과 목적론 을무효화한다. 3 분절화 이 모든 것은 분절화란 개념의 조작 속에서 나타난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긴 우회 노선을 거쳐야 할 것이다. 〈계약에 속 하는 여러 분절화〉 (4 장)가 어떻게 조작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는 한번 더 자연이란 개념 문제를 거쳐야 할 것이다. 많은 루소 주 석가들이 겪은 어려움의 한복판으로 성급히 달려가는 것을 피하면 서 우리는 한정된 방식으로 『인간 언어 기원론』에서 그 어려움을

식별해 보려 한다. 그 어려움은 이미 『 인간 언어 기원론 』 속에서 가공할 만하다. 막대기의 이 움직입… .. 몇 가지 확실성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명증성이 거의 의심의 여 지가 없는 몇몇 명제들을 선택해 보자. 우리는 1 장에서 그 명제들 을 읽을수 있다. 첫번째 명제. 〈언어는 동물과 인간을 구분되게 한다.〉 이것은 『인간 언어 기원론』에 나오는 첫번째 낱말들이다. 언어는 또한 〈최 초의 사회적 제도〉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그 것은 인간에게 자연적이고, 인간의 본성에 속하며, 동물의 본질과 는 달리 자연적이지 않은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 말은 인간에게 속 하고, 인간의 인간성에 속한다. 하지만 루소는 개별 언어와 말을 구분한다. 말의 사용은 보편적으로 인간적인 것이지만 언어들은 다 양하다. 〈언어는 민족을 구분짓는다. 한 사람의 출신지를 아는 것 은 그가 말하고 난 후에야 가능하다. 사용과 필요 욕구는 각자 자 기 나라의 말을 배우게 한다. 하지만 이 언어가 다른 나라가 아닌 자기 나라 말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는 지리적인 것, 즉 풍속 자체에 선행하는 모종의 이유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최초의 사회적 제도인 말의 형태는 자연적인 것에 기인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 언어의 자연적 인과율은 다음·과 같이 둘로나누어진다. 첫째, 담론 일반의 가능성이라 할 수 있는 말은 최초의 제도로 서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원인을 가질 수밖에 없다(필요 욕구와 정 념의 관계 등).

둘째, 일반적인 말의 존재를 넘어서서 자연적 원인들로서의 그 형식도 이해해야 한다( 〈 최초의 사회적 제도인 말은 그 형식이 자연적 원인에 기인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물리학, 지리학, 기후 등 때문에 야기되는 여러 언어의 다양성에 대한 설명이다. 이러한 이 중적 설명은 1 부에서 『 인간 언어 기원론 』 의 분화, 죽 언어 및 여 러 언어와 관련된 분화를 예고한다. 처음 일곱 장은 자연적 원인들 로서 언어 일반(또는 원시 언어)의 기원과 타락을 설명한다. 8 장부 터 언어 일반에서 개별 언어들로 옮겨간다. 일반적이고 지리적인 차이들을 자연적인 원인들로 설명한다 . 이 자연적 설명은 어떻게 분석되는가? 두번째 명제. 〈한 인간을 다른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고, 자기와 닮은 존재로 인지할 때부터 자기 감정과 사고를 소통하려는 욕망 또는 필요 욕구는 그에게 그럴 수 있는 수단을 찾도록 했다.〉 · 욕망 또는 필요 욕구. 남방 또는 북방의 두 개의 기원지가 이미 확증된 다. 아울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마찬가지로 언어가 사 회의 성립 조건으로서 사회에 선행해서 나타났는지 그 정반대인지 를 묻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그러한 물음에서 어떤 해결책도, 어 떤 의미도 감지하지 못한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에서 언어의 계 보라는 엄청난 어려움 앞에 직면하여 루소는 자연적이고 순전히 인간적인 설명을 거의 포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것은 또한 이미 『인간 언어 기원론』에서 함축된 것이다. 〈중폭되는 여러 어려움으로 인해 겁에 질리고, 여러 언어들이 순전히 인간적인 수 단에 의해 탄생되고 정립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설득당한 나로서 는 이 어려운 문제의 토의를 앞으로 올 연구가에게 남겨두겠다. 그 러한 문제는 여러 언어 또는 이미 창안된 여러 언어 제도와 사회 의 성립과 연결된 문제로서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었 다.〉(1 51 쪽)

똑같은 제스처가 『 인간 언어 기원론 』 에서도 엿보인다. 순수한 자연 상태를 넘어서는 순간, 죽 절대적 분산이 최초로 정복당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언어와 동시에 사회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사람들은 이 최초의 넘어서기 순간에서 언어의 기원을 포착하려고 한다.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에서도 일종의 참조 노트를 지정할 수 있다. 원래 『 인간 언어 기원론 』 속에 있었지만 본론에서 이탈된 긴 글을 위한 자리가 있다. 그것은 언제나 1 부에 속해 있으며, 콩디악 을 포함해서 〈자연의 상태에 관한 성찰에 사회와 관련된 관념을 이식시커는〉 사람들을 비판한 후에 나온다. 순수한 자연 상태 속에 서, 또 근원적 분산 속에서 여러 언어의 탄생에 대한 설명의 뿌리 를 찾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시실을 루소는 잘 알고 있다. 아울러 그는 일종의 비약을 제안한다. 〈이 첫번째 어려움이 극복되었다고 가정하자. 순수한 자연 상태와 여러 언어들의 필요 욕구 사이에 있 었을 거대한 공간을 순간적으로 넘어서 보자. 그리고 그것이 필연 적이라고 가정하면서 어떻게 확립되기 시작할 수 있었는지 모색해 보자. 첫번째보다 더 최악의 새로운 어려움이…….〉 (147 쪽) 〈거대한 공간을 순간적으로 넘어서 보자……〉 어느 점까지? 성 립된 사회가 아니라 사회의 탄생 조건들이 결집되는 순간까지. 순 수한 자연 상태와 이 순간 사이에는 분명히 구분되는 단계들이 리 듬을 매긴 〈수많은 세기들〉이 있다 . 4 7 ) 그러나 이 단계들의 구별은 어렵다. 루소의 모든 텍스트에서 그 차이는 이 미묘한 점에서는 불 안전하고 늘 문제가 있다. 이미 식별된 구별에 이 토론을 더욱더 복잡하게 할 위험성을 감수하면서 디옴꾀- 같은 정확한 구분을 첨 가해야 할 것이다 . 그 구분은 바로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관계 있는 『 인간 언어 기원론』에 연결된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 과 『인 47) R. Derath e , Rousseau et la sci en ce po liti qu e de son tem p s , 175 쪽참조.

간 언어 기원론 』 에서 루소는 순수한 자연 상태와 사회 사이에 오 두막집 시대를 묘사한다. 『 인간 언어 기원론 』 9 장에서 이 시대는 〈 최초의 시간 〉 의 시대로 소개되기 때문에 순수한 자연 상태는 『 인 간 불평동 기원론 』 (1 부)에서만 근본적으로 자리 매김되고, 『인간 언어 기원론 』 의 오두막집 시대는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2 부에서는 순수 자연 상태 다음에 나타나는 시대에 해당된다. 비록 이 가설이 단순히 그릇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여러 가지 묘사적인 요소들에 의해 확증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뉘앙스를 갖거나 복잡한 것일 수밖에 없다• 〈최초의 시간〉을 언급하면서 〈대지의 표면에 홑어진 인간들에게 사회라고는 가족, 법이라고는 자연의 법칙, 언어라고는 몸짓과 분절되지 않은 몇몇 소리만이 있었을 때〉, 루소는 주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첨가한다. 〈나는 그 시대를 확정하고자 하는 인 류의 특정 시대에 인간들이 분산된 시대를 가리켜 최초의 시간이 라고 부른다.〉 아울러 가족 사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 2 부에 나타난 것과 같은 위상이 아니다 . 4 8 ) 그 두 가족 사회가 서로 가까 이 있는 것은 나중에 우리가 검토할 하나의 변혁 이후에 또 다른 가족의 연결 관계가 사랑, 도덕, 언어를 가능하게 하면서 성립되는 순간에 비로소 이루어진다. 단지 『인간 언어 기원론』 9 장 끝 부분 만이 『 인간 불평등 기원론』 2 부와 견줄 수 있을 뿐이다.

48) 모스코니J. Moscon i는 『 인간 언어 기원론 』 에서 순수 자연 상태가 부재 하지 않으며 〈오두막 시대는 그 두 개의 텍스트에서 비교될 만한 것이 없 음〉을 보여준다 . 『분석과 발생 : 18 세기에서 오성의 생성 이론에 관한 시 각』 , Ca hier s po ur J'an alys e, 4 호, 75 쪽.

〈거대한 공간을 순간적으로 넘어서 보자……〉 그리고 다음과 같 은 가설을 시도해 보자. 인간은 순수한 자연 상태로부터, 나중에 우리가 언급하게 될 모종의 격변 덕분에 인간을 만나고 그를 인지 한다. 연민의 정은 각성되고 능동적이 되며, 그는 의사 소통을 하 고 싶어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을 떠나는 순간에야 비로소 도래

한다. 역시 자연적인 원인인 의사 소통의 수단을 설명해야 할 것이 다. 인간은 자연적인 성찰 또는 〈도구들 〉 을 사용할 수 있었을 뿐이 다. 즉 감각 기관을 사용했을 뿐이다. 세번째 명제. 따라서 인간은 타인의 감각에 대해 감각으로 행동 해야 한댜 〈사고를 표현하기 위한 감각적인 기호들의 제도화가 이 렇게 생겨난다. 언어를 창안한 사람들은 이렇게 추리하지 않았지만 본능이 그들에게 그 파급 효과를 암시해 주었다.〉 타인의 감각에 반응하기 위한 두 개의 수단이 있다. 그것은 움직이는 것과 목소리 이다. 물론 루소는 〈수단〉이나 〈도구〉란 말들이 의미하는 것울 자 문해 보지 않으며, 『 에밀』(1 60 쪽)에서 그렇게 하는 것처럼, 목소리 도 일종의 움직임이 아니냐는 물음도 던지지 않는다. 〈 움직임이란 행위는 촉각에 의해 직접화되고, 몸짓에 의해 중계화된다. 전자는 팔 길이의 한계 때문에 멀리까지 전달될 수 없고, 후자는 시각의 폭만큼 멀리 도달한다. 그래서 홀어진 사람들 사이에, 언어의 수동 적인 기관으로서의 시각과 청각만이 남는다.〉(강조는 필자의 것임) 따라서 언어 〈도구들〉의 분석은 자연 상태를 특징짓는 순수한 분산 상황에 의해 지배된다. 언어는 분산에서만 도래할 수 있었다. 언어를 설명하는 〈자연적 원인들〉은 분산에서 규정된 자연 상태와 일치한다는 점에서만 있는 그대로(자연적으로) 인지된다. 분산은 언어에 의해 정복되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그것은 자연적인 조건 을규정한다. 자연적인 조건, 죽 언어가 출현하게 되는 근원적 분산은 계속해 서 언어의 환경과 본질을 지적한다. 언어가 그 공간을 지나쳐야 하 고 사이가 멀어져야 한다는 것은 우연적 특성이 아니고 그 기원의 칭표이다. 분산은 결코 과거, 죽 확실히 언어가 탄생했을 언어 이 전의 상황이 아니며 오히려 그 상황과 단절된다. 근원적 분산은 그 표시를 언어 속에 남겨둔다. 우리는 그 점을 확인할 것이다. 차이

를 제도로 도입하는 것으로 보이는 분절은 자연적인 분산을 토양 과 공간으로 삼는다. 잘라 말해 공간을 갖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자연이란 개념은 더욱더 수수께끼가 된다. 만약 루소 에게 한치의 모순도 없기 바란다면, 분석과 동정을 크게 소모해야 할것이다. 자연적인 것은 먼저 가치가 매겨지고 이어서 자격이 박탈된다. 근원적인 것은 고차원적인 것 속에 갇힌 저차원적인 것이다. 몸짓 언어와 목소리의 언어, 시각과 청각은 〈똑같이 자연적이다•〉 물론 몸짓 언어의 계약들이 있을 수 있다. 나중에 루소는 일종의 몸짓 약호를 암시한다• 하지만 이 코드는 음성 언어보다는 자연에서 덜 멀어진다. 그래서 루소는 몸짓 언어에 대한 찬양에서 시작한다. 반 면 나중에 필요 욕구에 대한 정념의 우월성을 입증하려고 할 때, 음성 언어를 몸짓 위에 놓는다. 이 모순은 단지 외관적일 뿐이다. 자연적 직접성은 기원인 동시에 종말이다• 이 두 단어 각각의 이중 적 의미에서말이다 . 즉 탄생과 죽음, 미완결된 스케치와 완료된 완 벽함이 그것이다. 그때부터 모든 가치는 절대적 본질과 그 자체의 근접성에 따라 규정된다• 하지만 이 개념은 분극적 구조라는 개념 이기 때문에 근접성은 멀어짐이기도 하다. 루소 담론의 모순점은 자연 개념의 구조에 의해 조정되고 필연화되고 해결된다. 즉 자연 법칙에 대한 규정에 앞서 효율적으로 그 담론을 구속하는 자연 개념 의 법칙이 있다. 이런 식으로 해결된 모순은 루소가 몸짓 언어를 찬양하면서 사 랑을 언급할 때 명백하게 나타난다. 나중에 이 정념에 대해 루소는 그것이 노래로 된 말의 기원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그 림을, 그것을 푸는 최상의 해석자로 삼는다. 사랑을 선언하기 위해 시각에 호소하는 것은 더 자연적이고, 더 표현적이고, 더 살아 있 는 것이다. 동시에 더 직접적이고 생동감 있고, 더 원기 넘치고,

능동적이며 자유롭다. 『 인간 언어 기원론 』 은 이런 식으로 모든 모 순을 해결하면서, 그 모순을 양극으로 요약하면서 찬양으로 시작해 서 소리 없는 부호를 비난하는 것으로 결론을 낸다. 1 장에서는 목 소리 없는 언어, 시선과 제스처(루소는 몸짓과 손짓을 구분한다)의 언어를 고무시킨다. 〈이렇듯 귀보다는 눈에 대고 더 잘 말할 수 있 다.〉 마지막 장은 역사의 또 다른 끝에서 말없는 부호의 유통에 의 해 조직화되는 사회의 궁극적인 예속화를 지칭한다. 〈 여러 사회는 사회의 마지막 형태를 취했다. 거기서 사람들은 오직 대포와 금전 으로만 교환한다. o}-% 러 국민에게 ‘돈을 내시오'란 말을 빼고 할 말이 없기 때문에 거리의 구석에서 벽보로, 또는 집에서 병사들과 함께 말할 뿐이다.〉 소리 없는 부호는 직접성 속에서 표현될 때 자유의 기호이다. 소리 없는 부호가 표현하는 것과 그것을 통해 표현되는 것은 고유 하게 현전한다 .1 4 거기에는 우회도, 익명도 없다. 표상적 중개성이 모든 의미 작용의 체계를 침략했을 때, 소리 없는 부호는 예속화를 의미한다. 끝없는 순환과 다시 돌려보내기를 통해서 , 기호에서 다 른 기호로 그리고 표상체에서 또 다른 표상체로 옮겨가는 현전의 마당에서 현전의 고유성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 누구를 대신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기 자신을 위해 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더 이상 의미를 구비하지 못하며, 더 이상 그것을 멈추게 할 수 없고, 끝없는 의미의 운동 속을 옮겨갈 뿐이 다. 기호 체계는 바깥쪽이 없다. 말이 의미 자체를 상실할 위험이 있는 의미 작용의 심연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시원적 순간, 말이 없는 기호의 최초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려고 할 것이다. 그때 정념은 필요 욕구를 넘어서서, 그러나 분절과 차이에 앞서서, 전대 미문의 노선, 즉 직접적인 기호를 통해 표현된다.

몸짓 언어와 목소리 언어가 똑같이 자연적이라 하더라도, 어쨌든 전 자가 훨씬 더 쉽고4 9) 사회적 계약들에 덜 종속된다. 왜냐하면 더 많은 대상물이 귀보다 눈에 큰 자극을 주고, 소리보다는 형체에 많은 변화 무쌍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또한 표현력이 높고, 짧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사랑은 그림의 창조자다. 그것은 또 다 행스럽지는 않지만 말의 창조자이기도 하다. 말에 만족하지 못해서 사 랑은 말을 노골적으로 무시한다. 사랑에는 자신을 표현하는 좀더 생동 감 있는 방식이 있다. 그처럼 즐겁게 그 연인의 잔영을 추구하는 여인 은 그에게 그처럼 많은 것을 말한다! 이 요술 지팡이의 운동을 대신하 기 위해 어떤 소리들을 그 여인이 사용했을까?

49) 이 논증은 루소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많은 부분 콩디악의 Essai sur J'or ig ine des conna iss ances hum ai nes 의 2 부에서 유래한다 (L'orig ine et les pro g res du lan g a g e 에 대한 첫번째 단락). 콩디악을 통해 우리는 다시 바르부르통 Warbur t on 으로 귀결된다(앞의 책). 또한 십 중팔구 뒤 보스 Du Bos 신부의 R 까 ex i ons cri tiqu es sur la po esie et la pe in t ur e(l719, 특히 언어의 기원에 관해 논의하고 있는 35 장)와 『인 간 언어 기원론』에서 인용되고 있는 라미 Lamy 신부의 Rhe t or iq u 려룽 참 조하게 된다 이 문제들에 관해 우리는 스타로빈스키가 편집한 폴레야드 판 본의 『인간 불평동 기원론』 15 과 La tra nspa rence et l' obs t acle(l69 쪽 이하 )16 에서 〈기호〉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참조한다.

그처럼 즐겁게 흔적을 추적하는 이 요술 지팡이의 운동은 몸 바 깥쪽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음성 언어 또는 문자 기호와는 다르게 그것은 흔적을 추적하는 사람의 갈망하는 육체 또는 타자에 대한 직접적으로 지각된 이미지로부터 단절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요술 지팡이 끝에서 그려지는 하나의 이미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는 그것이 표상체와 완전히 구별되지 않는 이미지이다. 데생에 서 그려진 것은 그림자 속에서 직접 사람에게 현전한다. 그림자 또 는 요술 지팡이의 거리는 거의 없다. 요술 지팡이룰 잡고 흔적을

추구하는 그 여인은 미세한 차이를 차치하고 또 다른 자기 자신에 가까이 있는 것을 만지는 데 거의 근접해 있다. 이 미묘한 차이(가 시력, 공간화, 죽음)는 기호의 기원이며 직접성과의 단절이다• 그 의미 작용의 윤곽을 표시하는 것은 가능한 한 최대로 그것을 축소 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기호를 한계점에서 생각한다면, 그 한계점 은 자연에도 계약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 한계(불가능한 기호, 시니 피에, 게다가 시물을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주는 기호의 한계)는 필연 적으로 말보다는 몸짓 또는 시선에 가깝다. 소리의 일정한 관념성 온 본질적으로 추상성과 중계성의 힘으로 처신한다. 요술 지팡이의 운동은 모든 가능한 담론들로 풍부해지지만 어떤 담론도 그 운동 울 빈곤하게 하거나 왜곡시키지 않고는 재생시킬 수 없다. 문자로 씌어진 기호는 그 몸에서 부재한다. 그러나 그 부재는 몸의 접촉과 운동을 모방하기에는 역부족인 음성 언어의 비가시적인 창공에 가 득한 요소에서 이미 예고되었다. 필요 욕구보다는 정념의 기호이며 그 기원의 순수함 속에서 고려되는 몸짓은, 이미 소외를 만드는, 죽 그 자체에 이미 부재와 죽음이 내재한 음성 언어에 맞서 우리 를 보호한다. 그런 이유에서 바로 몸짓이 말에 선행하지 않을 때 는, 그것은 말을 대신하며 그 결점을 교정하고 그 결핍을 메워준 다. 요술 지팡이의 운동은 가장 큰 간격을 두고 그 지팡이를 대체 하게 되는 모든 담론을 대신한다. 이 끊임없는 상호 보충적인 대리 보충성 관계는 언어의 질서이다. 그것은 『인간 불평등 기원론.!l과 일치하는 『인간 언어 기원론』이 명시적으로 선언하지 않고 기술하 는 바대로 나타나는 언어의 기원이다. 그 두 텍스트에서 좀더 자연 적이고 좀더 표현적인 가시적 몸짓은 대체물인 음성 언어에 대한 대리 보충으로서 첨가된다. 대리 보충의 서법은 여러 언어의 기원 이다. 그 서법은 부르짖는 소리의 애초에 신비적이며, 절대적으로 직접적이고, 자연적인 순수함 속에서 결합되었던 몸짓과 음성 언어

를 갈라놓는다. 인간 최초의 언어, 가장 보편적이며, 가장 원기 왕성하고, 군집화된 인간들을 설득하기 이전에 필요했던 유일한 언어, 그것은 자연의 부르 짖음이다. …… 인간의 관념들이 유포되고 증가되기 시작할 때, 그리고 좀더 긴밀한 의사 소통이 설정되기 시작할 때, 그둘은 좀더 많은 기호들 과 좀더 폭넓게 전개된 언어를 추구했다. 그들은 목소리의 억양을 늘렸고, 거기에 몸짓을 결부시켰다 . 몸짓이란 본질적으로 좀더 표현력 있고, 그 의 미는 이전의 규정에 덜 종속된다 . (148 쪽. 강조는 필자의 것임) 여기서 몸짓은 음성 언어의 첨가물이지만 이 첨가물은 인위물로 된 대리 보충이 아니고, 좀더 자연적이고 좀더 표현력 있고 좀더 직접적인 기호에 의뢰하는 것이다. 몸짓은 계약에 덜 종속된다는 점에서 좀더 보편적이다쁘 하지만 몸짓이 거리, 공간화, 가시성의 환경을 가정한다면, 소원함 또는 중개가 지나쳐 가시성을 중단할 때 그 효율성은 멈춘다• 즉 음성 언어가 몸짓을 대리한다. 언어에 서 모든 것은 대체물이고, 대체물이란 개념은 자연과 문화의 대립 에 선행한다. 대리 보충은 몸짓만큼 자연적일 수 있고, 음성 언어 만큼 인위적일 수 있다.

50) 어린 아이의 〈자연 언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목소리 언 어에 여전히 정열적인 몸짓 언어가 결부된다. 이 몸짓은 아이들의 연약한 손에 있지 않고 그 얼굴 위에 있다.〉(『에밀 .!) , 45 쪽 . 강조는 필자의 것임)

그러나 몸짓은 현전하거나 묘사하기 쉬운 물체와 가시적 행위만을 지 적하기 때문에 보편적 사용에 이르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몸의 애매 모호함 또는 간섭이 그것을 불필요하게 하고, 주의를 자극하기보다는 주 의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 끝내 사람들은 목소리의 분절로 그것을 대체하 려고 한다. 목소리의 분절은 특정 관념과 동일한 관계를 갖지 않고, 제

도화된 기호이기 때문에 모든 관념을 표상하기에 더 적절하다. 대체는 공통된 의견 수렴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조악한 음성 기관들을 가지고 어떤 실행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서 실천되기 힘들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보존하기는 더욱더 힘들다. 왜냐하면 이 만장 일치에는 동기 부여가 있어야 하고 음성 언어는 말의 사용을 설정하기 위해 꼭 필요 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148-149 쪽. 강조는 필자의 것임) 음성 언어는 주의를 자극하고, 시각적인 것은 주의를 요구한다. 그 이유는 청각이 언제나 시선보다 더 수동적인 관심 유발에 개방 적으로 제공되기 때문일까? 듣는 것을 스스로 방해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럽게, 눈을 감거나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다. 이러한 자연적 상황은 물론 젖먹이의 상황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반성되고, 상호적이며, 사변적이고, 무한한 대리 보충성의 구조 만이 공간이란 언어, 시선, 침묵(루소는 그것들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51) 등이 음성 언어가 더 커다란 부재 위기를 수반 해 생명의 에너지를 손상시킬 때 음성 언어를 대신한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이 경우 가시적 몸짓들로 된 언어는 더 생동감이 있 다. 사랑은 〈또한 다행스럽지는 않지만 말의 창조자이기도 하다. 말에 만족하지 못해서 사랑은 말을 노골적으로 무시한다. 사랑에는 자신을 표현하는 좀더 생동감 있는 방식이 있다. 그처럼 즐겁게 연 인의 잔영을 추구하는 여인이 그에게 그처럼 많은 것을 말한다! 이 요술 지팡이의 운동을 대신하기 위해 어떤 소리들을 그 여인이 사용했을까?〉 죽 언어의 창조와 정념의 탄생 이후에야 비로소 현전을 다시 포

51) 〈정신 분석학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꿈속의 침묵은 죽음의 상투적 표상이다.〉 (Freud, Le choix des tro is coff ret s ) 루소는 凡춘 veri es 에서 〈침묵은 죽음의 이미지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1047 쪽).

착하기 위해 우리가 인지한 도식에 따라 욕망은 요술 지팡이의 운 동, 손가락과 눈, 이야기를 담고 있는 침묵으로 되돌아온다. 여기 서는 좀더 자연적인 것으로 향하는 대리 보충적인 귀환이 문제되 지 언어의 기원이 문제되지는 않는다. 루소는 손짓과 몸짓을 구분 하면서 그 점을 분명히 한다. 현전의 잔영을 그리는 몸짓은 말없이 최초의 메타포를 다루고 있다. 손짓은 말로 가득한, 신중하지 못한 첨가물이다. 그것은 나쁜 대리 보충이다. 사랑이라는 침묵의 언어 는 언어 이전의 제스처가 아니라 〈무언의 웅변〉일 뿐이다. 〔우리 유럽인들의] 몸짓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초조감 이의에는 아 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몸짓에 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손짓하는 사람은 유럽인들밖에 없다. 그들 언어의 힘은 모두 팔 움직임에 있는 것 같다. 그들은 거기에 심장의 언어를 첨가한다. 이 모든 것은 그들에게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프랑스인은 분노했을 때, 많은 말을 쏟아붓기 위해 온몸을 고통스럽게 요동친댜 터키인은 한 순간 입에서 파이프를 떼고 낮은 목소리로 몇 단어를 말하고는, 짧 은 경구로서 그 프랑스인을 뭉개버렸다. (여기서 터키인은 그 언어와 마찬가지로 북방이 아닌 동방 출신이다• 우리는 북방과 동시에 서양에 있다.) 소리 없는 기호의 가치는 또한 말 속의 절제와 신중함의 가치이 기도 하다. 죽 말의 경제이다. 몸짓하는 법을 배운 후로, 우리는 팬터마임 예술을 잊어버렸다. 같 온 이유로 많은 훌륭한 문법들과 더불어 우리는 더 이상 이집트인들의 상징을 듣지 못한다. 고대인들은 가장 생동감 있는 말을 낱말이 아니 라 기호들로 표현했다. 그들은 말하지 않고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들이 보여준 것은(그것을 분명히 해두자) 사물이 아니라 그 상 형 문자적 메타포인 가시적 기호였다. 고대 이집트의 상징성에 대 한 이러한 찬양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다. 그것은 문자에 대 한 찬양이고, 야만성에 대한 찬양, 즉 나중에 가서 야만족에 걸맞 는 문자라고 말하는 문자에 대한 찬양이다. 야만성은 인간의 원시 상태, 순수한 자연 상태를 특징짓는 것이 아니고, 갓 탄생한 사회, 최초의 언어와 최초의 정념들의 상태를 특징짓는다. 구조적으로 미 개 상태에 선행하는 상태이며, 미개 상태 자체는 시민 사회에 선행 한다. 실제로 〈문자에 관하여〉 (5 장)에서 이집트 상형 문자는 가장 투박하면서도 오래된 문자로 정의되었다. 그 문자는 야만성이라는 형식 아래 공동체로 모인 민족에게 안성마춤일 것이다. 문자가 투박하면 할수록 그 언어는 더욱더 오래된 것이다. 최초의 쓰는 방식은 소리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물체 자체를, 멕시코인들처럼 직접적으로, 또는 옛날 이집트인들처럼 우의적안 형상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이 상태는 정념에 찬 언어에 해당하며 정념이 탄생시킨 모종 의 사회와 필요 욕구들을 전제로 한다. ……물체를 그리는 회화는 야 만 민족에게 안성마춤이다. 상형 문자 언어는 정념에 찬 언어이다. 야만성은 언어의 정념적 인 기원에 제일 가깝다. 역설적인 것은 그 문자는 말보다는 문자에 더 가까이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서는 필요 욕구를 표 현하는 몸짓이 여기서는 정념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몸짓은 문자인 데, 그 이유는 단지 그것이 요술 지팡이의 운동처럼 공간 속에서 그림을 그리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시니피앙은 사물 자체도, 직접 적으로 현전하는 시니피에도 아닌 시니피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상형 표기는 이미 우의적이다. 낱말들에 앞서 말하고, 〈눈에 대고

논증을 펴는 〉 몸짓, 그것이 바로 야만적 문자의 계기이다• 고대 역사를 펼쳐보자. 여러분은 그것이 눈에 대고 논증을 펴는 방 식들로 가득함을 찾아보게 될 것이다. 결코 그런 방식들은 그 자리에 놓일 수 있었던 다른 담론들보다도 더 확실한 효과를 제공하는 것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말하기 전에 제공된 물체는 상상력을 뒤혼들어놓 고, 호기심을 자극하고 정신을 호기심의 지연 상태로 묶어두고 , 앞으로 말할 것을 기다리게 만든다. 나는 몸짓이 담론에 뒤따르는 이탈리아인 과 프로방스인들이 이런 식으로 자기 얘기를 더 잘 듣게 하고 심지어 더 많은 줄거움을 가지고 그렇게 한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러나 가장 정열적인 언어는 말하기 전에 기호가 모든 것을 말해 버리는 언어이다. 양 귀비의 머리를 따는 타르쿠엥, 테라시빌, 총명한 신하의 입을 다물게 하는 알렉산더, 제논 앞에서 산책하는 디오게네스, 이들은 낱말로 말하 는 것보다도 더 잘 말하고 있지 · 않은가? 어떤 말의 회로가 똑같은 관 념들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강조는 필자의 것임 )5 2)

52) 『에밀 』 4 권에서 비슷한 술어들로 표현되는 예들을 다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고대 웅변술에서 말의 경제성을 찬양하는 것이다. 〈가장 생동감 있 게 말하는 것은 낱말이 아닌 몸짓 신호로 표현되었다. 그것은 말하지 않고 보여주었다. 눈에 노출된 물체는 상상력을 뒤혼들고, 호기심을 자극하며 . 사람의 마음을 앞으로 말하게 될 것의 기대감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자주 이 물체만이 모든 것을 말했다. 테라시빌과 타르쿠엥온 양귀비 머리 를 잘랐고…… 알렉산더는 인장을 찍었다…… 어떤 말들이 그와 똑같은 생 각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는가?〉 (400 쪽)

어떻게 몸짓 또는 시선 언어가 한 곳에서는 정념을, 다른 곳에 서는 필요 욕구를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상이한 텍스트 사이 에 있는 〈모순〉은 어떤 의도의 통일성과 어떤 구속의 필연성에 부응 한다. 첫째, 루소는 직접적인 현전의 욕망울 말하고 있다. 직접적인 현

전이 목소리의 사정 거리에 의해 더 잘 표상되고 분산을 축소시킬 때, 루소는 정념의 언어였던 살아 있는 음성 언어를 찬양한다. 현 전의 직접성이 몸짓의 근접성과 신속성에 의해 더 잘 표상될 때 루 소는 구두적 표상체를 표상하지 않는 가장 야만적인 문자, 죽 상형 문자를찬양한다. 둘째, 이 문자 개념은 거북스러움과 비수미 일관성의 장소를 지 칭하지만 이러한 비수미 일관성은 『인간 언어 기원론 』 과 루소를 넘어서는 개념들 속에서 해결된다 . 이러한 비수미 일관성은 필요 욕구와 정념의 통일성이 (연상된 의미 작용들의 모든 체계와 더불 어) 끊임없이 루소가 집요하게 그 윤곽을 제시하고 상기시키는 한 계를 소거하는 것에 기인한다. 그것 없이는 일체의 개념적 유기체 가 와해되는 이러한 중심 맥을 루소는 구분 기준으로 선언하고 또 그렇게 생각하기를 원하거니와 그는 그 중심 맥을 대리 보충적 차 이/지연으로 기술한다. 이러한 대리 보충적인 차이/지연은 그 서법 에서 정념과 필요 욕구의 기묘한 통일을 구속한다. 어떤 점에서 문자가 그것을 계시하는가? 어떤 점에서 문자는, 가령 연만의 정처럼, 자연 속에 또 〈자연〉 밖에 존재하는가? 또한 옛날의 상상력의 각성처럼, 만약 문자가 자연에도 자연의 타자에도 속하지 않는다면, 문자의 각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크리튀르는 음성 언어에 선행하고, 음성 언어에 뒤이어 오며, 음성 언어를 포함한다. 이것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다루는 관점만 으로도 사실이다. 죽 『인간 언어 기원론』의 구조라는 관점에서말이 다. 한편으로 실제로 문자 이론은 음성 언어의 족보를 파헤치고 일 종의 대리 보충적 부록으로 자신을 제안한다. 한 번 음성 언어의 정념적 기원을 기술한 후에, 여러 언어의 상태에 관한 보충적인 몇 몇 정보를 끌어내기 위해 문자 언어라는 보충물을 부차적으로 고 찰할 수 있다. 5 장 〈문자에 관하여〉 전체는 이 명시적으로 선언된

기획에 의해 개방되고 통제된다. 여러 언어의 진보와 진보를 그러 한 법칙 아래 놓는 대리 보충성과 대체의 운동을 요약한 후(〈새로 운 분절에 의해 소거되는 악센트를 대리한다. 감정을 관념으로 대신한 다 〉 등), 루소는 새로운 논의를 전개시킨다. 〈여러 언어를 비교하 고 그 나이를 평가하는 또 다른 수단은 문자에서 도출되며, 이것은 문자라는 기술의 완벽성과 정반대의 이유에서이다.〉 그렇지만 에크리튀르는 음성 언어와 그 정념적 기원이 문제되기 이전부터 출현한 것임에 틀림없다. 요술 지팡이의 운동과 상형 문 자는 〈 최초의 목소리〉를 나오게 한 정념 이전에 정념을 표현했다. 아울러 문자가 필요 욕구의 언어로 인지될 것이기 때문에, 문자는 필요 욕구 이전에 필요 욕구를 말했을 것이다. 문자에 대한 최초의 암시는 일체의 구벌이나 필요 욕구의 정념에 대한 차이에 손이 미 치지 않는 곳에 있다. 문자를 쓴다는 이득은 새로운 개념들을 요청 한다. 그것은 바로 음성 언어에 대한 은유적 기원이 이를테면 언어의 중심부에 눈을 뜨는 것이다. 최초의 목소리를 내게 한 정념은 이미 지와 관계가 있다. 목소리의 출생 증명서에 등록된 가시성은 순전 히 지각적인 것은 아니고 의미를 만들어낸다. 에크리튀르는 음성 언어 이전에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1 장부터 나타난다. 군대를 끌고 스키티 전투에 참전한 다리우스는 스키티 왕으로부터 개구리 한 마리 , 새 한 마리, 쥐 한 마리, 다섯 개의 화살을 받았다. 그 군사는 선물을 말없이 놓고 떠나갔다. 이 끔찍한 이야기가 퍼졌고, 다 리우스는 최대한 서둘러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이 기호들 대신 철자 하나[죽 하나의 음성 문자]로 그것들을 대체하자. 그것이 위협적일수록 겁을 덜 줄 것이다. 이것은 다리우스가 웃음거리를 제공한 허풍에 불 과할 것이다 . 5 3) 다른 일련의 성서 또는 그리스 신화들의 예에서도 귀보

53) 문자의 역사를 다루는 모든 책들이 예로 드는 이 이야기는 알렉산드르의 클레망 Clemen t d'Alexandre 과 해로도투스 Herodo t e 가 전한다. 루소는 바르부르통의 Essai sur Jes hi ero gJyp hes 에서 그것을 읽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르의 클레망은 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말들로 우리에게 전한다. ‘페레시데스 시루스에 따르면, 스키티 족의 왕 이단투라는 이스터를 지난 다리우스를 무찌를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그에게 편지를 보내는 대신 상 징 형태로서 쥐 한 마리, 개구리 한 마리, 새 한 마리, 투창 하나와 쟁기 하나를 보냈다.’ 구어와 문자를 대리하는 이 메시지에서 우리는 행동과 그 림의 혼합으로 표현되는 의미를 보게 된다.〉 바르부르통은 주에서 헤로도 투스(I. IV) 의 해석을 상기시킨다. 〈다리우스는 스키티 족이 이 수수께끼를 통해서 그에게 대지와 물을 표시하고 그에게 복종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 각했다. 그의 생각대로 쥐는 대지를 의미했으며, 개구리는 물을 의미했다. 새는 말에 바교할 수 있었다. 아울러 화살표를 통해 그들이 자신들의 힘을 버릴 것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게스(고대 페르시아의 승려) 족을 파괴시킨 사람 중의 한 명인 고브리아스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만약 새 들처럼 도망가는 대신 쥐나 개구리처럼 땅이나 물 속에 숨으면, 당신은 이 화살에 의해 생명을 잃을 것이다.’ 왜냐하면 헤로도투스는 창 대신 다섯 개 의 화살을 세고 쟁기 등에 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었기 때문이다. …… 페레시데스의 텍스트에 헤로도투스의 주석을 첨가함으로써 독자에게 줄거 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63-65 쪽)

다 눈에 대고 더 홀륭하게 말을 한다 이 점에서 호라티우스의 판단에서 진리를 느끼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장 웅변적인 담론들은 가 장 많은 이미지들을 새겨넣는 담론들이며 소리들은 색깔 효과가 있을 때 가장 많은 에너지를 갖는다.(강조는 필자의 것임) 결정적인 결과는 웅변은 이미지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이미 예 고된 것은 〈최초의 언어가 비유적이었음에 틀림없다〉 (3 장의 제목) 는 것이다. 구어에서 메타포는 그 가시적인 것과 일종의 구어적 회 화정형의 에너지를 이끌어낸다. 그런데 루소가 다른 곳에서는 가 시성, 공간, 회화, 문자 등을 정념적 에너지의 상실, 필요 욕구, 때 로는 죽음과 연관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문자를 쓰는 이득에 있어 이질적 또는 있는 바 그대로 명시적으로 선언된 가치

들의 통일성을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자를 쓰는 이득의 통일성을 루소는 명시적으로 선언할 수 없었다. 그는 단지 담론을 상이한 장소에서 작동시키면서 밀수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기술할 수 있을 뿐이다. 자신과 모순되는 것을 무릅쓰고 루소는 문 자 언어를 필요 욕구 쪽에, 음성 언어를 정념 쪽에 놓는다. 방금 전에 우리가 인용한 단락에서 문제의 요건은 정념적 기호였음이 분명하다. 이 점은 상형 문자가 〈정념적인 언어〉로 정의될 때 확증 될 것이다. 그렇지만 〈소리들이 색깔 효과가 있을 때 가장 많은 에 너지를 갖는다 〉 고 하더라도 정념에 호소하는 것은 그 기호들의 색 채 또는 공간이 아니다. 따라서 루소는 돌연히 그 증명 순서를 뒤 집는다. 오직 음성 언어만이 정념을 표현하거나 자극시킬 힘이 있 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감동시키고 정념을 불사르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 이다. 몇 배로 증가된 충격을 주는 담론의 연속적 인상은 당신에게 한 눈에 모든 것을 본 물체 자체의 현전고는· E톤· 감정을 줄 것이다. 완벽 하게 알려진 고통의 상황을 가정해 보라• 슬픔에 젖은 사람을 보면서 당신은 울 정도까지 감동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가 느끼는 모 든 것을 말할 시간을 주라. 그러면 당신은 눈물 바다를 이룰 것이다 . 비극이 바로 이런 식으로 효과를 낸다. 이야기 없는 팬터마임만은 당 신을 침착하게 내버려둘 것이다. 몸짓 없는 이야기는 당신이 눈물을 짜내게 할 것이다. 정념은 몸짓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악센트도 갖고 있 다. * 우리를 소스라치게 하는 이 악센트들, 이 목소리의 톤은 사람들의 귀 에 들리게 되어 있으며 심장의 한복판까지 스며들어가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악센트들을 이끌어내는 감동을 수반하며 우리가 듣는 것을 우리가 느끼게 한다. 가시적 기호둘은 좀더 정확한 모방을 가능하게 하고, 그 관심은 소리에 의해 더 잘 자극된다고 결론짓자.

* 나는 다른 곳에서 왜 거짓으로 불행한 척하는 것이 진짜 불행보다 더 우리를 감동시키는지 그 이유 를 말했다. 비극에서 그러한 오열은 어 떤 불행한 사람에 대해서도 연민의 정을 갖지 못했다. 연극의 창안은 우리에게 없는 미덕들에 대한 자존심을 자만하게 만드는 데 탁월한 것 o] 다. 이 논리 연쇄에서 우리는 두 개의 핵심적인 행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소리는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의 관심을 끌고, 우리 를 정념에 사로잡히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파고들기 때문 이다. 그것은 내재성의 요소이다. 왜냐하면 소리의 본질, 소리의 고유한 에너지는 그 소리의 수용이 반드시 있어야 함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우리가 주목했듯이, 나는 눈을 감을 수 있고, 내 가 보는 것에 의해, 그리고 거리를 두고 지각되는 것에 의해 감동 되는 것을 회피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수동성과 나의 정념은 〈사 람들의 귀에 들리게 되어 있으며 심장의 한복판까지 스며들어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것들(악센트)을 이끌어내는 감동을 수반하는 〉 악센트에 열려 있다. 목소리는 격렬하게 내 속으로 스며든다. 그것 은 전율과 내성화를 위해 특권화된 노선이다. 그 상호성은 〈자신이 말串臣 것을 듣기〉, 그리고 목소리와 대화의 구조에서 만들어진다 .54 ) 이러한 폭력은 루소로 하여금 정념에 대한 찬양을 누그러뜨리고 목소리와 마음의 공범 관계를 의심하게 한다. 하지만 또 다른 폭력 이 이 도식을 더욱더 복잡하게 만든다. 목소리에서 대상의 현전은 이미 사라진다. 목소리의 자기로의 현전과 자기 말을 듣는 것의 현 전은 가시적 공간이 우리 앞에 방치하는 사물 자체를 숨긴다. 사물 은 사라지고, 목소리는 음성 기호로 그것을 대체한다. 음성 기호는 감추어진 대상 자리에서 나 자신에게 심층적으로 파고들며, 〈내 마 54) 『 목소리와 현상 』 참조 솔

음의 한복판까지〉 자리 잡을 수 있다. 그것은 현상을 들린 소리로 변형시키면서 내면화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이것은 근원적 공(共) 에너지와 공감각을 전제한다. 또한 그것은 눈앞에 보이는 존재, 손 안에 있는 존재의 대상 형식 안에서 현전의 탈취가 거짓말이 아니 면 일종의 허구를 음성 언어의 근원으로 설정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말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모사형(시뮬라크르)을 보여줄 뿐이 다. 그런데 그 모사형은 진리보다도 더 심오하게 우리를 감동시키 고, 훨씬 더 효율적으로 우리에게 〈충격을 준다•〉 음성 언어의 평 가에 또 다른 애매 모호함이 있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대상의 현전이 아니라 음성 기호이다. 〈계속되는 자극으로 충격을 주는 담 론의 연속적 인상은 대상 그 자체의 현전과 다른 감정을 되돌려준 댜 …… 다른 곳에서 나는 거짓으로 꾸민 불행이 진짜 불행보다 훨씬 더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유를 말했다. ……> 만약 연극이 비 난받는다면, 그 이름이 지적하듯, 그것이 볼거리 장소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듣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루소가 다른 곳에서 그처럼 엄격하게 평가 절하한 필요 욕구의 사회에 대한 향수가 설명된다. 소리 없는 사회, 모든 언어의 기원 이전에 있었던 사회에 대한 꿈, 엄밀하게는 사회 이전 의 사회에 대한 꿈이다. 이 점은 나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만약 우리 들이 오직 물리적 필요만 가지고 있었다면, 결코 말하지 않을 수 있었 을 것이고 오직 몸짓 언어만으로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들은 오늘날의 사회와 대동소이한, 또는 그들의 목적을 향해 더 훌륭하게 진척되었을 사회를 건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들은 법률 도 제도화하고, 우두머리도 선택하고, 예술도 창조하고, 상업도 부흥시 키고, 한마디로 음성 언어의 도움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살람인들의 서간체 언어는 질투하는 사람들에 대한 두 려움 없이, 가장 잘 보존된 규방울 통해 동방의 정사 비법을 전수한다. 대영주의 벙어리 시종들은 그들끼리 서로 알아듣·고, 사람들이 사인으 로 그들에게 말하는 모든 것과 사람들이 이야기로 할 수 있는 모든 것 울 이해한다. 이러한 무성 문자에 대해 음성 언어의 도래는 재앙, 예측 불허 의 불행과 홉사하다. 아무것도 그것을 필연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인간 언어 기원론』 끝부분에서 이 도식은 역전된다. 만약 필요 욕구의 언어가 자연적이며, 무성 사회와 동물 사회를 구분짓기 위한 확실한 기준을 찾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고 려한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우리는 루소가 동물 언어의 고정 성이라고 간주했던 것과 인간 언어의 진보 사이에 있는 유일한 차 이는 어떤 기관, 어떤 감각에도 기인하지 않으며, 가시성의 차원에 서도 청각 차원에서도 모색되지 않는다는 점을 간파할 수 있다. 다 시 한번 그것은 신체 기관을 다른 신체 기관으로 대체시키고, 공간과 시간을, 시각과 목소리를, 손과 정신을 분절시키는 힘이며, 여러 언 어의 진정한 〈근원〉(또는 비근원)은 바로 이 대리 보충성의 능력이 다. 그것은 자연과 계약의 분절, 자연과 자연의 모든 타자들의 분 절과 마찬가지로 분절화 일반이다. 그 점은 1 장 말미에서부터 강 조해야 할사항이다. 동일한 관찰을 통해 우리 관념을 소통하는 예술의 창조는 이 소통에 사용되는 신체 기관들보다 음성 기관을 사용하게 하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에 더 종속된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아울러 음성 기관이 없었다면, 그는 같은 목적을 위해 다른 기관을 쏠 것이다. 당신 마음껏 사람들에게 조악한 조직체를 부여해 보라. 아마도 그는 관념들을 덜 획득할 것이

다. 그러나 단지 그와 그 동료 사이에 서로 행동하고 느낄 수 있는 소 통 수단으로 그들이 갖게 되는 것만큼의 관념울 서로 소통하는 데 도 달하게 될 것이다. 동물들은 이러한 소통을 위해 충분한 것 이상의 신 체 조직을 갖고 있지만 동물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그 조직을 사용하지 는 못했다. 바로 이 점이 특징적인 차이이다. 공동으로 일하고 삶을 영 위하는 동물 가운데 해리 , 개미. 벌 등에는 서로 소통하기 위한 자연 언어 가 있으며, 그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구나 해리와 개미의 언어는 몸짓에 있으며 단지 눈으로만 말한다고 생각할 여지가 있다. 어쨌든 이 언어 모두가 자연적이라는 사실 그 자체로서 그 언어들은 후천적으로 획득된 것은 아니다. 죽 동물들은 태어나면서 그 언어를 갖고 나온다 . 그들은 어디서나 같은 언어롤 갖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조금도 변화 시키지 않으며 최소한의 진보도 하지 않는다. 계약 언어는 인간에게만 속한다. 동물 언어(아울러 동물성 일반)는 고정성, 상징을 쓸 줄 모르는 무능, 비대리 보충성의 생동하는 신화를 표상한다. 만약 동물성이 란 개념을 그 지식 또는 무지의 내용이 아니라 거기에 할애된 기능 에서 고찰한다면, 동물이 그것의 출현과 놀이룰 기술하는 모든 것 에 무지한 생명의 계기를 식별하게 된다. 상징, 대체, 결핍, 대리 보충적 첨가 동. 아직까지 대리 보충성의 놀이를 개시하지 못하고, 동시에 그 놀이에 의해서 개시되도록 방치되지 않는 생명이 그것 이다. 차이/지연도 없고 분절도 없는 생명. 기원의 각인 이러한 우회는 분절이란 개념의 기능을 다시 포착하기 위해서

필요했다. 분절은 언어를 개시한다. 그 분절은 음성 언어를 정념에 서 태어난 제도로서 개방시키지만 노래를 근원적 음성 언어로서 위협한다. 그것은 언어를 필요 욕구와 이성 쪽(그것은 서로 공모한 다)에서 도출시키며, 따라서 문자에 더 잘 들어맞는다. 한 언어가 분절될수록 악센트가 줄어들고, 합리적일수록 덜 음악적이며, 문자 로 쓰일 때 잃는 것이 적을수록 필요 욕구를 더 잘 표현한다. 그것 은 북쪽 언어가된다. 루소는 이 운동을 우발적 사건으로 생각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기원적인 필연성에서 그 운동을 기술한다. 이 불행한 우발적 상황은 또한 〈자연적 진보〉이다• 그것은 성립된 노래에서 도래하지 않고 충만한 음악을 놀라게 하지 않는다. 분절 이전에 음성 언어는 없으며 따라서 노래도 없고 음악도 없다. 정념은 분절 없이는 표현 도 모방도 될 수 없다. 〈자연의 울음 소리〉(『인간 불평등 기원론 』 ), 〈목젖에서 자연적으로 나오는 단순음〉( 『 인간 언어 기원론』 4 장)은 언어를 만들지 못한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아직 분절이 제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목소리는 미분절이다.〉(『인간 언어 기원론』 4 장) 계약은 소리 지르기에서 언어를 이끌어내는 분절에 근거해서 입지를 갖게 되며, 자음, 시간, 음절 길이와 더불어 증가 한다. 따라서 언어는 그 타락 고陸!에서 탄생한다. 이런 이유에서 기 정 사실을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편차를 추정해 보려 했던 루소의 기술적 절차 방식을 반영하기 위해서 그 편차를 측정하고 그 구조 를 그리는 것을 영도(零度, deg re zero) 또는 단순 근원이라고 부 르는 것은 신중하지 못하다. 영도 또는 근원은 시작이 단순하다는 점을 함축한다. 또 그것이 타락의 시발점은 아니며, 현전 일반의 형식에서 생각될 수 있고, 그 근원이 변형된 현재, 과거의 사건 또 는 영속적인 본질이라는 점을 상정한다. 단순 근원을 말하기 위해 서는 그 편차가 단순한 축에 따라 한 방향에서만 측정될 수 있어

야 할 것이다. 루소의 기술 속의 그 어느 것도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 아직도 필요할까? 기원과 영도를 언급하는 것은 명시적으로 선언된 루소의 의도에 주석을 다는 것이며, 그것은 고전적 독서 또는 성급한 독서를 교정 해 준댜 하지만 이렇게 의도가 명시적으로 선언되었는데도 루소의 담론은 기원이라는 대리 보충 형식이 갖는 복잡성에 의해 제약받 게 된다. 명시적으로 선언된 의도는 무효화되지 않았고, 그것이 더 이상 지배되지 않는 체계 속에 등록된다. 기원의 욕망은 필수 불가 결하고 파괴되지 않는 기능이 된다. 하지만 그 기능은 기원 없는 통사 속에 위치한 기능이다. 루소는 근원성과 대리 보충성을 분리 시키고자 한다. 우리들의 로고스에 의해 성립된 모든 권리가 루소 쪽에 있다. 기원이라 이름 붙은 것이 대리 보충성 체계 위의 한 점 에서만 위치한다는 것은 생각될 수도 없고 참기도 힘든 것이다. 대 리 보충성은 실제로 그 기원 조건, 그 조건법 또는 그 기원 미래에 서, 그것이 될 수 있었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은 것에서 언어를 비틀어놓는다. 그것은 일체의 근원 관계를 지연시키면서 비로소 태 어날 수 있었다. 그 역사는 근원의 대리 보충의 역사이다. 근원적 대리 보충물과 근원에 대한 대리 보충물이다. 근원적 언어의 관념 성을 기술하는 4 장 끝에서 시제와 법의 놀이를 관찰할 수 있다. 자연적인 목소리가 비분절된 것처럼 낱말들도 매우 적은 수의 분절 을 가질 수 있다. 모음들의 히아투스를 피하기 위해 사이에 낀 몇몇 자 음들은 그 모음들을 미끈하게 하고 쉽게 발음하는 것을 축복할 것이다. 더구나 소리들은 매우 다양하며, 악센트의 다양성온 같은 목소리들을 몇 배로 늘릴 것이다. 음정의 양과 리듬은 새로운 조합의 근원이 될 것 이다. 그 결과 자연에서 오는 목소리, 소리, 악센트, 그 숫자는 계약에 속하는 분절들과 거의 아무 상관도 없다. 사람들은 말하는 대신 노래

부를 것이다. 대부분의 어간을 포함하는 단어들은 모방적이거나 정념들 의 악센트 또는 감각적 대상들의 효과일 것이다. 의성어는 계속적으로 느껴지게 될 것이다. 언어에는 그 상이한 관계들로 동일한 존재를 표현 하는 많은 동의어들이 있게 될 것이다.* 그 언어는 이 동일한 관계들을 표현하기 위해 거의 극소수의 부사나 추상적인 단어들을 갖게 될 것이 다 그 언어는 문장에 리듬을 주고 문장들에 굴곡을 주기 위해 많은 확 대사, 지소사, 복합어, 허사적 조사 등을 갖게 될 것이다. 그 언어는 많 은 불규칙성과 변칙성을 갖게 될 것이다. 그 언어는 음조, 어품, 하모 니, 소리들의 아름다움과 결부되기 위해 문법적 유사를 무시할 것이다. 그 언어는 논증 대신 판결을 갖게 될 것이다 그 언어는 설복시키지 않 고 설득시킬 것이며, 합리적 추론 없이 묘사할 것이다. 이어서, 으레 그 런 것처럼, 다른 곳에서 그리고 고고학적인 것에서 참조를 구한다. 그 언어는 몇몇 점에서는 중국어를, 다론 면에서는 그리스어를 닮을 것이 다. 이 관념들을 그 모든 가지로 확대시켜 보라. 그러면 당신은 플라톤 의 크라틸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것은 아니라 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아랍어에는 낙 E 遷· 말하기 위해서 천 개 이상의 상이한 단어가 있 고 겁울 말하기 위해서는 백 개 이상의 단어가 있다고 한다 . 이렇듯 조건법으로 기술된 단계는 이미 몸짓, 필요 욕구, 동물 성 등과 관계를 끊은 언어의 단계이다. 하지만 분절, 계약, 대리 보충성에 의해 아직까지 타락하지 않은 언어의 단계이다. 이 언어 의 시간은 이미 있음과 아직도 없음 사이의 불안전하고 접근할 수 없는 신화적 한계이다. 〈갓 태어나는 사회〉의 시대가 있었던 것처 럼 갓 태어나는 언어의 시대가 있다. 기원 이전도 아니고 이후도 아니다. 이러한 문법적 시제의 놀이를 관찰한 후에 책 읽기를 계속해 보

자. 그 다음에는 바로 〈 문자에 관하여 〉 라는 장이 나온다. 유일하게 제목만이 앞에 온 인용문과 뒤에 오는 인용문을 분리시킨다. 거기 서는 몇몇 동사의 의미와 모든 동사의 법을 강조할 일이다 .1 7 여러 언어의 역사 및 진보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목소리가 단조로 워 질 수록 자음은 늘어나고, 소거되는 악센트와 동일해지는 음절의 양 대신 문법적 조합과 새로운 분절로서 대리 보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은 시간이라는 매개를 통 해서만 일어난다. 필요 욕구가 늘어가고, 일이 뒤죽박죽 얽히고, 계몽 이 확 장되면서 언어는 그 성격을 바꾼다. 그것은 더 적절해지고 덜 정 념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감정 대신 관념으로 대체한다. 언어는 더 이 상 마음이 아닌 이성으로 말을 한다. 바로 그렇게 해서 악센트는 소멸 되고 분절은 확장된다. 언어는 더 정확하고 명확하며, 더 단조롭고 무 성적이며 차가운 언어가 된다. 내가 보기에 이 진보는 완전히 자연적 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대리 보충성은 인간의 고유성을 만드는 모든 것을 가능· 하게 한다. 음성 언어, 사회, 정념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고유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한편으로 그것은 인간 이전에, 또 인간을 벗어나서 그 가능성을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인 간의 부수적 또는 본질적 속성이 아닌 대리 보충성 이후 그 자신 에게 예고되도록 방치된다. 왜냐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현전도, 부 재도, 그 아무것도 아닌 대리 보충성은 인간의 실체도 , 본질도 아니 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현전과 부재의 놀이이며, 어떤 형이상학 이나 존재론의 개념으로도 이해될 수 없는 놀이의 열림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러한 인간의 고유성은 인간의 고유성이 아니다. 고유성 일반의 와해 자체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근접성의 불가능성(죽 욕

