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순 성균관 대학 사학과/동대학원 졸업 세인트루이스 대학 박사 학위 취득 현재 성균관 대학 역사교육학과 교수 논문 「 Bas tard Feu dalis m 연구」 역서 『중세시대의 서유럽 Weste r n Europe in the M 直l e A g es 』

뚱건제의 이애

Feudali stn in Hi st o r y

Edit ed by Rushto n Coulborn WITH CONTRIBUTIONS BY JO SEPH R. STRAYER WILLIAM F. EDGERTON EDWIN 0. REISCHAUER DANIEL THORNER DERKBODDE ERNST H. KANTOROWICZ BURR C. BRUNDAGE M 사 lC SZEF fEL RUSHTON COULBORN FOREWORD BYA. L. KROEBER PRINCETON, NEW JER SEY PRINCETON UN 禪 RSITY PRESS 1956

手건제의 이매

러쉬른 클븐 편저셉뚱순 쇼김 딘릅사

서언 1950 년 학자들의 회합으로 시작하였던 것이 심포지엄과 비교 논문 둘이라는 두 개의 결과물을 낳았다. 이 연구를 낳은 1950 년 〈 봉건제에 관한 토론회 Con fere nce on Feu- dal i sm 〉* 에 앞서 역사의 해석 Inte r p re ta t i on of Hi s t or y에 관한 두 번 의 비공식적인 토의가 있었는데, 로버트 오펜하이머 Robert Op pen - he i mer 와 월트 스튜어트 Wa lt er Ste w art7 } 각각 1948 년 4 월과 1949¾빈 5 월에 있었던 전보 학회 Insti tut e for Advanced S t ud y에서 이 문제를 정리하였다. 앞서 있었던 이 두 번의 회합에는, 그 당시 미국에 있었 던 아놀드 토인비와 그의 견해에 관십이 있는 우리들 중 일부가 참석 하였다. 토인비는 1950 년 회합에도 참석하였고, 그의에 쿨본 Rush t on Coulborn, 하비슨 E. H. Harbis o n 그리고 본인이 세 번에 걸친 토의에 참석하였다. 오펜하이머와 스튜어트는 1, 2 차 토의에 참석하였고, 끄} 토의에는 철학자 에리히 칼러 Er ich Kahler 과 폴 슈레커 Paul Schrecker * 이 책은 록펠러 재단이 관십을 가져주고 미국 지식인 단체 위원희 &neri ca n Council of Learned So ci e ti e 아 후원해 준 덕택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의 목 적은 역사에서의 반복성의 정도를 데스트하는 것이다. 미국 지식인 단체 위원 회는 〈 역사에서의 일관성에 관한 위원회〉를 발족시켰고, 역사에서 대체로 반 복적인, 죽 일관된 현상의 한 예로서 봉건제를 선택하였다. 미국 지식인 단체 위원회는 1950 년 9 월 31 일과 11 월 1 일 사이에 프린스턴 Pr i nce t on 대학에서 〈 봉건제에 관한 토론회 〉 를 개최하였는데, 특별 협정에 따라 참가한 아놀드 토 인비 Anold To yn be 여} 포함한 23 명의 학자들이 참석하였다. 이 책의 두번째 부분에 있는 8 편의 논문은 그 토론회를 위해 작성되었고 뒤이어 이 책에 수 록되기 위하여 수정되었다.

그리고 미술사가인 어윈 파노프스키 Erwi n Pano f sk y와 코트 자흐 Cou t Sachs7} 각자의 분야를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록펠러 재단의 존 마샬Jo hn Marshall 도 당시 참석하였는데, 그는 미국 지식인 단체 위원회의 후원하에 3 차 회의를 열 것을 제안하였 다. 그 위원회는 그의 제안을 받아둘였고, 당시 의장이던 찰스 오데가 드 Charles Ode g aard 는 〈 역사에서의 일관성에 관한 위원회 〉 를 구성하 도록 결정내렸다. 그 위원회는 맡은 소임을 다했으며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여 8 편의 논문이 저술되었고 봉건제에 관한 토론회가 이틀동 안열렸다. 8 편의 논문은 미리 작성되고 인쇄되어 그 토론회의 회원들에게 보 내졌다. 그 토론회에서 토의된 후 그 논문들은 토의된 관점에 따라 각기 필자들에 의해 수정되었다. 이 논문들이 지금 이 책의 2 부에 실 려 있다. 이들 8 개의 논문들은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 논문들은 특정 민족의 제도들이 특정 시기에 얼마나 봉건적인가, 또는 유사(類似) 봉건적인가, 또는 비(非)봉건적인가에 관한 부분에 관해 많은 전문 학자들의 최근 견해들울 제시한다. 특별 기고한 이 8 명의 필자들은 타분야의 전문가들이 그들의 주제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에 나타난 아 이디어를 자신들 개개인의 주제에 적용시키기는 했지만 이 8 편의 논 문은 최초의 상호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봉건 제도 는 유럽의 봉건 제도의 관점에서 재수정되었고, 이는 유럽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 두 경우는 메소포타미아, 중국, 비잔티움의 봉건적 또는 비봉건적 제도둘과 비교 연구되었다. 논문을 제출하지 않은 일부 학자들 역시 봉건제가 있었다고 여겨지 는 여러 지역 또는 분야의 전군가들이여서 관점을 수정하는 데 영향 을 끼쳤다. 또 다른 이들은 전반적으로 비교사적 성격에 관심이 있거 나 또는 추상적인 개념을 형성하는 데 관여하고 있었다. 그 토론회

구성원의 1/3-1/2 정도는 중국학 학자, 동양학 학자, 사회학자, 인류 학자, 철학자 등이었으며 그의는 역사학자들이었다 . . 이 책의 세번째 부분에서 쿨본은 〈 봉건제에 관한 비교 연구 〉 를 상 세하게 제시하였다. 이것은 복잡한 과정을 따라 진행되었으며 결론울 내리면서 주요한 봉건제의 경우들과 봉건제가 일어났던 문명 단계와 의 관계를 살피고 있다. 쿨본은 봉건제란 지적 노력에서의 창조성이 소멸되고 뒤이어 문명이 쇠퇴할 때 그 문명의 부활을 사회 정치적으 로 촉진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 문명의 정치적, 경제적인 구조는 해체된다. 그러고 나서 새로운 종교가 발전하거나 받아들여지고 그 종교는 이후 문명 부활의 토대가 된다. 봉건제는 발달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만일 발달한다면 봉건제는 해체와 쇠퇴로부터 부활 하는 데 있어 조야하지만 적철한 고안물이자 부활한 문명을 확산시키 는수단이 된다. 쿨본은 역사에서 봉건제(그리고 유사한 현상)의 반복이 짧은 간격 울 두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으나 이를 완전히 부정하기에는 봉건제의 반복이 많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류 역사에서 일관성을 따로 떼내어 정당화하기란 쉽지 않다-―이것이 그가 왜 봉 건제에 관한 작업을 하기 위해 10 장(章)이나 되는 분량을 필요로 했 고 또 봉건제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다른 많은 형태의 일관성을 필요로 했는가의 이유이다.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 가변성은 많고 인류 역사는 한없이 복잡하다. 그러나 쿨본은 일관성은 존재하며 또 규정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나는 쿨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나는 일관성을 주 로 문화적인 것이라고 덧붙이고자 한다 . 실제로 봉건제 또는 여타의 제도는 문화적인 것이다. 사건들에 일관성이 있는 한, 그 일관성은 개 개인이나 또는 특정 집단의 직접적인 활동이라기보다는 문화와 그 형 태의 역사에 있어 〈점진적인 사건〉들일 것이다.

왜 그렇지 않은가? 어느 면에서 문화는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기 때 문이다. 좀더 자세하게, 여러 민족 또는 부족들의 관습을 고려할 때 이 사실은 분명해전다. 역사의 광범한 시간과 공간을 통틀어 살펴볼 때 그 안에 있는 것들이 너무나 다양하여 우리는 다만, 특히 1 차 조 사에서는, 그럴듯하게 반복을- 발견할 수 있는 전체의 극히 사소한 한 부분만을 기대할 수 있다. 점차로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분석이 필요하다. 쿨본은 여러 봉건제를 집중적으로 비교 분석하였다. A. L. 크뢰 버 Kroeber 캘리포니아 대학교 1953 년 3 월

서문 지난 20 여 년 동안 나는 줄곧 비교사 연구에 거의 모든 시간을 보 냈다. 이 연구를 위하여 먼저 이전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역사, 즉 중 국과 인도, 러시아와 이슬람 그리고 초기 역사 시대를 이해하기 위하 여 선사 시대의 일부 역사를 읽어야 했고, 두번째로 다른 주제, 주로 인류학과 철학에 대해 연구해야 했다 . 나는 이 연구둘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그리고 내가 연구할 수 있도록 여러 방 면에서 나를 도와준 이들에게 감사한다. 나보다 한 세대 앞서는 훌륭한 학자인 알프레드 크뢰버Alfr ed Kroeber 와는 10 년 동안 우의를 나누었고, 그로부터 우리가 함께 연구 하는 광범한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격려를 받았다. 따라서 내가 이 책 울 저술하고 그리고 그가 주최하였던 이전의 토의에 참여한 것은 나 에게는 큰 기쁨이 었다. 조셉 스트레이 어 Jose p h S t ra y er 는 출판과 저술 에 있어 적극적이고도 귀중한 도움을 주었다. 이 두 사람이 이 책에 서 내가 맡은 부분을 읽어주었고, 다른 이들도 각각의 장(章)을 읽고 비판해 주었다.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의 편집부원들과 교정을 보아준 이들도 이 책 전체의 배열과 내용에 대해 귀중한 제안을 해주었고, 그들과 함께 일 하게 된 것은 큰 영광이었다. 사회 과학 연구회 Socia l Sc ien ce Research Coun ci l 에게는 1943 년에 서 1945 년까지 2 년간의 시간을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해준 것에 대해, 프린스턴 대학측에게는 1946 년 쉬리브 펠로우십 Shreve Fellow-

ship 직(職)을 맡게 해준 것에 대해 그리고 미국 철학 협회 Americ a n Ph ilo sop h ic a l Soc i e ti es 에게도 1946 년 펜로즈 Penrose 기금에서 연구 자 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준 것에 각각 감사를 드린다. 내가 이 책에서 사용한 많은 자료들은 그때에 모아둔 것들이다. 록펠러 재단과 미국 지식인 단체 위원회는 이 책의 출간 기획 전체를 지원해 주었다. 내 가 말은 부분을 완성하는 데 그들의 관심이 큰 도움이 되었고, 또 그 것을 실현시 키는 데 특별한 도움을 준 존 마샬 Joh n Marshall, 찰스 오데가드 Charles Odega a rd 그리고 모티머 그레이브스 Mo ti mer Gra- ves 에게 감사드린다., 또한 출판에 도움이 된 데이 턴 스턱튼 Da yt on 一 Sto c kto n 기금에서 연구비를 얻을 수 있게 해준 프린스턴 대학 사학 과에도감사를드린다. 폴록 F. Pollock 과 매이트랜드 F. W. Mait lan d7} 저술한 『영국 법제 사 Hi s t ory of Eng lish Law 』, 차드윅 H. M. Chadw ic k 이 저술한 『영웅시 대 The Heroic A g e 』를 출판한 캠브리지 대학 출판부와 섬머 W . G. Summer 의 Folkway 를 출판한 Gi nn & Com p an y사에 게 이들의 저 서 에 서 인용을 할 수 있게 허락을 해준 것에 감사한다. 애틀란타 대학측으로부터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비교적 적은 수의 대학원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칠 수 있는 기회였다. 그 수업은 이 책에서 제안된 많은 내용들을 가다듬는 데 도움이 되었 으며 역사를 비교사적으로 연구하는 데 선행되어야 할 광범하고도 깊 이 있는 역사 연구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게다가 애틀란타 대학에 서 나의 일은 항상 적었는데 나의 동료 교수들이 내가 이런 식으로 휴가를 보낸 것에 대해 이해하기를 전심으로 바란다. 그 휴가의 결실 이 이 책에서 잘 드러난다. 대학 당국은 내 계획을 지지하였고 경우 에 따라서는 격려도 해주었다. 내가 겪었던 한 가지 불편한 점은 내 연구에 필수적인 사료들이 있는 대규모 도서관들이 애틀란타 대학에 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카네기 재단이 아틀란타 대

24

【차례】

서언 • 19

서문 •23

제 1 부

I 봉건제의 개념 • 스트레이어와 쿨본 31

제 2 부

II 서유럽의 봉건제 • 스트레이어 45

III 일본의 봉건제 • 라이샤워 61

IV 중국의 봉건제 • 보드 91

V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란의 봉건제 • 브런데이지 150

VI 고대 이집트의 봉건제 • 에드거튼 188

VII 인도의 봉건제 • 소너 205

VlII 비잔틴 제국의 봉건제 • 칸토로위츠 231

IX 러시아의 봉건제 • 제프텔 253

제 3 부

1 분류 277

2 일본과 서유럽의 봉건제의 기원과 초기의 발달 281

3 주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의 봉건제의 가능성 319

4 구제국들과 그들의 유령 249

5 봉건제에 대한 대안 373

6 후기 봉건제와 국가들 394

7 봉건제의 종말 418

8 이란 469

9 러시아와 비잔틴 496

10 결론 524

옮긴이 해제 • 569

찾아보기

제 1 부

I 봉건제의 개념 스트레이어 Jose p h R. S t ra y er 와 쿨본 Rushto n Coulborn 봉건제는 초기 유럽의 역사적 사실에서 유출한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봉건제의 개념 그 자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정복왕 윌리 엄 이나 고드프리 부용 Godfr ey de Bo ui llon 과 같은 동 시대 인룰 중 어 느 누구도 봉건제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용어는 학자들, 특 히 18 세기 학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그들 자신의 시대에 남아 있 었던 어느 특정 제도를 연구하고, 그 제도들이 발생하고 번성하였던 시대를 돌아보던 학자들이 일련의 느슨하게 연관된 사실을 종합하기 위하여 봉건제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봉건제의 개념은 처음부터 대 단히 추상적이었다. 그 개념은 어느 한 구체적인 정부 형태를 묘사하 기보다는 일반적인 제 범주에 속하는 여러 제도들을 묘사한 것이다. 9 세기 프랑스에서, 12세 기 영국에서, l 때 l 기 독일에서 봉건제를 발견 하였다. 또한 그들은 구제도 말기에 유럽 대륙에 남아 있었거나 또는 재생되었던 봉건 요소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본 저서의 의도를 명확히 하기 위하여 이러한 역사 서술 방식의 기 본적인 제 요소들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역사가들은 봉건 제는 중세 서유럽의 제도에만 사용될 수 있는 전문 용어라고 주장해 왔다. 그들은 선험적으로. 유럽 이의의 지역 또는 중세 이의의 시대에

서 봉건제를 찾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봉건제라는 용어의 기원과 그 사용에 대하여 생각한다면, 그 용어가 그러한 제한 적 의미만을 가졌다는 데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 귀족 정치 ari st o c racy > 또는 〈 독재 정치 d i c t a t orsh ip 〉 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봉 건제는 하나의 독특한 정부 형태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정치 조직의 방 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 조직 방법이 서유럽 이외의 지역과 중세 이의의 시대에 살았던 다양한 제 민족들에 의하여 발달 하지 않았을 이유가 없다. 본 저서는 봉건제라는 정치 조직 방법이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 로 서유럽 이의의 지역, 죽 러시아, 비잔틴 제국 , 이란, 고대 메소포타 미아, 제 6 왕조부터 제 12 왕조 그리고 제 20 왕조부터 제 26 왕조에 이르는 이집트, 모슬렘 지배하의 인도, 주(周)와 한(漢) 왕조 말기의 중국과 쇼군 Sho gun 지배하의 일본에 적용될 수 있는가라는 가설을 시험하려 고 시도하고 있다. 이 연구 방법은 봉건제에 대한 잠정적인 규정 없 이는 시작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규정은 연구가 진행되어 가는 동안 에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봉건제에 대하여 단 하나의 정의를 내린 다고 해도, 그 정의는 그것이 묘사하고자 하는 서유럽의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아홉 개의 상이한 봉건적 또는 부분적인 봉건 사회들의 공통적인 요소들을 묘사할 수 있는 하나의 틀을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이들 사회에 공통된 요소 들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봉건제의 본질적인 특질이 무엇인지 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이견들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 저서의 궁극적인 목적은 봉건 제도에 대한 새로운 정의 를 내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봉건제에 대한 연구가 역사에 있어서 일관성의 문제에 어떤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는 데 있다. 간단히 말해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 죽 수세대 동안

역사가들은 모든 역사적 사건 또는 모든 역사적 인물들은 독특하며 결코 반복되거나 재현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동시에, 그들의 저서 에서 그리고 거기 깔려 있는 그들의 사상에서 역사가들은 구체적인 의미를 가진 개념과 용어보다는 일반적인 개념과 용어들을 사용하여 왔다. 그들은 모든 새로운 상황은 그 이전에 있었던 어떤 다른 상황 과 공통점을 가전다고 생각하였다. 로마, 중국 그리고 잉카에는 〈제국 em pi re 〉 이 있었다. 아테네, 풀로렌스 그리고 맨체스터에는 〈 중산 계층 mid d le class 〉 인 시민이 있었다. 왜 그러한 일반적인 의미의 용어 사 용이 허용될 수 있는가? 똑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유사한 사건 들이 있었는가? 인간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 숫적으로 아주 제한되 어 있어 실제 거의 유사하지 않은 사건이 거의 동일한 결과밖에 가져 올 수 없었는가? 아니면 그것은 우리의 어휘의 결핍에서 나타나는 환 상인가_우리들은 친숙감을 얻기 위하여 그들의 새로운 정착지에 유럽 도시들의 이름울 명명한 초기 아메리카 이주자와 같은 부류의 인간인가? 봉건제는 이러한 일관성의 문제를 연구하는 대 좋은 본보기가 된 다. 봉건제를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봉건제는 군주제 또는 제 국과 같은 개념보다도 그 의미가 보다 정확하며 한정되어 있다. 또한 봉건제는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다. 봉건제가 역사에 나타난다고 해도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 본 저서에서 연구된 아홉 개의 사회는 봉건제 의 모든 가능한 예들을 망라하는 것은 아니나, 이 아홉 개의 사회는 봉건제의 유형을 대부분 갖고 있다. 동시에 이들 사회들은 시대적, 지 역적으로 잘 분배되어 있다_만약 봉건 제도가 재현될 수 있는 조 건, 죽 일관성을 가졌다면 그 일관성은 인종과 문화의 차이룰 초월하 는것이다. 봉건제를 참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봉건제 는 분명히 사회, 경제적인 환경을 변화시키고 또 그 환경에 의해 변

화되지만, 봉건제는 사회적 또는 경제적 제도가 아니고 원래 통치하 는 수단이다. 봉건제는 그 본질적인 관계가 지배자와 예속자의 관계 가 아니며 또 국가와 시민과의 관계도 아니며 주군과 봉...AJ vassal 사 이의 관계를 본질로 하는, 통치의 한 수단이다. 이것은 정치적 기능이 한정된 수의 개인들 사이에 맺어전 개별적 협정에 의해 수행되며 정 치적인 권위는 사적인 소유물로 취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봉건 정부에 있어서는 개별적인 접촉이 아주 중요하였으므로, 그러한 접촉 이 용이했던 지방 정부의 규모에서 봉건제는 가장 효과적이었다. 정 치 권력은 제도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이었기 때문에, 정치 기능의 분 리는 거의 없었다. 군사 지도자는 언제나 행정가이며, 행정가는· 언제 나 재판관이다. 대부분의 봉건 사회, 특히 봉건제 초기 사회에서는 군 사 기능이 가장 중요하였다. 유력자에게 봉사하는 사병의 존재는 봉 건적인 제도의 성장을 가능하게 하였던 여건이었고 라미시드 Ram i­ ssid e 왕조 이후의 이집트와 같은 준봉건 사회는 결코 이 단계를 넘어 서지 못하였다. 지도자와 추종자 사이의 협정은 언제나 군사적인 봉 사를 강조하였으며 어떤 추종자들은 전문적인 군인으로서의 의무 이 외의 어떤 의무도 갖지 않았다. 실제 군사적인 봉사가 더 이상 중요 하지 않았을 때에도, 서양의 기사도에서, 일본의 부시도(武士道)에서 그리고 찰 알려지지 않은 중국 주의 경전에서” 나타나듯이 뿌리 깊은 그 군사적인 전통은 가끔 사회의 관습으로 남아 있게 된다. 봉건 사회에서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처음으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을 때 반드시 귀족은 아니었다. 그러나 (만 약 우리의 역사적 경험이 찰못되지 않았다면) 그들은 곧 귀족으로 인 정되었다. 귀족 계층 내에서도 언제나 뚜렷한 구분이 있었다. 아주 단 순한 봉건 사회에서도 지도자와 추종자가 있었으며, 서유럽과 같이 고도로 발달된 봉건 사회에서는 보다 다양한 계층이 발견된다. 이론 l) H. G. Creel, The Bir t h of Chin a (New York, 1937), pp. 278 一 280.

상, 실제 봉건 귀족충은 때로는 능력을 가진 귀족충일 수 있다. 실제 로 모든 봉건 사회에서 봉건귀족충이 갖고 있는 세습화의 경향을 거 의 저지할 수 없었다. 봉건적 특성을 거의 갖지 못한 제 6 왕조와 제 12 왕조 사이의 이집트에서조차 노마크 (nomarch : 지방 행정의 최고 관 리)의 지위는 세습되었다. 기존의 귀족들이 봉건화되는 것도 가능하 였다. 죽 이미 부와 정치적 특권을 가전 집단이 봉건적인 형태로 정 부를 재구성하기 위하여 부와 권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사 실상 이 책에서 연구된 사회는 거의가 다 귀족들이 그와 같은 일을 시도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피프(fi e f, fe odum 은 fi e f의 라틴어 표기이며 봉토로 번역하였음. 역자 주)는 대개(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크기의 토지였기 때문 에 봉건제와 토지 재산의 관계는, 그 제도를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 는 바로 그 용어에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다시 한번더, 그 용어는 사실이 있은 지 오랜 후에 만들어졌으며 봉토를 너무 강조하 는 것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비록 봉 토를 더 강조하는 소수의 학자가 있기는 하지만 ,2) 유럽의 봉건적인 제도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봉신제 vassalag e, 죽 주군과 봉신 사이의 관계가 봉건 제도의 본질적인 요소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 여주고 있다.J) 이 문제를 여기서 해결하려고 시도하지 않지만 우리들 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토지롤 점유한다는 사실이 반드시 봉건적인 관계를 형성하지는 않는다는 것과 봉건적인 주군의 세력은 단순히 지주로서의 세력의 연장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반면에 주군-가신 re t a i ner 의 관계가 전혀 봉건적이 아닌 사회, 예를 들면 초기 게르만인들 사이에서 대단히 중요하였다는 것은 분명 히 사실이다. 봉토 제도의 유입은 유동적이고 비영구적인 약정에 안 23)) FFu. sLteo l t,d eM C. oBulloacnhg, esF , . FL.. SGeaenbsohhomf,, CG.. SBt.e pA h de anmsosn. .

정성을 가져다 주고 주군과 봉신의 관계 위에 보다 견고한 제도적인 구조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완전히 봉건적인 사회에서는 봉 신 제도와 봉토의 양여 제도( 讓 與制度)가 모두 같이 발달한 것 같다. 그러나 원(原)봉건 pro to - f eu dal 내지는 부분적인 봉건 사회에서는 두 제도 중의 어느 하나는 발전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모스코 공국 시 대 이전의 러시아에서는 가신 dep e~ dent p ersons 들은 자의로 주군을 바꿀 수 있어 봉신이라고 거의 간주될 수 없었던 반면에 카롤링거 제 국 초기에 많은 봉신들은 봉토를 갖지 못하였다. 더욱더 어려운 것은 주군과 농노 사이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봉건 적인 특성을 발견하는 문제이다. 대부분의 지배 계층은 농노들의 노 동에 의해 부양되었고 또한 그들을 지배하고, 재판하고, 세금을 부과 하는 권리를 가졌다. 봉건제가 발생하기 전부터 서유럽에서는 지방 영주가 촌락인 v ill ag ers 에 대해 이러한 권리를 행사하였다. 그러나 봉 건제가 서유럽에 도입되었울 때, 봉건제는 점진적으로 이전에 임의적 이고 초법적인 권리를 점진적으로 정당화하였다. 초기에는 상당히 유 동적이었으나 12 세기에 이르는 동안 관습법이 상당히 좁은 범위 내에 서 영주의 권리와 농노의 의무를 결정하였다. 지방 영주의 촌락인에 대한 권리가 봉건제보다 앞서는 또 다른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면 중국의 주가 그 경우이다. 모스코 공국 시대의 러시아는 특별한 경우 이다 . 모스코 공국이 홍기하기 전에는 소향신 g en t lemen 은 물론 농노 들도 그들 영주의 재판권 밖에 존재하였으나, 모스코 공국은 영주에 게 촌락인에 대한 상당한 권한을 양도하였다. 이러한 권한은 아주 방 대하여(만약 그권리가 봉건적이라고 규정한다면) 이 권한이 바로 봉건 적인 권리의 중요한 실체를 형성하는 것같이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장 보뎅 학회의 학자들이 농노제를 4) 연구하면서, 그들이 봉건제는 가 장 억압적이며 강력한 중앙 정부가 영주와 농노들을 다같이 통 4) Le Servage ( Brussels, 1937).

제했을 때 농노제는 가장 억압적이며 영주의 권력은 가장 확고히 보 장된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점을 우리들은 주목해야 한다. 봉건 주군 들은 언제나 그들 농노들의 노동에 의해 부양되고 그들은 농노들을 지배하고 재판하는 권리를 가지나, 그러한 권리의 존재가 곧 봉건제 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리는· 것은 타당성 있는 결론이다. 다른 정치 제도와 마찬가지로 봉건제가 끊임없이 발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고정된 정의를 내리는 것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러므 로 고정된 정의에 다이나믹한 의미의 정의가 첨가되어야 한다. 이 말 은 봉건제가 어떤 도전에 대한 일련의 웅전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많은 사회에 영향을 끼친 도전은 잘 조직된 정치 제도, 즉 제국이나 큰 왕국을 쇠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갑작스럽게 그러한 제도를 쇠 퇴시키는 충격에 대한 응전의 수단으로서 쇠퇴하는 사회가 봉건적인 방향으로 다시 구성되는 일련의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 경우에 봉건 제는 언제나 합법적이라는 탈을 쓰고 중앙 집권적인 경향을 가진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봉건 시기에 음영을 던져준다. 예를 들면 신성 로마 제국과 일본 제국의 황실과 같이 구군주제의 잔영이 남아 있다. 모스코 공국과 파르티아의 경우와 같이 만약 그 사회가 부분적으로 봉건화된다면 구군주제는 잔영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은 완전한 봉건적 또는 부분적 봉건 사회들이 그러한 도전으로부터 발생하였는지를 알 수 없다. 주나라에서는 봉건 관계가 성장하기 전에는 제국이나 대왕국이 없었다는 것이 그 나라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이며, 제국보다도 더 단순한 사회에서 봉건제가 직접 발달한 실질적인 예들도 있다. 그러나 주의 군주제는 봉건제가 발달 하면서 그 자체가 잔영이 되었고, 주나라가 아직 봉건화되지 않았을 때인 주나라의 초기에 주의 군주제가 어떠하였는가 하는 기억이 남아 있었다. 만약 주의 경우가 예의적인 것이라면 그 예의적인 것은 전체 가 아니라 부분적인 것이기 때문에 더욱더 이해하기가 힘이 든다. 그

것은 봉건제의 비교 연구에서 발생하는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이 책의 결론부에서 이 문제를 밝히겠다. 또한 봉건제가 발생하는 알 맞은 조건으로 정부가 내적인 억압자나 또는 의부의 침입자로부터 그 의 신민을 보호할 수 없는 곳, 군사적인 세력이 소수인의 수중에 장 악된 곳 그리고 이전의 경제적 통일체가 붕괴된 곳 또는 경제적 통일 성이 없이 거대한 정치 단위가 형성된 곳 둘이 고려의 대상이 될 것 01 다. 언제나 농업이 지배적이었고, 경제적인 이해는 지방적이었으며 lo- cal, 광범위한 정치 조직을 부양하는 부담을 경제적 이득으로 보상해 주지 않는 사회는 강력한 봉건적인 성향을 보였다. 반면에 고도로 조 직화된 상업은 봉건화를 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후술하는 바와 같 이, 중세 비잔틴 제국의 상업은 러시아의 키에프 공국, 비잔틴 제국 지배하의 소아시아와 이란에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는 · 세 지역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났지만, 세 지역에서 모두 봉건적인 경향을 저지하 였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영향을 끼쳤다. 농업이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공통적으로 상당한 정치 권력을 행사 하던 지방 대귀족이 있었다. 만약 중앙 정부가 이들 지방 귀족을 복 종시킬 수 없다면, 이들 지방 귀족이 갖고 있던 실제 권력은 쉽게 합 법적인 권리로 되며, 그 권리는 그들의 후손에 의해 세습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방 귀족들이 일상적인 사법권으로부터 면제권을 양도받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단계였다. 이 지방 귀족의 사법적인 면제권이 확 립되어 가면서 중앙 정부가 권력을 통일하는 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상업의 역할이 무색하게 되었다. 바바리안 Barba ri an 의 침입의 영향 때문에 쇠퇴해 가고 있는 군주제 의 약점이 드러나게 되었고, 귀족들에게 지방 방어의 부담을 지움으 로써 귀족 계층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모든 봉건 시기가 바바 리안의 침입으로 시작된다고(일본의 경우는 다르다), 또는 바바리안이

항상 똑같은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할 수 없다. 예를 들면 한(漢)과 당(唐)대에 이르는 시대의 중국의 경우가 있다. 그 당시 초원 지대에 서 온 바바리안은 중국의 대부분을 유린하였으나, 바바리안이 침략하 지 않았던 남부 지방에서 봉건제가 발달하였다. 개인적인 봉신제를 명예스럽게 생각한 것은 바바리안의 영향에 의한 것이며, 바바리안의 전사단 war-band 에서 수장(首長)과 추종자 사이의 관계를 변형시킨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 견해는 서유럽의 봉건 제도의 특칭을 입증하 는 것이며, 이 견해가 타지역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 보는 것은 홍미 있는 일이다. 봉건제는 주군과 봉신 lord-vassal 들의 집단이 군사력을 모두 독점 하거나 또는 대부분 독점하지 않고서는 거의 존재할 수 없다. 새로운 전투 기술이 도입되었을 때, 특히 이 전투 기술이 값비싼 군사 장비 를 요구한다면, 이러한 군사력의 독점은 아주 쉽게 만들어진다. 서유 럽의 기사는 이러한 현상의 전형적인 예이다. 기사는 12 살부터 특별 훈련을 받아야 하고, 특히 전투를 위해 사육된 말과 값비싼 군사 장 비가 필요하다. 일본의 무장한 기마 무사, 비잔틴과 이란의 중무장 기 사 cata p h r act, 고대 근동과 중국의 전차대 char ri o t-fig h t er 가 이 계층 에 속한다. 그러나 또한 군사력의 독점은 순전히 정치적 방법에 의해 획득될 수 있다. 만약 인구의 대부분이 결코 군역에 동원되지 않는다 면, 군사력은 소수 집단의 독점물이 된다.어느 경우이든 전문적인 전 사가 봉건 계급의 중추가 된다. 권력이 지방으로 분산되고, 전문적인 전사들의 수중에 들어갔을 때, 잦은 반란과 내란이 발생하고, 이러한 전쟁은 무정부 상태가 봉건제 의 당연한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많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 것은 위험스러운 주장이다. 가장 혼란스러운 지역에서도 유럽적인 지 방 정부가 유지될 수 있었고, 사정이 나은 지역에서는 봉건제가 강력 하고 상당히 중앙 집권화된 국가를 조직할 수 있는 견고한 기반을 제

공하였기 때문이다. 칼 스티븐슨 Carl S t e p henson 은 어떻게 봉건 제도 가 북서 유럽에서 정치 제도의 발달에 기여하였는가를 보여주었고 ,5) 도쿠가와(德川) 막부하의 일본은 유럽의 경험이 독특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완전히 발달된 봉건제는 원시적이고 지방적인 정치 구조에서 상당한 규모의 정치 구조를 형성할 수 있게 하는 여러 방법 중의 하나이며, 대규모의 내전은 이러한 유의 발전을 위한 대가 라고 말할 수 있다. 봉건제가 보다 잘 운용될수록 완전히 봉건적이 아닌 정치 구조를 더 빨리 창출한다는 아이러니가 이러한 사실에 내 재해 있다. 이와는 반대로 잔존해 있던 제국적인 제도와 새로운 봉건 관계가 상호 완충 작용을 하고 있었던 반봉건적(半封建的)인 사회들 은 수세기 동안 나약한 사회로 존속하였다. 프레드릭 바버로사 Frede- rick Bararossa7}- 12 세기에 모든 대귀족들을 봉건 관계에 끌어들임으 로써 신성 로마 제국을 강력하게 만들려고 노력하였을 때 그는 분명 히 이 점을 인식하였다. 그는 성공을 하지 못하였으나, 그의 기본적인 생각은 옳았다. 그의 시대의 가장 강력한 국가들은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에 봉건적인 제 요소에 의해 건설되었다. 도쿠가와 막부 정권의 기반을 구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유사한 원칙에 입각하 여 행동하였고, 그는 이미 대봉건 귀족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봉사하면서 봉건적 관계를 이용하는 것과 악용하는 것을 모두 터득하 였다. 히데요시는 봉건적인 내전 상태에 있던 일본을 구해냈다. 그러나 때]기 전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輯朝)는 중앙 정부의 지배를 벗어난 토 지 소유자들에게 주군-봉신 관계를 직접 적용함으로써 제국을 파국 의 위기에서 구하였다. 이 정책은 바버로사의 정책과 비슷한데, 바버 로사보다 성공하였다. 요리토모의 성공은 1 세기 이상이나 지속되었던 5) The Or igin and Sig nifica nce of Feudalism , _Americ a n Hi st o r ic a l Revie w , Xll'I(19 41), 811-812.

정체(政體)를 만들었으나, 그 정체는 그 이후 붕괴되었다. 반제국적 (半帝國的)이며 반봉건적인 정체가 붕괴된 이유와 또한 봉건적 정체 가 갖게 된 다소 급속적이고 영구적인 기반 위에 있을 수 있었던 강 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도쿠가와 막부 정부 의에도, 정복왕 윌리엄의 영국, 사산조 이란과 같은 많은 국가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봉건제는 전반적으로 고도로 발달한 문화가 몰락한 시 대에 항상 나타나는가러는· 광범위하고 심도 깊은 문제가 있다. 이 문 제는 여기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광범위하다. 그러나 봉건 시기는 문 화가 일반적으로 몰락한 상태에서 회복되는 시기라고 하는 것은 위험 한 발상일 것이다. 몇몇 봉건 시기는 신앙의 시대 ag es of faith.£ 유 명하였다는 또 다른 역사적 사실이 있다. 한에서 당에 이르는 시기의 중국과 유럽 중세의 경우는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중세 서유럽의 기 독교국과 불교가 유입된 중국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의 연구 대상이 되는 봉건적 또는 준봉건적인 시기의 몇몇 국가둘의 종교와 종교 제 도에 대해 우리는 거의 알고 있지 못하나, 우리들은 메소포타미아 지 방에서 봉건 시기 동안 또는 봉건 시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마르두크 가 아누, 엔릴과 엔키를 대신하였고, 아르사세스 시대 또는 그 직전에 이란의 조로아스터 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하였지만 그러나 애매모호한 사건이 발생하였다는 것과° 제 5 왕조의 발흥 시기 이후의 이집트에서 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의 영생에 대한 전망을 밝게 해주는 예배 형식 이 발생하였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7) 이와 같은 문제둘은 제 2 부와 제 3 부에서 수집된 증거둘을 연구한 후 에 본 저서의 제 3 부에서 다시 고려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단순 6) N. C. Debevois e , A Politi ca l Hi st o r y of Parth i a ( Ch ica go , 1938), pp. xx- 7) xiJxo, h n1 49A. . Wi lso n in Jo urnal of Near Easte r n Stu d ie s , m(1 9 44), 215-2 18.

히 연구된 여러 시기들의 유사점을 밝히는 보편적인 지식들을 이용하 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유사점들이 우리들에게 제기된 중요한 문제, 죽 역사에 있어서 일관성의 문제에 대한 답을 충분히 제시하기 시작 하였다고 생각한다 . 봉건제의 개념을 서유럽의 역사에서부터 여타 사 회의 역사에까지 확대하여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 분히 반복적인 정치적, 사회적 여건들을 추적하였다. 그 결과 우리는, 봉건제는 역사에 있어서 일관성을 가졌다는 것으로 잠정적으로 생각 할 수 있다. 물론 이 가정은 보다 구체적인 자료로 입증되어야 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봉건제를 일관성 있게 만드는 제 준거에 대한 우 리들의 정의가 명확해질 것이다. 여기에서 이용된 보편적인 지식중에 는 유사점이 아니라, 상이점을 나타내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유사점 과 상이점을 가능한 한 철저히 연구하였을 때 우리는 봉건제가 무엇 이며, 언제 봉건제가 발생하였으며, 어떤 현상이 봉건제와 유사하거나 또는 봉건제 그 자체는 아니지만 봉건형태로 발전하는가라는 이해에 접근하게 된다. 봉건제에 대한 설명과 그 한계점은 역사의 다른 반복 적인 사건들에서 어느 정도의 일관성이 발견될 수 있는가를 시사해 줄것이다.

제 2 부

II 서유럽의 봉건제 J.R . 스트레이어 서유럽사에 있어서 봉건제는 많은 의미가 부여된 단어이다.” 그러 나 그 의미는 대부분 두 개의 일반적 범주로 나눌 수 있다. 한 그룹 l ) Pollock and Mait lan d, Eng lish Hi st o r y of law, 2nd edn. ( Cambri dg e , 1923), I, 66-67. 〈……봉건제는 불운한 말이다. 첫째로 그 말은 복잡다단 한 사회의 불분명한 하나의 요소에만 우리들의 관십을 집중시킨다. 죽 봉건 제는 널리 시행된 예속적, 파생적 토지 보유에 우리의 관십을 기울이게 한 다. 그러나 이러한 토지 보유 방식은 어떤 의미에서도 봉건적이라고 할 수 없는 사회에서도 존재하였을 것이다. 봉건 시기의 특색이 되는 것은 임차인 과 임대인과의 관계, 죽 토지를 빌려주는 자와 빌리는 자의 관계가 아니라, 주군과 봉신의 관계, 또는 이 두 관계의 결합이 그 특성이다. 만약 우리가 새로운 용어들을 만들 수 있다면, 봉토적-주종 관계 fe udo-vassal i sm 가 더 타당하다는 것울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려움은 단순히 용어를 만듦 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봉건제라는 단어가 지니고 있는 어려움~ 단 하나의 개념으로 세계사의 상당한 부분, 죽 8 내지 9 세기부터 14 내지 lSAI] 기에 이르는 각 시기의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을 특칭짓게 하는 데 있다. 프랑스의 봉건제가 루이 때 I Lou is d'Outr e -Mer 또는 루이 9 세때 철 정에 달하였으며, 노르만의 윌리엄이 영국에 봉건제를 도입하였다고 혹은 봉건제로부터 영국을 구하였다고, 브랙돈 Bra ct on 은 영국 최고의 봉건주의자 였다거나 혹은 강력한 반봉건적(反封建的)인 견해를 표명하였다고 우리들은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견해의 전부 또는 그중 일부가 주장될 수 있다. 그 것은 우리들이 사용하는 문제의 용어, 죽 봉건제라는 용어가 애매하기 때문 이다.〉

의 학자들은 봉신이 주군의 예속인이 되고 토지 재산(경제적 이익이 첨가된)이 종속적인 보유지, 죽 봉토로 조직되는 기술적인 제도를 묘 사하기 위하여 그 용어를 . 사용하였다. 다른 그룹의 학자들은 봉건제 라는 용어를 중세의 어떤 시기 동안에 정치적, 사회적 조직의 지배적 인 형태를 집약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하였다. 이 두 경우 모두 문제점이 있다. 첫번째 범주에 속하는 학자들간에 는 전형적으로 봉건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관계에 대한 일치된 견 해가 없다. 봉건제를 만드는 것은 봉신이 되는 행위인가 아니면 봉토 를 양도하는 행위인가 아니면 양자가 결합된 것인가? 유력자의 가신 단(家臣團), 피보호자단, 무장 종사단—―이들 모두는 心1 ] 기부터 게르 만과 로마 사회에 다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은 이들 사회를 각기 로마 말기 봉건제 또는 원시 게르만 봉건제라고 칭할 수 있을 까? 찰스 치세 시대에 봉신들이 있었고 이들 봉신들은 예속적인 보유 지를 받았다. 그러나 찰스는 여전히 모든 신민(臣民)과 모든 토지를 철저히 지배하였으며, 예속적인 관계는 반드시 세습적인 것은 아니었 다. 만약 이것을 봉건제라고 한다면, 11 세기의 상황을 묘사하기 위한 다른 용어가 필요하다. 17 세기의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봉건제의 모든 특수한 형태가 남아 있었다-대부분의 귀족들은 봉신이었고 그들 토지의 대부분은 봉토로서 보유되었다. 그러나 단지 형태만이 남아 있었다. 왕과 귀족들의 관계를 지배하는 정신은 더 이상 봉건적인 패 턴과 일치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봉건제의 특수한 양상에 초점을 맞추어 봉건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 따르는 문제점은 그렇게 하여 만들어전 봉건제라는 용어가 시대적인 한계를 설정하지 못하고 봉건 제 이전의 그리고 봉건제 이후의 조직 형태와 분명히 구분할 수 있는 준거를 제공하지 못하는 데 있다. 두번째 범주에 속한 학자들간에서는 이 문제점은 봉건 시대, 죽 분 명히 시대적인 한계를 가전 봉건 시기가 있다고 주장됨으로써 처음부

터 극복되었다. 그 시대적인 한계는 다양하지만, 핵심 시기에 대해서 는 일반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 모든 학자들은 11, 12 세기에 봉건제가 절정에 달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 근 방법은 시대적 혼란을 제거하지만, 그 방법은 봉건적이라는 딱지 롤 10 세기와 13 세기 사이의 모든 사회 현상에 붙임으로써 기능적인 혼란을 유발하였다. 예를 들면 중세말의 계급 구조는 중세초의 계급 구조와 아주 다르다 ―一 두 시기 모두가 봉건적인가? 영주는 그들의 토지를 이용하는 데 있어서 1200 년대에는 1000 년대에 널리 사용되는 기술과는 전혀 디론· 기술을 사용하였다-어떤 기술이 봉건제의 전 형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만약 현대 역사학자들이 공장제가 민주주의의 필요불가결한 부분이라고 생각할 때 그들이 칙 면할 그런 유의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봉건제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러 형태의 사회에 공 통되는 비본질적인 요소와 양상을 반드시 배제해야 한다. 봉건제는 귀족제와 동의어가 아니다-봉건적이 아닌 여러 형태의 귀족제가 있어왔고 봉건제의 초기에는 귀족에 관한 명확한 개념도 없었다. 봉 건제는 반드시 예속적 노동에 의해 경작되는 대농장을 수반하지 않는 다__그러한 농장은 다론 많은 사회에서 존재하였다. 봉건제는 단순 히 영주와 그의 예속인과의 관계가 아니며 또한 예속적인 토지 보유 제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의 일부는 비봉건적인 사회에서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종속 관계와 예속적인 보유 관계 의 결합은 봉건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나 여전히 무엇인가 결여되 어 있다. 우리가 서유럽에서 완전히 발달된 봉건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통치권(단순히 정치적 영향력이 아니라)이 영주권 Lordshi p3lt 봉 토에 귀속되었을 때만이다. 봉건제를 다른 형태의 사회 조직과 분명 히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은 봉건 귀족에 의한 통치권의 소유와 봉건 귀족들을 통해 대부분의 정부 기능이 수행되었다는 것이다.

I1 서유럽의 봉건제 47

이것은 서유럽의 봉건제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라는 뜻이다 __ 그 것은 하나의 정부 형태이다. 그것은 소수의 군사적 지도자들 집단에 의해 정치적 권력이 독접되었으나 그 정치적 권력이 그들 사이에 균 등하게 나누어전 정부 형태이다. 그 결과 어떠한 지도자도 아주 광범 위한 지역을 통치하지 못하였고 그 한정된 지역 내에서조차 완전한 정치적 권력을 갖지 못하였다. 그는 그의 동배(同賊)들과 권력을 나 누어가져야 했고 그의 예속인 subord i na t es 들에게 권력을 양여해야 했 다. 허구적인 통일성(봉건 귀족들 사이에 종속 또는 협동을 통한 통일 적 통치 체제가 있었다는 이론)이 존재하였으나 백작령 또는 영주권 이 미치는 지역, 즉 지방적 수준에서만 실제로 통치력이 발휘되었다•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자는 법정을 개최하고 무엇이 법인지를 결 정했던 영주였다. 왕은 기껏해야 영주들 사이의 평화만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대개는 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조차 불가능하였다. 정치적 권력을 소유한 자는 또한 부의 중요한 원천(토지와 건물, 시장과 방앗간, 삼림과 강)을 소유하였고 이러한 부는 자연적으로 그 둘의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고 증대시키는 데 유용하였다. 그러나 부 자체만으로 정치 권력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충성스러운 봉신과 용감한 종사들이 더 중요하였다. 지각 있는 봉건 귀족은 누구나 그의 봉신들의 수를 증가시키기 위하여 그의 토지의 상당한 양을 양도했을 것이며, 노르만공 윌리엄과 같은, 세력이 막강한 귀족들은 실제로 비 교적 적은 토지를 보유하였다.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이 항상 일치하 지 않았다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어떤 귀족은 그가 토지롤 갖고 있 지 않는 곳에서 통치권을 가질 수 있었으며 그리고 그 귀족은 다른 귀족이 상위의 정치 권력을 가전 곳에서 토지를 가질 수 있었다. 어 느 누구도 이것이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 면 우리가 구분하려는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 사이의 차이는 중세 초 기에는 거의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권력은 사적인

소유물로 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법정의 소유자가 그 법정으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리고 그 법정 소유자의 장남이 그 의 업무 수행 능력에 상관없이 이 이득을- 많이 주는 권리를 상속받을 것을 알았다. 또 다른 한편으로 사적으로 중요한 많은 재산을 축적하 게 되면 거의 불가피하게 공적인 의무를 지게 된다. 대토지의 소유자 는 자신의 토지를 방어하며, 치안을 유지하고, 도로와 다리를 보수, 유지해야 하며 그의 차지인을 위해 법정을 열어야 한다. 그러므로 영 주권은 경제적, 정치적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그것은 최고의 독립된 통치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사적 재산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효과적인 봉건 통치는 지방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며 지방 차원에서 공적인 권력은 사적 소유로 되었다. 그러나 봉건제에서 중앙 정부와 공권력의 개념이 결코 상실되지는 않았다. 왕권은, 약화되기는 하였지 만 실제로 위엄을 지니고 있었으며 기독교 교회는 강력한 군주제의 로마적 전통과 공법 (公法, pub lic law) 을 결코 잊지 않았다. 12 세기의 로마법 부활 운동은 이러한 전통을 강화하였고 13 세기에 이르자 대부 분의 법률가들은, 모든 통치권은 왕에 의해 위임되며 왕은 봉건 영주 둘의 모든 행위를 감독할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봉건 영주권은 부족의 족장권과 귀족정의 중간 위치를 차지한다. 봉건 영주권은 보다 격식화되어 있으며 보다 덜 자발적이라는 접에서 족장제와 다르다. 봉건 영주는 반드시 그가 지배하는 집단의 일원이 지는 않았다. 그는 상속이나 양도에 의해 영주권을 획득한, 완전히 이 방인일 수도 있다• 봉건 영주권은 보다 개체주의적이며 보다 덜 중앙 집권적이라는 점에서 귀족정과 다르다. 봉건 영주는 정부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 집단의 일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역에서는 그가 바로 정부이다. 봉건제가 절정에 달했을 때 귀족들은 결코 광대한 지 역을 공동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연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제각기 최

대 한도의 독립을 추구하였다. 서구에서 봉건제 쇠퇴의 칭표 중의 하 나는 한 집단의 귀족에 의한 통치 사상의 출현이다. 위의 문단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서양 봉건제를 초기 단계 와 후기 단계로 구분해야 한다. 초기 단계에서 봉건제는, 정치에 있어 아주 중요한 요소였으나 그 요소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거나 정당화하 는 것은 거의 없었다. 후기 단계에서는 봉건제가 다론 형태의 정치 조직과 경합하여 서서히 패퇴하고 있었으며, 많은 유능한 저술가들은 봉건제가 어떻게, 왜 작동하였는지를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 . 13 세기 의 유명한 법률 서적들(노르만의 『 법률 대전 Summa Le gi bus 』 , 브랙톤 과 보마느와르의 법률서)은 봉건제의 제 요소들을 논리적이고 잘 조 직된 법과 정부 제도에 짜맞추었다. 자연히 봉건제에 대한 연구 서적 들의 대부분의 저자들은 상기의 법률서에 의존해 왔으며 그 결과 봉 건제에 대한 현대적 개념은 주로 l2 세기 말과 13 세기의 봉건제, 죽 초기의 봉건제보다도 훨씬 더 잘 조직되고, 더 명확하고, 보다 덜 중 요한 봉건제에 대한 개념이 되었다. 1100 년경의 북프랑스의 제도들은 초기 봉건제를 가장 잘 대표한다. 북프랑스에서 가장 기본적인 제도는 지방 영주에 의해서 지배되는 소 봉건 국가fe udal s t a t e 이다. 그 영주는 어떠한 칭호도 가질 수 있고 (노르만의 지배자는 경우에 따라서 공작, 백작, 또는 자작이라고 불리었 다), 그는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대개는 국왕의 봉신이었다. 그러나 그의 칭호가 무엇이라 할지라도, 또는 그가 주군에게 명목상으로 어 떻게 예속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그는 사실상 그의 영역 내에서는 최 고의 권력자이다. 어느 누구도 그의 판결에 불복하여 상급의 권력자 에게 상소할 수 없으며, 그의 명령에 냉담할 수도 없었다. 그의 지위 는 그의 군사적 힘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는 그에게 봉사하는 일단 의 훈련된 전사들을 갖고 있다. 그는 그의 영역 내에 요새화된 전략 적 거점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군대와 요새지의 유지를 위한

경비롤 충당할 충분한 경제적 자원을 갖고 있었다. 보호를 받기 위하 여 그의 지도력을 받아들였거나 또는 그의 군사적인 세력 때문에 복 종할 수밖에 없었던 소귀족들이 그의 영향력 내에 있었다. 그의 가신 들의 일부는(반드시 전부는 아니지만) 그들의 봉사에 대한 대가로 봉 토롤 양도받으며, 이 봉토에서 그들은 한정된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영주와 그의 예속인, 즉 봉신들과의 관계는 아직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았다. 봉신이 수행할 정확한 봉사의 양, 그가 행사할 통치권, 이러 한 권리들이 그의 후손에 의해 상속될 수 있는 정도는 법이론보다는 영주의 세력과 위엄에 달려 있었다. 영주는 봉신의 영토와 권리를 보 호하였다. 만약 영주가 보호에 실패한다면, 영주는 그의 영토를 더 강 력한 영주나 또는 보다 강력한 자신의 봉신들에게 빼앗길는지 모른 다. 세대가 바뀌면서 또는 시대가 변하면서 영주가 갖고 있는 세력과 그가 지배하고 있는 지역이 크게 바뀔 수 있었다. 비교적 변하지 않 았던 것은 통치 방법이었다. 영주권이 바뀐다 하더라도 그 지역의 관 습은 변하지 않았으며, 모든 영주들은 봉신을 통하여 그리고 봉신과 더불어 통치하였다. 봉신들은 그의 군대를 형성하였고, 통치의 모든 중요한 행위가 일어나는 조정(朝廷, cour t)을 구성하였고, 또한 봉신 들은 그들의 봉토에서 지방 통치 기능의 대부분을 수행하였다• 봉건제의 두번째 단계 __ 13 세기 대법률가들에 의해 설명된 단계_ 는 교과서에 나오는 균형잡힌 피라미드형 구조와 아주 흡사하다. 봉 신제적 유대 관계는 위로는 아주 엄격하고 아래로는 느슨하였다. 이 제 한 지역의 지배자는 그의 상급자에게 더욱 예속되어 있으며 그의 하급자로부터는 봉사를 더 적게 받았다. 초기의 봉건제는 어떤 일련 의 중첩된 세력권으로 묘사될 수 있는데, 이 세력권은 각기 강력한 지방 영주의 성채 주변에 집중되어 있었다. 후기의 봉건제는 일련의 지주 회사(持株會社)와 같은 것이며 지방 영주는 여전히 중요한 기능 울 수행하지만 상위의 권력자의 감독과 통제를 받게 된다. 소봉신들

은 그가 속해 있는 그 지방의 상급 영주에게 상소하는 것이 장려되었 고 과도한 봉사의 요구와 그들의 봉토를 빼앗길 위험으로부터 보호되 었다. 어떤 경우에는 중앙 정부가 지휘 계통을 따라서 명령을 하달하 는 대신에 칙접적으로 배신(陸臣, reavassal : 재분봉으로 인한 봉신의 봉신으로서 주군의 입장에서 보면 이 재분봉된 봉신이 이에 해당함. 역 자 주)을 상대했다. 왕실 법정은 이러한 조직의 재편에 중요한 역할 울 하였다. 12 세기 말 영국의 재판 제도i ns tit u ti ons of ass i zes 는 배신 울 보호하였고 또한 그를 왕과 직접 접촉하도록 하였다. 파리에 있는 왕실 법정에 상소하는 제도의 발달도 13 세기 프랑스에 똑같은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보다 고도로 조직화된 봉건제에서는 권리와 의무가 보다 자세하게 규정되었다. 봉신이 부담해야 할 봉사의 양이 상세히 기술되고 상속의 규칙이 결정되었으며, 개개인의 영주가 행사할 수 있는 통치권이 규정되고 정리되었다. 무력은 여전히 중요하였으나, 왕 과 대영주들만이 이를 사용함으로써 이득을 얻기에 충분한 무력을 소 유하였을 뿐이며, 일반 영주는 그의 분쟁에 대한 사법적 해결을 받아 들여야 했다. 분명히 봉건제의 두 단계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여러 지역에서는,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의 전환이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부활된 로마법과 기독교의 군주제 사상과 같은 초기 봉건제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개념이 후기 단계에서 지배자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부의 영향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지만, 12, 13 세기에 비교 적 전보된 정치 조직의 급속한 발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초기 봉건 제에 있었던 질서와 성장이라는 어떤 원리이었음이 틀림없다. 혼란스 럽기는 하였지만 초기 봉건 사회는 결코 완전히 무정부 상태는 아니 었다. 비록 유치하고 지방적이기는 하였으나 항상 어떤 형태의 정부 가 있었고, 항상 피난처와 방어 전지 역할을 할 수 있는 어떤 거점이

있었다. 초기 봉건 정부는 유치하기는 하지만 족장제 정부보다는 훨 씬 정교하고 복잡하였고, 보다 고도로 전문화되어 있었다-전사(戰 士)와 통치권을 가진 자는 여타의 집단과 분명히 구분되었다. 이 정 치 조직에는 약간의 인위성도 있었다 . 봉건 정부는 옛날 공동체 사회 구조의 일부는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의부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었으며 영주와 그의 봉신들에 의해 의식적으로 변경될 수 있었다. 초기의 봉건제는 조야하기는 하였지만 정체되지 않았으며 활력을 상 실하지도 않았다. 유연하고 융통성을 가전 초기 봉건제는 짧은 시간 내에, 아마 보다 정교한 정부 조직보다도 더 빠르게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다. 봉건제의 진정한 활력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봉건제가 처음 유럽에 나타났던 상황을 간단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서유럽에서 로마의 신민 어느 누구도 로마를 방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 문에 로마 제국이 붕괴하였다. 로마의 황제를 계승한 게르만의 지배 자는 로마 문화에 대하여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많이 로마 문화를 보존하였고, 가능한 한 큰 정치 단위로 결 합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노력은 완전히 성공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들은 실제의 권력을 중앙 정부에 귀속시켰으며 독립적인 지방 영주권 의 성장을 배격하였다. 게르만 지배자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인 샤를마 뉴는 유럽의 대부분을 새로운 제국으로 통일시키기도 하였다. 이것은 천 년 이상 동안 사람들을 감명시킨 놀라운 성과였다. 그는 거의 무 에서 유를 창조한 셈이었다 . 그가 통합한 로마인과 게르만인은 어떤 공통된 정치적 전통, 어떤 공통된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경제적 유대도 거의 없었다. 수세기 동안 그랬듯이, 그들의 관심사는 주로 지방적이었다. 단지 성직자들만이 로마의 평화와 질서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교회의 정신적 지원과 그 자신의 민족, 죽 프랑크족 군대의 무력적 지원을 받은 샤를마뉴는 그의 제국을 결

속시켰으나 그의 제국은 항상 위태로운 구조였다. 교회는 제국이 존 재함으로써 교구 제도를 확장하고 고위 성직자의 교육을 개선하는 이 점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교회의 발달은 서유럽 제 민족간의 문 화적인 차이를 어느 정도 완화시키고 공통된 유럽 문화의 기반을 닦 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으나, 아직도 지방주의적 경향이 통일을 지향 하는 힘보다 더 강했다. 지방 통치권은, 왕으로부터 권력을 양도받았 으나 항상 왕에게 완전히 복종하지 않는 부와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 진 백작(여기서 백작이라 함은 당시 지방의 최고 관리를 말함• 역자 주)들의 수중에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백작들도 그들의 영역 내에 있는 대토지 소유자들을 항상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8 세기 중엽부터 봉신제가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고 왕이나 또는 영주로부터 양여받은 봉토fi e f와 비슷한 제도가 나타났다. 샤를마뉴는 지방 세력 가들을 그의 봉신으로 만듦으로써 그의 신민들의 미심쩍은 충성을 다 시 확고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지방 세력가들과 그들의 가신들과의 관계는 샤를마뉴와 세력가들과의 관계보다 더 긴밀하였다. 왜냐하면 영주(세력가)들은 샤를마뉴 제국의 궁정을 아주 간헐적으로 방문하였 는 데 비해 가신들은 그들의 영주(세력가)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이 다. 그 결과 세력가들은 그들의 지역 내에서 막강한 세력을 갖게 되 었으며 단지 왕의 간헐적인 간섭에만 복종하였다. 이것은 아직 봉건 제도가 아니다. 아직 공권력이 존재하였으며, 세력가들은 그들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왕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정치 권력을 행사하 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봉건 제도와 아주 유사하여, 완전한 봉건 제도가 되기 위하여는 어떤 강력한 계기가 필요하였다. 이 계기는 샤를마뉴의 사후 50 년 만에 도래하였다. 샤를마뉴의 후 계자들은 샤를마뉴보다도 유능하지 못했으며, 서로 대립하였다. 세력 가들은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 이들의 대립을 이용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관직을 개인 소유물로 간주하였으며 그들의 자손에게

상속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의부로부터의 침략은 유럽의 모든 주민들 의 안전을 위협하였다. 사라센족들은 프랑스의 남부 연안과 이탈리아 의 서부 연안을 공략하였으며 가르더 -프 레네 Garde-F ra i ne t에 영구적 인 요새를 건설하여,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육로 여행을 심각하 게 방해하기까지 하였다. 마자르족은 헝가리를 점령하였으며 이룰 전 전 기지로 삼아 남부 독일, 동부 프랑스와 남부 이탈리아 전역에 기 마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노르만의 침입은 최악의 타격을 가했다. 1 세 기 이상 동안 그들의 얕은 홀수선 (D 乞水船)은 북유럽의 모든 강들을 거슬러 올라가 공격대를 파견하여 농촌 지역을 약탈하였다. 중앙 정 부는 이에 대하여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제국의 광대한 변경 지방의 모든 곳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없었고 재빨리 이동하는 약탈군을 사 로잡을 수 있을 만큼 빠른 군대를 동원할 수도 거의 없었다. 그리하 여 방어는 지방의 책임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단지 지방 영주와 그의 성채만이 제국의 대부분의 신민에게 어느 정도의 안전을 제공할 수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봉건 정부가 북유럽(내란과 바이킹의 침략으로 심 하게 타격을 받은 지역)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우리들은 이런 초 기의 봉건 정부들이 잘 조직되고 효율적이었을 것이라고 거의 생각할 수 없다__이들 정부는 절망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즉각적으로 만들어졌고 급조된 흔적을 갖고 있다. 그러나 봉건 정부가 갖고 있는 두 가지 장점이 봉건 정부를 더 발달시킬 수 있었다. 첫째로, 봉건 정 부는 특권을 가전 자에게 책임을 강제하였다. 로마 제국 말기, 프랑크 왕국과 카롤링거 왕조하에서 부유한 대토지 소유자들은 개개인의 특 별한 이익을 획득하려고 그들의 지위와 영향력을 행사한 데 반하여 중앙 정부에 대하여는 가능한 한 도우려 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모든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약 그들이 이것을 피한다면 그들은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두번째로 봉건제는 정부의 구조를 기존

사회, 경제 조건에 부합할 정도로 단순화하였다. 수세기 동안 지배자 들은 적어도 임명된 관리들을 통하여 비교적 넓은 지역에 대한 그들 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 로마 정치 제도를 보존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러한 노력은 대디수의 사람들로부터 거의 호응을 얻 지 못하였다. 대규모의 통치 조직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을 주지 못 하였고 무거운 부담을 안겨주었다. 항상 지배자의 범지역적인 이해와 피지배자의 편협되고 지방적인 이해가 위험스럽게 상충하였다. 봉건 제는 이러한 긴장 상태롤 완화하였다. 봉건제는 보통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작동하였고 그들에게 최소한도의 요구만 하였 다. 초기의 봉건 정부는 그들이 요구해야 하는 것보다 더 적게 요구 하였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필요 이상으로 요 구하는 것보다는 낫다. 유능한 봉건 영주들이 봉건 정부를 개선하기 시작하였을 때, 그들은 새로운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사람 들의 지지를 받았다. 12 세기에 보다 나은 정부의 필요성에 대한 요구 가 있었다는 사실은 로마 제국과 카롤링거 제국이 붕괴하는 것을 방 관했던 서유럽 사람들의 냉담과는 상당한 대조를 이룬다. 요컨대, 봉건제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기반이 되는 원초적인 통치 체제로 낡은 구제도를 일소하고 또한 그것을 대신하였다 . 초기의 봉 건제는 형식을 갖춘 것이 아니며 유연성을 갖고 있었다. 일반적인 견 해와는 달리 봉건제는 처음에는 전통에 거의 구애받지 않았다. 봉건 제가 지방의 관습을 따랐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헌 기록이 거 의 없었으며, 구전(口傳)은 정확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믿을 만한 것 도 아니었기 때문에 관습은 상황이 바뀔 때 급속하게 변했다. 만약 개혁이 보다 나은 안전을 제공해 준다면 그 개혁은 재빨리 수용되었 다. 엄격한 회의 진행 규칙이 없는 비공식적인 회의에서 중요한 사안 이 영주와 봉신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의욕적인 영주는 통치상의 여 러 시도들을쉽게 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봉건 법정에서 보다 나은

증거를 찾는 방법들을 강구하기 위하여 11, 12 세기 봉건 법정의 소송 철차를 끊임없이 고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특정한 임무를 수행 하기 위하여 일시적인 위원회가 설립될 수 있었다. 만약 그 위원회가 일을 잘 수행한다면, 그 위원회는 영구적이 될 수 있으며 정부의 한 부서의 핵심을 형성할 수도 있다. 많은 유용한 아이디어가 세속의 봉 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직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다. 그러나 만약 봉건 정부가 융통성이 없었다면, 봉건 정부는 성직자 의 학식과 기술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봉건제가 통치의 지배적인 형태가 된 곳에서만 봉건제는 최선의 결 과를 가져다 주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는 처음으로 프랑스의 적합한 통치 조직을 북프랑스의 제후국들, 즉 플랑드르, 노르망디, 앙주와 왕 자신의 영주권이 미치는 일 드 프랑스 Ile de France 에서 발달시켰다. 프랑스 왕의 권력이 처음으로 증대되는 것은 봉숙 l 에 대한 봉건 수장 으로서 그의 권한울 강화시키는 데서 비롯되었다. 13 세기 프랑스 군 주제의 많은 제도들은 12 세기 말의 봉건 국가들에서 이미 시험되었 고, 다른 제도들은 국왕의 봉건 법정에서 발달되었다• (프랑스 왕에 의해) 새로이 병합된 지역에서 봉건 시기에 발달한 법과 제도들이 유 지되는 것이 용인됨으로써, 프랑스 왕은 적대감을 최소화하면서 프랑 스를 통일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후에 이러한 지방주의적인 배타주 의에 대해 많은 대가를 지불하여야 했으나, 거의 감독을 받지 않고 운영될 수 있는 지방 정부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통일의 첫 단계는 아 주 간단하였다. 영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여러 지방이 집합하여 형성된 프랑스 왕 국과 갇은 형태가 아니라 프랑스의 한 지방과 흡사하였다. 봉건 영주 가 그의 보유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과 똑같이 노르만 정복 이후의 몇몇 왕들은 영국을 그들의 봉토로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은 노 르만 정복 이후에 철저히 봉건화되었다. 앵글로 색슨 법이 공식적으

로는 유효하였지만 그 법은 구시대적인 것이어서 적용될 수 없었다. 영국의 관습법으로 발전하였던 법은 왕의 봉건 조정에서 적용되던 법 이었다 . 마찬가지로 영국 정부의 주요 관직들은 이 조정에서 발달하 였다. 그리고 유능한 왕과 효율적인 제도가 결합하여 왕권이 대단히 강력하게 되었을 때, 대헌장 Ma gn a Car t a 에 나타난 봉건 원리라는 명 목으로 귀족들은 왕권을 견제하였다. 그리하여 봉건제는 영국이 너무 약하지도 않고 너무 강하지도 않은 균형을 잡힌 정부를 만드는 데 도 움울주었다 .• 구정치 제도 때문에 봉건제가 완전히 발달하지 못했던 국가에서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독일에서는 봉건제가 서서히 성장하였으며, 모 든 전사와 모든 토지가 봉건제에 포함되지 않았다. 독일의 왕들은 그 들 정부의 중요한 지주(支柱 會) 로 봉건제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에 그들은 카롤링거 왕조로부터 상속받은 정치 제도에 의존하였다. 이것은 왕이 마치 지방 영주가 아직 그의 관리인인 것처럼 그리고 지 방의 법정이 여전히 그의 지배하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것을 의 미한다. 반란이 일어나면, 왕은 그의 봉신에 의존하지 않고 주교나 수 도원장으로부터 재정적, 군사적 도움을 받았다. 이 제도는 왕이 간헐 적으로 독일 전역에 대한 정치 결정에 간섭할 수 있고 강력한 봉건 제후국의 성장을 방해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은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11, 12 세기의 독일왕들은 옛날의 전례(前例)를 사용 하는 데 뛰어난 기술을 보였지만, 그들은 새로운 제도와 사상을 발달 시키지 못하였다. 왕실 정부는 약해지게 되었으며, 독일은 시간이 지 남에 따라 더욱 분열하였다. 지방의 가장 중요하였던 지배자인 제후 pri n 때도 효율적인 정부를 만들 수 없었다. 왕들은 그들의 세력을 질투하였고, 모든 제후국pri nc ip a lity들을 몰락시키거나 또는 약화시키 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왕들은 적절한 제도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이러한 성공으로부터 아무런 이득을 얻을 수 없었다•

봉건적인 계약 때문이 아니라, 교황과의 오랜 싸움으로 왕권이 더욱 약화되면서 권력은 마침내 보다 작은 제후국의 지배자에게 넘어갔다. 그리하여 중세 말기의 독일왕들은 봉건 수장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 여 프랑스를 통일하였던 프랑스 왕들을 모방할 수 없었다. 독일은 중 세의 나머지 기간과 근대 초기 동안 분열된 상태로 남아 있었고 잘못 통치되었다. 이탈리아 역시 서로 다론 정부 형태가 경쟁함으로써 타격을 받았 다. 독일 황제는 전통적으로 (북)이탈리아의 왕을 겸했다. 그는 이 지 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으나 광대한 토착 제후국의 성장을 방해할 수 있을 만큼 자주 간섭을 하였다•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북유 럽과 같이 결코 인구가 감소하지 않았고 11 세기 말의 경제의 대부활 때문에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부유하고 강력해졌다. 이탈리아의 도시 들은 어떤 의부의 지배자(왕이든 또는 봉건영주이든 간에)라도 완전 히 지배할 수 없을 만큼 강하였으나, 도시의 성(城) 밖에 있는 농촌 지역을 병합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 못하였다(적어도 11 세기 초에 는). 로마 교황의 존재는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하였다. 로마 교황은 대개 독일의 황제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중부 이탈리아의 대부분 을 지배하기를 원하였다. 로마 교황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정책을 보 호하기 위하여 도시들의 독립을 고무하고,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에 대한 모든 노력을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에 봉건제가 있었지 만, 이탈리아는 봉건제가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갖지 못하고 프랑스 와 영국에서와 갇은 봉건제가 발달하지 못하였다. 이탈리아는 점접더 분열되었다. 중세말경에는 독재자에 의해 지배되는 도시 국가가 이탈 리아 반도의 지배적인 정부 형태였다. 중세 정치 이론에서 이러한 정 부 형태는 정당한 위치를 차지할 수 없었다. 이 접이 바로 이탈리아 인들이 열렬히 고전 고대의 저작들에 관심을 가전 이유이다. 여하간 에 이탈리아의 정치 제도는 실패작이었고 이탈리아는 1 6,\-1]기 중영부

터 19 세기 중엽까지 의국에 의해 지배되었다. 봉건제 이의에 프랑스와 영국을 유럽 정치 제도의 한 패턴으로 만 둘수 있었던 다른 요인둘이 확실히 있었고, 완전히 발달된 봉건제가 결여되었다는 사실 이의에도 독일과 이탈리아를 정치 제도의 불모지 로 만들었던 다른 취약점이 분명히 있었다• 동시에, 봉건적이 아닌 이 탈리아와 독일의 제도는 활력성이 거의 없었던 것에 반하여, 봉건 관 습에서 성장한 13 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기본 제도들은 변화된 상황에 찰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서유럽의 봉건제는 결코 효율 적인 정부 형태는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성 때문에 정적인 정부 형태가 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결코 유효적철한 정부 형태는 아 니다. 그러나 개인적 관계가 강조됨으로써 그 관계는 변함없는 충성 심의 원천이 되었다. 서유럽의 왕들이 최초로 근대 국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제도의 유연성과 신민의 충성 때문이었다.

m 일본의 봉건제 라이샤워 Edwi n 0. Reis c hauer 1 서론 봉건제라는 개념은 초기 유럽의 역사적 사실에서 도출된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 9 세기와 19 세기 사이의 일본의 많은 역사적 사실에도 마 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유럽의 봉건제보다 일본 의 봉건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들이라 하더라도 제 1 부의 서론 부분에서의 봉건제에 대한 설명이나 혹은 유사한 서양의 봉건제 에 대한 설명이나 정의에 세부적으로는 약간의 수정을 가할 수 있을 지 모르나 구체적인 골격은 변경시킬 수 없을 것이다. 서로 다른 여러 사실들 중에서 유사접이 우연히 발견될 수 있으나 봉건 유럽과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현상의 일반적 패턴이 아주 흡 사하다는 사실은 봉건제라는 것이 단순히 초기 유럽의 역사적 사실에 서 유출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주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 조직의 근본 형태 중 하나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에 역사의 위대한 일관성이 있으며, 봉건 시대 이전부터 유럽과 일본의 기나긴 봉건적 경험을 거쳐 봉건제 이후의 시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발전 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기 때문에, 이들 유사한 경험들의 비교

연구를 통하여 서유럽은 아직도 역사 발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2 고립과 시기 일본의 봉건적 경험과 유럽의 봉건적 경험 사이에는 하나의 근본적 인 차이가 있는 듯하다. 문화적으로 비슷하게 전보된 다른 지역과 비 교하여 볼 때 일본의 경험은 19 세기까지는 문명 세계의 모든 다른 지 역으로부터 훨씬더 고립되어 있던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크기나 인구수 에 있어서 일본 전체와 비슷한 지역들간의 커다란 압력과 영향력 때문 에, 또한 유럽 봉건제의 영향권 밖에 있는 지역의 민족으로부터의 많은 압력 때문에, 유럽의 봉건제는 일본의 봉건제보다도 빠른 속도로 발전 한것 같다. 일본은 상대적으로 고립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발전 속도가 느렸고 봉건제 이전의 제도가 장기간에 걸쳐 존속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일본 봉건제의 요소들은 9 세기 혹은 l 伊1 ] 기에 나타났으나, 12 세기가 되어서 야 비로소 분명한 봉건 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그후 2, 3 세기 지나서야 완숙된 유럽의 봉건제와 아주 유사한 제도가 발전되었다. 한편,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봉건제가 성장하는 동안, 봉건제가 발달 하기 이전의 제도들은 새로운 제도들과 계속 공존하였으며, 그 중 일 부 제도는 일본 봉건제가 발달한 천 년 동안 지속되었으나 소멸되지 않았고, 19 세기에는 이 제도들은 새로운 생명과 근대적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러한 것 중의 하나는 일본에 합당한 정치 조직이었던 중앙 집권적인 국가라는 개념이었다. 또 다론 하나는 황실가계(皇室家系) 였는데, 이는 이론상 모든 정치 권력의 근원이었으며, 봉건 시기의 우 여곡절을 잘 견디어냈다. 봉건 사회 주변에서 불안스럽게 존속해 온

궁정 귀족은 황실과 결합되어 있었다. 봉건 시기 이전 시대의 또 다 른 중요한 유산은 구황실 정부의 관직 명칭이었는데, 구황실 관리의 서열과 소멸된 제국 정부의 관직의 명칭은 봉건 시대에는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봉건 제도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일본 봉건제가 고도로 발전된 국면으로, 혹은 좀더 적절히 말한다 면 보다더 나쁜 국면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기본 요소는 일본아 고립 되었다는 사실이며, 이것은 서유럽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일본에서는 만약 고립 때문에 봉건 시기 동안 봉건 시기 이전의 요소들이 유럽에 비해 더 오래 존속하였으며, 또한 그 고립 때문에 기본적인 봉건 조직이 기술적, 경제적 발전이라는 관점에 서 볼 때 유럽의 근대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까지 지속될 수 있었다. 일본이 의부의 영향력으로부터 거의 고립되지 않았던 두 시기는 고 립과 일본 봉건제의 느린 발전 과정과의 관계를 거꾸로 설명할 수 있 다. 서구 세계를 대표할 수 있었던 이들이 고립된 일본을 갑자기 침 략하였을 때인 16 세기 후반기 동안에 온갖 종류의 봉건 제도들이 이 전보다도 더 급격한 변화를 하였고, 봉건제 자체가 단시일 내에 일소 될 것 같은 칭후들이 있었다. 고의적으로 고립 정책을 시행하였던 다 음 두 세기 동안에 이러한 경향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19 세기 중엽 서구인들이 일본에 다시 등장함과 동시에 봉건제는 거의 붕괴하여 2, 30 년 내에 거의 사라졌다. 일본과 서유럽의 봉건제의 기본 요소들은 아주 유사하다. 유럽에서 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세습적인 지배권 leadersh ip:;:斗 개인적인 충 성 관계를 유달리 강조하는 부족 혹은 씨족 조직의 전통을 가졌으며 몰락하는 후손들에게 발달된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를 물려준 민족이 었다.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두 요소의 결합 과정은 유럽과는 현저하 게 차이가 난다. 적어도 기원후 어]기까지는 주도권을 장악한 씨족이 여타의 씨족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고, 그리고 7 세기와 8 세기를

거치는 동안, 그들은 일본의 느슨한 씨족 연맹을 경제적으로 농민에 게 직접세를 부과하는 복잡한 제도에 기반을 둔 중앙 집권적인 국가 로 전환시킴으로써 중국의 정치 제도를 모방하려는 야심적인 시도를 시작하였다. 특히 일본 중심부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디는- 것 은 9 세기에서 12 세기 동안에 이 노력이 궁극적으로 실패하였다는 것 보다 더 놀라운 것이다. 이 실패가 일본에서 문화적, 경제적 수준을 저하시켰는지는 의문이 다. 분명히 그 수준의 저하는 수도권 지역에서 어느 정도 발생하였으 며, 수도권 지역은 지방에 대한 이전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를 상실하 였다. 그러나 지방의 경우에는 오히려 경제적, 문화적 수준의 향상이 있었던 것 같다. 분명히 13 세기까지는 일본인들은 전반적으로 8 세기 의 제국적 지배가 절정기에 달했을 때보다 경제적, 문화적으로 훨씬 앞섰고, 점차적으로 정치 혼란이 심해지고 있던 다음 3 세기 동안 보 다 괄목할 만한 발달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도입했던 중 앙 집권적인 정치 제도는 일본에서는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그 정치 제도는 일본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하나의 이상에 지나지 않았으 므로, 일본에서의 봉건제의 성장은 일반적으로 경제적, 문화적인 쇠퇴 가 수반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봉건 제도들은 경제적, 문화적 성장을 부추겼으며 궁극적으로는 구제국 정부보다는 훨씬더 강력한 정치적 통합울 달성케 하였던 것 같다. 3 장원과 전사단(무사단) 일본 봉건제는 별개의 두 제도로부터 형성되었는데, 그 제도가 점 차 통합되면서 하나의 완전한 봉건 일본을 탄생시켰다. 하나는 시키 (職 보유권)를 갖고 있는 쇼(莊, 장원)였는데, 이는 중국에서 도입된

토지 제도와 조세 제도가 폐지됨으로써 발달된 토지 보유 유형이었 다. 다른 하나는 무사단이었는데, 이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일본 고 대의 사회 조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중앙 권력이 쇠퇴할 때 이 제도는 중앙 정부가 제공할 수 없었던 보호를 사적인 관계를 맺은 자에게 제공할 수 있었다. 장원은 원래 경제적인 것으로 과중한 조세 부담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였고 후자, 즉 무사단은 군사적 인 것으 로 단순한 경찰적인 보호를 제공하였다. 쇼는 일찍이 새로운 경작지가 실수나 혹은 특별 허가에 의해 조세 등록 명부에서 제의되었던 때인 BAi l 기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쇼는 더 많은 토지 개간을 통해서, 조세 칭수관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막 대한 정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점진적이지만 꾸준히 공동지를 약탈함 으로써 그리고 조세 납부자들이 탁신(託身)을 통해서 강력한 후원자 의 면세권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성장하였다. 성직록(聖職錄, 寺院領, bene fi ce) 을 받고 정부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했던 대불교 사원들이 최 초로 쇼를 형성하였다. IO 세기까지 일본의 대부분의 농지는 쇼로 나 누어지고, 쇼를 구성하는 토지들에 대해서는 세금이 완전히 혹은 부 분적으로 면제되었다. 쇼와 유럽 장원과의 중요한 차이는 쇼의 경작지는 대개 산재해 있 으며 촌락 단위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사카와에 의하 면 그 차이는 전통적으로 규모가 작고 크기가 일정하지 않는 논에서 경작되는 쌀이 일본 농업의 기초가 되었고 단위 촌락이 소유하고 이 용할 수 있는 공동 방목지가 전무했거나 아니면 거의 없었다는 사실 에 기인한다고 한다. 쇼의 크기는 아주 다양하다. 12 세기 말에 규슈 남부에 있었던 유명한 시마즈 쇼는 세 개의 현(縣, p ro vi nce) 에 걸쳐 23,000 에이커 이상의 경작지를 가전 것 같다. 그러나 그외의 대다수의 〈쇼〉는 몇 개의 가정만울 부양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에 지나지 않 았다.

12 세기까지는 한 쇼 내에서 토지에 대한 사람의 관계가 복잡한 패 턴을 이루게 된다• 이 관계는 서구 봉건제의 토지 보유와 유사하지만 아주 다른 일면이 있다. 서구의 토지 보유는 조건과 의무를 함축하고 있다. 일본의 〈시키(원래 관직이나 직능을 뜻했던 말) 〉 는 원래 수입에 대한 권리를 의미한다. 〈 시키 〉 의 등급은 다양하다. 무엇보다 먼저, 〈료케(領家) 〉 의 〈시키〉가 있었는데, 아사카가는 이를 영주 se ig n i or 와 영 지의 주인 domania l lord 으로 다양하게 해석한다. 〈 료케 〉 는 거의 언 제나 부재 지주였으며 대개는 궁중 귀족 가문 또는 불교 사원 혹은 아마도 신토(神道) 사당을 지키는 가문 출신들이었을 것이다. 료케는 또한 〈혼케(本家)〉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원래 료케가 추가 보 호를 받기 위해 보다 더 강력한 사람 혹은 기관(혼케)에게 〈 쇼 〉 를 양도했을 경우에는 료케와 혼케는 서로 다르며 각기 구분된 시키, 즉 쇼로부터의 수입을 가진다. 영지 주인의 대리인 또는 원래의 소유자 가 쇼 자체에서 생활하며 때로는 그 양신분에 해당하는 사람도 쇼에 서 생활하며, 이들은 제각기 〈시키〉를 가졌다. 그리고 경작자도 실제 시키를 가졌다. 이 경우 그 경작자는 반드시 그 자신이 농부일 필요 는 없었으며 그를 위해 실제로 경작하는 고용된 일꾼, 즉 임금 노동 자의 관리인과 유사하였을 것이다. 수입에 대한 권리로서의 〈시키〉는 보통 분할되고 양도될 수 있었 다. 물론 보유라는 측면에서 보면 시키는 아주 다양하여, 어떤 것은 상급의 권력자로부터 전혀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시키가 있는가 하면, 대리인의 〈시키〉와 같은 것들은 료케의 엄격한 지배를 받고 있 었다. 각 그룹은 그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보유 조건들을 수정하려 고 항상 노력하였다. 그러나 12 세기에는 〈시키〉는 대부분이 자유롭게 분할되고 임의로 처분되었다. 장자 상속제의 관습은 이 시기에 아직 정착되지 않았으며, 세대가 바뀔 때마다 남자 상속자들 전부에게 〈시키〉를 분할 상속하는 경향이

있었다. 때로는 여자들까지 이러한 상속을 받았다. 왜냐하면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여지들도 〈 시키 〉 를 보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 개인이 여러 종류의 토지에 대해 다른 형태의 〈시키〉를 보유하게 되어 〈 시키 〉 권에 극심한 혼란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어 느 토지에 대해서는 다론 사람의 상급자가 될 수 있었으며, 어떤 토 지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의 하급자가 될 수도 있었다. 분명히 사회적 관계가 단지 〈 시키 〉 에 의존된 것만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료케는 지방의 〈 시키 〉 의 보유자보다 지위가 높았으며, 〈시키〉를 전혀 갖지 않은 노동자는 지위가 아주 낮았다. 그러나 대리인과 토지 소유자와 경작자 사이에 계급을 구분하는 · 일반적인 기준이 없었으며, 사회 계 급의 차이는 경우에 따라서 달랐다. 일본 봉건제의 배후에 깔려 있는 두번째 제도는 무사단인데, 이것 은 귀족적이며 세습적인 구일본 씨족 조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선사 시대에 있어서와 같이, 12 세기에는 전사는 귀족이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이들이 귀족이 된 중요한 이유는 유럽에서와 같이 군사 장비의 비용 때문이었다. 완전히 무장을 한 말을 탄 개개인의 기사가 전투 단위였다. 그는 마부와 종복(從僕)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말을 타고 이동하면서 활로 적을 공격하고 근접 전투에서는 칼을 사 용하며 개별적으로 전투룰 하였다. 중국의 제도들을 일본에 이식하려고 시도하였던 정부는 중국의 모 델을 따른 대규모 보병을 창설하는 데 실패하였다. 일본의 실제 전투 단은 여전히 지방 귀족들로 구성된 비교적 소수의 집단이었던 반면 에, 군대에 칭집된 농민들은 노동을 제공하는 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지방 귀족 집단의 발달에 관해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12 세기에는 그들은 대체로 지방의 〈쇼〉의 〈시키〉 보유자였던 것 같다. 일부는 지방의 씨족적 귀족의 후예들이며, 일부는 황실의 지손(枝孫)

들로서 궁정 귀족과 영주의 지방 관리나 대리인으로 지방에 부임하였 던 이들 지방 귀족들은 중앙 정부의 과거의 지방 행정 기구의 명목상 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들은 동시에 〈 쇼 〉 의 실질적인 지배자로서, 이 〈 쇼 〉 를 용감하게 방어하였으며 〈 시키 〉 권으로 인해 〈 쇼 〉 에서 기반 울가질 수 있었다. 〈 쇼 〉 가 경제 조직의 적절한 기반이 되었지만, 〈 쇼 〉 가 지리적으로 분산되었고 〈 쇼 〉 에 대한 소유권과 지배권이 무절제하게 분할되었기 때문에 〈 쇼 〉 는 지방 군사 조직의 자연적인 단위가 되지 못하였다 . 지 방 전사들의 상호 방위의 구심점이 된 것은 가문과 또 다른- 가문들의 구성원들의 오랫동안의 교분과 상호 의존에 의해 만들어전 가문들의 집단이었다. 고대의 씨족제를 상기시키는 이러한 집단의 구성으로부 터 11, 12 세기의 봉건적 집단, 죽 타이라(平)와 미나모토(源)의 두 개 의 집단이 성장하였다 . 이 두 집단들은 일련의 전쟁을 하였는데, 그 전쟁은 마침내 1185 년에 타이라파의 핵심이 완전히 몰락하고 미나모 토파가 완전히 승리함으로써 끝났다 . 아제 전 일본의 군사적인 지배 자가 된 미나모토파의 우두머리는 고대의 칭호인 〈 쇼군(將軍) 〉 , 죽 대원수라는 직함을 채택하였으며, 일본 동부의 미나모토파 세력의 중 심지 가까이에 있는 가마쿠라에 그의 군사 정부의 본부(바쿠후, 幕 府)를 건설하였다. 4 두 개의 봉건 단계 : 가마쿠라와 아시카가(足利) 1185 년은 보통 일본에서 봉건 시대가 시작된 해로 간주된다. 왜냐 하면 이 시기부터 19 세기까지는 지금까지 남아 있었던 중앙 정부의 제 조직에 대한 지배권이 대부분 황실이나 궁정 귀족의 수중에 있었 던 것이 아니라, 군사 지도자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봉건 집단이

〈 쇼 〉 제도와 융합되어 하나의 봉건 구조를 형성한 것은 미나모토의 초 기 통치 시대였다. 미나모토 쇼군의 개인적인 가신들(고케닌, 御家人) 이었던 지토(地頭)들, 죽 대리인 st eward 에게 〈 쇼 〉 와 일본 전역에 남 아 있는 공동지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함으로써 봉건 구조가 형성되었 다. 이둘은 종종 그 토지의 원소유자들이었거나 혹은 이미 미나모토 의 가신들이 되거나 또는 가신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던 지방의 〈 시키 〉 보유자들이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일본 동부 출신들이 그들 의 과거의 봉사에 대한 대가로 일본의 여타 지역에서 이미 확립된 〈 쇼 〉 의 복잡한 지배 구조에 편입되어 〈 지토 〉 가 되었다. 물론 〈지토〉 는 그들 자신의 〈 지토 시키 〉 를 가지고 있었다• 〈 지토〉들은 아주 자연 스럽게 그들 각자의 〈 쇼 〉 에서 다른 〈 시키 〉 보유자들과 권력과 수입 에 대해 경쟁하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지방에서 가신이 한 명의 〈 슈고(守護) 〉 , 죽 보호자로 임명되어 봉건 구조가 더욱 발전하게 되 었는데, 이들 〈 슈고 〉 둘은 질서를 유지하고 전시에는 지방의 가신들을 조직하는 전반적인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론상으로는 한 군사 집단이 무능한 중앙 정부의 군사 기능을 단순히 인계받은 꼴이 되었지만, 이 집단이 세력을 확장하여 전 국가의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 이 집단은 〈지토〉를 통하여 구중앙 정부와 궁중 귀족의 수입을 통제하였고 〈 쇼〉에 거주하고 있는 대다수 의 사람들을 직접 감시, 감독하였다. 모든 가신들의 쇼군에 대한 충성 울 통하여 그리고 〈슈고〉의 통제하에 있는 방어 목적을 위해 그들이 만든 조직을 통하여, 이 군사 집단은 일본 전역에 대해 효과적인 군 사 지배를 하였고, 1274 년과 1281 년의 두 번에 걸친 몽고족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 방어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일본의 봉건제에서 법적 권리와 의제(擬制)는 유럽의 봉건제에서와 같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알 려져 있지 않다. 이것은 유럽 봉건제의 기원에서 로마적인 요소인 법

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 데 반하여, 일본 봉건제의 배후에 깔려 있 었던 중앙 집권적인 중국 제도에서는 법적 개념이 비교적 중요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동시에, 법적 인 의제가 아니라, 법적인 실체가 일본에서 제국적인 통치에서 봉건 지배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군사적인 집단은 관습 과 전례(前例)에 기초를 둔 그들 자신의 〈 가문(家門)의 법〉을 발달시 키고 있었다. 미나모토파의 승리로 미나모토 〈 가문의 법 〉 이 사실상 일본에서 유일하게 효력을 가진 법이 되었다. 이론상으로는 〈 지토 〉 의 시키를 제의한 모든 〈시키〉는 제국의 법의 지배를 받지만, 실제로 가 마쿠라 막부 정권하에서 대부분의 소송자들은 가마쿠라 법정에서 재 판을 받으려 했다. 왜냐하면 이 법정만이 그들의 결정을 집행할 수 있는 유일한 법정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법은 쇼군의 법정이 인정 하지 않는 한 점차 사문화(死文化) 되었고, 이후의 봉건 시기 동안, 유일하게 효력을 가진 법은 계속 대를 이어가는, 쇼군 가문의 법과 때에 따라서 다른 독립적이거나 자치적인 귀족들의 법이었다. 가마쿠라 막부 시대는 일본 봉건제의 전형적인 시대로 종종 간주되 어 왔다. 그러나 다론 봉건 사회의 유사한 시기와 비교해 보면, 그 시 대는 완전히 발달한 봉건제의 서곡이 되는 원 (原)봉건 시대 pr oto - fe ud 라로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어떤 봉건적인 장치를 통해 괄목할 만한 정도로 안정되었다. 미나모토가 이룩한 업적들은 1 세기 이상이나 지속되었으나, 한편으로는 미나모토 가계의 적손(姬孫)이 소멸됨에 따라 개인적으로 미나모토파 가신들의 충성을 전정으로 요구할 수 없었던 상칭적인 쇼군은 교체되었던 반면 에, 쇼군의 섭정, 죽 〈시켄(執權)〉이었던 호조 가문(기이하게도 다이 라 가문의 후손)과 막부의 중앙 위원회가 이 가마쿠라파를 결속시켰 다. 더욱 놀랍게도 그들은 그들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였다. 그 결과, 그 파에 속하지 않았던 〈시키〉 보유자는 예상했던 것만큼 빨리

지토에게 권력을 빼앗기지 않았다. 다른 한편, 〈 지토 시키 〉 의 끊임없 는 분할은 가신들의 경제 기반을 극심하게 참식하였다. 시간이 지남 에 따라, 지방 가신들과 상칭적인 인물인 쇼군의, 그의 섭정 사이의 개인적인 충성에 의한 유대 관계가 극도로 약화되었다. 1333 년에 급 작스러운 반란으로 가마쿠라 막부가 전복되었을 때, 가마쿠라 군사 집단은 일시에 와해되어 버렸다. 가마쿠라 막부의 몰락과 더불어 일본은 지방 전사 집단들의 경쟁으 로 거의 끊임없는 오랜 전쟁 시기에 돌입하였다 . 한때 전국적으로 조 칙되었던 전사들의 집단은 소멸되었으며, 정치 통일을 위해서는 새로 운 기반이 필요하였다. 가마쿠라계의 쇼군은 미나모토의 지손이었던 아시카가 가문의 새로운 계열의 쇼군에 의해 계승되었지만, 대부분의 전사 계급의 충성을 사실상 요구할 수 없었던 아시카가 가문은 〈지 토 〉 또는 〈 슈고 〉 같은 제도를 확립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으며, 그 결과 일본 전역을 결코 지배할 수 없었고, 또한 일본의 상당한 지 역을 통치했다 해도, 그렇게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들은 구제국의 수 도 교토(京都)에 안주해 있었으며, 여러 가지 직함을 가진 그들의 대 리인을 국가의 중요 지역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2 세기에 걸친 대부분의 통치 기간 동안, 일본 전역에서 세력을 신장하고 있던 다론 귀족들에 대한 지배는 물론 그들 자신의 대리인에 대한 : 통제도 거의 할 수 없었다. 아시카가 시대의 끊임없는 전쟁은 자연적으로 중대한 변화롤 가져 왔다. l 心1 ] 기 전반과 1~] 기 후반 사이에, 일본 봉건제는 비교적 급속 도로 발달하였으나, 예상대로 많은 지역적 차이와 복잡성을 지녔다. 일본 봉건제에 있어서 이 시기는 가장 혼돈되고 가장 잘 알려지지 않 은 시기이므로 일반화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이 시기의 일 본 봉건 제도는 절정기에 달했던 유럽의 봉건 제도와 아주 유사하기 때문에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사실상 이 시기는 일본에서 봉건

제의 최고(最高)의 시기이다. 이 기간 동안의 어느 한때에 일어난 일 본의 상황은 정확하게 설명될 수 없지만, 전 기간에 걸친 일반적인 발달은 비교적 명확하게 설명될 수 있다. 중앙 정부의 통제 기능이 상실되었고 사법적인 결정을 집행할 수 있는 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이 기간은 약자를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 시키 〉 권에 대한 재정비가 시작되어 마침내는 〈 시키 〉 제도 가 폐지되었다. 맨 처음 희생된 계층은 부재 영지의 주인 doman i al lords 이었는데, 이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수도에 거주하는 무기력한 궁중 귀족으로서 그들의 권리를 방어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사원은 인근의 〈 쇼 〉 에서 그들의 영주권을 보호할 수 있을 정도의 군사적인 세력을 보유하기도 하였으며, 소 〈 시키 〉 보유자를 희 생시키면서 그들의 지배권을 증대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영지의 주인의 대리인이었던 〈 슈고 〉 , 〈 지토 〉 와 같은 지방의 여러 귀족들, 토지 소유자들 그리고 경작자들은 그들의 토지에 대한 철대적인 지배와 그 토지의 확장을 위해서 서로간에 장기간의 전쟁을 시작하였다. 출신이 분명치 않는 가문이 득세하고 전통적으로 명문인 가문이 몰락하여 사라지게 되면서, 권력의 판도가 놀라울 정도로 빨 리 바뀌었다. 전통적인 명문 가문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일본의 전통 때문에, 새로 출세한 각 가문은 그들의 선조들 중에 훌륭했던 인물들 울 내세웠다. 그러나 일본 역사에서 이 시기만큼 무력이 권력을 장악 하는 확실한 수단이 되었던 시기는 없었다. 〈시키〉권이 소멸되면서, 〈쇼〉 자체도 사라지게 되었고, 그 자리에 영주(다이묘, 大名)나 대사원의 확실한 소유물이 된, 강화된 봉건 영 지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 이 과정은 느리면서도 불규칙적으로 전행 되었다. 왜냐하면 강력한 지방의 무사들이 분봉(分封)을 통해서 또는 약한 그들의 이웃을 정복하면서 그들의 세력을 신장하였기 때문이다. 분봉 조건과 토지 지배권의 실상은 상당히 다양하였고, 봉신들은 가

끔 자신의 영주를 배반하고 다른 영주에게 봉사하거나 기회가 오면 그들의 독립을 주장하는 데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그 결과 충 성의 양태가 급격하게 변하였고 여러 〈 다이묘 〉 둘이 효율적으로 지배 할 수 있는 영역의 크기가 끊임없이 변하게 되었다. 그러나 I~] 기까 지는 상당히 안정된 봉건 영지가 나타나게 되었고, 이 영지 내에서 봉신들은 그 영지를 지배하는 다이묘의 충성스러운 봉신이 되었고, 그들의 토지 보유권은 그 다이묘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었다. I~] 기 에는 영지의 규모가 커지고 다이묘들이 그들의 봉신들을 더 효율적으 로 지배하면서 독립적인 영주의 수가 감소되는 추세였다. 보유지와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일어난 이면에는 중대한 사회적 변화가 있었다. 장자 상속제, 다시 말해 일본식 장자 상속제가 확립되 었으며, 이 제도에 의하면 아버지, 다이묘이든 세습적인 봉신이든 간 에 그의 지위를그의 소생의 아들중의 한명 또는그가둘여온양자 에게 상속할 수 있었다. 강화된 봉건 영지가 점차적으로 〈 쇼 〉 를 대신하면서, 지방의 무사들 의 군사, 행정 기능도 변화되었다. 12 세기에 그둘은 대부분 소규모의 지대 칭수인이었으며, 토지 경영인이었다. l@1] 기까지는 소수의 무사 만이 다이묘 또는 다이묘의 봉토를 분봉받은 봉신 내지는 재분봉된 배신(陸臣, sub-vassal) 의 지위를 가졌다. 대부분의 무사들은 토지에 서 일탈하게 되어, 지방의 보유지가 아니라, 영주의 토지에서 생산된 일정양의 쌀을 받음으로써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은 영주에게 봉사하는 세습 녹봉을 받는 관리가 되었다. 토지를 분봉받은 봉신과 토지 없이 녹봉만을 받는 봉신 모두를 포함한 봉건 계급은 고도로 조직화되고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발달한 일본의 다양 한 통치 기능을 위임받은 세습 관료가 되어가고 있었다. 무사 계급의 군사 기능도 역시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 12 세기에 는 무인 집단에 속한 무인은 소집되었을 때 개개인의 기사로서 봉사

하였다. 가마쿠라 체제가 몰락한 직후 중요한 전쟁 무기로서 창이 널 리 사용되면서, 농민 출신의 바교적 규모가 큰 보병 군대가 출현하게 되었다. 16 세기 중엽에 총이 일본에 들어왔고 이는 군사 전술을 더욱 변화시켰다. 그 결과, 세습적인 봉건 무사는 이제 더 이상 개별적인 기사가 아니고, 그 대신에 직업 군대의 일원이 되었으며, 칭병된 농민 군을 지휘하는 중추 관리가 되었다. 5 후기 봉건제 : 히데요시(秀吉)와 도쿠가와(德川) 체제 16 세기 후반에 일본 항구에 유럽인들이 점차 많이 왕래하게 되면 서, 일본 봉건제에 새로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비일본인과 비 일본적인 제도에, 새로운 충성을 은연중에 요구하고 있는 서양 기독 교의 원리는 일본에 정치적 위협이 되었고, 일본인들은 동남 아시아 에 있던 유럽 선교사들과 상인들이 자신들의 순수한 목적을 달성한 다음에 정치적 지배에 관심을 돌릴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아러한 도전 때문에 이 시기 동안 일본 봉건제에 급격하고 중 대한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아시카가 시대에 발생하였던 모든 경 향이 가속화되고 강화되었다. 봉건 영지의 강화는 이전보다도 더 빠 론 속도로 진행되었으며 마침내는 일본 전역이 사실상 봉건 영지로 분할되었다. 그리고 다이묘들 사이에서도 봉신제의 서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다이묘의 지위에 오른, 출신 성분이 명확하지 않 은 평범한 무인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많은 봉신들의 영지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므로 나머지 독립적인 다이묘들은 그의 수장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봉건 일본은 드디어 재통일 이 되었고,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강력한 중앙 정부가 다시 수립되었 다. 히데요시는 그의 수도인 오사카와 교토에 야심적인 건설 계획을

시작하면서, 비록 성공은 하지 못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중국을 복속시 키려는 의도로 한국에 침략을 감행함으로써 그가 전 국가의 힘을 장 악하고 있다는 것을 즉각 과시하였다. 통일이 이루어지는 동안, 새 시대의 다이나믹한 힘이 다른 면에서 도 나타났다. 의국 무역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 상업이 급속하게 확장 되었다. 히데요시와 같은 평범한 무인이 일본의 군사 지도자가 되었 다는 사실은 사회 계층간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 다. 군대는 그 규모가 커졌으며, 서양 총의 도입으로 군사력이 더욱 향상되었다. 또한 일본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성들이 이 시기에 축조 되었는데, 이 성들은 이상적인 구조를 갖고 있었다. 이전에는 보통 방 어에 유리한 곳에 요새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새는 대개는 수비대가 상주하는 요새가 아니었다. 16 세기 후반에 축조된 성은, 비 록 유럽의 영향을 받았을런지 모르나, 중세 유럽의 성과는 다르다. 일 본의 성은 중세 유럽의 성과 보다 강화된 l@11 기 유럽의 성의 중간 형태이다. 성벽과 성의 천수각(天守닳H , t ower) 은 비교적 가벼운 나무 와 소석고로 만들었지만, 이 성벽과 천수각 아래에 대개 실재 방어 진지, 죽 상당한 크기의 토루가 만들어졌는데 이 토루는 일련의 동심 원 모양으로 배치한 넓은 해자(堀)로 둘러싸여 있다. l 데기 말의 일본의 재통일은 완전히 중앙 집권적인 정부 형태를 다시 확립하여 봉건적 정치 제도의 종말을 가져왔을런지도 모른다 . 그러나 일본인들은 의부 세계의 영향력을 피하면서, 다시 250 년 동안 16 세기 말의 봉건 구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히데요시의 중요한 다이 묘 중의 한 사람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1600 년대 전 쟁에서 히데요시의 어린 상속자를 충성스럽게 지지하는 자들 사이에 서 실력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도쿠가와 세력의 몰락을 가져올 수 있 는 어떠한 변화도 피하고자 했던 이에야스와 그의 계승자들은 그 당 시의 사회적, 정치적 여건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선교사에 의해 성공적으로 포교되었 던 기독교를 억압하고, 일본에 이익을 가져다 주었던 의부 세계와의 대부분의 접촉을 단절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일본의 자연적 고립은 이전의 3 세기 동안 일본 해상 선원들의 활동과 그 뒤 유럽인들의 일 본 해역 출현으로 극복되었다. 그러나 이제 법에 의하여 고립 정책이 다시 실시되고 엄격하게 강제되었다. 사실상 의부의 모든 압력을 제 거하여 인위적인 고립 정책을 수행하지 않았다면, 일본에서는 봉건 형태가 아주 늦게까지 존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의부의 압력이 근절되고, 정치적, 경제적인 변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인들이 일찍이 누려보지 못했던 가장 오랫동안 중단 없는 평화를 일본인들에게 가져다 주었다. 도쿠 가와 막부 통치의 2 세기 반은 일본 봉건제의 최후 단계이다. 이 단계 는 봉건제에서 아주 정교한 중앙 집권적 지배를 이루었다고 규정할 수 있는 단계이거나 아니면 중앙 집권화한 초기 근대 국가 속에서 봉 건적 형태가 지속되는 단계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도쿠가와 막부하에서는 사회 계급은 고정되었으며, 인위적으로 4 개 의 계급(士, 農 工, 商) _ 무사 출신의 행정가,” 농민, 장인(匠人)과 상인__으로 구분하는 것은 고대 유교 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다. 15, l 어기 동안 계급간의 이동이 급격하게 이루어졌으나, 이제는 사무라 이라는 무사 계급은 사실상 하나의 특수한 계급이 되어 이론상으로는 이 계급에 들어갈 수도 없고 이 계급을 떠날 수도 없었다. 이 제도는 1868 년 천황의 복고때까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 훨씬 전부터 사무라이 계급은 몰락하기 시작하였고 상인과 소기업가들의 수중에 부와 토지가 점차적으로 더 많이 집중되면서, 무사들의 허황된 사회 적 우월성은 때때로 조롱을 받기도 하였다.

1) 중국의 문인 관료에 상옹하는 계층.

도쿠가와 쇼군은 그의 수도, 현재의 도쿄(東京)인 에도(江戶)와 모

든 대도시들 그리고 몇 개의 전략적 요충지 주변의 광대한 영지를 직 접 지배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대부분은 여러 계층의 다이묘들에 의 해 분할된 영지(藩)로 남아 있었다. 쇼군의 영지는 가장 세력이 강한 다이묘의 영지보다도 약 5 배가량 컸다. 도쿠가와 가문의 일원이었거 나, 그렇지 않으면 1600 년 이전에 도쿠가와의 수장권을 인정하였던 영주와 가신들의 후예들이었던 후다이(譜代 다이묘)의 〈한〉은 쇼군의 영지 주변과 일본 중심 지방에 몰려 있었다. 일본 변방 지역의 대부 분은 1600 년까지 도쿠가와에게 복속하지 않았던 토자마(外樣 다이묘) 들 사이에 분할되었다(종교 기관은 l~~l 기 말에는 사실상 영지의 지배 권을 박탈당했다). 약 265 명의 다이묘가 있었는데, 이들 모두는 쇼군의 직속 봉신이었 으며, 쇼군으로부터 서임울 받았다. 그들은 쇼군의 허가 없이 서로 집 촉할 수 없었으며, 쇼군의 승인 없이는 그들의 상속자도 지명할 수 없었다• 그들은 또 쇼군의 허가 없이 요새지롤 구축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새로운 성의 축조는 사실상 끝났다. 모든 다이묘들은 그들의 직 계 가족들을 에도에 있는 쇼군의 궁중에 인질로 두어야 하며, 다이묘 자신들은 세밀하게 짜여진 계획(산킨 고타이 제도, 參勤交代)에 따라 에도와 그의 영지 사이를 왕래하여야 했다. 그들은 언제나 특별 봉사 요구에 응해야 하며, 이 제도는 산킨 고타이 제도와 더불어 그들의 재정을 고갈시켰다. 그들은 그들 영지의 행정과 방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으며, 요구가 있을 때마다 에도에 대한 군사 지원을 할 의 무가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에게는 직접적으로 세(稅)가 부과되 지 않았으며, 그들은 위에서 언급된 범위 내에서 자신의 영지에서의 자치권을 향유하였다. 이론상 쇼군은 다이묘의 재산을 빼앗거나 혹은 마음대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보다 멀리 떨어져 있고, 보다 강력한 다이묘들은 1600 년 이전부터 그들 조상들이 보유해 왔던 영지

에서 쇼군의 지배를 받지 않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소 다이묘들은, 특히 쇼군의 직접 지배하에 있는 다이묘들은 그들의 세 습 가신들과 함께 이곳저곳으로 자주 이동되었으며, 마치 세습 관료 체제의 지방 관리와 같이 그들의 영지의 크기가 증감되기도 하였다. 가족을 포함하여 인구의 약 5% 를 차지하는 사무라이는 쇼군과 다 이묘들의 직속 가신들이었으며, 이들은 세습 관리와 무사로서 그들의 영주에게 봉사하였다. 중요한 가신들은 그들의 영주로부터 조그만 봉 토를 받았으나, 그들은 보통 그들의 봉토에 거주하지 않고, 그들 영주 의 수도에 거주하였다. 쇼군의 봉토를 보유하고 있는 가신은 하타모 도로 알려졌다. 그들의 봉토는 지위가 가장 낮은 다이묘둘의 봉토보 다도 더 작았으나(1 0,000 고쿠(石 )2) 의 쌀 생산량), 세력이 강한 다이묘 들의 가신들 중에는 10,000 고쿠 이상을 수확할 수 있는 봉토를 가진 가신들이 실제로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신들은 토지를 전혀 갖 지 못하고, 쌀로서 녹봉을 받았다. 영주가 임의로 모든 가신들의 봉토 보유량 또는 녹봉을 결정하였다.

2) 대체로 와낵 l 에 해당한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봉토 는 공식적인 평가보다 생산력이 좀더 향상되었다.

에도에서는 쇼군의 직속 가신들, 연합 다이묘와 연합 다이묘의 가 신들 중에서 임명된 관리로 구성된 정부가 발달하였다. 이 관료 제도 내에서의 관직은 그 사람이 봉건 계급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러나 능력이 있는 사람은 가신으로서 보다 많은 녹봉 또는 보다 큰 봉토를 할당받음으로써 가신의 지위에서 다이묘의 지위 로 승전하며, 보유하고 있는 다이묘의 영지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보 다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된다. 중앙 정부 조직에 대한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더라도, 각종의 위원회와 여러 관직들 사 이에 권력을 분산시킴으로써 집단적인 책임이 수상격인 쇼군 개인의 책임보다도 더 보편적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쇼군의 토지는 에도 정부에서 직접 파견된 대리인(代官)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일본 전역에서 실시되었던 법칙에 따라, 토지에서 생산된 생산물의 약 절반은 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세금으로 칭수된다• 쇼군 의 토지에서 징수된 이 세는 중앙 정부 수입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 며, 교역에 부과하는 세, 화폐의 발행, 광업과 상업의 독점으로부터 나온 수입을 훨씬 능가한다. 쇼군의 특별 대리인(부교, 奉行)들은 막 부의 직접 지배하에 있는 여러 도시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그 러나 대부분의 지방은 행정적인 목적을 위해 〈 후다이 〉 와 〈토자마 다 이묘 〉 들의 영지로 나누어졌다. 개개의 〈 다이묘 한 〉 의 행정 체제는 에 도 정부를 축소 모방하여, 다이묘의 가신들이 관리로 임명되었고, 막 부 정부와 같이 각 〈 한 〉 의 재정은 주로 토지세에 기반을 두었다. 다 이묘들의 영지 내에서는 다이묘에게 사실상 자치권을 허용하였지만 에도 정부는 〈 산킨 고타이 〉 제도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다이묘와 에도 정부에 위험이 되는 무리를 감시하는 의무를 지닌 비밀 경찰(메츠케, 目付)를 통해서 그들을 주의깊게 감시하였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민은 봉건적인 다이묘와 가신들과 분 명히 구분되며, 모든 정치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이론상 평민들은 농 민, 장인과 상인의 세 계층으로 다시 나누어져 있지만 이들 세 기능 적인 집단들 사이에는 실제 아무런 구분이 없었다. 그러나 토지 소유 가문(이들 중에는 도쿠가와 이전 시대에 무사 계층이었던 가문이 있었 다)과 소작농과 하인들 사이에는 분명히 사회적 구분이 있었다. 정치 적으로 평민들은 쇼군의 영지와 여러 다이묘들의 〈한〉 사이에 나누어 져 있었으며, 그들은 그들 개개인의 영주에게 충성하고, 그들 영주들 의 영지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특히 농민들은 가혹한 조세 제도의 희생물이 되었으며, 잔인하고 세밀한 처벌 법규의 적용을 받았다. 평 민들은 그들 영주들의 재정과 안전에 부담을 주지 않는 일들을 처리 하는 데는 어느 정도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이 접은 특히 농민들에게

실제로 적용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봉건 엘리트들이 그들의 영지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에도와 각종의 〈 한 〉 의 수도에 대체로 거주하 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이 모여사는 촌락은 아시카가 시대에 〈 쇼 〉 를 대신하여 지방 농업 조직의 단위로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도쿠가와 시대에는 분명히 지방에서의 사회, 경제 조직의 최초의 단위가 되었 다. 상업 도시 내에서와 마찬가지로 준자치적인 촌락 내에서도 각종 의 비봉건적인 성향이 발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 결과 어느 정도의 기업적인 행위가 상업과 단순한 제조업에서 나타난 반면에 19 세기 초까지는 소작제와 지주제가 급속히 발달하였다. 6 종교와윤리 기독교가 서양인들의 정신을 완전히 지배하였던 시대에 유럽에서 봉건제가 융성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와 비교될 수 있을 만한 어떤 종 교가 일본의 봉건 시대에 일본인의 정신을 지배하였을 것이라고 상정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가정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중세 일본의 불교 는 중세 유럽에서의 기독교와 어느 정도 같은 역할을 하였지만, 기독 교가 유럽에서 행했던 역할처럼 결코 지배적이거나 또는 독점적인 윤 리나 종교가 아니었다. 기독교가 로마의 이방 종교였던 것처럼 원래 중국의 이방 종교였던 불교가 마치 기독교가 서양의 고전 시대 후기 문화의 주요 부분이었던 것과 같이, 중국 문화의 핵심적이고 중요한 요소로서 일본에 유입되었다. 9 세기까지 일본에 잘 정착되었던 불교 는 중국 제도의 어떤 다론 요소들보다 쉽게 일본 사회의 봉건화에 적 응하였다. 중앙 정부의 권력이 쇠퇴하면서, 불교는 점차적으로 일본에 서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고, 14, 15 세기까지는 승려들이 일본 문화의 거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였다. 마찬가지로 불교는 대토지 소유자가

되었으며 초기 봉건제의 〈 쇼 〉 를 발달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 다. 봉건적인 토지 소유자로서 불교는 대규모의 무사단에 대한 지배 권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중요한 군사적인 실체가 되었다. 특히 교토 주변의 구수도권 지역에서 불교 사원은 당시의 최대의 토 지 보유자였으며 군사력을 가졌다. 16 세기 말에 일본이 통일되면서 불교는 대부분의 토지와 그들의 군사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유럽에서와 같이, 일본의 봉건 시기는 종교적인 열정과 신앙의 시 대였다. 봉건 이전 시대에 불교는 장엄한 의식, 예술적인 전통과 위엄 때문에, 지배 계급의 대부분에 영향을 끼쳤다 .• 그러나 IO 세기에 새로 운 형태의 대중 종교의 열정이 나타나게 된다. 종교적 열정으로 가득 찬 승려들은 대중들에게 지옥의 불과, 저주에 대해서 설교하였으며, 일반 대중들은 여기에 호응하였다. 미나모토 일파가 최초의 막부 정 권을 수립하였을 때인 12 세기 말과 13 세기 초에, 점증하는 종교적인 열정은 새로운 종파롤 낳게 되었다. 후기 일본 불교의 주요한 한 종파가 되는 새로운 종파들이 계속하 여 나타났다. 몇몇 종파들은 신앙을 통한 개인의 구제라는 대중적인 개념과 영광스러운 천국에서의 실질적인 사후의 삶을 강조하였다. 선 (禪)을 중시하는 다른 종파들은 쉽게 무사들의 호응을 얻었던 금욕적 인 신비주의를 강조하였는데, 이러한 종파주의는 호전성을 갖게 되었 고, 수세기 동안 일본의 불교도들은 유럽에서 가끔 기독교 역사를 특 칭지었던 상호 자기 파괴적인 mu t ual self-d estr u cti on 성향과 유사한 성 격을보였다. 14, 15 세기의 봉건제의 절정기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사상은 일본 문화의 거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였다. 선승(禪僧)은 아시카가 막부의 궁정에서는 물론 일본의 대의 무역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당시의 문학은 불교의 영향을 깊게 받았으며, 당시의 중요한 예술 적 조류는 선(禪)철학의 직접적인 영향하에 있었다. 한편, 신양을 통

해서 개인이 구제된다는 개념을 강조하였던 종파들은 하층 계급의 삶 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중의 한 종파는 성직자의 결혼을 허가하는 개혁과 중국 불경을 일본어로 번역함으로써 새로운 인기를 얻었다. 이 종파는 역시 속인들의 집회를 조직하였으며, 이 조직은 후 에 농민과 도시인들의 정치적, 경제적 행위의 중추가 되었다. 아시카 가 통치 시기의 후반에 호전적인 평민 불교도 조직은 그들의 권리를 위해 가끔 봉건 계급에 대해 투쟁을 하여 꽤 성공하였다. 일본의 중세 불교 내에서 이러한 경항들은 일본의 재통일에 의해 중단되었다. 사원은 그들의 군사적, 경제적 세력을 빼앗겼을 뿐만 아 니라, 지배 계급에 대한 불교 사상의 영향력도 많이 감소하였다. 예술 과 문학은 거의 세속화되었고 불교는 급속히 그 권위를 상실하였다. (도쿠가와 시대의 인구 조사 제도 때문에) 모든 일본인들은 법에 따라 불교의 사원이나 수도원의 교인으로 등록하였고, 이는 도쿠가와 시대 인구 조사 제도의 한 방편인 사원의 학교는 하층 계급을 위한 초등 교육 기관으로 존속하였다. 그러나 도쿠가와 시대는 그 이전의 e1l 기 동안과 비교해 볼 때 불교가 지배적인 시대는 아니었다. 봉건 일본에서 불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이 시대의 유일한 윤리 사상의 원천은 아니었다. 불교가 어떤 인도주 의적인 개념을 제공하고, 금욕주의적인 선철학이 무사들에게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였으나, 봉건제의 윤리는 유교적인 의미로 나타나게 되 었다. 중국의 봉건 시대에 나타났던 초기의 유교는 영주와 봉신과의 관계를 강조하였고, 충성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일본에서 봉건 계급이 유교의 이러한 면들에 치중을 한 것은 아주 당연하며, 도쿠가와 시대 에 불교의 쇠퇴와 더불어, 유교는 이전보다 더욱더 중요하게 되었다. 유교는 거의 국가 철학의 지위를 갖게 되고, 쇼군의 각별한 후원을 받게 되었다. 유교, 선철학과 봉건적 경험으로부터 봉건적 윤리 강령이 점차적으

로 나오게 되었다. 이 강령은 자연적으로 충성, 복종, 용맹성과 운명 론을 강조하였다. 서양의 기사도와 같이 여성들을 어떻게 취급하는가 라는 문제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지만, 일본 봉건제의 윤리 강령은 명 예를 매우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여성 문제로 인해 명예를 더럽혔을 때는 복수나 혹은 세 푸쿠(할복 자살하는 〈 하라키리 〉 로 알려짐)에 의해서만 그 불명예를 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윤리 강령은 최근에까지 부시도(武士道)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갖지 못하였지만, 미나모토 막부 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며 봉건제 그 자체가 붕괴된 이후에도 수정 된 형태로존속하였다. 7 상업과 산업 일본의 봉건 시대는 꾸준하게, 때로는 급속하게 경제적으로 성장하 던 시기이다 .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농지는 물론 봉건 계급의 지배하 에 있었고, 상업과 산업은 발전하면서 당시의 지배적인 제도인 봉건 기구에 적응하였다. 국내의 교역과 생산은 주로 〈좌(座)〉, 죽 조합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 13, 1 때]기에 나타난 조합들은 그들의 후원자와 보호자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하는 대가로 조합원들을 위한 지방에서 독점권을 획득하고, 흔히 봉건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의 착취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그들의 후원자와 보호자들은 보통 종교 단체이거나 봉건 귀족들이었으며, 구제국의 수도 주변에서는, 구궁정 귀족들도 보 호자가 되었는데, 그 귀족들의 실제 권력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이 갖고 있던 권위는 조합원들을 충분히 · 보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봉건제가 발달함에 따라, 조합의 크기와 규모도 발달하였다. 사실 봉건 일본에서 이 두 정치적, 경제적인 성장 과정은 전 성장 과정에

서 볼 때, 상호 의존적인 양상을 띠고 있었다. 도쿠가와 시대까지는, 보통 한 영지에서 활동하였고 그리고 한 다이묘의 보호하에서 활동하 고 있었던 그러나 때때로 일본의 주요 도시 전체에까지 그들의 활동 영역을 확장하였던 상사(商社, merchant com p an y)가 중세의 조합을 대신하였다. 봉건 지배자들은 대개 국내의 조합과 상사로부터 어떤 이득을 당연 히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의국 무역에서는 그들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중국과 한국과의 무역이 일본 경제에 중요 하게 되었을 때인 13 세기에 사원이 보다 큰 규모의 상업 행위에 자금 울 조달하는 데 주역이 되었으나, l 心1 ] 기 말경에는 아시카가 쇼군과 일본 서부의 영주들이 중국과의 무역에 직접 자금을 조달하였다 . 다 음 2 세기 동안 더욱더 많은 일본 서부 지방의 선원들이 이 국제 무역 에 종사하였고, 극동 지방울 거쳐서 멀리 말라카 해협까지 그들의 활 동 영역을 확장하면서 일본인들의 상업적 관심은 급속히 성장하였다. 일본 서부 연안 지방의 봉건 영주들은 그들 수입의 주요 부분울 해 의 무역에 의존하게 되었고, 16 세기에 유럽인들의 도래로 인한 해의 무역의 발달로 그들은 상업 수입에 더욱더 의존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많은 무사 계급의 후손들이 아마 해의 무역에 종사하였을 런지 모른다. 여하간에 일본 서부 지방 무사 계급의 한 부류는 모험 적인 해외 무역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전 극동 지방에서 그들 의 순수한 상업 행위보다는 그들의 군사적 용맹성 때문에 더 찰 알려 지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근대초 유럽인의 해의 상업 활동과 마찬 가지로, 중세말 일본의 해의 상업 활동은 해적 행위와 같은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일본의 왜구들 merchan t - pi ra t es 은 중국 연안 지역의 고통거리가 되었으며 16 세기 말에는 일본의 왜구둘은 동남 아 시아 전역에서 유명하였다. 이러한 해의 무역의 성장은 의심할 여지없이 일본 내의 경제 발달

에 자극을 주었고, 16 세기에는 특히 일본의 서부 지방에서 급속한 경 제 성장을 촉진하였고 순수 상업 도시를 발생시켰다• 외국 무역의 영 향하에 있었던 규슈 서부 지방의 나가사키(長崎)는 어촌에서 일본의 중요한 항구 중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세토나이카이(潮戶內海, Inland Sea) 의 동쪽 끝에 있는 사카이는 오랫동안 번성한 상업의 중심지였으 며, 아시카가 말기에는 최초의 〈 자유 도시 〉 로서 상당한 정도의 자치 권을 얻었다. 16 세기에는 사카이(璟)에서 북쪽으로 몇 마일 떨어전 오사카는 일본 제일의 상업 도시가 되었고, 오사카의 거대한 사원이 마침내 그 시대의 주도적인 봉건 영주에 의해 함락되었을 때인 1580 년까지 오사카는 봉건 계급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17 세기에는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일본의 대부분의 대의 무역과 일 본인들의 해의 활동이 근절되었다. 그러나 아마 일본의 재통일과 그 에 따른 지속된 평화 덕택에 경제 성장이 지속될 수 있었다. 일본 정부의 봉건적 기반에도 불구하고, 막부 정부와 개개의 〈한〉 에 의해 발행된 여러 형태의 신용장과 지폐가 보여주고 있듯이, 일본 경제는 곧 기본적으로 화폐 경제가 되었다. 막부 정부와 모든 〈한〉은 여전히 대부분의 수입을 경작지에 대한 현물세의 형태로 쌀을 받았 다. 그러나 그들의 여러 가지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이러한 쌀 수 입을 화폐로 바꿔야 한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일본 서부의 〈 한 〉 둘은 봉건 수도인 에도에 거주지와 사무실을 유지하 는 것 의에도 오사카에 역시 사무실들을 개설하였고, 17 세기가 끝나 기 전에 장차 두 개의 거대한 쌀 저장소가 될 교역소가 오사카와 에 도에서 발달하고 있었다. 고정된 미곡 수입을 갖고 부분적으로는 지출을 화폐로 해야 하는 다이묘와 그들의 가신들은 항상 물가 변동의 희생양이 되고 있었다. 그 결과, 다이묘와 그들의 가신들은 도시의 상인들과 고리대금업자에 게 빚을 지게 되었다. 〈한〉은 가끔 지방의 상사들과 협동하여 상업의

독접권을 차지함으로써 재정의 파탄을 피하려고 노력하였다. 개개의 사무라이는 단순한 제조품의 도급일과 같은 부업을 가짐으로써만 자 신의 재정적인 파탄을 모면할 수 있었다 . 이러한 상황 때문에 봉건 귀족들과 경멸스럽게 여겨졌던 부유한 상인들 사이의 상호 결혼이 찾 게 되었으며,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간의 선이 점차 분명치 않게 되었다. 도쿠가와 시대에는 일본의 부의 대부분이, 상인둘 특히 19 세기까지 는 인구가 일백만 명에 육박하는 대도시인 에도와 오사카의 상인들의 수중에 집중되었다. 그리하여 상인들은 후기 봉건 일본의 경제를 주 도하였으나, 이 시기의 문화를 그들이 지배하였다는 사실이 더 주목 할 만하다. 비록 그들은 정치 권력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지만, 그들은 도쿠가와 일본의 전형적인 문화인 그들의 특수한 도시 문화 형태를 만들었다. 그 당시의 문학은 대도시의 상인들의 후원하에 발달하였다. 구체적 으로 문학은 중산층의 독서 계층을 위해 씌어졌고 상인과 상인들의 삶이 가끔 주제가 되었다 . 인쇄가 널리 행하여졌고 인쇄소는 대개 비 봉건적인 도시 거주자들의 취미에 영합하였다• 연극과 디론· 예술도 마찬가지로 상인들의 취미에 의해 지배되었고 이 당시에 목판 인쇄술 의 대발전은 중산층의 예술 작품에 대한 욕구를 저령한 가격에 직접 적으로 부응한 결과였다. 문화적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경제적 으로 도쿠가와 일본은 정확히 봉건 사회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후기 봉건 사회였다. 8 봉건유산 일본의 봉건제에 대하여 언급되어야 할 마지막 부분은 봉건제가 현

대 일본에 남긴 유산이다. 유럽의 봉건제와 아주· 흡사한 일본의 봉건 적인 경험은 지난 수세기 동안 일본이 유럽의 모델을 따라서 그들의 사회와 정부를 재구성하였던 속도, 용이성과 어떤 관계가 있다. 이러 한 일본의 성공을, 서구화하는 데 서구 문화와 더 오래 그리고 더 밀 접하게 접촉하였으나 봉건적인 배경을 결여하였던 여타의 아시아인들 의 완만하고 고통스러운 노력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유럽과 비슷 한 경험을 가전 일본은 유럽 봉건제에서 성장하였고 근대 서양 사회 형성에 도움을 준 것과 똑같은 특성을 적어도 초기 일본의 근대화 시 기에 창출할 수 있었다. 아주 급속하게 근대 서구 형태의 국가로 전 환할 수 있었던 일본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것 은 아시아 여타 국가들에서보다 일본에서는 그 전환으로 인한 변화가 적었다는 점이다. 봉건제의 마지막 단계에 있었던 일본과 초기 근대 유럽 사이의 비 슷한 어떤 특칭들은 이 점을 밝혀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일본인들 은 유럽과 비슷하게 젊고 유능한 사람들이 군인직을 매력적으로 느끼 게 만들었고기 이러한 전통이 없을 때, 칭병에 의한 군복무도 가능하게 하는 귀족적, 군사적인 전통을 가졌다. 일본인들은 아시아의 다른 민 족들보다는 훨씬더 깊은 관심과 열정을 갖고 근대적인 육군과 해군을 창설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둘째, 비록 일본인들은 기사도와 같은 명확한 개념을 갖고 있지 않 았지만, 그들은 명예를 중시하는 강한 봉건적인 규범을 갖고 있었다. 개개 일본인들은 상급자에 대한 의무와 충성이라는 면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는 것이 습관화되었고 어떤 면에서는 청교도적인 양십과 비슷 한 의무감을 가졌다. 일본인들은 개인 또는 가족을 초월한 어떤 실체 또는 이상을 위해 용의주도한 의무 수행과 무한한 자기 희생을 강조 하였다 . 셋째, 강한 민족 의식이 일본 봉건제의 초기 단계에서 성장하였다.

일찍이 13 세기에 나타났던 그 민족 의식은 19 세기 일본인들 사이에 당시 서양의 가장 진보된 어떤 민족들 못지않게 보편화되었다. 강한 봉건적인 충성심과 결합된 이 민족 의식은 1854 년 일본의 개항 훨씬 전에 전정한 애국심을 만들어냈다• 봉건적인 단위가 커짐에 따라, 충성심이 쇼군이나 또는 다이묘로부 터 천황에게 그리고 봉건 국가에서 국민 국가로 용이하게 전환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까지, 개개인의 충성심이 봉건제와 더불어 성장하였다. 넷째는 일본 봉건제에서 발달한 법의 개념이다. 국동에는 로마적인 법 개념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일본 봉건제는 일본인들 사이에 만약 사회가 혼란 상태에 빠지지 않는다면, 계속 지속되는 재산권을 포함 한 법적인 권리들에 대한 강한 인식을 발달시켰다. 이것이 일본인들 이 19 세기에 서양식의 법제도로 쉽게 전환될 수 있었고 법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평등의 개념을 채택하는 데 아시아의 여타 민족보 다도 어려움을 덜 가전 이유이다. 다섯째는 법적인 특칭과 연관되어 있는데, 봉건 구조 내에서 자본 주의 기업의 발달이다. 중국과 여타의 아시아 국가에서는 사업가들을 보호할 수 있는 법이 없어 이들을, 쉽게 몰락할 수 있는 위험한 상태 에 놓여 있게 했던 반면에, 일본의 사업가와 기업가는· (상인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멸시와 상인을 사회의 최하위 계급으로 배정하였음에 도 불구하고) 봉건 정부로부터 훨씬 많은 법적인 보호를 받았다. 이 것은 도쿠가와 시대에 안정된 상사의 발달뿐만 아니라, 위험을 무릅 쓰고 소산업 활동에 그들의 자본을 투자하려고 했던 기업가를 출현하 게 하였다. 19 세기 초까지는 공장 조직이 방사와 방직 산업에서 나타 나기 시작하였고 공장 도시들이 출현하였다. 일본인들의 이러한 봉건 사회 내의 기업적인 자본주의에서 완전히 발달한 자본 제도로의 이행 단계는 여타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처럼 전자본주의 단계를 뛰어넘은

것이 결코 아니다. 여섯번째이자 마지막 특징은 사회 조직이다. 예를 들면 일본의 가 족 단위는 중국의 가족 단위보다는 훨씬 더 유럽의 가족 단위에 가까 웠고,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봉건제에서 성장한 상속 제도로 인해 상속을 받지 못한 장남 이의의 자식들은 사회에서 위치를 확립하려는 그들의 시도 때문에 가끔 사회 발전의 전취적이고 대단히 활동적인 전위대인 사회 계층을 형성하였다. 어떤 면에서 서양의 중산 계층과 비교할 수 있는 요소들의 출현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부유한 도시 상인들은 분명히 이 그룹에 속한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사무라 이와 일본의 일부 지역의 농민들도 이 그룹에 속한다. 예를 들면, 시코 쿠(四園) 섭에 있는 〈 토사 한(土佐藩)〉에서 시골뜨기 사무라이 (〈고 시, 鄕士 〉 )는 농민과 무사 사이의 중간 계층을 형성하였으며, 여러 가 지 이유로 전통적인 계급 구분이 대부분의 일본에서 더욱더 소멸되었 다. 남부 규슈의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 한 〉 에서는 전체 인구 대 사 무라이를 대비할 때, 예의적으로 높은 비율의 사무라이가 자신의 직 (職)을 버리고, 농부 또는 여러 종류의 소생산자로서 일을 해야 했다. 이 두 경우로 볼 때, 상류 계층의 구성원들은 어떤 의미에서 중산 계 충이 되어, 세습 귀족으로서 그리고 생산자로서의 복합된 기능을 가 졌다. 동시에, 비단을 생산하고 방직업을 하는 일본 중부 지방에 있는 간토(關東) 지역의 부유한 농민들은 소규모의 지방 기업인이 되기 위 해 충분한 자본을 축적하였으며, 갖가지 소규모의 생산업을 시작하기 위하여 그들이 농업에서 얻은 수입을 사용하였다. 서부 일본의 보다 가난한 사무라이, 특히 사츠마와 토사와 같은 지역 출신의 사무라이 와 도시 상인은 물론, 간토 지방의 보다 부유한 상인들은 메이지 시 대 (1 868-1912) 에 정부, 사업 그리고 각종의 직업에서 일본 지도자층 의 상당수를 차지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우연은 아닐 것이다. 다이묘 와 그들의 중요한 가신들은 새로운 일본의 지도지들을· 만들어 냈다

해도 극소수이었고 전정한 농민 대중들은 거의 지도자를 만들어내지 못하였던 반면에, 중산 계층을 구성한 요소들은 근대 서양의 경제적, 정치적 제도로 전환할 수 있게 하였던 것 같다. 어느 누구도, 일본에서 봉건적인 경험이 봉건 시대 이후의 유럽의 주요한 어떤 특성과 유사한 특성을 가졌고, 이러한 유사점은 일본이 현대 서양의 정치, 경제적 형태를 채택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는 일반적인 데제를 명확하게 언급하고 주의깊게 연구하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된 것은 단순히 이 문제에 대한 몇 가지 면만을 제시하 고 있지만, 이것은 이 문제의 범위와 중요성을 제시할 것이며 , 인류의 봉건적인 갖가지 경험에 대한 아직 개발되지 않은 비교 연구 방법에 대한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여 줄 것이다 .

W 중국의 봉건제 보드 Derk Bodde 1 서론 중국 봉건제의 시기들, 최근에 봉건적 또는 봉건제적(fe udal 또는 fe udal i s ti c) 이라는 용어들은 근대 이전의 중국 사회를 지칭하는 용어 로 점점 더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이런 식의 용어 사용은 정치적이 라기보다는 경제적이다. 전통적인 중국에서 부의 기본 수단은 소토지 소유자나 혹은 소작농인 농민들에 의해 소토지에서 생산되는 곡물이 었다. 전체 인구의 70 내지 80% 를 차지하는 이러한 농민들은 상호 결합된 관료인 지주 사인(地主士人)과 지방의 고리대금업자들의 소집 단에 의해 경제적으로 지배되었다. 이 소집단의 자본은., 대부분이 소 규모이며 가족적이고 지방적이며 그리고 전체 경제의 주변에 지나지 않는 상업이나 산업에 투자되기보다는 대개 토지에 두자되었다. 이것 은, 법적으로는 자유로이 토지를 매매하거나 또는 직업을 바꿀 수 있 지만, 상당수의 농민들은 실제로 여러 가지 경제적 요인 때문에 그들 이 경작하는 토지에 사실상 속박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 한 요인들 중에는 인구의 압력과 지배 그룹으로의 토지 집중, 그 결 과로 높은 토지세와 지대, 자본의 부족으로 인한 고율의 이자, 농업을

대신할 수 있는 산업과 상업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점 등이 포함되 어 있었다• 전통적으로 농민이 경제적 여건 때문에 토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대부분의 농민들은 군인이 되거나 혹은 도적이 될 수밖에 없 었을 것이다. 분명히 이 사회는 전(前)자본주의 사회이지만, 이 사회 는 노예의 수가 비교적 적었기 때문에, 이 사회를 노예 사회라고는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봉건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이 의의 다른 방법으로 이 사회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논 쟁은 계속되고 있다 .I)

I) 많은 학자들의 대답은 다음과 갇다. 이 사회는 자본주의나 노예 사회는 아 니며, 그렇다고 봉건 사회도 아니다. 그것은 다른 독특한 형태의 사회, 죽 위트포겔 K . A. W ittfog el 이 말하는 동양적인 사회이다. 에버하르트 Wol fr am Eberhard 는 이를 향신 사회 gen tr y soc i e t~桓 L 규정한다. 이러한 학자들과 오웬 라티모어 Owen La tti mor 려 이론에 대해서는 아래 4 절과 이 논문의 결론부분을참조.

그러나 위의 주장은 봉건제의 정치적 측면을 무시한 것인데, 중국 울 연구해 보면 이 책의 서론에서 강조되었던 봉건제의 정치적 측면 은 중국의 주요 왕조하에서는 상당히 또는 완전히 결여되어 있던 부 분이다. 그러한 왕조들의 공통적인 특칭은 귀족이 아니며, 이론상으로 는 세습적이 아닌, 정부가 임명한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중국의 유명한 과거 제도를 통하여 선발한 봉급을 받는 문인 관료를 통해서 중앙 집권화된 제국이 통치되었다는 점이다. 한 제국에서 다른 제국 이 성립할 때까지의 시기 동안 짧은 정치적 혼란과 군웅할거 시기가 있었으나, 이 시기는 너무 짧고 분명히 과도기적인 시기이기 때문에 여기서 논의될 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엄격히 정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중국의 역사에서는 봉 건적 또는 유사 봉건적인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주요한 시기는 단지 두 시기뿐이다. 일반적으로 중국 봉건제의 고전 시대라고 생각 되는 첫번째 시기는 주(周)왕조(기원전 1122?-256) 시대인데, 우리의

목적상, 이 왕조를 그 이전의 상(商, 기원전 1765? - 1123? )2 ' 왕조와 같 이 묶어 생각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두번째 시기는 기원후 221- 589 년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중국은 24 개 이상의 단명의 왕조와 국가들로 분열되었으며, 이 시기를 지칭하기 위하여 근대에 만들어전 분열의 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이 두 시대는 전 (秦 기원전 255 - 207) 과 한(漢, 기원전 206 _ 기원후 220) 의 두 왕조에 의해서 서로 분리되는데, 이 두 왕조하에서, 즉 기원전 221 년부터 주 의 봉건제의 잔재가 붕괴되고 , 새로운 관료적인 제국 형태가 주의 봉 건제를 대신하였다. 한의 멸망은(공식적으로는 220 년 그러나 한은 삼 국으로 분열되었던 때인 190 년에 붕괴) 분열의 시대를 열었고, 이 분 열의 시대는 다시 수(隨 590 - 617) 와 당(唐, 618- 9 06) 왕조들하에서 중앙 집권화한 제국이 재확립됨에 따라 끝이 났다.

2) 기원전 841 년 이전의 사건들의 연대는 다양하며, 많은 학자들은 상에서 주 로의 변천은 이 책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연대보다 실재로 약 1 세기 후에 일어났다고 믿고 있다. 상왕조 이전의 시기에는 기록이 너무 간헐적으로 나 타나 있어 우리들의 주제에 대해서 유익한 논의를 할 수 없다 .

아래에서, 우리는 첫째, 주의 봉건제의 성장과 몰락에 대하여 논의 하고, 전, 한 제국 제도 변화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논의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국 고대 사회에서 이러한 변화의 원인이 되는 제 요 소들을 설명하려는 현재의 이론들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분열의 시 대 동안에 다시 나타나는 어떤 유사 봉건적인 현상들에 대해 보다 간 단하게 논의하고자 한다. 2 주왕조초기의 봉건제 봉건제를 뜻하는 중국의 용어 fe uda li sm( 봉건제)에 해당하는 근대 중국어는 복합어인 봉건 제도

인데 이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봉(封)을 확립하는 제도라는 뜻이 다. 이 용어는 서양으로부터 사회학적, 역사학적인 개념이 유입된 후 인 비교적 최근에 중국에서 실제 널리 사용되었지만, 봉건 제도라는 단어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봉이리는· 단어는 거의 3000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고대 중국 고유의 문화에서 유래하는 서로 관련된 많 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주왕조의 문집들에서 사용된 것처럼, 봉은 무엇보다도 둔덕, 둔덕을 만드는 것, (식물에) 흙을 북돋아주는 것, 경계, 봉토의 경계를 결정하는 것, 봉토를 수여하는 것 등의 의미를 가진다. 봉이라는 단어의 고대에 씌어진 대로의 글자 형태는 토지에 서 자라는 식물 옆에 있는 손을 나타내며, 분명히 식물 주변에 흙울 쌓는 행위 혹은 보다 일반적으로 둔덕을 만드는 행위를 묘사하고자 의도되었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흙으로 된 둔덕은 주의 봉지 수여 의식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상(商)의 전례 봉이라는 단어는, 이제까지 발견된 상왕조의 갑골문 d i v i na ti on in- sc ripti ons 에는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봉건적 인 관점 에서 이 러한 갑골문을 철저히 연구한 호후선(胡厚宣, Hu Hou-hsuan) 은 다 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3) 상의 어떤 왕들은 분명하게 그들의 부인, 아들들 그리고 탁월한 대신들에게는 물론 갑골문에 단순히 후 (候 hou) 또는 (그렇게 잦은 것은 아니지만) 백(伯, po ), 남(男, nan) 으로 언급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사람에게 영지를 양도하는 것을 관행으로 삼았다. 이러한 용어들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주의 봉건 계급 제도에서 잘 알려진 귀족의 칭호가 되었다. 다른 토지의 보유자 로서는 이웃에 있는 부족장들이 있었는데, 원래 상나라로부터 독 3) 그의 Chia - ku-hsi ieh Shan/-shih ( Collecte d Essays on Shang Histo r y on the Bone Insc ripti ons) 에 포함된 그의 「殷代封建制度考」 I , Essay I.

립되어 있었던 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분명히 정치적으로 예속된 지위로 전락하였다. 호후선은 그가 상왕둘의 봉신들이라고 해석하는 이러한 각종의 토지 보유자들은 일반적으로 다음의 의무들 중 하나 또는 몇 가지를 수행하여야 한다고 믿고 있다-첫째, 상의 국경 지 방의 방어, 둘째, 반도(反徒)들을 응칭하기 위한 전쟁 수행, 셋째, 거 북의 껍질과 지방의 다른 특산물의 납부, 넷째, 기장과 기타 다른 곡 물로 된 세금의 납부, 다섯째, 왕의 토지 경작을 위한 부역의 제공. 호후선이 사용한 갑골문은 너무 단편적이고 애매하여 그가 주장하 는 바와 같이 단정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아마 주시대에 봉건적인 구조로 발달하게 된 것과 대단히 유사한 종 속적인 관계가 이미 상왕조 시대 동안 존속하였을 것이라는 가설에는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들의 지식 수준으로 이 이상 더 나아가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닐 것이다 .4)

4) 상이 봉건제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많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주장을 하면서 상시대 훨씬 이후에 만들어전 전동적 인 설명을 단순히 따르 고 있다. 그러므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호후선보다도 약 8 년 전에 저술 하고, 근본적으로 갇은 갑골문에 의존한 크릴 H.G . Creel 은 봉건제가 상시 대에까지 거슬러 울라간다는 데 강한 의문을 제시하였다. 그가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뒤에 주의 봉건 계급 제도에서 나타나는 칭호가 상의 원전에도 단순히 나타난다고 해서, 이러한 호칭들이 상시대에도 주의 시대와 같은 의 미를 가졌다는 것을 임중할 수는 없다 . 그의 Bir t h of Chin a (New York, 1937), pp. 135-13 礎 참조.

주의 봉건제의 기원과 단계 상의 수도는 황하의 약간 북쪽인 하남성 북부, 죽 오늘날의 경한선 (北京, 漢口 )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서쪽으로 약 300 마일 떨어전, 오 늘날의 위하(iiiiJ) 유역에 있는 서안시(西安市) 근처에서 주나라 사 람들은 상문화의 주변에서 정치적으로 강성하게 되었다. 그들의 초기 역사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 당시에 문화적으로 상보

다 훨씬 뒤떨어졌으며, 상의 글자와 발달된 청동 제조 기술은 상을 정복하였을 때 아니면 바로 그 직전에 획득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역 시 두 나라 사이에 문화적 차이도 있었던 것 같다. 현재 이용할 수 있는 자료의 부족 때문에, 이러한 문화적 차이가 명확하게 인종적 차이를 단정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여전 히 의심스럽다· 크릴과 라티모어 Latt im ore 같은 학자들은 그렇지 않 다고 생각한다. 이들 학자들에 의하면, 주와 상 두 나라 모두 신석기 시대에 북중국의 단일 인종에서 유래하였으며, 이 두 나라 문화의 상 당 부분이 공통된 조상들로부터 유래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상을 정 복할 당시의 주는 침입해 온 완전히 이질 집단이라는- 의미에서 이민 족이 아니라, 지방적이고 문화적으로 약간 뒤떨어전 상의 사촌이라는 의미에서 이민족이다 .5) 그러나 에버하르트는 아주嗣 강력하게 이 점에 반대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들이 현재 알고 있는 한 주 는 본래 터키족이었다〉 6) 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래의 4 절에서 다시 취 급할 이 논제는 에버하르트의 주의 봉건제에 대한 전체 이론의 중심 부분이다. 주가 위하 계곡에서 점진적으로 정치적인 통합을 이룬 후, 기원전 12 세기 또는 11 세기에 마침내 그들의 동방 원정을 감행하였을 때, 그 들은 상을 전복시키는 데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의 영역의 주변 에 놓여 있는 상당한 지역을 차지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그러고 나서 이러한 새로운 광범위한 지역을 직접 지배하는 데에 따른 어려움 때 문에, 주의 정복자들은 서쪽에 있는 그들의 원거주지로 돌아가고, 그 들은 이 이후부터 단지 왕령지(王畿)라고 알려진 제한된 지역만 직접 지배하였다. 그들이 새로 획득한 동방의 영토 중에서 일부는 주의 여 5) Creel, 위의 책, p. 221 ; Owen Latt im ore, Inner Asia n Fronti er s of Chin a , 2nd edn.(New York, 1951 ), pp. 307-3 08. 6) Wolfr am Eberhard, Hi st o r y of Chin a , E. W. Dick es(tr a ns.} ( Berkeley, 1950), p. 25.

러 지도지들과 그 정복에서 그들을 도왔던 동맹자에게 분할하였다. 그러나 상당 부분은 주의 정복 과정에서 주에 의해 정복되었거나 혹 은 주에게 자발적으로 항복을 한 토착 씨족장들이 계속적으로 소유하 도록 되어 있었다• 실은, 상왕실의 후예들까지도 제거되지 않았고, 규 모가 축소된 상을 계속 통치하도록 허용되었다. 이리하여, 일단의 조그마한 나라들, 즉 제후국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우리가 자세한 역사적 기록을 가지기 시작한 때인 기원전 8 세기에는 적어도 100 개의 제후국이 존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각 제후국들에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수도가 있었으며 주변에는 그들의 생활 기반이 되 는 경작지가 있었다. 주왕조 초기에 대부분의 이러한 제후국들은 산, 늪지와 경작되지 않았던 〈 누구도 소유하지 않은 땅(이 땅은 누구도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는 야만족들만이 거주하고 있었다) 〉 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러한 제후국의 지배자들과 주나라 그리고 토지를 보유하고 있는 그들 자신의 예속인들과의 관계에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관계에 적용 되는 봉건적이라는 용어가 적절한 것같이 보인다. 이 책의 관점에서 본다면, 주의 봉건제가 주의 정복과 동시에 완전히 발달한 제도로서 시작되었고, 기원전 221 년에 진제국의 출현으로 종말을 고했다는 통 설은 그 정당성이 희박하다. 이 통설의 첫 부분에 대한 반대는 다음과 같다. 죽 이 책에서 정의 한 대로라면, 봉건제는 한편으로는 토지를 가진 귀족들의 집단과 다 론 한편으로는 지배자 가문 사이의 종속적인 유대 관계의 존재 그 이 상을 뜻하나, 진정한 봉건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러한 대토지를 가 전 귀족들이 그들보다 낮은 위치에 있고 보다 지방적인 귀족들과 하 향적인 계급 구조로 연결되는 유사한 유대 관계 또한 포함되어야 한 다. 그리하여 이상적으로 전 인구가 위임받은 권력과 의무의 복잡한 피라미드 구조 속에 사실상 통합되어야 한다.

얼핏 보아도, 그러한 정교한 구조가 주가 정복을 할 당시에 완전히 발달한 형태로 발전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만약 주가 그 당시에 기존의 상의 제도를 이어받아 유지시키지 않았다면,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정연한 제도의 발달은 불가능했던 것 같다. 기존의 자료로 는 어떻게, 언제 이러한 발전 과정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정복 후 몇 세기 뒤에 우리들에게 알려진 주의 봉건제 는 점진적인 발전의 결과였다라는 가정이 더 타당할 것이다. 상당히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제도가 나타나기까지는 1 세기 또는 2 세기가 요 구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당시에 이미 주왕실은 정치적으로 쇠약해진 칭후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마 정복 직후에 그러한 방향으로의 발전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다음에 제시되는 두 자료에는, 그러한 발전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는 그들이 후에 사용한 고정된 계급 서열과는 달리 ,7) 주왕조의 초기에는 귀족의 호칭 방식이 엄격하게 규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다른 하나는, 주왕조의 초기에는 제후국의 지배자와 주왕의 관계가 제후국 내에서의 제후와 토지 보유 자의 관계와는 성격상 다르다는 마스페로 Mas p ero 의 이론이다(아래의 주 12) 를 참조). 그러나 마스페로가 주장하듯이, 후기에는 토지 보유 자들이 점점 국가 귀족의 계급 제도에 동화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 러한 차이는 사라지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만약 그러한 경향이 실제 일어났다면(불행하게도 그 증거는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한 현 상은 원봉건 단계 p ro t o- fe udal 에서 완전히 발달한 봉건제로의 이행을 암시해 줄 것이다.

7) 위의 p .50 를 참조. 여기서 스트레이어는 봉건 유럽에서 동일한 현상이 나 타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행을 추적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이 절에서 우 리는 기원전 약 7세 기 또는 @l 기까지 우리들에게 알려진 봉건제의

전반적인 모습을 설명하는 데 만족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일어난 변화는 보다 확실하게 개괄될 수 있다. 그 무렵 주는 아주 약 해져서 봉건적이라는 단어를 주나라와 그 이전의 제후국과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 사용할 수 있울지는 의문이다. 어떤 면에서 살펴보아도 이러한 제후국들은 완전히 독립적인 국가가 되어 있었으며, 제후국들 중의 하나인 진이 경쟁국들을 하나하나 병합하여 기원전 221 년에 새 로운 형태의 제국을 수립할 때까지 이 제후국들은 독립된 국가로 남 아있었다. 그러나 개개의 제후국 자체 내의 봉건 제도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제후국이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기원 전 약 g 11 기경에 시작된, 일련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의 영향 때문에 구봉건적 질서가 점전적으로 변화되고 마침내는 와해되지 않 을 수 없었댜 특히 진의 경우에는 진 제국이 수립되기 이전에 이미 봉건제가 소멸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위에서 분석한 관점에서 본다면, 전이 기원전 221 년에 봉 건제를 붕괴시켰다는 전통적인 설명은 - 단지 부분적으로만 옳다. 실제 로 진이 하였던 것은 지방화한 봉건제의 잔재를 붕괴시키고 중앙 집 권화된 제국의 관료 형태를 도입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 정은 특히 전에서는, 시기적으로 좀더 빨리 시작되었다. 제 3 절에서, 우리들은 이러한 모든 중요한 단계로까지의 변화는 물론 다음 한 왕 조하에서 일어난 보다 강화되는 한 제국의 통합 과정을 보다 상세하 게 연구해 보고자한다. 정치 구조 주의 지배자들은(상나라의 지배자들과 같이) 왕 8) 이라는 칭호를 가 8) 고대의 그립 문자는 발을 땅에 단단히 딛고서 양팔을 뻗어서 똑바로 서 있 는 사람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그는 모든 침입자에 대항하여 땅을 확고하게

지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 칭호는 주왕들이 가지는 특권이지만 초 기에는 왕실 이외에서도 사용한 경우가 발견된다고 크릴은 (B i r t h of Chin a , pp. 343-344) 주장한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이 관행은 주왕조의 후기 에는 거의 보편화되었다.

