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슨 Rey no ld A. Ni ch olson 영국의 동양학자이자 이슬람 신비주의 연구의 대가 런던 대학(1 901) 및 케임브리지 대학 페르시 아어 교수 (1902 - 1926) , 케임브리지 대학 아랍 어 교수(1 926-1933) 역임 주요 저서 . 『 아랍 문학사 』 , 『이슬람 신바주의 연구 』 , 『 성인 회고록 』 등 사회만 한국외국어대학교 아랍어과 졸업 동 대학교 통역대학원 아랍어-영어과 졸업 동 대학교에서 문학박사 취득 카이로 아메리칸 대학교 연구교수 현재 조선대학교 아랍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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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TERARY HISTORY OF THE ARABS
아랍문학사
머리말 1 엇 7 년에 티 . 피셔 언윈 T. Fis h er Un win에 의해 출판되어 그 후 개정판을 내지 않고 두 번이나 간행되었던 『아랍 문학사 A literary Hz story cf tk Arobs 』가 이제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국의 후원하에 이전보다 어떤 면에서 더 정확하고 유용한 새로운 판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기회롤쩌]공해 준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국에 깊은 사의(謝意)를 표하는 바이다. 이번 판은 초판을 그대로 찍은 것이므 로 대대적인 수정이나 필요한 개정 작업을 할 수는 없었다. 물론, 고쳐 쓴 페이지도 상당 부분 있고, 참고 문헌의 목록을 최신 자료로 보강하기는 하였다. 또 본문 중 몇 군데 잘못된 곳을 빼고 상당 양 의 보충 자료를 포함하고 있는 부록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초판의 서문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필자는 <본서를 아랍 문학의 일반적인 입문서로서, 학생용으로는 너무 평이하지 않으며 일반 독자에게는 지나치게 깊이 있는 전문서가 되지 않도록 하려고 하였다. 아랍인들 의 사상을 개략적으로 기록하고, 가능한 한 그들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미친 영향을 최대로 적시(摘示)하고자 하였다. 나의 경험에 따르면, 젊은 아랍어 학도들은 ___ 본서는 바로 이 들을 위해 지은 것이다-그들에게 제시되는 정치적, 이성적, 종 교적 관념이 직접 접해 보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내용을 읽고 이해 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거의 모든 아랍어 서적에는 인명, 사건,
운동, 사상을 가리키는 단어들이 많이 나오는데, 무슬림의 경우엔 이에 대한 설명을 요하지 않지만, 넓은 의미에서 아라비아 역사에 대한 상식이 없는 서양의 독자들은 당혹감을 갖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개괄은 유럽에서 나온 그 어떤 단행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 며, 비록 편견이 들어 있고 부적합한 면이 있다 하더라도 본서가 그 러한 면에서 부족함을 채울 수 있다면 필자의 노고는 충분히 보상 되었다고 생각한다. 주제 선정에 관해서는, ‘저술보다 편찬이 더 어렵다ikhtiy aru al- kalam l1$'abu mi.n ta'l dih i..’ 고 한 어 느 유명 한 명 시 선 편자의 말에 공감한다. 그러나, 발췌나 요약의 경우에는 모든 주제를 골고루 다 다루지 않아도 괜찮을지 모른다. 필자로서는 본서의 주제인 아랍문 학의 역사적 측면보다 문학적인 면에 더 홍미가 있었으므로 스스럼 없이 내 마음 쏠리는대로 하였다. 이는 다른 사람을겁중미롭게 해주 기 위해서는 작자 자신이 우선 홍미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라 비아의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는 아랍 시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필자가 시에 할애한 지면이 결코 과다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디론 문학 장르들에는 시에 쏟온 만큼의 관심을 쏟지는 못 했다. 단 몇 줄로 저명한 많은 작가들을 소개하거나 아예 생략해 버 린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본서는 작가와 그의 저술, 날짜 등을 기록하려 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환경 속에서 형성 된 그들의 사상을 개략적으로 서술하고자 한 것이다. 아랍어 단어의 정확한 전사(轉寫)는 전문학자나 아랍어에 전혀 문외한인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것이지만 작자가 특별히 염두에 두 고 있는 부류의 독자충에게는 절대적으로 긴요한 도움이 될 것이 다. 본서에서 사용한 전사 방법은 <왕립 아시아 학회 Ro y al Asiat i c Society> 에서 추천하고 브라운 Browne 교수가 그의 『페르시아 문 학사lite r ary His tor y cf Pers ia』에서 채택한 것이다. 다만 본서에 서는 맥를 죠i 표기하였다. 고유명사의 맨 앞에서는 생략하였던 정
관사 a1 을 색인에서는 원래대로 표기하였다 . 또한 번거로움을 덜고 자 다음과 같은 약칭을 사용하였다. ‘i bn' (아들)을 ‘b . ’ 로, < 왕립 아 시아 학회지 Jou m :d cf the R 아디 Asiat z.c 요 m. ety > 룰 ]RAS 로 <독 일 동양학회지 Zeits chrift der Deut sch en Morge nlan dischen Gesells 야# > 를 ZDMG 로 택 l 洞데미 의사보고 Sitz ungsb e- n· 야te der Wien er Akademi. e ~ 를 SBWA 로 약기하였다. 끝으로 본서의 집필에는 박식한 ‘동양학자Ori en tali s t'"들의 저술 울 참고하여 임의로 그 내용을 옮긴 바 있는데, 그들에게 감사의 말 울 전한다. 참고 문헌을 모든 경우에 제공할 수는 없었지만 몇몇 중 요한 것만 언급한다면 폰 크레머 Von Krerrer, 골트치어 Goldz iher, 뉠데케 Noldeke, 벨하우젠 Wellhausen 의 저술을 주로 참고하였음을 독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 . 동시에 , 원문의 기본 자료도 충실히 조사 하였다> .
1) [역주] 이는 주로 19 세기 이후 영국과 프랑스, 독일을 중심으로 발달 된 동양학 O ri en tal S tudi es 에 종사한 학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서의 동 양학은 오늘날의 중동과 근동지방, 북부 아프리카 지방의 언어와 문학 , 종교, 인류학, 고고학, 역사학 및 문화연구를 포괄하는 연구영역을 말한 다. <오리 엔탈리 스트>를 중 • 근동연구학자 또는 아라비 아학자 Arab i s t 로 옮길 수도 있으나 본 역서에서는 그 어의에 충실하고 우리에게 낯 익은 용어인 동양학자로 부르기로 한다.
이제 개인적인 감사의 뜻을 전하여야겠다. 2'2년 전, 필자는 <처음 부터 끝까지 교정을 보아주고 각주에서 드러나듯이 수없이 많은 귀 중한 조언을 아끼지 않은 나의 친구이자 동료인 배반A. A. Bevan 교수에게 가장 충심으로 감사한다>고 쓴 바 있다. 여기서 또다시 우리들 사이의 유대를 재론하게 되어 퍽 다행한 일이다. 그의 도움 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 본서가 이제 <성년>을 맞이하게 되니 이는 오직 그의 덕택인 것이다 . 1 g정년 11 월 1 일 레 이놀드 알렌 니콜슨 Rey n old A Nich olson
차례
머리말 5 일러두기 10 서설 13 제 1 장 사바와힘야르 ... .. . . ....... .... ... . . ····35 제 2 장 이교도 아랍인들의 역사와전설 ... .. . . .... 75 제 3 장 이슬람 이전의 시, 관습, 종교 · • • • • • • • • • ·127 제 4 장 예언자와 꾸란 · • • • • • • • • • • • • • • • • • • • • • • • • ·215 제 5 장 정통 칼리파 시대와 우마이야조 .... .. . .. . 26'3 제 6 장 바그다드의 칼리파 ..... . ....... .. . . · ··· ·355 제 7 장 압바스 시대의 시와 문학, 학문 ... . . ... . . 393 제 8 장 정통 교파, 자유 사상 및 신비주의 ·······491 제 9 장 유럽의 아랍인들·· •• • • ···: • •• • •• • •• • · ·· · 541 제 10 장 몽골 침략으로부터 현재까지 ••.• •• .•. .. 585권말 해설 621 유럽 학자들이 저술한 참고문헌 목록 631 옮긴이 참고문헌 어 4 해제 647/후 기 鉛 3 부록 칼리파 계보 ®입주요 사건 연대표 o1'2/지도 的 2 찾아보기 인명 閔y지명 fff2/전문용어 由 5
일러두 71 1 역주는 원서의 각주 번호를 그대로 지키면서 [역주]로 구 분 표시하였다. 2< 본문에>서로 묶강었조으를며 위<해 사>용 -된 속 의 이강탤조릭와체 나인 용인은용 ‘ 어구’는 를 사용하였다. 또한 간혹 나오는 ‘ '속의 인용은 r 'T 를 사용하였다. 3 본문에 나오는 전집, 단행본은 국역에서 『 』로 표시하 며 논문이나 개별 작품은 「 」로 묶었다. 학술지는 < >로 구분하였다. 4 모든 연대는 서력 기원을 사용하였다 . 서력 기원전은 B. C. 로, 서력 기원후는 초기에만 A. D 를 밝히고 그 뒤는 그냥 연 대 숫자만 표기하였다. 다만, 필요한 경우 이슬람력인 히즈 라력의 표시로 A. H 를 밝힌다 . 5 본 역서에서 사용된 전사법은 다음과 같다. 1) 자음 ' [ ], b[ '-:-' ], t[ ..:... ], th[ .:., ], j[ C ], l:i[ C ], kh[ t ], d[ ., ], dh[ > ], r[ ; ], z[ j ], s[ v ], sh[ J- ], ~[ if ], d[ ,.;, ], t[ .l, ], z[ ~ ], ' [ t ], gh [ t ], f[ 나 ], q[ J ], k[ !I ], l[ J ], m[ r ], n[ .:, ], h[ • ], w[ J ], y[ '-' ], 2) 모음(단모음, 장모음 , 이중모음) /i, J/, /u, o/, /a, a/, /aw/, /ay/ , /iyy/, /uww/
여러 모로 호의를 베풀어준 배반 교수를 감사한 마음으로 회고하며
서설 • 셈족 아랍 민족 Arabs 은 구약 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 Noah 의 아들 셈 Shem 의 후예들로서 <셈족Semites>으로 널리 알려진 민족이다. 여기서 셈족은 바빌로니아 Babyl o ni ans, 아시리아 Ass yri ans, 히브리 Hebrew, 페니키 아fllcenici ans, 아람.AramP.ans, 아비시니 아 Ab yssi nian s, 사바 Sabreans, 아랍 둥 제 민족을 가리키는 총칭이다. 이 명 칭이 인종학상 정확한 분류법에 기초한 것은 아니지만-예컨대 창세기 10 장에서 페니키아나 사바인들을 햄 Harn 의 후손으로 간주하 는 것 처 럼 _―—아이히호른Ei chhom(A D. l 'i!Zl년 사망)”이 상호 밀 접한 관계가 있는 이들 민족들을 셈족이라 지칭한 것은 적절한 것 이다. 셈족의 발상지가 아시아의 일부 지역, 죽 아라비아, 아르메니 아 또는 유프라테스 강 하류 지역이라든지 또는 근래 주목받고 있 는 견해로 셈족이 아프리카에서 아시아로 건너갔다는 것2 J 둥은 아 직도 불확실한 가설에 불과하다. 이들은 역사상 최초로 등장하기 훨 씬 이전에 한 조상으로부터 가지롤 뻗어 각기 별개의 민족을 · 형성
1) [역주] E ic hhorn0752-18 'l7):독일의 동양학자 . 『히라 왕국과 시리아의 갓 산 왕국』등의 논문을 남겼다. 2) H Gri mme, Weltg es ch ichte in Karokter bil d em : Mohmmed
한 것이다. 여기서 셈어족에 속하는 언어들의 상호 관계 롤 논할 수 는 없지만 현존하는 문헌상의 기록을 토대로 이 를 발생 연대순으로 배열하면 다음과 같다 . 3)
3) Noldeke, Di e Semi tisc hen Sp r achen(Leip zi g , 1899), 또는 동 학자의 논문으로 대영 백과 사전 En cycl opa ed ia Bri t:anniaz 2 판에 나오는 <제 셈언어 Se miti c Lan g ua g es> 를 참조할 것. 그러나 Renan, Hi st o i r e g~ nerale des lang ue s s tmitiq ues(l855) 는 지금은 고색창연한 것이 되었 다. 문명사에서 셈민족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관한 홍미로운 시론(試論)이 F. • Hommel, Semi tisc hen Volker und Sp r achen, vol. i (Leipz ig , 1883) 의 서론으로 발표되었다. 이 표의 연대는 물론 대략적인 것이다 .
비문(碑文) 1 바빌로니아 또는 아시리아어(기원전 3CXX)-따洙년) 2 히브리어(기원전 1 !:m년부터) 3 사바어나 힘야르어 Hmy ari比로 불리는 남부 아랍어 최고(最古) 의 비문(기원전 앉 n 년부터) 4 아람어 비문(기원전 印沃년부터) 5 페니키아어 비문(기원전 700 년부터) 6 고대 에티오피아어 비문(였)년부터) 7 가장 오랜 아랍어 비문(“玉년부터) 셈족의 대표 아랍 이와 같이 아랍어는 셈어족 중 가장 연륜이 짧은 언어이지만 셈 어족의 어느 언어보다도 가장 <원시 셈어 Ur semiti sc h>에 근사한 언어로 간주된다. 이는 아랍인이 지리적인 여건이나 단조로운 사막 생활로 인해 어떤 면에서는 다른 셈족보다 셈족의 특성을 보다 순 수하게 보존함으로써 그 특성을 보다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이슬람 정복 (700 년)이 시작된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 지, 아란인들은 고대 셈왕국의 영토를 합친 것보다 훨씬 넓은 광대
한 지역에 걸쳐 그들의 언어 , 종교 , 문화를 확산시켰다 . 오늘날의 아랍이 세계룰 지배하던 중세의 아랍은 아니지만, 일시 적인 세력 상실은 오히려 이들의 정신적인 지배권을 강화시켜주었 다. 죽 이슬람교는 여전히 서 아시아의 지배적인 종교이며, 아프리 카에서도 점차로 세를 확장하고 있고 유럽에서조차 스페인과 시칠 리아 S icily4 ) 로부터 쫓겨난 대가를 터키에서 찾고 있다 . 대부분의 셈 민족은 빈약하거나 애매 모호한 기록을 남기고 멸망해 버려 이들 셈 민족의 역사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아랍 의 경우에는 6 세기 이후 전개되는 역사적 발전과정을 고찰하고, 그 들의 민족사나 사상사룰 기술할 수 있는 충분한 자료가 전해지고 있다.
4) [역주] 이탈리아 남쪽의 섬으로 지중해에서 제일 큰 섬 .
그렇다고 해서 본서가 그렇게 풍부한 자료를 토대로 잘 쓰여진 문학사임을 내세우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 필자에게 주어진 지면이 무한정이라고 하더라도, 방대하고 다양한 아랍 문학의 모든 분야를 철저히 고구(考究)하여 사가들이 그 결과를 손에 넣을 수 있기까지 는 앞으로도 좀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북부아람과남부아람 옛부터 아라비아는 아라비아 반도를 가로지르며 교통에 자연적인 장애물이 되어온 <알-루브아 알-칼리 al-Rub' al- Kh.a1I >5) 라는 광대 한 사막에 의해서 남북으로 갈라졌다. 뿐만 아니라 기질이나 생활 방식에서도 아주 이질적인 두 종족이 대치함으로써 북부 아랍과 남 부 아랍으로 나누어졌다 . 북부 지방인 히자즈H j泣와 나즈드 Na j d 고원의 주민들이 <천막 houses of hair >6 ) 에 기거하며 낙타의 방목지
5) [역주] 이는 아랍어로 <비어 있는 지역> , 죽 <공허지대>를 의미한 다. 또 <공허한 사분의 일>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6) [역주] 특히 이 천막온 양이나 낙타 털로 만든 천막을 가리킨다 . •
를 찾아 여기저기로 옮겨다니는 유목민政처 o uin s 들인데 반해, 예로 부터 <아라비아 펠릭스 Arab i a Fe lix > 11 로 불리던 남부 지방의 예멘 Y印 남은 일찍이 문화가 고도로 발달하였던 곳으로 솔로몬 Solo ID) n 왕의 사치를 더해준 향료, 금, 보석 등이 풍부한 곳이었다. 북부의 유목민들은 이슬람 이전의 시(詩) 언어이며 코란 Koran9 1 의 언어인 아랍어를 말하였으며, 남부에서는 <힘야르>리는· 방언이 사용되었다. 이 힘야르 말의 독특한 문자는 근자에 해독된 바 있다. 이들 그리스와 로마의 지리학자들이 명명한 명칭을 그대로 따르면----: 사바인들에 관해서는 뒤에 상술하고자 한다. 이들의 전성기는 기원 후 초기 역사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종말을 고하고 , 북부 아랍이 발 홍한 A. D. 00:)년 이전에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7) [역주] 이는 <풍요한 아라비아> 또는 < 행복의 아라비아>를 뜻한다. 고대 아라비아를 나눈 3 구분 중 하나로서 아라비아 반도 남부를 가리 키며 아라비아에서 가장 번영했던 지역이다. 때로는 예멘만을 지칭하 기도 한다.
8) [역주] 아랍어의 y umun 은 행복을 의미하는데 이 때문에 <행복의 아 라비아>로 불리어졌는지 모른다. 또 yamin은 오른쪽을 뜻하므로 홍해 쪽에서 보아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 데서 그렇게 불리었다는 것이 정 설이다.
9) [역주] 원문에서의 영문 표기는 코란 Koran 이나 본 역서에서는 아랍 어의 원음을 살려 이후 꾸란Q ur'an 으로 음역하기로 한다.
이스마일족 lshmael it es 과 요끄딴족 Yoq tan id s 아랍인이 그들의 공통 조상인 삼 븐 누흐 Sam b. N w:i(노아의 아 들, 셈)로부터 두 혈통을 이어 받았다고 하는 것이 무슬림 족보학자 들의 지배적인 견해이다. 이는 종족의 차이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하다. 즉 북부는 이스마일 Isrna‘ il(또는 Ishmael) 의 자손인 아드난 ‘Adnan 의 분파임이 보편적으로 인정되며 남부의 혈통은 대개 의 족보학자들이 아비르 ' Ab ir(또는 Eber) 의 아들인 요끄딴 Y여 園 1 . (또는 J o ktan)과 동일시하는 까흐딴Q由臣 n 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
자(長子)의 혈통인 요끄딴족에는 사바족이나 힘야르족 외에도 이슬 람 발생 훨씬 이전에 북부 및 중부 아라비아에 거주하였던 몇몇 강 력 한 부족들 - 예로서 따이이 Tayy i', 킨다Kinda, 타누크 Tan ol
10) Ibn Qu ta yba , Ki tab al-Ma'ari j, ed. by Wt ist e nfeld , p. 18.
11) 아랍인들의 족보에 관한 상세한 자료는 훌륭한 호적부와 함께 뷔스 텐펠트W ti s tenf eld 의 Genealog isch e Tabellen der Arabis c hen Sta m me und Fami lien (Gott ing e n, 1852-1853)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역주] 아 랍어 원전으로는 이븐 하즘 lbn H aj m 의 『 아랍 족보 대전Ja mhzra t Ansab al- '.A rab 』 이 있다.
라비아 RabI‘a 의 후손
II
1) 부족 답바, 타입 쿠자이마, 후다일, 아사드, 키나나, 꾸라이쉬는 모두 킨 디프 Kh i nd if로 알려진 집단을 형성하였으며 까이스 아일란Q a y s 'Ay la n 과는 구분된다 .
무슬림 족보의 특징 위와 같은 혈통이 다소 허구적인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슬람 이 전에는 족보학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초기 무슬림 학자들은 난삽 하고 빈약한 전숭만을 가지고 족보 작업을 해야 했다. 더욱이 이들 은 정치, 종교 등의 여타 동기로 인해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I J) 이 들의 꾸란 연구와 성서사의 연구를 통해 아랍 민족의 족보상 최고 정점에 있는 족장들의 이름이 전해졌다. 아드난으로 시작되는 아랍 족보의 상당 부분이 이슬람이 창시될 당시 아랍인들의 기억 속에 실제로 보존되고 있었고 이슬람 이전 시인들의 증언으로- 입증이 되 긴 하지만 온전하게 시실(史實)로서 받아들이기는 어렵댜 14) 또한 모 든 부족 이름의 시조가 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혈통이 작금의 연구 결과와 상충되는 점도 있다 .15) 지리상의 연합 또는 임시 연합을 나 타내는 예로 마앗드 Ma'add 같은 이름은 본래 커다란 부족 집단이 나 부족 연합을 지칭했을 듯싶다. 이슬람 초기 이래 늘 북부 아랍과 남부 아랍 사이를 갈라놓은 지독한 적대감1 6) 에서 보듯이 양자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이론은, <예멘인>(남부)이라는 용어를 예멘 에 거주하며 그곳의 방언을 말한 개화된 사바인이나 힘야르인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쓸 경우에는 딱 들어맞으나 반도 전역에 흩어져 있던 아랍어를 말하는 <예멘인> 베드윈에게까지 확대 적용하기에 는 무리가 따른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이 민심을 읽을 수 있는 족보 문서의 사료로서의 가치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그와 같은 견지 에서 전설이 때로는 사실보다 우위에 놓이게 되는 것이며, 아랍인들 이 믿는 바가 정당한지의 여부를 파악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람인들
13) Goldz ihe r, Mulnmmedanis c he Stu dien , Pa rt 1, p. 133 이 하와 p. 177 이하 참고.
14) Noldeke in ZDMG, Vol. 40, p. 177.
15) Margo lio u th , Molnmmed and the Ri se of Islam, p. 4.
16) 이 적대감의 성격과 원인에 관해서는 Goldzih e r, 앞의 책, Pa rt I, p. 78 이하 참조.
이 믿는 바를 구명(究明)하려는 것이 본 장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 아랍어 > 는 2 개의 방언으로 구분된다 . 1 7) 첫째, 마흐라 Mahral B) 와 쉬흐르 S hibr l 9) 의 여러 친족방언을 비롯하 여 사바, 힘야르, 미나 Mm 鉉깍 1 20) 등 예멘에서 사용된 남부 아랍어 둘째, 예멘을 제의한 아라비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진정한 의 미의 아랍어이다.
17) [역주] 아랍어는 언어의 계통 분류상 셈어족으로 분류되며 그 중에 서도 남부 셈어군의 동남부 셈어계로 분류된다. 이는 다시 힘야르어, 리흐얀어, 미나어, 사바어 둥의 고대 남부 아랍어 Old South Arabic 와 이보다 늦게 나타난 소코트리어, 마흐리어, 쉬호르어 둥의 근대 남 부 아랍어 Modem South Arab ic로 구분된다 . C. F. & Voeg e lin (1 978), Classif ica ti on and Index of the Wor/d's Lang uage s, ELSEVIER, p. 304 참조.
18) 〔역주] 오만과 하드라마우트 사이의 남부 아라비아 지역.
19) [역주] 마흐라에 속하는 도시로 특히 오만과 아덴 사이 의 남부 아라 비아 해안지대를 가리킨다. 용연향이라는 향료로 유명하였다 .
20) 〔역주] 예멘 북부룰 중심으로 번영하였던 고대 남부 아라비아의 왕 국 (B . C. 1400-700). 북부 아라비아의 알-울라 al-‘Ula 에서도 미나어로 쓰여진 비문이 발견됨에 따라 그곳에 식민지롤 운영하였던 것으로 보 인다 .
남부아랍어 이들 남부 아랍어 중에서 마호리 Mahri,21 ) 소코트리 Soco tn..22 ) 를 비 롯한 기타 현존하는 방언들을 빼놓으면 유럽 여행자들이 수집한 수 많은 비문 외에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이에 관해서는 편의상 다음 장에서 사바인과 힘야르인에 관한 전설적인 역사의 개요를 간략히 살펴보는 것이 낫겠다. 남부 아람어는 불규칙 복수와 쌍수 형태, 그 리고 m을 첨가하여 비한정을 나타내는 방법(아랍어는 n 을 첨가시킨 다) 23) 둥 문법형태나 어휘면에서 아랍어와 유사한 점이 있다. 히브리
21) 〔역주] 마흐라 지 역, 죽 남부 아라비아 해안의 언어.
22) [역 주] 아덴만의 소코트라 Soco tra 섬 의 납부 아랍어 방언 .
23) [역주] 명사 어말에 무모음 nun 을 첨가하여 우리말
어처럼 S in과 Sarrech 가 구별되는 幻개의 문자로 된 알파벳은 에티 오피아어에 더 가깝다 .% ) 힘야르 왕국은 6 세기에 아비시니아인들에 의해 무너져 따灰년경에는 남부 아랍어는 이미 사어(死 語 )가 되어 있 었다. 이때부터 북부 방언이 널리 쓰이게 되면서 <가장 우수한 아 랍 Arabic JXJT excellence>25) 로 불리 게 되 었다.
24) [역주] 에티오피아어는 남부 아라비아인이 아비시니아 를 식민화하여 에티오피아 문명을 만든 데서 나왔다 .
25) 이후 <아랍어>라 함은 이러한 의미로 사용됨을 뜻한다 . [역주] 이 아랍어를 al-lug h a al-'arabiy ya al- fu$l_la라고 하는데, 오늘날에 와서 는 흔히 고전어로서의 문어체 아랍어를 가리킨다 . 니콜슨은 fu sha 를 <우수한>으로 옮겼으나 그보다는 <가장 순수한>으로 옮기 는 것 이 아랍어 원의에 더 맞다.
가장 오랜 아람어 문자 기록 약 였 H 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바어 비문에 비해 아랍어 비문의 역사는 짧다고 할 수 있다. 히자즈 북부의 히즈르I:Iij r 비문 과 다마스쿠스 근교 싸파$afa 비문(기원전에 북부 아랍인들에 의해 쓰여졌으나 사바어와 비슷한 독특한 문자로 되어 있어 일반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아랍어라고 할 수는 없음)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아랍어 기록은 알렘포 Al eI)J;X) 동남부에서 발견된 앉합년 또는 513 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자바드~ 비문(시리아어, 그리스어, 아 細로 쓰여짐 )26) 과 fffi년경의 그리스어와 아랍어로 쓰여진 하란I:Ja rran 비문m ) 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들 비문의 기록에 관해서는 그 해 독이 어려우므로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일 필요는 없다. 이슬람 이전 의 아랍인들 중에 읽고 쓸줄 이는 사람은 드물었다. 281 그럴 만한 재
26) Monats b eri ch te der Koll, Preuss, Akad, der W i ssensc 庫 en zu Zl)B Derel inV o (Fg eiibe,r u Sayry r,i e1 8C8e1n),t r pa.l e1, 6I9n s이c r하 ip에ti o서n s 자S코en Siatc iqhua eus 가, p.최 1초17로. Z공D개M 합G, vol. 35, p. 749 에 다른 참고문헌들이 제공된다.
28) 이 에 대 해 서 는 Goldzih e r, Muhammedanis c he St u die n , Part I, p. 110 이 하를 참조.
능을 가졌다면 유태인이나 기독교 교사들 덕택이거나 히라 Hm나 갓산 Ghass~ 의 외래 문화의 영향 때문이었다. 야마마 Yamarna 전투(懿년) 직후에 최초로 수집된 꾸란이 가장 오랜 아람어 문헌이지만 아랍어로 쓰여진 문학 작품의 기원은 그보 다훨씬 앞선다. 이슬람 이전의 시 전래되는 이슬람 이전의 시가 모두 이슬람 출현 전(따H 立:년)의 작품으로 추정되지만 그 속에서 아라비아 시가〈詩歌)의 <최초의 연 원(淵源)>을 찾아볼 수 있다는 가설은 오히려 그 작품들의 정교한 형식과 기술적인 완벽함으로 인해 받아들이기 어렵다. 『일리아드 Il ia d 』나 『오디세이Odys s ey』에 대해서처럼, 이들 뛰어난 송시(碩詩) 에 대해서도 <오랜 기간 시적 기교에 숙달되기 전까지는 도저히 나 올 수 없었던 고도의 완벽한 예술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추후 기술하겠지만 이들 시는 수백 년간 전승, 보존되어 왔으며 대부분 花 0 았 D 년 사이 압바스조 ‘Abb asi d 시대 초기의 무슬림 학자 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아라비아 반도의 각기 다른 부족 출신들인 시인들에 의해 쓰여진 시의 언어가 단일 언어라는 점은 주목할 만 한 사실이다. 방언에 따른 언어상의 변형은 지극히 미미하다. 이들 시 인들은, 구어로 널리 쓰이지는 않았지만 도리스lliri s29) 나 아이올 리스 Aro li s30 ) 의 음영 시인들이 차용한 이오니아 Io ni a3” 의 서사시 방 언과 유사한 인위적인 방언을 사용한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그 러나, 다소 교양 있는 방랑 음유 시인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 히라의
29) [역주] 고대 그리스 중부의 한 지방. 30) [역주] 소아시아 서북부의 연안지역에 있던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 31) [역주] 소아시아의 서해안에 인접한 에게 해 제도를 포함한 고대 그 리스의 식민지 .
기독교 아랍인들뿐 아니라 양치기, 도적, 무지한 유목민들까지도 이 언어룰 사용한 점에 비추어 볼 때 당시 아라비아 전역에 걸쳐 사용 되던 아랍어가 6 세기의 시 언어로 쓰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이다. 꾸란 무함마드 M曲 如 m 터의 성공과 정통 칼리파Orth odox Calip h3 2 ) 의 통치 기간에 이슬람이 이룩한 정복사업은 이 고전어에 전혀 새로운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아람어는 전 이슬람 세계의 신성한 언어가 되 었다. 이는 분명 꾸란의 덕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꾸란의 언어인 메카 방언을 아랍어의 기점(起點) 언어나 원형으로 간주하며 또는 아랍어를 <꾸라이쉬 방언>이라 하는 것은 전말이 전도된 주장이다.
32) [역주] 칼리프 Ca lip h 라 표기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으나 본서에서 는 아랍어 원음에 맞게 칼리파 Kh alif a 로 표기하기로 한다 . 정식 칭호 는 <칼리파 라술 알라 Kha lif a Rasul Allah( 알라의 사자의 후계자)>였 다. <칼리파>는 본래 <후계자> 또는 <대리인>의 두 가지 뜻을 동 시에 갖는다.
뉠데케 Noldeke판 )가 고찰한 바와 같이, 무함마드는 고대시룰 하나 의 본보기로 삼았다. 또한 이슬람 초기에 아랍어의 고전적 관용어법 과 정확한 화법의 기준이 된 것은 이교도 시인들(묘하게도 꾸라이쉬 부족에는 시인들이 적었다)이 남긴 자료에 의해서였다. 꾸란이 신의 말씀으로서 그 문체를 모방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 무슬림들은 모 든 부족이 메카로부터 떨어져 있는 거리에 비례해서 그만큼 순수하 지 못한 언어를 사용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예언자 부족의 방언 이 다른 여타 부족의 방언보다 우위에 있음을 찬양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같은 견해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학자들의 호
33) [역주] Theodor Noldeke(1836-1930) :독일의 동양학자. 주요 저서로는 lOOO 년 간행된 『꾸란사』 (3 권)과 『다섯개의 무알라까트 F iirrf Mualla q a t』 (1899-1901) 둥 몇 가지 역작이 있다. 특히 셈어학의 체계를 세우는 데 이바지했다.
감을 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란은 아랍어와 아랍 문학사에 독특한 영향을 미쳤다. 꾸란의 원형이 훼손되지 않도록 잘 보존하고 모호한 부분을 해명하려는 필요성에서 아랍어의 문법학과 사전 편찬학이 창시되고, 사장될 뻔한 이슬람 이전의 시와 무함마드 의 전승이 수집되었던 것이다. 이슬람제국의 아랍어 시리아와 페르시아에서 정복자인 아랍인들이 이민족과 뒤섞여 살 게 되자 고전어의 순수성도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아라비 아의 사막 유목민들에게서는 아무런 변화도 감지할 수 없었지만 주 민들 대다수가 이슬람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로서 급속히 아랍화되고 있던 바스라표햏 a 나 쿠파Ki1f a 같온 지방 위수 도시나 상업 중심지 에서는 문호가 개방됨으로써 온갖 부패와 타락이 잠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이처럼 세속화된 아랍어에 대항하여 언어학자들은 끊임없이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고전 아람어가 그 존폐 위기를 넘기 게 되는 데는 그들의 노고에 힘 입은 바 큰 것이다. 이교도 베드윈 들의 언어는 온전히 보존되지는 않았지만 ___ 또는 보존되었더라도 현학자(衛學者)들이나 시인들의 입에서 뿐이지만―~형태가 바뀐 채로 이슬람 사회 상류계층의 보편적인 표현 매체가 되었다. 중세 초기에는 인더스 강에서 대서양에 이르기까지 어느 지방 사 람이든 모든 교양 있는 무슬림들이 아랍어로 말하고 표기하였다. 아 랍어는 궁중어와 전례어로서뿐 아니라 법과 상업, 외교, 학술, 문학 의 언어였다. 13 세기 몽골 침략으로 압바스조가 무너지고 동시에 이 슬람의 마지막 정치 통합도 무산되자 고전 아랍어는 더 이상 이슬 람 세계의 <공용어>가 아니었다. 이제 아라비아, 시리아, 이집트 동 아랍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에서도 고전 아랍어가 구어체 아람어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이들 국가에서 고전 아랍어는 여전히 상용어, 문학어, 교육어이며 학계 권위자의 말을 빌리면, <지금도 아랍어는
르네상스를 치르고 있으며, 또다시 위대한 문학의 표현 매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3'1) 또 비아랍인 무슬림들에게는 고전 아랍 어가 현 유럽 문화권에서의 라틴어나 그리스어와 같은 위치를 점하 고 있지만 그들이 아람어 최대의 걸작이라 할 꾸란을 학교에 다니 면서 처음 배우게 되고 매일 기도 가운데 꾸란 암송을 되풀이함으 로써 여느 기독교도로서는 실감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상생활 전체 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34) Profe s sor Margo lio u th in ]RAS for 1965, p. 418.
나 U 巴흐족 Naba 底迎 E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묘비에서나 채집이 가능한 고대 아라비 아에 관한 사료를 본서에서 소홀히 한 점 독자들의 양해를 바랄 뿐 이다. B. C. 左 U 년부터 금세기 초까지의 아랍의 세력 판도를 약도 (略圖)로 그리면 존 맨데빌 경 Sir Joh n Mande vill e3 5) 이 그린 중국 지도와 비슷한 모양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라비아 반도에서 부침했 던 제 민족 중에서 사바와 힘야르 외에도 매우 인상적인 민족이 바 로 나바뜨 Naba t(복수, 안바뜨 Anba t)족이다. 도시에 정착한 나바뜨인 들은 기원전 이미 오래 전에 교역을 통해 번성하였으며 페트라 Pe tra 왕국을 세워 105 년에 트라야누스 Tr aj an361 황제에 의해 합병될 때까 지 고도의 문화와 번영을 지속하였다. 이들 나바뜨인들은 아랍인으 로서 아랍어를 말하였으나 기록할 고유의 문자가 없어 아람어 문자 를 대신 사용하였다.-.r/ 1 무슬림 학자들은 이들 나바뜨인돌을 아람인 과 동일시하는데, 이같은 견해는一—_꽈트르메르Quatrerrere3 8) 도 그
35) [역주] (?-1372) 14 세기에 프랑스어로 출판된 동방 여행기의 저자; 실제로 그 인물이 누구인가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36) [역주] Marcus Ulpi us Nerva Traja n us (53?-117) :로마황제 (98-117) . 37) Noldeke, Di e Semi tisc hen Sp r achen, p. 36 이 하 및 p. 51 참조. 38) Jou rnal Asia t i qu e(March, 1835), p. 209 이 하 참조. [역 주] Et -M arc Qu atr em ere (1782-1852) :프랑스의 동양학자. 드 사시의 사후 프랑스
동양학계를 이끌었으며, 이슬람 이전의 아랍에 관한 논문과 연구서, 주해서, 번역서 둥을 많이 남겼다.
들과 견해를 함께 하였다 ___ 나바뜨인들의 비문을 자세히 조사해 보면 금세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004 년에 무슬림 학자인 이븐 알-와흐쉬야 Ibn al-Wabshi yya 7l- 지 은 『나바뜨 농업서 Ki t ab al-Fal 강끄 al-N따 따i_»a 』 는 칼데아어 Ch aldaean 39) 로부터 옮긴 것이라고 작자 본인이 주장하고 있지만, 오늘 날 이는 날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서 본 필자가 이를 거론한 것 은 단지 무슬림 학자들이 <나바뜨>라는 용어를 어떻게 쓰고 있는 가를 예시하고자 했을 뿐이다. 물론 여기서 문제가 되는 나바뜨는 페트라를 지칭하지 않고 바빌론을 가리키는 말이다.
39) [역주] 칼데아인 고유의 셈어로, 보조 언어로서 아람어가 쓰였다 .
아람역사의 시대 구분 전술한 바와 같이, 아랍의 주요 문헌 자료에 따르면 아랍 역사는 다음과 같이 시대 구분할 수 있다. I. 사바 및 힘야르 시대로서 남부 아랍어 최고의 비문 연대인 B. C. 800 년부터 기원후 앉 D 년까지의 시기 II. 이슬람 이전 시대(따}泣 2 년) m.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동(히즈라Hij ra 또는 헤지라Hegira)한 6Z2 년부터 현재까지의 이슬람 시대 人担卜 및 힘야르 예멘 또는 남부 아라비아의 역사에 해당되는 첫번째 시대에 관해 서는 비문을 제외하곤 당시의 아랍어 기록이 전무하다 . 이 비문들에 서 나온 귀중하지만 불완전한 자료들은 이슬람 이전 시가와 꾸란, 특히 후대의 이슬람 문학에 보존되 온 전승 자료에 의해 보강된다. 대부분의 자료가 전설에 가깝고 따라서 역사학자들은 마땅히 이룰
무시해 버릴 수도 있지만, 필자의 주 목적은 아랍인들의 믿음과 견 해 를 알리는 데 있으므로 많은 지면 을 여기에 할 에코자 한다. 이교도아람인들 두반째 시대는 무슬림 사가들에 의해 < 자힐리야Jahiliyya> 시대 즉 무지 또는 야만의 시대로 불리는 시대이다. 40 ) 동시대의 특징은 전해져 내려오는 이교도 시인들의 시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이 시대 에는 산문 문학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시인은 자신이 속한 부족 민들의 삶의 역사를 노래하며 그네들의 족보를 기록하거나 무공을 찬양하고 덕을 기리는 일을 전담하였다. 이슬람 이전 시의 상당량은 소실되었지만 무슬림 언어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이 수집한 설화와 더 불어 적지 않은 시가 보존되어 있어 동시대의 황량한 생활상을 대 강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다.
40) 엄밀히 말하면, 자힐리야 시대는 아담과 무함마드 사이의 전 기간을 포함하지만 협의로는 여기에서처럼 아랍 문학사 중 이슬람 이전 시대 룰 의미하는 데 사용된다 .
무슬림 아랍인들 마지막이며 가장 중요한 시기가 이슬람화된 아랍의 역사이다. 독 자 앞에 펼쳐질 복잡다단한 동시대의 정치 상황을 일별할 수 있게 끔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세분 , 요약하였다 . 1 무함마드의 생애 기원후 7 세기 초쯤, 꾸라이쉬 부족 출신인 압둘라‘AJ:xlull ah 의 아 들 무함마드라는 인물이 신의 계시인 꾸란과 함께 메카에 나타났다. 그는 자기 부족민들에게 우상 숭배를 타파하고 유일 신을 경배하도 록 호소했다. 조롱과 박해 속에서도 수년간 메카에서 이슬람교 포교 를 계속하였으나, 별다른 성괴를 거두지 못하자 6'l2년 이웃 도시 메
디나로 이주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포교활동은 한층 활발해졌고 이 후 10 여 년 동안에 전 아라비아가 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새로운 종교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 2 정통 칼리파 시대 (632-661) 예언자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교우 중 됨됨이가 가장 뛰어난 아 부 바크르 Abu Bakr, 우마르 ‘Umar, 우쓰만 ‘Ut hrnan, 알리 'Ali가 <칼리파>, 죽 대리자의 칭호를 지니고 무슬림들의 통치 책임을 차 례로 맡았다 . 이들 네 명의 칼리파를 정통 칼리파 al-Khul af a' al- Ra shi don 라 한다. 이들의 인도하에 이슬람교는 아라비아 반도에 뿌 리를 내리고 반도를 벗어나 멀리까지 전파되었다. 이와 함께 유목민 출신의 병사들이 식민지 개척의 전사가 되어 비옥한 시리아 평원과 페르시아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이 창건된 제국은 내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 우쓰만의 시해 사건은 자칭 칼리파 후보자들 간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예언자의 사위 알리가 칼리파칙을 맡자 유력자인 시리아의 주지사 무아위야 븐 아비 수프 얀 Mu'a wiy a b. Abi S ufy an 이 그의 칼리파 선출에 대해 이의를 제 기하였다. 3 우마이 야조 (661-750) 알리가 자객의 단검에 쓰러지자 무아위야가 칼리파 위를 승계하 여 OO 년 동안 그의 가문이 칼리파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우마이 야 칼리파들은...:,___단 한 명만 빼놓고4 U_ __ 우선 무엇보다도 종족
41) [역주] 여기서 단 하나의 예의란 칼리파 알-왈리드 븐 압둘 말리크 al-Wa l!d b. 'Abdu 'l-M alik (705-715 년 재위)를 가리킨다. 30 세가 약 간 넘어 칼리파 위에 오른 왈리드는 그다지 교양은 높지 않아 배타적 인 정치를 폈으며 역대 칼리파들 중에서 유례가 없는 종교적 열정을 보였다. 칼리파가 된 다음 그의 첫 관심사는 수도인 다마스쿠스에 옹 장한 모스크를 짓는 일이었다. El1, al-Wa l!d, p. 1111 참조. 또한 본서
p. 290 참조.
상 아람적인 면을 중시했고 이슬람은 그 다음이었다. 종교가 그들에 게는 별로 부담이 되지 않았으며 우마이야조는 몇몇 유능하고 강력 한 군주와 위세 당당하고 훌륭한 지도자를 배출하였댜 乃 2 년에 이 르러 이슬람 정복 사업은 절정에 다다랐다. 다마스쿠스의 칼리파 는 옥수스 강 Oxus42) 과 피 레네 Pyren ees 산맥 이북 지 역과 카스피 해, 나일 강 계곡까지 그의 부장(副將)들을 파견하였다 . 한편 왕조의 권세는 정치와 종교의 분규로 인해 약화되고 있었다. 칼리파 위가 신권에 의해 알리와 그의 후손들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쉬아파 S hi'it es 교도들이 수차에 걸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아랍인과 억압적인 우마이야 정권을 증오하는 페르시아인 무슬림들도 이 반(反)우마이 야 세력에 가세하였다. 예언자 가문의 친족인 압바스가가 선동의 선 두에 섰다. 결국 우마이야조는 붕괴되어 지리멸렬해지고 말았다.
42) [역주] 중앙 아시아 파미르 P amir 고원에서 발원하여 서북방으로 홀 러, 아랄 Aral 해로 홀러든다 . 아무다랴 Amu Da rya 강이라고도 한다. 이 옥수스 <강 건너편의> 지방을 Ma .- wara.- 1-nahr 또는 트란스옥사 니 아 Transox ani a 라고 한다.
4 압바스조 (7 50-i 258) 지금까지는 아랍인들이 이슬람 사회에서 지배자로서의 역할을 수 행해 오며 비아랍계 무슬림들을 멸시하였다. 이제 형세는 바뀌었다. 바야흐로 아라비아 민족 주도의 시대에서 페르시아 패권주의와 세 계주의적인 co srr.opolitan 문화의 시대로 옮겨간다. 압바스의 정예 군 대는 쿠러산 Khurasan 출신 페르시아인들이었으며 압바스의 도읍 바그다드는 페르시아 땅에 세워졌다. 페르시아 출신들이 압바스 궁 의 고위직을 차지하였으며 새로운 왕조는 종교 왕조는 아니지만 종 교를 장려하여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내려 하였다. 한동안은 아랍인 과 페르시아인들이 상호간의 차이점을 잊고 선한 무슬림의 도리대
로 협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앙심도 더는 득이 되지 못했다. 한편 학문은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으며 동시기가 이슬람의 황금시대로서 특히 칼리파 하룬 알-라쉬드 Harun al-Ras hi d(786 - 8ffi)의 재위 기간 이 최고의 전성기였댜 그가 세상을 떠나자 평화는 다시 깨져 막강 한 제국은 차차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주(州)가 하나 둘씩 칼리파로 부터 떨어져 나가고 수많은 독립 왕조가 일어니는 한편 칼리파는 터키 용병의 손아귀에서 무기력한 꼭두각시가 되었다. 이들 칼리파 의 권위는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서 형식적이나마 여전히 인정을 받고 있었지만 9 세기 중엽부터는 실질적인 권위를 갖지 못했다. 5 몽골 침략에서 현재까지(1 258- ) 1 滋년 훌라구 H 떠agO. 휘하의 몽골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하므로써 칼리파 통치는 종말을 고하였다 . 계속 진격하던 몽골군은 이집트 마 믈루크 Man 터 ukes 의 저항을 받고 페르시아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약 50 년 후 이슬람교에 귀의하였다. 이후 훌라구의 뒤를 이은 일 -칸 n-Khan 들이 페르시아를 통치하였으나 1300 년부터 1 4ffi년까지 티무르 TnnOr 휘하의 야만인들에 의한 ~ 파상공격으로 서아시아 전 지역은 정치적으로 무질서 상태가 되고 황폐화되왔다. 이제 정치 적 의미에서 이슬람의 단일성은 파괴되었다. 혼란의 와중에서 세 이 슬람제국이 점차로 형태를 갖추었다. 1358 년, 오토만 터키는 헬레스 폰트 Helles lX) n t 43) 를 건넜으며 1453 년에는 콘스탄티노플 Cons tantino p le44) 에 입성, 1517 년에는 시리아, 이집트, 아라비아 반도가 이들 세 력권에 들어왔다. 페르시아는 싸파위조$afa 펴 ds(l fll.2 -1736) 산하의 독립 왕국이 되었다. 한편 인도에서는 티무르의 후손인 바부르 Bab trr에 의해 대 무갈 Grea t Mog마 S 제국이 세워졌고 바부르의 뒤
43) [역주] 다르다넬스 Dardanelles 해협의 옛 그리스명으로 마마라 Ma nnara 바다와 에게 해 사이룰 연결하는 유럽·아시아 대륙간의 해협. 44) [역주] 터키의 이스탄불의 구칭;동로마 제국의 수도.
룰 이은 아크바르 Akbar 와 아우랑지브 A wrang떠 b 에 의해 무갈 제국 의 위업은 찬란히 계승되었다(1 525-7 ff7). 아랍문학사 앞으로 본론에 들어가면 위에서 요약한 정치적 사건 중 어떤 부 분은 다시 상세히 기술될 것이나 어떤 부분은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게 될 것이다. 아랍 문학에서 나타나는· 사상은 민족사와 밀접 히 관련되어 있고 그들이 성장한 주위 환경과 분리되어서는 이해가 어려우므로, 우리의 특별한 관점에서 진실로 특징적이고 중요한 사 실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역사적 관심사를 상세히 고찰할 수 밖에 없었다. 고대(E00-7f:IJ)에 할애된 지면이 아랍 역사의 중추적인 핵심 부문으로 인식된다면 지나친 분량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그후 백 년 동안에 이슬람 문화가 절정에 달하나 아랍인들은 뒷전으로 물러서게 된다. 시리아와 이집트에서는 터키 지배하에서도 그들의 전통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몽골 침략으로 아람 민족의 삶은 거의 말살될 지경이었고, 스페인의 아람인들은 기독교도들과 치열한 싸움을벌리게 된다. 비아랍계 작가들 이보다 수세기 앞서 압바스조의 전성시대에 아랍인들이 아랍이라 는 명칭이 붙은 문학 발전에 기여한 바는 그리 크지 않았다 . 여기서 필자는 아람어로 저술 활동을 한 이방인이나 혼혈의 작가들을 아랍 인의 범주에서 배제할 만큼 엄밀히 국적을 따진 것은 아니다. 페르 시아인들(요즘도 신학이나 철학적 주제에 관한 글을 쑬 때면 아랍어를 사용하기도 한다)의 문학 작품을 통해 아라비아의 사상사 그 자체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페르시아 사상이 아랍 사상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쳤는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페르시아인들의 아랍어 작품 은 위와 같은 연구 목적 의에 별도로 논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아
랍인도 페르시아인도 아닌 또는 양자의 혼혈인 수많은 유명 작가들 의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의 족보를 추적하여 어떤 혈통 이 더 우세한가를 알아내야 하는 작업은 지루하고 유익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우마이야 시대 이후의 아랍 문학사에서 아랍적인 요소와 외래 요소를 확연히 가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들은 각 기 서로에 대해 반발하기도 하고 때로는 양자가 확고히 결합하기도 한다 . 가능한 한 이들 요소들은 구별되어야 하겠지만, 이들을 상호 배타적인 요소로 보려는 것도 문학사를 현학적이나 편견으로 바라 보는시각이 될 것이다.
제 1 장 사바와힘야르
원시종족 엄밀한 의미에서 아라비아의 역사는 사님巨유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전설 속에 다소 뚜렷이 그 윤곽이 나타나거나 무슬림 사가들이 아라비아의 원주민이라고 추정하는 어 떤 종족들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이들 종족 가운데는 <오만한 자는 결국 망하고 만다>는 교훈적 예로서 꾸란에 자주 등장하는 아 드 ‘A i와 싸무드 Thamud 족이 있다. 아드족의 원주지는 <아흐까프 알-라몰 Ah qaf al-Raml> 이라 불리는 곳으로 예멘과 접한 하드라마 우트 I:Iac;lrama w t에 있었다. 아드의 전설 이들이 북부지역에서 내려온 침입자에 의해 멸망한 아람족 계통 의 셈 민족인지 또는 홈멜 Horrnrel 의 주장대로” 아드족의 왕 샷다드
1) Di e Namen der Saug e th i e r e bei den Sadsemi tisch en Volkem, p. 343 이하. [역주] Fr. Hommel(1854-1936) :독일의 셈언어 및 셈족 연구가. 『남부 셈민족의 포유동물의 명칭J (l879) 동의 논문을 발표하였 다. 특히, 아랍인들의 의상 명칭을 연구하며 고대 아랍 시인 이븐 까이 스 알-루끄야트 Ton Qa ys al-Ru qy a t의 시집을 수년간 탐독한 끝에 마 침내 두 개의 의상 관련 어휘를 발견하고 기뻐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Shaddad 가 세운 지상의 낙원 <기둥이 늘어선 이람Iram> 2) 의 전설 에 전해 내려오는 저 웅장한, 셈 계통이 아닌 문화의 상속자들인지 는 확실하지 않다. 이들의 멸망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3)
2) Iram Dh lJ.t al-1mad( 꾸란 89:6). 이 어구의 의미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많다. 특히 따바리 Taban 의 탁월한 꾸란 주해서에 나오는 해석 을 참조할 것 (0. Loth in ZDMG, vol. 35, p. 626 이하). [역주] <이 람>은 남부 아라바아에 있는 도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거기에는 높 은 건축물이 즐비했었다. 혹자는 이룰 아드의 최초 선조 이름이라 한다.
3) Taban, Annals, i, 231 이하에서 요약하였음. 또한 꾸란 7 장, 11 장, 26 장, 46 장을 참조.
힘이 장사 같고 키가 장대 같은 이들은 우상 숭배동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신이 이들을 회개시키고자 후드 Huc t'리는- 예 언자를 보내자 그들은 <후드여, 당신께선 아무런 증거도 가져오지 않았으므로 무슨 말을 해도 우리의 신을 포기하거나 당신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이 당신에게 광기(狂氣)를 앓도록 한 모양 입니다 >5) 라고 말했다. 그러자 무서운 가뭄이 아드 땅에 닥쳐 그들 은 부족의 사절단을 메카로 보내 기우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메카에 도착한 이들 사절단은 아말레크족 Arnal ekite 6) 의 왕자 무아위야 븐 바크르 Mu'aw iy a b. Bakr 의 기무(歌舞)를 곁들인 주연(酒妻)으로 환 대를 받았다. 무아위야에게는 <알-자라다탄 al- J arada tan>으로 알려 진 두 명의 유명한 가희가 있었는데 사절단은 이들의 유혹에 빠져 꼬박 한 달 동안 자신들의 임무를 망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뒤늦게 기우제를 갖고 식을 시작하였는데 대표가 기도를 마치자마자 백색,
4) [역주] 이슬람 이전에 아람인들에게 보내진 예언자. 꾸란 7 장 63-70 절, 11 장 52-63 절, 26 장 123-139 절에 언급됨.
5) 꾸란 11 장 56-57 절.
6) [역주] 꾸란에 언급되고 있지 않은 이 고대 민족은 무슬림들의 전승 에 따르면 창세기 10 장의 셈이나 햄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따숨족이 나 싸무드족과 함께 아랍어를 말한 최초의 부족 중 하나일 것으로 추 정 된다. EI 릭 ‘Am 책q, p. 429 와 본서 pp. 38-39 참조.
적색, 흑색의 세 가지 구름이 나타나며 하늘에서 다음과 같은 소리 가 들려왔다. <너 자신과 너의 민족을 위해 선택하라!> 그는 검은 구름아 가장 많은 비를 내려줄 것으로 믿고 검은 구름을 골랐다. <너는 어둠침침한 잿불 embers dun 을 골랐으므로 아드 민족은 씨 를 말리리라>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아드 땅 위로 구름을 몰고가서 폭풍을 일으켜 예언자의 경고를 진심으로 믿 고 우상 숭배를 포기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집어 삼켰다. 얼마 후 여기에서 <제 2 의 아드>라고 불리는 새로운 민족이 일 어났다. 이들은 사바 지역의 예멘에 거주하였다. 전설적인 거대한 마리브 Ma' ri b 댐은 여러 가지 우화가 전해지는 그들의 왕 루끄만 븐 아드 Lu q rnan b. 'Ad 의 공으로 돌려진댜 그는 독수리 일곱 마리 의 수명을 모두 합친 만큼 살도록 허락받았기에 <인간 독수리 Dhu al-Nusur> 라 불렀다. 싸무드의 전설 히자즈와 시리아 사이의 북부 아라비아에는 자력으로 산의 암석 울 잘라내어 집을 짓고 살았다고 꾸란 (7:74) 에 기술되고 있는 싸무 드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메디나에서 북쪽으로 일주일 가량의 여행 길에 나오는 히즈르Bij r( 마다인 쌀리흐:Mada.'in $alilJ. )7) 에서 아직도 발 견되고 있는, 바위를 깎아 만든 방들의 정체를 무함마드도 알지 못 한 것이 분명하다 . 또 이 방은 거기에 새겨진 나바뜨어 비문에 의해 무덤임이 입증된다 .8)
7) [역주] 페트라에 활동 기반올 두고 있던 나바뜨인들에 의해 통제되던 남쪽 변경의 전초기지로서 북부 아라비아의 카라반 중심지의 하나였 다 . 나바뜨인들은 혜그라I:I e g ra 라고 불렀으며 후에 아랍인들은 알-히즈 르 또는 마다인 알-쌀리흐로 불렀다. 8) 이 에 관해 서 는 Doug h ty 's Documents Ep igrap h iqu es recueil lis dans le nord de !'Ar abie , p. 12 이 하 참조. [역 주] 북부 아라비 아에 서 발견 된 비문에 관한 상세한 현지조사 결과는 F. V. Wi nn ett & W. L.
Reed, Ancie n t Records from North Arabia , Un ive rsit y of Toronto Press(1 9 70) 참조.
싸무드는 아드족처럼 죄를 짓고 그와 비슷한 운명에 처해졌다. 그 들은 예언자 쌀리흐Salib가 기적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를 믿지 않 겠다며 코웃음을 쳤던 것이다. 그러자 쌀리흐는 새끼 밴 암 낙타를 바위에서 나오게 하여 싸무드족 사람들에게 낙타를 해치지 말도록 하였으나 꾸다르 알-아흐마르 Qud ar al-Abmar 라는 이단자가 낙타 를 죽이고 말았다 .9 ) <그러자 천둥 소리와 함께 천지가 뒤흔들리더 니, 그 다음날 아침 그들은 집에서 납작 엎드려 죽어 있었댜 > IO ) 이 재앙의 장본인은 후세에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 아람인들에게 <암 낙타를 불구로 만든 이보다 더 불행하다>와 < 씨무드.의 아흐마 르보다 더 불운하다>란 속담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역사심1- 그 자취 롤 찾아볼 수 없는 아드족과는 달리 싸무드족의 경우는 디오도로스 시큐러스Di odorus S i culus11) 나 프톨레마이오스Pto lemy 1 2 ) 가 그 실재 룰 언급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 또한 이들은 바잔틴 제국 군대에 부속된 <싸무드 기사단equite s Tharnude ni > 에 서 기원후 5 세기까지 활약하였다 .
9) [역주] 이 낙타가 3 일마다 마시는 물의 양이 엄청나 모든 우물의 물 을 고갈시킬 것 같아 죽였는데, 죽은 어미 낙타의 뱃속에서 새끼가 상 처 하나 없이 나와 마다인 쌀리흐 평원의 남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 속 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3 일만에 재앙이 발생했다는 전설이다. Charles M. Doug h ty , Travels in Arabia Deserta ( 3rd. ed., 1 921), vol 1, p. 96 참조.
10) 꾸란 8 장 78 절. 11) k역 주] 기원전 1 세기 후반의 그리스의 역사가. 12) [역주] 2 세기 중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한 그리스의 수학자·천 문학자 · 지리학자 .
。땔말리끄 ‘Amaliq 아드족과 싸무드족 이외의 원시 민족 가운데는 아말리끄족이 있
다. 이 민족은 무슬림 고고학자들이 가나안족Canaanites이나 팔레 스타인족Phili s ti nes 같은 먼 과거 속의 몇몇 민족을 인위적으로 한 데 묶어 지칭한 전적으로. 가공의 민족이다. 이 아말리끄족의 주거지 는 메카의 티하마 Ti han님 3 1 를 비롯한 반도의 여러 지역에 분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3) [역주] 아라비아반도 서남부와 남부에 걸친 해안지대의 평원.
따슴 Tasm 과 자디스J a di s 마지막으로 따숨족과 자디스족을 언급해야겠는데 , 이들의 멸망과 그에 따른 일련의 사건들을 제외하곤 이 두 자매 부족에 대한 기록 이 전무하다. 그러한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전설이 초기 아 라비아 사회에서 < 봉건 군주의 초야권(初夜權) le droit du seigne - ur > 1 4 깥온 미개한 봉건적 관습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다소 고고학적인 관심을 갖게 하지만 본 장의 주제로 넘어가겠다.
14) [역주] 봉건 군주가 가신(家臣)의 결혼 첫날 밤에 그 신부와 성 적 관계를 가질 것을 요구할 수 있다고 한 권리.
요끄딴의 역사 여기서 다룰 요끄딴, 즉 남부 아랍의 이슬람 이전 역사는 사실상 홍해로부터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남부 아라비아 제국을 차례로 지 배하였던 사바족과 힘야르족 양대 민족사인 셈이다. 人担卜 묻 E 국 사바 Saba( 구약의 쉬바 Sheba) 1 5) 는 <아라비아 펠릭스> 전체를 지칭 하는 것으로 간혹 잘못 사용되고 있으나 이는 아라비아의 여러 왕 국 중 ___ 이 왕국들의 이름이나 도시명이 그리스·로마 지리학자들 의 저술에 나타나고 있다 ___ 하나의 왕국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5) 본래는 hamza 가 있는 Saba’ 로서 모두 단음절이다.
그 중 사바 왕국이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왕국이었음은 의심의 여 지가 없다. 사바가 누렸던 부와 영광에 관해서는 다소 과장되게 기 술된 면이 없지 않지만, 사바가 기원전 수세기 전에 번창하였던 상 업 국가였음은 분명하다 .1 6)
16) 사바에 대해 연대를 붙일 수 있는 가장 오랜 기록은 아시리아의 설 형 (模型)문자로 쓰여 진 비 문에 서 발견된다. 사르곤 Sargon 왕의 연 대 기(기원전 715 년)에는 <이집트의 왕 파라오와 아라비아의 여왕 샴시 야 Shams iyy a, 사바의 이싸마라 I th amara 로부터 공물로 금, 향료, 노예, 말, 낙타를 받았다>고 쓰여 있다. 이싸마라는 사바의 여러 왕들이 가 지고 있던 이름 야싸아마르 Ya th a'amar 와 동일한 것이다
<동부 아라비아의 항구와 인도 간의 해상 교통이 매우 일찍이 발 달되어 인도 토산물, 특히 향료와 희귀 동물들(원숭이나 공작 등)이 오만 ‘Um 如 해안으로 운반되었다 이 물품들이 기원전 10 세기에는 오만으로부터 아라바아 만까지 육로를 횡단, 그곳에서 해상을 통해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운반되었다. 홍해의 항해 어려움으로 예멘과 시리아 사이의 육로 교통이 선호되기도 하였다. 하드라마우트의 샤 브와트 Shabwa t(또는 사보타 Sabo ta)에서부터 시작되는 사막의 대상 로(隊商路)는 사바의 수도인 마리브(또는 마리아바Mari aba) 와 북쪽의 메카를 지나 페트라를 경유, 지중해 연안의 가자요娑루. 이어졌다 . > 1 7) 사바 왕국의 번영은 인도와의 무역이 육로 대신 하드라마우트의 해 안을 따라 바브 알_만답 Bab al-M andab 해협을 통과하는 해상로를 찾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17) A Mi llier, Der Islam im Morge n 따i Abend /and, vol. i , p. 24 이 하
기원후 1 세기에 일어났음직한 이러한 변화의 결과로서 사바 왕국· 의 세력은 점차 쇠퇴하고 주민 대다수는 북쪽에서 새로운 삶의 터 전을 찾아야 했다. 또 그들이 살던 도시는 황폐해지고 거대한 댐은 붕괴되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이러한 쇠망의 결과가 단 한가지 사 실, 죽 <마리브 댐>의 붕괴로 구체화되었음을 독자들은 아라비아의 전설을 통해 이내 알게 될 것이다.
힘야르왕국 사바의 멸망으로 같은 혈통의 신홍 부족인 힘야르족, 또는 고대 사가들이 지칭하였듯이 <호메르족 Ho rrerit:re>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 힘야르 왕국은 아라비아 남서부의 해안지방에 위치하였다. 룹바 아 Tubba‘ 란 호칭으로 불린 왕들의 통치를 받은 이들은 이내 남부 아라비아의 지배 세력이 되어 북부 부족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 였다. 그러나 5 세기 말 쿨라이브 븐 라비 아 Kulay b b. Rabt'a 휘하 북부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발발한 카자자 Khazaza 대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예멘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하였다 . 18)
18) 그런데 뉠데케는 쿨라이브가 예멘의 통합군에 대항하여 라비아 RabI'a 부족을 지휘한 것으로 묘사한 전승이 전적으로 사실(史實)과 어긋나 는 것 이 라고 단정 한다 (F iirif Mo'a ll aqa t, i, 44).
힘야르는 사바만큼 번성하지는 못했다. 힘야르는 바다에 접해 있 어 의부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고, 인구 감소는 군사력을 크게 약 화시켰다. 원래 예멘에서 이주해 온 아비시니아 Ab y s sini a191 인들은 힘야르에 발판을 구축키 위한 시도를 되풀이하고 총독을 임명하기 도 하였지만 이들 총독들은 결국 힘야르 왕에 의해 축출되곤 하였 다 . 이들 아비시니아 총독 중 아브라하 Abraha 총독이 가장 유명한 데 그의 불운한 메카 정벌에 대해서는 추후 적당한 때에 기술하겠 다. 결국 힘야르 왕국은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전락하여 이슬람 이전 100 년 전쯤에는 정치 세력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19) [역주] 에티오피아의 옛 이름.
자료의 전거 사바와 힘야르에 관해 아라비아어로 쓰여진 주요 사료는 1) 이른 바 <힘야르> 비문과 2) 이슬람 문학에 보존되고 있는 대부분 전설 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전부이다.
남부 아람어(또는 사바어)의 비문 남부 아랍어는 예언자 시대 또는 그 후까지도 오지에서만 고립되 어 사용되었다. 일상 대화의 표현 수단은 < 가장 우수휴} 아람어 > 로 서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서 널리 사용되던 북부 아람어로 이미 오 래 전에 대체되었다. 그러나 남부 아랍어가 사어가 되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6 세기의 베드윈 시인은 타고 가던 낙타를 세워 성벽이나 부서진 돌 조각에 새겨진 생소한 글자의 비문을 의아해 바라보곤, 반쯤은 지워 져 신비스럽기조차 한 그 바문의 혼적을 그로서는 정겨운 추억이 깃들어 있고 옛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야영지의 자취에 비유 하였다. 무슬림 학자들은 <무스나드 Musnad> 201 로 이 비문들을 들기 도 한다. 소수이지만 어떤 무슬림들은 이 남부 아랍어의 문자를 읽 올 수 있거나 철자의 기본 규칙을 익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 함다니 HanmnI 의 『왕관 IldIl 』 제 8 권의 한 구절에서 드러난다 . 그러나, 그 들이 고유 명사를 해독하고 군데군데 단어의 뜻을 이해했는지는 모 르지만 언어에 대한 지식은 실제로 갖고 있지 않았다. 모험심 강한 유럽 여행가들에 의해 재발견된 이 비문이 점차 해독, 해석되어 역 사 연구의 밑거름이 될 수 있었던 과정과이 비문에 대한 연구 결 과를 다음에서 가능한 한 간략히 기술해 보겠다.
20) [역주] 전거를 뜻한다.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쓰>에서는 전거를 연속, 소급 Is 떠 d 함으로써 무함마드의 말인 주문(主文)에 권위를 부여한 다. 본서 p. 218 참조.
<힘야르>라는 용어에 대한 반대 그에 앞서 <힘야르 비문>이나 <힘야르어> 대신 보다 낯선 용어 인 <남부 아랍어> 또는 <사바어>를 사용한 이유를 설명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 <힘야르>를 비문의 언어 또는 비문 그 자체를 가리 키는 데 사용할 경우 모두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로든 남부 아랍어는 힘야르족뿐 아니라 사바 왕국, 미나 왕국 등 예멘의 모든 부족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 무슬림 학자들은, 단지 힘야르족이 이슬람 이전 수세기 동안 그 지역에서 최강의 세 력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고대 예멘어에 <힘야르 > 라는 이름을 붙였 다 . 만일 모든 비문이 힘야르가 지배하던 시대의 것이라면 지배 민 족의 이름을 따르는 것이 타당할는지도 모른댜 그러나 실제로는 많 은 비문들이 그보다 훨씬 오래 전 시대의 것으로 어떤 비문은 기원 전 8 세기, 즉 힘야르 제국이 세워지기 일 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 가는 것도 있다 . 그에 비해 <사바>라는 용어는 정치적 의미보다는 민족을 뜻하는 명칭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에 <힘야르>보다는 이의제기의 가능성이 덜하다 . 아무튼 여기서는 <힘야르>나 <사바> 보다 <남부 아랍어>라는 용어를 주로 入l-%하고자 한다.
21) [역주] Carste n N i ebuhr(l733-1815) : 덴마크의 동양학자. 독일에서 교육받은 직업적인 여행가로서 아랍 지역을 향한 제 1 회 과학적 탐험 대 중 유일한 생환자이다 . 측량술을 배우고, 덴마크의 프레데릭 5 세에 의한 이집트, 아라비아, 시리아의 과학적 탐험대에 참가하였다 (1760). 아라비아 자료를 많이 남겼다.
남부 아람어 비문의 발견과 해독 예멘 지역을 답사하고 비문 발견에 관심을 가졌던 최초의 인물은 카르스텐 니부어 Carste n Ni ebuhr2“ 이다. 1T2 년에 간행된 『아라비아 에 관한 서술 Besdlre i bun g van Arab i en 』에서 그 자신이 직접 보지 는 못했지만 <힘야르>어로 추정되는 비문이 한때 유명했던 자파르 葬값 시의 폐허 속에 있다는 보고를 유럽에 전하였다. 언젠가 무슬 림으로 개종한 한 네덜란드인이 생전 처음 보는 알파벳으로 쓰여진 비문의 사본을 그에게 보여주었으나 <당시 나는 심한 열병을 앓고 있어 낡은 비문을 · 수집하는 일보디는 죽음에 대비하는 일이 더 급 하였다 >22) 고 적고 있다. 이와 같이 힘야르어 비문 해독의 기회가 무
22) 앞의 책, p, 94 이하 . 1841 년까지의 남부 아랍어 비문의 발굴기는
Wellste d, Travels in Arabia , vol. i~ p. 368 이하의 독일어 번역판인 Rod ige r,·Excurs iibe r hi,rifar i tisc he Inschr ift en 에 훌 륭하게 기술되어 있다 .
산되는 듯하였으나, 그에 대한 호기심이 다시 살아나 1810 년 울리히 야스퍼 제첸Ulri ch Ja s~ See tze n2 31 이 자파르 근방에서 몇 개의 비 문을 발견하고 탁본을 떴다. 안타깝게도 성급히 만들어진 이들 탁본 은 매우 부정확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비문 한 개를 구입하여 직접 탁본을 떴으나 문자에 대한 무지로 인해 돌이 움푹 들어간 곳을 문 자로 잘못 해석함으로써 그가 내린 결론은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 었다 언 최초의 유용한 남부 아랍어 바문의 탁본은 아라비아 남서부 해안을 측량하는 데 동원된 영국 장교들에 의해 유럽으로 전해졌다 웰스테드]. R Wellste d 대위는 1838 년 간행된 그의 『 아라비아 기행 Trovels in Arab ia』에서 히쓴 구라브l:Ii ~n Ghurab 와 나끄브 알_하 자르 Na qb al- I:laj ar 의 비문을 공개하였다.
23) [역주] 독일의 동양학자이자 여행가 (1767-1811). 주요 저서로 『 시리 ’ 아 , 팔레스타인, 요르단 동부 , 상 이집트에서의 시 ,/J 가 있다.
24) 제첸의 비문은 Fundg rub en des Or ien ts , vol. ii (Vi en na, 1811), p. 282 이하에 발행되었다. 위에 언급된 비문은 그후 모르트만 Mord tm ann 에 의해 ZDMG, vol. 31, p. 89 이하에서 해독, 설명되었다.
한편 할레 Halle 25) 의 동양어 교수인 에밀 레디거 Emil Rodig er 26 1 는 베를린 왕실 도서관 소장의 <힘야르 말 > 알파벳이 들어 있는 두 비문의 탁본에 힘입어 당시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던 드 사시 De Sac y'ZI ) 의 주장, 죽 남부 아랍어는 좌측에서 우측으로 쓰여졌다는 견
25) [역주] 독일 라이프치히 서북쪽에 . 있는 도시 . 여기서는 1694 년 설립 된 유럽 최초의 근대적인 대학인 할레 대학을 가리킨다. 26) [역주] Em il Ro dig er(l801-1874) :독일의 동양학자. 아랍어 언어학자 로 명성을 얻었으며, 공저로 하드라마우트에 관한 저술이 있다 (1860). 동생 G. Rod ige r 역 시 동양학자였다 Z7) [역주] 실베스트르 드 사시 Sil ve str e de Sac y(l 758-1838) :프랑스의 동양학자로서 『아랍 명문 선집 Chres t boma thi e 』 전 3 권 (1806, 1827), 『 아 라비아어 문법의 범례집 』 (1815) 둥을 저술하였다. 또 많은 번역을 남겼 으며, 『칼리리와 딤나 』 와 알-하리리의 『 마까마트 g 에 관하여 상세한 주
석을 썼다.
해를 반박함으로써 정확한 해독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딛었다 .28) 특히 그는 모든 단어의 끝이 수직선으로 표시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291 헐튼 Hul t.o n 과 크루텐덴 Cru tte nden 이 싸나$an‘감에서 발견한 비문 과 더불어 웰스테드의 비문은 거제니우스Geseni us3 1 ) 와 레디거의 각 기 독자적인 작업으로 해독되었다〈 1841).
28) 그러나 가장 오랜 비문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 로 번갈아가며 쓰여 있다 .
29) Noti z iibe r die hin mjar iti sc he Schrift nebst dopp e lte m Alp 區 e t Gdeorts teinlbg ee nn, i1n8 3Z7)e, itp s.c h33ri2f t 이fi i하r . die Kunde des Morge nlandes, vol. i
30) 〔역주] 아라비아 반도 서남부의 도시로서 현재는 통일된 예멘 공화 국의 수도 . 31) [역주〕 독일 동양학자 (1786-1842) . 성서 비평가.
이제까지는 영국과 독일이 비문 발견의 공을 공유하였으나 수년 후에는 프랑스도 이들에 가세, 멋지게 이들을 앞지르고 선두에 나서 게 되었다 . 1843 년 싸나를 출발한 아르노 Th Arnaud 는 사바의 고 대 수도 마리브의 유적을 발굴하고 5, OO 개의 비문을 복사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비문들은 후에 < 아시아 저널Jo urml Asia tique:J -> 에 발표되어 오지안더 Os i ander 라는 한 유능한 비문 해석자에 의해 해석되었다 . 32 )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lITTO 년 유태인 학자 죠셉 할레비 Jos eph Hale vy3 3 ) 의 탐사 결과였다. 그는 기 원전 24 년 아엘리 우스 갈루스JEli us Gallus34) 가 같은 경로로 로마 군대를 이끌고 지나
32) 이 에 관하여 는 jo urnal Asia t i qu e, 4th seri es , vol. v (1845), p. 211 이 하와 p. 309 이 하의 Amaud's Relati on d'un voy a g e a Mareb (Saba) dans !'Arabie meri di o n ale 참조 . 33) 〔역주] J. Hale vy (1837-1917): 프랑스 동양학자 . 소르본 대학 교수 역 임. 그는 나즈란과 마리브 댐 지역까지 여행하고 정확히 686 개의 비 문을 복사하여 돌아와 이를 번역·주해하였다. r 다마스쿠스 아랍어 방 언의 어법』 (1883), r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인들』 (1884) 둥의 논문을 발 표하였다 . 34) [역주] 로마의 장군으로 이집트의 총독이었다. <아라비아 펠릭스> 의 풍요로움에 대한 과장된 소문을 들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 령 에
따라 그곳으로 원정을 떠났으나 실패하였다.
간 이래 어느 유럽인도 통과한 적이 없는 싸나의 동부 지역 자우프 J aw f에 들어갔다. 온갖 고초를 겪으며 수없이 위험한 고비를 넘긴 끝에 할레비는 거의 700 개에 달하는 비문 탁본을 가지고 돌아왔댜 351 지난 25 년 동안 많은 새로운 자료가 글레이저 E. Glaser3 61 와 줄리우 스 우팅Juli us Eu ting3 71 에 의해 수집되었으며, 한편 프래토리우스 Prreto rius,3 81 할레비, 뮐러 D. H Ml iller, 391 모르트만 Mord trnann 401 등 의 학자들은 기존 자료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슬람 이전 시대 남부 아라비아의 언어, 역사, 종교에 관해 우리가 갖고 있던 지식의 폭을 크게 넓혀주었다.
35) 이에 관해서는 Jou rnal Asia t i qu e, 6th seri es , vol. 19(1872), pp. 5ol-o9g8 i, qu1- e29 d-2a6n6s, le4 8Y9-e5m4e7n 에 참나조오 . 는 Rapp o rt sur une mi ss io n arche-
36) [역주] Edward Glaser(1855-1908): 오스트리아 고고학자 겸 탐험가 . 1882 년 이후 세 차례에 걸친 아라비아 유적 탐사룰 통해 1000 개 이상 의 비문을 발굴하고 마리브 댐의 유적을 발견하였다.
37) [역주] 독일의 동양학자(1 839-1913).
38) [역주] Fr. Prae tori us(1847-1927) :독일의 동양학자. 에티오피아어 연 구와 비문 연구로 유명하다.
39) [역주] 오스트리아 동양학자. 당대의 손꼽히는 셈어학자. 1898-1899 년에 비엔나 학술원의 남부 아라비아와 소코트라 섬에 대한 고고학 탐사단장 역 임 . 저 서 로 Di e MehrI und Soco tri s p rache(l902 ~ 1907) 동 이 있음. 40) [역주] J. H. Mord tm ann(1852-1932) :독일의 동양학자. 자료 수집을 위해 납부 아라비아를 여행하고 (1882-1894) 비문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
무슬림 사가들이 작성한 명단에서 나타나듯이 힘야르 군주들의 이 름이나 이 이름들이 나열된 순서가 정확성을 띠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만약 이들이 역사상의 실존 인물이라면 이슬람 출현 직전에 통치하다가 고대 전설 속에 파묻혀버린 영웅적 기질을 지닌 하찮은 왕들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 이 점에 의심이 가면 비문의 자료로 부터 만들어진 명부와 최근에 만들어진 명부를 비교해 보면 된다 . 4 11
41) SBWA, vol. 97, p. 981 이하에 소재한 D. H. Mi lller , Di e Burge n und Schlosser Sadarabie n s 참조 .
비문의 역人困 가치 D. H 뮐러는 3.3명에 달하는 미나 왕국 왕들의 이름을 수집하였다. 개중에는 왕왕 같은 이름이 계속 나오기도 하는데, 이는 왕조의 통 치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대개 왕의 이름에는 Dharnar 迪 D hinib(영예로운), Yath a'a mar Bay yi n( 뛰어난), Kariba 'Il Wat.a r Yuhan' im(위대한, 자비로운), Samah'alI Yan uf(고귀한) 등의 형 용사가 붙었다. 또 이들 왕은 남부 아라비아 역사상 각 시대마다 사 바의 교황 Mu karri b Saba>/2 1 <사바의 왕 M 책{ Sab a>, <사바와 라 이단 Ra yd an 의 왕> 등의 칭호로 불리었다. 이렇게 해서 여러 건축 물과 비문의 대략적인 연대를 결정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일반적으 로 추정되어온 바와 같이 이들이 서력 기원후에 세워진 것이 아니 라 어떤 경우에는 최소한 기원전 앉 D 년에 세워졌음을 보여주는 것 이다.
42) Muk ani b 라는 칭 호는 왕과 성 직 자의 의 미 를 함께 갖고 있다.
봉헌비문 평화롭게 상업에 종사하던 사바와 힘야르 민족이 무함마드를 배 출한 거친 사막의 아랍인들괴는 전혀 기질이 다름을· 전자의 신에 대한 순종적 태도에서 확연히 알 수 있다. 신에 대한 순종은 골트치 어 Gol dzih er43) 가 언급한대로 남부 아라비아 비문의 기조를 이룬다. 44)
43) [역주] Goldzih e r l g naz (1 850-1921): 헝가리의 동양학자. 유태계로 부 다페스트 대학을 나와 베를린·라이프치히·라이덴 둥지에서 학문을 닦 고 1894 년에 모교의 아랍어 교수가 되었다 . 이슬람 법학·하디쓰·이슬 람 신학·아랍 시학 등에서 당대 최고의 권위자로서 유럽의 이슬람학 을 낳게 한 장본인이다. 그의 주요 저서 중 특기할 만한 것은 1889-1890 년 할레에서 발행된 『이슬람 연구 Mulr .unme danis c he S tu d i en 』 (2 권) 이다 . 44) Goldz ihe r, Mutr: zmm edanis c he Stu d ie n , Pa rt I, p. 3.
왕은 적에게서 승리를 거두게 해준 신에게 감사의 제물을 바치며, 제사장은 자기 자식과 모든 재산을 봉헌한다. 죽음을 모면하고 <정 당 방위의 살인>으로 노획품까지 얻은 운좋은 전사는 자신의 감사 하는 마음을 기록하며 그와 같은 은총이 지속되기를 경건히 갈구하 는 것이다. 사자(死者)는 신의 가호 아래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서 숭배되거나 때로는 신으로 섬기기도 한다 . 45 1 프리도 W. F. Pri deaux461 중령이 번역한 다음 비문은 이의 전형적인 예다.
45) F. Praeto r i us , Unste r blic h keit sg l aube und Heil ige nverehrung bei den Hi m y a ren in ZDMG, vol. 27, p. 645 참조. 휴버트 그림 Hube rt G rimm e 은 Weltg e sckic h te in Karak ter bil d em : Mohammed(Mun ich , 1904), p. 29 이하에서 남부 아랍인들의 종교 사상과 관습에 관해 홍 미로운 내용을 적고 있다.
46) [역 주] 영 국의 동양학자 프리 도 H. Pri dea ux: (1648 - 1724) 가 케 임 브리 지 대학에 약 300 권의 장서를 기중하였는데 (1721), 그 후 이 장서 중 에서 W. F. 프리도가 나쉬완 븐 사이드 알-힘야리 Nashwan b. Sa'id al 一I;Iimy an 의 힘야르어로 쓰여진 시를 영어로 번역하였다(1 879).
<사드 일라흐 Sa‘d- 池 h 와 그의 자손인 베누 마르싸드 Beno Martha d im는 히란Hirran의 일-마카 Il - Mal5ah 에게 이 비(碑)를 바친다. 이는 아우왐 두 이란 알루 Awwam Dhu 'Iran Alu 의 군주 일-마카가 자신에게 행하여지는 기도를 호의적으로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베누 마르싸드가 히란의 일-마카의 면전에 아르하킴 Arh akim의 풍요로운· 땅에서 나온 햇과일을 바 쳤을 때 그분은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었고 또한 그분께서는 일 년 내내 바 치는 공물을 참작하여 목초지와 거주지에 살고 있는 부족민을 보호해 달라 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진실로 그의(사드 일라흐) 자손들이 아르하킴으로 내려와 아쓰토르 ‘At hto r 와 샴스 S ham.5 i m 의 두 사원에서 제물 을 바치며 히란에서도 봉헌이 있을 것이다. 이는 모두 일-마카가 기도를 들 어주고 빈 마르싸드 B in Marthacf'1의 밭을 지켜주시기를 바람에서이다. 또 하르와트I:Iarwat의 일-마카 신전에서 제물 봉헌이 있을 것이다 .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사드 일라흐가 나만 Na'man 의 일-마카 성전에서 목도한 징조에
따라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시기를 기원하노니 , 히란의 일 구 마카는 아르하 킵의 풍요로운 토지를 우박과 모든 재앙(또는 혹한과 혹서)으로부터 보호해 주셨다 .>471
47) Transactio n s of the Socie t y of Bi bl ia il A rclr:z e olog y, vol. 5, p. 409.
남부 아랍어 비문에 관한 매우 부정확한 기술을 마치기에 앞서, 직접 체험에 의해 얻은 지식 없이 어떤 주제에 관해 명확히 서술한 다는 것이-특히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가 동 분야의 새로운 연 구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바뀌고 있는 상황에서_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 너그러운 양해롤 빌어야 하겠다. 문헌자료 다행히 적지 않은 문헌 자료가 있어 이들 빈약한 유적을 보완해 준다. 남부 아라비아의 지리, 고고학, 전설적인 역사에 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은 두 예멘 사람 하산 본 아흐마드 알-함다니 l:Iasan b. Al:unad al- Ham:lani와 나쉬완 본 사이드 알-힘야리 Nash函 m b. Sa'id al- Himyart의 저술에서 주로 얻어진 것이다. 예멘의 옛 영광 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했던 이들의 기록은 그것이 사실이든 꾸며낸 이야기이든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여전히 교훈적이다. 함다니 (945 년 사망) D. H 뮐러가 다시 정리하여 펴낸 훌륭한 지리서인 『아라비아 지 리 Sifat ]azir at al- 거 mb 』 외에도 함다니는 예멘의 역사와 고대 유 물을 다룬 『왕관』이라는 대작을 남겼는데 모두 l 어生으로 되어 있다. 48)
48) 이 목차는 D. H. 뮐 러 (Sadarabis c he Stu d ie n , p. 108, n. 2) 가 『 왕관 』 의 영국 박물관 필사본 제 8 권의 속표지에서 따온 것이다. 이 작품의 전집은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의 상당수가 영국 박물관과 베를린 왕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제 1 권 :족보의 기원에 대한 개론 제 2 권 : 알-하마이사아 븐 힘야르 al 一 Hama y sa' b. Bi.mya r 후손의 족보 제 3 권 :까흐딴Q由臣 n 의 특징 제 4 권 룹바아 아부 카리브 Tubba' Abo. Kari b 의 치세에 이르는 초기 역사 제 5 권 :아스아드 룹바아A s'ad Tubba‘ 의 죽위부터 두 누와스 Dh o. Nu 函 1S 왕까지의 중기 제 6 권 : 이슬람 출현까지의 말기 제 7 권 :그릇된 전승 , 전설의 비판 제 8 권 정야르의 성곽, 도시, 묘, 알까마 ‘Al q ama4 9) 의 현존하는 시, 애가, 비문 제 9 권 : 힘야르어 속담, 금언 및 비문의 글자 제 10 권 : 하쉬드 Ba shi d 와 바킬 Bakil(함단 Harrrlan 의 양대 부족)의 족보
49) 여 기 서 는 시 인 알까마 븐 디 자단 ‘Al q arna b. Dhr J adan 을 지 칭 하며 「힘야르 송시」의 주석에서 그의 시가 종종 인용된다.
나쉬완 븐 사이드 알-힘야리 (1177 년 사망) 부계 쪽으로 고대 예멘 왕가의 후예인 나쉬완 븐 사이드 역시 함 다니를 학구적으로 만들었던 강렬한 애향심에 고취됨으로써 전설적 인 과거를 회상하고 오래 전에 사라져 거의 잊혀질 뻔한 제국의 계 관시 인이 될 수 있었다 . 「 힘 야르 송시 al-Q a$ida al- 1:Iimyariyy a 」 에 서 그는 그의 민족을 통치했던 왕들의 위세와 영광을 노래하며 신 실(信 實 )한 무슬림의 어조로 인생의 무상과 인간의 허욕을 설파하였 다우 사실, 왕의 이름을 비교적 거짓 없이 기록했디는 점 외에는 별
50) Di e Hi rrifar i sc he kasrdeh herausg e ben und iibe rsetz t von Alfr ed von Kremer (Leip zi g , 1865). The Lay of the Hi m y a rite s, by W . F.
Pri de aux(Sehore, 1879).
무 가치인 이 송시에는 폰 크레머 Von Krerrer5 ” 의 추측대로 나쉬완 자신이 직접 기록한 것이거나5 2l 또는 동시대의 다른 사람이 기록해 둔 것을 토대로 작성된 방대한 주석이 붙어 있다. 역사란 것이 드러 난 사실의 총체를 뜻하는 사람들에겐 , 진실의 실마리가 환상적이고 비사실적인 장식 속에 뒤엉켜 있는 이 주석은 별로 쓸모가 없다. 이 와 같은 전설이 문학의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은 이슬람 초기의 직 업적 이야기꾼들에 의해서였다.
51) [ 역주] Von Alfr ed Kremer(18Z7-1889) : 오스토리아의 동양학자. 「나 쉬완 븐 사이드 알-힘야리의 힘야르 시』 (1865) , r 아부 누와스, 아랍의 가장 위대한 시인」(1 855) 등의 논문과 『 예멘의 유적 』 (1 865) 등의 저술 을 발표하였다 .
52) 나쉬완은 어느 정도 평판이 있던 언어학자였다. 그의 대사전 『 학문 의 태양 Shams al-'Ulam 』 은 남부 아라비아의 고고학 연구에 관심 있 는 이들에게는 귀중한 도움이 된다. D. H. 뮐러는 힘야르 송시에 나 타나는 고유명사의 정 확한 철자법을 마련하는 데 이 사전을 사용하였 다 (ZDMG, vol. 29, p. 620 이하 ;Sadarab i sche Stu d ie n , p. 143 이하) .
아비드 본 샤르야 ‘AbTd b. Shary a 이야기꾼의 한 사람으로 남부 아랍인인 아비드 븐 샤르야가 <고 대의 전승 , 아랍과 타 민족들의 제왕(諸 王 ), 말이 혼란해진 원인, 인 간이 세계 여러 나라로 분산된 역사 >53’ 에 관해 칼리파 무아위야 1 세로부터 질문을 받고 그의 명에 따라 다마스쿠스를 찾아가게 되었 다. 칼리파는 질문에 대한 답을 글로 써서 자기 이름으로 발표할 것 을 명하였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단 한 권도 전해 내려오지 않는 본 서의 제목은 『 제왕(諸 王 )의 서( 書 )와 고대사Ki ta b al, -Mul 成 u:a akhb 젊 aJ, -Ma r)In 』 였다. 마스우디 Mas‘ 따(甄년 사망 ) 54 ’ 는 본서가 당
53) Fih rist, p. 89, I. 26.
54) 〔역 주] 아부 알-하산 알리 븐 알_후사인 Abo al-I :I as an 'AII b. al-I:I us ayn :유명한 아랍의 지리학자 · 역사학자 . 약 30 권의 백과사전격 인 사서 (史 書 ) 『황금의 목장과 보석 의 광산 Mur 떠 al-Dlv ir;zb wa-
Ma'adin al- Ja wlrzr 』을 저 술하였다. 본서 pp. 476-478 참조 .
시 널리 보급되었던 명저임을 지적하였다. 죠) 「힘야르 송시」의 주석 자도 이 책의 내용을 직접 참고하였거나 함다니의 『 왕관 』 을 통해 이 책의 내용을 재인용하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등장 인물 과 일부 사건이 실제에 근거하였고 여기에 전설과 허구적인 시구가 가미되었다는 점에서 「힘야르 송시」의 주석 그 자체처럼 역사소설 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학자나 직업적인 이야기꾼이라면 이를 마땅 히 홍미 본위의 이야기 소재로 삼을 만하다.
5.5) Muroj al-D/ nhab, ed. by Barbie r de Meyn a rd, vol. iv, p. 89.
이쓰파한 |$fa han 의 함자 Hamza 남부 아라비아 역사에서 이슬람 이전 시대에 특별히 관심을 쏟온 소수의 무슬림 학자 중 여기서는 이쓰파한의 함자만을 간단히 언급 해 두겠다. OO1 년에 완성된 그의 『연대기 』 중 제 8 권은 연대순으로 사건을 요약하면서 곁들여 예멘의 힘야르 왕들인 룹바아에 관해 개 략적으로 잘 기술하고 있댜 0~ 브 Ya'rub 남부 아랍인들의 조상인 까흐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야루브가 왕이 되었다. 그는 아랍어를 최초로 사용하였으며 아랍인들의 왕에 대한 인사말인 <이님 싸바한 In' im ~baban>(좋은 아침!)과 <아바이 타 알-라나 Abay ta al-la' na>(재앙을 면하시기를!)의 인사를 처음 받 은 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손자인 압드 샴스 사바 ‘Abd Shams Saba 가 <마리브 댐>을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데 혹자는 루끄만 븐 아드 가건설했다고도한다. 힘야르 H i따 /ar 와 카홀란 Kahlan 사바는 두 아들 힘야르와 카홀란을 두었다. 그가 죽기 전 내정은
힘야르에게 넘기고 변방을 지키며 전쟁을 수행하는 일은 카홀란에 게 맡겼댜 이처럼 통치권을 차지한 힘야르는 아부 아이만 Ab o. A yman의 칭호를 갖고 왕국의 수도에 거주하였으며 카흘란은 변방 의 수비와 전쟁 수행을 떠맡았다 . 561 이제 전설 속에서도 전할 만한 것이 별로 없는, 신비에 가까운 사바의 왕들에 관한 장황한 이야기 는 그만 하기로 하고 아람인들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한 사건, 죽 아랍인들의 전승에서 <댐의 범람>으로 알려진 <사일 알_아림 Say l al-' Arirn>을 다루어 보자 .
56) Von Kremer, Di e Sadarabis c he Sag e , p. 56. 아마도 그의 말대로 (p. 115) 이 이야기는 사바인들이 양대 부족, 힘야르와 카홀란으로 나 누어졌으며 전자가 대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 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리브댐 마리브 57 1 서남부 수마일 떨어진 곳에 산맥이 둘러서 있고 그 사 이로 아다나 Adana 강이 흐른다. 여름에는 강바닥이 메마르지만 우 기에는 강물이 급격히 불어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리하여 홍수막이와 관개의 목적으로 주민들은 견고한 벽돌로 댐 을 건설하였댜 그 후 붕괴되어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이 댐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상상력을 불러일으켰으며 무슬림들은 이를 세계 의 불가사의 중 하나로 생각할 정도였다우 무슬림 사가들이 댐의
57) [역주] 남예멘의 수도였던 싸나의 동쪽 약 100 킬로미터, 1,200 미터의 고원상에 있는 지방 도시로서 고대 사바 왕국의 수도 유적이 있다. 인도양과 지중해를 잇는 대상로(隊商路)의 중요 지접이었다. <마리브 댐>은 싸나의 북동쪽 165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기원전 8 세기 경에 만들어졌는데, 이는 수도 마리브와 사바 왕국의 번영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1843 년 프랑스인 아르노가 이곳을 처음 탐사하였 다. 그 후 1951 년에 미국의 탐험대가 약간의 발굴 조사를 하였으나 아직까지 이 고대문화의 수수께끼가 완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58) 꾸란 34 장 14 절 참조 . 현존하는 유적에 관해서는 Jou rnal Asia tiqu e, 7th seri es , vol. 3(1874), p. 3 이하에서 아르노에 의해 기술된 바 있다.
붕괴 사실을 전설적 분위기가 풍기게끔 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 지만 여기서는 그에 관한 긴 이야기를 간략히 요약하겠다 .59 l
59) 필자는 Mas'o.d I, Mur 떠 al-Dhahab(ed. by Barbie r de Mey n ard), vol. iii , p. 378 이 하와 라이 스크 Re i ske 의 Prim re line re Hi st o rire Rerum Arabic a rum, p. 166 이하에서의 누와이리 Nuwa y n 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댐 붕괴의 조짐 3 세기 말경, 또는 이보다 앞서 601 마리브의 왕좌는 한때나마 무자 이끼야 Muza yqiy a 라는 별명의 611 아므르 븐 아미르 마 알-사마 ‘Amr b. ‘Amir Ma’ al-S 교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부인 자리파Zartf a 에게는 예지력(豫知力)이 있었다. 꿈을 꾸면 곧 닥쳐 올 재앙을 예시 하는 환상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의 비상한 투찰력을 의심 하는 남편에게, <댐에 가서 생쥐 한 마리가 이빨로 구멍을 파고 뒷 발로 커다란 돌을 움직이는 것을 보면 재앙이 우리에게 닥쳐 온 것 올 확신케 될 거예요>라고 말했다. 아므르가 댐에 가서 자세히 살 펴보니 과연 쥐 한 마리가 쉰 명의 장정이 밀어도 꿈쩍않을 거대한 암석을 혼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댐이 곧 터져 땅이 황폐케 되리라 는 이런 저런 징조에 확신을 갖게 된 그는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처분하고 가족과 함께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이러한 행
60) 아래에서 기술하고 있듯이, 마리브로부터의 이주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역사적 근거가 있을 수 있다 . 그러나 댐 그 자체는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결국 파괴되지 않았다. 현존하는 유적에 새 겨져 있는 바문은 6 세기에 이르기까지 사용 가능한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최초로 기록된 홍수는 447-450 년에 일어났으며 또한 539- 542 년 사이에는 예멘의 아비시니아 총독 아브라하가 댐올 부분적으로 재건하였다 . 이에 관해서는 E. Glaser, Zwei lnschrift en iibe r den Dllsacmham ftb, r1u8crh.J 7 , v6a)n 참M조a.r i b( Mi tteil u ng e n der Vorderasia t i sc hen Gese-
61) 그는 낮에 입은 옷을 매일 밤 <갈기갈기 찢는 maza q a> 습관에서 이 러한 별명을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동이 남의 눈에 띄어 의심을 사지 않도록 다음과 같은 책략을 사용 하였다 . 그는 족장들을 성대한 잔치에 초대해 놓고는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 아들(혹자들은 그의 집에서 양육하던 고아라고도 함)과 격렬 한 말싸움을 벌려 잔치를 중단시켰다. 주먹이 오가며 아므르가 소리 쳤다 . <오, 부끄럽도다! 이 영광스러운 날 풋내기 자식이 나를 모욕 하고 내 얼굴을 쳤도다.> 그는 자기 아들을 처형할 것을 맹세하였 지만 동석한 손님들이 애원하므로 자비를 베풀기로 하였다. <그러 나 맹세컨대, 내가 수모를 당한 도시에서는 더 이상 머무르지 않겠 다. 내 땅과 가축을 모두 팔겠다>고 소리쳤다. 그로서는 거추장스러 운 것들을 모두 처분하였으므로 ___ 그의 말을 믿고 너도 나도 사 겠다는 사람이 많았다 ___ 그제서야 주민들에게 임박한 위험을 알 려주고 많은 사람의 무리를 이끌고 마리브롤 떠났다. 제방의 갈라진 틈새로 차츰 물이 새더니 드디어는 제방이 무너지고 전역을 휩쓸어 그 황폐함이 극에 달하였다 . 여기서 Dhahab o.(또는 tafarraqa) ayd i Sab a, 죽 <사바 사람들처럼 떠나갔다(또는 ‘흩어졌다’)>라는 속담이 생겼다. 621 人担卜 윙글구의 몰락 이 마리브 댐의 유실로 인한 홍수가 남아라비아의 역사에 하나의 새로운 기원을 이루었다. 물이 빠지고 육지는 문명과 번영을 되찾지 만 마리브는 황폐해져 사바의 사람들은 <교훈적인 사례나 이야기거 리로 입에 오르내리는> 경우를 제외하고 영원히 사라진 존재가 되 었다. 시인 아샤 al-A's 悼는 이를 시로 읊었댜 그 운율은 무타까 리브 Mu taqari b 이다 : ( ~―二長―二| ――二長―). <누구든지 이를 교훈으로 삼아라.
62) Freyt ag, Arabum Proverbia , vol. i, p. 497.
댐울 높이 쌓아올리고, 대리석으로 힘야르가 세운 마리브는 아무리 물이 넘치려 해도 철벽이었으니. 그것은 논과 밭, 그리고 포도밭에 물을 대주고 그로써 매 시간마다 토지가 구획되었다 . 그처럼 풍요롭게 살아 온 그들이 거센 파도에 쫓겨 났도다. 그 후 그들의 왕과 귀족들은 안내인도 쩔쩔매는 신기루의 사막을 헤매야 했다 .>631
63) Hamdaru, Iklil , bk. viii, ed ited by D. H. Muller in SBWA(Vi en na, 1881), vol. 97, p. 1037. Yaqu t, Mu'ja m al-Buldan, ed. by Wuste - nfe ld , vol. iv , 387 과 lbn Hish am, p. 9 에 서 는 본문과 다른 시 구가 인 용되고 있다 .
여기서 시인은 힘야르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정확 한 것은 아니다 . 자파르(후의 싸나)를 수도로 힘야르인이 예멘의 통 치자가 된 것은 댐이 파괴되고 댐을 건설하였던 터 1 사바인들이 뿔뿔 이 홑어지고 난 뒤였다 .
64) 다음 비문이 원통형 돌 기둥에 새겨져 있는데 아르노의 풀이는 다 음과 같다. <사마흐알리 야누프 Samah ' alr Yanu f의 아들이며 사바의 왕인 야싸아마르 바이 인 Ya th a ' amar Ba yyi n 이 발라끄 Bala q 산을 관통 시켜 관개를 위해 라합Ra}J. ab 이라는 수문을 세웠다.> 이는 D. H. Mu- ller, 앞의 책, p. 965 의 번역을 다시 옮긴 것이다.
톱닌p| 힘야르 왕들은 둡바아란 칭호로 무슬림 사가들에게 알려져 있다. 최초의 툼바아는 하리쓰I:Iarith였다. 그는 마치 < 어미 새가 둥지를 깃털로 수북하게 덮듯이> 정복자로서 인도와 아자르바이잔 .Adhar- ba yj an 에서 가지고 온 노획물로 백성들의 배를 채워주었으므로 <깃 털 사나이 al-Ra' ish>로 불렸다 . 65 l 그의 뒤를 이은 룹바아 왕들이 힘
65) 힘야르와 룹바아라는 단어는 오래된 비문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 으며 좀더 나중의 비문에서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야르 족의 혈통에 속한다는 주장은 날카로운 통찰력보디는 꾸란을 더 존중하는 족보학자들에게서 나온 것임이 명백하다. 여기서 나온 가공인물이 싸브 두 알-까르나인 $a‘b Dhu al- Qamayn(뿔이 둘 달린 싸브)이다. 두알-까르나인 다음 시구에서는 이 가공의 인물이 바로 꾸란에 나타나는 전설적 신비의 두 알-까르나인임을 알 수 있는데 661 대부분의 꾸란 해석학자 들은 이를 알렉산더 대왕과 동일 인물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66) 꾸란 18 장 82-98 절 참조 .
< 우리는 영광의 ‘두 알-까르나인’ 왕국 태양을 따라 현세의 어느 왕도 그와 같은 왕국은 손에 넣지 못했네. 그가 해 지는 곳에 이르렀을 때, 해가 컴컴한 바다 속으로 가라 앉는 것을 보았네. 그는 아침에 일어나 동방으로부터 붉게 타오르는 태양을 보았네. 온종일 지평은 그를 앞으로 인도하고fil l
67) 두 알-까르나인에 관해 Hamda ni, ]azira t al-'A r ab, p. 46, I, 10 에 서 는 <지 구를 답파하는 자M ass al) al-ar r;t>라고 칭 하고 있다. 잠시 문학사의 영역 밖에서 이 시가 지니고 있는 신화를 논한다면, 두 알 까르나인은 <아름다운 금성-샛별> 두 가지 이름을 의미하는 사바의 신 아쓰타르 ‘A thtar를 인격 화한 것 이 라고 보는 것 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 각한다 (D. H. Mi llier in SBWA, vol. 97, p. 973 이 하 참조). 미 나어 비문에는 <지는 별 A thtar과 뜨는 별 A thtar>이 적혀 있다(같은 책, p. 1033). 더욱이 좀더 오랜 비문에서는 아쓰타르와 알마까 Alma q a 가 항상 함께 언급된다. 함다니에 따르면, 금성 Al-Zuhara 의 이름이라고 하는 알마까는 아랍의 천문학자들에 의해 빌끼스 B ilqi s 와 동일한 것임 이 확인되었다. <광선> 또는 <빛>이라는 의미의 q arn 에 관하여는 Goldzih e r, Abrondzur Arab. Ph ilol og ie, Pa rt I, p. 114 참조. 필자는 두 알구가르나인과 빌끼스가 이슬람교에 들어와서도 여러 가지 구실로
존속할 수 있었던 수많은 이교도 신들의 실례(같은 책, p. 111 이하) 를 보여주는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밤새 별을 바라보아도 지칠줄 모르네. 쇠붙이와 녹은 동을 가지고 누구도 오르지 못할 철옹성을 쌓아두고 곡Gog과 마곡Magog 68) 을 그곳에 가두어 두었도다. 심판의 날, 마침내 그들이 깨어날 때까지 >69)
68) [역주] 사탄에 미혹되어 하늘 나라에 대항하는 두 나라로 요한 계 시록 20 장 8 절에 언급된다. 지금의 러시아 부근에 살고 있던 미개의 종족이었다 .
69) 이 시의 아랍어 원문은 폰 크레머의 Alta ra bis c he Gedic h ie iibe r die Vo/ksag e van Jem en, p. 15(No. viii, I. 6 이하)에서 찾아볼 수 있 다. 이 시 의 작자인 핫산 븐 싸비 트I:I assan b. Thab it는 무함마드와 동시대인으로서 그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시 재능을 바쳤다 . 위에 번 역한 시의 앞 부분에서는 자신이 까흐딴의 후예임을 주장하였다.
빌끼스 B i l qi s 또한 룹바아 가운데는 꾸란 刃장 70 ) 에서 솔로몬 71) 과의 사건이 기술 되고 있는 시바 Sheba 의 여왕이 있다 . 72) 무함마드 자신은 그녀의 이 름이나 혈통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샤라힐 Sha 효빠(또는 샤라흐빌 S haral).b il)의 딸 빌끼스임이 꾸란 해석학지들에 의해 밝혀 졌다. 아스아드 카밀 茂 ‘ad 降 m i I 남부 아라비아 전설 속에 나오는 민족 영웅은 룹바이- 아스아드 카밀, 또는 아부 카리브 Ab o. Kari b 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폰 크레머
70) [역주] 이는 나물 N am!(개미)의 장이다.
71) [역주] 이스라엘 왕국 제 3 대 왕(재위 기원전 971- 9 32). 다윗의 아들 로 <지혜>의 왕으로 알려졌다. <솔로몬의 영화>로 일컬어지는 융성 울 구가하였다.
72) [역주] 기원전 1000 년경 사바족의 여왕이었다. 솔로몬의 명성을 듣 고 예루살렘으로 많은 난문(難問), 금옥(金玉), 향료를 준비 하여 그를 방문하였다. 꾸란에서는 그녀를 빌끼스로 기록하고 있다 .
에 따르면 오늘날까지도 그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 으며 자파르에 있는 왕궁 유적지에서는 여전히 그의 유령이 출몰하 고 있다고 한다. < 그의 무용담을 노래한 시나 임종 때 아들 핫산I:Ia ssan 에게 들 려준 훈계의 말을 읽어 보면 그것이 남부 아라비아 전설의 단편적 기록으로서 그 기원이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진정한 의미의 민 요와 관련이 있다는 확신을 떨칠 수 없다 . > 73) 여기 < 세 마법사의 민요 >74) 란 제목으로 이 시의 전반부를 옮겨본다.
73) Von Kremer, D i e Sii da rabis c he Sag e , 서 문 p. vii.
74) 이의 산문체 번역은 Von Kremer, 같은 책 , p. 78 이하에 나온다. 그 가 후에 Alarabis c he Gedic h te iibe r die Volkssag e von Jem en, p. 18 이하에 발표한 아랍어 원문은 여러 군데 틀린 것이 있거나 부정확 한 것이 보인다. 명백히 필자의 견해와 다른 경우를 제외하고는 폰 크레머의 해석을 따랐다. 이 시가 본래 음유시인들이 해가 떨어져 자 기 주위에 몰려든 청중들에게 낭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임을 독자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힘야르 왕들의 시나 이야기(Ag比 m t X vii, 52) 를 지어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아비드 븐 샤르야(p. 51 참 조)나 야지 드 븐 라비 아 븐 무파리 그 Yaz i d b. RabI' a b. Mu farrigh (688 년 사망) 같은 히즈라 1 세기에 활약한 전문적인 이야기꾼들이 지 어낸 시일 것이다.
< 세월은 흘러가면서 수많은 경이룰 가져오네. 거기에서 교훈을 움미해야지 . 모든 것이 그대에겐 잘 정돈된 것으로 보이지만 오 운명의 여신은 그곳에 혼란을 가져 왔도다. 예정된 운명 앞에 잔꾀나 조심하는· 것도 소용 없다네 . 이제 내가 놀라운 이야기를 하려니 내 말을 믿고 그것을 바르게 전하라! 옛날 옛적, 함단Ham:lan에서 태어나
촌뜨기로 자라다가 마침내 왕이 된 아스드 Asd 출신의 한 소년이 있었다네 . 그의 마을 이름은 카미르Khamir 75 ) 였지. 이 소년은 젊음을 뽐낸 나머지 자기 친구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그들 역시 경멸로 대하였다. 그가 자라서 일단 유명해지기까지는 아무도 그의 진가를 짐작할 수 없었다. 어느날 아침, 홀로 힌왐 Hnwarn7 6 1 산에 올라 두려움에 떨고 있었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어디를 헤메고 있는지 알지 못했지. 그들은 전날밤 그를 보았을 뿐이다 . 아직 어리고 거친 아이라고 그가 안 보여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네 . 비열한 사람들이리구! 그가 나중에 그네들의 자랑거리가 되는 줄 알았다면 그를 찾느라고 법석을 피울테지만, 그 옆에세 마녀가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두려움이란! 가장 나이 많은 마녀는 술을 잔뜩 가지고 왔는데 어떤 술은 색깔이 피 빛이었다 그는 대담하게 소리쳤다 . ‘진을 주시오’ ‘참아라! 참아요’라고 그녀가 외쳤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술잔을 건네주자 그 신기한 술을 쭉 들이마시고
75) [역주] 고대 아랍 시에 나오는 지명들은 오늘날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다 . 대체로 사막의 지형이나 지세를 나타내는 형용어들이 지명으로 사용되었으므로 그 원의(原 義 )를 통해 대강의 지리적인 정 보를 구할 수 있다 . 카미르는 <짐승이 숨는 장소> 또는 <나무가 울 창한 곳>을 의미한다.
76) 원문에는 Hinw arn 대신에 Ha yyom으로 되어 있는데 폰 크레머는 이'.Ar룰 ab ,A ph. n1o9m3 으의 로마 지정 막정 하구였절다 이. 하그를러 나참 조필하자였는다 .H amdanI, ]azira t al-
비틀거리면서도 마다하지 않고 마셔댔다 . 그러자 두번째 마녀가 그에게 소리쳤다. 그는 가슴속에 분노를 느끼며 사자처럼 그녀에게 맞섰다. ‘이것은 우리 말이니 올라 타시오 당나귀는 사람이 타기에는 몹쓸 짐승이오’ 라고 그녀가 외쳤다 . ‘그건 그래요’ 라고 그는 답하곤 야윈 하이에나 위에 사뿐히 걸터 앉았다 . 그 야수는 어찌나 힘차게 그를 내팽개쳐 버렸는지 큰 상처를 입고 땅 바닥에 나자빠졌다. 그러자 가장 어린 마녀가 와서 그를 부드러운 침대 위에 눕히고 간호하여 주는 동안 ,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하나 그는 얼굴을 돌려 더 거친 휴식처를 구했다. 이따위 정부( 情婦 )는 그에게는 너무도 비천해 보였다. 그곳은 바늘 방석 위에 누운 것처럼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T)
77) 필자는 al- jahli 를 al- j ah di로 정정하였다 .
그들은 그의 대담한 태도를 눈여겨 보고 그가 매사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아스아드여! 그대가 치를 전쟁은 인류를 불행으로부터 치유시켜 줄걸세 . 깊은 상처 속으로 햇빛이 투과하고 행군을 계속할 때마다 손에 피가 흐를 때면 적(敵)은 칼과 창을 든 것을 후회할 것이오. 우리의 조언을 들으시오:카미르에 머물지 말고 자파르葬f孟7 8) 로 가서 싸움에서 승리하시오! 그대는 더이상 빈둥거리며 지낼 수 없소. 적은 그대의 소식을 듣기 전에 먼저 그대를 발견할 거요
78) [역주] <침입을 막아낼 수 있는 요새>의 의미.
존귀하신 왕자님이시여, 우리 세 마녀는 그대 를 만나기를 갈망해 왔소. 장난이 아니라, 우리는 그대 를 진지하게 시험하였소만 그대는 우리의 기대에 딱 들어맞았소. 아스아드는 고향에 돌아와 자신이 본 바를 이야기했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열흘째 되는 날, 다시 길을 떠나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을 다하며 자파르로 갔다 . 그곳에서 운이 좋아 명성을 높이 떨치게 되었으니 왕관을 쓴 사람 중 그만큼 공격에 민첩한 이는 없었도다7 9) 이상은 기억 속에서 이야기를 한 것이네. 신은 전지 전능하시도다. 영생의 신과 만인이 기도드리는 영광의 그 분께 찬미를!>
79) 필자는 메디나의 한 늙은 여인이 어떻게 해서 아스아드 왕에게 자 신의 원수를 갚아줄 것을 호소하러 그에게 왔으며 그가 어떻게 막강 한 군사를 모아 적을 패주시키고 의기양양하게 자파르에 돌아왔는지 에 관한 내용의 위 시 다음에 이어지는 시구는 생략하였다 .
전설에서 아스아드는 눈부신 전공( 戰 功)을 세운 페르시아 원정의 영웅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는 이 원정에서 아르세이시즈 Arsac i ds 801 가 보낸 적장을 물리치고 카스피 해까지 진출하였던 것이다. 귀로에 히자즈 지방을 지나면서 메디나에 남겨두었던 아~골이 어이없이 살 해당한 것을 알고 메디나 주민들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웠다.
80) [역주] 기원전 250 년 경 건설된 파르티아 왕조의 왕.
아스아드 카밀과 메디나의 두 람비 <한편 툼바아가 적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동안 , 그가 메디나와 주민들을 파멸시키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꾸라이자족 Ban il Quray尊 출신의 박식한 랍비 두 명이 와서 진언하였다. ‘왕이시여 , 참으십시오뺄 그대가 소망하~큰 것 외에는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으시다면 왕과 메디나 사람들 사이에 다
른 사람들의 간섭이 있게 될 것이오 그렇게 되면 돌발적인 응징을 받을 지 도 모릅니다 . ’ 젝 그러냐’고 묻자 그들은 답하였다. ‘그곳은 후에 꾸라이 쉬의 신성한 영토에서 나오게 되는 예언자의 피난처입니다. 그곳은 그분의 거처가 될 곳입니다.’ 그래서 왕은 이들 두 사람에게 특별한 지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제하였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홉족해 했다 . 그리하여 메 디나를 떠나자마자 그들이 믿는 종교에 귀의하였다 .81)
81 ) Ton Hish am, p. 13, 1, 14 이 하 참조.
메카에서의 아스아드 카밀 그후 예멘으로 가는 통로인 메카를 향해 출발했는데 우스판 ‘Us f an 과 아 마즈Amaj의 중간 지점에 왔을 때 몇몇 후달인 Hu dhalites들이 와서 말했다. ‘왕이시여, 선왕(先王)들이 미처 찾지 못한 진주, 에메랄드, 귀감람석, 금, 은이 보관되어 있는 보물창고로 안내해 드릴까요.’ 그는 그렇게 하라고 대 답했다. 그들은 ‘그곳은 메카 사람들이 경배하고 기도드리는 메카의 사원입 니다’라고 말했다. 이제 신성한 사원 경내를 침범하려는 왕에게 파멸만이 기다릴 뿐임을 아는 후달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를 죽일 작정이었다. 이 들의 제의를 듣고 두 랍비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 일에 대해 물어보고자 하 였다. 그들이 답하였다. ‘이 자들은 왕과 왕의 군대를 없애려고 할 뿐입니 다. 하느님 스스로를 위하여 택하신 이곳 말고는 이 세상 어느 곳에도 그런 곳은 없습니다. 그들이 권하는 바를 행하시면, 왕은 물론 왕과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이 멸하고 말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그러면 내가 그곳에 가 서 어떻게 하란 말인가?' 랍비들이 말했다. ‘그곳 사람들 하는 대로 따라 하면 됩니다. 죽 카바 신전을 한 바퀴 돌고 그것을 찬미하며 경배하십시오. 그리고 머리를 깎고 그곳 성역에서 나갈 때까지 그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취하십시오!' 왕이 다시 물었다. ‘너희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못하는가?' ‘예, 그곳은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의 사원이며 저희가 말씀드린대로 이지만 거기 사람들이 주위에 세워 놓은 우상과 옆에서 그들이 바치는 피의 봉헌 때문에 접근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악의에 찬 다신교도들이기 때문이죠.’ 왕은 이들의 충고가 올바르고 이들의 이야기가 진실함을 믿었다.
그는 후달인들을 불러 손과 발을 잘라버렸다 . 그런 다음 메카로 가서 사원 올 돌고 낙타를 봉헌하고 머리를 깎았다. 유태교를 예멘에 정착 시키려 하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메카에서 6 일간 머물며 주민들에게 낙타 고기로 잔 치를 베풀고 꿀을 마시도록 허락하였다고 한다 . 821 그 후 두 랍비롤 대동한 그는 예멘 쪽으로 그의 군대를 이동시켰다. 예멘에 들어서자 그는 자신이 귀의한 종교를 백성들도 갖도록 권하였다.
82) 같은 책, p. 15, 1, I 이하.
불의심판 그러나 그들은 이 문제를 당시 예멘에 존재하던 <불의 심판>에 맡겨보 지 않으면 거절하겠다고 하였다. 당시 예멘에는 예멘인들끼리의 분쟁에 심 판올 내려주는 불이 있어 악한 자는 멸망시키지만 악에 의해 해를 입은 사 람은 상처도 입히지 않았다. 그래서 예멘 사람들은 자신들의 우상이나 신에 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지고 왔다. 두 랍비는 경전을 목걸이처럼 목에 매달고 와서는 불이 내뿜음직한 위치에 자리를 잡 고 앉았다. 불길이 솟고 예멘 사람들이 불길에 닿을까 봐 몸을 움츠리며 겁 올 먹자 구경꾼들은 오히려 이들을 부추기며 용기를 내라고 하였다. 이들은 불길에 휩싸이게 될 때까지 버티었고 결국 불길은 우상과 힘야르인들, 짐꾼 들을 삼켜버렸다. 그러나 두 랍비는 눈썹이 땀에 촉촉히 젖었을 뿐 온전히 빠져 나왔고 여전히 경전을 목에 걸고 있었다. 그제서야 힘야르인들은 왕이 귀의한 종교를 따르기로 하였고 이것이 유태교가 예멘에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831
83) 같은 책, p. 17, 1. 2 이하.
아스아드, 아들과 작벌을 고하다 아들이자 후계자인 핫산을 위해 지은 다음 시는 일종의 마지막 유언이자 증언으로서 그 대부분이 자신의 정복사업에 대한 기술과
자신과 가문에 대한 찬양 일색이다. 8-1 1 격언이나 엄숙한 훈계에서 찾 아볼 수 있는 내용이 다음 시구에 담겨 있다. < 핫산이여, 네 애비가 임종할 시간이 마침내 도래하였도다. 때를 놓 치지 말고 너 자신을 돌아보라 강자가 굴욕을 당하고 약자가 추앙받는 것이 다반사인지라. 그처럼 태어났다가 죽는 것이 인간인지라. 내가 폿끗이 선 채로 묻혔음을 힘야르에게 알려라. 내 포도주 가죽부대와 예멘 의상도 함께 묻어주렴 85 1 분명히 진리를 예언하는 여자 예언자의 말에 귀 기울여라. 그녀가 지켜주는 가이만 Gha yman 성은 안전하니 .>861 예멘의 성(城) 가이만 성과 관련하여, 쓸쓸한 고원 지대에 우뚝 솟아 뼈대만 앙 상히 남은 유적들이 지나가는 나그네를 위압하고 있는 예멘의 여러 성에 대해 몇 마디 더 보태야겠다 . 었 H) 년 전 쯤 , 아니 그보다 더 오래 전에 , 다소 독립적인 강력한 호족들이 이 성을 차지하고 있었 다. 이 호족들은 후에 힘야르 왕국이 쇠망하기 시작하자 힘야르의 84) 아랍어 원문은 Von Kremer, Alta ra bis c he Gedic h t e aber die Volkssag e van Jem en, p. 20 이 하 참조 . 동 저 자의 산문체 번 역 이 Di e Sadarabis c he Sage , p. 84 이 하에 수록되 어 있다. 85) 이 시의 후반부는 그 번역이 잘못 되어 있다. 폰 크레머는 아랍어 원문 주석 p, 26 에서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나와 함께 암 낙타 al- khil an 와 노예들 al - ru qq an 을 묻어주시오 . > 그러나 ru qq an(ra qiq의 복수)이 사전 편찬자들이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온 그렇다 치고 라도 왕이 그와 같은 야만스러운 짓을 요구했으리라고는 보기 어렵 다. 그러므로 필자는 암낙타를 뜻하는 al- khil an(khal 의 복수)을 <부 드러운 예멘의 모직물>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며 ruq q~ <가죽부 대>를 뜻하는 zu qq an(z iqq의 복수)으로 정정한다. 86) 가이만 Gha y man 또는 미끌라브Miq lab 는 힘야르 왕들이 묻혀 있는 싸나 근처의 성이다 .
군주를 옹위하거나 때로는 찬탈하기도 하였다. 이들 성에 대해서는 지리학자인 함다니가 예멘의 역사와 유적에 관해 쓴 그의 역저 『왕 관』 제 8 권에서 상술한 바 있다 .f!7)
87) 『왕관』의 이 부분에 대한 원문과 번역은 D. H. 뮐러가 SBWA, vols. 94, ITT(Vi en na, 1879-1880) 에 발표하였다.
굼단 Ghurrdan 가장 오래된 유명한 성이 싸나의 굼단 성이었다. 한층의 높이가 5-6 미터나 되는 20 층 짜리 거대한 건축물로 묘사되고 있다 . 사면이 흰색, 검정색, 녹색, 적색 등 각기 다른 색깔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꼭대기에는 창틀이 혹단과 플라타너스 나무로 짜여진 대리석 창문 이 달린 방이 하나 있었다. 지붕은 투명한 대리석 석판이어서 굼단 의 성주(城主)가 침대 위에 누워 머리 위로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 고 까마귀와 솔개를 구분할 수 있었다. 구석구석마다 청동 사자가 놓여 있었고 바람이 불면 이 청동 상(像)은 사자의 포효와 같은 소 리를 내는 것이었다. 자르까 알-야마마 Zar q a' al-Yamama 아스아드 카밀과 세 마법사와의 기담은 모든 독자에게 셰익스피 어의 『멕베스 Macbe t h』 에 나오는 한 장면을 상기시켜 주었으리라. 아들 핫산의 일대기 중에서 묘하게도 <버넘 숲 B irnam Wo cxi> 881 의 진군과 매우 흡사한 한 사건이 기술되고 있다. 따슴과 자디스에 관 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89) 따슴 부족이 자디스 부족에
88) [역주] 멕베스는 반란이 일어나자, 마녀를 찾아가 예언해 줄 것을 요구한다. 마녀는 버념의 숲이 그의 성을 공격하지 않는 한 안전하다 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던컨 왕의 유아(遺兒) 맬컴울 추대한 맥더프가 인솔한 군대는 버넘 숲속의 나무가지를 베어 들고 몸을 감추면서 멕 베스 성을 공격하여 결국 멕베스를 살해한다. 89) [역 주] 본서 p. 39 참조.
의해 대학살을 당해 리바흐 븐 무라Ri넒 b b. M 끄 m 라는 따슴 사람 만이 유일하게 겨우 목숨을 구하였다 . 그는 룹바아 핫산에게 피신하 여 살인자들을 징벌할 정벌대를 이끌어 달라고 설득하였다. 그런데 리바흐의 누이가 자디스족 남자와 결혼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 은 자르까 알-야마마 죽 <야마마 출신의 푸른 눈을 가진 여인>이 었는데 투시력이 뛰어나 30 마일 떨어진 적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핫 산은 기마병들에게 나무에서 잎이 무성한 나무가지를 잘라내 가는 길 앞에 놓도록 하였다. 이들은 나무 뒤에 숨어 진격하였다. 저녁 무렵, 하루 정도의 여정이 남았을 때, 자르까가 부족민들에게 알렸 다. <나무가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아 무도 그녀의 말을 곧이 듣지 않았으므로 다음날 아침, 핫산의 급습 을 받은 자디스 부족민들은 모두 살해되었다. 핫산, 아우에 의해 살해됨 핫산이 전력 투구한 군사 원정은 그를 살해하고 동생 아므르 ‘Amr 룰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던 힘야르 족장들에게는 큰 부담이 었다. 아므르는 처음에는 이들의 음모에 가담하기를 꺼렸으나 결국 자기 손으로 룹바아를 칼로 찔러 죽였다. 이 암살자는 불면증에 시 달리는 가혹한 벌을 받았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공모자들을 한 명씩 차례로 처단하기 시작했다 . 두 루아인 Oho Ru'ayn 그러나 족장 두 루아인만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므르에게 충성하 며 동족상잔의 죄악으로부터 그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그 는 자신의 노력이 헛된 것을 알고 아므르에게 봉함된 문서를 맡긴 다음, 그것을 돌려달라고 할 때까지 안전하게 보관해 줄 것을 부탁 하였다. 아므르는 부탁을 들어주고 나서 그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 다. 나중에 두 루아인이 음모에 가담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처형할
것을 명하였다. <내가 어찌 범죄와 관련된 것을 그대에게 말하지 않겠소!>라고 외치며 그가 맡겨 두었던 봉함 문서를 요구했다. 그 안에는 다음 시구가 적혀 있었다. <영면과 불면을 맞바꾸는 어리석은 자여! 평안히 눈을 감는 이는 축복 받으리. 힘야르는 반역죄를 지었지만, 분명한 것은 신의 용서도 두 루아인의 덕택이도다 >90)
90) A g函, xx, 8, 1, 14 이 하.
이룰 읽고 난 아므르는 두 루아인이 진실을 말했음을 인정하고 그의 목숨을 살려 주었다. 아므르와 함께 둡바아 왕조는 막을 내린다. 이후의 왕들은 세력이 가장 막강하였던 8 명의 족장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그들은 사실상 독립적인 군주로 각기 자신의 견고한 성 안에서 가능한 많은 봉신 과 가신울 다스렸다. 이 시기에 아비시니아인들이 이 나라의 일부 지역을 정복하였고 나자쉬 N aj as hi(니거스 N egu s911) 에 의해 파견된 기 독교도 총독들이 대리 통치하였다.
91) [역주] 보통 명사로는 에티오피아 황제의 칭호이며 왕을 의미하는 암하라 말 Amh ari c 에 어원을 둔다. 여기서는 고유명사로서의 에티오 피아 황제이다.
투 누와스 Dh0 Nuwas 마침내 룹바아 아스아드 카밀의 후손인 두 누와스가 반란을 일으 킨 부족들을 전멸시키고 일약 예멘 왕국의 군주가 되었다. 유태교의 열렬한 신자인 그는 나즈란 Na j ran 에서 기독교를 몰아내기로 마음 먹었다. 나즈란의 기독교는 파이미윤 Fa yrniyun(페미온 Ph emi on) 이란 성인이 시리아로부터 들여와 전파된 것이었다. 힘야르인들은 종교적
동기에서보다는 아비시니아인에 대한 증오심에서 그의 기치하에 몰 려들었다 . 두 유태계 어린이가 살해되었다는 주장으로 두 누와스는 그럴듯한 개전(開 戰 )의 구실을 얻었다. 나즈란의 기독교도 대학살 (523 년) 그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으로 나즈란으로 진격, 주민들로 하여금 유태교와 죽음 중 택일하도록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칼에 맞아 쓰러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왕의 명에 따라 파여진 구덩이 속 에 쳐넣어져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휩싸였다. 그 후 약 100 여 년 후 무함마드가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을 때, 나즈란의 기독교인들은 < 권능과 찬미로 충만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받은 예를 들어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92 ) 두 누와스가 거둔 승리는 값 비싼 대가를 치렀다. 대학살을 모면한 다 우스 두 쌀라반 Daws Dhu Tha'laban 은 기독교도들의 수장(首長)인 비잔틴의 황제에게 가서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였다 . 이 에 유스티누스J us tin us9 3 1 황제는 나자쉬에게 출정 준비를 지시하여 아르야뜨Ary a t가 지휘하는 7 만 여 병력의 아비시니아 군대가 예멘 에 상륙하였다.
92) 꾸란 85 장 8 절 이하 참조.
93) [역주] 비잔틴 제국 황제 (578 년 사망); 재위 565-578 년.
두누와스의 죽음 두 누와스는 힘야르 족장들의 충성심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미 그의 부하들은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 <자신과 부하들에게 닥친 운 명을 직시한 그는 바다를 향해 말에 박차를 가하였다. 얕온 여울올 건너 마침내 깊은 바닷물에 다다랐다. 그러자 파도 속으로 뛰어든 그의 모습은 이내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94) 어쨋든
94) Taban, i, 927, I, 1 9 절 이하.
오랜 힘야르 왕가의 마지막 왕이 이렇게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예멘 은 이슬람 이전 역사에서 아비시니아의 속국이나 페르시아의 보호 국 정도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제 기술할 사건들은 남부 아라비아가 새로운 무대에서 주역이 아닌 시시한 조역을 맡게 됨을 예고하는 서막에 불과하다 .951
95) 다음 이야기는 Taban, i. 928, 1. 2 이하에서 요약한 것이다. =Nold- eke, Geschi ch te der Perser and Araber zur Zeit der Sasanid e n, p. 192 이하.
아비시니아 통치하의 예멘 두 누와스가 죽자 아비시니아 장군 아르야뜨는 예멘을 지나 진격을 계속 했다. 그는 남자 3 분의 1 을 학살하고 토지 3 분의 1 을 페허화했으며 여자와 아이들 중 3 분의 1 을 노예로 나자쉬에게 보냈다 . 예멘인들울 굴복시키고 새 로운 질서를 확립하고 난 그는 수년간 총독의 자리에 있었다. 아브라하 Abraha 와 아르야뜨 이즈음 아비시니아 점령군에서 반란이 일어나 그의 권위에 아브라하라는 이름의 부장(副將)이 도전하였다. 두 적수가 서로 상면하자 아브라하가 아 르야뜨에게 말했다.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내전에 아비시니아인들을 개입 시켜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나와 대결하여 군대가 승자를 따르도록 합시다. > 그의 도전이 받아들여지자 아브라하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작은 키에 뚱뚱 하고 단단한 체격의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한편, 아르야뜨는 키가 크고 얼 굴이 잘 생긴 인물이었다. 결투가 시작되어 아르야뜨가 아브라하의 머리를 겨냥하여 창으로 찔렀지만 이마를 빗겨 가 눈꺼풀, 코, 입술을 째어 놓았다 . 이후 아브라하는 <알-아쉬람 al- Ashram> 96) 이라 불리게 되었다. 아르야뜨가 주먹을 채 혼들기도 전에, 아브라하를 모시고 있는 아트와다 ‘At wa cla 라는 한 젊은이가 상관 뒤쪽의 언덕에 앉아 있다가 앞으로 뛰쳐나와 아르야뜨에 게 치명상을 입혔다. 이렇게 하여 아브라하는 아비시니아군의 총사령관이
96) [역주] 아람어 로 <코를 다쳐 볼꼴 사나운 모습>을 뜻함.
되었으나 나자쉬는 격노하여 예멘 땅에 발을 딛고 반역자의 머리를 자를 때까지 편히 쉬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하는 나자쉬에 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왕이시여, 아르야뜨는 저와 마찬가지로 당 신의 종이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왕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며 그분 의 지휘를 받을 자격을 놓고 싸운 것입니다. 다만, 아비시니아인들을 지휘 하고 군기를 확립하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이 저에게 더 많았다는 것 뿐입니다 . 왕의 맹세를 듣고 저는 머리털을 잘랐으며 여기 한 포대 예멘 땅 의 흙을 보내드리오니 발 밑에 놓으시고 맹세한 바를 성취하시길 빕니다.> 예멘 총독아브라하 나자쉬는 아브라하를 총독으로 임명함으로써 이같은 복종의 행위에 답하 였다. 그후 아브라하는 당시 어느 곳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웅 장한 교회 al- Qa]I s 를 싸나에 세웠다. 그는 나자쉬에게 보낸 서한에서 아라 비아의 모든 순례자들이 그 교회로 발길을 돌리기 전까지는 만~운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이 서한은 많은 얘깃거리를 남겼다. 달력을 만든 푸까임족 Bano. Fu q a ym의 사람이 아브라하의 의도를 전해 듣고 매우 분개하여 교회 에 들어가 모독행위를 하였다 . m) 아브라하는 이러한 무례한 짓을 한 장본인 이 메카 사원을 모시는 부족민이며 그가 그러한 행위로써 새로운 토대에 대한 경멸과 멸시를 과시하려 했다는 것을 알고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하여 사원으로 진격, 그곳을 폐허로 만들것을 다침하였다.
97) [역주] 카나나 Kanana 에서 온 한 남자가 밤에 교회에 침입하여 그곳 에 대변을 보고 벽을 더럽힌 행위를 가리킨다 . 최영길 (1988), 『꾸란해 설』(송산 출판사), p. 1252 참조.
사이프 본 디 야잔 Sa yf b. DhT Yazan 코끼리의 해 (570) 에 이루어진 이 원정에서 아비시니아인들이 대패 했음에도 불구하고9 8) 예멘은 아비시니아의 지배를 금방은 벗어날 수
98) [역주] 아브라하는 메카의 카바 신전을 파괴하기 위해 코끼리와 대 군을 인솔하여 메카로 진격하였으나, 하느님은 부리와 양 다리에 세 개의 돌을 가진 새들을 보내 이들 코끼리와 아브라하 군대를 막았다.
따라서 이 해 (570) 를 코끼리의 해라 부르며 예언자 무함마드가 탄생 한 해이기도 하다. 꾸란 105 장의 명칭은 코끼리 를 뜻하는 아랍어 어 휘 Rl 에서 유래된 것이다 . al-Ta fst r al-Kabir 96/3 1 및 최영길 , 앞의 책 , p. 1252 참조 .
없었다. 아랍인들은 아브라하의 두 아들인 야크숨 Yaksum 과 마스루 끄 Masru q의 압정에 시달렸다 이에 사이프 븐 디 야잔이라는 힘야 르인 지도자가 동족민 가운데서 도움을 찾지 못하자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기로 결심했다. 비잔틴과 페르시아 제국 중 양자택일의 기 로에서 그는 먼저 콘스탄티노플로 갔다 . 그러나 그곳에서 실망한 그 는 페르시아의 속국인 히라의 아랍 왕에게 마다인 Mada' i n( 크테시폰 Cte siph onr 궁전의 배알( 拜誕 )을 부탁했다 .
99) [역주] 이라크의 바그다드 부근에 있는 티그리스 강에 면한 페도. 파 르씨아 P arthi a 와 사산조 Sassan id 페르시아의 수도였다 . 아랍어로는 마다인이라고 한다.
예멘의 페르시아인들 (512 년경) <정의의 사나이>라는 별칭을 가진 사산 왕 누쉬르완 Nus hirwan 과의 알현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또 교묘히 술책을 써 8 p명의 중 죄인(重罪人)을 모아 달라고 한 다음 이들을 석방시켜 노(老) 장군의 지휘하에 예멘으로 파병한 과정, 그리고 이들이 절망을 극복하고 용 감하게 문자 그대로 <배수의 진>을 치고 아비시니아 주둔군을 괴 멸시켜 예멘을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만든 과정 둥을 얘기하자면 , 1 00 ) 한편의 소설을 쓰고도 남을 정도이므로 여기서는 그에 대한 상술을
100) 이는 브라운 Browne 교수의 『 페르시아 문학사 L it era ry Hi st o r y of Pers ia』, vol. i, pp. 178 - 181 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역주] Edward Granv ille Browne(1862-1926) : 영 국의 동양학자. 케 임 브리 지 대 학에 서 아랍어 교수를 역임하였고 페르시아어 · 아랍어·터키어·우르드어 동 동 양의 여러 언어에 능통하였다. 페르시아의 문학과 사상에 관한 『 페르 시아 문학사 』 (4 권, 1902 - 1924) 는 세계적 명저이다. 이란의 종교 문학 과 사상, 특히 19 세기 중엽에 발생한 바브교, 그 후신인 바하이교에 깊은 홍미와 공감을 나타냈다.
약하기로 한다 . 그것은 지면상의 제약 때문이 아니라, 뉠데케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예멘에 정착한 페르시아 정복자들로부터 그들의 당당한 후손 들 이들은 아랍인들에 의해 <알-아브나 al-Ab 떠(후손)> 또는 <닙뜹 알_아흐라르 Bann al-Abrar( 자유민의 후손)>라 불렀다 ___ 에게 전수된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아라비아 문학사보다는 페 르시아 문학사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왕년의 대국 예멘의 몰락 과정을 다소 안타까운 심정으로 살펴 보았는데 이제 북쪽으로 눈길을 돌려 아라비아 역사의 본류로 들어가기로 한 다.
제 2 장 이교도 아랍인들의 역사와 전설 무지의 시대(자힐리야 al- J ah iliyya) 무슬림 사가들은 아라비아 역사상 고대부터 이슬람교 출현 이전 까지의 시기를 <자힐리야>시대라고 한다. <자힐리야>는 <무지의 상태> 또는 간단히 <무지>라 옮길 수 있겠는데 무함마드는 꾸란의 네 구절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골트치어는 이슬람 이 전 시인들이
1) [역주] 꾸란 3 장 154 절, 5 장 50 절, 33 장 33 절, 48 장 26 절이다.
<이슬람이 ‘자힐리야의 관습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무슬림 사가들· 의 말은 바로 야만적인 풍속, 습관이나 기질을 염두에 둔 것이다. 아라비아의 이슬람과 이교(異敎 )21 가 구분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점 에서이며, 무함마드는 그러한 관습의 폐해를 없애고 동족민들의 도 덕적 개혁을 이루고자 하였다. 즉 ‘무지의 시대’가 낳은 오만}:larni yyat al- Jahiliyy a31 이나 부족의 자존심, 부족간의 끝없는 반목, 복수;
2) [역주] 본래 기독교에서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이르는 말이나 여기서 는 이슬람 이전의 우상 숭배의 신앙을 가리킨다.
3) [역주] 꾸란 48 장 26 절에 나오는 표현이다. b amiyy a 의 원의는 <열기, 뜨거움>이다.
에 대한 예찬, 무자비함 둥 모든 이교적인 특성들을 이슬람은 극복 해야만 되었다. >41
4) Goldzih er , M u!nmme danis c he Stu d ie n , Pa rt I, p. 225.
자힐리야 시대에 관한 자료의 출처 1 시와 단편적인 시구(詩句) 이는 당대에 기록되지 않고 구전에 의해 보존되다가 대부분은 2-3 백년 후에 기록되었다. 이슬람 이전 역사의 유일한 기록인 시의 중요성은 <시는 아랍인들의 등기부 (al- shi 'r drwan al-'Arab) 로서 거 기에는 족보가 보존되고 유명한 전투가 기록된다>라는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고대 아람시의 주요 선집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기술 하겠다. 2 속담 속담은 그 자체로는 말뜻을 알 수 없으므로 자료의 가치로서는 시보다 떨어진다. 속담에 딸린 주석은 속담 해설을 위한 학자들의 노고의 산물이나 대부분 속담의 본래 의미는 추측에 맡겨지거나 속 담이 발생한 상황에 대한 설명은 빠져 있다. 그럼에도 무팟달 븐 살 라마 M 따따c;la1 b. Salama( 었)년경 사망)와 마이다니 May danI(112A 년 사망)의 속담집은5 ) 이슬람 이전의 생활상을 조명해 주는 홍미로운 자료가 많이 들어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전거가 된다.
5) 마이다니의 선집은 프라이타크 Fre ytag의 라틴어 번역으로 3 권이 편 찬되 었다(A rabum Prouerbia , Bonn, 1838-1843). (역주] G. W . Freyt ag (1788-1861) :독일의 동양학자로 본 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타압바따 샤란의 애가 둥 고대 아랍시의 번역·주해에 전념하였다.
3 전설 대체로 이교도 아랍인들은 문자를 알지도 사용하지도 않았으므로 이들에게 문학 형태로서의 산문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아랍 산문의 싹은 자힐리야 시대에 이미 싹트고 있었다. 속 담 ma thal과 연설 khu tu b 외에도 서사시 음송자들이 시를 노래하기 앞서 도입부로 사용하는 산문체 이야기나 부족과 개인의 공적을 이 야기하는 전설에서 사실( 史實 )과 소설적 구성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다 . 이러한 방대한 양의 이야기가 __― 어떤 이야기는 사실이고 어떤 이야기는 가공의 흔적도 있다 _ 一―압바스조에 쓰여진 많은 문 학서, 역사서, 지리서에 전해진다. 『 노래의 책 Kitm a/-A gh m i.』 특히 이쓰파한 I$f ahan 태생의 아부 알-파라즈 Abu al_Fa raj(% 7 년 사망)가 쓴 『 노래의 책 』 은 찰스 라이얼 경 Sir Charles Ly all6 1 이 적절히 명명하였듯이 히즈라 2 - 3 세기의 위대한 <고전 문학자>들의 연구를 토대로 나온 귀중한 편찬물이다? 이들 초기 비평가들과 학 자들이 저술한 원본은 거의 예의 없이 소실되고 그 작품들의 풍부 한 인용문만이 『노래의 책』에 전해진다. 이 책에 대해 이븐 칼둔 Ibn Khaldon 은 다음과 같이 갈파하였다. <『노래의 책』은 아랍인들의 둥 기부이다. 이 책은 시, 역사, 음악 둥 각 부문에서 아랍인들이 과거 에 이룩해 놓은 모든 업적을 담고 있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그러
6) [역주] 영국의 동양학자 (1845 - 1920). 독일의 동양학자 뉠데케의 제자 로서 수년 동안 런던 대학교 동양학부 학장을 역임 . 주로 자힐리야 시 룰 번역하거나 고중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주요 저서에 번역 시집인 『 고대 아라비 아 시 Anc ien t Arabia n Poe try 』 (London, 1885) 와 그가 고 중주해한 알-무팟달 알-답비의 『 알-무팟달리야트』가 있다 .
7) 『 노래의 책 』 은 20 권의 전집으로 불라끄 Bulaq ( 1284-12 8.5 A. H) 에서 발행되었다. 이 전집에 포함되지 않은 전기집(傳記集)은 브륀노우R. E. Bri .inn ow(Leid e n, 1888) 에 의 해 편찬되 었다.
한 면에서 이 책과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있는 책은 없다 이 책은 문학도들의 마지막 참고 문헌으로서 그들이 구하고자 하는· 모든 자 료를 이 책에서 찾아낼 수 있다 .>8 )
8) Muqa ddim a of Ibn Khaldun(Bey rou t, 1900), p. 554, II .8-10 ;Les Prolego men cis d'I bn Kl rildo un trad uit s p ar Mde Slane(Pa ris, 1863— 1868) vol. iii p. 331 .
본장의개관 여기서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시 와 전설이 뒤섞여 있는 자료들을 정리할 생각은 없다. 이 작업은 이 미 꼬생 드 퍼시벌 Causs in de Perceval9) 의 『이슬람 이전 아랍 역사 에 관한 소론 표逸꼬 sw /'hi,st o i r e des Arobes avcmt l 'ls lami, sme 』 JO) 에서 경탄할 만큼 능숙하게 수행되었다. 따라서 독자들에게 이 명저 의 내용을 무미 건조하게 요약해 주는 것은 유용한 목적에 합당치 않으리라. 오히려 그 보다는 동시대를 대표하는 전형적이고 현저한 특징 몇 가지롤 선정하여 가능한 한 아랍인들 스스로에 의해 - 주로 상상력으로――_그려진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라비아의 구비 문학이 역사적인 정확성은 결여되 어 있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이미 죽은 자가 소생되고 <암혹시대 >II) 가 경건히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다는 의미에서 아라비아의 구비 문 학에는 암흑시대의 시대 정신이 충실히 반영되고 있다고 하겠다.