망)이다. 순수한 현전의 불가능성, 곧 그 욕망이다. 대리 보충성이 인간의 고유성이 아니라는 말은 (단순히 또 그처럼 단호하게) 그것 이 고유성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또한 그 놀 이가 사람들이 인간이라고 명명하고, 자기 밖에서 확장되는 것에 선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대리 보충성 놀이의 타자를- 배 제하면서 그 한계점들을 그려나갈 때에만 인간이라고 불린다. 자연 의, 동물성의, 원시성의, 유년기의, 광기의, 신성함의 순수성. 이 한계점들의 접근은 일종의 죽음의 위협으로서 두려움을 불러일으 키는 동시에 차이/지연 없는 생명으로의 접근으로서 갈망된다. 인 간이 인간으로 불리는 역사는 이들 사이의 모든 한계점의 분절이 다. 비대리 보충성을 규정하는 일체의 개념들(자연, 동물성, 원시성, 유년기, 광기, 신성함 따위 등)은 물론 어떤 진리 가치도 없다. 그 개념들(더구나 진리란 관념 그 자체와 더불어)은 그 놀이의 울타리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에크리튀르는 더욱더 우리에게는 이러한 대리 보충성 구조의 또 다른 이름으로 나타날 것이다. 만약 루소 자신의 견해에 따라 분절 을 가능하게 하는 것과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를 고려한다면(언어 는 반드시 분절이 되고, 그것이 분절되면 될수록 그것은 문자 언어에 더 적합하다), 우리가 소쉬르의 아나그람을 통해 알고 있는 것처럼 소쉬르가 말하기를 망설였던 것으로 보이는 것, 죽 문자소 이전에 는 음소가 없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죽 음성 언어에서 죽음의 원칙으로 작동하는 것 이전에는말이다. 아마도 이러한 대리 보충 개념을 염두한다면, 루소 담론의 상황 과 우리가 시도하는 것의 분석의 위상을 더욱더 잘 간파하게 될 것이다. 루소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대리 보충을 염두에 두고 있고, 그가 말한 것은 그가 의도하는 바이며, 또 기술을 명시적 선언에 할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는 족하지 않다. 이러

한 간극 또는 모순을 더욱 조직화해야 할 것이다. 루소는 그 단어 룰 사용하고 그것을 기술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와 관계되는 것 은 그 단어도 그것 자체도 아니다. 그 단어와 사물은 오직 대리 보 충적 구조만이 생산하고 표시할 수 있는 지시체적 한계점들이다. 루소는 그 단어를 사용하고 그것을 기술하면서 일정한 방식으로 〈대리 보충〉이라는 기호, 명사들(대리 보충, 대리 보충물)과 동사들 (대리 보충하다, 대체하다 등), 형용사들(대리 보충적인, 대리적인) 사이에서 분절되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통일성을 이동시키고 왜곡시킨다. 그리고 그는 일정한 어휘 목록에서 시니피에들을 조작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동과 왜곡들은 특정 욕망의 모순되는(또는 대리-보충적인) 통일성에 의해 조정된다. 프로이트가 분석하는 꿈 처럼 양립 불가능한 것들은 동일성 원칙 또는 제 3 자 배제 원칙, 즉 의식의 논리적 시간 원칙에 위배되는데도 욕망을 완수하는 것 이 문제될 때는 동시에 수용된다. 꿈이란 단어가 아닌 다른 단어를 사용하면서, 더 이상 현전 또는 의식의 형이상학 개념틀이 아닌 개 념틀을 착수시키면서(프로이트 담론의 내부에서 각성과 꿈을 대립시 키면서), 이 조정된 〈모순〉을 가능하게 하고 기술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을 정의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사상사〉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영역과 자기 영역을 분절하기 전에 이 공간을 추출하는 것으 로 시작되어야 한다. 물론 여기서는 우리가 단지 제안만 할 수 있 는물음들이다• 루소가 동시에 구출하려 했던 모순되는 두 가지 가능성은 무엇 인가? 그리고 어떻게 루소는 그 일을 해내는가? 한편으로는 분절 이 그 원칙이 되어 체계를 이루는 모든 것(정념, 언어, 사회, 인간 등)에 실증적인 가치를 부여하면서 단정짓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 는 동시에 분절에 의해 말살된 모든 것(악센트, 생명, 에너지, 여전 히 정념 등)을 진술하려고 한다. 대리 보충은 이 두 가지 가능성의

분절된 구조이며, 손상되지 않은 순수함을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으로 이끌면서 루소는 두 개의 단순한 것, 논리적으로는 모순되 는 것을 방치하면서, 분해시키고, 분리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하지 만 동일성 논리처럼 대리 보충성의 서법 속에 사로잡힌 루소는 말 하려는 바가 아니었던 것을 말하고, 결론짓기를 원치 않았던 것을 기술한다. 긍정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이고, 생명은 죽음(이며), 현 전은 부재(이며), 이러한 반복적 대리 보충성은 어떤 변증법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만약 최소한, 늘 그랬듯이, 현전의 지평에 의해 제어된다면말이다. 루소가 대리 보충성의 서법에 사로잡힌 유일한 사람은 아니다. 모든 의미, 곧이어 모든 담론이 거기서 취해졌다. 특히 특수 회전을 통해, 그 내부에서 루소의 개념들이 이동되는 형 이상학 담론, 아울러 헤겔이 부재와 현전, 비존재와 존재의 통일성 울 말할 때, 변증법 또는 역사는 최소한 우리가 루소가 말하려 했 던 바라고 불렀던 담론의 층위에서는 두 개의 충만한 현전 사이의 매개 운동이다. 종말론적 재림 또한 그 모든 차이와 분절을 로고스 의 자기 의식 속에서 추려내는 충만한 음성 언어의 현전이다. 결과 적으로, 루소 텍스트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 필연적인 질문을 던지 기 전에, 플라톤에서 헤겔까지 현전과 자기 자신을 향한 현전의 분 절에 의해 리듬이 짜인, 현전의 형이상학에 대한 루소 텍스트 소속 의 모든 특징을 식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전통의 통 일성은 루소 텍스트롤 짜고 있는 모든 소속 특징, 족보적 연계성, 좀더 꼼꼼한 인과율 회로를 통해서, 그것의 일반적인 영속성 속에 서 존중되어야 한다. 선결적으로, 또 조심스럽게 이러한 역사성에 귀결되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이러한 역사성 없이는, 좀더 좁은 구조 속에 각인시키는 것이 텍스트, 특히 루소의 텍스트는 아닐 것 이다. 여러 시기들에 걸친 형이상학 또는 서구의 이러한 함의 관계 내부에서 루소 텍스트(여기서 우리는 매우 조심스럽게 스케치했을

뿐이다)를 이해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아울러 역사라는 개념 자체가 귀결되는 형이상학의 이러한 역사는 역사란 이름이 더 이 상 적절하지 못한 총집합에 속한다. 이러한 일체의 함의 관계 놀이 는 너무나 복잡해서 엄밀하게 텍스트. 가령 루소 텍스트에 귀결되 는 것을 확신하려는 경솔함 이상의 것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단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 실제로 불가능하다. 이렇게 답하려고 주장하는 물음은 현전의 형이상학, 고유성과 주체의 형이상학을 벗어나서는 어떤 의미도 없댜 엄밀하게 말해 그 작가 또는 주체가 장 자크 루 소라고 할 수 있는 텍스트는 없다. 이러한 주명제로부터 엄밀한 결 과를 도출시켜야 하는 일이 남아 있다. 또 그 의미와 한계점들이 이미 일차적인 뿌리에서부터 통박된다는 구실 아래 종속 관계에 있는 모든 명제를 뒤범벅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네우마 따라서 우리는 가령 루소가 자연 언어의 불가능성을 기술하면서 그 가능성의 한계를 정의하려고 시도할 때, 자연적인 목소리 또는 미분절된 언어를 어떻게 그가 조작하는가를 탐색하게 될 것이다. 언어의 탄생 이전에는 동물의 울부짖는 소리도 더 이상 없다. 더구 나 이미 부재와 죽음에 의해 조작되는 분절된 언어도 없다. 언어 이전의 것과 언어적인 것 사이에서 루소는 〈막 태어나는〉 한계점 울 모색하고 거기에 여러 가지 규정을 부여한다. 여기에는 동일한 기능이 있는 두 가지의 최소한의 규정이 있다. 그것들은 유년기와 신과 관계가 있다. 매번 상호 모순되는 두 개의 술어가 하나로 모 인다. 문제의 핵심은 대리 보충성의 순수한 언어이다. 이 불가능한 〈자연적 목소리〉의 모델은 무엇보다 유년기의 모델

이다. 『인간 언어 기원론 』 에서는 조건법으로 기술되었는데(〈미분절 된 상태인〉 〈자연적 목소리〉의 분석을 상기하자) 『 에밀 』 에서는 다음 과 같이 씌어졌다. 공간적 부재와 시간적 부재는 더 이상 중국어와 그리스어가 아니라 아이이다. 우리들이 쓰는 모든 언어는 인위적인 작품들이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자연적인 동시에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언어의 존재에 대해 연구해 왔 다. 물론 그런 언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아이둘이 말하는 법을 배우기 이전에 쓰는 말이다. 이 언어는 제대로 분절된 발음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 은 억양이 있고, 음조가 있으며, 알아들을 수 있다. 우리둘은 어른이 되어 성인의 말만을 사용한 나머지 그 언어를 완전히 잊어버린다. 아이들을 연 구해 보자. 그러면 곧 우리들은 아이들의 언어를 다시 배우게 된다. 이 언어에서 선생은 바로 유모이다 . 유모들은 젖먹이들이 말하는 것을 모 두 알아듣는다. 유모들은 젖먹이에게 대답하고 또 상당히 지속적으로 아이와 대화한다. 그리고 유모들이 어떤 낱말을 늘어놓든 그 말은 전 혀 소용이 없다. 아이들이 알아듣는 것은 낱말의 뜻이 아니라 억양이기 때문이다. (45 쪽. 강조는 필자의 것임) 말하는 법을 알기 전에 말하는 것, 그 한계점으로 루소는 기원의 반복을 유도한다. 이 한계점은 비대리 보충성의 한계점이지만 이미 언어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대리 보충은 산출되지 않고, 예고되어 야 하며, 결핍과 부재는 시작하지 않고 시작되었어야 한다. 대리 보충의 도움 없이는 아이는 결코 말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아이가 하나도 어려움이 없고, 부족한 게 없다면, 그 아이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리 보충성이 단순히 일어났다면, 그것이 정말로 시작되었다면, 그 아이는 말하는 것을 알면서 말할 것이다. 그런데 아이는 말하는 것을 터득하기 전에 말한다. 그에게는 언어가 있지만

그 언어에 결여된 것은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힘, 하나의 기호를 다른 기호로, 하나의 표현 기관을 다른 표현 기관으로 대체할 수 있는 힘이다. 그 언어에 결여된 것은, 『 인간 언어 기원론 』 에서 말 하고 있듯이(우리 역시 그 점을 기억하고 있거니와) 〈인간에게 고유 한 직능이며, 그것은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 자기의 신체 기관을 사 용하는 것이다. 또 적당한 음성 기관이 없다면 동일한 목적을 위해 다른 기관들을 사용하게 한다.〉 어린아이(아이라는 개념)는 여기서 오직 하나의 언어만을 갖고 있는 대상에 붙인 개념이다. 왜냐하면 아이에게는 하나의 기관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곧 그것의 결 팝 즉 불편한 상태 자체가 유일하고 획일적이며, 어떤 대체, 어떤 대리 조작에도 결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것이 곧 루 소의 어린아이이다. 그 아이에게는 언어가 없다. 왜냐하면 오직 하 나의 언어만이 있기 때문이다. 아기에게는 오직 하나의 언어만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어린 아기 에게는 오직 하나의 불편함만이 있기 때문이다 . 자기 신체 기관의 발 육이 완전하지 못한 상태인 까닭에 아기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인상들을 구별하지 못한다 . 따라서 온갖 종류의 좋지 못한 불쾌감이나 아픔 따 위는 오직 고통이라는 감각만을 형성한다 .(46 쪽) 아기는 불쾌감의 온갖 형태가 서로 대체될 때 비로소 말하는 법 을 배운다. 그래서 아이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행하고, 한 기호에서 다른 기호로 이행하며, 의미를 만드는 실체들과 놀이하게 된다. 아이는 인간적 차원으로 규정된 대리 보충의 차원으로 들어 간다. 아이는 더 이상 울지 않을 것이며, 〈나는 아프다〉고 말할 줄 알게 된다.

아이들이 말하기 시작하면서 우는 빈도가 줄어든다. 이러한 진보는 자연적이다. 한 언어가 다른 언어로 대체된다. …… 에밀이 〈나 아퍼〉라 고 말하기만 하면. 그를 울게 하려면 실제로 상당한 고통이 있어야 한 다 .(59 쪽) 말할 줄 알기 전에 말한다는 것• 음성 언어는 재산이며 인간의 고유성이기 때문에 유년기는 선이다. 그런데 아이는 말한다. 말할 줄 아는 것은 분절이란 악을 동반하기에 유년기는 선이다. 그런데 아이는 말할 줄 모른다. 하지만 유년기는 이미 말을 하기 때문에 선이 아니다. 또 그것은 선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고 유성도 선도 아니기 때문이다. 죽 말할 줄 아는 것이 아니다. 거기 서부터 유년기에 대한 판단의 불안전성이 야기된다. 최상 그리고 최악에 있어서, 유년기는 때때로 동물성 쪽에, 또는 때때로 인간성 쪽에 있다• 아이가 말할 줄 모르면서 말한다는 것은 확실히 신임받 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노래 부를 줄 모르면서도 말한다. 그 점 에서, 그는 말도 못하고 노래도 못 부르는 동물이 아니지만 그렇다 고 말도 할 수 있고 노래도 부를 수 있는 인간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목소리가 있다. 말하는 또는 분절된 목소리와 노래하는 목소리, 죽 멜로디가 담긴 목소리, 그리고 격앙된, 죽 억양이 깔린 목소리로서 이것은 격정에 쓰이는 언어이며 노래와 구어를 활기 있게 해준다. 어린이도 어른과 마찬가지로 이 세 가지 목소리가 있지 만 어른처럼 이 세 가지를 연결짓지 못한다. 아이는 우리 어른들과 마 찬가지로 웃고, 울고, 투덜대고, 감탄하고, 흐느껴 울 수 있지만 그 억 양을 다른 두 목소리에 섞지 못한다. 완벽한 음악은 이 세 가지 목소 리를 잘 조합한 음악이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이러한 음악이 불가능하 며 그들의 노래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말하는 목

소리 속에서도 그 언어는 강조의 억양이 없다. 아이들은 울지만 강조 의 억양을 못 낸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 거의 악센트가 없돗이 그들의 목소리에도 에너지가 없다.( 『 에밀 』 , 161 - 162 쪽) 분절은 사람들이 그것을 취하는 곳에서 분절된다. 수족과 기관 의 분절, [고유한] 몸의 차이/지연. 바로 이러한 자연적인 표현에 서 이 차이/지연을 소거하기에 제일 적절하게 보이는 것은 숨결이 아닌가? 말하고 노래하는 숨결, 그것은 언어의 숨결이기도 하지만 미분절된 숨결이다. 그러한 숨결은 인간적 근원과 여정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어 린아이의 언어처럼 더 이상 인간성으로 진행되지 않고 초자연성 노선에 있다. 그 원칙과 목적은 자연의 목소리와 섭리처럼 신학적 이다. 이러한 존재 신학적 모델에 근거해 루소는 기원 반복을 해결 한다. 즉 우리에게는 순수한 숨결, 손상되지 않은 생명, 미분절된 노래와 언어, 공간 없는 음성 언어로 된 모범적인 모델(비록 그것 이 우리에게는 유토피아적이고 비실제적인 패러다임이지만)이 있다. 그것은 네우마이다. 순수한 음성화, 음성 없는 미분절된 노래의 형 태로 그 이름은 신에 의해 우리에게 영감으로 주어지고 신에게만 호소될 수 있는 숨결을 의미한다. 『음악 사전』이 그것을 정의하는 바대로이다• NEUME : 여성 단수. 일종의 종교 음악을 나타내는 술어 .18 . 네우마 는 일정한 특정 방식의 노래를 짧게 요약한 것이며, 그 요약은 응답송 의 끝에서 어떤 음성 언어도 결부시키지 않고 단순한 소리의 다양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카톨릭 신자들은 이 특수한 사용법을 아우구스티누 스 책의 한 구절에서 인용한다. 그 구절은 신을 즐겁게 할 만한 가치 가 있는 음성 언어를 찾을 수 없을 때는 환희에 찬 혼동된 상태의 노

래를 그에게 바치게 한다고 말한다.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가 아 니라면 그러한 무언의 환희가 누구에게 안성마춤일까? 만약 침묵할 수 도 없고, 미분절된 소리를 제외하고는 말을 표현할 수단을 아무것도 찾지 못할 때 어떻게 이 표현할 수 없는 존재를 축복할 수 있는가? 〉 (강조는 필자의 것임) 말할 줄 알기 전에 말하는 것, 침묵을 지킬 수도 없고 말할 수 도 없는 것, 이 기원의 한계점은 순수한 현전의 한계이거니와 생동 감 넘칠 정도까지 현전하고 환희 속에서 느껴진다. 하지만 차이라 는 작업에 의해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아주 순수한 것이 며 자기 자신의 환희가 중단이나 불연속적 변질성에 의해 변질되 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미분절된 현전이다• 현전에 대한 이러한 경 험은 자신에게서 계속되고, 루소는 그것은 오직 신에게만 부여되었 다고 생각한다. 신에게, 또는 그 마음이 신의 마음과 일치하는 사 람들에게 부여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일치, 이러한 신성과 인성 의 닮은 꼴이 『몽상록』에서 현전으로 환원된 시간의 경험을 루소 가 꿈꿀 때 그에게 영감을 준다. 〈현전의 시간에서는 현재가 그 지 속과 어떤 연속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속된다.〉 이 페이지 전체를 다시 읽을 일이다. 거기서 말하는 것은 그 현 전으로 파열된 시간의 불행을 회고와 예기(豫期)로서 말하고 있다. 계속되고 미분절된 현재의 향유는 거의 불가능한 경험이다. 〈그것 온 우리들의 살아 있는 향유 속에서, 마음이 진정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순간에 겨우 있을 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순 간이 언제나 늘 지속된 E 臣· 것이다.〉 마음은· 신체 기관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차이와 분절의 체계 안에 각인되지 않았기 때문 이다. 그것은 신체 기관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한 현전의 기관이기 때문이다. 거의 이러한 불가능한 상태에서, 루소는 이즐

드 생-피에르에게서 그 경험을 얻는다. 자연, 물, 유출 등의 테마 에 대해, 그리고 그 묘사에 대해서 사람들은 많은 것을 썼다 . 55) 그 것을 순수한 모음 조화, 자연 언어와 네우마의 순수한 모음에 견주 면서 우리는 단지 거기서 네 개의 의미로 된 체계를 도려낼 것이다. 자기 자신을 향한 현전의 향유, 어떤 바깥쪽에 의해서도 변질되 지 않은 순수한 자기 정서 유발은 신에게만 부여된다.

55) 우리는 여기서 플레야드 판본 B춘 ve ri es의 편집자들이 단 주의 참고 문 헌을 참조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1045 쪽 이하 ).19

그러한 상황에서 어떤 것으로 향유를 · 느낄 수 있는가? 자기 자신의 어떤 바깥쪽이나 어떤 다른 것이 아닌 자기 존재 자체를 즐겨야 한다. 단 이 상태가 지속되는 한 신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으로 족하다. 거기에는 운동, 생명, 시간의 향유, 자기 자신을 향한 현전 · 등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운동은 중간 휴지도 없고, 차이/지연도 없 으며 불연속성도 없어야 한다. 절대적인 휴식도, 너무 많은 동요도 있어서는 안 된다. 충격도, 중간 휴지도 없는 획일적이고 적당한 운동만이 있어야 한다. 운동이 없다면 생명은 혼수 상태에 불과하다. 만약 운동이 불균등하거나 너무 세면, 그것은 잠을 깨운다. …… 바깥쪽에서 오지 않는 운동은 우리의 안쪽 에서 이루어진다. 이 운동은 분절되지 않은 말이다. 죽 낱말들 이전의 말이다. 하지 만 말하기에는 충분히 살아 있고, 어떤 대상에도 귀결되지 않고 자 기 자신에게서 어떤 치명적 차이도, 어떤 부정성도 수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순수하고 내적이며 동질적인 말이다. 그것은 매혹, 죽

노래이다. 만약 운동이 불균등하거나 너무 강하면 그것은 남을 깨운다. 이웃하 는 물체에서 우리를 상기시키면서 그것은 몽상의 매혹을 파괴하고, 우 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밀어내고, 한순간에 부와 인간들의 굴레 속에, 또 불행의 감정 속으로 갖다 놓는다. 절대적인 침묵은 의로움을 낳는 다. 그것은 죽음의 이미지롤 제공한다. 하지만 거의 불가능한 경험, 대리 보충성의 구속에 거의 이질적 인 이 경험을, 우리는 이미 대리 보충으로, 죽 피해 보상으로 경험 한다. 아울러 우리 경험과 신의 경험 간의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 잘려나가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다론 사람 을 위해서 좋은 일이나 유용한 일을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행한 인간은 이런 상태에서 부와 인간들이 그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일체의 인간 행복에 대한 피해 보상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피 해 보상은 모든 영혼이 어떤 상황에서나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평화로워야 하고 어떤 정념도 그것을 동요시켜서는 안 된다. 신과 우리의 차이는 신은 나누어주고 우리는 피해 보상(위안)을 받는다는 것이다. 루소의 도덕적 신학(『사보아 지방 보좌 신부의 신 앙 고백』에서 이 말을 자주 사용한다)은 모두 신의 정성이 언제나 정당하게 피해 보상하려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신만이 그가 변제 하는 대리 보충으로부터 면제된다. 신은 대리 보충의 면제이다. 네우마, 자기 자신을 향한 현전의 매혹, 시간의 미분절된 경험, 이 모든 것은 유토피아를 말한다. 그 같은 언어 (왜냐하면 그것은 틀 림없이 하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는 엄밀하게 따져서 일어나지 않

는다. 그 언어는 공간 띄우기와 장소들의 조직을 필수적으로 요하 는 분절을 알지 못한다. 지역적 차이 이전에는 언어도 없다. 그런데 〈여러 언어의 기원에서 일반적이며 지역적인 차이〉 (8 장), 〈 남방 언어의 형성 〉 (9 장), 〈북방 언어의 형성 〉 (1 0 장) , 〈이 차이점 들에 대한 성찰 〉 (11 장)은 그 기술에 따라서 『 인간 언어 기원론 』 의 명시적으로 선언된 조직에 의해 확증된 것으로 보이는 것을 부정 하고 있다. 그 장들이 기술하는 것은 분절 이전에, 죽 지역적 차이 이전에 언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여러 언어의 양극 사이에 있는 지역적 차이는 언제나 분절의 놀이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리학적인 것을 고려하지 않고 언어의 구조나 일반적인 본질을 기술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여러 언어의 기원에 대해 일반적이며 지역적인 차이에 대한 장에 접근하기 전에, 일반적인 언어를 다루면서 루소가 하고 싶어 했던 것이댜 이렇게 하면서 그는 기원의 구조 또는 지역적 기원의 구조 적 기원을 분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모든 것은 일반적인 원시 언어와 그 지속에서 결과된 진보에 적합하지만 그 기원도 차이도 설명하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8 장이 열린다. 만약 분절을 통해 그때부터 지역적 차이를 측정하고, 언어에서 그 어떤 것도 분절에 선행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시실에서 여러 언어의 분류와 그 지역적(지리적) 분포, 그리고 그 생성의 구조에서 오직 관계들의, 죽 상황 관련성의 놀이만이 있 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 어떤 부동의 자연적인 절대적 중심도 없다고 결론지울 수 있을까? 바로 거기서 우리는 기술과 명시적 선언을구별해야한다. 루소는 그 중심을 명시적으로 선언한다. 언어사에 있어 오직 유 일한 기원과 하나의 영도(零度)만이 있다. 그것은 남방, 생명의 열 기, 정념의 에너지이다. 두 장의 외관상의 균형과 위에서 우리가

언급한 이중 기원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지만 루소는 두 개의 형성 축을 언급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단지 하나의 형성과 왜곡 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을 뿐이다. 언어는 오직 남방에서만 진정으 로 형성된다. 언어의 기원적 중심은 『 인간 언어 기원론』의 중심부 에서, 다른 장들 가운데 가장 길고 가장 풍부한 9 장에서 성찰된다. 겉보기와는 달리, 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루소는 여기서 단순히 기정 사실들을 끊임없이 논외로 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사실들은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좀더 풍부하게 나온다. 하지만 그 내용은 그 본질의 현상학적 직관을 조정하는 〈전범 의 식〉과 더불어 구조적 색인의 명목으로 작동한다. 첫번째 줄, 첫번 째 주는 이미 이러한 해석을 허락한다. 태초에* 대지의 표면에서 혼돈 속에 있던 인간들에게는 사회로는 가 족, 법으로는 자연법, 언어로는 몸짓과 몇몇 미분절된 소리들만이 있었 을뿐이다. * 나는 이 태초의 시간을, 그 시대를 확정짓기 원하는 인류의 어떤 시대 든지, 인간둘의 분산 시간이라고 부를 것이다. 따라서 〈태초의 시간〉이라는 표현과 그 시간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하는 모든 지표는 어떤 날짜, 사건, 연대기도 참조하지 않는 다. 구조적 불변 요소를 변경시키지 않으면서도 기정 사실들을 다 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 그것은 시간 이전의 어떤 시간이다. 가 능한 일체의 역사적 구조에서 언제나 적나라하게 노출시켜야 할 선사적, 선사회적, 선언어적 성층이 있을 수 있다. 분산, 절대적 고 독, 침묵, 선반성적 감각에 놓인 그 순간, 기억도, 예고도, 상상력 도 이성과 비교의 힘도 없는 경험, 그것이 바로 모든 사회적, 역 사적, 언어적 모험의 순수한 지반이다. 사실적 설명, 심지어 기원

과 동떨어진 사건들에 의뢰하는 것은 순전히 허구적이다. 루소 자 신은 그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아울러 사람들이 루소에게 기정 사 실들의 개연성 또는 양립 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적 이의를 제기할 때(또는 루소 자신이 대립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할 때) 루소 는 주변만을 빙빙 돌면서 다음과 같은 것을 상기시킬 뿐이다. 즉 언어의 기원을 기술하고 〈태초의 시간〉을 정의할 때, 그는 기정 사 실에 조소를 보낸다. 카인은 일꾼이었고, 노아는 포도밭을 일구었다고 나에게 말할 것이 다. 왜 안 될 소리인가? 그들은 혼자였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무엇 이었는가? 더구나 이 점은 나에게는 전혀 문제가 안 된다. 나는 위에 서 태초의 시간이란 말로 내가 의미하려는 바를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순수 자연 상태라는 관점에서 『인간 언어 기원 론』 과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사이에 있는 여러 관계들의 문제 속 에 또 다른 입구를 가지고 있다. 〈태초의 시간〉 이전에 아무것도 없었고, 따라서 그 두 텍스트 사이예는 엄밀하게 규정될 수 있는 어떤 시차도 없다. 우리는 위에서 움막 시대에 대해 말할 때, 그 점을 암시했다. 바로 지금 그것을 분명히 밝혀둘 여지가 있다. 첫번째로 읽을 때는 그 시차가 반박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인 간 언어 기원론』의 〈원시인〉은 〈산업도, 음성 언어도, 주거지도 없 이〉 숲속에서 배회한다• 『인간 언어 기원론』 속의 야만인은 가족도 움막도 있으며, 〈몸짓과 몇 개의 미분절된〉 소리로 한정되기는 하 지만 언어를 갖고 있다. 이러한 불일치들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관점에서는 변별성이 없 다. 루소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연속적인 상태를 기술하고 있는 것 이 아니다. 『인간 언어 기원론』에서의 가족은 사회가 아니다. 그것

은 원시적 분산을 한계짓지 않는다. 〈 태초의 시간에, 대지의 표면 에서 혼란에 빠진 인간들에게 사회라고는 가족밖에 없었다…… .〉 이것은 곧 이 가족이 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스코니 (이 책 참조)가 상기시켰듯이 그것은 순전히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선제도적 현상이다. 그것은 세대들의 이러한 과정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었으며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역시 그 과정을 인정하고 있 다(세대는 불필요하게 자꾸만 불어난다). 이러한 자연적 환경은 어 떤 제도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언어에 대해서 〈몸짓과 몇 개의 미분절된 소리들 〉 을 부여한 후에, 루소는 주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진정한 언어에는 가족적인 기원은 결코 없으며, 그 언어들을 성립시 킬 수 있는 좀더 일반적이고, 좀더 지속적인 계약이 있을 따름이다. 아 메리카 야만인들은 자기들 사이룰 벗어나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각 자 움막 속에서 침묵을 지키며, 가족에게는 시늄으로 말을 한다. 그리 고 이 시능들은 아주 가끔 쓰인다. 왜냐하면 야만인은 유럽인보다 덜 초조하고, 덜 조급해 하기 때문이며, 그처럼 많을 필요 욕구도 없고, 그 자신이 직접 그 필요 욕구에 대처하는 정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두 개의 텍스트 사이에 있는 모순 또는 엄밀한 시차 를 소거하면서, 우리는 그것들이 반복되도록 하거나 서로 겹치게 환원시키지 않는다. 한 텍스트에서 다른 텍스트로 강조 악센트가 이동되었고 연속적인 미끄러지기가 조작된다. 아니면 어떤 연속성 의 질서도 갖다 놓지 않고, 『인간 불평등 기원론』으로부터 『인간 언어 기원론』에 이르기까지 그 이동이 연속성을 향해 진행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시초를 표시하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것은 순수 자연 상태에서 처녀성의 특성들을 첨예하고

철저하게 만든다. 『 인간 언어 기원론 』 은 그 시작들과 운동을 느끼 게 하고 싶어하는데, 그 운동을 통해 〈 대지의 표면의 혼란에 빠진 인간들은 〉 순수 자연 상태에서 막 태어나는 사회에서 계속해서 서 로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인간 언어 기원론 』 은 인간을 탄생 과정 과 기원에서 발생으로, 이렇게 미묘하게 이행하는 과정에서 포착한 다. 이 두 기획은 서로 모순되지 않고 그중 어느 하나에 대한 우선 권이 없으며, 위에서 우리가 썼듯이 순수 자연의 기술은 『 인간 불 평등 기원론 』 에서 그러한 넘어서기에 자리를 할애한다. 늘 그렇듯이, 그것은 거의라는 부사가 일러주듯, 파악될 수 없는 한계점이댜 자연도 사회도 아닌 준(準)사회로 탄생되고 있는 사회. 순수 자연 상태에 속하지 않는 인간(『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그 점 에 대해 말하고 있다. 〈 그러한 순수 자연 상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 고, 과거에도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아마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 다. 하여튼 현재 우리들의 상태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를 적절 히 개념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 〉, r 서문」)이 사회를 벗어나서 존재하 는 순간이다. 자연의 생성-문화를· 복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다. 헤겔 역시 가족이 선사적인 것이라고 말하거니와 움막집, 몸짓 과 몇 개의 미분절된 소리로 이루어진 언어는 이 거의라는 부사의 지표들이다. 사냥꾼들의 〈원시적〉 생활, 유목민들의 〈야만적〉이며 선농경 생활은 이러한 준사회에 가까운 사회에 해당한다. 『 인간 불 평등 기원론』처럼 『 인간 언어 기원론』에서도 사회를 농업에, 농업 을 금속술에 종속시킨다 . 56) 루소는 여기서 성서를 참조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실제로 〈족장 56) 〈예술의 창조는 인간이란 종이 농업에 종사하느라 필요했다.〉( 『 인간 불 평등 기원론 』 , 173 쪽) 〈최초의 인간은 사냥꾼 또는 목동이었지 농부는 아 니었다. 최초의 재산은 가축이었지 전답이 아니었다. 토지의 소유가 공유되 기 전에는 아무도 토지를 경작하려고 하지 않았다. 농업은 도구를 요구하 는 기술이다.〉( 『 인간 언어 기원론 』 , 9 장)

시대부터 대규모 농업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루소를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답변은 사실적 역사의 위상을 밝혀주고 있다 . 성 서가 전하는 여러 사실들은 결코 순수 자연 상태와 관련이 없다. 투박하게 구조적 기원과 경험적 기원을 구분하는 대신 루소는 그 에게 구조적 도식을 제공하는 성서의 권위 속에 은닉하면서 족장 시 대는 기원으로부터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디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이 모든 사실온 참이다. 그러나 결코 시간을 혼동하지 말자. 우리가 알고 있는 족장 시대는 최초의 시대와 멀리 떨어져 있다. 성서는, 인간 들이 오랫동안 살아왔던 시대에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모두 열 세대를 세고 있다 . 이 열 세대 동안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 우리는 그 점에 대해서 아는 바가 하나도 없다. 이곳저곳 흩어져 사회도 없는 상태 로 살면서, 그들은 겨우 말할 줄 알았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이 글을 쓸 줄 알았겠는가? 아울러 고립된 생활의 획일성 속에서 그들이 어떤 사 건을 우리에게 전달할 수 있었을까?(강조는 필자의 것임) 이러한 성서의 근거에 루소는 또 다른 근거를 첨가한다. 농업으 로 이행한 후에 일어난 야만 상태로의 타락 또는 재전락이 그것이 다 . 진보를 무로 만들고, 반복을 구속하는 파국적인 사건 덕분에 구조적 분석은 제로에서 다시 출발할 수 있다. 이것은 곧 구조적 이야기가 일직 신 적 발생을 따르지 않고, 순환하는 동안에 순간순간 재출현할 수 있는 영속적인 가능성들을 조준한다는 사실을 확인하 는 것이다. 야만 상태의 준사회적인 상태는 실제로 사회 상태 이전 이나 또 그 후에, 더구나 그 동안, 그리고 그 아래에서 존재할 수 있다. 아담은 말을 했다. 노아는 말을 했다. 그렇다고 치자. 아담은 신에

의해서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노아의 아이들은 서로 떨어져 흩어지면 서 농업을 내팽개쳤고, 공통 언어는 최초의 사회와 더불어 소멸된다. 이것은 바벨탑이 결코 없었다고 하더라도 일어났을 것이다. 분산은 언제나 다시 나타날 수 있고, 그 위협은 사회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에 순수 자연 상태의 분석은 언제나 가능하고, 자연적 설명에 의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점에서 루소의 방식은 콩디 악의 방식을 상기시킨다. 콩디악은 신이 언어를 아담과 이브에게 완성된 형태로 주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노아의 대홍수 이 후 서로 다른 성의 두 아이가, 기호의 사용을 알기 전에,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고 가정하자.〉 〈다음과 같은 가설을 내세우는 것을 내 게 허락하기 바란다. 문제는 이렇게 탄생한 민족이 하나의 언어를 만들었냐는 것이다•〉 57) 〈이런 담론, 이러한 우회는 이미 바르부르 통에 의해 실행되었다(콩디악은 구렇게 주장한다). 또한 칸트가 『단 순 이성의 한계점에서의 종교』에서 차용하는 담론 역시 유사하다 고 할 수 있다.〉 만약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인간 언어 기원론』으로 경미한 옮김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러한 연속적 미끄러지기, 순수 자연으 로부터 탄생하는 사회로의 완만한 전이 과정에 기인할 것이다. 더 구나 이러한 실증성은 그처럼 간단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미분절에 서 분절로, 순수 자연에서 문화로, 충만함에서 대리 보충성 놀이로 의 이동에서는 어떤 연속성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탄생과 대 리 보충에서 탄생하는 존재를 기술해야 하는 『인간 언어 기원론』 은 두 개의 시간을 화해시켜야 한다. 자연 밖으로 나가는 것은 점진 적이며 갑작스러운 동시에 순간적이며 끝나지 않는다. 구조적 분절은 57) Essa i sur J'or ig ine des connais s ances huma ine s(I I, I. De l'ori gine et des pro g res du lang a ge , Es. A. Coli n, 111 쪽) .

확연히 구분되어 일어나지만 역사적 분리는 완만하여 많은 수고가 들고, 지각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중적 시간성에 『 인간 언어 기원 론』은 역시 『인간 불평등 기원론 』 과 일치된다 . 58)

58) 비록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 순수 자연 상태와 갓 태어난 사회 상태 사 이의 중간 휴지를 그 정도까지 첨예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여러 언 어의 최초의 창안에 소모된 엄청난 고통과 시간에 대해서〉 암시하고 있다 (1 46 쪽). 아울러 〈전개된 시간〉과 〈태초의 거의 지각되지 않은 진보〉를 암 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건들이 계속되면 될수록 기술하기에 적당하기 때문이다.〉 (167 쪽. 볼테르는 이를 〈우스꽝스럽다〉고 판단했다. 플레야드 판본의 편집자 주를 볼 것 )20

이 〈간단한 손가락 운동〉 : 문자와 근친 상간의 금기 『인간 언어 기원론』에 따르면, 이제 갓 태어나는 사회는 세 개 의 상태 21 로 이루어진 법칙에 종속된다. 하지만 〈사회와 관련해서 고려된 인간의 세 가지 상태〉 (9 장) 또는 〈민족으로 뭉친 인간들을 고려할 수 있는 세 개의 다양한 상태〉 (5 장) 들 가운데 마지막 상 태만이 사회 속에서 인간이 인간 자신으로 접근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그것은 문명인과 경작자의 상태이다. 그에 앞선 두 상태(원 시 사냥인과 야만적 유목민)는 일종의 선사 시대에 속한다. 따라서 루소의 최고 관심은 두번째 상태에서 세번째 상태로의 이동 과정 이다. 이 이동 과정은 사실 극도로 완만하고,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것 이었지만, 그 전상태에서 그 다음 상태를 만들어낼 것을 구조적으 로 함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계보는 단절 또는 전복, 혁명 또는 재앙을 기술해야만 한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자주 혁명에 대해 언급한다. 비록 재앙 이라는 단어는 『인간 언어 기원론』에 단 한번 나오지만 엄밀하게

제시된다. 아울러, 그것은 그 체계의 약점이 아니라 다른 모든 개 념의 연쇄에 의해 지시된다. 왜 문명인의 기원, 여러 언어의 기원 등, 한마디로 대리 보충적 구조의 기원, 문자의 기원은 파국적인가? 왜 그 기원은 전복, 귀 환, 혁명, 점증적인 운동의 형식 속에서 혼란을 유발하는가? 만약 우리가 여러 언어의 형성에 대한 장들을 방향 설정하는 인 간학적 지리적 테마와 자연적 설명의 도식을 검토해 본다면, 그 재 앙은 무엇보다 지상의 혁명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그러한 혁명 없 이 인간은 결코 〈 야만성 〉 의 〈황금 세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 이다. 야만성의 체계 내부에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절력 또 는 명분이 없었다. 따라서 단절의 인과율은 자연적인 동시에 선문 명적 상태 체계의 바깥쪽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지상의 혁명은 이 두 가지 요청에 부응한다. 그것은 『인간 언어 기원론 』 의 중심부에 서 상기된다• 온화한 기후와 기름지고 풍성한 나러들로 사람들이 제일 먼저 모이 기 시작했고, 그곳은 마지막으로 민족 국가가 형성된 곳이다. 그 이유 는 거기에서 사람들은 더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었고 사회를 탄생하게 하는 필요 욕구들을 나중에서야 비로소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 가령 지구에 계속해서 봄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도처에 물, 가금(家 萬 ), 방목이 있다고 하자. 자연의 수중에서 벗어나, 이들 사이에 분산 된 인간들이 있다고 치자. 그들이 원시적 자유를 영원히 포기하고 자 연적 무위에 안성마춤인 고립된 전원 생활을 떠나 ,59 ) 아무 필연성 없이 59) 루소는 주에서 다음과 같이 밝혀놓고 있다. 〈인간이 천성적으로 어느 정 도까지 게으론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미치지 못한다 . 인간은 오 직 자고. 무위 도식하고, 움직이지 않은 채로 살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굶어 죽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운동만을 겨우 할 뿐이다. 아무것도 이 달콤한 무위 도식만큼 원시인들을 오랫동안 지속시키지 못한다 . 인간을 초

조하고 선견지명이 있게 하고 능동적이게 하는 것은 오직 사회에서만 탄생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을 보존하려는 정념 다음으로, 최 초의 가장 강한 정념이다. 만약 그 점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심지어 우리 가운데 모든 이가 일하는 것은 휴식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들을 부 지런하게 만드는 것은 게으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

사회적 상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노예화. 노동, 빈곤 등을 스스로 에게 부과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인간이 사회화되기를 원했던 이는 손가락으로 지축을 만지고 우주의 축에 그것을 경도시켰다. 이 가벼운 운동이 지상의 모습을 바꾸고. 인간 종의 소명울 결정짓는다. 나는 멀리서 지각 없는 군중의 환희에 찬 울 음 소리를 듣는다. 궁전과 도시가 세워지는 것을 본다. 예술, 법률, 상 업이 탄생하는 것을 지켜본다. 인민들이 바다의 물결처럼 형성되고, 서 로 소통하고, 분열 와해되고, 계승되는 것을 본다. 나는 인간들이 거처 의 몇몇 장소에 집합해서 서로 발전하고, 세계의 나머지를 끔찍한 사 막으로 만드는 것을 본다. 세계는 사회적 결속과 예술의 공리성에 걸 맞는 기념비가 된다.(강조는 필자의 것임) 야만적 인간의 자연적 무위는 여러 경험적 특징 중 하나가 아니 다. 그것은 자연적 체계에 필수 불가결한 근원적 규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발적으로 야만 상태, 그 황금 시대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 을 설명한다. 야만적 인간은 좀더 앞으로 나가기 위한 움직임을 가 지고 있지 않았다. 휴식은 자연적이다. 기원과 종말은 타성이다. 초조는 휴식 상태에서는 생겨날 수 없었고, 따라서 야만적 상태와 야만성, 그리고 끝없이 계속되는 봄에서는 오직 재앙을 통해서만 도래한다. 지상의 체계에서, 엄밀하게 말해 예측 불허의 어떤 힘의 결과로 인해서만 초조감이 발생한다. 그런 이유에서 태만의 인간학 적 속성은 타성의 지리적-논리적 속성에 상응해야 한다. 초조감과 계절의 차이화로 볼 수 있는 재앙이란 논리적으로 타

성 상태 안쪽에서는 일어날 수 없가 때문에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해야 한다. 죽 그것은 완전히 자연 밖에 있는 자극이다. 〈자의 적인 〉 겉모습을 띠고 있는 설명은6 0) 근본적인 필연성에 부응하고 여러 가지 요청들을 화해시키고 있다• 부정성, 악의 기원, 분절 등 은 바깥쪽에서 온다. 현전은 자신을 위협하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 란댜 한편 , 이러한 악의 외재성이 무이거나 거의 무에 가까워야 한다는 것은 필수 불가결하다. 또 자극, 〈가벼운 운동〉은 무로부터 혁명을 산출한다. 손가락으로 지축을 만지는 이의 힘은 지구 바깥 쪽에 있는 것으로 족하다. 거의 무에 가끼운· 힘은, 그것이 움직이 게 하는 체계와 무관할 때부터 거의 무한정한 힘을 발산한다. 이 운동은 그 힘에 어떠한 저항도 대립시키지 않고, 적대적인 힘들은 지구의 안쪽에서만 작동한다• 가벼운 자극은 지구를 공허 속으로 이동시키기 때문에 강력한 것이다. 따라서 악 또는 역사의 기원은 무이거나 거의 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손가락으로 세계의 축을 경도시킨 이의 익명성을 설명한다. 그것은 아마도 신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루소가 그처럼 자주 언급하는 신의 섭리가 재앙 울 바랐을리 만무하고, 신이 행동하는 데는 우연과 공허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의 힘이 무였고 어떤 실제적인 능 률도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 그것은 아마도 신일 것이다. 그것 은 십중팔구 신이다. 왜냐하면 신의 옹변과 권능은 무한대이고 그 힘은 어떤 저항과도 맞부닥치지 않기 때문이다. 무한한 힘. 죽 세 계를 기울게 만드는 손가락이다. 무한한 웅변이다. 왜냐하면 그것 온 침묵의 웅변이니까. 세계를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신에게 손 하 나만 움직이는 것으로 족하다. 신의 행동은, 가령 『고백록』과 『인 간 언어 기원론』을 사로잡는 바대로, 가장 옹변적인 기호 모델과 60) 데라테는 그것을 이런 식으로 특징짓는다 (Rousseau et la sci en ce… … , 180 쪽).

합치된다. 이 두 개의 텍스트 모두에서, 소리 없는 기호의 예는 〈간단한 손가락 움직임 〉 , 〈 간단한 손가락 기호 〉 , 61 ) 〈 요술 방망이 운동 〉 이다. 여기서 손가락 또는 요술 지팡이는 은유이다. 그것은 다른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문제는 신이다. 신은 손이 없으며, 그는 어떤 신 체 기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신체 기관의 분화는 인간의 고유함 이자 그 악이다 . 여기서 침묵의 운동은 웅변을 대체하지 않는다. 신은 말하기 위해서 입이 필요 없고, 분절하기 위해서 목소리가 필 요한 것도 아니다. 기후에 관한 『 글 Fra gm en t 』 은 『 인간 언어 기원 론 』 보다 더 날카롭다. 만약 황도와 적도가 하나로 뒤섞였다면, 결코 사람들의 이주는 없었 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가 태어난 곳의 기후와 다른 기 후 를 참을 수 없어 결코 자기가 태어난 곳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 손가락으 로 세계의 축을 경도시키거나 인간에게 말을 하는 것. 지구를 덮고 , 사 회화되는 것은, 행동하기 위해 손도 필요 없고 말하기 위해서 목소리 도 필요 없는 존재에게는 똑같은 것이었다 .(531 쪽) 그것은 확실히 신이라고 할 수 있다 . 왜냐하면 악의 족보는 동시 에 신의 선함을 증명하는 합리적 신학이기 때문이다. 여러 사회와 여러 언어의 재앙적 기원은 인간 속에서 잠자고 있던 잠재적 능력 울 현실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오직 우발적 원인만이 자연적 인 잠재력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러한 자연의 힘은, 그 자 체에 그 고유한 궁극성을 각성시키는데 충분한 어떤 동기도 함축 하고 있지 않았다. 목적론은 의재적인 것이며, 시원론(始源論)의 파국적 형식이 의미하는 것이다. 그 결과 무로부터 운동을 일으키 61) J. Sta r obin s ki , La tra nspa rence et l'obs ta c le, 190-191 쪽 참조.

는 손가락과 이미 보았듯이, 무로부터 각성되는 상상력의 자기 정 서 유발 사이에서 그 친족성은 본질적이다. 상상력은 자연 속에 있 지만 자연 속의 아무것도 그 각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자연에서 대 리 보충은 그 놀이로서 자연 속에 있다. 그 누가 자연 속의 결핍이 자연 속에 있다고 말할 것이며, 자연이 AA쿠쿠부터 벗어나는 재앙 이 역시 자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자연적인 재앙은 법을 뒤 엎기 위해 모든 법에 합치된다. 자연의 능력들(본질적으로는 완성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상상력 의 각성에서, 또 자연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운동에서 무엇인 가 파국적인 것이 있다면 , 그것은 『인간 언어 기원론』의 한 명제 로, 『 인간 불평등 기원론』 1 부 끝 부분에서 그 철학적 거처 또는 그 소묘를 찾아볼 수 있다. 불평동은 자연 상태에서 분명하게 지각될 수 없고 그 영향이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후에, 나에게 남아 있는 일은 인간 정신의 연속적인 발전 속에서 그 기원과 진보들을 증명하는 일이다. 자연적인 인간이 잠재적으로 수용한 완성 가능성, 사회적 덕목, 그리고 다른 능 력들이 결코 그 자체로부터 발전할 수 없었고, 발전을 위해 여러 가지 기묘한 원인들의 우발적인 지원이 필요했다는 서실을 증명한 후에(그 러한 요인들은 탄생하지 않을 수도 있었으며 그것이 없었다면 인간은 영원히 원시적 조건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내게 남아 있는 것은, 그 종을 손상시키면서 인간적 이성을 완벽하게 할 수 있었고, 인간 존 재를 사회화하면서 인간을 악덕한 존재로 만들 수 있었으며 . 장기적으 로는 끝내 인간과 세계를 우리들이 지금 보고 있는 곳까지 몰고 갈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상이한 우연들을 고찰하고 접근시키는 일일 것이 다 . (162 쪽)

우리가 여기서 외재적 목적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종의 방법론 서설울 고정시키는 것을 허락한다. 기원의 문제는 사건적이지도 구 조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사실과 권리, 역사와 존재의 단순한 교체 에서 벗어난다. 하나의 구조에서 다른 구조로의 이동 과정(가령 자 연 상태에서 사회 상태로)은 어떤 구조적 분석에 의해서도 설명될 수 없다. 외적, 비합리적, 파국적인 기정 사실이 침입했음에 틀림 없다. 우연은 체계의 부분을 이루지 않는다. 아울러 역사가 이러한 차원의 특정 사실 또는 사실들을 규정할 수 없다면, 철학은 일종의 자유롭고 신화적인 창안으로서 똑같은 역할을 맡고 새로운 구조의 분출을 설명하는 시실적 가설을 만들어야만 한다. 따라서 여러 사 실을 역사에, 법 또는 구조를 철학에 전담시키는 것은 지나친 남용 일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의 단순주의는 그 〈힘〉이 〈놀랄 만한〉 〈매우 가벼운 원인들〉의 개입을 요청하는 기원 문제의 형식에서는 참을수없다. 이 점은, 그 기간이 극소수 사건들의 개연성을 보상하는 방식에 대 한 나의 성찰을 확장시키는 것을 면하게 할 것이다. 또 매우 가벼운 원인들이 쉼 없이 움직일 때, 그것들의 놀라운 힘에 대한 더 이상의 성찰도 면하게 해줄 것이다. 한편, 몇 가지 가설들을 파괴하는 것이 불 가능하다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또 한편, 만약 그 가설들에 여 러 사실의 확실성 정도를 부여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될 때말이다. 두 사실이 중개적이며, 미지의 또는 있는 그대로 연결되는 현실적인 것으로 주어질 때, 그것을 연결시키는 여러 사실들을 부여하는 것은 (그것을 갖고 있을 때) 역사이다. 역사가 없을 때, 그것을 연결할 수 있는 유사한 사실들을 규정하는 것은 철학이다. 끝으로 사건들의 질료 에서, 유사성은 여러 사실들을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작은 수의 계열들로 축소시킨다. 이 대상물을 내 심판관의 성찰에 제공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통속적 독자들이 그것을 고찰할 필요가 없도록 만드는 것으로 나에게는 족할 것이다 .(162-163 쪽) 따라서 자연 상태로부터 언어와 사회 상태로의 이동, 죽 대리 보충성의 도래는 발생과 구조, 사실과 권리, 역사적 이성과 철학적 이성의 간단한 교체를 벗어나서 일어난다. 루소는 체계의 완전 바 깥쪽에 있는 부정성으로부터 대리 보충을 설명한다 . 그 부정성은 예측 불허의 기정 시실,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무한한 힘, 자연 속 에도, 자연을 벗어나서도 존재하지 않고, 이성의 기원이 그렇듯이 비합리적인 상태로 남아 있는(합리성의、 체계 속에 나타나는 투명성 처럼 단순히 비합리적이지는 않다) 자연적인 파국, 이 모든 방식으 로 체계에 개입하면서 그 체계를 전복시킨다. 대리 보충성의 서법 le gr a p h iq ue 은 논리로 환원될 수 없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서법 이 대리 보충성을 그것이 나타나는 여러 경우들 중 하나로 포함하 며, 혼자서도 그 기원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대리 보충성의 재앙은 루소에게 〈위험한 대리 보충〉과 〈죽음에 이르는 만족〉을 구비토록 하는 재앙처럼(기억하듯이, 그것은 『고백록』에서 쓰인 단어이다),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성, 언어, 사회의 가능성, 대리 보충적 가능성은 이성에서는 도저히 수긍될 수 없다 거기에 탄생을 부여한 혁명은 합리적 필연성의 도 식에 따라 이해될 수 없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불길한 우연〉 에 대해 언급한다. 루소는 자연적 상태와 사회적 상태 사이에서 막 탄생한 (야만적인) 사회를 상기하고 있는 중이다. 『인간 언어 기원 론』에서 말하는 〈영속적 봄〉의 계기이며,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따르면 〈가장 행복하고 지속적인 시대〉이다. 그 점을 성찰하면 할수록 이 상태는 모든 혁명에 덜 종속되고, 인간

에게 최상의 상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두의 공리성을 위해 결코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던 모종의 불길한 우연으로 인해, 그 최상의 상 태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또한 알게 한다.(1 71 쪽) 결코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것이 일어나야만 했다• 이 두 가지 방식 사이에 불필연성의 필연성, 모종의 잔인한 놀이의 치명성이 끼여든다. 대리 보충은 오직 어떤 놀이의 비논리적 논리에만 부응 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놀이는 세계의 놀이이다. 세계는, 간단한 손가락 운동이 그 세계를 자신에게 회전시키기 위해 자기의 축에 서 작동할 수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세계의 운동에서 놀이가 있었 고, 거의 무에 가까운 힘이 단번에 침묵의 제스처로, 그 행운과 불 행을 사회, 역사, 언어, 시간, 타자와의 관계, 죽음 등에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계속되는 행운과 문자라는 악은 놀이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루소는 그 점을 확언하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을 체념하고, 그의 담론의 조정된 모순 속에서 그 증상을 포착하고, 그 점을 수용하고 또 부인하지만 확언하지는 않는다• 지구의 축을 경도시킨 존재는 최상과 최악의 위험을 동시 에 감수하면서 정작 자신은 알지도 못한 채 놀이하는 신일 수 있 다. 하지만 그 신은 다른 곳에서는 섭리로서 규정된다. 이 마지막 제스처와 루소 사상에서 그런 입장으로 정돈되는 모든 것에 의해 그 의미는 놀이 밖에 놓인다. 모든 존재 신학적 형이상학에서처럼, 또 이미 플라톤에서처럼, 또 예술을 비난하고 매번 그것이 획일적 일 때, 그 점을 분명히 증언한다. 만약 여러 사회가 재앙으로부터 탄생했다면, 그것은 우연으로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루소는 성서적 사건을 자연화시킨다. 그는 그 실추를 자연의 사건으로 삼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주사위 놀 이, 모종의 놀이를 하는 신의 운, 또는 만약의 경우를 원죄의 실추

로 변형시킨다. 자연의 여러 사건들과 사회적 악 사이에는 신의 섭 리가 발현되는 모종의 공모가 있다. 사회는 오직 자연의 우발적 사 건들을 회복하기 위해서만 창조된다. 노아의 대홍수, 지진, 화산 폭발, 대화재들은 아마도 원시인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갔지만 그들은 곧이어 공동으로 〈 모두가 잃어버린 것을 복구하기 위해 〉 하나로 뭉쳤다. 그것이 바로 〈 인간들이 서로 하나가 되게 하기 위 해 신의 섭리가 사용한 몇 개의 도구이다 . 〉 여러 사회의 형성은 세 계의 일반 경제 속에서 보상적 역할을 맡았다. 재앙으로부터 탄생 한 사회는 광분하는 자연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또한 사회는 이 조정적인 역할을 가져야 하며, 그것 없이는 재앙은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재앙은 일종의 경제에 복종한다. 그것은 내포된 것이다• 〈 사회가 설립된 이후로 이 커다란 돌발 사건은 멈추었고 점점 희 박해졌다. 그것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저곳 흩어져 당 황하는 인간들을 하나로 단결시킨 그 불행들이 단결한 사람들을 다시 분산시켰다•〉 6 2) (9 장 )22

62) 만약 분산력이 재앙 전에, 그리고 그 후에 나타날 수 있다면. 만약 재앙 이 출현하는 순간부터 인간을 단결시키고 다시 그 집요함으로 사람들을 분 산시킨다면, 명백한 모순 아래서 필요 욕구 이론의 수미 일관성을 설명하 는 것이다. 재앙 이전에 필요 욕구는 인간들을 홑뜨려놓는다 . 재앙이 일어 나는 순간, 그것은 그들을 집합시킨다. 〈대지는 인간에게 자양분을 공급한 다. 그러나 최초의 필요 욕구가 그들을 분산시켰을 때, 다른 필요 욕구는 그들을 집합시키며, 그때에만 그들은 말하고, 자신에 대해서 말하게 된다. 나 자신과 모순이 되는 꼴을 피하기 위해서 나에게 설명할 시간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의 전쟁은 자연적인 요소들의 전쟁을 축소시킨다. 이 경제는 재앙에서 나온 타락(다른 곳에서 우리가 확인했듯이)이 우리가 그 도식을 세웠던 대리 보충적인 조작에 의해 보상되고, 한 계가 그어져야 하고 규칙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키고 있다. 〈그 것 없이 나는 그 체계가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고 그 균형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조직화된 두 지배권 속에서 큰 종(種)은 장기적으로 작은 종을 흡수한다. 지구는 곧 나 무와 맹수들로만 가득하게 되었다. 궁극에는 모든 것이 소멸되었 다.〉 뒤이어 인간의 노동에 대한 루소의 탁월한 묘사가 나온다. 인 간의 〈손〉은 자연의 타락을 억제하고 〈이러한 진보를 지연시킨다.〉 재앙은 대리 보충의 놀이를 개방시키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지 역적 차이를 개입시키기 때문이다. 〈영속적인 봄〉의 통일성에 재앙 은 원칙의 이원성, 모든 장소의 극과 대립(북과 남), 규칙적으로 그 재앙을 반복하는 계절들의 혁명을 계승시킨다 .63 ) 그것은 이를테 면 죽석에서 장소와 기후를 바꾸게 만들고, 끝내 뜨거운 것과 찬 것, 물과 불의 교체를 도입한다.