졌다. 그둘의 봉신들은 집단적으로 제후(諸候), 즉 영주로 9)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개개인의 영주는 공(公), 후 (1 侯, 위에서 언급된 것과 똑같은 후), 백(伯), 자(子), 남(男)이라는 5 개의 구체적 인 칭호 중의 하나를 가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칭호들은 서열상 공작이 제일 높고 남작이 제일 낮은 고정된 계급 서열제로 명 확하게 발전되었다. 이 때문에 서양의 학자들이 이들을 각기 공작 duke, 후작 mar q u i s, 백작 earl, 자작 v i scoun t, 남작 baron 으로 쉽게 번역 할 수 있었댜 주나라 말기불 연구하는 학자들은 영지의 크기에(이들 학자들은 그들 영지의 크기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법을 가졌다) 따라 구분하는 계급 서열제와 이들 칭호가 가지는 지위를 동일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후기에 그리고 이상적으로 도식화된 것이다• 주나라 초기에는 위에서 언급된 5 개의 칭호가 철대적인 계급 서열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많이 있다 .10)

9) 상시대에 하나의 칭호로서 이미 사용되었던 똑같은 후(候). 10) 호후선에 의하면(위의 책, pp. 32ff .), 이 칭호들은 개개의 칭호에 할당된 기 능은 분명하지 않지만 상의 갑골문에 나타난다고 한다. 그에 의해 해석된 것처럼, 공은 원래 가장(家長), 죽 가족의 장을 의미하고, 후의 그립 문자는 과녁을 관통한 화살을 나타내는데 그 단어는 분명히 군사적인 칭호로서 사 용되었으며, 백은 연장자를 뜻하며, 자는 아들, 죽 왕의 아들 또는 아들들을· 의미하고, 남은 남자를 뜻한다 .

귀족들이 하사받은 이러한 영토는 국(國)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오 늘날에도 여전히 국가 또는 제후국을 의미한다. 정실(情 實 ) 또는 음 모 때문에 장자 상속의 원칙이 무너지는 경우도 많이 있었지만, 이러 한 제후국의 지배권은 보통 장자 상속제였다. 부용(附庸, fu-yu n g)이 라고 알려진 보다 작은 봉토도 있었는데, 이 봉토의 지배자는 주의 왕을 직접 알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예속된 이웃의

특정한 제후국에게 봉사하여야 했다. 귀족들과 그들의 영주인 주왕실과의 관계에 관해서 우리는 산재해 있는 자료에서(이중 어떤 것은 후대에 속하기는 하지만) 지식을 얻을 수밖에 없다. 귀족들은 주의 조상을 모시는 사원에서 거행되는 서임 의식에 의해서 그들 봉토의 점유권p ossess i on 을 확인받았다. 거기에서 새로운 봉신은 왕으로부터 그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것을 충고받 은 후에, 왕 앞에 무릎을 끓고 비취로 된 홀(勿)과 그의 봉지 수여에 대한 내용울 기록한 문서를 받았다. 이러한 의식에서 청동제 그릇, 포 (布), 무기, 전차 등과 같은 값진 선물이 가끔 하사되었다. 주왕조의 초기에는, 죽은 귀족의 아들이 봉토의 점유자로서 아버지를 계승할 때마다 이 의식은 분명히 실시되었다.!” 이 의식에는 토지신과 연관된 아주 중요한 측면이 있는데 이 절의 뒷부분에서 이 면을 다루겠다. 그들의 봉토에 대한 대가로, 귀족들은 왕을 직접 알현하기 위하여 주의 조정으로 가 그들의 충성을 표시하였다(그러나 전통적으로 생각 하는 것만큼 자주 또는 정규적으로 조정에 간 것은 아니다). 후대의 의 식에 관한 문헌은 왕국의 전역에서 온 귀족들의 집단 알현에 대해 언 급하고 있지만, 실제 그러한 규모로 알현식이 이루어졌는지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우리들은 귀족들이 그들이 다스리고 있는 지방의 비 싸고 쉽게 운반할 수 있는 지방의 특산물을 공물로 바쳤다는 것을 알 고 있다. 반란이 일어났을 때와 이민족이 침입하였을 때, 그들은 왕을 돕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하여야 했다. 때때로 그들에게는 왕도(王都) 의 성벽을 수리하기 위해 인력과 물자를 제공하는 것과 같은 특별 봉 사가 요구되었다. 왕은 두 귀족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는 재판관으로 서 역할을 할 권리(만약 이것이 항상 왕의 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11 ) 청동제에 씌어진 기록과 다른 기록 자료에서 나온 내용은 의식에 대한 齊 思和의 Investi tur e Ceremony of the Cho Peri od , 《 燕京學報 》 , No. 32( 北 京, 1947. 6), 197-22 6-i끌 참조.

하더라도) 또는 굴복을 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군대를 파견하여 복 종시킬 권리를가졌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제후국 내에서 귀족들은 명실상부하게 독립적 인 권한울 가졌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관리를 임명하고, 세금을 부과 하고, 군대를 유지하고, 재판권을 행사하였는데, 이는 분명히 규정된 어떤 법에 의해서라기 보디는- 전통적이고 개인적인 의견에 기반을 두 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제후국의 대부분은 읍(邑)이라는 영지의 형태로 더욱 세분되었고, 귀족들은 이 영지를 그들의 친척, 관리와 궁 신(宮臣)에게 나누어주었다. 주왕실의 왕령지 내에 있는 토지도 마찬 가지였다. 이러한 읍의 크기는 그 읍에 거주하고 있는 농민 기구의 수에 의해 측정되었다. 예를 들면, 『 역경 (易 經 ) 』 의 첫 부분은 300 가구 를 가진 한 읍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문맥에서 보면 이 단어가 도시를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프랑스어의 ville , vill ag e 등이 유래한 라틴어의 v ill a 와 유사한 어의적인 변화를 겪 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한 개인이 때로는 그가 속해 있는 제후국 내의 여러 지역에 분산되 어 있는 한 개 이상의 읍을- 보유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가끔 그는 제 후국의 수도에 살았으며, 그의 영지는 재(宰)라고 알려진 그의 대리 인에게 맡겨졌다. 이러한 재는 종종 아주 영향력이 있는 사람으로 그 둘주인의 분신이었다. 제후들이 그의 신하에게 주었던 토지를 다시 회수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양도한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러한 영지는 그 영지를 받은 자의 세습 재산이 되었고, 의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그 들에 의하여 관리되었다. 이것은 여러 제후국에서 어떤 가문이 관직 을 세습적으로 차지하고 그중의 몇몇은 그들이 봉사하는 제후보다도 더 세력이 강해지는 사실과 비견될 수 있다.

이 제후국 내에서의 토지의 재분배는 봉토를 주왕실이 제후들에게 할당하는 과정의 연장이라고 일반적으로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마스 페로는 이 두 제도는 원래 분명히 구별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왕이 봉토를 귀족들에게 양도하는 서임식은 귀족이 자신의 신하에게 영지를 양도할 때는 거행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 므로 귀족 자신들의 신하들은 엄밀하게 말한다면 봉건 계급 체제에 속하지 않고, 그들의 지위는 봉신이 아니라 토지 소유자의 지위이다. 한 예로 마스페로는 제후가 한 관리의 토지를 몰수하면, 그 관리는 그 제후에게 아무런 봉사의 의무가 없고, 새로운 영지를 양도받을 수 있는 다론 제후를 자유로이 찾아 봉사할 수 있다는 접을 들고 있다 .12) 그러나 이러한 구분이 원래 존재하였다 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구분은 사실상 없어지게 되었다. 마스페로 자신도 고위 관리들이 그들 자신을 실제의 봉신으로 전환시키려는 끊임없는 경향이 있었다 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게다가 마스페로는 한 개인이 근엄한 서약을 함으로써 자신을 그의 후원자에게 기탁을 하고, 그 이후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충성심을 갖고 봉사하는, 불행하게도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는 한 제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이 관행을 서양의 탁 신 commemda ti on 에 비유하고 있다. 〈개개의 대제후들은 이 혼란의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그 자신의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13) 우리는 위에서 이 이론이(불행하게도 확실하게 증명하기는 어렵다) 주 나라 봉건제 초기의 발전을 추적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중요성을 이 미 지적한 바 있다 • 많은 학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영토는 실제 주나라 왕에게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하나의 증거로서, 그들은 유명한 주나라 초의 12) Henri Maspe ro, Le regi m e feo dal et pro p riet e fon cie r e dans la Chin e anti qu e, Melange s pos th u mes sur /es relig ion s et /'his t o i r e de la Ch ine , ill. Et ud es his t o r iq u es(Paris, 1950), 133, 143- 1 44. 13) Le reg im e feo dal, p. 144.

시구( 『 시경(詩 經 ) 』 제 205 편)를 인용하고 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천하의 모든 곳이 왕토(王土)가 아닌 곳이 없고, 모든 땅끝까지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은 없다 . 그러나 여기에서 마스페로는 다시 의견을 달리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이 시구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주권의 개념 이지 어떤 명확한 재산권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 의해 요약 된 것처럼, 고대 중국의 철학적 이론은 토지는 양도될 수 없는 어느 한 개인의 재산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 한다면, 엄격한 계급 사회에서는 그의 지위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 지만, 모든 사람들은 토지롤 이용할 권리를 가진다. 그러므로 군주가 행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토지의 분배를 결정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이 권리를 규제하는 것이다모 귀족 계급, 주나라 문집(文集) 에서 상류 계층을 흔히 지칭하기 위한 칭호는 지배자의 아들들이라는 뜻을 가진 군자(君子)이다. 원래 이 칭호는 출생이 좋다는 것을 지칭 한 것이나, 유교의 영향하에 영어의 gen tl em an, 죽 신사와 아주 유사 하게 도덕적인 색채를 얻게 되었다. 군자 중의 최하위를 차지하는 계 충은 사(士) 인데, 크릴은 무엇보다도 사를 젊은이 a you ng man 또는 강건한 자 s t alwar t라는 의미로 풀이하며, 그는 미국 인디언의 전사들 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용감한 자 brave 라는 단어와 비교하고 있다. 그는 모든 사가 전사는 아니었지만, 하나의 계급으로서 그들은 대체로 중세 유럽의 기사와 비교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5) 14)p oMs ta hsu pme re os,, ilLl,e s2 0te4r- m2e0 s5 . d esig na nt la pro p ri e t e fon ci er e en Ch ine , Melange s

그둘이 귀족의 칭호를 갖거나 또는 갖지 않거나 간에, 이러한 모든 귀족은 족보를 가지며, 농업이나 또는 장인의 일을 전혀 하지 않고, 상업에 종사하지 않으며, 정교한 예(의식, 전통적인 정신, 관습적인 도 덕성 등으로 해석됨)로 알려진 불문률의 의식과 예의범절에 따라(초 기에는 문자화되지 않았음) 생활하였다는- 점에서 여타 계층의 사람들 과 구별된다. 어떤 다른 법전을 대신한 이 예는 인간 생활의 주요 부 분을 디루고 있으며, 예를 배우는 데는 많은 시간이 요구된다. 군사적 인 측면에서의 예는 어떤 면에서 유럽의 기사도를 연상시킨다. 만약 역사적 기록을 믿을 수 있다면 전쟁은 전리품이나 영토를 얻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영예를 위해 수행되었다• 적에 대해서는 관대해야 하 며, 적을 궁지에까지 몰고가지 말아야 하며, 정당하지 않은 책략에 의 존하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면 기원전 638 년에 『좌전(左傳) 』 에는 다 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송양공(襄公, duke of Sun g)은 그가 적을 공 격하기 전에 그의 적이 강을 건너도록 허용하였기 때문에 크게 패하 였다. 그의 행동이 심한 비난을 받자 그는 〈 우월자는 16) 적에게 두번 째의 상처를 입히지 않으며, 백발이 된 지는· 어느 누구도 포로로 잡 지 않는다 〉 고 말하였다. 〈 옛사람들은 전쟁터에 나아갔을 때, 적이 좁 은 골짜기에 있을 때는 공격을 하지 않았다. 〉 17) 주왕조의 대부분의 시기 동안 전쟁이 만연하였다. 귀족들은 가죽으 로 된 갑옷을 입고, 4 필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전쟁을 하였는데, 각 전차에는 한 명의 마부, 한 명의 창수(t倉手), 강한 탄력을 가전 중 국의 활로 무장한 궁수(弓手)가 타고 있었다. 평민에서 칭발한 전통 적으로 120 명으로 구성된 보병 부대가 각 전차를 따랐으며, 보병 부 대를 가전 72 개의 전차 부대는 일급 국가의 군대가 되는 것으로 생각 15 ) Bir th of Chin a , pp. 278-2 79. 16) 군자, 죽 위에서 언급한 용어인 지배자의 아들들 . 17) 주나라 초기의 군사 행동 강령에 대한 생생한 설명으로는 Marcel Granet, Chin e se Civ i li za ti on (London and New York, 1930), pp. 266-2 81 롤 참조.

되었다. 전쟁을 하지 않을 때 주의 귀족들은 유럽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연 회, 사냥과 궁술 대회와 같은 경기를 하면서 즐겼다. 그러나 그들은 유럽의 귀족보다는 평화를 유지하는 데 훨씬더 관심을 가전 것 같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많은 교육을 받았고 그들은 의교적인 모임 또는 궁중 회의에서 『시경』과 같은 고전을 적절히 인용하면서 그들의 주장 울 뒷받침하였다. 주나라와 중세 유럽과의 현저한 차이는 주나라는 서유럽과 같은 보 편적인 교회와 전문적인 사제가 없다는 점이다. 분명히 종교 의식, 점 복(占卜) 등과 같은 일에 종사하는 전문적인 사람이 있었으나, 그들 의 역할은 종교 의식의 주관자로서보다는 보조자로서의 역할을 하였 으며, 이 의식에서 귀족들은 스스로 사제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그렇 게 된 중요한 이유는 이 의식은 의심할 바 없이 대부분이 조상 숭배 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각 귀족의 조상은 그 귀족 가문의 구성 원들에게만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조상 숭배는 필연 적으로 통합적이라기보다는 개별적으로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 므로 이 조상 숭배는 조직적인 사제를 가전 보편적인 교회로 발전할 수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상 숭배는 귀족 계급이 그들의 권능과 권 위를 끌어내는 가장 중요한 정신적인 요소였다. 각각의 중요한 가문 들은 그 가문의 정교한 족보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족보를 통하여 그 가문이 지방적으로 그리고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던 고대 영웅들의 후손들이라는 것이 추적되었다. 후손들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정기적 으로 제물을 바쳤으며, 중요한 일이 일어난 경우에는 항상 이 조상들 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 조상들은 그들의 가문을 도와줄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그 가문에 속하지 않은 자가 그 가문의 분노를 일으켰을 때, 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강력한 영(靈)이었다. 이것이 주

가 상을 정복하였을 때, 상왕의 후예로 하여금 그들의 조상에게 제물 을 바치지 못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에 대한 보복을 초래하기보다는 조 그마한 봉건국의 우두머리로서 계속 지배할 수 있도록 허용한 이유 중의 하나임이 틀림없다. 고대 중국의 경우처럼 조상 의식이 강한 사회에서 주요 가문들 사 이의 유대 관계가 아주 중요하였다는 것은 명백하다. 사실상 정치적 인 제휴는 추상적인 봉신의 주군에 대한 의무로서, 이러한 유대 관계 에 의하여 더 빈번하게 결정되는 것이 분명하다. 차라리 봉신과 주군 과의 관계는 가문과의 관계에 상당한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 이 더 옳을 것이다. 제사화의 말을 인용하면, 〈 제국 전체가 하나의 대 가족 제도로 전환되었다 〉 .18) 가문을 아주 중요시하여서 후기 유교 사 상에서는 국가 그 자체를 단순히 가족 제도의 연장이라고 생각하였 다. 주나라 초기에서조차, 군주를 보통 〈 백성의 아버지로〉 칭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조상 숭배 의에, 또 다른 종교 의식이 정치 제도에 정신적으로 중 요한 역할을 하였다. 왕과 귀족들에게서 토지에 대한 지배권이 상칭 적으로 표시되는 것은 그들이 후토(后土), 죽 토지신에게 드리는 제 사이다. 사실상 그러한 신들이 많이 있었다. 죽 보다 작은 신들은 지 방의 촌락을 주관하고, 보다 더 큰 신들은 각 봉토를 주관하고, 최고 의 신은(주나라 왕만이 제사를 드리는) 나라 전체를 주관한다. 각 신 둘은 제각기 욱의에 흙으로 만든 사각형으로 된 제단을 갖고 있다 . 고대에는(그 이후에는 그렇지 않다) 이 제단에 한 그루 또는 여러 그 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이 숭배는 거의 확실하게 풍년을 기원하 는 데서 비롯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 숭배의 정치적인 측면이다. 새 18 ) 齋思和, A Comp ar i so n betw e en Ch ine se and Europe an Feudal Insti tu- tion s, 《 燕京學報 》 , N( 19 48), 11-12.

로운 봉토가 만들어졌을 때, 새로 서임되는 귀족은 왕으로부터 전 국 가를 주관하는 토지신의 제단에서 가져온 한 중의 흙을 받으며, 이 흙은 새로이 서임된 귀족이 그 자신의 봉토에 세운 지방 제단의 토대 가 된다. 우리는 이 절의 처음에서 이러한 의식을 지칭하기 위하여 상용되는 단어인 봉의 의미를(둔덕, 둔덕을 만드는 것 등) 살펴보았 다. 그 봉토의 토지신은 그 귀족 자신의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제사를 드리는 가장 강력한 신이었고, 그가 봉토를 가지고 있는 한, 이러한 제사는 지속되었다• 만약 그 봉토가 병합된다면, 그 봉토의 제 단에 지붕을 씌워, 그 신의 힘을 붕괴시킨 다음 새 지배자는 그 자신 의 새로운 제단을 세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마스페로 는, 비록 소영지 내에 있는 농민 사회가 그 지방의 토지신을 가졌다 고 할지라도 이러한 서임 의식은 봉토의 보유자가 그의 예속인에게 나누어주는 소영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1 9 )

19) E. Chavannes 의 Le T'ai Chan(Pari s, 1910) 의 부록에 있는 논문 Le Dieu du Sol dans la Chin e an tiq ue 은 아직도 이러한 숭배에 대한 고전적인 연 구로 남아 있다. 그러나 독자는 이러한 숭배와 연관하여 사용된 다섯 개의 색깔에 대해 언급한 접을 유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5 색, 다섯 개의 방향, 다 섯 가지의 요소 등을 중십으로 한 중국인의 자연적인 사색은 기원전 4 또는 때]기까지는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주의 왕들은 특별하게 그들의 최고의 신(神)인 천(天), 죽 하늘과 연관된 종교 의식에 의해 전 국토의 지배권을 보증받았다. 천의 옛 그림 문자는 분명하게 인간의 형상을 나타낸다. 그 문자는 왕을 상칭하는 문자에서 사람이 서 있는 땅을 나타내는 아래의 수평 선이 없다는 점을 제의하고는 왕을 상칭하는 옛 그립 문자와 대단히 유사하다. 그러나 이미 주왕조 초기에 이 글자는 종교적으로 최고의 힘을 가전 신을 가르키기 위하여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비종교적 으로 하늘을 가르키기 위한 단어로도 사용되었다. 크릴은 주왕실의 조상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보아 집단적으로 지칭하는 데서 비롯하였

으며, 그후에는 그 조상들이 살고 있는 영역을 위한 명칭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서양의 단어 천국과 유사한 비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개념 으로 변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 20) 이 이론은 왜 주왕들 이의에 어느 누구도 천자, 죽 하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가질 수 없고, 모든 사람 들이 하늘에 호소를 할 수 있지만, 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주 왕의 특권이었는가를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분명히 천은 상이 아니라 주의 신이라는 것과 주가 천명(天命)이라 고 알려진 정 치 이론의 창시자러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크릴은 주가 상을 전복시킨 것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이 이론이 주에 의해 정 치적인 선전물로 이용되었다고 전정으로 믿고 있다. 주나라는 상의 도덕적 타락 때문에 상을 대신하였고, 그리하여 천이 그들에게 천명 울 주어 통치할 수 있는 신권을 부여하였다고 주나라는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이론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천명은 반드시 영 원하지 않는다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 천명을 가진 자 가 하시라도 무능하다는 것이 입증이 되면, 천명은 천에 의해 다른 지배 가문으로 이전될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후에 통일 제 국의 사인(士人) 관료들에 의해 보다 상세하게 다듬어지면서, 이 사 상은 지배자를 비판하고, 그리하여 그들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중요 한 도구가 되었다. 천명은 중국 역사에서 많은 왕조의 변천을 합리화 하기 하기 위하여 계속 사용되었으며, 문자 그대로 천명을 바꾼다는 뜻인 혁명이라는 말 속에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평민 우리가 기술하고 있는 봉건제의 경제적 기반은 민(民) 혹은 서인 (庶人) 또는 중인(衆人)으로 알려진, 귀족이 아닌 대다수의 평민이다. 귀족들과는 달리 민은 성(姓) 또는 족보가 없고, 조상 숭배를 하지 20) Bir th of Chin a , pp. 342-3 44.

않으며, 지배 계급의 생활을 지배하였던 예의 복잡한 규칙에 대한 지 식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평민이 귀족의 지위 에 오르거나 또는 귀족이 평민의 계급으로 전락하는 사례가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볼 때 평민과 귀족들 사이에는 절대적인 단절이 있었다 기보다는 일련의 단계적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귀족에 속하지 않은 평민 계층은 다양하다. 어떤 이는 지배 계급에 봉사하는 장인 혹은 하인이었다. 이 두 집단에는 분명히 전쟁 포로나 또는 범죄로 인해 노예가 된 노예 계층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숫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중요했던 것 같지는 않다. 상인도 역시 존재하였으며, 어떤 상인들은 상당한 부를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주조된 화폐는 아직 없었으므로, 교역은 주로 물물 교환의 형식이었다. 이 모든 집단 은 성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살았거나 혹은 농촌의 토지 소유자의 저 랙에 예속되어 있었다. 경제적으로 그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 였고, 주나라 초기에는 중세 유럽에 비견될 만한 장인들의 조합이나 또는 도시 부르주아지의 발달은 없었다. 전체 경제에 주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대다수의 농민이었다. 그들 은 그들이 경작하는 토지에 대한 공식적인 권리를 갖지 못하였고, 그 토지에 농노처럼 속박되어 있었으며, 그 토지에 대한 지배권이 바뀔 때마다 한 영주에서 다른 영주로 양도되었다. 유럽에서와 같이 자유 토지 보유자의 흔적은 전혀 없었던 것같이 보인다. 농노제가 영주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들의 삶을 지배하는 공인된 영주의 권한에서 유래 하였는지 아니면 그 자신의 영주로부터 도망친 절박한 상태에 있던 농민은 누구든지 다론 영주로부터 토지를 획득하는 것이 아주 어려웠 다는 사실에서 유래하였지는 불투명하다. 마스페로는 두번째의 견해 를 따르는 것 같다 .21) 여하간에, 우리는 농민들은 평화시에 그들의 곡 물의 일정한 양을 영주에게 바쳐야 하며(후기의 기록에는 아마 실제 21 ) Le reg ime feo dal, p. 126.

의 양은 더 많았지만 약 1/10 이라고 함), 성이나 도로의 건설, 관개, 치수 사업 및 홍수 통제 사업, 다른 공공 건설 사업에 징발되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전쟁시에는 귀족들의 전차를 따르는 보병에 충당되었 다. 주나라 초의 토지 보유 제도의 정확한 성격에 이론이 제기되었으 나 그 성격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은 거의 없다• 우리가 갖고 있는 조그마한 지식둘은 거의가 후기 시대의 것이고, 단편적이고, 애매모호 하기 때문에 그 성격을 규정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정전법을 중심으로 많은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정전법에 대한 최초의 비 교적 자세한 기록은 맹자(기원전 372?-279? )때 바로소 시작된다. 맹 자에 의하면, 정(井)은 9 개의 토지 구획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8 개는 사전(私田)이며, 각 사전은 한 농가에 의해 점유되었으며, 공전 죽 영 주의 토지 (公田 : 공공 또는 영주로 번역될 수 있음)로 알려진 9 번째의 토지를 둘러싸고 있다• 개개의 농가에 의해 경작된 사전의 수확물은 개인적인 사용을 목적으로 각 농가가 보유하는 반면에, 여덟 가구에 의해 공동으로 경작되는 이 가운데에 있는 토지의 생산물은 영주에게 로 돌아간다. 전통적으로, 정전이라는 용어는 우물이라는 뜻인 정(井) 이라는 글자가 토지를 9 개의 구획으로 구분하는 모습과 유사하다는 점 에 근거하여 설명되었다. 그러나 9 개의 구획이 실제로 관개를 위해 사 용된 우물을 중심으로 배열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된 토지가, 맹자가 설명한 것처럼 산 술적으로 정확하게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되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다. 다른 한편으로, 현재의 많은 학자들은 맹자의 설명은 주나라 초 기의 모종의 실질적인 경제적, 정치적 단위를 염두에 두고 설명한 것 이며, 그것의 본질은 일부의 토지는 농민에 의해 그들 영주를 위해 경작되고, 일부는 농민 자신들을 위해서 개인적으로 경작되었다고 믿 고 있다. 제사화는 공공, 죽 영주의 토지를 유럽 장원의 영주 직영지 와 그리고 사전을 유럽의 농노 보유지와 비교하기까지 한다 .22)

여러 중국 학자들은 맹자와 여타의 자료에서 애매모호하게 언급된 고대의 여러 토지 제도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들을 제시하였다• 독창 적이기는 하지만, 이 이론들은 일반적으로 설득력이 없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리고 이 이론들을 여기서 다루는 것은 이 논문의 주제 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어서 논의로 한다 .23) 마스페로가 따르는 24 ) 가 장 그럴싸한 이론은 일정한 토지 제도가 발달하기 전의 고대의 농민 들은 잡초와 덤불을 불태워 새로운 경작지를 마련하면서 몇 년마다 한 번씩 이 경작지에서 저 경작지로 옮기는 공동 경작을 실시하였다 는 것이다. 이 이론은 초기의 문헌에 의하여 입증될 뿐 아니라, 인도 차이나 반도와 그의의 지역에서 최근에 발견되는 유사한 관행에 의해 입증되기도 한다. 그러나 보통 이러한 화전(火田) 방식에 의한 농업 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온 상의 갑골문에 나타나는 단어는 사 실상 들판을 불태우는 것은 농업을 준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사냥 을 준비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결정적으로 해석됨으로써 이 이론 은 설득력이 약해진다 .25) 22) 齊思和, ”孟子의 井田論,” 《 燕京學報 》 , No. 35( 北京, 1948. 10), 101-127, 특히 124- 1 26. 23) 그러나 徐中舒의 이론은 아래 4 철에서 간단하게 취급될 것이다• 이 이론과 다른 몇개의 이론에 대한 간단한 요약을 위 해서는 楊聯陸의 Note s on Dr. Swann's Food and Money in Ancie n t Chin a , Harvard Jo urnal of Asia t i c Stu die s , Vll( l95 0), 531-543 을 참조. 24) Le regi m e feo dal, pp. 124-1 26. 25) 胡厚宣 Yi n -ta i Fen-t' ien Shuo(On the Burnin g of Fie l ds durin g the Yi n - i . e., Shang -P eri od ) , Chia - k u-h sueh Shang -sh ih Lun-ts ' ung , I , Essay 4 를 참조.

3 주의 봉건제의 붕괴와 소멸 주왕실 세력의 쇠퇴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하였던 주의 봉건제는 자료의 부족 때문에, 분명히 존재하였던 많은 지역적, 시대적 차이에 대해서는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인 설명에 의하면, 이민족의 갑작스러운 침입으 로 주왕실이 서쪽에 있는 수도를 버리고 동쪽으로 약 200 마일 떨어전 오늘날의 낙양시 근처에 새로운 수도를 건립하였던 때인 기원전 771 년에 격변의 시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거기에서 주는 기원전 256 년 까지 존속하지만, 주나라의 계속적인 존속 여부의 문제가 이제는 아 무런 실질적인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에 그때까지 존속하는 데 성공 하였다. 주의 마지막 몇 세기 동안의 역사는 6, 7 개의 주요 제후 국가 둘(이 당시까지는 주의 지배권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다) 사이의 권 력 쟁탈전의 역사이었으며, 이 와중에서 주의 왕들은 전혀 중요한 역 할울 하지 못하였다• 그 초기 단계에서의 정치적 변화를 시사하는 것 은 『좌전』(기원전 722-481 년까지의 자세한 역사서)에 수백 명의 귀족 들의 이름이 언급되지만, 이들 중 단지 9 명만이 봉건 서임식을 거행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위에 언급된 9 개의 경우 문제의 9 명의 귀족 중 어느 누구도 실제로 주의 수도에 간 예가 없다. 그 반대로, 서임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매번 왕이 자신의 사자를- 각 귀족들의 제 후국에 파견하였다 .26) 같은 기간 동안에 보다 강력한 봉건 귀족들이 왕실의 각종 기능을 빼앗은 방식은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들 중의 한 사람이 군주의 보호 자 또는 참주(그리스적인 의미에서)의 뜻을 지닌 패(覇)라는 새로운 칭호를 가졌을 때인 기원전 679 년에 첫 단계가 시작되었다. 이 칭호 는 그 이후 4 개의 다론 제후국의 지배자가 계속적으로 사용한 다음에 26) 齊思和, Investit ur e Ceremoney of the Chou Perio d , pp. 224-2 26.

591 년에 최종적으로 소멸되었다. 이러한 패의 주도하에 주요 귀족들 의 회의가 소집되었고, 이 회의에서 주요 귀족들은· 근엄하게 어쩌면 냉소적으로 평화를 유지하고 주의 왕실을 도운다고 약속하는 조약에 서명하였다. 부분적으로는 어느 한 국가도 한 세대 이상 동안 그 칭 호를 보유할 만큼 세력이 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평화를 유지하려 는 노력은 실패하였다. 만약 그렇지가 않았다면, 일본의 쇼군 제도와 비교될 만한 제도가 발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약 6A1| 기경부터의 변화 봉건적인 잔재가 기원전 221 년에 진아 통일을 할 때까지 개별 국가 에 존재하기는 하였지만, 주의 후기는 봉건 질서의 해체를 가속화시 킨 광범위한 변화와 변혁의 시기로 특칭지어진다. 첫째, 기술적인 변화이다. 이것에는 철(기원전 513 년에 처음으로 언 급됨)의 출현과 개량된 농업 기술(보다 나은 쟁거와 비료, 관개 사업 과 치수 사업 등)의 출현이 포함된다. 인구의 성장은, 도시와 군대의 규모가 증대가 입증하듯이 하나의 중요한 결과였다. 주요한 제후국들 이 기원전 때)기와 3 세기에 주력하였던 축성(築城) 사업은 기술적인 진보와 공공사업에 대규모의 인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능력을 인상적 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북쪽의 국경선을 따라 길이가 수백 마일이나 되는 장성은 중국 전체를 초원 지방의 민족들과 분리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개개의 제후국들을 서로 분리하기 위해서 그 밖의 곳에서도 건립되었다. 둘째, 군사적 변화이다. 전국 시대(기원전 403 - 221) 라고 적절하게 이름 붙혀진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전쟁은 기사도적인 성격을 상실하 고 대규모 전투로 변하여, 영토 병합을 주된 목적으로 수천 명의 군 대가 결사적으로 싸웠다. 전쟁 기술은 정치적인 동맹, 의교적인 음모, 뇌물과 암살과 갇은 기술로 보강되었다. 그 결과 기원전 3 세기까지는

몇 개의 강대국을 제의한 모든 제후국이 역사의 장에서 사라지게 되 었다. 포위 공격을 하는 데 필요한 복잡한 기구와 성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공격하기 위한 다론 기술이 고안되었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어기 말에 북쪽과 서쪽에 있는 제후국들, 특히 진(기원전 771 년에 동 천하기 전의 주의 수도였던 곳을 중심으로 한)은 이웃의 유목 민족으 로부터 다루기 힘든 전차 대신에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 전법을 배웠다는 사실이다. 셋째, 경제적, 사회적 변화들이다. 하층 귀족들로부터(이들 중 대부 분은 끊임없는 전쟁 때문에 몰락하였는데)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은 정치가, 교육가와 사상가들의 새로운 계층이 성장하였는데 이들은 가 끔 여러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그들의 사상을 실현시킬 지배자를 찾았 다. 중국 철학의 황금 시기는 이들 사상가들에서 연유하며, 아중에서 공자(기원전 552/551-479) 가 그 최초의 예이다. 직업적인 전사와 〈자 객 〉 으로서 전문화된 다른 귀족들은 여러 제후국의 지배자에게 귀속되 어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또 다론 현상은 주조된 화폐에 기반을 둔 화폐 경제의 출현이다(화폐의 출현과 더불어 상인 계급이 성장함). 이러한 발달은 보통 기원전 5 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봉건제 해체의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은 농노제의 소멸로 그 철정을 이루게 되는 농민과 토지의 관계가 변화하고 있었다는 점이 다. 기원전 594, 590, 543 년과 438 년에 두 제후국 노(魯)와 정 (鄭)에 서 새로운 형태의 토지세와 징병 제도가 출현했다는 것은 아마 이러 한 변화를 암시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들은 상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 제도들은 국가 통치의 입장에서 농민들의 영주, 죽 지방의 토지 소유자들을 거치지 않고, 농민들로부터 직접 세 금을 거두려는 시도였다고 간주된다. 전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아주 철저하였다. 유명한 정치가 상앙(商

陝, 기원전 338) 이 적어도 전나라의 일부에서 구토지 보유 제도를 폐 지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매매할 권리를 주었다고 한다. 그는 그러 한 지역에서는 농노들이 이전에 그들의 영주에게 바치던 노역 대신에 현물세를 직접 국가에 내도록 하였다. 이러한 제도를 통하여 진은 다 른 국가의 사람들이 이주해 오도록 장려하는 데 성공하였다. 넷째, 제도의 변화들이다. 기원전 536, 513 년 그리고 501 년에 두 제 후국(정과 전(晋))에서 언급된 성문법의 등장과 더불어 우리는 새로 운 개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전통적인 관습 또는 예에 기반을 둔 의제화된 봉건 관계 대신에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복종하여야 하는 일반적인 법이 출현하였다. 법가(法家)들에 의해 개전된 이 새로운 개념은 진나라에서 최고로 발달하였고, 전이 최후의 승리를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복잡한 사회 구조의 발달을 암시하는 또 다른 현상은 행정의 전문 화 경향이다. 초기에는 동일인에 의해 가끔 수행된 문무의 기능이 구 분되게 되어, 문관직은 상(相)이 주도하고 무관직은 장군(將)이 주도 하는 문무의 계급 체제가 전국 시대에 편성됨에 따라 문무 관직이 구 분되었다. 세력이 좀더 강한 제후국에서는 지방 관리와 토지 소유자의 세력이 꾸준히 약화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전에서의 이러한 정치적 중앙 집 권화는 위에서 언급한 토지 개혁에 의해 입증된다. 진과 여타의 제후 국에서의 중앙 집권화 현상온 현(縣)과 군(郡)에 기반을 둔 새로운 행정 제도의 발달에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지역적 행정 단위는 타제 후국의 영토를 새로 병합한 지역 또는 북쪽에 있는 초원 민족과 경계 를 하고 있는 국가들의 군사 지역에서 비롯된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특히 전에서는 점차적으로 국가의 경계 지역이 아닌 지역에서까지 지 역 단위의 행정 제도가 발달하였다. 토지 소유자의 영지와 지역 단위 행정과의 차이점은 전자와는 달리 후자는 적어도 원칙상 세습적이 아

닌 국가가 임명한 관리를 통해서 중앙 정부에 의해 직접 지배된다는 점이다. 군은 상당히 늦게 나타나지만(위(魏)의 변경 국가에서 기원전 400 년경에 처음 나타나고 다시 기원전 361 년에 나타남), 현(군보다는 작다)은 일찍이 전에서 기원전 688 년과 68 7\1에 처음으로 언급되었 다. 군은 후에 성 (省, p rov i nce) 으로 바뀌 지만, 현은 오늘날까지 행 정 단위로남아 있다. 기원전 350 년에 전에 의해 시행된 또 다른 개혁은 영지나 세습적인 의미가 아니라 순전히 명예적인 의미를 가진 18 등급으로 된 새로운 귀족 계급 제도(爵制)이다. 이 등급은 출생에 의해서가 아니라 군사 적인 업적에 따라 혹은 후대에 가면 납속(納栗 : 기원전 243 년에 처음 으로 기록됨)에 의해 획득되었다. 다섯째, 보편적인 제국의 개념이다. 주나라 초의 행정 제도는, 실제 에 있어서는 적절한 것이 아니었음이 입증되었지만,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 이전에 중국에 존재하였던 어떤 정치 제도보다도 아마 더 정 치적인 보편성을 창출하려 시도하였다. 전쟁과 사회 불안이 심화되었 던 주나라의 마지막 2 세기 동안에 거의 모든 사상가둘의 꿈은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 주는 보편적인 제국을 다시 창조하는 것이었다. 이 꿈 은 예교주의자들이 주초와 주 이전의 제도와 관습에 대해서 상세하게 서술한 고도의 이상주의적인 문헌에서 나타난다. 정 치적으로, 이와 동일한 이상이 왕(王)과 제 (帝)라는 단어의 역사 에서 상칭적으로 나타난다. 기원전 370 년에 위(魏)의 새로운 지배자 가 왕이라는 칭호를 참칭하였다(지금까지는 거의 예의 없이 주나라 왕 만이 사용). 다른 제후국의 지배자들도 그의 예를 따랐다. 그러나 이 칭호는 더 이상 권력을 차지하려는 자들의 열망을 표현하기에는 불충 분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운 제(帝)라는 칭호를 찾아내었으며, 이 단어 는 종교적, 역사적으로 많은 함축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제(또는 상제)는 상(商)왕조 시대의 가장 강력한 신의 이름이었다. 전국 시대

까지는 하(夏)왕조 시대 이전의 황금 시대를 지배하였다고 생각되는 어떤 전설적인 영웅들의 이름에 붙여지기도 하였다 . 마지막으로 주나 라 말기 기원전 288, 286, 25A 빈에는 몇몇 제후국의 지배자들이 정치 적인 칭호로서 제를 채택하려고 시도하였다. 경쟁국들의 경계심 때문 에 이러한 노력들은 실패하였지만, 진제국의 건국자는 기원전 221 년 에 제를 자신의 칭호로 삼았고, 그 이후 제라는- 단어는 중국에서 황 제라는 뜻을 나타내는 단어로 영구히 존속하게 되었다. 진과 한 제국하의 관료 지배의 확립 기원전 221 년에 마지막으로 남은 제후국을 정복한 진의 왕은 스스 로 시황제, 즉 최초의 황제라는 칭호를 취했다. 『 사기(史記) 』 (역사 기 록서, 이 시대의 공식적인 역사)에 의하면, 그와 동시에 〈 그는 봉(封) 이 없는 진제국을 만들고 제국 내의 약 십이만 명 정도의 부유하고 세력을 가전 가문들을 〉 진의 수도에 이동시켜 중앙 정부의 감시하에 두었다. 그들의 무기는 몰수되어 종(鐘)이나 금인(金人)으로 주조되 었다. 몇몇의 귀족 칭호들은 폐지되지 않았지만, 이 칭호들은 단지 명 예적인 것이며, 영지의 의미를 띠고 있지는 않았다. 제국은 기원전 221 년과 그 직후에 전체 42 개의 군 commande ri e~ 로- 나누어졌다 . 2 7) 각 군은 중앙에서 임명한 수(守 : 행정 책임관), 위(原t : 군사 책임관), 감(監 : 감사)의 삼두 체제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각 군은 령 (令)에 의해 통치되는 현으로 나누어졌는데, 현의 수는 군마다 달랐다. 진의 주요한 기술적인 업적은 수만 명의 징발된 노역에 의해 건설 27) 『 사기 』 에는 기원전 221 년에 36 개가 설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숫자는 D. Bodde 의 Chin a 's Fir s t Unif ier : A Stu d y of Ch'in Dy n asty as Seen in the Lif e o f Li Ssu( 기원전 280?-208), Sin i c a Leid e nsia , ill(L eid e n, 1938), pp. 135, 144, 238 에 다시 사용됨. 그러나 p. 2 46 에는 214년 에 만들어전 4 개 의 군을 첨가하였다. 우리는 산재해 있는 자료를 통해 진왕조 시대에 만들 어진 실제 수는 아마 모두 42 개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된 만리장성인데, 이 장성은 몇 개의 제후국이 북쪽의 국경선을 따라 이미 건설하였던 장성이 부분적으로 연결되어 완성된 것이었다. 전제국이 건립된 지 12 년 만에 붕괴하자, 이전의 많은 귀족들 또는 그들의 후손들은 제국의 붕괴에 따른 내란의 와중에서 다시 세력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한왕조(기원전 206- 기원후 220) 의 창건자 고조 (高祖)가 제위에 올랐을 때, 자신은 평민 출신이었지만, 그는 기원전 202 년에 새로운 영지 보유 귀족을 만들었다. 그는 새로운 제국의 거 의 2/3 에 해당하는 지 역을 왕국(王園)과 후국(f侯園)으로 나누어, 그의 형제, 아들과 공이 많은 자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이들은 자신의 영 지 내에 있는 백성들에 대한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나면서 새로운 귀족들의 세력이 위험하다는 것 이 드러났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특히 기원전 12 7\1의 오초 7 국(吳楚七國)의 반란 이후에는 이들 세력을 견제하였다. 그리하여 기 원전 12 7\1의 칙령은 모든 왕국으로 하여금 왕의 사후 왕자들에게 왕 국을 균등하게 분할 상속케 함으로써 장자 상속제를 폐지하였다. 기 원전 106 년에는 왕국들을 포함한 제국을 13 개의 주(州)로 구분하였 고, 각 주는 중앙 정부를 대신하여 각 주를 감시하는 임무를 가진 자 사(刺史)에 의해 지배되었다. 많은 귀족 가문들은- 음모와 반란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으며, 한 왕조의 첫 2 세기 동안 각 귀족 가문 의 평균 수명은 단지 2 .3 1 세대였다. 사실상 한고조에 의해 만들어전 열후들 중 그 작위를 기원전 86 년까지 보유하고 있던 열후의 후손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군현 제도는 계속 유지되고 또 점차적으로 확대되어 기원전 1 세기 말까지는 단지 20 개의 왕국과 241 개의 후국(후작령의 크기는 100 가구에서 20,000 가구로 다양하나, 평균적으로 2,600 가구)이 있은 데 반하여 83 개의 군과 1,314 개의 현이 있었다. 확실히 귀족들은 사치스 러운 생활을 하였으나, 이 당시에 이르면 실질적인 행정권은 중앙에

문제에 대한 어떤 대답도 사실상 결정적인 대답이라 할 수 없다. 그 럼 에도 불구하고 오웬 라티모어 Owen Latt im or~ 보다 최근의 볼프 람 에 버하르트 Wol fr am Eberhard 의 이론들은, 이론들이 갖고 있는 주 도면밀한 성격 때문에, 전지하게 고려해 볼 만한 것들이다. 우선 라티모어의 『중국의 아시아 국경선 내부 /nner Asia n Fronti er s of Ch i na 』 28 ) 에 전개된 이론을 살펴보기로 하자. 라티모어는 위트포겔 K.A. W ittfog el 이 동양적 사회라고 칭하는 위트포겔의 개념에서 많은 것을 차용하고 있지만, 그는 이 개념에 자신의 유목 사회의 성격에 대한 개념을 결합시킴으로써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이리하여 그의 이론은 중국 역사의 중요한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죽 중국이라는 농업 사회와 중국의 북방의 변경에 접하고 있는 초원, 산악과 사막지 방의 유목 사회 사이에 상호 작용을 한 힘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 농업 생활 방식 라티모어의 이론은 후에 중국의 문화가, 개와 돼지의 사육과 원시 적인 농업이 결합되는 수렵, 어로와 채집의 혼합 경제에 기반을 둔, 선행(先行)하고 있던 비교적 획일적인 신석기 문화로부터 화북 지방 에서 발전하였다는 주장에서 출발하고 있다 . 농업적인 성향은 비옥한 양자강 계곡보다는 중국 북쪽에서 처음으로 발생하였다. 왜냐하면 양 자강 계곡은 여전히 울창한 삼림 지역이었던 반면에, 황하 유역을 대 부분 덮고 있는 황토에서는 초목이 비교적 무성하게 자라지 못하고 석기로써 쉽게 작업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화북 지방 이라 하더라도 농업이 모든 곳에서 고르게 발달된 것은 아니었다. 처 음에는 농업이 황토로 된 고지대의 일부 계곡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 었다. 물이 많고 좋은 피난처였던 이 계곡은 곡물 재배에 적합한 지 28) 특히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시기와 가장 관계가 깊은 IX-X III 울 참조.

서 임명된 관료의 수중에 있었으며, 애제(哀帝, 기원전 6 기) 통치하에 서 이 관리의 수는 130 , 285 명에 달하였고, 이들은 토지(수도에 있는 관리의 대부분은- 토지를 받았지만)가 아니라, 현금이나 곡물로 급료를 받았다. 그리하여 아주 중요한 관리-사인 계층이 형성되었으며, 이 시기 이 후에 이 계층은 중국에서 유용한 지배 계층이 되었다. 이 계충은 하 나의 계급으로서 자생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지만, 작위가 없고 자신 이 갖고 있는 정부 관직을 세습할 수 없는 비세속적인 계급이었다. 이 계층의 정통적인 이념은 유교 사상이었다. 한나라 시대에 정부의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인 과거 제도가 처음 시행되었고, 이 제도는 당 과 그 이후의 왕조에서 정교하게 발달되었다. 이러한 내부적인 정치 통합은 제국의 국경선이 남쪽으로는 오늘날 의 인도차이나 반도, 북동쪽으로는 만주와 한국., 북서쪽으로는 동투르 키스탄의 서쪽 끝까지 확장되는 군사적인 팽창을 수반하였으며, 한은 중국의 역사에서 서너 개의 거대한 제국 중의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토지의 사적 소유와 매매는 이제 보편화되었고, 그리하여 정부가 토지 소유의 규모를 가끔 제한해야 할 정도로 부유한 자의 수중으로 토지가 집중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왕위를 찬탈한 왕망이 전 농지 의 국유화를 선언한 유명한 칙령을 반포한 기원후 9 년에 이러한 토지 의 집중화 현상은 그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 칙령은 지주 사인 둘의 강력한 반대 때문에 3 년 후에 철회되었다. 4 주나라 봉건제의 역동성 우리가 지금까지 서술해 왔던 관점에서 볼 때 초기의 중국 사회를 형성시킨 힘은 무엇인가? 현재의 우리의 지식으로는 이러한 복잡한

역이었을 뿐 아니라 수렵과 어로도 병행하여 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그 뒤에 아마 농업 사회가 황하 하류- 지역에서 출현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지역의 토지는 비옥하기는 하지만 늪지여서 배수(排水) 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을 하는 가운데, 하나의 결정적인 요소가 나타 났다. 그것은 화북 지방이 강우량이 적고 계절적으로 불규칙하다는 점이었는데, 이는 관개 시설의 도움 없이는 농업이 어느 한계 이상은 발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아직까지 중국의 관개 시설 이 언제부터 시작하였는지를 알 수 없지만, 관개 시설이 시작되었을 때, 공동체가 협동으로 노동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농업이 화북 지역 전역에서 발달한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몇 개의 지역에서 발달 했을 경향이 질다. 상나라는 이러한 핵심 지역 중의 하나이다. 다른 지역은 주나라인데, 다같이 동일한 신석기의 문화 전통에서 출발하였 으나 주는 상보다는 늦게 성숙하였고, 마침내는 상을 정복하였다. 또 다른 지역들은 정치적으로 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소국이었는데, 그 각 소국들은 성곽 도시를 중심으로 한 자립적인 경제 단위로서, 그들이 생산한 귀중한 곡식은 그 도시에 저장할 수 있었다. 농경 생활 양식은 이러한 핵심 지역으로부터 경작하기 좋은 지역이 면 어느 곳이든 전파되었다. 다른 일에 종사하는 것보다도 곡물 생산 에 종사하는 것이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으 므로, 농업은 더욱더 대규모적인 치수 사업을 촉진하게 되었다. 이러 한 치수 사업은 더욱더 많은 토지의 경작을 가능케 하였고, 그리하여 더 많은 인구의 증가를 가져오게 하였다. 이러한 사업들은(관개뿐만 아니라 특히 후에는 홍수 조절, 배수와 수상 운수) 중국인이 초기 에는 극복할 수 없었던 환경의 장애를 점차적으로 극복할 수 있게 하였다. 동시에 농업에 대한 관심이 점차 중대하여 다른 경제 활동은 하찮 은 것으로 전락하였다. 예를 들면, 한때 경제적으로 중요하였던 사냥

은 귀족들의 오락이 되었다. 양보다는 돼지가 중요한 식육 동물이 되 었다• 왜냐하면 잡식 동물인 돼지는 다른 가축보다 방목지를 많이 필 요로 하지 않아, 다른 가축을 사육할 때보다 더 많은 땅을 곡물 생산 에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곡물 생산은(화북에 서는 밀과 기장 그리고 후에 화남에서는 쌀) 중국인의 중요한 생활 양 식이었다. 무력을 이용하여 큰 국가가 작은 국가를 병합하는 것은 주나라 시 대의 특색인데, 이것은 어느 중요한 지역이 경제적으로 발전하여 이 지역이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 한 경제 발전은 일정하지 않고, 지역에 따라 발전의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정치적인 세력 균형도 당연히 지역간에 차이가 있었다. 이런 현상은 기원전 221 년에 하나의 통일 제국이 성립되었을 때 그 철정을 01 루었다. 라티모어의 이론을 살펴보았으므로, 이제 몇 가지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첫째로 , 이 책의 서론에서 지적된 바와 갇이, 봉건제의 성장을 가져온 요인 중의 하나는 종종 〈 하나의 고도로 조직된 정치 제도(제 국 또는 비교적 규모가 큰 왕국)가 쇠퇴하거나 또는 약화되는〉 현상 일지 모른다. 그러나 몇 줄 뒤에, 그 서론은 이것은 모든 봉건 사회에 반드시 적용되지 않는다고 현명하게 경고를 하면서, 그 증거로 중국 울 들고 있다. 이 경고는 잘 받아들여져야 한다. 왜냐하면 주의 봉건 제의 경우에는, 상나라의 견지에서 생각하건 또는 정복 당시의 주나 라가 확립한 주도권(여기서부터 접차로 후대의 완전한 봉건제가 발전 했다고 볼 수 있는)이라는 견지에서 생각하건 간에, 그러한 선행하 는 〈고도로 조직화된 정치 제도〉가 실제로 중국에 존재하였는지는 아 주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마스페로의 표현을 빌리면 〈중국의 봉건제 는 중앙 집권화된 선행 왕조가 붕괴하면서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29) 29) Le reg ime Jeo dal, p. 144. 유사한 견해로는 Latt im ore, p. 3 7 어t 참조.

두번째로, 주의 봉건제가 처음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그 다음에는 지방적 차원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전 국 차원에서 실패하였던 것은, 봉건제가 필요로 하는- 중간 크기의 정 치 단위가 봉건제가 적용되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정치 단위들의 경제 통합을 앞질렀기 때문이었고, 그 다음으로 후에 지방 차원에서 실패하였던 것은, 이러한 정치 단위들의 경제 성장이 이둘을 효과적 으로 대처할 수 있는 봉건제의 조직 능력을 능가하였기 때문이다• 이 로 인해 야기된 긴장 상태는 상술한 대로 봉건제의 변화와 종국적인 붕괴를 초래하여, 처음에는 이전의 봉건 제후국이 주의 군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국가로 전환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고,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국가들이 새로운 형태의 관료적인 제국으로 통합되는 길을 열 어주었다. 그러나 이 과정은 구체제를 옹호하는 쪽의 극심한 저항 없 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기원전 3, 4-J.~]기 동안 여러 국가 둘의 축성 활동을 라티모어는 〈 중국에서 봉건 분리주의의 마지막 단 계의 일반적인 현상〉 30) 으로 해석한다.

30) p.4 0 4. 물론 우리들의 견해로 봉건적이라는 용어는 이 시점에서 완전히 정 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봉건적인 잔재가 개개의 국가에서 존재하고 있 었지만, 이 당시에는 봉건제가 중국 전체에서는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세번째로, 집중된 인력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필요성과 더불어 중국 에서 성장하고 있던 실리적인 단일 작물 재배주의 때문에 일찍부터 주의 봉건제는 관료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다. 〈주의 봉건제는 유럽 봉 건제의 특칭과 다르게 공공 사업에 필연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전 사회의 노동력은 공공 사업의 유지를 위해 규제되어야 했다一― 수리권(水利權)이 할당되어야 하고, 곡물이 저장되어 노역자들에게 지급되어야 했다. 따라서 봉건적인 여건하에 있으면서도, 유럽에서보 다도 더 절박한 사무적인 기능이 필요하였다.〉 31) 결국 봉건 중국의 지배 귀족들은 중국 제국의 지배 계층인 학자 - 사인 Scholar-g en tr y 계

31 ) Latt imo re, pp. 375- 3 76.

충으로 전향하는 데 성공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들고 있는 요소들 때문에 주의 봉건제는 다양 한 기원과 여러 형태의 지방 경제 조직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봉건제 보다 훨씬더 동질적인 성격을 가졌다. 이 사실은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라티모어가 지적한 것처럼 ,]2) 〈 유럽이 화 폐 경제와 산업주의로 발달하는 방식으로 변하였으나, 중국은 중앙 집권적인 제국적 관료 제도를 창출하는 방식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관료들의 토지에 대한 관심과 행정적인 관심의 결합이 자본주의 발달 울 견제하고 산업 발달을 거의 완벽하게 방해하였다〉]”는 것은 우연 한 일이 아니다.

32) p. 393. 33) 대부분의 일반화와 마찬가지로, 이것 또한 한계접을 가지고 있다. 예를 둘 면, 한(漢)사회가 복잡하게 발달하면서 필연적으로 산업적, 상업적 발달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발달은 국가 관료들에 의해 끊임없 이 저지되었고、 유럽에서와 갇이 산업과 상업이 국가를 지배하는 위치에 결 코 도달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 당시나 그 이후에도 사실이다.

목축 생활 방식 라티모어의 이론의 또 다른 면은 중국의 북방 국경 지방의 초원 유 목 민족에 관한 것이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이러한 민족들의 목축 경제의 대부분은 중국의 농업 경제가 발생한 것과 같이 일반적으로 화북 지방의 신석기 문화에서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처 음에는 어떤 유리한 조건을 차지하고 있던 집단이 농업을 발달시켰던 것같이(이 지역 사람이 후에 한족이 됨), 유리한 지역에 있던 민족만 이 목축을 발달시키게 되었다. 조건이 좋지 않은 중간 지대에는 다른 집단이 있었는데 그들은 초기에 갖고 있던 혼합 경제를 유지하고 있 었고, 그리하여 그들은 주나라 초기에 봉건 제후국들 사이에 있는 어 느 누구도 소유하지 않고 경작하지 않은 땅을 차지한 야만족(胡族)이

되었다. 주왕조의 초기에 한족과 야만족의 전쟁을 기술한 역사서에서 야만 족을 흔히 침략자로 묘사한 것은 놀랄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러나 그 들의 보다 넓은 장구한 역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전쟁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한족의 농업 경제가 확대되어 가는 조류를 야만족이 저지하지 못한 일련의 사건을 뜻하고 있다. 이 조류에 저항하지 못한 야만족들은 한족의 생활 방식을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그들 자신은 한 족이 되었다. 그러나 저항을 한 다른 야만족들은 점차 산간 지방쪽으 로 더 깊숙히 쫓겨났으며 마침내는 황량한 초원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 시점에 이 야만족들이 전정으로 유목민이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그들이 한족과 싸울 때 보병 (步兵)으로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 . 그러나 그들이 초원 지방에 도달하면서, 점차적으로 그 들이 갖고 있던 구혼합 경제는 새로운 생활 방식으로 발전해 갔다. 〈그들 자신이 처해 있는 지대와 환경은 그들에게 구혼합 경제도 허용 하지 않았고 또는 중국화되는 특칭이었던 농업조차도 허용하지 않았 다. 그래서 그들은 넓은 초원에서 가축들을 전문적으로 기르는 새로 운 생활 방식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단일의 기술 즉, 가축을 다루는 기술에 주력함으로써 중국 사회보다는 더 단일하나 중 국 사회와는 판이하게 다르며, 주로 중국에 적대적인 사회가 필연적 으로 출현하게 되 었다.〉 34) 그리하여 북중국에 연해 있는 초원 지대에서는 출현할 때부터 중국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정한 유목 생활이 발달하였다. 예를 둘 면, 우리는 기원전 때回 말에 전을 포함하여 중국의 어떤 제후국들 이 이전의 전차 대신에 이웃의 유목민으로부터 기마전 사용법을 어떻 34) Latti mo re, p. 381 .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서는(p. 355) 내륙 지방의 목축 유 목 생활의 기원은 북중국 초원 지방의 변경에서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삼림 지역과 중앙 아시아의 오아시스 지방에 있다고 조심스럽게 주장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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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배웠는가를 이미 살펴보았다. 진왕조 때 만리장성의 축조는 중국 을 유목적인 생활 방식과 구분하려는 인위적인 시도로 일반적으로 간 주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농업적인 중국과 목축적인 초원 지대 사이에 명확히 구분되는 자연적인 경계선이 없고, 어느 정도는 농업에도 적 합하고 목축에도 적합하지만, 그러나 이상적으로는 어느 것에도 적합 하지 않은 단지 불분명한 유동 지역만이 있었디는· 지리적인 사실 때 문에 실패하였다. 그러므로 이 지대에는 농업과 목축을 겸하는 사회 가 발달하였다. 정치적으로, 이 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특수한 전 술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 왜냐하면 그둘은 두 생활 방식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분명히 어느 한쪽의 생활 방식을 취하지 않았고, 그 리하여 두 생활 방식이 상충하였울 경우에는 자유로이 어느 한쪽의 생활 방식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漢)왕조 시대부터는 한족과 유목 민족은 이 중간 지대 롤 지배하기 위하여 계속하여 싸웠으며, 이로 인하여 한쪽이 다른 한 쪽의 본거지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려고 시도해 왔다. 이러한 전쟁 에서 각 민족은 일시적인 성공은 하였으나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다른 민족을 지배하기 위하여 한 민족은 다론 민 족의 정신과 생활 방식을 받아들여야 하였고, 이로 인해 자신의 문화 와 정치적인 실체를 상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5 절에 서 〈분열 시대 Peri od of D i sun ity〉에 나타난 봉건적인 현상에 관한 논 의를 하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 그러나 이 문제에 들어가기 전에, 먼 저 에버하르트의 중국 사회에 대한 이론을 살펴보고, 이것을 라티모 어의 이론과 비교해 보기로 하자. 주의 봉건제와 중국의 사인 사회 에버하르트가 주장하는 주의 봉건제와 봉건제에서 중국의 사인 사

회로의 발전에 관한 이론은 그가 최근에 출판한 『 정복지들-과 지배자 : 중세 중국의 사회적 힘 Conq ue rors and Rulers : Soc ial Forces in Medie v al Ch i na 』 (Le i den , 1952) 의 제 1 장에 제시되어 있다. 거기에서 그는 루스 토우의 상부 계층 형성 이론 Su p ers t ra tifi ca ti on,3 5> 즉 봉건제는 인종적 으로, 문화적으로 한 집단이 다론 집단을 정복하였을 때 생기는 계층 형성에서 발생한다는 이론을 중국에 적용하면서 시작하고 있다. 에버 하르트에게서 중국의 경우는 〈 주나라 사회는 종속적 상부 계층 형성 의 산물이다 〉 라는 것을 의미한다. 〈 주나라의 지배지들은- 군사적으로 조직된 비한족계의 부족 동맹족을 이끌고 중국의 서쪽에서 왔다. 그 둘은 중국의 동부 지방울 정복해서 차지하고 영토 확장과 식민 활동 을 시작하였다.〉 36) 다른 곳에서(위의 책, pp.2 4-25), 에버하르트는 상부 계층 형성의 개념을 일반적으로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 다. 〈우리는 봉건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본질적으로 또는 적어도 원래 유목 집단이 기본적으로 농업 집단에 대한 상부 계층 형성의 결과로 간주한다. 봉건제는 이동 시기에 놓여 있던 원래 유목 생활을 하던 종족이 로마 제국을 정복하였을 때, 원래 목축을 하던 주와 그 동맹 자들이 상을 정복하였을 때,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고족과 터키족이 인 도, 또는 페르시아, 또는 러시아를 정복하였을 때 존재하게 되었다. 〉 그러나 에버하르트가 조심스럽게 덧붙이고 있듯이, 이러한 사실은 〈유목민에 의한 어떤 정복은 반드시 봉건제의 성립을 유발한다 〉 는 것 울뜻하는것이 아니다. 주나라에서는 그 정복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심대한 이중 구 조를 초래하였는데 이는 종교, 문학, 법과 같은 분야에서 나타난다고 에버하르트는 믿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이중 구조는 재산 관 35) A. Ri isto w , Ortb e stim m ung der Gege n wart, I (Zuric h , 1949) 를 참조 . 36) p. 4( 에버하르트의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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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주의 정복자들이 중국의 동부와 중부 지 방의 새로운 봉토에 정착하였을 때, 그들은 토착인들이라는 바다에 떠있는 섬과 같은 성곽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들의 식량 공급을 전적 으로 이러한 피지배자들에게 의존할 수 없었던 정복자들은 그것을 대 신할 그들 자신의 식량 공급원을 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부족인들을 각각 8 호(戶)로 구성된 반군사적인 집단으 로 조직하였다. 이러한 집단은 초봄에 성채를 떠나 조그마한 땅을 개 간하여 그 땅의 지력이 다할 때까지 한, 두 계절 경작하고, 그 다음에 는 새로운 땅을 개간하였다. ) ” 그 토지는 이상적으로 크기와 형태가 일정했는데, 8 호에 의해 집단적으로 경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 토지가 맹자와 주나라 후기의 다른 학자들이 말하는 정전이다. 이들 의 엄격한 조직은 토착인의 느슨한 조직과는 상당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토착인들은 다소 독립적으로 그들 자신의 촌락에 거주하면서, 복종의 표시로 간헐적으로 정복자에게 공물을 바쳤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배 귀족들의 성곽 도시는 그들의 독점적인 행정적, 군사적인 성격을 상실하고 산업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도시 장인들이 생산한 물건을 얻고자 하는 주변 토착인돌이 이 도시 를 자주 출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발달은 상인 계급과 화폐 경제의 성장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였다. 여타의 복잡한 요인과 함께 나타난 결과로, 원래 토착인들에게 속했던 토지의 대부분을 귀족들과 도시에 거주하고 있던 그들의 추종자들이 매입하였거나 또는 다른 방법으로 획득하게 되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지주-소작적인 성격을 가전 새로 운 관계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 관계는 지금까지 성행해 온 봉건제 모델에 따라 형성되기는 하였지만〉, 〈그 관계는 윤리적인 요소(충성 심), 권리와 의무의 쌍무적인 관계가 결여되어 있으며〉, 〈어느 정도 순전히 경제적 관계였다〉라는 사실 때문에 봉건적인 관계와는 다르 37) p. 7.

다 .3 8 ) 이러한 발달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배 집단과 피지배 집단과의 문화적 동화를 촉진하였고 ,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 이 부정기적으로 내는 공물을 귀족들이 공동으로 경작하는 정전에서 받는 〈 십일세 〉 와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 고정된 세금으로 정례화시킬 수 있었고, 정전 그 자체를 분리된 단위로서 완전히 사라지게 하였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이제 지방을 순회하며 새로운 세금을 징수하는 대리인(에버하르트는 상인 계급에서 많은 대리인을 선발하였다고 믿고 있다)을 고용하였다. 〈귀족들은 이러한 징세인둘을 그들의 관리로 간 주하였고, 그들의 집안 행정의 모델을 본받아 징세인들과의 관계를 형성하였다.〉 39) 우리가 3 철에서 설명하였던 이러한 유의 여러 변화는 구봉건 관계 롤 점진적으로 해체하게 되었고, 상업 중심적인 새로운 지주-소작 관 계가 봉건 관계를 대신하게 되었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러한 과정은 기원전 3 세기와 2 세기에 에버하르트가 사인이라고 적절하게 이름을 붙인 새로운 사회 집단에 의해 지배되었던 새로운 형태의 제 국의 탄생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에버하르트에 있어서, 중국의 사인 사회와 서양의 시민 사회 bur- ghe r so ci e ty롤 구분짓는 두 개의 중요한 특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의 사인은 경제적으로 산업 자본이 아니라 토지 재산에 의존하고 있었다. 둘째, 그들의 중요한 3 개의 칙업은 지주, 학인, 정치가로서, 이 세 가지는 흔히 하나의 사인 가족 내에 때로는 한 개인 속에 모두 나타나고 있다. 이 계급이 상당히 안정을 누릴 수 있었던 주요한 요 인은 한 사인 가문은 흔히 도시와 시골 모두에 저택을 가졌다는 사실 에 있다. 도시의 저택은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가족들이 거주하고, 그 반면에 시골 저택에서는 그 가문이 임대해 준 토지를 관리하는 가족 38) pp. IO-I I. 39) p. I I.

이 살았다. 동시에 아 시골 저택은 도시에 있는 가족들이 정치적으로 불리할 때나 불안정할 때 돌아올 수 있게 하는 경제 기반을 제공하였 다. 〈 중국 사인 사회가 극도로 안정되었다는 것은 중국 문화의 해체 를 방지하고 중국에 대한 의국인의 지배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도록 한 결정적인 요소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또한 변화를 가로막았다. 그것은 변화의 도구인 근대 과학의 발달을 방해하였다.〉 40) 에버하르트와 라티모어의 이론 비교 에버하르트의 사인 사회에 대한 서술은 대체적인 윤곽에 있어서 라 티모어의 주나라 이후의 사회에 대한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 북방의 변경 지방울 따라 목축 사회가 발달하고, 이 사회가 중국의 농업 사회와 상호 교류를 하였다는 라티모어의 이론에 반대하지 않는 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진정으로 라티모어에 근본적으로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41) 그러나 에버하르트가 그의 저서 제 2 장에서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는 점은 농업적인 측면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라티 모어를 직접 언급하지 않고 위트포겔의 동양적 사회라는 이론 체계에 만 오로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 체계는, 앞에서 언 급한 바와 감이, 라티모어 자신의 농업적인 측면에 대한 이론을 구성 하는 데 기본적으로 중요한 개념이었다. 지면 때문에 우리는 에버하르트의 주장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없 다. 그러나 이 주장의 중요한 부분은 위트포겔의 중심적 테제 the si~ 관련되어 있다. 이 테제에 따르면, 국가가 치수 사업 특히 관개를 위 한 치수 사업에 주력한 것이 중국과 그의의 동양적인 사회의 틀을 형 성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고 한다. 이룰 반박하면서 에버하르트 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역사적 증거를 제시하였다. 40) p. 16. 41 ) Eberhard, pp. 8, 9, 72 를 참조.

첫째, 관개는 북중국의 밀과 기장 농업에 결정적인 것이 아니었으나 (중국 문화가 처음 시작하였던 곳), 후기에 남쪽의 도작 농업과 관련 해서는 실제로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둘째, 중국의 치수 사업에 대 한 정치적 관심은 확실히 봉건제 시기까지 거슬러 울라갈 수 없고, 치수 사업은 관개 사업을 중심으로 하였던 때보다는 운하 건설을 중 심으로 하였던 때인(그 당시의 교통 수단의 향상에 접차 더 많은 관심 울 보인 결과인) 제국 시기 동안에만 활발해진다. 셋째, 사료에서 가 끔 발견되듯이, 순전히 관개 사업적인 계획의 시도는 중앙 정부가 아 니라, 지방민에 의해 흔히 시작되었다.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 많은 의문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트포겔 이 적어도 중국 북부에 관한 한 중국에서의 관개 사업의 전반적인 역 할을 아마 상당히 과대 평가하였을 것이라는 에버하르트의 전체적인 주장에 대해서는 필자도 동감한다. 분명히 에버하르트가 그의 저서 마지막 페이지에서 내린 비판은 위트포겔이 동양적이라는 용어를, 범 위가 광대한 문화들에 맹목적으로 적용시킴으로써 그들 문화 사이에 존재하던 실질적인 차이를 애매모호하게 하는 경향이 있음울 입증한 것으로 보인다. 에버하르트 자신에 의해 제시된 무난한 길은 중국을 포함하여 사례로서 각개의 문화를 개별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에버하르트 자신의 정치 - 사회적인 접근 방식은­ 적어도 필자에게는―-중국 사회가 봉건적인 그리고 전(前)봉건적인 단계에서 중국의 후기 사회 형태로 발전한 것에 대한 완전하고 만족 스러운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의 이론은, 예를 들 면 결국 사인이 지배하는 중국 제국으로 전환하게 한 경제적인 단일 작물 재배와 정치 관료주의의 성향이 중국 사회 초기부터 나타났던 이유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위트포겔과 라티모어의 환경적인 요소와 경제적인 요소를 기반으로 한 접근 방식이 더 다이나믹하고 일관된 원리를 제공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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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에버하르트의 위트포겔에 대한 혹평을 받아들인다 하더라 도, 위트포겔-라티모어의 이론을 수정된 형태로 이용하는 것은 가능 할 것이다. 그리하여 라티모어의 이론으로, 화북 지방에서 초기의 농 업의 발달은 환경이 유리한 지역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고, 이러한 농업의 집중은 그 지역의 인구 성장을 촉진하였으며, 그 지역의 정치 적인 실체의 성장을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타당할 것이다. 마찬가 지로, 환경이 좋지 않는 중간 지대를 차지한, 인구가 희박한 지역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구혼합 경제를 유지하다가, 목축이 그 환경에 더 적합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전적으로 목축 생활 방식으로 기울어져 가는 경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도 타당할 것이다. 이리하여 라티모 어가 제시한, 한편으로는 농업을 전문으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목축 을 전문으로 하는 두 개의 다른 사회가 구성되는 단계가 설정되었다. 게다가 화북 지방은 계절이 고르지 못하고 강우량이 비교적 적었기 때문에 농업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자들이 어느 단계에 이르러 관개 라는 수단을 통해서 이런 여건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상 한 일일 것이다. 그들의 관개 사업이 농업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그 사업이 거대하거나 광대하지도 않고, 어떤 중앙 집권적이고 정치 적인 권위가 아닌 사적인 집단에 의해 그 사업이 계획되었다 하더라 도 그둘은 이 사업을 시행하였을 것이다. 어떠한 경우든 그 결과는 농업 생산력을 중전시켰으며, 농업 생활 방식에 젖어드는 인구의 증 가와 확산을 초래하였다• 다시 이러한 요소들로 인하여 지방 정치 제 도가 증가하는 인구를 지배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점점 더 관료적인 형태로 발달시키게 되었다. 이리하여, 일단 시작이 되면, 중국이 마침내 중앙 집권적인 제국이 될 때까지 그 자신의 관성으로 지속되는 연쇄 반웅이 일어났울 것이 다. 제국 시대에 가서야 비로소 국가가 치수 사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그리고 그때에도 관개 사업보다는 운하 건설에 더 관십을 기

울였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모든 현상은 사실 발생할 수 있는 일들이 었다. 더군다나 우리는 지금까지 에버하르트 자신이 비교적 조금밖에 언 급하고 있지 않은 저지대의 배수(排水)와 홍수 조절과 같은 치수 사 업 형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의 농업 생활 방식이 황토로 된 고지대의 계곡에서 양자강 하류의 충적토로 된 대평원으로 확장되었을 때, 치수 사업은 중국인들에게 아주 중요 하였다. 그때에 그들이 직면한 곤경은 너무 거대하였기 때문에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제의 감독을 받지 않고서는 이 곤경이 거의 극복될 수없었다. 이제 주의 봉건제를 해결하는 요소로서 에버하르트 자신의 〈 인종적 상부 계층 형성〉 이론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몇 가지 어려움에 직 면하게 될 것이다. 첫째, 주는 〈 원래 터키 종족 〉 이었으며 , 그리하여 인종적으로는 그들이 정복하였던 민족과는 구분이 된다는(위의 2 절을 보라) 에버하르트의 가설은 지금 남아 있는 자료들로는 분명히 입증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만약 주가 이민족이었다면, 후기에 중국에 침입 한 많은 이민족의 경우처럼, 아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언어학적인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은 확실히 이상하다. 두번째로, 에버하르트가 주사회의 특칭이라고 믿고 있는 〈 철저한 이 원 구조 dee p dual i sm 〉가 인종적 상부 계층 형성 에 기 인한다는 그의 주장은 이미 2 절에서 제시된 요소에 의해서 어느 정도 근거가 희박하 다. 이것은 주나라가 상을 정복하였을 때, 그들은 그들 자신과 동맹자 들을 위해 새로운 영토의 일부만 봉토로서 차지하고, 나머지 부분은 토착의 씨족장들이 계속하여 보유하도록 허용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것은 전(全) 영토에서 새로운 지배 귀족 계급이 이민족의 정복자들로 만 구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번째로, 에버하르트는 주사회의 이원 구조가 정전제에서 가장 현

저하게 나타나며, 그것은 피지배인들의 느슨한 조직과는 대조적인 것 으로 주의 정복자들이 그들 자신의 민족을 위해 만든 반군사적인 조 직이라고 보았다• 이 점에 있어서 에버하르트는 초기 주의 토지 보유 제에 대한 서중서의 이론 4 2 ) 에 입각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정하 고 있다. 그러나 서중서의 이론은 아주 독창적이기는 하지만, 산만하 고 때로는 애매모호한 자료에 너무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필자는 그 의 이론을 신뢰하기 힘들다. 게다가 서중서는 정전제가 주의 정복자 에 의해 실시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상왕조 때부터 존재하여 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이 산만하고 애매한 증거를 이용하고 있다 . 4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버하르트는 한마디의 설명도 없이 그의 목적을 위해 이 등식을 뒤바꾸어 놓았다. 요약하면, 우리는 에버하르트가 상부 계층 형성 이론을 주나라에 적용하면서 설정했던 인종적 구분은 실제로 필요하지 않다고 제시하 고 싶다. 앞서 인용한 에버하르트의 견해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봉건제의 근원은 본질적으로 혹은 적어도 원래 유목 생활을 하던 집 단이 기본적으로 농업적인 생활을 하던 집단에 대해서 상부 계층을 형성한 데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화 유형은 반드시 인종적 차 이와 연관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로 주의 정복이 초래한 결과는 기본적으로 인종적 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상부 계층의 형성이라고 본다. 어떤 문화적 차 이 때문에 이러한 정치적 상부 계층 형성이 물론 수반되지만, 이러한 대부분의 상부 계층 형성은 정복 이전에 두 집단간에 내재해 있는 인 종적 또는 문화적 차이룰 표시하는 것이 아니고 인구가 지배 집단과 피지배 집단으로 나누어졌다는 사실에서 기능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42) Eberhard, p. 6. 徐中舒 A Stu d y on the Chin g T'ien Sy st e m , 《 中國文化 硏究會 》 , Vol. N, Pt. I (Cheng tu, 1944), 121- 1 56 참조. 43) 徐中舒, pp. 131 fT., 특히 p. 139. Harvard jou rnal of As iat i c Stu d ie s , XllI (I95 0), 536 에 있는 徐中舒의 이론을 요약한 楊聯陸의 논문율· 참조 .

생각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이렇게 수정된 의미에서의 상부 계층 형성이 주나라에서 봉건제가 발생하는 데 직접적으로 연관되었던 요소였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 러나, 동시에 만약 우리가 결국 중국의 사인 사회를 낳게 한 과정을 설명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보다 오래 지속된 다른 요소들(아 마 환경적이고 경제적인)도 연구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요소 들은 위트포겔과 라티모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양하였고 치수 활동과 같은 성격은 갖지 않았겠지만, 이러한 요소(환경적, 경제적 요 소)들이 분명히 존재하였고, 결국에 가서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는 것도 어느 모로 보나 확실한 것 같다. 우리는 주의 봉건제의 중요한 윤곽을 어령풋이나마 잡을 수 있지 만, 이용할 수 있는 자료의 한계 때문에, 주의 봉건제의 역동성에 대 해서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진정한 학자다운- 겸손한 태도로 에버하르트는 그의 책을 끝맺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이 사실을 인정하였다. 〈여기에 개전된 이론은 단지 하나의 해석을 위한 시도이 다. 중국 사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아직도 너무 제한되어 있기 때 문에 어떠한 결정적인 설명도 불가능하다.〉 5 분열 시대의 봉건적 현상들 44) 주왕조 및 중세 유럽과의 비교 한왕조는 공식적으로 220 년에 끝났다 (30 년 전에 이미 한은 세 갈래 로 분열되었지만). 그 다음의 분열 시기 (221-5 89) 는 3 개의 주요 시기 44) 이 시기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 논문이 상당히 부족하기 때문에, 필자는 이 시기에 대한 논의를 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을 찰 알고 있다. 그러므로 아래 의 여러 주장은 부득이 시론적인 것이며 수정을 요한다.

로 나뉜다. 첫째, 삼국 시대 (221-280), 둘째, 서전 왕조 (265-316) : 280년 이후에는 대부분의 중국이 일시적으로 재통일됨. 셋째, 남북조 시대 : 남조는 남경에 수도를 둔 5 개의 왕조에 의해 연이어 지배되었 고, 반면에 북조는 20 개의 국(園)과 왕조들로 분활되었으나, 이중에서 단지 북위 (386- 5 35) 만이 1 세기 이상 존속하는 데 성공하였다. 마침내 위 (590 - 617) 에 의해 남북조가 재통일됨으로써 이 시기는 종말을 고 하였다. 장기간에 걸쳐 분열되었던 시대로서 이 시대는 한편으로는 주와 다 른 한편으로는 중세 유럽과 비교될 수 있다. 이렇게 비교를 해보면 몇 가지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이 분열의 시대는 주와는 다른 반면 에, 비록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중세 유럽과는 상당히 유사점이 있다 는 것을 알수 있다. 첫째, 주와는 다르지만 유럽의 중세와 마찬가지로, 분열 시대는 하 나의 제국이 몰락한 이후에 나타났으나, 그 제국으로부터의 유산과 정치 제도를 중세 유럽보다는 더 광범위하게 보지(保持)하고 있었다. 그 결과는 이중적이었다. 한편으로는 분열 시대는 정치 제도적인 면 에서 주와는 달랐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와의 단절이라든지 또는 학문의 쇠퇴 현상은 유럽의 경우와 같이 현저하거나 또는 오래 지속 되지 않았디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주와는 다르지만(주의 정복 이후), 서양의 중세와 마찬가지로 분열 시대는 거의 3 세기 동안 북중국에서 한족 지배를 몰락시킨 일련 의 계속되는 주요 이민족의 침입 시기였으며, 투르크, 터키, 티베트, 퉁구스 족에 의해 지배된 이민족의 왕조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민 족의 침입이 실제로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는 데 도움을 준 유럽과는 달리, 분열 시기 동안 중국에 대한 이민족의 침입은 때 1 기 초, 죽 한 왕조 자체가 멸망한 후 1 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사실 그 당시의 상황에 침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최초의 이민족 국가인 전조(前趙, 304-329) 는 초원 지대에 서 온 이민족의 침입에 의하여 수립된 것이 아니라, 1 세기 이상 화북 지방에 이미 거주해 왔던 흉노족과의 연합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 다. 흉노족들은 거기에서 삼국 중에 가장 북쪽에 있었던 왕국(魏)에 용병으로 고용된 후에 군사적인 힘을 얻었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 이 그들의 국가를 수립하였을 즈음에는 부분적으로 한화(漢化)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우리가 앞절에서 그 중요성을 설명하였던 중국과 초원 지대 사이의 확정되지 않은 변경 지대 출신들이었다. 마찬가지 로 이 이후 분열 시대에 존속한 이민족 국가의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 도 그중 일부는 정복 왕조가 아니라 비슷하게 서서히 침투하여 부분 적으로 한화한 민족에 의해 수립된 〈침투 왕조 d yn as ti es of inf ilter a- ti on 〉였다 .45)

45) 이 용어는 W ittfog el 과 Feng Chia - sheng ol 사용한 용어이다. Hi st o r y of Chin e se Soc iety : Lia o (Ph ila delph ia , 1949), pp. 15-1 6.

셋째, 주와는 달리 서양 중세와 마찬가지로, 분열 시대는 〈신앙의 시대〉였다. 한왕조 시대에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널리 퍼져, 분열 시 대 동안 상류층과 하류층 모두의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이 점에 있 어서도 역시 유럽과의 유사성에는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유럽에서 기독교는 로마 제국하에서 이미 국교가 되었던 반면에, 중국의 불교 는 이민족의 침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3 세기 말, 心1 l 기 초 한왕조 몰락 후 약 1 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사실은 그때가 되어서도, 불교는 경쟁 관계에 있던 유교와 도교의 계 속적인 도전에 대처해야 했으며, 유교와 도교는 일시적으로 약화되기 는 했지만,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중국 불교는 성직 계서 제도를 가전 통일된 전정한 보편적인 종교가 되었다기보다는 서 로 다른 종파와 사원들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사회 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불교의 영향은 대단하였지만, 불교의 정치

적 영향력은 유럽에서 기독교 또는 심지어 봉건 일본에서 불교가 행 한 정치적 영향력보다도 훨씬 못하였다. 넷째, 분열의 시대는 주와는 달리 그리고 이보다는 정도가 덜하지 만, 서양 중세와는 달리, 정치적 단위의 구심체가 없었다. 말하자면, 분열 시대에는 주왕조의 왕실의 경우처럼 정치적인 영속성을 제공할 수 있었던 단일 지배 가문이 없었다. 정치적인 정통성은 전혀 고려되 지 않은 채, 한 왕조 다음에 다른 왕조가 잇달아 발생하였으며, 남조 와 이민족이 지배하는 북조는 서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단일의 군주에게 바치는 공동된 충성심이 조금도 생겨날 수 없었다. 봉건주의적인 현상들 유럽 봉건제와의 이러한 부분적인 유사성을 제의하더라도, 분열의 시대는 다른 지역에서 필연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흔히 볼 수 있는 봉건 시대의 칭후가 되는 현상들을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면, 정치적 인 분열이라는 사실 자체가 그 한 예이다. 전쟁은 기근과 기타 재앙 과 겹쳐 어마어마한 인명 피해를 초래하였으며, 역사서에는 식인(食 人) 풍습이라는 전율스러운 단어가 여러 차례 기록되고 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한대 이후 인구의 감소는, 실제 발생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감소는 전통적으로 생각되어 온 것보다 훨씬 적다 .46) 무질서의 부산물로 나타난 것은 북으로부터의 침략을 피하기 위한 중국인들의(특히 상류 귀족들의) 남쪽으로의 이주이다. 때 1 기 말까지 46) 왕조사 d y nas ti c h i s t o ri es 에 기록된 인구 조사 통계 수치는 기원후 140 년에 서 280 년 사이에 약 4 천 8 백만 명에서 약 1 천 6 백만 명으로의 인구 감소를 나 타내고 있다. 그러나 두 수치는 실제로 비교 연구를 위해서는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처음의 수치는 전체 인구에 대한 대체로 완전한 동계인 것 같지만, 두번째의 수치는 단순히 거의 확실하게 그 왕조의 납세자들을 열거한 데 지 나지 않기 때문이다. Hans Bie le nste i n , .. The Census of Ch ina duri ng the SPteor ic ok dh o2lm-,7 4 N2o .A .1 9D(1 . ,9 4 7B)u, llpetis n- 1 o6f 3 ,t h특e 히M u1s2e8u,m 1 3of9 - 1F4a5r, E1a5s3t-e 1r n5 5 A를n t참iq조u i.t i es,

는 약 1 백만 명의 한인들이 양자강 이남으로 이동하였다고 추정되고 있다. 이 이동은 지금까지 중국에서 전례가 없었던 규모였는데, 이로 인해 경제적으로 남쪽의 중요성이 증대되었으며, 마침내는 남쪽이 북 쪽을능가하게 되었다. 또 다른 부산물은 경제 생활의 대혼란이다. 중국의 농업상의 단일 작물 경작에도 불구하고 한왕조에서 상당한 규모로 발달하였던 교역 이 여러 지역에서 중단되게 되었다. 3 세기부터는 화폐의 사용이 줄어 들었으며, 3 세기와 心1 ] 기 사이에 화폐가 사용되지 않았다고 기록된 시 기도 있었다• 그 결과, 여러 지역이 물물 교환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중앙 권력의 약화로 정부의 기능은 종종 지방의 강력한 지주 가문­ 에 의해 독점되었다. 토지 겸병을 금지하는 칙령에도 불구하고, 부유 한 가문이, 사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상당한 규모의 공전(公田)을 겸 병하는 것은 관례가 되었다. 의지할 곳 없는 가족이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객(客), 죽 손(가신, re t a i ner) 으로서 부유한 가문에 의탁하였 고, 그로 인해 생계를 유지하고 신변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음은 물론,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중앙 정부가 부과하는 각종의 세와 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비슷한 이유로 다른 사람들은 불교의 승려가 되 거나, 혹은 그들 자신과 토지를 강력한 사원에 의탁하였다. 부유한 가 문과 마찬가지로 사원둘은 특권을 갖고 있었다. 이둘 사원은 보통 막 대한 양의 토지를 소유하였으며, 종종 교역의 중심지 또는 대금업자 (貸金業者)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보호자(호족(豪族) 또는 귀족(貴族)을 의미)는 객이 된 사람들을 세습적으로 소유하였으며, 친구들에게 선물로 양도할 수 있었다. 객과 노예(역시 존재하고 있었다)와의 중요한 차이는 노예와는 달리 객은 매매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제도는 수차에 걸쳐 지배 왕조에 의해 인정되었으며, 이 지배 왕조는 보호자의 신분에 따라 보유할 수 있는 객의 수를 제한하려고 노력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유력한 가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칙령에 의해 노예와 객이 해방되어, 병사 또는 운수 노동자(驛人, tra nsp o rt workers) 로 징발되는 경우가 있었다 는 기록도 있다 •47)

47) 위의 자료는(앞에서 본 주에 나타난 인구에 관한 자료 이의에) 楊聯陸, Note s on the Economi c Hi st o r y of the Chin Dy na sty , Harvard Jo urnal of A sia t i c Stud ie s , IX (19 46), 112-117 을 편리하게 요약한 것이다. Wang Yi - t'u ng, Slaves and Ot he r Comp ar able Socia l Group s duri ng the North e rn Dy na sti es (386-618), 위의 책, XVI( l95 3), 293-3 아와 Eti en ne Balazs, Le tra it e economi qu e du 'Souei- C hou,' T'oung Pao, XLII( l95 3), 113-329 에 있는 관계 자료를 참조. Wan g에 의해 분명히 지적된 것처럼 고(隱)는 사실 상 여러 농노와 같은 사회 집단 중의 단지 하나의 (가장 괄목할 만한) 집단 이며, 그들의 지위는 노예의 지위보다 나을 바가 없다.

다론 곳의 봉건 시대를 상기시키는 그러한 일반적인 현상 이의에, 서전 왕조의 창건자인 무제(武帝, 265-289) 의 정치적인 활동에 주의 를 기울여야 한다. 이 책에서 내린 정의를 따른다면 봉건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의 정치적 행동은 다른 여건하에서, 결국 제도화된 봉건 체제의 발달을 유도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즉위를 하자마자, 그의 친족 중 27 명 이상을 왕으로 봉하였으며, 이전의 군(郡)을 전환 시켜 국(園), 즉 제후국을 그들에게 주었으며, 그 크기는 5,000 호에서 20 , 000 호에 이른다. 각 국은 중앙 정부의 제도를 모방한 자체의 군대 와 행정 관리를 갖고 있었다. 국 이의에 규모가 작은 수많은 공작령 과 후작령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귀족들은 처음에는 그들 자신의 봉토에 사는 것보다는 수도 에서 사는 것을 분명히 더 좋아한 것 같다. 그러나 22 7\1에는 제국의 칙령에 의하여 지방으로 돌아가도록 강요되었다. 제국이 통일이 된 다음 3 년 후에, 중앙 정부는 전반적인 무장 해제 계획을 시도하였는 데, 이 계획은 한편으로 새로운 귀족들에게 적용되지 못하였으며, 다 른 한편으로는 정부의 많은 무기를 흉노족에게 팔게 되는 결과를 빚 었다. 이러한 사건이 결합되어 대재난이 초래되었다. 291 년에 시작된

8 왕(八王)의 난은 306 년에 가서야 겨우 진압되었다. 이 난으로 서전 은 아주 나약하게 되어 흉노족의 손쉬운 공격 대상이 되었고 10 년 뒤 에는 흉노족에 의해 북중국으로부터 완전히 추방되었다. 진의 지배자 들이 좀더 유능하였더라면, 분열 시대는 2 세기쯤 단축될 수 있었고, 호족에 의한 화북 지방의 지배는 거의 완전하게 피할 수 있었을 것이 라고 생각할 수 있다 .48) 분열의 시대는 봉건 시대인가? 만약 우리가 이 책의 서론에서 제시된 봉건제의 개념을 규정하는 데 설정된 핵심적인 기준들이 옳다고 인정한다면, 방금 열거한 사실 들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분명히 부정적이다. 이 서론 울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봉건제는 원래 통치 방법이다. 이 통치 방 법에서 그 본질적인 관계는 지배자와 신민, 국가와 시민과의 관계가 아니라, 주군과 봉신과의 관계이다. 〉 아주 간헐적인 경우를 제의하고 는 그러한 관계는 분열 시대 동안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49)

48) 이러한 사건에 대해서는 Teng Chih - ch'eng, Chung -h ua Erh-ch'ie n -nie n Shih ( Two Thousand yea rs of Chin e se Hi st o r y) ( Shang ha i, 1934), II, 40 ff를 참조. 49) 이 판단-특정한 정치적인 기준에 기반을 둔一―은 모든 학자들에 의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위에서 언급한 Balazs 는 분 열 시대와 연관하여 여러 차례나 봉건적fe odal it e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규정하지 않고). 가장 좋은 예는 다음과 갇이 시작되는 그의 논문의 125 페이지에 있는 문장이다. 〈 그러나 북 쪽에는 남쪽으로 이주한 중국 귀족들의 봉건제에 대립히는- 터키-몽골의 정 복자들의 새로운 봉건제가 있었다.〉 분열 시대의 중국 사회의 성격에 대한 다른 가능한 설명에 관하여는 이 논문의 결론 부분을 참조.

이 시기 동안의 중요한 투쟁은 봉건제에 대한 관료제의 투쟁 혹은 지방 분권주의에 대한 중앙 집권주의의 투쟁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두쟁은 이미 몇 세기 전에 후자에게 유리하게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것은 우리가 羽i에서 설명한 한족의 농경 생활 방식과 유목

저인 목축 생활 방식의 투쟁이었다. 이 투쟁에서, 그 이전의 한 왕조 그리고 그 이후의 수와 당은 한족이 우세하였듯이, 분열의 시대는 유 목민이 우세하였다. 더기부터 남쪽으로 도피한 한족의 이주자들은- 전형적인 한인의 사 회 형태를 갖고 들어왔다. 정치적인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는 부유하고 영향력이 있는 자들에게는 번영의 시기이었다. 수많은 농노 pe asant t enan t와 〈 이주지들 colon i zers 〉 의 노력을 통하여 개간되었고, 배수되어, 경작지로 전환된 토지에서 대농장이 창출되었다. 이러한 농 장의 보유자인 지주 사인은 관료들과 상호 결합되어 있었거나 아니면 그들 자신이 관료 계층이었다.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그들은 모두 권 문세족 old fa m ili es 에 속하였다는 점이다. 배타적인 상류 클럽의 회원 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모든 신홍 가문들이 그들의 지위에 끼어들 지 못하도록 세심한 주의를 하였다. 그들이 어떻게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한 예는 관리를 임명하는 근거로 사용된 구품중정법(九品中正法)이라고 알려 진 제도이다. 이 제도하에서는 각 지방에 있는 정부의 관료는 표면상 으로는 지방민의 도덕적, 지적인 능력에 따라 그러나 실제로는 가~든 의 배경에 기반을 두어 지방민을 정기적으로 筑긁 E 으로 분류하였다 . 진왕조 시대의 비평가 유예(劉穀, 285 년에 사망)의 말을 인용하면, 〈 상품에는 한문(사회적으로 천한 가문)이 없고, 하품에는 세족(世族) 이 없었다. 한문 출신이 관직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上品無寒門 下品無世族) >50 ) 그러나 화남 지방울 지배하였던 자들은 특권층을 형성하였다. 이들 에게는 가문과 사회 관계가 아주 중요하였으나, 그들은 작위를 가전 50) 진왕조 동안의 대안정과 향신들의 배타성을 확인할 수 있는 통계 자료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에버하르트는 북위 (386-5 35) 에 관해 비교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었다. 아래 주 52) 를 참조.

귀족충을 형성하지 않았고 또한 주군과 봉신의 봉건적인 계급 체제에 도 속하지 않았다. 그들의 정부는 부패, 무능, 정치 투쟁으로 약화되 었지만, 그 정부의 형태는 전과 한의 관료 제도의 형태를 따랐다. 그 러므로, 이 책에서 사용된 정의를 따른다면, 이 정부는 봉건 정부라고 말할수 없다. 북쪽에서는 훈족, 티베트족과 여타의 침입자들은 종족마다 서로 다 른 그들 자신의 종족 조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조직은 어느 정도 그들의 목축적인 생활 배경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지배 하에 있는 인구의 압도적인 대다수는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한인으 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한인을 다루는 데 있어서, 이민족에게는 네 가지 선택이 있었다. 한편으로, 만약 그들이 그들 자신의 생활 방식을 지키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한족 농민을 남쪽으로 몰아내거나, 그들을 노예적인 목동으로 전환시키거나, 그들을 전멸시키거나, 혹은 지배적 인 군사 계급으로서 그들 위에 군림하면서, 그들을 순종하는 농노로 남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자발적으로 그들 자 신의 유목 생활을 포기하고 한족의 생활 방식에 가능한 한 많이 동화 되는 것이었다 .SI)

51 ) Eberhard, Hi st o ry of Chin a , p. 112. 그의 저서 Conq ue rors and Rulers 의 4 장에서 에버하르트는 이러한 몇 가지 선택을 자세하게 논의하고 있다.

이민족의 왕조가 시도하였던 앞의 세 가지 방법 중 어느 것도 수십 년 이상 지속되지 못하였다. 비교적 오래 존속한 복위 (386-5 35) 에 의 해 시도된, 네번째의 평화적인 방법은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왜냐 하면 북위는 중국의 지주 사인의 매우 귀중한 협조를 얻었기 때문이 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그것도 역시 똑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들 자신을 한족 사회의 일부로 동화시킨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정복자들 은 그들의 정치적인 실체를 상실하고 역사의 장에서 사라지게 되었 다. 그리하여 중국이 다시 통일이 되었을 때, 이 과업을 이룩한 왕조

죽 수(隋)가, 비록 북쪽에서 발생하였지만, 이민족이 아니라 한족이었 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결국 유목민의 종족 조직은 새로운 중국 의 환경을 견뎌낼 수 없었다 . 52 ) 이민족이 한화되어 가는 과정은 북조와 남조의 토지 정책에서 나타 난다. 한나라의 일반적인 정책(제정되기는 하였으나 거의 시행되지 않 았던)은 부유한 사람들이 각기 소유할 수 있는 토지의 양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분열 시대에 이 정책은 균전법이라고 알려진 정책으로 전 환되었다. 균전법하에서는 농민들은 연령, 성별과 가족수에 따라 정부 로부터 토지를 할당받았으며, 이 할당된 토지는 그후의 재조정에 의 해 정기적으로 균등화되었다. 그러나 지방적인 이해를 무시하고 중앙 집권적인 지배를 확장시키 려는 노력을 뜻하는 이 정책은 결코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였다 . 왜냐 하면 이 정책이 내포하고 있는 기술적인 어려움 때문만이 아니라, 특 히 이 정책은 일반적으로 공유지(사적으로 소유되지 않은 토지)에만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정책은 세력이 강한 사인들의 토지에 는 거의 적용될 수 없었다쁘 의미심장하게도, 이 정책은 사람들아 오 랫동안 거주하였고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특히 북위가 한화되어 가 는 시기와 그 이후의 시기 동안에 북쪽에서 열렬히 저지되었다. 일종 의 식민주의적인 영토 팽창이 진행되고 있었고, 인구가 희박하여 토 52) Das Toba-R eic h Nordchia n s : Eine sozio l og isch e Unte r suchung ( Leid e n, 1949) 에서 에버하르트는 동계학적인 분석을 제시하여 (Con q uerors and Ru/- er 여서도 역시 취급됨, pp. ll61T.), 북위에서는 알려진 중요한 향신 가문 중 단지 28% 만이 이민족의 혈통이었고, 나머지 중국계의 향신 가문 중에서, 적 어도 92% 는 북위가 창건되기 이전에 이미 중요한 정치 계층에 속한다는 것 울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북위가 쇠되해 가면서 중국계 향신의 중요성은 증대되고, 이민족 출신의 향신의 중요성은 감되된 것을 보여준다. 53) 이 점은 Balszs 에 의해 강조되었다. Balazs7t 번역한 대략 577 - 58 oi,1간의 중 국 사료를 참조(pp . 278- 2 81 ). 이 사료에서 우리는 그 당시에 토지의 소유 규 제에 관한 이론과 그 적용에 대한 커다란 차이접을 생생하게 얻을 수 있다.

지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지 않았던 남쪽에서는, 서류상으로조차, 이러한 유의 정책을 시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점에 있어서는 이민족이 지배 하던 북조가 한족이 지배하던 남조보다 덜 〈 봉건적 〉 이었던 셈이다. 6 결론 이 책의 서론에서, 봉건제를 정의하기 위한 두 개의 기준이 제시되 었다. 죽 정적인 의미로 봉건제를 정의하려는 기준, 다시 말하면 봉건 제 그 자체가 무엇인지와 , 동적인 의미로 정의하려는 기준, 다시 말하 면, 봉건제가 어떻게 작용하였으며, 봉건제가 발생할 수 있는 부대적 (附帶的) 상황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설명하려고 하였다. 정적인 기준에는 봉신-주군의 관계(특히 중요한 것으로 생각됨), 지방적인 차원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정치적인 기능이 거의 분리되어 있지 않는 개인적인 정부 형태 , 기능의 상속, 봉사의 대가로 지불된 봉토로 구성된 토지 보유 제도, 영주의 농노에 대한 권리의 조정 그 리고 사병의 존재와 군사적 의무를 강조하는 신사도 code of honor 등 이 포함된다. 동적인 기준에는(봉건제가 발생하기 전에 존재하였던) 선행 제국의 몰락, 이민족 침입의 영향, 경제적 통일에 대한 정치적 통일의 능가, 그리하여 중앙의 권력이 약화되고, 사실상 상당한 권한울 행사하는 지방 귀족의 성장을 초래하는 것, 특정한 집단에 의한 군사적 기술의 독점, 보다 작은 정치 단위에서 보다 큰 정치 단위를 건설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전쟁과 봉건 시대를 신앙의 시대로 만드는 보편적인 종 교의 존재가포함된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기준을 중국에 적용한다면, 홍미 있는 사실이 발생한다. 전체적으로 주의 시기는 동적인 기준보다는 정적인 기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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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잘 부합한다. 그 반면에 분열 시대는, 전체적으로 정적인 기준보다 는 동적인 기준(어떤 한계점은 있지만)에 더 잘 부합한다. 바꾸어 말 하면, 주왕조는 순수한 봉건제를 만들었지만, 타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봉건제와 연관이 있는 요소와는 상당히 다른 요소를 통해 봉건제가 형성된 것 같다. 그 반면에, 이론상으로는 봉건제에 유리한 조건들을 경험하였지만, 분열 시대는 진정한 봉건제를 발달시키지 못하였다. 만 약 우리가 이러한 여건을 여타 문명과 비교한다면, 이질적인 여건은 유사한 제도를 탄생시킬 수 있고, 유사한 여건은 이질적인 제도를 탄 생시킬 수 있다는 피상적인 결론을 얻게 된다. 그러나 중국을 대상으로 한 특정 사례 연구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일반화의 두번째 부분은 제한 조건이 필요하다. 羽i에서 우리는 이미 고대 중국 사회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제시하려 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요소들은 봉건 시대에서도 작용하였을 뿐만 . 아니라, 후대 중국 사회 후기의 발전 전반에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것 울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지속적인 영향은 다른 사회에서 는 완전히 발달한 봉건제를 발생시킬 수 있었던 요소들이 당시에 나 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분열 시대가 왜 그런 식으로 발달하였는가를 설명해 준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다시 한번 더 이 글이 따르고 있는 이 책의 서 론에서 내려진 봉건제에 대한 정의에 관심을 기울이고자 한다. 봉건 제는 〈원래 통치의 방법이며, 경제적 또는 사회적 제도가 아니다〉라 고 정의했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면울 강조함으로써, 봉건제에 있어서 어떤 경제 현상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만약 구체적이고 정치적인 관계와 연관되지 않고 발생한다면 이러한 현상은 그 자체가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이 책의 서론은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봉건제를 지주-소작인의 광범위한 범위에까지 적용시켜 봉 건제의 개념을 확대시키려는 많은 학자들이 있다. 확대된 봉건제 개

념의 공통된 특칭은 농민을 지주의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상태로 만들 어 그가 경작하는 특정한 토지에 철저하게 얽매어 놓고 있다는 점이 다. 그러한 관계는(정치 제재보다는 가끔 경제 제재에 기반울 둔) 반 드시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구체적이고 정치적인 구조 내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최근에 봉건제를 아시아의 많은 농업 사회를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수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확대된 봉건제의 개념을 널리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일반화된 개념을 적용시킨다면 중국의 경우에 우리가 내린 결 론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거의 확실히 수정을 가해야 한다. 예를 들 면, 북위의 균전법은, 물론 적어도 농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려고 의 도하였지만, 동시에(그 제도가 실제 시행되었던 면에서는) 농민을 그 에게 할당된 토지에 긴박시킴으로써 그의 경제적인 선택의 자유를 매 우 제한하였다. 이렇게 된 상태에서는 균전법을 농민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서 해석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균전법을 〈봉건 적인〉 제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가 개인적인 영주 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국가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제도 롤 위해서 국가 봉건제 또는 관료적인 봉건제와 같은 특수한 용어가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S4) 54) 관료적 봉건제라는 용어는 사실상 이미 사용되어 왔다. 예를 들면, Jos ep h Needham, The Chin e se Contr ibu ti on to Scie n ce and Technolog y, Re/l ee- tion on Our Ag e( London, 1948) p. 2 21 를 참조. 여기에서 Needham 은 〈 중국 사회는 관료적 봉건제로 불리었다〉고 주장한다. Chun 一 kuo T 'ung - shih Chie n -p ien (A Short Hi sto r y of Ch i na) 의 편집장 Fan Wen-Ian 이 사용한 비슷한 중국 용어, 관료적 중앙 집권화한 봉건제 bureaucrati c centr a liz e d fe udal i sm 를 참조. 이 책의 초판(1 947) 에서 3 판 (1949) 에 이르기까지 제 2 부 제 1 장은

and Rulers, p. 5 떼: 참조. 중국 사회의 성격에 관한 여러 중국 학자들의 견 해에 대한 논쟁을 더 알기 위해서는 Benja m in Schawrtz , A M arxist Con- tro versy on Chin a , Far Easte r n Qu arte r ly, XID (l95 4), 143-1 53 을 참조.

그러한 규정에 입각하고 있는 봉건제는 통상적인 논의의 목적을 위 해서는 편리하지만 보다 좁은 의미의 정치적 해석이라는 정확성이 결 여되어 있고, 중국의 관료 - 사인적인 사회 형태와 여타 지역의 비관료 적인 사회 형태와의 중요한 차이점을 호도하려는 결점을 갖고 있다. 그 반면에 이 방식은 정치적인 접근 방법에서 간과되기 쉬운, 중국에 서는 아주 중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거의 체계적인 연구가 되지 못한 중요한 경제적인 요인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장점이 있다.

V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란의 봉건제 브런데이지 Burr C. Brundage 1 서론 고대 근동의 역사에서 봉건적인 제도들을 찾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어려움 중의 일부는 자료가 부족한 정치 분열 시대를 연구할 때의 일반적인 현상이나, 이 자료들 중 일부는 고고학 자료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고고학 연구도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이 어려 움 가중시키고 있다. 더군다나, 현재의 연구는 서로 다른 시대와 지 역의 제도들을 상호 비교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래서 유럽의 봉건 제도를 위해 만들어진 용어들이 근동의 제도들에 어느 정도까지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이러한 제도 들이 규명되지 않으면, 이 연구는 거의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 이 러한 특별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은 때로는 대단히 어렵기는 하지만, 비교 연구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던 그러한 용어들을 근동의 제도에 적용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점검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하여야 한다. (자료 자체는 물론 특수한 연구 목적이 갖고 있는 여건 때문에) 이 연구에는 처음부터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독자들은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으며, 특히

중세 유럽에서 발달한 봉건제와 유사한 형태의 봉건제가 고대 근동 지방에서 존재하였는지의 여부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얻을 수 없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전의 정치 통일에 대한 기억은 물론, 통치 형태에 있어서의 지방주의, 사병과 사적 사법권은 봉건 사회의 핵심 요소들이다. 봉건제의 또 다른 요소들에는 재분봉 subin f e u dati on , 신서 homag e, 봉토 보유, 개인적인 면제권i mmun iti es 이 있다. 이 장에서는 언제, 어디서 이러한 요소들이 나타났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봉건제는 본질적으로 정치 현상이며, 종교와 토지 보유가 다른 측면에서 아무 리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봉건제의 정의와 연관되지는 않는디는 점을 우리는 이 책의 서론에서 알았다. 그러나 우리의 자료들은 정확히 정치 관계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는 유일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아마 토지 보유라는 사실 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발달 과정으로서의 고대 근동 지방의 봉건제를 가시화하려는 우리들의 시도는 자료의 결핍 때문에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없었다. 2 카시트 Kass it e 시대 이전의 정치 제도 메소포타미아에서 카시트 시대 이전의 정치 형태는 문화적으로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치적인 도시 국가가 그들의 독립성을 유 지하기 위하여 맹렬히 노력하였던, 전쟁이 만연한 사회의 정치 형태 였다-물론 이 전쟁은 그들 도시 국가의 생존 문제에 직결되어 있 었다. 이 무질서한 구조 속에서 대혼란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규모 가 더 큰 정치 통합을 가능케 하였다. 아카드 Akkad, 우르 Ur, 마리 Mari , 바빌론 Bab y lon 과 그의의 도시들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계 곡의 전부 또는 일부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였고, 그들이 건설한 왕

국과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다. 봉건제 또는 봉건적인 요소가 카시트 이전 시대에 존재하였는가? 이 시기에 중앙 집권적인 제국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지만 도시 국가의 정체(政體)에서 본질적으로 탈피한 어떤 정체도 없었다고 단 정할 수 있다. 그 결과, 카시트 이전 시대에는 그 계곡에서 봉건제와 조금이라도 유사한 토착 제도가 있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도시 국가군(群)은 (이 시대의 남, 중부 메소포타미아와 후에 그리 스에서와 같이) 봉건적인 발달보다는 고도의 중앙 집권화한 영역 국 가의 발달을 위한 여전을 제공한 것 같다. 중앙 집권화한 영역 국가 에서, 봉건 귀족이 갖고 있던 많은 사회 특권은 물론 봉토 보유나 봉 신제의 형태와 같은 것이 최소한도로 존재할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 계곡에서 토착적인 정치 풍토가 새로운 요소 의 유입으로 바뀌던 시기에 봉건제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여건은 메소포타미아와 근동의 일반적인 역사에서 대체로 나 타났던 이민족의 침략기 이후의 시기에 나타난다.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근본적인 배경이 되는 것은 오베이드 Obe i d i an 와 원(原)수메르p ro t o-Sumer 문화권이다. 그러나 〈 수메르의 도시 국 가는 개인 상업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상업 신정 정치 commer­ cial t heocrac 澤· 대표한다 〉 ”는 스파이서 S p e i ser 의 주장은 이 시기에서 봉건적인 요소를 찾으려는 학자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사원이 삶을 지배하였던 시기의 이면에는 제이콥슨Ja cobsen 이 말하는 〈 원시 민주 정치제 prim i tive democrac y〉 2) 가 있었으며, 이 체제에서는 수메르의 도 시 국가는 본질적으로 공화정이었으며, 그들의 정치 구조는 막대한 권한을 가전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만약 우리가 판단 가 I) Jo urnal of the Americ a n Orien ta l Soc iety , Sup ple ment No. 4(1 9 39), p. 2 7 . . 2) T. Jac obson, Pri m i tive Democracy in Anci en t Mesop o ta m ia, Jo urnal of Near Easte r n Stu d ie s , II (19 43), 159- 1 72.

능한 많은 유물과 유적을 가졌다면, 저(低)계곡 지역에서 수메르인들 이 지배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 자체는 아마 또 다른 사실을 우리에 게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크레이머 Kramer 가 최근에 말한 수메르의 영웅 시대 (Heroic Ag e of the Sumeria n s : 오베이드 이후 초기 제 1 왕조 이전)-수메르인 자신들도 동부의 산악 지대에서 온 침략자들이었 다-다음에 봉건적인 경향을 가전 시대가 도래한다고 추측할 수 있 울지 모른다. 크레이머는 이 시기에 저계곡 지역에서 문화가 발달하 고, 이란-셈족이 지배하며, 더 이상 부족의 법에 저촉받지 않는 야만적 인 수메르인의 강력한 군인 계급이 출현하고, 게르만의 종사제 comi - t a t us 와 아주 유사한 개 인적 종사제 (從士制)가 나타나고, 마지 막으로 조야한 부족 국가 crude pri n c ipa li ties 7} 붕괴 되 었다고 주장하고 있다.J)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가정은 봉건적인 방향으로 발전될 수 있 는 요소가 처음으로 출현한 시기를 상당히 앞당길 수 있으나(기원전 4000 년 말과 3000 년대의 어떤 시대 ), 이 시기는 여전히 보다 정교하고 반(半)도시적인 문화를 가전 시대 이후에 도래하였던 시기이다 .4) 그 러나 이 주장은 여전히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3) Americ a n Jo urnal of Archaeolog y, LII ( 1948), 155-164. 4) 크레이머의 이론은 거의 전적으로 문헌 기록의 분석에 기반을 두고 있으 며, 아직까지 고고학적으로는 검증되지 않았댜 필자는 이 이론을 제이콥슨 의 원시 민주제의 이론과 일치시키기는 어렵다고 본다. 만약 크레이머의 이 론이 옳다면, 약간의 이견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민주제라는 용어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기원전 2,000 년경에 아무루족이 이 계곡에 도착하게 된 것을 간단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유럽사에서 빌려온 용 어들이 사용됨으로써, 아무루 제 1 바빌로니아 왕조 중반기에 봉건적인 요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처럼 자주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완전히 발달한 봉건적인 여건이 아무루족의 위대한 통치자 함 무라비의 통치 시기에 존재하였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위대한 통치 자가 반포한 법전에서 봉건제의 힌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법전에서 언급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은 그 법 조항에 저촉을 받았다. 왕실의 재판관이 있었고, 다른 계급은 물론 귀 족 계급에도 반드시 적용되는 간음죄의 경우에는, 왕이 모든 신민의 생사에 대한 전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므로 사적인 재판권은 없었으며, 귀족 전체의 신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면제권을 가전 계급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그 법전이 내포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목적을 이해하 기 위해서는, 어떤 사건에 있어서는 개인보다는 국가가 손해 보상을 강구하는 데 있어 더 적극적이었다는 점(법 8) 과 그리고 예를 들어, 도난당한 물건을 찾지 못하였을 때는 국가와 도시 정부가 져야 하는 책임이 상세하게 열거되어 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법 26-41 은 어떤 토지, 과수원, 또는 가축의 용익권과 관계가 있는 일쿠il ku 라고 알려진, 군사 의무를 언급하고 있다. 미크 Meek 는 그의 번역서에서 일쿠를 설명하기 위해 〈봉건적 〉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 다 .5) 이 법들은 분명 히 불안정 한 은대 지 보유 benefi ce -h old i n g에 대 해 언급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법들이 왕 밀에서 사법적인 권한을 가전 개인적인 봉신제가 존재하였다고 유추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지는 못하며, 정치적으로 그때의 상황은 로마의 변경 군인들의 토지 보유와 동일시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본질적으로 귀족적 이 아니다. 관련된 법 조항 전체를 살펴보면, 사병 제도가 인정되지 않았디는­ 것을 함축적으로 알 수 있다. 왕의 군대에서 군사적인 봉사를 대신할 수 있는 자를 고용하는 것은 상당히 일반화된 것같이 보이는데(법 26, 33), 이는 분명히 전쟁의 특권을 독점하는 계층이 존재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군의 고위 관리들은 그들의 휘하에 있는 5) Anc ien t Near Easte r n Texts Relati ng to the Old Testa m ent, J. B. Pil c hard (ed.)(Pri nc eto n , 1950), pp. 163ff .

보병들을 지휘하는 법적으로 규정된 지위에 있었고(법 34), 이 사실 은 다시 사병의 존재를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다. 유일하게 군역의 면 제를 구체적으로 명기한 토지는 사원이 소유한 토지였다(법 182). 예상했던 대로, 우리는 함무라비 법전에서 귀족 계층이 발견되지만, 사병 제도, 사적인 사법권은 발견되지 않으며, 강력한 국가의 영향하 에 있는 지방 통치 형태만 발견할 수 있다. 함무라비 법전보다 더 오 래되었고 또 함무라비 법전에 영향을 준 이신의 리피트-이쉬타르 L i­ pit-Is hta r of Is i n 와 에 슈나의 빌라라마 Bil al ama of Eshunna 의 법 전들 에서 그 계곡에 발달된 봉건제가 있었다는 근거를 찾지 못한다면, 우 리의 연구는 시기적으로 바빌론의 제 1 왕조와 중복이 되고 또 그 왕조 롤 계승한 카시트 시대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결론지울 수밖 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바빌론 제 1 왕조의 아무루 왕들이 개인적으로 어떤 면제권을 부여받은 일단의 군사적인 예속인milit a ry de p enden t혜 7 때 때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그들은 왕의 군 대에서 전문 관리였으나, 그들이 토지를 보유하였다 해서 그들에게 행정적, 사법적 특권이 주어전 것은 아니었다. 봉건제의 어떤 요소들 이 구바빌론 시대에 나타났으나, 중앙 정부의 강력한 권력의 행사로 인해 발달할 수 없었다고 가정함으로써 우리는 딜레마에서 빠져 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바빌론 제 1 왕조에서 나타났던 군역 i lku 과 개인적인 면제권이 지금 논의하게 될 카시트 시기의 봉건제 발달에 영향을 끼쳤다는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6) 6) 필자와 이라크 정부에 근무하고 있던 Taha Ba qi r 와 사신(私信)으로 이 문 제를 논의했다. 〈불행하게도 아콰르 쿠프 A q ar Quf에서 우리가 부분적으로 연구한 결과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실마리를 제공하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예컨대 유럽 중세의 형태의) 봉건제는 바빌 로니아에 없었던 것 갇다. 아마 내가 틀릴 수도 있지만, 나의 일반적인 느낌 은 어떤 시기에(예컨대 카시트 시기) 봉건제와 같은 제도가 발생하였다면 그 봉건제는 아랍의 칼리프제 iqt a 의 어느 단계에서 나타났던 봉건제 아니면

오토만의 봉건제와 유사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중앙 정부의 약화에 주로 기 인한다.〉

3 카시트 체제 카시트족은 자고로스 산맥의 첫번째 고지대의 후면에 있는 계곡에 거주하였던 산악 민족이었다. 함무라비 왕조의 왕들의 지배하에서 그 계곡에서 발달하였던 장엄하고 정교한 문화 때문에 이 의지 민족은 로마 제국의 말기의 역사에서 잘 알려지게 된 〈 삼림에서 농장 그리고 시장fo res t-t o- fa rm - t o - fo rum 〉 이라는 운동 법칙에 따른 이동을 시 작하였다 . 함무라비의 아들이며 계승자였던 삼수 - 일루나 Samsu - li una 의 치세 동안 무력으로 그 제국을 침략하려는 그들의 첫번째 시도가 실패한 후에도, 그둘은 계속 압력을 가하였는데 이번에는 소그룹으로 점진적으로 참입하여 농장 노동자 , 하인, 일반 노동자로 고용되어 여 러 가지 일을 하였다 . 우리는 또한 그들이 용병으로 고용되었으리라 고 예측할 수 있으나, 여기에 대한 증거는 희박하다 . 이러한 과정은 그들의 최초의 왕 간다쉬 Gandash 가 옹립되기 전 거의 1 세기 반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카시트 시대(대략 기원전 1595 - 1171) 로 알려진 길고도 명예스럽지 못한, 아주 애매모호한 하메소포타미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아무루족과는 달리, 카시트족은 계곡의 원주민과 동화되지 않았던 것 같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바빌로니아의 상류 계 급과 다른 종류의 귀족 계층을 형성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간다쉬때부터 상업 활동은 쇠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아마 최초의 카시트 왕조의 어리석음의 결과인 것 같다). 왕은 그의 총신, 사제, 감독관 등에게 나누어주기 위하여 촌락의 보유지와 집단적인 부족의 토지를 매입하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칭발하는 방법으로 막대 한 토지롤 획득하였다. 이러한 토지의 양도를 기록한 왕의 옥쇄가 찍

힌 문서가 쿠두루 Kudurru 라고 명명된 석주(石柱)에 새겨졌으며, 그 목적은 새로이 획득한 재산의 보호를 위해 신의 가호를 빌기 위한 것 이었다. 카시트 정부는 개인 재산울 적절하게 보호하지 못하였기 때 문에 아마 이때에 이런 관습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여하간에 왕실의 관리들은 실재로 문제의 토지를 분배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다 음과 같이 말해지고 있다. 〈 왕에 의해 만들어진 봉토는 세습적이고 명확하게 주어졌으며, 그 이전 시기의 일쿠처럼 일시적인 것은 아니 었다• 봉토를 받은 자는 그 면세를 허락하는 문서를(갖고 있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갖고 있지 않는 한 그 봉토에 부과된 의무와 세를 지불할 의무가 있었다.〉 7 ) 이러한 면제권 문서의 조항에 의하면, 왕은 문제의 토지에 각종의 역(役), 부과금과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권한, 둑과 운하의 건설을 위한 노역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 수리권과 방목권과 군사적인 보호 권을 양도하였다 .8) 우리는 적어도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은대지가 세 습화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9) 특히 한 은대지는 세 왕의 통치 기간 동안 왕의 법정에서 소송에 계류되어 있었다 .10) 이 경우에서 우리는 만약 그 소유자가 후사 없이 죽거나, 혹은 소 유권에 대한 분쟁이 있다면 왕이 그 토지를 양도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왕은 그 은대지를 다시 양도할 수 있는 권한 이 의에 그 토지를 다시 회수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 못하였다. 7) L. Delap o rte , La Mesopo t a m i e : Les Civ i li sa tio n s Babyl o nie n ne et Assy ri e n - ne(Paris, 1923), p. 113. 8) A. T. Olmste a d, Hi st o ry of Assy r ia ( New York, 1923), p. 5 12 와 전형적인 쿠두루가 길게 인용되어 있는 Delap o rte , Mesop ot a m i e, pp. l1 4fT . 9) Kurig a lzu 3 세에 의해 양도된 봉토가 후에 그를 계승한 왕들에 의해 원래 의 양도받은 자의 후손에게 확인된 경우를 위해서는 Cambrid g e Anc ien t Hi - sto r y , II , 244 를 참조. 10) L. W. Ki ng , Baby lo nia n Boundary- S to n es and Memoria l Tablets in the Briti sh Museum(London, 1912), pp. 7-18.

촌락은 물론 도시들도 때때로 관리들에게 일반적으로 군역의 의무 를 지닌 은대지로 분할되어 양도되었다. 이렇게 양도된 토지는 왕에 의해 회수될 수 있었다 .11) 왕이 이런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던 때는 왕들이 신성화된 카시트의 후기 시대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 여 기서 국가가 통일되었다고 적어도 가상할 수 있고 실재로 상당 부분 통일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은대지 보유자와 왕을 결속시킨 개인적인 관계가 무엇인지 룰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은대지 보유와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우리 는 카시트의 봉신제에 관하여 결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아 없다(만 약 봉신제라는 단어가 적합하지 않다면 다른 형태의 종속 관계)• 아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카시트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봉건적인 요소가 전반적으로 이완되었을 것이다-이것은 중앙 권력의 점진적인 강화 에서 나온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카시트의 지배는 아시리아와 엘 람의 두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수년간의 혈두를 하였으나 끝내 그 계 곡에서 사라졌다. 이 지역에서 그 다음으로 나타난 파쉬 Pashe 왕조도 카시트와 같은 불안정한 패턴을 반복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두어야 한다. 위대 한 왕 네부카드네자르 Nebuchadne 끄 ar 1 세는 군사적 인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전차 부대의 한 대장에게 위험한 엘람의 국경에 있는 한 변 경 지역을 양도하였다. 이 변경 지방에 있는 촌락둘은 모든 왕실의 세금과 역으로부터 면제권을 받았고, 그 주민들은 제국의 관리에 의 해 체포되지 않았으며, 군인을 숙박시켜야 하는 의무로부터도 해방되 었다. 또 네부카드네자르 치세 동안에는 그들의 신의 이름을 갖고 있 는 사제들에게 양도된 토지에도 유사한 면제권이 주어졌다(이것은 그 계곡에서 카시트가 멸망한 뒤에도 봉건적 흔적이 남아 있었다는 증거 11 ) H. Radau, Baby lo nia n Expe d it ion of the Un ive rsi ty of Pennsy lv ania , Serie s A : Cuneif orm Texts , XVII (l90 8), Part I , 49ff .

가 될 수 있다 ). 12 ) 4 하티와 미타니 Hatt i and Mi tan ni 우리는 이제 바빌로니아 문화권의 주변에 있던 제 지역을 살펴보고 차례로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가 살펴볼 하티, 미타니, 시리아-팔레스 타인과 아시리아는 모두 기본적으로 메소포타미아 문화를 수용하였지 만, 이들 지역에서 발견되는 봉건적 혹은 그와 유사한 제도들은 반드 시 일반적으로 상호 연관된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이들 지역과 그 와 비슷한 성격을 가전 카시트와 바빌로니아 사이에서 끌어낼 수 있 는 봉건적인 유사점은 일반적으로 결론에서 설명되는 단순히 획일화 된 논리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과 갇다. 기원전 2 , 000 년 전반에 일어났던 북쪽과 동쪽의 대침략은 인도-유 럽인들이 남부 러시아 초원 지대에 있던 원거주지에서 이동함으로써 비롯되었다. 비인도 - 유럽어족인 카시트족은 인도 - 유럽어족의 동부 분파에 속하는 인도 - 이란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으나, 그들만이 이 러한 인종적 대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메소포타미아 지방 주변의 산 악 지역에서 가장 먼저 떨어져 나온 것은 아니다 . 당시 인도-이란의 잘 조직된 귀족의 지배를 받고 있던 또 다론 비인도-유럽어족인 후 리언 hur ri ans 족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와 시리아를 횡단하여 밀려 들어 왔다. 이 지역에서 그들은 강력한 미타니국을 건설하였다. 러시아 지방에서 온 인도-유럽어족의 서부 분파는 두 갈래로 나누 어져 보다 따뜻한 지역, 죽 한 갈래는 발칸 반도로, 우리가 관심을 갖 고 있는 다른 한 갈래는 보스프러스 해영을 건너거나 혹은 코카서스 지방을 통과하여 근동으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정복 민족들은 쇠잔해 12) Ki ng , Baby lo nia n Boundary - Sto n es, pp. 29-3 6, 96-9 8.

가는 수메르 문화의 영향하에 있었던 아나톨리아 지방의 비인도 _ 유 럽어족을 정복하여, 소아시아의 중부, 동부, 남부 지방에 일단의 왕국 울 건설하였다. 이들 왕국 중에 세력이 가장 강한 나라는 하투사스 (Hatt us as : 오늘날의 보가즈 - 코이 Bo g haz - ko y)에 수도를 둔 하티라고 불리는 히타이트 H ittit e 국이었다꼬 그들은 조그만 엘리트 계층을 형성 하여 토착민들을 지배하였고 이 점에서, 앞의 상황은 카시트족이나 후리언족의 상황과 유사하다. 구히타이트 제국은 아나톨리아 고원 지대의 중심부에 있던 조그만 도시가 밖으로 팽창하면서 형성되었다. 이웃하던 도시들을 연이어 복 속하면서, 히타이트 왕은 대체로 그의 아둘을 새로이 복속하였던 지 역의 제후로 삼았다. 이러한 제후들은 주군과 봉신 사이의 계약의 한 형태인 서면 계약에 의해 그들 영토가 안전하게 보존되고 그들 권력 이 세습적으로 싱속되는 것을 보장받았으나 히타이트 왕은 이론상 유 일한 통치자였다 .14) 그 대가로 종속적인 왕(위에서 언급한 제후)들은 그들의 히타이트의 왕에게만 신서 homa g여룹 행하고, 공물과 일정 수 의 군인을 제공하여야 했다. 신서는 종속된 제후들이 직접 왕의 수도 에 와서 행하는 연중 행사였다. 구히타이트 왕국이 일시적으로 붕괴 한 뒤에 나타난 신제국에서는, 이러한 종속적인 제후(반드시 왕의 핏 줄일 필요는 없다) 제도는 여전히 새로 획득한 지방울 지배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그 제국 자체 내에서는 왕이 임의로 해고할 수 있는 왕 에 의해 임명되는 총독이 종속적인 제후를 대신하였다 .15) 한 지역의 소왕(小王)은 동시에 다론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봉건 적이든 아니든 간에 이러한 히타이트의 통치 제도는 그 이전에 존재 하였던 중앙 집권적인 지배가 붕괴한 다음에 바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13) A. Goetz e, Kult ur ge s chic h te des a/t en Orien ts , m, Part I : Klein a sie n (Mu- nich , 1933) 은 아주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14) L. Delapo r te , Les Hi ttites (Pari s, 1936), pp. 180, 196. 15) Les Hi ttites , pp. !8lff.

점에서 대단히 홍미가 있다. 왜냐하면 그 계곡에서 아카드 또는 아시 리아의 지배를 고려의 대상에 넣지 않는다면(이것은 알려진 사실로 미루어볼 때 근거가 아주 희박한 가정이다) 그 고원 지대에는 자치권 을 가진 어떠한 대세력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제도 는 임시 방편적인 제도였지만 점차적으로 강력한 왕국 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소왕(小王)과 총독 이의에 왕을 중심으로 보다 밀접하게 결 집된 인도-유럽의 전사 귀족이 있었는데, 이들은 아마 부족적인 전통 을 이어받았을 것이다. 예속적인 왕들은 서면 계약에 의해 권력을 가 지지만, 이 전사 귀족 계급은 그들의 권력을 전통적인 특권에 의해 가졌다. 이것은 명사의 집회 Assembly of No t ables 를 살펴봄으로써 입 증될 수 있다 .16) 두 개의 계급, 죽 대귀족t he Greate Ones4 전사 계 급이 나타났다. 대귀족들은 분명히 이 집회의 구성원이었다. 그들은 충성 서약을 받기 위해 주기적으로 소집되는 집회에서 왕에게 충성을 서약하여야 했고, 무장 군인과 전차 부대를 왕에게 제공하여야 하였 으며, 전쟁에서 그들의 왕을 수행하여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왕이 친히 그들 앞에 나타나, 왕실에 대해 저질러진 범죄에 대하여 판결을 하는 데 왕과 더불어 참가할 수 있는 권한울 가졌고, 적어도 초기에 16) Delap o rte ( Les Hi ttites , pp. 171-172) 는 이 회의를 히타이트 국가의 봉건적 인 구조의 증거로 생각한다. 필자는 이 제도만으로는 업격하게 봉건제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다음과 같은 근거 없는 주장을 한다. 〈인도-유럽 어족의 히타이트족은 유럽에서 왔다. 히타이트족은 봉건제라는 개념을 유럽에서 가져왔다. 사람들은 훨씬 후에야 호머 시의 군주제에서 봉건제의 개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La Civ il i s a - tion des Hi ttites et des Hurrit es du Mi tan ni( P ari s, 1948), p. 111 의 저자 G. Con t enau 는 이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인도-유럽어족의 어떤 종족도 그들이 근동 지방에 둘어가기 전에 봉건제를 실시하였다는 명 확한 중거가 없다• 봉건제가,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전 지역으로 이동한 찰 조직되지 않은 민족에 의해 상품과 갇이 수입될 수 있다는 것은 주장되기 어렵다.

그들은 왕의 후사의 선택을 인준하는 데 소집되기도 하였다 .17) 왕은 그 집회에서 귀족들의 권한을 지지할 것을 서약하였다. 동시 에 사회 계층은 고정되어 있지 않아, 국가에 어떤 중죄를 지은 귀족 은 사회 신분이 농노 혹은 노동자로 전락될 수 있었다 .18) 물론 전사들도 왕이나 대귀족과 마찬가지로 인도-유럽의 혈통과 언어를 구사하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의 토지는 한 가족을 부양할 수 있고 그들을 전사로서 무장시킬 수 있는 정도의 크기에 지나지 않 았으며, 그들은 왕으로부터 양도받은 토지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전사 들 중 어떤 집단은 문서에 의해 부역 corve e¾ 면제받았다 .19) 왕은 분 명히 귀족들의 특권은 물론 전사들의 특권을 존중할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사회 구조를 히타이트 법전에서 밝혀진 토지 보유 제도와 연관시키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 법전에 언급된 은대지 보유자는 분명히 위에서 언급된 귀족 계급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20) 성직자 의 보유권과 도시에 속하는 어떤 집단적인 토지의 보유권 의에 세 가 지 토지 보유 형태가 있었던 것 같다. 정상적인 보유지는 매매될 수 가 있었지만, 언제나 왕에게 세금 또는 역을 바쳐야 했다. 이의에 히 파라스(hipp aras : 전사 계급?) 계층의 사람이 보유하는 토지가 있었는 데, 이 토지는 영구히 그 가족에 의해서만 보유되고, 그 가족은 왕에 게 봉사할 의무가 있다(법 48). 이 히파라스 계충의 사람은 개인적으 로는 체포되지 아니하는 중요한 특권과 절도죄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 로부터의 면책권을 가졌으며(법 49), 후자의 경우에는 히파라스 계층 의 전체가 그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들이 귀족인지, 그들의 특권에 사적인 사법권이 포함되어 있는지, 또는 그들의 토지가 농노를 가질 17) Delapr o te , Les Hi ttites , pp. 63, 66ff ., 170-172. 18) Les Hi ttites , pp. 66, 184. 19) Les Hi ttites , p. 185. 20) 영 역된 Anc ien t Near Easte r n Texts , pp. 188-1 97, 인용된 히타이트 법은 이 영역본에 의거함• 법 39-42- 2} 46-56 이 연관되어 있음.

정도로 대규모적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이 그룹이 면제권을 가전 전정한 봉신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은대지를 양도하는 표시로 왕은 그들에게 그의 식탁에 있던 빵을 주었다(법 47). 이때의 상황을 아주 개괄적으로 판단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히 타이트에는 세 가지 요소가 나타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이며, 귀족 계 충이 성장할 수 있었던 부족 귀족t r i bal pee rag e, 어느 면에서는 원시 적인 기원을 가졌으나 근동 지방의 왕제(王制)와 급속히 닮아간 왕제 그리고 종속적인 제후 제도(소왕 제도)가 그것이다. 이들 세 요소는 유럽 봉건제와 어떤 유사점을 갖고 있지만, 완전한 봉건제로는 발달 하지 못하였다. 왜 그렇게 발달하지 못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점과 관련하여 왕의 권력과 기능에 관한 세 가지 문제가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로, 히타이트는 그들 주위에 있던 민족, 특히 북쪽의 연안 산맥 지방의 가스가스 Gas g as 족의 맹렬하고도 계속적인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 위협으로 봉건적인 발달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있 었지만, 이 경우에는 봉건적 발달 대신에 고원 지대를 방어하기 위한 중앙 집권화한 군사 세력을 발달케 하였다. 그 결과 하티는 왕이 매 년 그의 예속자 de p enden t s 의 보병과 전차 부대로 구성된 상비군 s t an­ din g arm y울 전두지 휘하는 21) 아시 리아에 비견될 만한 호전적 인 국가 가 되었다. 둘째로, 우리는 그 국가의 종교적인 보호자로서 그리고 그 민족과 신의 중재자로서의 왕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국가의 안녕 과 풍년은 왕에게 달려 있었다. 왕은 이런 중차대한 책임을 귀족과 분담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아주 초기에 그 고원 지대에 유입된 수메르-셈계의 강한 율법주의의 전통이 있었는데, 이 종교적 율법주 의는 사법권이 지방주의화하는 경향에 강력하게 대처하였다. 왕의 법 이 히타이트의 법전이었으며, 그 법은 그의 관리에 의해 집행되었고 그리고 제국의 전체가 아니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지역에 적용되었다. 21 ) Delapo r te , Les Hit tites , pp. 206tT .

미타니의 사정은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히타이트와 동일한 것 같다(그들은 말을 사육하는 귀족, 죽 마르야누 mar y annu 에 의해 지지되는 강력한 군주제를 갖고 있었다)포 누주 Nuzu 지방의 발 굴로 인하여 미타니의 토지 보유제는 군역의 대가이든지 또는 부역의 대가이든지 간에 히타이트의 히파라스의 보유제와 유사한 점을 가졌 다는 것이 분명하지만 23) 우리는 이 같은 제도가 귀족들에게까지 확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시기에 나온 한 조약서에서 미타니 왕국 의 중앙 권력이 붕괴하는 동안 후리언의 마르야누가 그들이 획득한 독립적인 지위를 불안하게 유지했다는 점이 발견된다 . 24) 이 귀족들은 전차 부대와 보병 모두를 가졌다고 한다.

22) 사회 계급으로서 마르야누를 알기 위하여는 R. T. O'Callagh a n, Aram Naha- raim (Rome, 1948), pp. 66-6 8 를 참조. 23) 일쿠의 토지의 양도가 분명히 상류의 귀족 계층이 아니라, 촌락의 주민, 어 떤 경우에는 전사 계층에 연관되어 있는 한, 전형적인 누주의 sales-adop - ti on 은 봉건적인 요소가 될 수 없었다. sales-ado pti on 의 논쟁을 위해서는 P. M. Purv is, Commenta r y on Nu zi Real Prop er ty in the Lig h t of Recent Stu d ie s , Jo urnal of Near Easte r n St ud ie s , N (l 945) 를 참조. 24) Anc ien t Near Easte rn Texts , p. 318.

후리언족의 미타니 왕국을 연구하게 되면 당연히 아시리아를 연구 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두 민족은 기원전 l 心1 ] 기에 아주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후기 역사에서 메소포타미아 북쪽 너 머까지 팽창하였던 대아시리아는 영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전의 기 원전 15 세기에 후리언족이 이룩한 업적을 모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후기 시대를 살펴보기 전에, 당시의 서쪽의 상황을 먼저 고찰하여 야 한다 .25)

25) 만약 이용 가능한 자료가 충분히 있다면, 메소포타미아 문화권에 있는 다 른 지역들도 고려되어야 한다. 고대 근동의 역사 전체를 통하여 대아나톨리 지대는 특히 봉건적인 경향을 띠는 것 같고, 이 점은 그 자체로 홍미 있는 연구 과제가 된다. 바닉 Vann i e 지방에 있던 아시리아의 전통적인 적이었던 우라르두 Urar tu 에 대하여, Ni ch olas Adon tz는 다음과 갇이 말한다.

〈 urar t u 의 상황은 아슈르 혹은 하티 제국을 지배했던 것과 같은 원리에 기초 하고 있었다. 그것은 봉건 왕조였고 그로부터 urar t u 의 지배권인 ‘왕중왕'이라 는 칭호가 나온다. ……궁정 조직은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아시리아 궁정 조직과 다른 것일 수 없다. 〉 (H is t o i re d'Arnebie : Les orig ine s, Pari s, 1946, p.2 1 5)

5 시리아와 아시리아 시리아 _ 팔레스타인은 기원전 2,000 년대에 초기 청동기가 쇠퇴한 다 음 점진적으로 다시 정착되고 도시화되었다• 이곳의 연안 전역에서 이집트인의 활동이 재개되고 메소포타미아와의 교류가 증대되었다는 것은 이집트화되고 있던 아무루-가나안에서 점진적으로 문화가 깨어 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련의 충격적인 침략으로 인하여 이 반(半)농촌적인 사회가 동요 되었다. 기원전 1750 년과 1600 년 사이에 카시트, 하티와 미타니를 건 설했던 민족과 똑같은 혼합된 비인도-유럽계와 인도-유럽계의 전사 둘이 해안 지방으로 침입하여, 시리아의 북부와 동부에서 강력한 세 력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깊숙히 침입하였다 . 2 6) 그들

26) 이 전 지역에서부터 그들은 아무루와 후리언족 모험가들이 했던 것과 갇이 이집트로 침략해 들어갔으며(물론 트란스-요르단 초원 지대의 잡다한 부족 의 요소를 가지고), 거기에서 역사에 힉소스로 알려지게 되었다.

의 제 2 중기 청동기 시대는 이전보다도 훨씬 더 많은 상업적인 교류를 하였던 시기이며, 새로운 도시 국가 체제의 제도들이 나타났던 시기 이다. 우리는 편의상 이 시기의 잡다한 지배자들을 힉소스 H yksos 라 고부를 것이다. 힉소스인들은 상메소포타미아와 이란 계곡의 많은 문화 유산울 갖 고 왔다. 그러므로 그들은 단순한 무식한 야만족이 아니었으며, 그 반 대로 말을 사유한 전사 계급은 최신의 그리고 가장 무서운 전쟁 도 구, 죽 전차, 복합적인 활, 금속이 달린 화살촉, 투구, 비늘 달린 갑옷 과 신월도(新月刀)(이중의 일부는 이전에 이 지역에서 나타남)로 효율 적으로 무장하였다꼬 장방형의 도시-캠프 c ity - cam p와 경사전 피복 (被 覆 )과 갇은 많은 정교한 요새지를 축조하는 기술이 향상되어 어디 에서든지 새로운 도시와 성채가 건립되었다. 이 지역에 대한 발굴의 결과는 치열한 지방 전쟁이 계속 일어났고 도시가 끊 임없이 무너지고 다시 세워졌다는 흔적을 여실히 보여준다 . 28) 모든 유물과 유적은 힉소 스 시대의 번영과 불안정을 나타내고 있다. 정복 활동을 하고 있던 힉소스인들의 사회 형태에 관해서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하고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 팔레스타인에서는 물론 시리아에서도 알레포 Ale pp o, 알라라크 Alalakh, 카샤움 Khashah­ um, 콰트나 Qu atn a , 카르크미 쉬 Carchmi sh 등과 같은 잘 방어된 작은 도시들이 많이 있었다. 기원전 1,500 년경의 조잡하고, 호전적이며, 반 후리언화 한 무키쉬크 (Muk i shke : 알라라크가 수도임)국의 지방 군주 였던 이드리미 Id ri m i의 비문은 그 당시의 불안정, 영웅적인 약탈, 반 역적인 봉신들의 반란, 도시의 파괴와 급작스러운 상황의 변화에 대 한 현상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29)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전 27) H. E. Wi nl ock, The Rise and Fall of the Mi dd le King d o m in Thebes(New York, 1947), Chap. Vil l. 28) W. F. Albrig ht, The Archaeolog y of Paleste i n ( Harmondsworth , Eng ., 1949), pp. 90ff .

형적인 전(前)봉건적 또는 원(原)봉건적인 사회의 혼란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 사회는 그들의 세습 군주(토지 귀족이 아니라)의 주변에 가신의 형태로 모여든 도시에 거주하는 전사 집단 housecarles 의 사회 였다. 우리가 재편한 귀족의 영웅적인 성향을 나타내는 페니키아의 케레트 Kere t 서사시는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서사시에서 지배자인 케레트는 대향연에 그와 함께 초대되었던 70 명의 동료와 80 명의 귀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3 0) 파라오p harao h.£.서 나일강 어귀 의 삼각주에서 통치하였던 키얀 Kh y an 과 같은 힉소스의 지배자는 아 주 빈번하게 이러한 조그만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나라pri nc ip al iti es 들의 일부에 대하여 강력한 권한울 행사한 것 같다. 이러한 영향력하 에 있지 않았던 나라들은 독립권을 유지한 것 같다. 이 시기의 시리아 - 팔레스타인의 토지 보유권에 관한 사료는 거의 없다. 이 시기보다 뒤에 나타난 이집트 제 18 왕조하의 이러한 귀족적 인 도시 국가군에 대해 라이트 Wr ig h t와 필손 F i lson 은, 〈‘이집트 제국 의 지배하에 있던' 가나안 사회의 사회 조직은…… 아래로는 농노와 노예라는 하층 계급이 있었던 반면에, 위로는 왕과 일부는 이민족 출 신의 ‘전차를 탄 전사 char i o t war ri ors' 들로 구성된 귀족 계급이 있었 던 봉건 제도였다• 독립적이고 정열적인 중간 계급은 존재하지 않았 다〉 3” 라고 기술하고 있다. 위에서 주장된 것처럼 힉소스 사회가 정말 느슨하게 봉건적이었던 또는 아니었던 간에 그 사회는 최소한 귀족적 인 사회였다. 우리는 여기서 마치 봉건 시대라기보다는 영웅 시대를 29) W. F. Albrig ht, Some Imp o rta n t Recent Di sco veri es : Alph a beti c Or igins ad the ldrim i Sta t u e , Bulleti n of the Ameri ca n Schools of Orien ta l Re- search, No. 118(1 9 50), pp. l4 ff . 30) H. L. Gi ns berg, The Leg en d of King Keret, BASOR, Sup ple menta r y Stu d ie s , Nos. 2-3(New Haven, 1946), p. 24. 물론 동료pe er~ 귀족 baron 이라 번역한 것은 단순히 유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31 ) Wr igh t and Fil so n, The Westm ins te r His tor i ca l At las to the Bib l e(Ph ilad el- phi a , 1945), p. 36.

다루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목적상, 아시리아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5 시기로 구분한다. (l) 제 1 바빌로니아 왕조의 몰락기로부터 제 3 바빌로니아 왕조(카시트) 의 첫 12 왕들의 치세와 일치되는 시기는 거의 공백 상태이다. 이 시 기 중의 어느 시점에 한정된 범위의 도시 국가였던 아슈르가 있었으 며, 아슈르는 봉건적인 것 감지는 않다. (2) 그 다음 시기에(아마르나 Amarna 시대와 그 이후) 아시리아와 이웃의 보다 큰 나라들, 미타니 와 카시트의 바빌로니아와의 투쟁이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3) 아슈 르-우발리트 (Ashur - uba llit , 1362 년에 즉위)부터 티그라트 - 필레서 l 세 (T igr a t h - P il eser, 1114 년에 죽위)의 치세 기간 동안 , 제국이라는 개 념이, 특히 그 시기의 중엽기에 심한 반전이 있었기는 하지만, 아시리 아의 역사의 방향을 다시 바꾸어 놓았다. 왕의 세력이 신장될 때마다, 매년 왕이 전두 지휘하여 격심한 전쟁을 치르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티그라트-필레서 1 세는 이제 전형적인 근동 지방의 세력가로서, 왕권 울 획득하려는 자였으며 roy al hunte r , 주로 종속적 인 제후들로 구성되 고, 지방 행정권이 자신의 원래의 세력 기반이 된 지역에만 미치는 원초적인 형태인 제국의 군주였다 .3 2 ) (4) 티그라트구밀레서 이후에는 갑자기 암흑기가 도래한다. 왕위 찬탈이 이 시대의 특성이 되었으며, 아다드- 니라리 2 세 (Adad- n ir a ri, 91 I 년에 죽위 )까지의 약 200 년 동안, 아시리아는 다시 약해졌으며, 이 시기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 려지지 않았다. (5) 아다드 - 니라리 2 세때부터 아시리아는 천천히 대 제국의 시기, 죽 사르곤 왕조 Sar g on i ds 시기로 진입하며, 이 시기는 기원전 612 년에 니네베 N i neveh 의 함락으로 끝난다. 선험적으로 우리는 1 기의 후반, 2 기 그리고 아마 3 기 전반에서 봉 건제의 칭후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한 단계적인 발달은 이미 찰 알려진 봉건 사회의 발달과 유사한 것이다 . 봉건제의 잔재와 그 32) Olmste a d, His t o r y of Assyr i a , p. 6 6.

효과는 마찬가지로 예견될 수 있다. 사료가 제시하고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 찬란한 사르곤 왕조 시기 바로 직전인 5 기의 중반기 에, 많은 지방의 총독과 궁중 관리들이 독립하게 되었다.)” 샬마니서 Shalmaneser 3 세의 치하에서는 왕권이 급격하게 약화되기 시작하였 고, 샬마니서의 심복 대장군(t ur t anu, chie f man amd g eneral i ss i mo) 이 었던 다이언 아수르 Da i an Asur 는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와 거의 비슷 한 방법으로 왕의 많은 권리와 의무를 빼앗아갔다민 국왕 제조자 k i n g -makers 들과 귀족들이 샬마니서 때]와 그의 두 후계자의 통치 기간 동안 정국을 지배하였다 . 3 5) 이러한 만연된 귀족들의 소동을 종식 시킨 티그라트-필레서 3 세도 이전의 왕으로부터 막대한 토지와 면제 권을 부여받고 또한 왕의 권력을 빼앗은 대귀족이었으며, 처음에 그 는 이전에 그와 갇은 계급에 속하였던 귀족들의 특권에 대해서 세심 한 주의를 기울이기까지 하였다 .3 6) 길고, 가끔 중단되고 그리고 아주 혼란스러웠던 역사를 계승한 아 시리아 제국 시대 이전의 시기는 다음과 같은 정치 형태 중의 하나에 속한다. 이 시기는 후(後)봉건 시대나 혹은 전(前)봉건 시대에 속할 수 있으며, 아니면 두 시대에 모두 속하지 않을 수 있다 . 첫번째의 가 능성에 대해서, 죽 이 시기를 후봉건 시대라고 한다면, 이 시기는 우 리가 봉건 사회라고 규정할 수 있었던 사회가 너무 오랫동안 존재한 것이 된다. 두번째의 가능성에 대해서, 실제로 봉건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시대도 그 이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문제가 된 이 시 기가 부분적으로, 일시적으로 붕괴되었다는 것은 봉건제와 아무 관계 가 없다고 결론지울 수 있다. 아시리아인들은 그들의 원거주지인 산악 지방에 너무 오래 살았기 33) L. Delap or te , Le pro che- o rien t asi at iq u e(Paris , 1948), pp. 242- 2 43. 34) Olmste a d, pp. 152-1 53. 35) Olmste a d, pp. 167- 1 68, 172. 36) Olmste a d, pp. 175, 203-2 04.

때문에 침입자라고 생각될 수 없다. 논의의 목적상, 아시리아는 카시 트, 히타이트 등의 민족과는 달리 토착인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아시 리아에서 왕권(티그라트-필레서 1 세까지는 이미 확립됨)은 최고(最 高)이며, 신성하고, 놀랍게도 영속적이며, 위험한 환난을 견디어낼 수 있었다 .37) 아시리아 역사의 제 5 기 중엽의 불안한 시대처럼 통치권과 사법권이 지방 귀족들의 수중에 들어갔을 때, 이 귀족들의 권리는 왕 의 권리를 빼앗은 것이며, 정상적인 아시리아의 정체(政體)의 일부는 아니었다. 반면에, 중세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 봉건적인 지방주의는 하나의 이상적인 형태였으며, 그 자체는 오랜 역사적인 전통을 갖고 있었다 .38) 근동 지방에서 적의 침입을 가장 잘 받게 되어 있던 지역 에서 발생하였던 아시리아는 처음부터 호전적, 제국적이었으며, 완전 히 전쟁 지향적이었다. 아시리아의 전사 귀족인 마르 바누티 mar ba- nu ti의 수가 아주 적었으므로 그들은 아시리아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 하여 필요한 사제적, 관료적 그리고 군사적인 의무를 수행하도록 부 단히 이용되었다. 이 제도는 구세습적인 토지 귀족제라기보다는 본질 적으로 궁중 관리제였다는 것이 분명하다 .3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에 대한 보상은 직급의 승진과 아울러 막대한 토지의 지급이었다. 토 지의 양도는 전형적으로 왕이 특별히 허가하는 특허장의 양도였으며, 이 제도는 분명히 형태와 양식에 있어서 양도되는 토지, 농장, 그 토 지에 부속된 농노 그리고 세금과 부역으로부터의 면제권을 상술한 카 시트의 쿠두루를 모방한 것이었다 .40) 37) 아시리아 역사의 마지막기의 궁중 서한(書翰)은 전형적으로 왕 앞에서 신 민이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고, 수많은 다른 방법으로 아시리아 왕권의 중요성을 찰 나타내고 있다. R. H. Pfe iffer , Sta te Lett er s of Assyr ia( New Haven, I953), 특히 pp. 113-15~ 그의의 부분을 참조. 38) 대귀족 Bel Harran-b el-u sur 의 악명 높은 사건, Olmste a d, pp. 168-169, 203-204 를 참조. 39) 어떤 귀족들은 지방의 귀족과 전혀 다론 형태인 환관이었던 것 같다. Olmste a d, p. 15 瑾 참조.

40) 전형적인 아슈르바니팔 Ashurban ip al 치세때의 특허장의 원본을 보려면, C. H. W. Joh nes, Assyr i an Deeds and Documents Recordin g the Transfe r of Prop er ty , N(London, 1923, 165-166) 를 참조. 이 후기 시대에는(사르곤 왕 조) 그 양도는 일생 동안만이었던 것 갇고, 사후에는 왕에게 다시 회수되었다. 아시리아의 일쿠, 죽 은대지 보유 관계는 토지뿐만 아니라 도시와 그의 주민 도 언급하고 있다. 왕에 의해 각종의 의무가 면제되었으나 건설 사업을 위해 이전의 그 지방의 지방관에게 계속적으로 의무를 지고 있는 도시에 대해서는 R. H. Pfe iffer, On Baby lo nia n - A ssy rian Feudali sm , Ameri ca n Jo urnal of S~mi tic Langu a ge and Lit er atu r es, No. 39( 1922), p. 67 를 참조.