9) [역주] 프랑스의 동양학자 (1759-1835). 파리에서 동양의 언어들을 배 우고 국립도서관의 동양 문서국의 국장을 역임. 프랑스 학술원 회원으 로 선출되었으며 많은 번역서 외에 주요 저서로는 『이슬람 이전 아랍 역사에 관한 소론』이 유명하다.
10) 파리 에 서 3 권으로 발간됨 , 1847-1848.
11) [역주] 자힐리야 시대의 암울한 사회상을 반영하는 시대명인데 깁 H. A. R. Gib b 교수는 동시대의 시에 많은 영옹들이 주인공으로 둥 장하므로 영웅시대라 명명하였다. H. A. R. Gib b , Arabic Li ter atu r e: An Intr od ucti on (Ox for d Un iv. Press, 1<5 14 ), p. 13 참조.
3 세기 중엽의 아라비아는 북쪽과 북동쪽으로 로마와 페르시아 양 대 제국에 포위되어 있었으므로 반도를 가로지르는 시리아 사막이 자연히 변경의 끝이 되었다. 변경을 넘나들며 약탈을 일삼던 베드윈 침략자들로부터의 자위책으로 양대 세력은 황량한 변경에 수비대룰 배치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게 하여 베드윈 부족 일부는 견제가 되었으나 무력 행사는 값비싸고 비효율적인 방책이 되었다. 그러므 로 유용한 <각개격파divi de et ~의 전술에 따라 호전적인 부 족들을 제국 군대로 징병키로 하였다. 히라 Hira 와 갓산 Ghassan 의 아랍 왕국 당시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에는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나오는 급료와 무한정 약탈할 수 있다는 점은 베드윈이 라면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각자의 부족장 지휘를 받는 독립적인 동맹군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리하여 두 아라비아 왕국―-―-시리아의 갓산 왕국과 유프라테스 서쪽 히라의 러큼 왕국I..akhmit.es―――이 나타났다. 군사적인 완충국으로서 배후 종주국의 사주가 없을 때라도 항상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랍인들은 군사 훈련을 받기만 하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이내 보여주었다. 쿠스로우 사부르 1 세 Chosroes Sa. bu r I 121 에게 발레리아 누스 Val eri an13 ) 가 패하자 우다이나 Udhay na(오데나쑤스O:lenathu s) 라 는 팔미라 P almyra l41 의 한 아랍 족장이 정복자에 맞서 강력한 군대 룰 이끌고 진격하였다. 그는 시리아에서 정복자를 축출하고 페르시 아의 수도 마다인의 성벽 바로 밑에까지 추격하였다 (265 년). 12) [역주] 이는 사산 조의 샤푸르 Sha p!lr 1 세이다. 13) [역주] Publi us Lic i n ius Vale ri anus(?-260 년 경):로마 황제 (253-260). 14) [역주] 다마스쿠스 동북쪽에 있던 고대도시로 기원전 10 세기경 이스 라엘 왕 솔로몬 Solomon 이 건설했다고 전해진다. 팔미라의 주민도 아 랍 부족에 속했지만 그들의 언어는 서 아람어 Wes t -Aram ai c 계통의 팔미라어였으며 문화는 그리스화되었다.
오데나쑤스와 제노비아 Zenob i a 오데나쑤스의 혁혁한 공적은 갈리에누스Galli enus1 51 황제가 그에 게 아우구스투스 Au gu s tu s16 1 칭호를 수여함으로써 적절히 보상되었 다. 17) 그는 명실공히 중동 주둔 로마군단의 사령관이 되었으나 일 년 후 모살되었다. 당당하고 야심만만한 그의 부인 제노바아는 그의 후계자로서 부족함이 없었으며 위대한 동방제국 건설을 꿈꾸었댜 그러나, 그런 면에서는 클레오파트라 Cleo patra 18 1 만은 못하였다. 아우 렐리아누스 A ureli an191 에게 패배한 거만한 <동방의 여왕>은 그의 포 로가 되었다. 그녀는 로마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로마 황제의 전차를 끌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l:14 년)고 하나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길 이 없다.
15) [역주] 로마 황제 (253-268) 로 발레리아누스의 아들.
16) [역주] 로마 제국 초대 황제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G ai us Octa via - nus(63 B.C.-A .D. 14) 의 칭호.
17) 로마 제국은 팔미라 왕국의 통치자인 우다이나가 사산조의 사부르 1 세에게 패한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구해준 대가로 260 년 그에게 동부 주의 통치롤 맡겼다.
18) [역주] 이집트의 여왕 (51-49, 48-30 B.C.).
19) [역주] Luc ius Dom itius Aur eli anus(212?- 'Z7 5) :로마 황제(재위 'Z70 -275).
이 사건들은 아랍인들에겐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때 로마 군대가 한 아라비아 여왕의 휘하에 있었다는 것을 아람인들에 게 상기시켜 민족적 긍지를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설 속의 이야기는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 이름과 장소가 뒤죽박죽일 뿐 아니라-제노비아 본인도 그녀 휘하의 시리아 장군 자브다이 죠困회와 혼동되기도 한다-역사적 배경이(물론 어렴풋이나마 그 윤곽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크게 왜곡되어 있다. 오늘날 아랍의 후예들이 『안타르 ‘Ant ar 이야기』나 『천일야화』를 아무리 들어도 싫증내지 않는 것처럼 이 이야기는 <자힐리야>의 아랍인들을 즐겁게 해주었던 영웅담에 불과할 뿐이다.
아즈드족의 말리크 Malik the 泣 d it e 이라크‘Iraq (Bab y lo ni a) 에 정착한 아랍인들 20) 가운데서 나온 최초의 왕은 아즈드족의 말리크였다고 한다. 그는 아들 술라이마 Sula yrna 의 화살에 잘못 맞아 죽었는데, 숨을 거두기 전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고 한다. 이것이 후에 속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20) 이들이 바로 후에 히라의 일부 주민을 형성한 타누크 Tanakh 의 베 드윈 아랍인들이 다 . p. 85 이 하 참조 ..
Ua llirrruhu al- 터y at a kulla yaw rnin fal arrnna 'sta d da sa'idu ho. ra 孛 <매일 궁술을 가르쳐 오던 나에게, 그의 팔뚝이 겨냥한 것은, 나의 심장이었네> 자디마 알-아브라쉬 Ja dhfm a al_M :Jra sh 왕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적합할지는 모르나 말리크의 왕국은 아브라쉬 al-Abrash( 얼룩 점의 사나이)――― 이는 아브라쓰 al_ 시 m 꾹 (문둥이)의 완곡어귀이다 란 별명의 아들 자디마J a dhirna에 의 해 기틀이 잡혔다. 말리크 왕국은 페르시아에서 시산· 왕조롤 일으칸 (226 년) 아르다쉬르 바바칸 Arda shir Babakan 의 속국이 되었으며 사 산 왕조는 후에 이슬람 이전 시대 내내 이라크의 아랍인들을 지배 하였다. 자디마는 많은 전설과 속담 속의 영웅이다. 그는 자존심이 너무 강해 술 친구가 없었으므로 별(파르까단 a1-F arq adan)2” 을 벗삼 아 술을 마시는 일이 유일한 낙이었다. 또 술을 마셨다하면 두주불 사였다. 그에게는 아디 븐 니쓰르‘Adi b. N~ 근 어진 시종이 있 었는데 자디마의 누이를 사랑하고 있었다. 어느날, 자디마는 술 김 에 두 사람의 결혼을 승락해 버렸다. 이튿날 아침, 자디마는 그들의 술수에 놀아난 것을 알고 대노하여 신랑의 목을 자르고 노예와 결
21) [역주] 작은곰 자리의 빛나는 두 별(U rsa Mino r).
혼한 누이동생을 크게 꾸짖었다 . 그러나, 그녀가 아들을 낳게되자 자디마는 그 아이룰 양자로 받아들여 정성을 다하여 키웠다 . 어느날, 나이 어린 아므르 ‘Amr 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 오랫동안 그의 행방울 알 수 없었는데, 마침내 말리크M 却 k 와 아낄 'Aqtl 두 형제가 벌거벗은 채 마구 뛰어다니는 그를 발견하고 잠시 돌봐주다가 옷을 입혀 왕에게 데려다 주었다. 자디마는 너무 기뻐 그들 형제가 요구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기로 하였다. 이들은 그의 술 친구가 되기를 원함으로써 이제껏 어느 누구도 넘보지 못한 영광을 차지하 게 되었다. 이들은 <나드마나 자디마 Nadmana J a dhima(자디마의 두 술 친구)>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졌다. 잡바 Zabba 의 이야기 자디마는 지(智)와 무(武)를 겸비한 왕이었다. 그는 원정중, 동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한 아랍 족장 아므르 븐 자리브 본 핫산 븐 우다이나 ‘Amr b. %,arib b. I:Ias san b. Udha yna를 살해하였 는데 그의 이름 우다이나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제노비아의 남편 인 오데나쑤스와 동일 인물인 듯하다. 이같은 추정은 < 자디마가 남 편의 왕위를 승계하여 여왕이 된 메소포타미아 왕의 딸 잡바 Zabba 에게 구혼했다>는 이븐 꾸타이바 Ibn Qutayb a 22) 의 말에서 뒷받침된 다 .Zll 무슬림 학자들에 따르면 잡바는2 4 ) 아므르 븐 자리브의 딸로서 아 22) [역주] 바그다드 출생의 이슬람 문학자 (828-889) . 페르시아인의 혈통 올 이어받았지만 아라비아어로 많은 명작을 남겼다 . 그의 작 품은 언 어·문학평론·역사 에세이 둥의 영역에까지 이르렀다. 그의 저서 『시와 시인의 책 K it ab al-S hi누 wa al-Shu 'a r5 』 은 독창적인 문학평론이다. 본서 p. 469 참조. 23) Ibn Qu ta yb a in Br i.inno w's Chresto m ath y, p. 29. 24) 본래는 <털이 많온>을 뜻하는 형용사 al-Zabba 이다. 따바리 Taban 에 따르면( i, 757) 그녀의 이름은 나일라 Na' il a 였다고 한다 . 묘하게도 이 이야기의 아랍어판에서는 여주인공의 누이가 제노비아 Zenob i a(Za-
yn ab) 란 이름을 갖고 있다 .
버지가 전사하자 그의 뒤를 이어 족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자신 이 비범한 용기와 결단력 있는 여인임을 입증하였다. 공격에 대비하 여 유프라테스 강 양쪽 언덕에 견고하게 두 개의 성을 쌓아 이를 지하 땅굴로 연결시켰다. 성 하나는 자신의 주거용으로 삼고 다론 성 하나는 여동생인 자이납:lciyna b 몫으로 하였다. 그녀는 이와 같이 진지를 튼튼히 구축하자 자디마에게 복수를 하기로 결 심하였다. 그녀는 그에게 서신을 보내 연약한 여자의 힘으로는 왕권을 더 이상 장악할 수 없으며 자디마 이외는 자기와 어울리는 남자가 없으므로 자신과 결혼하여 두 왕국을 통합시키자고 제의하였다 . 자디마~근 더 부추키 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친구 겸 참모인 까시르Q학I r 의 경고를 무시하고 유 프라테스 강 유역의 밧까 Ba qq a 성에서 출발하였다. 그들이 어느 정도 갔을 때 까씨르가 돌아가자고 애원했으나 자디마는 <안 돼! 이 문제는 이미 밧 까에서 결정된 것이야 > 라고 말했다. 이 말은 후에 속담이 되었다. 목적지에 다가가자 왕은 기병대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에 놀라 까씨르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지혜로울까?> <그대의 지혜는 밧까에 놓고 왔네.> 그 의 대답이었다. <만일 저 기병대가 전진하여 왕에게 인사룰 드리고 물러선 다면 그 여자는 진실한 것이고, 우리를 좌우 양쪽에서 포위한다면 그것은 배신을 의미하오. 아싸 al-'~ ――이는 자디마의 애마(愛馬)이다_룰 타 시오 그 말을 따라 잡을 수는 없을테니까 . 그리고 아직 시간이 있으므로 본대로 돌아가시오.> 자디마는 그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 이윽고 그는 기병 대에 포위되어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그러나 까씨르는 말 둥을 박차고 타 올라 백리길을 고삐도 당기지 않고 질주하였다. 잡바는 생포한 자디마를 가죽 깔개 위에 앉히고 시녀들로 하여금 그의 팔에 혈관을 따서 금사발에 피를 받도록 하였다. 그녀는 <오, 자디마! 피 한방울도 딴 데로 홀리지 마오. 광기의 치료제로 필요하니까요>라고 말했 다. 빈사 상태의 그는 불쑥 팔을 움직여 궁전의 대리석 기둥에 피를 뿌렸는 데 이것은 잡바에게 불길한 징조였다. 이는 왕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사발
속에 들어가지 않고 딴 데로 흘리게 되면 그의 죽음은 복수를 낳게 되리라 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까씨르는 자디마의 조카이며 양자인 아므르 본 아디 ‘Am r b. 'Adi에게 가 서 잡바에게 복수를 하려면 군대를 자기 편으로 모아달라고 하였다 . 아므르 가 소리쳐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소? 하늘을 니는 독수리보다 그녀 에게 접근하기가 더 어려운데. > 까씨르는 < 나를 도와주게 . 자네한테 누는 안 끼칠테니까>라고 답하였다. 그는 지신의 코와 귀를 자른 다음 잡바에게 가서 아므로가 자기를 불구로 만든 척 하였다. 여왕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나서 그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 그리고 그를 맞이하여 자기 대신 장사 할 밑천까지 주었다. 히라의 아므르 궁전에 서둘러 돌아온 까시르는 왕의 재가를 받아 궁전의 보물을 끌어모아 잔뜩 싣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그는 점차 잡바의 신임을 얻게 되었는데 어느날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이나 여왕은 모두 비상시에 도피할 비밀 통구를 준비해 놓아야 합니 다.> 잡바가 대답하였다. <이미 그렇게 하였소.> 그녀는 유프라테스 강 밑 으로 파놓은 땅굴을 보여주었다. 이제 바야흐로 까씨르의 계획은 실행에 옮 길 때가 되었다. 아므르의 도움으로 2 천 마리의 낙타룰 준비하여 낙타 한 마리에 무장한 병사 두 명씩을 부대에 감추어 날랐다. 잡바 성에 이르자 까 씨르는 맨 앞으로 달려나와 여왕에게 대상의 도착을 보고하였다. 여왕은 잔 뜩 짐을 실은 길다란 낙타 행렬을 바라보며 낙타들의 걸음걸이가 느린 것 을 의아해 하였다. 맨 마지막 낙타가 성문을 통과할 때 성문 보초가 부대 하나를 곤봉으로 내려치자 아픔에 못 견뎌 지르는 병사의 비명소리를 듣고 외쳤다. <젠장, 부대 속에 화(禍)가 숨어 있구나!>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 다. 아므르와 그의 부하들은 수비대를 덮쳐 모두 칼로 찔러 죽였다 . 잡바는 땅굴로 도망가려 하였으나 까씨르가 강 건너편 출구를 막고 있었다 . 다시 허겁지겁 되돌아오니 아므르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에게 복슈효의 달 콤한 맛을 보여 주지 않으려고 그녀는 치명적인 독이 묻혀져 있던 인장을 새긴 반지를 빨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아므르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내 손 으로 !>25) 25) 위 이야기는 Ag M nI, xiv , 73, l, 20-75, l, 25 를 요약한 것이다. Ta-
ban, i , 757-766 ; Mas'u c: I I, Mur 떠 al-Dhahab(ed.by Barbie r de Me- yn ard), vol. iii pp. 189-199 참조.
이슬람 이전의 문화는 히라와 갓산 왕국에서 최고에 달하였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발달한 문화는 널리 전파되어 아라비아 전역에 걸 쳐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이들의 역사와 이들이 개명(開明)의 역할 울 맡게 된 상황에 대해 잠깐 기술해 두는 것도 불필요한 일은 아 니리라 . 26)
26) 히 라와 그 역 사에 관하여 는 자료가 충분한 명 논저 Dr. G. Roth s t- ein , Di e Dy n asti e der Labmi de n in al-I:I Ira (Berlin , 1899) 의 p. 5 이 하 참조 . 아랍의 역사가들이 이슬람 이전 시대에는 역사의 신시대를 구획하는 뚜렷한 획기적 사건이 없기 때문에 추측으로만 연대기를 만 들수 있는 데 바해 시리아나 비잔틴의 학자들은 직접 목격한 것을 기 술하여 당시의 사건들을 자주 언급함으로써 연대기를 작성하는 데 극 히 귀중한 수단이 된다. 이슬람의 일반 역사에는 대개 <히라와 갓산 의 왕들에 관해> 성격상 다소 신화적인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히샴 븐 무함마드 알-칼비로부터 유래되는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일 만 한데 뉠 데 케 의 번 역 으로 그의 저 서 Geschi ch t e der Perser und Ara- ber 2ur Zeit der Sasan i den 에 실려 있다. 히샴은 히라의 교회에 보존 되어 있던 옛 기록을 접하고 거기에서 라큼왕조와 관련된 많은 족보 및 연대기상의 세세한 내용을 입수했다고 주장한다 (Tab ar!, i , 770, 7).
히라의 건설 3 세기 초 무렵, 서로 동맹을 맺고 이른바 타누크 Tan o.kh라는 총 칭으로 불리던 예멘계의 베드윈 부족들이 당시 아르세이시즈 Arsacid 제국이 혼란한 톰을 이용하여 이라크(바빌로니아)를 침략하 고 유프라테스 강 서쪽 비옥한 땅에 정착하였다. 이들 침략자들 중 일부는 계속 유목생활을 영위해 나갔고 일부는 농사를· 지었다. 얼마 후 이들은 마을이나 도시를 이루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빌 로니아 왕국의 수도 히라I:fira 'l:1 1 ( 본래는 알-히라 al- I:fira인데 천막을 뜻
27) 히라는 시리아어로 hena( 성역, 수도원)이며 원래 페르시아계 아랍인 들의 이동 천막을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후에 수비대 주둔 도시의 명 칭이 되었다 .
함)로서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수도 바빌론의 근방인 쿠파 Ko f a 에 서 남쪽으로 수마일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슬람 이전 시대 역사에 정통한 히샴 븐 무함마드 알-칼비 I:fish am b. Mubarnmad al-Kalbi:( 81 9 또는 8'2 1 년경 사망)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 최초의 왕인 아르다쉬르 바바칸의 재 위 기간(2'm -2Al) 히라의 주민들은 다음 세 부류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한다. 1) 히라와 안바르 Anbar 사이 유프라데스 강 서쪽에서 낙타 털로 만든 천막에서 거주한 <타누크> 족 2) 히라에서 가옥에 거주한 <이바드 ‘Ibad > 족 3) 위 어느 부족에도 속하지는 않지만 히라 주민들에게 애착심을 갖고 함께 거주한 <아흘라프시曲칼(예속민)> ___ 이들은 살인죄 룰 범하여 쫓기고 있는 도망자이거나 돈을 벌어 팔자를 고치려 는 궁핍한 이주민들이었다. 이바드족 마땅히 이들 원주민이 전 히라 주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세력 올 형성하였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히샴은 그들을 <이바드> 족이라 불렀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그의 이 용어 사용이 정확한 것 은 아니다. 이바드족은 오직 <히라의 기독교도 아람인들>만을 가리 키는 것으로서 히라가 세워진 당대와 그후 오랜 기간 주민의 다수 룰 이루었던 이교도 아랍인들은 이교 신앙의 정반대를 나타내는 지 칭 속에는 결코 포함되지 않았다. <이바드>는 <종>, 죽 하느님이 나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를 뜻한다. 6 세기 히라에서 다수의 유력한 부족으로 이루어진 종교 사회를 분류하는 데 어느 시기에 이 이름 이 처음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언제이냐는 비교적 중요한 문 제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슬람 이전 시대에 혈연이나 동 일한 조상으로부터의 혈통에 의하지 않고 정신적 도의(道義), 죽 공
통의 신앙에 기초하여 아라비아 사회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다음 장에서 기술하겠지만, < 이바드 > 의 종교와 문화는 여러 경로를 통해 반도 내부 깊숙이 전파되었다. 읽지도 쓰지도 못하며, 솔직히 털어 놓아 교육을 받고 싶어하기는커녕, 교양을 노예적인 것이라고 생각 하며 그러한 교양에 대한 무지롤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는 이교도 아람인들에게 이바드족은 스승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윈 유목민 중 최고의 지성을 자처하는 자들은 어쩔 수 없이 히라에 가 장 큰 매력을 느꼈다. 당대의 시인들은 왕의 총애를 받았다. 이슬람 이전의 많은 방랑 시인들이 히라의 라큼 왕궁을 찾아 갔는데 나비 가 Nab ig ha 나 아비드 븐 알-아브라쓰 ‘Ab id b. al-~ 같은 시인 들은 그곳에 영구 정착하였다 . 라큼왕국 히라의 라큼 왕조에 대한 기원을 논하는 일은 불필요한 작업이다. 정확히 5 2'2년 8 개월 동안 등장한 2'2명 왕의 목록을 제시하고 있는 히샴 븐 무함마드 알구갈비에 따르면, 최초의 라큼 왕은 자디마의 양자로서 후에 자신의 양아버지를 살해한 잡바 여왕에게 복수를 한 아므르 븐 아디 븐 나쓰르 븐 라비아 븐 라큼 ‘Amr b. 'Adi b. N8 $ b. Rabi'a b. Lakhm 이 었다. 누만 Nu'man 1세 (400 년경)와 카와르나끄 Kha'N amaq 성 5 세기 초에 통치했던 <알-아와르 al-A'war( 애꾸 눈)>이란 별명을 가진 누만 1 세에 이르기까지 아므르 븐 아디의 계승자들에 관해서 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누만은 히라 근방의 유명한 카와르나끄 성을 쌓은 것으로 전설 속에 전해진다. 이 성은 사산 왕 야즈디기르 드 Y azdigird 1 세가 아들 바흐람 고르표此감 n @r 왕자에게 안락한 저택을 마련해 주고자 누만에게 부탁하여 세워진 것이다. 축성(築城) 이 되자 누만은 시님마르 Si nim따距采즌 <로마인>(죽 비잔틴인) 건
축가를 대포 쏘는 흉벽(胸 壁) 에서 아래로 내던져 곤두박질시켰다. 그 것은 <태양을 따라 회전하는> 더욱 멋진 건물을 건설할 수도 있었 다는 그의 오만 때문이거나 아니면 어떤 돌을 빼내면 성 전체가 붕 괴될 수도 있는데 그 돌의 위치를 알고 있어 그것을 누설할까 두려 워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만, 은자(隱者)가 되다 어느 봄날(전해지는 이야기는 그러하다), 누만은 서쪽으로는 정원과 야자니무 숲, 운하가 자리잡고 있고 동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 는 늪지 al-Najaf가 내려다보이는 카와르나끄 성에서 그의 대신과 함께 앉아 있었다.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어 누만이 큰 소리로 말 했다. <그대는 이와 같은 경치룰 전에 본 일이 있는가?> 그가 대답 하였다. <보지 못했습니다만, 그것은 영원불멸한 것은 아니지요. > <그럼, 영원한 것은 무엇이냐?>고 누만이 물었다. <하늘에 계신 하 느님과 함께 있는 그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곳에 이를 수 있는 가?> <속세를 버리고 하느님을 섬기며 그분이 가지신 것을 추구함 으로써 이를 수 있습니다.> 이에 누만은 즉시 자신의 왕국을 떠날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날 밤 그는 삼베옷을 입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왕궁을 빠져 나와 방랑하는 은자(사이흐sa.'ilJ)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아디 븐 자이드 ‘Adi b. 7.ay d 가 지은 시 <이바드인들>에 서나온것같다. <그대 생각해보라, 카와르나끄의 군주를 -하늘의 인도를 받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도다_ 광활한 영토를 손에 넣고 기뻐하며, 넓은 유프라테스 강과 사디르 S adir2 8) 를 굽어 보던 그의 모습을. 28) 사디르는 히라 근방의 성이었다.
그때 그가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혀 소리쳤다.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인간이 여기서 쾌락을 찾을 수 있을까?' 인간들은 세도를 부리고 영화를 누리지만 그러한 영화도 다 지나가고 저 무덤 속에 그들은 허구한 세월을 누워 있구나. 마치 바람에 빙빙 돌며 날라가는 낙엽마냥 , 29 1>
29) Taban, i , 8.53 , 20 이 하.
누만이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대다수 아라비아 학자들의 견해는 근거가 없는 듯하지만, 그가 기독교에 호의적이었으며 그의 기독교 도 백성들이 히라의 한 주교 이름이 410 년에 이미 언급되고 있 다_――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누렸디는 것은 믿을 만하다. 문디르 Mundhir 1세 누만이 떠나버린 공백은 유능하고 정력적인 그의 아들 문디르 왕 자에 의해 메워졌다. 당시 라큼인들의 세력은 야즈디기르드 1 세가 죽은 후 문디르가 페르시아의 왕위 계승 문제에 강력히 개입, 그동 안 성직자들로 부터 배척받아 온 바흐람 고르를 왕으로 뽑은 데서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301 그후 페르시아와 로마 간에 벌어진 전 쟁에서 문디르는 페르시아에 충성을 다 하였으나 로마군에게 대패 하고 말았다 (421 년).
30) 바흐람은 히라에서 누만과 문디르 밑에서 교육을 받았다. 페르시아 의 귀족들은 그가 아랍인들 사이에서 자란 탓에 아랍인의 관습과 용 모를 갖고 있는 것을 불평하였다 (Taban, i, 858, 7).
문디르 3Ail , 문디르 븐 마 알_사마 Mundhir b . 隣i' al-Sama 몇몇 무명 왕대를 거쳐 6 세기 초에 이르면 동명이인(同名異人)의 세 왕 중 가장 이름이 난 문디르 3 세가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아랍인들이 문디르 븐 마 알-사마3 ” 라 부르는 자이다. 그는 오랜 치
31) MA' al-S 쿠(하늘의 물)은 본명 이 마리아Mariy a 또는 마위야 Ma wiyy a 인 문디르 어머니의 별명이었다고 한다.
세 동안 빛나는 업적을 쌓았지만 그같은 평판은 동시대의 전반적안 역사룰 언급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한 사건 때문에 잠시나마 더럽혀지다. 킨다Ki nda 왕국의 발흥 페르시아 왕 밑의 라큼 왕국과 비슷한 처지로 예멘의 룹 바 왕들 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킨다 부족은 480 년경 중부 아 라비아와 북부 아라비아의 대부분 지역을 그 세력하에 두게 되었다. 이 정복 사업의 주동자는 시인 이므루 알-까이스 hnru' al- Qay s 의 조상으로 <아킬 알-무라르Akil al-M따 泣>라는 별명을 가진 후즈 르 H uj r 였다 . 그가 죽은 후 킨디 연합체는 와해되었으나, 었 D 년경 손 자인 하리쓰 븐 아므르l:larith b. 'Amr 에 의해 잠시 동안 재건되어 갓산과 히라 왕국의 강력한 경쟁자가 되었다. □ 卜즈닥隣塗固 한편 페르시아에서는 마즈닥의 공산주의적 com rrnmist i c 교리가3 2) 하층 계급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마침내 카바드 Kawadh 왕 자 신도 이를 받아들이기까지 하였다.
32) 마즈닥과 그 교리에 관하여는 Taban, pp. 140- 14 4, 154, 455-467 에 대한 뉠데케의 번역과 브라운의 Li tera ry Hi st o r y of Persia , vol. i, pp. 168-172 참조 . [역 주] 마즈닥 이 밤다드 Mazdak i Bamdad(528 년 경 사망)가 세웠으며 마니교의 한 분파로서 고대 페르시아에서 발달 한 이원적(二元的) 종교로서 마즈닥파 Mazd aki sm 라고도 한다 . 세계의 근본원리는 선과 악, 또는 빛과 어둠의 대립이라 생각하고, 광명의 세 계에 도달하기 위한 엄격한 금욕생활을 요구하였다. 사산조의 카바드 1 세 치하 (488-531) 에서는 보호를 받았으나 나중에는 금지되었고 , 이슬 람화한 뒤 탄압을 받게 되었다 .
문디르, 킨다의 하리쓰에 의해 히라에서 축출됨 렀 5 년에서 529 년 사이에 킨다의 하리쓰 븐 아므르가 이라크를 침 공, 문디르를 그의 왕국에서 축출한 것 은 확실하다 . 많은 학자들의 주장대로 문디르의 몰락이 그의 반( 反 )마즈닥적인 지론때문이라는 것은 그럴싸한 추 정 이다. 그랬을 경우 그의 종주국의 불쾌감을 살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 아무튼 , 이유야 어떻든 간에 문디르 대신 일시적으로 하리쓰가 들어앉게 되었다. 얼마 후 추방되었던 문디르 왕은 황태자 시절 마즈닥 추종자들을 대학살한 (528 년) 아누쉬르완 Anus 다이 즉위하기 전에 복위하였지만 그가 당한 수모와 모욕 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 33) 이므루 알-까이스의 생애와 시는 라큼 왕국과 킨다 왕국이 조상대대로부터 서로를 얼마나 증오해왔는 지 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33) 문디 르는 포로가 된 킨다 왕가의 4, 50 명 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하리 쓰 자신은 529 년 문디르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후 킨다의 세력은 기울 어 지고 그들은 점차 하드라마우트의 원주지로 쫓겨갔다.
문디르의 로마에 대한 군사 행동은 힘차게 펼쳐졌다. 그는 시리아 의 안티오크 An ti och3 4) 까지 쳐들어갔다. 이에 유스티니아누스J us ti一 nian 황제 1 세는 35 ) 이 지 역의 방어를 갓산의 하리쓰 븐 자발라珪i_ rith b. J abala( 또는Barith al_A‘ raj )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는데 문디 르는 드디어 만만한 적수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히라와 갓산의 왕은 줄기차게 상대방의 영토를 침략하고 약탈하게 된다. 어느 땐가 정벌에 나선 문디르가 하리쓰의 아들을 생포한 죽시 <아프로디테 Aph ro dite 36) 신에 해당하는 아라비아의 여신 알 - 웃짜 al_‘Uz 盆에게 그를 제물로 바친 적도 있다.>지)
34) [역주] 터키 남부의 도시로 고대 시리아 왕국의 수도 (300-64 B.C .). 아라비 아명 은 Anta kiya.
35) [역주] 비잔틴 제국 황제 (483-565); 재위 5 업 -565 년.
36) [역주〕 고대 그리스의 사랑과 미의 여신 .
37) 또 언젠가는 4 백 명의 기독교 수녀들을 같은 여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문디르양1 I 의 죽음 그러나 조 4 년 다시 출정한 그는 속담에서 <할리마I:fulima의 날> 로 알려진 전투에서 계략에 빠져 급습을 받고 살해되었다 . 38)
38) 본서 p. 101 참조.
문디르의 <축복의 날과 불행의 날> 대체로 라큼인들은 이교도로서 미개한 종족이었는데 이같은 수식 어는 문디르 3 세에게도 족히 붙일 만한다. 『노래의 책』이 전하는 바 로는, 그는 뜻이 맞는 술 친구들인 칼리드 본 알-무달릴 Khalid b. al-Mu <;1allil과 아므르 븐 마스우드 ‘Amr b. Mas' o. d 와 함께 곧잘 홍 청망청 마시며 놀곤 하였다. 한번은 취중에 한 말에 화가나 그들을 생매장하도록 명령하였다. 이틀날 아침,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못하고 여느 때처럼 자기 친구들을 찾았다. 그제서야 어떤 일이 벌 어졌었는 지를 깨닫고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그는 두 개의 묘비를 묘에 세우게 하고 매년 이틀간 <피투성 이 al_ Ghariyyan>라 불리운 이 묘비에 와서 앉아있곤 하였다. 이틀 중 하루는 <야움 나임 ya wm nann( 축복의 날)>이어서 누구든 그날 맨 먼저 그를 만나는 사람은 백 마리의 흑색 낙타를 받았다. 다른 하루는- <야움 부스y awm bu's( 불행의 날)>로서 그날 맨 처음 만나게 되는 사람에게 검은 족 제비乙 m 悼 n 의 머리를 주고나서 그를 제물로 바치고 묘비에 그의 피를 바르는 것이다. 39) 앞서 언급한 시인 아비드 븐 알一아브라쓰가 이 끔찍한 의식의 희생물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39) A g函, xix , 86, l, 16 이하.
한잘라比印廻 a 와 샤리크 Shanl < 이 관습은 계속되어 따이이 Tay yi’의 한잘라I:Ianzal a 라고 하는 사 람도 그러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보증인을 세우는 조건 으로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처리할 수 있게끔 1 년간의 유예기간이
주어졌다 . 그는 문디르의 시종인 샤리크 븐 아므르 Shank b. 'Amr 에게 사정을 호소하였는데 샤리크는 선뜻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 < 만일 그가 약속 날짜에 돌아오지 않으면 그의 손 대신 내 손을, 그의 피 대신 내 피를 바치겠습니다.> 약속 날짜가 되어도 한 잘라가 나타나지 않자 문디르는 샤리크를 제물로 바치려 하였다. 슬 픔에 잠긴 그의 부인은 벌써 애가( 哀歌 )를 읊기 시작했다. 그때 향수 가 뿌려진 수의를 걸친 채 말을 타고 오는 사람이 보였다. 여인 하 나가 곡을 하며 그를 따라 왔다. 그것은 한잘라였다. 문디르는 그들 의 의리에 감복하여 경의를 표한 다음, 자리를 물러나게 하고 자신 이 만들어 놓은 관습을 폐지하였다 .401
40) 같은 책, xix , 87, I, 18 이하.
아므르 본 힌드 ‘Amr b. Hin d (554-f i69) 문디르의 뒤를 이은 것은 당대의 시인들과 후세의 역사가들에게 아므르 븐 힌드 4 1) (힌드의 아들, 아므로)로 알려진 그의 아들· 아므르였 다. 그의 치세 동안 히라는 문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 당대의 유명 시인들 대부분이 그의 궁전을 찾아왔다. 다음 장에서 따라파 Ta- rafa, 아므르 븐 쿨씀 ‘Amr b. Kulth um, 하리쓰 븐 힐리자Barith b. H 沮꼬와의 관계를 살펴보겠다. 아므르는 까다롭고 성미가 급하며 독단적이었다. 아랍인들은 그를 무척 두려워하였지만 그에 대한 가 슴속의 옹어리는 거리낌없이 표출하였다. 다합 알-이즐리 Dahab al-' Ijli는 , <히라예는 모기, 열병, 사자 그리고 부당하고 부정한 짓을 서슴치 않는 아므르 븐 힌드가 있다 > 42) 고 말했다. 그는 타글리브 Ta ghli b 족의 족장인 아므르 븐 쿨씀의 어머니 라일라 Lay la 를 모욕
41) 힌드는 킨다의 공주(위에서 언급한 하리쓰 븐 아므르의 딸)로서 문 디르가 자르반 Zarb a. n 약탈 원정에서 그녀를 포로로 잡은 듯싶다 . 그 녀는 기독교도로서 히라에 수도원을 세웠다(뉠데케의 Taban 번역서 , p. 172, n. I ). 42) A g函 I, xxi, 194, I. 22.
한 데 대한 앙갚음으로 그녀의 아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누만 아부 까부스 Nu‘man Ab0 Qab0 s 모두 힌드의 아들들로서 짧은 기간 왕좌를- 차지하였던 까~i스 Qab us 와 문디르 心 1] 는 그 이름만 드는 것으로도 족하다. 이제 문디 르 4J.-l l43) 의 아들이자 히라의 라큼 왕조 마지막 왕으로 전승 가운데 가장 유명한 아들 누만 3 세 (500- f:112년 또는 585- fff/년 재위)의 차례 다. 아부 까부스 Abu Qa bus 란 <쿤야 kun y a( 존칭 )>44) 로 불린 그는 히라의 한 기독교도 명문 집안에서 자라며 교육을 받았다. 이 집안 의 문장(門長)은 시인인 아디 븐 자이드의 아버지 자이드 본 함마드 .aiyd b. 1:Iamma d 였다.
43) [역주] 문디르 4 세에게는 12 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 12 왕자를 가리켜 <흰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그 중 왕자 누만만은 예외였는데 용모가 추악했으며, 몸집도 키도 작고 얼굴은 문둥이 같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은 이 추악한 누만 왕자였다 .
44) [역주] 전통적인 아람 이름의 체계 중 존칭이나 별명에 사용되는 이 름이다. Abu( 아버지) 또는 Umrn( 어머니)와 본명 (Ism) 의 연결형으로 이 루어지는 복합명이다. 이 <쿤야>로써 같은 이름의 다른 왕과 구별된 다. 본서 p. 179 각주 참조.
아디 본자이드 아디는 홍미 있는 인물로 그의 운세가 누만과 매우 밀접하고 비 극적으로 맺어져 있으므로 그의 생애와 성격을 기술해 보겠다. 교양 있는 그의 부친과 조부는 문디르 3 세와 그의 후계자들 밑에서 고위 행정직을 맡았다. 특히 자이드는 파루크-마한 Farrukh-Mahan 이라 는 <디흐깐dihq an( 페르시아의 지주 )>45) 의 추천으로 쿠스로우 아누쉬
45) [역주] 본래 촌장의 의미에서 아람 정복 후 지주를 의미하게 되었 다. <디흐깐>둘은 고대 페르시아의 이야기를 많이 암송하여 구전으 로 전했는데 피르다우시가 이룰 모아서 『샤흐나마(왕의 책)』로 엮 었다.
르완으로부터 총독 아들이나 되어야 취임할 수 있던 중요한 관직인 우체국장이란 자리를 얻어냈다 쁘 아디가 자라자 그의 아버지 자이 드는 그를 < 디흐깐 > 에게 보내 그의 자녀들과 함께 교육받도록 하 였다. 그리하여 아디는 페르시아어를 완벽하게 쓰고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격조 높은 아랍어를 구사하였다. 그는 다재다능하여 궁술과 승마술에도 조예가 있었다. 페르시아 궁내에서 그의 용모와 재주, 재치에 좋은 인상을 받은 아누쉬르완은 그를 비서 겸 통역관 으로 채용하여――_아랍어는 궁내에서 전혀 사용되고 있지 않았으 므로_~모든 호의와 특권을 베풀어 주었다. 콘스탄티노플에 사절 단으로 파견된 그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귀로에 오른 그를 까이 싸르Qay햏4 7 ) 는 의례적으로 역로(驛路) 담당 관리에게 지시하여 사 자{使者)가 직접 비잔틴 제국의 위용을 볼 수 있도록 역마(驛馬)와 모든 편의를 제공하였다.
46) 자이드는 까부스의 사후에 사실상 히라의 섭정왕이 되어 문디르 4 세 의 등장을 가능케 하였으며 결국 문디르 4 세는 그의 난폭성 때문에 사 람들로부터 미움을 샀다(뉠데케의 Taban 번역서, p. 346, n. I . 참조).
47) 아랍인들은 비잔틴 황제를 까이싸르Q a y $ar( 케사르 Creesar) 로, 페르시 아 황제를 키스라Ki sra( 코츠러이즈 Chosroes) 로 불렀다 . [역주] Chosroes 는 코스루 Khosru 의 그리 스어 형 이 다. 이는 코스로우 Khosrau, 쿠스로우 Khusrau( 또는 Khusraw) 로 쓰이기도 하는데 본 역서에서는 니콜슨이 사용한 Chosroes 와 Khusraw 중 쿠스로우 Khusraw 로 통일하기로 한다.
아디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얼마간 머무르면서 그곳에서 그 의 첫 시를 발표했다고 한다 . 그즈음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맘 먹으 면 언제라도 얻을 수 있는 히라의 높은 자리도 마다하고 사냥과 온 갖 잡기(雜技)에 빠졌으며 이따금 크테시폰 왕궁에 가서 비서 업무 만을 수행하였다. 히라에 머무는 동안 당시 열한 살이던 누만의 딸 힌드와 사랑에 빠졌다 . 『노래의 책』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홍미진진한데 지면 관계상 상술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생략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 48 )
48) 필자의 친구이자 동료인 베반A. A. Bevan 교수는 다음과 같은 견
해를 보내오고 있다. <아디가 왕의 딸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시인 자신이 왕가와 인척관계임을 말해 주는 시구 (A g꿉ru, i~ 26, I, 5) 나 힌드의 고향을 언급하고 있는 또 다른 시구(같은 책, ii, 32, I, I )에 어느 정도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힌드는 왕의 딸이 아니라 베드윈 여인이었음이 명백하다.> [역주] A. A. Bevan(l859-1933): 영 국의 동양학자. 케임브리지 대학교 아랍어 교수 .
아디가 힌드 공주를 교회에서 만나다 당대의 미인인 힌드가 성지( 聖枝 ) 주일이 지난 3 일 후 성( 聖 ) 주간의 목 요일 날 성찬을 받기 위해 교회에 갔다. 아디도 같은 목적으로 교회에 들어 섰다. 몸집이 크고 키가 큰 그녀 를 멀찌감치 바라보며 눈치 채지 못하게 그 녀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 그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본 그녀의 시녀들은 주인 마님에게 아무 귀림도 해주지 않았다 . 왜냐하면 그 중 마리야.Mariy a 라는 시녀가 평소 아디 를 사모했는데 도저히 그와 면식 을 쌓을 방법이 없 었기 때문이었다 . 자신을 훔쳐보고 있는 그를 발견하 고 힌 드는 매우 불쾌해 하며 시녀들을 꾸짖고 몇 명은 벌로 때려 주었다. 아디는 힌드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일 년 내내 비밀로 해 두었다. 그 무렵, 마리야 는 힌드가 지나간 일을 잊어버린 줄로 생각하고 그녀에게 성 도마 Th6ma(S t. Thomas) 교회 와 그곳에 출입하는 여자 아이들과 수녀들, 교회 건물과 그곳 램프의 아름 다움을 얘기해 주고 나서 말했다. < 어머니께 승낙을 받아 구경 가보십시 다 . > 승락을 얻자 마리야는 이러한 정보를 아디에게 전해 주었고 그는 죽 각 금박의 페르시아 정장 상의 <얄마끄yalrnaq>를 걸치고 히라의 젊은이 몇 명을 대동하고 만날 장소에 나갔다 . 마리야가 그 를 알아보고 힌드에게 소리쳤다. <이 젊은이 좀 보세요. 정말 주인 마님께서 보고 계신 램프나 그 무엇 보다도 훨씬 아름답군요.> <그가 누군데?> 그녀가 물었다. <자이드의 아들, 아디입니다.> 힌드가 말했다. <내가 가까이 가면 그가 나를 알이볼 까?> 그녀는 직접 다가가서 친구들과 담소하고 있는 그가 빼어난 용모와 세련된 언변, 화려한 옷차림으로 친구들 중 가장 출중함을 알았다. 마리야는 공주의 안색에서 감정을 헤아리고 <그분에게 말을 걸어 보십 시오>라고 말했다. 몇 마디 말을 나눈 뒤 두 연인은 헤어졌다. 마리야는 아 디에게 가서 만일 그가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면 힌드와의 재회를 성사시켜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녀는 곧 누만에게 가서 딸이 아디를 열렬히 사랑하 고 있으므로 만일 아디에게 딸을 주지 않으면 힌드가 스스로 욕된 짓을 하 거나 슬픔에 겨워 죽을지도 모른다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누만은 지나치게 거만하여 아디에게 그같은 제의를 할 수 없었고 , 한편 아디로서는 그녀에게 청혼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살까봐 주저하고 있었다 . 힌드와의 결혼 슬기로운 마리야는 곤경에서 벗어날 방도를 찾아냈다. 그녀는 아디가 누 만과 그의 수행원들을 연회에 초대하여 술을 억지로 권해 취한 상태에서 청혼하면 퇴짜 맞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마침내 아디는 성공하였다. 누만은 결혼 승낙을 하고 3 일후 힌드는 신랑집에 오게 되었다 . 4 9 1
49) A g函I, ii , 22, 1, 3 이 하.
아디, 히라의 왕으로 누만을 추대함 문디르 4 세가 죽자 아디는 과거 그의 제자로서 지금은 장인이 된 누만이 히라의 왕권을 요구하자 그를 열렬히 지지하였다. 그가 이때 쓴 책략은 완전히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떄문에 또한 목숨을 잃게 되었다 .50 1
50) 후르무즈 Hurmuz 가 문디르의 아들 중에서 왕을 선출하기 위해 그들 울 크테시폰 C t es ip hon 으로 불러들이자, 아디는 그들 각자에게 은밀히 말해 두었다. <만일 쿠스로우가 아랍인들을 평정할 수 있는지를 묻는 다면 누만만 빼놓고는 모두 할 수 있다고 답하여라.> 그러나 누만에 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쿠스로우가 너의 형제들을 다스릴 수 있 겠느냐고 물을 것이다 . 그러면 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 ‘나에게 그들 올 다룰 만큼 힘이 세지 않으면, 다른 민족은 더욱이 휘어잡을 수도 없소!> 후르무즈는 이같은 답변에 홉족해 하여 왕관을 누만에게 씌어 주었다.
아디, 누만에 의해 투옥 처형당함 왕권 쟁탈에서 실패한 아스와드 븐 문디르 Aswad b. M 血dhir의
부하들은 복수를 결심했댜 이들이 꾸민 음모로 누만을 왕으로 옹립 하였던 <킹 메이커King -maker> 아디는 오히려 누만의 의심을 샀 다. 결국, 아디는 투옥되어 오랫동안 옥중에서 고생하던 중 쿠스로 우(후르무즈의 아들, 파르베즈 ParwezSI)) 가 그의 석방을 위해 중재에 나서던 때에 누만에 의해 처형되었다 .521
51) [역주] 페르시아어로 <승리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 52) 이에 대한 상술은 Taba li, i , 1016-1024 와 뉠데케의 번역서, pp. 314-324 에 소재.
자이드 본 아디 Zay d b. 'A di의 복수 아디는 자이드라는 이들을 하나 두었다 쿠스로우 파르베즈는 누 만의 추천을 받아 크테시폰 왕궁의 아라비아 담당 대신으로 그의 아버지에 이어 자이드를 임명하였다. 자이드는 외견상 누만과 화해 한 것처럼 보였지만 내심 복수를 결심하고 오직 기회만을 엿보았다. 페르시아 왕들은 여성의 아름다움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어 후궁 을 뽑고자 할때는 원하는 신체상의 특징이나 품성을 상세히 묘사한 광고를 내었다 .53) 그러나 이제까지는 그와 같은 완전 무결한 여인을 공급할 수 없는 아라비아를 무시해 왔었다. 그래서 자이드는 쿠스로 우에게 가서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누만의 가족 중에는 그같은 특징을 갖춘 여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랍어를 아는 호위병을 한 명 붙여서 저를 그에게 보내 주십시오.> 쿠스로우의 허락을 받아낸 자이드는 히라로 향해 출발하였다. 그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알고난 누만은 화를 버럭내며 소리쳤다. <무엇이라고! 그만한 일에는 페르 시아의 영양(玲羊, gaz.el1 e) 으로도 족하지 않은가?> 아라비아 시가에 서는 미인을 영양에 비유하는 것이 다반사인데 자이드를 따라온 호 위병은 아랍어를 잘 몰라 누만이 사용한 <인‘in 또는 마하 m 此心란
53) 이 와 유사한 서 술은 프라이 타크의 Arabum Prouerbia , vol. ii. p. 589 이하에 나타난다.
단어의 의미를 물었다 . 자이드는 < 암컷 들소를 뜻한다 > 고 말해 주 었다. 누만 3 세의 죽음 파르베즈는 측근으로부터 < 파르베즈에게는 페르시아의 암 들소들 로 족하지 않은가 > 라고 누만이 말했다는 것을 듣고는 대노하였다. 곧 누만을 소환하여 쇠사슬에 묶고 코끼리한테 짖밟혀 죽도록 하였 다 .러)
54) Taha. Ii, i, 1024-1029 엔데케의 번역서, pp. 324-331. Ibn Qu ta yb a in Br iinn ow's Chresto m athy, pp, 32-33.
누만 3 세의 성격 누만 3 세는 전설 속에서 주색과 시가에 탐닉한 폭군으로 묘사되 고 있다 . 그는 많은 유명한 시인들, 특히 히라에서 쫓겨난 나비가 두브야니 Nabig h a Dhub y aru 의 후원자였다. 시 인 무낫칼 Mun 책 hkh a1 에 관한 일화에서 누만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으리라 . 누만은 당 대의 절세 미인이었던 그의 계모 무타자리다 Mu tajarri da 와 결혼하 였다. 그는 무타자리디를 열렬히 사랑하였지만 그녀는 디론· 곳에 애 정을 쏟았다 . 시인 나비가가 왕비의 매력을 아주 세밀히 묘사한 시 때문에 의심을 받았지만 정작 죄를 저지른 장본인은 무낫칼이었다. 누만은 이 두 연인의 밀애 현장을 급습하였고 그후 무낫칼은 사람 들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이로부터 속담 <코끄시그루Ox:J.cigru es 조) 가 올 때까지>처럼 <무낫칼이 돌아올 때까지>라는 속담이 전해온 다.
55) [역주〕 전설속의 새 .
누만의 기독교개종 히라의 왕 중에서 몇 명은 기독교도였다고 하지만 누만 3 세 이외
의 어느 왕이 기독교도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 라큼 왕들은 대다수 백성들과는 달리 철저한 이교도였댜 누만의 교육 정도를 봐서는 당 연히 기독교 개종의 소지가 있었지만 전설에서 전해지는 바와 같이 그의 개종은 조언자였던 아디 븐 자이드를 통해 이루어졌는지도 모 른다. 갓산 왕국 Ghassan i ds( 또는 자프나족J a f n it es) 무슬림 족보학자들에 따르면, 메디나에 정착한 갓산인들이나 통칭 시리아의 갓산인들 모두가 아므르 븐 아미르 알-무자이끼야 ‘Arnr b. 'Amir al-Muza yqiy a 의 후예라고 한다. 앞 장에서 기술한대로, 아 므르는 마리브 댐이 붕괴되기 직전 예멘에 있던 그의 전 재산을 처 분하고 주민들을 이끌고 고향을 떠났었다. 그의 아들 자프나Jafna가 이 갓산 왕국을 창건한 것으로 여겨진다 . 56 ) 갓산의 초기 역사에 관 해 전해오는 사실 중 근거가 있는 것은 극히 드물다 . 처음 이들은 로마의 비호를 받으며 시리아 접경지대를 통치하던 살리흐 S alih 가 문의 일족인 다자이마J,}o,j a' ima에게 공물(供物)을 바쳤다고 한다. 그 후 벌어진 전투에서 갓산인들이 승리함으로써 이들은 로마 황제의 총독 Pa trici us( 또는 Ph y larch) -갓산의 아랍인들은 이 칭호를 아 랍식대로 간단히 <말리크 m 或比>라 옮겼다-이리는· 공식 칭호 와 함께 이 지역에서 로마의 권위를 대표하게 되었다 .
56) [역주] 갓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갓산이라는 숲의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같은 아츠드족의 다른 군소부족과 구별하기 위해 갓산이라 불 리게 된 듯하다.
이븐 꾸타이바의 갓산 왕국에 대한 기술 자프나 가문에서 시리아를 통치한 최초의 인물은(이븐 꾸타이바의 말을 빌리면) 하리쓰 븐 아므르 무하리끄I:J,arith b. 'Amr Mu}Jarriq이다. 그는 아 랍인들을 집 안에 가둔 채 불태웠다{};i.arraq a) 고 하여 그렇게 불리웠다 . 그
는 하리쓰 형제 중 < 맏형 al-Akbar > 으로 존칭 kuny a 은 아부 샤미르 Abu S hamir였다. 그의 뒤를 이어 <절름발 이 al-A'ra j> 하리쓰로 알려진 하리쓰 븐 아비 샤미르I:Iarith b. AbI Shamir가 통치를 맡았다. 그의 모친은 <귀고 리>의 마리야Mariy a 였댜 그는 갓산 왕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운이 좋았으 며 동시에 가장 교활하였다. 공격할 때는 전선의 최전방까지 나아갔으며, 카이바르 Kha y bar5 71 에 원정하여 많은 포로를 끌고 왔지만 시리아에 돌아와 모두 풀어 주었다 .
57) 아라비아의 촌락으로 메디나 북부에 위치 .
절름발이 하리쓰 문디르 븐 마 알_사마가 십만 대군을 이끌고 진격해 오자 절름발이 하리 쓰는 강화를 맺는 양 백여 명의 병사~룹 보내어 맞이하게 하였는데 그 중에 는 당시 젊은 시인 라비드 1abId 도 끼어 있었다. 하리쓰의 병사들은 문디르 의 천막을 포위하고 왕과 수행원들을 살해하였다 . 그리하여 일부는 말을 타 고 도망가거나 살해되었다 갓산의 기병대는 문디르의 군사들을 공격하여 이들을 패주시켰다. 하리쓰에게는 할리마 H 책 ma 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날 백여 명 가량의 전사들에게 향수를 뿌려 주고 흰 마로 만든 수의와 갑옷을 입혀주었다. 그녀가 바로 <할리마의 날은 비밀이 아니다 >58 ) 라는 속담의 장 본인이다. 하리쓰의 뒤를 아들인 작은 하리쓰I:Iarith the Yo ung er 가 승계하 였다. 그 외 다른 아들 중에는 아므르 븐 하리쓰 ‘Amr b. I:Iarith(작은 아부 샤미르라 불림)와 문디르 븐 하리쓰 Mun clhi.r b. I:Iarith, 알_아이함 븐 하리 쓰 al-Ay ham b. I:Iarith가 있었다 . 아이함의 아들 자발라J abala 가 갓산 왕국 의 마지막 왕이다. 자발라 본 알-아이함J abala b. al-Ay ham 그는 키가 lOO 인치 (2 미터 74 센티미터)로 말을 타고 갈 때면 그의 발이 땅을 스칠 정도였다. 그는 우마르 븐 알-카땀‘ Umar b. al-Khatta b 칼리파 시절에 무슬림이 되었으나 그후 기독교로 개종하여 비잔틴 제국에 가서 살
58) Freyt ag, Arabum Prouerbia , vol. ii , p. 611 참조.
았다. 그가 기독교인이 된 계제는 이러하다 . 다마 스 쿠 스 의 시장 골목 을 지 나가다가 그가 탄 말이 구경하던 행인을 밟아버렸다 . 그러자 그 행인은 펄 쩍 뛰어 자발라의 얼굴을 가격하였다. 갓산인들이 그 를 붙잡아 아부 우바이 다 븐 양자라흐 Abu 'Ub ayd a b. al- J arrab 59) 앞에 데리고 와 그가 자신들의 주인을 때렸다며 불평을 털어놓았다 . 아부 우바이다가 증거 를 요구하자 증 거가 무슨 소용 있느냐고 자발라가 말했다 . 아부 우바이다가 대꾸했다 . < 그 가 당신을 주먹으로 때렀다면 당신도 주먹으로 그를 치시오. > < 그는 죽어 야 마땅치 않습니까? > < 아니오. > < 그의 손을 자르지 않을 겁니까? > < 아 니요, 하느님께서는 주먹에는 주먹으로 응수해서만 보복하도록 명하셨소 > 라고 아부 우바이다가 말했다. 그후 자발라는 로마 영토로 자진하여 들어가 기독교도가 되었고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60)
59) 예언자의 유명한 친구로서 무슬림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를 정복하 였으며 639 년 역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60) Ibn Qu ta yb a in Br iinno w's Chresto m ath y, pp. 26-28.
61) 다음의 상세한 내용은 뉠데케의 논저에서 발췌한 것이다 :D i e Gfr :Jss anis c hen Fi lrs te n aus dem Hause Gqfna's , in Abhand. d. Kon. Preuss. Ad ad. d. Wi ss enscr aften (Berlin , 1887).
절름발이 하리쓰 갓산 왕국에 관하여 전해오는 아랍의 전승은 뒤죽박죽되어 사료 로 활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나마 비잔틴 학자들이 여기저기 써놓은 단편적인 굴 속에서나 자료를 종합할 수 있다. 61 ) 최초의 갓 산 왕은 아랍 연대기에서 <절름발이 하리쓰>로 통하는 하리쓰 븐 자발라I:Iarith b. J abala 인 듯하다. 그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히라 의 왕 문디르 븐 마 알-사마에 맞설 로마측 · 대리인으로 유스티니아 누스 황제에 의해 임명되었다(약 529 년). 그는 오랜 통치기간 (529 - 箕) 대부분을 이 위협적인 상대와의 전쟁으로 보냈다. 문디르 3 세 가 할리마의 결전에서 당한 패배와 죽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하 리쓰는 그의 혈족들처럼 단성 Mono ph y s it.e 교파의 기독교도로 그
교회의 존재 자체가 위태롭게 되자 교회를 열과 성을 다해 훌륭하 게 지켜냈다. 다음에 할 이야기에서 그의 무서운 성격을 알 수 있다. 그는 말년에 자기 아들 중 누구를 후계자로 삼을지를 상의하기 위 해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였다. 그리하여 그 도시의 주민들,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조카인 유스티누스에게 강력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여러 해가 지나, 유스티누스가 노망이 들어 헛소리를 하게 되자 시종들은 < 귓! 조용히 하세요 아리싸 Are tha s 621 가 와서 당신을 잡아가요 > 631 라고 말해 그를 놀래켜 주곤 하였다.
62) [역주] 비잔틴인들은 하리쓰를 아리싸로 불렀다.
63) Noldeke, 앞의 책 중 p. 20 은 에 베소의 요한J ohn of Ep h esus, iii, 2 를 참조하도록 하고 있다. 페인 스미스 R Payn e S mith의 번역서, The Third Part y cf the Ecclesia stica l Hi st o r y of Joh n, Bis h op cf Ep h esus, p. lf>8 참고.
문디르본하리쓰 하리쓰의 뒤를 아들 문디르가 승계하였다. 그는 짜 0년 그리스도 승천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히라의 새로운 왕 까부스 븐 힌드Qa bus b. Hi nd 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아마도 아랍안들이 아인 우바그 'Ay n Ubag h 의 전투라고 기념하는 전투와 동일한 전투일 것이다. 유스티누스 황제는 문디르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을 중단함으로써 문디르는 그의 우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부터 이들 사이 에는 노골적인 적대관계가 발전되었으며 약 11 년 후 문디르가 콘스 탄티노플에 끌려가 시칠리아로 귀양감으로써 두 사람사이의 반목은 절정에 다다랐다. 이때부터 페르시아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할 때까지 (614 년), 무정부 적인 혼란이 갓산 왕국 전역에 파급되었다. 각기 다른 여러 부족들 이 독자적으로 족장을 뽑았는데 그 중에는 자프니~ 포함되어 있 었다. 그러나 왕국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헤라클리우스 Hera cli us64) 가
64) [역주] 비잔틴 황제로서 610-641 년 재위.
시리아로부터 페르시아인들을 몰아낼 때 (629 년) 갓산인들도 로마 편 에 서서 무슬림에 대항하므로써 무정부적인 상태에서 벗어났다. 아 랍 사가들의 일치된 견해는, 이 전투에 적극 참가한 자프니~ 사람 인 자발라 븐 알-아이함이 갓산 최후의 왕이라는 것이다. 그의 죽 위는 대략 635 년 무렵인 듯하다. 메디나 태생으로 갓산인들과 친척 관계이며 젊은 시절 갓산 왕궁을 자주 방문했던 시인 핫산 븐 싸비 트I:Ia ssan b. Thab it는 갓산인들의 사치와 화려함을 적나라하게 묘 사해 내고 있다. 핫산 븐 싸비트의 갓산 왕궁 묘사 <나는 궁전에서 열 명의 가희(歌姬)들을 보았다. 그 중 그리스에서 온 다섯 명의 가희들은 류트 lu te의 선율에 맞춰 그리스 노래를 부르고, 이야스 븐 까비싸 l yas b. Qab I !;,a6 51 가 자발라 왕에게 선물한 히라 출신의 가희 다섯 명은 바빌로니아의 노래를 한 곡조 부르는 것을 보았다. 아랍의 가희들이 메카나 다른 지방에서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몰려오곤 했다. 왕이 술을 마 실 때는 용연향(龍誕香)과 사향(뽑香)으로 가득 찬 금은 그릇에 둘러싸여 도금양(桃金讓)과 재스민과 온갖 향기 그옥한 꽃으로 장식된 등의자에 걸터 앉아 마셨다. 겨울에는 가라목(伽羅木)을 태워 방울 덥히고 여름에는 눈으 로 몸을 시원하게 하였다. 그와 신하들은 무더운 날씨에는 격식보다 편의에 더 치중하여 마련된 가벼운 의상을 ,661 추울 때에는 파나크f anakf j/)라는 하얀 털옷 같은 것을 입었다. 왕과는 함께 어울릴 기회가 그리 흔치 않았지만 그
65) 이야스 븐 까비싸는 누만 3 세의 뒤를 이어 히라의 통치자가 되었다 (60'2--61 1). 그는 따이이 부족의 일원이었다. Roth s te in, La!Jm i de n, p. 119 참조.
66) 필자는 yanf a$ il ll 를 y a taf addalu 로 정정하였다. 후자의 어휘가 의미 하는 <옷차림새>에 대해 레인 Lane 의 사전에서는 <옷을 왼쪽 어깨에 걸치고 오른쪽 겨드랑이로 옷자락을 끌어당긴 다음, 양 옷자락을 가 슴 위에서 매듭짓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67) f anak 는 본래 아비시니아와 북부 아프리카에서 발견되는 일종의 백 (白) 담비나 족제비인데 무슬림들은 이 이름을 다른 동물 털에 불이 기도 한다.
날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나에게 주었으며 이런 식으로 많은 친구들이 그 의 환대를 받았다. 그는 무례한 자를 관용으로 다스렸고 스스럼없이 웃으며 선물은 달라고 하기도 전에 후하게 베풀었다. 잘 생긴 얼굴에 얘기도 활달 하게 나누었으며, 말할 때나 행동할 때 화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 681
68) Ag hanI, xvi , 15, I I . 22-30. 위 인용문이 핫산으로부터 나온 것이 라면, 그것은 의심스러운 것이지만, 갓산인들이 흔히 언급되고 있는 동 시인의 시집(di wan) 에서 수집된 것임을 고려하면 이 접이 사료로 서의 가치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자발라 븐 알-아이함을 언급하 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핫산이 갓산인들과 교제한 것은 그의 생애 중 이교도 시대의 일이며 자발라가 통치를 시작하기 수년 전에 이슬람에 귀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갓산의문명 적대 관계에 있던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러큼- 왕국과는 달리, 갓 산인들에게는 고정된 정착지가 없었다 . 이들은 다마스쿠스 주변과 팔미라를 통치하였으나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이 유목민 왕 국은 그들이 옮겨 다니는 곳마다 세운 임시 야영지(아람어로는 헤르 타 h 합 E) 가 중심 도시를 이루었는데, 주로 다마스쿠스 남부 자울란 al- J awl 삶6 91 지 역에 위치하였다.
69) [역주] 아랍어 원의는 <바람에 날린 먼지>를 뜻하며 오늘날 골란 고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헬레니즘 문화의 자극을 받아 갓산 왕국은 라큼 왕국보다 훨씬 우수한 문명을 발전시켰다 . 라큼 왕국은 야만적인 성격 때문에 이교도 아랍인들과 더 잘 어울렸고 따라서 이교도 아랍인들에게 보 다 깊은 영향을 끼쳤다. 갓산 문명의 면면은 자발라 븐 알-아이함 의 궁전에 대한 시인 핫산의 묘사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나비가의 찬사 고대의 방랑시인으로 유명한 나비가는 히라 왕국 누만 3 세의 눈 밖에 나자 시리아로 달아나 그곳에서 그의 후견인인 절름발이 하리
쓰의 아들 아므르 왕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갓산을 칭송하는 훌륭 한 송시(領詩)를 지었다. 그는 자주 인용되는 다음의 시구에서 갓산 인들의 불후의 용맹성을 찬양하고 있다 . <단 하나 결점은:그들의 칼날이 무디다는 것뿐, 적의 갑옷을 무수히 두드린 탓에> 그런 다음 좀더 부드러운 어조로 끝을 맺는다. <그들은 신이 누구에게도 부여하지 않은 관대한 성격의 소유자들;그들의 미덕은 틀림없는 것, 그들의 고향은 성지이니 ;신앙에 대한 의지는 강직하도다 . 선행을 행함으로써 그들은 번성하기를 바란다. 그럴싸하게 띠를 두르고 신을 신은 모습이 우아한 그들은 승리의 잔치를 벌인다. 이때 갸날픈 처녀들은 가대(架 臺 ) 위에 주홍빛 비단 옷을 걸어놓고 향기로운 나뭇가지로 그들을 맞이하여 환호한다 . 싸움질에 길들여진 그들의 손발도 편안히 겹쳐 얹으면 녹색 어깨띠를 두르고 하얀 소매를 단 옷 속에 넉넉히 감추어진다 .> 7 0 ) 베드윈 역사의 특성 베드윈 유목민들의 이슬람 이전 역사는 주로 전쟁(또는 그보다는 게릴라전이라고나 해야 할까)에 대한 기록으로서 수많은 침략 행위나 약탈7 “ 이 대개 커다란 유혈 참사 없이 이루어졌다 . 고함만 치고 마 70) Nabig lrz , ed. by Derenbourg, p. 78 ; Noldeke's Deleclus, p. 96. Sir Charles Ly a ll, Anc ien t Arabia n Poetr y, p. 95 이하에 동 시가 완역 되었다. 71) [역주] 베드윈들의 <약탈 g hazwa( 또는 ma g hazI)> 은 다른 부족의
양 떼나 낙타 떼 를 급습 약탈하는 것이 주목적이므로 격렬한 전투를 벌리는 것은 피하였다 .
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며 허풍이나 풍자를 번갈아 주거니 받거니 하기도 하였댜 낙타와 여자는 약탈의 대상이었다. 또 사소한 접전 은 많이 있었으나 전쟁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것은 개개인의 분발이 최고로 요구되며 단독으로 영웅적인 공적을 쌓을 千 있는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는 호머식 Ho rreri c 의 전쟁이었다 ? < 이같은 베드윈들의 반목과 싸움에 관해 진실된 역사룰 기록한다는 것은 거 의 불가능한 일이다. 비교적 신뢰할 만한 원문 자료로서 시와 단편 적인 시구가 전해져 온다. 수유띠 Su yuti 73, 에 따르면, 아람의 전승 기록자들은 역사적 사건을 진술하는 베드윈에게는 반드시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시구를 인용할 것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기실, 시는 전해 내려오는 이러한 이야기들 모두의 결정체인 것이다. 아쉬운 점 은 이들 결정체가 늘 맑고 투명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 죽 시에 등 장하는 이야기들은 대개 시의 내용에 적합하게 풍부한 상상력을 발 휘하여 교묘히 꾸며 낸 것으로 보인다 . > 74 ) 그러나 <아랍인들의 나 날들 Ay yam al-'Arab >151 에 관해 전해 오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전 설적인 것이긴 해도 부족간의 적대 행위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그 진행 과정을 매우 충실히 묘사하고 있다. 이슬람 출현 이전에 벌어 진 전쟁중 가장 유명한 바수스 Bas il s 전쟁에 대한 다음 이야기는 베드윈 생활상의 중요한 일면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761
72) [역주] 그리스인들이 트로이 전쟁에서 목마 속에 병사룰 숨기고 트 로이 시로 들어가 점령한 책략처럼 일종의 게릴라전을 의미한다.
73) [역주〕 잘랄 알-딘 알-수유띠J al 회 터 -D in a1-Suyu t;i(l4 45-1505). 마 몰루크 시대의 이집트 저술가. 그의 저술은 『 꾸란 주석집』등의 신학 서적과 『칼리파 열전 』 둥의 역사 저술 동 다방면에 걸치며 백과사전 을 편찬하였다. 본서 pp. 600-601 참조 .
74) Thorbecke,'Anta r ah , ein vorisl ami sc her Di ch t er , p. 14.
75) [역주] 부족간의 불화와 반목이 지속되던 이슬람 이전의 시대적 상 황을 아랍 사가들은 이와 같이 불렀다.
76) 다음 이야기는 티브리지 T i brIZI 의 [fama sa 주해서 (ed. by Freyt ag),
pp. 251-255, 420-423 에 기 술되 어 있는 바수스 전쟁사의 요약이 다. Noldeke's Delectu s, p. 39 이 하 참조.
바수스전쟁 5 세기 말경 쿨라이브 븐 라비아 Kula y b b. Rab i' a( 라비아의 아들 쿨라이 브)는 타글리브족 Bano Ta ghli b 의 족장이었다. 중부 고원에서 시리아 사막 에 이르는 동북 아라비아의 넓은 지역을 동족인 바크르족 Bano Bakr 과 분 할한 강력한 부족이었다. 쿨라이브는 여러 부족으로 구성된 연합군을 이끌 고 예멘의 아랍인들에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일약 아라비아 반도의 제일인 자가 되었고 이내 그의 자만심은 그의 세력 못지않게 유명한 것이 되었다 .771 그는 바크르족 무라M 山 m 의 딸 할릴라I:Ia].Il a 와 결혼한 후 자신과 무라의 자손들만 방목할 수 있는 <보호 구역 坤댜>에 거주하였다. 그의 처남 잣사 스Jassa.s에게는 바수스라는 이름의 숙모가 있었는데 조카 신세를 지며 살 고 있었다. 그녀에게 사드 Sa'd 라는 같은 부족민이 사라비 S ara.bi라 불리는 암낙타를 가지고 와 얹혀살게 되었다.
77) 본서 p. 41 참조.
쿨라이브 븐 라비아와 잣사스 본 무라 어느날 산책을 하던 쿨라이브가 종달새 둥지에서 알을 품고 괴로운듯이 지져대며 날개짓을 하고 있는 새에게 <두려워 마라. 내 너를 지켜주리>라 고 말했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가보니 바로 그곳에 낙타 발자국이 나 있 고 알이 짓밟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잣사스와 함께 목초지 룰 찾아간 쿨라이브는 사드의 암낙타가 처남의 낙타 떼에 섞여 있는 것을 보고 그 때문에 알이 깨진 것으로 생각하고 잣사스에게 소리쳤다. <조심하 게! 조십을! 나한테도 생각이 있소 누가 그랬는지 확실히 알기만 하면 그놈 을 혼내 줄테니까. 다시는 이 암낙타를 낙타 때가 있는 곳으로 몰고 오지 마시오!> 잣사스는 <하지만 이 놈은 또 올 걸!>하고 대꾸했다 . 그러자 쿨 라이브가 위협조로 그 낙타의 젖가슴을 화살로 관통시키려 하자 잣사스가 반발하였다. <와일 Wa' il 781 의 바위에 맹세코 낙타 가슴에 화살을 꽂기만 하
78) 와일은 바크르족과 타글리브족의 공통 조상이다. 이교도 아랍인들의 돌 an 햏 b 승배에 관해서는 Wellhausen; Reste Arabis c hen Heid e ntu ms
(2nd ed.), p. 101 이 하 참조. Robert on Sm ith, Lectu r es on the Reli - gion of the Semi tes( London, 1894), p. 200 이 하.
면 네 동 뒤에 창을 꽂겠다!> 그런 다음 그는 자기 낙타들을 <보호 구역> 에서 몰고 가버렸고 이에 쿨라이브는 분이 차서 집에 돌아왔다. 부인은 무 엇 때문에 그가 고통스러워 하는지 몹시 궁금하였다. 쿨라이브가 부인에게 말했다. <여보 자기 것이라고 해서 감히 나의 뜻에 반해 그것을 고수하려 는 자가 누군지 알기나 하오?> <그런 말을 할 사람은 오빠 잣사스뿐이에 요> 그녀는 싸움이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 다. 사드의 암낙타가 부상당함 얼마 동안은 서로 욕설을 퍼붓는 정도 이상의 최악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어느날 쿨라이브가 낙타 떼롤 몰고 물가로 갔는데 잣사스의 낙타들 이 뒤를 따라왔다. 잣사스의 낙타들이 물 마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사드 의 암낙타가 대열에서 튀어나와 물가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쿨라이브는 잣사스가 그 낙타를 일부러 풀어준 것으로 단정하고 모욕감을 느끼며 화살 울 당겨 낙타의 젖기슴을 쏘았다 . 낙타는 바수스의 천막 앞에서 큰 신음소 리를 내며 땅에 쓰러졌고 바수스는 친구인 사드가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 에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때리며 머리에 쓴 베일을 찢고 큰소리로 외 쳐댔다 .79) <아, 부끄럽도다, 부끄럽도다!> 그런 다음 잣사스도 돌을 수 있도 록 목청을 돋구어 사드에게 <선동자들 al-Mmva ththi넒t>이란 시를 읊어 주 었다. 바수스가지은시 <사드여, 속지마라! 너 자신을 보호하라! 이들은 아래 사람에겐 마음을 쓰지 않으니.
79) [역주] 슬픔을 표현하는 이와 같은 제스처는 오늘날까지 아랍인들의 관습으로 전해진다.
그대에게 명하노니, 내 낙타들을 지켜주게. 내 어린 딸들조차도 악의를 품을까 두려우니, 여보게! 친구, 내가 민까르Mi nq ar 의 집에 있었더라면 그대 해를 입지는 않았을 터인데! 하나 내가 이런 사람들 틈에 살고 있으니 늑대가 와서 물어 뜯는 것은 내 양떼들이라네 >80)
80) I:Iam쵸 a, 422, 14 이 하 . Noldeke's Delectu s, p. 39 마지 막 줄 이 하.
쿨라이브, 잣사스에게 살해당함 잣사스는 아랍인들에게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누명을 쓰고 무고한 친구 에게 마음의 상처와 모욕을 안겨준 것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며칠 후, 쿨라이브가 비무장으로 외출한 것을 알고 그의 뒤를 쫓아가 살해한 다 음, 재빨리 자기 부족에게 피신하였다. 무라는 이 소식을 듣고 아들에게 말 했다 . <너 스스로 저지론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의 친족들이 너 롤 쇠사슬로 묶어 죽이려 할지 모른다 . 와일의 돌에 맹세컨대, 쿨라이브가 죽은 이상 바크르와 타글리브는 이제 동맹이 아니다. 잣사스여, 너로 인해 부족민들이 재앙을 겪게 되었구나. 네가 타글리브족의 족장을 살해함으로써 동맹 관계가 깨지고 그들은 우리와 싸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라는· 잣사 스를 쇠사슬에 묶어 천막에 가둔 다음 부족의 원로들을 모시고 자문을 구 하였다. <잣사스를 어떻게 할까요? 복수를 하려는 자들이 그의 인도를 요 구해 올 때까지 이 자는 죄수입니다.> 사드 븐 말리크 븐 두바이아 븐 까이스 Sa'd b. Malik b. ])ub ay' a b. Qay s 가 소리쳤다. <아니오 절대 안 됩니다. 우리는 그롤 결코 포기하지 않 을 것이며 최후의 한사람까지 그롤 위해 싸울 것이오!> 그는 이 말을 마치 자마자 제물로 바칠 낙타를 끌고 와 혀를 잘라 그 피로 서로의 맹세를 다 짐하였다.
잣사스의 아버지, 무라의 시 <그대 나에게 싸움을 걸어 온다면 낡은 무기를 드는 데 꾸물대지 않으리 . 무슨 일이 닥치든, 아침이면 죽음의 독배(毒益) 가득 채우리. 창끝이 부딪히면, 부상당한 내 병사는 그 피로 더럽혀진 창을 질질 끌고 갈 수밖에. 싸움이 하늘의 뜻이라 해도 나는 개의치 않으리. 갑옷을 걸치면 나는 부끄럼없이 싸우리. 기마병과 창병(槍兵)이 격돌하는 소리에 벌써 내 몸은 떨리고 전의(戰 意 )가 살아난다 . >8 11
81) I:lam쵸 a; 423, II 이 하 . Noldeke's Delectu s, p. 41, 1. 3 이 하 . ,
E 달리브와 바크르사이에 싸움이 일어남 이렇게 타글리브족과 무라가 속한 샤이반 Shayb an 부족 간에 바수스 전 쟁은 시작되었다 . 처음에는 바크르족의 다른 부쭉들은 샤이반 부족에게 명 백히 잘못이 있다고 보아 싸움에서 초연하였다. 이때 바크르족의 유명한 기 사인 하리쓰 본 우바드I:Iarith b. ‘Ubad 가 이 싸움에 끼어들기를 거부하며 명언을 남겼다 . <나에게는 수낙타든 암낙타든 거기서 건질 게 없다> ,82) 죽 <내 알 바 아니다>는 뜻이다 . 이 말은 후에 속담이 되었다. 그러나, 한 사 건으로 바크르족이 하나가 되어 샤이반족 대신에 봉기하자 샤이반족은 난 처하게 되었다.
82) [역주] 사막의 유목민에겐 낙타야말로 가장 유용한 동물이다. 낙타 는 <사막의 배>로서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며 의류와 천막의 원료, 유목민의 식량, 유일한 재산이다.
어느날 하리쓰의 조카인 부자이르 B uj a yr가 쿨라이브의 형 무할힐 MU halhil과 마주쳤다 . 그러자 무할힐은 잘 생긴 이 젊은이에게 반하여 그가 누
군지를 물었다. <우바드의 아들인 아므르의 아들 부자이르오>라고 그가 말 했다. <그럼, 너의 외삼촌이 누구냐? > < 우리 어머니는 포로예요. > (그는 존 경하지 않는 외삼촌의 이름을 대고 싶지 않았으리라) . 그러자 무할힐은 그 를 죽이며 <비명에 간 쿨라이브의 보복이다! > 고 외쳤다. 하리쓰는 이 소식 올 듣고 무할힐에게 전갈을 보내 부자이르의 죽음으로 복수를 한 셈이라면 자기도 묵인해 주겠노라고 하였다 . 그러나 무할힐은 < 나는 오직 쿨라이브 의 원수를 갚아야만 만족할 따름이다>고 답하였다 . 그러자 하리쓰는 화를 버럭내며 크게 외쳤다. <신은 알고 있다, 내가 이 불을 붙이지 않았음을 , 오늘 그 불 속에 내 몸 불사를지라도. 비명에 죽어간 주인은 더 소중하다. 말을 타라! 말을 타라! 떠나자 !>831
83) Jfamasa, 252, 8 이 하 . Noldeke's Delect us, p. 44, 1. 3 이 하.
바크르족의 핀드 al-F in d 는 이때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핀드의시 <우리는 바누 힌드 Ban o. Hincf)를 용서해 주며 말했다, ‘그네들은 여전히 우리의 형제이지 세월이 흘러 우리는 또다시 한 민족이 되겠지 . ' 그러나 악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무자비한 증오만이 남게 되었을 때, 우리는 악에는 악으로 응징하였다.! 사자의 당당한 걸음처럼 우리도 분연히 그리고 떳떳이 출정한다네. 우리의 칼은 과부를 만들고 눈물과 통곡을 가져오고,
84) 힌드는 바크르와 타글리브의 모친이다. 여기서 바누 힌드(힌드의 자 손)는 타글리브족에 속한다.
우리의 창은 넓고 깊은 상처 를 내어 피를 줄줄 흐르게 하였지 . 무력을 꺾고 이기는 길은 무력일 뿐, 야만적 행동에 인간적으로 대하는 것은 오만 무례함을 구하는 것. 선이 무용지물일 때는 악으로 평화를 구할 수도 있는 법 .>庄) 머리깎은날 이제 바크르족은 일대 결전을 치를 태세가 되었다. 적은 숫적으로 우세 하였으므로 하리쓰가 궁리해 낸 책략을 썼다. 그는 < 여자들을 데리고 그들 과 싸우라 . 여자들에게 작은 물주머니를 나누어주고 곤봉으로 무장시킨 다 음, 여자 군단을 후미에 배치하라. 그렇게 하면 너희들은 전의를 더욱 다지 게 될 것이다. 또 각자 몸에 표시를 해두라. 여자들이 부상병 옆을 지나가 다가 그 표시를 보면 아군임을 알고 마실 물을 주며 그를 부축해 줄 수 있 으리라. 그러나 표시가 없는 적병이 쓰러져 있으면 그를 곤봉으로 때려 죽 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바크르 인들은 결사적 투쟁의 뜻으로 머 리를 깎아 버리고 이를 여자들이 아군을 식별할 수 있는 표시로 삼았다. 이 날을 <머리 깎은 날 > 이라 한다. 그런데 자흐다르 븐 두바이아JalJclar b. I)ub a y 'a 는 이마에 늘어뜨린 애교 머리에도 불구하고 왜소한 체구에 얼굴은 못 생겼었다 . 그는 < 여러분 , 내 머리를 깎아 버리면 내 모습이 볼꼴 사납게 될 것이니 내일 고갯길에 나타날 타글리브의 첫 기병을 위해 내 앞머리를 놔두시오> (죽 머리를 깎지 않도록 해준다면 자신이 그 기병을 맡아 해치우 겠다는 뜻임)라고 말했다. 자흐다르 븐 두바이아의 맹세 그의 청이 받아들여지자 소리쳤다. <부인과 딸에게 고하노라. 이후나는죽은몸이므로 8.5) lfam쵸 a , 9, 17 이 하. Noldeke's Delectu s, p. 45, I. 10 이 하 .
내 머리 위에는 기름 대신에 흙을뿌려라. 저기 말 타고 오는 병사들과 일전을 하리니, 내가 옆으로 바켜서면 내 앞머리를자르라! 어머니란 아들을 낳아 품안에서 감싸안고 그의 냄새를 맡으니 잘 아는 법, 싸움에 나선 전사들은 나약한 사람이든 어른이든 모두 싸움의 명수가 된다 .>86 J
86) l;famasa, 252, 14 이 하. Noldeke's Delectu s, p. 46, 1. 16 이 하.
여전人|(女殿士) 그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지만 그만 전투중에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여 자들이 달려와 그의 애교머리를 보고는 적으로 단정하여 곤봉으로 사정없 이 때렸다. 전쟁에 여자들이 나왔다는 점과 그들이 전쟁에서 행한 적극적 역할은 마땅히 씁쓸한 느낌을 자아냈다. 만약 여자들이 남자들의 피비린내 나는 작업올 마무리짓는 일에 몰두하지 않았다면 그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싸움을 독려하기위해 온갖 수디를 다 떨었을 것이다. 핀드의 딸이 거리낌없 이 알몸을 드러내고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고 한다. <전쟁! 전쟁! 전쟁! 전쟁! 그 때문에 우리들은 얼마나 노발대발하고 안절부절하였던가. 고지는 전투의 함성으로 가득하다. 그대 머리를 깎았던 그 아침은 멋있어라. >871
87) l;fama sa, 254, 6 이 하. Noldeke's Delectu s, p. 47, 1. 2 이 하.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데리고 다녔는데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성난 적들 이 가만두지는 않았다 . 타글리브족의 기병 하나가 어린 사내아이를 창으로 찔러 창끝에 세워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런 야만적인 짓은 뒤에 타고 있던 한 바즈바즈 al-Bazbaz 인이 부추켜서 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거둔 승리는 잠시 뿐이었다 . 핀드가 그들을 발견하고 창으로 찔러 하나씩 창에 꿰어 달았다. 그는 자신의 시에서 이 전공(戰功)을 기록해 놓 고있다 . 이날 바크르족은 대 승리를 거두었고 타글리브족은 패주하였다. 이 전투 는 양 부족이 쇠퇴하고 히라 왕 문디르 3 세의 영향력으로 종전되기까지 침 략과 약탈 행위가 계속된 <40 년 전쟁> 중 가장 유명한 마지막 전투였다. 다히스 D at:ii s 와 가브라 Ghabra 의 전쟁 바크르와 타글리브 양대 부족이 화해한 지 수년이 지나지 않아 바수스 전쟁보다는 덜 알려진 또 다른 전쟁이 중부 아라비아에서 일어났댜 가따판족 Banu Gha tafa n 의 유력한 가문들인 압스 ‘Abs 와 두브얀 Dhub y an 부족이 싸웠는데 싸움의 동기는 이러하다. 주하이르 Zuha yr의 아들, 까이스Qay s 는 압스의 족장이었다. 그에게는 빠 르기로 이름난 다히스라는 말이 있었는데 두브얀족의 족장 후다이파 븐 바 드르I:Iu clha yf a b. Badr 의 암말 가브라와 경주를 벌였다. 주로(走路)의 길이 는 100 시정(矢程 : 시정은 약 300 미터)이며 승자는 백 마리의 낙타를 받기로 하였다. 경주가 시작되자 가브라가 선두에 나섰으나 딱딱한 땅을 지나 주행 이 어려운 모랫길로 들어서자 다히스가 점차 따라잡아 상대를 앞질렀다. 그 가 결승접에 다가오자 미리 매복중이던 두브얀족의 병사들이 뛰쳐나와 다 히스를 주로에서 몰아내고 가브라가 이기게 하였다. 이같은 반칙 플레이를 전해 듣고 까이스는 당연히 자기가 내기에 이겼다고 주장하였으나 두브얀 족 사람들은 단 한 마리의 낙타도 못 주겠다고 버티었다. 그들의 약속 위반 에 격분한 압스족은 두브얀족의 족장 후다이파의 형제 중 한 사람을 기습, 살해하였다. 이에 후다이파는 복수할 기회를 노렸고 자신의 기병이 까이스
의 동생인 말리크 M 책 k 를 살해함으로 써 전 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잇단 전 투에서 두브얀족이 예상외로 잘 버렸으나 어느 쪽도 결 정 적 으로 우세하지 는 못하였다. 결국 까이스는 후 다이파와 하말I:lamal 형제 를 살해하였다. <하말을 없애고 나니 내 마음 누그러졌네 . 후다이파에 대한 원한울 한껏 풀었네. 그들을 없애고 내 한은 풀었지만 차라리 내 오른팔을 잃은 편이 나았을 것을 >81! 1
88) J:[ama sa, 96. Ibn Nubata
오랜 세월 __- 전 통적인 계산법에 따르면 대략 40 여 년 __- 이 지난 후 압스족과 두브얀족은 두브얀족의 두 족장 하리쓰 븐 아우프I:Jarith b. ‘Awf 와 하림 븐 시난Harirn b. S inan의 노력으로 화해하였다. 시인 주하이르 Zu ha 冠 두 사람의 너그럽고 충정어린 중재 노력을 찬양하였다. 까이스는 유 랑의 몸이 되었다. <나로 인해 부모 형제나 남편, 자식을 잃은 두브얀 여인 들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으리 > 라고 말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기독교 수 도사가 되어 오만에서 그의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히자즈 나즈드 고원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면 점차 홍해에 가까워진다. 이 홍해를 따라 산맥과 티하마 Ti harna(저지대)라 불리는 좁고 길다란 해안이 나란히 뻗어 있는데 나즈드와 해안 사이의 바위 투성이의 고원이 히자즈 지방이다. 값비싼 물건을 실은 고대 사바 왕국의 카 라반이 지중해 항구로 가기 위해 이곳을 통과하였던 것이다 . 이슬람 출현 오래 전에 양대 상업도시, 즉 마코라바 Macoraba( 메카 Mecca) 와 북으로 약간 떨어진 야쓰립파 Yat hrippa(또는 야쓰립 Yath rib : 메디
나의 이슬람 이전의 명칭)가 이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에 거주 한 초기의 주민들과 그들의 역사에 관해서는 무슬림 사가들이 기술 해 놓은 것 외에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는데 이들이 기술한 내용은 아담과 아브라함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메카는 이슬람을 낳 은 요람이었댜 무함마드에 따르면 이슬람은 본래 아브라함의 종교 인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타락되었기 때문에 무함마드 자신이 직 접 타락된 종교를 정화시키고 새롭게 전도를 하도록 계시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메카의 이슬람 이전 역사는 모두 <이슬람화>된 셈 이었댜 그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이슬람의 성도 Hol y C ity는 예언 자 무함마드가 출현하기 수천년 전에 출현케 된다. 이곳에서 하나같 이 알라 Allah 를 믿고 숭배하던 아랍인들은 후에 뿔뿔이 흩어져 우 상 숭배에 빠졌다고 한다 . 이곳의 신전은 본래 유일지고의 신을 모 셨던 신전이었으나 나중에는 일개 부족신을 모시는 신전으로 전락 하였다. 오늘날 이 신전을 매년 무슬림 순례객들이 찾아와 순례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간략히 기술하게 될 무함마드에 관한 전승에서 유래한다. 카바의 건설 이브라힘 (아브라함 Ab raham)과 하자르(또는 하가르Hag ar) 사이에 서 태어난 이스마일의 직계 후손임을 자처하는 아랍 민족의 원주지 메카의 계곡에는 각 면의 크기와 모양이 다른 입방체의 작은 건축 물 카바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카바는 아담이 신의 명령에 따라 천체의 원형을 모방하여 지온 것이라 한다. 또한 노아의 대 홍수 때 하늘로 올려졌다가 아브라함과 이스마일이 전에 있던 자리에 다시 세운 것이라고도 한다. 이들이 이 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 가브리엘 천사는 유명한 흑석 Black S to n 터끌 가져왔는데 이 돌은 신전의 남동 쪽 모퉁이에 박혀 있다. 또한 가브리엘은 그들에게 그곳에서 순례 의식을 거행하도록 지시하였다. 신전이 완성되자 아브라함은 후세에
<마깜 이브라힘 Ma q am Ib rahim>으로 알려진 바위 위에 우뚝 서서 하늘을 우러러 사방을 보며 다움과 같이 외쳤다. <세상 사람들아! 너희들에게 명하노니 하느님의 집에 순례하도록 하여라. 너희는 주 의 말씀을 들어라!> 그러자 온 세상 곳곳에서 <랍바이카 알라훔마, 람바이카 Labba y ka Allah 띠mna, labba y ka> (우리는 신에게 복종한다, 당신에게 복종한다)라는 응답이 들려 왔다. 우상 숭배의 종교, 메카에 들어옴 이스마일의 후손들이 부쩍 늘어나 불모의 계곡에서 모두 살아갈 수 없게 되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다른 땅을 찾아 나섰다. 그 대신 이 성지는 주르훔 부족이 다스리게 되었는데 자만과 악행을 일삼다 신으로부터 응징당하였다. 앞서 마리브 댐 붕괴로 인해 예멘족들이 북부로 대대적인 이동을 한 것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이돌 침략자들은 히자즈에 머무르며 주르훔족을 거의 전멸 시킨 다음 계속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들 중 족장 루하이이 L uJ:iayy 가 이끄는 쿠자아족 Ban o. Khuza'a 은 메카 근방에 정착하였다. 루하 이이의 아들 아므르는 돈이 많고 관대한 것으로 아랍인들 사이에 유명했다. 이븐 히샴 Ibn Hi sham 은 89)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하고 있 다.
89) [역주] 아부 무함마드 압드 알-말리크 븐 히샴 Abo Mubammad 'Abd al-Ma lik b. Hi sham(833 년 사망). 무슬림 전승학자. 그의 예언 자 전기는 가장 오래 된 것이며 이븐 이스하끄 Ibn ls l)aq의 『예언자의 전기 al-Srra t al-Nabaw iyy a 』를 이븐 히샴이 요약한 것이 지금까지 전 해진다. 본서 p. 125 참조.
<교양 있는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는 아므르 본 루하이이 'Amr b. L uJ:iayy가 무역을 하러 메카에서 시리아로 갔는데 그가 발 까 al-Bal qa 의 마아브 Ma’ab 에 도착하자 아말리끄족9 0) 의 주민들이 우 상 숭배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물었다고 한다. ‘이 우상들이 도대
90) [역주] 본서 p. 36, p. 38 참조 .
체 무엇인가?' ‘비를 내려달라고 빌면 비를 주시며 도움을 청하면 도움을 주는 우상이오' 아므르가 ‘아라비아로 가져가 그곳에서 모시 게 하나 주지 않겠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후발 Hubal 이라는 우상을 아므르에게 주었다. 아므르는 이를 메카로 가지고 와 사람들 로 하여금 그것을 숭배하도록 하였다 .>91) 그를 본따 아랍인들은 각 자 우상을 가져다 신전 주위에 세워 놓았다. 완전히 우상 숭배판이 었다. 629 년(=히즈라 8 년) 이슬람군을 이끌고 메카에 입성한 무함마 드는 수백 개의 우상을 파괴했다고 한다. 꾸라이쉬족 Qu ray sh 이스마일부터 아드난까지의 자손들 중에서 히자즈 지방에 남아 있던 주요 부족으로는 후다일 Hudhayl , 키나나Kinana, 꾸라이쉬족 이 있었다. 그 중 꾸라이쉬족이 지금부터 우리의 관심을 독차지하게 된다. 무함마드가 출현하기 이전, 이미 그들은 메카의 상업적 가치 롤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메카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고 카바 신전의 수호자임을 자처하였다. 꾸라이쉬족이 득세하게 된 배 경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꾸싸이이야휴 w 의 이야기 꾸라이쉬족의 일원인 킬라브 븐 무라Kil ab b. Murra 에게는 주흐라 Zuhra 와 자이드.2ay d 두 아들이 있었다. 자이드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파띠마 R it:irna는 그 후 얼마 안 있어 재혼하였다 . 파띠마는 자이드 를 데리고 메카롤 떠나 시리아 변경의 새 남편의 고향에 가 살았다. 자이드 는 자기가 태어난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꾸싸이이 죽 <약간 멀리 떨어진>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가 성인이 되어 자신의 본래 혈통을 알게 되자 훌라일 븐 홉쉬야l;I ula y l b. l;Iub shiyya 족장 휘하의 쿠자 아족 Kuza'ites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메카로 돌아갔다. 그는 이스마일의 순 91) lbn Hish am, p. 51, 1, 7 이 하.
수한 혈통을 가진 후예로서 당연히 동족인 꾸라이쉬족이 카바 신전을 관리 하는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는 신념에서였다. 그는 훌라일의 딸 홉바I:I ubba 와 결혼하여 장인에게서 신전을 관리할 수 있는 특권을 물려받기 를 바랐지 만 훌라일은 임종시 카바 신전의 열쇠를 아부 굽샨 Abu Ghubshan 이라는 친척에게 주었다 . 꾸사이이는 낭패를 보지 않도록 열쇠 관리인을 술에 취하 게 한 다음, 구슬려서 포도주 한 포대와 열쇠를 맞바꾸었다 . 이로부터 < 아 부 굽샨보다 더 어리석은 바보 > 라는 속담과 파렴치한 사기 행각을 뜻하는 <아부 굽샨의 홍정 > 이라는 속담이 나왔다. 쿠자어족 사람들이 이 거래의 결과에 반발한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무기를 들고 일어섰지만 꾸싸이이는 이미 전투 태세가 되어 있었으므로 결국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메카의 주인, 꾸싸이이 이제 그는 신전과 성도의 주인이 되어 꾸라이쉬족을 조직하는 일에 착수하 였다. 우선 메카 계곡까지의 넓은 지역에 분산되어 있던 꾸라이쉬족을 모아 모든 부족원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다 . 이로써 그는 < 무잠미아 al - M ujarrnni' (모으는 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는 일종의 의회 Dar al-Nadwa 를 세워 공공의 복리에 관한 문제를 부족의 원로들이 토의케 하였다. 또한 카바 신전 의 관리와 순례 의식의 집행 , 그 밖에 정치·군사적 성격의 문제들과 관련하 여 많은 권한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그의 권한은 이처럼 막강하였으므로 생전에 못지않게 그의 사후에도 꾸라이쉬족은 그가 내린 포고령을 신성 불 가침한 것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 안1 | 기의 메카 꾸싸이이는 5 세기 후반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후손인 예언자 무함마드는 약 백 년 후인 o/0 년 또는 571 년에 태어났다. 곧 기술할 한 가지 유명한 예외적인 사건을 빼고는 지금까지의 메카 역사는 사소한 파벌 싸움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동 시대에는 예 언자의 조상들이 독무대를 이루며 예전에 없던 지배자의 지위를 차 지한다• 우마이야조와 압바스조의 역사상의 경쟁 의식이 두 왕조의
창시자인 우마이야 Urna yy a 와 하쉼 Has him이라는 인물에서 나타나 듯이. 한편 꾸라이쉬족의 영향은 점차 확대되었다. 카바 신전은 하 나의 거대한 민족 집합소가 되었다. 아라비아의 거의 모든 부족들의 순례객들이 몰려듦으로써 꾸라이쉬족의 명성은 한층 올라가게 되었 고 이들의 상업 활동도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앞에서 예멘의 아비 시니아 총독인 아브라하가 꾸라이쉬족 사람 하나가 싸나$an ‘a 의 교 회 안에서 신성 모독죄를 범한 데 대한 앙갚음으로 메카의 카바 신 전을 공격하기로 결심한 과정은 이미 기술한 바 있다판 그러한 것 이 하나의 구실에 불과한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아브라하의 속셈은 메카를 점령하여 메카롤 중심으로 한 시장권을 차지하려던 것이 튤 림없다 .93)
92) 본서 p, 71 참조.
93) [역주] 메카는 시리아와 예멘 중간에 위치하여 고대에는 이곳이 가 장 중요한 상거 래의 중심지 였다. 대상들이 겨울에는 예멘을 내왕하고 여름엔 시리아를 내왕하면서 메카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코끼리의 해 무슬림 사학자들은 이 기념비적인 메카 원정이 무함마드 탄생(약 570 년) 연도인 코끼리의 해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94) 이는 아 비시니아의 군대에 따라 온 거대한 코끼리 때의 진기한 장면이 아 랍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아브라하 가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는 보고는 부족민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 었다. 처음 이들은 카바 신전의 수호를 신성한 의무로 여겨 그의 진 격을 막으려 애썼으나 이내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아브라하는 힘 야르의 족장 두 나파르 Dho . N afa r 를 패퇴시킨후 더 이상의 저항을 받지 않고 메카 근방에 진지롤 구축했다.
94) 아브라하의 침공에 관한 기술은 Tabarr, i, 9367, 9-945, 19= 뉠데케 번 역 서 , pp, 206-220 을 따랐다.
메카의 아비시니아인들 그는 당시 메카 의 유지인 예언자의 조부 압둘 무딸립 ‘Abdu 'I-Mu- ttali b 에게 다음과 같은 전갈을 보냈다. < 나는 전쟁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신전을 파괴하려고 왔을 따름이오. 그것을 지키려고 무 기를 들지만 않는다면 그대의 피를 흘리게 하고는 싶지 않소. > 압둘 무딸립이 회답하였다 . <감당하기 어려운 싸움은 아예 할 생각이 없 소 여기가 하느님의 성스러운 집이며 그 분의 친구인 아브라함의 집 이요. 그 분의 집과 성지를 지키는 것도 하느님이며, 만일 그 분이 그 것을 포기하면 우리도 지킬 수는 없소.> 압둘 무딸립과 아브라하의 대면 그러자 압둘 무딸립은 아브라하의 지시대로 사신을 따라 아비시니아 진 영으로 들어갔다 . 그곳에서 친구인 두 나파르가 포로로 잡힌 것을 알았다 . 그가 <두 나파르여. 우리의 어려운 처지를 도와줄 수 없소? > 라고 말하자 두 나파르가 답하였다. <포로로 잡혀 있어 이제나 저제나 죽을 때만 기다 리는 사람인데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소. 하지만, 코끼리 몰이꾼인 내 친구 우나이스 Una y s 에게 사람을 보내 당신의 부탁을 들어달라고 할테니 그에게 왕과의 알현을 주선하도록 얘기하시오. 당신의 소원을 우나이스에게 말하시 오 능력껏 당신을 위해 변호할 거요> 그래서 두 나파르는 우나이스를 불 러 말했다. <우나이스여, 압둘 무딸립은 꾸라이쉬족의 족장이며 메카 대상 의 주인이오. 그는 평지에서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산꼭대기의 야생동물을 먹여 살립니다. 왕이 그의 낙타 이백 마리를 잡았으니 왕을· 배알할 수 있도 록 최선을 다해 도와 주시오.> 우나이스가 이 부탁을 들어 주어 압둘 무딸 립은 왕 앞에 서게 되었다. 그를 본 아브라하는 예의상 그롤 아랫자리에 앉 힐 수도 없고 그렇다고 체격이 우람하고 잘 생긴 아랍의 족장을 자기와 대 동한 자리에 앉혀 만니는 장면을 아비시니아인들에게 보이는 것도 마음 내 키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왕좌에서 내려와 양탄자 위에 압둘 무딸립과 나란히 앉았다. 그는 통역을 시켜 그가 원하는 바를 묻도록 하였다. 압둘 무딸립이 답하였다. <왕께서 빼앗아 가신 이백 마리의 낙타를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 아브라하가 통역자에게 말했다 . < 그에게 말하라 . 너 를 처음 보 았을 때는 내 마음에 들었 지 만 네 얘기를 듣고 보니 너도 별수 없는 놈이 구나. 그래 무엇이라고! 너와 네 조상들아 숭배하던 신전을 내가 때려부수· 려고 한 것은 말도 꺼내지 않고 내가 가져간 낙타 이백 마리에 대해서만 얘기 를 하다니 . > 그러자 압둘 무딸립이 말했다. < 낙타는 제 것이지만 신전 은 다른 사람 것이고 그것은 그 사람이 지켜야 합니다 .> 그리고 왕에게 소 리쳤다 . < 그것은 내가 알 바 아니오. 단지 내 낙타만 돌려주시오.> 좀더 믿을 만한 이야기로는 , 메카 주위에 거주하던 부족들이 압둘 무딸 립을 일원으로 한 사절단을 아브라하에게 보내 신전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들 재산의 삼분의 일을 내어 놓겠다고 제의했지만 거절당했다는 것이다. 낙타를 되찾은 압둘 무딸립은 꾸라이쉬 부족에게 돌아와 그간의 자초지종 을 이야기하고 부족민들이 마을을 떠나 산속에 피신토록 하였다. 그 후 그 는 꾸라이쉬 부족민 몇 명을 데리고 카바 신전에 가 아브라하의 군대를 대 적할 수 있도록 신의 도움을 빌었다. 문고리를 잡고 큰소리로 외쳤다. <신이여, 인간이 그의 장식물9 5) 을 지키듯이 당신 이웃을 지켜주소서! 아브라하의 십자가와 악의에 찬 계략에 당신이 뜻하는 바가 헛되게 되지 말게 하소서! 그렇게 해주신다면 당신 뜻대로 잘 이루어지리라 .>96)
95) 필자는 bil히 ak 로 정정하였음 . Taban 서의 용어해설집 참조.
96) Taban, i, 940, 13.
아비시니아인들의 패주 다음날 아침 , 아브라하가 메카에 입성할 채비를 차릴 때, 그가 탈 코끼리가 무릎을 꿇은 채 꼼짝도 않는 것이었다. 아비시니아인들이 코끼리 머리를 도 끼로 치고 옆구리에 뾰족한 막대기를 꽂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코끼리 의 방향을 예멘 쪽으로 돌려 놓자 벌떡 일어나 가뿐히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때 하느님이 바다로부터 제비 모양의 새 떼룰 불러왔는데 새들은 각기 콩알만한 돌을 세 개씩, 죽 부리에 한 개, 두 발톱에 한 개씩 날라왔다. 그
리하여 이 돌에 맞은 사람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다. ”’ 겨 우 살아남은 자 들도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다가 죽거나 갈증으로 쓰러졌다. 아브라하 자신은 역병(疾病)에 걸려 사족이 점차 썩어갔다 .981 이와 같은 상세한 내용이 <코끼리의 장>이라 이름 붙여진 꾸란 l QS장에 나오고 있다.
97) 다른 이설에 따르면 , <사람이 이 돌에 맞으면 그 신체 부위에 상처 와 농포(膜抱)가 생겼다. 이것이 천연두의 시초였다 .>(Taban, i, 945, 2 이하). 여기서 위에 기술한 전설을 낳은一―아비시니아 군대에서의 역병의 발생_―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나온다.
98) 아브라하가 패배 후에도 얼마 동안은 계속 예멘을 통치했다는 믿을 만한 자료가 있다.
<그대의 주님이 코끼리의 무리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대는 보지 못했느뇨? 그분은 그들의 음모를 무참히 짓밟아 버리지 않았더냐. 그들 머리 위에 떼 지은 새를 보내시고 벽돌장을 우박처럼 그들에게 쏟아부어 다 갑아먹은 나무 줄기처럼 만드셨다.> 물론 이 이야기 중에서 압둘 무딸립의 역할은 성도 메카를 미화 하고 예언자의 가문이 이슬람 출현 印년 전에 이미 유력한 가문이 었음을 내세우기 위해 선의로 꾸며낸 것이다. 또한 이 이야기에는 이슬람 신앙의 단면이 나타나고 있으므로 초기 이슬람에 관한 특징 적 예로서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 <하느님이 아비시니아인들을 메카에서 쫓아내고 그들에게 복수를 하자, 아랍인들은 꾸라이쉬족을 우러러 보게 되었다. ‘그들은 하느 님이 보낸 사람들이다. 하느님이 그들 편에서 적과 싸우며 지켜주셨 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를 소재로 시를 지었다 .>99) 이
99) Ibn Hish arn, p. 38, I. 14 이 하.
븐 이스하끄 Ibn Is b.a d 00 ) 는 다음 시가 아부 알-쌀트 븐 아비 라비아 Abu al-$a lt b. AbI Rab i' a 의 시라고 하나 혹자는 유명 한 시 인이며 무함마드와 동시대인으로 유일신론자〈하니프l:Ianif)인 그의 아들 우 마이 Uma yy a 야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고 주장한다.
100) [역주] 무함마드 븐 이스하끄 M 曲 ammad ibn Ishaq (7 04?- 76 8). 아 람의 역사학자 • 전승학자. 그의 필생의 역작은 『예언자의 전기』였으 나, 원본대로 남아 있지 않고 이븐 히샴이 이 책 중에서 특히 예언자 의 생애에 관한 부분을 요약한 것만이 남아 있다 . 본서 p. 118 참조 .
우마이야 븐 아비 알-쌀트의 시 <보라! 주님의 기적은 영원하도다 . 불신자가 아니면 그 누구가 의심하랴. 그분은 낮과 밤을 창조하신 분, 모든 인간에게 분명하고 확실한 심판을 예정하고 계신 분 . 자비로운 주님! 그분은 사방 천지에 빛을 발하는 해 롤 만들어 낮을 밝히시는 분, 마치 오금을 절여 절룩거리는 양 코끼리를 무감마 M 璃 hammaS I O ” 에 멈추게 하였네 . 굴레를 찢으며 쓰러졌네. 한 마리가 바위 산에서 떨어지자 그 주위에 모여든 것은 킨다의 왕자들, 고귀한 영웅들, 씨움에서는 매서운 매 . 그들이 그곳을 떠나 도망칠 때는 모두 정강이 뼈가 부러졌네. 사자(死者)가 부활하는 그 날, 신 앞에서는 하니프롤 빼고는 모든 신앙이 헛되도다. >102)
101) [역 주] <물에 잠긴 곳> 또는 <목초가 풍부한 곳>을 의 미 . 102) Ibn Hish am. 앞의 책 , p. 40, 1, 12 이하.
두 까르 DhO Q혀의 전투(약 610 년경) 아비시니아인들의 침략으로 히자즈의 아랍인들 사이에 생긴 애족 심-대체로 베드윈들도 그러한 마음이 생겨났으리라-은 이 로부터 약 印년 후에 반도의 다른 쪽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통 해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 히라의 라큼 왕국이 쿠스로우 파르베즈에 의해 잔혹하게 처형당한(ffJ2년 또는 f:fJ1년) 누만 3 세와 함께 종말을 맞이한 것은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103) 그는 죽기 전 자신의 무기 와 재산을 바크르족의 족장 하니I:fani'에게 맡겼다. 이에 대한 소유 권을 쿠스로우가 주장하고 나서자 하니는 결코 내줄 수 없다며 맞 섰다. 그러자 물이 풍부해서 건기(乾期)에 바크르족이 휴양지로서 즐 겨 찾는 쿠파 근처의 두 까르에 페르시아 군이 파병되었다. 이어 벌 어진 격렬한 전투에서 페르시아인들은 완패하였다 .104) 비록 이 전투 에 참전한 군사력은 소규모였지만1 05) 여기에서 아랍인들이 거둔 숭 리는 새로운 질서의 출발점으로 기록되었다. 무함마드는 이 소식을 접하고 말했다. <오늘이야말로 아랍인들이 페르시아인들로부터 만 족을 얻은 최초의 날이다.> 지금까지 사산 왕조의 그늘에 가려 있 거나 강력한 히라 왕국에 의해 견제받아 온 사막의 부족들은 이제 자신감이 넘치고 호전적이 되었다. 아랍인들은 주변 대국들을 증오 하고 얕잡아 보기까지 했으며 대국들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 니었다. 몇년 후 주변 대국들은 흙먼지 속에서 짓밟히는 신세가 되 었다.
103) 본서 p. 99 참조.
104)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Taban, i, 1016-1037= 뉠데케의 번역서, pp. 311-345 에 소재함.
105) 한 시인은 병력 수를 아랍인이 3 천 명, 페르시아 군사가 2 천 명이 라고 말한다 (Taban, i, 1036, 5-6).
제 3 장 이슬람 이전의 시 , 관습, 종교 <아랍에서는 어느 집안에 시인이 나오게 되면, 주위의 다른 부족 민들이 그 집으로 몰려가 시인 탄생의 행운을 함께 기뻐해 주었다. 잔치가 벌어지며, 부족의 여인네들은 결혼식에서처럼 한데 모여 현 (鉉)을 타고 어른 아이할 것 없이 서로 축하의 말을 나누었다 . 그것 은 시인이 부족민 모두의 명예를 지켜 주는 수호자이자 그들의 선 한 이름을 욕되지 않게 해주는 하나의 무기로서 그들이 쌓은 공훈 과 명성을 영원 불멸케 해주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랍인들은 세 가지 경우 죽 사내 아이룰 낳거나 시인이 배출되었을 때, 또 순 종 암말이 새끼를 낳았을 때만이 경사났다고 서로 기뻐하고 축하해 주었다.>J l 동 시대의 것으로 현재까지 전해 오는 문학 작품의 관점에서 동 시대에는 구전으로 보존되 온 구비 문학만이 존재하였고 기록화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__국 :자힐리야> 또는 이슬람 이전 시대 1) lbn Rashi q in Suy u tr 's Muzhi r(B ulaq, 1282 A. H.), Pa rtII , p. 236, I. 22 이하. 필자는 , 이 난해한 주제의 연구를 시작하는 모든 사람의 수 중에 반드시 들어가야 될 가장 훌륭한 저술인 찰스 라이얼 경 S ir Cha- rles L y all 의 『고대 아라비아 시 An ci en t Arabia n Poe try』, p. 17 서문 에 나오는 번역을 인용하였다.
라 함은 기록상 최고(最古)의 시가(詩歌)가 지어진 기원후 500 년경부 터 아라비아 역사상 신기원을 이루는 무함마드의 메디나 이주(62'2 년)까지 일세기를 겨우 넘는 기간이다. 이 lal 년이 후세에 미친 영 향은 지대하고 지속적인 것이었다. 아람어를 말하는 대부분의 무슬 림들이 단연 뛰어난 솜씨의 전형으로서 간주해 온 시의 흥망성쇠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시는 민중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려 그네들의 정신과 성격을 형성했으며, 무함마드가 여러 분쟁 집단을 적어도 얼 마 동안 공통의 목적에 의하여 하나의 조직체로 만들기 훨씬 이전, 정신적으로 하나의 민족을 이루게 한 것이 바로 시였던 것이다. 당시 시가는 개화된 소수의 사람만을 위한 사치품이 아니라 문학 적 표현의 유일한 매개체였다. 부족마다 시인들이 있어서 마음껏 자 신들의 감정을 표현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시인들의 말은 <화 살보다 더 빨리 사막을 가로질러 날아가> 듣는 이의 가슴속에 가 닿았다. 표면상, 투쟁과 분열로 치닫고 있는 와중에서도 통합의 원 동력은 작용되고 있었다. 혈연 관계만이 신성한 것임을 내세우는 부 족 사회에서 이질적인 부족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유대를 맺어 주 고 의식적이든 아니든 정적(情的)인 민족 공동체의 근간을 형성해 준 아랍인의 이상적인 덕목 <무루와 M 꼬 uwwa>2) 가 바로 시를 통해 되살아나고 널리 퍼지게 되었다. 아람시가의 기원 다음게서는 아랍 시가의 기원을 추적하고, 그 형태와 내용, 일반 적 특징을 기술한 다음 가장 유명한 이슬람 이전의 시인들과 그들 의 시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시가 어떻게 보존되어 전래되어 왔는가를 밝혀보겠다.
2) [역주] 원의(原 意 )는 <남자다움>을 뜻한다 . 이에 속하는 덕목인 <관 대함 Karam> 과 <명예 Shar af>, <용맹l;lam.a. sa> 이 자힐리야 시대의 이 상적 인간상을 형성한다.
고대 아랍인들은, 시인을 뜻하는 명사 샤이르 s 區‘ir(복수는 슈아라 shu' ara. )31 가 암시하듯이, 시인을 초자연적인 인식 능력을 타고 난 사 람이거나 <진ji nn>4l 또는 악마 sha y a t m 의 힘을 빌려 마력을 과시 하려는 마법사쯤으로 생각하였다. 시인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 었고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한 젊은이의 이야기에서 잘 나타난 다. 그는 시인도 예언자도 물 점장이도 아니라는 이유로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퇴짜 맞았다는 것이다 ? 예술 작품으로서의 시의 개념 은 후에 발달되었다. 이슬람 이전의 <샤이르>는 출신 부족의 신탁 자(信託者)였으며 평시에는 부족의 지도자로서, 전시에는 전사(戰士) 로서 활동하였다. 새 목초지를 찾을 때면 시인에게 자문을 구하며 오직 그의 말을 좇아 <낙타 털(또는 양털)로 만든 천막>을 치거나 부수었다 . 지치고 목마른 방랑지들이 샘을 발견하고 샘물로 목을 축 이고 몸을 씻고 나면 시인을 따라 그들은 소리높여 노래 불렀다. 마 치 이스라엘 Israel 6) 처 럼 —— <솟아라, 샘이여, 그대 위해 노래부르리 >7)
3) [역주] sha‘ ir는 아랍어 동사 sha'ara( 감각하다, 알다)의 파생형으로서 본래의 어의는 <깊은 통찰력이 있는>, <본능적인 지각으로 아는>을 뜻한다 .
4) [역주] <진>은 아랍의 민간신앙에서 사람과 귀신의 중간 존재로서 불로 만들어져 있으며 사람의 몸속에 들어와 그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으로 믿어졌다. 꾸란에 따르면, <진>의 종류에는 믿음을 가진 <진> 과 믿음을 불신하는 <진>이 있다고 본다.
5) Freyt ag, Arabum Proverbia , vol. ii, p. 494.
6) [역주] 야곱J acob 이 천사와 격투하고 나서 주어진 별명. 7) Numb. xxi, 17. 이와 같은 우물 노래는 여전히 시리아 사막에서 불려 지고 있다 (Enno Lit tma nn, Neuarabis c he Volkspo esie , in Abhand. der Kon. Gesellsc璋 der Wi ssensc 며't en, Ph il. - His t Klasse, Gott ing e n, 1901), p. 92 참조. p. 81 에 인용된 자료에서는 witla ya dlewena- 죽, <올라 오라, 두레박아!>라는 구절이 수차례 반복되고 있다.
풍 X| 人 I 고대에는 샘터의 노래fo unt ai n-so ng s, 군가 war-so ng s, 우상 찬 가 외에도 연가나 애가 등 여러 종류의 시가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샤이르>의 능력은 풍자시hij a 에서 주로 발휘되었는데 이와 같은 풍자시는 <부족간의 분쟁을 유발하거나 분쟁에 반드시 수반되는 가 장 오래된 시 형태로서 실전(實戰) 못지않게 중요한 전쟁의 기본 요 소였다 >.8 1 <샤이르>가 적에게 행한 위협조의 풍자는 필연코 치명 적이었을 것이다. 날아가는 화살에 곧잘 비유되는 그의 각운시는 신 의 계시를 받은 예언자나 사제가9 1 말하는 성스러운 저주와 같은 효 과가 있었다 .IO I 이러한 시를 읊을 때는 머리 한 쪽만 기름을 바르고 망토를 축 늘어뜨리고 신발도 한 짝만을 신는 것처럼 상징성이 질 은 독특한 의식이 따랐다 .LLL 나중에 시인의 입에서 주문(呪文) 대신 적을 비방하는 모욕적인 풍자시가 나왔을 때도 이 풍자시는 여전히 불길한 감을 연상케 하였다.
8) Goldzih e r, iibe r die Vorge schi ch t e der Hi ga '-Poesie in his Abhand, zur Arab. Ph i lolo 成, Pa rt I (Ley d en, 1896), p. 26.
9) [역주] 여기서의 예언자나 사제는 아랍어의 <카힌 K 갑出 l> 을 지칭한 다.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에서 이들 <카힌>은 신전의 관리자를 겸하 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사즈아>로 된 축복이나 저주롤 내리기도 하고,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잃어버린 가축을 찾아주는 둥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는 점장이나 무당으로 행세하였다 . CEI, Kahin, p. 216 참조 .
10) Goldzih e r, 앞의 책 , p. 42 이 하에 나오는 발락 Balak 과 발람 Balaam 의 이야기와 그에 관한 골트치어의 견해를 참조.
11) 같은 책, p. 46 이하.
사즈아 Sa j‘ 애당초 아랍 시는 마법사와 그와 친근한 <진>에 의해 시작되었 기 때문에 그 기원이 불분명한 점이 있다. 따라서 문학의 형태로 전 승된 것은 없지만, 아랍인처럼 보수적이고 옛 것에 대해 집착력이 강한 사람들의 경우는 재구(再構) 작업이 비교적 수월하다. 아랍에서
가장 오래된 시적 표현 양식은 운율이 없는 각운인 < 사즈아>, 죽 <각운 산문 rh yrrro p rose > 이었던 것이 분명하댜 꾸란에서 <사즈 아>가 사용되었다고 해서 무함마드의 적들이 그를 시인이라고 불렀 다는 사실은 운율이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후에도 시가 어떻게 다루 어졌는 지를 짐작게 해주는 대목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사즈 아>는 후에 단순한 수사학적 장식으로 웅변적 말이나 글의 특징이 되었다. 그러나, 본래는 시인과 예언자 등이 초자연적인 계시를 내 리거나 온갖 신비스럽고 심원한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해 채택한 독 특한 표현 형식으로서 보다 심오한, 종교적이라고 할 만한 중요성이 있었다. 라자즈 Ra j az <사즈아>에서 아라비아의 운율 중 가장 오래된 <라자즈>로 알 려진 운율이 발달되었다 . 1 2 ) <라자즈>는 한 구절에 보통 네 개 내지 여섯 개의――_어떤 아랍인은 <두세 개>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운각(韻脚)으로 구성된 불규칙 약강격(弱强格) 운율이다. 모든 시행 이 똑같은 운을 갖고 보다 안위적인 운율에서는 시작하는 첫 행만1 3) 12) <라자즈>는 원래 <낙타의 뒷다리와 볼기에 생기는 진전(震類 :근육 의 불규칙한 운동으로 이는 질병의 증상임)>을 의미한다. 이에 암시 롤 받은 야콥 G. J acob 박사는 낙타를 타고 가는 사람이 낙타의 다양한 걸음걸이에 홍을 맞추어 부르는 노래 hi da 에서 아라비아의 운율이 생 겨났다는 홍미로운 이론을 제시하였다 (S tu d i en in arabis c hen Di ch tem , Heft ill, p. 179 이하). [역주] Georg J acob(1862-1937) :독일의 동양학 자 . 아랍문학을 비롯하여 다방면에 걸쳐 학문적 업적을 내었다. 특히 터키 문학과 <그림자 연극 Kha yy al al-? ill>에 관심을 가졌다. 13) 아랍시의 한 행 ba yt은 두 개의 반행 m i sra‘ 혹은 반구(半句)로 되어 있다. m i sra‘ 의 번 역 으로는
이중 운을 갖는 것이 <사즈아>와 유사한 점이며 또한 <라자즈>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밖에 <라자즈>의 특징으로는 즉흥적으로 한 번 에 서너 구절씩 읊으며 대개 개인의 감정이나 체험을 표현하는 것 인데 노쇠한 전사인 두라이드 븐 자이드 븐 나흐드 Dura yd b. 7-ayd b. Nahd 가 임종시 노래한 시구에서 <라자즈 > 의 특징이 잘 드러난 다. <주검을 위한 천막 141 이 오늘 두라이드에게 드리워졌네. 세월이란 흘러 지나가는 법이지만, 나는 세월을 하릴없이 허송하였네. 단 한명의 적도 궁지에 빠뜨려 보지 못했네. 내가 끌어모은 전리품은 , 그 얼마나 훌륭했던가! 내가 사랑했던 여인들은, 그 얼마나 화려하게 옷을 차려 입었던가 ! > 1 5 1
14) 원문의
기타운율 그 밖에 아랍 시의 주요 운율에는 <카밀Karni1(완전한)>, <와피 르 Wa fir(충분한)>, <따윌 Ta Wil(기다란)>, <바시뜨 Bas it(폭넓은)>, <카피프Khafff(가벼운)> 동 몇 개가 더 있지만1 6 1 이에 관하여는 찰 스 라이얼 경이 그의 저서 『고대 아라비아 시.!l의 서문 45-52 쪽에서 명쾌히 다루고 있으므로 이룰 참고하도록 한다. 아랍어 운율에는 그 리스나 라틴어에서처럼 음절의 장단이 나타난다. 운율의 명칭이나 규칙은 이슬람 이전 시인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운율법은 처 음 고대 시가에서 유래하여 문법학자인 칼릴 븐 아흐마드Khalil b.
16) [역주] 칼릴온 시를 13 개의 운율로 구분하였는데 후에 2 개를 추가하 고 아크파쉬 al- Akhf ash 가 하나를 더 보태 모두 16 개의 운율이 되었다. 이들 운율에 대해서는 송경숙 외, 『아랍문학사』(송산출판사), p. 14 참조.
도 d (791 년 사망)가 체계화하였는데 구리 세공기사가 망치로 모 루를 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에 대한 착상이 떠올랐다고 한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시 이제 아람어로 쓰여진 가장 오래된 아랍 시의 형태와 내용을 살 펴보자. 이들 고도로 발달된 작품들과 <사즈아>나 <라자즈> 같은 조잡한 시 사이에는 어림짐작조차 어려운 만큼의 오랜 세월이 가로 놓여 있다. 최초의 시인들은 이미 대가의 경지에 들어서 있었다. <이들이 사용하는 운율의 수나 복잡성, 이미 확립된 장단율이나 압 운법, 시기적으로 동 시대에 속하지 않는 시인들 사이에서도 시의 주제를 끌어내는 방법이 획일적인 점 171 등은 모두 그들이 오랫동안 시작(詩作)을 통해 어법, 표현술을 갈고 닦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 다 .>18 )
17) 이미 6 세기의 시인 안타라 ‘An tar a 는 자신이 말할 수 있는 새로운 것 올 선배 시인들이 모두 말해 버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고 불평한 다 (Mualla qah, vol. I). 18) Anci en t Arabia n Poetr y, Intr od ucti on , p. xv i .
그연대 아랍 시의 황금시대는 기원후 6 세기 초에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무렵, 바수스 전쟁이 한창이었는데 이룰 기록한 전사〈戰史) 에 상당한 분량의 운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최초의 아랍 시는 무할 힐 븐 라비아 알-타글리브 Mu halhil b. RabI'a al-T aghli b 가 그의 형 쿨라이브 족장의 죽음을 애도한 시라고 하는데 그의 죽음이 바크르 와 타글리브 양 부족간에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아무튼 이후 수백 년동안 아라비아 반도 거의 전 지역에서 똑같은 시 언어와 똑같은 시 작법을 사용하는 일련의 찬란한 시인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이 지은 시의 형태는 우마이야조 말까지(7ffJ년) 변형되지 않고 유지되
었다. 압바스 시대에 들어와 소수의 진보적인 시인들이 이 형태를 거부하고 나서지만 이내 그러한 도전을 물리치고 아랍 시의 정형으 로 뿌리를 내렸다. 7}阿다 Oa$ i da 이같은 시의 정형은 아랍 문학사의 고대에 해당되는 시대에 있어 서 유일한 시의 형태, 다시 말해 완성된 형태의 유일한 시인 <끼씨 다 >19 ) 즉, 송시0:ie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 시의 행(아브야트 abya t , 먄뚱 바이트 ba yt) 수는 시마다 각기 다르나 25 행 이하인 경 우는 드물고 백여 행이 넘는 끼씨다도 있다. 까씨다의 각운은 첫 행 의 두번째 반구(半句)에 사용된 것과 똑같은 운이 둘째, 셋째 행에서 도 반복되며 시의 마지막 행까지 계속된다. 따라서 각운을 기분좋게 해주는 장식물이나 <성가신 굴레>가 아니라 시라고 하는 유기체의
19) 아라비아의 사전학자들은 Q asIda 가 예술적 목적을 지닌 시를 의미 하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이 <목적>이 뜻하는 바 정확한 의미에 대해 서는 의견이 구구하다 . 현대 비평가들 역시 의견의 일치 를 보지 못하 고 있다 . 야콥 (S t ud in Arab. Di ch tem , Heft III, p. 203) 은 이 시 들의 주제, 죽 칭찬이나 아첨의 말을 해주고 상을 많이 받는 데서 이 단어 의 근원을 찾는다. 알바르트 Ahlward t (Bemerkun g en iibe r die Ae- ch the it der alte n Arab. Gedic h t e, p. 24 이하)는 동사 q a~ada( 깨트리 다)와 관련지우고 있는데 이는 시가 시행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시행 은 각기 2 등분되어 같은 각운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시 전체가 말하 자면 2 등분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라자즈 시의 경우에는 이미 본 바와 같이(본서 p. 131) 그러한 구분이 없다 . [역주] 따하 후사인은 자힐리야 시대의 아람인들에게 극시나 서사시가 존재하지 않은 점을 들어 <까씨다>를 서정시로 분류하였다 (Taha I:Ius ayn , Fi al-Adah al- J函 l iyy , Dar al-Ma'ar if, pp. 321-322). 또한 비 스톤 Bees t on 은 그 와 같은 분류를 고대 그리스 문학에 근거하는 서양식 분류법(서정시, 극시, 서사시)으로 보고 그 자체를 독립적 문학 양식으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보았다(A. F. L. Beesto n , Arabic Lit er atu r e to the end of the Um ayya d Perio d , Cambri dg e Un iv. Press, p. 42). 또 <까씨 다> 를 복합적 정형 장시 또는 송시로 옮길 수도 있다(송경숙 외, 앞의 책, p. 13 참조).
중요한 기관(器官)으로 생각하는 아랍인들에겐 무운시( 無韻詩 )는 전혀 생소한 것이 된다. 각운은 대개 여성 운을 갖는데 < 사키나sakhina>, <툴리나tulina>, < 무히나rnuhina>, < 무클리디 rrrukhliclI > ' < 야디 yac lI>, < 우와디 ‘uwwaclI>, <리자무하rijarnuha>, <실라무하 s il a 一 m 麟, < 하리무하 區 mm 止多 등이 여성 운이다 . 독특한 언어 구 조상 운이 유별나게 풍부한 언어에서 한 가지 운만을 각운으로 사 용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로서 상당한 기교롤 요하게 된다. <장 시(長詩) > 인 < 무알라까트 Mu'all aq a t> 중 가장 긴 시도 그레이 Gray 20 ) 의 애가보다는 훨씬 짧다. 아랍인 가운데서 호머 Hom 군“나 초서 Chaucer2 2) 와 같은 작가가 나왔다면 산문으로 격을 낮추어 썼을 것 이다. 운율의 경우 시인은 송시의 품위룰 떨어뜨리는 것으로 여겨지 는 < 라자즈 > 를 제외하고는 어느 운율이든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 지만 주제를 고르고 그 주제를 다루는 방법까진 시인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죽 그로서는 감히 타파하기 어려운 고정 관념에 의해 상상 의 나래가 펼쳐지게 마련이다.
20) [역주] Thomas Gray (1716-1771) : 영국의 시인 .
21) [역주] 고대 그리스의 시인(기원전 800?-750). 『일리아드Ili ad 』나 『오 딧세이 Od y sse y』의 작자로 전해진다.
22) [역주] 영국의 시 인 (1340-1400).
까씨다의 내용과 구분에 관한 이븐 꾸타이바의 기술 <까씨다는 폐허가 된 주거지나 주거의 유적과 흔적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한 학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 다음 시인은 흐느끼면서 황량한 야영지를 향해 푸념을 늘어놓는다. 동행한 친구에게 한때 그곳에서 살다 떠나버린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도록 잠깐 멈추어 줄 것을 제 의한다. 본래 천막 생활을 하는 유목민들은 비가 내린 장소나 목초지를 찾 아서 샘에서 샘으로 장소를 옮겨 다닌다는 점에서 도시민이나 촌락민들과 는 다르다. 여기에 에로틱한 서두인 ‘나시브nasi b' 를 연결시켜 그의 애인과 의 열렬했던 사랑과 이별의 아픔을 슬퍼한다 .231 이것은 그 시를 돋는 사람
23) [역주] 이므루 알-까이스의 <무알라까>에 사용된 <나시브>는 고대 아랍 시인들 시의 도입부 모델이 되었다.
둘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의 이목을 자신에게 쏠리게 하는 데 목적이 있 다. 사랑을 노래한 시는 사람의 영혼을 감동시켜 마음을 사로잡으며 하느님 이 피조물을 만들 때에 영혼을 불어넣어 남녀간 사랑을 하게 하였듯이 합 법적이든 불륜이든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는 인간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이때 시인은 청중이 주의깊게 경청하는 것을 확인하고 그 름을 타 자기의 주장을 펼친다. 피로와 수면 부족, 밤중의 여행, 한낮의 더 위, 자신의 낙타가 얼마나 말라빠졌는지 둥을 불평하는 것이다. 그는 여행 의 어려움과 위험을 모두 묘사한 뒤, 시를 읊어 주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옹 당 받을 것을 받는다는 희망과 기대가 저버려지지 않았을 때 칭송 ma dib에 들어가며 상을 내려 줄 것을 촉구한다. 그리하여 그를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치켜 세워 주고 아무리 훌륭한 고관대작도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 을 공포함으로써 . 그의 관대한 마음에 불을 질러 놓는다 >24) 라고 이븐 꾸타 이바는 전한다. 수많은 송시들이 이븐 꾸타이바의 이러한 설명과 일치하나 이것 이 불변의 모형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흐 특히 애가에서는 에로 틱한 도입부가 흔히 생략되기도 한다. 만약 곧장 주제에 이르지 않 으면, 영양이나 노새 또는 타조만큼의 속도로 광야를 횡단하는 시인 의 말이나 낙타를 충실하고 상세히 묘사해 준다. 베드윈 시는 동물 의 생태에 대한 연구 자료도 풍부하다 .26) 모티프를 설정하는 것은
24) Ki tab al-S 따 wa-al-Shu ara, p. 14. I, 10 이 하.
25) [역주] 비스톤(p. 43) 은 까씨다의 구조를 도입부인 <나시브>, <나시 브>로부터 본 주제로의 이행 과정으로 시의 제 2 부에 속하는 <타칼 루스 Takhallu~>, 본 주제 인 <가라드 Gharad> 로 구분하였다. 26) 뉠데케 (F iinf Moalla qa t,i, p. 3 이하)는 동 시의 극히 인위적인 특 성을 보여 주는 홍미로운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 죽, 아랍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특정 동물들(예로 표범, 날쥐, 토끼 둥)이 언급되거나 묘 사되지 않는데 이는 전해 내려오는 목록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 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시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 . 그 중 찬양은 다른 주제보다 더 나 은 대가를 받았기 때문에 시인들이 즐겨 선택하는 주제였다. 그러나 대체로 이슬람 이전의 시인은 자기 좋을대로 행동하였다. <까씨다> 는 유기적 통일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의 통일성은 동일 작가가 그린 일련의 그림이 갖는 통일성, 또는 동양의 시구를 인용하자면 목걸이에 크기와 종류가 각기 다론 진주를 실로 꿰메어 놓은 것과 같은 통일성에 비길 수 있다. 고대시는 이슬람 이전 시대의 생활상과 사상을 실증적으로 묘사 하고 있다. 즉 아랍인들은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였다 . 아 부 탐맘 Abu Tarnrnarn의 유명한 시 선집이 이 시 선집의 거의 반 올 차지하는 제 1 장 <하마사I;famasa>, 죽 <불요불굴의 정신(아랍 어 원의는 열광’)>에서 그 제목을 따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마사>는 아랍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미덕――_전장에서의 용감함, 고통을 이겨내는 인내심, 집요한 복수심, 약자는 감싸주고 강 쟈개는 맞서는 정신―――을 의미한다. 테니슨 Tenny sonv) 의 말처럼, <싸우고, 추구하며, 찾아내고, 결코 물러서지 않는> 의지인 것이다. 이상적인 아람의 영웅 이상형의 아랍 영옹으로서 아즈드 A 짜의 샨파라 S hanfa ra 와 그의 동료인 타압바따 샤란 Ta'abba ta Sharran 을 들 수 있다. 둘 다 발이 빠르고, 부족에서 버림받은 도적으로 훌륭한 시인들이기도 하였다. 샨파라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샨파라 <그는 일찍 이 어려서 살라만족 Bann Salarnan 의 포로가 되어 그들 사이 27) [역주] Alfred Tenn y son(1809-1892) : 영국의 계관 시인
에서 양육되었다. 자신의 혈통을 모르고 자라다가 커서 이를 알고 나선 자 신을 포로로 잡은 자들에게 복수를 맹세하고 출신 부족에게로 돌아갔다. 그 는 살라만족의 남자 백 명을 죽이겠다고 맹세하였다. 그가 98 명째 죽였을 때 적의 매복병들이 그를 생포하려 하였다. 그들과의 싸움에서 한 쪽 손을 잃고 남은 한 손으로 살라만 부족민의 얼굴에 칼을 던져 그를 죽게 하니 99 명이 되었다. 그때 힘이 달려 그가 맹세한 숫자에서 한 명이 모자란 채 전 사하고 말았다 . 그 뒤 적병 하나가 그 길을 지나다 길바닥에 됭구는 흰 해 골을 발로 찼다가 뼈 조각이 발에 박히는 바람에 생긴 상처가 치명상이 되 어 죽음으로써 백 명의 숫자를 채우게 되었다 .>28 1
28) Andent Arabia n Poetr y, p. 83.
다歸 샨파라의 뛰어난 송시 『아랍의 lam 각운을 지닌 시 29) Lami- yyatal.-요』인데 자신의 영웅적 기질과 약탈 생활의 고난을 묘사 하고 있다 .30) <고매한 자는 어딘가 몸을 맡길 안전한 피난처가 있지만, 버림받은 무법자에겐 증오심을 불태울 친척조차 없이 외롭다네. 그러나 분별 있는 자는 그렇지 않다. 희망과 두려움 속에서 땅바닥에 바싹 붙어 야행하는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지금 내게는 네가 모르는 사이에 동지들이 생겼다.
29) [역주] 각 시행의 끝 어구가 우리말의 <근>음으로 끝난다.
30) 시행 3-13. 아래에서 필자는 원문에 사용된 <따월> 운율을 그대로 옮겨 보고자 하였다 . ....., _ .='..I ....., -二 ._.I....., _ .='..I.__,-....,- Lam iyy a 의 아랍어 원문은 산문 번 역 , 주석 과 더 불어 드 사시 의 Chre-sto m ath ie Arabe (2nd ed.), vol. ii , p. 337 이 하에 실 려 있다 . 휴즈 G . Hug h es(London, 1896) 는 이룰 영시로 옮겼다. 다른 번역판은 Noldeke, Beit rage zur Kenntn iss d. Poesie d. alte n Araber, p. 200 에 언급되 어 있다.
끈질긴 늑대, 매끈한 표범 , 텁수룩한 갈기의 맹수 하이에나 , 3 1 I 그것들은 나의 진정한 동지들로서 비밀을 입 밖에 내지도 않으며 친구로 인해 손해를 보았다고 그 친구를 버리지도 않는다 . 모두 용기 있고 언제든 신의를 지켜 준다. 그러나 맨 앞에서 돌진할 때의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자이다. 설사 용감한 자들이 전리품에 손을 뻗친다 해도 탐욕한 무뢰한만이 그런 동작이 빠른 법 , 나는 그런 면에선 가장 느림보 나에게서 관대함을 빼놓는다면 그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 베푸는 자가 분명 최고인 까닭에. 그렇다. 호의를 갚지 않는 자는 , 그가 내 이웃일지라도 가만두지 않는다. 결국 친구는 셋으로 족하다:용맹스러운 영혼, 번쩍이는 날카로운 칼날, 넉넉히 크고 꺾이지 않으며 가장자리가 매끄럽게 윤이난 멋진 활. 활을 가죽끈으로 어깨 혁대에 멋드러지게 걸치고 화살을 당기면 마치 자식을 잃고 비통해서 통곡하는 여인처럼 꿍꿍거리며 신음 소리내는 화실 •.>
31)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세 친구들이 마치 이들 동물들과 닮았음을 말하고자 하는 듯하다 . 그러나 베반 교수는 아랍인이 친구를 하이에 나에 비유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이러한 해석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는 견해이다.
샨파라는 자기로 인해 피롤 흘린 적들이 복수를 하고자 그의 부 족을 사방으로부터 협공해 오자 자신의 추방을 결의한 부족을 떠나 며 다음과 같이 읊었다. <나를 파묻지 마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적들이 내 몸에서 가장 소중한 머리를 베어 가고 싸움터에 나머지 몸덩이룰 버리고 가면, 하이에나여, 그대 이윽고 잔치를 벌이고 홍겨워하리니.
여기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네_一빗나간 행동으로 자신의 부족민을 곤경에 빠트린 저주받을 이방인이니> 3'!) 타압바따샤란 싸비트 븐 자비르 븐 수프얀 알-파홈 Thab it b. Jab ir b. Su fyan al-Fahm 이 타압바따 샤란이란 별명을 얻게 된 것은, 그가 겨드랑이 에 칼을 끼고 천막을 나가는 것을 본 어머니가 <싸비토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난 몰라요, 겨드랑이에 화(禍)가 될 물건을 끼고(타압바따 샤란 Ta'abba ta Sharran) 나갔어요>라고 답한 데서 비롯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이 <화>는 바로 그가 싸움에서 죽인 사람이 귀신 Ghoul 이 되어 그러한 형태로 현시된 것이라고 한다. 그의 사~든 인 샴스 븐 말리크 Shams b. Malik를 위해 지은 다음 시구는 시인 자신의 이야기도 될 수 있다. <그는 자기에게 닥친 힘든 일을 한 마디 불평도 없이 기꺼이 행한다. 여러 방법을 꾀하여 뜻한 바는 꼭 이루어낸다. 낮에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밤에는 별빛 아래서 야생의 나귀처럼 쓸쓸히, 안장도 없는 ‘위험한 물건’을 타고 밤낮없이 사막을 횡단한다. 그는 파상적으로 불어오는 돌풍의 선두를 앞질러 속도를 늦추지 않고 쉼없이 계속 질주할 따름이다. 적을 급습하려고 이제나 저제나 망을 보다가 그만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잠이 들지만 그의 심장은 깨어 파수를 본다. 적의 전위대가 시야에 들어오면 칼집에 손을 대어 날이 선 검을 뺀다. 그가 적장의 가슴올 향해 칼을 휘두를 때면 싱긋이 웃는 운명의 여신은 32) 표-:un asa, 242.
그 번쩍이는 어금니가 보일 정도로 기뻐하였다! 고독을 벗삼아 하늘 높이 미로 같은 성좌의 주 별자리를 따라 그는 길을 떠난다 . >33)
33) lfama sa, 41-43. 이 시는 Sir Charles Ly a ll, A 따 en t Arabia n Poetr y, p역. 되16어, D있r.다 A . B. Davi ds on, Bib l i azl and Lit era ry Essa ys, p. 263 에 번
고대 아라비아의 <명예와 체면> 위 시구는 아라비아의 기본적인 덕목들인 용기와 강인함, 불요불 굴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제 이교도 사회의 토대를 이룬 도덕적 가 치관을 보다 폭넓게 개관해 보겠는데 이슬람 이전 시는 바로 그러 한 가치관을 널리 세상에 전파시켜 주며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기록 하고 있다 . 전통적인 감정, 죽 <명예와 체면>이라는 구속력을 제의 하고는 성문법이나 법률적, 종교적인 제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교 도 아랍인들이 이해하고 있던 바, 아라비아 남성의 덕목 <무루와> 를 이루는 명예와 체면에 관계되는 것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용맹 용맹스러움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아랍인에게 있어서 용기는 <흥분한 상태에서 나오며 의기소침하기 전 급속히 사라져 버리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용기와 유사하다 . 34) 따라서 아랍의 영옹 은 아므르 븐 쿨씀 ‘Amr b. Kul th um 의 <무알라까>에서 엿볼 수 있 듯이 도전적이고 거만하다. 아랍인은 도망가도 손해볼 것이 없으면 거침없이 그대로 달아나 버린다. 그러나 전쟁의 위험 속에서도 부족을 따라다니며 전선 후방 에 머물고 있던 여자들을 위해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울 것이다. 35)
34) Maha ffy, Soc ial Lif e i n Greece, p. 21. 35) 본서 p. 114 참조.
<단단한 땅이 우리 여인들의 날쎈 발자국으로 움푹파인 것을보고, 또 라미스냐 mIs 36) 가 하늘에 뜬 보름달 같은 그녀의 얼굴에서 베일을 벗고 감추어진 미( 美)를 드러낼 때 사태가 심각해져 달리 도움의 손길이 없으면 나는 그녀들의 우두머리 를 전투에 가담시켰네 .>37)
36) [역주] 원의는 <손길이 부드러운>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여자 이름 으로 쓰였다. 37) I:lama sa, 82-83. 시인은 유명한 이교도 기사로서 이슬람에 귀의하여 후에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름을 떨친 아므르 븐 마디카리브 ‘Amr b. Ma' d!kari b 이 다.
부족의 통치는 부족내의 원로들의 주도하에 민주적 방식으로 이 루어졌다. 그들의 권위는 고귀한 혈통, 고매한 인격, 부와 지혜, 풍 부한 경험에서 우러 나온 것이었다 . 한 베드윈 시인은 디옴-과 같이 소박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족장이 없는 부족은 이내 쇠하고 마니 부족민들이 동요하는 것은 족장이 없기 때문. 버팀목이 있어야 천막도 세워지는 법, 나무못으로 지탱되지 않으면 버팀목도 소용없다네. 나무못과 버팀목을 겸비해야만 뜻한 바 이루어지는 것이니 . >38 1 충성심 그러나 족장은 부족민들에게 명령을 하거나 벌을 내리려 하지는
38) Al-A fwa h al-AwdI in N~ldeke's Delectu s, p. 4, ll, 8-10. 기 둥과 쐐기는 각각 군주와 평민을 나타낸다.