63) 〈계절의 혁명은 이 다양함에 노출된 기후들 속에서 동일한 결과를· 산출 시키는 가장 일반적이며 영속적인 또 다른 원인이다.〉(『인간 언어 기원 론』) 〈전자의 다양함을 증식시키고 조합하는 또 다른 다양성은 계절의 다 양성이다. 하나의 기후에서 교대로 여러 가지 기후를 담은 계절의 연속은 그 다양한 인상에서 계절을 사는 사람들을 익숙하게 만들고, 그들을 자기 나라와 온도가 비슷한 지방에서 지낼 수 있고 살아갈 수 있게끔 했다.〉 (『기후에 관한 단편들 』 , 531 쪽)

언어와 사회는 대강의 원칙 또는 두 개의 의미 계열에 따라 제 도화한다(북쪽/겨울/추위/필요 욕구/분절. 남쪽/여름/열기/정념/악센 트화). 북쪽에서는 겨울에 날씨가 추울 때에 필요 욕구가 계약을 창출 한다. 겨울을 나기 위해 식량을 비축해야 했던 주민들은 서로 상부 상조하 는 형편에 놓인다. 바로 그때 그들끼리 일종의 계약을 설정해야 했던 것이다. 장보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추위의 혹독함이 그들을 멈추게 할 때, 권태는 필요 욕구만큼 그들을 하나로 단결시킨다. 얼음집 속에 은 둔한 라퐁 족과, 종족 중 가장 야만적인 에스키모 족은 겨울에 움막집

에서 하나로 모여 살고, 여름에는 더 이상 서로 알고 지내지 않는다. 그 정도를 높여 그들의 발달과 계몽을 증진시켜 보자. 그러면 영원히 그들은 모여 지낼 것이다. 불은 자연적 열기를 대리 보충하고, 북방 인간들은 가정을 중심 으로 모인다. 단지 고기를 굽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루소의 시각으 론 인간은 말을 하고 사회 생활을 영위하며 먹는 것을 굽는 유일한 동물이다) 춤추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위나 창자는 날고기를 소화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미각은 그것을 참지 못한다. 아마도 방금 전에 내 가 언급한 에스키모 족을 빼고는 야만인조차 고기를 불로 굽는다. 고 기를 굽기에 필요한 불의 사용뿐만 아니라 인간의 시각에 주는 쾌락과 몸에 주는 쾌적한 열기가 덧붙여진다. 동물들을 도망치게 만드는 불꽃 의 모습은 인간을 매혹시킨다. 하나의 공동 가정을 중심으로 모이고 거기서 축제를 벌이고 춤을 춘다. 타성에 의한 부드러운 관계들은 쥐 도 새도 모르게 인간과 그 동료들을 하나가 되게 하고, 이 시골의 따 뜻한 화로를 중심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최초의 인류애를 가져오는 성 스러운 불꽃으로 타오른다. 남쪽에서는, 그 운동이 정반대이다. 그것은 필요 욕구에서 정념 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정념에서 필요 욕구로 간다. 아울러 대리 보충은 따뜻한 난로의 열기가 아니라 물웅덩이의 신선함이다. 열대 지방의 나라에서는, 고르지 못하게 분산된 자원과 강들이 다른 모임 장소를 제공하며, 사람들이 물 없이는 지낼 수 없을 정도로 불보 다는 물이 꼭 필요하다. 가축으로 먹고 사는 야만인은 특히 공동의 가

축 물통이 필요하다……. 물을 구하기 쉽다는 것은 제대로 물이 관개 되는 곳에서 주민들의 사회 형성을 지연시킬 수 있다. 이 운동은 아마도 앞의 경우와 정반대지만 그렇다고 어떤 대칭 을 결론짓는 것은 그릇될 것이다. 남방의 특권은 명시적으로 선언 된다. 방금 전 우리가 기술한 가역성 구조에 루소는 절대적이며 고 정된 시작을 할당한다. 〈열대 지방에서 태어난 인간종. 〉 가역성은 근원의 단순성에 초부과되었다• 열대 지방은 황금 시대의 〈영속적 인 봄〉에 좀더 가깝다. 거기에서 정념은 기원에 더 가낍·고 물은 불 보다 더 최초의 필요 욕구와 최초의 정념과 관계를 갖는다. 최초의 필요 욕구라고 하는 이유는 〈인간들은 불보다는 물 없이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 〉 최초의 정념, 즉 사랑과 관계를 맺는 데, 〈그 최초의 불꽃은〉 〈샘의 순수한 결정체에서 나왔다• 〉 또한 더운 지방에서 출현하는 한 근원적인 언어와 사회는 절대적으로 순수하다. 최초의 언어와 사회는 이 포착 불능의 한계점에 가장 가 깝다. 그곳에서 아직 사회가 타락하지 않은 채 형성된다. 거기서 언어는 제도화되었지만 여전히 순수한 노래, 순수한 악센트로 된 언어, 일종의 네우마로 남아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동물적이지 않 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념을 표현하기 때문이며, 완전히 계약적이 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절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 사회 의 기원은 계약이 아니다. 그것은 조약, 계약, 외교관 , 대리/대표인 둘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축제이다. 그것은 현전 속 에서 소모된다. 거기에는 확실히 시간 경험이 있지만 그 경험은 계 산, 성찰, 비교 따위에서 일어나지 않는 순수한 현전의 시간에 대 한 경험이다. 〈아무것도 시간을 표시하지 않았던 행복한 시대.〉 6 4 ) 64) 축제에 대한 이 묘사롤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의 묘사와, 특히 시 간과 관련해서는 『 에밀』의 편지와 견줄 일이다. 〈우리들은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먼저 하인이 되어야 하며, 각자 모든 사람에 의해서 대접을 받을 것이다. 시간은 쉴새없이 홀러갈 것이다.〉 (440 쪽) 매우 짧은 길온 이 두 가지 기록이 병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해시켜 줄 것이다. 루소가 이 개념에 부여하는 의미에서, 〈비교〉 가능성은 시간적 차이(그것 은 시간을 측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우리를 현전 바깥쪽으로 내던진 다)와 주인과 하인의 차이 또는 불균형의 공통된 뿌리이다.

그것은 『 몽상록』에 나오는 시간이다. 그것은 곧 차이/지연이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떤 중간 휴지도 남기지 않고 욕망과 쾌 락 사이에서 어떤 우회도 허락지 않는다. 〈쾌락과 욕망이 혼동되어 동시에 느껴지게 되었다.〉 『 인간 언어 기원론』에서 가장 탁월한 다음 페이지를 읽어보자. 이 부분은 한 번도 인용되지 않았다. 매번 물 또는 〈크리스탈의 투 명함 〉 이란 테마를 상기시킬 때마다 인용될 가치가 있을 것이다 .65)

65) 마르셀 레이몽의 Intr o ducti on aux Reveri es 와 스타로빈스키가 La tra nspa rence et J'ob sta c le. 317 쪽에서 에 할애하고 있는 장을 참조할 것. 루소는 바슐라르의 L'eau et des reves 에서 한 번도 인용되지 않는다.

…… 우물을 통해서만 물을 얻을 수 있던 건조한 장소에서는, 우물 울 파기 위해, 또 최소한 그들이 물을 사용하는 데 일치하기 위해서 단결해야 했다. 그것이 열대 지방에서 여러 사회와 언어의 기원이었을 것이다. 거기서 가족들의 최초 관계가 형성되었고, 거기서 남성/여성의 최초 약속이 있었다. 젊은 처녀들은 집안 청소를 위해 물을 길렀고, 젊은 청 년들은 가축 물통에 물을 채우기 위해 왔다. 거기서 유년 시절부터 동 일한 물체에 익숙해진 눈들은 더 부드러운 물체들을 보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물체들을 보고 마음은 감동되었고 이미지의 매혹은 그들을 덜 야만적으로 만들었고, 사람들은 자기가 혼자가 아니라는 쾌락을 느 꼈다. 물은 부지 불식간에 더 필요해졌고, 더 자주 목이 말랐다. 서둘 러 도착했고 유감을 갖고 떠났다. 그 어떤 것도 시간을 표시하지 않던

행복한 시대에는 아무도 시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없었다 . 시간은 즐 거움과 권태 이외에는 다른 측정 단위가 없었다 . 오랜 세월의 정복자 인 오래된 떡갈나무 아래서, 끈질긴 청춘이 점차적으로 그 맹폭함을 망 각했다. 사람들은 조금씩 서로서로 길들었고 서로 의사 소통하려고 애 쓰면서, 자신울 설명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때 최초의 축제가 이루어졌 다. 발은 기쁨에 젖어 뛰어올랐고, 다급한 몸짓은 더 이상 충분치 않게 되어, 목소리는 정념이 있는 악센트를 동반했다. 하나로 혼동된 쾌락과 욕망은 동시에 느껴졌다. 그것이 민족들의 진정한 요람이었다. 그리고 최초의 사랑의 불꽃은 샘물의 순수한 결정체에서 나왔다. 다음 사실을 잊지 말자. 루소가 여기서 묘사하는 것은, 사회 이 전 단계도 아니고 이미 형성된 사회도 아니다. 그것은 탄생의 운 동, 현전의 연속적인 도래이다. 현전이라는 단어에 능동적이며 역 동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작동되는 현전이며 그 자체를 현전시키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현전은 하나의 상태가 아 니라 현전의 현전적 생성이다. 규정된 술부들의 대립 중 그 어떤 것도, 자연 상태와 사회 상태 사이의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 라 『몽상록』의 현전처럼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지속되었을 어떤 이 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분명하게 적용될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사회이며, 정념이며, 언어이며, 시간이지만 예속화도, 편애도, 분절 도, 측정 단위도, 음정도 아니다. 대리 보충성은 가능하지만 아무 것도 작동하지 않았다. 루소에 따르면, 축제는 놀이를 배제한다. 축제의 순간은 이러한 순수한 연속성, 욕망의 시간과 쾌락의 시간 의 무차이의 순간이다. 축제 이전에는, 순수한 자연 상태에서 연속 적인 것에 대한 경험이 없다. 축제 후에 불연속적인 것에 대한 경 험이 시작된다. 축제는 연속적인 경험의 모델이다. 따라서 이러한 개념들의 대립들 가운데 우리가 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축제 다

음날에 형성된 사회이다• 아울러 이러한 대립들은 무엇보다 연속적 인 것, 비연속적인 것, 기원이 되는 축제와 사회의 조직화, 춤과 법률의 중추적인 대립을 전제로 할 것이다. 축제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대리 보충, 분절, 기호, 대리 대표자들의 시대이다. 이 시대는 근친 상간의 금기 시대이다. 축제 이전에는 근친 상간도 없었다. 왜냐하면 근친 상간과 사회의 금기 가 없었기 때문이다. 축제 이후에는 더 이상 근친 상간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금기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것을 읽게 되거니 와) 이 점을 루소는 명시적으로 선언한다. 하지만 축제 기간 동안 이 장소에서 벌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또 욕망과 쾌락의 무차이/지 연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최소한 누군가가 그것을 원한다면, 〈최초의 축제〉의 묘사를 완결지을 수 있을 것이며, 축제 에 가해진 금기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축제 이전, 무엇이라고! 이 시간 전에 인간이 이 대지에서 탄생했다고? 남성과 여성의 결합도 없이, 아무도 서로 소통하지 않고, 세대들이 계속되었다 고? 아니다. 가족들이 있었지만 결코 민족 국가는 없었다. 집에서 쓰이 는 언어는 있었지만 결코 사회에서 함께 쓰이는 언어는 없었다. 결혼 이 있었지만, 결코 연애는 없었다. 각 가족은 그 자체로 충분했고 그 유일한 피로서 영속화되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다 함 께 성장했고, 조금씩 조금씩 그들끼리 자신을 설명하는 방식을 찾았다. 성(性)은 나이와 더불어 구별되었다. 자연적 성향은 그들을 결합시키는 데 충분했고, 본능은 정념 대신 자리 잡았고, 터성온 편애 대신 자리 잡았으며, 서로 남매 관계를 유지하면서 남편과 아내가 되었다. 이러한 비금기는 축제 이후 중단된다. 만약 우리가 대단히 혼한

다른 비약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축제의 상기에서 근친 상간을 빼 먹은 것에 거의 놀라지 않을 것이다. 비금기를 기술하면서, 루소는 모친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단지 누이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 66 ) 아 울러 〈누이〉란 단어로 명칭되는 주에서 루소는 모종의 당혹감을 갖고, 근친 상간의 금기는 축제 디음에 왔으며 , 인간 사회의 탄생 활동에서 태어났고 , 그 사회에 신성한 법을 각인시켰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 66) 근친 상간이 허용되는 한 근친 상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이 라는 정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성 관계는 번식의 필요에 국한된다. 아니면 그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에밀』에 따르면, 그것은 어 린아이의 상황이다. 하지만 루소는 어떤 아이와 엄마의 관계에 대해서, 여기에서 그 와 여동생의 관계에 대해서 그가 말했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 에밀 』 에서 엄마가 부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 〈나이에 따라 자란 아이는 혼자이다 . 그는 타성의 애착밖에 알지 못한다. 그는 자기 시계처럼 여동생을, 자기 개 처럼 친구를 사랑한다. 그는 어떤 성도, 어떤 종도 느끼지 못한다. 그에게 남성과 여성은 똑같이 이방인일 뿐이다.〉 (256 쪽) •

태초의 남자들은 자매와 결혼했음에 틀림없다. 태초의 풍속에 깃 든 단순함 속에서, 이런 관습은 불편 없이 가족들이 고립된 채로 남아 있 는 한, 영속화되었다. 그리고 심지어 가장 오래된 민족들의 모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몰락시킨 법률도 사회적 제도가 된다는 점에서 는 여전히 신성한 것이다. 그러한 것을 오직 가족들끼리 형성하는 관계 를 통해서만 쳐다보는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측면을 보지 못한다. 가 족 속의 교류가 필연적으로 남녀 이성 사이에서 다져지는 친밀감 속에 서, 그처럼 신성한 법률이 마음에 말하는 것을 그치고 감각에 부과하는 순간부터 가장 끔찍한 풍속은 인류의 파멸을 가져오게 된다.(강조는 필자의 것임) 일반적으로 루소는 신성한 것, 신성함의 성격을, 마음에 말하는

자연적인 목소리에, 유일하게 마음속에 각인된 자연법에만 부여하 고 있을 뿐이다. 그의 시각으로는 유일한 제도, 유일한 기본 계약만 이 신성한 것에 속한다. 그것은 『 사회 계약론 』 이 일러주듯 사회 질 서 자체이며, 법의 권리, 모든 계약에서 토대로 사용되는 계약이 다. 〈 사회 질서는 모든 법에 기초가 되는 신성한 법이다. 하지만 이 법은 결코 자연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계약에 토대를 둔 다. >(1 권, 1 장, 352 쪽) 다른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신성한 법이라 할 수 있는 근친 상간 의 금기를 이러한 근본적 제도 , 즉 다른 모든 것을 지탱하고 합법 화하는 사회 질서의 수준에 갖다놓는 것이 허용될 수 있을까? 근 친 상간 금기의 기능은 『사회 계약론』에서는 명명되지도 않았고 전시되지도 않았지만 그것은 거기서 텅 빈 괄호 속에 그 위치가 새겨진다. 유일한 〈 자연적〉 사회로 가족을 인정하면서, 루소는 〈계 약을 통해서만 〉 생물학적 긴급성을 넘어서 지속될 수 있음을 정확 히 짚고 넘어간다. 그런데 자연적인 사회인 가족과 시민 사회의 조 직 사이에는 유사와 이미지의 관계가 있다 . 〈우두머리는 부성의 이 미지이고, 민족은 자식들의 이미지이다. 아울러 모든 사람은 평등 하고 자유롭고, 그들의 자유를 오직 그들의 필요 욕구만을 위해 양 도한다.〉 오직 한 요소만이 이 유사 관계와 고리를 끊는다. 정치적 부친은 더 이상 자식들을 사랑하지 않고, 법의 요소는 그를 분리시 킨다. 따라서 생물학적 가족을 제도 사회로 변형시킨 최초의 계약 은 부친의 형상을 옮겨놓았다. 하지만 분리와 그가 구현하는 법의 추상화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부친은 쾌락을 행하기 때문에 새로운 권한 부여가 필요하다. 그것은 대리 보충의 형식을 갖게 될 것이 다. 〈가족에서는 자식에 대한 부친의 사랑이 정성을 대신하고, 국 가에서는 우두머리에게 없는 민족에 대한 사랑을 명령을 내리는 쾌락이 대신한다는 것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352 쪽)

따라서 다른 모든 법의 기초가 되는 신성한 법으로 간주되는 〈사회적 질서〉로부터 근친 상간의 금기( 『 인간 언어 기원론 』 은 신성 한 법이라고 말한다)를 분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만약 이러한 신성한 법이 사회적 계약의 질서 자체에 속한다면, 왜 그것은 『 사 회 계약론 』 의 설명에서 명시되지 않았을까? 왜 그것은 미간행 『 인 간 언어 기원론』에서 페이지 아래 각주에 나타나지 않을까? 모든 것은 실제로 근친 상간의 금기를 이 자리에 재각인시키면 서 루소의 이론적 담론이 가지는 수미 일관성을 존중하게 한다. 만 약 그것이 비록 제도화되었지만 소위 신성하다면, 그 이유는 그것 이 제도화되었다고 하더라도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화의 보편적 질서이다. 아울러 루소는 계약을 오직 한 가지 조건에서만 신성시한다. 즉 그것을 보편화하고, 그것이 인위물 중의 인위물이 라도 자연에 순응하는 준자연법으로 간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 은 바로 이러한 금기의 경우이다. 그것은 또한 이러한 최초의 유일 한 계약 질서에 속하며, 이 최초의 만장 일치에 대해 『 사회 계약 론』은 법의 가능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359 쪽)고 말한다. 하나의 법이 모든 법률의 기원 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인간 언어 기원론』의 주에서 이 법은 물론 정당화되지 않았다. 그것은 사회적인 유통과 친족 법률의 경제에 의해 설명되어서는 안 되고, 〈그것이 가족간에 형성하는 관계〉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 다. 이 모든 것은 근친 상간의 금기를 전제로 하지만 그것을 설명 하지는 못한다. 근친 상간에서 우리를 우회시키는 것은 도덕(〈끔찍 한 풍속들〉)과 일종의 종의 생물학적 경제(〈인류의 파멸〉)가 뒤섞 이고 뒤범벅되는 술어들로서 기술된다. 이 두 개의 논항은 모순적 이지는 않더라도 이질적일 뿐만 아니라(그것은 프로이트가 『 꿈의 해 석』에서 상기시키는 냄비 솥에 빗대어 나온 논항이다), 이 두 개의

논항 중 어떤 것도 논증의 내부에서는 변증법적이지 못하다. 근친 상간을 비난하는 도덕은 금기로부터 성립된다. 도덕은 바로 금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생물학적 또는 자연적인 논항은 금기에 선행 한 시대에 대해 일러준 것에 의해 취소된다. 세대는 세대를 계승한 다. 〈 심지어 가장 오래된 민족의 결합 이후에도〉, 〈이는 아무런 불 편 없이 영속화되었다.〉 신성한 법이 보편성을 한계 긋는 이 사실 이 루소를 멈추게 하지 못한다. 따라서 사회, 언어, 역사, 분절 , 한 마디로 대리 보충성은 근친 상간의 금기와 동시에 태어난다. 후자 는 자연과 문화 사이에 벌어진 틈이다. 이 언술은 루소의 텍스트에 서 모친을 명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자리를 더욱더 훌륭하게 보 여준다. 제도의 기호들의 시대, 표상체와 피표상체 사이의 계약적 관계의 시대는 이 금기의 시간에 속한다. 만약 자연적 여성(자연, 모친, 또는 자매)이 피표상체 또는 대체 된 시니피에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거기서 금기의 신성함을 고양 시키면서 그것을 시니피앙으로 대체할 것을 명령하는 유일한 표상 체, 죽 유일한 시니피에를 갖게 된다. 단 한번, 기호의 신성한 의 무, 피표상체의 신성한 필연성에 권리를 부여할 것을 받아들일 뿐 만 아니라 그것을 명령한다. 〈일반적으로 ( 『 인간 언어 기원론 』 에서 볼 수 있듯이) 사물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불가능할 때만 사물을 기 호로 대신할 일이다. 왜냐하면 기호는 아이의 관심을 끌고 표상된 사물을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1 89-190 쪽. 강조는 필자의 것임) 따라서 사물을 보여줄 수 없는 불가능성이 있지만 이 불가능성 은 자연적이지 않다. 루소 자신이 그 점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여 러 요소들 가운데 하나인 문화 요소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 성하고 보편적인 금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화 자체의 요소이 며, 정념, 사회, 여러 언어의 명시적으로 선언되지 않은 기원이다. 일반적으로 시니피에를 시니피앙으로 대체하는 것 , 다른 시니피앙

대신 또 다른 시니피앙으로 대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최초의 대리 보충성, 그것은 말과 사물들 사이의 차이에 대한 담론을 궁극 적으로 낳는다. 그것은 너무 위험한 대리 보충이라 그 몇몇 파생 효과마저도 간접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것을 보여줄 수도 없고, 그 자체를 명명할 수도 없고, 단지 손가락의 말없는 운동으로 가리 킬 수 있을 뿐이다. 기본적 시니피에로서의 모친, 자연, 존재의 관계의 이동, 바로 그것이 사회와 여러 언어의 기원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기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기원 또는 기본적 시니피에란 개념은 필수 불가 결하지만 금기예 의해 개시된 의미 체계 속에 위치하고 각인된 기 능이 아닌 다른 무엇일까? 대리 보충성이란 놀이에서, 그 시니피 에에 대한 대체물을 언제나 가져올 수 있으며, 시니피에는 다시 하 나의 시니피앙이 될 것이다. 기본적인 시니피에도, 표상된 존재의 의미도, 사물 자체도 기호 또는 놀이를 벗어나서는 그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근친 상간의 금기라는 이름 아래 말 하고, 명명하고, 기술하는 것은 놀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시니피 앙이 더 이상 시니피에에 의해 대체될 수 없는 체계에는 한계점이 있고 이것은 그 결과 어떤 시니피앙도 그렇게 대체될 수 없게 만 든댜 왜냐하면 비치환 지점은 모든 의미 체계의 방향점이며, 기본 적 시니피에가 모든 반사의 종착점으로 약속되는 동시에 기호 체 계를 파괴시키는 것으로서 스스로를 감추는 점이다. 그것은 모든 기호에 의해서 언급되는 동시에 금기된다. 언어는 금기도 위반도 아니며, 끝없이 하나를 다른 하나와 짝짓는다. 그 지점은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모습을 감추거나 (같은 말로 귀결되지만) 파괴될 수 없는 동시에 사멸하는 욕망에 따라서, 회피해야 하거나 회피했어야 할 것에 이미 각인된댜 이 점은 축제 속에서 반사되고, 물통 속에 서 반사되거니와 이 물통을 중심으로 〈쾌락과 욕망이 하나로 혼동

되어 동시에 느껴질 때 〉 환희에 들떠 껑충 뛰어오른다. 축제 그 자 체는 근친 상간 그 자체이다. 만약 그 자체가 일어날 수 있었다면말 이다. 만약 발생한 후에 근친 상간이 금기를 금기로 확증하지 않는 다면, 금기 이전에 그것은 근친 상간이 아니다. 그것은 금기를 인 정할 때만 근친 상간이 된다 . 언제나 한계점, 축제, 사회의 기원, 금기가 위반과 동시에 주어지는 현전을 넘어서서 있게 된다 . 언제 나 일어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일어나지 않는다. 언제나 마치 내 가 근친 상간을 범한 것처럼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의 탄생은 이동 과정이 아니라 점(點)이며, 순수하고, 공상적이며 불안전하고 포착될 수 없는 한계점이다. 거 기에 도달하면서 그것을 건너가는 것이다. 그 한계점에서 사회는 개시되고 분화된다. 그것은 시작하면서 타락하기 시작한다 . 남방은 곧 북방으로 옮겨간다. 정념은 필요 욕구를 초월하면서, 그것을 타 락시키는 새로운 필요 욕구를 파생시킨다. 후기 근원적인 타락은 선근원적인 반복과 유사하다. 분절은 정념을 대신하면서 필요 욕구 의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 인지적 계약이 사랑을 대신한다. 춤을 추자마자 곧 타락한다 . 축제는 곧 전쟁이 된다. 아울러 이미 물통 에서는, 가축으로 먹고 사는 야만인들은 특히 공동의 동물 사육 물통이 필요 하고 , 태고적 시대의 역사는 실제로 조약과 싸움이 거기서 시작되었음 울 알려준다.* * 「창세기」 21 장에 나오는 명세 서언의 우물에 관한 , 아브라함과 아 비멜렉 사이에 맺은 협약의 예를 참조하라. 가축 물통은 정념과 필요 욕구, 문화와 대지의 경계선에 있다. 물의 순수성은 사랑의 불꽃을 반영한다. 그것은 〈샘물의 순수한 결

정체〉이다. 하지만 물은 단지 마음의 투명성이 아니라 신선함이다• 육체는 그 건조함 속에서 자연의 육체, 가축들의 육체, 야만인의 목자의 육체는 그것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불보다는 물 없이 살 기가 더 힘들다.〉 만약 문화가 그 기원점에서 개시된다면, 어떤 직선적인 질서도 (그것이 논리적이든, 연대기적이든 간에) 인지될 수가 없다• 이 첫 개시에서 시작된 것은 이미 기원을 넘어서서 되돌아가면서 변질된 다. 말은 분절되면서, 다시 필요 욕구를 표현하려고 다시 냉랭해지 면서 남방에서 이해될 뿐이다. 말은 다시 북쪽으로 되돌아오거나 (아니면 같은 말로 귀결되지만) 남방의 남방으로 되돌아온다. 축제 다음날은 하나도 부족함이 없이 축제의 전날과 홉사하고, 춤의 지 점은 차이의 포착될 수 없는 한계점일 뿐이다. 남방과 북방은 영토 가 아니라 타자로부터 자신들로 되돌아갈 때에만 나타나는 추상적 인 장소들이다. 언어, 정념, 사회는 북방도 남방도 아니다. 그것들 은 양극이 차례로 대체되는 대리 보충성의 운동이다. 운동에 의해, 악센트는 분절 속에서 개시되고, 공간화되면서 차이/지연화된다. 지역적 차이는 욕망과 쾌락 사이의 차이/지연일 뿐이다. 따라서 그 것은 단지 모든 언어의 다양성에 관련될 뿐만 아니라 단지 언어 분류의 기준도 아니고, 모든 언어의 기원이다. 루소는 그 점을 명 시적으로 선언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가 그 점을 기술하고 있음울보았다. 에크리튀르가 이러한 차이/지연의 또 다른 이름이리~ 사실을, 우리는 지금부터 끊임없이 검증할 것이다.

【역주】 1. 데리다가 표기한 2 쪽은 11 쪽의 오기. 2. 원문의 et qu e !es an ci ens ……은 et ce qu e les anc i ens ……으로 수정 해야함 . 3. 바롱 (Marcus Terenti us Varron, 기원전 116-27) : 고대 로마의 문법학 자. 『 라틴어 표준 문법 De Lin g ua La ti na 』 을 저술했다. 원래 모두 25 권 의 방대한 분량이었지만 5 권에서 10 권까지만 전한다. 4. 자기애 : 살아 있는 피조물, 특히 인간의 의도와 행동을 설명하고 해석하기 위해 사용하는 루소의 주요 개념이다. 루소는 『 에밀 』 에서 이에 대한 명시 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다 (4 장, 212-213 쪽). 〈우리 정념의 근원, 다른 모 든 것의 근원이나 원칙, 인간이 타고날 때부터 갖고 있는 유일한 것. 그것 은 자기애이다. 〉 루소의 생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살아 있는 유 기체는 생득적으로 생명을 보존하려 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데 몰두한다. 하등 동물은 이러한 관심사를 의식화하지 않고 본능적인 욕망과 행동 양식 으로 표현한다 . 루소는 이러한 자기애에서 나온 행동을 자연적으로 선한 것이라고주장한다 . 5. 이기심 : 루소의 사회 정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루 소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존재와 관계맺고 협조해 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타인보다 우세 또는 우월하다는 욕망이 솟구친다. 그 가운데 타자에게 복 종을 강요하면서 자신의 중요성과 가치를 부각하며 쾌락을 만끽한다. 따라 서 인간 관계는 지배와 명성의 추구에 의해 굴절되고 왜곡된다. 모든 안간 이 나와 동일한 욕망을 추구하기 때문에 끊임없는 경쟁과 투쟁이 모든 인 간 관계를 지배한다 . 기만, 억압, 권모술수 등이 인간 관계의 지배적인 수 단으로 팽배한다. 아울러 인위적인 가치가 진정한 가치를 대체한다 .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소외되어 자신의 개인적 가치와 성공에 혈안 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이기심은 자존심을 대체하는 데 이른다. 이러한 설 명틀 속에서 루소는 이기심을 개인의 타락과 사회적 악의 근원으로 보고 있다. 6. 원문에 인용된 concourt a la conversati on mutu e lle de l'es pe c e… … 는 concourt a la conservati on mutu e lle de tou te !'es 函 e 의 오기 . 7. 원 제목은 ( 1 758).1750 년 루소의 친구이자 『백과 사전』의 편집자인 달랑베르가 쓴 기사가 『 백과 사전』 7 권에 수록된다. 도시의 성립 및 가내 수공업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달랑베르는 이 글에서 연극을 부홍시킬 것을 제안했다. 루소는 이 제안에 서 볼테르의 영향을 직시한다. 그리고 달랑베르의 글에 응답한다. 그 편지 에서 루소는 연극을 세운 제네바 시민들의 관습 및 도덕성을 옹호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8. 데리다가 언급한 플레야드 판본의 주석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루소는 비교적 소상히 r 동물들의 본질에 관한 논문」에 나오는 잘 알려진 페이지를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뷔퐁이 오직 동물들에게만 할당한 기본적인 행복을 원시 인간에게 부여한다. 정신나간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 든, 좋은 것은 오직 정념의 육체적인 것이 있을 뿐 도덕적인 것은 아무 가 치도 없다. 실제로 사랑의 도덕적인 것은 무엇인가? 정복의 쾌락 속에 있 는 허망함뿐이다. 이 허망함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경우에 범하는 오류이 다. 정념을 배타적으로 간직하려는 욕망 속에 있는 허망함. 이것은 언제나 질투를 동반하는 불행한 상태이다. 너무 보잘것없고 비천한 정념이지만 사 람들은 그것을 감추고 싶어한다. 그 정념을 향유하려는 술수 속에 있는 허 망함. 자신의 쾌락을 증진시키는 허망함. 그 정념을 상실하려는 방식 속에 있는 허망함 누구보다 먼저 산산 조각내고 싶어하는 허망함. 만약 누군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가면. 그것은 얼마나 비천한 것인가! 그리고 이 비천함 은, 자신이 오랫동안 눈이 멀어 착각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절망감으로 돌 변한다. 동물들은 결코 이런 불행에 빠지지 않는다. 동물들은 쾌락이 있을 수 없는 곳에서 결코 쾌락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직, 감정에 의해 유도되는 동물들은 선택에서 착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들의 욕망은 언제나 향유할 수 있는 능력에 비례할 뿐이다. 동물들은 그들이 향유하는 만큼만 느끼며 그들이 느끼는 만큼만 향유한다. 인간은 정반대로 쾌락을 창조하기 원하면 서 자기 천성을 망친다. 인간들은 억지로 감정을 자아내기를 원하면서 자 기 존재를 남용하고 자기 마음속에 그 어떤 것도 채울 수 없는 공허감을 파둔다.〉(Hi s t o ir e natu r elle, in- 12. t.- VII. Paris . 1752, 115-116 쪽) 9. 완성 가능성 :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루소는 인간들이 자연적 또는 원 시적인 조건에서조차도 맹수와 구분되는 두 가지 직능을 갖고 있다고 설파 한다. 그중 하나는 자유 의지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 발전, 즉 완성 지향성 또는 완성 가능성이다. 대부분의 하등 동물들에게 있어서 행동의 종류와 행위의 가능성온 한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새가 집을 짓는 행위는 오직 본능으로만 이루어지며 개체들마다 변화가 없다. 반대로 인간에 있어서 행 동 반응의 조형성은 매우 큰 신축성을 보여준다. 인간은 환경이 어떻게 작 동하는가를 알 수 있으며 행동을 이득에 적용시킨다. 인간에게 있는 융통

성과 적응성, 그리고 지식량을 증식시킬 수 있는 능력 등을 루소는 완성 가능성의 범주에 넣고 있다. 안간은 자신을 인식하고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해가 되는 조건을 제거 지연시킬 수 있다. 만약 인 간이 인간이란 종에 내재하는 한정된 가능성에 국한한다면 , 이것은 가능하 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인간의 완성 가능성은 덕성과 동시에 사악함의 근 원이 된다. 10. 여기서부터 데리다는 『 인간 언어 기원론 』 의 집필 시기 및 경위를 둘러싼 연구사를 일람한다. 연구와 관련된 주요 사실 및 쟁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인간 언어 기원론 』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사람은 에스피나스이며 그는 1895 년 Revue de J'en seig ne ment su p eri eure 에 이 소책자에 대한 논문 을 발표했다. 그는 주로 이 텍스트에서 뒤클로의 Remarqu es sur la gr amma i re(l754 년)로부터 도출한 인용문에 근거를 두고 『 인간 언어 기 원론 』 이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보다 나중에 쓰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랑송은 Annales J. J. Rousseau(l9l2 년)에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L'unit e de la pe nsee de J.- J . Rousseau, Annales, VII. 5 쪽). 〈『 인간 언어 기원론 』 은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과 모순을 보여준다. 어떤 근거에서 에스피나스는 연대기적으로 전자가 후자보다 뒤에 왔다고 단정하 는가? 그것은 1754 년 출간된 뒤클로의 책에서 루소가 인용한 몇몇 문장 때문이다. 그러나 『 인간 언어 기원론 』 이 루소에 의해 최소한 한두 번 개작 되었다는 사실을 알진대, 그러한 논리는 어떤 가치를 갖을 수 있단 말인 가 ? 인용문은 단지 재인용의 하나 속에 낄 수 있었을 뿐이다.〉 랑송은 1754 년 이후에 이루어진 〈 개작〉을 받아들였고 『인간 언어 기원론』 의 핵심 내용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1750 년, 죽 루소의 체계적인 시각이 형성되지 않았던 시기에 씌어졌다고 결론짓는다. 랑송은 콩디악의 『 인간 지식 기원론 』 {l746) 과 디드로의 Lett re sur Jes sourds et mue t s0750-1751) 를 상기시키면서 그는 『 인간 언어 기원론 』 을 라모의 Demonstr a ti on sur le pri n c i pe de J 'harmo ni e 에 대한 답변 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 인간 언어 기원론 』 은 제 2 논문이 아닌 제 1 논문과 동시대에 씌어졌다고 주장한다. 1913 년 마송은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한다(Q ues ti ons de chronolog ie- rousseau ist e , Annales, IX, 37-61 쪽) . 이 논문에서 마송은 랑송의 논 지에 기본적으로 동조하면서도 몇 가지 접에 대해 반박한다. 랑송이 몰랐 던, 1884 년 얀센에 의해 출판된 Praje t de pre fa c e 수고에 대해 마송은

면밀하게 고증한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안간 언어 기원론 』 은 각각의 장 들로 나누어지기 전에 l· 761 년 독립된 단독 논문으로 집필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마송의 견해는 대부분의 루소 연구가들이 수용한다. 그러나 『 인간 언 어 기원론 』 과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사이의 모순은 여전히 남는다(이 모순 들에 대한 상세한 텍스트 분석은 스타로빈스키가 편집한 플레야드 판본 3 권 1330 쪽, 주 2) 참조) . 하여튼 이 책을 둘러싸고 잘라 말할 수 없는 몇 가지 미결점이 남는다 . 특히 루소 자신이 이 책에 대해서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도 이 책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의문을 증폭시킨다. 11. 루소와 말레르브의 관계에 대한 플레야드 판본의 주석은 다음과 같다 (560 쪽, 주 4). 〈루소의 『 인간 언어 기원론』을 읽은 후, 말레르브는 루소에게 전 저작물 을 독자에게 알리는 것 대신 단행본 형식으로 출판할 것을 권고한다. 그는 루소에게 보내는 서간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제까지 당신이 쓴 모든 글에서 얻은 기쁨만큼 이 책에서 사람들이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1761 년 11 월 18 일 , Correspo ndance gen erale, t.V I, 206 쪽)〉 12. 데리다가 인용한 『에밀』 27 쪽은 26-27 쪽의 오기. 13. 스타로빈스키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직접적인 것 속에서 살았다 . 욕구에는 결코 장애 물이 없었고 욕망은 그에게 직접적으로 제공된 대상물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는 결코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음성 언어는 오직 보충해야 할 결핍이 있을 때만 태어날 수 있을 뿐이다. 자연인은 말하지 않는다. …… 자연의 인간은 침묵의 소통만을 고집한다. 이 소통은 소통이라기보다는 교섭일 뿐이다. 거기에는 사고의 교환이 없고 토론도 없다. 왜냐하면 넘어서야 할 장애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은 다른 인간에 의해 인지되기를 원하게 된다. 자연에 의해 그 앞에 놓인 완성 가능성, 그것은 오랫동안 단지 잠재적 능력에 국한되다가 뒤늦게 발 전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모든 창조를 만들어내고, 그 창조들이 보존되고 소통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구두 언어를 만들어낸다. …… 태초에 음성 언어는 아직도 감정의 계약적 기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감정 그 자체였으 며, 정념을 소리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전달한다. 말은 그 말이 지칭하는 존재와 구분되는 나타남이 아니었다. 태초에 언어는 감정이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언어였으며 여기서 감정의 본질과 발성된 소리는 하나였다. 그런

데 근대로 오면서 어떤 실추가 일어나는가! 문자 언어의 계약에 의해 지배 되는 그 언어의 구조는 더 이상 감정의 살아 있는 현전을 표현하지 않는다. 일반적 개념의 비개인적 명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개인적인 진리(진정성)를 떠난다. …… 살아 있는 억양이 있는 언어가 인격의 직접적인 표현을 성립 하는 반면에 문자 언어는 인위적으로 , 음성 언어가 갖고 있는 에너지와 정 념의 대략적인 동등 가치 를 구성하기 위해서 기나긴 우회와 끝없는 말의 회로를 요구한다. 〉 (La tra nspa rence et J'ob sta c le, 177 쪽 이하) 14, 원문에는 celui qu 'il s'ex p r i me 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celui qu i s'ex p r i me 의 오기. 15. 스타로빈스키가 플레야드 판에서 이 점을 밝히고 있다 (1327-1329 쪽). 〈 루소는 순전히 인간적인 수단은 제 언어의 창안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하 지 않음을 시사하면서도 여기서는 언어의 신적인 제도의 옹호자들에게 많 이 양보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설에 불과하다. …… 왜냐하면 아무런 유보 없이 언어의 신적인 제도 를 받아들이는 것은 원시 인간이라는 개념과 사회 이전의 역사를 포기하는 것이며, 그러면 루소의 제 1 논문인 『 과학 및 예술 론 』 의 모든 이론적 구성을 산산 조각내고 만다. 『 인간 언어 기원론 』 4 부에서 루소는 독자로 하여금 라미 신부를- 참조하 게끔 유도한다. 모든 언어에서 가장 살아 있는 감탄문은 미분절이다. 소리 지르기, 오열 둥은 단순한 목소리이다. 귀머거리, 죽 벙어리는 오직 미분절 된 소리만을 낼 수 있다. 라미 신부는 만약 신이 인간들에게 분명하게 말 하는 법을 배위주지 않았더라면, 다른 방식의 언어를 만들지 못했을 것임 을 파악조차 못하고 있다 . 〉 여기서 라미 신부의 『 수사학 』 에 나오는 한 구 절을 인용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인간이 버섯처럼 대지에서 탄생했기 를 원하는 철학자나 역사학자들은 우리에게 , 그들이 서로 도울 필요성이 그들을 모이게 하고 언어를 만들어 쓰도록 했다고 말해 보았자 소용없다. …… 인간을 형성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최초의 기원을 갖고 있다는 것, 죽 인간의 신의 작품이었던 최초의 인간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은 진실 이다 (Bernard Lamy , La rheto r iq u e, Pari s, 1687, 1, I, 4 장; 5eme edit ion . Amste r dam, 1712, 17 쪽). 16. 스타로빈스키는 La tra nspa rence et J'ob sta c le 6 장 〈기호의 힘〉에서 이 문제를논하고 있다. 〈인간들 사이의 직접적인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 결과 우리는 필연적으로 몸짓과 감각적 기호의 힘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인간들은 계 약적 언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고는 직접적으로 소통될 수 없기 때문

이다. ‘제도의 기호'는 이제 부득이한 수단이 된다. 말을 하고 글을 써야 한다. 청각과 시각의 매개 를 거쳐야 한다 . 이러한 언어 이론은 루소의 상당 수의 동시대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로크에게서 이론을 빌려 오고 있다. …… 로크에 따르면 관념 그 자체는 이미 '고려되는 사물'의 기 호이며 따라서 관념의 기호인 음성 언어는 기호의 기호가 된다. 이런 식으 로 계속해서 외재성의 관계가 나타난다. 루소에게 음성 언어는 사고의 분 석적 기호이며 문자 언어는 다시 음성 언어의 분석적 기호가 된다. 궁극에 가서 우리는 기호의 기호를 만나게 된다 . 사고의 분석은 음성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고 음성 언어의 분석은 문자 언 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 음성 언어는 계약적 기호를 통해 사고를 표상하며 , 문 자 언어는 마찬가지 방식으로 음성 언어를 표상한다. 이렇듯 글을 쓰는 기술 이란 사고의 중계적 표상일 따름이다.〉 (G. Str e ckeis e nMoulto u , (Eu vres et correspo ndances ine dit es de J. J. Rousseau, Pari s. 1861 . 299 쪽; voir O. C., II. 1249) 문자를 쓰는 기술은 사고를 이중적으로 표상체이다. 자! 이렇게 해서 우 리는 직접적인 소통의 특권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게 된다……. 〉 (169-170 쪽) 17. 바로 앞 인용문의 시제가 조건법으로 씌어진 반면 이하 인용문의 시제는 직설법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 유의할 것. 18. 종교 음악 : 로마 카톨릭 교회의 종교 의식에 쓰이는 단조의 의식적인 목 소리, 음악. 이 음악은 교회 초기부터 존재했다 . 그 목록은 성가 , 성시. 답 창을 비롯하여 다양하다. Sain t Ambrois e 시대부터 체계적으로 코드화되 었고, 이어서 11 세기인 Sain t Grego ir e le Grand 시대부터 로마 그레고 리안 성가라고 불린다. 19. 생피에르 섬에서 일어난 이 경험은 『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凡춘 veri es 』 제 5 의 산책 중간 부분에 기술되어 있다 (Plei a de I. 1045 쪽). 〈저녁이 다가오자 나는 그 섬의 봉우리에서 내려와 모래 사장이 있는 호 수가에 앉았다. 그곳에서 물결 소리와 물의 동요가 내 감각을 사로잡고 내 영혼으로부터 다른 모든 동요를 말끔히 씻어내고 감미로운 몽상으로 나를 빠뜨렸다. 그곳은 나도 모르는 사이 밤이 되고 나는 갑자기 소스라쳤다. 그 호수 물의 밀물과 썰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되는 ,파도 소리는 지체 없이 고막을 때리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생각도 필요로 하지 않은 채 즐 겁게 내 존재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의 현전에 대해서는 『고백록 』 12 부 (642 쪽)에서도 언급된다. 〈나는 언제나 물을 열정적으로 사랑했고 내

시각은 정해진 대상 없이 나를 감미로운 몽상으로 함몰시켰다.〉 호수의 물 은 루소의 몽상에 영감을 주었고 그 물은 바슐라르의 『 물과 꿈 L'Eau et Jes Reves 』 에 나오는 물의 유형론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그 물은 〈깊이가 있는 물 〉 도 아니고, 〈 호르는 물〉도 아니며 부동의 물일 뿐이다(J ean Grenie r , Intr o ducti on de J'ed it ion des Revrie s , Club du meil leu r livre , 1958 참조) . 그 물은 그저 조용히 잠자고 있는 은둔의 물이다. 그것 은 우주의 숨결과 같다. 이 단락의 리듬에 대해서는 Robert Osmont, Et ud es pych olog iqu es·… • • Annales J. J. Rousseau, t.X XIII, 96 쪽과 suit . (Pleia d e I. 1798 쪽) 참조〉 20. 플레야드 판 전집의 주. 〈이 행의 여백에 볼테르는 이렇게 썼다. Rid i c u le (우수꽝스럽다).〉 (R. G. Havens, Vol t터 re's margi na lia on the pa g e s of Rousseau, 16 쪽) (III. 1342 쪽). 21. 이 세 가지 상태(또는 세 단계)의 법칙은 오귀스트 콩트의 학설을 생각 하게 한다. 콩트는 인간의 지식을 신학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 실증적 단계 등의 세 단계로 나누어 인간의 경험의 발전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데리다가 사용하고 있는 맥락은 콩트의 의미와 내용적으로 전혀 상관이 없다. 22. 『 인간 언어 기원론 』 9 장. 이 단락의 앞 내용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협동 체계는 대부분 자연의 우발적 사건들의 작품이다. 대홍수, 해 일, 화산 폭발, 대지진, 숲을 초토화하는 산불 등, 이 모든 것은 원시 주민 울 공포에 질리게 한다. 그리고 공동의 손실을 막기 위해서 그들을 하나로 모은다.〉( 『 인간 언어 기원론.!l, Edit ion s, A. G. Ni ze t- int r o duc tion et note s pa r Charles Porset, Paris )

4 대리 보충으로부터 근원으로 : 문자 언어 이론 시각을 돌려보자. 그리고 문자 언어가 그 자체로 명명되고 분석 되면서 이론적, 역사적 전망 속에 각인된 곳에서 텍스트를 파고들 어가 보자. 5 장 〈문자 언어에 관하여〉와 6 장 〈십중팔구 호머는 문 자를 쓸 줄 알았을 것이다〉는 어느 정도 인위적으로 분리되었지만 『인간 언어 기원론』의 가장 긴 장(章)들 중 하나에, 어쨌든 남방 언어의 형성에 관한 장 다음으로 긴 장에 속한다. 우리는 이미 그 장에 나타나는 호머에 관한 수정 사항들을 상기시킨 바 있다. 그의 이론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실에 맞서서 그 이론의 수미 일 관성을 재구성하거나 지속시키는 것이 문제의 관건이다. 만약 노 래, 시, 말 e p os 이 문자 언어와 양립할 수 없다면, 그리고 그것이 죽음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면, 두 시대의 공존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한 호머가 글을 쓸 줄 알았고, 『일리아드』에 나오는 벨 레로폰 Bellero p ho 값의 일화가 증언하듯이, 그가 문자를 알고 있 1) 〈내 마음속에서는 호머가 단지 글을 쓸 줄 알았을 뿐만 0 ti.1라 그의 시대 에 사람들이 글을 쓰고 있었다는 생각이 자주 일어났다. 이 의심이 『일리 아드 』 에 나오는 벨레로폰 이야기에 의해서 꼼꼼히 반박된다는 사실에 나는 크게 유감스러워 했다.〉 곧이어 벨레로폰의 에피소드가 내포하는 범위와

더불어 그 진정성을 부정하려는 데 골몰한 루소는 그 의미에 대해서 어떤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다. 호머에게 · 문자 언어의 유일한 획은 죽은 철자였 다. 벨레로폰은 자신 속에 알지도 못했지만 죽음을 정지시키는 각인을 품 고 있다. 끝없는 표상의 연쇄 속에서 욕망은 문자 언어의 우회로써 죽음을 지니고 있다 . 〈프로에테스의 부인 안테 Ante e 여신은 은밀한 사랑에서 그 [글라우쿠스 Glaucus 의 아들인 벨레로폰]와 결합하려는 맹렬한 욕망을 품 었다 .〉 그걸 성사시키지 못하자 그녀는 자기 남편을 위협한다. 〈프로에테 스, 만약 당신이 내 뜻과는 상관없이 나를 범하려 한 벨레로폰을 죽이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을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을 맹세한다 . 〉 안테의 욕망을 대표하는 왕은 감히 자기 손으로 그를 죽일 엄두를 못 낸다. 그는 감히 글 을 쓰고. 그 살인을 지연하면서 그의 손으로 〈접히는 널반지 위에〉 〈살상 적인 선 Ou止 沼沿끄〉을 그린다. 그는 벨레로폰을 리키 Ly ci e 에 유배시키고. 그에게 〈죽음의 기호

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루소는 그 사실을 참작하지 만 〈[나의] 역설 속에 집착해서〉, 〈호머의 편집자들〉을 비난한다. 그들은 나중에 문자로 쓰인 이 이야기를 〈오직 인간들의 기억력 속에 쓰인 채로 남아 있던 시들〉 속으로 도입시키면서 그 문자 이 야기를 쓰지 않았을까? 〈『일리아드 』 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런 기교 의 흔적을 거의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그 영웅들이 문 자 언어를 몰랐다고 가정하면서 그 시를 합리적이고 심지어 훌륭 하게 꾸며진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 견해와는 반대로 나는 과감하 게 『오디세이』는 바보 천치와 무능으로 짜인 그물망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한두 개의 철자가 그것을 연기 속으로 사라지게 했을 것 이다. 만약 『일리아드』가 문자로 쓰였다면, 그것은 노래로 훨씬 덜 불렀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하나의 논지를 구해야 하며, 그것이 없다면 모든 언어 이론은 와해되고 말 것이다. 조금 전 우리 가 추출한 집요한 논지의 징표는 그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즉 문자에 관한 이 장들은 『 인간 언어 기원론 』 의 결정적인 계기라는 사실이다. 그 장들은 더구나 희귀한 테마들 중 하나를 다루고 있다. 그 테마들은 『 인간 언어 기원론 』 에는 나오지만 『 인간 불평등 기원 론 』 에서는 전혀 연구되지 않는다. 조직화된 이론 속에서 분절된 테 마들치고는 다른 루소 텍스트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테마들이다• 어떤 이유에서 루소는 문자 언어 이론을 완결하지도 출 판하지도 않았을까? r 서문 기획」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 자신이 형편없는 언어학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인가? 문자 언어 이론이 『 인간 언어 기원론 』 에서 전개된 언어 이론에 엄밀하게 종속되었기 때문인가? 아울러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합리적으로 추정된 이 논거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인간 언어 기원론 』 은 『 인간 불 평등 기원론』의 부록이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 에밀 』 에서 밝히고 있듯이, 문자 언어라는 이 어리석은 짓거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부끄럽기〉 때문인가? 왜 여기서 그것이 부끄럽다는 말인가? 문자 언어에 대해 언급하는 것, 그것에 대해 쓰는 것, 또 그것을 쓰는 것이 창피하다면, 문자 언어의 의미에 어떤 뜻을 부여해야 하는 가? 아울러 어떤 이유에서 어리석은 짓거리인 이 조작에 대해, 특 히 『인간 언어 기원론』에서는 너무나 위험하고 치명적인 힘을 인 정하고 있는가? 어쨌든 이 두 장의 중요성, 하나의 이론을 공고히 하기 위한 끈 질긴 노력, 문자에 대한 관심을 평가 절하시키기 위한 교묘한 술 책, 이런 것들은 거기서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징조들이다. 그것 은 형이상학의 역사에 노출된 문자의 상황이다. 그 위상이 낮아지 고 측면화되고 억압되고 이동되었지만 그것은 그 장소로부터 영속

적이며 끈질긴 압력을 행사하는 주제로 남는다. 거기서 문제의 관 건은 가공할 위험성을 내포하는 문자를 소거하는 것이다 . 왜냐하면 문자 언어는 음성 언어 속에서 고유성의 현전 자체를 말소하기 때 문이다. 기원적 메타포 『 인간 언어 기원론 』 속에서 〈문자 언어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장이 차지하는 위치는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다• 어떻게 루소는 차 용된 요소들의 힘을 빌려 이러한 문자 이론을 구성하는 데 이르는 가? 그는 여러 언어의 기원을 기술한 후에 그 이론 구성에 착수한 다. 그것은 여러 언어의 기원에 대한 대리 보충이다. 이 대리 보충 은 첨가적 대리, 음성 언어의 대리 보충을 노출한다. 그것은 언어 가 분절되기 시작할 때, 죽 언어가 그 자신에 결여되어 있는 순간 에 삽입되며, 그 기원과 정념의 표지인 그것의 악센트는 분절이라 는 또 다른 기원 표지 아래에서 소거된다. 루소에 따르면, 문자의 역서는 분절의 역사이다. 소리 지르기로부터 언어가 생성하는 것은 음성 언어로 말할 때의 충만감이 자신을 상실하고, 스스로 빈 틈이 패이고, 균열이 생기고, 분절되면서 그 지신으로 생성되는 운동이 다. 소리 지르기는 모음으로 된 음성 언어를 소거시키기 시작하면 서 구어화된다. 고유하게 말해서 말하기의 내용, 죽 소리의 악센트 를 성립시키는 것에서 발생하는 기원적 소거를 설명하는 것이 문 제의 핵심이 되는 순간 루소는 문자에 관한 장을 도입한다. 자음 (북방에서 온다)과 동시에 문자를 취급해야 한다. 〈문자에 관하여〉 는 무엇보다 (첫번째 단락에서 벌써) 자음적 분절화에 의한 악센트 의 말소를 상기시킨다. 소거와 동시에 일어나는 대체를. 우리는 다