토지 귀족 이의에, 중요한 중간 계층의 토지 소유자, 죽 농민 그룹 이 있었는데 이들 중의 일부는 부유하였으며, 노예와 소작인을 소유 하였다. 이의에 상당히 많은 자치권이 주어져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번성한 제국의 자유 도시가 있었다. 4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 제국을 건설하였을 당시의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을 순전히 침입자 로만 간주하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아리안의 내지(內地)에서 남쪽 으로 장기간에 걸쳐 간헐적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그들은 우라르두,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엘람의 영토와 끊임없이 접촉하였고, 그들이 이들 문화와 접촉하던 3 세기 동안, 그들은 그 지역의 사상과 기술을 많이 흡수하였기 때문이다 .41) 이 시기는 단편적으로만 알려져 있는 그 들의 연대기에서 언급되는 시기이며, 대부분의 부족 집단은 이미 오 래전에 부족적, 유목적인 단계를 버리고, 가끔 요새화되었던 자그로스 Za g ros 에 정착하였던 시기였다. 7 세기경에 이러한 정치적 기반 위에

41) 키루스 C yr us7} 메디아 재국을 정복하기 거의 끄 1 기 전, 샬마니서 3 세의 통 치 기간인 기원전 9 세기 후반에 처음으로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의 역사가 기록되었다.(A. T. Olmste a d, His to r y of the Persia n Emp ire, Ch ica go , 1948, p.2 2)

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체제가 접목되었다 .42) 이러한 발달(거의 기 억할 수 없는 부족적인 유목 시기, 그 다음의 촌주(村主, 부족장)의 지 배하에 있던 긴 시기와 마지막으로 왕제의 발달)은 근동 지방에서 거 의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명확한 정치 발달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고, 초기 아케 메네스 Achaemen i d 왕들의 지배하에서 발생한 귀족들의 다 이나믹한 역할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정치 발전은 그 시대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에 언급하였다.

42) 기원전 714 년에 사르곤 왕조는 단지 일련의 지방 메디아인과 전쟁을 하였 을 뿐이다 .(Olms t ead, Hi st o r y of Aszy r ia , p. 23l) 정확히 1 세기 후에, 재편 된 군대를 지휘하였던 왕 샤샤레스 C y axares(Olms t ead, Hi sto ry of the Per- sian Emp ire, pp. 3l tT.)는 그 계곡의 북쪽 지방울 침략하였고, 아시리아에 대 항해서 나보포라사 Nabo p olassar 와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714-614 년 사이 에 이란의 왕제(王信 I], k i n g sh ip)가 기원하였다. 이전에 산재된 촌락에서 그 들 지방의 족장의 지배하에 있던 메디아인이 데이오케스 De i oces 를 법의 제 정권을 가진 왕으로 선출하였는데, 헤로도두스가 메디아인에 대한 역사를 서술하였을 때는 이 시기를 염두에 둔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이 이야기 를 받아들일 수 없지만 (Geor g e Cameron, Hi sto r y of Early Iran, Chic a g o, 1936, pp. 176-177), 그것은 본질적으로 이란의 왕제도 역시 메디아인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왕제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분명 히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배제하여서는 안 된다. 메디아의 남쪽에서 페르시아인들이 스스로 자신이 〈대왕, 왕중왕, 파르사 Parsa 의 왕〉이라 칭한 지도자를 선출하였다. 그 반면에 이 지도자의 아버지 는 단지 도시인 안샨시의 왕ki n g of Anshan 에 지나지 않았다 .(H i s t o ry of the Persia n Emp ire, p. 29)

아케메네스 왕조 정체의 특징은 신에 의해 왕권이 인정된 중앙 집 권 정부이었다. 귀족제는 이 정부의 근간이 되므로, 여기서 귀족과 왕 의 세력 균형에 대해 정확한 연구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참시 초기 시대를 살펴보면, 제국이 되기 전의 페르시아에는 성직 자, 전사와 경작자로 나누어전 사회 계층(본질적으로 베다 ved i c 족의 사회 계급과 유사한)이 있었다. 이 초기 부족 국가 시대의 두번째 계 급은 전차 전사 Charr i o t war ri ors 둘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이 역사에 나타나기 시작하였을 때 토지와 비드 v it h - ―비드페이티스 Vi t h p a iti s 의 지배하에 있던 영토의 주변에 모여 형성한 촌락의 부족 ―_ 의 관계에 의해 그들의 지위가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43) 전 사들이 이러한 관직을 점유하였다는 것은 명백하다 . 이러한 발전을 하면서, 비드페이티스는 그의 부족장적인 재판권과 특권 이의에 막대 한 토지의 보유로 생긴 사회적인 세력을 갖게 되었다 . 44) 이것은 메디 아의 영주에게 반란을 일으킨 키루스가 페르시아 제국을 형성하였을 때와 갇은 상황이다. 아득한 옛날에 갖고 있던 부족적인 전통, 전쟁에 서 지도자의 특권 그리고 영토 소유자가 지위를 통해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을 배경으로 하여, 비드페이티스는 영구히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여(세력이 가장 막강한 7 개의 가문이 입증하듯이) 아케메네스조, 셀 레우코스조 Seleucid , 파르티 아조 Par t h i an 와 사산조 Sassania n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그들은 계속 존속하였다 .4S) 키루스때부터 이 귀족들은 왕실 회의, 군대, 고위 관직, 지방 장관직에서 그들의 위치를 확고하 게 잡을 수 있었다• 그둘은 그들의 광대한 토지, 그들의 가신과 그들 에게 예속된 자들에 대해서 왕으로부터 독립된 면제권을 주장하였으 나 ,46) 여전히 그들은 보다 큰 왕실의 목적을 위해서 일반적으로 왕실 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 귀족둘을 왕의 전차 부대에 예속시킨 인물은 조직에 탁월한 능 력을 가전 다리우스 Dar i us 였다 .47) 아후라_마즈다 Ahura-Mazda 에 의 43) M. Eht ec ham , L'Iran sous /es Achemenid e s(Swi tze rland : Fr ibo urg, 1946), pp. 18- 4 1. 44) Ehte c ham, p. 5 0• 바드페이티스의 권력은 그가 가지고 있는 토지 재산의 중 요성과 그에게 개인적으로 종속된 사람의 수에 기반을 두고 있다. p. 21, 주 4) 를 참조. 45) 아케메네스조의 비드페아티스는 사산조의 바스푸란 Vas p uhran 이 된다. 아 래 pp. 179-1 8 여룹 참조. 4476)) EEhhttee cc hhaamm,, pppp.. 6I 414fff .f, . 84, IO! ff.

해 주어전 왕권은 신성하였다. 귀족들은 왕에게 봉사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징병 군인을 제공하여야 하였고, 그들 역시 더 큰 세력을 갖 고 있는 왕의 소환에 응해야만 하였다. 비드페이티스를 행정을 담당 하는 지방관으로 이용함으로써 , 총독의 의무를 장군의 의무와 분리시 킴으로써, 아주 철저한 정보원 제도를 유지함으로써, 아케메네스 왕들 은 귀족의 정치적 세력을 효과적으로 제한하였다. 아케메네스 제국이 존속하는 동안, 비드페이티스의 토지에 대한 면제권과 법률상 제한된 다른 면제권이 계속되기는 하였으나, 정치 권력을 분할하기 위하여 왕과 귀족이 개인적으로 협정을 맺은 제도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이 협정은 그 다음에 나타나는 파르티아와 사산조 시대의 기초가 되며, 이 두 시기는 앞서 있었던 아케메네스의 업적을 기반으 로 하지 않으면 설명될 수 없다. 이론상, 왕은 절대적이었다. 실제로 아케메네스국에서 왕과 귀족들 은 꽤 안정된 공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가끔 왕을 암살하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왕위 그 자체를 공격하지 않았다. 제국 말기에는, 특히 완강히 저항하 던 지방관들이 군주제를 나약하게 만들었고 이 상황은 마치 야심적인 장군들과 총독들이 각자 그 자산의 지배하에 로마의 권력을 장악하려 한 때인 3 세기의 로마 제국의 혼미한 상황을 연상케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아케메네스 시대가 붕괴하면서부터 봉건제가 나타난 것은 결 코아니다. 7 파르티아 체제 역사상에 나타나는 파르티아인들은 기원상으로 카스피해 동쪽의 초 원 지방에 있던 다해 Dahae 부족에 속하는 반유목적인 이란족이었다 .

그들은 방랑 생활 끝에 기원전 250 년경 페르시아의 파르타바 Par t hava 주(州)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들은 후에 이 지역에서 제국으로 발전 하였다. 쿠人투프체프 Ros t ov t ze ff에 의하면 〈 파르티아 제국의 봉건 구조는 아르사세스인이 아케메네스인들로부터 물려받았고, 파르티아인들에 의 해 사산조 왕들에게 전달되었다 〉 고 한다 .4 8 ) 이 주장은 방금 설명한 이 유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후대에 무엇을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살펴볼 것이다 .49) 여기서 우선 느슨한 파르티아 제국이 봉건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지의 여부가 결정되어야 하며, 만약 그렇다면 파르티아 봉건제의 기원이 되는 여건이 무엇인지 결정되어야 한다. 알렉산더가 죽자, 그의 미완의 제국은 몇 개의 국가 로 분열되었다. 이 분열된 국가 중의 하나인 셀레우코스 제국도 특히 기원전 189 년에 안티오쿠스 An ti ochus 3 세의 처참한 패배 이후에 보다 작은 국가들로 분열되었다. 이 분열된 보다 작은 국가들, 죽 엘리메이 스 Ely ma i s, 카라신 Characene, 메디아 Med i a, 페르시스 Pers i s 동은 이전 에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주에 지나지 않았다. 미스라다테스 M it hrada t es 1 세가 카스피해의 관문을 지나 서쪽에서 의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파르티아의 영토를 더욱더 확장하였을 때, 그가 정복하였던 지역은 잘 조직된 제국이 아니라, 각기 독립된 지배 계층을 갖고 있던 이미 분열된 독립 소국가둘로 구성된 지역이었다 . 페르시스와 사카스틴 Sacas t ene 과 같은 일부 국가들은 토착 세력에 의 해 지배되는 것이 허용되었고, 독립적인 화폐 제도등의 권한을 소유 하는 예속 국가 중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를 가졌다. 또 파르티아는 어떤 국가에는 아케메네스의 지방관보다 더 독립적인 마르즈반 (mar­ zbans: 총독 혹은 장군)-카롤링거조의 백작과 아주 유사한-울 48) Cambrid g e Anc ien t His t o r y , Xi, 117. 49) pp. 1 16-119.

임명하였댜 아랍의 어떤 국가 혹은 그리스 도시들과 같이 쉽게 복속 되지 않았던 국가들은 왕과 지방관에 의해 공동으로 지배되었다. 그 리고 국경 지방에는 변경주 marches 제도가 유지되었다. 바꾸어 말하 면 파르티아 제국은 끊임없이 무력을 행사함으로써만 결속될 수 있었 던 임시 방편적인 제국에 지나지 않았으나, 거의 3 세기 반 동안 존속 될 수 있었다.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로마 제국의 이상(理想)이라는 힘(교황, 카롤링거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을 통하여 다양하게 표현되었다)이 유 럽에서 서유럽 봉건 사회의 특성을 부여하고 이론상으로 서유럽을 통 합하였다. 만약 파르티아의 봉건제를 전정한 봉건제라고 한다면, 마찬 가지로 파르티아의 봉건 사회를 통합시키는 요소로 나타난 것은 키루 스와 다리우스의 오랜 영향이라고 할 수 있으나 다음과 같은 차이는 있다. 그 도시들울 지탱하였던 광범위한 상업 활동이 지속되었던 것 처럼, 이 시기 전체를 통하여 대도시들이 계속하여 존속하였기 때문 에, 파르티아의 경우는 그 이상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왕의 수도인 체시폰 C t es ip hon 은 광범위한 무역로상에 놓여 있었다. 파르티아 제국 은 중세 유럽보다도 화폐가 풍부하였고, 이 점에 있어서 토지에 기반 을 둔 봉건적 인 토지 보유와 같은 제도는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파르티아 제국 자체가 이 상업 활동에 종사하지 않 았다는 접은 지적되어야 한다. 화폐 경제를 유지시킨 사람은 시리아, 아랍, 바빌로니아, 그리스 상인들이었다. 수렌 Suren, 카린 Karin , 게 파르트란 Gewp ar th r an, 미 란 Mi hr an, 아스 파바드 As p ahbad 와 같은 유명한 가문들이 있었다. 이 가문 중의 일부 는 원래 파르티아 종족이었으며, 정복의 결과 파르티아의 왕이 이들 에게 막대한 토지를 양도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수렌가(家)는 메소포 타미아에, 카린가(家)는 니하완드 N i hawand 근처에, 미란가(家)는 메 디아의 라게 Rhaga e 근처에, 그리고 게파르트란가(家)는 히르카니아

H y rcan i a 에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였다. 그들 토지의 대부분이 위치하 고 있는 주(州, sa t ra pi es) 의 총독은 이들 가문에서 임명되었다고 흔히 주장되고 있다. 이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귀족은 예속국의 토착 귀족과 구별되어야 한다. 파르티아의 귀족과 9, l()).-j] 기 의 프랑크와 튜돈의 귀족은 쉽게 비교될 수 있다. 파르티아인들은 이상하게도 역사에서 특색이 없는 민족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회적으로 그들은 말을 타고 생활하는 지 배 계급으로 특칭지을 수 있으며, 말을 타고 전쟁과 사냥을 하였다. 4 세기에 걸친 풍부한 바빌로니아의 전통, 헬레니즘 문화, 로마의 우수 한 정치 제도와의 접촉과 중국과의 교역으로 인한 자극도 이들에게 괄목할 만한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계급이 포악하였 다는 것은 당대의 아르메니아의 아르사세스 왕이 그들의 송곳니를 뽑 아버리려고 한 시도에서 감지할 수 있다. 루이 l 心1 ] 와 마찬가지로, 그 왕은 그들에 대해 철저히 감시하기를 원하였고, 이 목적을 위해서 그 왕은 그들에게 그들의 토지를 떠나 궁중의 주변에서 살도록 명령하였 다 . SO ) 이 파르티아 귀족의 수는 적었던 것 같다. 오르데스 Ordes 2 세 치하 의 최대 의 파르티아 귀족인 수레나스 Surenas 는 그의 개 인 가신으로 갑옷을 입은 천 명의 기사 (ca t a p hrac t s : 창과 칼로 무장한 중무장한 기사)를 가졌고, 탄 Tarn 의 주장과 같이, 이 사실로부터 파르티아 기 사 전체의 수가 단지 약 6,000 에 지나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51) 보다 하급의 귀족이 존재하였던 것 같고, 하급 귀족들은 아마 스페인 의 하급 귀족 h i dal g o 과 마찬가지로 수가 좀더 많은 경무장한 기마 궁 수였을 것이다. 보다 상급의 귀족들은 아르메니아와 비슷하게 왕이 양도한 대토지 50) A. Christ e n sen, L'Iran sous /es Sassanid e s(Cop en hage n , 1944), p. 24. 51 ) Cambrid g e Ancie n t Hi st o r y, IX, 601 .

롤 소유하였으며, 일반적인 통치권(면제권)과 특정한 관직을 갖고 있 었다. 토지의 크기와 정치적 권위를 동일시하는 경향, 그리하여 그 관 직을 세습적으로 보유하게 되는 경향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강력 한 왕은 한 가문의 권력을 빼앗아 다른 가문에게 다시 그 권력을 부 여할 수 있었다. 반유목적인 배경을 가진 민족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파르티아의 귀족은 부족적인 성향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파르티안계의 후손인 대귀족 가문은 그들만의 회의체를 구성하였고, 그들의 조언과 선거권 electi ve po wer~ 국왕의 통치권을 상당히 제한하였다. 보통의 봉건적 인 궁정 cour t과 마찬가지로, 이 회의 counc i l 는 그 자체가 왕과 같은 지위에 있는 자들의 집단으로 간주되었다. 아르사세스 가문이 왕이 갖고 있는 특권을 가지는 것처럼, 각 가문은 그 가문의 고유한 특권 을소유하고 있었다. 파르티아 귀족의 분열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 아르사세 스 가문의 특권을 존중하였다는 것은 홍미로운 일이다. 그들이 아르 사세스의 왕을 암살하거나 또는 폐위시킬 수 있었을런지는 몰라도, 그들은 반드시 아르사세스 가문 출신을 그의 후계자로 옹립하였다. 여기서 고도로 발달된 세습적인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아케메네스의 중앙 집권적인 전통과 더불어 순수한 파르티아의 전 통 때문에 강력한 왕은 귀족들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상 황은 중세 유럽에서 볼 수 있는 상황과 다르다. 파르티아의 왕들은, 이전의 아케메네스의 왕들처럼, 그들 자신을 왕중왕이라고 불렀고, 그 들 자신의 사냥터, 정원, 여름 궁전 summer pal ace, 환관, 하렘 harem, 친위대, 재판관을 가졌으며, 그의 개인적인 보고(寶庫)에는 정복 지역 에서 온 공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아마 독재 권력을 휘둘렀을 것 이다. 그래서 파르티아는 부분적으로 봉건적, 부족적 그리고 동양의 독재적인, 철저히 혼합된 제도를 갖고 있었다.

8 사산조 체제 기원후 224 년에 왕중왕의 칭호를 가전 아르다쉬르 Ardash i r I 세는 그의 종주였던 파르티아 왕에 대한 반란에 성공했다. 그 결과 구제국 의 폐허 위에서 사실상 구제국이 지배하던 지역을 지배하는 활기 찬 제국이 다시 건설되었다. 권력의 이동이 아주 쉽게 이루어졌기 때문 에, 사회 조직 내에서 작용하고 있던 힘은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정복이라는 바로 그 사실은 파르티아 체제하에서 결 코 소멸되지 않았던 중앙 집권적인 전통을 새로이 강조하는 것을 의 미하였다. 사실상 파르 Par 지방에서 성장하였던 샤산조의 왕들은 아 케메네스 왕조의 독재적인 정부 구조에서 자신들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식적으로 재확립하였다. 파르티아 체제하에서보다는 사산조 체제하에서 사회가 더 계층화되 고 더 복잡하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 성직자 계급, 전사 계급, 관료, 도시 bour geo i s i e 의 주민을 포함한 일반민 등, 전체 4 계급이 있었다. 두 번째 계급, 죽 전사 계급이 분화되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들 계급의 서열을 위에서부터 차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샤르다란 Shahrdaran ―― 제국의 제후들pri nces. 이들은 속국의 왕들, 속국의 유력자들(히라Hi ra 등의 아랍왕들처럼), 각종의 총독직에서 통 치 기술을 연마하고 있던 황실의 자손들과 마르즈반들이다. 이들 모 두는 왕의 칭호를 가졌다. 이 계급은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비(非)사산조, 죽 비(非)이란계의 속국의 왕들인데, 이 왕들은 세습적 으로 그 속국울 통치한다. 다른 하나는 정부에서 임명하는 사산조의 총독들이다. 바스푸란 Vas p uhran 一-대토지를 소유한 가문의 귀족들. 7 개의 유명 한 가문이 나타나며, 일부는 파르티아 체제에서부터 계속 존속하였다.

이들 가문은 사산조, 카린, 수렌 Suren, 아스파바드, 스판디야드 Sp an­ diy ad h, 미란, 지크 Zik 가문이 다. 부주르간 Vuzur g an- 〈 유력자t he Great> . 제 국의 각종의 행정 기관 의 장(長). 아자단 Azadhan- 자유인 또는 귀족(t he or men). 주(州)정부의 소관리, 소귀족. 토지를 경작하지 않을 때 군대에 근무 하는 소기사들도 아마 이 계급에 속하였을 것이다. 위에서 열거한 계서제는 중앙 정부가 최고의 권한을 가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귀족은 이제 두번째 계급, 죽 전사 계급에서 하찮은 역할밖 에 하지 못하였다. 왕중왕의 지배하에 있는 중앙 정부는 일단의 대신 (大臣)들-각 대신은 그 자신의 자문· 기구 d i van 와 문인 관리를 가 짐― ― 에 의해 운영되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정부의 권력이 더욱더 증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무장한 기사(이제 의 형상 중세 유럽의 기사와 구별할 수 없는)와 기마 궁수가 여전히 군대 의 중추였 지 만, 코끼 리 부대 와 보조 부대 eleph a nts and aux ili ar i es 의 수가 다시 증가되었다. 군대는 사령관인 동시에 국방 상인, 정규적으 로 임명되는 관리, 죽 에란-스파바드 Eran-s p ahbadh 에 의해 통솔되었 다. 초기 파르티아 시대에 수렌가(家)가 소유했던 것과 갇은 사적인 기사단은 없었다. 귀족들의 특권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느 정도까지 왕이 그들의 토지에 대해 간섭을 할 수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면제권에 대한 언 급은 어디에도 없다. 7 개의 대가문이 세습적으로 어떤 관직을 보유하 였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왕위는 물론 사산조가(家)에 속하였으나, 기사에 대한 감독, 조세와 재무, 일반 행정, 법적인 중재 등에 대한 세습적인 감독권은 다른 가문에 속하였다. 관료제의 출현과 정부의 절대주의적인 성격 때문에 이러한 세습적안 감독권은 이 시기 동안에

는 실질적인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번째 계급에 속하는 가문은 관습과 법에 의해 순수한 혈통을 유 지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귀족 가문이 쇠락하고 마침내는 그들보다 계급이 낮은 상인 계층과 정부의 관리 계충에 동화되어 갔다. 거꾸로, 왕은 공적 (公續)이나 또는 봉사의 대가로 새로운 가문을 귀족으로 승 격시키는 권리를 가졌으나 이 권리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성직자 들은 이 귀족 계급 출신이 아니었으며, 레비 Lev i가 히브리인의 성직 을 독점한 것과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옛날의 부족 내에 있었던 현자 (資者, Mag i) 출신이 성직자가 되었다. 귀족으로서 바스푸란은 그들의 거주지가 있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 던 토지뿐만 아니라 제국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토지도 소유하 였다. 그러나 왕실령과 비교하면 이러한 토지는 규모가 아주 작았다. 귀족들은 마르즈반과 같은 고위 행정직들을 차지하기는 하지만, 한 가문이 이 행정직들을 쉽게 세습적으로 독점할 수 없었다. 바스푸란 의 실제 권력이 약화되면서 나타난 자연적인 결과는 전정한 궁중 귀 족 noblesse de cour 으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귀족들은 이전에 갖고 있던 권력보다는 왕중왕의 궁중의 매력, 흥분과 문화에 더 도취되었 던 것 같다. 이 궁중을 중심으로 한 통치 형태를 가진 사산조 시대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우리는 간단하게나마 그 특칭을 살 펴보아야 한다• 제국의 팽창, 허세, 의식주의 ceremonia l i sm , 요약하면, 왕중왕이라는 개인을 중심으로 풍부한 문화적 제 수단이 집중되어 있 었기 때문에 카바드 Kavadh 와 두 쿠스로스(K.h usros, 기원후 488-628) 시대는 겉으로는 루이 1 때] 시대와 거의 유사하였다는 인상을 준다. 하층 계급도 루이 l 때] 시대와 같이 침울하고 비참하였다. 수도와 그 주변은 이제 많은 귀족들의 집합지가 되었다. 귀족의 자제들은 시동 으로 궁중에 보내져 문학, 신학, 음악, 천문학, 마술(馬術), 사냥 등의

기술을 배웠다. 유럽 중세 전성기 시대의 귀족 출신 여자들과 마찬가 지로 귀족 출신의 여자들은 남자들과 같이 사냥 놀이에 참가하였다. 귀족들은 궁중에 머물 수 있도록 경비를 일부 받았고, 군대에 봉사할 때는 처음으로 봉급을 받고 봉사하였다 .52)

52) 그 시대가 얼마나 복잡하였는가는 모든 동양적인 혁명 중에서 가장 홍미 있는 혁명인 마즈다카이트 운동 Mazdak it e movemen t에서 찾을 수 있을 것 이다. 이 운동은 하층 계급 사이에서 일어난 반종교적인 반란이지만, 궁중 세력이 그들에게 열렬히 동조하였다. 이 반란의 목적은 부를 다시 분배하여 탐욕을 뿌리째 근철하려는 것이었다• 카바드 왕은 이 운동에 매료되어, 최초 로 어떤 호의적인 법을 제정하였다. 이 사회 반란의 와중에서 귀족들이 살 해되고、 그들의 성이 약탈당하였으며, 부인들이 체포되고, 그들의 재산이 파 괴되었다. 교회와 귀족들이 격렬하게 저항하여 그 반란을 진압하였으나, 귀 족들은 극히 약화되어, 다음의 왕들 특히 쿠스로스 1 세와 2 세의 전제적인 지배를 보다 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38 년간 통치하였던 쿠스로스 2 세가 죽자, 제국의 중앙 집권적인 전 구조가 붕괴되었다. 총독둘은 사실상 독립하였고, 바스푸란은 그들이 잃었던 권력과 세력을 다시 회복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대가문이 정 부의 어떤 행정직을 세습적으로 보유하면서 10 세기까지 계속 존속하 였다는 것은 홍미 있는 일이다. 이 페르시아의 귀족 기 문들은 아주 확고한 지위를 확립하였으므로, 찰 알려진 바와 같이, 그들은 새로운 이슬람 세계에서도 그들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분명 히 그 세계를 형성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632 년에 사산조 제국은 광신적인 이슬람인들 앞에 붕괴하였다. 9 결론 이제 다시 자료를 검토해 보면, 참정적으로 봉건제라고 불릴 만한 것이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주로 첫째, 기원전 2,000 년대가 시작할 무

렵에 인도-유럽인(히타이트롤 포함하여), 카시트, 후리언족의 침입과, 둘째, 훨씬 뒤의 메디아-페르시아인과 파르티아인의 출현의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카시트의 경우에는 이전의 중앙 집권적 인 정부를 약화시킴으로써, 봉건적 발달의 씨앗이 뿌려졌을지도 모론 다. 하티의 경우에는, 히타이트족이 도래하기 이전에 아나톨리아 지방 에서 어떠한 강력한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약화된 중앙 집권적인 선례를 메소포타미아의 제도를 모방한 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아시리아 봉건제의 경우는 침략과는 쉽게 연관될 수 없으나, 이 지역은 이전에 통일이 되어 있었던 좋은 예이다. 이 T 구축의 침입과 같은 초기의 침입은 봉건 제도를 창출하지 못하 였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53) 그 차이는 첫째 초 기의 그룹은 말을 사육하지 않았던 민족이었던 반면에, 히타이트, 후 리언, 힉소스인 둘은 말을 사육하던 민족이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 당시에 말은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침략의 성공을 위한 도구였던 말과 전차는 귀족적, 기사적인 전사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경향을 가졌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다. 농 업적, 상업적 사회에 갑자기 들어온 비싸고, 기동력 있고 치명적인 전 쟁 무기 때문에 소수 집단이 고대 근동 지방에서 효율적으로 권력을 휘두를수 있었다. 그러나 말과 전차를 사용했다는 것만으로 이 질문에 대해 완전히 답했다고 할 수 없다. 보다 복잡다단한 사회 관계도 역시 연관되어 있다. 근동 지방에서 부족의 침입이 성공한 후에 나타난 정체에서, 군 사 세력(침입자들이 소유한)과 문화적인 세력(침입당한 자들이 소유 한) 간에 거의 자동적인 세력 균형이 확립되는 것 같았다. 죽 그 사 회가 전 구성원들이 그 사회의 치밀하고 제도적인 목적을 다시 확신 53) 메소포타미아 역사에 있어서 아무루족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또 다른 입 장에 관해서는 아래 pp. 360-36 2 를 참조.

할 때까지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에 임시 방편적인 생활 방식이 존 재하였던 것 같다. 카시트, 히타이트와 아르사세스의 경우는, 이질적 인 소수 부족이 그들의 통치 부담을 덜어주는 데 필요한 문화적인 도 구 없이 (처음에) 지배권을 차지하고, 그 결과 갈등을 거의 해소하지 못하고, 전정한 봉건제가 아니라 봉건제와 유사한 제도를 만들었던 좋은 예가 된댜 왕국과 제국에 대한 동양적인 개념이 이 갈등을- 완 화하였고, 때로는 그들의 목적에 맞게 이 갈등을 완전히 이용하였다. 아케메네스, 사산조의 경우는 그들이 차지하였던 지역에 남아 있던 전통에 짖었다는 점에서 이민족들과는· 다르다. 여기서 얻은 자신감 때문에 그들은 곧바로 왕국에서 제국적인 지배로 전환할 수 있었다. 사산조의 봉건적인 전통은 파르티아 체제를 이어받은 것이다. 또 다 른 면에 있어서, 사산조의 경우는 그들에게 권력을 안겨다 준 혁명은 문화적인 전통을 다루는 데 익숙지 못한 이민족의 침입이 아니라, 구 페르시아적인 요소가 재출현하였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제시된 경우와 차이가 있다. 이 마지막 두 경우를 생각해 보면, 위에서 제기한 아무 루족에 대한 질문의 답이 나올 것이다. 아무루적인 요소가 메소포타 미아 계곡에 유입되는 과정은 상당히 길었다• 메소포타미아 계곡에서 접한 문화는 먼 옛날부터 인접하고 있는 셈족의 요소의 지속적인 유 입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급격하게 권력을 재분배하여 침입자와 피침입자 사이에 문화적인 이원성이 작용하지 않았다. 카시트, 히타이트와 아르사세스의 침입과 같은 이민족의 침입의 경 우에는 상황의 논리가 즉각적으로 작용하였다. 침입자의 수가 소수였 다는 사실 때문에, 획득한 권력을 단순히 유지하기 위하여 절박한 노 력을 기울여야 했고, 이것 때문에 모든 전사들이 철저히 이용되고 계 속적으로 동원되었다. 그리하여 토착민 위에 군림하는 이민족 귀족의 성장을 촉진하였는데, 이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초기의 자치적인 수메르 도시 국가의 전형적인 관리, 죽 엔시 ens i의 지배와 대조를 하

면 바로 그 차이점을 알게 된다• 여기서 국가의 안녕은 신(神)과의 계속적인 우호 관계를 확립하는 데 있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국가는 국가의 관리, 즉 엔시를 고용하였다. 수단과 목적의 통합은 논 리적인 결과이었으며, 이것은 내적으로 생각되고 또 수행되었다. 이민 족의 전사가 지배 계급이 되는 것은 또 다른 통합을 필요로 하며, 새 로운 그룹이 오로지 권력을 유지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면서 이 통 합을 강제한다. 이 통합은 군주제일 수도 있고 봉건제일 수도 있으며, 또한 두 제도 모두일 수도 있다. 이 절의 처음에 우리는 침입한 민족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아시 리아를 제의하면 하나의 거대한 인종적 대변동의 결과로 나타난 사회 였던 첫번째 그룹과는 달리 우리가 논의하였던 사회의 두번째 그룹인 아케메네스, 파르티아와 사산조 인들은 정확히 시대순으로 그 요소들 울 이어받았다는 점에서 하나의 단위를 이룬다. 즉 첫번째 그룹과는 달리 페르시아와 파르티아 인들은 침략 민족이고 말을 사육하는 민족 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나타나기 오래전부터 근동 지방에는 말이 알 려졌으므로, 이 경우는근 상호 비교될 수 없다. 초기와 분석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후기 사이에는 전반적으로 미묘한 차이가 있다. 페르시아와 파르티아 인이 지배하던 근동 지방 의 상당히 많은 부와 인구는 침입자의 에너지를 많이 흡수할 수 있는 완충제가 되었고, 경제적으로 지방 귀족의 극심한 부담을 줄여주었다. 그들이 침입해 들어간 그 시대의 사회 제도는 더 오래되었고, 활기 차고, 더 복잡하였고,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 페르시아-파르티아 의 왕국이 제국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카사투-후리언-히타이트 그 룹에서보다 페르시아 - 파르티아 집단에서 왕제(王制)가 훨씬 더 효과 적인 정치적 요소였다는 사실들이 이것을 말해 주고 있다. 두 시기 중 어느 시기에서 급격한 봉건제로의 발달을 막을 수 있었 던 중요한 요소인 상업과 도시 생활이 언급되어야 한다. 유럽의 봉건

제와 고대 근동의 봉건제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깊은 차이가 있다. 유 럽의 봉건제는 일반적으로 농촌적이고, 고립된 상황에서 발전하였다. 유럽에서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도시가 거의 없었으며, 오늘날에도 크고 작은 성들이 산재해 있다. 고다 근동에서 매우 고풍스러운 성벽 으로 둘러싸인 도시들은 귀족들이 위치하였던 곳이다. 이웃하고 있는 보다 큰 정치적 단위가 타지역을 상당히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있었 던 시대에는 요새화된 도시만이 유일하게 실질적인 보호를 해줄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유럽식의 성은 아무런 효력이 없었을 것 이다. 유럽의 정치 생활은 완전하게 서로 연계되지 않았으므로, 전형 적인 봉건 군대는 일반적으로 약탈을 일삼는 약간의 보병을 동반한 소수의 기사군이었고 대개는 대규모의 성을 공략할 수 없었다. 대규 모적인 근동의 왕국과 제후국들은 귀족이 도시적인 성향을 갖도록 하 는 데 영향을 끼쳤다. 아시리아의 경우에는 특허장을 가진 거의 자치 적인 제국의 자유 도시가 존재하였다. 파르티아의 경우에는 메소포타 미아 계곡과 이란 고원 지대의 중요한 도시들이 그들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할 수 없었지만, 그 도시들은 크고, 활기에 차 있고, 고대 의 종교적, 상업적 생활의 패턴(이때에는 새로운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확산됨)에 잘 적응되어 있어, 그들의 생활 방식은 제국의 안정을 유 지하는 데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파르티아인 자신들은 코라스미안 Choras mian 초원 지방에서 물려받은 집시 같은 생활을 결 코 버리지 않았지만, 그들은 가능·한 한 그들의 왕국에서 도시 생활이 번성하도록 의도적으로 허용하였다. 로마, 인도, 중국의 교역품은 관 세를 낼 때 이의에는 중단 없이 제국을 통과할 수 있었다. 힉소스 지 배하에 있던 가나안 지방에도 많은 부유한 도시들이 발달하였다. 하 란 Haran 과 같은 잘 발달된 도시들이 미타니 왕들의 치하의 북시리아 와 메소포타미아의 평원을 점철하고 있었으며, 아나톨리아 고원 지대 에도 중요한 도시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나톨리아는 가장 도시화가

덜된 지역이었다. 왕국, 제국, 상업과 도시의 계속적인 존속 등의 요소가 결합하여 근 동에서의 봉건적인 특징을 약화시켰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더 약화되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인정하여야 한다. 이 책 의 서론에서 봉건제를 〈 정치적 권력이 제도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이 었던 〉 통치 방법으로서의 봉건제로 잠정적으로 설명한 것에 동의를 하지만, 근동의 자료는 정확히 그러한 정체가 근동 지방에서 존재하 였다고 명확하게 주장될 수 있을 만큼의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지 않 다. 그러나 동시에 간접적인 사실을 종합해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 지만 봉건제에 근접하는 어떤 제도가 고대 근동에서 발생하였다는 것 울 믿게 한다. 그러나 어쨌든간에 우리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 VI 고대 이집트의 봉건제 에드거튼 W illi am F. Edg er to n 1 도입 〈봉건적〉이라는 용어를 이집트 역사에 적용시켜 왔던 이집트 연구 학자들이 이 책의 서론에 제시된 봉건제의 개념을 염두에 두지 않았 다는 것은 확실하다. 오히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시기를 〈봉건적〉인 시기로 생각하여 왔다. 대개 상속과 드물게는 왕의 임명에 의해 그들 의 지위를 획득한 영역적 또는 지방적인 귀족들이 정부의 중요한 권 력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와 중앙 정부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또는 지 방 세력을 완전히 지배할 수 없었던 시기를 〈봉건적〉인 시기로 간주 하였다. 따라서 아 글에서는 설명되고 있는 제도들이 봉건적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을 제시할 수 없고, 단지 우리의 지 식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이 제도들의 성격이 어떠하였는지만을 제시할 뿐이다. 이 제도들이 전혀 봉건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이 글이 제시할지도 모른다. 이들 제도의 성격에 대한 문제는 쿨본 교수의 글 에서 논의될 것이다.” 다음의 도표는 이 글에서 취급하고 있는 시기들에 대한 개략적인 I ) 아래 pp. 320-3 23, 373-3 93 를 참조.

개념을 갖게 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다. 모든 연대는 개략적이며, 중왕 국과 그 이후의 시기들에 대한 오차는 단지 몇 년에 지나지 않으며, 고왕국은 많으면 2 세기 정도의 오차가 있다. 고왕국 Old Kin g d o ms, 기원전 28- 2 3 세기 (수도는 멤피스 Mem p h i s) 제 4 왕조, 기원전 28 세기 말에서 2 6,\}]기 중반까지 제 5 왕조, 기원전 2@1] 기 중엽부터 25 세기 말까지 제 6 왕조, 기원전 25 세기 말부터 23 세기 초까지 제 7 왕조, ( 〈 70 일 동안 통치하였던 70 명의 왕들 〉 )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과 전혀 일치하지 않음. 제 8 왕조는 멤피스에서 제 6 왕조를 계승하였고 분열의 시대 a period of D i sun ity인 기원전 23 세기에서 21 세기에 이르는 제 1 중간기에 접어든다. 제 9 , 10 왕조, 기원전 2242 - 2060 년(수도는 헤라클레오폴리스 Heracleo p o­ lis) 제 11 왕조(테베 Thebes) 는 제 1 중간기 동안에 시작하여 기원전 1985 년에 끝난다 . 중왕국 M i ddle K i n g dom 은 기원전 21 - 1 찌기 제 11 왕조, 기원전 1985 년경에 끝남 제 12 왕조, 기원전 1985 - 1776 년 제 13 왕조, 기원전 1776 년경에 시작되어 18 세기 말에서 16Al] 기 초에 이 르는 제 2 중간기에 접어듬(힉소스의 지배 시대를 포함함) 제 17 왕조는 제 2 중간기에 시작되어 기원전 1580 년경에 끝난다. 제국, 혹은 신왕국 New King d o m, 기원전 1580-1085 년 제 18 왕조, 기원전 1580 - 1350 년 제 19 왕조, 기원전 1350-1200 년 제 20 왕조, 기원전 1200-1085 년

제 21 왕조, 기원전 1085-9 50 년 제 22 왕조, 기 원 전 950-7 30 년 (제 23 왕조는 제 22 왕조 말기와 동 시대이다.) 제 24, 25 왕조, 기원전 730-663 년 제 26 왕조, 기 원 전 663-5 25 년 2 고왕국과 제 1 중간기 이론상, 이집트의 왕들은 언제나 신이었으며, 인간을 지배하도록 보 다 상위에 있는 신들로부터 명령을 받았다. 그의 의지는 단순한 법적 효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 의지가 바로 법 그 자체였다. 파라오가 지배하였던 이집트에서는 왕 이의의 인간들이 제정한 법은 인정되지 않았다. 제 4 왕조의 현실은 이 이론과 아주 일치하는 것 같다. 그 당시의 정 부는 왕에 의해 주도되는 독재적인 관료 체제였다. 단 한 사람의 관 리, 죽 비지어vi s i er 가 왕의 지배 아래 전 왕국에 대한 최고의 행정적, 사법적인 권한을 행사하였다. 그 왕국은 전국을 노메스 Nomes 라고 불 리는 행정 단위인 여러 개의 주로 나뉘었다(아마 상이집트는 227H, 하 이집트는 20 개로 나뉘었을 것이다. 포토레미 왕조 이전 시대의 완전한 리스트를 작성할 수 없다). 많은 노메스들은 옛날의 독립된 국가에서 유래하였다. 이 노메스들은 왕이 임명한 총독 nomarch 에 의해 통치되 었으며, 이 당시의 총독의 최대의 관심은 그들 자신의 노메스의 통치 보다는 중앙의 행정과 왕실에 집중되어 있었다. 행정적으로, 중앙 정 부는 수 개의 부서(部署)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각 부(部)의 행정력 은 전국에 영향을 미쳤다. 노메스의 행정 제도가 중앙 정부의 행정 재도와 얼마나 유사하게 조직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당

시의 사료에 의하면 왕의 마음을 홉족하게 할 만한 업적을 이룬 관리 둘은 한 직책에서 다른 직책으로 쉽게 이동했던 것 같다. 왕실의 왕 자들은 종종 최고의 관직을 차지하였다. 이의에는, 출생 신분은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고 이집트 연구 학자들은 믿고 있으나, 필자는 개인 적으로는 이 주장에 대해 회의적이다(왕들의 후손들이 대부분의 공직 울 차지하였다는 융커Ju nker 2) 의 견해는 왕의 후손 혹은 아마 단순히 왕과 친분이 있는 자라는 의미를 가전 애매한 칭호, 죽 rh-n y sw t라는 칭 호를 엄밀하게 해석한 데 부분적으로 근거하고 있다) . 이집트 전역에 운하와 둑을 만들고 이를 유지함으로써, 이집트 정 부는 홍수를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한 홍수 통제는 언제나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집트에서 안락한 삶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관개와 배수는 이집트의 농업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었던 노동력의 대부분을 소모하였다. 이 사업은 순전히 지방적인 차원에서는 효과적 으로 수행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복지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강력한 통일 왕국과 상호 적대적인 지방 세력이 군집해 있는 국가 사 이에서 발생하는 차이는 세계의 어느 지역에서보다 이집트에서 더 컸 다. 그래서 이집트 정부는 대규모의 노동력에 대해 효과적인 통제를 해야 했다. 이집트인의 강제 노역은 후대에서와 갇이 고왕국 시대에 서도 왕의 수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왕의 또 다론 수입은 관리들이 왕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여행을 할 때, 관리들이 숙박 울 하고 각종의 물건을 징발할 수 있는 권리였다. 왕령지에서 나온 수입은 왕의 가장 중요한 수입이었다. 이 왕령지는, 일부는 왕으로부 터 봉급을 받는 관리에 의해 직접 관리되었고, 일부는 임대되었다. 필 자는 왕이 또한 사원이 보유하는 토지와 능(陵)에 속해 있는 재산 tom b endowments 그리고 개인이 갖고 있는 토지에 대해서도 세 2) Gi za , vi, Akademi e der Wi ss enschq /ten in Wi en , Phil -hi s t . Klasse, Denk-schrift en (Vi en na and Leip zig, 1943), 24.

3) 토지에서 거두어 둘이는 세나 다른 재정 수입에 관한 최근의 논의에 관해 서는 Alan H. Gard i ner 의 The Wi lbo ur Papy ru s, II : Commenta r y ( Oxfo r d, 1948) 를 참조. 이 책을 W. F. Ed g er t on 이 Jo urnal of the Americ a n orien ta l soc iet y , LXX( i95 0), 299 ff에서 비평했다. 이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시기는 4) 기U원rk전un d1e1n5 0d 년es경 a의g yp Rtiasmc hseens A5 세lt e의r t u m치 s세, 기l 이:다 U.rk unden des alte n Reic h s, Kurt Seth e (ed), 2nd edn.( L eip z ig , 1932-1933), pp. 12 , 10.(Urk. I 처럼 아래에서 인용된 이집트어의 상형 문자 원문)

를 칭수하였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지만, 알렉산더 이전의 이집트의 토지세에 관하여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3) 제 4 왕조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왕의 피라미드를 세우는 일과 왕과 그의 측근들의 영생을 강구할 수 있는 각종의 물건을 징수하는 일이었다. 왕의 특별 배려에 의해서, 이 왕국의 고위 관리들은 왕의 피라미드 주변에 그들의 무덤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들은 현세에서처 럼 저승에서도 왕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었다. 제 5 왕조 이전에는 수 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많은 비용을 들여 만든 무덤은 극히 드물 었다. 왕과 관리들은 영구히 그들의 무덤(관리인에게)에 재산울 양도하려 고 하였다. 이 재산에는 토지, 가축, 〈 사람(농노 또는 노예?)〉이 포함 되었다 .4) 이 재산에는 어떤 신이나 혹은 이전의 어떤 유명한 사람의 무덤에 우선 바치고 난 다음에 바로 이 무덤에 바치게 되는 제물도 포함되었다. 이 재산은 묘지기 soul-servant 또는 일단의 묘지기둘에 의해 관리되었다. 그 묘지기는 그 자신의 후손일 수도 있고 아닐 수 도 있다. 이 재산은 때로는 왕이 하사한 것이었으며, 때로는 망인(亡 人)의 개인 재산으로 그 자신에 의해 만들어질 수도 있었다. 신전에 서 일하고 있는 사제도 유사하게 만들어전 재산으로 생활하였다.

그러므로 이 두 경우(묘지기와 사제)에 토지나 그의의 재산의 보유 권과 명시된 봉사를 이행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이 두 경우 중 어느 경우에도, 살아 있는 사람이 봉사의 실질적인 수혜

자는 아니다. 이집트의 법이론에 의하면, 그 수혜자(신 또는 망인인 무덤 주인)는 그 재산 endowmen t의 소유자였으나, 개개의 사제 또는 묘지기는 적어도 유언에 의해 그가 갖고 있는 개인적인 권리와 의무 를 효과적으로 이행할 수도 있었다. 중왕국과 그 후기에는 사제직이 다론 재산과 마찬가지로 매매되었지만, 고왕국에서도 매매가 되었는 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 재위에 있는 왕은 그의 관리들에게 일부는 식량, 술과 의복 등으로, 일부는 토지의 양도로 봉사의 대가를 지불하였다. 그렇게 양 도된 토지를 지속적으로 소유하기 위해 계속해서 봉사해야 한다는 증 거는 없다. 그 반대로 그 토지의 소유자와 상속지들은· 그 토지를 영 구히 소유할 수 있었다고 이집트 연구 학자들은 현재 믿고 있다. 그 러나 필자는 그 토지는 또한 자유로이 매매될 수 있었다고 가정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관리들에게 봉사의 대가로 그리고 사원과 무 덤의 재산 mor t uar y endowmen t~로 토지를 계속 양도한 결과 왕권이 점진적으로 약화된 것이 고왕국의 몰락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여 겨진다. 제 4 왕조 초에도(이와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최초의 시 기 ) 어떤 토지는 매매 및 양도가 가능하였다 .5) 제 5, 6 왕조의 특칭은 통치 형태가 접전적으로 지방 분권화되었다는 점이다. 주(州, 노메스)의 총독은 자유로이 한 지방에서 다른 지방으 로 전보되지 않고, 개개의 노메스에 영구히 귀속되었고, 그들의 무덤 을 자신들의 노메스에 만들었다. 상이집트의 총독 nomarch 과 비지어 visi e r 중간에 상이 집 트의 총독 Governor of Up pe r E gypt이 라는 새로 운 관직이 생겼다. 이 관직은 총독이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지만, 총독의 세력은 점점 커져 마침내 독립적 5) E. Seid l , Eir i{uh rung in die iigyptisc he Rechts g e s chic h te bis zum Ende des Neuen Reic h s, I , Ju ris t is c her Tei/, Ag yptol. Forschunge n herausg. - A. Scharff, Part lO(Gliic k sta d t, Hamburg, New York, 1939), 47ff .

인 세력이 되었다. 어떤 때는 몇 사람의 주의 총독들이 동시에 상이 집트의 총독이 되었고, 각 주의 총독들은 제한된 수의 노메스를 관장 하였다. 관직은 세습화되어 갔다(관리들이 항상 바라던 여건). g1 ] 기 말에 이르기까지 주의 총독은 대체로 6) 그의 노메스의 중심 사원의 사 제장이 되었다. 노메스에서 중대한 토지 재산과 더불어 최고의 행정 (행정과 사법)직과 사제직을 상속받은 주의 총독은 중앙 정부에서 나 타나고 있는 약점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6) Kees 에 의하면 〈관례적 re g elmass ig〉이다. (H. Kees, Beit ra ge zur alt ag ypti- schen Provin z ia lv erwaltu n g und der Geschic h te des Feudalis m us. Nachric h te n von der Gesellscha/t d er Wi ss enscha/ten zu Gott ing en , 1932, p. 93)

강제 노역으로부터 그리고 왕의 관리들이나 혹은 다른 강력하고 영 향력 있는 자들이 부과할 수 있는 강제 노역과 강제 칭수로부터 면제 되는 면제권i mmun iti es 이 양도된 것은 분명히 고왕국을 멸망시킨 원 인이 되었다. 사원과 무덤 재산을 위하여 제 5, 6, 그리고 8 왕조의 7) 왕 둘이 수많은 그러한 면제권을 양도하였다는 사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어떤 면제권은 실제로 정부의 관리가 그 특권을 가진 사원의 토지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였다 .8) 페피 Pep i 2 세 시대까지는(제 6 왕 조 말) 왕이 어떤 특정한 경우에 특정한 관리가 도시와 사원에서 그 둘이 필요한 것을 칭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여야 할 정도로 면제 권이 널리 퍼졌는데, 이 경우에 그 관리는 〈어떤 면제권도 양도받지 않았다.〉 9) 다음 단계는 새로운 면제권을 발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어떤 면제

7) 이것은 세트 Se t h~ 왕조이다-아래를 보 라. 8) e.g. , Urk. I, 283, 8. 내가 보기에 피렌느는 이 내용의 중요성을 과장한 것 같이 보이는데, 이것은 어느 경우에서든 면제권이 양도될 때 일어나지 않았 다.(J. Pir e nne, La Feodalite en Egy pte, Revue de rlnstit ut de Soc iol og ie, XVI, 1936, 24f) 9) Urk. I, I3I, 7. Harku f에 보낸 페피 양]의 서한.

권도 양도받지 않은 특별 관리를 인정하고, 그런 특별 관리도 새로 양도된 면제권 10) 에 대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명기하고 있 다. 이 이중적인 모순에 대한 결과는 우리들의 상상에 의존하여 해석 할 수밖에 없다•(피렌느 ,II) 헤이즈 ,12) 샤프 13) 도 이 상황을 잘못 이해하고 있으며, 세트 14) 가 정확히 해석을 하고 있다) 이집트 연구 학자들에게 제 1 중간기로 알려진 분열의 시기가 나타났 다. 일단의 아시아계의 민족이 적어도 전 델타 지방울 침입하여 상당 한 기간 동안 점령하였다. 이 민족들은 상이집트에 많은 피해를 입혔 으며, 이푸워 l p uwer는 이들 민족의 대부분은 거기에 자리잡았고 아마 지배 민족의 지위를 가졌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5) 이러한 침략은 물론 왕실 정부의 권력 약화와 이집트의 분열로 말미암아 초래되었 다. 이유야 어떻든간에, 국가 권력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못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고왕국의 왕들과 귀족들의 장엄한 무덤들이 이 시기 에 일반적으로 도굴되고 파괴되었다 .16) 고대 이집트에 있어서 이 시기 만큼 무정부 시대를 기록한 적이 없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새로운 분묘와 다른 예술 작품은 규모가 작았고 그것을 만든 기법도 아주 조 잡하였다. 제 8 왕조는 멤피스의 제 6 왕조를 곧바로 계승하였다. 남쪽으로는 멀 리 콥토스 Co pt os 에서 그리고 아마 제 1 폭포 지역에서도 제 8 왕조를 공 1IO1 )) eH.gi s., t oU r irek . deIs , I2n8st2it -u2t 8i o3n. s et du droit pr iv e de f anc ien ne Egy pte, m( Brussels, 1935), 295. 12) Roy al Decrees, Jo urnal of Eg yptian Archaeolog y, XXXII (19 46), 8. 13) Der his t o ris c he Abschnit t der Lehre fiir Konig Meri ka r, Sit zu ng s beri- chte der Baye r isc hen Akademi c der Wi ss enschq ften , Phil -h is t . Abt. (19 36) , Heft 8, p. II , n. I. 14) Gott ing isc he ge lehrte Anzeig en , CLXXN( l91 2), 713. 15) Alan H. Gardin e r, The Admonit ion s of an Eg yptian Sage (Leip zig, 1909). 16) J. A. Wi lso n, The Burden of Eg ypt(C hic a g o , 1951 ), p. 109.

식적으로 인정하였다. 필자는 · 세트가 주장하는 콥트 왕조는 사실은 멤피스의 제 8 왕조였다라는 헤이즈의 견해 1 7) 에 동조한다 . 그러나 이 마 지막 멤피스의 지배자들이 진정한 권력을 행사하였던 것 같지는 않 다. 지방의 중요 지역에 있던 경쟁 가문(귀족)들은 왕이나 국가에 봉 사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증대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헤라클레오폴리스(상이집트의 20 번째 주)의 총독들은 왕의 칭 호를 사용하고 제 9, 10 왕조를 이룩하였다. 그들은 델타 지방과 상이집 트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지역을 다시 정복하였으나, 그들은 제 II 왕조를 이룩한 테베(1 4 번째 주)의 총독에게 굴복하였다. 기원전 21 세기 중엽에 II 왕조의 멘투호터 2 세 혹은 3 세는 헤라클레오폴리스 를 정복하여 전 이집트를 재통일하였다. 그래서 통일기인 중왕국이 시작되어 거의 3 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제 1 중간기 동안 많은 주의 총독들은 사실상 소왕으로 행세하였다 (물론 실제로 완전한 왕의 칭호를 가전 헤라클레오폴리스 왕과 테베의 왕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제 11 , I2 왕조하의 통일은 많은 전쟁의 결과 로 이룩되었다. 일부 대주(州)총독 가문은 새로운 데베의 세력에 반대 한 결과 몰락하게 되었고, 일부 가문은 그들에게 동조하여 번성하였 다 . 제 12 왕조의 왕들의 주요한 과제는 그들을 지원하였던 주총독 가 문이 갖고 있던 가통적인 독립성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이었다. 이 과 업은 세소스트리스 Sesos t r i s 3 세때에 완수되었으리라 믿어진다(기원전 19 세기 중엽). 제 1 중간기의 제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이고 만족스러운 것 은 아니다. 주총독은 그의 통치기를 기준하여 날짜를 기록하였고(이 전에는 왕만이 그렇게 사용할 수 있었음), 그의 이름에 〈만세, 번 영 , 건강하기 를 may he live , be pro spe rous, and be healt h> 등을 첨 가 하였다(또 다른 왕의 특권)• • 이러한 피상적인 현상은 물론 이 당시의 17) Roy al Decrees, pp. 19- 2 3.

근본적인 실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총독은 멀리 떨어져 있는 왕의 권위를 인정하고 왕실에 공물을 바쳤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의 주에 서 사실상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총독은 조세를 징수하고, 재판 권을 행사하고, 도둑을 처벌하고, 과부와 고아를 보호하고, 군대를 칭 발하고 전쟁에서 군대를 지휘하였으며, 그리고 현명하고, 열렬하고, 자비스러운 모든 왕들이 행할 수 있는 일들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행 위는 이상적이었으며, 이 당시의 무덤의 부장품이었던 사자(死者)의 서( 書 )를 통해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12 왕조(대략 기원전 1960-1926) 의 두번째의 왕 세소스트리스 1 세의 통치 시대에 나온 한 독특한 문서는 분명히 제 1 중간기부터 내려온 어 떤 관습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시우트 (S i u t : 상이집트의 13 번째 주)의 총독 헵제피 He p ze fi는 10 개의 계약을 체결하여 그의 묘에 대한 관리를 영구히 하도록 하였다. 그 계약서는 전해지지 않으나, 그의 묘 지기가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헵제피는 그 계약 의 요약문을 묘에 기록해 두었다. 헵제피는 다음 3 개의 항목으로 그 의 토지와 수입을 처분한다고 했다. 첫째, 그의 아버지의 토지에서 그는 42 아루라 (arouras : 28 1/3 에이 커) 토지와 그 주에 있는 주사원(主寺院, pricip le tem p le : 우연히 이 사원의 사제장이 되었음) 연수입의 27/360 (1 /13 이 조금 넘음)을 팔 것 이다. 사원 수입의 일부를 어떤 성직자에게 팔았으며, 〈나는 너희들과 같이 사제의 아둘이다〉라는 표현으로 그가 그것을 팔 수 있는 권리를 정당화하였다. 물론 그는 그의 세습 재산의 일부를 이렇게 양도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둘째, 주총독의 재산 중에서 다음과 갑은 재산을 어떤 사원에 팔려 고하였다. 가) 사원이 총독에게 바치게 되어 있는 고기와 숯의 일부. 나) 장래의 총독이 관습적으로 자유 의사에 의해 바치기로 되어 있

는 공물인 총독의 첫 수확물 . 그는 분명히 장래의 총독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숯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가능성을 알고 있었고 첫 수확물에 대해서도 어떤 불안감을 나타내었으나, 그러나 고기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그러한 불안감 울 나타내지 않았던 것 같다. 총독의 토지롤 양도하려고 하지 않았던 점을주목하라. 셋째, 그 사원의 사제장( 〈 성직자들에 대한 감독관 〉 )으로서, 그는 그 사원의 제사에 바쳐지는 모든 황소 고기의 일부와 어떤 축제를 치르 고 난 다음에 생기는 일정양의 술을 장래 그 무덤의 주인이 되는 자 신에게 팔았다. 이 두 물건값으로 헵제피의 가득 재산인 그 사원의 연수입 중 2/360 를 지불하였다. 아마 이 이유 때문에 그는 장래의 사제 장이 고기와 술값을 계속 지불하리라는· 확신을 가전 것 같다 . 그리하여 제 12 왕조 시작 직후 다음과 같은 법제도가 분명히 존재하 였으며, 이 제도는 제 1 중간기에서부터 계속 존속되어 왔던 것으로 간 주된다. 한 개인은 개인의 자격으로 그리고 이와는· 별개로 여러 가지 직을 맡고 있는 공인의 자격으로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가 개 인 자격으로 소유하였던 것은 매매할 수 있었다. 총독의 자격으로 그 가 소유하였던 것은 매매할 수 있었으나 매매 방식이 장래의 총독에 게 법적으로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 . 사원 수입에서 생긴 몫은 그 몫에 따르는 의무에 관계없이 매매 및 양도가 7H 중하나, 인정된 성직 자 가문에 한해서만 양도가 가능하였다. 아마 사원 수입의 다른 몫은 어떤 특정한 사제직에 귀속되었을 것이다. 이 몫은 매매되어 장래 그 직의 계승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의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다른 사료는 성직 그 자체가 매매될 수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18) 18) Seid l , Eie fuhr ung, p. 46, P. Kahun II, 1 에서 인용한, 12 왕조 말 또는 13 왕 조초의 문서.

3 제국과 리비아 체제 중왕국은 기원전 18 세기 동안 해체되었다. 아시아의 새로운 민족인 힉소스족이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아마 100 여 년 동안(기원전 17 세기와 1~ 사기) 〈 상, 하이집트의 왕 〉 으로서 통치하였 다. 데베의 제후들은 민족적인 저항을 주도하여 힉소스족을 몰아내고 16 세기 전반에 전 이집트를 재통일하였다(제 17 왕조와 제 18 왕조의 시 작). 해방 전쟁의 열기는 이집트군을 북쪽으로 유프라데스 강과 남쪽 으로는 나일 강 계곡까지 전출케 하였다. 이렇게 이집트를 해방시키 고 정복을 하였던 제 18 왕조의 이집트 왕들은 그들의 전사둘에게 토 지, 노예, 금으로 보상하였으며, 이 모든 재산은 아무 제한 없이 수령 자의 재산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왕들은 그들에게 승리를 안 겨준 신들, 주로 카르나크의 아몬 Amon of Karnak, 그리고 멤피스의 프타 Pth a of Memp h is , 헬리오폴리스의 레 Re of Heli op o li~ 군소 신 들에게 막대한 부를 헌상하였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런 막대한 신전 에 대한 헌상이 왕실 정부를 약화시켰다는 이집트 연구 학자들의 주 장은 대개 과장된 것 같다. 여러 가지 증거로 미루어보아, 가장 부유 한 사원들까지도 제 18, 19 왕조 전 기간 동안 그리고 거의 제 20 왕조 말기까지(대략 기원전 1580-1100) 왕에게 복속되어 있었으며, 종교적 이라기보다는 군사적인 요인에 의해 제 20 왕조가 붕괴하였던 것 같다 .19) 19) Kees, wHeri ho r und die Aufr ich tu n g des the banis c hen Gott es sta a te s , Na-chric h te n von der Gesellschaft der Wi sse nschq /ten zu Gott ing e n ( l93 6-1938), pp. 1- 2 0 : W. F. Edg er t o n , Th e Government and the Governed in the Eg yptian Emp ire , Jo urnal of Near East er n Stu d ie s , vi( l94 7), 152- 1 60 ; Edg er to n , wThe Nauri Decree of Seti I, JN ES, vi( l94 7), 219- 2 30 : Edg er to n , wThe Str ike s in Ramses m's Twenty - nin t h Year, JN ES, x (19 51), 137-145 ; Edg er to n in Cambri dg e Anc ien t Hi st o r y, II(2nd edn.), Chap . xx iv( fo r th c omi ng ). Gardin e r's obje c ti on s, JE A, xxxvii (19 52), 24- 33 등은 Nauri Decree 에 관한 나의 견해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나 호전적인 정신은 퇴색하였어도, 파라오들은 점점더 의국 용 병에 의존하여 그들의 군대를 유지하였다. 제 19 왕조 말과 제 20 왕조 초에는(대략 기원전 1250-1150) 지중해 맞은편 지방과 누비아 Nub i a 지방 출신의 용병이 주종을 이루었다. 특히 셔든 Sherden 족이 유명하 였는데, 후에 이 민족의 이름에서 사르디니아라는 섬의 명칭이 나온 듯하다 . 2 0) 람세스 (Ramses, 대략 기원전 1150) 5 세의 치세하에서는 셔 단족은 토지 보유자로서 유명하였다 .2 1 ) 셔단과 누비아의 두 민족은 제 20 왕조 말경에(기원전 11 세기 초) 용병으로서는 자취를 감추었고, 그 자리를 리비아인들이 메꾸었다. 용병과 이민족의 침입과 내란 때문에 제 20 왕조 후반(기원전 1150- 1100 년과 그후)은 계속해서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데베의 왕릉은 고왕국의 몰락때 멤피스의 왕릉처럼 약탈되었다. 헤 리오 He ri hor 라는 이름을 가진 한 장군은 스스로 카르나크의 아몬 신 전의 최고의 사제(이집트에서 가장 부유하고 세력이 강한 사제직)가 되었으며 , 한편 출신이 알려지지 않은 부부인 스멘데스 Smendes 와 텐 타몬 Ten t amon 은 델타 지역에 있는 타니스 Tan i s 의 지배자로 자처하 였다. 이 세 사람의 유력자들은 마지막 왕 람시스 Rams i s 를 무시하였 으며, 그를 왕좌에 머물러 있게는 하였으나, 왕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 은 채 그들 자신의 이름으로 이집트롤 통치하고 의국에 사절을 파견 하였다. 다른 〈이집트의 유력자gr ea t ones of E gypt〉들이 이들의 배후 에 나타나 개개의 도시를 지배하였으며, 헤리오, 스멘데스 그리고 텐 타몬이 왕에게 복종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그들에게 복종하지 않았 다. 람시스 11 세가 죽자, 처음에는 헤리오, 후에는 스멘데스가 파라오 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후 헤리오의 손자와 스멘데스의 손녀가 결 20) Cf . Alan H. Gardin e r, Anc ien t Eg yptian Onomastic a , I (Oxfo r d, 1947), 21 ) 1C94f.- G1 9a9r. din e r, The Wi lbou r Papy ru s : II , commenta r y, p. 80.

혼하여 한동안 이집트를 통합한 것 같다. 이 인물들은 기원전 950 년 까지 통치한 제 21 왕조에 속한다. 한편, 리비아의 약탈자와 그들 자신의 지도자 밀에서 그들 자신의 부대에서 근무하는 리비아의 용병들과 평화적인 리비아의 정착자들이 점차적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기원전 950 년경에, 강력한 세력을 가전 세숀크 Sheshonk 라는 이름을 가진 한 리비아인이 (그의 가문은 수세대 동안 헤라클레오폴리스 주변의 광범위한 지역을 이미 통치하고 있었다) 스스로 파라오가 되어 제 22 왕조를 창건하였다(기원전 950 - 730 년 수도는 델타 지역에 있는 부바스티스 Bubas ti s). 세숀크 가문은 이집트의 다른 도시에 자리잡은 많은 리비아인들의 가문 중에서 유일 하게 가장 세력이 강한 가문이었다. 이러한 리비아인들은 하나의 분 리된 군인 계급(이집트에서는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음)으로 다른 민족 과 분리되어 그들의 민족성을 유지하였고, 계속해서 리비아식의 옷을 입었다(특히 우두머리들은 고대 리비아의 관습인 머리에 깃털을 한 개 내지 두 개 꽂았다). 그러나 세숀크가 왕위에 즉위하기 전에, 그들은 종교와 다른 많은 부분에서 이미 철저하게 이집트화되었다. 그들은 계속하여 조직된 군사 공동체에서 살았으며, 이 공동체 내에서 개개 의 군인은 그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였다 . 테베에서는 아몬의 최고의 사제가 한때 상이집트의 상당한 부분을 포함한 제국의 효과적인 지배 자였던 장군 헤리오가 누렸던 지위를 계속 유지하였다. 종교적 성격 을 가전 제후국 sacerdo t al p r i n cip al ity은 왕의 아들 또는 가까운 친척 에 의해 잘 통치되었다. 유사한 종교적 성격을 가전 제후국들이 헤라 클레오폴리스, 멤피스, 헬리오폴리스와 그의의 도시에도 존재하였다. 다른 도시들에 대한 지식은 거의 갖고 있지 않으므로, 우리는 주로 데베의 기록으로 이 시기에 대한 판단을 하고 있다. 군사적인 성격을 지닌 제후국은 최고의 사제이면서 동시에 장군인 자들에 의해 지배되 는 반면에, 종교적인 성격을 지닌 제후국은 장군이면서 동시에 최고

의 사제인 자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필자는 그 차이가 중요하였다는 점에 대해서 논의하고 싶지 않다. 최고의 사제들과 장군들 모두 이집 트화하였지만, 그들은 자랑스럽게 그들의 뿌리를 계속해서 리비아에 서 찾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제 22 왕조 초기 동안에는 현재 통 치하고 있는 왕의 우위권을 인정하였다. 가끔 반란이 일어났으나, 이 반란이 불만을 품은 리비아인이나 혹은 이집트인들에 의해 주도되었 는지롤 우리는 알 수 없다. 기원전 820 년 또는 810 년경에 리비아 왕 조인 제 23 왕조(아마 세숀크 가문의 일파일 것임 )가 확립되고, 제 22 왕 조와 나란히 통치하면서 경쟁하였으나, 이 상황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기원전 찌기에는 분열이 계속되었다. 누비안족의 피안키 Pia n - k hi가 기원전 730 년경에 일시적으로 이집트를 정복하였을 때, 그는 독립적이거나 준독립적인 모든 제후들의 항복을 받았는데, 이들 중 네 명은 한때 〈상이집트의 왕〉이라는 뜻을 가진 옛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자인 사이스의 데프나크트 Tefn a khte of Sa i s 는 왕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 22 ) 특히 제 21 왕조에서 제 22 왕조에 이르는 시대의 특칭은 신탁(神託)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점이다. 신탁에 의한 정부의 개념은 적어도 제 2 중 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2J) 튜트모스 3 세 (Thu t mos, 기원전 15 세기)는 그의 총신들에게 한 연설 22) Raym o nd We ill은 최근에 여러 왕제 mult iple k i n g sh ip의 중요성에 대한 견 . s해io를 n m십u화lt시ip 켰le 는a데 d,iv e 필rse자s 는ep 그 o q u의 es 견d에e la동 p의er 할io d 수e p없h a다ra •o(niLq au er,o y aJuo tue r n eanl adsivi ai -- tiqu e, ccxxxwii i, 1950, 59-8 0) 23) 태양신인 레가 제 1 왕조의 세 명의 왕둘을 낳았고 그들의 연속적인 통치를 예언하였다는 전설을 고려해 보라 .(A. Erman, Die Mi irch en des Papy ru s West ca r, Berlin , 1890, 10- 1 3). Erman 은 그의 서문에서 파피루스의 연대를 대략 제 2 중간기 Second Inte r media t e Perio d .£. 잡고 있다.(Di e Handschrift und ihr Alte r , pp. 5-6) 따라서 거기에 기록된 관행은 적어도 그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감이 분명하다.

(거의 사실적인 근거가 없다)에서 그 자신이 왕에 즉위한 것은 카르 나크의 아몬의 신탁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설사 이것이 사실 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 주장은 그러한 개념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입 증한다• 200 년 후에 람세스 2 세는 덴데라 Dendera 와 디스 Th i s 지방 도시들의 최고의 사제를 카르나크의 아몬 신전의 아주 중요한 사제직 으로 승격시키기 전에 분명히 아몬의 신탁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아주 젊은 왕이 처음으로 독립적으로 행한 행위이므로 우리는 왜 신 탁이 필요한가를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람세스 2 세와 그 후의 통치 기간 동안 일반 백성들은 그들의 문제를 데베의 여러 중요한 신과 군 소의 신들에게 가끔 의탁하였고, 이 경우에 그들이 받은 신탁은 법률 적인 효력을 가졌다. 그러나 제 21 왕조와 제 23 왕조에 이르는 시대에는 왕과 장군들 그리고 고위 사제들은 거의 모든 중요한 결정을 위해서 신탁에 의존한 것같이 보인다. 헤리오와 감은 벼락 출세자 혹은 이민 족 출신이라는 것을 명예스럽게 생각하는 리비아인의 지배를 여전히 증오하고 있는 이집트인을 지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을 이 신탁 에서 찾은 것 같다 . 〈 리비아 〉 시대의 또 다른 발전은 카르나크의 아몬 〈신의 부인g od' wife 〉 을 테베의 종교적인 성격을 지닌 제후국의 우두머리로 격상시켜 최고의 사제를 대신케 하였다는 점이다. 제 18 왕조 치하에서는 〈신의 부인 〉 은 왕비였으며 , 이는 신 아몬이 파라오들의 실제 아버지라는 것 울 거짓으로 꾸며냈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제 23 왕조에서 제 26 왕조 에 이르는 시대에서는 항상 왕의 딸이 〈신의 부인〉이 되었다.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았으나, 그 〈신의 부인〉은 다음에 왕이 되는 자의 딸 울 그녀의 〈양녀〉로 삼아 그녀의 계승자가 되게 하였다. 이런 방식으 로 이집트와 누비아 왕조들은 테베 제후국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에 대 한 지배권을 계속하여 획득하고 유지하였다 . 24 ) 기원전 730 년부터 663 24) Sander- H ansen 의 Das _Gott es weib des Amun, Det Kong el ig e Danske

vide nslcabernes Selskab, His to r i sk -fi iolo g iske , I , No. I (Cope n hage n , 1940) 울참조.

년까지 이집트의 역사는 누비아인과 아시리아 정복자들에 의해 지배 되었다. 이 시기에 겨우 명맥만 유지하였던 이집트의 왕자들 중에서 도 사이스의 왕자들은 아주 중요하였다. 죽, 피안키에 저항하였던 데 프나크트, 제 24 왕조의 유일한 왕으로서 역사에 나타난 테프나크트의 아들 보코리스 Bokkhor i s, 아슈르바니팔에 의해 포로가 되어 니네베에 끌려갔으나 후에 아슈르바니팔에 의해 다시 그의 제후국에 복위된 보 코리스의 아들 네코 Necho 그리고 기원전 663 년에 자신을 상, 하이집 트의 왕이라 칭하고 사실상 이집트롤 통일하여 기원전 525 년에 캄비 세스 Camb y ses 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지배하였던 제 26 왕조를 창건한 네코의 아들 프삼네티코스 Psamne ti chos7} 바로 그들이었다. 제 26 왕조 의 왕들이 그리스인과비이집트인의 용병에 많이 의존하기는 하였지 만, 〈리비아〉 시대에 성장한 〈전사〉 계급은 후에 그리스 저술가들에 의해 목격될 정도로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세습적인 사제직에 관해서, 사제 가문의 출생이 제 12 왕조(헵제피)에서 그리고 제 26 왕조와 페르시 아의 지배하에서 분명히 중요하였으나, 사제 가문 출신이 아닌 자가 사제직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을 필자는 감히 할 수 없다. 전사, 사제 또는 그의의 계급이 고대 이집트의 어떤 시대에서도 인도의 계 급 제도와 같은 의미의 계급 제도를 형성하지 못하였다.

VII 인도의 봉건제 소너 Danie l Thoner 대부분의 인도 역사에 관한 원사료는 드물고, 다루기 힘들며, 일상 생활적인 사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인도 역사를 연구하는 사학자들은 이런 난해한 사료들로부터 단순히 언제, 어떤 일이 발생하였는가를 밝히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저서둘은 인도의 중요한 발달 단계 또는 발달 유형을 설정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는 사회 과 학도에게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필자가 알고 있는 한 인도의 봉건제만 중점적으로 연구한 서적은 없다. 더군다나 인도의 역사 발전에 있어 봉건제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논문은 한 편도 없다. 인도에, 이 책의 서론에서 - 설명한 의미의 봉건 시대가 있었는지의 여부를 말하기 위해서는, 인도-아리안어를 구사하던 민족이 약 33 세기 전에 북쪽에서 인도로 침입해 온 이후의 인도 역사적 단계 전부가 새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연구를 하는 대신에, 우리는 〈봉건적〉이라는 용어가 가끔 적 용되는 두 체제, 죽 서인도에서의 라지푸트 Ra jp u t의 지배와 북인도의 모슬렘 체제를 선택하여 논의할 수 있다. 인도 역사의 이러한 단계를 봉건제라는 관점에서 연구한 중요한 두 학자의 업적을 먼저 검토하 고, 그러고 나서 그들이 설명하고 있는 시대와 제도를 어느 정도로

타당하게 봉건 시대로 규정지을 수 있는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1 라지푸트 국가 〈라자스탄 봉건제의 개관〉은 제임스 토드Ja mes Tod 가 1829 년에 『라자스탄의 연보와 업적』” 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던 책의 앞부분 에 나오는 제목이다. 인도의 봉건제에 대한 논쟁은 원사료의 분석에 서 유래하였다기보다는 이 책의 출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6 살때에 토드는 동인도 회사 군대의 사관(士官) 후보로 임명되었고, 1800 년경 에 영국에서 인도로 건너갔다. 거기에서 그는 군인, 정치인의 자격으 로, 특히 인도의 중부 지방과 라지푸타나 지방에서 24 년간 근무하였 다. 이 근무 기간 동안에 토드는 라지푸트의 생활 방식에 깊은 관심 을 느꼈고, 라지푸트 제후pri nces 들과 친교를 맺었으며, 몇몇 제후들 이 그에게 그들의 궁전에 보관되어 있던 문서와 여러 가지 기록들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할 정도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2) 토드 자신도 초창기에는 라지푸트에 대한 연구를 취미삼아 시작하 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라지푸트의 〈군사 제도 mar ti al sys - t ern 〉와 〈전통적인 통치 원리〉가 〈적어도 유럽의 봉건제가 아직 완전 히 발달하지 않았을 때의 유럽의 봉건 제도〉와 아주 유사하지 않나하 고 추측하기 시작하였다. 할람 Hallam 이 중세 봉건제에 관한 연구를 그의 저서 『중세 유럽 국가의 전망』 (London, 1818) 에 발표하였을 때, 토드는 이 책을 연구하였고 그의 의문은 풀리게 되었다 .3) 그는 라 1) Jam es Tod, Annals and Anti qu it ies of Raja s th a n, or Cent ra l and Weste r n Rajp u t Sta t e s of India , ed. wi th Intr o ducti on and Note s by Wi lliam Crooke, 3vols.(London, 1920). 2) 토드의 경력에 대한 설명은 Crooke7l- 편 집한 토드의 Annals l, i -x x liv 의 서론에 기술한 것을 따름.

지푸트의 제도는 정말 봉건적이라고 할 정도로 유럽의 제도와 유사하 다고 결론지었다• 만약 토드의 견해가 그 이후의 연구자들에 의해 확 인된다면, 그의 결론은 현재 우리들의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 고 있다 . 왜냐하면 라지푸타나는 사회사의 연구가들에게 아주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11 세기부터 18 세기까지 라지푸트국은 인도의 다 른 어떤 지역보다도 그들의 옛날의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라지 푸타나에 대 한 연구자의 한 사람인 라이 알 A. C. L y all 이 187 5\'i에 말 한 바와 같이, 이 국가들은 〈 비교적 안정된 정착 생활을 하였던 종족 둘의 문화권에서 지금 찾을 수 있는 고대 제도를 갖고 있는 가장 훌 륭한 본보기 〉 가 된다 . 라지푸타나의 제도는 〈 인도에서 고대의 정치적 제도가 상당한 규모로 남아 있는 유일한 제도이다 . ……>4) 토드는 라지푸타나의 어느 쪽을 살펴보더라도 특질상 봉건적인 관 계가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다. 토드가 말하고 있는 봉건적인 관계의 주요한 특칭은 무엇인가? 첫째 , 계급적인 사회 구조인데, 이 계급의 정점에는 수십 명의 라지푸트의 제후들이 있었다. 귀족 가문들은 제 각기 화려한 봉건적 인 문장(紋章), 죽 군기 (軍旗, armori al beari ng ), 북 kett le- dr um, 은제 홀(忽 sliv e r mace) 을 갖고 있었으며 그들의 명 예를 노래하는 음유 시인 bard 울 데리고 있었다. 대제후 ch i e f는 그의 휘하에 봉토fi e f를 보유하며 그 토지의 크기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는 높고 낮은 봉신 vassal 을 거느리고 있었다. 봉신들의 의무는 군역, 제 후 개인에게 시중 드는 일, 상속세 reli ef 부조금과 같은 각종의 부담금 울 내는 것이었다. 지체가 낮은 가문은 제후가 이미 양도된 토지를 다시 재분할받았다. 토드는 이것을 분명히 재분봉이라고 명명하였다. 토드는 이 재분봉 과정은 한 사람의 기사를 부양할 수 있는 정도의 3 ) Annals, I , 154. 4) Asia t ic Stu d ie s : Relig iou s and Soc ial , 2nd edn., I (London, 1907), 219 - 220.

토지, 죽 최소 단위 인 차르사 (charsa : l 하아드 hid e of land) 의 크기가 될 때까지 계속된다고 생각하였다 .5) 지금 설명된 이런 각종의 토지 보유권을 토드는 봉건적이라고 불렀 다- 영주 t hakur 는 제후가 양도p a tt a 한 토지를 보유 gi ras 한다• 그러 나 라지푸타나에서는 이러한 것만이 유일한 토지 보유 제도가 아니었 다. 이것과 더불어, 토드는 부미아 bhum i a7} 유럽의 사유지 allord 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였다. 부미아는 〈 가장 의미 심장하고 포괄적인 이 름이며, 그 토지 소유자의 신분은 그 토지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뜻이 다 〉 . 이런 식으로 보유된 토지는 그 지방의 지배자에게 관습적으로 수확의 . 일부를 내는 조세가 면제되었다. 부미아를 가전 제후의 재정 을 담당하는 관리라 할지라도 부미아의 크기를 측정할 수 없을 뿐 아 니라 거기에서 나오는 수입의 정도를 측정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부 미아 보유권은 아주 높이 평가되었다• 부미아를 보유하고 있는 자들 은 그들 자신들을 라지푸타나의 초기 제후들의 후손둘이라고 생각하 였다. 부미아 토지는 그것을 양도받는 데 따른 세를 납부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 토지는 관례적인 형태로 소유p rescr i pti ve po sse- ss i on 되므로 이 토지의 양도가 반복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토지 가 부담을 지고 있는 것은 매년 납부하는 소액의 부역 면제세 qui t - ren t와 국경 수비대 혹은 일종의 불규칙적인 봉건적인 민병으로서 봉 사하는 의무뿐이다. 〈대제후들은 심지어 그들의 지배하에 있는 촌락 에서도 이 토지 보유권을 가지려고 노력하였을 정도로 이 보유권은 인기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일반적으로 양도된 토지보다도 부미아가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는 증거이다〉라고 토드는 말하고 있다. 부 미아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이점 때문에, 실온 토지를 양도받지 않 고 봉사하는 것이 최대의 희망이었다 . 라지푸트 귀족의 입에 자주 오 르내리는 문구는 〈나의 토지 ma ka bhum 〉라는 말이 었다 .6) 5) Annals, I , 201 : I , Book ill, pas sim .

라지푸트국에서는 이러한 부미아 보유권에 의해 보유된 토지는 그 양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양도된 토지 g ran t s 보다도 훨씬 적었다. 여 러 형태로 양도된 토지의 분포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토드는 라지푸타 나의 최고(最古)의 국가이며 고대의 제도들이 아주 순수한 형태로 보 존되어 있는 메와르 (Mewar 또는 우다이푸르 Uda ip ur) 의 경우를 예로 둘어 설명하고 있다. 수도 우다이푸르(소위 우다이푸르국의 창시자라 는 우다이 성 Udai S i n g h 의 이름을 땀) 주변의 중심부를 제의하면, 전 국토의 약 3/4 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땅을 제후들이 그들의 영지로 보 유하고 있었다. 이 영지는 각기 약 50-1 0 ()7 n 의 촌락과 도시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나라의 중심부에는 지배자, 죽 메와르의 마하라나 Maharana 왕의 왕령지인 가장 기름진 토지가 놓여 있었다. 둘레가 약 25 마일이 나 되는 이 토지는 칼리사 kha li sa, 죽 왕의 수입원(寶庫)이었다. 〈중 요한 봉사의 대가로 이 땅의 일부를 하사하였다〉고 토드는 말하고 있 다. 수도 가까이 있는 단 몇 에이커의 땅을 정원으로 획득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되었다. 현재의 수도가 위치하고 있는 촌 락을 하사하는 것은 최고의 보상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부미아는 태고적부터 정착되었던 메와르의 일부 지역에서 나타나며, 〈이 지역 은 그들이 최초로 정착하였던 곳이며 황량한 돌과 바위 때문에 의부 의 압력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쿰발메르 Kumbhalmer 에서와 마찬가지로, 차판 Cha pp an 의 야생 지 또는 만달가르 Mandalga r h 의 평원은 오랫동안 왕의 지배하에 있었고, 거기에서 그들은 농업 생 활을 영위하였다. 만달가르 지역에서는 4,000 개의 부미아 토지가 있었 다. 그들은 지난 반 세기 동안의 혼란 속에서 자신들의 군주를 위해 서 아무런 도움 없이 그 지역의 요새지를 지켜 나갔다 .7) 군주pri n ce, 족장 ch i e ft a i n, 소봉신 lesser vassal 과 부미아의 관계는 무엇인가? 여기 6) Annals, I, l90-197, 576-577. 7) Annals, I, 166, 196-197.

서 우리는 실제로 있었던 것 이상으로 〈 정부 〉 의 기능을 서술하지 않 도록 주의해야 한다. 토드 자신의 〈 라자푸타나의 봉건 제도 〉 들에 대 한 설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 이 제후국 중에서 민사, 형사 법전을 가졌던 제후국이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1829 년 현재에 그들의 문서고에서 그런 법전이 발견될 것 같지 않다 는 것은 분명하다 〉 . 이것을 전제로 하여 다음과 같은 아주 개략적인 정부 구조의 윤곽이 제시될 수 있다. 〈 국가의 주요한 원천은 군주였 다. 국가의 성격과 안녕은 통치자의 성격과 안녕에 달려 있다. 〉 전국 에 효력을 미칠 수 있는 입법권은 군주, 그의 자문 회의, 4 명의 그의 중신과 중신들의 보좌관에게 있었다. 그러나 군주의 자문 회의의 주 된 관심사는 평화와 정부의 안정을 위협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 다. 이러한 문제가 자문 회의에 제기되었을 때, 호족들도 그 회의체 성원이 된다. 평화시에 그 자문 회의의 주된 관심사는 왕에게 바칠 세의 칭수에 대한 감독과 왕실령에서 사법권을 행사하는 일이었다 .8 ) 지방에서 군주의 권력이 행사되었다면, 그것은 두 부류의 관리들, 죽 변경 수비대의 우두머리와 그 제후국을 구성하고 있는 지방에 거 주하고 있는 그 지방의 상주(常住) 지배자 (res i den t rulers : 일반 행정 관리와 군무(軍務) 관리가 병합됨)에 의해 행사되었다. 상주 지배자의 중심 관청은 일반적으로 각 지역의 중심 위치에 있었다. 이 상주 지 배자의 일반 행정적인 힘은 상당히 약하였다. 왜냐하면 지방 호족들 c hi e f s 은 그들 자신의 특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었 다. 그리하여 〈사법권 행사와 호족 영지의 내부 관리 문제에 대해서 정부 관리는 거의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토드는 말하고 있다. 옛날 부터 지방에서 선출한 재판관인 판차야트 Pancha ya t s7} 재산에 관계된 모든 사건을 재판하였다. 호족은 왕의 특별한 허가 없이는 형사 사건 에 관여할 수 없었으나, 사실상 〈사법권은 오랫 동안 지방의 특성에 8) An 血 /s, I, 174, 170, 172.

따라 행사되었다 〉 는 점을 토드는 인정하고 있다. 군주의 법정은 항상 왕령지, 죽 칼리사에 설정되었다. 〈 만약 군주의 법정이 호족의 영지 내에 설정된다면 그것은 호족을 경멸하며 호족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 이다• 호족의 거주지 담안에 깃발을 세우는 것은 그 호족의 재산울 몰수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과 같이,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서이 건 또는 각종의 의무 수행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건 간에 호족의 영지 내에 ‘깃발을 세우는 것 erec t fl a g'은 호족의 독립적인 특권을 심각하 게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 9) 재산 몰수는 호족과 그들의 봉신과의 상호 관계에 대한 심각한 문 제를 야기하였다• 어떤 상황하에서 군주 혹은 호족이 봉신에게 토지 를 양도할 수 있었는가? 이러한 양도의 조건은 무엇인가? 어떤 조건 하에서 봉신은 그의 주군 lord 에게 대한 의무를 거절할 수 있는가? 이 러한 문제에 대한 토드의 연구는 라지푸타나에 봉건제와 봉건제에 관 한 용어를 적용할 수 있을지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토드의 주장에 따르면, 부미아 토지 보유권은 특별 범주에 속하 는 것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러한 토지를 소유한 자들은 군주로부터 토지를 하사받은 자들보다도 더 강력하고 더 실질적인 권한을 그 토 지에 대해 행사하였다. 〈영구적인 봉토를 받았을 때, 운수가 사납고, 왕의 은총을 잃게 되면, 그가 쌓아온 영주적인 권리가 몰수될 수 있 었지만, 그가 살고 있던 사회에서 저절로 얻어전 그의 권리는 결코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과, 그가 영주직을 잃게 되면, 그는 그가 속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며, 그의 타쿠르(영주)라는 칭호는 보다 격이 낮 은 부미아의 주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 이의에 호족이 라이오트 (r y o t : 죽 농노)를 통하여 수에이커에 지나지 않는 부미아에 대한 권리를 왜 확립하려 하였겠는가〉고 토드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10) 9) Annals, I, 167, 172, 167n, 171- 1 72 . IO) Annals, I , 575.

우리의 진정한 관심사는 특히 메와르국에서 토드가 말하는 왕의 봉 토에 집중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그 형태가 원래의 모습 그대로 오랫 동안 유지되어 왔던 곳이다. 라지푸트인들이 그들의 종족 이름을 붙 였던 땅(라지푸타나 또는 라자스탄 Ra jp u t ana 또는 Raj as t han) 을 정복 하던 초기 단계에서는 봉토는 한 사람에게 영구히 양도된 것이 아니 며, 그 봉토는 타인에게 다시 양도될 수 있었다고 토드는 믿고 있었 다. 그러나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라지푸타나에서도 봉건 제도의 발 달 과정에서, 봉토는 점차적으로 영구히 세습되었다. 발달된 봉건제에 서 토지는 〈 그 보유자의 일생 동안 양도되었는데, 군주의 허락을 얻 어 그의 직계 후손 또는 그가 입양한 양자에게 상속될 수 있었고, 그 보유자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와 무능력하였을 때 회수될 수 있었다. 이렇게 회수할 수 있는 권한은 피양도인이 죽을 때마다 상속인이 상 속세를 납부하는 행위와 신서와 서임의 의식에서 나타난다 〉 . 이러한 보유권의 특징은 혈연 관계의 중요성이라고 토드는 강조한다. 전형적 으로 봉신은 그의 영주의 친척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는 경우, 즉 영 주가 라지푸트인이기는 하나 혈통이 다른 종족 출신의 봉신을 거느릴 경우에, 하사된 토지의 보유권은 열등하였다. 이러한 혈연 관계가 없 는 사람에게 하사된 토지는 칼라 파타 kala pat t a, 죽 〈 흑색 토지 black gr an t〉라는 별명을 갖는다. 혈연 관계가 없는 자는 그 토지롤 계속하 여 〈 20 세대 동안에〉 보유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혈연 관계를 갖고 있는 자가 토지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만큼의 권리를 행사 할수 없었다 .II) 사실상 이 사회에서 혈연 관계의 역할을 생각하면, 라지푸트 사회 는 전정한 가부장적인 사회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 16 명의 최고 의 귀족으로부터 차르사(하이드)의 토지 보유자에 이르기까지의 봉신 들 중에서 수장격에 해당하는 자의 대부분은 왕과 동일한 혈통〉이라 I l) Annals, I , 192-1 95.

고 토드는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양가(兩家)가 왕실의 혈통을 순수 하게 갖고 있는 자만이 왕의 봉토를 전정으로 세습할 수 있었다. 라 지푸트의 최고의 군주는 단지 1 차르사의 토지밖에 소유하지 않은 가 난한 라지푸트 집안의 딸과 결혼을 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결혼으로 결코 그의 신분이 격하되지 않았다. 메와르에서 세력이 강한 두 부족 촌다와트 Chondawa t와 삭타와트 Sak t awa t는 왕실 혈통도 가졌으며, 쿠 라 세소디아 Kula Sesod i a는 라지푸트의 주요한 부족이었다. 이 두 부 족의 지손(枝孫)들은 메와르의 주된 봉신들이었다. 그러한 혈연 관계 는 이미 오래전부터 실질적으로 소유해 왔던 하사된 토지를 회수하려 고 하는 군주에게 위협이 되었다. 〈비록 이 모든 영지에서 이질적인 요소가 혼합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그 영지의 장(長)의 혈통은 아주 중요하였다. 이러한 영지는 그들의 우두머리를 가졌거나 혹은 가까운 친척의 영지와 통합되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영지의 증가는 왕에게 는 바람직하지 못하나, 그렇다고 배신 sub-vassal s¾ 방치해 둘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지방에서는 여러 사람이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토 지의 회수가 절실하게 필요하였다. 만약 범죄와 무능 때문에 새로운 우두머리의 임명이 필요하다면, 군주는 그 가문에 새로운 우두머리를 임명하였다. 군주가 그 선택을 잘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들의 긍지일 뿐 아니라 군주에게도 이익이 되는 것이다.〉 12) 사실 토드의 비판자들은 라지푸타나에서 주군과 봉신의 관계가 실 질적으로 기본적인 관계였는지의 여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 관계는 부족장과 그의 친척과의 관계라고 주장하였다. 토드 자신은 이 문제를 연구하기 위한 자료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의 저서 『라자스탄의 봉건제의 개관』의 부록에 주로 1750 년과 1820 년 사이의 시기에 해당하는 20 개의 문서를 수록하고 있다. 이 시기는 무굴 제국 이 몰락한 다음의 시기이다. 라지푸트 사회의 구질서는 의부로부터 12) Annals, I, 155-156, 165, 193, 195.

W 인도의 봉건제 213

공격을 받았고 안으로는 모험심이 있고 야심만만한 군벌 warlords 둘의 도전을 받았다. 그 사회의 구질서를 옹호하고 그로부터 이득을 본 자 둘은 이 도전에 저항하였고 마침내는 의부로부터의 도움을 요청하였 다. 그들은 그들이 옹호하였던 고대 사회의 구조와 그들이 수모를 당 한 방식을 기술하여 그들의 불만을 토로하였다. 이 도움을 받은 자들 중에 토드도 끼어 있었는데, 그는 1818 년에서 1822 년 동안에 라지푸 트국의 동인도 회사 정치 고문이었다 .13) 이 항변과 호소문의 주요한 골자는 고대의 관습이 파기되고 토지의 강탈이 자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그들은 대제후와 족장들이 소 귀족과 라지푸트인들에게 보여야 할 위엄을 지키지 않고, 농민들은 각종의 부담금과 임의로 부과되는 벌금으로 핍박받고 있다고 불평을 하였다. 1821 년에 그들의 군주 조드푸르의 마하라자 Maharaj a of Jod - h p ur 가 그들의 토지롤 때앗은 과정을 기술하면서, 마르와르 Marwar 의 족장들은 다음 내용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마하라자와 그들 자 신들은 모두 라지푸트의 혈통이며, 모두 라토르 Ra t hors 가(家)에 속한 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들의 우두머리이며, 우리는 그에게 봉사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는 화가 치밀어 우리들의 토지를 빼앗았 다. 그 토지 중에서 우리들의 가득 재산과 주거지의 일부는 칼리사 ‘군주의 재정 수입원’으로 변경되었으며, 이런 운명을 피하려 한 자들­ 도 똑같은 운명에 처해지게 되었다. 조두푸르의 이전의 어떤 군주에 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정신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의 조상들 은 수세대 동안 지배해 왔다. 우리의 조상들은 그들의 관리였으며 조 언자였다. 우리들의 족장들 회의의 집단적인 지혜로 모든 일이 시행 되었다. 지금은 사려 깊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 군주를 둘러싸고 있다. 그런고로 이런 상황은 원상대로 복원되어야 한다.〉 이 간결한 선언의 첫부분은 다음과 같은 군주와 마르와르의 족장들 사이의 상호 관계에 13 ) Annals, I , xxvi .

관한 선언으로 끝을 맺는다• 〈 우리들의 봉사를 받아들일 때, 그는 우 리의 주인이다. 그가 우리의 주인이 아닐 때, 우리는 다시 그의 형제 둘이며 친척들이고, 토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을 할 수가 있다. 〉 1 4) 봉 신과 그들의 주군이라고 표현되기는커녕, 이 표현은 부족적인 형제, 동일한 혈통을 가전 사람들, 서로 평등하다는 말을 한 것같이 들린다. 이것은 지체가 높은 군주가 아주 가난한 라지푸트의 딸과 거리낌 없 이 결혼할 수 있는 부족에게 적합한 표현이다. 단순히 거두절미된 전 술로부터 여러 가지 결론을 내렸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수도 우 다이푸르 북쪽으로 몇 마일 떨어전 메와르의 한 지방인 데오가르 Deo g arh 에서 1819 년에 만든 비슷한 선언문이 증거로 제시되었다. 데 오가르의 부(副)부족장 subch i e f s 둘은 그들의 족장 마하라자 고쿨다스 Maharaja Gokuldas7} 〈 옛날부터 확립되어 내려온 특권 또는 관습을 존중하지 않는다 〉 고 비난하면서 그에게 충고하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목적을 위하여 메와르의 족장들이 조드푸르의 마하라자에 대해 느끼 고 있는 감정과 유사한 느낌을 표현한 문구를 들어보기로 하자 : 〈데 오가르가(家)가 확립됨과 동시에 우리들의 토지의 몫 allo t men ts.£ 확 립되었다. 그것이 그의 세습 재산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또한 우 리들의 세습 재산이다.〉 이러한 전술을 한 부(副)족장들, 그리고 그들 의 친척과 그들의 불만의 근원이 된 족장 모두 세소디아가(家)의 종 가(宗家) 계통이며, 이 가문의 족장이 메와르를 지배하였다. 그러므로 맺음말에서 부(副)족장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는 것은 중요하 다. 〈 그의 가문에 대한 우리의 권리와 특권은 그가 그의 가문에 대한 권리와 특권과 동일하다. ‘죽 메와르의 지배자 마하라나 앞에서는 동 등하다.’〉 15) 이제 우리는 다음의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토드가 주군과 봉신과 14) Annals, I , 228- 2 29. 15 ) Annals, I , 230- 2 32.

의 봉건적인 관계라는 의미로 설명한 보유지는 본질적으로 가문의 혈 연과 생득권(生得權)에 의해 보유되는 부족 보유지 tri b a l hold i ng s 였던 가? 토드의 저서 『연보 Annals 』를 가장 찰 편집한 윌리엄 크루크 W it­ liam Crook 눈 후자의 입 장을 취하고 있다. 북인도의 부족 조직 에 대 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크루크는 라지푸트의 현상과 서유럽 중 세 봉건제의 현상에 대한 토드의 비교 연구를 일축하면서 다음과 같 이 기술하고 있다. 〈토드가 했던 것처럼, 라지푸트의 제도들과 중세 유럽의 사회 조직 사이에 어떤 유사성-상속세, 양도에 따르는 세의 납부, 회수권 es­ cheat, 경제적 부조 a i ds, 후견권과 결혼권의 유사성-울 추적하는 것 은 가능하지만, 면밀히 검토를 해보면, 이러한 유사성은 아주 피상적 이라는 것이 판명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라지푸트의 부족 제도에 대 해 비교 연구하기를 원한다면, 인도의 국경 지방인 파탄 Pa t hans, 아 프간Afg hans, 발로치 Baloch 에 어느 정도 혈연을 중심한 부족 제도 혹은 칸드 Kandhs, 곤드 Gonds, 문다스 Mundas 또는 오라온스 Oraons (인도의 중부 고원 지대의)에 좀더 원시적인 단계에 있는 부족 제도 가 있는 한, 우리는 굳이 중세 유럽을 들출 필요는 없다. 중요한 골자 만이 서로 공통이 되는 두 제도를 비교하는 것과 그리고 단지 피상적 인 유사점만 나란히 제시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 면 각개의 사회적인 발달은 서로 다른 선상에서 진전되었기 때문이 다.〉 16) 만약 라이알A. C. L y all 이 187 처에 정치 제도에 초점을 맞춘 「인 도의 라지푸트 국가들 The Rajp u t Sta t e s of Ind i a」 17) 이라는 훌륭한 논 문을 발표하지 않았더라면, 토드가 제시한 봉건적인 비교 연구를 일 축한 크루크의 견해는 설득력이 덜했을지도 모른다. 라이알 자신은 16) Intr o ducti on to Annals, I , xxxix . 17) As iat i c Stu d ie s , I , 203-2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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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지푸타나에 대해 정통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1870 년대에 그는 최고의 지방 장관으로서 라지푸타나에서 근무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헨리 메인 경 Sir Henry Ma i ne 의 친구이자 가까운 제자로서, 그 는 정치 제도 비교 연구에 광범위한 관심을 갖고 있는 메인 경과 견 해를 같이하고 있었다 .18) 라지푸타나 연구의 초두에서, 라이알은 라지 푸타나라는 용어는 〈 라지푸트인의 땅 Land of the Raj p u t s 〉을 의미한 다기보다는 〈 라지푸트인에 의해 지배되는 땅 Lands Ruled by the Raj- pu t s 〉 을 의미한다고 강조하였다.(라지푸타나 내에서보다는 라지푸타나 밖에 더 많은 라지푸타나인이 있었고 현재에도 그렇다) 그는 독자들에 게 프랑스인들의 나라인 프랑스라는 식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롬바르드 인에 의 해 정 복된 롬바르드 이 탈리 아 Lombard It al y4i:곤 식 으로 생 각 하도록 요구하였다. 라지푸타나의 서부 국가들에서는 적어도 〈정복 부족이 처음 그 지역에 들어갔을 때 그들이 획득한 지위를 그대로 유 지하고 있었다〉 19) 고 라이알은 생각하였다. 그는 라지푸트족을 그들이 처음 정복을 하였을 때 복속시킨 종족으로 구성된 경작자들의 계층 위에서 정치적, 군사적으로 군립한 종족으로 보았다. 그들은 정복을 한 종족 집단이며, 그 땅의 주인이다. 그리고 개개의 라지푸트국에서 는 통치권은 유력한 가문의 씨족장의 수중에 있었는데, 그 족장의 지 위는 세습되었다. 이 족장은 〈각 제후국을 세운 사람의 남자쪽으로 가장 가까운 직계 적자의 후손이었다. 그리고 종가(從家)의 장(長)은 라지푸트의 중요 귀족이 되었으며, 그 국의 지주(支柱)가 되었다〉 .20) 어떤 점이 봉건제와 유사한 점인가라고 라이알은 묻고 있다. 라지 18 ) Hennan Ausubel 등이 편집 한 Some Modern His t o r ia n s of Brita in : Essays in Honor of R. L. Schuy le r(New York, 1951 ) pp. 66-8 4 에 필자가 기고한 논문 “Sir Henry Ma i ne” 를 참조. 19) As iat i c Stu d ie s , I, 224. 위에서 pp. 225-245 를 인용한 것처럼, 이곳과 다음 에 계속되는 3 문단은 라이알의 표현을 거의 그대로 인용함. 20) As iqtic Stu d ie s , I , 228.

W 인도의 봉건제 217

푸트 전체 국가들의 내적인 조직이라고 그는 답변하고 있다. 유력한 가문의 족장은 단일한 최대의 땅을 보통 소유하였으며, 나머지 땅은 종가와 그들의 지손(枝孫)들에게 대체로 분할되었다• 씨족 조직이 강 하면 족장에 의해 직접 지배되는 지역은 적었고, 족장의 세력이 최근 에 강대해전 곳에서는 그의 지배 영역은 커지게 마련이었다. 종가의 세습적인 족장들도 상당히 넓은 지역의 땅을 소유하여 소족장처럼 그 지역을 지배할 수도 있었다. 종가의 족장들은 그들의 국의 족장들에 게 의무를 지고 있다. 그들은 이민족의 침입 또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 군사적인 봉사를 해야 한다. 그들의 토지는 그들이 제공할 수 있 는 기사의 수에 따라 . 등급이 나누어졌다. 상속될 때마다 소족장의 상 속인은 국가의 우두머리에게 신서를 해야 하고 그에게 세를 지불하여 야 한다. 이 행위는 그가 그의 상속 재산울 법적으로 소유하는데 따 론 본질적인 행위이다. 그는 또한 다른 관습적인 의무를 수행하는데, 라이알은 이것을 〈봉건적인 성격〉이라고 규정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 지 않았다. 이러한 봉사, 의무와 병행하여 〈그의 권력에 대한 그들의 질투십은 결코 중단되지 않았다〉. 그러나 합법적인 소환에 불응하거 나 혹은 신서를 거부하는 행위는, 만약 족장이 강행할 수 있다면, 토 지의 몰수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21) 이러한 사회는 얼핏보아 놀라울 정도로 봉건 사회와 유사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라이알은 기술하고 있다. 이것 때문에 〈토드는 두 형태의 사회, 죽 부족 사회와 봉건 사회의 명백한 차이점을 간과 하였다. 그는 소위 그가 말하는 봉신과 그들의 주군과의 관계가 혈연 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라지푸타나에서 실시되고 있던 제도를 봉건적이라고 여전히 주장하고 있다.〉 22) 그러나 사실온 서(西)라지푸타나의 어디에서도 그 제도들은 완전한 봉건 제 21 ) As iat i c Stu d ie s , I , 240. 22) As iat i c Stu die s , I ,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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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발달되지 않았다고 라이알은 단언하였다. 다시 말하면 〈 어디에 서도 군사적인 보유권이 혈통과 종족의 생득권에 의한 보유권을 대신 하지 못하였다 〉 〈 라지푸타나에서의 토지 보유권은 라지푸트 귀족제의 기반이 되지 못하였다 〉 라고 라이알은 기술하고 있다. 오히려 〈그들의 순수한 혈통이 그들의 토지 보유권의 기원이 되었다 〉 . 이러한 사실이 마르와르의 족장들과 데오가르의 부(副)족장들의 항의의 배경에 깔려 있었다• 이러한 항의는 봉건적인 개념과 무관한 권리에 기초하고 있 댜 그리고 모든 라지푸타나의 종족들은 족장과 국의 지배자는 단지 동등한 자들 중에서 제 1인 자 pri m us int e r p ares 이다라는 점을 보편적 으로 인정 하였다 .23 ) 토드에 대한 그의 마지막 평가에서, 라이알은 토드를 라지푸타나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갖고서, 전례 없이 철저한 특수 연구를 한 인물 로 평가하였다. 〈 라지푸트의 봉건제는 그 사회의 기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상부 구조였디는· 점과, 그가 조사한 바와 같이 라지 푸타나는 유럽에서처럼 부족적인 기반 위에 세워진 봉건 단계로 급속 하게 이행해 가는 부족적인 수장제였다는 점을 토드가 간과하였다고 해서 그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24)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라이알은 만 약 1750 년 이후에 영국의 세력이 인도 전역을 지배하지 않았다면, 라 지푸타나에서 실제로 봉건제가 발달하였을 것이라는 인상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다. 2 북인도의 모슬렘 체제 인도의 초기 모술렘과 무굴 제도를 봉건적이라고 분명하게 특칭지 23 ) As iat i c Stu d ie s , I , 245. 24) As iat i c Stu d ie s , I ,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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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인물은 제 1 차 세계 대전 전의 러시아 사회, 경제사가 협회의 회장 이었던 막심 코발레프스키 Max im M . Kovalevsk i였다 . 2 5) 코발레프스키 가 오랜 연구 기간 동안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분야는 〈 토지 재 산의 발달 과정에 대한 역사 비교 연구 〉 였다. 그는 인도에 매력을 느 꼈다. 왜냐하면 인도는 이상하게도 옛날 형태의 토지 보유처]도를 많 이 유지하고 있었고, 이러한 보유 제도가 영국의 농업 정책의 영향하 에 해체되어 가는 방식을 연구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코발레 프스키는 역사 연구를 처음 시작하였을 때인 1870, 1880 년대에 이 분 야에서 영국의 최고의 권위자였던 헨리 메인 경과 교분을 맺었다. 그 가 같은 분야에서 연구를 시작하게 된 것은 메인 경의 저서와 그와의 대화 덕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메인은 그가 런던에 있는 인도관 의 문서고를 출입할 수 있게 하고 수많은 값진 자료들을 집할 수 있 도록 도와주었다 . 2 6) 코발레프스키는 모술렘 인도를 다루고 있는 저서 의 6 장에 필요한 자료들을 런던에서 발견하였다.

25) Kovalevski, Obshchin n oy e Zy em levladye n ie , Prich in i, Khod i Poste d ' st v iy a evo Razlozh e niy a (Communal Landholdin g : Causes, Course, and Result s of Its Dis in t e g r a ti on )(Moscow, 1879). 인도에 관계되는 장의 번역은 펜실베이 니아 대 학의 The South Asia Regi on al Stu d ie s De p ar t men t의 과장인 Dr . W. Norman Brown 의 격려와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Leig h L i sker 와 Suren-dra J. Pate l 박사가 이 장을 번역하였다. 26) Kovalevski, 서문.

코발레프스키에 의하면, 인도가 〈 봉건화 〉 되는 과정에 결정적인 영 향을 끼친 것은 11 세기부터 특히 북서 인도에서 시작된 일련의 모술 렘의 정복이었다. 그는 첫째 〈 토착 민족인 라자스 (Na ti ve Raja s : 주로 힌두족)〉하의 인도의 농업 구조를 개괄함으로써 그의 입장을 개진하 고 나서 모술렘 정복자들의 정책이 구제도들에 끼친 영향을 분석하였 다. 그의 견해를 갇은 순서로 소개하고자 한다. 〈토착 라자스〉하의 농업 구조를 분석하면서, 코발레프스키는 특질 상 봉건적인 특칭을 가전 어떤 관계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는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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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의 재산, 죽 공동체 토지 보유와 개인적인 토지 보유의 두 형태 를 찾아냈다. 기본적이고 가장 전형적인 토지 보유 형태는 항상 공동 체적 보유였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27)

27) 여기서 코발레프스키가 분석하여 열거한 공동체적 토지 보유의 제 범주를 자세하게 논의할 수 없다 : 종족 공동체 (친족에 기반을 둠), 촌락 공동체 (친 족보다는 지역적으로 같이 거주하고 있는 자들에 기반올 둠), 가족 집단의 보유지 (분할할 수 없는 대가족의 재산). 토지 재산의 성격과 역사에 관한 방대한 저서들에서, 코발레프스키의 견해와 저서둘이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라고 언급하는 것으로 족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친족에 의한 공동체적인 보유는 반드시 친족 이 아닌 촌락인들에 의한 공동 보유로 바뀌었다고 코발레프스키는 믿 었다. 이것은 다시 분할될 수 없는 대가족 보유제로 바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토지 보유제는 비교적 늦게 출현하였다 . 코발레 프스키는 재산이 개별화되는 과정은 수세기에 걸찬 대단히 완만한 과 정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공동체적인 보유제가 개인적인 보유 제로 전환되는 데 작용한 두 요소에 주목하였다. 첫째, 그들 종족이 차지하고 있던 토지에 대한 최고의 소유권을 차지하려고 하였던 부족 장들의 노력이 그 첫째 요소였다 . 특히 부족장들은 소유자가 없는 땅 울 그의 개인 재산으로 하여, 그 땅을 경작하려고 하는 개인이나 집 단에게 양도할 수 있는 특별 권리를 가졌다고 주장하였다. 둘째, 성직 자 계급, 즉 브라만 Brahmans 의 역할이 두번째 요소였다. 그들의 활 동을 유지하기 위하여-종교적인 의식, 사원의 건립, 자선 등 __ 브 라만들은 특히 토지와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선물로 원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심한 장애가 된 것은 촌락 공동체와 분할할 수도 없고 또 양도할 수도 없었던 대가족 토지였다. 집단 보유제를 개인 보유제로 전환시키면 브라만에게 이익이 되었다. 인도의 법전을 분석 하면서 코발레프스키는 브라만이 행하였던 역할이 어떤 결과를 초래 하였는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코발레프스키의 중심 데제는 II 세기 이후부터 북인도의 모슬렘 정 복자들의 토지 정책이 구구조를 봉건화시키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모술렘의 토지 정책의 두드러진 특징은 익타iqt as28) 의 양도인데, 익타 는 술탄이 추종자들에게 요구가 있을 때마다 규정된 수의 군대를 제 공한다는 조건으로 분배하였던 촌락과 지역 d i s t r i c t이었다. 군역에 대 한 대가로 익타다르(iqt adars : 익타의 보유자)는 그들에게 하사된 촌 락 혹은 지역에서 거두어들인 토지 수입을 그들 자신이 사용하였다 (코발레프스키는 익타를 서유럽의 은대지 benefi ce 9 .} 동일시하였다). 하 지만 촌락인들은 계속하여 이전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적으로 혹은 개 인적으로 토지를 보유하였으나, 이전과 똑같은 개인적인 지위는 갖지 않았다. 그러나 조만간에 탁신(託身)에 의해 자유 토지 보유자는 〈 그 둘의 독립성울 상실하고, 그들의 사유지는 봉건 토지가 되었다 〉 . 코발 레프스키에 의하면, 이 〈봉건화 과정은 두 단계를 가지고 있는데, 첫 단계는 12 세기에서 15 세기까지이며(투르크와 아프간의 정복) 두번째 단계는 16 세기에서 18 세기까지의 무굴 (Mo g uls or Mong ol s) 지배하에 있던 시기이다.

28) 코발레프스키는 익타는 모술렘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울라가서 페르시아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믿었다.

코발레프스키에 의하면, 12 세기에서 15 세기까지의 봉건화 과정의 핵십은 익타의 보유자가 그들의 특권을 세습화하고 델리 Del i h 의 술탄 으로부터의 독립하려고 했던 노력이었다. 그리하여 13 세기 중엽에 많 은 익타다르가 그들이 갖고 있는 토지는 조건부가 아니라 세습적이며 조건이 붙지 않은 토지라는 이유로 군사적인 봉사를 거부한 예가 기 록되어 있다. 술탄은 군사적인 봉사를 할 수 없는 익타다르는 그들의 보유지를 · 몰수한다는 명령으로 대처하였다. 그는 또한 익타다르가 죽 으면 미성년의 상속자에게 상속된 토지를 회수하였다. l 心 }l 기에도 술 탄과 익타다르 사이에는 똑같은 마찰이 있었다. 일단 왕위에 오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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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낼 필요는 없었다. 이러한 익타다르 의에, 제국의 의곽 지대의 전 지역은 초기 모슬렘 지배때부터 계속 존속하여 온 힌두족의 귀족 가 문이 보유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자민다르 (zam i ndars, landholders : 토 지 보유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토지세를 칭수하여 중앙 정부에 납부하였다. 그들은 봉사의 대가로, 그들이 지방 주민에 대해 또 다른 세를 부과하여 그것을 소유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자민다르와 익타의 보유지는 세습적인 것이 아니었다. 황제와 지방관들은 새로운 통치가 시작될 때마다 이러한 보유지는 다시 양도받아야 하며, 임의 로 보유지를 박탈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은 〈 이 보유지 들의 대부분은 장남에게·상속되었다〉. 간단히 말해, 무굴의 지배자들은 인도에서 시행되었던 토지 제도를 기본적으로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지배하에서 기본적인 변화 가 서서히 발생하였다. 이 변화의 한 원인이 된 것은 은대지 보유자 여타다르)와 세리 (稅吏 : 코발레프스키의 표현을 빌리면 자민다르)에 게 양도된 권리가 애매모호하고 방대하였다는 점이다. 막대한 부담이 되는 조세, 핍박과 혼란 때문에 소토지 소유자들은 그들의 토지를 포 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자민다르는 소토지 소유자들의 토지를 개인 소유로 경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소토지 소유자들은 그 토지를 세습적으로 사용할 권리를 보유한다는 조건으로 그들의 토지에 대한 권리를 대귀족에게 양도하고 그들의 예속인이 되었다. 코발레프스키 가 서양 중세의 탁신과 아주 유사하다고 한 이러한 관행은 익발다르 iq baldar 로 알려졌다. 익발다르는 무굴 제국이 약해짐에 따라 급속도 로 파급되었다(황제 중에서 마지막으로 강력하였던 황제는 1707 년에 죽은 아우랑제브 Auran gz eb 였다). 동시에 은대지의 보유자와 자민다르 는(실제 이 두 계층은 통합되었음) 그들의 지위를 세습화하려고 노력 하였다. 그들의 세력이 증대되면서, 그들은 그들 자신이 직접 토지세 를 칭수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칭세권

울 제 3 자에게 임대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세금 청부업자들 은 징세권을 그들 자신의 세습적인 권한이라고 주장하게 되었고, 그 들의 권한을 그들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다시 임대하였다. 코발레프스키는 영국이 정복하기 전에 인도에서 무엇이 봉건적이 며, 무엇이 봉건적이 아닌가를 설명하면서 그의 논문의 결론을 맺는 다. 이를 위해 봉건제의 존속 여부를 가름하는 근거로 은대지 제도, 탁신, 관직의 임대와 세습적인 사법권의 4 개의 제도를 들었다 . 3 0) 이 중의 처음 3 개는 모술렘 지배하의 인도에서 분명히 존재하였다고 그 는 주장하고 있다. 마지막의 사적 사법권은 분명히 존재하지 않았다. 지방 법정(판차야트, 죽 5 인 위원회의 형식으로 촌락인들 자산들에 의 해 형성되고 운영되었음)은 대부분의 형사 사건과 모든 민사 특히 재 산에 관한 송사를 취급하였다. 코발레프스키는 인도에서는 봉건화가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서유럽에서는 봉건화가 철저하게 이루어지 게 되는 차이는 사실상의 자치적인 성격을 가진 이런 사법 제도에 기 인한다고 하였다. 그는 〈 관직의 임대 제도가 제국 전역에서 성행한 것은 아니었다 〉 라는 사실에 의해 민사 법정에 대한 자치권이 존재하 였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전 행정 구역은 중앙 행정부의 재무상 과 칭세관에 직접 예속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임의로 임명되고 해임 될 수 있었다. 이 제도는 대무굴 제국에서뿐만 아니라 무굴 제국에 종속되어 있는 나라에서도 시행되었다. 이 제도는 중부와 서부 인도 전 지역에 대한 권력을 단계적으로 그들의 수중에 집중시킨 ‘1~] 기' 마라타스 Mara t has 족에게도 알려졌다.〉 간단히 말해 중앙 정부의 권력 때문에 봉건적 관계가 제한적으로 발달하였고 공동체적 토지 보유와 봉건적이라기보다는 대중적인 사법 제도p op ular j us ti ce 가 유지될 수 30) 코발레프스키 자신은 이것을 봉건제의 존속 여부를 가름하는 타당한 준거 로럽에 받서아 들이이것지을 널않리았다 사. 용그하러였나기 그때가문 에18 7이01것d 대을 후준반거에로 저삼았술다을. 할 당시의 유

있었다. 서양에서는 개개의 공동체 사회 내에서 행사할 수 있는 최고의 권한 과 더불어 토지 보유권이 결국은 이전의 은대지 소유자와 지방관들의―― 이들 관직은 법적으로 세습화되었다-재산이 되었던 반면에, 인도에 서는 모술렘 통치 시대 말경에 이와 같은 결과는 단지 일부의 지역에 서만 나타났다. 그의의 지역에서는 공동체적 그리고 개인적인 재산은 전과 같이 토착의 소유자의 수중에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통치 권한은 중앙 정부에 의해 임명된 관리에게 맡겨졌다. …… 영국이 인도를 정복 하였을 당시에 인도의 봉건화는 여전히 완성되지 못하였다.…… 3 1)

31 ) Kovalevski , 6 장의 마지 막 문단.

모슬렘 인도의 봉건적 요소들에 대한 코발레프스키의 견해는 라지 푸트 봉건제에 대한 토드의 견해만큼이나 많은 신랄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모어랜드 W. H. Moreland 는 그의 주요 연구서 『모슬 렘 지 배 하의 인도 농업 제 도 Ag ra ria n Sy s te m of Moslem Ind i a 』 에 서 코발레프스키에 대한 비판 중 델리의 술탄 Sul t ans of Delhi 시대에 대 해서는 심한 혹평을 하지 않았다. 모어랜드는 두 형태의 익타들 . , 죽 보유지가 작은 단순한 〈군인들t roop ers 〉과 상당한 지역에 대한 행정 울 책임지고 있는 대귀족을 구분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면서 분석하 기 시작하였다. 모어랜드는 후자를 13 혹은 l 때 1 기에 흔히 갖고 있었 던 이름, 죽 묵티 mu qti라는 의미로 논의하였다. 그는 1.µ사 기에는 많 은 세력을 가진 묵티들의 대부분은 어렸을 때는 노예었는데 뒤에 왕 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는 점을 우선 지적하고 있다. 사실상 몇몇 왕 들은 노예 출신이었으며 그 결과 13 세기 왕조는 가끔 〈노예 왕 Slave Ki n g s 〉의 시대로 불린다. 이 이유만으로도, 〈왕은 그의 영역 봉신들 ter rito r ia l vassals 중에서 단순히 제 1 인자라는 의 미로 봉건제를 해석할

때 위의 귀족제를 봉건적인 관점에서 볼 수 없다고 모어랜드는 생각 하였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왕실은 노예로 가득 차 있으며, 이들 노예들은 그들의 공적이나 또는 왕의 총애에 의해 비천한 직책에서 지방관 혹은 왕국의 중요한 직책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이것 은 본질적으로 정상적인 아시아적 형태의 관료 제도이다 〉 .32) 초기 묵티의 출신 성분 때문에 모어랜드가 봉건적이라는 용어를 사 용하기를 거부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지위와 의무에 대해서 분 석하면서도 모어랜드는 역시 봉건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거부하 고 있다. 〈 묵티는 그 자신의 영토에 기반을 둔 지위를 갖지 않았다.〉 왕은 그를 언제든지 어느 곳에 임명할 수 있고, 이유가 있건, 없건 간 에 그를 해임시키거나 전보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조치는 봉건적인 제도와는 정반대가 되는 조치이다.〉 묵티의 지위는 순전히 행정가의 지위였다. 그의 의무는 통치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행정을 잘못하였 을 경우에는, 그는 벌금을 물거나 해임되었다. 그의 임무 중의 하나는 일단의 군대를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군인의 수와 보수는 왕에 의해 결정되었다. 묵티는 그가 책임지고 있는 지역에서 거둔 수입에서 군 인의 보수를 지급하였다. 이 경비와 그의의 인정된 경비를 제한 나머 지는 왕에게 납부하여야 했다. 묵티의 수입과 지출은 왕의 재무 장관 revenue min i s t r y의 감사를 받게 되어 있었다. 만약 결손이 생기면, 그 는 그 결손 부분에 대해 때때로 그 자신의 생명으로 보상해야 하였 다. 공금 횡령자는 산채로 살이 벗겨지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왕들은 좀 덜 잔인하기도 하였으나, 회계 감사는 계속해서 시행되었다. 이러 한 분석에 기초하여, 모어랜드는 델리의 왕국에 봉건적이라는 용어롤 적용하기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32) W. H. Moreland, Ag ra rian Sys t e m of Moslem India ( Eng : Cambri dg e , 1929), p. 218.

우리는 왕에 의해 그들의 직책에 임명되고、 그의 기분에 따라 전보, 해임 혹은 처벌을 받고, 왕의 명령에 따라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고, 재 무 장관의 엄격한 재정적인 통제를 받는 관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징의 어떤 것도 유럽의 봉건 제도의 특징에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요접을 살펴본 유럽의 역사 학자들괴- 같이, 그 유 사점은 봉건 조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국의 헨리 2 세와 같은 지배자 들이 봉건제의 대안으로서 내세우려고 시도하였던 관료 제도에 있다• 때때로 델리의 일부 귀족들이 봉건 귀족과 갈이 행동하였다는 사실, 죽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혹은 왕위 계승에 대한 분쟁이 있을 때 어느 한편에 가담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봉건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충동을 받게 되었다.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관료들은 봉건 귀족과 같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으며, 두 제도가 유사하다는 것도 너무 피상적이어서 봉 건적이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며, 만일 적용한다면 그 용어들이 의미하는 개념을 오도하게 된다. 그 왕국은 관료제와 봉건제 가 혼합된 것 01 아니며 그 왕국의 정치는 철저한 관료제였다 .33) 모어랜드가 행한 델리 왕국에 대한 분석 방법은 그 다음에 나타난 무굴 제국에 대해서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위에서 언급된 라지 푸트국들에 대한 그의 논쟁에서 라이알은 무굴 제국의 황제들이 인도 의 구토착 귀족제를 분쇄한 행위에 대해 언급하였다. 무굴족들은 그 둘의 세력이 미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지방 귀족들을 철저히 분쇄 하였다고 라이알은 주장하였다. 한편으로 〈그들이 만든 유일한 귀족제 는 고집쟁이로서 봉사의 대가로 하사받은 토지를 수세대 동안 상속하 여 유지할 수 있었던 운 좋은 소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34) 이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라이알은 무굴 제국의 위대한 황제 중 33) Ag rar ian Sy st e m , pp. 218-219, 221 . 34) As iat i c S tu d ie s , I , 248-2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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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마지막 황제인 아우랑제브의 궁중에서 봉사하였던 프랑스의 의사 프랑수아 베르니에르의 유명한 여행기 Travels 에 나오는 충격적인 문 구를 인용하고 있다. 무굴 제국의 궁중 귀족들은 프랑스의 귀족들과 같이 고래의 명문 집 안 출신이라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왕은 제국에 있는 모든 토지의 소 유자이며, 공국도 없으며, 후작령도 없다. 그리고 영지에서 나오는 부를 소유하며 그들 자신이 소유한 재산으로 생활하는 어떤 가문도 발견되 지 않는다 . 궁중의 총신은 때때로 귀족의 후손이 아니기도 했다. 귀족 둘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재산의 상속자인 왕 때문에 어떤 가문도 그 들의 영예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었고, 귀족의 사후에는 그 가문은 곧 몰락하여 그들의 자식 혹은 그들의 손자들은 일반적으로 거의 거지 상태로 전락하고, 다른 귀족의 기병대의 평범한 병졸로서 근무하지 않 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왕은 보통 그 귀족의 미망인과 때로는 그 가족 에게 조그만 연금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만약 그 귀족이 보다 오래 살 수 있었다면, 그는 왕의 총애를 받아, 특히 그들이 찰 생기고, 그들의 의양이 순수한 무굴인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경우에는, 그의 아들들 울 승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왕의 특별 총애를 받아 승전하는 것은 아주 느린 승전 과정이었다. 왜냐하면 조그마한 녹봉을 받는 보찰것없 는 관직에서 보다 신임을 받고 많은 녹봉을 받는 관직으로의 승진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변할 수 없는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귀족의 대부분은 서로 왕실에 소개하여 궁중에 들어온 타민족 출신의 모험가로 구성되어 있었고, 일반적으로 하층 계급 출신이며, 대부분은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무굴의 왕들은 그 자신의 기분에 따라 그들을 권좌에 올리기도 하고 하잘것없는 지위로 전락시키기도 하였다 .35) 35) Fancois Berni er , Travels in the Mogu l Emp ire, Arch iba ld Consta b le(ed.) (London, 1891), pp. 21 1-212.

V1 인도의 봉건제 229

그래서 이 책의 서론에서 제시한 대로 봉건제를 동치 방법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면 우리는 라지푸트국이나 북인도의 모슬렘 체제는 봉 건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영국의 침략이 없었더라면, 18 세기 북인도에서 혹은 19 세기 라지푸타나에서 봉건제가 실제로 발달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문제는 기껏해야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VIll 비잔틴 제국의 봉건제

1) 이 논문은 미국 지식인 단체 Ameri ca n Council of Learned Soc i e ty가 주최 한 봉건제에 대한 학술 희의에서 일반적인 논의를 위한 발제 논문으로 1950 년 가을에 제출되었다. 이 학술 회의의 결과에 기초하여 본 저서가 편집될 수 있었다. 이 요약문이 출판되도록 한 것은 이 논문의 필자의 의도는 아니 다. 왜냐하면 이 논문은 단순히 A. A. Vasil iev , Georg Ostr o g or sky 등의 학 자들이 아주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언급한 것을 요약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자신의 어떤 견해도 피력하지 않았다 . 하지만 필자는 그들 학자들의 주장을 찰못 이해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접을 인정하고 있다. 이 논문이 출판된 것은 편집자의 요구에 의해서이다.

칸토로위츠 Ernst H. Kanto r owi cz 1 서론 역사가들 사이에는 한 문화 주기에서 나온 제도를 설명하는 용어를 다른 문화 주기에 적용하거나 또는 근대적인 개념을 과거의 상황에 자유롭게 또는 아무 제한 없이 적용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神國)의 개념을, 비록 그 개념을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Ph il o of Alexand ri a 에서 끌어냈다고 하더라도, 비잔틴 제국의 종교 사상 또는 비잔틴 교회 전체에 적용하 는 것을 반대할지도 모른다. 또한 역사가는 중세의 길드를 노동 조합 tra de un i on 이라고 부르기를 꺼려할지 모르며 고대 세계의 사회주의

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유추하여 해석하는 방법은 원래의 제도와 그와 유사한 제도 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거의 내릴 수 없게 한다. 원래의 제도는 너무 쉽게 추상화되어, 그 제도가 형성된 시대와 지역의 고유의 환경이 무 시되고, 그리하여 그 제도 자체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원래의 제도 와 유사한 제도 모두를 지칭하는 용어로 원래의 제도에 사용되던 용 어를 사용하면, 유사한 제도가 생성될 수 있었던 환경이나 그 사회의 정신과는 무관한 상황에 빠지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러므로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역사가들은 그들이 논의하고자 하 는 시대와 문화권에 속하는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향을 갖고 있 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 과정을 통해 역사가들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역사가는 중세의 르네상스라고 언급하지 않고, 중세 의 개혁 운동 Renova ti o 이라고 언급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카롤링거 시대의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역사 발달 전 체가 분명해지게 된다. 카롤링거조의 개혁은 로마 제국의 개혁이라는 관계에서 볼 때 분명하게 나타나며, 다른 한편으로 중세의 개혁과 이 탈리아의 르네상스를 구별짓는 특칭들은 두 운동이 갖고 있는 공통적 인 특성만큼이나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점은 봉건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역사가가 서구의 봉건제 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그는 토지의 소유가 아니라, 토지에 대한 인 간의 일시적인 관계에 의해 결정된 군사적,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행 정적 조직의 한 형태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토지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인간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였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으며, 토 지라는 수단, 죽 봉건적 토지 보유를 통해서 아주 많은 인간 관계一一 각종의 특권과 연금은 물론 봉사와 의무들―_가 표시되었으며, 이 인간 관계는 토지 그 자체와는 관계가 없으며, 일단의 토지를 보유하

는 대가로 군사적인 봉사룰 행하는 것과는 더더군다나 관계가 없다. 그는 독일의 소귀족들의 통치권과 마찬가지로 의회적인 대의제가 봉 건적인 개념에서 나왔다는 것을 또는 근대 관습법의 적어도 50% 가 봉건적인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쉽게 잊어버린다. 다시 봉 건제를 논의할 때 역사가는 지방 분권화된, 분열된, 개인적인 정부를 생각하거나, 또는 봉건 계급의 서열을 당대의 천사들의 서열을 반영 한 것으로 해석하거나, 또는 봉건적인 보편주의를 정치적인 이데올로 기로 보고 있다. 봉건제는 서유럽에서 실제로 서유럽 사회다운 사회, 죽 봉건 사회를 형성하였고, 교회 역시 이 봉건 사회에 통합되었다. 서구의 봉건제는 사실상 서구 세계에 대한 하나의 독특한 개념을 반영하며 이 독특한 개념과 동의어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서구 봉 건 사회의 복잡성을 유념하고 있다면, 비잔틴 제국이 프랑크화된 시 대와 지역 이외에서는, 비잔틴 제국의 복잡성에 비견될 만한 것이 결 코 존재하지 않았다고 우리는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봉건 사회의 복잡한 조직이라는 의미의 봉건제라는 용어 는 비잔틴 제국의 여건에 적용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만약 우리 가 그러한 복잡한 봉건 사회와 서구 세계의 봉건적인 개념을 염두에 두지 않고, 비잔틴 세계에서 상호 연관성이 없는 봉건적인 어떤 특성 울 찾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단순히 묻는다면, 그 대답은 궁정적이다. 군사적인 토지 보유, 독립적인 대귀족, 면제권, 사병(私兵)과 사적인 조세 제도와 그의의 봉건적인 특칭들이 바잔틴 제국에서도 역시 발견 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봉건적인 제도를 만들지 못하였지만, 봉 건적인 어떤 특칭과 원리를 1066 년 이전에 발달시켰던 앵글로 색슨 영국을 상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르만 정복 이전에 영 국은 봉건적으로 조직된 왕국으로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 지로, 비록 비잔틴의 제 제도들이 그러한 새로운 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는 갖고 있었을지라도, 1204 년 프랑크인의 정복이 있은 다

음에야 비로소 비잔틴의 영토는 실제로 봉건적으로 조직될 수 있 었다. 비잔틴 제국에서의 프랑크인들의 지배는 여기에서 고려할 필요가 없는 단순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그러나 봉건적인 특칭과 원리가 비잔틴 제국에서 존재하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결코 그러한 특칭과 원리들이 결합하여 그 자체가 분명하게 일관된 하나의 제도를 형성하지 못하였다. 정치 사상이나 법 사상도 봉건적인 세계의 개념 에 의해 결정된 적이 없다. 봉건제는 결코 이상이 되지 못하였다. 영 주 없는 토지는 없다는 유명한 문구에서 표현된 봉건 구조의 이상은 비잔틴 제국에서는 전혀 없었다. 그 반대로 봉건적인 특칭은 항상 고 립적이며 우연한 것이었고, 봉건적인 특징들은 정상적인 국가 조직의 한 유형에서 발생한 변형된 형태였으며, 그 국가 조직의 이상은 구세 주와 같은 왕과 그 왕에 의존하고 있는 관리들에 의해 중앙 집권적으 로통치되는국가였다. 여기서 논의될 상호 연관성이 없는 봉건적인 특칭들은 비잔틴의 역 사 전체, 영토의 획득과 상실, 군사적인 필요성과 방어 문제의 해결, 제국의 농민 문제와 밀접하게 상호 얽혀 있다. 자료는 여기저기에 산 재해 있다. 말할 필요조차 없이 서구의 관습법 cous t um i ers 또는 예루 살렘과 모레아 Morea 에 대한 프랑크의 식민지 법전과 비교할 만한 봉 건적인 법과 관습이 편찬된 적도 없다. 우리는 근대 학자들이 여기저 기서 분석한 연구에 의존하여야 한다. 그들의 연구는 아직 확정적인 것도 아니며, 상당한 부분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 러나 어떤 사실들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비잔틴의 사회사, 군제사는 농민 민병대와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의 상반되는 성격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 두 제도는 로마 제국 말기의 혼란된 상태에서 유래하였다. 7 세기에서 11 세기에 이르는 비잔틴 역 사의 중기 시대에는 뎀th em 어 1 때문에 농민 민병제가 중요하였다. 11

의 예속 민족이었으며, 때로는 국경 지방에 산재하여 로마의 보호하 에 반독립적인 조공국을 형성하였다. 국경 지방에서 개인적이 아니라 부족 단위로 정착하였던 이러한 바 바리안 출신의 부족 단위의 보조군 aux i l i ar i es 은 초기 비잔틴 시대와 바바리안이 이동하던 시대에 대단히 중요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 실이다. 고트족, 훈족, 알란족, 롬바르드족과 그의의 바바리안의 인력 울 이용함으로써 제국은 이러한 민족의 공격은 물론 다론 바바리안의 공격에 대해서도 제국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부족들이 서로 견제하도록 하기 위하여, 또 이러한 부족들이 동맹자로서 너무 위험하게 되었을 때 이들을 제국의 서쪽 지방으로 몰아내기 위해서는 비잔틴 제국의 모든 의교 기술이 요구되었다 . 유프라데스 강은 물론 라인 강과 다뉴브 강변에 형성된 이러한 변 경 부족 국가를 제국의 봉건 제후국으로 간주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왜냐하면 1000 년경에 오토 3 세가 폴란드, 보 헤미아와 헝가리를 로마 제국의 우방 am ici im p e rii Romanorum 이라는 형식으로 조직하였을 때, 이러한 변경에 위치한 이웃 국가들은 봉건 적으로 종속된 왕국으로 가끔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조공 관계와 봉신제의 관계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초기 비잔틴 시대나 또는 그 이후의 시대에도 비잔틴 제국은 이웃에 있던 조공국들과의 관계를 지칭하기 위하여 봉건 이데올로기를 사용 하지 않았다. 비잔틴 제국과 다론 국가들과의 관계는 복잡한 정신적 인 친족 관계 spi ritua l ki nsh ip를 나타내는 용어로 표현하였다. 예를 둘 어, 불가리 아의 차르 Tsa 뎨― 정 신적 인 아들 spi ritua l son 이 라 부르는 반 면에 프랑크의 왕 또는 황제를 정신적인 형제 spi ritua l bro t her4 고 불 렀다면, 그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터키 또는 파 치나크 Paz i naks 의 군주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군주가 제국의 칙서 im p erial lett er s gr amma ta를 받았을 때와 크로티 아, 세르비 아, 나폴리 ,

아말피, 베니스의 지배자가 제국으로부터 명령 (keleusis , order) 을 받 았을 때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제국의 칙서는 황제 bas i leus 가, 명령 keleus 은 주군 Lord 이 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 방법에 내포되어 있는 종속 관계를 봉건적인 의미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 2) 국경 지방의 부족과 국가들을 제외하고 나면, 국경 지방에 있던 민 병대는 우리의 연구 주제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시베루스 알렉산더의 치세 기간이었을 3 세기에 로마 군대가 양분되 었다. 세계의 어느 곳이든 파견될 수 있는 기동 부대 mobil e ann y의 임무는 국경 지방을 수바하기 위하여 정착된 비(非)기동 부대인 리미 타네이(lm it ane i : 국경 수비대) 때문에 줄어들었다. 국경 수비대는 순 전히 농민군이었다. 그들은 군사적인 봉사의 대가로 정부로부터 그들 자신이 소유할 수 있고 상속할 수 있는 토지롤 받았다. 그리하여 여 기에 소토지를 소유한 변경 지방의 민병대가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 것은 토지의 양도와 군사적인 봉사가 결합된 분명한 한 사례이다. 이 러한 봉사를 하는 정착 군인들은 종종 바바리안 출신이었으며, 이들 은 위에서 언급한, 변경 지방에 하나의 부족 단위로 정착한 전사들과 구별되는 개별적으로 정착한 바바리안이었다. 비잔틴 시대에 변경 지 방의 농민군의 제도가 남아 있었다는 것은 법 조문에서도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의 법전 (code, XI, 60, 3) 에서 5 세기 초반의 테오도시우스의 신법을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거 기에서 유스티니아누스는 리미타네이로서 군사적인 봉사를 하는 것은 제국의 변경 지방에서 토지롤 소유하기 위한 필요 조건아라고 선언하 고 있다. 그리고 테오도시우스는 그의 칙령은 단순히 구(舊)관습과 구법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2) Georg Ostr o g or sky in Semi n. Kondakovia n um, \1(19 36), 4lff. ; A. A. Vasi- liev in Sp ec ulum, \I ( 1932), 350fT .

리미타네이를 구성하고 있는 농민군은 비잔틴 중기의 역사에서 대 단히 중요하였다. 5, 6 세기 동안에, 신뢰할 수 없는 바바리안의 유입 으로 약화된 기동 부대는 점차 쇠락되고 있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의 전쟁은 기동 부대의 세력을 약화시키게 되었다. 여하간에 기동 부대 는 발칸 반도를 점령하였던 슬라브족들을 격퇴할 수 없었으며, 페르 시아의 공격과 이집트와 시리아를 점령하였던 아랍족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7 세기 후반에 기동 부대는 제국의 수도 로 이동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잔틴의 국경이 다뉴브 강과 유프라데 스 강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 의곽 지대, 죽 소아시아로 옮겨져야 했 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군대의 완전한 재조직이 불가피하였다. 이전에 국경 지방이 세습적인 농민군인 리미타네이에 의해 수비되었 다면, 제국의 중심 주(州)이며 이제 국경 지방이 된 소아시아에 그 제도를 왜 적용시킬 수 없는가? 사실상 제국의 심장부에 리미타네이 제도를 적용시키는 것은 뎀제도를 도입하는 것과 거의 다룰 바가 없다. 여전히 제국에 속해 있던 지방들의 행정적인 재편(이는 헤라크리우 스 황제 (610-641) 에 의해 시작되어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완수되었다) 은 여기서 자세하게 논의할 대상은 아니나 다음 사항은 분명한 것 갇 다. 군관구t hema t a7 l-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만든 이전의 지방의 주를 대신하였다는 점에서 그 행정적인 재편은 대체로 군사적인 재편에 해 당한다. 게다가 군관구는 주의 경우처럼 일반 행정 관리에 의해 통치 되지 않고 완전한 군사적, 행정적, 사법적인 권한울 위임받은 스트라 테고이 s tr a t e g o i라고 불리던 군사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둘의 복 합적인 권한은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확립된 라벤나와 카르타고의 두 태수 exarch 의 권한과 유사하였다. 그러나 뎀제도는 제국의 사회 계층에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콘 스탄티노플에 있던 황제의 근위대 이의에는, 바바리안 출신의 용병으

로 구성된 이전의 전문 군대는 없어지고, 그 대신에 새로운 농민군이 만들어졌다. 이 변화는 군대를 국경선을 따라 이리저리 이동시키지 않고 이제 바잔틴 수비의 핵심이 된 소아시아의 군단을 영구히 주둔 시키면서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면 그 군단은 이전의 리미타네이와 같이 한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한곳에 정착하려는 경향은 아마 군인 둘 사이에서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정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군 인을 한곳에 정착시키게 되었다. 군대를 정착시킬 수 있는 땅은 충분 히 있었다. 페르시아인과 아랍인이 소아시아를· 침략한 이후, 이 침략 자들이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 그리고 이 황폐화된 지역을 재정복한 이후, 정부는 정부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아무도 소유하지 않은 많은 땅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땅울 한 가정이 생계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토지로 나누어 개개인의 군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토지는 군사적인 봉사를 한다는 조건으로 세습적으로 소유되었다. 물론 농민군은 그 자신 또는 그의 가족이 토지를 경작할 수만 있다면 그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토지 이상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소유해야 하는 최소한의 토지는 그 가치가 금 伊 H 든드에 해당하는 토지였다. 아 최소한의 토지는 양도되거나 매매할 수 없으 며, 토지의 가치가 EH 폰드를 초과할 때는 그 초과분은 매매될 수 있 었다. 일반적으로 농민군의 장남은 군사적인 의무가 딸린 토지를 상 속받았으며. 그의의 자식들은 군사적인 의무가 없는 토지를 소유한 자유 농민으로서 그리고 보통의 세금 납부자로서 생활하였다. 이 변화는 상당한 결과를 가져왔다. 옛날에는 전문 군인들은 스트 라티오트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이제 스트라티오트는 서구의 기사령 knig h t' s f e 라 비교될 만한 크기의 토지인 렘을 소유한 템 내에 정착 한 군인을 지칭한다. 우리는 후기의 기록에서 스트라티오트는 의무 수행을 위해 소집되었을 때 말을 가지고 완전 무장을 하고 출두하여 야 하며, 그는 그의 조그만 토지에 대한 세를 내야 하나, 실제 봉사를

하는 기간 동안에 적기는 하지만 일정액의 보수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트라티오트의 토지 str a ti ot i ko n kte m a7} 한정된 기간 동안 만 주어전 것이 아니라 세습적으로 주어졌다는 점에서 스트라티오트 의 토지는 서구의 기사령과 다르다. 게다가 스트라티오트는 귀족 계 급을_ _ 적어도 고전 시기에서는__형성하지 못하였고 소농민으로 남아 있었다• 뎀조직의 결과 바바리안이나 다른 용병을 고용하지 않고 제국 내에 서 군인을 칭발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정부의 군대 유지바와 제국 전 체의 방어 비용이 상당히 감소하였다. 훨씬더 경제적이었다는 점 이 외에도, 템제는 그들의 재산을 방어하려는 의지가 있고, 그들이 소유 하고 있는 토지에서 그들의 생계 수단과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수단 울 끌어내고 국가에 세금까지 내는 믿을 수 있는 농민군을 창출하였다. 서구의 봉건제에서는 군사적인 의무가 개인에게 부가된 반면에, 비 잔틴의 뎀제에서는 군사적인 의무가 토지에 부가되었다. 이것은 중요 하다. 왜냐하면 뎀제는 수도의 외곽 지대가 국경 지방과 다를· 바 없 이 되었을 때 국경 지방에서 제국의 심장부까지 이동된 로마 제국의 리미타네이의 연속이었거나 또는 그것을 재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스트라티오트 전부가 그리스 출신은 아니다. 그들 중의 상당수는 이방인, 때로는 바바리안이었다. 아르메니아 정착자들이 많았으나, 농 민군에는 슬라브족도 많이 있었다. 슬라브적인 요소는 특히 러시아의 학자들이 뎀제도는 술라브족의 영향을 주로 받았다는 주장을 하는 근 거가 되는데, 이것은 무엇보다도 농민들이 때로는 촌락 공동체와 일 치하는 조세 공동체 tax ati on commun iti es 로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그 러나 다른 학지들은 페르시아의 모델을 따랐다고 주장하며 페르시아 와 비잔틴은 투라니아 부족들, 죽 훈족, 아바르족, 프로토마쟈르족, 터 키족의 영향을 입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뎀제도는 그 영향이 무엇이었던간에 로마의 리미타네이 제도에서 발달한 것이다.

뎀제도는 3 세기 반 동안 효과적으로 운용되었으며, 농민군의 시대 가 비잔틴 역사의 가장 찬란한 시대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뎀제도는 바잔틴의 군사력을 활성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도 놀랄 만한 영향을 끼쳤다. 왜냐하면 강력한 농민군과 스트라티오 트의 젊은 자식들이었던 강건한 농민들은 대토지 소유자, 죽 대귀족 dy na t o i의 세력을 견제하고 그들의 탐욕을 억제하는 가장 좋은 수단 이 되었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 말기 이후로 정부는 라티푼디아의 발달을 중지시키고, 헬레니즘의 전통을 이어받은 결과, 이탈리아의 경제 생활, 죽 전형적 인 농민 중심의 국가로 전환시켰던 대토지 소유자의 세력이 점차 증 대하는 것을 저지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동시에 정부는 재정적, 군사적 목적 때문에 그리고 세금 칭수와 군인의 칭발을 위해서 대토 지 소유자에게 의존하였으며, 자유 농민은 이 대토지 소유자에게 예 속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농민은 농노 ser f7l- 되었으며 법적으로 토지 에 속박되어 gle bae adscrip tii, 사실상 그들 영주의 소유권에 속박되었 다. 이 집 트의 옥시 린쿠스 파피루스 Oxy rh yn c hus p a pyri에 나타난 아피 온 A pi on7l-(家)의 문서 때문에 제국 전역의 라티푼디움 조칙이 아주 자세하게 알려져 있다. 아피온가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통치 시기때 이집트에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자들이었고, 동시에 제국의 최고의 관직 보유자들이었다. 공국pri n cip a liti es 을 사적으로 소유한 것과 갑이 그들의 거대한 토지는 제국의 행정 제도를 모델로 하여 운영되었다. 다른 토지 소유자와 마찬가지로, 아피온가는 그들이 고용한 사병 buc- ella rii을 가졌으며, 이둘 중에는 게르만 출신도 포함되었는데, 이 사병 은 기동 부대를 보강하기 위하여 정부가 극도로 필요로 하는 예비군 을 형성하였다. 비잔틴에서 대귀족라고 불리는 이러한 토지 소유 대귀족들은 다론 국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농민의 토지를 병합하여 그들의 토지를

확장시켰으며, 자유 농민을 준봉건적인 예속인으로 만들었다. 비잔틴 황제들은 이러한 발달을 억제하려고 노력하였고, 유스티니아누스 1 세 는 물론 2 세도 농민을 희생시키면서 라티푼디아를 확장하는 것을 금 지하는 입법을 제정하였지만 소용이 없었고, 뎀제도를 통하여서만 이 러한 경향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정부의 보호하에 있던 군 역지 mi litar y esta t e 제도는 그 자체적으로 발달하였을 뿐 아니라, 지 주들이 스트라티오트와 군역지를 소유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였 다. 대토지 소유자들이 농민 보유지를 실제로 매입하였거나 또는 그 의의 방법으로 획득하였을 경우에는 아무런 보상 없이 이전의 소유자 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게다가 페르시아와 아랍안들의 침입으로 대토 지 소유자들은 상당한 타격을 받았으므로, 대귀족의 세력이 약화되었 울 때 뎀제에 의한 농민의 토지 보유제가 확립되었다. 11 세기 중엽까지 지속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국은 국력을 회복하 기 시작하였다. 뎀정부가 군사화되고 일반적으로 국가가 아주 안정됨 으로써 뎀제하의 농민군이라는 새로운 제도는 비잔틴이 상실하였던 대부분의 지방울 다시 회복할 수 있게 하였다• 동남쪽에서 시리아가 다시 제국의 영향권 안에 들어왔으며, 국경선은 유프라테스 강까지 다시 확장되었고 한동안은 알레포 Ale pp o 까지 점령하였다. 가장 괄목 할 만한 것은 바실 2세 (976 - 1025) 가 불가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 였다는 것이다• 발칸의 속주는 다시 제국에 복속되었으며, 다시 한번 더 다뉴브 강은 비잔틴 세력의 경계선이 되었다. 그러나 그 회복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악순환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며, 이 러한 악순환의 결과, 비잔틴은 초기의 변화보다는 더 봉건화에 근접 하게 되었다.