않았댜 부족민들 각자가 치자(治者)로서 행세하여 누구든 다른 사람 의 일에 참견하는 것을 보면 스스럼없이 꾸짖었다. <그대가 우리의 주인이라면(죽 ‘사이이드 sa yyi d’ 로서 분별 있는 처신을 한다면), 우리에 게 큰 소리 쳐도 되지만, 그렇지 않고 그대가 오만의 희생이 된다면 계속 거만이나 떨어라(죽 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의미 )>. 391 이교 도 아랍인이 말하는 충성심은 윗사람에 대한 충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동배(同輩)의 사람들에 대한 헌신적인 애정 즉 신의나 의리 를 뜻하는 것이댜 그것은 친족 개념과 밀집한 관계가 있었다. 보호 맹약을 맺고 부족내에서 살고 있는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가족들과 부족민을 개개인 또는 집단적으로 지키는 일은 신성한 의무였다. 체 면을 세우기 위해선 자기의 동족을 만난을 무릅쓰고 지켜줘야 했었 다.
39) Jfam쵸 a, 122.
<나는 가지야Ghaziyy a 부족 출신, 만일 부족이 잘못하면 나도 잘못, 가지야 부족이 정도(正道)를 가면, 나도 정도를 가리!> 이처럼 노래한 두라이드 븐 썸마 Duray d b. $irnma는 전투에서 자신의 판단이 더 옳다고 생각하였으나 친족의 뜻을 따랐다 .40) 결국 그 전투에서 동생 압둘 라 ‘Abdullah 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친척이 도움을 청하면 사안의 시비를 가리지 않고 즉시 도와주어 야 한다. 만약 그네들이 나쁜 짓을 하더라도 폭력을 쓰기앞서 가능 한 오랫동안 인내하고 지켜보아야 한다 .41) 공리적(功利的)인 우정관 이 다음 시구에서처럼 종종 강조되기도 한다.
40) 같은 책 , 378.
41) 알-핀드 al-F i nd 의 시와 비교, 본서 p. 112 참조.
<평화시에는 소홀히 대하는 그대 형제를 예로 들어보자 . 막상 전투가 임박하면 그대 친척만이 가까이 있음을 기억하라. 창칼이 피에 홈뻑 젖어서 도움을 청하면, 호의로 응해 주는 것은 친척뿐이니 그야말로 진정 우리편이다. 오 친척이 그대를 오해할지라도 그를 결코 버리지 마라. 그가 망쳐 놓은 일은 후에 그 자신이 고쳐서 바로잡을 것이니 . >421 대체로 아람인들은—— _ 이교도이든 무슬림이든 판단력이 치 밀하고 계산이 빈틈없지만, 아무런 사심 없이 친구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수도 있디는 기사도적인 헌신만큼 그들의 성격상 특성을 나 타내는 것은 없다. 특히 고대 시는 아랍인들이 보호자와 피보호자 또는 주인과 손님 사이에 맺은 숭고한 계약을 깨뜨리는 것을 두려 워했음을 보여 준댜 이에 대한 예는 무수히 많지만 여기서는 한 가 지 예만을들겠다. 사마우알 븐 아디야 Samavlal b. 'Ad iy a 의 이야기 아랍인돌이 즐겨 하는 말에 <사마우알보다 더 충실한 A wfa min al-Sa- maw'al> 또는 <사마우알 같은 충성심 wafa' ka-w afa'i al-Samaw'al> 이 있다. 이 고사성어는 유태교를 믿는 유태계 아랍인으로 메디나에서 북쪽으 로 얼마간 떨어져 있는 타이마 Ta yma의 알-아볼라끄 al-Abl aq(얼룩말)라고 하는 성채에서 살고 있던 사마우알 븐 아디야에 관한 것이다. 그곳에 그는 샘울 파서 찾아오는 아랍인들을 환대하였다. 이들은 그의 성에서 식량을 공 급받고 그곳에 장을 세웠다. 시인 이므루 알-까이스는 적의 맹렬한 추격을 받고 시리아로 도망하던 중 사마우알에게 피신하였는데 다시 길을 떠나기 앞서 선왕으로 부터 물려받은 다섯 벌의 갑옷을 주인에게 맡기고 떠났다. 그 후 콘스탄티노플에 무사히 도착하여 비잔틴 황제에게 빼앗긴 왕국을 되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였다. 그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아무 42) I:lamasa, 3'2: 7.
런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귀로에 죽고 말았다. 한편, 이므루 알-까이스의 숙적인 히라의 왕은 하리쓰 븐 잘림Barith b. Zalim의 지휘하에 군대를 파 견하여 사마우알에게 갑옷을 내놓도록 요구하였다 . 사마우알은 일종의 배신 행위를 할 수 없다며 성 안에서 버티었다. 어느날 , 포위하고 있던 적병이 사냥을 나온 그의 아들을 생포하였다 . 하리쓰가 사마우알에게 물었다. < 이 소년을 알겠는가? > < 그렇소 내 아들이오. > < 그럼 그대 수중에 있는 것을 내놓겠소? 그렇지 않으면 그를 없애 버리겠소.> 사마우알이 옹수하였다. <그를 없애든지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 나는 약속을 저버릴 수도 없고 나 를 찾아온 친구의 재산울 포기할 수도 없소 .> 그리하여 하리쓰는 소년을 칼로 찔러서 몸통 한 가운데를 반쪽 내버렸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포위를 풀었다. 이에 사마우알이 다음과 같이 시를 읊었다. <나는 킨다족의 갑옷을 지켰네 . 431 사람들은 신의를 저버리고 비난을 받지만 나는 진실하네. 언젠가 아버지 아디야‘Adiy a 가 훈계하셨지. ‘사마우알이여, 내가 세워 놓은 것을 부수지 마라.’ 나를 위해 아디야는 탄탄한 성벽을 쌓아주고 마음대로 물을 길어 올릴 수 있게 우물도 파 주셨네 . 어찌나 높은지 비스듬히 날라오는 독수리도 어지럽 타네. 불의를 보면 결코 가만 있지 않으리 . >44 1
43) 이므루 알-까이스는 중앙 아라비아의 유력한 부족인 킨다Kin da 의 왕자였다.
44) A g函1f, xix , 99. 마지막 두 행은 인용시에는 빠져 있지만 1881 년 베이루트에서 발간된 Ag h an[, vol. ii, p. 18 에는 나타나고 있다.
손님에 대한 환대와 관대함의 전형적인 베드윈 상(像)은 많은 일 화가 전해지고 있는 하팀 따이이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다음 일화 에서 아랍인들이 이 주제를 얼마나 과장하여 다루는지 알 수 있다.
하팀 따이이 Hati m TaW i 하팀의 어머니가 그 를 뱃속에 가졌을 때 꿈속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죽 < 어느 것을 더 원하느냐? ― ―하팀이라 불 리 는 관대한 아 들이냐 또는 다른 사람들의 아들 열 명이 다 그렇듯이 힘 세고 싸움터에서 는 사자처럼 용맹스러운 아이들이냐. > 그녀는 < 하팀 > 이라고 대답하였다. 하팀은 자라면서 음식을 갖고 나가는 습관이 들어 같이 먹을 사람이 있으 면 나누어 먹고 그렇지 않으면 음식을 버리는 것이었다. 하팀의 아버지는 그가 음식을 낭비하는 것을 알고 그에게 어린 노예 소녀와 새끼 밴 암말을 딸려 낙타 떼롤 돌보게 하였다. 목초지에 도 착 한 하팀은 같이 어울릴 사람 을 찾아보았으나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길가에 나와 보아도 아무도 없 었다 . 그가 이처럼 열심히 사람을 찾고 있을 때, 길에서 낙타를 타고 오는 한 패거리의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맞이하러 나갔다. 그들이 말했다. <젊은이, 우리에게 대접할 것 좀 없소? > <저기 있는 낙타 를 보고도 대접할 것을 찾소?>라고 그가 대답하였다 . 이들은 아비드 븐 알-아브라쓰와 비쉬 르 븐 아비 카짐 Bis h r b. AbI Khazirn, 나비가 알-두브야니 였으며 누만 왕 에게 가는 도중이었다 으 하팀이 자기들을 위해 낙타 세 마리를 잡는 것을 보고 아비드가 말했다 . <우유나 좀 얻어 마시고 싶었는데 좀더 내놓더라도 낙타 새끼 한 마리면 족할텐데요.> 하팀이 대꾸하였다. < 압니다. 여러분이 생김새와 옷 모양이 각기 다른 것을 보고 한 나라에서 오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여러분 각자가 보신 것을 돌아가셔서 그대로 말씀해 주시기 바라 서입니다 . > 그래서 이들은 그를 찬양하는 시를 지어 그의 마음씨 넓음을 칭송하였다. 하팀이 말했다. <여러분께 친절을 베풀고 싶었을 따름인데 여 러분의 마음씀이 저보다 더 훌륭하십니다. 신에게 맹세컨대, 여러분만 괜찮 으시다면 낙터를 모두 잡아서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 시인들은 그의 뜻에 따라 각자 앗마리의 낙타를 받아 여행을 계속하였다. 하팀의 부친은 이 소 식을 듣고 달려와 <낙타가 다 어디 갔느냐?>고 물었다. 하팀이 대답하였다. <아버님, 저는 그분들을 통해서 산비둘기의 발목 고리처럼 당신을 늘 따라 다닐 영원한 명예와 명성을 당신께 드린 것입니다 . 그리하여 사람들은 저희 45) 본서 p. 99 참조.
를 칭송한 시구를 항상 기억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낙타 를 준 데 대한 보답입니다. > 이 말을 듣고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 네가 내 낙타를 그렇게 했느냐? > < 예 > < 아이구, 이제 너와는 같이 살지 못하겠다. > 그리하여 하 팀의 아버지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떠나 버렀다. 하팀에게는 노예 소녀와 암말 , 새끼 말만을 남기고 . ~61
46) Ag hani, xvi , 98. II. 5-22.
하팀의 딸과 예언자 하팀의 딸이 포로가 되어 예언자 앞에 끌려와 다음과 같이 말했 다고 한다. < 무함마드여, 저의 아버님도 돌아가시고 저를 변호해 줄 사람도 떠나고 없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를 풀어 주시어 저의 불 행에 아랍인들이 기뻐하도록 하지 마십시오. 저는 부족장의 딸이랍 니다. 아버님께서는 포로된 자들을 풀어주시고 그들을 애지중지 보 호해주셨고 손님에게는 환대를 베푸셨습니다. 또 배고픈 자는 배부 르게 해주시고 고통받는 지는· 위로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안부를 물었습니다 . 도움을 청하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저는 그 하팀의 딸입니다.> 예언자(그분에게 신의 축복과 평화가 깃들기를)가 답하였다. <아가씨, 진실되게 믿는 지는· 아가씨가 지금 이야기한 그와 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 그대의 아버지 가 무슬림이라면 당연히 우리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오. ‘그에게 신 의 자비가 있기를!' > 예언자가 말을 이었다. <그녀를 풀어 주어라. 그녀의 아버지는 고귀한 예의를 사랑하였도다. 하느님은 그들을 똑 같이 사랑하신다 .> 4 7)
47) A g ha 마, x vi, 97, I. 5 이하.
또한 하팀은 유명한 시인이기도 하였다 . 48) 다음은 부인 마위야 Maw iyy a 를 위해 지은 시의 일부이다.
48) 그의 시집 (D i wan) 은 슐세스 F . Schul th ess 가 번역, 주석을 달아 편찬 하였다 (Le ip z ig, 1897).
<압둘라 ‘Abdullah 와 말리크 M 証 k 의 딸이여 , 또한 예멘 산 옷감으로 만든 두 벌의 외투 를 걸친 그분의 딸이여! 밤색 말~ 91 을 타고 달린 영웅의 딸이여! 그대가 식사를 차려 놓으면, 손님이나 밤새 달려온 여행자 또는 이웃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기를 니는 간절히 바랐지 . 구두쇠처럼 혼자서만 먹지는 않으니. 나 떠난 후, 사람들이 책망할 말이 정말로 두렵네 . 손님이 우리 집에 머무는 동안 진정 나는 그의 노예이도다 . 내 본성에 노예 기질이란 없지만. > 50 1
49) [역주〕 정확히는 밤색에 흰색 또는 회색의 털이 섞인 말이다.
50) Ifam쵸 a, 729. 셋째 행에 나오는 영옹은 바흐달라 Bahdala 의 아미르 븐 우하이미르‘Amir b. Uba ymir이다 . 언젠가 아라비아 제 부족들의 사자(使者)들이 히 라에 모였을 때 문디 르 븐 마 알-사마왕이 예 멘 산 옷감 두 필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가장 고귀한 부족민은 일어나서 이것을 갖도록 하라 . > 그러자 아미르가 나아가 한 필은 허리에 감고 다른 한 필은 어깨에 걸치고 당당히 이 상을 차지했다.
여성의 지위 여기서 이슬람 이전 사회의 여성의 위치와 영향력에 대해 완벽하 지는 않지만 개략적이나마 독지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게끔 잠깐 본론에서 벗어나는 것도 괜찮으리라. 대체로 여성들의 지위는 높은 편이었고 그들이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남편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으며 남편으로부터 학 대를 받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기 부족에게 돌아갈 수도 있었 다. 어떤 경우에는 직접 청혼을 하기도 하고 이혼할 수 있는 권리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노예나 재산이 아닌 동반자나 동둥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또 여자들은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고 전사에게 는 용감히 싸우도록 기운을 북돋워 주었다. 아마도 중세 유럽의 기 사도 정신은 이교도 아라비아에서 유래된 것이리라 <의협심 넘치
는 행동, 모험을 찾아 말을 타고 달리는 것, 포로가 된 여자들을 구 출하는 일, 또 어디서든 곤경에 처해 있는 여자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는 것 둥 ‘기사도 C hi v alry’란 말의 뜻처럼 기사 , 특히 귀족 출 신의 기사란 모름지기 예의 바르고 훌륭한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아랍인들이 추구하는 이상 이었다 . >5 1 ) 그러나 여인들의 기품은 남성들의 영웅적 행위나 헌신적 인 애정에서만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노래, 전설 , 사서(史 書 )에 도 기록되어 전해진다 . 아라비아의 여걸둘 1 쿠르슐 Khurshub 의 딸 파띠마 Fa ti ma 쿠르습의 딸인 파띠마는 <알-문지바토 al - M 끄1 j i ba t > 죽 <영웅 들의 어머니>란 칭호를 갖고 있던 당대 세 명의 여걸 중 하나였다 . 그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세 아들 라비아Rabi', 우마 라 ‘Um 虹 a 와 아나스 Anas 는 <완전 무결 al-Kamal a>이라 불렸다. 어 느날, 하말 븐 바드르 알-파자리 I:Iama1 b. Badr al-Fa zari가 파띠마 의 압스 ‘Abs 부족을 급습하여 그녀를 포로로 잡았다. 그녀룰 낙타 에 태워 끌고가자 그녀가 외쳐댔다. <여보시오. 당신 정신이 오락가 락하는 모양이요 . 맹세컨대, 당신이 나를 포로로 잡아 앞에 있는 언 덕을 넘어가기만 하면 당신과 지야드의 아들들(지야드Ziy ad 는 자기 남편의 이름임) 사이는 결코 평화롭지 못하게 될 것이오. 사람들은 마음에 내키는대로 지껄이게 될 것이고 악한 마음을 품는 것만으로 도 족히 싸움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오.> <내 낙타나 지키게 하 려고 당신올 끌고가는 것이오>라고 그가 말했다. 파띠마는 그의 포 로가 된 것을 확신하자 타고 있던 낙타에서 곤두박질 쳐 자살하였 51) Lady Anne and Mr. Wi lfrid Blunt, The Seven Golden Odes of Paga n Arabia , Intr od uctio n , p. 14.
다. 그녀는 자식들에게 치욕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52) 충절 로 이름을 남긴 여자 가운데 푸카이하 Fuka y ha 와 움 자밀 Umm Jamil이 있다. 푸카이하에 관해서는 디움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52) A g函11, xvi , 22, 11. i0- 16.
2 푸카이하 그녀의 부족민들은 도적인 술라이크 븐 술라카 Sula yk b. Sulaka 의 기습 공격을 받고 그에게 보복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 가 이름난 달리기 명수이므로 원로 sha yk h 들의 조언에 따라 그가 목이 말라 물가에 가서 물을 마시게 되면 잘 뛸 수 없을 줄 알고 미리 물가로 가서 숨어서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술라이크 는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을 알고 가까운 천막 집으로 피신하였는 데 그것은 푸카이하의 천막 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던 겉 옷으로 그를 덮어 준 다음, 칼을 빼어 들고 추적자들을 가로막고 나 섰다. 그들이 술라이크를 내놓을 것을 완강히 요구하자 그녀는 머리 에 쓰고 있던 베일을 찢으며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그녀의 오빠들 이 달려와 술라이크를 보호해 주었고 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53) 지면만 허락한다면 <여장부>들에 관한 전설을 좀더 길게 인용해도 좋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이 명예와 충절을 얼마나 중시하고 있 었는지를 예시하였지만 이는 동시에 그녀들의 우아한 기품과 재치, 열정을 보여 주는 예도 된다고 생각한다.
53) 같은 책 , xviii, 137, 11. 5-10. Freyt ag, Arabum Proverbia , vol. ii, p. 834. z8.
몇몇 여자들은 시재(詩才)도 뛰어났다. 그들은 특히 사자(死者)에 대한 시를 지었다. 영옹을 애도하거나 찬양하는 데 영웅의 어머니나 누이들이 최적이었다는 것은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에 있어 여성의 고귀한 성격과 위치를 보여 주는 결정적 중거가 된다. 한편, 연인사
이의 사랑하는 여자를 칭송한 시는 전혀 다른 어조를 띤다. 시에서 여주인공의 육체적 매력은 충분히 묘사되지만 도덕적 미에 대한 음 미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대한 주목할 만한 한 가지 예외가 샨파라의 송시 서두에 나타난다. 이 시 구절은 번역이 쉽지 않다. 찰스 라이얼 경에 의한 이 고대 아랍 시의 번역이 성실하고 공감이 가는데 모든 아랍 문학도는 이를 접해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그 의 말을 인용 해보자. <『라미야Lami,yya』에서 최고의 미덕인 용맹 스러움과 냉철함, 남성다운 힘을 동시에 보여 주었던 샨파라가 그의 또다른 송시 서두에서는 그 어느 것과도 비할 데 없는 이교도 아라 비아의 가장 아름다운 여성상을 그려내고 있다.>터) 우마이마 Uma yma <수줍은 듯 얼굴을 가리고 평온한 모습으로 찬찬히 걷는 그녀가 나를 매혹시켰다. 내리뜬 눈은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찾는 듯하고 눈길을 주지 않고 살며시 대꾸한다. 해뜨기 전에 그녀는 자기가 먹을 음식을 갖고 나간다. 그것은 기근이 들어 굶주린 부안들에게 거저 주기 위한 것. 허구 많은 이웃 사람들의 천막은 웃음거리지만 그녀의 천막 집에는 비난이 눈꼽만큼도 쏟아지지 않는다. 남편은 창피스러운 뜬 소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마이마의 이름은 깨끗하고 성스럽기 때문에. 기쁨이 충만하여 저녁에 집에 돌아온 그는 ‘어디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냈느니?'라고 그녀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다. 안성맞춤의 키에 호리호리하면서도 통통한 그녀는 ―미(美)의 여신이 세속의 아이를 우아한 요정으로 변모시킬 수만 54) Andent Arabia n Poetr y, p. 81.
있다면!一 진정 요정이었다. > 도)
55) M ufa(j< ;bli y ya t, ed. Thorbecke, p. 23.
이처럼 정교히 묘사된 성격은 오직 사막의 지유·로움 속에서만이 꽃피고 무르익을 수 있었다. 이슬람이 어떤 면에서는 아라비아의 여 성들을 한층 높은 수준의 문명으로 끌어올렸을지도 모르지만 그들 의 사회적 영향력까지도 증대시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시구가 충분한 답이 된다. 조)
56) Goldzih e r, Muhammedanis c he Stu d ie n , Pa rt II, p. 295 이 하 참조.
물론 이 모든 것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기도 하다. 힘이 정의이며 <힘 있는 자만이 쟁취하며 능력 있는 자만이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단순한 방식>이 널리 통용되는 곳에서 여자가 궁지에 빠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 영아살해 <자힐리야>시대에 널리 행해지던 여아의 생매장 관습은 강우량 의 부족으로 인한 잦은 기근이나 명예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동 시대의 아버지들은 쓸모없는 식구들만 건사하게 되거나 딸들이 전쟁 포로가 됨으로써 치욕을 당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꾸란에서처럼 딸의 출산은 불행의 씨앗으로 간주되었다 .57)
57) [역주] 꾸란에서 영아 살해 를 언급하고 있는 장은 모두 5 장 (6, 16, 17, 60, 81 장)이다 . 그 중 81 장 8 절에서 생매장을 의미하는 아랍어 동 사 wa'ada 의 어근 w'd 이 유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꾸란 구절의 전후 문맥이나 그 내용에서 이 여아 생매장이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사 회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관습이었음과 무함마드는 이를 큰 죄악 으로 간주하고 이 룰 금할 것을 이슬람의 주요한 계율 중 하나로 삼았 음을 알 수 있다 . 그러나 영아 살해의 관습이 반드시 여아에게만 적 용된 것은 아니었다 . 죽 꾸란 구절 중
다. 이 에 대 해 서 는 Avner Gil ad i , Some Obseroati on s on In fan ti cide in Medie v al Muslim Socie t y , Int. J. Midd le East Stu d . 22(1 9 90), pp. 185-200 참조.
<또 그들은 하느님께 딸들이 있다 하니, 그분께 영광이 있기를! 그들은 그들대로 좋아하는 것이 있더라 . 그들 중 누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에 접하면 그 안색이 검게 변하며 58) 성내더라. 나쁜 소식을 듣고 사람들로부터 몸을 숨기며 ‘부끄러움을 참고 그대로 살려둘까, 그렇지 않으면 땅 속에 묻어버릴까?' 생각한다 .>58 )
58) [역주] 아랍인들은 검정색을 괴로움과 슬픔의 상징색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좋지 않은 일을 당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그의 얼굴이 검게 되었다>고 말한다.
59) 꾸란, 꿀벌의 장 (16 : 57-59).
속담으로 <딸을 죽이는 일은 친절한 행위다>와 <딸의 매장은 고 상한 행위이다>가 전해 온다 .60 ) 이슬람은 이같은 야만적 행위에 종 지부를 찍었는데 꾸란은 이를 명백한 금기 사항으로 규정하고 있다. <가난이 무서워서 자식들을 죽여서는 얀 된다. 우리들(하느님)이 그 들이나 너희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나니. 그들을 죽이는 것은 큰 죄악이다 >61)
60) Freyt ag, Arabum Proverbia , vol. l, p. 229. 61) 꾸란 17 장 31 절. 81 장 8-9 절의 부활의 날에 대한 묘사와 비교. <산 채로 매장된 계집애가 질문을 받으니, 무슨 최로 살해되었는가 하고.>
아마 아랍 시에서 가장 심금을 울리는 구절은 가난에 찌든 아버 지가 딸이 자기보다 먼저 죽음으로써 친척들의 무자비함을 모면할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을 노래한 시일 것이다. 가난뱅이의 딸 <우마이마를 위해서라면,
가난도 슬퍼하지 않았고, 그녀가 먹고 싶어하는 빵조각을 집에 가져가려고 칠혹같은 어둠의 공포도 헤쳐나갔다 . 몰인정한 친척에 더부살이할 수밖에 없는 이 고아 소녀의 무정한 운명을 뻔히 아는 나의 소망은 내가 오래 사는 것 언젠가 내 자식이 가난해지고 난폭한 열정에 부딪치면 창피를 당할까 621 두렵도다. 그녀는 나의 장수를 기원하지만 나는 그녀의 죽음을 기원하여야 하네 . 아, 슬프도다. 죽음은 무기력한 여자에게 가장 숭고한 구혼자 . 631 숙부가 가혹하고 오빠가 매정하게 대할 때, 나는 그녀의 마음속에 사무칠 말을 한 마디도 못할 거야. >
62) 직역하면 <그리고 푸줏간 널판지 위의 그녀의 살에서 베일을 찢어 • 버린다>이다 . 죽 맨 처음 온 사람에게 무방비로 몸을 맡긴다 .
63) Jfam쵸 a, 140. 사실 이 시는 이슬람 이전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이 슬람시대 후기에 지어진 시지만, 그 분위기는 여기서 인용되기에 충 분할 만큼 불신앙적인 것이다. 작자인 이스하끄 븐 칼라프 lsba .q b. Khala f는 마문 Ma'man(813-833) 시 대 에 살았다 . 그는 자신 의 양녀 보 다 오래 살아__우마이마는 그의 누이의 딸이었다-그녀를 기리는 애가를 지 었는데 무바라드 al-Mubarrad 의 Kami l, p. 715, l. 7 이하에 보존되 었으며 본문의 시 와 함께 Sir Charles Ly a ll, Ancie n t Arabia n Poetr y, p. 26 에 번 역 되 어 있다.
또 다른 이는 말한다. <내 주위에 떼 지어 모여드는, 가날픈 병아리 같은 내 어린 딸들만 아니면 빵을 구하기 위해
바다와 육지롤 찾아 헤메리라 자식들은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고 우리의 마음은 그들뿐인데 그들에게 불어오는 바람이 나의 잠을 설치게 하네 .>터)
64) I;Iama sa, 142. Ly a ll, 앞의 책, p. 28.
적을 E 흡는 법 <증오와 사랑 ru et arm>, 시인의 이 말은 베드윈들의 윤리관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교도 아 랍인은 자기 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우호적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적에 대해서는 증오심이 대단하였다. 공격을 받고도 반격을 하지 않 은 자는 겁장이로 간주되었다. 체면이나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이라 면 모욕을 당하고 그대로 넘길 수 없으며 반드시 복수를 해야 한다. 약탈자들에게 낙타를 빼앗겨 손해를 보고 마음이 상한 아랍인이 자 기를 도와 주기를 거부한 친척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그들은 숫자가 얼마이든, 모두 무익한 존재. 우리 부족은 약간의 손해를 보더라도 악인들이 저지른 악행을 용서하는 부족. 그들은 원수를 자애로 갚는다 . >651
65) I;Iam쵸 a, 7.
기독교도나 무슬림 도덕군자들은 마지막 구절에 찬사를 아끼지 않겠지만 당시의 청중들에겐 부끄럽게도 나무라는 말로 들렸으리라. 적을 다루는 방법이 다음 구절에서 분명히 드러나 있다.
<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도 그대를 업신여기는 자에게는 똑같이 대해 주어라. 그의 콧대를 꺾을 수 없다면, 그가 수중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라 . 어쩔 수 없는 때는 그와 친해지고 그보다 우위에 있을 때 공격하라. > 66 1
66) 같은 책 , 321.
혈족에 의한복수 무엇보다도 피는 피를 불렀다. 이러한 복수의 의무는 이교도 아랍 인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복수는 <인과율(因果律)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당사자는 잠 못 이루며 식욕과 건강까지 모두 잃고 만다.> 그것은 피롤 맛보 지 아니하고서는 고통스러운 갈증을 해소할 수 없는 일종의 광적인 명 예병 dise ase of honor 이었다. 복수는 가능한 한 살인자 당사자에 게 행해지나 그의 부족민 중 한 명을 골라 복수를 하기도 하였다. 대개 이 정도로 복수가 끝나기도 하나 어떤 경우에는 당사자들의 일가 천척 전체가 동원되는 등 양 부족간의 전면전의 발단이 되기 도 하였다. 죽 쿨라이브가 피살되어 바크르족과 타글리브족 양 부족 간에 40 년 전쟁이 일어난 것과 같다 .671 피살자에 대한 보상으로 그 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오늘날의 돈이나 마찬가지이던 낙타롤 위자 료 diy a로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한다 치더라도 복수의 피 보다 우유(죽 암낙타)를 선택한다는 것은 맞대놓고 책망 듣기 십상 의 일이었다 .681 아랍인들의 진실한 감정이 다음 시구에서 드러난다.
67) 본서 p. 108 이하 참조.
68) Rli ck ert 's Ham 쵸 a, vol. i, p. 61 이하 비교. [역주] 프리드리히 뤼케 르트 Fr i e dri ch Rli ck ert (1788-1866) :독일의 위대한 시인으로 아랍 시 와 페르시아의 많은 시를 번역하였다.
<칼로써 내 수치심을 씻어버리리, 어찌 되든 신의 뜻에 따르리라 !>69 J
69) Jfam쵸 a , 30.
아랍인들은 억울하게 죽은 이의 혼이 자신의 원수 를 갚을 때 까 지는 올빼미 넒m a( 또는휴cla.)가 되어 < 이스꾸니 I squru!(나에게 마실 것을 달라!)>고 의치며 자기 묘에 나타난다고 믿어 왔다 . 70 1 그러나 이교도들의 복수관은 미래 지향적이기보다는 과거에 보다 더 집착 하였다. 아련하기만 한 내세는 부정(父情)과 효(孝), 전우애에 대한 뿌리 깊은 기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70) [역주] 또 다른 아랍의 민간 신앙에 따르면, 올빼미는 본래 인간이 었는데 아들을 때려 죽였기 때문에 알라가 그를 올 뻬 미로 만들어버렸 다는 것이다 . 그리하여 인간에 대한 중오심에서 특히 아이들에게 전 염병인 <열병 Har 江 a> 을 전파시킨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성자가 올 빼미의 못된 짓을 막고자 손으로 올빼미의 머리를 쳤는데 그 자국이 남아서 머리에 검은 줄이 생겼다고 아랍인들은 믿는다 . Joh n Walker (1934), Folk Medic ine in Modem Eg ypt, Luzac & Co., pp. 46-47 참조.
부족간의 복수라는 졸속적인 심판은 그 나름대로 유익한 측면이 있었다. 그것은 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무법의 본능에 탐닉할 수 있 는 사람들을 자제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 서 보면, 그것이 원시적 제도란 점에서 보다는 고대 아라비아의 삶 과 문학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 다. 이 주제를 충분하고도 적절히 설명하려면 본래의 계획에서 훨씬 벗어니는 것이 되므로 『 노래의 책 』 에 보존된 풍부한 자료 중에서 까이스 븐 알-카땀 Qays b. al - Kha tim이 자기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살해자들에게 어떻게 복수했는지를 알려 주는 이야기를 하나 골라 보았다 .71 )
71) Ag h anr, ii, 160, 1. II -162. I = 베 이 루트판 p. 13 이 하.
까이스 븐 알-카땀의 복수 이야기 아부 우바이다 Abu 'Uba y da 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 까이스 의 조부인 아디 븐 아므르-‘Adi b. 'Amr 는 아므르 븐 아미르 븐 라비아 븐
아미르 븐 싸싸아족 Banu ‘Amr b. •A mir b. Rabfa b. ‘Amir b. $a‘휴 ‘a 의 말리크M却 k 라는 사람에 의해 살해되었고 아버지 카땀 븐 아디 Khati rn b. ‘Adi는 하자르Haj ar 에 거주하던 압드 알겁가이스족 Bano 'Alxl al- Qay s 의 사람에 의해 살해당했다. 카땀은 아버지 아디의 복수를 하지도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의 아들 까이스가 아직 어릴 때였다. 까이스의 어머니는 아들이 자기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나섰다가 죽지나 않을까 걱정 이 되어 주거지 입구에 있는 모래더미에 돌을 쌓아두고 까이스에게 말했다 . <이는 너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묘이다.> 까이스는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가 싸움터에 나설만큼 건장하게 자란 어느날, 자파르족의 한 젊 은이와 말싸움이 붙었는데 이 젊은이가 말하기를,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네 팔힘을 나한테 쓰는 것보다는 너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살해한 자들에 게 쓰는 게 현명하리라. > <누가 죽였지?> <너의 어머니께 여쭈어 보아라. 얘기해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까이스는 칼을 들고 어머니에게 달려가서 칼자루를 땅에 세워 칼날을 가슴에 대며 어머니에게 말했다. <누가 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죽였습니까?> <그들은 여느 사람들처럼 돌아가셨다. 이것이 야영지에 있는 그분들 묘이다.> <정말 누가 그들을 죽였는지 말씀 해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칼이 제 등을 꿰뚫도록 제 온 몸의 무 게로 누르겠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누가 그 분들을 돌아가시게 했는지 를 말해 주었고 까이스는 그 살인자들을 처치할 때까지는 눈을 감을 수 없 다고 맹세하였다. <오, 나의 아들아, 너의 할아버지를 죽인 말리크는 키다쉬 븐 주하이르Khi dash b. · Zuha yr와 같은 부족 사람이며 너의 아버지가 언젠 가 키다쉬에게 친절을 베풀어 준 적이 있어 그가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 러니 그에게 가서 조언을 구하고 도움을 청하라.> 까이스는 서둘러 길을 떠났다. 그의 낙타가 야자나무 우거진 오아시스에 다다르자 샘에서 물통의 끈을 칼로 잘라 물통이 샘 속에 떨어지게 하였다 . 그런 다음, 낙타 고삐를 잡고 야자열매 두 자루를 낙타에 실으며 말했다 . <내가 없는 동안 누가 이 노인네(자기 어머니를 가리킴)를 돌보아 주겠는가? 혹시 내가 죽으면 오아 시스에서 나오는 것으로 어머니를 모시도록 하고 돌아가시면 이 오아시스 는 그 자의 것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살아 돌아오면, 내 재산은 나에게 돌 아오며 그는 먹고 싶은 만큼의 야자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부족
한 사람이 소리쳤댜 < 내가 하겠소. > 그래서 까이스는 그에게 오아시스를 맡기고 키다쉬에 관해 수소문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를 마르 알-자호란 Marr al- 도에서 찾아보라는 귀뜸울 들었으나 그 천막에도 그가 없자 키다쉬의 손님들이 더위를 피해 찾던 나무 그늘 아래 앉아 키다쉬 부인에 게 < 먹을 것이 있습니까? > 라고 소리쳤다. 그에게 다가온 그녀는 그의 잘 생긴 모습에 반해 말했다 . < 야자 외에는 당신에게 대접해 드릴 게 없어요.> < 상관없소. 무엇이든 좀 가져오시오`> 잠시후, 부인이 다른 사람을 시켜 그 에게 큰 나무그릇q u 遠‘으로 하나 야자를 보내오자 까이스는 야자 한 개를 집어 반쯤 먹고 나머지 반을 그릇 속에 도로 넣어 키다쉬 부인에게 다시 갖다 주도록 시켰다 . 그러고 나서 그는 볼일을 보기 위해 떠났다. 키다쉬가 돌아와 부인이 까이스의 소식을 전하자 그가 말했다. <이 자는 보호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i2 1 부인과 함께 앉아 막 따온 잘 익은 야자를 먹고 있는 데 까이스가 낙타를 타고 돌아왔다 . 키다쉬는 가까이 다가오는 낙타 탄 이 의 발을 보자 부인에게 말했다. < 이 자가 바로 그 손님인가?> <예> <그의 발이 내 친한 친구 카땀 알-야쓰리비 KhaUrn al-Yath ribi 같구나.> 까이스 가 다가와 천막 끈을 창끝으로 치며 들어가도 좋은지롤 물었다. 허락을 받 고 키다쉬를 대하자 자기의 혈통을 말하며 지나간 일에 관해 얘기해 주고 자신의 용무에 대해 도움과 조언을 구하였다. 키다쉬는 그에게 환영의 인사 말을 하고 그의 부친에게서 받은 호의를 회상하며 말했다. <그 일이라면, 진작 자네가 이런 얘기를 꺼낼 줄 알고 있었네. 자네 조부를 살해한 자는 내 사촌인데 복수를 도와 주마 . 우리가 약속 장소에서 만나면 그 사람 옆에 앉아 얘기를 나눌텐데 내가 그의 넓적다리를 칠 때, 그 사람을 덮쳐서 없애 버려라.> 다음은 까이스 자신의 이야기이다:<키다쉬를 따라간 나는 먼저 가 있다가 키다쉬가 그와 합석하고 그 사람의 넓적다리를 때리는 것을 보 고 ‘두 알-쿠르싸인 Dh(i al-Kh 따~yn(두 개의 고리가 달린)’ 칼로 그의 머 리를 찔렀다.> <그의 부족민들이 나에게 달려들어 죽이려 했으나 키다쉬가
72) 베드윈들은, 만일 누구든지 자기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든지 천막의 끈에 손을 댄 자는 자기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사람을 <다킬 d akhil>이라 부른다. Burckhardt, Note s on the Be- douin s and Wahaby s (London, 1831), vol, i, p. 160 이 하 및 329 이 하.
가로막고 외쳤다. ‘그에게 손대지 마라 . 그는 다름아닌 자기 조부의 살인자 룰 죽였을 따름이다 . '> 그 다음 키다쉬는 낙타에 올라 타 까이스와 함께 그 의 아버지를 죽인 압드족 사람을 찾기 위해 출발하였다. 하자르가 가까워지 자 키다쉬는 까이스에게 직접 가서 그 사람을 찾아보도록 권하고 만약 그 를 찾아내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시켰다. <내가 당신의 부족 출 신 도적때를 만나 내 물건들을 빼앗겼는데 누가 족장인지를 물으니 당신에 게 가보라고 하더군요 그들에게서 내 재물을 찾을 수 있도록 같이 가주시 오> 계속해서 키다쉬가 말했다 . <만일 그가 눈치채지 않고 너를 따라오면 네 뜻을 이룰 수 있을테지만 그가 다른 사람을 시켜 따라가게 하면 웃도록 하여라. 그가 왜 웃느냐고 묻거든 ‘우리가 고상한 사람이라면 당신처럼은 하지 않습니다. 자기 부족 출신의 도적에게 갈 때는 칼은 놔두고 채찍만 가 지고 혼자 갑니다. 그러면 족장을 본 도적은 두려운 나머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고 맙니다’ 라고 답하여라 . 만약 그가 동행 없이 가겠다면 네가 취할 방도는 뻔하다. 그러나, 그가 동행 없이는 가지 않겠다고 하면 그를 나에게 데려오도록 하여라. 네가 그들 모두를 모조리 없앨 수 있을테 니까 . > 그래서 키다쉬는 나무 그늘 밑에 자리를 잡고 한편 까이스는 압드 족 족장에게 가서 키다쉬가 시킨대로 그에게 말했다. 족장은 체면이라는 급 소를 찔렀으므로 부족원들을 물러가게 하고 까이스와 단둘이 갔다. 까이스 가 키다쉬에게 돌아오자 키다쉬가 말했다. <까이스여 선택하라! 내가 그대 룰 도와주랴, 너를 대신할까?> 까이스가 대답하였다. <어느 것도 바라지 않 지만 만일 그가 나를 죽이더라도 당신은 그의 손에 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다음 그는 압드족장을 덮쳐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관통시켜 죽사시켰 다. 까이스가 그를 처치해 버리자 키다쉬가 말했다. <우리가 지금 도망치면 그의 부족이 우리를 쫓아올지 모르니 여기서 멀지 않은 곳으로 가자. 그들 온 미처 네가 그를 살해하고 가까운 곳에 숨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테니까. 아니지, 그들은 그를 애타게 찾으며 그의 발자국을 따라오다가 그가 살해된 것을 알고서는 사방으로 우리를 추적하기 시작할 것이고 결국 단념하고 돌 아갈 것이다 . > 그래서 두 사람은 모래 웅덩이에 들어가 그곳에서 며칠을 보낸 뒤(키다쉬가 예견한대로 정확히 되었기 때문에) 추적이 끝나자 그곳에 서 나와 키다쉬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곳에서
까이스는 그와 헤어져 자기 부족에게 돌아갔다. 타압바따 샤란의 『 복수의 노래.!l 혈족끼리의 복수를 노래한 시는 이교도 아랍인들의 최고의 장점과 부끄러운 결점을 동시에 담고 있다. 즉 , 용기와 결단력, 죽음에 대한 경멸과 불명예에 대한 두려움, 산 자에 대한 것처럼 죽은 자에 대해 서도 일편단심으로 정성을 다하는 것, 자신의 혈육에 대한 깊은 관 심과 다정다감함이 그려져 있는가 하면 무자비한 기질, 불성실한 잔 악함과 살인자를 끝까지 추적해서 잡는 포악한 행동, 살해된 자에 대한 야만적이고 거의 비인간적인 광희(狂 喜 )가 나타나고 있다. 다음 에 소개하는 유명한 『복수의 노래』는 타압바따 샤란7J’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혹자는 샨파라의 걸작시의 작자이며 고대 시인들의 시를 기막힐 정도로 모방해 내는 솜씨를 가진 칼라프 알-아흐마르 Khal af al-Abmar 의 위작(僞作)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노래는 어조나 분위기가 전적으로 이교도적이다. 이 직품의 뛰어 난 가치는 괴테가 라틴어 번역본으로 읽고 나서 그 시에 대한 상 세한 비평과 함께 독일어로 번역한 시를 그의 『서-동 시집 West- oestli c h er Di IX111 』에 실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741 필자는 이 시의 독 특한 효과가 운율과 리듬에 연유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원문의 운 율과 리듬을 가능한 제시해 보고자 하였다. 운율은 <마디드 M 펴id> 이다. 죽
73) 본서 p. 140 참조.
74) Stu ttgart, 1819, p. 253 이하 . 필자가 알고 있는 다른 시 번역으로는 뤼케르트의 것 (Hamasa , vol., p. 299) 과 찰스 라이얼 경의 번역시가 있다 (An ci en t Arabia n Poetr y, p. 48). 여기서는 찰스 라이얼 경이 대 가답게 번역해 놓은것을 충실히 따랐으며 이 중 번역이 극히 안 좋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몇몇 구절은 고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 인용하였다.
_` ―-― I~'-' ―|-一 __
따라서 첫 구절은 아랍어로 다음과 같다. Inna bi'I - s h i' / bi'l la dh i / 'incl a Sal'in la-qa til an I damuho / ma yutallu 물론 아랍어 운율법은 영어의 운율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러나 다음 번역문 중 몇몇 시구(예컨대 세번째, 여덟번째, 아홉번째)는 일부 필요한 수정을 가한 것이지만 전형적인 영시의 운율과 딱 들 어맞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논급한 바와 같이 필 자의 의도는 단지 급전하는 운율과 장중하고 두드러진 운율을 제시하는 데 있으 므로 시에 변형올 가하면서 동시에 작품의 예술성을 견지할 수 있 었다. 아마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시 번역자는 자신뿐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시인은 후다일 Hudhay l 부족민에 의해 살해된 삼촌의 복수를 갚 겠다는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이야기하며 고인(故 人 )의 영웅적 기질과 적과의 전투에서 거둔 승리와 패배, 끝으로 그의 죽음에 대 한 치열한 복수심을 그려내고 있다. 75 1
75) 이에 대한 아랍어 원문은 Jfama sa, p. 382 이하에 소재함.
<골짜기 그곳에 한 사람이 죽어 누워 있는데 — 그는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복수를 절규하는 듯하다. 그는 나에게 짐을 남겨두고 떠나가 버렸도다. 내 그 짐을 기꺼이 떠맡아 지겠노라. 나, 그의 조카로서 그의 원수를 갚아야 하니 내 고집은 아무도 꺾지 못한다. 76 )
76) 이 시행 이하에서는 시인 자신이 아니라 시인의 조카에 대한 묘사 롤 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위에서의 번역은 자구를 고치지 않고 도 극적 효과를 크게 올리고 있다.
험악한 얼굴로 노려볼 때면 독을 내뿜는 독사마냥 수치심은 사라지고, 갑작스러운 비보에 애끓는 내 마음 그로 인한 마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네. 운명은-~ 사납고 심술궂지만-친구에게서 겁장이란 말을 들은 적이 없는 한 영웅을 내게서 앗아가버렸네 . 그는 엄동설한의 따뜻한 태양이며 시리우스 별빛을 가려주는 차양이다. 옆구리가 훌쭉하지만-이것이 그의 비천함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손은 크고, 대담하고 날카롭다. 과단성 있고 두려움 없는 기사이니 말을 타거나 내리거나 늘 용맹스럽다 . 그의 관대함은 비구름이 밀려오듯하며 싸움터에 뛰어들면 무서운 사자가 된다. 마을 사람들은 늘어뜨린 머리 털과 긴 외투입은 모습을 전에 보았지만 싸울 때의 그의 모습은 엉덩이가 훌쭉한 늑대와 같았다. 그는 아무나 맛보지 못하는 두 가지 맛을 지녔다. 친구에게는 꿀맛, 적에게는 쓸개의 쓴 맛을. 그는 어떤 일에 부닥쳐도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두려움을 물리쳤다. 그의 곁에는 깊이 금이 난 예멘 칼을 빼고는 아무것도 없다. 전사들은 칼을 뽑으면 전광석화처럼 단숨에 벨 수 있게 허리에 칼을 찬다. 그네들은 한낮의 무더위 속에 길을 떠나 밤길에도 계속 말을 타고 가다가 새벽녘에야 말에서 내린다. 77) 77) 원본에서는 이 시행과 앞의 구절들의 순서가 바뀌어 있다.
그들이 간간이 눈을 붙이면서 꾸벅꾸벅 졸 때, 그대가 급습을 하니 그들은 마치 홑어지는 구름처럼 혼비백산, 가차없이 우리는 그들에게 복수를 한 셈이다. 두 부족 가운데 단 한 명도 살아 남지 못했으니 . 781 아, 그네들이 그의 칼날에 낸 홈집은 그들의 칼도 그의 칼에 수없이 부러졌다는 표시, 때로는 그들을 억지로 무릎 꿇여 달리면 발이 찢어지는 뾰죽한 돌부리에 꿇게 하였다. 그리고 아침이면 그들을 참 재워 주었다. 살인에는 약탈행위가 뒤따랐다. 그들이 나를 노리지 않을 때까지
78) 시인의 숙부는 이 습격에서 사망하였지만 기습을 당한 쪽은 심한 타격을 받았다 . <두 부족>은 대 부족인 후다일족에 속해 있었다 .
나 역시 언제까지나 그들의 목숨을 노리겠다 . 먼저 내 창은 적의 피를 깊이 빨아들인 다음 , 그 핏속에 깊숙이 담근다. 오랫동안 금지되 온 술을 이제 마실 수 있게 되도다. 그 금기를 깨지 않으려고 얼마나 무진 애를 썼던가. 791 아므르 ‘ Amr 의 아들이여, 나에게 술을 따르라! 숙부에 대한 슬픔으로 내 몸이 쇠약해 있으니 그 술을 맛보리다. 후다일족 전사자들 위로 하이에나가 울부짖으며 서 있다 . 저 늑대의 반짝이는 이빨을 보라! 새벽이면 독수리떼 날개 치는 소리를 듣게 되고 그것들이 시체를 짓밟고 포식하여 날지도 못하는 것을 보리라.>
79) 복수자는 복수를 하기 전에는 술을 결코 마시지 않겠다고 엄숙히 맹세하는 것이 관례였다.
귀족의 혈통에 의해 부여된 명예 아라비아의 <명예>라고 하는 개념에 속하는 모든 미덕은 선천적 이든 후천적이든 개인적 특질로서가 아니라, 조상들로부터 물려 받 아 이를 더럽히지 않고 후손에 물려 주기 위해 잠시 어느 한 개인 에게 맡겨둔 유산 정도로 인식되었다. 아랍인들이 <귀족처럼 말과 행동을 하게 된 것>은 자신이 불후의 명성을 얻고 싶어서보다 조 상들의 명예를 지키고 그것을 본받으려는 바람에서이다. 스코틀랜 드 농민이 <아무래도 사나이는 사나이이다 a man's a man for a' th a t>라고 말하는 감정과는 동떨어진 것이지만 아람인들은 전통적 으로 전해지지 않은 미덕이나 명성은 얕잡아 본다. <목초지에서 일어난 영광은, 대대로 물려 받은 유산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110)
80) Jfam쵸 a, 679.
조상 대대로 이어지는 명성 }:Ia sa b.,/존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쌓은 튼튼한 성이나 높은 산에 비유되기도 한다 .811 시인들은 온갖 자화자 찬rnafakhir이나 욕설 rna thali b 을 구사하여 조상들의 고귀함을 큰소 리 치거나 적의 명성을 사정 없이 깎아내린다.
81) 하리쓰 H arith의 무알라까트에서 번역한 시 구절과 비교.
여기서 본 저자는 히브리어 시, 페르시아어 시, 영시(英詩)와의 비 교를 통해 아라비아 시에 대한 몇 가지 일반적인 견해를 덧붙이려 하였지만, <모범은 교훈보다 낫다>는 격언대로 아랍 문학에 조금이 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알라까트>, 죽 <걸려진 시> 로 잘 알려진 저 유명한 송시로 곧바로 들어가겠다 .821
82) 무알라까트의 최고 걸작판으로는 7 개 무알라까트 외에 아샤, 나비 가, 아비 드 본 알-아브라쓰의 무알라까트롤 담고 있는 찰스 라이 얼 경 의 A Commenta ry on Ten Anc ien t Arabic Poems(Calcutt a, 1894) 가 있다. 뉠데케는 다섯 개의 무알라까트(이므루 알-까이스와 따라파
는 빠짐)를 번역하고 독일어 주석을 달았다 (Sit zu ng s beric h t der Kais , Akad der Wi ss enschq ften in Wi en , Ph il 一 H i s t or, Klasse, vols. 140-144(1899-1901) ;아랍어 학도에게는 이 책이 최적의 번역서 이다. 만족할 만한 영문 번역판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지만 다소 산 만하기는 하여도 정교하고 독창적인 레이디 앤 불런트, 월프리드 스 카벤 불런트 Lad y Anne Blunt, Wi lfrid Scawen Blun t의 영시 번역 (The Seven Golden Odes of Paga n Arabia , London, 1903) 을 주목할 만하다
<무알라까트 Mu'alla q a t(걸려진 시)> <무알라까(복수 : 무알라까트 Mu'alla q a t) > 는 < 귀중한 물건 > 을 뜻하 는 단어 <일끄‘ilq > 에서 파생된 것으로 사람이 그 물건을 꼭 < 붙잡 고 늘어지거나> 혹은 명예로운 장소나 눈에 띄는 곳 , 또는 창고에 <걸어두는> 것에서 그 의미가 유래된다 . 83 ) 세월이 흘러 < 무알라까 > 의 정확한 의미가 잊혀졌으므로. 거기에 따른 그럴 듯한 설명을 해 야만겠다. <걸려진 시>는 이들 시의 우수성 때문에 카바 신전에 걸 려지게 된 데서 그렇게 불려진 것이라는 전설이 생겨났다. 즉, 메카 근처의 우카즈 ‘Ukaz 시장에 심사원들이 모여 시의 등급을 매김으로 써 일종의 시 경연대회가 열렸던 것이다. 시인들이 나름대로 정선한 작품을 낭송하고 그 중 잘된 작품은 카바 신전 문에 이집트산 아마 포(亞麻布) 조각에 금빛 문자로 옮겨 써서 내걸었다 . 84) 이것이 사실 이라면 고대 문헌 자료 가운데서 은연중 드러날테지만 실제로는 꾸 란이나 종교적 전승, 메카의 고대사, 또는 『노래의 책 』 같은 신뢰할 만한 고전에서도 그에 관한 언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 85) 이 전설
83) Anc ien t Arabia n Poetr y, Intr od ucti on , p. x I iv. < 무알라까트>의 의미에 관해서는 <구술(口述)에서 기록된 시 > (폰 크레머),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것>(알바르트), 목걸이에 매달린 진주처럼 <늘어뜨 린 장식>(A. 뮐러) 둥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84) 무알라까트가 금빛 문자로 쓰여진 것이라는 생각은, 이 무알라까트 의 뛰어남의 표시로서 쓰이는 Mudhabat 혹은 Mudhahhaba t(금박으로 입힌 시)라는 이름을 잘못 이해한 데서 기인하는 것 같다 . 일부 <무 알라까트>가 우카즈 시장에서 낭송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 며 아므르 이븐 쿨씀의 경우 명백히 확인되고 있다 (A ghan!, ix, 182).
85) 이 전설적인 이야기는 940 년에 사망한 이븐 압디 랍비히 Ibn 'Abd i Rabb ihi의 ‘Iq d al-Far id ( 카이 로판 히 즈라 1293 년, vol. iii , p. 116 이 하)에서 최초로 나온다.
적인 이야기를 맨 처음 언급한 이는 문법학자인 아흐마드 알-나하 스 Ahmad al-Nabbas( 약 949 년 사망)인데 그는 이 이야기를 전혀 근 거가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 라이스크Rei ske ,86) 존스 경 Sir W. Jon es,1>;71 드 사시 ~ Sacy 같은 학자들도 이 전승을 인정하긴 하였지만 신뢰할 만한 이야기는 못 된다. 헹스텐베르크Heng s t.e nberg 88’ 는 그의 저서 『 이므루 알-까이스의 무알라까트 .!)(Bo nn, 1823) 의 서문에서 다소 타당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 누가 심사위원이었 으며 어떻게 이들이 임명되었는가? 왜 이들 일곱 시만이 두각을 나 타냈는가? 더 나아가 당시에는 글쓰기가 보편화되지 않았다는 그의 반대 의견은一_ _ 그 가 반대에 집착하는 만큼의 무게를 싣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__ 6 세기 이후 아랍인들의 성격이나 관습에 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만으로도 충분히 반박되고도 남는다. 사막의 자존심 강한 후손들이 무엇보다도 시기의 대상인 부족의 명예에 관 한 문제를 외부의 중재에 맡간다든지, 시평회(詩 評 會)가 메카 근방에 서 열려 멀리서 온 부족의 참가자에게는 심사위원들의 배려가 없었 올 것이고 따라서 불공정한 판정에 순순히 따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 89)
86) [역주] Joh ann Jak ob Rei s ke(l716-1774) : 독일의 그리스학자이자 동 양학자. 근대 독일 최초의 동양학자로 간주된다. 아랍 시의 일례를 보 여 주기 위해 무타납비의 시 중 연애시와 애도시 일부를 아랍어 원문 과 함께 독일어로 번역 • 해설하였다 (1765) .
87) [역주] 영국의 동양학자 (1746-1794). 주요 저서로 번역 시집인 『 모알 라카트 Moallaka t 』 (1782 년)가 있다. 또한 페르시아 문학작품을 많이 번역하고 연구하였다.
88) [역 주] 독일 동양학자 (1820 년 사망).
89) Noldeke's Beit riige zur Kenntn iss der Poesi e der alt e n Araber (Ha nnover, 1864), p .x vii 이하 및 대영백과사전에 실린 그의 논문 Mo'allka t를 참조 .
<무알라까트> 시선(詩卽의 기원 <무알라까>를 어떻게 설명하든 간에 그 명칭은 시와 함께 동시 대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 십중팔구 이 시의 제목은 무수히 많은 시 중에서 정선된 시를 골라 별도의 시집을 만든 사람이 그렇게 명명 하였올 것이다. 이 사람은 우마이야 왕조의 후기에 활약하다 압바스 칼리파 마흐디 Mah di의 통치기 인 72 년경 사망한 유명 한 음유-시인 함마드 알-라위야I:Iamma d al-Ra wiy a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함마 드가 어떤 원칙을 가지고 시를 고르는 기준으로 삼았는지는 알 수 없다 . 다만 함마드의 시대에는 고대 아라비아의 시가가 비교적 온전 하게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모든 <무알라까트>가 장 시― __ 이것은 <일곱 개의 장시 al-Sab' al-Ti w 책>라고 불리기도 한다――-라는 사실에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뉠데케는 추측하고 있 다. 무알라까트 번역의 난점 <무알라까트>를 번역할 경우 아랍어 원문이 담고 있는 시상(詩 想)을 충실히 전할 수 없으며 기껏 직역만을 할 수밖에 없는 점을 솔직히 고백해 둔다. 이들 시에는 주석을 상세히 달아야만이 겨우 이해가 가능하거나 현대적 심미안으로는 시적 표현 양식과 전혀 맞 지 않는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베드윈의 생활 관습에 대한 정 교한 묘사는 조잡하거나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그것은 사막의 지 리와 인간을 잘 알지 못하면 시인이 전달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헤 아릴 수 없게 되며, 또 표현코자 하는 진실이나 미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인위적인 형식, 제한된 범위에서 나오는 주 제와 그 주제를 다루는 방법, 시 전체가 사실적(寫實的)인 것이 우리 에겐 놀라운 점이다. 다음에서는 <무알라까트>와 그 작자들에 대해 살펴보고 번역에 적합한 구절을 골라 각 시가의 특징을 도출해 보 고자 한다 .90)
90) 전해 내려오는 <무알라까트>의 시행 순서는 뒤축박죽인 경우가 많으며 원본마다 이문(異文)이 많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 대체로 필자는 뉠데 케의 독일어 번역판과 그 순서를 따랐다.
이므루 알-까이스 lmru' al-Q ays <무알라까트> 중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것이 고대 예멘의 왕자 였던 이므루 알-까이스의 <무알라까트>이다. 그의 조부는 히라의 왕, 문디르 3 세와 맞서다가 그에게 패배하고 살해당한 킨다 왕국의 하리쓰 왕이었다 .9” 하리쓰가 죽자 그가 이룩한 동맹 체제는 무너지 고 그의 아들들은 동맹을 형성하던 각기 다론 부축들을 나눠 가졌 다. 동 시인의 아버지인 후즈르 H uj r 는 중부 아라비아의 아사드족 Banu Asad 올 얼마 동안 지배하였으나 반란이 일어나 처형되고 말 았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할 의무가 가문에서 유일하게 유능 한 왕자라고 하는 이므루 알겹까이스에게 지워졌다. 그에 관한 얼마 안 되는 사료들은 복~ 불타는 그의 모험담을 기술하고 있다.>9'Z I 이에 관해서는 『노래의 책』에서 자세히 기술되고 있으므로 여기서 는 더 이상의 상술은 피하기로 한다. 다만 그의 가문 대대로의 숙적 인 문디르의 도움을 받던 반군을 처벌하려는 그의 노력이 거의 성 공을 거두지 못했음을 말해 두는 것으로 족하다. 그 후 그는 콘스탄 티노플로 떠나 킨다의 세력이 로마의 적인 페르시아 옆구리에 가시 처럼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91 ) 본서 p. 90-91 참조.
92) Anc ien t Arabia n Poetr y, p. 105.
황제로부터 팔레스타인의 총독 Ph yl arch 으로 임명받아 가는 도중 앙고라Ang ora931 에서 사망하였다〈 540 년경). 그는 유스티니아누스가 딸 과 음모를 꾸며 그에게 선물로 보낸 독 묻은 옷을 입고 그리스 신 네소스 Nessus94) 처럼 죽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는 <종기 난 사나
93) [역주] 앙카라 A 마 cara 의 옛 이름 . 94) [역주] 헤라클레스 Hercules 의 아내를 범하려다 독화살을 맞고 죽음.
이 Dho. al- Qurub>라 불리기도 한다. 허무맹랑한 많은 전승이 이므루 알겁가이스란 낭만적 인물을 감싸 고 있다 .95 1 일설에 의하면, 그의 부친은 그가 시인이 된 데 못마땅한 데다 그가 연애 사건까지 일으켜 풍문을 내자 격분을 참지 못한 나 머지 그를 추방하였다는 것이다 . 이므루 알-까이스는 그의 고향을 떠나 자신과 같은 처지의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이 부족 저 부족 을 따라 돌아다니는 떠돌이 신세가 되어 < 방랑의 왕자 al - M첵 k al- 這>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부친의 부음을 듣고 울부짖었다. <부친 때문에 내 청춘 허송하였는데 이제 늙으니 혈족에 의한 복수 라는 짐을 떠맡기고 돌아가셨네. 오늘은 술이나 마시고 볼 일은 내 일 보자 !96 ) > 그는 연속 이렛날 밤을 통음하고 나서 부친의 복수를 갚을 때까지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고 고약도 바르지 않으며, 여자 의 몸에는 손도 안 대고 머리도 감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나즈란 Na jra n 북부의 타발라 Tabala 계곡에는 이교도 아랍인들이 숭배하 던 <두 알-칼라싸 Dh o. al-Khal~ 라는 우상이 있었다. 이므루 알 -까이스는 여느 때와 같이 신탁을 구하기 위해 성소를 찾아가 각기 <명령>, <금지>, <기다림>이라 명명된 세 개의 화살 중 어느 하나 를 당겼다 . 그는 두번째 <금지>의 화살을 쏘게 되자 화살을 부러트 려 우상의 얼굴에 집어던지며 거친 저주의 말로 외쳤다 . <너의 아 버지가 살해되었다면 아마 나를 방해하진 않았으리!>
95) 맥구킨 드 슬란 남작 Baron MacGuck in de Slane(Pa ris, 1837) 이 번 역, 주해한 Le Di w an d'A m ro' l kais 에 나오는 그의 생애에 관한 일대 기(이는 Ki tab al-A g hanI의 내용을 따르고 있다), pp. 1-5. [역주] De Slane, Baron MacGuck in( 1801- 18 78) : 아일 랜드 태 생 의 프랑스 동양학 자 . 드 사시의 제자로 이므루 알-까이스의 시집을 맨처음 프랑스어로 번역· 주해하였다.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Amrilk ais , der Di ch t er und Konig 참조 (S tuttgart and Ti. ibi n g e n, 1843).
96) [역주] 이 마지막 어구는 그의 시 중 유명한 시구가 되었다. 아랍어 원문은
이므루 알 - 까이스는 이슬람 이전 시인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시 인으로 손꼽힌다 . 무함마드는 그를 < 지옥행 사자들의 두목>으로 묘 사하였으며 칼리파 우마르와 알리는 종교적으로는 반감을 갖고 있 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능과 독창성을 극구 찬양하였다. g/ ) 이므루 알-까이스의 < 무알라까 > 그 자체에 대해서는 유럽의 비평가들도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동 시의 절묘한 어휘와 훌륭한 시상, 감미로 운 시구의 흐름, 매력적이고 다양한 묘사 , 특히 젊은이의 환희와 의 기양양함을 느끼게 해주는 분위기를 찬양하였다 .
97) 앞에서(p . 135) 기술한 바와 같이 그가 아라비아의 까씨다를 창안한 장본인이 아니라는 것은 거의 모든 송시들이 황폐한 야영지에 대한 탄 식을 도입부로 삼는데 (Ibn Qu ta y b a, K.al -Shi' r w a-al-Shuara, p. 52) 비해 이므루 알-까이스는 자신이 지온 어느 시에서 그러한 도입부를 처음으로 소개하고 적어도 유행을 시킨 사람들로 이븐 후맘 Ibn Humam 이나 혹은 이븐 키담 Ibn Khi dham 이란 이름들을 언급하고 있는 사실에 서 나타난다 .
아래 번역은 시의 전반부에서 따온 것인데 사랑이 주제를 이루고 있다 .981
98) 다음 시구들은 아놀드 Arnold 의 Mu'a lla q a t 번역에서 옮긴 것이다 (Leip s ic , 1850), p. 9 이 하, vv. 18-35. [역주] Fr. Arnold(1820-1869): 할레 대학교의 아랍어 교수 역임 . 일곱 무알라까트롤 번역 · 주해하였다 (1850).
< 언젠가 모래 언덕에 선 그녀는 나를 비웃듯 맹세하며 말했지 ’ 이제 당신 곁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라.:il. 멈추시오! 그대 마음속에 작별할 생각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파띠마, 무정하게 나를 버리지 마오. 당신에 대한 열정으로 미칠 것만 같은데 내 곁을 떠나려 합니까? 자기 멋대로 하고 싶은 때문입니까? 아니, 혹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 옷을 잡아 혼들어 흘러내리게 하오.
그증오에찬두눈,눈물맺힌그눈! 그것이 황폐해진 내 마음속을 꿰뚫습니다. 그 얼마나 많은 점잖은 천막이 나에게 귀중한 보물을 내어 주었던가 그래서 쾌감을 한껏 맛보았지. 그러한 행위를 쉬쉬하며 내 기분을 재빨리 잡치게 했던 파수꾼들을 지나 묘성(昴星)이 금빛 찬란한 보석띠 펼쳐 보일 때는 언제일까. 내가 다가갔을 때, 그녀는 가벼운 잠옷 차림으로 휘장 옆에 선 채로 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이런 고통이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소? 당신의 광기는 여전합니다.' 그녀를 집아끌어 발자국이 보이지 않게 수놓은 치맛자락을 질질 끌면서 천막 건너편 굽이치는 모래 언덕 사이 계곡까지 다다르면, 이옥고 양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나에게 당겨 본다. 하면, 처녀는 정답게 몸을 기댄다 .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와 다리는 날씬하기보다는 토실토실한 편, 우아한 얼굴에 흰 살찾 가슴은 빛을 받은 거울 같구나. 하야스름한 누구도 손 댄 적 없는 진주는 인적미답의 심연의 맑은 물을 먹고 그렇게 광택을 내는가. 그녀가 이제 반쯤 몸을 젖히니, 두 뺨이 보이고 눈은 놀란 새끼 사슴의 - 눈을 하고 있구나. 점 하나 없이 장신구로 꾸민 맵시 있는 모가지, 어깨로부터는 야자 열매처럼 풍성한 새까만 머리카락이 치렁치령하다.> 위와 같이 부드럽고 섬세한 이야기체의 시와는 묘한 대조를 이루 면서 난잡하고 경직된 시구들이 이어지는데, 황야를 헤메는 시인은 굶주린 늑대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롤 친구라 부르고 있다.
<그가 찾아내는 것들을 우리는 모두 먹어 치운다. 우리처럼 살아가는 저 녀석은 깡 마르구나.> 언 l
99) 아랍의 주해자들이 이 시행과 그보다 앞의 세 구절(아놀드 번역판의 pp. 48-51) 이 도적 시인 타압바따 샤란의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일말 타당한 데가 있다.
자기가 탄 말이 순종이라는 것과 적을 추적할 때의 훌륭한 솜씨, 나즈드고원 산 속의 천둥 번개 치는 장관에 대한 묘사로 시는 끝나 고있다 . 따라파 Tara f a 따라파 븐 알-압드 Ta rafa b. al-' Alxi는 대 부족인 바크르족의 부 족원이었다. 그가 속한 이 유별난 부족은 페르시아만의 바레인 Ba}Jrayn에 정착하고 있었다 . 그는 일찍이 풍자의 재능이 뛰어나 친 구든 적이든 가리지 않고 풍자를 쓰곤 하였다. 그가 방탕한 생활에 빠져 물려 받은 재산을 탕진하자 가문에서는 그를 <옴에 걸린 낙 타>인양 부족에서 추방하였다. 그러나 화해가 이루어져 그는 행실 을 고칠 것을 약속하고 자기 부족에게 돌아가 바수스 전쟁에 참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그는 재산을 또 날려버려 자기 형의 양 떼를 돌보아 주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지어진 <무알 라까>가 한 부유한 친족의 눈에 들어 일시적이나마 무위도식할 수 있었다 . 바크르와 타글리브족이 화평을 맺자 따라파는 그즈음 아므 르 본 힌드 ‘Amr b. Hin d 가 왕위를 계승한(ffi4년) 히라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왕으로부터 환대를 받아 왕의 숙부인 시인 무타람미스 Mu talan:nni s 와 함께 왕위 후계자를 모시는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따라파는 나쁜 말버릇 때문에 비싼 대가를 치뤄야만 했다. 궁중의 딱딱한 격식에 염증을 느낀 그는 풍자시룰 죽홍적으로 읊었다.
<아므르 대신, 우리 천막을 돌며 매애하고 우는 암양이나 한 마리 있으면!> 이옥고 시인은 왕의 누이와 마주보고 식탁에 앉게 되었는데 그녀 의 미모에 반해 소리쳤다. <보라, 그녀가 나에게 돌아왔도다. 귀고리가 반짝이는 나의 아름다운 가젤g azelle 이여! 왕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다면, 그녀의 입술을 내 것에 맞출 수 있었을 것을> 아므르 븐 힌드는 격하고 무자비한 데가 있는 사나이였다. 따라파 의 풍자에 대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그에게 이 새로운 무례함이 그를 더욱 분노케 하였다. 그는 따라파와 무타람미스를 불러 그들에 게 고향을 방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고 바레인 총독에게 보내는 봉인된 칙서를 각자에게 주었다. 이들이 도시 밖으로 벗어나오자 무 타람미스는 의심이 생겼다. 그와 동행하는 사람도 글을 읽을 줄 몰 라 히라의 한 소년에게 칙서를 건네 주어 그 내용이 자기를 생매장 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음을 알았다. 100) 그러자 그는 이 위험천만한 문 서를 깅물에 던져버리며 따라파도 따라 하도록 권했다. 따라파는 왕 의 칙서를 개봉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는 바레인으로 여행을 계속하여 결국 그곳에서 붙잡혀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이렇듯 한창 젊은 때에 —일설에 의하면 그의 나이 스물이 채 안 되었다고 한다 열 정적이고 능변인 따라파는 비참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의 <무알라 까>에서 그는 활기찬 모습의 자화상을 그렸다. 이 시에서 가장 두 드러진 특징은 베드윈이 아닌 우리들로서는 지루한 감마저 드는 긴 100) pp. 86- 없에서 히라의 기독교도 아랍인들의 문화에 관해 언급한 바 있다.
낙타 묘사 이의에도 삶의 유일한 낙으로서 관능적인 쾌락만을 고집 하는 것이리라. <날더러 전장에 쫓아다니고 덧없는 쾌락만 좇는다고 꾸짖는 그대가, 나를 불사신으로 만들 수는 없지 . 만약, 그대가 죽음의 사자로부터 나를 지켜 줄 수 없다면 나 죽기 전에, 그를 맞이하여 내 수중의 재산을 허비하게 해다오. 멋진 젊은이들이 즐기는 세 가지만 있다면, 당장 내 머리 위로 조가가 크게 울려 퍼진다 해도 괜찮네. 물을 부으면, 투명하지 않고 불그스름한 거품이 이는 술, 트집 잡는 무리로부터 빼앗아 단숨에 마셔버리는 거무슴한 술, 둘째는, 목이 말라 움츠려 있는 늑대를 놀라게 했을 때의 그 늑대처럼 O형 다리를 하고 말에 앉아 고통스러운 소리를 지르며 돌격하는 것, 셋째는, 양털로 된 천막에서 연인과 함께 온종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거친 빗방울 소리를 듣는 것 >1011
101) Vv. 54-59(Ly a ll) ; 56-61 (A rnold).
연대순으로 따지면 서로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동시대, 즉 히라 의 왕 아므르 븐 힌드의 시대(5.54-由 8 년)에 쓰여진 두 개의 <무알라 까>를 언급해야만 된다. 102) 더군다나 이 두 <무알라까>는 서로 매 우 비슷하다는 점과 다른 <무알라까>, 특히 안타라 ‘An t.ara나 라비 드 Lab i d 의 <刀 D] 다> 같은 전형적안 <까씨다>와는 다르다는 점이
102) Noldeke, F il자 Mu'a ll aqa t, i, p. 51 이하 참조 . Ag h am~ ix, 179 에 따르면, 일단의 타글리브족이 습격을 나갔다가 사막에서 길을 잃고 바크르족에게 물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고 타는 목마름으로 축게 되 었다. 그러자 타글리브는 보상금의 지급을 아므르 왕에게 간청하였 으며 아므르 븐 쿨씀을 뽑아 히라에서 그들의 주장을 개진토록 했 다. 그래서 아므르 븐 쿨씀은 왕 면전에서 <무알라까>롤 암송하고 이에 바크르를 대신하여 하리쓰가 옹수하였다.
이 둘을 서로 이어 주는 이유가 된다. 이 두 <무알라까>의 특징은 주된 테마를 지나치게 많이 다룬 나머지 보조적인 주제가 사용될 여지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아므르 븐 쿨씀 Amr b. Kulth O m 아므르 븐 쿨씀은 타글리브 부족의 일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유 명한 시인이자 전사인 무할힐 Muh 책파의 딸 라일라 Lay la 였다 . 그녀 의 여장부 기질은 아들 아므르가 민첩하게 복수한 것을 적고 있는 다음의 일화에서 잘 드러나는데 여기에서 <공격시에는 아므르 븐 쿨씀보다 더 담대하게 >1031 라는 속담이 생겼다. 어머니의 모욕에 대한 아므르의 복수 어느날, 히라의 왕 아므르 븐 힌드가 친한 친구들에게 말했다. <아람인들 중에 자기 어머니가 우리 어머니 시중 드는 일을 우습커 l 생각할 자 있을 까?> 그들이 대답했다. <그럼, 아므르 본 쿨씀의 어머니지> 왕이 물었다. <왜 그렇지?> 그들이 말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무할힐 본 라비아 Mu halhil b. Rabt a 이며 삼촌은 아랍인 중 가장 힘이 센 쿨라이브 븐 와일 Kulayb b. Wa' il이고 남편 쿨씀 븐 말리크 Kul th um b. M 책 k는 의협심 이 가장 강한 사 람인데다 아들 아므르 ‘Amr 는 부족장이기 때문이지.> 그러자 왕은 아므르 븐 쿨씀에게 사람을 보내 그의 어머니 라일라를 모시고 자기 어머니 힌드 를 방문해 주도록 초청하였다. 그래서 아므르는 타글리브 사람 몇 명을 대 동하고 라일라는 많은 부족 여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히라에 왔다. 왕이 히 라와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세운 정자에서 아므르와 그의 일행을 환대하는 동안 라일라는 이웃 천막에서 힌드와 자리를 함께 하였다. 왕은 자기 어머 니와 미리 짜고 다과를 청하는 순간 자기 어머니가 하인들을 물리치고 라 일라가 그녀의 시중을 들도록 할 작정이었다. 미리 약속된 신호에 따라 그 녀는 자기 손님과 단둘이 남고 싶음을 알리고 시녀들을 물러가게 한 후 말 103) Freyt ag, Arabum Prouerbia , vol. ii, p. 233.
을 꺼냈다. <라일라여, 저 접시를 집어 주세요.> 이에 라일라가 옹수하였다. <원하는 사람이 일어나서 가져가야죠.> 힌드는 몇 번이고 같은 요구를 되 풀이하며 싫다는 말을 못하게 하였다 . 라일라가 의쳤다 . <부끄럽도다! 살려 줘! 타글리브, 도와다오! > 아므르는 자기 어머니의 고함을 듣자 피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그는 천막 안에 있던 유일한 무기인 벽에 걸린 칼을 빼서 단칼에 왕을 베어 죽였다 .1 야 1
104) Ag h anl, ix, 182.
아므르의 <무알라까>는 자조적(自助的)인 행동과 결단력의 과시 를 중요시하는 그것도 아주 지극히 중요시하는一――한 종족이 생각하는 바 이상적인 남성형의 자질을 갖추었던 사람의 작품이다. 만약 아므르의 시에서 이들 미덕이 우리의 예의 범절과 겸양의 미 덕에 거슬리는 과장된 허풍이 나열되고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느 껴지는 어감이나 격정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단정한다면 그것은 중대한 실수이다. 이 베드윈 시인은 자신을 비롯한 그의 가 족과 부족을 최대로 미화시키는 것을 하나의 의무로 여겼다. 베드윈 전사는 전투에서의 용맹성을 널리 알리고 혁혁한 무공을 세운 것을 일일이 열거한다. 또한, 한편으로 그는 협박과 허풍울 번갈아 해댄 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 <허풍쟁이 꾀돌이 l.\1iles Glo ri osus> )!E l 라 는 것은 아니며 아므르는 분명히 그런 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무알라까>에서는 박력과 의기양양함이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다. 첫 여덟 구절은 이로부터 아므르가 순수한 포도주를 마시고 죽었다 는 전설이 나왔다는 점에서 아주 초기에 이 시에 첨가된 것으로 보 인다. 이 구절은 원본 <무알라까트> 선집에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구절만은 번역할 만한 가치가 있다.
105) [역주] 이는 특히 코미디의 등장 인물로서 허풍 떨고 만질만질한 성격의 인물을 의미하는 라틴어이다.
<아가씨, 일어나 해장술을 좀 가져오소- 안다린 An dartn의 포도주는 아끼지 말고 따뜻한 물을 섞으면 사프란 꽃 향기나는 맑은포도주를 그것을 맛 본 연인은 열렬한 사랑도 잊어버리고 마음이 편해지네. 인색한 구두쇠는, 술잔을 들어올리며 그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네. 술잔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려라! 왜, 그대는 나와 친구들을 목마르게 하느뇨? 그대가 오늘 아침 내 시중을 들지 않는데, 내가 우리 세 명 중 가장 나쁜 사람은 아니다! 발벡 Balbec 과 다마스쿠스에서, 그리고 까씨린Q¾iri n 에서 얼마나 많은 술잔을 비웠던가. 하지만, 언제가는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우리도 죽음을 운명으로 맞이하리 .>1061 다음 구절에서 그는 사랑하는 연인이 떠나간 데 대한 슬픔을 묘 사하면서 그녀가 여정을 끝마치고 마침내 멀리 야마마에 도착하는 모습을 상상으로 그리고 있다. <아, 땅거미가 지고 나의 사모하는 연인이 탄 낙타가 질주하는 것이 보였네. 빽빽히 늘어선 칼날처럼 솟아오른 날카로운 봉우리까지. 나는 얼굴을 야마마로 향하였지! 새끼를 잃어버린 어미 낙타도 106) Vv. 1-8(Arnold); 라이얼 판에서는 끝에서 둘째번 시행이 생략되어 있다.
또 모진 운명으로 아홉 아들의 묘를 쓴 은발의 여인도 나만큼 비통해 하지는 않았으리 . > I (11 l
107) Vv. 15-18(Ly al l) ; 19-22(Arnold).
이제 시인은 돌연히 그가 말하고자 하는 본 주제로 들어간다. 그 는 히라의 왕 , 아므르 븐 힌드에게 대들 듯이 말을 걸며 타글리브족 의 적들에게 만만치 않은 호적수를 만나게 되리라고 경고한다. <힌드의 아버지여 ,I OO J 조심하시오. 성급히 우리에게 대들기 전에 알아 둘 것이 있오. 우리의 깃발이 전장에 나갈 때는 하얗지만 돌아올 때는 피에 물들어 붉어진다는 것을. 수많은 부족장의 왕관을 뒤엎고 이 땅의 무법자들을 무력하게 했던 우리들, 그 주위에 고삐가 당겨진 말이 서 있고, 이웃들은 가시나무처럼 늘어지고 악마 같은 사냥개도 우리가 두려운 듯 으르렁거린다 . 1091 적병에게 맷돌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분명 가루가 되고 만다 . 우리는 영광의 계승자, 모든 마앗드 Ma‘add 인은 알고 있다 창으로 그 영광을 지킨다 .IIO J 전투에서 천막 지주가 무너지면 친구를 구해 주는 것은 우리이니 안심하라!
108) 아랍인들은 어떤 사람의 본명을 부르지 않고 <아무개(아들 또는 여기서처럼 딸)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낯익은 호칭법을 <쿤야 Kun y a> 라고 한다 .
109) 죽 마신 ji nn 까지 도 우리 를 경 외 한다.
110) 여기서 마앗드는 일반적으로 아랍인들을 의미한다.
111) Vv. 20-30(Ly a ll), vv. 22, '27, 28 은 생 략.
아므르여, 얼마나 버릇이 없는고! 우리 타글리브족이 그대의 시종인가? 아므르여, 얼마나 버릇이 없는고! 고자쟁이들의 엉터리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우리를 평가하는 것이. 아므르여, 이전에 우리네 창이 그 얼마나 많은 적을 굴복시켰던 가를 아는가 .11 2 ) 악에 바치면 그것은 마치 야생의 낙타처럼 튀어오른다. 그러면 손도 쓸 수 없게 될 정도로. 야생의 낙타처럼 구부리면 삐걱거리며 굽히는 사람의 이마를 찢어버린다 . > 3)
112) 이것은 타글리브족이 정복당한 적이 없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 고 있다.
113) Vv. 46-5l( Ly a ll), v. 48 은 생 략
이 <무알라까>는 시인의 부족에 대해 도가 지나칠 정도의 극찬 으로끝나고 있다. <우리들의 천막이 그네들의 계곡을 따라 들어서면, 모든 부족 사람들은 잘 알고 있지 감히 우리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겐 죽음뿐이며 친구들에겐 우리에게 있는 양식을 주리란 것을 . 우리들의 대의를 충실히 지키며 가고 싶은 곳에서 야영하고 성나면, 성이 풀릴 때까지는 평화란 무망한 것이 되고 충신은 안전하게 지켜 주지만 역적은 곧 무릎 꿇게 만든다. 우리가 우물가에 가면 깨끗한 물을 마시지만
다른 이들은 흙탕물 마시네. 고로 세상은 우리의 것, 우리가 일격을 가하면, 두번째 가격(加擊)은 무용지물. 왕들도 타글리브의 갓 젖 뗀 아기 앞에선 고개 숙이고 경배하며 엎드렸지.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압제자로 불리지만 곧 진실된 이름으로 불릴 거야 !114) 우리들은 세상이 좁다할 만큼 이 세상을 가득 메우고 우리 전함들은 바다룰 메우도다 !>5)
114) 바꾸어 말하면, 적이 아무 탈 없이 우리들에게 덤빌수 없음을 보여 주겠다는 것이다. 라이얼 판의 93 행인 이 시구는 아놀드 판에서는 빠져 있다.
115) Vv. 94-104(Arnold), vv. 100, 101 생략 맨 마지막 구절이 시 어법 올 벗어 나는 것이라면 여기서 <바다>는 유프라테스 강을 지칭함에 틀림없다. [역주] 셈어들이 그러하듯이 아랍어에서도 <강과 바다>라 는 단어가 같다 (b a.l)r).
하리쓰 븐 힐리자 Har ith b. Hi|liz a 바크르족의 하리쓰 븐 힐리자의 <무알라까>는 아므르의 <무알라 까>보다는 재미가 덜 하다. 그의 시가가 <무알라까트>에 포함된 것은 뉠데케가 말했듯이, 아므르 븐 쿨씀의 <무알라까>가 바크르족 과 앙숙인 타글리브족에게 불후의 명성을 안겨주는 것을 보고 그 자신 바크르족의 신세를 지고 있던 함마드가 아므르의 <무알라까> 에 필적할 시를 골라 자신의 보호자들을 치켜 세우고 싶었던 때문 인지도 모론다. 그러나, 하리쓰의 시는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이 서로 적대함으로써 빚어진 북부 아라비아에서의 반목 관계를 밝 혀 주는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시인은 시를 통하여 아라낌 뚜im이라고 하는 타글리브 부족의 일족이 바크르족을 비난한 것 은 부당함을 불평하고 있다.
<우리의 형제 아라낌족이 우리를 비난하며 혀를 끝 없이 놀려 대었지. 그들은 죄 없는 사람과 죄 지은 사람을 혼동하누나 . 죄가 없다고 한들 무슨 소용 있나? 그들은 우리를 비열한 행위의 수호자로 뒤집어 씌우지만 우리 부족민들은 누가 사악한지 안다 .>116 ) 하리쓰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떤 사람이 히라의 왕 앞에서 바 크르족을 헐뜯고 있었다. 시인은 그에게 바크르족이 이미 적의 중상 비방을 자주 받아 왔기 때문에 그의 비방의 효과가 오래 지속되지 는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시인은 세련된 어조 로다음과같이 말한다. <그들이 미워해도 우리는 굳건한 힘과 훌륭한 조상 덕분에 의기 양양하다. 그 힘은 전에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했던 그것, 고로 굴복은 수치이며 우리에겐 당당한 기백이 있다. 냉혹하고 비참한 충격을 막아 주며, 운명의 신의 시달림으로부터 지켜주는 탄탄한 산. 구름 한 점 없는 위엄 속에 우뚝 솟아 있는 어스름한 산을, 산산조각낼 수 있으니 승리는 우리의 것이도다 .>7) 그는 잘못을 저지른 자들에게 바수스 전쟁을 종식하고 얻은 평화 롤 자기들 멋대로 깨트리지 말라고 호소한다. <어리석음과 과오는 버려라! 너 스스로 눈을 가리면, 116) Vv. 16-18. 117) Vv. 23-26.
바로 거기에 병폐가 있는 것 불모들을 안전하게 해준 두 알-마자즈 Dhu al_Maj 泣 1 1 8’ 의 맹세를 기억하라, 무력이나 간계로 그 맹세가 깨지지 않게끔. 변덕으로 서 약문이 무효가 될 수 있을까 ?> 91
118) 메카 근처의 지명입 [역주〕 알-마자즈는 <통로, 회랑>을 의미.
119) Vv. 40-42(Ly al l) ; 65-67(Arnold).
안타라 ‘An t ara 압스 부족 출신의 안타라 븐 샷다드 ‘Anta ra b. Shaddad 는 다히 스 전투에서 유명해졌다 .1 201 오늘날에는 시인보다 연애담 속의 주인 공 죽, 베드윈판 아킬레스 Ac hill es1 2” 로서 기억된다. 그러나 아킬레스 의 경우는 신화 속의 인물이므로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머리속 에서만 맴돌 뿐이다 .
120) 'Anta r ah, cin vorisl ami sc her Di ch t er , by H. Thorbecke(Le ipzig, 1867) 참조.
121) [역주] 호머의 『 일리아드 』 에 나오는 그리스 영웅. 그의 유일한 약 접인 발꿈치에 활을 맞아 쓰러졌음.
그의 어머니는 흑인 노예였다. 이처럼 아프리카 피를 받고 태어난 까닭에 놀림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의 용감무쌍함을 보면 역시 그의 혈통은 속일 수 없었다. 순수한 혈통이지만 용맹성이 떨어지는 아랍 인들에겐 그같은 용맹성은 존경의 대상이었다. 안타라는 사촌인 아 불라 ‘Abla 를 사랑하게 되어 시촌에게 결혼의 우선권이 있다는 아라 비아의 시촌혼 관습에 따라 그녀에게 청혼하였다. 노예인 어머니에 게서 태어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면 역시 노예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의 구혼은 무모한 짓이었다. 언젠가 한번은 압 스족 사람들이 낙타를 탈취해 간 약탈자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안타라가 그 전투에 뛰어들기를 거부하며 말했다. <노예는 싸울 줄 모릅니다. 그가 하는 일이란 낙타의 젖이나 짜고 젖통을 묶
는 일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외쳤다 . <적을 향해 돌격하라! 너는 자유의 몸이다.> 안타라는 허튼 자랑은 좀처럼 하지 않지만 이때만 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 <한쪽으로만 귀한 자식으로 태어난 나 , 압스 가문에서도 최고는 나이니 , 내 칼이 나머지는 이룬다! > 그가 <재잘거리는 야만인들> 또는 <귀가 잘리고 양가죽을 입은 노예들>이라고 경멸조로 말하는 것은 과연 오명을 극복하고 출세한 그답다. 그는 노년에 이웃 부족인 따이이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 다. 그의 <무알라까>는 감동적인 전투 장면의 묘사로 유명한데 그 중 일부를 옮겨 본다 .1 22 J <말리크 M 却 k 의 딸아, 내가 싸움터에 돌격할 때의 모습을 아는가. 또 전리품을 나눌 때만 뒤로 물러나는 것을 아는가. 나의 힘센 말이 민첩하게 날뛰지만 나는 말 고삐를 놓치지 않는다 . 전사들은 하나씩 차례로 부상당하고 싸움질에 겁먹은 사람 하나가 완전 무장하고 내게 덤렸지. 그는 잽싸게 도망치지도 않았고 쉽사리 포로가 되지도 않았네. 길쭉하고 단단한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찌르니 불시의 공격에 두 개의 상처만 넓게 생기고, 거기에서 그의 생혈(生血)이 분출하며 그 소리에 밤에 돌아다니는 굶주린 늑대들이 몰려든다. 122) 독자들이 라이얼 판의 44, 47-52 행의 시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필자는 위 번역에서는 다소 의역을 하였다.
그 다음 나는 내 용맹무쌍한 창끝으로 그의 갑옷을 떠받친다. 一실로 창에 찔릴 때는 아무리 고귀한 사람도 약자가 되는 법 그리하여 그곳에 몰려든 야수에게 진수성찬으로 바친다. 그러면, 그것들은 그의 손가락, 팔목을 갈가리 찢어버린다.> 주하 01 르 Zuhay r 안타라의 시가 다히스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 속하는 것이라면 그 와 동시대 시인인 무자이나 Muzay na 부족 출신의 주하이르 븐 아비 술마 Zuha yr b. AbI Sulma 의 <무알라까>는 화평을 맺게 해준 사적 인 후덕한 행위를 찬양하고 있다. 두브얀 Dhuby an 의 두 족장, 하림 븐 시난 Harim b. S i.nan과 하리쓰 븐 아우프I:Iarith b. 'Aw f의 헌신 적인 중재로 희생자를 많이 낸 압스족에게 당연히 친족 살인의 위 자료 blood- ITX)ri e y 전액이 지급되 었다. 이같은 관대하고 사욕이 없 는 애족심의 예는-하림과 하리쓰 자신들은 전혀 피를 흘리지 않았다―-~%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만 골라 칭송했다는 시인에게는 적절한 주제였다. <가이즈 븐 무라 Gha yi ibn Murra 의 후예인 1231 그대 두 사람은 피비린내 나는 싸움질로 산산조각 난 혈연 관계를 회복시키려 애썼도다. 꾸라이쉬 부족과 주르홈족이 세운 경건한 순행(巡行 )124l 의 대상인 메카 분지의 오랜 사원 1251 에 맹세컨대, 그대들은 어렵든 쉬운 일이든, 결코 부족함이 없었도다. 압스와 두브얀이 각기 상대의 손에 쓰러지고 그들이 내뿜은 독기가 대지를 가득 메웠을 때,
123) 가이즈 븐 무라는 두브얀의 후손이며 하림과 하리쓰의 선조였다.
124) 이는 종교적 순행 Taw 값을 가리킨다.
125) 카바 사원
그대들은 그들을 화해시켰도다 . >1 26l
126) Vv. 16-19(Ly a ll).
찬양시를 끝내며 시인은 화해한 부족민들과 그들의 동맹자들을 향해 복수심을 품지 말 것을 진심으로 경고하고 있다. <너희들은 신에게 감히 드러내보이지 못할 죄를숨기려 드느뇨? 너희들이 신에게 숨기려 드는 것을 그분은 모두 알고 계시다. 그분은 죄를 적어둔 두루마리를 말아 최후의 심판날까지 보존하거나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벌하신다 .m1 너희들은 전쟁의 쓴 맛을 다 보았다. 소문에는 너희가 지혜롭지 못한데 그 끔찍한 괴물을 더 이상 키우지 마라! 그대로 두면 피에 굶주려 울부짖을 것이며 연자방아처럼 밑에 있는 모든 것을 깔아 뭉개고 말 것이니 또 쌍둥이를 잉태한 자궁에서는 재앙만 나올 것이다 .> 128 1
1'2: 7) 이교도 아라비아에서 유태교와 기독교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중거하는 이 구절의 진실성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 이븐 꾸타이바는 이들 구절이 부활에 대한 시인의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Ki tab al-S 沿 wa-al-Shu'a r a, p. 58, l. 12).
128) Vv. 짜 31.
새로운 전쟁을 또 일으킬 뻔했던 후사인 븐 담담I:Iu say n b. ])a- m 拍 m 이라는 자의 무법 행위를 언급한 뜻이 다소 모호한 구절에 이 어 주하이르는 자기의 지긋한 나이를 자연스럽고 감동적으로 빗대 며 경우에 맞는 처세훈과 도의를 역설한다.
<나는 삶의 무거운 짐에 지쳤다네 : 여든 살이 넘은 사람이라면 지치고도 남을 테지만, 지금 그것이 나에게는 뚜렷하네. 죽음은 마치 밤눈이 어두운 낙타가 비틀거리는 것과 같다네. 결국 병든 자는 죽는 법, 하나 그가 지나치며 만나는 다론 사람들은 나이만 먹어 늙어가네. 무정하게 사람들을 다루는 자는, 바로 그 사람들에 의해 발 밑에서 짓밟히고 그들 이빨이 얼마나 예리한가를 느끼게 되지. 넉넉히 가진 자가 돈에 인색하면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고 자화자찬에 빠질 것이네. 공명정대한 행동으로 명성을 높이는 자만이 그것을 온전히 얻는 것이지. 스스로 욕먹을 일을 피하지 않으면 그 때문에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고. 자기 저수지를 지키는 데 자신의 튼튼한 팔을 믿지 못하는 자는 그 저수지가 황폐해짐을 보게 될 것이라네. 적을 해치우지 못하면 자신이 해롤 입게 되며, 죽음의 다리를 건너기를 두려워하는 자는, 하늘과 땅 사이를 사닥다리로 다리를 놓을 수 있다 해도 결국은 쫓기고 만다. 기회를 잡았을 때 창의 밑동을 잡지 못한 자는, 그 후로는 창의 대못 끝이나 잡는 것으로 족하리. 약속을 지키는 자는 책잡히지 않으며 마음속으로 신성한 사원에 직행하는 자는 망설일 필요가 없다네. 이방으로 나다니는 자는 친구룰 적으로 여기며 자존(自尊)하지 않는 자는 어디에 가든 존경받지 못한다. 인간의 본성이란 모름지기 그 이웃에게는 드러나는 법, 그것이 감추어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려면 그러려무나 .>129l
129) 라이 얼 판에 나오는 이 시 행 의 순서 는 다음과 같다 . 56, 57, 54, 50, 5!5, 53, 49, 47, 48, 52, 58.
주하이르 시의 노련한 교훈적인 지혜와 도덕적 성실성은 앞에서 언급한 그의 종교관과 일치되며 , 또 넉 달에 걸쳐 < 까씨다 > 를 짓고 넉 달 동안 수정하며 또 넉 달간 지기(知已)의 시인들에게 보여 주 며 일 년이 지나기 전까지는 발표하지 않는 전통과도 일치되는 것 이다 .1 301
130) [역주] 주하이르와 후따이아 둥 죽흥적으로 시 를 짓지 않고 심사숙 고하여 시작을 한 이들 시인들은 <시의 노예>라고 불렸다 .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거의 이야기할 것이 없다 . 그는 이슬람 이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의 나이 백 세 되던 때에 예언자 무함마드를 만난 적이 있었다 예언자가 그를 보고 < 하느님, 저를 저 악마로부터 지켜 주소서!>라고 외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 3 11 숙부 바샤마 Bas넒 m 죠똑i터 물려 받은 그의 시재는 유명한 송시 <바나트 수아드 Bana t Su'ad >의 작자인 아들 카브 Ka'b 에게로 이어 졌댜
131) 시인들의 영감이 때로는 사탄 Sha y a ti n 이라 불리는 <진>에 의한 것이라는 고대 아라비아의 미신은 이미 앞에서 언급된 바 있다. Go- ldzih e r, Abh: :md zur arab. Ph ilo log ie, Pa rt I, pp. 1-14 참조.
라닌|드 Lab i d 아미르 븐 싸싸아족 Bano . 'Amir b. $a ‘ 휴 ‘a 의 라비드 븐 라비아 LabId b. Rab f a 는 6 세기 후반에 태어나 ffi l 년 무아위야 Mu'aw iya 가 칼리파에 죽위한 직후까지 살았다고 한다 . 그는 이처럼 일곱 시 인 중 가장 젊은 세대에 속하는 시인이다. 이슬람에 귀의하자 <하 느님께서 시 대신에 꾸란을 주셨으므로> 시작 활동을 포기한다고 말하였다. 주하이르와 마찬가지로, 그는 심지어 이교도 시절에도 그 의 시집 Dwan 의 여러 구절에서 보이듯이 강한 종교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전형적인 베드윈답게 사막의 생활과 풍경을 매혹적으로 생생히 그린 라비드의 <무알라까>는 구전되어 온 이슬람 이전 <까씨다> 중 가장 훌륭한 본보기가 됨에 틀림없다. 시인의 묘사 중 어떤 것은 선배 시인의 묘사 기법을 따른 것도 있지만 대부분 시인 자신의 관 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애인이 속한 부족의 야영지에 남 아 있는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자취를 묘사함으로써 전통적인 기법 으로 시를 시작한다. <미나 M 迫i의 주민인 리잠 H j am 과 가울 Ghawl, 단둘이 말에서 내려 머물던 그곳이 황량하구나. 라이 얀 Ra yyari의 골짜기 야영지에는 마치 비바람에 시달린 비문처럼 희미한 자취만 눈에 띈다. 이 황폐한 풍경 위로 세속과 신성의 세월이 얼마나 흘러갔던가. 봄에는 반짝이는 별빛 아래 소나기의 축복을 받고 뇌운(雷雲)은 때로는 빈약하고 때로는 풍부한 은혜를 내려 주었다. 색바랜 풀이 솟아나고 타조는 비탈에 서서 새끼를 낳고 가젤 영양도 새끼를 낳았으니 눈이 큰 들소들은 갓 태어난 송아지 곁에 기대어 있고 반쯤 자란 송아지들은 그 주위에 떼를 지어 모여 있네. 흙먼지 자욱한 옛터는 억수 같은 비에 씻겨 모습을 드러내어 새로이 새겨진 글씨처럼, 또 여인의 팔뚝에 새긴 문신처럼 마침내 빛나고 한줄 한줄 보이게 그울음울 뿌린 듯하다. 멈추어서 물어 보지만, 미지의 언어를 말하는 말 없는 불변의 사물에게 물어본들 무슨 소용 있으랴 ?>1321 132) Vv. 1-lO(Ly a ll). v. 5 는 생 략
시인은 애인이 자기 곁을 떠났음을· 한탄한 후 그녀를 더 이상 생 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는 재빨리 야영지를 떠나버린다. 당연히, 자 기가 탄 낙타를 칭찬한 다음, 비유를 사용하여 동물들의 생태에 관 한 두 개의 훌륭한 이미지를 이끌어낸다. 먼저 시인과 그의 동료가 갈증과 허기 때문에 황량한 황야에서 나와 거처로 가기 위해 야생마를 타고 언덕을 넘어 전력 질주하는 모습을 그린다. 두번째는 새끼 송아지가 늑대에게 잡혀먹은 줄도 모 르고 밤새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모래 언덕에서 잠자고 있는 들소를 묘사한다. 동이 틀 무렵, <어미 소는 딱딱하고 축축히 젖은 땅위를 미끌어지듯 나아간다.> 일주일 내내 어미 소는 새끼를 찾느라 이리저리 정신 없이 뛰어다니다가 갑자기 사냥꾼들이 다가 오는 소리를 듣고 놀라 도망친다. 사냥꾼들은 화살이 미치지 못하자 개를 풀지만 어미 소는 죽을 힘을 다해 개들에게 덤벼들어 뾰족한 뿔로 한 마리를 부상시키고 디~ 한 마리를 죽인다. 그 다음, 시인은 다시 한 번 그의 애인에게 말을 건다 . 그리하여 잔치나 주연(酒妻)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 홉족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해 주는데 그것이 고상한 아랍인에게는 용맹성 못지않은 자랑 거리가된다. <나와르 Nawar, 내가 늘 사랑의 끈을 묶어 두지만 또 겁 없이 그 끈을 툭 끊어버릴 수 있음을 알지 못하~든가? 죽음이 영혼을 속박하고 그녀의 삶을 괴롭히지 않는다면 내가 원하지 않을 때는 그곳을 떠날 것임을 알지 못하는가? 아니, 쾌락과 주홍(酒興), 성찬(盛撰)의 수많은 밤을 이야기로 지새며 오래된 포도주가 값이 비쌀 때면, 그 표시로 깃발이 걸려 있는 주막으로 자주 드나든 것을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적잖은 돈을 주고 거무스레한 술 가죽부대나 진흙 항아리를 사고는
거기에 구멍을 뚫어서 맑은 술이 흘러 나오게 했었지. 새된 목소리로 노래 부르던 가희들에게 값을 치르면 그녀들의 손가락은 내 귀에 감미로운 음악을 들려 주었지 .>1 331
133) Vv. 55-60(Ly al l).
계속해서 시인은 자신이 급경사진 험한 바위산 꼭대기에서 온종 일 망을 보는 동 적진에서 첩자로 위험한 일을 해낸 것을 자랑한다. 또 그가 사절단의 일원으로 히라에 와서 집회에서 자기 권리를 떳 떳하게 주장하는 등 당당한 태도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관대함을자랑한댜 마지막 구절은 여느 시처럼 시인의 당면한 관심사와 시인 쪽 친 족의 미덕에 대한 찬양 일색이다. 두브얀의 나비가 Nab ig ha <무알라까트>의 시인 외에 세 명의 시인 죽, 나비가 ,134) 아샤, 알 까마를 들 수 있는데 그 중 두 명은 아라비아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시인들과 쌍벽을 이루는 시인들로 인정받고 있다. 나비가는 본명은 두브얀 족의 지야드 븐 무아위야Ziy記 b. Mu'aw iy a 이다 이슬람 출현 직전에 갓산과 히라 궁전에서 살았 다. 그의 보호자는 히라의 누만 븐 문디르 아부 까부스 Nu'man b. Mund hir Abo. Qab o. s 왕이 었다. 수년 동안 왕의 총애를 홈뻑 받으며 왕이 절친한 친구들에게만 베풀어 주는 특권을 모두 누렸다 . 그들 사이가 틀어진 계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지는데, 일설에 의하면 나비가가 누만의 요구로 무타자리다 여왕의 매력을 묘사하 게 되었는데 남편의 의혹을 살 만큼 황홀하고 생생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34) <나비가>는 시인의 재능이 더디지만 이내 <활기차고 풍부하게 분 출되는> 시인에게 적용되는 단어이다(동사 nabagha 에서 파생).
그러나 나비가의 얘기도 그럴듯하다. 그의 적들이 누만에 대한 무 례한 풍자를 꾸며 놓고서는 자신이 그런 풍자를 했다고 몰아 붙였 다는 것이다 . 아무튼 그는 부랴부랴 히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머 지 않아 갓산에서 아므르 븐 하리쓰와 귀족인 자프나족의 찬양자로 서 환대받는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아직 히라에 있었다. 그 자신 중상 비방의 희생자로서 깊은 상처를 받았으므로 그는 쉴 새 없이 자신의 결백함을 입증하고 처량한 귀향살이룰 한탄하였다. 누만에게 바치는 다음 시에서 시인은 자신의 정당함을 변명하며 동시에 자바 를 베풀어 줄 것을 애원하고 있다 .1 조)
135) D il.Va n, ed. by Derenbourg, p. 83 ; Noldeke's Delectu s, p. 96.
<그들이 저에게 전해 준 말은 , 왕께서 저를 책망하신다는 것이오. 그 때문에 슬픔과 근심으로 몸둘 바를 모르지요. 지난 밤온 몸이 아파 꿍꿍거렸소. 보모가 잠자리를 깔면서 그곳에 찔레를 산더미처럼 쌓아 둔 것 같았소. 그대 마음속에서 의심을 품지 않도록 우리의 마지막 피난처인 신에게 맹세하오니, 나에게 잘못이 있다고 말한 자 그 자야말로 나와 둘 중에서 더 거짓말장이며 신의가 없는 자이오 쫓겨난 몸으로 편안히 바람씌며 지낼 수 있는 좁고 긴 땅을 찾아 내었소. 왕들은 나에게 재산 관리를 떠맡기고 나를 곁으로 불러 정중히 말했소 그대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자바를 베풀면 그들의 감사하는 마음은 잘못이 아니니라 .1 36 1
136) 여기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나비가가 갓산인들의 아낌없는 후원에 감사하고 있으므로 누만이 불만을 품을 이유가 없다는 것 이
댜 죽 누만은 그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감사를 표시하 는데 있어 그들의 과거 후원자들을 배신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는 것이다.
노여움을 버리시오! 아니면 사람들의 눈에는 마치 내가 송진에 더럽혀진 옴투성이의 낙타로 볼테니까요 신이 그대에게 명성을 내려 주셔 그 앞에서는 제왕들도 벌벌 떨며 자포자기함을 알지 못하십니까? 다른 제왕들이 별이라면 그대는 태양이니, 태양이 떠오르면 하늘도 발가벗습니다! 곤경에 처한 친구를 그대는 저버리지 않을 것이오. 제가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르지만 잘못은 인지상사입니다. 만일 저를 부당하게 다루신다면 노예를 학대한 것이나 진배 없으니 저를 용서하신다면 자신을 용서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침내 나비가가 자신이 사모하는 왕과 화해하고 히라를 다시 그 의 고향으로 삼게 되었으니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닌가. 그가 사망한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슬람이 전파되기 이전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 그에게 기회만 주어졌더라면 죽기 전에 무슬림으로 개종 하였을지도 모른댜 그는 스스로 <종교인 Dhu Umma tin> m ) 으로 자 처하였다. 실제로 그가 기독교도였다는 전승이 그 근거가 희박한 것 일지라도 오랫동안 시리아와 이라크에 거주한 점에 비추어 기독교 의 의형적인 면이나 최소한 기독교의 주요 교리를 파악하고 있었음 이 틀림없다.
137) Di wa n, ed. by Derenbourg, p. 76, ii, 2 1. 다른 데(p . 81, vi, 6) 에서 는 그의 애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왓드 Wadd 가 그대에게 안부를 전하노니! 여자들과 장난하는 것은 이제 나로서는 타당치 못 한 일이다. 이제 종교는 진지한 문제가 되었으므로 . > 왓드는 이교도 아랍인들이 숭배하던 신이었다 . 데렌구르그 Deren g our g의 텍스트에 는 <랍비 rabbI>, 죽 알라로 되어 있으나 이에 관해서는 ZDMG, vol. X1i (18 frl), p. 708 의 뉠데케의 견해를 참조 .
0~ 人 ~A'sha 나비가보다는 더 젊은 동시대 시인으로 아샤 즉, <시력이 약한 사 람>이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진 마이문 븐 까이스 Ma ymun b. Qays 에게서는 나비가 시의 특징인 심각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다. 직업적인 음유시인으로서 하프를 손에 들고 자기에게 상을 베 풀어 주는 이들에 대한 찬가를 노래하며 아라비아 반도를 종횡무진 하였다. 풍자가로서 그의 명성은 대단해서 그에 대한 상금은 <부르 는 것이 값>이었다 . 만장일치로 그는 아라비아 시인들 중 일등급에 속한다. 『노래의 책』 저자인 아부 알-파라즈는 그가 다론 모든 시인 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공언하지만 <이같은 견해가 아샤를 비롯한 기타 다른 시인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부언하고 있다. 그의 방랑 생활은 당시 아라비아에 존재하던 모든 문화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아샤는 기독교 신자임을 내세우지 않았지만 그의 시는 그와 친교를 맺고 있던 나 즈란의 주교들과 술을 그에게 판 히라의 기독교도 상인들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롤 보여준다. 그는 이교도들의 도덕 수준을 넘 지는못하였다. 아샤는 무함마드를 위해 지은 송시를 그에게 직접 낭송키 위해 그의 방 문길에 나섰다고 한다. 꾸라이쉬족은 이 소식들 듣고 그들 적의 명성이 그 렇게 유명하고 인기있는 시인의 찬사로 더 올라갈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도중에 그의 앞을 가로막고 행선지를 물었다. 그가 말했다. <이슬람 에 귀의하려고 당신들 친척에게 가는 길이오.> <그는 당신이 좋아하는 어 떤 관습걸을 금하거나 불법이라고 할 거요.> <그런 것이 어떤 것입니까>라 고 아샤가 물었다. 아부 수프얀 A 比 S ufy如이 말했다. <간음이오.> <내가 그 짓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니를 포기해 버렸어요. 또 무엇이 있습 니까?> <도박>이라고 아부 수프얀이 답했다. <아마 내가 도박에서 손해본 것을 보상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그로부터 얻어낼 수 있을 거요. 그 밖에
또 무엇이죠? > <고리대금업> <돈을 빌린 적도 빌려준 적도 없어요. 또 무 엇이죠? > <술> < 아, 그 경우에는 미호라스 al- Mihras에 저장해 놓은 물을 마시겠소. > 아샤를 말릴 도리가 없음을 알게 된 아부 수프얀은 그가 야마 마의 집에 돌아가서 무함마드와 꾸라이쉬 부족 간에 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기다린다는 조건으로 백 마리의 낙타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이에 아샤가 < 그렇게 하겠소 > 라고 말하자 아부 수프얀이 크게 외쳤다. <오, 꾸라이쉬족 이여! 여기 아샤를 소개합니다. 만일 그가 무함마드의 추종자가 되면 아랍 인들이 그의 시에 자극받아 우리의 적이 될테니 차라리 그에게 백 마리의 낙타를 모아주고 그를 우리 편으로 만듭시다 . > 1 381 아샤는 술과 주연의 묘사에 뛰어나다. 이 시인이 묻혀 있는 야마 마의 만푸하 M 如鉛垣를 찾은 이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술꾼 둘이 그의 묘지에서 술을 마시다가 술잔에 남은 마지막 몇 방울을 그의 묘 옆에 쏟아 붓곤 했다고 한다. 다음에 이 장르에 속하는 주시(酒詩)의 한 예로서 <무알라까트> 에 포함된 그의 시 일부를 소개한다. <이른 아침부터 술집으로 달려가기를 수백 번, 그때마다 잽싼 요리사와 재치 있고 활발한 시중이 인도의 초승달 모양의 굽은 칼처 럼 씩씩한 무리 톰에 끼여 바로 뒤쫓아 달려 온다 . 모든 인간은, 신을 신었든 벗었든,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안다. 편안한 자세로 기대어 서서 그들을 즐겁게 맞이하며 온매화(銀梅花) 가지 혼들어 인사한다. 술병 주동이에서 쏟아져 나오는 씁쓸하면서 달콤한 술을 그들에게 돌려라. 138) Ag h ani, viii, 85, 마지막 행 -86, I. 10.
술잔마다 모두 비워버리지만 어느 누구도 술병은 비우지 못하리라 . ‘잔을 또 채우라’고 외칠 뿐, 그네들은 흥청망청 마셔댄다. 시동(侍童)은 잽싸게 시중을 드는데, 귀에는 진주가 주렁주렁, 부산히 오가며 허리띠를 졸라맨다. 류트의 감동적인 선율을 살려주는 것은 하프Haip였다고 생각할 때, 느슨한 옷을 걸친 가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 부론다. 무리 사이를 예쁜 처녀들이 이리저리 휘짖고 다니고 모두가 흰 길다란 치마 자락을 질질 끌며 옆구리에는 술 가죽 부대를 혼들고 있다 .>1 391
139) Ly a ll, Ten An cien t Arabic Poems, p. 146 이 하, vv. 25-31.
알까마 ‘Alq arra 별명이 <씨 말 al -F alJI>인 알까마 븐 아바다 ‘Al q ama b. 'Abacla 의 생애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시 중 가장 유명 한 시는 할리마 전투 후에 갓산의 하리쓰 알-아라즈 H 祖ith al_A‘ra j 룰 위해 지은 것으로 시인의 부족인 타밈 T amim의 포로들__즈그 중에는 시인의 형제 또는 조카인 샤스 Shas 가 들어 있었다―――을 석방시켜 줄 것을 탄원하는 것이었다. 다음 시구들은 속담처럼 되었 다. <여자들에 관해 묻는 것입니까? 그들의 고통을 날카로운 의사의 눈으로 꿰뚫어 알 수 있습니다. 회색머리거나 가축을 적게 가진 남자는 여자들에게서 호감은커녕, 빈정거리는 말만 듣습니다 . 부(富)는 명성을 얻게 해주니, 그들은 부를 얻기를 꿈꿉니다. 또 청춘은 여전히 그들 마음속의 소망입니다 .>140)
140) A 비 ward t, The Di va ns, p. 106, vv. 8-10.
애 7H( 哀歌) 위 시에서 처럼 남성에 대한 경멸조의 시구를 볼 때 이슬람 이전 시대 아라바아 여성들의 시가가 눈에 띄게 남성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사랑보다는 죽음을 더 자주 노래하였다. 애가(리싸 ri臨 또는 마르씨야mart.hiy a) 는 여류시인들의 고유 영역으로 여겨졌 다. 가장 오랜 애가의 형식이 타압바따 샤란의 죽음에 관해 그의 누 이가 읊은 시구에서 나타난다. <오 너그러운 기사, 그대 라크만 Rakhrnan 에 잠들다 . 수프얀 S ufy an 의 아들, 자비르J ab ir의 아들안 싸비트 Thab it여! 그는 친구들을 위해 술잔을 가득 채우고 그의 부하를 즐겁게 해주었 다 .>'4 1)
141) [fama sa, p. 382, I. 17. 142) Noldeke, Beit rag e zur Kennta niss der Poesie der a/ten Araber, p. 152.
<대체로 아라비아의 애가는 매우 단순하다. 여류시인은 억누를 길 없는 슬픔과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여 고 인이 얼마나 깊은 애도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지를 보여준다. 그 를 아라비아의 미덕 중 용맹과 관대함의 귀감으로서 묘사하며 ‘이 제 누가 고차원의 결정을 내리며, 적을 패배시키고, 궁핍할 때 가난 한 이들을 먹여 살리며, 낯선 이를 환대할 것인가?'라고 걱정하며 자문한다. 만약 애가의 주인공이 무참히 최후를 맞이하였다면 살인 자에 대한 불타는 복수심이 여자 특유의 강렬한 감정과 함께 표현 될 것이다 .>1421 칸사 Khansa 시적 재능이 뛰어난 아라비아 여성 중에서 영예의 상온 이슬람이
출현하기 전 마지막 몇년간 활약했던 칸사 그녀의 본명은 투마 디르 T1 ..1111ac;lir이다 ――? 에게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그녀의 애가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자신의 두 용감한 동생 무아위야 Mu'a wiy a 와 싸크르$akhr가 창과 칼에 찔려 쓰려지자 이를 비통해 하며 읊은 시 이다. 칸사의 시는 코 끝을 찡하게 하면서도 정감이 어려 있고, 강 렬한 열정을 나타내면서도 장중하고 간소한 문체가 특징인데 이룰 다른 언어로 옮긴다는 것은 도저히 어려운 일이지만 다음에 몇 구 절만옮겨본다 <죽음의 사자가 관대한 자의 죽음을 만방에 큰 소리로 고하니 만인이 알게 되도다. 그 소리에 벌떡 일어나 보니 바로 싸크르가 죽었다네. 비통함과 두려움에 나의 영혼은 그 부음(計音)을 맞이할 수 없구나 . 비탄과 절망에 잠겨 나는 마치 술 취한 사람으로 보이네. 서 있는 것도 잠시, 이내 비틀거리는 다리가 절로 주저앉는다 .>143 ) Yud hakkiruni 血 ‘u al-sh amsi $akhran wa-adhkuruho likulli ghu robi shamsi <해 뜰 때 싸크르의 슬픈 추억 살아나더니 해가 져도 그의 모습 떠오르네.> 이교도 시대에 출생한 마지막 시인들 지금까지 열거한 시인들 외에도 많은 시인들이 있다. 죽, 예언자 에 의해 <고용>되어 그를 대신해 유용한 역할을 수행한 핫산 븐 싸비트, <바나트 수아드 Banat Su‘ 타(수아드는 떠나고)>로 시작하는 유명한 무함마드 칭송시의 작자인 카브 븐 주하이르 Ka'b b. 143) 같은 책 , p. 175.
Zuhayr , 칸사처럼 형제의 죽음을 몹시 애통해 한 무탐밈 븐 누와이 라 Mu tarnmim b. Nuwayr a, 술을 노래한 시인으로 금기인 술에 빠 져 칼리파 우마르로부터 투옥과 추방의 처벌을 받은 아부 미호잔 Abu 編an, 풍자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였던 후따이아 al- I:Iutay 'a (난장이)가 있다. 이들 모두는 <무카드라문 Mu khac;1ramun>의 부류 에 속했다 . 이는 이교도 시대에 태어나 무슬림이 되지는 않았더라도 이슬람 이후에 사망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고대 시가의 수집 바스라와 쿠파의 문법학자들은 여러 다양한 원칙에 따라 고대 아 라비아 시가의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함으로써 귀중한 유산을 보존 하였다. 이렇게 개인의 시나 같은 부족 또는 같은 부류에 속하는 시 인들의 작품을 한데 모아 만든 시집을 <디완Di wan( 복수는 다와윈 Dawawm) > 田) 이라 불렀다 또한 편찬자는 시가 좋은 평판이 났거나 시의 우수홍} 때문에 또는 그 밖의 다른 이유로 선정한 다수의 <까 씨다>를 시집으로 묶어 편집하기도 하였다. 또 단시(短詩)나 시의 단편(斷片)을 주제에 따라 각기 다른 제목으로 한데 묶어 명시 선집 을 펴내기도 하였다.
144) [역주] 회계장부, 둥기부, 시집을 뜻한다. 공문서를 보관하는 행정관 청을 의미하기도 한다 . 아랍 최초의 <디완>은 우마르가 병사들의 급여 지급을 위해 작성한 <회계장부>였다. 그 어원은 다양한데 페르시아 어 원으로서는 dev( 미친 , 악마)와 서기룰 뜻하며, 아랍어 어원으로는 da- wwana( 모집하다, 기록하다)의 의미이다. EI2, Drwan, p. 323 참조.
디완 <디완> 중에 손꼽을 만한 것으로는 스페인의 아랍 언어학자 알 람 al-A'lam (약 l ffi3년 사망)이 주해 • 편집하고 l 'ol O 년 알바르트 Ahlward t l45) 가 발행한 『여섯 시인(나비가, 안타라, 따라파, 주하이르,
145) [역주] Wi lh elm Ahlward t0 828-1909) :독일의 동양학자. 아랍어에
정통 하였으므로 고대 아랍 시집을 비롯 고대 문헌의 고중·주해 작 업에 몰두하였다 주요 저술로는 『 아랍 시와 시학 Uber Poesie und Poetik der Araber 』 (1856) 『 여 섯 시 인 의 디 완 The Di va ns of the six anc ien t Arabic Poe ts 』(1 870), 『고대 아람시 의 진위 에 관한 고찰 Bemerkung e n iibe r die Aecht he it der a/te n Arab. Ged i c ht e 』 (1872) 이 있다.
알까마, 이므루 알-까이스)의 디완 The Diwa n of the Six Poe ts』이 있다 . 또 숫카리 al - S ukkaii(약 塗 3 년 사망)가 자료를 수집하고 코저 가르텐 Ko segaJte n1 46 ) 과 벨하우젠 Wellhausen 147) 에 의해 발행된 『 후달 족의 시가 Ash‘ar al-Hu dfaliw in 』 를 들 수 있다.
146) [역주] Joh ann Gott fried Ludw ig Kose gart en(l792-1862) :독일의 동 양학자. 고대의 아랍어 자료를 번역하거나 주해하였다 . 『 후달족의 시 가 』 는 1 권이 1834 년 런던에서 간행되었다.
114487)) [원역 주제] 목J.은 W ealll-hMauuskehn ta (rl a 8t4 4 또-1는91 8)al :- I독k일ht의i y삶동a양 t로학서자 .모 두 시선(詩選)을 뜻한다.
시 선집 편찬된 순서로 주요 시 선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 무알라까트 』 이므루 알-까이스, 따라파, 주하이르, 라바드 , 안타라, 아므르 븐 쿨씀, 하리쓰 븐 힐리자의 일곱 송시의 시 선집에 붙여진 이름으로 때로는 나비가와 아샤의 두 송시가 덧붙여지기도 한다. 이 시집의 편찬자는 우마이야조에서 활약하고 8 세기 후반부에 사망한 페르시 아 계통의 유명한 음유시인인 함마드 알-라위야이다 . 『 무알라까트 』 에 관해서는 앞에서 이미 다루었으므로 이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훨 씬 방대한 동시대의 시 선집으로 넘어가겠다. 2 『무팟달리 야트 Mufa o<;j al iyy a t』 1 481 편찬자인 무팟달 알一답비 Mu fac; lo al al- I)a bbI( 약 7% 년 사망)의 이
름을 따서 지어진 것으로 칼리파 만쑤르 Man $訂가 자기 아들이자 후계자인 마흐디 Mah di의 교화를 위해 그의 제의로 만들어졌다 . 1 2.8개의 송시를 포함하며 무팟달의 의붓 아들 이븐 알-아라비 lbn al-A ' rabI 로부터 원본을 구한 안바리 An 넒Ii (916 년 사망)의 개정 판과 마르주끼 Marzuq i (1 030 년 사망)의 개정판 두 종류가 남아 있 다 . 세번째 『 무팟달리야트 』 는 1885 년 토르베크 Thorbecke 에 의해 발 행되었고 찰스 라이얼 경이 최근에 전권을 아랍어 주석과 영문 번 역 , 주해와 함께 펴냈다 .1 49)
149) Oxfo r d, 1918-1921. 인명, 지명, 시 인용문, 선택 어휘의 색인은 베 반 교수가 작성, 1924 년 E. J. W. Gib b 추모집 시리즈로 발행되었다.
3 아부 탐망의 『 하마사』 아부 탐맘 하비브 븐 아우스 Abu Tamrr 函 n I:Iarn b b. Aws 자신 이 유명한 시인으로서 칼리파 마문 Ma'm 따과 무타썸 Mu‘ 臼與 n 밑에 서 활동하다가 훈 0 년경 사망하였다. 그의 생애 말엽에, 쿠라산의 강 력한 지방 총독으로 실질적으로 독립 군주였던 압둘라 븐 따히르 ‘Abdul1 曲 b.Ta hir를 찾아갔다. 이븐 칼리칸 Ibn Khallikan1 50) 의 기술 에 따르면, 아부 탐맘이 『하마사』를 지온 것은 이 여행길에서였다고 한다. 즉 하마단 Hamadhan( 에크바타나F.c ba tana)에 도착하자 막 겨울 철이 시작되어 혹독한 추위와 눈 때문에 길이 막히자 그는 하는 수 없이 여행을 중단하고 해빙을 기다려야 했다. 그가 일시 체류하는 동안 그 지방 유지의 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는데 그의 서재에서 사 막의 아랍인들을 비롯한 여러 지방의 사람들이 지은 시 선집을 발 견하였다. 마침 한가로운 때였으므로 거기에 나오는 작품들을 탐독 하여 그 중 좋은 시구만을 골라 『하마사』를 편찬하였다 .1511 이 선집 도 각기 길이가 다른 l(y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 장의 제목이 시
150) [역주] 저명한 전기사전 작가. 본서 pp. 596-597 참조. 151) Ibn Kha llika n, ed. by W ilste n fe ld , No. 350= 드 슬란의 번역서, vol. ii , p. 51.
집의 제목이 되었다. 이들 장의 제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용기의 장 (Bab al-I:f arrnsa ) 2 애가의 장 (Bab al-Mar 건thI) 3 예절의 장 (Eb al-Adab) 4 연가의 장 (Bab al-Nas ib) 5 풍자의 장 (Bab al-H ija) 6 환대와 찬양의 장 (Bab al-Ac ;lyaf wa-'1-Ma 에J) 7 묘사의 장 (Bab al-Sif at) 8 여 행과 휴식 의 장 (Bab al-Say r wa-'1-Nu'as) 9 해학의 장 (Bab al-Mulab) 10 여성 훈계의 장 (Bab Madhammati al-N isa ) 『하마사』의 목차를 보면 장시에서 발췌한 구절과 그 자체 완벽한 형식인 단시가 포함되어 있다. 동 시집에 등장하는 시인들은 이슬람 이전이나 이슬람 초기의 시인돌인데 이름이 알려진 시인은 비교적 얼마 안 되고 대다수는 무명이거나 그들 이름이 붙은 시구에 의해 서만 겨우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이들 무명 시인들이 이룩한 고도 의 탁월성이 한편으로는 천부적 시의 재능이 당시 널리 퍼져 있었 음을 보여 주며, 또다른 한편으로는 시가 아라비아 사회의 일반 대 중 계층에 널리 장려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주해자인 티 브리지 Ti b rizi가 말한 바와 같이 <자신이 지은 시보다 『하마사』로 서 더욱 이름이 난 훌륭한 시인>인 아부 탐맘의 정교한 심미안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4 부흐투리 Bu l)turi의 『 하마사』 아부 탐맘과 동시대인인 부흐투리('iE?년 사망)의 『하마사』는 아부 탐맘의 『하마사』보다는 뒤진다 .152) 실제로 편리하다고는 하지만 여러
부문으로 구분하고 각 부문이 극히 제한된 주제를 예시하는 것은 본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심히 손상시킨다. 게다가 부호투리는 시의 미적 가치에 대한 평가에 있어 보다 포용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했 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이나 생각과 일치되는 시만을 극찬 하였다. 5 『 장하라Janil ara 』 49 편의 송시를 모은 시집인 『잠하라토 아쉬아르 알-아랍 Jar nha- rat Ash‘ar al-'Arab 』은 1 (XX)년경 아부 자이드 무함마드 알-꾸라쉬 Abu l.ayd Mu}:iarnmad al- Qura shI 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자에 관해 다른 문헌에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다. 시집 이외의 출전 많은 이슬람 이전의 시가가 <디완>이나 시 선집 외에도 전기나 문학사, 언어학의 관련 서적 등에서 인용되고 있다. 죽 아부 알-파 라쥐 이쓰파한 (%7 년경 사망)의 『노래의 책.!I, 아부 알리 알-깔리 Abu 'Ali al- 馨 (%7 년경 사망)의 『키탑 알-아말리 Ki 넒 b a/, -Am 짊I 』 , 무바라드 Mubarrad (歸년경 사망)의 『카밀 Kan 끄1 』, 바그다드의 압둘 까디르 ‘Abdu ' 1-:- Qadir (1 68'2년경 사망)의 『문학의 보고 Khiza nt al,- Adab 』가 있다. 이슬람 이전 시가의 전승 지금까지의 기술에서 아랍 최고(最古)의 현존하는 시가는 앙1 ] 기 초 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그 후 약 2 백년 동안 필기술(筆記術)이 아 랍인들 사이에 보편화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따라서 이슬람 이전 시 가는 구전에 의해서만 보존되어 왔는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느냐 152) Noldeke, Beit rag e , p. 183 이하 참조. 부호투리의 시 선집에는 이 슬람 이전 시기의 시가 비교적 적다.
하는 의문이 생긴다. 사람의 입을 통해 오랜 기간 전해온 시가가 원 형을 대강이라도 유지하였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시인의 부족을 찬양하였거나 적을 비방한 많은 시들이 꾸준히 시인의 친척들에 의해 음송되었고 그런 식으로 짤막한 < 특별한 경 우를 위한 시 occasio n al P'.)eIT1S > 나 좀더 긴 시들이 단편적(斷片的) 으로 계속 구전되어 왔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 무알라까트 > 처럼 완전한 <까씨다>들도 그 생명이 전적으로 인기에만 의존하는 것이 었다면 그 중 극히 소수의 시만이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일 것이다. 라위茂 W( 전송자) 시를 사람들의 망각으로부터 구해 준 것은 그리스의 음유 시인 Rha psodi s t과 유사한 제도였다. 자칭 시 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라 위>를 두고 가는 곳마다 데리고 다녔다. 그리하여 자기 시를 암송 케 하여 시 그 자체와 시와 관련된 상황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게 하였다. 때로는 시인이 <라위>를 겸하는 경우도 있었다 . 주하이르 는 계부인 아우스 븐 하자르 Aws b. I:Ic지 ar 의 <라위>였으며 그 자 신의 <라위>는 후따이아였다. 처음에는 시의 전송이란 것이 무보수 로 좋아서 하는 일이었지만 후에는 일종의 영리 사업이 되어 <라 위>둘은 시인 일 개인에 부속되는 대신 점차 독자적인 계층을 형성 하고 막대한 양의 고대 시와 다방면에 걸친 지식을 기억해 두었다. 일예로, <라위> 중 한 사람인 함마드는 언젠가 칼리파 왈리드 븐 야지드 Wand b. Ya zi d 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저는 알 파벳 한 글자마다 그 글자와 운이 맞는 장시 100 편, 단편은 셀 수도 없을 만큼 읊어 드릴 수 있습니다.> 그가 마침내 시 음송을 시작하 였는데 한참 후에 피곤을 느낀 칼리파가 자기 대신 그의 주장을 확 인하고 끝까지 그의 시를 돋도록 다른 사람을 남겨두고 자리를 떴 댜 그의 암송은 그 뒤까지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는 그 자리에 서 이슬람 이전에 활동하였던 시인들의 <까씨다> 쵸 H 片넷t 읊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왈리드는 그에게 십만 디르함dir hem 상당의 상을 내려주도록 명하였댜 153 ) 이처럼 히즈라 1 세기 말경, 즉 기원후 700 년경, 시를 기록하는 관습이 시작되었을 때는 이미 상당한 시가 소실된 뒤였을지는 몰라도 여전히 이슬람 이전에 지어진 시들이 많 이 전송되고 있었다. 이후 많은 <라위>들이 자신들의 전승을 아무 에게도 이어 주지 못하고 전사하거나 자연의 순리대로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댜 인문학자들 새 시대는 새로운 관심과 새로운 생활 방식을 가져왔다. 대다수 무슬림들의 눈에는 고대 시가가 이교도들의 낡은 시대 정신을 나타 내는 것으로만 비추어진 까닭에 전혀 무슬림들의 공감을 불러일으 킬 수 없었다. 그들은 꾸란이나 하디쓰 이의의 어느 것도 바라지 않 았다. 그러나 다른 장에서 그 이유를 말하겠지만 꾸란과 하디쓰의 언어는 아라비아 반도를 벗어나자 지역 방언으로 급속히 전락하게 되었다. 무함마드 스스로 긍지로 여기던 <순수한 아랍어>가 이라크, 쿠리산, 시리아, 이집트에 정착한 무슬림들에게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성전인 꾸란의 해석 문제가 대두되면서 아람 문법학과 사전 편찬학이 태동하였다. 이들 학문에 대한 연구의 열기가 가독하던 바스라와 쿠파의 언어학자들이一-― 이들은 인문학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때묻지 않은 아랍어의 원천인 이슬람 이전 시가에서 최상의 자료를 구한 것은 당연하였다. 처음 고대 시가는 단순히 언어학적 연구를 위한 토대만을 제공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학 연구에 대한 의욕 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생존해 있는 <라위>둘을 열심히 수소문하 여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도록 권유하였다. 이렇게 하 153) Ibn Kha llika n, ed. by Wi iste nfel d No.204= 드 슬란의 번역서, vol. i, p. 470.
여 유명 시인들의 시가 수집, 정리되어 기록되었으며 시에 대한 일 종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공급도 증가하게 되었댜 1 5-1 )
154) 라위들과 언어학자들에 의한 이슬람 이전 시가의 구전에 관한 많 은 홍미로운 이야기는 본 주제의 기술에 자료를 제공해 준 알바르트 의 Bemerkung e n iibe r die Aecht he it der alte n Arabis c hen Gedi- ch te( Greif sw ald, 1872) 에서 찾아볼 수 있다 .
고대 시가의 변조된 전승 이같은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실수는 부득이 한 것이었다. <라 위>들의 기억력이 나빠져서 그렇게 된 경우는 고의성이 없다 치더 라도 의도적으로 속임수를 쓴 경우도 많았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탄로의 위험성이 가장 적기 때문에 자신의 시나 자기들만이 아는 출처에서 갖다 짜집기한 것을 일부 고대 시인들의 작품인양 거짓 꾸미려는 유혹이 가장 강하였다. 시에 관한 지식이나 시를 짓는 재 능에서는 이들 <라위>들이 언어학지들·보다 한 수 위에 있었다. 물 론, 언어학자들이 비평력은 없어도 손에 넣은 것은 무엇이든지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기는 하였다. 함마드 알一라위야 함마드 알-라위야에 관해 전해지는 이야기는_물론 함마드의 경우가 위와 같은 부류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예는 아니라고 할 수 도 있지만― __ 그가 쓴 방법이 얼마나 비도덕적인가를 극명하게 보 여준다. 그와 동시대인인 무팟달 알-답비는 함마드가 손댄 시는 돌 이킬 수 없는 것이 되버린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이유는 <함마드가 아랍인들의 언어와 시에 정통하고 시인들의 표현법이나 사상을 익히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항상 남의 시를 모작(模作), 표절하거나 모작한 시구를 똑같은 작자의 원작 속에 삽입하였다. 그 럼으로써 그 시는 비평가가 아니면 진위를 분별할 수 없을 만큼 원
작으로 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 죠)
155) A g函[, V, 172, l. 16 이하. [역주] 자힐리야 시대의 시 표절 문제 룰 거론한 대표적인 학자로는 무스따파 싸디끄 알-라피아 Musta fa Sadi q al-R afi‘의『아랍문학사』 (1911) 와 따하 후사인의 『자힐리야 시』 (1926) 둥이 있다.
칼라프 알一아호마르 이같은 위조술은 함마드 파에서 기술을 전수받은 칼라프 알-아흐 마르 (800 년경) 사망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가 정말로 샨파라의 저작 으로 알려진 유명한 『라미야』의 원작자라면 그의 시 재능은 최고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노년에 그는 회개하여 바스라와 쿠파의 학자들 이 진품으로 인정하였던 몇몇 시가 자신이 직접 쓴 작품이였다는 사실올 털어 놓았다 . 그러나 이들 학자들은 칼라프의 고백을 일소 (一笑)에 부치며 <지금 네가 주장하는 것보다 그때 말한 것이 훨씬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변조의 다른 원인 <라위>들 말고도 언어학자들에 의해 변조가 이루어졌다. 꾸란과 하디쓰가 무함마드의 출신 부족인 꾸라이쉬의 방언으로 말해지고 그 후 기록됨으로써 이 방언이 고전적인 표준어로서 간주되었다 .156) 이에 따라 고대 시가에서 발생한 변이는 대부분 바로 잡아지게 되 었다. 그리고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예컨대 <알라 All ah>가 이교도들의 여신 <알一라트 al_ 냐it>대신 쓰여졌다. 더욱이 <까씨다>의 구조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든지 논리적인 통일 성이 부족한 것은 몇몇 구절이 빠지거나 바꾸어졌기 때문이다. 이같 은 변조의 모든 형태는 상세히 예시될 수도 있으나 오늘날 전해지 는 시가가 이슬람 이전 시대의 미개한 아랍인들에게 읊어졌던 초기
156) 그러나 이 견해는 역사적 사실이나 이슬람 이전 아랍인들의 여론과 일 치하는 것은 아니다 (Noldeke, Di e Semi tisc hen Sp r achen, p. 47 참조).
시의 원형을 얼마큼 유지할 수 있었는지는 앞서 전술한 내용에서 독자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 종교는 이슬람 이전의 아랍인들 생활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 으므로 시에는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은 막연히 절대 신 <알라>를 믿고 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해 아라비아 전역에서 숭 배되던 알라의 세 딸―-― · 그들의 간청이라면 알라는 두말 없이 들 어 주었다-알-라트, 마나트 M 印 a t, 알-웃짜 al-'Uzza 를 믿었다. 또한 그 밖에도 수많은 우상들이 숭배되었으며 숭배자들에게는 계 속 행운을 안겨다 주었다. 대부분의 베드윈들은 진정한 신앙심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들은 신에게 맹세하는· 일이 편 하다는 것을 혹 알기도 했지만 신에게 기도 드릴 충동은 느끼지 못 하였다. 곤경에 빠졌을 때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 려고 하듯이 <알라>에게 의지하려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 은 미신적인 의식에 대한 믿음이 더 강하였다. 종교라는 것을 진지 하게 생각하기보다는 그것의 실용적인 장점만을 잽싸게 받아들였 다. 종교에서 아랍인들은 다소 유치한 종교적 만족감을 즐길 수 있 올 뿐 아니라, 싸움이 금지된 넉 달의 신성한 기간 동안 휴식과 평 안을 제공받았다. 또한 메카 순례의 관습에 따라 거족적 축제에 참 여할수 있었다. 우카즈 ‘U 造 z 시장 상업도 종교와 나란히 보조를 맞추었다. 동시대에는 큰 시장이 섰 는데 가장 유명한 시장이 幻일 동안 계속되는 우카즈 시장이었다. 이들 시장은 어떤 면에서 고대 아라비아의 사회, 정치, 문학의 장 (場)이었다. 그것은 여러 부족원들 사이에 자유롭고 대담한 교제가 가능한 유일한 기회였다. Im)
아랍인들은 고대 그리스나 근대 영국에서처럼 운동 경기를 통해 서가 아니라 시나 웅변의 과시를 통해 홍취를 돋구었다. 장이 서고 맞수가 되는 시인들이 각자의 시를 웅변조로 낭송하면 이룰 정평 있는 대기들이 심시를 하였다 . 다른 어느 곳에서도 그만한 신인 등 용 무대는 없었다. 오늘 우카즈에서 말한 것이 내일 전 아라비아에 그대로 전파되는 것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젊은 시절의 무함마드가 우카즈에서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나즈란의 주교인 꾸스 븐 사 이다Qu ss b. Sa' i da 의 설득력 있는 웅변을 돋곤 하였다고 한다. 따 라서 그는 기독교 설교자의 강론과 이교도 음유 시인들이 읊은 훌 륭한 송시를 대조, 바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베드윈의 인생관은 철저히 쾌락주의적인 것이었다. 사랑, 술, 도 박, 사냥, 노래와 연애의 즐거움, 재치와 지혜가 깃든 짧고 신랄하며 우아한 표현 이러한 것들이 좋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밖에 베드윈들의 눈에는 묘지만이 보일 뿐이었다. <구운 고기와 술 : 믿음직한 낙타를 기운차게 올라 타고 주인은 나즈막한 골짜기와 평평한 평원을 지나 황급히 달려간다. 하얀 살결의 여인들이 금술로 장식을 단 희한한 옷자락을 질질 끌고간다. 감미로운 기타 소리와 풍요, 안락함과 같은 즐거움도 잠깐 뿐, 세월은 변화무쌍한 것, 그 세월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인간; 부자든 가난뱅이든, 식량을 넉넉히 쌓이둔· 자든 변변치 않게 쌓아둔 자든, 모두 똑같은 자들이다. 죽음만이 전부일 뿐이므로 >1581 그렇지만 이들이 항상 쾌락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며 일생을 보 157) Wellhausen, Reste Arab. Heid e ntu ms(2 nd. ed.), p. 88 이 하 . 158) lfama sa, 506.
냈다고 추측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에게는 어떤 목표 ― -확실히 세속적인-즉 부와 명예, 혈족에 대한 복수 둥의 목표가 있었다. 어떤 이는 말한다 < 마치 거대한 산처럼, 간절한 그리움이 내 가슴 을 짓누르는데 내가 죽는다니 그런 일이 없도록 하여 주소서 ! > 1 59) 이므루 알-까이스의 다음 이야기는 더욱 심금을 울린다 . < 내가 그럭저럭 먹고 살아가기 위해 일하는 것이라면, 약간의 수입만 있다 면 족하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네 . 그러나 나는· 영원 무궁한 명 성을 얻고자 할 뿐이며 나와 같은 사람들이 때로는 영원히 이름을 떨칠 때도 있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사나이란 야망을 한껏 펼쳐 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도다 . > I f,()) 이것은 고상 한 감정을 점잖게 표현한 것이지만, 이는 마치 화자가 대의명분을 잃고 죽음이라는 운명의 최후의 일격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절망감 울 떨쳐버리려다 지쳐서 나오는 탄식으로만 들린다. 아라비아의 유태교와 기독교 동시대는 소요와 혼란의 시기였다. 주하이르의 말대로 부족과 집 안끼리의 싸움이 땅을 악취로 뒤덮었다. 진지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 라면-인생이란 무슨 가치가 있으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또 그것은 어디로 이르는 것인가?——_라고 자문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의문에 우상 숭배가 해답을 줄 수는 없었댜 그러나, 무함 마드 출현 전 일백 년 동안 아라비아가 우상 숭배에만 빠졌던 것은 아니었다. 유태교 이주민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히자즈 지방에 거주
159) 같은 책 , 237. 160) Dil na n of Imru' al-Q a y s , ed. by 드 슬란이 편집한 아랍어본 p. 22, I. 17 이 하 =No . 52, 11, 57-59(p. 154) in A비 ward t' Di va ns of the Six Poets . 그러나 마지막 구절의 경우 원수 를 갚고 난 까이스 븐 알-카 땀Q a y s b. al-Kha tun의 말을 비교:<그렇게 죽음이 다가오면, 욕구 룰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한 내 영혼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네> (Jfama sa, 87).
하고 있었다. 이들이 이곳에 정착한 것은 티투스 T itu s1 6 11 또는 하드 리안 Ha dri an1 62) 의 팔레스타인 정복 때부터 일 것이다 . 그들은 새로 운 고향에서 자신들과 거의 같은 혈족의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완전히 아람화되었다. 이는 얼마 안 되는 현존하는· 그들의 시가가 증명한다. 그러나 그들은 교역이나 상업 활동뿐 아니라 극히 중요한 사항인 종교에 있어서도 역시 유태인다웠다. 이러한 점과 그들이 주 위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 톰바구니에서 고립되어 살고 있다는 사 실이 그들을 사막의 소금으로서 특징짓고 있었다. 히자즈에서는 그 들의 정신적인 우위가 심각할 정도로 도전을 받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예멘에서 그러하였다. 유태교가 룹바아 아스아드 카밀에 의 해 히자즈로부터 예멘에 들어왔다는 전설은 무시해도 좋을 듯싶다. 분명한 것은 유태교가 6 세기 초경 기독교와 나란히 그곳에 확고하 게 뿌리를 내렸다는 점과 유태교에 귀의한 힘야르의 군주 두 누와 스를 통해 유태교의 적인 기독교에게 일시적이지만 피비린내 나는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멘에서의 기독교는 나즈란의 고원 지대 주민들을 제의하곤 갓산과 히라의 아랍 군대가 대치하고 있던 로마-페르시아의 접경 최북단과 북동 지역에서처럼 번성한 것 같지는 않다.
161 ) [역주] 로마 황제 (40?-81, 재위 79-81) 로서 70 년 유대 전쟁의 최고 지휘자로서 예루살렘을 침략시켰다.
162) [역주] 로마 황제 (76-138, 재위 117-138).