음 도입부를 다시 읽어야만 할 것이다. 여러 언어의 역사 및 진보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목소리가 단조로 워질수록 자음은 늘어나고, 소거되는 악센트와 동일한 음정의 양을 문 법적 조합과 새로운 분절이 대리 보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들은 시간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일어난다. 필요 욕구가 늘어나고, 일이 뒤죽박죽 얽히고, 계몽이 확장되면서 언어의 성 격은 바뀐다. 그것은 더 적절해지고, 정념에 덜 사로잡힌다. 그것은 감 정을 관념으로 대체한다. 언어는 더 이상 마음이 아니라 이성으로 말 을 한다. 그렇게 해서 악센트는 소멸되고 분절은 확장된다. 언어는 더 정확하고 명중해지고 더 단조롭고 무성적( 無聲 的)이며 차가운 언어가 된다 . 내가 보기에 이러한 진보는 전적으로 자연적인 것이다 . 따라서 문자 언어의 진보는 자연적인 진보이다. 아울러 그것은 이성의 진보이다. 퇴보로서의 진보는 문자 언어로서의 이성의 생성 이다. 왜 이 위험한 진보가 자연적인가? 아마도 그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필연성은 언어와 사회 내부에서 순수한 자연 상태에 속하는 노선과 힘에 따라 작동하는 까닭에 나타난다. 열을 빛으로, 욕망을 명철함으로, 힘을 정확함으로, 감정을 관념으 로, 마음을 이성으로, 악센트를 분절로 대체시키는 것은 필요이지 정념이 아니다. 자연적인 것(언어보다 하등하며 언어에 선행했던 것) 은 언어 속에서는 나중에 작용하고, 기원 이후에 조작되며, 퇴조 또는 역행을 야기한다. 그것은 우수한 것을 덥석 물어 열등한 것으 로 이끌고 가는 것으로서 마지막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상한 시간, 문자의 기술될 수 없는 흔적, 그 힘과 위협의 표상될 수 없는 운동 이 바로그런 것이다. 그런데 문자의 거처인 언어의 적확성과 정확성온 무엇으로 이루

어지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그 고유성에 있다• 적확하고 정확한 언 어는 절대적으로 하나의 의미만 있고 고유한 것이어야지 은유적이 어서는 안 된다. 언어는 비유를 억제하거나 소거하는 정도에 따라 문자로 쓰이고. 진보하고, 퇴보한다. 죽 비유는 언어의 기원이다. 왜냐하면 언어는 기원적으로 은유 적이기 때문이다. 루소에 따르면, 언어는 그 모친으로부터 정념을 이어받는다. 메타포는 언어를 기원으로 귀결시키는 특성이다. 문자 는 이 특성의 말소이다. 이는 〈모성적 특성들〉(위의 책, 285 쪽 참 조)이다. 따라서 여기서 〈최초의 언어는 비유적임에 틀림없다〉 (3 장)는 명제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이 명제는 『인간 언어 기원론』 에서만 명시적으로 나타난다. 인간이 말하게 만든 최초의 동기가 정념이었듯이 최초의 표현은 온 유적인 표현이었다. 은유적 언어는 최초로 탄생한 언어였으며, 고유한 의미는 나중에 생겼다. 진정한 형태 속에서 사물을 쳐다볼 때에야 비 로소 사람들은 진정한 이름으로 그것들을 불렀다. 먼저 시로만 말을 했고, 훨씬 후에야 합리적으로 추론할 엄두롤 냈다. 서사시이든, 서정시이든, 이야기이든, 노래이든, 태초의 말은 필 연적으로 시적이다. 최초의 문학 형식인 시는 은유적인 본질에서 나온다. 따라서 루소는 (그는 달리 주장할 수 없었고, 그러한 주장은 대단히 진부한 것이다) 문학적 에크리튀르를 이야기 또는 노래 속 에 현전하는 음성 언어로부터 규정하는 전통에 속한다. 문학의 문 학성은 시를 고정시키거나 응고시키며 메타포를 표상하는 대리 보 충적인 부속물일 따름이다. 문학적이라는 것에는 어떤 특수성도 없 으며, 기껏해야 시적인 것의 부정적인 불행이라는 특수성만이 있을 뿐이다. 루소가 체험한 문학적 긴박성에 대해 우리가 언급한 것에

도 불구하고, 루소는 이러한 전통에 쉽게 안주한다. 문학적 근대성 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 반대로 시적인 것, 즉 은유적 인 것, 그리고 루소 자신이 자연 발생적 언어로 분석하고 있는 것 에 대한 예속화에 맞서 문학적 특수성을 부각시키려 한다. 만약 문 학적 독창성이 있다면(이것은 그렇게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나치게 축소적이라고 판단된 메타포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비문 학적 언어에서 나타나는 바대로의 문체가 갖는 원시적 자연 발생 성에서 해방된다. 이러한 근대적 통박은 승리를 거둘 수 있으며, 또 카프카의 방식으로 일체의 환상을 까발리고, 아마도 좀더 명철 하게 절망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의 문체 속에서, 자신을 벗어나서 살고 있는 문학은 비은유 속에서 자기 자 신에게 돌아가면서 죽어갔다. 〈글자 하나에 대해서, ‘외로운 겨울 동안 몸을 따뜻하게 한 것은 이 불 곁에서이다.’ 메타포는 문학에 서 나를 절망시키는 것 중의 하나이다 .(Schre i ben) 문자는 독립성 이 결여되어 있고, 그것은 불 피우는 하녀, 냄비 근처에서 몸을 녹 이는 고양이, 심지어는 불을 쬐는 불쌍한 사람에 종속된다. 이 모 든 것은 자신의 고유한 법칙을 갖고 있는 자율적인 기능에 부응하 며, 문학만이 그 자체에서 탈출구도 이끌지 못하고 자신 안에 머무 르지 못하는 동시에 절망의 놀이에서 허우적댄다.〉(카프카, 『 일기 』 , 1921 년 12 월 6 일) 〈최초의 언어는 비유적인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비록 이 명제 가 루소에게 고유한 것이 아닐지라도, 루소가 비코의 『새로운 과 학』에서 이미 그러한 명제를 집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2 ) 또 그 2) 비코는 많은 어려움 끝에, 최초의 국가는 〈시인들로 된 국가였다. 이 원칙 속에서 우리들은 모든 언어의 진정한 기원을 알아보았다〉 (S ci enza nuova, 1. 174 쪽)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모든 언어의 기원을 이해했다고 말한 다. 세 언어의 구분은 서로 서로 루소의 도식에 들어맞을 것이다. 음성 언 어와 메타포의 출현을 표시하는 두번째 언어는, 엄밀한 의미에서 기원의

계기가 될 것이며, 그때까지도 시적인 노래는 분절과 계약 속에서 아직도 산산 조각나지 않았다. 〈 사람들은 순서대로 세 종류의 언어로 말했다. 첫번 째는 가족 생활 시절에 쓰인 언어이다. 오로지 가족으로 무리를 진 인간들 만이 겨우 인간성에 도달했다. 이 최초의 언어는 무성 언어였으며 기호를 수단으로, 몸의 몇 가지 위치를 선택함으로 그것이 의미하고자 하는 관념 들을 나타낼 수 있었다. 두번째 언어는 영웅적인 문장들로 구성되었다. 그 것은 닮은꼴에 토대를 둔 언어이며, 비교, 매우 생동감 있는 이미지. 메타 포. 자연 묘사들로 형성된 상징적인 언어이다. 이 이미지들은 영응적인 언 어의 주요 골격이며, 그 언어로 말한 후에야 영웅들은 지배를 했다. 세번째 언어는 민족들이 설정한 음절들과 자신들의 취향대로 그 의미를 고정시킬 수 있었던 낱말들로 구성된 인간 언어였다.〉 (3, 1. 32 쪽) 비코는 다른 곳 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최초의 언어는 결코 사물의 본질에 토대를 두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이미지로 된 언어이며, 대부분 신의 이미지로 된 언어였으며, 생명 없는 사물을 생명 있는 존재로 변형시켰다.〉 (3. 1. 163 쪽) 〈만약 우리가 모든 언어와 철자에 나타나는 그러한 기원의 원칙을 모 색한다면, 우리는 이 사실에서 그것을 접하게 된다. 이교도 국가들을 구성 한 최초의 민족은 그 본성에서 기인하는 필연성 때문에 시인들이었다. 그 둘은 시적인 글자들로 자신을 표현했다. 이 발견은 『 새로운 과학 』 의 핵심 열쇠이다. 그 발견을 위해 내 학문 일생을 잡아먹은 오랜 연구를 그 대가 로 지불해야 했다.〉 (3, Idea de] ]'Op e ra, I. 28-29 쪽) 〈인간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커다란 정념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들은 노래 부르면서 매 우 맹렬한 정념의 자극 속에서 최초의 언어를 형성할 수 있었다.〉 (3, 1, 95 쪽, tra . Chaix - Ruy ) 〈산문이 운문에 선행했다고 주장하는 문법가들의 공통된 오류를, (우리가 발견한 시의 기원 속에서 여러 언어의 기원과 철자 D의e 기la원 을sa g보e s여se준 p 후o e에ti) q u 의e, 기5 장양, 양§하5, 게t ra반 . 박M했ic다h e고le t필, 자43는0 쪽생)각 한루다소.와〉 (마2 권찬, 가지로 비코의 주장에서도 역시 언어의 진보는 분절의 진보에 뒤따른다. 언어는 이런 식으로 실추되고, 시와 신적인 성격을 상실하면서 인간화된다. 〈신들의 언어는 겨우 분절되는 무성의 언어였다. 반면, 인간 언어는 기호와 동시에 몸짓으로 형성되어 전적으로 분절되었다.〉 (3. 1. 178 쪽, tra . Chaix - Ruy )

가 그것을 콩디악에게서 읽을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콩디악은 그것 울 바르부르통에게서 빌려오고 있다), 여기서는 『 인간 언어 기원론 』 의 독창성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루소는 콩디악이 『 인간 지식의 기원에 관한 시론』을 집필하려고 준비할 때, 〈산책하면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한〉 것을 상기

하고, 〈자신이 그 책의 파급 범위를 파악한 최초의 사람 〉 이라고 말 하고 있다( 『 고백록 』 , 347 쪽 ).I 루소는 바르부르통보다는 콩디악에 더 가깝다. 『상형 문자에 대 한 시 론 Essai sur Jes h i ero g]yp hes 』 은 물론 기원적으로 상징화된 언어라는 테마가 지배하고 있고, 『백과 사전』의 항목들 중에서 가장 긴 항목 중 하나인 은유에 관한 항목 에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비코, 콩디악 , 3) 루소와는 달리 바르부르 통은 기원적 메타포는 〈혼히 가정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결코 시 적인 상상력의 불꽃에서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은유는 분명 개 념의 조약함에 기인한다.'〉 4 ) 고 생각했다 . 만약 최초의 은유가 시적 3) 콩디악은 바르부르통에 진 빚보다는 바르부르통의 사상과 자기 사상의 수 렴을 인지한다. 앞으로 우리가 보게 되듯이, 이러한 수렴이 완전하게 이루 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은 불어로 번역된 바르부르통의 『 상형 문자 에 대한 시론 』 이 내 손에 들어왔을 때 거의 완료되었다. 이 책 속에는 철 학적 정신과 박학 다식이 배어 있다. 나는, 그 책의 저자처럼, 언어는 시작 부터 비유적이고 메타포가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을 즐겁게 깨달았다. 내 자신의 고유한 성찰은 문자는 단순한 회화였다는 것에 주목하게끔 나를 유 도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어떤 진보를 통해 문자의 창안에 이르렀는지 발견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또 그것이 성공하는 것은 어렵게 보였다. 그 일 은 바르부르통에 의해 완벽하게 집행되었다. 나는 그의 책에서, 그것에 대 해서 내가 말하는 모든 것(또는 거의)을 추출했다.〉(1 3 장 De l'ecr it ure , §127, 177 쪽) 4) 『상형 문자에 대한 시론 』, 195 쪽. 〈유사 관계는 한자의 표지 또는 글자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울러 이 표지들이 알파벳 글자의 축약된 방법 을 산출시킨 것처럼, 이야기를 더 수려하고 세련되게 하기 위해서, 유사 관 계는 메타포를 산출시켰는데, 그것은 작은 것으로 된 직유일 뿐이다. 왜냐하 면 물질적인 대상물에 익숙한 인간들은 그들의 추상적인 관념을 소통하기 위해서 언제나 감각적인 이미지가 필요했다.〉 (Ess ai sur Jes hiero gl y p h es, T. I, 85-86 쪽) 〈바유로 된 표현의 진정한 기원은 그런 것이고, 사람들이 통 상적으로 가정하듯이, 그 기원은 시적인 상상력의 불꽃에서 오지 않는다. 아 메리카 야만인들의 문체는, (그들이 매우 차갑고 냉정한 기질을 갖고 있더 라도) 여전히 오늘날 그 점을 증명해 준다 .... ... 그들의 급한 기질이 문체를 간결하게 할 수 있었지만 비유를· 삭제할 수는 없었다. 이 상이한 특징들의 결합은 메타포가 선택이 아닌 필연성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 고 있다……. 인간의 품행, 우리가 보다시피, 이야기 속에서 , 그리고 문자 언

어에 있어서나 옷과 주택에 있어서 욕구와 필요를 과시나 장식으로 변화시 킨다.〉 (195-197 쪽)

인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노래로 불린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바르부르통에 따르면 그것은 연속적인 전이를 통해 행동 언어에서 음성 언어로 옮겨간다. 그것은 또한 콩디악의 논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루소는 행동 언어 또는 필요 욕구의 언어와 음성 언 어 또는 정념의 언어 사이에 놓인 절대적인 단절을 부각시킨 유일 한 사람이다• 루소는 이 점에 대해 직접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이 렇게 콩디악에 대립한다. 콩디악에게 〈음성 언어는 행동 언어를 계 승하면서 그 성격을 간직한다. 사유를 소통하는 이 새로운 방식은 최초의 언어의 모델에 근거해서만 상상할 수 있다. 이렇듯 육체의 거센 운동이 있는 ·자리를 차지하면서 목소리는 강하게 지각되는 음정에 의해 고양되었고 또 내려갔다.〉 (II, I , 11, §13) 이러한 유 사와 연속성은, 여러 언어의 형성과 지역적인 차이에 관한 한, 루 소의 논지와 양립 불가능하다. 게다가 콩디악과 루소에게 북방은 아마도 정밀성, 정확성, 합리성을 촉진시킨다. 하지만 정반대의 이 유에서이다. 루소에게 기원으로부터의 소원함은 행동 언어의 영향 을 증가시키는 반면, 콩디악에게서는 그 영향을 축소시킨다. 그에 게는 모든 것이 음성 언어 속에서 연속된 행동 언어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문체의 정밀성은 북방 민족들에 의해 훨씬 일찍부터 알 려졌다. 그들의 냉철하고도 침착한 기질의 결과로 그들은 좀더 쉽 게 행동 언어에서 느낀 것을 포기했다. 다른 곳에서는 사고를 전달 하는 이러한 방식의 영향은 오랫동안 보존되었다. 오늘날 아시아의 남방에서, 췌언은 담론의 세련됨으로 간주된다 .(§67) 문체는 그 기 원에 있어서 시적이었다…….〉 (149 쪽) 콩디악의 입장은 지지하기가 더 곤란하다. 그 입장은 시적인 기 원(루소)과 현실적 기원(바르부르통)을 화해시켜야 한다. 이러한

난점과 차이점들의 경위에 대한 루소의 의도는 정확히 밝혀진다. 역사는 기원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북방으로 향한다. 하지만 콩디악 에게서 이러한 멀어짐이 단순하고, 직선적이며 연속적인 일직선상 에서 진행되는 반면, 루소에게서 그 직선은 기원을 넘어서 필요 욕 구의 언어와 행동 언어를 비은유적인 것으로 다시 유도한다. 따라서 일체의 차용과 수렴에도 불구하고, 『인간 언어 기원론』 의 체계는 독창적이다• 또 모든 난점에도 불구하고, 몸짓과 구어, 필요 욕구와 정념 사이에서 중간 휴지는 지속된다. 따라서 필요 욕구가 최초의 몸짓을 지배했고, 정념이 최초의 목소리 를 이끌어냈다고 믿을 일이다. 이러한 구분에 맞춰 사실들의 흔적을 추적하면서, 아마도 이제까지 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여러 언어의 기원에 대해 합리적으로 추론해 봐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 장 오래된 동방 언어의 독특한 양상온 그 언어들의 구성에서 사람들이 상상하는 계통적 진행을 송두리째 부인한다. 이 언어들은 전혀 방법론 적 양상이 없으며 합리적 추론을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들은 태 초의 사람들의 언어를 기하학자들의 언어로 보고 있는데, 내가 보기엔 그것은 시인들의 언어였다. 궁극적으로는 필요 욕구와 정념 사이의 구분은 〈순수 자연〉이라 는 개념에 의해서만 정당화된다. 이러한 개념 한계와 법률적 픽션 의 기능적 필연성은 역시 이런 관점에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순수 자연 상태의 본질적인 술부는 분산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문화는 언제나 화해, 근접성, 고유한 현전성의 결과이다. 그런데 필요 욕 구는 실제로 정념 이전에 또는 그후에 발현되거니와 기원적인 분산 을 지속하고 연장시키거나 반복한다. 필요 욕구는 그것을 변형시키 는 선행하는 정념으로부터 탄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순수한 분산

력이다. 그 점은 틀림없댜 사람들은 합리적 추론이 아니라 느낌으로 시작했 다. 사람들은 인간이 그 필요 욕구를 표현하기 위해 말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필 요와 욕구의 자연적인 결과는 사람들을 서로 갈라지게 하는 것이었지 그들을 서로 모이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인종이 번창하고, 지구가 급 속하게 인구로 가득 차게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인류는 세계의 한구석에 처박히고 나머지 땅은 황량한 상태 로 남아 있었을것이다. 만약 〈 이 모든 사실이 무차별적 사실이 아니라면〉 구조적으로 정념에 선행하는 필요와 욕구는 실제로 그것을 이어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하나의 기정 사실이나 경험적 잠재성일 뿐인 가? 만약 분산 원칙이 작동된다면, 그것은 우발적 사건이나 잉여 물에 불과한가? 진실로 필요와 욕구는 사회의 전단계를, 죽 사회 의 성립에 선행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사회의 확 대을 간파하기 위해서도 필수 불가결하다. 필요 욕구 없이는 현전 과 견인의 힘이 자유롭게 작동할 것이며, 그 성립은 절대적인 집중 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사회가 어떻게 분산에 저항하는가를 이해 하겠지만, 사회가 분화되고 공간 속에서 시차화되는 것을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사회의 확대〉는 실제로 〈집합한 사람들〉의 해체에 도달하지만 여전히 사회 구조의 조직화, 시차화, 유기적인 분화에 공헌한다. 『사회 계약론』에 따르면 너무 작아서도 안 되고 너무 커 서도 안 되는 도시의 이상적인 차원들은 시민들 사이에서 일정한 외연과 거리를 요구한다. 공간화의 법칙으로서 분산은 순수한 자연 이자 생명 원칙이자 사회의 죽음의 원리이다. 또 언어의 은유적 기

원은 정념에 의한 필요 욕구의 초월로 분석되지만 분산 원칙은 그 것과무관하지 않다. 바르부르통이나 콩디악처럼 루소는 소리로 된 언어와 〈 조악한 개념들〉 속에 우리를 가둬놓는 행동 언어의 연속성을 제시할 수는 없다. 그는 정념과 정서의 구조를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 그는 의관상 대단히 밀도 있고 복잡한 지름길 속에서 세심하게 혼 란으로부터 벗어난다 . 3 장 두번째 단락에서 그의 출발점은 무엇인 7}? 그것은 정념에 의해 은유를 파악하는 어려움이 아니다. 루소의 시각에서 그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것은 원초적으로 비유화된 언어 라는 실제로 놀라운 개념을 수용하는 어려움이다. 왜냐하면 은유를 문체의 변경으로 파악하는 데 일치하는 상식과 적절한 수사학은 사 람들로 하여금 비유를 뜻하고 그것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본래의 의미에서 시작하는 것을 요청하지 않는가? 비유는 고유한 의미의 전도가 아닌가? 옮김? 루소가 알고 있던 수사학 이론가들 역시 비 유를 그런 식으로 정의하지 않았던가? 『백과 사전』도 그런 식으로 정의를 내리지 않았는가 ?5) 5) :rvfET APHORE. S.F.(gr am .) 〈 뒤 마르세 M. du Marsa i s 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하나의 낱말이라고 말하는 ~ 편이 낫겠다)은 고유한 의미를 또 다른 의미로 옮겨놓는다. 그 의미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비유 덕분에 그 것에 적절하다. 은유적 의미에서 쓰인 단어는 고유한 의미를 상실하고 , 새 로운 의미를 취하는데, 그것은 이 단어의 고유한 의미와 비유하는 것 사이 에서 쓰는 직유를 통해서만 정신에 나타난다. 가령 거짓말은 자주 진리의 색깔을 띤다…….〉 그리고 마르세의 긴 인용문 뒤에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나는 때때로 뒤 마르세가 약간 장황하다고 비난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가령 메타포에 대한 예들을 덜 제시하고 , 좀더 길게, 그 예들에 관한 논지 를 전개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접을 고백한다. 그러나 과연 누가 그러한 바람직한 장황함에 욕심을 품지 않겠는가? 『 언어 사전 .II 의 저자는 고유한 의미와 비유적 의미의 구분을 지속하며, 하나에 다론 하나의 토대를 부여 하는 문법가의 놀라운 정확성에 의해 놀라지 않고는 메타포 항목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메타포의 최초의 용솟읍을· 반복하기 위해서, 루소는 상 식이나 수사학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는 고유한 의미를 취급하지 않는다 . 아울러 이론과 상식이 연역하려고 하는 것에 성립된 가능 성을 부여하는 이론과 상식에 선행하는 장소에 자리잡으면서, 루소 는 상식과 문체학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정념들에 대한 루소의 기획과 심리 언어학의 독창적인 조준은 바로 그런 것 이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 여러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보게 되듯이) 루소는 본래의 고유한 의미에서 출발하고, 거기에 다가간다. 왜냐하면 고유한 것은 기원과 종말에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마 디로 말해, 그는 감정 표현에 애초부터 대상물의 지칭에서 상실했다 고 보는 속성을 갖다놓는다. 바로 그 해결책의 난점과 원칙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 독자는 내 말을 막고, 비유는 본래의 고유한 의미가 전이될 때만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표현이 본래의 고유한 의미 를 갖기 전에 상징적으로 비유가 될 수 있냐고 물어볼 것이라고 직감 한다. 나는 그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내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우 리가 옮긴 단어를 정념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관념으로 대체시켜야 한 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관념을 전환시키기 위해 단어를 전환시키기 때문 이다. 그렇지 않으면, 비유적인 언어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시니피앙의 놀이가 되기 전에 은유는 관념 또는 의미의 진행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관념은 기호화된 의미이며 단어가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물의 기호, 내 정신 속에서 대 상의 표상이기도 하다. 끝으로, 대상을 기호화시키고, 단어, 또는 언어 시니피앙 일반에 의해서 기호화된 대상에 대한 표상은, 간접 적으로 하나의 감정 또는 정념을 의미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표

상적 관념의 놀이(어떤 관계에 따라서 시니피앙이 되거나 시니피에가 되는 것)에서 루소는 그의 설명을 담고 있다. 구두 기호에서 방치 되기 전에, 은유는 관념과 사물들의 질서 속에서, 관념과 관념의 대상이 되는 것, 즉 이미 표상적인 기호를 연결시키는 것에 따라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이다. 본래의 의미는 관념과 그것이 표 현하는 감정의 관계가 된다. 아울러 정념을 고유하게 표현하는 지칭 (메타포)의 부적합성이다. 만약 두려움이, 나로 하여금, 실제로는 사람들밖에 없는데, 거인들을 보게끔 한다면, 시니피앙(대상의 관념 으로서)은 은유적이며, 내 정념의 시니피앙은 본래의 것이 된다• 만약 내가 〈나는 거인들을 본다〉라고 말한다면, 이 그릇된 지칭은 내 두려움의 고유한 표현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실제로 거인 들을 보고, 확실한 진리가 있고, 즉 데카르트가 그의 『진리 탐구에 있어서 정신의 방향 규칙 Reg u lae 』에서 분석하는 것과 유사한 감 각적 인지 주체의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노랗게 보인다〉는 명제는 현상학적으로는 반박할 여지가 없고 오직 〈세계는 노랗다〉 라는 판단에서만 오류가 있을 수 있다 .6) 어쨌든 거인들의 지각과 지칭 속에서 본래의 고유한 표현으로 우리가 해석하는 것은 하나의 은유이며 경험이나 언어 속의 그 아 무것도 그것을 선행하지 못한다. 말이 대상에 대한 지시체로 통하 6) 이 점에서 루소의 원리는 매우 데카르트적이다. 그것은 그 자체를 자연의 정당화로서 해석한다. 자연적인 감각은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를 혼란하게 하고 천성을 속이는 것은 우리들의 판단이다. 〈결코 자연 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우리를 속이는 것은 언제나 우리들 자신이다.〉 『에밀 』 의 이 구절을 자필 수고는 다음 글월로 대체하고 있다. 〈나는 우리 들의 감각이 우리를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느끼는 바로 그것을 우리가 느낀다는 사실은 언제나 참이기 때문이다.〉 에 피쿠로스 학파는 그 점을 시인한 것으로 찬양받지만 〈우리들의 감각에 대 해서 우리가 행했던 판단들온 결코 그릇되지 않았다〉고 주장함으로써 호된 비판을 받았다. 〈우리는 감각은 느끼지만 판단을 느끼지는 못한다.〉

지 않는 가운데 〈 거인 〉 이 두려움의 징후로서 본래의 것이라는 사 실은, 대상의 기호로서 그것이 부적절하거나 비유적이라는 사실을 저지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사실을 함의한다. 그것은 이 정념의 추 정된 원인의 관념 기호로서 주어지면서, 바깥쪽을 한번 쳐다보면서 비로소 그 정념의 관념 기호가 된다. 이 열림은 원시적인 은유에 자리를 내준다. 어떤 본래의 고유한 의미도 그것에 선행하지 않는 댜 어떤 수사학자도 그것을 감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주관적인 감정으로 되돌아가야 하고, 지칭들의 객관적 질서 대신 여러 정념의 현상학적 질서로 , 지시 대신 표현으로 대체 시켜야만 비로소 은유의 용솟음과 전도의 원시적 가능성을 이해할 수 있다. 본래의 고유한 의미의 우선권에 대한 반박에 대해 루소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다른 원시인과 맞부닥친 원시인은 먼저 겁에 질리게 된다. 공포로 그는 그 사람들을 자기보다 크고 힘세게 보게 된다. 그는 그들에게 거 안이란 이름을 붙인다. 많은 경험을 한 후에, 그는 이른바 거인들이 결 코 자기보다 키 크고 힘세지 않으며, 그들의 몸집도 결코, 그가 애당초 거인이란 단어에 결부시킨 관념에 적절치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다. 따라서 그는 그들과 자신에게 공통된 또 다른 이름, 가령 사람이란 이름이 그것이며, 그 이름은 거인이란 이름을 자신의 환상 동안에 그를 사로잡은 가짜 대상에 연결시킨다. 정념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고, 그것 이 우리들에게 제공하는 최초의 관념이 진리의 관념이 아닐 때, 어떻 게 해서 상징적으로 바유된 언어가 본래의 말보다 이전에 탄생했는가 를 보여준다. 낱말과 이름에 대해서 내가 언급한 것은 문장의 유형에 대해서도 별다론 어려움 없이 적용된다. 정념에 의해 제공된 환상적인 이미지가 최초로 보이며, 그것에 부응했던 언어 역시 최초로 창조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 각성한 정신이 최초의 오류를 깨닫게 하면서,

그 오류를 야기했던 동일한 정념 속에서만 그 표현들을 사용할 때 온 유적이게 된다. 첫째, 『인간 언어 기원론』은 이런 식으로 은유의 도래와 동시에 수사학에서 메타포의 〈차가운〉 재현을 기술한다. 따라서 은유를- 문 체의 비유, 언어의 테크닉 또는 절차 방식으로 언급할 수 있는 것 은 담론의 유사, 우회, 반복을 통해서이다. 루소는 결단을 내려 고 유하게 정념을 표현한 최초의 이동을 편력한다. 또는 정념의 대리 표상이댜 거인이란 단어가 적절하게(본래의 뜻으로) 표상체는 공포 자체가 아니라 (표현의 고유성까지 손상시킬 새로운 구분이 필요하 다) 〈정념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관념이다.〉 〈거인〉이란 관념은 정 념을 대리 표상히는 ` 고유한 기호인 동시에 그 대상(사람)의 비유적 기호이자 그 감정(공포)의 비유적 기호이다. 이 기호는 비유적이 다. 왜냐하면 그 대상과 관련해서 볼 때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것 은 은유적이다. 왜냐하면 정서에 견주어볼 때 간접적이기 때문이 다. 그것은 기호의 기호이며, 오직 또 다른 기호를 통해 공포의 대 리 표상, 죽 거짓 기호를 통해서만 감정을 표현한다. 그것은 거짓된 대리 표상을 묘사할 때만 고유하게(본래적으로) 감정을 표현한다. 곧이어 수사학자 또는 작가는 이러한 조작을 재현시키고 그 조 작을 헤아릴 수 있다. 이 반복의 간극은 야만성과 문명성을 구분짓 는다. 그것은 은유의 역사 속에서 그 둘을 구분짓는다. 물론 이 야 만성과 문명성은 정념과 최초의 비유가 열어놓은 사회 상태 내부 에서 관계맺는다. 〈각성한 정신〉, 죽 이성의 열기 없이 북쪽으로 향하고, 기원의 시체를 질질 끌면서 〈최초의 오류〉를 깨달은 후, 그가 본래의 참된 의미라고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준거를 통해 그 는 은유를 있는 그대로 다룰 수 있다. 남방의 언어에서는 정념에 사로잡힌 정신은 은유 속에 사로잡혔다. 시인은 비고유성의 문체에

서만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합리적 사변가, 계산하는 작가, 문법 가들은 능수능란하게, 또 냉철하게, 문체의 비고유성의 효과들을 조직화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들을 뒤집어보기도 해야 한다. 시 인은 그가 표현하는 것과 관련해서 진리와 고유성의 관계를 가지 며, 정념에 가장 가까이 있으려고 집착한다. 그는 대상의 진리를 놓치면서, 자신을 충만하게 말하고 진정으로 말의 기원을 전한다. 수사법가는 객관적 진리에 접근하고, 오류를 비난하며 정념들을 취 급하지만, 기원이 생생한 진리를 상실하고 난 다음이다. 이렇듯 표면적으로는 최초의 언어가 상징적으로 비유가 된 언어 라고 단언하면서도 루소는 고유한 것을 시작과 끝으로 유지한다. 기원에서는 정념에 대한 일차적인 관념이 그 최초의 대리 표상이 기 때문에 본래의 의미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종국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왜냐하면 각성한 정신은 본래의 의미를 고정시키기 때문이 다. 그는 지식의 진행에 따라 진리를 기준으로 그렇게 한다. 궁극적 으로 이러한 기준을 통해 루소는 그 문제를 다룬다. 그는 관념 기 호라는 매우 소박한 철학에 사로잡힌다. 둘째, 공포라는 예는 우연히 온 것인가? 언어의 은유적 기원은 필연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위협, 침울함, 완전 고독의 상황으로, 그리고 태초의 고독, 분산의 초조감으로 몰고 가지 않는가? 따라 서 절대적인 공포는 다른 사람을 타자로 만나는 최초의 만남이다. 내가 아닌 타자로서, 자기 자신이 아닌 타자로서, 내가 (내가 아닌) 타자로서 타자의 위협에 답할 수 . 있는 것은 그를 (자신이 아닌) 타 자로 변형시키고, 내 상상, 공포 또는 욕망 속에서 그를 변질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다른 사람들을 만난 원시인은 무엇보다 겁에 질 릴 것이다.〉 따라서 공포는 최초의 정념이 되고, 위에서 우리가 언 급한 연민의 정의 오류의 일면을 띠게 된다. 연민의 정은 결합과 현전의 힘이다. 공포는 분산으로서의 순수 자연에 곧바로 선행하는

상황으로 향하게 된다. 타자는 먼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마주치게 되고, 그를 가까운 이웃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분간과 공포를 무 너뜨려야 한다. 멀리서 보면, 그는 주인과 위협적인 힘처럼, 대단 히 크다. 그것은 작고 어린애 같은 사람이 갖는 경험이다• 그는 , 이 러한 왜곡된 지각, 그리고 자연히 점점 더 커져만 가는 지각으로부 터 말을 하기 시작한다? 분산의 힘이 결코 축소되지 않기 때문에, 공포의 근원은 언제나 그것의 반대의 경우와 한 덩어리가 된다. 모두가 인정하는 콩디악으로부터 받은 영향 2 은 공포라는 예가 우연이 아님을 생각하게 한다. 초조와 반복은 『인간 지식의 기원에 대한 시론』에 따르면, 언어의 두 가지 뿌리이다.

7) 여가에서 비코의 텍스트롤 상기할 일이다. 〈우화의 본질을 성립하고 있는 시적인 특징들은 하나의 필연적안 관계에 의해. 주제의 형식과 속성을 추상 화시킬 수 없었던 인간들의 본질에서 파생된다. 그들은 모두 민족의 (이 민 족들이 가장 커다란 야만성에 참여한 그 시대에서) 모든 개인들에게 공통 된 사고 방식을 가져야 했다. 그 가운데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특수한 물 체의 이미지를 지나치게 크게 하려는 경향을 언급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 스가 언급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인간의 정신(그 본질은 무한울 지향한 다)은 감각의 원기에 의해 제약받고 억눌린다. 오직 하나의 수단만이 그에 게 그의 준신성적인 본질에 기인하는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다. 특별한 이 미지들을 크게 하기 위해서 상상력을 이용하는 일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 서, 그리스 시인들에게 (또한 로마 시인들에게 있어서도) 신과 영옹을 표상 하는 이미지들은 인간을 표상하는 이미지보다 언제나 크다. 아울러 야만 시 대가 도래했을 때, 그리고 역사의 흐름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영원하신 아 버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동정녀 성모 마리아가 그려진 그림들은 지나 치게 확대된 신적 존재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Sc i enza nuova, 3, IL 18 쪽. tra . Chaix - Ruy )

하지만 그것은 행동 언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신이 인간에게 언어를 주었다는 사실은 그렇게 받아들인 것의 본질을 알려주는 철학적 픽션을 통해 언어의 자연적 기원을 묻도록 한다• 〈철학자는 어떤 것이 특별한 방식으로 생겨났다고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을 어떻게 자연적인 수단을 통해 만들 수 있었는가를

설명하는 것도 그의 임무에 속한다. 〉 노아의 방주 이후에 〈어떤 기 호도 사용할 줄 모르는 채 〉 8)3 황야에서 길을 잃은 두 아이가 그 가설에 해당한다. 이 두 아이는 오직 공포의 순간에만 말하기 시작 했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말이다. 그러나 언어는 순수한 초조감 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또는 초조감은 오직 반복 속에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8) II. I. 111-112 쪽. 이 수순은 Orig jne et pro g res du Janga ge (T. I. 48 쪽 이하)에 바르부르통이 할애하고 있는 주목할 만한 단락에서 쓰이는 수 순이기도 하다 .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보다 확실한 안내자인 계시와는 독립해서 사물의 본질로서 판단하자면, Diod ore de S ici le 과 de Vit ruv e 의 견해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죽 최초의 인간은 한동안 동물들처럼, 움 막집과 숲 속에서 살았으며, 혼동되고 불확실한 소리들만 분절해낼 수 있 었고, 곧이어 서로가 서로를 돕고 구하기 위해서 하나로 결합해 기호나 그 들 사이에 적당한 자의적인 표시들을 수단으로 해서 명백한 소리들을 형성 하는 데 이르렀다. 그 목적은 말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소통할 필요가 있는 관념들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상이한 언어는 바로 이렇게 해서 생 겨났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언어가 결코 생득적이 아님에 동의하기 때 문이다.〉 그러나 〈성서에 의해서, 언어가 다른 기원을 갖고 있다는 사실보 다 더 명백한 것은 없다. 성서는 이르기를, 신은 최초의 인간에게 종교를 일러주었다고 말한다. 이 점은 곧 신이 인간에게 동시에 말하는 법을 일러 주었다는 사실에 의심을 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기서 모방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각과 반성 사이에 놓인다. 그 점을 강조해 보자. 이렇듯 이 아이들은 오직 본능적으로 서로 묻고 서로 도움을 준다. 나는 오직 본능적으로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반성 (성찰)은 아직 거기에 껄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 중 한 명은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댜 내게 필요한 것을 그가 알게 하기 위해서, 또 그가 나를 구출하게 하기 위해서 나는 움직여야 한다. 다른 아이도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 댜 나는 그 움직임 속에서 그가 어떤 것을 원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에게 기쁨을 줄 것이다. 하지만 그 둘 모두는 그들을 그만큼 급하게 할

필요 욕구의 결과로 요동을 쳤 다……. 가령 자기가 겁에 질렀던 장소를 보고 있던 사람은, 그가 겪은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다른 아이에게 경 고하기 위해, 공포의 기호였던 울음소리와 움직임을 모방했다 . 91

9) II, I. §2, 3, 113 쪽. 우리는 단지 〈 e ff ra y e( 대경실색한) 〉 과 〈 imit a it(모 방하다) 〉란 낱말만을 강조했다 . 똑같은 예가 L'orig ine de la p oes i e 에 관 한 장에서 다시 취해졌다. 〈가령 누구에게 겁에 질린 사람이라는 관념을 주기 위해서는, 행동 언어에서는 공포의 울부짖는 소리와 운동을 모방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었다.〉 (§66, 148 쪽)

셋째, 보통 명사를 만들어내는 일은,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정 념의 냉각과 이동을 전제로 한다. 거인이라는 명시를· 적합한 보통 명사(사람)로 대체시킬 수 있는 것은, 공포가 아니고 오류를 깨달 은 다음에야 가능하다. 이 작업과 더불어 보통 명사의 수와 외연이 확장된다. 그렇게 해서 『 인간 언어 기원론』은 『 인간 불평등 기원 론 』 과 밀접하게 통한다. 최초의 실사(명사)는 보통 명사가 아니었 고, 고유 명사였다. 절대적인 고유성은 기원에서부터 사물에 의한 기호, 정념에 의한 대리 표상이다. 그것은 곧 지식에 한계가 그어 지는 것만큼 어휘록이 더욱더 확장되는 계기이다 .1 0) 하지만 그것은 범주소(範 耆 素)에 있어서만 진실한 것이고, 이러한 사실은 논리적 이며 언어상의 난점 이상의 것을 돌출시킨다. 왜냐하면 고유 명사

10) 〈각각의 물체는 장르와 종에 상관없이 하나의 특수한 이름을 받았으며, 최초의 제도 설립자들은 구분지을 수 없는 상태에 있었고……, 그 결과 지 식이 한정되면 될수록 사전이 확대되었다…… . 4 더구나 일반적 관념들은 단 어들의 도움을 통해서만 정신에 도입될 수 있으며, 오성은 오직 명제 를 통 해서만 그것을 간파한다. 동물들이 그러한 관념으로 형성될 수 없고 거기에 달려 있는 완성 가능성을 획득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군 따라서 일반적인 관념을 갖기 위해서는 말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상 상이 멈추자마자 정신은 담론의 도움으로만 작동되기 때문이다 . 만약 최초 의 창안자들이 가지고 있던 관념들에만 이름을 부여할 수 있었다면, 그 결 과 최초의 실명사들은 오직 고유 명사일 수밖에 없었다.〉 (149-150 쪽, 또 한편집자주를볼것)

로서의 실사는 전적으로 언어의 최초의 상태인 것은 아니기 때문 이다• 그것은 언어에 있어서 유일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하 나의 분절과 〈담론의 분화〉를 표상한다. 비코식으로 루소가 의성 어, 감탄사, 이름, 명사, 관사 다음에, 하지만 동사보다 앞서서 명 사의 탄생을 위치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명사는 동사 없이는 나 타날 수 없다. 언어가 분열되는 첫 단계 이후에, 각 단어는 〈전체 명제의 의미〉를 갖게 되며, 명사는 동사와 동시에 나타난다. 담론 을 여는 것은 명제의 최초의 내적 분열이다• 따라서 명사는 고유 명사만이, 동사의 법에는 부정법만이, 시제는 현재만이 있다. 〈그 둘이 주어와 속사, 동사와 명사를 구분하기 시작할 때, 이것은 천 재의 평범한 노력이 아니었고, 우선 실사는 고유 명사에 불과했고, 부정법 II) 은 동시들 중의 유일한 시제였으며, 형용사에 대해서 그 개념은 매우 어렵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모든 형용 사가 하나의 추상적인 단어이며, 추상화란 힘들고 자연적이지 못한 조작이기 때문이다.〉 (149 쪽) 고유 명사와 현재 부정형의 이러한 상관 관계는 우리들에게 매 우 중요하다. 죽 동일한 운동 속에서 우리는 현재와 고유성을 떠난 댜 그것의 동사와 더불어 주어를 식별하면서 (그리고 나중에는 그 속사와 더불어) 고유 명사를 보통 명사와 대명사(인칭 또는 관계 대 명사)로 대체시키는 사람은 차이들의 체계 속에서 그 분류를 가다 듬고 여러 시제를 부정법의 비인칭 현재로 대체시킨다. 이러한 시차화 이전에, 〈담론의 분화를 모르는〉 여러 언어들의 순간은 자연 상태와 사회 상태 사이에서 지연된 상태에 있는 시대 에 해당한다. 자연 언어, 네우마, 이즐 셍 피에르 시대, 가축 물통 · 을 주위로 일어나는 축제의 시대. 선언어와 담론의 분화를 설립하 는 언어적 재앙 사이에서 루소는 일종의 행복한 휴식, 충만한 언어 11 ) Le pre sent de l'inf i nitif'(e d ition . 1782) .

의 자발성, 순수한 통과점에 불과한 것을 고정시키는 영상을 다시 포착하려고 시도한다. 담론이 없는 언어, 문장 , 통사, 문장 성분, 문법도 없는 말, 울음소리를 넘어서는 동시에 의미의 직접적인 단 위를 분절시키고 비분절시키는 틈을 넘기 전에 일어나는 순수한 유출의 언어, 그러한 의미 단위에 있어서 주어의 존재는 그 행동이 나 그 속사와는 구분되지 않는다• 바로 그때가 〈 이미 형성된 언어 〉 에서 작동하는 것처럼, 아직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낱말들( 〈 최초의 낱말들〉)이 있는 순간이며 , 사람들이 〈 각각의 낱말에 명제 전체의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언어는, 이러한 순간성이 그것 의 허구적인 직접성을 대체하고 그 운동 속에서 다시 놓이는 순간 에, 이러한 행복한 충만성의 차단과 파열에 의해서만 진정으로 탄 생한다. 따라서 그것은 담론 속에서 차이를 측정하고 기술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절대적인 식별점으로 사용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미분화된 언어를 언제나 이미 넘어선 한계점을 참 조할 때만 기능하며, 미분화된 언어에 있어서는, 고유함(부정법) 현재는 이 점에 있어서 그 자신과 연결되어 있으며, 고유 명사와 동 사의 부정법 현재의 대립 속에서 그것은 나타날 수가 없다. 모든 언어는 곧 이어서(대명사와 형용사를 대신해서) 고유 명사와 보통 명사 사이에서, 부정법의 현재와 법과 시제의 다양성 사이에 있는 톰 속으로 처박힌다. 모든 언어는 언어로서 이미 사물들을 대 체시킨 데 이어 고유성의 자기 자신으로의 살아 있는 현전을 대신 하게 된다. 언어는 현전과 대리된 것에 첨부되며 , 그 현전에 결합하 려는 지칠 줄 모르는 욕망 속에서, 그 대리되는 것을 지연시킨다. 분절화는 허구의 순간적 정지와 선의 음성 언어, 즉 충만한 향 유의 위험천만한 대리 보충이다. 왜냐하면 현전이란 루소에 의해 언제나 향유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현재는 언제나 향유의 현재이며 향유는 언제나 현전을 맞이하는 곳이다. 현전을 차단시키는 것은

차이와 지연, 욕망과 쾌락 사이의 공간화를 도입한다• 분절된 언 어, 지식과 노동, 지식에 대한 초조한 탐구는 두 개의 향유 사이의 공간화일 뿐이다. 〈 우리가 알려는 것은 우리가 향유를 갈망하기 때 문이다. 〉 (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 143 쪽) 아울러 『 기쁨을 얻는 묘법 Art de j ou i n 에서 , 말의 과거 속에서 대리된 현전에 대해 상징적 복원을 언급하는 다음과 같은 아포리즘이 그것이다. 〈나 스스로에 게 말하면서 나는 향유감을 느꼈고 여전히 즐거워한다.〉 12 ) 『고백 록 』 의 커다란 목적은 〈내가 말할 때 다시 한번 향유를 누리는〉 (585 쪽) 일이 아니었던가? 역사와 문자 언어의 체계 〈 대리 보충하다〉라는 동사는 글 쓰는 행동을 정의한다. 이것이 〈 문자 언어에 관하여〉란 제목을 달고 있는 장의 최초의 말이자 최 후의 말이다. 우리는 서두의 한 단락을 읽었다. 그것의 마지막 줄 은다음과같다. 목소리를 쓰는 것이지 소리를 쓰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악센트가 있는 언어에서는, 언어의 가장 커다란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하나의 공 통된 문장을 그 문장이 나타나는 곳에서만 고유하게, 만드는 것은 온갖 종류의 소리, 악센트 , 억양 등이다. 언어를 대리 보충하기 위해 취하는 수단들은, 문자 언어를 확장시키고 증가시키며 담론 속에 책의 요소들 을 개입시키면서, 음성 언어 그 자체를 쇠약하게 만든다. 마치 글로 쓰 는 것처럼 말을 하면서 책을 읽듯이 말을 하게 된다.〉(강조는 필자의 것임) 12) T. I. 1174 쪽.

만약 대리 보충성이 필연적으로 무한의 과정이라면, 문자 언어 는 다름 아닌 대리 보충이 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이미 의미적 음 성 언어를 대신해서, 대리 보충이 대리 보충의 대리 보충으로서, 또 기호의 기호로서 나타나는 지점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대리 보 충성은 문장의 고유한 자리, 대체될 수 없는 주체에 의해서 여기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발음된 문장의 유일함을 이동시키고 그 대 가로 목소리를 쇠약하게 한다. 그것은 최초의 중복의 장소를 각인 한다. 이 두 개의 단락 사이에는, 첫째, 문자의 다양한 구조 및 일반적 인 생성예 대한 매우 간단한 분석이 있고, 둘째, 이러한 유형론과 역사의 전제 조건으로부터 알파벳 문자에 대한 긴 성찰과 문자 일 반의 의미 및 가치에 대한 평가가 나온다. 여기서도 역시 상당한 차용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유형론은 매우 특이한채로 남아 있다. 바르부르통과 콩디악은 경제적이며 기술적이며 순전히 객관적인 합리화의 도식을 제안한다. 경제적 정언 명제는 여기서 경제의 제 한적인 의미, 죽 축약이라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문자는 그 기호에 있어서 현전의 차원들을 환원시킨다. 축소판은 빨강색으로 표시된 대문자에만 해당되지 않고, 그것의 파생적인 의미에서, 문 자의 형태 그 자체로 이해된다 . 따라서 문자의 역사는 축약 테크닉 의 연속적이며 직선적인 진보를 따른다. 문자 체계들은 기본 구조 의 본질적인 변화 없이 동질적이며 단일 발생적인 진행 과정에 따 라서 상호적으로 파생되었을 것이다. 여러 문자는 좀더 많은 공간 과 시간을 획득한다는 점에서만 서로가 서로를 대체시킨다. 콩디악 이 제시한 문자 언어의 통사 기획을 믿어보자면 ,13) 문자 언어의 기 원은 음성 언어와 동일한 기원을 갖는다. 필요 욕구와 거리가 그것 13) 13 장 (De l' ecr it ure) 과 특히 『 인간 언어 기원론 』 의 §134 를 볼 것.

이댜 문자 언어는 이렇듯 행동 언어를 계속한다. 몸짓을 음성 언 어로 유도한 사회적 거리가 증가하여 부재할 정도에 이르는 순간 문자 언어는 필연적이게 된다(거리의 생성-부재를 콩디악은 단절로 해석하지 않고 하나의 연속적 증가의 결과로 기술한다). 그때부터 문 자는 단지 서로가 멀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각의 장에서 벗어나 고 목소리의 유효 거리를 벗어난 주체들에게 도달하는 기능을 맡 는다. 어떤 이유에서 주체들인가? 어떤 이유에서 문자 언어는 주체들 의 성립, 이를테면 잘라 말해서 헌법의 또 다른 이름이 되는가? 하 나의 주체, 즉 하나의 법칙 앞에서 지신에 대해 대답을 해야 하는 동시에 이 법에 종속되는 개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문자 언어라는 이름 아래 콩디악은 그러한 주체의 가능성을 염 두에 두고 있다. 아울러 그것의 부재를 제어하는 법칙을 염두에 두 고 있다. 사회의 장이 부재, 비가시성, 비청취성, 비기억 가능성의 지점으로 확대될 때, 지역 사회가 차단되어 여러 개인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더 이상 자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지각될 수 없는 주체들이 될 정도까지 이르렀을 때, 문자 언어의 시대는 시작한다. …… 인간이 알고 있어야 하는 여러 사실, 법칙 그리고 모든 것들은 너무나 빠르게 증폭되어 기억력은 그러한 부담을 지기에는 너무 취약 했다. 온갖 법률의 선포가 모든 시민에게 가까스로 전달될 정도까지 사회가 커져 갔다. 따라서 국민을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힘을 빌려야 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문자를 상상하게 되었다. 아래에서 나는 그것의 진보에 대해 설명하겠다……. (II. 1, §73) 소리로 사고를 전달하던 인간은 사고를 영속화하고 부재하는 사람에 게도 알리기에 적당한 새로운 기호를 상상할 필요성을 느꼈다. (§127)

문자 언어의 조작이 음성 언어의 작동을 재생하듯이, 최초의 문 자 언어는 최초의 음성 언어를 반영한다. 형상과 이미지가 그것이 다. 그것은 상형을 모방하게 된다. 다음 글 역시 바르부르통의 것 이다. 상상력은, 그들이 행동과 낱말로 이미 표현했고 시작부터 상징화되 고 비유적인 언어를 가능하게 한 똑같은 이미지들만을 그들에게 표상 했다. 따라서 가장 자연적안 수단은 사물들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었 다. 한 명의 인간 또는 한 마리의 말이라는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그 모양을 표상했으며, 문자 언어의 최초의 시도는 단순한 그림이었을 뿐 이다 .14)

14) II, I, 8 장. 바르부르통의 해당되는 단락을 볼 것 (T. I. 5 쪽). 그는 콩디 악이 하지 않은 것, 죽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가 서로 영향을 주는 〈상호 관계〉를 참작하고 있다. 〈이러한 상호 영향을 제대로 전개시키기 위해서는 책 한 권이 통째로 필요하다.〉 (202 쪽) 순전히 상형적인 문자의 불가능성에 대해서는, Duclos, 앞의 책, 421 쪽 참조.

최초의 낱말과 마찬가지로, 최초의 상형 문자는 모방적 표상과 은유적인 이동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이미지이다. 사물 자체와 그 재현(아무리 충실하다고 할지라도) 사이의 간극은 전이에 의해서만 메워진다. 최초의 기호는 이미지로 규정된다. 관념은 감각의 표상 적인 대체물, 즉 기호와 본질적인 관계를 갖는다. 상상력은 지각을 대리하는 주의(主意)를 대리한다. 주의는 〈최초의 효과〉로서 〈대상 의 부재 상태에서 대상들이 때때로 일으키는 지각을 정신 속에 남 아 있게 한다.〉(I. 11. §17) 상상력은 〈하나의 기호, 가령 그 단순 한 이름으로부터 물체의 표상을 가능하게 한다.〉 관념 일반의 감각 적 기원 이론, 18 세기의 거의 전 사상을 지배하는 기호 이론과 은 유적 언어 이론은 손상되지 않은 부동의 신학적 형이상학적 핵심

에 대한 데카르트적 유형의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을 제시한다. 그 것은 위에서 언급한 노아의 홍수처럼 작동한 원죄로서, 생득적 관 념에 대한 감각론 비판과 기호, 또는 은유, 음성 언어 또는 문자 언어에 의한 지식으로의 접근과 (우발적, 자연적, 자의적인) 기호 체계를 가능하게 한다. 〈이렇듯 내가 우리들의 어떤 관념도 감각으 로부터 오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할 때, 나는 원죄 이후로 우리들이 있는 상태만을 언급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순수함의 상태 속에서 또는 영혼과 육체의 분리 이후에 영혼에 적용된 이 명제는 완전히 그릇된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단번에 현 재 상태로 국한한다.〉(I, 1. 8, 10 쪽) 따라서 말브랑슈 Malebranche 에서처럼, 경험 개념은 원죄라는 관념의 종속 아래에 놓인다• 거기에는 하나의 법칙이 있다. 경험이 란 개념은, 비록 형이상학 또는 사변을 파괴하는 데 그것을 사용한 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그 기능 작동의 한 지점 또는 다른 지점 에서, 기본적으로 존재 신학론 속에 각인된다. 최소한 그 개념이 그 자체에서 그 함의를 축소시킬 수 없울 현전의 가치에 의해서말 이다. 경험은 그것이 감각적 단순성이든 신의 무한한 현전이든 언 제나 하나의 충만성과의 관계이다• 헤겔과 후설에 있어서까지 이 점은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모종의 감각론과 신학의 공모를 노출시킬 수 있다. 감수성 또는 경험이라는 존재 신학적 관념, 수 동성과 능동성의 대립은 형이상학 체계들의 다양성 아래 숨겨진 근본적인 동질성을 성립시킨다. 언제나 부재와 기호는 최초와 최후 의 현전 체계 속에서, 하나의 의관적이며, 잠정적이고 파생적인 홈 집을 낸다. 그것들은, 갈구하는 현전의 조건이 아니라 우발적인 사 건들로서 생각된다• 기호는 언제나 실추의 기호이다. 부재는 언제 나 신의 소원함과 관계를 갖는다. 이 체계의 울타리를 회피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가설 또는 장

애를 제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루소는 사회, 음성 언어 그리고 문자 언어의 자연적 기원을 모색하면서 콩디악의 신학적인 안일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연 또는 기원이라는 대체적인 개념들에 유사한 역할을 맡긴다. 타락이라는 주제가 이 담론에서 부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소위 자연적인 재앙 의 순간에서 신의 사라지는 손가락이 나타나게 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그 사실을 믿어야 할까? 루소와 콩디악 사이의 차이는 언 제나 동일한 닫힘의 세계 속에 포함될 것이다. 타락의 모델 문제 (플라톤적이든, 유대 기독교적이든)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러한 공통된 울타리 내부에서이다 . 15)

15) H. Go uhi er 는 그 점을 체계적이면서 심도 있게 접근하고 있다 (Na t ure et Histo i r e dans la pe nsee de Je an-Ja cq u es Rousseau. Annales J.-J. R,ou sseau, T.XXXIII, 1953-1 9 55). 〈그렇소와 아니오〉라고 유대­ 기독교 모델이라는 문제에 대해 답하고 있다 (30 쪽).

따라서 최초의 문자는 그림으로 그려진 이미지이다. 그러나 그 림이 문자 언어와 축소 모방에 이용되었을리는 없다. 그 둘은 처음 에 하나로 혼동되었다. 죽 폐쇄된 무성 체계이며 그 속에서 음성 언어는 아직도 거기에 낄 권리도 없었고 어떤 다른 상징적 의미로 부터도 벗어나 있었다. 거기에는 대상 또는 행동의 순수한 반사밖 에는 없었다 . 〈그림의 기원은 십중팔구는 우리들의 사고의 흔적을 남기려는 필연성에 기인할 것이며 이러한 필연성은 가장 쉽게 그 려질 수 있었던 언어처럼, 행동 언어를 보존하는 데 일조했 다.〉 (§128) 따라서 이러한 자연적인 문자는 유일한 보편적 문자이다. 여러 문자의 다양성은 순수한 회화 문자의 문턱을 넘어서면서부터 나타 난다. 따라서 순수한 회화 문자는 단순한 기원이 될 것이다 . 이 점 에 있어서 콩디악은 바르부르통을 추종하면서 이러한 자연적인 체 계 이후로 문자의 다른 모든 유형과 상태들을 파생시키거나 추론

해 낸다 .1 6) 직선적인 진보는 언제나 압축에 속할 것이다. 아울러 순전히 양적인 압축일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그것은 객관적인 양, 죽 볼륨과 자연적인 공간에 관계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심층 적인 법칙에 모든 이동과 문자적 압축이 종속되거니와 단지 외관 상으로만 그 법칙에서 벗어났을 뿐이다.