3 후기, 준봉건 체제 제국이 크게 확장되면서 군대 조직이 변하게 되었다. 제국의 중심 부에 위치한 주들에 주둔하고 있던 국경 수비대 형태를 띤 리미타네 이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으며, 이는 뎀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대신에 재빨리 이동할 수 있는 전문 군대가 필요하였다. 이 새로운 상비군p ermanan t arm y은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에 주둔하였던 제국 의 핵심 경비대에서 발달하였고, 10 세기까지는 수도의 수비대는 기동 군대와 거의 동일시되었다. 그러한 수비대, 죽 타그마타 tagma ta 가 농민군인 데마타t hema t a 만큼이나 중요하게 되었고, 노르만, 루소-바 랑지안 Russo-Varan gi ans, 앵글로 색슨족 등의 용병으로 구성된 직업 군대에 의해 뎀제가 완전히 쇠퇴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전에 완전히 군사화된 지방 정부는 이제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 작하였다. 템의 지방 사령관이며 총독인 스트라데고이는 정치력을 행 사하고 황제에 대항하는· 데에 템의 민병대보다는 훨씬 더 편리하게 사용될 수 있는 영구적이고 직업적인 군대에 점차 더 많은 관심을 보 이기 시작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들은 대토지를 소유한 가문 출신이었으며, 제국이 더욱더 안정되어감에 따라 부의 근원으로서 토 지의 소유에 대한 가치가 증대하고 이들 가문들의 영향력도 증대하기 시작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장군들과 대토지 소유자들이 다른 나라에 서와 같이 비잔틴 제국에서도 대두하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곧 중앙 정부와 황제에게 위협이 되었다. 10 세기의 황제들, 죽 로마누스 1 세, 콘스탄티누스 7 세와 바실 2 세는 토지 귀족의 세력이 증대되는 것을 저지하는 법울 만들었으며, 템조직을 파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동시에 이들 황제들은 황제위를 탐내고 있던 반항적인 귀족들과 싸워 야만 하였다. 마지막으로 마케도니아 왕조 다음의 두카스 왕조 (105 9- 1081) 는 전술을 바꾸었다. 교회의 지지를 받은 두카스 왕조는 수도에

학자와 고위 관리 출신을 민간 귀족층으로ci v i li an ari st o c racy of scho-lars and gre at off ici a l s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미카엘 셀루스 M i chael Psellus 는 이러한 유의 귀족에 속함), 이 새로운 귀족이 대토지 소유자 의 지지를 받고 있는 장군 출신의 군사 귀족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간단히 말해, 11 세기의 지배자들은 정부를 바군사화, 문민화하고 군 인 계층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 정책의 영향으로 인 하여 템조직이 분명히 쇠퇴하였다. 주총독으로서 스트라테고이는 이 때 사라지기 시작하였으며, 그 자리는 이전에 스트라테고이의 한 관 리인 최고 사법관인 프레토p rae t or 가 차지하였다. 물론 프레토는 민간 출신이었고, 그리하여 뎀제에 있어서 장군 중심의 체제가 수도에 기 반을 둔 학자와 민간 출신의 새로운 귀족 중심 체제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수도에서 민간 출신의 귀족의 세력이 강화되었다고 해서 그 것이 동시에 지방에서 중앙 권력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없다. 장군들 과 대토지 소유자들의 세력이 민간 출신 귀족의 세력을 능가하였고, 알렉시우스 콤네누스 (Alex i us Cornnenus, 1081 - 1118) 의 즉위는 군사 력을 기반으로 한 귀족이 어쨌건 국가를 정복하였다는 것을 의마하였 다. 그러나 알렉시우스와 추종자들이 세력을 갖기 이전에도, 두카스 왕조의 황제들은 그들의 문민 출신의 추종자와 그들과 적대 관계에 있는 군사 또는 토지 귀족들 모두에게 많은 특권을 양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잔틴에서 준봉건화한 제도인 프로노이아p rono i a 제도가 처 음 발달한 것은 이러한 민간 지향적인 마음을 가전 지배자의 지배하 에서였다 . 이론상으로 프로노이아는 섭리 p ro vi dence 를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통찰력 fore sig ht 또는 보살핌 car 텨t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한 사람에 게 토지를 그의 프로노이아 e i s p rono i an 하에 둔다는 것은 그 사람의 보호하에 토지롤 넘겨준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것은 국가 또는 군대 의 고위 관리, 수도원 그리고 일반 개인에게도 토지를 양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토지들은 봉사의 대가로 관리권이 주어졌다. 프로 노이아 토지는 그것을 받은 자에게만, 죽 프로노이트p ronoe t es 에게만 절대적으로 예속되어 있다는 점에 있어서 단순한 토지의 기증과는 다 르다. 프로노이트는 한정된 시기, 대개는 일생 동안만 그 토지롤 양도 받는다. 그 토지는 상속될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프로노이트는 콘스탄티누스 모노쿠스 (1 042 - 1055) 가 그의 행정부에 책임 있는 관리로서 선택한 미카엘 셀 루스의 천구이자 대학자인 콘스탄티누스 리쿠데스이었는데, 그는 수 도의 민간 출신의 귀족 중의 한 사람이었다. 민간 출신의 귀족충의 세력이 약화되었을 때, 토지 소유 귀족 또는 군인 귀족이 프로노이트 가 되었다. 이미 알렉시우스 1 세(1 081-1119) 는 군사적인 목적을 위하 여 급속히 발달하고 있는 프로노이아 제도를 이용하고 있었다. 뎀제 도하의 농민군의 구( 舊 )농민 보유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군역지 룰 구입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달리 획득하는 것을 금지하는 이전의 법은 두카스 왕조하에서 폐지되었다. 그 결과 대귀족은 이제 토지를 확장할 수 있었으며, 이전의 스트라티오트를 예속적인 관계에 둘 수 가 있었다. 어쨌던 간에, 스트라티오트는 그들 자신을 가난한 농민군 의 지위에서 소귀족, 죽 젠트리의 신분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뎀제 도의 창시자인 헤라크리우스의 치세하에서는, 군사적인 의무를 수반 하고 있는 토지의 최소의 가치는 금 伊 H 폰드에 해당하였으며, 스트라 티오트는 이 가치에 해당하는 토지를 팔 수가 없었다. 10 세기 말경에 이르면, 화폐 가치가 하락해서가 아니라, 스트라티오트가 소유하기로 되어 있는 중무장 장비의 가격 때문에 이러한 토지의 최소한의 가치 가 금 12 파운드로 인상되었다. 그러나 금 12 파운드에 해당하는 정도 의 토지는 가난한 자가 소유할 수 있는 땅의 크기는 아니었다 . 그 정 도의 토지는 젠트리 출신의 중무장한 기사가 소유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이다. 이러한 새로운 계층인 젠트리는 프로노아아 토지의 소유자

V1 비잔틴 제국의 봉건제 245

인, 죽 프로노이트에서도 발견된다. 게다가 새로운 계층인 프로노이아 소유자는 몰락하고 있는 뎀제도 하의 농민군을 대신하여 군사적인 의무도 수행하였다. 프로노이아의 소유자는 중무장을 한 기 사 heavil y mail ed kn ig h 루- 봉사를 하여야 하 며, 소집이 되었을 때, 그는 그의 프로노이아의 크기에 따라 그와 똑 갑이 무장을 한 일정수의 기사를 대동하고 출정하여야 한다. 물론 다 론 토지 소유자들도 군사적인 봉사를 하여야 했다.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수도원과 교회 역시 군사적인 의무가 면제된 것은 아니다. 그러 나 그들의 군대는 경무장을 한 보병이며 중무장을 한 기사는 아니다. 더 많은 중무장을 한 기사를 확보하기 위하여 정부가 프로노이아 제 도를 확산하였을 가능성아 있으며, 그 결과 군사 귀족제가 급속하게 발달하였다. 그들은 정부와 대다수의 농민, 죽 그들에게 의존하게 된 농민과 소토지 소유자 사이의 중간적인 위치에 있었다. 비잔틴의 프로노이아를 소유한 자p rono i a lord 와 서유럽의 봉건 영 주 사이에 어떤 유사점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유사 접은 프로노이아를 소유한 자들이 누린 면제권i mmun iti es 을 고려해 보면 더욱 분명해전다. 면제권은 콤네니 Comnen i 왕조 이전부터 존재 해 왔다. 교회와 수도원은 그들 토지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조세 수 입을 종종 전유해 왔다. 사실상 그들은 일상적인 세금을 그들 스스로 칭수하여 소위 솔렘니아 solem ni a 라고 하며 그 세금을 자신들이 소유 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러한 관행은 세금을 칭수하는 황제의 특권 을 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이러한 면제권은 자주 발 생히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제도가 일반적인 관행이 된 것은 아니다. 물론 로마 제국 말기와 초기 비잔틴 제국에서도 대토지 소유자들은 면제권을 일반적으로 갖고 있었다. 이 관행은 없어지지 않았으나, 제 국 정부가 창안한 뎀제가 융성하였던 비잔틴 제국의 중기 시대에는

이 관행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뎀조직을 위해서 10 세기의 황제들 은 갖은 방법으로 대귀족의 세력을 제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11 세기에 뎀제와 농민군의 쇠락으로 인하여 면제권이 도처에서 우후 죽순처럼 발생하게 되었다. 면제권에는 그의 영지 내에서 프로노이아 영주가 세의 일부 또는 전부를 면제받는 것을 비롯하여, 공공 사업에 참여해야 하는 의무로부터의 면제, 제국의 관리가 프로노이아의 영지 로 들어오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 특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프로노이 아 지역 내에 있던 이전의 자유 농민은 프로노이트의 파로이코이p a­ roik o i, 죽 농노의 신분으로 전락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제한적이긴 하 지만 프로노이트의 사법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동시에 세금 칭수 권을 임대하는fa rm i n g out 나쁜 관습이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는 직접 세를 부과할 수 있는 권리와 함께 제국의 농촌 지역에서 정부가 행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특권이 방해받게 되었다. 왜냐하 면 세금을 내지 않거나 또는 세금의 전유를 허가받은 프로노이트가 있었고, 이전의 제국의 세금 칭수관을 대신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하 여 세금을 부과하고 또 칭수하는 조세 청부업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프로노이트는 제국 내에서 대귀족이 되었고, 그 둘이 소유하고 있는 대토지는 g1 ] 기 이집트의 아피온가의 대토지와 마찬가지로 제국 내의 소제국이 되었다. 대귀족은 사병을 소유하였다. 이들 군인들은 군사적인 봉사의 대가로(개인으로서는 물론 대귀족의 가신으로서) 토지를 보유하였고, 그들의 가신의 수는 그들의 토지의 크기와 가치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그들은 일정 기간 동안만 보유하 였으며, 이들 토지는 사적인 재산으로서 보유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면제권을 향유하였고, 그들의 영지 내에서는 어느 정도의 사법권을 행사하였다. 이전의 스트라티오트가 프로노이트로 되지 못하였던 곳 에서는 그들은 이전의 농민 보유지를 잠식하여 그들의 세력을 흡수하 였다.

직업 기동 군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거의 충당할 수 없는 상황하에서 황제는 더욱더 이들 귀족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기동 군대의 보수와 보급 물자가 아주 비싸져서, 군 대를 유지하는 데 드는 막대한 경비는 국가 재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 하게 되었다. 군대의 보수는 주로 도시에서 거둬들이는 세금과 시골 의 세금 청부업자가 지불하는 세로 충당하였다. 후기 바잔틴 제국의 전 시기 동안 기동 군대의 유지비는 가장 심각한 재정 부담이었다. 왜냐하면 용병의 유지비가 서유럽에 있어서와 같이 비잔틴 제국에 있 어서도 막대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라노이아 영주의 군대는 분명 히 비잔틴 군대에 있어서 가장 값싼 요소였다. 그러나 면제권과 이들 영주가 세를 전유함으로써 발생한 황제권의 간접적인 상실 때문에 파 라노이아의 군대는 비잔틴 제국의 황금 시대에 있었던 뎀제보다는 사 실상 정부에 많은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파라노이아 영주의 군사적인 봉사도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군사적인 봉사를 일정액의 화폐의 지불로 대신하게 하는 경향이 나타났기 때문 이다. 물론 이것은 서유럽의 군역 면제세 scu t a g e 와 동일하다· 교회의 특수한 위치 때문에 군사적인 의무의 금납화는 수도원에게 허용되었 다. 이것은 비잔틴과 서유럽에서 · 모두 일어난 현상이다. 남아 있던 농 민군은 실제 의무를 수행하지 않고 화폐를 지불하도록 대개 허용되었 고, 후기 비잔틴 제국 시대에는 군역 면제세는 거의 일반적인 관습이 었다. 풀로렌스의 종교 회의에서 플라톤에 대한 논쟁으로 서유럽에 잘 알려진 정치가인 게미스토스 플레돈 Gem i s t os Phle t hon 이 그의 용 병을 고용하기 위하여 특별세를 부과하자 일어난 강력한 반대 운동은 이러한 관행이 일반적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후기 비잔틴 시대에는 콤네니 왕조를 기점으로 고립적이 며, 세계의 일반적인 봉건적인 개념과 부합하지 않은 많은 봉건적인 특성이 있었다. 프랑크인들이 콘스탄티노플과 제국의 상당한 부분을

4 교회와 봉건적인 경향 마지막으로 교회와 교회권 내의 봉건적인 특성에 대하여 몇 마디 언급되어야한다. 국가에서 독립된 교회의 봉건적인 특칭은 비잔틴에서 결코 발달하 지 못하였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로마 교황이 달마티아와 시실 리, 아라곤과 영국 그리고 그의의 왕국과 공국들에 대하여 행사하였 던 봉건적인 권한과 비교될 수 있는 봉건 영주권을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가 세속의 봉신들에 대해 행사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 캄파냐 의 봉건 귀족으로서 교황의 직속 봉신이며, 교황을 그들의 주군으로 인정하는 백작과 남작으로 구성된 국가인 교황령과 비교될 수 있는 교회의 영지가 비잔틴에는 없었다. 교회의 주교이면서 동시에 봉건 귀족이며 왕의 관리인 서유럽 형태의 수도사를 가전 대귀족이 비잔틴 에는 없었다. 그들 스스로가 봉신이며 또한 자신들이 봉신을 소유하 고 있었던 이들 서유럽의 수도사 출신의 대귀족은 봉건제 전체의 툴 속에 통합되었으며, 이들은 그 중요성에 있어서 그리고 어떤 지역에 는 그 수에 있어서도, 세속의 봉건 귀족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500 년경의 신성 로마 제국에서 159 명의 세속의 대귀족과 더 불어 12 7°a의 승려 출신의 대귀족이 있었다. 비잔틴 제국에서는 이와 유사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봉건적인 경향 둘, 죽 면제권과 교회의 토지에서 군인을 칭발하여야 하는 의무는 비 잔틴 교회에 영향을 끼쳤다. 또한 수도원들은 프로노이아의 토지를 양도받았다. 그러나 고려되어야 할 하나의 제도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 제도에 해당하는 서유럽의 제도는 봉건제 전체의 발달 과정에 막 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것은 카리스티키온 cha ri s ti k i on 이라는 제도 01 다. 카리스티키온은 서유럽에서 봉토fi e f를 의미하고 봉토라는 용어와

동의어가 된 라틴어의 은대지 bene fici um 를 직역한 것이다. 은대지 be- nefi ce - c 특별한 종류의 토지의 임대, 죽 로마의 프레카리움제와 같은 토지의 임대를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임대에 의하면, 아주 좋은 조건 으로 일시적으로 사용되거나 또는 일생 동안 임대되었기 때문에 프레 카리움p reca ri um 은 그것을 받은 자에게는 은대지로 나타난다. 비잔틴의 카리스티키온은 서유럽에서 물려받은 제도는 아니다. 그 러나 그 제도는 은대지 제도와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 말기의 똑같은 상황에서 유래되었다. 그 제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서유럽과 비잔틴 제국에서 교회의 필요성에 부합하였다. 왜냐하면 교회의 재산은 양도 될 수 없고 교회의 토지에서 수입을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으로 든지 교회의 토지가 임대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유럽에서 는 특히 카를 마르텔이 교회의 토지를 세속화한 이후에 은대지는 봉 신제와 결합되는 데 반하여, 비잔틴의 카리스티키온은 처음부터 다른 기능을 가졌다. 그것은 주로 수도원의 토지에 적용되었다. 반드시 그 런 것은 아니지만 수도원의 소유자-황제, 주교 또는 어떤 개인일 수도 있음-는 수도원의 토지를 속인에게 보유지로 임대하고 임차 인은 그 토지를 경영하고 그 토지에 부속된 건물을 관리하고 수도사 둘의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여야 한다. 비잔틴에서는 교회의 토지는 결코 세금이 면제되 지 않았기 때문에 , 임 차인 cha ri s ti ka ri os 은 그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국가에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모든 경비를 일단 공제하고 나면, 그는 그 수입의 차액을 소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카리스티카리오스에 의한 토지 경영이 가끔 가혹하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카리스티키온제는 일반적으로 생각되 어 온 것처럼 전적으로 반수도원적이 아니며 또한 우상 파괴 운동의 결과나 우상 파괴론자의 반수도원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이 제도는 우상 파괴 운동보다도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이 제도의

근원은 칼케돈 종교 회의에 참석한 교부들이 그 관행을 신란하게 비 난하였던 때인 5 세기로 거슬러 울라간다. 이러한 비난은 후대에도 가 끔 반복되었다. 그러나 어떤 성직자들은 카리스티키온제를 비호의적 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임차인을 고용한 사람은 흔히 성직자들이었 다. 카리스티키온의 준봉건적인 모습은 초기 콤네니 왕조 시대에 나 타난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황제(알렉시우스 1 세가 시작하였음)가 카 리스티카리오스의 임명권을 차지하여 황제의 지지자들에게 대개는 평 생 동안 카리스티키아를 양도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그들에게 보상하는 편리한 방법이었다. 프로노이아와 카리스티키온이 동시에 나타났다는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 두 제도는 서로 유사하며, 알렉시우스 1 세는 이 두 제도를 발전시킨 주요 인물이었다. 알렉시우스 1 세가 동일인에게 프로노이아 와 카리스티키온을 거리낌없이 양도하였다. 서유럽에서는 여러 면에 서 카리스티키온과 유사한 성직 천거권 advowson 이 봉건화되었으며, 카리스티키온과 프로노이아 사이의 관계는 성직 천거권과 봉토의 관 계와 유사하다. 그러나 전자는 일정 기간 동안 양도되었지만, 후자는 기한이 없었다. 비잔틴에서는 세속 제도와 마찬가지로 교회 제도에서도 봉건적인 발달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제도들은 결코 봉건제로 통합되지 못하였다. 서열을 가전 봉신제, 분할된 사법권과 분할된 권 력의 형태를 가전 서유럽의 봉건제가 비잔틴 제국의 관료제를 대신하 지 못하였던 것처럼 서유럽의 봉건제는 또한 비잔틴 교회를 봉건화 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IX 러시아의 봉건제 제프텔 Marc Szeft el l 정의 러시아 제도의 봉건적 측면에 관한 연구는, 봉건제의 정의 및 연구 되어야 할 역사적, 지리적 영역의 획정(劃定)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후자에 관해서 볼 때, 그 영역은 유럽 방면 대러시아 Euro p ean Great Russia 7 } 될 것이다. 13 세기 이래 러시아사에 통일성과 지속성을 부 여해 주었던 것은 바로 대러시아였으며, 대러시아의 역사는 러시아사 보다 더 멀리 거슬러 울라갈 수 있다. 아시아 방면 러시아 As i a ti c Russ i a 는, 대러시아의 봉건 제도들(진정으로 봉건적아든 그렇지 않든 간에)이 그곳에까지 보급되지 않았으므로 제외된다.” 도시 지배적인 ,,_ 닌 7 쿠 亡 Nov g orod 와 立 人구 立 Pskov 공화국은 주민상으로는 대 러 시아적이었으나 무스코비 Muscov y에 의해 그들이 병합되기 전에는 우 리의 주제와 관련이 없다 .2) 따라서 획정을 해보면, 우리의 연구 지역 I) 〈중앙 아시아와 트란스코카시아의 봉건 국가들(소련의 역사가들에게는 익 숙한 용어이다)〉과 볼가, 크리미아, 시베리아의 타타르 한인들 Tar t ar kha- na t e 려 영토는 제의된다. 만일 이들 중 어떤 지역이 봉건적이라 해도, 그것 둘은 역사상 대러시아의 계열에 속하지 않는다. 2) 키에프-'r't:I T 쿠亡- 러시아는 단지 역사적 배경으로서만 고려될 것이다. l 꺼 1

기부터 18 세기의 전 기간 혹은 일부의 기간 동안 리투아니아 또는 폴란드의 지배를 받았던 러시아의 그 지역 서쪽 영토에서는 봉건 제도둘이 발전하였 다. 그러나 대부분 폴란드의 전통 속에 있던 이 제도들은 대러시아의 제도 들과구분된다•

은 각각 다른 배경을 갖는 다움과 같은 주요 지역들로 대강 구성되는 하나의 역사적 구성 단위가 된다. 우선, 볼가 Vol g a 강 상 • 중류 연안 과 그 지류인 오카 Oka 강 연안으로서, 이곳은 1462 년 현재 모스코 대공국t he Great Pri nc ip a lit y of Moscow 울 형성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는 대공국의 서부, 북부, 북동부 지역으로서, 형식적으로는 누닌 T 쿠 드 공화국과 立人구立 소(小)공화국에 속하는 영토둘이었으나, 각각 1478 년과 1510 년에 양국은 대공국에 흡수되었다. 마지막으로는 남동 부 지역으로서, 원래는 비러시아인 지역이었으나, 1552 년 이후 대공국 의 일부가 되어 폭군 이반 Ivan the Terrib l e 치하에 둘어갔으며, 곧 대 러시아인들이 정착하였다.” 봉건제의 의미에 관해서는, 하나의 정의가 이미 서론에서 제시되어 있으므로 4) 요행히 우리는 여기에서 정의를 내리는 과제로부터 면제된다. 그 정의는 봉건제의 정치적 측면이 일 차적임을 강조한 것으로서, 우리가 러시아에서의 봉건제의 범위와 성 격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때 그 기준으로서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그 것은 불변의 정의가 아니므로, 분석적 연구에서 그 용어는 자유롭게 사용될 것이다. 그 연구는 자연히 연대기상의 근거와 실재상의 근거 양쪽으로, 즉 그 기원에서부터 모스코의 발생까지와 무스코비 및 근 대 러시아 정권하에서라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자에서 후자로 의 변화는 물론 순간적이지 않다. 그것은, 무스코비가 대러시아로 확

3) 우리의 연구 대상이 되는 대러시아 지역의 변경들은 다음과 갇다• 즉, 핀란 드의 국경처럼 저 멀리 서쪽에 있는 북극해의 유럽 방면 해안, 그곳으로부 터 남쪽으로 레닌그라드까지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T 口스 I 걸 남쪽으로 가다 가 약간 동쪽으로 가서 돈 Don 강의 입구까지, 그곳에서 카스피해의 데렉 강 입구까지 그리고 거기서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고 있는 우랄 산맥까지, 마지막으로 우랄 산맥을 따라 북국해까지. 4) 위 의 pp. 32ff .

대되고 무스코비 정권의 성격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과 갇은 점전적 인 이행이다. 2 역사적 배경 : 중앙 러시아 제후국들에서의 봉건적 제 측면 타타르인의 침입 이전 모스코 주변 지역은 누닌 7 쿠亡 지방 및 드 니페르 Dn ip er 강 유역의 영토와 한 국가 s t a t e 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 었다. 그 국가는 9 세기 중엽 한 스칸디나비아의 왕조에 의해 건설되 었지만, 그후 그것의 통일에 있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타타르 의 침입은 그 최종적인 타격이었던 것이다. 이 키에프-누닌 T 쿠亡 러 시아 K i ev-Nov g orod i an Russ i a 에서 비잔티움과 중동과의 무역은 매우 중요하였는데, 이것은 대도시들 및 그 도시 내의 상업 주민에게 정치 적 지배권을 부여해 주었다. 그 나라는 전체적으로 볼 때 일종의 연 결 고리로서의 하나의 공통 왕조를 가진 여러 지역들의 연방의 모습 울 보여주었고, 각 지역은 가장 큰 도시의 독립 의회의 지배를 받았 다. 어떠한 제후pri nce 도 그 도시의 가문들의 모든 수장이 참가하는 이 의회의 의지와 대립하고서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여 러 제도들도 이와 같은 도시 생활의 우월성에 의해 매우 강하게 영향 을 받았는데, 이 시기의 사료들, 예컨대 가장 오래된 조항들이 II 세기 초까지 거슬러 울라가는 법전인 『러시아의 사법 Russi an J us ti ce 』과 갇 은 사료들이 이 점을 증명하고 있다. 농업은 확실히 중요했으나, 12 세 기 중엽까지 교회를 제의하고는 대토지 소유들이 없었으며, 농촌 주 민은 세속 영주전 교회 영주건 간에 아직 영주에게 의존하는 관계에 있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노예들은 많았지만, 그들이 교회에 속 해 있지 않을 경우, 주로 국제 무역의 한 품목으로 취급되었다. 교회 에 속해 있을 경우, 노예들은 교회 영지에 인력으로서 고용되었다.

상황은 12 세기 중엽에 이르러 완전히 변했다. 서유럽과 동유럽 간 의 상업 관계의 기본적인 변화와 연관된 경제 위기 때문에 앞에서 말 한 지역들에서의 해의 무역은 거의 수지가 맞지 않았다• 13 세기 중엽 에 러시아의 경제, 사회 생활의 변혁을 가져온 발전이 시작되었다. 해 의 무역과 도시들의 쇠퇴에 따라, 도시적 요소는 더 이상 이전의 역 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도시들은 그들의 경제력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고 주민도 잃었다. 많은 수의 노예들을 갖고 있던 상인들­ 혹은 상업 활동과 연관을 맺었던 군사 계급-은 12 세기 중엽부터 많이 나타난 영지에 그 노예들을 인력으로 고용하는 것이 훨씬더 수 지가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더 큰 경제적 곤궁에 직면해 있으면서 그리고 유목민의 끊임없는 침입에 시달리면서 영지 주변에 살고 있던 농촌 주민은 이제 성 • 속의 영주에게 의존하게 되었는데, 이전에는 이러한 상황이 없었다. 해의 무역에 대한 공통의 관심에 의해 만들어 졌던 러시아 연방이라는 이전의 정치 통일체는 점점더 원심적 경향둘 에 굴복하였고, 류릭 Ri ur i k 왕조의 제후들은 자신들의 이해 관계를 지방에 두고, 무엇보다도 토지 소유를 확대하는 데 집중하였다. 그들 의 무사(武士, milit a r y men) 들도 그들의 예를 따랐다. 훨씬 북쪽에 있으면서 발틱해와 더욱 가까운, 타타르 침입 이전의 러시아의 노브 고로드 지역은 상황이 달랐다. ,,..l:I 7 쿠t::-는 여전히 상인 공화국이었 고, 타타르 침입 이후에조차도 이 기본 성격을 잃지 않았다. 그의의 지역은 봉건적이라고 여겨져 온 그리고 몇 가지 방식에서 확실히 봉 건제와 유사한 성격을 갖는 변화들을 정치 생활과 농촌 생활 양쪽에 서 경험하였다. 침입기에, 드니페르 강 유역과 중앙 러시아 양쪽 지역 모두에서 이 러한 발전은 상당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주요한 인구 통계상의 변화 형태에 있어서는 두 지역 사이에 차이점이 커지고 있었다. 죽 인구는 드니페르 강의 위험 지역에서보다 안전한 중앙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

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앙 러시아 지역에서 이주자들의 이동은 한편 으로 정치적 봉건화 혹은 정치적 권위의 분할에 대한 하나의 자극제 로 작용하였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농촌 주민의 대영지 소유자에 대한 의존화를 지체시켰다. 따라서 중앙 러시아에서는 12 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인구가 희박했 고, 중요한 도시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12 세기 중엽, 사람들이 갑자 기 이 지역으로 대거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제후들은 이 상황을 이용했다. 그들은 이주자들의 이동을 조직하였고, 이주자는 자신들이 거주하게 될 토지가 그 지방의 제후가 지배권 domi ni u m en i nens 을 갖 는 토지라는 조건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관계가 처음부터 확립되었다. 러시아의 주요한 수로로부터 멀리 떨어전 이 지역에서 상업적 이해 관계는 결코 농업적 이해 관계만큼 커보이지 않았고, 도시들도 큰 세 력을 갖지 못했다. 제후가 이 지역의 도시들에 대한 자신의 지배를 주장하기란 어렵지 않았고, 이와 동시에 지방의 농업적 이해 관계는 수많은 제후들을 통합시키기보다는 분열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개개 의 제후는 자신의 영토에 주민을 정착시키면서 그들을 관장하고 보호 를 제공해야 할 임무에 직면했다. 이러한 기능들을 위해서 제후들은 특별한 인력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화폐는 부족하였고 교력도 번성하 지 못해 옛 키에프 러시아와는 달리 제후는 돈이나 상업적 이익의 일 부를 제공함으로써 행정관과 전사들을 확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 다. 그가 제공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란 토지(토지는 정말 무한정했 으므로)롤 소유케 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토지는 봉사에 대한 급부 가 되었다. 그러나 막대한 양의 토지와 군사적, 행적적 가신(家臣)들 (복수 명사로 voia r e, vol' ny e slu gi)”의 부족은 제도상의 발전에 깊은 5) 이것들은 러시아 역사 서술에서 매우 흔한 용어둘이며 실제로 역사 용어들 이다. 그 용어들에 대한 필요성은 러시아와 서유럽의 역사의 한 두드러진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훗날 무스코비하에서 〈군사적, 행정적 가신들〉은 어떤 측면에서는 서유럽의 봉건적 종신들의 지위와 크게 다르지 않은 지위

를 종종 부여받았으며, 이것은 아래의 참고 도서에서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논의되고 있는 시기를 포함하여 초기에는 토지 보유와 사적인 봉 사 사이의 명백한 구분 때문에 〈가신들〉을 표기해 줄 수 있는 단어가 필요 했다. 봉사가 토지 보유와 무관했던 때부터 토지 보유와 매우 연관이 있을 때까지 봉사의 성격은 지속성을 가졌기 때문에, 피터 대제가 국가에 대한 봉사와 토지 재산 제도 양쪽을 재조직하기 전까지는 똑같은 단어들이 다양 한 어의를 가진 채 계속 사용되었다. 봉신 vassal 이러는 용어는 정확한 의미 를 전달해 주기보다는·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으므로 글자 그대로 서유 럽의 용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엄격한 어원상의 동의어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죽 서유럽의 언어에서 하인 ser g ean t이라는 용어는 중세 라틴 어로는 봉사 serv i ens 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slu ga 의 가장 가까운 역어이지만, vol' ny e slug i 혹은 무스코비 시대의 sluzh ily e l i lu di(복수)의 높은 지위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서유럽 봉건 사회에서의 비교적 소수의 계급을 가 르키고 있는 것이다.―― 편집자

영향을 미찬 두 가지의 특수한 조건들이었다. 제후와 가신과의 관계와 영주와 정착민의 관계는 그 상황 아래에서 가신이 영주에게 혹은 정착인이 영주(제후 자신, 군사적 가신, 혹은 교 회 기구)에게 더욱 의존하게 될 수 없었다는· 것이 곧 명백해졌다• 그 지역의 땅은 광대했으나 아직 거의 개간되어 있지 않았다. 제후의 수 는 많았으며 그들의 권력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동일했다(제후국의 평균 크기는 하나의 작은 강 유역 정도의 크기였다). 사업이 토지 자체 보다 더 중요했을 때, 군사적 가신들을 구하려는 제후들 사이에서, 그 리고 정착민을 구하려는 영주들 사이에서 경쟁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그 결과 군사적 가신들과 정착민들 양쪽 모두 자신들의 주인을 바꿀 수 있는 자유는 관례가 되었다. 군사적 가신의 경우에 그 관계는 오 로지 제후만을 구속하는 일방적인 관계였다. 죽 어느 때라도 군사적 가신은 이전에 자신이 모셨던 제후의 국가에 위치한 자신의 토지 재 산을 상실하지 않고서도 다른 제후를 섬길 수 있었다 .6) 제후의 〈자유

6) 파블로프-실반스키 (『군주의 봉사자들 Gosudarev y Sluzhily e lzud i』, St. Pe- ter sburg, 1898, pp .24-25) 에 따르면, 처음에 제후의 권력이 약하고, 보야 르의 독립성이 매우 강했을 때, 다른 제후로의 〈이탈〉은 대개의 경우 그 다 른 제후의 토지가 확대되고 그의 새로운 가신이 전(前)주인의 제후국에서

갖고 있던 토지 재산에까지 지배권이 확장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 그러 나 13 세기와 1 ,µJ]기에서의 〈 자유로운 탁신〉이라는 이 주장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이용할 수 있는 자료들은 I 때 1 기 말 이후의 것인데, 그 자료은 그와는 다른 관습을 강조하고 있다. 죽 보야르는 자신이 원하는 어떤 사람 에게든 봉사할 수 있으나, 그의 토지 재산은 지방 제후의 지배권하에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제후의 재판에 예속되어 있고 제후에게 공물t he Pri n- cely t r i bu t옳 바쳐야 했다.

로운 가신 (vol'n yi' slug a , free servan t) 〉 의 이와 같은 〈이탈 de p ar t ure 〉 의 권리는 그의 토지 소유 (vo tc h i na : 세습 토지 p a tri mon y)에는 비제 약적 non-condit ion al 성격이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그 토지 소유는 그 기원이 어떠하든-제후가 직접 수여했건 아니면 최초의 점유 사 실을 인정했건 간에一_봉토가 아니라 사유지 allod 였다. 제후에게 봉 사하는 인물과 그의 제후국에서 대토지 재산을 보유한 인물 사이에는 대체로 유사성 p aralle li sm 이 있었으나 그 두 가지 기능 사이에 어떠한 법적인 연관도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죽 〈자유로운 가신 〉 은 대영 주가 될 수 있었고, 만일 그렇다면 그는 가신뿐 아니라 보야르 (bo y­ ar, bo i a ri n) 로도 불리었다. 농촌의 주민들의 경우에는, 1 책 l 기 중엽 이전에는 중앙 러시아에 농노제의 흔적이 없다. 주민은 자신의 보유 지를 양도하고 주인을 바꿀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발전에는 또 다른 두 개의 중요한 특칭이 있었다. 첫째, 정 착민이 살고 있는 한 영지의 주인은, 그 자신이 성직자이건 세속인이 전, 자기 영지의 주민을 재판하고 어떤 경우에 그들로부터 세금을 거 둬들일 권리를 향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면제권 7) 은 현존하는 조

7)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세속의 면제권 문서 (13 25-13401d 사이 모스코 의 Ivan Danil o vic h Kali la 대제후가 수여한 것이다. 14501d Basil 刀 l 에 의 _M해 o서y e는n aIvgaen ruPsese t e, liB n 에rus게se ls추 a안nd장 으Pa로ri s서, 만19 3보3,존 p되p.었 4다92.- 4 불93어 참 번고역)에판는 A 제. E후ck, 재판권에 맡겨지는 사건들을 담고 있다 . 〈……그리고 나의 지역 수장들 vo­ J os t el 라 그들의 재판관들ti un i s 은…… 물적(物的) 증거가 있는 살인, 강탈, 절도를 제의하고는 어떤 경우든 그들 ‘예컨대 Ivan 과 모든 그의 신민(臣民) 들’을 재판하지 않는다 . 〉 우리논 그보다 앞선 문서를 갖고 있지 않지만, 이

용 가능한 면제권 문서에 의하면 많은 요소들은 새로운 것이 아님을 보여준 다. 오히려 그것들은 예전에 잘 확립되어 있는 관습을 추인하였다. 예전의 매우 광범한 면제권이 앞에서 인용한 문서에 언급되어 있는 3 가지 사건에 대한 제후의 재판의 단서 조항과 같은 제약을 받게 된 것은 오직 모스코 제 후의 권력이 성장하면서였다. 초기에 자신의 세습 보유지 vo t ch i na 에서 토지 보유자의 득권에는 그러한 제약이 없었고, 실제로 관습에 뿌리를 둔 그의 행정적, 사법적 권한은 대체로 제후국에서의 제후의 권한과 같았던 듯하다. 이 이론은 네볼린 K. Nevo li n 에 의해 그의 『시민법의 역사 』 (S t. Pete r sburg, 프18-51 실) 반II스 권키 2(7G2o 페su이da지re에vy 전slu재zh되il었 ye고 、llu d몇i, 몇pp .러 18시 - 아2 0 )역, 사E가ck들(M, o예y e컨n 대ag e파 r불uss로e, pp. 235- 2 54) 그리고 스트로제프( Votc h in a in Brockhaus-Efr on , Ents i k / o- pe dic h eskil Slovar'(Encyc l op e dic Dicti on ary) Xill , 1982, p. 321) 에 의해 인 정되었다. 그것을 지지하는 강력한 증거는 있다. 또 다른 이론은 면제권의 제도를 제한적으로 해석하여, 그것을 옛 관습의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피수 여자들에게 예의적인 상태를 만들어 주기 위해 제후가 확립해 준 특전들로 서 간주한다. 이것은 솔로베프의 견해 (/s t or ifo Rossiis drevneis h ik h vremen (Hi st o r y of Russia from Most Anc ien t Tim es), 2nd edn., St. Pete r sburg, 1897, Book I, p .1213) 인데, 클류체프스키 (Kurs russkol ist o r ii( L ectu r es on Russia n Hi st o r y) , Moscow, 1937, I , 375-37 7) 와 여타의 학자들이 그것을 지지한다. 에리아세비치는 그의 책 lsto r ila pr ava po zemef n ol sobstv e nnosti v Rossii( L ega l Hi st o r y of Land Ownershi p in Russia ) , I (Paris, 1948) 중 보 야르의 토지에 관한 장(pp .249-266) 에서 이 해석을 매우 강력히 강조하였다.

건들, 즉 한편에서는 군사적 가신이 드물고 디론· 한편에서는 영토가 부족했던 그러한 조건들 아래에서, 단지 실행 가능한 방식으로 경찰 과 사법을 조직해야 할 필요성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모 든 세대에 걸쳐 제후의 수는 증가했고 그둘의 제후국도 지역상으로 커졌으나, 반면 그들의 이해 관계는 지방적 • 경제적 • 비정치적 문제 들에 대단히 집중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점차로 많은 제후국 이 일종의 군주의 영지 a pri n c ely eta t e 형태에 접근하였다는 것을 의 미한다? 따라서, 봉건제로 혹은 어느 정도 그와 닮은 정치 구조로 발

8) 키에프 시대에 류릭 왕실 가문의 공동 재산 중의 〈몫 share 〉만을 의미했던 udel 이라는 용어는 이제 세습 재산의 의미로 발전하였으며, 이에 따라 〈제후 국〉과 〈영지〉의 이중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어떤 저자들은 이 용어를 이 시기의 정치적 분열을 특정짓기 위하여 형용사적으로 사용한다. 엑크 (Mo y-

en age russe, p. 569) 는 그것을 pri n c i pa ute p a t r i mon i a/ 러라고 을바르게 번 역하고 있다. p. 43 를 참고할 것. 〈 udel 은 일반적으로 ‘속령 (涼領, app a n- ag e)’ 으로 udeli ny j kn j az i(엑크의 음역(音譯))는 ‘예속 제후 a pp ana g ed prin- ce’ 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완전히 찰못이다. udel 은 소유자의 사망 후에도 왕 실에 전혀 귀속되지 않는 세습 재산이고, 반면 속령은 귀속되는 것이기 때 문이다.〉 이 반박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의국의 역사가들은 단지 시대 착오 적 으로 1797 년 4월 5 일 풀 1 세 의 Uchrezhden ie o Imp e rato r skoi fam i lii( Es- tab li sh ment concernin g the Imp er ia l Fam ily ) 이래 근대 러시아 입법에서 udel 이란 용어를 속령으로 사용하고 있다• Sto / eti e Udelov(Cente n ary of the Ap pa nage s ), 1797-1897(St. Pete r sburg, 1897) 을 참조.

달시키는 두 가지 중요한 경향들이 타타르 침입 시기의 중앙 러시아 의 조건을 결정하고 있다. 죽 공적인 권위의 분열 및 그것과 토지 소 유와의 연관이 그것들이다. 크건 작건 자신들의 제후국에서 완전히 독립적이던 다수의 제후들 위에는 이론상 상급 권력, 즉 불라디미르 대제후 Grand Prin c e of Vlad i m i r 의 권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침 입기에는 그리 중요한 것이 되지 못했다. 침입이 시작되어 중앙 러시아와 드니페르 지역 전부가 유린된 결과 (침입은 멀리 누닌 7 쿠亡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실질적으로 독립 상 태로 남아 있던 누닌 T 쿠亡-와 (성장하고 있던 리투아니아 제후국들과 폴란드 왕국에 의해 곧 흡수되었던) 드니페르 지역의 러시아와 궁극적 으로는 중앙 러시아의 세 지역으로 영토가 최종적으로 분할되었다. 중앙 러시아의 경우, 타타르인들은 무엇보다도 물질적 획득물에 관심 을 가졌으므로 이 지역에 대한 물질적 약탈을 감행했음은 물론, 1328 년부터 전면적인 공물 징수에 있어 그들의 칭세 사령관fa rmer - g eneral 이 되었던 블라디미르 제후의 권한에 물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때부터 그들은 모스코 공에게 불라디미르 대제후의 위엄과 그것이 포함하는 기능들을 자연스럽게 부여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모 스코공은 다론 제후들보다 상위에 있는 권위를 획득했다. 이것이 모스코 발생의 시작이었다. 2 세기 반 이내에, 그 권력은 중

앙 러시아가 극도로 분열한 데 힘입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 발생 에 관한 이야기는 단지 하나의 주석(注釋)으로서가 아니라 따로 한 장(章)을 할애하여 자세하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만 분열로부터 야기되는 하나의 움직임, 죽 모스코공에게 봉사하려 고 군사적 가신들과 세습 제후들 스스로가 이전보다 더 큰 규모로 일 제히 쇄도한 것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히는- 가운데 군사적 가신들은 자신들의 관습적인 자유 이탈의 권리를 행사하고 있었고, 한편 세습 제후들은 스스로를 모스코공에게 의탁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의존적인 위치를 찾고 있었다. 모스코공은 새로운 보야르를 받아들이 는 것을 다른 제후국에 있는 토지 재산에 대한 병합의 구실로 쉽게 이용하였고, 따라서 점차 군사적 가신들의 무리들뿐 아니라 더욱더 많은 토지가 모스코 공의 수중에 집중되었다. 1462 년 이반 3 세의 통 치가 시작되었을 때까지, 이 집중화 과정은 거의 모든 중앙 러시아 영토에서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집중화는 한 사람의 대제후가 수많 은 제후들을 대신하는 형태로 진행되었으므로, 봉사의 대상을 자유롭 게 바꿀 수 있는 옛 관습은 통하지 않게 되었다. 예전의 지방적 이해 관계는 모스코의 대공이 대변하는 하나의 주된 전국적 이해 관계에 밀려났고, 대공에 대한 봉사는 전국적인 봉사가 되었다. 그리고 자유 로운 이탈, 국가적 충성의 전환, 혹은 군주에 대한 복종의 파기 등은, 그것이 제후국이든 아니면 군주의 것이 아닌 토지 재산이든 간에 세 습 재산의 박탈이라는 처벌을 받았다. 따라서 15 세기 말경 세습 재산 과 군주에의 봉사 사이에는 일종의 관계가 성립되었고, 새로운 관습 법이 자유로운 봉사라는 옛 관습을 대신하면서, 직접적으로든 9) 혹은 9) <… …그리고 내가 나의 보야르인들인 안드레이 페도로비치 Andrei Fedorov ich 제후와 피터 미키티치 Pete r Mi kitich 제후에게 부여한 것은 … … 그들과 그 둘의 자식이 나와 나의 자식에게 봉사하는 동안 …… 그들 ‘자신의’ 세습 재 산을 ‘새로운 세습 재산의 이름을 따서’ 교체할 수 있도록 내가 그들에게 준 세습 재산이다. 만일 그들의 자식이 나의 아들에게 계속 봉사한다면 그

것은 그들에게 속하며, 만일 그들이 나의 아들에게 봉사하지 않으면 그때는 그들의 세습 재산은 나의 아들에게 ‘돌아울 것이다'• 그리고 만일 신이 나의 아들 페도르를 부르신다면, 내가 이렇게 양도한 것은 그들의 세습 재산이 되어 그들 ‘자신의’ 세습 재산이 교체될 것이다.〉 (Wi ll of Pri nc e Bori s Va-sil' e vi ch of Volok, 1477, Dukhovny e i dog ov orny e gra moty veli kik h i 백 r nyk h knia z ii (W i lls and Treati es of the Grand and Patr im on ial Pri nc es) x iv- x vi c., Moscow and Lenin g rad , 1950, p. 251 )

더 빈번하게는 몰수라는 유예적 위협 수단을 동한 간접적인 방식으로 든 세습적 토지 재산에 조건부적 성격을 부여했다. 동시에, 누닌 7 쿠트 영토의 병합 결과로서 새로운 발전이 시작되었 는데, 그 병합은 모스코의 발생의 마지막 단계였으며, 당시에 존재하 고 있던 대러시아의 모든 영토에 대한 동일한 모스코 권력 아래로의 통일을 사실상 완성하였다. 이때부터 민족적으로, 군사적으로, 행정적 으로 새로운 과제들이 무스코비 앞에 놓이게 되었고, 이것들을 극복 해 나가기 위해서는 옛 관계의 소멸과 새로운 관계의 창출로 이끄는 개혁들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새로운 관계가 봉건적이었는지의 여부 는 새로운 문제를 낳고 있다. 기본적인 개혁은 은대지 제도(p ome­ stn aia sis t e m a, the sys t e m of benefi ce s) 를 출현시 킨 군사적 인 개 혁 이 었다. 러시아 농민은 이것 때문에 그들의 중세적 자유를 상실하게 되 었다. 이 과정은 이반 3 세의 치하에서 시작되었고 17 세기 중반에 완 성되었다. 3 무스코비에서의 봉건제의 제 측면(그리고 이의 근대 러 시아에 있어서의 영향) 중앙 러시아가 통일되지 않았던 기간 동안, 수많은 독립 제후들간 의 분쟁들은 거대한 군사력의 참가를 동반하지 않았다. 군사적 가신 들은 전쟁에 대비하여 자기 영지의 주민들을 조직하였고, 필요할 때

마다 그들을 소집하여 제후에게 봉사하도록 했는데, 제후와 그들은 자유로운 봉사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봉사는 실제적으로는 토지 보유에 대응하는 것이었으나 후자는 법적으로 아무런 조건도 붙 어 있지 않은 것이었으며 군역 보유지(軍役保有地, mi litar y t enure) 로 서의 성격을 갖지 않았다. 거대한 무스코비의 국가가 대러시아의 전 영토 위에 건설되었을 때, 그 국가의 증대된 요구들은 새로운 군사 제도를 창출하였다. 무스 코비는 더 이상 러시아의 이웃들과 싸워서는 안 되었고 의세들과 싸 워야만 했는데, 그 의세들이란 스웨덴, 리보니아 사회 the Livo nia n Order, 리투아니아 대제후국 그리고 무스코비가 1480 년에 몇 세기간 의 오랜 충성을 거부한 이후에도 여전히 남동부 지방에서 강력하였던 이전의 지배자들인 타타르인들 등이다. 더 넓어전 국경선이 방어되어 야만 했으며, 수만 명 심지어는 수십만 명을 헤아리는 잘 훈련되고 무장이 잘 갖추어진 전사들로 이루어전 보다 유능한 군사력에 대항하 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동력 있는 대규모의 특수한 군사 계급이 시 급히 요청되었다. 무스코비는 l5 세기 말 이 군사 계급을 조직하기 시 작했는데, 이 목적을 위해서 다양한 사회 성원들을 활용하였다. 그들 중의 일부는 군사적(그리고 행정적) 가신 가문의 자제들인 연소한 보 야르 (de ti boia r ski ia, jun io r boy ar ), 일찍이 독립 제후 혹은 보야르의 법정 (dvor, cour t)에서 관칙을 보유하던 사람인 드보리아네 dvori an e, 도시 외곽에 토지를 갖고 있던 도시민인 누l:l T 쿠亡의 지주들 svoe­ zemt sy 등과 같이 전(前)시대의 유물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 분치 않았다. 외국으로부터, 특히 리두아니아와 타타르 지방들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전사들이 대공에게 봉사하기 위해 무스코비로 왔다. 그 후에 계속해서, 코사크 (Cossacks : 무스코비 영토의 가장자리에 있 는 러시아의 〈변경〉, 주인 없는 땅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찾았던 사람 들)들로부터 충원된 전사들이 왔다. 이들 모두가 기 사군 a militia of

cavalr y을 창설하는 데 기여했다• 동시에 무스코비에서는 보병과 특수 기술병으로 구성된 소규모의 상설 용병대가 결성되었다 . 1 0)

10) 리보니아 전쟁 (Liv o nia n War, 1558- 1 583) 동안, 무스코비군은 7 만 5 천 명 의 기사군 (dvo ri ane, deli bo ia rsk iia와 그의 부하들) , 2 만 명의 보병 (화승총 기병 ) 그리고 코사크(기병 코사크와 보병 코사크), 마지막으로 1 만 R! 명 의 타타르인과 여타의 동맹군 allo g enes 및 일부 의국인들(네덜란드인, 스코 트랜드인, 그리스인, 덴마크인 등)을 합해 모두 약 11 만 명으로 구성되었다. (S. M . Seedonin , Sochin e nie Gil es' a Fletc h er's kak istor ich eski l isto c hn ik( Gi - Jes Fletc h er's Work as Source of Histo r y) , St. Pete r sburg, 1891, pp. 337- 338, 349, 359)

이 많은 군인둘을 유지하기에는 충분한 돈이 없었다. 이 목적을 위 해 모스코의 대공은 군역지(軍役地, p omes t e) 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새로운 군사적 가신의 봉사가 계속되는 동안, 그에게 개인적으로 그 리고 조건부로 부여되는 토지였다. 처음에 이 보유지는 법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세습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16 세기 초에 군사적 봉 사가 더욱더 세습 토지 vo t ch i na 와 연계되면서, 세습의 원칙이 군역지 에까지 확장되기 시작했다. 곤경의 시대 Tim e of Troubles 이후, 그 원 칙은 법이 되었고, 이와 동시에 세습 토지와 군역지 사이의 모든 구 별은 사실상 사라졌으며, 그 두 가지는 결국 군사적 봉사의 의무를 갖는 세습적 토지 소유가 되었다. 이러한 발전의 결과, 지주 계급은 공공 가신 (sluzh i l y e liu d i : 죽 주로 군사적 가신)의 계급과 일치하게 되었다. 어의상의 전화도 이 과정에 조응하였는데, 원래 군역인 m i l i­ tar y t enan t을 뜻했던 p omeshch i k 라는 단어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러 시아어에서 〈 영주 landlord 〉 라는 일반적인 뜻으로 자리잡아 왔던 것이 다. 그 발전은 17 세기 중반까지 완성되었다. 1649 년부터 1762 년까지 토지 소유-세습적 토지 소유-~의 특성이 점차 군사적 봉사의 특 성을 압도하게 되었고, 이것은 토지 보유를 봉사에 대한 급부로 만들 었던 봉건화 과정을 실질적으로 반전시키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17 세 기에 일반적으로 dvo ri ane 로 불린 지주 계급은 국가에 대한 모든 봉

사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주적 특전은 유지 하였다. 피터 대제의 입법도 이 발전을 단지 일시적으로만 정지시켰 울뿐이었다. 군역지의 발생은 러시아 농민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 는, 자유 농민 공동체들이 정착하고 있던 땅에 군역 봉토들 m ili a t r y fi e fs 이 매우 빈번하게 만들어져, 이 공동체들은 한 사람의 주인 아래 로 들어갔는데, 그 주인은 이 공동체의 지원을 받아 오로지 공공 봉 ` 사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군역인들에 대한 새로운 토지의 끊임없는 분배가 자유로운 농촌의 존립 가능성을 크게 제약했 다. 이러한 발전이 I~ ]기 중반 폭군 이반의 치하에서 이미 현저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갑자기 남동부 전체가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고, 그 후 I~] 기가 끝날 무렵 무스코비의 국경은 우랄 산맥을 너머 태평양 쪽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이주의 가능성이 열렸으며, 주민들 은 보다 나은 생활을 찾기 위해 오래된 대러시아 영토를 떠나기 시작 했다. 이것은 무스코비가 발틱 해안을 둘러싼 주요한 전쟁 (1558- 1583) 에 빠져들게 되어 군역인의 존재와 세원(稅源)의 존속을 확보하 는 일에 이전보다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 발생했다. 멀리 남동 부 지역으로 이주해 가고 있는 주민들 때문에 군역인들은 자신들의 인력을 상실하고 있었고 정부는 납세자들을 상실하고 있었다. 이 두 가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농민의 이동의 자유에 대한 제한들이 생겨났 다; 곤경의 시대 이후에도, 이러한 상황을 만든 전제들은 변하지 않았 고, 따라서 국토 방위를 보장받고 그것에 필요한 것들을 충족시킬 재 원을 확보하는 유일한 방법은 영주로부터 떠날 수 있는 농민의 권리 를 더욱더 제한하는 것이였기 때문에, 그 결과 1649 년까지 농민은 자 신의 거주지에 꼼짝없이 묶이게 되었다. 한편, 사유지 재산과 군사적 봉토간의 모든 구별도 사라졌고, 자의적인 영주 교체를 금지하는 규 정은 사적으로 소유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주민 재산에 대한 법이 되

었다 . 1649 년과 1762 년 사이에 농노제 ser f dom1” 를, 비록 노예제와 똑같지 는 않지만, 사실상의 노예제에 가깝게 만든 하나의 발전이 있었다. 농 노들은, 제국 정부가 막고자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토지와는 상관없 이 심지어는 토지에 딸리지 않은 채 팔렸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이 관습을 합밥화시켜 주는 어떠한 것도 없었다. 그것은 영주에 대한 농 노들의 절대적인 의존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는데, 영주들은 이 기간 동안 농노들의 재판관이 되었고(주요한 사건을 제의하고는) 칭세자가 되었고, (국가를 대신하여) 경찰이 되었다. 사실상, 다론 곳에서와 마 찬가지로 사적 소유 영지의 농민은 이론적으로는 차르 Tsar 의 여타 신민들과 같은 시민이었다. 그들도 새로운 군주가 등장할 때마다 통 상적으로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 상황은 그들을 매 우 엄격한 의존 제도라는 절박한 상황 속에 빠뜨렸는데, 그 제도는 귀족의 이해 관계에 관한 한 예전의 무스코비 이전 시대의 면제권 제 도와 여러 측면에서 닮은 것이었다. 즉 농민들은 한 사람의 동일한 주인에게 묶이게 되었으므로, 이 제도는 이전의 면제권 제도에는 없 었던 자유의 실질적인 상실을 그들에게 가져다주었다

11) 이것은 공식 용어가 아니었다 . 러시아어로 농노에 대한 법률상의 용어는 po ddanye , 죽 예속인 subj ec t s 이었다. 관습적으로 농민의 상태는 krep os tn o e pra vo, 죽 예속법 law of. bonda g떠 지배를 받는 신분으로 정의되었다•

따라서 1762 년까지, 한편에서 영주들은 그들의 조상들 대부분이 갖 고 있던 원래 토지 보유의 조건이었던 복종으로부터 벗어났으며, 다 론 한편에서 농민들은 많은 특성들에서 노예제와 가까운 상태에 도달 하였다. 러시아 농민들은 그들의 자유가 상실된 역사적 상황에 대한 기억울(대러시아의 제도들은 수세기를 경과하면서 병합된 영토의 일부 에까지 보급되었고, 반면 여타의 영토들은 병합되기 이전부터 독자적인 농노제를 발전시켜 왔었다) 간직하여 왔으므로, 매번 새로운 군주로부

터 그들의 주인들이 더 이상 국가에 봉사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갖 게 되는데 따르는 자연스런 부수물로서 〈 농민의 자유 〉 를 확증해 줄 문서를 기대하였다. 농민의 자유는 농민에게는 예속으로부터의 해방 을 의미하였으나, 그것은 그 이상, 죽 국가가 군역인에게 주기 위해 농민으로부터 빼앗았던 토지의 반환까지도 의미했다. 1861 년 알렉산 더 2 세 황제에 의해서 농민의 자유가 부여될 때까지 100 년이 더 필요 하였다 . 그때 사적으로 소유되어 있던 러시아 농민 전체는 개인적 자 유뿐만 아니라, 그들이 경작해 왔던 토지의 4/5 를 획득했다. 이 개혁 의 결과로, 1864 년 지방 행정과 사법 제도의 개혁은 몇 세기 동안의 농노제와 연관된 모든 특권들을 폐지시켰다. 봉건제는 이날 러시아어] 서 그 모든 측면과 세부 사항에 있어 종말을 고했다고 확실하게 결론 내릴 수 있다. 4 만일 이제 서론에서 제시된 것과 같은 봉건제에 관한 정의의 특수 한 점들을 채택하여 러시아의 발전에 적용한다면, 유사점과 상이점 두 가지 모두가 나타날 것이다. 면제권과 더불어 udel( 세습 제후령) 제도는 무스코비 이전의 중앙 러시아에서 정치적 권위와 사적 토지 소유를 결합시키고 있다. 이 결 합은 어떤 의미에서는, 무스코비에서도, 근대 러시아에서도 농민을 지 배하는 군역인들에게 혹은 나중에는 영주들에게 부여된 특권들 속에 서 존속하고 있다. 이 결합은 무스코비 이전의 중앙 러시아에서는 지 방 정치에 있어서의 군사 기능의 중요성 때문에 그리고 무스코비에서 는 국가적 중요성 때문에 강고하게 확립되었다. 토지 소유가 세습될 때마다, 그것과 결합된 권위도 역시 세습된다. 이 세습은 무스코비 이

전 시대에는 정상적인 제도였고, 17 세기에는 다시 일반적인 것이 되 면서 바세습적 군역지는, 비록 다소 오랫동안 존속하기는 했어도, 하 나의 제도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무스코비 이전의 러시아에서 근본적인 관계는 주군과 봉신 간의 관계가 아니라, 지배자와 신민의 관계에 가까워지고 있던 세습 토지 보유자 vo t ch i nn i k 와 그의 세 습 보유지 vo t ch i na 의 주민들 간의 관계이다. 제후의 봉사와 토지 소유 간에는 어떠한 연관도 없었고, 설 령 토지 보유의 세습은 있었다 해도 제후의 봉사 자체의 세습은 없었 다. 또한 이때에는 이탈의 자유(자신의 주군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자유. 역자 주)가 있었으며, 어떠한 중죄(重罪, fe lon y)의 관념도 없었 다 . 이 러한 상태 아래 에서 봉신제 vassala g e 에 관해 이야기 할 수 있을 까? 파불로프一실반스키와 엑크는 그렇다고 대답하지만, 클류체프스키 는 모든 의면적인 유사성을 무시하면서 봉건적 관계의 존재를 명백하 게 부인한다. 클류체프스키는 소제후국의 지배자이면서 동시에 그 토 지의 영주 dom i nus em i nens 인 세습 제후는 서유럽의 주군을 연상케 하지만, 〈그러나 그의 보야르들과 자유로운 가신들은 확실히 봉신들 이 아니다〉라는 것을 거리낌없이 인정한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만일 15 세기에 일부 모스코의 대공들이 세습 제후들과 자신들 사이 에 종사 관계를 만들려고 도모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은 권 력의 봉건적 분화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중앙 집권적 국가의 형성의 선행적 칭후였고 지렛대였던 것이다〉 1 2 ) 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무스코비의 군역지에서 주종 관계를 포착할 수 있을까? 여 기서 비록 군역지는 세습되지 않지만, 군사적 기능과 토지 소유 사이 에는 어떠한 연관이 있다. 그러나 그 연관은 주인과 봉신 간의 상호 충성을 포함하는 봉건적 계약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그것의 연원은 신민으로부터의 봉사를 요구하는 그리고 봉사에 대한 대가로 군역지 12) Kurs n1ssko1 ist o r ii, I , PP: 375- 3 77.

를 부여하는 차르의 절대적 권한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이 익을 위해 이 봉사를 강제하였는데, 피터 스트루베 Pete r S t ruv 읊근 그 것을 일종의 〈제의적 (祭儀的) 〉 제도(막스 베버 Max Weber 가 명명한 바의 Le it our gi a 를 참고할 것 )의 한 특칭으로서, 〈 법적 인 측면에서 볼 때, 어떤 점에서는 고전적인 봉건제와 반대되지만 일종의 국가적 봉 건제〉 13 ) 로 규정한다. 그래서 중세 러시아에서 서유럽과 비견될 만한 기사도의 이상을 발 전시키지 못했디는 ·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 요소들은 키에프 시 대의 서사시들 속에서도 드러나고 있지만, 오랜 타타르 지배와 차르 에의 봉사라는 무스코비의 관념 중 그 어느 것도 기사에 대한 개념을 만들 만한 풍토를 조성하지 못했다. 러시아의 경우, 바바리안의 영향 (만일 타타르인을 바바리안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은 서유럽의 주종 관계에서 나타났던 것과 같은 개인적 권한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개 인적 복종에 대한 개념의 전달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러시아의 중세 제도들은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전두 기술과 군사 조칙 모두 그전의 키에프 시대에서와 같이 무스코비 이전의 중앙 러 시아에서도 대개 동일하였다. 새로운 값비싼 군사 장비도, 보다 작은 새로운 집단에 의한 군사적 봉사의 독점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발생 한 것이란 의부와 내부의 위험들에 대한 일종의 지방적 보호의 중심 체로서 전사의 중요성이 커졌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전사는 물질적 부조의 원천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정착 기간 동안 지방의 보야르는 일반적으로 사회의 하층에서부터 성장한 강력 한 사람이 아니라, 원시 농업이 유용한 생존 수단을 제공해 주었던 극히 의딴 삼림 지역에서 특별한 가치를 지니는, 육체적인 힘과 경제 적인 힘의 원천이었던 노예들을 가전 남쪽에서 온 식민의 조직자였던 것이다. 더욱 값비싼 군사 장비 (더 많은 수의 그리고 보다 잘 무장된 13) Cambrid g e Economi c His t o ry of Europ e , I (Cambrid ge , 1941), 419.

기사군의 활용) 때문에 득수한 계층이 군사적 독점을 할 수 있었다고 군이 말할 수 있었던 시대는 무스코비의 시대뿐이었다. 그러나 이러 한 개혁도 점차 확대되어 가고 있는 중앙 집중화의 한 수단이었지 정 치 권력 분화의 시초는 아니었다. 다이나믹하게 생각해 보면, 러시아의 〈 봉건 시대〉는 고도의 정치 조직인 키에프_누1:1 7 쿠트 연방 시기 다음에 나타났다. 통일의 원칙 은 수많은 세습 제후들 모두가 똑같이 류릭 가문에 속하였다는 점에 서 훨씬 더 쉽게 그들 사이의 관념상의 연결끈으로서 존속하였다• 이 기억은 그 제후들 중의 하나인 모스코 대공의 수중으로 권력이 집중 되게 하는 수단이 되었다. 무스코비 차르 국가 Tsardom of Muscov y에 이른 모스코 제후국의 성장은 이러한 기억의 끈끈한 존속과 중앙 러 시아에서의 정치 권력의 극단적인 분열이 결합된 결과였다. 〈러시아 의 중세 〉 라는 용어는 대개 이 과정이 완성되고 있던 시기에 해당된 다. 이 용어는, 러시아 문화사에 관심의 초점이 놓여진다면, 13 세기부터 17 세기 말까지의 다소 긴 시기에도 적용된다. 키에프그 T 년 7 쿠亡 러 시아는 무스코비 이전의 중앙 러시아보다, 십지어는 무스코비 그 자 체보다 더 높은 문화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12 세기까지 그것은 적어 도 동 시대의 서유럽 문화 수준만큼 높았고, 서유럽과 꾸준한 관계를 발전시켰다. 기독교 교회의 영향력은 컸지만, 그 문화는 많은 중요한 면에서 세속적이었다. 특히 타타르의 침입 이후 중앙 러시아는 대개 서유럽으로부터 고립되었고, 중앙 러시아가 무스코비로 발전될 때까 지 그 고립은 지속되었다. 문화적으로 자부심이 강했으나 또한 문화 적으로 후진 지역이었던 이 지역에서 모든 지적 생활은 교회의 지배 롤 받게 되었다. 오직 피터 대제에 의해서만 러시아는 완전히 문화적 중세로부터 벗어나 유럽과 다시 접촉하게 되었고, 새롭고도 웅장한 세계적인 문화를 갖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러시아의 〈 봉건 시대 〉 는 이 책의 서론에서 분석된 것 과 단지 부분적으로만 일치한다. 면제권과 군사적 기능에 기초한 통 치 체제가 확실히 존재했으나, 쌍무 계약으로서의 종사제와 봉토 그 어느 것도 러시아에서는 발전하지 않았으며 군사적 혹은 행정적 기능 의 일사불란한 세습도 없었고 기사도도 없었다. 다른 한편, 설령 러시 아의 〈 봉건 시대 〉 가 주로 농업 사회의 시대라고 해도 그리고 본질적 으로 고도로 조직화된 정치 체제로부터 더욱 고도로 중앙 집권화된 정부로의, 고도로 발전된 문화 시대로부터 더욱 고도로 발전된 또 다 론 문화 시기로의 이행기라고 해도, 한 걸음 더 나아가 러시아의 봉 건제가 일종의 〈신앙의 시대 〉 라고 해도, 신탁과 장원의 사회적 • 경제 적 조직이 서유럽과의 공통성을 가졌다고 증명되더라도 그 기원은 야 만족의 침입이라든가 새로운 군사 기술 및 새로운 군사 조직에까지 거슬러 울라갈 수는 없다. 만일 그러한 차이가 있다고 해도, 여전히 러시아의 봉건제에 관해 언급할 수 있을까? 단순히 부정적으로 대답하는 것은 독단적이 될 것 이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제도로서, 즉 〈 전(全) 문화t o t al cul t ure 〉 로 서의 봉건제는 러시아사의 어느 시기에서도 발달하지 않았고, 만일 우리가 스트레이어 S t ra y er 나 쿨본 Coulborn 과 같이 문제의 핵심 이 주 종 관계라고 말한다 해도 그것마저도 러시아에서는 완전한 발달에 거 의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제도의 발달 에는 의심할 바 없이 중요한 봉건적 측면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반 (半)봉건제, 준(準)봉건제, 근사(近似)봉건제 혹은 유산(流産) 봉건제 abortiv e feu dalism 등으로 정 의 될 수 있을까? 유산 봉건제가 제 일 적 절할 것이지만, 그 정의가 어떤 것이든간에 중충적인 역사적 실체를 거의 포괄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완전히 이해되어야 할 문제를 미결 인 채로남겨둘 것이다. 완전한 이해를 목표로 한다면, 중세의 중앙 러시아에서 재정착하기

위한 이동 및 그 이동과 연결될지 모르는 러시아의 발전과 서유럽 발 전과의 중요한 차이점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요구된다. 만일 그 이 동이 러시아의 생활에서 봉건적 측면들을 낳았다면, 그것은 또한 사 회 관계에서 불안정을 유발하는- 근원이기도 했다. 근본적으로 그 이 동은 원시적 , 조방적 농업의 조건 아래에 있는 그다지 비옥하지 않은 토지의 지력이 급속히 소모된 데서 비롯되는 농민의 유동성 때문에 발생하였다 모 여기서 러시아와 서유럽 사이에 하나의 현저한 차이가 나타난댜 왜냐하면 서구에서 자유인은 〈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마치 성벽(城壁)과 같이 자기 둘레에 견고한 세습적 관계등의 사슬을 둘러쳤고, 그에 의해 이끌려지고 그를 뒷받침하는 견고하고도 항구적 이기조차 한 사회 단위로서의 지방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이었 기 〉!”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지방 인구의 이동 때문에 〈 자유로운 봉사자 〉 는 그가 믿을 만한 사람둘을 갖지 못하게 하였고 그의 봉사의 일시적인 성격 그리고 자유로운 이탈의 권리 이의에 그의 자유에 대 한 다른 보호막은 없었다. 이렇듯 농촌 주민의 유동성은 군사 계급의 유동성을 촉진하였으므로 , 서유럽 형태의 어떠한 주종 관계도 무스코 비 이전의 러시아에서 발전할 수 없었으며, 그 관계에 기초한 기사도 도, 기능들의 일사불란한 세습도 발전할 수 없었다.

14) 〈 삼림은 개간되거나 불태워졌다. 경작한 지 1 년 혹은 正빈 후, 토지는 포기 되고 경작자들은 앞으로 나아간다. 일 년에 한 번씩 경작을 하지 않고 거름 3만 년 주윤는작 (휴輪경作지)는은 11 5어 세기기 말후에반야부터 나 타알난려다지.게 그 되리었고다 휴 . (경Ec지k ,와 M 더oy불 en 어 a g곡e 물 ru의s- se, p. 5 9) 15 ) Kl iuc hevsky, Kurs russko'i ist o i i, I , p. 377.

이와 반대로 무스코비 시대의 제도의 발전은 주민을 정착시키려는 강한 욕망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제 군사 개혁은 제도들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쳤고, 의면상으로 서유럽 초기의 봉건 발전과의 일정한 공 통성이 지적될 수 있는 것이다. 그 공통성은 군사적인 필요의 원인들

그리고 서유럽의 은대지 제도와 군역지의 유사성 그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된다 .16) 그러나 그 맥락은 다르기 때문에, 이 유사성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무스코비 제도의 모든 변화들은 〈제의적〉 국가에 의 한 위로부터의 작용의 결과였다. 그 변화들은 봉건 체제를 향한 디딤 돌이 아니라, 그 체제로부터 국가의 모든 생활의 극단적인 중앙집권 화로 이끄는 많은 수단들이라고 할 수 있다. 16) 이것은 단순한 유사성이 아니다. 군역지 제도는 비잔틴의 프로노이아p ro­ no i a 와 모술렘의 익타igt a 를 연상시키며, 두 가지의 발전, 죽 무스코비의 발 전과 동(東)비잔틴의 발전은 서로 영향을 미쳤다는 (P . M il i ukov 의 Ents ik . S/ovar' , I.XX(l90 2), 549 안에 있는 러시아에서의 봉건제에 관한 그의 논문 을 불 것) 생각, 혹은 비잔틴의 패턴이 군역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또는 어쩌면 오토만 O tt oman 의 군사적 봉토milit a ry fi e f인 티마르 T i ma r¾ 통해서 영향을 끼쳤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제시되어 왔다 .(Vernadsk y, On Some Parallel Trends in Russia n and Turkis h Hi sto r y , Trans. of the Coon. Ava- demy of Arts and Sc ien ce, xx 짜, Jul y, 1945, 33-3 4) 그러나 이 영향력을 입증해 줄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제 3 부

1d~1 이 글의 목적은 봉건제가 발전적 인 일관성 develop m enta l unif orm i ty 울 가졌는지의 여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상 서 로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발생한 봉건제가 어느 정도 유사한 발달 단 계를 거쳐왔는지 그리고 이전의 정치 형태가 비슷하고, 그 정치 형태 로 일어나는 사건과 결과가 비슷하면 봉건제는 어느 정도로 다시 되 풀이되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지역은 이 책의 앞부분에서 여덟 명의 전문가들이 취급한 지역과 대체로 동 일하다. 그러나 필자는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필자의 동료들이 내린 판단과는 다르다는 것을 당연히 변명과 함께 언급해 두어야겠다. 이 점은 학문 연구에 있어서 당연히 있는 일이며, 궁극적으로는 우리들 의 지식을 중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연구된 12 개의 봉건 제에 대해 간단한 분류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분류는 필자의 주된 판단이 무엇인지를 곧바로 나타내주기 때문이다. 완전히 입증된 봉건제의 사례는 단지 두 경우가 있는데, 서유럽의 봉건제와 일본의 봉건제가 그것이다. 기원전 700 년경의 중국의 주나 라와 함무라비 왕 이후의 5, 6 백 년 동안의 메소포타미아의 두 경우 에는 봉건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 주나라의 경우에는 그 가 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봉신이 주군에게 종속되어 있는 형태에

관한 중요한 자료 이외에도 봉건적인 여건이 있었디는· 것을 입증하는 거의 모든 증거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리비아계의 파라오 지배하의 이집트와 북인도의 라지프트의 국가의 경우에는 이들 사회의 의부에 서 온 이방인들의 침입으로 이들 국가의 정치 발달 과정이 다른 방향 으로 발달하였다. 이 시기까지 이집트에서는 봉건제로 발전하는 징후 가 많이 있었다. 인도에서 그 과정은 매우 복잡하며, 그에 관한 사료 도 상당히 희박하고 혼란을 일으키게 하나, 모슬렘과 유럽의 간섭이 없었다면 봉건제가 발생하였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이들 6 가지 경우는 봉건제의 일관성을 입증하기 위해 이 책에서 사 용된 모든 긍정적인 증거둘을 갖고 있다. 이 증거들만으로도 이 책의 서론에서 채택된 어느 정도 정확한 정의롤 정당화시키고 그리고 본 논문에서 그 정의를 위의 모든 사례들에 적용될 수 있는 추상적인 역 사적 개념 ou tli n~ 포료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을 정당화시키기에 충분하 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그 정의를 확인하는 데 사용 될 수 있는 부정적인 증거들도 있다. 이 부정적인 증거는 또한 그 정 의를 확대 적용할 수 있다는` 것도 확인해 주고 있다. 이 부정적인 증 거로 우연히 또 다론 일관성을 얻을 수 있는데, 그 일관성이란 추상 적인 의미에서 봉건적인 발달과 유사하나 봉건제와는 아주 대조적이 며 구체적으로는 실제 인접하고 있는 지역에서의 봉건제의 발달보다 는 선행하거나 또는 동 시대적인 사건이 되풀이되는 과정을 말한다. 이 부정적인 증거는 또한 봉건적인 발달과도 다르며 부정적 증거에 의해 세워진 또 다른 일관성의 발달과도 다른 특수한 사례들을 제시 해 준다. 이러한 경우는 약간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발생한다. 다른 일관성이라는 것은 하나의 대제국이 제국 그 자체와 통치 방 법이 갈은, 둘 또는 그 이상의 상당히 큰 국가로 분열되었다가 다시 제국으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의 발생 과정은 제 5 왕조와 제 12 왕조 사이의 이집트, 후한에서 당까지의 중국 그리고 기원후 약

5 세기에서 비잔틴 제국이 확고히 확립되었을 때인 12 세기에 이르는 동로마 제국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비잔틴 제국이 발흥했던 시기는 서유럽에서 봉건제의 발생 시기보다 앞서거나 같은 시대이다. 중국에 서 당왕조는 일본에서 봉건제가 출현하기 수세기 전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당왕조는 일본 봉건제의 직접적인 선례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 시기와 동 시대이다. 그리고 이집트에서는 봉건제의 선례가 되는 정 치 형태가 이집트의 제 12 왕조 시대에 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하였을 가 능성이 있다. 이집트, 중국 그리고 비잔티움의 역사에서 이들 모]기는 때로는 봉건적이라고 규정되고, 앞에서 이들 시기에 해당하는 이집트 와 비잔틴을 다룬 사례 연구 논문들은 이 문제에 관해 약간의 의문을 남겨 놓고 있으나, 이 시기가 봉건적이 아니라는 것은 이 논문에서 분명히 밝혀질 것이다. 아르사세스와 사산조가 지배하던 시대의 이란-메소포타미아, 후기 비잔티움과 러시아가 특수한 경우로 남아 있는데, 비잔티움과 러시아 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세 경우에서 발생하였던 복잡성은 역 사적으로 발생한 복잡성이라고 해도 좋울 것이다. 이 경우는 복잡한 과거에서 발생한 특별한 영향 때문이었다. 봉건제에 대한 연구를 함 으로써 이들 세 경우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잡을 수 있지만(봉건제의 연구는 이들 세 경우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지만) 이들 세 경우 중 어 느 것도 봉건적이 아니다. 이 세 경우는 서로 유사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들로부터 또 하나의 일관성, 죽 세번째의 일관성을 얻을 수 없다 . 어느 경우도 이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봉건 제의 정의를 확대하거나 또는 축소시킬 만큼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도 의 봉건제의 형태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 책에서 취급하고 있는 12 개의 경우만이 __ 6 개는 봉건적이며, 나머지 6 개는 봉건적이 아님一_역사에서 나타나는 봉건제의 가능한 유형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 12 개의 경우는 봉건제 유형의 대부분을

1) 숫자는 실제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수량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부정적인 요소를 가진 러시아의 경우를 시대에 따라 최소한 두 개 아마 세 개의 경우로까지 분할할 수 있다.

차지하며, 이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아볼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가능 한 다른 봉건적 발달 중에서 네 경우는 주목할 만하다 . 첫번째의 것 은 제 6 왕조때에 이집트에서 초기의 제국이 붕괴한 이후에 이미 언급 한 이집트에 인접한 국가에서 나타난다. 두번째는 인도 유럽족의 침 입 이후에 인도의 갠지스 강 계곡에서 나타난다. 세번째의 것도 역시 인도에서 그리고 인도양을 동쪽으로 가로지른 반도에서 그리고 마우 리다 제국 몰락 후의 동인도 제도에서 나타난다. 네번째의 것은 한 제국 몰락 후에 일본과 한국 이의의 지역에서 나타난다. 한국은 이 책에서 취급되지 않은 봉건 체제를 분명히 가졌다. 그의의 지역에 있 어서는 봉건적인 발달이 있었는지 또는 없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충 분한 자료가 현재로는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들 지역은 이 논문 에서 취급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나일 강 계곡,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인더스 강에서 문명이 발생하였을 때 봉건제가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 황하 유 역에서는 주왕조의 봉건 시기보다는 더 빠른 봉건 시기가 있었을 가 능성도 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이전의 아메리카에서 도 봉건제가 있었다는 가능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구세계의 강유역 에서 문화가 발생하였을 때의 봉건제의 문제는 고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홍미 있고 중요한 과제이다. 이것은 이 책의 결론에서 고려하겠 다.

2 일본과 서유럽의 봉건제의 기원과 초기의 발달 봉건제가 바바리안에게서 기원하였다는 생각은 봉건제의 개념 그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이 생각을 서유럽에 적용시키는 데 있어서 상당한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가끔 비과학적인 동기에서). 그러 나 지배적인 견해는 현재 그 생각이 옳다는 것이다. 어떤 특칭적인 사건과 조건이 봉건제의 기원에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바바리안이 그 기원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견해를 이 논문은 지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건과 조건을 개략적으로 기술하기 전에 바바 리안에 대한 설명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어의 바바로스 barbaros 는 이방인, 비그리스인을 의미한다. 문 제의 민족이 고도로 발달한 문화를 가전 페르시아인이든지 또는 이집 트인이든지 또는 중앙 유럽과 러시아의 유목 사회 출신의 민족이든지 간에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말은 그리스인들이 아주 자주 접하는 민족, 죽 어느 정도는 그리스의 매력적인 문화의 영향을 불가피하게 받은 그리스 국경 지대에 있었던 민족에게 아주 자주 적용되었다. 전 형적인 바바리안은 점차 국경 지방에 사는 사람을 지칭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 국경선은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인 사건이 되었고, 국경 지방에 살고 있던 바바리안들은 전사로서 제국에 봉사할 수 있 었다. 사실상 바바리안들은 로마 제국의 가장 뛰어난 군인이 되었으

며, 전사로서 문명화된 사회에 받아들여졌다• 후에 서유럽의 봉건제의 기원과 발달에 기여하였던 사람들은 바로 이 바바리안들이었으며, 이 들은 국경 지방, 죽 반은 로마적이고 반은 바바리안적인 영웅 시대 heroic a g e 의 세계에서 그들이 기여하였던 것을 배웠다. 그 세계는 그 자체의 아주 특수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특징이 어떤 의미에 있어서도 원시적이 아니라는 것은 언급 해 둘 만하다(차드윅은 말한다). 사회 조직에 있어서 영웅 시대의 괄목 할 만한 특징은 원시 민족 사회를 지배하였던 부족인의 의무와 사상으 로부터의 해방 또는 이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는 데 있다. 원칙적으로 정치 조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영웅 시대의 군주들은 그 부족 또는 그 사회가 그들에게 행사하는 어떠한 공적인 통제로부터 상 당히 해방되었다. 이전에 그 부족에 의해 행사되었던 힘은 이제 그들의 족장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맹세하였던 선별된 추종자들의 집단인 전사 단에게 대체로 이전되었다. 행정에 있어서도 부족 회의 또는 그 공동체 회의도 이제는 전사단의 모임에 지나지 않았다. 이 변화의 결과 전사단 울 소유한 사람은 그의 부족의 통제를 벗어난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고, 한편 전사단의 우두머리 역시 마찬가지로 그의 공동체 내에서 어떤 통 제도 받지 않게 되었다.” 서유럽 봉건 사회의 중심 윤리로 작용하였던 것은 코미타투스, 죽 전사단에서 그 우두머리와 추종자들의 결속이었다. 이 결속은 아주 강력하고 긴밀하며 개인적이었다. 설령 이 결속이 원시적인 것이 아 니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분명히 원시적인 관계의 단순함, 열정, 지속 성을 재현한 것이다. 충성심, 용기 그리고 개인적인 명예가 쇠잔해 가 는 제국에 유입되어, 사회를 결집시키는 새로운 제도로서 역할을 하 1) H. M. Chadwic k , The Heroic Ag e( Eng. : Cambri dg e , 1912), p. 443.

게 되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똑같은 윤리가 다론 봉건 사회에서 유 행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나, 어떤 사회에서는 차드윅이 서 유럽 사회에서 발견하였던 것과 같이 2) 부족과 전사단이 제도적으로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두머리와 추종자들, 죽 주 군과 봉신 사이의 개인적인 충성 관계가 정치 제도로 사용되어, 국가 에 봉사하는 관리들이 통치하는 정치 제도를 대체한 사회는 봉건적인 방향으로 발전해 가는 사회이다. 구국가는 단순히 형체만을 남기게 되고, 그 국가의 관리들이 봉건적인 대귀족으로 전향되었을 때(되었 다면), 봉건적인 정치 형태가 도래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구국가가 얼마만큼이나 적게 그 형체를 남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정 확하게 규정할 수 없다: 그러나 봉건제의 발생에 있어 구국가가 대체되기 전에 많은 일들이 발생하는 것은 틀림없다. 첫째, 구국가는 반드시 약화되어야 하며 그 리고 오랫동안 계속 약화되어 가야 한다. 구국가가 약화되어 가는 초 기 단계에 대귀족(지주, 장군들, 관리, 때로는 부족 또는 씨족의 족장) 이 대두되며, 이들은 지방울 거점으로 국가의 권력을 차지한다. 대귀 족은 반드시 바바리안 전사단의 지도자들의 성격을 갖고 있어야 한 다. 주군과 봉신과의 지속적인 관계가 그들과 그들의 추종자들 사이 에도 반드시 확립되어야 한다. 한 개인적인 관계가 다른 종류의 관계 로 대체되는 것은 첫째 부족장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부족장들은 이러한 성격돌을 쉽게 획득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사회가 전적으로 부 족만으로 구성된 곳에서는, 부족적인 관계에서 전사단의 관계로, 그 다음에 봉건적인 관계로의 전환은 내전과 구국가가 분열되는 경우 이 의에는 계속적이며, 순조롭다. 귀족의 대부분이 구관료 국가의 관리들 이거나 또는 그러한 국가의 대귀족 또는 군인들이었던 곳에서는, 차 드윅이 말하고 있는 부족 조직을 버리고 이미 전사단으로 결속된 바 2) 영웅 시대의 그리스 사회에 대해서는 호머에 의해 기록됨.

바리안들이 그 사회의 의부에서 침략자로서 들어와서 바바리안의 귀 족과 문명화된 귀족과의 결합이 일어나게 된다. 그 이후로 봉건적인 상태로 발전되는 사회에서는 바바리안적인 형태가 지배적인 형태가 된다. 한 사회에서 정치 개혁자들이 사회의 고위충에 나타나게 되는 개인 적인 봉신 관계의 도움을 받아 관료 체제 내에서의 느슨한 관계를 강 화하거나 또는 이를 대체함으로써, 해체되어 가는 국가를· 다시 정상 으로 회복시키려고 노력할 때, 그 사회의 지도력이 위에서 언급한 방 식으로 변화하는 시기가 다가울지도 모른다. 이러한 · 유의 변화가 발 생하는 곳마다, 이 변화는 아주 두드러진 개혁이 된다. 이 책에서 연 구된 모든 경우의 봉건제에서, 이런 변화가 발생하였으며, 필자는 이 런 변화를 봉건제의 발달에 있어서 원봉건 단계p ro t o- fe udal 시대라 부른다. 원봉건 시대에 도달한 사회가 반드시 완전히 성숙된 봉건제 로 발달해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다만 완전히 발달 한 봉건제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필지는· 생각한다. 원봉건 시대 다음에, 초기 봉건 단계가 도래하는데, 이 초기 봉건 단계는 스트레이어의 서유럽 사회의 서술에서 아주 잘 나타나 있다 .3) 원봉건 시대에서 초기 봉건 시대로 전환되어 가는 시기는 아마 봉건 제의 전 발달 과정에서 가장 무질서하고 격렬한 시기일 것이다. 이 무질서와 격렬함은 그 강도가 급작스럽게 줄어들기는 하지만 초기 봉 건 단계의 l 내지 2 세기 동안 지속된다. 그러나 이 시기의 상황 또는 그 이전의 변화를 무정부 상태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장된 것이다. 이 책의 서론에서 무정부 상태가 봉건제의 일반적인 특칭이라는 원리 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여기에서 그 원리는 부정될 것이고, 전쟁 과 정치 제도의 기능이 결여된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로 3) 위 pp. 50-51.

그리고 언제 실제로 봉건 제도의 일부가 되는지를 우리가 이제 보여 줄 것이다. 필자는 전정한 무정부 상태는 봉건제의 형성을 방해한다 고 생각한다? 기본적이며, 규모가 작고, 강력한 봉토 (elemen t al, small, str o ng fief ) 의 출현은 초기 봉건 단계의 출현을 알리는 것인데, 이 봉토는 영주 의 개인적인 가신과 더불어 한 봉건 영주에 의해 지배되는 아주 강력 한 작은 정치 단위이며, 이 봉토에는 봉건 영주, 그의 가신들 re t a i n­ ers, 그 봉토에 산재해 있는 그 봉건 영주의 다른 봉신들, 소수의 배 신 rear - vassals 5 l 그리고 토지에 예속되고 비천한 일을 하는p raed i al and menia l 예속인이 거주하고 있다.

4) 이러한 가능성을 알려주는 사례는 아래 pp. 334-335, 441- 4 44, 46 . 6-467 를 참조. 5) 봉토 발생의 아주 초기 형성 단계부터 아마 어떤 계서제적 인 발달이 있었 울 것이다. 왜냐하면 봉건제는 그 본질상 세력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의 상호 지원을 위한 일련의 조치이기 때문이다. 분봉에 의한 계급을 7 등급으 로 나눈 서유럽식의 계서제(법적으로 인정되었으며, 그 이상은 인정하지 않 았다)는 후에 발달한 것임에 틀립이 없다. 필자는 이러한 발달이 서유럽이 아닌 다른 사회에서 널리 발생하였거나 또는 실제 일어났다고 하는 것에는 희의적이다.

이 〈 기본적이고 , 강력한 봉토 〉 는 원봉건 체제가 붕괴하고 전정한 봉건 체제가 시작되면서 나타나는 무질서한 상태에서 특칭적으로 나 타나는 산물이다. 이 무질서는 기본적이고 강력한 봉토의 생성을 위 한 대가이다. 아마 이 무질서는 봉토를 생성시키는 데 필요한 여건이 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아마 이것은 봉건제는 본질적 으로 격렬하고 무정부적이라고 주장되는 주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봉건제가 후기 단계의 대부분의 시기에 있어서 훨씬더 정연한 제도였 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기본적이고 강력한 봉토는 찰 통치 되었으며, 봉토 내의 성원의 실질적인 동의와 협조를 받아 통치되기 도 하였기 때문에 이 봉토는 내적으로는 평화로운 지역이며, 무정부

상태와는 거리가 먼 안정된 조그만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인, 강력한 봉토 〉 는 적자 생존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사회의 전화에 있어 아주 드물계 나타나는, 다윈주의의 진정한 한 예 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 기본적인, 강력한 봉토 〉 는 또 다론 유명한 원리, 죽 섬너 Sumner 가 주장하고 있는 내집단i n - g rou pe,?:- 모든 의집 단 ou t - g rou p을 적대한다는 원리를 예증한다는 것을 역사가들은 지금 까지 감지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섬너가 설명하고 있듯이 초기 봉 건 사회는 사실상 원시 사회와 아주 흡사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섬너의 주장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원시 사회의 개념은 한 지역에 산재해 있는 소그룹에 대한 개념이다 . …… 이 들 그룹 중의 한 그룹은 상호간에 어떤 관계를 가졌을 것이다(친족, 이웃, 동맹, 결혼과 교역). 이러한 관계는 이들 그룹을 서로 결합하고, 타그룹과 구분을 짓게 한다. 그리하여 갇 은 편에 속하는 내집단과 다른 편에 속하는 의집단 사이에 구분이 발 생한다. 같은 편에 속하는 사람들은 상호간에 평화, 질서, 법, 통치 그 리고 산업적 관계에 놓여 있다. 모든 의부인, 죽 다른 편에 속해 있는 사람과의 관계는 협정을 체결하지 않는 이상 전쟁과 약탈의 관계에 놓 이게 된다. 같은 편 내의 동지적, 평화적 관계와 다른 편에 대한 적대적 전쟁 관 계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외부인과의 전쟁의 위급함 때문에, 내부적 불화가 조정되어 같은 편 내에서의 평화가 조성된다. 이러한 위급함은 내부 전쟁을 방지하고, 규율을 강제하기 위하여 같은 편 내에 정부와 법을 만든다. 그리하여 전쟁과 평화는 하나는 그룹 내부에서, 다른 하 나는 그룹간에, 상호 반웅을 일으켜 상호 발달을 하게 하였다. 이웃간 의 관계가 깊을수록, 그 관계가 강할수록 전쟁은 더욱 격렬해지며, 각 개의 내부 조직과 규율이 더욱 강화된다. 그리고 이에 상웅하는 감정이

발생한다. 그룹에 대한 충성심, 그룹을 위한 희생, 의부인에 대한 증오 와 경멸심, 내적으로는 형제애, 의적으로는 호전성 등이 발생하며, 이는 동일한 상황의 공통된 산물이다. 이러한 관계와 감정이 사회 철학을 형 성한다 . 6 ) 이것은 서로 대립하고, 그 대립 과정에서 점점더 강력한 소집단으 로 굳어져가는 봉토를 가진, 특히 봉건제 발달의 초기 단계에 있는 봉건 사회에 대한 놀라우리만치 정확한 설명이다. 그러면 봉건 사회 는 원시적 사회인가? 우리가 차드윅의 견해롤 상기할 때까지 이 문제 에 대한 답은 긍정적이다. 원시적 사회는 영웅 시대에 붕괴되었다. 만 약 그 시대의 주역들이었으며, 봉건제의 발생시의 주요 인물들이었던 바바리안들이 원시인들이 아니었다면, 왜 그들이 형성한 봉건 사회가 거의 원시적으로 보일 수 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인류학자와 사회학 자들의 주장을 원용한다면,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쉽게 대답할 수 있고, 문명 사회의 발생시에 봉건제가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유용한 지침을 발견할 수 있다. 레드필드 Red fi eld 와 되니스 Tonn i es 는 이 목적을 위하여 두 개의 가 장 유용한 분석적인 구분을 제시하였고, 뒤르켐 Durkhe i m 은 적용할 수 있는 중요한 원리를 제시하였다. 레드필드는 사회를 문명 사회와 원시 사회의 두 종류의 사회로 구분하지 않고, 그 대신에 민속 사회 folk so ci e ty와 도시 사회 urban soc i e ty로 구분하였다 . 7) 이 새로운 구분 은 첫째, 추상화를 가능케 하고, 순전히 민속적인 특칭으로 구성된 사 회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그러나 레드필드는 다시 사실 로 돌아와서, 실제 사회는 민속적, 도시적인 특칭이 결합된 사회이며, 6) W. G. Sumner, Folkways , 3rd edn.( B osto n , 1940), pp. 12- 1 3. 7) Robert Redfi eld , The Folk Socie t y , Americ a n Jo urnal of Soc iol og y, UI (19 47), 293-3 08.

그러한 결합이 다양하게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 8) 그래서 봉건 사회는 아마 민속 사회와 도시 사회, 즉 원시적인 특징과 문명 적인 특징이 결합된 사회의 한 형태일 것이다 ― ― 필자는 아래에서 곧 나타날 이유 때문에 원시적, 문명적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한다. 이것은 기본적인 것같이 보이는데, 실제도 그렇다• 그러나 봉건 사 회가 그 두 요소의 결합이라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봉건적 결합이라 는 특수한 형태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역사가들은- 제시된 결합이 어 떻게 기본적이 아닌 것으로 존재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다. 되니스의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 사이의 구분은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봉토는 그 형성기에 있어서 어떤 목적, 죽 상호 방어를 위해 의식적으로 형성된 하나의 결합체임에 틀림없 다. 이러한 경우는 원시 사회에서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히 이들 조직은 원시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드물었다. 이들 조직은 대 개는 원시인들이 공동 목적을 위하여 서로 다른 원시 사회들간에 만 들어진 임시 방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다수의 원시 사회에 기반을 둔 원초적인 상부 구조를 만들지 모른다. 분명히 게젤샤프트적인 형 태의 집합체는 봉건 사회처럼 원시적인 사회의 기반이 아니다. 다시 레드필드는 민속 사회에서의 관계는 계약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 민속 사회에서의 관계는 묵시적이고 전통적이다 .10 ) 그러나 봉건 사 회의 관계는 엄밀하게 말한다면 계약적이다. 그러므로 봉건 사회는 원시 사회가 아니다• 그러나 봉건 사회는 원시 사회와 많은 공통된 특징을 분명히 나누 어 갖고 있다. 두 사회 모두 제각기 내집단과 의집단의 관계에 의해 8) pp. 306- 3 08. 9) Ferdin a nd Tonn ies , Gesellscha ft und Gemein s haft (T heorem der Kultu r- philo sop hie) : Entw urft von 1880/81, Sozio l og isc he Stu d ie n und Krit ike n, I (Jen a 1925), I -3 3. 10) p. 3 00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신 상태도 유사하다• 레드필드는 사실 민속 사회의 사람들은 중세인들과 마찬가지로 인과 법칙에 의해 서가 아니라 행위를 구체화한 상징의 결합들에 associa t i on of sym b ols 의해서 생각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11 ) 봉건 사회의 행위는 충동적이며 무비판적이다• 그 행위는 상당히 규정화되어 있다 . 배저트가 말하는 〈 관습의 응고화 cake of cus t om 〉 1 2) 가 봉건 사회에 쉽게 자리잡게 된 다.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봉건 사회의 힘은 무력에 의해 강제 된 기강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공동의 인식에 의해 좌우된다 .13 ) 원래의 게젤샤프트는 게마인샤프트로 전환되는 경향 을 갖고 있는데 게마인샤프트라 함은 사물의 성격과 같이 사람들이 출생이나 환경에 의해 가담하는 사회를 말하고, 사람들은 그 사회의 목적을 생각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14) 봉건 사회는 어떤 이론에 의해 11 ) p. 305. 〈 상징의 결합 〉 이리는 표현은 레드필드가 쓴 용어가 아니라 필자가 쓴 표현이다 . 레드필드는 레비 - 브륄 Lev y -B rii hl 을 인용하고 있으며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갇다. 원시인들뿐만 아니라 중세인들도 인과 관계에 익숙 해지면 인과 법칙이 아니라 〈 상칭의 결합 〉 , 죽 행위를 구체화한 상칭에 의해 서 생각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날 과학에서 인과 관계가 무용 지물이거나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일부학자들이 있다. 아래 10 장 주 26) 을 참조. 민속 사회에서 사람들은 〈 상칭의 결합 〉 이라는 관점에서 생각 하며 중세 시대에도 사람들은 같은 습관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 12) Walte r Bag eh ot, Phys ic s and Politi cs; or, Thoug ht s on the Ap pli ca ti on of the Prin c ip le s of uNatu r al Selecti on and uInherita n ce to Politi ca l Socie t y (New York, 1875), P. 25 and pas sim . 이 주제에 대해 베저트가 언급한 것 은시사하는바가많다 . 13) Redfi el d, p. 129. 이 문장에서 필자는 민속 사회에 대한 레드필드의 말을 차용하였고, 말을 약간 바꾸어 의미를 수정하여 봉건 사회에 맞도록 하였다 . 그의 말은 다음과 같다. 〈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민속 사회 의 힘은 무력으로 강제된 기강이나 단순한 행동 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 라 삶의 제체를 보완하는 모든 행동 원리에 충실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 .〉 14) 어떤 게젤샤프트에서도 이런 경향이 일어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어떤 게젤샤프트에서는 다론 게젤샤프트보다도 강하다 . 봉건 사회에서는 이 경향이 아주 강하다.

만들어전 것은 아니고, 그저 발생된 것이다. 원시 사회도 마찬가지이 나, 원시 사회는 인간의 힘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간 의 힘에 의해 만들어전 봉건 사회와는 차이가 있다. 뒤르켐은, 한 사회의 여러 발달 단계에서 작용하는 원리로서 분업 div isio n of laborOl 그 사회가 거쳐갈 변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를 보여주고 있다 .IS) 봉건 사회에서는 원시 사회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하나의 분명한 분업이 있었다 .16) 그것은 전사와 농민, 즉 정치를 행하는 사람과 경제를 말고 있는 사람, 서유럽에서는 귀족과 일반인 사이의 구분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구분의 근원을 찾는다면, 우리 들은 봉건 사회가 원시적인 특성과 문명화된 특성의 철충 형태를 취 하게 된 역사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차드윅이 연구하였던 특수한 사회에서는 거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는 원시 사회의 특성을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전사는 바바리안 이며, 농민은 전사의 지배를 받게 되는 문명화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만약 원시 상태가 급작스럽게 변하지 않는 지역을 연구한다면 농민과 바바리안 출신의 전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지역 들은 일본, 로마 제국의 영토 안에 있지 않았으며 봉건제가 프랑스에 서 생성된 이후 서서히 도입된 중앙 유럽과 북유럽 그리고 주나라 시 대의 중국의 대부분 혹은 주나라 전역과 그의의 지역(만약 우리가 충 분히 중국과 여타의 지역에 대해서 확실히 알고 있다면)이 될 것이다. 이러한 유럽과 일본 지역에 대한 역사는 아래에서 취급될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이들 역사에 대해 알려진 몇 가지를 미리 언급해 두겠 다. 일본의 경우에서는 봉건 관계가 아주 점진적으로 친족 관계를 대신하였다는 것, 무사는 점진적으로 농민과 구분되었다는 것, 무사와 15) Emi le Durkheim , De la div i s ioo n du tra vail soc ial (Pari s, 1983), pp. 50-7 2. 16) 레드필드는 민속 사회에서는 노동의 구분이 그리 많지 않다고 주장한다. p. 297.

농민 사이의 분업이 전개되었다는 것 등은 분명하다 .1 7) 차드윅이 주장 하는 것처럼 어디에서든지 원시 사회 관계의 주된 실체가 되는 친족 관계는 주군과 봉신이리는· 봉건 관계로 대체된다. 처음에는 새로운 형태의 관계와 옛날 형태의 관계가 나란히 존재한다. 한 개인은 토지 를 가진 귀족의 사촌임과 동시에 그의 봉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점 차적으로 사촌 관계는 그 중요성을 상실하면서, 구원시적인 관계는 퇴색하고, 단지 봉건적인 형태의 관계만 남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 한 변화가 완전히 끝난 뒤에도 새로운 봉건 형태가 구원시적인 형태 를 닮았다고 해서 놀랄 필요가 없다. 정신적인 습관과 생활의 습관은 이러한 변화 특히 점전적인 변화보다는 더 오래 지속된다. 혈족 관계 룰 가전 게마인샤프트는 장기적이고 광범위한 일련의 의식적이고 의 도적인 협정에 의해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그 변화가 일어났을 때, 특히 그 변화의 목적인 어떤 정치적인 안정을 회복하였을 때 ,18) 전 사회가 게마인샤프트적인 성격을 꽤 많이 보유하게 되는 것은 당 연한 일이다.

17) 일본의 전환기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러한 사실들은 아주 명백하다. 아래 pp. 298- 3 02 를 참조. 18) 봉건 사회가 이룩한 안정성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안정성 은 원시 사회보다는 못하다. 그러나 이들 두 사회 모두 전체적으로 보면 안 정되지 못하였다. 안정을 보인 곳은 씨족 또는 부족 내부의 지역이었으며, 기본적인 봉토 내에서도 안정을 유지하였다. 아래 본문을 참조 .

문명 사회가 발달하는 데 있어서 봉건제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설명은 아직 완전하지 못하나, 우리는 혈족 관계를 대신한 다른 어떤 관계의 중요성 에 잠시 주목해 야 한다. 타일러 Ty lo r, 바코팬 Bachofa n, 모간 Mor g an 과 그의의 이들 시대의 학자들은 사회의 전화는 가족 관 계에서 시작하여 그 관계가 씨족, 종족, 부족 동의 관계로 확대(이들 관계는 모두 혈족 관계를 형성함)되는 것으로 보았다. 사실상 역사에 서는 이들 학지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친족 관계가 확장되고 팽창된

예가 많이 있다 .19) 그러나 혈족 관계의 확장만으로는 인간 사회의 전 진화 과정을 설명하지 못한다. 만약 그것이 잘 알려져 있다 하더라도, 인류학자들이 혈족 관계로부터 벗어나는 명백하고 잘 규정된 변화의 과정을 알아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게마인샤프트 - 게젤샤프트적인 구분은 중요한 이론적인 개념이다. 게마인샤프트는 오로지 혈족 관계 로만 구성될 수 있다. 그것은 혈족 관계를 초월하여 혈족 관계 의의 다른 관계를 포함할 수 있는데, 이 다른 관계는 아주 자연스러우며, 인위적으로 인간이 만든 것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봉건 적 계약 행위는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의 이론적 구분을 현시하 는 것 이의에, 그 구분이 생길 수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제시하고 있 다. 필자는 다른 그러한 역사적인 사건들이 있었거나 아니면 원시 사 회에서 문명화된 사회로 발전하는 모든 사건들은 봉건적인 관계 또는 그와 아주 유사한 관계를 설정하였다고 제안한다. 무엇이 사실이든간 에, 필자는 이 논문에서 사용된 의미의 문명은 혈족 관계에서 나온 정치적인 측면의 기반이 아니라 혈족 관계에서 탈피한 정치적인 측면 의 기반 위에 건설되었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 논문의 핵심과 연관된 문제가 아니며, 결론에서 간단하게 다시 언급하겠다한 한편 혈족 관계에서 탈피하여 봉건 관계 로 전환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변화였다고 한다면, 지금까지 고려되 지 않았던 봉건 사회의 발달과 원시 사회의 발달 사이의 커다란 차이 가 설명될 수 있다. 봉건 사회 이의의 모든 종류의 문명 사회에까지 확대되는 일반적인 차이는 광범위한 〈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인데, 원 칙상 그 관계는 혈족에게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으로 가능하며, 그리 고 그 보편성은 잠정적인 성격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회 발달에 중요 19) 키에프-누1:1 T 己= 러시아에서 리우리크Ri u ri k 의 후예들인 제후들의 관계 는 아주 좋은 예이다. 아래 pp. 503-504. 508-5 09 를 보라. 20) pp. 538ff .

한 요소이다. 그리하여 개인들 사이의 관계의 변화는 문명 사회에서 기대될 수 있는 일이며, 원시 사회에 있어서보다는 더 자주 그리고 더 급속하게 변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족 또는 부족을 역사적으로 계승한 기본적인 봉토는 원시 사회가 갖고 있던 모든 결속력과 지구력을 상실하지 않 는다. 원시 사회의 특성은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으며 수천 년 아니 수만 년 동안 그 특성이 감지될 수 있다. 아마 기본적인 봉토는 그렇 게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시 사회처럼, 내집단과 의집단의 두 쟁의 결과로 나타난 기본적인 봉토는 분명히 그러한 강인함을 갖고 있다. 하나의 연합체로서 그것은 문명 사회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많 은 변화를 견디어냈다. 유럽, 일본 그리고 이집트에서 우리는 그러한 중요한 예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속성 때문에 그 기본적 인 봉토는 변화를 동반하였다. 기본적인 봉토는 하나의 지리적 위치 그리고 항상 뚜렷한 지방 문화와 연합체로서 그 개별성을 유지하기는 하지만, 그 기본적인 봉토의 본질은 그의 봉건적인 특질을 상실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규모가 더 큰 국가의 행정 구조 속에서 하나의 단위 가된다. 그 변화하려는 성향에서, 즉 기본적인 봉토의 특질이 변화하려는 성향과 그 상부 구조가 대변화를 하려는 성향에서 봉건 사회는 성장 하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힘은 그의 문명화된 과거에서 (만약 그것이 문명화된 과거를 가졌더라면 그리고 실재로 가졌던 곳에 서) 시작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21) 아마 그러한 힘의 일부는 과거의 제 국을 회복시키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유래하는데, 그 과거의 제국이란 우리가 앞으로 보겠지만 봉건 사회에서는 소위 필자가 말하는 유령 제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해 항상 입증된다. 분명히 그 힘의 대부 분은 종교적인 영향에 근거하고 있다. 정치적인 성장의 시작은 문명 21) 앞의 주를 보라.

화된 과거의 잔존물로서 기본적인 봉토 자체 내에 아마도 항상 내재 해 있다. 봉건 사회는 사실상 어느 면에서도 원시 사회는 아니다. 봉건 사회 는 원시 사회처럼 성장하지 않는다. 봉건 사회는 노동의 분업이 이루 어지고 있다. 그것은 계약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것은 혈족 관계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원시이고 문명적인, 즉 민속적이고 도시 적인 특성의 조합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도시적이라는 용어를 봉건제에 적용하는 것은 아주 잘못이다. 레드필드 식으로 민속적이라 는 용어를 사용하면 그 용어는 원시 사회가 다론 어떤 사회로 발전하 는 중요한 역사적 변화를 아주 애매모호하게 만든다. 문명화된 것들 중에서 어떤 것은 원시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문명화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상 원시 사회와 봉건 사회와의 차이룰 암시하는 역사적 증거가 있다. 그것은 필자가 알고 있는 한, 몰락하고 있는 문명화된 사회는 결코 원시 상태로 전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몰락하고 있는 문명화된 사회는 더 일찍이는 아니더라도 항상 봉건 단계에서 몰락 과정을 멈추며, 이 단계에서 회복을- 한다. 봉건 사회와 원시 사회 사이에는 넘어 올라갈 수는 있으나 넘어 내려갈 수는 없는 또는 조금이라도 넘어 내려간 적이 없었던 어떤 장벽이 항상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한 몰락 후 새로이 형성된 봉건 사회는 〈문명화된ci v ili zed 〉이 라는 용어를 적용할 수 있는 사회 등급의 최하위에 속한다. 봉건 사 회는 그 초기 단계에 있어서는 비정치적인 것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 라 생존의 필요성에 의해 추구된 기본적이고 아주 단순한 관계에서 새롭게 시작된 것이다. 기본적인 봉토라는 것은 이러한 단순한 관계 의 특수한 형태이다. 그것은 특수한 내집단의 봉건적인 형태이며, 봉 건 사회에서는 이웃 국가들이 가까이 있고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적 어도 원시적인 내집단이 갖고 있던 강인성을__아마도 그들 대부분

보다 더욱 굳건한 강인성을 一 -갖고 있다. 기본적인 봉토는 바로 봉 건제의 가장 특징적인 그리고 가장 가치 있는 부산물이었다. 만약 봉 건제가 정치의 온상이라고 한다면, 정치의 교훈을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곳은 기본적인 봉토 내에서이다. 그 봉토는 국민 국가 na ti on7} 출현할 때까지 사회의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제도로 남아 있었고, 봉토에서 국민 국가로 발전하는 데 복잡한 변화가 일어났으며, 이 변 화는 원봉건 정체(政體)에서 봉건 정체로 변화한 뒤에 발생한 두번째 로 중요한 변화이다. 우리가 봉건제라고 입증한 두 경우의 명백한 차이점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지리적인 차이이다. 서유럽에서는 바바리안들이 구제국 으로 이동하였다. 일본에서는 제국이 바바리안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 두 경우에 있어서 기본 과정은 같다. 우리는 봉건제가 반 드시 바바리안과, 몰락해 가는 제국이 접촉함으로써 발생한다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 어디에서 또는 어떻게 그 접촉이 일어났는지 또는 바 바리안과 제국 중 어느 것이 이런 접촉을 유발하도록 이동을 먼저하 였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것 갇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실을 어느 정도 단순화하는 것이다. 그 두 제국이 해체되기 시작하기 전인, 그 접촉 과정의 초기 단계에 로마 제국은 확장되고, 그 제국의 국경선이 의부로 확장되어 듀턴족 과 그의의 이민족과 접하게 되었다. 중국의 한(漢)제국은 실제로 확 장되었다기보다는 개념적으로 확장되었다. 죽 한제국이 실제로 국경 선을 일본에까지 확장한 것이 아니라 개념상 국경선을 일본에까지 확 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일본 제국은 원래의 중국 제국의 연장이 아니라, 중국 제국의 영상(映像, re fl ec ti on) 에 지나지 않는다. 초기 일본 제국은 항상 원래의 중국 제국의 희미한 영상이었고, 일본 제국을 수립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빨리 일본 제국이 해체되는 것을 막는 데 힘이 되었는가를 말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마치 로마

제국이 붕괴되기 시작하였을 때 로마 제국의 투쟁이 게르만족의 부족 조직룰 붕괴시킨 것처럼 일본의 투쟁은 일본의 씨족을 붕괴시켰다. 그리하여 일본의 씨족인들 clansmen 과 게르만의 부족인들t r i besmen 은 똑같은 이유 때문에 이 책에서 사용하는 의미의 바바리안으로 취급된 다. 이 지점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로마의 국경선이 사라졌을 때 국경 부근 언저리에서는 전사단 war-band 의 발달이 급속하다기보다는 차 라리 필사적이었고, 이 전사단은 로마 제국 내 말하자면 엘도라도로 이동하는 전초가 되었다. 하지만 이미 살펴본 바와 갈이 원시 사회의 부족 제도가 국경 지역의 동쪽, 죽 독일, 중앙 유럽의 다른 지역 그리 고 북유럽에서는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일본에서 국경 지역이라는 것은 연약한 일본 제국이 지배하려 하였던 전 지역을 말한다. 그 지 역은 초기 제국의 수도였던 나라와 교토에서부터 시작하여 일본의 중 심 섬인 혼슈(本州)의 서쪽 1/3 을 그리고 혼슈의 남쪽과 서쪽에 있는 큐슈섭과 시코쿠섬을 포함한다. 일본 씨족들은 이동하지 않았다. 그리 하여 그들의 씨족 조직은 잔존하였고, 서서히 봉건 조직으로 전환되 어 갔다. 그리하여 일본에서의 봉건 사회는 동일한 지역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그 반면에 유럽에서 봉건 사회는 구제국의 특정한 지역, 죽 침입해 온 바바리안이 아주 강력한 거점을 만든 북프랑스에 그 근 원을두고 있다. 중복부 유럽의 대다수의 민족들, 게르만족과 다론 부족들은 일본처 럼 오랫동안 그들의 부족 제도를 유지하였고, 또한 일본에서처럼 제 국이 그들과 접촉하고, 제국의 제도를 그들에게 강제하여 그들의 부 족적인 관계를 파괴하고, 봉건적인 관계를 발생시켰다. 중앙 유럽에 세워진 제국은 샤를마뉴의 제국이었고, 이 제국은 일본에 영향을 끼 친 중국 제국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그 차이는 중앙 유럽인의 봉 건화와 일본인의 봉건화를 비교하는 것을 무의미하게 할 만큼 크지는

않다 . 2 2)

22) 중앙 유럽의 민족이 경험했던 것과 거의 유사한 경험을 한 일본의 부족은 일본의 북동 지역에서 살았던 부족이며, 일본 제국이 극십하게 붕괴될 때까 지 제국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아래 p. 308 를 참조.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봉건화된 사례와 봉건화가 가능하였 던 사례들 중에서, 바바리안에 의해 유린당하여 하나의 제국에 복속· 하게 되었던 것보다는 원주지에서 봉건화되고 그들의 부족과 씨족이 사실상의 준원시 상태에서 봉건 상태로 전환되었던 민족이 아마 더 많을 것이다. 중국의 주에서는 아마 대다수가 원주지에서 씨족 관계 에서 봉건 관계로 전환되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우리가 살펴본 바 와 같이, 모두가 원주지에서 씨족 관계에서 봉건 관계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아주 극소수만이 그런 식으로 전환되었다. 함무라 비 왕 이후의 메소포타미아에서만 거의 모든 민족이 제국의 신민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 중의 상당수는 일시적으로 복속되었으며, 이 지 역의 바바리안의 침입 규모는 대규모적이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바바리 안의 침입자들에 의해 유린당하였던 사회들 중 봉건화되었던 것보다는 봉건화되지 않았던 사회가 더 많았다는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23)

23) 초기 비잔턴은 바바리안에게 유린당하였다. 제 5 왕조와 제 12 왕조 사이의 이 집트와 한과 당 사이의 중국은 침입을 당하였으나, 유린당하지 않았다. 이들 중의 어느 곳도 봉건화되지 않았다. 리비아 왕조하의 이집트는 바바리안에 의해 보다 철저히 유린당하였으며 봉건화되는 갖가지 칭후가 있었다.

이것이, 대체로 봉건제의 전형적인 사례로서 일본의 사례가 유럽의 사례보다도 더 적합하다고 하는 이유일 것이다. 봉건화 현상은 원주 지에 남아 있던 부족에게는 일반적이며, 의부로부터 바바리안에 의해 침입을 받은 사회에서는 덜 일반적이었다는 사실은 봉건화에 있어 바 바리안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한 제국의 문 명화된 신민으로부터가 아니라 부족인으로부터 바바리안이 생성되는 것이 훨씬 용이하다• 그리하여 변화를 일으킬 만한 필요한 정치적인 상황하에서는, 이전의 부족적인 성격을 가전 민족 사이에서 봉건제가

쉽게 발생할 것이다.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만약 봉건제가 발생한다 해도, 봉건제는 침입하는 바바리안이 집중된 지역에서 혹은 그들이 정치적으로 특히 중요하게 된 곳에서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물론 그 것만이 유일한 동인이 아니다. 아래 5 장에서 연구될 주제인 24) 문명화 된 사회의 해체의 정도와 관계되는 다른 요인이 있다. 서유럽의 역사에서 전사단과 봉건 관계의 형성은 별개의 것이며 연 속성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필자 생각으로는 이 주장은 언 제나 하찮은 주장이었으며, 아마 지금 이 주장에 관심을 기울이는 학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 2 5) 간단하게 이 주장의 장점이리는· 무 분 뜰 을 고려하겠으나, 그 주장이 시사하는 일반적인 가능성을 알기 위해 일 본에서 일어난 유사한 변화롤 먼저 검토하겠다.

24) pp. 298- 3 02. 25) 그것은 1~ 빈 전에 칼 스티븐에 의해 주의깊게 연구되었다 .(The Orig in and Sig nifica nce of Feudali sm , Americ a n Hi st o ric a l Revie w , XLVI, (19 41, 788 一 812)

초기 일본 제국의 실패에 재정 문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갇 다. 제국의 조직이 커지면서, 경비가 더 많이 들게 되고 세금이 늘어 났다. 이것은 토지에 대한 면세권을 획득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때로는 이 권한을 획득하였던 소농민에게 타격을 가하였다. 주로 이 과정을 통하여 대체로 조세를 내지 않는 토지, 죽 쇼(庄)가 발달하였다. 그러 나 돈이 부족한 제국은 평화를 유지할 수 없었으며, 보호를 필요로 하는 쇼의 소유자는 그 자신의 씨족에 속하든 아니든 간에 가장 가까 운 아웃의 강력한 자에게 의존하려고 하였다. 일본에서 대씨족의 우 두머리들은 상당한 기간 동안 막강한 세력을 가전 인물로 남아 있었 고 T 대다수의 사람들은 직접 그들에게 탁신(託身)하였다. 소토지 소유 자들이 탁신하였던 보다 세력이 약한 자들은, 마침내 씨족의 우두머 리에게 직 • 간접적으로 종속되었다. 10 세기에는 사회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씨족의 우두머리들은 그들의 군사적 기능의 중요성이 증대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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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11 세기에는 씨족 구조가 여전히 남아 있 긴 하였지만, 단순히 그런 구조를 유지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씨족의 구성원이 아닌 사람들이 그 씨족의 우두머리와 그 씨족원 중의 유력 자들에게 자신들을 많이 탁신하였기 때문이다. 원봉건 시대인 13 세기 에는 씨족의 개념과 실제 씨족의 잔재가 남아 있었기는 하였으나 그 개념은 그 당시에는 거의 허구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진정한 봉건제 가 출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강한 씨족적인 것이 여전히 잔존해 있었 다. 효과적인 보호를 위해서 씨족당(氏族黨, clan-cl iq ue) 의 우두머리는 전사단 com it a t us 울 형성하였다. 여기서 전사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나 불행하게도 그것에 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 지지 않고 있다. 처음부터 개인적으로 그 우두머리에게 예속된 핵심 적 인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다케코시 Takekos hi는 그러한 핵심적 인 조직이 있었다고 생각하며, 그 구성원들은 모든 다른 전사들과 같 이 이전에는 농민이었다고 주장한다안 필자도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 각한다. 그러나 씨족, 죽 해체되어 가는 씨족의 일부는 소행정가 계층 을 형성하였을지 모르며, 전사단의 새로운 구성원들은 주로 이 계층 에서 뽑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행정가 계층이 이 변화에 개입이 되었든지 또는 안 되었든지 간에, 전사단은 씨족의 전사단에서 직접 발달하였으며, 아마 처음에는 출신 성분이 무엇이든지간에 새로운 구 성원이 구전사단에 첨가됨으로써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필자는 분명히 생각한다. 전사단은 더 많이 싸워야 했으므로, 그 우두머리는 신 • 구 의 구성원을 지원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지원은 일본의 특수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 우두머리는 그에게 탁신을 한 토지 소유자 둘로부터 시키(職 : 그들의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의 일부, 주로 쌀)를 26) Yosoburo Takekosh~ The Economi c Asp e cts of the His t o r y of the Civ - iliza tio n of Jap a n, I (London, 1930), 127-1 28.

받았다. 그는 그의 집에 기숙하고 있는 전사와 그 자신을 부양하고 그리고 그들을 무장시키기 위해 이 수입을 사용하였다. 전사단 구성 원의 출신이 어떠하였든지간에, 그들은 점차 생계의 지원을 받는 가 신으로 전락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며, 필자는 그 전환을 씨족 제도에 서 봉건 제도로 전환하는 내적인 제도 변화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전 사단의 우두머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군대는 이러한 가신들뿐만이 아니다. 새로운 군사 제도가 전면적으로 시행되고 있었을 때인 12 세 기에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다스리는 지역에 살고 있고 그들의 우두머 리가 필요로 할 때 소환을 하면 봉사에 응하는 사람들도 그 우두머리 의 군인이 되었다• 그들은 반드시 그들의 우두머리(영주?)에게 자신 들을 탁신한 토지 소유자들은 아니나, 중요한 농민이거나 아니면 위 에서 언급한 그런 종류의 행정가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간헐적인 군사적인 봉사의 대가로 그리고 만약 그들이 이전에는 행정적인 의무 롤 수행하지 않았다면 지금 그들이 행하고 있는 행정적인 의무의 대 가로서 시키(여기서의 시키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받는 시키와 다름)를 받았다 .27)

27) 라이샤워(위, p. 67-68) 는 이 당시의 대부분의 전사는 지방의 시키 보유자 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가신들이 주요한 전사가 되었고, 그들의 수는 점차 증가하였 다. 그들은 특수한 계급, 죽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전 사무라이 계층을 형성하였다. 이 사무라이들의 그들의 우두머리에 대한 예속은 모든 면에서 튜턴족의 바바리안의 그둘의 전사단의 우두머리 war - leader 에 대한 예속에 상응하는 것이며, 이 예속의 윤리는 튜턴족의 윤리가 서유럽 사회에 영향을 끼친 것만큼이나 일본 사회에도 분명히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서 그 윤리는 영웅 서사시에서 분명히 나타나 는 것과 같이 씨족의 윤리에서 직접 나왔다. 예를 들면, 1240 년경에 씌어진 헤이케 모노가타리(平家物語)는 분명히 대씨족인 타아라가(平

家)의 성쇠를 묘사하고 있으나, 사실 그 가문은 대봉건 파벌이었다. 하나의 씨족으로서 그 가문은 소설에서 말하는 일시적으로 화려한 군 사적인 경력을 쌓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소설에 걸맞는 사건들은 일 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씨족의 전통, 편견과 충성심은 끊임없 이 그 주제의 일부가 되었고, 봉건 가신으로서 그 가문에 예속된 주 인공들의 그 씨족에 대한 헌신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 소설의 윤리는 봉건적이며, 그 윤리는 군사적인 표 현으로 약간 축소되었고, 과장된 격렬한 감정을 보여준다. 그러한 격 렬한 감정은 일반적으로 사무라이의 특징이 되었고, 그것은 전쟁의 신(神), 하치만(八幡)에 대한 숭배가 더욱 중요하게 되었디는· 사실에 서 여실히 나타난다. 유럽에서는 튜턴족의 전사단이 처음 형성되고 그들이 로마의 정체 에 끼어들면서부터 봉건제가 출현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 다. 이것이 유럽에서 전사단과 봉건 관계의 생성 사이를 연결짓는 데 생기는 실제로 어려운 문제이다. 나머지 문제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같이 보이며, 봉건제가 게르만족에서 기원하였는가 아니면 로마에 기원을 두고 있는가에 대한 고래(古來)의 논쟁에서, 그리고 독일인에 대한 프랑스인의, 프랑스인에 대한 독일인의 국민적인 편견이나 계급 적인 편견과 깊이 관련되어 나타났다. 이러한 논쟁은 오늘날 이해되 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실제와 너무 동떨어져 있어 관십 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 해서는 주목해야 한다. 그리하여 전사단의 정신이 어떤 지역에서 오 랫동안 망각되었고, 어떤 지역에서 어떻게 다시 부활하였다는 생각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 .28) 불로크는 바바리안 이주자들이 로마 제국 말기 의 불안정한 사회 에 정 착하면서 그들의 전사단 com it a t us 관계를 포기 28) agPea, u Pl aGrisu, i l 1h 9ie0 r2 m, opz.( 8 E6s saanird spu ars sri mo)ri 를g in e참 조de. la noblesse en France au moy en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 29) 왜 그들이 그것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 사회의 조건과 전사단이 처음 형성되었던 국경 지역의 사회 조건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없었다. 시간과 장소라는 측면에서 보면 전 자는 지속적으로 후자와 연결되어 있다• 돕쉬가, 전사단의 정신은 메로빙거조의 왕의 수비대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왕과 토지를 가전 그에게 개인적으로 종속된 자들 사이 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하였을 때 그가 어떤 실질적인 것을 구별하였다 는 것은 인정할 만하다 .30) 여기에는 어떤 전실이 있을 수 있다. 메로 빙거 정부의 제도는 그 내용상 대단히 로마적이며, 아마 바바리안적 인 개인의 명예는 그러한 환경에서 거의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러나 로마적인 것과 바바리안적인 것 사이의 커다란 차이점이 메로빙 거 왕조가 지배하는 갈리아 지방이나 후에 프랑크 왕국의 어디에 널 리 퍼져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는 후기 로마 귀족들에게 봉사하 는 스콜라레 스 scholares, 푸에 리 pue ri , 부켈 라리 buccella rii는 게 르만의 코미타투스와 아주 다르다고 배워왔다. 정말로 그들은 서로 다른 것 인가? 비노그라도프는 부켈라리 관계는 듀턴족의 전사단의 관계와 거 의 흡사하다고 생각하였으며, 부켈라는 일반적인 제국의 군인이 받는 빵보다도 더 나은 빵이라는 것을 지적하여, 로마 귀족의 가신은 특권 을 가진 사람으로 구분된다고 하였다 . 31) 그것이 로마 사회에서 발생하 였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그러한 종속적인 군인은 바바리안이기 때문 에 개인적인 의존 관계의 정신은 사실상 바바리안에서 그 근원을 찾 을 수 있다는 것이 돕쉬의 생각이다. 이 주장은 이 문제에 대한 대 29) Marc Bloch, La soc iet e feo dale(Paris, 1939), p. 238. 30) Alfo n s Dop sc h, Mi ttei lu n g en des oste r reic h i sc hen lnstit ut s fur Geschic h ts - Jor schung , XLI (19 26), 35ff . 필자는 그것이 돕쉬의 뜻이라고 받아들인다. 그 러나 필자는 메로빙거 시대에 사용편 /eude p]라는 단어의 의미에 의존하고 있는 일부 논의에 대해서는 신뢰하지 않는다. 31) P. Vin o g rad off in Cambrid g e Medie v al Hi st o r y , IT , 2nd edn.( Cambri dg e , 1926), 641-642.

다수인들의 견해보다도 더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필자는 이러 한 종류의 개인적인 관계가 3 세기부터 8 세기까지의 사회에서 사용되 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이 시기에 많은 기록을 남겨두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아마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관계가 어느 시기에는 불법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것에 대한 가능한 일반적인 설명은, 죽 테오데릭의 정부와 같은 일부의 정부를 제의하면, 로마 제국의 말 기와 로마 제국 이후의 정부는 여전히 로마적이었고, 바바리안들이 생각하는 대로 개인적인 관계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을 하지 않고, 로 마인들이 생각한 방식대로 기록을 했다는 것이다. 로마의 법적 표현 은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 역사가들을 오도하고 있는 것 갇다. 일본 봉건화의 전형적인 성격은 원봉건 단계에 잘 나타나 있다. 일 본에서 이 원봉건 단계는 최초의 막부, 즉 가마쿠라 막부 시대였는데, 이 막부는 아주 성공해서 약 1 세기 반 동안 지속하였고, 그 기간 동 안 완전한 봉건제로의 발달을 지연시켰다. 가마쿠라 체제의 주요 특 성은 미나모토 요리토모에 의해 건설된 기본적이면서 부분적으로는 씨족 관계에 기반을 둔 대봉신제였으며, 붕괴해 가는 제국을 재건하 기 위하여 그 구조를 이용한 것이었다. 이 체제의 가장 중요한 면은 우선 그것이 유럽의 카롤링거조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이며, 이 점 에 대해서 참시 후 검토하겠다. 그러나 어떤 면에 있어서 가마쿠라 체제는 12 세기 또는 13 세기 유럽의 것과 아주 유사하다. 가마쿠라 정 부의 중심 기관인 바쿠후는 강력한 권한울 가전 몇 개의 부서, 죽 만 도코로(政所 : 행정 관서), 몬추조(門注所:중앙 법정), 봉신들을 통제 하고 중앙의 경찰 기관으로 봉사하는 사무라이-도코로(待所)를 두고 있었다. 영국의 헨리 2 세의 행정 개혁 나아가서 프랑스의 필립 아우 구스투스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한 행정 개혁이 있을 때까지 유럽에서 는 이와 비교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유럽의 봉건 정부는 꾸준 히 발달하는 제도를 만들었으나, 바쿠후 제도는 그것이 만들어지자마

자 최고로 발달한 제도가 되었으며, 그후로는 쇠퇴하였다. 쇼군에 의해 만들어전 대부분의 지방 관리들은 관리이자 봉신이었 다. 집사인 지토는 여러 쇼에 임명되었다. 그들은 막부의 봉신이었으 며, 그들은 농민이 아니라 지주에게 부과되는 〈 병참미 commi ss aria t ri ce 〉라는 새로운 세금을 포함한 각종의 세금을 칭수하여 막부의 군대 를 지원하였다• 그들은 징수된 세금의 일부를 제국의 지방 관리들에 게 주었으며 그리하여 한동안 구제도를 강화하였다. 바쿠후의 확립은 정부의 이원성과 관계가 있는데, 이것은 독특한 것이었다. 바쿠후 제 도의 확립이 국가에 끼친 영향은 국가의 기능을 분열시키는 것은 아 니었다. 왜냐하면 바쿠후는 제국 관리의 권한에서 벗어난 봉신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바쿠후의 행정 구조로 제국 행정부의 허점을 메우 도록 하였으며, 처음에는 여전히 유용한 구제도를 폐지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쿠후는 가끔 구제도에 의해 수행되어 온 정책을시행하였다. 카롤링거 체제는 유럽의 원봉건 단계에 있었다. 그것은 가마쿠라 바쿠후와 아주 유사하다. 구국가를 강화하기 위하여 봉건 관계를 사 용하였다는 점은 아주 중요하다. 게다가 양체제 모두 정부의 비봉건 적인 면을 개선하려고 하였다. 후자의 경우에 쇼군은 바쿠후를 건설 하는 데 있어 제국의 행정부는 있는 그대로 두면서 관료적인 그리고 봉건적인 방법을 사용한 반면에 카롤링거조는 구국가를 재건하였다. 쇼군과 카롤링거조는 지방의 관리를 철저하게 감독하는 방법을 갖고 있었다. 죽 바쿠후의 지방 관리는 바쿠후의 봉신이었으며, 카롤링거의 지방 관리는 그 자신의 행정적 상급자의, 대개는 백작의 봉수 l 이었으 나, 백작과 그의 봉신은 순찰사 mi ss i dom i n ici의 감독을 받았다. 두 체제가 성립된 방법은 대조적이었다. 유럽의 체제는 제국과 바 쿠후라는 이중 제도와 거의 유사한 이중 체제로 시작하면서 서서히 건설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것은 왕이 아니라 궁재였던 카를

마르텔 치하의 8 세기 초에 일어났다. 그는 국가를 강화하기 위하여 봉신제를 적용하는 특별한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回]기 중엽에 피 핀은 이중 체제를 폐지하고 왕위를 차지하여 봉건화 정책을 수행하였 다. 그렇다 하더라도 원봉건 구조를 완성하는 일은 샤를마뉴에게 남 겨졌다. 이에 반하여, 하루아침에 만들어전 것은 아니지만, 쇼군 제도 는 사실상 요리토모에 의해 만들어졌다. 쇼군 제도, 즉 바쿠후가 빨리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제도로서의 바쿠후의 효용성을 보면 알 수 있다 . 카롤링거조는 결코 그것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을 만들지 못하였 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근본적인 사회 여건이 그러한 제도를 창출 할 여건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요리토모는 그의 계승자, 섭정 호 조(北條)에게 1 세기 이상 동안 지속된 정체를 물려줄 수 있었던 반면 에, 그렇게 힘들게 만든 카롤링거조의 구조가 그것이 완성되면서 붕 괴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쿠후와 같은 중요한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에게는 카롤링거조의 봉신제는 단순히 군대를 강화하기 위한 제도인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제 2 차 바바리안의 침입, 죽 사라센, 노르만과 마자르 족의 침입은 군대의 강화를 필요로 하였다. 그리하여 시간상으로 볼 때는 연속적이지만 별개의 두 바바리안의 침입 때문에 봉건제가 성장 하였다는 일반적인 이론이 생겨난 것 같고, 그 이론은 유럽의 봉건제 이외의 다론 경우에 적용되었다 . 필자는 제 2 차 바바리안의 침입이 봉 건화에 필요한 한 단계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최초의 전사단을 형성 시킨 제 1 차의 바바리안과 구별되는 제 2 차의 바바리안이 원봉건 단계 와 초기 봉건 단계의 봉건화와 관계가 있다고 믿는다. 아래에서 이러 한 근거를 제시하겠지만 먼저 원봉건 체제의 중요한 일반적 특성으로 서 정 부의 군사화 mi litar i za ti on of g overrunen t를 검 토하겠다. 정부의 군사화는 카롤링거 체제와 가마쿠라 체제의 대단히 중요한 특성이었다. 왜냐하면 바쿠후 제도 또한 새로운 군대를 창출하였으며

이 군대는 카롤링거의 군대보다도 더 오랫동안 믿을 만한 군대였기 때문이다. 이 두 체제는 다 같이 이 목적을 위하여 이미 존재하였던 제도, 일본에서는 사무라이, 유럽에서는 기사를 이용하였다. 카롤링거 조가 그들의 정책을 발달시키면서 유럽에서는 기사의 수가 증대되었 으나, 그 당시에 그들의 무기와 장비에 대변화가 있었다는 근거가 없 는 듯하다. 그 변화는 구로마의 군대가 대귀족의 사병으로 대체되어 가던 때인 1 세기 전에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그 군대는 이미 말 탄 전사들이었으며, 대개는 바바리안이었고, 갑옷, 등자와 그의의 장비둘 울 사용하고 있었다 . 32 ) 사실상 모든 것을 고려한다면, 말을 타고 무장 을 한, 그의 우두머리에게 개인적으로 종속되고, 전사단의 일원이며, 귀족으로서의 자질을 가전 기사는 로마 제국 말기에 유럽에 이미 존 재하고 있었으며, 봉건 시대까지 과도기적인 사회의 일원으로서 실질 적으로 거의 변화하지 않고 계속 존재하였다. 죽 기사의 기원에 대한 가장 간단한 설명이 최선의 설명이 되는 것이다. 원봉건 체제의 출현 과 더불어 변하였던 것은 기사의 정치적인 지위일 뿐이며, 후에 그 체제가 붕괴되고 완전한 봉건 체제가 그 뒤를 이었을 때 다시 그 지 위가 변하였다. 어느 체제에 있어서건 봉신 또는 배후 봉신으로서 기 사는 전사로서 봉사하였다. 기사가 카롤링거조의 왕들에게 봉사하였 울 때, 그 당시 만연하였던 반란, 약탈과 사적인 전쟁을 진압하는 것 이 기사의 의무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의무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 것이 그의 중요한 의무가 아니었던 시대와 지역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또한 행정을 말아야 했기 때문이다(봉건 계약 자체는 군사적인 의무뿐만 아니라 행정 의무도 규정하기 때문이다). 비록 성공을 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사회의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항상 카롤링거조의 32) Bloch, La soc iet e Jeo dale, pp. 234-2 37 를 참조. H. Brunner, Forschung en zur Geschic h te des deuts c hen und Jra nzosi sc hen Rechts ( St ut t ga rt, I984), pp. 39-41 ; Guil hier moz, Essai sur rorig ine de la noblesse, pp. 450-45 1 ; Carl Ste p h enson, AHR, XLVI , 807 과 비 교하라.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군사적인 의무가 가끔 더 중요한 의무였 을지 모르지만 봉신들의 행정적인 의무도 그만큼 본질적이었다. 카롤링거조의 지배자들은 영토 확장 및 방어 전쟁 등의 많은 전쟁 울 하였고 그들의 봉신들은 그러한 전쟁에서 그들에게 봉사하였다. 그러나 8 세기 유럽 사회에 만연하였던 무질서를 고려한다면, 그들은 의국과의 전쟁에서보다 내전에서 더 많은 봉사를 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과 함께 또 다른 이유 때문에, 사라센, 노르만과 마자르족 의 침입이 봉건 제도를 만드는 데 어떤 역할을 하였다는 생각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33) 그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는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사건이 발생한) 시간적인 문제 때문이다. 원봉건제가 형성된 시기는 사라센의 남부 유럽의 공격과 노르만인의 유럽 연안의 침략 시기에 해당한다. 카롤링거조의 확장 정책이 실패할 때까지는 노르만 족의 침입은 심각하지 않았다. 사실상 카롤링거조의 방어 조칙이 없 었기 때문에 노르만족의 침입이 매우 심각해졌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 가 없다. 카를 마르텔이 봉신제 Vassalag e½ 발달시키는 데 사라센 침 입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침략이 극에 달하였을 때는-카롤이 승리한 두르 전쟁―_봉신이 이미 국가의 실질적인 지주가 된 지가 상당히 오래된 때였다. 게다가 카롤과 피핀 은 프랑스의 남부 지방에서 그들이 사라센인들의 침입으로 겪는 어려 움보다는 이 지역에서 사실상의 독립적인 지배자가 된 툴루즈 백작과 갇은 대봉신들 때문에 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마자르족의 침입은 9 세기 말까지는 시작되지 않았고, 그 침입은 주로 독일 지방에 영향 울 끼쳤다. 우리가 잠시 후에 살피게 되는 것처럼, 노르만족과 마자르 족의 침입은 후에 유럽에서 봉건제의 발달에 커다란 역할을 하지 못 33) 그 침략이 봉건제의 발달에 어떤 역할을 하였다면 그것은 기사의 발달을 전제로 하는 것이 된다. 필자는 기사가 오래전부터 존재하였다는 불로크의 견해를 더 선호한다(위의 주를 참조).

하였다. 원봉건 시대의 일본의 바바리안의 침입에 대한 경험은 유럽의 경우 보다 훨신 더 제한적이며 특수하다. 그러나 일본은 이 시기에 그의 정체 내로 새로운 바바리안의 집단을 끌어들인 경험을 갖고 있다. 이 둘은 일본의 주된 섬인 혼슈의 북동 지역의 사람들이다. 그둘은 서부 일본에서 발달한 우수한 중국 문화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으며, 12 세기에 여전히 동부의 바바리안이라는 뜻을 가전 아즈마-에비스로 알려졌으며, 일본 제국은 이민족울 결코 지배한 적이 없다 .34) 가마쿠 라가 쇼군의 거주지로 선택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정치적인 혼란 시기에 세력을 층대하였는데, 이 정치적 혼란기는 쇼군제의 확 립으로 일시에 타개되었다. 왜냐하면 가마쿠라는 혼슈의 북동 지역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여기에서 요리토모는- 새로운 지방의 봉신을 편리하게 통제할 수 있었으며, 이 지방에서 봉신들을 획득한 다른 귀 족들을 그의 지배하에 둘 수 있었다. 왜 새로운 바바리안이 원봉건 단계에 있는 사회로 편입되었는가? 필자는 그 당시에 그 사회가 확장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경쟁울 하며 제국의 여러 요 구에 저항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던 대씨족_도당인 타이라, 아베, 특히 미나모토가가 봉건적인 방법으로 의부로 확장하였기 때문이다.

34) 의다 케관오계시와는 비 그교들하의였다 제(국 I 과, 의58 ).관 이계러를한 바 비바교리는안 인가 능게하르나만 족구과로 마구 로제마국 제보국다과는 메로빙거 왕국과의 관계를 비교하는 것이 더 나울 것이다.

원봉건 시기의 서유럽과 완전히 발달한 봉건 시기의 서유럽은 마찬 가지로 대의적으로 팽창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노르만과 마자르족의 침입을 특별한 관점에서 보게 한다. 위에서 일본의 봉건화는 라인 강 동쪽의 독일의 봉건화와 비교되었다. 만약 이 비교가 정확하다면, 일 본의 대봉건 가문과 중세의 중기와 후기의 독일 봉건 가문, 예컨대 미나모토가와 웰프가 (Wel f家)가 비교될 수 있댜 독일의 가문들도 역

시 경쟁적으로 의부로 확장하는 데 몰두하였다. 그들은 그들에 대한 제국의 지배를 약화시키려고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웬드족 Wend, 소 르브족 Sorbs, 포메라니 아족 Pomerania n s, 모라비 아족 Morav i ans 과 그의 의 새로운 바바리안들이 봉건 유럽에 편입되었다. 이것은 유럽의 팽 창 운동중 후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 운동은 샤를마뉴 시대에 시작 되었고, 사실상 강압적으로 진행되었다. 요리토모와 갇이 샤를마뉴는 대정복을- 하였다. 샤를마뉴는 그의 정복 과정에서 바바리안들 중에서 가장 완강히 저항하였던 민족, 죽 색슨족에 직면하였고, 토인비는 노 르만족의 서유럽 침입은 샤를마뉴가 색슨족을 철저하게 복속시킨 데 대한 반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홍미 있는 제안을 하였다 . 3 5) 이 제 안은 상당히 근거가 있다. 왜냐하면 그와 색슨족의 전쟁 과정에서 샤 를마뉴는 덴마크, 남부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막대한 영토의 지배자인 노르만 왕 구드뢰드 Gudrod 와 접촉하게 되었고, 구드뢰드는 사실상 샤를마뉴를 반격할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도전만 이 바바리안의 공격의 원인이 된 것은 아니다. 노르만인들을 스칸디 나비아 반도에서 의부로 진출하게 한 3 6) 내적 원인과 마자르족을 돈 강과 드네프르 강 사이에 있던 그들의 원주지에서 이동하여 중앙 유 럽으로 진출케 한 다른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를마뉴는 그의 군사적인 정복과 그의 기독교 선교 활동의 강화로 그의 왕국의 북부와 동부에 있던 모든 민족을 자극하였다 .

35) A Stu d y of His t o r y, II , 2nd edn.(London, 1935), 344-3 45. 36) 그러나 우리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만약 그 원인이 스칸디나 비아 반도로 상당히 많이 유입되었던 동치와 토지 보유에 관한 유럽적인 개 념이라면, 그 해석은 궁극적으로 내적 요인만이 아니며, 유럽의 도전에 의한 것이라는 설명은 확대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입증할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 한,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샤를마뉴의 성공 때문에 인접해 있는 바바리안들은 위압당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경건왕 루이의 치세 동안에도 참잠하게 순종하였다.

그러나 일단 서유럽의 강대한 세력이 분명히 사라지게 되자, 바바리 안의 공격은 배가되었는데 그들은 지속적인 서유럽의 압력에 의해 자 극을 받은 것이었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샤를마뉴의 정복으로 시작된 대귀족들의 점진적인 세력 확장이 그들에게 자극을 주었던 것 이다. 대귀족들은 카롤링거 제국이 붕괴된 후 더욱더 자유롭게 되어 그들의 사적인 목적을 추구할 수 있었고, 일본 역사에서 이에 상응하 는 시기의 유사한 영향이 일본의 씨족들을 변화시켰던 것처럼, 그들 은 게르만족들을 변화시킨 서유럽의 토지 보유 개념과 더불어 새로운 정치 제도를 중앙 유럽에 가져왔다. 게르만의 대귀족들은 봉건화되면 서 토지에 대해 강한 욕구를 갖게 되는데, 이는 성직자들의 선교적인 욕구와 필적할 수 있는 일이며, 성직자들 역시 토지에 대한 욕구에서 세속의 귀족과 다룰 바 없었다. 이제 기독교와 서구화한 색슨족의 괭 창은 프리지아 연안에 있던 데인족과 다른 노르만인들에 의한 약탈을 초래하게 되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내적인 압력이 여기에 가중되 면서, 모든 서유럽의 연안 지방과 강 유역 지방이 공격을 받게 되고, 마침내는 노르망디와 영국으로 노르만족들이 이동하게 되었다꼬 마자 르족의 침입은 카롤링거조의 마지막 인물이며 마자르족이 점령한 모 라비아와 헝가리에 이웃한 동쪽 끝에 개인적인 토지를 갖고 있었던 카린티 아의 아눌프 Arnulf of Car i n t h i a 의 활동의 결과로서 시작되 었 다.

37) 만약에 샤를마뉴의 색슨, 노달빙지언 Nordalb i n gi ans, 프리지언의 정복이 없 었다면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봉건 유럽이 북방으로 더 이상 압박하지 않았 다면, 영국은 데인족의 침입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재미있 는 추측이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본론에서 벗어나 이 논문의 후반부에서 연구될 사회 인 파르티아 이란 Par t h i an Iran 의 역사에 대해 탄 Tarn 이 제시한 개념 을 참시 생각해 보도록 하자 .38) 원파르티아인들은 초원 지방에서 이란 으로 침략한 바바리안들이었다. 탄의 개념은__시험적인 형태이기

38) 아래 8 장 pp. 4 69-495. 거기서 이란이 봉건적이었는가 아니었는가 하는 문 제를다루게 된다.

는 하지만_파르티아의 국가 발달의 어떤 중요한 시점에 제끄} 바 바리안의 침입과 연관된 무장과 전술의 변화가 있었다고 제시하고 있 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알려지지 않은 어느 시기에_~그 과정을 사카족의 침입과 분리하여 생각하기는 어렵다_파르티아인들은 혼합된 헬레니즘적인 군대를 포 기하고 말 탄 궁병(弓兵)을 채택하였다. 그들은 용병을 더 이상 사용하 지 않고, 보병도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상비군도 없었다. 아케메네스의 기병과 같이 그들의 군대는 토지 소유자와 귀족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들은 전쟁을 하기 위해 그들의 주군 lord 을 따른다. 파르티아의 개혁은 창과 단창을 버리고, 파르티아인이든 이란인이든 모든 귀족은 활로써 그들의 가신들을 무장하도록 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들은 활 쏘는 연 습을 한다. 사막에서 가져온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그들의 방 법一-파르티아 식 활쏘기_은 유명하게 되었다 .39)

39 ) W. W. Tarn in Cambrid g e Ancie n t Hi st o r y , IX, 601-6 02.

분명히 이것은 노르만과 마자르족이 유럽을 침입하였고, 이 침입은 유럽의 전쟁 방법의 변화를 일으키고 그 결과 유럽의 사회적, 정치적 구조를 봉건제로 바뀌게 했다는 가정을 칙접 본뜬 것이다. 유럽에 대 한 가정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이란에 대한 그 가정도 역시 근거가 없다는 것에 놀랄 필요가 없다. 파르티아인이 전쟁의 방 법에서 혁신을 한 때라고 하는 〈알려지지 않은 시기〉라는 것은 사카 족이 침입하였을 때인 기원전 2 세기 말이라기보다는 파르티아인이 이 란을 침입하였을 때인 기원전 3 세기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마치 유 럽에서 등자를 사용한 기사가 제 2 차 바바리안의 침입때가 아닌 제 1 차

바바리안의 침입때에 나타난 것 과 같다• 간단히 말해 파르티아인들은 헬레니즘적인 형태의 혼합 군대를 사용하지 않았고, 만약 탄의 가정 이 옳다면, 파르티아 식의 활쏘기는 사카족으로부터 모방한 것으로 되나 실제로는 사막에서 그들이 직접 가져왔고 사카족으로부터 모방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서유럽의 팽창이 노르만과 마자르족의 침입을 유발하였던 것과 같이 미스라다테스 (M it hrada t es, 기원전 124- 1 87) 2 세가 초원 지방으로 파르티아 영토를 확장하면서 사카족의 침입이 유 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 질문에 대해 연구 할 필요가 없고, 이란을 연구할 때까지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원봉건 유럽과 봉건 유럽의 확장을 다음 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원봉건 일본과 봉건 일본처럼 원봉건 유럽 과 봉건 유럽은 팽창하면서 수많은 새로운 바바리안을 편입시켰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격상 팽창하는 정치 제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노 르만의 침입과 마자르족의 침입은 팽창하는 유럽 사회의 특수한 의부 상황에 의해 조장된 유럽 확장의 부산물이었다. 일본의 동부 바바리 안은 아마 덜 위협적이었을 것이다 . 그러나 이 바바리안들 중에는 아 주 거친 종족이 많이 있었고, 스칸디나비아인, 리두아니아인과 폴란드 인이 봉건 유럽으로 복속되는 것이 천연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들 종족 중 멀리 떨어져 있던 종족의 복속은 아시카가(足利) 시대까 지 천연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바바리안들은 두 개의 다른 방법으로 그리고 중복이 되기는 하지만 다론 시기에 봉건제의 발달과 관계가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다. 한 부류는 구국가의 해체 시기 초에 그 사 회에 들어와서 그후 그 전환되어 가는 사회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 지한다. 봉건 체제가 실제로 만들어지면서, 정치적인 권위는 첫째 부 류의 바바리안의 후예들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동시에 그 봉건 체제가 확장되면서 새로운 바바리안이 유입된다. 이것은 일본처럼 유럽에서 도 마찬가지였으며, 유럽에서보다 규모가 크고 보다 다양한 내적인

사건과 더불어 어떤 복잡한 의적 사건이 발생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들의 궁극적인 성격을 모호하게 만들지 않는다. 원봉건 체제가 붕괴하고 그 다음에 완전히 봉건적인 여건이 도래한 상황에서 의부의 침입은 유럽과 일본에서 모두 어떤 역할을 했을 가 능성이 있고, 우리가 완전한 봉건제의 발달의 초기 단계를 고려할 때 이 문제에 대해 반드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침입의 영향은 중요한 것 같지 않다. 한 이유는 이 두 경우에 침입은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그것은 몽고인의 침입이며, 단기간에 정복을 목적으로 한 공격이었다. 유럽에서 노르만의 침입은 처음에는 약탈, 후에는 정착을 목적으로 한, 1 세기 이상 동안 지속된 장기간에 걸친 침입이었다. 그 반면에 몽고족의 일본에 대한 위협은 衣!이 안 되어서 끝났다. 다론 이유는, 이 두 경우에 있어서 그 침입은 결정적으로 다른 상황에서 발생하였다. 몽고의 침입은 가마쿠라 막부가 번성하고 있을 때에 일 어나 그 막부에 일대 타격을 가하였고 그 이후로 약 반 세기 동안 막 부의 세력이 약화되어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갇이 노르만의 침입은 카롤링거 체제가 완전히 붕괴된 다음에야 비로 소 시작되었다. 원봉건 체제에서 봉건 체제로의 이행의 전정한 원인 은 사회가 겪고 있는 모든 중요한 변화의 원인들이 지속적으로 발달 한 것이다. 즉 위로부터의 통제가 충분치 못한 사회에서 안정이나 혹 은 이득을 취하려는 무쟁이 그 원인이 되는 것이다-그 사회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해체되고, 곧 더 이상 통제될 수 없었다. 원봉건 체제의 붕괴로 유럽과 일본 모두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 던 극도로 무질서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 말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다. 왜냐하면 구국가는 마침내 거의 완전히 붕괴되고 남아 있는 것 은 단지 구국가의 흔적과 구국가에 대한 기억뿐이었기 때문이다. 여 기에는 냉엄한 아이러니가 있다. 귀족과 쇼군 혹은 귀족과 왕 사이에

서처럼 봉건적인 충성은 그 사회를 안정시키려고 의도되었고, 부분적 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사회를 안정시켰지만, 이제 봉신이 그들의 대귀족에게 봉건적 충성을 함으로써 대귀족은 남아 있는 국가의 구조 롤 붕괴시키는 군대를 갖게 되었고, 그리하여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생명과 부가 파괴되었다. 신의를 저버림에 대한 분노와 지배 계급들에 의한 그들 자신의 이상을 배신한 것에 대한 분노에 관한 이 시기의 기록이 일본과 유럽에 많이 남아 있다. 일본에서 그 투쟁 기 간은 가마쿠라 쇼군이 붕괴되고 가마쿠라 쇼군이 유지해 온 제국이 붕괴된 다음에 아시카가 쇼군이 확립된 때인, l 心1 ) 기 마지막 2/3 의 시기를 점한다. 서유럽에서는 그 시기가 9 세기 중엽 이전에 시작되었 고 분명한 기간은 없다. 게다가 이 시기에 해당하는 지역은 봉건제의 핵심적인 지역인 북프랑스이다. 남부 유럽과 영국에서는 특수한 영향 때문에 사건의 발생 과정이 다양하게 전개되었지만, 독일과 독일 이 동 지역에서는 북프랑스보다 발달이 늦다 .40) 일본에서 15 세기의 첫 2/3 시기는 비교적 안정이 되었지만 그러나 결코 평화로운 것만은 아 니었다. 여전히 봉건 전쟁이 만연하였다. 그 다음에 10 년 동안의 대혼 란이 일어났던, 1467 년부터 1477 년까지의 오닌(應仁)난이 일어났으며, 40) 남부 유럽에서의 특수한 영향이라는 것은 이슬람이라는 의부의 영향과 문 화적으로 완전히 이탈리아와 단절한 적이 없었던 비잔틴의 영향과 연관된 구제도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아일랜드, 스코트랜드, 잉글랜드의 최 북단은 스칸디나비아만큼이나 문화가 뒤졌다. 북쪽에 있건 남쪽에 있건 이 모든 지역은 북프랑스의 예를 따랐으며, 봉건적인 발달이 늦었을 뿐 아니라 완전하게 봉건화되지도 못하였다. 스코트랜드의 고지대와 이탈리아의 일부 지역과 같은 소수의 특수한 경우에는 전혀 봉건화되지 못하였다. 잉글랜드의 납부, 중부, 북부와 남부 웨일즈는 또 다른 특수한 경우이다. 앵글로 색슨 말기에는 봉건 요소가 보였으나, 노르만 정복이 이 지역에 완 전한 아니 특수하게 발달한 봉건제를 가져왔다. 스티븐 동치기의 혼란 상태 를 봉건제 초기의 또 다른 혼란의 한 국면으로 분류하여야 할 것인지는 누 구나 추측할 수 있으나, 면밀히 연구해 보면, 그 혼란은 이런 유의 혼란이 다.

그러한 혼란이 아시카가 시기에도 간헐적으로 재개되었다. 1 4J.J]기부 터 16 세기까지는 일본에서 〈 봉건제의 절정기 hig h fe udal i sm 〉였다 .41) 프랑스에서 이에 상응하는 시기는 아마 10 세기 말에 시작되어 12 세기 의 어느 시기까지 지속된다. 영국에서는 1066 년 노르만의 정복으로 갑자기 시작되어 헨리 2 세의 통치 시기까지 계속된다. 이 시기의 주 목할 만한 특징은 유럽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며, 일본에서는 분명한 패턴이 없었던, 간헐적인 봉건 전쟁이 아니다. 이 시기의 특칭 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새로이 성장하고 있는 문화에 속하고 구사회 의 제도를 부활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옛날의 것에 접목 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최초의 정치 실체인 기본적이고, 강력한 봉 토의 출현이다. 이 봉토는 봉건 사회의 내적 집단이었다. 봉토는 그 (혼란된)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최초로 만들어진 정치 형성체라 는 점에서 전실로 새로운 것이다. 물론 봉토는 어떤 이론에 입각하여 만들어지지 않았다. 봉토는, 아 무리 아이디어가 단순하다 하더라도, 그 아이디어롤 실체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통합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단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강력한 단위이다. 봉토둘 사이의 일반적인 의적 관계로 나타나는 전쟁은 개개의 봉토 내에서는 평화, 질서, 규율과 긴 밀한 협동 체계를 강제할 수 있다. 그것은 엄격하게 지방적이며, 지방 의 유력자의 업적이다. 그리하여 일본에서의 정교한 쇼-시키 제도는 소멸되어, 그들의 세력은 빼앗기고, 다이묘의 수중에서 그 세력은 재 건되었다. 그들은 유럽 초기의 귀족들과 같은 지위를 차지하였으며, 유럽과 일본에서 모두, 중요한 지방 관리, 죽 그들의 선조들이 구국가 에서 가진, 유럽에서는 백작, 일본에서는 슈고(지방의 성주)가 된 사 람들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구 법과 관습의 제약을 받지 않았 다. 장차 새로운 법과 관습이 만들어져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41) 위 pp.7 1-72.