히라의 이바드 ‘lbad 우리는 앞에서 히라에 이바드 죽 신의 노예들이라 불린 기독교도 들이 많이 살고 있었음을 알았다. 이들을 통해 바빌로니아의 아람문 화가 아라비아 반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그들은 따라파나 무타람 미스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필기가 아라비아에서 보편화되기 훨씬 오래 전부터 글쓰기를 배워 알고 있었으며 본 장의 주제를 이
루는 시와는 성격상 전혀 다른, 아람어로 쓰여진 최고( 最 古)의 시를 만들어냈다 . 안타깝게도 이 시의 대부분은 소멸되고 말았는데 이는 수많은 이슬람 이전 시를 보존하는 데 공헌한 음유 시인들이 전통 적인 시가만 집착하고 새로운 형태의 시가는 암기해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디 븐 자이드 ‘Ad i b. Zay d 이바드족 출신 시인 중 가장 유명한 시인은 모사꾼으로서의 대담 한 관록에 관해 이미 앞에서 대략을 적은 바 있는 아디 븐 자이드 이다. 이슬람의 문학 비평가들은 그를 도회지 사람q ara Wi이라고 해 서 <일급 시인 Fub따 >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일화는 시사적이다 . 시인 앗자즈 al-'Aj j척 (7OO 년 사망)는 동시대인인 띠림마흐 al_Ti rimmab와 쿠마이토 al-Kuma yt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이 나에게 시 언어에 사용되는 진기한 표현을 물어 오면 가르쳐 주었는데 얼마 후에 똑같은 표현이 그들 시에서 잘못 쓰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유인즉 , 그들은 도회지 사람으로 자기 들이 직접 보지 못한 것을 묘사하는 반면 , 베드윈인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본 바대로 묘사하고 그것을 올바로 적용하기 때문이다 . >163l 아 디를 말할 때는 주로 그의 주가(酒歌) wi ne-so ng를 떠올린다. 동양 의 기독교는 항상 음주나 술의 판매와 연관이 있었다. 기독교 사상 은 이바드 출신 술 판매상들에 의해 아라비아 중심부에 전달되었는 데 이들이 기독교 교의를 유명한 시인인 아샤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아디는 술을 마시면 다른 사람들처럼 희희낙낙해지지만 <우 리 내일은 죽으리>라는 기본 사상온 여전히 되풀이해서 들려 준다. 그가 묘지 옆을 거닐 때 사자(死者)가 그에게 크게 외쳐댄다 . 164l
163) A g函u, ii, 18, 1. 23 이 하. 164) 같은 책 , ii, 3 4, 1. 22 이하 .
<우리를 꿰뚫어 보시는 그대가 말씀하시길, 곧 나에게 쇠망의 때가 닥쳐올 것이다.' 태산이 세월의 변화무쌍함과 그에 따른 모든 것을 견디어낼 수 있을까? 수많은 나그네들이 우리 곁에 와서 머물고는 가장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곳에서 술을 꿀꺽꿀꺽 들이킨다. 술병 주둥이마다 여과기는 술을 걸러내고 멋진 마구(馬具)로 장식한 명마(名馬)는 땅을 차네! 한때는 그들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고 빈둥빈둥거리며 마음껏 사치하며 살았지. 그러나보라! 이제 세월이 그들을 왕겨처럼 휩쓸고 가버렸음을…… 그처럼 인간은 유수 같은 세월의 희생양이니, 그처럼 세월은 용맹한 자와 선한 자를 밤낮 쾌락에 빠지게 하누나.> 이 시의 낭송으로 히라의 신화적인 이교도 왕 누만 알-아크바르 Nu'man al-Akbar 가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며 후에 그는 은자가 되었 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연대가 맞지 않는 불합리한 점이 있지만 보 다 엄숙한 분위기의 기독교 시가 이교도들의 마음속에 남겼던 인상 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긍이 간다. 이슬람 이전의 시가 반드시 정서적으로 이교도적인 것은 아님 히라와 갓산의 궁전은 무함마드 출현 이전의 방랑 시인들에게는 이미 익히 잘 알려져 있었다. 이들은 후원자와 보상금을 찾아 그곳 으로 몰려들었다. 나비가, 라비독 아샤 같은 시인들이 주변 문화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은一一-주변의 문화가 삶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경우는 드물었을지 모르지만 __- 분명하다. 종교적 감정 의 영향을 이슬람 이전 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 이에 해당하는 시구는 앞에서 설명되었다 . 그러나, 이 견해는 더 이상 통설이 아니다. 주로 폰 크레머, 찰스 라이얼 경, 벨하우젠 의 논증 덕분에 다음과 같은 점이 인정되었다. 1) 대개의 경우, 위에 서 언급한 종교적 감정은 그 기조가 이슬람적이 아니며, 2) 그러한 종교적 감정이 드러나는 구절이 이슬람에 기원하지 않고, 3) 대체로 피상적이지만, 유태교 특히 기독교의 광범위한 영향을 받은 당연하 고 필연적인 결과이다 .lro) 이는 예컨대 독방의 승려와 그 방에서 새 어 나오는 불빛이 밤 늦게 돌아오는 나그네들의 밤길을 비춰 주는 장면 등의 빈번한 인유(引 P 兪)와 이미 인용한 바 있는 주하이르의 언 급과 같이 사악한 행위는 두루마리에 적혀져 심판의 날에 밝혀진다 고 되어 있는 『하늘의 책 Heav enl.y Book 』을 특히 언급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도덕적 관점에서의 고찰과 자기 성찰, 죽 음에 대한 묵상, 가문의 지속적인 생존보다는 개인의 생명을 고귀하 게 여기는 풍조에서도 그러한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 이러한 사실이 고대 아라비아 시가를 특징짓는 것은 아니지만 왕왕 그와 같은 사 실이 나타난다는 것은 앞에서 기술한 다론 사실들과 전적으로 일치 되는 것이다. 또한 6 세기에는 종교와 문화가 아라비아에서 그 세력 범위를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서서히 확장하며 이교도 민중에게 영 향을 끼치고 점차 이슬람이 도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정당화 시켜 주는 것이다.
165) Von Kremer, Ober die Gedic h te des Laby d in SBWA, Ph il.- Hi st . Klasse(Vie n na, 1881), vol. 98, p. 555 이 하 참조. Sir Charles Ly al l, Anc ien t Arabia n Poetr y, pp. 92-119. Wellhausen, Reste Arabis c hen Heid e ntw ns(2 nd ed.), p. 224 이 하.
제 4 장 예언자와꾸란 무함마드의 등장과 함께 전대에 드리워졌던 불가해한 장막이 거 두어지고 이제부터의 전승은 근거가 확실한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게 된다. 이같은 변화의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언자의 생애와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는 주요 사료를 대강 훑어보아야 한다. • 자료의 출처: 1 꾸란 첫째로, 꾸란을 들 수 있다 . 꾸란은 <무함마드가 가브리엘을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하는 계시나 계명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계시를 무함마드가 신의 명령에 따라 사람들에게 전달했을 뿐이다. 무함마드는 이른바 영감이라고 하는 것이 떠올랐을 때, 또 는 바로 그 직후에, 자리를 함께 한 교우나 추종자들 앞에서 꾸란 구절을 낭송했는데, 대개는 그들 중 어느 누군가가 야자나무 잎이나 가죽, 둘 또는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것에나 그 구절을 적어 두었 다. 이러한 계시는 그의 생애 중 예언자로서 보낸 23 년 동안 계속되 었다. 그러나 그의 생존 시에는 온전한 꾸란은 나올 수 없었다. 계 시는 일단 끝났지만 예언자의 생시에는 꾸란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거나 그의 계시를 수집할 수 조차 없었다.>
꾸란의보존 계시는 단편적인 사본으로 보존되거나 무함마드의 사후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꾸란 구절을 암송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가 크게 줄 어들 때까지 구전에 의한 암송으로 전해졌다. 그리하여 야마마 전투 (A D. 633 년)가 끝나고 우마르 븐 알-카땀 ‘Umar b. al-Kha tta b 은 당시 칼리파인 아부 바크르 Ab o. Bakr 에게 디움과 같이 진언하였다. <다론 싸움터에서 암송자들의 학살이 점점 늘어나면 꾸란의 상당한 분량이 유실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지체 없이 곧 그 꾸란 구절들 올 모아야 합니다.> 이에 아부 바크르는 예언자의 서기 중 한 사람 인 자이드 븐 싸비트.2ay d b. Thab it를 시켜 그것들을 모아 기록하 게 했는데, 그는 <양피지나 가늘고 흰 돌, 잎이 없는 야자나무 가지 와 사람들의 마음속에 홑어져 있던 것을 아주 어렵사리 끌어모았 다>. 이렇게 해서 편찬된 사본은 아부 바크르 생존 시에는 그에게 보관되다가 우마르에게 넘겨지고, 그가 죽자 딸 하프싸辻曲휴에게 맡겨졌다. 그 후 칼리파 우쓰만 ‘Ut hman의 재위 기간에 후다이파 븐 알-야만I:Iu dha yfa b. al-Yaman 이 시리아에서 읽혀지는 꾸란과 이라크에서 통용되는 꾸란 사본이 크게 다른 것을 발견하고 무슬림 들의 경전이 유태교나 기독교의 성서와 같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지 않도록 칼리파가 미리 손을 쓰도록 권하였다. 651 년 우 쓰만은 자이드 븐 싸비트에게 세 명의 꾸라이쉬 부족민의 도움을 받아 <개정판>을 마련토록 지시하고 꾸라이쉬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꾸란의 어느 단어에 관해 자이드와 이견이 생기면, 꾸라 이쉬 방언으로 쓰도록 하라. 왜냐하면 꾸란은 꾸라이쉬 방언으로 계 시되었기 때문이다 .>21 이것이 후에 결국 꾸란 정본이 되었다. <꾸
1) 무이르 Mu i r 의 Li fe of Mahomet, Intr od ucti on , p. 2 이하. 필자는 무 함마드 자신이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이 인용문에 제시 된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함을 밝혀둔다.
2) 여기 기술된 내용은 Fih r is t , ed. by G. Flueg e l, p. 24, I. 14 이하에서
인용함.
란의 새로운 사본을 많이 만들어 이슬람 제국의 주요 도시에 보냈 고 기존의 꾸란 사본은 칼리파의 지시에 따라 소각되었다 .>3)
3) Mu ir, 앞의 책, Intr od uc tion , p. 14.
꾸란의 사료로서의 가치 오늘날 전해지는 꾸란은 이본(異本)에 따른 이문(異文)이 거의 없 거나 사소하므로 정본임이 틀림없다. 더구나 꾸란은 극히 인간적인 기록으로서 무함마드 생시의 현세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그의 인 격과 신분에 관한 모든 면을 반향한다. 따라서 이슬람교의 기원과 초기 발달사를 추적하는 데 독특하고 권위있는 자료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료는 불교나 기독교 혹은 다른 고대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꾸란에 수록된 계시의 배열은 다소 뒤죽박죽이다. <수라 Sora( 꾸란의 각 장 )>~I 의 순서에서 연대순 배열은 찾아볼 수 없고 그 길이의 장단에 의해서만 그 순서를 알 수 있을 뿐인데 가 장 긴 장이 맨 앞에 위치하게 된다 .51 또한 꾸란의 각 장은 각운을 빼고는 공통점이 없는 앞뒤 연결이 안 되는 단편적인 구성으로 되 어 있다. 따라서 예언자가 실제 행한 말의 본 뜻이나 계시 배경, 시 기를 알아내기가 곤란할 때가 있다. 이러한 사정에서 꾸란을 이해하 는 데는 그 다음으로 중요한 자료 출처인 전승을 참고해야만 한다.
4) S 야 a 는 본래 일렬로 늘어선 돌이나 벽돌을 의미한다.
5) 짧은 기 도문 인 개 경 장 al-Fa ti ba 을 제 외 하고.
2 하디쓰 Ha dit h( 전승) 무함마드 생애 말년에 이르면, 무슬림 두 사람이 만날 경우 서로 새로운 진문(珍聞)을 묻고 각자 들은 예언자의 말이나 일화를 얘기 해 주는 것이 이미 경건한 관습으로 되어 있었다. 그의 사후에도 이 관습은 계속되었으며 <하디쓰>라는 명칭은 이제 전혀 새롭지 않은
전승이나 일화에도 쓰여졌다 . 61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래 무슬림들의 공적, 사적인 이해 관계가 걸린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유 일한 기준이던 꾸란이 급속히 팽창하는 이슬람 제국의 복잡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푸는 데는 충분치 못한 것으로 드러나 전승이라는 정교한 체계가 세워졌다. 이제 < 법적 효력과 어느 정도의 영적 권 위>를 획득한 무함마드의 말과 관행(순나 sunna) 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 예언자에게는 보즈웰 Boswe t 1 같은 전기 작가가 없었 지만 그가 이미 주목받는 인물로서 포교를 시작하자 교우들이 설교 내용을 빠짐없이 기억하거나 그의 행동을 주의 깊게 관 찰 하였다. 이 와 같이 <하디쓰>는 이슬람 이후 1 세기 동안 수많은 생존 증인들 로부터 전승을 수집하여 기억해 두었다가 구전된 것 이다. 전승은 주 문(마튼 ma tn)과 전거(사나드 sana d, 또는 이스나드i s 떠 d) 의 두 부문으 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 예언자와 아부 바크르 , 우마르가 기 도를 드릴 때 ‘만물의 주이신 하느님께 찬미' 란 말로 시작했다는 것을 나는 A 로부터 들었고 A 는 B 에게서 들었고 B 는 C 로부터 들었 다 >8) 는 식이다 .
6) Sp re~ g e r, 島 er das Tradit ion swesen bei den Arabem, ZDMG, vol. X, p. 2.
• 7) [역주] Jar nes Boswell (1 740-1795) : 영국 스코 틀 랜드의 전기 작가로서 사무엘 존슨 Samuel J ohnson 의 전기 인 Lif e of Samuel J ohnson 을 썼 다. 흔히 충실한 전기 작가를 지칭하는 데 인용된다.
8) [역주] 여기 우리말로 번역된 배열 순서와는 반대로 아람어의 <하디 쓰>는 긴 이스나드가 선행하고 주문(主文)이 끝에 오게 된다 . 결국 , 예 언자 무함마드에게로 귀착하는 권위 있는 중언을 연결, 소급 lsnad 함으 로써 무함마드의 말인 주문에 권위를 부여하는 방법과 형식을 취한다. 따라서, 하디쓰 수집자와 <이스나드>의 부분에 열거한 인물의 신용도 가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무함마드전기 이븐 이스하끄 Ibn Is 悼q (768 년 사망)의 무함마드 전기가 가장 오
래 된 것인데 그 원본은 전해 오지 않고 이븐 히샴 Ibn Hish am(83 :3 년 사망)의 수정판이 전해지고 있다 전기류로서 중요하고 훌륭한 저술은 와끼 디 W탸 di (822 년 사망)의 『 전쟁의 서 Ki tab al.내 4ag 塩 zI. !I 와 이븐 사드 Ibn Sa'd(844 년 사망)의 『계급 대전(大典) Ki t志 al._ T먀 -aqat al. 一 Kab ir .!l(여기서 계급을 뜻하는 Taba q a t는 여러 부류의 무함 마드 교우들과 그 후대 사람들을 가리킴)를 꼽을 수 있다. 언행록 신자에게 삶의 법도를 제시해 주고자 의도된 여러 전승 가운데 주제별로 각 장이 꾸며져 있는 가장 오랜 권위 있는 언행록은 부카 리 B ukhari (ITTO 년 사망)와 무슬림 Mus lim (ITT4 년 사망)의 것인데 이 두 언행록의 제목은 모두 『알-싸히흐 al- 요止軌!이다. 꾸란의 주해서 이제 남은 것은 꾸란의 주해서이다. 어떤 꾸란 구절은 무함마드가 직접 해석을 내린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 꾸란 해석학을 일으킨 사 람은 예언자의 서~은인 압둘라 븐 압바스 ‘Abdu1l 曲 b.‘Abbas 이다. 초기 해석학자들의 문헌은 모두 없어졌지만 그들이 이룩한 학문적 성과의 요지는 당대 유포되던 모든 전승을 파악하고 있던 백과사전 적 학자 따바리 Ta bari (922 년 사망)의 주해서에 들어 있다. 그 후에 나온 주해서들은 대체로 이 방대한 저술을 토대로 한 것이다. 자마 크샤리 Zarnakh shati(1143 년 사망)의 주해서 Ii'캇샤프 Kashs hif./J와 바 이다위 Ba y da wi (l286 년 사망)의 주해서가 동부 아랍권에서는 가장 널리 알려지고 최고의 권위서로 여겨진다. 이보다 폭넓게 꾸란을 다루고 있는 저술로는 꾸란학을 개괄하며 꾸란의 비평적 연구의 입 문서가 될 수 있는 수유띠 Su yu µ(l !:ffi년 사망)의 『이트깐 lt q~』이 있다.
무슬림 전승의 특징 편견없는 학자라면 <이슬람만큼 역사적으로 입증이 되는 종교도 없다 lays a li-w mnati n min al-um arni as 떠d un ka-as 떠dihim> 91 는 이븐 꾸타이바의 주장이 정당함을 인정하겠지만 동시에 다른 무슬 림 학자들의 견해, 즉 <신앙심 깊은 사람들이 다름아닌 전승에서 거짓에 넘어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lam nara al_ 후恥 Ina fi shay ' in akdhaba minhUffi fi al-ba dith> 101 는 것에도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 야 한다. 이같은 혹평은 골트치어의 『이슬람 연구 Mu h:.o刀 ne dani she S 따. en 』 제 2 부에서 충분히 확인된다 .Ill 이슬람력 히즈라 1 세기 동 안 전승을 위조하는 일은 모든 당파가 공공연히 사용하는 정치적, 종교적 무기가 . 되었다. 심지어 가장 신실하다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이같은 사기 tadli s 를 치며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관점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말했다는 다음 구절에서 잘 나타 나고 있다. <내가 한 말을 꾸란과 비교하라, 그래서 그것과 일치되 면 실제로 내 입에서 나왔든 아니든 간에 그 말은 나에게서 나온 말이며 무슨 말이든 좋은 말은 내가 직접 말한 것이 된다.>)” 이러 한 원칙의 결과로서 모든 새로운 교리는 <하디쓰>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모든 종파나 조직이 무함마드의 권위에 의존하였다. 가짜 전승이 얼마나 유포되고 있었는지는 부카리가 『알국사히호』라는 제 목의 하디쓰를 편찬하면서 당시 OO 만 개에 달하는 전승 중 약 7(X X) 개만 엄선하였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9) 슈프렝거 S p ren g er, 앞의 인용서 p. 1 에서 재인용.
10) Noldeke, Geschic h te des Q orans 의 서 론 p. 22 에 서 재 인 용.
11) 특히 pp. 28-130 참조. [역주] 독일어로 저술된 본서는 바버 C. R. Barber 와 스턴 S. M. S te m 에 의 해 영 어 로 번 역 되 었다 (Musl i m Stu d ie s , London; George Allen & Unw in Ltd.) .
12) Mufw nm. Stu d ie n , Pa rt II , p. 48 이 하.
예언자의 생애에 관한 한 여기서는 전승의 신빙성을 논할 수 없 다 .131 가장 오래되고 훌륭한 예언자 전기인 이븐 이스하끄의 전기에
13) 여기에 관해서는 무이르의 저서 Lif e of Mahomet 서문을 참조하도 록 한다. pp. 28-87.
는 가공적인 내용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의 서술은 대체로 솔직하고 꽤 근거 있는 듯하다 . 무함마드의 탄생 전래되고 있는 연대기를 인정할 경우, 무함마드는 코끼리의 해(쩡0 년 또는 571 년) 라비아 알-아우왈 Rab i' al-Awwal 월 12 일에 메카에서 꾸라이쉬 부족 출신의 압둘라 .Abdullah 와 아미나Amina 사이에서 태어났다. 꾸싸이이Q뿌i YY 로부터 내려오는 그의 가계 혈통은 다음 도표로서 설명된다.
압드우 샴마스이l 야/‘A Ul:mrla 압S y畑 y드 a m 꾸 s마싸압 나이바프이스Q I ‘.Au\A l압~二:brbly둘 aMys 무 印 딸삼압하립 둘쉼 ‘라A 庄Il| :답\‘r A :lurb id ' mu1- llMa hu tt aA아lbib부o . T딸a립lib
무함마드의 유년기 무함마드는 태어나자마자 베드윈 출신 유모인 사드족 Banu Sa'd 의 여인 할리마I:Ialirna에게 맡겨져 다섯 살 때까지 사막에서 자라
며 사막의 순수한 언어를 익혔댜 I , ” 이때쯤 그에게 있었던 신기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아마도 사실에 근거한 것일 것이다.
14) [역주] 당시의 아라비아 귀족들 사이에서는 유아를 베드윈 유모에게 맡겨서 키우는 관습이 있었다.
무함마드와두천사 <(할리마의 말에 따르면) 무함마드와 그의 수양 형제가 야영지 뒤편의 가축들 틈새에서 놀고 있었는데 내 아들 녀석이 헐레벌떡 소리치며 달려왔 습니다. ‘꾸라이쉬 형을요! 하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데리고 가서 옆으로 눕히고 형의 배를 갈랐습니다. 뱃속에 손을 넣어 휘젓는 것을 보았어.8...' 그래서 남편과 함께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보니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 린 채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얘야, 어디가 아프니?'라고 묻자 ‘하얀 옷을 입은 사람 둘이 오더니 저를 옆으로 눕게 하고 제 배를 갈라 무엇인 가를 손으로 더듬어 찾았습니다. 저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요’라고 대답 했습니다. 우리는 그를 천막으로 데리고 왔는데 남편은 이 아이에게 불행이 닥쳤으니 (u~ i ba) 큰일이 나기 전에 집으로 데려다 주자고 하였습니다. 그리 하여 그를 데리고 그의 어머니에게 갔더니 ‘무슨 일인가, 유모! 그렇게도 그를 귀여워해 주고 같이 데리고 있겠다고 그러더니.’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덕분에 그가 이제 다 컸고 제가 할 바는 다했다고 생각됩니다. 그 에게 불행이 닥칠까 두려워 당신 뜻대로 그를 데리고 왔습니다’라고 제가 말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그렇지가 않을 걸세. 사실대로 말해 주게 . '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지 내 입에서 사실이 나오도록 하려고 나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녀가 말했습니다. ‘그에게 악마가 들렸다는 것이냐?' ‘예' 결코 아니야, 악마가 그에게 손을 뻗칠 수는 없어. 내 아들에게는 고 귀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데’라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15l
15) Ibn Hish am, p. 105, l. 9 이 하.
또다른 이야기의 내용은 보다 명료하다. 천사들이 무함마드의 심 장올 꺼내 깨끗히 씻어내고 검은 덩어리, 죽 원죄의 더러움을 없앴
다고 한다 1 61 이 꾸며낸 이야기는 장차 예언자를 미화시키려는 것외 에 일종의 지랄병 같은 발작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여러 전승의 일치된 주장에 의하면 후에 무함마드가 하늘에서 계시를 받 울 때면 종종 그러한 병의 발작 증세가 있었다고 한다.
16) 이 전설은 꾸란 94 장 1 절 <우리가 그대의 가슴을 열지 않았느냐> 즉 <그대에게 위안 또는 깨우침을 주다>의 직역에서 나온 것으로 보 인다.
수도사 바히라 Bal:lira 와의 만남 무함마드가 태어났을 때는 부친 압둘라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 다. 게다가 그가 여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잃게 되자 부모 잃 은 고아 신세가 되었다. 그를 처음에는 나이 지긋한 조부 압둘 무딸 립이 맡아 양육하였다. 그러나 조부의 양육도 오래가지 못하고 무함 마드가 여덟 살 되던 해 조부도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리하여 가난 하지만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그의 숙부 아부 딸립 1 71 이 그의 양육을 맡아 목숨이 다할 때까지 보호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무함마드는 얼마 안 되는 유산울 곧 다 써버리고 당시 여자들이나 노예들의 차지나 되던 천한 일거리안 양치기를 하였다. 무함마드는 열두 살이 되자 숙부 아부 딸립을 따라 시리아로 가는 장사꾼들 톰 에 끼여 먼 여행길에 나섰다. 가는 도중에 기독교 수도사인 바히라 를 만났는데 그는 어린 소년의 어깨 사이에 있는 예언자 문장(紋章) 을 발견하고 그가 바로 약속된 사도라며 맞아~넋었다. 사실, 그에게 서 그러한 것을 기대할 만한 구석은 없었다. 무함마드가 예언자의 역할을 맡기 전까지는 무명의 꾸라이쉬 부족민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의 나이 스물 다섯 살에 당시 상당한 재력가인 장년의 미망인 카 디자 Kha dij a 와 결혼한 것을 빼면 그 이전 무함마드의 행적에는 역 사적이라고 할 만한 사건은 없다.
17) [역 주] 후에 제 4 대 칼리 파가 된 알리 의 부친.
이후 15 년 동안 무함마드는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부유하고 행복 하게 살았는데 묵묵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보였다. 이때 그가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는 설교자로서 행한 그의 첫 설교에서 대충 짐작해 볼 수 있다. 무함마 드 자신도 시인하였듯이 전에는 그도 고향 사람들처럼 우상 숭배를 한 것이 틀림없다. <길 잃은 그대를 발견하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 시지 않았느냐?>(꾸란 ffi:7 ). 그러면 언제 어떻게 그의 이슬람 귀의 의 과정이 시작되었는가? 이에 대해 정확히 답할 수는 없지만 무함 마드 전기학자들이 신중을 기하여 내린 최종적 결론은 무함마드의 이슬람 귀의가 오랜 기간 혼란과 우여곡절 끝에 니~ 것이라는 것 이다 . 하니프 Han if 일신교lll) no thei sm 의 개념은 아라비아에서는 특히 히자즈 지방에 많이 살고 있던 유태인들과 금욕적인 그노시스교파 Gnos tici sm181 인 사비교도$abi anl91 와 라쿠시교도Rako.si an 들에 의해 알려졌다. 더군 다나 <이슬람 전승은 하니프라고 하는 무함마드 출현 이전의 많은 종교 사상가들을 언급하고 있다 .>201 이들 중 꾸라이쉬족의 와라까
18) [역주] 초기 기독교 시대에 있어서의 신비주의적 이단의 기독교 .
19) <세례자>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모든 무슬림들이 의무적으로 하루 다섯번 기도를 하기 전에 행하는 세정식(洗淨式)으로 인해 이교도 아 랍인들이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켜 이름 붙인 것이다 . We-llhausen, Reste Arab. Heid . , p . 237 참조 . [역 주] 꾸란 2 장 62 절, 22 장 17 절에 기독교도, 유태교도, 마기교도와 함께 언급된 민족명. 또한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에 있는 한 민족 집단이 비 이슬람 신앙에 대한 박해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비교도임을 주장하였다. 특히 수학자들과 천문학자들이 이 민족에서 많이 나왔다. CEI, Sabia n s, p. 340 참조.
20) Sir Charles Ly al l, The Words '!fan( and 'Mu slim ' , ]RAS for 1903, p. 772. 하니 프의 본래 의 미 는 알 수 없으나 히 브리 어 h 如산(세속 적)와 관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꾸란에서는 일반적으로 아브라함의 종
교를 지칭하며 때로는 무슬림과 거의 동의어로 쓰인다. 하니프에 관한 상세한 자료는 위에서 인용한 찰스 라이얼 경의 논문이나 Sp r eng e r, Das Leben und die Lehre des Mobammed, vol. i , pp. 45-134 ; Wellhausen, Reste Arab. Heid , p. 238 이하 ;Cae tani, Annali dell' Islam, vol. i, pp. 181-192 에서 찾아볼 수 있다.
븐 나우팔 Wara q a b. Naw fal, 역시 꾸라이쉬족의 자이드 븐 아므르 븐 누파일 Zayd b.'Amr b. Nu fay l , 싸끼프 Tha qif족의 우마이 야 븐 아비 알-쌀트 Uma yy a b. Abi al - Sal t가 가장 유명하댜 슈프랭거 S pr e ng er 2 1 ) 의 추정대로 이들은 종파를 형성하지 못했다 또한 이슬 람 이전 시대에 무함마드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종교 운 동을 조직하고 이끌었으며 그 종교 운동이 널리 전개되었다는 동 학자의 주장은 근거가 없음이 최근의 연구에 의해 밝혀졌다. 무함마 드의 아라비아 선구자들은 - 一— - 그렇게 불러줄 수 있을지 모르지 만-다름아닌 몇몇 소의된 사람들이었다. 이븐 이스하끄에 따르 면, 와라까와 자이드는 꾸라이쉬족의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우상 숭 배를 거부하고 아브라함의 진정한 종교를 찾아 출가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와라까는 기독교도가 되었고 자이드는 신앙심은 깊었지만 기독교, 유태교 어느 쪽도 믿지 않았다 . 그는 우상 숭배를 삼가고 죽은 것은 입에도 대지 않으며 우상의 제물로 바쳐진 동물의 피나 고기를 먹지 않았다. 여아를 생매장하는 야만적 관습을 비난하며 그 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브라함의 주를 섬긴다 .> 221 『 노래의 책』 은 우마이야 븐 아비 알-쌀트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는 성경을 탐독하였다. 또 믿음의 표시로서 삼베 옷을 입고 음주 룰 삼갔으며 우상을 불신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진정한 신앙을 추 구하는 데 열심이었다. 그는 아랍인들에게 예언자처럼 비쳐지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으므로 무함마드가 동장하자 그를 시기하며 반 대편에 섰다 .23 ) 우마이야의 시는 일부 앞 장에서 옮긴 바있지만2 4 ) 주
21) [역주] Aloy s S p ren g er (1 813-1893) :오스트리아의 동양학자. 22) Ibn Hish am, p. 143, 1. 6 이 하.
23) Ag lwzI, iii, 187, l. 17 이 하. 24) 본서 p. 125 참조.
로 종교적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꾸란의 초기 <수라>에 나오는 교 리와 많은 유사점이 있댜 한 사람만 빼고 이름이 기록으로 남아 있 는 모든 하니프들이 히자즈와 아라비아 반도 서부에 살고 있었다 . 그들 대부분이 무함마드와 동시대인들이었으므로 무함마드가 그들 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으며 그가 맨 처음 자극을 받은 것도 이 지역에서였을 것이다 .25)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구원에만 관심 울 갖고 있던 반면 무함마드는 똑같은 위치에서 출발하였어도 훨씬 그들을 앞지르고 있었다. 그의 위대함은 그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준 숭고한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양심에 대한 그의 힘찬 호소력과 열정에 있는 것이다.
25) 구전에서는 무함마드를 그의 첫번째 부인 카디자의 사촌이었던 와라 까와 특히 연관짓고 있다. 무함마드 자신은 아직 망설이고 있는데 와 라까는 그를 예 언자로 부르며 맞이 하였다고 한다 . Ibn Hish am, p. 153, l. 14 이하 .
무함마드의 환상 마흔 살이 되던 해에 무함마드는 꿈속에서 환상을 보는 일이 잦 게 되자 다른 일은 모두 제쳐두고 호젓한 곳에 혼자 가 있기를 원 했댜 그는 메카 근방의 히라1:fira 산에 있는 동굴 속에 은신하고 종교적 금욕 생활ta}Jann u th을 시작하였다. 라마단 Rarna c.lan 월의 어느날 밤2 6) 천사가m ) 그의 앞에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읽 어라!iqra'>. 이에 <저는 일자 무식합니다 ma ana b i-qari'in>라고 그가 대답하였다 .28) 그러자 천사는 그를 끌어당겨 꽉 붙잡더니 재차
26) 이것이 꾸란 97 장 1 절에 언급되고 있는 유명한 <능력의 밤 Lay la t al- Q adr> 이다. 27) 이 는 성 령 R 曲 al- Q uds 인 데 메 디 나 장에 서 는 가브리 엘Ji b 미로 바뀌 어 있다. 28) 그러나 다른 출처 (Ibn Hish am, p. 152, l. 9 이하)에서는 무함마드가 천사에게 <내가 무엇을 읽어야 합니까? ma aqr a 'u 또는 madha
a q ra'u> 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베반 교수는 필자에게 이같은 형태의 구전 내용이 구약성서의 이사야서 40 장 6 절 : <한 소리 있어 명하신다 . ‘외쳐라.' ‘무엇을 외칠까요?'라고 나는 물었다>와 결 코 우연일 수 없는, 공교롭게도 유사접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해왔다. 예언자가 읽고 쓸 수 있었느냐에 관한 의문은 뉠데케가 이룰 논하고 있는데 (Gesch i c ht e des Qo rans, p. 7 이하)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위 인용문 중 p. 7 이하) 꾸란에서 무함마드 이름에 붙어 다니며 보통 <무식자>로 옮겨지는 형용사 ummI 는 그가 일자 무식이 었을 뿐 아니라 고대의 성서들을 알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 이다; cf.
<읽어라!>고 말했다. 그래도 무함마드가 천사의 말에 따르지 않자 한 번 더 그를 붙잡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장 <옹혈의 장> 1) 창조자이신 그대 주님의 이름으로, 읽어라2 9l 2) 그분은 옹혈로 인간을 창조하셨도다. 3) 읽어라! 그대 주님은 가장 은혜로운 분 4) 펜으로 쓰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분 ,30 l 5)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 주셨도다.
29) 이 어구(iq ra' bis m i rabb ik a) 의 의미에 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 다 . 뉠데케는 <주의 이름으로 설교하라>, 히르쉬펠트Hir sc hfe ld 는 <주 의 이름으로 고하라>로 번역하고 있다. 필자는 4 행과 5 행에 의해 뒷 받침되고 있는 전통적인 해석을 배제할 만한 타당한 근거를 찾지 못 한다 . 무함마드는 모든 계시의 근원인 <하늘의 책>에 새겨져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읽으라는 계명을 받는 꿈을 꾸었다.
30) 혹자는 <펜의 사용을 가르쳐 준>으로 옮기고 있다.
이 말을 듣고 난 무함마드는 몸을 벌벌 떨며 카디자에게 돌아와
소리쳤다. <날 좀 덮어주시오! 덮어줘요!> 그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때까지 담요로 계속 몸을 감싸고 있었다 . 3 이 사건에 관한 또다른 전승은 계시가 꿈속에서 일어났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 32) <잠에서 깨어 보니 마치 그것이 내 마음속에 쓰여진 듯하였다 > 고 예언자는 말했다. 당시의 아랍인들이 영적 감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 는지를 감안하면 331 무함마드 자신도 처음에는 시인이나 점쟁이처럼 악령인 <진>에 신들렸다고 믿은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댜 그의 마 음속 번민이 이만한지라 심지어 자살까지도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카디자의 위안을 받고 마음이 놓이게 된 무함마드는 자신이 악령의 영향으로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로서 신의 계시를 받았음을 확신케 되었다 . 그 후 얼마 동안은 계시를 받지 않 았다 .341 그러다가 언젠가 별안간 천사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왕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두려움에 질려 그는 집으로 달려가 집안 식구들에게 따뜻한 외투dithar로 자기 몸을 감싸 달라고 하였다. 그 가 외투로 몸을 감싸고 누워 있는 동안 디음· 구절이 계시되었다 .
31) 이 와 같은 무함마드의 초기 환상에 대 한 기 술은 (Bukh ari, ed. by Krehl, vol. iii, p. 380, 1. 2 이하) 카디자가 죽은 후 결혼한 그가 아끼 던 부인 아이샤 ‘A'i sha 에게서 비롯된다 .
32) Ibn Hish am, p. 152, 1. 9 이 하.
33) 본서 p. 129 참조 .
34) 계시를 받지 않은 이 시기를 Fa tr a 라고 한다.
제 74 장 <외투를 걸친 자의 장> 1) 오, 외투를 걸친 자여! 2) 일어나서 예언하라 .35) 3) 그리고 그대의 주님만을 찬양하며, 4) 그대의 옷을 깨끗하게 하고 ,361
35) 직역하면 <경고하라>이다. 36) [역주] 옷을 깨끗하게 하라는 것은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어떤 죄악 에도 빠지지 말라는 의미이다.
5) 부정한 것을 피해라 . 371
37) 여기서 <부정한 것 al- ruj z> 은 우상 숭배를 가리킨다.
무함마드는 이제부터 공개적으로 설교를 행하는 일이 신이 그에 게 내려준 사명임을 더 이상 의심치 않았다. 구원과 감사하는 마음 이 이 시기의 몇몇 <수라>에서 드러나고 있다. 제 93 장 <아침의 장> 1) 아침에 걸어 맹세하여, 2) 고요히 잠드는 밤에 걸어 맹세하여, 3) 그대의 주님께서 그대를 버리시지도 않았고 미워하시지도 않느니라. 4) 그대에게 내세는 현세보다 더 나으리라 .381 5) 그대 주님께서는 틀림없이 그대가 기뻐하는 걸 내려주시리라. 6) 그분께서는 고아인 그대를 발견해서 보호해 주시지 않았느냐? 7) 길 잃은 그대를 발견하고 인도해 주시지 않았느냐? 8) 또 가난한 그대를 발견해서 부유하게 만들어 주시지 않았느나? 9) 고로 그대는 고아를 거칠게 다루지 말며, 10) 또 구걸하는 자를 쫓지 말고, 11) 그대 주님의 은혜를 말해 주어라.
38) 직역하면, <그대에게 처음 상태보다는 마지막 상태가 더 좋은 것이 다>로서 내세에서 무함마드가 받을 보상이나 현세에서 그의 대의(大 義)가 종국적으로 승리할 것을 가리킨다.
최초의 무슬림 무함마드의 전기학자들은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고 나서 개인적인 신앙을 공개적으로 포교하고 나서기까지는 3 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난 뒤였다고 한다. 우선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포교하는 것이 당연하기는 하지만 그가 그렇게 오랜 기간 공개적인 포교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와 반대의 주장이 주호 리 al - Z uhri (742 년 사망)가 전하는 고대 전승 가운데 나온다. 죽 예언 자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은밀히 포교하기도 하고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이슬람3 91 으로의 귀의를 권했다고 전한다. 또 그의 간 청에 응한 사람들은 대부분 빈민층에 속하는 젊은이들이었다고 한 다 . 401 그러나 유력한 신자도 있었다 . 여기에는 최초의 신자인 카디자 외에 사촌인 알리 ‘Ali, 양자인 자이드 븐 하리싸7-ay d b. l:laritha,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중요한 인물인 아부 바크르 븐 아비 꾸하파 Abo. Bakr b. Abi Qu}Jafa 가 있었다. 특히 아부 바크르는 꾸라이쉬 족에서 손꼽히는 부상( 富 商)으로서 성실하고 지혜로우며 누구에게나 친절하였으므로 널리 존경을 받고 있었다.
39) 이슬람 Islam 의 본뜻은 <굴복·복종>을 의미하며 종교적인 의미로는 <신의 뜻에 복종하다>를 뜻하는 아랍어 동사 aslarna 에서 파생된 동 명사이다. 따라서, 이의 능동 분사형인 무슬림 musl i m 은 <신의 뜻에 따르는 사람>을 의 미 한다.
40) Sp re ng e r, Leben des Mofr: unmad , vol. i , p. 356.
꾸라이쉬족의 적대감 포교 초기에 무함마드는 주로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면에만 그의 활동을 국한함으로써 이교도들의 비위를 거슬리는 일은 피하고 많 은 사람들이 그를 믿고 따르도록 하였다 . 메카의 귀족들도 그를 해 롭지는 않은 사이비 예언자 정도로 눈감아 주었다. 무함마드가 지나 가는 것을 보고 그들은 < 봐라! 저기 하늘나라에 관해 이야기하는 압드 알-무딸립 가문 Ban o. 'Abd al-Mu ttali b 의 일족이 지나간다> 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신의 유일성을 강조하며 우상 숭배를 비 난하고 사자(死者)의 부활을 설교하기 시작하자 꾸라이쉬 부족 내부 에는 무함마드에 대한 반감과 적대감이 팽배해졌다. 마침내 무함마 드의 추종자들은 지리멸렬해지고 말았다. 꾸라이쉬 부족 사람들은
자신들의 상업이 번성하는 이유가 카바 신전을 숭배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그들 조상이 화형(火刑)을 당하고 있다는 무함마드 의 공언에 분개하고 있었댜 겨우 아부 딸립의 권위 덕분에 무함마 드의 신변 안전이 보장되었다. 믿음을 지킨 신지들 중 소수는 고대 아라비아 사회의 특징인 강한 친족애로 보호받을 수 있었지만 대개 는 가난하고 친척도 없었댜 이슬람의 평동 사상은 특히 많은 노예 들을 입교시켰는데 이들은 잔혹한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 • Ill 그럼에 도 불구하고 무함마드는 포교를 계속했다. 아부 딸립은 꾸라이쉬 부 족이 위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알려주며 너무 무리하지 말도 록 충고해 주었다. 이에 대해 무함마드는 <신이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주고 우리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결코 이 과업을 포기하지 못 합니다. 설사 태양을 내 오른 손에 얹어 주고 달을 왼손에 얹어 준 다 해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4 2 ’ 라고 답하였다.
41) 이 같은 이 슬람의 구전은 히 즈라 1 세 기 의 경 건파 교도들로부터 유래 함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그들은 당시 통치하고 있던 우마이야조에 게 불만을 품고 우마이야조의 메카 조상들이 무함마드에게 대했던 태 도를 가능한 나쁘게 표현함으로써 복수를 하였다.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꾸란에서 실제적인 박해가 단 한 건도 언급되고 · 있 지 않는데 이는 의미 있는 대목이다. 무함마드는 메카에 남아 수년 동안 선교활동을 수행토록 허용되었는데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메 카 시민들은 이를 못마땅하고 위험스러운 일로 여기고 있었다. 여기 서 꾸라이쉬 부족의 중용에 경탄할 만도 하지만 이는 신중한 정책이 었다기보다는 종교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과 무함마드가 메카에 현저 하게 진출할 수 없었던 결과였다. 42) Ibn Hish am, p. 168, l. 9 이 하 .
아바시니아로의 이주 그러나 포교 활동은 진척이 더디었고 고통스러웠다. 메카 사람들 은 냉담하였으며 오히려 무함마드의 예언자로서의 권위를 무시하고 천벌이 내리리라는 식의 위협조인 그의 설교를 비웃었다. 더구나 그
들은 무함마드와 추종자들을 떼어 놓기 위해 온갖 폭력에 가까운 압력을 행사해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포기하게끔 만들었다. 포교 5 년째 되던 해에 무함마드는 기독교 왕국인 아비시니아로 신자둘을 이주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그곳에서는 무슬림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고 43) 또 박해와 유혹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4) 드디 어 남녀 백여 명이 아비시니아로 길을 떠났고 예언자와 그의 충실 하고 헌신적인 교우들이 남아서 날로 어려워지는 전투를 치르기로 하였다.
43) 이 당시 무함마드는 이슬람 교리와 기독교 교리가 본질적으로 동일 하다고 믿고 있었다. 44) Taban, i , 1180, 8 이 하. Caeta ni, Annali dell' Islam, vol. i , p. 267 이하 참조 .
꾸라이쉬족과의 임시 화해 몸과 마음이 지친 무함마드는 꾸라이쉬 부족민들과 타협하기로 마음 먹었다 . 어느날 여느 때처럼 카바 신전 옆에서는 메카의 유지 들이 모여 앉아 부족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이때 무함마드가 나 타나 그들 옆에 살며시 다가 앉으며 그들이 들을 수 있게끔 꾸란 53 장을 음송하기 시작했다. 그가 19- 幻절 <그대들은 진실로 알-라트 나 알-웃짜를 보았는가. 그리고 세번째인 알-마나트도 보았는가> 45) 룰 읊자 사탄이 다음 구절을 덧붙이도록 충동하였다. <이들이야 말로 가장 우아한 백조, 진정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드리고 싶네.>
45) [역주] 알-라트, 알-웃짜, 알-마나트는 모두 메카의 불신자들이 숭배 하던 우상의 이름이다. 메카의 불신자들이 숭배하던 카바 신전 주변 의 우상은 대략 360 개가 넘었는데 이 중 가장 잘 알려진 우상들이 라 트, 웃짜, 마나트였다.
꾸라이쉬 부족민들은 자기들이 모시는 신을 무함마드가 인정하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였다 . 무함마드가 <하느님께 엎드 려 오직 그분만을 숭배하라 > 는 구절로 5.'3장을 끝맺자 그 자리에 모 인 사람들이 일제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 461 그러나 무함마드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자기가 저지른 죄를 뉘우쳤다 . 그는 우상 숭배에 관한 구절을 취소하고 그 대신 다음 꾸란 구절을 계시하였다.
46) Mu ir, Li fe o f Mahomet, vol. ii, p. 151.
< 그대들에게는 남성이 있고 그분(하느님)에겐 여성이 있다고 하는 건가~ ) 그렇다면 이것은 가장 공평치 못한 분배이리라 . 그것들(우상)은 그대들이나 그대들의 조상들이 붙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
47) 이교도 아랍인들이 여자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싫어하였음은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지만, 그들의 3 대 신을 알라의 딸들이라고 불렀다.
무함마드, 우상 숭배자들에게 양보함 이븐 히샴이 지은 무함마드 전기서에서 이 일화가 빠져 있는 것과 무슬림 신학자들 대개가 이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이유는 간 단하다 만 예언자의 친구들은 분개하였고 그의 적들은 경멸조의 비 웃음을 쳤댜 전승에서 드러났듯이 그것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꾸라이쉬족과의 화해를 위한 계산된 노력이었다. 일시적인 화해는 금방 깨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화해의 소식이 아비시니아로 이주한 무슬림들의 귀에도 들어가 그들 중 일부는 메카로 돌아오려고 까지
48) 이븐 이스하끄 (Taban , i , 1192, 4 이하)에 의해 기술되어 있다. 카에 타니 Cae tani 왕자는 초판이 1905 년에 나온 그의 명저 Annali dell' Islam 에서 이 구전의 진위에 대해 논박하고 이 설화를 상세히 비평하 고 있지만 주 쟁점에 대해서는 논급하지 않는다 . 무이르의 말대로 <이 이야기가 진실성의 토대가 없지만 어떻게 조작될 수 있었는지롤 추정 하는 일 은 거 의 불가능하다 . > [역 주] Leone Caeta ni(1 869-1926) : 이탈리아의 동양학자.
하였다. 무함마드는 겉으로는 짐짓 태연자약하면서도 내심 부끄럽고 창피하였다 . 우상 숭배와의 타협이-그것은 사실 계시의 정도(正 道)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불가능한 일로 파악되자 무함마드는 자신의 잘못과 망상을 솔직히 고백하였는데 이는 그의 진실됨을 여 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이후 그는 <온갖 형상의 우상과 필사적인 투쟁을 벌이게 된다>. <알라> 이의의 신은 없는 것이다. 카디자와 아부 딸립의 죽음 무함마드가 메디나로 이주하기까지의 일련의 사건의 흐름을 간략 히 살펴보자. 원기를 회복한 거인처럼 마음의 동요에서 우뚝 일어난 무함마드는 우상 숭배를 비난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섰으며 이에 따 라 박해는 갈수록 심해졌다. < 철혈( 鐵 血) 인간 > 인 미래의 칼리파 우 마르 븐 알-카땀의 입교는 무슬림들의 노골적인 반발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제 무슬림들은 집안에서의 예배를 숨기려 하지 않았 으며 떳떳하고 당당히 무리를 지어 카바 신전 주위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소(聖所) 둘레를 돌았다. 그들은 의기 충천하였다. 오히려 꾸라이쉬족이 공포와 불안감에 사로 잡혔다 .> 하쉼 가( 家 )가 무함마 드를 예언자로 인정하는 것과 관계 없이 친족의 일원으로서 보호할 것을 맹약하자 꾸라이쉬족은 보복으로 하쉼가와의 모든 관계를 단 절하였다. 이러한 고립과 배척으로 무슬림들은 메카의 변두리로 옮 겨 2 년 이상 궁핍된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무함마드 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을 한층 더 굳건히 해 줄 뿐이었으며 마침내 꾸라이쉬족의 내부 분열로 고립은 저절로 풀렸다. 얼마 후 예언자는 두 사람과 사별하게 된다. 이슬람에 귀의하지는 않았지만 조카를 끝까지 변치 않고 옹호해 준 아부 딸립과 부인 카 디자의 죽음이었다 .49 ) 홀로 된 무함마드는 자위책으로 어떤 과감한 49) [역주] 이 해가 <슬픔의 해>로 알려져 오고 있다 .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사태는 심각하였다 . 메카의 귀족 사회로부터 기대할 것은 하나도 없고 두려움만 안겨 주는 것을 일 련의 사건들은 보여 주었댜 그는 메카인들에게 앞으로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수없이 경고하였지만 그의 말에 귀 기울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하느님이 불가해한 지혜로 이미 그들을 영원히 저주받 도록 하셨으므로- 그들이 믿지도 않을 것이며 믿을 수도 없다는· 확 신이 서게 되었다 . 이에 따라 그는 아랍적 사고 방식으로는 언어도 단이고 무모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 죽 동족민을 버려 두고 의방인 에게서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했다 우 따이프 Ta' if의 주민들에 대한 호소가 수포로 돌아간 다음, 주민들 다수가 유태인들로 이루어진 메 디나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성도 메카보다 이슬람의 혁명적 사상을 보다 쉽게 뿌리내릴 수 있고 번창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 었다. 그는 이번에는 실망하지 않았다. 메디나의 유력한 세력이 그 를 진정한 예언자로 인정하고 그의 교시를 받들어 온갖 위험을 무 릅쓰고라도 그것을 지켜나갈 것임을 맹세했기 때문이다. 622 년 봄, 메카의 무슬림들은 조용히 고향을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 몇 달 후 (62'2년 9 월) 무함마드 자신도 꾸라이쉬족의 감시를 피해 마치 전승 ( 戰 勝)을 거두고 돌아오는 장군을 맞이하듯 환영 인파의 환호 속에
50) 무함마드의 이러한 행동에 대한 메카의 견해는 바드르 Badr 전투에 서 아부 자흘 Abu Jahl 이 행한 말에서 알 수 있다 <신이시여 , 누구보 다도 친척의 유대를 단절하고 불명예스럽게 행동한 그에게 고통을 가 져다 주소서 !>(Tab ?Ji, i, 132, I. 8 이하). 고향을 둥지고 예언자와 함 께 메디나로 도피한 무슬림들을 가리켜 메카의 한 시인은 다음과 같 이 부르짖 었다 (Ibn Hish am, p. 519, 11. 3-5). <그들은(바드르에서 전사한 꾸라이쉬족 사람들) 명예롭게 쓰러졌도다 . 그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 살며 혈연 관계도 먼 이방인들에게 친족을 팔아 넘기지는 않았다네 . 그들은 갓산(메디나 주민들)과 친구가 된 너희돌과는 다르다네 . 우리말고 그들(이방인들)과 한편이 되다니- 아,얼마나 수치스런 짓인가! 그것은 불경한 행위이며 명백한 범죄이고 모든 혈연 관계를 끊는 일이지 . 분별력 있고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너희들의 죄를 알고도 남옴이 있다.>
독의양양 메디나로 입성했다. <히즈라 Hij ra >, 메디나 성천(62'2년) 이것이 야만의 시대(자힐리야 al- Jahiliyy a) 에 작별을 고하고 이슬람 시대의 막을 올리는 저 유명한 <히즈라>이다. 그것은 또한 예언자 의 생애에 새로운 신기원을 이룬다. 그러나 여기서 그러한 변화의 본질을 지적하기 앞서 무함마드 개인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끔 메카에서 계시되고 꾸란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의 초기 가 르침과 설교에 대해 어느 정도 기술해 두는 것이 좋겠다. 꾸란Qu r'an 꾸란은 아랍어의 <읽다>라는 동사 의 파생어로서 <낭 독> 또는 <낭송>올 의미한다. 이 용어는 단일 계시나 몇 개의 계 시를 음송할 경우 또는 통념상 무슬림들이 <신의 말씀>이라고 생 각하는 계시 모두에 적용될 수 있다. 따라서 무슬림들이 꾸란 구절 올 인용할 때는
, 죽 <하느님 이 말씀하셨다>라고 말 하는 것이다. 각 계시는 하나의 <수라>를 이루며 <수라>는 운율은 띠고 있지 않으나 대개 각운이 일치하며 길이가 각기 다른 구절로 되어 있다. 꾸란의 문체 특징은 이교도 예언자들이 사용하던 <사즈 아 >,51) 죽 각운 산문을 본뜬 것이지만 규칙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으 므로 독창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함마드로서는 전혀 새로운 표현 형식을 창조한다는 것이 역부족이었다. 그는 당시 아랍인들에 게 알려져 있던 유일한 표현 형식의 고상한 문체인 <사즈아>와 시, 이 둘 중에서 양자 택일 하여야만 했다. 51) 본서 pp. 130-131 참조.
무함마드는 시인이었는가? 무함마드는 자신이 시인이 아니라는 점을 누누이 밝혔다 . 52) 그에 게는 운문을 지어낼 재능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맞는 이야기이댜 그러나 그가 시인임을 부인하는 것이 시적 재능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인격체로서의 시인을 가리킨다는 점을 염두에 두 어야 한다. 신으로부터 영적 감응을: 받은 그로서는 사탄의 감옹을 받고 우상 숭배를 이상적인 것으로 찬미하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 었다 . <시인들이란, 사악에 길 잃고 헤매는 자들이며 그들(사탄)의 뒤를 따르는 이들이다 . 그대는 그들(시인)이 골짜기마다 헤매고 있는 꼴을 보지 못했는가 . 그들(시인)은 행하지도 않은 것을 말하고 있도 다.>(꾸란 26:2'2 A- 226). 무함마드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비 록 거짓으로 그런 체 할 땐 그들과 다룰 바 없었지만. 그가 이교도 <샤이르 S 區‘ir(시인)>과 흡사한 데가 있다는 것은 마법을 막는 주 문(呪文)격인 꾸란 113 장, 114 장과 별명이 아부 라합 Abu Lahab( 불 의 아버지)인 예언자의 숙부 압둘 웃짜 ‘Abdu '1-'Uzza 에게 파멸의 운명이 떨어지기를 비는 엄숙한 저주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제 111 장 <아부 라합의 장> 1) 아부 라합의 양손이 썩어지고 그도 망하리라. 2) 그의 재물이나 그가 얻은 소득도 그에게는 아무 소용없으리. 3) 곧 훨훨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타 죽으리라. 4) 그의 아내는 땔감을 나르고 5) 그녀의 목에는 대추 야자나무의 새끼줄이 감기고. 그렇다면 동시대인들이 무함마드 본인이 그토록 완강히 거부하던 시인의 칭호를 그에게 부여한 것은 그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음을 52) 꾸란 69 장 41 절 <그것은 어떤 시인의 말이 아닌데 너희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구나.>
인정해야겠지만, 꾸란은 전혀 시가 아니며 거기에는 많은 수사(修辭) 와 산문이 명백히 사용되고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는 오늘날의 비 평가들이 자신은 시인이 아니라는 무함마드의 변명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초기 메카 장에서는 자주, 다론 장에서 는 간헐적으로 <그러한 재능을 발휘하도록 하늘이 내려 주신 절호 의 계기>룰 필요로 했을지라도 단지 수사학자의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는 거대한 감정의 분출을 볼 때 그의 재능은 자명해진다 . 메카 장(章) 뉠데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메카 장에서 무함마드가 노리는 단 하나 의 목적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그들이 믿고 있는 그릇된 신앙으로부터 유일 신앙으로 개종시키는 데 있다. 어떤 취지의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가더라 도 항시 주안점은 거기에 두게 된다. 그는 청중에게 논리적인 증명으로 이 치를 확신시키려 하지 않고 상상력을 통해 그들 마음을 움직이려고 수사법 을 사용한다 . 그리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자연과 역사 속에서 그분이 행하 신 바를 묘사하는 한편, 우상의 무능함을 조롱한다. 특기할 만한 것은 신앙 심이 깊은 자는 영원히 축복받으며 사악한 자는 고통을 겪는다고 한 점이 다. 이 점이 특히 이슬람 전파의 유력한 유인이 되었다고 보아지며 그것은 어려서부터 유사한 신학 사상의 주입으로 사고가 굳어지지 않은 단순한 사 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 예언자는 때때로 이교도 인 적을 직접·비난하기도 하며 하느님의 징벌은 영원하다고 겁주기도 한다 . 그러나 그가 이교도들 사이에 끼어서 살고 있을 때는 보다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유태인들을 비난하고 나서는 경우가 드물며 하물며 기독교인들 에게 그렇게 하는 경우란 거의 없다.>책 전술한 바와 같이 꾸란의 앞뒤가 뒤바뀐 배열 때문에 꾸란이 애 매 모호하고 지루하며 재미가 없다고 하고 또 잡동사니 같은 이야 53) Noldeke, Gesch ich te des Qo rans, p. 56.
기와 무미 건조한 훈계서라는 점에서 구약 성서의 예언서와는 견줄 수 없다고 꾸란을 읽어 본 서양의 독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꾸란 1 장부터 쭉 읽어 내려가도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지루함을 덜 어줄 만한 감동적인 구절은 별로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무함마드 가 예언자로 타고 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은 꾸란의 뒷 부분 에 있는 짧은 <수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이 꾸란 장들은 메카 계 시 초기의 것들인데 이들 장에서는 영감의 불꽃이 순수하게 타오르 며 그 자연스러운 효과는 감소되지 않는다. 다음에 몇몇 꾸란 장을 번역해 보았지만 아람어 원문을 크게 소리내어 읽을 때의 낭랑한 음향 효과는 제대로 살릴 수 없었다. 꾸란은 본래 낭송을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바르게 의미를 전하기 위해서는 큰 소리로 읽어야 만된다. 제 8'2장 <산산조각이 날 때의 장> 1) 하늘이 산산조각나고 2) 별들이 흩어지고 3) 바다가 넘쳐 흐르고 4) 수많은 무덤이 파헤쳐질 때 5) (인간의) 영혼은 이미 앞서 보낸 일, 뒤로 미룬 일을 알고 있도다.러 1 6) 오 인간이여, 은혜로우신 주님으로부터 그대들을 유혹한 것은 대체 무엇인가. 7) 그분은 그대를 창조하고, 형상을 만들고 균형을 이루게 하셨도다. 8) 그분의 뜻대로 그대에게 모양을 나게 하신 분이 아닌가. 9) 아니, 정말이지 너희들은 심판을 거역한다 .551 10) 하지만, 너희들을 감시하는 자들을 두었도다. 11) 고귀 한 서 기(書記)들도 있다. 561 54) 즉 행한 것이나 행하지 않은 것 . 55) 최후의 심판.
56) 무슬림들은 모든 인간에게는 그의 선행과 악행을 기록하는 두 기록 담당 천사가 따라 다닌다고 믿는다.
12) 그들은 너희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도다 . 13) 정의로운 자는 축복 속에 있게 되나 14) 사악한 자는 지옥에 있다가 15) 심판의 날 그 속에서 타 죽으리라 . 16) 그때 그들은 거기서 빠져 나오지 못하리라. 17) 심판의 날이 무슨 날인가를 누가 네게 가르쳐 주랴. 18) 또 다시 심판의 날이 무슨 날인가를 누가 네게 가르쳐 주랴 19) 그날은 영혼들이 서로 서로에게 아무 일도 해줄 수 없는 날, 그날은 알라의 명령만이 있을 뿐 제 密장 <별자리의 장> 1) 별자리를 가진 하늘에 맹세하여 2) 약속된 그날에 맹세하여 3) 증인과 증언의 주제에 맹세하여 4) 함정을 만든 그들에게 저주가 있으리 5) 불씨를 가진 불 속에서 6) 그들은 그 옆에 앉아서 7) 믿는 자들에게 저지른 자기의 소행을 증언하나니 SI J 8) 그들이 믿는 자들을 박해함은 오직 믿는 자들이 영광되고 찬미받는 알라를 믿었기 때문인 것이도다. 9) 하늘과 땅을 가지신 분 알라는 만사를 증언하시는 분이시다. 10) 남녀 신자를 박해하면서 뉘우침이 없는 자들에게는 지옥의 옹벌이 있을 것이니 그들에게는 타오르는 화염의 징벌이 뒤따르리라.
57) 이는 대체로 두 누와스가 나즈란의 기독교도를 박해한 사건을 가리 • 키는 것으로 사료된다(p. 69 참조). 게이저 Ge ig er 는 이를 불타는 화덕 속으로 던져진 세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D ani el, ch.iii ).
11) 믿음을 갖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밑에 강물 흐르는 낙원이 있으 니, 그것은 위대한 성공이다 . 12) 참으로 그대 주님의 처벌은 엄하도다. 13) 그분은 창시하고 생명을 다시 줄 수 있는 분 14) 그분은 관용과 사랑이 충만하신 분 15) 영광스런 옥좌의 주인이시자 16) 뜻하는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 17) 그대 귀에 군사들의 이야기가 도달했는가 18) 파라오와 싸무드의 이야기가우 19) 불신자들은 진리를 거 역하고 있지만 20) 알라는 그들을 배후에서 포위하시노라. 21) 아니, 이것이야 말로 영광스런 꾸란, Z2) 보존된 명판(銘板)에 새겨진 것이도다 .591
58) 본서 p. 38 참조.
59) 이슬람 신앙에 따르면 , 꾸란과 다른 모든 계시들의 원형이 천국에 보 존된 명판 al-Lawb al-~ 에 적혀 있다고 한다. [역주] 본서 p. fjJ'/ 참조 .
제 101 장 <재앙의 장> 1) 재앙의 날 , 재앙의 날이란 무엇이뇨 2) 재앙의 날이 무엇인지 누가 그대에게 알리리요 3) 이날은 사람이 흩어진 나비처럼 되는 날, 4) 산들은 솔질한 양털처럼 되는 날, 5) 저울이 선행으로 무거운 자는 안락한 삶을 살며 6) 저울이 선행으로 가벼운 자는 나락(奈落)에 거처하게 되리. 7) 그것이 무엇인가를 누가 그대에게 알려 주랴 8) 그것은 사납게 타오르는 불길이다.
제 1OO 장 < 불신자들의 장 > 1) 말하라 , 불신자들이여 2) 너희들이 숭배하는 것을 나는 숭배하지 않으며 3) 내가 숭배하는 것을 너희들은 숭배하지 않고 4) 나는 너희들이 숭배해 온 것을 숭배하지 않을 것 이며 5) 너희들은 내가 숭배하는 것을 숭배하지 않 을 것이니 6) 너희들에게는 너희들의 종교가 있고 내게는 내 종교가 있도다 . 메카에서의 무함마드의 교시 메카 계시에서 무함마드가 설파한 주요 교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 될수있다. 1 하느님 이외의 신은 없댜 2 무함마드는 신의 사자이며 꾸란은 그의 사자에게 계시된 하느 님의 말씀이다. 3 죽은 자는 최후의 심판날이 오면 부활하여 현세에서의 행위에 대해 심판받는다. 4 믿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며 사악한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 다음에서는 각 교리의 배경과 내용올 좀더 상세히 기술해 보고자 한다. 무함마드는 본격적인 예언자의 모습을 아직 드러내고 있지 않 다. 다만 다른 사람을 믿게 할 수 없는 경우 그에게 신앙을 강요할 권한은 없는 경고자nadhir에 불과함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1 신의 유일성 메카의 주민들은 <알라>의 절대적인 지위를 인정하였지만 평상 시에는 무함마드를 무시하고 우상을 더 가까이 하였으므로 무함마 드는 다음과 같이 불만을 털어 놓았다. <너희가 바다에서 불행한 일을 닥칠 때 그분 아닌 다른 것에 구원을 청하는 자는 모두 방황
케되리라. 그렇지만 알라께서 너희들을 육지로 구해 주시면 너희들 은 곧 동을 돌린댜 참으로 인간은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른다 . >60 1
60) 꾸란 17 장 67 절 .
그들은 사리사욕에서 뿐 아니라 조상에 대한 공경과 대대로 내려 오는 전통에 대한 긍지라는 훌륭한 동기에서 카바 신전 숭배에 집 착하고 있었다. 무함마드 자신은 <알라>를 <카바 신전의 주인>으 로 여겼으므로 꾸란 lOO 장 3 절 6” 에서처럼 알라를 섬기도록 꾸라이쉬 족에게 호소하였댜 그러나 그들은 <알라>를 섬기기 거부하면서 아 랍인들이 반발하여 자신들을 쫓아낼까 두렵다는 이유를 내세우자 무함마드는 그들 모두가 번창할 수 있게 해주신 분이 바로 <알라> 라는 점을 확신시켰다〈꾸란 2.8: 57 ). 그러나 그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 는 바는, 작은 파리 새끼 한 마리도 만들어낼 수 없는 무력한 우상 들은 천지창조를 통해 능력과 섭리를 현시( 顯 示)하신 하느님과는 비 할 바 아니리는 것이댜 621
61) [역주] <그러므로 이 집의 주님을 그들로 하여금 경배케 하라.>
62) 예 컨 대 Lane, Selecti on s from the Kuran(London,1843), pp. 100-113 에서 레인이 번역한 구절을 참조.
무함마드가 자신의 유일 신앙에 대한 생각을 다음에서처럼 강한 어조로 요약한 것은 메카 시대 말엽이었다 . 제 112 장 <순수(純粹)의 장 >631 1) 말하라, 하느님은 단 한 분이시다. 2) 영원하신 하느님 3) 낳지도 않으시고 태어나지도 않으신 분 4) 이분에 비할 자 아무도 없도다. 2 신의 사자, 무함마드 처음 무함마드가 예언자로서 둥장하였을 때 몇몇 사람을 제외하
63) 본 장의 제목 11chlas 는 <알라 이외의 다른 신을 믿는 죄로부터 스 스로를 깨끗이 함>을 의미한다.
고는 모두 무함마드가_독자들로 하여금 < 아라비안 나이트> 시 절을 회상케 해줄 어휘를 사용하자면_ < 마즈눈 m 척 nun> , 즉 마 귀(진니jinnI 또는 진jinn)가 씌었다고 생각하였다. 이교도 아랍인들 은 예언자, 점장이, 시인들과 같은 사람들을 경외시하였다. 만일 무 함마드의 <광기>가 제대로 진행되었더라면 계시를 받았다는 그의 주장은 별 이의없이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꾸라이쉬족이 그에게 반대 입장을 취한 이유는 그의 영적 계시에 대한 불신에서가 아니 라――-그들에게는 그가 <알라>나 <진>에게 흘렀는지의 여부는 상관이 없었다-자신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며 기존의 제도 자체 를 위협하고 고대 아라비아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뒤엎으려는 교 리를 전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하늘로부터 신권(神權) 울 부여받았다고 히는 선전을 저지하기 위해서 꾸라이쉬족은 그와 정면 충돌할 수밖에 없었댜 그리하여 그가 주장하듯이 예언자나 <알라>의 사자가 아니라 <무례한 거짓말장이>, <유식한 미치광 이>, <귀신에 흘린 시인>이라고 비난하였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이 라고 주장한 꾸란이 단지 <고대 신화 asa pr al-a wwalin>이거나 시 인 또는 마법사가 지어낸 것으로 일축하였다. <그는 우리에게 권세 를 부리고 싶어하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아닌가? 우리가 믿을 수 있게끔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자>고 그들은 외쳐댔다 . 이에 무함마 드는 전과 똑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며 이교도들에게는 무서운 벌이 현세와 내세에 기다리고 있음을 경고하였다 . 그는 자신과 똑같은 논 리를 펴고 똑같은 처지가 되었던 고대 예언자들——―노아, 아브라 함, 모세― __ 와 그후에 나온 예언자들과 몇번이고 자신을 비교하 였다. 또 그들이 불신자들인 조상들처럼 멸망하지 않으려면 자기 말 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하였다. 꾸란의 진실성은, 모두 유일신의 계시이고 따라서 내용이 동일한 모세 오경과 복음서에 의해 입중된 다고 말했다. 자신은 보수를 바라거나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운 예언 자가 아니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은 오로지 전도하는 것뿐이라고
하였다. 기적을 행하라는 요구에 대해 천사를 꿈에 본 것과 특히 꾸 란 그 자체가 각 구절이 분명한 증거이자 기적(아야토 a y a tt ) 임을 지 적하였다. 도) 만일 그가 꾸란을 날조한 것이라면 왜 그의 적들은 유사 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인가? < 말하라 . ‘ 가령 인간과 「진」이 합심해서 이 꾸란과 같은 것을 만들려고 해도 그런 것은 도저히 만 들 수 없도다 . 비록 그들이 서로 도운다해도’>(꾸란 17:& 3)
64) [역주] 기적과 꾸란의 구절을 동시에 의미하는 아랍어 단어.
65) 기적을 행할 수 없다는 예언자의 고백만으로는 그의 사후에 추종자 들이 기 적을 날조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 그래서 그가 불신자들에 게 < 산산이 찢겨진 달>(꾸란 54 : 1) 을 보라고 했다는데, 문맥에서도 명백하듯이 이 어구는 최후의 심판일의 징후를 나타낸다 .
3 부활과 심판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에서 통용되던 내세관은 죽은 사람의 무 덤에는 올빼미의 모습을 한 유령이 나온다는 식의 모호하고 야만적 인 미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한 따라서, 꾸란이 위협조나 설 득조로 강력하게 내세우고 있는 부활과 심판에 대한 개념이 메카의 우상 숭배자들에게는 우스꽝스럽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댜 < 이븐 캅샤 Ibn Kabsha 가 우리의 영생(永生)을 약속 하는가? > 라고 메카의 어느 시인은 말했다. <싸다휴也와 하마區 ma 에게 어떻게 삶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가? 그대 나를 죽음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하면서 어찌 내 뼈가 썩었을 때 나를 소생시켜 주겠는 가? > 67 ) 이같은 조롱에 대해 하느님은 죽시 응답하셨다. <말하라.
66) 필자는 이 기회에 필자의 친구이며 동료인 베반 교수의 홍미로운 논문 The Belie f s of Early Mohammedan respe cti ng a Futu re Ex i- ste n ce( Jou rnal of Theolog ica l Stu d ie s , Octo b er, 1904, p. 20 이하)에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 이 논문에는 본 주제가 충분히 논의되고 있다.
67) 샷다드 븐 알-아스와드 알-라이씨 Shaddad b. al-Aswad al-Layt hI, 아부 알-알라 알-마아리 Abo al-'Ala al-Ma'am 의 저서 Ri sa lat al- G lu.qra n 에 인용 (]RAS 1902. pp. 94, 818 에 발표된 필자의 논문을 참
조 );Ibn Hish am, p. 530, 마지막 행을 참조. 이븐 (아비) 캅샤는 무함 마드에 게 붙여 진 조롱조의 별명 이 었다. <싸다>와 <하마>는 사자(死 者)의 해골 hama 에서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죽 음의 새 dea th -b ir d 를 지칭하며 이들 두 단어는 <영혼>이나 <유령> 으로 옮길 수 있다
‘태초에 창조하신 분이야말로 썩어버린 뼈를 소생시킬 수 있으시도 다. 알라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알고 계시댜'>(꾸란 36:7 9 ). 이는 여 러 가지 실례들이 웅변적으로 예증하고 있댜 그러나, 무함마드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자연과 인간에게서 보여지는 하느님의 창 조력보다는 하느님의 파괴력을 보여 주는 역사상의 무시무시한 사 건들의 예를 통해 더 감명받았으리라 . 포교 초기의 무함마드에게는 자신이 언젠가 하느님 앞에 나아가 보고를 해야 된다는 것이 필연 적인 것처럼 여겨졌댜 무함마드는 자신의 책임이 막중함을 인식함 으로써 동족민들을 구원하기 위한 포교에 나서게 되었으며 본디 나 약하고 소심한 그에게 온갖 비방과 박해를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생 겼다. 뉠데케의 말대로 꾸란을 통틀어 가장 웅장한 <수라>는 최후 의 심판일이 다가옴에 따라 모든 천지만물이 사시나무 떨 듯하고 몸서리치는 장면을 묘사하는 <수라>들이다 . <마치 하늘이 반쪽나 고 산이 가루가 되어 무너지며 별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보 는 듯하였다 .>681 꾸란 82 장과 101 장은 무함마드의 독특한 예언 방식 을 보여 주는 좋은 예다 . 69 1
68) Noldeke, Geschic h te des Qo rans, p. 78.
69) 꾸란 18 장 45-47 절, 20 장 102 절 이하, 39 장 67 절 이하, 69 장 13-37 절 참조.
4 이슬람에서의 천국 천국과 지옥에 대한 무함마드의 묘사에는 영적인 것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무함마드의 천국은 신앙심 깊은 자들이 시원한 그늘에 서 향긋한 포도주를 마시고 조가비 속에 감춰진 진주처럼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의 <요정 I:Iu r> 1 01 과 놀며 휴식을 취하는 미화된 낙원일
70) [역주] 아랍어 hawra’ 또는 h uriyy a 의 복수. 천국에 들어가 구원받 온 자로서 영원한 처녀성을 간직하는 여성이다 . 가젤과 비유될 정도 로 아름다우며 흔히 황홀경의 정신 상태를 상징한다. 꾸란 44 장 54 절, 52 장 20 절, 56 장 22 절, 55 장 72 절에 나온다.
뿐이다 . 7 11 이는 무함마드가 자신의 설교를 듣고 있는 회중에게 아라 비아에서의 삶의 단조로움을 잊게 해주는 오락거리로 이슬람 이전 시가에서도 자주 묘사된 홍겨운 주연을 회상시켜 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의도였던 것이다. 무함마드는 천국에 관한 묘사의 상당 부분을 이슬람 이전 시가에서 가져왔다. 이슬람의 내세가 천하 고 관능적인 성격을 띠는 것 이 예언자의 유별난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흔히 생각하거나 그러한 비난을 아랍인 전체에 뒤집어 씌우 기도 하지만 베반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처음에는 미래의 심판에 대한 개념이 무함마드 자신이나 설교 대상인 대중 모두에게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는 설명이 맞을 것 같다. 천국과 지옥은 전통적으로 서로 연관이 없었으며 아랍어도 이런 개념을 표현하는 종교 용어가 없었다 . 그것을 이해하려면 현세의 사건들에서 비유적 표현을 찾아 그 형상을 자세히 묘사함으로써 가능하였을 것이다 . > 72 1
71) 유명한 자유 사상가 아부 알-알라 알-마아리는 그의 저서 Ris a /a t al-G lu,ifr an 에서 이 주제에 관한 이슬람의 개념을 교묘히 풍자화하였 다 (]RAS 10 월호, 1900, p. 637 이하).
72) Jo urnal of Theolo gi따 l Stu d ie s for Octo b er, 1904, p. 22.
5 기도 무함마드는 환상만을 좇는 사람은 아니었다 . 의식, 철야 기도, 금 욕 행위가 그의 종교의 일부가 됨으로써 형식적이고 고행적인 성격 이 부여되어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기도는 최초의 계시가 있은 후 곧 도입되었댜 가장 오래된 장의 하나인 꾸란 히장 14-15 절에 <자신을 정결하게 한 다음, 주님의 이름을 찬미하고 기도 드리는 자 번성하리라>고 되어 있다 . 꾸란 어느 곳에서도 신실한 신자는 하루 다섯번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의무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무슬림들은 성경의 주기도문에 해당하는 <수라트 알_파티 하 Surat al-Fa tiba(개경장)>을 기도 때마다 닝송하며 개인 예배나 전체 예배의 기도에서 빠뜨리는 법이 없다. <개경장>은 메카 계시 중 후기에 속하므로 여기에서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제 1 장 <개경장> 1)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2) 온 세상의 주님이신 하느님께 찬미를 3) 그분은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분, 4) 심판일의 주재자, 5) 당신만을 경배하며 당신에게만 구원울 청하나니 6) 저희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7) 당신께서 은총을 내려 주신 길로, 노여움을 산 사람들이나 길 잃은 사람들이 간 그런 길이 아닌 곳으로 야행과무함마드의 승천 메디나로 이주하기 직전 무함마드는 자신이 카바 신전에서 예루 살렘의 신전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일곱번째의 하늘로 올라가는 꿈 올 꾸었다. 이 꿈의 전반부가 꾸란 17 장 1 절에 나온다. <하람 성원 al-l\.1 as jid al- 표교 m 으로부터, 주님이 증거를 보이기 위해 축복을 내려주신 아끄사 성원 al- l\.1a sj i d al- .Aq후으로 밤에 그 종을 데리고 여행하신 그분에 영광 있으라.> 전승은 동양에서 <예언자의 승천> 으로 알려진 <미라즈Mi'raj>를 훌륭히 윤색하였다. 페르시아와 터 키에서는 오랫동안 신비주의자와 시인들의 인기 있는 소재가 되었 다. 무슬림 신학자들 대부분도 인정하는 민간 신앙에 따르면, 무함 마드가 천상으로의 여행을 마칠 때까지 그의 육신이 옮겨 다녔다는 것인데 무함마드 자신은 당시 메카에 널리 유포되던 이와 같은 그 릇된 해석을 용인하지 않았다. 이 일로 해서 일부 믿음이 약한 추종
자들은 신앙을 포기하게 되었다 . 메디나의 무함마드 인간으로서 수용할 수 있는 가장 고매한 사상에 감응한 무함마드 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신에게 계시된 진리를 설파하며 거의 혼자 서 난공불락 같은 미신에 대항하였다. 그는 실날 같은 희망을 버리 지 않고 온갖 조롱과 위기를 겪는 동 불리한 조건을 의연히 극복하 고 적들에게 최악의 경우를 맛보게 해주었다. 무함마드가 포교 초반 에 보여 준 눈부신 활약은 아낌없는 동정과 찬사를 함께 받지 않을 수없다. 메디나에서의 무함마드의 등장은 그다지 각광을 받지는 못하였다. 순수한 종교적 열정으로 충만했던 시절은 지나가고 예언자로서 보 다는 무함마드의 정치가적인 면모가 돋보이게 된다. 메디나로의 이 주는 분명 이슬람의 확립에 중요한 사건이었다. 무함마드는 혈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종교로서 유일한 유대를 형성할 수 있는 공동체룰 건설하기 위해 출신 부족과 의절해야 했다. 비록 그가 이 과정에서 채택한 어떤 방법들은 자신의 행위가 <알라>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는 그의 신념에 의해서만 눈감아 줄 수 있는 것이긴 하였지만 그는 이 과업을 지혜롭고 능수능란하게 수행해 나갔다. 영적이나 세속적 으로 그는 이슬람 신정(神政)의-이슬람에서는 교회와 국가를 구 별하지 않으므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一__최고 우두머리로서 절 대 권한을 행사하였고 신의 뜻에 따라 포악하고 신뢰감이 없는 이 교도 아랍인들이 죄책감을 느끼는 행위를 용서해 주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여기서 무함마드가 자신에게 내려진 계시를 얼마나 믿고 있 었으며 얼마만큼 지략을 썼는지는 새삼 물을 필요도 없다 . 전능하신 하느님이 특별한 중재자의 역으로 소개되는 것이 불쾌하긴 해도, 무 함마드는 그가 처한 위치 때문에 바로 그와 같은 관점에서 이 문제 를 판단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메디나, 무함마드를 입법자와 예언자로서 맞이함 메디나의 전반적인 여건은 무함마드가 뜻을 펼치기에 아주 안성 맞춤이었다. 아우스족 Banu Aws 이 유태인 동맹 부족인 꾸라이자족 Banu Quray za 과 나디르족 Banu Na c;Itr의 도움을 받아 카즈라즈족 Banu Kha 年지을 참패시킨 유명한 부아쓰 Bu'a th 전투 (615 년)이래 메 디나는 적대적인 양대 세력으로 갈라져 있었댜 지금까지 평화가 유 지될 수 있었던 것은 양 세력이 싸움을 재개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 었기 때문이었다. 세속적인 불행으로 몸과 마음이 지치면 인간은 기 꺼이 종교에서 위안을 찾게 되는 법이다 . < 히즈라 > 이전의 메디나에 서 이와 같은 경향을 보여 주는 예는 많다. 금욕 생활로 < 수도승 al- Rahi b> 이란 칭호를 얻은 아부 아미르 Abu ‘Arnir는 < 하니프 >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73 1 우후드 Ubud 전투에서 그는 꾸라이쉬 편에 서서 싸웠으며 그후 시리아로 가서 그곳에서 추방자의 최후를 마쳤다. 메디나의 또 다른 이슬람 이전 유일신론자인 아부 까이스 븐 아비 아나스 Abu Qays b. Ab1 Anas 는 노년에 무슬림 이 된 것으 로 전해진다 . 74)
73) Ibn Hish am, p. 411, 1. 6 이 하 .
74) 같은 책 , p. 347.
<메디나 주민들은 우상 숭배에 크케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으며 수호해 야 할 성소도 갖고 있지 않았다 . 이들은 비잔틴 제국의 경계선상인 아라비 아 북단에 거주하던 기독교도 부족과 메디나 근방의 유태인들과의 부단한 접촉을 통해 그들에게 세습되던 우상 숭배 신앙을 경멸하고 훨씬 고상하고 순수한 유일 신앙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 그리하여 그들은 모세 오경이나 복 음서와 같이 초자연적 원천인 성서 를 통한 신의 계시라는 개념에 익숙해 있었다. 종교적 관점에서 메디나의 우상 숭배는 이슬람에 아무런 장애도 되 지않았다 . 신앙으로서는 이미 시들해 있었다. 아무도 우상 숭배를 옹호하거 나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슬퍼하지 않았다. 무함마드가 개혁을 추진하는 것 에 대해 이교도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 반
대자들은 예전의 무질서한 이교적 생 활 을 지속하기 를 바라는 자들과 무함 마드의 전횡에 가까운 통치 를 싫어하는 자들이었다 .>乃 l 메디나의 파벌 메디나에는 4 개의 주요 파벌이 있었다. 예언자의 열렬한 지지자들 인 이주자들(무하지룬 M uhajiron)과 조력자들(안싸르心않다 예언자의 반대 세력인 위선자들(무나피꾼 Mun 函qun), 비교적 중립적 입장을 취한 유태인들(야후드 Yahod) 이었다 . 1 이주자들 이주자들은 62'2년 무함마드를 따라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이주(히 즈라Hij ra) 한 무슬림들로서 <무하지룬>이라 불린다. 그들은 모든 것 올 잃고 남은 것이라곤 승리와 복수에 대한 일념뿐이었으므로 무함 마드에게 이들의 열렬한 지지는 큰 힘이 되었다. 2 조력자들 이들은 메디나 주민으로서 이슬람에 입교하고 무함마드가 공격을 받을 시에는 그를 보호해 주겠다고 맹세한 무슬림들로서 <안싸르> 라 한다. 이주자들과 함께 점차 막강한 신앙 공동체를 구성하였으며 이슬람을 옹호하는 최초의 전사들이 되었다. 3 위선자들 <그러나 메디나 주민들 대다수는 무함마드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그를 예언자로 인정하거나 통치자로서 그에게 복~ 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무함마드를 따르는 열성적인 신자들 이 많기 때문에 노골적으로는 그에게 반대하지 않았으며 이들의 소 극적 저항, 죽 비협력 때문에 무함마드의 계획이 여러 차례 좌절되 75) L. Caeta ni, Annali dell' Islam, vol. i, p. 389.
기도 하였다. 무함마드로서는 이들의 영향력이 컸으므로 이들에 대 해 단호한 조치는 취하지 못하고 때로는 양보를 해야 할 때도 있었 다 .> 76) 다음은 무함마드가 위선자들을 묘사하고 있는 꾸란 구절이다. 제 2 장 <암소의 장> 8) 사람들 중에는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최후의 심판날을 믿나이다> 라고 하는 자가 있으나 그들은 실로 믿는 자들이 아니도다. 9) 이런 자들은 하느님과 믿는 자들을 속이려 한다. 하나 이들이 속이 고 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들임을 알지 못하도다 . 9) 그들의 마음은 병에 걸렸으니 하느님께서는 그 병을 더욱 더 악화 시키셨도다. 이는 그들이 거짓말한 죄로 고통스러운 벌을 받는 것이 니라. 이들의 리더격인 압둘라 븐 우바이이 ‘Abdullah b. Uba yy는 유능 하지만 나약한 성격으로 무함마드에게는 성가신 존재였으나 적수는 되지 못하였다. 4 유태인들 한편 무함마드에게 유태인들은 큰 골치거리였다. 처음 이들은 아 브라함과 모세에게 이미 계시된 것과 동일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히는 무함마드의 새로운 계시를 인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태인 들은 이 계시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무함마드에게 온갖 질문을 퍼부으며 그의 무지함을 놀려댔다. 이에 무함마드는 그러한 비난이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그들이 성서를 위조하고 변조시켰다고 비난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유태인들 에 대한 층오심으로 불탔으며 그로 인해 유태인들은 정치적으로 분 76) Noldeke, Geschi ch te des Qo rans, p. 122.
열하여 무력화되었댜 소수의 유태인들만이 이슬람에 귀의하였으며 나머지는 학살당하거나 추방되었다. 무함마드가 불과 몇년 사이에 모든 저항을 물리치고 전 아라비아 를 이슬람화한 과정을 여기서 상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학사적 인 문제에 보다 지면을 할애하기 위해 중요한 사건만을 간략히 짚 고 넘어가기로 한다 . 이슬람제국의 출범 무함마드의 첫번째 관심은 메디나의 파벌들을 화해시키고 이질적 인 구성원들 사이에 법과 질서를 도입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주자 들과 조력자들간의 헌장을 기초하고 여기에 유태인들의 종교 활동 과 재산 소유를 인정하고 그들의 의무와 권리를 명시하는 유태인들 과의 맹약을 포함시켰다 .>n) 이 주목할 만한 기록이 이븐 히샴의 『무함마드 전기』(pp. 341-344) 에 기록되어 있다. 벨하우젠이 이 기록 의 내용을 분석하여 이것이 관련 당사자들의 대표들에 의해 합의가 이루어지고 정당하게 재가된 숭고한 맹약이 아니라 무함마드가 메 디나에 도착한 이래 전개된 기존의 여건을 바탕으로 무함마드가 내 린 교령(敎令)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것은7 8 ) 타당한 것이다. 동시에, 누구든 이 기록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작성자의 정치적 수완에 감 명을 받게 된다. 표면상으로는 신중하고 적절한 개혁이었지만 실제 로 그것은 혁명이었다. 무함마드는 부족의 독립에 대해 노골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권력의 중심을 부족에서 공동체로 옮김으로써 79)
77) Ibn Hish am, p. 341, 1. 5.
78) Mu!n mm ad's Gemein d eordnung von Medin a in Sk izz en und Vorarbeit en , Heft IV, p. 67 이 하.
79) [역주] 무함마드는 하나의 민족 통일체로서 아랍이라는 관념을 가진 최초의 인물이었다. 김용선, 『아랍 문화사』(한국외대 출판부), p. 24.
사실상 독립성을 훼손시켰다. 공동체에는 무슬림은 물론 유태인과 이교도까지도 포함되었는데 무함마드는 무슬림들이 새로이 건설된 국가에서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협력자가 될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 다. 이는 그의 반대자들이 미처 예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바드르 Badr 전투 (Ee4 년 1월 ) 이제 꾸라이쉬족과 일전을 치를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하느님 은 그의 사자에게 믿는 자들이 꾸라이쉬족과의 성전을 수행하도록 명하는 꾸란 구절을 계시하였다. <불법한 일을 당하여 싸움을 걸어 오는 자들에게 대항하여 투쟁하도 록 허락하셨으니, 이것은 오직 ‘우리들의 주님은 오직 하느님 뿐이 시다’ 라고 말한 것으로 부당하게 고향을 쫒겨난 사람들의 일이 다 >(22 :39-40) <그러한 자들과 마주치면 어디서든지 싸워라. 당신들이 추방된 곳에 서 그들을 추방할지어다 >(2:19 1) <박해가 더 이상 없을 때까지, 종교가 하느님의 것이 될 때까지 그 들과 싸워라 >(2:1 9.'3) 6'24년 1 월, 무함마드의 약탈 위협을 받던 돈 많은 대상을 구출하 기 위해 출동한 군사력이 월등히 우세한 메카 군대에 맞서 약 삼백 명의 무슬림 전사들이 바드르에서 영광의 승리를 거두었다. 꾸라이 쉬족은 용감히 싸웠으나 모스크Mosqu eao) 에서의 수련으로 죽음을 천국에 가는 중명서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의 불퇴전의 맹공에 무릎 울 꿇고 말았다. 무슬림들은 14 명만이 전사하였고 꾸라이쉬족은 49 명이 전사하고 같은 수의 병사가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거둔 승리의 중요성은 적에게 입힌 물적 피해만으로는 헤아릴 수 80) [역 주] 이 슬람교 사원을 뜻함. 아랍어 로는 mas ji d 라 함.
없다. 이와 관련된 여러 문제를 고려해 볼 때 바드르 전투가 마라톤 Marath on 811 전투처럼 역사상 위대한 기념비적인 전투 중 하나임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 마침내 예언자의 적들이 그에게 요구하던 기적 이 일어난 것이다.
81) [역주] 그리스 아테네 북동의 평원으로 기원전 490 년에 아테네군이 페르시아의 대군을 격파한 곳.
<서로 맞붙은 양 군대의 일도 당신들에 대한 증거이다. 한편은 하느님을 위해 싸우는 군대이고 디~ 편은 불신자의 군대이다. 이때 불신자 측에서는 저 편이 배나 더 있는 것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뜻에 따라 승리를 도와 주시니, 눈을 가진 자들에게 참으로 좋은 교훈이도다.>(꾸란 3:13) <그들을 죽인 것은 너희들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죽이신 것이다.>(꾸란 8:17) 우후드 전투 (625 년) 바드르에서의 승리로 무함마드는 만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아 랍인들도 그의 종교는 관심 밖이었지만 메카 귀족들의 콧대를 꺾어 놓은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는 <히자즈의 왕, 무함 마드>로서 이 지역의 유력자가 되었다 .82) 메디나에서 그는 활기차게 포교 활동을 폈다. 열광적인 신자들은 그들의 신앙을 더욱 굳게 하 였고 믿음을 망서리던 사람들은 신앙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불만 세 력들은 위압감에 사로잡혔다. 이듬해 무함마드는 우후드에서 일시적 이지만 심각한 좌절을 맛보았다. 아부 수프얀이 이끄는 군대에 무슬 림 군대가 패퇴한 것이다. 그러나 승리자들은 바드르 전투의 복수를 한 데 만족하고 그들의 유리한 고지를 계속 지키려하지는 않았다.
82) Ibn Hish am, p. 763, 1. 12.
메카의 항복(었)년) 한편 무함마드는 이미 얻은 명예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는 적들을 격멸시킬 무자비한 계획을 빈틈없 이 밀고 나가 드디어 630 년 1 월 메카인들은 더 이상의 저항이 소용 없음을 깨닫고 예언자에게 성문을 열어 주고 <알라>의 전능하심을 인정하였다. 성도의 함락으로 아라비아에서 무함마드와 대적할 자가 아무도 없게 되었다. 그의 과업은 거의 성취되었다 . 베드윈 부족들 이 보낸 사절단들이 메디나로 쏟아져 들어와 꾸라이쉬의 정복자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고 약탈 같은 재미있는 일이라곤 전혀 없는 종교를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무함마드의 죽음(효 2 년) 무함마드는 얼마 동안 병석에 있다가 632 년 6 월 8 일 세상을 떠났 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변함 없는 충실한 추종자였던 아부 바크르가 그의 뒤를 이었다. 이로서 아부 바크르는 초대 <칼리파>가 되었다. 지금까지 꾸란 중에서 메카 시대를 살펴보았거니와 이제부터는 그 이후에 나온 계시의 성격과 내용을 살펴보겠다. 메디나장 메디나 장에는 무함마드의 메카 탈출로 시작된 숙명적인 그의 변 모가 잘 나타나고 있다. 이제 그는 예언자와 신의 사자로서 인정받 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적 의미의 유력자가 되어 있었다. 또한 그의 종교 활동도 세속적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 다. 그 자신이 왕, 입법관, 정치가, 외교가, 장군의 역할을 모두 겸하 고 있던 사람이라면, 간혹 일어나서 설교하라는 신의 명령을 모른 체 해버린다든지 그것을 전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이 시기의 계시들은 대개 법적, 정치적, 사 회적 중요성을 갖는 계시가 많다. 금식, 희사, 순례 둥의 종교상 의
무가 이 메디나 계시에 나타나며 결혼과 이혼에 관한 법을 설명한 다. 메디나 장들은 때에 따라서는 무함마드가 실행한 바를 정당화하 거나 무슬림들에게 나태함의 유혹을 뿌리치도록 권하고 , 승리와 패 배에 대해 설교하며, 휴전을 선포하는 둥 그때그때 상황에 따른 주 제를 짤막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마치 보고서나 성명서 같다. 메카의 우상 숭배자들 대신 , 이제 메디나에서는 유태인들과 위선자들이 커 다란 장애가 되었다. 특히 유태인들이 같은 유태인인 고대의 예언자 들 얘기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 목이 뻣뻣한 자들로 비난의 대상이 었다. 메디나 장은 역사적인 자료로서 가치가 있지만 문체가 단조롭 고 지루하기 때문에 꾸란을 읽는 사람들은 흥미를 별로 못 느낀다. 문체상으로는 메카 후기의 계시들과 유사하다 . 극적인 장면의 묘사 는 점차 줄어들었지만 유명한 <옥좌의 구절 Ay at al 一 kurs i>에서처 럼 때로는 잿더미 속에서 불길이 솟아오를 때도 있다 . <옥좌의 구절> : <알라 외에 신은 없고 그분은· 살아 계시고 영원한 분이시다. 졸음도 잠도 그분을 붙잡을 수 없도다 .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도다. 어느 누가 그분의 허락 없이 그분 앞에서 중재를 할 수 있겠 느냐 . 그분은 사람들 앞에 있는 것도 사람들 뒤에 있는 것도 다 아신다. 사람들은 그분 지식의 일부분이라도 그분 마음이 내키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알 수 없도다. 그 옥좌는 하늘과 땅 위에 펼쳐지고 또 그분은 두 개를 지키는데도 지치지를 않으신다. 참으로 그분은 숭고하시고 위대하 신 분이다. >83l 이슬람의 민족화 무함마드가 메디나에 소개한 이슬람은 거의 모두 기독교와 유태 83) 꾸란 2 장 255 절.
교에서 구전으로 유래된 것 이며 이때문에 일반적으로 원시적인 종 교 관념을 갖고 있던 이교도 아랍인들에게 감명을 주지 못했다. 이 슬람 자체의 외래적 성격과 아라비아의 민족 감정에 맞지 않는 점 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보았듯이 이미 이슬람을 받아들일 여 건이 되어있던 메디나에서 이슬람은 급속히 전파되었다 . 그러나 만 일 무함마드가 당시 아람인들의 숭배 대상이며 예배의 중심지였던 메카의 고대 이교도들의 성소인 < 카바 > 신전과 이슬람의 낯선 교 리를 연계시키지 않았다면 과연 이슬람이 반도 전역에 그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예언자는 메디나 이주 이전에 이미 유태교도를 개종시키려는 그 의 희망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있었다 . 따라서 그는 메디나로 온 이 후 그동안 지켜오던 기도 방향을 예루살렘 사원에서 <카바 > 로 바 꾸도록 그의 추종자들에게 명했다 . 또 일이 년 후에는 < 카바 > 신전 의 창건자 아브라함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전해지는 미신적인 순례 의식을 이슬람에 도입하였다. 이슬람과 아라비아 이상(理想)의 대립 그러나 이와 같은 조치가 사막의 자유분방한 생활과 사고에 젖어 있는 유목민들에게 쾌락을 제한하거나 세금을 내게 하고 기도를 행 하게 하는 둥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가치를 야만이란 이름으 로 낙인 찍는 종교를 수용하기에는 미흡한 것이었다. 이슬람의 교리 는 우상 숭배의 전통에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으로 골트치어의 지 적대로 이슬람의 독창성은 유태교나 기독교와 흡사한 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라비아의 인생관에 맞서 끈질기게 이 교리를 주창한 최초의 인물이 무함마드라는 사실에 있다. 84) 신홍 종교 Dn 와 예로부 터 내려오는 남성의 덕목 <무루와> 간의 갈등을 충분히 논하기 위 84) Mulnmm Stu d ie n , Pa rt I, p. 12.
해서는 골트치어 박사의 빛나는 연구 성과를 참고해야겠지만 우선 이 둘 사이의 상충되는 주요 쟁점을 요약해 보고자 한다. 85 ) 이슬람의 기본 사상은 베드윈들에게는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 < 그들이 이슬람에 반대한 이유는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파괴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불어넣으려한 신앙의 정신 때문 이었다. 죽 인생이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운명 예정적이고 인과 옹 보적인 전능하심에 의해 결정되며 , 기도와 금식을 해야 하고, 쾌락 올 포기하며 , 신의 이름으로 요구되는 재물 봉헌 때문이었다.> <남 성의 덕목 없이는 종교도 없다 La dJna ilia bi '1-rrruruwwa ti>는 경 구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에 입교한 베드윈들은 그들이 지켜 온 불문 율의 도덕규범을 버려야 했다. 독실한 무슬림이라면 악을 선으로 갚 고 적을 용서할 줄 알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召 1 란 3 : 128) 는 데 서 베드윈들은 위안을 삼았다. 우상 숭배를 하던 아랍인들의 사회 조직이 부족을 토대로 한 반면, 이슬람의 사회 조직은 모든 신자들 의 평등과 형제애에 바탕하였다. 종교적 유대는 모든 계급과 혈통상 의 차별을 없애 주었다. 또한 그것은 아라비아의 기사도적 정신의 근본을 이루는 부족간의 반목 , 명예욕, 혈통에 대한 자긍심 등의 폐 단을 제거하였다. 무함마드는 <알라 곁에서 가장 존귀한 자는 가장 알라를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자이니라>(꾸란 49:13) 라고 외쳤다. 이 런 교리에 대해 보수적이고 물질적인 사막의 유목민들은 본능적으 로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들이 집단적으로 무슬림이 되었지만 대개 는 이슬람을 믿지 않았으며 이슬람의 의미도 알지 못했다. 간혹 그 들의 입교 동기는 실리적인 면도 있었다. 그들은 이슬람이 행운을 가져다 주리라 기대했다. 그들의 몸이 건강하고 암말이 새끼를 잘 낳아 주며, 여자들은 튼튼한 아들을 낳고, 재산과 양 떼가 불어나는 한은 <우리가 이 종교를 받아들이고 나서부터 축복을 받았다>고 8.5) 골트치어의 서장(序章) Muruwwa und Di n(같은 책, pp. 1-39) 참조 .
말하면서 만족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이슬 람을 비난하고 등을 돌리는 것이었다 . 861 그러나 이들도 능히 종교적 열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 후 비잔틴과 페르시아 양대 제국 의 잘 훈련된 군대에게 거둔 승리로 충분히 입중된다. 그들을 크게 고무한 것은 전리품에 대한 욕심은 접어 두고라도 < 알라>가 자기 들 편에서 싸우고 있다는 데서 온 자신감이었다.
86) Bayc ;law I on Koran, xxii , II .
지금까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무함마드가 설교자로서 처음 등장할 때부터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슬람의 전파 과정을 대략 살펴보았다. 후세 아랍의 정치 • 지성사에서 발생 하는 거의 모든 사건의 원인이 이 20 여년 동안에 싹렀다. 이전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무함마드는 동족민의 운명적인 삶의 행로를 결정 지었다. 그들이 개명(開明)의 과정에서 그를 뒤에 처지게 한 경우도 있었지만 매 단계마다 그에게서 가르침과 의견을 구하였다. 여기서 는 이제까지 다양하게 내려졌던 그에 대한 인물 평가를 삼가려고 한다.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무함마드가 뻔뻔한 사기꾼도 아니 며, 신경증에 걸린 변절자도 아니고 사회주의 개혁가도 아니었으며, 애당초 구약성서에 나오는 여느 예언자처럼 진실로 계시받은 신실 하고 열성적인 종교가였다고 확신한다. 무함마드의 성격 드 괴제 ffl’ 는 무함마드의 성격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에 게는 그의 동족민들과 달리 진실성, 고귀함 , 재치 , 평형 감각이 엿보이며, 약 골의 사람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자질과 자제력을 적지 않이 갖추고 있
87) [역주] Mich ael Jan De Goe j e(1836-1909) :네델란드의 동양학자. 라 이덴 대학교 아랍어 교수 역임. 특히 아랍의 지리·역사에 관심을 갖고 많은 고대 아랍 지리서들을 번역 • 연구하였다 . 주요 저술로 『아랍지리 학자들의 문고(文 庫 )B i bl i o t heca Geog rap h orum Arab i corum 』 (8 권)가 있으며 그 밖에 많은 역서와 저술을 남겼다 .
다. 주변 상황이 그 를 예언자에서 < 입법자 > 와 < 통치자 > 로 변신시켰지만 그 자신은 < 알라 > 의 사자라는 점을 인정받는 것 외에는 더 바랄 것이 없 었다. 그것은 이슬람 전체에 대한 인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형적인 아 랍인처럼 다혈질이었으며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기 전의 영적 투쟁에서 이 러한 자질은 무함마드 자신도 놀랄 정도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 서 그가 환상만을 쫓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이 환영(幻 影 ) 이었다는 비난에 대해 엄숙한 맹세의 말로써 항변한다. 어찌 그의 말을 믿 지 않겠는가 ? >88 1 88) Di e Ber 頃g Molnmmed's, by M. J. de Goeje in N6 /de ke-Fe- sts c hrift (G i es sen, 1906), vol. i, p. 5.
제 5 장 정통 칼리파 시대와 우마이야조 정통 칼리파(효 2631 년)시대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칼리파들의 재위 기간은 육백년 (632 년 -1 2:JS • 년)이 넘으며 시대별 특성상 3 기로 구분된다. 제 1 기는 아부 바크르가 초대 칼리파로 즉위한 63'2년부터 예언자 의 사위이며 4 대 칼리파인 알리가 암살당한 OO1 년까지이다. 이들 초 기 4 명의 칼리파들은 예언자의 뜻을 이어 받아 성도 메디나에서 예 언자와 가장 가깝던 교우들의 도움을 받으며 통치하였기 때문에 정 통 칼리파(알-라쉬둔 al- Rashi d 血)로 불린다. 우마이야조 칼리파 (e61-7 EA:l년)시대 제 2 기는 OO1 년 무아위야 Mu‘aw iy a 의 죽위에서부터 우마이야가 의 마지막 칼리파인 마르완 Marwan 2 세가 자브 Zab 대전투(7ffJ년) 에서 예언자와 가장 가까운 친척임을 내세워 칼리파 위(位)를 요구하고 나선 압바스가에 패배하여 폐위당할 때까지이다. 무슬림들은 우마이 야조가 좋게 말해 칼리파제였을 뿐 실제로는 왕정제였다고 생각했 다. 후에 밝혀지겠지만 그들에게는 종교적인 칭호도 붙지 않았으며 신앙심도 별로 없었다. 시리아의 아랍인들이 세운 이 왕조는 도읍을 메디나로부터 다마스쿠스로 옮겼다.
압바스조 칼리파시대 (7 50-- 1258 년) 동 시대가 가장 길고 가장 중요하다 . 이 시대는 7~ 년 아부 알 압바스 알-사파호 Abo . al-·A bbas al ― S aff ab 의 즉위로 시작, 압바스 가의 符명에 이르는 칼리파들이 칼리파위를 이어오다가 12513 년 1 월 압바스조의 웅대한 도읍지 바그다드가 몽골의 훌리구 ·Hol agu에 의 해 함락됨으로써 그 막을 내린다. 압바스인들은 우마이야인들 못지 않게 전제적이었으나 좀더 개화되어 있었다. 우마이야인들의 정서가 전적으로 아랍적인 반면, 압바스인들은 칼리파위를 차지한 것을 페 르시아 민족의 공으로 돌리며 이슬람 문명에 새롭고 유익한 요소를 제공한 페르시아 사상에 홈뻑 젖어 있었다 . 초기 이슬람문학 문학의 관점에서 볼 때, 본 장의 주제인 정통 칼리파 시대와 우마 이야 칼리파 시대의 문학 산물은 다소 빈약한 편이댜 우상 숭배 시 대 아랍인들의 단조로운 삶이 그들이 지은 시 속에 잘 나타나 있고 압바스조 무슬림들의 다방면에 걸친 생활 면모도 동시대의 모든 특 성을 보여 주는 풍부한 문학을 통해 연구될 수 있댜 반면, 초기 이 슬람 시대의 사상사를 보여 주는 문헌은 전해 오는 것이 별로 없고 그나마 대개 반(反)이슬람적인 취지로 쓰여진 것들이다. 여기에는 주 로 종교 운동, 신학의 발생, 후에 여러 갈래로 니누어진 종파의 기 원 동에 관한 자료가 불충분하지만 포함되어 있다. 정교일 *I( 政敎-致) 이슬람에서 교회와 국가는 본질적으로 하나이므로 정치와 종교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종교적 사건도 정치적 사건을 언 급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정통 칼리파들에게서 이와 같은 정교일치가 얼마나 완벽히 실현되었으며 그 영향이 얼마나 광범위 하게 미쳤는지를 다음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아부 바크르, 칼리파에 선출됨 (632 년 6 월) 무함마드가 아들을 두지 않았다는 것보다 그가 후계자를 지명하 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문제이다. 아랍인들은 왕권 세습에 익숙해 있지 않았다. 왕권 세습의 개념은 예언자 가문만이 갖는 신 수권에서 발달되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무슬림 사회에서 그 지도 자를 선출하는 것은 우상 숭배 시절에 부족의 족장을 뽑는 것처럼 전적으로 아라비아의 관습에 따른 것이었다. 가장 유력한 지도자로 는-세 명 모두 꾸라이쉬족 출신인다-나중에 무함마드의 장인이 된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 븐 알-카딸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후에 예언자의 딸 파띠마와 결혼하여 사위가 된 알리가 있다. 특히 알리는 예언자와는 혈연과 혼인으로 맺어진 각별한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선출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이들 중에서 최고 연 장자인 아부 바크르가 우마르의 지지를 받아서 칼리파로 선출되었 다. 소박한 성품과 겸손한 태도를 지닌 그는 예언자에 대한 확고 부 동한 믿음 때문에 <알-씻디끄 al-S i d diq(진실한 자)>라는 별명을 얻 었다. 천성이 온화하고 동정심이 많은 그는 이슬람의 대의(大義)가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의연하게 대처하였다. 무함마드의 죽음이 알 려지자 반란이 아라비아 전역으로 삽시간에 퍼져 나갔는데 아부 바 크르는 이들 반란을 강압적으로 진압하였다 . 사이비 예언자들이 곳 곳에서 속출하자 유목민들은 희사금과 기도의 부담을 떨쳐버리고 싶어 그들 주위로 몰려들었다. 거짓말쟁이 무사일리마 Musa yli ma 아라비아의 중심부에 거주하던 하니파족 Ban o. I:Jaruf a 이 무사일리 마에 의해 전장에 끌려 나왔다. 무사일리마는 그가 말한 것으로 추 정되는 다움 인용문으로 미루어 보건대 꾸란의 초기 문체를 우스꽝 스럽게 모방하고 있다. <코끼리, 코끼리는 무엇이며, 코끼리가 무엇 인지 누가 너에게 말해 주랴? 그것은 보잘것없는 꼬리와 길다란 코
롤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신의 피조물 중 보잘것 없는 것이다.> 이슬 람 전승은 그를 거짓말쟁이 al-ka d.h dhab 라고 부르며 기적을 행한다 고 주장하는 음흉한 사기꾼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이는 전혀 사실무 근이다. 마구리우쓰 Marg o li ou th 교수의 지적대로 ,11 그가 일부 교리 롤 기독교에서 받아들였을 수도 있지만 그 교리들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므로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 없다 무사일리마는 치열한 전투 끝에 <알라의 칼 Sword of Allah > 칼리드 븐 왈리드 編 d b. Wa lid 에게 패하고 살해되었다. 무슬림 군대는 가는 곳마 다 승리를 거두었다. 아라비아가 얌전히 굴복했던 것이다.
1) On the Orig in and Imp o rt of the Names Muslim and Ifan( (]RAS for 1903, p. 491). [역주] D. S. Mar g o li ou th (1858-1940) :영국의 동양학자. 옥스퍼드 대학교 아랍어 교수 역임 . 시리아 아랍어 학술원 회원과 독일 동양학회 회원 둥으로 선출. 아부 알 - 알라의 저술 목록을 펴냈으며 (1910) r 이슬람 Mohammedan i sm 』둥의 많은 논문과 번역을 남 겼다.
세계 종교로서의 이슬람 무이르 경 Sir . W. Muir2 1 을 위시한 일부 무함마드 전기학자들은 이슬람이 본래 아랍인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보편성을 인 정하지 않지만 이같은 주장은 꾸란에 나와 있는 명명백백한 중거와 상치된다. 가장 오래된 계시 중 하나안 꾸란 68 장 51 - 52 절은 다움과 같다.
2) [역주] Wi lliam M uir (1819-1905) : 영국의 동양학자. 오랫동안 영국의 인도 식민정부에서 고위 행정관료를 역임하면서 기독교 선교에 몰두하였 다. 이 시기에 아랍어 를 익히고 선교의 목적으로 <캘커타 리뷰 Calcul ta Rev i ew~ 지에 이슬람 이전의 역사와 예언자 무함마드의 전기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룰 토대로 방대한 저술인 『무함마드의 생애와 이슬람의 역사 The Li fe of Mahomet and Hi st o r y of Islam 』 (4 권, 1856-1861) 와 『 칼리파제 : 그 기원과 홍망성쇠 The Calip lr zte , its R is e , Declin e and Fall 』 (London, 1891) 룰 남겼다 .
<믿지 않는 자들은, 이 교훈을 들으며 그대를 노려보며, ‘그는 마귀들린 놈이다’ 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만인을 위한 교훈'c1hikrun Ii 'I-‘ 리amin이 아니랴 .>3)
3) 이와 비슷한 중요성을 지닌 인용 구절이 수록되어 있는 아놀드 T. W. Arnold 의 저 서 The Preachi ng of Islam, p. 23 이 하 참조.
페르시아와 시리아의 정복(633--643년) 드디어 이 멋진 꿈을 실현할 때가 왔다. 위대한 정복 사업은 예언 자의 열성적인 포교 덕분에 활기를 띠었으며 무함마드 자신이 모범 울 보임으로써 정당화되었다. 신앙의 의무가 국가적 이유 reasons of s tate 41 와 일치되었다. <새로 정복한 미개한 부족들로 하여금, 전리품 만 탐하고 호전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신앙에 대한 애착심 을 강화시켜줄 수 있도록 의부 목표에 전념케 한 것은 분명 더할 나위 없이 기발한 수법이었다 .>5) 여기서는 이들의 전공(戰功)에 대 해 자세히 논할 수 없지만 예언자의 사후 12 년만에 페르시아 제국 은 속국으로 전락하였다는 것과 시리아는 이집트와 더불어 비잔틴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을 지적해 두는 것으로 족하다.
4) [역주] 위정자의 정치적 변명. 5) Noldeke, Sketc h es from Easte r n Hi st o r y , tran slate d by J. S. Black, p. 73.
이슬람의 관용, 신교(信敎)의 자유 이들 국가에 있던 조로아스터교 mroas ter 교도와 기독교 신자들 이 이슬람 개종을 강요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서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자발적으로 이슬람에 귀의하였다. 본디부터 가지고 있던 신앙을 계 속 유지하고 싶으면 인두세(지즈야jizy a) 를 치르고 신분 보장과 신교 의 자유를 부여받았다 .6)
6) 브라운 교수의 Lit era ry Hi st o r y of Persia , vol. i, p. 200 이하 참조 .
칼리파 우마르 (634 -644년) 아부 바크르가 죽기 얼마 전에 시작된 정복 사업은 우마르 븐 알 -카땀 칼리파의 재위시에 시리아와 페르시아를· 삽시간에 휩쓸어버 렸으며 3 대 칼리파인 우쓰만 치하에서도 그 열기가 약간 식기는 했 어도 계속 진행되었다. 칼리파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덕목을 지니고 있어 후세 무슬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우마르라는 고귀한 인물 에 대해 잠시 고찰해 보기로 한다. 그에 관한 일화들·은 그의 성격을 다소 이상적으로 묘사한 부분도 없지 않지만 그의 남자다움과 시대 상이 잘 나타나고 있다. 다음 일화는 따바리의 전기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1 그의 소박한 태도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였다. <니~ 우마르가 잔치에 오 는 것을 보았다. 그는 양손을 사용하여(그는 양수잡이었다) 붉은 자수가 있 는 천을 몸에 휘감은 채 맨발로 걷고 있었다. 그는 마치 말둥에 걸터앉아 있는 것처럼 사람들 사이에 우뚝 서 있었다 .>71 칼리파 우쓰만 븐 아판의 부 하 한 사람이 다음 얘기를 전한다. 그가 주인과 함께 낙타를 타고 구빈세 (求貧稅)로 받은 가축들을 방목하고 있는 곳을 가는 중이었다. 무더운 날씨 에 아라비아 사막의 시뭄책 m 江 m( 모래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었다. 그들은 허리에 천을 두르고 짧은 망토rida.를 걸친 사람이 낙타 때를 몰고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우쓰만이 그의 부하에게 <이자가 누구라고 생각되느냐?>라고 물었다. 가까이 가보니 그는 우마르 븐 알-카땀이었다. 우쓰만이 말했다. <아이구, 이분이 바로 그 힘 세고’ 믿을 수 있는’ 분이시구나 . >81 우마르는 시징을 돌아다니며 꾸란을 음송하고, 사람들이 말싸움을 벌리는 곳마다 가 서는 판가름을 해주곤 했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들었다. 메디나의 유명한
7) Taha. Ii, i, '2:72 9, 1. 15 이 하.
8) 같은 책, i, 짜 36, 1. 5 이하. ‘ ’의 어구는 꾸란 28 장 26 절에서 인용 한 것으로 모세에게 붙여지는 수식어이다. [역주] 꾸란에 쓰인 아랍어 원어는 각각 al- q a wiyy(힘센), al- ami n( 믿을 수 있는)이다.
유태인 율법학자인 카브 알-아흐바르 Ka'b al- 서允 bar 가 <신자들의 지도자 Corrnnander of the F aithful >9' 를 알현할 수 있는 방법을 묻자 우마르는 다 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통과해야 할 문이나 장막도 없소 그 분이 예배를 마치고 자리에 앉고 나면 누구든 원하는 사람은 그와 얘기를 나눌 수 있 소> 101
9) 우마르가 최 초로 이 칭 호(아미 르 알구구미 닌 Amir al-Mu' minin)률 사 용하였으며 그의 뒤를 이어 칼리파들도 이 칭호로 불려졌다.
10) Tabar1, i , '2:73 8, 7 이 하 .
2 그의 책임감 우마르는 설교중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리와 함께 무함마드를 보내 신 그 분께 걸어 맹세컨대, 만약 단 한 마리의 낙타라도 유프라테스 강둑에 서 죽게 방치해 둔다면 하느님께서 알-카땀(자신을 뜻함)의 가문에게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을 일’이 두렵습니다 .>111 또 언제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신이여, 앞으로는 백성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일 년 내내 그들과 함 께 지내겠습니다. 그들의 불평 불만이 미처 제 귀에 들어오기도 전에 차단 되는 경우가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방총독들이 백성들의 소원을 나에 게 보고하지도 않고 백성들도 직접 나에게 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먼저 시 리아에 가서 두 달 머문 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 다음엔 바레인, 쿠파, 바스라에서 각각 두 달씩 머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꼭 일 년이 지나갈 것 입니다 .>121
11) 같은 책, i, '2:73 9, 4 이 하 .
12) 같은 책, i, '2:73 7, 4 이하.
3 치안 유지자로서의 칼리파 어느날 밤, 그가 압둘 라흐만 븐 아우프 ‘Alxlu '1-Ra l;irnan b. 'Aw f의 집 대문을 두드리니 그의 부인이 문을 열어 주며 <제가 다시 들어가 제자리에 앉을 때까지는 들어오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기다렸다가 그녀가 들어오라고 해서야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에 먹을 것 좀 있습니 까?>라고 묻자 그녀가 음식을 내왔다. 한편 압둘 라호만은 한쪽에서 기도
에 몰두하고 있었다 . < 빨리 끝내시오 이 사람아 > 라고 우마르가 소리쳤다. 압둘 라흐만은 죽시 마지막 살람 salam 을 말하고 칼리파에게 말했다. < 신자 들의 지도 자 시여 , 어떻게 이 시간에 오셨습니까? > 우마르가 답하였다 . <시 장 근방에 일단의 여 행자들이 머무르고 있는데 메디나의 도적들이 그들을 습격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오. 함께 가서 지켜 봅시다 .> 그리하여 그는 압 둘 라흐만과 함께 시장에 가서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얘기 를 나누기 시작 했다. 그때 멀리서 등잔불 빛이 어렴풋이 보였다. < 취침 후에는 소동을 하 도록 명하지 않았는가 ?>1 3) 라고 칼리파가 외 쳤 다. 그들은 현장으로 . 달려가 서 술을 마시고 있는 일단의 사람들을 발견하였다 . < 아는 사람이니 돌아 갑시다>라고 압둘 라흐만에게 조용히 말했다. 다음날 아침, 죄인을 불러 그 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지난 밤 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지 . > <신자들의 지도자시여, 어떻게 그걸 아셨습니까?>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 <하느님께서는 염탐하는 짓을 금하지 않으셨습니까! > 우마르는 묵묵부답으로 그의 잘못을 용서해 주었다 .l 4)
13) 우마르는 쥐들이 불 붙은 심지로 당시 야자나무 가지로 만들어져 있던 지붕에 불을 지르곤 하였기 때문에 등불 사용을 금지하였다고 한다.
'14) Taban, i , 2742, 13 이 하.
4 자기 가족에게는 엄격함 우마르가 설교단에 올라 회중에게 어떤 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 고하고 나서 가족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 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런 일 을 하는 것을 금하였다. 이제부터 그들이 너희들 보기를 마치 새가 고기 먹 이를 보듯할 테니 만일 너희 중에서 그같은 일을 하는 자가 눈에 띄면 하느 님에 맹세코 그 벌을 두배로 내리리라 . > 15 )
15) 같은 책 i, 없 45, 15 이 하.
5 지방 총독들에 대한 지시 그가 총독을 임명할 때는 이주자나 조력자들 몇 명을 중인으로 세우고 임명장을 작성케 하였다 .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지시가 적혀 있었다. <그대
는 말을 타지 말 것이며 하얀 빵을 먹지 말지어다 . 또 좋은 옷을 입어서도 안 되고 그대와 청원자들 사이에 문을 세워 두어서도 안 되느니라 . >161 우마 르는 총독을 임명하면 문 밖까지 나가서 그들을 전송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하였다 . < 내가 그대를 총독으로 임명한 것 은 무함마드(그 분에게 신의 축복과 평화를 !)1 71 의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그 들의 머리채를 잡아당기거나 매질해서 상처를 입히라는 것이 아니며, 기도 할 때 그들을 인도하고 , 그들을 공정히 심판하며, 공금을 공평하게 분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는 그대를 그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군주로 임명한 것이 아니다 . 아랍인들이 모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매질을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외지 근무를 오래 시 키지 말도록 하라. 또 그들이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무시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꾸란에만 의존할 것이며 무함마드(그 분에게 신의 축복과 평화를!)의 전승은 가급적 기록하지 마라. 그러면 나는 그대와 한편이도다 . > 그는 백성 들이 총독에게 보복하는 것을 묵인하곤 하였다. 불평이 접수되면 고발인과 대면시켜 총독의 잘못이 입증되면 그를 처벌하였다 .1 8)
16) 같은 책 , i, '274 7, 7 이 하.
17) [역주]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의 이름을 언급할 때 반드시 이 표현을 이름뒤에 사용한다 . 아랍어로 <쌀랄 라후 알라이히 와 살라마$all a 'Ila - hu 'alayh i wa sallama> 이 다 .
18) 같은 책, i, 2740 마지막 행 이하.
우마르의 회계장부 이슬람에서 최초로 아랍인들의 회계장부(디완 Dwan) 롤 만들고 여 기에 부족별로 이름을 올려 봉급을 나눠준 것은 우마르였다. 이 제 도에 관한 다음 기술은 『알-파크리 al. -Fa khri.』라는 홍미로운 역사서 에서 발췌한 것이다. 히즈라 5 년 (636 년), 당시 칼리파인 우마르는 정복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 됨에 따라 페르시아 군주들의 재산이 전리품으로 노획되어 금은보화와 호 화찬란한 의싱들이 창고에 쌓이는 것을 보고 이 모든 재물을 무슬림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이 풍족하게 살 수 있게 해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 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메디나에 있던 한 페르시아 총독 marzuban 이 우마르가 당혹해 하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 말했다 . <신자들의 지도자여, 페 르시아 왕들에게는 ‘디완이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세입과 세출이 빠짐 없이 기록되며 봉급자들의 명단이 계급별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 마르의 관심울 불러일으켰다. 그는 페르시아 총독으로부터 이 제도의 특징 에 관해 설명을 듣고 나서 회계장부를 작성하여 모든 무슬림들에게 일정 액수의 봉급을 할당하였다. 또 사자(그분에게 신의 축복과 평화를!)의 부인 들과 가까운 친척들에게도 일정한 금액을 배당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수중 에는 한푼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에게는 저축해 놓은 돈도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와서 말했다. <신자들의 지도자여, 바상시에 쓸 수 있도록 좀 남겨 두셨어야 합니다.> 이에 우마르가 그를 꾸짖었다. <악마가 이 말을 네 입에 쳐 넣었구나. 신이여, 그로 인한 재앙으로부터 저를 지켜주시고 저 의 후계자들이 그 말에 현혹되지 않도록 도와 주옵소서 . 무슨 일이 있어도 신과 그 분의 사자만을 따르겠나이다. > 그 후 봉급에 관해서는 이슬람 개 종 여부와 전장(戰場)에서의 사자에 대한 공헌도에 따라 우선 순위를 정해 지급하는 것이 옳다고 그는 생각했다. 19) 이슬람의 귀족정치 무함마드와의 인척 관계도 고려되었다 . 우마르는 큰 소리로 외쳤다. <신 에게 맹세컨대, 우리는 무함마드(그 분에게 신의 축복과 평화를!) 그 분을 통하지 않고는 이 세상에서 우위에 올라서지도 못했을 것이고 내세에 우리 의 행위에 대한 보상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분으로 인해 우리는 고귀함을 얻었다. 그의 부족은 아랍에서 가장 고귀하며 그 다음으로는 그와 혈연적으로 보다 가까운 사람들이다. 실로 아랍인들은 ‘신의 사자’로 인해 기품을 갖게 되었다 . 혹 그들에게도 사자와 공통된 조상이 있었을지 모르며 우리들의 조상 중 몇몇은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집안과 촌수를 따질 정도로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방인들이 선행을 베풀고 우 19) Al-FakhrI, e d. by Derenbourg, p. 116, 1. I to p. 117, 1. 3.
리는 전혀 그렇게 안한다면 분명 심판의 날에 우리보다 그들이 무함마드에 더 가까우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친척 관계를 따지지 말고 신이 베풀어 주실 은혜를 받고자 힘쓰라. 선행을 늑장부리는 사람이 혈통으로 만회하려 고 해서는 안된다 .>20 )
20) Taba r!, i, 2751, 9 이 하.
크롬웰 Cromwell2” 을 두고 한 말을 우마르에게도 할 수 있으리라. 죽 우마르는 <고대 왕국을 다른 형태로 주조(鑄造)하였다.> 그는 또 한 어느 시인의 경구와 딱 들어맞았다.
21) [역주] O li ver(1599-1658) :영국의 장군으로 청교도의 정치가;호민관 (1653-1658).
<권력이란, 그것을 획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지하는 데도 똑같은 수완이 필요하다 . > 바스라와 쿠파의 건설 (628 년) 이교도들이 숙청된 아라비아는 우마르에 의해 체제가 정비되자 이슬람 상비군의 방대한 병력 보충지가 되었다. 정복지의 아랍인들 은 대규모 야영지에 거주하면서 비무슬림들로부터 거두어 들인 세 (稅) 수입으로 살아나갔다. 이들은 배타적인 군사 계층을 형성하였 다. 이들 야영지로부터 문학사에서 그 이름도 빛나는 양대 도시 _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삼각주에 자리잡은 바스라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히라에서 멀지 않은 유프라테스 강 서쪽의 지류에 세워진 쿠파가 건설되었다. 우마르의 죽음 (644 년) 우마르는 <대 모스크 Grea t Mo squ e>221 에서 예배를 인도하던 중
22) [역주] 메카 사원으로 카바 신전이 중앙에 위치해 있다.
피루즈 F1IUZ 리는 페르시아 출신 노예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의 죽 음으로 호전적 신정 체제와 <원로 칼리파>의 전성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 그의 성격을 완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차후 그에 대한 보완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앞의 일화에서 대강 그 윤 곽은 드러난 셈이다. 그는 소박하고 검소하였으며, 편벽됨이 없이 본분을 다하고, 거칠다고 할만큼 정력적이지만 약자에 대해서는 온 유하였다.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엄격한 심판자였던 그는 타고난 통치가이며 그야말로 사내 대장부였다 그의 사후에 계 속된 혼란과 소요를 생각하면 5 백년이 지나 한 덕망 있는 학자가 <이슬람의 운명은 우마르 븐 알-카탑의 수의 속에 덮혀 가려졌다> 고 한 말에 공감이 간다 . 23 1
23) Ibn Khalli ka.n( ed. by Wi lst e n feld ), No. 68, p. 96, 1. 3; 드 슬란의 번 역 서 , vol. i, p. 152.
우쓰만, 칼리파로 선출됨 (644 년) 메카의 귀족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 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뿐이었다. 이제 그들에게도 복수적의 기 회가 왔댜 우마르에 이어 칼리파직을 승계한 우쓰만 븐 아판은 예 언자의 초기 제자 중 한 사람이지만 무함마드의 반대편에서 항상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우마이야가의 후손으로서 메카의 명문 출신 이었다. 그는 신앙심이 깊고 마음씨 좋은 노인이었지만 야심만만한 일가 친척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그네들의 끄니풀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이내 요직에 등용되어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였지만 종종 그 들의 불경한 행동거지는 이들 마지막 개종자들이 내심으로는 아직 도 우상 숭배자들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불평 • 불만의 소리가 팽배해짐 또 다른 이유도 불만이 널리 확산되는 데 기여하였다. 새로운 정
착지와 성도에서 사치와 부도덕한 행위가 급속히 늘어나는 것이 경 건한 무슬림들에게는 눈꼴 사나운 일이었다. 알리, 딸하 T alba, 주바 이르 Zuba yr가 이끄는 이슬람의 진정한 귀족 계급인 예언자의 교우 들은 경쟁 상대인 우마이야가 귀족들의 위세를 약화시키려고 하였 다 . 마침내 우마이야가의 오만과 탐욕이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반란 이 일어나자 노령의 칼리파는 수주일 동안 포위 공격을 견뎌내다가 그의 자택에서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아랍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었다. 잇따른 내전으로 이슬람의 통일은 완전히 깨지 고 말았고 그 후유층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알리, 칼리파가 됨(忠 3 년) 이제까지 뒷전에만 있던 예언자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가 칼리 파위에 올랐다 . 그가 우쓰만을 살해한 세력과 결탁하고 있었다는 의 혹은 제쳐두고라도 그가 우쓰만을 구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기는커녕 오히려 파멸로 치닫는 것을 수수방관함으로써 그의 우유 부단함은 비난을 살 만하였다. 알리의 성격 그러나 알리는 활동력과 결단력, 통찰력을 빼고는 통치자로서 갖 추어야 할 모든 덕목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싸움에서는 용감한 전사 였고 친구에게는 진실하고 적에게는 관대하였다. 그는 시와 옹변에 뛰어났다. 그가 남긴 시와 명언은 출처가 분명한 것은 얼마 안되지만 이슬람 세계의 동부지역에서 특히 유명하였다. 몬트로즈 MOnt rose2 4 ) 나 바야르 Bay ard25) 와 견줄만큼 고상한 그에게는 냉혹한 현실을 다 24) [역주] Jam es Graham, 몬트로즈 (1612-1650) :스코틀랜드의 귀족이자 군인;찰스 1 세 Charles I 의 지지자. 25) [역주] Pie r re Terrai l, 바야르 (1473-1524) :프랑스의 영옹적 기사로 중세의 가장 고결한 기사 중의 한 사람.
룰 정치적 수완은 없었으며 <전쟁은 속임수 놀이이다>라고 인식하 고 있던 사악한 적들보다는 한 수 아래였다 이처럼 그의 인생은 어 떤 의미에서 실패였다. 알리의 신격화 생전의 그는 공동체의 구성원들로 부터 칼리파로서의 권위를 인 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 그러나 그의 사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무함마드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댜 죽은 지 백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알리는 예언자의 후계자로서, 결백하고 무류(無雲)의 축복받은 순교자로서 간주되었으며 그를 신의 화신이라고까지 생각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쉬아파에 전해 오는 전승 속의 알리는 역사 적으로 미화된 인물이라기보다 한 이슬람 종파의 종교적 열망과 정 치적 목표를 상징하는 인물인 것이다. 알리 대(對) 무아위야 승리를 거둔 반군에 의해 알리가 칼리파로 추대되자 시리아 총독 인 무아위야 븐 아비 수프얀 Mu‘a wiy a b. AbI S ufy年은 우쓰만의 원수를 갚을 것을 벼르며 칼리파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했다. 우 마이야가의 문장(門長)인 무아위야가 친족을 살해한 자들에 대한 옹 징을 요구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사실 그가 알리와 힘 겨 루기롤 한 속셈은 칼리파위 때문이었다. 씨핀 Siffi n 전투(約 7 년)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한 마을인 씨핀에서 대전투가 벌어졌다. 무 아위야가 알리에 대한 계략을 꾸미고 있을 때 알리는 승리를 거의 눈앞에 두고 있었다. 무아위야는 꾸란을 창끝에 매달도록 병시들에 게 지시하였다. <여기 하느님의 경전이 있다. 그것으로 누가 옳고 그른지를 결정하자!> 이 변변찮은 술책이 성공하였다 . 무아위야가
꾸란을 걸고 넘어가자 알리의 병사들 중 어쩔 수 없이 꾸란에 더 마음이 쏠릴 수밖에 없는 믿음이 강한 열성 신자들이 벌 때처럼 들 고 일어났다. 이들은 알리가 그의 대의를 꾸란에 두지 않는다면 자 신들도 알리에게 동을 돌리겠다고 위협하였다. 알리는 이들 항명자 들에게 충고도 해보고 적의 함정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했지만 허 사였다. 이미 대세는 그들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중재 이에 알리는 한 발 양보하여 충성심이 미심쩍긴하지만 예언자의 교 우로서 생존한 분 중 가장 연로한 아부 무사 알一아쉬아리 Abi1 MU 력 al-Ash‘ aii를 중재자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무아위야 측에서는 아므르 븐 알 _ 아쓰 ‘Amr b. al-As 를 임명했는데 그는 교활하여 결 정적인 책략을 쓸 수 있었다 . 이들 중재자들이 중재를 하기 위해 모 이자 사전에 미리 합의본대로 아부 무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알리와 무아위야롤 폐위하고 백성들이 직접 칼리파를 선출해야 된 다고 공언하였다. 그가 칼을 버리며 말했다. <자, 이로써 알리 븐 아비 딸립을 폐하노라.> 판정 그때 아므르가 앞으로 나서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 제 동료의 판정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그가 알리의 폐위 룰 선언했습니다. 이제 내 칼을 칼집에 넣음으로써 나는 무아위야를 칼리파로 . 인정하겠는데 여러분이 중인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자기가 말한대로 칼집에 도로 칼을 집어 넣었다. 이러한 뻔뻔 스런 사기룰 쳐서 칼리파위를 차지한 것을 두고 무아위야의 추종자 들이 외교적 승리라고 찬양한 것은 당시 아라비아 특유의 도덕 관 념을보여 주는 것이다.
카리지파 Kha rijites , 알리에 반기를 들다 양편이 모두 싸움을 재개할 태세를 갖추었는데 그 사이에 알리 진영은 내분으로 바람 잘 날 없었다. 그에게 중재를 강요하였던 바 로 그 열성신자들을 포함하여 그의 군사 중 다수가 오히려 알리가 그 중재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와 절연(絶 緣 )하고 떨어져 나와 반 기를 들었다. 이들 <이탈자>들, 이른바 카리지파는 신정(神政)의 원 칙을 필사적으로 고수하였댜 이들은 전투에서 패배 를 맛보기도 하 였지만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싸웠다. 알리의 암살 (661 년) 시리아를 되찾겠다는 알리의 계획은 왔沿년 무아위야와 화평을 맺 음으로써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그의 도읍으 로 삼았던 쿠파의 한 모스크에서 카리지파의 이븐 물잠 Ibn Mulja m 에게 암살당하였다 . 알리를 끝으로 정통 칼리파들에 대한 기술을 마 치게 되는데 독자들로서는 정치적 사건들이 지면을 덜 차지하기를 바라겠지만 다소 지루한 감이 있더라도 이슬람 역사상 극히 중요한 이 시기에 대한 얼마간의 기술은 꼭 필요한 것이다. 우 □ ~010~ 조 권력을 잡은 우마이야가는 시리아와 이집트룰 빼고 다른 지역에 서는 무력으로 통치하였다 . 무함마드를 패배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 해 싸웠던 이교도 귀족 계급의 후손으로서 그들 딴에는 무함마드의 후계자로 자처하였지만2 6) 무슬림 공동체가 보기에는 찬탈자일 뿐이 었다. 후에 이와 같은 대립이 양대 종파, 즉 알리의 추종자들인 쉬 아파와 급진주의적인 카리지파 사이에 어떻게 나타나는지와 그것이 점차 비아랍인 무슬림들에까지도 파급되어 결국 우마이야 정권을 26) 무아위야 자신은 <나는 최초의 왕이다>라고 말했다 (Ya' q ub i, ed. by Houts m a, vol. ii, p. 276, 1. 14).
무너뜨리고 압바스 정권을 세우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우마이야인들에 대한 무술림들의 전통적인 적대감 우마이야인들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있어 명심할 것은 패망한 왕 조의 비명(碑銘)은 반대자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는 점이다. 죽 타 키투스 Ta citu s2 11 가 티베리우스 T iberi us28) 황제를 소름 끼치게 묘사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역사적으로 사실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 댜 우마이야인들은 반란 세력을 무자바할 정도로 잔혹하게 다루었 기 때문에 피에 굶주린 압제자로 통했지만, 어쨌든 대다수 우마이야 인들은 강력하고 뛰어난 능력의 통치자들이었으며 못된 무슬림이거 나 세속의 착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고상한 사상가는 아니지만 여 간해서는 잔혹하지 않으며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또한 압바스인들보다 도덕성에서는 우위에 있지만 교양이나 지적 수준은 그들보다낮았다
27) [역 주] 타키 투스 Pub li us Corneliu s Tacit us : 로마의 역 사가 (55?-120?)
28) [역주] 로마 제 2 대 황제 (42 B. C.- 3 7 A. D.)
무아위야의 관대함 무아위야는 엄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관대한 편이었다. 이슬람 제 국의 수도가 된 다마스쿠스로 알리의 일가 친척들이 찾아오면 그들 에게 융승한 대접을 해주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례한 어조와 비열한 태도로 무아위야를 대했다(이 점은 사 가들도 인정한다). 이에 그는 농담으로 답하기도 하고 못 들은 체 넘 어가기도 했으며, 그들이 돌아갈 때면 푸짐한 선물과 함께 많은 하 사금을 주었다 .29) <채찍으로 충분하면 칼을 쓰지 않으며, 말로 해서 되면 채찍도 쓰지 않는다. 나와 신하들 사이에 머리카락 한 올만큼 의 우정만 있다 해도 그것을 잘라버리지 않겠다 >m) 고 그는 말했다.
29) Al-FakhrJ, ed. by Derenbourg, p. 145.
30) Yq 'qo br, vol. ii, p. 283, I. 8 이 하 .
무아위야의 독서 무아위야는 하루 일과가 끝 나면 책 속 에 파묻혀 휴식을 취했다. < 아랍인들과 그 들 의 유명한 전투룰 기록한 역사서나 타 민족과 그 들 의 왕과 통치에 관한 역사서, 또는 전쟁과 책략, 통치술이 포함된 제왕 諸王 )들의 전기서 , 고대사와 관련된 자료를 읽는 데 그는 매일 밤의 삼분의 일을 보냈댜 > 3l)
31) Mas'odr, M ur 띠 al-D lnlnb(ed. by Barbie r de Meyn ard) , vol. v. p. 77.
지야드 븐 아비히Ziy ad b. Abih i 무아위야의 충복 중에 지야 드 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어머 니는 수마이야 Surnay y a 라고 알려졌지만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아무 도 몰랐기 때문에 지야드 븐 아비히, 죽 <지야드, 그의 아버지의 아 들>로 불렸다. 소문으로는 아부 수프얀이 그의 아버지라고 하는데 그럴 경우 지야드는 무아위야의 배다른 의붓 형제였을 것이다. 무아 위야는 그와 같은 수치스런 비방에 아랑곳없이 그의 실력을 인정하 여 바스라의 총독으로 임명하였으며, 이에 지야드는 동부 지역에서 철권 정치를 펼쳤다 . 야지드 Y azi d( 由 H 놨 3 년) 무아위야는 리슐리외 Ri ch eli eu3 21 와 견줄만큼 사교에 능하였다. 그 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반대파의 온건한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상의 허울좋은 화해는 이내 일련의 사건들에서 그 허구성이 입증되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야지드는 무아위야가 칼리파에 죽위하기 전에 결혼한 베
32) [역주] 프랑스 주교이자 정치가 (1585-1642). 대외적으로는 유럽국가 들 사이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크게 신장시키고 대내적으로는 왕권 울 강화시켰다.
드윈 출신 여인 마이순 Ma y son 의 아들이었다 . 다마스쿠스의 호화찬 란함도 그녀의 야생적인 기질을 매혹시키지는 못했으며 자신의 향 수에 젖은 감정을 다음과 같이 슬픈 어조로 노래하였다.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은 높이 솟은 궁전이 아니라 산들바람 불어오는 시원한 천막이라네. 내가 줄겨 입는 옷은 입고서 한숨짓는 옷이 아니라 수수한 양털 옷이라네. 내게는 천막 한쪽 구석에서 먹던 딱딱한 빵이 이 보드라운 빵보다 훨씬 맛있었다네. 고갯길 넘어가는 바람소리는 방울북 소리 이상이었다네. 귀여운 고양이 울음 소리보다는 집 지키는 개 짓는 소리가 더 좋다네. 덩치 큰 미련둥이보다는 베드윈 기사가 나는 더 좋다네 .>33) 무아위야는 자신을 비꼬아 빗대어 말한 것에 화가 나서 그녀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친정으로 돌아갔고 야지드는 쾌락을 좋아하고 경건함을 싫어하며, 종교상의 계율은 아예 무시해 버리는 둥 베드윈 특유의 본능과 심미안을 갖춘 베드윈으로 성장하 였다. 그의 통치는 지금까지도 무슬림들사이에서 공포와 경악의 대 상으로 회자되는 한 특징적인 사건에 의해 시작되었다. 33) Noldeke' Delectu s, p. 25, 1. 3 이 하. 1. 8 은 생 략
후사인, 쿠파로향함 ®3 년 가을, 예언자의 후손임을 내세워 정통 칼리파를 자처하는 알리의 아들 후사인 Husa yn이 가족과 많은 헌신적인 교우들을 대동 하고 메카를 떠나 쿠파로 향하였다. 그곳은 거의 모든 주민이 쉬아 파이므로 자기의 뜻에 공감하여 지지를 보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모한 모험이었댜 시인 파라즈다끄 Farazda q는 고 향 사람들의 변덕스러운 기질을 알고 있던 터이므로 비록 그들이 심정적으로는 그에게 동조한다 할지라도 칼은 우마이야인들에게 맡 겨두고 있다고 일러 주었다. 그러나 그의 경고는 헛되었다. 한편 쿠 파의 총독인 우바이둘라 븐 지야드 ‘Ubayd ullah b. Z iy ad 는 쿠파의 폭도들을 제압하고 후사인의 사촌이자 폭도들의 지도자인 무슬림 븐 아낄 Muslim b. 'Aqil을 참수형에 처하고 나서 기마대를 보내 반 란의 주모자를 증언대에 세우도록 하였다. 후사인이 후퇴할 수 있는 길온 아직 열려 있었다 .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은 무슬림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목청을 돋구었으므로 후사인은 주저할 수 없었다. 후사인과 그의 추종자들 카르발라에서 학살됨(히즈라 61 년, 무하람 Muharram 월 10 일 =Ex30 년 10 월 10 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따라 북쪽으로 향한 그는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 약 200 명의 작은 무리를 이끌고 카르발라 Karbala 에 주둔하였 다. 이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타협을 제의했다 . 만약 악 당의 대명사인 샤미르 븐 디 알-자우샨 S hamir b. Dh i al-Ja w shan 이 후사인에게서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아내라고 우바이둘라에게 조 르지만 않았어도 우바이둘라는 이 타협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제의는 어쨌든 거부되었고 후사인은 포위하고 있는 적에 대항키 위해 그의 동지들 __― 동지들이라고 해봐야 몇 안 되는 어 른과 어린애들뿐이었다――떨t 규합하였다. 이 비참한 최후의 장면 올 비통하고 가슴이 미어질 듯하여 어찌 제대로 묘사할 수 있으랴.
우마이야의 병사들은 스스로 대학살의 오명을 면하고 예언자 손자 의 목숨을 구해 주고 싶어 했던 것으로- 보인다 . 그러나 샤미르에게 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 공격이 지연되고 있음을 안달한 샤미르는 병사들에게 공격을 재촉하였다. 불공평한 싸움은 이제 끝났다. 후사 인은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용맹스런 그의 추종자들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다가 칼에 맞아 그의 곁에 쓰러져 갔다. 무슬림 학자들과 유럽 학자들간의 이견(異見) 우마이야조에 대해 대체로 적대적인 이슬람의 전승은 후사인을 순교자로 야지드를 그의 살인자로 간주한다. 반면 오늘날 대부분의 사가들은 후사인이 <칼리파위에 대해 무력하지만 반역적인 음모를 꿈 꾸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를 혼란에 빠뜨릴 죄를 범하고 있었고 따라서 신속한 진압을 요하였다>는 무이르 경의 지적에 동의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권력을 잡고 있는 쪽의 견해였고 이들이 취한 행 동의 정당성 여부에 관해서는 독자들 스스로가 판단할 문제이다. 우마이야인들 이슬람의 심판을 받다 무슬림들은 이 문제를 우마이야인들과 이슬람의 관계루 파악한다. 이슬람 법을 어기고 이슬람의 이상을 일축한 그들로서는 압제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압제자인 그들에게는 빼앗긴 권위에 대항해서 무 기를 들고 일어선 신자들을 살해할 권리가 없었다. 이른바 역사의 심판이라는 것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종교의 심판, 즉 <아 라비아의 제국주의>에 대한 이슬람 신정의 심판인 것이다. 이 때문 에 우마이야인들이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무슬림들에게는 교회와 국 가의 구분이 없었다는 점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야지드의 성격 그는 신자로서는 불성실하였으며 사악한 압제자였다. 이 두 가지
관점은 서로 상호 관련성이 있다. 공정한 관점에서 볼 때, 그는 모 친의 시 재능을 물려받은 온아한 성품의 왕자였다 . 공적인 일에 매 달리기보다는 술과 음악, 유렵(遊;嚴)을 대단히 좋아하였다. 우마이야 조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있던 시리아의 아랍인들은 그를 존경하였 다. 한 기독교도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는 쾌활한 사람 이었다. 그의 통치하의 만 백성이 그를 따랐다 . 통치자들이 대개 자 신의 명예만 찾는 것이 다반사지만, 그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명예를_그것은 당연히 자신의 왕위에 걸맞는 명예이다――구추 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정중하면서도 상냥하게 대 하였다. et cuncti s nati on ibu s regn i eju s sulx litis vir gratiss irr e habit us, qui nullam tinquarn, ut om nibu s ID'Jris est, sib i reg alis fas ti gii causa glo ri am ap petivit, sed com munis cum om nibu s civi- lit.er vixit>3 41 그는 후사인의 부인과 자녀들의 비운을 몹시 애통해 하며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여 보살펴 주었다 . 그러나 메디나로 보내 진 이들의 비극적 이야기는 오히려 이들을 그 지경에 빠트린 우마 이야인들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에 불을 질렀다.