16) 이러한 단일 발생 기원과 이 족보의 경제적 합리성에 관한 한, 콩디악의 신중함은, 비록 Trait e des sys t,e m es0749) 17 장에서 명시적으로 나타나 지만, 그것은 한계점들을 갖고 있다. 〈만약 역사의 기원 이후 사용된 모든 글자들이, 그것을 설명하는 열쇠와 함께 우리들에게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면, 우리들은 상당한 정도까지 이 진보를 검토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과 더불어, 우리들은 이 체계를, 그것의 상세한 분류 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문자의 여러 가지 상이한 종류의 파생을 확실 하게 일러줄 정도로 발전시킬 수 있다. 바르부르통의 저서는 그 증거이 다.〉 (DE. 101 쪽 참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물을 기호로 사용하는 일차적인 방법인 회화 문자는 가장 경제적이다: 기호들의 낭비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다. 〈 이 방법에서 파생하는 결점들이 있는데도 아메리카의 가장 예의 바론 민족들은 더 나은 것을 창안할 줄 몰랐다. 캐나다 의 야만인들에게는 다른 것이 없다.〉 (§129) 〈그림과 글자〉로 된 상형 문자의 우월성은 〈여러 가지 기호를 위해 오직 하나의 형상 만을〉 사용한다는 점에 기인한다. 이것은 (회화적인 한계점의 기능 이다) 유일한 사물에 대한 유일한 기호처럼 무엇인가 거기에 있다 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기호 개념과 그 조작에 모순된다. 이 런 식으로 최초의 기호를 규정하고, 하나의 기호에 기준점을 두고 다른 기호들의 전체 체계를 세우거나 파괴하는 것은 의미를 현전 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기호는 그때부터 도서관에 있는 현전의 정 돈에 불과하다. 상형 문자의 이득은 (하나의 기호로 여러 가지를 나 타내는) 도서관의 경제로 환원된다. 〈좀더 천재적인〉 이집트 사람 들이 이해한 것이 바로 이 점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상형 문자란

이름을 부여한 것보다 축약된 방법 노선을 이용한 최초의 사람들 이었다.〉 〈그 엄청난 부피가 야기시킨 당혹감은 다수의 사물을 기 호 표시하기 위해 오직 하나의 형상만을 사용하게 했다.〉 이집트 문자 체계를 시차화시킨 이동과 축약 형식들은 이러한 경제적 개 념에서 이해되고, 〈사물의 본질〉에 일치하기 때문에 (사물의 본질 을) 〈참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세 단계 또는 세 계기가 있다. 전체에 대한 부분, 크리오의 상형 문자 속에는 전투를 나타내는 두 손과 방패와 활이 있다. 사물에 대한 (실제 또는 비유적인) 도구, 신의 영험한 지혜를 나타내기 위해 눈이, 폭군에 대해서는 검이 나 온다. 끝으로 열대 지방의 상형 문자에서는 총체성에 대해 시물- 자 체와 유사한 사물, 별들로 가득한 우주에 대해서 뱀과 얼룩무늬 점 이 나온다. 바르부르통에 따르면, 엄밀한 의미에서의 상형 문자 또는 신성 한 문자를 대신해서 초서체 또는 민중용 상용 문자를 쓴 것은 경 제성의 이유에서였다• 철학은 이러한 운동을 촉진시킨 것의 이름이 다. 즉 시니피에를 위해 시니피앙을 축약시키고 소거하면서 신성함 이 퇴색되는 경제적 변질성이 그것이다. 이제 이러한 주제의 변화와 그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이 상형 문자 형상의 특성들 속에 개입시킨 변질을 언급할 시간이다. 표상하는 데 사용된 동물 또는 사물은 그때까지 자연적인 그림이었다. 그러나 상징 문자를 유발시킨 철학 연구가 이집트의 학자들에게 다양한 주제에 대 한 많은 글을 쓰게 했을 때, 그 부피가 너무 큰 이 정확한 그림은 매 우 성가시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점차 다른 글자를 사용했고, 우리 들은 그것을 상형 문자의 통상적인 글씨체라고 부를 수 있다. 그 글자 는 중국 사람들의 글자와 닮았고, 각 형상에 있는 단 하나의 윤곽에서 형성된 후에 장기적으로는 일종의 표지둘이 된다. 이러한 통상적 글씨

체의 글자가 시간과 더불어 야기한 자연적 결과를 언급하는 것을 빠뜨 려서는 안 될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상징에 부여한 관심이 줄었고, 대신 그 관심을 의미된 사물에 고정시켰다. 이 수단을 통해 상징적 문자 연구는 매우 축약된다. 과거에 상징으로 사용한 사 물 또는 동물의 속성을 터득하는 대신 상징적 표시의 힘을 상기시키는 것 이의에는 다른 어떤 것도 터득할 필요가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 그 런 식으로 해서 이런 문자를 현대 중국 사람들의 문자가 놓인 상태로 환원시켰다. (T. I. 139-140 쪽) 점차 시 니 피 앙의 소거는 알파벳으로 유 도되었다(1 48 쪽 참조). 그것은 또한 콩디악의 결론이기도 하다 (§134). 따라서 지식(철학)의 역사는, 그 부피를 늘리려고 노력하면서 형 식화, 축약, 대수학으로 향한다. 동시에 기원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시니피앙을 공동화, 환속화시키고, 그것을 민중화시키고 보편화시 킨다. 과학사로서의 문자사는 보편적 문자의 두 시대, 두 개의 단 순성, 두 개의 투명성, 일의성의 형식 사이에서 순환될 것이다. 죽 시니피앙의 궤도에서 일탈한 소비 속에서 자연적 존재자의 전체를 중복하는 절대적인 회화 문자와 시니피앙의 소비를 거의 무로 줄 이는 완전히 형식적인 서법 가운데에서말이다. 문자의 역사와 지식 의 역사는(잘라 말해 역사) 오직 이 두 개의 사이에서만 있을 수 있다. 아울러 만약 역사가 이 두 개의 한계점 사이에서만 생각될 수 있다면, 역사 개념 그 자체를 의심해 보지 않고는 보편 문자(회 화 문자 또는 대수학)의 신화론의 권위를 떨어뜨릴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역사를 진정한 언어의 투명성과 대립시키면서 정반대의 것을 생각했다면, 그것은 고고학적 또는 종말론적인 역사 개념을 형성시 킨 한계점들에 대한 맹목성에 의해서이다. 따라서 과학(바르부르통과 콩디악이 여기서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 에피스테메와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앎, 의식 둥은 관념화

의 운동이 될 것이다. 대수학적이고 탈시적(脫詩的)인 형식화, 그 조작은 자유를· 뺏긴 상형 문자를 정확하게 제어하기 위해, 시니피 앙을 억압하는 데 있다. 이 운동이 로고스 중심적 단계에 의해 그 이행을 필연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은 의관상의 역설에 불과하다. 로 고스의 특권은 음성 문자의 특권이며, 잠정적으로 더 경제적이고 특정한 지식의 상태라는 이유에서 더욱더 대수학적인 문자의 특권 이다. 로고스 중심주의의 시대는 시니피앙의 세계적인 소실 시기이 다. 음성 언어를 보호하고 고양시킬 수 있다고 믿지만, 그 기술의 일개 형태에 의해서 매혹될 뿐이다. 동시에 사람들은 (음성) 문자 를 무시한다. 그 이유는 문자는 자신을 소실시키면서, 달리 말해, 좀더 보편적이고 편리한 시간에 있어서 (구두의) 시니피앙을 가능 한 최상으로 반영하면서 가장 확실한 제어를 확보한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외부적〉 도움 없이 가능한 음성적인 자기 정 서 유발은, 세계와, 사람들이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의 역사의 특정 시대에 있어서 가능한 최상의 제어와 자기 생명으로의 가장 커다 란 현전, 가장 커다란 자유를 가능하게 한다. 바로 이 역사(시대로 서의, 역사의 시대가 아닌 역사로서의 시대)의 지식이라고 부르는 세 계에서의 존재 형식과 동시에 종결된다. 따라서 역사란 개념은 철 학과 에피스테메의 개념이다. 비록 철학사라고 명명하는 것에서 뒤 늦게서야 개념이 부과되었지만, 그것은 이 모험의 시작 이후로 거 기서 명명되었다. 지금까지 전대미문의 의미에서(이것은 관념주의 자나 그와 유사한 외관을 한 재래식의 헤겔적인 어리석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역사는 철학의 역사이다. 또는 굳이 원한다면 헤겔의 공식을 문자 그대로 새겨야 할 것이다. 죽 역사는 단지 철학의 역 사일 뿐이며, 절대적 지식은 완결된다. 이러한 울타리를 초과하는 것은 무이다. 죽 존재의 현전도, 의미도, 역사도, 철학도 아니라 이 름도 없는 다른 무엇이며 그것은 이 울타리의 사상에서 선언되고

우리들의 에크리튀르를 유도한다. 그 에크리튀르 속에서 철학온 그 것이 지배하지 않는 텍스트 속에서 하나의 자리로서 각인된다. 철 학온 에크리튀르에 있어서 시니피앙의 소실로서의 에크리튀르의 운동이다• 그것은 복원된 현전, 그것의 휘황찬란함과 섬광 속에서 의미된 존재의 욕망으로서의 에크리튀르의 운동일 뿐이다. 따라서 문자의 엄밀한 의미에서의 철학적 진화와 경제는 시니피앙의 소실 이란 방향에서 이루어지며, 이때 시니피앙은 망각 또는 억압의 형 태를 띤다 . 망각이나 억압이란 개념은 똑같이 불충분하며 사람들은 그것을 대립시키거나 연상시킨다. 어쨌든 망각을 과거 파악 능력의 유한성에 의한 소실이란 의미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억압의 가능성 그 자체이다. 아울러 억압은, 그것 없이는 은폐가 어떤 의미도 갖 지 못할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억압이란 개념은 최소한 망각이란 개념만큼 (의미의) 철학의 생산물이다. 어쨌든 시니피앙의 은폐 운동 문자 언어의 완벽성은 시니피에 의 현전을 위해 주의 및 의식을 해방시키게 된다(지식과 자신의 지 식을 확실히 제어된 대상의 관념화로서말이다). 시니피에는 그것이 관념적일수록 더욱더 획득이 가능하다. 아울러 언제나 시니피에의 현전을 상정 하는(진리 aleth e ia 또는 적확성 adeq u ati o) 진리 가치 일반은 이 운동을 지배하고 그것을 생각하게 하기는커녕, 그 특권 이 무엇이든 하나의 시대에 불과하다. 기호의 생성 내부에 있어서 의 유럽 시대. 아울러 바르부르통의 명제에서 그것의 형이상학적 배경과 안전성을 제거한 니체와 더불어 기호들의 축약의 안쪽에서 (괄호 속에서 언급된 대로, 그 결과 니체 사상 속에서 하나의 진리와 기원적 또는 기본적인 존재론을 복원하기를 원한다면 아마도 나머지 의 결점 때문에 그의 해석 개념의 축이 되는 의도를 무시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바르부르통과 콩디악의 언술을 그것의 울타리 밖에서 반복하면

서 철학의 역사는 산문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또는 세계의 산 문-생성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철학온 산문의 창안이다. 철학 자는 산문으로 말한다. 공동체 도시에서 시인을 추방하는 것보다는 글을 쓰면서말이다. 철학자가 오랫동안 생각했던 이 철학을 필연적 으로 쓰면서, 그가 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편리한 문자가 그에게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을 모르면서, 그는 곧바로 철학을 말 로 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의 기 원 Orig ine de la p oes i e 』에 관한 장에서 콩디 악은 그것 울 기정 사실로서 상기시킨다. 〈끝내 시의 규칙에 순종할 수 없었 던 철학자는 최초로 산문으로 글을 쓰는 모험을 시도했다.〉 (§67) 〈산문으로 글을 쓴 최초의 사람인…… 시로스 Sc yr os 섬의 페레시 드 Pherec y de 〉이다. 통상적 의미에서 문자는 그 자체로 산문체이 다. 그것은 산문이다(이 점에서도 루소는 콩디악과 분리된다). 문자 언어가 나타날 때, 콩디악에 따르면, 의미를 기억 속에 각인시키는 기능을 맡는 리듬과 운율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위의 책, 같은 곳). 문자 이전에, 시는 일종의 순간적인 각인이며 철자 이전의 문 자이다. 시를 참지 못한 철학자는 문자 언어를 액면 그대로 취했을 것이다. 여기서 루소와 바르부르통과 콩디악을 띄어놓는 거리를 평가하고 그 단절의 가치를 규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한쪽에서 보면 루 소는 그가 차용하고 있는 모델들을 세련되게 다듬는 것 같다. 발생 적 파생은 직선적이지도 않고 인과율적이지도 않다. 루소는 문자 와, 사회 또는 경제적 체계와 정념의 형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문자 체계의 구조에 더욱더 관심을 기울인다. 문자의 형식들의 출현은 상대적으로 여러 언어의 역사의 리듬과는 독립된다. 설명 모델들은 덜 신학적인 외관을 갖고 있다. 문자 언어의 경제는, 동질적이며 단순화시키는 객관주의적 의미에서 파악된 필요 욕구와 행동의 동

기 부여가 아닌 다른 동기 부여로 귀결된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 에서는, 루소는, 바르부르통과 콩디악의 체계에서는 요지부동으로 경제적인 것으로 예고되는 것을 중성화시킨다. 아울러 우리는 그의 담론 속에서 신학적 이성의 술수들이 어떤 식으로 수순을 밟아가 는지 알고 있다. 그러면 그의 텍스트에 접근해 보자• 객관적인 공간의 기술적, 경 제적 의무 사항에 대해서 루소의 설명은 하나의 양보일 따름이다. 아마도 이것은 은밀하게 바르부르통과 콩디악의 단순주의를 수정 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문제는 홈 자국 si ll ons 에 의한 문자이다. 홈온 농부가 새긴 그대 로의 선이다. 쟁기날이 판 길이다. 농업의 밭고랑은, 우리가 기억 하듯이, 자연을 문화로 개방시킨다. 아울러 문자는 농경과 더불어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거니와 농경은 반드시 정착화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농부는 어떻게 일에 착수하는가? 경제적으로이다. 밭고랑의 끝에 도달해서 그는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쟁기와 소를 놓고는 반대 방향으로 떠난 댜 시간, 공간, 에너지가 절약되는 것이다. 수익성의 개선과 노동 시간의 감소가 바로 그것이다. 소의 반전으로 된 문자, 죽 밭고랑으 로 된 문자는 직선적이며 음성 표기적인 문자 표기의 계기였다 .17)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된 선의 끝에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 로, 그리고 그 반대 방향으로 다시 출발한다. 그런데 어떤 영문에 서 그것은, 예컨대, 그리스 사람들에 의해서 특정 시기에 포기되었 는가? 왜 기록자의 경제는 농경자의 경제와 단절되었는가? 왜 어 17) bous t ro p hedon( 소 밭갈이 형태의 문자) 문제에 대해서는 페브리에와 코엥 앞의 책, 참조. 그리고 문자와 길. 근친 상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Freud et la scene de l'ecr i tur e, L'ecrit ure et la dif fere nce 참조

느 한 명의 공간은 다른 사람의 공간이 아닌가? 만약 그 공간이 〈객관적이고〉, 기하학적이며, 관념적이면, 그 둘의 홈 파기 체계 사이에는 어떠한 경제성의 차이도 가능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기하학적 객관성의 공간은 문자 언어의 특정 순간에 발 생한 하나의 물체 또는 관념적인 시니피에이다• 그것 이전에는 기 술과 경제의 유일한 동일 유형에 종속된 동질적인 공간은 없다• 그 것 이전에는, 전체 공간은 〈고유한〉 신체의 공간 내에서의 거주와 각인에서 조직된다. 아울러 유일하고도 동일한 〈고유한〉 신체가 귀 결되는 공간의 내부에는 이질성의 요소들과, 따라서 상이한, 게다 가 양립 불가능한 경제적 강제 조항들이 있으며, 그것들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며, 그것들 가운데에서는 희생과 서열 조직이 필요 하다. 이렇듯 책 쪽의 표층, 즉 양피지 또는 문자를 담는 다른 질 료의 넓이는, 그것이 글 쓰기냐 아니면 책 읽기냐에 따라서 상이하 게 분배된다. 매번 독창적인 경제성이 지시 명령된다. 첫번째 경 우, 그리고 기술 이전의 전 시대에, 그것은 손의 체계로 조직되어 야 했다. 두번째 경우에 있어서, 그리고 동일 시대 동안에는 눈의 체계로 조직되어야 했다. 그 둘 모두에 있어서, 문제는 직선적이며 방향성을 갖춘 이행이었으며 그 방향성은 동질적인 배경 속에서 무관하지 않고, 역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 홈 자국으로 글을 쓰는 것보다는 읽는 것이 더 편리하다. 독서의 시각 적 경제성은 농경 법칙과 유사한 법칙에 따른다. 문자의 손에 의한 경제성온 이와 다르며, 문자는 음성 표기적, 직선적인 시대에서 규 정된 공간과 시대 속에서 지배했다. 그 물결은 그 필연성의 조건에 서 생존했다. 그것은 인쇄 시대에도 계속된다. 글 쓰기와 책 읽기 는 여전히 대부분 손 운동에 의해서 규정된다. 인쇄 기계는 문자의 손가락 움직임과 필기 도구에 대한 직접적인 예속화의 표층의 조 직을 해방시키지는 못했다.

따라서 루소는 이미 다음과 같이 놀라고 있다. 먼저 그리스 사람들은 페니키아 사람들의 글자를 채택했을 뿐만 아 니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글자들의 선의 방향도 채택했다. 곧이 어 그들은 홈 파기식으로 , 죽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이어서 오 른쪽에서 왼쪽으로 교체해서 돌아가면서 글자를 쓰는 묘수를 고안했다. 끝으로, 그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하는 · 것처럼, 모든 줄을 왼쪽에서 오 른쪽으로 다시 시작하면서 문자를 썼다. 이러한 진보는 오직 자연적인 것일 따름이다. 홈 파기에 의한 문자는 이의가 없고 읽기에 가장 편리 하다. 그것이 인쇄술과 더불어 정립되지 않는 것이 놀랍다. 손으로 글 울 쓰는 것이 어렵게 되자, 수고(手稿)가 늘어나면서 그것은 무너져버 렸다. 따라서 문자의 공간은 본래부터 판독 가능한 공간은 아니다. 그 것은 기원부터, 즉 모든 기호 작업처럼, 문자가 반복과 관념성을 산출하면서 판독 가능하게 생성된다. 만약 기원적 문자를 둘로 갈 라놓는 이 계기를 책 읽기라고 부른다면, 순수한 책 읽기의 공간은 언제나 이미 판독 가능하고 순수한 문자 언어의 공간은 언제나 감 각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들은 잠정적으로 이 낱말들을 형이 상학의 틀 안에서 사용한다 . 그러나 글 쓰기와 책 읽기를 순전히, 그리고 단순하게 분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은 단번에 이러한 대립 올 실격시킨다. 편의상 그 대립을 지속시키면서, 문자 언어의 공간 은 칸트가 뜻했던 의미에서 순전히 감각적이라고 말해 두자. 어쩔 수 없이 방향성을 띤 공간으로서 그 속에서 왼쪽은 오른쪽을 포괄 하지 않는다. 아울러 그 운동 속에서 하나의 방향의 다른 방향에 대한 우세를 참작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는 단지 하나의 자각이 아니라 조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두 측면은 자신의 신

체의 태도 또는 단순한 행동의 관점에서는 결코 균형 대칭을 이루 지 않는다. 이렇듯 〈소의 반전〉은 글 쓰기보다는 책 읽기에 더 적합하다. 이 두 가지 경제적 요청 사이에서 해결책은 불안정한 타협이 될 것이며, 그 타협은 잉여를 남길 것이며 불균등한 발전과 쓸모없는 낭비를 유발시킬 것이다. 이를테면 눈과 손의 타협이다. 이러한 화 해의 시대에 있어서 사람들은 단순히 문자를 쓸 뿐만 아니라 손의 질서에 유도되어 약간은 맹목적으로 읽는다. 그러한 경제적 필연성을 가능하게 한 모든 것을 상기하는 것이 필요할까? 이러한 타협은 이미 강하게 파생되었고 나중에 왔으며 그 자체 가 역사의 부담을 진 특정 유형의 문자 언어가 이미 실천되는 순 간에만 우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러하다. 죽 직선 적인 음성 표기 방식이다. 음성 언어의 체계, 스스로가 말하는 것 울 듣기, 세계에 대한 실체의 시니피앙의 차용을 지연시키고 시니 피에에 보편적이고 투명하게 되는 자기 촉발, 손을 지배하는 소리 는 결코 그것의 체계에 앞설 수 없었고, 그것의 본질 자체에 있어 서도 그것과 무관할 수 없다. 그것은 그 자체의 책 읽기 속에서 스 스로를 보고 E 遷 때 비로소 시간적 선조성의 질서와 탁월함으로서 표상될 수 있었다. 눈 또는 손이 말한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 다. 이미 그 자체의 표상 속에서 목소리는 보이고 지속된다. 직선적인 시간성이란 개념은 음성 언어의 일개 방식에 불과하다. 이러한 연 속성의 형식은 그것의 각인으로부터 규정된 특정 공간으로부터 소 리, 의식, 선의식(先意識)에 다시 부과되었다. 왜냐하면 목소리는 언제나 그 본질에 있어서 일정한 공간성에 의해서 이미 의미 부여 가 되고, 간청되고, 요구되며, 그 특징이 표시되기 때문이다 .18) 18) 이에 따른 문제점과 뒤따르는 논리 전개에 대해서는 『목소리와 현상』을

참조할것

우리가 하나의 형식이 부과되었다고 말할 때는 (자명하듯이) 결 코 어떤 고전적인 인과율 모델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말을 하 듯 글을 쓰느냐 또는 글을 쓰듯 말을 하느냐, 말을 하듯 글을 읽느 냐의 상투적으로 제기된 문제는 그 질문의 통속성으로부터 일반적 으로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 이상으로 은닉된 역사적 또는 선사적 깊이로 귀결된다. 끝으로, 문자 기록 공간이, 루소가 그러한 직관 울 가졌던 것처럼, 사회적 공간의 본질, 기술적 종교적 경제적 등 의 지각적이며 역동적인 조직과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 면, 공간에 대한 초월적 물음의 어려움을 가늠할 수 있다. 새로운 초월적 미학은 단지 수학적 관념성에서뿐만 아니라 각인 일반의 가능성에 의해서 유도되어야 할 것이며 이미 성립된 공간에 우발 적인 사건으로 일어나지 않고 공간의 공간성을 생산하게 된다. 우 리는 각인 일반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문제의 관건이 단지 그 자 체를 표상하는 준비된 음성 언어의 기록뿐만 아니라 음성 언어 속 에서의 기록과 이미 위치된 거주로서의 기록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그러한 질문은, 기본적안 수동성의 형식에 대한 그것 의 참조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이 낱말의 칸트의 의미에서도 후설 의 의미에서도 초월적 미학으로 불려서는 안 될 것이다. 공간에 대 한 초월적 물음은 공간적, 시간적 경험의 선사적이며 선문화적인 성층과 관련되며, 그 경험은 경험적 다양성과 그것들의 공간과 시 간의 고유한 방향성을 넘어서서 일체의 주관성에 통일적이며 보편 적인 지반을 제공한다. 그런데 만약 일반적인 거주로서의 각인에 의해서 유도된다면, 칸트 질문의 후설에 의한 근원화는 필수 불가 결하지만 불충분하다. 알다시피 후설은 칸트가 하나의 과학(기하학 또는 역학)에서 이미 성립된 관념적인 대상들에 의한 그의 질문에 서 유도되도록 스스로를 방치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직능으로서)

성립된 주관성은 반드시 성립되는 관념적인 공간에 해당한다. 우리 의 관점에서 보자면, 칸트 비판에서 그처럼 자주 나오는 선(線)개 념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을 수 있다. (내재적이며 외재적인 모든 감각적 현상들의 형식인 시간은 외재적 감각 현상의 형식인 공간을 지배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선으로 표상시킬 수 있는 시 간이며 〈관념주의의 부정〉은 이 질서를 전복시킬 것이다.) 후설의 기 획은 과학의 객관적 공간을 괄호 속에 집어넣을 뿐만 아니라 미학 을 초월적 운동학에 분절시키는 데 있었다. 어쨌든 칸트의 혁명과 순수한 감수성의 (감각에 대한 일체의 의뢰로부터 순수한) 발견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수동성으로서) 갑수성이란 개념과 그것의 상반되 는 것은 계속해서 이러한 질문들을 지배하게 될 것이며, 이 질문들 은 형이상학의 틀 속에 사로잡힌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만약 우 리가 살고 있는 공간_시간이 선험적으로 선의 공간_시간이라면, 거 기에는 순수한 능동성도 순수한 수동성도 없다. 이 개념들의 쌍은 (주지하다시피, 후설은 끊임없이 그것들을 다론 하나에 의해 소거시켰 다) 주거하지 않은 세계, 흔적과는 무관한 세계의 기원 신화에 속 한다. 순수한 현재의 순수한 현전, 그것은 생명의 순수성 또는 죽 음의 순수성이라고 구별 없이 명명할 수 있다. 신학적이며 형이상 학적인 질문뿐만 아니라 언제나 초월적인 질문들을 통제한 존재의 규정, 그러한 물음을 사람들은 스콜라 신학 또는 칸트와 후기 칸트 적 의미에서 생각한다. 초월적 미학과 〈미학적 세계의 로고스〉의 복원에 대한 후설의 기획은(『형식 논리학과 초월 논리』) 경험의 보 편적이며 절대적인 형식에 종속되듯이, 살아 있는 현재의 심급에도 종속된 채로 남아 있다. 각인의 공간으로 개방되는 것은 이 특권을 복잡하게 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에 의해서이다. 루소는 직선적인 발생과 단절하고, 문자 체계와 사회 구조, 그리 고 정념의 형상들 사이에 있는 상관 관계를 기술하면서, 빙금· 전

우리가 지적한 방향에서 그의 질문들을 열고 있다. 사회를 형성한 인간의 세 가지 상태: 세 개의 문자 체계, 세 개의 사회 조직 형식, 정념의 세 가지 유형. 〈이러한 글 쓰기의 세 가지 방식은 다양한 세 가지 형태에 정확히 부응하며 그 단계에서 민족 국가로 모인 인간들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 방식 사 이에는 아마도 〈투박성〉과 〈고대성〉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차 이들이 연대기적이며 직선적인 식별점을 확보해 주는 한, 그것들은 루소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한다. 다양한 체계들이 공존할 수 있으 며, 좀더 투박한 체계가 세련된 체계 다음에 나타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역시 회화로서 시작한다• 즉 야만성에 의해서이다. 〈최초의 문자 방식은 소리가 아닌 물체 그 자체를 그림으로 그리 는 것이다…….〉 이 그림은 사물을 복제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 가? 그것은 어떤 이동도 없이 자연을 복제시키는 이러한 보편적인 원형 문자에 해당되는가? 여기에서 첫번째 복잡함이 끼여든다. 루 소는 실제로 두 개의 회화 문자를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단도직입 적으로 진행되며, 다른 하나는 우의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멕시코 사람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직접적으로, 또는 옛적에 이집트 사 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비유적인 형상으로.〉 아울러 루소가 〈이 상 태는 정념에 찬 언어에 해당하고 이미 모종의 사회와 정념이 탄생 시킨 필요 욕구를 전제로 한다〉라고 진술할 때, 그는 십중팔구는 〈이집트〉 또는 〈비유적인〉 상태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 으면 하나의 문자 언어(직접적인 회화 문자)가 정념 없는 사회에서 존재할 수 있었다고 결론 내려야 할 것이며, 이것은 『인간 언어 기 원론』의 기본 가설과 상반된다. 반면에, 정념의 상태에서 비유가 없는 직접적이며 고유한 그림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점 역시 기존 가설과 상반된다. 이러한 양자 택일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을 복

원할 때만 가능하다. 은유적 이동이 없는 순수한 표상, 죽 순전히 반사적인 회화가 최초의 형상이다. 그것에 있어서 가장 충실하게 표상된 것은 이미 더 이상 고유하게 현전하지는 않는다. 사물을 반 복하려는 기획은 이미 사회적 정념에 해당하고, 따라서 은유성, 기 본적인 이동을 함축한다. 사물은 또 다론 것을 위해 그 이중성 속 으로 (즉 관념성으로) 이동시키며, 완벽한 표상온 그것이 둘로 갈 라놓고 재현시키는 것이 아닌 다른 무엇이다. 우의는 거기서 시작 된댜 이런 이유에서 진정한 문자는 없다. 회화 속에서 사물이 복 제되는 것은 또 사물이 현전하고, 보호되고, 시선을 받고, 아무리 적지만 시선 아래에서 지속되는 현상의 섬광 속에서 사물의 이중 화는 사물의 나타남을 그것의 고유성과 진리로의 사물의 부재로 개방시킨다. 결코 사물 그 자체의 회화는 없는데, 그 이유는 무엇 보다도 사물 그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원시적이며 회화적 인 단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문자는 이러한 부재, 이러 한 악 또는 언제나 현상의 진리를 작동시키는(그것을 산출하고, 물 론 대리하는) 이러한 근원을 고발한다. 이미지의 기원적 가능성은 대리 보충이며, 그것은 충만성 가운데 자신을 대체시키도록 방치하 는 빈 것을 메우기 위해서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부과되는 것이 다. 회화로서 문자는 파이네스타이 또는 에이도스 속에서 악인 동시 에 처방이다. 이미 플라톤은 문자의 예술 또는 기술은 파르마콘 (ph armakon : 유익하거나 해로운 마약 또는 염료)이라고 말했다. 문 자가 만들어내는 걱정은 이미 그것이 회화와 닮은꼴 이후로 느껴 졌다. 문자는 회화, 동물 글자와 같은 것이며, 그 자체가 미메시스 문제에서 규정 된다 (Cra ty] e, 430-432 쪽 참조). 닮은꼴은 초조한 것이다. 〈페드로여, 내 생각에는 문자에서 끔찍한 것은 문자가 회 화와 진정으로 너무나 많은 닮은꼴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따 ta, 275d) 여기에서 회화, 동물지(動物誌)는 존재와 음성 언어, 낱

말과 사물 그 자체를 배반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열거한 것들을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의 새싹은 살아 있는 형상을 하지만 사 람들이 그것들에 물음을 던질 때, 그것들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는 다. 동물지는 죽음을 가져왔다. 문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람 둘이 물음을 던질 때, 거기에 대답하기 위해 그 누구도, 특히 아버 지도 있지 않다. 루소는 아무런 유보 조건 없이 동의할 것이다. 문 자는 죽음울 가져온다. 문자를 살아 있는 유기체의 회화로서 동물 성을 고정시키는 회화로 조작할 수 있을 것이다. 루소에 따르면 동 물지는 야만인의 문자이다• 주그레이아 zoo gr e i a, 살아 있는 유기체 룰 포획하는 인간들, (우리가 알다시피) 그들은 사냥꾼일 수밖에 없다. 문자는 사냥하는 동물의 회화적 표상일 것이다. 즉 마술의 포획과살상이다. 즉 원형 문자 개념에서 오는 또 다른 어려움은, 계약에 대한 어 떤 참조도 거기에서는 도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계약은 〈두번 째 방식〉에서만 나타난다. 죽 야만성과 상형 문자의 계기가 그것이 다. 사냥꾼들은 존재들을 그리고, 목동은 이미 언어를 각인시킨다. 〈두번째 방식은 계약적인 글자들을 가지고 낱말들과 명제들을 표 상시키는 것이다. 이 점은 언어가 완전히 형성되고, 하나의 민족이 공유하는 법에 의해서 결합될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미 여기에는 이중적인 계약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 사람들의 문자 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은 진정으로 소리를 그리고 눈에다 대고 말을 한다.〉 따라서 첫번째 상태에서는 은유가 어떠한 계약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비유는 여전히 원시적인 생산이었 다. 존재 그 자체를 표상하기 위해서는 결코 제도가 필요 없었고 은유는 자연과 제도 사이의 전이 과정이었다. 곧이어 언어가 아닌 사물을 그렸던 원형 문자는 하나의 언어, 죽 결코 〈완전히 형성되

지〉 않은 사회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이 첫번째 상태는 불안 정한 한계점이다. 〈순수한 자연〉을 떠났지만 완전히 사회 상태에 도달하지는 않았다. 루소에 따르면, 멕시코 사람들과 이집트 사람 들은 〈특정 사회〉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두번째 방식은 소리를 그리지만 단어와 명제들을 분해하지 않는 방식이다. 따라서 그것은 상형 음성 표기 문자이다. 각각의 시니피 앙은 하나의 음성적 총체의 개념적 종합, 의미와 소리의 복잡하며 전반적인 통일성으로 귀결된다. 아직도 순전히 음성 표기적인(예컨 대, 알파벳 유형의) 문자에 도달하지 않았거니와 거기에서 가시적 시니피앙은, 그 자체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는 음성적 단일성으 로귀결된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상형 음성 문자는 〈이중적인 계약〉을 전 제로 한다. 즉 문자 요소를 그것의 음소적 시니피에와 연결시키는 계약이 첫번째이며, 시니피앙으로서 이 음소적 시니피에를 그것의 기호화된 의미, 이를테면 그것의 개념과 연결짓는 계약이 그 다른 하나이다. 그러나 이런 문맥에서, 〈이중적인 계약〉은 다른 것(그 개연성은 덜 하지만)을 뜻할 수도 있다. 언어적 계약, 그리고 사회 적 계약이 그것이다(〈이것은 언어가 완전히 형성되고 한 민족이 공 유한 법에 의해서 결합될 때에만 가능하다〉). 사물과 자연적인 존재 들의 회화에 대해서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도화된 법이 필 요 없지만, 소리들의 회화, 낱말과 관념의 결합의 규칙을 정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루소는 이러한 〈공유된 법들〉과 〈이중적 계약〉을 쓸 수 있는 민족 국가들을 〈야만적〉이라고 부른다. 야만성이란 개념의 사 용은 『인간 언어 기원론』에서는 대단히 당혹스러운 것이다. 여러 번에 걸쳐 (4 장과 9 장에서) 루소는 매우 단호하고 엄밀하며 체계적 인 방식으로 그 개념을 작동시킨다. 세 가지 사회 상태, 세 가지

언어, 세 가지 문자(원시적/야만적/문명적, 사냥꾼/목동/농부, 회화 문자/상형 음성 문자/분석적 음성 문자)가 그것이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그 단어의 외관상으로 좀더 느슨한 사용(〈야만적〉이란 단 어보다는 〈야만성〉이란 단어의 사용)은, 그것이 순수한 자연에서이 든, 또는 길든 구조에서이든, 여전히 분산 상태를 지칭한다. 9 장의 주 2) 는 곧이어 야만성이라고 기술하는 사람들을 〈원시적〉이라고 부른다. 〈이 관념들을 최초의 인간들에게 적용해 보라. 그러면 그 들의 야만성의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이 야만성의 시간들은 황금 시대였는데, 그 이유는 인간들이 결합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서로 따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이 거대한 사막에서 어리둥절해진 인간들은, 만약 그들이 지구로부터 탄생했 다면 그들이 처하게 되었을 우둔한 야만성의 늪에 다시 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길든 야만적 사회는 언어가 없다. 가족 언어는 언 어가 아니다 . 〈어리둥절하게 살면서 사회도 없이 겨우 말을 했던 그들이 어떻게 문자를 쓸 수 있었단 말인가?〉 이 문장은 4 장에서 문자와 심지어는 이중적 계약을 야만인들에게 부여한 것과 명백히 모순되지 않는가? 어떤 주석도 이 모순을 지울 수 없을 것 같다. 한 가지 해석이 그것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해석은 측면성의 심층적 수준과 접맥하면서, 좀더 표충적인 수준을 중성화시키면서 루소의 텍스트 속에서 사회 체계의 구조로부터 문자 체계의 구조를 상대적으로 고립시킬 수 있는 권리를 추구하는· 데 있다. 비록 사회적, 문자 표 기적 유형들이 관념적으로, 또 유사하게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문명 적 유형의 사회가 실제로는 야만적 유형의 문자 언어를 가질 수 있다. 비록 야만인들이 겨우 말을 하고 문자를 쓰지 못한다고 하더 라도 야만성 속에서 특정 문자의 속성을 추출할 수 있다. 이렇듯 〈물체들의 회화가 원시 민족들에게 적합하고, 낱말과 명제들이란

기호는 야만 민족에게 적합하다. 아울러 알파벳은 문명화된 민족에 게 적합하다 〉 고 말하면서, 구조적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문명적 유형이 나타나는 우리 사 회에서는, 회화 문자적인 요소들은 원시적일 것이며, 상형 음성 문 자적 요소들은 야만적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쓰는 문자의 실 제에 있어서 이 모든 요소들의 현전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 왜냐하면 루소는 구조적 유사 원칙을 지속시키면서, 여전히 사 회적, 언어적, 그리고 문자 표기적인 구조들의 상대적 독립성을 계 속해서 고수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는 나중에 그 점을 밝히고 있 다. 〈글 쓰는 법은 말하는 법에 결코 연연해 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본질의 필요 욕구에 기인하거니와 그 필요 욕구는 민족의 지속과는 완전히 독립된 상황에 따라서 좀더 일찍이 또는 나중에 태어나고, 매우 오래된 민족 국가에 있어서는 결코 그러한 글 쓰기 의 필요 욕구는 없었다.〉 따라서 문자 언어의 출현 사실은 필연적이지 않다. 아울러 구조 적 또는 형상적인 분석 속에서 그 사실을 괄호 안에 집어넣는 것 울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경험적인 우발이다. 우리가 그 내적인 조직 과 본질적인 필연성을 알고 있는 하나의 구조가 실제로 여기 또는 저기서, 좀더 일찍이 또는 좀더 니~ 출현한다는 사실, 바로 그 것이 (우리가 다론 곳에서 주지했듯이) 있는 그대로 그것의 순수한 순간 속에서 구조적 분석의 조건과 한계점이다. 그것의 고유한 심 금 속에서 그 조직의 내적 특수성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한 구조 에서 다른 구조로의 이행을 우연에 맡겨 버린다. 이 우연은, 여기 서의 경우처럼, 부정적인 재앙으로서, 또는 긍정적인 놀이로서 생 각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조주의적 한계점과 힘은 하나의 인 종-형이상학적 편리함을 지니고 있다. 새로운 각인 체계의 도래로 서의 일반적인 문자는 그 첨가적 측면과(게다가 그것은 단번에 도래

했다), 독소적 영향(그 과거 조건 속에서 아무것도 그것을 필연적으 로 만들지 않았는데도, 그것은 외부로부터 덤으로 잘못 왔다)만을 알 고 싶어하는 하나의 대리 보충이다. 그것의 역사적 출현에 어떠한 필연성도 부과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리 보충의 부름을 무시하는 것인 동시에 악을 놀랍고 외적이며 비합리적이며 우발적인, 따라서 지워질 수 있는 첨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알파벳과 절대적 대리 표상 문자 표기와 정치는 복잡한 법칙에 따라서 서로에게 맞물려 있 다. 그것들은 모두 타락의 진행 과정으로서 이성의 형식을 띠게 되 며, 그것은 두 개의 보편성 사이에서 또 재앙으로부터 재앙으로 옮 겨가면서 현전의 총체적인 재소유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 E 臣· 루소의 모든 담론을 지배하는 신학적이며 종말론적 예기(豫期)이자 시제이다. 루소는 이러한 법과 시제 아래 에서 차이/지연과 대리 보충성을 생각하면서, 그것들의 궁극적인 소실의 지평으로부터 그것들을 예고하기를 원한다. 이런 의미에서 도시 공동체의 질서에서처럼 문자 언어의 질서에 서도, 그것의 현전 속에서 인간의 절대적인 재소유화가 완수되지 않는 한 ,19) 최악의 것은 동시에 최선의 것이다. 잃어버린 현전의 시간 속에서 가장 멀리 나간 것은 현전의 다시 찾은 시간에 가장 가깝다• 19) 현전의 궁극적인 재소유화는 루소에 의해서 매우 빈번하게 인간 중심적 텔로스로 명명된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중요한 것은 인간 그 자신이다.〉( 『 에밀 』 의 수 고)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이 인간 중심주의는 본질적으로 모종의 신학 과 연계된다 .

이렇게 해서 세번째 상태가 된다. 즉 문명화된 인간과 알파벳 문자가 도래한다. 바로 여기에서, 가장 눈에 띄게, 또 가장 심각하 게 법은 자연을 대리하고 문자 언어는 음성 언어를 대리한다. 이 둘 모두의 경우에 있어서, 대리 보충은 표상이다. 『 발음 Pronon ci a ti on 』 에 관한 한 토막의 글을 기억할 일이다. 말하기 위해 언어를 만들었고, 문자 언어는 음성 언어의 대리 보충으 로 쓰일 뿐이다……. 사고의 분석은 음성 언어에 의해 이루어지고, 음 성 언어의 분석은 문자 언어에 의해 이루어진다 . 음성 언어는 계약적 기호들을 통해 사고를 표상하고 문자 언어 역시 같은 요령으로 음성 언 어를 표상한다. 이렇듯 문지를 쓰는 기술은, 최소한 우리들이 쓰는 유 일한 언어인 음성 언어에서는 사고의 간접 표상에 불과하다. 대리 보충의 표상 운동은 기원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기원에 접근 한다. 총체적 소외는 자기 자신으로의 현전의 총체적 재소유화이 다. 표상체를 표상하고 대리 보충의 대리 보충이라 할 수 있는 알 파벳 문자는 표상의 힘을 악화시킨다. 알파벳 문자는 현전을 다소 상실하면서, 그것을 더 훌륭하게 복원시킨다. 두번째 상태의 문자 언어보다 더 순수하게 음성 표기적인 알파벳 문자는 목소리 앞에 서 소거되기가 더 적합하고 그렇게 방치되기에 더 적합하다. 정치 적 질서에 있어서, 『사회 계약론』이 말하듯, 〈아무 유보 조건 없 이〉 이루어지는 총체적 소의는 〈가지고 있는 것을 보존하기 위해 상실한 것의 동등 가치와 더 많은 힘을 얻도록 한다.〉 (L. I. 361 쪽) 물론 그 전단계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순수 자연 상태로부터) 그것을 기원 너머로 다시 내팽개치지 않으며, 그 결과 〈이러한 새로운 조건의 남용이 그것이 벗어난 것 아래로 타락시키 지 않는다면〉 (364 쪽)이라는 조건 아래에서말이다.

따라서 유보 없는 소외는 유보 없는 대리 표상이다. 그것은 자 기 자신으로의 현전을 절대적으로 박탈하고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그것을 절대적으로 재현한다. 악이란 언제나 표상적인 소외, 그것 의 박탈적인 측면에서 대리 표상의 형식을 갖는다는 점에서, 루소 의 전 사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적 의미만큼이나 언어학적 의 미에서 , 대리 표상에 대한 비판이다. 하지만 동시에 (바로 여기에서 전체 형이상학의 역사가 반영된다) 이 비판은 대리 표상의 순박함 속에서 살고 있다 . 그것은 동시에 대리 표상이 일차적인 현전을 추 구하고 또 궁극적인 현전을 복원시킨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현전 과 현전 속에서의 표상에 무엇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자문하지 않 는댜 표상을, 현전이 상실된 요인으로 몰아 호되게 비판하면서, 또 거기에 현전의 재소유화를 기다리면서, 그것을 하나의 우발적 사건이나 수단으로 삼으면서, 현전화와 대리 표상(재현전화)의 명 증성과 그 분열의 결과에 안주하고 만다. 기호를 비판하면서 시니 피에와 시니피앙의 차이의 명중성과 결과에 안주하는 꼴이다. 즉 차이의 효과(차이/지연의 묘한 에크리튀르)를 생각하지 않고서말이 다(나중에 오는 비판 역시 동일한 효과의 내부에서 이 도식을 전복시 키고 표상체의 논리와 피표상체의 논리를 대립시키면서도 그 점을 고 려하지 않는다) . 따라서 세번째 상태(문명 사회와 알파벳)가 『 사회 계약론』과 『달 랑베르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도식에 따라 기술된다는 점에서 전혀 놀라울 것이 없다. 축제 때 또는 정치 집회에 〈모인 민족〉에 대한 찬양은 언제나 표상에 대한 비판이다 . 언어(음성 언어 또는 문자 언어)에서와 마찬 가지로 도시에서도, 또 예술에서도, 합법적인 인자는 직접 사람에 게 현전하는 피표상체이다. 합법성의 근원이자 신성한 기원이다. 타락성은 바로 표상시키는 것, 또는 시니피앙을 신성시하는 데 있

다. 통치성은 현전이며 현전의 환희이다. 〈 민족이 합법적으로 통치 조직으로 모이는 순간에, 정부의 모든 사법권은 정지되고 행정권은 지연되며, 마지막 시민은 최초의 통치자처럼 신성시되고 범할 수 없게 되는데, 그 이유는 피대리자가 있는 곳에는 더 이상 대리인이 없기 때문이다.〉(『사회 계약론 』 , 427-428 쪽) 이 모든 질서 속에서 대리하는 것(대리인)의 가능성은 선에 대한 악으로서, 기원에 대한 역사로서, 대리된 현전에 도래한다. 시니피 앙 대리자는 재앙이다. 아울러 그것은 그 자체로 어느 시대에 나타 나건 새롭다. 그것은 근대성의 본질이다• 〈대리자들이란 관념은 근 대적이다〉라는 명제는 루소가 거기에 할당하고 있는 한계점들을 넘 어 확장시켜야 할 명제이다 (430 쪽). 정치적 지유순근 대리자의 힘이 지연되고 피대리자들에게 돌아갈 때에만 충만한 것이다. 〈 어쨌든 한 민족이 대리 대표자들을 두는 순간에는, 그 민족은 더 이상 자유 롭지 못하다. 그 민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431 쪽) 따라서 이 순간, 즉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서 지속되고 자기 자 신의 환희의 소의될 수 없는 직접성 속에서, 불가능한 대리 표상의 계기 속에서, 그것의 통치성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거나 거슬러 올라가는 그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 정치적 질서 속에서 이 근원은 의지로서 규정된다. 〈통치성은 그것이 소외될 수 없다는 똑 같은 이유로, 대리 대표가 될 수가 없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총체 적인 의지로 이루어지며, 의지는 결코 대리 대표가 될 수 없다. 그 것은 동일하거나 다른 것이다. 결코 중간은 없다.〉 (368 쪽) 타락적 원칙으로서 대리자는 피대리자가 아니며 피대리자의 대 리자일 뿐이다. 대리자는 자신을 제외하고는 다른 것과 동일한 것 이 아니다. 대리자로서 그것은 단순히 피대리자의 타자가 아니다. 현전의 대리 표상체, 또는 그것의 대리 보충의 악은 동일자도 타자 도 아니다. 통치 의지가 위임되고, 따라서 법이 쓰일 때, 그것은

차이/지연의 계기에서 도래한다. 따라서 총체적 의지는 양도된 권 력, 특수한 의지 , 편에 불평등이 될 위험성이 있다. 법을 대신해서 칙령, 즉 문자가 자리잡을 수 있다. 특별한 의지를 대표하는 칙령 속에서 〈 일반 의지는 침묵을 지킨다•〉(『사회 계약론 』 , 438 쪽) 문자 와 대리 대표에 선행하는 순간의 존재에 토대를 두고 있는 사회 계약 체계는 철자에 의해서 위협받도록 방치된다. 바로 이런 이유 에서, 대리 대표에 의존해야만 하는 〈 정치 조직은, 인간의 조직과 마찬가지로 그것의 탄생부터 죽기 시작하며 그 안에 그것의 파괴 의 원인들을 포함하고 있다.〉 (424 쪽) (3 권 11 장 〈정치 조직의 죽음 에 대해서 〉 는 대리 대표에 관해서 모든 것을 전개시키고 있다 . ) 문자 언어는 불평등의 기원이다 . 20 ) 그것은 바로 그 자체에서는 길을 잃 을 수 없는 일반 의지가, 그 자리를 〈특별한 의지들의 유혹 속으 로 〉 (380 쪽) 끌고 갈 수 있는 판단에 자리를 내주는 순간이다. 따라 서 법을 기초하는 권력과 입법권을 분리시켜야만 한다. 〈리큐르그 L y cur gu e 가 자신의 조국에 법을 부여했을 때, 그는 왕권을 폐위 시키기 시작했다…….〉 〈법을 기초하는 사람은 어떤 입법권도 없으 며 또 그래서도 안 되며, 국민 자신도 그들이 원할지라도 이러한 양도될 수 없는 권리를 버릴 수 없다•〉 (382-383 쪽) 따라서 대리권 이 없는 투표둘에 의해서 표현되는 일반 의지는 절대적으로 필연적 20) 사회, 정치적 생활 속에서 문자로 다루어지는 모든 것에 대해서 루소에 게 영감을 준 경계심의 또 다른 예들. 첫째, 베니스에서. 〈이곳에서는, 보 이지 않는 정부와 더불어 문자로 일을 처리하는데 , 이는 대단한 용의 주도 함을 필요로 한다.〉 둘째, 〈몽상의 나라로 되돌아가고 싶을 때, 사람들은 플라톤의 제도를 명명한다 . 만약 리큐르그가 그의 제도를 문자로써만 설립 했다면 나는 그것을 더욱더 몽상적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 에밀 ,/J , 10 쪽) 셋째, 〈 나는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르지만. 가장 많이 쓰는 장부와 회계 장부의 조작들은 바로 사람들이 가장 사기를 잘 치는 조작이라는 사 실을 잘 알고 있다.〉 마이스트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본질적인 것은 결 코 문자로 쓰이지 않으며, 그 상태를 노출시키지 않고는 그렇게 될 수조차 없다.〉

이다. 일반 의지는, 그것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 국민 조직 〉 의 목소리 속에서 선언될 때 〈법을 만들어낸다. 〉 달리 말해서, 그것은 특별 의지, 행정 기관의 행위, 칙령 따위로 나누어진다 ( 369 쪽). 그러나 자연 상태를 중단시킨 재앙은 접근하는 소원함의 운동을 개방시킨다. 완벽한 대리 표상을 완벽하게 재현전화해야 한다 . 그것 은 현전을 복구하고 절대적 인 재현으로서 사라진다. 이 운동은 필 연적이다 . 2 1 ) 이미지의 궁극적 목적은 그 자체의 비지각성이다. 완벽 한 이미지, 그것이 사물이 아닌 다른 것으로 되는 것을 멈출 때, 그 것은 기원적 현전을 존중하고 복원시킨다. 끝없는 순환이 진행된다. 대리 표상의(대리 표상화된) 근원, 죽 이미지의 기원은 그 대리 표 상체들을 대리 표상하고, 그 대체물을 대체시키고, 그 대리 보충물 울 대리할 수 있다. 그 자신으로 다시 귀결되고, 자기 자신을 표상 하는 최고의 현전은 대리 보충의 대리 보충에 불과하다• 이렇게 해 서 『정치 경제에 관한 논문 Di scours sur J'ec onom ie p o litiq ue 』 은 〈일반 의지를, 모든 법의 근원과 대리 보충으로서 정의하며, 그 의 21) 그런 이유에서 루소는 대표 대리자의 필연성을 한탄하면서 그것을 받아 들이고 있다. Consid e rati on s sur le Gouvernement de Polo gn려 응 볼 것 .6 그는 거기에서 대표자의 〈유혹이 좀더 비용이 들고 어렵게 〉 하기 위해 서 대표자들의 재빠른 쇄신을 제안하고 있으며, 이 접은 『 사회 계약론 』 에 의해서 공식화된 규칙과 접맥이 될 수 있다. 그 공식에 따르면 〈 통치자는 빈번하게 자기 모습을 보여야 한다.〉 (426 쪽) 또한 데라테, Rousseau et la sci en ce po lit iqu e de son tem p s , 277 쪽 이 하 참조. 그가 동시에 비난하고 나서는 대표(표상)의 필요성을 정상화하면서 루소 는 어떤 논리에 복종하는가? 바로 대표(표상)의 논리에 복종하고 있다 . 표 상이 자기의 악을 더욱더 악화시킴에 따라서 , 더욱더 표상적이게 되는 것 에 따라서, 표상은 그것이 탈취하는 것을 복원시킨다. 그것은 곧 피표상체 의 현전이다. 〈악으로부터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처방을 이끌어 내도록 〉 노력해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서(자연 상태 L'e t a t de na t ure 에 관한 토막 글, 479 쪽), 그리고 그 논리에 따라 〈자신의 운동이 종료될 때 계약은 자 연과 다시 결합되며, 예속화는 자유와 다시 결합된다〉 둥(〈뭐라고! 자유는 예속의 도움으로만 지탱된다고? 아마도. 두 개의 극과 극은 서로 만난다〉 ( 『 사회 계약론 』 , 431 쪽)).