은 봉토 내에서 요구되는 질서와 규율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어야 했다. 이러한 봉토가 만들어졌을 때, 관습과 법은 살아남기 위한 두쟁 의 실질적이며 절박한 필요성에 맞게끔 조정되어 있었다. 봉건 프랑스에서 봉토는 일본에서보다도 규모가 더 컸다. 노르망디, 플랑드르, 앙주, 프와두, 부르군디 등은 프랑스의 중요한 봉토가 되 었 다. 일본의 봉토도 역시 군주의 행정 단위로서 오랫동안 잔존하였으 나, 그것은 프랑스의 것보다는 작았다 . 분고(豊後), 이즈모(出 雲 ), 아 키(安藝), 오와리(尾張), 에치젠(越前)은 모두 중요한 다이묘의 거주 지 였다. 이것들은 평균적으로 12 세기 메 인 Main e , 퍼쉬 Perche, 또는 라 마르쉬 La March~ 같은 프랑스의 조그만 백령의 크기였다. 규모 가 더 큰 대부분의 일본의 봉토는 안정이 되지 못하였고, 16 세기의 혼란시까지 나타나지 않았으며, 기본적인 봉토는 아니었다. 시마즈가 의 재산인 규슈 섬에 있던 사츠마(薩馬)와 같이 초기에 발생하고 기 본적인 봉토라고 불릴 수 있는 소수의 규모가 큰 봉토는 최북단 또는 남서쪽에 있었다. 크기가 일본의 것과 비슷한 영국의 봉토롤 비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영국의 봉토는 강력 한 노르만 왕들의 정책에 의해 인위적으로 그 크기를 작게 하였기 때 문이다. 아마 이 두 사회에서 나타난 봉토가 순수히 봉건적이었을, 최초의 시기가 있었을 수도 있고, 없었을 수도 있다. 역사에서 〈순수〉라는 것은 거의 드문 일이다. 항상 초보적인 관리제가 있었다는 것이 더 타당할지 모른다. 우리가 그 관리제를 알게 되는 때에, 프랑스의 봉토 는 비콩트vi com t e, 바이 이 bail li, 세네샬 seneschal 과 같은 관리를 이 미 발달시켰고, 봉신이 그들의 주군을 만나고, 공동의 일을 위해 서로 만 날 수 있는 그리고 논쟁접과 정책에 대한 합일점을 찾기 위하여 만날 수 있는 코트 (cour t : 주군이 봉신들을 소집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협의 하는 모임. 역자 주)가 있었다. 영국의 헌정사가와 프랑스의 제도사가

들은 이러한 제도를 아주 강조하였으나, 그것이 봉토가 갖고 있는 힘 의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근원이 된 것은 아니었다. 힘의 근원이 된 것은 봉건적인 유대였다. 수세대 동안 계속해서 훌륭한 정부가 있었 던 프랑스의 대봉토인 노르망디, 앙주, 플랑드르, 일 드 프랑스의 철 저히 봉건적이었고, 개인적이고 봉건적인 유대는 봉건제의 전성기와 그 이후의 시기 동안에도 계속해서 갱신되었다. 행정 관리와 행정 제 도가 개인적인 봉건 관계보다 우선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결과이 지 원인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중요한 결과이다. 스트레이어 는 완전히 봉건화된 일부 유럽 지역은 후기의 유럽 제도의 발달에 가 장 많이 공헌하였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42) 문제의 이 제도들은 프랑스 와 영국의 대봉토에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원인과 결과라고 생각하기는 아주 쉽다. 이 제도들은 그러한 강력한 정치 단위에서 처 음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제도들은 유용하고 오래 지속될 수 있 었다. 10 세기 프랑스 또는 l 心1 ] 기 일본의 절박한 위험 속에서 이루어전 봉건 관계는 쉽게 그리고 완전히 이해되었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봉 건 관계는 예속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정치적 기능을 43) 배우고 수행하 도록 강제하였고, 상급자에게는 그들의 생존과 운은 그들의 예속인에 대한 그들 자신의 정치적 의무를 이행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보다 어 려운 교훈을 가르쳤다. 사실상 개인적인 봉건 관계는 정치 제도가 통 합될 수 있는 궁극적이면서도 아주 단순한 요소 중의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원시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원시 사회의 내적 집단과 비교될 만한 강하고 지속적 인 내적 집단을 만든다. 위에서 연구된 두 경우에 있어, 봉건 관계의 42) 위 pp. 56-6 0. 43) A. B. Whit e, Self -G overnment by the Kin g ' s Command(London, 1933) 를 참조. 이 원칙은 lYI] 기 초 영국 정부에 대한 것을 알려주는 고문서의 철저 한 연구로밝혀졌다.

산물, 죽 기본적이고 강력한 봉토의 지속성은 그들의 내적 구조가 변 천하였을 때에도 지도상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 입증 된다. ll, 12 세기에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일부에서 성장한 거의 모든 봉토는 프랑스 혁명 당시에 주로서 존재하였다. 마찬가지로, l5 세기 일본의 많은 봉토가 1868 년에도 여전히 존재하였다. 이러한 결 정적인 시기가 도래하기 오래 전에 유럽과 일본에서 봉건 관계 그 자 체는 미묘한 전위(轉位)와 확대를 거쳐 그 국가의 윤리적인 기반이 되었다.

3 주,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의 봉건제의 가능성 우리둘이 분류한 두번째와 세번째 사회권에 대해 살펴보자 . 두번째 사회권은 봉건적일 수도 있으나 세번째 사회권은 봉건적이 아닐 수도 있다. 만약 정복이나 다른 문명 사회권으로부터 들어온 영향 때문에 역사의 방향이 바뀌지 않았다면, 후자 그룹, 죽 리비아 왕조 시대의 이집트와 인도의 라지푸트는 봉건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전자 그룹, 즉 중국의 주와 메소포타미아는 사실상 봉건적이었을 가능성은 있으 나, 그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나 보드 Bodd ei근 주는 봉건 적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네 경우 모두에서, 바바리안이 나타났다-죽 바바리안의 1 차 침입이 있었다. 중국의 경우를 제의하면 어떠한 바바리안의 2 차 침입 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서유럽에서와 같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 아에서 바바리안은 침입자들이었으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1 차와 2 차 침입의 중간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에도 그 침입은 계속되었다. 인도에서 바바리안의 일부는 침입자들이었으며, 그들의 인도 침입 시기 는 다른 사례들에서 나타난 바바리안들의 침입 시기의 패턴과 거의 I) 인도에서의 모술렘과 유럽인둘, 이집트에서의 아시리아인과 그리스인들은 이방인 a li ens 이었으나, 이 책에서 의미하는 뜻의 바바리안은 아니다. 그들이 이들 두 사회에서 행한 역할은 전혀 바바리안의 것이 아니었다.

일치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의의 인도에서 바바리안은 토착인이었 다. 주에서는 바바리안의 일부는 토착인이었고, 일부는 아마 침입자였 을것이다. 우리는 이 네 경우에 있어서 봉건적인 것처럼 보이는 여전이 성장 하기 전에 구정치 제도기- 붕괴되어 가는 것을 우선 접하게 된다 . 이 장에서 중국의 구제도에 관해서는 가능한 한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 는 부분에만 국한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분은 그렇게 많지 않으며, 그것은 주가 상(商)의 체제를 정복하기 전후(前後)의 짧은 시기에 관한 것이다• 상에 대한 충분한 논의는 4 장으로 미루기로 하 겠다. 봉건제 이전의 대귀족이 이 네 경우 모두에서 나타나며, 이 귀 족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두 개의 주된 형태, 구체재의 대관리와 부 족의 우두머리로 나누어지는 경향이 있다 . 이집트의 리비아는 원봉건 적이었을 것이고, 라지푸트는 그러한 체제를 가졌을 수도 또는 갖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주는 거의 확실히 그 체제를 가졌고, 메소포타미 아 역시 가졌다. 주와 메소포타미아가 〈 기본적인 강력한 봉토제 〉 를 가졌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없으며, 실제 봉신제 vassalag e 에 관한 특수한 사례들이 부족하다는 사실 의에, 기본적인 봉토가 출 현하였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 두 사회를 확실히 봉건 시기를 가진 사회로 인정할 수 없다. 이집트와 라지푸트는 메소포타미아와 주보다는 간단히 다룰 수 있 다. 왜냐하면 그들의 발달 역사가 외부의 간섭에 의해 줄어 들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집트롤 다루기로 하겠다. 라메시스 말기와 라메시스 몰락 후의 이집트에는 대제국이 붕괴되 었을 때의 일반적인 역사 발달 현상인 중앙 정부가 약화되고 강력한 지방 귀족이 성장하였다. 이 이집트 〈제국〉에서 직업 군대가 제 18 왕 조에 의해 만들어졌었다. 이 군대는 그 국가에서 특수한 계급이 되었 고(전 주민이 계급으로 조칙되어 있었기 때문에 몇 개의 계급 중의 하

나에 지나지 않지만) 이들 중의 일부는 토지를 소유하였다 . 제 20 왕조 (1 200 - 1090) 하에서 이 군대는 거의 전적으로 바바리안으로 구성되었 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리비아인이었으며, 이들은 크레테의 해양 제국 이 몰락하였을 때 〈 해양 민족p eo p les of the sea 〉 이 이동하는 동안에 유럽에서 리비아로 온 사람들이었다. 무력으로 이집트로 들어가려던 시도가 실패한 후에 이들 리비아인들은 리비아인의 우두머리가 지휘 하는 군대의 용병으로 자신들이 고용되어 있는 이집트에 침투하여 정 착하였고 이집트의 군사 계급에 둘어갔다 . 이들 중의 일부는 파라오 가 델타 지역만을 지배하고 데베에서는 아몬 신전의 최고의 사제 Hig h Prie s t of Amon 가 상이집트 U pp er E gypt의 지배자였던 때인 제 20 왕조 말과 제 21 왕조 (1090 - 1945) 의 체제에서는 중요한 민족이었다. 제 21 왕조가 멸망하자, 한 리비아인의 우두머리가 세숀크 Sheshonk 1 세 로 파라오에 즉위하였다. 이것은 로마 제국 말기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었다. 리비아인들은 〈 두 개의 깃털을 꽂고 다니는 wearer of the tw o fea - the rs> 바바리안이었다. 그들은 항상 그들의 부족적인 뿌리를 기억하 는 메쉬 워 141 Meshwesh 족이 었고, 그들 중에 가장 지체가 높은 자들은 부유와와 Bu yu wawa 혈통을 가전 자들이었다. 우리는 족장과 그의 추 종자, 죽 주군과 가신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에 관한 기록을 갖고 있 지 않으나, 리비아인들은 분명히 전사단으로 조직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관계는 명예적인 전사단의 관계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리비아 의 제 22 왕조의 체제는 우리가 일본과 서유럽의 원봉건 체제에서 발견 할 수 있는 특칭을 많이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세숀크는 영토롤 정 복한 ―― 이 경우는 이전에 잃었던 영토이다― _ 활동적인 지배자였으 며, 무엇보다도 정부를 제 20 왕조 초기보다도 더 강력한 기반 위에 울 려놓았다. 그의 세력은 메 Me, 부족의 장, 죽 메쉬워버들의 지지에 기 반을 두고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세력을 가졌고 그

곳의 수비대를 지휘하고 있었던 리비아의 대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일 반 행정도 수행하거나 감독하였다. 어떤 도시에서는 고위 사제들이 지배자였는데, 이들 역시 리비아인이었으며, 대개는 왕가(王家)의 일 원이었다. 왕위 상속자는- 테베에 있는 아몬 · 신전의 최고의 사제가 되 었으며, 이 직은 사제직 중의 최고의 직이었다. 또 디론· 중요한 직은 헤라클레오폴리스 Heracleo p ol i s 에 있는 하르사페스의 최고의 사제 Hi gh Pr ies t of Harsap hes 인데, 이 직은 세숀크가 권력을 잡기 1 세기 전인 그들이 이집트에 처음 정착하였을 때부터 왕가의 수중에 있었다. 헤 로도두스의 서술이 옳다면, 그 요새지는 개개의 군인들이 조그만 토 지롤 수여받는 군사 식민지였을 것이다 .2) 메의 부족장들이 리비아의 파라오에게 예속된 형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예속은 구국가의 구조를 지탱하기 위하여 리비아 귀족들과의 특수한 관계를 필요로 하 였다는 점에서 볼 때 분명히 요리토모와 카롤링거 왕들의 제도와 아 주 유사한 제도였을 것이다. 만약 왕이 모든 군인들에게 토지를 직접 나누어주었다면 그것은 요리토모의 제도와 더 흡사하였을 것이다.

2) 헤로도두스는 단지 델타 지대와 데베에 있는 요새지만 언급하고 있다. 그 는 특히 왕 자신의 지휘하에 있었던 칼라시리스 Calas i r i es 와 헤르모트비스 H( eIIr, m1o6 t4y b-1 i e6s 라6).고 그 알러려므진로 델이타들 요지대새의지 만요이새 지조에그 만많 토은지 관를심 수을여 갖받고았 고있 다었른다 요새지는 그와는 달리 보급 물자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델타 지대의 군 대는 리비아의 지배 이전의 유산이며, 다른 도시의 수비대는 아주 다르게 조칙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제 22 왕조가 지배하기 시작한 지 처음 1 세기 동안 그 지배권이 극도 로 약화되었다고 생각할 만한 뚜렷한 이유는 없다. 그 이후로 제 22 왕 조의 어려움이 심각해지고, 지방 귀족들이 왕의 권한울 찬탈하기 시 작하였다. 이 시기는 많은 사람들이 왕위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왕조 시대로 알려졌다. 이 시기는 전정한 봉건 체제가 발생할 수 있는 내 란의 전단계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집트에서는 그 정도로까지 사태가 발달하지 않았다. 이 시기는 외국의 영향으로 역사의 발달 과정이 변

화된 시기이다. 피안키 (P i ankh i, 751-716) 의 최초의 에티오피아 정복, 에사라돈 (Esarhaddon, 681-6 69) 과 • 아슈르바니팔 (Ashurban ip al, 669 - 626) 의 아시리아 정복도 당시의 혼란을 더욱더 가중시켰을 뿐이다. 사이스의 군주 보코리스 (Bocchor i s, 720-715) 와 제 4 대 에티오피아의 파라오 타하르카 (Tahar q a, 690-664) 는 둘다 합법적인 수단으로 리비 아 귀족의 기존의 지위를 약화시키려는 정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제거하고 이집트의 역사에서 봉건적 발달의 가능성을 배제시 킨 정책을 시작한 인물은 분명히 사이트 Sa it e 조, 죽 제 26 왕조의 창시자 인 삼티크 Psam ti k 1 세였다 . 봉건 체제는 군사적 기반에 의존하며, 삼티 크는 군사적으로 리비아인들보다 우세한 그리스 용병을 고용함으로써 3) 리비아의 왕조 시대의 기반을 제거해 버렸다. 리비아인들은 급속하게 정치적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그후 그들은 대토지 소유자로 계속 존 재하였으나, 다양한 토지 개혁 과정에서 그들의 수는 감소하게 되었 고 마침내는 일반인으로 전락하였다. 아시리아보다 훨씬더 효과적인 변화를 가져온 52 5\:接] 페르시아의 정복은 강력한 이민족의 군대에 계속하여 토지롤 제공함으로써 더 이상의 저항이 없도록 하였다.

3) 원봉건 단계에 있었던 사회에서 이러한 군사적 변화의 영향은 봉건제 후기 시대에 봉건 군대가 붕괴됨으로써 생긴 영향과 대조를 이루게 된다• 아래 pp. 445-4 47 를 참조.

라지푸트에 대해서는 토드의 견해에 대한 소너 Thomer 의 비판은 대체로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본질적으로 소너는 18 세기 라지푸트는 봉건적이 아니라 부족적이라는 크루크 Crooke 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이 견해를 여기서 고찰하겠다. 우선 라지푸트는 무굴 제국이 붕괴할 때에 인도에 들어간 부족이 아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주자였던 그들은 g1 ] 기 또는 그 이 전에 굽타 제국이 몰락하고 있는 동안 들어와서, 모술렘의 침입기에 인도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잡다한 민족 출신이었으며, 그들이 이

주한 후 얼마 동안은 라지푸트로 알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라지푸 트라는 말은 인도 말이며, 라지푸트 사회의 형성이라는 것은 인도의 사회 제도 내에서 발생한 사건 중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라지푸트 사회에 편입된 사람들 중의 일부는 이주자가 아 니라, 높은 수준의 문화 발달에 영향을 받지 않고 인도에서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던 곤드 Gonds 족과 다른 부족들이었다. 9 세기 중엽에 는 북인도를 지배하던 프라티하라 Pra ti hara 제국이 있었다. 이 국가는 아마 구르자라 Gur j ara 의 침입자들에 의해 지배되었을 것이고, 라지푸 트 사회의 일부는 이 민족 출신이었으며, 이 국가는 1 세기 가까이 지 속되었다. 프라티하라 제국은 원봉건 체제였다고 주장되기 쉽다. 그러 나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그 제국이 침입자들에 의해 지배되었고, 원봉건 체제가 성장할 수 있었던 시기에 있었던 굽 타 제국이 몰락한 후에 성장하였으며, 원봉건 체제가 일반적으로 지 속되는 기간만큼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들은 그 제국의 정부 형태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제국을 원봉건 적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도 그 제국은 굽타 제국 울 계승한 어떤 다른 종류의 바바리안 국가인 것 같다. 10 세기에 그 제국이 몰락하면서 라지푸트 국가가 출현하였다. 이주자였건 잔존해 있던 토착 원주민이였건 간에 모든 라지푸트인 들은 프라티하라 제국의 지배하에서 또는 아마도 그 이전에 인도화되 어 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도시 생활을 발달시켰고 인도인들 이 일찍부터 갖고 있었던 예술을 어느 정도 모방하였기 때문이다 .4) 이 인도화는 어 l 기에서 11 세기 사이에 일본이 중국화된 것과 같이 비교적 피상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았다면, 토드가 19 세기 초에 4) 푸라닉 전설은 항상 인도화의 대리인이었던 브라만이 라지푸트인을 크샤트 리아의 계급에 받아들이는 내용울 기록하고 있다. H. G. Rawlin s on, India : A Short Cult ur al Hi st o r y( L ondon and New York, 1938), p. 200 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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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 대한 연구를 하였을 때 그들이 유지하고 있었던 부족 제도가 사실상 존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라티하라 제국이 몰락하기 시작한 직후에 모슬렘의 침입이 시작 되었다. 사실상 가즈니의 마무드 Mahmud of Ghazn i가 그 제국을 멸 망시켰는데, 이것이 정상적인 침입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그것은 다른 문화, 즉 이슬람에 속하는 일련의 제 민족의 인도 로의 잠입이었다. 무굴인들을 포함하여 그들의 대부분은 이슬람 문화권의 페르시아 계통에 속하였다. 라지푸트인은 이슬람에 대항한 최초의 인도의 보호 자 cham pi on7 l- 되었다. 이슬람에 대한 보호벽으로서 라지푸트인들이 발달시킨 강력한 보수주의가 부족 제도를 유지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 지 않았을까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단지 악바르 (Akbar, 1556-1605) 의 건설적인 정책만이 라지푸트인을 무굴의 지배에 순응시키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고, 이 정책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라지푸트인들이 뫼]기 반 동안 계속해서 모슬렘에 저항해 왔던 그 시점에 나왔다. 악바르의 정책은 겨우 1 세기 동안 유지되었으나, 이 시기 동안에는 그 정책은 효과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다음에는 아우랑제브 (Auran g zeb, 1658- 1707) 의 철저한 이슬람화의 정책이 뒤따르는데, 이 정책은 무굴 제국 이 몰락하여 분열되기 시작하였을 때 라지푸트인들의 반모슬렘 전통 이 다시 격렬하게 되살아나게 하였다. 라지푸트에서는 혈연 관계가 중요하였다는 토드의 주장에 의해 18, 19 세기 라지푸트 사회의 주된 기반이 여전히 부족적이었다는 것이 확 실하게 되었다. 만약 라지푸트의 보수주의가 아주 유별난 어떤 특질 울 갖지 않았다면, 위에서 제시된 이슬람의 침입에 대한 보호벽으로 서 발달한 보수주의로는 이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거의 할 수 없 다. 그러나 라지푸트는 아주 특별한 어떤 특질을 가졌으며, 이 특질은 인도 사회 제도의 특질을 바탕으로 하여 확립되었다고 생각되는 근거

3 주,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의 봉건제의 가능성 325

가 있다. 이 제도에서 국가는 부차적으로 중요하며, 중요한 바탕은 브 라만에 의해 위에서 주도되는 카스트와 종교에 의해 제공되었다. 우 리들은 이 특색 있는 사회 구조의 역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기 때 문에 그 사회 구조의 많은 것이 일반적으로 모슬렘에 대항해서 종교 와 인도 문화의 보호자의 역할을 한 브라만에 의해 라지푸트 부족 제 도의 구조 속에서 건설되었다고만 제시할 수 있다. 11 세기 모슬렘의 학자 알 비루니 al-B i run i가 기록한 여러 불량배 ou tl aw 의 집단이 존재 하였다는 글에서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정치 적인 권위가 모슬렘의 수중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정치적 권위가 그 리 중요하지 않았던 이 사회 제도가 힌두교인을 보호하였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 시대의 인도에 대한 알 비루니의 설명은 또한 다른 중 요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는 바이샤와 수드라 사이에 는 많은 차이가 없다고 언급하고 있다 .6) 이 언급은 인도 사회의 구조 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디는· 것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바이샤는 자유 자영 농민 계급이었고, 그들보다 훨씬 아래에 있는 수드라는 알 비루 니의 기록에 하층 카스트가 행하는 천한 일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수드라는 브라만과 크샤트리아의 개인적인 예속인이었으며? 특히 모든 권력과 위엄과 권위를 가전 브라만의 개인적인 예속인이었다 . 사실, 위의 두 계급과 나머지 계급들 사이의 격차가 더 벌어지게 되 었고, 브라만은 도덕과 종교적인 주도권을 확고히 가지게 되어 크샤 트리아가 분명히 그들의 추종자가 되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 당시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다. 이러한 종류의 사회는 분명히 강력한 보 수주의 사회 중의 하나이며, 이 사회는 브라만의 지도 아래 이슬람에 대한 인도 문화의 보호에 전심전력 한 보수 사회였다. 5) E. S. Sachau, Alberuni' s Jnd ia ( London, 1888), I, 101-102. 6) Sachau, I , 101 . 7) Sachau, II, 136.

라지푸트의 부족 조칙은 그 문화의 핵심 요소로서 유지되었을지 모 른다 .8) 그러나 아직 부족 조칙의 실제 기원에 대한 설명은 없다. 게다 가 그들을 알고 있는 의부인들이 본 라지푸트의 군인 상태에 대한 설 명도 해야 한다. 그것은 부족장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돈키호테적인 영웅 심리였다. 그것은 사실상 모든 헌신적인 충성심과 전형적인 바바리안의 과장된 군인 정신을 가전 영웅 시대의 정신 태도였다.

8) 알 비루니는 인도 사회에 대해서 부족적인 것과 부족적이 아닌 어떤 특징 도 기록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토드가 그러한 특칭 중 단 하나의 특정만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놀랄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알 비루니는 인 도의 정신 문화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위에 언급된 그의 주장은 그의 주제 에 부수되어 나온 것이다.

라지푸트 부족 조직의 기원에 대한 가장 쉬운 설명은 라지푸트 사 회가 형성되면서 그 사회에 편입된 토착의 곤드족과 다른 부족의 조 직이 그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의 대안으로서, 역시 라지푸트인 이 된 구르자라 Gur j ara 침입자들이 그들의 부족 조직을 라지푸트로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만약 굽타 제국이 그들의 침입시에 거의 저 항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하였다면 그들은 그들의 부족 조직을 가지 고 들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굽타 제국이 그 정도로 약했을 가능성 이 있으며, 몰락한 제국의 영토로 이동해 들어갈 때 그들의 부족 조 직을 간직한 원주민의 전례가 있다. 예를 들면, 카시트 시대에 납부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한 칼데아 부족이 있다 .10) 이 가정에 의하면, 라

9) 라지푸트의 부족제는 파탄 Pa t han, 아프간Afg han, 바로크 Baloch 의 부족제 와 비교될 수 있다는 크루크의 주장 (Tod, Annals, I, xx.x ix , Intr o ducti on ) 은 이 두번째 안을 지지하는 것 갇다. 그러나 북인도의 토착적인 부족제도 역시 유사할수 있다. 10) 그러한 부족은 제국이 강성하였을 때 제국의 국경 지방에서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국경선을 넘어 아주 멀리 떨어전 곳에서 이주하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구르자라족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갇다. 그러나 훈족의 경우 에는 널리 찰 알려진 사실이다.

지푸트의 호전적인 성격은 인도에서 모슬렘에 대한 그둘의 투쟁 과정 에서 발달한 것으로 되며, 이것 역시 가능한 일이다. 이 가정에 가로놓여 있는 주된 어려움은 프라티하라 제국이다. 부 족장들은 이 책에서 의미하는 바바리안으로 전환되어서야 비로소 보 다 큰 국가인 제국을 세웠다 .II) 그래서 구르자라족이 굽타 제국의 영 토로 들어왔을 때 굽타 제국이 아무리 약했을지라도, 그들은 저항을 받았으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러한 유의 전사단을 형성하였을 가 능성이 더 높다. 테오데릭 Theoder i c, 클로비스 Clov i s 등이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전사단의 우두머리가 국가를 세우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리고 그 국가가 몰락하고 라지푸 트가 모슬렘의 침입자들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을 때, 그들의 정신 태도는 아마 유럽 십자군의 정신 태도와 마찬가지로 영웅적인 특질을 유지하고 발달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부족 조직은 토착 인의 부족 조직임에 틀림없고, 힌두교가 그 사회의 전반적인 제도에 있어서 부족적인 관행이 시행되는 것을 허용하였기 때문에, 브라만은 부족 조직을 유지하는 것을 옹호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11 ) 이주하지 않은 부족장들은 이웃하고 있는 문명화된 국가에 자국되어 그 국 가의 형태를 모방하려고 노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초기 일본이 어떤 준거가 된다면, 그러한 부족장들은 그들이 어떤 문명화된 국가를 세우기 전 에 사실상 문명화된 사람으로 전환되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라지푸트는 기본적으로 부족 적이었으나, 종교와 문화에 있어 일반적으로 인도화되었고, 인도화의 과정에서 어느 정도 도시화되었다. 그러나 라지푸트의 귀족은 옛날의 바바리안의 이동기에 나타났던 영웅적인 모습을 여전히 보여주고 있 다 .. 그래서 라지푸트의 경우는 인도의 정치 제도의 일반적인 나약함 과 의국의 우수한 문화의 인도로의 유입에 따라 봉건화가 중지되었거 나 혹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아주 특수한 예이다. 그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질은 부분적으로는 원시적이며, 부분적으로는 문명화되었

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추축일 뿐이나, 자료가 부족하고 해 석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추측은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함무라비 왕 이후의 메소포타미아와 주의 경우는 이집트나 인도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메소포타미아에는 봉건 시기가 있었다는 실질 적인 가능성 p oss i b il ity이 있고, 중국에서는 봉건 시기가 있었을 개연 성 p robab il ity이 있다. 메소포타미아는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 논의하는 것이 가 장 좋을 것이다. 첫째 부분은 엘람, 바빌로니아,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계곡의 중 • 남부와 해양 지역이다. 둘째 부분은 티그리스, 유프라 테스 강 계곡의 북부 지역으로서, 이 지역의 대부분은 기원전 16, 15 세기에는 북부 산악 지대에 있던 반바바리안인 우라르투 Urar t u 와 더 불어 미타니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13 세기에 그리고 아 마도 이미 기원전 l 心1 ] 기에는 아시리아에 의해 이 지역이 지배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티 Ha tti, 카니스 Kan i s 의 메소포타미아의 식민지 가 한때 있었고, 다수의 메소포타미아 식의 도시가 성장하였던 곳은 소아시아의 동부 지역이다. 바바리안들은 두번째와 세번째 지역으로 흘러들어 왔으나, 그들은 서로 다른 바바리안들이었으며, 각기 다른 방향에서 왔다. 히타이트는 헬레스폰트 Helles p on t와 보스프러스를 건 너 서쪽으로부터 왔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대다수는 아시리아_미타 니一우라르두를 지나 북쪽과 동쪽에서 왔는데, 이 예의적인 이주의 물결은 그 뒤의 아시리아의 호전적인 정책과 많은 관련이 있었을 것 이다. 바빌로니아에는 바바리안이 아마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에는 카시트족이 있었으며, 시리아와 미타니의 일부 지역 에서처럼 아라비아에서 온 부족들이 있었다. 기원전 17 세기에서 기원전 13 세기경까지 나타나는 훌륭한 자료들은 하티에 관한 것들이다(그러나 이 자료는 아주 열악한 전체 자료들 중

에서 최선의 것이다). 이 자료 때문에 고왕국 Old K i ng dom 과 신왕국 New King do m 사이가 아니라, 기원전 15 세기의 어느 시기에까지 이 르는 고왕국 시대의 하티에 관해 분명히 설명할 수 있다. 다음에 나 타나는 이유 때문에 필지는· 하티의 정치 발달 과정에 대해 다음괴- 같 이 당돌한 추측을 할 수 있다. 죽 하티는 고왕국의 주된 시기는 원 (原)봉건 시기였으며, 초기 봉건 단계에서와 같은 봉건적인 여건이 고왕국의 말기와 신왕국이 출현하기 전의 혼란한 시기에 나타났다는 것 0] 다. 제각기 특권을 가전 대귀족과 전사 그리고 왕에게 세습적으로 예속 되어 있는 왕의 아들들(이들은 정말 왕의 아들들이었을까? 아니면 명 예적으로 그렇게 칭하는 것일까?)이 있는 고왕국은 의심할 바 없이 이전에 제국의 영토에 건설된 바바리안 국가였다. 아마 그 지역은 일 정 기간 동안 제국에 의해 지배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히타이트족이 거기에 도착하였을 때 메소포타 미아의 여러 문명과 함께 도시를 중심으로 한 메소포타미아의 정치 제도가 거기에 존재하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히타이트는 그 제도를 그들 자신의 정부의 기반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12) 그리하 여 히타이트의 군주와 그의 귀족과 전사의 개인적인 관계는 구(舊) 정치 체제를 지탱하기 위하여 원봉건적인 방식으로 분명히 이용되었 다. 만약 그 전사가 왕에 의해 직접 하사된 소토지를 가전 히파라스 Hipp aras 였다면 그 군사 제도는 이집트의 리비아 체제와 일본의 가마 쿠라 막부의 군사 제도와 유사하다고 하겠다. 이 가정에 대한 중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왕국의 무르실리스 (Murs ili s, 대략 기원전 1555-1530)131 이후 통치기로부터 신 12) R. S. Hardy, The Old Hi ttite Ki ng do m : A Poli tica l Hi st o r y, Americ a n Jo urnal of Semi tic Langu a ge s and Lit er ~tu r e, ll'l(l9 41 ), 178-179 ; L. Dela- por te, Les Hit tites (Pa ris, 1936), p. 176.

왕국의 수필루리우마스 (Su ppil u li umas, 대략 기원전 1360 년)의 통치 시기까지의 기간을 초기 봉건 시기라고 하는 것은 추측에 지나지 않 는다. 이 기간 동안은 텔레피누스 Tele pi nus14) 라고 불리는 어떤 군주에 의해 질서가 약간 회복되었으나, 연약한 군주들 때문에 분명히 혼란 된 시기였디는 것이 입증되었고, 그 뒤로는 이보다 더한 혼란기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 시기가 봉건 체제였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불충 분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제도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 이다. 그러나 그 뒤에 나타난 신왕국은 고왕국이 원봉건 체제의 특성 울 보여준 것갇이 분명하게 후기 봉건 체제의 15) 성격을 보여중으로써 하티가 초기 봉건 체제의 일면을 가졌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13) 무르실리스의 연대는 W. F. Albr ight의 A Thir d Revis i o n of the Early Chronology of Weste r n Asia , Bulleti n of the America n Schools of Orien ta l Research, No. 88(December, 1942), 28-3 6, tab le p. 32 에 따라서 수정된 것 을 이용한 Hard y의 것에서 의한 것임. 앞으로 메소포타미아에 관계된 연대 는 이것을 이용할 것입

히타이트는 때때로 시리아로 이주해 들어갔고 다른 민족 특히 후리 언족들도 그곳으로 이주했다. 많은 소제후국pri nc ip al iti es, 대혼란과 파괴 그리고 그들의 예속적인 귀족과 전사(예속인의 두 종류)를 가진 소군주 pri nce li ng s 들이 있었던 것 같다. 예속인들은 소군주의 주변에 〈군집된 가신의 형태 cluste r ed re t a i ner- fa sh i on 〉이며 토지롤 가전 귀 족 landed a ri s t ocrac y 16) 이 아니었기 때문에, 브런데이지 Brunda g~즌 이 때의 상황을 봉건 시대라기보다는 영웅 시대라고 생각한다(문제의 시 대는 기원전 1500 년 전후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둘이 토지를 가진 귀 족이 아니라는 증거는 없다. 다만 그들이 토지롤 소유하였다는 증거 가 부족할 뿐이다. 이것과는 별도로, 만약 소군주가 토지를 가졌다면, 그의 가신들이 토지롤 갖지 않고 그의 집에서 기숙을 했을지라도 그

14) Hardy , pp. 201-2 10. 1165)) 위아 래p . 61 장66 -167.

는 봉건적인 귀족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아마도 이 시기를 원봉건 시대라고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영 웅 시대에 해당할 수도 있고 혹은 초기 봉건 시대에 해당할 수도 있 다. 그러나 하티는 그 당시에 초기 봉건 단계에 있었다고 추정되었고 기원전 16 세기 말에 무르실리스가 시리아에 있는 알레포 Ale p여} 약탈 하였다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에, 추측을 확대하여 시리아를 하티와 더불어 그 당시에 초기 봉건 단계 지역에 포함시켜도 무방할 것이다. 바빌로니아의 전 지역 내지는 대부분의 지역과 미타니-아시리아의 일부는 함무라비에 의해 직접 지배되었고 그리고 아마 바비론의 제 1 왕조의 몇몇 황제들에 의해서도 지배되었을 것이다. 함무라비의 지배 는 봉건 지배가 아니라는 브런데이지의 주장에 18) 필지는- 전적으로 동 의한다. 그것은 원봉건적인 지배도 아니었다•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들 이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전(前)봉건적인 단계를 형 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강유역의 북부 지역의 대부분이 미타니 왕에 의해 지배되었거나 또는 그들의 지배 영역이었다고 주장되었던 기원 전 15 세기는 누주 Nuzu 점토판 시대였는데, 이 시대는 토지 보유에 대해 어떤 암시를 해주고 있다. 토지보유 형태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 논쟁이 많으나, 그중 어떤 보유 형태는 함무라비의 법에 의해 규정된 형태와 일치하는 것갇이 보여전다. 이것은 농민들이 왕을 비 롯하여 여러 귀족들로부터 토지를 받아 보유한 형태였다. 이 점토판 은 함무라비의 치세에서와 갇이 왕의 재판관이 그러한 보유지에 관한 소송을 재판하였다는 것도 역시 말해 주고 있다 .19) 함무라비의 정부 17) Hardy, p. 203. 18) 위 pp. 153-155. 19) 이 점에 있어서 전문가들 사이에는 이견이 없는 것 갇다. 이에 대한 논쟁 울 알기 위해서, H. Lewy , The Nuzi an Feudal Sy st e m , Orie n ta l i a, XI n. s.(1 9 42), 1-40 , 209-2 50, 297-3 49 ; F. R. Ste e le, Nuzi Real Esta t e Transac- tion s, Americ a ! Orie n ta l Serie s, No. 17(New Haven, 1943) : P. M. Purves, Commenta r y on Nuzi Real Prop er ty in the Light of Recent Stu d ie s ,

Jo urnal of Near Easte r n Stu d ie s , N(1945), 68-86. 〈가짜 채택 fals e adop - ti on 〉에 대한 Purv~ 견해가 Le wy의 견해보다는 나은 것이라고 필자는 생 각한다. Lew~ 근 이 형태에서 봉건적인 조건이 있었다고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봉건적인 조건이 있었다면 그것은 사회의 상류 계급에서 존재하였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필자는 E.A. S pei ser의 조언을 받았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필자에게 있다.

이의에 봉건제를 시사할 만한 것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운 제의 토지 보유제는 보찰것없는 농민의 것이며, 그 보유제는 어떤 방 법으로도 상류 계급의 지위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한다. 다 만 미타니의 군주들은 귀족 계층인 마르얀누 mar y annu 에 의해 지원을 받았고, 군주의 세력이 약하여 마르얀누들이 그들의 독립을 주장할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는 것만이 알려져 있다. 기원전 l 心1 ] 기와 13 세기에도 아시리아는 북부 계곡에서 주요한 세 력이 되었고, 미타니의 대부분의 영토와, 아마 북쪽에 있던 다론 부족 의 영토 그리고 바빌론 영토의 일부를 분명히 획득하였다. 아시리아 의 세력은 기원전 12 세기에도 유지되었고, 아마 어느 정도 확장되었 을지 모르나, 그 이후에는 몰락하였던 것 같다. 기원전 I 心1 ] 기에서 기 원전 12 세기까지는 아시리아의 제국 시대라고 불렸으나, 제국이라는 용어는 그리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이 시기의 이 지역에 대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죽 전쟁이 항상 있었고, 부족 또는 부족적인 성격을 띤 상당히 많은 정치 단위가 있었다는 것이다. 대체로 잘 알 려지지 않은 사실도 두 개가 있다. 부족에서 유래된 정치 단위의 성 격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그리고 많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국가가 이 지역에서도 잔존하고 있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 고 있다. 브런데이지가 주장햐는 것처럼 20) 심증적으로는 봉건적인 조 건이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여건은 사실상 봉건제가 발생한 다른 지역들과 같이 봉건제가 발생할 수 있 었다. 이것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

20) 위 p. 168 를 참조.

3 주, 메소포 E fa|아, 이집트, 인도의 봉건제의 가능성 333

야 하지만, 필자는 이 이론적인 논쟁에 대해서 한 가지 중요한 점, 즉 기본적인 봉토조차도 형성될 수 없을 만큼 극심한 혼란이 있었던 것 같다는 접은 유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의 마지막 문장은 우리들의 일반적인 이론을 새로이 고찰하도록 하며, 극심한 전쟁이 기본적인 봉토의 형성을 방해했던 경우는 없었 다고 바로 첨언해야만 한다. 이 가정은 현재 논의하고 있는 이 지역 에만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군주들이 기원전 l

세기, 죽 기원전 8 세기 우라르두의 귀족에 대한 설명에도 찰 부합된다. 아돈 츠 Adon t z 는 우라르두의 중십 지역에는 후봉건 시대의 귀족인 라부티 rabuti 와 구분되는 임명된 지방의 현령들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아돈츠는 라부티를 봉건적이라고 부른다 (H i s t or i e de I'Ar menie , pp. 21 7~ 2 19). 우라르 두의 그러한 변형 제도는 가능한 것이며, 히타이트의 제도와 유사하다는 접 이 중요하다. 필자는 우라르무에 대한 증거는 아시리아와 하티에서(좀더 일 찍 발생 ) 봉건 시기가 일찍이 발생하였다는 가정을 보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는 우라르투에 대한 증거가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 는다는 것을 첨언해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증거의 대부분은 아시리아의 자료에서 나왔으며, 아시리아의 개념에 의해 각색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미타니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을 때인 기원전 15 세기에는 계곡의 북 쪽 지방은 아직 봉건적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그러나 이 지방은 미타니의 체제하에서는 원봉건적인 단계에 다달았을지도 모른 다. 왕과 마르얀누 사이의 관계는 원봉건적인 방식으로 유지될 수 있 었다. 미타니에서 아시리아로 권력이 바뀌었던 기원전 1,µ사 기에 분열 이 일어났다. 이 변화로 어느 모로 보나 더 조잡한 통치 방법이었던 군사적인 정부 형태가 나타났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 또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더 많은 원시인과 바바리안의 유입으로 사회의 전 구 조는 더 피폐해지고 계곡의 북부 지방과 더 북쪽에 위치한 산악 지대 가 어느 정도 서로 동화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기원전 l 心1 ] 기와 기 원전 10 세기 사이에 실제 봉건적인 여건이 조금이라도 발달할 수 있 었는지의 여부는 말할 수 없으나, 만약 발달할 수 없었다면 그것은 바바리안들이 그 지방에 가져온 극도의 무질서의 결과인 것 같다 . 22)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은 카시트 군주들의 지배하에 들어갔는데, 이들은 메소포타미아의 다른 지역의 바바리안의 지배자들과 마찬가지 로 그들 아래 귀족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 귀족에 관해서는 다른 귀족에 관한 것보다도 덜 알려져 있다. 카시트의 군주는 약하였을 것 이며, 귀족들은 군주들의 권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 이다. 또한 엘람국이 있었으며, 이들의 침입은 다른 적들의 침입보다

22) 이 논쟁의 발달에 관해서는 아래 pp.4 41-444, 466 - 467 를 참조•

바빌로니아에 더 많은 손상을 입혔을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16 세기 말에 실제로 바빌론을 약탈하고 바빌론 제 1 왕조를 종식시킨 인물은 하티의 무르실리스이었다. 부족인들이 그 지방의 일부에 자리잡았고, 도시들은 더 많은 토지롤 넘겨받았다. 쿠두루스 kudurrus 에 기록된 보 유지는 봉건적이라고 가끔 말해지고 있다. 그들이 규정한 은대지는 막대한 면제권을 갖고 있어서 사적인 정부가 그곳에 생겼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봉건적인 정부갇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많은 행정 기능이 보수를 받는 관리들에 의해 수행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왕 도 비슷한 관리 제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미타나, 아시리 아와 하티에서는 이러한 관리 제도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왕이 어 떤 경우에는 토지를 쿠두루로 양도하기 전에 부족장들과 부족민으로 부터 토지롤 구입하였기 때문에 쿠두루 보유지 제도는 도시 또는 부 족의 수중으로 들어간 토지를 바빌로니아의 일반적인 행정 제도하에 다시 끌어들이려는 정책같이 보인다. 필자는 쿠두루에 의한 토지 보 유자가 그들의 보유지에 대한 대가로 군사적인 봉사를 행하였다는 증 거를 찾을수 없었다. 이제 여기서 논의의 편의상 나눈 세 지역을 비교하여 메소포타미아 에 대한 어떤 결론을 유출할 수 있다. 첫째, 만약 미타니 - 아시리아의 여건에 관한 가정이 받아들여전다면, 여건은 하티의 여건보다도 덜 봉건적이다(실제 어느 정도는 봉건적이었든 아니었든 간에). 아시리아 에 있었던 것과 같은 봉건적인 경향은 하티에서보다도 훨씬 늦게 작 동하였다. 만약 위의 마지막 문단의 가정이 받아들여진다면, 바빌로니 아에는 전정한 봉건 시기가 없었다. 바빌로니아 사회의 여러 지역을 봉건화의 정도에 따라 구분하는 것은 봉건 유럽의 봉건화 정도를 연 상케 한다. 바빌로니아와 같이 구문화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에서는 단지 미미한 봉건제의 발달이 있었다• 유럽 봉건제의 중심 지역인 북 프랑스는 아주 옛날부터 구사회, 죽 로마의 식민지였고 그리고 로마

제국이 붕괴하였을 때 바바리안 이주자들이 북프랑스에 이주하였다 . 이 설명은 하티에게도 잘 부합된다• 그러나 역사적 유사성이 있는 곳 에는 상반되는 점이 항상 있게 마련이다. 아시리아는 하티처럼 구사 회의 식민 지역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가정은 아시리아가 차지했던 위치를 봉건 유럽에서 독일이 차지한 위치에 두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일은 프랑스보다 덜 봉건적이었던 것과 같이, 아시리아는 하티보다 도 덜 봉건적인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며 독일은 어느 면에서나 로마 의 식민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생각하면, 메소포타미아 는 아마 중세 유럽보다도 덜 봉건적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확실 하지 않지만 하티는 아마 프랑스보다도 덜 봉건적이었을 것이고, 바 빌로니아는 이탈리아보다도 훨씬더 덜 봉건적이었을 것이다. 만약 아 시리아 지역이 바바리안과 과도하게 융화되었다는 필자의 특별한 가 정이 받아들여진다면, 미타니 -아시리아―우라르투는 독일보다 덜 봉건적이었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대해서 내려야 할 두번째의 결론은 도시들이 이 지방의 정치 제도에 일억울 담당하였다는 점이다. 아슈르 Ashur 는 이 시기 초에 도시 국가였던 것 같다. 도시들은 봉건 혹은 봉건적인 제도들을 가전 히타이트 왕국이 성립된 후에도 하티에서 중요하였다• 메소포타미아는 아카드 왕조의 대제국과 우르 Ur 의 제 3 왕조가 확립되 기 전에 도시 사회였고 그러한 제국이 사라전 새 시대에서는 도시 국 가의 정체가 재현되는 조짐을 보였다. 어떤 사회에서는 봉건제와 도 시 사이에는 양립할 수 없는 어떤 이율배반적인 면을 보였고, 그와는 반대로 어떤 사회에서는 도시와 봉건제가 서로 특수한 관계를 가지면 서 발달하였다. 메소포타미아는 아마 후자에 속할 것이다. 전정한 봉 건제가 조금 변형된 형 태 인 〈도시 -봉 건제 city-fe uda lity〉라는 형 태가 거기에서 발달하였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우리가 메소포타미아에서 특칭적이며 기본적인 봉토를 발견할 수 없는 이유이다. 도시는 아마

도시-봉건제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도시 - 봉건제는 다음에 연구하 게 될 주(周)에서도 역시 가능하였던 것 같다. 주가 한때 봉건적이었을 가능성은 있다. 설령 주가 봉건적이 아니 었더라도, 봉건 체제와 아주 유사한 체제를 가졌음에 틀림없다. 주에 는 바바리안이 많이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중국을 연구하는 학자들 은 문명화된 중국인들 사이에서 산악 지역, 늪지역 등과 같은 보다 조건이 좋지 못한 지역에 살고 있던 원시인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이들 두 문화는 상이한 그둘의 농업 방법의 수준에 따라 구분이 되 고 중국인들이 원시인을 내쫓거나 혹은 흡수하였다고 한다. 중앙 유 럽의 원주민도 비슷하게 봉건 유럽에 흡수되는데, 그들의 환경에서 일어난 주요한 변화는 역시 그들이 비교적 높은 유럽의 농업 수준에 동화되었다는 점이댜 유럽의 원시인들은 유럽 사회 내에 산재해 있 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의 원시인도 중국의 영토 내에 골고루 홑어져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필자는 우리가 디루코. 있는 시기에 중국 의 대평원 지역에 이러한 내적인 바바리안이 많이 남아 있었다는 것 에는 회의적이다 .23) 23) 보통은 많은 바바리안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중국 문화 의 성장에 있어 필자가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의 발생 순서에 대한 견해에 의존하고 있다. 이 견해는 황하에서 아루어전 관개 시설과 치수 사업의 발 달을 사건 발달 과정에서 꽤 늦게 나타나는 클라이막스로 보고 있다. 그와 는 반대로 필자는 모든 대하의 유역에서처럼 관개 사업은 최초의 업적이며, 어떤 대규모적인 문명 사회도 그것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필자 의 Concept of th Cong lom erate My th, Proceedin g s of the Te nt h Inte r - nati on al Cong res s of Phil oso p h y, Beth , Pos, and Hollak(ed.) , I , Amste r -dam, 1949, 74-81 을 참조) 이 가정을 따르면, 대평원으로 치수 제도가 확산 된 것은 분명히 그 다음 단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의 불가피한 결과이 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주시대에는 그 지역에 원시인이 거의 있을 수 없다고 필지는 생각한다. 이와 반대되는 견해를 알기 위하여는 Owen La ti more 의 Inner Asia n Fronti er s of Chin a (London and New York, 1940), pp. 312-

319, and p as si m 을 참조.

그러나 서쪽에 있는 황토 산악 지대에 상당수가 있었을지 모른다. 많은 의곽 지역에 바바리안이 있었으며, 이들의 일단은 항상 중국 사회를 둘러싸고 있었고, 이둘은 분명히 부족 체제로 형성되어 있었 다. 동쪽에는 이(夷), 남쪽에는 만( 딸 ), 서쪽에는 융(戒)과 후기에 이 르러서는 적(秋)이 있었다. 마치 내적인 바바리안은 다론 어떤 곳에 서보다 중국의 서부 산악 지대에 더 많았던 것처럼, 서쪽의 의부 바 바리안은 다른 바바리안보다도 수가 더 많고, 더 공격적이었던 것 갇 다. 사실상 내적, 의적 바바리안들은 서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었다. 주가 정복하기 직전에는 주도 역시 서쪽의 어디엔가 살고 있던 바바 리안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위수(i W 水) 유역에의 도달은 그들의 여건 에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위수는 황하의 중요한 지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수 계곡에 기반을 두고 있던 주는 황하 유역에 있던 상(商)이 사용하였던 관개 방법을 채택할 수 있었다 . 이 것은 상의 경우와 같이 도시 사회를 위한 물질적 기반을 제공하였으 며, 주는 정복 전 시대의 상의 문화를 가능·한 한 빨리 흡수하고 있었 다는것은분명하다. 중국인 자신들 사이에는 부족 내지는 씨족 관계가 강하게 남아 있 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연구한 일본의 전례를 따른다면, 만약 중국 이 봉건적인 방향으로 발전되었다면, 그것은 씨족 전사단에서 전사단 이 형성됨으로써 발전되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리하여 중국인 자 신들이 바바리안의 역할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중국이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변화를 시작했을 때 의부 바바리안의 침입을 받았 다면, 그러면 그것은 처음부터 바바리안이 두 종류의, 죽 유럽과 메소 포타미아에서처럼 침입자로서 그리고 일본에서처럼 원거주지에서 변 화하고 있는 대다수의 씨족인으로서 봉건적인 발달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럽에서는 원봉건 단계 이후부터는 단지 후자의 경

우만이 이루어졌으므로, 정확하게 판단하면, 중국의 경우만이 전자와 후자 사이의 관계를 균형 있게 연결지울 수 있을 것 이다 . 24) 주의 정 복은 이 책에서 의미하고 있는 뜻의 바바리안의 침입은 아니다. 그것 은 아래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봉건적 발달에 있어서 다른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 정복 훨씬 전에 서쪽으로부터 바바리안의 침입이 발생하였다고 가정할 만한 이유는 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추 론적이다. 왜냐하면 서쪽으로부터의 칩입은 후기에도 역시 극심하였 다는 것과, 변화가 일어나면서부터 어떤 형태의 정치적인 붕괴가 있 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

24) 아마 여기서 제시된 중국과 유럽 사이의 차이는 하찮은 것일지도 모른다.

중국의 정치 제도의 붕괴는 아마도 주의 정복 훨씬 전인 기원전 13 세기 또는 12 세기에 시작되었음이 틀림없다 . 2 5 )

25) 주는 그들이 상을 정복하기 전에 서쪽의 영토에서 거의 1 세기 동안 전쟁을 하고 있었다. 상도 주가 정복을 하기 전에 이(夷)와의 심각한 전쟁에 휩싸 여 있었다 . 상의 수도는 13 세기 盤庚의 치세때 〈 대도시 상 〉 으로 옮겨졌으며 (전통적인 중국의 연대에는 l 때]기. H. G. Creel, Stu d ie s in Early Chin e se Cult ur e, 1st seri es , Baltim ore, 1937, pp. 133- 1 40), 이 사건은 퇴보적 인 변화 를 나타낸다. 바바리안에 대한 중국인의 식민 과정은 은(殷) 왕조의 중엽 또는 말기에 시작되었다고 마스페로는 생각한다 (Annual Rep o rt of the Smi t- hsonia n Instit ut i on , 1927, Wash ing ton , 1928, p. 4 46).

혼란이 시작되기 전의 중국의 사회와 정체는 어떠하였는가? 분명히 그 사회에는 부족 혹은 씨족 관계가 대단히 중요하였으나, 아마 순전 히 부족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스페로에 의하면, 주가 정복 이후 정착을 하였을 때 〈 봉건 귀족fe udal lords 〉 둘은 여러 관리들의 봉사를 받았다 . 2 6 ) 이러한 귀족들(분명히 봉건적은 아니다)의 조상들은 아마 그와 유사한 관리들의 봉사를 받았을 것이다. 그 관리들의 임무는

26) Le regi m e feo dal et la pro p riete fon cie r e dans la Chin e anti qu e, Revue de 「 lns tit u t de Socio i g ie, XVI (19 36), 43-49. 이것은 Melang e s po sth u mes sur !es reli gion s et fh is to r i e de la Chin a , m, Etu d es hit or iq u es(Paris, 1950), pp.118-124 에 재수록되어 있다. Bodd, 위 pp. 94- 9 5 참조.

토지의 관리뿐만 아니라 상인의 관리와 그의의 문제를 다루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인도에서 라지푸트가 영역 국가에서 발생했고 대부분 의 부족적 성격을 유지하였던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영역 국가는 원래의 부족 조직으로부터 유래한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 2 7) 이것이 중국의 상의 정치 체제의 전부인가?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디론 정치 제도가 있었을 가능성도 역시 있다 - 상왕이 행사한 지배권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아주 논란이 많은 주제이므로 아래에 서 별도로 논의될 것이다 . 28 ) 그러한 주도권은 평상시에는 일반적으로 평화를 유지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 체제가 존재하 였다고 해도 그것은 어떤 때에는 개개의 국가 구조보다는 훨씬 더 미 약한 것이었다.

27) 반드시 브라만과 갇은 성직자들의 영향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종교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인도의 경우는 좋은 예 이다. 28) 4 장, pp. 366-3 72.

이 정치 제도의 붕괴의 원인은 무엇인가? 라티모어는 주로 주와 같 은 다론 집단이 상의 문화를 배우면서, 그 집단들은 〈보다 적은 노예 를 그리고 더 많은 자유 전사를 가졌기 때문에 그들이 상보다는 군사 적으로 더 강한 시기가 오기로 되어 있었다〉고 제시하고 있다 . 2 9 ) 그 러나 위에서 이미 그 정치적 붕괴는 주의 정복 이전에 시작되었다고 주장되었기 때문에 라티모어의 견해로는 주의 정복 그 자체만 설명할 뿐이며 이 시기의 변화에 대해 전부를 설명할 수 없다. 만약 상이 헤 게모니를 행사하였다면, 그 헤게모니의 붕괴는 그 정치 제도의 몰락 원인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해도, 변화가 시작되는 자연 적인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30) 상(商)대에 중국이 어떤 정치 형태를 가졌을지라도 그리고 그것의

29) Inner As ian Fronti er, p. 3 05. 30) 무엇이 사회와 그들 문화를 몰락하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래 pp.5 24-526 를참조.

붕괴 원인이 무엇일지라도 그 정치 형태가 변하였다는 것과 그리고 주가 상을 정복한 이후 약 1 세기여 만에 관습적으로 봉건적이라고 부 르는 새로운 질서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새 로운 질서가 반드시 봉건적이라고 기술되든 않든 간에 우리는 그에 관한 몇 가지 요인들을 알고 있으며 적어도 봉건적 발달의 한 단계는 상시대의 정치 제도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이것은 보드 Bodde 가 이 책에서 쓴 논문에서 잘 서술되어 있다• 이 논문의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한 부분은 봉건화를 거친 사회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변화의 과 정이 중국에서 발생하였다는 것을 제시해 주고 있다. 두 개의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하나는 한 사람이 자기 자신 을 엄숙한 맹세로 후원자에게 탁신(託身)을 하고 그리하여 〈 개개의 대귀족은 그 자신에게 추종하는 자들의 집단을 〉 3 1 ) 갖는 탁신의 관행 과 귀족들의 생활의 준거가 되는 정교한 윤리 제도, 즉 예이다. 보드 는 탁신의 관행에 관한 증거는 충분하지 못하나, 다론 경우에서는 탁 신과 예가 아주 자주 병행되고 있기 때문에 예가 존재하였다는 것은 탁신의 관행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고 한다• 우 리들에게 알려진 예는 아주 후기의 것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과 유럽의 윤리 제도와는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 제도 중에서 단 지 중국의 것만이, 그것이 퇴색되어 가는· 때에, 대사상가들이 문제를 삼아 그것을 고도로 정교한 사회에 맞도록 법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 다 . 그러므로 공자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다시 서술된 예에서 봉건 사회 초기의 예의 성격을 추출하기가 더욱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공 자가 기원전 어]기에 그 제도를 다시 개발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 다면 그 제도는 그 이전의 사회에서 아주 강력한 위력을 가졌다는 것 을 추측할 수는 있다. 봉건 시대에 올바른 행위로 간주되었던 이야기 31 ) 위 pp. 99-109. <> 안에 있는 말은 실제로 마스페로의 것이다. Revue de fln stit ut de Socio / og ie, XVI, 68 : Melang es po sth u mes, ID, 144.

가 예에서 많이 인용되었다는 사실은 예가 지니고 있었던 위력이 어 떠하였는가를 확인해 준다. 주의 사회에는 유럽의 기사와 일본의 사무라이와 비교될 수 있는 기본적인 계급인 사(士)와 더불어 귀족, 즉 군자가 있었다. 일본의 귀 족보다는 중국의 귀족에서 씨족적인 관습이 더욱 두드러지게 남아 있 었다. 이러한 씨족적인 관습이 강력히 실행될 수 있었던 것은 그 관 습이 종교적인 제재력을 가졌다는 사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그 관습은 전적으로 조상 숭배라는 의적인 표현으로 나타났다. 조상 숭 배가 상의 종교였다는 것이 고고학적인 증거에 의해 충분히 입증되었 기 때문에, 예와 탁신 제도에서 발생한 전사단 조직은 구질서에서 신 질서로 전환되어 가는 과정에서 문명화된 중국인 자신들에 의해 발달 되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것은 바바리안들 만약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바바리안이라고 하였다면 다른 바바리안들을 그 과정에서 완전히 배제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위에서 그들의 존재를 알았던 내적 바바리안과 의적 바바리안 모두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정착한 중국인들보다는 더 일 찍 전사단을 만들었기 때문에, 유럽의 바바리안과 같이 그들은 전사 단의 형성에 원초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조상 숭배의 관 습이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정착한 사람들이 새로운 윤리와 새로 운 사회의 건설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고, 단순히 바바리안에 의해 그 사회에 이끌려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보드는 주가 중국을 정복하였을 때 원주민에 가까웠다는 의미에서 주는 바바리안이 아니었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있다 .32) 말하자면 서유럽의 프랑크족처럼, 그들은 문명화된 사회의 지배권을 당연히 주 장하고 있었다. 봉건화되는 과정에서 주의 지도자들의 역할은 카롤링 저조의 지배자들의 역할과 같았다. 그들은 원봉건적인 정체를 건설하

32) 위 pp. 95-9 6.

였다.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이 세운 체제에 이런 특성이 분명히 있었다. 이 체제의 개인적인 관계와 토지 보유 관계에 관한 마스페로 의 연구는 이러한 관계가(실제로 그 관계가 어떠하였을지라도) 국가를­ 강화하기 위하여 사용되었으며, 사실상 원봉건적이라는 특유한 방식 으로 국가 구조의 일부가 되었디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그리고 그 연구는 또한 구행정 제도가 그 국가의 전체적인 구조 속에 남아 있었다는 것도 솔직히 보여주고 있다 •33) 의심할 여지도 없이 주공의 정책의 중요한 부분은 그가 건설하고 있는 정치 구조에 윤리적인 요 소를 첨가하고 있디는 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바쿠후와 같 이 중앙 집권화를 이루기 위한 어떠한 중요한 기구를 만들려고 시도 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것이 그 당시 중국에서는 분명히 가능하지 않 았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카롤링거조가 만들었던 것 과 갇은 정도의 중앙 정부조차도 없었다.

33) 이 주제에 대한 마스페로의 자료는 국(園 : 제후국 아니면 봉토)의 내적 행 정에 대체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계약 없이 행해전 봉사의 예를 수집함 으로써 제후의 왕에 대한 의무를 다루고 있으며, 자료가 애매하디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왕의 제후에 대한 의무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있다. 그는 역시 서임 의식에 관한 설명도 하고 있다•

주의 정복은 실제 정복울 하기 한 세대 전에 계획되어 왔다. 전통 적으로 생각되어 온 바와 같이, 만약 주의 문왕이 그 계획의 일부를 수립하였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문왕은 시야가 넓고 상당한 능력을 가전 사람이었을 것이다. 정복자인 무왕에 대해서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정복에 가담하였고 후에 어린 성왕의 섭정으로 봉사하 였던 주공은 중국 역사에 있어서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요리토모나 샤를마뉴와 비교될 만하다. 만약 그의 실제의 업적 이 요리토모의 업적보다 위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샤를마뉴의 업적 에는 비길 만하다. 이 위대한 인물들은 그들의 업적 때문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요리토모조차도 영구적인 체제를 확립할

수 없었고, 샤를마뉴와 주공이 만든 체제는 그 체제가 만들어진 직후 에 곧 분쇄되었다. 주의 중국, 일본 그리고 유럽에서 원봉건적인 정부 룰 안정시키고 영속시킨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사실 상 역사상에는 안정되고 영속적인 원봉건적인 정부 같은 것은 없었 다. 이러한 사람들이 평가되어야 하는 기준은 그들의 목적의 고상함 과 그들이 이룩한 일시적인 업적의 위대함이다• 주의 전통에 의한다 면, 주공이 공언한 목적은 전문명화된 세계를 통일(혹은 재통일 ) 34 ) 하 고, 평화를 재확립하고, 하늘의 의지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었다. 샤를 마뉴와 같이 그는 일시적으로 그의 목적을 실현하였다. 그는 계획된 정복을 끝내고, 혹자에 의하면 중국의 어느 왕조도 가져보지 못했던 거대한 국가를 통일하였다고 한다.

34) 만약에 상의 지배권이 있었다면 재통일하는 것이 된다.

반 세기 후에 남쪽으로 한수(漢水)와 양자 강 유역으로 새롭고 거 대한 팽창이 시작되었다 . 35) 이것은 전형적인 봉건 사회의 팽창인 것같 이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역시 일시적으로 이루어진 원봉건 사회의 균형을 깨는 칭후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종류의 팽창은 봉건 제후들이 상호간의 그리고 그들의 대군주인 왕과의 투쟁에서 그들의 세력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영토를 찾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 들이었기 때문이다. 원봉건 체제는 실제로 붕괴되었다. 우리는 언제 그 붕괴가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체제가 성립된 지 반 세기 후부터 붕괴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마스페로는 원봉건 정부의 지방 행정 관리들은 곧 귀족으로 변신하기 시작하였고 ,36) 이는 구국가의 최 종적인 몰락을 그리고 초기 봉건 체제 혹은 그와 비슷한 것의 출현

35) Maspe r o, La Chin e anti qu e(Paris, 1927), pp. 102- 1 04. 36) 실제로 마스페로는 주왕조의 말영에 그렇게 하였으며 그리고 아마 옛날과 같이 행했을〈 des I'anti qu it e> 것 이라고 서술하고 있다_아주 애매한 표현 이다 .(Revue de rInsti tut de Soc iog i e, XVI, 57 : Me/age s pos th u mes, ill, 133) Bodd, 위 p. 103-104 참조.

내지는 곧 출현할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본적인 강력 한 봉토의 출현에 대한 어떤 기록도 없다. 봉건제에서처럼 권력이 나 누어져 지방의 중심지로 분산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그 러나 지방 단위 local un it는 초기 봉건 체제에서 발견되는 그러한 기 본적인 강력한 봉토가 아니었을 가능성과 심지어 그 지방 단위는 어 떤 형태로도 진정한 봉토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최초로 알려진 지방 단위에 대해서 보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일단의 조그만 국가둘, 죽 제후국들이 존재하게 되었고(기원전 앙1 ] 기에는 적어도 100 개의 국가가 존재하였다고 알려짐), 개개의 국은 성(城)으로 둘러싸인 수도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수도는 그 주변에 그들의 생활 기반이 되는 경작지가 있었다. 〉 3 7 ) 성으로 둘러싸인 수도 는 도시이며, 이러한 정치 제도에 있어서 도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 난 것은 이 체제가 봉건 체제이었는지 아니면 도시 귀족이 정치적으 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도시 국가의 체제였는지를 생각게 한다. 유럽 의 봉건 귀족은 결코 도시인이 아니었으며, 일본의 다이묘는 제한적 인 의미에서만 그리고 후기에 들어와서만 도시인이었다. 중국의 제도 는 아시리아와 히타이트의 귀족이 전정한 봉건 귀족이 되면서 도시에 흡수되었다는, 아시리아와 하티에 대해 알고 있는 우리들의 조그만 지식과 일치하고 있다. 주의 중국 실제 토지 보유에 관해 알고 있는 우리의 지식은 귀족이 왕에게 행한 봉사와 서임 의식에서 추론된 것 이다. 우리는 계약이나 혹은 다른 형태의 협정에 의한 토지 보유에 관한 것은 전혀 알 수 없다. 봉건적이었든지 혹은 도시의 과두적인 37) 위 p. 9 7. Maspe ro , La Chin e antiq u e, pp. 24-2 5 : K Wi ttfogel , The So-cie ty of pre his to r i c chin a , Zeit sc hri/ Jfur Sozi a l / ors chung ., VD!( 1939), 182- 183 : Lati m ore, Inner Asia n Fronti er s, pp. 394-3 95 를 참조. 필자는 라티모어 가 말하고 있는 〈도시와 시골의 단위 city and countr y cell 〉 가 형성되는 데 있어 치수 사업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약간 회의적이다. 그러나 그 생각은 대단히 홍미 있고 고려해 불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귀족제였든지 간에, 주의 귀족제에 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반인과 분명히 구분되는 귀족들이 새로운 봉건적 또는 도시적 정체 의 형성기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식의 계급 구분은 부족 사회 에는 적합하지 않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계급 구분은 도시적 성격이 지배적이었는가 아니면 봉건적인 성격이 지배적이었는가에 대한 문제 롤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봉건 화되어 간 모든 사회는 뚜렷한 계급이 있었다. 그러나 도시가 형성되 면서, 그리스와 로마의 도시와 같이 도시도 계급으로 구분된 것같이 보인다 . 3 8) 그러므로 중국의 최초의 정체로서 주가 봉건 제도를 발달시 켰는지 아니면 도시 국가 제도를 발달시켰는지에 대한 결정을 유보하 지 않을수없다. 성장하고 있는 문명 사회가 도시 체제city s y s t em 를 발달시켰는지 아니면 봉건 체제fe udal s y s t em 를 발달시켰는지에 대한 질문은 실질 적이고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것을 알기 위 해서는 그리스 도시들의 고전적인 경우와, 기원전 3, 4 천 년 전의 메 소포타미아 역사의 첫 주기에 해당하는 메소포타미아를 살펴보고, 그 러고 나서 이와는 대조적으로 봉건 유럽과 봉건 일본을 살펴보는 것 이 필요하다. 이 논문의 9 장에서는 도시 국가와 전사단을 가진 바바 리안의 우두머리가 있었으나 봉건제가 없는 키에프의 러시아의 경우 를 다루게 될 것아다 .39) 러시아의 역사 상황은 아주 예의적이어서 키 에프의 정체를 도시와 봉건 체제의 절충적인 체제의 본보기로 제시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점에서도 절충적인 것이 아니었다. 왜냐 하면 키에프의 봉건적인 측면은 성장이 완전히 억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봉건적인 것과 도시가 반드시 양립될 수 없다고는 생 각하지 않으며, 이들이 항상 양자택일적인 것이라야 한다고는 생각하 38) 그러나 Z i mmern 의 견해를 참조. 아래 p. 54 처t 참조. 39) 아래 pp. 500-5 05.

지 않는다. 주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얼마되지 않은 것과 개개 의 도시-봉건적인 단위 city-feu dal unit 내에서 다소간 균형 있게 조 칙된 도시-봉건제city-f eudal ity는 일치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균형 있게 조화된 제도가 발달하였다면, 그 사회에서의 그 제도의 위치와 그 제도의 역사 발전 과정은 전정한 봉건제의 발달 과정과 아주· 유사 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나타나는 증거의 대부분이 봉건제 로의 발달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스가 한때 도시-봉건제를 갖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도 역시 우리는 모르고 있다. 만약 그리스가 도시­ 봉건제를 가졌었다면 그리스의 초기 역사에 관한 몇 가지 어려운 점 을 풀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40)

40) 마지막 장에서 도시와 봉건제의 관계와 도시_봉건제의 가능성에 대해 좀 더 논의하겠다. pp. 545-5 5 어문 참조.

4 구제국들과 그들의 유령*

* 유령 Ghos t이라는 용어는 토인비가 이 글에서 의도하고 있는 정체에 처음으 로 사용하였다. (A Stu d y of Hi st o r y, l, 342-343 and pas si m )

이 장에서는 역순으로 역사를 기술할 것이다. 앞의 마지막 두 장에 서 취급된 대부분의 사회는 그들 사회의 과거에 이미 존재하였던 대 제국에 대한 이상한 영상(映像)을 갖고 있었다. 이 책에서 유령이라 고 부르는 이 영상들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다. 왜냐하면 이 영상은 봉건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이전의 대제국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특히, 〈유령〉은 발생하였지만 구제국 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혹은 예기치 않은 지역에서 구제국이 발견되는 비정상적인 사례들에 관심을 둘 것이다. 원봉건 국가는 유령이 대제국을 계승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대제국 이 발견되기 어려운 특별한 곳에서 그 지역의 정체를 특별히 이어받 는 데 있어서 항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 분의 사례들에서 원봉건 국가란 제국을 재건하려는 마지막 시도였다. 그러나 만약 역사적 배경에서 대제국이 실제로 없었던 경우, 원봉건 국가는 그에 선행하는 나약한 정체를 지탱하려는 시도일 수 있었다. 분명히 원봉건 국가는 직접적인 의미에 있어 항상 그러한 나약한 정 체를 항상 부흥시키려는 시도였으며, 우리는 봉건제롤 반드시 직접

적이라고 할 수 없으나, 어떤 형태로든지, 중앙에 의해 지배된 나약한 구국가가 몰락한 후에 나타나는 정치 제도로만 우선 고려하겠다 .I)

1) 최소한 일시적으로 역사에 있어 봉건제의 위치에 대한 개념을 그렇게 제한 해야 되는 중요성은 보드와 필자 사이의 논쟁에서 나왔다.

서유럽의 유령 제국은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유럽 사회에 서 유령 제국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신성 로마 제국은 분명한 유령이다. 사실상 신성 로마 제국의 유령적인 특질은 유령 제국의 한 형태를 찰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신성 로마 제 국의 기원은 단순한 것이 아니며, 그 복잡한 기원 때문에 중요한 결 과가 나오게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이 일반적으로 의미 하는 것은 10 세기에 오토 대제와 교황 요한 12 세에 의해 세워진 게르 만의 신성 로마 제국 German Holy Roman Em pi re 을 말한다• 그러나 게르만 제국은 과거의 구제국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부활한 것은 아니 다. 그것은 그 이전에 부활했던 제국을 다시 부활시킨 것이며, 그 이 전에 부활했던 제국은 800 년에 샤를마뉴와 교황 레오 3 세에 의해 세 워진 제국을 말한다. 이 두 부활은 각각의 주역들, 샤를마뉴와 오토에 게 전 유럽, 아마 전 기독교 사회(유럽의 혹은 근대적인 개념을 사용 한다면 서유럽의 모든 사람)에 영향을 미치는 제국의 권위와 위엄을 수여하려는의도였다. 샤를마뉴의 권위는 바바리안이 그 권위에 저항한 곳과 구제국 황제 의 부정할 수 없는 합법적이고 직접적인 계승자인 비잔틴 황제의 권 위와 상충하게 된 곳을 제의하고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샤를마 뉴는 무력으로 일부 바바리안을 복속시켜 그의 권위를 확실히 했고 그의 후계자들로 하여금 다른 바바리안에 대해서도 그의 정책을 따르 게 할 수 있는 전례를 세웠다. 샤를마뉴는 비잔틴의 황제와 협상하였 고, 그 결과로 제국을 공식적으로 분할하게 되어, 서로마 제국과 동로 마 제국이 동등한 자격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것은 약 5 세기 전 디

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처음으로 나타났던 경향을 완전히 현실화한 것 이다. 오토 대제는 비잔틴의 황제로부터 그의 황제 칭호에 대한 인준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의 제국 내에서 샤를마뉴가 직면하였던 저항 보다도 더 무서운 저항에 직면하였다. 그는 샤를마뉴와 마찬가지로 바바리안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샤를마뉴의 제국에서처럼 봉 신제 vassala g e 는 그의 제국에서 그들에게 일종의 질서를 강제하는 수 단이 되었다. 그러나 오토와 그의 후계자들은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 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예속인 중에 보다 덜 바바리안적인 사람 둘이 그들의 권위에 도전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둘은 제국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들의 지도자 ch i ef lords 둘은 자신들의 지 배권 k i ng sh ip울 주장하면서, 황제가 그들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울 배 제하였다 . 2) 그 결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서부 또는 북부 유럽 에 대해서가 아니라, 독일과 이탈리아의 일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가졌댜 따라서 유럽에는 최소한 두 종류의 유령 제국의 권위가 생겨 나게 되었는데, 하나는 독일과 이탈리아에 국한된 지배권을 행사하는 권위이며, 다른 하나는 유럽 전역, 죽 모든 라틴 기독교 사회에 확장 되었으나 종주권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배권을 갖지 않은 권위였다. 그 리고 이 두 종류의 권위는 한 사람이 갖고 있었다•

2) 오토는 아마 이탈리아의 Beren g a 뎨― 대신한 찬탈자였을 것이다. 이 사건이 있은 뒤 25 년 후에 프랑스인들은 그들의 카롤링거조의 명목상의 왕을 제거 하고 Hug h Ca p e t를 황제가 아니라 왕으로 옹립하였다. 프랑스와 서부와 북 부에 있던 다른 지역에서의 오토와 그의 후계자들의 애매한 지위는 프랑스 의 위와 갇은 조치와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배저트 Ba g eho t와 브라이스 Br y ce 이래로 학자들은 이러한 구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 구분은 애매모호하며, 이해하기도 어려워 서 무시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분은 중요한 의미를 가졌고, 어떤 면에서는 중앙 유럽과 서유럽이 체계적으로 서로 다르게 되었다

는 것과, 이 두 유럽은 서로 구분이 되는 사회였을 것이라는 것 그리 고 이돌 두 사회 사이의 차이로 어떤 역사적 사건을 설명할 수 있다 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결과가 아주 분명하기 때문에 더 잘 알 려져 있으나, 마찬가지로 애매모호한 구분이 한 가지 더 있다. 이것은 유럽에서 교황과 황제의 권위와 위엄 사이의 구분이며, 우리는 대체 로 이것을 교회와 국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구 체적으로 교황은, 일반적으로 성직자는, 서유럽 사회의 초기에 세속 귀족의 권위와 위엄과 쉽게 혼돈될 수 있는, 가끔 혼돈되었던(만약 이것이 적절한 말이라면) 권위와 위엄을 갖고 있었다. 레오 3 세와 요 한 l2 세는 세속 제국의 필요성을 받아둘였으나, 모든 교황들이 다 그 것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고, 상당수는 제국의 권위는 애초에 교황청 에 있다고 믿었다. 황제 교황주의 Caesarop a p ist 사상은 비 잔틴에 한정 되지 않았다. 서유럽에서도 역시 제국의 권위는 성직자적인 특질을 갖고 있었다. 황제는 어떤 면에서는 교황이었고, 교황도 어떤 면에서 는황제였다. 위의 이 마지막 말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유럽이 교회와 국가로 양분되는 것은 으레 당연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 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상하고 특기할 만한 일이다 .4) 이 구분 법은 다른 사회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나, 서유럽의 경우 는 극단적인 경우이다. 서유럽과 중국을 대조함으로써 우리는 이것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국 특히 우리가 지금까지 주로 관심을 갖고 있었던 주는 정반대되는 극단적인 경우이기 때문이다. 주는 사실상 교회와 국가로 양분되지 않았다. 주의 왕은 황제임은 물 론 교황(종교적인 우두머리라는 뜻에서)이었다. 그에게 예속된 귀족들 3) 아래 pp. 430-43 5, 452-4 55 를 참조. 4) 이 문제에 대해서는 Bage h ot and Thomas Arnold as rep o rte d by Bag- ehot. Phys i c s and Politi cs, pp. 26 ff를 참조. 유럽이 교회와 국가로 양분됨으 로써 생긴 영향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아래 pp . 448 - 455 를 참조.

은 귀족임과 동시에 사제들이었고, 귀족의 토지가 바로 성직자의 토 지였다. 신성 로마 제국과 마찬가지로 주의 군주는 유령 (군주)였으 나, 신성 로마 제국과는 달리 그것은 하나의 유령이었다. 군주와 경쟁 울 할 독립된 교황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왕 (여기서 왕이라 함은 당시 중국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최고의 실권 자. 역자 주)이 통치권을 가졌다면, 그는 그 통치권을 거리낌없이 어 디에서나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주나라가 어떤 제국의 영상인지 알지 못한다. 이 문 제는 이 장의 끝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주나라는 유령 그 자체이거 나 아니면 주에 선행하였던 더 나약하였던 어떤 국가의 유령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지 모른다. 주나라가 언제 나약하게 되었는지는 말 하기 어려우나, 그 시기는 봉건 혹은 도시-봉건 체제의 성장 시기와 일치한다. 주는 바바리안에게 참패를 당하여 그의 수도를 서안의 교 의에서 낙양으로 옮겼을 때인 기원전 771 년 후에는 분명히 세력이 약 화되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갇이 주왕의 권위와 위엄은 어 디에서나 동일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에, 주왕은 분명히 신 성 로마 제국의 황제보다도 더 존경받는 인물로, 중국의 명목상의 지 배자로 남아 있었다. 서유럽의 유력한 군주들은 신성 로마 황제의 종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당시 중국에서 나타났던 다른 군주들은 주왕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주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은 그 자체가 유령 제국이었다. 일 본 제국은 가마쿠라 쇼군이 득세하였을 때인 12 세기에 해체되어 가고 있었다. 1 세기 반 동안 제국은 가마쿠라 쇼군의 보호 아래 명맥을 유 지해 왔다• 그러고 나서 아시카가 쇼군하에서는 제국은 그 실체마저 도 상실하여 단순한 환영, 죽 유령이 되었다. 궁정은 명맥만을 유지하 였을 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강력한 도쿠가와 쇼군하에서도 제국 정부는 정치적인 생명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 정체의 완전한

재건이 계획되고 봉건 구조를 마침내 폐지하려고 하였을 때인 19 세기 에 황실이 다시 소생되어 국가의 새로운 기틀이 완성되고, 황제는 가 장 신성한 합법성을 갖게 되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에서(권력 구조가) 제국과 바쿠후로 양 분되는 것과 서유럽 메로빙거조에서 군주와 궁재가 잠시 공존하였던 것은 비슷한 일이다. 이 유사성은 제국 - 바쿠후로 양분되는 것이 교회 ­ 국가로 양분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다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 나 이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구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능적으로 분류하면 이 두 경우는 약간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가 교황 이건, 중국의 황제이건 또는 메로빙거조의 왕이든 간에 신으로부터 지명을 받은 자 nom i nee of de ity가 냉혹한 현실 정치를 해나가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레오 3 세와 같은 교황은 그런 현실 정치를 할 수 있는 황제를 옹립하였다 . 궁중에 고립된 일본의 이전의 황제는 쇼군의 통치를 인정하였고, 수도사와 같은 메로빙거조의 군주는 그들 의 궁재가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용납하였다. 이들 사이의 차이점은 궁재는 권력과 위엄을 가지려 했고, 또 그것을 차지하였으 며, 쇼군은 황제의 권위를 가지려 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실 제로 황제의 권위를 획득하지 못하였으며, 유럽의 황제들은 결코 교 황(나폴레온은 신 Re 의 아들이 되는 것을 좋아하였지만)이 되려고 노 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럽에서 궁재가 메로빙거조의 왕을 대신함 으로써 제국이 처음으로 부활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리고 이러한 모든 조치가 원봉건 사회에서 발생하였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식의 지배자들이 그러한 사회의 냉혹한 정치 현 실에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단지 봉건 귀족 만이 그 정치 현실을 다룰 수 있었다. 그것은 구지배자들이 봉건 사 회에서 요구되는 정치 방법에 적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이 봉건 사회에서는 구지배자인 황제들은 신성화되었고, 유령

제국은 제도들을 신성화하였다). 개개의 유령 제국은 그들의 전임자, 즉 구제국보다도 더 명확하게 신성한 특질울 가졌고, 구제국은 정치 세력이 약화되어 봉건 사회에서 잔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성한 특 질을 가져야만 존속할 수 있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상당수의 대귀족들이 황제의 위엄을 가졌다고 주장하나, 그들은 모두 냉혹한 현실 정치에 대처하는 데 있어 다른 사회(유럽, 중국 등)의 왕, 황제와 교황이 갖는 것과 똑같은 어려움을 갖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그 권위를 주장하는 자가 많이 나 타나서 누가 진정한 유령 제국의 황제인가를 결정하기가 상당히 어렵 다. 그러나 그 황제의 실체는 기원전 l

5) 함무라비 이전에는 광범위하고 약간 보편적인 권위를 뜻하는 여러 칭호가 황제들에 의해 사용되었고, 이들 중 여러 개가 후에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에 잔존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왕중왕이라는 칭호가(만약 아시리아에서 사 용된 유일한 것이 아니라면)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 갇고, 이 민족으로부터 페르시아를 포함한 다른 민족으로 전파된 것 갇다.

이것은 제국의 신성(神性)과 관계가 있다-이 경우에는 모든 정 치 권력의 신성을 의미한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이것은 신으로부터 보

유권t enur 여t 받았다는, 죽 개개의 지배자는 〈 신의 소작인t enan t-fa r­ mer 〉 이라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모든 신들은 그들의 주된 도시 를 갖고 있고 다른 신의 권위를 능가하는 한 신에게 모든 권위를 부 여함으로써 신학적-우주론적 의미의 정치 이론이 나오게 되었다. 그 리하여 바빌론의 제국의 권위는 나머지 제 신(諸神)을 능가하는 바빌 론의 신인 마르두크 Marduk 를 숭배함으로써 확보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함무라비의 짧은 전성기 동안에 일어났으며 이 시기 동안 바 빌론이 붕괴되어 가는 와중에 구제국이 잠시 부활하였다 . 이 전성기 는 너무 짧아 다른 국가들의 제국에 대한 주장을 무시하고 바빌론의 제국에 대한 주장을 할 수 없었다. 함무라비 시대의 아시리아는 바빌 론의 동맹자였거나 아니면, 예속적인 동맹자였을 것이고, 함무라비가 단명한 제국을 부활시키는 데 가담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함무 라비 국가가 붕괴된 뒤에 나타난 혼란된 시기에 아시리아의 어떤 군 주가 그 혼란을 타개하고 제국을 다시 통일하려고 노력한 것같이 보 인다. 왜냐하면 마르두크가 아시리아의 제 1 수도의 신인 아슈르 Ashur 에게 그를 영광되게 하기 위하여 〈 4 지역의 신들을 영구히 예속시켜 누구도 피할 수 없게 하였다 〉 6) 는 비명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시 리아의 군주가 이것으로 무엇을 꾀했는지 그리고 언제 그렇게 하였는 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은 함무라비 직후에 일어났을 것이다.

6) Musee du Louvr:e : Depa rte m ent des anti qu it es orien ta l es, II , fig. 315 로부터 L. Dela p or t e 에 의해 Mesop o t am i a 에서 인용. Gordon Ch il de 가 이 책 (Lon- don, 1925, p. 309) 을 번역.

아시리아의 왕 이의에 다론 메소포타미아 왕들이 황제적인 스타일 울 취하고 바빌로니아의 군주와 경쟁적으로 제국의 계승자라고 주장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만약 아시리아의 왕만 이 그렇게 하였다면, 메소포타미아의 경우는 유럽의 경우와 유사하다 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비잔틴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서로의

권리를 인정하였지만 그들은 전정한 로마 제국의 황제의 계승자가 되 기 위한 경쟁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전 메소포타미아의 모든 왕들이 경쟁을 하고 있었다면, 그와 유사한 경우는 전적으로 비봉건 적안 사회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아마 이집트의 리비아 시기와 그 후의 유령 제국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그 유령 제국은 그 의 중심지를 곧 메뢰 Meroe 로 옮겼으며, 거기서 거의 1000 년 가까이 나 지속한 나파타 Na p a t a 의 군주국이었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그 군주국을 유령 제국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제국은 테베에 있는 아몬 신전의 사제장의 체제를 거쳐 이집트 제국 에서 직접 유래하였고, 나파타-메뢰 체제는 분명히 대제국의 영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뢰에 남겨진 봉분 8) 의 규모는 그것이 유령 제국이 아니라 실제로 제국이었을 것임을 시사해 준다. 이 체제 의 아주 강력한 신성 (神聖)은 모든 다론 유령 제국의 신성을 연상케 한다. 나파타-메뢰는 교회와 국가로 양분되기는 하였으나, 이집트에 서와 같이 그 구분은 아주 미미하였다. 나파타-메뢰 체제의 기이한 점은 이 체제의 전성기 동안 이 체제가 이집트에 기반을 두지 않았다 는 것이다. 그의 지배자들이 이 체제가 이집트에 기반을 두고 있어야 한다고 느꼈다는 사실은 이 체제가 나파타(나파타 그 자체는 그 당시 에 이집트에 속하지 않았다)에 확립되자마자 그들이 이집트를 정복한 것에 의해 나타난다. 그러나 수도를 메뢰에서 둔 이 유령 제국은 소위 말하는 〈피난한 유령 제국 re fug ee g hos t〉이다. 페르시아의 이집트 정복 의 위협 때문에 그 지배자들이 메뢰에서 피난처를 찾은 것 같다 .9) 7) 아래 pp. 436-4 38 를 참조. 8) Dows Dunham, Note s on the Hi st o r y of Kush, 850 B. C.-A. D. 350, Americ a n Jo urnal of Archaeolog y, L ( 1946), 378-3 88. 9) 다음과 같은 시대순이다. 기원전 525 년에 Camby se S7} 이집트를 정복하였 다. S ait e 조의 (제 26 왕조) 마지막 파라오 다음에 집권한 Amasi S7 } 리디아의 크뢰수스 Croesus of L y d i a 와 동맹을 맺고 C y rus 에 반대해 그에게 약간의 지원을 하였을 때인 20 년 전에 페르시아의 정복 위협의 소문이 난무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나파타-메뢰에 대해서 Dunham 은 메뢰로 수도를 이동한 연 대를 53 8\1이라고 분명하게 했다.

메뢰의 체제만이 유일하게 〈 피난한 유령 제국 〉 은 아니다. 참시 후 에 인도의 역사에 그러한 체제가 있었는지를 살펴보겠다. 특이한 비 잔틴-러시아, 다시 말하면 비잔틴의 후기 역사에서 그리고 비잔틴이 러시아로 확장하였던 시기에 분명히 그러한 제국이 있었다. 비잔틴이 정복당하고, 이교도에 의해 몰락되었기 때문에 비잔틴 제국을 모방하 여 세워진 〈 제 3 의 로마인 모스코 Moscow , the Thir d Rome 〉 는 분명히 비잔틴 제국의 유령 국가이다. 즉 로마가 비잔틴에서 단人구로 망명 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모스코는 아주 신성화된 체제였으 며, 모스코 체제가 출현하면서부터 러시아 최초의 중요한 기관이 되 었던 교회를 통하여 모스코 체제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스코 는 비잔틴에서 만들어전 황제 교황주의 제도를 그 유산의 일부로 받 았다. 이 제도는 서유럽 체제와 닮았으나 국가를, 보다 정확하게 말하 면 군주를 교회 위에 두게 되었다. 인도에서는 굽타 제국의 유령이 있었을 수도 있고 없었을 수도 있 다. 그리고 후에 〈 피난한 유령 제국 〉 이 있었을 수도 있고 없었을 수 도 있다. 하르샤 Harsha 의 국가는 굽타 제국 그 자체를 부활시킨 것이 다. 그러나 9 세기에서 11 세기의 프라티하라 제국은 시종 매우 나약한 국가였는데, 그 제국을 유령 제국으로 간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이유 가 있다. 그리고 애매모호한 약 2 세기 동안에 걸친 암울한 시기가 있 었는데, 이 기간 동안에는 동~ 데칸 고원과 남쪽에 있었던 여러 나약한 체제를 통해 들어온 모슬렘의 침입을 받아 퇴각하다가, l 心1 ] 기에 비자야나가르 V ij ay ana g ar 에 제국이 들어서게 되었다. 만약 이것 이 옳다면, 이 퇴각은 천천히 이루어졌고 여러 단계를 거치기는 하였 지만, 이집트 제국이 메뢰로 퇴각한 것과 흡사하다. 그래서 비자야나 가르는 〈피난한 제국〉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가정이 옳은

지는 확실하지 않다. 프라티하라 제국과 비자야나가르 제국은 분명히 있었지만 인도 전체에 걸친 그리고 인도의 식민 지역에 있던 수많은 단명한 국가들 때문에 이들 제국의 존재가 어느 정도 애매모호해졌 댜 프라티하라 제국은 브라만들이 성공적으로 라지푸트 국가에 주었 던 신성과 똑같은 신성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르나, 우리는 그것에 대 해 알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프라티하라의 지배자와 그들의 신민 둘이 프라티하라 제국은 굽타 제국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또는 부활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이것은 비자야 나가르가 모슬렘-페르시아 문화에 대해 힌두 문화의 진정한 보호자 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문제의 전정한 핵심이 아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과거의 정치적 영상과 구제국을 지속 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지녀왔던 정치 제도이다. 비자야나가르는 17 세기 초까지만 지속하였고, 그 이후로는 시험적으로도 굽타 제국의 유령 제국으로 간주될 수 있는 소지는 없었다. 그리고 비자야나가르 를 유령 제국으로 간주하더라도, 그 제국은 단명하였던 다른 유령 제 국보다 몇 세기 전에 멸망하였다. 그러므로 인도에서 유령 제국의 출 현 문제는 논란거리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지금 고찰하고 있는 6 개의 사회에서 몇몇 구제국은 일부 유 령 제국과 같이 분명하지만, 단 한 경우 죽 서유럽에서만 분명한 유 령 제국과 분명한 제국이 동일 사회에서 나타난다. 신성 로마 제국이 진정한 로마 제국의 유령이었거나, 아니면 진정한 로마 제국의 유령 중의 하나였듯이 로마 제국은 유럽 사회가 발생하기 이전에 있었던 대제국이었음이 분명하다. 이집트의 리비아와 인도에는 분명한 대제 국 또는 상당히 분명한 제국들이 있었다. 제 18, 19 왕조는 이집트의 대 제국이었으며, 인도의 제국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무굴 제국이 아니라 굽타 제국이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인도에 있었던 제국의 성

격을 보다 애매모호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미 이 두 제국을 이전의 제국과 연계하는 데서 발생하는 문제의 복잡성을 고 찰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집트에서는 제국들이 단절 없이 계승되었디는 · 것을 알게 되 었다. 죽 각 제국들은 한 제국이 붕괴하면서 뒤이어 계속적으로 발생 한 제국들이었다. 그 다음으로 메소포타미아, 일본, 중국이 있는데 이들의 경우에는 많은 문제가 있으며, 이 문제는 메소포타미아, 일본, 중국의 순으로 더욱 심각해진다. 이 셋 중에서 메소포타미아가 가장 다루기 쉬운데, 그의 주된 어려움은 메소포타미아의 두 주요 왕조 사이에 제국의 통 일성이 오랫동안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 두 왕조는 아카드 왕 조와 우르의 제 3 왕조였다. 아카드 왕조의 통치는 기원전 2360 년에서 2180 년에 이르는 거의 2 세기 동안 지속되었는데, 이 시기는 1 세기 이 상 동안이나 혼란과 바바리안의 지배로 인한 왕조 사이의 분열이 있 었던 시기이다. 그리고 우르 제 3 왕조의 지배도 역시 기원전 약 2070 년에서 1960 년까지 100 여 년간 지속되었다 .1 0) ,구제국들에 있어서도 역 시 단절이 있었다 . 예를 들면 3 세기의 상당한 기간 동안의 로마 제국 과 제 18 왕조에서 제 19 왕조로의 전환기에 있던 이집트가 그 예이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단절은 다른 경우에서 일어났던 것보다는 그 정도가 더 심하다는 것뿐이다.

10) 메소포타미아의 모든 연대는 알브라이트의 1942 년의 연대표를 따름. A Thir d Revis io n of the Early Chronolog y do Weste r n Asia , pp. 28- 3 6 ; tab le, p. 3 2.

우르 제 3 왕조 이후에 제국의 쇠퇴와 몰락이 시작되었다. 그 쇠되는 원봉건 체제가 나타날 때까지 약 3 세기 반에 걸쳐 오랫동안 지속 되었는데, 이 시기는 이에 상응하는 로마 제국이 몰락하는 기간보다는 조금 짧았다. 그 몰락은 점진적이었고, 첫 100 년간은 그리 나쁜 상태 는 아니었다. 그 다음에 지배권이 두 개의 중요한 국가, 죽 이신 Is i n

과 라르사 Larsa 사이 에 분할되 었다. 바빌론의 제 1 왕조는 기 원전 1830 년경에 나타났으나 · 함무라비 (기원전 1728-1686)II) 통치기의 얼마 동 안과 아마도 그의 후계자이었을 삼수 일루나 (Samsu Iluna, 기원전 1686-? )의 통치기의 얼마 동안을 제의한다면 제 1 왕조는 지방의 국가 만을 지배하였다. 함무라비의 업적은 제국의 상당한 부분을 일시적으 로 재정복하였다는 것과 법을 포함한 행정 개혁을 하였다는 점에서 유스티니아누스의 업적과 아주 비슷하였다. 카시트는 함무라비가 죽 기 전에 이미 공격을 하였고, 제 1 왕조에 나타났던 재난은 1 세기 이상 이나 지속되었으며 대다수가 바바리안 침략자였던 지방의 세력가들이 무질서하게 지배를 하고 있었다. 이 제국은 다른 제국에서처럼 중심 세력이 결코 강력하지 못하였다. 아카드 왕조하의 초기 메소포타미아 제국처럼 제국의 초기에는 비교적 느슨한 조직을 갖게 되었다. 그후 그 제국은 대개 점차적으로 더 효과적인 중앙 집권화된 제도들을 발 달시켰다 .1 2 ) 메소포타미아 제국도 완전하지는 않았으나 이러한 발달 과정을 따랐다. 우르 제 3 왕조는 효과적인 관료 제도를 만들었고, 정치 적으로 그 철정에 달하였으나 그 제국은 2세 대밖에 지속하지 못하였 기 때문에, 그 제국이 쌓은 정치 업적은 단명하였다 . 이 설명은 물론 두 제국 사이의 오랜 단절과 그 당시에 일어났던 바바리안들의 침입 울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이동해 왔던 바바리안의 집단 중의 하나인 아무루인들은 제 3 왕조 시대에도 11 ) 당대의 증거를 가전 알브라이트는 함무라비 통치기의 초기의 분열에 관십 을 기울이고 있다. 마리의 왕인 Z i m ri -L i m 의 관리였던 It ur-Asdu 는 한 편 지에서 l0 내지 15 명의 왕이 함무라비를, 이 정도의 수의 왕이 Ri m sin of Larsa, Iba!-p i-el of Eshnunnak, Amut- p i-el of Q a t na 를 각각 따르고, IO 명의 왕이 Yarim -L im of Yamkhad 를 따른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자기 혼자서 강력했던 왕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Wes t ern Asia in the Twenti - eth Centu r y B. C.(E ig htee nth , on the 1942 chronolog y), Bulleti n of the Americ a n Schools of Orien ta l Research, No. 67, Oct. 1937, pp. 26-3 0). 12) Toyn b ee, A Stu d y of Hi st o ry, VI, 36-3 7 and 37 n. 을 참조.

4 구제국들과 그들의 유령 361

아마 계속하여 이동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상 기원전 22 세기와 21 세기에 그들 자신의 생활 방식을 가진 바바리안들과 문명화된 사회의 생활 방식을 가진 문명 사회인 사이에 일종의 투쟁이 있었다. 제 3 왕 조의 지배는 문명의 힘을 확인한 것이다. 또 제 3 왕조의 지배로 많은 (대다수의) 아무루인들이 메소포타미아의 사상에 동화될 수 있었으므 로, 아무루인들은 제 3 왕조의 몰락 후에도 구사회가 추구하던 바를 지 속시키는 데 가장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신 왕조는 본질적 으로 제 3 왕조의 지배 노선을 따른 아무루 왕조였고, 바빌론의 제 1 왕 조도 역시 아무루인이었으므로 함무라비의 탁월한 업적은 한 아무루 지배자의 업적이었다. 그의에 기원전 19 세기와 그 이후의 혼란 시기 에도 메소포타미아 문화를 간직한 많은 훌륭한 아무루 왕조가 있었 다. 메소포타미아 후기의 역사에서 극심한 바바리안의 침입으로 메소포 타미아 제국들이 얼마나 약화되었는지를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몰락의 원인으로 물론 다른 요소들도 있었다. 그러나 초기의 침입으 로 제국이 결정적으로 몰락하던 시기에 후리언, 히타이트인과 그의의 바바리안이 쇄도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바리안의 반복된 침입으로 문 화가 몰락하고 그 사회가 이루어 놓은 업적이 파괴되었디는· 주장을 증명하는것이다. 그러한 불안정한 여건하에서 제국의 통일이라는 바로 그 생각이 대 부분의 문명화된 사회처럼 메소포타미아의 전통에서도 뿌리를 확고히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은 의심스럽다. 우르 제 3 왕조의 몰락 후의 정치 상황은 메소포타미아의 후기 역사에서 모든 민족 지배자들이 보편적 인 권위(만약 그 권위가 있었다면)를 주장할 수 있었던 가장 그럴듯 한 원인이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왕중왕이 되고자 하는 자가 일반 적으로 할 수 있었던 일은 추종자로 될 수 있는, 보다 세력이 약한 왕을 규합하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식의 결합이 제 3 왕조의 몰락 직후

인 이신 - 라르사 시기에 이미 두 번이나 있었다. 그 이후에 이러한 결 합은 항상 두 번 이상 있었다. 함무라비는 일시적으로 모든 경쟁이 되는 결합을 분쇄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만약 그가 분쇄하였다 해도, 제국의 권위를 주장하는 자가 다시 많이 나타나는 것을 막지 못하였 다. 그 다음으로 이신과 라르사 시대의 이원적인 지배의 근원은 제 3 왕조와 아카드 왕조 사이의 분열 시대로 거슬러 울라가며, 다시 어떠 한 제국도 존재하기 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통일 시기 가 길었던 시대는 첫번째 왕조, 죽 아카드 왕조 시대였으나, 그 통일 시기는 메소포타미아의 전통에 단일 제국의 이상을 효과적으로 정착 시킬 만큼 길지도 못하였고 통일도 철저하지 못하였다. 일본의 경우에는 전혀 예기치 않은 장소, 죽 일본이 아니라 중국에 서 대제국이 나타난다. 일본은 중국 사회권에 속하는 한 국가였고, 그 사회(중국)의 상당한 지역은 전혀 봉건화되지 않았고 그 대신에 중국 에 있었던 대제국이 붕괴된 후 3 세기 반 만에 (다시 중국 사회가) 통 일될 수 있었다는 두 사실을 고찰함으로써 이 의미를 감지할 수 있 다. 중국 사회권에 속하는 한 국가로서의 일본은 서유럽 사회에 속해 있는 유럽의 국가들과 비슷하며 ,13) 그중에서도 일본이 중국 제국의 일 부가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스칸디나비아의 국가들은 로마 제국 의 일부가 결코 아니었다는 점에서 일본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었 던 국가와도 아주 유사하다. 우리는 이 책에서, 일본과 라지푸트롤 예 의로 하고, (위에서 언급된 6 개의) 전 사회권, 아니면 적어도 몇 개의 국가를 포함하고 있었던 사회권둘의 상당한 지역에 대해 연구할 것이 다. 라지푸트는 인도의 발달에 있어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 .14) 그리 13)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러시아는 유럽에 속한 한 국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러시아는 배제되어야 한다. 14) 만약 라지푸트가 원래 프라티하라 제국의 후예라고 한다면, 라지푸트는 유 럽 역사에 있어서 샤를마뉴의 제국의 후예들과 같은 위치를 차지한다. 유럽 의 모든 국가들이 샤를마뉴의 제국에 포함되었던 것은 아니나, 핵심적인 국

가는 포함되었고, 그 핵심적인 국가 내의 그리고 그 주변 국가의 대부분의 정치 제도는 샤를마뉴 시대에서 유래되었다. 마찬가지로 라지푸트가 후기 (모술렘이 아닌) 인도의 제도의 발달을 위한 수단으로서 어느 정도 역할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정도는 역할을 하였음에 틀림없다.

하여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다론 유령 제국들은 이 유령 제국이 속한 전체 사회권 또는 그 사회권의 대부분의 지역을 포괄하고 있다. 일본의 유령 제국은 한 국가라는 한정된 규모였다는 점에서 아주 특 수하다. 일본과 다른 유령 제국이 어느 정도 유사한지는 중국 사회권의 중 심 지역인 중국이 구제국이 붕괴된 후 수세기 만에 다시 실질적인 제 국을 형성할 수 있었던, 위에서 언급된 환경에 의해 알 수 있다. 그래 서 만약 유령 제국이 반드시 봉건제를 수반하는 것이라면, 일본은 일 본 자체의 유령 제국을 가졌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사회의 중심 지역(예컨대 중국)에는 성질이 다른 제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망정 특이한 발달은 아니다. 사실상 유럽 에서도 유사한 발달이 일어났고 이 양자를· 비교하면 그 유사점은 더 욱 명백해진다. 유럽에서도 구제국은 적어도 중국과 같은 속도로 부 활되었으나 비교적 작은 지역, 죽 비잔틴에서 부활되었다. 반면에 유 럽의 봉건 지역은 상당히 넓고 많은 국가를 포함하며, 그의 유령 제 국은 유럽의 봉건 지역만큼은 넓지는 않지만 여러 국가를· 포함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창시자들은 동쪽에서 부활된 로마 제국 울 본받아 로마 제국의 제도들을 모방하려고 하지는 않았다(그들이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긴 하지만). 그들은 제국의 원래 중심 지역이었던 제국 서부의 옛 지역을 부활하려고 하 였고, 비잔틴 제국보다 더 합법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자 체의 지방적인 뿌리를 갖지 않은 일본은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 그러 므로 일본은 일본과 중국의 역사적 배경이 된 고대의 정치 제도인 한

( 漢 )제국이 아니라 당시에 구제국을 부활시킨 당(唐)제국의 모델을 따랐다. 사실상 7 세기 중엽에 야심적인 개혁인 다이카(大化) 개혁은 분명히 일본에서 동 시대의 당의 제도를 모방할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이것으로 일본의 유령 제국은 다른 유령 제국과 얼마나 많은 차이 가 나는가?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당제국은 여러 면에서 한 제 국이 부활한 것이므로, 중국에 당이 들어섰다 해도 일본 제국은 간접 적으로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 특히 한의 강력하고 완전히 문명화 된 성질은 전혀 희석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적어도 안록산의 반란이 일어나기 전의 당제국은 한제국보다는 더 크고 더 강력한 정치 체제 였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한제국과의 관계는 당제국을 통하지 않고 서도 지속되었다. 중국이 일본에 최초로 많은 영향을 끼친 때는 한시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후 1 세기에 한반도에 세워진 식민지를 통 하여 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 다른 형태의 관계는 의적인 것에서 가 아니라, 중국 제도의 기본을 형성하는 유교 원리에서 발견된다. 일 본인들은 유학을 수용하는 데 있어 당의 유학이 아니라 1 5 ) 한의 유학 에 수세기 동안 의존하였다.

15 ) G. Sansom, Jap a n : A Short Cult ur al Hi st o r y ( London, 1931 ) , pp. 225- 227. 당대의 주석이 아니라 한의 주석이 유학에 대해 정통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일본의 전(前)봉건 단계와 장구한 봉건 시대에 있어서 일본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다음의 시도가 실패하였다는 점이다. 죽 그들은 유학을 수용할 수도 없었고 그 유학을 구현하는 전정한 제국도 건설 하지 못하였다. 조그맣고 부차적인 비잔틴 제국이 유럽인에게 전정 한 제국을 건설할 기회를 주지 못했던 것처럼 중국의 전통을 계승한 당이 있었다는 사실은 일본인들에게 유학을 수용하고 전정한 제국을 건설할 기회를 주지 못하였다. 어떤 형태로든 각자의 동 시대의 모델 울 가전 일본인과 유럽인들은 그러한 모델을 갖지 않았던 메소포타

미아와 주시대의 중국보다 더 나을 수 없었다. 그들 모두다 단지 유 령 제국만 건설하였다. 그 유령 제국에서 파생되었던 형태는 그 유령 제국들의 견고성에 아무런 영향을 준 것 같지 않다 .16) 마지막으로 구제국에 대한 주제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문제, 죽 중국에서 주의 체제에 선행하는- 정체 혹은 정체들의 성격이 무엇 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우선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현재로서는 없다고 말해 두는 것이 좋겠다. 최소한 두 가지 견해가 있지만, 그러 나 현재 이용 가능한 자료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해석은 모두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한 자료는 수가 적고 불확 실하며, 아직까지 거의 사용되지 않은 자료이다. 이 자료는 바로 황하 유역의 고고학적인 자료들이다. 앞으로 발굴되어야 할 것과 비교하면 지금까지 행한 발굴은 너무 빈약하다. 말하자면 메소포타미아에서 행 한 것처럼 조직적으로 그 유역을 발굴할 때까지는 중국의 초기 역사에 대해 결정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1920 년 이전에는 인도의 역사가 기원전 2000 년 후반의 어떤 시기에 아리아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침입 으로 시작하였다고 생각하였던 점을 기억해야 한다. 마샬 Marshall, 맥 케이 Mackey, 마줌다 Maj umdar 등의 인더스 강 계곡에 대한 연구가 있은 다음, 인도의 역사는 늦어도 기원전 3000 년경, 아마 기원전 4000 년경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밝혀졌고, 인도 초기의 역사는 고대 메소 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역사와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밝혀졌 다. 현재 이 책에서 하는 연구 이의의 거의 모든 일반적인 연구에서 아마 봉건 시대에 선행하는 중국 초기의 역사에 대한 연구가 보다더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행하는 비교 연구 방법은 이용 가능한 자료에 대한 분석을 우선 요한다. 왜냐하면 대제국이 반드시 봉건 사 회에 선행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우리는 가능한 한 어떤 개념을 16) 유령과 보다 건실한 제국의 건설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아래 pp. 373- 37 峰참조.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주의 정체에 선행하는 정체는 기원전 1500-1000 년까지의 상(商)의 정체였다.)” 만약 중국에서 봉건 시대 이전에 제국이 있었 다면, 그 봉건 시기는 아마 상시대에 존재하였을 것이다――필자는 주의 봉건제가 사실상 진정한 봉건 형태에서 유래하였는지에 대한 문 제와는 상관없이 주의 중국에 봉건적 fe udal 이라는 용어를 앞으로 사 용할 것이다. 상국가의 성격에 관한 주요한 사료는 『서경(書經)』 18) 의 두 부분에서 발견되는데, 이것은 고고학적인 증거와 더불어 중국의 초기의 역사 연구에 막연한 자료가 되는 가장 어려운 고대 문서 중의 하나이다. 그 문서는 다사(多士 : 수많은 관리들)와 다방(多邦 :수많은 지역들)으로 구분되어 있다 .19) 이 책들이 진본이라고는 확실히 말할 수 없으나, 필자는 이것이 진본이라고 주장하는 크릴 H . G. Creel 의 견 해에 따르며 ,20) 아래에서 필자는 이 책을 진본이라고 생각하고 이용한 다. 이 책들은 주의 정복 이후에 상의 국민들에게 주의 체제를 받아 들이도록 하는, 주공(周公)에 의해 발표된 권고문이다. 이 권고는 천 명 사상을 구체화하였고, 후에 천명 사상은 맹자에 의하여 고전적인 17) 전통적인 연대는 기원전 1765-1123 년이나 이 연대는 너무 거슬러 올라간 것으로알려졌다. 18) Jam es Legg e (tr a ns.), The Chin e se Classic s , III : The Shoo Kin g (L ondon, 1865). 19) pp. 452-463 그리고 492-507. 20) 전본이라고 주장하는 개인적인 견해를 필자에게 알려준 크릴 교수에게 감 사한다. 그의 결정은 언어학적인 증거, 죽 이 두 책의 언어가 서주(주나라 초기 ) 시대의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銘文)과 유사하다는 것에 의존하고 있 다. 크릴 교수는 이 문제에 대해서 Ku Chie h -kang 교수와 논의하였고, Ku 교수도 이에 동의하고 있다.(크릴 교수가 필자에게 보낸 편지, 1953 년 5 월 26 일자 ; 필자의 파일에 있음) 필자는 The Great Declarati on (The Shoo Kin g , pp .281-297) 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사실울 중국 연구학자에게 알렸다. 이 책에 대해 필자에게 경고를 해준 크릴 교수와 고(故) J. J. L. Duy ve n- dak 교수에게 감사한다.

정치 이론으로 발달되었다• 이 원리에 의하면, 하늘은 지배자를- 그의 덕에 따라 선택을 하고, 천명이 바뀔 정도의 나쁜 짓을 하지 않는 한 그 지배자와 그의 후예들은 계속 통치를 한다는 것아다. (만약 지배 자가 사악한 일을 저지른다면) 하늘은 초월적인 덕을 가전 다른 사람 에게 천명을 내림으로써 지배지를· 선택하며, 그리하여 새로운 지배자 는 사악한 지배자의 지위를 차지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게 된다. 물론 주공은 주에 의한 상의 전복을 그렇게 설명하고, 그의 주장 속 에 상왕실의 초기 지배자의 한 사람이었던 탕왕(湯王)이 선조였던 하 (夏)가문의 타락한 지배자를 비슷하게 전복시켰다는 점을 포함시키고 있다. 주공이 제국을 분명히 건설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주장은 주가 정복을 하기 전에 이미 상의 군주들은 제국을 지배하고 있었디는- 것 울시사한다. 크릴 교수는 『서경』의 이러한 부분과 이 문제에 관련된 다른 자료 들에 대해 연구하였다 .21) 그는 당연히 주공의 주장을 선전이라고 의심 하였으나, 그러나 필자는 크릴이 증거를 제시할 수 없는 부분에까지 그의 비판을 확대하였다고 생각하고 싶다• 탕왕은 정말로 정복자였으 며, 그가 하마저 정복하였다는 사실을 크릴은 알았으나, 하는 제국을 지배하였다거나 그의 하정복에 의해 탕왕이 그 제국을 획득하였다는 사실을 크릴은 부정한다 .22) 크릴이 주장하듯이 주공 혹은 다론 조언자 둘이 탕의 정복에 관한 이야기를 알면서도 과장을 했을런지도 모르 나, 그러나 〈많은 부족과 국가를 포괄하고 있던 막대한 제국이 수세 기 혹은 수천 년 동안 실제로 존재하였다는 것이 반드시 허황된 것이 라고는 할 수 없고, 게다가 그것은 주의 지배자들이 처음으로 꿈꾸어 왔던 허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2 3 ) 선전을 그 21 ) Stu d ie s in Early Chin e se Cultu r e, pp. 50-6 3 and pa ssim . 22) pp. 97-131 . 그러나 Lati m ore, Inner Asia n Fronti er , pp. 298-3 06 와 대조. 23) p. 51.

럴듯하게 하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유용하며, 하나의 제국이 존재 해 왔다는 지식과 아마 그러한 제국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인식이 사 람들의 마음에 이미 있지 않았다면, 제국의 이름으로 호소하는 것은 거의 설득력이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탕왕이 하와 다른 국가를 정복 하였다는 단순한 사실 의에 주공의 연설을 순전히 조작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주공의 연설 중의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 탕왕이 상제국의 진정한 창설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그 지배권은 점진적으로 생기게 되었을 것이고, 주공은 그 자신 의 특수한 목적을 위하여 그 기원을 국화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전에 제국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기보디는- 주가 상을 정복하였을 때 제국이 존재하였다는 것이 더 가능한 설명인 것처럼 보인다. 그 제국 은 상의 정복 직전에 존재하였던 것 같으며 상의 왕들은 그 제국을 잃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상 필자는 주의 초기와 그 이전의 시대에 관한 크릴의 일반적 견해에 대해 혹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는 다른 책에 서는 상은 소왕국들의 연합체였으며 결코 중앙 집권화된 제국이 아니 었던 아카드의 사르곤의 국가와 유사하였디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24) 호후선의 갑골 문자에 대한 연구가 이 주장을 잘 뒷받침해 준다는 점 에 주목해야 하며 ,25) 크릴이 지적하듯이 그러한 정체가 초기에 존재하 였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후기의 전승이 있었다 .26) 그러나 초기의 어느 24) The Bir t h of Chin a (New York, 1937), p. 136. 크릴은 사르곤 제국에 대한 근거로 로스토우체프롤 인용한다 (A Hi st o ry of th e Anc ien t World, I, Ox- ford , 1926, 27). 25) 위 pp. 51-5 2. 26) 또 다른 중국 고문서 인 Shih Ch i n g의 한 책 인 Shang Sung< >!] 이것이 포함 되어 있다.(Ja mes Legg e , The She King ; or, The Book of Ancie n t Poetr y, London, 1876, pp. 384-3 91 ) 아 책은 주의 정복이 있고 난 다음 오랜 후에 죽 기원전 7 세기에 지방의 상국가의 산물이고, 그래서 이 책은 전동에 관한 홍미 있는 것을 포함하고 있지만, 주 정복 전의 사건에 대한 근거로서의 가

치는 희박하다. Creel, Stu d ie s , p. 54 를 참조.

시대에 어느 정도 중앙 집권화한 제국이 있었는지, 다른 경우에서처 럼 이 제국의 몰락이 마침내는 봉건제를 유발하였는지에 대해 고찰하 는 것은 여기서 아주 중요하다• 이 점에 대해 반대하는 두 학자가 있 다. 위에서 보드가 긍정적으로 인용한 구절에서 27) 마스페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국의 봉건제는 앞서 있었던 강력한 중앙 집권적인 체제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28) 라티모어는 〈문화가 발달되었으나 이 제 쇠퇴기에 있는 사회가 진화하고 있는 원시 사회와 융합되는 경우 는 없다〉고 말한다 .29) 라티모어의 견해는 본질적으로 그의 이론의 결 과이며, 이 특수한 견해는 그 견해가 함축하고 있는 것보다는 이론에 더 치중하고 있는 것 같다. 라티모어와 마스페로 둘다 주시대에는 농 업이 아주 단순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견해에 의존하고 있으나, 필 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 견해에는 회의적이다 .30)

27) 위 p.1 23. 28) Revue de flnsti t ut de Socio l og ie, XVI ( l936), 68 ; Melang e s po sth u mes, m (Paris, 1950), 144. 29) Inner As ian Fronti ers , p. 370. 30) 주된 이유는 아주 초기부터 강유역의 문화에서는 아주 발달된 농업이 필요 하다는 보다 광의의 일반 이론을 필자가 지지하기 때문이다. 주시대에 농업 이 단순하였다는 주장은 수년 동안의 경작 후에는 일단의 토지의 지력이 소 모되어 덤불을 태워 새로운 경작지를 준비하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 같으나, 이것과 관련되었다고 생각되어 왔던 상의 명문(銘文)에 있는 말, 화 전「ir e- farmi n g이라는 것은 분명히 사냥을 위한 준비로서 둘을 태운다를 뜻 하는 것이라고 보드는 밝히고 있다• 위 p. 65 와 같은 페아지에 있는 주 25) 를참조.

이 견해에 대해서 상의 후기 시대부터 주의 중엽까지 심미적인 문 화가 쇠퇴하였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다.J I) 그러나 그것은 농업 수준과 같은 문제와 관련이 있으며, 그것은 중앙 집권화에 대한 어떤 면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라티모어의 일반적인 주장을 뒤엎는 것같이

31 ) 아래 pp. 536-5 37.

보인다. 사르곤 제국과 갇이 느슨하게 조직된 지배권은 중앙 집권적 인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사실상 얼마간의 과도기를 거친 후에, 처음의 두 지배자가 효과적으로 중앙 집권화를 이룩한 우르 제 3 왕조 가 사르곤 제국의 뒤를 이었다. 다시 여러 경우에서 알려진 것처럼 느슨하게 연합된 지배권은 하나의 제국이 몰락하는 시기에 발생할 수 있었다. 호후선의 연구는 결코 중앙 집권화되지 못한 국가뿐 아니라 그러한 종류의 계승 국가가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단순한 가능성일 뿐이다• 주, 상, 하의 제국은 한, 당, 송 그리고 그의의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견실하고, 문명화되고, 강력한 일련의 제국들이었다는 것이 중국의 전 승이다. 얼핏 이 견해를 거부할 이유들이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그 이유둘은 부정적인 이유둘이고 필자는 중국의 전승이 정교한 이론과 빈약한 자료에 의해 결론지어지는 데 아주 불만이다. 안양의 발굴이 시작된 때인 1928 년에 이르도록 탁상공론가둘은 상의 도기(陶器) 연 대를 일찍이 상시대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는 생각을 비웃고, 그것들 은 한시대의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한 사실을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상의 도기들이 안양에 있는 상의 유적지에서 발굴되었다• 현 재 필자는 상의 왕을 종주로 한 소왕국들의 느슨한 연합체 였던 상의 체제를 사르곤의 체제와 비교하는 크릴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에 대해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마 이 지식 은 없는 것보다 좋을지 모르나, 아주 좋은 것은 아니다. 초기 중국 역사에 관한 자료의 결핍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봉건제의 선례에 대해 만족할 만한 일반화를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봉건제는 나약한 국가가 붕괴하였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혹은 중앙의 지배자가 관리들을 통해 지배하는 나 약한 국가의 연합체가 붕괴하면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이 장의 두번째 문단에서 고찰된 주장보다 더 나아갈 수 없다.)2)

우리는 나약한 국가 또는 국가들이 이전에는 어떤 정체를 갖고 있 었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역사에서 봉건제의 위치에 대한 가장 중요 한 문제를 미해결인 채 남겨두어야 한다. 만약 유능한 관리에 의해 아주 발달한 문화를 갖고'중앙 집권적으로 지배되었던 전정한 제국이 나약한 국가에 선행하였다면, 그러면 봉건제는 고도의 문화의 단계―― 우리는 그것을 주기라고 부른다”)__사이의 일반적인 역사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하나의 현상이다. 그리하여 봉건제는 문명 사회가 발 생할 때는 아무런 위치를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완전히 발달한 중앙 집권화한 제국을 이미 갖고 있는 문명 사회들은 갑자기 발생하지 않 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만약 토착 사회의 집단들을 기반으로 해서 통일되었던 국가가 그 이후 나약하게 되면서 봉건제가 발생한다면, 봉건제는 원시 사회에서 문명 사회로 발달하는 데 결정적인 단계가 될 수 있고, 역사에 있어서 봉건제의 위치는 아주 다르게 나타날 것 이다. 이 거대한 질문에 대한 어떤 대답도 이 연구에서는 찾을 수 없 다. 산재해 있고 또 어떤 것은 애매모호하지만, 좀더 많은 자료가 나 울 것이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해서는 마지막 장에서 완전하게 고찰 될 것이다 .34)

32) 위 p. 350. 33) 다음과 같은 것이 주기이다. 발생기로부터 우르의 제 3 왕조 후의 몰락기까 지의 메소포타미아, 후자의 시기로부터 마케메니아 제국 말기의 몰락까지. 발생을 해서 제 5 왕조에서 제 12 왕조 사이의 몰락기의 이집트 그리고 후자의 시기부터 제 19 왕조의 몰락기까지. 주기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 있어 어떤 기 계적인 혹은 다른 특별한 원리는 함축되지 않았다. 이 말의 사용에 대한 완 전한 설명을 알기 위해서는 pp. 364-3 와 p. 3 65 에 있는 주 1 )를 참조. 34) 아래 pp. 538-5 40.

5 봉건제에 대한 대안 앞장에서 설명하였던 가정은 역사의 주된 과정에서 봉건제가 대제 국의 붕괴 다음에 나타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 의 제국이 몰락하면 항상 봉건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 다. 사실상, 함무라비 이후의 메소포타미아에서 봉건제가 확산되었다 는 것에 대해 의문이 이미 제기되었다• 만약 하티와 우라르두와 아시 리아에 봉건 시기가 있었을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사회의 구문 화의 중심지였던 바빌로니아에는 봉건 시기가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 유럽 전역에서 봉건 시기가 있었던 것 갈이 보이나, 봉건 시기가 동 일한 시기에 유럽 전역에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서유럽의 전부 가 똑같이 봉건화된 것도 아니다. 독일에서는 비봉건적인 제도들이 봉건 시기 동안에도 많이 남아 있었고, 이탈리아의 대부분에서는 봉 건제가 깊이 자리잡지 못하고 겉치레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I) 한(漢)제국이 몰락한 후에 중국에서는 우리가 여기서 정의를 내린 의미의 봉건 체제는 분명히 발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초기 일 본 제국은 중국 제국의 유령이었으며, 일본 봉건제는 일본에서 중국 l) 우리는 주가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게 봉건화되었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 체제가 대제국 다음에 나타났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도 역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의 중국은 현재의 논의를 위해서는 유용한 것 이 되지 못한다.

형태의 문명화된 정체를 만드는 데 실패한 다음에 나타난 어떤 형태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대 이후에는 진정한 봉건제와 같은 것은 결코 나타나지 않았지만, 중국 자체 내에서는 한동안 미미한 봉건적 인 어떤 경향이 지속되다가, 그 다음에 여러 면에 있어서 구제국이 부활한 새로운 제국이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당(唐)제국이었다• 그러 므로 이 시기의 중국 문화권에 속한 전체 세계를 고려한다면, 중국 세계의 일부, 예를 들면 일본은 아주 완전히 봉건화되었고, 나머지는 거의 봉건화되지 않았고, 봉건화되었다 하더라도 아주 짧은 기간 동 안만 봉건화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시기 의 중국의 문화권에 속한 전체 세계는 로마 제국의 몰락 후의 전 유 럽 세계와 비교될 만하다. 중국 문화권에 속한 세계와 서유럽의 세계 도 비교할 수 있으나, 만약 비잔틴을 유럽에 포함시켜 비교한다면 더 욱 좋은 비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비교되는 두 사실에 가능 한 요소를 전부 포함시키면, 보다 분명히 비교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죽 사실상 봉건 제가 발생하지 않은 커다란 중국(중국만을 말함)과 봉건제가 발생하 지 않은 조그만 유럽 지역(비잔티움과 이탈리아의 일부)과 그리고 거 꾸로 봉건제가 발생하였던 아마 조금 작은 중국 지역(일본, 한국, 아 마 그의의 지역은 아닐 것임 )2) 과 봉건제가 발생한 보다 큰 유럽 지역 이 비교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 세계에서 유령 제국은 봉건화 된 지역에서 발생하였고 봉건화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실제의 제국이 발생하였다.

2) 만주, 티베트, 인도차이나도 역시 봉건제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필 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교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 이 것은 고왕국 다음의 제 5 왕조와 제 12 왕조 사이의 이집트이다. 사실 고 왕국은 실제의 제국이었으나, 그 제국이 몰락한 다움에 이집트의 어

느 곳에서도 봉건적 발달과 유령 제국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 제국이 몰락한 뒤 얼마되지 않아 새로운 제국, 죽 중국에서의 당 제국 그리고 유럽에서의 비잔틴 제국과 같은 실질적인 제국이었던 제 II 왕조와 제 12 왕조의 제국이 발생하였다. 이집트의 주변에는 봉건화 된 지역이 있었을 것이며, 아 지역에는 분명히 유목민인 다른 바바리 안도 있었을 것이다 . 3) 팔레스타인 - 시리아, 리비아와 상누비아 U pp er Nubia 7 } 이 지역에 속하는대, 이 지역은 일본, 한국과 그의의 지역이 한제국 시대부터 중국 사회에 소속되었던 것과 똑같이 그 당시에 이 집트에 속하였다. 말하자면, 중국의 문화가 한국과 일본으로 퍼져갔던 것처럼, 이집트의 문화가 팔레스타인-시리아, 리비아와 상누비아에 퍼져 나갔다. 문화의 전파는 구제국에서 새로운 제국으로 혹은 봉건 체제로 전환되는 모든 시기에 나타나는 한 특성이며, 그 전파는 구제 국의 몰락 이전에 시작해서 전환되는 전 시기를 통해 일어난다. ° 우 리는 원봉건 시대와 봉건 시대에 유럽과 일본에서 그러한 변화가 일 어나고 있었던 것을 이미 보았다 . 5)

3) N. Glueck, The civi l iza ti on of the Moabit es , Americ a n Jo urnal of Ar- chaeology , XXXVi ll(l93 4),' 212- 2 18 ; W. F. Albrig ht, Th e Excavati on of Tell Beil Mi rs im , II : The Bronze Ag e, Annual of the Americ a n Schools of Orien ta l Research, XVII (19 36-1937), 16 ; N. Glueck, Exp lo rati on s in Ea-ste m Palesti ne , ill, Annual of the Americ a n Schools of Orien ta l Research, XVI- X IX( l93 7-1939), 90-92,.2 6 8- 2 69. 4) Toyn b ee, A Stu d y of Hist o r y, m, 128 ff를 참조. 5) 위의 2 장 pp. 308- 3 14 를 참조.

대제국아 붕괴되었을 때, 자연히 그 제국을 부활시키는 것이 정치 가들의 목적이었다. 아직도 제국이 존재하고 있을 때, 지나간 황금 시 대에 대한 기억이 강력하게 나타난다 . 그러한 기억이 성공하지 못한 정도에 따라, 그 사회를 결속시키는 마지막 수단인 봉건제가 성장하 게 되나, 그 제국의 명성이 너무 높아서 봉건 사회에서 그 제국을 존 속시켜야 할 필요가 있거나 또는 존속시키는 것이 옳다고 믿음으로써

그 제국의 유령 제국은 유지된다. 그리하여 정치 구조가 붕괴된 문명 화된 사회에는 그 정치 구조의 회복과 봉건제라는 두 가지 대안이 있 다―_이들 사이의 전정한 절충안, 제 3 의 중간 형태는 없다 . 6) 모든 사 례에서 이러한 전환기 동안에 문화가 새로운 민족에게 전파되었고, 부활된 제국은 모든 구민족뿐만 아니라 새로운 민족의 일부를 받아들 였다. 그러나 새로운 민족이 남아 있었던 곳에서는 어디서나 봉건제 와 유령 제국이 발생한다. 만약 우리가 상의 중국에는 이미 제국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제국은 구제국이 실제 부활한 것이 아니라고 임의적으로 말하지 않는 한, 또는 서유럽 사회와 비잔틴 사회는 완전 히 분리되고 구분된 사회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부활된 실제 의 제국이 없이는 그 사회를 완전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임 의적일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하여 후자의 두 경우를 분리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사실상 서유럽과 비잔티움은 모두 로마 제국을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 마찬가지로 중국의 당, 일본, 한국 그리고 그의 의 지역들은 모두 한제국을, 모든 후기의 메소포타미아 국가둘은 우 르 제 3 왕조의 제국을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국가, 팔레스타인 - 시리 아, 리비아와 누비아는 제 1 왕조에서 제 6 왕조의 제국을 계승하였다 . 7) 6) 중간 형태가 있었는지의 여부는 이란의 경우에 재고되어야만 하는데, 이란 은 그러한 타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아래 pp.493-494 를 참조. 만약 제국이 붕괴된 다음에 가끔 도시 - 봉건제와 같은 것이 있었다면, 그 도시 ­ 봉건제는 진정한 봉건제와 대단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도시-봉건제에 대하여는 위 pp. 345-3 48 와 아래 pp. 543-5 5 어문 참조 . 7) 이웃하고 있는 사회의 사회적, 정치적 구성은 결코 완전하게 분리되지 않 았다. 분리된 주권 국가의 극단적인 경우에서와 같이 그 사회의 일부가 실 제로 그 연관성을 깨려고 할 때까지도 그 사회는 지리적으로는 항상 연속적 인 것이 인간 사회의 성격이다. 그럼에도 불구중}고 발달 과정들_성장과 쇠되의一―은 물론 어느 중심지에 집중되고, 핵심적인 중심지로부터 확산되 어 가면서 그 발달 과정은 하찮게 된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실용적으로 연 구를 진행해야 한다• 실제로 연구되는 문제들이 한 국가의 경계 내에서 발 생하였다면 연구를 한 국가에만 한정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마찬가지

로 만약 연구되는 문제가 주로 중국과 일본 그리고 비잔티움과 서유럽 내에 한정되었다면 분리된 사회적 실체들로서 이들을 연구하는 것도 타당하다. 그러나 현재의 문제는 이들 사회가 각기 분리되어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제 5 왕조부터 제 12 왕조까지의 이집트, 한으로부터 당왕조까 지의 중국과 초기 비잔티움은 모두 봉건화되었다고 흔히 말한다. 그 러므로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들은 봉건 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 보여주어야 한다• 봉건화의 과정과 제국 의 부활 과정 사이의 차이는 증명을 하는 과정에서 충분하게 나타날 것이다. 봉건화는 봉건화가 실현되기 위하여 다른 요소를 제의한 단 하나의 원인 요소에 달려 있는 단순한 과정은 아니다. 하나의 제국이 몰락하 는 데 있어 최초의 구조적인 현상은 토지와 사병과 이의에 예속인을 가전 지방 대귀족의 출현이다. 그 다음으로 그의 전사단을 가전 바바 리안이 있다. 그는 봉건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나 그의 출현으로 봉 건제가 뒤따를 것이리는- 보장은 없다. 만약 바바리안의 우두머리와 그의 전사단이 지방의 대귀족과 그의 예속인이 되는 형태로 통합된다 면, 봉건화가 진행되나, 봉건화가 완성되지 않을 수도 있다. 구제국은 반드시 철저하게 붕괴되어야 하고, 행정 기구는 유명무실한 기구로만 남아 있어야 하며, 지방의 대귀족은 바바리안 지도자의 중요한 어떤 속성을 획득하여 진정한 봉건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지방의 귀족이 유 일한 효과적인 통치 수단이 되어야 한다. 봉건화 과정의 이 마지막의 결정적인 부분은 두 단계, 죽 원봉건 단계와 초기 봉건 단계에서 일 어나는데, 원봉건 단계에서는 지방 대귀족이 구정치 제도에 도움을 주는 때이며 초기 봉건 단계는 기본적인 강력한 봉토와 그 영주가 출 현하는 것으로 특칭지어진다. 문제의 시기에 이집트, 중국과 비잔티움 에서 지방 대귀족, 바바리안들, 구제국의 철저한 붕괴, 원봉건적인 정

체와 기본적인 강력한 봉토를 찾아보기로 하자. 지방의 대귀족은 여느 때처럼 이 세 사회 모두에서 일찍이 나타났 다. 이집트에서는 주(州, nornes) 라고 불리는 이집트의 고대 지방 행 정 조직의 지배자인 노마크 (nornarch, 주총독)가 있었다• 노마크는 봉 급을 받는 임명직 관리였으나, 제 5 왕조하에서는 특히 상(上)이집트와 중(中)이집트에서(델타 지역과 구분되는 나일 강 유역) 그들은 중앙 정부가 한때 그들에게 행사하였던 권력 중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면 서, 궁극적으로 노메스의 세습 영주가 되는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 둘은 많은 면제권을 획득하였다. 특이하게 중국의 대귀족들은 남쪽에 서 아마 농노와 비슷한 예속인이었던 고(屋, k'o) 가 딸린 대토지를 획득한 씨족(확장된 중국의 가문)의 구성원들이었다. 대귀족 가문들은­ 계급적 기반 위에서 지방 관직을 장악하였으나, 중앙 정부는 아직도 약간의 세력을 갖고 있었으며, 그 세력은 이집트의 중앙 정부가 가졌 던 것보다는 더 컸었다. 그리고 지방 토지 단위에 대한 조정은 없었 다. 중국 남쪽 지방은 대부분이 새로 획득되었고, 남부 지방에는 이집 트가 가졌던 것과 같은 고대의 지방 단위는 없었다. 로마 제국 말기 의 대귀족은 잘 알려져 있다. 로마 제국의 동부의 대귀족은 디나토스 D yn a t os 였고, 그의 토지인 라티푼디움은 제국의 동부에서 서부로 전 파된 헬레니즘적인 제도라고 어떤 학자들은 주장하였다. 로마 제국 말기의 비잔틴에는 상당히 많은 옛날의 행정 구분이 있었으나, 이집 트와는 달리, 이 행정 제도는 사용되지 않게 되고, 중앙 정부에 의해 만들어지고 중앙 정부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는 새로운 제도로 대체 되었다. 대귀족의 토지가 지방 행정 단위와 우연히 일치하는 경우가 있었고, 이러한 토지는 중국의 대귀족 가문의 토지와 똑같은 일반적 인 형태이다. 그러나 비잔틴 정부는 전환기의 전 시기를 통하여 중국 과 이집트의 정부보다도 훨씬 강하였다. 비잔틴 제국의 지배하에 있는 발칸 반도 지역에는 많은 종류의 바

바리안들이 홍수처럼 몰려들었다. 비잔틴 정부는 초기의 바바리안, 고 트족, 게피드족과 알란족을 간신히 서유럽으로 내쫓을 수 있었고, 이 들은 거기에서 홍미 있는 생활을 하였다• 뒤에 들어온 바바리안은 정 착하였다. 그들의 대 무분은 은 발칸 지역의 인종적 기반을 크게 바꾸 어 놓았던 슬라브족이었다. 그들은 소아시아까지 전출하여, 새로운 요 소를 형성하였다. 불가족 Bul g ars 둘은 정복자로서 도래하였고, 아래에 서 고찰하게 될 역할을 하였다. 대귀족이 참으로 중요하였던 지역은 발칸 반도가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소아시아와 소아시아의 인접 지역이 대귀족의 주근거지였다 __ 곧 인접 지역을 이슬람에게 빼앗긴 이후로는 소아시아만이 근거지가 되었다. 이집트에는 아시아 계의 부족민이 델타 지역에 잠입해 들어와 정착하였다. 그들의 부족 장들의 일부가 파라오의 권위를 빼앗았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이 분야에 가장 정통한 학자들은 그 침입을 위협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당시 헤라클레오폴리스에서 지배하고 있던 파라오에게 그 둘은 치안 문제의 어려움만을 제기하였을 것이라고 윌슨은 주장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노마크들이 강력 한 지방 귀족으로서 확립될 수 있었던 곳은 주로 계곡 지방이었다. 중국에서는 대가문들이 주로 남쪽에서 기반을 확립하고 있던 동안에, 북쪽에는 바바리안이 들어왔다. 거기에서 그들은 치안 문제 이상의 골치거리였다 . 그들은 정부를 세워 왕조를 만들었고, 이 왕조 중의 일 부는 단명하였으나, 어떤 것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 존의 중국 생활 방식을 바꾸려고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 반대 로 아시아계 부족인들이 이집트의 생활 방식에 흡수된 것과 마찬가지 로 그들은 중국 생활 방식에 흡수되었다. 한 지역에서 바바리안 침입이 반복되고 다른 지역에서 지방 귀족이 대두하는 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것이고, 바바리안과 대귀족이 아 8) Joh n A. Wi lso n, The Burden of Eg ypt(C hic a go , 1951), p. 106.

주 긴밀하게 접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형태, 죽 바바리안과 대 귀족 사이에 일반적인 봉건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은 찰못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이집트와 중국에서는 다른 바바리 안들이 있었다. 왜냐하면 두 사회는 남쪽으로 확장하고 있었고 현지 에 있던 바바리안을 흡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바바리안들은 각 각 노마크와 중국의 대가문의 예속인과 종속인이 되었지만, 어느 곳 에서도 그들은 사회 구조의 전체적인 기반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왜 냐하면 이집트와 중국의 농민들도 역시 각각 새로운 남쪽 사회로 들 어갔기 때문이다? 북쪽의 위험한 바바리안과 마찬가지로 남쪽의 맥 없는 바바리안도 곧 흡수되어, 이집트화 또는 중국화되었다. 그러므로 이 세 경우에는 바바리안과 지방 대귀족 사이의 불충분한 접촉이라는 요인 이의에 봉건화를 방해하는 다른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다고 결론 짓는 것이 대체로 무난하다. 다른 요인이라는 것은 바바리안과 지방 대귀족 사이의 충분한 접촉을 방해하는 요인이었다. 이 다른 요인은 정치 과정을 통해서 나타났건 혹은 다른 과정을 통해서 나타났건 간 에 구문화의 살아남은 활력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0)

9) 이 두 경우에 있어서, 남쪽 지역의 일부는 바바리안이 없었던 구지역이었 으나, 이것은 사회적, 정치적 패턴에는 현저한 차이룰 만들지 못한다. 10) 다른 과정에 대해서는 아래 pp. 527 ff.를 참조. 왜 사회와 그 사회의 문화가 어떤 때는 다른 때보다 더 많은 회복력을 가지는가 하는 문제는 역사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Gi bbon 이 로마 제국의 몰락 이유 를 연구하기 시작한 이래로 학자들에게 알려져 왔다. Kroeber 의 Cori figur a- tion s of Cult ur e Growt h( Berkerly, 1944) 가 출판된 이후부터, 필자는 문화의 활력에 관한 문제가 진정한 문제라는 확신을 느끼게 되었다. 그 책에서는 문화 패턴의 고갈이라는 의미로 대답하고 있다. 그 대답은 무엇이 문화 패 턴을 고갈시키는가에 대한 의문을 다시 제기하지만, 필자는 그 패턴이 실체 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잔티움에서 바바리안 전사단이 대귀족에게 봉사하게 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국 정부는 심지어 제국 자체의 보수를 받는 군대를 감소시키고 제국의 전쟁에 궁극적으로 라틴화하지 않은

대귀족의 전사단을 고용하였다. 그 반면에 대귀족 자신들과 그들의 측근들은 라틴화한 그리스 문화에 그대로 젖어 있었다(노마크들이 이 집트 문화에 젖어 있었던 것처럼)• 북중국의 타타르와 다른- 민족의 침 입자들이 바바리안의 조직과 문화를 유지하려고 한 것도 소용이 없었 다 .II ) 그들이 그들 자신의 문화를 유지하려고 하였던 경우에 어느 경 우에도 그들의 지배는 수십 년 이상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들이 계속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들은 중국화되어야 했다. 간단히 말해, 이 세 경 우 모두에 있어서, 바바리안의 습관과 윤리는 포기되거나 아니면 구 사회와 정부의 습관과 윤리에 종속되어 하찮은 지위를 차지하였다. 원봉건적인 여건은 이집트나 중국에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비잔 티움에서 국가가 대귀족의 사병에 의존하였다는 것은 국가가 행정적 인 목적으로 대귀족을 사용하였던 경우와 같이 원봉건적인 여건에 접 근한 것이지만, 대귀족은 결코 황제의 봉신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원봉건 관계의 본질이 결여되어 있었다. 비잔틴 제국은 봉건적인 봉 신제의 특별한 봉사를 결코 필요로 하지 않았다. 비잔틴의 관료제는 봉신제가 없이도 충분히 효력을 발휘하였다.

II ) 그들의 조직과 문화는 유목적이었다. 유목적 조직이라 함은 문명화된 사회 의 변경 지방 특유의 전사단의 조직이 특수한 무리를 짓는 관습과 일반적으 로 초원의 외형적인 조건에 알맞는 다른 소소한 관습이 결합된 것으로 정의 될 수 있다. 중국의 문명화된 변경 지방에서 유목 생활이 기원하였다는 점 을 미루어보면 이 정의는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이것에 대한 라티모어의 설 명 (Inn er As ian Fronti ers , pp. 53- 7 0, 326-3 34) 은 Chadw i ck 의 듀턴과 그리 스 영웅 시대의 전사단의 성장에 대한 설명 (The Heroic Ag e, pp. 4 32-463) 과 비교될 수 있다. 그리하여 문명화된 사회에서 유목민에 의한 침입은 바 바리안에 의한 침입과 똑같은 영향을 갖는다. 유목민은 여기서 사용되는 의 미의 바바리안이라는 범주에 속한다•

이 세 사회 중에서 어떤 사회도 원봉건 시대에 도달하지 못하였으 므로, 강력한 봉토의 출현을 야기하는 원봉건 시대 다음에 나타나는 투쟁이 없었다. 이집트의 노메스는 파라오의 권력이 약해지면서 봉토

가 되었다는 )2) 자크 피렌느Ja c q ues P i renne 의 이론은 봉건제의 본질을 찰못 이해하였다. 기본적인 강력한 봉토가 형성되기 전에 무질서가 오래 지속되고 구정부가 사실상 완전히 붕괴되어야 하는데(혹은 그에 상응하는 어떤 다른 과정이 요구되며) 피렌느는 그것에 상응되는 것이 라고 생각될 수 있는 어떤 것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집트에서도 그리고 다른 두 사회(중국과 비잔티움)에서도 구행정 제도는 일시적 으로 붕괴되었을 뿐이며, 이집트에서 구행정 제도가 가장 효과적으로 유지되었던 곳은 노메스였다. 중국과 비잔티움에서는,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어떤 특별한 안정성을 가진 지방 단위는 형성되지 않았다. 이 두 사회에서는 그것이 개인 소유의 토지였건 혹은 행정 단위였건 간에 그러한 단위는 유연성을 갖고 있었고, 만약 그 단위가 행정 단 위였다면, 중앙 정부의 의지에 따라서, 혹은 만약 그 단위가 개인 소 유의 사적 토지였다면, 상속과 그의의 다른 방법으로 그 단위는 바뀌 게 되어 있었다. 노메스는 예의적인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문제를 삼 고 있는 시대로부터 약 2000 년 전에는 노메스는 봉토였을 가능성도 있으며, 그래서 아주 막강한 세력을 가졌을런지도 모른다 .13) 다시 노 메스는 기원상 관개나 강의 통제와 아마 연관되었을 것이고, 이것은 이집트의 존속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이며, 협동적인 기반 내 지는 강압적인 기반 위에서 수행되었을 것이다. 이때, 기본적인 강력 한 봉토가 적절한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전이기는 하지 12) Hi st o i re des ins tit ut i on s et du droit pri v e , I , 248- 2 49 and pa ssim ; La feo daliti e en Eg ypte, Revue de 「 Ins tit u t de Socio l og ie, lnsti tut s Solvay, Brussels, XVI(l936), 15-35. 피렌느가 봉건제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신때문뢰에하,기 제어 5 렵왕다조.와 그 제의 6 왕견조해의는 이다집음트과가 갇 다몰.락 죽하 는파 라과오정의에 이대마한쿠 그 im의 a k견hu해-는— 측근자라는 의미를 지닌 말임 __ 는 신으로서의 파라오를 숭배히는· 사제가 되었고, 그리하여 그들은 노마크로서 그들이 행사할 수 있는 막대한 지방의 세력을 획득하였다는 것이다. 13) 아래 pp. 540-5 42 -2} p. 542 에 있는 주 16).

만 노메스가 한때 봉토였다면, 그후로 노메스는 봉건적인 특질을 나 타내었을 것이고 , 강력한 힘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 5 왕조와 제 12 왕조 사이의 붕괴 시기에 바로 이 강력한 힘이 봉건화에 효과적인 장애물이 되었다. 이집트, 중국, 비잔티움은 각각 이집트의 고왕국, 한제국, 로마 제국 이 붕괴되고 난 디음에 봉건화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제 증명되 었다. 봉건화되어 간 지역들은 보다 규모가 큰 지역, 죽 서유럽에서는 북프랑스, 남프랑스, 부르군드 동과 같은 단위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하티, 미타니 등과 같은 단위로 나누어지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렇게 광대하게 나누어전 지역은 후기에 오면 대부분이 규모가 다른 지역으 로 세분되었으며, 초기에 광범위하게 나누어전 지역은 불안정하였고 봉건화 과정과 비교해 보아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비봉건적인 지역 도 대단위로 나누어지는데, 중국에서는 세 개, 이집트와 비잔티움에서 는 두 개의 대단위로 역시 나누어지게 되었고, 정치적인 분열 과정은 노메스의 세력이 강력했던 이집트를 제의하고는 보다 규모가 작은 지 방적인 차원에서 진행되었던 것보다도 더 현저하게 나타났다. 그 분열 과정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는 그 당시의 특수한 영향과 더불어 자연 환경, 인종과 역사에 따라 발생한다. 비잔티움은 로마 제 국이 붕괴하였을 때 나타난 국가 중의 하나이나, 그 뒤 7 세기에 분열 되었고, 불가의 칸국 Bul g ar Khana t e 은 비잔틴 제국 자체로부터 떨어 져 나갔다 . 이슬람에게 동쪽의 모든 지역과 소아시아의 남부 지방울 빼앗긴 것은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그러한 분열은 물론 아니다. 이것은 동종이 아닌 분리된 두 사회 사이의 두쟁의 산물이었다. 비잔 틴과 불가리아는 인종적, 자연 환경적인 결정 요인에 따라 분연히 구 분되었다. 인종적으로 그리스-슬라브인 비잔틴에 대해서 불가리아는 불가 - 슬라브인이었다. 동서로 뻗은 발칸 산맥은 자연 환경적으로 경 계선을 이룬다.

중국에서는 한제국이 몰락하였을 때 나타났던 세 지역은 자연 환경 적으로 그리고 인종적으로 분명히 구별되며, 현대의 사천에 해당되는 촉한(蜀漢)은 그 당시의 역사적 변천을 이겨내지 못하였지만, 나머지 두 지역, 즉 북조와 남조는 그 변천을 이겨 나갔다. 남쪽이 현지에 있 는 바바리안을 흡수하였던 반면에, 황하와 양자강 유역 사이의 경계 선에 의해 구분되는 북조는 타타르족과 터키족을 받아들였다. 이집트 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자연 환경에 의해 나누어졌다. 즉 북쪽은 델 타 지방이고, 남쪽은 계곡 지방이었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 이 아시아적인 부족인이 델타 지역으로 침입한 것은 중요하지 않았 다. 제 6 왕조와 제 11 왕조 사이에 이집트는 대부분이 테베의 국가들과 헤라클레오폴리탄 국가들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국경은 델타에서 남 쪽으로 200 마일 떨어전 시우트 S i u t에 있었다. 그것은 결코 고정된 국 경선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특수한 여건이 어떻게 환경의 영향을 다 양하게 바꿀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국경선이 그렇게 아주 남쪽에 놓여 있었다는 것은 델타 지역이 통일되었을 때 델타 지역과 계곡 지 역의 상대적인 세력의 척도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델타 지역이 항상 통일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제 11 왕조가 무력으로 남 쪽 계곡으로부터 전 지방울 다시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분열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약 통일을 하지 못하였다면, 제 6 왕조 시대에 제 국이 몰락하였을 때 잠시 동안 그랬던 것처럼 두 국가가 아니라 셋 또는 그 이상의 국가로 분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제 6 왕조가 붕괴하였을 때 있었던 단명한 국가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고, 기원전 心i 1 기에 중국의 북쪽이 붕괴하였을 때 중국 의 북쪽에서 발생한 단명한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국경 너 머에 있는 새로운 지역 한국과 만주에서도, 역시 작고 단명한 국가들 이 있었고, 이집트의 국경 밖에 있던 팔레스타인-시리아에서도 마찬 가지였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은 중국 본토의 주요한 두 국가와 갇이

일관된 단일 국가를 오랫동안 형성해 있었고, 자연 환경적으로 서로 분명히 분리되어 있었다. 이런 현상은 팔레스타인 - 시리아에서는 후대 에 이르기까지 발생한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시리아 내륙 지방에서 나타났던 카데쉬 Kadesh 와 같은 도시 군주제 c ity -monarch y는 이집트 문화를 몰아내기 시작하였던 메소포타미아의 문화가 이 지역에 침투 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꽤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국가들(중국의 북조와 남조, 촉 한, 한국과 일본, 이집트의 델타 지역과 계곡 지역, 비잔틴 제국과 불가 칸국)은 민족 국가 na ti o~ 간주되어야 한다. 사실 자연 환경적, 인종 적, 역사적 그리고 이들 사이룰 구분짓는 그의의 구분선은 민족 국가 가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주요 수단의 일부로 쓰여질 수 있다 .14) 이 민족 국가들은, 봉건화되어 간 지역에서 마침내 성장한 민족 국가와 는 어떤 중요한 면에서는 다르지만, 두 경우 다 민족 국가라고 불러 야 한다. 왜냐하면 봉건화된 지역에서 성장한 민족 국가들도 비슷하 게 지리적으로 그리고 어떤 다른 방법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 한 방법 중의 하나는 그들의 지배자가 황제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것 이며, 어떤 경우에는 민족 국가적인 정부가 제국 정부의 방법을 모방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봉건 유럽에서 왕들은 신성 로마의 황제의 칭 호와 실제 권력을 모방하거나, 로마법에 나타나기만 하면 심지어 로 마적인 통치 형태와 더불어 로마 황제 자체의 권력까지도 모방하였 다. 중국 본토의 여러 민족의 지배자들은 중국 황제의 정부와 위엄을 모방하였다. 마찬가지로 불가의 칸은 비잔틴 황제가 지녔던 권력과 위엄을 갖추었다. 봉건화되어 간 지역에서 왕국들은 봉건제의 말기 또는 그 이후에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이러한 민족 국가(왕 국)들이 잠재적으로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 안 봉건적 발달이 그들이 국가를 형성하는 것을 방해하였다는 것이 14) 아래 pp. 398-400 ½ 참조 .

다.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고찰할 것이다. 우리가 연구해 온 세 제국이 실제 다시 통합되면서 나타나는 특징 둘은 봉건 체제에서 일어나는 발달과 어떤 점이 유사하며 어떤 점이 상이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중국 제국은 탄생하면서부터 봉건 체제와 아주 다르게 나타 난다. 1 세기 동안 당의 정부는 강력한 · 중앙 집권제를 취했고 ,15) 역대 중국 정부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정부만의 특성인 비교적 강력한 법을 발달시켰다 .16) 토지를 재분배하여 농민이 균등하게 토지를 보유하게 한 제도”)(한이 몰락한 직후에 발생함)는 아마 대가문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런 제도가 실시되었든자 또는 안되었든 지 간에, 그것은 당정부와 그 이전의 정부인 중국 정부에 활력이 있 었다는 증거이다. 당의 체제는 한의 체제와 상당히 유사하지만, 차이 점도 많이 있다• 이 차이점 중의 하나는 당이 군대에 더 의존하였다 는 점이다. 군사 도독(都督)은 변경 지방과 제국 내의 전략적으로 중 요한 지역에서 지방의 행정을 감독하였거나 혹은 행정을 담당하였다 .18) 이것 역시 군사적인 봉건 지배와 비교될 수 있는 중요한 것이다. 잠 시 후 이 문제를 다시 살펴보겠다.