34) Isid o re of Hisp a lis, Conti nu ati o, § 27. Wellhausen, Das Arabis c he Reic h und sein Stu r z, p. 105 에서 재인용.
우마이야인들이 <카르발라의 그날>을 후회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 그로부터 <후사인의 복수를!>이란 쉬아파의 구호가 생겨나 도처에 서 이 구호를 외치는 함성 소리가 드높았다. 또한 아랍의 질곡으로 부터의 해방을 갈구하였던 페르시아 <마왈리 Ma wali >35) 들도 이룰 구호로 내세웠다. 쉬아파와 이들 마왈리들의 결합은―一―몇년 후 이들 수 천명이 무크타르 Mukh tar의 기치하에 몰려들었다 __― 역 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서 후에 쉬아파에 관해 언급할 때
35) [역주] 비아랍계 무슬림 개종자들 . 단수는 Mawl a.이며 피보호민을 뜻한다. 아랍인 보호자의 보호를 받는 일종의 2 동 시민의 신분이었다 . 특히 페르시아인들이 마왈리로서의 불만이 컸다. CEI, Mawla., p. 263 참조 .
좀더 상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메카와 메디나의 신성이 더럽혀짐 (682 -683년) 야지드의 극악 무도함에 관한 이야기는 후사인을 잔인하게 학살 한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예언자의 도시인 메디나는 우마이야 총 독을 몰아낸 뒤 시리아군에 의해 약탈되었고, 압둘라 븐 주바이르 'Abdullah b. Zuba yr가 칼리파로 자처하고 있던 메카는 포위 공격 올 받고 카바 신전이 폐허가 되었다. 무슬림들에게 충격을 안겨 준 이 만행은 반란을 유발하였다. 무크타르의 반란(68.5---686년) 무크타르가 후사인의 원수를 갚아 주었다. 그는 쿠파를 점령하고 이단자인 샤미르를 비롯한 죄를 범한 약 3 백 명의 주민들을 처형하 였다 . 그의 군대는 우바이둘라 븐 지야드가 이끄는 군대를 격퇴하고 그를 살해하였다. 그러나 무크타르 역시 오래지 않아 이븐 주바이르 Ibn Zuba yr의 형 인 무쓰아브 M 딱 ‘ab 에게 살해되었으며 7 천 명에 달하는 그의 추종자들도 비참하게 학살당했다. 야지드가 죽자(ffi3년) 우마이야조는 거의 붕괴 직전까지 갔다. 동시대의 시인은 다음과 같 이 노래했다. <이제 만인이 증오하는 것은 바람에 날리는 불꽃처럼 복수심에 불티는 눈먼 ‘복수의 여신’뿐이네. 그들은 분열되어 지방마다 ‘신자들의 지도자’가 있어 왕좌를 차지하고 있네 .>361 36) I:lam쵸 a, 226. 여기서 <왕좌>는 칼리파가 예배를 인도하며 회중에 게 설교하는 설교단(壇)을 뜻하는 아랍어 · rnin bar 의 번역이다.
내전이 재개됨 우마이야조에서 중추적 역할을 해 온 시리아의 아랍인들 가운데 서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다. 칼브 Kalb 족과 까이스Qay s 족 양대 부 족의 연합으로 이제껏 우마이야가의 권력이 유지되어 왔는데 마르 즈 라히뜨 M 따 Rahit에서 칼브족은 마르완 편에 , 까이스족은 이븐 주바이르 편을 들어 서로 대적하여 싸우게 되었다 (684 년) . 마르완의 승리로 시리아의 충성은 확보되었지만 이로부터 까이스족과 칼브족 은 앙숙이 되었다 .37)
37) 칼브는 본래 북부 부족 중의 하나였다 (Robe rt son Sm ith, Ki ns hi p and Marria g e , 2nd ed., p . 8 이 하 참조. 이 는 베 반 교수 덕 택 에 알게 된 참고문헌이다). 또한, 칼브족은 이슬람 초기에는 <예멘> 혹은 <납 부> 아랍인들로 간주되 었다는 중거 가 있다. Goldzih e r, Muhammed-anis c he Stu d ie n , Pa rt I. p. 83, 1. 3 이 하 참조.
북부 아랍과 남부 아랍의 대결 이는 필연적으로 북부 아랍인들과 남부 아랍인들 사이에 불화를 일으켜 민족간의 영구적인 반목으로 확대 발전되었다 . 이들 사이의 반감은 이 세상 끝까지라도 따라다닐 정도로 심각하였다. 예컨대 스 페인 정복 후 북부 아랍인들과 남부 아랍인들이 같은 구역에 거주 하지 않도록 하는 등 내전 발발에 대한 예방 조처를 취해야 할 정 도였다. 이러한 반목의 문학사는 골트치어 박사의 해박한 지식과 날 카로운 통찰력에 의해 기술되었다우 물론, 풍자가 양쪽의 주된 무기 였다. 다음에 우마이야 시대 북부 아랍 출신 시인의 시 일부를 소개 한다. <조상을 들먹인다면, 할례받지 않은 겁장이들인 까흐딴Qahtan의 자손들보다 흑인들이 더 훌륭하다네 . 39 )
38) 같은 책, i, 78 이하. 39) 까흐딴은 남부 아랍인들의 전설상의 조상이다.
전쟁의 불길이 타오르면 천하게 짓밟히는 신발짝보다도 더 비굴하게 구는 사람들 , 그들의 안주인들은 호색가들의 욕심이나 채워 주게 되고 그들 부하들은 기병과 보병들의 밥이라네 . >40) 이와 같이 아람 민족은 무함마드가 폐지하고자 했던 오랜 관습인 부족의 자존심 때문에 또 다시 갈기갈기 찢어졌다. 결국 그러한 자 촌심이 우마이야인들에게는 치명타였음도 새삼 놀라운 일은 아니다. 곤경에 처해 있던 왕조는 와해 직전이었고 적은 이미 코 앞에 와 있었다. 다행히 이러한 위기에서 남달리 유능하고 정력적인 통치자 인 압둘 말리크 븐 마르완 ‘Abdu ' I-M alik b. Marwan 이 출현하였 댜 그는 그의 가문이 망하는 것을 구해냈을 뿐 아니라 우마이야조 롤 재건하고 과거 어느 때보다도 찬란한 새 시대를 열었다. ’ 압둘 말리크와 그의 후계자들 685 년 압둘 말리크는 그의 부천의 뒤를 이어 칼리파가 되었으나 칼리파로서의 그의 자격을 입증하는 데는 7 년에 걸친 고된 투쟁이 필요했다. 그의 강력한 라이벌인 이븐 주바이르가 전사하였지만 (®2 년) 동부의 지방주는 이라크의 압제적인 총독인 핫자즈l:Jajjaj에게 필사적 저항을 전개하던 반란군들에 의해 여전히 유린되고 있었다. 그러나 유혈(流血)은 이제 질색이었다. 압둘 말리크의 파란 많은 치 세와 그의 후계자들의 별 풍파 없는 치세 동안은 평화가 지속되었 다. 칼리파 5 명 중 왈리드 Wa li d(7a5-715), 술라이만 Sula yman (715- 717), 야지드 2 세 Ya zid II(7'2 JJ-7'2A), 히샴Hi sham( 7'2A -743) 4 명이 그 의 아들들이었고 다섯번째 칼리파인 우마르 2 세 ‘Umar II 는 그의 형 압둘 아지즈 ‘Abdu '1 - ' Aziz의 아들이었다 . 이 시기에는 대체로 40) Ag ha.nI, xii i, 51, Goldzih e r 재인용 , 같은 책, p. 82.
이슬람 제국이 자력으로 태평 성대를 누린 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20 년간 거의 계속된 내전으로 황폐화된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압둘 말리크의 개혁 그는 많은 개혁을 실시하였는데 어떤 것은 다분히 정치적 성격을 띠었고 또 문학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도 있었다. 그는 말을 갈아타고 공문서를 송달하거나 여행자를 운송히는· 훌륭한 역마제도 를 도입하였다. 당시 화폐로 통용되던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주화를 꾸란 구절을 새겨 넣은 새로운 금화와 은화로 바꾸었다. 또한 재무 행정의 공용어로서 그리스어와 페르시아어 대신 아랍어를 채택하였 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결점이 많은 아랍어 문자를 개 선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꾸란 연구와 그 해석은 물론 꾸란 연구 에 필수적인 예언자의 전승인 <하디쓰>를 수집하는 일에 탄탄한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아랍어 문자표기 당시 사용되던 아랍어 문자는 완전히 자음으로만 구성되어 있었 다. 영어를 예로 들면, bnd 는 band, bend, bin d, bond 를 의미할 수 있고 crt는 cart, carat, curt 등을 뜻할 수 있다. 아람인에 게 이 정도 의 애매모호성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자음들의 모양이 비슷한 것이 더 혼란을 가져 왔다. 동일한 세 자음의 결합을 bnt, nbt, by t, tnb, ntb , ny b 둥 여러 가지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아랍어의 난해함에 비추어 볼 때, 초기 정복 사업에서 이슬람 에 귀의한 이방인들 중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꾸란이 모든 사람들에 게 수수께끼 같은 책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본래 교사 출신으로 압둘 말리크의 이라크 총독인 핫자즈는 모음 부호(시리아 말에서 차 용함)와 동일 자음 위아래에 변별점을 사용하도록 장려하였다. 이
비범한 사나이에 대해서는 좀더 상술한 만한 가치가 있다 . 핫자즈 본 유수프 Haj j혀 b. YOs uf (714 년 사망) 핫자즈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자신에게 주어 진 의무만을 다하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압둘 말리크는 이븐 주바이 르가 반 칼리파 세력을 이끌며 장악하고 있던 메카를 포위 공격하 도록 핫자즈에게 지시하였다. 그는 메카를 공격하여 칼리파를 꿈꾸 던 이븐 주바이르의 목을 베어 다마스쿠스로 보냈다. 2 년 후 그는 이라크의 총독이 되었다. 쿠파의 모스크 설교대에 올라가 회중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디움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내가 바로 어둠을 헤치고 정상에 오른 사람이니 내 얼굴에서 터번을 치우면 그대들은 나를 알아볼 것이네 . 4 11 쿠파 주민들이여! 그대들의 머리통을 보니 잘 익어서 베어도 좋겠소. 나는 그렇게 하고도 남을 사람이도다. 그대들의 터번과 턱수염 사이에 피가 보인다 .>421
41) 시인 수하임 븐 와씰 S 曲 a y m b. Wa thil의 시.
42) Kami ! of al-Mubarrad, ed., by W. Wr igh t, p. 215, 1. 14 이 하.
그의 설교 나머지 부분도 위 시작 부분과 비슷한 어조였다. 그는 공연히 쓸데없는 협박을 하지 않았다. 그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격 렬하던 폭동이 급속히 수그러들었다. <그는 이라크에 질서를 회복 하고 그곳 주민들을 진정시켰다 .>43 1 a)년에 걸친 그의 압제적인 통 치는 동부 아랍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왔다. 핫자즈의 문학에의 공헌 핫자즈의 잔혹성을 보여 주는 얘기들이 지나치게 과장된 면도 있
43) Ibn Qu ta yb a, Ki tab al-Ma'arif , p. 202.
지만 그가 유달리 잔인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학문의 발전을 위해 여유 있고 안정된 여건을 조성하고 유지시켰다는 점은 그의 공으로 돌려야 한다. 예언자의 많은 교우들이 본거지로 삼고 있던 쿠파와 바스라에서는 그의 보호를 받으며 꾸란과 하디쓰가 활발히 연구되었다. 특히 바스라에서는 문법학이 일어나 다음 장에서 다루 겠지만 이 도시명을 딴 문법학파가 형성되었다. 그에게도 칼리파와 같은 문학적 심미안이 있었다. 그는 원로 시인들의 작품에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신인들에게는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그의 말은 간결 하면서도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었고 자신의 우아한 아랍어 문 체를 자랑하였다. 당대에 가장 악명 높던 그는 역시令L 포악한 압제 자로서, 또한 신앙심 깊은 무슬림들의 학살자로 기록된다. 그는 우 마이야가에 충성하다가 714 년 사망하였는데 유산으로 남긴 것이라 고는 꾸란과 그가 쓰던 무기, 수백 개의 은화뿐이었다 . 왈리드 Wal i d(7 05- 715 년) 다마스쿠스에 널리 회자되던 말로, 왈리드 치하에서는 사람들이 훌륭한 건축물을 얘기하고, 술라이만 치하에서는 요리와 여자를, 우 마르 븐 압둘 아지즈의 치세에는 꾸란과 종교를 주된 화제로 삼았 다고 한다 .44) 왈리드의 건축열은 오늘날까지 다마스쿠스 시의 관광 명소로 남아 있는 불후의 유적 다마스쿠스 대 사원(본래는 성 요한 성당임)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아랍어가 매우 서툴렀다. 그의 아버 지는 <아랍인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언어에 능통해야 한다> 며 그를 꾸짖곤 하였지만 그의 아랍어 실력은 제대로 의사 표현을 할 정도도 못 되었다 .45) 44) al-Fakhri, p. 173;1bn al-At hir, ed. by Tornberg, vol. 5. 45) 같은 책 , p. 174. cf. Mas'ndI, Mur 떠 al-Do oh::zb , v, 412.
동부지방에서의 정복사업 이슬람 제국이 태평성세를 구가하자 왈리드는 정복 사업을 재개 할 수 있게 되었댜 동부지방에서 그의 군대는 트란스옥사니아 Tra nso xani a 를 침공하고 보카라政)曲泣 a 와 사마르칸트 Sarnarcand 를 점 령한 후 중국과의 국경선까지 밀고 나갔다. 또 다론 병력은 인더스 강을 건너 펀잡 Punj ab 남부지역의 순례지로 알려진 물탄 M 띠tan까 지 들어갔는데 결국 오랜 포위 공격 끝에 무슬림들의 수중에 들어 왔다. 스페인 정복 (711-713 년) 그러나 가장 혁혁한 풍성한 전과를 올린 곳은 스페인의 운명을 결정지은 서부의 끝에서였댜 이미 30 년 전부터 무슬림들은 북부 아 프리카에 발판을 구축하고 있던 터이지만 그들이 놓인 처지는 항상 불안한 것이 었다. 7OO 년 무사 븐 누싸이르 Musa b. Nl .1$clyr가 베르 베르족을 완전히 정복하여 지배권을 행사하고 이슬람신앙이 대서양 까지 이르게 됨으로써 비로소 무슬림들의 안전이 확보되었다. 2 년 뒤, 무사 븐 누싸이르의 노예 출신인 따리끄 T- q가 해협을 건너 고대 캘프 Cal pe 족이 전망좋은 고지(高地)라 부르던 곳을 점령하였 다. 그 후 이곳은 따리끄의 이름을 따서 <자발 따리끄J abal T-q (지브롤터 G i bral tar )> 4 61 로 알려지게 되었다. 서 고트 왕조의 마지막 왕인 로데릭 Rcxle ri c 은 왕국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소집하였으며 그 자신도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병사들 중에서 반역자가 나와 전세가 역전되었다. 왕은 어디론가 도주해 버리고 말았는데 그 후 그가 어 46) [역주〕 본래는 스페인의 남쪽 끝의 해안에 깎아지론 듯한 바위산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 711 년 따리끄 장군이 이를 거점으로 하여 스페인 으로 쳐들어 갔으므로 이때부터 따리끄의 산(자발 알-따리끄 Jab al al-T ariq)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이것이 지브롤터라는 지명의 기원이 되었댜
떻게 되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따리끄는 미미한 저항을 받으 며 톨레도 Toledo 로 진격하였으며 무사는 그의 부장(副將)이 승리의 가도를 달리는 것을 시샘하여 자신도 직접 전투에 참가,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하여 마침내 피레네 산맥에 다다르게 되었다. 무슬림 사 가들에 의해 많은 낭만적 사건들이 얘기되는 스페인 정복은 아랍인 들이 서양 세계에 가장 근접하였던 시점이었다. 아람군은 뚜르 Tours 에서 샤를르 Charles the Harnrrer 에게 대패함으로써 프랑스 영토로의 진격 이 좌절되 었다 (732 년 ).47 1
47) [역주] 뚜르와 쁘와띠에 Po iti ers 의 중간 지점에서 샤를르 마르텔 Char1- es M art el( 영어로는 Charles the Hammer 로 옮길 수 있다)이 이끈 프 랑크족 Franks 군대와 압둘 라흐만 알-가피끼 ‘Abdu' 1-Ra l;lman al-Gh afiq I 가 지휘하는 아랍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뚜르 전투 또는 쁘와띠에 전투로 알려져 있다.
우마르 븐 압둘 아지즈 ‘Umar b. 'Abdu 'I-' Azj z(717-720 년) 여느 통치자와는 달리 특출한 데가 있는 우마르 븐 압둘 아지즈 를 빼놓고 우마이야조에 대한 기술을 끝낼 수는 없다. 그의 짧은 치 세는 불신앙과 피로 얼룩진 일세기 동안의 압제 정치에서 무슬림들 에게는 유일한 양지(陽地)였다. 그와 이름이 같고 친척인 48) 우마르 븐 알-카땀 시대 이래 그와 같은 경우는 전무후무하였다. 철학자 플라톤은 모든 왕은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무슬 림들의 견해를 따르자면, 칼리파는 모름지기 성자가 되어야 한다. 우마르는 이같은 기대에 부응하였다 . 칼리파위에 오른 그는 그의 총 애를 받던 살림 알-숫디 Sa lim al-Sud di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 우마르 : <내가 즉위해서 기쁜가 섭섭한가?> 살 림 : <백성들을 생각하면 기쁘지만 칼리파에겐 유감입니다.>
48) 그의 모친 움 아씹 Umm 'A$ im은 우마르 1 세 ‘Umar I 의 손녀였다.
우마르 : < 내가 나의 영혼을 파멸시켰을지도 몰라 두렵다네. > 살 림 : < 두려우시다면 다행입니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을 저는 두려워할 따름입니다. > 우마르 : < 나에게 한 마디 조언을 해주게. > 살 림 : < 우리의 조상 아담은 단 한 가지 죄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 났습니다 .>491
49) Mas'o d I, Mur 따 al-Dhahab, v. 419 이 하 .
신학자와 수도승들로 북적대는 그의 궁전에서 시인들이나 이야기 꾼들은 푸대접을 받았다 .501 그는 총독들에게 누구에게나 공정히 대 해주도록 주의를 주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의 개념에 정치 적 배려가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듯하였지만, 벨하우젠의 지적대로 그는 실용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의 신앙심은 그로 하 여금 개인의 구원 못지않게 일반 대중의 복리를 위해 열심히 매진 하도록 만들었다. 그가 국가 경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는지의 여부 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의 재정 개혁은 성격상 이상적인 것이지 만 국고에는 피해가 막심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51 ) 그렇지만 그는 이슬람과 국가와의 관계에서 갈라진 틈을 줄이는 데 지혜로움 을 보여 주었다. 예컨대, 금요 예배의 설교에서 알리를 비난하는 오 랜 관습을 없앴다. 화해 정책은 시기적으로 너무 늦게 시도되었고
50) Ibn al-At hir, ed. by Tornberg, v. 46. Cf. A g油1I, xx , p. 119, 1. 23. 베반 교수가 필자에게 일깨워 주었듯이 우마르는 시인 자리르 Jarir를 예외적으로 총애하였다. Brockelmann's Gesch der Arab. Li- tter atu r, vol. i, p. 57 참조.
51) 벨하우젠의 노작(勞作) , Das Arabis c he Reic h und sein Stu r z (pp .169-192) 는 이 난해한 문제롤 새롭게 조명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 르면, 우마르의 개혁은 순전히 이상적인 동기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 라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 나온 것이라는 것이다 . 또한 그가 취한 조 치들은 재정에 혼란을 가져오기 보다는 이미 존재하던 혼란 상태를 개선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너무 짧은 기간 시행되었으므로 별 효과가 없었다 . 그러나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중에 우마이야조가 전복되어 미움받던 <압제자>들의 묘가 더럽혀지고 그들의 시신이 파헤쳐졌을 때도 우 마르의 무덤은 온전하였다. 마스우디(있 3 년 사망)에 따르면 당시 그 의 묘지에는 수많은 순례자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히샵과왈리드 2 세 그 밖의 우마이야 통치자들은 특별히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히샴 만은 무아위야나 압둘 말리크와 같은 정치가 축에 낀다. 압바스의 위대한 칼리파인 만쑤르 M年 s 虹는 히샴의 통치술에 반해 모방까지 했다고 한다 .5 2 1 왈리드 2 세는 구제불능의 방탕자였다. 금지된 술을 마시는 낙을 찬양한 그의 시는 저명한 시인이자 자유 사상가인 아 부 알-알라 알-마아리 서沮 al-'Ala al-Ma ‘紅 H 가 인용할 만큼 그 가치를 꽤 인정받았다 .531
52) Mas'odI, Mur 떠 al-Dhahab, v. 479. 53) 이 시의 아랍어 원문과 그 축어역은 아부 알-알라의 Ri sa lat al- G떠 函에 관한 필자의 논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RAS for 1902, pp. 829 와 342).
왈리드 2 세의 시 (743-744 년) <이맘 왈리드가 바로 나로소이다! 눈부신 옷자락을 질질 끌며, 감미로운 노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녀의 침실로 당당히 쳐들어 갈 때면, 누가 뭐라한들 어떠하리. 노래 소리 돋는 것과 깊은 황홀감에 빠지게 하는 술을 빼면,
이 세상에 무슨 낙이 있으리요. 천국의 요정을 나는 찾지 않소. 제 정신이 있는 사람일까? > 동 시대의 정치 및 종교운동 이제 지배 계층으로부터 피지배 계층으로 눈을 돌려보자. 우선 첫 째로 우마이야조에 저항하여 서서히 그 세력을 잠식하고 종국에는 우마이야조의 몰락을 초래한 여러 정파와 종파에 관해 논하고 나서 이들 파벌들이 추구한 이상과 통치권에 대한 불만의 원인에 관해서 도 기술하고자 한다. 둘째로 순수한 종파인 무타질라파 Mu' tazilites, 무르지파 M 떠jite s, 수피주의 $ufi sm54 를 논한 다음 마지막으로 시문 학이 주류를- 이루는 동시대의 문학상을 기술하겠다.
54) [역주] $O fi sm 은 수피주의 또는 수피즘으로 옮길 수 있는데 본 역서 에서는 수피주의로 통일하였다. 또한 $O fi sm 의 수행자를 수피 $0fi 또는 수피주의자로 옮기기로 한다.
이라크의 아랍인들 우마이야조에 대한 반대는 처음에는 주로 정치 문제에서 출발하 였다. 무아위야의 죽위는 이라크에 대한 시리아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이에 따라 왕조의 도읍도 쿠파대신 다마스쿠스로 옮겨 졌다. 벨히우젠은 <무아위야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발은 이라크에 서 나왔다. 반발은 특정 도시에서가 아니라 독립 Selbs th err li chk eit을 빼앗긴 데 분개하며 이라크의 독립을 앗아간 자들을 증오하는 전 아랍 대중들로부터 니온 것이다>고 말했다 .551 동시에 이러한 감정은 종교적 색채를 띠었으며 이슬람의 대의와의 일체감에서 나온 것이 었다. 새로 들어선 정권은 애석하게도 신정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그것은 사악한 것이며(무슬림의 의무라는 관점에서) 온전한 무
55) Wellhausen, Das Arabis c he Reic h und sein Stu rz , p. 38.
슬림이라면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이다. 우마이야조의 반대파들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아직까지는 공동 전선을 펴고 있던 4 대 당파는 다움과 같다. 1) 정통파를 형성한 대체로 독실한 무슬림들5 61 2) <청교도>나 혹은 신정을 주장하는 과격분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카리지파 3) 알리와 그의 가문의 붕당인 쉬아파 4) <마왈리>라 불리는 비아랍안 무슬림들 독실한무슬림둘 신앙심 깊은 무슬림들이 - ~ 법률에 조예가 깊은 신학 자, 꾸란 암송가, 예언자의 교우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포함된다――_ 이제 그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세속적 권위를 탐탁하게 여길 수 없 었음은 분명하다 . 압제자와 그의 앞잡이들에게서 나오는 <권력>이 꾸란과 <순나>(무함마드의 관행)로 대표되는 <정의>를 짓밟았다는 확신에 많은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메디나를 점령하 고 약탈하는 데만 오천 명이 사망했다고 하며 바스라의 하산I:Ia san 처럼 헤어날 수 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속세를 떠나 후 에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 금욕주의 asce tici sm 에 빠졌다. 56) 이 는 무슬림 들의 주류를 이 루어 후에 순나 Sunna 의 추종자, 죽 순니 파 Su nni s 라 불리었다. 이들은 (1) 칼리파는 무슬림 공동체에 의해 선 출되어야 하며 (2) 예언자의 부족인 꾸라이쉬 부족의 일원이어야 한 다고 주장하므로써 쉬아파나 카리지파와 구별되었다 . 이들 종파는 모 두 알리와 무아위야 사이의 싸움에서 생겨났으며 그들 사이의 근본적 인 차이점은 오로지 칼리파위 문제로 인한 것이었다 .
7 固天 I 파 씨핀 전투 후 각기 칼리파위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던 알리와 무아위야가 이 문제를 중재로 결정하자는 데 합의하자 알리를 따르 는 일부 추종자들은 알리가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비난하였다. 알리 가 정당한 절차를 거쳐 선출된 유일한 칼리파로서 어떤 대가를 치 르더라도 칼리파의 고귀한 품위를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들의 주장이었댜 본영(本 營 )으로 복귀하던중 약 만이천 명의 불평분 자들이 본대에서 이탈하여 쿠파 근처의 하루라珪虹~며 마을에서 야 영하였다. 그들이 의치는 구호는 <심판은 오직 하느님만이! 냐i hukma ilia lill函>였다. 그들은 이같은 표현을 빌려 중재에 대해 항의했다. 나흐라완 Nahrawan 의 전투 (658 년) 알리는 이들을 설득하여 원대 복귀시키려 했지만 여의치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칼리피를· 뽑고 사천 명의 병사~t 나흐라완에 집 결시켰다. 알리가 훨씬 우세한 병력을 이끌고 나타나자 반란군의 대 부분은 패주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약 절반쯤되는 반군은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다. 카리지파에게 있어서의 나흐라 완은 쉬아파에게 있어서의 카르발라와 같은 것이 되었다. 이때부터 카리지파는 쉬아파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간주하게 되었다. 카리지파의 봉기 카리지파의 봉기는 우마이야조 초기에도 빈번히 일어났지만 야지 드가 사망한 후 혼란이 야기되자 이때 최고조에 달했다. 지도자인 나피아 븐 알-아즈라끄 N頭 ‘ b. a1-Am 피의 이름을 딴 카리지파의 분파인 아즈라끼파 Am 피it.es는 이라크와 남부 페르시아를 공격하였 으며 또 다론 분파인 나즈디파 Na jdites는 나즈다 븐 아미르 Na j da b. ‘Amir의 지휘하에 아라비아 대부분을 수중에 넣었다.'SI) 반군은 오랫동안 압둘 말리크에 맞서 저항했으며 衍 7 년 샤비브Shabi b 가 일
57) [역주] 아즈라끼파가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대부분의 무슬림을 비 신자로 규정한 데 대해 나즈디파는 이들을 위선자 muna fiq un 로 취급 하였다.
으킨 반란이 핫자즈에 의해 진압될 때까지 소요가 그칠 날이 없었다. <카리지>의 의미 <카리지 Khariji(복수, 카와리지 Kha warij)>의 의미는 꾸란 4 장 100 절에 <집을 떠나(y akhn 지) 거처를 옮기는 사람rnuhajirun>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카리지>는 <하느님을 위해 불신자들에 둘러싸여 있는 자기 집을 떠나는 사람>을 가리키며 예언자를 따라 메디나로 이주한 메카의 개종자들을 지칭하는 <무하지르 Mu hajir>와 일치된 다 . 581 이들에게 붙여진 또 다른 이름인 <슈라트 Shura t(샤린 S hruin의 복수)>도 꾸란에서 나온 용어로서 직역하면 <파는 사람>을 뜻하는 데 영혼과 재산을 팔아 천국을 구한 자를 의미한다 .591
58) Br tinn ow, Di e Charid s ch iten unte r den erste n Om ayyad en(Le ide n, 1884), p. 28. 그러나 카리지파인들이 스스로 이 이름을 썼는지는 불 확실하다. 아무튼, 이 용어 는 무슬림 사회 로부터 의 이 탈을 의 미 하며 <분리자 Seceder> 혹은 <국교 불신봉자 Non con fornri s t>로 옮길 수있다
59) 꾸란 9 장 111 절 참조.
카리지파의 정치적 견해 카리지파는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후 바스라와 쿠파에 주둔하였 던 베드윈 전사 출신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문명화된 생활이 그 들의 자유 분방한 기질에는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했다. 그들은 꾸라이쉬족 사람의 전유물처럼 된 신성(神聖)을 인정하지 않고 같은 혈통의 족장이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남용하거나 월권을 행사하 지 않는 한은 베드윈 방식대로 족장을 선출하고자 했다 .60) 그러나 이같은 카리지파 운동의 주요 동기는 신앙심과 관련된 것이었다. 또
60) Br tinn ow, 앞의 책 , p. 8.
이 운동의 기 원은 벨하우젠이 지적하였듯이 카리지파의 광적인 신 앙 때문에(한때 이에 심취하였던 카리지파도 나중에는 거기에 빠졌던 것 을 깊이 뉘우 쳤 다) 알리 스 스로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치명적인 과 오에 대한 통회( 痛海 ) 를 양심의 문제로 삼은 꾸란 낭송자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댜 그들은 우쓰만을 공격해야만 했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알리와의 인연을 끊었다. 이 두 경우 모두 카리지파는 부정 한 칼리파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를 부르짖고 있었다 .6 1) 이는 카리지 파의 주요 교리인 (1) 아랍인은 누구든지 칼리파가 될 수 있는 자격 이 있으며 , 62) (2) 악을 행하는 칼리파는 폐위되고 필요하다면 처형될 수도 있다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카리지파의 < 신자들의 지도자 > 무스타우리드 븐 울리파 Mus tawri d b. 'Ullif a 는 크테시폰의 총독 시마크 븐 우바이드 S irnak b. 'Uba yd 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그대에게 명하노니,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의 경전과 예언자 ___· 그분에게 평화가 것들기를! 의 ‘순나’를 따 르며 ,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_ 二 그분들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기
61) Wellhausen, Di e relig ids -po liti sc hen Op po sit ion spa rtei e n im ali en Islam(Abhandlung e n der Konig !. Gesellsc며 t der Wi ss enscrq ften zu Gdtt ing e n Phil - H i st. Klasse, 1901), p. 8 이하. 벨하우젠은 브륀 노우 B rii nnow 의 견해에 대해 반론을 펴 초기에 활동한 카리지파인들 은 진정한 베드윈들 A ' rab I 이 아니었으며 사실 쿠파나 바스라의 군사 식민 통치자들보다 오히려 베드윈 전통과는 거리가 더 멀다고 주장하 였댜 꾸란 낭송자들의 지극한 경건심-그들의 끊임없는 기도, 철야 기도 , 꾸란 암송-은 카리지파에 관해 기술되는 바와 딱 들어맞으며 그 표현이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 더욱이 초기의 카리지파인들 중 에서 당시 금욕주의의 특징이었던 길다란 외투 b arani s( 복수 burnus) 를 입은 일단의 사람들이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초기 에 나온 전거 (Abo Mikhna f in Taban, i, 3330, I. 6 이하)는 카리지파 룰 꾸란 낭송자들의 분파로 보며 후에 광적인 카리지파가 된 꾸란 낭 송자들을 개개인 언급하고 있다.
62) 나중에 많은 비아랍계 무슬림들이 카리지파에 가담하자 칼리파 선 출의 범위는 외국인들과 심지어 노예까지도 포함될 만큼 확대되었다.
를! 의 통치를 받도록 하며, 우쓰만과 알리는 진정한 종교를 부 패시키고 경전의 권위를 포기하였으므로 그들을 비난하도록 하라 .>631 여기서 카리지파는 초기 이슬람에서 추구하던 평등과 형제애의 정 신이 여지껏 완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고 특히 당시에는 구제불 능일 정도로 타락한 상태였으므로 그러한 초기 이슬람 정신을 회복 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음이 분명해진다. 이론상으로는 맞는 이야 기지만, 경건한 무슬림들은 모두 초기 이슬람으로의 복귀를 갈망하 고 있었고 카리지파 못지않게 진지하게 당시 집권 정권을 비판하였 다. 카리지파의 특징은 자신들이 내세운 원칙은 철저히 행동으로 옮 기는 데 있었다. 그들은 이맘뇨固 n어 1 또는 지역 공동체의 우두머리 가 하느님의 이름과 그 분의 뜻에 따라 통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 다. 하느님 이외의 다른 것을 따르는 자는 이미 내세에서의 운명이 예정되어 있으며, 또한 영원한 구원은 예언자의 후계자 선출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63) Taban, ii, 40, 13 이 하.
64) [역주] 아랍어 어의는 맨 앞에 서는 사람을 뜻하나 이슬람에서는 다 양한 의미로 쓰인다. 이슬람 예배시의 인도자, 이슬람 법학파나 신학 파의 창시자들에게 이맘의 칭호가 붙는다. 또한 경칭으로서 사용된다 (예:이맘 가잘리 Imam al-Ghaza. II). 특히 쉬아파에서의 이맘은 특별한 의미룰 갖는데, 이맘은 알리와 파띠마의 후손들로서 중재자의 영적 기능을 갖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쉬아파는 한 시대에 한 명의 이맘 이 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 CEI, Imam, p. 186 참조.
우쓰만과 알리에 대한 비난을 거부한 무슬림들이 가장 사악한 이 단자들이였다. 진실된 신자의 의무는 이들과의 성전에 참여하여 그 들은 물론 그들의 부인이나 자녀 등 가족까지도 모두 없애는 일이 었다. 그러나 이러한 잔악한 행위의 결과는 반란자들에게 되돌아와 서 오히려 그들이 전멸당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카리지파내 에서는 보다 온건한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지배적이 되었다 . 예컨대 이바디파比적ites(압둘라 본 이바드 ‘Abdull 曲 b. Ibad 의 추종자들 )651 는
65) [역 주] 카리지 파의 분파로 오늘날 오만, 동부 아프리 카와 남부 알제
리 둥지에서도 발견된다. 흔히 아바디야 Aba c;liyy a 파로 불린다. EI2' lbac; lites , p. 648 참조.
무슬림 상호간의 관용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 생활을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타협은 이 땅에 하느님의 왕~ 세우고 자 하는 카리지파의 존재 이유rai son d'e tre 와는 사실상 상반되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그들의 확 고부동한 논리가 그에 바탕하여 세워진 모든 구성 조직을 산산이 무너뜨렸다.> 알리가 말했듯이, <그들은 ‘정부는 없다 la imara’고 말하지만, 그러나 좋든 나쁘든 정부는 있어야 한다.>f,6)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들이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투쟁한 목표는 다론 종파와는 달리 세속적인 이해에 연연하지 않는 숭고한 이상이었다.
66) Shahrasta nI, ed. by Cureto n , Pa rt I , p. 88, I. 12.
카리지파의 신조 거의 광신에 가까운 열정이 음울하고 엄격한 그들의 종교관을 형 성하였다. 이러한 종교관은 속세의 선택받은 소수 사람에게는 안성 맞춤이었다. 샤흐라스타니 Shahras tani는 알리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 킨 일만 이천 명의 카리지파 신자들을 <단식과 기도하는 사람들 ahl ~iyarnin wa-~a tin> o1) 이라고 했다. 꾸란이 그들의 일상 생활과 상 상력을 지배함에 따라서 초기 교회의 역사, 박해, 순교, 신앙의 승리 는 그들 스스로 연출한 한 편의 드라마가 되었다. 지옥에 대한 두려 움은 그들로 하여금 선행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켰다. 그들은 이웃 사람의 신앙뿐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도 철저히 점검하였다. 아, 슬 뚜다! 신앙이 없는 자들이여! 단 · 한 발자국이라도 헛디디면 이슬 람으로부터 파문을 당하며, 설사 그 실수가 진정한 회개를 증거로 용서받을 수 있을 지라도 일단 지옥에 갈 대죄(카비라 Kabrra)68) 를 지
67) 같은 책, p. 86, I. 3 각주에서 인용.
68) [역주] 이는 사형에 처해야 할 정도의 큰죄를 의미하며, 우상 숭배, 신에 동반자롤 두는 행위, 지도자가 꾸란의 계명을 어겼을 때 적용된
다. 김정위, 『이슬람 사상사』(민음사), p. 48 참조.
은 무슬림은 헤어날 길 없는 지옥의 불 속에서 이단자로 저주받는 다고 카리지파 중에서도 규율을 엄격히 따지는 신자들은 생각하였다. 카리지파의 시 지면이 허락된다면 카리지파가 벌린 전쟁 , 카리지파의 주요 지도 자, 논쟁의 쟁점 , 카리지파에서 갈라진 다른 분파에 대해서도 더 논 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카리지파 운동의 일반적 성격만을 제시하 고자 하였다. 카리지파의 정치, 종교적 측면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 있으므로 이제 문학 쪽을 논급하고 카리지파에 관한 기술을 마치고 자 한다. 카리지파는 밀톤Milt.o n 69' 이나 번얀 Buny an 10 1 같은 대문호 는 배출하지 못했지만 베드윈 혈통의 아람족인 이들에게도 천부적 인 시적 재능이 있었다. 꾸란은 경건한 무슬림들이 시를 다루는 것 울 못마땅하게 여기며 시를 악마의 조작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카 리지파의 시는 예언자도 마음에 들어 할 엄격한 종교적 열정을 풍 기고 있다는 점에서 우상 숭배인들의 시와는 전혀 다르다. 한 카리 지파 시인이 감옥에 있는 동안 지은 다음 시구 를 보자 .711 <‘장사꾼'들아, 제 발로 신에게 붙어버린 자가 일어나 잽싸게 말에 올라 탈 때가 되었다. 어리석은 자들아, 이단자의 땅에서 살다가 너희들 모두가 추적당하고 살해되고 말 것이냐. 내가 갑옷을 입고 또다시 질풍 같은 나의 애마 를 타고 너희들 무리 중에 끼일 수 있다면!
69) [역주] Joh n Milto n : 영국의 시인 , 『실낙원 Par 五s e Los t 』 의 작자 (1608-1674).
70) [역주] Joh n Buny an : 영국의 설교사로 『천로역정 P i lg ri m's Pro gr ess 』 의 저 자(1 628-1688).
71) Taban, ii , 36, ll. 7, 8, 11-16.
또 너희들의 적이 나에게 죽음의 잔을 비우도록 할진대 너희들 틈에 끼여 그들과 싸울 수 있다면! 가슴 아픈 것은, 내가 이단의 무뢰한에게 칼을 뺄 수 없고 단 한 뺨의 땅도 양보치 않는 존귀한 기사들은 그들을 쳐부실 수 없는데 너희들이 짐승처럼 놀라 쫓겨 다니는 일이다. 그러나 싸움이 한창 치열하고 날카로운 칼날로 힘든 길을 헤쳐 나가는 때, 싸움의 욕구를 억제하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 나는 포로가 되어 쇠사슬을 질질 끌며 고통받는데, 너희들은 억압받고 학대받고 있으니 애통하도다.> 까따리 븐 알-푸자아 Oata ri b. al-Fuja ' a 핫자지가 파견한 군대를 모조리 격퇴시킨 카리지파의 용맹한 지 도자 까따리 븐 알-푸자아는 싸움만큼이나 시도 잘 읊었다. 『하마 사 』i2 l 에 포함된 다음 시구에 관해 이븐 칼리칸은 이 시구가 세상에 서 제일가는 겁쟁이를 용감한 사나이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단언하 고 있다 . <이와 똑같은 주제로 지은 어떤 시도 이 시와는 비길 바 없다 그것은 치욕을 수치로 여기는 정신과 진정한 아라비아인다운 용맹성에서만 나올 수 있었으리라 .>73)
72) I:Iama sa, 44.
73) lbn Kha llika n, .ed . by W liste n fe ld , No. 55.5, p. 5.5. 1. 4 이 하 ; 드 슬 란의 번 역 서 , vol. ii, p. 523.
<나는 내 놀란 영혼에게 말하노라. 용기를 내라! 그대는 예정된 시간을 넘어 단 한 시간도 기도로 삶을 연장할 수 없으니. 어두운 죽음의 광야에서 용기를, 용기를 내라! 영생이란 불가능한 것이도다.
인생이란, 어느 영웅의 고귀한 외투가 아니도다 . 비열한 겁쟁이도 마침내 벗어 던지는 외투일 뿐 . > 쉬 0 固 우쓰만의 살해로 이제껏 분열된 적이 없던 무슬림 사회는 두 개 의 < 쉬아 Sh‘ a> , 74 1 죽 알리파와 무아위야파로 갈라졌다. 무아위야의 칼리파 즉위로 그는 이제 일개 파벌의 우두머리가 아닌 국가 원수 가 된 셈이었으며 무아위야파라는 쉬아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때부터 쉬아파라 함은 예언자의 가문을 정통 후계자로 인 정하는 알리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되었댜
74) [역 주] 아랍어 로서 <추종자>, <분파>를 뜻한다 . <쉬 아파>는 본래 알리파란 뜻의 <쉬아 알리 ShI‘a ‘Ah> 를 줄인 것이다 .
신수설 그러나 알리가 예언자의 동료 중 가장 훌륭하며 그의 적수인 무아 위야에 맞서 정당하게 선출된 칼리파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보다 뱃심 좋은 사람들이 칼리파위의 신수설을 들고 나온 것 도 이때쯤이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쉬아파의 교리상 특징이 된다. 칼리파의 신수설은 대체로 페르시아의 사산 왕들이 <신>(중세 페르시아어의 bag h) 의 칭호를 갖고 신의 위엄을 지닌 화신으로 간주 되던 페르시아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도지 Do zy 75 ) 의 쉬아파 기원설 도지에 따르면 , <쉬아파 사람들은 자신들을 개인적 목적 달성에 이용한 아랍 지도자들의 지휘를 받고 있었지만 사실은 페르시아 종파였다. 자유 분
75) [역주] Rein h a rt Doz y (1820-1883) :네덜란드의 동양학자 . 특히 스페인 에서의 아랍 역사에 관한 연구로 유명하다. 특히 그가 편찬한 사전 『 아랍어 사전의 보유 편 Sup ple ment awe Di ct i on nair e s Arabes 』은 안달루스와 마그립 지방 학자들의 지리서·역사서의 텍스트를 연구하 는 데 긴요한 자료이다.
방함을 좋아하는 아랍 민족과 비굴한 굴종에 익숙한 페르시아 민족 사이의 가장 명확한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 페르시아인들에게는 예언자의 후계자 를 선출하는 원칙이란 금시초문의 일로서 불가해한 것이었다. 그들이 인정하는 유일한 원칙은 세습이었으며 무함마드가 아들을 두지 않았으므로 사위인 알리가 그의 뒤 를 이어야 하고 왕권이 그의 가문에 세습된다고 보았다 . 따 라서, 쉬아파에게는 알리 를 제외한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쓰만 둥 나머지 칼리파들과 우마이야인들에게는 복종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찬탈자들로 보 였다. 중앙 정부와 아람의 지배에 대한 그들의 증오심은 이같은 생각을 더 욱 굳게 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지배층의 부( 富 ) 를 탐내는 듯한 눈치였다. 더군다나 그들의 역대 왕들이 신성도가 낮은 후손들임을 줄곧 보아온 터이 므로 알리와 그의 후손들을 우상 숭배하듯 숭상하였다. 이맘 알리 가문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의무였다 . 이 의무만 이행한다 면 나머지는 모두 풍유적으로 해석하거나 예사로 어겨도 무방하다. 그들에 게 이맘은 전부였으며 신인(神人)이나 다름없었다. 부도덕이 수반된 굴종이 쉬아파의 체계를 이루는 근본이었다 . > 76 1
76) Dozy , Essai sur l'hist o i r e de l'Isla mi sm e (빅토르 쇼뱅 Vic t o r Chau vi n 의 불어 번 역 판) p. 219 이 하.
사1::1 ~파 Saba' ites 이제 쉬아파의 신권설은 페르시아 사상과 일맥 상통함을 알았는 데 그렇다면 과연 그 기원 역시 페르시아였을까? 그렇지 않다. 예멘 의 싸나 태생으로 유태안인 압둘라 븐 사바 ‘Alxlullah b. Sa넒 (본래 는 Saba' )가 창시한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아라비아의 한 분파에 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77) 그는 칼리파 우쓰만의 시대에 무슬림이
77) 벨하우젠은 쉬아파의 교리가 유태교보다는 페르시아의 종교에서 나 온 것이라는 견해롤 피력하였다 . 필자가 이미 언급한 그의 가장 유익 한 논문 Di e relig ios -po li tisch en Op po sit ion spa rtei e n im a/te n Islam (Ab h der K,函ig, Ges, der W is sensc 벼't en zu Gott ing e n, Ph il- Hi st , Klasse, 1901), p. 89 이하에 소재한 사바파에 대한 그의 기술을 참조.
되어 순회 전도사가 되었다고 하는데 무슬림 역사가에 따르면 <그 는 이곳 저곳으로 돌아다니며 무슬림들울 나쁜 길로 들어서게 했 다>고 한다 781 그가 히자즈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면 그 다음에는 바스라, 쿠파에서 그에 관한 소식이 들려왔다.
78) Taban, i , 2942, 2.
이본사바의 교리 마침내 이집트에 정착한 그는 재림(라즈아 raj 'a) 사상의 교리를 설 파하였다 그는 <예수가 메시아로서 재림한다는 것은 믿으면서도 하느님께서 선포하신 무함마드의 부활은 부인하는· 것이 참으로 이 상한 일이댜i9 1 더욱이 천 명의 예언자가 있고 각기 예언자는 집행 자 w益 I' 룰 두고 있는데 무함마드의 집행자는 알리이다 .80 ) 무함마드 는 예언자 중에서 최후의 예언자이며 알리는 마지막 집행자이다.> 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븐 사바는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쓰만을 찬 탈자로 간주하였다. 그는 알리를 지지하는 음모를 꾸며 이슬람 제국 내의 여러 지방주에 퍼져있는 불평불만 분자들과 비밀 연락을 취했 다. 81) 샤흐라스타니에 따르면, 그는 <너는 너다 an ta anta >, 죽 <너 는 신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알리에 의해 추방되었다고 한다 .82 1 이 는 이븐 사바와 그로부터 유래한 과격한 쉬아파인 <굴라트 Ghula t >831
79) 꾸란 28 장 85 절 <실로 그대에게 꾸란을 계시하신 분이 그대가 돌아 갈 곳으로 그대를 돌아가게 하시리라>의 돌아갈 곳 (ma‘ad) 은 메카 룰 뜻한다. 그러나 어휘 (ma ' ad) 의 다의성으로 그것이 말세에 무함마 드가 부활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는 이븐 사바의 주장을 그럴싸하 게 만들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을 무슬림들은 부활에 앞선 가 장 큰 징조로 간주한다.
80) 이는 유태교의 개념이다. 알리와 무함마드의 관계는 아론과 모세의 관계와 같다.
81) Taban, 앞의 책
82) Shahras 따, ed. by Cureto n , p. 132, 1. 15.
83) [역주] 과격주의자를 뜻하며 종교적으로 <과장된 표현 g hula> 을 일 삼는 사람들을 비 난하는 용어 이다 . 최초의 <굴라트>가 이 븐 사바이
며 그의
의 교리, 죽 모든 예언자에게는 성령이 임하시며 그것은 대대로 이 어지고 무함마드의 사후 성령은 알리에게 임하였고 그 후 이맘직을 계승한 그의 후손들에게 옮겨 갔다는 교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사바파는 이맘이 일시적으로 자취를 감추더라도(g ha y ba) 어느날 그 가 다시 돌아와 이 땅을 정의로 충만케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그 들은 지복천년이 임박했다고 믿었으므로 처음에는 이맘의 숫자를 넷으로 한정하였다. 시인 쿠싸이르 Kut hayyir (7Z3 년 사망)는 다음과 같이 말한댜 <네 명의 완전무결한 이맘, 그들은 꾸라이쉬족의 정의의 사도들이라네. 알리와 그의 착한 세 아들은 모두 빛나는 등불 . 그 중 하나는 신실하고 또 한 자식은 카르발라에서 사라지고 마지막 아들 하나는 나부끼는 깃발 아래 기마병을 이끌고 출전하기까지 맑은 물과 꿀을 마시며 라드와 Radwa 산에 숨어 있다네.>읽)
84) Ag hani, viii, 32, 1. 17 이하. 알리의 세 아들은 하산 l:Ias an, 후사인 I:Ius ay n , 무함마드 븐 알-하나피 야 M 曲 ammad Ibn al- 1:I an afiyy a 이 다.
□ 區흐디 Mah di(구세주) 구세주 개념이 쉬아파 특유의 것은 아니다. 일찍이 유태교나 기독 교에서 개종한 무슬림들에 의해 이슬람에 들어와 곧 이슬람 신앙의 일부로 정착되었다. 최후의 심판일이 다가왔음은 혼란한 시대상과 <그리스도의 적 al- Dajj터>을 살해하게 될 예수의 부활에 의해, 또 한 폭력과 부정이 난무하는 이 땅에 정의를 가져 올 마흐디, 죽 <신의 인도를 받는 자>의 재림으로 알 수 있다는 예언자의 전승이 퍼지기 시작했다. 예언자로부터 유래된 구세주 재림 서~}이 쉬아파
의 전 역사룰 통해 면면히 흐르고 있다 .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쉬 아파의 교주는 알리 가문의 이맘들로서 이맘직은 세습되었다. 그러 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이맘직의 승계 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어떤 분파는 일곱 명의 정통 이맘만을 인정하고 어떤 분파는 열두 명의 이맘을 인정하였다. 이스마일파로 통칭되는 < 일곱 이맘파 al Sab'iy ya> 중 마지막 이맘온 무함마드 븐 이스마일 M ulJamma d b. Isma‘ il이었고 < 열두 이맘파 al - I thna -'as hariyya>의 마지막 이맘은 무함마드 븐 알-하산Mu}Jamma d b. al - I:Ia san 이 었다 . 85’ 이들 두 이 맘은 각기 770 년과 얽 0 년 신비에 쌓인 채 종적을 감추었는데 이들 의 추종자들은 이맘이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잠시 인 간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을 뿐이며 언젠가 약속된 마흐디로서 분명 히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 이후 마흐디임을 자처한 광신자들이 나 위선자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이 나타났다. 86’ 이들 중 두 사람이 파띠마조 Fa timi d 와 알모하드조 Alrrohade 를 세웠는데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전사하였다 . 그러나 이들이 구현한 이상은 그 들의 죽음과 더불어 소멸되지는 않았다 . 악마를· 물리치고 역사상 유 례가 없는 정의와 진리의 황금시대를 열어 준디는 · 하느님에 의해 약속된 혁명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 신앙인 마흐디 사상은 이슬람의 개혁 가능성을 의심하는 자들이 충분히 검토해 볼 만한 가치가 있 는것이다.
85) 이들 교파의 기원에 관해서는 브라운 교수의 Lit er ary Hi st o r y of Persia , vol. i, p. 295 이하 참조. 86) 다르메스테터 Darmes t e t er 의 홍미로운 논문, Le Mahdi dep u is /es ori gine s de !'Isla m ju sq u 'a nos jo urs(Pa ris, 1885) 참조 . 본 주제는 Revue colonia l e i n t erna ti onale 에 서 재 수록한(1 886) 스누크 후르그론 즈 Snouch Hur gro nj e 의 논문 ‘'Der Mah di에서 보다 과학적으로 다루 어지고 있다.
쉬아파, 카르발라에 모임 애당초 쉬아파는 하나의 정파로서 출발하였으나 정파로서 오래 존속하지는 못했댜 그것은 성공적인 종교 개혁가가 반드시 통치자 가 되듯이 이슬람에서는 정치가 항상 종교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 었다. 사바파는 쉬아파 운동에 신학상의 논거를 제공하였으며, 후사 인의 비극적인 죽음은 종교적 열광이라는 필요 불가결한 요소를 제 공하였다 후사인의 사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카르발라에 있는 그 의 묘지는 이미 쉬아파의 순례지가 되어 있었다. 684 년 <회개자들 al-Tawwab un>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곳에 가서 모두 통곡하며 곤 경에 처한 예언자의 손자를 저버린 데 대해 하느님에게 용서를 빌 었다. 그들의 우두머리가 외쳤다. <신이여! 순교자이시며 또 다른 순교자의 아들이고, 마흐디이시며 또 다른 마흐디의 아들이고, 씻디 끄 S i dd iq이시며 또 다른 씻디끄의 아들인 후사인에게 자비를 베풀 어 주소서!Ir/) 신이여! 우리가 그들의 종교와 행로를 그대로 따를 것 이며 우리는 그들을 죽인 자의 적이고 그들을 사랑하는 이들의 친 구임을 증거하나이다 .> 881 여기서 쉬아파가 매년 무하람 M 曲 arram 월 10 일에 행하는 <타지야ta'ziy as>,891 죽 수난극이 싹튼 것이다.
87) S i d diq는 <진실한>을 의미한다. 베반 교수는 이 단어의 어근이 지 닌 개념 <진실함>이 <인내>나 <용기>를 뜻하는 개념으로 쉽게 바 뀔 수 있다는 견해이다 .
88) Taban, ii, 546. 이 들 <참회 자>둘은 쿠파의 자유 사상을 지 닌 아랍 인들이었는데 이 사실은 벨하우젠이 고찰한 바대로 <타지야>의 기원 이 셈족임 을 암시 하고 있는 듯하다.
89) 〔역주] 아랍어로 <위문·문안·조문>을 뜻한다. 이슬람력 정월인 무하 람월 10 일째 되는 날(이날을 ‘Ashara’ 라고 한다), 후사인에 대한 추모 와 애도의 격한 감정을 관중에게 불러일으키 위해 행해지는 일종의 <수난극 pa ssio n day > 이 다 . CEI, Ta'ziy a, p. 401 참조 .
무크타르 쉬아파를 직접 승리로 이끌지는 않았지만 승리의 길로 인도해 준
쉬아파의 <모세 > 가 바로 무크타르이다 . 그는 알리의 아들로서 어머 니 이름을 따 이븐 알-하나피야 Ibn al- }:Iana:fiyy a 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무함마드를 대신하여 전면에 니섰다. 그리하여 그는 알리와 그의 가문에 충성하며 예언자 혈통의 여부를 중시하지 않는 아랍계 쉬아파의 지지를 얻었다 . 그런데 쉬아파 중에서도 페르시아의 쉬아 파 교도들은 예언자의 혈통을 긴요한 문제로 간주하고 알리와 그의 부인 파띠마 사이에 태어난 아들들만이 이맘의 자격이 있다고 주장 하였다. 후사인의 복수를 소리 높이 외치며 무크타르는 쉬아파를 이 끌었다. 紀 6 년 그는 쿠파의 주인이 되었다 . 그가 거둔 승리의 결과 나 그의 세력이 급속히 무너진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지만 그가 이끈 운동의 목적과 성격에 대해서는 다소 언급을 해두어야 겠다. 쿠파의 <마왈리> 쿠파의 주민 반수 이상이 수공업 , 상업 , 교역을 독점하고 있던 < 마왈리> 들이었다. 그들은 대체로 인종과 언어 면에서 볼 때 페르시아인들이었으며 , 전쟁 포로로 쿠파에 끌려와 그곳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던 것이다 . 그 후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어 아랍족의 피보호민이 되었다 . 이제 노예는 아니었 지만 아직까지도 주인과 종속 관계에 놓여 있는 <애매모호한 입장 Zw itterstellung>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주인의 보호 를 받아야 하며 평시나 전시에 주인을 모시고 시종 노릇을 해야 했다 . 이슬람 덕분에 < 아랍 우월 주의 do minant Arab ism>가 그들에게 허용하는 정도 이상의 혜택을 받고 있던 이들 <마왈리>들에게서 자신들이 피보호민 신분에서 해방되어 무슬 림들의 국정 운영에 본격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희망 이 싹렀다 .90) 무크타르와<마왈리> 무크타르는 자신이 귀족 가문· 출신인 아랍인임에도 불구하고 <마 90) Wellhausen, Di e relig ios -po li tisc hen Op po sit ion spa rtei e n , p. 79.
왈리>들을 신뢰하고 이들을 공평하게 대해 주었다. 이에 특권층은 몹시 분개하였다 . < 신이 이 나라와 더불어 우리에게 내려 주신 전 리품인 피보호민을 너는 빼앗아 갔댜 우리는 그들을 해방시켜주고 하느님의 상을 받고 싶었는데 우리 몫의 전리품으로 그들을 넘겨 주지 않으면 네가 편치 않으리라 . >911 무크타르는 < 마왈리>둘을 공 평하게 대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무슬림인 그들에게는 당연히 세입 의 한 몫울 차지할 권리가 있었다 . 그러나 오만한 아랍인들은 평소 얕잡아 보던 이방인들이 자기들과 똑같이 대우받는 것을 못마땅해 하였다 . 페르시아가 쉬아파에 미친 영향 이처럼 무크타르가 <마왈리>들 속으로 파고 들어감으로써 쉬아 파 운동은 반( 反 )우마이야적이라기보다 반(反)아라비아적인 것이 되 었다. 이것이 쉬아파 역사상 전환점이 되었다. 이들 진용에는 사바 파의 극단적인 교리에 젖어 있고 피압박 민족으로서 압제적인 정복 자에 대한 강렬한 증오심에 불티는· 수천 명의 페르시아인들이 가세 해 왔다. 따라서 쉬아파는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광신적인 경향을 띠 게 되고 정통 교파에서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쉬아파 교리 중 <은유적 해석 Ta' wil> 교리는 온갖 터무니없는 엉뚱한 사상까지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쉬아파의 주요 분파 중 하나인 하쉬미야Hashi rniyy a 는 <외면적인 것에는 모두 비교적(秘敎的)인 측면이 있으며, 모든 형태에는 정신이 있다. 또 계시마다 ‘숨겨진 의미ta'wil’가 있 고 이 세상의 모양이 유사한 것들은 저 세상에도 상옹하는 실체가 있다. 또 알리는 온갖 비법에 대한 지식을 겸비하여 그것을 아들 무 함마드 븐 알-하나피야에게 전수하고 또 알-하나피야는 아들 아부 하쉼Abo. Hashim에게 전했다 . 이 보편적 지식의 소유자야말로 진정 91) Tabar! , ii, 650, 1. 7 이 하.
한 이맘이다>라고 주장하였다 .92 1 그리하여 쉬아파는 명목상만 무슬 림일 뿐, 무함마드 가문의 특징인 무류( 無陰 )의 권위에 기초한 신비 주의적 해석에 의해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어떤 모양으로 이슬람을 변화시켜 나갔다. 또 지극히 다양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우마이야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함께 투쟁할 수 있는 대규모 종교 조직 이 붕괴된 정파에서 서서히 생겨났다. 이와 같은 사태의 진전을 향 한 첫 조치는 정치 모험가, 사회 개혁가, 예언자, 야바위꾼의 역할을 모두 겸비한 듯한 다재다능한 천재적 자질의 소유자 무크타르에 의 해 취해졌다. 후에 무크타르와 그의 페르시아 동맹군은 거의 전멸하 다시피 하였지만 OO 년후 쿠라산에서 아부- 무슬림 Abu Mus lim이 압 바스의 검은 깃발을 날리게 됨으로써 무크타르가 뿌려 놓았던 씨앗 이 풍성한 수확을 거둬 들이게 되었다 .
92) Shahrasta nI, Haarb ril cker 의 번 역 판, 제 1 부, p. 169.
최고(最古)의 신학파 이슬람의 가장 오랜 신학파인 무르지파와 무타질라파의 기원에 관 해서는 그것을 입증할 만한 명확한 자료가 없다. 폰 크레머의 추정대 로 무타질라피는 그리스 신학자들, 특히 다마스쿠스의 요한과 그의 제자인 하란I:Iarran 93) 의 사제 씨오도르 아부카라 Theodore Abucara (아부 꾸라 Ab i1 Qurra)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M l 기독 교인들은 우마이야 궁전의 출입이 자유로웠다. 기독교도인 아크딸 al-Akh 固은 계관 시인이었으며 그 외 많은 독실한 기독교도들이 우마이야 정부에서 고위 관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 무슬림들과 기독
93) [역주] 소아시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로 가는 중요한 대상로의 교 차점에 있는 작은 강 줄라브J ullab 강변에 위치한 도시 . 기독교 신부 들은 이곳에 이교도 주민들이 거주하였다고 해서 헬레노폴리스 Hell enop olis, 죽 <이 교도의 도시 >라고 불렀다 . 오늘날은 터 키 에 속한다. EI 러 H 킥댜 n, p. 227 참조 . 94) Von Kremer, Cultu r ge schi ch t Str ei fz ag e , p. 2 이 하.
교도들은 논쟁을 벌이거나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의 토론을 통해 의견을 교환했다. 기독교도 아랍안들은 비잔틴 신학으로 무장하고 이를 곧잘 궤변의 무기로 써먹으면서 이슬람 교리에 대한 우세를 계속 지키려 했다. 무르 AI 파 무르지파의 주요 교리는 이러하였다. 일단 유일신에 대한 신앙 고 백을 한 사람은 그가 어떠한 죄를 범했더라도 하느님이 직접 그에 대한 심판을 내릴 때까지는 이단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95) 이때 의심 의 여지가 있으면 그들은 결정을 미루고(arj a'ar 죄인의 운명을 미 결로 남겨 두었기 때문에 무르지파로 불렸다.'5/) 그들은 이 원칙을 여러 가지로 적용하였다. 예를 들면 무르지파는 카리지파처럼 알리 와 우쓰만을 대놓고 비난하기를 거부했다 . <알리와 우쓰만은 하느 님의 종으로서 하느님에 의해서만 심판받는다. 그들이 무슬림을 분 열시켰지만 그들을 이단자로 규정짓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 다>라고 했다 .98 ) 한편 무르지파는 알리와 무아위야에 의해 각기 대
95) 지금까지 초기 무르지파에 대한 가장 훌륭한 기술은 반 불로텐 Van Vlo t en 의 논문 lrdj a (ZDMG, vol. 45, p. 161 이 하)에 포함되 어 있 다. 독자는 또한 하르브뤼커 Haarb rii cker 의 번역으로 Shahrasta .n!, 제 1 부, p. 156 이 하를 참조할 수 있다 . Goldzih e r, Muhunmedanis c he Stu d ie n , Pa rt II , p. 89 이 하 ; Van Vlote n , La domi na ti on Arabe, p. 31 이하를 참조할 수도 있다. [역주] Van Vlote n (?-1903) : 네덜란드의 동양학자. 드 괴제의 제자. 『쿠라산의 압바스인들』 (1890) 을 비롯한 다 수의 논문과 주해서가 있다.
96) [역주] 무르지파의 명칭은 아람어 동사 arj a'a( 연기하다, 미루다)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97) 반 블로텐 Van Vlo te n 은 <무르지 m urji'>라는 명칭에서 꾸란 9 장 106 절의 구절이 암시된다고 생각한다:<거기에는 아직 하느님의 명령 올 기다리는 (m urj awna) 다른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벌이 내려지 거나 관용이 있을지어다. 실로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지혜로우시 다.>
98) 무르지파 교의롤 쉽게 서술하고 있는 싸비트 꾸뜨나 Thab it Qutn a 의
시 (ZDMG, 위 인용서에서 p. 162) 를 참조. 무르지파 교도인 이 시인 은 히즈라 1 세기 후반에 쿠라산에 거주하였다.
표되는 쉬아파와 우마이야가의 주장을 모두 반박하였다 . 대체로 무 르지파는 우마이야 정부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 를 취하였다. 그들은 벨하우젠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인격적 법의 옹호>에 만족한 소극 적 저항자였다. 그러나 때로는 무르지파도 관용의 원칙을 무시하고 지배자들에게 둥을 돌리기도 하였다. 죽 하리쓰 븐 수라이즈I:Iarith b. Sura yj를 비롯한 아라비아의 무르지파는 개종으로 획득한 당연한 권리를 정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채 억압받고 있던 쿠라산의 <마 왈리>들 편에 가담하였다 . ”I 무르지파의 견해는 이들 페르시아인들 이 이슬람의 신앙을 고백하였으므로 납세의 의무가 있는 이교도 취 급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무르지파는· 똑같은 관용의 정신 올 이슬람에 도입하였다. 그들은 신앙을 행위보다 우위에 두고 하느 님의 사랑과 선을 강조하며 무슬림은 영구히 저주받지 않게 될 것 이라고 주장하였다. 자홈 븐 싸프완J ahm b. $afw如 같은 이는 <신 앙Irnan>을 내면적인 신념에 불과한 것이라고 공언하기까지 하였다 . 죽, 인간은 마음속으로 <알라>를 인정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여전히 올바른 무슬림인 이상은 기독교나 유태교 또는 어떤 형태의 불신앙이든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01 이 온건파는 아부 하니파.Abi1 l:Ianifa (7ol 년 사망)를 가장 훌륭한 전형으로 삼았으며 이 위대한 신학자-그의 추종자는 오늘날도 수백만으로 추산된 다一 __ 를 통해 무르지파의 관대한 교리가 확산되고 보존되었다.
99) Van Vlote n , La domi na ti on Arabe, p. 29 이 하.
100) Ibn I;Iaz m, ZDMG, vol. 45, p. 169, n. 7 에 인용. 자홈 (747 년경 사 망)온 그의 대담한 사색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페르시아인이었다 .
무 E~ 라파 우마이야 시대의 바스라는 이슬람 사상의 중심지였다. 바로 이 도
시에서 진리의 탐구에 있어 사상은 자유로워야 된다는 원칙을 내세 운 종파가 처음 나타났다, 이른바 < 무타질라파 al-Mu' tazila>의 기 원은 유명한 신학자이자 수도승인 바스라의 하산(刀 8 년 사망)으로 거슬러 올라간댜 어느날 그는 무르지파와 카리지파의 상반된 견해 차이, 죽 대죄를 범한 자가 신자로 간주되야 할지 아니면 불신자로 보아야 할지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하산이 이 문제를 심사숙고하는 동안,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와씰 븐 아따 W塗 il b, ‘A臣 (다른 전 승에 따르면 아므르 븐 우바이드 ‘Amr b. 'Ubay d 이다)가 이런 사람들은 신자도 불신자도 아닌 중간으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답하였다 , 그러 고는 모스크 안의 한쪽 구석에서 사람들에게 자기가 내세우는 주장 의 근거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산이 말했다. <와씰이 우리와 갈라 섰다(ftazal a ‘anna)> . 이 때문에 와씰의 추종자들은 <무타질라파>, 죽 <교파 분립론자 > 라 명명되었다,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닐지도 모 르지만 이 새로운 종파가 바스라에서 기원하였으며 또한 히즈라 1 세기의 종교운동을 이끈 제일인자였던 하산1 011 의 제자들 가운데서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는 있다. 초기의 무타질라파는 운명 예정설과 관련이 있다. 이에 대해 꾸란은 각기 다른 두 개의 의견을 말하고 있다 . 무함마드는 결코 논리적이거나 언행이 일치하~든 사상 가는 아니었다 , 후세의 무슬림들이 그러했듯이 무함마드 역시 순간 적인 충동에 이끌려서 꾸란의 언어가 종종 모순이 있다는 것을 자 각하지 못했으며 그의 말을 듣는 이들도 이룰 감지하지 못했다. 따 라서 인간은 스스로 행한 바에 대해 도덕적 책임이 있음을 나타내 는 꾸란의 구절 <영혼은 각기 그 행한 바에 따라 저당잡혀진다> 1 0'2 1
101) 하산은 그 자신 한때 자유 의지론에 기울었지만 후에 그것을 포기 하였다 (Ibn Qu ta yb a, Ki tab a/-Ma'arif, p. 225). 그는 죄악을 제외하 고 만사는 운명적으로 발생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진다(A/ M뤼커u'의taz i번lah역 , 으ed로. by된 TS.h aWh.r aAstran noIl,d p, apr.t 1I2,, pI.. 436 을각주 참) 조. 그할러 것나. 하르브
102) 꾸란 74 장 38 절 .
또는 <선을 행하는 자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악을 행 하는 자 자신의 영혼에 거역하는 것이다 >103’ 라는 구절은 하느님께서 는 자기 뜻대로 인간을 올바른 길로 이끌거나 타락의 길로 이끌 수 도 있으며, 사악한 자들은 마음이 봉해져 있고 귀가 멀어 진리를 듣 지 못하며, 그들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 뻔한 운명이라는 것을 단언 하는 다른 꾸란 구절들과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숙명론적인 견해는 이슬람 초기 일세기 동안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 운명 예 정설>은 교리로 거의 공인되었다. 그러나 이븐 꾸타이바는 인간의 행위는 자유롭다는 의견을 제시한 刃명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 .1 여 1 그 중 압둘 말리크와 그의 아들 히샴에 의해 처형된 마바드 알-주 하니 Ma'bad al- Juhani와 아부 마르완 가일란 Abu Marwan Ghay - lan 두 사람은 이단자로 비난받은 것이 아니라 우마이야조의 적으로 비난받은 것으로 보인다 .105 1 무타질라파의 실제 창시자는 자유 의지 의 교리에 제 2 의 기본 교리를 첨가한 와씰 븐 아따 (748 년 사망)였 다. 106) 그는 권세, 지혜, 생명 등과 같은 신성의 존재를 부인하였는데 이 속성들이 영속적인 것으로 이해될 경우 하느님의 유일성을 훼손 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무타질라파는 · 자칭 < 유일성 과 정의의 일파 Ahl al-ta w}:ud wa-'1-'acll> 라 하였다. 유일성이라 함은 앞서 든 이유 때문에, 정의라 함은 하느님이 악의 창조자가 아 니며 그 분은 피조물들이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행위를 제외하고
103) 꾸란 41 장 46 절.
104) Ki tab al-Ma'arif, p. 301. 자유 의 지 론을 주장한 이 들은 까다리 파 al- Q ad ariyy a 로 불리었다. 이는 q adar( 능력)에서 파생한 것으로 (1) 인간행위를 결정하는 신의 능력, (2) 인간이 스스로의 행위를 결정하 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들의 반대자들은 인간은 강요(j abr) 에 의해 행위한다고 주장하여 자바리파 al- J ab ariyy a 로 불리었다 . 105) 가일란에 관해서는 al 一 Mu' tazil ah , ed. by T. W. Arnold, p. 15, I. 106)1 6I bn이 하Kh a참 l조lik.a n, 드 슬란의 번역서, vol. iii, p. 642; 하르브뤼커 번역, Shahrasta nI, Pa rt I , p. 44.
는 피조물을 벌하지 않는다고 무타질라파가 주장하였기 때문에 붙 여진 이름이다. 이 합리주의 사상의 차후 전개과정에 관해서는 압바 스 시대에 속하는 것이므로 다음 장에서 논하게 될 것이다. 금욕주의의 발달 이슬람의 창시자는 l f17 1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인간성과 상식의 소 유자였댜 그러므로 유태교의 엣세네파 &senes1001 사람들이나 기독교 성직자들이 수행하던 고행의 금욕생활을 동족민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슬람교에 금욕주의의 요소가 없지는 않다. 예컨대 라마단 Rama c;lan의 금식을 비롯해 금주, 순례 의식이 있는데 이것들 울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반면에 무함마드는 독신 생 활을 비난하였는데 몸소 모범을 보이며 훈계도 그렇게 하였다. 그는 <이슬람에 수도승 생활은 없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며 실제로 그의 사후 백 년 이상 동안 그런 것은 절대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 간 동안에 금욕주의가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 그것은 이슬람에서 <알라>를 어떻게 파악하느냐, 죽 자비나 사랑의 속성보다 위엄과 경외심, 천벌의 속성이 보다 중요시되는데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꾸란에 강렬히 묘사되고 있는 심판의 날에 대한 두려움을 명확하게 파악한 것이다 . 골트치어가 말했듯이 과장된 죄 의식과 천벌에 대한 두려움이 무슬림의 금욕주의를 처음으로 자극하였다. 죽 기독교도 출신으로 예언자의 교우 중 한 사람인 타밈 알-다리 Ta mim al-D ari 는 꾸란 45 장 21 절의 구절 <사악한 행위를 하는 자들이 자기들과 믿음을 갖고 선을 행하는 자를 우리가 동등하게 보며 그들의 죽음 과 그들의 삶을 같이 생각한다는 것인가? 그들의 판단은 전혀 잘못
lW) [역주] 무슬림들은 이슬람교가 <창시>된 것이 아니며 아브라함의 종교 죽, 유태교와 기독교와 같은 하느님을 섭기는 종교로서 이들 종교의 뒤 에 <출현>한 종교라고 주장한다.
108) [역주] 고대 유태의 금욕·신비주의의 한 파.
된 것이다 >109) 를 암송하며 새벽까지 꼬박 밤을 지셨다고 한다. 또한 예언자의 교우인 아부 알-다르다 Abu al-Darda 는 다음과 같이 말했 다. <죽어서 무엇을 보게 될지 안다면, 음식은커녕 물조차 마실 생 각이 싹 없어질 것이다. 차라리 한 그루 나무처럼 잘라져 죽어버렸 으면 좋겠다 .>110 )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들은 전제적이 고 불경한 <정부>에 대한 혐오와 거의 끊이지 않는 유혈 참사와 약탈, 내전의 비참한 광경을 보고 속세를 버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 살고자 하는 그들의 결심을 더 굳혔다.
109) Sha'raru, Lawaq ih al-Anwar(Ca iro, 1299 A. H.), p. 31. 110) 같은 책
바스라의 하산 무타질라파를 논하면서 이미 접해 보았지만 하산은 정통 노선을 걸은 초기 금욕주의 운동에서 특출한 인물이다 .Il l) 신에 대한 두려움 에 사로잡힌 그를 가리켜 그의 전기 작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 다. <마치 지옥의 불이 그 때문에 만들어진 것 같았다 .>112 ) 그의 얼 굴을 본 사람은 모두 어떤 큰 재난이 그에게 닥친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113) 어느날 그가 흐느껴 우는 것을 본 친구가 이유롤 물었 다. 그는 <내가 무의식적으로 또는 본의 아니게 어떤 일을 하지나 않았는지, 혹은 잘못을 저지르고 하느님을 불쾌하게 해드릴 말을 하 지나 않았는지 두려워 울고 있네. 만약 그렇다면, 그 분께서는 ‘이 제 너는 내 궁전 안에 더 이상 머무를 자격이 없으니 떠나 가거라. 이제부터는 너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씀하실테니까 .>1141
111) Von Kremer, Herrschende Ideen, p. 52 이 하 ; Goldzih e r, Mate r ia - lien zur Entw ick elung s ge sch, des S[f fism us( Vien na Orie n ta l ]our-nal, vol. 13, p. 35 이 하) .
112) Sha'r 訂 II, Lawllqi h, p. 38. 113) Qu shay n's Ri sa la(l287 A. H.), p. 77, l. 10.
114) 본 저자가 편집한 파리듯딘 앗따르 Fandu'd di n 'A ttar의 『 성인 회고 록 Tadhk i ra t al-Awl iy lI 』 , Pa rt I , p. 37, l. 8.
무바라드 AI-Mubarrad 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시리 아에서 온 두 수도사가 바스라로 들어가 하산을 보자 한 수도사가 <틈을 내어 그를 찾아가 보세 . 그의 생활 방식이 ‘구세주’의 그것 같 으니>라고 제의했다 . 그리하여 찾아간 그들에게 하산은 손바닥으로 턱을 고이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 양식을 사재거나 먼 여행을 떠나도록 명령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이상하도다. 하 지만 그들 중 가장 으뜸인 자는 제일 뒤로 처져 있는 자들이다. 그 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5 1 하산이 말한 다음 구절들은 그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115) Kami l(ed . by W righ t) , p. 57. I. 16.
<하느님께서는 단식을 일종의 경마장에 비유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종들이 결승점인 자신에 대한 복종심을 향해 질주하게끔 만들었다. 116 1 어떤 이는 일착으로 들어와 상을 받고 어떤 이들은 뒤에 처져 낙심천만 하여 돌아오기도 한다. 맹세컨대, 뚜껑이 열리면 새 옷을- 입거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신성하게 하는 일보다 선행자는 선한 일을, 악한 자는 나 쁜 일을 즐기 게 되 리라 .>117 1
116) 이같은 은유의 묘미는 아라비아 말들이 대개 경주 40 일 전에 시작 되아는볼 수훈 련있 다기.간 동안 식량을 적게 주어 풀어 놓는다는 사실에서 찾
117) Kami !, p . 57, 마지 막 행 .
<그 중 하얀 피부에 얀색이 좋은 사람이 허무의 길을 달리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엉덩이를 혼들고 옆구리를 가볍게 치며 말한다. ‘나 여 기 있다. 나를 알아보겠느냐.’ 그래, 우리는 그대를 알아 보겠는데 그대 는 하느님을 증오하고 착한 사람들을 미워하지 . >118 1
118) 같은 책 , p. 58, I. 14.
<하느님의 자비심은 그지없어 그 분의 도움이 없이는 헤아릴 수도 없다. 인간의 죄는 너무 크므로 그분의 용서가 없으면 벌을 면할 수 없 도다 .>119)
119) 같은 책 , p. 67, 1. 9.
<놀라운 것은 길을 잃은 자가 어떻게 길을 잃었느냐가 아니라 구원 된 자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이다 .>1 20 1 <마음을 깨끗이 하라(명상이나 신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은 녹슬기 쉽기 때문이다. 감정을 억제하라, 그렇지 않으면 감정에 이끌려 악에 이 르게 되리라 .>1 2 1 1
120) 같은 책, p. 91, 1. 14.
121) 같은 책, p. 120, 1. 4.
바스라의 하산, 진정한 수피 S Ofi가 아님 수피들은—_ _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이들에 대해 참깐 언급을 해 두어야겠다-하산도 자신들과 같은 수피주의자라고 주장하는데 그가 영적인 정의를 중요시하고 형식상의 기도행위에 만족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그들의 주장에 공감이 간다 . <손톱만큼이라도 진실된 신앙심이 그보다 몇천 배 무게가 나가는 단식이나 기도보다 낫다>고 그는 공언하였다 .1 22 1 그러나 후세의 전기에 기록된 그의 말 은 그가 원숙한 경지에 다다른 수피였다는 이야기에 진실성을 더해 줄지 모르지만, 그의 신비주의는 ___ 만약 이 명칭을 달 만한 가치 가 있다면 ___ 전설 가운데 그와 함께 등장하는 성녀(聖女) 라비아 알一아다위야 Rabi• a al-·Ada wiyy a 의 열정과 의기양양함이 결여된 가장 온건한 유형에 속하는 신비주의일 것이다 .1 23)
122) Qu shay n's Ri sa la, p. 63 마지 막 행 .
123) 수피 주의 에 관한 최 고( 最 古)의 권위 자인 꾸샤이 리 Q usha yn (1073 년 사망)가 R i sala 에 전기가 실려 있는(pp. 8-35) 수피 셰이크들 속에 하산을 포함시키지 않으며 그의 작품에서도 그를 언급하고 있지 않 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하산의 명 언은 Kami l 에 보존되어 있는 것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수피> 명칭의 유래 <수피>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수피들 자신들도 그 설명이
구구하다 . 이들이 제시하고 있는 유래 중에서 < 지혜로운 0 에 b g>, <순수함핵多, < 양털 s of>과 관련된 昭) 세 가지만이 검토할 만한 가 치가 있댜 < 휴f a > 로부터의 파생형이 수피 성자들의 권위에 의해 신성화되고 동부 아랍지방에서 널리 인정되고 있는 기원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 1 251 처음 두 기원은 언어학적 근거에서는 받 아들이기 어렵다 . 이같은 편견의 이유는 다음 정의에서 잘 나타난 다. < 수피는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순수한휴 H 상태로 갖는 자 >1 26 ) 이거나 < 수피주의는 ‘순수함 때문에 선택되어지는 존재’(i領 f a) 이며 누구든 이처럼 선택되어 하느님을 제의한 모든 것으로부터 순수하게 되는 자는 진정한 수피이다 .>l 'l:1 1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수피는 선민( 選 民)들에게 부여되는 매우 고상하고 의미심장한 단어 이다. 또 이보다 훨씬 소박한 어원도 있다. 이븐 칼둔에 따르면, 이 슬람 초기의 고행자들이 즐겨 양털 옷을 입은 것은 보다 사치스러 운 옷차림을 뽐내려는 이들과 구별되려고 함이었다고 한다 . 여기에 서 < 수피>라는 말이 나왔는데 마치 카푸친회의 수도사들 Ca puchin s 이 그들이 쓰던 두건인 <카푸초 Ca ppucci o> 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듯 이 1 28 ' <수피>는 < 양털 s of>을 걸친 고행자를 뜻한다. 꾸샤이리에 따 르면 , 이 단어는 히즈라 2 세기 말 (815 년) 이전에 상용되었다고 한다.
124) 뉠데케의 논문 ‘$qfi' in ZDMG, vol. 48, p. 45 참조 .
125) $a f a 에 대한 언급은 유명한 페르시아인 신비주의자 파리듯딘 앗따 르 (1230 년경 사망)의 『 성인 회고록 』 에 수록되어 있는 수피와 수 피주의 Ta$awwu f에 대한 70 개의 정의 중에서 12 개의 정의에 나오 고 있으며 sn f는 단 두 번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126) 841-842 년 사망한 비쉬르 알 - 하피 Bis h r al- 1:Iafi(맨발을 뜻함)가 언급한 것입
127) 가장 고명 한 수피 셰 이 크 중 한 사람인 바그다드의 주나이 드J una yd (909 - 910 년 사망)가 언급한 것 임 .
128) 〔역주] 프란체스코회의 한 분파의 수도사들로서 길고 뾰족한 두건 이 달린 망토를 입었다 .
수피주의의 시초 그러나 이때쯤에는 이슬람의 고행운동이 어느 정도 새로운 성격 을 띠게 되었고 만약 < 수피 > 라는 단어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면 그 의미는 거기에 상응하는 변화를 이미 겪은 뒤일 것이댜 이 형용 사는 바로 정통 금욕주의를 이탈하는 출발점이 되며 자미Jami의 말 대로 그것은 팔레스타인의 라몰라 Ramla 에 수피들을 위한 < 수도원 Khana q합을 세운 쿠파의 아부 하심 Abu Has him ( 서기 幻天년 이전 에 사망)에게 처음으로 붙여진 것 같다. 그건 그렇다치고, 금욕주의 와 수피주의는― ― _이는 대체로 서양 중세 신비주의의 via pu rga ,- a• 따(정화의 도정 )1 29 ) 과 via illuminati oo( 깨우침의 도 정 )1 30 ) 에 상응하는 차이이다 우마이야 시대가 끝나기 이전에 구별되기 시작하여 외래 사상, 특히 그리스 철학의 영향 아래 초기 압바스 시대에 이르 자 그 차이가 더욱 명확해졌다. 이의 전개 과정에 관해서는 다음 장 에서 다루기로 하며 여기서는 정확히 말해 수피주의의 기원과 거기 에 기초한 특이한 경향의 초기 징후들에 관해서만 고찰해 보겠다.
129) [역주] 신비주의자가 완성에 이르는 첫 단계로서 자기훈련, 금욕, 고행 둥을 통한 의식과 도덕적 정화로서 이루어진다.
130) [역주] 초기에는 기독교 교리에 심취하여 복음에 따라 살며 영혼을 하느님과 직접 접촉함으로써 타락한 영혼을 구제할 수 있다고 믿었 다. 그러나, 18 세기에는 강신술, 자기(磁氣), 연금술 , 마법을 믿은 유 사 신비주의 운동 illumini sm 으로 발달하였다.
수피주의의 기원에 대한 이븐 칼둔의 견해 수피주의의 기원에 관해서는 이븐 칼둔이 그의 명저 『 역사 서설 al. -Mu qaddirrri』 중 수피주의 에 관한 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견해를 인용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겠다. <이것은 이슬람에서 탄생한 종교 학문 중 하나다. 수피들이 추구하는 길 은 초기의 무슬림들이나 그들 중 유명한 사람들_죽 예언자의 동료 al-
寧ba, 계승자 al - Tab i ‘on,131 ’ 그 다음 세대들 一― 에 의해서 진리와 구원 의 길로 간주되었다. 신앙에 열심이고, 하느님을 위해 신앙 이외의 모든 것 울 포기하며, 세속적인 번지르한 의식이나 허영을 외면하고 인간 욕망의 일 반적 대상인 쾌락, 부, 권세를 버리고 속세롤 떠나 은둔하며 오로지 하느님 을 섬기는 데 전념하는 생활을 하는 것, 이러한 것들이 예언자의 동료들과 초기 무슬림들 가운데 널리 퍼져 있던 수피주의의 기본 원리였다. 그러나 이들 다음 대(代)에서 세속적 기운이 널리 만연되며 사람들이 거기에 물들 게 되자 경건한 신앙생활을 목표로 삼은 사람들이 ‘수피’ 또는 ‘무타싸위파 Mu 零wwifa'(수피 지망자)>라는 칭호로 구별되었다 .>1321
131) [역주] 예언자 교우들의 다음 세대를 가리킨다. 또 그 다음 세대를 넒 b i ‘U al_Tab i ‘In 이라 하며 이들 모두들 통틀어 sala f(제일세대)라 한 다. 따라서 이들은 예언자의 가르침을 간접적으로 받은 셈이어서 종 교적 견해에 있어 그 후의 세대보다 더 권위를 인정받는다 . CEI, Tabi'a n, p. 384 참조.
132) 이븐 칼둔의 Mu q add im a( 베이루트, lro >), p. 451= 드 슬란의 불역판 vol. iii, p. 85 이하. 동일 내용이 수흐라와르디의 ‘Awa rif al-Ma'ari f (가잘리 Ghaz a.li의 Iby a 여백부분에 인쇄된 것임, 카이로, 히즈라 1289 년), vol. i, p. 172 이하에 보다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또한 브 라운의 Li ter ary Hi st o r y of Persia , vol. i, pp. 297-298 에 번역된 꾸 샤이 리 의 인용문을 참조.
수피주의의 초기 형태 여기서 수피주의가 당시의 현실에 대한 반동으로 IDI 발생한 금욕 생활과_ . ~이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스라의 하산이었음은 앞서 살 펴본 바와 같다 본디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간에 그와 같은 금욕주의 운동에서 발생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로 드러난다. 수 피주의는 무타질라파와 같은 사색적 체계가 아니라 실천적 종교이 며 생활 규범이었다. 주나이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피주의는 단식이나 속세를 떠나는 것, 친근 관계를 끊고 인간들이 좋다고 여 기는 것을 포기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논쟁qil wa- q책에서 나온
133) [역주] 본서 p, 318 참조.
것이 아니었다 .>1 34) 초기 수피들은 고행자이자 은둔자였으며 또한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그들은 이슬람에 있는 영적이며 신비주의적 요소를 끄집어 내거나 아직 그러한 요소가 없을 경우 이슬람에 그 러한 요소들을 들여 왔다.
134) SuhrawardI, 앞의 책 , p. 136 이 하.
금욕주의와 수피주의의 차이 수흐라와르디 Suhraward i에 따르면 1 35) < 수피주의는 ‘청빈faqr’도 아 니고 ‘고행 zuhd' 도 아니며 이 두 개념과 그 밖의 다른 것이 함축된 용어이다. 이들 추가된 특질이 없다면 그 사람은 ‘ 고행자zahi d' 나 ‘수도승faqtr'일지라도 수피는 아니다. ‘청빈’ 의 미덕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끝나는 곳은 수피주의의 출발점일 뿐이다. > 그는 두 용어의 차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135) SuhrawardI, 앞의 책 , p. 145.
< ‘ 파키르fakir ’l %) 는 자신의 ‘ 청빈’에 집착하며 그것의 우월성올 지극히 확 신한다. 그는 자신의 신앙심에 의해 보장되는 하느님의 상을 받고 싶어하기 때문에 부자인 것보다는 청빈을 더 좋아한다 . 그리고 영원한 상을 타게 해 달라고 묵상할 때마다, 현세에서의 덧없는 즐거움을 절제하고 가난을 기꺼 이 받아들인다. 또 그는 ‘청빈 ' 한 상태를 벗어나면 가난의 미덕과 상을 모 두 잃어버리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수피주의의 교리에 따르면 이것 온 절대로 불합리한 것이다 . 왜냐하면 수피는 약속된 상을 받기 위해서 세 상을 동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가 ‘현세의 인간’ 이므로 현재의 ‘상태' 를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며, 그 때문에 상을 바라고 세상을 등진다는 것 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l'.TI ) ‘청빈’이 수피주의의 근본이라는 이론은 수피주
136) [역주] 아랍어 원음 표기는 faqir가 정확한 표기이나 여기서는 본문 에 사용된 표기를 그대로 적었다. 또는 f akeer 로 적기도 한다. 137) 죽 그는 신의 뜻에 따라서 자신에게 엄습하는 영적인 <상태 abwal> 에 전적으로 몰두한다 .
의의 다양한 여러 단계가 청 빈’의 도정으로써 도달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 렇다고 해서, 수피가 반드시 ‘파키르’라는 것은 아니다. > 수피주의의 기조( 基 調)는 사심 없는 헌신, 한마디로 <사랑>이었 다. < 사랑>이라는 개념은 하느님의 선과 자비보다는 그 분의 권세 와 천벌에 더 깊이 감명을 받은 경건한 무슬림들에게는 전혀 생소 한 것은 아닐지라도 익숙한 개념은 아니었다. 대체로, 꾸란은 <알 라>를 그분의 자의적인 의지에 절대 복종을 요구하며 인간의 감정 과 열망에는 극히 무관심한 엄격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전제 군주로 서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존재는 종교적 본능을 만족 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수피주의의 전 역사는 이러한 개념 속에 포 함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부자연스런 분리에 대한 항의의 역사이 다 . 그러므로 기독교의 영향이 수피 교의의 초기 발전과정에서 담당 했을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피 · 교의의 기원을 이슬람 이외에서 구명할 필요도 없다고 본다. 점차 사색적 성격이 수피주의에 스며들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완 전히 수피 교의를 변질시켰는데 우마이야 시대와 압바스 시대의 초 기 일세기 동안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잠복 상태에 있었다. 초기의 수피들 초기의 수피들은 아직도 정통의 이슬람 토대 위에 있었다. 그들과 이슬람과의 관계는 중세 스페인의 신비주의자들과 로마 카톨릭 교 회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무함마드의 가르침 중 어떤 점은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고 강조한다. 그리하여 그 외의 다른 가르침들 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빈 말이 되고 만다. 그들은 심오한 논리에는 심취하지 않고, 실용적 신학과 관계가 있는 문제에만 매달린다. 자 기 도취, 엄격한 금욕 생활, 종교적 열정, 거의 냉담에 가까운 정적 주의(靜寂主義, Qui e tism) 138) 가 그들 교리의 주요 특징올 이룬다 .
138) [역주] 17 세기 후반 스페인의 사제 몰리노스 Mo li nos 가 주장한 종교 적 신비주의의 한 형태;의지를 멸각(滅却)하고, 세속적인 관심을 버 리며, 신 및 신성한 것에 대한 정지적( 靜 止的) 명상을 주장한다.
이브라힘 본 아드함 |brahim b. Adham 초기 수피주의에 대한 풍부하고 생생한 기술은 이 들 무슬림 성자 들의 엄격한 생활, 환상 , 기적, 발언 등 생활 방식에 관해 충실히 기 록하고 있는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많은 전기서로부터 찾 아볼 수 있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서 모두 히즈라 2 세기 중반과 말기 사이에 사망한 (767 -8 15 년) 이브라 힘 븐 아드함, 아부 알리 샤끼끄 Abu ‘AI Shaq Iq , 푸다일 븐 이야드 Fuqa yl b. 'Iya c ;l, 라비아 Rab i ‘a 에 관해서만 몇줄 덧붙이고자 한다 . 이브라힘은 발크 Balkhl 39l 의 왕족이었댜 40 개의 금으로. 만들어진 신월도(新月刀)와 40 개의 금으로 된 권표( 權標 )가 그의 앞뒤에서 운 반되었다. 어느날, 사냥을 나갔다가 <깨어라! 너는 이 때문에 창조 되었느냐?>하고 외치는 목소리를 들었다 . 그는 입고 있던 화려한 옷을 허름한 옷차림으로 바꿔 입고 양치기의 펠트 모자를 쓴 채 고 향을 떠나 나이서부르 Na y sab 面 1 401 에서 가까운 한 동굴에서 9 년간 칩거하였다 .14 1) 그가 일상적으로 올리는 기도는 <하느님, 당신의 뜻 에 따르는 영광에 불복하는 부끄러움으로부터 저를 거두어 주소 서!>였다. 그의 기도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139) [역주]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도시로서 고대 왕국인 박트리아 Bac tri a 의 수도이자 조로아스터교의 중심지였다.
140) [역 주] 니 샤푸르 N i sha p ur 라고도 하며 오늘날 이 란의 동북지 방에 위 치하였다.
141) 아마도 이브라힘은 쿠라산의 <동굴 거주민들 S hi k aftiyy a>(S hikaft 는 페르시아어로 동굴을 의미함) 중 한 사람이었을 것아며 시리아 사람들은 이들을 <금식자들 al - J u ' r yy a> 라 칭하였다. SuhrawardI, 앞의 책, p. 171 참조 .
< 하느님이시여! 여덟 개의 천국은, 당신께서 베풀어 주신 명예에 비 하면, 당신의 사랑에 비하면, 당신 이름을 찬미함으로써 저에게 친교를 주시는 것에 비하면, 당신의 위엄을 명상할 때 제게 주시는 마음의 평 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님을 당신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는 이어 다음과 같이 말을 잇는다 . < 누구든 ‘여섯 고개 a q a 넒t’를 넘을 때까지는 의( 義 )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첫째 고개가 쾌락의 문을 닫고 신고(辛苦)의 문을 여는 일이다 . 둘째 고개에서는 스스로를 높이는 문을 닫고 스스로를 낮추는 문을 열 며, 셋째 고개에서는 안락의 문을 닫고 고통의 문을 연다. 넷째 고개는 수면의 문을 닫고 깨어 있는 문을 여는 일이며, 다섯째 고개는 부의 문 울 닫고 청빈의 문을 열며, 여섯째 고개에서는 장래의 희망에 대한 문 올 닫고 죽음을 준비하는 문을 여는 일이다 . > 발크의 샤끼끄 역시 발크 태생인 샤끼끄는 <신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ta wakkul> ——이 용어는 사실상 수동성(受動性)과 동의어적인 의 미이다――국三 점을 특히 강조하였다. 죽 <무타와킬 Mu tawakkil >l 42l 은 기껏 생계를 유지하는 데만 급급해서는 안 되며 i 구걸해서도 안 되고 장사를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의 사업은 오직 하느님과의 사업일 뿐이다 . 샤끼끄의 명언 중에 <기도의 십분의 구는 인간으로 부터의 도피에 있으며 십분의 일은 침묵 속에 있다>는 말이 있다. 푸다일 븐 이야드 이슬람으로 개종한 악당 두목 출신의 푸다일 븐 이야드는 <인간 을 위해서 무엇을 절제하는 것은 위선이며, 인간을 위해 무엇을 하 는 것은 우상 숭배이다>라고 단언하였다. 위에 언급한 세 명의 수 142) [역주] 동사 ta wakkala( 의지하다)의 파생형으로 <신에게 의지하는 자>를 의미.
피들이 쿠라산이나 트란스옥사니아 출신으로서 불교 사싱괴- 접촉하 였을지도 모르지만, 폰 크레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불교의 <니 르바나 Nrrv 助 a( 열반)>와 동일시한 수피주의의 핵심 교리 <파나fa na (자아 소멸)>를 이들의 언설 중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수 피주의의 인도 기원설에 대한 반박이 되는 것이다. 라비아 알-아다위야 Rabi' a aJ- 'Adaw iw a 다음에서는 이제까지의 금욕적이고 정적주의적인 수피주의의 형 태가 감성에 의해 변형되며 다음 단계로의 발전 방향을 분명히 드 러내 보여 주기 시작하는 보다 홍미로운 인격체를 접하게 된다. 여 성들이 유럽 신비주의의 역사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몇몇 이름만 생각나는대로 든다면 세인 트 테레사 S t. Ter esa, 1 43, 마담 구용 Madarre Guy o n, 144 1 시에나 S i ena 의 카타리나 Ca thari ne,1 45, 노리츠 No rwi ch 의 줄리아나Juli anal461 등이 있 다 . 무슬림 여성들의 대디수가 예언자의 명령에 따라 지적인 사망을 선고받았지만, 로마 카톨릭처럼 수피들도 상당수의 성녀를 탄생시켰 다. 이들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유명한 성녀는 라비아 알-아다위 야라 불리는 아디 ‘Adi 부족의 라비아이다. 그녀는 바스라 출신으로 서 히즈라 2 세기 말경에 예루살렘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븐 칼리칸 (1 28'2년 사망)에 따르면 그녀의 묘지는 중세에 순례의 대 상이 되었다고 한다. 수피학자들이 그녀의 작품으로 생각하는 시나 그녀가 남긴 말은 그 진위 여부는 불확실하긴 해도, 그녀의 신앙심 의 실제적 특성을―—_이는 다정다감하고 열정적인 느낌을 준다는
143) [역주] 스페인의 성녀·신비문학자 (1515-1582) . 그녀가 일으킨 개혁 운동은 카톨릭 교회의 각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44) [역주] 프랑스 신비주의자 (1648-1717). 정적주의를 일으켰다.
145) [역주] Cath arina de S i ena(l347-1380) :카톨릭의 성녀로 이탈리아의 수호 성인으로 열성(列聖)되었다.
146) [역 주] 영 국의 신 비 주의 자 (1342-1416) .
점에서 모든 여성 신비주의자들의 그것과 유사하다-여실히 보 여준다고 볼 수 있댜 그녀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 다음 <악마를 증오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하느님에 대한 저의 사랑으로 악마를 중오할 여유도 없습니다. 저는 꿈속에서 예언자를 만났습니다. 그 분께서 ‘라비아여,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서 제가 이렇게 말했 습니다. ‘하느님의 사자여,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 습니까. 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저를 사로잡기 때문에 어 느 다른 것을 사랑한다든지 미워할 마음이 제게는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라비아는 다음 시를 읊은 것으로 전해진다.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이기적인 사랑과 당신에게 걸맞는 만큼의 사랑인 것입니다. 항상 당신만을 생각하느라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은 바로 이기적 사랑인 것입니다. 나의 홈모의 눈길에 베일을 걷어올려 줄 때 그것이 바로 가장 순수한 사랑입니다. 이것 저것에 대한 찬미는 내 몫이 아니며 당신이 그 모두를 찬미하는 분임을 저는 잘 압니다 .>147) 헌신적 사랑과 사색이 어우러진 이 시는 그 진위여부에 관계 없 이_~작자는 명상의 삶과 계몽적인 삶을 구별하며 명상을 더 나 은 방법으로 분명히 간주한다 __- 금욕주의적 수피주의가 끝나고 새로운 견신론(見神論)이 시작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견신론은 수피주의라는 이름 아래 여전히 꾸란이나 <순나>와의 완전 일치를 147) Ghaz 핵 Jbya( Ca iro, 1289 A.H .), vol. iv , p. 298.
공언하면서도 어떠한 계시 종교와도 양립할 수 없으며 엄격하고 위 엄 있는 이슬람 신조의 단순성에 직접적으로 대치되는 외래 사상들 에 어느 정도 근거하였다 . 우마이야문학 이슬람 시대를 여는 첫 일백년 동안에는 정복, 확장, 조직에 여념 이 없었고 그 후에는 내전에 국력을 허바하였으므로- 문학에는 유리 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 후 우마이야조에서 고대의 이교도 정신이 다시 나타났다 . 따라서 이 시대의 문학은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혼 적이 거의 없는 시로만 순전히 이루어진다. 필자는· 여기서 오랫동안 유럽을 풍미하였던 견해, 즉 무함마드가 꾸란을 시적 문체의 비길 데 없는 모델로 제시하면서도 찬양의 대상인 이교도들의 작품들과 시의 예술적 가치 그 자체는 비난하므로써 그의 동족민들의 심미안 울 더럽혔다는 견해를 인용할 필요는 없겠다. 또한 꾸란이 형태상 시적이 아니다(따라서 시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라는 것과 이슬람 신 앙에서 꾸란은 하느님의 실제적 말씀이므로- 독특하고 모방할 수 없 는 것이라는 점을 독자에게 주지시켜야 할 필요도 없다. 아라비아 시의 쇠퇴가 무함마드 탓은 아님 또 한편 예언자가 비난한 시인들은 그에게는 가장 위험스러운 반 대자들이었다. 그는 그들이 시인이라서가 아니라 그릇된 이상을 선 동하고 옹호하였기 때문에 싫어하였다. 무함마드는 올바른 방법으로 재주를 쓰는 자들은 아껴 주고 상을 주는 데 반해서 그들 시인들은 그의 가르침을 비웃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다마스쿠스나 바그다드의 훌륭한 계관 시인들의 시가 사막의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또 그 것을 시로서 노래하였던 유목민 출신의 음유 시인들과 기사들의 시 만 못하다고 한다면, 그와 같은 아랍 시가의 쇠퇴는 시에 관한 무함 마드 개인의 입장에 기인한다키보다 그가 아라비아 사회를 변혁시
킬 종교 및 정치 제도의 창시자라는 점에 있어서 그에게 전적인 책 임이 있는 여러 가지 사정에 기인하는 것이다. 우마이야조의 시인들 지금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동시대 시인들은 고대인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그리하여 대도시에 거주하는 시인은 무슬림 전사 들의 찬란한 승리와 용맹스런 행위를 찬양하는 대신에 여전히 그의 연인이 머물다 간 야영지의 혼적을 놓고 슬퍼하며 특히 날렵하기 짝이 없는 낙터를 타고 사막을 달리는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만일 칼리파에게 시를 바칠 경우, 십중팔구는 이 위엄 있는 사람에게도 <베드윈 셰이크>의 온갖 미덕이 있다고 노래할 것이다. <아무튼 가장 위대한 우마이야 시인들조차 고대 ‘까씨다’를 모방 한 것은 다행이도 우리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켜 주 는 또 다른 형태의 예술을 위한 악세사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그때 그때마다의 분위기에 의해 생각이 떠올라 지어지며, 당대의 역 사를 생생하게 밝혀 줄 수 있는 ‘특별한 때에 지은 시occasi onal F 단 n' (이는 거의 모든 시인들의 작품에서 다루어진 주제이다)인 것이 다 .>148) 성도의 음악과시 예언자의 후계자들에 의한 정복사업은 메카와 메디나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었다. 게다가 우마이야가의 귀족들이 우쓰만 칼리파 재위시 우위를 점하게 되자 이들 도시들은 이슬람에 의한 온갖 규 제를 빠져나가며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에 빠졌다. 사치가 늘자 그 에 상옹하여 시적 예술도 세련미룰 더해 갔다. 음악은 우상을 승배 하던 아랍인들에게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까지는 외방인 148) Brockelrnann, Gesch d Arab. Lit ter atu r, vol. i , p. 45.
들, 특히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가희들이 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히즈라 1 세기에 오면 메카와 메디나 출신의 몇몇 아랍 가수들이 149 ) 마음에 드는 시구를 골라 곡을 붙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따라서 그러한 예가 수백 개가 들어 있는 『노래의 책』을 보면 가사 와 멜로디가 일체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댜 쾌락을 추구하는 무리 중에서 여성들이 당연히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제까지 대부분 송시의 진부한 서곡에 지나지 않던 사랑이 이제는 그 자체 룰 주제로 노래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곧 언급하게 될 위대한 <지 방 시인 >150) 들의 대담하고 남성적인 기질과는 대조적인 이른바 <반 도 시파 >15” 에서 최고의 영광은 부유한 메카 상인의 아들인 우마르 븐 아비 라비아 ‘Urnar b. Abi Rabi ' a(719 년 사망)의 것이다.
149) 예를 들면, 마바드 Ma'bad, 가리드 Gh aii d, 이븐 수라이즈 Ibn Surayj , 뚜와이스 Tuwa y s, 이븐 아이샤 Ibn 'A'i sha 가 있다.
150) [역주] 메소포타미아 지방 출신의 알 - 아크딸, 알-파라즈다끄, 자리 르 둥을 가리킨다.
151) [역주] 히자즈의 연애시 가잘 Ghazal 파를 의미한다. 자힐리야 시대 의 에로틱한 모티프에서 발단한 것으로 두 가지 시의 경향이 나타났 다. <적나라한 연시 Ghazal Maksh a.f>와 <순애시 Ghazal 'U dhri>이다.
우마르븐아비 라비아 그는 평생을 시적 영감을 제공해 준 귀부인들을 쫓아다니는 데 보냈다. 그의 시는 어찌나 매혹적인지 경건한 무슬림들로부터 <하 느님에 대해 저질러진 가장 큰 죄>로 간주되었다. 또 시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예언자의 사촌이자 꾸란 및 전승의 저명한 권위자인 압둘라 븐 압바스 ‘A1xlull 助 b. ‘Ab 悼 s 조차 우마르가 자신에 게 들 려준 연애시의 일부 구절을 암송할 정도였다 .1 52) 아랍인들은 꾸라이 쉬 부족이 시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고 말했는데 이는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우마르 븐 아비 라비아의 경우는
152) Mubarrad, Kami /, p. 570 이 하.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라는 경구에 해당됨을 인정해야 한다. 그 의 시어는 카툴루스 Ca tull us153 ) 의 그것처럼, 세련된 대화체의 자연스 러움을 지니고 있다. 다음에 몇 구절을 소개한다.
153) [역주] Ga ius Valeri us Catu llus (84?-54? B. C.) :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서정 시인 . 특히 <레스비아>라 이름한 다정한 귀부인에 대 한 사랑과 실연의 갖가지 감정을 노래한 일련의 시가 유명하다.
<친구들이여! 나를 더 이상 꾸짖지 말아주오 오늘만은 잠자코 나와 함께 가마 옆에 있어 주오 . 자이납 Zay na b 에 대한 나의 사랑을 꾸짖지 마오. 내 마음은 그녀에게 포로가 되어 있으니까. 아! 언젠가 알-카이프 al-Kha yf에서의 우리의 만남을 생각해 보면, 서운한 생각이 들지 않는가 . 다른 여인들을 노래한 것은 장난이었을 뿐, 그녀 앞에서 다른 모든 여인들은 무색해진다. 그녀가 나의 진정한 사랑, 타오르는 듯한 열정에 불을 당긴 것도 바로 그녀이니, 비난은 이제 그만하세 !>1541
154) A g函, i I 43, 1. 15 이 하 ;Noldeke's Delect us, p. 17, 마지 막 행 이 하.
연애시 같은 시파의 이류 시인들인 아르지 al-' Arji(우마이야가의 일원임), 아흐와쓰라 Ahw 怨를 비롯한 그 밖의 다른 시인들에 대해서는 상술 할 여유가 없다. 브로켈만C. Brockelrnann1 또) 박사는 동시대의 연애 시가 대체로 대중적 민간 전승에 기원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예컨 대 부싸이나 But hayna에게 바치는 시를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자밀
155) [역주] Carl Brockelmann(l868-1956) :독일의 동양학자. 뉠데케로부터 셈언어를 배웠으며 아랍어학, 이슬람 역사, 아랍문학사 둥의 분야에서 명성을 날렸다. 그의 역작 『아랍 문헌사 Gesc hichte der Arabis c hen L it era tur 』 (5 권)은 고대 아랍 문학 연구에 중요한 참고 문헌이다.
Jamil l 56 ) 의 시와 수많은 페르시아와 터키의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라 일라 La y la 에 대한 사랑을 예찬한 마즈눈 M 척 non 의 시 는 『 아라비안 나이트 』 에도 등장하는 전형적인 민요로서 오늘날에도 베이루트의 거리나 티그리스 강둑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시들은 지극히 아름다운 것들이댜 자밀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시의 몇 구절을 다음에 인용한다.
156) [역주]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크게 보급된 <순애시>의 연애 시인 중 가장 위대한 시인이다.
<아! 부싸이나여 , 청춘의 꽃 이 다시 피어나 지난 세월이 다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대 친척들이 다가와 그대가 나에게 베풀어 준 것 을 시샘할 때 늘 그렇듯이 우리는 또 다시 축복받을 것이오. 우리 모두 비구름처럼 사랑에 충만하여 부싸이나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어릴 적부터 그녀의 그물에 걸려 내 마음은 한결 같았으니 이날까지도 나의 사랑은 더욱 커지고 있소 . 그녀가 한 마디 말이라도 해주기를 고대하며 내 한평생 보냈지만 한창인 내 젊음도 내 뺨에서부터 사라지고 있소. 하나 그녀가 나의 구혼을 거절하는 데 대해 괴로워하지 않겠소. 만물이 멸망한다 해도 나의 사랑은 영원불멸할 것이기 때문에 . >1571
157) Noldeke's Delectu s, p. 9, I. II 이 하, I. 13 은 생 략
지방의시 우마이야 시인들의 명단 중에서 아크딸 , 파라즈다끄, 자리르의 이 름이 가장 돋보인다. 이들은 시인 자밀처럼 사랑의 싸움터에서가 아 니면 싸움올 거부한 고뇌하는 연애시인이나 여자와의 교제를 즐기 는 남자와는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었다. 이들 세 명이 모두 메
소포타미아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시의 발상지는 이미 피폐된 상태였다 . 야심차고 진취적인 젊은이들이 이 제 지적 활동의 주요 중심지가 된 지방으로 몰려들었다. 자리르와 파라즈다끄의 <나까이드 Na q a' ic;l> 파라즈다끄와 자리르는 둘 다 <취미가 똑같은 두 사람A rcades ambo- 죽 욕쟁이 > 들로 보기 드문 호적수의 사이다. 수년간 이들은 공개적인 < 악담 muh 척 a t > 으로 설전(舌 戰 )을 벌였는데, 어느 쪽도 체 면 같은 것은 차리지 않았으므로 아주 지저분한 욕설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그 욕설은 문학적 우수성으로 또한 아랍어의 모든 독설적 자원을 교묘히 다루는 풍자가의 놀랄 만한 솜씨로 저속함을 면하였 다 . 1 58 ) 이내 이 < 욕지거리 시 Na q a' ic;I>는 도처에서 애송되었다. <나 까이드 > 시인들에게는 각기 자신의 시가 맞수가 되는 다른 시인의 시보다 우수함을 내세우는 수많은 열렬한 팬들이 패거리로 있었다. 15!1 )
158) [역주] 우마이야조의 풍자시는 자힐리야 시의 주요 주제였던 <자 랑>이 나타나므로 과거의 관용구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였다. 따라서 풍자시는 언어학적 자료의 보고가 된다. A. F. L. Beesto n , 앞의 책 , p. 413. 159) 베반 교수가 편집한 Naqa 'i(/.7 t 라이덴 Le y den 에서 발간되었다.
시에 대해 널리 사람들이 홍미를 가짐 어느날 쿠리산의 총독인 무할라브 븐 아비 쑤프라 Muh 책 ab b. AbI S ufra가 카리지파의 일파인 아즈라끼파Azariq a 를 향해 진군하 던 중 진영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자 그 까닭을 물었다. 그리하 여 병사들이 자리르와 파라즈다끄의 장점을 비교하며 격렬한 논쟁 올 벌이느라고 소란이 일어났음을· 알았다. 병사들은 이 문제를 그의 결정에 맡기고 싶어했다. 무할라브가 말했다. <내가 이 두 마리 개 에게 갈기갈기 찢기는 것을 보고 싶으냐? 나는 그 둘 사이룰 해결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두 사람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을 사람을 가르쳐 주겠다. 아즈라끼파에게 가 보아라! 그들은 시를 이해하는 아랍인들로서 올바르게 판정해 줄 것이다. > 다음날 양쪽 군대가 서 로 맞섰을 때 아비다 븐 힐랄 ‘AbIda b. Hil회이라는 아즈라끼파의 병사가 전열 맨 앞에서 나와 일 대 일의 싸움을 제의했다. 무할라브 의 병사 하나가 이 도전을 받아주었지만 싸우기 전에 상대방 적에 게 파라즈다끄와 자리르 중 누가 더 훌 륭한 시인인가를 알려 달라 고 요구하였다. 아비다가 외쳤다. < 망할 자식! 꾸란이나 종교법을 공부하지 않고 시에 대해 나에게 묻느냐? > 그 다음 , 그는 자리르의 시를 한 구절 인용하여 그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렸다 .160} 이 에피소 드는 시에 대한 풍류가 문학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지역에 걸쳐 널리 퍼져 있었으며 전쟁으로 지쳐 있고 위험한 와중에서도 장려되었다는 뚜렷한 중거가 된다 . 그와 유사한 예가 서양과 그 밖 의 모든 지역을 통틀어 타고난 재능이 가장 뛰어난 아테네인들의 역사에서는 발견되지만, 과연 영국 병사들이라면 야영 모닥불 옆에 서 그러한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0~ 크딸 아크딸도 이 싸움에 끼어들었는데 파라즈다끄와 한 통속이었다. 그와 자리르가 서로를 비빙하여 지은 <나까이드>가 전해진다. 이슬 람 이후의 시인들이 대개 그러했던 것처럼, 이 시인들도 모두 탐욕 스럽게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인 직업적인 아부꾼들로서 돈 주고 찬 양시를 사지 않는 사람을 욕하였다. 특히 전기학자들이 전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일화는 그 시대의 관습에 관해 간접적으로 많은 설명 올 해주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 관해 좀더 이야기하는 것도 독자들 에게는 홍미로운 것이 될 것이다. 160) A g函 11, vii, 55, l. 12 이 하.
336 아랍문학사
풍자시인 삼총사 중 가장 늙은 타글리브의 아크딸(기야쓰 븐 가우 쓰 Gh iya th b. Gha wth)은 오래 전부터 메소포타미아에 거주해 온 대 부분의 그의 부족민들처럼 기독교도였다. 아크딸이 무슬림으로 개종 할 경우 은급(恩給)과 현금 일만 디르함을 주겠다고 칼리파 압둘 말 리크가 제의하였지만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신앙을 고집하였다고 한 다. 그러나, 그의 종교는 원칙상의 문제이기보다는 편의상의 문제로 서 그에게 있어 기독교의 최대 장점은 자기가 술 마시고 싶을 때에 술을 마시게 해주는 데 있었댜 그에 관한 이야기는 중세 카톨릭을 연구하는 학자에게는 익숙한 현상인 매우 안이한 도덕심과 결부된 비천한 경건함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시리아를 여행한 어떤 사람이 다마스쿠스의 한 교회에 아크딸이 칩거하며 그의 주장을 신부(神父) 에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고 기술하였다. 신부가 아크딸 옆에 서서 몸을 지탱하고 있는 지팡이를 올리며 그는 노인이었다 ___ 소 리쳤다. <하느님의 적이여, 또 다시 사람들을 모욕하고 빈정대며 정 숙한 여인을 중상하려는가?> 그러자 시인은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다시는 그러한 무례함을 되풀이하지 · 않겠다고 약속했다. 칼리파도 그에게는 경의를 표하며 뭇 사람들이 모두 그를 어려워하는데 어떻 게 이 신부의 말은 고분고분 들었는지를 질문받고 그는 <그것은 종 교 때문이지, 종교 때문이야>라고 대답하였다. 16ll 또 언제가는 신부 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임신중인 자기 부인에게 <그를 쫓아가 외투 에 손을 대라>고 외쳤다. 이 가련한 부인은 신부가 탄 당나귀의 꼬 리에만 겨우 손이 닿았는데 이에 아크딸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 녀를 위로하였다. <그와 그가 탄 당나귀의 꼬리는 전혀 다룰 바가 없어 !>162) 우마이야인들이 뽑은 계관시인이자 최우수 시인이 사실상 이교도 시인들의 직계 후손인 기독교도였다는 것은 우마이야 시대 에 특히 강하게 나타나는 반 이슬람적 정신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
161) Ag h anI, vii, 182, I. 25 이 하.
162) 같은 책, viiI 183, I. 6 이하.
이다. 그가 화려한 비단옷에 목에는 금줄에 매달린 금 십자가를 걸 고 턱수염에서는 술이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며 1631 불쑥 칼리파 앞 으로 뛰어들 때면 신앙심 깊은 무슬림들이 노발대발하는 것도 당연 하였다. 그러나 다마스쿠스 궁전에서는 그들의 항의는 무시되었다 . 거기에서는 훌륭한 시구의 작자가 무슬림이든 기독교도이든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종교적인 면에서 무슬림들의 감정에 아랑곳하지 않 고 자신의 주인을 섬길 수 있는 시인이 남보다 갑절로 환영을 받았 다. 예를 들면 야지드 1 세가 메디나 지방의 한 시인이 자기 누이에 게 연시를 읊었다고 해서 메디나 사람들에게 복~ 하면, 다음 의 유명한 시 구절에서처럼 이슬람의 승리를 가져다 준 < 안싸르 柚휴 r> 둘을 ’ 망신시킨 아크딸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댜 <꾸라이쉬 부족이 모든 영광과 명예룰 빼앗아 가버렸도다. ‘안싸르’의 터번 밑에는 비열함만이 남아 있도다. > 由i
163) 같은 책, p. 178, 1. I 이 하. 164) 같은 책 , X iii , 148, 1. 23.
·` 시인들이 여론을 앞장서서 이끌었음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그들 의 말 한마디는 당시의 정권을 찬양 또는 비방하는 정치 팸플릿이 나 정당 옹변에 대신하는 것이다. 우마이야조를 찬양하는 아크딸의 송시를 듣자 165 ) 압둘 말리크는 자기 부하를 시켜 다마스쿠스 거리에 서 시인을 따라 다니며 외치게 하였다. <여기 ‘신자들의 지도자’의 시인이 계시도다. 여기 아랍인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시인이 있도 다 !>166 ) 그가 궁정의 총신으로 저명인사였으므로 대부족인 바크르족 에게 내분이 있을 때면 그에게 중재자의 역할을 맡아 달라고 한 것 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1m ) 호사스러운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
165) Encomi um Omaya darum, ed. by Houts m a(Leyd en, 1878). 166) Ag h anr, vii , 1. 27 이 하. 167) 같은 책 , p. 179, 1. 25 이 하.
는 야성적인 베드윈 기질상 자유를 갈망하였고 그리하여 자주 도시 를 떠나서 사막의 고향으로 찾아가곤 하였댜 그곳에서 여러 여인들 과 결혼과 이혼을 번갈아 하였을 뿐아니라 부족 내의 다툼에도 열 성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미 자리르와 파라즈다끄 간에 벌어진 문학 논쟁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을 고찰한 바 있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파라즈다끄에게 그들의 공동 적이었던 자리르를 용서해 주지 말라 고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아랍의 비평가들은 아크딸 시의 문체상의 정격(正格)과 세련됨, 적확성은 물론 그의 장시(長詩)의 길이와 우수성을 높이 평가한다. 아부 우바이다 Abu 'Uba y da 는 이슬람 시인들 중에서 그를 으뜸으로 꼽았으며 이슬람 이전 시의 유명한 편찬자인 아부 아므르 본 알-알 라 Abu 'Amr b. al-'Ala 는 만일 아크딸이 이교도 시대에 단 하루 라도 살았다면 그 시대 사람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그를 더 좋아하 였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그가 지은 찬양시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파라즈다끄까지도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아크딸 본인은 찬양시, 풍 자시, 연시의 세 유형 모두에서 다른 모든 경쟁자들을 앞질렀다고 주장하였는데 그의 풍자가 <소녀>들에게――_그는 <소년>을 덧붙 이지 않는다 168l ___ 얼굴 붉히지 않고 낭송될 수 있다는 그의 자부 에는 앞의 주장보다는 좀더 수긍이 간다. 1691 파라즈다끄 파라즈다끄로 더 알려진 함맘 븐 갈리브 Harnmam b. Ghali b 는 타밈 부족의 일원으로 칼리파 우마르의 재위 말기 무렵에 바스라에 서 출생하였다. 그의 조부인 싸싸아$a닿 l‘a 는 이슬람 이전 시대에 168) [역주] 본문에서는 라틴어의 표현 virginibu s p ue ri s q ue( 소년 소녀 를 위하여)에서 각각 v irgini bus( 소녀)와 p ue ri s q ue( 소년)를 사용하고 있다. 169) 같은 책 , p. 178, I. 26 이 하.
부모들에 의해 버려져 죽음에 처하였던 여아들의 목숨을 구해줌으 로써 이름을 날렸다. 이 때문에 그는 <무호이 알-마우다트 Mu l)yi al-Maw' 따 a t(매장된 여자를 소생시키는 자) > 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 의 부친 역시 베드윈의 오랜 전통적 기질인 자유분방함과 명예심에 고취되어 있었는데 이와 같은 기질은 도덕이 문란해진 이라크 주민 들 사이에서는 급속히 무용지물이 되어 가고 있었다. 파라즈다끄는 무모하고 방탕하며 줏대가 없던 프랑소와 뷔용 Franco i s Vi ll on110 1 처 럼 전형적인 <악동 mauva i s s 떠 et >의 일례가 되었다 . 그에 게서 독 설의 재능을 빼놓고 나면, 자기 부친에 대한 추모와 알리 가문에 대 한 끊임없는 충성(그는 이를 새삼 숨기려 들지 않았다) 외에는 감탄할 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리하여 칼리파 히샴의 면전에서 알 리의 손자인 자인 알-아비딘 Zayn al_‘Ab idJn을 격찬하는 시를 낭 송하였다가 투옥되었다. 카르발라에서의 후사인의 비극적 운명은 그 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리하여 알리의 동족민들에게 사나이답 게 훌륭하게 행동할 것을 촉구했다.
170) [역주] 프랑스의 시 인(1 431-1463 ?)
<너희들이 가장 훌륭한 자손인 그의 복수를 갚지 않는다면 칼을 던져버리고 물레가락의 가닥이나 쥐고 있어라 . >1 7 1 }
171) Ag hanI, xix , 34, 1. 18.
그는 일찍이 젊은 시절에 바스라의 고귀한 가~곤인 나흐샬족 Ban o. Nahshal 에 대해 읊은 풍자시 때문에 고향에서 쫓겨났다. 그 후 메 디나로 도망하여 그곳에서 연애와 방탕에 빠진 그는 자신의 불륜관 계를 파렴치하게 묘사함으로써 또 다시 추방 명령을 받았다. 그의 시에는 서촌인 나와르 Nawar 에 대한 언급이 여러 군데 나타나는데 그녀가 다른 남자와 혼인을 맺기 직전에 남부끄러운 술책을 써서 자기와 강제로 결혼하게 하였다. 이들 부부는 시도 때도 없이 싸움
질이었다. 파라즈다끄는 마침내 유명한 신학자인 바스라의 하산을 중인으로 세우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이혼에 동의하였다. 막상 이혼을 하자 파라즈다끄는 이혼한 것을 후회하며 다음과 같은 시구 를 읊었댜 1721
172) Mubarrad, Kami !, p. 70, 1. 17 이 하 .
<나와르와 이혼하고 나니 쿠사이 al-Kusa‘ i처럼 후회스럽도다 .1 7JJ 신의 명령을 거스른 아담처럼, 그녀는 나의 잃어버린 낙원 나야말로 부러 제 눈을 빼야 될 사람, 그러면 광명이 없는 이 사람에게도 빛나는 날 있으리.>
173) 쿠사이는 스스로 만든 훌륭한 활을 부러뜨렸다. 체너리 Chen ery 번 역 의 The Assemblie s of lfarfr f , p. 351 참조 베 반 교수는 이 불완 전한 시행은 시인 아디 븐 자이드의 적인 히라의 아디 븐 마리나 'AdI b. Manna 가 지은 시에서 거의 구전으로 인용된 것이라고 말한 다 (A g h3n i, ii , 24, 1. 5).
여기서 씁쓸한 후회나 실망을 의미하는 <파라즈다끄의 후회>라 는 속담이 생겨났다. 그는 바스라의 하산과 이븐 시린 Ibn Smn 두 유명한 신학자의 죽음으로 유명해진 해인 728 년에 자리르보다 몇달 앞서 사망하였다. 자리르 자리르 븐 아띠야Jartr b. 'A t:iyy a 는 파라즈다끄를 배출한 타밈 부족의 일족인 쿨라이브가의 일원이었다. 그는 이라크의 소름끼칠 만큼 무시무시한 총독 핫자즈의 궁정시인으로 자신의 주인을 얼마 나 예찬했던지 칼리파 압둘 말리크의 질투를 사고 말았다. 그가 다 마스쿠스에 나타나자 눈에 뛸 정도로 그를 냉대하고 오만불손하게
대하였다. 그러나 몇번 퇴짜를 맞고 나서 마침내 왕을 위해 지은 시 를 낭송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대 낙타 타기의 명수가 아니더며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관대하신 분이 아니더냐 . > 자리르가 이 시구를 읊고 나자 칼리파는 왕좌에 몸을 바르게 하 고 앉아 소리쳤다 . <예찬을 받으려면 이렇게 받거나 그렇지 않으면 말을 하지 말자 !>174) 풍자가로서의 자리르의 명성이 이만큼 자자하 였으므로 말싸움에서 그에게 져도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보다 더 큰 수훈으로 간주될 정도였다.
174) Ibn Kha llikan(e d. by Wi .ist e nfel d), No. 129; 드 슬란의 번역서 vol. i, p. 298.
맹인시인 밧샤르 븐 부르드 Bashshar b. Burd(7 8.3년 사망)는 다음 과 같이 말했다. <자리르를 풍자시로 공격했지만 나를 너무 어린 풋내기로 여겨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나의 시를 받아서 대꾸해 주었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시인이 되었을 것이 다 .>175) 다음 일화는 아무리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도 자리르 같은 풍자의 대가가 내뱉는 독설로 품위를 잃을 수 있으며, 또한 그 독설은 그의 가족과 부족을 영원히 치욕적으로 만들고 그 후유중이 멀리까지 미치는 무기가 됨을 보여 준다.
175) A g函I, iii , 23, l. 13.
라이 알一이빌Ra.'i al-Ib il(낙타치기)라는 유명한 한 시인이 있었다. 시인 자리르는 라이의 출신 부족인 누마이르족 Banu Numa yr을 찬양하였고 파라 즈다끄는 라이의 부족에게 적대적인 시를 읊었다. 그런데도 라이는 파라즈 다끄가 자리르보다 더 낫다고 외치고 다녔다. 어느날, 자리르가 그를 만나 타일렀지만 대꾸도 하지 않았다. 라이가 아들인 잔달Ja nda1 을 데리고 노새
를 타고 가고 있었는데 그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쿨라이브족의 이 개 1 76) 앞에서 멈춥니까 그것에게 바랄 것이 있거나 두려워할 것이 있습니 까?>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노새를 채찍으로 후려쳤다. 노새가 힘차 게 움직이면서 옆에 서 있던 자리르를 발로 차는 바람에 그의 모자가 땅에 떨어졌다. 라이는 모르는 체하고 계속 걸었다. 자리르는 모자를 들어 먼지 롤 턴 다음 머리에 다시 썼다. 그러고 나서 그는 시를 읊어댔다.
176) [역주] 무슬림들은 개를 불결하게 생각한다. 여기서 쿨라이브족의 개 는 바로 자리르를 일컫는 일종의 욕이다. 본서 p. 589 역주 참고.
<잔달아! 내가 쏜 모욕적인 화살이 너의 아비롤 관통하면 누마이르는 너를 무엇이라고 할까> 그는 성이 잔뜩 난 채 집에 돌아와 저녁 기도를 마치고 한 병의 대추야 자 술과 등불을 청한 뒤 시를 짓기 시작하였다 . 집에 있던 한 늙은 여인이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층계를 올라와 어디가 아픈가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그가 침대 위에서 벌거벗은 채 기고 있는 것을 보고. 뛰어 내려와 <그가 미쳤다>고 외쳐댔다. 그리고 집안 식구들에게 자신이 본 바를 그대 로 묘사하였다 . 그들이 말했다 . <물러가세요. 그가 무엇에 열중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요> 동이 틀 무렵, 자리르는 바누 누마이르를 비난하 는 印수의 풍자시를 지었다. 그는 시를 완성하고나자 의기양양하게 <알라 는 위대하다 Allah akbar!> 를 외치고 라이 알-이빌과 파라즈다끄, 그들의 친구들이 있을 만한 곳으로 떠났다. 그는 라이에게 인사도 채 하기 전에 시 롤 낭송하기 시작하였다. 자리르가 말하는 동안 파라즈다끄와 라이는 머리 를 숙이고 그 자리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은 굴욕을 묵묵히 감수하며 잠자 코 듣고 있었다 . 자리르가 마지막 구절 <부끄러우면 눈을 돌려라! 그대는 누마이르 출신, 카브 Ka‘b 족이나 킬라브Kilal줍적는· 상대도 안 된다>를 마 치자마자 라이는 일어나 그의 노새를 전 속력으로 몰아 자기가 머물고 있 던 곳으로 달려갔다. 그는 자기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안장을 얹으시오기 안 장을!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게 되었소. 자리르가 여러분 모두를 욕보
였습니다. > 그들은 곧바로 바스라 를 떠났다 . 그리고 라이가 그의 부족인 누 마이르족에게 치욕을 안겨준 데 대해 가혹하게 그를 꾸 짖 었던 출신 부족에 게로 다시 돌아갔다 . 그 후 수백 년이 지난 뒤에도 그의 이름은 아랍인들 사이에서 마음씨 나쁜 사람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 1771
177) Ag hanr, vii, 49, I. 8 이 하 .
두 알-룸마 DhO al-R umma 동시대의 시인 삼총사 다음으로, 그러나 오랜 시간 간격을 두고, 사막 아람인들의 송시를 지루하고 단조롭게 원형과 똑같이 흉내내 었던 두 알-룸마(가일란 븐 우끄바 Gha y lan b. 'U q ba) 가 등장한다 . 후 대의 언어학자들은 그의 고풍어린 난해한 문체를 즐기고 그를 극구 칭찬하였다. 아랍 시는 이므루 알-까이스로 시작하여 두 알-룸마로 끝난다는 말이 있다. 그가 순수 베드윈 시파를 대표하는 마지막 중 요한 시인이라는 점에서 이는 맞는 말이다 .1 78 1 우마이야 시대의 산문 작가들 동시대의 산문 작가들에 관해서는 그들 작품이 거의 대부분 없어 졌기 때문에 몇 가지 일반적인 견해만 피력하겠다 .1 79> 이 문학 장르 에서는 우마이야조에서 번성하였던 시인들의 특성이자 왕조 자체의 특성으로 언급된 것과 똑같은 세속적이며 비이슬람적인 정신이 지 배적이었다. 역사학은 다마스쿠스 궁전으로부터 장려되었다. 이미 앞에서 예멘 출신의 아비드 븐 샤르야에 관해 언급한 바 있지만 그 의 본업은 고대의 전설 이야기를 아름답게 꾸며 대중에게 읽힐 수
178) [역주] 훌륭한 시의 네 가지 기본 주제는 찬양·자랑·풍자 · 묘사였다 . 이 네 가지 주제에서 모두 뛰어나야 인정을 받았는데 두 알-룸마는 묘사시에서 대가로 인정받아 4 분의 1 이란 조롱울 받았다 . 송경숙 외, 179)앞 이의 하 의책, p기. 술64은. 주로 골토치 어 의 Mu romm. Stu d ie n , Pa rt II , p. 203 이하에서 인용한 것이다.
있는 형태로 그 내용을 전하는 일이었다. 페르시아계의 또 다른 예 멘 사람인 와홉 본 무납비흐 Wahb b. Munabbi h는 무슬림 연대기 학자들이 저술한 역사서의 앞 부분에 대개 붙이는 <기원(起源 Aw 一 a' il) >l80’ 의 일부를 이루는 전설들을 많이 전한 장본인이다.
180) [역주] 아랍어 awwal( 첫번째)의 복수.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최초 로 발명 또는 창안하고 발견한 사람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무슬림 관습 중 이쑤시개의 최초 사용자는 예언자 이브라힘이라는 식이다. 역사학뿐 아니라 문학·정치·신학 동 모든 주제에는 <누가 처음이었 느냐>라는 의문이 따랐다. EI 러 Awa'il, p. 758 참조.
동시대에는 초기 이슬람의 전투maghazr를 소재로 한 무용담이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칼리파 압둘 말리크는 이런 종류의 책이 아 들의 수중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책을 소각하도록 명한 다음 꾸 란을 공부하도록 하였다. 이 일화는 그렇지 않다고 여겨지던 압둘 말리크의 독실한 믿음을 보여 주며 1811 또한 전설적이고 민간 전승의 성격을 띤 야사(野史)가 무사 븐·우끄바 Musa b. 'Uq ba(758 년 사망) ’ 의 『전투 Mag ha.랴나 이븐 이스하끄의 『예언자 전기』처럼 종교적 전통에 기초한 역사서들보다 우선함을 보여 준다. 전자에 속하는 작 품은 보존되어 오는 것이 없다. 히즈라 2 세기에 나타난 강력한 신학 의 영향은 민족적인 차원에서 아라비아 산문 문학의 발달에는 도움 이 되지 못했다. 한편, 학식을 갖춘 신학자들이 <하디쓰>를 수집하 여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류의 유일한 산물로는 아사드 븐 무사 Asad b. Mii sa(749 년 사망)의 『고행의 서 Kitt1b al.- zuhd 』에 전해진다. 우마이야 시대의 가장 유명한 하디쓰 전승자는 무함마드 븐 무슬림 븐 쉬하브 알-주흐리 Mubarnmad b. MUs 1im b. Sh ihab al-Z ului (742 년 사망)이다. 그는 독재자 밑에서 판사직을 맡 아 이름을 떨쳤는데 이는 치사하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그보다 더 완고하고 양심적인 무슬림 형제들에 비하면 너무 고분고분 말을 잘들은 짓이다.
181) Browne, Lit era ry Hi st o r y of Persia , vol. i, p. 230 참조.
비아람무슬림 아랍인들이 시리아와 페르시아를 침략하고 또 타 지방에 정착한 것은 선교의 열정에서보다는 정복에 대한 욕심에서였다. 정복 지역 의 아랍인들은 그들이 열등 민족으로 간주한 원주민들을 희생시키 면서 전투를 치렀다. 만약 원주민들이 정복지들의 종교에 귀의함으 로써 특별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면 그것은 안됐지만 오산이었음을 알게 되리라. 새로운 개종자들은 <마왈리>로서 아랍 족에 배속되었다 .l it!) 이들도 무슬림이었지만 국가의 어떠한 중요 직 책도 그들에게 돌아올 차지는 없었다. <마왈리>둘은 그들이 애타게 바라던 __— 그리고 이슬람교 교리에 따라 당연히 누려야 할—― 동동한 권리를 누리기는 고사하고, 그들의 배타적인 보호자로부터 멸시받으며 온갖 사회적 차별을 감수해야 했다. 또 비무슬림이 내야 했던 인두세는 면제받는 대신 정부 관리들의 강제 징수는 점점 더 혹독해지고 있었다. 이들 <피보호민>들은 무지한 노예가 아니라 아 랍인들도 인정하는 교양인들이었고 개중에는 영향력 있는 지식인충 의 중추적 세력을 형성하며 당시 최고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던 신학과 법률학에 정진한 학자들도 많았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 이제 위험천만한 상황이 벌어졌다. 쉬아파와 카리지파에 대항하여 우마이 야인들은 이슬람이 아닌 법과 질서라는 명분을 그럴듯하게 내세우 려 했다. 억압받는 <마왈리>들의 비통한 호소에 대해 우마이야인들 에게는 칼 이외의 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182) [역주] 마왈리는 이슬람군에 편성되어 아랍인과 함께 전투했는데 마왈리들은 주로 보병으로 싸웠고, 그 대우는 기병으로 복무하는 아 랍인에 비하여 훨씬 떨어졌다. 김정위, 『이슬람 문화사.!J(문학예술사), p. 66 참조.
혁명의 조짐 위에서 <메시아>에 대한 무슬림들의 보편적인 신앙과 그것이 그
들의 종교 • 정치사에 끼친 특이한 영향에 대해 논급하였다. 이처럼 묘한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 염증을 느끼고 시기 적으로 히즈라 1 세기 말에 예상되는 <좋은 시절의 도래>라는 환상 에 빠졌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댜 신비한 예언과 무함마드가 말한 것으로 추정되는 뜻이 모호한 이야기, 그리고 전쟁과 구원에 대한 예언이 난무하였다. 사람들은 정경(正經)이 아닌 위서(僞 書 )를 탐독하며 <마흐디>의 출현을 예고한다는 혼란과 <살육 al- harj>의 시기가 실제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최후의 결판은 짧고도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것이 끝남과 동시에 우마이야조와 아랍의 지배도 끝났다. 정치와 문학 모두에서 페르시 아 민족이 패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여기서는 이 <혁명>이야기를 아주 간략히 기술하고 결과는 새로운 장에서 다루도록 하자. 압바스가의 사람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쉬아파 선교사 (du'a t, 단수는 也 ‘I) 들이 알리와 그의 후손들을 무함마드의 유일한 정통성 있는 후계자로 인 정하는 쉬아파의 지원에 발 벗고 나서는 한편에서 예언자 가문의 또다른 분가〈分家)인 압바스가가 알리파가 애써 이룩해 놓은 것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저의를 갖고 · 싸움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조상인 예언자의 삼촌인 압바스 ‘Abbas 로부터 신중함과 표 리부동한 기질, 세속적 지혜를 이어받았다. 이러한 자질은 장차 정치 적 음모에서의 성공을 확실하게 해주었다. 압바스의 아들인 압둘라 'Alx:lull ah 는 자신의 재능을 신학과 꾸란 해석학에 쏟았다. 그는 <종교 전통을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대들보로- 통하지만 편견이 없 는 유럽학자의 눈에는 단지 교활한 거짓말쟁이일 뿐이다.> 그의 후 손들은 사해 남부에 있는 작은 마을인 후마이마I:Jumayma에서 외견 상으로는 속세에서 완전히 벗어나 은거한 것처럼 보였지만 시리아 의 메카 순례객들이 통과하는 길에 인접한 까닭에 이슬람 세계의
가장 먼 지역과 교류할 기회가 있었다. 쿠라산에서의 압바스인들의 선전 활동 압바스인들은 쿠라산을 중심으로 하여 나름대로 교묘하게 선전 활동을 수행해 나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 멀리 떨어진 쿠라산 지방, 죽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광범위한 동북부 지방이라는 것을 알 만한 재간은 있었다 .183) 이 지방에는 씩씩하고 용맹스러운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우마이야조의 전제 정치하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였고 집은 파괴되었으며, 거의 노예와 같은 생활을 강요받고 있었던 터이므로 구원의 희망을 주는 일이라 면 무엇이든지 닥치는대로 할 참이었다. 더욱이 쿠라산의 아랍인들 은 이미 상당히 페르시아화되어 있었다. 그들은 페르시아인 부인을 두고 있었으며, 바지를 입고 술을 마시며 나우루즈 Na 펴ilz l &1)와 미흐 르간 M 恥g넒 115) 축제를 지내고 있었다. 또 페르시아어는 그들 사이 에서 널리 이해되고 구어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 1!6) 이와 관련된 압바 스가 밀사들의 방법에 관한 흥미롭고 상세한 이야기들이 반 볼로텐 Van V1o te n 의 훌륭한 저술에서 많이 발견된다. I~) 선동 활동을 지휘 한 사령부가 소재하고 있던 쿠파를 출발한 이들은 상인이나 순례자
183) Noldeke, Sketc h es fro m Easte r n Hi st o r y , tran slati on . by J. S. Black, p. 108 이 하.
184) [역주] 페르시아 태양력의 정월 초하루를 가리킨다. 이때 사산조의 페르시아에서는 왕들이 큰 잔치를 열고 백성들은 왕에게 선물을 바 쳤다. 또한 홍에 겨운 백성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서로에게 물을 뿌리 고 불장난을 하였다고 한다. EJ I, Nawl iiz, p. 888 참조.
18.5 ) [역주] 페르시아력의 7 월인 미호르Mi hr 달 16 일(이를 미호르간 M i hr g an 이라고 함)에 시작하여 21 일까지 계속되는 축제이다 . 이 축제 는 가을 절기의 시작과 관계가 있으며 또한 영웅전설과도 관계가 있 댜 죽 페리둔 Fer i dan 이 다하크 D 탸 h 책에게 승리를 거두고 즉위한 후 벌린 잔치에서 연유한다는 설도 있다. 같은 책, Mihrga.rt, p. 485 참조. 186) Wellhausen, Das Arabis c he Reic h , p. 307. 1 얽) Recherches sur la domi na ti on Arabe, I). 46 이 하.
로 위장한 다음,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지적 수준에 맞게끔 교리를 교묘하게 뜯어고치며 지지자를 모았다. 쉬아파와 마찬가지로 <예언자 가문>의 명예를 걸고 활동하였는데 <예언자 가문>이란 표현은 다음 도표에서 보듯이 알리나 압바스의 후손들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모호한 표현인 것이다.