지는 법의 결점에 대비해서 언제라도 참조되어야 한다.〉 (250 쪽. 강 조는 필자의 것임) 민족에게 자유를 주고 현전에게 통치성을 주는 순수한 법의 질서는, 어디엔가 결함이 있는 자연적 질서의 대리 보 충이 아니던가? 대리 보충이 그의 임무를 완수하고 결핍울 메워줄 때는 악이 없다. 그 심연은 자연의 결함과 대리 보충의 지연 사이에 서 열려진 채로 남아 있는 깊게 파인 골이다. 〈 인간의 가장 창피한 무질서, 문란함과 빈곤의 시간은, 새로운 정념이 자연적인 감정을 은폐시키고 인간의 오성이 현명함의 준칙으로서 자연의 운동을 대 리할 만큼 충분히 진보하지 못했던 시간이다.〉 22) 대리 보충의 놀이 는 무한정이다. 반사(돌려보내기)는 다시 반사로 돌려보내진다. 따 라서 일반 의지, 이 〈천상의 목소리〉( 『 정치 경제에 관한 논문』, 248 쪽)는 자연의 대리 보충이다. 하지만 재앙이 돌아음으로 사회가 타 락할 때 , 자연은 그것의 대리 보충으로 대체될 수 있다• 그래서 그 것은 나쁜 자연이며, 〈우두머리들은 더 이상 마음속에서 말하지 않 는 의무감의 목소리 대신에, 공포의 울음소리 또는 눈에 보이는 이 익의 미끼를 이용해야만 했다.〉 (253 쪽. 강조는 필자의 것임) 이 대리 보충의 놀이, 즉 재앙적인 퇴조와 진보의 취소로 언제 나 열려진 가능성은 단지 비코의 반복ii cors i만을 생각하게 하지 않는댜 비코는 우리가 기하학적 퇴조라고 부른 것과 접맥해 헤겔 유형의 무한한 목적론으로부터 역사를 도치시켰다 . 루소는 일정한 방식으로 역사가 언제나 그것의 진보를 중단하고, (그리고 심지어 는 퇴조 속에서 진보하며) 역사의 배후로 (다시) 온다고 간주하면 서, 〈죽음의 고통〉, 차이의 놀이와 부정성의 조작을 예수의 재림이 라는 지평 속에서 진리의 변증법적 완결에 이용하지는 않는다. 하 지만 이 모든 명제는 역전될 수 있다. 루소의 유한주의는 섭리주의 적 신학의 핵심에서 제거가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해석하면서, 22) De J'etat de natu r e, 478 쪽. 또한 『 에밀 』 , 70 쪽 참조 . 7

다른 차원에서 역사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우발적인 것으로 환 원시키면서 자기 자신을 지워버린다. 그는 현전 등의 무한한 복원 이라는 지평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형이상학이라는 폐쇄된 장 속에서, 우리가 여기서 〈루소적〉이고 〈헤겔적인〉 자리들의 무한한 교환들로서 묘사한 것은 (다른 많은 예들도 들 수 있을 것이다) 우 리가 방금 전에 상기시킨 모든 개념들 속에 각인된 법칙들에 복총노 한다. 이 법칙들의 형식화는· 가능하며 그것은 실현된다• 정치적 차원에서 우리가 방금 전에 지적한 것은 문자 표기 차원 에서도가치가 있다. 음성 문자에 대한 접근은 대리 표상성의 대리 보충적인 수준 정 도와 대리 표상의 구조 속에서 총체적인 혁명을 성립시킨다. 직접 적인 회화 문자(또는 상형 문자)는 사물(또는 시니피에)을 표상한 다. 상형 음성 표기 문자는 이미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복합을 표 상한다. 그것은 이미 언어를 그린다. 모든 문자사기들은· 그것을 표 음화의 탄생(예컨대 전이적 판화와 같은 방식에 의해) 계기로서 식 별한다 .23) 그 개념 속에서 명명된 것을 표상하는 기호는 이제 개념 으로 귀결하지 않고 음성적 시니피앙의 가치를 간직할 뿐이다. 그 시니피에는 자체로는 어떤 의미도 없는 음소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분해 이전에, 그리고 〈이중적 계약〉에도 불구하고 표상은 복제이다• 그것은 시니피앙 덩어리와 시니피에 덩어리를 분석하지 23) rebus( 수수께끼)에 관해서는, 이 책, 184 쪽 참조. 역시 문자의 세 개의 상태 또는 단계를 구분하고 있는 비코는 최초의 문자의 예로서, 다른 어떤 것들보다(표음 문자이든, 상형 문자이든, 그것은 〈동시에 태어났으며〉 〈그 것의 기원을 결코 계약에서 도출시키지 않는다.〉) 〈피카르디 P ic ard i e 의 수 수께끼〉를 제시하고 있다. 〈두번째 문자의 형태도 마찬가지로 죽각적이다. 그것은 상징 문자이거나 영웅의 문자들로 되어 있다.〉(갑옷, 가문 〈호머가 세메타

않고 덩어리로 반복한다. 표상의 이러한 종합적 특징은 〈목소리를 그리는 〉 상형 음성 표기 문자의 회화 문자적인 잔재이다. 음성 문 자는 그 잔재를 축소시키는 일을 한다. 개념적 시니피에와 직접적 인 관계가 있는 시니피앙들을 쓰는 대신 음성 문자는 소리의 분석 을 통해 시니피앙 없는 시니피앙을 사용한다. 자체로는 어떤 의미 도 없는 철자는 기초적인 음성 시니피앙만을 의미할 뿐이며 몇몇 규칙에 따라 포함될 때에만 의미가 있다. 그림을 대신하고 무의미성까지 나가는 분석, 그것이 바로 알파 벳과 문명 사회에 고유한 합리성이다. 대리 표상의 절대적 익명성 과 고유성의 절대적 상실. 알파벳 문화와 개화된 인간의 출현은 농 경 시대에 해당한다. 아울러 농경은 (그 점을 잊지 말자) 산업을 전 제로 한다. 그렇게 되면, 세 가지 상태에서는 결코 명명도 되지 않 고, 어떤 고유한 시대도 갖지 못하는 상인에 대한 암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세번째〔글 쓰는 방식]는 말하는 목소리를 일정한 수의 기본 요소, 구두적이거나 분절된 [모음 또는 자음] 부분들로 쪼개는 것이며, 그 요소들을 가지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낱말과 음절 등을 형성할 수 있 다. 우리들이 쓰는 이러한 방식은 상인들이었던 민족에 의해서 착안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여러 말을 하며, 그 모든 언어에 공통된 글자를 창안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확히 음성 언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분석하는 것이다. 상인은 문자 표기 부호의 체계를 창안하며, 그것은 원칙상 어떤 특수한 언어에 더 이상 결속되지 않는다. 원칙상 이 문자는 일반적 으로 모든 언어를 전사할 수 있다. 그것은 보편성을 획득하고 , 상 업을 돕고 〈다른 말을 하는 민족들과의 의사 소통을 더 쉽게〉 한

다. 하지만, 그것은 각각의 개별 언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에, 언어 일반에 완벽하게 예속된다. 그것은 원칙상 보편적인 음성 문 자이다. 그것의 중립적 투명함은 각각의 언어에 그것의 고유한 형 식과 자유를 남긴다. 알파벳 문자는 오직 순수한 표상체와 상관될 뿐이다. 그것은 시니피앙 체계이며 그것의 시니피에는 시니피앙, 죽 음소이다. 기호의 유동은 무한정으로 용이해진다. 알파벳 문자 는 있을 수 있는 가장 무언의 언어인데, 그 이유는 직접적으로는 어떤 언어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파벳 문자는 목 소리와 무관하면서도, 그것에 더 충실하고 더 훌륭하게 그것을 표 상한다. 구두 언어의 경험적 다양성에 대해서 알파벳 문자가 갖는 이러 한 독립성은 문자의 생성에 있어서의 일정한 자율성을 확인시켜 준다. 문자는 〈민족들의 지속〉과 독립해서 좀더 일찍이 또는 더 나 중에 탄생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천천히 또는 갑자기 탄생할 수도 있었다 .24) 그것은 덤으로 어떤 언어적 파생도 상정하지 않는 24) 그것은 뒤클로의 논지이다 . 〈문자는(나는 음성 문자를 뜻한다) 언어처럼 완만하면서 눈에 띄지 않는 진전에 따라서 태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태어 나기 전부터 수십 세기 동안 존재했으며, 빛처럼 한 순간에 태어났다.〉 뒤 클로는 알파벳 이전의 문자들의 역사를 더듬은 후에, 그것에 대해서 〈천재 성의 섭광〉이라고 부르고 있다. 〈오늘날 중국 사람들의 문자가 바로 그런 것이며, 그것은 소리가 아닌 관념에 해당한다. 우리들 사이에 쓰이는 대수 학 부호와 아랍 숫자가 또한 그런 것이다. 문자는 이런 상태 속에 있었으 며 현재의 문자와는 최소한의 관계도 갖고 있지 않았다. 담론은 관념을 표 현하기 위해 아무리 다양하고 폭이 넓다고 하더라도 적은 수의 소리로만 구성되고 각각의 소리에 표상적인 글자 하나씩을 부여하는 것이 관건이라 고 느꼈을 시기이다. 그 점을 차분히 성찰해 본다면, 이 문자 사용은 한 번 착상이 된 후로 거의 동시에 형성되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점은 문자 창안자의 영광에 속한다……. 한 언어의 모든 소리를 셈으로 셀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셈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었다. 하나는 천재성의 번득임이요, 다른 하나는 단순한 주의의 효과이다.〉(앞의 책, 421-423 쪽)

댜 이 점은 다른 문자 체계들보다도, 알파벳 문자와 그 구속으로 부터 해방된 다른 모든 언어들에 있어서 더욱더 참된 사실이다. 따 라서 문자 표기 부호를 그들 문화와 기원 언어 밖에서 아무런 탈 없이 차용하고, 이주시킬 수 있다. <…… 비록 그리스 문자가 페니 키아 문자로부터 나왔다고 하지만 그 결과 그리스어가 페니키아어 에서 나온 것은 결코 아니다.〉 자의적인 기호들의 유통 속에서 이러한 분석적 추상화 운동은 화폐가 성립되는 운동과 평행선을 달린다. 돈은 사물들의 기호로서 사물을 대체한다. 단지 한 사회의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한 문화에 서 다른 문화로 또는 하나의 경제 조직에서 다론 경제 조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알파벳은 상업적이다. 그것은 경제적 합리성의 화폐적 계기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돈에 대한 비판적 기술은 문자에 관한 담론의 충실한 반영이다. 그 두 경우 사물을 익명의 대리 보충으로 대체한다. 개념이 다양한 사물들에 대한 비교만을 보유하듯이, 화폐가 동일한 척도로 계산될 수 없는 제 대상에 대해서 그것들을 상품으로 성립시키기 위해 〈공통된 척 도 25 ) 〉 를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알파벳 문자는 자의적이며 공 통된 시니피앙들의 체계 속에서 이질적인 시니피에들(죽 살아 있는 여러 언어)을 전사한다. 그것은 이렇게 해서 그것이 유통시키는 생 명에 반해서 폭력을 열어놓는다. 만약 화폐를 언급하면서 『에밀』 26) 25) 『에밀 』 , 218 쪽. 루소는 거기서 화폐의 기원, 필요성, 그리고 위험성에 대한 이론을 제시한다 .9 26) 위의 책, 같은 곳. 또한 『정치론 단편 Fragm e nts p oli tiq ues 』 속에서 역시 다음 글을 읽게 된다. 〈금과 은은 그것과 맞바꿀 수 있는 질료들에 대한 표상 기호일 뿐이며, 자체로는 어떠한 절대적 가치도 없다…….〉 〈돈 에 어떤 실제적 가치도 없더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모든 나라에서 묵시적 계약에 의해 가치를 취한다 ... ….〉 (520 쪽) 그리고 Consid e rati on s sur le go uvernement de Pologn e 속에서는 다음 글을 읽을 수 있다. 〈요컨대 돈은 부가 아니라 부의 기호일 뿐이다. 증식시켜야 하는 것은 기호가 아니 라 표상된 사물 자체이다.〉 (1008 쪽) 『 사회 계약론 』 (L. III) 이 돈을 노예화

의 힘으로 비난하는 것은 국회 의원 또는 대표자들에 관한 15 장 서두에서 이다. 〈돈을 주어라. 그러면 곧 당신은 쇠사슬을 갖게 될 것이다.〉 1 0 또한 J. Sta r obin s ki , La tra nspa rence et J'ob sta c le, 129 쪽 이하와 『 고백록 』 (플레야드 판본 『전집 』 1 권)의 37 쪽에 있는 편집자 주 3) 을 참조 할 것 11

이 말하고 있듯이, 만약 〈기호가 사물을 무시하게 한다면 〉 , 사물을 망각하는 것은 돈과 알파벳 문자와 같은 완벽하게 추상적이고 자 의적인 기호들의 사용 속에서 가장 극명하다. 그러므로 동일한 문자 표기에 따라서 알파벳온 분석적 합리성의 진보를 표시하는 표상성의 대리 보충적인 단계를 도입시킨다 . 이번 에는 명백하게 나타난 요소는 순수한(순전히 자의적인) 시니피앙이 며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이러한 무의미성은 보편성 또는 합리 성의 부정적, 추상적 형식적인 측면이다. 따라서 그러한 문자의 가 치는 애매모호하다. 문자의 가장 원형적인 단계에 일종의 자연적인 보편성이 있었다. 알파벳이 그렇지 않은 것처럼, 회화는 어떤 규정 된 언어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 모든 감각적 존재를 복제할 수 있는 회화는 일종의 보편 문자이다. 그러나 여러 언어에 대한 그것 의 자유는 회화와 그것의 모델을 갈라놓는 거리에 기인하지 않고 그것을 모델에 연결시키는 모방적인 근접성에 기인한다. 보편적인 외관 아래에서 회화는 그것이 모든 코드를 벗어나서 표상시키는 감각적 개체들처럼 완전히 경험적이고, 다양하며 변화한다. 반대 로, 음성 문자의 관념적인 보편성은 그것의 소리(그것을 자의적으 로 표시하는 문자의 최초의 시니피에)와 음성 언어에 의해서 기호화 된 의미에 대해서 갖는 무한한 거리에 기인한다. 이 양극 사이에서 보편성은 상실된다. 우리는 양극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 가 검토했듯이, 순수한 회화 문자와 순수한 음성 문자는 이성을 대 표하는 두 가지 관념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현전의 관념들. 첫번째 경우에는, 그것의 완벽한 모방에서 표상된 사물의 현전이며, 두번

째 경우에는 음성 언어 그 자체의 자신에 대한 현전이다. 매번 시 니피앙은 시니피에의 현전 앞에서 지워져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 애매 모호함은 플라톤 이후로 일체의 형이상학이 그 고유한 문자에 대해서 행한 평가를 표시한다. 바로 루소의 텍스트는 이 역 사에 속하며, 거기에서 주목할 만한 시대를 분절한다. 좀더 합리적 이고 좀더 정확하고 좀더 정밀하며 좀더 명료한 목소리의 문자는 최상의 경찰 치안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것이 목소리의 가능한 현 전 앞에서 다른 것보다 더 잘 지워져 버린다는 점에서 그것은 현 전을 더 잘 표상하고 최소한의 해도 입지 않게 한다. 목소리의 충 실한 복종자로서, 다른 사회에서 쓰이는 문자보다도 그것을 더 선 호하거니와 그것은 마치 야만인보다는 노래를 선호하는 것과 마찬 가지이댜 동시에 그것을 죽음의 기계로서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문자의 합리성은 정념과 노래, 즉 언어의 살아 있는 기원으로부터 그것을 소원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음-과 더불 어 진보한다. 그것은 사회 제도의 최고의 상태에 해당하면서, 하나 로 결합한 민족의 주권적 현전 없이 더 쉽게 살아갈 수 있는 수단 울 부여한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적인 분산을 복원하려는 경향이 있다. 문자는 문화를 자연화한다. 문자는 그것이 열어놓은 차이룰 지워버리는 데 사용되면서, 문화 속에서 분절로서 작동하는 문화에 선행하는 힘이다. 정치적 합리성(기정 사실의 합리성이며 『 사회 계 약론』이 그 권리를 기술하는 합리성은 아니다)은 동일한 운동 속에 서 문자와 동시에 분산을 용이하게 한다. 문자의 보급, 그 규칙들의 교육, 그것의 도구와 대상의 산출, 루 소는 그런 것들을 예속화의 정치적 시도로 간주한다. 『슬픈 열대』 에서 역시 그 점을 읽울 수 있다. 몇몇 정부들은 언어가 무성화되 고, 주권 국민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사태를 갈망했다. 문 자의 남용은 정치적 남용이다. 후자는 전자의 〈명분〉이다.

…… 언어는 책 속에서 완벽할수록 일상 언어에서 변질된다. 그것은 글로 쓸 때 더 명료해지고, 구어로 말할 때는 더 불명확해지며, 통사법 은 세련되고 조화는 상실되거니와 프랑스어는 점차 더 철학적이고 덜 세련되며, 곧이어 읽기에 적합지 못하게 되고 그것의 모든 가치는 도 서관 가운데 처박히게 된다. 이 남용의 명분은, 내가 다른 곳에서 [ 『 인 간 언어 기원론 』 의 마지막 장에서〕 언급했듯이 , 통치 형태 속에 있다. 이러한 통치 형태는 국민에게 그들을 가장 덜 감동시키고, 그들이 가 장 덜 들으려고 하는 세계의 사물들, 이를테면 설교, 아카데미에서의 연설 따위 이외에는 말할 것이 없게 만든다.(『발음 .!l 에 관한 단락, 1249-1250 쪽) 정치적 지방 분권화, 통치권의 분산 및 탈중심화는 역설적으로 하나의 수도의 존재와 찬탈과 대체의 중심부의 존재를 요청한다. 그 자체에 자신들의 중앙이었고 살아 있는 목소리로 교섭한 고대 의 자급 자족적 도시와는 대립되게, 근대 수도는 언제나 문자 언어 를 독점한다. 그것은 문자로 쓰인 법, 칙령, 그리고 문서로써 명령 한다. 그것이 바로 『발음』에 관한 텍스트에서 루소가 파리에 부여 하는 역할이다. 하지만 『사회 계약론』은 국민이 인정한 주권 행사 와 수도의 존재를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대표자들의 경우에서처럼, 수도의 설정이 필수 불가결하다 면, 그 도시를 자주 바꾸면서 악을 치유해야만 했다. 이것은 곧 문 자를 살아 있는 목소리로 재충전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어쨌든 국가를 그것의 적당한 경계선으로 축소시킬 수 없다면, 하나의 수 단은 남아 있다. 그것은 수도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도시에서 돌 아가면서 정부를 설치하고, 아울러 돌아가면서 국가 회의를 개최하 는 것이다.〉 27)(427 쪽) 문자의 심급은 이 점에서 소실되고, 주권적 27) 또한 Proje t de consti tut i on po ur la Corse, 911-912 쪽 참조 .12

국민은 자기 자신에게까지도 글을 써서는 안 되며 그것의 회의는 〈별다른 소집 수속〉 없이 즉각적으로 집회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것은 (루소가 읽고 싶지 않았던 문자가 바로 그것이다) 〈그 어느 것 도 붕괴시키거나 연장시킬 수 없는〉 〈고정되고 정기적인〉 모임이 〈표시된 어느 날에〉 있었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러한 표시는 구두 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왜냐하면 문자의 가능성이 조작 속에 진입하자마자 그것은 사회 기구에서 찬탈을 넌지시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표시는 그것이 어디서 생산되건, 문자의 가능성이 아닌가? 정리(定理)와 극장 목소리의 역사와 목소리의 문자 언어의 역사는, 두 개의 무성 문자 사이에, 또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으로서 서로 귀결되는 보편성의 양극 사이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회화 문자와 대수학 이 그 양극이다.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 또는 자의적인 것과 의 관계 그 자체는 〈서로 촉각으로 결합되는〉 〈잉여〉의 법칙에 따 른다. 그런데 만약 루소가 알파벳 문자를 절대적으로 단죄하지 않 은 채 그것을 의심한다면, 그 이유는 거기에는 최악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알파벳 문자는 구조적으로는 이 역사의 최종 단계의 전 단계일 뿐이다. 그것의 인위적 수법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일체 의 개별 언어로부터 해방된 알파벳 문자는 여전히 소리 일반 또는 언어 일반으로 귀결된다. 그것은 음성 문자로서 언어 주체 일반, 초월적 화자의 현전과,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 생명의 자체로의 현전으로서의 목소리와 맺는 본질적 관계를 간직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음성 문자는 절대적인 악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의 철자

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을 예고한다. 알파벳 문자가 자음적 냉각과 더불어 진보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음성 언어의 빙결과 영 도를 예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모음의 소멸과 사어 문자가 바 로 그것이다. 모음보다 문자 언어로 더 잘 써지는 자음은· 보편적 문 자인 대수학 속에서 이러한 목소리의 종말에 착수한다. 자음만으로 문자 언어를 써서 (하지만 구두 언어로는 말할 수 없는) 더 명료한 언어를 만드는 것은 용이할 것이다. 대수학은 이러한 언어 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 하나의 언어가 그 발음보다는 철자법으로 더 명료할 때, 그것은 구어보다는 문자 언어로 쓰이는 기호이다. 이집트 학자들의 언어가 바로 그랬을 것이다. 우리들에게 있어 사어는 그런 것이다. 불필요한 자음으로 채우는 언어에서, 문자 언어는 음성 언어에 선행한 것 같다. 폴란드어가 이 경우의 일례가 된다고 누가 믿겠는 가 ?(7 장) 보편 기호학, 구어와 일체의 관계를 끊고 순전히 계약적으로 되 어버린 문자 언어, 바로 그것이 절대적인 악이 될 것이다. 『포르 르와얄 논리 Log iqu e de Por t -Ro ya l 』 , 로크의 『시 론』, 말브랑슈, 데카르트와 더불어 라이프니츠는 루소의 초기의 철학 독서들 중의 하나였다 .28) 그는 『인간 언어 기원론』에서는 인용되고 있지 않지 만, 『발음』에 관한 한 단편에서 인용되고 있다. 『에밀』의 〈레이몽 룰의 예술〉 (575 쪽 )13 에서만큼이나 경계하면서말이다. 모든 언어는 말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문자 언어는 음성 언어에 대한 대리 보충으로만 쓰일 뿐이다. 만약 문자로만 쓰미고 말로 할 수 없는, 과학에만 고유한 언어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문명 생활에서

28) 『 고백록 』 , 237 쪽.

580 2 부 자연, 문화, 에크리튀르

는 결코 사용되지 않는다. 대수학이 그런 것이며, 라이프니츠가 추구했 던 것도 틀림없이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 언어는 예술가보다는 형이상학자에게 더 편리했을 것이다.(1 249 쪽) 따라서 과학이라는 보편 문자는 절대적으로 소외될 것이다. 대 리자의 자율성은 터무니없게 된다. 그것은 그것의 한계점에 도달했 고 일체의 대리자, 살아 있는기원, 살아 있는 현재와 관계를 끊었 다. 그것에서 대리 보충성은 완결된다(죽 텅빈다). 단순히 시니피 앙도 아니고 대리자도 아닌 대리 보충은, 시니피에 또는 피대리자 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며, 이것은 의미 작용과 대리 표상이란 개 념에 의해서, 또는 〈시니피앙〉이나 〈대리자〉란 단어들의 통사의 명 령을 받는댜 대리 보충은 하나의 결함, 비시니피에 또는 비대리 자, 비현전의 자리에 온다• 그것 이전에는 어떤 현재도 없고, 따라 서 그것은 그 자체, 즉 또 다른 대리 보충에 의해서만 선행될 뿐이 다. 대리 보충은 언제나 하나의 대리 보충에 대한 대리 보충이다• 대리 보충에서 그것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보게 된다. 죽 근 원에 대리 보충이 존재함을 인정해야만 한다. 아울러 그것은 언제나 대수학적이다. 대리 보충에 있어서, 가시 적 시니피앙인 문자는 언제나 목소리와 떨어져서 그것을 대리하기 시작한다. 과학의 비음성적이며 보편적인 문자는 또한 이런 의미에 서 하나의 정리이다. 셈을 하기 위해서는 쳐다보는 것으로 족하다. 라이프니츠가 다음과 같이 말했듯이말이다. 〈이것을 소리에 결부시 키는 것은 필요치 않다 ad rocem refe r ri n on est necesse.> 이러한 침묵의 치명적인 시선을 통해 과학과 정치의 공범이 교 환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근대 정치학의 공모가 태동된다. 〈문자 는 살상을 한다.〉(『에밀』, 226 쪽 )14 도시 어디에서 시선과 목소리의 이 상실된 통일체를 · 찾을 것인

4 대리 보충으로부터 근원으로 : 문자 언어 이론 581

가? 어떤 공간에서 서로가 서로의 육성을 들을 수 있을까? 구경거 리를 담론과 연결시키는 극장을 고대의 만장 일치 집회와 교체할 수 있을까?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대중에게 책으로만 말했을 뿐이 다. 대중의 관심을 끄는 무엇인가를 살아 있는 목소리로 말하는 곳 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극장이다.〉( 『 발음 』 , 1250 쪽) 그러나 연극 자체는 대리 표상이라는 근본적인 악에 의해서 조 작된다. 연극은 이러한 타락 자체이다. 왜냐하면 연극 장면은 바로 그 자체에 의해서 위협받기 때문이다. 전시, 상연, 앞에 놓는 것 (독일어 Dars t ell 山追의 번역)의 의미에서는, 연극 상연은 대리 보 충적인 재현전화에 의해서 오염된다. 이것은 대리 표상의 구조, 연 극 장면의 공간에 각인되어 있다. 루소가 궁극적으로 비판하는 것 은 (그 점을 혼동하지 말자) 구경거리의 내용이 아니라 비록 그것 역시 비판하고 있지만, 그것에 의해 대리되는 의미, 즉 대리 표상 그 자체이다. 정치적 질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위협은 대리자의 형 식을취한다.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는 실제로 연극이 상연하는 내용 속 에서 그것의 대리 표상된 것 속에서 고려한 연극의 역효과를 상기 한 후에, 대리 표상과 피대리 표상체를 비난한다. 〈대리 피표상체 들과 관련된 연극의 이러한 효과 이의에도. 여전히 필연적인 다른 효과들이 있거니와 그것은 직접적으로 무대와 대리되는 인물들과 관계를 맺는다. 이미 인용한 제네바 사람들은 사치 , 분장, 낭비 동 의 취향을 이 대리된 인물들에 전가시키고 있으며, 그들은 그러한 취향이 우리들에게 전파될까봐 우려하고 있다.〉 29 ) 따라서 불멸성은 대리자의 위상에 결부된다. 악은 그것의 자연스러운 경도이다. 대 리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외적이며 인위적인 시니피앙과 기호의 타락적 사용에 대해 취향을 갖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사 29) Ga rnier 편 앞의 책, 168 쪽 . 강조는 필자의 것임.

치, 치장, 그리고 낭비 탕진은 여기저기서 도래한 시니피앙이 아니 다. 그것은 시니피앙 또는 대리자의 역효과일 뿐이다. 두 가지 파급 결과가 생겨난다. 첫째, 두 종류의 공적인 인물들과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두 사람 이 있댜 한쪽은 연설자 또는 설교자, 다른 한쪽은 연기 배우이다. 전자는 자기 자신을 대리하고, 거기에서 대리하는 자와 대리되는 자는 한 사람뿐이다. 반면에, 연기인은 대리하는 것과 대리되는 것 의 분열 속에서 탄생한다. 알파벳 시니피앙처럼, 문자처럼, 연기자 자신은 어떤 특수한 언어에 의해서도 영감을 받지 않고 활기를 얻 지 못한다. 그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체험을 거의 안하며 그의 목소리를 빌려줄 뿐이다. 그는 대변자일 뿐이다. 물론, 연설가 또는 설교자와 연기자 사이의 차이는, 전자가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고 그들이 말을 해야만 하는 것을 말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댜 만약 그들이 그들의 말에 윤리적 책임을 지 지 않는다면, 그들은 겨우 연기 배우가 될 뿐인데, 그 이유는 배우 자신이 생각지도 않는 것을 말하는 임무를 스스로에게 부과하기 때문이댜 연설가, 설교자는 배우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행동한 다. 그러나 그 차이는 매우 크다. 연설가가 자신을 내보일 때, 그것은 말을 하기 위해서이지 구경거리를 만들어주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만을 대표할 뿐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역할만을 맡을 뿐이며, 자기 자신의 이름만으로 말을 하며, 그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거나 또 그것만을 말해야 한다. 그 사람과 그가 맡는 인물은 똑같은 존재이며, 그 는 자신의 자리에 있다• 그는 자신의 상태의 기능을 완수하는 완전히 다른 시민의 경우에 속한다. 하지만 무대 위의 배우는 자신의 감정이 아닌 다른 감정들을 표출하고, 그에게 말을 하도록 하는 것만을 말하

며, 빈번히 가상의 존재를 대리하고 자신을 절멸시키면서, 그의 주인공 과 더불어 자신을 폐기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자신의 망각 속에 서 무엇인가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오직 관객들의 노리개가 되기 위 한 것뿐이다 .(187 쪽. 강조는 필자의 것임) 이것은 최상의 경우이다. 배우는 그가 구현하는 역할을 받아들· 이고 그것을 사랑한다• 하지만 상황은 더욱더 악화될 수 있다. 〈그 둘 자신에 의해서 너무나 많은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들이 닮기도 싫은 사람들을 억지로 대리할 정도까지 타락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대리자와 피대리자의 동일회는· 두 개의 노선에 따라서 완결될 수 있다. 최상의 노선은 대리자의 소거와 피대리자 본인의 현전(연 설가, 설교자)이다. 또는 최상의 경우(피대리자가 없는 대리자)는 단 순한 배우가 아니라 파리 사교계 사람들의 특정 사회에 의해서 밝 혀진다. 이 모임은 이 사회의 연극을 대리하는 연극, 즉 연극에 관 한 연극이라 할 수 있는 모종의 연극에서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스스로를 소외시킨다. 〈오직 그들을 위해서만 구경거리가 만들어진 다. 그들은 극장 가운데에서 피대리자인 동시에 대리자로서 자기를 보여준다. 그들은 무대 위의 인물이며 관객석에 있는 배우이다.〉 (『누벨 엘로이즈』, 252 쪽) 따라서 대리자 속에서 피대리자의 총체 적 소외는 사회적 협약의 부정적인 측면이다. 이 두 경우 모두 피 대리자는 아무런 유보 조건 없이 그의 대리 속에서 자신을 상실시 킬 때 재소유화된다.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갈라놓는 포착되지 않는 차이, 그리고 영원히 타락하는 연극의 진정한 사회 적 조약을 어떤 술어들로써 형식적 정의를 내릴 수 있는가? 즉 연 극으로 얼룩진 사회에 대해서말이다. 둘째, 시니피앙은 축제의 죽음이다. 이를테면 공적인 구경거리의

584 2 부 자연, 문화, 에크리튀르

순박함, 좋은 축제, 가축 물통 주위에서의 춤 등은 대리 표상이 없 는 연극을 개방시킬 것이다. 또는 구경거리가 없는 연극 장면, 즉 연극이 없는, 그 어떤 것과도 관계 없는 장면이다. 가시성(방금 전 에는 정리, 여기에서는 연극)은 언제나 그 자체로부터 살아 있는 목 소리를 분리시키면서 그것을 손상시킨다. 하지만 아무것과도 상관없는 연극 장면은 무엇인가? 그것은 관 객이 자신을 구경거리로 만들면서 더 이상 보는 사람도 아니고 엿 보는 사람도 아니며, 그 자신 속에서 배우와 관객, 대리자와 피대 리자, 쳐다보는 대상과 쳐다보는 주체 사이의 차이를 소거시키는 것이다. 이 차이와 더불어 일련의 대립들은 연쇄 고리로 해체된다• 현전은 충만할 것이지만, 하나의 경험적 개체 또는 전위에 또는 배 후에 나타나는 에이도스처럼 직관으로 보이고 주어지는 현전하는 대상의 방식으로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으로의 현전의 친밀 성, 자기 지신으로의 근접성과 · 고유성의 의식 또는 감정으로서이 다. 이러한 공적인 축제는 자유롭게 법을 제정하는 국민의 정치 집 회와 유사한 형태를 갖게 된다. 대리적 차이/지연은 주권의 자기 지신으로의 현전 속에서 소실될 것이다. 〈집단 축제의 열광은 『사 회 계약론』이 말하는 일반 의지와 동일한 구조를 갖는다. 공동체의 환희에 대한 기술은 일반 의지의 서정적 양상을 우리에게 제공한 다. 그것은 일요일의 나들이옷을 입고 취하는 양상이다.〉 30) 사람들 은 이 텍스트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인간 언어 기원론』에서 축 제의 언급을 상기시킨다. 대리 표상이란 단어 속에 연결된 모든 의 미(지연, 대표단, 그것의 기호 또는 개념 속에서 현재의 반복, 구경거 리 또는 보이는 물체의 면제 또는 대립 등)와 더불어서 대리 표상을 30) J. Sta r obin s ki. La tra nspa rence J'ob sta c le, 119 쪽. 우리는 아울러 축제 (114 쪽)에 할애된 장 모두를 참조하거니와 스타로빈스키는 〈투명함의 세계〉와 〈불투명성의 세계〉의 대립으로서 축제를 연극과 대립시킨다 .15

사라지게 하려는 욕망을 인지하기 위해서 그 텍스트를 함께 읽어 보자. 무엇이라고! 공화국에서는 어떤 구경거리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오히려 더 많은 구경거리가 있어야 한다. 구경거리들이 태어난 것은 공화국에서였고, 그 구경거리들의 한복판 속에서 진정한 축제 분위기 가 더불어 공화국을 빛낸다. 이러한 순수한 구경거리들은 야의에서 진행될 것이며, 그 어떤 〈방종한 것〉이나 〈돈에 욕심을 품은〉 것을 갖지 않을 것이다• 기 호, 화폐, 술수, 수동성, 맹종 따위는 배제될 것이다. 그 누구도 다 른 누구를 이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 누구도 다른 누구를 위한 대 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더 이상 볼 것도 없을 것 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구경거리의 대상들은 무엇이 되는가? 거기서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이를테면 아무것도 아니다. 자유와 더불어서, 윤택함이 지배하는 도처에서는 안락함이 지배한다. 광장 한복판에, 꽃 들로 가득한 말뚝을 박고 거기에 대중을 모아라. 그러면 당신들은 축 제를 갖게 될 것이다; 더 잘해봐라. 관객들을 구경거리로 만들어라. 그 들을 배우들 그 자체로 만들어라. 모두가 하나로 결합되기 위해서는 각자가 타인들 속에서 자기를 보고 스스로를 사랑하게 하라•(『달랑베 르에게 보내는 편지』, 224-225 쪽) 대상이 없는 축제란 동시에 희생도, 소비도, 놀이도 없는 축제임 울 우리는 지적해야 한다. 특히 가면이 없는 축제는 그러하다 .3 1) 31) 주지하다시피 루소는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로부터 『누벨 엘로이

즈 』 에 이르기까지 가면을 비난한다. 교육의 임무 중의 하나는 아이들에 대 해서 가면의 효과를 중화시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잊지 말자) 〈이 모든 아이들은 가면을 겁내기 때문이다 . 〉( 『 에밀 』 , 43 쪽) 문자의 비난은 또한 (자명하게) 가면에 대한 모호한 비난이다.

비록 야외에서 벌어진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바깥쪽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자신과의 순수한 관계 속에서 지속된다. 〈각자는 타인 속에서 자기 모습을 보고 자신을 사랑한다.〉 일정한 방식으로 그것은 폐쇄되고 보호된다. 반면에, 극장의 방은 놀이와 대리의 우 회에 의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되고, 차이/지연 작용에 의해 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고 분열되어 그 자체 가운데서 외부 를 증대시킨다. 민중의 축제에는 개벌적 놀이들은 있지만 결코 총 칭적 놀이는 없다. 만약 이 단수 명사로 내용의 대체, 현전과 부재 의 교환, 우연과 절대적 위험을 뜻한다면말이다. 이 축제는 죽음과 의 관계를 억압한다. 이것은 폐쇄된 연극의 기술 속에 반드시 연루 되지는 않았다. 이 분석들은 두 가지 의미에서 선회할 수 있다. 어떤 경우든 놀이는 이 점에서 축제에서 부재하고 춤은 결혼으 로의 유도로서 받아들여지고 무도회의 폐막 가운데 포함된다. 그것 이 최소한 축제에 관한 그의 텍스트의 의미를 신중하게 정하기 위 해서 루소가 그것을 종속시키는 해석이다. 물론 루소로 하여금 다 른 것을 말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울러 루소의 텍스트를 복 잡하고 성층화된 구조로서 끊임없이 파악해야 할 것이다. 몇몇 명 제들은, 우리가 일정한 정도까지는 몇 가지 주의를 가지고 자유롭 게 달리 읽었던 다른 명제들의 해석으로 읽힐 수 있다. 루소는 A 라고 말하고, 곧 이어서 우리가 규정한 이유들로 해서, 그는 A 를 B 로 해석한다. 이 점을 인식한 후에, 루소의 텍스트로부터 벗어나 지 않고도 우리는 B 에서 그것의 해석으로부터 A 울 따로 떼어놓고, 루소의 텍스트에 속하지만 그에 의해서 산출되거나 개발되지 않았 던 가능성, 의미의 바탕 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루소는 그러

한 가능성 대신, 의식적이지도 무의식적이지도 않은 제스처로서 가 시적인 동기로 인해 잘라 말하는 것을 선호했다. 가령, 그의 축제 묘사 속에는 앙토냉 아르토의 잔인성의 연극의 의미나 32) 조르주 바타이유에 의해 그 개념들이 제안된 축제와 주권의 의미에서 해 석될 수 있었던 명제들이 있다. 하지만 놀이를 놀이들로, 춤을 무 도회로, 소비를 현전으로 변형시키는 루소 자신에 의해서 이 명제 들은 달리 해석된다.

32) 다른 유사 관계들 가운데 〈말하는· 사람〉에 불과한 코르넬과 라신의 구어 텍스트에 대한 경계심으로서, 〈영국인들을 모방해서〉 〈때때로는 연극 장면 울 표상하는〉 과감성을 보여야 할 것이다(『누벨 엘로이즈 』 , 253 쪽). 하지 만 이러한 접근은 (사람들은 이 점에 회의적이다) 가장 신중하게 조작되어 야 한다. 문맥은 때때로 두 개의 동일한 명제 사이에 무한한 거리를 갖다 놓는다.

어떤 무도회가 문제되는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도 야외(野外)에 대한 찬양을 이해해야 한다. 야외, 그것은 아마 자연일 것이며, 이런 점에서 그것은 교육, 산책, 식물학 등의 주제 들을 통해 루소의 사상을 유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 면, 야외는 목소리의 요소이며 그 어느 것도 중단시킬 수 없는 숨 소리의 자유이다. 야외에서 들릴 수 있는 목소리는 남방의 원칙이 아직까지 자음으로 무성화할 수 없었고 조각 내거나 분절하고 틀 에 따라 격리할 수 없었던 자유로운 목소리요, 명증한 목소리로서 직접 화자에게 이를 수 있다. 야외는 솔직 담백하게 말하는 것이 요, 우회의 부재요, 살아 있는 말 사이에 있는 표상적 중개들의 부 재이다. 그것은 그리스 공동체 도시의 요소로서 〈그것의 가장 중요 한 일은 자유였다.〉 그런데 북방은 야의의 가능성에 한계를 긋는 다. 〈당신들의 거센 기후는 당신이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하게 할 것이며, 따라서 매년 여섯 달 동안은 공공 장소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 당신들의 무성화된 언어가 야외에서는 들릴 수 없다. 당신

들은 자유보다는 이득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추구할 것이며, 노예화 보다 물질적 빈곤함을 두려워하게 된다 .〉 ( 『 사회 계약론 』 , 431 쪽) 한번 더 북방의 영향은 불길한 것이다. 하지만 북방 사람은 북방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북방에서 남방의 풍속을 채택하거나 적용시 키는 것은 순전한 광기이거나 굴종이다(위의 책, 같은 곳). 따라서 북방에서는 또는 겨울에는 대체물을 찾아야 한다. 축제라는 겨울의 대리 보충은 프랑스 사람에게는 결혼할 처녀들을 위한 무도회이다. 루소는 아무런 숨김 없이 그것의 실천을 권한다. 스스로 아무런 거 리낌없이말이다. 아울러 그가 겨울에 관해 말하는 것은 여름에 관 해 생각하는 것을 밝혀주고 있다. 친구들과 사적으로 교제하기 위한 시간이라 할 수 있는 겨울은 공적 인 축제에는 그다지 안성맞춤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온 사람들이 덜 조심스러워 하는 축제의 일종이기를 바란다. 가령, 결혼할 젊은이들 사 이에 벌어지는 무도회 따위이다. 나는, 왜 사람들이 때때로 즐기는 무 도회와 모임에서, 마치 노래 부를 때보다는 춤출 때 더 어려운 일이 있는 것처럼 질겁하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춤과 노래 그 어느 것 도 자연의 영감은 아닐진대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솔직담백한 휴식으 로서 함께 즐기기 위해 결합하도록 운명지어진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범죄였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위해 만들어졌다. 신께선 그 들이 그들의 운명을 걸어갈 것을 원한다. 물론 사회의 모든 관계 중에 서 최초이며 가장 성스러운 관계는 결혼이다 . 3 3 ) 계속 이어지는 교화적인 장문의 담론에 대해서는 글자 한자 한 33) 226 쪽. 『 에밀려 이 단락을 다음 단락과 연계시킬 수 있다 . 〈봄이 오면. 눈을은 생 각녹해지 만보 아인야간 의할 결것이합다은. 〉그 (대57로0 쪽 남 )16아 있다. 모든 계절에 대해서 그 접

자에 주석을 달아야 할 것이다. 하나의 접합점이 모든 논의를 분절 시키고 있다. 현전의 충만한 날은 위험 천만한 대리 보충을 피한 다. 〈환희에 찬 광기가 있는 청춘이 더 위험한 것으로 대체되는 것 울 피하기 위해서, 또 능수 능란하게 조율된 사적 회담이 공공 모 임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줄거움으로 기득한 · 청춘에 쾌락을 허용해야 한다……. 〈순수한 환희는 대낮에 발산되 기를 좋아하지만 사악함은 암흑의 친구이다• 〉 ( 『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 227 쪽) 한편 육체 그 자체를 노출시키는 나체는 옷 따위의 시니피앙, 북방의 대리 보충, 〈능수 능란한 화장〉에 의존하는 것보 다 덜 위험하다. 화장술은 단연코 〈노출만큼의 위험성을 내포하는 데, 노출의 타성화는 처음의 노출 효과룰 무관심이나 싫증으로 바 꾸어 놓을 것이다.〉 〈옷의 뒤범벅이 노출을 외설적으로 만들 때만 비로소 조각이나 그림이 눈을 사로잡는다는 것을 모르는가? 상상 의 중개를 통해 감각은 가장 심한 맹위를 떨친다. 욕망을 자극시키 는 일은 상상력의 몫이다.〉 (232 쪽) 그 효율성이 상상력에서 나오 는 대리 보충의 위험성을 밝히는 데 지각이 아닌 표상(그림)이 선 택되었음을 주목할 일이다. 곧이어, 후대의 오류를 예방하는 결혼 에 대한 이러한 찬양의 한복판에 삽입된 주석에서 루소는 그의 모 순에 하나의 예의만을 둘 뿐이다 . 몇몇 사람이 나의 취향과 글에 대해서 가질 판단들을 때때로 상상해 보는 것은 나에게 유쾌한 일일 것이다• 내 글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 사람은 춤에 미쳤어〉라고 말하는 것을 빼놓지 않을 것이다. 나는 춤추 는 것이 따분하다• 〈이 사람은 연극 보는 것을 고통스러워할거야.〉 나 는 연극을 정열적으로 사랑한다. 〈이 사람은 여자들에게 혐오감을 가 질 사람이야〉 그 점에서 나는 정정당당할 따름이다 .(229 쪽)

이렇게 해서 북방, 겨울, 죽음, 상상력, 대리 표상, 욕망의 자극, 이 모든 계열의 대리 보충적 의미들은 자연적 장소나 고정된 항목 들을 지칭하기보다는 주기성을 지칭한다. 계절 등 시간의 질서 속 에서, 또는 시간 그 자체처럼, 그것들은 현재의 현전이 그 자체와 분리되고 그 자체를 대리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대체 속에서 스스 로를 만들어내는 운동을 말한다. 일종의 절대적 현재(지금), 현재 의 생명, 살아 있는 현재를 특권화시키면서 자기 자신으로의 근접 성으로서 현전의 형이상학이 말살시키려는 것이 바로 그 운동이다. 그런데 대리 표상의 냉혹함은 단지 자기 자신으로의 현전뿐만 아 니라 시간성의 절대적 형식으로서 현재의 기원성과 관계를 끊는다. 이러한 현전의 형이상학온 매번 대리 보충의 운명이 그것을 제 한할 때마다 루소의 텍스트에서 끊임없이 다시 나오고 요약된다. 빼앗긴 현전에 현전의 대리 보충을 첨가해야 할 것이다. 〈이 세계 의 빈곤함에 대한 가장 큰 처방〉은 〈현재 순간 속으로 흡입되는 것〉이라고 『고독한 자들 Les sol it a ir es 』에서 루소는 설파한다. 현 재는 근원적인 것이며, 이 점은 근원의 규정이 언제나 현전의 탄생 임을 의미한다. 그것 이전에는 현전이 없다. 아울러 현전이 자신 속에서 자신을 견지하고 선언하면서 그것의 충만함에 균열을 내고 그의 역사를 짜나갈 때부터 죽음의 고통은 시작된다. 루소가 자신 의 탄생을 기술하듯이, 탄생 일반은 쓰인다. 〈나는 나의 어머니에 게 생명의 빚을 졌다. 나의 탄생은 내 최초의 불행이었다.〉(『고백 록』, 7 쪽) 루소가 본질을 재포착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기원, 권리, 이상적인 한계점 등의 형식 아래에서) 그는 충만한 현전의 지점으로 언제나 우리를 재유도한다. 그는 현재, 현재 있음보다는 현재의 현 전 그 자체를 드러내고 그 자체 안에서 견지되는 바대로의 본질에 더 관심이 있다. 생명으로서, 죽 자기 자신으로의 현전으로서 그것 은 탄생이다. 현재가 자기 자신 속에서 되돌아가기 위해서만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근원의 모든 반복들을 허용하 는 재생은 가능하다. 루소의 담론 및 질문들은 근원의 탄생 또는 재활성화를 예고할 때에만 가능하고. 재생, 부활, 또는 각성은 그 것들의 찰나의 순간 속에서 자기 지신으로 돌아오는 현전의 충만 감을재소유화한다. 근원의 현전성으로의 귀환은 매번 재앙 후에, 최소한 그 재앙이 생명의 질서를 파괴하지 않고 전복시키는 점에서 산출된다. 신의 손가락 하나가 지구의 축을 우주의 축에 기울이면서 세계의 질서 를 전복시키고 〈인간이 사회화될 것〉을 원한 후에 축제는 가능했고 쾌락은 직접적으로 욕망에 현전한다. 〈덴마크의 커다란 개 한 마 리〉가 두번째 『산책』에서 루소를 넘어뜨린 후에, 그를 거꾸로 만든 〈실추〉 이후에(〈내 머리는 나의 다리보다 더 낮은 곳에 있었다〉) 그 가 체험할 수 없었던 〈사건〉을 그가 다시 암송할 때, 그가 두 번이 나 〈나는 나 지신으로 돌아온다〉, 〈나는 정신을 차린다〉라고 말하 는 순간에 멀어지는 것을 우리에게 설명할 때, 그것은 언제나 동일 한 모델에 따라 기술하는 순수한 현전에 대한 깨어남으로서의 각 성이다• 그것은 예고도, 추억도, 비교도, 구별도, 분절도, 상황도 아니다. 상상력, 기억, 그리고 기호들은 소실된다. 물리적 또는 심 리적인 전경 속에서 모든 이정표는 자연적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처한 상태는 너무나 생경한 것이어서 그것에 관 한 묘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밤은 깊어 갔다. 나는 하늘과 몇 개의 별, 그리고 약간의 풀잎을 보 았다. 이 최초의 감각은 기가 막힌 순간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그것 을 통해서만 나를 느끼고 있었다• 나는 생명을 향한 이 순간에 탄생했 고. 가벼운 존재로서 내가 지각했던 모든 물체들을 채워넣을 것 같았 다. 현재의 모든 순간에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나라는

개체에 대한 어떤 분명한 개념도 없고 나에게 일어나는 것에 대한 최 소한의 생각도 갖고 있지 못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도 몰랐다. 나는 아픔도, 두려움도, 초조감도 느끼지 못했다. 우물가 주위나 이즐 드 생 피에르에서처럼, 순수한 현전의 환희 는 일정한 유출에 대한 향락이다. 태어나는 현전, 생명의 기원, 피 와 불의 닮은꼴. 루소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나는 마치 시냇물이 호르는 것을 보는 것처럼 내 피가 흐르는 것을 보지만, 이 피가 나의 몸에 속한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나는 나의 모든 존재에서 하나의 평온함을 느꼈으며, 매번 그것을 상기할 때마다 익히 알려진 쾌락의 활동 속에서는 그러한 평온함에 견줄 만한 것을 나는 찾지 못한다 .(1005 쪽) 실제로 더 원형적인 무엇이 있겠는가? 유일한 쾌락인 이 쾌락은 동시에 고유하게 상상될 수 없다. 상상력의 역설은 그런 것이다. 그 것만이 욕망을 각성시키거나 자극하며, 동일한 이유로 동일한 운동 속에서 그것은 현전을 넘쳐흐르거나 분화시킨다. 루소는 현전에 대 한 각성과 상상의 조작을 분리시키기를 원하거니와 그는 언제나 이러한 불가능한 한계점으로 힘을 기울인다. 왜냐하면 현전의 각성 은 우리를 직접적으로 현전의 바깥.으로 투영시키거나 내던져버리 며,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장래를 예견하고, 준비하는 강렬한 관 심에 의해 도입되며 이런 관심은 이러한 현재로부터 멀리 우리를 집어던지고 그것은 자연의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대화 록』 )34) 대리 표상의 기능인 상상력은 시간적 기능이며 현재의 지나 침이며 현전의 잉여물들의 경제이다. 상상의 잠 속에서만 유일하며 34) 또한 『 에밀 』 , 66-69 쪽 참조 .

충만한 현재가 있다. (그렇다면 현전이 있는가?) 〈잠자고 있는 상상 력은 그것의 존재를 상이한 두 개의 시간으로 확장시킬 수 없다.〉 ( 『 에밀』, 69 쪽) 상상력이 나타날 때면 죽음보다 더 최악의 경우인 기호와 신탁의 가치와 문자가 돌출한다. 서인도 제도에서 하찮은 불상사가 일어나도 얼마나 많은 상인들이 파리에서 아우성을 치고 야단법석을 떠는가? …… 자금 내 앞에 신선 하고 쾌활하며 원기왕성한 건장한 남자가 있다. …… 그의 존재만으로 도 기쁨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이다. …… 그런데 우체국에서 한 장의 편지가 날아온다. …… 그는 편지를 읽고 실신해 쓰러진다. 제정신이 들자 그는 끔찍한 경련을 일으키며 괴로워한다. 터무니없는 일이다! 도대체 그 종이쪼가리가 자기에게 무슨 해를 끼쳤는가? 그것이 자기의 수족이라도 떼어갔단 말인가? …… 우리는 현재 있는 곳에서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지금 있지 않는 곳에서만 있을 뿐이다. 우리 둘 삶의 근거가 온전하게 남아 있기 위해서 그처럼 죽음에 대해서 커 다란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 에밀.!1, 67 - 68 쪽) 루소 자신은 이러한 의미들의 연쇄(본질, 근원, 현전, 탄생, 재탄 생)를 에너지로서의 존재자의 고전적인 형이상학에서 분절시키고 있으며 그것은 행동하는 존재(에네르게이아)로서 현재로부터 존재 와 시간 사이의 관계들을 포함한다. 희망이라는 초조함으로부터 해방되어서, 또 조금씩 욕망의 초조감을 잃어버릴 것을 확신하면서, 또 과거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터득 하면서 나는 새롭게 삶을 살기 시작하는 사람의 상태에 들어가려고 애 썼다. 나 스스로에게 말하기를 실제로 우리들은 오직 시작할 뿐이며 우 리둘의 존재에 있어서 오직 현재 순간들의 연속 관계만이 있을 뿐이며 그

최초의 순간은 언제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순간이다. 우리는 우리들 삶의 매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또 죽는다. 그 결과 (그것은 하나의 연관성이며 루소는 그것을 생략하기 위해 서 모든 것을 다한다) 현전이라는 본질 그 자체는 만약 또 다른 현 전 속에서 언제나 그것이 반복된다면, 기원적으로 현전 그 자체 속 에서 대리 표상의 구조를 개방시킨다. 아울러 본질이 그 현전이라 면, 현전의 본질도 본질의 현전도 없다. 거기에는 대리 표상의 놀 이가 있으며 이 관계 또는 이 여파를 생략하면서 루소는 그 놀이 를 놀이 바깥쪽에다 갖다 놓는다. 그는 생략한다. 이것은 놀이를 하는 또 다른 방식이며, 또는 사전들이 말하듯, 업신여기는 또 다 른 방식이다. 그런 식으로 생략된 것은 바로 대리 표상이 현전에 갑작스레 돌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 그것은 그것의 경험, 욕 망, 그리고 환희의 조건 그 자체로서 현전을 에워싸고 있다. 현전 의 내적인 이분화, 죽 그것의 이분화는 현전의 있는 그대로, 죽 환 멸 속에서 기쁨을 빼앗아가면서 나타나게 하며, 또 있는 그대로 사 라지게 한다.- 이것은 대리 표상을 바깥쪽으로 놓으면서, 곧 바깥쪽 울 바깥쪽에 갖다 놓는 것이다. 루소는 현전의 대리 보충을 순수하 며 단순한 첨가, 죽 하나의 우발로 치부하려고 한다. 이렇듯 현전 의 안쪽에서 대리하는 것을 부르고, 이 호소 속에서만, 그리고 그것의 흔적 속에서만 성립되는 것을 생략하기를 갈망하면서말이다. 바로 거기에서 문자가 나온다. 문자 언어는 대리적 반복의 악이 요, 욕망의 길을 열어놓고 환희를 다시 간직하려는 이중성이다. 문 학적 문자 언어인 『고백록』의 혼적들은 현전의 이러한 이중성을 말하고 있다. 루소는 문자라는 악을 비난하면서도 동시에 문자 속 에서 구원을 추구하고 있다. 문자는 상징적으로 환희를 반복한다. 그리고 환희가 오직 일정한 반복 속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문자

는 그것을 상기하면서 또한 그것을 부여한다. 루소는 쾌락이 아닌 고백을 슬그머니 생략한다. 우리는 이 텍스트들을 기억하고 있다 ( 〈 나는 즐거웠다고 말하면서 나는 여전히 즐거워한다… … . 〉 〈 나는 더 이상 없는 쾌락을 여전히 즐긴다……. 〉 〈 끊임없이 지나가버린 행복에 연연해 하면서 나는 그 행복들을 상기하고 두루 생각한다. 이 를 테면 내가 원할 때면 또 다시 그 행복을 즐길 수 있을 정도까지말이다 〉 ). 문자는 환희를 (이 단어의 모든 의미에서) 대리 표상한다. 그것은 환희를 조작하고, 그것을 없게 만들거나 있게 만든다. 그것은 놀이 이다. 아울러 그것은 루소가 그것을 비난하면서 실천하는 반복된 환희의 경우이기 때문이다. 〈나는 문자 언어를 통해 나에게 올 수 있는 것들[〈매혹적인 관조〉]을 고정시킬 것이다. 매번 그것들을 내 가 다시 읽을 때마다 나에게 환희를 가져다 줄 것이다. 〉 ( 『 몽상록 』 , 999 쪽) 이 모든 우회는 (외재적 욕망이 거기에 부여되지 않는 한) 라이프 니츠의 보편 문자가 환희의 죽음 자체룰 표상한다는 사실을 지적 하는 데 필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대리 표상체의 지나침을 한계점 까지 몰고 간다. 아무리 추상적이고 자의적인 음성 문자라 하더라 도 그것은 표상된 목소리의 현전, 일반적으로 가능한 현전, 따라서 모종의 정념의 현전 등과 맺은 관계를 보존했다. 소리와 근본적으 로 관계를 끊은 문자 언어는 아마도 과학 기계 중에서 가장 합리 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문자 언어는 더 이상 어떤 욕망에도 부응하지 않으며 그것은 욕망에 대한 죽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 미 목소리 속에서 문자와 기계로서 조작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피 대리 표상체 없이, 또는 자연적으로 그것과 연결되는 피대리 표상 체의 질서 없이, 순수 상태로 남아 있는 대리 표상체이다. 이런 이 유에서 순수한 계약성에서는 순수한 상태에서 언제나 자연과 계약 을 뒤범벅으로 만드는 〈문명 생활〉 속에서 쓰이는 것이 정지된다.

계약의 완벽성은 여기에서 지나침에 맞닿는다. 그것은 죽음이요, 치안 유지의 완전한 소외이다. 루소의 시각에서 볼 때, 문자적 소 외의 목적론은 과학적 또는 테크닉한 문자의 모습을 띠지만 도처 에서, 심지어 〈 과학 〉 과 〈기술〉에 할애된 영역들 밖에서도 활동할 수 있다. 신화, 특히 이집트 신화에서 과학과 기술의 신이 문자의 신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또 루소가 『 과학과 예술에 대한 담 론 』 에서 비난하고 있는 것이 (플러톤은 이미 『페드로 』 의 끝 부분에서 문자의 창안을 비난했다) 바로 그것(토트, 테우트, 테우투스 또는 그 의 짝인 그리스의 술책, 상업, 도둑둘의 신 헤르메스)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간들의 휴식의 적수가 되는 신이 과학의 창안자였다는 것은 이집 트에서 그리스로 이어진 오랜 전통이었다. * …… 실제로 전세계의 역 사 기록들을 뒤적이든 철학적인 연구들을 통해 불확실한 연대기를 대 리하든 간에, 인간의 지식에 있어서 원하는 관념에 부응하는 기원을 찾지 못한다……. 그것들의 기원의 결핍은 너무 그것들의 대상들 속에 서만 그 자취가 추적되었다……. * 사람들은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비유를 쉽게 납득한다. 코카스에 그를 못박은 그리스 사람들은,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의 신 테우투스를 생각했던 것보다 우호적으로 그를 생각했을 것 같지 않다 .(12 쪽) 근원으로서의 대리 보충 〈문자에 관하여〉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장의 마지막 쪽에서, 문 자 언어와 문자 언어의 역사에 대한 평가적인 제시는 문자의 절대 적 외재성을 선언하지만 언어에 있어서 문자 언어의 원칙의 내재성

을 기술한다. 바깥쪽의 악(그것은 바깥쪽에서 오지만 이를테면 똑같 이 또는 정반대로 바깥쪽으로 끌어낸다)은 그것의 말소 원칙과 그 자체의 죽음과의 관계로서 살아 있는 음성 언어의 심장부에 놓여 있다. 달리 말해서, 루소가 바깥쪽이라고 생각했을 것의 내재성을 보이는 것으로 충분하지도 않으며 또 그것이 문제의 관건도 아니 댜 문제는 차라리 외재성의 힘을, 내재성, 음성 언어, 기호화된 의 미, 있는 그대로의 현전 등을 성립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 이다. 바로 방금 전에 우리가 치명적인 대리 표상적인 중복 이중화 가 그 자체에 첨가되지 않고 살아 있는 현재를 성립시켰다고 말한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또는 오히려 그것에 첨가되면서 역설적 으로 그것을 성립시킨다. 따라서 문제의 관건은 근원적 대리 보충 이다. 이러한 터무니없는 표현이 위험 천만하고, 또 그것이 고전 논리에서는 도저히 수용될 수 없을지라도말이다. 결핍된 근원을 대 리 보충하지만 파생되지 않은, 이를테면 근원의 대리 보충, 이러한 대리 보충은 작품을 두고 말하듯이, 근원(원본)에 속한다. 이렇게 해서 문자 언어의 절대적 이 E 망이 바깥쪽에서부터 안쪽 으로 살아 있는 음성 언어를 촉발시킬 수 있다는 것, 죽 그것을 변 질시킬 수 있 E 는· 것을 이해한다. 우리가 보았듯이 발전의 불평등성 과 구조적 상관 관계를 맺고 있는데도 문자 언어는 독립된 역사를 가지면서 음성 언어의 역사를 표시한다. 비록 그것이 〈또 다른 본 질의 필요 욕구에서〉 〈민족들의 지속과는 완전히 독립된 상황에 따라〉 탄생되었다고 할지라도, 비록 이 필요 욕구들이 〈결코 일어 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절대적 우연성의 침입은 본질적 인 역사의 안쪽을 규정했고 생명의 내적인 통일성을 촉발시켰으며, 액면 그대로 그것을 오염시켰다. 본질성을 갖지 않는 것이 대리 보 충의 기묘한 본질이다. 그런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 다. 액면 그대로라면 그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결코

여기 지금 현전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현전한다면. 다른 것을 대신해서 지금의 자리를 대신하는 대리 보충은 지금 있는 그대로 의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언어의 살아 있는 근원을 변질시키는 일은(〈언어롤 고정시켜야 하는 문자 언어는 바로 그것을 변질시킨다. 즉 그것은 낱말이 아니라 언어의 특질을 변화시킨다〉) 일어나지 않았 다. 그 효과로 판단하자면 없음 이하의 것은 없음 이상의 것이다. 대리 보충은 현전도 부재도 아니다. 어떤 존재론도 대리 보충의 조 작을 생각할 수 없다. 소쉬르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루소는 문자 언어 체계의 의재성 과 동시에, 언어의 골격에서 그 증상들을 추출해 내는 불길한 효과 를 지속시킨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가? 그렇다. 우리가 외재성의 내재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것은 곧 윤리적 평가를 폐기시키고 에크리튀르를 선과 악을 넘어서서 생각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특히 고전적인 로고스, 동일성 논리, 존재론, 현 전과 부재의 대립,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대립, 심지어는 변증법에서조차 대리 보충성의 운동을 공식화시킬 수 없는 불기능· 성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최소한 영적 또는 유물론 적 형이상학이 늘 그렇게 했듯이, 현전과 재소유화의 지평 속에서 그것을 규정한다면말이다. 물론 이러한 불가능성의 지칭은 오직 하 나의 첨단을 통해서만 형이상학의 언어를 회피할 수 있다. 그 나머 지에 대해서는 그것이 해체하는 논리 속에서 그것의 방편을 캐야 한다. 대체물이 또 다른 대체물로 대체되는 순간부터 대체에서는 더 이상 악을 볼 수 없다. 바로 『인간 언어 기원론』이 기술하는 것이 그것이 아닌가? 〈문자 언어는 표현을 정확성으로 대체시킨다.〉 표 현은 정서와 정념의 표현이다• 정념은 언어의 기원에 있다. 죽 표 현은 어조와 힘으로 표시된 노래를 대체한 음성 언어의 표현이다.