15) R. des Roto u rs, Les gran ds Jon cti on nair e s des pr ovin c es en Chin e sous la dyn a sti e des T'ang , T'oung Pao, XXV(1927), 220;id e m, Trait e desJ on e- tion nair es et tra it e de fa rmee tra duit s de la nouvelle his t o i r e des T 'ang (Chap. XLVI-L), 1 (Leyd e n, 1947), lxvii -lxxi . 16) K. Bunge r , Qu ellen zur Rechts g e s chic h te der T'ang -Z eit (P eip ing , 1946), Monu- menta Seric a, Monogr aph II. 이 법은 본질적으로 형사 처벌법이었다―― 중국인들은 그것을 처벌이라고 한다. 17) Des Roto u rs, roung Pao, ID, 321-3 23. 18) Des Roto u rs, T'oung Pao, ID, 235 ; Trait e desJ on cit ion nair es , II (Leyd e n, 1948), 684, n. 2 ; 707, n. 2.

비잔틴의 경우에 제국의 부활은 분명히 봉건제의 대안이었다는 것 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비잔티움은 봉건화되어 간 지역에서와 같이

치안 문제에 봉착하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이 동, 서로 양분된 것은 초기에 있었던 하나의 붕괴 과정에서 하나는 봉건제, 다른 하나 는 제국의 재건이라는 상이한 두 개의 발달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다. 동부에서 새로운 생활의 첫 칭후는 5, 6 세기의 전환기에 아나스타 시우스 1 세의 재정 개혁으로부터 나타난다. 조세 제도의 개선으로 제 국 정부가 꽤 오래전부터 그의 신민들의 부담을 경감시켜 주었으며, 이것은 콘스탄티노플 정부가 서부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게 되었을 때 가능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여하간에 아나스타시우스의 개혁의 결 과로 도시의 관리들은 아우렐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가 제국의 모순된 구조를 유지하려고 시행하였던 국단적인 조치인 세 금울 징수하고 그들의 관할 지역의 토지세의 부측분을 메워야 하는 부담에서 해방되었다 •1 9 )

19) J. B . Bury , Hi st o ry of the Late r Roman Emp ire, I (London, 1923), 441- 447. 시 관리둘은 그들의 의무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않았고 후에 부분적으 로 다시 구제도로 환원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적어도 아나스타시우스: 개 혁의 일부는 영구적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와 더불어 다른 의미 있는 사건들이 발생하 였다. 아래에서 곧 고찰할 그의 일시적인 전 제국의 부활은 차치해 놓고라도, 대귀족에 대한 그의 공격과 그의 새로운 정부에서 사용하 였던 방법들은 중요하게 되었다. 제국의 서부에서 대귀족들이 그들의 세력을 증진시키고 있었지만, 동부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가 그들의 세력을 억압하려고 시도하였다. 그의 많은 후계자들은 그 정책을 답 습하였으므로 7, 8 세기에는 그들의 세력이 줄어들었다. 긍정적인 측면 에서는, 후에 뎀제라고 불렸던 제국의 새로운 제도가 발달하였다. 그 것은 군사 제도(중국의 당의 제도보다도 더 분명하게)였고, 그 제도는 대개는 제국의 속주(屬州)둘이 완전히 재정복되기 전에 그 주를 군사 총독 ma gi s t r i m ilit um 에게 말기고, 일반 행정을 그들이 관할하도록 한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어)기 말에는 라벤나와 카르타고

의 태수직도 이 기반 위에 조직되었고, 페르시아에 대해 최 후 의 승리 를 한 후에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이 조직을 제국 전역에 실시하였다. 그후 마케도니아 왕조까지의 모든 왕조는 활기를 되찾은 제국의 특징 적인 구조에 새로운 요소를 가미하였다 . 20) 템제도가 바로 비잔틴 제국 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20) A. A. Vasil iev , Hi st o r y of the By za nti ne Emp ire , I (Madis o n, 1928), 275- 279, 305- 3 06, 423-426 ; II (Madis o n, 1929), 147-1 58 ; G. B. Ive 아 반격 한, C. Die h l, Hi st o r y of the By za nti ne Emp ire ( P r inc eto n , 1925), pp. 46-5 0 를참조.

이 군사화한 정부는 봉건제의 중요한 목적을 몇 가지 수행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로부터 헤라클리우스까지 그리고 그 뒤로 간간이 비잔 티움은 내적, 의적인 적에 의해 포위되었다. 슬라브족 , 불가족 그리고 근거를 빼앗긴 토착인들은 극도로 심각한 치안 문제를 야기하였다. 페르시아인과 그 뒤를 이어 아랍인들이 동남쪽에서 제국을 공격하였 다 . 봉건 사회에서는 지방의 대귀족과 그의 가신들에 의해 그러한 위 험에 대처하였는 데 반하여, 비잔티움은 군사화된 제국의 군대로서 그 위험에 대처하였다. 이 제도의 근본 특칭은 군사적인 봉사의 대가 로 받으나, 양도할 수 없는 스트라티오티콘 데마 s t ra ti o ti kon kte m a, 죽 군인 보유지에 정착한 농민군이었다. 이 제도는 구로마 국경 지방 의 정착민 제도와 비교될 수 있으며 비잔티움 제국 전역에서 일반화 되었다. 때때로 이 제도는 봉건적이라고 설명되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다. 봉건제와 같이 뎀제는 토지가 많은 전사를 양산하도록 하는 한 방법이지만, 봉건제와는 달리 강력한 관료 제국이 토지로 하여금 전 사를 양산하도록 하는 방법이며, 이 방법에 의해 정치적 권위가 지방 귀족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본다면, 비잔틴 제국의 세력은 인상적이며, 부활된 중국 제 국의 세력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제국 중에 어느 제국도 이루지 못한 과업이 있었다. 그 과업은 그 사회의 영토, 즉 구

제국 시대에 혹은 그 이후에 고도로 발달한 문화가 새로운 민족에게 전파됨으로서 크게 확장된 영토(양제국에서 모두 영토가 확장됨)의 통일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중국은 비잔틴보다 훨씬 나은 업적을 이루었다. 왜냐하면 수, 당 제국은 한보다 더 크게 확장 되었고, 중국 문화권에 속한 영토 가운대 조그만 지역(이 지역 전부가 다 새로이 문명화되었다)만이 재통일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는 반대로 중요한 지역이 재통일에서 빠졌고, 여기에는 새로이 문명 화된 지역뿐만 아니라 구제국의 중심지인 로마와 시실리와 이탈리아 의 일부를 제의한 전 서유럽 지역이 포함되었다. 이 새로운 두 체제가 그들의 권위를 전 문명화된 사회에 확장하려 고 했던 노력은 인상적이다• 유럽에서 그 노력이라는 것은, 결국 재앙 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시실리와 이탈리아의 일부를 영 원히 비잔틴의 지배하에 두려는 유스티니아누스의 노력이다. 중국의 노력은 유럽보다도 더 성공적이었지만, 실제 유럽보다는 더 많은 노 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럽보다는 중국이 더 잘 결집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역시 제국에 통합되는 것에 대한 저항이 극심하였던 때가 있었고, 그 저항을 분쇄하려는 시 도가 재앙으로 끝난 적이 있었다. 수의 두번째 황제인 양제는 한국을 정복하려고 하였다• 그는 이 전쟁에서 참패하게 되었고 이미 달성된 재통일이 무산되고, 수는 몰락하였다• 그리고 최초의 수황제인 양견과 같이 재통일 사업을 되풀이 한 당왕조로 정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이 것은 당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려는 마지막 노력이 아니었으며, 반세기 뒤에 당의 도움으로 신라가 한국을 통일하였을 때, 한국은 명목상으 로 중국에 예속되었다. 우리가 부활된 이집트 제국에서의 이와 상응하는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은 불행한 일이다. 분명히, 연대와 그 사건의 세세한 부분은 불확실하다. 제국울 부활시켰던 제 12 왕조는 후에 팔레스타인

과 시리아를 정복하려고 하였었는지도 모른다 • 2 1) 그러나 제 12 왕조가 실제로 정복했건 또는 안했건 간에, 제 18 왕조는 분명히 그곳을 정복 하였다. 그 정복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았지만, 이집트가 제국을 부 활하는 데 있어 이룬 업적은 중국이나 비잔틴의 업적 중의 어느 것보 다 대단한 것이다 .22) 이집트의 중요한 제국 부활 작업은 중국이나 비 잔티움과는 다르게 행하여졌다. 그것은 행정을 군사화함으로써 이루 어전 것이 아니다. 그 대신에 노마크들의 독립적인 세력을 제거하는 문민적인 수단에 의해 이루어전 비교적 단순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행정적으로는 단순한 과정이었지만, 그 부활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기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이 있었고, 제 11 왕조가 노마크의 세력을 너무 과도하게 억압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제 11 왕조는 제 12 왕조에 의 해 전복되고 대치되었다는 것은 아마 훌륭한 추측일 것이다 .23) 다른· 한편으로 제 12 왕조의 몰락 과정은 세누세르트 Senuser t 3 세때까지 1 세 기 이상의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중국이나 비잔틴과는 달리 노메스 21) 여기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W. F. Albrig h t, wNew Eg yptian Data on Palesti ne in the Patr ia r chal Ag e, Bulleti n of the Americ a n School of Orie n ta l Research, No. 81 (February 1941 ), pp. 16-21 ; Albrig h t, wThe Land of Damascus betw een 1850 and 1750 B. C., Bulleti n of the America n Schools of Orie n ta l Research, No. 83(0cto b er, 1941 ), pp. 30-36 ; J. A. Wi lso n , The Eg yptian Mi dd le King d o m at Megi dd o, Ameri- can Jo urnal of Semi tic Langu a g e s and Lit er atu r es, LVII (19 41), 225-236. 그 러나 윌슨은 l0 년 뒤에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The Burden of Eg ypt, pp. 134, 136. 22) 만약 제 12 왕조가 그 지역을 정복하였다면 이집트가 팔레스타인-시리아를 복속시키는 것을 방해하였을 그리고 제 12 왕조가 그 지역을 정복하지 않았다 면 그 지역으로 먼저 진출하였을 힉소족 앞에 이집트가 몰락하였다는 것은 부활된 체제의 세력의 한계를 제시하지만, 힉소스의 군사적 세력은 메소포 타미아의 세력이어서 이집트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세력으로 이집트에 대 적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23) Dr iot o n and Vand i er 에 의한 추측이다 (Les pe up le s de fo rie n t Medit er ra- nen : Il . L'Eg ypte, Paris, 1938, pp. 247-248).

의 특수한 성격 때문에 천연되고 주의깊은 정책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집트의 이러한 정책과 봉건제 후기의 어 떤 군주의 정책, 예를 들면 프랑스 군주 사이에는 아주 놀랄 만한 유 사점이 있다. 우리가 디음- 장에서 살피게 되는 바와 갇이, 그들은 주 로 법적이고 행정적인 방법에 의해 점진적으로 그리고 교묘하게 그들 의 대봉건 제후를 억압하였다. 제 5, 6 왕조하에서 노마크들이 권력을 획득한 것은 분명히 비봉건적이라고 할지라도, 이 문제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학자들이 노마크가 후기 봉건 체제 혹은 제 12 왕조 하의 원봉건 체제와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 것은 무리가 아니 댜 여기에는 명백한 유사점 이의에는 차이점은 없다. 그러면 이 부활된 세 제국들 사이에는 실제 어떤 유사접이 있었는 가? 표면상으로는 이집트와 다른 두 제국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 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집트의 정부는 문민 정부였고 비잔틴 정부와 중국 정부는 군사화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잔틴과 중국 정부 사이에도 군사화된 정도에서 차이는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차 이는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 이들 세 국가가 제국적인 확장을 하는 데 있어서 세 제국이 모두 같았고 각국이 성공한 정도의 차이는 내 적, 의적 원인들로 설명할 수 있다. 새로운 중국과 이집트 제국은 비 슷하게 구제국보다 컸고, 새로이 병합된 영토와 구영토와의 관계는 이 두 제국의 경우에는 비슷하였다. 만약 시리아-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집트의 첫 정복이 제 18 왕조때에 일어났다면, 이집트가 시리아-팔레 스타인을 정복한 것은 힉소스의 이집트 정복에 대한 반발이었을는지 모른다언 한국과 일본을 정복하지 않았던 중국은 결코 이들 국가로부 터 정복될 위협을 받지 않았다. 사방에서 적들로 둘러싸이고 바바리 24) Wl i son 은 그렇게 생각한다 (The Burden of Eg ypt, pp. 166-167). 이 문제에 있어서 이집트와 중국 사이의 차이는 국경 지방에 압력을 가하는 문명화된 이웃 사회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다 .

안들이 물밀듯 몰려왔던 비잔틴은 순전히 군사력 때문에 중국과 이집 트처럼 확장할 수 없었다. 만약 비잔티움이 키에프 러시아를 정복할 수 있는 군대를 가졌다면, 키에프 러시아를 정복하였을 것은 분명하 다. 그러나 그리스와 로마라는 이중성은 그들 사이에 반작용을 하였 으며, 비잔티움이 보다 덜 확장된 이유를 찾는 데 있어 이 사실을 고 려하여야 한다. 비잔티움은 그리스 문화권에 속하였으며, 그리스가 정 치적으로 로마화하였다는 제한된 의미 의에 로마 문화권에 속하지 않 았다. 이 새로운 세 제국이 확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세 제국 모두 지방주의 par tic u laris t 운동의 위험에 직면하였고, 이 사실은 이들 제 국들의 성격에 본질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 제국이 부활된 후 1 세기 반 뒤에 바바리안 출신의 군사 지도자이며, 지방 행정에 관심 을 갖고 있던 관리들을 선동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던 안록산은 반란 을 일으켜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 반란 이후로 군사적인 세력 을 가진 자가 지방의 지배권을 갖게 되었고, 황제의 권위는 상당히 감소하였다. 결국 당왕조는 사실상 반란에 의해 전복되었고 그리고 그들의 세력을 지방에 둔 군사적 모험가(대부분이 바바리안 출신이 다)들 사이에 반세기에 걸친 전쟁이 계속되었다. 이집트와 비잔티움 에서는 사태가 이보다 더 악화되지는 않았지만, 지방의 대귀족은 이 들 국가들에서도 여전히 위험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디나토이는 6, 7 세기에 세력이 약화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남아 있었고, 그들은 끊 임없이 뎀제의 군인을 지배하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그 군 인들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할 위험은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는 노마크롤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세누세르트 3 세가 노마크의 마지막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으므로, 본질적으로 비군 사적인 정부였던 이집트는 세 제국 중에서 가장 안전하였지만). 봉건 정체와 비교해 보면, 이들 제국 정체들의 지방주의 경향은 의

미가 있댜 이 세 경우에서 지방 단위의 기원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더 욱 의미가 있는데, 이집트에서는 유서 깊은 노메스, 비잔티움에서는 고 정된 단위는 아니나 고대의 사회 제도인 디나토스, 중국에서는 군사적 인 모험가들이 임시로 차지하였던 지역이 지방 단위의 기원이 되었다. 봉건 사회에서 기본적인 봉토는 기원상 이러한 성격 중의 일부가 아니 떤 전부를 가지며, 마지막의 성격, 죽 중국적인 성격은 분명히 갖고 있 었다. 따라서 지방주의의 경향은 봉건화되어 간 사회와 봉건화되지 않 았던 사회에 모두 공통으로 나타나는 경향이었다. 봉건화되지 않은 사 회가 봉건화될 수 없었던 것은 이러한 지방주의가 결여된 때문은 아니 었다. 따라서 이 점에 있어서 두 사회는 같은 점에서 출발하였다. 봉건 제는 관료 구조가 너무 약해 지방주의 경향을 극복할 수 없을 때 필요 한 수단이었다• 제국이 부활된 후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던 중국의 경우 에도, 지방 세력의 우세는 단지 2 세기 동안만 지속되었다. 게다가 그것 도 2 세기 중 무정부 상태에 달하였던 마지막 반세기 동안만 지속되었 다. 그 이전에는 당의 후기의 지배자들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야심적 인 지방의 지배자들에 대항하여 위태롭기는 하지만 국가를 지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 다음에 송에 의해 새로운 부활이 있었고, 후기에는 초 원 지방으로부터 침입을 받았지만, 10 세기와 20 세기 사이에 제국의 구조가 다시 심각하게 혼들린 적은 결코 없었다. 다른 두 제국은 그 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았으나, 이들 제국이 지속한 기간도 역시 인상 적이다• 이집트 제국은 항상 팔레스타인 .,; 시리아를 지배하지는 않았 다. 그러나 이집트는 모든 나일강 유역 지방을 거의 1000 년 가까이나 지배하였고, 그 뒤 이집트 내부의 타락으로 서서이 쇠퇴하기 시작하 였다. 비잔틴 제국은 아나스타시우스 1 세때부터 정복에 의해 몰락할 때까지 약 1000 년 가까이 지속하였다.

6 후기 봉건제와 국가들 우리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회들의 정치적 발전은 일반적으로 거의 갇은 과정을 밟아왔다. 그 정치적 발전은 구제국의 붕괴로부터 시작하여 신제국의 건설에 이르는 과정이다. 중국은 처음에 구제국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한 사례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주의 중국은 꽤 일찍부터, 죽 우리가 원봉건 단계라고 부르 는 시대거나 아니면 원봉건 시대 이전부터 일반적인 발전 과정에 돌 입하였다. 그리고 아직 새로운 제국이 건설되지 않은 두 사례가 있는 데, 서유럽 사회와 현재의 중국 사회권이 그 경우이다. 그러나 이들 사회는 각기 마치 새로운 제국을 건설한 단계에까지 접근한 것처럼 보인다. 구제국이 몰락하고 신제국이 건설되는 중간기에는 항상 민족 국가 na ti on 들이 있었다. 우리는 앞장(章)에서 구제국에서 민족 국가로 그 리고 그 다음에 보통 규모는 더 크지만 여러 면에서 구제국이 부활한 신제국으로 단순히 발전해 가는 사회들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이제 이보다 더 철저하게 몰락하였고, 봉건제에 의해 치유되어야만 했던 (왜냐하면 이것이 봉건제의 본질적 기능이기 때문이다) 사회들의 후기 발전 단계를 고찰하여야 한다. 봉건제는 의집단에 대한 방어를 위해 구제국의 몰락기에 문명화된 사회에 들어왔거나 혹은 문명화된 사회

와 접촉을 한 바바리안이 갖고 있던 고대 원시적인 내집단의 한 형태 를 취하여, 이것을 수단으로 하여 사실상 거의 무(無)에서 사회의 기 본적인 기초를 재창조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만약 그때에 사회의 기초가 실제로 거의 없었다 해도, 그 사회의 상층부는 항상 제국에 대한 기억울 갖고 있으며, 이 기억은 대부분 유령 제국으로 실체화된다(만약 유령을 실체로 부를 수 있다 면). 가끔 민족 국가들이 나타난 징후도 역시 있었다. 왜냐하면 구제 국이 붕괴되 었을 때, 비록 규모가 큰 단위 large unit. 7} 뒤 에 붕괴 될망 정 구제국은 대개는 처음에 규모가 큰 단위에게 그 위치를 물려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민족 국가들은 그 사회에 새로운 사상을 불어넣지 못한다. 그 국가들은 초기의 봉토가 갖고 있던 기본적인 힘의 원리를 갖고 있지 못하여, 또한 제국이 가전 웅장하고 보편적인 원리도 갖지 못했다(비록 그 민족 국가들이 구제국으로부터 그 원리를 빼앗으려고 시도를 하더라도). 유령 제국과 봉건 체제는 지방주의와 보편주의 사 이의 건널 수 없는 심연에 가로막혀 서로 대치 상태에 있게 된다. 〈 그들이 융합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제국주의적 특성과 봉건제의 특 성 사이에는 깊은 적대감이 있었다〉고 브라이스는 말한다.”

I) Jam es By ce , The Holy Roman Emp ire, rev. edn.(London and New York, 1921 ), p. 130.

그 적대감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오토 3 세의 행적에 잘 나타나는데, 그는 게르만의 영토에서 이동하여 제국의 도시인 로마에서 자신의 기 반을 확립하고, 그 도시를 위해 새로운 관리를 뽑아 임명하였다. 그는 그의 사법관에게 그 도시와 세계를 단지 로마 법에 의해서만 지배하 도록 명령하였고, 교황들을 임명하였고, 왕들을 지명하였고, 그리고 2 세기 후 호헨슈터우펜 황제들에게 둘이닥친 대재앙이 발생할 때까지 실제로 포기되지 않았던 과거로 복귀하는 정책을 수립하였다. 오토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자로 알려진 황제들 중의 하나였고, 놀랍고 이해

할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었던 독일의 격렬한 귀족들은 토지를 빼앗 고 황제를 포함한 모든 침입자에 대항하기 위하여 봉건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롬바르드의 귀족들도 똑같은 행동을 하 였고, 그들은 새로 부활된 로마 제국에 복종하도록 위협을 가하지 않 는, 그들 중에서 선출된 그들 자신의 왕을 옹립하려는 야심을 키웠다. 그리고 황실의 야심을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그 당시에 비틀거리고 있던 가마쿠라 막부를 전복하고 제국 체제를 회복하는 데 영향을 준 일본의 천황 고다이코(後酸酉胡)가 있었다. 일본에도 세력의 중심지 를 바바리안의 지역에서 제국의 도시로 다시 옮기려고 하였던 일단의 관리들이 있었다. 그것은 대재앙으로 끝났다. 죽 원봉건 체제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제국의 권위는 각기 궁정과 관리를 가전 두 주장자 에 의해 분할되었다. 제국의 권위를 주장하던 이들 두 사람은 꼭두각 시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의 배후에는 현실적으로 2 세대 동안 자기들 목적에 맞는 실질적인 지도자를 내세운 야심적인 귀족 집단이 있었 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은 제국 도시를 획득하는 것이고, 이것은 봉건 적인 방법에 의하여 달성되었다. 봉건제와 유령 제국과의 투쟁은 매번 봉건제의 승리로 끝났다. 왜 냐하면 봉건제에 의존한 시대는 제국적인 거대한 구조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구조적으로 지극히 단순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봉 건제는 그 자체의 구조인 봉토를 점점더 확대시키고 개선시켰다. 그 방법은 본질적으로 단순하다. 이를테면, 주로 종주제 overlordsh ip라는 계급의 발달에 의하여 봉토가 통합되었을 때, 봉토는 더 커지게 되었 다. 그리고, 배신 rear - vassal 부터 계서제의 말단에 이르는 모든 사람 들의 권력을 빼앗고 그리고 관리들의 봉사를 중대시키는 것을 통해서 그 권력을 획득한 자를 최고의 영주로 하는 계서제를 다시 발달시키 는 두 과정에 의해 봉토제는 개선되었다. 그리하여 어떤 뚜렷한 구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유럽에서 일찍이

12 세기에 앙주의 헨리 Henry of An j ou 는 근대 프랑스 영토의 거의 절 반에 해당하는 영토를 통합하였다. 그는 아퀴테인의 상속녀와 결혼하 여 거대한 봉토를 얻어 그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였고, 그리고 노르망 디와 브리타니의 종주권을 획득하였다. 이의에도, 그의 어머니의 상속 권과 정복으로 영국의 왕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왕조적 결혼과 상속 보다는 정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이 정복으로 득을 본 대귀족 둘이 있었으며, 이들 중에서 벼락 출세지들은- 유럽보다 더 많았다• 이 과정은 유럽에서 약 3 세기 동안 지속되었는데 반해 일본에서는 1 세기 도 못 되는 짧은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16 세기 일본에서는 오다 노 부나가와 두 , 뚜 꾸 히데요시의 정복을 통하여 일본 전역이 하나의 봉 토로 될 때까지 봉토의 집적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어떤 면에서 유 럽에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봉토를 집적한 것은 더욱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합스부르크가는 궁극적으로 수많은 백작령, 공작 령, 변경백령, 오스트리아 대공령과 함께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소왕국 울 그리고 일시적으로는 스페인 왕국을 통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집적된 봉토에는 양과 질 사이의 모순이 발생하는 경향 이 있다. 영주권 lords hip이 서열화되어 있어 군주는 말단에 있는 소 봉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 서열의 정점에 있게 되었으며, 그들의 결합된 세력이 아주 약하게 되면 연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봉건 유 대는 느슨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느슨해지는 봉건 관계를 보완 하기 위하여 관리를 두는 것은 집적된 봉토의 구조와 상충되기 마련 이다. 그러나 만약 봉토가 봉건 구조로 유지되려면, 봉토의 구조는 그 대로 유지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대립은 고질적으로 되며, 봉토의 경 영은 필요한 발달을 못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봉건 구 조는 여건이 좋을 때에는 오랫동안 지탱될 수 있으나, 이러한 여건은 혼하지 않다. 그래서 대봉토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였다. 이것은 민족 국가의 성장을 위한 기회였다. 국가와 봉토는 한편으

로는 동일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결속의 원리에 기반을 두 고 있다. 사실상 봉건 사회에 있어 민족 국가는 일종의 헤겔적인 정, 반, 합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반(反)에 해당하는 것은 봉건제와 제 국이 대립되는 원리이고, 민족 국가가 나타나는 시기는 봉건 시대와 제국으로 회기하는 시대 사이에 있는 봉건 사회에서 필요한 단계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민족 국가 발생 초기에 대부분의 민족 국가를 지배 하고 있던 군주는 최고(最高)의 봉건 군주였으나, 그는 또한 황제와 마찬가지로 하늘의 명을 받은 자였다. 그래서 국가 결속의 원리는 한 편으로는 봉건 유대를 신민의 군주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 그리고 군 주의 신민에 대한 충성으로 변질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군주 가 지상의 최고 지배자인 양 신민이 그를 찬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러한 민족 국가들로부터 역사상에 뛰어난 민족 국가를· 만들어내는 놀랄 만한 정신적인 힘의 집중이었다. 그들은 비봉건 사회의 민족 국 가들보다 더 광범위한 문화적 독자성과 더 많은 물질적인 힘을 가졌 다. 그들의 문화는 항상 그들 사회에 독특한, 때로는 특정한 민족 국 가에 독특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 국가들은 기본적이고 강력한 봉토가 붕괴한 후에 나타 나는 최초의 강력하고 안정된 정치 단위이고, 민족 국가와 봉토의 세 력과 결속력은 둘다 내집단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민족 국가와 봉 토는 문명화된 사회의 역사에 나타나는 유일한 내집단의 두 형태이 다젼 중요한 면에서 민족 국가들은 제국을 모델로 하였지만, 민족 국 2) Sumner 는 유럽의 국가들을 내집단으로 본다.(p. 15) 그는 중세 기독교 교 희, 이슬람과 어떤 제국들은 내집단이 되지 못하였다고 생긱굴}고(pp .15, 503-505), 집단들의 통합이 그 통합에서 우위를 점한 그룹들이 유리한 위치 롤 차지하면서 어떻게 민속적인 방법 fo lkwa y s 과 결합하는가를 보여준다(pp. 115-117). 이 통합은국가의 형성에 중요한 과정이라고 Sumner 는 생각한다. 이러한 주장의 전부 또는 어떤 부분이 국가는,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주 장경,향 죽을 〈가유전럽 은특 수그한 본 국질가상들 동을일 제성시을한 다갖〉고 ( G.있 W고. F국. 가H를eg e형l , 성T하he는 P h절il 대o so적p 인h y

of Hi st o ry, J. Sib r ee(tr a ns.), rev. edn., New York, 1900, p. 400) 는 주장이 의도하는 바와 같은 사회적, 문화적 단위로서 궁극적으로 습득된 것이라는 주장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에게는 〈국가를 형성하는 절대적인 경 향〉이라는 것은 미신의 산물이거나 아니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갇 다. 이런 식의 생각의 광범위한 결과의 예들에 대해서는 0. Sp en g ler , De- cline of West, C. F. At ki n s on(tr a ns.) (New York, 1932) 을 참조.

가들은 내집단이 아닌 제국이 갖지 못한 결속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대부분의 봉토는 과도기적인 형태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민족 국가 둘은 안정성과 결속력에 있어서 봉토보다 훨씬 나았다. 자연히 내집 단으로서 민족 국가들은- 서로간에 경쟁적, 무장 대립적인 상태에 놓 여 있었다. 사실상, 그들의 대립은 인간이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 중에 최대의 대립으로 끝까지 심화되어 가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대립 의 심화 과정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아래에서 우리가 반드시 짚 고 넘어가야 한다. 어떤 민족 국가들은 대봉토에서 발달하였으나 이것은 흔히 있는 일 이 아니다. 흔히 민족 국가는 영토적으로 봉토와는 다른 방법으로 형 성된다. 보통 민족 국가는 대봉토보다 훨씬 크다. 한 사회가 영토적으 로 구분되어 민족 국가들로 나누어지는 것은 비봉건적인 지역에서와 같이 봉건 지역에서도 커다란 결정 요인들에 의해 좌우된다. 이 결정 요인들은 자연 환경적, 역사적, 인종적 요인들이다• 도서(島峽)와 반 도(半島)는 가장 분명하게 국가의 영토를 결정짓는 자연 요인이다. 해안선은 평범한 국경선이며, 산맥들도 역시 국경선이 된다• 초기 대 륙의 역사는 왜 산맥들, 울창한 삼림, 사막 등이 민족 국가의 경계선 이 되고 다른 것들은 그 경계선이 되지 못하는가를 대체로 설명해 준 다. 또한 역사는 왜 자연 장벽이 없는 지역에 국경선이 있는가를 혼 히 설명해 준다. 예를 들면 바빌로니아는 메소포타미아의 최초의 문 명화된 지역의 하나였던 대체로 고대 아카드의 북쪽 경계선을 따라 아시리아와 구분되었다. 아시리아 지역은 아카드의 후기 시대에 식민

지역으로 시작되었다. 인종적 요인만으로는 결코 경계선이 결정되지 않지만, 인종적 요인은 종종 자연 경계선을 더욱 강조하고 때로는 민 족 국가들을 역사적으로 구분하는 데 인종적 구분이 일익을 담당하 였다. 이러한 모든 결정 요인들은 시간상으로 봉건제의 발달보다 앞서지 만, 그러나 이러한 요인들은 봉건화로 혼란이 제거될 때까지는 그 혼 란된 지역에서 민족 국가가 형성되는 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크 든 작든 간에 봉토는 이미 결정된 경계 내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 나 그러한 결정 요인이 모호하거나 또는 아예 없었던 아주 드문 경우 에는 봉건화 과정으로 국가의 경계선이 결정될 수 있다. 이러한 현상 이 주로 일어났던 두 지역은 독일과 북중국 평원 지방이었다. 이런 유의 지역에서는 봉토가 집적된 정도에 따라 영토의 크기가 결정되 고, 그래서 실제의 경계선은 아마 변경주(邊境州, march) 의 형성으로 결정되었을 것이다. 이 변경주는 단순한 봉건적인 도구이며, 이것에 의해 봉건 귀족은 변경주 너머에 있는 적들을 방어한다는 조건으로 아주 많은 특권, 특히 면제권을 가전 변경의 봉토롤 받는다. 대부분의 변경주는 자연적으로 결정된 경계선을 단순히 강화한 것이지만, 독일 인들은 변경의 지배권 marcher lordsh ip을 사용하여 중세 북독일의 동 쪽에 있던 술라브족을 정복하고 그들을 독일의 봉건적인 생활 방식으 로 전향시켰다. 이 경우 변경주는 인종적인 구분을 무시하였다. 국경 선의 상당한 부분이 대평원에 놓여 있는 주의 중국에서도 어떤 형태 의 변경주를 사용한 것 같다. 우리는 자연적인 장벽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는 점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한때, 중국의 국가들은 그들의 경계선을 성을 쌓아 강화하였기 때문 이다.J) 그래서 보통 영토적으로는 기원이 다르고, 부분적으로는 다른 정치 3) Latt im ore, Inner Asia n Fronti er s of Chin a , pp. 390, 403-4 04, 429-43 0.

원리 위에 세워진 민족 국가와 봉토가 서로 대립될 가능성이 있었다. 봉건제의 후기의 역사는 그러한 대립, 죽 왕과 봉건 귀족의 대립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관련이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민족 국 가와 봉토가 공유하는 정치 원리에는 봉토에서 민족 국가로 발전하는 연속성이 있었는데, 이는 왕과 봉건 귀족의 대립으로 두드러지게 나 타난 비연속성과는 상반되는 것이였기 때문이다. 봉건 사회의 민족 국가들은 그들의 몰락해 가는 봉건 사회에 동시에 소속되어 있기 때 문에 연속성과 비연속성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실상 봉건 체 제에서 민족 국가로 이행하는· 것을 봉건 체제와 모든 봉건적인 것이 끝나고 민족 국가와 민족 국가적인 것이 이를 계승하는· 단순한 변천 으로 보는 것은 아주 잘못이다. 민족 국가가 성장하면서 봉건제는 결 국 소멸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봉건 귀족들이 왕을 크게 위협하고 강 력한 민족 국가의 출현을 오랫동안 지연시키는 데 성공한 경우도 분 명히 있다. 이러한 경우는 다음 장에서 다룰 문제이다. 봉건제와 국가 의 밀접한 관계가 이 장의 주제이다. 그 밀접한 관계는 두 단계로 나 누어 다루겠다. 첫 단계는 봉토와 민족 국가 사이의 연속성이고, 두번 째 단계는 비연속성이다. 연속성이 아주 강하기는 하지만, 비연속성도 역시 강하였고, 비연속성은 때로는 혁명으로 나타날 정도로 아주 강 력하였다. 봉토에서 민족 국가로 발전하는 연속성은 보통 지리적으로가 아니 라 정치적 형태들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가 방금 살펴본 바와 같이 주로 북중국의 평원을 차지한 주의 예의적인 경우가 있다 . 주에 있던 민족 국가들은 몇 개의 보다 큰 봉토가 집적되어 형성되었다. 이 발 달은 봉토와 민족 국가와의 모든 관계를 단순화하는 것같이 보인다 (곧 입증되겠지만, 좀 망상적인 것 같다). 기원전 8 세기경에 주왕의 세 력은 약화되어 제후국의 지배자들은 단지 명목상으로 그의 봉신으로 남아 있었으나, 사실상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렇게 나타난 몇몇 제후

국에서는 약 7 세기경에 귀족들의 세력을 감소시키고 지방 정부를 중 앙 정부의 직접적인 권위하에 두고 일반 행정권과 군사 권한을 분리 한 개혁이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봉건제를 제거하는 첫 단계였으며, 이러한 변화들은 또한 제후국의 세력을 증대시키고 제후국들을 국가 와 감은 형태를 갖기 시작하게 한 첫 단계였다. 그러므로 주에서는 봉건제의 제거와 국가들의 성장은 동일선상에서 변천을 하고 있는 연 속적인 부분들인 것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적어도 몇몇 제후국에서는 봉건적인 어떤 형태가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이것은 제후국 진이 5 세기에 삼국으로 나누어졌고, 각국이 그 분열 이전에는 대봉토였다는 사실에 의해 나타난다. 주의 제후국이 언제 더 이상 봉토로 남아 있지 않고 민족 국가로 되었는지를 말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굳이 그 시기를 말해야 한다면, 왕의 권력이 중단되고 제후국의 지배자가 사실상의 통치자가 되었던 기원전 8, 7 세기가 최적의 시기일 것이다. 이때에 제 후국들은 강력한 세력을 갖게 되고 또한 독립도 하였다. 이 시기는 아래에서 다른 사회에서도 민족 국가가 출현하였다고 할 수 있는 시 기와 일치한다 .4) 중국 연구학에서 흔히 있었던 것처럼, 주왕에게 명목 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제후국들이 단순히 존재하였다는 것만으로 기 원전 7 세기에서 3 세기 사이에 일종의 봉건제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하 는것은잘못이다.

4) 필자가 알고 있는 한, 라티모어는 주의 후기에 분리된 제후국들을 유럽의 국가와 비교될 수 있는 민족 국가로 본 최초의 학자이다. Inner Asia n Fron- tiers , pp. 392-393 를 참조. 중국, 유럽, 그의의 국가들의 유사점과 상이점에 대하여는 아래 pp .430-438 를 참조.

주에서 민족성의 출현은 이데올로기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데, 이 경우에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구사회에서 신사회로의 전환을 중재하고 주도하기 위하여 추구하였던 의식적으로 형성된 이데올로기 이다. 이는 제자백가의 사상인데, 그중에서도 공자의 사상이 가장 뛰

어났다. 우선 이데올로기의 변화에서 그 사회의 변천 과정을 찾는 것 은 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적 변화가 그렇게 분 명히 그리고 직접적으로 이론으로 공식화되는 것은 아주 드물기 때문 이다. 주에서 이 공식화된 이론은 지적, 심미적 문화 모두를 망라하였 으나 윤리적, 정치적인 면을 중시하던 시대에 무엇이 가장 중요하였 던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물론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윤리적, 정치적 원리이다• 이 원리 중에는 아주 분명하게 주군과 봉신 사이의 관계를 변환시킨 군주와 신민 사이의 관계를 적절히 표현한 것이 있다. 그것은 공자가 말한 것이다. 공자는 군신의 관계를 사회에 서 세 개의 가장 중요한 관계 중의 하나라고 말하고, 이 관계를 그 세 개의 관계 중의 디른- 관계, 죽 부자 관계와 비교하였다. 신민으로 부터는 존경과 복종이 요구되었고, 군주로부터는 신민에 대한 본보기 로서 그리고 그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는 수단으로서 가장 엄숙한 덕 의 실천이 요구되었다. 그 통제는 권력의 남용에 대한 주의로서 극단 적인 자제로 확대되었다. 권력의 자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 것은 정부가 점점더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강력한 군주의 성장)을 입 증한다. 그것은 또 그 자체로서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중국의 여러 정체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며, 이는 권력의 자제라는 이론에 대한 전적인 반대가 있었다는 사실로 확안되며, 제자백가 사 상의 한 파인 법가 사상에서 그 반대를 찾을 수 있다. 법가들은 전체 주의적인 독재주의 비슷한 것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유가의 영향보다는 훨씬 깊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강력한 군주제의 출현을 찾는 데 있어, 중국의 민족 국가의 군주들은 강력한 군주로 출현하였지만, 대부분의 군주들은 유가의 영 향 때문에 그들의 세력을 사용하는 데 자제하였다는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그러한 자제가 중국 사회가 오래 지속할 수 있었던 근원이며 중국 사회가 기반으로 하고 있는 윤리 제도의 근원이었다는 것은 그

럴듯한 테마이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연구할 수 없다 . 5 )

5) 필자는 그것이, 한과 당 사이 사회의 몰락 규모가 크지 않았고 후에 다시 재건된 사회에서 문화의 본질적인 성격의 변화가 비교적 적었다는 · 것과 연 관되어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희의적이다. 필자는 어떤 별개의 원인 때문 에 한과 당 사이의 사회가 쇠되하였다고 생각한다.

독일에서는 대부분의 경우에 봉토와 민족 국가가 중국처럼 지리적 으로 연속되어 있었으며, 또 이탈리아의 몇몇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 지였다. 브란덴부르크 - 프러시아의 경우에도 역시 그렇게 되었다는 것 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다른 제후국을 민족 국가라고 하는 것은 일부 학자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는지 모른다. 분명히 이들 제후국들은 제국 밖에 있는 유럽의 대민족 국가들과는 약간 다른 종류의 민족 국가들이었다. 그 자체가 제국 내의 제후국에 서 제국 밖의 유럽 국가로 전환됨으로써 브란덴부르크-프러시아는 그 차이룰 보여준다. 그 차이가 일어나는 방법과 그 차이의 의미는 뒤에 서로 다른 사회의 발달 과정을 비교 분석하는, 다음 장에서 다 루겠다 .6) 하지만, 독일의 제후국들은(여기서 제후국이라 함은 1555 년 에 아우구스부르크 회의의 결정에 의한 제후국들을 말함) 중국의 제후 국들처럼 그들 유령 황제로부터 거의 독립적이었다는 것, 독일의 경 우에는 중국의 경우보다 국가 제도에서 봉건제가 더 지속되었다는 것 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아마 우리가 독일에 대하여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는 것 그리고 독일에서는 유교와 갈은 원 리가 없었지만, 반대로 한편으로는 성숙되지 않은 절대주의와 다른 한편으로는 반동적인 귀족들의 지방주의의 경향이 있었다는 것을 우 리는주목해야한다.

6) 아래 pp. 430-43 5 와 위 pp. 352-3 54 를 참조.

유럽의 그의의 대민족 국가들은 독일과는- 다르다. 영국도, 프랑스 도, 서유럽의 분명한 봉건 국가들도 봉토로서 시작되지 않았다. 어떤 중요한 의미에 있어서도 그것은 봉토는 아니었다 .7) 그리고 이러한 민

7) 존왕이 영국을 교황 인노센트 3 세의 봉토로서 보유한다고 동의한 것은 분 명히 예의적이며, 아주 비합리적인 우발 사건이었고, 영국인들은 그의 행위 를 중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시적으로 스코틀랜드에 의해 그리고 에드 워드 1 세의 원정의 결과 그윈네드에 의해 다소간 영구적으로 영국 왕실의 종주권을 받아들인 사실은 보다더 중요한 의미를 가전 예외로 생각될 수 있 다. 그러나 어떠한 제후국도 처음에 영국 왕실의 봉토로 시작된 것은 아니 다. 집적된 봉토에서 건설된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3 개의 민족이 결합하여 영국이 통합되어 갔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족 국가들 때문에 민족 국가라는 것은 다른 통치 방법으로 봉건적인 것을 억압함으로써 획득될 수 있디는· 가정을, 봉토와 국가 사이의 지 리적 연속성을 갖고 있는 주에서 추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 입 증된다. 이러한 민족 국가들은 그들 국가에 강력한 군주제의 성장으 로 국가라고 하는 것들이 실제 나타나기 시작하였을 당시에 철저한 봉적인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중으로써 위의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것 울 보여준다. 중세 유럽의 왕은 항상 그의 봉신에 의존하였다. 그가 효과적인 세력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의 봉신 중의 일부와 의 전쟁에서 성공함으로써 비롯된다. 그는 대개 성공하였고, 그 성공 은 때때로 반복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의 봉신 중의 누군가와 전쟁을 할 때, 그는 다른 봉신의 도움을 받았고, 성공적인 봉건 왕은 점점더 적게 전쟁을 하면서 그리고 그의 봉신들의 충성에 점점더 의 존하면서 그의 〈 평화 〉 를 확대하고 강화하였다. 이런 식으로 왕에게 봉사를 잘하였던 봉신은 그 대가를 받게 되고, 반란을 일으킨 봉신들 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처벌의 두려움 때문에 충성한다는 것을 거 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실제 세계에서는 그러한 충성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충성이 기본적이고 강력한 봉토 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한 봉토를 가진 귀족과 봉건 왕은 그들 각자 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다 같이 몰락하였다. 봉신들은 만약 충성 울 하지 않는다면 패망의 위험에 직면한다-의부의 적의 손에 의해 멸망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이고 강력한 봉토의 경우에는 그들의 주군

에 의해서도 멸망하는 위험, 강력한 군주제의 경우에는 전적으로 왕 의 손에 멸망하는 위험에 직면한다. 강력한 군주제는 사실상 기본적 인 강력한 봉토의 지속적인 안정과 민족 국가의 지속적인 안정 사이 의 과도기적인 정치 균형을 구현한 것이다. 최초의 비봉건적인 행정 개혁을 한 이들은 봉건 귀족, 즉 초기의 강력한 봉토롤 가진 귀족들이었다. 그래서 강력한 봉건적인 왕이 유 사한 개혁을 단행하였을 때 봉토의 운영과 민족 국가의 운영 사이에 는 단철이 없었다. 개혁적인 봉신의 경우처럼 왕의 경우에도 행정 개 혁은 봉건 개혁과 깊은 연관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양자 사이에는 어떤 근본적인, 의식적인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봉토와 민 족 국가의 행정 개혁 사이에 단절이 없었다 해도, 민족 국가의 개혁 에는 중요한 새로운 면이 있었다. 이 새로운 면은 민족 국가의 군주 가 봉건 관행에서 어느 정도 탈피하였는지 그리고 봉건 관행에서 탈 피함으로써 그들이 만들어낸 특별한 제도에서 나타났다. 이 특별한 제도는 이미 봉건 정부에서 시행되고 있던 관행 또는 제도를 수정한 것이거나, 이 관행과 제도에서 발달한 것들이다. 유럽에서 이런 식으 로 발달한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봉건 궁정 feu dal cour t에 서 발달한 것들을 둘 수 있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의회적인 성격을 가전 보다 복잡한 기구이면서, 다~ 한편으로는 전문 법률가들로 구 성된 법정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도들이 출현하였다는 것은 주 도권이 봉토에서 민족 국가로 이동하는 칭후를 나타낸다. 왜냐하면 봉신들은 군주와 보조를 맞추어 그들의 봉토에서 유사한 제도롤 발달 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봉신들은 봉토의 구( 舊 )구 조를 유지하고 다른 면에서의 순수한 보수주의를 유지하려는 성향을 가졌기 때문에 그둘은 왕과 보조를 맞출 수 없었다. 그러므로 정치적 결속력은 봉토의 기반에서보다는 민족 국가의 기반에서 발달하였다. 비록 새로운 정치 제도가 여전히 봉건적이거나 혹은 봉건제와 가까운

변형이었다 할지라도, 이러한 새로운 민족 국가의 제도가 시행되는 과정에서 신민의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효과적으 로 성장할 수 있었다. 프랑스, 아라곤, 카스티야, 포르투갈은 군주제였으며, 그들의 초기의 세력 기반은 봉건적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제도는 강력한 봉토와 강 력한 군주 사이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앵글로 색슨의 군주제, 스칸디 나비아의 군주제, 크전 작전 독일의 여러 왕국들에서의 군주제와 중 앙 유럽의 동부의 변경 지방에 있던 군주제들은 덜 봉건적이었기 때 문에, 이들 군주제는 그 연속성을 보다 적게 나타낸다. 그러나 앵글로 색슨의 군주제를 일소(一掃)하였던 노르만의 정복은 역사의 다른 어 떤 사전보다도 강하게 그 연속성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영국은 이 혁 명적인 사건에 의하여 그 이전보다도 덜 봉건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더 봉건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정복왕 윌리엄의 막강한 세력은 위 에서 언급된 일반 테제를 아주 찰 입증하고 있다. 죽 그는 항상 대부 분의 그의 봉신들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그들의 도움으로 반란을 일 으켰던 소수의 봉신을 억압하였다. 봉건적인 관행과 함께 그가 도입 하였던 비봉건적인 관행은 중요하다. 예를 들면 노르만의 자작vi com t 의 기능에 맞추어 영국의 주지사 sher iff.의 기능을 개혁한 것과 갇은 것이다. 그가 직접 갖고 있었던 거대한 영지와 마찬가지로 그의 봉신 들에게 면제권의 양도를 억제한 것은 아주 과감하고 효과적이었다. 일본의 역사도 역시 강력한 봉토와 강력한 군주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훌륭한 예를 제시해 준다. 16 세기의 정복을 통한 막부 세력의 재건은 완전히 봉건적인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다. 사실상 도쿠카와 막부가 들어섰울 때, 도쿠카와 막부는 거의 일본 전역을 포괄하는 대 봉토였다. 막부제는 군주제였다. 왜냐하면 쇼군은 일본 전체를 지배하 는 유일한 통치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쇼군이 지배하는 지역은 또 한 봉토로 남아 있었고, 전국을 통합하는 데 있어 막부는 봉건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죽 모든 다이묘를 막부의 봉신으로 만듦으로써 전국을 통합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새로운 쇼군의 봉건적인 특성에서 너무 많은 것이 만들어졌다. 중앙 관료로서 결코 봉건적이 아니었으 며 이제 다시 활기를 찾은 막부도 여기에 포함된다. 막부는 유럽의 강력한 군주국들이 발달시킨 것과 같은 관청 secre t ar i a t이었고, 유럽에 서와 같이 일본에서도 이 제도는 봉건 체제에서 핵심 기능을 하고 있 었을 때에도 비봉건적이었다. 도쿠가와 막부가 아주 봉건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다이묘는 쇼군의 관리의 정기적인 간섭을 받지 않고 그들 자신의 봉토를 다스렸다. 도쿠가와 이전의 아시카가 막부는 적 어도 다이묘에 대한 조세권을 주장하였지만, 도쿠가와 막부에서는 다 이묘에 대한 징세는 없었다. 막부는 사법적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러 나 중앙 정부를 위한 유일한 감독은 스파이에 의존하였다. 유럽의 강 력한 봉건 국가에서와 갇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수비대와 직영지의 기사들과 유사한 대전사단을 유지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하였 다. 14, 15 세기 유럽의 소위 의사 봉건제(擬似封建制)에서 기사가 용 병에 의해 대체되었던 것괴는- 달리, 이 전사단은 어느 때에도 용병에 의해 대체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봉토와 민족 국가 사이의 연속성의 요소를 제시한 것 중 도쿠가와 막부와 영국의 노르만 정부는 전형적인 강력한 봉건 군주국들이었다. 노르만 정복은 혁명이었고, 일본에 도쿠가와 막부의 설립을 가능케 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복도 어느 의미에서는 혁 명이었다• 그래서 이 두 경우에는 예의적이라 할 수 있는 연속적인 면이 있다. 정부의 비봉건적인 요소의 발달을 극소화하려는 막부의 노력과 더불어 봉건 제도를 유지하고 그 정복으로도 변질되지 않았던 봉건 제도를 고착화시키려고 하였던 도쿠가와 막부 체제의 절박한 노 력은 아주 특별한 것이다. 이것들은 일본에서 쇼군의 세력이 황제의 세력을 억압하였던 것을 참고하면 설명이 된다. 왜냐하면 봉건적이었

던 것은 쇼군의 권리에 속하였고 그리고 모든 권력은 봉건적인 채널 울 통해 행사되어 황제는 그 권력 행사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노르만에 의해 완전히 발달된 봉건 제도가 영국에 도입된 것도 역시 특별한 것이다• 영국 해협이 있었기에 이것이 가능 하였으며 이 해협은 영국의 발달이 일정 기간 동안 북프랑스의 발달 보다 뒤떨어지게 하는 데 충분한 장벽이었으나, 영국의 후진성이 극 에 달했을 때 새로운 제도가 영국 해협을 갑자기 건너오는 것을 막기 에는 충분하지 못한 장벽이었다. 본질적으로 성격이 완전히 다른 일 본과 영국에서의 이 특별한 두 발달은 두 나라의 새로운 정부를 더욱 봉건적으로 되게 하였고, 이들 정부 이전의 어떤 정부보다도 더 봉건 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로부터 민족 국가적인 규모의 강력한 봉건 정부가 세워졌을 때, 이 봉건 정부가 반드시 그 이전에 있었던 정부보다 더 봉건적이다는 가정을 유추하는 것은 아주 잘못이다. 강 력한 민족 국가적인 군주제가 되는 정상적인 과정은 동 시대에 존재 하였던 대봉토보다도 더도 덜도 아닌(대봉토와 거의 비슷한) 봉건 상 태에서 시작된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강력한 군주국은 기원전 5, ¥1]기경에 출현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 군주국과 그 이전에 있었던 체제들 사이의 연속 성을 입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시기 동안 아시리아의 제도에 관한 자료는 없으나, 역시 봉건적, 죽 도시-봉건적이었던 하티에서는 〈 신왕국 (New Ki ng do m 혹은 신제국)〉은 강력한 군주제였다. 그 왕국은 텔레피누스 Tele pi nus 의 치세기인 기원전 5 세기 말에 처 음으로 출현하였다? 텔레피누스는 국가의 제도를 상당히 많이 개혁 하고 수정하였고, 또한 그는 왕의 세습적인 예속인 대신에 왕의 의지 8) Sir George Sansom 의 주장을 참조(Ja p an : A Short Cult ur al Hi st o ry, New York, 1938, p. 4 33). 9) Hardy in Americ a n Jo urnal of Semi tic Langu a ge and Lit er atu r es, LVIII , 209-2 10. Hard y는 텔레피누스의 재위 연대를 기록하고 있지 않다 .

대로 제거할 수 있는 지방의 주요 귀족들을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만 약 이 변화로 안하여 봉건 제도가 폐지되었다고 하더라도, 구( 舊 )제 도가 새로이 정복된 국경 지방에서는 여전히 계속되었기 때문에 이 변화로 봉건제가 일소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새로이 정복 된 국경 지방에서는 변경주의 지배권과 같은 제도가 계속되었다. 텔 레피누스의 변경주의 지배권은 이전의 바바리안의 지역에 있었고 그 러므로 그것은 중세 독일의 동부 경계 지역의 변경백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모든 변경주의 지배권이 바바리안의 침입에 대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브런데이지 Brunda g~근 기원전 12 세기 경에 엘람 국경 지방에 바빌론의 네브카드네자르가 세운 변경주가 있 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네브카드네자르 왕조와 그 이전의 카시 트 왕조의 마지막 왕 치하에서 바빌로니아는 강력한 민족 국가였다. 이러한 변경주의 지배권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변경주들은 하나 하나가 그 정부의 초기 형태와 연속되었디는- 것을 의미하고, 초기의 형태란 중앙 정부가 지방 귀족들에게 봉건적이든 아니든 간에 권력의 위임을 의미한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하티의 경우에는 이것을 의 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강력한 군주제가 출현하면서, 하티에서 발 생했던 변경주 이외의 속령에 대한 권력을 다시 차지하는 현상이 메 소포타미아의 어떤 지역에서든 역시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변경 속령들이 계속 존재하였다는 것이 그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 다. 왜냐하면 변경의 속령은 대부분의 봉건 사회에서 여타의 봉건 형 태보다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변경주 지 배권은 봉건제의 증거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하티와 이와 유사하 게 우라르두에는 봉건제에 관한 다른 증거가 있고 아시리아에는 봉건 제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반적인 증거가 있다-―왜냐하 면 다른 것과 연관하여 생각해 보면, 강력한 군주에 의한 군사적인 지배하에 있는 변경주의 형태는 너무 일반적인 정치 형태이기 때문에

봉건 형태에 대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10)

10) 1908 년 이후에 합스부르크 왕가는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변경주로 만 들었고, 합스부르크 영지의 의적인 형태――오스트리아-헝가리-는 그 당시에 여전히 봉건적인 색채를 가졌고, 분명히 내적 형태의 어떤 영지도 역시 봉건적이었으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의 변경주는 진정한 봉건 제 도는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봉건 제도와 민족 국가 제도 사이에 연속성이 있으면서도, 또 한편 으로 봉토와 민족 국가 사이에 연속성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봉토와 민족 국가의 기원의 요소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주로 이러한 요소들 때문에 봉토와 제국 사이의 원 리에는 심오한 차이가 있게 된다. 그 결과 나타나는 비연속성은 종종 혁명적인 변화,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은 변화들을 일으킬 만 큼 뚜렷하다. 사실상 이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비연속성에 대한 명백 하고 주요한 증거이다. 봉건 사회에서 한 민족 국가의 출현은 언제나 혁명에 의해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주요 혁명들이 일어났던 사례들의 어쩔 수 없는 명확성 때문에 민족 국가의 출현에 대해 과장을 하지 않 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취급하는 사례들 가운데 혁명적인 변화를 가전 사례들은 불가피하게 명확하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러 한 사례를 기반으로 하여 봉건 사회에서 한 민족 국가의 출현에 대한 결론을 짓는 것은 사실을 너무 과장한 것이다. 우리는 이 점에 주의 를 하여야 한다. 봉건 사회에서 대부분의 민족 국가들은 천천히 그리 고 아주 점진적인 발전 과정에서 출현한다-이것은 민족 국가들의 출현과 그 국가들의 출현에 선행하였던 또는 그 출현과 동시에 일어 난 봉건적인 성장 사이의 비연속성을 결코 지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바연속성을 애매모호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민족 국가 가 출현하는 데 12 세기에서 15 세기에 걸친 거의 3 세기가 소요되었고, 아라곤과 카스티야도 거의 같은 정도의 시간아 걸렸고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유럽 이의의 사회에 대해서는 우

리는 소요된 시간에 대해 확실하게 알지 못하며, 어떤 경우는 혁명적 인 사건이 있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또 어떤 경우에는 혁명적인 사 건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심대하였을지 모른다. 중국의 주에서 국 가들이 출현하는 데는 아마 기원전 8 혹은 7 세기에서 6 혹은 5 세기까 지 2 내지 3 세기가 걸렸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15 세기 말 이 후에 시작되어 그 시간이 더 길었을 것이다. 혁명적인 경향은 많은 국가들의 점진적인 발달을 방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봉건제의 후기의 특성이었던 대귀족들과 왕이 교대로 권력을 잡게 되는 데서 나타난다. 만약 왕과 대귀족들이 나란 히 발달할 수 있었다 해도, 그들 사이에 분명히 대립의 시기가 있었 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다른 세력을 대표하였고, 한쪽의 세 력이 강해지면, 다른 한쪽은 세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사건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발생하였다. 일본에는 일시적 으로 강력하였던 쇼군 요시미츠 체제가 l 心 1] 기와 15 세기의 전환기에 귀족들의 세력이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였던 단 하나의 사건이 있었 다. 유럽의 경우에는 어떤 것은 거의 주요한 혁명적인 사건들이었다. 이러한 경우들은 변화 과정의 말기에 왕이 귀족들의 세력을 마지막으 로 억압하였던 경우들이다. 그러나 유럽의 주된 봉건 지역이었던 프 랑스는 그러한 사건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찰스 7 세와 루이 9 세는 부르군드파와 아르마냑파의 상쟁과 백년 전쟁 이후에 귀족들의 세력 에 일대 타격을 가했으나 I~] 기의 헨리 때 1 와 17 세기에 리슐리의도 귀족들의 지방 세력을 약화시키는 조치를 여전히 취해야 했다 .11) 유럽에서 귀족들의 세력을 종식시킨 가장 격렬하고도 결정적으로 혁명적인 군주들은 영국의 헨리 7 세와 포르투갈의 주안 2 세(J uan, 11) 리슐리의의 마지막 조치조차도 사실상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히 입 중되었다. 왜냐하면 프랑스의 귀족들은 여전히 마자랭 체제에 대해 반기를 둘수 있었기 때문이다.

1481-1495) 였다. 헨리 7 세는 장미 전쟁을 종식시키고 영국의 군주제 를 유례 없는 강력한 위치에 올려 놓았다. 그의 방법은 주로 임의적 인 법 정 과 강력한 군사 위 원회 mi ltar y comm i ss i on 롤 사용하는 것 인 데, 이 방법은 사실상 그의 전임자 에드워드 때]에 의해 상용되었다. 비록 포르투갈과 같은 작은 나라에서는 소규모로 귀족을 억압하였지 만, 헨리 7 세의 혁명 직전에 주안 2 세는 대대적으로 귀족을 억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다시 그의 전임자들, 두라테 (Dura t e, 1433-1443), 알 폰소 Al fo nso 페의 첫 중신이었던 코임브라의 페드로 Pedro of Coim - bra 도 귀족 세력을 억압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주안은 주로 왕의 지 방 관리 인 corre gi dores 의 권한울 크게 증진시 키 고, 과감하게 귀족둘의 토지를 몰수하고, 영국의 헨리 7 세가 역시 사용하였던 거의 흡사한 방법으로 강력한 정책을 수행하였다. 유럽에서 일어났던 어떤 사건과 마찬가지로 대변화를 가져왔던 또 다른 사건은 1 세기에 걸쳐 귀족들의 당쟁이 있은 뒤에 아시리아에 티그라트 - 필레서가 왕권을 회복한 사건이다. 아시리아의 군주제는 수세기 간에 걸쳐 세력이 신 장된 후 샬마니서 3 세 (Shalmaneser, 기원전 859-824) 의 통치때 몰락 하였다. 그 다음에 나타난 대귀족들의 지배권은 면제권의 증대, 사적 인 전쟁 등과 같은 일반적인 특성을 갖는다. 그들은 약한 군주들을 지배하려고 경쟁을 하였고, 마침내는 영국에서와 같이 왕 자신도 그 러한 경쟁에 빠지게 되었다. 이것은 군주권의 회복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티그라트 - 필레서 3 세는 사실상 대귀족들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한 귀족의 한 사람이었던 왕위 찬탈자 풀루 Pulu 였기 때문이다. 헨리 7 세의 그리고 주안 2 세의 혁명과 마찬가지로, 티그라 트-필레서의 혁명은 끝내는 귀족들의 세력을 종식시킨 혁명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된 것보다 더 중대한 혁명들이 있다. 이 혁명들 은 몇 개의 다론 사회들에서 일어났고 항상 그들 사회의 정치적 발달 에 있어서 유사한 시기에 발생한 것은 아니다. 이중의 하나인 l Q 1l 기

에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에 의해 전 일본이 정복된 것은 위에서 방금 고찰하였던 것과 같은 사건이다. 왜냐하면 그 정복은 귀족들의 세력 울 최종적으로 분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강력하게 통 치되고 효과적이었던 정치 단위의 규모를 아주 갑자기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유럽의 혁명보다도 더 큰 변화였다• 일본에서 그러한 정치 단 위의 규모는 이전에는 다이묘의 지배하에 집적된 2 내지 3 개의 지방 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의 이런 혁명은 한 세대만에 그 규모를 전 일 본으로 확대하였다. 이 점에 있어 일본의 혁명은 노르만의 영국 정복 과 유사하다. 노르만 정복은 일본의 그것보다 더 의미 있는 혁명이었 다. 왜냐하면 그 정복은 10 년도 채 안 되어 유럽에서 효과적으로 통 치되던 정치 단위의 규모를 노르망디에서 전 영국으로 확대하였기 때 문이다. 이 두 괄목할 만한 역사적 변화는 봉토의 성장과 민족 국가 의 성장 사이의 연속성을 예시함과 동시에 이들 사이의 비연속성도 아울러 예시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혁명적인 성격에 의 해 비연속성이 나타나고, 정복자들이 사용한 봉건적인 통치 방법에 의해 연속성이 나타난다. 이것은 한 봉건 사회에서 민족 국가 출현의 전체적인 과정에서 연속성과 비연속성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일본의 경우는 16 세기의 정복과 귀족들의 세력을 종식시킨 혁명들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일본에서 봉건적인 방법으로 통치되었다는 것은 그 정복 이후에 나타 난 도쿠가와 막부의 뚜렷한 특색 중의 하나였던 반면에, 영국의 헨리 7 세는 전혀 봉건적인 방법으로 지배하지 않았고, 포르투갈의 주안 2 세는 어느 정도로만 봉건적인 방법으로 지배하였기 때문이다 .12) 왜 도쿠가와 막부가 봉건적인 통치 방법에 아주 고집스럽게 집착하 12) 티그라트-필레서 3 세는 귀족들의 독립적인 권한울 효과적으로 억압하였지 만, 어느 정도는 귀족들을 동하여 지배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봉건적인 방법 에 의한 지배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였는가 하는 문제는 다음 장까지 미루어두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그 정부가 봉건적인 방법에 집착하였다는 것은 일본 역사의 후기에 혁명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는 봉건적인 발달과 민족 국가적 발달 사이의 비연속성에 관한 또 하나의 단순한 예증이 된다. 1868 년에 일어난 이 혁명으로 막부제와 그 당시에 쇠잔하고 있었던 봉건 기구가 억압되고 그 자리에 새롭고 고도의 제국적인 성격을 가 진 국민 국가가 세워졌다. 1868 년 일본의 혁명과 일반적으로 성격이 같은 여타의 혁명은 중국의 전에서 기원전 때]기에 일어난 혁명이다. 이 두 혁명은 노르만의 정복이 영국에 가져왔던 것과 같은 대변화를 각각 진과 일본에 가져왔다. 그러나 전과 19 세기 일본에서의 변화는 영국과 16 세기 일본에서의 변화와는 아주 · 다르다. 전자는 효과적으로 통치된 국가(정치 단위)의 규모를 전혀 확대하지 못하고, 그 대신에 전과 19 세기 일본에서 이전에 이들 나라의 초기의 군주들이 가졌던 것보다 더 막강한 권한을 가전 새로운 왕을 세웠다 .13) 8 장에서 사산조 왕조의 최초의 두 지배자인 아르다쉬르 Ardash i r 와 샤푸르 Sha p ur l 세 에 의해 이루어진 괄목할 만한 정복에 관한 문제를 다룰 것이다. 이 정복은 국민 정부의 확립을 유도하지 않았고, 아마 전정으로 봉건적 이 아니었던 사회에서 발생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정복은 어떤 중요 한 면에서는 11 세기 영국의 정복과 16 세기의 일본과 흡사하다. 일본과 영국의 혁명들 사이에는 고찰되어야 할 어떤 차이점이 있으 나 전체적으로 이들 혁명들에는 차이점보다는 유사점이 더 많다. 이 두 혁명 모두 국가 규모의 강력한 봉건 정부를 탄생시켰고, 이 두 정 부는 각각의 사회에서 국가 규모를 가진 최초의 강력한 정부였다. 16 세기의 일본에서는 11 세기의 유럽에서보다도 봉건제가 덜 성숙되었 고, 이 시기들에 일어난 혁명은 각각 일본과 유럽 사회에서 봉건제의 발달이 거의 극에 달했을 때 발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14) 13) 전과 19 세기 일본의 혁명들의 분류에 대해서는 아래 pp. 445 - 447 를 참조.

14) 1066 년에 북프랑스의 봉건 체제는 약 2 세기 이상 오래 지속되었고, 히데요 시가 최종적으로 그의 권위를 확립한 때인 1590 년의 일본의 봉건제는 약 2 세기 반이나 오래 지속되었다. 양지역의 봉건 제도들은 각각 1066 년과 1590 년에는 완전히 발달하였다.

이 두 경우에 있어 혁명 과정은 다음과 같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효과적으로 통치될 수 있는 지역의 규모는 일련의 유능한 봉건 귀족 들의 축적된 경험에 의해 꾸준히 증대되었다 •I S) 많은 귀족들 사이의 경쟁은 무능한 귀족들을 제거하였는데, 이는 어떤 통치 방법이 효과 적이고 어떤 것이 비효과적인가를 암시한다. 이뿐만 아니라 만약 그 들이 끊임없이 서로서로 압박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봉토가 더 확장될 수 있었지만, 끊임없는 경쟁은 봉토의 확장을 제한하였다. 그 리하여 결정적인 혁명 운동이 일어나기 전보다 더 크게 사용될 수 있 는 정치 기술이 축적되었고, 동시에 혁명을 유발할 수 있는, 말하자면 압축된 정치 여건이 발생하였다. 혁명이 실제 일어났을 때, 그것은 마 치 영토 확장의 결정 요인들이 갑자기 풀려나 효력을 발생한 것같이 보인다. 일단 대봉토가 붕괴되면, 효과적으로 통치되는 영토의 단위의 규모가 국가적인 영토의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확장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연 환경적으로 결정된 그러한 영토 의 한계는 앞서 아시카가 막부와 세르딕 Cerd i c 가의 지배권을 각각 만 들어낸 사건들에 의해 설명되었으나, 이 사건들은 새롭고, 강력한 정 부가 들어설 때까지 거의 실질적인 중요성을 갖지 않았다.

15) 이불테면 유럽에서는 앙주가, 노르망디가, 상파뉴와 불로와가 , 풀랑드르가. 일본에서는 北條(關東지방), 大律(九州) 織田(尾張), 毛利(周防), 竹田(甲 斐), 今)(駿河). 일본의 경우에 대해서는 다케고시(竹越), I, 329 - 331 을 참조.

이 두 경우에 있어서 혁명이 진행된 속도와 같은 속도로 영토의 한 계에 도달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그 속도가 빠르기는 하였지만 영 국만큼 빠르지는 않았다. 일본에서는 그 확장은 단 한번의 결정적인 전쟁에서가 아니라 일련의 계속적이고 치열한 정복에서 달성되었다.

정복왕 윌리엄이 전쟁에서 단 한번만에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지리적 환경 때문이었는데,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프랑스로부터 영국으로 선진 정치 제도가 전파되는 것 을 지연시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불균형을 이루게 하였던 영국 해 협이라는 장벽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다. 이제 정치 진보와는 별도로 지리적 환경이 혁명의 또 다른 이유가 되었으며 ,16) 이 두 원인이 복합되어 진행된 영국의 혁명의 중요성은 그 뒤에 발생한 반발에 의해 입증된다. 노르만의 첫 세 왕들은 정복 왕 윌리엄의 혁명 체제를 성공적으로 유지한 능력 있는 인물들이었 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평범한 지배자가 계승을 하자 반발이 발생하 였다. 스티븐의 무사안일적인 지배하에서 영국은 정치 발달에 있어 원봉건적인 단계에서 초기 봉건 단계로 이행하는 시기에 흔히 발생하 는 최초의 혼란과 비슷한 혼란을 경험하였다. 이 단계는 그 당시에는 혁명의 결과 때문에 빠진 단계였다. 스티븐 이후에는 존왕의 국심한 탄압과 같은 몇 번의 혼란이 있었고, 그 다음에 영국의 정치 발달은 봉토와 국가 사이의 비연속성을 조금이나마 나타냈던 왕과 귀족들이 교대로 권력을 장악하는 흔히 일어났던 유럽적인 패턴을 밟게 되었 다. 일본의 주요 혁명은 영국 혁명 뒤에 나온 것과 갇은 주목할 만한 반발을 유발하지 않았다. 사실상 일본 혁명은 일본 자신의 정치적 경 험이 지탱할 수 있는 것과 보조를 맞추었다. 영국 혁명이 그 당시에 영국의 정치 발달과 북프랑스의 정치 발달 사이의 불균형 때문에 일 어난 것과는 달리, 일본 혁명은 일본이 지탱할 수 없는 단계로 치닫 지는 않았다. 일본의 혁명은 정치 발달에 있어 봉토의 우세에서 민족 국가의 우세로 바뀌면서 발생한 대규모적인 혁명의 가장 좋은 본보기 라고할수있다.

16) 178 혓에 지리적 환경은 다시 혁명의 원인이었다. 이 경우에는 반대 방향 으로, 죽 영국에서 프랑스로 역시 정치 제도가 그 장벽을 넘었다.

7 봉건제의 종말 봉토와 민족 국가는 연속적인 관계를 갖기도 하고 비연속적인 관계 를 갖기도 하기 때문에, 봉건제가 소멸되었다는 것이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사실 봉건제에 관한 연구서에서 봉건제의 종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이다. 대부분의 저지들은- 왕들의 정책과 상업, 도시, 중간 계급의 성장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첫번째의 문제, 죽 왕들의 정책에 대해서는 살펴보았다. 그러나 왕과 귀족의 대립에서 왕이 승리하는 경우라도 그 대립으로 인해 반드시 귀족들 세력의 봉건적 기반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봉건제가 폐지 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지역에서도 의식적으로 봉건제를 폐지하려는 운동은 드물었고, 있었다 하더라도 후기에 이루어졌으며, 그 운동은 봉건 제도의 핵심적인 것을 제거하기보다는 봉건 잔재를 제거하는 것 에 목표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봉건제 폐지에 대한 역사를 추적하기 전에 필요한 이론적인 분석이 요구되는 수수께끼이다. 〈봉건제의 개념은 18 세기경에 잔재하고 있었던 어떤 제도들을 묘사 하기 위하여 18 세기 사상가들이 개발한 추상 개념이다〉라는 이 책의 서론에 나오는 말에서 이 수수께끼에 대한 최초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유럽에만 적용되나, 유럽 사회에서 왜 의식적인 봉 건제 폐지 운동이 보다 더 일찍 일어나지 않았었는가에 대한 이유를

암시해 주고 있다. 초기에 사람들은 봉건제를 정치적 관계들의 일반 적인 범주로서 의식하지 못하였다. 왕들은 가끔 특정한 봉건적인 인 물들 혹은 특정한 봉건 관행에 반대하였고, 성장하고 있던 중간 계급 은 가끔 봉건적 인물과 그 관행 모두에 반대하였으며, 봉건적 인물을 제거하고 그 관행을 타파하려 했던 왕들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이러 한 형오감 때문에 봉건 제도를 전면적으로 폐지하고자 하지는 않았 다. 중간 계급의 성장과 증대하는 부 그리고 그 부의 유동성이 봉건 제를 약화시키는 도구들이었으나 그렇다고 봉건제를 몰락시킨 요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봉건제를 하나의 제도로서 인식하기 훨씬 전에 봉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유럽의 경우는 특수하다. 봉 건제 붕괴의 시기는 약 l 心1 l 기에서 17 세기경이며, 서유럽에서는 그 시작이 빨랐고, 동유럽에서는 늦었다. 봉건제가 붕괴되던 바로 그 당 시에 정부와 주민들은 그때 일어나고 있던 또 다른 변화, 죽 교회 세 력의 몰락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것이 유럽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봉 건적 정치 관계의 변화를 거의 알지 못하고 있었는가의 이유이다. 죽 다론 곳으로 관심이 옮겨졌기 때문이었다. 그 반대로 주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정치 변화에 대한 인식이 봉건제가 몰락하면서 바로 나타났 거나 아니면 아마 봉건제의 몰락과 더불어 나타났을 것이다. 왜냐하 면 대체로 제자백가의 정치 사상은 바로 이 사건, 죽 봉건제의 몰락 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는 정치 변화로부터 관심을 돌리게 하 는 유럽식의 정교(政敎)의 분리나 그 대립과 같은 현상이 없었다. 그러나 주에서도, 그 변화에 대해 인식하기 얼마 전부터 이미 그 변화가 시작되었다. 유럽에서 봉건제의 폐지가 미리 계획된 정치 변 화가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미리 계획된 정치 변화~ 아니었다. 이 두 사회에서, 전적으로 어떤 새로운 것이 그 당시에 이 미 해묵은 봉건제를 변화시켰다.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 사이의 관계

는 직접적이거나 혹은 논리적으로 연속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 때문 에 앞장에서 우리는 봉토와 민족 국가의 발달 사이의 비연속성의 문 제에 직면하였다. 한 봉건 사회에서 한 민족 국가는 봉토에서 그 민 족 국가의 이데올로기의 일면, 죽 군주와 신민의 개인적인 관계에 관 한 이데올로기만 취한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봉토와 민족 국가 사이 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비연속성은 봉토와 그리고 봉건제 전반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이 비연속성은 특히 일 본에서 오랫동안 봉건제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 반면에, 이 비연속성은 한 제도와 대립하는 다른 제도, 더 구체적으로는 봉토에 대립하는 민족 국가를 설립할 수 있는 다른 요소들이 개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러한 요소들은 사실상 민족 국가의 이데올로기 의 다른 면, 죽 제국에서 유래한 이데올로기_그러나 그 이데올로 기는 국가의 성격에 부수되는 것이다 ― ―에 의해 들어왔다. 민족 국 가는 본질적으로 그 민족 국가가 포괄하고 있는 봉토를 파괴할 수는 없다. 개개의 민족 국가는 한 제국의 영상(映像, re fl ec ti on) 이기도 하고 예형 (豫型 p re fig ura ti on) 이기도 하다. 모든 민족 국가의 군주는 많든 적든, 빠르든 늦든 간에 황제의 특질에 근접하려고 한다. 민족 국가가 완전하게 발달하면 할수록, 민족 국가는 더 제국적인 성격을 띠고 그 군주는 더 황제의 특질을 지니게 된다. 사실상 성공적인 민족 국가는 제국으로 발달할 잠재력을 갖고 있으며, 우리가 다루고 있는 모든 사 회에서 지금까지 발달했던 국가는· 실제 제국으로 발달하였다. 그리하 여 민족 국가는 본질적으로 공격적인 성격을 가전 제도(한때 봉건적 이었던 국가는 또한 강력하게 방어적인 상태에 있긴 하였지만)이며, 다 수의 민족 국가들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민족 국가들간의 전쟁이 발생하였다. 만약 전쟁을 억제하는 다른 인자(因子)가 개입하 지 않았다면, 끊임없는 전쟁이 있었을 것이다. 함무라비 이후의 메소

포타미아에는 그러한 인자들이 거의 없었거나 혹은 있었다 해도 아주 약했으며, 사실상 민족 국가들은 끊임없는 전쟁 상태에 놓여 있었다. 봉토는 민족 국가와는 다르다. 봉토는 아주 강력한 세력을 가졌을 지는 모르나, 본질적으로 방어적인 성격을 가진 제도였다. 봉토는 의 집단에 대한 방어롤 목적으로 하는 내집단이다 . 그래서 한 봉토는 다 른 봉토의 침입으로부터 안전이 확보되었을 때는 전쟁을 할 필요가 없다. 강력한 민족 국가가 세워졌을 때, 그 민족 국가에 포함되어 있 는 봉토에 대한 안전은 자연히 획득된다. 그리하여 봉토의 결속력은 약화되게 된다. 그러나 한 봉건 사회에서 발생한 민족 국가는 봉토가 원래 갖고 있던 강인한 성질을 가지며, 민족 국가의 공격적인 특성이 이 방어적인 성격과 결합되면 아주 위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다론 국 가들과의 투쟁에 있어, 봉건적인 민족 국가 혹은 한때 봉건적이었던 민족 국가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세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하 였고, 이 가능한 수단 중의 하나는 강력하고, 중앙 집권적인 관료 국 가, 궁극적으로는 전체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봉건제를 폐지하 는 것이었다. 의집단으로부터의 위험이 점점 소멸되면서 내집단으로 서의 결속력이 점차 약화된 봉토는 민족 국가가 굳건하게 확립되기 전에 처음 나타난 군주의 공격에 저항하였던 것과 같은 강력한 저항 울 이제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이것이 이론상 봉건제 폐지에 대한 확실한 이유이다. 봉건제가 폐지되는 과정의 역사를 살피기 전에, 이론적으로 두 가 지 사실이 더 밝혀 두고자 한다. 첫째, 군주들은 많든 적든, 빠르든 늦든 간에 황제의 특질에 근접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다. 항상 그들은 그러한 특질을 황제로부터 그리고 봉건적인 여건하에서 는 유령 황제로부터 배운다. 군주가 유령 황제의 봉신으로서 출발하 였던 곳에서는, 그 봉신제 때문에 황제의 특질이 오랫동안 발달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당연히 예기된 일이다. 왜냐하면 봉건 영주, 죽 귀

족으로서 그들이 추구하였던 것은 본질적으로 방어적이었기 때문이 다. 실질적이었건 잠정적이었건 처음부터 군주가 민족 국가의 왕이었 던 경우에는 그 군주의 제국주의적 목적은 일찍부터 추구되었을 것이 댜 후자의 형태를 띤 군주는 전자의 형태를 띤 군주보다 더 빨리 국 가간의 전쟁을 유발하고, 그 결과 그 사회가 발달하는 초기 단계에서 봉건 제도를 억압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두번째로, 결코 봉건화되지 않았던 민족 국가들괴·, 그들의 군주둘이 봉건화되었던 국가의 군주와 황제의 특질을 공유하는 민족 국가들에 우리는 다시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봉건화되지 않았던 민족 국가들 은 봉건화되었던 민족 국가들이 갖는 강인한 내집단의 결속력을 공유 하지 않았다. 그 반대로, 비봉건적인 국가둘은 해체되어 가는 제국에 서 직접 성장하여 ,I) 구제국의 보편성을 물려받으며, 내집단의 성격이 발달하는 것을 강력하게 억제하였다• 그러므로 비봉건 국가들간의 전 쟁은 치열하지 않은 경향이 있다. 한 민족 국가의 국민은 쉽게 다른 민족 국가의 제국적인 권위에 복종하게 된다 .2) 그러나 봉건적이었던 국가들 사이의 전쟁은 끝까지 싸워야만 하는 치열한 전쟁이었다 .3) 만 약 전쟁이 종국에 이를 때까지 봉건 잔재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 면, 그 잔재는 전쟁이 끝날 쯤에는 소멸된다. 이러한 전쟁은 역사의 대아이러니이다. 왜냐하면 한 민족 국가가 다른 민족 국가와 싸울 수 I) 만약 도시 국가들의 통합도 역시 민족 국가로 설명된다면, 그 도시 국가들 은 아마 다른 성격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도시의 통합으로 형성된 그 리스의 D i adoch i(알렉산더 사후 마케도니아를 분할하여 다스린 6 명의 장 군)와 로마의 도시 국가들은 다른 성격을 가졌던 것 같지 않다. 2) 스펭글러는 로마 제국을 형성케 한 여러 전쟁에서 이것을 연구하였다. 그 러나 그는 그 속에서 그가 말하는 〈문화〉의 보편적인 성격을 발견했다고 생 각하는 오류를 범 하고 있다. Decline of the West, C. F. At ki n s on(tr a ns.), one vol. edn. (New York, 1932) , I , 36 ; II , 422 를 참조. 3 ) Sp en gl er, II , 416-4 31 ; Toy nb ee, A St ud y of Hi st o ry, I , 53-1 24 and pa s- si m 을 참조.

있는 능력을 부여한 힘은 그들 민족 국가의 봉건적인 성격에서 유래 하였고, 그 전쟁에서 확실히 그리고 완전하게 파괴된 것은 봉건적인 제도 혹은 봉건제 이후 시대 p os t-fe udal 의 제도였기 때문이다. 봉건제를 억제하고 폐지하는 것에 관한 역사를 추적하는 것은 단순 한 과정이 아니다. 복잡한 정치적 과정에 대한 문제를 다루기 전에, 경제적 변화의 영향을 추출하여 재검토하겠다. 정치적 과정에 대한 문제를 디를 때, 다론 문화권에 속한 사회의 군주들의 다양한 황제적 인 특질이 그 정치적 과정을 추적하는 지침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 01 댜 중국의 주, 유럽, 함무라비 이후의 메소포타미아는 전체적으로 고찰 되어야 하고, 일본은 문화적으로 한대(漢代) 이후의 중국의 연장이기 때문에 한 이후의 중국도 고려되어야 한다• 위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정치 사상에 관한 이론적인 논쟁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것은 메소포타미아에 관한 직접적인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가 능한 한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논의를 종결지으면서 추론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일본의 정치 사상에 대해 전혀 무지하지 않 기 때문에 일본의 정치 사상에 대해서는 보다 확고한 근거를 갖고 어 떤 제안을 할 것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일본의 봉건제는 유럽에서 발생한 국가간의 경쟁과 유사한 경쟁의 결과로서 해체되었고, 주로 유럽의 정치 사상에 입각하여 형성된 새로운 국가에 의해 대체되었다 -. 는 홍미 있는 사실에 대한 가능한 설명을 할 것이다. 유럽과 일본에 대해서는 상업의 발달과 중간 계급의 성장이 봉건제 폐지의 도구가 되었는지의 여부를 시험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다른 사회에서는 이를 시험할 증거가 거의 없다. 유럽에 적용할 때, 그 원 리는 부분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죽 군주들은 교역으로부터 새로운 재원을 얻어 군사적으로 그리고 행정적으로 그들 봉신들의 봉 사에 보다 덜 의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군주들은 봉건 귀족들의 권

력을 빼앗고 봉급을 받는 군대와 관리들로 구성된 정부를 발달시켰 댜 이 원리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너무 단순화한 것이다. 왜냐하면 대 귀족들도 역시 관리와 봉급을 받는 군대를 가질 수 있었고, 그리하여 똑갇은 방법으로 왕이 그들에 대해 취한 방법에 대응할 수 있었기 때 문이다.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중세 말기에 대귀족들이 교역에 상당히 많이 종사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들은 가끔 상인들에게 자 금을 대주는 투자가 s i len t p ar t ner 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영지에서 그리고 왕실 정부와 관련해서는 그들이 제공할 수 있는 보호의 대가 로 상인들과 이익을 나누어가졌다. 때로는 그들은 상인들을 위해 정 부로부터 특권과 독점권을 획득하였다. 실제로 서유럽의 어떤 시대와 어떤 지역에서는 대귀족들이 왕들보다 더 많은 이득을 교역으로부터 얻을수 있었다. 그러나 소봉건 귀족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부정한 방법으로 소 상인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 한, 그는 상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없었고, 그의 조그만 수입은 토지에서 나오는 고정된 수입이었 기 때문에 상업의 확대로 발생한 물가 상승 때문에 간접적이기는 하 지만 극심한 손상을 입었다. 만약 그의 지위가 아주 위험하게 된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토지를 팔아 그 자신이 상인이 되는 길 이었다. 많은 소귀족은 이 길을 택하였다. 대체로 그 토지의 구매자는 대귀족이었고, 대귀족은 그 토지를 사기 위하여 상업으로 번 돈을 사 용하였다. 봉토가 크게 확장된 것은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방식에 의 해서였다. 그의 소귀족들은 용병이 되거나 또는 보다 보수적인 대귀 족의 개인적인 가신이 됨으로써 그들의 수입을 보충하였다. 어느 경 우를 택하더라도, 그는 대귀족 또는 왕에 의해 고용될 수 있었다. 중세 말과 근대 초 유럽 사회가 급격하게 변화하게 된 것은 많은 용병과 그 용병을 고용할 수 있었던 유동 자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 변화는 사회 변화에 미치지 못하였다. 군대는 더 이상

40 일간 봉사하는 봉건 군대는 아니었고 4)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 는 다양한 단위 부대로 형성된 용병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계약에 의해 고용되었고 상임 지휘관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결코 집도, 직업 도 없는 떠돌이가 아니었으나, 본질상 운과 목숨을 걸고 모험하는 투 기꾼들이었다• 그들의 직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포로의 몸값을 받 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였을 때 그들은 포로를 잡았다. 그 부대 의 모든 사람들은 포로에 대해 각자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부대의 지휘관은 포로에 대한 최우선의 권리를 갖고 있었다. 그들을 고용한 왕 또는 귀족들은 그들과의 계약에서 포로에 대한 그들의 권 리를 보증하였다 . 전쟁에서의 승리는 그들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었으나 전쟁에서의 패배는, 특히 포로가 된 자에게는 몰락울 의미 하였다 .5)

4) 실제 소집된 봉신들은 너무 많은 권리를 갖고 있어 전사로서의 기능은 용 병과 경쟁이 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봉신들은 훈련이 잘되지 않았고 시대 에 뒤떨어전 장비를 갖고 있었다. 5) 이 관행과 연관되어 발달한 많은 홍미 있는 사실이 있다. 런던, 파리, 보르 도 등의 상인들은 투기를 목적으로 이 포로들을 돈을 주고 구입하였다. 대 상인들은 이 포로둘을 대귀족에게 다시 팔았다 . 이들은 사병을 갖고 있었으 며 포로들이 몸값의 일부를 지불할 때까지 감금할 수 있는 감옥을- 갖고 있 었다. 포로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하여 주의 깊은 배려를 하였고, 사회적 지 위가 높은 사람은 지위가 낮은 사람의 포로가 될 수 없고, 지위가 낮은 사 람은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사회적 지위가 높은· 포로를 파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몸값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군사 법정이 발달하였 고, 서유럽에서는 이 분쟁에 대한 판례법이 발달하였다. 이 분야의 가장 대 표적인 예들 중의 하나는 영국의 기사들 Shakell 과 Haule, 그리고 그들의 포로 the Casti lian Count of Den i a 의 이야기이다. G. M. Trevelya n , Eng la nd in the Ag e of Wy e/if/, 4th edn.(London, 1909), pp. 87-9 7 를 참조.

이것이 의사 봉건제(擬似封建制, basta r d fe udal i sm) 이다. 백년 전쟁 은 이런 식으로 전행되었고, 이 때문에 백년 전쟁은 간헐적인 전쟁을 하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영국의 장미 전쟁에서 귀족들이 그리고 프랑스에서의 백합의 귀족들 (Pr i nces of Li lies : 릴리는 백합꽃

으로 프랑스에서는 왕실의 문장울 나타내는데, 왕실 귀족을 의미함. 역 자 주)이 이런 식으로 싸웠다.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의 대부분도 역 시 전쟁터와 돈을 벌기 위한 장소가 되었으며 fina nce6, 점점더 전자라 기보다는 후자를 위한 장소로 되어갔다. 그리하여 서유럽의 왕과 귀 족, 봉토와 민족 국가 간의 마지막 전쟁에서 용병들이 싸웠다. 이 이후 용병은 오랫동안 전쟁의 주역들이었다. 30 년 전쟁은 거의 전적으로 용 병에 의한 전쟁이었다. 프랑스에서는 국민군이 일찍이 15 세기 중엽에 등장하였으나,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민군은 훨씬 늦게 출현하였다.

6) 재정(財政, fi nance) 이라는 단어가 이 시기에 몸값을 결재한다는 의미로 유 럽어에 들어온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4, 15 세기 유럽의 용병과 봉건제 이전의 로마 제국 말기에 대귀족 에 의해 고용된 용병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다. 유럽의 군주들은 용병 울 고용하는 데 있어 거의 독점적인 권리를 추구하기 시작하였고, 종 국에 가서는 그 권리를 획득하였기 때문에, 사실 거의 원점으로 회귀 하는 듯했다. 그들이 그 권리를 획득하였을 때, 로마 제국이 강성하였 울 때처럼, 군대는 다시 국가에만 예속되었다. 상업의 발달이 관리(官吏)에 의한 정부의 발달에 미친 영향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관리에 의한 정부의 발달은 전적으로 상업의 영향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경험에 의해 행정 수단이 개선되고 점차 더 많은 관리들이 요구됨에 따라, 오랫동안 왕과 대귀족 모두 관리에게 봉급을 주지 않고서도 그들에게 봉사할 관리를 찾을 수 있었다. 왜냐 하면 비록 성직 천거권 advowson 은 실제 남용되었다고 하더라도, 직 영지 형태의 소봉토와 교회에 대한 성직 천거권이 봉급을 대신하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두 재원(財源)은 중세 동안에 그리고 근대에 도 계속 사용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봉급과 상업을 통하여 군주와 대 귀족의 수중에 들어온 소비재의 공급권은 관리들의 봉사에 대한 대가 로 그들에게 보상할 수 있는 아주 편리한 수단이었다. 어떤 형태의

수입이든지간에 많은 수입은 어느 정도 7 ) 많은 관리를 고용할 수 있게 하였다• 시간상으로 볼 때, 상업의 성장은 관리제 성장의 2 차적인 원 인이었으며(만약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리고 수단이라는 측면 에서 볼 때 그것은 항상 2 차적인 원인이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

7) 여기서 말하는 어느 정도라는 것은 아주 제한된 정도라는 뜻이다. 왜냐하 면 증가된 수입의 상당한 부분이 물가의 상승과 물질적 요구의 중대에 소요 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어떤 지역에서 상인들은 대귀족과 군주들로부터 해방되었으 나, 그 자체는 아마 이탈리아를- 제의하고는 봉건제의 발달에 깊은 영 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이탈리아에서 상인의 자유가 봉건제의 몰락을 촉진시켰으며 또한 봉건제의 발달도 저해하였다. 독일에서도 역시 상 업 도시는 대체로 군주와 대귀족으로부터 해방되었고, 독일 제후들이 신성 로마 황제의 세력을 붕괴시키는 데 상업의 확장이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아시카가 막부 시대의 일본에서 상업이 점진적으로 번성하였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중세 말기 유럽의 번성과 똑같다고는 할 수 없으 나 어느 정도는 홉사하였다. 중요한 차이점은 정치적 발달과 연관시 켜 볼 때 일본에서는 유럽보다 더 일찍 상업이 발달하였다는 점이다. 의국 무역, 즉 중국과의 무역은 주로 선원(禪院, zen monas t er i es) 에 의해 조직되었고, 쇼군과 대귀족 모두 그 무역에 관심을 가졌으나, 전 자가 후자보다 더 많은 이득을 취했다고는 할 수 없다. I Q1 l 기에 일 본을 통일한 지배자가 그들이 복속시킨 그들의 경쟁자들보다 상업으 로부터 더 많은 이득을 취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 귀족과 쇼군은 국내 상업에서 이득을 거의 취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상인들은 독일 에서와 같이 도시를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연합된 조합gui ld 울 기반으로 하여 독립적이었기 때문이다 .8)

8 ) Takekoshi, The Economi c Aspe c ts of the Hi st o r y of the Civ i l iza t i on of Ja - pan , I , 239- 2 43.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상업의 번영이 소귀족들의 생활을 어렵게 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그러나 그 정도는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일본 에서는 의사 봉건제가 발생하지 않았고, 따라서 일본의 봉건 군제(封 建軍制)는 변화되지 않았다. 관료 정부가 일본에서 발달하였다고는 하나, 15 세기 말까지는 그렇게 많이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 관료 정부 의 발달은 귀족들이 상업에서 얻은 부가 증대하면서 가능할 수 있었 을지 모르나, 이 점은 여전히 증명되어야 할 숙제이다. 왜냐하면 정상 적인 봉건 통치 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미세(米稅)의 일부를 받아 생계를 유지하였다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아시카가 시대에 다이묘가 출현한 것은 프랑스에서 지방의 대귀족이 출현하였던 것과 매우 흡사하다. 다이묘의 출현은 소귀족들의 중요성을 절감시키게 되 었고, 소귀족들은 대체로 다이묘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이러 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상업에서 발생한 부가 프랑스에서 그에 상응 하는 시기에 발생한 부보다도 비교적 더 많았을지 모른다. 물론 부가 정치 발달 과정과 연관되어 있으나, 그 부는 그 과정의 성격을 크게 변화시킬 수 없었다. 이 장(章)의 후반부에 어떤 해석을 하기는 하였지만, 도쿠가와 시 대의 상황은 해석하기가 아주 어렵다. 도쿠가와 정체의 봉건적 구조 는 다소간 고착화되었고, 그 정부는 무역을 간간이 네덜란드인을 통 한 무역에만 국한시키는 고의적인 무역 정지 정책을 추구하였다는 것 은 명백한 사실이다. 18 세기에 이르면 이러한 상황하에서는 봉건 체 제의 유지가 어렵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고, 국내 교역은 일본 의 부가 꾸준히 상인, 특히 대상인의 수중에 들어가고, 그의의 사람들 은 가난하게 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막부의 보수주의 덕택에 나약 한 봉건 귀족이 권력을 쥐고 있었다는 설명은 아주 믿을 만한 것이다. 그 체제가 부를 가전 계급, 죽 상인에게 권력을 이양하였다고 가정 해 보라. 사태가 더 호전되었을까? 그 체제가 배타 정책을 버리지 않

는 한 그리고 의국 무역을 허용함으로써 새로운 부의 근원을 개척하 지 않는 한, 더 나울 것이 없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 의국 무역은 상인들로 하여금 그들과 같은 민족을 더 이상 수탈하지 않게 했을 것 이고 아시카가 막부하에서와 같이 다이묘와 그들의 예속인들은 부를 더 많이 축적하여 상인들의 물건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만약 도쿠가와 막부가 배타주의 정책을 버렸다면, 그들이 봉건 정책을 역 시 포기하도록 하는 어떤 강제적인 요소가 있었을까? 그러한 강제적 인 요소가 있었다고 보기는 상당히 어렵다.” 그 당시 다이묘는 아마 몰락하지 않았을 것이고, 17 세기와 그 이전처럼 지방에서 상당한 영 향력을 행사하였을 것이다. 일본 최대의 귀족인 몇몇 토자마 다이묘 10) 는 현명한 정책으로 막부의 배타주의 정책의 나쁜 영향을 피할 수 있 었으며 그들 봉토가 번영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대봉건 귀족 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II)

9) 만약 아마 의국에서 들어온 사상의 영향에 의하지 않았다면, 이 외래 사상 은 그 당시 만연할 수도 있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IO) 1600 년에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도쿠가와 가문에 복종한 가문들은· 島津, 前田, 伊達이다. 그들은 항상 일본의 다른 가문과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 었다. 1I) 적어도 한 경우, 薩摩 가문의 현명한 정책에는 고립 정책을 위반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Takekoshi; m, 223-226 을 참조.

사실상, 도쿠가와 지배하에서의 비정상적인 일본의 역사는 대봉건 귀족들의 세력과 정부의 봉건 관행 중 어느 것도 번성하는 상업과 양 립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는 것 갇지는 않다. 만약 일본의 역사가 봉건 정체는 의국 무역의 억제와 국내 상 업의 발달과 양립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해 준 다면, 그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다른 사회들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은 이 문제에 대한 실마 리를 거의 제공해 주지 못한다. 주(周)의 상업 발달은 아주 늦었던 것 같고, 대제후국들이 형성되어서야 비로소 상업이 발달하였다. 그러

나 이것은 충분한 자료가 없는 데서 비롯된 주장이며, 그래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유럽과 일본에서 나온 증거 자료의 결과는 다른데, 그것은 주로 유 럽의 군사적인 변화 문제에서 다르다. 민족 국가간의 전쟁은 유럽 상 황에서는 또 다론 문제이며, 이 문제는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유럽의 봉건 군대를 용병군으로 전환시킨 것은 상업의 발달 이라기보다는 민족 국가간의 전쟁이었을지도 모론다. 이 문제를 차치해 놓고, 유럽과 일본의 증거를 종합해 보면 봉건 사회에서 상업의 발달은 그 체제를 반드시 붕괴시키지는 않는다. 상 업의 발달은 소지방 귀족에 이를수록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는데, 그렇게 줄어든 세력을 어떤 비율로 군주와 대귀족이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물론 많은 상업 수입으로 관리제가 발달할 수 있었을 때 군 주와 대귀족들이 소귀족들을 종속시킴으로써 획득한 보다 큰 영지는 관리들에 의해 지배될 수가 있었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그 영지가 반 드시 관리제에 의해 지배되었는가는· 분명하지 않다. 봉급을 받는 관 리들의 증가와 봉건 행정의 감소 사이의 관계는 사실상 상당히 복잡 한 것이며, 전혀 단순한 산술적인 관계는 아니다 . 군주와 봉건 귀족과 의 관계에 있어서는 군주의 활동 범위와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권리 와 같은 전통적인 권리 때문에 그들은 결국 귀족들보다 더 많은 이득 울 상업에서 취할 수 있었다. 여하간에, 상업이 아주 중요하게 되었을 때, 유럽과 일본에서 모두 통일된 민족 국가가 성장하였으나, 일본은 여전히 봉건적이었으며, 몇몇 유럽의 국가들도 봉건 잔재를 상당히 많이 갖고 있었다. 이제 정치 문제에 대해 알아보자. 중요한 것부터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민족 국가들간의 경쟁이 민족 국가들의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개혁을 하도록 하는 것, 성격이 아주 다론 군주의 제국적 또는 절대 주의적인 성격 그리고 새로운 정치 사상의 대두와 국가의 구조에 대

한 그 새로운 정치 사상의 영향 등이다. 처음의 두 개는 봉건제 폐지 에 영향을 끼친 요소들이다. 세번째, 죽 국가에 관한 이론의 대두는 봉건제가 폐지되는 후기 시대에 병발(供發)되는 것으로, 적어도 초기 단계 이후에야 나타나는 것이다. 주와 유럽의 경우에 새로운 정치 사 상은 근본적으로 봉건적인 과거에 대한 연구에 의해 한정되었다. 유 럽에서의 봉건제 폐지의 전 과정이 그랬던 것처럼, 유럽에서의 새로운 정치 사상은 유럽이 정치와 교회로 분리되어 있어 더욱 복집하였다. 민족 국가의 군주들이 갖고 있는 제국적인 성격의 정도는 아주 홍 미로운 방식으로 사회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이 입증된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차이가 다음과 같은 일련의 시리즈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 기 때문이다. 죽 주, 서유럽, 함무라비 이후의 메소포타미아와 한(漢) 이후의 중국의 순(順)으로 이 지역들에서는 황제와 민족 국가 군주 사이의 구분이 점차 희미해졌다. 다시 말하면 이 시리즈의 한쪽 끝에 서는, 죽 주의 황제와 민족 국가의 군주는 서로 완전히 구분이 되며, 다른 끝에서는, 즉 한 이후의 중국에서는 황제와 민족 국가의 군주가 완전히 일치되었다. 게다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12) 독일의 신성 로마 황제의 영토인 중앙 유럽을 중심부 사회에 포함되어 있는 별개의 사회, 즉 부속 사회 sub-soc i e ty로 규정할 수 있다. 이렇게 중 앙 유럽을 분리하였을 때, 이 시리즈는 5 개의 사회를 연결시키는 시 리즈가 되어, 중국에 앞서 중앙 유럽이 그 시리즈의 맨 처음에 오게 된다. 이 시리즈에서 주와 서유럽은 민족 국가 군주의 기원에 대한 의식을 버리고 철저히 연구되었다. 중앙 유럽과 주의 민족 국가 군주 는 유령 황제의 봉신으로 출발하였고, 그들의 국가는 원래 대봉토였 다. 다른 세 사회에서는 민족 국가의 군주는 황제와는 상관없이 독립 적으로 성장하였고, 그들의 국가는 영토적, 역사적, 자연 환경적 구분 에 의해 결정되었다. 12) 위 pp. 350-3 52 를 참조.

이 시리즈의 의미는 이 연구의 결론에서 다시 고찰될 것이다 .1 3) 하 지만, 이 시리즈는 봉건제 폐지의 전 과정을 다룰- 수 있는 아주 유용 한 골격이다. 사실 이미 재검토한 경제적 요인들도 이 골격에 맞추어 넣을 수 있다. 그러므로 곧바로 이 시리즈에 대해 분석하기로 하자. 중앙 유럽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항상 황제로 남아 있었으 며, 그의 권력은 황제로서의 권력이라기보다는 사적인 봉건 귀족으로 서의 권력이었지만, 그는 항상 어떤 권력을 갖고 있었다. 1555 년 아우 크스부르크 회의때까지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던 독일의 제후들은 민족 국가 군주들(만약 독일의 제후들을 민족 국가의 군주라고 부를 수 있다면)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황제의 봉신들이었으며, 1555 년에 는 그들과 황제 사이의 관계가 봉건적인 성격을 띠지 않았지만, 그들 의 대부분은 민족 국가들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황제의 예속인으로, 종속 신분으로 남아 있었다. 독일의 제후들은 결코 황제의 성질을 갖 지 못하였다. 브란덴부르크-프러시아는 서유럽의 대민족 국가와 같은 방식으로 민족 국가를 형성하려고 노력하였다. 브란덴부르크-프러시 아의 성공이 아주 제한적아었다는 사실은 독일의 다른 제후국들이 이 방향으로는 거의 성공할 수 없었다는 것을 강조해 주고 있다. 주에서 〈 왕〉은 언제나 황제를 의미하였다(실제로 왕이 존재하지 않 을 때까지).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는 달리 중국의 왕은 8 세 기에 그의 권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왕이 권력을 상실하면서 또는 권력을 상실한 후에 민족 국가들이 형성되었고, 그 민족 국가들의 지 배자들은 독일의 제후들보다는 더 민족 국가적인 특질을 가졌다. 실 제로 때]기 중국에서 민족 국가들의 지배자들이 스스로 황제의 칭호 를 참칭하였으나 ,14) 중앙 유럽과는 대조적으로 그것은 왕이 권력을 상 13) 아래 p. 553 를 참조. 14) 기원전 370 년에서 315 년 사이 ; Bodde, 위 p. 69 와 H. T. Lei, The Ri se of the Emp er or Sy st e m in Ancie n t Chin a , Chin e se Socia l and Poli tica l Sc i- ence Revie w , XX (19 36), 253-254 를 참조.

실하였다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 .1 5) 왜냐하면 유럽의 경우는 나폴레 옹 시대에 이미 1 세기 동안 존속해 왔던 프러시아의 왕 이의에 일단 의 왕들이 등장한 가운데 주의 왕과 같은 성격을 가진 신성 로마 황 제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15)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계승자는 전(前)봉건적인 관행의 발달로 인하여 초 기에는 선출되었다. 그 결과, 각 가문의 철박한 사정 때문에 차례로 몰락하 면서 황제의 관은 한 대가문에서 다른 대가문으로 전달될 수 있었고, 또 전 달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주에서는 왕관은 사실상 양도될 수 없는 것이 었다. 황제의 권위를 신왕조에 물려줄 수 있게 하는 〈천명이 바뀐다는 원 리 〉 는 후기 중국의 역사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쳤으나, 맹자(기원전 373- 288) 이전에, 이론으로서 널리 알려졌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리하여 주왕조가 기원전 771 년에 서안에서 이주하여 주왕조의 모든 것을 상실하였을 때, 주 왕의 몰락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서유럽에서는 민족 국가의 기원이 변화하였기 때문에 민족 국가 군 주의 성격도 변화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신성 로마 황제가 유령 황제 로 간주되면서 발견된 서유럽과 중앙 유럽 사이의 구분을 좀더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중앙 유럽이라는 것 그리고 서유럽이라는 것은 여기서 단순히 지리적 용어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치 발달 의 두 체제를 16) 의미한다. 중앙 유럽이라 함은 원래 독일 지방울 말 하는 것인데 잠시 동안 북이탈리아가 이 지역에 병합되었다. 그것은 독일의 신성 로마 황제가 지배권을 가지며 최고(最高)의 귀족이었던 정치 체제였다. 거기에서 로마 교황은 황제와 대등한 권위를 갖고 있 었으나 불안정하였고_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교황과 황제 모두 유 령 황제였다 ―一 신성 로마 황제는 유럽 기독교 사회의 상칭적인 세속 의 지배자였기 때문에, 교황과의 대립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

16) 그러한 체제는 물론 완전한 체제는 아니다 . 완전한 체제는 수학에서만 존 재하며, 인간이 발명해 낸 것이다. 만약 사회적 발달 단계에 있는 체제가 다 론 대부분의 체제보다는 더 불완전한 것이라면, 그것은 사회적 발달 단계에 있는 체제를 자연적인 상태에 있는 일반적인 체제와 정도의 차이만 나타내 는것이다.

람은 어느 누구보다도 황제 자신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성 • 속의 대 립이 중앙 유럽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여기서 서유럽이라 함은 중앙 유럽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 문에 중앙 유럽은 실제로 한 체제 안에 있는 또 다른 한 체제이다. 사실상 서유럽이라 함은 라틴 교회가 포괄하는 전 유럽 지역을 일컫 는 것이다. 신성 로마 황제와 교황 모두 서유럽에서 그들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나, 그 지위는 그들이 중앙 유럽에서 차지하고 있던 지 위와 같은 것은 아니다. 단지 카롤링거조의 황제들만이 서유럽에서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의 신성 로마 황제는 결코 그 지배권을 갖지 못하였다. 그들은 종주(宗主, suzera i n) 는 아니었고 다만 다른 군 주들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전,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군주였을 뿐이 다. 마찬가지로 서유럽에서 교황의 지위도 한정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황제 이의의 다른 군주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는 대관식과 같은 순 수한 정치 권한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라틴 유럽은 분명히 역사적으로 두 체제 로 양분되어 있었다. 서유럽의 체제는 샤를마뉴가 유령 황제가 되었 울 때인 로마 제국의 첫 부활에서 비롯되며, 중앙 유럽의 체제는 오 토 1 세가 유령 황제가 되었던 때인 로마 제국의 두번째 부활, 즉 신 성 로마 제국의 부활로부터 바롯된다. 이 두 경우에 있어서 유령 황 제의 동반자였던 교황은 이 부활의 대리인 역할을 하였다. 두번째 부 활이 있은 다음 어느 시대에도 서유럽과 중앙 유럽은 서로 연관되지 않은 적이 없다. 이들 두 지도자들은 두 체제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하였지만 각각의 체제에서는 같은 유의 사람들이었다. 이의에도, 독일 은 중앙 유럽의 많은 민족 국가들로 구성되기는 하였지만(중앙 유럽 의 국가들은 서유럽의 체제에서는 봉토가 됨) 독일은 참정적인 민족 국가였고 종국에 가서는 실제로 서유럽의 한 민족 국가가 되었다. 이 탈리아는 이 두 체제와 관련하여 이상한 지위에 놓여 있었다. 납부

이탈리아와 시실리는 11 세기 노르만 정복이 있었을 때까지 전적으로 라틴 유럽이 아니라 비잔틴 유럽에 속하였고,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들은 주로 비잔틴 문화권에 남아 있었다.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는 2 세기 동안 중앙 유럽에 속하였으나, 그 이후로 그들은 중앙 유럽보 다는 서유럽에 의존한 제 2 의 부속 사회로 되었는데, 이때에 그들은 도시 국가이었다. 그러나 교황의 세속령은 그 속에서 비정상적인 지 위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서유럽의 민족 국가들은 중앙 유럽과 주의 민족 국가들과는 다르나, 함무라비 이후의 메소포타미아와 한 이후의 중국의 민족 국 가들과는 같다. 이 후자 형태의 국가들은 봉건적 발달이 그들의 정 치 적 결속을 위해 충분한 수단을 만들어주었을 때 비로소 나타나지만 봉건제가 발생하기 이전에 그들의 사회가 생겨난 순간부터 이미 잠정 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서유럽의 민족 국가들은 중앙 유럽 지역을 말발굽 형태로 에워싼 지역에서 나타났다. 최초의 민족 국가들은 말 발굽같이 생간 경계선의 서쪽에 있는 국가들, 죽 영국과 프랑스였으 며, 이베리아 반도의 민족 국가둘은 이슬람의 침입에 의해 늦게 발생 하였다. 발생 연대순으로 보면, 민족 국가는- 대체로 북쪽으로 스칸디 나비아 반도, 그 다음으로 동쪽과 남쪽으로 이동하여 라틴 유럽의 동 쪽 경계 지방에서 발생하였다. 마지막으로 중앙 유럽의 체제가 붕괴 되고 이전에 이 체제에 포함되었던 지역이 서유럽의 체제에 흡수되었 울 때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민족 국가가 발생하였다. 서유럽 국가들의 군주들은 다양한 형태에 있는 일련의 군주들 중에 서 중간 형태를 취한다. 독일이나 중국의 제후들과는 달리 서유럽의 모든 군주들은 그들의 기원상 대단한 신분이었을지 모르지만 최초에 는 봉건 대귀족이었다. 사실상 유럽의 군주들은 왕이었는데, 이 칭호 는 그 기원상 바바리안의 전쟁 지도자를 의미하며, 나중에 봉건화되 어 간 귀족들 중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귀족의 일원이었

다. 그래서 만약 유럽의 민족 국가의 군주가 기원상 실제 귀족 출신 이었고 귀족들과 더불어 봉건화되어 갔다면, 그 군주는 항상 귀족들 중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황제의 특질이 실제 권력의 행사에 있 어 효과적이 되면서 그 군주는 황제의 특질을 획득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놓일 수 있었다. 서유럽의 입장에서 보면, 신성 로마 황제는 왕들보다는 높은 권위를 가전 자이지만, 동시에 그는 결코 자신은 민 족 국가의 군주가 될 수 없었다. 합스부르크 왕조 시대에는 그의 지 배권이 방대하기는 하였지만, 그의 지배 영역을 민족 국가로 전환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그는 완성되지 못한 지배자였다. 중앙 유럽의 영 역이 서유럽의 정치 체제에 병합되면서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이 붕 괴되면서, 황제의 칭호는 일시적이기는 하였지만 어떤 특정한 민족 국가의 군주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초기에 서유럽의 왕들은 그러한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였고, 합스부르크 황제들은 막대 한 세력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서유럽 왕들과 대등한 지위에 있었지 만, 그들은 명예상 그리고 명예를 하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는 접에서 서유럽의 왕들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였다 .17)

17) 유럽의 왕들은 신성 로마 황제가 그들에게 황제의 칭호를 하사할 때까지 황제의 칭호인 〈폐하 Maj es ty〉라는 말조차 사용하지 않았댜 왕들은 17 세 기 에 폐하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Zedler, Univ e rsal Lexic o n, s. v. Maj es 血 quo te d by Bry ce , Holy Roman Emp ire , p. 263, note j를 참조.

메소포타미아의 모든 민족 국가 군주들이 황제의 칭호인 왕중왕(혹 은 이에 해당하는 )18) 을 항상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메소포타미아는- 서 유럽, 주 그리고 중앙 유럽과 다르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의 왕은 함무 라비와 구(舊)제국의 다른 지배자의 직계 후예들이기 때문에 그 7} 합 법적인 왕중왕의 칭호를 사용할 수 있는 인물인 것갇이 보인다. 그리 고 다른 군주들은 바빌로니아의 군주의 스타일을 직, 간접적으로 모 방하였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빌로니아의 왕중왕은 민족

18) 4 장 주 5) 를 참조 .

국가의 군주이면서 동시에 유령 황제였고, 이 점에서 그는 실제로 신 성로마 황제가 이룰 수 없었던 것을 이룬 셈이다. 그리하여 메소포타 미아의 모든 국가가 제국이라고 항상 공언될 수 있을 정도까지 근접 하였으나, 실제 거기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서유럽의 국가들과 마찬가 지로 메소포타미아의 민족 국가들의 경우 그 위치와 영토는 역사적으 로 자연 환경적으로 이미 결정되었으며, 봉토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 다. 예를 들면 하티와 페르시아의 군주들과 같은 몇몇 군주들은 바바 리안의 지도자들에서 비롯되었고, 하티, 우라르투, 미타니와 아시리아 의 군주들은 한때는 봉건 왕들이었거나 아니면 그와 유사한 왕들이었 을 것이댜 메디아와 페르시아는 전정으로 봉건화된 적이 없다고 알 려져 있다回 바빌로니아와 엘람도 봉건적이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래서 종합해 보면 메소포타미아의 민족 국가 군주들은 유럽의 군주 들보다 덜 봉건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정당한 것 같다. 왜냐하면 유 럽의 군주들 중 초기에는 조금이라도 봉건적이 아니었던 군주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 2 0 )

19) 아래 pp. 472-474 를 참조. 20) 스칸디나비아와 중앙 유럽의 동부 변경 지방에서는 각종 제도의 봉건적인 측면이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와 같은 정도로 발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 제국을 계승하였던 바바리안 국가의 여건과 같은 여건에서 관료적으로 통일 된 국가로 칙집 발전한 메디아 페르시아와 갇은 국가를 거기에서 발견할 수 없다. 혼합된 부족적 - 봉건적 제도가 동부 중앙 유럽에서 발생하였는데, 아 마 그 제도들은 우라르무에서도 역시 발생하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이후의 중국에서 모든 군주들은 자신을 천자라고 불 렀고, 모든 국가는 제국이라고 공언하였다. 메소포타미아와의 차이접 은 중국에서 합법적인 천자라고 자처하는 자들 가운데 누가 합법적인 가를 선택하는 만족할 만한 기준이 없었던 데 반하여 바빌로니아의 군주는 합법적인 군주이며, 그의의 군주들은 합법적이 아니었다는 점 이다. 한 이후의 중국은 여러 민족 국가들로 분열되었고, 거기에는 자 연적, 인종적-_-아주 드물게 역사적一―구분 의에는 어떤 의문점도

없다• 가장 외곽에 있던 민족 국가들은· 중국의 문화가 서서히 확장되 었던 지역에서 나중에 발생하였다. 우리가 일본의 예에서 살펴본 바 와 같이, 유령 제국들은 중국 문화의 일부로서 새로운 지방에서 나타 나게 되었고, 실제의 제국과 같이 유령 제국들도 그 수가 증가되었다. 유령 제국은 최초로 수입된 문화의 한 산물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 다. 유령 제국은 최초로 수입된 정치적 문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가장 의곽에 놓여 있던 지방에서는 민족 국가라고 불릴 만한 어떤 결속력 이 있기 훨씬 이전에 제국이 존재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일본에서 봉건제는 전형적인 발달 단계에 도달하였고, 한국에서도 중 요한 봉건적 발달이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중국 문화에 속하였던 티 베트에서도 역시 봉건적 발달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본토에서는 전혀 봉건적인 발달이 없었다. 중국은 중국 문화권에 속해 있는 모든 사회에서 영토의 규모나 인구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하였으므로, 아 중 국 문화권의 사회는 5 개의 사회 중에서 봉건적 발달이 가장 미미한 것으로나타났다. 일본에 대한 주된 관심사는 봉건제의 폐지가 아니라 봉건제가 오랫 동안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봉건제의 전형적인 예인 이러한 현상이 이 시리즈의 제일 마지막에 해당한다는 것과, 이 사회의 모든 국가는 제국이었고,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다른 어떤 사회보다도 봉건제가 덜 발달되었던 사회에서 발생하였다는 것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실제 로 한 이후의 중국 사회는 극단적인 예들이 나타나는 사회였다. 전형 적인 봉건 국가까지도 하나의 제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론상 이 것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봉건제와 제국주의는 원칙상 근본적으로 대 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제에 있어서 이 대립이 황제의 세력을 완전히 중지시킴으로써 극소화된다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 그 래서 유령 황제들 중에서도 가장 유령적인 황제가 황제가 되어야 한 다. 중국 문화권 사회에서 황제들은 극히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황

제를 폐위시킨다든지 혹은 그 지위를 격하시킬 수 없다. 후자에 대해 서 생각을 해보더라도, 황제들은 그둘 스스로가 봉건 귀족이 될 수 없었고, 그리하여 쇼군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막대한 권위를 가전 자에게 흔히 일어난디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러한 일은 메로 빙거조의 왕들에게도 일어났다. 메로빙거조의 왕들은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권위는 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 의 영상이었다. 그러나 궁재는 결국 메로빙거조의 왕을 폐위시키고, 그가 왕이 되었고, 동시에 궁재들은 그들의 후계자들처럼 봉건 군주 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일은 황제의 전정한 특성이 잘 알려졌고, 실 제로 그 특성은 중국 본토에서 언제든지 볼 수 있었던 중국 문화권의 사회에서는 일어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쇼군은 그러한 황제의 특성을 갖기를 열망할 수 없었고, 그는 단순한 봉건적 지배자로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황제들은 계속하여 존재하였고 쇼군의 정부는 철저히 봉 건화되었다. 그러므로 유럽의 군주들이 대봉건 귀족을 붕괴시킨 것과 같이 히데요시도 다이묘를 붕괴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국가를 통일한 히데요시와 그의 후계자들은 이 통일 국가를 집적된 대봉토의 형태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감히 관료적인 행정 개혁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개혁은 국가를 다시 황제의 지배에 적합하도록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아무리 황제가 유령 황제라 고 하지만, 황제는 항상 쇼군의 세력에 잠정적인 위협으로 남아 있었 기 때문이다. 일본의 초기 역사에서처럼, 황제의 특성과 기능은 잘 알 려져 있었다. 그 전에 일본의 황제들은 국가의 권력을 다시 잡으려는 노력을 하였고, 중국과 한국의 경우에는 권력을 쥐고 있었던 황제가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철저히 봉건 상태로 남아 있었으며, 제 1 대, 제 3 대 도쿠카와의 쇼군이었던 이에야스와 이에미츠는 황제를 정치로부 터 고립시키기 위해 특별한 조치를 취하였다. 마치 클리오(역사의 신)가 그들에게 봉건제 유지를 위한 필요한 조

건을 알려주기라도 한 것처럼, 도쿠카와의 쇼군들은 일본을 고립시켜 다른 국가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들은 아주 운이 좋아 이러 한 정책을 수행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들의 정책뿐 아니 라, 중국 문화권 사회의 중요 지방, 죽 중국 본토가 일본에서 도쿠카 와 시대가 시작하기 1000 여 년 전에 이미 재통일되었고, 오랫동안 비 침략적이었다는 사실 덕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른 사회에 개혁 과 봉건제의 폐지를 강제하였던 국가간의 전쟁 압력이 도쿠카와 시대 의 약 2 세기 동안 일본에서는 없었다 . 싱공업의 번성은 도쿠카와 정 부로 하여금 손쉽게 관료적인 개혁을 할 수 있게 하였으나, 도쿠카와 정부는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어느 것도 그 정부에게 개혁을 강요하지 않았다. 이것이 19 세기까지 일본에서 봉건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일본의 봉건제 유지가 때때로 신비스 럽게 보이지만, 그것은 결코 신비스러운 것은 아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일본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 그곳에서는 국가간의 전쟁은 아주 일찍 시작되었고,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며, 가끔 아 주 격렬하였다. 기원전 15 세기부터 11 세기까지 이 사회의 국가간의 전쟁은 다론 사회들의 역사에 있어 이 시기에 해당하는 기간에 있었 던 전쟁보다도 그 빈도가 더 심했다. 아마 전쟁은 기원전 10 세기와 9 세기에 증가되어 기원전 앙 1l 기, 7 세기에 그 절정을 이루었을 것이다• 이때는 아시리아의 정복으로 전쟁이 최종적으로 끝나고 새로운 제국 이 건설된 것으로 결말지어전 것같이 보이나, 실제로는 결코 그러한 상태에 이르지 못하였다. 새로운 페르시아 국가 의에 모든 국가둘이 쇠잔하게 되었고, 어]기 말에 페르시아가 혼란을 수습하여 새로운 제 국을 건설하는 것으로 최종적으로 결말지어졌다 . 그래서 국가간의 전 쟁 문제에 있어서, 메소포타미아와 일본과의 차이는-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메소포타미아 사회와 중국 문화권의 사회 사이의 차이는—_ 상당하였다.

메소포타미아의 국가 제도들의 발달에 대한 자료와 격렬한 전쟁이 이들 제도들에 미친 영향에 대한 자료는 불행하게도 빈약하다. 그러 나 믿을 만한 자료들은 이미 지적하였듯이 봉건 제도들이 발생하였던 초기의 한정된 지역에 국한되어 있다. 아시리아 지역에서는 혼란아 아주 극심하여 일반적으로 기본적인 봉토조차도 확립될 수 없었다는 가정이 있다 .21) 기원전 12 세기 또는 11 세기의 어느 시점 이후부터는 전쟁의 증가로 아시리아에서뿐만 아니라, 바빌로니아와 그의의 지역 에서도 국가 제도의 발달이 더욱 방해를 받은 것 같다. 이것이 바로 그 제도들이 서로 유사하게 보이게 되는 이유이다. 견고한 기반을 가 전 그리고 안정된 강력한 군주제의 출현에 필요하였던 영구적인 개혁 은 절박한 적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재차 급조된 군사적인 성격 울 가전 힘에 의해 밀려난 것 같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모두 그 칠 줄 모르는 전쟁 압박의 결과로 내부적으로 붕괴하였다. 이 붕괴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가 아시리아에서 고찰한 붕괴이며, 이 붕괴는 약 1 세기 동안 지속되었는데, 이때 아시리아는 귀족들의 영지로 분할 되었고, 뒤에 티그라트-필레서 3 세의 정복에 의해 재통합되었다. 이 정복은 기원전 9, 8 세기에 일어났는데, 귀족의 영지로 분할된 국가가 재통일되는 시기로는 꽤 늦다. 왜냐하면 아시리아는 구(舊)국가들과 의 보조를 맞추기 위하여 과격한 개혁이 요구되는, 문화가 뒤진 변경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사회에서 바빌 론과 엘람의 뒤를 이어 상당히 오래된 국가였고, 9 세기에 아시리아가 붕괴되기 전 500 년 동안은 그 지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쟁탈전에 가담하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의 다른 국가에서 발생하였던 상황은 더 극적이다. 미 타니와 하티는 기원전 12 세기에 멸망하였다. 아시리아가 기원전 9 세 21) 위 p.3 33. 이 문제에 대한 보다 깊은 설명에 대해서는 아래 pp.4 66-468 를참조.

기에 접어들어서는 귀족들의 정치적 지방주의 덕택에 분할된 채 명맥 울 유지할 수 있었던 것에 비추어보면, 위의 두 국가가 12 세기에 완 전히 멸망하였다고 해도, 상당히 일찍 멸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아시 리아가 하티를 몰락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지만 하티의 몰락은 부 분적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밖에서 일어난 사건의 결과라고 흔히 생각 되어 왔다. 하티의 몰락에 있어 아시리아가 주원인이 되었건 혹은 크 레타를 몰락시킨 대사건이 주원인이 되었건 간에, 하티는 강력한 군 주가 출현한 지 200 년이 채 못 되어, 그의 세력이 절정기에 달했을 때 몰락하였다. 이집트가 미타니의 몰락에 일익을 담당하였을지 모르 지만, 미타니는 분명히 몰락하여 아시리아에 의해 병합되었다. 아시리 아 자체의 종말은 더 비참하였고 더 극적이었다. 아시리아의 정복이 극에 달한 지 20 년도 되지 않은 때인 기원전 612 년과 606 년 사이에 아시리아는 적 앞에 맥없이 몰락하였다. 아시리아의 지배자들은- 살해 되고, 그의 도시들은 파괴되었으며, 그들의 민족은 분산되고, 아시리 아의 실체는 소멸되었다 .22) 그래서 우리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알 수 있 는 것은 봉건제의 폐지나, 어떤 건설적인 개혁이 아니라, 미타니와 하 티의 경우에는 이상하게도 일찍 그리고 아시리아의 경우에는 철저하 고 급격한 몰락을 가져온, 국가 그 자체를 없애려는 아주 예의적인 경향이다. 국가간의 전쟁의 극심한 정도에 있어서 한 이후의 중국 사회와 함 무라비 이후의 메소포타미아 사회 사이에 심한 대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하나의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들이 제시한 시리즈에서 앞뒤로 나란히 놓여 있는 이 두 사회에는 제국의 성격을 가전 국가들이 있었 으므로 이 대조 현상에 대한 설명은 제국의 성격이 아닌 다른 요소에 서 찾아야 한다. 그 설명은 단순히 봉건화가 더 많이 되고 덜 되고 하는 문제에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중국 사회는 전반적으로 봉 22) Toy nb ee, A Stu d y of Hi st o r y, N, 468-484 에 나오는 문구를 참조.

건화가 미미하였지만 메소포타미아 사회도 유럽 사회만큼 많이 봉건 화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회의 제도 발 달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고, 이들 사회가 발달해 가는 데 있어 큰 차이를 보인 것에 대한 설명은 바로 이 제도 발달의 차이에서 구 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러한 차이룰 발견하기 위하여는 단 지 약간의 민감성만이 필요하다. 메소포타미아는 역설적인 사회이다. 메소포타미아 사회는 실제로 봉건제의 초기 단계가 결코 끝나지 않은 사회였다. 전쟁은 계속되었고, 봉건 제도나 국가 제도 어느 것도 적당 하게 발달하지 않았다고 우리는 가정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 이 옳다면, 이러한 과도한 전쟁은 봉건 국가간의 전쟁과 똑같은 성격 을 갖고 있었고, 이러한 전쟁은 봉건 제도들이 결코 확실하게 발달할 수 없었던 부차적안 이유가 아니라 주된 이유였다. 그러므로 한 이후 의 중국 사회와 대조를 이루는 것은 본질적으로 봉건화가 더 되고 혹 은 덜 되고 하는 차이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정치적으로 봉건화를 이룰 수 있는 여건 이 되지 못하였다. 다음으로, 이러한 분석은 아시리아에 의한 병합에 대해 바빌로니아 가 끈질기게 저항한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대체로 비봉건적인 민 족 국가였던 바빌로니아는 일찍이 아시리아의 침입으로 몰락하고, 쉽 게 병합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종종 바빌로니아는 실제 전쟁에서 아 시리아에 의해 몰락하였다. 그러나 바빌로니아는 놀랄 정도로 규칙적 으로 뚜렷한 정치적 실체로서 다시 나타나곤 하였다. 확실히 이것은 아시리아가 바빌로니아를 병합할 수 있는 분명한 민족 국가로서의 성 격을 발달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 이후의 중국 사회와 함무라비 이후의 메소포타미아 사회의 양극 단 사이에 중간적인 사회인 주와 유럽이 있다. 만약 중앙 유럽을 서 유럽과 구분되는 사회라고 한다면 세 개의 사회가 놓이게 된다. 주는

건국 초기에 국가간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직접적인 행동을 취했다는 점에서 서유럽과 다르다. 그리하여 기원전 7 세기부터 5 세기 초까지 이 목적을 위한 정치 기구가 있었으며, 이 기구는 가끔 우세한 세력을 가 전 국가의 주도하에 평화와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가 연합 한 형태를 취하였다. 이것은 중국의 제후들은 여전히 이론상으로는 왕 의 예속인이었으며 황제의 성질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고 필자는 생각한다. 신성 로마 황제와는 달리 중국의 황제는 유명무실 한 존재가 되어서, 만약 중국의 제후들이 평화를 유지하기를 원하였다 면, 그들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기구를 만들어야 하며, 독일의 제후들과는 달리――미미하기는 하였지만―一황제의 법에 의존할 수 없 었다는 점에서 독일의 제후들과는 달랐다. 중국의 국가들의 연맹은 기원전 g1 ] 기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던 아주 중요한 정치 이론과 분명히 연관되어 있으며, 이 정치 이론은. 6 장에 서 이미 고찰하여 국가의 성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정치 이론들 은 원래는 한 제후국이 다른 제후국들과의 경쟁에서 그 제후국의 세 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많다. 그것이 원래의 목적이었음이 분명하며, 그것아 주된 목적이고, 디른- 목적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국가간의 전쟁 압력은 연맹이라 는 수단에 의해 경감되었고, 그것은 유학자인 묵자와 그의의 학자들­ 의 강력한 도덕적 영향 아래에서 국가간의 경쟁이 상충되는 사회 이 념들의 융합으로 승화되어 가는 경향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어느 정도 그렇게 되었다면 그리고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면 그 당시 의 중국의 업적은 제일 중요한 정치 문제에 있어서, 위대한 어쩌면 아주 드문 인간 이성의 승리의 업적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우리는 중국의 정치 이론이 어떻게 봉건제의 폐지에 영향을 끼쳤는 지 알 수 없으나, 그 정치 이론이 영향을 끼쳤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 가 없다. 한동안 그 정치 이론은 봉건제 폐지의 속도를 완화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가장 강력한 이론이었던 유학은 아주 보수주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권위는, 철저히 자제하면서 사용하여야 한다는 바로 그 중요한 원리는 봉건제에서 발견되는 쌍무 적인 의무의 개념을 옹호하고 있다. 실제로 그것이 그 원리의 핵심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건 형태에서 다른 형태의 제도로의 전 환은 이 원리를 이용하여 발생하였다. 특정한 제도적 구조를 강조하 지 않고 그 구조에 깔려 있는 원리를 강조함으로써, 그 원리는 그러 한 전환을 조장하였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그리고 얼마나 빠른 전환 이었던가? 기원전 5 세기 말경에 전이 비참하게 몰락하였을 때, 전은 세 개의 제후국, 조, 한, 위로 분열되었고, 각 제후국들은 전이 멸망하 기 전에는 전에 예속된 대제후국이었다. 기원전 때]기 중엽에 전(秦) 의 상앙의 전체주의-독재주의적 tot a l i tar ia n -auta r kic 대개혁으로 적어 도 구귀족둘은 제거되었다. 분열되기 전의 조, 한, 위가 전정으로 봉 건적이었는지, 혹은 탄압을 받기 전의 전의 귀족들이 봉건적이었는지 에 대해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중국의 제도들이 기원 전 9 세기와 7 세기 사이에 봉건적이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면, 이 제 도들은 5 세기와 때]기에는 봉건적이었거나 아니면 후(後)봉건적 p os t 一 fe udal 이었을 것이다. 보드의 주의 봉건제 해체에 대한 중요한 분석은 대부분이 g1 l 기에서 때 l 기에 이르는 시대에 관한 분석이다 .23) 이 시기 동안에 중국에서 구(舊)종속 관계의 폐지에 관해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그 폐지는 그 당시의 국가간의 전쟁의 절박함 에 의해 야기되었다는 것이다. 최악의 전쟁인 전국(戰國)들 사이의 23) 위 pp .114 기 16. 중국 초기 문헌에 권력이 지방 귀족에게로 이양되는 것을 봉건적이라고 관습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봉건제는 진시황제가 전제국을 건설 하고 중국을 재동합할 때까지 폐지되지 않았다고 하며, 기원전 206 년에 한 의 건립과 기원전 156 년의 7 왕의 반란 사이의 시대에도 봉건제가 다시 부 활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주목할 때, 보드의 설명의 중요성이 이해될 것이다•

전쟁은 제도적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의 후반기에 시작되었으며 ,24) 이 시기 전체를 통해서 국가간의 경쟁이 꾸준히 일어나고 있었다. 기원 전 때]기 말에 전은 기병을 도입하여 봉건 귀족들의 특수한 기술이었 던 전차술을 대체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 기술사(技術史)에서만 중요하였다. 봉건제의 폐지가 이미 완료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봉건제 의 폐지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25)

24) 그 당시에 발생하고 있던 변화에 대한 견해를 알기 위해서는 Masp er o, La Chin a anti qu e, pp. 390-391 를 참조. 25) 진이 이미 구귀족들을 억압하였는데 다시 전의 개혁이 필요하였을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진의 개혁의 기반이었던 법가의 정치 원리의 출현과 아마 그 당시의 다른 개혁의 출현이었다. 그 정치 원리는, 이 미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전국 시대의 시련기 동안에 국가를 강 화하기 위하여 봉건제 또는 봉건 잔재를 폐지하는 데 특히 목적을 두 고 있었다 .26) 그리고 기원전 때 1 기는 국가 군주들이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고, 이전의 주왕(周王)의 칭호는 마침내 폐지되었던 세기이 댜 국가간의 전쟁의 절박성 때문에 군주들이 영향을 받아 행정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던 것은 이러한 사태의 발전 때문인 것 같다. 그 전 쟁이 결정적인 단계에 도달하였을 때, 만약 군주들이 이전의 봉건 형 태를 폐지하여 잠정적으로는 제국적이며 실제로는 전쟁을 수행하는 데 최대의 효력을 가전 새로운 정치 형태를 세우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면, 그 전쟁은 군주들의 성질의 변화를 강제하였을 것이다. 일본에서 막부 정부롤 무너뜨리고 급속히 제국을 재건할 수 있었던 19 세기의 한 사건으로부터도 비슷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배타주의 정책은 경제에 많은 해롤 끼치고 결국은 봉건제를 붕괴시킨 결과를 초래하였거나 아니면 경제적 고립주의롤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했을지

26) 중국에서는 최초의 아주 간단한 법체계가 기원전 6 세기에 나타났으며, 아 무리 빨리잡는다 해도 기원전 Yl] 기 말 이전에 법가의 정치 이론이 발생하 였다고 필자는 생각하지 않는다.

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배타주의 정책을 종결시키고 봉건제 폐지 를 야기시킨 것은 의국으로부터의 위협과 의국의 사상과 제도들의 영 향 때문이었다. 확실히 일본에 대한 의국의 위협은 결정적인 시기에 는 대단하지 않았지만 현명한 일본인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듯이 유 럽 국가들간의 경쟁은 더욱더 심해졌고, 19 세기 중엽의 일본은 중국 보다 훨씬 나약한 국가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중국 제국에 대한 압력은 일본에 어떤 자극을 줄만한 것이었다. 유럽에서의 봉건제의 몰락 과정은 아주 복잡하다. 그러나 어느 면 에서는 시기와 방법이 다르기는 하였지만, 다른 사회에서 작용하였던 요소들이 유럽에서도 역시 작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유럽에 서는 그 과정은 메소포타미아에서처럼 전쟁으로 시작되었으나, 그것 은 단지 한정된 지역과 장소에서였다. 중세 후기의 유럽은 사실 일반 적으로 제국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27)

27) 제국주의를 지향하였다는 사실은 황제 계승권에 대한 여러 주장이 있었다 는 것에서 나타난다. 많은 왕들과 십지어는 군소 귀족들까지도 자신들을 잠 정적인 황제둘이라고 생각하였다. 카스티야의 알폰소와 영국의 헨리 3 세의 동생인 콘월의 리처드는 대공위(大空位) 시대에 신성 로마의 황재가 되려고 노력하였다. 발로아의 찰스는 l 때 1 기 초에 황재가 되려고 하였고, 영국의 에 드워드 3 세는 그 칙후 황제로 선출되었으나, 황제의 위(位)에 오르지 않기 로 결정하였다. 보헤미아의 George Pod i ebrad 는 1 5-IJJ기에 황제로 선출되었 으나, 실제 황제의 위(位)에 오르지 못하였다. 151 9'i반에 막시밀리언 1 세가 죽자, 서유럽의 세 국가, 죽 영국, 프랑스, 스페인의 왕들은 황제 선거에서 경쟁하였으며, 프랑스의 프란시스 1 세는 아주 열렬하게 선거 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최초의 국가간의 대전쟁인 백년 전쟁 28) 은 서유럽의 주요 군 주인 영국과 프랑스의 왕들에 의해 주로 진행되었다. 프랑스를 정복 하려고 했던 프란테지네트 왕조와 랭커스터가(家)의 의도가 제국주의 적이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고, 랭커스터가의 경우는 일시적으로 성공 하였다 .29)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들과 서부 독일의 일부 지역이 그 전

28) A. F. Pollard 에 의하면 백년 전쟁은 실제로 최초의 민족 국가간의 전쟁이 었다 (Fac t ors in Modern Hi st o r y, 3rd edn., London, 1932, p. 19).

29) 영국의 리처드 2 세의 경우 제국주의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그것은 백년 전쟁이 발발한 후 거의 반세기가 지난 뒤의 일이었고, 리 처드의 야망은 영국 밖의 정복이 아니라, 영국 내에서 그의 권위를 고양시 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았던 제국주 의적 야망의 두 면이 그 당시의 사람들의 마음에 있었다는 것을 단지 보여 줄 뿐이다. 한때 리처드는 공식적으로 자신을 〈 그가 다스리는 영국의 진정 한 황제〉라고 불렀다 (Ro t . Par/ ., ill, 343). 리처드는 웬스라스 Wenslas 의 여 동생이며 신성 로마 황제 찰스 5 세의 딸인 보헤미아의 앤 Anne of Bohemi a 과의 결혼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정부와 관계를 맺으면서 이러한 사상을 배 웠다. 찰스는 오컴과 마르실리오의 후원자였던 루드비히 Ludwig ~l 의 계승 자였다. 리처드의 철대주의에 대한 주장과 그가 그것을 상칭하려고 하였던 특별한 궁중 의식에 대하여는, T. F. Tout, Chapt er s in the Admi ni s t r a ti ve Hi st o r y of Medie v al Eng la nd, IV(Mancheste r , 1928), 32-3 3 을 참조 .

쟁에 휘말려들게 되었는데, 유럽 특유의 교회와 국가의 대립이 없었 다면, 장기간에 걸친 국제 전쟁은 뒤따르지 않았을 것이고 유럽 사회 전체가 그 전쟁에 휘말려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봉건 군대를 용병군으로 전환시키고 동시에 장궁(長弓)과 포(砲)의 사용과 갇은 군사 기술의 혁신을 가져온 것은 전쟁의 압박 때문이었 다고 생각하여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기술적인 변화와 군역 조전 에서의 화폐의 도입, 이중 어느 것도 반드시 봉건 관계의 폐지의 원 인은 아니었다. 폴란드에서처럼 봉신들은 새로운 형태의 전사와 더불 어 군사적인 봉사를 하였고, 특히 중앙 유럽에서는 군인으로서 고용 될 수 있었던 소귀족들은 봉건 젠트리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만약 그들이 군인으로서 고용될 수 없었다면, 경제적인 변화의 결과 로서 그둘은 젠트리에게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넘겨주어야 했을 것이 다. 군사적 기술의 변화가 기존의 봉건 질서를 붕괴시켰다는 것에 필 자는 회의적이다 .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보았듯이 주의 경우에는 군 사 기술의 변화가, 봉건제가 완전하게 사라지는 순간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군사 기술의 변화는 봉건제 몰락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그 결 과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백년 전쟁의 발발은 유럽에서 평화에 대한 욕구가 결코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평화에 대한 욕구가 있었다는· 것을 알기 위해 서 단지 단데의 저서 『군주제에 관하여 De Monarch i a 』 를 읽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중앙 유럽에서는 평화를 확립하려는 직접적인 시 도가 있었다. 그리하여 15 세기 말에는 법적인 측면에서 제국주의적 제도를 다시 확립하려는, 성공하지는 못하였지만, 진지한 노력이 분쟁 을 해결하는 데 이용되었으며, 상업을 보호할 목적으로, 더 넓게는 지 방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각종의 연맹, 특히 도시 연맹이 생기게 되었다. 중앙 유럽의 연맹과 뚜렷이 구별되는 서유럽 에서의 최초의 연맹은-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1919 년의 국제 연맹 이 지 만, 그러 나 소위 말하는 유럽 의 협 약 concert of Euro p~즌 1815 년에 생겼으며, 1714 년에는 국제적인 협조에 의해 평화를 유지하 려는 계획이 있었다. 이 모든 계획은 백년 전쟁보다 규모가 더 큰 국 가간의 대전쟁이 있은 후에 나타났다. 14, 15 세기 유럽에서도 봉건 정체에서 새로운 정체로 변화하기 시 작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새로운 정치 이론이 발생하기 시작하였 다. 주가 새로운 정치 이론을 가졌듯이 유럽도 새로운 정치 이론을 가졌다. 단데, 파두아의 마르실리오 Mars igli o of Padua, 오컴의 윌리 엄 Wi lliam of Occam, 게 르손 Gerson, 쿠사누스 Ni ch olas Cusanus, 독 자적인 마키아벨리 등은 국가에 관한 새로운 사상을 형성하는 데 최 초의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특히 마르실리오, 게르손, 쿠사누스는 유 럽 특유의 형태인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바른 관계를 주로 피력하였다 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상가들은 중세 말기에 봉건 왕의 자문 회의에서 발달하기 시작하였던 의회 제도를 통해 군주의 권력에 제도적인 제한울 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또한 제도적인 제한울 가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새로운 이론은 그 기원부터 교회와 국가의 대분쟁으

로 말미암아 복잡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분쟁이 정치 분야에서 치 열하게 계속되었던 만큼이나 사상 분야에서도 치열하게 계속되었기 때문이댜 정치 분야에서 그 분쟁은 중앙 유럽에서 질서와 평화를 위 한 건설적인 운동을 갑작스럽게 종식시키고, 단테가 주창하였던 평화 에 대한 일반적인 욕구에 아이러닉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설혹 백년 전쟁 이후 서유럽에서 그 욕구의 실현을 위한 어떤 기회가 있었다 하 더라도 그 기회는 서유럽에 위기가 발생하면서 생긴 분쟁에 의해 다 시 무산되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서유럽의 두 강대국들에 의해 시작 되었던 국제 전쟁에 지장을 주었다. 백년 전쟁부터 30 년 전쟁에 이르 기까지 유럽의 군사 분쟁은 국제 분쟁임과 동시에 한 국가 내의 국내 분쟁이기도 하였으며, 그 분쟁은 거의 모두가 종교 또는 교황의 아해 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어떤 분쟁에서는 왕과 후(後)봉건적 또는 진정한 봉건적 성격을 가진 귀족 사이의 대립은 부차적인 이슈였다. 실제로 봉건 정체에서 어떤 새로운 정체로의 전환 과정은 종교 분쟁 으로 말미암아 방해받고 변질되고, 다양화되었다. 어디에서도 그 전환 은 중단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지방에서 그 전환은 종교 분쟁에 말려들게 되어서, 그 전환은 이상하고 다양하고 불안정하고 혹은 실 행될 수 없는 임시 변통적인 정치 제도로 되었다. 교회와 국가의 대분쟁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 단계는 규모가 작은 공회의 운동 Counc ili a Movemen t이고 두번째 단계는 더 규모가 큰 종교 개혁 운동이다. 첫 단계에서는 교황이 승리하였고, 두번째 단 계에서는 세속 군주가 승리하였다. 새로운 정치 이론은 처음부터 교 회에서의 공회의에 제기된 문제로 복잡하게 되었다. 공회의 운동의 실패로 중요한 건설적인 이론은 사실상 1 세기 반 동안이나 무시되었 고, 그 대신에 17 세기의 왕권 신수설로 그 절정을 이룬 절대주의 이 론이 발달하였다. 비록 루이 1 心 1] 가 여러 곳에서 두 사상(제국주의가 갖는 본래의 의미와 이 책에서 의미하고 있는 제국주의)의 대변자이기

는 하였지만, 이 사상은 이 책에서 사용하는 의미의 제국주의는 아니 다. 신권 사상은 교회와 귀족 세력에 대한, 주로 교회 세력에 대한 왕 의 승리를 나타내는 일시적인 개념이지만, 교회와의 분쟁이 일소되면 서 제국주의 경향으로 후퇴하게 되는 개념이다. 신권(神權 Di vi n e R ig h t)은 슬로건이지 주의 (主義), 주장은 아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에 대해 다시 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은 최초의 협약, 죽 계약 (Or igi nal Comp a ct, or Con t rac t)의 원리가 대두되었다는 사실에 의해 알 수 있다. 그 원리는 프랑스에서 위그노 와 카톨릭의 분쟁시에 처음으로 제기되었고, 또한 교회 세력과의 분 쟁으로 인하여 아주 명백하게 곡해되었다. 그러나 그 원리가 일시적 으로 곡해된 것만은 아니다. 계약 사상에서뿐만 아니라 그 원리의 제 도적이고 법적인 형태에서도 곡해되었다. 로마법에 대한 연구가 부활 하였던 11 세기 이래로 정치에 대한 법학적인 접근 방식은 유럽 사상 과 관행의 특칭이 되었다. 어떤 면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에 선행하고 그 관계를 규정 짓는 최초의 계 약 Orig ina l Con t ra ct이라는 개 념을 아주 이상하게 곡해하였다• 후기의 사상가들이 그 계약이 실질 적이었는가 아니면 비유적이었는가를 결정할 수 없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유럽의 전통과 일치하는 그 계약 자체는 극히 유익한 것으 로 나타났다. 그 사상이 봉건적인 관행에서 나왔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피기스 F iggi s 는 그 사상을 〈봉건제가 근대 사회에 물려 준 영속적인 유산〉 3 0) 의 일부를 형성한다고 생각하였다. 계약의 원리 30) Cambrid g e Modern His t o r y, ill, 762. 그가 생각하고 있는 다른 한 부분은 〈 대표 없는 과세는 없다 〉 는 경구이다 . 문제가 되는 것은 계약 사상이 봉건 제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보다는 그 사상이 널리 팽배하였다는 점이라고 그는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 계약의 기원을 봉건제, 로마법, 혹은 그리스 사상 중 어느 것에서 찾아야 하는가는 아주 재미 있는 문제이다. 협약 십지 어는 공식 협약까지도 봉건제의 본질이며, 그것은 진정한 봉건제가 존재하 였던 어느 곳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유럽에서

는 계약 형태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을 서면 계약하는 것은 업밀하게 로마 법에는 없지만 로마의 모델을 따른 것이다.

를 제기한 초기 프랑스의 문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 군주에 대한 확신 Vin d ic i a e contr a T yr n ri os 은 지배자의 피지배자에 대한 관계에 관 한 마르시 리오, 게르손과 쿠사누스의 지금까지 무시된 사상을 다시 칙접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그 이후로 근대 국가가 유용한 것들로서 봉건제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가를- 알기 위해 과거의 봉건제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만족할 만한 관계를 확립할 수 있다는 전망이 교회와 국가의 분쟁에서 발생한 격 렬한 감정과 그 분쟁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었던 것은 당 연하다. 봉건제에 대한 분명하고 완전한 이해가 l8 세기 중엽 몽테스 키의때까지는 없었고, 그후 교회와 국가가 대립하던 시기에 나온 임시 변통적인 정치 제도가 혁명적인 반란의 와중에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정치 제도는 봉건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거나 혹은 과거의 봉건제에 많은 영향을 받은 후(後)봉건 시대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봉건 잔재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왜냐하면 과거의 봉건제에 대한 건설적인 고찰이 시작되자마자 그 고찰이 방해를 받았 기 때문이다. 그 결과 봉건 관계의 변화를 거의 완전하게 통제할 수 도, 계획할 수도 없었다. 계획된 변화를 할 수 있었던 경우는 교회의 변화였고, 일부 지역에서는 교회의 변화에 보조를 맞추어 봉건 제도 와 관행을 변화시켰고, 다론 지역에서는 거의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어떤 지역에서는 봉건제가 몰락하도록 방치되었다. 봉 건 시대의 가시적인 그리고 가장 성가신 잔재는 귀족들이었다. 그들 은 새로이 통일된 국가에는 필요 없는 존재였고, 영국과 같은 아주 국소수의 국가에서만 아주 효과적으로 국가에 통합되었다. 물론 그들 의 정체의 핵심 요소로서의 토지 귀족들을 필요로 하는, 거의 봉건 상태로 남아 있던 나라도 있었다. 그러한 나라에서는 지방과 중앙의

회의체 die t 7 } 분명히 남아 있었는데, 이 회의체에서 귀족들이 군주의 봉신으로서 군주와 만나 회의를 하였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귀족들은 사회의 독(毒)으로 남아 있었으며, 그러한 회의체는 군주에 의해서 대부분 폐지되었거나 혹은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그러한 회의체는 대부분의 경우 중세 말기에 의회로 성장해 갔다. 중앙 유럽(종교 개혁은 여기서 시작되었음)은 그 자체의 특유한 변 화를 통해 교회와 국가의 대립의 본산지이자 중심지가 되었고 종교 개혁도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그 결과는 황제의 봉신들이었던 독일의 대귀족들이 16 세기 전반 동안에 독립 제후로 변신하게 되는 급속한 변화였다. 그들은 〈 영 주의 종교가 그의 신민의 종교가 된다 cuju s re- gio eju s rel igi o 〉 는 원 리 를 가결한 1555 년의 아우크스부르크 회 의 때 에 이르면 그들의 영지 내의 통치권을 갖게 된다. 의적 통치권, 즉 독립 적인 의교 정책은 1648 년 베스트팔렌 조약때까지 그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이 급격한 변화는 제후들이 갑자기 두 왕의 종주권에서 벗어 났던 기원전 때]기의 중국의 변화와 유사하다. 중앙 유럽에서는 황제 가 루터파의 공격에 대해 카톨릭를 보호하려고 하였을 때 이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에서의 변화는 국가간의 극심한 경쟁의 직접적인 결과 이었다. 중국의 변화는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고, 그 변화의 목적은 권위를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유럽에서 황제는, 아미 약해지기는 하였지만, 제후들은 1555 년과 같은 결정적인 시기에 황제로부터 황제 가 제후들에 대해 여전히 행사하고 있었던 권리를 빼앗았다. 이 두 변화의 유사점은 봉토로서 시작된 제후국이 국가로 출현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점에서 직접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영향 때문에 중앙 유럽의 사회는 거의 완전하게 독립적 으로 되었다. 중세에는 신성 로마 황제는 미약하기는 하지만 새로이 성장하는 민족 국가 군주의 성격에 근접하게 되었고 그의 예속인들은 고집스럽기는 하였지만 그의 봉신이 되었던 반면에, 독일이 한때 중

앙 유럽 체제의 주요 기반이 되었듯이 , 이제는 서유럽의 한 민족, 국 가가 될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서유럽 체제가 급작스럽게 느슨해지 고 중앙 유럽 체제가 강화되는 현상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사실상 그 현상은 1 세기 동안 지속되었고, 그러고 나서 30 년 전쟁의 후반에 서유럽의 강대국들이 중앙 유럽에 엄습하여 중앙 유럽을 멸망시켰다. 그 결과 중앙 유럽의 영토는 다시 서유럽에 병합 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전환은 1871 년 혹은 아마 1918 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왜냐하면 중앙 유럽을 따로 떼내어 생 각해 볼 때, 만약 우세한 유럽 체제 내에서 발생하고 있던 보다 중요 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30 년 전쟁은 틀림없이 한 민족 국가가 나머지 모든 국가를 정복할 때까지 계속되었을, 국가들간의 전쟁이었 기 때문이다. 서유럽 체제의 국가들 중에서 폴란드에서는 봉건제가 종교 개혁 이 후까지도 계속 존재하였다. 거기에서는 심지어 소귀족까지도 계속하 여 존재하고 있었다. 폴란드에는 전(前)봉건적인 요소들이 너무 많이 잔존해 있었고 이 요소들이 봉건 요소와 더불어 발달하였기 때문에, 폴란드는 완전히 발달한 봉건제를 가졌다고 말할 수 없다. 헝가리 귀 족들은 폴란드 귀족과 비슷한 지위를 확보하였으나, 그들은 그들의 군주를 선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전(前)봉건 시대에 기원을 둔 선거 롤 통하여 군주를 선출하는 방법은 봉건제의 발달이 늦거나 또는 불 완전하게 발달한 북유럽과 중동부 유럽에 널리 퍼졌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그러한 제도를 갖고 있었고, 또한 의회의 귀족원을 통해서뿐 만 아니라 왕실 자문 회의 (Raad, Rad) 를 통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귀 족들, 죽 대귀족들의 뚜렷한 과두 체제를 발달시켰다. 왕실 자문 회의 를 장악함으로써 귀족들은 일반적으로 특정한 행정 업무를 담당하였 다. 15 세기부터 17 세기 후반까지 덴마크와 노르웨이에서는 실제로 왕 은 사실상 자문 회의에 권력을 위임하였고, 귀족들은 그들의 봉건적

인 권리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봉건적 의무는 거의 수행하지 않았다. 중앙 유럽, 폴란드, 스칸디나비아의 영향을 받은 브란덴부르크 - 프 러시아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항 상 바바리안이거나, 심지어는 원시 상태에까지 놓여 있었던 브란덴부 르크는 15 세기와 16 세기의 전환기에 선제후의 권력이 신장되었으나, 요하힘 2 세 (Joa chim , 1535-1571 )와 프리드리히 윌리엄 (Frederic k W il-liam , 1640- 1 688) 사이의 시기에는 정치-행정적인 봉건제가 놀랍게도 다시 재현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스칸디나비아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 은 것은 아니지만, 이 현상은 또한 왕의 대자문 회의가 의회로 전환 되어 갔던 시기인 13 세기의 영국의 봉건 귀족과 왕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과 똑같은 현상같이 보인다. 사실상, 영국에서 막 발달하기 시작 한 의회가 헨리 3 세를 지배하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브란덴부르 크의 의회가 요하힘 2 세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프러시아에는 영 국의 에드워드 1 세와 같은 왕이 요하힘을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지배권은 대선제후의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 31) 대선제후는 사실상 의회의 세력을 폐지하였고, 프러시아에서 군주와 귀족 계급 사이의 건설적이고 제도적인 관계는 후(後)봉건 시대의 발달 과정에서 생성 되지 않았다. 정치적 의미에서 프러시아의 융커들은 영국의 봉건 귀 족과 비슷한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대선제후 시대부터 프러시아 정체 의 상층부에서는 전제 정치가 극심하게 팽배하였다 해도, 봉건적 하 부 구조가 그 기저에서 여전히 성장할 수 있었다. 15 세기부터 계속하 여 융커들의 하찮은 지방 정치의 기능이 증대되었고, 그들은 18 세기 까지 그러한 기능을 계속 담당하였다. 프러시아의 특수한 발달은 봉건적이라 불릴 수 있는 군대의 발달이 31) S. B . Fay, The Ris e o/Brandenburg- P russia to 1786(New York, 1937), pp. 22 ff.를 참조.