굴넘
쉬아파, 압바스가와 손을 잡다 물론 압바스인들에게는, 무크타르의 반란이 실패로 끝난 이래 많 은 페르시아 <마왈리>둘을 자기 진용으로 끌어들여 막강해진 쉬아 파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긴요하였다(p. 311 참조). 이제 쉬아파의 두 주요 분파인 하쉼파 Ha shmites 죽, 무함마드 븐 알-하나피야의 추 종자들과 예언자의 딸 파띠마까지 이르는 예언자의 후손들을 절대 신앙하는 이맘파Imamites 중에서 하쉼파가 압바스인들과 제휴한 셈 이었다 . 그것은 716 년 사망한 이맘 아부 하쉼이 그의 상속권을 압바 스가의 가장인 무함마드 본 알리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남
은 일은 이맘파를 눈가림하는 일뿐이었다. 따라서 압바스의 밀사들 은 압바스와 알리의 공통 조상인 하쉼의 이름으로 활동하도록 지시 받았다. 이러한 계략을 써서 그들은 쿠라산에서 행동의 자유를 얻게 되었으며 그 지방 총독인 나쓰르 븐 사이야르 N~r b. Sa yy ar 가 우 마이야조 칼리파인 마르완에게 친서를 보내 증원군을 요청하면서 幻만 대군이 압바스의 대리인이던 아부 무슬림에게 충성을 맹세했 다고 알릴 만큼 사태는 진전되었다. 그는 친서 말미에 다음 시구를 덧붙였다. <잿불 아래로 숯이 시뻘갛게 빛나는 것이 보이니 이내 타오를듯하네! 두 막대기를 마주 비비면 불이 붙듯이 말다툼이 싸움이 되는 법, ‘아! 우마이야가는 깨어 있는가 , 잠자고 있는가?' 나는 경악 속에 울부짖노라 .>I 圖
188) Dmawan, ed. by Gu irga ss, p. 356. 189) 같은 책, p. 360, I. 15 이 시는 브라운 교수가 그의 저서 Lit era ry Hi st o r y of Pers i a 에서 완역하였다. vol. i , p. 242.
이 용맹무쌍하고 충성스런 관리가 지은 다른 시 구절에서는 부족 간의 불화로 무력화된 쿠라산 주둔 아랍 병사들에게 <신앙심도 없 고 천하기 짝이 없는 오합지졸>에 대항해 반격해 달라고 간청한다. <‘아랍인들에게 죽음을’―그것이 그들 신조의 전부다 .>I H9) 선전포고 그러나 이러한 경고도 헛되이 747 년 6 월 9 일 아부 무슬림은 메르 프 Merv 근방 시까단즈 S iq ada 떠에서 압바스가의 검은 깃발을 휘날
리고 있었다 . 메르프도 몇달 뒤에 점령되었다. 다마스쿠스 를 향한 혁명군의 의기양양한 진격은 루비콘 Rub i con 강 190 ) 을 건너 로마로 진 격한 시저 Oesar 의 유명한 전투 룰 상기시켜준다.
190) [역주] 이탈리아 북부의 강으로 기원전 49 년 시저가 이 강을 건너 폼페 이 우스 Pom pey와 대 결 했다 .
아부무슬림 아부 무슬림은 혈통이 애매모호한 지유민이지만 그는 분명히 아랍인은 아니었다 훌륭한 귀족 못지 않았다. 뉠데케는 <그는 선동자의 재치와 수단을 선택하는 데 물불을 가리지 않는 파렴치함 과 함께 장군과 정치가의 행동력과 투철한 통찰력, 나아·가 군주다운· 면모까지도 겸비하였다 > 고 말한다. 1911 험상스럽고 잔혹하며 보통 사 람들의 쾌락을 경멸하는 그는 맹종과 열광적인 헌신을 불러일으키 는 능력 ― ~ 역시 이 능력이 뛰어났다 ― ~울 가졌다. 두 사 람의 비교 를 마치기 앞서, 아부 무슬림이 이 가문의 2 대 칼리파인 만쑤르에 의해 배반당해 ― ― ― 무슬림이 만쑤르를 칼리파로 옹립했었 다一 ― 국薛腦되었으며, 그의 살해 동기는 셰익스피어가 브루투스 Bru tus 의 입을 빌어 한 말과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시저도 그럴지 모르지, 그러니 그렇지 못하게 선수를 써야지. 다만 지금으로선 그를 규탄할 만한 명분이 없으니, 우선 이렇게 해야지. 현재의 그가 이대로 성장하면 여하한 극악의 비행을 범할는지도모를 일, 그러니 독사의 알같이 알이 까지면 근성을 나타내서 해를 끼칠 테니까 껍질 채 죽여버려야 한다고`>'g2 )
191 ) Sketc h es from Easte r n Hi st o r y , p. ill.
192) [역주]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 작품 중 브루투스 의 대사.
우마이야인들의 몰락은 그들이 의지해 오던 아랍인들의 배신과 이기주의 때문에 앞당겨졌다. 무다르 Mu c;lar와 예멘 사이의 오랜 불 화가 다시 터져나와 북쪽의 무리는 우마이야조에 충성인 반면, 예멘 의 무리는 다소 공공연히 혁명 세력과 운명을 같이 하였다. 여기서 이 불공평한 경쟁 과정을 고찰할 필요는 없겠다. 아부 알-압바스 알-사파호 AbO al-'Abbas al-Sa ffat:i의 즉위 실의에 빠지고 분열된 아랍인들은 도처에서 쉽게 적의 포로가 되 었다. 우마이야조의 마지막 칼리파인 마르완이 바빌로니아의 자브 강에서 대패를 당하자(7fl.)년 1 월) 이제 모든 것이 끝장났다. 한편 우 마이야가와 적대적인 가문의 가장인 아부 알-압바스는 이미 칼리파 로 옹립되어 있었다 (749 년 11 월). 쿠파의 대사원에서 행한 취임 연설 에서 아부 알-압바스는 스스로를 <피를 흘리게 하는 자 al-Sa ffa}J>19 31 라 칭하였다. 이 칭호는 그의 형 만쑤르나 다른 가족들보다는 아부 알-압바스에게 더 잘 어울리는 칭호였다. 그는 우마이야인들을 무 자비하게 박해하였으며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두려워할 것
193) 배반 교수의 도움으로 필자는 아래와 같은 견해를 피력할 수 있다. 그는 대부분의 유럽학자들이 al-Sa ff ab 를 <피를 홀리게 하는자>로 번역하고 있지만, 그것이 정확한 번역인지에 대해서는 매우 의심스 럽다고 지적하였다. 드 괴제 교수에 따르면, al-Sa ffa}J.는 <관대한> (직역하면 ‘쏟아져 들어오는' 선물)을 의미한다 . 아무튼 이 명칭은 이슬람 이전의 특정 족장들에게 붙혀진 것이라는 점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쿨라브 al-Kulab 의 최초 전투에서 타글리브족을 지휘한 살 라마 븐 칼리 드 Salama b. Kha lid( lbn al-At hir, ed. by Tomberg, vol. i, p. 406 마지막 행)는 전투에 앞서 병사들의 가축물병 mazad 을 <싹 비우게 하였기 때문에> al-S aff ab 로 불리었다고 한다 .(lbn Du-rayd , ed. by Wi lste nfel d, p. 203, I. 16); 또 알-사파호 븐 압드 마나 트 al-Sa ffab b. 'Abd Mana t란 이름의 시인도 눈에 띈다(같은 책, p. 刃 맨 끝에서 두번째 행).
이 없다는 가장 숭고한 약속을 믿고 항복한 이들까지 학살하였다. 소수의 생존자들은 도주하거나 또는 죽은 자나 산 자를 가리지 않 는 1 !1- 분노와 복수의 폭풍이 가라앉을 때까지 간신히 피신하였다. 그 중 압둘 라흐만 ‘Alxlu ' 1-Rabman 이라는 한 젊은이는 북아프리카로 도망가 여러 차례의 위험한 고비를 넘긴 끝에 스페인에 신 우마이 야조를 세웠다. 194) 본서 p. 294 참조. [역 주] <우마이 야조가 전복되 어 미 움받던 ‘압제 자'들의 묘가 더럽혀지고 그들의 시신이 파헤쳐졌다.>
제 6 장 바그다드의 칼리파들 사파호의 죽위 (A D. 749 년)부터 무스타썸 Mus ta‘햏 n 의 죽음, 몽골 족의 바그다드 함락 (1258 년)에 이르기까지 압바스조는 대략 5 세기에 걸쳐 존속하였다. 이 오랜 역사를 3 장에 나누어 기술코자 한다. 첫 장에서는 지면이 허락하는 한, 보다 중요한 문학 및 정치적 발달 과 정에 관해 개관하겠으며, 둘째 장은 이슬람 문학의 황금시대인 동시 대에 활약한 위대한 시인들, 학자, 역사가, 철학자, 과학자에 대해 할애하고, 셋째 장에서는 주요 종교 운동과 종교 사상의 경향에 관 해 기술코자 한다. 혁명의 정치적 결과 칼리파 우마르에 의해 창건되고 우마이야조에 의해 경영된 이슬 람 제국은 독자들도 추측하겠지만 본질적으로 지배 민족을 위한 군 사 조직체였다. 이론상으로는 모든 무슬림들이 평등하다는 것에 의 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사실상 아랍인들만이 지배층이었다. 이는 민 족적 자존심이 권력을 지탱하려는 개인적 이해와 결탁한 특권이었 다. 페르시아의 무슬림들이 통치 참여의 몫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어떻게 주장하고 나섰는지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압바스인 들을 칼리파위에 오르게 만든 혁명은 아랍 제국이 아닌 이슬람 제
국의 출발점이 된다 . 페르시아 민족, 특히 쿠리산· 지방 주민들의 도 움에 크게 힘 입어 세워진 이 새 왕조는 페르시아인들과 아람인들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존립할 수 있었다. 이같은 정책이 영구적으로 성공적이지는 못하였다는 것이 두 민족의 상이한 성격 올 한번쯤 생각해 본 사람에게는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 러나 라이벌인 양대 민족은 만쑤르의 비범한 재능과 바르메시드가 Banreci des ” 의 화해책 덕분에 印년 동안은 그럭저럭 협력해 나갔다. 그러나 그후 바르메시드인들의 멸망으로 동맹체제는 사실상 와해되 었다. 이어 계속된 하룬 알-라쉬드Haii1n al-Ras hi d 의 아들들끼리 의 내분에서 아랍인들은 아민 Amin 편을 들고 페르시아인들은 마 문 Ma'm 血을 지지함으로써 이 두 민족은 각기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갈라서기까지는 그 과정이 매우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두 민족의 종교적, 지적 생활은 이슬람 문명의 도도한 흐 름 속에서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뒤섞이게 되었다. 새도읍지의 선택 이 이슬람 문명의 중심지는 이라크 지방(바빌로니아)으로서 그 유 명한 수도는 바그다드, 죽 <평화의 도시 Ma dinat al-Sal am>였다. 이곳에서만이 압바스인들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우마이야조 의 예속민들이 거주하던 다마스쿠스는 새 도읍지로는 부적합하였다. 우선 압바스인들의 권력의 주요 거점인 페르시아에서 너무 멀리 떨 어져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 국경에서 위험할 만큼 가 까웠다. 바로 이곳에서 우마이야조 후기의 혼란스런 치세 중 이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한 기독교도들의 침략이 시작되었었다 . 또한 장 차 이슬람의 정복사업이 비잔틴에 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서쪽으로 진출하는 것보다는 동쪽의 중앙아시아 쪽으로 진출해야 된다는 것 1) [역주] 8 세기경 바그다드에서 권세를 떨쳤던 귀족. 본서 pp. 361-362 참조.
이 명백해지기 시작하였다 . 말하자면 시리아의 고원지대에 위치한 다마스쿠스는 지중해를 지배하며 서부 지향적인 것이지만 그것에 대신할 새 수도는 동방 지향적이고 페르시아에 가까우며 교역의 필 요상 바다와 수로에 의한 연결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모든 것 울 감안할 때 유프라테스 강이나 티그리스 강 유역의 한 지점이어 야 하는데 압바스인들은 지체 없이 바그다드를 선택하였다 >. 2)
2) G. Le Str an g e, Bagh dad under the Abbasid Cali pln te , p. 4 이 하.
바그다드의 건설 여러 지점을 예의 검토한 만쑤르 칼리파는 티그리스 강 서안에 있는 < 하느님이 내려 주신 것(또는 ‘하느님이 세우신 것’)>이라는 뜻 울 가진 한 자그마한 페르시아의 촌락을 도읍지로 확정하였다 . 만쑤 르가 손수 첫 벽돌을 쌓았으며 공사는 여러 나라에서 모아 온 석공, 건축기사, 측량기사들에 의해 그의 진두 지휘 아래 놀랄 만한 속도 로 진척되어 그가 계획한 <원형 도시>는 4 년이라는 단기간에 사실 상완공되었다. 압바스 통치의 전제적 성격 제국의 중심지를 바그다드로 옮김에 따라 정치제도에도 대대적인 변화가 왔다. 우마이야인들이 아라비아의 거친 귀족정치의 지배지들· 에 불과했던 데 비해 이들의 후계자들은 페르시아인들이 다리우스 Dari us3 ) 와 크세르크세스 Xerxes 4 ) 왕 시대 이후 친숙해진 고대의 동 양적 전제정치의 형태로 복귀하였다. 충성심을 믿을 수 있는 쿠라산 출신의 강력한 호위군에 에워싸여 압바스인들은 앞서 사산 왕조 군 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피지배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절대 권력으 로 다스렸다. 제복이나 장식적인 옷을 입은 관리들이 죽 늘어서 있
3) [역주] 옛 페르시아의 왕(기원전 558?-486?). 4) [역주] 옛 페르시아의 왕(기원전 519?-465).
고 그 밖에도 칼리파의 친 척 과 자유민들이(그 집안의 여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모여든 궁전에서는 페르시아 풍이 모방되었다. 궁중 관리 들 중 중요한 인물은 『 아라비안 나이트 』 에서도 중요한 역할로 등장 하는 대신 V떠 er 과 사형 집행인이다. 대신 대신의 직제는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드 괴제 교수에 따르면 단어 자체는 아람어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 51 압바스 시대에 이 칭호를 맨처음 가진 사람은 <사파흐>의 대신 아부 살라 마 Abu Salama 였다. 그는 <와지르 알 무함마드 Wa ztr Al Muha- rnmad >, 즉 <무함마드가의 대신>이라 불리었다. 대신의 책무는 막 강한 군주와 백성들 간의 중재자로서의 역할과 국사를 다루는 데 군주를 보좌하며 특히 무엇보다도 그의 기분을 맞추어 주는 데 있 었다. 그는 절대적 권력을 휘둘렀지만 온갖 수난을 겪어야 했으며, 언제 토굴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될지 또는 왕좌 옆에 놓여 있으면서 교수대로 쓰이는 둥그런 가죽 카페트 <나뜨아 Nat ‘ > 를 관할하는 무 시무시한 사형 집행관에 의해 눈깜짝할 사이에 처형되는 신세가 될 지 알수 없었다 .
5) 드 괴제 교수는 혼쾌히 다음 참고 문헌을 필자에게 제공해 주었 다 :Taban, ii, 78, I. 10 에서는 지야드 Z iy ad 가 무아위야의 <와지르 wazir>로 불려지고 있다 .; Ibn Sad, iii, 121, 1. 6 에는 예언자의 <와지 르>, 아부 바크르라는 구절이 보인다. 이 단어는 이슬람 이전 시에서 도 둥장한다 (Ibn Qu ta yb a, K. al-S hi누 wa al-Shu'a r a, p; 414, 1. 1). 드 괴제 교수에 따르면 압바스조의 칼리파들이 <와지르>의 칭호를 그 전 에 <서기 Ka ti b> 로 불리던 대신에게 부여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 처음에는 단순히 <조력자>, <추종자>였던 아랍어의 <와지르(직역하 면 정을 진 사람')>는 후에 사산 왕들 밑에서 <공식 서기관 Dap ir> 의 기능을 잇게 되었다.
압바스조 역사의 양대 시기 압바스조의 역사는 두 시기로 구분된다. 대략 100 년 (754-847 년) 동 안의 찬란하게 번성하였던 시기로서 만쑤르로부터 마흐디, 하룬 알 라쉬드, 마문, 무타쌀 와씨끄 Wa thiq에 이르는 치세 기간이다. 또 한 시기는 무타와킬 (847-861) 로 시작하며 전자의 네 배가 넘는 기간 으로서 잠깐 호전의 기미가 있다가 급속히 구제 불능의 부패 속에 빠져버린 쇠퇴의 시기이다 .6)
6) 이러한 시대 구분이 편리하며 보편적인 근거에 바탕을 두고 정당화 된다. 엄밀히 정치적인 의미에서 쇠퇴의 시기는 이보다 30 년 앞서 마 문 칼리파 (813-833) 때에 시작된다. 아부 알-마하신 Abo al-Maba. s in (14 69 년 사망)은 칼리파 제도의 쇠퇴를 902 년 무크타피 M uktafi의 죽위 때 로부터 로 계 산한다 (al-N uj am al-Z a hi.ra , ed. by Juy n boll, vol. ii , p. 134). [역주] 니콜슨의 이러한 시대 구분은 순전히 압바스조에 대한 정 치사적 시대 구분이다. 물론, 압바스조의 문학은 동시대의 정치상황을 고려하여 시대 구분이 이루어져야 한다. 문학사가들마다 압바스조의 시대 구분의 방법이 다른데 이집트의 아랍 문학자인 샤우끼 다이프 Shawq i: ])a yf는 압바스 문학올 <제 1 기 압바스 시 대 >(750-846 년), <제 2 기 압바스 시대 >(846-944 년)로 구분하고 그 후의 문학을 <군소국가 들과 토후국 시대 문학>으로 분류하였다 . 또 깁G i bb 은 황금 시대 (750- 1055 년), 은 시대 (1055-1258 년)로 나눈 다음 황금 시대를 다시 제 1 기 (750-813 년), 제 2 기 (813-945 년), 제 3 기 (945-1055 년)로 나누었다. 송경숙 의의 『 아랍 문학사』에서는 정치·문화적으로 페르시아적인 경향이 뚜렷 한 제 1 기 압바스 문학 (750-846 년), 칼리파 무타씹 이래 터키인들의 영 향력이 강했던 제 2 기 압바스 문학 (846-946 년), 중앙집권의 약화로 압바 스 제국이 군소국가로 분열된 제 3 기 압바스 문학 (946-1258 년)으로 세 분하였다.
만쑤르 치세 (754-775) 아부 자파르 Abu J a' fa r 는 그의 가족들이 대개 그러했던 것처럼 잔인하고 믿을 수 없는 인물이긴 하지만 압바스조가 배출한 통치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통치자일 것이다 .71 그는 칼리파위를 차지하기
7) 뉠데케의 저서 Sketc h es from Easte r n H i s t o ry(블랙J. S. Black 번 역) 중에서 논문 Ca liph Man$11r, p. 107 이하 참조.
위해 일대 격전을 치러야 했다. 파띠마계라는 점 때문에 예언자의 진정한 후계자로 자부하던 알리파는 찬탈자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무방비한 틈을 이용해 그를 급습, 곤경에 처하게 하였다. 그로 인해 만쑤르는 7 주 동안이나 공식 기도회에 참가하는 때를 제외하고는 옷을 갈아입지 못하였다. 그러나 알리파는 또 다시 기 회를 놓치게 되었다 . 알리파의 지도자들로서 <깨끗한 영혼 al-N afs al- Zakiyya>이란 별명으로 알려진 무함마드와 그의 동생 이브라힘 이 전사한 것이다 . 마흐디와 하룬의 치하에서 알리 가문의 사람들이 계속 나섰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페르시아에서의 반란 압바스인들은 강력한 민족 감정과 마즈닥M azdak 이나 조로아스터 교 같은 이슬람 이전의 종교가 뒤섞여 있는 동부 페르시아에서 완 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 특히 이 저항은 마기교도Magi an 인 신바드 S inbadh(古-冠년), 우스타즈시스 Usta dhsi s ( 7e6-768), <쿠라산의 가 면 쓴 예언자> 무깐나아 Mu q anna‘(7OO-7OO) , 쿠라미족 kh urramit.e의 바박 Babak(816-838) 등이 연속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더욱 기세를 올렸다 .8)
8) 브라운 교수는 그의 Lit era ry Hi st o r y of Persia , vol. i, ch. ix에서 이들 과격 쉬아파 분자들에 대해 홍미로운 기술을 하고있다.
만쑤르가 마흐디에게 준 충고 만쑤르는 그의 아들 마흐디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부 압달 라 Abu ‘Abdall 曲야, 네가 사람들 모여 있는 곳에 가면 항상 신학 자가 있는가를 살피고 그와 얘기를 나누도록 하여라. 이는 무함마드 븐 쉬하브 알-주흐리 M 曲 arm 寧i b. Sh ih.ab al-Z uhri가 ‘하디쓰란 단어는 남성이다. 오로지 남성다운 남자들만 그것을 좋아하며 유약 한 남지들은 그것을 싫어한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진
리이댜 >9 1
9) Taba ri, ii~ 404, I. 5 이 하.
만쑤르와시인 언젠가 한 시인이 당시 후계자로 지목되던 마흐디에게 와서 그는 마침 라이이 Ra yy !O I 에 있었다-그를 칭송하는 시를 낭송하 였다. 왕자는 그에게 2 만 디르함을 주었다. 그때 라이이에 있던 파 발꾼이 만쑤르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자 그는 아들에게 편지를 띄 어 그렇게 돈을 낭비 한데 대해 <그에게 문간에서 1 년간 기다리게 한 다음 炫i 디르함을 주었어야 했다>고 꾸짖은 다음, 그 시인을 붙잡아 그에게 데려오도록 하였다. <네가 아무 생각도 없는 아이에 게 가서 그를 감언이설로 꾀었느냐?> <신이여, ‘신자들의 지도자’를 굽어 살피소서. 예, 저는 뜻 모르는 관대한 젊은이에게 가서 그를 감언이설로 꾀었으며 그는 감언이설에 넘어갔습니다.> <그럼 그를 찬양한 시를 읊어 보아라.> 시인은 순순히 그의 말에 따르면서 마 지막 시구에서 만쑤르를 찬양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 칼리파가 외쳤 다. <훌륭하도다! 하지만 2 만 디르함의 값어치는 아니잖아. 돈을 내 놓아라!> 시 낭송이 끝나자 그는 炫i 디르함을 상으로 주고 나머지 금액을 몰수하였다.11)
10) [역주] 고대 메디아 M edi a 왕국의 도시. 테헤란 납부 5 마일쯤에 유적 이 남아 있다. 이 도시의 지리적 중요성온 산악지대와 사막 사이의 비옥한 지대에 위치해서 이란의 동서롤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 역할 을 했다는 점 이 다 . El1, Rayy , p. 1104 참조.
11) Taba ri, iii, 406, I. 1 이하.
1::1~르메시드 7 卜 서로 대립 관계에 놓여있던 분파들인 알리파와 페르시아의 과격 파, (또 여기에 덧붙인다면) 카리지파에 대한 <화해>의 정책은 대체 로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이 정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칼리파들은
고대 페르시아의 명문(名門)인 유명한 바르마크가Barrnakit.e―_―이 를 바르메시드가라고도 한다-로부터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 마 스우디에 따르면 ,12 ) 바르마크 Bannak 는 원래 발크에 있는 마기교의 큰 배화교당 고위 성직자 Sa di n 의 칭호였다고 한다.
12) Mas'odI, Muroj al-Dhahab, ed. by Barbie r de Mey na rd, vol. iv, p. 47 이하 .
야호야 본 칼리드 Y al:ly a b. Kh 하i d 이들 고위 성직자들 중 어느 한 사람의 아들인 칼리드Khali d 는 ―따라서 그와 그의 후손들은 바르마크가의 가문으로 불리게 되 었다一—사파흐와 만쑤르 밑에서 정부의 요직을 맡았다 . 칼리드의 아들인 야흐야 Ya }J.y a 는 하룬 알-라쉬드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어 린 왕자가 칼리파가 되자 그를 총리 대신 Grand VJ .Zi er 으로 임명하 였다. 칼리파가 말했다. <나의 보호자시여, 제가 왕좌에 오른 것은 당신을 따라다니는 축복과 행운 때문이며 또 당신의 훌륭한 경영 때문입니다 .13) 그러므로 당신께 국정의 감독을 맡기겠습니다.> 그런 다음 그에게 인장을 박은 반지를 건네주었다. 야흐야는 지혜롭고 마 음씨가 고결하고 말씨가 우아한 것으로 이름이 났다 . 그의 전기학 자에 따르면 ,14) 그는 진정 페르시아인답게 철학적 논쟁을 줄기면서 도―~ 위해 자유 사상가들과 저명한 이교도들이 그의 집에서 자주 회동하곤 하였다-외형상으로는 경건한 신앙심을 철저히 견지하였다. 일반적으로 압바스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 혼자 있으면 서 사색에 잠겨 있을 때든간에 옷 소매에 자랑삼아 이슬람의 공식 기장을 달고 다녔다고 한다. 야흐야가 그의 아들 파들 Fa 대을 위해 지은 다음 시는 과연 그다운 시이다. 15)
13) 칼리파 하디가 아들 자파르를 하룬 대신 후계자로 선포하고 싶어하 자 야흐야는 그러한 결정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그로 하여금 단념케 하였다 (al-FakhrI, ed. by Derenbourg, p. 281). 14) Ibn Kha llika.n, 드 슬 란의 번 역 서 , vol. iv, p. 105.
15) Mas'adI, Mur 떠 al-D fvl따 vol. vi , p. 364.
<한창 젊을 때에 명예를 추구하며, 노력을 아끼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이 네 곁에 없어도 참고 견디어라. 그러나 밤의 장막이 서서히 다가와 온갖 악이 어둠으로 덮어 가려지면, 그때는 기쁜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라. 현명한 사람의 하루는 밤에 시작되노라 . 금욕적인 생활로 존경받는 이들이 밤이면 이상야릇한 일을 시작하누나. 방의 음침한 장막이 그들에게 드리워지면 그네들은 해질 녁부터 해 뜰 때까지 마냥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 . 바보가 아니고선, 염탐꾼과 홈 잡기 좋아하는 적에게 그 누가 자신의 쾌락을 드러내겠느냐?> 바르메시드가의 멸망 (003 년) 17 년 동안 야흐야와 그의 두 아들 파들과 자파르는 하룬의 두터 운 신임속에 국정을 다스리는 실세였다. 적어도, 여러 갈래로 설명 할 수 있는 동기에서 칼리파가 바르메시드가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기로 결심할 때까지는 그러하였다. 이 이야기는 너무 잘 알려져 있 으므로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16) 자파르만 처형되었으므로 그가 특 히 칼리파의 분노를 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같은 불행을 그가 하룬의 누이인 압바사 'Abbasa 와 벌린 로맨틱한 연애 사건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있는데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17) 하룬 자신은 이들 위대한 페르시아 호족들의 재치 있는 수완과 끝없는 관대함, 문학에 대한 아낌 없는 후원에 힘입어 자신의 통치가 불후의 명성올 발하
• 16) 예컨대 New Pluta rch Se ri es 에 있는 팔머 E. H. Palmer 의 Haroun 17)A Alra sMchui ldl,e rp, . D81e r 이Is 하lam를, 참vo조l. .i , p. 481 이하 참조.
게 된 데 대해 이들에게 크게 빚지고 있음을 뒤늦게나마 인정하였 던 것 같다 . 그 후 누가 자기 면전에서 바르메시드인들을 욕하면 , 후따이아의 시롤 인용하여 반박하곤 하였댜 1 81
18) Ibn Kha llikan, 드 슬 란 번 역 , vol. iv, p. 112.
<헐뜯는 자들아, 너희들은 애비의 애비도 없는 놈들이냐 !19 1 그만 두거라, 그렇지 않으면 애비 없는 공백이나 메워라 . >
19) 칙역하면, 저주의 공통 형식인 <너는 애비도 없는 놈!>이다.
하룬 알-라쉬드 (7 86-00:l) 하룬은 그가 정통파 무슬림이며, 도량이 넓고, 비잔틴 황제 니케 포루스Nicep horus 20) 에게 승리를 거두었으며, 마지막에 말하기는 하 지만 가장 중요한 점으로 그의 재위시 문학이 가장 꽃 피었다는 점 에서 다른 어느 칼리파보다 훨씬 평판이 좋았다. 동방의 샤를마뉴 Charlem agne 대제 2” 로서 그의 이름은 『 아라비안 나이트 』 의 황홀한 이야기를 통해 전 유럽에서 유명해졌다. 이슬람 역사를 연구하는 학 자라면 <명군(明君) 하룬 알-라쉬드th e go od Haroun Alrasc hid>가 사실은 불성실하고 성급한 전제 군주였으며, 온후한 성격에 음악과 문학을 진정 애호했다는 ___ 항상 그러했던 것은 아니지만――-사 실만으로 그를 위대한 군주나 착한 사람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금방 알아 차릴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그가 <후원>이라는 고상한 술책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시인인 아부 누와스 Ab o. Nuwas, 아부 알-아타히야 Ab o. al-' At ahiyya, 디빌 Di 'bil, 무슬림 븐 왈리드 Mu slim b. Wa lid, 압바스 븐 아호나프 ‘Ab函 b. 서)Ilaf , 음악가인 모술의 이브라힘 Ib rahim과 그의 아들
20) [역 주] 동로마 제 국 황제 (?-811, 재 위 802-811).
21) [역주] 칼 대제 Karl der Grosse: 서로마 제국 황제 (742-814). 로마 고전 문화의 부활을 장려하여 유럽의 역사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프 랑스에서는 샤를마뉴로 불린다.
이스하끄 Is baq, 언어학자 아부 우바이다.Abii ‘Ubayd a, 아쓰마이 도 ‘I, 키사이 Ki책’i, 설교가인 이븐 알-삼마크 Ibn al-Sa mmak, 역사학자 와끼디 Wa q迎-이는 바그다드의 하룬 알-라쉬드 주위 에 모여든 몇몇 화려한 재사〈才 士 )들의 이름을 든 것뿐이다. 아민과 마문 (OC9- fil3년) 바르메시드가의 몰락은 그들이 덮어버리려고 애썼던 종족간의 적 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으며 칼리파위 계승에 대한 하룬의 근시안 적인 정책으로 불화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하룬은 장성한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의 부인이자 사촌인 주바이다 Zura y da 와의 사이에 난 아민과 페르시아 노예 출신의 부인 사이에 태어난 마문 이었다. 칼리파위는 먼저 아민에게 물려 주고 형의 뒤를 동생인 마 문이 잇기로 하였지만 제국의 영토는 둘 모두에게 나누어 주기로 하였다. 아민은 이라크와 시리아를, 마문은 동부지방울 물려받기로 하였다. 특히 동부지방의 주민들은 같은 혈통의 통치자를 기꺼이 받 아들일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 하룬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시 작된 대권 쟁탈전은 주로 페르시아 대 아랍의 대결이었으며 마문의 승리로 바르메시드인들의 복수는 충분히 한 셈이었다. 마문의 이단(異端) 새 칼리파는 정통파 무슬림이 아니었다. 그는 알리파인 알리 븐 무사 븐 자파르 알-리다 ‘Ali b. Mo.sa b. Ja' fa r al- Ri oa롤 후계자 로 지명할 만큼 쉬아파를 편애하였는데 이 때문에 칼리파의 집안 식구들이 고립되고 칼리파 자신도 일시적이나마 물러나게 되었다. 또한 그는 무타질라파의 견해를 수용하고 이룰 실행하기 위한 종교 재판소를 세웠다. 그러므로 순니파의 역사가인 아부 알-마하신 Abu al- :Mal;iasin은 마문이 저지론 세 가지 중요한 이단적 교의를 다음 과 같이 제시하였다. (1) <녹색 옷의 착용 labs al-Kh 떠ra> zz) 과 알
22) 검정색이 압바스가의 상징색인 반면 녹색은 알리파의 상징색이었다.
리파의 비위를 맞추고 압바스가를 홀대한 점 (2) < 꾸란의 창조설 al-qa wl bi- K halq al- Qur'an>을 지지 (3) 쉬아파사이에서 널리 행 하여지는 무절제한 결혼 형태인 <무트아 rrru t'a> 23’ 의 공인 241 마문이 문학과 학문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또 어떤 성과를 낳았 는지는 차차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찬란한 치세 동안에 정치 적 쇠퇴의 불길한 징조가 나타난다는 데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23) [역주] 일종의 계약 결혼으로서 일정 기간 동안 단지 성적 쾌락만을 추구할 목적으로 행하여지는 결혼이다 . 24) gl -N 떠 am al-Za. hira , ed. by Juy n b oll, vol. i, p. 631 .
독립 왕조의 발흥 햏년, 마문 휘하의 장군 중 하나로서 쿠라산 총독으로 임명된 따 히르Tahir는 금요일 설교 khu t ba 에서 관례상 언급되던 칼리파 이름 을 생략하였다.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칼리파에 대한 충성을 천명하 면서도 실제로는 독립적인 따히리조r-ahiri d 를 세웠다. 따히르는 칼 리파들의 권한이 약화되는 톰을 타 왕국을 분할해 가진 일련의 야 심적인 총독이나 대담한 모험가들 중의 최초의 인물에 불과하였다. 더욱이 이라크의 무슬림들은 전통적인 호전적 기질을 상실한지 이 미 오래 되었었다. 그들은 학자나 상인으로서는 훌륭하였지만 군인 으로서는 형편없었다. 터키족용병의 채용 그리하여 마문의 후계자인 칼리파 무타씹 (833-842 년)은 주로 트랜 스옥사니아 출신 터키족 병사로 근위대를 구성함으로써 이들에게 스스로 포위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동시에 그는 궁전을 바그다드에 서 티그리스 강 상류 OO 마일 이상 떨어져 있는 사마라요 mm 학로 옮겼는데 궁전과 병영이 함께하는 거대한 도시로 ___ 동방의 베르
사유 Ver saill es 궁전이라 할 만하다 ― ~급속히 발전하였다 . 25 1 여기 서 압바스조의 초기 번성기에 대한 요약을 마치겠다 .
25) 궁전은 오육십 년간 (836-892) 사마라에 남아 있었다. 사마라의 본래 철자는 Surra-man-ra'd 로서 <방관자의 기쁨>으로 의역할 수 있다.
칼리파위의 쇠퇴 이후 4 세기 동안은 여러 칼리파들이 어느 때보다도 들쑥날쑥하였 다. 대체로 그들의 권위는 유명무실하지는 않더라도 불안한 것이었 다. 한편 제국의 지방주에서는 군소 왕조들이 일어나 겨우 명맥을 유지해 나가거나,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여 이슬람 문화의 전통을 계 속 이어 나갔다. 그리하여 수 세대에 걸쳐 이같은 상황이 계속됨에 따라 평화롭고 안정적인 통치의 시대에서 무질서와 유혈 사태가 난 무하는 시대로 돌아갈지도 모르게 되었다. 여기서 이들 지방에서 일 어난 군소 왕조들에 관해서는 주로 정치적 국면에 국한하여 견해를 피력하고자 하며 동시대의 문학, 종교적 양상은 추후 보다 자세히 고 찰 하기로 한다. 압바스조 2 기 (847-1258 년) 무타와킬 (OO 융 31 넨과 그의 칙계 후겨 k 潛의 통치는 집정관 Prret.orian 통치의 전형적인 특징을 모두 보여 준다. 칼리파의 선출과 폐위를 좌지우지하며, 소요와 암살로 자신들의 탐욕스러운 요구를 강력히 주장하고 나선 터키족 군인들에게 거액의 돈이 지급되었다. 짧은 기 간 동안 (869- 初 7 년), 비록 유능하고 정력적인 무흐타디 Muh tadi와 그 의 뒤를 이은 네 명의 칼리파 치하에서 사정이 좀 나아지긴 하였어 도 이내 터키인들이 다시 우위를 점하였다. 이때부터 모든 실질적인 권력 이 군 총수인 총사령관Arnir a1-Urrara 에 게 집중되고 그 동안 전권을 행사하던 칼리파는 겨우 자신의 이름이 주화에 주조되거나 주일 예배에서 의식을 이끄는 형식적인 명예에 만족해야 했다. 터키
족 근위대의 공포 정치는 945-l Cffi년까지 바그다드를 지배한 페르 시아 왕조인 부와이호조 Buwa yhi d 에 의해 분쇄되었다 . 그 후 뚜그 릴 베그 T ugluil Beg의 수도 입성과 함께 시작된 셀주끄 Sel j u q조의 통치는 산자르 Sanj ar(1157 년 사망)에 이르기까지 꼭 일세기 동안 계 속되었다. 1258 년 바그다드를 점령한 몽골족은 웃음거리에 불과하던 가련한 칼리파의 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초기 압바스 시대의 왕조들 스탠리 레인-풀 S tanl e y l.an e-Poole2 61 이 이슬람 왕조에 대한 그의 훌륭한 기술에서 고찰하였듯이 <칼리파들의 제국이 가장 넓울 때는 대서양에서 인 더스 강까지, 카스피 해에서 나일 강 상류까지 뻗쳤다 . 너무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으므로 제국의 통일 상태가 그리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 분열을 향 한 첫 걸음은 花 8 년 스페인에서 시작되었다. 그곳에서는 억압받던 우마이야 가의 일원인 압둘 라흐만이 압바스 칼리파로부터 분리, 독립 왕조를 선포하 고 압바스 칼리파와는 관계를 끊었다. 30 년 후 칼리파 알리의 증손자이며 따 라서 압바스인들과 우마이야인들과는 모두 사이가 나쁜 이드리스 I dri s 가 모 로코에 알리조를 세웠다. 아글라브조Aghl ab i d 총독이 까이라완Qayra wan 을 손에 넣게 되자(앉 n 년) 칼리파는 북부 아프리카 해안의 나머지를 사실상 잃 게 되었다 .>I
26) [역주] Sta nley Lane-Poole(l832-1895) :영국의 이집트학자. 영국 박 물관의 화폐부장 역입 영국 박물관에 소장된 동양 화폐를 정리하여 그 자료를 저술로 남겼다(1 0권). 또한 니콜슨이 역사학도의 필독서로 추천 한 바 있는 『이슬람 왕조 The Mommmadan D y nas ti es 』 를 지었다.
力) [역주] 같은 책, p. 6.
제 2 기의 왕조들 부패한 칼리파 제국을 대신하여 들어선 수많은 왕조 중에서 가장 중요한 몇몇 왕조를 문학 및 종교적 관심에 따라 특별히 주목해 본 다면 먼저 페르시아를 꼽을 수 있다 .28) ITT2 년, 당시 따히리조가 점령
28) 이 들 왕조에 대 한 필자의 기 술은 부득이 가장 간단하고 최 소한의 것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풍부한 자료는 브라운 교수의 Lit era ry Hi st o r y of Pers i a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싸파리조와 사만 왕조에 대해 서는 vol. i, p. 346 이하를, 파띠마조 Fa t:irna ds 는 vol. i, pp. 391-400 및 vol. ii, p. 196 이하에서, 가즈네브조 Ghazne vi ds 는 vol. ii, chap. ii 를, 셀주끄조는 역 시 2 권의 chaps iii-v 까지 롤 참조하도록 한다.
하고 있던 쿠라산은 싸파리조$affari ds 의 창건자인 <구리 세공인 al- $aff泣>이란 별명의 야꿉 븐 라이쓰 Ya‘ qub b. La yth의 수중에 넘어갔다. 싸파리조는 사만조 S arnani ds 에 게 넘어가기 전까지 印년 동안 페르시아 대부분의 지역을 지배하였다. 人!-DJ-조 (874-- -939) 사만조는 트란스옥사니아에 권력의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10 세기 전반부에 사실상 페르시아 전역이 이스마일과 그의 유명한 후계자인 나쓰르 N 益 r 2 세와 누흐 N ol). 1 세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들 왕은 이미 시작된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민족문학의 발전을 장려하 고 조장하였을 뿐 아니라―-여기서는 맹인 음유시인인 루다기 Ro.dagi와 시인 다끼끼 Da qiqI ( 그의 페르시아 서사시의 단편이 후에 피 르다우시 F ird awsI 의 『샤흐나마 S hNrnlJml(왕의 서)』에 포함됨), 우리에 게 전해 내려오는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가장 오랜 산문인 따바리의 위대한 역사서를 축약한 만쑤르 1 세의 대신 발아미 Bal‘ arni의 이름 을 상기해 두는 것으로 족하다―――또한 아랍어를 사용하는 것을 더 좋아한(대부분 페르시아 계통이지만) 시인들과 학자들에게도 똑같 이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그리하여 유명한 아부 바크르 알-라지 Abo. Bakr al- Razi(라지 Rhazes) 는 사만왕 아부 쌀리흐 만쑤르 븐 이 스하끄 Abu $alilJ. M 印 sor b. I 中印에 게 그의 후의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서 『만쑤르의 서 al-Kit ab al-Man 額따라 명명한 의학서를 헌정하였다. 위대한 의학자이며 철학자인 아부 알리 븐 시나Abo. ‘AlI b. Sma( 아비센나 Av i cenna) 는 같은 이름으로는 두번째인 누흐
No lJ 왕 @6- 얽 7) 에 의해 부카라에 소환되어 왕궁 도서관을 방문한 다음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나는 그곳에 있는 많은 방마다 책 상자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빽빽이 차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방은 아랍 언어학과 시에 관한 책들로 할당되어 있었고 또 어떤 방은 법 률 서적들로 채워져 있었다. 또 각기 학문 분야마다 독립된 방울 갖 고 있었다. 나는 고대 그리스 저자들의 목록을 검토하고 필요한 서 적을 찾아보았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하고 나 자신도 전혀 본 적이 없는 책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있었다 .>29 1
29) Ibn AbI U$ayb i'a , Tabaqa t al-At ibb ll, ed. by A. M 비 ler, vol. ii , p. 4, l. 4 이하 . 아비센나는 이 당시 약관 18 세였다.
부와 01 흐조 (932-1055) 사만조의 세력은 급속히 절정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10 세기 중반 경에는 사만 조의 영토가 쿠라산과 트란스옥사니아에 국한되고 서 부 페르시아에는 그들 대신에 부와이호조가 들어섰다. 카스피 해의 남부 해안을 따라 가로 놓여 있는 산악지대인 다일람 Da y lam 의 족 장인 아부 슈자아 부와이호 Abu Shuj a' Buway h 는 동시대 역사에 서 흔히 마주치게 되는 운 좋은 군인 중 한 사람이였다. 그의 활기 넘치는 세 아들 알리와 아흐마드, 하산도 똑같이 모험적인 사업에 뛰 어들어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 그리하여 13 년 동안에 걸쳐 파르 스 Fars 와 쿠지스탄 Kh uzi s tan3 0) 지방울 점 령하였을 뿐 아니라 945 년 에는 다일람족의 군사를 이끌고 바그다드에 입성하였다 . 이들은 무스 타크피 Mus takfi 칼리파로부터 이마드 알_다울라 ‘Imad al-Dawla, 무 잇쯔 알-다울라 Mu' iz z al-Dawla, 루큰 알-다울라 Rukn al_Dawla 란 칭호를 수여받고 최고 사령관직을 떠맡았다. 향후 수백 년 동안 페르시아와 이라크를 다스린 이 가문의 왕 중에서 가장 유명한 왕
30) [역주] 이란 서남부, 자그로스 Za g ros 산맥의 남쪽, 페르시아 만에 면 한 주(州).
은 아두드 알-다울라 ‘Ac;lud al-Dawla 이댜 이븐 칼리칸에 따르면, 아두드 알-다울라만큼 광대한 제국을 차지하고 그렇게 많은 왕과 왕국을 지배한 부와이호인은 없었다고 한다. 무타납비 Mu tanab回룰 포함한 당대의 주요 시인들은 쉬라즈 Sruraz 에 있는 그의 궁전을 찾 아가 훌륭한 송시로 그를 찬양하였다 . 그는 또한 바그다드에 비마리 스탄 알-아두디 Bu nari s 臣 n al-‘ Ac;l u 야라는 큰 병원을 세웠는데 이 는 오랫동안 의학교로서 명성을 날렸다 . 부와이흐가의 대신들은 부 와이호조의 문학적인 명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루큰 알-디울러·의 대신인 이븐 알-아미드 Ibn al 一‘Amid 는 언어학과 서간문 작성에 있어 그의 동시대인들을 능가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제 2 의 자히 즈J ab 認>라 불리었으며 흔히 하는 말로 <서간문의 기술은 압둘 하 미드 ‘Alxlu '1- I:Jarni d 로 시작하여 이븐 알_아미드로 끝난다>고 한 댜 3 이븐 알-아미드의 친구이며 무아이드 알-다울라 Mu' ayy id al-Dawla 와 파크르 알_다울라 Fakhr al-Dawla 의 대신인 싸히브 이 스마일 븐 압바드$abi b Ismi ‘1 b. ‘Abbad 는 훌륭한 학자였지만 학 자로서보다는 많은 학자와 문인들을 후원한 후원자로서 더 명성이 높았다 . 후자의 관점에 있어서는 아부 나쓰르 바하 알-다울라 Abu Na ;,r 寧' al-Dawla 의 총리인 사부르 븐 아르다쉬르 S 曲証 b. Arclas hir가 싸히브와 우열을 다투었다. 싸히브를 찬양한 사람이 너 무 많아 싸알리비 Tha 넓i bI 는 『야티마 Ya tirra』의 장(章) 하나를 모 두 할애하여 그들을 다루고 있다. 그가 바그다드의 카르크 Karkh 지 역에 많은 기금을 기부해 세운 학술원은 학자들이 즐겨 찾아 오는 곳으로 그 회원은 마치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의 평의원이 갖 는 특권을 똑같이 누렸던 것 같다 .32) 31) 압둘 하미드는 우마이야조의 후기에 활약하였다 . Ibn Kha llika.n, 드 슬란의 번역, vol. ii, p. 173;Mas'od. I, Mur 떠 al-Dlr lJr:zb, vol. vi, p. 81 참조 . 32) Margo lio u th , Lett er s of Aba al-'A l a al-Maarrr, p. 24 의 서문 참조.
부와이흐인들은 대부분의 그 지방 주민들처럼 종교가 쉬아파였다. 아부 알-마하신의 연대기 중 히즈라 341 년 (=~2 년)의 항목에 다음 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부와이호인들의 쉬아파 교리에 대한 열정 <이 해에 대신인 무할라비 al-M 따터 lab i는 윤회 tanas ukh 사상을 가진 몇 사람을 체포하였다. 그들 중에는 알리 븐 아비 딸립의 영혼이 자신의 육체 에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젊은이와 파띠마의 영혼이 자기 몸 속에 살고 있 다고 주장하는 여인이 끼어 있었다. 또 한 남자는 가브리엘 천사로 행세하 였다. 매질로 체형을 가하자 예언자 가문과의 관계를 내세워 변명을 하였고 이에 무잇쯔 알-다울라는 그들의 석방을 명하였다 . 이는 쉬아파에 대한 그 의 애착 때문이었다. <부와이호조 사람들이 쉬아파이자 라피다파Rafidites 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라고 저자인 아부 알-마하신은 결론짓고 있 다 .331
33) Abu a1-Ma ].1a sin , al-Nu jam al-Zahir a , ed. by Juy n boll, vol. ii, p. 333. 원 래 의 라피 다파는 칼리 파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의 정 통성을 거부한 (r af a c;l a) 분리주의자들이었지만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쉬아파 와 동의어로 쓰인다.
7 ~즈네브조 Ghazne vi ds(97 6- 1186 년) 부와이흐조와 동시대인 세 왕조, 죽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네브조와 시리아의 함단조, 이집트의 파띠마조에 대해 언급해야겠다. 가즈네 브조의 창건자 사부크타긴 Sab uktagin은 터키족 출신 노예였다. 양 8 년, 가즈나 Ghazna34’ 의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마흐무드는 이미 기울기 시작한 사만조를 무너뜨린 다음 멀리 인도 북부까지 진출하 여 일련의 정복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 따 0 년에는 라호르로 부터 사마르칸트와 이쓰파한까지 진출하였다. 그의 거대한 제국 중 페르시아와 토란스옥사니아 지방이 이내 셀주끄인들에 의해 유린되
34) [역주] 가즈네브조의 수도로 오늘날에는 아프가니스탄에 위치.
긴 하였어도 이슬람 전파의 목적으로 시도된 마흐무드의 인도 침략 은 어쨌든 펀잡 지방에 이슬람 세력이 영구적으로 뿌리 내리게 하 는 데 이바지했다. 터키계 가즈네브인들의 종교관은 페르시아계인 사만과 부와이흐의 그것과는 커다란 대조를 이룬다. 터키인들의 진 정한 민족성은 사색보다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댜 그들은 이슬람을 접하게 되자 이슬람의 교리가 병사들에게 적합한 단순하 고 실용적인 교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군소리 없 이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터키인들은 쉬아파 페르시아가 믿는 이슬 람과는 전혀 다른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의 이슬람교를 신봉하였다. 마흐무드는 라이이에 있던 무타질라파룰 추방하고 그가 입수한 철 학서와 천문학 서적 둥과 함께 무타질라파의 서적을 불태워버림으 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거의 바슷한 시기에 100 여 마리 낙타분의 무해(無害)하다고 생각되는 책들을 그의 수도로 옮겼다. 그가 문학에 대해 깊은 열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시 인인 피르다우시를 홀대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대의 문학, 학술 분야에서 최고의 대가들이 집결하는 궁전을 가진 군주에게서 생기는 영광과 위엄을 열망하였으며 11 세기의 가 즈나가 그러하였다. 일단의 페르시아 출신 훌륭한 시인들-그 중 피르다우시가 우두머리 격이다 의에도 이 왕조에서 아랍어 로 저술을 한 작가들 중에서 역사학자인 우트비 al_‘Ut b I 와 비루니 al 壬泊記 I 를 꼽을 수 있다. 함단조 f:i an겁 an i ds( S.29- 1 (XX3년) 이슬람 제국의 동부 지역이 페르시아와 터키족의 손에 넘어가고 있는 동안, 아랍인들은 10 세기 말까지는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있다. 이들 아랍 왕조들은―~이는 주 로 유목 민족으로 이루어졌다-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았다. 여기 서는 알렙포의 함단조만이 주목할 만한데, 그것은 우상 숭배 시절
시인이자 전사인 아므르 븐 쿨씀을 배출한 타글리브 부족의 훌륭 한 후예로서 독보적 존재인 사이프 알-다울라 Sa yf al-Dawla 가 있 기 때문이다 압둘라 븐 함단 ‘Abdullah b. 珪 m 었如은 없 E 년 칼리파 무크타피에 의해 모술 Mosul 과 그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942 년에는 그의 아들 하산과 알리가 각각 나씨르 알-다울라 N~ ir al-Dawla( 국가의 수호자)와 사이프 알-다울라(국가의 칼)이라는 경칭 (敬稱)을 받았댜 2 년 뒤, 사이프 알-다울라는 알렙포를 점령하고 북 부 시리아 전역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는 Z3 년간의 통치 기 간 중 내내 소아시아 변방의 비잔틴을 계속 공략하였다 . 그의 계관 시인 무타납비가 불후의 명시에서 표현하였듯이 수차례 영예로운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지만, 차츰 전세가 그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 다. 그의 후계자들은 북부의 비잔틴과 남부의 파띠마조 톰바구니에 서 그들 소 왕국의 멸망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함단조는 각별히 우리의 공감을 살 만하다. 그 이유는 급속도로 사향길에 접어들어 이미 거의 한풀 꺾여버린 아라비아의 민족 혼을 한때나마 되살려 주었기 때문이다. 무타납비의 시에서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민족 혼이다. 그는 다음 시구에서 자신의 소신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35)
35) Muta nabb I, ed. by Diet e r i ci, p. 148, 마지 막 행 이 하.
<백성들은 왕에게서만이 그들의 존재 가치를 찾는다. 하지만 이방인들의 통치를 받는 아랍인은 번영할 수 없는 법, 버릇없고 비천한 촌놈들은 충성이니 명예니 하는 단어의 뜻도 모른다. 어디든 마음대로 가보아라.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이 가축처럼 노예 상인들에게 끌려 다니는 것을 보게 될테니.>
사이프 알 -E 頃라의 폭넓은 교제 동시대인들은 사이프 알 一 디울·라가 이슬람의 적과 싸워 승리를 거 듭하고 무공을 쌓음으로써 명성을 얻은 것처럼 생각하였지만, 사실 은 화평책을 활발하게 장려하고 후한 관용을 베품으로써 그의 명성 이 한층 더 올라갔던 것이다. 그의 짧은 통치 기간과 비교적 적은 재원을 감안할 때, 그가 유달리 많은 문학 재능가들을 알렙포로 끌 어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먼저 당대의 무슬림 시인 중 가장 위대하다는 무타납비가 있었으며, 사이프 알 다울라의 사촌으로 의협심이 강한 아부 피라스 Abu Fi ras의 전쟁을 노래한 시는 섬세하고 진실된 정감어린 필치가 돋보인다. 이쓰파한 의 아부 알-파라즈는 아랍 문학을 통틀어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저 술의 하나인 『 노래의 책 』 을 사이프 알-다울라에게 중정하고 일천 개의 금화를 받았다. 이때 왕은 불충분하지만 그 정도의 상을 하사 할 수밖에 없는데 대해 유감의 뜻을 표했다. 또 위대한 철학자인 아 부 나쓰르 알-파라비 Abu N 益 r al-F ara.bi는 매일 국고에서 4 디르함 (약 2 실링)의 일당을 받아 남부럽지 않게 살아 나갔다. 분명히 이것 은 압바스조의 후원이 전성을 이루던 시절에도 전무후무하였던 기 록적인 금액이다. 사이프 알-다울라가 알렙포에 끌어들인 지명도가 낮은 문인들로 말하면 그 이름을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시 인으로는 사리 알-라파 San al- Raff쵸 아부 알 - 압바스 알-나미 Abu al - Ab넒 s al-N 탸, 아부 알-파라즈 알-밥바가 Abu al-Fa raj al- Bab bagh a 가 있다. 설교가로서는 비잔티움의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 여 성전의 의무를 다할 것을 역설하면서 열광적인 청중의 호옹을 불러일으키곤 한 이븐 누바타 Ibn Nubat a가 있다. 언어학자로는 이 븐 칼라와이흐 Ibn Khalawa y h 가 있었는데 이슬람 세계 전 지역에서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때 시리아에서 시작 된 문예부홍은 사이프 알-다울라 사후 약 30 년 후 싸알리비가 『야 티마』를 썼을 때까지도 여전히 그 영향이 미치고 있었으며 다시 거
론할 기회가 있겠지만 아부 알-알라 알-마아리(r;J7 3 년 태생)에게서 독창적이고 극히 홍미로운 개성을 창출하였다. 파띠마조 (OCB-1171 년) 지금까지 기술한 왕조들은 대체로 야심어린 총독들이나 신하들이 세운 것으로 그 발단이 본디 정치적인 것이었다. 이들 벼락 출세자 들은 칼끝으로 칼리파룰 위협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독립을 인정하 도록 강요하면서도 칼리파의 수중에 남겨두었던 유명무실한 권위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사만조와 부와이호조는 쉬아파이면서도 순니파 인 가즈네브조처럼 칼리파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10 세기 초 아프리카에 파띠마조라는 강력한 쉬아파 세력이 일어났다. 이 왕 조는 자칭 칼리파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그에 따른 특권을 향유하였 는데 이룰 정당하게 신에게서 부여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사 건은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터무니없는 사건으로 교묘히 꾸며진 음모의 절정이었을 뿐이다. 그것은 아흐와즈Al:i waz 36) 에 소속된 페 르시아인 안과의사q ad dab. 마이문 Ma yrnun의 아들인 압둘라(압둘라 븐 마이문)라는 사람에 의해 반세기 앞서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랍인들에 대한 중오심과 이슬람에 대한 자유 사상가적 경멸감으 로 가득찬 압둘라 븐 마이문은 방대한 비밀 결사 계획을 구상하였 다. 이 비밀 조직은 누구에게나 마음에 들게 행동해야 하며, 인간 본성이 갖고 있는 가장 강렬한 감정을 건드리고 감춰진 약점을 부 추킴으로써 모든 부류의 불평분자를 규합, 공모하여 현 정권을 전복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비슷한 비현실적인 계획을 듀마 DumaS' .rl l 의 작품 중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의 작품 「 20 년 후」에 등장하는 아라미 Arami s38' 는 압둘라에 비하면 숙맥이다. 압둘라는 자신의 계 36) [역주] 쿠지스탄의 주도(州都). 37) [역 주] 프랑스의 소설가 (1802-1870). 38) [역주] 동장인물 세 총병 muskete e rs 중 하나. 그는 수도 서원( 誓
願)에도 불구하고 호화스러운 삶을 산다.
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종교적인 기반에서 출발되어야 한 다고 생각했으므로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쉬아파의 분파인 이스 마일파와 제휴하였다. 이스마일파의 선전활동 이 이스마일파는 무함마드 븐 이스마일 븐 자파르 알-싸디끄 Mu }Jarnmad b. I 교‘il b. Ja 'fa r al- 潟q룰 일곱번째 이맘으로 간주하 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었다 . 압둘라 밑에서 이스마일파는 그들의 신비적이고 도덕율 폐기론적인 교리를 발전시켰는데 이에 관해서는 브라운 교수의 『페르시아 문학사』 제 1 권(p. 4(6 이하)에 잘 기술되 고 있다. 여기서는 그가 개종자를 널리 끌어 들이기 위해 고안한 교 묘하고 음험한 방법을 언급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이 방법은 놀랄 만 한 성공을 거두어 이때부터 몽골 침략 때까지 거의 心1 ] 기 동안 이스 마일파-여기에는 파띠마인들과 카르마쓰파 Cannat hi ans,39) 암살 단파 Assas sin s4 0 ) 가 포함된다― __ 는 이슬람 제국의 대부분을 지배 하였다 . 브라운 교수의 개인적인 견해대로 압둘라 븐 마이문이 종교 적 광신자였는지 또는 일반적인 견해대로 그의 진정한 동기가 애국 심이거나 개인적인 야심이었는지를 논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이슬람 역사는 혁명가가 거의 언제나 종교 지도자로 위장하며 반면
39) [역 주] 762 년 이 스마일 븐 자파르 알-싸디 끄가 사망한 후 나타난 영 지주의 적 일곱 이맘파의 초기 분파 . 본서 p. 379 이하 참조 .
40) [역주] 이스마일파의 이란·시리아 분파(1 090-1256 경);이스마일파의 분파인 니자리 N i z art파가 비밀 암살단을 조직하여 귀족·정치가·십자 군 둥의 기독교도들을 습격한 데서 십자군이 붙인 이름이다. 영어의 암 살자를 뜻하는 assass i n 은 아랍어의 hashshas hin(하쉬쉬l,l as hi sh 롤 피 우는 사람)이 어원이다 . 그러나 암살단파와 하쉬쉬와의 관련성은 불투 명하다. 단지, 마약이 지도자들에 대한 완전한 복종심을 끌어내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이야기에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는지도 모른다. CEI, Ass- asin s , p. 53 참조.
에 호전적인 종파의 창건자는 모두 국가 원수가 될 가능성이 있음 을 명백히 보여 준다. 압둘라의 경우는 처음에는 광신자였고 나중에 는 정치가였다고 할 수 있다. 또는 애당초부터 양자 모두에 해당되 었을 수도 있다. 그의 계략은 간략히 말해 다음과 같았다. 숨겨진 이맘(p . '2m 참조)에 대한 충성심이 요구되며 추종자를 끌어모으 는 일을 떠맡은 <선교사沮 ‘I> 는 한 곳에 머물며 자칭 상인이나 수피 둥으 로 행세한다. 세속적 쾌락을 포기한 채 엄격한 경건함을 과시하며 눈에 보 . 이는 기적을 행함으로써 일반인들에게 쉽게 성자로 행세할 수 있었다. 그는 이웃 사람들의 신뢰와 촌경을 받게 되었음을 확신하면 그들의 마음속에 의 심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는 난해한 신학 문제를 제시하거나 꾸란 중 특 정 구절이 지닌 신비한 의미를 깊이 사색하였다. 종교 그 자체에는 표면상 보이는 것보다 더 심오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고 자~ 그런 다 음, 청자의 호기심을 유발하고 난 다음에는 갑자기 말을 중단한다. 설명을 계속해 달라고 조르면 이러한 신비는 성실의 표시로서 비밀유지와 복종, 일 정한 금액을 내겠다는 구속력 있는 맹세롤 하는- 자에게만 전달될 수 있다 고 단언한다. 이 조건들이 받아들여지면 새로운 개종자는 9 동급의 입회식 중 두번째 동급에 들어가게 되며, 진정한 교리는 이슬람법을 준수하는 것만 으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으며 그것을 보존해 온 이맘들을 통 해 직접 전수받아야만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받는 다. 이들 이맘은(다음 단계에서 알게 되겠지만) 알리로 시작하여 7 명인데 일곱번째이자 마지막 이맘이 이스마일의 이들· 무함마드이다. 네번째 동급에 도달하면 이제 그는 분명 무슬림이 아니다. 그것은 이 등급에서 무함마드 븐 이스마일이 모든 예언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최후의 예언자로서 이슬람 창시자에 대신한다는 이스마일파의 신학 체계를 교육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 둥급을 넘어서 모든 형태의 실중적인 종교가 비유적으로 말해지고 오직 철학만이 남게 되는 정도까지 나아가는 입문자는 비교적 드물다. <그렇게 해서 굉장히 무시무시한 무기 아니, 기계가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다. 각자 는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지력과 자신의 편견에 어울리는 지력이 주어졌
378 아랍 문학사
다 . 또 전 과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가장 소망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것을 달 성하는 것이라고 믿게끔 되었다. > 411 더욱이 ,.,이맘 무함마드 븐 이스마일이 오래 전에 사라져버리고 그 대신 가시적인 숭배의 대상이 지상에서의 그의 후계자이며 대리인인 압둘라 븐 마이문으로 자연스럽게 바뀜으로써 이스마 일과 마이문은 아론4 2) 과 모세의 관계, 무함마드와 알리의 관계와 마찬가지 가되었다.
41) D. B. Macdonald, Muslim Theology , p. 43 이하.
42) [역주] 모세 Moses 의 형으로 보통 헤브루 사람 최초의 대제사장으로 간주된다 .
9 세기 중반의 이슬람 제국 상황은 우마이야 시대 후반기보다 더 욱 악화된 상태였댜 빈번하게 발생하고 장기간에 걸쳐 계속된 내란 의 결과로서 번성하였던 이라크 지방이 점차 황폐해지면서 농민들 은 가난해졌다. 由 9 년, 바스라의 유명한 초석업(砲石業)에 고용된 혹 인 노예들 Zanj 이 한 알리파 구세주의 명령에 따라 무장 봉기하였다. 그리하여 14 년 동안 쿠지스탄과 인접 지역에까지 전화(戰禍)가 미쳤 다. 이 모든 불행과 불만은 이스마일파에게 하늘이 내려 주신 선물 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압바스인들이 우마이야인들에게 대항하는 데 유용하게 쓰였던 옛 구호 <예언자 가문의 구세주>가 이제는 압 바스인들 자신들에 대한 항의 구호로 그 못지 않게 효과적으로 쓰 이게 되었다. 파띠마조 마흐디 우바이둘라 Mahdi 'Ubay du ' llah 에 의해 창건됨 (없년) 875 년 압둘라 븐 마이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소요는 계속되었 다. 그리고 소요의 불길은 급속도로 거세어졌다. 이 소요의 주동자 는 함단 까르마뜨珪 m 쇼 m Qarrnat4 3) 였다. 이스마일파의 카르마쓰파
43) [역 주] 까르마뜨는 농민 출신 이 었다. 아랍어 로 q anna t는 <두 개 의 붉은 눈을 가진 사람> 또는 <비교교의를 가르치는 사람>을 의미.
는 그의 이름을 따 만든 것이다. 이들 카르마쓰파(Q,댜rnita, 단수는 Qirmip)는 남부 페르시아와 예멘에 세력을 확장하고 10 세기에는 바 그다드를 위협하였으며 , 성지 순례객 대상 (隊 商)에 대한 습격을 되풀 이하였다. 또 메카를 공격하고 흑석 Black S to ne 을 전리품으로 탈취 하였다. 요컨대 그는 본격적인 공포 정치를 확립하였다. 이제 압둘 라 븐 마이문의 후예들이 이끄는 정통 이스마일파로 돌아가 보자. 그들이 파견한 사자들은 북부 아프리카에 거주하던 잘 속아 넘어가 고 열광적인 베르베르인들 가운데서 유망한 일터를 발견하였다. 기 회가 무르익자 압둘라 븐 마이문의 손자인 사이드 븐 후사인 Sa'rd b. I:Ju sa yn은 막후 조정의 중심지였던 시리아의 살람야 Salamy a 를 떠나 아프리카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는 우바이둘라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고대하던 마흐디로서 등장하였다. 그는 자신이 이맘 무함 마드 븐 이스마일의 증손자, 따라서 알리 븐 아비 딸립과 예언자의 딸 파띠마의 직계임을 내세웠다. 여기서 파띠마조의 명칭이 유래되 는 이러한 지극히 미심쩍은 족보를 논할 필요는 없다. 910 년, 우바이 둘라는 라까다 Ra qqa da 에 개선하여 < 신자들의 지도자 > 의 칭호를 썼다. 서기 800 년 이래 아글라비조Ag hlab ites섞 )의 통치룰 받던 튀니 스 Tu ni s 는 파띠마 세력의 요람이었다. 이곳에 그들의 수도 마흐디 야 l\ifahdiyy a 를 고대 도시 탑수스 Tha ps us4 5) 근처 에 건설하였다. 그 들은 점차 동진하여 이집트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까지도 정복하였 다(oo:)-c.J7 0). 이때 통치의 중심지는 새로이 건설된 카이로 al - Qahira 시로 옮겨져 2 세기 동안 파띠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 46) 44) [역주] 칼리파 하룬 알-라쉬드가 자브 Zab 지방 총독이던 이브라힘 븐 알크가글라브 Ibrah im b. al-A g hlab 에게 전 아프리카 지방의 통치 룰 맡김으로써 사실상의 독립 왕조가 되었다 (800-909). 45) [역주〕 튀니지에 있던 고대 도시로서 기원전 46 년에 시저가 원로원 파에 대승하여 독재를 실현한 곳으로 유명하다. 46) 지면 관계로 파띠마조의 역사에 대해 더 이상 논할 수 없음은 유감 이다. 이 주제에 관한 자료를 원한다면, Sta nley Lane-P o ole,
Hi st o r y of Eg ypt in the M idd le Ag e s ; Wi .ist e nfeld , Gesch ich te der Fati mi de n-Clrllife n (Gott ing e n, 1881 ) ; Profe s sor Browne, Lit era r y Hi st o r y of Persia , vol. i~ p. 196 이 하를 참조.
아유닌 1 조 AWOb i ds(1171-1 척)) 반(反)칼리파 세력인 쉬아파는 이집트가 유명한 살라딘 Sal adin ($alab al-D in b. Ay yub ) 장군에 의해 점령당하고 (1171 년) 순니파 신 앙이 회복될 때까지 그곳에서 버티고 있었다. 살라딘은 시리아를 자 신의 영토로 곧 편입시켰으며 <예루살렘의 함락 (11 얽)은 유럽이 제 ~}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도록 하는 자극이 되었다.> 아유비조는 기독교에 대항하는 이슬람의 전사로서 당연히 엄격한 정통파였다. 그들은 많은 신학교를 세워 기증하였다. 수피의 범신론자인 쉬하브 알-딘 야흐야 알-수호라와르디 Sh ihab al-D in Ya })ya al-Suhrawa- 떠 I 는 살라딘의 아들 말리크 알-자히르Malik al-~ 의 명령에 따 라 1191 년 알렙포에서 처형되었다. 셀주끄조 SeljO q s(1 Cfil-1 3 ):)) 압바스조가 몽골에 의해 멸망되기 전 2 세기 동안, <아프가니스탄 의 서부 변경으로부터 지중해에 이르는 이슬람권의 아시아를 단일 주권하에 재통일한> 셀주끄 터키인들의 홍망 성쇠를 보게 된다. 셀 주끄 븐 투까끄 Selj u q b. Tu q頭는 투르크멘 Turcoman47) 출신 족장 이었다. 트란스옥사니아 지방에 들어가자 그는 부카라 근방에 정착 하였는데 부족민을 모두 이끌고 이슬람에 귀의하였다. 그의 후손인 뚜그릴 베그와 차가르 베그 C hag ar Beg가 쿠라산을 침략하여 가즈 네브 제국의 서부 주(州)를 합병하였으며 마침내 부와이호조의 남은 영토를 홉수하였다. 바그다드는 l
47) [역주) 투르케스탄 지방의 터키족.
아르슬란 Al p Arslan 과 그의 아들 말리크 샤Malik s 國 h 는 우선적 으로 군사 문제에 전력을 기울였지만, 후자만은 교양 있고 계몽된 군주였다. <그는 문명의 혜택이 널리 보급되도록 애를 썼다. 그는 수많은 운하를 파고 많은 도시에 성벽을 둘렀으며, 다리를 건설하고 사막지역에 대상의 숙소인 ‘리바뜨Ri bat ’를 지었다 . >48) 그는 천문학 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과학과 신학의 연구는 그의 각별한 지 원을 받았다. 만일 알프 아르슬란과 말리크 샤에게 결점이 있었다면 이는 유명한 재상인 하산 븐 알리 I:Ias an b. ‘Ali에 의 해 충분히 보 상되었다. 그는 자칭 니잠 알-물크 Ni zam al-Mu lk, 죽 <제국의 보 안관>이라 하였다. 다른 위대한 재상들의 경우처럼, 그 역시 페르시 아인이었다. 여기서 그의 업적을 다 논할 수는 없지만 바그다드와 나이사부르에 각각 이름난 학술원을 세웠다는 것과 그에 대한 경의 의 표시로서 학술원의 이름이 니자미야 al-NI ?,aITUyy a 라 불리게 되 었다는 것만 언급해 둔다.
48) Ibn Kha llika n, 드 슬 란의 번 역 서 , vol. iv, p. 441.
아라비아와스페인 지금까지 아라비아와 스페인을 제의한 이슬람 제국 대부분 지역 에서의 압바스 시대 정치 상황울-비록 빠트려진 것이 많고 일 관성이 없기도 하지만-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슬람의 발원 지는 지방의 작은 주로 전락한지 오래 되었다. 칼리파 치하의 아라 비아가(성도는 빼고) 처하였던 창피스러운 운명이나 알렉산더 대왕 이 그의 승계자들인 프톨레마이오스 왕들Pto l emi es491 과 셀루시즈 왕 들 Seleu ci ds50’ 에게 통치권을 물려주었던 마케도니아 Macedo ni a51’ 의
49) [역주] 기원 전 4-3 세기에 이집트를 지배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역대 왕 .
50) [역주] 알렉산더 대왕 휘하의 장군이던 셀루쿠스가 세운 왕조로 기 원전 312-64 년에 소아시아, 시리아, 페르시아 대부분을 통치함.
51) [역 주] 그리 스의 북부 지 방, 발칸 Balkan 반도의 옛 왕국.
운명이나 매 한가지인 셈이다. 스페인의 정치사에 관해서는 다른 장 에서 스페인 무슬림들이 생산한 문학이 우리의 주의를 끌게 될 때 잠깐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서는 동시대의 문학 발달 과정 에 대한 특성으로 넘어가겠다. 중세 아랍 문학을 연구하면서 받는 첫 인상은 주요 작가들 상당 수가 비아랍인이거나 적어도 부모 중 어느 한쪽이 외국인, 특히 페 르시아인인 혼혈계 아랍인이러는 사실이다. 이들은 아랍어로 저술 활동을 하였는데, 그것은 아랍어가 약 l CXX)년 경까지 이슬람 세계의 유일한 문학적 표현의 매개체였으며, 13 세기 몽골의 침공이 있을 때 까지 독보적인 학술언어였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밧샤르 븐 부르 드, 아부 누와스, 이븐 꾸타이바 , 따바리, 가잘리를 비롯한 수많은 문학가들을 아랍 문학사에 포함시켜야 하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들이 문학사에 올려지는 것이 바람직할 뿐 아니라 논리적 근거에 서도 타당함을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으므로5 21 여기서는 그 이유를 되풀이하여 말하지 않겠다. 그들을 페르시아인으로 다룰 경우의 불 합리성은 ― ― 一 만일 아랍인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면, 그에 대한 별다 른 대안도 없다 _ _ _명약관화한 것이다. 학문이 퍼匡시아의 무슬림둘에 의해 발전되었다는 이븐 칼둔의 견해 이븐 칼둔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묘하게도, 무슬림 중 종교학이 나 지적 학문 분야에서 출중하였던 학자들은 대부분-몇몇 예외 를 빼놓고는-모두 비아랍인‘J\j am 인 페르시아인들이다. 아랍의 혈통을 내세우는 학자들도 외국어를 말하고, 외국땅에서 성장하였으 며, 외국의 대가들 밑에서 공부한 사람들이다. 비록 이들이 속한 사 회가 아랍 사회이고 그들이 믿는 종교의 창시자가 아랍인이지만> 이 역사학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이와 같은 특이한 상황의 원인을 52) 본서 의 서 설 p. 32-33. 참조.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초기 무슬림들은 예술이나 학문에는 전혀 무지하여 그들이 <늘 가슴에 품고 다니는> 꾸란의 계율과 예언자의 <순나>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의 아랍인들은 학문의 교수법이나 처술의 기법, 지식을 기록하는 수단에 대 해서는 아는 바가 전무하였다. 꾸란을 암송하고 무함마드의 전승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암송자 또는 독경사q um1 라고 불리었다. 이같은 구전 은 하룬 알-라쉬드의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전승을 변조 하거나 완전히 유실되지 않도록 기록으로 남길 필요성을 인식하였기 때문 이다. 또한 전승의 진위를 구별하기 위해 모든 <일련의 증거 i s na.d>들이 면밀히 검토되었다. 한편, 아랍어의 순수성은 점차 훼손되었다. 따라서 문법학이 일어났으며 법과 신학의 급속한 발전은 다른 학문들, 예컨대 논리학이나 변증법이 이슬 람 제국의 대도시에서 전문적으로 장려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들 도시의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문명의 이기(利器)에 익숙해 있던 페르시아인과 자유 민, 상인들이었다. 따라서 초기 문법학자나 전승자들, 신학자, 법학자들과 꾸란 해석자들은 인종상으로나 교육 배경상 페르시아인들이었다. 예언자의 다음 말씀은 입중된 셈이었다. <만일 학문이 하늘 끝에 매달려 있다면, 페 르시아인들 중에서는 거기까지 쫒아갈 사람이 니올· 것이다.> 이처럼 지적 활동이 한창임에도 불구하고, 유목 생활~ 벗어난지 얼마 안되는 아랍인들은 군사와 행정력의 행사에만 너무 몰두하여 지배 계급으 로부터 항시 천대받던 문학적 취미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문학에 대한 연구를 페르시아인들이나 또는 정복민과 피정복민의 결혼으로 생긴 혼혈아들 al-rrruwalladan 에 게 맡겼다. 아랍인들은 학자들을 얕잡아 보지 않 고 그들의 공적을 인정하였다. 왜냐하면 결국 그렇게 함으로써 이득을 보는 것은 이슬람과 이슬람 관련 학문이기 때문이다. 531 53) lbn Khaldan, Muq a ddim a(Bey rou t, 1900), p. 543 이 하 =De Slane, Proleg o mena, vol. ii~ p. 296 이 하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우마이야 시대에서조차도 <아는 것이 힘 이다>라는 금언이 이슬람 사회에서 페르시아 신학자들이 행사한 막 대한 사회적 영향력에 의해 뚜렷이 입증되었다우 그럼에도 불구하 고 전형적인 순수한 혈통의 아랍인들은 이들 <마왈리>들과 그들의 학식을 노골적으로 경멸하였다. 순수한 혈통을 자랑하며 이교도 시 대의 영광스런 전통과 그들 조상이 실천한 미덕 이외는 아무것도 모르는 대부분의 아랍인들에게 문학적인 교양은 하잘것없고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보였다.
54) Goldzih e r, Mura mm. Stu d ie n , Pa rt I, p. 114 이 하 참조.
골트치어의 『이슬람 연구』 앞 부분에서 잘 묘사되고 있는 <마왈 리>에 대한 그들의 오만한 태도는 격렬한 반응에 부닥치게 되었다. 비아랍인들이나 무슬림들 중 짐짓 경건한 체 하는 사람들은 모두 최고의 권위인 꾸란에 의존하였다. 그들에게는 이 원전에서 나오는 것보다 더 명확하고 단호한 의견이 절실히 필요하였으므로 예언자 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은 말을 원용하였다. <아랍어를 말하는 자 는 그 때문에 아랍인이다 . > <페르시아 사람들 중에서 이슬람에 귀 의한 사람은 아랍인과 마찬가지로 꾸라이쉬 부족민이다.> 이러한 신조는 아라비아의 귀족 사회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였지만 우마이야의 몰락과 함께 <마왈리>들의 정치적, 사회적 평등은 기정 사실화되었댜 아랍인들이 <마왈리>들의 주장을 누그러뜨리고 싶어 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편애를 누리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대해 크게 분개하고 있었다. 초기 압바스 시대의 많은 시에서 이러한 민족적 의분을 노래하고 있다. <어떻게 그들이 즐겨 타던 당나귀를 내려 날씬한 노새에 올라 앉는지를 보라. 푸성귀는 이제 더 이상 사고 팔지도 않는다. 55)
5.5) 필자가 옮긴 바와 같이 musharat7 t 아닌 masharat al-bu q nl( 채소
모판)으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바꾸어도 의미에는 아무런 상 관이 없지 만 아람어 단어 인 mash 江 a t가 여 기 에 는 적 합하다 .
궁전에 사는 그들이니까. 그들은 예언자와 이슬람의 종교din를 증오하며 56) 우리들 아랍인에 대해 화가 잔뜩 나 있도다 . >
56) Ag hanI, x ii , 177, 1. 5 이 하 ; Von Kremer, Cultu rge sch St rei fz ug e , p. 32. S. Khuda Bukhsh( Contr ibu ti on s to the Hi st o r y of Islami c Civ i l iz a ti on , Calcutt a, 1905, p. 92) 가 언급한 바와 같이 이 행은 페르 시아인이라고 거짓 주장을 하였던 나바뜨인들을 지칭한 것이다 .
슈우닌 | 0 !:IL~ al-Shu ' Obiw a 이같은 문학 논쟁에서 비아랍인들의 편을 적극 들고 나온- 것이 자칭 슈우비야파이다 . 57 ) 슈우비야파의 반대자들은 슈우비야파가 인 종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무슬림들의 평등을 주장한다고 하여 평등 주의자 Ahl al-Tas wiy a 라고 불렀다. 슈우비야 운동의 역사에 관해 서는, 슈우비야파에 의해 채택된 방법들 __- 이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방법이다 __― 에 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 골트치어의 훌륭 한 연구서를 참조하기 바란다우 골트치어는 그들 중 <평등>한 위 치에 만족하지 않는 좀더 대담한 성격의 사람들이 어떻게 아랍인들 이 페르시아인들을 비롯한 다른 민족보다 절대적으로 열등하다고 주장하는지를 보여 준다. 이 문제를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져 많은 저명한 작가들이 이 논쟁에 참가하였다. 슈우비야 쪽에서는 아부 우 바이다 비루니 이쓰파한의 함자I:Iarnza를 들 수 있다. 자히즈Jal:i認
57) 이 명칭은 꾸란 49 장 13 절에서 유래한다 : <오, 믿는 자들아, 우리는 그대를 한 쌍의 남녀로부터 창조하여 너희들을 민족 shu'ab 과 종족으 로 만들었다. 이것은 그대들을 서로가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알라 곁 에서 가장 존귀한 자는 가장 알라를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자이니라.> 이처럼 <슈우비야>라는 명칭은 무함마드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랍인 무슬림들이 비아랍인 무슬림 형제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
58) M uh:unm. Stu d ie n , Pa rt I , p. 147 이 하 .
와 이븐 두라이드 Ibn Dura yd 가 특히 아라비아 민족의 우월성을 가 장 열렬히 옹호하였지만 그 밖에도 <친(親) 아랍계>에는 이븐 꾸타 이바, 발라두리 Balaclhu ii, 자마크샤리 Zarnakhshan 같은 페르시아계 인물도 다수 포함되었다. 슈우비야는 아랍인들의 민족적인 자존심, 죽 전 세계의 민족 중에서 자신들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민족이며, 가장 순수하고 가치 있는 언어를 말한다고 자랑을 늘어놓는 것에 대해 주로 공격하였다. 따라서 페르시아의 족보 학자들이나 문헌 학 자들은 톰만 나면 아랍 부족들이나 특정 가문의 역사와 관련된 수 치스럽고 불명예로운 사실을 폭로하였다. 아라비아의 시, 특히 비난 하는 시 ma thali b 는 그와 같은 류의 사실을 예시하는 풍부한 자료 를 제공해 주었으며, 슈우비야는 아랍인들의 우월성에 대한 주장이 터무니 없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로서 그 시들을 인용하였다. 동시에, 아랍어가 독특하고 비길 데 없이 우슈=하다는 민족적인 견해 도 다소 거센 비판을 받았다 .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의 동화 아랍과 페르시아간의 민족적 반목은 그 정도가 심하여서 화해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후자가 몇 세대를 지 나는 동안에 어떻게 완벽히 아랍화되었는지롤 알게 된다면 독자들 은 놀라고 말 것이다. 아랍 부족의 예속민으로서 그들은 아랍 이름 을 사용하였고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온갖 수단 방법을 써서 자신 들의 이질적인 혈통을 감추려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가공의 족보를 마련하였는데 그렇게 하면 아랍인으로 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 이다. 이러한 가식(假飾)도 언어와 관습, 심지어 성격상의 완전한 동 화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거기에 속아 넘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 을 것이다. 양 민족은 이슬람 학문이라는 중립 지대에서 적의를 한 쪽으로 밀어놓고 공동의 대의를 위해 매우 열심히 노력하였다. 일세 기 동안 유혈 투쟁과 정치적 소요에 빠졌던 열정적이고 야심 찬 많
은 사람들이 공무(公 務 )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자 부 를 좇거나 학문 수행에 아껴둔 정력을 모두 쏟아부은 것은 당연하였다 . 여기서는 폰 크레머가 그의 저서 『 동양 문화사 Cul tw-g es chicht e des Ori e nts』에 서 충분하고도 홍미롭게 기술한 바 있는 초기 압바스 칼리파 치히에 서의 놀랄만한 교역의 성장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 그러나 영어와 대부분의 유럽 언어들에서 쓰이고 있는 많은 상업 용어들은―――예 컨대 관세를 뜻하는tariff, 칙물 이름인 rrrus lin, ta bb y 가 아랍어가 어 원이다――一바그다드, 모술 , 바스라를 비롯 서남 아시아의 여러 다 른 도시에서 온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건너간 것이다. 초기 압바스 시대의 학문에 대한 열의 이와 같은 물질적 팽창은 동양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폭발적인 지적 활동을 수반하였다 . 위로는 칼리파로부터 아래로는 가장 비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갑자기 문학도 또는 최소한 문학 애호가가 되었던 것 같다. 지식을 찾아 사람들은 삼대 대륙을 여행하고나서 마치 벌집에 돌아온 꿀벌처럼 그들이 모아온 귀중한 저장물을 지식욕에 불타는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백과 사전류의 저술을 부지런히 지어냈다. 넓은 의미의 <근대 학문>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이들 백과사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슬람제 학문의 발달 압바스가의 번영을 가져 온 혁명은 이슬람과 종교 개혁파에게는 대승리였다. 세속적인 우마이야인들 밑에서는 법학이나 전승학이 공 개적으로 장려되지 못하고 오직 억압받는 신학자들의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열의로서 명맥을 이었다. 그러나, 새 왕조는 스스로 확립 하였다고 공언하는 이슬람 사상에서 힘을 얻었고 교회의 점중하는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정책을 교묘히 썼다. 따라서 이 당시에 일어 난 이슬람 학문은 처음에는 꾸란과 하디쓰에서 출발하였다. 지방 아
람인들과 특히 페르시아인을 비롯한 비아랍계 혈통의 무슬림들에게 는 그러한 종교적으로 신성한 책들이 많은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 종교 관련 문헌들의 올바론 이해를 위해서는 아랍어 문법과 언어학 에 대한 지식이 긴요하였으며, 여기에는 원형에 가까운 순수성을 지 닌 아랍어의 가장 진정한 모델을 제시해 주는 고대 이슬람 이전 시 가에 대한 연구가 포함되었다. 이 시에 대한 연구가 족보학과 역사 학의 모태가 되어 니중에 독립 학문 분야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전 승학은 무슬림들에게 모든 면에 있어서의 실제적인 생활 규범을 제 공해 주기 위해 체계적으로 개발되었으며 다양한 법학파가 생겨났다. 이슬람 학문의 분류 대체로 무슬림 학자들은 꾸란과 관련된 학문과 아랍인들이 이민 족에게서 습득한 외래 학문을 구분한다. 전자의 범주에는 전승학 또 는 종교학하 -'Ul iim al-Na qliyya aw al-Shar' iyy a 과 아랍어 언어학 'Ul 血 al-Ll 핵 al-' Ara bi이 포함되며 후자에는 이성적 또는 철학 적 학문 al-'Ulum al-'Aq liyya aw al- ijikrniyy a 이 포함된다. 이 외 래 학문을 때로는 <이방인들의 학문 ‘Ul 먀 n al-'A ja m)> 또는 <고대 학문 al-'Ulom al- Qadima>이라고도 한다. 위에서의 구분에 따라 이슬람 학문은 다음과 같이 세분된다. 1 토착학문 1) 꾸란 해석학( ‘Tun al-Ta fsir) 2) 꾸란 독본 대조( ‘Tun al-Q ira' at)5 9 ) 59) [역주] 이슬람 초기에 각기 다른 꾸란본이 나타나게 되자 히츠라 4 세기 일곱 명의 권위 있는 독경사들로부터 전수된 <독본qira 'a t>을 정본으로 삼게 되었다. 전송(傳:j'fj)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각 독경사 마다 2 명의 암송자 rawI 룰 두었다. 이에 따라 <일곱 개의 득본 al- qira'a t al-sab‘> 이 나왔다 . 이는 꾸란 낭송법을 체계화한 학문인 ‘Ihn al-T aj w i d 와는 구별된다. CEI, qira'a , p. 324 참조.
3) 전승학( .Ilrn al-I:I adith) 4) 법학 (F iq hr 5) 사변적(思辨的) 신학( 'Ilrn al-Kalru n) 6) 문법 (Na b.w ) 7) 사전 편찬학(Lug ha) 8) 수사학 (Bay an) 9) 문학 (Adab)61)
60) [역주] <피끄흐 F iq h> 의 아랍어 원의는 알려진 것을 연구하여 아직 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감지하는 것이다. 종교 용어로서의 <피끄 흐>는 이슬람 법규와 교회법동을 그 원천에서부터 추리하는 것을 의 미한다 김정위, 『이슬람 사상사』, p. 208 참조.
61) [역주] 문학을 뜻하는 <아답 Adab> 의 의미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의미도 바뀌었다. 자힐리야 시대에는 <성찬에의 초대>를 뜻하였 고 이슬람 초기에는 <교훈, 교육>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후 8-9 세 기에 이르러 <아랍인의 · 시와 연대기에 관한 지식>을 나타냄으로써 일반적의 의미의 문학의 정의에 접근하게 되었다 . 특히 압바스조 초 기에는 베드윈의 <야만>에 대치되는 말로 <정중함 , 예의 • 예절>을 의미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지식‘iltn>은 종교적 지식과는 구별되는 세속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븐 칼둔은 종교뿐 아니라 세속적인 모든 개념에 adab 을 적용하였다.
2 외래 학문 1) 철학 (Fal saf a) 6'2 1 2) 기하학 (Handasa)631 3) 천문학( 'Tun al-N 떠om) 4) 음악 (Mns iqi) 5) 의학 (Ti bb) 6) 마법과 연금술 (al - S il:rr wa-' 1-K imiya)
62) f als afa 는 본디 논리학, 형이상학, 수학, 의학, 자연과학을 포함한다.
63) 여기에 수학의 여러 부문들, 죽 산수와 대수학, 역학 둥을 덧붙일 수 있다.
초기 압바스시대, 자유사상에 호의적임 동시대의 종교 현상에 대하여는 별개의 장에서 논할 것이므로 여 기서는 그것의 일반적인 성격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다. 우마이야조하 에서는 칼리파 우마르 븐 압드 알-아지즈 ‘Urrm b. 'Abel al-'Az iz 의 짧은 재위 기간을 제의하고 칼리파의 통치에 동조하지 않은 많 은 신학자들이 공직에서 물러났음을 이미 고찰한 바 있다. 그러나, 압바스가가 세력을 잡자 사정은 달라졌다. 이제 신학자들이 왕좌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정책을 지시하였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 고 칼리파와 가장 은밀하며 친근한 관계에 놓여 있던 유명한 법학 자나 신학자들은 칼리파로부터 융승한 대접을 받았다. 그 전형적인 예로 카디 아부 유수프 Ca di Abu Yus uf와 하룬 알-라쉬드의 우정을 들 수 있다. 혁명 후 1 세기 동안에 4 대 이슬람 법학파가 탄생하였는 데 각기 창시자들-말리크 븐 아나스Malik b. Anas, 아부 하니 파 Abu B,페fa, 샤피이 Sh afi‘I, 아흐마드 븐 한발 Abrnad b. l:lanbal ―의 이름을 따서 학파를 명명하였다. 이즈음 학문과 지적인 운 동이 활발하였다. 초기 칼리파들은 당시 정권에 위협이 되지 않는 한 대개는 사색을 조장하였다. 마문과 그의 후계자들 치세에서 무타 질라파의 <합리주의>는 국교가 되었고 이슬람은 계몽 시대로 접어 든 돗 하였다. 이처럼 초기 압바스 시대(7fil--- 847 년)는 새로운 학문과 진보적 신학의 대두와 함께 유럽의 르네상스에 비유될 수 있다. 그 러나 유명한 페르시아 시인 64) 의 다음 시구는 어떠한가 . khil ·at:I bas fakhir runad ·umr •ayb a sh kUta hisI <인생은 화려한 외투, 짧은 것이 홈이지만.> 정통신학의 승리 칼리파 무타와킬 (847-831) 은 무타질라파의 교리가 이단임을 선언 64) 압둘 라흐만 자미 ‘Abdu 'I-Ra l;lma.n Ja.nu (1492 년 사망).
하고 전통적 신앙으로 돌아감으로써 자신의 칼리파 즉위를 돋보이 게 하였다. 엄중한 조치가 반대자들에 대해 취해졌다 . 이제부터 이 슬람에는 사색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졌으며 민중은 철학과 자연과학을 일종의 불신앙으로 간주하였다. 이런 주제를 저 술하는 작가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견해를 숨기고 꾸란의 구절을 명 백히 따르는 연구결과를 내놓지 못할 경우 중대한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10 세기 중반경, 본질적으로 지적 지유에 반대하며 지금까지도 엄청난 영향력을 그대로 유지해 오고 있는 이슬람의 <사변적 신 학>의 아버지인 아부 알-하산 알-아쉬아리 Abo. al-I:I as an al- Ash‘ aii의 체계 안에 반동적인 경향이 교리로서 구체화되었다. 본 장의 제목에 걸맞게 기술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독자들이 동 시대의 정치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또한 동시대 종교 및 문학사 의 흐름을 나타내는 광범위한 특징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면 본 장 울 기술한 소기의 목적은 달성된 셈이다.
제 7 장 압바스 시대의 시와 문학, 학문 이슬람 이전의 시인둘이 전형으로 간주됨 이슬람 이전의 시는 유목 생활의 자연스런 표현이었다. 그러므로 이슬람에 의해 도입된 새로운 여건과 사상은 다음 세기의 시 문학 에 그에 상응하는 혁신을 곧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었다. 우마이야의 시인들은 영옹 시대 의 위대한 모델들에 고집스럽게 연연하였으며 심지어 고대 시를 능 수능란하게 모방할 수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기까지 하였다 . 전문 적인 언어학자였던 초기 무슬림 비평가들은 이슬람 이전 시대의 시 가 당대의 어떤 시인도 흉내낼 수 없는 완벽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 으며 이는 오직 지금은 잊혀진 이상적인 기사도 정신에 의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주장을 고수하였다.” 어떤 시인이 이슬람 이 후에 태어났다는 것은 곧 그의 시가 이슬람 이전의 시만 못함을 입 중해 주는 중거였다 . ” 물론 이러한 편견은 언어적 측면만을 고려한 1) 다음 몇 페 이 지 는 골트치 어 의 저 서 Abw td zur Arab. Ph ilol og ie, Pa rt I, pp. 122-174 에 나오는 그의 논문 Alte I.ind Neue Poesie irn urtheile der Arabis c hen Kritik er 에 서 큰 도움을 받았다. 2) 아부 아므르 븐 알-알라가 시 인 아크딸에 관해 언급한 견해를 참조 (본서 p. 339).
것이다. 고대 시는 순수한 고전 언어의 보고로서 연구되고 주로 문 법학자의 견지에서 평가되었다. 이같은 관점이 문학계에서 널리 용인되면서 아랍 운율학의 창시 자인 칼릴 븐 아흐마드Khalil b. Abmad 같은 현학적 인 학지들은 새 로 나온 시인의 평판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자신들이라고 자랑을 늘 어 놓을 정도로 대중의 심미안을 편향되게 만들었다. 앞서 독창성에 관해 비난받은 바 있어 이들 자칭 <학술원>의 승인을 바라는 자들 은 고대의 걸작시들을 정교하게 재생산해 내는 데 시간과 재능을 허비하며 그들이나 청중이 전혀 홍미도 갖고 있지 않은 베드윈의 삶에 대한 묘사룰 차용함으로써 궁중의 대신이나 일반 대중들을 줄 겁게 해주어야 했다. 비평가로서의 아부 누와스 Abo Nuwas 사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것의 불합리성을 인정하였다. 다른 곳 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아부 누와스 (810 년경 사망)는 아랍 시의 첫 행에서 황량한 <야영지 a tl혀 또는 ml 미>에서 연인을 부르는 관습을 이따금 비웃으며 낡은 유행이 된 칭송을 강력히 비난하였다. 사막과 사막의 유목민들을 묘사하고 있는 다음 시 구절은 존슨 박사 Dr. J ohnson3) 가 스코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비꼰 경구를 연상케 한다. <남풍이 비를 몰고 와 황량한 대지를 촉촉히 적셔 주며 세월은 흘러 한때의 싱싱함과 푸르름을 앗아가 버리는구나. 낙타 타고 오는 이가 사막을 마음대로 드나들도록 하라. 그곳은 순종 낙타들이 지칠 줄 모르고 총총히 걸으며 오칙 함수초(含差草)와 엉겅퀴만이 무성히 피어나고
3) [역 주] 사무 엘 존슨 Samuel Joh nson(l709-1784) : 영 국의 사전 편 집 자 • 비평가·시인. 흔히
사냥감으로 늑대와 하이에나가 혼한 곳! 유목민들은 쾌락을 추구하지 않는다 . 그러면 무엇을 즐기는가? 굶주립과 갈중 속에 살아갈 뿐, 우유나 몇 사발씩 마시게 해주고 그들 곁을 떠나자 . 인생에 더 멋진 쾌락이 있음을 그들은 알지 못하니까 .> 41
4) Di w an des Abu Nowas, Di e Wein l i ed er, ed. by Ahlwardt, No. 10, vv. 1-5.
고대 및 현대의 시인들에 관한 이븐 꾸타이바 lbn Qut ay ba의 견해 이븐 꾸타이바 (9 세기 말경 사망)는 고대 시인이나 당대의 시인에 대한 평가가 시대와 상관 없이 그들이 지닌 장점으로 판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본격적인 비평가였다 . 그는 그의 『시와 시인 들의 책』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5 1
5) ed. by De Goeje , p. 5, 11. 5-15.
<시인들의 작품에서 인용할 경우 , 나 스스로의 선택에 따르며 다른 사람 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무조건 찬양하지 않는다. 고대 시인이 옛 날 사람이라고 해서 높이 평가하지도 않으며 현대인이 새롭다고 하여 무시 하지도 않는다. 어느 한 쪽으로만 치중하지 않고 모두 공평하게 다루면서 장점은 충분히 인정해 준다. 내가 아는 바로는, 학자들 가운데는 질이 떨어 지는 시라도 그 작자가 옛날 사람이라는 점 때문에 좋은 시로 판정하여 선 집에 포함시키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매우 우수한 시를 당대에 지어졌거나 작자를 알고 있다는 한 가지 홈 때문에 나쁜 시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학문과 시 , 수사롤 특정 시대로 한정하거나 특정 계충의 전유물로 준 것이 아니며 그의 종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준 것이다. 또 그 분께서는 오래된 것을 모두 당대에는 새롭게 만들고, 고전적 작품은 모두 처음 나오자마자 출세작이 되게 하신 분이다 . >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 새로운 시와 동시대의 문학 전반에 유리하게 작용될 수밖에 없었 던 반발이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앞당겨 일어났다. 그러한 복합적 인 사정은 아라비아의 이교도 시대와 그 특징적인 미덕들—-―명 예, 용기, 관대함 등 만이 천재 시인을 만들 수 있다는 지배적 인 이론을 뒤엎었다. 골트치어의 논문(pp . 148 이하)에서 명쾌하게 밝 혀지고 있듯이, 이 방면의 주요한 사상적 경향 중에서 (1) 압바스 조 정권에 의해 조장된 경건하고 신학적인 분위기와 (2) 외래 문 화, 특히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주목할 만하다. 전자의 경우, 독실 한 무슬림들이 <자힐리야>에 대한 배타적인 주장을 인정하려 하거 나 <남성의 덕목rrn.uuwwa>을 <종교din>보다 치켜 세우려 하지는 않을 것이 명백하다. 꾸란의 언어나 문체가 비교도 안 될 만큼 뛰어 나지 않았는가? 분명히 이교도들의 시보다는 경전이 연구하기에 보 다 더 적절한 주제였다. 그러나, 무슬림들이 이슬람 이전의 이상(理 想)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한 것은 압바스가가 승리하고 따라서 페 르시아가 패권을 잡게됨에 따라 아랍 민족이 지적으로 우위에 있다 는 해묵은 오만한 신념이 혼들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상 숭배시대의 전통을 찬양하기는커녕, 오히려 압바스 칼리파를 하팀 따이이나 하립 븐 시난과 같은 과거의 영웅들과 나란히 입에 올리는 것을 심히 욕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철학자인 킨디 al- Kin뎨 (약 윤 0 년경 사망)는 어느 시인이 감히 그와 같은 밉살스런 비교를 하자 그를 꾸짖었다. 그는 <이들 아라비아의 건달휴넓ik al-'Arab 들은 누구인가, 또 그들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61 새로운 시파를 지지하는 비평가들 이븐 꾸타이바가 새로운 시파에 속하는 시인들의 말에도 공평하 6) 이븐 칼리칸이 아부 탐맘에 관해 이야기한 내용을 참조(드 슬란의 번 역서 vol. i, p. 350 이하 참조) .
게 귀를 기울여야 하며 연대기나 언어학적으로 보다는 <미적 감 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그의 뒤에 나온 위대한 문학 비평가들은 신시가 고대 시보다 더 낫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 싸알리비 T 函책 bI(1038 년 사망)는 이슬람 이전의 시인들이 섬세함과 우아한 점에서 이슬람 이후에 나온 시인들보다 못하며 또 당대의 시인들이 모든 이슬람 이전 시인들의 명성을 무색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 이븐 칼둔에 의해 획기적인 저술로 묘사된 시학을 주제로 다룬 『 움다 'Umda 』의 저자 이븐 라쉬끄 Ibn Ra shiq(lCJl O 년경 사망) 는 당대의 시인들이 송시의 진부한 인습을 버린다면 그들의 우월성 을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전혀 타 본 적이 없는 낙타를 타 고 전혀 가 본 적이 없는 사막을 지나 그들과 같은 도시에 거주하 는 후원자에게 가는 것처럼 상상속의 여행을 이야기하지 말고, 시인 들이 자연과 진실로부터 영감을 끌어내야 된다는 이븐 라쉬끄의 견 해에 유럽 독자들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매 우 합리적이고 필요한 이의 제기가 될 것으로 보이지만 베드윈의 시 <까씨다>는 도시의 생활 여건에 맞추어 쉽게 개작될 수 없는 것이다. 세세한 데를 고치기보다는 시 구조를 완전히 재구(再構)하 는 것이 긴요함을 알아야 한다. 7)
7) Noldeke, Beit rlige, p. 4 참조.
신진 시인둘의 인기 골트치어는 <히즈라 5 세기, 즉 서기 l (XX)년경부터 이교도 시인들 의 시가 어느 누구도 달성하기 어려울 만큼 완벽하다고 하는 정설 이 완전히 깨진 것으로 간주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로부터 대중의 미적 감각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홀렀다. 이는 압바스 시대와 그후에 편찬된 시 선집에 현대풍의 시들이――-이는 아랍 문학에서 인기 있고 특징적인 부문이다一一구설대 다수를 차지하고, 고대 시가 홀
대받고 있다는 불평이 자주 나온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 으로 무슬림들에게 있어서의 이므루 알-까이스와 그의 동족민들의 관계는 초서 Chaucer8 ) 와 영국의 보통 사람들의 관계에 비유될 수 있 겠지만, 이븐 꾸타이바가 처음 개진한 견해는 , 고대의 언어학적 비 평론을 고집하며 심지어 무타납비 Mu tana bb i나 아부 알 - 알라 알 마아리 Abu al-'Ala al - Ma'am 가 고전적 < 정 형 a sali b > 을 지키지 않 았다고 해서 그들의 작품을 시로서 간주하기를 거부한 지식충의 격렬 한 반대에 부딪쳤다 ? 이와 같은 현학생 街學 )의 결과는 고어(古 語 )와 골 동품에 대한 관심과 같이 잊혀져 아득히 먼 것에 대한 암시만 풍부 한-마치 빅토리아 시대의 문학사에서 영국학자들이 그리스어 와 라틴어로 쓴 시만큼이나 중하게 여길 만한 것이라곤 없는 것처 럼 ___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수천 개의 <까씨다 > 에서 찾아볼 수있다.
8) [역 주] 영 국의 시 인 (13 40?-1400) ; 『 켄 터 베 리 이 야 기 The Cante r bury Tales 』의 작자로서 <영시의 아버지>라 불린다
9) lbn Khaldun, Muqa d dim a(Bey rou t, 1900), p. 573, I. 21 이 하 ; Prole- go mena of lbn K., 드 슬 란의 번 역 서 , vol. ii~ p. 380.
신시(新詩)의 특징 이제 압바스조 칼리파의 즉위에 따라 나타난 신시의 특징으로 넘 어가면, 처음부터 끝까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궁정의 후원하 에 번창하였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조직적인 서적 판매나 부유한 발행인이 없었으므로 대개의 시인들은 생계 유지를 위해 칼리파들 이 기분내키는대로 주는 하사금이나 칭송해 주고 받는 대가에 의존 하였다. 잘 된 칭송시에는 막대한 금액이 지불되었고 시인들은 가장 기발한 묘사로 서로 경쟁하듯 아첨하였다. 진짜 재능 있는 작가들조 차도 돈이나 재물을 받고 자신들의 시 재능을 팔아 넘겼다. 그러나 그들이 지은 시는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의미한 허
풍에 불과하였다. 그리하여 종종 동양의 시 모두가 그런 것으로 잘 못 인식되곤 하지만1 0 1 이같은 특질은 전성기의 아라비아 시와는 전 혀 관계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내재적인 면을 칭송하고 자연으 로부터 직접 이미지를 끌어낸 고대의 베드윈들은 싸알리비의 동시 대인들과는 정 반대 축에 서게 된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우마이야 조하에서는 거의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명백히 새로운 특징이 두드 러지게 나타난 것은 압바스조가 들어서며 페르시아인들이 궁중의 주요 직책을 차지하고 상당수의 시인들과 저명한 학자들이 페르시 아인의 피와 섞이게 된 후의 일이다. 과장되고 허풍 떠는 화려한 문 체가-무타납비가 이러한 문체를 대표하는 가장 전형적인 시인 이며 이 문체는 후세 이슬람 시의 현저한 특징을 이룬다一一-바그 다드의 칼리파 주위에 모여 들어 명문인 바르메시드가처럼 자기 민 족의 승리를 찬양한 페르시아인들과 페르시아계 아랍인들에 의해 맨 처음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문 체 그 자체는 특별히 페르시아적인 것은 아니다. 밧샤르 븐 부르드 Bashshar b. Burd 와 아부 누와스 같은 이란계의 시인들이 초기에 아람어로 시를 썼는데 거기에는 필자가 아는 한 페르시아어 문체의 혼적을 찾아볼 수 없다.11) 페르시아인들이 아라비아 시에 들여온 것 은 웅장한 스타일이 아니라 생생하고 우아한 이미지, 세련된 시어, 오묘하고 다정다감한 감정, 풍부한 착상이었다.
10) Browne, Lit er ary Hi st o r y of Persia , vol. i~ p. 14 이 하 참조.
11) [역주] 일부 시인들이 페르시아 어휘를 사용한 것은 사실이나 대부 분 아람어 문법 형태를 보존하였다. 페르시아 어휘를 가장 많이 사용 한 시인은 아부 누와스이며 특히 주시에서 조로아스터교의 남종들에 게 이야기할 때 그들 신이나 종교적 축제에 관한 어휘롤 페르시아어 그대로 사용하였다. 송경숙 외, 『아랍 문학사』, pp. 112-113.
변형 과정은 페르시아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의 유입 이외에도 다 른 여러 원인들에 의해 촉진되었다. 예컨대 공공 생활에서의 이슬람 의 점증하는 중요성과 공동체 전반에 걸친 강력한 종교 정신이 ___
이는 아부 알_아타히야 Abu al-'A tahiy a 의 사색적이고 교훈적인 시 에서 가장 완벽하게 표현되었다―――변형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다양한 삶의 온갖 변화가 이들 새로운 시인들의 눈 부신 문장 속에 묘사되고 있으며 거기에서 읽는 이의 기분에 따라서는 가장 열광적 인 환희와 가장 수치스러운 천박함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또한 세 상만사가 다 귀찮은 염세관과 고상한 명상의 기운이 뒤섞여 있으며, 섬세한 감정, 자연스러운 정념(情念), 강렬한 수사도 엿볼 수 있으리 라. 그러나 베드윈 시가의 남성적인 자립심이나 야성적이고 활기 넘 치는 자유 분방함, 추종을 불허하는 생생한 인상은 이들 시인들의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압바스 시대 다섯 명의 전형적 시인 본 장에서 주요 압바스 시인들을 모두 공평하게 다루기란 불가능 하지만 무띠아 븐 이야스 Mu t:I • b. lya s , 아부 누와스, 아부- 알-아타 히야, 무타납바, 아부 알-알라 알-마아리의 다섯 시인을 대표적 시 인으로 꼽을 수 있겠다. 처음 세 시인은 바그다드 궁정과 긴밀히 접 촉하였으며 무타납비와 아부 알-알라는 알렙포의 함단조에서 활동 하였다. 무띠아븐 이야스 무띠아 븐 이야스는 여기서 새로운 시파의 초기 시인으로서 주목 할 만 하다. 부친은 팔레스타인 태생이었으나 그 자신은 쿠파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다. 그는 우마이야조에서 시작 활동을 시작하여 칼리파 왈리드 본 야지드만을 섬겼다.]” 칼리파는 이야스가 <교양은 있으나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뻔뻔스럽고 신앙심이 미심쩍긴해도 즐 거운 말동무가 되고, 재치가 넘쳐> 자신의 마음을 알아 주고 따라 12) Ag hiJnI, x ii , 80, 1. 3.
줄 친구로 생각하였댜 그러나 압바스인들이 권력을 잡자 무띠아는 칼리파 만쑤르에게 붙었다. 다른 장에서 논하게 되겠지만 그가 자유 사상가들인 <진디끄>와 어울려 보낸 방탕한 생활에 대해 많은 이 야기가 전해진다 사랑과 술을 노래한 그의 시는 밝고 우아한 특징 을 지니고 있다. 그의 유명한 시로는 그가 <디흐깐dihq an( 페르시아 인 지주)>의 딸과의 이별을 슬퍼하며 하마단과 바그다드 사이에 있 는 지발Ji bal 주의 경계선에 위치한 마울인 훌완I:Iul w 如의 두 그루 야자나무에 빗대어 떠나간 애인을 그리는 시이다. 이 시에서 <훌완 의 두 그루 야자나무보다 더 빠른 친구들>이란 속담이 생겼다 .13)
13) Freyt ag, Arabum Proverbia , vol. i , p. 46 이 하에 서 이 번 역 시 의 아람어 원문을 찾아볼 수 있다. 뤼케르트 R il ck ert는 Hamasa, vol. i, p. 311 에서 동 시를 독일어로 옮겨 놓고 있다 . 동 시의 전문은 A g降 m, xii , 107 이하에 나온다.
자유민의 딸 <훌완의 두 그루 야자나무여, 세월의 무정함을 슬퍼하노라! 세월은 언제나 모든 생물과 생명을 갈라 놓는다는 것을 아는가. 이별의 고통을 그대 맛보았다면 버림받은 나처럼 슬피 울 것이건만, 나를 도와다오! 그대들도 곧 똑같은 모진 운명으로 뿔뿔이 홑어져야 할 것이니. 그 옛날 얼마나 많은 친구들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버렸던가. 잘가시오, 자유민의 딸이여! 이같은 비애를 나는 견뎌낼 수 없소 아, 슬프도다! 그녀의 눈길이 나에게서 떠나
더 이상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구나! > 아부 누와스 (810 년경 사망) 『 아라비안 나이트 』를 통해서 유럽인들에게 알려진 아부 누와스는 <명군 하룬 알 一 라쉬드>의 술 친구겸 궁정 광대, 혹은 수많은 익살 이나 소담(笑 談 )의 주인공으로서 기억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아부 누와스는 동양의 하울글라스 Howle g lass 나 조우 밀러 Joe M 비 erl 4) 라 고 할 수 있다. 아부 누와스는 그의 시를 심사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의 견해에 따르면 무타납비를 비롯한 그의 모든 동 시대인들과 후계자들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댜 또 어느 고대 시인보다도 시재가 출중한 위대한 시인이었다는 점이 종종 간 과되고 있다 .
14) [역주] 영국의 희극배우 (1684 - 1783).
하산 븐 하니l:Ia san b. Bani'는 아부 누와스(머리채가 있는 사람) 란 별명으로 더 유명하였는데 그의 어깨 너머로 늘어트린 두 개의 머리채에서 그런 별명이 생겼다 . 15) 그는 8 세기 중반경 쿠지스탄의 주도인 아흐와즈에서 비천한 신분의 부모로부터 태어났다 . 그가 순 수한 혈통의 아랍인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의 어머니 이름 잘라반 J allaban 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다움 시구는 그가 페르시아계임을 부 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15) [역주] 고대 남부 아라비아 왕국의 마지막 왕 두 누와스의 이름을 따서 <아부 누와스>로 불리어지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Charles Gre- ville Tuete y , Classir o l Arabic Poetr y(L ondon, 1981), pp. 56- 57 .
<타밈과 까이스 그리고 그들 친척은 모두 누구인가? 신이 보기에 아랍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1 61
16) D.r wa n, ed. by Ahlwardt, Die Wein lied er, No. 26, v. 4.
아부 누와스는 바스라와 쿠파에서 교육을 받았다 . 특히 바스라는 자신의 고향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1 7) 쿠파에서는 박식한 칼라프 알 아흐마르 밑에서 시와 언어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학자들의 관습대 로 사막의 아랍인들과 함께 <방랑의 해 Wan derj ahr> 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뒤 바그다드로 갔는데, 얼마 안 있어 하룬의 궁전에 있는 경쟁자들을 모조리 무색하게 만들었다. 방탕한 성격의 아부 누와스 는 굳이 애써 그런 성격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그는 악명 높은 부 도덕한 행위와 취태, 신에 대한 불경 때문에 칼리파의 노여움을 사 사형에 처하리라는 위협을. ' 받기도 하였다. 실제로 그는 수차례 투옥 되었다 . 그러나 이같은 가혹한 처사는 잠깐 뿐이었다 . 이 시인은 하 룬과 그를 이은 아들 아민의 시대에 걸쳐 살았다. 나이가 듦에 따라 아부 누와스는 다음과 같이 회개하였다. <악마는 병들었는데, 그 악 마가 수도승이 될 뻔하였다네.> 바르메시드가의 몰락 후 하룬에 의 해 재상으로 임명된 파들 븐 알-라비아 Fa 대 b. al- 표虹‘에게 아부 누와스는 감옥에서 다음 시를 헌정하였다.
17) Ibn Qu ta yb a, K.al -Shi' r w a al-Shuara, p. 502, I. 13.
<파들, 나를 선(善)에 이르게끔 지도 편달해 주신 (선이란 습관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대를 찬미하오. 이제 악이 나를 떠나버리고 선이 다시 찾아오니, 고결하고 경건한 짓만 하리라. 나를 보면, 아마 바스라의 성자인 하산이나 까타다Qata cla 를 보는 듯 할거요 .181 누르스름하고 메뚜기 같은 내 뺨이 색조를 띠면 나는 깡마른 몸에 겸손해지네.
18) 저명한 금욕주의자인 바스라의 하산에 관해서는 pp. 318-320 참조. 까타다 역시 바스라 출신이며 하산과 동시대인으로 박식한 신학자였 다 .• 7 35 년 사망.
팔에는 묵주 , 가슴엔 경전, 옛날 같으면 금 목걸이 주링주렁 매달려 있던 곳에 .>1 9)
19) 이 시는 Ibn Qu ta yb a, 앞의 책, p. 507 이하에 인용되어 있다 . 여기 서 <경전 al-ma$b af>은 꾸란을 가리킨다.
아부 누와스의 디완에는 찬양시 ma dib, 풍자시hija, 사냥 노래 tard i yyat , 애가 m 紅 a 出 I , 종교시 zuhd iyya t 둥 다양한 종류의 시가 포함되어 있으나 사랑과 술이야 말로 그의 재능을 가장 마음껏 발 휘하였던 주제였다. 그의 주시(酒詩) khal miyy a t는 비할 바가 없는 뛰어난 작품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여기 그 중 가장 짧은 것을 소개한다. <포도주와 나를 못마땅해하는 그대가 내게 미소를 보여 주지는 못한다 해도 그대에게 반항한다고 욕하는 것은 비열하지요. 꾸짖는 일을 그만두기까지는 술이란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시오뺄 그대의 더러운 혀가 오히려 그 아름다운 (술이란) 이름을 더럽힐까 두렵소이다! 이봐라, 술 심부름하는 아이야, 어서 와서 술을따라라. 마치 잔속에 해 맑은금빛호수가담겨 있는듯한 십 년짜리 포도주를 거기에 물을섞으면, 심미안이 있는 자에게는 반짝이는 진주들이
촘촘이 꿰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마치 목걸이인 양 >20)
20) Di e Wein l i ed er, ed. by Ahlwardt, No. 47.
또 다른 시구를 인용한다. < 허허! 잔을 채우고 그것이 술이라 말해 주게나 . 양지에서 마실 수 있는데 굳이 음지에서 마실 수는 없는 법! 정신이 맑은 시간은 나에겐 가련하고 지긋지긋할 뿐이지만 기분좋게 마셔 갈 지(之) 자 걸을 때면 내 마음은 부자라네. 괜히 사람 눈을 속이기보다는 창피하더라도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을 말하라. 장막이 드리워진 쾌락이 무슨 소용있으랴 .>2 1)
21) 같은 책, No. 29, vv.1-3.
아부 누와스는 자신이 말한 것은 그대로 행동으로 옮겼으므로 그 를 위선자로 몰 수는 없다.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도덕적 종교적 정 취는 단순히 위선적인 말이 아니며 오히려 일시적이킨 하지만 진지 한 감정의 표출로서 간주되어 마땅하다. 그는 쾌락이야말로 그의 삶 의 최고 관심사이며 종교적 양심의 가책이 장애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신의 자비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악 보다 훨씬 위대하므로 부도덕함을 겁내지 말도록 뭇 사람들에게 역 설하고 있다. <가능하면 죄를 많이 지어 두어라, 신은 언제든지 화를 풀 수 있으니. 그날이 오면, 위대한 왕과 자비로우신 폐하의 면전에서 용서를 받을 것이니, 지옥에 대한 공포 때문에 포기하였던 것을 후회하며
그대 손가락을 깨문다 .>끄)
22) Ibn Khallik a n, ed. by Wt ist e n feld , No. 169, p. 100; 드 슬란의 번역 서 , vol. i, p. 393.
이제 궁정과 궁정의 영향을 주로 받은 상류사회 계층에 널리 퍼 져 있던 사상과 관습을 아주 훌륭하게 보여 준 아부 누와스와 방탕 한 시인들 al-shu'ara al- m.rjj an 과 작별할 때가 되었다 . 그들이 묘 사한 관능적인 방탕함과 우아한 환락의 장면은 그리스 예술이 로마 인들에게 축복이 아니었던 것처럼 페르시아 문화가 아람인들에게 진정 고마운 것이 되지 못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은 어두 운 면만을 볼 경우이다. 동시대 다론 시인의 작품에서는 도덕성과 종교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은 대다수 무슬림들이 상류사회 의 유행이었던 방탕 생활에 대해 분개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 아부 알-아타히야 (74 8- 828) 아부 알-아타히야는 그와 라이벌이던 아부 누와스와는 달리 아랍 계였다. 그는 쿠파에서 자라 젊은 시절 도자기를 팔아 생계를 이어 갔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그는 전도가 양양하였다. 칼리파 마흐디 면전에서 시를 읊어 그로부터 푸짐한 상을 받기도 하였으며, 그 후 하룬 알-라쉬드는 연봉 5 만 디르함과 함께 많은 부상(副 賞 )을 하사 하였다. 바그다드에서 그는 마흐디의 여종인 우트바 ‘U t ba 와 사랑에 빠졌으나 그것은 짝사랑에 불과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매력을 찬양 한 시나 자신 때문에 아부 알-아타히야가 겪어야 되는 고통을 한탄 한 시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녀로부터 실연당한 그는 무슬림 고행자가 입는 양털 옷을 걸치기 시작하였으며 , 23) 그때부터 허무한
23) Di iva n(ed. of Bey rou t, 1886), p. 279, 1. 9. 참조. 여기서 그는 <내가 다르위쉬 수도승의 옷을 걸쳤다 $irtu fi ziy yi mi s kini>고 해서 자기 를 저버 린 옛 친구를 꾸짖고 있다. 혹자는 그의 개종이 함께 살던 궁 전 시인들의 부도덕함과 세속성에 대한 중오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
였다.
연애시 대신, 죽어야 할 운명에 대한 쓸쓸한 명상을 다룬 시를 짓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이들 시는 그의 고향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 아부 알-알라 알一마아리나 혹은 경험과 묵상에 기초한 도덕적 철학에 찬성하여 이슬람의 긍정적 교훈을 무시하였던 다른 시인들 처럼 아부 알-아타히야는 <진디끄>로 비난받았다 . 24) 그가 시에서 죽음에 관해 자주 이야기하면서 부활이나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는 주장은2 5) 하나의 중상 모략이며, 이는 그의 <디완>에 나타나는 많은 구절로서 반박될 수 있다. 문학사가 안 쑬리 al-$u li (946 년 사망)에 따르면, 아부 알-아타히 야는 무(無)에 서 창조된 두 개의 상반된 요소로 우주를 만든 유일신을 믿었으며, 나아가 만물은 모든 현상이 마지막으로 파멸되기 앞서 그와 똑같은 요소로 변화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죽, 신의 계시가 없더라도) 명상과 추론, 탐구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라고 생각하였다 .26) 그는 위협적인 옹보 al-wa'Id 와 속세와의 교류를 금하는 계명 tabrim al-makas i b 을 믿고 있었다 .m) 그는 자이디파 Za ydites―이는 쉬아파의 분파로서 자이드 븐 알리 븐 후사인 븐 알리 븐 아비 딸립 Zayd b. Ali b. I:Ius ayn b. 'Ali b. AbI 'falib 을 추종하는 자들이며 자이드의 이름을 따 자이디파라 명명되었다 __- 의 분파인 부트리파 But rites 28) 의 견해를 대변하였다. 그는 어느
24) 그는 시에서 이 비방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같은 책, p. 153, 1. 10). <인간은 타락하였으므로 만약 누구든 건전한 신앙심을 가진 사 람을 보면 그를 이단자 mub tadi‘라 한다.>
25) [역주] 따라서 그의 죽음관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견해롤 채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송경숙 외, 앞의 책, p. 129 참조.
26) 아부 알-아타히야는 지식이 세 가지 원천 죽 유추qiy as, 고찰‘iy ar, 구전 sama‘ 에서 유래된다고 공언한다. 그의 DlW 차, p. 158, 1. II. 참조.
27) Mam , sein e Lehre und sein e Sch riften , by G. Flug el , p. 281, 1. 3 았이다하 (참DI조w 如 . ,아 p부. 刃알 0,- l.아 3타 히이 야하)는. 이같은 극단적인 견해를 취하지는 않
28) Shahrasta nI, 하르브뤼커 Haarb rli cker 의 번역, Pa rt I , p. 181 이하
참조. 아부 알-아타히야가 쉬아파였을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 초기 이 슬람의 예언자들과 성자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시구 를 참조 (D iW如, p. 104, I. 13 이 하). <그들 중 진실한 아부 바크르를 으뜸으로 꼽아라. 두번째로 존경받을 만한 인물로는 ‘우마르여!'라고 크게 외쳐라 . 우쓰만 다음으로는 하산의 아버지를 꼽아라. 그 두 사람의 장점을 사람들이 기리고 얘기하므로 . >
누구도 욕하지 않았으며 정권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도 찬성하 지 않았다. 그는 운명 예정설 j ab 며t 주장하였다 . 291
29) Ag h ani, ii~ 128, I. 6 이 하 .
아부 알-아타히야는 그의 작품중 일부로 추정되는 어떤 구절에서 마니교도Mani chrean 의 견해를 내심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의 시에는 정통파 무슬림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만한 것은 거의 들어 있지 않다. 다음 구절에서 골트치어가 부처를 암시하는 말을 찾아내 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해석도 가능한 단어이다 . 301 그것은 특정 개 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금욕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찬양하고 있는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30) Transacti on s of the Ni nt h Cong res s of Orie n ta l is t s , vol. ii, p. 114.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인간을 찾는다면, 거지 옷을 걸친 왕자를 찾아 보아라 > 3 1 )
31) D 邸 an, p. 274, I. 10. (p. 199, 마지막에서 두번째 시행)의 시 참조 . <나 이제 족함을 알게되니, 이제부터는 부를 빈곤으로 여기는 왕아 되겠다 . > 금욕주의자는 <왕과 같은 생활을 한다>(같은 책, p, 187, I. 5). 만족 한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숭고하다(p. 148, I. 2). 그래서 위대한 페르시아의 신비주의자 잘랄 알-딘 루미J al 회 al-Di n RomI 는 완벽 한 수피 주의 자를 가리 켜 (D iV찮 z- i Shams-i Tabriz , No. viii, v. 3) : Mard-i Khuda Shah buvad zir - i dalq, <하느님 의 아들은 다르위 시 수도승의 외투를 입은 왕이다>라고 말했다 . 또한 저명한 영성(靈性) 주의자들은 흔히 <신비적 도정(道程)의 왕>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필 자는 이 비유가 본래 부처의 이야기에서 암시를 받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인이 노골적인 이단적 주장은 삼가하고 있지만, 그의 시집에 나오는 대부분의 시는 엄밀히 말하자면 이슬람적 의미의 종 교적인 시가 아니라 <철학적> 시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때 문에 도덕적 교훈이 아무리 순수하더라도 교리라는 틀 속에서 만들 어진 것은 아니므로 이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건한 신 학자들이 그를 무신론자나 불신앙자로 비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 다. 그가 하룬 알_라쉬드에 의해 감금된 이유라는 것이――_즉 그 가 연애시를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한 때문인데―一국문트치어가 지적하였듯이 아마도 위험천만한 자유 사상 쪽으로 치우칠 수도 있 는 종교시를 계속 쓰겠다고 고집한 사실이 항간에 그렇게 소문난 것이리라. 그의 시는 심각한 우울증과 절망적인 염세주의의 정신을 풍기고 있다. 죽음과 죽음 이후에 오는 것, 인간의 나약함과 정신적 고통, 세속적 쾌락의 허무함과 그 쾌락을 끊어야 할 의무――-이러한 것 들은 그의 시가 한결같이 다루는 주제로서 독자들에게 금욕생활과 신에 대한 경외심, 최후 심판의 날에 대비하여 선행을 쌓도록 훈계 하고 있다. 그의 시의 문체는 소박하고 평이하며 자연스러운 점이 높이 살 만하다. 스스로 고백하듯이 그의 종교시는 궁중이나 또는 드물고 애매모호한 표현을 요구하는 학자들보다는 신앙심이 깊은 민중, 전통주의자와 신학자들, 특히 <이해할 수 있는 것 중 최상의 것을 좋아하는홋 서민들에 의해 주로 읽혀졌다. 아부 알-아타히야 는 <일반 대중>을 위한 시를 썼다. 진부한 기교로써 꾸며진 전통적 주제를 버리고 그는 공감에 호소하거나 보편적 체험의 소재를 사용 하였다. 그는 고대 아랍 문학사상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으로, 시 인도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하고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가 32) DiW an, p. 25, 1. 3 이하. 아부 알-아타히야는 <시장 바닥의 언어>를 자신의 시에서 사용한 점을 자신의 공로로 돌렸다(같은 책, p. 12, 1. 3 이하).
능<5 1 · 디는 것을 보여 주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부 알-아타히야의 시는 대부분 그 특 성이 철학적이지만 본질적으로 이슬람적인 교의, 특히 부활과 내세 에 대한 것도 많이 전해진다. 이같은 철학과 이슬람의 배합은 종교, 좀더 정확히 말하면 금욕주의를 주제로 한 시 중 가장 훌륭한 작품 으로 여겨지는 다음 시에서 알 수 있다 . <자식은 태어나서 언젠가 죽게 마련이고 집을 지으면 언젠가 썩게 마련이도다! 그렇듯이 만물은 소멸되는 법 , 우리도 태어난 흙으로 돌아갈 것을 누굴 위해 집을 짓는단 말이나? 죽음의 신(神)이여, 그대는 폭력을 쓰지도 아첨도 하지 않지만 그대가 올 즈음에는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도다. 그대 언제든 불시에 내 인생에 들이닥쳐 내 젊음을 먹이로 삼을지도 모를 일 그대를 아무 데고 억지로 잡아두려 하건만 잠자코 있는 것이 나를 애태우네. 아, 세월아! 세월이 흘러 나를 망치게 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으란 말이나? 자기가 준 선물을 스스로 앗아가 버린단 말이냐! 아, 세월아! 변덕스러운 그대여, 그대는 페허가 된 땅을 지배하노라. 이승이여, 그대에게 젖을 주려 해도 기쁜 결과 가져 오지 못하니 어찌된 거냐? 그대의 환심을사려 해도 그대는 왜 사방에 말썽만 피워 실망시키나? 사람들은 지혜로운 그대를 찾지만 그대는 마치 일장춘몽,
구름의 그림자마냥, 이제는 지나가버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날처럼, 번쩍이는 중기로 날아가 버렸네. 이 사람들은 그대에게 진 빚을 다 갚았도다. 그들의 발은 등자 위에 있으니 그들이 지체하지 않도록 하라. 그러나, 선행에 힘쓰는 자는 저 세상에서 약속된 보상을 받으리라. 나는 어떠한 벌도 두렵지 않은 듯, 모가지에 한 짐 죄를 얹고 드러누웠다. 이 세상을사랑하건만, 아, 슬프도다. 아직도 내 멍한 정신은 신으로부터 방황하고 있으니. 이승에서 내가 한 일에 관해 질문을 받으면, 무어라고 변명할까? 무어라고 반박할까? 심판의 날에 보고서를 내라고 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영원한 축복 속에 살건지, 아니면 영겁의 벌을 받아 고통을 겪을지 내 행실을 적어 놓은 두루마리를 살펴보는 사이에 그 무서운 시간에 최후의 심판이 내려지겠지 !>33) 다음에서는 이 시인의 염세적인 인생관을 보다 명확하게 요약해 주며 그의 시집 면면을 꽉 채우고 그의 인기에 적지 않게 기여한 도덕훈과 금언에 해당되는 몇몇 시구를 그의 시집에서 발췌하였다. <이승이란, 감촉은 부드러우나 독을 내뱉는 독사와 같다. >34) <사람들은 술자리에서 흥청거리며 앉아 이승의 손에서 건네받은 죽음의 술을 마신다 >35) 33) DIWan(B e yr ou t, 1886), p. 23, 1. 13 이 하. 34) 같은 책, p. 51, 1. 2.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나 은총 속에 살고 있다 하지 마오뺄 은총을 빌어 준 그가 죽은 자를 깨울 수 있으니 .> 36) 미덥지 못한 친구들 <나를 경멸케 하는 것은 시대 탓이 아니라 바로 이 시대에 태어나는 자들 때문이다. 말은 달콤히 하면서도 신용을 깨는 친구들을 믿을 수 없다. 그들은 도움도 안 되며 악마나 그들을 돕는 것을 반겨할 뿐, 내가 그들을 쳐다보지 않도록――-그러는 것이 최선의 길일테지――_ 그들도 나를 쳐다보지 않도록 해주소서 .>31) <사람들이 만약 예언자가 구걸하는 것을 보면, 돌아서서 코웃음 칠 것이다. 친구는 그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게 될 때까지는 친구이다. 그러나 그대가 곤경에 처해 그의 곁에 다가가면, 그대에게 토악질할 것이다 .>381 사악한세계 <죄는 그 죄를 저지른 자에게 다시 돌아온다. 무식한 바보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무장한다. 인정은 사악함에 무너지는 법,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사람이다 .>391 35) 같은 책 , p. 132, 1. 3. 36) 같은 책 , p. 46, 1. 16. 37) 같은 책 , p. 260, 1. II 이하. 38) 같은 책, p. 295, 1. 14 이하. 39) 같은 책, p. 287, 1. 10 이하.
<나에게 희망을 준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나의 절망감이었고 어떻게 해서인가 모르겠지만 나도 곧 신의 은총을 받으리라. >40 ) 생과사 <삶이란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깨끗이 살아 이름을 남기는 것 . 죽음이란 다가오는 그 날이 아니라, 오명을 남기는 것 바로 그것. 그러므로 선행으로 그대 명성에 활력을 주어라. 아, 인간이여! 고로, 그대는 이승에서 두 삶을 살게 될 것이다. >411 격언과 처세술 <거짓은 표정에서 드러나고 진실은 우화와 훈계에서 알 수 있다 .>42) <나는 모든 인간에 대한 애정의 유대가 손상되지 않게 하노라. 이는 내가 타인에게 위선자가 되면 그것은 나 스스로에 대한 배신이 되기 때문이다 .>43) <안전한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구출되기를 바라는가? 배는 육지에서는 빠른 항해를 하지 않는 법 .>44) <이승에서 벗어나 알몸으로 살아라. 알몸으로 세상에 나왔으므로 >45) 40) 같은 책, p. 119, 1. II. 41) 같은 책, p. 259 마지막 두번째 행 이하. 42) 같은 책 , p. 115, 1. 4. 43) 같은 책 , p. 51, 1. 10. 44) 같은 책 , p. 133, 1. 5. 45) 같은 책, p. 74, 1. 4.
<인간은 자기 재산울 남이 못 건드리게 하면서도 이웃 재산을 탐낸다. 그들이 방해하면 그는 화를 낸다. 대지를 침상으로 삼는 자는, 비단이 없어도 기분좋게 잠든다 . > 46 1 <인간은 고귀한 집안에 태어난 것을 자랑하지만 아무리 명문의 혈통이라도 선행과는 견줄 수 없다네 .>4 7 1 <지식이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다면 내가 이제껏 쌓아온 경험은 충분치 못하리.> 481 <믿음은 모든 근심을 덜어 주는 약이며 의심은 걱정거리를 많이 낳을 뿐이다 .>491 <나를 꾸짖지 마오, 그것은 나의 예정된 운명, 내가 설혹 잘못하더라도 운명의 신은 절대 무류(無 懿 )이니 .>501 아부 알-아타히야를 가련한 위선자쯤으로 여긴 동시대인들에게는 그가 눈에 들어올리 만무였다. 그는 마문· 칼리파 시대까지 오래 살 다가 세상을 떠났다 .5” 폰 크레머는 아부 누와스보다 아부 알一아타 46) 같은 책 , p. 149, 1. 12 이 하. 47) 같은 책 , p. 195, 1. 9. p. 243, 1. 4 이 하 참조 . 48) 같은 책 , p. 274, 1. 6. 49) 같은 책 , p. 262, 1. 4.
50) 같은 책 , p. 346, 1. II . p. 102, 1. II ;p. 262, 1. I 이 하. ; p. 267, 1. 7 참 조. 이 시는 4 천 개의 경구로 되어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 각운 2 행 대 구(對句)로 지어진 아부 알-아타히야의 유명한 훈계시에서 인용해 온 것이다. 이 중 일부가 폰 크레머가 그의 저서 Cultu r ge schi ch te des Or ien ts , vol. ii, p. 374 이하에서 번역해 놓고 있다.
51 ) 그는 자신의 시에서(Diw an, p. 160, 1. II) 90 세까지 살았음을 얘기하 고 있지만 이것이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면, 정정해야 될 것이다. <70> 과 <90> 의 숫자는 아랍어 필기에서는 혼동되기 쉽다. [역주] 이
는 저자의 착오로 생각된다 . 아라비아 숫자에서 <90> 과 비슷한 숫자 는 <70> 이 아니라 <60> 이다 . ·
히야가 더 시재가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필자는 이에 동의할 수 없 다. 그러나 그의 지적대로 두 시인은 당대의 전형적인 시인들이다. 아부 누와스가 쾌락에 빠진 부패되고 천박한 사회에 대한 묘사룰 섬뜩할 정도로 실감나게 해주고 있는 반면, 아부 알-아타히야는 중 류 및 하류계급에 파고들어 그들에게 보다 진지하고 고양된 인생관 을 갖도록 해준 종교적인 분위기나 믿음을 묘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9 세기 중반경 들어선 압바스 제국이 급속히 몰락하고 해체됨에 따라 수많은 군소 왕조가 일어나고 이제껏 무적을 자랑하던 바그다 드의 당당한 면모도 여러 지방 군주들로부터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 다. 독립 왕조를 통치하거나 준 독립적으로 통치룰 하고 있던 이들 지방 군주들은 때로는 열렬한 학문의 후견인들이었다. 예컨대 페르 시아의 민족 문학이 초기에는 쿠라산의 사만조와 이라크의 부와이 흐조의 후원으로 탄생된 것임은 잘 알려진 대로이지만, 그들이 세력 을 유지하는 데 쏟은 열의나 세력 확장의 욕심 때문에 비록 그들이 그렇게 하고 싶어 했다고 하더라도 문학을 장려할 만한 여유는 거 의 없었다. 944 년, 친히 군사를 이끌고 알렙포를 점령하여 북부 시 리아에 독립 왕국을 세운 함단조의 사이프 알-다울라 만큼 무력과 화평책 양면을 절묘하게 구사한 사람은 없었다. 사이프 알-다울라에 대한 싸알리비의 찬사 싸알리비는 사이프 알 - 다울라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함단인들은 용 모가 단정하고 달변이며, 천부적으로 관대하고 마음의 중심이 잡혀 있는 왕 과 왕자들이었다. 사이프 알-다울라는 그 중에서도 목걸이 한 가운데 박힌 진주격의 중심 인물로 유명하였다. 그는――-신이 그를 어여삐 여기시어 그 의 소망을 들어 주시고 천국을 그의 주거지로 하여 주시기를一一-당대의 가장 빛나는 별이며 이슬람의 기둥이었다. 그는 변경을 지키며 국정을 잘
다스렸다 . 반란을 일으킨 아랍인돌에게 공격을 가해 그 들 의 기세 를 꺾고 그 들의 만행으로부터 백성들을 온전케 하였다. 그의 이러한 활약은 그리스 황 제의 원한을 샀지만 결정적으로 그들의 공격을 분쇄하였다 . 또한 그는 이슬 ~I 훌륭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궁전은 사자들의 최종 목적지이자 관대함 이 시작되는 곳이며 희망의 지평점이었다 . 또한 여행의 종착지이자 학자들 의 집합소였으며 시인들이 명예 를 걸고 자옹을 겨루는 곳 이었다 . 압바스 칼 리파 시대 이후 사이프 알-다울라만큼 저명한 시인들과 유명한 문학가들을 끌 모은 군주도 없다고 한다 . 사람들은 시장에 갈 때와 마찬가지로 오직 수요가 있는 것만을 군주에게 가져 간다 . 그는 조예가 깊은 학자이자 직접 시를 쓴 시인이면서 훌륭한 시에 대한 후원자였다. 특 히 자신에 대한 찬사 에는 매우 민감하였다 .> 52 )
52) Tha 넓i bI, Yati mat al-Dahr(Darnascus, 1304 A. H.) vol. i, p. 8.
사이프 알-다울라의 사촌인 아부 피라스 알 - 함다니 Abu Fir as al- 표m 쇼回는 용맹무쌍한 군인으로서 여기서 지면이 허락한다면 좀 더 주목받을 수 있는 시인이다 .53) 그러나 그가 평범한 궁정시인들보 다는 우수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이내 한 시인의 등장으로 빛을 잃 고 만다. 이 시인은 적지않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인들에게 각 별한 인상을 남겼으며 그의 명성이 당당히 영향력을 미침으로써 장 차 이슬람 세계에서의 시 감상의 기준이 되었다.
53) Von Kremer, Cultu r ge schi ch t e, vol. ii, p. 381 이 하 ; Ahlwardt, Po- esie und Poeti k der Araber, p. 37 이 하 ; R. Dvorak, Aba Fir a s, ein arabis c her Di ch ter und Held (Ley d en, 1895) 참조.
무타납닌 |(91 5-005년) 무타납비로 유명해진 아부 알-따이입 아흐마드 븐 후사인.Abo. al-Tayy ib Abmad b. I:I usa yn은 쿠파에서 나서 자랐는데 그의 부친 은 물을 운반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유망한 젊은이들을 외국으로 보내 교육시키는 훌륭한 관습에 따라 그는 다마스쿠스에서 공부하
면서 시리아의 다른 여러 도시들을 가 보았다. 뿐만 아니라 많은 시간을 베드윈들과 함께 보냈는데 그의 시에서 과시되고 있는 아랍 어에 관한 비범한 지식과 정통함은 모두 그 덕택이었다. 여기서 그 는 예언자로 자처하며 자신의 말을 믿도록 많은 사람들을 부추겼 다. 따라서 후에 알-무타납비, 즉 <예언자 연(然)하는 자>로 불리 게 되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힘쓰 Hm 방(에뎃사표 mssa)541 의 총독인 루루 lu'lu' 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는 석방된 후 이곳 저곳으 로 방황하며 어중이 떠중이 다 찬양하다 운명의 손길에 끌려 마침 내 알렙포의 사이프 알-다울라 궁정에 오게 되었다. 9 년 동안 (948-
54) [역주] 고대에는 에뎃사로 알려졌던 시리아 중부의 도시.
언젠가 무타납비가 그의 후견인인 사이프 알-다울라에게 그를 위해 얼마 전에 지은 송시를 건네 주고 물러 나왔다. 사이프 알-다울라가 한가할 때 그것을 읽어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마침내 왕은 이 송시를 읽다가 다음 구절에 눈길이 멈추었다. Aqil anil aqti ‘ 무 ‘alli salli a 'id zid hashsh i bashsh i taf a銅 adn i Strrra $i.li또 I <용서하라 하사하라 증여하라 터라 높이 올려라 위로하라 저 k 固에 돌 려 놓아라, 덧붙여라, 웃어라, 기뻐하라 호의를 보여라, 가까이 가져오 라, 기뻐하라, 주라!>
55) Muta n abbI, ed. by Diete rici, p. 493. 와히디 W 뱌i dI 는 동 시의 주해 서에서 이 시구에 얽힌 내력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사이프 알-다울라는 시인의 오만 불손함에 불쾌해하기는커녕, 오히려 한 개의 시행 속에 14 개의 명령형을 교묘히 배열시켜 놓은 것에 넋을 잃고 그 의 모든 부탁을 다 들어주었다. 사이프 알_다울라는 용서하라에서는 <우리 는 그대를 용서하노라>고 말했으며, 하사하라에서는 <그에게 얼마간의 돈 을 주라>.:il, 증여하라에서는 <우리는 그대에게 재산을 증여한다 > , 타라에 서는 <이러이러한 말을 그에게 끌고 가라>로, 높이 올려라는 < 그렇게 하겠 다>로, 위로하라는 <그렇게 하겠으니 마음 편하게 가져라>로, 제자리에 돌 려 놓아라는 <그대를 존경받던 예전의 위치로 회복시킨다>로, 덧붙여라는 <그에게 이러이러한 것을 덧붙여 주어라>로, 가까이 가져오라는 <그대를 친구로서 받아주리라>로, 호의를 보여라는 <이미 그렇게 했다>로, 기뻐하 라는 <그대를 기쁘게 해주었다 >561 로, 주라는 <이미 그렇게 했다>로 고쳐 말했다. 무타납비와 경쟁하던 시인들은 그의 행운을 시기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사이프 알一다울라에게 말했다. <페하, 그의 요구를 꾼.두 들어 주셨 지만 그가 웃어라, 기뻐하라라는 말을 하였을 때는 왜 ‘하,하 , 하’ 라고 답하 지 않으셨습니까?> 사이프 알 ― 다울라가 웃으며 <너의 소망도 이루게 해주 마>라고 말하고 그에게 상을 내려 주었다.
56) 무타납비가 사이프 알-다울라에게 surra( 기쁘게 하다)를 사용하여 su rriyy a 를 뜻하고자 하였음을 설명하자, 기분이 좋아진 왕은 그에게 여자 노예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역주] 아랍어 s uniy a 는 <첩>을 의 미한다 .