어조와 힘은 현전하는 목소리를 뜻한다. 그것은 개념에 선행하며 생경한 것이다. 다른 한편 그것들은 모음과 언어의 비자음적인 모 음적 요소에 결부된댜 표현력은 모음적 소리로만 귀결되며 , 그때 비로소 주체는 그의 정념을 발언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주체가 더 이상 없을 때는 힘 , 어조, 억양은 개념 속에서 상실된다. 문자로 쓸 때는 〈악센트 부호로써〉 억양을 대리해 보려고 하지만 헛된 일 이다. 우리는 법칙의 일반성에 종속된다. 〈문자를 쓰면서 사람들은 공통된 의미에서 모든 단어들을 취해야만 한다. 그러나 말하는 사 람은 어조로써 그 어의롤 변화시키고, 그의 마음에 드는 대로 그것 들을 규정한다. 명백한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방해를 받지 않고 힘 에 더 많은 것을 부여한다. 문자 언어로 쓰는 언어가 , 오직 말로만 쓰이는 언어의 생동감을 간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문자 언어는 어조가 없다• 주체의 자리는 다른 주체에 의해서 취해지며 탈취된다. 오직 단 한번만 의미를 하고 〈그것이 나타난 곳에서만 오직 고유하게 남아 있는〉 음성 언어로 말해진 문장은 그것이 문자 언어로 쓰이는 순간부터 그것의 장소와 고유 한 의미를 상실한다. 〈음성 언어를 대체하기 위해서 취하는- 수단들 은 문자 언어를 확장시키고 책들을 담론 속에 담으면서 음성 언어 그 자체를 쇠약하게 한다.〉 만약 루소가 〈사람들은 소리가 아닌 목소리들을 쓴다〉고 말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목소리가 바로 문자 언어를, 즉 자음과 분절을 가능하게 하는 그 자체에 의해서 소리와 구분되기 때문이 다. 자음과 분절은 그 자체만을 대체할 뿐이다 . 악센트를 대체하는 분절은 여러 언어의 기원이다• 문자 언어에 의한 변질은 기원적인 외재성이다. 그것은 언어의 기원이다. 루소는 그것을 명시적으로 선언하지 않고 기술할 뿐이다. 금지 규정을 어기고 몰래말이다. 자음 원칙 없는 음성 언어, 죽 루소에 따르면 일체의 문자 언어

로부터 보호받은 음성 언어는 음성 언어가 될 수 없다 . 35) 그것은 미분절된 순전히 자연적인 울부짖는 소리라는 허구적인 한계점에 서 지속이 될 것이다. 그 반대로 순수한 자음, 순수한 분절에서 나 오는 음성 언어는 순수한 문자 대수학 또는 사어가 될 것이다• 따 라서 음성 언어의 죽음은 언어의 지평이며 기원이다. 하지만 그것 의 외적인 가장자리에 자리잡지 않는 기원이며 지평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앞으로 올 현전도 아니고 지나간 현전도 아닌 죽음은, 음성 언어의 안쪽을 그것의 흔적, 예비 저장, 내적이며 외적인 차 이, 즉 그것의 대리 보충으로서 조작한다.

35) 루소는 미분절된 언어롤 꿈꾸고 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언어의 기원을 부르짖는 소리로부터 분절로의 이행으로 묘사한다. 그에게 분절과 한 짝을 이루는 자음은 소리의 생성 언어이며 자연적인 울림의 음성적 생성이다. 이를테면 소리를 대립 속에 각인시키면서 거기에 언어학적 변별성의 가능 성을 부여하는 것은 자음이다. 야콥슨은 통상적인 편견에 반기를 들고 〈언 어의 획득에 있어서 최초의 모음 대립은 최초의 자음 대립보다 나중에 온 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자음이 이미 변별적 기능을 완수하지만 유일한 모음 하나가 자음의 힘을 빌려 표현적 변이음들을 위해서 사용되는 일정한 단계가 있게 된다. 따라서 자음이 모음 이전에 음소의 가치를 갖고 있음을 깨닫는다.〉 ( Les lois ph on iqu es du lang a ge en fan ti n et leur pla ce dans la ph onolog ie gen erale, Selecte d Writ ing s I . 325 쪽)

그러나 루소는 음성 언어 이전에, 그리고 음성 언어 안에 있는 이러한 에크리튀르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현전의 형이상학에 그가 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루소는 생명에 대한 죽음의, 선에 대한 악 의, 현전에 대한 대리 표상의, 시니피에에 대한 시니피앙의, 피대 리 표상체에 대한 대리 표상체의, 얼굴에 대한 가면의, 음성 언어 에 대한 문자 언어의 단순한 외재성을 꿈꾸었다. 그러나 이 모든 대립은 도리 없이 이러한 형이상학 속에 뿌리를 박고 있다. 루소는 그 대립들을 사용하면서, 역전을 통해서만, 즉 추인을 통해서만 조 작할 수 있다. 대리 보충은 이 술어들 중의 그 어느 것도 아니다. 특히 그것은 더 이상 시니피에보다는 시니피앙, 현전보다는 대리

표상체, 음성 언어보다는 문자 언어가 아니다. 이 계열의 어떤 술 어들도 차이/지연 또는 대리 보충의 경제를 지배할 수는 없다. 루 소의 꿈은 강제적으로 형이상학 속에 대리 보충을 도입시키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또 무슨 뜻인가? 꿈과 경계심의 대립 역시 형이 상학의 표상이 아닌가? 우리가 지금 그 점을 주지하다시피, 만약 사람들이 글을 쓰면서 꿈을 꿀 수 있다면 꿈은 무엇이며 문자 언 어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만약 꿈의 장면이 언제나 문 자 언어의 장면이라면? 『에밀』의 한 쪽 아래에서, 한번 더, 책, 문 자, 기호들에 대한 경계심을 고취시킨 후(〈그들에게 아무것도 표상 시키지 않는 부호들의 카탈로그가 그들 머리 속에서 어떤 것을 일러 주는 데 쓰이는가?〉)에 이러한 인위적인 기호들의 〈새겨넣기〉를 자 연이라는 책의 〈지워지지 않는 문자〉와 대립시킨 후 루소는 주 하 나를 첨가한다. <…… 사람들은 철학을 위해서 몇몇 악몽의 밤들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혹자는 나 역시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할 것이 다. 나는 그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이 실패한 것을 한다. 나는 내 꿈을 꿈으로서 주며, 그 꿈이 각성한 사람들에게 무 엇인가 쓸모 있는 것을 갖고 있는지 독자에게 탐구하도록 한다.〉 17

【역주】 1. 『 고백록 』 에서 루소는 콩디악과 맺은 교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나는 또 콩디악과 친분을 맺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는 문학에 취향이 없 었지만 오늘날의 그가 있을 수 있기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그 의 잠재성을 파악하고 그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했던 최초의 사람일 것이다. 그는 나와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페라 근방의 장 셍드니 거리에 있 는 내 방에 처박혀 헤지오드 Hes i ode 를 면밀히 검토할 시절 콩디악은 나와 머리를 맞대고 야의에서 저녁 식사를 하곤 했다. 당시 그는 『인간 지식 기 원론 』 을 집팔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 책은 그의 처녀작이었다. 그 책의 집 필이 완료되었을 때 문제는 출판과 배포를 맡을 서점 주인을 찾는 일이었 다. 파리의 서점 주인들은 작가 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교만하고 쌀쌀맞게 굴었다. 더구나 당시 유행과 거리가 먼 형이상학온 별로 매력을 끌 만한 주제가 못 되었다. 나는 디드로에게 콩디악과 그의 책에 대 해서 말을 했다. 그리고 그들을 서로 소개시켜 주었다. 그들은 서로 통했다. 디드로는 콩디악의 원고를 뒤랑 서점 대표가 맡도록 주선해 주었다. 이 위 대한 형이상학자는 최초의 출판 저작에서, 거의 신의 은총이라 할 정도로 큰 돈인 100 에쿠스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돈은 내 도움 없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액수였다. 우리들은 서로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한 주일에 한 번씩 팔레-로얄에서 모여 꽃 바구니로 장식된 호텔에서 함께 저 녁울 들었다. 주말에 만나 오붓한 저녁 식사를 하는 이 모임이 디드로의 마 음에 쏙 들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번번히 약속에 불참했던 디드로가 이 모임에는 한번도 빠지지 않고 나왔기 때문이다.〉 (347 쪽) 2. 콩디악의 『인간 지식의 기원에 관한 시론』의 2 부 1 편은 〈언어의 기원과 진보에 대하여〉란 제목을 달고 있으며 거기서 언어 문제가 집중적으로 거 론된다. 18 세기 프랑스에서 태동했던 언어 사상의 주요 흐름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서들을 참조하라. Pie r re Ju li ard , Ph ilos oph ies of Lang uage s in Eig h te e nth Centu ry, Mouto n , 1970. Je an Rondant, Poete s et Grammair ien s au XVI/le sie c le, Gallim a rd, 1971. S. Auroux, La Sem iot i qu e des Encyc lope dist e s , Payo t, 1979. S. Auroux, Emp irism e et t h 細ri e lin guist i qu e chez Cond illa c,

Condil lac et Jes pro blemes du Jan g a ge , pa r J. Sg n ard, Gene ve . Slatk i n e . 117-219 쪽. 3. 원문의 sans qu 'ils connais s ent !'usage d'aucun s ig ne ……는 avant q u' i ls ……로 수정되어야 한다. 4. 플레야드 판본의 편집자들은 이에 대해 다움과 같은 주 를 달고 있다. 〈 콩디악은 그와 정반대의 견해 를 진술했다. ‘개별적인 사물에 대해 이 름 을 상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일찌감치 일반 용어 를 갖는 것이 필요했다 .'(L'Essa i sur J'or ig ine des connais s ances humain e s II. Paris, 1746, pa rti e II, sect I . 10 장, 102 쪽) 루소는 직접적인 생명과 반성으로 이루어진 사고 사이에 오랜 시간의 간격을 개입시킨다. 일반적 용어의 형성은 루소가 보기엔 긴 시간 동안의 지적인 구축 끝에야, 그리고 원시인들은 구비하고 있지 못한 ‘정신적 도구화'의 도움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 도구는 바로 일반적 관념에 의해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 전집 』, 1326 쪽) 5. 관계절은 여기서 설명적이 아닌 규정적인 가치를 갖는다. 문제의 관건은 언어에 종속되는 특별한 완성 가능성이다. 완성 가능성에 대해서 루소는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며 원초적 속성이라고 말했다 . 죽 완성 가능성은 언 어의 파급 효과가 아니라 언어의 원인이다. 따라서 이 노트가 결부된 텍스 트와 Ii' 인간 언어 기원론 』 의 다음 구절 사이에는 아무 모순도 없다 . 〈 관념 울 소통하려는 묘법울 창안하는 것은 이 소통을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신 체 기관보다는 신체 기관을 사용하는 인간의 고유한 직능에 달려 있다. 계 약 언어는 인간에게만 속한다. 그런 이유에서 인간은 선하든 , 악하든 진보 하고. 동물은 결코 진보하지 못하는 것이다.〉 (1 장) (플레야드 판본 『 전집 』 · 1327 쪽) 6. Consid e rati on sur le go uvernement de Polo gn e(1770 - 1777 년 씌어 1782 년 출판됨) 빌호르스키 Wi el horski 백작이 제공한 당시 폴란드의 제반 조건. 사회 구조, 정치적 절차에 관한 정보를 바탕으로 루소는 이 저작에서 당시 폴란드의 사회적, 정치적 통합성을 보존하고 강화하며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루소의 제안은 교육, 사회 계층 및 입법과 사법 제도의 구성 및 절차, 군대, 국왕의 위상을 포괄하고 있다. . 1764 년 이후 폴란드는 러시아의 압력과 굴레 속에서 뽑힌 왕에 의해 통 치되고 있었다 . 그리고 당시 이 왕권마저 러시아가 홉수할 운명에 처했다. 1768 년 소수의 지주 계층은 러시아의 지배에 저항해 연합 동맹을 세운다. 이때 빌호르스키 백작은 이 동맹의 의장직을 맡는다. 1769 년 이 연합 동

맹은 국회에 폴란드 전역의 모든 구성원을 소집해 의세로부터 폴란드의 자 주 독립을 보장할 수 있는 헌법 제정을 목적으로 빌호르스키에게 루소와 접촉하도록 권한울 위임한다. 이때 루소의 제안은 수용되지 않았으며, 따라 서 그것이 시행되었는지 알 수 없다. 결국 연합 동맹은 존속하지 못하고 1795 년 폴란드는 러시아와 프러시아가 분할 점령한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루소의 이 시론을 입법자의 역할을 정의하기 위한 시도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주요 관심사가 아님이 분명하다 . 실제로 지신들의 공통된 정 체성과 민족의 독립을 갈망하는 폴란드 국민 의 관습, 습성, 그리고 편견 등에 초점을 두며 루소는 개인적이며 특수한 관심과 취향에 핵심적 중요성을 부여한다. 폴란드 국민의 애국심과 충성심 을 강렬하게 하는 것은 이러한 관습과 취향을 집약하려는 필요 욕구에서 나온다는 것이 그의 주요 생각이다. 애국심이야말로 공동의 자유와 평등한 법을 향유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루소는 주장한다. 한편 루소는 폴란 드같이 오랜 전통과 사회적 위계 질서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당장 평등법과 만인의 보호를 보장하는 법을 도입하는 것은 무리라고 인정한다. 귀족은 노예가 시민권을 얻는 것에 반대할 것이며 노예 역시 오직 기존의 ·권위와 통치 체제의 제거를 통해 무정부적 파괴의 가능성을 모색할 것이기 때문이 다. 따라서 법이란 법을 지탱하기 위한 적절한 감정과 정서 없이는 아무것 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예충 역시 자유의 법의 옹호자의 역할을 맡도록 집중적인 교육을 시킨다는 것이다. 제도적으로 루소는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최고의 정치적 걸작이라 찬양하는 연방 정부의 형태를 권장한다. 7. 해당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사회는 인간을 좀더 약하게 하고 있다. 사회는 인간이 자신의 힘에 대해 서 지니는 권리를 수탈할 뿐만 아니라 욕망에 비해 능력 자체를 부~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그 약화와 함께 증가한다. 그리고 어 린이가 어른에 비교해 약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른이 강한 존재이고 어 린이가 약한 존재라 하더라도 그것은 어른이 어린이보다 절대적으로 더 강 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른은 스스로 할 일을 하는 데 비해 어린이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에게는 좀더 많은 의지가 있으며 어린이에게는 좀더 많은 환상이 있게 마련이다. 여기서 환상이라는 말은 참다운 욕망이 아닌 타인의 도움을 통해서만 충족될 수 있는 욕망을 가리키는 말이다. …… 인간적인 모든 편견이나 제도가 자연적인 경향을 손상하지 않는 이상 어린이의 행복도 어른의 행복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자

유를 행사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유년 시절에는 그들의 무력함 때문에 제한된다. 하고자 하는 바를 행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다. 만약 그것이 자기 손으로 충족되기만 한다면말이다. 그것은 자연의 상 태 속에 사는 사람의 경우이다. 만약 욕구가 능력을 넘어선다면 자기가 하 고 싶은 일을 한다고 해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같은 자연 상태 속에 있는 어린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린이는 자연적인 상태에서도 불완전한 자유밖에는 향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이는 사회 상태에서 어른 둘이 누리는 불완전한 자유와 유사하다. 우리는 타인의 도움 없이 지낼 수 없다. 이 점에서는 무력하고 불쌍하기 짝이 없다. 〉 ( 『 에밀 ,/J , 김봉구 옮김, 범 우사, 88-89 쪽 참조) 8. 비코의 해당 원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 모든 종족은 먼저 문자를 쓰면서 말하기 시작했고 모든 문자는 근 원적으로 무성(無聲)이었다. 문자는 관념과 형식 모델을 의미하며 몇몇 시 적인 문자들은 분절된 소리(죽 알파벳 문자)보다 앞서 존재했다. 언어와 문자가 생겨난 방식을 모르는 학자들은 최초의 종족이 어떻게 시적인 문자 들로 생각하고, 우화로 말하며 상형 · 문자로 글을 썼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은 본질상 가장 중요한 것이며 인간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 있어 철학의 가장 확실한 부분이며 인간의 말을 연구하는 데 있어 문헌학의 원 칙임에 틀림없다• ...... 최초의 언어는 상형 문자이다. 그것은 신성화된 신 의 문자였다. 두번째 문자는 상징적인 언어로서 기호와 영옹의 문장을 통 해 이루어졌다. 세번째 문자는 멀리 떨어져 있는 인간들이 서로 생명의 필 요 욕구를 소통하기 위해 만든 서간체 문자였다. …… 첫번째 언어인 신의 언어는 호머가 증명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언어보다 오래된 언어를 언급 하고 있다. …… 두번째 언어는 영웅의 시대에 해당되며 상징으로 말하던 시대이다. 여기에는 영웅의 문장들이 쓰였고 호머는 그것을 세마타라고 불 렀다. 따라서 그것들은 메타포, 이미지, 모사, 비유 등으로 이루어진 언어 였으며, 시적 언어에 일체의 표현의 밀거름을 제공한다.〉 (The New sci en ce of Gia m att ista Vic o , abrid g e d tra nslati on of the third ed ition (1744), Cornell Un ive rsit y Press, 1970, 97-110, 291-293 쪽) 9. 『에밀』에서 해당되는 원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물들 사이의 계약에 의한 평등은 화폐를 발명하게 했다. 왜냐하면 돈 이란 여러 가지 사물들의 가치에 대한 비교의 표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돈이란 사회의 진정한 결속체라 하겠다. 그러나 무엇이든 화폐가 될 수 있다. 옛날에는 가축이 화폐였다. 조개 껍질이 아직도 몇몇 민족들

사이에서는 화폐로 통용되고 있다. 스파르타에서는 쇠가 화폐였고 스웨덴 에서는 피혁이 화폐였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금과 은이 화폐이다. 운반하기가 가장 용이한 까닭에 금속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교환의 매개 물로 선택되고 있다. 그리고 금속은 화폐로 바뀌면서 교환할 때마다 매번 그 무게와 크기를 측정하는 수고를 던다. 왜냐하면 화폐에 찍힌 각인은 그 화폐의 소정의 중량이 있다는 증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주만이 화폐를 주조할 권리가 있다 . 자신의 보증이 국민 전체에 권위가 있기를 요구할 권 리는 오로지 군주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 모든 일에는 폐해를 지적하기 에 앞서 효용을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 만약 여러분이 아이들에게 어째 서 표시에 불과한 것이 실물을 소홀히 하게 하며, 어째서 화폐로부터 모든 의견의 환영이 생겨났는가를, 그리고 어째서 돈 많은 나라가 모든 것에서 빈곤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려 하다가는 아이들을 철학자로 취급하는 격이 될 뿐더러 현자 취급을 하는 셈이 되며, 여러분은 철학자들조차도 소수의 사람들만이 알아차리는 일을 그들에게 이해시키려 하는 결과가 될 것이 다. 〉(『 에밀 』 , 김봉구 옮김, 250-251 쪽) 10. 『 사회 계약론』의 해당 원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 공공 봉사가 시민들의 주요 관심사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리고 나라의 선 량인 국회 의원이나 대표자들이 국민들보다는 그 호주머니를 탐내게 되면 서 국가는 곧 망하기 일보 직전에 처한다. 전장에 나가야 할 것인가? 시민 들은 군대를 고용하고 자기 집에 머문다. 국회로 가야 할 것인가? 시민들 은 국회 의원을 뽑고 자기 집에 머물 뿐이다. 태만과 돈의 힘을 빌려 그들 은 마침내 대표자들의 조국에 봉사하고 그 조국을 팔기 위한 군인을 고용 한다. 그것이 바로 상업과 공업의 혼란이다. 그것이 바로 이익만을 게걸스 럽게 탐내는 것이요, 돈으로 사람의 봉사를 사는 재화의 무기력이다. 이득 울 증가시키기 위해 이득의 일부분을 기꺼이 양보한다. 돈을 주어라! 그러 면 당신은 쇠사슬을 갖게 될 것이다. 재정이란 말은 곧 예속화를 뜻하는 말이다. 그 말은 그리스 공동체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말이다. 참으로 자 유로운 국가의 국민들은 자기 손으로 모든 일을 하며 돈을 가지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이 국가에서는 의무를 면제받기 위해 돈을 지불하기는 커녕 의무를 실천하기 위해 돈을 지불한다 . 나는 상식적인 생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나는 부역이 세금보다 자유를 덜 구속한다고 생각한다.〉 (3 권 15 장, 428-429 쪽) 11. 스타로빈스키의 저서에서 해당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루소는 지속적으로 의식의 문제와 경제의 문제를 연결시켰다• 그에 따르

면 오직 경제적 독립에 근거 를 둔 의식의 독립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토아 학파에 기원을 두는 도덕적 요청임에 틀림없다. 축 자아는 오직 자신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소유 재산 속에서만 만족을 추구하는 것 이다. 결코 외부의 도움을 통하지 않고말이다. …… 맑은 영혼을 가진 이는 물질적 축적에 대항한다 . 그들은 돈을 염탐하지 않는다. 그들의 경제는 부 채가 없으며 금은 보화의 부를 갖지 않는다. 작은 공동체는 단지 그들이 생산하는 만큼 소비하고, 소박한 축제의 모습을 띠기 위해 일상의 소비 를 허용할 만큼의 가벼운 잉여물을 생산한다. 채울 수 없는 욕구도, 지나친 풍 족함도 아닌 완벽한 자급 자족의 이미지이다. 경제적 품목 중에서도 돈은 거의 언급도 안 된다. 실제로 돈은 소공동체의 내적인 생활과는 관계가 없 다. 돈은 외부 세계와 맺은 계약과 관련될 뿐 가능한 한 소공동체 사람들 은 돈을 피하려고 애쓴다. 루소는 돈에 대해 『 고백록 』 (36-37 쪽)에서 다음 과 같이 적고 있다. ‘내기 보기에 돈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값진 것 같지 않다. 더구나 그것은 나에게는 결코 편리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돈은 자체로는 아무 쓸모가 없다. 돈으로 기쁨울 얻기 위해서는 그 것을 변형시켜야 한다. 〉 플레야드 판본의 편집자들은 돈에 대한 루소의 이 러한 혐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해설을 첨가한다 (1250-1251 쪽). 〈 물론 루소는 이론적 글 속에서는 아주 냉정하게 화폐의 유용성과 의미를 인정하 고 있다. 『 에밀 』 3 권에서 루소는 ‘화폐는 사회의 진정한 관계’라고 적고 있 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정당화는 몇 가지 유보 조건이 붙는다 . 『 사치, 상 업, 공업에 대해서』에서 루소는 경제 과학을 통해 국가가 부유해지면 부유 해질수록 더 많은 빈자가 생겨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못박는다. 진정 한 부란 사물 자체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렇돗 일정 관점에서 보자면, ‘도둑'의 제스처는 자연적인, 죽 직접적인 제스처이다. 죽 욕망이 중계 없이 만족된다. 여기서 비난받는 것은 일체의 매개(중계)에 대해 루소가 갖고 있는 불쾌감이다. …… 자 연적인 제스처는 손을 직접적으 로 생명에 필수 불가결한 것에 갖다놓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제스처이다. 돈이 우정과 매개물로 개입되자마자 평등과 자유는 파괴되고 영혼과 영혼 의 소통은 정지된다. …… 돈은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주는 사람 역시 타락 시킨다. 돈은 감사하는 마음을 억지로 갖게 하기 때문에 도움을 받는 사람 을 노예로 변형시키며 돈을 기부하는 사람을 폭군으로 만든다. 이는 곧바 로 주인과 노예의 심리에 대한 헤겔의 고찰과 연결된다.〉 12. Proje t de consti tut i on po ur la Cors 쩍 해당 원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만약 도시들이 해롭다면 수도는 이보다 더 해롭다. 하나의 수도 는. 전 민족이 자신들의 풍속, 법률, 용기. 자유를 구현하는 근원이다. 사람 들은 대도시가 식 량을 많이 소비하기 때문에 농업을 장려한다고 미루어 짐 작한다. 하지만 대도시는 여전히 더 많은 경작자들을 소비하는데 이것은 그들을 매료시키는 최상의 직업을 갖기 위한 욕망이나, 상류 사회가 언제 나 모집하는 부르주아 종의 자연적 소멸을 통해서이다. 도시의 근교는 생 명의 분위기가 있으나 거기서 멀리 떨어질수록 모든 것은 황량해진다. 도 시로부터 끝내는 민족 국가 자체를 파괴하는 끝없는 페스트가 만연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모든 것을 연결하는 중앙을 필요로 한다. 최고 행정을 이리저리 방황시키는 것은 너무 많은 불편이 뒤따른다. 최고 행정부를 지 방에서 지방으로 순환시키기 위해서는 여러 연방 국가로 나누어 순서에 따 라 회의를 주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 체계는 국가의 기구 놀이룰 복잡하게 할 것이며 부속 기관의 연결이 순조롭지 못할 것이다. Isle( 코르시카 섬)은 이러한 분할을 필요로 하기에는 충분히 크지 못하고, 수도 없이 지내기에 는 너무 크다. 그러나 이 수도에서는 모든 법률의 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곳에서 모든 것을 소통시켜야 하며 각기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한다. 한마 디로 최고 정부의 소재지는 수도보다는 중심 장소가 되어야 한다.〉 13. 데리다의 텍스트에는 lais s ant chercher s'ils ont qu elqu e chose d'uti le. . …· 로 되어 있으나 lais s ant chercher au lecte u r s'ils ont qu elqu e chose d'u til e 의 오기 (誤記)이다. 14. 레이몽 륄 (Ra y mond Lulle, 1235 一 1315) : 팔마 Palma 에서 태어남. 스 페인의 신학자이자 작가. 백과 사전적 지식을 갖추고 라틴어, 카탈랑어, 아 랍어로 철학, 신학, 신비학과 연금술 등에 대해 많은 저서를 남겼다. 특히, 카탈랑어를 문학어의 수준으로 고양시켰다. 해당되는 『 에밀 』 의 원문을 옮 기면 다음과 같다.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편견과 우리의 편견이라는 두 가지를 모두 동시에 뚫어야 하는 엄청난 일이 있다. 지금까지 나는 수많은 여행기 를 읽어왔지만, 동일한 국민에 관해서 동일한 관념을 부여해 주는 두 개의 여행기를 발견한 적이 없다. 내가 관찰한 약간의 지식을 책에서 읽은 지식 과 비교하고 나서 나는 그만 여행자들을 의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들 을 읽음으로써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보낸 시간들이 아까웠다. 관찰할 것이 있으면 어떤 것이든 책으로 읽어서는 안 되고,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확신 울 얻었다. 가령 모든 여행자들이 성실해서 눈으로 본 일과 믿었던 일만을 얘기할 때도, 그들이 진실을 왜곡하는 수가 가끔 있고, 눈에 비친 사실을

채색한 그 색채가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믿지 않으면 안 되기 때 문이다. 또한 여행자들의 거짓말과 무성의를 통해 진실을 발견해야 한다면 대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랑으로 삼는 많은 책의 자원은 책을 읽는 일로만 만족하는 사람들에게 맡기도록 하자. 그것은 레이몽 륄의 기술과 마찬가지 로 알지도 못하는 일에 관해 지껄이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아다. 〉 ( 『 에밀 』 · 김봉구 옮김 , 626 쪽) 15. 『 에밀 』 의 해당 원문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내 아들에게 직업이라니 ! 내 아둘을 쟁이로 만들다니 ! 선생님, 당신은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나는 당신보다 훨 씬 더 진정으로 생각합니 다 . ……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결코 잃지 않을 지위를 주려는 것입니다. 모든 시대가 그를 존경하게 할 지위를 주려 합니다. 나는 그를 인간이라는 신분으로 높이고자 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무엇이라고 하든 당신으로부터 받은 모든 자격보다도 이 인간이라는 지위에 있는 편이 더 귀한 인간이 될 것입니다. 글자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그 정신을 살려라. 직업적인 기량을 습득하 기 위해서 그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기보다도 그러한 것을 경멸하는 편 견을 타파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분들은 생활을 위해 일해 야 하는 경우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아아, 얼마나 안 된 일인가. 여러분들 울 위해서 정말로 안 된 일이다! 그러나 상관없다. 필요 욕구를 위해 일하 는 일이 없다 하더라도 명예를 위해 일하라. 지금 현재 여러분들의 신분을 더 높이기 위해 쟁이의 상태로 몸을 낮추라 . 운명과 사물을 여러분에게 순 종하게 하기 위해 우선 그러한 것으로부터 독립하라. 여론으로 지배하려거 든 먼저 여론부터 지배하라.〉(『에밀 』 , 김봉구 옮김, 25 9- 260 쪽) 16. 스타로빈스키는 La tra nspa rence et J' obs t acle 에서 축제를 다음과 같 이 설명 한다( 116-121 쪽) . 〈전원의 축제는 아름다운 영혼들에게 최초의 순수성으로 되돌아가는 것 울 모사하는 구경거리를 제공한다. 그들은 그것이 한낱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단지 이러한 환상의 효과는 , 종말이 시작에 도달하고, 도 덕적 진화의 종국에는 의식이 다시 역사가 앗아간 비성찰적 즉각성 속에 다시 침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할 정도로, 목가적 순수함의 이미지에 훌 륭하게 접근하는 데 있다. 요컨대 루소에게 포도 수확 축제는 그 어떤 의 식적인 것도 없으며 어떤 전통에도 결속되지 않는다. 그 어느 것도 관례에 따라 진행되지 않는다 . 반대로 그것은 전적으로 죽흥적이다. 그것은 인류의

황금 시대와 성서의 고대 시대로 복귀하는 것을 상징하는 동시에 클라렌스 Clarens 가 말한 ‘친밀한 사회'의 성공작으로 기술된다. 미리 설정된 일체 의 형식을 벗어난 순수한 창안이자 자유로운 창조. 이러한 즉홍 축제에 루 소는 희극과 비극의 ‘허위적' 명예를 대질시킨다. 연극과 축제는 불투명성 의 세계와 투명성의 세계로 대립한다. 연극은 애매성과 더불어 허위적 매 료로 지배한다. 연극의 적대자였던 루소는 연극의 유혹의 힘을 잘 알고 있 었다. 단지 그에게는 이러한 유혹이 인간들을 불투명성과 역겨운 환상과 불행한 분리의 영역으로 몰고 가는 것으로 비쳤다. 루소에게는 극장의 관 객을 성립하는 데 매개된 관계는' 전혀 가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시각에서 볼 때, 절대적 직접성 속에서 완수되는 일치감은 진정한 공동체적 일치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고독과 분산의 불행한 왕국이다. 루소에게 중계화된 공동체적 일치는 타락한 일치감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해결책 은 없다. 단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자유롭고 텅 빈 공간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투명성의 환경이다. 의식들 사이에 어떤 것도 끼지 않고 순 수하게 현전한다.〉 17. 해당되는 『 에밀 』 의 원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자네가 열중하는 동안에도 예측 못 했던 시간은 홀러가고 있네. 여름은 가고 겨울이 가까워오고 있네. 아주 혹독한 계절에도 우리는 계속 걸을 수 있겠지만 사람들은 결코 그것을 견뎌내지 못할걸세.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 는 사는 법을 바꾸어야 하네. 현재와 같은 방식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네. 그러한 곤란쯤은 자네에게는 거의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 자네의 그 조바 심치는 눈빛으로 알 수 있네. 소피의 승인과 또 자신의 욕망은 눈을 피하 고, 또 그녀를 보러 가기 위한 여행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 안이한 방법을 암시하고 있네. 일시적인 방편으로는 분명히 편리한 것이네. 하지만 봄이 오고, 눈이 녹아도 결혼 문제는 남네. 결혼은 앞으로 있을 모든 계절 을 고려해 생각해야 하네. 자네는 소피와 결혼하기를 원하네. 그러나 자네 가 그녀를 알게 된 지 불과 다섯 달밖에 안 되네. 자네는 그녀와 결혼하기 룰 원하는데 그것은 그녀가 자네에게 알맞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자네 마음에 들기 때문이네. 마치 사랑이 적합이란 문제에 있어서 결코 잘못 생 각하는 일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사랑으로 시작한 사람들은 결코 서로 미워하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없기라고 한 것처럼!〉(『에밀 』 , 김봉구 옮김, 620-621 쪽)

역자해제 지난 30 여 년 동안 데리다 (1930 년 7 월 15 일 알제리 태생)는 기 존의 고전적 사유 양식의 범주를 넘어서서 생경하고 절묘한 책 읽 기와 글 쓰기로 수십 권의 굵직한 저서들을 발표했다. 그 영역은 철학, 문학 비평, 사상사, 언어학, 정신 분석학, 윤리학, 정치학, 회 화 동을 비롯해 인문, 사회 과학 전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러나 데리다의 인식론적 방법론의 기본 방향은 초기 저작 속에서 이미 형성되었다. 『그라마톨로지』는 바로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에 크리튀르 개념 및 서구의 현전의 형이상학 비판을 체계적으로 담 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책은 모두 2 부 7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단원들의 분절 방식과 내용의 결속은 상당히 생소하게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독 자들의 당혹감을 의식했는지, 데리다는 『서문」에서부터 자신의 글 쓰기와 책 읽기가 기존의 사상사와 문학사의 범주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환기시킨다. 데리다가 엮은 텍스트와 사상가들의 궤적은 일 견 이질적이고 혼동스럽지만 그 지향점은 비교적 명쾌하다. 그것은 서구 사상사를 현전의 형이상학으로 규정하고, 가장 파격적이며 독

창적으로 이 틀에서 벗어나려 했던 인물들이 어떻게 자신도 모르 게 다시 이 그물 속에 갇혀버렸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그 한계를 지적하고 새로운 사유 체계의 끄트머리를 암시하는 것 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한마디로 형이상학 비판이라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1 부 문자 이전의 에크리튀르〉에서 데리다는, 플라톤과 소크라테 스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서구는 인종 중심주의, 로고스 중심주의, 소리 중심주의로 철저히 무장한 채 로고스에 진리를 부여하는 진리 의 역사, 즉 현전의 형이상학 속에 밀폐되어 있다고 선언한다. 이러 한 형이상학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문자 언어를 하대 하고 충만한 음성 언어만을 진리의 구현으로 보는 형이상학과 신학 의 족쇄가 설치된 곳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과학과 문자에 관한 극 도로 다양한 개념들을 통해 추구하는 모든 것의 통일성과 정체성은 이미 이러한 역사적 형이상학적 시대에 의해 규정된다. 데리다는 이러한 형이상학의 울타리 la clot u re de la me t a p h y s iq ue 를 엿본 다. 아울러 과학과 문자라는 관념은 기호에 대한 형이상학의 특정 개념 속에서 의미가 있다. 따라서 데리다에게 있어서 기호의 문제 는 서구 형이상학의 진면모를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방이 된다. 데 리다는 미래는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관계에 대한 특정 개념을 지정 하는 이 울타리 를 넘 어 사상의 방황 l'errance de la p ensee 이 시작될 것을 예고한다. 〈 1 장 책의 종언과 에크리튀르의 개시〉에서 그는 그러한 예고를 뒷받침하는 몇몇 이론적 편린들을 보여준다. 데리다는 여기서 글 쓰기, 문자 언어, 문체 등을 의미하는, 문자와 관련된 총칭적 개념의 불어 단어 에크리튀르를 묶고 있던 특수적, 파생적, 보조적 형태의 틀에서 벗어나는 파격적 에크리튀르 개념을 준비한다. 이에 앞서, 데리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목소리는 영혼과 본

질적 직접적 근접성의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사료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신의 로고스, 무한한 오성 속에서 생각되는 의미 로부터 창조된다. 잘라 말해 목소리와 존재의 의미는 절대적 근접 성을 유지한다. 이렇듯 음성 중심주의는 존재 일반의 의미에 대한 현전으로서의 역사 규정성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이 포괄하는 총체 성과 신학적 뿌리(기독교의 창조주의와 무한주의)에는 여러 침전물 들이 밀착되어 있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 개념들을 버리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강조 한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그러한 형이상학적 전통을 떠나서는 아 무것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개념과 사유 태도 의 체계적, 역사적 연대를 명중하게 포착하고 그것을 노출시키는 일이다. 예컨대 서구 지성사에서 기호 개념은 신성과 출생 장소를 공유한다. 죽 기호 개념이 형이상학의 역사에 의해서 규정된 채 남 아 있다는 점에서 그 소속은 명백하다. 이 시대의 내부에서 책 읽 기와 글 쓰기, 죽 기호의 생산과 해석, 그리고 기호들이 짠 직물망 인 텍스트는 이차성의 레벨로 국한된다. 여기서, 데리다는 문자와 관련된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한다. 하나 는 은유적 의미에서 쓰이는 자연적이며 보편적인 문자, 지성적이며 비시간적인 문자이며, 다른 하나는 문화, 기술, 인위적 측면에서 말하는 감각적이며 유한적인 문자이다. 첫번째 의미의 문자는 좋은 문자로서, 마음과 영혼 속에 각인된 신의 문자이다. 반면 두번째 의미의 문자는 나쁜 문자이며 타락하고 인위적이며 육체의 의면성 에 해당된다. 이것이 바로 문자를 파악한 플라톤의 도식이다. 그러 나 니체는 이 도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문자 언어는 근원적으로 로 고스와 진리에 예속되지 않았다고 설파했다. 이러한 니체의 통찰을 언급한 후, 데리다는 이러한 예속화가 특정 시대에 일어났으며 우 리는 그 시대의 의미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2 장 언어학과 그라마톨로지 〉 부터 본격적인 데리다의 텍스트 분 석이 선보인다. 먼저, 그는 문자에 대한 실증 과학과 고전 과학들 은 문자의 존재 현상학적 물음을 억제하고 여러 사실들의 역사적 유형론적 연구 수준에 머무르면서 이 분야를 불모화했다고 힐난한 다. 따라서 기존의 문자학 연구서들은 고고학적, 인종학적 가치의 풍요로움을 제공하지만 문자의 철학적 목적론적 성찰의 결여로 인 해 이론적 취약성을 노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약점을 간파한 후, 데리다는 현대 언어학이 과학으로서 제도화되는 운동 속에서 설정 된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관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전제들을 주 도 면밀하게 끄집어낸다. 그는 그 대표적 전범으로 소쉬르의 텍스 트를 택한다. 먼저 그는 현대 언어학의 음운론 중심주의에 주목한 다. 언어학에서 소리는 언어의 의미 작용과 언어 활동의 토대를 이 루는 직접적이고 경험적인 단위이며, 이 단위에 견주어볼 때 문자 란 언제나 파생적이며 뜻밖에 일어난 특수한 돌연변이 취급을 받 는다.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헤겔은 그것을 기호의 기호라고 불렀 다. 그러나 소쉬르의 논리는 좀더 복잡한 긴장 관계를 보여준다. 소쉬르는 서구 전통에 따라 문자에 대해 협소하고 파생적인 기능만 울 부여한다. 즉 문자는 표상적 대리적 기능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언어와 문자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두 개의 기호 체계이다. 후자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전자를 표상하기 위한 것이다.(소쉬르, 『 일반 언어 학 강의』, 45 쪽) 데리다는 이러한 문자의 표상적 규정은 본질적으로 기호라는 관 념과 소통하고 있음을 간파한다. 소쉬르가 말하는 문자는 이미 특 정 문자의 유형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죽 그것은 음성 문자이며 서구의 에피스테메를 지배해 온 주춧돌이다. 이어 소쉬르는 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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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한계를 긋고 있다. 〈 우리들은 연구를 음성 체계, 특히 오늘날 가장 많이 사용되며 그 원형을 그리스 알파벳에 두고 있는 것에 한정하려고 한다•〉 (48 쪽) 이렇듯 언어학의 과학성은 언어학의 장 이 엄격한 경계선을 치고 하나의 내적인 필연성과 그 장의 구조가 폐쇄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전제로 한다. 문자 언어의 개념을 표상 적으로 파악하는 것과 음성 언어만을 배타적으로 참작하는 것이 언어의 〈 내적 체계〉의 요청에 부응한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 니다. 음성 문자는 언어 내적 체계의 통합성을 준수하고 보호해야 할 기능적 원칙을 구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심각하게 타락 화시키는 지속적인 오염에 대항해 그 개념의 순수함 속에서 언어 의 내적 체계를 온전히 보존해야 한다. 이같이 소쉬르는 문자에 의 한 변질의 위험성을 도덕론자의 어조로 비난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는 이러한 소쉬르의 비난 어조는 의미 심장한 것이다. 이는 에피스 테메의 가능성과 로고스를 연결시키는 순간에 플라톤이 문자가 인 위적 조작으로 독보성에 침입해 원형을 파괴한다고 비난할 때부터 들리기 시작한 어조이다. 죽 문자는 영혼의 내재성과 참된 진리 속 에서 그 자체에 현전하는 영혼의 살아 있는 목소리에 대한 난입이 다. 이러한 전통에서 소쉬르는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자연스러 운 관계의 역전을 개탄한다. 문자는 그에 따르면 변장된 옷이다. 따라서 언어학은 자연적 관계를 회복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즉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 사이의 단순하고도 본초적인 관계를 설정 하고 바깥쪽과 안쪽 사이의 관계를 퇴폐시킬 수 있는 역사와 그 추락을 넘어서 문자의 찬탈로부터 그 위상을 복권시키고 그 절대 적 신선함과 근원적 순수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런데도 현실적으로는 문자 언어가 모종의 특권을 누리고 있음 울 소쉬르는 인정한다• 소쉬르에게는 문자 언어의 특권에 양보하는 것이 곧 정념에 양보하는 것을 뜻한다. 정념이란 폭정이며 굴욕이

다. 정념은 수동성이며 영혼의 병이며, 이러한 도덕적 퇴폐는 곧 병리적인 것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자연에서 일탈하는 것이다. 〈 3 장 실증 과학으로서의 그라마톨로지〉는 문자의 기원 문제를 언급한다. 데리다는 서두부터 단순 기원은 없었다고 못박는다. 기 원 문제는 본질 문제와 뒤섞여 있으며 존재 현상학적 물음을 전제 로 한다. 흔적의 사상인 기원성 그 자체는 단순히 본질에 대한 존 재 현상학적 질문에 종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흔적은 없음이며 현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넘어선다. 문자는 도처에서 역사적이었고 문자에 대한 과학적 관심이 언제나 문자라 는 형식을 취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동시에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 점에서 18 세기는 커다란 단절을 나타낸다. 비서양 문자의 판독과 보편 문자의 기획에 이어서 탈중심화가 이루어지며, 논리­ 철학적 관점과 신학적 관점을 화해시키고 있다. 여기서도 공통점은 단순 절대성 개념이 필연적으로 또 필수 불가결하게 관여한다는 점이다. 그 개념은 무한주의적 신학과 로고스 또는 신의 무한한 오 성과 귀결된다. 이런 점에서 본질적으로 비음성적인 보편 기호학이 라 할 수 있는 라이프니츠의 기획은 로고스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지 않는다. 데리다가 여기서 밝히려는 것은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운동의 공범 관계이다• 즉 무한주의적 신화인 로고스 중심주의와 거기에 결부된 특정 기술주의(技術主義) 사이에는 일정한 역사적 시대의 내부에 존재하는 모종의 심오한 통일성이 자리잡고 있다. 죽 로고스 중심주의는 일종의 인종 중심주의이다. 그것은 서구의 역사와 연계되어 있다. 라이프니츠가 중국 한자에서 빌려오려 한 것은 그 자의성, 죽 역사에 대한 한자의 독립성이다. 그 무렵, 한 자에 대한 서구인의 개념은 일종의 환각 상태로 작동하고 있었다. 2 부는 루소에 대한 책 읽기이다. 루소 시대에 전범적 가치를 부 여하는 이유, 죽 로고스 중심주의 시대에 루소가 누리는 특권은 무

엇인가? 플라톤, 헤겔, 루소. 이 세 이정표가 시사하는 바는 무엇 인가? 이들은 소리 중심주의의 개방과 그 철학적 완결 사이에서 현전성의 동기가 분절되는 지점들이다. 신의 무한한 오성은 데카르 트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자기 지신에 현전하는 것으로서 로고스 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로고스는 목소리를 통해서만 비로소 무 한해지고 자기 자신에 현전할 수 있다. 루소는 데카르트와 헤겔 사이의 형이상학 내부에서 문자 언어의 환원을 주제로 삼아 그 체계를 파악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플라 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개시되는 운동을 반복하면서도 자신의 새로운 현전 모델로부터 시작한다. 그 모델의 요체는 의식 또는 감 정 속에서 주체가 자기 자신에 현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 로 그가 배제했던 것은 다른 무엇보다 그를 사로잡았고 번뇌하게 했다. 문자 언어로 인한 위기는 18 세기 루소 시대에 비로소 촉발된다. 18 세기는 감수성, 상상력, 기호의 권리를 복권시켰을 뿐만 아니라 로고스 중심주의의 보루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시대이다. 헤겔 이 전에 루소는 이미 명시적으로 문자 언어롤 비난했다. 그 비난의 이 유는 무한한 오성 또는 신의 로고스에 대한 가능성을 지시했던 신 학적 토대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문자가 목소리를 지연시 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위협적인 것이다. 데카르트, 라이프 니츠, 루소, 헤겔 등이 지칭하는 운동들 또는 이동들, 그리고 데리 다가 이 고유 명사에 부여하는 지시적 가치는 그들의 텍스트에 나 타나는 특정 담론과 역사적 총체성의 분절을 생각하기 위해서 데 리다가 고안한 계보이다. 이 작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데리다는 이 책이 출판된 1960 년대 의 프랑스를 지배한 담론, 죽 로고스 중심주의를 극복했다고 주장 한 구조주의가 자신도 모르게 어떻게 형이상학의 성충에 다시 사

로잡히는지를 레비AE 쿠 A 의 텍스트를 분석함으로써 보여준다. 레 비 AE 쿠 A 를 택한 이유는 텍스트들의 풍성함과 이론적 관심뿐만 아니라 루소와 그의 연계성을 고려해서이다. 〈 1 장 문자의 폭력 〉 에 서 이 두 사람을 묶어주는 친밀성과 담론적 혈통을 세운다. 물론 텍스트의 역사적 귀속은 일직선이 아니다. 레비AE 쿠 A 는 특정 18 세기에 대해 자신이 거기에 귀속됨을 자처한다. 성립된 텍스트 에 대한 의식과 계보적 표상 등은 단순한 과거 지향적 착각이나 환상도 아니며 이론적 부유물도 아니다. 우리는 그러한 제스처의 필연성과 실증적 효과를 간파해야 할 것이다• 레비AE 쿠 A 는 구조주의가 표명하는 음운론주의를 비판 없이 수용한다. 특정 과학, 즉 언어학을 최고의 우두머리에 놓으려는 인 식론적 조작은 목소리를 문자 언어 위로 고양시키는 언어학적 형 이상학인 음운론주의를 전제로 한다• 레비 AE 쿠 A 의 인류학 사상 은 과거 유산으로부터 물려받은 개념들을 보존과 동시에 폐기시키 고, 소쉬르 사상과 마찬가지로 한계점들에 위치한다. 특히, 그의 인류학에는 공공연한 루소주의가 있다 . 둘 모두 문자 언어의 힘과 폭력 행사룰 연결시킨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문자의 교훈」에서 레비AE 쿠 A 는 남비크와라족이 〈문자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다. 데리다는 이 표현이 문자에 대한 통 속적, 죽 인종 중심적 개념을 남발하는 인종 중심주의적 몽상에 속 한다고 일침을 가한다• 데리다는 따진다. 도대체 하나의 모델을 기 준으로 문자의 본질을 결정지으면서 문자 언어 일반에 접근하는 것을 어떻게 부정한단 말인가? 남비크와라족은 순수한 공동체이 며, 축소된 차원들로 이루어진 유일한 공동체로서 그 구성원 모두 가 자신이 하는 말 속에서 자신에게 충만한, 직접적이며 투명한 비 폭력의 상징이다. 레비AE 쿠 A 는 스스로 반인종 중심주의자라고 자처하지만 자유주의적 진보주의 의식 속에서 또 다른 인종 중심

주의자로 나타난다. 그는 언어와 문자를 분리하고 문자를 아래쪽과 바깥쪽에 놓으면서 언어학을 문자 언어라는 일체의 통로로부터 해 방시킨다고 착각한다. 진정한 언어, 인간적이며 충만한 의미를 갖 는 언어의 위상을 지금도 계속해서 〈문자 없는 민족〉으로 알려진 민 족들에 의해서 실천된 모든 언어들에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음성 언어에서 문자 언어로의 이행을 일종의 도 약으로 보며, 순전히 음성적이며 일체의 문자로부터 순수하게 남아 있는 언어에서 그 문자적 표상을 일종의 억압 기술과 착취 수단으 로 봄과 동시 에 부차적 시니피앙으로 간주한다. 남비크와라족의 추 장은 문자의 기능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굴 쓰기를 무작정 흉내 낸다. 즉 문자의 커뮤니케이션, 의미 작용, 시니피에의 전통을 이 해하기 전에 그 심층적인 예속화 기능을 먼저 이해한다. 레비스트 로스는 문자의 본질적 기능이 과학의 탄생을 손쉽게 했다기보다는 타인을 예속화시키는 일올 손쉽게 했음울 시사한다. 이 책 2 부의 2 장부터 4 장까지는 루소의 텍스트, 특히 『인간 언 어 기원론』에 대한 비판적 책 읽기이며, 그 독해는 치밀성과 압축 성을구비하고 있다. 데리다는 무엇보다 루소의 글 쓰기에서 일견 모순되고 또는 상 반되는 이중 운동을 파악하고 이 모순성을 유기적인 상위 구조로 승화시킨다. 이 운동의 절묘한 통일성을 마련한 것이 바로 데리다 해법의 독창성이다. 이 이중 운동은 루소의 텍스트에서 묵시적으로 기술된 것과 명시적으로 선언된 것 사이의 긴장 관계로 요약된다. 루소는 음성 언어 그 자체에서, 그리고 그 직접성이라는 신기루 에서 어떤 은닉을 예감한다. 애초에 음성 언어의 길을 열어놓고, 음성 언어가 구성하는 주체를 해체시키고, 그 주체가 그 기호에 현 전하는 것을 방해하며 주체의 언어 활동을 문자 언어를 갖고 괴롭 히는 이 같은 힘을 인지한다. 루소는 그 힘의 필연성을 수용하기보

다는 그것을 추방하는 데 골몰한다. 루소는 문자 언어를 가리켜 현 전의 파괴이며 음성 언어를 병들게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 는 음성 언어에서 박탈된 것의 재소유화를 문자 언어가 약속한다 는 점에서 문자 언어를 복권시킨다. 이 욕망의 첫번째 운동은 그의 언어 이론으로 표명된다. 『 고백록 』 에서 루소는 글 쓰기로의 이동을 모종의 부재와 계산된 소거 형식을 빌려 음성 언어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현전의 복구로 묘사한다. 문자 언어를 쓴다는 것 은 곧 음성 언어를 간직하거나 다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다. 문자를 쓰는 행위는 현전의 재소유화를 갈망하는 희생인 것이 다. 그러나 에크리튀르의 작업과 차이/지연의 경제는 이러한 고전 적 개념에 의해 지배되도록 방치되지 않는다. 차이/지연은 소유화 에 저항하지 않으며 그것에 외부적 한계를 부과하지 않는다. 차이/ 지연은 소리를 개시하는 동시에 마침내 재소유화를 방치한다. 필연 적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죽음은 차이/지연의 운동이다. 즉 차이/지 연은 현전과 대립의 부재를 가능하게 한다. 차이/지연은 형이상학 에선행할 뿐만 아니라 존재의 사상을 넘어선다. 문자 언어와 관련해서 루소는 경험과 이론의 불일치를 보여준다. 경험 측면에서 루소는 현전, 죽 자연의 재소유화에서 문자 언어의 힘을 빌린다. 반면 이론 측면에서는 문자 언어의 부정성에 대한 종 교 재판이 이루어진다. 문자의 부정성에서 문화의 퇴조와 공동체의 와해롤 읽을 수 있다. 이 두 가지 모두에서 루소에게 문자는 위험 천만한 대리 보충적 수단 le sup ple ment dan g ereux 이 다. 자기 자신에 대한 근접성인 자연이 금지되거나 단절될 때, 음성 언어가 현전을 보호하지 못할 때 문자 언어는 필연적으로 나타난 다. 문자 언어는 구두 언어에 첨가되는 꼴이다. 음성 언어는 자연 적이거나 최소한 사고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며 사고를 하기 위한 가장 자연스러운 제도 또는 계약 형태인 반면에, 문자 언어는 거기

에 이미지 또는 표상으로 첨가된다. 문자 언어는 음성 언어가 부재 할 때 음성 언어를 현전시키기 위해 도입하는 일종의 인위적이며 교활한 속임수인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운명에 가하는 폭력이 다. 표상이 현전으로 자처하고 기호가 시물 그 자체의 모습을 행사 할 때 문자 언어는 위험 천만한 것이다. 그것은 기호의 작동에 애초부터 스며 있는 숙명적 필연성이 있 다. 그것은 대체물이 자신의 대리 기능을 망각하고, 실제로는 음성 언어의 무능과 불구를 보충하는 것뿐이면서도 음성 언어적 충만함 울 자처한댜 루소가 사용하는 불어 단어 su pp lemen t에는 동시에 두 가지 의미가 있으며, 데리다는 루소의 모든 사상을 이 한 단어 로 집약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식의 대리 보충성은 일체의 개념 대립들을 일정한 방식으로 규정한다. 이 개념 대립 속에서 루소는 자연 개념을 그 자체로 충분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대리 보충 이라는 두 가지 의미의 공통된 기능은 다음 사실로 인지된다. 그것 이 첨가되는 것이건, 대신하는 것이건, 대리 보충은 바깥쪽에 있는 것이며 첨가되는 것에 대한 실증적 외부에 있는 의적 첨가이다. 그런데 루소에 따르면 악의 부정성은 언제나 대리 보충성의 형 식을 띠게 될 것이다. 악은 자연의 바깥쪽에 있으며 순수한 것의 저편에 있다. 악은 자연에 불쑥 도래한다. 그러나 악이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하나도 부족한 것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을 보충하는 꼴로 나타난다. 주지하다시피 루소의 사상에서 자연적인 것, 모성 적인 것으로 요약되는 현전은 자기 자신에게서 충족되어야 한다. 그것은 결코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따라서 보충할 것도 없이 충분 하며 스스로에게 현전한다. 죽 그것을 대신하기를 바라는 것은 결 코 똑같은 것을 가져다 줄 수 없다. 설사 대신한다 하더라도 법속 한 임시 변통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자연은 결코 대신 메울 수 없 고, 대리 보충은 그 자신으로부터 진행될 수 없으며, 단지 본래의

것에 비해 열등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결함이 있는 자연,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며 자연에서 일탈한 것 이다. 그리고 이 결함을 메워주는 것은 문화이다. 어쨌든 결함이 노출된 자연, 그것은 곧 파문이다. 그리고 대리 보충은 자연도, 이 성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위험한 대리 보충, 이 말은 루소 자신 이 『고백록』에서 사용한 표현이다• 자연 속에서, 처녀성으로서의 자연적 동정성과 동정성으로서의 자연적 순진성에 위험한 대리 보충의 침투가 일어난다. 대리 보충 온 문자 언어처럼 작동하며, 문자 언어와 마찬가지로 생명에 위험 한 것이다. 이 위험은 이미지의 위험이다. 문자가 그 이미지, 그 표상으로부터 살아 있는 음성 언어의 위기를 고조하는 것과 마찬 가지로 자위 행위는 상상적 유혹으로부터 살아 있는 생명력과 원 기의 마멸과 소진을 예고한다. 루소가 〈죽음을 동반하는 위험한 만 족〉이라 부르는 이 위험한 대리 보충은 엄밀하게 따져보면 유혹적 이다. 자위 행위는 욕망을 정도에서 탈선시키며 자연적인 길에서 벗어나 방황하게 하며 욕망의 손실 또는 파괴로 유도되는 파문이 다.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자연 파괴이다. 이 위험한 대리 보충은 전력을 다해 자연이 지속적으로 축적한 힘을 한순간에 산산 조각낸 다. 기호와 마찬가지로 사물의 현전과 존재의 지속을 생략한다. 또 대리 보충의 경제에 하나의 특성을 첨언해야 한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위협인 대리 보충은 또한 가장 우선적이고 확실한 보호 이다. 그 위협 자체에 대해서말이다. 대리 보충에는 단지 부재하는 현전을 그 이미지를 통해 대리할 수 있는 능력만 있는 것은 아니 다. 기호라는 대리 수단을 통해 우리에게 부재하는 현전을 대리하 며 대리 보충은 부재하는 현전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취하고 제어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전은 갈망의 대상인 동시에 두려움의 대 상이기 때문이다. 대리 보충은 금기된 것을 위반하는 동시에 그것

을존중한다. 루소에게 전부와 전무 사이에는 결코 중계적인 것이 있을 수 없 다. 중계적인 것은 총체적 부재와 현전의 절대적 충만함 사이의 중 간 단계이다. 중계성은 루소가 끈질기게 소거하고 싶었던 것 모두 를 대변한다. 그런데 대리 보충은 바로 총체적 부재와 현전 사이의 중간을지탱한다. 이 책에서 가장 긴 〈 3 장 『인간 언어 기원론』의 발생과 구조〉는 당시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루소의 언어 이론이 담긴 『인간 언어 기원론』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대리 보충의 연쇄 속에서 문자는 자위 행위와 통한다. 이 둘은 모두 위험 천만하다는 공통점 울 갖는다. 그들은 금기 사항을 위반한 죄책감 속에서 체험된다. 하지만 차이/지연의 경제에 따라 이 둘 모두 자신들이 위반하는 금지된 것을 확인하고 위험성을 교묘히 회피하며 소바의 여분을 남긴다. 이 두 가지 경우에서 자기 정서 유발의 가능성은 있는 그 대로 표출된다. 그것은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하나의 시니피앙의 세계 속에 있는 거처는 난공 불락이 되어버린 다. 문자로 씌어진 것은 만지고 만질 수 있는 제 3 의 세계를 수용 한다. 자기 정서 유발은 경험의 보편 구조이다. 이 가능성은 생명 의 역사에 의해 분절되고, 형이상학은 대리 보충을 단순한 외재성, 순수한 첨가 또는 부재로 규정하면서 비현전을 배제하는 데 있다. 바로 대리 보충성의 구조 내부에서 배타 작업이 작동한다. 음성 언 어는 직관적 현전에, 문지는 구어에, 자위 행위는 성적 경험에, 문 화는 자연에, 악은 순수함에, 역사는 근원 둥에 첨가된다. 따라서 근원 또는 자연이란 개념은 첨가의 신화, 순수하게 첨가적인 말소 로서의 대리 보충성의 신화이다. 근원적 차이/지연은 구조로서의 대리 보충성이다. 구조란 여기서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복잡성을 의미하며 그 복잡성의 내부에서 단지 현전 또는 부재의 놀이를 굴

절시키거나 이동시킬 수 있을 뿐이다. 바로 이 놀이에서 형이상학 이 생산될 수 있지만 형이상학은 그 구조를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과연 데리다의 루소 독서는 정당한 것인가? 루소 사상의 문외한인 역자로서는 근거 있는 논지를 제시할 능력이 없다. 따라 서 데리다의 루소 독해에 반기를 들면서 탁월한 비판을 내놓은 폴 드만의 글을 정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I)

1) Paul de Man, Blin d ness and Insig h t, Essays in the Rheto r ic of Cont em p o rar y Critism (Ox for d U. P., 1971). 모두 9 장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의 제 7 장 The Rheto r i c of Bli nd ness: Jac qu es Derr ida 's ~adi ng of Rousseau 에 실려 있다.