었다. 이것 역시 대선제후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상비군 을 건설하였고, 그 군대는 융커로 구성된 부대 혹은 소수의 융커와 융커들의 장원에서 차출한 농노들로 구성되었다. 프리드리히 윌리엄 1 세(1 713 - 1740) 시대까지는 이들이 군대에서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프러시아 군대는 그 조직에 있어 중세 말기의 영국과 프랑스의 의사 봉건제의 군대와 아주 흡사하게 보인다. 프러시아 군대에서 농노들이 담당한 역할은 중세 말기 군대에서 궁수와 다른 비천한 출신의 군인 둘이 행한 역할보다는 훨씬 컸지만,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은 아 니다. 프랑스의 상비군은 의사 봉건제하의 군대를 직접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프러시아에서 일어난 현상과 같은 현상은 아니다. 그 차이점은 대단한 것은 아니며, 중세 시대에 불완전하게 봉건화되었던 브란덴부르크-프러시아는 다음 3 세기 동안 봉건 제도의 어떤 중요한 특정한 요소를 확대시킴으로써 봉건화되었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프러시아에서 발견되는 기이한 형태의 봉건제는 말할 것도 없이, 봉건제는 서유럽의 구(舊)봉건 국가에서 근대까지 지속되지는 않았 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영국에서는 귀족까지도, 성장하고 있던 민족 국가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영국에서는 사실 장미 전쟁이 발발한 것 이의에는 그 전환은 아주 순조로웠다. 하지만 의회는 군주의 권한울 성공적으로 영구히 제한할 수 있는 봉건제에서 기원한 몇 안 되는 제 도 중의 하나이며, 지금까지 그러한 몇 안 되는 제도 중에서 가장 중 요한 제도였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많은 관심을 끌지 못한다. 왜냐 하면 거기에서는 봉건 잔재를 포함하여 구제도들이 식민지로부터의 부(富)의 급속한 유입과 재유출로 인하여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스페 인에서는 특히 토지 귀족들이 물질적으로 주민들에게 많은 부담을 주 는 지위에 있었기는 하지만, 이베리아 반도의 군주들은 16 세기 말까 지는 몰락한 귀족들의 세력을 효과적으로 제거하였다. 프랑스에서는 많은 저주의 대상이 된 봉건 잔재가 가장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유럽 나라들·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나라이다. 15 세 기에 많은 귀족들이 영국의 귀족들처럼 일반민과 통합되는 경향이 있 었으나, 16 세기에는 정부가 고의적으로 이러한 경향을 중지시키려고 하였고, 귀족들에게 상업과 기타 수입이 좋은 업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써 이러한 경향을 중지시키는 데 성공하였다.J2) 문제가 되는 것은 유럽 대륙의 다론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귀족들이 세금에 대한 면제권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만약 그들이 상업에 종 사하게 된다면 그 면세권은 상업에까지 확대되고, 그리하여 국가는 중요한 수입원을 상실하게 된다는 점이다. 귀족들이 그러한 면제권을 갖지 않는 영국에서는 국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 계급에서 다른 계 급으로, 한 기능에서 다른 기능으로의 전이는 완전히 자유로웠다• 그 러나 프랑스의 군주는 귀족들이 그들의 면제권을 감히 포기하지 않으 려고 했던 것을 걱정하였으며, 이 권한울 포기하게 하는 것이 15, 16 세기에 나타난 정치적, 사회적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었다. 그리하여 왕이 왕의 수중으로 권력을 집중시키면서, 우선 귀족 들만으로 대표되는 명사회 Assemblie s of Nota b les- 2} 귀족들이 한 신 분 계충을 형성하는 삼부회가 무용지물이 되게끔 고의적으로 내버려 두었다. 그 결과 귀족은 정치적 또는 경제적인 기능을 갖지 않은 쓸 데없는 계급이 되었다뿌 프랑스인들과 정부로부터 고립된 그들은 필 32) M. Szeft el, uLa reg le de vie examp la ir e des nobles et !'evoluti on socia l e de la Frannce de I'an cie n regi m e, Revue • de rlnstit ut de Soc iol og ie, XVI (19 36), 603-6 06. 33) 그들의 기능은 원칙상 프러시아의 융커와 같은 기능이었다. 만약 프랑스가 브란덴부르크-프러시아와 갇이 단순한 나라였다면, 프랑스의 귀족들은 사회 와 국가에서 유용한 요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방 정치 문제에 있어서 프랑스는 귀족이 필요 없었다. 다른 계급들도 그러한 문제를 다를 수 있는 충분한 능력과 정 열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귀족들의 대부분은 그러한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많은 귀족들은 그들의 장원의 경영도 동일 한 방법으로 수행하여, 스튜어트나 베일리프에게 그 직무를 위입하였다. 왜 냐하면 농업을 행하는 것은 귀족들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납

겨진 일이라고는 군역과 중앙 정부의 통제하에 공공의 일을 수행하는 것뿐 이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단지 고위 관직만 생각하였고, 고위 관직은 그 수 가 많지 않았다• 군사적 봉사는 상당히 많은 귀족들에게 직업을 줄 수 있었 으나, 그것도 수가 많지 않았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귀족들은 프러시아의 귀 족들과 같은 군대 조직가들이 아니었다.

연적으로 무책임한 골칫거리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귀족 계층의 무용화와 더불어 진취성 없는 봉건 정체의 구조가 놀랍게도 계속 유 지되었다. 후봉건 시대에 있었던 개혁은 리슐리의의 감독관 제도로. 절정을 이루었다• 이러한 감독관들은 구봉건 귀족이 지배하였던 동일 한 영역을 지배하였으나, 그들의 행정적인 일의 양은 이 제도가 설립 된 때부터 17 세기 말과 18 세기의 전 시기를 통하여 증대되었고, 이들 은 중앙 관리들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그들의 행정 업무를 수 행하였다. 이러한 체제는 아주 모순이며, 1789 년의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단지 프랑스의 규모와 부만이 1 세기 전에 프랑스가 붕괴하는 것을 저지하였을 뿐이다. 봉건 잔재를 일소하게 하였던 것은 교회와 국가 간의 문제가 해결 된 후에 34) 발생한 국가간의 전쟁의 재개였다. 그 전쟁이 처음 재개된 곳은 중앙 유럽 사회, 즉 소중앙 유럽 사회였으나, 그 전쟁은 중단 없 이 전 유럽 사회로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30 년 전쟁은 중앙 유럽에서 국가간의 전쟁의 절정을 이룬 전쟁이었다. 그 러나 그 전쟁과 중앙 유럽의 독립적 발달은 서유럽 체제의 국가, 특 히 프랑스와 스웨덴의 간섭으로 중단되었다. 그리하여 중앙 유럽의 소국가들은 제국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혼 히 병합하던 것과 같은 병합을 서로간에 할 수 없었다. 그 대신에 서 유럽의 강대국들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몰락시키는 전쟁〉에 몰두하 개되었고 서유럽 사회의 전쟁의 제 1 회전이 북유럽에서 시작된 것

34) 교회와 국가 간의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된 때는 나폴레옹 시대였으나, 17 세기 초에는 그 문제가 정치에 있어서 갑자기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지는 않았다.

은 그 당시에 처음으로 서유럽 사회의 강대국으로 등장하였던 스웨덴 이 30 년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북유럽 전쟁과 루이 l 心1 ] 와 연관된 전쟁은 이러한 〈 서로를 몰락시 키는 전쟁 〉 의 제 1 회전이었다-클라우제비츠 Clausew it z 의 용어를 빌 리면 이 전쟁들은 절대주의 전쟁 absolute war 이 된다. 그러고 나서 약 8 년간의 휴전이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에는 전쟁의 횟수가 많고 널리 확산되기는 하였지만 제한된 전쟁만 있었다. 그 다음으로 공격 자 위치에 있던 프랑스와 다시 싸우는 20 년간의 절대주의 전쟁이 있 었다. 루이 l 心1 ] 는 아마 서유럽에 대한 헤게모니만을 추구하였을지 모르나, 나폴레옹은 제국을 형성하려고 하였다. 루이 I 心1 ] 의 군대는 대체로 그의 적들에 의해 봉쇄되었고, 그의 목적이 달성되지 못하였 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네덜란드, 네덜란드 연방과 같은 소제후국들 은 합스부르크로부터 각각 옛날의 지위를 유지하였고 독립 국가가 되 었다. 스페인도 프랑스와 긴밀하게 연합되지 않았다. 그러나 제국을 건설하려는 힘은 대전쟁 기간처럼 평화 시기에도 아 주 강하였다• 약소국둘을 멸망시키고 병합하는 현상은 대전쟁의 제 2 회전, 죽 1772 년에 제 1 차 폴란드 분할이 있기 20 년 전부터 시작되었 다. 폴란드는 서유럽 체제 중에서 가장 봉건 국가였고, 폴란드가 철저 하게 굴복되고 1796 년에 몰락하게 된 것은 봉건적인 그리고 전(前)봉 건적인 제도들로 인하여 폴란드가 나약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는 것 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것이 바로 10 년 후에 프러시아가 당한 재앙의 실마리가 된다(만약 그 재앙의 한 원인을 찾는다면). 프러시아 의 군대는 프리드리히 윌리엄 1 세 시대의 군대였던 대체로 봉건적(擬 似 封建的) 군대를 유지하고 있었고, 만약 발미 Valm y에서 퇴각하였 던 프러시아의 군대가 30 년 전부터 있었던 프리드리히 대제의 군대였 다면, 예나J ena 와 아우엘스타트 Auers t a t에서 프랑스가 항복시켰던 군 대는 마찬가지로 거의 50 년 전부터 있었던 군대였다. 이 전쟁에서 패

퇴하였던 프러시아는 봉건 국가도 아니었고, 폴란드와 같이 부분적으 로는 봉건적인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전(前)봉건적인 변칙적인 국가도 아니었다. 프러시아는 프리드리히 대제 또는 프리드리히 윌리엄 1 세 와 같은 아주 유능한 인물에 의해 지배되었을 때는 효과적인 후(後) 봉건적 전제주의 국가였다. 그와 같은 유능한 지도자의 통제가 없이 는 전제 국가는 군사적인 문제 의에는 아주 피상적인 체제가 되고, 그 체제는 그 국가의 중요 계층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 체제를 건설한 자들이 귀족과 통치의 임무를 분담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잘못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편협하고, 파당적이며, 아주 지방적이고 봉건적인 융커들은 국사에 거의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에 의해 300 개 이상의 독일 제후국이 몰락했다는 것은 봉 건제 폐지 과정에 나타난 단지 우연하고 하찮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 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이들 제후국들은 이미 봉건적이 아니었기 때 문이다. 그러나 이들 제후국들이 쉽게 나폴레옹의 제물이 될 수 있었 던 것은 이들 제후국의 규모가 작았기 때문이며, 규모가 작았던 이유 는 이둘 제후국들은 이전에 봉토였기 때문이었다. 봉건제의 발전 과정과 더욱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은 18 세기 개혁들이 합스부르크 영지에 적용되었을 때 이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 둘이다. 계몽 군주들의 특칭이었던 이러한 개혁들은 점증하고 있던 국가간의 전쟁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왜냐하면 전제 군주들이 계몽주 의로부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경쟁의 심각성을 이 해하게 되었고, 그들이 개혁을 하지 않으면 몰락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가에서 가장 계몽된 군주인 요제프 2 세 (1780- 1790) 는 오로지 정치 문제에만 몰두하고, 다른 문제는 도의시하였던 18 세기 정치가들 중의 한 인물이었다. 그는 교회 세력을 해체시키기 로 결심하였고, 특히 헝가리에서 상당히 남아 있던 귀족들의 세력을

왕의 세력에 흡수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사법적, 형사법의 개혁, 행정적인 합리화와 18 세기 정치에 가장 잘 알려진 여러 가지 개혁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계획을 즉시 수립하고, 그가 즉위한 후 수개월 내에 개혁 작업을 수행하였다. 요제프가 계획하였던 것은 거대한 합스부르크의 집적된 영지를 하나의 국가로 전환시키려고 한 데 지나지 않으며, 그 전환을 한 세대만에 이룩하려고 하였다. 물론 그러한 광대한 변화를 그렇게 급격하게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 하였다. 후에 발생한 사건들은 하나의 민족 국가로 통합하려는 주된 목적을 그러한 시간 내에 달성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디는· 것을, 그리 고 그러한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16 세기 혹은 그보다 더 빨리 시 작되었어야 한다는 것도 아울러 시사해 준다. 요제프가 개혁에 실패 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합스부르크의 지배 영지 내에는 여전히 후(後)봉건적 제도들이 상당한 활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이러한 제도들은 후봉건적 제도들일 가능성도 있지만 봉건적인 성격도 갖고 있었다. 귀족들은 전정한 지방의 지도자들이었으며, 그들 이 갖고 있던 의회는 그 지방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가 있었다. 무 엇보다도, 헝가리를 제의하고는 왕과 귀족 사이에 세력 균형이 일반 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 균형은 잘 조화되어 있었다. 요제프 의 개혁은 후봉건 체제의 안정을 영구히 붕괴시키는 역할을 하였을 뿐이다. 레오폴드 2 세 ( 1790-1 792) 는 안정을 회복하였다. 나폴레옹 시 대에서는 스타디온 S t ad i on 이 행정 체계를 강화하였고 합스부르크의 지배 영지는 새로운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영지는 다 시 전정한 안정을 회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여러 민족들이 각기 전 보적인 제도와 그리고 요제프가 계획하였지만 그의 후계자들도 이룩 할 수 없었던 단일 국가가 아닌, 분리된 국가를 원하게 되는 것은 시 간 문제였다. 국가들 간의 전쟁의 압력하에 놓여 있던 프랑스의 운명은 아주 예

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혁명의 원인이 되는 연속된 사건들은 주로 사회에서의 귀족들의 지위의 변천에 관계된 제한된 사건들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35) 루이 l 心1 l 의 전쟁의 결과 나타난 어려움 속에서 아전에는 귀족들에게 금지되었던 상업적 그리고 기업적 활동이 허용 되었다안 루이 l 心1 ] 와 루이 15 세의 섭정들은 아주 어리석게도, 귀족 둘을 돈벌이 직업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한 제도를 폐지했음에도 불구 하고 귀족들의 면세권을 계속 유지시켜 주었다. 이것이 바로 국가의 파탄과 1789 년의 혁명으로 인도하였다. 놀라운 사실은 혁명이 1789 년 이전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과 비틀거리는 정부를 몰락시키기 위해 서는 국가의 재정 파탄과 같은 특수한 병폐가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프랑스는 많은 인구를 가졌고, 고유의 부가 많이 축적되어 있었디는­ 점이 분명히 이 사실을 설명해 준다. 이러한 근본적인 이점 때문에 15 세기 이후로 프랑스가 참정적으로 또는 실질적으로 유럽에서 최강 의 국가가 되었고, 그 이후로 귀족 계급뿐만 아니라 봉건 제도들에서 유래한, 또는 봉건 제도를 대신한 각종의 변칙적인 제도들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일단 프랑스가 이러한 변칙적인 제도들을 제거하였을 때,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의도하였던 제국의 건설 계획의 중추적인 기반 으로 될 수 있는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대혁명이 본질적으로 변칙적 인 제도와 봉건 잔재를 일소하려는 데 목적을 두었다는 사실은 혁명 35) 역사에서 분명한 획일적인 인과 관계를 설정할 수는 없다. 이 경우에 혁명 의 모든 원인을 귀족들의 지위의 변화에서 찾는 것은 아주 찰못된 것이다. 국가의 파산이 전적으로 귀족들의 면세권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질 서한 행정 구조도 그들의 면세권과 더불어 국가의 기반을 약화시킨 큰 원인 이다. 아주 불합리한 조세 제도는 또 다른 요인이었다. 그리고 다론 많은 원 인도 역시 있었다. 36) 해양 상업은 166 9¾빈에, 도매업은 1701 년에, 금융업은 법으로 정한 상업 계 획이 실패한 때, 왕실 토지와 왕자들의 토지에 대한 임대 계약에 의한 경작 S은ze f1t e7l2, 0R 년e에v,ue 왕de실 r의Jn s 독 titu접t 이de었 S던oc io제 / o조g i업e, 에X의VI, 6참07여-는6 0 8 과17 2주2 년를에 참조개.방 되었다.

의 초기 단계, 특히 영주와 봉건적 권리를 폐지한 1789 년 8 월 4 일과 5 일에 일어났던 사건과 1789 년 10 월과 1790 년 4 월 사이에 있었던 행 정 제도의 재편에 의해 입증된다. 그리하여 유럽에서의 봉건제의 폐지는 유럽에서 새로운 제국이 설 립되기 얼마 전에 이루어졌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봉건 잔재 의에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러나 만약 봉건제가 유럽에 제국이 형성되기 전에 폐지되었다 해도, 그리고 그러한 제국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고 하더라도, 유럽의 역사는 중국과 메소포타미아의 역사가 보여주듯 이 분명하게 봉건제의 폐지와 제국의 출현 사이의 연관성을 보여준 다. 증대하고 있던 국가간의 경쟁의 압력이 봉건제 폐지의 주된 원인 이다. 민족 국가 군주들에 의해 수행된 국가의 찬양은 그 다음으로 중요한 원인이고, 이것은 결코 주원인과 동떨어전 원인은 아니다. 여 러 가지 면에서 주와 닮은 중앙 유럽은 이전의 봉건 귀족이 후에 민 족 국가 군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서 유럽에서는 결코 봉건 예속인의 출신이 아니었던 민족 국가 군주들이 일찍부터 국가를 찬양하기 시작하였고, 장기간에 걸쳐 간헐적으로 국 가 찬양 정책을 수행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럽에서는 국가와 교 회가 양분되어 특수하게 발달하는, 다른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현 상을 보이고 있지만, 그 양분 현상은 봉건제 폐지 과정을 방해하거나 변경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유럽에서의 봉건제 폐지 과정은 다른 사회에서와 똑같았다. 이 장(章)에서 발견한 것들을 하나의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쇠망 해 갔던 모든 문명화된 사회는 다시 부활되는 경향이 있었고, 그 몰 락한 서회는 일정 기간 민족 국가적인 지방(할거)주의 nati on ali sti c p ar ti cula ri sm 를 거친 다음 정치적으로 다시 통합되는 경향이 있었다. 한(漢) 이후의 중국 사회와 제 6 왕조 이후의 이집트 사회처럼 몰락의 정도가 비교적 미미하였다면, 그 국가의 군주들은 자신들을 황제라고

생각하였고, 몇 세기 후에는 한 군주가 그 사회를 다시 통합하는 데 성공을 하게 되고, 구제국과 큰 차이가 없는 새로운 제국을 세우게 된다. 우리는 이 논문의 앞부분에서 새로운 제국은 흔히 구제국보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나, 새로운 제국은 그 문화가 확장되었던 지역 의 모든 민족을 흡수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그 쇠퇴 의 정도가 아주 심하고, 오랫동안 끌었다면, 특정한 민족 국가들이 형 성되고 강력해지기 전에 그 사회의 대부분의 지역에 봉건 시기가 생 길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경우에 그 사회의 재통합이 결국은 이루어 지겠지만, 그 뒤의 발달 과정에는 상당한 변화가 있을 수 있다. 중요 한 변수는 황제와 민족 국가 군주의 상대적 지위이다. 주와 중앙 유 럽과 같은 사회에서는 군주들은 황제와 판이한, 본질적으로 봉건 대 귀족으로 남아 있는데, 결국 주위의 여건 때문에 그들은 서로 다투어 황제의 역할을 맡으려고 하기에 이른다. 함무라비 이후의 메소포타미 아 사회와 같이 아주 국단적인 경우에는 민족 국가 군주는 전혀 봉건 화되지 않았던 사회와 거의 같은 정도로 일찍부터 거의 황제와 같은 존재가 된다. 중요한 봉건 시기를 가전 모든 사회에서 정치적 통일을 마침내 가져오게 하는 국가간의 전쟁은 아주· 치열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특정한 사회의 특수한 요소들이 그 전쟁의 치열함을 완화시키 거나 혹은 그 치열함을 방지할 수 있다. 전쟁의 치열함과 군주가 그 의 국가 내에서 제국울 건설하려는 욕구의 강도와 그 사회의 역사의 초기에 바바리안의 침입의 강도라는 특수한 두 요소 사이에는 일반적 인 상관 관계가 있는 것같이 보인다.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명제이다. 다음 두 장에서 다루어질 이 명제 에 적용되지 않는 특별한 사례가 보여주듯이 이 명제는 완전히 일반 화된 명제는 아니다. 게다가 이 명제의 적용 범위도 아주 시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이 장에서 제기되었던 부수적인 문제 그리고 간단하게 논의되

어야 할 문제인 새로운 정치 이론이 대두되는 여건에 관한 문제만이 고찰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한 이후의 중국 사회에서는 근본적으로 어떤 새로운 정치 이론이 창안되지 않았다. 초기 중국 역사의 주기에서 물려받은 법가에 의해 약간 수정되고, 중국 역사의 새로운 주기에서 나타난 불교에 의해 미 약하게나마 수정된 유교가 주요한 정치 이론으로 남아 있었다. 필자 는 봉건제 말기의 일본에서 효과적인 새로운 정치 이론이 발생하지 못한 것은 유교의 위엄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단 하나의 국가에서 의 아주 건설적인 봉건 시대조차도一一혹은 만약 그러한 시대가 다른 중국 문화권의 나라에서 있었다면, 그러한 소수의 국가들에서의 봉건 시대도 __ 중국 역사의 한 주기의 말기에 몰락해 갔던 발전된 구사회 의 지배적인 정치 원리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 것 같다. 전반적으로 새로운 정치 이론의 결핍이 도쿠가와 막부의 보수적 봉건 정책의 원 인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두 경우에서 살펴보았듯 이 새로운 이론은 봉건제의 붕괴 이후에 나타나며, 봉건제 붕괴 이전 에 나타나지 않는다. 쇼군이 황제 세력의 부활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보수주의 정책을 사용하였다는 위에서 제기한 설명이 보다 타당할 것 이다. 그리고 19 세기에 일본이 유럽의 정치 이론에 접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을 요한다. 그 이유는 주로 그 당시에 유 럽이 갖고 있던 큰 위엄 때문인 것 같다. 일본만이 영향을 입은 나라 는 아니다. 전정으로 봉건화되지는 않았지만 러시아도 유럽 국가들의 압력에 자극을 받아 봉건 정체와 같은 느슨한 정치 제도를 제거하였 고, 그러한 느슨한 정치 제도를 유럽적인 성격을 가진 정체로 대체하 려고 노력하였다. 일본의 경우에 만약 중국이 그 당시에 쇠퇴하고 있 지 않았다면 유럽적인 형태의 국가보다는 유교적인 국가가 채택될 수 있었는지의 여부는 말할 수 없으나, 이 점은 유의해 둘 만한 사 항이다.

주와 아주 유사한 중앙 유럽이 유교와 비교될 만한 정치 원리를 결 코 창안하지 못하였다거나 혹은 실제 중앙 유럽 자체의 어떤 정치 원 리를 갖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물론 서유럽과의 관계에서 설명된다. 중앙 유럽의 일부는 항상 서유럽의 일부였고, 유럽의 정치 원리는 서 유럽의 것이었다. 유럽에 최초로 나타난 제도들은 영국, 프랑스, 이들 나라들보다는 좀 못하지만 이베리아 반도 국가둘 그리고 아마 이탈리 아의 한두 도시 국가들의 의회 제도이었다. 최초의 이론들은 유럽의 몇몇 나라들의 죽 영국, 프랑스, 독일인과 이탈리아의 대사상가 마르 실리오의 저작에 포함되고 있으나, 그들이 제기한 사상은 유럽의 유 명한 대학들, 죽 프랑스, 영국과 이탈리아의 대학에서 나온 것이다• 16 세기와 그 이후에 이러한 이론들이 다시 채택되고 완전히 발달할 수 있었던 곳은 유럽 국가 중에서 오로지 프랑스와 영국 뿐이었다. 완전히 발달한 이론이 최초로 시험적으로 적용된 곳은 바다 건너에 있는 17 세기의 영국 그리고 18 세기의 영국과 프랑스에서였다. 그 이 론은 각 나라들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일본이 중국의 이론에 의해 지 배되었듯이 중앙 유럽은 서유럽의 이론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 점에 있어서, 서유럽의 북부와 동부 지역의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서유럽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이론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중요한 정치 이론을 발견하지 못하였 던 함무라비 이후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어떠하였는가? 메소포타미아 에서는 그러한 이론이 발달할 경향이 전혀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찰못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중요한 이론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가능 성은 있는 것 같다. 다음 장에서 연구될 이란의 역사가 그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란의 문화는_ ― 다소간――메소포타미아 문화였으며,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늦게 발생한 페르시아는 실질적 으로 부정적인 정치 특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정체는 어떤 전(前)봉건적인 그리고 봉건제에 근접하는 관계가 아시리아와

비슷한 체계적이지 못한 왕당주의 roy al is m 또는 제국주의와 결합된 것이다. 만약 메소포타미아가 그의 봉건 시대에서 탈피하면서 어떤 중요한 정치 원리를 발달시키는 데 성공하였다면, 그 당시에 발생하 였던 메디아와 페르시아에서 그 정치 원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메디아와 페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 사회에 들어가면서 종류 가 다른 아주 새로운 이론, 죽 조로아스터교를 창안할 수 있었다. 메 소포타미아 역사의 특성이라고 생각되었던 효과적이고 안정된 국가 제도들을 창안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정치 이론을 창안할 수 없었 다. 사실상 아시리아가 정복 후에 바빌로니아를 통합하는 데 여러 번 실패하였던 이유를 설명하는 데 있어, 아시리아가 메소포타미아에 끼 친 영향에 관한 한, 아시리아는 효과적인 국가 성격을 갖지 못하였다고 가정함으로써 우리는 정치 이론에 관한 문제를 교묘히 피해 왔다 .37) 정치 사상과 제도면에 있어서 메소포타미아가 아무것도 이룰 수 없 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봉건제가 끝나면서, 봉건제가 종종 건설 적인 정치 업적을 이룰 수 있게 하였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봉건제가 항상 같은 결과를 가져오 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유럽에서는 후에 그 사회의 특칭적인 정치 제 도들의 발달에 크게 공헌을 하였던 곳은 중요한 봉건적인 발달이 있 었던 나라들이었다는 스트레이어의 통찰력은 이 장에서는 적어도 다 론 한 사회에서 유사한 발달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지를 받고 있다. 증거의 차이 때문에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봉건제가 더 이상 존재하 지 않게 되었을 때, 봉건제의 발전 과정은 지배자의 권력에 제한울 가할 수 있고, 피지배자의 입장에서는 정치 결속력과 협력의 의무감 을 갖게 하는 정부 형태를 유발하는 경향을 가졌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봉건제의 발전은 광범위한 국민이 정부에 참여할 수 있게 유도 하였으나, 그러나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봉건 시 37) 위 pp. 441-444.

대가 이러한 가치를 가지는 형태의 새로운 정치 원리의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니나, 그러나 후봉건 시대에 그러한 원리가 필요하였던 곳에 서는, 그러한 원리의 발달을 방해하는 치명적인 저해 요건이 없는 한, 그 원리가 발생할 기능성은 있었던 것 같다.

8 이란 만약 역사에서 봉건제에서 비봉건제로 발전하는 가운데 제국에서 제국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있다면, 아케메네스조 제국의 붕괴로부터 사산조 제국의 성립에 이르는 이란의 발전 과정이 그 경우일 것이다. 이 발전 과정은 크세르크세스(기원전 486-465) 의 통치 시기에 처음으 로 구제국이 몰락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르다쉬르가 신제국을 세우기 위하여 정복을 시작하였던 기원전 226 년까지 약 7 세기가 소요되었다. 그 기간은, 짧게 잡는다 하더라도 순전히 비봉건적인 성격이 발달하 는 데 걸린 가장 오랜 기간보다도 약 2 배나 더 길다. 그러나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한, 그 기간은 봉건 단계의 발전 과정의 시기보다는 짧고, 만약 우리가 봉건적 발전 기간의 평균치를 잡는다면,” 그 기간 은 아마 그 평균치의 절반밖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봉천 사 회들과 마찬가지로, 이란에도 유령 제국, 죽 파르티아 제국이 있었다. 또한 다른 봉건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이란에서도 방대한 영토를 정복 I) 서유럽은 구제국이 몰락한 이래 15 세기가 지났지만 아직도 신제국을 건설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판단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상(商)의 중국· 에 대한 문제도 역시 어렵다. 그러나 만약 구재국이 있었다면 구제국이 붕 괴되기 시작한 때와 신제국의 건설 사이에는 11 혹은 12 세기의 격차가 있 다. 일본 역사에 기반을 두고서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봉건적이었든 혹 은 아니었든 간에 메소포타미아의 경우에 그 기간은 약 l 서 l1 기간이었다.

하였으나 오래 통치하지 못한, 샤를마뉴 또는 요리토모와 갇은 능력 울 가전 대지배자 미스라다데스 2 세(기원전 124 - 87) 가 있었다. 그 영 토는 어떤 면에서는 원봉건적인 상태에 있었던 것같이 보인다. 그러 나 이란에 진정으로 봉건적인 토지 보유제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 으며, 그러한 제도가 이란에는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몇 가지 이 유가 있다. 그 한 이유로서 이란 전역에서 파르티아 제국에 예속되어 있었고, 상품 집산 도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던 메소포타미아의 도 시둘에서는 상업이 상당히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들의 구제국이 붕괴되면서, 봉건화되었던 국가들과 - 봉건화되지 않았던 국가들 모두 바바리안의 침입을 받게 되었는데, 파르티아인이 바로 그 침입자들이었다. 그들이 정치적 권위를 이어받았다는 점에서 그들은 봉건화되지 않았던 국가의 침입자라기보다는 봉건화된 국가의 침입자와 유사하다. 사실상 그들은 서유럽의 역사에서 프랑크족이 차 지하는 위치와 같은 위치를 이란의 역사에서 차지하였다. 그 제국이 붕괴하는 동안에 그들은 파르타바 Par t hava 지방에서 자리를 잡고 있 었으며(이 지방의 명칭에서 그들의 이름이 알려지게 됨) 그들은 카스 피해와 이란 사막 사이의 서쪽으로 뻗어 나가 메디아로 들어가고, 메 디아 지방울 건너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어느 정도 깊숙히 들어갔 다. 이 과정은 약 1 세기가 걸렸으며, 미스라다테스 1 세(기원전 160- 138) 때 그 확장이 끝났다. 따라서 이 지역은 어느 정도 결속력을 가 지고 있었고, 그들의 지배는 유럽에서의 프랑크의 지배와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와 비교될 수 있다 . 갈리아 지방이 로마 제국에서 차지하 는 중요성보다는 이 파르티아인의 영토가 아케메네스조 제국에서 차 지하는 중요성이 더 컸지만, 로마의 우수한 문화가 갈리아 지방의 문 화를 압도하였던 것과 같은 정도로 메소포타미아의 우수한 문화가 이 란의 문화를 압도하였다. 한 제국이 몰락한 후 문화가 타락하여 생기 는 암흑 시대에 발생한 여러 국가들 중에서 파르티아와 프랑크 왕국

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는 점에서 이들 두 국가는 정치적으로 유사하였다. 파르티아인돌은 프랑크족과 마찬가지로 원래 바바리안들이었으며, 바바리안으로서 그들은 침입을 하기 전에 문명화된 지역의 고도로 발 달한 문화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 프랑크족과 파르티아인들이 각각 이주를 하기 전에 프랑크족들은 정착한 농경 촌락인이었던 것에 반해 파르티아인들은 초원의 유목민이었다는 사실 그 자체는 그들이 이주한 뒤에도 사건의 발달에 거의 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목민들이 제국의 영토에 이주해 들어왔을 때 유목민의 전 사단 조직은 이전에 정착한 바바리안들이 형성한 전사단 조직과 거의 유사하게 되기 때문이다 • 2 ) 그리하여 이란에 정착하고 난 뒤의 파르티 아인들은 사회적으로 프랑크족과 아주 유사하였다. 파르티아인들은 말을 타고 생활하며 전쟁을 하지 않을 때에는 사냥하기를 좋아하는 전사 귀족들이었다. 그들의 유명한 기마 전법은 그들이 초원 지대에 서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이 전법으로 그들은 정복을 할 수 있었던 것 같고, 그 이후부터 이 전법은 중동 지역의 전쟁을 새로운 양상으 로 변화시킨 것 같다 .3) 그들에게는 개인적인 충성이 아주 중요하였으 며, 그 충성 관계는 혈맹의 형제애로 맺어졌다? 이것은 이제 프랑크 족과 유럽의 다른 바바리안의 경우에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연구된 다른 사례들에서도 잘 알려진 사회 윤리이다. 그러나 파르티아의 경 우에서는 자료가 빈약하기 때문에 이러한 바바리안의 특칭에서 유래 한 봉신제의 토지 보유 형태를 찾을 수가 없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 는 것은 어떤 종속적인 보유 형태가 파르티아의 귀족 계급 내에서는 발달하였다는 사실과 귀족들은 전쟁에서 왕중왕에게 봉사하는 어떤 2) 위 5 장 주 11) 을 보라. 3) Tarn 이 주장하고 있는 다른 이론에 대해서는 위 pp .310-312 를 참조. 4) Cambrid g e Anc ien t Hi st o r y , IX, 589.

형태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5)

5) Tam 은 파르티아인의 종주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지지 않았다고 주장 한다 (Cambr i dg e Anc ien t Hi st o ry, IX, 590). 몇몇 메소포타미아의 도시의 경 우에서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어느 정도 알려졌으나, 그의의 경우 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파르티아인의 본거지에서의 소작인의 경우와 본거지 밖의 예속 군주들의 경우에 만약 봉사와 조공의 의무가 있었다면, 어떤 봉사와 의무 혹은 왕중왕에게 조공을 했는지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 았다.

파르티아의 봉건제는 아케메네스조의 제도에서 칙접 유래된 것이며 파르티아인들에 의해 도입된 제도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 주장에 대해 검토해 보도록 하자. 크리스텐슨 Chr i s t ensen 은 이와 같은 의미의 주장을 한 사람 중에서 가장 합리적이다. 죽 〈페르시아에서 봉건제의 기원은 (아케메네스조 제국)에 있다. 그러나 아케메네스조 제국하에서는 아직 봉건제가 발달하지 않았다 〉 . 6 ) 로스 토프체프도 유사한 주장을 하지만 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 7) 브 런데이지 Brunda g~근 이에 관한 연구에서 아케메네스조 체제를 어떠 한 의미로서도 봉건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찰못이라고 하였다? 그 러나 그 잘못 자체는 홍미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의 바바리안적 인 개인 관계가 문명화된 정체로 되는 비봉건적인 방법이 우리의 관 심을끌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제국은 어느 면에서는 아시리아 제국이 갑자기 붕괴한 후

6) A. Chri ste n sen, L'Jr a n sous /es Sassanid e s, 2nd edn.(Cop en hage n , 1944), p. 16. 7) Cambri dg e Anc ien t Hi st o ry , XI, 117. 쿠人두 프체프는 봉건 구조는 이란 군 주제의 특칭이라고 말하며, 이집트와 아시리아에서 발견되는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헬레니즘 세계와 로마 제국에 전파되었던 중앙 집권화와는 아주 대 조를 이룬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시리아와 아케메네 스 군주제의 연속성은 아주 잘 알려진 사실이고, 그 반면에 이집트와 아시 리아 사이의 격십한 차이는 최근 Fran kf or t에 의해 밝혀졌다 (K i n g sh ip and the Gods, Ch ica go , 1948, pp. 6, 215). 8) 위 pp. 171-174.

거의 1 세기 동안 명맥만 유지해 왔던 칼데아 제국 다음에 나타난 아 시리아의 후속 제국이었다. 이 변화는 메소포타미아 역사 초기에 있 었던 아카드와 우르 제 3 왕조 사이의 변화 같은 것이었다. 아케메네스 조하에서 봉건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비드페이티스 V it h p a iti s, 죽 귀 족들이 갖고 있던 개인적인 면제권과 이 귀족들의 일부가 지배하고 있던 주(州, sa t ra py)의 독립성이다 - 후자는 아마 아시리아로부터 물려받은 것일 것이다. 에테샹 Eh t echam- 브런데이지가 인용하고 있는 - 은 비드페이티스가 갖고 있는 권력과 권위, 그들이 제국을 세우기 전에 이란에서 그들이 자리잡고 있을 동안의 그들의 토지 재 산과 상당수의 그들의 예속인에 대한 이중적인 기원을 설명하고 있 다. 이 설명은 아주 재미있다 . 그것은 부족 제도가 아니라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들이 제국의 국경 지방에서 살고 있던 바바리안이었을 동 안에 발달한 어떤 제도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적인 종속 관계 문 재는 차드윅이 이러한 바바리안에 대해 설명한 것과 일치한다. 토지 재산에 대한 문제는 국경 지방의 바바리안의 특성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페르시 아의 경우에는 그것은 제국에서 시행되던 토지 제도를 모방한 결과이 며, 그것을 채택함으로써 페르시아는 후에 제국을 인수받아 그 제국 을 부활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미드와 페르 시아인들은 정복을 - 시작하기 전에 3 세기 동안 메소포타미아 계곡의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였다. 사실상 그들은 순전히 바바리안으로서가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사회에 속하는 국가로서(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두 국가로서)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였 다. 마치 전이 주의 중국 사회의 여타의 국가들과 다르듯이, 그들은 문화적으로 메소포타미아의 여타의 국가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언어를 가졌고, 그들의 종교는 특수하고 약간 신비적 이었다는 것 의에는 모든 예술적인 문제와 지적인 문제에 있어서 완

전히 메소포타미아적이었다. 그들이 실제로 이렇게 동화되었다고 하 더라도, 비드페이티스의 세력을 약화시키거나 혹은 그들의 개인적인 관계를 파괴한 것은 아니며, 비드페이티스의 개인적 관계는 페르시아 정복의 부산물로서 제국의 구조 속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사이러스 C y rus 가 그의 주의 총독에게 그둘이 지배할 지방 영토에 대한 군사적, 행정적 권한 모두를 주었기 때문에, 그것은 부수 적인 사건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만약 제국이 이후 분열되었다면, 사이러스의 봉신 vassal 으로서의 - 만약 이 용어 를 쓸 수 있다면-그들은 봉건 영주가 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 었다. 주 총독둘은 독립적인 지방 귀족이 되고자 시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제국은 분열되기는커녕 오히려 그와 정반대였고, 봉건제 가 발달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다리우스의 지배하에서는 주총독은 그를 보좌하는· 장군이며, 단지 일반 행정 보 좌역에 지나지 않는 장관격이었으며, 왕중왕의 권위에 의해 직접 예 속되어 있었다. 또한 이들은 왕의 귀와 눈이었던 순회 감사관의 감독 하에 있었다. 이 제도는 사이러스 왕때보다는 봉건적이라고 할 수 없 었으나, 주의 정부는근 감사를 받는 것과 중앙 정부에 세금을 내는 것 의에는 완전히 독립적이었다. 이외에도 주총독은 개인적으로는 막대 한 특권과 면제권을 누린 인물이었으며, 실제로 표면에 나타난 권력 보다도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있었다. 분명히 이 제도는 봉건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책에서 의미하는 뜻의 봉건제는 아니다. 이제 이러한 제도가 파르티아 체제하에서 종속 관계의 성장에 영향 울 끼쳤는지의 여부에 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 두 시기 사이 의 대략 때]기 동안 아케메네스조 체제는 몰락하여 셀레우코스 체제 가 계승하였고, 셀레우코스 체제 또한 붕괴하고 파르티아 체제가 홍 기하였으며 마침내 소멸되었다. 파르티아 체제하에서 지방의 대귀족 이 이전부터 독립적인 세력을 갖고 있었다고 믿기는 상당히 어렵다.

이 시대는 제국이 붕괴되고 새로운 바바리안과 파르티아인에 의해 정 복이 이루어지고 새질서를 회복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아케메네스조 체제하의 예를 들면 왕이 행사하는 특권을 행사할 수 있고 많은 권한 울 갖고 있었던 7 가문들이 나타났던 것과 같이 몇몇 제도가 아라시드 체제하에서 다시 나타났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원칙상 아르사세스가 아케메네스조의 왕중왕이라는 칭호를 부활하였던 것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간단히 말해, 이것은 구제국의 유령을 다시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가문의 세력은 아라시드 체제하 에서는 실제로 상당하였으나, 그것은 이전의 형태와 다른 새로운 요 소를 갖고 있었다. 사실상 쿠人뚜立체프의 잘못은 형태를 실체로 잘 못 본 것에 있으며, 크리스텐슨도 어느 정도 그러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아르사세스 시대의 사적 정치 권력은 그 시대의 상황에서 발생 하였으며, 아케메네스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름과 형태 뿐이었다. 대귀족의 정치 권력과 권위의 문제에서 그들이 갖고 있던 영토의 문제로 눈을 돌린다 해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란-메소포 타미아의 이전의 지리적인 구분을 보존하기 위해 아케메네스조 제국 의 니아 주의 독립성이 사용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제도가 유지 되었디는 점은 유의할 만하다. 메디아는 다리우스의 지배하에서 10 번 째 주가 되기 전에도 메디아였다. 우바야 Uvaj a 는 8 번째 주가 되기 이전에는 엘람이었고, 파르티아 체제하에서는 엘리마이스 El y ma i s7} 되었다. 아케메네스조 제국의 연방 형태가 파르티아 시대에 봉건화 뿐만 아니라 그 제국의 붕괴의 실질적인 동인이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만약 그것이 동인이 되었다면, 분명히 아케메네스조 체제하에서 제국이 붕괴되어 갔을 것이다. 파르티아 체제하에서 일어났던 실질적 인 분열이 이것을 확증해 준다. 메디아는 셀레우코스조 아래에서도 메디아로 남아 있었으며, 메디아가 파르티아 세력의 실질적인 중심부

였음에도 불구하고 메디아는 파르티아 체제하에서 5 개의 예속적인 구 역으로 나누어졌다. 우바야는 엘리마이스가 되었으며, 이 지역을 다스 리는 왕이 있고 이 왕위에 파르티아의 왕중왕이 군립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나, 이 지방은 귀족들에 의해 여러 세력권으로 분열되었다. 페 르시스와 이란 지역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일어났다. 셀레우코스와 아 케메네스조 그리고 그보다 훨씬 이전의 민족들이 살았던 지역에서 상 당히 많은 분열이 일어났다 할지라도, 사실상 파르티아 시대의 분열 은 아케메네스조와 셀레우코스 시대의 연방 제도와 같은 분열과는 아 주 다르다는 것이 분명하다. 아케메네스조 제국을 반봉건적인 정체 혹은 조금 양보하여 〈발달되지 않은 〉 봉건제가 예기되는 정체로 간주 하고, 그리하여 파르티아가 출현할 때에 완전히 봉건제로 발달한 정 체로 간주하는 것은 사실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파르티아 이란의 역사에서 아케메네스조 제국만이 유일한 제국은 아니다. 셀레우코스 제국도 역시 거기에 있었으며, 여러 제국이 존재 했었다는 사실이 이란 역사의 특수성이다. 알렉산더 대제의 정복 그 리고 그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가 성립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에피소드가 아니다. 사실상 이들의 영향은 정치면에서는 미약하다. 보 다 강력한 헬레니즘화 현상은 그 지역 문화의 다른 양상과 관계가 있 다. 메소포타미아와 박트리아는 영구적이지는 않았지만 헬레니즘화가 아주 심하였다. 그러나 메디아와 페르시아, 그리고 파르티아와 사산조 세력의 근거지였던 서부 이란이 헬레니즘화가 덜되었다는 것은 홍미 있는 일이다.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메소포타미아라고 일컫는 지역 의 도시들의 헬레니즘화이다. 구메소포타미아 문화는 곧바로 소멸되 었으며, 심지어는 종교까지도 소멸되었다 .9) 그리고 비록 그 문화가 소 9) H. S. Ny be rg( D ie Relig ion en des A/t en Iran, H. H. Schaeder(tr a ns.), 1938, pp. 406-407) 과 J. M. Vnvala(Observati on s on the Reli gion of the Parth i a n s, Bombay, 1925, p. 5) 는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에 대한 헬레니즘의 영향에 대 해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찰못된 것이다. O rp h i sm 과 T yche( 행운의 신)와

같은 특수한 신 이의에는 그리스의 종교는 널리 행해지지 못했으며, 어떤 형태의 종교가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그것은 그리 인기가 없었다. 때로 메소 포타미아인들은 조로아스터교, 때로는 유태교를 신봉했으며, 후에는 그노티 시즘, 기독교, 매니키아니즘 등의 종교에 귀의하였다.

멸되고 난 뒤 다시 소생하였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문화적 공 백 상태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문화적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 다. 헬레니즘화되지 않았던 지역은 유태화되었고, 파르티아 시대와 그 이후에는 메소포타미아 문화는 메소포타미아라고 일컫는 지역보다는 이란 고원 지방에서 더 많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메소포타미아 문화가 이란 고원 지방에 많이 남아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10)

10) P. S y kes 는 페르시아에 관한 짧은 저서 (Per si a, Oxfo r d, 1922, p. 30) 에서 파르티아인들을 유목 상태에 머물러 있고, 군막과 같은 체제로 지배하는 민 족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과장된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유 목 민족이 그보다 문화 수준이 낮은 민족이라도 그 민족과 동화됨이 없이 500 년 이상이나 그 민족을 통치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지배 민족의 전반적인 문화 수준은 하락하였다고 생각한다.

파르티아 제국에서 헬레니즘화한 신민들은 분명히 중요한 사실이었 으며, 아르사세스의 지배자둘은 필헬린 Ph ilh ellene, 죽 그리스 예 찬자 라는 칭호를 취함으로써 그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파르티아 제 국은 그 제국의 모든 특색을 고려해 볼 때 페르시아 제국의 한 유령 제국이었으며, 아르사세스인들은 자신들을 아케메네스조의 후계자로 생각하였다. 만약 헬레니즘화가 문화 부분에서보다 정치면에서 덜 효 과적이었다고 한다면, 헬레니즘화는 정치적으로는 그 제국의 전통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셀레우코스의 군대와 그의 통 치 방법이 마케도니아적이기는 하였지만, 셀레우코스 체제는 거의 아 케메네스조 제국의 방식으로 통치되어야 했다. 순환적인 정치 발전 과정에서 헬레니즘화의 영향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헬레 니즘화는 정치적인 붕괴를 1, 2 세기 지연시켰을 뿐이며 그 붕괴 자체 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는 그 당시의 상황 때문에 셀레우코스는 아

케메네스조 말기의 지배자들이 지배하였던 것보다는 더 느슨한 행정 체제로 이란을 지배해야 하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라고 주게 Jo ug ue t는 주장한다 .II)

11 ) P. Jou gu e t, Macedonia n Imp er ia l ism and the Helleniz a ti on of the East, M . R. Dobie (tra ns.) (London, 1928), p. 365. Jo ugue t는 그의 근거로 Jo urnal des savants , 1913, p. 301 에 나오는 G. Rade t를 인용하고 있다.

상업에 관한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다. 파르티아에서 그리고 사산조 제국에서 행해졌던 무역은 철저하게 헬레니즘화하였다. 그 무역은 본 질적으로 그리스 무역, 죽 그리스-로마 세계와 중국과 인도 사이의 무역이었다. 분명히 그 무역은 파르티아 혹은 이란의 무역은 아니었 다. 물론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들은 그리스인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거 대한 상업 도시였으나, 만약 그리스인들이 그 도시들을 장악하지 않 았더라면 파르티아 시대에도 그들의 무역이 계속될 수 있었을지는 의 문이다. 간단히 말해, 헬레니즘화되지 않았더라면 교역, 도시들 그리 고 고도의 문화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전될 수 있었거나 혹은 이후의 이란-메소포타미아의 발달에서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을까? 이것 은 파르티아와 사산조의 제도들의 성격을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문 제이며, 우리는 아래에서 이 문제를 다룰 것이다. 정치사의 몇 가지 주된 사건들이 이 제도들의 발달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들 사건들을 이제 재음미해야 한다. 미스라다테스 2 세의 통 치 시기는 파르티아 제국의 발달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위 대한 정복자였다. 그는 이란의 북부에 있는 모든 파르티아를 정복한 것 의에도, 엘리마이스와 아케메네스조 세력의 근거지이며, 이란에서 파르티아 다음으로 강력하였던 페르시스의 종주가 되었다. 이란의 의 곽 지역에서 그는 카시트 후기 시대부터 바빌로니아로 알려진 티그리 스-유프라테스 강 계곡 지방울 한동안 지배하였다. 그는 이 당시에

흔히 메소포타미아 지방이라고 일컫던 지역인 북부의 계곡 지역을 아 라사세스의 왕중왕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까지 확장하였다. 그는 역시 북부에 있던 초원 지대의 상당 부분을 정복하였으며, 옥수스 Oxus 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하였다. 이 정복 때문에 그의 통치하에서 중요한 일련의 사건이 된 사카 Saca, 예시 Yue Ch i h 와 다른 유목 민족의 침 입 이 발생하였다. 그는 이러한 위협에 직면하여 서부 이란을 성공적으 로 방어하였다. 그러나 노르만의 유럽 침입과 같이 사카족의 침입은 어떤 지역에서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첫번째 침입과 유사한 제 2 차 바바리안의 침입이 일어났고, 그 침입으로 무인이 지배하는 정 부를 등장시켰을지도 모른다. 가장 심한 영향을 받은 지역은 헬레니 즘화한 박트리아 국가가 설립된 동부 지역이었다. 박트리아국은 멸망 하고 사카틴 (Saca t ene, Se i s t an) 이 그 뒤를 이었는데, 이 지방은 결국 은 사산조 제국의 한 지방이 되었다. 사카족이 박트리아를 넘어 인도 로 침공하여 들어갔을 때 이란은 사카족의 위협으로부터 모면할 수 있었으며, 사카족은 그 침입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 었다. 미스라다테스의 제국은 단명하였고, 미스라다테스와 그의 후계자~ 은 부와 유능한 행정 관리를 갖지 못하였고 제국의 통일을 유지시킬 만한, 믿을 수 있고 항구적인 군사적인 기반을 분명히 갖지 못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찰스 대제의 제국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고 데브브와 즈 Debevo i se 가 미스라다데스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많은 권력을 그의 부하에게 양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하였을 때 ,12) 우리는 그러한 권력의 양도가 봉건 관계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이 의문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다 .13) 미스라다테스의 총독 중의 총독 12) N. C. Debevois e , A Politi ca l His t o r y of Parth i a ( Chic a go , 1938), p. 44. 13) 헬츠펠드 Herz fe ld 는 베히스문 Beh i s t un 에 있는 미스라다테스와 4 명의 조각

상一―이 중의 한 명은 고타레즈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헬즈펠드는 그 그립은 미스라다테스가 4 개의 봉건 가문에 대해 봉토로서 서임을 하는 장면이라고 말하고 그 제국의 실질적인 창건자인 미스라다테스는 그 제국의 봉건 조칙을 창시하였음이 틀림없다고 첨언하고 있다 (Archaeolo gi cal Hi s- tor y of Iran, Schweic h Lectu r es of the Bri tish Academy , 1934, London, 1935, pp.5 4-55). 봉건적이란 말을 원봉건적인 말로 이해한다면 헬즈펠드의 견해는 유용할지 모르나, 어떤 특정한 자세로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그립이 봉건 관계를 묘사하는 유력한 증거라고 하기는 힘든다.

marzban of marzbans14) 인 고타레즈는 바빌로니아의 통치를 위임받았 고, 그는 미스라다테스가 죽기 전에 아마 그 지역에서 독립적인 지배 자(영구적인 것은 아니지만)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반항적인 봉신(봉 건적 의미에서)이었을까? 혹은 단순히 믿을 수 없는 반역적인 관리였 을까? 크리스텐슨은 왕중왕과 그의 직속 대봉신들 사이의 관계는 대 봉신들과 보다 지위가 낮은 향신들 사이의 관계보다도 견고하지 못하 였다고 주장하였다 •15) 그러한 관계는 원봉건 국가 혹은 초기의 봉건 국가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며, 유럽에서는 카롤링거조 말기의 시대에 그랬다는 사실이 스트레이어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16)

14) 총독은 구제국의 총독의 기능을 실제로 수행하는 관리를 지칭하는 파르티 아의 공식적 인 단어이다. marzban of marzbans 는 왕중왕이 왕의 우두머 리 인 것처럼 총독의 우두머리이다. 잘 동치되고 있는 왕국에서 marzban of marzbans 는 일반적 인 행정 권한울 갖고 있었다. 그가 한 지방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예외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미스라다데스 2 세 다음의 3 세기 동안의 파르티 아 역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지식의 거의 대부분은 요제푸스와 로마의 학자들로부터 얻은 것인데 이들의 지식 도 간접적인 것이다. 예의적으로 시아 카 Ms i ha Zkha 지방의 아르벨 라의 연대기 Chronic le of Arbela7} 있는데 이는 너무 지방적 인 것이 어서 그 연대기로부터 일반화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그러나 여 기에 근거하여 그 시기는,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잠정적으로 일본의

15) L'Iran sous /es Sassanid e s, pp. 18-19. 16) 위 pp. 53-5 4.

아시카가 막부 시대 또는 9 세기에서 11 세기의 프랑스와 같이 봉건제 가 형성되는 시기로 간주될 수 있다. 분명히 내전이 있었음이 틀림없 다. 특히 유능한 왕이었던 아르다완 Ardawan 3 세의 불행 때문에 귀족 둘의 세력이 증대하였고, 그의 통치 말기인 기원후 20 년대 말과 30 년 대는 혼란의 시기였다• 이 시기 동안 왕은 그의 지지자들을 모을 수 있었을 때까지 숨어 살아야 하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 로마의 관리들 은 왕과 귀족둘이 함께 로마의 침입에 강력하게 저항하였다고 보고 있다. 그러한 왕과 귀족의 연대는 아마도 이민족의 침입으로 형성되 었을 것이다. 필자는 이 시기에 여러 제도들이 강화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 제도에서 어떤 형태의 개인적인 종속 관계가 중요하게 되었음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군주들은 관리들을 통해 정부 를 운영하였을 가능성 또한 있었으며, 이 관리들은 봉급을 받았으며 하시라도 해임될 수 있었다. 기원후 1 세기 후반 볼로가시스 Volo g ases 2세 는 반란을 전압한 후에 아디아빈 Adia b ene 왕국울 마르즈반이 지 배하는 속주로 전락시킬 수 있었으며, 그 마르즈반은 아마 임명된 관 리였을 것이고, 이전의 아디아빈의 왕은 분명히 어떤 형태로든지 왕 중왕의 예속인이 되었다. 이 문제는 아르다시르와 사푸르 1 세의 유명한 정복 문제로 다시 되 돌아가게 하는데, 그둘의 정복은 이 장(章)의 서두에 전 사회를 다시 통일시킨 정복으로 설명되었고, 6 장에서는 유럽, 일본, 주의 중국에서 혁명적인 강력한 국가의 출현과 비교되었던 정복이었다. 아르다시르 와 사푸르의 업적의 진정한 성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이란-메소포타미아 전 사회의 재통일이었다 .17) 그러나 그것은 봉건 사회에서 강력한 한 민족 국가가 출현하는 것과 아주 흡사하며, 17) 로마인들이 침 입하여 때로는 메소포타미의 일부를 드물게는 전 메소포다미 아를 장악하였다는 사실은 이란-메소포타미아의 발달에 실제로 영향을 미 치지 못하였으며, 그 침입은 피상적이고, 이방 사회 alie n so ci e ty에 대한 일 시적인 침입에 지나지 않는다.

이란의 발전 과정에서 강력한 군주의 출현이 기대되었던 바로 그 순 간에 강력한 군주가 출현하였다. 사실 아르다시르와 그의 아버지 파 바그 Pabha g h 는 아르다시르가 대정복을 시작하기 직전에 페르시 스 에 자신들의 강력한 민족 국가를 건립하였다. 따라서 후자는 강력한 민 족 국가의 출현의 연장이었다. 만약 우리가 사산조의 업적을 중세 유럽에 그대로 옮겨 놓고 상상 해 본다면, 사산조의 업적의 중요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근 거하여, 우리는 정복왕 월리엄의 아버지인 노르만의 로버트 1 세가 앙 리 1 세를 프랑스의 왕위에 즉위하는 것을 돕지 않고 반란을 일으켜, 그를 몰아내고 자신이 왕위에 즉위할 수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 왜냐하면 파바그는 페르시스에서 단순히 지방의 대귀족으로서 출발 하였고기 그는 그의 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그 자신이 왕이 되었 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 윌리엄 자신은 프랑스의 전역에 있는 그 자신의 대봉신들을 억압하였을 것이고, 프랑스를 통치하기 위하여 관 리둘에 의한 행정을 도입하였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 만약 그 렇다 하더라도 l 心 11 기 이전의 프랑스에서는 실제로 거의 불가능힌· 일 이었다 그 다음으로 윌리엄의 중요 관심사는 그 자신이 직접 프랑코 니아 가(家), 아마 하인리히 心사의 가문을 정복하고 제국의 황제의 관을 획득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월리엄 루푸스에게는 영국, 스칸디나 비아 반도와 동부에 있던 소왕국들을- 정복하는 임무가 주어졌을 것이 라고가정할수 있다. 이렇게 상상해 보면 파르티아-사산조 시대의 이란은 중세 유럽과 좀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지역적으로 그 당시의 이란은 서 유럽 크기의 약 3/5 정도여서 아르다시르와 사푸르의 정복은 이 점에 있어서 비교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을 감안한다 하더라 도, 앞서 가정하였던 로버트 1 세, 윌리엄 1 세와 윌리엄 루푸스의 정복 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 이유로는 첫째 노르만의 지배자들은 충분

한 군대를 갖고 있지 않았다 . 그 반면에 아르다시르는 끊임없는 전쟁 으로 인하여 대규모의 군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둘째 사산조의 디브 헤란 d i bheran 과 같은 관리의 봉사 제도는 11 세기 유럽에서는 확립될 수 없었고, 만약 그러한 봉사가 가능하였던 때인 l 心1 ] 기 또는 15 세기 유럽과 비교해 본다면, 백년 전쟁은 다른- 국가를 정복하려고 하였던 한 민족 국가의 군주가 수행한 전쟁이었다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또 다른 중요한 문제를 야기한다. 죽 아르다시르와 사푸르는 그들이 정복하였던 이란의 몇몇 국가들의 저항을 받았으나, 필자의 판단으로 는 그 저항은 봉건 사회에서 형성된 강인한 국가들의 저항은 아니었 다. 만약 이것이 맞다면, 사산조 제국의 성립과 더불어 이란이 재통일 되었을 때 이란은 봉건적이 아니었으며, 그 이전에도 봉건적이 아니 었다. 이란이 봉건적이 아니었다는 가정을 이제 검증하여야 한다• 민족 국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나라들이 셀레우코스 제국이 붕괴하면서 발생하였으나, 이란의 전역에서 이러한 나라들이 발생한 것은 아니다• 남쪽에서 발생하였던 페르시스도 이러한 국가 중의 하 나이다. 페르시스가 발생하였다는 것은 역사적 숙명론의 한 예이다. 왜냐하면 페르시스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원페르시아의 영토였고, 지 금은 바스랑기 Basran gi족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이다. 페르시스는, 그 남서쪽에는 만( 灣 )이, 북쪽에는 사막 지대가 있었으나, 북서쪽 또는 동쪽으로는 분명한 경계선을 갖고 있지 않았다. 북동쪽의 박트리아는 그리스화하였다. 박트리아도 역시 주로 산악 왕국이어서, 힌두쿠시 산 맥과 파미르 고원이 박트리아를 감싸고 있었다. 카스피 해의 동남쪽 구석 주변에 있었던 엘부르즈의 히르카니아 Hy rca nia .5:.. 작기는 하지 만 산악 왕국이었다. 최북단에는 또 다론 산악 왕국이었던 아르메니 아가 있었는데, 아르메니아는 인종적으로 이란과 메소포타미아와 확 실히 구별되었다. 아르메니아는 그리스화되지는 않았고, 그 자신의 언 어와 제도들을 갖고 있었다. 아르메니아의 남동쪽의 메디아 아트로파

틴 Media At ro p at e n e. ?:- 일찍이 민족 국가를 형성하여 안정된 정치적 단위가 되었다. 이 나라는 이란인돌로 구성되었으며, 남서쪽의 자그로 스 산맥과 북동쪽의 카스피 남서 연안 사이에 놓여 있는 아르메니아 다음으로 높은 산악 지방울 점유하고 있었다. 히르카니아와 박트리아 사이의 나라에 있던 카스피아 해의 동남쪽의 파르티아 자체도 역시 초기의 민족 국가로 간주되어야 한다. 파르티아는 유서 깊은 파르타 바 지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특수한 인종으로 파르티아인이라고 불리 는 초원 유목- 이주자들이 있었다. 박트리아를 제의한 이들 국가들은 만약 아케메네스 제국이 몰락하 면서 셀레우코스 제국이 2 세기 동안 존속하지 않았다면 아마 더 일찍 이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 아르메니아, 메디아, 아트로파틴은 나머 지 국가들보다 더 일찍 등장하였다. 일찍부터 이러한 국가들이 등장 하였다는 것은 이 지역의 주된 사회에서 비봉건적인 발전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 북부 또는 남부, 또는 주 로 대메디아와 아마 구엘람이었울 엘리마이스로 구성되어 있는 대계 곡의 동부의 광활한 지역에서는 민족 국가가 발달하지 않았다는 사실 에 주목하여야 한다. 사실 엘리마이스의 경우는 불확실하다. 셀레우코 스 제국이 붕괴하면서 엘리마이스가 실질적인 민족 개체성을 가졌는 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우리는 알지 못한다. 첫째, 파르티아의 왕중왕이 대부분의 메디아와 메소포타미아 지방 의 북부 지역을 조금 포함한 이 지역의 북부의 반을 정복하였다. 파 르티아와 더불어 이 정복 지역은 파르티아 왕중왕의 주된 세력 거점 이 되었으며, 이것은 파르티아가 독일의 신성 로마 제국과는 다른 방 식으로 성립되었지만, 지리적으로 볼 때 유럽에서 독일의 신성 로마 제국이 차지하였던 지역과 흡사하였다. 그러나 파르티아의 왕중왕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보다 더 효과적인 유령 황제였다. 그렇게 생각 하는 주된 이유가 있다. 그의 주된 세력 기반이 된 지역에서의 그의

지위는 위태하기는 하였으나,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독일에 서 가졌던 것보다도 더 많은세력을 가졌다. 그의에도 신성 로마 제 국의 황제는 유럽에서 여러 국가들에 대한 종주권을 갖지 못하였는데 반하여, 이란의 민족 국가들은 유럽의 국가들보다도 훨씬 일찍 발달 하였고, 왕중왕(대부분의 경우에는 미스라다테스 2 세의 경우이지만)이 이들 국가들에 대한 종주권을 가졌을 즈음 이 민족 국가들은 유럽의 민족 국가들보다 훨씬 세력이 강하였지만, 이 민족 국가들은· 왕중왕 의 종주권을 대부분의 시기 동안 인정하였다• 왕중왕에 의해 직접 지 배되었던 지역에서 만약 그 지역이 봉건화되었더라면 우리가 예상할 수 있었던 시기쯤에 민족 국가들이 발생하였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 을 만큼의 지식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우리들의 문제롤 해결하는 데 실제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확실히 우리는 다른 지역의 국가들의 왕중왕과 의 관계의 형태에 관한 것보다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국가들의 왕중 왕과의 관계의 형태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있으며, 우리가 파르티아 시대에 이 사회의 다른 국가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도 이 지역의 도시 국가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리스적인 도시 국가들은(그 리스화되면서) 항상 형태상으로는 집정관과 민중이 있는 전형적인 그 리스 정치 구조를 가졌다. 이들 도시 국가들의 일부는 중세 유럽의 도시처럼 준봉건적인 형태로 그 지역의 군주에 예속되었으나, 그렇다 고 그것이 전정한 봉건제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도시의 관리와 시 의회 그리고 군주를 대리하는 관리가 공동으로 통치하는 그의의 도시 둘이 있었다―_방대한 영역을 다스리는 대귀족의 세력이 증가하면 서, 16 세기 독일의 일부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제도이다. 이러한 도시 이의에도 상당히 많은 다른 형태의 공국, 죽 한때 지배자들이 유태교 를 채택하였던 최북방에 있던 아디아빈 공국, 유태와 아랍 부족 국가 들(아랍의 부족 국가들 중에서 유명한 것은 히라 왕국이 있었음)과 그

의의 국가들이 있었다. 이러한 국가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존재하였다. 정치적으로 이웃하고 있던 비잔티움과 이란이 상이한 지배자의 지 배하에 있던 그리스와 접촉하였다는 점에서 메소포타미아 - 바빌로니 아에서의 이란의 지위는 중세 유럽의 이탈리아의 지위와 비슷하였다. 그리하여 메소포타미아는 중요한 봉건적인 발달을 찾을 만한 지역이 되지 못한다. 그 반면에 이 사회의 다론 지역에서 우리가 봉건화되었 던 사회에서 예상할 수 있는 시기에 또는 방식으로 민족 국가가 보다 분명히 발달한 것 같지는 않다. 민족 국가의 발달에 · 관한 증거보다는 봉토의 발달에 관한 증거가 더 희박하다. 중앙 유럽 또는 주의 중국에서와 같이 민족 국가로 발 전해 가는 경향을 가전 봉토에 관해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 이란 의 민족 국가들은 분명히 자연 환경적, 역사적 결정 요인으로부터 성 장한 국가들이며, 모순되기는 하지만 왕중왕을 종주로 인정한 것은 이들 국가들을 예속적인 지위로 전락시키게 되었고, 이는 아주 일반 적인 의미로 볼 때 이들 민족 국가를 봉토와 유사한 지위를 갖게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방금 살펴본 바와 같이 민족 국가가 예속적인 지위로 전락한 경우 의에 다른 예속적인 경우가 있다. 메소포타미아 의 도시들과 메소포타미아와 그의의 지역의 부족적인 제후국t r i bal pri nc ip al iti es 은 어떤 특수한 영토 보유 조건으로 민족 국가의 군주, 죽 왕중왕에 예속되어 있었다. 아케메네스 제국으로부터 본받은 제국 의 한 통치 수단이 되었던 7 가문의 구성원들도 역시 왕중왕에게 예속 되어 있었다. 그들의 토지 보유 조건은 민족 국가의 왕의 보유 조건 과 거의 같을 수 없었다. 7 가문 중의 하나인 수렌 Suren 가문에 관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은 그 가문의 토지가 아주 방대하여 군사적인 봉사를 할 경우에 그 가문은 일단의 군대를 제공하였다는 점이다. 왕 중왕 자신은 크라수스의 연락망에 대한 와해 작전을 수행하고 있을 동안 크라수스와의 카레 Carrhae 전투에서 승리를 한 군대는 바로 이

군대였다. 풀루타르크가 이 군대에 대해 서술한 것에 의하면 이 군대 는 봉건적인 군대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대봉신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군대는 소봉신과 일부는 아마 수렌 가문 자체의 사병과 소봉신의 사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기병이었다 . 1 8)

18) 〈 ……그는 히페이스 h ipp e i s, 펠라데스p ela t e s, 둘로스 doulos 를 모두 합하여 만여 명쯤 거느리고 있었다. 〉 (Crass , xxi. 6) 펠라데스는 거의 대부분 사회 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토지 소유 예속인, 죽 클리엔스 cl i ens 였다• 둘 로스는 정의하기 어렵다 . 노예는 믿을 수 있는 전사가 아니었기에 그 7} 노 예인 것 같지도 않다. 나는 둘로스는 언제나 개인적 노예였기 때문에 그들 이 개인적 봉사자 servan t s 였음에 들립없다는 견해를 취하였다. Cf. Per ri n 의 번역본 (Plu t arch ' s Liv e s, Loeb edn., London and New York, 1916, m, 37) 과 Dr yd en-Clough ( Pluta r ch's Liv e s : The Translati on Called Dr yd en's, New York, n. d. m, 22), 그러나 이들 중 어느 것도 확정적이지 않다. 그 군대는 아마 봉건제 이전의 형태 pre -fe u dal type였을 것이고, 그런 군대는 참된 봉건 군대로 대체될 필요가 없었다.

카레 전두는 미스라다테스 2 세가 죽은 지 34년 만에 일어났으며, 이 시기는 유럽과 일본의 예로 유추하면 진정한 봉건제의 제 1 단계에 해당한다. 수렌가의 토지는 봉건화의 초기 단계에 있던 봉건 영지로 생각하기에는 너무 광대한 토지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군대에서 봉건적인 주된 요소가 결핍된 것과 아울러 이 광대한 토지가 전정으 로 봉건적인 토지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것은 비잔틴 시 대에 대귀족 d yn a t o 의 토지로 발달하였던 로마 시대의 대 라티푼디움 과 유사한 것같이 보인다. 그것은 봉신제의 형태를 띤 가신제의 특칭 을 가졌고 수렌가의 토지도 유사한 특징을 가진 것같이 보인다. 그러 나 비잔틴의 경우에서 그러한 특칭은 전정으로 봉건적인 것이 아니 다. 형태상으로는 원봉건적이지만 결코 봉건화되지 못하였다. 왜냐하 면 비잔틴 국가의 구구조가 결코 붕괴되지 않았음으로 그 사회는 기 본적인 강력한 봉토가 발생할 수 있는 격렬한 전쟁에 휩쓸리지 않았 기 때문이다. 이란-메소포타미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 다(수렌가는 많은 토지롤 메소포타미아에 갖고 있었다). 부분적으로. 봉

건적인 기반 위에서 유지된 군대에 의해 보호되었을지라도 주로 관리 의 봉사에 의해 지배된 대토지는 그러한 유의 여건에서도 잔존할 수 있었다 •1 9 )

19) 그러한 토지가 근동 지역 전역에서 발생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는 무언가 있을지 모르며, 그것들은 이란 - 메소포타미아와 로마 제국의 동부 국경 지방 이 공통적으로 갖는 점들이다 . 만약 Jac qu e s P i renn 여 룹 믿을 수 있다면,처 ]6 왕조 이집트의 태수들도 역시 봉건적인 기반 위에서 예속인이 되었을 것이 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pp. 257- 2 61 ) 그 당시의 이집트는 봉건화 과 정을걷지 않았다.

상당수의 사소한 자료에서 이것이 확인되나 아르사세스 지배자하에 서 남아 있었던 관리들의 봉사 제도는 이를 더욱 분명히 해주고 있 다. 마르즈반은 적어도 대부분의 경우 아르사세스 제국하의 왕에 의 해 해임될 수 있었던 최고의 지방 관리였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볼로가시스 Volo g ases 2 세는 아디아빈 왕국을 마르즈반의 지배를 받는 주의 지위로 전락시켰고, 그러한 지위의 전락은 파르티아 시대 말기 인 기원후 1 세기 말에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일은 진정한 봉건 사회 에서는 발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공식적인 기록을 갖고 있는 사산조 시대의 계급 제도에서 제 3 계급인 부주르간 Vuzur g a n 은 제국의 고위 관리이자 행정의 우두머리였으나, 그 반면에 제 4 계급에 속하는 아자단 Azadhan, 죽 자유인 계급은 일단의 소관리였는데, 대개는 지 방의 소관리였다. 이러한 계층, 죽 부주르간과 마르즈반(마르즈반은 최고의 계급 샤르다란 Shahrdaran 에 속함)은 모두 디베란 d i bheran, 즉 관리들이었다. 아르다시르와 사푸르 1 세가 그 사회를 정복한 결과로 나타난 중앙 집권화 과정 속에서 그 제국에 봉사하는 디베란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정복자들이 그러한 봉사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관리로 만든 것은 아니다. 그 관리들은 분명히 토지를 정복 당한 대귀족들에게 봉사하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사실상 파르티아의 정체는 두 종류의 주된 단위, 죽 왕국 또는 제

후국 p r i n cip al ity과 귀족의 영 지로 구성되 어 있는 느슨한 연방 정체 임 에 틀림없는데, 이 왕국과 영지는 각각 두 개의 최고 계급인 샤르다 란과 바스푸란이 소유하고 있었다. 이 두 형태의 단위는 주로 관리들 의 봉사에 의해 지배되었으나, 그 영지의 주인은 봉건적인 기반에 기 초를 둔 군사적인 봉사를 행하는 예속인을 갖고 있었다. 샤르다란과 바스푸란은 그들의 주군인 아르사세스의 왕중왕 사이에서처럼 이런 토지 보유의 기초가 존재하였을지 모르나, 만약 그랬다면, 그 제도는 복잡한 상호간의 권리 의무와 전통적인 경칭을 사용하는 여건 때문에 애매모호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봉신들 은 전시에 왕중왕을 따르게 되어 있었고 때로는 실제 따랐다• 왕중왕 은 그의 예속인들이 반항적일 때 양(兩)계급에 속하는 그의 예속인 전부가 아니면, 분명히 샤르다란 계급의 예속인을 그와 똑같은 관계 에 있는 사람이나 또는 단순히 관리들로 대체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었는데, 전자는 봉건적인 사고와 일치하고 후자는 그렇지가 못하다. 이 권리는 아르사세스의 왕족둘이 그둘의 수중에 디수의 제후국을 차 지하게 하는 길을 열어 놓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한 왕족들의 수 중에 떨어전 것 중의 하나가 아르메니아였다. 왕중왕이 바스푸르 계 급을 유사한 방법으로 제거할 수 있었는지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으 나, 왕중왕이 그의 세력이 아주 강해졌을 때는 바스푸르의 토지의 일 부 또는 전부를 몰수하여 제국의 영지에 병합할 수 있었다.

20) 이것이 크리스텐슨이 찾아낸 이전의 왕과 제국의 왕 사이에서보다 대봉신 둘과 그들의 예속인들 사이에서 더 우선한다는 것의 실체라고 필자는 생각 한다(pp. 18-19). 그러한 모순은 진정한 봉건 사희의 발달의 초기 단계의 봉건 사회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이러한 정체의 전형적인 성격은 관리들과 대토지 귀족 사이의 관계 의 성격과 유사하다. 왕은 대마즈란 계층에서 그의 지위와 동등한 자 둘을 찾을 수 있었고, 바스푸르가 부주르그보다 서열이 우위에 있다 해도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권위

에 있어서는 서로 유사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통의 자유인 계층 인 아자드 azad 는 소향신이거나 또는 촌락의 우두머리였을지도 모른 다 . 2 1) 바스푸르는 그의 기능상 아직 왕밑에 있는 관리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토지 귀족으로서의 그의 지위는 아직 두드러진 정치적 특칭이었다. 무엇보다도 대관리로 항상 남아 있었던 부주르그는 아직 까지는 생활을 하기 위하여 토지롤 갖고 있어야 했다. 크리스텐슨은 여기서 아르메니아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를 소개하고 있다. 죽 아 르메니아에서 행정이라는 말은 지방 정부를 뜻하는 나카라루티운 na­ khararu t ' i un 과 봉토를 뜻하는 나하페투티운 naha p e t u t'i un 과 때로 혼 돈되고 있다 .2 2 ) 그 자료는 기원후 5 세기의 연대기이며, 그것은 분명히 그 시대에도 완전히 봉건화되지 않은 정체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 란-메소포타미아의 여타 지역에서 위에 언급한 지방 정부와 봉토라 는 용어의 혼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이 지역에서는 아르메니아 의 봉건화 정도보다도 덜 봉건화되었다.

21) 우두머리라는 뜻의 데칸은 그 자신이 소향신이거나 또는 촌락의 크기에 따 라서는 단순히 연장자인 농노였을지도 모른다. 이 불완전한 계급의 분류는 상당히 시사적이다 . 22) p. 22. 크리스텐슨의 5 세기에 관한 자료는 Moses of Chorene 의 Hi st o ry of Armen i a 이다.

이란-메소포타미아에서 봉건 정체가 결국 발생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집트의 리비아 또는 굽타 왕조 이후의 인도에서처럼 압도적인 이방 세력의 개입으로 인해 사건이 완전히 디른- 방향으로 전환되었기 때문 은 아니다. 죽 역사의 발전 과정이 단축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아마 역사 발전이 후퇴하여 우회적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진단은 입증되지 않았으나,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란­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지속적으로 수행되고 있었던 상업의 열기는 구제도의 최종적인 붕괴를 아주 오랫동안 천연시키는 데 기여하였으 므로 구제도의 붕괴는 실제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봉건 국가에서

상업의 성장의 결과에 대한 연구는 상업과 구제도 사이의 필연적인 상반성을 보여주지 않으나, 성행하는 상업은 정치 단위의 크기를 증 대시켰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대정치 단위는 정확히 우리가 이 란에서 보았던 단위이다(우리가 초기 봉건 시대에 기대할 수 있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큰 단위). 이러한 정치 단위의 수장은 상업에서 얻 은 부로 대정치 단위를 통합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부와 군사력을 유 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새로이 획득한 부로 대영토를 새롭게 건설 하는 것보다는 이미 존재하고 있던 상당히 광범위한 영토를 통합, 유 지하는 것이 아마 더 쉬울 것이며, 만약 봉건제와 잘 발달된 상업 사 이에 상반성이 없다면, 잘 발달된 상업과 관료제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 그래서 파르티아 시대의 이란의 정체는 유럽과 일본의 후기 봉건 시대의 정체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으나, 아주 유사한 것은 아니다. 이란의 정체는 아마도 덜 봉건적이며 훨씬 더 관료적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산인에 의한 이란의 정복은 유럽과 일본에서의 강력한 국가의 성립과 유사하나, 이란의 정복은 유럽과 일본에서 일어난 변 화보다도 훨씬 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군주와 귀족의 대립이 끝났 울 때 유럽에서는 대개 정부의 봉건 구조의 상당한 부분이 소멸되었 다. 이란에서는 대부분의 봉건적인 발달이 아르다시르, 사푸르 1 세 그 리고 그들의 두 후계자에 의한 새로운 통일 정부가 건설되면서 소멸 되었다. 크리스텐슨은 대다수의 기사들은 아르사세스의 지배하에서처 럼, 바스푸르에 예속된 것이 아니라, 제국의 황제에게 예속된 성주(城 主)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상 사산 제국의 지배하에서 바스 푸르는 전쟁에서 그들의 신민들의 군대를 지휘하였다. 아주 찰 지켜 • 지는 관습을 폐지하는 것은 어렵고 또한 그렇게 할 만한 가치가 없 다. 그러나 그들의 군대는 잘 조직되지 못한 농민들이었고 형편 없는 군대였다• 왜냐하면 바스푸르는 그들의 유일한 예속인의 군대를 상실

하였기 때문이다 . 23 ) 군대에 그러한 요소가 있었다는 것을 두고 봉건적 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 농민들이 그들의 주군으로부 터 진정한 봉건 토지 보유제로 토지롤 보유하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 다. 유럽에서 이에 상응하던 시대에 일어났던 것처럼 실제의 군대는 용병군이었다 . 단순히 한 민족 국가의 정복이 아니라 여러 민족 국가의 정복이었 던 사산인의 정복은 새로운 제국 정부에 민족 감정이라는 문제를 제 기하였다. 그 제국 정부가 이 문제를 성공적으로 다루었다는 것은 의 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 이후에 일어난 여러 문제들 중에서 이 문제로 발생한 혼란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혼란은 있기는 했으나, 그 혼란은 민족적인 분리주의와는 아무런 관 계가 없었다. 사산 왕조는 그들의 인척을 각 민족 국가들의 왕좌에 앉히는 아르사세스의 정책을 발달시키고 변형시켰다. 이 정책은 아르 사세스 왕조하에서는 왕자의 세습적인 왕위 계승을 유발하였지만, 사 산 왕조는 전정한 왕자들의 영 지 제도 ap pa nage s y s t em 에 목적을 두 어, 특히 황제의 관을 받는 세자는 중요한 민족 국가의 왕좌를 받았 다. 아마 여타의 왕관은 세자가 아닌 사산의 왕자에게 주어졌으나 , 2 4 ) 모든 민족 국가의 왕관이 이 제도에 의해 주어진 것은 아니다. 아마 너무 많은 민족 국가가 있어 그 제도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산 왕조는 다른 민족 국가의 왕실의 인물들을 잘 통제하였던 것 같 다. 행정적인 중앙 집권화와 더불어 이 정책은 물론 민족 감정의 성 장울 방해하였고, 심지어는 민족 감정의 성장 자체를 저지하였을지

23) L'Iran sous /es Sasanid e s, p. 2 59. 24) 기원전 1 세기 그리고 기원후 1 세기의 얼마 동안에는 남동 지방 이란의 사 카 - 팔라바 Saca-Pahlava 연방과 인더스 강 계곡에서는 가장 중요한 왕위를 매번 새로이 계승할 때마다 로데이션하는 제도가 있었다 (Debevo i se , pp. 63- 69). 그러한 생각이 사카족과 더불어 초원 지방에서 왔는지 아니면 이란인 둘의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그 제도는 사산 왕조가 채택하 였던 것과 똑갇은 제도이다.

도 모른다. 우리는 중앙 집권화에 대해 상세하게 알지 못하나, 중앙 집권화되었다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며, 영구히 유지된 정책이었다. 그 러나 중앙 집권화와 왕실의 통제로 이란에서 민족 감정의 발로의 혼 적이 결여되었다고 할 수 없다. 민족 감정이 봉건 사회에서 발달하였 던 것처럼 이란에서 강력하게 발달하지 않았다면 사산 왕조의 정복은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위에서 규정하였다. 마찬가지로 봉건 사회에서 발생하였던 민족 국가들-과 같이 만약 그 민족 국가들이 강 력하고 결집력 있는 내집단으로 발달하였다면 사산 제국의 중앙 집권 화와 그의 예속적인 군주들의 통제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사산 제국의 혼란은 민족 국가들의 대립에서 발생한 것은 아니다. 봉건 사회의 민족 국가간의 대립은 거의 없었으며, 이 점에서 볼 때 이란은 비봉건적인 사회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사산 제국이 실제 로 가졌던 문제는 반항적인 귀족들이었으며, 이 귀족들과 더불어, 사 산 제국 자체 내에서 왕조 대립이 발생하였다. 그 귀족들은· 더 이상 지방의 독립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궁중에 몰려와서 제국의 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사산인들의 정복의 결 과로서, 이란의 정치에 있어서, 지방의 분리주의는 중앙에 있는 파당 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이런 변화가 완전하게 발생하였다는 것은 그 새로운 체제의 괄목할 만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다른 특칭은 그 새 로운 파당이 지속적이고 격렬하였다는 점이다. 사산조는 사실상 황제 의 관을 가진다는 점에서 안전하였지만, 사산조의 어느 누구도 안전 하지는 못하였다. 사실상 그들은 그들의 침대에서 죽은 경우는 거의 드물고 전쟁에서 죽는 것보다는 사지가 철단되거나 암살당하는 것이 더 보편적이었다. 수세기 동안(사산 제국이 존속한 거의 心]]기 모든 기간 동안) 귀족들은 골칫덩어리, 아니 골칫덩어리 이상이었다. 왜냐 하면 그들이 실제로 통치하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사산조의 이란은 이전의 왕국의 지배 계급이었던 봉건 귀족 계급

의 부담을 안고 있었던 봉건제 이후의 국가와 어느 정도 홉사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봉건제 시기를 거친 민족 국가도 이란이 경험하였던 것과 같은 정도의 귀족과 왕조의 파당으로 곤욕을 치르지 않았다. 이 점에 있어서 사산조의 이란은 봉건제를 채택하지 않고서도 제국을 부 활시킨 다른 사회와는 비교될 수 없다. 왜냐하면 중국의 당, 비잔티 움, 제 12 왕조의 이집트의 경우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그러한 사회들은 놀랍게도 사산 왕조가 이란을 정복함으로써 끝맺은 지방 분 리주의의 곤욕을 치렀기 때문이다. 사산 제국은 그 자체가 독특한 사 회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이란-메소포타미아의 역사가 다른 국가와 같이 분류될 수 없는 국가로 발전되었다는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발전 자체가 아주 이색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란_메 소포타미아가 속할 수 있는 일단의 사회의 유형을 찾으려고 할 필요 논 없다. 봉건화된 사회와 봉건화되지 않은 사회 사이의 중간에 위치 한 그러한 유의 사회는 없다. 이란-메소포타미아가 입은 영향과 거의 유사한 영향을 경험한 또 다른 사회인 러시아는 아주· 다르게 발전하 였다. 이란五北]소포타미아의 특수한 발전은 이방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일 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발전은 많은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하 더라도 얼마간은 분명히 이방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전 것이다. 아케 메네스 제국이 분해되고 메소포타미아 문화가 거의 완전하게 소멸되 어 갔을 때, 메소포타미아가 중심이 되어 왔던 상업도 역시 침잠하였 다. 사실상 상업은 거의 전무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가 침체되면서 그리스가 성장하였다. 그리스 성장의 정치적 결과인 셀레우코스 제국은 메소포타미아와 이란의 정치 발전에 단순히 일시 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리스의 심미적, 정치적 문화는 메소포 타미아를 압도하였다. 메소포타미아의 도시의 대부분은 그리스적인

도시로 되었고, 그리스의 원거리 상업의 전전 기지를 형성하였다. 그 러한 상업이 파르티아와 사산조 시대의 전 시기 동안 번성하였고 그 지역의 역사 발전 과정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부의 근원을 이란에게 주었다. 한 사회의 역사 발전 과정이 다른 사회의 상업의 침투로 크게 영향 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유익한 일이다. 우리는 비정 상적인 역사를 가진 또 다른 사회인 러시아도 역시 러시아 의부로부 터 상업이 둘어옴으로써 일찍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다음 장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9 러시아와 비잔틴 위의 4, 5 장에서 통일된 옛 로마 제국이 붕괴한 후 비잔틴에서 제 국이 부활된 것과 봉건 제도둘이 이 변화의 과정에서 발생하지 않았 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 시기는 봉건적인 처방이 필요할 만큼 분열 된 과도기는 아니었다. 또한 러시아와 비잔틴에 대한 관계에도 관심 울 기울였으나, 그 관계 자체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정도에 지나지 않 았다. 러시아와 후기 비잔틴에서의 제도의 발달, 러시아와 비잔틴의 발달의 연관성 그리고 러시아와 후기 비잔틴이 봉건적인 상황으로 접 근한 것들은 연구 과제로 남겨두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이 장에서 특 별히 취급하려고 남겨두었던 것은 이 문제들이 아주 특이한 문제들이 기 때문이며, 이 이유 때문에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역사에서 러 시아와 비잔틴의 위치에 대한 명확한 성격 규정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 비잔틴은 로마 제국의 핵심적인 두 지역 중의 하나였다. 비잔틴은 이 두 지역 중에서 보다 오래되었고, 그리스-로마 사회에서의 최초의 그리고 최대의 문화 중심지 중의 하나였다. 남부 러시아는 로마 제국 외곽의 국경 지역에 있었으며, 초원이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다. 그의 의 러시아 지역은 단순히 로마의 외곽 지역이며, 대체로 그리스-로마 의 우수한 문화가 침투할 수 있었던 지역이었다. 러시아의 주민은 그 수가 아마 적었을 것이며, 비잔틴뿐만 아니라 초원 지대로부터 그리

고 그 너머 아시아로부터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어 있었다. 그리스­ 로마 문화가 일반적으로 쇠퇴하고 로마 제국이 붕괴하게 되었을 때, 남부 러시아와 바잔틴은 각각 독일이나 이탈리아와 똑같은 역사적 위 치에 놓여 있었는데, 문화가 다시 회복되어 가면서 또는 회복되었을 때 전자는 문명화된 지역에 문화적으로 완전히 흡수되는 바바리안 지 역이었으며, 후자는 문명화된 지역의 중심 지역으로 문화가 곧 다시 회복될 때 그 회복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지역이었다. 또 다 론 두 개의 여건이 러시아와 비잔틴의 위치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여건이란, 하나는 그리스-로마의 사회가 단순하고 단일한 사회가 아니라, 로마와 그리스라는 두 개의 사회로 나누어져 있었다는 사실 이고, 다른 하나는 적어도 두 개의 뚜렷한 문화가 그리스-로마 세계 의 동부 지역에서 번성하였고, 이 문화들이 그리스-로마 세계의 문화 에 병합되어 가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있었던 이러한 다양한 여건 때문에 러시아와 비잔틴의 운 명이 결정되었다. 구사회의 다른 극에 있었던 이탈리아와 달리 비잔 틴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고도의 문화를 다시 회복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독일이 서유럽에서 행하였 던 역할과 같은 것을 해내지 못하였다. 죽 러시아는 문명화된 지역으 로 완전히 편입되지 못하였다. 아래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상업 부분 을 제의하고는 러시아의 문화는 아주 단순한 채로 남아 있었으나, 비 잔틴의 문화는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두 지역간 에 문화적 장벽이 생긴 것같이 보인다.” 그리스와 로마의 차이는 그 리스-로마 문화와 로마 제국이 붕괴하게 되면서 점점더 극복될 수 I) 이 장벽은 비잔틴 문화의 복잡성과 급속한 발전에 기인한다기보다는 러시 아 문화의 단순성에 기인하는 것 같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유추 할 수 있다. 죽 중국과 일본 사이에는 그러한 효과적인 장벽이 없었다. 일본 이 러시아보다는 효과적으로 발달하였지만, 당나라때의 중국이 비잔틴보다 도 더 발전하였다고 입증하기는 어렵다.

없는 요소가 되었다. 마치 옛날의 고도로 발달된 문화는 결국 그 문 화의 명성지였던 그리스에만 잔존하게 되고 여타의 지역에서는 거의 소멸되는 위기를 맞은것 같았다. 그 결과 로마 제국의 동부와 서부 는 차이가 나게 되고, 계속하여 분리되어 갔다• 로마 제국의 동부와 서부의 연관성이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고, 두 문화는 중요한 요소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었기는 하지만, 이 두 문화는 실제 상당히 분리되 어 있었다. 이 두 문화는 실제 완전히 분리되어 다른 문화적인 실체 룰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잔틴-러시아는 서쪽에 아주 위험한 적 이 존재하는 꼴이 되었다. 그리고 비잔틴-러시아의 동쪽에도 역시 위 험한 적이 있었다. 수세기 동안 이 적은 사산조 이란이었으며, 7 세기 부터는 이란, 이집트 그리고 비잔틴 세계의 동쪽 지역을 정복한 모슬 렘이 위험한 적이 되었다• 비잔틴은 급속한 회복으로 그의 동, 서쪽에 있던 이웃들보다는 더 나은 입지를 가졌으나, 러시아는 동, 서쪽의 정 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이들 세력권의 위 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둘이 세력을 확장하였을 때, 러시아는 이들의 위협에 실제로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고, 비잔틴도 그들을 분명히 막아낼 수 없었다. 로마 제국이 붕괴하는 동안에 러시아에서의 민족 이동은 독일에서 의 민족 이동보다도 더 방대하였다. 이는 아마 러시아에는 초원이 깊 숙히 깔려 있었다는 점과, 모든 초원 지대 문화의 핵심이었던 기동성 때문일 것이다. 러시아는 비잔틴 지역으로 쇄도한 많은 바바리안의 직접적인 전원지였으며, 실제로 더 서쪽으로 이동하여 마침내 이탈리 아와 스페인에 정착하였던 고트족의 전원지였다 . 그러나 고트족은 발 칸 반도에서처럼 러시아에서도 단지 일시적으로 정주하였을 뿐이다. 러시아의 주요 정치 발전 과정에서 최초의 중요한 정치 형태를 만들 었다고 하는 바랑지안족도 고트족처럼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왔다. 바랑지안족은 대단치는 않지만 비잔틴에서도 어떤 역할을 하였다. 불

가족은 여러 방면에서 러시아로 들어오기는 하였지만, 이 시기에는 초원 지방에서 들어왔다. 그들은 러시아에서는 분열하였는데, 한 무리 는 볼가강 상류 지방에 정착하였고, 이들이 훨씬 뒤에 러시아 역사에 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타타르족의 선구자였다. 다른 한 무리는 발칸 반도로 들어갔으며, 거기서 그들은 중요한 공헌을 하였으나, 인 종적으로, 언어적으로 슬라브화하였다.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주된 인 종 기반이 된 슬라브족은 오늘날의 폴란드에서 그리고 초원 지방의 북부인 러시아 남서쪽의 끝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거기서부터 5 세 기와 8 세기 사이에 그들은 다른 유럽 지역은 물론 대부분의 러시아와 발칸 반도로 이동하여, 그들이 차지하였던 모든 지역의 인종적인 특 칭을 극도로 변화시켰다. 러시아와 발칸 반도가 갖고 있던 공통적인 바바리안 요소, 특히 슬 라브족은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두 지역과 일찍부터 밀집한 관계 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만약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 였던 것처럼 비잔틴 제국이 몰락하였다면, 봉건 질서가 처음에는 발 칸 반도에서 그 다음에 러시아에서 발달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제국의 영역 내에서 그리고 그 이후 제국을 지나 동, 서쪽으로 그들이 이동한 지역 내에서, 슬라브족과 불가족의 전사단에 서 서유럽의 모델을 따른 봉건 관계가 성장하였을 것이라고 상상하기 는 어렵지 않다. 그러한 여건하에서는 러시아와 비잔틴 사이에는 아 무런 장벽이 발생할 수 없었다. 문화적인 국경선은 토인비가 말하는 리멘 lim en, 즉 문턱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며, 아마 그 문턱은 이동될 수 있으므로 고도로 발달한 문화가 확장되면서 그 국경선은 밖으로 이동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바와 마찬가지로 구제국의 동부의 중심지는 서부의 중심지와 같이 결코 해체되지는 않았다. 그 반대로 구제국의 동부의 중심지는 6, 7 세기에 확고하게 회복하였고, 그리하여 비잔틴 제국이 그 형태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이전에도

심한 차이룰 보여왔던 비잔틴 제국과 러시아의 문화 수준의 차이는 더욱더 심화되었다. 문화가 쉽게 이전될 수 있었던 장벽인 문턱은 존 재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대신에 문화의 이전을 어렵게 하는· 장벽이 존재하게 되었다. 비잔틴 - 발칸 지역에서는 부활된 국가(비잔틴과 불 가의 두 국가)는 봉건적인 경향을 재빨리 눌렀으며, 그리하여 봉건적 인 경향이 러시아로 파급될 수 없었다. 반면에 발칸 반도에서의 발달 과는 무관하게 성장하고 있었던 봉건적인 경향도 비잔턴에서 들어온 아주 다론 영향, 죽 본질적으로 경제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방금 언급했던 것처럼 비잔틴의 부활은 구제국과 구별되는 비잔틴 제국이 출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당시에 뎀 t hem (1/~]가 형성되 었고, 이 제도로 다른 곳에서는 봉건제의 발생으로 해결되었던 문제 가 비봉건적인 방식으로 해결되어 제국의 관료제의 지배하에 있는 강 력한 군사 구조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황을 너무 단순화한 것이다. 이 새로운 체제와 병행하여 디나토이, 죽 대지 주들이 계속 존재하였으며 그들은 새로운 체제와 공서 관계에 놓여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이 일시적으로 눈에 띄지 않았다 하더라 도, 그들이 몰락한 것은 아니다. 위기에 처했던 제국이 디나토이 대신 에 디나토이가 행사하였던 지방적인 리더쉽울 쉽게 행사하였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존재는 템제도에 항상 위협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제국의 군대를 그들의 지휘하에 두려 고 끊임없이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잔틴 제국은 이원 구조 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비잔틴 제국은 새로운 성장을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제국의 붕괴가 일시 중지되었으나, 붕괴의 길로 회귀할 수 있는 구제국의 성격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이러한 설명은 단지 상칭적인 설명만이 아니다. 그것은 비잔틴 제국의 전정 한 성격에 근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비잔틴 제국이 이원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한다면, 러

시아도 역시 이원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로마 제국이 붕괴하면서 로마 제국의 변두리에 있던 혼란된 지역들이 가전 성격을 러시아도 아직 가지고 있었다. 즉 변방에 있던 바바리안은 그들이 의존하고 있 던 로마 제국의 경제 제도가 붕괴하면서 그들의 존재 양식이 위협받 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새로운 존재 양식을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구제국의 고도로 발달된 문화를 더 많이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 러나 곧 신생 러시아가 성장하였으며, 러시아는 고도의 문화를 받아 들이는 데 장벽이 된 국경선 너머에 있었지만, 부활하고 있던 비잔틴 제국이 급속히 이룬 새로운 경제 제도에 확고하게 밀착되었다• 이러 한 후자의 성격을 가전 러시아가 전자의 성격을 가전 러시아를 압도 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전자의 성격의 러시아는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래서 전자의 성격이 신생 러시아가 봉건적으로 될 수 있는 국가 의 제 특성의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를 제공하였다. 분명히 러시아는 소위 드루지나 druzh i na 러는 바바리안적인 전사단을 갖고 있었다. 차 드윅의 듀턴족의 종사 제도에 대한 성격 규정은 러시아 초기의 드루 지나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수세기 동안 드루지나는 사실상 게 르만의 종사 제도와 같은 제도로 유지되고 있었다. 물론 드루지나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유래하였으며, 어느 모로 보나 게르만의 것과 같은 기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신홍하는 비잔틴 제국과 경제적인 유대 관 계를 갖고 있던 러시아에서 본다면, 드루지나는 정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지위로 발달할 수 없는 어떤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 시기에 러 시아가 봉건화될 수 없었던 주된 이유는 비잔틴과의 중요한 교역 때 문이었다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교역의 영향으로 직접적으 로는 드루지나 계층 내에서 관계 변화가 일어났고, 간접적으로는 강 력한 도시들이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비잔틴의 성장과 기이한 러 시아 역사의 성격 사이에는 중요한 인과 법칙이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한정적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하지만, 어느 것도 일반적인 사실에 크게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의 강들이 상인들에게 이상적인 교역망을 제공하였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인정되 는 사실이다. 이 강들은 초원 지대와 그 너머에 있는 지역을 왕래하 는 상인들에 의해 고속 도로망갈이 이용되었고, 얼마 뒤에는 비잔틴 에서 러시아의 모피와 꿀을 샀던 상인둘은 물론이고 누_l:I T 쿠 亡를 거 쳐 북서 유럽을 왕래하였던 상인들도 이 강들을 이용하였다• 원시 농 경인은 상인이 아니었지만 러시아의 형성 초기에 영향을 끼쳤던 카자 르 Chazars, 쿠만 Cuman 족과 같은 초원 민족은 전문적 인 상인들이 었 다. 그러나 슬라브계의 키에프 러시아가 8, 9 세기에 나타나면서 슬라 브계의 키에프 러시아의 경제, 사회, 정치 제도는 비잔틴의 경제적 필 요성 때문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2 ) 한때 무역은 봉건화에 장애 요소가 된다는 원리가 있었으나, 그 원 리는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상업의 중심지였던 비잔틴은 러 시아, 이란 그리고 소아시아에 영향력을 미쳤고, 그 영향이 위의 세 경우에 있어서 다르기는 하지만 위의 세 경우에 모두 있었던 봉건적 인 경향을 똑같이 억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것은 이 책의 서론 에서 언급하였다.” 그 다음에 이란에서는 상업이 이란에서 봉건적인 발달을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상업이 번 창한다 해서 항상 동일한 정도의 반(反)봉건적인 경향이 생긴다고 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상업은 이미 제시된 것처럼 직, 간접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직접적 영향으로는, 러시아는 상업 으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는 점이다. 상업을 행한 러시아인들 중에는 드루지나롤 거느린 제후pri nces 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그둘은 2) G. Vemadsky, Kie v an Russia ( New Haven, 1948), pp. 118 - 121 과 Szeft el, 위 p . 168 를 참조. 3) 위 p. 38. 4) 위 pp. 489-491, 492-495.

그들의 충실한 추종자들에게 보수를 주거나 또는 그들을 상업적인 이 익에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봉 토를 제공할 필요가 없었고, 그 귀족들이 토지에 관심울 기울였을 때 는 ―― 항상 그렇지는 않았지만-그들은 그 토지를 경영하기 위하여 보야르 bo y ars 와 그 귀족의 드루지나의 우두머 리 인 무지 muzh i를 유급 관리로 고용하였다. 만약 그러한 관리들 자신들이 대토지를 소유하였 다 해도 一 _ 그런 경우는· 흔하지 않았지만 - 그 토지는 그들의 주군 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하지만 후에 토지와 개인적인 종속 관 계가 엄격히 분리되는 원리는 분명히 만들어지지 않았다. 상업이 간접적으로 봉건화를 억제하는 데에 그리고 도시의 성장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훨씬 전에 있었던 그리스 도시들의 성장과 같이 러시아에서도 같은 과정을 밟았다. 러시아의 제후들은 도시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으며, 도시 정부에 있어서 그들의 중요성은 도시마다, 그리고 아마 시대마다 다양하였을 것이다. 키에프 시대에 제후들의 세력이 얼마나 컸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베르나드스키 Vernadsk y는 〈 정치적으로 도시 국가가 기본 패턴이다〉 5 ) 라고 주장하고 있다. 제후들은 그리스의 왕들의 지위가 하락했던 것 처럼 그들의 지위가 분명히 하락하지 않았으나, 러시아는 그 초기에 (또는 그 이후로) 세계의 중심적인 상업에서 그리스만큼 큰 역할도 하지 못하였다 .6) 그렇다고 하더라도, 러시아의 초기의 가장 중요한 도 시인 최북단에 있었던 누티 7 근亡는 실제로 상업적인, 과두적인 공화 국이었으며, 그 제후는 오랫동안 그 도시에서 토지롤 갖고 있지 않았 으며, 계약에 의해 그 도시와 결속되어 있었다. 때로는 그 제후는 외 지인으로, 다른 도시의 제후였다.” 새로운 혼란으로, 제후들은 그들 5) Kie v an Russia , p. 2 12. 6) 문명화된 사회의 역사의 초기 단계에서 도시가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성장 하는 것이 항상 상업의 필요에 기인하는지를 질문해 보는 것도 좋다. 위 pp. 346-3 48 와 아래 pp. 543-5 5 여문 참조.

사이에서 때로 순위 제도 ro t a s y s t em 라고 불리는 , 권력을 승계하는 제도를 발달시켰다. 그리하여 류릭 R i ur i k7 t의 전 구성원들은 나이순 에 따라 러시아의 도시를 지배하였는데, 키에프시가 제일 중요한 직 위였고, 다른 도시들은 다음으로 중요한 직위였다. 그리하여 매 제후 가 죽을 때마다 그 생존자 중에서 도시 군주들의 전반적인 순위 바꿈 이 있었다. 오랫동안 그 군주들 전부는 공동의 조상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들의 관계는 분명히 키에프 러시아를 통합, 유지시 키는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그 순위 제도는 그 제도가 뜻하는 대로 정확하게 운영되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고, 그 제도는 제후들 상호간 의 전쟁을 결코 방지하지 못하였으나, 대체로 12 세기의 어느 시점까 지 키에프의 결속을 유지시키는 데 공헌하였으며, 그때까지 정치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 8 ) 키에프 체제는 역사적으로 이례적인 것이다. 미르스키 M i rsk y는 키 에프 체제는 사실상 무에서 발생하였으며, 〈 러시아 이전의 슬라브족 에 그 뿌리를 갖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북게르만의 전통에서 그 뿌리를 갖는 것도 아니다 〉 라고 말하고 있다. 〈 그것은 하나의 시작으 로 간주될 수 있다.〉 9) 키에프 체제는 일찍부터 봉건화의 길에서 이탈 하였다. 사실 부족제가 완전히 붕괴되기 전에 키에프는· 봉건화의 길 에서 이탈하였다. 왜냐하면 슬라브족의 거주지였거나 혹은 슬라브족 이 오래전부터 정착하였던 곳인 서쪽에서는 도시가 처음으로 건설되 고 있는 동안에도 부족제가 계속하여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 자는 순위 제도의 발달은 비봉건적인 어떤 형태인 부족제에서 발달하 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다른 제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비잔틴의 영 향을 막을 수 있는 장치였기 때문에 이 제도는 통일을 유지하기 위 7) 네덜란드의 영지들이 Oran g e - Nassau7}와 연계된 것을 참조. 8) Vemadsky, Kiev an Russia , pp. 179-181 를 참조. 9) Russia : A Soc ial Hi st o ry( L ondon, 1931 ), p. 34.

한 주된 고안으로 생각된다. 물론 드루지나 제도가 있었다는 것은 어 떤 지역, 아마 동부의 지역에서 대혼란이 있었던 영웅 시대가 존재하 였던 것을 의미하나, 도시의 성장은 질서를 확립하는 수단으로서 드 루지나 제도를 대신하였기 때문에 강력한 도시들의 성장은 봉건화되 는 과정을 방해하였다. 드루지나 제도에는 분명히 개인적인 봉신제가 있었으나, 러시아에서는 굳이 이 제도를 원용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 하면 이 종속제는 무너져가는 정부를 지탱하기 위해 종종 사용되었으 나, 키에프 러시아에서는 당시 그러한 정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 므로 개인적인 종속제는 정치적으로 그 기능이 확대되지 않는 군사적 인 관계로 머물러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원(原)봉건적인 체제가 전 혀 없었고, 그 단계에 이르기 전에 봉건화 과정이 중지되었다. 그리하여 키에프 러시아는 항상 비정상적인 이원적인 성격을 가지 고 있었다. 주로 그 지역은 비잔틴의 국경선 너머에 있었으며 비잔틴 과는 상업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다-상업은 항상 여러 관계 중에서 가장 피상적인 관계였다. 그러나 키에프 역사의 중반기에 키에프 러 시아가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중요하 지는 않지만 또 다론 유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사실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한 시기는 아주 늦었다. 그리고 기독교가 러시아에 자 리잡았을 때도 기독교적인 감정은 아주 느린 속도로 유입되었다. 키 에프 국가 시대에 기독교가 대중들 혹은 대다수의 정치 지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기독교는 대체로 형식적이 고 명목적인 상태였고 상급 성직자들은 여전히 그리스인들이 주종이 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낯설은 종교였다 .10) 비잔틴의 정치적 영향력을 기독교를 통해 행사하기에는 키에프 러시아의 기독교는 아직 적절한 제도가 못 되었다. 그러나 키에프 시대에 의형적이며 의식(儀式)적인 기독교가 서서히 들어왔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IO) P. Mi liuk ov, Ou tlin e s of Russia n Cultur e, I (Ph ilad elph ia, 1942), pp. 7-I L

동, 서쪽에 인접하고 있던 유럽과 이슬람이 이들 두 국가에 가한 맹렬한 공격 때문에 러시아와 비잔틴의 역사는 갑작스럽게 새로운 방 향으로 전환되었다 . 그러나 비잔틴과 러시아가 붕괴의 과정을 걷기 전까지는 그러한 공격은 심각하지 않았고, 실제 그 공격은 시작되지 도 않았다. 그 공격은 붕괴 과정의 결과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지 만 단언을 내리기에는 불확실한 것이 너무 많다. 러시아와 비잔틴의 이웃들이 세력을 성장시키고 확장하였다는 사실 은 붕괴 과정의 결과일 수도 있다-물론 정반대의 가능성을 배제하 지는 않지만. 서쪽으로부터는 십자군이 비잔틴을 공격하였다. 리두아 니아, 폴란드인 그리고 후에는 독일인들(이들 중의 일부는 분명히 십 자군이었다)이 러시아를 공격하였다. 동쪽으로부터는 타타르족이 러 시아를 유린하였고, 터키족이 비잔틴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었다. 최 초의 이러한 공격은 12 세기에 시작되었고, 이 공격의 결과는 15 세기 에 완연히 드러났다. 그들은 비잔틴-러시아의 관계가 가장 약했을 때, 죽 다른 여건하에서였다면 아마 그 공격으로 완전히 패망하여 두 민족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되었을지도 모를 시기에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다른 길을 걷지는 않았다. 러시아와 비잔틴은 거 의 패망하였으며, 비잔틴은 마침내 오스만 터키의 지배하에 거의 빈 사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살아남을 수 있었던 러시아, 죽 무스코비 muscov y는 구러시아가 결코 알지 못하였던 비잔틴의 전통을 배우고 그리고 그것을 고수하였다. 이미 〈 모스코가 제 3 의 로마 Moscow , the Thir d Rome 〉가 되었다는 사실은 설명되었다. 러시아와 비잔틴이 거 의 패망한 상태에서 소위 봉건적이라는 제도가 발달하였다. 그러나 양국가에서는 그들이 동, 서에서 압력을 받기 이전부터 내 부 분열이 시작되었다. 비잔틴의 분열의 원인은 비밀에 싸여 있다. 분 명히 비잔틴 정체의 이원적인 성격이 그 분열과 연관되어 있었다. 바 실 2 세 (976 - 1025)1“ 가 11 세기 초에 불가리아를 전복시킨 것도 역시

11) 이 사건은 제국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 사건이라고 토인비는 생각한다. 그 러나 이 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는 여기에서 개전된 것과는 다르며, 정기적 으로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의 한 예로서 개전된 것인데, 원문의 견해는 그 렇지 않다 (A Stu d y of Hi st o r y, N, 371-404 를 참조).

그 분열과 연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좀더 넓게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러시아가 비잔틴과 불가리아를 모두 정복 하려고 했기 때문에 비잔틴 제국과 불가리아 간국(干國) 사이의 대립 은 l 안 1] 기에 복잡하게 되었고, 바실이 불가리아를 전복시킴으로써 러시 아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려는 마지막 시도도 좌절시켰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최대의 공격은 앞의 바실의 선황제(先皇帝)였던 존 티미 세스(Jo hn Tzim i sc es, 969-976) 에 의해 저지되었던 스비아토스라프 Sv i a t oslav 의 공격이었다. 황제 존 티미세스와 바실 2 세는 사실상 바 바리안의 문제, 죽 러시아와 불가리아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할 수 있 다 .12) 그 결과 11 세기 중엽의 제국은 그 이전보다 더 세력이 강대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제국의 내부 제도에 변화가 시작되었던 한 이 유일 것이다. 불가리아인들이 분쟁을 일으켰을 때 디나토이들은 더욱 충성을 하지 않았고, 바실은 유스티니아누스처럼 격렬하게 그들을 공 격하였다. 그러나 바실 이후의 새로운 시대에 황제들은 그들을 관용 하였고, 심지어는 그들을 고무시키기까지도 하였다. 반면에 약 2 세기 이상 동안 뎀제의 구조는 대변화를 겪어 농민군제가 무너지게 되었 다. 그래서 6, 7 세기에 다시 나타나게 된 비잔틴 제국은 그때부터 11 세기까지 역경에 처해서 그 역경을 극복한 것같이 보이나, 성공을 거 두었을 때는 새로운 도전에 대응을 할 수 없었다 .13) 이보다 좀 후에 일어난 사건들은 이러한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 같다. 그러나 만약 이 주장이 옳다고 해도, 완전할 수는 없기 때문에 해결 되어야 할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다.

12) 러시아는 제 Zoe 황제 시대에 다시 콘스탄티노풀울 공격하였으나(1 043 년 경 ), 이 공격은 그후의 일이다. 13) 토인비의 〈압력의 자극 stim ulus of p ressures 〉의 원리를 참조( II, 112, 207).

키에프 러시아가 몰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비슷한 미스 테리가 없다. 그 몰락은 아마 동쪽에서 페치네그 Pechne g s 족의 침입으 로 시작되었으나 그 침입은 비잔틴과의 교역이 단철되었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이 단절은 십자군 원정의 결과 지중 해에서의 상업적, 정치적 관계에 있어 세속적인 변화가 일어났기 때 문이다. 그 이후로 그 관계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되었다. 이 과정 은 러시아가 동, 서쪽에서의 대침략에 대응하여야 할 무렵인 13 세기 에 끝이 났다. 비잔틴은 12 세기 후반에 동쪽에서 셀주크의 침입에 대 응하여야 했고, 13 세기 초 제 4 차 십자군 원정에서 서유럽은 비잔틴에 치명타를가했다. 러시아의 역사는 이 시점에서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 다 . 사실은 키에프의 정체가 발홍할 때와 같이 전정한 새로운 시작이었 다. 러시아의 역사는 여러 번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는(이중에서 몇 개 는 잘못 시작되었다) 사실은 러시아 역사에 대해 시사해 주는 바가 많다. 한 시대의 종말과 새시대의 시작을 점하는 타타르인의 침입에 이어 더 영향력을 미친 리투아니인과 폴란드인에 의한 맹렬한 침입이 있었다. 구키에프의 정체는 더 이상 존속하지 않게 되었고, 키에프의 상당한 영토와 주민이 유럽으로 편입되었으며 , 거기서 그들은 후의 모스코 공국의 실지 회복 운동주의자가 되었다. 키에프는 후대에 유산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예를 들면, 새로운 사회가 시작될 때 많은 사회들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번창한 농업 제도 같은 유산울 물려주지 않았다. 키에프가 남긴 가장 괄목할 만한 유산은 귀족들이었으며, 귀족들의 수는 상당히 많았다. 그들은 유용한 정치 형태였던 공동의 조상을 가졌다는 것을 망각하였고, 오랫동안 파괴적인 상호간의 전쟁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들은 교역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비잔틴에게 교역을 빼앗기자 몰락하게 되었다 . 이제 그들은 그들의 토지권 또는 토지에 대한 주장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 개개인들은 그 자신의 토지, 죽 우델 udel 을 갖게 되었 는데, 이 토지는 그가 죽을 때는 그의 상속자들에게 분할되었고, 그 결과 세대가 지나면서 귀족들의 수는 증대하게 되고, 더욱더 가난하 게 되고대 더욱더 호전적이 되었다. 만약 봉건화될 수 있는 여건이 성숙되는 것을 방해하는 다른 어떤 정치적 사건이 없었다면, 귀족들의 상호 대립과 동, 서로부터의 대침 입은 분명히 봉건화를 전행시킬 수 있는 여건들이었다. 아직까지 러 시아는 정치 사상의 원천인 대제국과는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약 2 세기 동안 그런 정치적 발달은 실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 기 동안에 러시아에는 아직 전정한 봉건제가 성장하지 않았다. 그 이 유는 분명히 클류체프스키가 말하는 〈러시아의 역사를, 정착인을 끊 임없이 끌어들일 만큼 광활하고, 어떻게 토지를 비옥하게 만드는지 알지 못하는 토착 농민을 끊임없이 몰아낼 수 있을 만큼 대부분의 지 역이 척박한, 끝없고 황량한 평원을 영원히 식민화해 가는· 국가의 역 사로 만드는 특수한 여건의 결합〉 14) 때문이었다. 제프텔이 이미 이 시대의 여건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더 파 고들 필요가 없다 .15) 이 시기는 만성적인 불안정의 시대였고, 토지의 가치는 아주 하락하였고, 토지의 궁극적인 소유자인 귀족들은,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과 토지를 조직화하여 그 토지를 자신을 위해 방어할 14) V. 0. Kliu c hevsky, A His t o r y of Russia , Hog ar th (tra ns.)(London and New York, 1911), I, 2. 국단적인 형태로 러시아인이 이주하였다는 클류체 프스키의 이론을 받아들인다는 전제하에서 여기서 그 문구를 인용한 것은 아니다. Sze ft el 의 견해를 따르는 필자는(위 p. 256) 어떤 이주가 있었다는 견해는 받아들인다. 필자는 러시아의 인구가 항상 어떤 형태로든지 이주 상 태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필자는 러시아 초기에 농업에 대해서 베르 나드스키가 언급한 것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베르나 드스키의 클류체프스키에 대한 비판(pp .92-102) 을 전적으로 따를 수 없다 는것을알았다. 15) 위 pp. 256-2 61 .

수 있는 보야르에 비해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보야르는 전정으로 봉신이 되지 못하였다. 귀족에 대한 그의 봉사는 예전에 행 하였던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으며, 그 봉사도 세습적이거나 장기간 에 걸친 것이 아니었으며, 봉사하겠디는· 협정도 쉽게 파기될 수 있었 으며 ,16) 그의 토지는 종종 사적 소유지 allod7} 되었다 .17) 마찬가지로 농민들도 토지에 매여 있는 농노가 아니었으며, 이 시대의 러시아는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었으며, 키에프 시대와 비교해 보면 극도로 침 체되어 있었다. l 心1 l 기의 제후들의 영지 pri n c ely t err it o ri es 에 대해서 클류체프스키는 〈그 영지는 어느 것도 확고한 위치나 혹은 믿을 만하 다고 생각될 정도의 수입원을 갖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18) 그는 이러한 영지에 있었던 보야르의 지위를 서유럽의 귀족과 대조시키고 있다.

16) agAe., ERckev, ue Ldae vfalnssstai t luitt e d ee t S loecsi o li im e, m Xu VnI(i tle9s 3 6d),a n1s0 6l.a MRi urss ksyie ( R dusus smia ,o yp epn . 105-106) 는 이러한 상황을 러시아 사회의 〈본질적인 개인주의적 성격〉의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다. 17) Szeft e~ 위 pp. 258-259 를 참조.

〈서유럽에서 자유인은 그 자신을 일단의 영구적이고, 세습적인 관 계_그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그 자신이 자신보다 낮은 사회 세력 의 구심점이 되도록 허용하고, 그리하여 그 자신의 주변에 그가 주도 하고 뒷받침하는 조그만 세계를 창조하는 것을 허용하는 관계―一에 엄격하게 한정시킴으로써 그의 자유를 확보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러 시아의 세습 제후령의!” 자유 봉사자는 서유럽과 같은 유의 영속적인 요소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방 사회에서 찾을 수 없었으며, 그리하 여 개인적이고 일시적인 협정을 그의 제후와 체결하여 그의 자유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는 언제라도 그 협정을 파기하고 다른 제후의

18 ) His t o r y of Russia , I , 267. 19) 이것은 우델에 대한 Ho g ra t h 의 해석이다. 그 사용에 대한 반대 견해로는 Sre ftel 의 주 24) 를 참조.

영지에서 봉사할 수 있었는데, 이때의 관계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공고히되는 어떤 유대 관계에 의해 얽매이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 20) 그리하여 13 세기에서 15 세기에 이르는 이 시기는 만약 필요한 여건 만 성숙되었다면 러시아에서 봉건제가 발달할 수 있는 시기 중의 하 나였다. 키에프 체제의 붕괴와 의부의 침입은 그러한 여건이었으나, 다른 여건이 결여되었다• 특히 토지는 러시아에서 가치가 거의 없었 다. 그리하여 러시아에서 두드러지게 결여되었던 여건이란, 토지를 지 키지 못하면 그의 토지를 잃게 됨으로 그 토지를 지키지 않을 수 없 었고, 동시에 그 토지의 경제적, 사회적 필요성을 배워야 했고 그 필 요성을 부추기지 않을 수 없었던 서유럽 형태의 제후가 없었다는 점 이다• 만약 봉건 유럽이 정치의 장이었다면, 우델이 주요 토지 소유 형태였던 러시아는 그렇지가 못하였다 .21)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의 많은 부분이 붕괴되고 있었지만, 긍정적인 발달 또한 있었다. 볼가 강 상류 지방, 오카 강 유역, 그 지역 너머 최북단의 북국해까지 새로운 국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오카 강의 한 지류에서 모스코가 발흥하였다. 동, 서쪽에서의 압력으로 실제로 남서쪽에 있던 일부 러시아인들은 의부의 압력이 없는 중부와 북부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22) 그러나 그러한 지역은 키에프-러시아인들만 의 피난처는 아니었다. 비잔틴에 대한 압박이 심각하게 되면서, 그리 스인과 불가-슬라브족도 북쪽으로 도망가서, 중앙 러시아의 메소포타 미아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에 피난처를 구했는데, 이 지역에서 는 모스코가 가장 강대하였다. 그리스인과 불가인들의 숫자는 이동한 키에프 러시아인들의 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거의 모든 20) Hi st o ry of Russia , I , 264-2 65. Sze ft el 은 유사한 문장을 클류체프스키의 후기 저술에서 인용하였다. 위 p.1 81 . 21 ) 유럽의 봉건제를 정치와 연관이 있는 장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Str a - 22) ye위r , 주위 p14p). 를55 -참6조 여.를 참조•

그리스인과 불가리아인들은 비잔틴과 불가리아에서 주도적인 인물들 이었고, 그들은 문명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 사실은 오래전에 있었던 단순한 인구의 이동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래서 만 약 동, 서쪽에서 대압박이 시작되었을 때, 러시아 역사에서 새로운 시 작이 있었다고 한다면, 새로운 시작 이후의 최초의, 최대의 긍정적인 발달은 비잔틴에서 들어온 고도의 문화와 남부 러시아 출신의 인구의 증대로 문명화된 사회가 중앙 러시아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 실 0] 다. 한편 의부의 압박을 받고 있던 비잔틴 사회는 더욱더 대귀족이 지 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제국 군대의 인적 자원이었던 자유 농민은 점 차적으로 대귀족의 농노로 전락하게 되었는데, 대귀족들은 점점더 많 은 국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콤네니가(家)의 즉위와 더불어 (10 81) 대귀족 개개인은 하나의 국가를 형성한 것처럼 되었다. 7, 8 세 기 전에 전 로마 제국이 분열되었을 때와 같이 당시의 비잔틴 제국은 전(前)봉건 사회가 된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아직은 후기 비잔틴 사 회의 성격을 단정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우리는 존 티미세즈와 바실 2 세에 의해 슬라브 - 불가의 바바리안의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 비잔틴 제국이 내부적으로 약화되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 약화 의 믿을 만한 원인이었던 뎀제의 해체가 서서히 계속되었으나, 비잔 틴의 다른 제도들은 동, 서로부터의 새로운 위협에 격렬하게 대응하 였다. 이러한 사실은 비잔틴 제국이 성공을 하였을 때보다는 위기에 처했을 때 더 효과적으로 대처하였다는 설을 확인시켜 주는 것같이 보인다. 말하자면 비잔틴 제국은 불가리아 또는 키에프의 바바리안으 로부터의 엄청난 공격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었으나, 비잔틴이 13 세 기부터 동쪽과 서쪽으로부터의 위협에 직면하여 제국이 와해되어 가 는 과정은 제국을 지탱할 수 있는 이상의 능력이 필요하였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전쟁을 해나갔으며, 실제로

국력이 쇠퇴하지 않았다. 국가의 고삐룰 느슨하게 하지도 않았고, 실 제로 국가가 약화되지도 않았다. 그 대신에 제국의 영토 내에 대귀족 이 부분적으로 소유한 지역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는 그들의 세력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에게 권력과 부가 무분별하게 주어졌다. 한편 대귀족의 입장에서 보면 대귀족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 막 강한 귀족이 되었다. 그들은 봉신을 획득하였고 그리고 서유럽의 무 장 기사와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 무장 군인 ca t a p hrac t s 을 지휘하였 다. 그러나 그들의 세력이 봉건적 기반으로 전환될 수 없었던 특성이 그들에게 있었다. 죽 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을 때, 그들은 서로 싸우고 그리고 황제와도 싸웠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의 가 문과 더불어 흥망성쇠를 감이 하였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 이 시행하였던 제도는 너무 제도적이었다. 효과적인 중앙 정부가 다 시 들어서서 확실하게 안정을 기할 수만 있다면 그 제도는 그 자체로 서 안정을 기할 수 있는 제도였다. 그 제도는 봉건 사회 속에 내재되 어 있는 것과 같은, 변화할 수 있는 특질이 없었다. 언어의 발달로 인 하여 라틴인이 펠로폰네소스와 그의의 지역에 정착하였을 때 그리스 어의 프로노이아p rono i a7} 라틴어의 봉토fe udum 로 번역되어 사용되 었다. 프로노이아는 그것을 받는 대가로 군사적 봉사를 행하는 예속 적인 보유지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것은 상속되지 않 았고, 그래서 그것은 서유럽의 봉토fi e f보다는 모스코 러시아의 군사 적 은대지 militar y bene fi ce 와 유사하였다. 프로노이아가 서유럽의 봉 토와 유사하게 되었을 때, 그러한 봉토 내에서의 정치 관계는 봉건적 인 수단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정부가 부분적으로 운영되었던 후기 봉건적인 정치적 관계였다. 비잔틴의 영지에서도 역시 후기 봉건적인 정치 관계였다. 주군은 가신들로 구성된 군대를 갖고 있었는데, 이들 은 주군으로부터 조그만 토지, 임금 및 유지비롤 받았으며, 그 영지는 실제로 봉건적으로 운영되지 않았다. 그 운영은 비잔틴 제국의 행정

부의 축소판이었으며, 그 영지는 봉토라기보다는· 조그만 공국p r i nc i­ p al ity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점이 후기 바잔틴 정체의 특성이었다는 사실은 비잔틴 제국 이 몰락한 뒤에 확인되었다. 왜냐하면 오스만 제국은 그 제도를 기반 으로 하여 일시적으로 안정된 정부를 가졌고, 그 제도는 그대로 존속 되었으며 분명히 봉건 국가가 아닌 이질적인 연방 형태와 같았기 때 문이었다• 그 정복이 있기 전 2 세기 동안 피해를 입었던 상업과 산업 은 회복되었고(이 상업과 산업은 처음에는 이탈리아의 경쟁을 통해 피 해를 입었음) 이 상업과 산업의 회복으로 얻을 수 있었던 사회적인 제 특성을 갖게 되었다 .• 이 특성은 그 사회를 다시 부유하게 하였고, 정부는 관리들에 의해 통치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오스만 터키족이 봉 건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내재적인 특성을 가졌었다면, 오스만 터 키족은 그 사회를 봉건제의 방향으로 몰고 갈 수 있었던 민족이었다. 그들은 바바리안 중에서 가장 바바리안적이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여 전히 바바리안이었고, 그들이 유목 생활에서 정착 생활로 부분적으로 전환하였을 때, 그들은 얼마 안 가서 동남부 러시아에서 봉건제 같은 사회를 발달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만약 그들의 지배자가 어떻게 관 료제를 만드는가를 이해하였고 또 관료제를 만둘기를 원하였다면, 그 사회는 분명히 관료제로 만들어졌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이전의 비 잔틴 영토에 세운 것은 전정한 관료 체제는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은 항상 세습적인 파샤에 의해 지배되는 연방제였다. 이러한 체제하에서 는 다양한 정치적 발전이 많이 일어나지만, 이러한 정치적 발전은 거 의 봉건적이 아니다. 거대한 토지 소유제, 혹은 준국가적인 규모의 토 지 보유 상태, 또는 완전한 국가적인 규모의 토지 보유 상태는 혼한 일이었다. 심지어 번창하던 돼지 사육 농장조차도 일련의 대토지 소 유제를 위한 그리고 이 토지에 세워지는 일종의 국가의 기반이 될 수 있었다. 교회는 비관료제적인 국가 내에서 관료제적인 국가였다. 사실

상 그러한 교회-국가 Church - S t a t e 가 여럿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에 의해 지배되던 교회 一 국가가 가장 세력이 강하였다. 수세기 뒤 제국이 붕괴하기 시작하였을 때, 봉건제가 아니라 이러한 종류의 국가와 대토지 소유제가 발생하였다. 역사에서는 가정이 있을 수 없다. 비잔틴 사회와 그 정체의 하부 구조가 터키 체제하에 살아왔기 때문에 물론 비잔틴 제국이 위에 언 급된 국가의 형태가 될 수 없었다: 만약 터키의 체제가 없었다면­ 다른 이방의 정복자가 없었다면-비잔틴은 봉건적인 단계를 경험하 지 않고서도 회복되었을 것이며, 12 왕조의 이집트, 중국의 당, 6, 7 세 기때의 비잔틴 제국과 마찬가지로, 비잔틴은 어떤 새로운 특성을 가 지고 다시 출현할지 모르지만, 새로 회복된 비잔틴은 구사회의 특성 이 주된 특성이 되었을 것이다. 모스코 러시아는 이중적인 특질을 계속 보여주고 있었다. 그 특질 은 옛날과 같은 특질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비잔틴의 국경선이 비잔 틴인들이 FA 구쿠 도망가면서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스 코는 우리가 炫沼]서 본 바와 같이 한편으로는 비잔틴 제국을 반영하 는 유령 제국이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여건하에서는 봉건제 로 되었을지 모르는 바바리안 국가로서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 바바 리안적인 러시아의 계승자로서의 모스코는 강력한 군주제의 어떤 특 성을 보여주고 있다. 모스코의 두 성격 중에서 전자가 지배적이었다. 모스코는 사실상 강력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모스코를 강력한 군주국 이었다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모스코는 그 당시 발생하였던 소우델리 (Udel i : 러시아의 군주의 자손들로 군주로서 토지를 받는 자. 역자 주)보다는 훨씬 강력한 국가였다. 이러한 우델리의 그의 영지에 대한 권한과 주장에 대한 모스코 공(公)의 정책은 서유럽에서 민족 국가의 군주가 귀족둘의 권한과 주장에 대해 행한 정책을 연상케 한다.

아마 모스코 러시아의 가장 두드러진 특칭은 모스코가 곧 통일된 국 가로 되었고 그리고 통일된 국가로 존속하였다는 점이다. 러시아와 같 은 광대한 지역에서는 여러 개의 강력한 군주국이 민족 단위로 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가 아니라 몇 개의 명확한 국가가 나움직도 하 였다. 물론 누티 T 쿠亡-와 스코프p skov 는 처음에는 별개의 공국으로 존 재하였다. 이들은 도시 국가였으며, 누닌 T 쿠亡는 상당히 넓은 지역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14, 15 세기 러시아에서는 봉건 체제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도시 국가의 발달은 분명히 있었다 . 그러나 누닌 T--근 亡-는 1478 년에 스코프는 l5l0 년에 러시아에 병합되었다. 이 병합은 키에프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특수한 발달로 간주되어야 한다• 우리들은 지형 적인 여건 그리고 드물게는 인종적인 차이, 그의 역사적인 차이를 민 족을 구분하는 경계선으로 삼아왔다. 이러한 방식은 러시아에서는 맞 지 않는다. 러시아는 북중국과 · 마찬가지로 주로 자연적인 경계가 없 는 평원이었으며, 변경 지역 이의에는 어떤 뚜렷한 인종적인 차이를 이 시기에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주(周)시대의 북중국은 대봉토의 집적에서 유래한 일련의 국가를 창출하였다. 그러나 모스코가 홍기할 즈음의 러시아는 봉건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가로 전환될 수 있었던 대봉토가 러시아에는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대봉토와 자연 환 경적, 역사적인 경계가 없었던 곳에서는 민족 국가 na ti on 라 할 수 있 는 국가가 아니라 하나의 제국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은 유령 제국 이었다. 왜냐하면 의형적인 여건이 그 이상의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시적으로 누닌 T 쿠亡와 스코프 이의에는 러시아에는 그 유령 제국에 대항할 만한 강력한 국가도 없었다. 모스코는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그 당시 러시아를 구성하고 있 던 수많은 소우델리의 무질서한 난립 상태에서 점전적으로 성장하였 다. 이러한 난립 상태에 있던 러시아를 통일하는 데는 이란의 아르다 시르나 중국의 진 시황제와 갇은 대정복자는 필요하지 않다. 이러한

상태를 통일하는 데는 극적인 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일련의 사 전에 성숙된 여건만이 필요하였다. 그 여건은 타타르 정복자에 의한 러시아인에 대한 과세와(이를 위하여 모스코 공이 1328 년에 타타르 정 복자둘의 대리인이 되었으며) 많은 우델리들의 보호에 대한 절실한 희망과(한때는 수백 명이 자발적으로 모스코에 복종하여 신민이 되었 다) 무엇보다도 1326 년에 모스코를 수도로 만든 교회의 영향이었다. 이러한 통일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두 개의 통일 방식, 즉 한 사 회의 고도로 발달된 문화가 조금 몰락한 다음- 나타나는 통일 방식과 문화의 극심한 쇠퇴, 봉건적 시기 그리고 민족 국가의 시기 다음 나 타나는 통일 방식과 비교하면 아주 변칙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역할을 아주 변칙적인 것으로 간주해 서는 안 된다. 그 시대의 여건과 영웅적인 군사 행위가 필요 없었다 는 사실이 결합된 점이 변칙적인 것이다. 이 교회의 역할은 서유럽의 교회가 신성 로마 제국을 탄생시키는 데 한 역할과, 초기 주나라 시 대의 중국에서 왕(王)의 지위를 지지하는 데 종교기· 행하여던 역할, 그리고 11, 12 왕조 시대에 이집트에 통일을 가져다 주는 데 있어서 테베 성직자들이 한 역할과 유사하였다 . 23) 사실 모스코의 통일에서 교 회의 역할은 주로 유령 제국으로서의 모스코의 특성 때문이며, 이는 봉건화의 전 단계 혹은 봉건화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특성에 속 하는 것이며, 봉건제 말기 시대에 발생되는 강력한 군주제의 특성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특성은 오로지 전자의 특성만은 아니었다. 왜냐 하면 교회는 10 세기 말 이후에 러시아에 자리잡았고, 그때부터 l 心1 l 기에 아를 때까지 완만히 그리고 피상적으로 러시아 사회에서 자리를 23) 아몬-레 성직자들이 이집트에 힉소스인들의 침입 후의 정책에 상당한 영향력 을 행사하였다고 한다 (D ri o t on and Vandie r , Les peu p le s de (Or ien t Medi- terr aneen, l : L'E g ypt, pp. 326-3 27, 339-3 40, 436, 451 ; Wi lso n, The Bur- den of Eg ypt, pp. 169- 1 70, 216-217). Ed g er t on 은 이 시기를 더욱 앞당긴 다. 위 p. 202 과 그의 주 23) 을 참조. 필자는 이 시기를 이보다 더 앞당긴다.

굳혀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4, 15 세기에 이렇게 자리잡은 교회는 비잔턴과 불가리아가 대재난을 겪는 동안 피난처로서 그리고 러시아 가 이전에 경험하였던 것과는 판이한 종교적, 정치적인 세력의 규합 울 위한 근거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러시아는 멀리 떨어져 있고 선 교 대상으로는 중요하게 여기지지 않았던 지역이 아니라 이제는 가장 중요한 그리스 정교 국가가 되었다. 필자는 러시아에 일찍이 교회가 존재하였다는 사실과 교회가 피난 처를 제공하는 기능을 하였다는 사실 이의에는 이러한 과정이 변칙적 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러시아의 이중적 특성의 직접적인 결과인 이 과정은 서유럽 또는 주(周)시대의 중국의 역사에서는 그 유사한 과정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다론 어떠한 사회에서도 유사한 발달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炫妙에서 모스츠i는 피신 한 유령 제국으로 묘사되었고, 러시아에 일찍이 교회가 존재하였다는 것은 그 유령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는 일련의 사건들의 필요한 연 결 고리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다른 피신한 유령 제국들이 있었기 때문에, 초기 러시아 교회에도 유사점이 또한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 다. 그러나 유령 제국으로서의 모스코의 특성에 있어서는 이상한 것 은 물론 전혀 없으며, 이 점에서 모스코는 다른 유령 제국들과 비슷 하다. 비록 모스코가 발생했던 여건에서는 이상한 점이 있으며, 유령 제국으로서 모스코가 후에 민족 국가들에 의해 대체되지 않았다는 사 실 또한 이상한 점이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예견하고 있었던 사실들이다. 민족 국가들이 성장하기 전에 봉건 시기가 있었으리라고 우리는 기대한다. 모스코의 역사에 그와 같은 시기가 있었던가? 전정한 봉건 시기가 아 니라, 봉건 시기와 유사한 성격을 가진 시기가 있었다-이 책의 연 구 관접에서 본다면 이것은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이상한 점이다. 15 세기 말 모스코는 그의 군대를 발달시키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차지

하고 있던 광대한 영토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을 고안하기 시작하였 다. 여기서 포메스데 p omes t 'e 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러시아 역사에서 아주 새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봉사를 조전으로, 주로 군사적 인 봉사를 하는 조건으로 하는 토지 보유제였기 때문이었다. 군대와 정부에서 봉사하였던 사람들은 포메스테를 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에 게 보수를 주는 다른 어떤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봉건적 인 관계는 결여되어 있었고, 봉신제는 분명히 없었다 . 모스코 공(公, 이제 차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음)에 대한 전정한 개인적인 충성 관 계, 신종 선서 혹은 충성 서약은 없었다. 이 관계는 사람들이 정부에 봉사하는 관계였다. 그 보유제는 약 1 세기 후에는 세습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세습적인 것이 아니었다. 얼마 안가서 그 보유제는 군사적 인 성격을 상실하였고, 지주 계층들은 점차적으로 봉사의 의무에서 벗어났다-이러한 특성 때문에 이 제도는 봉건적인 성격을 가진 보 유제와는 전혀 달랐다. 러시아에서 군주와 귀족들은 서로 오랫동안 대립하여 싸우고 있었 지만 군사적 봉사의 의무가 없어진 것은 우리가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는 비슷한 데가 별로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로 17 세기에 발생하였던 봉사 의무의 회피는 이러한 투쟁의 결과는 아니다. 그러 나 봉건제 시기 이후의 강력한 민족 국가의 군주가 귀족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그들의 군대를 중앙 정부의 군대로 만들기 위하여 귀족들의 봉건적 의무를 없앤 것과는 달리 러시아의 정부는 귀족들의 의무를 마지못해 면제하여 주었는데, 이는 그들의 봉사가 여전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봉건제 시기 이후에 군주국들이 귀족들의 봉사를 받지 않 아도 될 만큼 강력하였을 때 귀족들의 의무를 면제하였던 것에 반하 여, 러시아의 정부는 그 세력이 너무 약하여 귀족들의 봉사를 요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봉사를 면제하였다. 러시아 정부는 경찰 업 무, 사소한 사건의 재판과 세금 칭수를 위하여 귀족들p omeshc hi k i에

게 의존하였다. 이러한 자격으로 귀족들은 합법, 비합법적으로 부를 축적하였으며, 정부를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부분적으로 는 귀족들의 농민에 대한 이런 다양한 정치 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농민들의 실질적인 법적인 신분의 변화로 인하 여 농민들은 농노(농민들은 유럽에서 발간되는 책에서는 농노로 보통 기술됨)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노예에 가까운 상태로 되었다. 이것은 다시 봉건 질서에서 부수되는 흔히 있는 농업적인 결과가 아 니라, 아주 극단적으로 농민을 억압하여 생간 부산물이었다. 농민의 지위는 군주와 귀족 사이의 투쟁에서 불가피한 쟁점이 되었 으며, 군주의 최종적인 승리는 농노의 해방에 의해 분명하게 되었고, 이 해방은 19 세기, 죽 1861 년의 칙령이 반포되어서야 이루어졌다• 러 시아에서 근대 국가를 건설하는 대부분의 업적이 이 칙령이 반포된 이후로 미루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칙령이 반 포되기 이전의 러시아에서는 귀족이 정체에 있어서 아무런 법적인 지 위를 차지하지 못하였고, 특히 프랑스와 같이 어떤 인위적인 법적인 수단에 의해 존속되는 봉건제 시기 이후의 유럽과는- 상이하였다. 그 반대로 러시아의 귀족은 러시아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귀족들은 마치 러시아의 군주제를 없애버리고 러시아를 다른 유령 제국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 갇은 인상을 가끔 주었다. 그 러나 만약 귀족이 그 투쟁에서 성공하였다 해도 러시아에서 민족 국 가가 발생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사실상 군주 독재제와 귀족제 사이의 두쟁은 극심하였으며, 봉건제의 보통의 기준에서 볼 때에도 농노에 대한 억압만큼이나 그 무쟁이 과열되었다. 그리하여 피터 대제(I 689-1725) 와 폭군 이반 (1533-1584) 의 포악한 정치, 이반 시대 이후의 혼란기 (Tim e of Trouble, 1533-1584) 동안의 극심한 무 정부 상태에 군주와 귀족 모두 농노들의 공격을 받아 무기력하게 되 었으며, 그래서 귀족둘에게 마지막으로 대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

던 캐서린 대제(1 762 - I796) 치세시의 푸가초프 반란의 잔인한 진압 과 군주 독재가 나타났다. 귀족과 군주 사이의 권력이 평형을 이루었 울 때조차도, 이반이 독재 군주와 귀족 사이에 나누어져 있던 행정 지역을 오프리치니나 O p r i chn i na 와 젬쉬치나 Zemshch i n 죠i 분할했을 때처럼 그 결과는 이상하게 나타났다. 그래서 러시아 역사에 대해 이러한 해석이 요구되는 것은 첫째 러 시아의 역사가 비잔틴 역사와 긴밀하게 연계되었고 비잔틴과 러시아 모두 이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던 때인 7 세기에서 13 세기에 이르는 500 년 내지 600 년의 기간이다• 비잔틴은 지역적으로 한정된 로마 제 국의 연장이었으며, 동시에 기독교화, 군사화, 중앙 집권화된 새롭고, 독특한 정체와 사회를 가졌다. 따라서 러시아는 마치 쇠잔해 가는· 문 명 사회와 점차적으로 통합되어 가는 것같이 보이는 로마 국경선 너 머에 있던 최초의 바바리안의 지역이었으며, 봉건화되어 가는 어떤 중요한 조침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와 비잔틴 사이에는 문화 수준의 커다란 차이라는 장벽이 항상 있었으며, 비잔틴이 급격 하게 성장하면서 이 장벽은 더욱더 높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러시아 는 높은 수준의 문화 영역에 인접한 지역이 갖는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문명화된 지역에서 떨어져 있는 지역이 갖는 특성도 가졌고, 일종의 경제적 부속 지역으로서 비잔틴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러시아와 비잔틴 모두 동쪽과 서쪽으로부터 확장해 오 는 이민족 사회의 중간에 처하게 되었을 때인 13 세기에서 15 세기에 이르는 격렬한 변동의 2, 3 백 년간의 기간이 나타난다. 이러한 대혼란 이 끝났을 때 비잔틴 제국과 키에프 러시아는 멸망하였다. 그 대신에 새로운 지역, 죽 중앙 러시아에서 비잔틴과 키에프 러시아의 뒤를 이 은 새로운 정체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 정체가 바로 모스코였다. 이전 의 두 국가와 마찬가지로 FA 구 F 이중적인 특성을 나타냈다. 그것

은 비잔틴과 키에프 러시아로부터 각각 물려 받았다. 그 특성이 다른 특성 위에 겹쳐져 있었다. 죽 비잔틴 제국을 반영하는 유령 제국의 특성이 키에프 러시아가 종말을 고한 나약하고 변칙적인 우델 시기 다음에 나타난 강력한 군주국(민족 국가라고보기는 어렵다)의 특성 위에 겹쳐져 있었다. 이 이중적인 특성을 가전 러시아는 민족 국가를 창출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정치 형태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모스코는 키에프 러시아의 유산울 이어받아 발흥하였을 때도 전혀 민족 국가는 아니였으며, 하나의 유령 제국의 말기에도 주(周)의 중국과 중앙 유 럽처럼 일련의 민족 국가로 분할되지도 않았다. 17 세기 혹은 18 세기 에 막강한 세력을 가졌던 지방울 잠재적인 국가로 보기는 어렵다• 왜 냐하면 이러한 지방들은 내적인 통일성을 결코 갖지 않았으며, 지방 둘 사이에서도 서로 구분이 되지 않았고, 한 민족 국가가 속해 있는 사회 전체와도 전혀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민족 국가 둘을 서로 구분하는 자연 환경적, 인종적, 역사적 경계선을 갖고 있지 않았고, 주군과 봉신의 충성을 왕과 신민의 충성으로 확대하고 심화 시키면서 처음에는 봉토의 내집단을 후에는 국가의 내집단을 만드는 정치 - 윤리적인 과정인 본질적인 봉건적인 발달도 없었다. 그러나 모스코는 변칙적인 봉건제 p ara- fe udal 라고 할 수 있는 정체 를 만들었다 .24) 모스코는 봉건적인 계약 없이 그리고 개인적인 종사 관계를 맺지 않은, 처음에는 세습적이 아니었던, 그의 토지에 대한 군 사적인 봉사의 의무를 지고 있었으나, 후에는 그런 중요한 의무를 면 제받은 군주 혹은 아마 중앙 정부의 예속인인 포메쉬치크p omeshch i k 를 창출하였다. 그렇다면 모스코 러시아는 봉건적인 정체와 비봉건적 인 정체를 연결짓는 고리였는가?一_이 두 형태 가운데 있는 준봉건 적인 정체 sem .i-feu dal p o lity였던가? 분명히 모스코 러시아는 어떤 봉 24) 이 용어를 연구하였으나, 오히려 문제의 제도를 유산 봉건제(流産封建制, abortiv e feu dali sm ) 라고 불렀던 Szeft el 참조, 위 p. 272.

전적인 특성을 갖기도 하였으며, 결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만약 그 러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하여 러시아의 초기 역사적 환경과 러시아의 초기의 그리고 후기의 비잔틴과의 관계와 갇은 특수한 여건이 필요하 였다면, 그러면 어떤 사회가 봉건 시기를 가전 사회의 범주에 속하게 되는, 또는 봉건 시기를 갖지 않는 사회의 범주에 속하게 되는 명백 한 원인을 발견할 수 있다. 러시아는 사실 봉건화되는 경향의 정도를 암시해 주는 준거가 되며, 왜 봉건제가 역사에서 반복적인 현상이었 는가의 이유에 대한 증거가 된다. 러시아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전 시기 동안은 바바리안 국가였거나 아니면 거의 원시적인 국가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러시아는 봉건적인 경향을 세 번 경험하였고-만 약 우델 시기를 봉건 시기라고 생각한다면-그리고 세번째의 경우 에는 필자가 변칙적 봉건제라 부르는 시기가 있었다. 봉건적 형태를 가전 사회와 봉건적인 형태를 갖지 않은 사회가 엄 격하게 구분되는 또 다른 예로 파르티아-사산조 이란이 있다. 이 경 우에도 역시 전정한 봉건제가 발생하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하는 특수 한 조건, 즉 이란 지역과 이란에 부속된 메소포타미아 사이의 뚜렷한 구분과 부분적으로 메소포타미아 도시들에 기반을 둔 활발한 상업이 존재하였다는 조건이 있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상업이 이란과 러 시아에서 이러한 변칙적인 발달에 일익을 담당하였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이란의 경우는 러시아보다 특수하지 않다. 그러므로 사회 전화 의 어떤 규칙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있던 문명 사 회가 확연한 봉건적 발달 단계를 갖거나 아니면 사실상 그러한 단계 를 전혀 갖지 않는다는 가능성을 세우는 데 예의적인 것은 아란의 경 우가 아니라 러시아의 경우이다.

10 결론 봉건제는 정치 현상이다 그러나 정치는 다른 인간사와 분리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정치는 문화 운동의 한 양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봉건제는 보다 광범위한 측면 , 죽 전체 문화 운동의 측면에서 볼 때 에 비로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제47?}- o} ]서 언급하였으나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진 문제, 즉 봉건제는 한 문화가 붕괴된 다음 그 문화의 회복기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원래 문화가 처음 발생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보다 광범위한 문제를 연구하기 이전에는 충분히 이해될 수 없다. 사료의 부족 때문에 이렇게 중요한 문제물 지금까지 미루어온 것을 당연시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에서는 봉건제의 관계를 정치로부터 지적인 그 리고 심미적인 문화까지 확대하려고 한다. 그 다음으로 구세계의 첫 문명 사회가 발생하는 가운데 발생 가능하였던 봉건 혹은 봉건적인 단계와 관련된 테마를 다룰 것이다. 마지막으로 봉건제와 우리가 직 면하였던 어떤 다른 현상들이 역사에서 일관성 u nifo rm ity으로서 얼마 나 중요하였던가에 대해 고려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사회의 역사 에서 일관성과 반복성을 독특성과 구분하기 위하여 현재의 지식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예롤 보여주는 것이 이책의 보다 중요한 목적 이기 때문이다.