무타납비는 관대한 그의 주인에게 진심으로 정이 들었다. 이같은 감정은 후에 흑인 카푸르Kafor 왕을 지나칠 정도로 칭송한 시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더 순수하고 고상한 어조를 불러일으켰다. 무타납 비가 때로는 눈 밖에 날 때도 있었지만 사이프 알-다울라는 자신을 그토록 훌륭하게 칭송해 준 시인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을 수 없었 다. 또한 무타납비는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짐짓 점잖빼지 않고 뽐내었다. 그는 자신의 세도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대체 로 아라비아의 시인들이 그러하였듯이 그러한 점을 자랑하기도 하
였다. 그의 시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궤변은 다른 언어로 재생될 수 없지만 다음 번역시는 그의 문체상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내게 냉담하고 내가 잘못되기나 바라며 트집만 잡는 그 분에 대해 내 마음은 얼마나 열렬한가! 왜 나는 몸만 축나게 하는 사랑을 숨겨야 하나? 사이프 알-다울라에게 온 세상 사람들이 똑같은 얘기를 고백하노니, 높은 하늘의 별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가 손을 잡지만 사랑의 정도에 따라 사례금을 나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칼이 칼집에 들어 있을 때 그를 찾아가 보았고, 칼날이 피에 홈뻑 젖어 있을 때 그를 만나 보기도 하였지. 평시든 전시든 그 분은 전 인류 중 최고의 인물, 그 분의 장점 중 극치는 역시 그 분의 고결한 마음씨. 적은 도망쳐버려 그대의 공격을 피하고, 그대는 반쯤은 재미로, 반쯤은 수고의 보람으로 파란많은 승리를 쟁취한다. 싸우지 않고도 전쟁터는 그대 것, 산이나 평지에 파놓은 적들의 참호에서 그들을 쫒아내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네. 그대의 맹렬한 공격 앞에 적군의 전열은 혼들리는데, 그대의 야심어린 영혼은 그들 뒤를 바싹 뒤쫒아야만 하나? 그대 임무는 싸움터에서 적을 패주시키는 것, 적의 패주에서 안전함을 찾는다 해도 그대에겐 수치가 아니니, 혹시, 그대는 원월도(個月刀)와 목이 서로 인사를 나눌 때만이 달콤한 승리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대 나에게 가장 정의로운 행동을 보여 주오! 폐하, 그대는 바난을 받기도 하지만 청원도 판가름해야 합니다.
그대에게 청컨대, 그대 눈을 속이지 마오. 금빛 번쩍거리더라도 하찮은 거품 속 비계를 보시오! ) 어둠과 빛을 구별 못한다면 인간에게서 눈은 무슨 소용 있소? 내 심오한 시의 재능, 맹인들도 알아볼 수 있으며 내 시구는 귀머거리의 귀에도 울린다. 그것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 멀리 퍼져 나가지만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그것들을 모아들인다. 종종 내 웃는 모습으로 나를 욕하는 자들의 짓거리도 막을 수 있었고 그의 무례함을 필사적으로 줄일 수 있었네. 아, 사자가 이빨을 드러내고 그의 교활함을 눈치 채면 사자가 그대에게 미소를 띄는 것은 환상이 아니다. 앞 뒷발이 하나로 달리는 것처럼, 손발로 몰아댈 수도 없는, 누구도 둥에 올라탈 수 없는 순종 말을 타고 내 심장의 피를 원하는 자들을 수없이 살해하였도다. 파도가 세차게 몰아치는 죽음의 바다 한가운데서 내 날카로운 칼날을 휘두르는 그날이여! 사막도 나를 알고, 밤과 말 타고 오는 이도 니를 안다. 전쟁과 칼, 종이와 펜도 니를 알아본다.>책 )
57) 칙역하면 <(겉보기에) 지방이지만(사실은) 종기가 난 사람을 뚱뚱보 라고 생각하지 마라.> 58) Drwan, ed. by Diet e rici, pp. 481-484.
무타납비가 이집트로 도피하여 이크쉬드조Ikhshidite의 카푸르 왕 에게 붙음으로써 결국 그와 사이프 알-다울라 사이는 소원하게 되 었다. 노예 출신의 혹인인 새 후견인에게 실망한 무타납비는 바그다 드로 갔다가 그 후 쉬라즈 S hiraz에 있는 부와이흐조의 아두드 알-
다울라 ‘Ac;lud al-Dawla 궁전을 찾아갔다. %5 년에 그는 바빌로니아 를 지나 여행하는 도중 도적을 만나 살해당했다. 무타납비의 인기는 그의 <디완>에 대한 수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주해서들과5 9) 비평 논문들로서 입증된다. 아랍인들은 그를 가 장 위대한 아라비아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으며 상당수 의 사람들은 그가 단연 일등급의 시인이라고 주장한다. 유명한 시인 이자 문학자인 아부 알-알라 알-마아리는 무타납비의 시에서 여기 저기 어휘를 바꾸고 싶을 때도 종종 있었지만 더 이상 어떻게 가필 올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였다. 이븐 칼리칸은 <무타납비의 시에 관한 한은 완전무결하다>고 말한다쁘 폰 함머 Von 표:Ullil:er6 ” 를 제 외 하고 라이스크 Reisk e, 62) 드 사시 De Sacy, 63 ) 보홀렌 Bohlen ,64) 브로 켈만B rockelrnann65) 둥 유럽 학자들에게서는_그들이 이 문제에 관해 고찰한 바에서 알 수 있듯이―__무슬림 학자들이 무타납비에 59) 가장 평가받는 주석은 와히디 W 助idi(1 075 년 사망)의 것으로서 디에 테리시 신부 Fr. Di e t e ri c i가 편찬하고 발행한 Muta na bbi( B erlin , 1858- 1861) 에 포함되 어 있다. 60) [역주] 근대에 와서 아랍 비평가들의 무타납비의 시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따하 후사인은 무타납비를 평범한 시인으로 간주한 반면, 마흐무드 다르위쉬 Ma b.ma d Darw i sh 는 자신의 시집 전체보다 무타 납비 시 한행이 더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 송경숙 외, 앞의 책, p. 223 참조. 61) Mote n ebbi, der gros ste arabis c he Di ch t er (Vi en na, 1824) . (역주] Jos ef Von Hammer-Pur g s tall (l774-1856) :오스트리 아의 동양학자. 아 랍어, 터키어, 페르시아어에 능통하였으며 비엔나 학술원 원장 역임. 무타납비의 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둥 많은 논문과 100 여 권이 넘는 저술을 남겼다. 62) Abulfe d oe Annales Muslem ici(H a fnire, 1789, &c.), vol. ii, p. 774, 그가 1742 년에 펴낸 따라파 Tar af a 의 무알라까트 주석을 참조. 63) Chresto m ath ie Arabe(2nd edition ), vol. iii, p. 27 이 하. Jou rnal des Savans, Jan ua ry, 1825, p. 24 이 하. 64) Commenta lio de Mote n abbio ( bonn, 1824). 65) Geschi ch te der Arabis c hen Lit ter otu r( Weim ar, 1898, &c.), vol. i, p. 86.
대해 보여 준 열정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 물론 서양의 심미 안적 규범으로는 무타납비가 유명한 이슬람 이전의 음유 시인들보 다는 훨씬 떨어지며, 나중에는 아부 누와스와 아부 알-아타히야에 게마저 영예를 뺏기고 만다. 시 애호가들은一_一이 용어가 유럽에 서 이해되는 바와 같이 ___ 그의 작품에서 심미적 쾌감을 구할 수 는 없다. 또 그들은 아랍의 비평가들도 인정하는 무타납비의 결점에 대해서 만큼이나 절묘한 대목에 대해서도 싫증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오직 동양의 토박이만이 무타납비의 진가를 제대로 평가 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동양적 관점을 이해하도록 노력하기로 하자. 또 가능한 한 무엇이 좋은 시며 좋은 심미안인지에 대한 우리 의 선입관은 잠시 옆으로 제쳐 놓기로 하자 . 다행히 이러한 시도를 위한 충분한 자료들이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싸알리비의 귀중한 저 술 속에 남아 있다 .661 싸알리 비 (001 - 1038 년)는 무타납비와 거 의 동시 대인이었다. 그는 이 시인이 죽은 지 대략 30 년이 지난 후에 『야티 마』를 쓰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그는 사회 전 계층에서 무타납비의 <디완>이 폭발적인 인기가 있었음을 입증하면서 그의 시집이 굉장 한 호평을 받았을 뿐 아니라 호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고 말한다. 싸알리비 자신은 어느 쪽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을 취했다고 주장하 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66) 필자는 디 에 테 리 시 의 명 저 Muta nabb i und Seifu -d daula aus der Ede/pe r le des Ts 따li b i (Leip z ig , 1847) 를 활용하였다. 여기에는 pp. 49-74 에 Yati ma 제 1 부 5 장에 나오는 싸알리 비 의 비 평 에 대 한 요약 이 들어 있다.
<이제 비평가들이 무타납비의 시에서 발견한 결점과 오점을 말하 겠다. 도대체 완전히 만족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자가 있겠는가? kafa al-mar' a fa대 an an tu 'adda ma 'ay ibu h. 결점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는 것은 그 사람의 큰 장점이다.
그러면 미덕에 대해 얘기한 다음 그의 문체가 지니는 독창적이고 비할 데 없는 특징을 서술하겠다. 아름답게 빛나는 별들이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것을 보니 눈이 부시다 . > 시를 시작하는 첫 행의 대구(對句, ma tl a‘) 는 형태나 의미상 완전 해야 되며 시에 시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이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시되었다. 싸알리비는 무타납비가 이 규칙 을 위반하고 <병>, <죽음>같은 불길한 어휘나 음악 용어와 산술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애당초부터 청자의 공감을 사지 못하고 오히 려 청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며 짜증나게 하는 예를 여럿 들고 있 다. 또 그는 무타납비의 섬세한 사고와 이미지에는 품위 없고 진부 한 표현이 너무 빈번하게 뒤따른다고 불평을 늘어 놓는다. <그는 진주와 벽돌을 함께 한줄로 늘어놓는다j ama'a bayn a al-durrati wa-'l 쉽 urra ti>. <그는 가장 화려한 장식에다 가장 아름다운 목걸 이를 꿰매고, 색상이 다채로운 아주 정교한 옷감을 짠 다음, 장미가 만발한 정원을 위엄 있게 왔다갔다 한다. 그러다가는 갑자기 엉뚱한 은유나 애매모호한 언어와 혼란된 사고, 지나친 허식과 난해함, 무 한정의 터무니없는 과장,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시어, 낯설은 어휘 사용에서 야기된 현학과 기괴함 때문에 가치가 손상된 시구를 한두 구절 내뱉는다.> 싸알리비가 무타납비의 이런 저런 약점들을 ___ 그의 비난은 일면 지당한 것이다 ___ 열거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까 지도 덩달아 무타납비의 홈만 트집잡을 필요는 없다. 그것은 무타납 비가 파격적으로 누군가를 칭송할 경우에 대비해 골라둔 묘미가 있 는 대목에서 그의 일반적인 심미안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 이다. 우선 싸알리비는 관습적인 에로틱한 서두 nasI 낡룹 다루는 무타납
비의 솜씨에 주목한다. 특히 베드윈 여인에 대한 그의 멋진 묘사에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이에 대한 칭찬이 동양 전역에 걸쳐 자자했던 것이다. 그 일 예로 그는 < 절묘한 시어, 시에 나타난 정교한 정취, 완벽한 기교 때문에 상류 사회에서 즐겨 노래되던 > 무타납비의 시 룰 인용하고 있다 . <지금까지는 부끄러움에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곧잘 참곤하였지만 이제부터는 부끄러움도 눈물을 막을 순 없도다. 뼈는 살찾으로 흐느껴 우는 듯하며 심줄은 슬픔의 폭포수로 부어오른다 . 그녀는 모자를 쓰지 않았지만, 헤어질 적 그녀의 얼굴에는 창백한 베일이 씌워져 있었다 . 그것은 베일이 아니라 그녀 뺨에 그림자가 드리웠던 것. 눈물이 뺨 위로 뚝뚝 떨어질 때는 그럴 듯하였다. 마치 두 줄로 진주를 박아 넣어 아로 새긴 금빛처럼 그녀는 세 다발로 닿은 검은 머리를 풀었다. 나흘밤을 새워 닿은 그 머리를 그녀가 하늘에 떠 있는 달로 올라가자 나는 두 개의 둥근 달만한 그녀 얼굴을 바라보았다. >m I 그 다음 싸알리비는 무타납비의 아름답고 독창적인 문체상의 여 러 특징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1 짤막한 대칭 구절 중에 직유를 연속 배열한다. <그녀는 달처럼 반짝이고 나뭇 가지처럼 혼들거리네 . 그녀는 용연향처럼 향기를 내뿜고 영양(玲羊)처럼 바라보네.> 67) Muta nabb r, ed. by Diete rici, p. 182, vv. 3-9, v. 5 는 생 략
2 후견인의 곁을 잠시나마 떠나 있다 다시 돌아온 것을 노래하는 다음 시구는 새로운 비유와 상징을 보여 준다. < 난, 의지할 데 없어 되돌아 오는 하늘을 나는 화살이었을 뿐> 3 사이프 알-다울라에게 바친 디움 시에서처럼, 색깔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양면(兩面) 옷에 비유될 수 있는 <양면 의 찬양시 al-ma .db a1-rrn1w척 jaly가 특징적이다 . < 그대가 손에 넣은 목숨들은 모두 그대 것, 그대는 불사신 , 이 세상은 축복받으리!> 여기서 시인은 사이프 알-다울라가 적에게서 거둔 승리를 칭송할 뿐 아니라 그의 장수와 행운이 계속되는 데 대한 모든 친구들의 기 쁨을 표현함으로써 이중으로 그를 찬양하고 있다 . 4 후견인인 왕을 마치 친구나 동료에게 말하는 식으로 칭송함으 로써 무타납비의 신분이 일약 평범한 아첨꾼에서 왕과 동등한 수준 으로 껑충 뛰어 오르게 된다. 5 자신의 생각을 대구문(對句文)으로 구분한다. <우리는 즐거움속에 있고 그리스인들은 공포속에 있네 , 육지는 부산하게 붐비고 바다는 혼란속에 빠졌다네.> 싸알리비의 비평에 대한 위 요약에서 당시의 시는 우아한 표현과 어휘의 교묘한 배합, 환상적인 상상력과 재치 있는 속임수, 그리고 수사적 표현을 현저하게 사용하는 데 그 중요한 가치가 있음을 쉽 게 알 수 있다 .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전 이슬람 세계에서 보편화 된 견해인데 그들의 견해가 우리의 견해와 일치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잘못된 것으로 비난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나라 사이에 견해가 다룰 때 누가 옳고 그름을 판정할 것인가? 영국민들이 셰익 스피어에 대한 최적의 심판관이고 이태리인들이 단테의 심판관임을 주장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면, 무타납비의 동족민들이 내리는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판정도-판정의 결과는 이슬람 이후에 출현 한 모든 시인들 중 그를 으뜸으로 삼는 것이다-마찬가지로 권 위 있는 것이다. 비록 싸알리비가 지적한 무타납비 특유의 탁월성이 우리의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그만큼 뚜렷하게 위대하다는 인상을 준 시인도 없다. 무타납비를 동양의 빅토르 위고Vi c tor H ug o 681 라고 하는 것은 그의 문체가 숭고함과 과장에 빠지는 장엄체이기 때문이 다. 그의 시의 박력 있는 문체와 화려한 수사, 풍부한 상상력, 그리 고 무모할 정도의 대담성에서 흔히 인용되는 애가의 특징을 찾아볼 수있다. <그 분의 위대한 영혼이 그로 하여금 당당한 허식과 위엄을 지니게 하였다네. 그 분의 ‘말투’에서 예언자임을 알 수 있지만 기적은 그 분의 ‘사고(思考)'속에서 분명히 볼 수 있음을 우리 모두 인정해야지요 .>691 싸알리비가 격찬하고 있는 무타납비 시의 특징 중 하나로서 인간 의 삶과 관련된 주제를 훈계조의 경구로 말하길 좋아하였음을 간과 해서는 안 된다. 그 때문에 라이스크 같은 사람은 무타납비를 에우 리피데스Euripi des70 ) 에 비유했다. 그는 아부 알-아타히야로 시작하 68) [역주] 프랑스의 시 인 • 소설가 • 극작가(1 802-1885). 69) 이븐 칼리칸이 무타납비 항목에서 인용하고 있는 이 시 행의 작자는 아부 알-까심 븐 알-무잣파르 븐 알리 알-따바시 Abo al-Q a sim b. al-Muia ffar b. 'All al-TabasI 이 다.
는 새로운 시파의 특성인 철학적 잠언――크기는 아랍인들도 즐겨 사용하며 이미 일부 고대 아랍인들(주하이르의 시에 대해서는 본서의 상기 p. l'o / 참조)에 의해 발달된 것이다-의 대가로 인정받고 있 다. 다음 예는 보흘렌이 인용한 잠언 중 일부이다. <노인이 ‘옥!' 이라고 소리 칠 땐 , 인생에 지쳐서가 아니라 기력이 없어서 그럴 뿐이다 .>711 < 오랫동안 속세의 일에 익숙해진 자는 공정해 보이는 일이 어떻게 부정하게 되었는지 뒤돌아 보고 알게 된다 .>721 < 현자의 마음은 가장 행복할 때 오히려 불행하며, 어리석은 자들은 불행중에도 행복을 발견한다 .>73 ) 아부 알-알라 알-마아리 (97 'J- 1 CJS1년) 사회가 부패하고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대에 혼히 나타나는 회의 적이고 염세적인 경향이 시인이자 철학자이며 문학가인 아부 알-알 라 알-마아리의 작품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그는 973 년 다마 스쿠스로 가는 교역로인 알렙포 남쪽 약 幻마일에 위치한 시리아의 촌락 마아라트 알-누만 Ma'arra t al-Nu'man 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천연두에 걸려 눈이 완전히 멀게 되었지만 그의 문학적 야망에 치명적이 될지도 모를 이러한 불행은――_그와 같은 신체 장애의 70) [역주] 그리스의 3 대 비극 시인 중의 한 사람(기원전 480-406?). 71) Muta n abbI, ed. by Diete rici, p. 581, v. 없 72) 같은 책 , p. 472, V. 5. 73) 같은 책 , p. 341, v. 8.
취약점이 전적으로 메워진 것은 아니지만 - 그의 비상한 기억력 으로 보충되었다. 교양 있고 칭송받을 만한 시인인 아버지 밑에서 가정 교육을 받은 그는 알렙포로 갔다 . 당시 알렙포는 전성기였던 사이프 알-다울라의 통치 때 만큼 기라성 같은 시인들이나 학자들 이 성시(盛市)를 이루지는 않았어도 여전히 인문학의 중심지로서 번 성하고 있었다. 아부- 알-알라는 처음에는 그럴 생각도 있었는지 모 르지만 실제로는 직업적인 칭송자의 길로 들어서지는 않았던 것 같 다. 그는 『불쏘시개의 불꽃요刃t al-Zand』 서문에서 상을 받으려는 생각에서 누구를 찬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을 단련시키기 위 해 그랬다고 주장한다. <방랑의 해>가 끝나자 993 년 그는 마아라 Ma‘arra 에 돌아와 30 디나르라는 얼마 안 되는 보조금(그나마 시종과 나누어 씀)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젊은 시절 연구에 몰두했던 과목 들인 아랍 시와 고사(故 事 ), 언어학에 대한 강의를 하며 그의 생애 중 15 년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이 기간에 그의 명성이 차츰 자자해 지기 시작하였는데 보즈웰이 그와 비슷한 경우에 존슨 박사를 두고 평한 바를 아부 알-알라에게 적용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 <마침내 그는 온갖 재주꾼들이 마음껏 역량을 발휘하면서 최고의 대접을 받던 바그다드에서 그의 운을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바그다 드는 진정 천재들과 노력꾼들이 경쟁을 벌이는 위대한 마당이었다.> 바그다드 방문 마구리우쓰l\1arg o li ou th 교수는 그가 편집 한 아부 알-알라의 서 간집 서문에서 시인이 활동하고 있던 바그다드 문학계의 여러 가지 홍미로운 얘기를 상세히 전하고 있다. <고대 로마에서처럼 이슬람 의 대 도시에서도 대중적인 시 낭송회는 문인들이 자신들의 재능을 당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일찍부터 모스크가 이 목적에 사용되는 것이 관행처럼 되었다. 아부 알-알라의 시대에 는 주로 바그다드의 알 - 만쑤르 모스크에서 시 낭송회가 열렸다 . 그
러나 학자나 문인들이 자기 집에 들끓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 문학 과 예술의 아낌없는 후원자들에 의해 보다 나은 편의를 제공받았 다 .>7 4) 이들 문학 후원자 중에는 그 자신 유명한 시인인 샤리프 알 라디 Sh arif al-Ra c;li가 들어 있었다. 그는 수년 앞서 부와이흐조의 왕 바하 알 - 다울라 Baba' al-Dawla 의 대신인 아부 나쓰르 사부르 븐 아르다쉬르 Abu N 益 r Sa. bu r b. Arcla shir가 세운 학술원을 본따 자기 이름을 붙여 학술원을 세웠다. 이곳에서 아부 알-알라는 자신 울 같은 작가로서 맞이해 준 많은 저명한 작가와 학자를 만나게 되 었다. 동양의 여러 지역에서 온 여행가들과 상인들로 붐비고 모든 종파-기독교, 유태교, 불교, 조로아스터교, 사비교, 수피교, 유물 론자, 합리주의자 ___ 의 추종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이 이슬람 제국의 수도는 시골뜨기들에게는 신세계처럼 보였을 것이다. 끝이 없는 지식욕을 보인 호기심 많은 관찰자 아부 알-알라는 분명 이러 한 기회를 최대로 이용하였다. 이제 그가 최초로 몰입한 종교 및 철 학의 개념들이 뿌리 내리고 무르익었다. 불과 일 년 반 (1 (XB--- 1010) 동안 계속된 그의 바그다드 체류는 미래에 대한 그의 성향을 결정 짓게 되었다. 그가 마아라에 서둘러 돌아간 것이 자신의 말대로 사랑하던 어머 니가 병들고 수입이 부족해서였든, 혹은 세력가인 한 후원자에게서 겪은 모욕 때문이었든 간에 75) 그는 도착하자마자 집안에 칩거하며 채식 생활과 금욕 수행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짧지 않은 남은 여 생을 비교적 은둔 생활로 보냈다. <나는 세 번 투옥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얘기할 필요 없는 사실은 묻지마시오- 74) 아부 알_알라의 서간문집 Lett er s of Aba al - 'A la 에 대한 마구리우 쓰의 서문, p. 22 참조. 75) 같은 책, p. 28 이하.
앞 못보는 것과 집에 갇혀 사는 것 , 내 영혼이 머무는 이 못난 육체가 그것이로소이다 . >7 6 )
76) Luzami yya t( C a iro, 1891),· v ol. i, p. 201.
이와 같은 관습과 성향의 갑작스런 변화를 초래한 동기에 대해서 는 생각하기 나름이다. 분명한 것은 어머니의 죽음에 깊은 영향을 받았디는 것이며, 또 다른 추측으로는 바그다드에 확고한 지반을 다 지지 못 한데 대한 실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눈이 멀고 고독 한 사람이 젊은 시절에 대한 희미한 추억울 더듬으며 세상살이에 염증을 느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댜 또 세속적인 허 무에 대한 우울한 명상이 ,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최근 경험으로 암시를 받았을 이들 철학적 개념의 적용과 발전을 위한 아주 새로운 소재가 되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 불쏘시개 의 불꽃』이란 제목으로 주로 바그다드로 가기 전에 지어진 초기 시 집에서는 그의 선배 시인들이 771 추구했던 방법을 여전히 답습한 반 면, 그 이후 쓰여진 『 루주미야트 lU2 iiml.Y.Y쵸 』 7 8 1 로 잘 알려진 시들은 시 전반에 스며 있는 침울하며 진지한 색조와 대담성, 독창성 때문 에 주의를 끈다. 이러한 견해는 동 시인의 불경함을 못마땅해하며 그가 이미 노년에 접어 들어 있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려 들지 않 은 대다수 동양의 비평가들에게서는 공감을 사지 못했다: 그러나 유 럽에서는 공정한 평가를 충분히 받았으며 어쩌면 주제넘을 정도의 칭송을 받았다. 라이스크는 그를 <거대하고 불가사의하며, 고상하고 호방한 아랍의 천재 Arabi ce callenti ss irr rurn, vasti, subti lis, subli - mis et auda cis ingenii >1 9) 라고 평하였다 . 또한 그를 시 인 아부 탐맘
77) 이는 당대 학파의 선배들을 가리킨다. 무타납비와 마찬가지로, 그는 고대시의 전통적 정형 as 曲 b 울 비웃고 있다. Goldzih e r, Ablv: J.n d zur Arab. Ph ilog i ,e, Pa rt I, p. 146 이하 참조.
78) 원제는 Luzam mi l la ya lzam 이다. 이는 시인 스스로 불필요하게 각 운을 맞추는 데 따른 기술적 어려움을 말해 주는 것이다.
79) Abu[f ed oe Anna/es Muslemi d, ed. by Adler(1789-1794), vol. iii, p. 677.
Abu Ta mmaro, 부흐투리 Bu}: itur I, 무타납비와 동열에 놓은 폰 함 머는 철학자로서의 아부 알-알라에 대해서도 옳게 논하고 있다 .80 l 또한 폰 크레머는8 1 1 그의 훌륭한 논문을 통해 『루주미야트』룰 철저 히 분석하여 그 내용을 고찰한 바 있다. 그는 전 시대를 통해 위대 한 도덕가들 중 한 사람인 아부 알-알라에게서 이른바 현대의 계몽 정신의 기원으로 추정될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발견했다. 여기에서 폰 크레머의 열정이 아부 알-알라를 과대 평가하였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마구리우쓰 교수의 말대로 이 시인은 자신의 착상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였으며, 그것을 철두철미 이해하거 나 일관되게 집착하지도 못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잘 엮어냈지만 일면 건설적인 그의 철학은 부정적이고 파괴적 인 측면에 가려 빛을 잃었다. 그리하여 그의 순수하고 고상한 도덕 성은 단지 희미한 인상만을 남기고 더 큰 소리로 계속 되풀이되는 의심과 실망의 목소리 속에 파묻혀 이내 사라지고 만다. 아부 알-알라는 확고한 일신교 신자였지만 하느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 아무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신비스럽고 전능하신 냉혹한 운명의 신에 의해 만물이 지배된다는 신념을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는 사자伊死者)의 부활을 부인한다. <우리는 웃어버린다. 하나 웃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우리는 슬피 울어야 하며 통곡해야 한다.
80) Lie r atu rg e sch der Araber, vol. vi, p. 900 이 하. 81) Sit zu ng s beric h t e der Ph ilo soph isc h-His t o r i sch en Classe der Kai- serlic h en Akademi e der W i ssensc 며't en, vol. cxvi i, 6th Abhandlun g (Vi en na, 1889). 폰 크레머가 독일어로 훌륭히 옮겨 놓은 정선된 시 구절온 ZDMG, vol. 29, pp. 304-312;vol. 30, pp. 40-52;vol. 31, pp. 471-483;vol. 38, pp. 499-529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리처럼 산산조각 난 자가 나중에 어찌 부활할 수 있단 말이냐 !> 821 죽음이란 인간이 종국에 도달해야 할 목적지인 이상, 이 철인(哲 人)은 삶의 불행으로부터 가급적 빨리 벗어나기를 기원하며 다른· 사 람들에게 고통을-이는 자신의 잘못 때문은 아니지만 감내할 수 밖에 없는 고통이다 안겨 주기를 거부한다 . <보상은 아비로부터 아들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받아야 한다 . 만약 그대 자녀들이 대 도시를 다스린다면 어떨까? 그러한 명성 때문에 그들과는 더 소원해지며 , 아무리 꾀룰 부려도 빠져 나올 수 없는, 인생이란 암흑속의 미로로 그들을 던져버린 사람을 바라보면서 미움만 더 사게 될테니까 .>83 ) 마찬가지로 아부 알-알라가 생식(生 殖 )을 죄악으로 간주하고 전 인류의 멸망을 인류를 위한 최상의 희망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시구가 많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자기 주관대로 행동하였 으며 다음 시구를 자신의 묘비에 새겨달라고 하였다. <이러한 과오는 나의 아버지에 의해 나에게 행해진 것이며, 내가 다른 이에게 저지른 것이 아니다. >84) 현재의 삶을 증오하며 그 무거운 짐에 염증을 느끼면서 <존재의 82) ZDMG, vol. 38, p. 507;Margo li ou th , 앞의 책 , p. 131, l. 15( 아람어 원문 중에서). 8.3) ZDMG, vol. 29, p. 308. 84) Margo lio u th , 앞의 책, p. 133( 아랍어 원문 중에서).
무(無)>로 돌아가는 길만이 보다 나은 행복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 각한 아부 알-알라로서는 내심 무신론자가 아니었어도 신의 계시는 무엇이든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견해를-공공연히 밝히 기는 겁나고 ___- 그렇다고 해서 숨길 수도 없었으리라. 그의 생각 대로라면, 종교란 인간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이를 인간은 습관과 교육의 힘을 통해 믿으며 그 진실 여부를 끊임없이 고찰하 는 일인 것이다. <장사 수완이 좋고 더할 나위 없이 현명하며, 동시에 논쟁에 능한 사 람도 종교에 관한 한 완고하여 옛날 관례만을 좇는 것을 간혹 볼 수 있 다. 신앙심은 인간의 본성에 불어 넣어진 것이다. 그것은 확실한 도피처 로 여겨진다. 한창 자라니는 아이에게는 웃어른들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도 평생 기억될 수 있는 교훈이 된다. 수도원의 수도승이나 모스크 의 열성 신자들은 마치 이야기꾼으로부터 이야기를 전수받듯이 믿을 만 한 진짜 해석자와 가짜를 구별하지 않고 그들의 교리를 받아들인다. 만 약, 이들 중 누군가 자기 친척이 마기교도임을 알게 되면 자기도 마기 교도라고 공언할 것이며, 그 친척이 사비교도이면 자기도 거의 혹은 완 전히 사비교도 행세를 하였을 것이다. >15) 그렇다면 종교란 인간의 어리석음과 미신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비 도덕적인 사람들을 제의하곤 전혀 가치가 없는 <고대인들에 의해 날조된 우화>인 것이다. 이슬람은 다른 어떤 종교의 교리보다 더 나은 것도 더 나쁜 것도 없다. <무슬림 l;Janif은 비틀거리.:i1,庄) 기독교인은 길을 잃고 85) 이 구절은 아부 알-알라의 Ri sa /at al-G hufr an 에 나타난다. ]RAS for 1902, p. 351. 아부 알-알라에 관한 폰 크레머의 논문 가운데 나오 는 번역시를 참조, p. 23.
86) <하니프>에 관해서는 본서 p. 224 참조. 여기서는 <무슬림>과 동 의어로 사용되었다 .
유태교인은 미혹에 빠져 있고, 마기교도는 길을 잘못 들어섰다. 우리 인간들은 크게 두 파로 갈라진다. 즉 교화된 악한이거나 독실한 바보이다 .> 87) 시인은 이슬람만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오만한 주장을 단호 하게 부정할 뿐 아니라 이슬람 교리를 하나하나 열거하며 공격하고 있다. 우선, 꾸란에 관해 아부 알-알라는 그것이 정말로 신의 말씀 인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문체에 대해서는 훌륭 하다고 생각하여 무함마드의 도전을 받아들여 그에 맞설 작품으로 『알-푸쑬 왈-가야트 al-FU $떠 uxz-'l- Ghayat』를 내놓았댜 성전인 꾸란을 우스꽝스럽게 개작한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이 꾸란만 못한 것은 4 세기 동안 손을 보지 않은 까닭일 것이다. 정통파 무슬림들을 심히 불쾌하게 만든 또 다른 작품은 『용서의 서간문 Ris a lat al-GI 댜年』이다 .881 이 작품에서의 <믿는 자들의 천국>은, 죄를 용 서받고――-이 때문에 그러한 제목이 붙었다- __- 축복받은 사람들 축에 낄 수 있게 된 여러 이교도 시인들이 거주하는 영광스러운 살 롱이다. 이러한 착상은 저속한 소극(笑劇)의 분위기를 띠고 꽤 정교 하게 그려지는데 마치 루키아노스 Lu ci an89) 의 작품을 연상케 한다. 시인들은 이 작품의 주인공인 셰이크 알리 븐 만쑤르와의 일련의 대화 가운데 자신들의 시를 낭송하거나 해설하며, 서로 논쟁을 벌이 고 보헤미언 Boh emi an 과도 같은 자유 분방한 예술가로 소개된다.
87) ZDMG, vol. 38, p. 513.
88) 이 작품은 단 두 권의 필사본이 유럽에 남아 있는데 한 권은 콘스 탄티 노플에 다른 한 권은 필자가 소장하고 있다. JR AS (1 900년), pp. 637 구 20, JR AS (1 902 년 ), pp, 75-101, 337-362, 813-847 에 기 술되 고 부 분적으로 번역되어 있다.
89) [역주] 2 세기 그리스의 풍자 작가 • 수사가 .
둘째 부문에는 이슬람의 자유 사상가들인 <진디끄>들에 관한 수많 온 일화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들 시에서 인용한 시구와 그 들 신앙의 특성에 대한-이에 대해 아부 알-알라는 <진디끄> 들이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무리는 아니라는 위선적인 희망을 피력하는 동시에 비난을 퍼붓고 있다 _ -고찰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 그의 나이 육십이 넘은 이때쯤에는 관대한 정통파적 입 장을 취함이 적절하였으리라. 동양의 많은 현자들처럼, 그의 장기(長 技)는 시치미 떼는 일이었다. <헛소리를 할 때면 목청을 돋구지만, 진실을 얘기할 땐 목소리를 낮추느라 잘 들리지 않는다. >90 1 그러나 그는 『루주미야트』에서 가끔 위선의 탈을 벗는다. 그리하 여 모든 무슬림들의 숭앙을 받는 카바의 두 지주와 흑석을 우상 숭 배의 잔재로 묘사하며 순례 그 자체를 <이교도의 여 행 riblat jahili- yyin>으로 규정한다. 다음 시구에서 풍기는 정취는 그의 진면목을 보여 주지만 그러한 것이 메카에서는 지나친 이단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신을 찬양하고 기도하라. 신전을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을 돌며 계속 불경(不敬)하여라! 독실한 신자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할 때 절제할 용기가 있는 자이다 .>9ll 동 시인이 이슬람의 신조를 무시한 예를 더 나열할 필요는 없겠 90) Margo lio u th , 앞의 책, p. 132, 아랍어 원문 중 마지막 행. 91) ZDMG, vol. 31, p. 483.
다. 그가 이슬람의 원리는 물론, 위격(位格)에 대해서도 공격을 하고 이슬람의 대표적 성직자이자 법학자들로서 강력한 계급을 형성한 <울라마>들에게 통렬히 독설을 퍼부은 점을 고려할 때, 그가 이단 으로 호되게 몰리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것이 의아할 뿐이 다 . 이 문제를 놓고 양쪽으로 갈려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대다수는 아부 알-알라를 자유 사상가와 유물론자로 단정하였으나 그의 입장 을 옹호하는 이도 없지는 않았다 . 그들은 그가 그런 인물이 아님을 입증하고자 전거를 인용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철학적인 체계가 없 으며, 그의 견해는 길다랗게 이어지는 각운과 대개는 신중한 말투로 서 조리 없이 여기 저기에 삽입되어 있는 개념 중에서 수집되어야 함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또한 이미 애를 쓸만큼 쓴 이 작업이 나 무랄 데 없이 정통파적인 감상에 흐르거나 그 밖의 것과는· 전혀 모 순되는 감상에 흔히 치우침으로써 더욱 복잡해짐을 알아야 한다. 동 양의 사고방식에 익숙한 훌륭한 작가라면 아시아 사람 As i a ti c 의 도 덕 관념은 다음 요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1) 거의 노골적인 신앙심의 표현 (2)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의 특정 교의에 대한 열렬한 신봉 (3) 어떤 교의들은 아주 긴요한 것인데도 그것을 결단코 반대 하고나섬 (4) 완전히 외래적인 이론들과 관련된 사상의 축적(이는 비중이 얼 마 되지 않는다) (5) 이들 사상과 이론들에서 벗어나 낡은 것을 새 것으로 대체 하려는 부단한 경항?2 1 이러한 현상은 수많은 논리적 모순을 밝혀 주겠지만 이를 너무 확신하여 예로서 인용하는 것은 경계해야 될 것이다. 이지적이고 기질상 열광적이지 못한 아부 알-알라는 신비주의자 92) De Gobin e au, Les relig ion s et les philo soph ies clans l'As ie centr ale , p. 11 이하.
가 될 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그의 사고가 그의 작품에서 부득이 사 용된 어려운 운율에 의해 결정된다는 일부 이슬람 비평가들의 설명 은 더욱 불충분하다 때로는 아부 알-알라 스스로 자신의 불확실한 견해를 미심쩍게 여겨 이슬람을 좋게 보아 준 적도 있을지 모르지만 폰 크레머의 결론이 아마도 보다 진실에 가까운 것일 것이다. 죽 이 시인이 선량한 무슬림으로서 이야기하는 한, 그의 표현은 그것 이 상투적인 문구가 아니라면 ___ 신앙심 깊은 반대자들을 좌절시 키거나 그들을 따돌리려는 뚜렷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그에게 보 다 넓은 의미의 종교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만년의 그의 시를 연 구하는 편견 없는 학자라면 정통교파의 견지에서 그가 이단자로 낙 인 찍힌 것이 온당함을 인정해야 한다. 다음의 번역시는 그의 철학 이 지닌 부정적 측면을 보여 주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다. <거짓으로 온 세상이 더럽혀져 종파들은 입씨름하며 상대의 교의(敎義)를 비난한다. 만일 증오심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면 교회와 모스크는 서로 나란히 세워졌을 것이다. >93) <종교란 무엇인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숨겨 놓은 처녀와 같은 것. 그녀에게 줄 결혼 예물과 지참금의 액수에 구혼자는 깜짝 놀랄 판이네. 설교 단(檀)에서 들어 본 온갖 훌륭한 교리 중에서 내 마음속에 꼭 닿온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네 !>94) <이 땅에는 인간의 삶에 토대가 되는 네 개의 가둥이 있으니, 신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개의 그릇을 만드셔 93) ZDMG, vol. 31, p. 477. 94) 같은 책 , vol. 29, p. 311 .
95) 같은 책 , vol. 38, p. 522.
이 세상과 온 백성들을 모두 담게끔 하셨다. 시간은 모르는 사이에 계속 흘러가는 법, 우리는 왜 그것에 분풀이를 하나? 인간은 동굴로 발길을 돌리는 은자가 아니며 열심히 요행만을 노릴 뿐이다. 그는 나이 먹어 노쇠하고 지쳐 있는 몸이지만 영원히 잠드는 것을 걱정한다. 우리를 웃기고 울리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오직 운명의 장난일 뿐인 것을. 하나 우리는 ‘시간’이 무지하다고 헐뜯지만 만약 시간이 말을 할 줄 안다면 우리들 중에 선하고 악하고 가릴 것 없이 모두 죄를 저지롤 성향이 다분하다고 비난할 것이다 .>95) <행성의 합(合)은 신의 뜻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 보라! 온갖 교의룰 감싸고 있는 베일이 벗겨지도다. 어떤 왕국도 한 번 일어나면 쇠퇴하는 법, 가장 튼튼하게 지은 구조물도 이내 허물어진다 .'96)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슬픈 안색을 지으며 찌꺼기 같은 인간에게 이로울 뿐인 종교를 꼼꼼히 음미해 보아야 한다. 너희들의 자녀를 두려워하라. 마구잡이로 내팽겨진 불꽃이
96) De Goeje , Memoir e s sur les Carmath e s du Bahrain , p. 197, n. I 에 따르면, 이 행은 1047 년에 발생한 토성과 목성의 근접이 압바스조 에 대한 파띠마조의 궁극적인 승리룰 예고해 주는 것이라는 카르마쓰 파의 예언을 가리킨다고 한다.
바로 그 불꽃을 낸 부싯것을 태워버린다 . 인간은 모두 사악하다 : 나는 이것 저것 가리지 않는다 . 난 전 인류에게 오점을 남긴다. 그대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그가 아무리 존경심을 보여 준다 할지라도 그를 믿지마라. 너 자신이야말로 바로 저항해야 할 최악의 적인 것이다 . 고독할 때 조심하라. 덕망 있는 셰이크에게 자신의 신조에 대한 근거를 대라 한다면 괴로워할 것이다. 무엇이라고! 잎새가 나기도 전에 열매가 익는단 말인가! 나무는 녹음이 우거질 때만이 열매를 맺는다 .>m) <어찌 내가 그대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는가? 그리스도나 무함마드 모두 나에게는 매 한 가지이다. 여명의 빛이 우리의 갈 길을 비추지 않아 우리는 모두 끝 없는 어둠속에 잠겨 있네. 맹목적의 인식이 올바로 인도되고 흐릿한 눈이 밝게 보일 수 있을까? 고통에 찌든 몸은 차라리 덧없이 썩어 흙이 되는 뼈를 부러워할 것이다 . 하지만 녹초가 된 칼도 칼집에 들어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마련이다. 아, 흙이나 돌처럼 무감각한 나에게 뼈대를 만들어 줄 자, 그 누구인가? 영혼과육체가결합하면 97) ZDMG, vol. 38, p. 504.
그들은 죽을 병을 앓는 고통을 함께 나눈다. 오 바람이여 , 그대의 이름이 바람이면, 잠자코 있어라 오 불꽃이여, 그대가 불꽃이면, 꺼져버려라 .> 981 아부 알-알라는 염세주의자이자 회의론자로서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실증적 종교의 교리를 배척하긴 하였어 도 완전한 불신앙으로 빠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속 내면 에서 거역할 수 없는 도덕 규범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성’을 지표로 삼아 진실로 가장 참된 조언자인 그 ‘이성’의 뜻에 따라 행하고 모세 5 경의 율법을 믿지 마라. 거기에는 그대가 추구하는 평범한 진리가 없도다. >99 ) 그는 <덕행은 스스로 보답을 받는다>고 거듭 주장한다. <보상을 받거나 장사꾼처럼 물건을 팔아 이익을 보려고 선행을 할 생각일랑 버리시오 .>1001 그가 내세우는 신조는 철학자와 금욕주의자의 그것과 디름-없다. 살생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죽 자선을 베푸는 것보다 벼룩 한 마 리라도 그 목숨을 살려 주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식과 기 도보다는 활발한 신앙 생활과 자발적인 자선 행위를 더 중요시한다. <그의 도덕적 가르침의 골자는 모든 생물에 대해 똑같은 애정과 온 98) ZDMG, vol. 31, p. 474. 99) Luzami yya t( C a iro , 1891), i, 394. 100) 같은 책, i, 312.
정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양심껏 수행하는 것이 가장 숭고하고 가장 신성한 의무임을 깨우치는 데 있다 .> 1 01 1
101) Von Kremer, 앞의 책, p. 38.
아부 알-알라는 l ffi 7 년, 입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이보다 대 략 십 년 앞서, 페르시아의 시인이자 여행가인 나씨리 쿠스로우 N~-i K husraw 가 이집트에 가는 도중 마아라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는 아부 알-알라를 꽤 부유하고 주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마을 유지로 묘사하며, 그의 시와 문학 강의를 듣고자 각지에서 몰려온 2 백여명의 제자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 .102 1 이와 같은 신뢰할 만한 고찰은 아부 알-알라 자신이 서간문이나 저술 속에서 기술한 음울한 자화상과는 대조적이다. 가장 위대한 이슬람 시인들 축에는 끼지 못하지만 그가 가장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시인 중 하 나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럽의 독자들에게는 그가 무타납 비 이후, 아니 아부 알-아타히야 이래로 오히려 생소할 정도로 참 신한 시인으로 바칠 것이다. 그토록 인습에 얽매이지 않고 독단적인 편견이 없으며, 염세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합리적이며, 계시 종교 룰 비난하면서도 신앙심이 깊은 인물이 센레크 Senlacl031 전투 수년 전 시리아의 한 지방 도시에서 생을 마쳐야 했다는 것은 놀리운· 것 이다. 그가 비록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모든 종파로부터 초연하였지 만, 스스로를 가리켜 <나는 우리 시대의 아들이다ghadawtu ibn a waqti>라고 말한 것은 당연하였다 .1041 그의 시는 당시의 시대상을 투명하게 반영함과 동시에, 압제적인 통치자와 타락한 판사들, 위선 적이고 무도한 신학자들, 사기꾼 같은 점성가들, 떠돌아다니는 이슬
102) Sc (a r 一 nama, ed. by Schefe r, p. 10 이하:::번역서, pp. 35-36.
103) [역주] 영국 잉글랜드 동남부에 있는 언덕;이 언덕에서 1066 년에 월리엄 W illi am the Con q ueror 이 앵글로 색슨군을 격파했다.
104) Luzami yya t, i~ 280.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나는 동갑나기이 다>가 아니라, 과거를 잊고 장차 일어날 일에 개의치 않으며 <나는 현재에 살고 있다>이다.
람교 수도승들의 무리와 신을 믿지 않는 카르마쓰인들에 의해 주로 행해진 타락과 부패의 양상을 생생하게 묘사해 내고 있다 .I ():j) 아부 탐맘과부호투리 이미 너무 많은 지면을 시에 할애했다고 생각하지만, 이제 본 주 제를 끝맺는 데 있어 본서와 같은 저술에서는 도저히 빠트릴 수 없 는 꽤 유명한 시인들을 간략히 언급하겠다. 모두 9 세기에 활동한 이 두 시인은 무타납비와 같은 류의 저명한 궁정시인들이었지만 이들이 편찬한 『 하마사 』 (pp. 201-203 참조)라는 시집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븐 알-무 E~ 즈 |bn al-Mu 't azz(861 --ro3년) 칼리파 무타쯔 al-Mu' taz z 의 아들인 아부 알 - 압바스 압둘라 Abu al-‘Ab 넒 s ‘Abdull 曲는 다재다능한 시인이자 문인으로서 두 가지 새로운 시 문체의 작품들에서 그의 독창성을 보여 주었다. 흔히 아 랍인들에게는 『일리아드 n iad』나 페르시아의 『 샤흐나마 Shahnarra 』 같은 위대한 서사시가 없고 산문체 설화만 있다고 한다 . 그러나 이 들 설화는 때때로 서사시적인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지만 오히려 역 사 소설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낫겠다. 이븐 알-무타쯔가 이러한 결 점을 완전히 메울 수는 없었지만 그의 사촌 무타디드 Mu' tac;li d 를 찬양한 축소판 서사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 시는 터키 용병들의 난 폭성과 압제로 이슬람 제국이 처하게 된 불행한 상태를 생생하게 묘 사하는 것으로 시의 앞 부분을 시작하였다. 또한 술을 예찬하는 시집 외에도 시학에 관한 최초의 중요한 저술인 『 키탑 알-바디아 Ki ta b al- Badi‘』를 펴냈다 . 이처럼 재능이 뛰어난 왕자에게 슬픈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칼리파 무크타리 Mukh tari가 죽고 그가 칼리파위 에 올랐으나 죽위한 지 몇시간만에 무끄타디르 Muq tadir파에 의해 105) Von Kremer, 앞의 책 , p. 46 이 하 참조 .
폐위되고 말았다. 그는 은신처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교살당했다 . 그 장면을 상상하면 네로 106 ) 가 죽는 순간까지도 <내가 죽으면 예술 가는 다 사라지는 게 아닌가!Quali s artifex per eo!> 라고 한 말이 어 쩔 수 없이 생각난다. 우마르 븐 알-파리드 ‘Umar lbn al-Fa riQ( 1181-12 3.5) 아랍의 신비주의 시는 대체로 페르시아의 그것보다는 뒤떨어진다. 열정은 최고에 달하지만 상상력과 추리력은 물론 깊이나 알맹이가 결여되어 있다 . 우마르 븐 알-파리드는 분명 아라비아의 신비주의 시인이지만 페르시아의 위대한 동시대 시인인 잘랄 알-딘 루미 (IZ73 년 사망)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의 시어가 강렬하고 정교한 미 를 지닌다는 점에서만 잘랄 알 - 딘 루미보다 뛰어나다. 이븐 알-파 리드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동시대의 수피주의의 발달을 논할 때 상세히 이야기하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단 한 편씩의 시 발표로 유명해진――_이는 아랍 문 학 사상 결코 드문 현상은 아니다_~두 시인이 눈길을 끈다. 이 들 널리 찬양되고 있는 송시 중 하나는 1111 년 뚜그라이 Tu ghra 'I 가 지은 『비아랍인들의 각운이 냐~인 송시 L 衍 E.y yat al-‘ A im b 이고 다른 하나는 부씨리의 『외투송(~ Burd a,,,이다. 이 시인은 몽골 침 략 40 년 후에 죽었지만 본 장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뚜그라이 (1120 년경 사망) 하산 븐 알리 알-뚜그라이 l:lasan b. 'Ali al-Tu ghra' I 는 페르시 아 혈통의 이쓰파한 출신이었다 •1 (11) 그는 셀주끄의 위대한 술탄들인 말리크샤Maliks넒 h 와 무함마드 밑에서 <서기 ka.ti b> 와 <비서 mr 106) [역 주] Nero Claud ius Caesar('3'1 - 684) : 로마 황제 ( 기 원후 54 년 이 래 ). l(Y l) 참이조븐 . 칼리칸의 뚜그라이에 관한 소론(드 슬란 번역) , vol. i, p. 462
ns hi(혹은 mgh ra' I 라고도 함)>직을 맡았고 그 후 모술의 셀주끄 왕 기야쓰 알-딘 마스우드 G hiy a th a1-En Mas‘Udl OO1 의 대신이 되었다. 뚜그라이라는 그의 유명한 이름은 모든 국가 문서의 서두에 사용되 는 <비스밀라흐 B isrnill ah > 문구 위에 옥새 m 인 E i를 찍는 것을 주 임무로 하는 그의 관직명에서 유래된 것이다. 『라미야트 알 - 아잠』 은 같은 아랍어 문자 I am..Q로. 각운이 이루어지는 샨파라의 유명한 시 『 라미야트 알-아랍. !l (p. 138 참조)을 본따 그와 같이 명명된 것이 . 다 . 그밖에도 이 두 시의 유일한 공통점은 1091 샨파라가 그의 시에서 부족으로부터 추방당한 사람이 사막에서 겪는 삶의 고통을 묘사한 데 반해, 바그다드에서 시작 활동을 한 뚜그라이는 비천하고 비굴한 젊은 경쟁자들이 발탁된다고 불만을 털어 놓으며 노년에 친구도 없 이 무시만 당하는 자신의 불운함을 한탄한다.
108) 같은 책, vol. iii, p . 355.
109) <불굴의 정신과 인내심 I:I amasa> 은 양 시 인에 게서 모두 나타나지 만 그 방식은 각기 다르다. 샨파라는 영웅적 기질의 인물을 묘사 한 반면, 뚜그라이는 스스로 미덕을 갖추고 이슬람의 호라티우스 Ho race( 로마의 서정시인, 기원전 65-8) 처럼 설교조이다 . 그러나 싸파디 $af adI 는 뚜그라이 시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필자가 소장한 필사본에서 옮긴 것임);<두 시인의 시에서 경구나 금언이 유사한 점 때문에 『 라미야트 알-아랍 』 의 제목을 본따 『 라미야트 알 -아잠 』 으로 명명되었다 . >
부씨리 (1 척 3 년경 사망) 알-부씨리의 110) 『외투송』은 예언자 칭송시이다. 시인은 1212 년 이 집트에서 출생하였다. 그 자신의 말대로 시를 짓고 위인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보낸 그의 인생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Il l 그
110) 그의 이름은 이집트 촌락인 아부씨르 Ab0sIr( 부씨르 BO$Ir) 태생임을 보여 준다.
111 )r dTahhe tBraud rudiat e, e edt. cboym Cm. enAt.e e R aplafsr ( VRie enn nea ,B a18s6se0)t(, P vae rirss,e 1l84904;)L, av ebrose- 151.
러나, 전기 학자들에 따르면 그는 필사본을 뜨는 일로 생계를 유지 하였으며 저명한 수피인 아부 알-압바스 아흐마드 알-마르시 Abu al- ‘ Ab 悼 s 도 d al - Mars i의 제자였다고 한다. 그는 뇌일혈로 인 한 반신불수의 몸으로 『 외투송』을 지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다음 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 먼저 그는 병을 낫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드린 후 그 시를 낭송 하기 시작했다. 곧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예언자가 그의 마비된 쪽에 손을 대고 외투를 자기에게 씌어주는 꿈을 꾸었다 .Il 2)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혼자서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고 부씨리는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슬림들은 이 『외투송 』 을 신성시하여 이룰 암송 하거나 공공 건물의 벽에 금빛 문자로 써 놓기도 한다. 또한 이 시 룰 악령을 쫓는 부적으로 여길 뿐 아니라 매 구절마다 선통력을 담 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 『 외투송』의 시적 가치는 높이 평가받을 만 한 것이 되지 못하지만 부드럽고 우아한 문체 때문에 즐겁게 읽을 수 있고 , 예언자에 관한 중세풍의 전설을_~ 무함마드라는 역사상 인물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미화되고 있고 불가사의와 기 적으로 가득 찬 전설이다 ― ― 一 간결하게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재미 있게 읽을수 있다 . 각운산문 이슬람 이전 시대부터 사용된 각운 산문 <사즈아>는 종교와의 관련성을 견지해 왔다 . 특히 꾸란에도 쓰임으로써 모든 무슬림들은 이를 신성시하게 되었다. 9 세기 중반경 칼리파와 총독들의 연설 khu tab( 단수는 khu t ba) 에 <사즈아>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븐 누 바타 (984 년 사망)와 같은 전문적 설교가들과 이브라힘 븐 힐랄 알- 112) 이 는 카브 븐 주하이 르 Ka'b b. Zuhay r 시 인 이 그의 유명 한 송시 Banat Su‘ad 를 읊자 무함마드가 선물로 자신의 외투룰 벗어 주었다 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 p. 198 참조.
싸바 Ibra him b. Hil히 al- $ab i (994 년 사망)와 같은 서 기들에 의 해 더 욱 발달되었다. 이때부터 각운은 수사적 산문의 변별적이자 필수적 인 특징이 되었다. 바디아 알_자만 알_하마다니 Bad i' al-Zaman al-Hamadhani( 1 007 년사망) 이 문체로 새롭고 주목받을 만한 문장 형태를 창조하고 널리 보 급시킨 것은 후손들에 의해 바디아 알-자만 BadI‘ al-&m 如 즉, <시간의 불가사의>라는 타이틀이 붙은 알-하마다니의 공이다. 하마 번에크바타나F.c ba tana )113) 에서 태어난 그는 젊어서 고향을 떠나 이 럭저럭 재주껏 변통을 해가며 페르시아 지역 대부분을 주유하였다. 또 만나는 이마다 죽흥적인 재주로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의 <마 까마트M 최 ama t> 114) 는 로망스 romance, 혹은 자유 분방한 보헤미안 의 성향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마까마트>에서는 셈족에게서 발달된 적이 없는 극적(劇的) 문체로의 접근을 엿볼 수 있다. 하마다 니는 그의 작품 주인공으로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즉흥적으로 수사 와 시, 학식을 과시하고 격찬하는 청중들로부터 받는 선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재치 있고 무엄한 방랑자를 내세웠다. 두번째 인물 은 마까마의 해설자인 <라위 m 而>로서 <다른 사람들과 만나 자신 의 모험담을 얘기하고 훌륭한 문장을 되풀이한다. >115) 하마다니의 113) [역주] 에크바타나(하마단의 고대명) . 114) Ma q ama( 복수는 rna q ama t)는 본래 <서 있는 장소>를 뜻한다;따라 서 사람들이 연사의 말을 들으며 서 있는 집회, 특히 문학적 토론의 모임 을 말한다. 초기 에 이 와 같은 대 담이 나 토론은 Ma q ama t란 이 름 으로 불리 었다 (Brockelmann, Gesch, der Arab. Lit ter atu r, vol. i, p. 94). 문학적 의미로서 이 어휘는 대개
<마까마트>는 이 장르 문체의 대표적인 모델로서 그가 창작한 독 창적인 형태가 그의 후계자들의 보다 정교한 작품에서도 그대로 남 아 있다. 각각의 <마까마>는 독립체를 형성하므로 이를 한 편의 작 품으로 엮으면 운문과 산문이 혼합된 한 편의 소설로 간주될 수 있 다. 여기에서는 주인공의 일생 중 각각 별개의 에피소드들로만 구성 되었으므로 줄거리는 별 것 없고 문체만이 가장 중요시된다. 하리리 Hafiri(10 54-112 '2) 바디아 알-자만보다는 독창성에서 떨어지지만 박식함과 풍부한 어휘 구사 면에서는 그를 앞지르는 바스라의 아부 무함마드 알-까 심 알-하리리 Abi1 M 뱌i.arnma d al-Q asiin al- I:Iarm는 양 1] 기 동안 <꾸란 다음으로 아랍어의 보고( 寶 庫)가 된 걸작의 ‘마까마트롤 내놓 았다.> 그는 <마까마트> 문체에 대한 암시를 바로 그 분_<그 분의 암시 자체가 바로 명령이며 그 분의 뜻에 따름으로써 쾌감을 얻게 된다.>―――에게서 받았다고 그의 작품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 사람은 페르시아의 저명한 정치가로서 후에 칼리파 무스타르쉬 드 빌라흐 Mus tarshi d B ill ah(lll8-11 3.5)와 셀주끄의 술탄 마스우드 Mas‘ i1 d(1l 3.'3 -l152) 밑에서 대신올 지낸 아누쉬르완 븐 칼리드 An i1- sh irwan b. Khali d 였다 .116 ) 그러나 그가 하리리와 알게 된 것은 하리 리가 바스라에 칩거하며 문학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하리리 는 <절름발이 말은 힘 좋은 준마(駿馬)만큼 달릴 수 없다>며 자신의 능력으로는 <마까마트> 짓는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양하 였다. 117) 그러나 마침내 뜻을 굽히고 아누쉬르완의 요청에 따르게 되 어 있다. 저 자의 사망으로 미 완(未完)이 되 었지 만 1898 년 스타인가스 116)F .그 S의 t ei일ng 대 as 기s 에 는 의H해ou ts제 m a2, 권 R(e마cu까e마il d쩌e -t5e0x 을te 포re함la함ti )fs 이a l발'hi행st o되 i r었 e 다de . s Seldj ou c ide s, vol. it p. II 이 하에 소재 한다 . 브라운의 Lit . Hi st of Persia , vol. ii, p. 360 참조. 117) 이는 하마다니의 탁월한 재능에 대한 솔직한, 그러나 위선적일 수
도 있는 찬사이다 .
었다. 다음에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한다. <나는, 머리가 둔하고 능력이 모자라도 상상력이 메마르고 불안에 시달려도 印개의 마까마트 Ma q runa t를 지었네. 거기에는 진지한 말과 경박한 말이 들어 있고, 세련미가 우아한 문체와 어우러지고, 재기(才氣)와 보배 같은 화술이 아름다운 문장과 희귀한 단어가 함께 하네. 또 거기에 꾸란 구절을 넣어 치장하고 정선된 은유와 아랍 속담을 사이사이에 끼어 넣고 어휘의 이중 의미를 근거로 문체의 고상함과 문법적 수수께끼, 독창적인 담화와 아주 정교한 화법, 감동적인 훈계와 재미있는 농담, 그 모두를 사루즈 S aroj의 아부 자이드 Abu Zay d 입을 빌려 지은 것이며, 이야기꾼의 역할은 바스라의 함맘 Harnmrun 의 아들 하리쓰Harith에게 맡겼네 .>8) 이어서 하리리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계속한다. 고대 페르시아의 전설인 『루스탐 Rus tam과 이스판디 야르 Is fa n diy ar 의 이야기」 를 꾸 라이쉬인들에게 들려 주어 예언자를 몹시 기분 상하게 만든 나드르 븐 하리쓰 Na c;lr b. I:Iarith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꾸란의 유명한 구 절 (31:6-7)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무익한 이야기로 아는 것 없이
118) 위 구절은 나중에 앨머 너 경 Lord Almoner 의 아랍어 교수(1 855- 1 얽 1) 가 된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T rinity 대학 특별 연구원인 시오 도르 프레 스톤 Theodore Pres t on 이 1850 년 발간한 하리 리 의 마까마 트에서 약간 수정하여 발췌한 것이다.
하느님의 길을 탈선케 하거나 그것을 조롱하는 자들이 있나니 그들 은 굴욕적인 벌을 받게 되리라 . 우리의 말이 그에게 낭송될 때면 그 의 두 귀가 벙어리인듯 마치 그것을 듣지 않는 것처럼 오만을 피우 니 고통스러운 벌이 있을 것이라 경고하라>에 준해서, 자신의 <마 까마트>를 엄격한 무슬림이라면 멀리 해야만 할 경박한 이야기로 매도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 하리리는 이같은 <마까마트>의 구성은 도덕적 목적을 띠고 있다 고 주장한다. 그는 무지하고 악의적인 자들은 자신의 작품을 비난할 지도 모르지만, 편견을 버린 지혜로운 독자들이라면 이제껏 어느 누 구도 싫어하지 않은 동물 우화만큼 119 ) 유용하고 교훈적이라는 것을 인식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가혹한 비평을 두려워했다는 것은 전 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음이 유명한 역사서 『알-파크리 』 의 저자 (l &X)년경 사망)가 행한 말에서도 드러난다. 『알-파크리 』 의 작자는 자신의 저서가 아부 탐맘의 『 하마사』 보다 더 유용하다고 주장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19) 무슬림들은 이븐 알-무캇파아(약 760 년 사망)가 중세 페르시아어인 페흘레비 PehlevI 에서 아랍어로 번역한 『 비드파이 Bid p a i 우화 』 를 이 미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마까마트>, 부도덕한 것으로 비난받음 <다시 말해서 그 책은 사람들이 열심히 암기하려고 애쓰는 ‘마까마토’보 다 더 유익하다 . 왜냐하면 ‘마까마트’를 읽는 사람은 거기에서 우아한 문장 과 시와 산문의 규칙에 대한 지식 외에는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금언이나 교묘한 장치, 경험담이 들어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돈 몇 푼 받기 위해 하는 구걸이나 식객 노릇, 수치스러운 책략에 사용되기 위 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울 미친다. 그러므로 그것 들은 한편으로 유익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해롭기도 하다. 이 점은 하리리나 바디아 알-자만의 ‘마까마트’를 비평한 일부 학자들이 이미 지적
한 바 있다 . > ' 20)
120) Al-F akhri, ed. by Derenbourg, p. 18, I. 4 이 하.
아부 자이드NJ O Za y d 의 성격 여기서는 이같은 비난의 정당성을 단정하기 앞서 잠시 하리리 작 품의 주인공인 아부 자이드의 성격을 고찰해야겠다. 그의 모험담은 저자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는 하리쓰 븐 함맘Barith b. Hammam 에 의해 기술된다. 일반적으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 어느 날 바스라의 바누 하람 Banu I:Jaram 모스크에서 하리리가 많은 학 자들과 앉아 있는데 한 노인이 발이 부르트고 여행으로 더럽혀진 몸차림으로 들어왔다. 그가 누구며 어디에서 오는 길인지를 묻자 그 의 고귀한 이름이 아부 자이드이며 사루즈 S aroj l 2 1 ) 에서 온다고 답하 였다 . 그는 자기 딸을 볼모로 잡고 자신을 내쫓아 빈털터리가 되게 한 그리스인들이 어떻게 고향 마을을· 약탈했는지롤 감동적으로 묘 사하였다. 하리리는 그의 놀라운 임기옹변 능력에 감동되어 그날 밤 바로 아부 자이드의 불변의 성격이 소개되는 r 바누 하람의 마까마」 1 22) 를 짓기 시작하였다. <재주가 넘치고 박학하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 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재치나 사기로 번 돈을 환락에 빠져 탕진하는 교활한 늙은이지만 , 폐허가 된 고향과 포로가 된 자 식을 생각할 때면 거짓 없는 진실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1 23) 하리리의 <마까마트>가 비도덕적 성향의 특징을 지닌 것으로 비난 받는 이유는 작자가 이같이 줏대 없고 전혀 평판이 좋지 않은 망나 니를 칭찬해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아부 자이드의 매력은 훌륭 한 화술, 교훈적안 설교, 홍겨운 민요와 상스러운 농담이 뒤섞인 애
121) 이는 에뎃사 Edessa 에서 그리 멀지 않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이다 . 1101 년, 십자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Abo al-Fid a , ed. by Reis k e, vol. iii I p, 332), 122) 최종적으로 정리된 마까마 중 48 번째 마까마임. 123) Chenery , 앞의 책 , p. 23.
달픈 애가 속에 띄엄띄엄 나오는 진주 같은 위트와 금언에 있으며 , 이때문에 그의 못된 짓도 쉽게 눈 감아 줄 수 있다 . 오늘날의 독자 들이라면 위에 인용한 역사가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할 수는 없더 라도 그에 대한 비판이 옹졸한 데는 있지만 정당함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 하리리의 각운 산문을 각운에 구애받지 않고 옮기라고 한다면 흉 내 정도는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을 운율을 맞춰 똑같 이 옮길 수는 없으므로 원문 중 일부나마 번역하는 작업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 24) 그대신 아부 자이드의 입으로 읊조린 세 편의 시 룰 번역하였다. 첫번째 것은 이미 지나가버린 젊고 행복한 고향 시 절을 회상하는 다정다감하고 애수가 깃든 시이다 .
124) 독 일 시 인 프리 드리 히 뤼 케 르트 F riedri ch Ril ch ert (Die Verwandl- ung e n des Abu Seid von Serug, 2nd ed, 1837) 가 이를 훌륭히 해 냈는데 그의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든 번역은 아니다.
<나의 집안은 명문인 갓산, 내 고향은 사루즈, 그곳에서 나는 태양처럼 빛나는 대궐 같은 집에서 살았다네. 달콤함과 아름다움, 환희가 있어 천국 같은 곳! 아, 그곳에서 보낸 내 생애는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세월은 덧없이 홀러가는데, 나는 그곳 풀밭에서 옷자락을 질질 끌며 폼 재고 걸었다. 남자로서 한창 때인 나는 의기양양 ,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쾌락뿐. 만약 비통함에 사람이 죽을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고뇌에 시달려 진작 죽었을 것이다. 또 지나간 즐거움을 되찾을 수 있다면 내 가슴속에서 뛰는 피도 아깝지 않으리.
비천한 하이에나에 시달리는 사자처럼 멸시를 받으며 해마다 야만적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음이 더 낫겠다. 하나 운수 탓이지, 어느 누구도 예정된 운명을 거슬린 자는 없으므로 운수가 직선이라면, 인간의 조건도 결코 굽지는 않는 법.> 圈 열한번째 <마까마> 무대는 하마단과 라이이 사이의 중간에 위치 한 도시인 사와 Sawa 이다. <종교에 심취한 하리쓰는 명상을 위해 공동 묘지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장례식을 목격한다 . 장례가 끝나 자, 얼굴을 외투로 가린 한 노인이 언덕에 서서 죽음과 심판의 확실 성에 관해 얘기를 쏟아 놓는다. 그는 불현듯 시로 뛰어 들어 아랍 문학의 가장 고귀한 산물인 시 한 편을 웅변조로 낭독한다. 지고한 도덕성, 종교적 열정, 미문체의 언어, 힘 있고 우아한 운율에서 이 장엄한 찬가는 그 무엇에도 비길 데 없는 것이다. >126 ) <오 경박한 자여! 분별 있는 사람인양 행세하지만 헛된 일, 얼마나 오래 죄를 짓고 잘못을 저지를 것인가? 너의 죄를 고백하라! 하얀 눈썹이 그대에게 경고하노니 이 사람아, 그대의 귀는 막히지 않았다. 사신(死神)이 그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뇨? 그의 목소리가 또렷이 울리지 않는가? 이별을 두려워마라, 그대를 슬프게 하거나 지혜롭게 해주는 것이니. 그대 나태와 허식의 늪에 빠져 언제까지 경솔히 굴 것이냐? 마치 사신이 목숨을 살려 주고 있는 양. 정도를 벗어나 언제까지 악행만을 일삼을 것이냐? 125) 여섯번째 마까마에 둥장하는 이 시의 직역은 Chene:ry , 앞의 책, p. 138 에 소재한다. 126) 같은 책 , p. 163.
그대가 노란 주사위 모양의 동전을 보고 환호하지만 관이 지나갈 때 그대의 슬픈 얼굴은 거짓 꾸밈, 사악하고 무정한 인간! 배신과 치욕의 그릇된 빛을 좇아 그대는 올바론 충고를 비웃는다. 그대는 컴컴한 묘지와 여전히 남아 있는 비애감을 망각하고 더러운 노예만이 갖고 싶어하는 쾌락을 탐한다 . 그대 진정한 행복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면 그대 욕망에 의해 오도되거나 위로의 말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최후의 심판날, 그대를 구해 줄 친척이나 자기 편이 없을 때 그대의 눈에서는 눈물이 아닌 피가 쏟아질 것이다. 그대의 묘는 바늘 구멍보다 더 좁아 물 속으로 잠수하는 것처럼 그대가 깊은 곳으로 빠질 것임을 나는 안다. 그곳에 그대의 사지는 놓여 벌레들이 모여들어 잔치를 벌리고 마침내 나무와 뼈는 모두 완전히 썩게 된다. 그대 영혼이 저 무시무시한 시련을 물리칠 수도 없다. 지옥의 다리 위에서 그것이 도망하거나 떨어질 때 지도자들은 타락하고 힘 있는 자들은 비열해지며 유식한 척하는 사람들은 ‘이런 고통은 처음이다’ 라고 의칠 것이다. 분별 없는 친구야, 그렇다면, 이제껏 망쳐 놓은 일을 서둘러 고쳐라. 이제 인생이 그 종점에 다가오고 있고 그대는 아직도 올가미에 걸려 있으니 운명의 여신이 온화하고 즐거워할 때라도 그를 믿지 마라, 그대가 노망이 들면 언젠가는 독을 뱉올 것이니. 그대의 거만한 콧대를 꺾어라! 죽음의 신이 그대 옆에 다가와 어떻게 해서든 그대 목을 조르고 있다. 형편이 좋을 때 오만불손하지 말며, 혀를 함부로 놀리지 마라 말은 적당히 하는 것이 최선이다. 재앙을 당한 어린이룰 위로해 주고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라.
그대의 유약한 행동을 고쳐라, 그러면 복받으리라. 모아 놓은 적은 돈을 다 써 버린 자들을 다시 한번 돈을 모아주자, 그러한 손해는 애통해하지 마라. 야비한 일에는 용감하게 대처하라. 관용을 베풀 줄 알며 염세적인 사랑은 일축해 버리고 그대가 받은 싱금은 활수히 쓰라. 준비는 철저히 해두며 걱정이 될 일은 그만두어라. 배가 바다에 대비하며 세찬 폭 풍우 를 두려워하듯이 친구여, 이로서 명료한 언어로 훈계하는 바이니 나의 가르침에 따르는 모든 이에게 행운이 있기를!> 다음 다마스쿠스의 <마까마>에서는 옷을 화려하게 차려 입은 아 부 자이드가 술 마시며 홍청거리고 아름디운- 기타의 곡조를 들으며 시를읊는다. <광활한 사막을 건너가며 자만심을 내던져버리고 새처럼 줄거워한다. 무섭게 흐르는 급류를 막고 기운 찬 말을 길들여 나 가는 곳마다 젊음과 쾌락이 따르도록 하자. 나는 웃음을 참으며 둥뒤로 옷을 벗는다. 술잔을 올렸을 때 술이 부족하지 않도록 단숨에 술을 들이키고 싶지 않았던가. 내겐 재치와 능변은 재주로 타고 나지 않았으니. 늙은이가 술통마다 술이 넘쳐흐르는 대상(隊商)의 숙소에 머문다는 것이 놀랍습니까? 술은 무릎을 튼튼히 하고 만병통치약이며 슬픔에서 해방되어 망각케 해준다. 오, 세평에 얽매이지 않고 터놓고 사는 것이 가장 순수한 기쁨이다. 연인이 중명할 수 있는 가장 감미로운 사랑은
공포와 희망에 감동되어 자신의 열정을 표현할 때다. 그때 그대의 사랑을 널리 알려서 연기 피우는 불길을 잡아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수치심을 유발하여 웃음거리 될테니까. 그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인간이 추구하는 즐거움을 주는 술잔으로 고통을 덜어라. 그대에게 술사발을 건네주며 아가씨들은 구워 삶을 사람에게 시중 들며 부드러운 눈길로 영혼을 황홀케 한다. 가희들의 목구멍에서 고음의 곡조가 쏟아져 나와 선율을 감돌게 하면 무쇠 같은 바위도 춤을 춘다 . 장미가 만발하면 그대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자유가 있거늘 미인의 장미룰 따지 못하게 하는 바보의 말을 따르지 마라. 그대 능력 밖일지라도 그대 목적을 계속 추구하라. 세상사람들이 무어라 해도 쾌락을 만끽하고 그것에 감사하라! 그대 아비가 그대의 욕망을 좌절시키면 그의 곁을 떠나라. 그물을 폈으면 그물에 무엇이 걸렸는지를 묻지 마라. 친구에게 충실하며 구두쇠를 피하고 자선을 베풀 돗 돈을 쓰며 자선을 베풀 때는 인색하지 마라. 자비의 문을 두드린 자 곧바로 그 문에 들어가므로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운명의 여신이 그대를 산 자 중에서 불러낼· 것이다.> 독자들은 위 인용문에서 일부 비평가들의 추측대로 하리리의 <마 까마트> 내용에 결함이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 작품의 명성은 작품의 완전한 문학적 표현 형식 __- 이 점은 아 랍인들이 항상 각별하게 주의하는 점이다――-에 주로 기인한다. 하리리 자신은 치밀한 문법학자로서 언어학의 본거지인 바스라에 살고 있었다. I 'Z1 l 그는 <마까마트>를 훈계보다는 오락용으로. 쓴 것이 지만 내심 그의 작품을 통해 아랍어로서 표현 가능한 모든 미와 섬
12: 7) 하리리가 쓴 문법에 관한 논문 두 편이 오늘날까지 전해 온다. 그 중 r 참수부의 진주 Durrat al-Ghawwa$ 』라는 제목의 논문 (Thorbe eke 편, Leip zi g , 1871) 에서 그는 교양인들이 범하기 쉬운 문법에 어 긋나는 어법을 논하고 있다.
세함을 보여 주려고 했던 것 같다. 유럽인들로서는, 앞에서부터 읽 어도 뜻이 통하고 뒤에서부터 읽어도 모두 뜻이 통하는 그런 묘한 글이나 구두점이 찍혀 있기도 하고 찍히지 않은 문장에서처럼 , 그의 책을 가득히 메우고 있는 말장난들-재담, 음이 바슷한 말을 엇 걸어서 하는 말재롱, 유음법(類音法), 두운(頭韻)-에서는 이 작품 의 가치나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우리 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들이 아랍어의 특성이나 전통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 28 ) 즉 엘리자베스 시 대의 영국 문학에서 완곡어법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는 것과는 전 혀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리리의 동족민들은 <마까마트>를 자신들의 언어와 고대의 유산, 문화를 보여 주는 거의 유일무이한 기념비적 문학 산물로서 소중히 여긴다. 작자와 동시대인인 유명한 자마크샤리는 함축성 있는 시구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신과 그 분의 기적에 걸어 맹세컨대, 순례자의 의식과 성소에 맹세컨대, 하리리의 ‘마까마’ 는 줄줄이 금 물감으로 쓸 만한 가치가 있다네.> 동시대의 종교문학 특히 교리 신학이나 신비주의 같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학문에 관해서는 디음- 장에서 보다 상세히 논하게 되겠지만 사자의 언행록 인 <하디쓰>에 관하여는 앞서 언급한 바를 독자들은 참고하기 바
128) Chenery , 앞의 책 pp. 83-97 참조 .
란다. 여기서는 동 시대에 활동한 저명한 종교 분야 학자들과 그들 의 주요 저서만을 일별해 보고자 한댜 말리크 븐 아나스 Malik b. Mas(71 3-795 년) 그 중 영예의 우등상은 이슬람법을 최초로 집대성한 『 무왓따 MUUXl t(a’ 』 의 저자인 메디나의 이맘 말리크 븐 아나스에게 돌아간 다 . 알리파의 일원인 그는 압바스조에 대한 충성의 맹세가 아무런 구속력도 갖지 않는다고 공언한 점 때문에 칼리파 만쑤르의 명에 따라 태형에 처해졌다. 부카리 Bukh ari와 무슬림 Muslim 언행록의 대가는 부카리 (ITTO 년 사망)와 무슬림 (875 년 사망)으로 이 들은 『 싸히흐 』 라는 제목의 언행록을 편찬하였다. 이보다 범위를 좁 혀 예언자의 관행인 <순나>와 관계가 있는 전승만을 다룬 언행록 으로는 아부 다우드 알-시지스타니 Abo. Daw o.d al-S iji s tarn(滋天년 사망)의 『 수난 Sunan .!l 1 29) 과 아부 이사 무함마드 알-티르미지 Abo. 'Isa M 먀i.arnma d al-Ti rnlidhi(양년 사망)의 『 자미아Jami ‘.!l, 나사이 al-Na 텍 I( 않년 사망)의 『수난 Si ovn.!l, 이븐 마자 Ibn M 척 a( 있 3 년 사 망)의 『 수난 Si ovn.!l이 있다 . 이들 순나는 부카리와 무슬림의 『싸히 흐 』 와 더불어 6 대 정전(正典 )al-ku tub al- sitta으로 꼽힌다. 동시대에 나온 이와 유사한 종류의 무수한 저술 중에서 바가위 al- Bagha쩌 (약 1120 년경 사망)의 『순나의 둥불 Ma $8bib al-S~ 만 언급하는 것으로 족하다. 후에 이룰 개작한 『등불의 벽감(壁倉 )M 函M al- M磁 如은 여러 차례 발행되었으며 여전히 읽혀지고 있다. 129) [역 주] Sunan 은 <순나 Sunna> 의 복수형 이 다.
마와르디 隣:i. ward i (1058 년 사망) 보다 넓은 의미에서 문학의 영역을 벗어나는 이슬람 법학서들은 생략하고 정치학에 관한 유명한 논저인 『통치술의 책 Ki t ab al- A 比 al_sul 固퍄젯 z 』을 쓴 샤피이파의 법학자 마와르디만을 논하 여 보자. 그의 견해는 매우 논리적이다. 칼리파는 학식 있고 신앙심 깊은 정통파 신학자들의 집합체에 의해 선출되어야 하며 백성들은 자신 들을 대표하는 칼리파에게 전적으로 국정의 관리를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와르디는 부와이흐조가 득세하던 시기에 바그다드에 거 주하였는데 이 시기룰 무이르 경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동시 대의 연대기는 온통 당대의 정치 사건만을 디루-고 있으며 칼리파들 은 통치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으므로 여기서는 언급할 필요가 없 다 .>130) 수피주의 $0fi sm 에 관한 아람어 문헌 압바스조하에서 수피주의의 신비주의적인 교리가 체계화되고 해 석되었다. 수피주의에 관한 중요한 아랍어 참고 문헌으로는 아부 딸 립 알-마키 Abu Talib al- Makki(따 3 년 사망)의 『마음의 양식 Qi1t al,-Qul ab 』, 무함마드 븐 이스하끄 알-칼라바지 M 曲 amnad b. lsb aq al-Kala 넒dhi(약 l (XX)년경 사망)의 『수피주의에 관한 질의서 Ki ta b aJ,- Ta 'amj li-M adhrab ah/, aJ, -TQ $:11.卽녀』, 아부 압둘 라흐만 얄술 라미 Abu ·Abdu 'l-Rahman al-Sul ami (l021 년 사망)의 『수피 의 계 급 Tab aQat 따 -S 먀. m, 아부 누아임 알-이쓰파하니 Abil Nu ‘aym al-1$ fa hanI(1038 년 사망)의 『성자들의 장식품J:.i ly at al,-A wliya .n, 나 이사부르의 아부 알-까심 알-꾸샤이리 Abil a1-Q asim a1-Q us hayr i (1ITT4 년 사망)의 『꾸샤이리의 논문 R isa/at al,-Quslrzyri.Y}O』, 가잘리 130) The Calip /rite, its Ri se , Declin e and Fall, p. 573.
(1111 년 사망)의 『 종교학의 부활JJ;y a' 'Ulim al-D in』, 쉬하브 알-딘 아부 하프쓰 우마르 알-수호라와르디 Sh ihab al-Dn Abo. I:Iafs ‘Umar al-Suhrawar야 (1234 년 사망)의 『지식의 풍요 ‘'Awarif al-Ma 'arif』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가잘리 Ghazali(1 1 11 년 사망) 교의학(敎義學)에서 <이슬람의 증거 丑떠 a t al-Isl am>라는 별명으 로 알려진 아부 하미드 알-가잘리 Abu I:Iarnid al- Ghazali와 견줄 만한 이는 없다 . 그토록 매우 중요한 인물인 만큼, 이슬람 사상사를 보여준다는 본서에서 그의 생애와 지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상세한 기술이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의 학문적 업적 과 원대한 영향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기 앞서 먼저 그의 생애를 간 략히 기술하고자 한다. 『금 조각 Shadhara t al-Dhahab 』에 기술된 가잘리의 생애 <이해(히즈라 었 E 년=기원후 1111 년) 샤피이파로서 뚜스 Tas 출신이며 ‘신앙의 장식품’과 ‘이슬람의 중거’란 별칭을 가졌던 이맘 아부 하미드 무함 마드 Abo l:Iamid M 曲 amrr 터가 사망하였다. 그는 뚜스 근방의 마을인 따바 란 Tabaran 에서 두번째 주마다 월 Latt er J따따曲의 14 일에 사망하였다. 그 의 나이 조세였다. 갓잘리 GhazzalI 는 쿠라산 지방 사투리에서 아따리 'Attan 와 아따르 ‘Attar, 캅바지 Khab 넒깍와 캅바즈 Khabbaz 가 같은 의미인 것처 럼, 갓잘여 mz 책과 같은 뜻이다 .1311 『이바르 ‘Ilxir』의 저자가 그렇게 서술하 131) 또 다른 예는 우마르 카이얌 ‘Umar Kha yy am 을 우마르 알-카이야 미 ‘Umar al-Kha yy amI 로 쓰는 경우이다 . 이븐 칼리칸이 1256 년 그 의 전기사전(드 슬란의 번역서, vol. i, p. 80 참조)을 집필하였을 때 는 Ghazz al!(철자 z 가 두 개임)의 철자법이 상용되었다. 삼아니 Sam 'anI 에 따르면 이 명칭은 뚜스 근방의 촌락인 가찰라 Ghazala 에서 유 래 한다는 것 이 다 . 이 경 우 가잘리 는 니 스바ni sba([ 역 주] 아랍어 에 서 어미가 -I 로 끝나는 관계 형용사로서 혈통, 종파, 칙업, 출생지 둥 출신 배경을 나타내는 아랍 이름의 한 구성 요소이다.)의 올바른 형
태이다. 필자는 삼아니의 전거를 따라 <가잘리 Ghaza li>로 표기하였 다. 하지만 <갓잘리 Ghazza li>라고 쓰는 이들도 < 아무리 훌 륭한 사 람도 자기 들처 럼 실수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 그만이 다. [역 주] 가 잘리(라틴명 Alg azel) 의 이름은 가잘리 Gaz ali와 갓잘리 Gazz 회 I 모두 통용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전자가 더 선호된다. 후자의 이름은 그 의 부친이 양털장수 Gazz a!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 러나 이는 정확한 것은 아니다 . 그의 삼촌과 증조부도 유명한 학자 였으나 가잘리로 불렀기 때문이다.
고 있다 . 1 32 ) 이스나위 al-Isna 펴 1 33 ) 는 그의 저서 『 따바까트 Ta baq삶 』 에서 다음 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이맘 가잘리의 이름만 들어도 마음속이 시원해지고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돗해진다 . 또 그의 문학 작품 속에서는 잉크통이 기 뻐 날뛰며 종이는 환희에 젖어 전율한다. 그의 이름을 들으면 사람들은 소 리 를 죽이고 고개 를 숙인다 .
132) 샴스 알-딘 알-다하비 Shams al-Di n al-Dhahab i 0348 년 사망).
133) 이는 샤피이 학자들에 관한 전기서의 저자인 압둘 라힘 알-이스나위 'Abdu ' 1 - R a]).血 al-Isnaw i 0370 년 사망) 이 다 . Brockelmann, Gesch der Arab. Lit t., v ol. ii, p. 90 참조.
가잘리는 히즈라 低 D 년 (1 OCi8 - 1®9 년) 뚜스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양털에서 실을 자아내서(yaghzil u al-$a f)' 가게에 내다 팔았다 . 부친은 죽 기 앞서 두 아돌, 가잘리와 그의 동생 아흐마드를 한 독실한 수피에게 맡겼 다. 그는 가잘리의 부친이 남겨 준 재산을 다 써버릴 때까지 그들에게 문자 률 깨우쳐 주고 교육을 시켜주었다 . ‘ 그 후 우리는 생계를 세우기 위해 학 교에 나가 신학fiq h 을 배웠다’ 고 가잘리는 회고한다. 그곳에서 얼마간 수학 한 후 주르잔Jurj an 띠 ) 의 아부 나쓰르 알-이스마일리 Aha N 益 r al-Isn 려Ili 에게로 갔다가 다시 나이사부르의 이맘 알-하라마인 Imam al-I:J ararnaynl3 3 l 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리하여 ‘동시대인들 중에서 가 장 훌륭한 학자가 되었으며(~ aI1?
134) [역주] 카스피 해의 남부 연안도시.
135) 그는 나이사부르의 저명한 신학자인 아부 알-마알리 알-주와이니 Abo al-Ma 백 al- J uwa y nI(l085 년 사망)로서 수년간 메카와 메디나 에서 강의한 바 있으므로 <양대 성지의 이맘>을 뜻하는 이 칭호를 받았다.
학자들이 장사진을 이루던 셀주끄 궁전 ' 36’ 으로 가서 셀주끄의 재상 니잠 알 -물크를 알현하였다. 그가 지닌 높은 가치 때문이었지만 그곳에서 그는 대 학자들과 어울려 사교 를 즐기거나 반대자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아무리 저명한 학자들이라도 사정 없이 반박하였다 . 그래서 니잠 알-물크는 그에게 호감을 갖고 온갖 예를 갖추어 대하였으며 가잘리는 그의 이름을 온 세상에 떨치게 되었다. 그 후 lOO1 년 바그다드의 니자미야 대학의 교수 직에 초빙되어 융승한 대접을 받았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멀리까지 투루투루 미쳐 이내 그의 명망이 에미르표먀 . I 門 ' 나 재상들의 그것을 앞지르 게 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의 고상한 정신은 세속적 허영심에서 벗어낫다. 그는 기도와 금욕생활에 몰두하다가 1 <1l5년 히자즈로 떠났다. 1 38 1 순례에서 돌아오자 다마스쿠스로 여행하여 그곳 대 모스크에서 10 년간 머물면서 적운 교학의 부활』 1 39 1 을 비롯한 다수의 저술을 내었다. 그 후 예루살렘과 알렉산 드리아를 방문하고 고향인 뚜스에 돌아와 저술과 기도, 꾸란 낭송, 학문 전 파에 전념하고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였다. 니잠 알 - 물크의 아들로서 대신 인 파크르 알 - 물크 Fakhr al-M 매 (:140 1 가 그를 찾아와 나이사부르의 니자미야 대학 교수직을 맡아 줄 것을 사정하며 설득하였다 . 14 1) 이에 가찰리는 일단 교수직을 수락하고 참깐 동안 강의를 하였으나 이내 사임하고 귀향하여 말 년을 마쳤다.>
136) 즉 알프 아르슬란의 아들인 셀주끄 왕 말리 크샤 M alik shah 의 야영 지 궁전을 말한다 .
137) [역주] 이 단어는 본래 아랍어의 arnir에서 차용된 것으로 <왕자 , 추장 , 수장>의 의미이다.
138) 가잘리가 그의 저서 Mun qi dh 에서 기술한 바에 따르면, 바그다드를 떠나 맨처음 다마스쿠스로 간 다음, 그후 예루살렘, 메카로 갔다고 한다. 그가 다마스쿠스에 10 년 동안 체류했다는 기술은 부정확한 것 이다.
139) [역주] 모두 40 권에 달하는 대작으로서 각 권온 동분되어 10 책으로 나누어져 있다 . 본서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김정위, 『이슬람 사 상사』, pp. 137-139 참조 .
140) 원본에 는 Fakhr al-D i n 으로 되 어 있다.
141) 가잘리가 공직생활로 복귀한 것은 1106 년의 일이다 .
가잘리의 주요저서 온건파 수피의 입장에서 신학과 종교 윤리 를 해석한 역작 『종교 생학의애 를부 위활한 』 외변에호A도p o가l 잘og i리a 는pr o 다 V수i의ta S중덱 요 』 1 4한2) 처 저럼 서가 를잘 리남의 겼 다자. 서『 그전의이 라고 할 수 있는 『오류로 부터의 구원자M i u浮. dh min al-]) :ilal .!l , 143 ) 본래는 페르시아어로 쓰여졌던 『 행복의 연금술Kimi.y a' al-Sa 넓뇨 .!l , 이슬람 철학의 원리를 반박하고 공격하기 위해 쓰여진 『철 학자들의 모순 Ta i태泣 al-Falas ifa .!l 이 있다. 이 논저는 모로코에서 l198- ll OO 년에 사망한 유명한 철학자 이븐 루쉬드 ( 라틴명 Av e rroes) 로부터 반 박을 불러일으켰다 .1 44)
142) [역주] 추기경 존 헨리 뉴만 Car di nal Jo hn Hen ry Newman 의 종교 적 자서 전 (1864) .
114434)) [[역역 주주〕] 본이서외 p에. 도50 9 가이잘 하리 의참 조.저 서로는 『철 학자들의 의도 Maqa $id al-Falasifa .!l, 『신앙의 중용 al-Iqt i$ll d ft al-I ' tiq ad 』 , 『 제 40 권 Ki tab amlm- ' A rabna 'in 'i 』l,m 『 사al변-적Ka 圖신학 』 , 에『 청관원한자 평A l신-도Mu들s의 四h i굴 r레 i 』 , I『/ j길a m 잡 이al의- ' A시w a작- Bi da ya t al-H i da y야 , 『 빛 의 벽 감 M ish kat al-Anwar 』 둥 이 있다 . 그 러나 가잘리의 저서가 모두 그의 진정한 작품인지는 의심스럽다 . 이 에 관한 보다 상세한 기술은 김정위, 앞의 책, pp. 139- 40 참조.
샤흐라스타니 Shahras t an i의 『 종교와 종파의 서 .!l 여기서 종교사에 관한 동일 제목인 두 권의 귀중한 저술을 눈여 겨 보아야겠다. 코르도바의 이븐 하즘 Ibn l:Iazm (l
145) 이븐 하즘의 작품에 대한 정확한 제목은 불확실하다 . 카이로 판 (A H. 1321) 에서는 Ki tab al-Fi~ / Ji '!-Mi la / wa 'l-Ahwa wa 'l-Nil; Jal 이다.
온 샤흐라스타니는 이슬람 제국의 반대 쪽 끝에 위치하고 옥수스 강과 접경한 광활한 동부 지역의 쿠라산 태생이었다. 『종교와 종파 의 서』의 아랍어 원본을 주해 • 편집(런던, 1842-1846) 한 큐르턴 Cure to nl 46) 은 그 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개괄하고 있다 .
146) [역 주] Wi lliam Cureto n ( l80 8-1864) : 영 국의 동양학자.
<작자는 다섯 장에 걸친 서론을 마친 후, 그의 저서를 종교적 분파와 철 학의 분파로 크게 양분하고 있다. 이 중 전자에는 무함마드 추종자들의 여 러 분파에 대해 기술하고 있으며 또한 유태인들과 기독교인들처럼 진정한 계시를 받은 ‘성서의 사람들 Ahl al- Kita b' 과 마기교와 마니교처럼 ‘유사 계 시서를 받았다고 하는 자들 man laho. shubhat al- kitab'에 대해서도 기술하 고 있다. 후자에는 사비교도들$abi ans 의 철학적 견해에 관한 기술이 한 사 바교도와 정통파 무슬림 간의 매우 홍미로운 대화로 펼쳐지며 또 그리스의 여러 철학자들과 일부 기독교 교회 신부들의 교의에 대한 설명과 무슬림 학자들, 특히 이 책의 저자가 매우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이븐 시나(라틴명 Av i cenna) 의 학문 체계에 대한 기술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이슬람 이전 아랍인들의 교의와 인도 사람들의 종교에 대한 기술로 끝을 맺고 있다.> 문법과 언어학 문법학은 바스라와 쿠파 양 도시에서 발생하였다. 이 두 로시는 무함마드 사후 얼마 되지 않아 세워져 압바스의 수도에 가려 유명 무실해질 때까지 아라비아 반도 외에서 아라비아의 생활과 사상의 중심지였다. 이곳의 주민들은 각기 다른 여러 부족에 속하여 다양한 방언을 말하는 베드윈 아람인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동시에 이들 도시에는 페르시아어를 모국어로 말하는 수천 명의 기술공과 예속 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종국에 가서는 고전 아랍어가 순 수성을 잃고 여러 방언으로 전의信망誰)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
아랍문법의 효시 아랍인들이 그들의 고상한 언어를 자랑으로 여기고 또한 즐거움 을 주는 것으로 여김으로써 아람어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일을 민족 적 의무로 간주하게 되었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신앙심덕분 에 <신에 의한 능변의 기적>인 아랍어로 쓰여진 꾸란을 정확히 발 음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하는 단호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바로 이 후자의 동기 때문에 문법이 고안된 것으로 전해진다. 아랍 문법의 창시자는 우마이야 시대 바스라에서 사망한 아부 알_아스와드 알_ 두일리 Abu al-Aswad al-Du' ili로 알려져 있다. <아부 알_아스와드 는 문법학을 어디에서 배웠는지를 질문받고 문법의 기본 원리를 알 리 븐 아비 딸립으로부터 배웠다고 답하였다. 그는 대중들이 하느님 의 경전을 이해할 수 있도록 무언가 지침서가 될 만한 것을 저술하 도록 지야드Ziy ad1411 의 지시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알리에게서 받은 원리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처음에 그는 집필 을 사양하였으나 어 떤 사람이 꾸란 구절 anro 'llaJ- a lxzrI'm mim 'l-mushr ikinl u:a -ras iil uhu148} 에서 맨끝 단어의 격모음을 ras olihi로 발음하는 것을 듣고 ‘이 지경까지 된 줄은 미처 몰랐다’고 소리쳤 다. 그러고 나서 지야드에게 돌아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149 ) 고 말 했다.>
147) 본서 p. 280 참조.
148) 꾸란 9 장 3 절. 아를 번역하면 <하느님께서는 다신교도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고 그 분의 사자도 또한 그러하시다>이다 . 이를 rasul ihi로 읽으면, <하느님께서는 다신교도와 사자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으 149) 시lb다n> K가h a된 ll다ik.a n , 드 슬란의 번역서, vol. i, p. 663.
바스라의 언어학자들 아부 알-아스와드가 창시한 것으로 전해지는 바스라 문법학파는 라이벌인 쿠파 학파보다 더 오래되었으며 명성에 있어서도 쿠파 학
파를 앞질렀다. 바스라 학파의 대표적인 학자 중에는 다음과 같은 학자들이 있었다. 아부 아므르 븐 알-알라 (770 년 사망)는 언젠가 자신이 편찬한 고 대시 선집을 불태워 버리고 기도에만 몰두한 성실하고 심오한 꾸란 학자였다. 아랍시의 운율 체계를 고안하고 생전에 완성하지는 못했 지만 최초의 아랍어 사전 『알-아인의 책 Ki tab al.-' .Ayn』을 만든 칼 릴 븐 아흐마드와 페르시아인으로 『시바와이히의 책』이라는 문법서 로 널리 유명한 시바와이히 Siba wayh i, 하룬 알-라쉬드 시대에 활약 한 위대한 인문학자들인 아쓰마이 al-k 田따 I 와 아부 우바이다 Abu 'Ubayd a, 약 일세기 후의 무바라드 al-Mubarrad 一__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 『완전함 Ka mi. I 』을 윌리암 라이트 Wi lli am Wr igh t7 1- 편집하였다-둥이 바스라 학파의 학자들이다. 또 동시대인으로 고대 아랍 시의 저명한 수집가이자 비평가인 숫카리 al-Su kkart, 탁 월한 언어학자이자 족보학자이며 시인인 이븐 두라이드 Ibn Durayd (934 년 사망)가 있다. 그는 학문을 위하여 크게 이바지한 점을 인정받 아 칼리파 무끄타디르로부터 장려금을 받았으며, 그의 주요 저술로는 『마끄쑤라 Ma q s iilT1』로 알려진 유명한 송시 외에도 방대한 사전 『알 -잠하라 필 루가al.-Ja mrara ft 'l-Lu gra』와 아람 부족들의 족보에 관한 논저 『파생의 책 Ki ta b al. -Is htiq a q』이 있다 . 쿠파의 언어학자들 이제 쿠파학파 학자들의 이름을 열거한다면 페르시아인 학자로 하룬 알-라쉬드의 아들인 아민과 마문의 교육을 맡았던 키사이 a1- Ki책 'I 를 비롯하여 그의 제자이며 동족민인 파라 al-Farra( 82'2년 사망), 칼리파 마흐디에게 이슬람 이전의 시집 『알一무팟달리야트 al. -Mi if<,떠'<;tdiyyat』를 엮어 주어 칼리파의 총애를 받은 알-무팟달 알-답비 al- Muf따<;la1 al- 표虹b I,150) 알리 븐 아비 딸립의 가문에 대한 노골적인 편애 때문에 압제적인 칼리파 무타와킬의 터키족 호위병
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혀 죽음을· 당한 (858 년) 이븐 알-시키트 lbn al-Sik kit7} 있다 . 당대에 쿠파학파의 우두머리인 쌀라브 Tha'lab(004 년 사망)와 무바라드의 경쟁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 다. 동시대인인 아부 바크르 븐 아비 알-아즈하르 Abu Bakr b. AbI al-Azhar 는 그의 시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움으로써 지성을 높이려하는 그대여! 무바라드나 쌀라브를 찾아가라. 옴 걸린 낙타를 피하는 것처럼 바보가 되지 마라 인간의 모든 지식은 그들에게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니 동서를 막론하고 온 세상의 학문이 이 두 학자에게 결집되어 있도다 .>151 ) 함마드 알-라위야 (776 년 사망)와 그보다는 약간 젊은 동시대인인 칼라프 알-아흐마르 같은 초기 인문학자들이 고대 시들이 소실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울인 이루 말할 수 없는 각고의 노력과 그들이 때때로 사용하였던 무모한 방법들에 관해서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1521 그들 뒤를 이어 초기 압바스인들 치하의 이슬람 황금 시 대에 활약한 학자들 중에서 영예의 최고상은 아부- 우바이다〈약 825 년 사망)와 아쓰마이(약 830 년 사망)에게 돌아간다. 아부우바이다 유태계와 페르시아계의 혼혈인 아부 우바이다 마마르 븐 알-무싼 나 Abu 'Ubay da Ma'mar b. al-Mu than떠가 그의 저서에서 아랍 민족파에 대항하는 슈우비파의 대의를 주장한 점을 들어 그를 카리 150) 본서 p. 200 참조. 151) Ibn Kha llika n, No. 608 ; 드 슬란의 번역서, vol. ii~ p. 31. 152) 본서 pp. 203-207 참조.
지파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이는 틀린 것이댜 153 ) 아랍어의 희귀한 어 법이나 아랍인들의 투쟁 역사가 그의 주된 연구 분야로서 <이슬람 이전의 이교도 시대나 이슬람 시대에 두 마리 말이 전투에서 맞 부 닥쳤다면, 그 말들과 말울 탄 기사에 대한 정보가 반드시 나에게 있 다>고 큰소리 치기도 하였다 .1 54) 그러나 그의 박식함에도 불구하고 시 낭송은 발음이 나빠 도저히 알아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꾸란 낭송시 꾸란을 보고 읽으면서도 실수를 하였다 . 1 55)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아랍인들에 대한 지식은 주로 그가 수집하여 『노래의 책 』 둥에 보존되어 온 전승에서 나온다. 그는 대략 幻 3 여 권의 저술 올 남겼는데 이에 대한 길다란, 그러나 불완전한 목록이 『 피흐리스 트 Fi hri s t(도서목록)』(pp . 53-54) 에 나온다. 칼리파 하룬 알-라쉬드는 아부 우바이다를 바그다드로 불러 들였는데 아부 우바이다는 그곳 에서 아쓰마이를 처음 만났다. 이들 두 사람사이에는 성격 차이라든 지 1 56 ) 개인적인 질투로 인해 항시 불화가 있었다. 0 區口 ~01 압둘 말리크 븐 꾸라이브 알_아쓰마이 'Abdu ' I-M alik b. Qurayb al-~·1 는 라이벌인 아부 우바이다처럼 바스라 태생이었다. 그가 어떤 학문분야에서는 동시대 다른 사람들에 뒤떨어졌지만, 아~소마이 만큼 다양한 문학적 교양을一__바로 이 점 때문에 그는 높은 평가 와 푸짐한 상을 받았다――-완벽하게 보여준 이도 없다. 아부 우바 이다가 독설과 풍자적 익살 때문에 두려운 존재였다고 한다면, 아~소 마이에게는 재상이 갖추어야 할 온갖 재주와 우아함이 있었다. 압바 153) Goldzih e r, Mufw nme danis c he Stu d ie n , Pa rt I, p. 197. 154) 같은 책 , p. 195. 155) Ibn Qu ta yb a, Ki tab a/-M a 'ari f, p. 269. 156) 아부 우바이다가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알려졌던 반면, 아쓰마이에 게는 깊은 신앙심 이 있었다 . Goldzih e r, 앞의 책, p. 199 및 Abh zur Arab. Ph ilo /a gie, Pa rt I, p . 136 참조.
스 시대 최초의 위대한 시인인 아부 누와스는 아쓰마이야말로 그의 아름다운 가락으로- 듣는 이룰 매혹시켜 줄 밤꾀꼬리라고 말했다. 종 종 철학적 주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곤 하던 궁전에서 그는 인기 있는 논객이었으며 칼리파는 좌중의 어느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문학과 관련된 난해한 문제를 풀어 주도록 그에게 사람을 보내곤 하였다. 언어학이나 고전적 주제에 관한 수많은 저술 중에서 우리 에게 전해 오는 것으로는 『낙타의 책 Ki t ab al-Ib il』, 『말의 책 Ki t ab al- Kray!』, 아랍인들이 인체 해부에 관해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 음을 보여 주는 논저 인 『인간 창조의 책 Ki tab Kralq al-Insan 』 이 있다. 아라비아 시를 편집하고 주석을 달고 비평한 그의 저술은 지 금까지 동 주제에 대해 쓰여진 거의 모든 저술들의 근간을 이룬다 고말할수있다. 이븐 알-무껏파아 (7OO 년경 사망) 아랍의 순문학 Adab 과 문학사를 대표하는· 일련의 귀중한 직품들이 있다. 여기서는 가장 중요한 작품 중에서 몇 가지만 간략히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압둘라 븐 알-무캇파아 ‘Alxlullah Ibn al-Muq affa ‘ 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페르시아인 루즈비흐Riiz b ih는―~ 그 는 칼리파 만쑤르에 의해 처형당했다 페흘레비 Pehle vi 1 s, 1 로 쓰 여진 중세 페르시아 문학 작품들을 아랍어로 옮겼다. 그의 재능을 보여 주는 예가 유명한 『칼릴라와 딤나의 책 Book cf Kal.ila and Di. mrrz., 인데 이는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비드파이 우화집 Fables cf B i d] Xli.!I에 기원을 둔 것이다. 이 아랍어판 『비드파이 우화집』은 아랍어로 쓰여진 가장 오래된 산문 작품 중 하나로서 전형적인 아 ►; 랍어 수사의 특징인 번득이는 간결성을 엿볼 수는 없지만 우아한 문체의 표본으로서 마땅히 간주될 만하다.
157) [역주] 기원전 3 세기부터 기원후 10 세기까지 사용된 페르시아의 중 세 언어. 사산 왕조의 공용어였다.
이븐 꾸타이바 (889 년 사망) 메르프 출신인 이븐 꾸타이바는 한동안 디나와르Dina. war 에서 <까디 Cadi>의 직에 있었고 9 세기 후반에는 바그다드에서 거주하였 다. 그의 저술 중 『일반 상식의 책 Ki t ab al-Ma 'arif.!I 1581 과 『시와 시 인들의 책』은 이미 여러 차례 인용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문체의 입문서로 철자법, 정음법, 사전 편찬법을 다룬 『서기의 예(禮) Adab al-K組 b 』 1 59) 와 『역사의 정수(精lffi) 'Uy o n al-Akhb~』 160 ) 룰 덧붙일 수 있겠다. 『역사의 정수』는 10 장으로 되어 있으며 각 장에서 통치, 전 쟁, 고상함, 우정, 여자 둥 특정 주제를 다루고 있다.
158) 브라운 교수는 그의 저서 Lit era ry Hi st o r y of Persia , vol. i, p. 387 이하에서 이 책의 내용을 요약, 제시하였다.
159) Max Gr iine rt (L ey d en, 1900) 펴 냄 .
160) Vol. i ed. by C. Brockelmann(Weirn a r and Str as sbu rg, 1898- 1908).
자히즈 JatJi z(869 년 사망) 바스라의 아므르 븐 바흐르 알-자히즈 ‘Amr b. Babr al- J~는 유명한 자유 사상가로 그의 이름은 무타질라파의 한 분파 이름이 되었다(자히즈파 al- J ab 函yy a).161) 그는 일화집 같은 오락성의 책을 많 이 저술하였다. 이븐 칼리칸은 자히즈의 저술 중 가장 훌륭하고 교 훈적 인 작품으로서 『동물의 책 Ki tab al- J:f:zyaw an 』과 수사학에 관한 인기 있는 논저인 『명유(明 0 兪)와 상설(祥說)의 책 Ki ta b al-13 ayan. u:a-' l-Ta byin』을 꼽는다.
161) 별명인 Jal)i z 는 <통방울 눈>을 의미한다.
이븐 압드 랍비히 |bn 'Abd Rabbihi 공교롭게도―—_사실은 전혀 우연만은 아니다-~우마이야 가 문과 관계가 있는 두 작가가 아랍 문학사에 지극히 귀중한 공헌을 하였다. 스페인의 우마이야 칼리파 히샴 븐 압드 알코라흐만Hi sham
b. 'Alxi al-Rabman(788- 강 3 년)으로부터 해방된 노예 집안의 후손인 코르도바의 이븐 압드 랍비히는 『진기한 목걸이 al - 'Jq d al-Fa rii야라 는 제목의 잡문집(雜文 集 )을 남겼다. 이는 모두 25 권으로 되어 있는 데 각 권마다 각기 다른 보석 이름을 제목으로하여 <그것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 아부 알-파라즈 알-이쓰파하니 Abo al-Faraj al-1$ f ahan i (rl57 년 사망) 『 노래의 책 Ki tab al-A g han I.』의 저자 아부 알-파라즈 알리는 이쓰파한 태생이지만 꾸라이쉬 부족의 일원이자 우마이야조의 마지 막 칼리파인 마르완의 직계 후손이므로 그야말로 아랍인 중의 아랍 인이었다. 바그다드에 온 그는 아라비아의 고대 연구에 온 정력을 쏟았으며 그의 생애 말년쯤에는 부와이호조의 군주 무잇쯔 알-다울 라의 대신인 알_무할라비 al-Muhallab i를 관대한 후견자로 삼았다. 그의 저술 중 비교적 중요성이 덜한 작품들은 그의 명저인 『노래의 책 』 에 가려 빛이 나지 않는다. 이 책은 당대까지 지어진 모든 아라 비아 시의 시사(詩史)라고 할만 하다. 그것은 칼리파 하룬 알_라쉬 드를 위해 만들어진 일백여 개 시를 모아 놓은 시집을 기초로 하여 거기에 아부 알 _ 파라즈 자신이 직접 선정한 다른 시들을 덧붙인 것 이다. 먼저 시구와 시에 붙여진 곡조를 소개하고 그것을 지은 작사 자들과 작곡자들의 생애를 기술하며 고대시나 현대시를 포함하는 방대한 역사 전승과 일화를 소개하기도 한다. 싸히브 븐 압바드 寧 b Ibn 'Ab넒 dl62) 는 여행을 떠날 때면 30 마리의 낙타에 실을 만 큼 책을 가지고 다녔는데 『노래의 책』을 받고서는 이 책 한권으로 만족하여 다른 모든 책들을 없애 버렸다고 한다 .16:l) 116632)) l본bn서 Kph. a3 ll7ik1 an 참, 조드 . 슬 란의 번 역 서 , vol. ii, p. 250.
싸알리비 (1 0'.37 년 사망) 다음 세대의 중요한 문학가는 나이사부르의 아부 만쑤르 알-싸알 리비 Abn M 如 S 虹 al-Tha‘ 최ibi이다. 그의 저술은 대중들을 위한 훈 계서보다는 오락용의 바학술적인 편찬물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와 동 시대 시인들의 시 선집 『시간의 보석 yatim1t al- D:Jhr』은 그의 박학다식함과 바평력 있는 안목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시간의 보 석 』 뒤를 이은 속편들이 바카르지 al- Bakh.arzi(1(175년 사망)의 『 왕궁 의 조상(影像) Durrryat al- O:i$,길과 아부 알-마알리 알-하지리 Abu al-Ma‘ 첵 a1- l:Ja?m (11 72,년 사망)의 『시간의 장식품 Zi rot al- D:Jhr』, 살라딘의 총애를 받던 이마드 알-딘 알-카티브 알-이쓰파하니 ‘Irnad al-D in al-Kati b al-I~ fahani (1201 년 사망)의 『왕궁의 순수한 보석 K 뇨 Id at al- Q均』으로 이어졌다. 10 세기부터 엄밀한 의미로서의 언 어학은 쇠퇴하기 시작한 반면, 예전에 언어학의 주변 학문에 불과했 던 학문들이 이제는 독립하여 눈부신 학문적 성과를 거둠으로써 그 학문들은 짧은 기간에 전성기에 도달하였다. 역사학 역사학의 원리는 (1) 이슬람 이전의 전승과 (2) 예언자의 <하디 쓰>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본격적인 역사 서술에 대한 착상은 8 세기 이븐 알-무캇파아에 의해 『페르시아 왕들의 역사 S iyar Mulik al-‘ Aj m 라는 제목으로 아랍어로 번역된 『왕의 책 Pehlevi Khuday -m 衍口』과 같은 페르시아의 역사서에서 암시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 된다. 첫번째 항목에서는 히샴 븐 알-칼비Hi sham Ibn al-Kalbi (81 9 년 사망)와 그의 부친 무함마드가 성실하고 신뢰할 만한 역사 기록 자들로서 특히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다. 예언자와 그의 교우들의 역사서 예언자와 관련된 사실(史實)에 바탕을 둔 전승은 일찌감치 글로
옮겨졌디{p . 345 참조). 만쑤르 재위시 사망한〈 768 년) 이븐 이스하끄 가 편찬한 최초의 『 무함마드 전기 SIro t Rasal All 助 』 가 이븐 히샴 (834 년 사망)의 개정판으로만 전해져 내려온다. 와끼디 al - W頭 idi(8'23 년 사망)나 이븐 사드 Ibn Sa'd(845 년 사망)가 펴낸 무함마드 전기는 물론 이븐 히샴의 무함마드 전기도 이미 고찰한 바 있다. 동시대에 이름을 남긴 역사가들은 다음과 같다. 발라두리 Baladhun 페르시아 사람인 아흐마드 븐 야흐야 알-발라두리 Ahmad b. Ya- hya a1-Bal 記 h Uii(앙년 사망)는 드 괴제가 후에 재편집한 『초기 이 슬람 정복사 Ki ta b Fu tiib al-Buldan .!l와 족보식으로 쓰여진 방대한 연대기 『명가의 족보책 Ki t ab Ansab al-As~ 접』을 저술하였는데 그 중 두 권만 전해진다 .1 64l
164) 그 중 한 권인 전집 중 11 권은 알바르트가 편집하였다 : Anony m e Arabis che Chronik (Greif sw ald,1883). 우마이 야 칼리 파인 압둘 말 리크(68.5 -705 년)의 통치 기간 일부를 다루고 있다 .
디나와리 Din a wari 아부 하니파 아흐마드 알 - 디나와리 Abu I:Jarufa A}:irnad al-D ina- w 頭(獅년 사망) 역시 페르시아계였다. 그의 『옛날 이야기 책 Ki tab al-A 碑 ar al- Ti w 짊』은 주로 페르시아의 민족 설화를 다루며 순전 히 페르시아인의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다. 야꾸닌| Ya‘qu b I 디나와리와 동시대인인 이븐 와디흐 알-야꾸비 lbn Wac;l ib al- Ya‘ q(i bI 는 훌륭한 일반 역사 개론서를 냈는데 이는 알리 가문의 추 종자인 저자가 날조되지 않은 쉬아파의 오랜 전승을 보존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가치가 있다 . 그의 저서는 후츠마 Hou tsma 1 65 ) 교수에
165) [역주] Ma rtinu s Theodorus Houts rn a(l& il-1 943) : 네덜란드의 동양 학자. 아크딸의 시를 주해한 『우마이야인들의 칭송자, 알-아크딸 』 (1878) 과 안바리의 『 동음 반의어의 서 Ki tab al-A
의해 2 권으로 편찬되 었디{Lei d en, 1~). 드 괴제와 다른 유럽학자들이 편집(Leiden, 1879-1~) 한 따바리의 역사서와 파베 드 쿠르테이유 Pave t de Cmrrteill e 와 바비에 드 메이 나르 Barb i er de Me ynar d “ 가 불어 번역판으로 펴낸(Pari s, 1001- l'oT l) 마스우디의 『 황금의 초원 Mur 이 al-Drarab 』 167 ) 은 이미 앞에서 자주 인용한 바 있다. 이들 두 저자는 (아마도 이븐 칼둔을 제외하고 는) 동부 이슬람 세계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일 뿐아니라 아랍 문학 중 이 분야에 전념한 모든 이들 중에서 가장 저명하므로 독자들에 게 그들을 좀더 자세히 소개할 필요가 있다.
167) 불어 표제는 Les Prai ries d'or( 황금 목장)이다 . 브로켈만은 그의 Hi st . of Arabic Lit er atu r e(Leip z ig , 1901 ), p. 110 에 서 Mur 떠 al- D 奭 b 의 정확한 번역은
E cj-t:I固(83&-923) 아부 자파르 무함마드 븐 자리르 Abu Ja' far Mubamrrad b.J artr 는 838 - 헛 9 년 사이에 카스피 해의 남부 해안에 연한 산악지방인 따 바리스탄 Ta bari s tan의 아물 Arnul 에서 태어났다. 이로부터 그의 유 명한 이름 따바리가 나온 것이다 .168 ) 당시 이라크는 여전히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였으므로 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168) 따바리와 그의 저술에 관해서는 라이덴 Le yden 판에 나온 드 괴제 의 서문(용어 해설이 들어 있는 중보판에 발행된)과 Enc ycl op a edia Br itan n i ca 의 따바리와 초기 아랍 역사가들에 관한 그의 명 논문을 참조할것
<서가( 書 記)의 품위가 돋보이는 사람이 있다네 . 그는 이라크의 찬란한 문화를 과시하는 분.>! &!) 젊은 따바리는 교육을 받기 위해 이라크로 갔다. 그는 라이이를 거쳐 바그다드로 여행하면서 다른 이웃 도시들을 방문하고 시리아 와 이집트까지 여행하였다. 그의 부친이 매년 돈을 보내 주었지만 반드시 제때에 도착하지는 않았으므로 언젠가 한번은 입고 있던 옷 을 팔아 식량을 구했다고 따바리 스스로 전하고 있다. 다행히 바그 다드에서는 무타와킬의 대신인 우바이둘라 븐 야흐야 ‘Ubay du llah b. Yab y a 에게 소개를 받아 그의 아들 가정교사로 채용되었다. 따바 리가 얼마동안 이 교사직에 있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그의 후원자 가 공직을 물러났을 때는 그의 나이 겨우 23 살이었다. 15 년 후 카이 로에서 그는 또 다시 무일푼의 신세가 된다 (ITT6-ITT7). 그러나 다시 바그다드로 돌아온 그는 여생을 교육과 집필로 보냈다. 겸손하고 사 심이 없으며 성격이 소박한 그는 자신의 백과사전적 지식을 40 년에 걸쳐 매일 40 페이지씩을 써냈다고 하니 그의 정력과 열정은 가히 초인적이라고 할만하다. 따바리의 대표작으로는 『사자(使者)들과 제왕(諸王)의 연대기 Ta'rik h al,-R usul UXl 'l - Mul iik』와 『꾸란 해석 T에 S Im 이 있다. 둘 다 현재의 형태로라도 방대한 분량의 책이지만 본래는 훨씬 더 큰 규모로 저술된 것을 저자가 일반 대중들에게 널 리 읽힐 수 있도록 요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제자들이 그와 함께 초핀을 강독하기를 거절하자 <학문에 대한 열정이 죽었다!>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천지 창조부터 히즈라 幻 2 년=기원후 915 년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다룬 따바리의 역사서는 <지엽말절까 지 다루는 완벽함, 정밀성, 전편에 걸쳐 드러나는 저자의 해박한 지 식으로 특징지어지며 그러한 점이 이 연대기를 역사가는 물론 이슬 169) Abo. al-Ma ltas in , ed. by Juy n b oll, vol. i, p. 608.
람 학도에게 귀중한 자료의 보고가 되게 하는 것이다 .>1 7 0 ) 이 책에 서 역사적인 사건들은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고 사건이 발생한 연 도(이슬람력)마다 사건의 목록이 일람표로 작성되어 있다. 더욱이 이 저서는 매우 독특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 <가능한 한, 개개의 중요 한 사실은 목격자나 동시대인에 의해 기술되며 그것은 일련의 이야 기꾼들을 통해 저자에게 전해진다 . 만일 그가 다수의 이야기꾼들을 통해 하나의 사실에 대해 제각기 다른 이야기 다소 중요한 곳 을 가감한 를 들었다면, 그 모든 이야기를 가감 없이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이와 같이 해서 독자는 한 가지 이상의 관점에 서 여러 사실들을 생생하고 명확하게 파악하고 고찰할 수 있는 것 이다 .>1 7 1) 따바리가 펴낸 이 책은 역사 자료의 원본들을 토대로 비 평적이고 지속적인 이야기로 꾸미려 들지 않고 단순히 자료를 배열 해 놓은, 근대적 개념의 역사서라기보다는 그냥 귀중한 자료집이다. 사람은 언뜻 숲은 안 보고 나무만 보기도 하지만 이 책을 정독해 보면 전체에 신선함과 생기를 주는 하찮은 여건 가운데서 본질적인 특징들이 서서히 뚜렷이 눈에 띄게 된다. 따바리도 권위 있는 역사 가들이 흔히 겪게 되는 운명의 전철을 밟았다. 그의 저술은 요약되 고 대중화되었으며 전거(典操)의 연속인 <이스나드 Is nad>는 끊기고 여러 가지 유사한 기술은 후세 학자들에 의해 통합되어 단일화되었 다 .1 72 ) 작가의 손을 떠난 따바리 역사서의 완질본은 어느 곳에도 없 지만 낙질본은 세계 도처에 보존되어 있다. 라이덴 판은 이들 분산
170) Selecti on from the Annals of Tabar!, ed. by M. J. de Goeje (Leyd en, 1902), p. 11. [역 주] 따바리 역 사서 의 영 어 완역 본 (The Hi st o r y of al-Tabar!, ed. by Ehsan Yar-Shate r, 19 'ifl)이 뉴욕 주립 대학교 발행으로 전 39 권 중 38 권이 발간되었다.
171) 같은 책, 서설, p, 27.
172) 사만조 만쑤르 1 세의 부왕인 알-발아미 al-Bal'arnI 는 963 년 듀훼 Du beux 와 조텐베르그 Zo te nber g의 불어 번역판이 1867 一 1874 년 발행되 자 이룰 페르시아어로 요약하였다.
되어 있는 필사본들에 기초한 것으로서 다행히 몇몇 사소한 탈문(脫 文)을 제하고는 전집을 망라하고 있다 . 마스우디 (956 년 사망) 바그다드 태생의 알리 븐 후사인 ‘A1I b. Husa yn은 예언자의 교우 중 한 사람인 같은 혈통의 압둘라 븐 마스우드 ‘Abdullah b. Mas‘Ud 의 이름을 본따 마스우디라 불리게 되었다. 그의 많은 저술 중 남아 있는 것이라곤 얼마 안 되지만 문헌에서 뿐 아니라 아시아 거의 전역을 오랫동안 직접 답사하면서 수집한 방대하고 다양한 자 료는 가히 독보적인 것이다. 그가 방문한 곳으로는 아르메니아 , 인 도 실론, 잔지바르Zanzi bar,1 731 마다가스카르 Mada ga scar1w 등지가 있으며 카스피 해와 중국의 해역까지 항해한 것 같다 .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여정은 태양의 그것과 유사하며 어느 시인이 말한 다음 시구는 나를 두고 한 말이리라.>
173) [역주] 아프리카 동쪽 해안 먼 바다의 섬 .
174) [역주] 아프리카 동남 해안에서 약 390 킬로미터 떨어진 인도양에 있 는섭
<우리는 여러 나라로 발길을 돌린다. 이번에는 극동지방으로, 다음에는 서쪽으로 전인미답의 오지로 나아가는 것을 태양도 막지 못하노라 .>1 75'
175) Muraj al-Dlnl 따 ed. by Barbie r de Mey n ard, vol. i , p. 5 이 하.
그는 생애 후반을 주로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보내며 그는 일 정한 거주지가 없었다 중요한 역사서들을 편찬하였다 .1 76) 그 중 『황금의 초원』이 대표작이다. 마스우디는 저술 동기에 대해 학자들
176) 30 권(한 권은 비 엔나에 ` 소장되 어 있음)으로 된 Akhbar al-Zaman 과 Ki tab al-Awsat
과 현인들을 본따 칭송받을 만한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싶었을 뿐 이라며 자신이 선배 학자들보다 보는 시야가 더 넓었다고 주장한다. <고향을 떠나지 않고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역사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여행으로 여생을 보내고 끊임없 는 방황으로 세월을 보내며 숨겨진 보고에서 온갖 신기하고 귀중한 지식을 끄집어 내는 사람과 같지 않다 . > 177 )
177) Mur 떠 al-Dhalnb, p. 9 이 하 .
『 황금의 초원 Mur(j al-Dhahab 』 마스우디는 <아랍의 헤쿠두뚜 A> 라 불렸는데 이는 적절한 비유 이다 . 178) 그의 저술에는 그리스 역사가의 특징을 이루는 예술적 통일 성이 결여되어 있지만 치열한 탐구 정신이나 보고 들은 모든 신기 한 사물을 편견 없이 기록하려는 경향은 똑같으며, 성숙한 경험과 과거와 현재에 대한 폭넓은 조망이 엿보인다. 그것은 일견 천지 창 조로 시작하여 947 년 칼리파 무띠아 Muu‘ 로 끝나는 일반적인 역사 서로 보이지만, 이 책의 경우처럼 다루는 주제가 광범위하고 경우에 따라 독자를 즐겁게 하기도 하고 분노케 하는 무수한 지엽적인 이 야기들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딱부러지게 이름 붙일 수가 없다 .1791 몇가지 예를 임의로 꼽자면, 조수(潮水)에 관한 논문(1권, p. 2A4); 용 tinnin 이야기 (1 권, p. '251);페르시아 만의 진주잡이 (1 권, p, 328) ;코뿔 소 이야기(1권, p, 385) 둥을 들 수 있다. 마스우디는 통찰력 있는 신 학자이자 비평가로서 종교 신앙에 관한 몇 권의 저서를 남기고 있
178) 이븐 칼둔이 마스우디를 ima m lil-m u'ar rikhin 죽, 딱 들어맞지는 않지만 <역사의 아버지>란 표현과 흡사하게 <전 역사가들의 이맘> 이라고 칭한 것은 우연의 일치로서 주목할 만하다 .
179) 마스우디 는 드 괴 제 가 펴 낸 Tanblh wa-'l -Ishr 감 서 문 p. 2 이 하에 서 그의 역사서와 종교서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이 인용문에 대 한 드 사시의 번역은 바비에 드 메이나르가 편집한 MurOj al- D 奭 b, vol. ix , p. 302 이 하에 서 찾아볼 수 있다.
다 .1 80 ) 『 황금의 초원』은 이슬람교의 분파와 조로아스터교, 사비교에 관한 가치 있는 내용을 많이 상술하고 있다. 특히 이집트의 태수 아 흐마드 븐 뚤룬 Abroad b. Tulun(868- 얽 7) 과 어떤 늙은 콥틱교도 사 이에 있었던 면담에 관한 홍미로운 보고가 들어 있다 . 여기서 이 콥 틱교도는 나일 강의 수원과 피라미드 건축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후 기독교의 명명백백한 오류와 모순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많 은 사람들과 왕들이 기독교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것이 진리임을 나 타내는 결정적 중거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신앙인 기독교를 옹호 하였다 . 18 11 마스우디의 칼리파들에 대한 이야기 중에는 독특한 일화 가 많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나 공적인 사건들과 개인적인 관습, 사회상과 문학사에 대한 그의 기술은 훌륭하면서도 조리가 없고 균 형을 잃은 감이 없지 않다. 지면을 생각하다 보니 수에토니우스 Sue toni us182 1 의 작품에서처럼 생생하고 그림같이 아름·다운 구절을 많이 인용하지 못했는데 그랬더라면 본서의 가치가 좀더 올라갔을 것이다. 그의 마지막 저술 『 훈계와 지도의 책 Ki t ab al.-T anbih UXl -'l - Js hr,접』 183 1 은 그가 전에 저술한 책들에서 보다 자세히 고찰한 바 있는 분야를 개관하고 불충분한 곳은 보완하고자 하는 데 의도가 있었다.
180) Muraj , vol. i, p. 201 및 vol. iii, p. 268 참조 .
181) 같은 책 , vol. ii , p. 372 이 하 .
182) [역 주] Ga ius Sueto n ius Tranq uillu s(69?~ 1 40?) : 고 대 로마 제 정 기 의 전기작가. 그의 주저 『 황제전 De Vita Caesarum 』 은 시저로부터 도미티아누스에 이르기까지의 12 황제의 전가인데, 전대의 공문서나 서간 둥 생생한 사료를 자료로 삼은 점에서 귀중하다.
183) 드 사시 는 본서 의 제 목을
기타역사가들 그 밖에 동시대의 다소 지명도가 낮은 역사학자들이나 전기학자
들은 생략하기로 한다. 예컨대 우트비 ‘U tbi (l o:?o년 사망)의 『키탑 알 -야미니 Ki ta b 따 Ya mini』는 가즈나 지방의 술탄 마흐무드의 뛰어난 통치 역량을 찬양하였으며 바그다드의 카띠브 Kha t:I b (l ITTl 년 사망)는 바그다드 유지들의 전기를 작성하였다. 이쓰파한의 이마드 알-딘 '!mad al - Din (l201 년 사망)은 살라딘의 전기를 썼다. 상 이집트의 끼 프뜨Qit출생인 이븐 알-끼프띠 Ibn al- Qifµ(l 248 년 사망)는 그의 저 서 『 현자들의 역사 Ta' rikh al.-lfukama.o에서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생애를 전해 주고 있다 . 이븐 알-자우지 lbn al- J aw 떠(1 200 년 사망)는 문학의 거의 전 부문에 걸친 다산 작가이며 그의 손자 유수프 Yo . s uf(l'El년 사망)는 일반적으로 십뜨 븐 알-자우지 Sib t Ibn al - J a wzi라 불린다- 『 시간의 거울 Mi r' at al.-Zaman.o을 집필하 였다. 이븐 아비 우싸이비아!b n Abi U~ y b i 'a(l 'l:/ 0 년 사망)가 쓴 의 사들의 역사서인 『정보의 진수 ‘Uy m al. _Anb& 는 뮐러 A Milll타에 의해 편집된 바 있다(1~). 기독교도인 지르지스 알-마킨Jirji s al 一 Makin (lZ73 년 사망)은 『마즈무아 알-무바라크 M 떠'mfl I al. -Mub arak,』 라는 역사서를 펴냈는데 무함마드로부터 압바스조 말기까지를 다룬 이 책 후반부는 1 泣 5 년 에르페니우스EF 떄 us1841 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184) [역주] 네덜란드 동양학자 • 여행가 (1584-1624). 라이덴의 아랍어 교 수 역임 .
이븐 알-아씨르 lbn al-A t hTr(1Z34 년 사망) 잇쯔 알-딘 븐 알-아씨르 ‘Izz al-D in Ibn al-A thir에 대해서는 간략하나마 각별한 주목을 받을 만하다. 메소포타미아의 모술에서 자란 그는 바그다드, 예루살렘, 시리아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향하여 독서와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개인적으로 그를 알고 있던 이븐 칼리칸은 그의 인간됨과 학자로서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의 위대한 저서 『완전함 Kt n따』 1851 은 고대부터 히즈라 @8 년
18.5 ) 본서의 정식 명칭은 Ki tab al-Kami / Ji al-T a'r ik h, 죽 <연대기의 완 전한 책>이다 . 토른베르그 Tomber g에 의해 14 권 (Le y den , 18.5 1 - 18 76) 으로 편찬되었다 . 186) Ibn Kha llika n, 드 슬 란의 번 역 서 , vol. i~ p. 289. •
(1230-1231) 에 이르기까지의 세계사를 다루며 이 분야 최고의 저술 이러는 평판을 받을 만하다 . > 1 861 그는 히즈라 30'2년까지는 다른 문 헌 자료에서 수시로 보완하며 따바리의 역사서를 요약했을 뿐이다 . 제 1 권에서는 따바리의 원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슬람 이전의 전투들 Ay yam al-'Arab 에 대해 장황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베반 교수가 나에게 알려준 바로는 드 괴제는 본래 이 부분이 따바 리의 원본에 들어가 있었으나 나중에 삭제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 이다 . 이븐 알-아씨르는 <전승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그의 『 밀림의 사자들 Usd al-Ghaba 』 에는 예언자의 교우 T 꿨)명의 전기가 실려 있 다.
지리학자들 압바스 제국의 여러 나라와 민족에 관한 방대한 분량의 자료는 대부분 무슬림 지리학자들이 실제로 여행중에 목격하고 경험한 것 을 기술한 것이지만 때로는 선배 학자들의 저술에서 제멋대로 인용 해 오기도 하여 오늘날까지 보존된 것이다. 완벽하다고는 볼 수 없 지만 다음과 같이 인명록을 작성할 수 있다 . 1 87 1
1 얽) 아랍의 지리학자들에 관해서는 구이 레 스트란쥐 Gu y Le Str an g e 가 그의 저서 『 무슬림 통치하의 팔레스타인 Palestin e under the Moslems 』 (London, 1890) 의 서문에서 훌륭하게 기술하고 있다 . 드 괴 제 는 Bi bl i oth e a i Geog rap h ofu m Arabic o rum(Leyd en, 1870) 에 서 이븐 쿠르다드비, 이쓰따크리, 이븐 하우깔, 무캇다시의 작품들을 모 아 편찬하였다.
1 이븐 쿠르다드비 |bn Khurdacbih 페르시아인인 이븐 쿠르다드비 (9 세기 전반)는 옛 왕국 메디아
寧 a 의 지발Ji bal 주의 우체부였다. 공인된 여행 안내서인 그의 『 도 로와 왕국들의 책 Ki tab al-Mas 짊i k uxz-' !-Marnal i k 』 은 전해 오는 아랍어 지리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2 이쓰따크리 |$t akhr i와 이븐 하우깔 |bn f:ialA,{lal 페르세폴리스 P erseix>li s( 이쓰따크르 Is takhr ) 1 88 ) 태생인 - 이때문에 이쓰따크리 Is takhrt라 불렸다 ___ 아부 이스하끄 알 _ 파리시 Abu I 햐 al-Fa ri sI 는 『 왕국들의 도로망 Mas 짊i k al -M amal i k』 이 라는 책 을 썼다. 후에 이븐 하우깔이 중보판을 내었다. 양 저술 모두 10 세 기 후반의 것이며 이슬람 제국의 주요 도시나 명소와 함께 각기 지 방주에 대한 상세한 기술을 담고 있다.
188) [역주] 이란 남서부에 있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수도.
3 우껏다시 Muq a ddasi <성도(聖都) 태생>이라는 의미의 무캇다시 al-M~ 알 - 마끄디시 al-M 최di sI) 는 946 년 예루살렘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홍미 로운 저서 『지리를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구획A 垣 m al, - T띠 as imfi Ma 'rifat al. -A q組 m 에서 幻년에 걸쳐 칼리파의 영토를 주유한 결 실을모아놓고 있다. 4 야꾸트 Ya qOt 스페인의 아랍 지리학자들로 모두 11 세기에 활동한 바크리 Balm, 이드리시 Idr isi, 이븐 주바이르 Ibn J u ba.yr를 생략하고 건너뛰면 무 슬림 지리학자 중 기장 위대한 야꾸트 븐 압달라 Ya q먀 b. ‘서챠曲由 (117 9- 1229 년)와 만나게 된다. 그리스 태생인 그는 어린 시절 노예로 바그다드의 한 상인에게 팔려갔다. 그의 주인은 그를 훌륭하게 교육 시켜 페르시아 만과 그 밖의 다른 곳으로 가는 대상에 끼어 여행하
도록 하였다. 주인과의 불화로 노예에서 해방되어 필사본의 복사와 판 매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219-l zaJ년에 크와리즘 Khw arizm ( khi va/ 891 을 침공한 타타르인들 T artar l 901 과 마주치자 < 부활하는 날, 묘에서 흙먼지를 날리며 일어설 때처럼 거의 벌거벗은 모습으로 도망쳤다. > 그의 모험적인 일생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이 이븐 칼리칸에 의해 홍미롭게 기록되고 있다 . 1 9 1 1 그의 대작 『 제국( 諸國 )들의 사전 Mu Jam al-B ui年 』 은 뷔스텐펠트 Wi l s tenfe ld( Leipzig, 1 統 )1 921 에 의해 6 권으 로 편집되었고 레 스트란쥐 Le S trang e 193) 는 이 저술이야말로 < 그 가치를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는 지리에 관한 지식의 보고>라고 평했다. 약 일세기 후에 만들어진 『 제국들의 사전』의 요 약판 『 마라씨드 알-잇떨라아 Mar 쵸i d al-l tti. la‘ 』 가 있다 . 야꾸트의 다른 몇몇 현존 작품 중에서 관심을 기울일 만한 것으로 지명사전 인 『 무쉬타리크 Mus htari k 』 와 마구리우쓰 교수가 깁 G i bb 194) 교수 기 념 기금 평의회를 위해 편집한 『 문인 사전 Mu J am al - Udab a.n이 있다.
189) [역주] 아랄 해 남쪽의 옥수스 강 근방에 위치한 페르시아 왕국 (628 -1231). 후에 Khiva 로 불림 .
190) [역주〕 주로 몽골계 • 터키계의 여러 부족의 총칭 ; 중세에 칭기즈 칸 의 지휘하에 아시아와 동유럽의 태반을 휩쓸었다 .
191) 드 슬란의 번역서 , vol. iv, p. 9 이하 .
192) [역 주] F. Wi .ist e n feld (l808- 18 99) : 독일의 동양학자.
193) [역주] G. Le S tr an g e (1 854-1934) : 영국의 동양학자 . 아랍의 지리·역 사에 관한 많은 문헌을 주해·편집하였다 .
194) [역 주] Ha milto n Alexander Roskeen Gib b (1 8 95-1971) : 영 국의 동 양학자 런던 대학교(1 930), 옥스퍼드 대학교 (1937) 및 하버드 대학 교(1 955) 아랍어 교수 역임. 그의 학문적 편력은 아랍 문학 , 이슬람 역사, 이슬람의 종교 • 정치 사상 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고 다양한 성 과를 거두었다. 『 아랍 문학 서설 Arab i c Lit er atu r e:an In tr oduc ti on 』 (1926) 등의 저 술과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외래학문 무슬림들이 철학과 수학, 물리학 따위의 정밀한 학문에 있어서는 알렉산더 정복 이후 이집트, 시리아 , 서아시아에 자리잡은 그리스 문화에서 그 개념과 자료를 구한 것은 당연하였다. 5 세기 말경 시리 아의 에뎃사 Edessa1 951 파가 교회 분열에 의해 와해되자 쫓겨난 학자 들이 페르시아의 사산 왕궁에 피신하였다. 바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아테네로부터 추방당한 신플라톤파 철학자 들을 받아들여 환대해 주었던 쿠스로우 아누쉬르완 Khusraw Anu- shi rwan 혹은 일명 누쉬르완 Nu shirw an(531-578) 이 그리스의 의학과 철학이 압바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쭉 강의되어 오고 있던 쿠지스탄 의 준데 샤푸르J unde-s 悼p ur 에 학원을 세웠다. 헬레니즘의 또 다른 중심지는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이었다. 대개 사비교도라는 이름으로 이슬람 역사에 등장하는 그곳 주민들인 시리아의 이교도들은 아랍 어에 능통하였으며 그리스 학문의 보급에 적지 않게 이바지하였다.
195) [역주] 메소포타미아 서북부의 고대도시로서 현재의 우르파 U rf a 에 해당 . 초기 그리스도교의 중심지 .
그리스어 문헌의 번역 번역 작업은 거의 전적으로 시리아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시리 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수도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 , 갈렌 Gal en, 196} 프 톨레미 Pto lemy m} 의 저술들이 독창성 없이 원문에 충실하게 옮겨졌 고 이들 시리아판은 그 후 아랍어로 재번역되었다. 초기의 번역은 이슬람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우마이야인들에 의해 시작되었 다. 우마이야조의 칼리파인 칼리드 븐 야지드는 그리스어와 콥틱어 로 쓰여진 연금술에 관한 저술을 번역하였으며 그 자신이 직접 동
196) [역주] 로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 s 황제 시대의 철학자이자 의학자(1 29- ?1 99).
197) [역주]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수학자·지리학자(1없 - 148). 천문 학서로 Almag es t가 유명하다.
일 주제에 대한 논저를 세 권이나 집필하였다. 압바스인들이 권력을 승계하자 이같은 연구는 큰 자극을 받게 되었으며 칼리파 만쑤르라 는 계몽된 후원자가 나타났다. 논리학과 의학 서적들이 이븐 알-무 캇파아 (7OO 년경 사망)에 의해 중세 페르시아어인 페흘레비로부터 번 역되었다. 칼리파 마문의 신 학문에 대한 장려 그러나 이러한 동방의 르네상스가 가장 활기차게 펼쳐진 것은 칼 리파 마문 (813-833) 의 치세 동안이었다. 그는 비범한 데가 있는 인 물이었다. 전형적인 페르시아인답게, 그는 신학적인 사색에 홈뻑 빠 졌으며 칼리파의 권위를 이용하여 자유로운 정통파적 규범을 실시 하였다. 학문에 대한 그의 관심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열렬하였다. 『피흐리스트.!J 1 빡)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존경하는 인물 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왕좌에 앉아 있는 모습을 꿈에서 보고 로마 황제 (Lro the Arrre ni an)199) 에게 사절단을 파견하여 아랍어로 번역할 학술 서적을 구해오도록 하였다. 민간인들도 칼리파를 본받았다. 총 칭하여 바누 무사 Ban o. Mus 話 1 알려진 형제지간의 무함마드, 아흐 마드, 하산은 <충분한 보상을 준다고 제의하여 멀리 떨어진 나라에 서 번역자를 끌어들여 200) 과학의 경이룰 분명히 나타나게 하였다 . 기 하학, 공학, 천체의 움직임, 음악, 천문학이 그들이 관심을 기울인 주 요한 주제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학식의 극 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201) 마문은 그들을 야흐야 븐 아비 만쑤 르 Ya }J.y a b. AbI M 益E 를 비롯한 다른 학자들과 함께 장서가 잘
198) Fih rist, p. 243.
199) [역주] 레오 5 세 (813-820). 흔히 아르메니아인 레오 Leo the Anne- ni an 로 불림.
200) 바누 무사에 의해 고용된 번역사들은 월 약 500 디나르를 받았다(같 은 책, p. 431. 18 이하).
201) 같은 책, p. '271 ;lbn Kha llika n, 드 슬란의 번역서, vol. ii~ p. 315.
갖추어지고 천체 관측소를 갖고 있는 바그다드의 학술원 Ba yt al- 固 m 압에 배치하였다 . 9 세기에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역시 학자로서 도 새로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 중에는 꾸스따 븐 루까 Qust a b. LU q쵸 후나인 븐 이스하끄 l:funayn b. Isb aq, 사비교도인 싸비트 븐 꾸라 Thab it b. Qurra 만을 언급할 수 있다. 과학과 철학 분야에서의 무슬림들의 업적을 상세히 고찰하는 일은 본서의 영역 을 벗어니는 일이다 . 어떤 분야에서 그들이 기존의 지식에 귀중한 공헌을 더했다는 점은 분명히 인정되어야 하겠지만 이러한 인식은 학문의 개척자로서 암흑의 중세 유럽을 계몽시킨 아랍인들에게 빚 올 지고 있다는 것과 비교해서는 별로 대단치 않은 일이다 . 202’ 그럼 에도 불구하고 압바스 시대의 몇몇 유명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이름 을 열거할 수는 있겠는데 주요 철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극소수의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그들 대부분이 이방인 출신임을 알 수 있다.
202) 유럽 문명이 아람으로부터 받은 주요한 물질적 정신적 혜택을 적 절히 기술하자면 최소한 하나의 장이 필요할 것이다. 독자들은 다음 의 참고 문헌을 참조하기 바란다 ;Von lrremer's Cultu rg e schi ch t e des Or ien ts , vol. ii , chapt ers 7 & 9, Dier chs, Di e Araber im Mi ttela lte r (Leip z ig , 1882) ; Se dillot , Hi st o i r e ge nerale des Arab ; Schack, Poesie und Kunst der Araber in Sp anien und Sic ilie n ;M unk, Melang e s de Ph ilo soph ie Jui v e et Arabe;De Lacy O'Le- ary, Arabic Thoug ht and its Place in Hi st o r y (l 922);Camp bell, Arabia n Medic ine and its Irif [ue nce on the Mi dd le Age s (1926). 아놀드 경 Sir T. W. Arnold 과 길롬A. Gu illau me 교수가 편찬한 The Lega cy of the Islami c World는 발행중이다.
1 킨디 킨다 왕가(p . 00 참조)의 후손인 야꿉 븐 이스하끄 알-킨디 Ya ‘qub b. Isl; iaq al- Kindi는 동시대인들로부터 <아랍의 철학자 Fa y la Si ll al-.Arab> 라는 별명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9 세기 전반에 활 동하였다.
2 파라비 터키계로 트란스옥사니아의 파라브 Farab 태생인 아부 나쓰르 알 -파라비 Abu N益 r al-FarabI( 었)년 사망)는 사이프 알-다울라의 보 호 아래 생애 말년을 알렙포에서 보냈다. 그는 단테 203 ) 가 <아는 자 의 스승il maestr o di color che sanno> 이라고 부른-무슬림들 도 그러한 비유에 동의한다―—_아리스토텔레스 연구에 몰두하였 다.