전체적인 요지를 지배하는 폴드만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그는 이미 그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데리다의 작품이 문학 비평의 미래의 가능성이 결정될 장소 중의 하나임을 정확히 예고 하고 있다. 그는 데리다가 택하는 텍스트들의 이질성과 잡종성에 주목한다. 루소에 대한 데리다의 주석은 비평적 맹목성과 비평적 명철성의 교차점의 전범적(典範的) 경우라는 것이 그의 요지이다• 루소는 체계적으로 잘못 읽힌 작가들에 속한다. 문학사에서 이 같은 맹목성은 특정 작가에 대해서 터무니 없는 해석의 구조로 복 귀하는 형식을 취할 수 있다. 모든 문학 언어와 철학 언어의 본질 적인 알맹이가 본질적으로 상반적이라는 것은 주지의 시실이다. 대 부분의 주석과 비평은 이 같은 양립적 모호함을 제거하는 것을 목 표로 한다. 그것들을 모순으로 환원시키면서, 텍스트의 초조한 부 분을 제거하면서, 혹은 섬세하게 이 텍스트들 속에서 작동하는 가 치화의 체계를 조정하면서말이다. 루소의 경우처럼, 양립성은 철학 적 언술의 부분을 이룬다. 루소의 해석의 역사는 이 점에서 각별히 풍성하고, 그가 말했던 것과 다른 것을 말하기 위해 주석가들이 사 용한 전략들의 다양성도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여기서 이 같은 왜 곡의 이유와 자초지종을 따질 겨를이 없다.

처음 보면, 루소에 대한 데리다의 태도도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다• 그는 루소의 글 쓰기 결단을 픽션을 통해서 충만성을 회복하 려는 시도로 제시하는데, 루소가 결코 그의 인생에서 도달할 수 없 었던 존재의 통일성이 바로 그것이다. 데리다에게 있어 문학 언어 가 진리를 주장하고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은 출발부터 의심스럽다. 기존의 루소 비평은 액면 그대로의 수준과 상징적 수준사이의 혼 란을 창조하는 자아 내부의 이중성에 토대를 둔다. 주체가 자신의 표리부동에 대해서 눈이 머는 것은 심리적 원인을 갖는다는 것이 다. 환상의 메커니즘을 보지 않으려는 의지는 방어적이다. 그것은 근원적 소박성의 신화이기도 하다. 이 수준에서 데리다의 루소 책 읽기는 근본적으로 전통적 해석 에서 일탈한다. 문학 언어에 대한 루소의 불신, 그리고 문자를 경 도된 범인으로 고발하면서 그가 거기에 종속되는 방식, 그것은 데 리다에겐 단순히 심리적 원인들로 귀결될 수 없는 방대한 문제의 개성적인 발로이다. 글 쓰기 ecr it ure 와의 관계에서, 루소는 그 자 신의 필요 욕구와 욕망에 종속되지 않고, 전 서구 사상을 규정하는 전통에 종속된다. 일체의 부정성 -비존재를 부재로 파악하는 것 ―그리고 거기서 존재의 소유화와 재소유화의 가능성-진리, 진정성, 자연의 형식 아래 __- 이 전개된다. 이 같은 존재론적 입 장은 구성적이며, 문자 언어에 견주어 구두 언어 혹은 목소리를 선 호하는 특정 언어 개념에 의해서 성립된다.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대한 직접적 현전, 이것은 나 자아와 문자로 씌어진 자아를 갈라놓 는 반성적, 굴절적 거리에 대립한다. 루소는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 적 시대를 채우는 연쇄의 한 고리를 이룬다. 언어에 대한 루소의 태도는 심리적 특이질이 아니다. 그것은 결정적인 철학적 전제 조 건들의 전형이다. 데리다는 루소를 사상가로 신중하게 생각하고, 그의 명제들을 하나도 부정하지 않는다.

루소가 문자 기호에 대한 목소리의 일차성을 단정하는 것, 근원 적 순수함에 스스로를 결속시키는 것, 반성에 대한 직접적 현전의 가치 매김 등은, 데리다가 루소에 대한 긴 주석에서 뽑아낼 수 있 었던 특칭들이다. 그러나 그는 이 같은 신화들을, 루소의 심리 세 계에 초점을 둔 전략들로 환원하는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킨다. 서구 사상에서 데리다의 주요 주제는 언어의 일체의 문자 형식의 지속 적 역행 과정이다. 그리고 구어의 생동하는 현전에 대한 첨가나 보 충으로의 전락은 레비AE 쿠 A 의 저작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레비AE 쿠 A 에서 보이는 소박한 전제들은 루소에게서 더 사선 적이고 다가치적이다. 매번 루소가 사물의 시초에 존재하는 단일성 의 계기를 지칭하는 순간에 그의 욕망과 만족이 일치할 때, 자아와 타자가 그들의 공통된 모성애에서 통합될 때, 의식이 진리의 목소 리와 함께 말할 때, 데리다의 해석은 현전의 계기로 지칭된 것이 언제나 선행하는 또 다른 현전의 계기를 제기함을 보여준다. 따라 서 그것의 특권적 기원의 위상을 상실한다. 루소는 목소리를 문자 언어의 기원이라고 정의하지만, 그의 음성 언어 혹은 음악의 기술 은 출발부터, 문자 언어가 직접적인 현전의 조건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는 거리와 부정의 모든 요소들을 갖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 다. 문자의 역사를 구두 표현의 보다 근원적인 형식으로 거슬러 올 라가려는 일체의 시도는 이 같은 단절의 과정을 반복한다. 그러나 이 점을 루소는 결코 공공연히 선언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현전의 상실을 솔직히 단언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의 글들을 조직하는 가치 체계는 대립된 경향을 선호하고, 자연을 찬양하고, 근원, 즉각성을 선호한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인간 언어 기원 론』, 『에밀』 그리고 『고백록』에서, 루소는 직접적인 현전의 철학을 전시한다. 이것을 레비 AE 쿠 A 는 무비판적으로 다시 취하고 스타 로빈스키는 철학의 이름으로 탈신비화한다. 루소 연구에 대한 데리

다의 공헌은 루소의 고유한 텍스트가 그가 강변하는 교조적 원칙 에 맞서서 비난의 여지가 없는 증거를 제공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루소의 저작은 몇몇 문학 비평가~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유사한 표리 부동의 구조를 보여준다• 어떤 의미에서 루소 는 자신의 교조적 원칙이 그것의 정반대인 무엇인가에 대한 명철 함을 은닉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같은 앎에 맹 목적인 채 남아 있다. 폴드만에 따르면, 이 같은 맹목성은 직접적 인 현전성의 존재론의 직접적인 파급 효과로 진단된다. 폴드만이 던지는 물음의 축에서 우리의 주의는 데리다가 루소에 서 파악한 양립적 앎의 위상으로 향한다. 그에 다르면, 본서 『 그라 마톨로지 De la gra mma t olo gi e 』는 필연적으로 이 점에 있어 표류 한다는 것이다. 때때로, 마치 루소가 자기에게 그가 알고 싶지 않 았던 것을 단호하게 숨기는 것처럼 데리다는 루소를 묘사한다. 애초에 음성 언어의 길을 열어 놓으면서, 음성 언어가 구성하는 주 체를 해체시키고, 그 주체가 자신들의 기호들에 현전하는 것을 저지하 며 주체의 언어 활동을 문자 언어를 갖고 괴롭히는 이 같은 힘을 인지 한 후에, 루소는 그 힘의 필요성을 수용하기보다는 그것을 추방하는 데 몰두한다 . 2) 그러나 데리다는 다른 곳에서는 마치 루소가 자신의 의지롤 벗 어난 운명의 진영에 있는 것처럼 서술한다. …… 루소의 담론은 기원이라는 대리 보충 형식을 갖는 복잡성에 의 해서 제약을 받게 된다. 그의 명시적으로 선언된 의도는 취소되지 않 았고, 그것이 더 이상 지배하지 않는 체계 속에 등록된다 .3) 2) De la gram mato l og ie, 204 쪽 .

언어는 밀수를 통해, 언어 밖의 것으로 추정되는 순진성의 상태 속에 도입된다. 그러나 이 문지를 ` 수단으로 그것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언어가 맡는 이중적 가치는 의도되고 통제된다. 그것은 데리 다 논증의 핵심이다. 즉, 루소가 언어를 지배한 것은 언어를 통해 서이며, 이 역설은 문자 언어에 대한 그의 태도를 책임진다. 이 같 은 양립성의 인식론적 위상온 명료화될 수 없다. 따라서 루소가 직 접적인 현전성의 복구에 침여할 때는 이 점을 의식하고, 그 반대의 것이 일어날 때는 수동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 그러나 루소의 공식화의 본질적인 부분은 현전과 부재의 범주화 에서 벗어남을 데리다는 보여준다. 이 범주들은 더 이상 루소 언어 의 인지적 기능이라는 중요한 문제가 관건이 될 때, 객관적 식별점 이 될 수 없다. 데리다의 목적은 그것들의 형이상학적 전망의 토대 로서의 절대적 가치를 불신임하는 것이다. 루소에게 있어서 언어의 위상의 핵심은 그의 의식 속에도, 그의 언어의 인지적 가치에 대한 지각과 통제에도 있지 않다. 그 열쇠는 오직, 이 언어가 언어로서 자기 자신에게 전달하는 지식에서, 문자 언어 범주의 현전의 범주 에 대한 우월성을 확언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데리다의 논지이 다. 그렇다면, 왜, 데리다는 루소에게서 현전의 형이상학을 공식화 하고 있는가? 현전의 형이상학은 언어의 묵시적 힘에 종속된다. 데리다는 이야기한다. 루소는 진리를 엿보았지만, 그것을 지우기 시작했다고. 데리다가 주석을 다는 밀접하게 연결된 두 가지 형상은 『 인간 언어 기원론』에 나오는 미메시스와 메타포이다. 데리다는 루소의 표상 개념이 모방에 기초를 둔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모방에서 모 방되는 것의 존재론적 위상은 의심받지 않는다. 표상은 양립적 과 정이다. 그것은 표상체의 부재를 함의한다. 이 부재는 단순히 우발 3) 위의 책, 345 쪽 .

적인 것으로 고려될 수 없다• 이 같은 표상 이론의 모델은 시각에 대상을 마치 그것이 현전하는 것처럼 재구성하는 회화이다. 이런 식으로 그것의 현전성의 연속성을 보장한다. 18 세기의 고전적인 표상 이론은 고집스럽게, 음악과 시를 회화의 위상으로 환원시킨 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오직 상상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을 현전화시키는 것이 예술의 주요 기능이다. 표상은 모방의 가 능성이 현전의 보편적 증거임을 확증하는 조건이다• 처음 보면, 루 소는 전통에 머무른다. 음악의 특징을 다루는 『인간 언어 기원론.!l 의 구절에서 그가 음악의 내재성에 놓는 강조점은 음악을 모방으 로 보는 이론적 선언들과 일치한다. 모방이란 관점에서 보면, 외부 의 물리적 인상과 도덕적 인상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데리다의 논증은 정당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루소에게서 고전적인 모방 이론의 옹호자를 본다. 차분한 전통에 따라서, 루소는 예술의 본질이 모방이라고 획신한다. 모방은 현전을 되풀이하고, 그것을 대리 보충하면서 현전에 첨가된다. 따라서 모방은 현전하는 것을 그것의 바깥쪽으로 내쫓는다. ……회화와 노래는, 그것들의 차이가 어찌되었건 복제일 뿐이다 .4) 그러나 폴드만은 이 같은 데리다의 해석이 오류임을, 루소 음악 론의 심층적 맥락을 파헤치면서 보여준다. . 『인간 언어 기원론』의 음악론은 독창적이다. 루소는 음악, 회화, 예술 일반이 감각에 의존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데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회화적 혹은 음악적 기호의 부분을 이루는 감각적 요소는 미적 경험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도 맡지 않는다. 데리다의 주장과 는 달리, 루소의 표상 이론은 현전과 충만함으로서의 의미로 향하 4) 위의 책, 289 쪽.

지 않고 공허로서의 의미로 향한다. 음악은 그것의 실체의 결핍에 도 불구하고 회화보다 고차원이다. 루소는 음악을 하나의 순수한 가치 체계로 보고 그 어떤 경우도 현전의 실제적 진술에 종속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한다. 음악은 순수한 관계들의 놀이이다. 그러나 음악은 관계들의 체계로 환원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미 와는 독립된 순수한 소리들의 구조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루소에게 있어서는 기호의 기호학적 위상이나 비-감각적 위상과 관련해서 주저함이 없다. 음악은 순수한 구조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의 심장부에서 텅빈 것이기 때문에, 또 일체의 현전의 부정울 의미하 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악 구조는 〈충만한〉 기호에 근거하는 구조 들을 지배하는 원칙들과는 전혀 다른 원칙에 따른다. 이때, 기호가 감각 혹은 의식 상태를 참조하느냐의 여부를 아는 것에는 신경 쓰 지 않는다. 음악 기호는 어떤 실체에도 토대를 두지 않으며 존재한 다는 확증을 결코 갖지 않는다. 음악 기호는 결코 그 자신과 혹은 앞으로의 반복으로 정체 파악이 될 수 없다. 비록, 미래의 음이 현 재의 기호와 동일한 음색과 고저의 동일한 물리적 속성을 소유한 다고 하더라도말이다. 물리적인 것의 정체성들은, 감각적 속성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 기호의 존재 방식과 하등의 관계를 갖지 않는다. 회화의 안정된 감각적 자극과는 달리, 음악은 결코 한 순 간도 그 자신의 존재의 안정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 음악은 끝없이 무한의 상태로 남아 있는 운동 속에서 반복된다. 이 운동은 현전의 환상이지만, 주체가 그의 지향성을 해석하는 방식에 아랑곳하지 않 고 지속된다. 그 운동은 시니피앙으로서의 기호의 본질에 의해서, 언어로서의 음악의 본질에 의해서 규정된다. 거기서 결과되는 반복 구조는 시간성의 토대이다. 『인간 언어 기원론』의 언어 이론은 이 점에서 그의 음악 이론과 등식의 관계를 이룬다. 이 책은 루소가 계속해서 언어의 본질을 언

급하고 있다는 시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언어라고 부르는 것은 의 사 소통 수단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루소는 말이 음악의 원칙과 홉 사한 원칙에 따라 구조화될 때부터 언어의 존재를 인정한다. 음악 처럼, 언어는 관계들의 통시적 체계이며 하나의 이야기의 연속 방 식이다. 언어의 구조적인 특징은 정확히 음악의 그것과 동일하다. 시각적 지각을 방황하게 하고 현전의 환상을 만드는 동시성 s y nchron i sme 은 반복되는 시간성의 픽션을 만드는 일련의 비연속 적 계기들의 연속으로 대체된다. 모든 분절 언어는 극적 언어이며, 이야기이다. 그것은 정념의 언어이다. 왜냐하면 정념은 루소에 따 르면 바로 모든 의미나 특수한 의도와는 독립하여 존재하는 의지의 발현 , 따라서 어떤 기원으로 유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소에게 있어 정념의 원형인 연민의 정은, 데리다도 보 았듯이, 픽션의 과정이며, 이 과정은 실제 상황을 외관, 드라마, 문 학 언어의 세계로 전환한다. 일체의 연민의 정은 본질상 연극적이 다. 이 담론에 시작, 연속성, 종말의 환상을 주는 서술의 통시적 구조는 어떤 경우에도 근원의 연구를 함의하지 않는다. 『인간 불평 등 기원론』도, 『인간 언어 기원론』도 발생의 역사, 탄생과 타락의 계보적 과정의 역사를 만들지 않는다. 음악, 멜로디, 알레고리 같 은 통시적 구조는 회화, 하모니, 모방과 같은 가짜-공시적 구조들 보다 선호된다• 왜냐하면, 이 후자들은 존재하지 않는 의미의 안정 성을 허위적으로 믿게 하기 때문이다. 루소는 근원적 현전에 대한 향수를 표현하지 않는다. 자기가 말하려는 바를 말하는 유일하고 고유한 의미는 고유한 의미가 있을 수 없음을 진술하는 것이기도 하다. 루소의 텍스트의 서술적 수사학에서, 이것은 연대기적 픽션에 의해서 반영된다. 최 초의 언어는 시적 언어였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데리다는 루소 를 표상에 종속된 작가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그는 오히려 루소의

메타포 이론이 메타포적 의미보다 고유한 의미의 우월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루소는 정 반대의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점에서 추론은 표상에 적용된 도식을 이중화한다. 루소는 더 이상 고유한 의미를 메타포의 지시체 속에 위치시키지 않는다. 루 소의 어휘에 있어서 언어는 정념의 산물이며 필요 욕구의 표현이 아니댜 폭력과 억압의 또 다른 면인 공포는 공리적인 것이며, 정 념이 아닌 필요 욕구의 세계에 속한다. 궁극적으로, 두려움은 언어 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팬터마임이나 몸짓으로 표현될 수 있 울 것이다. 수사학과 비유 언어의 본질에 대해서 루소는 자신이 의 도하는 바를 말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인간 언어 기원론』 은 그것의 담론적 진술이 수사학적 방식을 유도하는 텍스트들이다. 언어의 본질에 대해서 말해진 것은 필연적으로 또 픽션적으로 통 시적인 이야기의 형식 아래 텍스트들이 씌어졌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것은 하나의 알레고리이다. 모든 언어가 비유화되었다는 진술, 그리고 이 같은 전망을 계시하는 반성의 통시적 구조는 알레고리 적 방식을 참작하고 있다• 텍스트는 그 자체의 오해석의 역사와 알 레고리를 이야기한다. 멜로디의 하모니로의 필연적 조락, 언어의 회화로의 타락, 정념의 언어의 필요 욕구의 언어로의 발전 등이 그 예들이다. 데리다의 텍스트는 루소의 텍스트와 어떻게 다른가? 폴드만은 • 루소 텍스트를 문학적이라고 부른다. 죽, 루소 텍스트는 묵시적이 건 명시적이건, 그 자신의 고유한 수사학적 방식을 의미하고 그 자 신의 오해석을 미리 형성하는, 선언적 언술이나 시적인 암시를 통 해서 의미망을 구축한다. 지식의 기능이 주체가 아닌 언어 속에 있 는 것은 문학 언어의 수사학적 본질로부터 나온다. 이제 궁극적인 과제는 비평 언어와 문학 언어 사이의 놀이를 묻는 일이다. 루소가

만약, 로고스 중심주의의 시대에 속하지 않는다면, 데리다의 구상 은 터무니 없음으로 밝혀질 것이다. 만약, 루소가 로고스 중심주의 에서 벗어난다면, 그의 언어가 문학적이라는 면에서, 문자 언어에 대한 목소리의 우선권의 신화는 이미 문학에 의해서 탈신비화되었 음을 함의한다. 비록 문학은 지속적으로 오해석의 가능성으로 개방 되었다고 하더라도말이다. 물론 이것은 데리다의 전망과 양립 불가 능하지 않다. 그의 역사적 도식은 하나의 서술적 계약일 뿐이며, 이 책에서 문학 언어의 본질에 대한 짧은 단락도 이 방향에서 진 행되고 있다. 하지만, 데리다가 문학 언어의 본질과 관련해서 옳 고, 이 전망의 적용에서 그 자신의 텍스트에 적용에 있어서 수미일 관하더라도, 데리다는 여전히, 루소를 〈문학〉으로 읽고 싶어하지 않는다. 데리다를 추종하면서, 루소를 로고스 중심주의의 언어 이 론의 대변자로 비난하는 것은, 철저화될 수 없다. 루소 자신아 18 세기의 감각주의 미학의 속성 아래서, 예술의 형이상학적 개념의 철학에서 유산을 물려 받은 개념틀 속에서 이미 반동적 운동을 개 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루소가 전통적 어휘에 대해서 행하는 관례와 사용은 그것의 전략과 함의에 있어서 데리다가 서구 철학 의 전통적인 어휘에 대해서 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 둘 모두에 있 어서 실체와 현전의 어휘는 담론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수사학적으 로 작동한다. 루소의 텍스트는 전혀 맹목적인 점이 없다. 반대로 데리다는 액면적 수준으로부터 담론의 비유적 수준으로의 전이를 맹목성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것은 곧 루소에 대한 데리다의 맹목성이다. 물론, 데리다의 주 석의 방법론 자체는 결함이 없다. 그러나 그는 대상을 혼동하고 있 는 것이다. 결국, 폴드만의 결론은 루소를 해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해체될 것은 루소에 대한 주석의 전통일 뿐이다. 이 책을 번역한 후 번역의 한계와 폭력성을 절감하지만, 그렇다

고 번역의 가능성에 대한 사변적 성찰의 테두리 안에 안주할 마음 은 더더욱 없다. 이제 나에게 있어 번역 작업은 하나의 필요이자 욕망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줄곧 염두에 둔 것은 번역의 윤리성의 문제였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지난 4 년 동안 역자는 많은 분들에게 빚을 졌다. 그분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1996. 1. 김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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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뉴뱅 336 가설 259 가족 사회 447 가족 언어 562 가치 15, 105 갈릴레오 37 감각적 인상 402 개념 68, 126 겔브 170 경험주의 410 고델 143 고유 명사 217, 221, 224, 537 고유함 101 공간 띄우기 371, 392, 395, 415, 440, 480 공간적 부재 473 공간화 539 공감각 182 공시 언어학 112 과거 파지 95 관념 기호 534 관념적 시니피에 552 구두법 439-4 40 구두 언어 131 구두점 438, 442 구술성 327 구어 텍스트 111

구조 68, 306, 329, 494, 624 구조적 형태 8 구조주의 9, 56, 117, 203, 208, 619-620 규범 명령 40 그라마톨로지 16, 19, 92, 103, 107, 118, 151, 192, 613, 629 그라페인 216 극적 언어 633 근원성 467 근원적 단어 46 근원적 대리 보충 597-598, 60i 근원적분산 448 근접성 286 근친 상간 502, 506, 508 근친 상간의 금기 503-507 글 쓰기 246, 282, 622, 627 금기 506 기본어 157 기본적 시니피에 507-508 기상 천의한 사건 244 기술 424 기술주의 618 기원 389, 466, 481, 499, 507, 534 기하학의 기원 63, 85 기호 17, 42, 53, 57, 67, 80- 82, 86, 88- 89 , 91-92, 95-97, 1 야 101, 103, 125-126, 249, 305,

397, 401, 452, 455, 457, 461- 502, 544, 566, . 585, 591, 593, 601, 614 -61 5, 617, 631-632 기호 개념 17, 34 기호론 32 기호 모델 491 기호의 경제 282 기호의 기호 66, 89, 616 기호 의미 32, 45 기호의 축약 550 기호 이론 543 기호 체계 70, 105-106, 450, 616 기호 표기 52, 95 기호학 56, 84, 92, 97-98, 103, 402 기호학적 문화 402 기호-함수 121 기호 형식 32, 45 『꿈의 해석』 93, 506 L 남방 언어 393, 425 내용 116 내적 언어 128 내적 체계 73, 83, 107, 617 네우마 473, 477-4 7 8, 480, 538 노동 435 노래 384 -38 6, 389, 391, 465 노발리스 355 노에마 42

노출증 302 논리 중심주의 319 논리학 63 논점 선취의 오류 425 놀이 101-102, 115-116 니 체 43-4 4, 52, 138, 355, 550, 615 c: 다르메스테르 88 다리우스 459 다비드 154 다산성 427 단순주의 552 단어 68-69 달랑베르 337 담론 179, 203, 206, 311, 420,444, 452, 457, 460, 463, 472, 526, 533, 573-574 담론의 계기 123 담론의 분화 537-538 대 리 대표 567, 569 대리 보충 23, 280, 285, 291-292, 294 --29 7, 306 -30 7, 311-312, 317- 318, 321-322, 349-350, 438, 470, 495, 564, 580, 623, 625, 631 대리 보충성 321, 366, 391, 426, 454, 464, 469, 473, 506, 540, 580

대 리 보충성 놀이 348, 487, 497, 499, 507, 570 대리 보충성의 구조 359 대리 보충으로서의 담론 421 대리 보충의 지연 570 대 리 보충적 구조 422, 424, 488 대리 보충적 부호 439 대리 보충적 재앙 393 대리 보충적 조작 497 대 리 보충적 차이/지 연 359, 458 대리 보충적 타락 350 대리 표상체 595 대상체 99 대수학 153, 579-580, 600 대 체 289, 433, 520 던스 스코터스 99 데라테 337-338 데리다 613, 630, 635 데카르트 37, 155, 157-158, 1(,(), 200 -20 1, 235, 362, 531, 579 도구주의 168 도다르 385, 387 도덕 506 도덕의 족보 355 도덕적 대리 보충 349 도덕적 신학 480 도상 97 도상학 93 동물성 384, 468 동물 언어 443, 464 동물 음악 383 동물지®位誌) 559-5(,()

동시성 633 동일성 논리 598 동일성 원칙 471 뒤르켐 362 뒤집기 135 뒤클로 331-332, 334 -33 5, 375, 377, 387, 439, 441-4 42 , 573 뒤페루 336 디오게네스 457 2 라모 379, 382, 409, 413 라바 181 라벨 75 라신 587 라이프니츠 53-55, 156, 158, 160 - 163, 165, 362, 580, 595, 618 라포르그식 연구 유형 315 랑그 57, 105, 107-108, 115-116, 134 랑베르 100 랑송 378 러셀 117 러시아 형식주의 120 레비나스 138 레비브륄 190 레비 ,,._E 쿠 !:_ 30, 204, 206 -20 8, 210 -21 2, 215, 217, 224, 227, 230 -23 2, 237, 247-248, 252- 254, 259-262, 264 -26 5, 274,

331, 620, 628 레이몽 336 로고스 467, 472, 548, 598 로고스 중심주의 13, 18, 30-31, 42, 49, 51, 90, 94, 100, 151, 162, 186, 199-200, 202, 214, 549, 614, 618-6 1 9, 635 로크 362, 399, 579 루소 8-9, 23, 39, 62, 66, 77, 83, 86, 88, 119, 199-200, 206, 212, 215, 227, 231, 264, 274, 280, 289, 295, 299, 618-619, 621, 623-6 2 6, 628-6 2 9, 633, 635 르낭 246 르루아구르한 171, 174- -1 75 리큐르그 568 口 마르크스 234 마르티네 69, 110, 111-112, 440 마송 376 말 31 말라르메 134, 189 말레르브 376 말브랑슈 75-76, 544, 579 말소 22, 520 말소된 근원 284 말 숨바꼭질 78 망드빌 339

맹목성 295 메 를 로퐁티 214 , 302 메타포 15, 36, 215, 522, 525, 529, 630, 634 멜라니 클라인 180-181 델로디 385, 393, 406 -40 7, 411 - 412 , 476 멜로디 형식 408 명중성 434 모델 68, 209 모방 396, 399, 406, 420, 442, 461, 466, 536 모방 가능성 400 모사형(시뮬라크르) 462 모스코니 447, 483 목소리 326, 387 목소리와 현상 43, 99 몸짓 언어 434, 449, 457, 463 몽테뉴 354 무위 76 무차이/지연 502 문명성 533 문자 26, 66, 436, 552, 559, 563, 576, 601 문자과학 62 문자 기록 공간 556 문자 기호 76, 201, 451, 628 문자소 26, 93., 1 19, 470 문자 언어 17, 23-24, 27, 39, 44, 57, 62, 64, 67-6 8, 73, 75-76, 78, 105-106, 109, 113, 119, 125, 151, 166, 172, 187, 189, 222,

242, 252, 280-282, 286, 383, 413, 437-4 3 8, 442, 460, 519-521, 558, 564, 595-598, 614, 616, 621-622, 624, 627-6 30 문자 언어 개념 14, 36 문자 언어의 출현 563 문자 언어 이론 519 문자의 공간 554 문자의 교훈 243 문자 이론 520 문자 체계 89, 106, 112 문자 텍스트 111, 297 문자 표기 41, 119-120, 152, 179, 185, 187, 240, 325 문자 표기론 117 문자학 19, 62-64, 151, 616 문체학 530 문학 언어 79 문학적 에크리튀르 522 문화 429 문화 코드 402 문화 형성 430 므네메 79 미개 상태 456 미메시스 396, 405-4 0 6, 559, 630 미분절된 언어 600 미학 402 미학적 기호 402 미학적 세계의 로고스 557

닙 바깥쪽 75 바깥쪽은 안쪽 91 바롱 334 바르부르통 450, 487, 524 -52 6, 535, 541-542, 545, 547-548, 550 -55 2 바르텔레미 166 바르트 104 -10 5 바슐라르 500 바타이유 587 반인종 중심주의 411 발생 494 발현 100 발화 행위 280 방향성(동방화) 421 방황 17 범람 22 『법의 정신』 428 베르그송 . 133, 235 베르니에 . 403 벨레로폰 517 변별적 자질 110, 137 변증법 472, 598 보강 337 보네 38 보두엥 377 보드엘 드 쿠르티네 127 보충성 287 보편 기 호학 1(i( ), 162, 579, 618 보편 문자 53, 158 -15 9, 161, 164 , 548, 575, 595

보편 언어 156, 161 볼테르 354, 487 부베 163 부정적인 거리 364 부호 439, 450 북방 언어 393, 425 분극 421 분산 527 분산 시간 482 분산 원칙 528 분석적 언어 169 분석적 음성 문자 561 분절 434, 436, 442, 465, 498, 520, 599 분절 언어 130, 633 분절화 443, 464 불길한 우연 495 뷔퐁 354 블레즈 드 비즈네르 155 비교의 역설 372 비금기 503 비동기화 96 비유 522, 525, 529-530 비코 418, 523-525, 535, 570 人 사변 문법 99 사상 191 사상사 471 사어 문자 579

사회 446 사회적 비진정성 269 사회적 진정성 274 살아 있는 현재 123 상상력 286, 357-358, 361, 365- 366, 371, 492, 543, 592 상징 92, 95-98 상징 문자 571 상형 문자 54- 55 , 70, 111, 134, 164-166, 186, 189, 459, 461, 543, 546, 548, 561, 571 상형 문자 . 언어 456 상형 음성 문자 561 생득성 362 생리 음성학 127-128 생성-문자 442 생성-문화 485 생성-부재 541 샹폴리옹 167 서법 26 서사적 모델 178 선(trait) 175-176, 406 -40 7, 556 선조성 141, 174 -17 5 성적 수치심 351 소거 521 소리 66, 108, 129 소리 중심 주의 201, 614 소쉬르 30, 33, 64, 66-67 , 70, 73- 76, 79, 81-82, 85, 88-89, 91-93, 97, 101, 103-104, 108 -1 10, 112, 115, 118, 124, 128, 130, 134, 140 -14 1, 208, 212, 235, 442,

470, 598, 616 소크라테스 56, 83 소피스트 46 솔리메스 518 수사학 529, 533 수학 언어 58 순수 문법 99 순수 자연 527 순수한 자연 상태 446, 483-4 8 6, 527 숨은 그림 184 슐레겔 167 스콜라 신학 557 스타로빈스키 81, 141, 281-282, 300-302, 311, 338, 355, 361, 366, 500, 584, 628 스토아 학파 32 스트라봉 418 『슬픈 열대』 206, 222, 230, 237- 238, 245, 248, 576 시간적 부재 473 시그나툼 33, 142-143 시그난스 33, 143

시니피앙 21-23, 25-26, 28- 30 , 32, •3 4- 36 , 41-4 3 , 45-4 6, 49, 57, 6&67, 76, 84, 91-92, 95, 116, 126, 137, 143-144, 169, 181, 187, 335, 397, 404, 456, 507~508, 549, 555, 566, 581, 583, 600, 620, 624 시니피에 21-23, 25-26, 29-30, 32, 34-35 , 41-4 3 , 45-4 6, 49, 57-

58, 67, 76, 84, 91-92, 95, 100, 102, 126, 137, 143-144, 169, 297, 335, 397, 405, 456, 507-508, 550, 555, 566, 575, 580, 600, 621 시민 사회 456 시선 언어 457 시원론 492 시차적 반사 314 신(神) 491 신화 문자 174, 178 실존적 선택 301 실체 116 심리 언어학 530 심리 음성학 127 。 아나그람 470 아나그람 연구 81, 141 아리스토텔레스 29, 58, 6&67 , 201, 535 아브라함 509 아비멜렉 509 아우구스티누스 477 아티카 427 왜惡) 344 악센트 413, 416, 418, 435, 438, 440: 461, 5()(), 520 악센트 부호 440, 59< ) 악센트 표기 442

안쪽 72, 75 알렉산더 457 알파벳 562, 564-565, 572-575 알파벳 문자 53-55, 70, 117, 155 애타섬 341 야만성 456, 488, 532, 561-562 야스퍼스 38 야콥슨 27, 33, 108-110, 129, 137, 140, 167, 600 양식 35 언리소 115 언리학 22, 108, 110, 120 -12 1 언어 24- 25 , 47, 213, 240, 359, 433, 442, 500, 508, 539 언어 기호 35, 66, 89, 91, 103, 112 언어 문제 20 언어병(病) 391 언어 분절의 축 436 언어와 친족 208 언어의 기원 64 언어의 내재성 89 언어의 산포 421 언어의 이중 분절 440 언어의 지역적인 차이 480 『언어 이론 서설』 116 언어적 악 329 언어 체계 86, 89, 105, 107, 121 언어 활동 88, 130, 170 에너지 435, 460 에네르기 아 306, 593 에로티시즘 298

에 밀 199, 264, 288-289, 298-299, 628 에스피 나스 376 -37 7 에우리피데스 393 에이도스 200, 306, 328, 559, 584 에크리튀르 8, 16- 17 , 20-22, 26, 40, 51, 56, 79, 103, 105-106, 112-113, 125, 130, 135, 137, 151, 172, 191, 254, 284, 314, 329, 459, 470, 510, 549, 566, 598, 600, 613-614, 622, 628 에포스 119 에피스테메 15, 18-19, 27, 63, 68, 73-74, 94, 187, 191, 548-549 에피쿠로스 학파 531 역사적 이성 494 역사적 총체성 9 연민의 정 339, 342-343, 355, 357, 361-362, 362, 370, 373, 383, 401, 422, 458 연애의 정념 344 열대 지방의 상형 문자 547 영도(零度) 466, 481 영속적인 봄 494, 497, 499 예 비 저 장 260, 362, 364, 368 예술 396, 402, 404 예술의 죽음 406 옐름슬레우 90, 101, 111, 113, 115, 117, 119, 122-123 오두막집 시대 446, 483 『오딧세이』 518 울달 118-119

완성 가능성 357-359, 385, 493 외재성 109, 139, 169 외재적 목적론 493 외적 체계 93 요르겐센 109 욕망 345, 435, 445, 539, 591 우시 아 200, 306, 328 울타리 16, 34, 614 원문자 113, 121, 134, 249, 274, 442, 560 원시주의 84 원시 헤브루어 442 원에크리튀르 226 완음성 언어 40 원-종합 26 원형-흔적 123 월라스톤 356 위험한 대리 보충 303, 314, 389, 419, 495, 507, 539, 589 윌킨스 156 유럽 중심주의 429 유로타스 427 유의미성 50 유형 론 167-168, 541 은유 36 은유적 언어 522, 526 온유적 언어 이론 543 은유화 184 음계 415 음성 문자 58, 67, 70, 82, 93, 155, 202, 240, 571-573, 595 음성 언어 7, 17, 23-25, 54, 57,

62, 64, 67-6 8, 73, 75-78, 80- 83 , 86, 88- 89 , 95, 102- 103, 109, 113, 125, 134, 137, 151, 162, 166, 173, 189, 222, 240, 242, 249, 252, 274, 280-282, 286, 299, 413, 437-4 3 8, 442, 460, 475, 541, 544, 600, 614, 616 -61 7, 621- 625, 628-6 2 9 음성 중심주의 30-31 음성 체계 70 음성학 108 음소 113, 137, 470 음소적 시니피에 561 음악 383, 390, 393, 401, 406, 心 9 음악의 기원 418 음악적 기호 631-632 음운론주의 208, 620 음운주의 66, 110 음정 389, 392, 395-396 음정 계산 385 음정의 필연성 391 음정 체계 385 음채학 415 음향성 386 음향적 언어 54 • 의미 101 의미 요소 251 의 미 작용 28, 45, 66, 68, 100, 104 , 139, 220, 243, 397, 450451, 580, 621 의미 작용의 체계 450

의미하는 바 99 의식의 논리적 시간 원칙 471 의지론적 심리학 263 이기심 342 이미지 73, 75, 77, 89, 93-95, 105, 299, 305, 360, 460, 501, 505, 524, 532, 535, 542-543, 559, 569, 623-6 2 4 이성 353, 357-358, 521, 564 이중 기원 481 이즐 드 생 피에르 538, 592 인간 과학 64, 171 『인간 불평등 기원론』 77, 214, 231, 264, 627, 632-6 3 3 『인간 언어 기원론』 9-10, 39, 62, 136, 214 -21 5, 253~254, 271, 621, 625, 628, 632-634 인간 중심적 텔로스 564 인간 중심주의 564 인공 언어 81, 164 인공 지능/인공 두뇌학 58 인식론적 음운주의 209 인종 기호학 403 인종 중심주의 13, 18, 84, 164, 221, 242, 246, 411, 429, 431, 614, 618 인종학 402 『일리아드』 380, 517 일반 기호학 108 『일반 문법 원리』 115 일반 문자학 90 『일반 언어학 강의』 67, 74, 80,

86, 91, 94, 103-106, 111, 115, 118, 130, 208 일반 의지 569-570, 584 x: 자기 에로티시즘 308, 310, 351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342 자기 정서 유발 305, 307, 326, 365, 478, 492, 549 · 자연 365, 389, 445, 450 자연 개념 법칙 449 자연법 341 자연 법칙 449 자연속의-존재 364 자연 언어 464, 538 자연재앙 86 자연적 기호 92 자연적 대리 보충 351 자연 전쟁 367 자유 330, 358 자의성 70, 91-93, 96, 103, 114 자취 124 잔인성의 연극 587 잠재적 기능 362 장면의 재기억 251 재앙 392 재현전화 200, 395, '58 1 적확성 550 전범 8, 39, 199 전위 의식 20

절대적 근원 130 ` ’ 절대적 시작 320 정념 383, 429, 435, 450, 459, 498, 530, 551, 557, 576 정 념/필요 422, 424, 426 -42 7, 432- 434, 444, 452, 456 -45 8, 460, 499, 508-509, 521, 528 정념의 근원 342 정념의 대리 표상 533 정념의 언어 422, 457-4 5 8, 526; 633 정당화 313 정신 분석학 315, 317 정신적 사랑 353-354 정신적 인상 402 정신주의적 관점 127 『 정신 현상학』 345 정체성의 변질 401 정치적 악 329 정치적 차이 259 정치 철학 368 제 3 자 배제 원칙 471 제네바 학회 230 -23 1 제르네 247 존재론 598 존재론신학 101 존재 신학 28, 58 존재 신학적 형이상학 4% 존재와 시간 46, 48 존재의 물음 51 존재자 51, 96, 125, 329 존재-현상학 152-1 5 3

종말 16 종합적 문자 169 주그레이아 560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345 죽음에 이르는 만족 389, 495 준사회 485 중계성 312, 625 . 중복적인 주석 313 지시 명령 41, 25.0 지시체 35, 86, 135, 335 지역적 존재론 47 진리 550 진보 443, 469 진중함 102 질투심 345 집중 작용 421 云 차이 345 차이/지연 51, 107, 121, 124 -12 5, 129, 133, 172, 191, 284 -28 5, 297, 325, 327, 329, 364 , 420, . 465, 476, 479, 500, 5{)')-510, 539, 566 -56 7, 584 , 586 차이성 107 찬탈 84-85 , 88, 105, 139 책 읽기 8, 296 『철학 대전 』 44 철학적 이성 494 첨가 286, 288 , 295

청각 영상 68, 126 -12 7 초언어학 104 초월적 독서 316 초월적 미학 556 -55 7 초월적 시니피에 101, 314 초월적 운동학 557 초월적 현상학 48, 124 총체적 소외 565 총체적 정신 분석 302 총칭적 철학 31 최초의 시간 446 -447 축제 502, 508, 583-584, 586, 588, 591 = 카프카 523 칸타타 403 칸트 49, 99, 487, 554, 556 -55 7 코기토 39, 121, 237 코르넬 587 코펜하겐 학파 119, 121 콩디악 208, 331, 425, 446, 451, 486, 524 -52 7, 535, 541-542, 544, 548, 550 -55 2 퀴내이폼 기호 13, 18, 182-183 크로마티크 415 크리오의 상형 문자 547 키르케 156 키메라 518

E' 타르쿠엥 457 타자〈他者) 534 타자 동화情]化)의 역설 401 탈구성 34 탈구성화 28 탈방향성(탈동방화) 421 탈자연화 226 탈중심화 155, 618 탈현전화 395 태초의 데카당스 390 태초의 시간 482 테라시빌 457 테우투스 596 테우트 596 텍스트 44, 129, 296, 615 텍스트성 321 토마스 데르푸르트 99 토트 596 틈 137 工 파롤 57, 108, 110, 134 파르마콘 559 파운드 189 파이네스타이 559 팬터마임 455, 461 퍼스 97-98, 100 『페드로』 35, 53, 74, 79, 83, 101,

107, 135, 200, 208 페레르 386 페레시드 551 페브리에 169-170 페놀로자 187 편애 344, 349 포르 르와얄 논리 579 폭력 42, 215 폰 슈베르트 38 폴드만 626, 629, 631, 634 -63 5 표기 기호 91 표상 75, 206, 227, 305, 395, 405, 530, 543, 558, 565-566, 589, 623 표상 이론 631 표상적 관념의 놀이 530 표상적 중개성 450 표상체 67, 99-100, 335, 360, 450, 451, 506, 565-566, 573 표음 문자 571 표음 표기법 27 표현 116 표현 실체 .120 표현 형식 120 푸리에주의 273 푸코 18 푸펜도르프 354 프레 155 프로그람 21, 26, 58 프로이트 93, 133-1~, 138, 235, 470, 506 폴라톤 36, 39, 41, 67, 73, 79,

107, 140, 200 -20 1, 393, 472, 496, 559, 596, 615 플루타르크 393 피표상체 335, 3(i() , 506 -50 7, 566 필상학 178 필생(筆生) 438-4 3 9 필요 445, 505 필요 욕구 426 -42 8, 433, 497 필요 욕구의 타락 429 필요 욕구 이 론 428, 497 필요의 언어 422, 464, 526 -52 7 핑크 45 근 하모니 390, 413, 419-4 20 하모니 형식 408 하이 데 거 28, 30, 44-45 , 47-4 8, 50, 52, 58, 102, 138, 140, 330, 365 한자 162-164, 186 할레 108-109 함의 관계 놀이 472 합리주의 410 해석체 100 해체 138, 143, 170 행동 언어 52~527, 535, 537 허음소店음소론 113 헤겔 30, 52-53, 66, 92, 140, 162, 201-202, 345, 353, 373, 428, 472, 485, 544, 549 헤르메스 5%

현대 구조주의 32 현대 언어 학 47, 117, 143, 616 현상학 100 현전 42, 114, 125, 134, 260, 284, 304-305, 307, 330, 461, 478- 479, 490, 501, 539, 564-565, 622-6 2 4 현전성 328, 420, 527, 567, 569- 570, -57 6, 578, 584, 586 -58 7, 589-592, 594 현전의 복원 305 현전의 철학 31 현전의 총체적 재소유화 565-566 현전의 형이상학 100, 152, 472 형식 116, 125 형식 개념 115 형식의 놀이 119 형식주의 408 『형이상학 서설』 49-50

형이상학의 역사 14 호머 380, 393, 517 홈 자국에 의한 문자 552 홉스 366, 369 회화 406 회화 문자 70, 545-546, 548, 558, 571, 578 후설 49, 63, 75, 85, 100, 124, 128, 235, 544, 556 -55 7 후성주의 242 흄 37 흔적 25, 41, 50, 55, 94 -96 , 102, 113, 122, 123-125, 129, 131, 137-1 38 히포므테시스 79 힐레 모르페 구조 126 힘의 우회 437 힘의 회전 436

김성도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졸업 파리 10 대학 언어학 석사 · 박사 학위 수여 파리 사회과학 고등연구원, 뉴욕 시립대학교, MIT 수학 전공은 언어철학 및 기호학 현재 고려대학교 언어학과 교수로 재직중 논문 「기호학사 서술 방법론」, 「소쉬르 기호학」, 「소쉬르 사상의 인식론적 연속성」(박사 학위 논문) 역서 『현대기호학의 흐름』(헤르만 파레트) 『의 미 에 관하여 (기 호학적 시 론)』 (그레 마스) 그라마톨로지 대우학술총서 • 번역 87 1 판 1 쇄 찍음 - 1996 년 2 월 1 일 1 판 1 쇄 펴냄 ——-1 996 년 2 월 5 일 지은이 자크 데리다 옮긴이 김성도 펴낸이 朴孟浩 펴낸곳 (주)인옵^t 출판등록 1991. 12. 20. 제 1 6-4 90 호 135-120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06 강남출판문화센터 5 층 대표전화 515-2000 팩시밀리 515-2007 © 김성도 1996. 철학 KDC/10 0 Pri nt e d in Seoul, Korea 값 25,000 원 ISBN 89~374 -408 7-3 94100 ISBN 89-37 4-3 000- 2( 세트) * 옮긴이와 합의하여 인지를 불이지 않습니다.

대우학술총서(번역)

1 유목만족제국사 콴 텐 /송 기 중 2 수학의 확실성 클 라인 /박 세 희 3 중세철학사 와 인버 그/강영 계 4 日本語의 起源 밀 러 /검방한 5 古代漠語音 韻 學槪要 칼그 렌 /최영 애 6 말과 사물 푸코/ 이 광 래 7 수리철학과 과학철학 와일/검상문 8 기후와 진화 피어 슨/김준민 9 이성진리역사 파트남/김효명 10 사회과학에서의 場理論 레 빈/박 재 호 11 영국의 산업혁명 딘/나경수 · 이정우 12 현대과학철학논쟁 쿤外/조승욱김동식 13 있음에서 됨으로 프리고 진 / 이 철수 14 비교종교학 바하/김종서 15 동물행동학 하인드/장현갑 16 현대우주론 시아마/ 양종 만 17 시베리아의 샤머니즘 디오 세 지·호팔/ 최 길성 18 조형미술의 형식 힐 데 브란트/조 창 섭 19 힐버트 리드/ 이 일해 20 원시국가의 진화 하스/최몽룡 21 商文明 張光直/윤 내 현 22 마음의 생태학 베이 츤/ 서 석봉 23 혼돈 속의 질서 프 리고진뇨 스 텐저스 /유 괴 뭏 24 생명의 기원 밀라오르겔/박인원 25 일반언어학이론 야콥슨 1 권재 일 26 국가권력의 이념사 마이 네 케/이광주 27 역 사 학 논고 브로델/이정옥 28 유럽의식의 위기 l 아자르/조한경 29 유럽의식의 위기 ll 아자르/조한경 30 일반국가학 켈젠/민준 기 31 일반언어학강의 소쉬르/최승언 32 일반체계이론 버 를란피/현승일 33 현대문명의 위기와 기술철학 애거시/ 이 군현 34 언어에 대한 지식 촘스키/이선우 35 음운학원론 트루 베 쯔코 이 /한문희 36 우주의 발견 하위트/강용희 3 7 수학적 발견의 논리 라카토스/우정호 38 택스트 사회학 지마/허창운 39 현대물리학의 철학적 테두리 보음/전일동 40 과학과 가치관의 우선순위 스페리/이남표 41 신화의 진실 휘브 너 /이규영 42 대폭발 실크/홍승수 43 大同 書 康有 8/ 아성에 44 표상 포더/이영옥정성호 45 과정과 실재 화아트헤드/오영환

46 그리스 국가 에렌버 그/검진경 47 거대한 변환 폴라니/ 박현 수 48 법인류학 포스피실/이문옹 49 언어철학 올스튼/곽강 제 50 중세 이슬람 국가와 정부론 램톤/김정위 51 전통 쉴 즈 / 김 병서 신 현순 52 몽골문어문법 뽀 뻬/유 원수 53 중국신화전설 I 裵河/전 인 초김선자 54 중국신화전설 Il 〈근간〉 55 사회생물학 ] 윌슨/ 이병 훈 · 박 시룡 56 사회생물학 Il 윌슨/이 병 훈 · 박 시 룡 57 일반언어학의 제문제 I · 밴베 니스트/황경자 •5 s 일반인어학의 제문제 Il 밴베니 스트/ 황경 자 59 폭력과 성스러움 지라르/검진식 · 박무호 60 갑골학 OO 년 董作賓/ 이 형구 61 현대수학의 여행자 피터슨/김인수 · 주형관 62 프랑스 혁명의 지적 가원 모르 네 /주명철 63 해석학과 과학 커 널 리 ·코이트 너 / 이 유 선 64 서양고대경제 핀리/ 지동 식 65 음악사회학 베버 / 이 건 용 66 왕 띠 요 이 디 푹 A 들뢰즈·가 따리 /최명관 67 과학커뮤니케이션론 프 라 이스/남 태 우청준민 68 교양교육의 개혁 다 니 엘 벨/송 미 섭 69 과학과 가치 래 리 라우 든/이 유선 70 초기제국에 있어서의 교역과 시장 칼 풀 라니 /이종욱 71 폭정론과 저항권 헬라 만토/심재우 72 생명과학철학 대 이 비 드 헐/하두봉 • 구 혜영 73 사랑의 역사 쥴리아 크 리 스 테바 /김영 74 大地의 노모스 칼 슈미트/최 재 훈 75 일반 공법학 강의 레옹 뒤기 /이광윤 76 텍스트학 반 다이 크/정 시 호 77 문명의 발생 찰스 레 드 만 /최몽룡 78 근대국가의 발전 G. 폿지/ 박 상섭 79 과학적 발견의 패턴 N. R 헨슨/송진옹 • 조숙경 80 아랍 문학사 R A 니 콜슨/사회만 81 18 세기 중국의 관료제도와 자연재해 P. E 빌/정철옹 82 역사비교언어학개론 R 안틸 라 / 박 기덕 • 남 성우 83 계몽주의 철학 E 카 시러 /박완규 84 토양 마생물학과 생화학 폴 • 클라크/이도원 • 조 병 철 85 수학 , 과학 그리고 인식론 L 라 카토시/ 이 영 애 86 봉건제의 이해 러쉬튼 쿨본/김동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