봉건제는 한 사회의 정체가 극도로 해체되어 간 사회를 다시 부활 시키는 양식으로 이 책에서 파악되었다. 이 해체된 정체는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경우 대제국이었으나, 봉건 제도들은 구제국에 속하였던 지역 또는 그 제국의 영역 밖에 있었던 지역에서도 발생할 수 있었 다. 봉건제논 정치적 회복을 하는 데 있어 필연적인 단계는 결코 아 니다. 사실상 그 회복이 완만하고 둔하였던 지역에서만 봉건제가 발 생하였다• 대개 광대한 구제국의 핵심 지역에서는(대체로 이 지역은 광대한 지역이다) 봉건적인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정치적 생동력 이 회복된다. 봉건제는 쇠퇴해 가는 한 문명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던 지역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나, 이 지역에서도 봉건제가 반드시 발달하 는 것은 아니다. 쇠퇴해 가는 사회의 변두리 지역이 아주 광대할 수 있댜 죽 서유럽의 상당한 부분, 혹은 일본, 한국, 티베트, 만주의 일 부, 몽고의 일부 지방과 같이 광대한 지역일 수 있다. 문명화된 사회가 쇠퇴하고 회복하는 것은 역사의 중요한 과정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주기적인 과정이다(만약 주기적이란 말이 그 과정을 설명하는 데 아주 적절한 용어라면).” 오늘날 적어도 소수의 저명한 학자들은 그 역사 과정에 관해 의견 일치를 보고 있지만, 그것은 여 전히 애매한 문제로 남아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 분석에 의하면 이러 I) 이 말이 부적철하디는· 것을 필자는 인정한다. 그러나 이 말만이 필자가 원 하는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편리한 말이며, 필자는 특별한 용어를 만들기 를 싫어한다. 필자가 주기적이란 말을 사용한 것은 명확히 규정된 반복성을 요구하지 않으며, 불합리한 무한한 반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문 화 운동으로부터 단순히 산술적으로 추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 도 아니다. 토인비는 특히 풀라돈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여러 권위 있는 학자들을 공격하면서 주기적이란 단지 무한한 반복을 뜻한다는 묵시적인 가 정 위에서 그 말을 쓰기를 거철하고 있다 (A Stu d y of Hi st o r y, N, 23-39). 우리들와 현재의 생각 양식으로는 불합리하고 무한한 것처럼 보이는.반복은 그리스와 아라비아의 사상에서는 불합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주기적과 갇 은 유용한 단어롤, 그것을 불합리하게 바라보는 입장으로부터 구해낼 수는 없는 7}?

한 전환기에 있는 고도로 발달한 문명 전체는 어느 정도 갇은 과정을 겪는다. 그러나 그 문화가 역사 과정을 거치면서 나타나는 변화의 정 도와 상호 연관성은 애매하다. 말하자면 그 연관성은 탄력적이며 경 우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몰락의 원인에 대한 단순한 요인을 발견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으나 부활의 원인에 대한 요인을 발견하 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필자는 이런 모든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 다고 생각한다. 근본적인 사회적 힘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 문제를 가장 성공적으로 다룬 것은 문명에 대한 인류학적인 개념과 갇은 종 합적인 개념을 적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의 형성은 쇠퇴에서 부 활로 전환하는 중요한 한 부분일 가능성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적어도 17 세기에서 18 세기로의 전환기에 있었던 비코 V i co 이래로 이 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이들이 있었다. 종교의 형성은 결코 간단한 일 이 아니다라는 사실이 첨언되어야 한다• 그것은 복잡하고 다중적이며, 실질적으로 문화의 다른 부분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루어전다. 우리 가 고려하고 있는, 전환기에서의 종교의 중요성을 주장했던 대부분의 학자들은 종교 속에서 종교를 통하여 인간과 사회를 통제하는 궁극적 인 힘을 발견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필자는 종교 롤 인간이 문화와 사회의 몰락에 직면할 때 인간이 만든 것, 즉 인간 이 문화에 영향을 끼치는 특별한 형태 fo rm 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종 교는 베르그송이 가장 잘 표현하였듯이 사회를 부활하는 에이전시가 되었다 . 2) 봉건제와 종교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주장될 수 있다. 그러나 봉건제는 신앙의 시대 age or fait h 에 항상 발생하는 현상이며, 봉건제와 전체 문화와의 관계를 설정하기 전에 이 시대의 종교의 역 2)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 gion , Sw iss edn.(Geneva, 1945), pp. 20l- 2 54. 필자의 Concep t of the Cong lom erate M yth, Proceedin g s of the Tenth Inte r nati on al of Cong re ss Phil o sop hy , I , 74 ff를 참조.

할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종교의 발생이 봉건 제의 발생보다 더 중요한 현상이며, 봉건제가 발생하기 오래전에 종 교가 발생하였다는 일반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종교와 봉건제 둘다 사회를 다시 부활시키는 에이전시가 되었다는 특별한 이유 때문이다. 사실상 쇠퇴의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았고 회복이 상당히 빨랐던 한 문명 사회에 세워진 새로운 종교는 분명히 회복의 성공적인 에이전시 가 되었다. 그러나 봉건제에 의존하게 되었던 변두리 지역에서는(그 크기가 아무리 광대하다 하더라도) 종교의 확립만으로는 그 사회를 분 명히 회복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정치 구조의 몰락은 궁극적으로 그 사회의 몰락을 초래하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정치 구조에 봉건 적 치유 방법이 적용되었는데, 우리가 연구한 바와 같이 이러한 특별 치유 방법은 몰락의 위협을 받는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비로소 원용 되었다. 그래서 봉건제와 종교 사이에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말 하는 것은 봉건제와 종교가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적용된 각기 독립 된 치유책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봉건제와 종교는 아주 다른 치유책과 같이 보인다. 봉건제는 단지 몇몇 경우에만 그리 고 문화의 한 국면, 죽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한 한정된 지역에만 적 용되었던 구체적인 방법이다. 반대로 종교는 모든 경우에, 사회의 전 지역, 그리고 문화의 대부분 내지는 아마 문화의 전 부분에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치유책이다. 이 문제에 대해 아래에서 더 언급하겠다. 한 문명이 몰락할 때, 종교는 일반적인 변화에 역행하는, 그 문명 속에 내재해 있는 한 요소이다. 그것은 성장한다. 이러한 모순은 많은 학자들을 당황하게 하였고, 실제 몰락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에 대해서 그리고 실제로 그 변화가 단순히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이행하는 단순한 전환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게 하였다. 필자는 그러한 이행이 있다고 믿으며, 구형태는 실제 몰락하여 형태뿐만 아

니라 그 문명의 묵은 실체의 대부분이 종국에는 사라지게 된다고 생 각한다. 몰락과 부활에 관한 우리의 개념이 이러한 역사적인 전환의 궁극적인 성격울 이해하는 데 완전히 적합하지 않다는 것도 분명히 하나의 사실이다. 어떤 의미 해석법이 여기에 적용되어야 유익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는 결코 구개념을 전적으로 버리는 것은 아니 며, 그러한 문제는 여기서 논의할 문제도 아니다. 새로운 종교와 이전의 종교를 근본적으로 재건하는 것은 사회가 몰 락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종교의 출현은 일반적으로 사회 가 몰락하고 있다는 것을 다분히 암시하고 있으며, 이는 문화의 특정 한 그리고 한정된 기능이 단순히 전환되는 것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문화의 모든 기능이 영향을 받으나, 그 영향은 똑같은 정도로 혹은 감은 시기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문화의 모든 기능이 똑같은 정도 로 종교의 발생과 연관된 것같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종교의 변화 와 연관된 정도도 물론 사회에 따라 다르다. 이것은 사실 가장 어려 운 문제 중의 하나이며, 이 어려움은 우리들의 종교에 대한 이해, 아 마 문화의 제 분야와 기능과의 모든 관계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가 잘 못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한 다. 이러한 여건하에서 우리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문화의 기능을 세 개의 주요한 범주, 죽 지적, 심미적, 정치 적 범주로 나누어 고려할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문화에 대한 궁극적 인 분석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그 내용이 서로 중복된 최종적인 결과를 구분한 것이며, 실제로는 분리될 수 없이(그리고 애매하게) 상 호 연관되어 있으며, 그것둘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우리는 이들 각각의 범주들의 종교의 발생과의 연관성을 문화의 몰락과 성장을 추적하는 토대로 사용할 것이다.J) 3) 다음 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은 필자가 다음에 출판하고자 한 비교 문화사에 대한 필자 자신의 원고를 많이 요약한 것이다. 이 논문은 여기에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끄}적인 연구 자료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러나 Kroeber 의 저서 Config ura ti on s of Cultu r e Growt h( Berkeley, 1944) 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밝혀둔다 .

문화의 몰락은 처음에 지적 문화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몰락 은 지적 혁신이 끝났을 때 시작된다. 아마도 지적 혁신이 더욱더 약 화될 때 그리고 보다 하찰것없는 지식에 더욱더 관심을 가질 때 몰락 이 처음으로 시작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 러한 지적 혁신이 약화되는 가운데 학자들이 얼마나 일찍 그 몰락을 감지하게 되는가는 분명히 개념적인 문제이나, 학자가 구지식이 소멸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확실히 그 몰락을 감지하게 된다. 기원전 3 세기의 사건인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아리스타 후의 발견을 그리스군료마 세계의 지식인들이 . 받아들이기 거부하 였다는 일화에서 그가 문화의 몰락을 감지한 것은 당연하다. 아리스 타르코스의 새로운 사상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거대한 사상이었다. 그 사상은 너무 많은 기존의 지적인 관심을 통째로 혼들어놓아, 기존 의 학자들이 다급하게 방어 수단, 죽 기존의 진리를 옹호하는 수단을 찾게 하였다. 사실상 지적으로는 ,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정통성을 추 구하는 것으로 되었을 때 몰락의 조짐은 보이기 시작한다. 그 전환이 진행되면서, 무지가 확산되면서, 중요한 규준이 몰락하면서, 철학은 신학에, 지식은 신화에 의해 대체되고, 신학과 신화는 하나의 실체가 되 어 종교적 목적 에 부합하는 사상으로 사용된다. 지적 문화 활동은 사실상 종교의 발생과 아주 깊은 관계가 있다. 이 두 개가 동일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지적 문화보다 훨씬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고 어떤 지식은 종교의 지배로 부터 벗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개의 활동은 아주 밀 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하여 종교가 성장하면서 지적 문화 활동 은 미묘한 변화를 겪는다. 신화로 격하되거나 혹은 신학적인 형태로

된 지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뒤 소멸되지 않고 다시 한번 축적되 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새로운 비판이 시작되기도 하는데, 이 바판은 새로운 정통성의 범주 내에 있는 비판은 결코 아니다. 새로운 부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변두리 지역에서 부활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그 리고 봉건제가 변두리 지역에서 발생하기 훨씬 전에 중심 지역에서 새로운 부활이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 심미적인 문화도 비슷한 과정을 밟으나 똑같은 과정을 밟지는 않는 다. 문학은 사상과 같은 정도로 많은 변화를 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문학의 여러 형태는 상당히 많은 지식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바리안에서 기원한 서사시와 그와 유사한 노래는 종교의 영향을 받 기는 하였지만 종교의 지배를 받지는 않는다. 문학은 보다 자유스럽 게 그리고 보다 다양하게 움직이는 실용적인 예술이다. 실용적 예술 은 사상보다는 몰락에 대해 더 저항을 하며(건축은 특히 장기 지속적 이다) 흔히 훨씬 더 오랫동안 종교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다. 몰락과 종교에 대한 저항이 반드시 병행되거나 혹은 매우 자주 병행되는 것 은 아니다. 종교는 항상 그 자체의 예술을 갖고 있으며, 이 예술은 일 찍 나타나 몰락 뒤에 부활을 가져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지 모론 다. 그러나 종교와 전혀 관계가 없는 여타의 예술도 일찍부터 영감을 보여주고, 새로운 주제롤 시도하고, 새로운 기술을 제기하고, 그 부활 에 기여할지도 모른다. 종교적 목적에 사용되는 예술과 그렇지 않은 예술, 혹은 우연히 종교적 목적에 사용되는 예술 사이의 구분은 명확 하나, 그 구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문제의 몰락이 심각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 예술이 종교의 지배를 덜 받는다는 것 을 의미할지 모르나, 이것을 확신할 만한 증거가 없다. 여하간 이 문 제에 관한 한 경우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대부분의 종교는 그들 자신의 건축 양식을 갖고 있다. 그러 나 한(漢)과 당(唐)의 전환기의 중국의 건축물은 불교에 의해 사용되

었으나 불교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파르티아 - 사산조 이란에서는 두 개의 건축 양식이 있었는데, 하나는 완전히 세속적이고 아주 장엄 한 궁전 건축 양식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 덜 장엄한 완전히 종교적 인 사원 fi re 一 t em p le 의 건축 양식 이 었다. 대부분의 종교는 그들 자신의 조각과 회화를 갖고 있으나, 이슬람교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조각과 미술을 거부하였으며 실제로는 금지하였다. 한에서 당대까지의 중국 에서는 절묘한 무덤의 입상(立像)은 유교가 인정한 고대 조상 숭배의 것이었고, 거대한 평범한 부처의 조각이 있었고, 이백과 두보의 위대 한 시들은 도교의 영향을 입었다는 것을 조금 보이고 있고, 이 전환 기에는 크게 발달하지 못했던 역사 서술은 세속인이 맡고 있었다. 전환기에 있는 문명 사회의 중심부 지역과 변두리 지역 사이의 사 상과 예술의 차이는 대단하다. 중심 지역에서는 항상 지식과 사상이 현저하게 쇠퇴하나, 결코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는다• 예술은 분명히 기법의 변화를 가져오나 이 전환기 동안에도 상당히 활발하다. 그러 나 적어도 실질적인 예술은 곧 다시 활력을 찾게 될 것이다. 원(原) 봉건 단계에서는 쇠퇴가 때로는 중단되지만 변두리 지역에서는 쇠퇴 는 오랫동안 지속되고, 마침내는 암흑 시대가 다가온다. 이 시기에는 지식은 극도로 위축되고 신학조차도 활발하지 못하며, 그 이론도 아 주 간단하다. 문학은 문맹 상태로 전락하여 거의 침묵 상태로 전락할 수 있다.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건축은 변두리 지 역에서는 회복 속도가 아주 느리고 양적으로도 그리 많지 않고, 아마 보다 중요한 것은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미는 단지 아주 제 한된 귀족들만 애호하였다는 것이다. 이전에 변두리 지역이 고도로 발달한 문화를 이룩한 대업적에 거의 기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생겼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필자는 그러한 차이 때문에 두 지역에서 쇠되의 과정과 정도가 달라 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상이라는 것은 아주 동적이며, 지리적으로

어느 지역이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어떤 학파의 사상 이 실제로 어느 지역에 속하는지 말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예술에 있 어서는, 중심 지역에서의 초기 쇠퇴 기간 동안 변두리 지역의 예술이 발달한다. 왜냐하면 변두리 지역에서는 대개 사태의 발생이 시간적으 로 늦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종교적 힘에 있어 변두리 지역과 중심 지역 사이에 차이가 어느 정 도 있었다는 것은 현재의 연구 목적울 위해 아주 중요하다. 동일한 전환기에 있는 어느 한 사회에서 종교의 발달은 그 사회의 중심 지역 에서보다는 그 사회의 주변 지역에서 지적, 심미적 문화에 대한 지배 력이 더 강하다. 그렇다고 해서 중심 지역에서의 종교의 지배가 약하 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종교의 지배는 비잔틴에서보 다는 서유럽에서, 당대의 중국에서보다는 일본, 한국과 티베트에서, 굽타 시대의 인도에서보다는 아마 내륙의 인도와 동인도 제도에서 더 강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비잔틴, 중국과 인도에서도 종교의 지배는 강하였다. 전환기에 있는 한 사회의 중심부에서보다도 전환기에 있는 주변 지역에서 종교가 더 강력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각기 특수한 전환기에 있는 중심부와 주변 지역 사이에서의 종교의 상대적인 힘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한 일반화는 어렵다. 이제 정치와 정치 제도 그리고 종교의 관계를 살펴보자. 여기서 우 리는 다시 봉건제와 접하게 될 것이다. 정치 제도의 쇠퇴는 새로운 종교의 발생과 관계 없이 오랫동안 지속될지 모른다. 정치적 부활이 일어날 때에 종교가 그 정치적 부활에 실제 관계되어 있다는 것은 어 떤 경우에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부활은 구제국의 부활의 형태를 취하거나 혹은 새로운 제국의 건설의 형태를 취하고, 여기서 종교 지 도자는 항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슬람의 경우에서와 같이 새 로운 국가의 지도자는 원래 종교 지도자였던 경우가 있다. 비잔틴의 경우에서와 같이 그 지도자는 원래 국가의 우두머리였으나, 부차적으

로 종교에 대해 막대한 힘을 발휘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당대의 중 국과 굽타 시대의 인도에서와 같이 국가의 우두머리는 종교와는 거리 가 멀지만 성직자들의 강한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경우 에 있어 종교는 그 국가가 활력을 찾도록 요구하였고, 성직자들은 활 력을 증진시키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몇몇의 주변 지역에서는 이러한 활력을 얻지 못하였다. 이러한 지 역에서의 유령 제국이라는 것은 활력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한 직접적 인 증거이며, 우리는 종교 지도자들이 정치를 부활시키려는 시도에 실제로 관심을 가졌고 그 시도가 실패함으로써 그 지역은 유령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봉건제는 유령으로 전락하였 던 국가의 당연한 (그러나 반드시 필연적이지 않는) 부산물이다. 봉건 제는 구( 舊 )국가와는 상관없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의 원 (原)봉건 관계는 항상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봉건제는 역시 종교와 상관없이 발생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종교가 항상 구국가의 부활을 시도하기 때문이다(종교가 사실 봉건적인 방식의 정치적 부활 을 꾀할 수 없다면). 적어도 서유럽과 일본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이들 사회에서의 종교는 봉건적 관행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있어서 일 부 예술이 종교의 권역 밖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봉건 정치는 종 교의 권역 밖에 있었다. 그래서 종교는, 쇠퇴해 가는 문화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그 쇠퇴해 가고 있는 문화 전체에 정연하고 논리적으로 부과된 형태를 반드시 취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 예술, 어쩌면 사상까지도 역시 부분적으로 종교와는 상관없이 발달하며, 인간 사회의 발달에서 체제의 발달은 한계가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예술의 경우에서보다 정치, 적어도 봉건 정치의 경우에 좀더 명확하게 된다. 정치의 내적인 실체는 윤리아며, 정치가 제도적인 대교회를 건설하는 곳을 제의하고는 종교는 단지 윤 리적 수단만으로 정치적 부활을 꾀한다. 사실상 윤리는 사상과 마찬

가지로 신홍 종교에 의해 효율적으로 커버되어 있다. 봉건제가 바바 리안의 전사단의 윤리 위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이다. 사실상 그 윤리는 아주 간단하고 원초적인 것이어서 토지 사용 권에 관한 단순한 착상 이의에는 봉건적 정치 구조를 만드는 윤리에 아무런 보뎀이 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봉건제와 종교 사이에는 여전히 구분이 있기는 하지만 이 둘은 윤리 분야에서 서로 만난다. .그 러면 봉건제는 일종의 종교인가? 혹은 봉건제와 종교는, 인간 사회가 필요로 하나 아주· 결여되어 있는 어떤 일반적인 특질의 변형들인가? 이 질문은 환상적인 것으로 보일 지 모르나 생각도 해보지 않고 그냥 지나칠 질문은 아니다. 봉건적인 한 사회, 죽 중국의 주에서는 종교와 국가는 하나였으며, 거기서 종교 는 봉건적인 관행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사실상 주에서 윤리 는 바바리안 전사단의 윤리와 갇이 개인적인 성격 문제 그리고 개인 간의 관계에 관한 문제였다. 주의 중국의 성직자 一 귀족들은 이 이의의 윤리는 알지 못하였으며, 그들은 이 윤리를 전작시키고 강화시킴으로 써 몰락해 가는 제국을 부활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다른 사회의 주변 지역의 제국과 같이 이 제국이 유령 제국이 되었다는 것에 놀랄 필요가 없다. 관료제가 궁극적으로는 봉건 계서제를 대신하였기는 하 지만 그러한 윤리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던 중국이 거대한 실질적 세력을 가진 국가 혹은 복잡한 정치 구조를 가진 국가를 발달시키지 못하였다는 것에도 놀랄 필요가 없다. 주는 바바리안의 전사단의 윤리 혹은 그와 아주 유사한 것이 종교 에 의해 조장된 윤리를 가전 유일한 문명 사회는 아니다. 토인비는 그리스의 종교는 바바리안 사회의 여건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종교 였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제우스는 바바리안의 전쟁 지도자였고 다 4) A Stu dy of Hi st o ry, I , 96. 필자의 제자인 Isaac R. Bar fi eld 는 토인비가 생각하였던 것처럼 봉건제와 종교와의 관계를 처음으로 알아냈고 필자는 거

기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필자는 그에게 감사한다.

른 울림피아 신들은 그의 추종자였다. 만약 이 경우에 그들의 개인적 인 관계가 약간 복잡하게 되고, 그들의 윤리 행위가 전혀 믿을 수 없 는 것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같은 현상이 봉건 사회에서도 역시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중국안들과 같이 그 리스인들도 복잡하게 얽힌 정치 제도를 발달시키지 못하였디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이 도시 국가를 초월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 나름대로 정치적으로 제각기 단순하게 형성된 두 문명 사회에서 바바리안의 윤리와 종교에 의해 규정된 윤리 사이에는 차이 가 발생하지 않았다. 거기서 사회 발달은 상당히 조직적이었다. 종교 는 정연하고 논리적으로 적어도 정치 문화를, 어쩌면 그 밖의 다른 문화까지도 포괄하였으며 또한 그 사회의 성장 혹은 부활을 촉진하였 다. 그 결과 어떤 종교는 바바리안의 정신과의 접촉 기회를 잃어 관 계를 끊고 바바리안들이 이해할 수 있고 따를 수 있는 윤리를 제공하 지 못하게 되는 것이 분명하다 봉건제가 발생하는· 지역은 항상 바 바리안들이 정치 세력을 쥐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면으 로 보나 종교가 바바리안이 중십 지역에서보다 그들이 지배력을 행사 할 수 있는 주변 지역에서 모든 면으로 힘이 약하기 때문은 아니다.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 주변 지역에서 종교가 더 강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문제의 종교, 죽 기독교, 불교, 조로아스터교, 힌두교는 바바리안들이 이해할 수 없는 대제국의 정치 구조에 걸맞고 또 이를 요구하는 철학적인 유산울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러한 종교들의 실패는 정치 문화 내에서조차도 아주 국부적이며 특 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의 실패는, 이 책에서 이미 언급하였 던, 뿌리 깊은 이율 배반적인 면을 입증하는 것으로서 대단히 중요 한데, 이는 브라이스가 봉건제와 제국주의의 사이에서 찾아냈던 것이

5) 위 pp. 394-39 6.

다. 그것은 정치가 몰락했다가 부활하는 경향을 봉쇄할 정도로 중요 한것이다. 지적, 심미적 문화가 그 봉쇄에 상당한 정도로 작용하게 되고 전반 적인 문화의 부활은 그 부활이 물질적 - 정치적 영역에서 분명히 시작 되고 난 다음에야 발생하는 듯이 보인다. 이것은 일단 봉건적 처방아 그 정체에 효과적으로 적용되고 사회에서 질서가 충분히 유지되었을 때 심미적, 지적인 문화에서 발생하는 것에 의해 분명하게 입증된다. 심미적인 문화는 극적으로 전면에 나타나며, 심미적인 문화보다도 덜 자유로운 지적 문화가 그 다음에 나타난다. 그리하여 11, 12 세기 서유럽에서 한때 주도적인 역할을 한 국가에 서 봉건제가 절정을 이루었고, 효과적인 사회 질서가 확립되었다• 이 시기는 중세 유럽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고, 건축이 처음으로 성공 가능성을 보여주고 로마법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던 때이다. 지적, 심미적인 업적이 그 절정에 달하였던 다음 2 세기 동안에 봉건 제도는 민족 국가 군주의 새로운 지도력에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보 잘것없는 업적을 남긴 이란도 그의 건축의 발달에 있어서는 서유럽에 필적할 만하다. 그 위대한 시기는 기원후 3 세기, 즉 첫 사산조 시기였 는데, 이 시기 이란에서는 모든 봉건 요소는 실질적으로 그 유명한 제국의 군주의 권위하에 놓여 있었다. 일본에서 이러한 관계를 연대 적으로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회화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기 법이 봉건 질서가 확고하게 자리잡은 후인 15 세기 말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의 건축은 봉건 시기의 초기인 l 心1 l 기 말에 절 정에 달하였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일본의 경우 대개 계기적인 승 계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건축이 이렇게 예의적으로 발달한 것은 중국의 특수한 영향 때문이다. 중국 자체에서는 기원전 9 세기에서 7 세기까지의 주의 봉건 시기에 봉건 수단에 의해 질서가 확립된 사회 에서 예술의 성장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것은 청동을 다루는 기술

인데, 이는 상(商) 말기와 주 초기의 시기를 거쳐 봉건 시기의 절정 기에 강력하게 부활하였던 시기까지 추적될 수 있다 .6)

6) Bernhard Karlgr en , New Stu d ie s in Chin e se Bronzes, Bulleti n of the MIX u(sle9u3m 7) , ofI - FI1a 8r , E특a히ste r 8n 1A-8n8ti, q 9u it5 ie-s9 (O~s ta참 s 조ia .t i sk a Saml ing ar na, Sto c kholm),

사회마다 반복된 이 중요한 발달 순서 때문에 문화의 성장기에서 봉건제의 위치가 중요하게 보인다. 봉건제가 몇 개의 중요한 문명 사 희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중요성이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봉건제는 종교 같은 것이 아니다. 중국의 주에서 봉건제는 종교를 정치에 도입하면서 발생한 정상적인 결과이다• 다론 사회에서 봉건제는 종교에서 무엇인가가 빠 진 것을 말한다. 봉건 사회에서 발생한 예술은 봉건 · 사상과 거의 본 원적인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봉건제는 극단적으로 단순한 사상 이기 때문에 이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술은 종 종 그 시대의 종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고딕 건축의 경우처럼 그 예술은 종교의 거대한 의적 표현들 중의 하나일 수 있다. 정치면 에서도 종교는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다. 봉건제는 종교에 기반을 둔 윤리가 없는 곳에서는 어떤 윤리도 갖지 못한다. 종교가 봉건 윤 리를 뒷받침하지 않는 곳에서는 봉건제는 아마 단지 중요한 순간에만 일반적인 윤리 구조, 죽 종교가 수용하지 못한 바바리안 정신의 윤리 를 강화한다. 봉건 사회에서 종교가 정치 의의 여타의 분야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서유럽의 경우에 이 점은 수세기 동안 국가의 정치 구조보다도 더 잘 발달하였던 교회의 정치적 구조에서 명백하게 나타나며, 성직 자는 서유럽 사회에 있었던 최초의 탁월한 행정가들이었고, 그들은 국가의 관리들보다 훨씬 유능하여 국가논 교회가 싫어할 정도로 그들 의 봉사를 받으려 하였다.

봉건제는 바바리안들, 죽 미개인들을 문명 사회로 끌어들이는 과정 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진 생각이다. 이 말은 봉건 제는 한 문화가 몰락한 후에 그 문화가 부활하는 시기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이 미개 상태에 있을 때인 문명이 처음 발생하는 시기에 속하는 것이라는 가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죽 봉건제는 문화 의 재건 현상 이전의 건설 현상이었다. 만약 이 가정이 옳다면, 이 책 에서 지금까지 취급해 온 대부분의 봉건제, 아니 모든 경우의 봉건제 들은 문명의 창시기에 대규모적으로 발생하여 막대한 영향을 미친 사 건들이 우연히 반복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일본의 봉건제는 처음으로 미개인을 문명 사회로 끌어들 이는 데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봉건제는 문명의 부활기에 있 었던 봉건제의 전형적인 경우가 된다. 이 점에서 볼 때 서유럽의 봉 건제는 전형적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던 사람인 북프랑스인들은 그 전에 어느 정도 문명화되었던 반면에 이미 그 전에 문명화되지 않았던 유럽의 중, 북부 사람들은 완전히 봉건화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

7) 만약 우리가 일본의 중부 지방의 사람과 북부 프랑스의 사람, 죽 초기 일 본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일본의 중부 지방의 사람과 로마 제국과 프랑크 왕국하의 북프랑스인은 봉건 시기 이전에 문명화되었고, 북부 일본의 민족 과 중, 북부 유럽의 민족들은 봉건화의 도움으로 처음으로 문명화되었다고 말한다면, 일본의 경우와 서유럽의 경우를 동일선상에 두는 데는 많은 이론 이 있을수있다.

말하자면 문화가 부활할 때의 전형적 봉건제는 문화가 창조될 때의 봉건제와 거의 같은 것이다. 봉건적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봉건제가 아닌 비전형적인 이란과 러시아의 경우는 놀랍게도 이 이론에 부합한 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전형적인 부활의 경우인 일본보다는 우발적인 반복이 훨씬 적었고 그리고 서유럽과 비교하면 사실상 우발적인 반복 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업과 도시 국가의 정체의 부활 내지는 성장

때문에 비전형적인 봉건제의 경우에는 이런 반복이 없었다. 이 상업 과 도시 국가 정체의 부활 내지 성장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잠시 후에 알게 될 것이다. 비잔틴과 한대(漢代) 이후의 중국에서 봉 건제로 형성되지 못한 사건이 봉건화되어 가는 방향으로 진행된 것으 로 비천 것도 이 이론에 잘 부합한다 .8) 왜냐하면 여기서에서는 정확 하게 봉건화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문화의 몰락이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8) 5 왕조와 12 왕조 사이의 이집트도 물론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연구해 온 몰 락에서 부활에 이르는 전환기 중에서 시차적(時次的)인 순서가 가장 짧은 이 경우에 봉건화로의 움직임이 있었는지에 대해 필자는 회의적이다.

그래서 우리를 난처한 입장에서 벗어나게 하고, 죽 우리가 알고 있 는 모든 것을 만족스럽게 설명하고, 장래의 연구를 위한 뼈대를 제공 하여 문명 사회의 기원에 대한 자료를 찾는 데 지침이 되는, 역사에 서 봉건제의 위치에 대한 과감한 해석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불행 하게도 이 제안을 뒷받침하는 문명의 기원에 관한 자료를 현재 거의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갖고 있는 자료는 달리 해석될 수도 있고, 적 어도 기원 문제와 상반되는 자료도 있다. 그러므로 이 제안은 실험적 인 가정으로만 남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의 자료들을 아 주 주의깊게 검토하는 것은 상당히 홍미로운 것이다. 최초의 중요한 자료는 문명 사회가 발생하였던 구세계의 4 개의 강 유역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의 북서부 북중국에 바바리안들이 침입하여 정착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실제로 고고학적 으로는 처음의 두 지역에서 그들이 분명히 정착하였고, 다른 두 지역 에서는 사실상 정착이 이루어졌다고 되어 있다. 아마 이 네 경우에서 바바리안이 정착을 하였다는 사실을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그 정착민을 이 책에서 봉건재의 발달과 연관지어 사용한

9) 우리는 그들이 구세계의 다론 지역, 다른 지리적 환경을 가진 계곡 지방 혹은 어떤 지역에서 정착하여 문명 사회를 만들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의미의 바바리안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그러나 필자는 그 의문이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최초의 정착인들은 문명 이 발생하기 바로 직전에 사막 지역을 넘어, 혹은 사막이나 또는 초 원이 된 지역을 넘어 그 유역에 정착하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의 이주는 후기 역사에서 몰락해 가고 있는 문명 사회 로 들어간 바바리안의 이주와 유사하다. 그러나 그들이 문명이 발생 하기 훨씬 전에 이주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문명이 발생할 무렵에 그 유역에서는 분명히 원시 사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문명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그러한 사회는 붕괴되었어야 하며, 바바리안의 전사단 같은 것이 성장했어야만 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 바바리안들 은 그들의 원주지에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던 일본과 다른- 지역에서의 바바리안과 조금 유사하다. 그의에도 우리는 강 유역에서의 정착은 단 한번에 걸친 이동이나 일련의 이동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4 대 강 유역에서 나온 초기의 유물로 미루어보아 우리는 초기에 정착된 지역에 다시 새로운 이주민이 들어와 정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소포타미 아의 경우에는 수메르 바바리안이 기원전 3 천년 전의 어느 시기에 있 었던 이미 정착된 이란-셈 계통의 문명 사회를 유린한 다음에 영웅 시대가 도래하였다고 크레이머 Kramer 는 주장한다 .10) 우리는 이러한 연구를 잘 알고 있으며, 브런데이지도 이 연구에 기반을 두어 봉건 시대 다음에는 영웅 시대가 따른다는 주장을 할 수 있었다 .II) 토킬드 제이콥슨 Thork il d · Ja cobsen 의 메소포타미아의 기원에 관한 가치 있는 연구도 역시 영웅 시대와 침략의 시대가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12) 제이콥슨과 크레이머가 제시하는 연구 속에는 10) New Light on the Early Hi st o r y of the Ancie n t Near East, Americ a n Jo urnal of Archaeolog y, Lil (1948), 155-164. 11) 위 pp.1 51-153.

12) Prim i tive Democracy in Anci en t Mesop o ta m i a, Jo urnal of Near Easte r n Stu die s , II ( 1943), 159-172.

최소한 두 시대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초기의 어느 시기에 메소포 타미아에 들어간 정복자 혹은 적어도 이주자들의 물결을 암시하는 것 이다 .13) 만약 메소포타미아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였다면, 아마 유사한 일이 다른 강 유역에서도 발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매번 침략 이 있은 다음 봉건 시기가 온다면, 정치 구조를 강화하는 효과를 가 진 반복된 봉건적 경험이 구세계의 최초의 4 대 문명 사회의 기원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는지의 여부는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필 자는, 문명 사회는 다윈 식으로 미개 사회가 조금씩 변화하면서 발생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에 대한 설명을 위해 서는 인과 관계에 선행하는 최초의 동인이 필요하다. 봉건적인 혹은 그 와 유사한 방법으로 내집단과 의집단의 반복된 투쟁이 강화되었다는 점이 그 인과 관계에서 일련의 최초의 동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4)

13) 그리하여 크레이머는 수메르인들의 침략에 대한 핵십적인 증거를 흔히 우 르크 Uruk 8 기와 우루크 7 기라고 알려진 메소포타미아 지층에서 발견된 고 고학적인 형태상의 단절에서 찾고 있다. 다른 유사한 단절이 메소포타미아 의 초기 (그리고 후에 )에 일어나며, 다른 4 대강 유역에서도 각기 몇 번의 단 철이 있었다. 14) 다른 중요한 인자를 알기 위 해서는 필자의 Concep t of the Cong lom erate My th, 74-8 1 을 참조.

불행하게도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문명의 발생 시기에 봉토였을, 강 한 정치 단위가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 또한 최초의 4 대 문명 사회의 어디에도 문명의 발생시에 그러한 정치 단위가 있었다는 증거가 없 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지방 정부의 중요 단위였던 〈놈 nome 〉은 제 5 왕조와 제 12 왕조 사이에 예의적으로 강한 정치적 실체였다는 것이 알 려졌다 .15) 이의 예의적인 특성은 그들 역사에서 유사한 시기에 있었던 다론 사회의 지방 단위와 비교하면 명백해전다. 그 당시 놈은 아주

15) 위 pp. 151-153.

강하였기 때문에 한때 봉토였던 일본과 프랑스의 지방 단위를 연상케 하고 놈도 역시 봉토가 아니었겠느냐고 의심케 하였다. 만약 그것이 봉토였다면, 그것은 기원전 4 천 년 내지 5 천 년 전에 이집트 사회가 발생하였던 시기에 속하였을 것이다 .16) 제이콥슨의 이론에서 그가 말하는 영웅 시대는 메소포타미아의 종 교가 처음으로 형성되었을 때 발생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17) 우리 16) 놈이 얼마나 오래되었는가의 문제는 의견의 차이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토론할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엘리 제 바움가르텔 Eli se Baum g ar t el 의, 놈은 만들어진 지가 상당히 오래되었다 는 견해가 이 견해에 대한 스타인도르프의 반박을 최근에 다시 재개시켰다 는 것은 사실이나, 그녀의 주장은 뉴베리와 다른 학자들의 견해롤 압도하지 못하였다. 하(下)이집트의 놈이 상당히 뒤늦게 재조직되었다고 하는 것은 선사 시대에 하이집트에 놈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며, 그 반면에 상(上)이집트의 많은 놈들은 상당히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므로 선사 시대에 이미 상이집트에 놈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 문제에 관한 주요 업적 으로는 다음과 같다. Eduard Meye r , Geschic h te des Alt er tu m s, II -I , 2nd edn.(Berlin , 1928), 176-1 78 ; G. Ste i n d orlT, Di e ag yptisc hen Gaue und ihre pol it isc he Entw ic k lung , Abhandlung en der sachsisc hen Akademi e der Wi ss enscha/ten , XXWII, no. 25(Leip zig, 1909), 8781T . ; W. M. Flin d ers Pet- rie, The Nomes of Eg ypt, Briti sh School of Archaeolog y in Eg ypt, St u- die s , II (London, 191l ) 22 ; P. E. Newberry, Some Cults of Prehis t o r ic Eg ypt, Annuals of Archaeology and Anth r op o log y, V( l91 2-1913), 132ff . ; ide m, Note s on Some Eg yptian Nome Ensig ns and the ir Hi sto r i ca l Sig -nifica nce, Anc ien t Eg ypt, 1914, pp. 51T; A. Moret, Une list e des nomes de la Haute - E g ypte, Comp tes rendus de fA cademi a des Inscrip tion s et Belles-Lett re s, 1914, p. 565 ; G. Benedit e, Jo urnal of Eg yptian Archaeolog y, V( l91 9), 2251T. 모레 More t는 뒤에 만들어전 것으로 밝혀진 것 의의 최초 의 놈은 사람들이 정착하고 씨족제를 포기하여 완전히 토지에 기반을 둔 조 직을 하면서 발생하였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 (From Trib e to Em pire , pp. 129-130 ; The Ni le a nd Eg yptian Ci vil iza ti on , pp. 40-5 3). 드리 오통 D ri o t on 과 방디르 Vand i er 는 중앙 정 부의 통일 체제하에서 놈의 행정 에 관한 명확한 설명을 해주고 여러 다양한 놈의 시기에 대한 논쟁을 잘 요약 하고 있다 (Les pe up /e s de fO r ien t Medit er raneen, II : L'Eg ypte, pp. 43-47). 17) .. Primitive Democracy in ancie n t Mesop o ta m ia, pp. 167-172.

는 이 문제에 더 깊이 파고 들어갈 필요 없이 여기서 중단해야 한다. 제이콥슨이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연구하였으며, 이는 그의 주장의 두 전제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전개되고 있 는 논쟁에 있어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우리가 제시한 문명의 생성기의 봉건제를 종교가 생성되는 것과 같은 현상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후기의 역사에서 봉건제와 종교 사이의 관계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주에서 발생했던 것과 아주 유사하다. 또한 적어도 문명 사회가 발생한 강 유역의 지리적 여건과 기후는 봉건 조직 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 강 유역에서 인 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운하와 제방에 의존하여 매년 정 기적으로 일어나는 대홍수의 피해를 막고 특히 비가 거의 오지 않거 나 전혀 오지 않는 기후를 가전 지역에서는 농업을 위해 물을 저장하 여 사용하여야 했다. 그래서 봉토 내에서의 엄격한 규율은 운하를 효 율적으로 이용하는 데에 필요한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괴 니히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토양을 아주 비옥하게 유지할 수 있게 하는 훌륭한 운하의 발달은 오로지 봉건 체제하에서만 가능하 다. 고대 오리엔트에서 방대한 운하와 봉건제는 분리할 수 없게 서로 결합되어 있다.〉 18) 여기에 치수 사업은 봉건적인 주의 경제의 본질적 인 특성이라는 라티모어의 주장도 있다 .19) 물론 괴니히의 주장은 분명히 너무 지나치다. 만약 그의 주장이 전 적으로 옳다면, 강 유역에서는 봉건 체제 이외에는 어떠한 체제도 있 울 수 없었거나, 또 실제로 없었어야 한다. 그러나 운하, 제방 그의의 다른 치수 사업을 유용하게 사용하였던 다론 체제가 있었다. 또한 강 유역의 일부 지역의 약한 체제는, 특히 메소포타미아 치수 사업의 실 18 ) F. W. Konig , ifltes te Geschic h te der Meder und Perser ; Der Alt e Orien t, XXXf il, Parts 3/4(Leib z ig , 1934), 13-14. 19) Inner As ian Fronti er s in Chin a , pp. 40-41, 317, 370-3 76.

패로 재난을 초래하게 되었고, 봉건 체제는 초기의 정치 수단이어서 후에는 효율적인 치수 사업을 하기 위한 더 강력한 다른 수단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봉건 사회의 물질적 생존 수단의 보호와 발달에 대해서 이 책에서 지금까지 보여왔던 것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최초의 문명 사회에서 생존 수 단의 일부로 물을 관리하기 위한 특별한 조치는 그러한 사회에 나타 난 봉건제가 특별한 성격을 지녔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필 자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이 책에서 제시되었던 봉건 사회의 핵 심적인 윤리 개념에 어떤 수정이 가해져야 한다곤 주장하는 것은 아 니다. 문명 사회가 처음 형성되는 단계에서 봉건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가 있다. 이 자료는 메소포타미의 경우에서만 발견되나, 전반적으로 자료가 부족하기 때분에 이 자료에 상당한 비 중을 둘 수밖에 없다. 이 자료에 의하면 영웅 시대에 바바리안 전사 단의 지배 아래에서 도시 국가 정체가 직접 발생하였다. 이 당시에 봉건적 발달을 했을 가능성을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크레이머와 제이콥슨은 크레이머가 말하는 수메르인의 정복 다음에 나타나는 영 웅 시대인 〈엔메르카르-루갈-반다-길가메쉬 Enmerkar-Lug al -banda- Gi lga mesh> 시 대쯤에 도시 국가가 발생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한 바 바리안의 지도자인 길가메시는 사실 우르크시의 군주 Lordi료 여겨졌 다. 몇몇 서사시의 자료를 이용한 제이콥슨은, 길가메시는 그의 권력 을 하나는 원로들의 회의체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 시민의 회의체인 그 도시의 두 회의체와 나누어 가졌다고 주장한다 .21) 만약 이 주장이 옳다면, 그것은 봉건제가 아니라 봉건제를 대신해서 어떤 다른 발달 이 있었던 것같이 보인다. 그리하여 우루크(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다 20) New Light on the Early Hi st o r y of the Anci en t Near East, p. 163. 21 ) Prim itive Democracy, pp. 165-1 66.

른 도시의)에서 보다 작은 회의체 assembl i es 는 전사단, 죽 지도자에게 도움을 주고 조언을 하는 집단으로부터 유래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봉건 체제에서 봉신들의 회의체 (council 또는 cour t)로 되었다 . 대회의체는 바바리안의 전 자유민의 집단을 계승한 것인데 이는 그들 이 바바리안의 전사 집단으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서 명확하게 알 수 있다 . 22) 봉건 체제에서 이 전사들의 집단은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종종 원래의 지도자와의 관계는 끝이 나나 지도자의 봉신의 봉신과 그들 상호간에 봉신이 되는 배후 봉신 집단이 된다. 프랑크인들의 캄푸스 마르티우스 Cam p us Mar ti us 는 바바리안의 자 유인 전사단의 총체이며 후에 봉건화되었다. 호메르 시대의 아고라는 그러한 유의 집단의 예인데, 이 집단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아테네 의 에클레지아 Eccles i a, 스파르타의 아펠라 A p ella 와 같이 도시의 대회 의체(민회)가 되었다 _ _그리고 유사한 우루크의 회의체와 마찬가지 로 이 두 회의체는 초기에 그 도시의 전사단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 스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제도는 아주 유사하였다. 후기 그리스 사 회의 어떤 특성들은 그리스 사회가 봉건화되지 않음으로 생긴 직접적 인 결과로 생각되었다. 짐메른은 그리스는 봉건적인 과거가 없기 때 문에 그리스에서는 계급 차이가 유럽에서보다 덜하다고 주장한다 .23) 물론 논란이 많고, 만약 그랬다고 할지라도, 메소포타미아가 이 점에 서 그리스롤 닮았는지는 해결되지 않은 채 숙제로 남아 있는 문제 이다. 그리스는 그 당시 세계의 대해상 왕국이었던 미노스를 계승한 국가 22) wPrim i tive Democracy, p. 1 64, n. 4. 23) A. E. Zim mern, The Greek Commonwealth , 3rd edn.(Oxfo rd , 1922), pp. 89-92. 집메론은 주로 헤시오드 Hes i od 에 의존하여 〈중세 그리스 Med i eval Greece 〉 를 서술하고 있다(pp . 93- 9 6). 그러나 필자는 그가 서술하고 있는 촌락 생활은 메로빙거 시대의 갈리아 지방의 촌락 생활이 아주 다르다는 데 회의적이다.

중의 하나이다(미노스의 해상 왕국을 계승한 국가는 둘이었는데, 첫번 째 계승자는 페니키아이고 두번째 계승자는 그리스임). 이것으로 그리 스의 어떤 지형적 특성과 더불어 그리스 도시들이 다른 정치 형태보 다 우월하고 강력하게 성장한 것은 그리스가 생성되면서부터가 아니 라 초기 역사에서부터 결정된 요소로 생각되어 왔다. 비슷한 현상이 초기 메소포타미아 역사에서도 발생하였다. 메소포타미아의 후기 역 사 시대에서 상업의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이 지역은 이 지역 의에서 생산되는 물품이 필요해서 일찍부터 상업이 중요시되었다. 이것은 도 시 국가의 정체가 그러한 상업의 발달 과정에서 발달하였고, 그 도시 국가가 봉건적인 형태를 압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 유역 지방 은 아주 특수한 환경을 갖고 있었다. 이 강 유역 지방의 충적토와 끊 임없는 물의 보급은 식량과 다른 산물을 충분히 공급하였으나, 식물 성 산물과 광물성 산물의 대부분 혹은 전부가 부족하였다. 그래서 만 약 메소포타미아가 초기부터 잉여물을 교역하여 그들에게 부족한 것 울 보충하였다면, 이는 우리가 예상한 그대로이다. 그리고 만약 메소 포타미아에 대한 이러한 주장이 타당하다면, 원시 사회에서 문명 사 회가 발생하였던 다른 대하(大河) 유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주장 울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모든 강 유역 지방에서는 봉건적인 형 태 대신에 도시의 형태가 출현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과 이집트의 경우는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마스페로는 중국의 주의 봉건 정체의 단위에 대해 설명하면서 귀족들 의 성(城)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성 주변에 농민들의 주거지가 운집 되어 적이 침입하였을 때 그곳으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단위 는 단지 촌락 v ill a g e 이 었다. 후에 인구의 증가로 분화되 어 도시 city, 아니면 읍(邑 t own) 이 발생하였으나 여전히 그 귀족의 지배하에 있 었다. 민족 국가가 발생하면서 봉건적으로 발달할 수 있는 여건으로 분명히 변화된 이후에도, 이곳은 여전히 아주 작은 읍으로 남아 있었

다 . 2 4 ) 이집트에서도 역시 촌락 인구는 일종의 방책(防橘) 같은 곳에 피신을 하였다, 왜냐하면 초기 정착 시대에 사막의 아랍 유목민들이 계곡의 농업 지역을 끊임없이 침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방책 이 봉건 귀족에 의해 유지되었디는· 근거가 없다. 더 중요한 촌락에는 사루 Saru 라는 연장자격인 족장이 있었고, 이러한 촌락들은 오래 전부 터 주변에 있는 그보다 못한 촌락을 지배하는 정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지역을 기초로 하여 지역적인 지배가 발달하여 씨족의 혈연 관계를 대신하였다. 이들 지역 중에는 놈이 된 곳도 있다. 모레와 에 드워드 마이어 Eduard Me y er 2” 는 초기 이집트에 대해 설명하였다. 물 론 중국의 주와 이집트에 대한 이 두 설명은 대개 추측에 의한 것이 지만, 이 두 설명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봉건 귀 족fe udal lord 이 발생하였는가 안 하였는가의 차이이다. 그러나 우리 는 실제 봉건 중국에는 귀족이 있었고, 이집트에는 없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게다가 놈은 봉토에서 발생하였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상반된 증거 자료에 봉착하게 된다. 초기 이집트와 중국에 대해 일반적으로 고려할 수 있고, 초기 대하 유역 사회의 침 입의 빈도를 보여주고, 물의 통제가 필요한 물질적 기반 위에서 성장 한 문명 사회의 · 급박한 상태를 나타내는 한 자료는 봉건적인 발달 가 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제이콥슨의 발견과 더 잘 알려진 유사한 그리스의 예에서 추론된 것과 강 유역 지방에 위치 한 사회의 상업 필요성을 고려하는 것을 확인해 주는 다른 자료는 도 시가 초기의 효과적인 문명 사회의 정체였을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 다. 강 유역 지방의 초기 문명 사회는 실제로 사정에 따라 달리 발달 하였다고 결론지울 수 있는가? 필자는 단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 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은 4 대 문명 사회 모두에 24) La Chin e anti qu e(Paris, 1927), pp. 24-: 25. 25) 위 주 16) 을 참조.

서 상당히 일찍 도시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정치 관계에서 봉건 원리가 작용했울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중국의 경우 도시와 봉건 원리가 결합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두 원리가 다른 강 유역 사회에서도 결합되었으나, 각 사 회는 그 사회 특유의 형태로 그 원리들이 결합되어 경우에 따라서 그 두 원리의 상대적 중요성이 달랐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만약 제이콥슨의 주장이 옳다면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도시 원리가 봉건 원 리를 지배하게 되었던 반면에, 중국에서는 봉건 원리가 도시 원리를 지배하였다 .26)

26) 제 5, 6 왕조에서는 물론 이집트가 발생하였을 때도 봉건제가 존재하였다고 생각하는 자크 피렌느Ja c q ues Pir e nn~ 봉건제는 상이잡트, 죽 계곡에 한 정되었고令 그 반면에 하이집트인 델타 지역에서는 도시 국가가 지배적이었 다고 주장한다 (H i s t o i re des ins tit ut i on s et du droit pri v e de fa nc ien ne Eg ypte, l, Brussels, 1932, 51-104).

문명의 최초의 주기가 끝나고 몰락의 단계에 들어간 후기의 역사에 서 봉건 정치 원리와 도시 국가의 정치 원리는 상호 대립하게 된다• 후기 시대에는 도시의 발생으로 봉건 관계가 다른 관계로 대치되나 물론 도시의 성장이 이 대체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다. 키에프 러시 아와 갑은 비정상적인 경우에 도시 국가의 발생은 예의적으로 일찍부 터 급속히 성장한 상업 때문에 봉건 관계가 형성되는 것보다 더 빨랐 다는 것을 의미할지 모른다. 그리스-로마 세계와 중국과 인도 세계와 의 상업은 파르티아 시대에 이란-메소포타미아에 전파되었고, 그것이 이란에 완전히 발달한 봉건 체제의 발달을 방해하는 수단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키에프 러시아와 파르티아 이란의 두 상업은 모두 그 지역에서 자생한 것이 아니라 타지에서 들어온 의래적인 성격을 상당히 많이 지니고 있고, 이러한 성격 때문에 아마 도시와 봉건제 사이의 정치 원리의 차이가 커졌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 시대에 들어 와서도 봉건 정체하의 상업에는 항상 의래적인 성질이 있었다. 봉건

체제하에서 이루어졌던 대규모 원거리 교역은 봉건 시대 이전에 구제 국과 그 국경 지방에서 행해졌던 상업이 계속되었던 것이거나 아니면 이를 부활한 것이었다. 봉건 서유럽에서조차도 주요 교역은 이탈리아 에서 그리고 이탈리아가 비봉건적인 비잔틴과 서남아시아와 경제 관 계를 맺고 있던 시대에 발생하였다. 최초의 문명 사회에서의 교역은 그러한 의래적인 요소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사회의 근거지였던 강 유역 지방에 생필품을 공급 하기 위하여 교역이 발생하였으며, 그 교역과 교역을 지배하는 통제 의 중심지가 바로 그 사회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 국가의 정체 원리와 봉건 정체 원리 사이의 차이가 이 사회에서는 실제 나타 나지 않고 잠정적으로 내재되어 있었으며, 단지 시간이 경과함에 따 라 그 차이가 실제로 나타나게 되었다. 현재의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만약 중국이 여전히 문명의 최초의 주기에 놓여 있었다면 우리가 상정하고 있는 주의 정체가 도시-봉건제의 정체라는 것은 이 이론과 잘 부합한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다면 주의 교역은 옛날부터 내려왔거나 부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주는 의래적인 요소 룰 가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주에게 의래적인 요소를 전해 줄 수 있었던 황하 주변 어떤 곳에도 문명 사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2 7)

27) 보다 멀리 떨어전 곳으로는 인도,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으로는 메소포 타미아와 같은 지역이 있었다. 그래서 이 주장에는 약접이 있다.

주에게 교역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 도시에 대한 봉건제가 도시 국가보다 우세하였다는 것은 예상되는 바였으며, 이 두 원리 사이에는 인지할 만한 대립이 없었다. 최초의 문명 사회에 대해 이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요소가 하나 더 있다. 봉건 원리는 도시 국가 정체의 원리보다 우선하고 더 본질 적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역사 시대에는 봉건제가 보다 확고하 게 자리잡은 곳은 어디에나 봉건제가 도시에 우선한다. 봉건제가 발

생하는 곳에서 봉건 원리는 문명 사회가 부활하는 데, 그 사회가 완 전히 몰락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그 사회의 구성원이 자급 자족적인 수준에서 삶을 영위케 하는 데 기본 요소였다. 그러나 도시는 생존 수단이 이미 오래 전에 확립되고 단순한 생존 수단 이상의 물건이 필 요하였을 때인 후기에 발생한다. 그래서 도시의 성장은 생존을 하기 위한 단계를 넘어선 시대를 의미한다. 이것은 최초의 문명 사회에서 도 마찬가지이다. 그 문명 사회는 교역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살아남 아야 한다. 그래서 만약 그 문명 사회가 봉건 수단을 통해 확실히 살 아남을 수 있다면, 그 문명 사회는 도시의 정체를 갖기 이전에 봉건 정체를 가진다. 그러나 봉건제가 실제로 문명의 창조에 일익을 담당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위의 주장에는 없다는 것을 필자는 유감스럽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위의 주장은 봉건제가 문명의 창조에 일익 울 담당하였다고 하더라도 봉건제가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만을 보여 준다. 봉건제가 일익을 담당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증거가 더 필요하다. 그러므로 역사에 있어 봉건제는 몰락하는 문명의 부활 을 위한 그리고 이전에 문명화되지 않았던 새로운 민족에게 문명을 전파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정치 수단이라는 위치를 가진다. 봉건제 의 위치는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위치, 죽 문명의 창조 과정에서 어 떤 역할을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입증할 수 없다. 일관성이라는 말은 이 연구에서 넓고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일관성이란 어떤 부류의 사물, 실체 혹은 사건이 어떤 중 요한 면에서 서로 일치하는 형태를 지칭한다.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 는 일관성은 문명 사회의 주요 역사적 발달 과정에서 발견된다. 그 과정을 좌우하는 원인은 분명히 대단히 복잡하고, 그 과정의 형태가 일치하기는 아주 어렵다. 아마 사회가 발달하는 데 있어 근본적인 것, 다시 말해 아주 단순한 사회 관계에서는 좀 쉽게 일치할 수 있을 것

이다. 우리는 그 관계를 주목해야만 한다. 주된 일관성이 어떤 것이었 나 알기 위해서 필자는 우리들의 연구 가이드로서 아주 범위가 아주 넓은 기준을 제시하여 몇 가지 중요한 일관성들의 준거로 삼았다. 일 관성은 역사가돌의 특수한 경험에 비추어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고 할 수 있는 반복적인 형태이다. 그러한 일관성을 보여주는 사건들 의 반복적 진행 과정은 같아야 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비슷하여야 한다.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봉건제를 주된 예로 사용하면 서 역사에서 일관성의 개념을 실체화하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롤 하는 데 있어 봉건제는 아주 유용한 예가 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행함으로써, 사회가 발달하는 원인에 대한 애매한 문제가 어 느 정도 규명될 수 있고, 동시에 역사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일관성들 이 정형화된 형태가 될 수 없는 몇 가지 구체적인 이유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밝혀짐으로써, 생물학과 물리학에 사용되 논 방법과 비교될 만한 역사와 사회 과학의 어떤 연구 방법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제시된 기준에 의하면 봉건제는 분명히 역사에서 나타나는 몇 개의 중요한 일관성들 중의 하나이다. 또 문명의 주기 운동은 또 다른 중 요한 일관성 중의 하나이다. 총체적으로 보면, 문명 사회가 몰락 다음 회복하는 것은 우리가 여기서 연구한 사례들에서 상당히 일관되게 나 타난다. 지식의 창조력이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발달된 문명이 쇠퇴하 고, 후기에는 정치(그리고 경제 제도) 구조의 해체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그리고 문화가 상당히 쇠퇴한 단계에서 그 사회는 구 문명의 중심부와 구문명의 외곽에 놓인 변두리 지역으로 나누어지는 데, 전자는 문명이 완전히 몰락하지 않으며 또한 아주 급속히 문명이 다시 회복되고, 후자의 경우는 정치 분열이 일어나고 문명은 일반적 으로 완전히 몰락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관성이 사실상 지금까지 연

구된 모든 사례에까지 확대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주는 두 지역으로 나누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 중국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몰락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달리 시 작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주시 대의 회복이 있기 전에 몰락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초기의 중국 사회는 다른 문명 사회의 봉건화된 변두리 지역의 발달 과정을 아주 비슷하게 밟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중국의 경우에서 이러한 발달 과 정을 거친 모든 사례들에 적용될 수 있는 새롭고 넓은 의미의 일관성 울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발달된 문명이 몰락하지 않은 채 급속한 회복을 한 다른 문명 사회에서 나타나는 발달의 일관성과 유사한(어 떤 면에서는 유사하고 어떤 면에서는 상이한) 일관성이다. 그래서 역사에서의 일관성은 서로 중복되나 약간 불규칙적이다• 전 체적으로 생각하면 문명 사회들은 몰락과 회복이 주기적으로 나타난 다는 점에서 상당한 일관성을 보이고 있으나, 모든 경우 다 이 일관 성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어떤 사회는 더 몰락하고 어떤 사 회는 덜 몰락한 것으로 구분한다면, 두 개의 새로운 일관성이 발견될 것이고, 이중의 하나는 전체적으로 생각된 사회 일관성의 범주에서 벗어날 것이다. 이러한 유의 논쟁을 더 심화시킬 수 있다. 둘로 나누 어진 문명 사회 중의 한 사회는, 나누어져 새로운 일관성을 다시 만 들어낼 것이다. 이 지역은 이전의 바바리안 지역에 있던 봉건 지역과 이전의 구제국의 변두리 지역에 있던 봉건 지역이다. 그러나 한대 이 후의 중국 사회는 이전의 변두리 지역에서 봉건 지역이 나타나지 않 는데, 이것은 또 다른 불규칙적인 일관성인 것이다. 문명 사회의 다른 지역, 죽 비봉건화된 지역도 역시 새로운 정부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있는 지역과 간접적으로 지배되는 지역으로 세분할 수 있으나 이것은 여기서 연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장에서 간단하게 살펴본 심미적, 지적 문화의 발달 과정은 일관성과 결부하여 연구하였으며 여기서는

상당수의 새로운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심미적, 지적인 발달에서 찾을 수 있는 일관성들은 정치 발달에서 찾을 수 있는 일관성과 일치하지 않고 또한 이들 일관성끼리도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일관성들은 다론 면에서 보면 일치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같은 사회들의 발달 구조를 하나의 기반에서 분석을 한다면 다른 기반에서 분석을 하였을 때 발견되는 일관성들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다시 갇은 사회를 수직적인 관 점에서 살펴본다면 제도와 운동 등과 같은 것에서 일관성을 찾을 수 있으나, 이것들은 보다 넓은 안목에서 본 규모가 큰 제도들의 사이에 서 나타나는 일관성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역 사의 중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관성은 구조적으로 불규칙적이다. 이 것은 마치 문명 사회의 역사는 일관된 형태에서가 아니라 여러 형태 에서 발달하는 것같이 보이게 하는데, 각 형태가 하나의 발달 과정이 며, 모든 형태가 개개의 사회에 일률적으로 사용될 수 없는 것같이 보인다. 여러 사회 중에는 어떤 한 형태, 또는 하나 이상의 형태가 완 전히 결여된 사회가 많이 있으며, 일률적인 형태가 아니라 약간 불규 칙적인 형태가 부여되어 있다. 일부의 역사 과정에는 하나 이상의 형 태가 이용될 수 있고 그래서 물론 발달 과정의 차이들 속에는 넓게 보면 서로 일치하는 점도 있기도 하지만 사회가 서로 다르면 아주 다 . 른 발달을 하게 된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 그 형태들을 정형화한다 는 것 자체는 아주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언급하였던 바와 같이 그 형태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형태는 시간과 지역(지속 기 간과 지리적인 지역)에 따라 규모가 다르고 이들이 나타나는 모습(사 건의 발생 순서)은 사회에 따라서 약간 다르다. 때로는 그 형태를 일치시킬 수 있는 서로 다른 형태 또는 서로 다 론 양식 때문에 사회를 연속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우 리가 전보적인 일련의 사회들을 비교할 때 발생하는데, 이때의 전보

적이란 민족 국가의 군주가 제국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의미이다. 그 러한 일련의 사회들이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분명 히 그렇지 않은 사회도 있다. 민족 국가의 영토 확장의 원인이 봉건 적이냐 비봉건적이냐 하는 차이에 따라 대체로 규정된다는 것은 일관 성 자체를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과 대체로 부합한다• 필자는 이것이 문명 사회의 역사가 가진 일종의 형태학 mor p holo gy 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역사에서 반복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나, 역사에는 전혀 반복이 없고 일관성이 전혀 없 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일관성 내의 비규칙적인 요소 들은 문명과 사회가 사회적 또는 문화적 수준에서 똑같은 단일한 힘 의 산물이 아니리는 명제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이 와는 반대로 규칙적인 요소들은 문명과 사회의 전보에 영향을 끼치는 여러 원인들이 통일되어 가는 경향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 러한 여러 원인들은 통일되어 가는 경향이 있으나, 완전히 통일되는 것은 아니다. 그 원인들이 통일되어 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사회 혹은 문명의 전보에 대한 일원적인 견해가 왜 발생하였고 그 견해가 왜 지지를 받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 통일이 완전히 이 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왜 일원적인 견해가 지지를 받지 못하 는가를 설명해 준다. 현재 주로 인류학자들간에 문명의 발생 원인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 고 있다. 이 논쟁은 콩트와 스펜서에 반대하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 는 사건은 주로 그 사회에 원인이 있다고 하는 뒤르켐의 주장으로부 터 시작되었고, 28) 그 이후로 그 논쟁은 사회적 또는 문화적 수준에 28) The Rules of Soc iol og ica l Meth o d, 8th edn., S. A. Solovay and J. H. Mueller(tr a ns.), G. E. G. Catl in( ed.) ( Ch ica go , 1938), pp. 101-102, 107-l08.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해서 가장 공헌을 많이 한 사람은 크뢰버이며, 1917 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그의 자료의 대부분은 그의 저서 The Natu r e of Cult ur e(Ch ica go , 1952) 의 제 1 부에 집적되어 있다. 원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의 II 항과 12 항은 새로이 출판되었다. 이의에도 그의 저서 Con- figu rati on s of Cultu r e Growl 底 직 , 간접 적 으로 이 문제 에 대 해 다루고 있 다. 다른 연구서들은 다음과 같다 : David Bid n ey, On the Concep t o 「 Cul­ tur e and Some Cult ur al Fallacie s , Americ a n Anth r op o log ist, XLVI (19 44), 30-4 4 ; Leslie A. Whit e, The Exp a nsio n of the Scop e of Scie n ce, Jo urnal of the Washin g t on Academy of Scie n ces, XXXVII (19 47), 180-2 10 ; ide m, The Scie n ce of Cult ur e(New York, 1949) : Edward W. Str o ng , A Qu es- tion of Inte r pr e ta t i on , Americ a n Anth r op o log ist, L( l94 8) , 216-2 24 ; A. Kroeber, Whit e's Vie w of Cult ur e, Americ a n Anth r op o log ist, L( l94 8), 405-4 15 ; J. H. Ste w ard, Cult ur al Causality and Law, Ameri ca n Anth r o- pol og ist, LI (19 49), I-27 ; A. L. Kroeber, Confi gu rati on s, Causes and St. Aug u sti ne , Americ a n Anth r op o log ist, LIII ( 1951 ) , 279-2 84 ; Rushto n Coul-born, Causes in Cult ur e, Americ a n Anth r op o log ist, LIV (l95 2), 112-116 : Phil ip H. Bag b y, Cultu r e and the Causes in Cultu r e, Americ a n Anth r o- po log ist LV(1953), 535-554 : 지영적이나 중요한 연구서로는 다음과 같다. Frederic k J. Tegg a rt, Theory and Processes of Hi st o r y( Berkeley, 1941), pp. 77ff . ; Sid n ey Hook, The Hero in Hi st o r y ( New York, 1943) : Causalit y, Lectu r e Deliv e red befo re the Phil oso p h ic a l Unio n , Univ e rsity of Califo rn ia , G. P. Adams(ed.), J. Loewenberg, and S. C. Pepp e r(l,J e rkeley, 1932). 이 연구서의 일부는 원인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으나 필자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두가 인정하고 있듯이 원인 문제는 밝히기 어려운 것이라는 아주 평범한 사실에 집약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이유 때문에 원인 문제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가능성, 규칙성 혹은 그와 유사한 개념을 연구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데 필자도 동의한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 에 보다 광범위한 원안의 개념을 잊어서는 안 되며. 아무리 어렵다고 할지 라도 여기서 우리가 전체로서의 사건을 다루는 경우에서와 갇이 원인의 개 념이 필요한 곳에서는 그 개념을 사용하여야 한다. 필자가 알고 있는 원인 의 개념에 대한 가장 건설적인 비판은 원인의 개념과 분리할 수 없는 존재 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Loewenber g의 Causalit y, pp. 3-37 를 참 조. 원리는 결국은 상식에 부응한다는 격언은 참으로 좋다고 필자는 생각한 다. 그래서 우리는 원인을 여전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사용하여만 한다고 필 자는생각한다.

서만 원인을 찾는 극단적인 일원주의자와 생물학적, 물리학적 수준에 서 출발하여 그 원인을 찾는 극단적인 환원론자를 피해 가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이 논쟁이 활기를 가지려면 사회와 문명의 일관성과 생

물학적, 물리학적 세계의 일관성이 비교되어야 한다. 생물 혹은 물질 세계는 사회적, 문화적 혹은 사회-문화적인 세계보 다도 훨씬 더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사회적 세계에서의 주기적 과정 은 생물적, 물질적 세계와 거의 같은 반복을 할 수는 없다 . 29 1 물질적, 생물적 세계 둘 다 아주 특칭적이고 반복적인 과정을 창출하였다. 물 질 세계의 과정은 많은 파생된 전동과 더불어 주요한 천체의 주위를 도는 위성계의 주기적인 순환 운동 과정이다. 생물 세계의 과정은 종 의 출산, 성장과 죽음에 의해 개체의 조직이 계속하여 유지되는 재생 산 과정이다. 물질 세계의 반복이 생물 세계의 반복보다 훨씬 더 철 저하다는 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다 .30) 아마 7 천 년 전에 문명 사회가 주기적으로 홍망하는 과정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명 사회 의 주기는 생물 세계의 주기와 비교하면 일순간에 지나지 않으며, 물 질 세계와 비교하면 일순간도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순간의 반복 울 생물적, 물질적 세계의 반복에 비교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 그러나 각 시대를 비교함으로써 얻은 단순한 주장만으로는 사회적 세계의 반복의 형태의 다양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아마 각 시대를 비 교하는 것까지도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복잡한 과 정이 있으며, 이는 세 세계의 구조적인 관계에 기인한다는 가장 명백 한 증거이다. 우리가 물질 세계의 한계를 알 수 없음으로 다음 주장 이 참정적일 수밖에 없으나, 필자는 그 주장이 사실이며 아주 중요하 다고 생각한다. 유기적인 세계에서 가시적인 전화가 일어나는 변화의 원인은 환경 ,31) 죽 본질적으로 물질적 환경이며, 물질적 환경은 또한 29) 앞의 주에서 열거한 연구서에서는 여기서 사용한 세계 world 라는 용어 대 신에 수준 level 을 사용하였고, 세 개의 세계는 비유기적, 유기적, 초유기적으 로 구성되어 있다. 필자는 여기서 그 용어들을 우연히 사용하게 된 것은 아 니며, 그 용어의 사용에 대해 비판할 의도는 없다. 그 용어들은 아주 훌륭하 다고필자는생각한다. 30) 위 주 l) 을 참조•

31) 여기서 생물 변화의 궁극적인 원인에 대한 문제를 다룰 수 없다. 실제 이 문제는 우리의 주제와 아주 연관되어 있으나, 이것은 아주 애매하여 이미 복잡한 주장에 이를 첨가시켜 보았자 별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체의 조직을 발달시키는 조건이 된다. 우리들이 이와 같은 기초적 인 연구 기반으로 비유기적인 물질 세계를 연구하려 한다면 이 세계 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연구를 중단하여야 한다• 우리는 아마 질량 을 원자 핵으로 나누어 후자를 전자 환경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지 모 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지나지 않으며, 만약 그것이 옳다고 하더라도 바로 원자 핵의 물질 세계가 환경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여기에 대한 답은 없다. 아무리 많은 존재의 세계 혹은 수준이 물질 세계의 기초가 된다고 하더라도, 물질 세계는 생물 세계의 기초가 되고_우리들의 현재의 연구에 중요한 것_생물, 물질 세계는 사회적 세계의 기초가 된다 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사회적 세계는 적어도 두 개의 조건 적인 세계가 있다. 그래서 만약 환경적 원인이 조금이라도 중요하다 면, 그것은 생물 세계에서보다는 사회적 세계에서 더 중요하다. 이 가정에서 명백한 추론을 하기 전에 세 세계의 가장 기본 요소에 서 발견되는, 필자가 생각하기에 가장 확증적인 증거를 우리는 고찰 하여야 한다. 오래전부터 생각되어 왔듯이, 원자가 물질 세계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라고 가정하자 __ 원자 핵을 무시해도 이 주장의 잠정 적 특칭 때문에 포용될 수 있다. 물론 세포는 생물 세계의 가장 기본 적인 요소이다. 사회 세계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고용주와 고 용인 사이의 관계, 국가와 국가의 관리와의 관계, 노동의 분업 혹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일을 하는 어떤 기구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사 이의 관계와 같은 간단한 사회적 관계이다. 여러 종에 있는 세포는 원자보다는 형태가 일정하지 않고, 사회 관계는 세포보다 형태가 일 정하지 않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는 아마 증명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17 세기부터 19 세기까지의 물리학자들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 이건 마치 같은 원자는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지만(그들은 여전 히 여러 가지 유용한 목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아무도 같은 세 포라 할지라도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같은 사회 관계라 할지라도 동일한 사회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지 만, 그럴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다. 군사 조직에 있어 하사관과 그의 휘하에 있는 사병 사이의 관계는 매 경우마다 이상적으로 똑같아야 한다. 왜냐하면 군사적인 관계가 다른 어떤 사회 관계보다 형태가 동 일하여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우리는 의식적으로 이러한 관계를 소위 기계적이라고 하는 형태와 유사하게 생각하는데, 이는 곧 물리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같은 하사관 일지라도, 그 관계가 개개의 사병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너무 잘 알 고 있다. 이것은 개개인은 서로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다른 사람과의 작용하는 관계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문명 사회만이 지금까지 알려진 유일한 인간 사회가 아니라는 점이다. 원시 사회도 역시 존재 하였다. 원시 사회와 문명 사회 사이의 기본적안 사회 관계는 실제 차이가 있으며, 원시 사회의 사회 관계와 문명 사회의 사회 관계는 형태적으로 볼 때 서로 유사하다. 이것은 원시 사회의 사회 관계의 게마인샤프트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필지는· 생각한다. 그들은 주로 문 명에 이끌려 둘어왔고 문명에 관련된 사람에 의해 초기 단계에서 무 의식적으로 그 문명을 배우게 되었다 .32) 원시 사회가 문명 사회보다도 훨씬 단순하고 작은 구조를 가졌기 때문에 원시 사회의 사회 관계가 형태상 서로 유사했다. 이 문제에 대한 디론· 중요한 한 요소가 되는 것은 원시 사회가 문명 사회보다는 시기가 훨씬 길다는 점이었다. 어 떤 종류의 원시 사회는 아마 인간이라는 종아 존재하였던 역사만큼 32) Redfi eld in Americ a n Jo urnal of Soc iol og y, LIi , 30 어춘 참조.

오래되었으며, 이는 생물 전화 과정과 아주 흡사한 과정이 진행되어 원시 게마인샤프트의 여러 계층에서의 관계의 형태를 형성하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 3” 그러나 원시 사회의 관계의 형태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그 관계는 인간 개성의 다양성을 탈피할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 만들어전 형태의 다양성은 생물 세계의 세포의 다양성보다 훨 씬 더 다양하고 세포의 다양성은 원자의 다양성보다 더 다양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

33) 인간 사회의 초기 시대에 생물적 전화와 사회적 진화 사이의 유사성에 대 해서는 Kroeber 의 sup er orga n ic (The Natu re of Cult ur e, pp. 49- 5 1 ) 끝에 나오는 설명을 참조. 모든 사회에서 사회적 전화의 단일한 과정을 제시하였 던 Bacho fe n 과 L. H. l'yf or gan 과 같은 학자둘의 이론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 은 그리고 그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학자들이 지식을 더 개진할 수 있게 한 것은 원시 사회에서의 사회 관계에 나타나는 형태의 근접성이라고 필자는 여긴다. 곤충 사회는 어떤 인간 사회보다도 더 오래되었고 훨씬 더 짧은 반복성을 갖고 있다. 물론 이것은 곤충 사회가 더 오래되었다는 데 기인하는 것이 아 니고 그 사회가 훨씬 더 단순하다는 데 기인한다. 개체성은 곤충에서보다는 인간에 있어서 더 다양하다고 생각될 수 있고、 이 점이 그가 독단할 수 없 게 하는요소이다.

디음으로 사회 진화의 원인 문제로 다시 돌아가자• 사회적 세계는 최소한 두 개의 환경을 가졌기 때문에, 그 사회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각각의 기본적인 세계에서 발생하는 원인 내지는 때로는 그 두 세계 의 원인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사회적 세계의 다양성은 생물 세 계의 다양성보다는 더 복잡하고, 물질 세계의 다양성보다도 더 복잡 하다. 이것은 사회적 세계의 원초적인 수준에서 확인된다. 왜냐하면 사회적 세계에서의 기본적인 형태로의 일치를 감소시키는 인간의 개 성은 그 중요한 부분이 생물적으로 결정되고, 중요성을 거의 평가할 수 없는 부분은 물질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민 만약 사회적 세계에

34) Kluckhohn and Mowrer, Cultu r e and Personalit y, Americ a n Anth r op o lo- gist, XLVI : 1944), I-27 , 특히 7, 9-14 : Mowrer and Kluckhohn, Dy na mi c Theory of Personality , Passim , in Personality and the Behavio r Dis o rders,

J. McV. Hunt( e d.)(New York, 1944), pp. 69- 1 35 ; Ot to Klin e berg, Race Di /lere nces(New York, 1935). 생물적인 결정 요인 을 평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며, 이 문제에 대한 유용한 연구서가 아주 드물다. 이러한 연구서 가 많지 않은 것은 이 문제에 대해 양적인 평가를 하는 접근 방식이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필자는 생각한다. 사회학자들이 아주 중요하지만 평가할 수 없는 몇몇 사실들과 요인들을 단지 인식 단계에까지만 끌고 와서 그 문제에 서 도피하는 것은 그들 학문의 균형을 잃게 하는 위험을 초래하는 그 학문 의 실패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만약 역사가들이 자료가 부족한 시대를 회피 한다면 역사가 설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생물적인 영향으로부터 유추하여 개성을 분석한 것에 대한 Ralph L i n t on 의 동의에 대해서 필자는 전적으로 반대한다 ; The Cult ur al Backg ro und of Personalit y( New York, 1945), pp. 84- 8 5. 이것은 물리학의 명성과 물리학적인 방법이 사회과학에 아주 나쁜 영향을 끼친 한 예이다.

서 그 기본 요소들이 그렇게 다양하다면 중요한 사건들은 얼마나 더 다양하게 발생하겠는가? 문화의 영향은 다른 원인들보다는 인간 사회에서 정상적이고 소규 모적이며 계속적인 사건에서는 더 강력하게 작용하나, 대규모적이고 비정상적인 역사적 사건에서 문화적안 요인은 중요한 요인이 되지 못 한다는 것을 필자는 다론 곳에서 주장하였다 .J S) 이 책에서 연구된 바 와 같이 역사의 중요한 일관성들 때문에 방대한 역사는 정상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36) 인간 사회의 발달의 원인이 통일되는 경향을 갖는 것은 문화의 영향이고, 필자가 일관성이라고 부르고 있는 대사건의 지속적인 반복성은 문화 의 영향과 생물 세계와 물질 세계에서 발생하는 원인의 영향 사이의 작용과 반작용을 나타내고 있다. 생물 세계와 사회적 세계 사이의 경

35 ) America n Anth r op o log ist, UV (19 52 ) , 114. 36) 앞의 주에 나오는 참고 서적을 참조. 본문에서 사용된 h i s t or y라는 용어는 hi s t o ri c 이라는 말과 갇아 대규모적인 비정상적인 사건이라는 제한된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포괄하기 위 하여 그 용어를 보통 사용한다. 이 연구에서는 달리 지정하지 않았다면 항 상 그런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방대한 역사라고 썼다면 그것은 필자가 보통 사용하는 의미대로 단순히 역사를 말한다.

계선 사이에서 인간 행위가 발생한다는 것에 주목을 해야 한다• 특히 원시 사회의 인간 행위는 문화 요인에 의해 결정되나, 개인으로서의 인간 행위, 즉 인간 개개인의 자유 의지에 의한 행위는 생물적인 요 인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이 두 요인이 복합되어 발생하는 많은 행위가 있다는 것도 물론이다• 사회적 원인과 생물, 물질적인 원인 사이의 대립은 주기적인 과정, 즉 우리가 말하는 사건의 장기적 발생 순서의 과정을 따르는,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반복이 실제로 사건의 발생 순서 의 반복으로 이해된다면 그 신비는 어느 정도 벗겨질 수 있다. 심지 어 우리가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단일한 사건도 연구를 위해 세분화될 수 있고 보다 규모가 작은 사건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연속적 인 사건이라는 것은 수학자들의 상상 속에나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설명이 필요한 것은 전체 사회의 역사에 중요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연속의 길이이다. 필자는 이것에 대한 설명은, 죽 최근의 사 회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간단하다고 생각한다. 인간 사회가 백만 년 전에 만들어졌을지라도, 문명 사회의 홍망과 그런 중요한 운동에 나 타나는 일관성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왜 자연은 반복적인 주기로 발생하는가라는 신비의 핵심은 물론 그대로 남아 있다. 다른 모든 주 기, 죽 사회의 홍망, 유기체의 생명과 물질 세계의 주기도 아마 마찬 가지일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전혀 아는 게 없다. 편의상 자연은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결 론지울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주기의 외부적인 메커니즘이 밝혀질 수 있지만, 자 연의 주기적인 반복 습성에 대해서는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 생물 학자들은 개체 발생이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고, 유기체가 생명을 이어갈 수있는 요소들의 조직적인 축적울 보여주었 다고 주장하나, 그들이 실제로 보여준 것은 자연이 그 요소들을 축적

한 것을 보여준 것이지 어떻게 혹은 왜 그렇게 하는지롤 보여준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회학자들은 문명 사회가 흥망하면서 일어나는 것만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우리가 연구하였던 것처럼 사회학 자는, 종교와 봉건제의 형성은 그 사회가 그 사회 역사의 다른 주기 를 따르도록 만든 요소들의 축적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 다 .37)

37) 베르그송은 유기체의 생명을 주도하는 요소와 사회의 역사를 주도하는 요 소의 축적을 설명하기 위하여 똑같은 형식, 죽 창조적 생명력 elan v it al 의 형식을 제시하고 있다. 유기체의 생명력에 대해서는 L'evoluti on creati ce , Sw iss edn.(Geneva, 1945), pp. 101-110 등 사회의 생명력에 대해서는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 ion , Sw iss edn.(Geneva, 1945), pp. 108fT . 물론 그 형식은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못한다• 일종의 속임수이다. 그 형식으로 베르그송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베르그송은 대단히 총명한 사상가이며, 그가 그 두 경우를 동일시한 것 은아주암시적이다.

우리는 이제 이 증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교와 봉건제의 형성 은 생물적인 에이전시인 인간에 의해 문명이 그 발달 과정에 있어 사 회의 대소용돌이를 거치는 것을 보여준다고 제시할 수 있다. 종교의 형성은 인간에게 사회적인 일로 다시 되돌아가도록 영감과 자극을 주 는 형태로 정치-윤리적, 지적, 심미적 표현 속에 대부분의 고도의 문 명을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재건한 것이다. 봉건제가 종교와는- 상관 없이 발생하였을 때, 봉건제는 훨씬 제한된 역할을 하며, 봉건제의 형 성이라는 것은 퇴색해 가는 문명 사회의 문명이 원초적인 윤리인 가 장 기본적인 관계, 죽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강화하는 과정이다. 이 두 과정 중 어느 것도 문명적인 결정 요인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 다. 반대로 종교를 형성 혹은 재형성한 인간과 전사단과 봉토를 형성 한 인간은 필요한 특성을 문명에 복구시키기 위하여 그들 자신의 자 유 의지의 범위 내에서 개인적으로 행동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 간 자신의 발달과 사회 진화의 방향이 결정되게 하였다• 필자는 이것

이 사회 질서와 같은 것을 만들기 위하여 인간의 가장 중요한 자산인 정신을 사용한 생물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인류학자들이 이 이론 울 그들의 문명 이론에 부합시키든지 아니면 필자의 이론을 무시하든 지 그것은 자유이다 .3 8 )

38) 간략하게 하기 위하여 문명의 흥망과 같은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다른 원인적인 영향에 대한 언급을 생략한다. 이 원인적인 영향이라는 것은 구문명, 묵시적으로는 신문명의 활동에 방해가 되는 모든 생물적, 물질적 환 경이다. 이 환경에서 한 특수한 요소에 의해 십각한 방해가 발생했을 때, 역 사가는 그가 몰락의 원인을 발견하였다고 잘못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예 를 들면 로마의 몰락의 원인을 토양의 쇠퇴에서 찾은 Lie b ig , Sig wa rt 등과 감은 괴짜들이 있다. 주의 깊은 연구로 그러한 물질적 어려움의 정도를 명 확히 밝힐 수 있다 ― ―이 경우에는 로스토우체프가 그렇게 하였다 (The So- cial and Economi c Hi st o r y of the Roman Emp ire, Ox for d, 1926, pp. 329-330) __ 그리고 그것들은 보통 개별적으로는 아주 하찮은 것이어서 몰락 문 제에 대한 것 이외에는 역사가들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한다• 경제 결정론자 둘은 그들이 환경의 저항을 단수적이라기보다는 복수적으로 보았다는 접에서 특수한 것을 원인으로 보는 잘못을 범하는 학자들보다는 좀 나은 편이다•

사회적 세계의 이러한 과정에 대한 설명에서 그 세계에 대한 지식 울 획득하는 데 알맞는 양식을 지배하는 논리적 근거가 나온다 .39) 사 실 생물적, 물질적 세계와 같이 사회적 세계의 지식 획득 방법에는 두 개의 양식, 즉 역사적, 이론적 양식이 있다. l5 년 전에 휴 밀러 Hug h M ill er 가 보여준 바와 같이, 역사적 방법이 일차적이고, 이론적 인 방법은 이차적이다 .40) 자연은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창조하였고, 인간 정신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모든 것들의 역사적 단계를 추적할 때, 인간 정신은 가능한 한 철저히 자연을 따른다. 그러나 그러한 과

39) 이전에 필자는 그 양식에 대해 논의를 하였고, 그때에 필자는 사회적 세계 의 비교적 소수의 요인에 의존하였다. 필자가 여기서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 의존은 전반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이전의 시도는 어떤 면에서는 분명히 찰못되었다• Note on Meth o d in Anth r op o log y, South - weste r n Jo urnal of Anth r op o logy , 1(19 45), 311-317 을 참조 . 40) His to r y and Sc ien ce : A Stu d y of the Relati on of Hi st o r ic a l and Theoreti ca l Knowledge ( Berkeley, 1939), pp. 5-8 and pa ssim .

정은 단지 자연이 한 가지 경우에서만 무엇을 했는지 알려주고, 자연 이 다시 똑같은 것을 행할 것이라는 어떤 암시도 없다. 말하자면 역 사는 예견하기 위한 기초로서는 거의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러나 만약 몇몇 경우에서 자연이 똑감은 혹은 유사한 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을 학자가 발견한다면, 자연은 다시 그것을 행할 것이라는 가능성이 존 재한다. 자연이 종종 같은 일을 과거에 행하여 왔다면, 여건이 같은 경우에는 미래에도 다시 같은 일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 론적인 지식의 목적이다. 이론은 일련의 유사한 사건의 과정에서 공 통된 것을 추출한 것이고 사건의 장래의 과정의 특징을 예견하는 데 사용된다. 그래서 이론은 역사보다도 훨씬 더 유용하다. 그러나 단순 한 숫적인 이유 의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 이론을 확립하기가 아주 어렵다. 그리고 이론이 확립되지 않을 때, 과학자들은 그들이 발 견할 수 있는 모든 관련된 역사의 발견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왜 냐하면 역사의 발견은 이론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그에게 제 공해 주기 때문이다. 그의 자료의 특성 때문에 사회학자들에게 끊임없이 강요되어 온 이 역사의 발견에 대한 의존은 생물학자와 물리학자에게도 알려져 있다. 수십 년 전에 물리학자들은 이론적인 지식에 탐닉하였고, 모든 실질 적인 지식은 계량적이라고 선언하였으며, 지식을 획득하는 다른 양식 과 그 양식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을 경멸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생물 학자들은 이론으로부터 많은 것을 기대하였으나, 가끔 그 이론을 확 고히 정립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후 다윈은 생물학의 구세주가 되었 으며, 그 이후로 유기체의 역사는 과학의 본질적인 것이 되었다. 현재 에도 물리학자들에게 물리학 전체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천문학의 역사적 측면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질학의 역사적인 측면이 그의 학문의 지질에 관한 부분에서 본질적이라는 것이 분명해야 하지 만, 최근까지도 그것은 거의 인식되지 못하였다. 물리학자들이 그들의

지식 세계에서 사물의 역사성을 인식하게 된 이유는 핵 물리학의 어 려움 때문에 물리학자들이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자료를 얻을 수 있게 하는 특수한 것의 역사를 추적하였기 때문이다 .41) 역사는 존재의 세계에서 본질적인 지식이며, 물리학자는 마침내 이것을 인정하지 않 울 수 없었다 . 42 )

41 ) 현재의 지식으로 분해할 수 없는 것, 미래에 발견되는 새로운 역사들은 자 료를 더 이상 분해할 ·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42) 물리학자들에 의한 이 진리의 인정에 대한 분기접은 C. F. von Weiz sa cker 의 The Hi sto r y of Natu r e, F. Wi ec k(tr a n.) ( Chic a go , 1949) 의 출현이다. 1946 년 강의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이 책의 중요성과 단접에 대하여는 Eth i c s , IXl( l95 1), 236 - 238 에 나오는 필자의 서평을 참조.

사회를 디루는 학자들은 결코 그러한 안이함을 갖고 있지 않고, 그 래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과학자들 중에서 가장 복잡한 사람 둘이다• 그들의 형태는 그들 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 있어서조 차도 불완전하게 형성되어 있어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추론은 분명히 어느 정도는 특수성을 무시한다(사실을 왜곡한다). 그래서 그 추론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아주 제한적이며, 실제의 지식은 비교적 적으 며, 오류의 위험성은 상당히 높다. 그리하여 물질 세계의 본질적인 요 소의 주변에서 작용하는 광범위하고 유용한 통계적, 수학적 작용은 사회적 세계에서는 되풀이되지 않는다. 그것은 생물적 세계에서도 되 풀이되지 않는다. 제임스 진Ja mes J ean 은 신은 수학자라고 생각하였 다. 그러나 그 신은 물질 세계의 신이다. 만약 사회적 세계의 신이 수 학자라면, 그는 철저히 나쁜 신이지 않겠는가! 이것은 통계학적인 지식과 통계의 수학적인 사용이 사회 과학에서 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들의 사용이 극 히 제한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통계적-수학적 방법의 사용은 아주 단순한 기본적인 사회 관계에서만 유용하나, 이 경우에 있어서조차도 개인이 형태에 접근하는 개략적인 방법에 의해 제한된다. 이러한 개

략적인 접근 방식 때문에 사회 과학의 통계적 측면에서는 평균치라는 유용한 방법이 나온다. 어떤 것이라도 평균치에 기반을 두고 있고, 또 그렇게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의 오류가 방지된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통계적인 의미가 극도로 상실된다. 통계의 의미가 상실된다 는 것은 나머지 의미의 견실함을 위해 지불되는 필연적인 대가이다. 그러나 평균치라는 것은 사회 과학에 특수한 것이 아니리는· 것을 명 심해야 하고 또 그것은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거의 모든 자연 과 학의 반복성은 그 자체가 평균화되는 과정들의 결과일 기능성이 있 다. 기체의 압력은 그 온도와 일정한 상관 관계에 놓여 있는 가스의 용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문제에 있어 자연 과학과 사회 과학 사이의 차이는 자연은 자연 과학에 있어 평균치를 제시하는 데 대하 여, 사회 과학자가 그 평균치를 애써 스스로 구해야 한디는· 점이다. 이 연구가 주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사회 과학에서의 일관성의 문제이다. 이 일관성의 문제는 전적으로 계량적인 지식의 영역 밖에 놓여 있는 문제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일관성이 중 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일관성의 범주 내에 있는 다양한 경우들은 그갇이 식별될 수 있고, 분명한 일관성들 을 보다 가치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보다 가치 있게 만들고 있다. 만약 그 일관성이 현재의 사건에 관계된다면, 그 일관성은 이주 · 특수 한 예견적인 가치를 가지기도 한다. 마르크스주의자, 스펭글러주의자 등의 학자들이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거기에는 가치가 있다. 비교 역사 사회적 연구를 함으로써만 사실상 이러한 학자들이 무시될 수 있고, 그들이 예견하였던 위험이 방지되고, 제거될 수 있다. 그러 한 연구에서 이론으로 해내지 못한 경우, 역사가 적절한 의존 수단이 다. 역사에서의 어떤 일관성의 형태에 접근하는 방식의 근접성은 주 의깊게 평가되어야 하며, 그 다음에 형태의 실패, 그 차이가 평가되어 야 한다. 그래서 사회 과학의 대문제를 연구하는 방법에서 이론은 그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첫째로 일관성의 범주에 속하는 매 경우 의 역사가 연구되어야 한다. 둘째로 일관성 그 자체가 추출되어야 한 다. 세째로 차이가 일관성에 의해 상쇄되기 때문에 그 차이에 대한 역사가 다시 고찰되어야 한다. 이러한 연구의 예로서 봉건제가 아주 좋은 예가 되는 것은 첫째로 봉건 제도들의 아주 특이한 성격과 봉건제가 발달함에 있어 사건이 발생하는 순서의 특이성에 있다. 그러므로 여러 봉건제의 경우에 일 관성은 그 자체가 아주 분명하고, 역사의 다른 일관성보다도 훨씬 명 확하다. 두번째로 일관성에서 파생된 경우의 다양한 역사와 일관성의 범주에 속하는 경우의 다양성의 의미가 깊다. 이러한 특칭들은 그 경 우들의 다양성의 이유와 봉건제 자체가 일관성을 갖는 이유를 암시하 고 있댜 봉건제가 이렇게 좋은 예가 될 수 있는 문명 사회의 역사에 서 봉건제가 차지하는 기본적이고, 중요한 그리고 아주 명확한 위치 에서 유래한다.

옮긴이 해제 역사상에 나타나는 중요한 용어 중에서 봉건제만큼 학자들간에 많 은 논란을 일으키는 용어도 드물다. 일상 생활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 는 〈 봉건적 〉 이란 말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든지 아니면 비합리적이라든 지 혹은 억압적이란 의미일 것이다. 프랑스 혁명때 국민 의회가 봉건 제의 폐기를 선언하였을 때의 봉건제란 말은 혁명 이전의 불합리하고 형오스쉽게 보이는 장원제의 제 악습을 통칭하는 의미였다. 아담 스 미스가 그의 국부론에서 사용하였을 때의 봉건적이란 의미는 하나의 생산 체계로, 노동자들이 자유 시장의 원칙 아래 노동하는 것이 아니 라 폭력과 강제 그리고 국가 권력의 강제에 의해 노동하는 것을 말한 다. 따라서 이 체계는 경제 법칙을 저해하여 비자발적인 노력, 저생 산, 최고의 부자를 제의한 모든 사람의 일반적인 비참함을 초래한다 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봉건적이란 말은 빈부의 격심한 차이, 비참 하고 착취당하는 농민 그리고 반웅이 느리고 비생산적인 경제로 특칭 지어지는 경제 및 사회와 동일시되었다. 18 세기 계몽 사상가들에게 봉건적이란 말은 다수에 의한 소수 특권층의 지배를 확립해 주며 이 성이나 정의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 없는 영주 특권의 총체를 뜻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봉건적이란 말은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고 이러한 이중성은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이렇게 봉건이란 말이 다양하게 쓰이고 혼란스럽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I) 헐리, 「봉건제 : 그 의미와 방법론」, 박은구 역, 『 서양중세사연구 』 , p.1 2 8.

〈봉건적 〉 또는 〈 봉건제 〉 란 말은 법률학자들에 의해 17 세기경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법률학자들이 주로 관심을 가졌던 것 은 서유럽의 특유한 토지 보유 형태인 〈 봉fe u 〉 이었으며, 그 〈 봉과 관 련된〉이란 뜻으로 〈 봉건적 fe odal 〉 이리는· 말을 그리고 〈 봉의 속성 〉 또는 〈봉의 보유에 따르는 여러 부담 〉 이라는 뜻으로 봉건제(fe od­ ali te, fe udal i sm) 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처음에는 봉이란 어 떤 봉사에 대한 대가로 받은 보수를 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반드시 토지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봉건제가 생성되는 중세 시대에는 토지가 부의 근원이었고, 화폐가 거의 유통되지 않았 기 때문에 봉사의 대가로 지불될 수 있었던 것은 토지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봉은 거의 대부분이 토지의 형태였기 때문에 봉이라 하면 토지, 죽 봉토를 생각하게 되었다. 봉사도 단순한 봉사가 아니라 특수 한 형태의 봉사, 주로 기사의 군사적인 봉사를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봉건적이라는 말은 기사의 군사적인 봉사의 대가로 주군이 토지롤 양 도하는 제도의 총체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따라서 봉건제의 연구에 는 주군과 그를 모시고, 그에게 봉사하는 기사들 간의 인적, 물적 관 계의 고찰이 요구된다. 이렇게 파악된 봉건제란 법률과 정치와 군사 조직의 체계이지 경제적 생산의 체계는 아니다. 이러한 봉건제의 개 념은 자유롭고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엘리트 전사 계급 내의 정치적, 사회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롭지 못하고, 봉건적 계약 관계에 속하지 않는 농노는 봉건제 연구에서 고려의 대상이 되 지 않는다젼 봉건제에 대한 이러한 법제사적, 정치적, 군사적인 해석 은 너무 편협되고 유럽 중심적이며, 중세 서유럽 이의의 사회에는 적 용될 수 없는, 보편성이 결여된 개념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봉건적이란 말이 아주 다르게 사용되는 두번째 의미는 18 세 기의 개혁론자들이나 아담 스미스의 저술들 속에 나타난다. 이들의 2) 위의 책, p. 2 9.

견해에 의하면 봉건제란 봉건 지대에 기초한 하나의 경제적 생산 체 계인데, 이것은 노동자로부터 노동과 조력을 얻어내기 위해 경제적 동인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력에 의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 시 말하면 봉건제의 경제적 측면을 중요시하여 봉건제를, 곧 장원제 와 동일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일부 경제사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19 세기 사회주의자들도 이러한 봉건제의 개념을 차용하였다. 특히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류 역사 발달의 한 단계, 죽 고대 노예제 사회 이후에 나타나는 사회를 규정하는 데 봉 건제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봉건제의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자 에게는 교범이 되었고 경제사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이들의 연구 대상은 기사의 의무인 봉사와 기사를 부양하는 수단이 아니라 주로 토지 보유의 형태, 지대 그리고 농민들이 착취당한 방법 들이었다. 봉건제의 개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은 그 사회의 기본적인 성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나 역사 발전을 너무 거시적 으로 도식화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프랑스의 사회사가 마르크 불로크는 이러한 봉건제의 정의에 대한 논란을 지양하고 봉건제가 지니는 제 특성의 열거를 통해 봉건 사회 의 특성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는 봉건제가 그 자체로서 고 립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하나의 제도라는 입장을 배격하고 전체 속 에서 파악되어야 할 하나의 사회형으로 파악하였다 .3) 따라서 그는 다 음과 같은 특성을 가전 사회가 봉건 사회라고 규정하고 있다. 예속 농민, 급료 대신 봉사를 조건으로 한 토지, 죽 (봉토) 보유지의 보급, 전문화된 전사 계급의 지배, 인간과 인간을 결합시키는 복종과 보호의 유대 관계, 권력의 분산 그리고 이 모든 것 속에서 가족이나 국 가와 같은 다른 형태의 유대 관계의 존속 4) 3) 나종일 편, 『봉건제』 , p. 14 .

불로크의 이러한 주장은 마르크스주의자들꾀- 비마르크스주의자들이 다갇이 봉건제에 대해 말해 온 것의 상당 부분을 효과적으로 결합시 키고 있다• 그의 정의가 개념상으로나 방법론상으로는 엄밀성을 결여 하고 있을지 모르나 봉건제의 기본 특성을 모두 함축하고 있는 것 은 사실이다. ” 불로크가 봉건제의 보다 명확한 이해를 위해서 서유럽의 봉건제를 동아시아의 여러 -나 라들, 특히 일본의 봉건제와 비교하기롤 희망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봉건제의 개념은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고, 그 해석에 따라 연구 방법과 대상이 달랐다. 그 결과 학자들에 관점 에 따라 봉건제라는 의미가 다양하게 사용되었고 이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아 그 용어의 사용에 많은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 이런 가운데 봉건제가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분석함으로써 봉 건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 것이 쿨본이 편집한 『 역사 에서의 봉건제 』 이다• 이 책에서는 위에서 제시된 봉건제의 의미 중에 서 첫번째 의미인 정치, 군사, 법제사적인 의미를 따르고 있으나 방법 에 있어서는 역사상에 나타났던 봉건제의 제 특성을 비교 분석함으로 써 봉건제에 관한 하나의 법칙성(필지는- 일관성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역사상에 나타난 봉건제의 보편적인 특징을 깅구한 · 다는 의미에서 법칙 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임)을 제시하여 정치적, 법제적인 의미의 봉건제가 갖는 편협성을 탈피하고 보편성을 찾아내어 봉건제를 새롭 게 인식하려고 하고 있다. 이 책이 출판된 경위는 서문에 찰 나타나 있다. 그에 의하면, 역사 에 있어서 어느 한 현상이 반복적으로 일관되게 재현되는가를 연구하 기 위하여 1949 - 1950 년에 미국의 학자들 - ―-중국학, 동양학, 사회학, 인류학, 철학의 전문가 _― 이 모여 한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 위원 4) 헐리, 앞의 책, p.1 31. 5) 위의 책, p. 13 2.

회는 록펠러 재단과 미국 지식인 단체 위원회의 후원하에 1950 년 10 월 30 일과 11 월 1 일의 이틀간에 걸쳐 봉건제에 관한 학술 회의를 개 최하였는데, 이 회의의 주제가 바로 역사에 있어 봉건제의 역할, 즉 봉건제가 반복적으로 일관되게 발생하는가라는 것이었으며, 이 학술 회의의 결과로 1956 년에 이 책이 프린스턴 대학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역사상에 나타나는 여러 봉건제를 상호 비 교함으로써 역사에서 행하였던 봉건제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자 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 책은 봉건제가 역사의 발달 시기에 특수 하게 다시 재현되는 현상인지를 규명하려고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 은 봉건제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리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역사 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를 찾아내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스트레이어와 쿨본은 제 1 부 봉건제의 개념에서 봉건제에 대한 잠정적인 정의를 내림으로써 그들의 연구의 기본 틀과 범위를 명확하게 설정해 놓고 있다. 〈 봉건제는 분명히 사회, 경제적인 환경을 변화시키고 또 그 환경에 의해 변화되지만, 원래 봉건제는 사 회적 또는 경제적 제도가 아니라 통치 수단이다. 봉건제는 그 본질적 인 관계가 지배자와 예속자의 관계나 국가과 시민과의 관계가 아니며 주군과 봉신 사이의 관계를 본질로 하는 통치의 수단이다. 그것은 정 치적 기능이, 한정된 수의 개인들 사이에 맺어전 개별 협정에 의해 수행되며 정치적 권위는 사적인 소유물로 취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 다. 봉건 정부에 있어서는 개별적인 접촉이 아주 중요하였으므로, 그 러한 접촉이 용이했던 지방 정부의 규모에서 봉건제는 가장 효과적이 었다. 정치 권력은 제도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이었기 때문에 정치 기 능의 분리는 거의 없었다. 군사 지도자는 언제나 행정가이며, 행정가 는 언제나 재판관이다.〉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하여 쿨본은 역사에 나타난 봉건제에서 정치 권력을 잡은 계층, 무사들의 역할, 주군과 가 신과의 관계 등에서 상호 유사점과 차이점을 찾아냄으로써 역사에서

의 봉건제의 일관성의 성격을 규명하려고 하였다. 나아가 쿨본은 봉건제의 발생 원인으로 토인비의 〈 도전과 응전의 이론 〉 을 원용하여 해석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는 〈 봉건제는 어떤 도전에 대한 일련의 응전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 . 여기서 도전이란 잘 조직된 정치 제도, 죽 제국이나 큰 왕국이 쇠퇴하는 것을 말하며 웅전이란 이 쇠퇴하는 사회가 봉건 국가로 다시 구성되는 것울 말한 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위대한 문화가 붕괴하고 다음의 문화가 생성 되기 전 중간 단계로 나타나는 것이 봉건제러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의 주나라는 이 가설에 부합되지 않는 예의적인 경우여서 쿨본은 자 신의 가설을 정설화하는 데 상당히 조심스럽다. 또 봉건제가 만든 직 접적인 조건 때문에 정부가 내적인 억압자나 의부의 침입자로부터 그 의 신민을 보호할 수 없으므로 무정부 상태로 되고 경제적으로 상업 이 발달하지 못했거나 쇠퇴하여 농업이 지배적인 사회였다는 것을 쿨 본은제시하고 있다. 제 2 부에서는 시대와는 상관없이 세계를 8 개의 지역으로 구분하여 이 지역에서 나타났던 봉건제의 특성과 유형을, 이 지역의 전문가들 이 서술하고 있다. 서유럽의 봉건제는 스트레이어, 막부 시대의 일본 의 봉건제는 라이샤워 E. 0. Reis c hauer 주나라 시대와 한나라 시대 의 중국에 대해서는 보드 Derk Bodde 가,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란은 브 런데이 지 B. C. Brundage , 제 6 왕조와 제 20 왕조 이후의 이 집트에 대 해 서는 에드거튼 W. F. Edg er to n , 인도에 대해서는 소너 Danie l Thorner, 비잔틴 제국은 칸토로위츠 E. H. Kanto r owic z 그리고 러시아는 제프텔 Marc Sze ft el 이 각각 서술하였다. 이들 학자들은 자신들의 주제를 주 의깊게 연구한 결과를 제시하였다기보다는 그 지역의 봉건제에 대한 기존의 연구 성과를 종합하여 제시한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그 러나 그들은 위에서 제시된 준거에 따라 획일적으로 그들 자신의 연 구를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루고 있는 사료 자체가 동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쿨본은 아주 느슨하게 연관된 사실 들을 종합하기 위하여 18 세기 학자들이 봉건제란 용어를 만들어냈으 며 이는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개별 연구가들이 그들 의 연구 분야에서 얻은 결론은 쿨본이 제시한 것과 부합되지 않는다. 이 개별 연구에서 나타난 특색은 일본의 봉건제를 제의하면 쿨본과 스트레이어가 제시한 잠정적인 봉건제의 개념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의 경우, 주로 주의 토지 보유 관계와 분열 시대의 관료 적 지배 체제의 성립에 주안점을 두면서 봉건제를 연구한 보드는 이 책에서 규정하고 있는 의미의 봉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짓고 있다• 보드의 결론에 의하면 〈 주왕조는 순수한 봉건제를 만들었지만 타지역의 봉건제와 공통적으로 연관이 있는 요소와는 상당히 다른 요 소들을 통하여 봉건제가 형성된 것 같다. 분열 시대는 이론상으로는 봉건제의 형성과 상당히 유사하였지만 진정한 봉건제를 발달시키지 못하였다 〉 라고 한다. 나아가 그는 봉건제를 지주-소작인의 범위까지 확대시켜야 전정한 봉건제의 의버를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봉 건제를 정치적인 문제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편협된 사고라고 비판하 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란에서 서유럽 식의 봉건제의 존재 유무 룰 연구한 브런데이지는 봉건 사회의 핵심 요소인 이전의 정치적 통 일, 통치 형태에 있어서 지방주의, 사병과 사적인 사법권과 봉건제의 핵심 요소인 재분봉, 신종 선서, 봉토 보유와 개인적인 면제권을 고찰 하였다. 그는 결론에서 〈 정치적 권력이 제도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이 었던〉 통치 방법으로서 봉건제를 잠정적으로 설명한 것에 동의하지만 근동에는 그것을 입증해 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자료가 없고 서구의 봉건제에 근접하는 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는 있으나 단정적 으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의 봉건제를 연구한 에 드거튼도 왕과 지방 관리와의 관계 및 그의 관리와 토지 보유 문제를 주로 연구하였다. 그 결과 스트레이어와 쿨본아 정의한 형태의 봉건

제는 이집트에서는 없었다고 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집트 연구 학자들이 이집트가 봉건적이었다고라고 하는 말은 왕이 임명한 관리 나 지방의 귀족들이 정부의 중요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와 중 앙 정부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또는 중앙 정부가 지방 세력을 완전히 지배할 수 없었던 시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인도의 경우는 원사료가 드물고 봉건제를 연구한 연구 서적은 물론이고 논문조차 없다고 한 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너는 토드가 연구한 라지푸트의 사회 조직, 특 히 부족 조직과 코발레프스키의 북인도의 무슬림 체제에 대한 연구에 의존하여 인도에 봉건제가 있었는지의 여부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토드는 라지푸트의 토지 보유권에 따른 제반 문제, 죽 상속세, 환수권 escheat, 경제적 부조, 후견권, 결혼 허가권과 같은 봉건 요소들이 발 견되나 이는 봉건제의 발달과는· 다론 선상에서 전전되었기 때문에 전 정한 봉건적인 특색이라 할 수 없으며, 군사적인 토지 보유권은 발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코발레프스키는 봉건제의 존속 여부를 가름하는 근거로 은대지 제도, 탁신(託身), 관직의 임대, 세습적이고 사적인 사 법 등 4 개를 든다. 그리고 종족 공동체와 촌락 공동체 그리고 가족 집단이 보유하고 있는 토지 보유 형태를 연구한 결과, 북모슬렘 체제 에서는 처음 3 개는 분명히 존재하였으나, 사적 사법권은 분명히 존재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소너는 토드와 코발레프스키의 연구 롤 통하여 인도에서는 통치 방법으로서의 봉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칸토르위츠는 비잔틴 역사 전체의 영토의 상 실과 획득, 군사적인 방어 문제, 제국의 농민 문제, 죽 대귀족의 토지 보유와 농민의 토지 보유 그리고 뎀제에 천착하면서 봉건제의 특질을 유추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군사적인 토지 보유, 독립적인 대귀 족, 면제권, 사병과 같은 봉건적인 특칭이 발견되기는 하나, 서열을 가전 봉신제, 분할된 사법권과 권력의 형태를 가전 서유럽의 봉건제 는 비잔틴에서는 없었다. 제프텔은, 러시아에서는 쌍무 계약으로서의

종사제와 봉토 중 그 어느 것도 발전되지 않았으며, 군사 혹은 행정 기능의 일사불란한 세습이나 기사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그는 러시아의 봉건제의 기원을 야만족의 침입이라든가 새로운 군사 기술 및 군사 조직에 두고 있지 않다. 쿨본과 스트레이어가 말하는 봉건제 의 핵심 요소인 주종 관계가 러시아에서는 완전하게 발달하지 않았다 고 한다. 군사적 인 봉사와 토지 보유와의 관계는 주군과 봉신 간의 상호 충성을 포함하는 봉건 계약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신민의 봉사 에 대한 대가로 차르가 부여하는 절대적인 권한에 기초한 것이다. 더 욱이 러시아에는 기사도의 이상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며, 값비싼 장비 를 보유함으로써 군사력을 독점하게 되는 계층이 출현하는 것은 중앙 집권화의 수단이지 정치 권력의 분할의 시초는 아니었다. 따라서 군 사적 봉사는 중앙 집권적 체제의 확립 수단으로 이용되면서 발달하였 다고 한다. 그러므로 러시아에서는 이 책에서 규정하고 있는 봉건제 가 있은 것이 아니라 봉건적인 측면만 있었다고 제프텔은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의 거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제 3 부에서는 약 20 여 년간 비교 사 연구에 전념한 쿨본 자신의 연구와 2 부에서 제시된 논문을- 바탕으 로 역사상에서 봉건제가 발생하였던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어느 정도 유사한 발달 단계를 거쳐왔는지 그리고 이전의 정치 형태가 비 슷하고, 그 정치 형태로 일어나는 사건과 결과가 비슷하면 봉건제는 일관되게 반복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가, 죽 봉건제의 일관성 unifor m- ity에 대해 논술하고 있다. 쿨본이 말하고 있는 일관성이란 〈역사가들 의 특수 경험으로 얻어진 일반 상식에 어긋나지 않을 만큼 반복적으 로 발생하는 형태, 다시 말해 그러한 일관성은 적어도 서로 유사하다 고 생각이 들 정도의 일련의 반복적인 사건을〉 말한다. 쿨본은 그가 갖고 있는 인류학과 사회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구제국이 분해되어 새로운 제국이 형성되는 경우와 봉건 국가로 해체되는 과정

과, 봉건 국가가 아닌 〈 유령 제국(이전의 있었던 제국의 통치 형태를 모방하였으나 그의 정치 권력과 지배 영역은 이전의 제국의 전 지역에 미치지 않는 국가의 예로 서유럽의 경우는 카롤링거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을 둘 수 있다) 〉 으로 발달하는 경우와, 제국의 분열로 인해 생긴 봉건 국가들이 국민 국가의 경쟁 시대로 돌입하였다가 마침내는 제국 이 다시 출현하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봉건제가 이 과정에서 행한 역 할을 고찰함으로써 역사에서의 봉건제의 일관성을 찾고 있다. 쿨본은 이러한 연구를 하는 데 있어 자연 과학의 방법론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자연 과학, 죽 물리학에서는 자연 그 자체가 추 상화를 제공해 주는 반면에 사회 과학지들은- 그들 스스로가 그 추상 화를 찾아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전 형태는 항상 조야하고 불 완전한 것이며, 본질상 그 추상화는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쿨본에 의 하면 물리학자들은 수학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지만, 역사 학자들은 수학으로부터 도움을 거의 받을 수 없다고 한다. 동시에 쿨 본은 역사 서술에 있어 계량적인 방법의 사용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 나 이것을 사용한다 해도 제한적으로 사용할 것을 주장하며 이 경우 는 상당히 유용하다고 한다. 쿨본은 일관성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개 별적인 사건들을 연구해야 하고, 개별 사건의 차이점을 알아내기 위 하여 그 사건들이 다양하게 발생하는 방법도 아울러 연구되어야 한다 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개별적인 사건을 연구하다 보면 어떤 법칙성을 얻을 수 있다고 상정하고 있으며, 이 방법에 의해 역사에서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역사에서 일 관성을 찾기 위해서는 다음의 과제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한다. 첫째, 일관성에 속한다고 생각되는 개개의 경우를 따로 연구할 것과, 둘째, 일관성 그 자체가 분명히 정의돼야 할 것과, 마지막으로 일단 일관성 에 대한 정의가 내려지면, 그 정의에 부합되지 않는 경우의 성격들에 관해 철저히 연구할 것 등이다.

이러한 연구 과정에서 일관성을 찾은 쿨본은 우선 봉건제는 위대한 문명의 몰락의 산물이거나 아니면 문명의 몰락에서 그 문명이 부활하 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이때 봉건제는 지 적인 창조력이 쇠잔하여 사회 전체가 부패하고 몰락해서 정치적, 경 제적 구조가 분해된 사회에서 다시 문화가 부활할 때 정치, 사회적인 측면에 활력을 불어넣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이때 새로운 종교가 창조되거나 도입되며, 이 새로운 종교는 후에 문화 발달의 기초가 된 다고 하면서 문화의 부활에서의 종교의 역할을 아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가정은 서유럽의 봉건제 이의의 다른 유형의 봉건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쿨본은 인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또 하 나의 가정, 즉 봉건제란 바바리안들을 문명 사회로 끌어들이는 과정 이라는 가정을 제시하고 있다. 이 가정은 봉건제는 한 문화가 몰락한 후에 그 문화가 부활하는 시기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이 미개 상태에 있을 때인, 문명이 처음 발생하는 시기에 속한다는 것이 다. 다시 말하면 봉건제는 〈문화의 몰락기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문명 사회의 성장기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의 봉건제는 처음으로 미개인을 문명 사회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일 본의 봉건제는 전형적인 것이며 이 점에서 볼 때 서유럽의 것은 전형 적이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초기 일본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일본 중부 지방 사람과 로마 제국과 프랑크 왕국하의 북프랑스 인들은 봉건 시기 이전에 문명화되었고 일본 북부 지방의 민족과 중, 북부 유럽의 민족들은 봉건화의 도움으로 문명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를 기반으로 하여 쿨본은 〈문화가 부활할 때의 전형적인 봉건제는 문 화가 창조될 때의 봉건제와 거의 같은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현상은 전형적인 봉건제를 갖지 않은 이란과 러시아와 비잔턴과 한 (漢)대 이후의 중국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쿨본은 4 대 문명이 발생하였던 강 유역에 바바리안이 이동했다는

사실에서 봉건제의 이러한 기능을 입증하고 있다. 설령 최초의 원주 만이 강 유역 지방에 정착해서 원시 사회를 건설하였다고 하더라도 문명 사회가 건설되기 직전에 그 원시 사회는 붕괴되었을 것이라고 쿨본은 가정을 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강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 하여 엄격한 규율과 통제가 필요하며 이는 봉건제에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교역이 발달한 강 유역에서도 정체는 도시 - 봉건제의 형 태를 가졌다는 것이다. 후기 문명 사회에서 교역은 봉건제를 붕괴시 키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으나, 초기 문명 사회에서 교역 그 자체는 이방의 문명 사회와의 교역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도시 그 자체 내의 교역이기 때문에 봉건 원리는 도시 국가 정체의 원리보다 우선하고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문명 사회는 교역을 시작하기 전에 먼 저 살아남아야 하고 만약 문명 사회가 봉건 수단을 통해 확실히 살아 남을 수 있다면, 그 문명 사회는 도시 정체를 갖기 이전에 봉건 정체 롤 가진다고 한다 . 그리하여 쿨본은 최종적인 결론으로 봉건제가 문 명의 창조에 일익을 담당했다고 보지 않고 있으며, 문명의 창조에 일 익을 담당했다고 하더라도 봉건제가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만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다. 죽 〈봉건제는 역사에서 몰락하는 문명의 부활을 위 한 그리고 이전에 문명화되지 않았던 새로운 민족에게 문명을 전파하 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라는 기능을 가전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쿨본은 봉건제가 발생하였거나 발생 가능성 이 있었던 지역의 봉건 요소들을 비교 연구하여 역사에서의 봉건제의 위치를 설정하고 일관성을 발견하여 봉건제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많 은 도움을 준 것은 이 연구의 긍정적인 평가이다. 그러나 비교되는 대상이 시간상으로 너무 많은 차이가 있다. 기원전 1122 년(?)부터 256 년까지의 중국의 주와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와 모슬렘 치하 의 인도, 9 세기에서 l 때]기의 유럽 또는 1 쩌]기에서 17 세기의 일본을 비교함으로써 사실 일관성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각 시대의 각 지역에 나타나는 사회상은 그 시대의 고 유의 특성에 의해 특징지어지기 때문에 피상적으로 나타난 현상만으 로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예를 들면 서유럽의 봉건제의 성격과 거의 같다는 일본의 봉건제도 이 책에서 설정된 비교의 대상 一 一봉건제 가 발생할 수 있는 여건과 봉토, 봉건적 부조, 상속세, 무사도 등—_ 에서는 유사한 성격을 가졌을지 모르나, 서유럽의 기사도는 반드시 일본의 무사도와 같은 것은 아니며 서유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궁정 식의 사랑 같은 것은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게다가 제 2 부의 개별 연구가들은(서유럽과 일본은 제의) 제 1 부에서 스트레이 어와 쿨본이 규정한 봉건제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 고 있음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쿨 본은 유사성에서뿐만 아니라 유사성 내에서의 다양성과 서로 상이한 요소에서도 일관성을 얻을 수 있다고 한 점은 자신의 주장을 어느 정 도 합리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왜 냐하면 일관성이란 유사한 사실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봉 건제를 통치의 수단이라는 법적이고 정치적인 면에 치중함으로써 토 지 보유로 발생한 농민들과의 인간 관계를 제의시키게 되어 사회 전 체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게 된 점이 이 책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번역을 하는 데 있어 가급적 원문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 지만 원문이 원만하게 전달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을 경우에는 의역 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책은 역사상에 나타난 봉건제를 거의 다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전문 용어를 우리말로 통일되게 번역하 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원어를 그대로 사용함으로 써 명확하게 그 뜻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원어를 그대 로 사용하였다. 전문적인 지식을 요하는 지역에 관한 번역은 그 분야 의 전문가들의 자문을 얻어 정확성을 기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그래도

찰못된 부분이 있지 않나 걱정이 앞선다. 이 점 독자 여러분들의 질 정을바라마지 않는다. 명륜동에서 김동순 -

찾 0~ 보 71

기 가르디-프레네 55 가마쿠라 68, 70-71. 74, 304, 308, 313- 314 , 353 가문 (家 門)의 법 70 가스가스 163 가신 35-36, 46, 78-79, 257, 300 -30 1 가즈니의 마무드 325 간다쉬 156 감(監) 118 갑골문 엇 개인적인 충성 관계 63 객(客) 140 게르손 449 게마인샤프트 288-289. 291-2 9 2 게미스토스 플레톤 248 게젤샤프트 288-289. 292 게파르트란 176 게피드족 379 결혼권 216 경건왕 루이 309 경제적 부조 216 고(眉) 378 고다이코(後酷酉胡) 396 고드프리 부용 31 고왕국 374 고조(高祖) 119 고케닌(御家人) 69 고타레즈 480

고트족 236, 379, 498 곤경 의 시 대 265-2& i 곤드 216, 324, 327 공공 가신 265 공작 100, 115 공작령 141 공회의 운동 450 관료적 봉건제 148 관리-사인 계충 120 교토(京都) 71 교황 레오 3 세 350 교황 요한 12 세 350 교회-국가 515 구드뢰드 3()() 구르자라 324, 327-328 구일본 씨족 조직 67 7 품중정법(九品中正法) 143 국(國) 100, 141 국가 봉건제 148 군관구 238 군벌 214 군사적 가신 263 군사적 은대지 513 군사적인 예속인 155 군사 총독 387 군역 155, 157 군역 면제세 248 군역 보유지 264 군역 봉토 2

군역지 242, 265. 269 군자 l 여. 343 굽타 제국 324. 327. 358 -35 9 궁재 169. 354. 43 9 권문세족 143 균전법 145. 148 그리스 M8 근동 지방의 봉건제 151 기동 부대 237. 248 기마전 126 기사 67. 104. 223. 264, 306 기사도 34. 87. 105. 114. 270 기사령 239 길가메시 544 L 나일 강 280 나카라루티운 490 나파타 357 나폴레옹 460 나하페투티운 490 낙양 353 남(男) 엇 남북조 시대 137 남작 100 납속’ 117 내집단 286, 288, 293-294, 398 -39 9, 422 네부카드네자르 1 세 158, 410 네코 204 노(魯) 115 노르만 305, 307, 309, 312 노르만공월리엄 信 노르만 정복 57, 233, 315

노르망디 57. 316 노마크 35 , 190, 378-3 8 1, 390 -39 1 노메스 190, 194. 541. 547 누l::l T 로드 253, 256, 261, 263, 502-503. 516 노예 140 노예 왕 226 노예제 267 녹봉 78 농노 llO, 143. 241, 520 농노 보유지 lll 농노제 26. 37. llO, ll5. 267 농민군 241 누비아 200, 203, 292, 376 누주 164 누주 접토판 332 니네베 168, 204 니케아 234, 249 니하완드 176 E: 다리우스 173 다이라 가문 70 다이묘 7~. 3 46, 408, 414, 428 -42 9, 439 다이묘 한 79 다이언 아수르 169 다이카(大化) 365 다케고시 299 다해 부족 174 단테 449-4 5 0 당(唐) 278 -27 9, 374 대러시아 253-254 대리인(代官) 79

대머리왕 찰스 223 대토지 소유자 235 대헌장 58 데브브와즈 479 데오가르 215, 219 데오데릭 328 데인족 310 덴데라 203 델리 222, 227-228 델타 지방 l96 도교(道敎) 138 도독(都督) 386 도시 군주제 385 도시~봉건제 337, 348, 353, 409, 549 도시 사회 287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40, 74- 75 , 397, 408, 414, 439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 4041, 75-78, 465 도쿠가와 시대 82, 86. 88. 440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75, 77-78. 353. 407-4 08 . 414, 429. 439 돕쉬 302 두라테 413 두카스 왕조 243-245 뒤르켐 287, 290 드루지나 SOI. SOS 드보리아네 264 등자 306 디나토스 378, 393 디나토이 241, 392, S07 디베란 488 디브헤란 483 디스 203 디오클레티아누스 238, 350. 31f 7

2 라게 176 라르사 361, 363 라 마르쉬 316 라메시스 320 라미시드 왕조 34 라벤자 387 라스카리데스 249 라이알 207. 216 -21 8 라이오트 211 라이트 167 라자스 220 라지푸트 205-219, 228, 278, 319-325, 327- 328, 341 라토르가 214 라티모어 %. 121- 12 7, 131-132, 136, 341. 370, 543 라티푼디아 241-242, 378 라틴 제국 235 람세스 2 세 203 람세스 5 세 200 랭커스터가 447 러시아 279 러시아의 사법 255 레드필드 287, 294 레비 l~l 레오폴드 2 세 461 령(令) 118 로마 교황 59 로마누스 1 세 243 로마 제국 37, 55-56 로마 제국의 우방 236 로버트 1 세(노르만) 482 쿠人두프체프 175, 472

롬바르드족 236 료케 66 루이 9 세 412 루이 14 세 181, 459, 462 루이 15 세 462 류릭 왕조 256, 504 르네상스 232 리멘 499 리미타네이 235. 237-240 리비아 왕조 319-320. 376 리슐리외 412, 458 리투아니아 261, 264 리파리엔시스 235 □ 마라타스 225 마르두크 41, 356 마르 바누티 170, 334 마르야누 164, 333 마르와르 219 마르즈반 175 , 179, 488 마리 151 □ 많 366 마스페로 98, 103-104, 110, 112, 123, 造 345 마자르족 55. 307. 310, 312 마줌다 366 마즈란 489 마케도니아 왕조 243 마하라나 209, 215 마하라자 고쿨다스 215 막십 코발레프스키 220- 22 6. 576 만달가르 209

만도코로(政所) 303 만리장성 119, 127 맥케이 366 맹자 lll, 367 메 321-322 메디아 170 -17 5, 437 메디아 아트로파틴 483 메로빙거 302, 354 메뢰 357-358 메소포타미아 41, 277, 319-320 메쉬웨쉬 321 메와르 209, 212-213, 215 메인 316 멘투호터 2 세 196 멤피스 196, 201 멤피스의 프타 199 면제권 38, 151-158, 163, 194 -19 5, 233, 246, 248, 259, 267-268, 400, 474 명사의 집회 161 명사회 457 모간 291 모라비아족 309-310 꾸 A 구 511, 515-517, 521-522 모스코공 261-262, 519 모스코 공국 36- 37 , 254 모스코 제 3 의 로마 358, 506 모어 랜드 226 -22 8 몬추조(門注所) 303 몽고인의 침입 313 무굴 제국 213, 325, 359 무르실리스 330, 336 무사 65, 67, 78, 81, 256, 290 무스코비 253, 264, 268, 271 무스코비 차르 국가 271 무왕(武王) 344

무장 종 사단 46 무지 503 무키쉬크 166 묵자 ( 墨 子 ) 444 묵티 226 - 22 7 문다스 216 문 왕 344 미나모토 요리토모 (源효 R 朝) 40, 68-71 , 81, 83 . 303 -30 9 . 322 . 344 . 470 미노스 545- 5 4 6 미란 176 , 180 미르스키 5 여 미세 (米 稅 ) 42 8 미 스 라다테스 175 , 312, 470 미스라다테스 2 세 47 0. 479 - 4 8 0 . 485 . 487 미카엘 셀루스 244 미카엘 팔 레올로그 249 미타니 I59ff , 325. 329. 333. 43 7 민병대 234 -23 5. 237 민속 사 회 287-288 민족 국가 385, 394, 397, 401 -4 02 , 405, 408, 41 0, 417, 42 0 -42 1, 431 -4 3 2, 438, 516 민족 의식 87-8 8 닙 바랑지안족 498 바바로스 281 바바리안 38- 39 . 281 바부르 223 바빌로니아 329, 373 바빌로니아 제 3 왕조 168 바빌론 151

바빌론의 제 1 왕조 155. 168. 332, 361 바스랑기 483 바스푸란 179, 182 , 489 , 491 바실 2 세 242-2 4 3 . 506 -50 7 바이샤 326 바이이 316 바이킹 55 바코팬 291 바쿠후( 幕 府 ) 68, 81, 303, 305, 344. 354 박트리아 476 , 479 반봉건적 ( 半 封 建 的) 40 발로치 216 발미 45 9 배신(陸臣 rear-vassal) 52, 73. 213. 285. 306, 396 배저트 351 백년 전쟁 447 , 450 백작 54, 94 , 100 법가 403 법률 대전 50 베르그송 526 베르나드스키 503 베스트팔렌 조약 4 53 변경주 176, 400, 410 변칙적인 봉건제 522 병참미 304 보드 319, 342-343, 346. 370 보병 223 보스프러스 329 보야르 259, 262, 264, 269. 503, 510 보조군 236 보치나 259, 265, 269 보코리스 204, 323 보편주의 395 볼로가시스 2 세 481, 488

봉(封) 94. 118. 283 봉건 관계 283. 290 -29 2. 297. 452 봉건 국가 50 봉건 법정 56- 57 봉건 서임식 113 봉건 영주권 49. 250 봉건적인 민병 208 봉건 정부 52. 55 봉건제의 윤리 82 봉건 주군 37 봉신 34. 36. 39. 緯 51. 95. 103, 154 , 207. 212. 277. 291. 405. 474 봉신제 74. 152. 251. 269. 307. 320, 351 봉토 51, 54. 78, 101. 108. 129. 207, 249-250. 285, 293-295, 315. 377. 382. 393. 3%. 401-4 2 1 봉토 보유 151-152 봉토의 보유자 108 봉토의 전유권 101 부교(奉行) 79 부르군드파 412 부르군디 316 부르나부리아쉬 355 부미아 208 -2( )C J, 211 부바스티스 201 부시도(武士道) 34. 83 부역 162 부역 면제세 207 부용(附信) 100 부유와와 321 부족 귀족 163 부족 보유지 , 216 부족적인 제후국 486 부주르간 180, 488-49 0 부켈라리 235 , 241. 302

북위 137, 144 분고(豊後 ) 316 분열 시대 93, 127, 136 -1 39. 142-143. 145, 147 불가의 칸국 383 불가족 379. 388 불교 81-8 2 , 138 브라만 221, 326, 328, 359 브라이스 351, 395, 535 브란덴부르크-프러시아 404, 432, 455 브런데이지 331. 333, 410, 472 블라디 미르 대제후 261 불로크 301 비노그라도프 302 비드 173 비드페이티스 173-174, 473-4 7 4 비밀 경찰 79 비자야나가르 358 -35 9 비잔틴 279 비지어 190, 193 비코 526 비콩트 316 人 사(士) 104, 343 사라센 55, 305, 307 사루 547 사르곤 왕조 168 -16 9. 371 사무라이 76, 89. 300, 303 사병 151 사병 제도 154 -15 5 人 K 산조 41, 173-174, 180, 184, 279. 415, 476, 493

사유지 259 , 510 사이러스 474 사이스의 테프나크트 202 , 2 여 사이트조 323 사인(士 人) 관료 109, 130, 132 사인 사회 128, 136 사적 사법권 151, 155, 162 사적인 재판권 154 사전 ( 私田 ) Ill 사제 106 사츠마 (薩 馬 ) 89, 316 사카 479 사카스틴 175 사카이 ( 塀 ) 85 사카틴 479 사두르 1 세 481 , 483 , 491 삭타와트 213 산킨 고타이 제도(修勤交代) 77, 79 삼국 시대 137 삼수-일루나 156, 361 30 년 전쟁 450 , 458 삼티크 1 세 323 상(商) 93-99, 341, 367, 369, 371 상누비아 376 상부 계층 형성 128, 134 -13 5 상비군 163, 243 상사(商社 , merchant comp an y ) 84 상설 용병대 265 상속세 207 상앙 115, 445 상업 신정 정치 152 상이집트 190, 193, 1%, 201-2 0 2, 321 상인 110 색슨족 310 샤르다란 179, 488-48 9

샤 를 마뉴 53-5 4 , 2%, 3(JC J- 310, 344. 350 - 351, 355 샤를마뉴 제국 54 샤푸르 415 샤프 195 샬마니서 3 세 169, 413 샬마니서 4 세 169 서안(西安) 95, 353 서인 l(JC J 서임 의식 M6 서중서 135 서진 137. 141 - 14 2 선 (禪 ) 81 선(禪)철학 81-8 2 선승 ( 禪 僧 ) 81 선원(禪院) 427 섬너 286 성 74 성곽 도시 129 성직록 65 성직 천거권 252, 426 세네살 316 세누세르트 3 세 389. 392 세르딕 416 세소디아가 215 세소스트리스 1 세 197 세소스트리스 3 세 1% 세숀크 201-202, 321-322 세습적인 지배권 63 세습 제후 262 세습 토지 보유자 269 세토나이카이 (浦戶內海) 85 세트 1% 세푸구(하라키리) 83 셀레우코스 173, 175, 474476, 484

셀주크 508 셔든 200 소너 323. 576 소르브족 309 소향신 36 손(가신) 140 송양공 105 쇼(莊. 장원) 64. 6%9. 72-73, 81, 298 쇼군(將軍) 32, 68-70 , 77-79, 82, 88, 113, 305-308. 313, 354, 407-4 08 . 439. 465 수(守) 118 수(隨) 93, 145 수드라 326 수렌 176 -17 7, 180. 486-487 수메르 152-153, 544 수장권 74 수필루리우마스 331 순위 제도 504 순찰사 304 술탄 222 슈고(守護) 69, 71-72. 315 스멘데스 200 스비아토스라프 507 스칸디나비아 309 人·구立 516 스콜라레스 302 스트라테고이 238, 243-244 스트라티오트 239-242, 245, 247 스트라티오티콘 테마 388 스트레이어 284, 317, 467 스티븐 417 스파이서 152 스판디야드 180 슬라브족 238, 388 시리아 165-171

시마즈 65 시민 사회 130 시베루스 알렉산더 237 시아 카 480 시우트 197. 384 시켄(執權) 70 시코쿠섬 2% 시 키 (職) 64-72 . 299-300 신권(神權) 451 신사도 146 신서 151, 160, 218 신성 로마 제국 37. 250, 350, 359. 364 신앙의 시대 41. 138, 526 신월도(神月刀) 166 신토(神道) 66 심마초이 235 . 십일세 130 십자군 328, 508 씨족 63 씨족 관계 297 씨족당(氏族堂) 299 씨족 연맹 64 씨족제 68, 300 。 아나스타시우스 387, 393 아나톨리아 고원 지대 186 아다드-니라리 2 세 168 아디아빈 공국 485 아라시드 475 아르다쉬르 1 세 179, 481-4 83 . 491 아르다완 3 세 481 아르마냑파 412

아르에니아 483 아르벨라의 연대기 480 아르사세스 41 . 175. 178. 183, 279. 488- 491 아르쉬다르 415 아리스타르코스 529 아무루 153, 156. 183, 361-362 아무루 제 1 바빌로니아 왕조 153 아베 308 아슈르 168, 337. 356 아슈르바니팔 204, 323 아슈르발리트 355 아슈르유2 발리트 168 아스파바드 176. 180 아시리아 165-171. 373, 437 아시카가(足利 ) 65 구 1 , 81-8 2 , 312 -3 15, 416, 427 -4 2 9. 481 아우랑제브 224 , 229, 325 아우크스부르크 회의 432 아자단 180, 488 아자드 49 0 아카드 151, 161, 360 -36 1, 363. 399 아케메네스 172 -17 5, 178 -17 9. 183. 185- 18 6, 311. 355, 467-4 7 8, 484 아키(安藝) 316 아펠라 545 아프간 216 아피온가 241. 247 아후라-마즈다 173 악바르 325 안티오쿠스 3 세 175 알라라크 166 알란족 236. 379 알레포 166, 242, 332 알렉산더 대제 476

알랙시우스 콤네누스 244 -24 5 . 252 알 비루니 326 알폰소 5 세 413 앙주 57 앙주의 헨리 397 애제(哀帝) 120 앵글로 색슨 233 앵글로 색슨 법 57 야만족(胡族) 125-126 양견(楊堅) 389 양자강 345 양제 389 에도(江戶) 76, 85-8 6 에드워드 1 세 249. 455 에드워드 마이어 547 에란 군 스파바드 180 에버하르트 %, 121, 127-128, 1 짜 131, 133 - 135 에사라돈 323 에슈나의 빌라라마 155 에치젠(越前) 316 에클레지아 545 에테샹 473 에티오피아의 정복 323 엑크 269 엔시 184 -18 5 엔키 41 엘람 171, 325, 329. 437 엘리마이스 175, 475-4 7 6. 478, 483 엘릴 41 엘부르즈의 히르카니아 483 여름 궁전 178 연합 다이묘 78 영국의 관습법 58 영웅 시대 153. lo !, 282, ·w . 3 꼬 332.

540, 542 영주권 47-53 영주 직영지 lll 영지(藩) 77 예(禮) 343 예속자 163, 285 예시 479 오닌(應仁)의 난 314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40, 397. 408, 414 오라온스 216 오르데스 2 세 177 오베이드 152 오사카 74, 85-8 6 오스만 제국 514 오스만 터키 506 오와리(尾張) 316 오초 7 국의 난 119 오컴의 월리엄 449 오토 3 세 236, 395 오토 대제 350 -35 1 오프리치니나 521 옥수스 479 옥시린쿠스 파피루스 241 왕 117-118 왕국과 후국(候國) 119 왕망 120 왕중왕 355, 436, 480, 484, 489 왜구 84 외집단 286, 288, 293, 394 요제프 2 세 460-461 용병 424- 426 우다이 싱 209 우다이푸르 209, 215 우델 269, 5~. 515 우라루트 171, 329, 373, 410, 437

우르 151 우르 제 3 왕조 337. 360 -36 1, 371. 376 우르크 544 우바야 475-4 7 6 우상 파괴 운동 251 운수 노동자 141 원(原)수메르 152 원봉건 36. 98. 312-313. 330 -33 1. 343, 345, 360. 375. 377. 381, 394. 396 원봉건 국가 349, 480 원봉건 단계 284, 303, 305, 531. 533 원봉건 시대 299. 308 원봉건적인 사회 167 원봉건 정체 295 원봉건 체제 285. 306 -30 7, 321, 324. 505 웬드족 309 웰프가 308 위(魏) 117. l37 위(尉) 118 위수(消水) 339 위트포겔 121, 131-134, 136 위하(淸河) 95 월리엄 루푸스 482 월리엄 크루크 216, 323 유교 82, 138, 404 유럽의 협약 449 유령 제국 374. 376, 395-396. 433-4 3 4, 438, 469. 518, 522 유령 황제 421, 438 -43 9. 484 유사 봉건적 93 유산 봉건제 272 유스티니아누스 235. 237. 242. 361, 387, 389, 507 유예(劉f,l) 143 율법주의 163

융(戒) 339 융커 191, 460 은대지 154, 157-158, 162, 222, 225, 251, 263 읍(邑) 102 의사 봉건제 408, 425 이(夷) 339 이누 41 이드리미 166 이란 고원 지대 186 이민족 침입 시기 137 이반 3 세 262 이신 360, 363 이신의 리피트-이쉬타르 154 이에미츠 439 이원 구조 134 이즈 □ I-에비스 308 이즈모(出雲) 316 이집트 278 -28 0, 319, 374 이푸워 195 익발다르 224 익 타 222-223 , 226 익 타다르 222-224 인더스 강 280 인도 319 인도 유럽족 280 일 드 프랑스 57 일본 제국 37 임차인 251 刀 자(子) 100 자객 115

자그로스 171 자문 기구 180 자민다르 224 자사(刺史) 119 자유 토지 보유자 110 자작 100, 407 자크 피렌느 195. 382 장궁(長弓) 竹 8 장미 전쟁 4l3 장인 no 장자 상속제 73 재(宰) 102 재분봉 151, 207 재판 제도 52 적(秋) 339 전(前)봉건 시대 169 전(前)자본주의 사회 92 전국(殿國) 445 전국 시대 ll4 전사(殿士) 53. 58. 67-o S. 104. m. 161 전사 귀족 161 전사단 39, 167, 223, 282-283, 296 -30 6. 377, 471, 534 전자본주의적 단계 88 전조(前趙) 138 전차대 39 전차 전사 172 정(鄭) II5 정복왕 윌리엄 31, 41, 417, 482 정신적인 형제 236 정신적 친족 관계 236 정전 129 -13 0. 134 제(帝) ll7 제우스 534 제임스 진 565

제자백가 402-4 03 , 419 제프텔 509, 576 제후(諸侯) 58, 100, 102-103, 제후국 58, 97, 99, 102-103, 113, 210, 2©, 402, 404 젠트리 245, 448 젬쉬치나 521 조드푸르의 마하라자 214 -21 5 조로아스터교 179 조상 숭배 106 -10 7, 109. 쏴 3 조정 51 좌(座) 83 족보 106, 109 족장권 49 존왕 417 존 티미세스 507, 512 종사 48 종속적인 보유지 46 종속적인 왕 1(,() 종속적인 제후 1© 주(周) %, 98, 147, 319, 338, 346, 432 주(周)왕조 92, 95, 97, 105, 280 주 177, 473 주 378, 381-382, 390, 393 -39 4 주게 478 주공(周公) 345 , 347 주안 2 세 412-4 1 4 주의 봉건제 93, 97-98, 103, . 113, 123 - 124, 127, 134, 136 주지사 407 준봉건적인 정체 522 중무장기사 39 중세의 개혁 운동 232 중인(衆人) 109 지방의 법정 58

지방주의 151, 393, 395 지주 사인(地主士人) 91, 143 지주-소작 130, 147 지크 180 지토(地fill) 69-71 지토 시키 69, 7l 직업 군인 235 진 (秦) 93, 97, 99, 115, 119 징세 사령관 261 大 차드윅 282-283, 287, 290-29 1 차르 236, 267, 519 차르사 208, 212-213 차판 209 찰스 7 세 412 천 108 천명 1()C ) 천명 사상 367 천수각(天守閣) 75 천자 437 체시폰 176 초기 봉건 단계 283-285 , 305 . 332 초기 봉건 사회 286 촉한(蜀漢) 384 촌다와트 213 촌주 72 충성 서약 161 친족 관계 290

겨 카니스 329 카데쉬 385 카라신 175 카레 전투 486 카롤링거 36. 55-56, 58, 304 -30 7 카르나크의 아몬 19< }-2 00. 203 카르크미쉬 166 카르타고 387 카를 마르텔 251, 305, 307 카리스티키온 250 -25 2 카린 176. 180 카린티아의 아눌프 310 카바드 181 카샤움 166 카스트 326 카시트 151-158, 183-184, 325-329. 361 카시트의 봉건제 158 카자르족 502 칸드 216 칸토로위츠 576 칼라 파타 212 칼리사 2()C ), 211 칼 스티븐슨 40 칼케돈 종교 회의 252 캄비세스 204 캄푸스 마르티우스 545 코라스미안 초원 지대 186 코미타투스(종사제) 153. 282. 302 코사크 264 코임브라의 페드로 413 콘스탄티누스 387 콘스탄티누스 7 세 243 콘스탄티누스 리쿠데스 245

콘스탄티누스 모노쿠스 245 콤네니 왕조 246, 248, 252, 512 콥토스 195 콰트나 166 쿠두루 170 쿠두루스 336 쿠라 세소디아 213 쿠만족 502 쿠사누스 449 쿠스로스 181-182 쿰발메르 2()1 ) 큐슈섬 D6 크라수스 486 크레이머 153, 540, 544 크리스텐슨 472, 475, 480 크릴 96. 108 -1( )(). 367-3 6 9. 371 크샤트리아 326 크세르크세스 %9 클라우제비츠 459 클로비스 328 클류체프스키 269, 5()1 ) 키루스 173 키얀 167 키에프 347 키에프-누t:::t'j1무C: 러시아 255, 271 키에프-러시아 257, 392, 508, 521-5 2 2, 548 키에프 시대 270 키에프 체제 504 E 타그마타 243 타니스 200 타이라(平) 68, 300, 308

타일러 291 타쿠르(영주) 211 타타르 381, 499, 506 타타르인 255, 261, 264 타하르카 323 탁신(託身) 65, 103, 222, 225, 298, 300, 쏴 2-343 탄 177, 312 탕왕(湯王) 368 -36 9 태수 238 테마타 243 테베 1%, 384 테오데릭 303 테오도시우스 신법 237 텐타몬 200 텔레피누스 331, 409-4 IO 템 234, 238, 240 -24 9, 387-388, 500 토드 206 -20 7. 20C }-2 12, 토루 75 토사(土佐) 89 토사 한(土佐藩) 89 토인비 309, 499, 534 토자마(外樣 다이묘) n. 79 토착 씨족장 97 토착 제후국 59 토킬드 제이콥슨 152, 540, 547 퇴니스 'lET 튜턴족 300 튜트모스 3 세 202 티그라트급詞 1 서 1 세 168 -17 0, 334, 413 티그라트급실레서 3 세 ”l

고 파두아의 마르실리오 “9 파라노이아 248 -24 9. 252 파라오 167, 190, 200, 203, 278, 379 파로이코이 247 파르 179 파르타바 175 , 470 파르티아 37, 173-183, 185-186. 310 -31 1, 469-4 7 1, 474, 476 파바그 482 파블로프슈김반스키 269 파쉬 왕조 158 파치나크 236 파탄 216 판차야트 210, 225 팔레스타인 279 8 왕의 난 142 패(覇) 113 퍼쉬 316 페데라티 235 페르시스 175, 478, 482-4 83 페르시아 171-174. 437 페치네그족 508 페피 2 세 1 엇 평민 1()C )-1 1 포메라니아족 309 포메쉬치크 265, 522 포메스테 519 폭군 이반 254; 266, 520 푸가초프 반란 521 푸에리 302 프라티하라 324 -32 5. 328 -35 9 프란테지네트왕조 “7 프랑크 왕국 55

프랑크족 471 프러시아 456, 459 프레카리움 251 프레토 244 프로노이아 244 -24 6. 249-250. 513 프로노이트 245-247 프리드리히 윌리엄 455-4 5 6 프리드릭 바버로사 40 프삼네티코스 204 프人구~ 253 프와투 316 플랑드르 57, 316 플루 413 플루타크 487 . 피기스 451 피난한 유령 제국 357 피라미드 192 피르즈 사 223 피보호자단 46 피샤 514 피안키 202, 2 야. 323 피터 대제 266, 271, 520 피터 스트루베 270 피핀 305 필립 4 세 249 필립 아우구스투스 303 필손 167 필헬린 477 -lo 하(夏) 118, 368-36 9 하금 귀족 177 하란 186

하렘 178 하르사페스의 최고의 사제 322 하르샤 358 하이집트 190 하인 110 하인리히 4 세 482 하치만(八幡) 301 하티 329. 336 -33 7. 373. 409-41 0, 437 학자」사인 계충 124 한(漢) 79-8 0, 85, 93. 었 127, 280, 295. 373 한수(漢水) 345 할람 206 함무라비 156, 277. 297. 329. 332, 356, 361-363 , 373 함무라비 법전 155 합스부르크 436. 4(,() 해양 민족 321 • 해자(堀) 75 헝가리 55, 319 헤라크리우스 238, 245, 388 헤라클레오폴리스 196, 201, 322, 379, 384 헤로도투스 322 헤리오 200 헤이즈 195-196 헤이케 모노가타리(平家物語) 300 헨리 2 세 315 헨리 4 세 412 헨리 7 세 412, 414 헨리 매인 경 217, 220 헬레스폰트 329 헬리오폴리스 201 헬리오폴리스의 레 191 ) 헵제피 197, 204

현자 181 혈족 관계 292, 294 호조(北條) 70, 305 호족 140, 142 호헨슈타우펜 395 호후선(胡厚宣) 94-95 , 369 혼슈(本州) 296, 308 흔케(本家) 66 화전(火田) 112 황실 가계(皇室家系) 62 황제 교황주의 352 황하 280 회수권 216 후(~ 94, 100 후(後)봉건 169, 445, 450 -45 1 후견권 216

후다이 77, 79 후리언족 159-161, 183, 362 후작 100 후작령 141 후토(后土) 107 후한 278 훈족 236 휴 밀러 563 흉노족 141-142 히라 179 히르카니아 176 히타이트 160 -16 2, 183-1 8 4, 221, 329-330, 362 히타이트 법전 162 히파라스 162, 330 힉소스 162-166, 183, 186 -21 9, 391

봉건제에 관한 토론회 참가자 명단 프린스턴 대학 1950. 10. 31. ~ 11. 1. Howard Becker, Univ e rsit y of W i sc onsin Derk Bodde, Un ive rsit y of P ennsyl v ania Crane Bri nt o n , Harvard Univ e rsity Burr C. Brundage , Cedar Crest C ollege George G. Cameron, Un ive rsity of Mi ch ig an Rushto n Coulbom, Atl an ta Un ive rsity W. Rex Crawf ord , Univ e rsit y of P ennsyl v a nia H. G. Creel, Un ive rsity of Chic a go Karl Deuts c h, Massachusett s I nstit ute of Technolog y Wi lli a m F. Edge r t on , Univ e rsity of Ch ica go Jam es K. Feib l eman, Tulane Un ive rsity Ernst H . Kanto r owi cz , Un ive rsity of C a lifornia (now, Instit ute f or Advanced Stu d y) Alfre d L. Kroeber, Un ive rsity of Ca lifornia A. N. Kurat, Un ive rsity of A nkara, Turkey Joh n Marshall, Rockefe ll er Foundati on Charles E. Odeg aa rd, Ameri ca n Council of L earned Socie t ie s (now, Un ive rsity of Mich i ga n) Robert Red field , Un ive rsity of Ch ica go Edwin 0. Reis c hauer, Harvard Un ive rsit y Jos eph R. Str ay e r , Princ eto n Un ive rsit y Marc Szeft el, Cornell Un ive rsity Da niel Thorner, Un ive rsity of P ennsyl v a nia Arnold J. T oy n bee, Un ive rsity of L ondon and Roy al Instit ute of I nte r natio n al Affairs

김동순 성균관 대학 사학과/동대학원 졸업 세인트루이스 대학 박사 학위 취득 현재 성균관 대학 역사교육학과 교수 논문 「 Bas t ard Feudalis m 연구」 역서 『중세시대의 서유럽 W e s t em Europ e in t h e M id dleA g es 』 봉건제의 이해 대11 판판우 학11 쇄쇄술 총펴찍서 음냄 • ——번——역 811699 9966 년년 11 월월 1150 일일 옮긴이 김동순 펴낸이 朴孟浩 펴낸곳 (주)민을시 출판등록 1991 .1 2. 20. 재 1 6- 490 호 135-120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06 강남출판문화센터 5 층 대표전화 515-2000 팩시밀리 515-2007 ©김동순 역사 KDC/9 0 0 Pri nt e d in Seoul, K orea 값 24,000 원 ISBN 89-374 -40 86 -5 94900 ISBN 89-3 7 4 -30 0 0-2 (세트) * 옮긴이와 합의하여 인지를 불이지 않습니다.

대우학술총서 (번역) 1 유목민족제국사 관텐/송기중 45 과정과 실재 화이트헤드/오영환 2 수학의 확실성 클라인/박세희 46 그리스 국가 에렌버그/김진경 3 중세철학사 와인버그/강영계 47 거대한 변 환 풀라니/ 박현수 4 日本語의 起源 밀러/김방한 48 법인류학 포스피실 / 이문옹 5 古代漠語音韻學槪要 49 언어철학 을스튼/ 곽강제 칼그렌 / 최영애 50 중세 이슬람 국가와 정부론 6 말과 사물 푸코 / 이광래 램톤 / 김정위 7 수리철학과 과학철학 와일/김상문 51 전통 쉴즈/김병서·신현순 8 기후와 진화 피어슨/김준민 52 몽골문어문법 뽀빼/유원수 9 이성진리 ·역 사 파트남 / 김효명 53 중국신화전설 [ 袁JiiJ / 전인초김선자 10 사회과학에서의 場理論 54 중국신화전설 ll 〈 근간 〉 레빈 / 박재호 55 사회생물학 [ 윌슨 / 아병훈·박시룡 11 영국의 산업혁명 56 사회생물학 ll 윌슨/이병훈·박시룡 딘/나경수 · 이정우 57 일반언어학의 제문제 [ 12 현대과학철학논쟁 밴베니스트/황경자 쿤 外 / 조승옥김동식 58 일반언어학의 제문제 ll 13 있음에서 됨으로 프리고진 / 이철수 밴베니스트 / 황경자 14 비교종교학 바하 / 김종서 59 폭력과 성스러움 15 동물행동학 하인드/장현갑 지라르/김진식·박무호 16 현대우주론 시 아마/양 종만 60 갑골학 60 년 董作었/ 이형구 17 시베리아의 샤머니즘 이 현대수학의 여행자 디오세지 ·호팔 / 최길성 피터슨 / 김인수·주형관 18 조형미술의 형식 62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 힐데브란트 / 조창섭 모르네 / 주명철 19 힐버트 리 드/ 이일해 63 해석학과 과학 20 원시국가의 진화 하스/최몽룡 커널리·코이트 너 /아유선 21 商文明 張光直/ 윤내현 64 서양고대경제 핀리 / 지동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