203) [역 주] Dante Alighier i (1 265-1321) : 이 탈리 아의 시 인 본문의 인용구 는 단테의 Di vin a Commed ia(신곡)의 첫째 편인 r 지옥편 I nfe rno 』에서 아리스토텔레스롤 지칭한 것이다.
3 이븐 시나 아부 알리 븐 시나 Abu ‘A1I Ibn Sma( 라틴명은 아비센나 Av i cenna) 는 앉刃년 부카라 근처의 카르마이싼 Khannay than에서 페르시아인 양친 사이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비상한 재주를 보여 <그의 나이 16 세 되던 해에 고명한 의사들이 와서 그와 함께 의학서를 강독하 고 그가 실습을 통해 발견한 치료법을 배우고 갔다>판 그는 파라 비처럼 얌전한 학생은 아니었다. 때로는 총애를 받으며 또 때로는 모멸을 받으며 이 궁전 저 궁전으로 떠돌면서 항상 지칠 줄 모르는 정열로 집필에 몰두한 쾌락 추구형의 모험가였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의 이론이 페르시아의 신비주의와 결합되어 있는 그의 철 학체계는 대중적 취향에 적합하였으며 동양에서는 아직도 그의 이 론이 널리 퍼져 있다. 주요 저술로 물리학과 형이상학에 관한 『구제 법 Sh i.f~과 의학 백과사전인 『법전Q anon 』이 있다. 그는 l (J1 3 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밖에 스페인의 철학자들인 이븐 바짜 Ibn Bajj a( 아벰파세 Ave 띠率e ), 이븐 뚜파일 Ibn Tu fay l , 이븐 루쉬드(아베로이즈 Averroes) 는
204) Ibn Kha llika n, 드 슬란의 번역서. vol. i, p. 440 ..
모두 12 세기에 활동하였다. 의학, 천문학 , 수학 아라비아 의학사에서 아비센나와 더불어 유명한 의학자가 테헤란 근방의 라이이 태생인 아부 바크르 알-라지 Abu Bakr al-Ra zi(9 Z3 년 또는 932 년 사망)이다. 타르서스 Tarsus206’ 의 자비르 븐 하이얀 J曲ir b. I:Iayy如 (7OO 년경 사망)은_이는 유럽학자들이 말하는 게 이버 Geber 이다__一연금술가로서 라지 못지 않은,명성을 얻었다. 천문학은 점성학과 서로 손을 잡았다. 파르가니라 -Far ghanI, 발크의 아부 마샤르 Ab o. Ma 'shar( 88.5년 사망), 하란의 사비교도인 밧타니 al-Ba ttanr (929 년 사망)는 유럽에서는 각기 알프라가누스Alfrag anus, 알부마세르 Alburnaser, 알바테니우스 Alba tegniu s 로 알려졌다. 마문 칼리파 시대의 인물인 아부 압달라 알-크와리즈미 Abu ‘Abdallah al - Kh warizmi는 이슬람 역사상 최초의 수학자였다. 의학이나 천문 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학문에서도 인도 문명이 이슬람 문명에 영 향을 미친 것을 알 수있다 .206) 그러나 문헌 자료에 의하면 그리스의 영향보다는 보다 더 제한적이고 그 중요성이 훨씬 떨어졌다.
205) [역주〕 터키 중남부 , 지중해안에 있는 농상 • 광산도시. 역사적으로 고대 소아시아의 킬디키아 왕국의 주요 도시로서 유명하다 .
206) [역주]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아라비아 숫자>는 본래 인도 숫자 에서 유래된 것이다.
닌 1 루니 BirO ni( 9T J-10 48) 크와리즘 태생의 아부 라이한 알_비루리 Abu Ra y悼 n al_BII iinI 룰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그의 과학, 고고학, 인도 관습에 대한 박식함은 어느 무슬림도 따라갈 수 없었다• 그의 대표작 『현존하는 유적 A th ar aJ, -B 組 1. 』, 『인도 역사 Ta' 대야 따 -H in d』 는 자코 Dr. Sachau 박사에 의해 영어로 번역, 편집되었다.'2111)
『피흐리스트 』 압바스 시대 초기 무슬림들의 놀랄 만한 지적 활동을 짐작게해 주며 , 오늘날 책 이름과 저자명 외에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는 수천 권의 서적이 분실됨으로써 아람 문학이 얼마나 막대한 손실을 입었 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무함마드 븐 이스하끄 븐 아바 야 꿉 알-나딤 알-와라끄 알-바그다디 M 曲 amrnad b. Isbaq b. AbI Ya‘ 禪 al-Nacl im al-Wa rraq al- Bag hda 야(寒년 사망)의 『 피흐리스 트 』 이다. 이 책의 편찬자에 관해서는 그의 이름에 붙어 있는 마지막 두 수식어에 담겨 있는 지식 이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가 필경 사로서 바그다드가 출생지 아니면 거주지였을 것이라는 정도이다. 또 그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그가 책을 쓴 988 년 바로 이 해에 콘 스탄티노플 Dar al-Rom 에 있었다는 것을 덧붙일 수 있을 뿐이다. 그와 모술 출신의 유명한 음악가인 이스하끄 븐 이브라힘 알-나딤 (849- 由년 사망)과는 친척 관계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는 아직 입 증되지 않고 있다. 아무튼 히즈라 心세기 말까지의 아랍 문학사의 유 일한 개요를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근면성 덕분이다. 『 피흐리스트』 는 (저자가 그의 짤막한 서문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히즈라 '3T7년 까지의 모든 학문 분야에 걸쳐 아람어와 아랍문자로 쓰여져 전해지 는 아랍 및 이방인 민족들의 도서 목록으로 편찬자들의 족보 등 편 찬자들에 관한 정보, 그들의 사회 계급, 출생 일자, 수명, 사망 일자, 출생지, 장단점을 총망라하고 있다.> 『피흐리스트』의 내용(싱술한 내 용의 정도를 상당히 초과하는)은 폴뤼겔 G. F1 ug el208) 이 자세히 분석한 바 있고 (ZDMG, vol. 13, p. 5.59 이하) 브라운 교수의 『페르시아 문학 사』 제 1 권에 209) 목록표가 나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본서의 일반
207) The Chronolog y of Anc ien t Nati on s(London, 1879) 와 Alber- u양n학i' 자s .In dia (London, 1888). [역주] E. Sachau(1845-1930) : 독일의 동
208) [역주] Gusta v Leberecht Flu g el(1802-1870) :독일의 동양학자
적인 체제와 범위만을 적시하겠다. 이 책은 모두 10 강( 講 maq짊 a t)으 로 되어 있고 이는 다시 여러 절( 節 fun on) 로 세분된다. 이븐 알-나 딤은 맨 먼저 제 언어와 문자들, 아랍 및 다른 민족의 성서들, 꾸란 의 계시 내용, 꾸란의 계시 장( 章 )의 순서, 그 수집자와 교정자, 주석 가들을 논하고 있다. 그 다음에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꾸란 연구 과정에서 파생하여 주로 신학의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한 학문으로 넘어가서 문법학의 기원과 각기 다른 문법학파들, 그리고 그들이 쓴 논저들을 함께 기술하고 있다. 제 3 강은 역사, 문학, 전기, 족보 를 포함하고 있으며 제 炫J은 고대시와 현대시를 다루고 있다 . 이 슬람의 사변적 신학 Kalam 이 다음 장의 주제를 이루는 데 여기에는 이스마일파와 그 창시자 압둘라 븐 마이문 ‘Abdull 曲 b. Ma ym1n과 유명한 신비주의자인 후사인 븐 만쑤르 알-할라즈I:Iu say n b. Ma- ru$Uf al- I:Iall적룰 다루고 있다. 이러한 이단을 연상케 하는 많은 이 름들을 언급하고 난 저자는 이슬람의 정통 법학파들인 말리키파 Ma likites, 하나피 파 I;Ianafites, 샤피 이 파 Sh afi 'ites, 자흐리 파.zabrites 로 돌아온 다음에 쉬아파의 법학자들을 거론한다. 제 7 강은 철학과 <고대 학문>들을 다루는 데 이 제목에서 그들 학문의 기원과 이슬 람권으로의 유입에 관한 호기심 어린 고찰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번 역가들의 명단과 그들이 아랍어로 번역한 도서 목록을 소개하며, 탈 레스 Thales210) 로부터 플루타르크 Plu tarch2 1” 에 이르는 그리스 철학자 들과 무슬림들에게 알려진 그들의 저서 이름도 함께 기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머지 학문들, 죽 수학, 음악, 천문학, 의학에 대한 학 문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갑자기 방향을 바꿔 동양의 매 력적인 우화의 영역에 들어선다. 『천개의 이야기 Haz泣 A 和年』, 『칼 릴라와 딤나』, 『신드바드 S indba d 의 책.!l, 『루스탐과 이스판디야르의
209) 『페르시아 문학사』 제 1 권, p. 384 이하.
210) [역주] 밀레투스Mil etu s 태생인 그리스 철학자(기원전 640-546?).
211) [역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 전기작가 (c46-c120)
전설 ./l , 마술, 마법, 주문, 부적 등에 관한 저술이 소개된다. 유럽의 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제 9 강의 중요성을 인정해왔는데 212) 여기서는 마니 M 印 es, 2 13 ) 바르디산 Bardesanes,214 ) 마르키온 Marcio n ,21s , 마즈닥 둥의 이교도들이 세운 이원파와 사비교의 교리와 문헌들만을 전적 으로 다루고 있다. 저자는 연금술사 al- Kiiniy a' on 들에 대한 장으로 끝을 맺고 있다.
212) 사비교도들에 관해서는 Chwolsohn, Ssabie r und Ssabis m us(St. Pete r sburg, 18. 56), vol. ii, p. 1 - 365 에서 풍부한 주석과 함께 편집, 번 역 되 었으며 풀뤼 겔은 Mani, sein e Lehre und sein e Schrift en (Leipzig, 1862) 에 서 마니 교도에 대 한 부문을 그와 비 슷하게 다루었 다.
213) [역주] 페르시아의 예언자;마니교 (M ani che ani sm) 의 창시자 (216?- 276?).
214) [역주] Bar DI$lln(154-201) ;시리아의 시인이자 신학자로서 그노시 스파의 교리를 전파.
215) [역 주] 그노시 스파적 인 경 향을 지 닌 그리 스도교의 이 단 사상가; 마 르키 온파의 창시 자 (c100-c160) .
제 8 장 정통 교파, 지유 사상 및 신비주의 압바스조와 이슬람 압바스조하에서 발생하였던 중요한 정치 변혁에 대해서는 이미 기술하였으므로 본 장에서는 새로운 시대가 정치 못지 않게 종교 분야에 미친 극히 중요한 영향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독자들 은 압바스가가 이슬람의 전사로서 억압받고 박해받는 신자들의 옹 호자를 자처하고 나섰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압바스가의 승 리는 민족의 개념에 대한 이슬람의 개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 대로 소멸된 예언자의 전승을 부활시키고자 하였다. 그들은 이제까 지의 본거지인 메디나로부터 이슬람 법학자들을 바그다드로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정치 문제일지라도 적법하게 다루며 꾸란과 순나에 따르게 하는 둥 반드시 이슬람 법학자들의 동의를 구하였다. 그러나 실제는 자신들의 이해 관계에 이슬람을 이용했을 뿐이다. 그들은 궁 전에서 신학자들을 길들여 지극히 부당한 조치까지도 적법한 것으 로 인정하게끔 만들었다. 또한 신앙심 있는 반대 세력에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이 반대 세력은 무기력하게 되었다. 우마이야조의 붕괴 와 함께 압바스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이제 편안하게 쉴 수 있게 되었다.>" 이같은 관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압바스의 칼리 파들은 이슬람의 엄격하지 못한 종교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진심으
1) Wellhausen, Das Arabis c he Reic h , p. 350 이 하 .
로 이슬람 대의에 헌신적이었으며 공적인 생활에서도 교리를 지키 려 애썼다 . 그들은 스스로 신앙의 최고 옹호자로 자처하며 우마이야 조의 국새 , 홀( o/3 ) 둥의 상징물에 예언자의 외투 al-burda 를 추가하 였다. 또한 아부꾼들이 자신들에게 붙혀 준 거창한 칭호들— ― _ < 신 의 대리인>, < 지상에서의 신의 술탄 >, < 신의 그림자 >― ―-에 만족 하고 스스로 신정(神政)의 속성을 띠며 백성들에게 존경심을 불어넣 고자 온갖 수단을 강구하였다 . 2)
2) Goldzih e r, Mu h:unm. Stu d ie n , Pa rt II, p. 53 이하 참조.
신학자들의 영향력 우마이야조의 군주들이 이슬람 정신을 무시하거나 묵살해 버리며 이슬람의 지도자들과 화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반면, 압바스 인들은 당대의 가장 저명한 신학자들을 칼리파 주위에 끌어들이고 그들에게 가능한 온갖 예우를 다해주었다. 또한 그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그들이 국가 행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말리크 븐 아나스는 그의 전승을 듣고 싶어하는 칼리 파 하룬 알-라쉬드의 부름을 받고 <지식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 찾아오는 법이다>라고 답하였다 . 그래서 하룬은 말리크의 집에 가 서 옆에 있는 벽에 기대어 섰다. 말리크가 말했다. <신자들의 지도 자시여! 신을 경외하는 자 , 지식을 경외하는 법입니다.> 알-라쉬드 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리크의 발 밑에 꿇어앉아 하느님의 사자로부 터 전해져 내려오는 많은 전승의 이야기를 들었다 . 그러자 이번에는 수프얀 븐 우야이나 S ufy an b. ' Uy a yna를 불러들여 자기 앞에서 전 승을 이야기하도록 하였다. 그후 알-라쉬드는 <말리크여, 그대의 지 식 앞에 겸손히 머리 숙여 이로움을 얻었지만, 수프얀의 지식은 그 것이 우리에게 고개를 숙였으므로 그로부터 이로움을 얻은 것이 없
3) 같은 책 , p. 70 이하 .•
습니다 >4 1 라고 말했다고 한다 . 당시 신학자들이 누린 총애라든지 칼 리파와 그의 대신들이 종교와 관련된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 인 예는 얼마든지 있다. 칼리파들이 점차 세속적인 권력을 잃어감에 따라 신학자와 법학자들인 <울라마>의 영향력이 중대되었다. 그리 하여 중세 기독교에서의 사제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위치를 점 하면서 이내 그들은 특권 계급을 형성하였다.
4) Fragm e nt,a Hi st o r ico rum Arabic o rum, ed. by De Goeje and De Jon g , p. 298.
압바스 시대의 종교 현상은 다음과 같은 주제로 구분하여 논할 수있다. I 이성주의와 자유사상 II 정통 교파의 반동과 이슬람 신학의 발홍 m 수피 신비주의 이성주의와자유사상 I. 압바스조가 통치한 첫 일백 년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 이 커다란 지적 논쟁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온갖 새로운 사상이 전파되었으며, 또한 발견과 각성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놀랄 만큼 짧은 기간에 신학, 법률, 의학, 철학, 수학, 천문학, 자연과학 둥의 다양한 학문이-――최고로 발달한 것은 아니지만-원숙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일부 신앙심 깊은 무슬림들이 외래 학문과 그것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미심쩍은 눈초리로 보기도 하였지만 아무래도 계몽 정신이 지배적이었다. 신학적 사색과 학문을 장려하였던-다시 말하면, 최소한 그것들을 허용해준~) ___ 궁전 의 예는 본받을 만하였다.
5) 물론 예외적으로 그렇지 않았던 칼리파들도 있었다. 마흐디, 하룬 알 -라쉬드 둥이다.
무 E 圈라파와 그 반대자들 이러한 상황은 무타질라파로 하여금 그들의 진보적인 견해를 아 무런 방해 없이 전파시키고 마침내 정통파에 대한 투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었다.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 s,61 던즈 스코투스 Duns Scotu s, 11 오컴 @댜 m81 의 시대에 유명론자(唯名論者) Nom i- nali s t 9) 들과 실재론자 Reali s t IO) 들을 갈라놓은 것과 같은 갈등이었다. 종종 중대한 원칙에 관한 문제가 걸려 있을 때처럼 이성과 계시 사 이의 전반적인 논쟁은 오직 <꾸란은 창조된 것인가, 그렇지 않 은 것인가?>의 의문에 대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하느님 의 작품인가 혹은 하느님의 말씀인가하는 것이다. 정통 교파의 신앙 에 따르면 꾸란은 창조된 것이 아니며 항상 신과 함께 존재해 온 것으로서 현재의 모양 그 자체가 천상(天上)의 원형 복사물이라는 것이다.11) 이처럼 꾸란을 신이 직접 행한 말씀으로 파악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지만 그같은 주장을 받아들인 이들에게는 무감각한 신앙심과 맹목적인 운명론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희생을 대단치 않게 여긴 이들도 많았다. 반면에 무타질라파는 지적 자유를 주장하였다. 전혀 계시가 없더라도 신을 경험하거나 선과 악을 구별 하는 일은 기능하다고 하였다. 그들은 꾸란이 신의 계시를 받은 예 언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신의 작품임을 인정하였지만 그 것을 신성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히 반대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솜씨가 문체의 아름다움과 감동적 표현에서 꾸란보다 더 나
6) [역주] 중세 이탈리아의 스콜라 철학자이며, 로마 카톨릭 교회의 대 신 학자 (1225?-1 없 4) .
7) [역주] 영국 스코틀랜드의 스콜라 철학자 (1265?-1308).
8) [역주] Wi lliam of Occam : 영국의 스콜라 철학자( ?-1349?).
9) [역주] 보편적 · 추상적 명사는 그것에 대옹하는 실재를 가지지 않고, 실재하는 것은 개물(個物)뿐이라는 유명론을 주장하였다 .
10) [역주] 유명론과 반대되는 중세의 이론으로 일반 개념에는 실재적 존재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11) p. 241, 각주 59) 참조.
올 수 있다고 공언하며 꾸란의 <모방 불가능>한 문체를 비난하기 도 하였다 .1 21 칼리파 마문, 이성주의를 채택하고 실행함 무타질라파의 논쟁은 이미 언급한대로 학문적 열정과 종교 문제 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보인 칼리파 마문 (813- 83.3년)시대에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는 부친 하룬 알-라쉬드의 정교 신봉을 계승하 지 않았다. 오히려 내심으로는 <진디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의 진보적인 경향은 반대자들에 대해 지나치게 편협한 홈만 없었더 라면 전적으로 칭찬받을 만한 것이었다. 그가 사망한 幻 3 년, 그는 모든 무슬림들이 꾸란의 창조에 관한 무타질라파의 교리를 받아들 일 것과 만약 이룰 위반하면 공민권을 잃는다는 교령(敎令)을 공포 하였으며 동시에 신학자, 판사, 법학자들의 동의를 구하기 위한 종 교 재판소mibna를 설치하였다. 심판에 응하지 않는 자들은 태형에 처하거나 처형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마문의 사후, 박해는 그 정도 가 다소 온건해졌을 뿐 여전히 계속되었다. 무타질라파에 대한 세간 의 감정이 급격히 반대로 돌아섰다. 정통파 진영의 가장 뛰어난 인 물은 처음부터 새로운 교리에 완강히 반대하고 나선 이맘 아흐마드 븐 한발뇨函 n AlJrnad b. I:Janb al 이었다. 순니파 역사가인 아부 알 마하신은 <그가 아니었더라면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더럽혀질 뻔했 다>라고 말한다 .13 ) 어떠한 위협이나 호소에도 그의 결심은 혼들리지 않았다. 그가 칼리파 무타씹으로부터 태형을 받게 되자 재판 결과를 알기 위해 성밖에 운집한 성난 군중들 때문에 궁전이 파괴될 지경 이 되기도 하였다. 12) 동시대의 몇몇 자유 사상가들은 꾸란에 대해 자신들의 창작물로 맞 서려고 하였다 . Goldz ihe r, Mulr. unm, Stu d ie n , Pa rt Il, p. 401 이하 참조. 13) al - N따 빠 al-Za hira , ed. by Ju y n boll, vol. i , p. 639.
무타와킬 정통 교파로 재복귀 칼리파 와씨끄가 무타질라파의 교리를 포기하고, 또한 잔악하고 편협한 무타와킬이 무타질라파를 이단자로 규정하기 전까지 (847 년) 무타질라파는 공인된 신앙이었다. 칼리파 와씨끄가 무타질라파 교리 를 포기한 시점부터 847 년까지 이 의기양양한 정통 교파는 이슬람 의 모든 이성주의 운동을 억압하였다. 무 E 隆라파의 종말 슈타이너 St ein erl4l 에 따르면, 본래 무타질라파의 이단적 경향은 어떠한 외래 영향도 받지 않고 이슬람의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발생 하였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그 후의 발전 과정에서는 주로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여기서 아부 후다일 알-알라프 Abu Hudhayl al-'A ll af (840 년경 사망)와 그의 동시대인들 낫잠 al-N a??,aITl, 비쉬르 븐 알_무타미르 B i shr b. al-Mu'ta rnir, 바스라와 바그다드 철학파 (무타질라파 운동은 결국 이 두 학파로 용해되었다)가 보여 준 심오한 성찰들을 규명할 필요까지는 없겠다 . 신을 의지로 파악하는 이슬람 적 관념을 신을 율법으로 파악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관념으로 대 체하려는 그들의 모색은 수포로 돌아갔다. 꾸란에서 신인동형론(神 人同形論)을 제거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천국에서 신을 마주 대하여 뵐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신도들에게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 하였다. 또한 무타질라파의 성과도 신통한 것이 별로 없었다. 그들 의 무기인 논리와 논법도 이제는 무용지물이 되었으며 사변 신학은 이성주의의 폐허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무타질라파의 교리는 이슬 `—
14) [역주] Heim ich S t e i ner(l841-1889) :스위스 동양학자. 주요 저술로 『무타질라파-이슬람의 자유 사상가들 -D i e Mu'taz iliten oder die Freid e nker in Islam, Ei n Beit rag zur alleg e mein e n Cultu r ge sch i- c ht e 』 (1865) 가 있다. 여기서 그는 무타질라파의 견해를 고찰하면서 히 츠라 1 세기에서 4 세기까지의 이슬람 신학의 발달과정을 살피고 있다.
람 사상에 간접적으로나마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권위와 이성을 조화시키려하고 종교 철학의 보편적 체계를 세우려한 <청정( 淸 淨) 형제단 Ikhwan al- $af企 같은 다른 진보적 운동이 출현할 길을 터 주었다. 청정 형제단 이른바 <청정 형제단 >15 ) 은 印편의 <서간문 Rasa' il>으로 이루어 진 백과사전식의 1 61 유명한 문집을 펴냈다. 10 세기 말경 바스라에서 활약한 저자들 중에서 디섯 명의 이름만이 전해진다. 죽 아부 술라 이만 무함마드 븐 마샤르 알 - 바유스티 Abo. Sulay rnan Mubarrnrad b. Ma·shar al-Bay u s ti(또는 무캇다시 al-Muqa d dasI, 마끄디시 M 끽di sI), 아부 알-하산 알리 븐 하룬 알-잔자니 Abu a1-I:I as an ‘AII b. 뚜 al- Zanj詞 , 아부 아흐마드 알 - 미흐라자니 .Abo. AI:urad al- M뇨 如 , 아우피 al-'Aw fi , 자이드 븐 리파아 Za yd b. Rifa ·a 이다. <그들은 신성, 청렴, 진실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단체를 결성하 고 독자적으로 교리를 확립함으로써 신의 동의를 구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종교법이 무지에 의해 더럽혀지고 오류에 의해 불순해졌으 므로 신앙의 지혜와 탐구의 이득이라는 장점을 함께 가지고 있는 철학 이외에는 그것을 정화하고 순화시킬 방법이 없다고 주장하였 다. 그들은 또 그리스 철학과 아라비아의 종교를 결합시키면 완벽한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서 이론 및 실제의 모든 철학분야에 관해 印편의 서간문을 쓰고 독자적인 목록을 첨부 시켜 제목을 『청정 형제단의 서간문 Rasa' il Ikfwa n aJ.-5:13.B이라
15) 이는 <이크완 알-싸파>의 직역이지만, 아랍어의 관용법에 따르면, <청 정 의 형 제 akh al - $ af a> 는 Goldz ihe r, Mu J-arnm Stu dien , Pa rt I, p. 9 주석에서 보여 주듯이 단순히 <순수하거나 진실한 사람>을 의 미한다. 이 용어가 어떤 단체롤 뜻하는 것은 아니다.
16) [역주] 이는 철학, 신학, 형이상학, 우주론, 자연과학(식물학, 동물학 포함)분야의 백과사전적 지식을 포함한다.
하였다. 이 작품의 저자들은 익명으로 발행한 이 작품을 서적 상인 들에게 배부하고 일반인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책을 경건 한 구절이나 종교우화, 은유나 비유적 표현법으로 장식하였다 .>17 1
17) Ibn al- Q叫 Ta'r!k h al-l: luk ama(ed. by Lippert), p. 83, I. 17 이 하.
거의 모든 서간문들이 디에테리시Di e teri c i 1 8l 에 의해 독일어로 번 역되었다. 그는 그의 『 10 세기 아랍의 철학 Pl i losop li e der Amber im X Ja hrhunde rt』 1 91 에서 이 백과사전 전부를 요약한 바 있댜 여기서 <이크완>의 체계를 기술하려면 너무 많은 지면이 소요되므로, 이에 대해 훌륭히 기술하고 있는 스탠리 레인-풀 S tanl e y Lane-Poole 의 『어느 모스크에서의 연구 St udi es in a Mos que 』 (2 판, p. 176 이하)를 독자들은 참고하기 바란다. 최근 <청정 형제단>이 어느 면에서는 이스마일파의 선전운동과 관계가 있으며, 그들의 절충적 이상주의는 파띠마인들, 카르마쓰파, 암살단파 Assass in s 의 가장 고매한 가르침 을 나타낸다는 견해가 개진되었다 . 이같은 이론을 뒷받침해 주는 강 력한 증거는 단편적인 <서간문>과 더불어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서간문이 포함되어 있는 국립 도서관 B i b li ot h놉 ue Nat i onale 의 필사 본(드 슬란의 목록 No. 2303) 인 『종합J如끄. ‘a .o에 나오고 있댜 201 후자 는 印편의 서간문 중에서도 가징- 뛰어난 서간문이라고 하며 이스마 일파의 특성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그것이 진본임을 가정할 때 이를 발견한 카사노바 M P. Casanova2” 의 다음과 같은 결론에 공 감할수 있을 것이다.
18) [역주] Fri ed r ich Diet e r i ci(l 821-1903) : 독일의 동양학자 . 아랍어, 아 랍 문학, 특히 이슬람 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무타납비 시집』둥을 번 역·주해하였다
19) [역 주] 이 는 Makrokosmos(l876), M 恥 okosmos(1879) 의 두 권으로 되어 있다.
20) Noti ce sur un manuscr it de la secte des Assassin s , by P. Casa-nova in the Jou rnal Asia t iq u e for 1898, p. 151 이 하.
21) [역주] 프랑스 동양학자. 이집트 대학교 교수를 역임 (1925) 하고 주로 이슬람 시대의 이집트에 관심을 갖고 저술· 논문 둥을 발표하였다.
<청정 형제단>의 교리는 이스마일파의 비교(秘敎) 철학과 동일 < 이스마일파의 철학적 교의들이 청정파 수도사들의 ‘서간문’ 속에 전적으 로 내포되어 있다고 확언하면서 무엇보다 나는 진실함을 믿는다. 그리고 그 것은 ‘그 교의가 진지한 사람들에게 끼쳤던 비상한 매력 ZI ’ 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보편적인 행복을 확립하기 위해 어느날 나타날 것이 틀림없는 숨겨 진 이맘 al- imam al-mas tor에 대한 신념을 덧붙임으로써, 그 교의는 모든 이상주의적 교의들의, 메시아니즘과 플라토니즘의 융합을 실현하고 있었다. 이맘이 숨겨진 채로 있는 만큼, 매우 고상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집착게하는 신비의 어떤 풍취 또한 거기에 섞여 있었다. 여하튼 카르마쓰파와 암살단파 가 그들의 반대자들로부터 무신론과 방탕함을 비난받았을 때 그것은 지나 친 중상모략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 내가 앞에서 인용했던 이븐 타이미야 Ibn T aimiyy ah 의 법적 견해fetwa는 그들의 입문의 마지막 단계 al-bal 速 h al 一 akbar 가 창조카의 부정 자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찾아낸 『종합 dj命 ‘a 』 은, 모든 것이 지적하듯이 청정파 수도사들과 이스마일파의 앎의 마지막 단계이다;그같은 비난 속에 근거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교의 는 매우 순수하고, 매우 고상하며, 매우 단순해 보이기도 한다;나~ 그것은 회의론과 유물론에 절대적으로 대립되는 일종의 기계론적이고 미학적인 범 신론이라고 강조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계의 모든 부분들의 전반 적인 조화_—그런 조화는 미 자체이므로 창조자에 의해 의도된 조화이다 ―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나의 결론은 , 광신자들과 야심가들의 손에서 극악무도하고 암살단파라 는 그 역사적인 이름에 결부되는 불명예에 마땅한 행위들의 원천이 되어버 린-이론적으로 매우 순수하고 매우 고상한-한 교의의 예를 역사 속에서 하나 더 갖는다는 것일 것이다.> <진디끄 Zindiq> •• 무타질라파 외에 <진디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부류의 이 단자들이 있다. 골트치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231 ~초기의 박해는, 22) De Goeje , Memoir e sur Les Carmath e s, p. 172.
23) S~li b b. 'Ab d al-Q u ddas und das Zin d ikthu m wahrend der Re- gCioenrgu nregs s doef s OrC iehna tlai fle inst s ,a lv-oMl. a iih, dpi . i1n0 5 T이r a하n.s actio n s of the Ni nt h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 사상을 이슬람으로 교묘히 눈가림하려고 획 책한 사람들에게 가해진 것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때로는 어떠한 속임수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이슬람의 교의와 관행에 반하 는 이신교나 페르시아 또는 마니교도의 교리와 그것들과 연관된 의 식을 노골적으로 내세우기도 하였다 . 이와 같은 사람들이 ‘진디끄’라 불리었다. 이 용어는 성격상 미미한 정도의 차이가 있는 이단자들을 함축하므로 그것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우선 이슬람에 통 합된 고대 페르시아의 일족이 있다. 이들은 슈우비파와 같은 노선을 따르면서 페르시아 종교 사상과 전통의 부홍에 ‘민족적 관심’을 갖 는데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슬람 체제의 ‘아라비아적’ 성격에 역 행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특히 이슬람의 완고한 교리에 반대 하고 ‘실용적인 종교’를 거부하여 오직 도덕률만을 인정하는 자유 사상가들이 있다. 후자 가운데서 이슬람과는 무관하며 종국적으로 불교의 영향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금욕주의가 발달하였다.> <진디끄>에 대한 박해 공인된 신앙만을 강요하고자 했던 압바스 정권은 우마이야조에서 보다도 신앙의 자유가 더 없었다. 정교(正敎)와 이단 모두 금지되었 다. 마문이 신앙심 깊은 순니파 교도들을 괴롭혔는가 하면, 그의 직 계 후임자들은 <진디끄>를 심하게 비난하였다. 칼리파 마흐디는 이 들 신앙의 적들을 조직적으로 박해함으로써 이름을 떨쳤다. 그는 종 교 재판소장$al:ri b al- Zanadiq a24)( 혹은‘Aiif al- 葬떠diq a) 을 임명하여 이단자들을 찾아내고 추적게 하였다. 이단을 포기하도록 요구받고도 자신들의 신앙을 계속 고집할 경우 사형이나 책형에 처하였으며 그
24) Taban, iii , 522, I.
들의 서적을2 51 칼로 난도질하였다 한 마흐디에 이어 하디와 하룬 알 라쉬드도 그를 본받았다. 그러나 압바스 칼리파들 중에는 덜 엄한 칼리파도 있었다. 만쑤르의 의사인 카씨브Kha$i b 는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 < 진디끄>였으며, 7:1) 칼리파 마문의 재위시에는 우아함과 세 련의 표시로서 마니교의 견해 를 신봉하는 척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 다 . 28)
25) 흔히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된 마니교도들의 성서를 가리킨다 . Von Kremer, C ultu r ge sch St rei [z ag e , p. 39 참조. 26) Taban, iii, 499, 8 이 하 참조. '27) 같은 책 ,· i ii, 422, 19 이 하 . 28) 격언 <진디끄보다 더 멋진A?rafu min al-Zin diq> (Freyt ag, Arabum Proverbia , vol. i, p. 214) 참조.
밧샤르본부르드 위에서 기술한 < 잔다까 Zan daqa> 29) 를 대표하는 두 전형적 인물이 당대 시인 밧샤르 븐 부르드와 쌀리흐 븐 압드 알-끗두스$alill b. 'Ab d al- Qu ddus 이다. 밧샤르는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 그의 부친 부르드는 노예였지만 페르시아의 명문 후손으로서 밧샤르는 강렬한 민족 감정을 품고 페르시아의 피보호민인 <마왈리>들에 대 한 동정심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그들을 선동하여 아람 군주들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또한 그 의 성향은 이미 조로아스터교에 기울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반 교수는 이러한 주장을3 0 ) 뒷받침할 실제적인 증거는 없다는 견 해를 피력하였다. 다만 부르드가 바스라의 유명한 무슬림 신학자들 로 무타질라파를 일으킨 와씰 븐 아따 Wi 3$il b. 'Ata와 아므르 븐
29) [역주] <진디끄 zi n diq>의 아랍어 동명사 어형(복수는 zanadi qa ).
30) 이는 배반 교수의 지적대로 문장의 전후 관계 없이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시구 (A ghanI, iii, 24, I. II) 에 오로지 기초한다. <땅은 어둡고 불은 밝다. 또 불이 존재할 때부터 그것은 숭배되 었다.>
우바이드 ‘Amr b. 'Ubayd 등과 논쟁을 벌였다는 사실에서 그가 조 로아스터교나 마니교도적인 입장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와 쌀리흐 븐 압드 알-끗두스는 같은 해 (783 년) 칼리파 마흐디에 의해 처형되었다. 쌀리호 븐 압드 알근근두스 쌀리흐는 아람 부족인 아즈드족 태생이었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 는 그가 얼마 동안은 바스라에서, 나중에는 다마스쿠스에서 거리의 전도사로 활동했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 비록 전도사들 이 하나의 계급을 형성하면서 교파와 매우 가까웠고 롤라드 교도들 Lollards3 처럼 종교적 악폐를 비난하지는 않았어도 그의 공공연한 교리가 위험스러운 것으로 간주된 것은 그럴 법한 일이었다 . 321 그의 시에는 이단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지 않고 단지 도덕적이고 교훈적 인 특성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앞서 아부 알-아타히야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이슬람의 정통 교파는 <철학적 사고>와 실증적 불신앙을 연결지으려하는 경향이 있었다. 바로 이러한 편견에 쌀리흐는 희생 된 것 같다 . 그는 이신교도thanaWi, 죽 마니교도로 비난받았다. 친 히 그를 조사한 칼리파 마흐디는 처음에는 그를 풀어 주었다고 한 다. 그러나 그가 다음 시구의 작자라는 자백에 의해 시인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31) [역주] 14-15 세기의 위클리프 W y c liff e 파의 교도.
<타고난 성깔은 수염이 하얗도록 늙은 노인도 어쩔 수 없다. 컴컴한 묘지 속에 들어가 흙더미에 덮여 가려질 때까지는. 성깔을 부리지 않는 것도 잠시 뿐, 환자가 통중을 다시 느끼돗 이내 젊었을 때부터의 바보짓으로 돌아온다 .>33)
32) 이들 대중 전도사들 q u 病 as 에 관해서는 Goldz ihe r, M uhzmm. Stu dien , Pa rt II, p. 161 이하에 훌륭히 묘사되고 있다.
33) 이 시 의 아랍어 원문은 골트치 어 의 논저 , p. 122, 11, 6-7 에 소재 함 .
<진디끄>에 대한 아부 알-알라 알-마아리의 견해 그 자신 이슬람 교리에 대한 대담하고 경멸적인 비판가였던 아부 얄알라 알-마아리는 그의 저서 『용서의 서간문』에서文:진디끄>를 난해하고도 홍미롭게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의심 많은 청중의 눈을 속이기 위한 것이 분명하다. <진디끄>란 용어의 의미 범주가 넓다 는 것은 그가 이 용어에 꾸라이쉬의 이교도 족장들, 시인들인 디빌 Di 'bil, 아부 누와스, 밧샤르, 쌀리흐 븐 압드 알급근두스와 압바스조 룰 세운 아부 무슬림 , 페르시아의 반도(板徒)들인 바박B abak 과 마즈 야르 M 泣y값, 바박을 진압한 후 칼리파 무타씹에 의해 굶어 죽은 아 프쉰 Afs hin, 카르마쓰파의 지도자 잔나비 al-Ja n nabI, 『다미그 Dan 끄.g正라는 저술에서 꾸란의 <경이적>인 문체를 의심하려고 한 이븐 알-라완디 Ibn al-Rawand i, 수피주의의 순교자인 후사인 븐 만 쑤르 알-할라즈 둥을 포함시킨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 이들 대 부분이 아부 알-알라의 <진디끄>에 대한 정의 <그들은 예언자나 성서를 인정하지 않는다> 속에 포함됨을 누구든 인정할 수 있다. 죽 자히즈 (868 년 사망)가 어떤 방랑 수도승들3 4 ) 을 지칭하는 데 사용 한 <진디끄>란 명칭은 처음에는 마니교와 그 신자들을 가리킨 것 으로 보이며 배반 교수의 지적대로 마니교의 성직 계급 중에서 특 권 계급을 형성한 <잣디끄 za ddiq>에서 파생한 것이 분명하다 .35)
34) 바론 로젠 Baron V. Rosen 이 Zapi sk i, vol. vi, p. 337 에 인용하였고 필자가 Translati on s from Easte r n Poetr y and Prose, p. 53 에 영어 로 번역한 · 『동물의 책 Ki tab al - J:Iay awan J 61] 서의 인용문을 참조. 아 마도 이들 수도승들은 불교 신자들이 아니라 마니교도였을 것이다.
35) Zad d.Iq는 <정의로운>을 의미하는 아람어이다. 아랍어에서의 어원상 동의어는 s i ddIq 인데 그 의미는 전혀 다른 의미인 <진실한>이다 . Za- dd iq는 이슬람 아전 페르시아인들이 사용하던 페르시아어의 Zandlk 어 형으로 변화하였으며 Z i ndi q는 Zandlk 의 아랍어화된 형태이다. 이같 은 고찰의 일부는 베반 교수의 덕택으로 가능하였다. Z i n d.Iq의 파생 과 의미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마니교의 교리가 명료하게 상술
되 어 있는 브라운 교수의 Lit era ry Hi st o r y of Persia ( vol. i, p. 159 이하)에 소재한다.
정통교파의 반발 II. 이성주의가 <국교>로 공인받던 시대는 847 년 무타와킬의 즉 위와 함께 끝나게 되었다 . 터키인 근위병들 덕분에 권좌에 오른 새 칼리파가 스스로 인기를 얻는 데는 대중들의 신앙을 지켜 주는 공 인된 수호자로서 앞장 서는 일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그는 요컨대 엄밀한 의미에서 순니파의 정통 교파에서 벗어나는 유태교 도 기독교도, 무타질라파 교도, 쉬아파 교도, 수피주의자 모두를 박 해하였다. 무타질라파가 이단자를 탄압할 때 가장 앞장 섰던 대신 이븐 아비 두아드 Ibn Abi Du' 타는 지위에서 물러나고 그의 재산 대부분이 몰수되었다. 바그다드에서는 아흐마드 븐 한발의 추종자들 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시민들에게 폭행을 가하고 겁을 주었다 .36) 이들의 광기는 923 년 사망한 유명한 신학자이자 역사가인 따바리의 장례를 제대로 치를 수 없을 만큼 극에 달해 있었다.' 마침내 935 년 칼리파 라디 R i야는 그들을 비난하는 포고문을 다음과 같이 공표 하였다.
36) Ibn al-At hir, vol. vili, p. 229 이하(히즈라 323=934-935 년).
37) 같은 책, p. 98.
<그대들은 그대들의 추하고 못 생긴 얼굴들이 만물의 영장이신 주님과 닮았으며 그대들의 천한 모습이 그 분과 비슷하다고 주장한 다. 신의 손, 손가락, 발, 금으로 만든 신, 곱슬한 머리카락에 대해 얘기하며 그 분의 승천과 지상에 내려오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칼 리파(신자들의 지도자)는 굳게 맹세하노니 만일 그대들이 그 혐오스 러운 버릇과 잘못된 교의를 포기하지 않으면 그대들 목에 칼이 들 어가고 그대들 집에 불을 지르겠노라 .>38)
38) 같은 책, p. 230 이 하.
아부 알-하산 알-아쉬아리 Ab0 al_Hasan a1-Ash‘ar i 극단적인 한발리파I:Ianbalites의 조잡한 신인동형론과 다른 한편 으로 진보적 무타질라파(여전히 하나의 세력으로 간주됨)의 순수한 이 성주의를 피하면서 전통과 이성론을 양립시킬 제도를 이룩할 시기 가 무르익었다. 말하자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필요에 따라 서서히 은밀하게 발생하는 지적 운동이나 종교 운동이 갑자기 독특한 해석 자를 만나게 되어 이때부터 그의 이름이 항상 따라다니게 된다는 것은 흔히 겪어 아는 일이다. 이 경우에 해당되는 장본인이 바로 아 부 알_하산 알-아쉬아리였다. 그는 예멘계의 대대로 정통 교파인 명 문 출신이었다. 그의 조상 중에서 아부 무사 알-아쉬아리 Abo. M 뇨 a al-Ash‘arI 는 씨핀 전투 후3 91 알리와 무아위야 사이를 중재하면서 다소 불명예스러운 역할을 수행하였다. 많은 학자와 지식인을 배출 한 바스라에서 873_ITT4 년 사이에 태어난 아부 알-하산은 일찍이 조 상들의 신앙을 버리고 자유 사상파에 가입하였다. 40 세까지 당시 무 타질라파의 총수인 줍바이 al- Ju b 넒' i (915 년 사망)의 총애를 받던 제 자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그는 신이 과연 자신의 피조물을 위해 항 상 최선 興 l 曲올 다하는 지에 관해 스승과 논쟁을 벌렸고 이 때문에 그와 절연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이븐 칼리칸에 의해 다음과 같 이 기술되고 있다(드 슬란의 번역서, 2 권, p. fffi 이하). 삼형제 이야기 아쉬아리는 줍바이에게 세 형제의 경우를 문제로 제기하였다. 삼형제 중 첫째는 진실된 신자로 덕망 있고 신앙심이 깊었으며, 둘째는 불신자로서 방 탕하며 무뢰한이고 셋째는 유아였다. 아쉬아리는 그들이 모두 죽은 후에 어 떻게 되었는지가 궁금하였다. 이에 대해 줍바이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덕망 있는 형은 천국에서 높은 자리에 있고 불신자는 지옥 한가운데 있으 며 어린 아이는 구원을 받은 이들 중에 끼여 있지 .>40) 아쉬아리는 <그렇다 39) 본서 p. 276 참조.
40) 죽 그는 지옥으로부터는 구원받았지만 천국에서는 쫓겨났다 .
면 어린 아이가 덕 있는 형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 오르려 한다면 그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 하고 물 었다. < 아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듣 게 될 것이다. ‘너의 형은 신에 대한 지극한 순종을 수없이 실천함으로써 그 자리에 올랐지만 너는 내세울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 고 줍바이가 답 하였다 . 아쉬아리가 다시 말했다 . < 그럼 그 아이가 ‘그것은 제 잘못이 아니 에요 저 를 좀더 오래 살게 해주지도 않고 저의 순종심을 입증할 만한 수단 도 주지 않으셨으니까요 ’ 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 . < 그렇다면 전 능하신 그 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걸세 . ‘내가 너 를 오래 살도록 해주었다면 너는 내 말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고 지옥에 떨어지는 가혹한 벌을 받았으리라. 그러므로 결국 너에게 유리하게 해준 셈이다' >. 아쉬아리 가 말했다. <그러면 불신자인 형제가 말하기 를 ‘우주의 신이여, 그에게 무 슨 일이 벌어질지롤 아셨으므로 저에게도 무슨 일이 닥칠지를 아셨을 것입 니다. 그러면, 왜 그에게만 유리하게 해주시고 저에게는 유리하게 해주지 않으셨습니까?' 라고 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 줍바이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아쉬아리, 정통 교파로 귀의 그 후 얼마 안 있어 아쉬아리는 공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 였다. 어느 금요일 날, 바스라의 대 모스크에서 강의하던중 의자에 앉아 있다가(그의 전기작가의 진술에 따르면) 소리쳤다. <나를 아는 자는 내가 누군지 안다. 나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내가 얘기해 주마. 나는 알리 븐 이스마일 알-아쉬아리 ‘AlI b. I 頭료녑 al-Ash ‘aii로서 그 동안 줄곧 꾸란이 창조된 것이며 인간의 눈으로는 신을 볼 수 없고 우리들 스스로가 악을 행하는 장본이들이라고 , 주장해 왔다. 이제 나는 진실로 돌아왔다• 나는 위와 같은 주장을 포기하고 무타질라파를 논박하고 그들의 파렴치한 행위와 비열함을 폭로할 것을 맹세한다. >4 1)
41) Ibn Kha llikan , ed. by Wt ist e nfeld , No. 440 ; 드 슬란의 번 역 서 , vol.
ii, p. 228.
이 일화는 역사적 가치가 거의 없다. 다만 아쉬아리가 무타질라파 의 모든 교리를 습득하고 또 그들의 논리에 정통하게 된 다음에는 무타질라파가 그의 손에 쥐어 준 무기를 오히려 그들을 향해 힘차 게 휘둘렀다는 사실을 보여 줄 따름이다. 사변 신학 창시자로서의 아쉬아리 자유 의지라는 명제에 대한 그의 신조는 그가 정통 교파를 지지 케하는 데 버팀목이 된 <칼람 kal 如戶 42l 의 체계를 보여 주는 한 좋 은 예가 될 것이다 .'13) 다른 경우에서처럼 여기서도 아쉬아리는 두 극단사이에서 중도 Iredio tutiss ir nus 를 택하였다. 초기 무슬림 교회의 견해에 따르면-~이 견해는 꾸란과 사도 전승의 충분한 근거로 뒷받침된다_모든 것은 미리 정해져서 태초부터 하늘에 보존된 명판(銘板) a1- 냐 wb al- Mabfui섞)에 기록되어 있으므 로 인간은 운명에 의해 정해져 있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었다. 반면에 무타질라파는 신이 악의 창조자라는 것을 부인하고 인
42) [역주] 아랍어로
43) 필자에게 낯익은 아쉬아리의 교리에 관한 가장 명확한 기술이 슈핏 타 발행의 Zur Gesch ich te Abu al 一 Hasan al...:Ashari(L e ip zig, l'o /6) , p. 133, l. 9 이하에 포함되어 있다;독일어판, p. 95 이하. 맥도널드 D. B역.하 M였ac다d.on ald 가 그의 Muslim Theolog y, p. 293 이하에서 영어로 번
44) [역주] 꾸란 8.5장 21-22 절 <그것은 보존된 명판에 적혀 있다>에서 <보존된 명판>은 형이상학적 실재를 나타내는 용어가 되었다. 이에 대해 형이상학적 형태를 나타내는 이슬람의 용어는 그 명판에 적는 <펜 al- q alarn> 이다 . 이로부터 아랍어에서 운명에 의해 정해진 것임을 나타내는 <쓰여진 mak ta b> 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CEI, al-Lawb al- Ma }Jfiiz;, p. 243 참조.
간의 행위는 자유롭다고 주장했댜 아쉬아리는 모든 행위가 신에 의 해 창조되고 예정된 것이지만 이미 창조된 행위를 획득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하위의 능력 비록 그것이 행위 자체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지만 이 인간에게 있다고 단언하였다 . 따 라서 인간의 힘은 이러한 획득 kasb 의 과정에 국한된 것이었다. 꾸 란에서의 신인 동형론적 구절에 관해 아쉬아리는 < 자비로운 그 분 께서 그의 권좌에 앉으셨도다 > , < 그 분의 양손이 펼쳐졌다 > 같은 표현들은 거기에서 <어떻게?>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b il a kay fa) 명백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규칙을 제시하였다. 아쉬아리 의 가설에 관해, 슈핏타 S pitta는 이슬람을 위협하고 있던 45 1 의 래사상 에 대해 아라비아의 민족 정신이 반발에 성공한 경우라고 보았는데 이는 대부분의 아쉬아리파 주요 핵심인물들이 페르시아인이었다는 사실과는 모순되는 주장이다 .4 6 )
45) Sp itta, 앞의 책, p. 7 이하 . [역주] W . S pitta : 독일의 동양학자 (1 8.53 -1883).
46) Schrein e r, Zur Geschi ch t e des Ashari ten th u ms in the Proceedin g s tohf e t htei r aE gi e g hat hp a Irn t te r nati on al Cong res s of Or ien ta list s ( 1889), p. 5 of
폰 크레머가 <아쉬아리의 승리는 성직자의 개가였을 뿐이다> 라고 말해 좀더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였으며 4 71 또한 쉬라이너 Schrein e r481 의 말대로 <그것은 사려 없는 신앙에 대한 사려 깊은 숙고( 熟考 )의 승리>였다. 그러나 이 승리는 곧바로 혹은 쉽게 얻어진 것은 아니 었다우 많은 정통 교파인들은 이전의 이성주의 못지 않게 새로운 사 변 신학을 증오하였다. 알프 아르슬란의 대신 아미드 알-물크 알-쿤 두리 ‘Amid al - M 때{ al-Kund Uii가 그의 상관의 허 락을 얻어 쿠라 산의 설교단에서 라피다파를 욕하면서 아쉬아리파도 똑같이 저주한
47) ZDMG, vol. 31, p. 167.
48) [역주] M. Schre i ner: 독일의 동양학자 (1863-19 '2:7).
49) 이후의 자세한 고찰에 관해서는 Goldzih e r in ZDMG, vol. 41, p. 63 이하를 참조.
사실과 그로 인해 아쉬아리파의 유명한 학자들인 아부 알-까심 알 꾸샤이 리 Abu al_Q asim al_ Qu shay rI와 이 맘 알-하라마인 아부 알 -마알리 알-주와이니 Imam al-J:I ararnayn Abu al-Ma 넓i al_Ju w a- 頭가 나라를 떠나야 했다는 사실을 히즈라 4E6 년 =1033-1004 년에 이븐 알_아씨르의 저서 『카밀』에서 알게 되는 것도 놀랍지 않다. 위대한 니잠 알一물크는 아쉬아리파를 위해 애를 썼으며 1®7 년 바 그다드에 세운 니자미야 학원은 아쉬아리파의 신학 체계를 보급시 키기 위해 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다 자신의 특출한 재능을 부각시키면서 최종적인 형태를 완성하고 정통 이슬람의 보편적 교 리로서 확립한 사람은 아부 하미드 알_가잘리 (lCIB-1111 년)였다. 이 미 그의 표면적인 인생 행로는 대략 기술하였거니와 그가 4 년 동안 (lOO1-1 따년) 바그다드의 니자미야 학원에서 강의했다는 사실만 상 기하면 된다 .501 이후 수피로서 속세를 떠나 그의 저술 『오류로부터 의 구원자』에서 기술한 바 있는 오랜 정신적 방황을 차분히 운좋게 끝내었다 .511 이 작품이 보기 드물게 심리학적인 홍미를 불러일으키 며, 곧 알게 되겠지만 가잘리의 종교적 진실에 대한 탐구가 장차 이 슬람 사상사에 심오하고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에 독자들 은 이 작품이 어떤 것인지를 대강 이해해 둘 필요가 있다. 그의 저 술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가잘리의 자서전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신의 이름으로, 누구든지 필기나 구두로 담화를 여는 사람을 찬양하므로써 신에게 찬미있을지라! 선택된 자, 예언자, 신의 사자이신 무함마드와 그의 가족, 우리를 오류로부터 이끌어 주시는 그의 교 50) 본서 p. 461 참조.
51) 필자는 A. H. 1309 년의 카이로 판을 사용하였다. 바비에 드 메이나 르의 불어 번역은 Jou rnal Asia tiqu e (1877 년 1 월), pp. 9-93 에 발표 되었다.
우들에게 축복있으라! 계속해 말하자면, 종교에 있어서의 나의 형제여, 학문 의 숨겨진 의미와 궁극적인 목표 , 각기 다른 교리의 은밀한 해악, 그것의 깊숙이 자리잡은 심원함을 설명해 달라고 그대는 나에게 부탁했소. 다양한 방법과 노선을 가진 분파들이 혼란한 가운데서 진리 를 회복하는 데 내가 참고 견딘 모든 것을 기술해 주고 고도의 판별력으로 맹목적인 신앙의 구 렁텅이에서 감히 어떻게 일어설 수 있는지 를 얘기해 주기 를 그대는 바라고 있소. 우선 맨먼저 이슬람의 사변적 신학에서 어떤 이득을 봤는지 알고 싶 어하고 두번째는 진리는 이맘의 권위에 복종·함으로써만이 도달할 수 있다 고 생각하는 < 타울리미파 Ta' liinites(교의 신봉자) >꼬) 의 방법에서 내가 무 엇을 도용했는지 를 알고 싶어 하오. 세번째로 내가 철학체계 를 일축해 버리 는 이유를 알고 싶어 하오 . 마지막으로 내가 왜 수피주의의 교의 를 받아들 였는지 알고 싶어 하오뺄 요컨대, 인간의 종교관에 대한 나의 집요한 연구에 서 내가 알게 된 본질적 진리 를 그대에게도 전해 주기 를 그대는 갈망하고 있소.>
52) 이들은 이스마일파이거나(카르마쓰파와 암살단파를 포함한) 바띠니 파 Ba (:ini s 이다. [역주] 이파는 은밀하고 영지적g nos ti c 교의를 약속했 기 때문에 타울리미파라 불렸다 . 가잘리는 바로 이 타올리미파와 바 띠니야파의 이름하에 암살단파를 공격하였다. CEI, Ta'lim .iyya, p. 394 참조.
브라운 교수가 번역한 이 홍미로운 구절에서 가잘리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어떻게 강렬한 지식욕에 사로잡혔는지를 얘기하고 있다 . 그러한 지식에 대한 갈망에서 가잘리는 온갖 형태의 종교와 철학을 연구하고 만나는 이마다 그들이 믿고 있는 종교의 특성과 의미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5.1) 그러나 그가 진실과 오류를 구별하고 자 했을 때는 확실한 시험 방법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판단을 중거 로서 신뢰할 수 없었다 . 눈으로 그림자를 보고도 그것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별을 보고도 금전 한 님만큼도 크지 않다고 여긴다. 판단력이 이처럼 기만적이라면 마음도 마찬가지가
53) 『페르시아 문학사』, vol. ii, p. 295 이하.
아닐까? 아마도 우리의 인생은 환상으로 가득찬 꿈과 같아서 무아 경의 순간이나 죽을 때에야 비로소 깨닫게 될 때까지는 그것들을 현실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 <두 달간, 공공연하게 그러지는 않았 지만 나는 정말로 회의론자였다>고 가잘리는 말한다. 그때 신은 그 에게 정신적인 빛을 줌으로써 그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건전한 사고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이같은 능력이 자신을 진리로 인도해야 만 한다고 결심했다. 맹목적인 신앙이란 일단 상실하면 다시는 돌아 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가잘리는 진리 탐구에 전념한 네 부 류의 사람들, 죽 이슬람 신학자들, 이스마일파(바띠니야~t:miyy a),54) 철학자들, 수피들을 중심으로 신앙의 토대를 고찰하기 시작했다. 오 랫동안, 그는 전혀 부정적인 결과에 만족해야 했다. 그는 사변 신학 이 이단을 깨끗하게 제거할 수 있음을 인정했지만 스스로의 병을 치유할 수는 없었다. 철학자들-예컨대 유물론자DahriyyOn, 자 연주의자 TabI' iyyun, 유신론자 Il ahiyyun 동 ___ 은 모두 <신심이 없으며 불경한 것으로 낙인 찍혔다>. 그가 철학파를· 논할 때도 종 종 그러하였듯이 여기서도 가잘리의 종교적 본능이 튀어나온다. 허 버트 스펜서 Herbe rt S~ncer55) 가 루르드 Lourdes55) 에 있는 것은 상 상할 수도 없듯이 가잘리가 순수 이성의 성지에서 경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다음으로 그는, 진리를 체험하고 그 진리의 유일한 원천은 무류(無雲)의 이맘이라고 주장하는 타올리미파나 비 교자(秘敎者)들인 바띠니파에게로 손을 뻗쳤다. 그러나 이들 교파의 사람들과 바싹 붙어 보니 그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것이 없으며 그들의 신비한 이맘이 공중으로 사라져버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수피주의는 가잘리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는 주의 깊게
54) [역주] 꾸란을 자의적(字義的, z ahir)으로 해석하는 칙해(直解)주의보 다는 꾸란의 구절에 숨겨진 내밀한 (ba tin) 의미를 강조하는 이스마일 파에 붙여진 이름이다. EI 라 Batin iyya, p. 1098.
5.5) [역주] 영국의 철학자(1 820-1903).
56) [역주] 프랑스의 서남부 도시.
신비주의자들의 저술을 연구하면서 그것을 읽어감에 따라 이제 정 도에 들어섰음이 분명해졌다. 그는 수피주의의 고차원적인 단계는 연구로 깨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경험, 죽 무아경과 도덕 적 변화에 의해 깨쳐야 한다고 보았다. 자신과의 고통스러운 싸움 끝에 모든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오직 신을 위해서만 살아가기로 그는 결심했다 . 히즈라 坐했년 두 알-까다 Dhu al- Qa 'da (leffi년 11 월)월에 바그다드를 떠난 그는 시리아로 정처 없이 떠나 기도와 찬 양, 명상의 수피주의 계율 속에서 그의 영혼이 갈구하던 평화를 마 침내 찾을수 있었다. 지금까지 쓰여진 가잘리의 전기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완벽하게 그의 생애를 그린 던칸 B. 맥도널드 Duncan B. Macclonal cf)는 그의 작품과 이슬람에 미친 영향을 네 가지로 요약하였다 . 58)
57) [역주] Duncan Black Macdonald(l863- 19 43) : 영국 태생으로 미국에 서 거주한 동양학자. 주요 저서로 『 이슬람의 제 양상 Aspe cts of Isl- am 』(1 911) 둥이 있으며 < 미국 동양학회지 Jou rnal of Ameri ca n Or i- enta l Soc i e ty ~ 에 『가잘리의 생애』를 발표하였다 (1899) .
58)S oTchiee t y L, ivf eo l.o f x axl -(G18f 9n9z)z, a pli. i1n2 2t h이e 하J.o u rnal of the Ameri az n Or ien ta l
첫째, 그는 사람들이 신학적 교의를 현학적으로만 논하지 않고 꾸 란과 전승을 연구하고 주석을 다는 등 직접 그것들과 부닥치도록 하였다. 둘째, 그의 설교와 도덕적 훈계에서 하느님에 대한 경의심의 요소 가 재도입되었다. 셋째, 수피주의가 이슬람 교파 내에서 확고한 위치에 달하게 된 것은 가잘리의 영향력에 의해서다. 넷째, 그는 철학과 신학을 보통 사람들도 접할 수 있게 하였다. 가잘리의 작품과 영향 맥도날드는 다음과 같이 가잘리의 작품과 영향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알
-가잘리의 작품에 관한 이들 네 가지 관점 중에서 첫번째와 세번째가 가장 중요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이슬람을 근본적이고 역사적인 사 실로 되돌려 놓고 감정적인 종교 생활이 이슬람 체제 안에 들어설 자리를 마련해 줌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네 가지 관점 어느 것에서도 그는 주창자적인 입장은 아니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는 새로운 길을 개척 한 학자가 아니라 강렬한 개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이미 사람들이 밟고 다 닌 길에 들어선 것이며 그것을 큰길로 만들었을 뿐이다. 여기서 그에 대한 특 성이 드러난다. 다른 사람들은 좀더 날카로운 논리가들이거나 보다 박식 한 신학자들이고 재주가 더 뛰어난 성인들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가잘리는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종교적 현실을 강력히 의식한 사람이었다. 그 리하여 한때 전투적이고 침착하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편협되고 강렬해진 그의 개성은 거침없이 발휘되었다. 이로써 이슬람교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 들게 되었다.> 압바스 시대의 수피주의 III. 지금까지 이슬람의 신비주의 역사를 그것이 기원한 1 세기의 금 욕주의 운동으로부터 이슬람 영향권을 벗어나-수피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이 예언자의 진정한 추종자라고 끊임없이 주장하지만――_예 언자로서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이상야릇한 길로 들어서기 시작하 는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이제 고찰해야 할 견신론적(見 神論的)이고 명상적인 수피주의가 앞 장에서 기술된 고대 금욕주의 와 정적(靜寂)주의가 발전한 것뿐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다. 그들 사이의 차이점은 본질적인 것이며 폰 크레머의 주장대로5 9) 부분적으로는 외부로부터의 비이슬람적인 요인이 끼어든 탓일 것이 다 . 이 새로운 요소의 특성에 대하여는 몇 가지 상충되는 이론들이 있는데 브라운 교수가 그의 『페르시아 문학사』 (1 권, p. 418 이하)에서 명쾌하고도 충분히 상술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길게 논할 필요가 59) Herrschende Ideen, p. 67.
없겠다. 이 이론들의 개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a) 수피주의는 인도 철학 특히 베단타 Vedan ta 철학6 0) 에서 영감 올받았다.
60) [역주] 주로 브라만 Brahman 과 아트만 A t man 의 동체성(同體性)에 관 한 우파니샤드 U pani shad 의 교리를 다루며, 800 년경 철학자 샨카라 Sha nkara 에 의해 전성기에 달했던 인도 철학의 주류.
(b) 수피주의의 가장 특징적인 사싱은· 페르시아에 기원한다 . (c) 이 사상은 신플러톤주의에서 파생하였다 . 상기 이론들은 각기 어느 정도의 진실을 내포한다고 보는데 다음 에서는 어느 이론에 대해 찬반형식으로 논하는 대신 주어진 자료의 범위 내에서 수피주의 교리의 역사적 발달을 개관해 보겠다 . 이것만 이 그 기원에 대한 명확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라는 유일한 방법일 것 같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신비주의는 비록 그 특유의 환경에 의해서나 지지를 얻기 위해 집착하게 되는 실증 종교에 의해 제한을 받더라도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것이다. 따 라서 관계가 적거나 또는 전혀 관계가 없는 제도들이 아주 비슷하 고 언어 표현상의 많은 특징들이 일치하기까지 함을 알 수 있다. 이 러한 유사점은 역사적 배경에 기초한 증거로서 확인되지 않는다면 전혀 입증될 수 없는 것이다. 수피주의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이 이 원칙을 무시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혼란이 지배하였다. 올바른 방 향으로의 첫번째 조치는 초기 수피주의자들이 남긴 말을 연대기적 으로 검토하여 귀중한 결과를 추론한 아달베르트 메륵스 Adal bert Merx6” 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는 그의 연구를 아부 술라이 만 알-다라니 Abu Sulayr nan al- Darani (830 년 사망) 이후로까지는 진척시키지 않고 그의 관심을 거의 전적으로 교의에만 한정시켰는
61) ]dee und Grundlin i e n ein e r allge mein e r Geschi ch t e der My s ti k, 이는 1892 년 11 월 22 일 행한 학술강연이며 1893 년에 하이델베르크 He i delber g에서 출판됨 . [역주] Merx, Adalbert (18 38-1909) : 독일의 프로 테스탄트 신학자이자 동양학자.
데 본 필자의 견해로는 이에 대한 연구는 그 교리를 강의한 사람들 의 생활, 성격, 민족성과 관련지어 연구되어야 한다고 본다 . 62l 다른 모든 종교에서와 같이 이슬람에서의 신비주의의 기원과 성장은 외 부 환경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일반적인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였 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62) 다음의 개요는 필자의 논문, An Hist o r i ca l Enq uiry concern ing the Or igin and Develop m ent of Sa fiisr r i( ]RAS, Ap ril, 1906, p. 303 이 하) 에 근거한다.
예컨대 우마이야 시대의 정치적 혼란, 초기 압바스 시대의 회의적 경향, 특히 무슬림 신학의 무미건조한 형식주의는 정적주의, 영적 권위, 감정적 신앙 쪽으로 반동을 유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 피주의는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자극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지만 (이는 너무나 명약관화한 문제이므로 논급할 필요가 없다) 이제 언급하 려는 것의 영향력이 대체로 현재의 수피주의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깊은 영향을 끼쳤으므로 수피주의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는 그것 들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마루프 알-카르키 Ma'ro t al-Karkh i (815 년 사망) 8 세기말 경, 새로운 사상의 영향력이 푸다일 븐 이야드와 발크의 샤끼끄와 동시대인인 마루프 알-카르키가 행한 발언 중에서 발견된 댜 그는 메소포타미아의 대 도시중 하나인 와시뜨 Was it 근방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친의 이름인 피루즈 Fl liiZ 혹은 피루잔 Fr ro.zan에 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는 페르시아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마루 프는 쉬아파 이맘 알리 븐 무사 알-리다 ‘AlI b. MU 책 al- Ri也의 피보호민으로서 그의 면전에서 이슬람 신앙 고백을 하였다. 그는 기 독교도로서 자랐는데(이것이 정설이다) 어쩌면 사비교도였는지도 모 른다. 하룬 알-라쉬드의 재위 동안 바그다드의 카르크 구역에서 거 주한 그는 덕망으로 평판이 자자하였다. 그리하여 바그다드의 그의
묘소는 지금까지도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는 신에게 심취된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이 측면에서 그보다 나중에 온 많은 사람들과 는 비교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피주의의 금욕운 동과 반대되는 신비주의의 수장(首長)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수피주 의를 <신의 실재에 대한 이해와 인간적 소유욕의 포기 >63) 라고 정의 하였다. 여기에 그가 남간 명언을 옮겨 본다
63) 필자의 지식으로는 이것이 수피주의에 관한 최고(最古)의 정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이 내려 주시는 선물이며 그 분의 은총으로부터 온다 . >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성인들은 세 가지로 표시가 난다. 그들은 하 느님 생각뿐이며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며 하느님과만 거래한다.> <영적 신비를 인식하는 자 ‘arif에게는 축복이 없지만 그 자신은 더없 이 행복하다. > <신에게 기구하는 것이 있다면, 나의 이름을· 걸어 그 분에게 맹세하라.> 제자인 사리 알-사까띠 San al-S aq a p에게 말한 마지막 구절에서 마루프는 스스로를 신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였음이 명백하다. 아부 술라이만 알-다라니(었)년 사망) 수피 위인전에서 마루프 다음의 위인인 아부 술라이만 (830 년 사 망) 역시 와시뜨 태생이었지만 그 후 시리아로 이주하여 다라야 Da ra y a( 다마스쿠스 근방)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다라니 al - Darani로 불 린다 . 그는 영지( 靈智 )주의 ma' rifa 를 발전시켰다. 유럽 신비주의가 들의 언어-illl077imti o, ocul,us cordis , &c. — 一이 )에 익숙한 사 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64) [역주] 여기서의 라틴어 단어들은 각각 계몽, 눈, 심장을 뜻한다.
<口璋속에 내세의 일에만 항상 몰두케 해주는 빛이 자리잡고 있는 사 람 외에는 이 세상의 욕망을 절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 > <영지( 銀 智)를 지닌 자 죽, 영적 신비를 인식하는 자의 영적 눈이 열 리면 그의 육체의 눈은 닫힌다. 그들에게는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영지가 가시적 형태룰 취한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두 그 것의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선함 , 우아함에 사족을 못쓸 것이다. 거기 서 나오는 광채에 눌려 모든 것은 빛을 잃고 어둠에 쌓일 것이다 .>65 1 < 영지는 말보다는 침묵에 더 가깝다.>
65) 이처럼 진리를 미(美)로서 인식하는 데 있어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알-눈 알-미쓰리 DhO al-Non al- Mi$ri(由)년 사망) 이제 수피주의자들 스스로 그들 교의의 창시자로 생각하고 있는 두 알 - 눈 알-미쓰리에 이르게 된다 .66 ) 어쨌든 그가 수피주의의 교의 를 영구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다는 것은 앗따르 ‘At tar의 『성인 회고록』과 그와 비슷한 류의 다른 저술 에서 전해지고 있는 그의 명언들에서 충분히 입증되는 사실이다•fj/) 그가 꽤 자세히 디루고 있는 영지 이론은 그의 가설의 핵심인 것이 분명하다 . 또 그는 신에 대한 진실한 지식은 오직 무아경 waj d 을 통 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교의를 도입한 것 같다. <신을 가장 잘 아 는 사람은 그 분에게 가장 정신이 팔린 사람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디오니시우스Di ony si us68) 처럼 그는 신에 관한 어떠한 실중적인 진
66) 자미Jami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N여 다沮t al-Uns,ed.by Nassau Lees, p. 36) : <그는 이 교파의 우두머 리 이 다: 그들 모두가 그의 후손 이며 친척관계이다 . >
67) 앗따르 ‘ A ttar의 Tadhkir a t al-Awl iya, ed. by Ni ch olson, Pa rt I , p. 114 ; Jami's N여 야 a t, p. 35 ; Ibn Kha llikan, 드 슬란의 번 역 서 , vol. i, p. 291 참조.
68) [역주] p, 520 참조.
술도 언급하기를 거부했다.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신은 그와는 정반대이댜> 그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세속에 노출되서는 안 되 는 신성한 신비로서 간주하였다. 이 모든 것이 바로 후기 수피주의 의 본질이다. 따라서 두 알-눈의 실제 성격과 그가 받은 영향을 확 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음에서 그의 생애에 대해 간략히 기술 해 보겠는데 좀더 상세한 내용은 위에서 언급한 저술을 참고하도록 한다. 그의 이름은 아부 알-파이드 싸우반 븐 이브라힘 Abu al-Fayc j Thawban b. Ib rahim이며 별명은 그가 행한 기적을 지칭하는 두 알 -눈 Dhu al-Nun( 커다란 물고기의 주인)이었다. 그의 부친은 상 이집 트의 누바아 Nubi a 또는 이크밈 Ikhmim 태생이었다. 이븐 칼리칸은 두 알 - 눈이야말로 학식, 기도, 신과의 영적 교섭 }:ial, 문학 adab 에 대 한 박식함에 있어 <당대의 독보적 존재>이며, 또한 철학자區畑正료 서 아랍어를 우아하게 말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 그와 함께 살고 있 던 이집트 사람들은 그롤 <진디끄>로 여겼으며 그는 이러한 비난 을 해명하도록 바그다드로 소환되었으나 사~: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피흐리스트』에서는 <연금술에 대해 논술한 철학자들> 중에 포함 되어 있으며 이븐 알-끼프띠 Ibn al- Qift:i는 유명한 신비학자 자비르 븐 하이 얀 Jab ir b. I:Jayy an 과 같은 항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는 페 허가 된 이집트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마스우디에 따르면 )691 잃어버린 고고학의 제 학문의 열쇠가 될 것으로 사료되는 신비스러운 그림들 울 해독하려고 비문을 열심히 조사하였다. 그는 또한 의학에도 잠깐 손을 대어 파라켈수스 Paracelsus70 ) 처럼 연금술과 마법을 결합시켰 다. 그러면 이러한 사실들이 수피주의의 견신론적 기원을 어떻게 해 명하고 있는지롤 살펴보도록 하자. 그것은 인도나 페르시아, 혹은 69) Mur 떠 al-Din /rib, vol. ii , p. 401 이 하. 70) [역주] 스위스의 의사• 연금술사 (1493?-1541).
그리스에서 이집트로 온 것일까? 견신론적 수피주의의 기원 견신론적 수피주의가 발생한 시대와 장소, 환경을 고려하고 추후 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인물의 성격에 유의한다면 그것이 대체로 그리스적 사색의 산물이라고 확단할 수 있겠다. 마루 프 알-카르키, 아부 술라이만 알-다라니, 두 알-눈 알-미쓰리 이들 세 명 모두 칼리파 하룬 알-라쉬드의 즉위부터 무타와킬의 시대까 지 (786-861) 활동하였던 수피들이었다. 이 75 년 동안 헬레니즘 문화 의 조류가 쉬지 않고 이슬람 세계로 유입되었다. 그리스의 철학자, 의사, 과학자들의 수많은 저술들이 번역되고 활발히 연구되었다. 이 와 같이 그리스인들은 아랍인들의 스승이 되었으며 앞 장에서 지적 한 바와 같이 고대 그리스의 지혜는 이슬람 과학과 철학의 기저를 이루었다. 그 결과는 무타질라파의 이성주의와 <이크완 알카사파>의 체제에서 엿보인다. 그러나 무슬림들이 문학을 통해서만 헬레니즘을 흡수한 것은 아니었다.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에서 토착화되면서 신 플라톤, 영지주의, 기독교, 신비주의, 범신론 둥의 풍성한 사상을 낳 았다. 압바스 제국의 심장인 메소포타미아에는 기이한 사람들이 거 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분명 시리아의 이교도들이었으나 9 세기 초쯤 칼리파 마문의 박해 위협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사비교도 라는 명칭을 썼다. 이때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이나 기독교 롤 받아들인 것도 사실이지만 대다수는 자신들이 갖고 있던 이교도 신앙을 고수하였다. 한편, 교양 계층은 샤흐라스타니와 다른 이슬람 학자들에 의해 서술된 바와 같이 프로클로스 Proclus11’ 와 이암볼리커 스 Iarnb li chus72’ 의 신플라톤주의에 지나지 않는 종교 철학을 신앙 고 백하기 시작하였다. 두 알-눈으로 다시 돌아가면, 9 세기 전반에 이 71) [역주] 그리스의 철학자· 신학자 (c 411-48 .5). 72) [역주] 시리아의 신폴라톤파 철학자 (330 년 사망).
집트에서 살고 있던 신비주의자 겸 자연 철 학자의 교의가 인도에서 직접 유래되었다고 보기 는 믿기 어렵다 . 신플라톤주의와 영지주의에 인도적 In di an 요소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러한 가능성이 수피 견신 론의 직접적인 근원은 그리스와 시리아의 사색에서 찾을 수 있다는 본 저자의 주장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의 형편에서 그것의 근원을 좀더 엄밀하게 정의를 내리는 것은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 그러나 메록스는 그것의 기원을 아레 오파구스의 재판관과 동명이인인 디오니시우스 Dion y s iu s , the Pseudo - Areop agit.e7 3) 나 그의 스승으로 < 히 에로테우스 Hier oth e us> 라고 하는 사람에게로 돌렸다. 프로싱엄 Fro thingham은 이 사람을 시 리아의 신비주의자 스테펜 바 수다일리 St.e ph en bar Su daili(있)년 경)와 동일 인물로 보았다. 물론 디오니시우스는 기독교인으로 신플 라톤주의자였다. 그의 저술은 유럽 중세 신비주의의 토대가 되었으 며 또한 수피주의가 나타난 당시 동양에서 인기가 있었다.
73) [역주] 아테네의 언덕인 아레오파구스에는 고대 아테네의 최고 재판 소가 있었다 . 디오니시오스Di on y s i us the Areo p a gite는 이곳의 재판관 이자 학자였으며 (1 세기 경), 사도 바울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 그러나 위 본문의 디오니시우스는 신분이 확실치는 않은데 19 세기 말 까지 아레오파구스의 재판관과 동일 인물로 찰못 알려졌던 시리아의 학자 (5 세기 후반)로 추정된다.
수피주의, 다양한 요소로 구성됨 수피주의의 기원에 관한 다양한 일반적인 이론들에 관해 언급하 면서 그것들이 어느 정도는 진실을 담고 있다는 본 저자의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 단 한 가지 원인만으로는 그처럼 광범위하게 유포 되고 다양하게 나타나는 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피주의 는 어떤 <굴절된 빛>이 그것이 나아가는 길을 비치더라도 홉수하 고 변화시키면서 항상 철저하게 절충주의적인 입장을 취했으므로 결과적으로 서로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 一 一―죽 유신론자와 범신
론자, 무타질라파와 사변 신학파, 철학자들과 신학자들 __」 사이에 서도 신자를 늘려갔다. 그리스 기원설의 내용은 살펴 보았지만 페르 시아-인도의 요인도 무시될 수 없다 . <수피주의가 아리아족Ary an 에게 억지로 강요된 셈족의 종교에 대한 반동으로 간주되어야 한 다>는 이론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예컨대 두 알-눈은 콥트 교도 Co pt이거나 혹은 누비아인이었다 당시 페르시아계의 수피 주의자들에게서 다소 의식적으로 강력한 반(反)셈족 an ti-Semiti c 의 반발이 표출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 또 기원후 1 야 3 년 이전 인도가 이슬람 시싱에 끼친 문학적 영향은 ___ 『피흐리스트 』 를 들추어 보 면 누구든 알 수 있겠지만一~그리스의 영향보다는 훨씬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도의 종교 시싱-은 그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쿠 러산과 동부 페르시아에 침투했음이 틀림없다. 위 고찰에서 수피주의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한 가지 명확한 답 만을 기대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상반되는 이론 중 완벽하게 백 퍼센트 올닙년본 이론도 없지만 부분적으로 지당하지 않은 이론도 있 을 수 없다. 골트치어 박사의 다음 말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모 든 사람들이 명심해 두어야 할 말이다. 수피주의의 특성에 관한 골트치어의 견해 <수피주의는 이슬람 내에서 정식으로 조직화된 분파로 볼 수는 없다. 그 교리를 모아 하나의 정식 체제로 만들 수는 없다. 수피주의는 나라마다 각 기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각기 다른 파를 창건한 저명한 견신론자들의 가 르침의 정신에 따라 상이한 경향들을 엿볼 수 있는데 그 추종자들은 기독 교의 수도회에 비유될 수 있다. 각기 다른 환경의 영향은 당연히 수피주의 의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어떤 곳에서는 신비주의, 또 다른 곳에서는 금욕 주의가 지배적인 사상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74) 74) The Inf lue nce of Buddh ism up o n Islam, by I. Goldzih e r(Budape s t, 1903). 이 논저는 헝가리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필자는 그것을 직접
참고할 수는 없었다 . 여기서는 ]RAS for Jan ua ry, 1904, pp. 125 一 141 에 소재 한 두카 T. Duka 의 훌륭한 번 역 을 인용하였다 .
수피주의의 4 대 외래적 근원은 의심의 여지없이 기독교, 신플라톤 주의, 영지주의, 그리고 인도 금욕주의와 종교철학이다 . 여기서는 그 것들의 상대적인 중요성을 평가하려고 하지는 않겠지만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에서 맨먼저 생겨난 수피주의 의 사색적이고 견신론적 측면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 주는 명백한 징후임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비스땀 Bi s t am 의 바야지드 Bay azid 초기 수피주의지들은 특히 신비주의적 결합fa na wa-baq a 이론에 흥미를 갖고 자칫 범신론을 연상하기 쉬운 표현들을 자주 사용한다. 그렇지만 수피주의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꼭 범신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다. 견신론에서 범신론으로의 진일보한 발전이 할라즈(안 2 년 사망)나 카스피 해의 동남부 구석진 곳 근처에 위치한 꾸미스Qumi s 지방의 도시 비스땀 출신의 유명한 아부 야지드 Abu Ya zi d( 페르시아 어로는 바야지드, ITT4-875 년 사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필 자는 생각한다. 그의 부친 수루샨 S l..1fi1 shan 은 조로아스터교도였으며 그의 수피주의 스승은 715 년 이래 무슬림 총독들이 임명되어 있던 신드 S in d75) 지역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바야지드는 < 자아소멸 fana>이라는 실험적 교리를 지나치게 전개하였으며, 그의 말에는 독특한 시적 형상이 담겨져 있었다. 이는 후에 쿠리~ 위대한 수 피주의자인 아부 사이드 븐 아비 알-카이르 Abu Sa'id b. Abi al- Kha yr (l 야 9 년 사망)에 의해 발전되었다. 그가 남긴 명언 몇가지만 예로 들겠다. 이것들의 진위에 대해서는 의심이 가지 않는 것도 아 니지만, 수피주의의 견신론적 토대가 특징상 그리스적인 것이라면 수피주의의 과도한 신비주의적 경향도 그에 못지 않게 동양적인 특
75) [역주] 인도의 인더스 강 하류에 걸쳐있는 지역 .
징임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피조물은 ‘상태 abwal' 761 의 지배를 받지만 영지주의자에게는 ‘상태' 가 없다 . 왜냐하면, 그의 혼적이 지워지고 그의 본질이 다른 사람의 본질에 의해 파괴되며 그의 발자국이 다른 사람의 발자국에 없어지 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내 속의 나로부터 ‘오, 그대여’라고 외칠 때까지 신을 찾아다녔다.> <인간에게는 금욕주의도 없고 이론이나 실제도 없는 무소유(無所有) 가 최고이다. 인간이 빈털털이일 때 그는 모든 것을 갖는다.> <정말로 니는 신이다. 나 이외는 신은 없으니 나를 경배하라!> <나에게 영광을! 나의 위엄이 얼마나 위대하냐!> <나는 뱀이 껍질을 벗듯이 바야지드로부터 왔다. 그 다음 나는 보았 다. 나는 통일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이므로 사랑하는 이, 사 랑받는 이, 사랑이 하나임을 알았다.> < 나는 술 마시는 사람이며 , 술 그 자체이고, 술잔을 따라 올리는 사람 이다 . >
76) [역주] 수피주의의 용어로서 <상태 hal> 의 복수형 . 일단 획득하는 영혼속에 영구히 자리잡게 되는 <마깜 ma q am> 과 반대되는 개념의 일시적인 상태를 가리킴. 이븐 아따 Ibn 'A ta'에 따르면 <신이 너에게 은총을 보이고 싶으면 그 분께서는 너의 마음속에 여러 상태를 마련 해 주고 그 원인을 너의 탓으로 돌리신다>고 한다. 페르시아 수피 아 부 나쓰르 알 - 사라쥐 Aba N8 $r al-Sarr 작 (988 년 사망)는 그의 저서 『 키탑 알-루마아 Ki tab al-Lumd 』 에서 상태의 전형적 예를 다음과 같 이 들고 있다. 주의 깊음 m 따 a q aba, 신과의 친근감q urb , 사랑 mababba, 신에 대한 기원 r aj a fI-L lah, 갈망 shaw q, 친교 uns, 신뢰감itmin, 묵상 mushahada, 확신y a qin 동이다 . CEI, I;lal, p. 144 참조.
이처럼 처음 일세기 동안은 금욕운동에 불과했던 수피주의가 연 달아 신비주의적이거나 견신론적이 되었고 범신론과 혼동될 지경까
지 되었다. 이제부터 <타싸우프 Ta~ wwuf>란 용어 속에 이 모든 다양하고 미묘한 의미들이 결합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히즈라 3 세 기 (815-912) 의 고명한 수피주의자들은 반(反)도덕적인 열정을 자제한 다. 그들 대부분은 <절제의 길>을 선호하고 법 shari 'a 과 실재 }:ia— qiq a 를 조화시키려 한 점에서 당대의 유력한 견신론자인 바그다드의 주나이드J una yd ( 있天년 사망)와 일치하였다. 사흘 븐 압둘라 알-투스 타리(沒 3 년 사망 )Sahl b. 'AJxiull ah al-Tus taii는 다음과 같이 말했 다. <우리의 원칙은 여섯 가지이다. 성 꾸란을 굳게 지키며, 사자 무함마드를 본받고, 합법적인 것만 먹으며,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해치려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해치지 않으며, 금기는 피하며, 의 무는 지체 없이 수행하는 것이다 . > 엄격하기 그지없는 무슬림들은 이 신조를 줄거운 마음으로 지킨다. 수피주의는 이슬람과는 본질적 으로 매우 다른 것이지만 그것이 금욕주의적, 도덕적, 헌신적 측면 에서는 영성화( 靈 性化)된 이슬람교였다. 기성 종교에 대해서는 입에 발린 말을 하는 한편, 이슬람으로부터는 그것이 본래 가지고 있는 중요성을 빼앗는 식으로 이슬람 교리를 수정하였다. 이처럼 자비와 천벌을 주는 <알라>는 어떤 의미에서 탈인격화되고 절대적으로 진 실한 al-1:J aqq 유일신으로 섬겨졌다. 이 점에서 수피주의자들은 무 타질라파와의 유사성을 드러내지만 양파사이에는 그리스 철학을 제 외하면 공통점이 거의 없다. 7) 수피주의는 <속세에 대한 증오와 주 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심오한 종교적 감정의 표현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78) 주나이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타싸우프.’는 이런 것이다. 죽 하느님은 그대로 하여금 속세를 버리게도 하시지만 77) 수피주의자들 스스로도 어떤 점에서는 그들의 교리가 분명히 무타 질파의 교리에 기초한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Sha'ranI, Lawaq ib al- Anw 삶 (C air o, 1299 A. H.), p. 14, 1. 21 이 하 참조. 78) 이 정의는 아부 알-후사인 알-누리 Abo al-I:I us ay n a1-NOrI(907-908 사망)의 것이다.
‘그 분'안에서 살게 해주시기도 한다.> 수피주의의 발달 이후의 수피주의 발달과정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 다.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제한된 범위의 교우들에게 전파되는 종교 형태였던 것이 점차로 성자들을 위한 도량(道 場 ), 죽 수도원 체제로 바뀌었다 . 수도사m1Ii d 는 그의 영적 스승(pir 또는 us t:adh)에 게 엄격한 계율과 헌신적 사랑을 사사하였으며 그의 가르 침에 절대 복종하였다. 히즈라 3 세기에는 미래의 전형적인 열렬한 수피주의자들이 이제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는 고독한 금욕주 의자가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을 이끌고 행사에도 나 오는 위대한 셰이크나 교리 해설자가 되어 있음이 점차 명백해졌다. 이내 교리가 수집되고 책으로 편찬되었다. 수피주의에 관한 아람어 참고 문헌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아부 나쓰르 알-사라즈(였 3 년 사망)의 『 키탑 알_루마아Kita b al.一 Lurr 끄 ‘』와 아부 딸립 알-마키 Abu Talib al- Makki(았 5 년 사망)의 『꾸트 알-꿀룹 Qat al.-Qul ab 』이 있다 . 12 세기에는 이슬람교 수도승Th!rvi sh 의 교단이 생겨났다. 아디 알-하카리 ‘Adi al- I:Iakkan (1163 년 사망)와 압둘 까디 르 알-질리 ‘Ab du 'l_Q adir al_ J山 (1lOO 년 사망)는 각각 우두머리의 이름을 따서 아다위파 ‘Ada펴 s 와 까디리파Qadin s 라 불리는 수도회 를 세웠다. 이어서 곧 리파이파 Rifa‘I S, 샤딜리파 S h.adhili s, 메브레 비파 Mevle Vi s 가 연달아 생겨났다. 이 중 메브레비파는 그 기원이 페르시아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잘랄 알-딘 루미 (1ZT3 년 사망)에게 로 유래된다. 이때쯤 주로 가잘리의 영향을 통해 수피주의는 이슬람 교파에서 탄탄하고 공인된 독자적인 지위를 획득했다. 정통교파는 많은 독실한 무슬림들이 성자들의 묘를 참배하는 미신적 숭배에 반 대하고 회중 순례자들이 바치는 기도, 회생 제물에 반대하는 목소리 를 높였지만 민간에 널리 퍼져 있는 성자 숭배를 받아들이고 성자
들 Aw liy a 의 기적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가잘리는 수피주 의의 교리에 형이 상학적인 논거를 부여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파 라비(역시 수피주의자임)와 아비센나가 이미 신플라톤주의자들로부터 차용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때부터 수피주의자들의 저술에서는 감 화와 무아경 의 플로티노스식의 Ploti nian7 91 이론이 줄기차게 제기되 고 있음을 알수 있다.
79) [역주] 플로티노스 (Plo ti nus, 205? -없 0?) : 이집트 태생의 로마의 철학 자. 여기서는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 주의를 가리킨다. 모든 실재는 하 느님th e One 으로부터의 유출 emana ti on 로 이루어지며, 사람의 영(앞)은 하느님과 합체(合體)를 이룰 때까지 끊임없이 재생을 거듭한다고 한다.
우마르 본 알-파리드 ‘Urrar ibn al-Fa rid 신비주의는 아랍인들에게보디는 페르시아인들에게 보다 더 취향 이 맞았다. 따라서 신비주의가 아랍 문학에 미친 영향은 11 세기 이 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페르시아인들을 매혹시킨 신비주의의 놀라 운 마력과는 비교가 안 된다. 몇몇 예외가 있지만 페르시아(터키를 덧붙일 수도 있다)의 이름난 시인들은 비유를 사용하여 말하며 환상 적 이미지를 사용하였다 페르시아인 수피주의자 이부· 사이드 븐 아 비 알-카이르8 0) 의 4 행시는 최초의 신비주의 문학 작품의 한 예이다. 아랍인들에게는 페르시아의 대가들과 나란히 설 만한 신비주의 시 인이 단 한명뿐이다. 바로 카이로에서 출생 (1181 년)하여 그곳에서 1 23.5년 사망한 샤라프 알-딘 우마르 븐 알-파리드 Sh araf al-D in 'Urnar ibn al-~ar i d 이다. 그의 <디완>은 손자인 알리에 의해 편집 되었다. 동 시인의 생애에 관한 다음의 자세한 이야기는 이 시집에 붙어 있는 그의 약전(略傳)에서 발췌하였다. 8 1)
80) 브라운의 『페르시아 문학사』, vol. ii, p. 261 이하 참조.
81) The Drwan of 'Umar Inb a/-Faric/. , ed. by Rushay yid al-Da l;ida b (Marseill es , 18. 53).
< 셰이크 우마르 븐 알-파리드는 보통 키였다. 그의 얼굴은 희고 잘 생겼 는데 불그스름하였다 . 그가 음악적 감홍엽 ma‘ 821 과 황홀경waj d 의 힘으로 무아경에 이르면 매력과 재기발랄함이 더하여졌으며 그럴 때면 몸에서 나 오는 땀방울이 발 밀의 땅 위로 비오듯 흘러내릴 정도였다. (그의 아들 말 인죽) 아랍인이나 의국인들 중에서 외모가 출중함에 있어 그와 맞먹을 인물 울 보지 못했거니와 나야말로 생김새가 어느 누구보다도 그와 가장 비슷하 다. 그가 시내를 거닐 때면 사람들이 주위로 몰려와 그의 축복을· 청하거나 손에 입맞춤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는 못하게 하고 대신 그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우마르 븐 알-파리드는 말했다. ‘내가 처음 속세를 벗어나려고(떠ri d) 하던 즈음,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무캇땀 al-M 띠a ttam8 31 의 두번째 산에 있는 와디 알-무스타드아핀 Wa di al - Mus tac;l'afin에 올라가 곤 했다 . 그곳에 가서 밤낮으로 은둔 생활siya}Ja울 계속하였다. 그러면 마 치 의무적인 일처럼 부친의 애정이 그리워져 그에게 돌아오곤 하였다. 당시 나의 부친은 경비가 펼쳐 있는 두 도시 까히라 Qahira와 미쓰르M i굽 ' 의 고동법원 원장 대리 khaJjfat al-hukm a1-‘ aZiZ로서 저명한 학자 중 한 사람 이었다. 그는 내가 돌아오면 늘 기뻐하며 법정에 따라 나가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 그런 다음에는 다시 ‘탈속'올 간절히 바라며 방랑하는 기도자의 생 활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하곤 했다. 나는 이와 같은 과정을 수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부친은 대법관Qacji al -Quc;la.t의 직책을 제의받았으나 결국 이를 거절하고 그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도 내놓은 뒤 속세에서 물러 나 알-아즈하르 al-Azhar 사원의 설교 강당q a‘a t al- khitaba에서 기도에만 전념하였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나는 전에 하던 은둔 생활과 고독한 기도 생활, 진리의 길로의 여정을 다시 시작하였으나 아무런 계시도 나에게 내려지지 않았다. 어느날, 나는 카이로에 와서 사이피야 대학Sayfiyya co-
82) [역주] 아랍어 원의는 <돋기> 또는 <음악을 듣고 거기에 빠침>을 나타낸다. 수피주의에서는 경건한 감정을 자아내고 황홀경에 이르게 하기 위해 음악을 감상하거나 찬송가나 시 낭송을 돋거나 또는 악기 연주를 감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EI' , Sama', pp. 120-121 참조.
83) [역주] 구 카이로 old Ca iro 지역에 있는 언덕.
84) 각각 신 카이로와 구 카이로를 말함.
ll eg e 에 들어가는데 문에서 규정에도 없는 세정(洗淨)을 하고 있는 늙은 식 료품 장수를 발견하였다. 먼저 그는 손을 씻고 나서 발을 씻은 다음 머리를 닦고 얼굴을 씻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영감님, 나이가 그만큼 드시고도 무슬림 신학자들이 드나드는 학교 정문에서 불법적인 세정을 합니까?' 그 는 나를 보고 말했다. ‘우마르! 이집트에서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을 걸세 . 오직 히자즈의 메카에서만이 무엇인가 그대에게 내려질 걸세 . 그곳으로 출발하게. 그대가 이름을 날릴 때가 되었으니 . ’ 그때서야 나는 그 노인이 신이 보낸 성자로서 장사꾼으로 변장하고 또 세정의 불법성을 모르 는 척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그의 앞에 앉아 말했다. ‘나의 사 부님, 메카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 순례달이 아니면 길을 안내해 줄 사람도 없어요’ 그는 나 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그대 앞에 메카가 있도다.’ 과연 그와 함께 쳐다보니 메카(신의 찬미 가 있기를)가 보였다. 그와 헤어져 메카롤 찾아 나섰는데 그것은 항상 내 앞에 있었다. 마침내 나는 메카에 들어갔다. 그 순간 나에게 빛이 비쳤으며 그 빛은 계속 나를 비추었다. 나는 메카로부터 밤낮으로 낙타 를 타고 열홀 이 걸리는 거리에 있는 마을에 거주하였다. 나는 매일 밤낮으로 하루 다섯 번의 기도를 올리기 위해 성전에 갔었다. 그곳에서 왔다 갔다하는데 덩치가 큰 야수가 나를 따라다녔다. 그 야수는 마치 낙타가 무 릎 을 꿇듯이 나에게 무릎을 꿇고 말했다. ‘타십시오, 주인님 . ’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 다.> 15 년이 지나 우마르 븐 알-파리드는 카이로로 돌아왔다. 사람들 은 그를 성자로 받들었다. 당시 세도를 부리던 군주인 말리크 알 카밀 Malik al- Kami.1도 그를 친히 찾아보고 싶어 했지만 우마르는 그 와 만나기를 거부하며 그가 보낸 하사품을 받지 않았다. 이 시인의 아들은 말한다. <대개 제이크’께서는 얼떨떨한 상태에서 눈을 크게 뜨고 뚫어지게 바라보곤 하였다. 그는 누가 자기에게 말을 걸어도 들은 척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일어섰다 앉았다 하다가는 옆으 로 누워 죽은 사람처럼 몸을 옷으로 휘감고 누워버리는 것이다. 이
런 식으로 계속 열홀을 식음을 전폐하고 말도 하지 않으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1231 년 메카로 순례를 떠난 그는 당대의 유명한 시 인 쉬하브 알—딘 아부 하프쓰 우마르 알-수흐라와르디 S hih.ab al- Din I:Iafs 'Umar al-Suma wardi를 만났다. 그는 4 년 뒤에 죽어서 무캇땀 언덕에 있는 까라파Qarafa 에 묻혔다. 이븐 알-파리드의 시 이븐 알-파리드의 손자가 처음 수집하고 발간한 그의 신비주의 시집은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비슷한 작품들과 비교하면 양적으로.는 적지만 아라비아 시인의 작품으로서는 그다지 짧지도 않다 .85 ) 그것 의 일반적인 특성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하였다. 주석자인 하산 알 -부리니 l:fasan al-BunnI(1615 년 사망)는 그의 시가 물흐르듯 거침이 없는 점을 찬양하며 이븐 알-파리드가 <변화 무쌍한 표현 형식 속 에서 관념을 마음대로 다루며 거기에 멋진 옷을 입히는 데 능 숙하다 >86 ) 고 단언하였다. 미묘한 어구로 가독한 그의 문체는 무타납비 의 영 향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87) 그의 <디 완> 중에 서 가장 긴 시는 『신비주의자가 가는 길에 관한 시 N따 m al-Sulm 』 라는 제목의 신에 대한 사랑을 읊은 찬가로서 때로는 『t각운의 대 송시 al-Ta'iyyat al-Kub 따로 불리기도 한다. 이 시는 함머 푸르그 8.5) Ta'iyy a t al-Kubra 를 제외한 DIWan 은 루샤이드 알-다흐다흐 Rusha yyid al-Dabdab(Marseil les , 1853) 에 의해 편집되었다. 86) DiW an, p. 219, l. 14 및 p. 213, l. 1 8. 87) 무타납비와 마찬가지로 이븐 알-파리드도 축소명사를 현저히 선호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D 1Wan, p. 5.52 ). ma qu ltu bubay yibI min al- 백函 bal ya' dhubu 'smu al-shakh$i bi- ' l-t a $ghiri, <‘여보'라고 말하는 것은 경멸에서가 아니다. '축소'된 이름은 한결 향기로워지는 것> [역주] 위 인용 시구의 첫 행 buba yyi b 가 bab i b( 사랑하는 사람)의 축 소명사이다.
스탈 Hamrrer Pur g s t.all에 의해 독일어로 번역, 편집되었다(비엔나, 1854 년). 이 시 때문에 시인은 < 훌튤tI:I ulol > 의 교리, 즉 신자성육(神 者成肉)을 찬성하는 것으로 비난받았다. 그의 또 다른 유명한 시는 『술의 찬가썼 mm• . Y.}U』 이 다 . 88)
88) D 助 an, p. 472 이하. 불어 번역은 그랑쥐레 드 라그랑쥐 Gran g ere t de La g ran g e 의 Anth o log ie Arabe(Pa ris, 1828), p. 41 에 소재 한다.
다음 번역시에서 독자들은 열광적인 환희와 신에 대한 찬미로 아 람 문학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이븐 알-파리드의 시를 어렴풋 이나마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 < 복받치는 감정으로 정신을 잃고 말리라! 사랑을 불태울 이 사무친 마음을 가없이 여겨 눈살을 찌푸리며 저를 대하지 마십시오. 실재( 實在 )의 당신을 보고 싶지만 ‘너희는 나를 볼 수 없다 ’ ~l 고 하셨지요. 나의 영혼이여, 그분이 하신 약속을 그대로 따르라. 끝까지 비틀거리지 않고 견뎌내라! 사랑은 삶과 죽음 그 자체이니 모든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을 사랑하라. 오늘을 전후하여 나의 시련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말하라 . ‘나에게서 배우고, 나를 따르고, 나에게 복종하라. 나의 열정에 관해 동서사방으로 얘기를 퍼뜨려라.' 나의 연인과 단둘이 있을 때면 저녁 공기보다 더 부드러운 은밀한 얘기를 니누었지요. 나의 기도 안으로 축복받은 환영이 들어와 무명( 無 名)의 나에게 끝없는 명예를 안겨 주었지요. 그 분의 미와 위엄 사이에서 한동안 경악하여 멍하니 정신이 팔려 있을 때
89) 하느님이 모세에게 행한 말씀(꾸란 8 장 139절).
그분은 내 영혼 위로 지나다니는 것을 드러내 보였지요 . 보라! 그 분의 얼굴에 온갖 매력과 우아함이 뒤섞여 있도다. 얼굴 전체에 아름다움이 가득한 그 분을 보면 ‘그 분 외에는 신이 없고 그 분이 가장 지고하시다’ 라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90)
90) DIWan, p. 257 이 하.
다음은 『t각운의 대 송시』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 붙여진 『t각운 의 소 송시 Ta'iyy at al- $ughra.n의 앞 구절이다. <그렇소, 서풍이 불어와 당신에 대한 그리움에 불을 붙였소. 서풍은 은은한 향기를 내면서 불어오지요. 그것은 아침이면 우물 가까이 사는 사람들의 은밀한 이야기를 (그것은 겁 많은 나의 마음을 어찌나 기쁘게 해주었던지) 내 마음속에 속삭여 주며, 우아한 옷차림으로 푸른 초원에서 나직하게 말하며, 무기력한 상사병에 걸린 산들바람을 퍼뜨려 나의 고통을 치유하여 줍니다. 녹음이 우거진 비탈길 넘어 나의 사랑하는 히자즈에 서풍이 불어올 때면 나를 황홀케 하는 것은 사람들을 취하게 만드는 술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랍니다. 그대는 내 마음속에 영원한 성약(聖約)을 회상시켜 줍니다 .911
91) 이는 꾸란 7 장 172 룰 가리킨다. 하느님은 아담의 갈바뼈에서 미래의 모든 인류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내가 너희들의 주가 아니냐?>고 말씀하셨다 . 수피주의의 해석에 따르면 그들온 <그렇습니다>라고 답 하고 하느님을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즐거운 바람이여! 그대는 나의 소중한 것들과 떨어지게 했도다. 아카시아 숲사이에 머뭇거리는 암갈색 낙타를 몰고 오는 이여 그대의 안장은 오랜 지친 여정에서도 부드럽고 소파 같구나! 그대에게 축복있으라. 한낮에 멀리 떨어진 투디흐 1u c;tib를 볼 수 있다면, 그대는 와즈라 W척 급적 새끼 시슴들이 노니는 사막계곡을 건너게 되리. 돌 투성이 땅에 집한 우라이드 ‘Ura y o 의 모래 언덕에서 후즈와丑끄函료- 방향을 틀어서 수와이까 Suwa yq a941 로 낙타 떼를 몰고 가리라. 그 다음 뚜와일리아 Tuway li‘의 버드나무를 떠나 살아요「 95) 까지는 그대가 타고 가리라. 그대에게 간절히 바라건대 산기슭에 사는 사람에게 안부를· 물어주시오! 내 그리워하는 그 무리 가운데 멈추어 서서(그때까지 건강이 함께 하 기를!) 그곳의 아랍인들에게 안부를 전해 주시오` 천막들이 저쪽에 쳐져 있고 그 중 한 천막에 만나주기를 꺼리고 이별을 우습게 여기는 여자가 있으니, 그녀의 주변은 칼날과 창끝이 성벽처럼 둘러 있어도 그녀가 나에게 눈길을 주기만 하면 나는 눈길을 어디에 둘지 모릅니다. 그녀는 두 겹으로 이어진 옷을 입고 _.:...나는 나대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람들이 그녀를 보지 못하도록 하는데, 그녀의 얼굴에서 아무리 베일을 벗기려 해도 더욱 가리어진다.
92) [역 주] <동굴> 또는 <야수가 사는 굴>을 의 미 .
93) [역주] <강이나 호수, 또는 바다의 한가운데>를 의미하는 ‘urd 의 축 소형
94) [역주] <작은 시장>. 아랍어에서 시장을 의미하는 so q의 축소명사.
95) [역 주] <산속의 오목한 곳>.
내 욕망의 고삐를 늦추는데 대해 그녀는 나에게 죽어야 될 몸이라고 한다. 홍정은 얼마나 비싼 것이며 목숨을 바치는 사랑은 얼마나 값싼 것인가 >961
96) Diw a n, p. 257 이 하,
순수한 아람계의 이븐 알-파리드의 시는 형식이나 특징에서 철저 히 아랍적이다. 여기서 페르시아의 위대한 수피주의자들을 언급할 계제는 아니지만 무끄타디르 칼리파시대에 처형된(92'2년) 후사인 븐 만쑤르 알-할라즈는 브라운 교수의 그에 대한 찬사가 아니더라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수피이다. 본 저자로서는 후사인에 관한 브 라운 교수의 기술에 덧붙일 것이 없다.',JI) 그러나 수피주의의 역사상 또 한 사람의 주목할 만한 인물인 무흐이 알-딘 븐 알-아라비 M~y al-D in Ibn al-'Arab i가 아랍인 수피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압바스 시대 말기의 인물이므로 이번 장의 끝을 장식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981
97) Lit era ry Hi sto r y of Persia , vol. i, p. 428 이하 참조 , 그러나 지난 20 년 동안 할라즈의 성격과 교리에 대해서는 상세하고도 새롭게 조명 되었다. 부록 참조,
98) 이븐 알구아라비의 가장 유명한 전기는 도지와 다른 이들이 편찬한 마까리 Ma qq arI 의 Nq f}.J. al-T ib, vol. i, pp. 567- 閔 3 에 나온다 . 그 밖에 도 많은 자료가 필자가 소장한 귀중한 필사본에서 발췌한 장문의 논 문 Soodoorat al-D ralr:Ib에 들어 있다. 이 논문은 ]RAS for 1906, pp. 806-824 에 발표되었다. 또한 Von Kremer, Herrschende Ideen, pp. 102-109 참조.
이븐 알-아라비 무흐이 알-딘 무함마드 븐 알리 븐 알-아라비 M 뱌y a1-Dn Mu- 區 m 따 b. 'AlI Ibn al-'Ara bi(혹은 Ibn ‘Arabl)99) 는 히즈라 EOO 년
99) 무흐이 알-딘 M 曲y al-D in은 <종교 부흥자>를 의 미 한다. 서 양에 서 는 이븐 알_아라비 Ibn . al-'ArabI 로 불리었으나 동방의 무슬림들온 세 비야의 카디 아부 바크르 븐 알-아라비 Ca di Abll Bakr Ibn al-'ArabI
(1151 년 사망)와 구별하기 위해 정관사 al 을 빠뜨렸다.
라마단월 17 일 =ll ffi년 7 월 29 일 스페인의 무르시야 M 따 s iy a (Mu- rci a)IOO’ 에서 출생하였다 1173 년부터 1 2fJ2년까지 세비야 Se vill e10” 에 거주하였다. 그 후 동양으로 떠나 이집트를 경유, 히자즈로 여행하 여 그곳에서 오랫동안 머문 다음, 바그다드와 모술, 소아시아를 방 문하고 결국 다마스쿠스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히즈라 638 년 =1240 년). 까시윤Qasiyun 산 믿에 있는 그의 묘는 <에덴 동산 의 일부>로 여겨졌으며 <철학자의 비석 >102’ 이라 불려졌다. 지금은 무호이 알-딘이란 이름을 가진 모스크의 구내에 있으며 둥근 지붕 이 묘 위에 세워졌다 .1031 주로 여행이나 수피주의자들과의 대화, 자 신의 계산으로 약 앉 D 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저술로 보낸 그의 파란많은 생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 중 특히 두 권의 저서로 이븐 알-아라비는 가장 위대한 이슬람 신비주의자로 유명해졌다. 『메카의 계시Fu t퍄젊 al. -Ma kki.Y.}U』와 『철학의 사면 (斜面) FU $ii,5 al.-I:Jikam.ti이 그것이다. 『메카의 계시』는 ffi)장에 달 하는 방대한 역작으로서 신비주의에 대한 완전한 학문적 체계를 담 고 있다. 이 책의 작자는 <실재적 관념 세계>에서 무함마드가 천사, 예언자, 성인들에 둘러싸여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으며 신의 신비에 관해 논술하라는 그의 명령을 받았다고 말한다. 또 한번은 카바 신전을 순례하면서 젊은이의 모습을 하고 똑같이 성지 순례를 하고 있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를 만났다. 천사는 그에게 무생명의 외부 속에 감추어진 살아 있는 비교(秘敎)의 사원을 보여 주었다. 그 것은 신성한 관념의 영속적인 실체가 일단 내부의 화려함에 도달하 면 신의 속성을 받고 인간의 눈으로는 차마 쳐다볼 수 없는 것 올 볼 때까지는 민간 종교의 베일-그것은 고상한 사람이 통
100) [역 주] 스페 인 동남부에 있는 도시 .
101) [역주] 스페인 서남부의 도시로 안달루시아의 주도(州都).
102) al-K ibn t al-abmar. 직 역 하면 <붉은 유황>이 다.
103) Von Kremer, 앞의 책 , p. 108 이 하.
과해야만 하는 베일이다 로 감추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븐 알-아라비는 곧 기절하였다 . 그가 정신을 차리자 그 환상적인 모습을 잘 기억하여 그의 눈에 비친 신비한 사건을 기록하라는 지 시를 받았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이븐 알-아라비와 함께 카바 신 전에 들어가 다시 성령의 모습을 하고 다리가 셋인 말을 타고 그에 게 나타나서 만물의 지식을 그의 가슴에 불어넣은 다음, 다시 한번 그에게 모든 신비가 모셔져 있는 천상(天上)의 모습을 그려 보도록 하였다 . 1 04 1 이것이 유명한 『메카의 계시』의 기원이다. 이 책의 대부 분은 6 백년 전 무함마드에게 계시가 내려졌던 마을에서 쓰여졌다 . 저자는 이 책의 글자 하나하나가 초자연적인 수단으로 그에게 구술 된 것이라고 정말로 믿거나 믿는 척하였다. 예언자들의 이름을 따서 각각 이름 붙여진 'lJ장으로 된 그리 분량이 많지 않은 책인 『철학 의 사면』은 『메카의 계시』 못지 않게 높이 평가되며 아랍어, 페르시 아어, 터키어로 된 수많은 주석서의 주제가 되었다.
104) 위 상술한 내용은 압둘 와합 알-샤라니 ‘Abdu '1-Wahhab al-Sha- 'raru(1565 년 사망)가 요약하고 Fleis c her, Leipzi g Un iv. Libr a ry(1 8. 38) 의 필사본 목록 pp. 490-495 에서 상세히 기술한 바 있는 futati a t의 요약에서 발췌한 것이다.
<완전한 인간>의 교리 묘하게도 이븐 알-아라비는 가장 사치스런 신비주의와 가장 엄격 한 정통 교파를 결합시켰다. <그는 종교상으로는 직해(直解)주의자 인 자히리파였고 그의 사변 신앙은 영성주의자인 바띠니파였다.>!
105) Maqq a n, i , 569, II .
106) 아흐마드 븐 한발 .
1m) 아부 하니 파 Aba I:Ian ifa.
시에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종교법의 자의(字義)를 꼼꼼하게 따지면서도 인간의 권위나 유추 또는 견해를 따르지 않겠다고 한 것은 스스로를 신에 의해 계몽되고 오류가 없는 것으로 여기는 선 지자의 순전히 거드럭거리는 주제넘는 짓이 아닌가 생각한다. 많은 신학자들이 그의 저술 중에 나타나는 명백히 불경스런 표현들에 분 노를 터트렸고 이단의 교리인 <신자성육 Hul 미>과 <인간과 신의 일 치 ittil)ad>를 신봉하는 데 대해 그를 비난하였댜 수세기가 지나서 도 그는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그는 성인들의 말씀은 직역되어서도 안 되며 비판을 가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히는· 많은 열렬한 지지자 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고도의 신비적 교의는 신앙심이 약 한 신지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 심지어 그의 고결함을 굳게 믿는 사람들조차도 그의 책을 읽는 것을 단념하였다. 그런데도 그 책들은 이슬람 세계 전역에 걸 쳐 공공연히 또는 은밀히 읽혀졌다. 사람들은 저자의 축복을 받기 위 해 그 책들을 복사하였으며 필사본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그의 입 장을 옹호하는 글을 쓴 저명한 사람들 중 여기서는 『알-까무스 al Qa rr 函라는 아랍어 대사전의 저자인 마즈드 알-딘 알-피루자바디 Majd al-D in al-F nuzabadi (1414 년)와 잘랄 알-딘 알-수유띠 J al 최 al-D in al-Su 函(1 445 년 사망), 압둘 와합 알-샤라니 'Abdu '1-. Wahhab al-Sha‘ranI(l fffi년 사망)의 이름을 들 수 있다. 그가 주장 하는 가설의 기본 원리는 <일원론 wabda t al- wuj u d>이다. <실재> 와 그 속성, 바꾸어 말하면 신과 우주 사이에는 진정한 차이가 없다 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신의 인식 중에 <관념 a'ya n thabita>으 로서 영구히 존재하며 존재는 앎과 동일하므로 그들의 <창조>는 현실적으로 신이 피조물들을 앎, 또는 신이 자기 자신을 앎을 의미 할 뿐이다. 사실 주체로서의 <실재>와 객체인 그 자신과의 제 관계 를 구체적으로 요약한 것이 우주이다. 이 범신론적 일원론은 <완전 한 인간>--:-이븐 알-아라비가 맨 처음 이 어구를 범신론적 일원
론과 관련지었다——_의 교리속에 이슬람의 정체를 숨겼다. 일련의 5 단계 })ac;iarat를 거쳐 진화하는 신에 대한 의식은 <영적 실재>의 창조적 속성과 피조물로서의 속성을 동시에 지니며, 신의 형상이자 우주의 원형(原形)이기도 한 소우주의 존재인 인간에게서 완벽하게 표현된다. 오직 그를 통해서만이 하느님은 자신을 알고 그분 자신 올 알린다. 인간은 하느님 자신이 하신 일을 볼 수 있는 세상의 눈 이다. 이븐 알-아라비의 대담하고 역설적인 논리가 다움 시구에서 엿보인다. <그 분은 (나의 완전함을 나타내 보여 주고 그 분의 모습대로 나를 만드셔서)나를 칭찬해 주시고 나는 (그 분의 완전함을 나타내 보여 주고 그 분에게 복종하므로써) 그분을찬미한다. 내가 그 분을 도와드리는데 어찌 그 분께서 혼자일 수 있을까? (신의 속성은 그 현시의 가능성을 인간에게서 찾는데). 고로 신은 나를 존재케 하셨고 나는 그 분을 알며 그 분을 존재케 한다 (그 분에 대한 나의 앎과 묵상속에서 ).>1081
108) Fu$U$ al-J:[ ika m(Ca iro, A. H. 1321 ), p. 78. 괄호 안의 문구는 본문 에 딸린 압둘 라자끄 알-카샤니 ‘Abdu 'I-Razzaq al-KashanI 의 주 석이다.
이처럼 신의 본성을 시현(示現)하는 일은 인간의 기본적인 기능이 다. 개인적으로 보면 <완전한 인간>이란 예언자와 성인들이다. 여 기서 마니교와 영지주의, 신플라톤과 기독교의 사색이 혼합된 이 교 리는 <마지막 예언자the Seal of the prophets>인 무함마드에 애착 올 가진다. 무슬림들의 믿음에 따르면, 육체와 합치하기 전에 존재 하는 영혼 혹은 <무함마드의 빛 Nfir l\1i..ibarnrmdi >100) 이 아담과 일
109) [역주] 무함마드의 실재 al-ba qiq a al-M 曲 amma diyy a 는 천지창조 이전에 이루어졌으며 <신이 한 줌의 빛을 받아 그것을 무함마드가 되게 하였다> . 그로부터 천지창조 그 자체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CEI, Nnr M 曲 amma di, pp. 303-304 참조.
련의 예언자들 그 중 무함마드는 마지막 예언자이다-의 육신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함마드는 하느님의 말씀 Log osllOI 이며, 중재자이고, 신의 대리인Khalif at Allah 이며, 우주를 존재케 하신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이 속세에 내려오신 신 인(神人)인 것이다.
llO) 이븐 알-아라비는 l6TOC eu5ldOETOC 와 동의적(同義的)인 의미로 <실재 중의 실재l:l a qiq a t al-ba q a' iq>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무함마드의 실재 al-l:l aq iqa al-Mubamma diyy a> 는 l6YOc np oo op l KbC 와 동의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물론 이븐 알 _ 아라비의 철학은 그를 실증철학의 범주를 훨씬 벗어나게끔 한다. 만일 신이 분별 있고 지적인 만물의 <자아> 라고 한다면, 이는 그 분이 신자의 예정된 능력에 맞추어 가능한 온 갖 형태의 신앙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 된다. 그 분이 어떤 모 습으로 오더라도 그 분은 단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신비주의자는 안다. 그것은 신비주의자의 마음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 이다. 죽 밀람으로 봉인을 하듯이 하느님은 자신의 모습을 어떤 형 태로든 신비주의자의 마음속에 드러내보일 수 있다. <내 마음속에는 온갖 모습이 들어 앉울 수 있네. 수도지를 위한 수도원, 우상들의 신전, 양 때를 위한 초원, 순례자의 카바 신전, 그리고 율법서와 꾸란이. 사랑은 나의 신앙 : 그 분이 낙타를 어디로 몰고 가든지 여전히 유일하고 진실된 신앙은 내게 있도다.>
lll) 동 시의 아랍어 원문은 필자가 편찬한 이븐 알-아라비의 신비주의 시 집 Tarj um 차 al-Ashwa q에 소재 한다 (O ri en tal Translati on Fund,
New Seri es , vol. xx, p. 19, vv. 13-15.
이븐 알-아라비는 방대한 양의 저술과 전문적 신학 용어 , 그리고 매우 난해한 사고 방식 , 서술 방법의 결여 둥의 탓으로 최근까지 유럽 동양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11 2) 수피주의 역사에서 그의 이름은 신기원을 기록한다 . 이슬람에서 종교성이 매우 강한 사적인 운동으로 시작한 것이 결국 비교적(秘 敎 的)이고 명백히 범신론적 철학 체계로 발전한 것은 순전히 이븐 알-아라비의 덕택이다. <대 주교 al-Shayk h al-Akbar > 라는 그의 별칭은 몽골 침략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슬람 신비주의 세계에서의 그의 탁월성을 입 중하여 주는 것이다 . 페르시아와 터키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막강하 였다. 이븐 알-아라비의 사상은 제자인 꼬니야Q5niy a 출신의 싸드 르 알꾹 1 $adr al- Din을 거쳐 자신보다 30 년 후에 죽은 『 마쓰나위 Ma t詞回 저자이며 가장 위대한 수피 시인 중 하나인 잘랄 알 딘 루미에게 이어진다. 그의 사상을 차용한 사람들이 모두 무슬림들 만은 아니었다. 그는 중세의 기독교도 학자들 중에서도 레이몬드 룰 Raym :,nd Lull11 맡은 <계몽 학자>나 어쩌면 단테 Thmt e에게까지도 영감을 주었는지 모른다 . 114)
112) 이븐 알 - 아라비에 관한 연구로는 마드리드의 아랍어 교수인 아신 팔 라시오스 As in Pala ci os 의 스페인어로 쓰여진 연구서들과 니베르그 H. S. Ny be rg( Klein e re Sch riften des Ibn al-'.A r abI, Leide n, 1919) 의 연구가 있다. 개괄적 인 견해는 졸저 Stu d ie s in Islami c My s ti ds m, pp. 77-142 와 pp, 149-161 에서 구할 수 있다 .
113) [역주] 스페인의 신학자· 철학자· 저술가 (1 23.5 ?-1315).
114) Asin Palaci os , Islam and the Di vi n e Comedy, London, 1926 참조.
제 9 장 유럽의 아랍인들 히즈라 1 세기가 채 끝나기 전, 우마이야조의 칼리파인 왈리드 븐 압둘 말리크의 재위 (7 (15 -715 년) 동안 따리끄 T- q와 무사 븐 누싸이 르 MU 회 b. N뿌 l yr가 이끄는 이슬람군은 지중해를 건넜다. 그리고 카디스@diz ll 근방에서 벌어진 대 전투에서 고트족 로데릭 왕의 군 대를 격퇴하고 이내 스페인 전역을 정복하였다. 이는 이미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새로운 식민지의 운명은 오랫동안 불안하 였다 아프리카에서 기승을 부리던 베르베르족의 소요 (734-742 년)는 스페인으로까지 파급되어 소수 세력인 아랍 식민주의자들은 전멸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위기를 넘긴 정복자들은 그들 조상인 까 이스와 칼브족 간에 대대로 내려오는 오랜 불화와 적개심을 다시 불태우기 시작했다. 또 다시 숙적인 시리아와 예멘의 양대 부족은 싸움을 벌임으로써 스페인 전역은 혼란의 도가니로 빠졌다.
1) [역주] 스페인 서남부, 대서양에 면한 항구도시.
우마이야조의 압둘 라흐만 ‘Abdu '1-R at)m an 한편 칼리파 히샴의 손자인 압둘 라흐만 븐 무아위야 ‘Abdu 'I- 표도 b. Mu'a wiy a 는 압바스인들이 우마이야가에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벌인 대 학살을 모면하고 노예신분에서 해방된 자 유민인 충복(忠僕) 바드르 Badr 만을 데리고 5 년간의 방랑 끝에 세우 타 Ceut a 2 1 근처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그곳의 베르베르족에게서 불 확실한 은신처를 구하였다 . 젊고 야심차며 자신만만한 압둘 라흐만 은 스페인을 공격하여 아랍인들의 도움으로 왕국을 차지할 대담한 계략을 꾸몄다. 그 아랍인들 가운데는 자기 가문의 추종자들이 많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花 8 년, 그는 바드르에게 비밀 임 무를 띠어 바디를 건너 보냈다. 이 사자(使者)는 기대 이상의 수확 올 거두었다. 추종자들을 그의 편에 끌어 들이는 일은 압둘 라흐만 이 본시 그들과 같은 부족의 족장인데다 계획이 성공할 경우 노획 물을 같이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추종자들 은 얼마 되지 않았다. 왕위를 노리는 그로서는 다수파안 시리아인들 이나 예멘인들 중 어느 한쪽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경우 그의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이때, 유약한 총독인 유수프 븐 압둘 라흐만 알 피흐리 Yusu f b. 'Abdu '1- Ral:n따 n al-Fi hri와 잔악하지만 유능한 그의 부장(副將) 쑤마일 븐 하팀 $urnay l b. 1:Iatirn이 이끄는 시리아 인들이 세력을 잡고 그들의 적을 무자비할 정도로 잔인하게 쫓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멘인들은 압둘 라흐만의 대의명분이 마음에 들 어서가 아니라 단지 시리아인들에게 피비린내 니는 · 복수내춘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서둘러 그의 편을 들었다. 이들 스페인 무슬림 들이야 말로 순수한 베드윈족이었다.
2) [역주] 모로코 북부,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
수개월 후 압둘 라흐만은 스페인에 상륙하여 세비야를 점령하고 코르도바 Cordov 갈의 성벽 밑에서 유수프와 쑤마일을 패퇴시키고 그 도시의 주인이 되었다. 그날 밤, 그는 대 모스크에 예배를 위해 모인 시민들에게 스페인 총독으로 행세하였다(四 3 년 5 월). 幻년간에 걸친 오랜 치세 기간 동안 압둘 라흐만은 몇번이나 그
3) [역주] 스페인의 납부도시로 이슬람 통치시대의 스페인의 수도 .
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뻔했던 제국을 수호하고 강화하는 데 분주 했댜 그의 앞에는 지난한 과제가 놓여 있었다. 압둘 라호만의 독립 을 질투하며 그를 공동의 적으로 간주하는 휘어잡기 힘든 아랍 귀 족들과 부닥치게 된 것이다. 그와 그들 사이에는 영구적인 타협이 불기능하였고 그들보다 강력한 힘에 의해서만 그들을 막을 수 있었 으므로 압둘 라흐만은 대부분 아프리카에서 수입된 베르베르인 용 병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숙명적으로 서쪽의 이슬람 제 국은 쇠퇴기의 압바스조를 연상케 히는 전제적이고 친위대적인 성 격을 점차 띠게 되었고 결국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다. 또한 왕은 광 적인 기독교도인 스페인의 민중과 함께 이방인들의 지배를 벗어나 고 싶어하는 막강한 스페인 민족파를 고려해야 했다. 이들 기폭제적 인 요소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힘과 책략이 필요하였으며 압둘 라흐만이 세운 이 왕조가 2 세기 반 동안 존속되고 그 어느 때 보다도 스페인이 번영과 문화의 찬란한 시대를 누렸다고 한다면, 전 적으로 그 공은 적조차도 감탄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이 대담한 모험가에게 돌아가야 한다. 어느날, 칼리파 만쑤르가 신하들에게 물 었다고 한다. <‘꾸라이쉬의 송골매’가 누구냐?> 그들이 답하였다. <신자들의 지도자시여, 그 칭호는 강력한 제왕들을 멸망시키고 내 전을 종식시킨 당신의 것입니다.> 칼리파가 말했다. <아니다, 그것 은 내가 아니다.> <그럼 무아위야 혹은 압둘 말리크인가요?> 이에 만쑤르가 대꾸하였다. <‘꾸라이쉬의 송골매’는 혼자서 아시아와 아 프리카의 사막을 횡단하고 군사의 도움도 없이 바다 건너 미지의 나라로 입신 출세의 길을 찾아나선 압둘 라흐만 븐 무아위야이다. 판단력과 결단력만을 무기로 심 0} 그는 적을 정복하고 반도(板徒)들 을 전멸시켰으며 변방을 튼튼히 하고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와 같 은 위업은 이전의 그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달성된 적이 없다 .>4) 4) Ibn al-'Idha rt, al-Ba yan al-Mug h rib , ed. by Doz y, vol. ii, p. 61 이 하에서 요약.
스페인의 이슬람 스페인의 무슬림 중에서 아랍인들은 소수 세력을 형성하였다. 더 욱이, 그들은 베드윈 전통에 물든 사람들에게서 충분히 예상되는 것 이지만 종교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였고 이슬람법은 하찮게 생 각하였다. 이 베드윈들의 조상들은 다마스쿠스의 세속적인 우마이야 조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랍인 세도가들의 보호하 에 있던 스페인인 개종자들로서 이른바 <배교자>들인 <무왈라둔 Muwallad 血>이나 베르베르족은 그렇지 않았다. 이 베르베르족은 열정적이고 차분한 기질로 유명하였거니와 그들이 귀의한 종교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스페인의 무슬림 집단 가운데서는 엄격한 정통 교파가 득세하였다. 야흐야 븐 야흐야 Y at:iy a b. Ya t:iya 이들 중 가장 전형적인 정통 교파 무슬림이 베르베르인인 야흐야 븐 야호야 (849 년 사망)이다. 況세의 나이에 그는 동부 지역으로 여행 하여 말리크 븐 아나스 밑에서 사사하였는데 그는 야흐야에게 『무 왓따 Mu u:atta’』로 알려진 그의 유명한 저술을 구술케 하였다. 야호 야가 어느날 많은 동료 학생들과 말리크의 강의를 듣고 있던중 한 학생이 <저기 코끼리가 온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모두 그 동물을 구경하려고 밖으로 달려갔지만 야흐야는 꿈찍도 하지 않았다. 말리 크가 말했다. <왜 나가서 구경하지 않느나? 이런 동물은 스페인에 서는 구경도 할 수 없을 텐데.> 이에 야흐야는 다움과 같이 대답하 였다. <제가 조국을 떠나 온 것은 선생님 밑에서 사사를 받으며 지 식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말리크는 이 대답을 듣고 매우 기뻐하 며 그가 스페인 사람들 중 · 가장 지혜로운(‘印il) 사람이라고 칭찬하 였다. 스페인에 돌아온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전파시키는 데 진력하 였으며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어떠한 공직도 완강히 고사했다. 그러 나 이븐 하즘의 말대로, 판사 G 떄 5) 임명시에는 반드시 야흐야의 견
5) [역주] 아랍어 표기는 q a cji이다.
해를 물어보고 그가 추천한 사람을 임명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과 명성은 대단하였다고 한다 .6)
6) lbn Khallik a n, ed. by Wi lste nfel d, No. 802; 드 슬란의 번역서, vol. iv, p. 29 이하 .
이처럼 전통에 대한 강한 집착에 바탕을 둔 말리키파의 체계는 그곳의 법이 되었다 . 10 세기의 한 학식 있는 문필가는 <스페인 사 람들이 꾸란과 『무왓따』만을 인정하고 있다 . 아부 하니파나 샤피이 파의 추종자가 발견되면 그들은 스페인에서 추방되며 무타질라파나 쉬아파 또는 그와 비슷한 유파의 사람이 발견되면 사형을 딩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 )고 말했다. 거만하고 고집불통이며 권력에 대한 야심을 가진 이슬람 신학자들이 국정에서 종속적인 역할을 하고 싶 을리 만무하였다 . 압둘 라흐만의 후계자인 히샴(范꾼졌 5) 이야말로 신앙심과 자기들을 위한 헌신으로 그들 마음에 꼭 드는 왕이었다. 따라서 그에게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7) Muq ad dasI(ecl. by De Goeje ) , p. 236, 골트치어에 의해 재인용됨, Di e Za hiri t en , p. 114.
<변방 rabad> 의 반란 하캄 (7% - 泣 2) 은 히샴처럼 고분고분하지는 않았다. 그는 성직자들 을 존경하고 예우를 해주었지만 그들의 정치 관여는 용납하지 않겠 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성격이 불 같은 야흐야 븐 야흐야가 이끄는 불평분자들은 욕설과 협박으로 옹수하고 코르도바의 주민들, 특히 이 도시의 남쪽 <변방>에 거주하는 <배교자>들에게 압제자 와 그의 무례한 병사들에 대항하여 반기를 들도록 호소하였다. 히즈라 100 년 라마단 월 (814 년 5 월)의 어느 날, 하캄은 수비대와 갑자기 차단되고 성난 군중들에 의해 궁전이 포위되었다. 그러나 그 는 용기를 잃지 않고 침착함과 교묘한 계략을 쓴 덕분에 그가 처한
위험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 . 반란이 일어난 < 변방 > 지역은 불 길에 휩싸였으며 대학살 을 면한 주민 약 6 만 명이 추방되었다 . 그 러나 정작 반란의 주범은 처벌되지 않았다. 하캄은 이제 신학자들을 더 이상 성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왕에게서 무력으로 뺏지 못 한 것을 말로 부탁해서 얻어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 이다. 대개 아랍인이거나 베르베르인인 그들은 자신 들 을 각별히 배 려해 주도록 왕에게 요구하였다. 그들은 곧 세력을 회복하였고 압둘 라흐만 2 세(오 2 년 852 년)의 치세 동안 반란의 주모자인 야흐야는 자 기 멋대로 교회 정책을 지시하거나 재판시 은전을 베풀었다. 우마르 븐 하프쑨 ‘Umar b. Mc 사 s0n < 변방> 지역의 반란은 무슬림이거나 기독교도인 스페인 주민들 과 다른 한편으로 코르도바 군주 사이의 길고도 피비린내 나는 투 쟁의 와중에서 벌어진 하나의 삽화적인 사건에 불과하였다. 이 투쟁 은 라이벌 사이인 양대 아랍 부족 때문에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었 다 . 그들은 스페인 애국지사들에 맞서기 위해 때로는 반목 관계를 일시 중지하기도 했지만 어떤 경우든 그토록 증오하던 우마이야 정 권은 결코 지지하지 않았다. 이 독립 전쟁의 영웅은 우마르 븐 하프 쑨이었다. 그의 가문은 서고틱 Wes t -Go thi c 계로 이슬람으로 개종해 서 말라가 M 최ag a 81 의 동북부 산악지역에 정착하고 있었다 . 혈기가 넘치고 사소한 일에도 칼을 빼들고 싸울 정도로 싸움을 좋아한 이 젊은이는 이내 곤경에 빠졌다. 처음에는 론다 Ronda 의 황량한 성채 에 은신하면서 산적 노릇을 하다가 치안대에 붙잡혔다. 그 후 바다 건너 아프리카로 간 지 얼마 안 되어 그의 옛 은신처로 돌아와 도 적떼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 여기서 2 년 동안 버티다가 항복할 수밖 에 없게 되자 그와 도적떼들이 제국 군대에 편입되어야 한다는 코 8) [역주]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Andalus i a 지방의 주.
르도바의 술탄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나 우마르에게는 술탄이 그에 게 안겨 준 명예보다 더 큰 명예가 운명적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상 관으로부터 몇마디 경멸조의 말을 듣고 자존심을 상한 그는 부하들 을 모두 데리고 론다 쪽으로 서둘러 떠났다. 그들은 한때 로마의 요 새였던 보바스트로政 )bas tr o 성에서 난공불락의 은신처를 발견하였 다. 도지에 따르면, 이때부터 우마르 븐 하프쑨은 산적 두목이 아니 라 남부에 있는 모든 스페인 사람들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 무법의 건방진 용병은 사소한 폭력 행위도 엄격하고 공평하게 다스 리는 것으로 유명하였으며, 부하들로부터는 존경받고 같은 동족민들 로부터는 민족적 대의의 수호자로서 추앙받는, 고상한 애국지사로 탈바꿈해 있었다. 그는 남은 여생 동안(ffi4 -917) 끈질긴 게릴라전을 벌여 아랍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종국에는 행운 의 여신이 그의 곁을 떠나버려 그의 일당이 전멸되기 불과 수년 앞 서 죽고 말았다. 말하자면 다행스럽고 시의적절한 죽음이었다lfe l ix op po rt unitate mort is). 자신들의 지도자가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눈 에 띄게 사기가 저하된 무슬림 스페인 사람들은 더 이상의 투쟁은 무모한 것으로 생각하고 정부와 화해하기를 바랬다. 912 년, <신앙의 수호자 al-N~ ir Ii-din All ah>인 압둘 라흐만 3 세는 그의 조부 아미 르 압둘라Amir 'Al:xiull ah 의 뒤를 이어 코르도바의 왕좌에 올랐다. 이 위대한 군주의 성격과 재능, 모험심이 한 감동적인 역사가의 저 술 중 다음 구절에 뚜렷히 묘사되어 있다. 그의 저술은 약 印년 전 발행되었지만 여전히 권위가 있다 .9) 압둘 라흐만 양 ~1(912-001) <스페인을 지배한 우마이야 군주 중에서 최고의 군주는 당연히 압둘 라 호만 3 세이다. 그의 업적은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제국이 혼란과 9) Dozy , Hi st o i r e des Musulmans d'Espa gne (Ley d en, 1861), vol. iii, p. 90 이하.
내란에 빠지고 파벌 싸움으로 분열되며 영토가 다수의 이질적인 왕들사이 에 분할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또 북부의 기독교도들로부터 끊임없는 공격 에 시달리며 레온 왕국 LeonneselOI 이나 아프리카인들에게 정복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처럼 수많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페인을 안팎으로부 터의 위험에서 구해냈다. 그는 스페인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과거보다 더 위대하고 강력한 나라로 만들었다. 국내적으로는 질서와 번영을 이룩하 고 국의에서는 존경을 받았다.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던 국고는 이제 재화 가 넘쳐나게 되었다. 제국의 국고 세입은 매년 육백 이십 사만 오천 개의 금화에 달하였는데 압둘 라흐만은 그 중 3 분의 l 을 일상 경비에 쓰고 3 분 의 1 은 예비비로 남겨두었으며, 나머지는 건설 사업에 쏟아 넣었다 . %1 년, 그의 금고 속에는 2 천만 개나 되는 엄청난 금화가 들어 있었다고 하며 재 정 문제에 대해 전혀 문외한은 아니었던 한 여행자가 압둘 라흐만과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통치하던 함단 왕조의 왕 나씨르 알-다~ 당대의 가장 부유한 왕이었음을 우리에게 확인해 주고 있다. 나라의 형편은 풍족한 재정 상태와 일치하였다 . 농업, 산업, 상업, 예술과 학문 등 모든 것이 번창 하였다. 오십만 명의 인구와 삼천 개의 모스크 호화 궁전, 십일만 삼천 채 의 주택, 삼백 개의 목욕탕, 28 개의 변방 지역을 갖춘 코르도바는 그러나 코르도바 사람들이 곧잘 비교하던 바그다드보다는 규모나 호화 정도에서 떨어졌다. 압둘 라흐만의 권력은 막강하였다. 그는 막강한 해군력으로 지중 해의 대국인 파띠마조와 겨룰 수 있었으며 모리타니아l\!Iauritani a 의 관문인 세우타를 확실하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압둘 라호만이 북부의 기독교인들 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세계 제일의 잘 훈련된 군대 때문 이었으리라. 자존심이 강한 군주들도 그에게 동맹을 맺어달라고 간청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독일, 이태리, 프랑스의 왕들이 그에게 사신을 보내왔 다. 분명히, 이것은 눈부신 성과였다. 그러나 우리가 이 영광스러운 치세를 연구할 때 경탄과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만들어진 물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물건을 만든 사람이다. 죽 그것은 어떤 것도 놓치지 않는 저 포 괄적인 이해력이다 . 이는 가장 고상한 개념에서보다 가장 사소한 일에서 돋 10) [역주〕 스페인 서북부의 한 주 : 원래 왕국.
보인다. 중앙 집권적이며 국민과 군주의 통합성을 이룩하고, 동맹 을 통해 일종의 정치적 균형을 세우며 크게 관용을· 베풀어 타 종교의 신자들을 회 의에 초청하는 이 예민하고 총명한 사람은 중세의 칼리파라기보다 근대적 인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 '
11) 압둘 라흐만 3 세는 스페인 우마이야조의 역대 군주 중 이 칭호를 가진 최초의 칼리파였다.
만쑤르 본 아비 아미르 M 硏 s0r b. A i ‘Ani r(97G1m2 년)의 섭정 요컨대, 압둘 라흐만 3 세는 스페인의 무슬림들을 단일 민족으로 만들고 아랍인들과 스페인인들로서 이루어진 통일된 안달루시아1 2) 국가를 형성하였다. 이 국가는 곧 알게 되겠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 로 신속하게 유럽이 시기할 만큼 또한 이슬람 동부 지역의 어느 나 라도 앞지르지 못할 고도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더불어 우마이야조의 쇠퇴는 시작되었다. 그의 아들· 하캄 2 세 (W&; 터 사망)는 열한 살된 아들을 후계자로 남겼는데 그가 칼리파 히샴 2 세 이다 . 한편, 그의 모친 오로라 Aurora 와 야심 찬 대신 무함마드 븐 아비 아미르 M 曲印 m 효i b. AbI ‘Amir가 섭정을 하였는데 후자는 사실상 스페인의 군주처럼 행세하였다. 그의 출세 방법이 어떻다 해 도, 또 어린 칼리파의 정신적 성장을 고의로 저해하고 그를 수도사 같은 은둔생활에 처하게 하는 등 불행한 칼리파를 다룬 방법이 어 찌 되었든 간에 그가 통치는 잘 하였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 는 위대한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다 . 그가 자칭 <승리자 al-~ur> 라고 했을 때 그의 헛된 거드름을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매 년 두 차례씩 그는 군대를 이끌고 기독교도에 대항하는 일에 익숙 해져 있었다. 그는 공포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오십여 차례 이상 의 전투에서도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그는 1002 년 사망하였다. 한 기독교 수도승은 그가 쓴 역사서에서 <알-만쑤르는 지옥에 묻
12) [역주] 스페인의 이베리아 반도를 아랍인들은 알-안달루스 al- Andalus 라 부른다. 스페인어로는 안달루시아 Andalu ci a 로 표기한다.
혔다>고 기록하였지만 무슬림들은 그들의 수호자 묘비에 다음 구절 울 새겨 넣었다. <그는 아직도 살아서 우리 앞에 마주보고 서 있는 것 같건만 그의 이야기는 유품 중에서나 찾을 수 있으니, 세월은 그와 필적할 사람이나 스페인의 협곡을 지켜줄 사람을 또 다시 낳지 못하리 .>' : 11
13) Maqq ali, vol. i, p. 259. 마까리의 저서는 무슬림 스페인의 문학사에 대한 주요 전거가 되므로 필자는 편의상 여기서 그에 관해 약간 기술 코자한다. 저자인 아흐마드 븐 무함마드 알-틸림사니 알-마까리 Abroad b. M 曲 ammad al-Til ims aru al-Ma qq an (1 632 년 사망)는 그라나다의 유명한 대신 이븐 알 - 카멉 Ibn al-Kha ti b 의 전기를 쓰고 거기에 8 장으 로 된 길고 광범위한 서론을 덧붙였다 : (1 장) 스페인의 특징 열거, (2 장) 아랍인들에 의한 스페인 정복, (3 장) 스페인 왕조사, (4 장) 코르도 바, (5 장) 동방을 여 행 한 스페 인 계 아라비 아 학자들, (6 장) 스페 인을 방문한 동양학자들, (7 장) 스페인 문학사에 관계가 있는 잡문, 일화, 시 인용문, (8 장) 기독교들의 스페인 재정복과 아랍인들의 축출이다. 그의 전집의 제목은 Nq fb al-T ib mi n gh u$ rl al-Anda/us al-ra(:J. 1J wa- dh ikr wazir ihii Lis a n al-Di n Ibn al-Kha t.Jb이다 홍미롭고 귀중한 자 료를 풍부히 갖고 있는-<고로, 하나의 작은 도서관이라고 할 만하 다>-서론은 도지와 다른 유럽의 아라비아 학자들에 의해 Anale- ctes sur L'H i st o i r e et la Lit ter atu r e des Arabes d'Es[ Xlgn e 란 제 목 으로 편집되었다 (Le y den, 1855-1861).
그의 죽음으로 근위병들이 사태를 장악하였다. 베르베르인들과 노 예들이 14) 자기들끼리 왕국을 분할하였으며 혁명과 내란속에서 우마
14) 노예 $a qali ba 란 명칭은 본래 스페인의 아랍인들에게 팔려간 북부의 여러 인종들에 속하는 전쟁 포로들에 붙여졌지만, 이내 이 용어는 국 적에 상관없이 하렘 harem( [역주] 무슬림 가옥에서 남자들의 출입이 금지되는 여자들만의 방)이나 군대에서 근무하는 모든 외국인 노예들 을 포함할 만큼 확대되었다. 마물루크나 터키의 옛 근위보병처럼 그 들은 왕궁의 비호 아래서 특권층을 이루었으며 압둘 라흐만 3 세의 통 치 이래로 그들의 숫자와 영향력은 점차로 중대하였다. Dozy, Hi st . des Mus.d'Es[X lgne , vol. iii, p. 58 이하 참조.
이야조는 사라져 갔다(1 031 년) . 군소 왕조의 왕들 MulOk al-Tawa' if 11 세기 스페인의 역사는 15 세기 이태리의 역사와 대단히 흡사하 다고 할 수 있다. 압둘 라흐만 3 세의 찬란한 제국은 붕괴되고 그 폐 허로부터 뜻밖에도 군소 국가들이 나타났다. 이들 국가는 운 좋은 용병대장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 이슬람 학자들이 지칭하듯이, 이들 <군소 왕조의 왕>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왕은 세비야의 압바스인 들이었다. 정치적으로는 부패한 시기였지만 스페인의 물질적 번영은 여전하였댜 한편 문화적으로도 이 시대의 스페인 사회는 전례없이 높은 문화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면 여기서 무슬림들이 유럽 땅을 정복한 기간 중 가장 결실을 맺었던 시기의 문학과 학문의 발 달을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아람 문화가 스페인에 미친 영향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시아에서의 아랍 정복자들은 자기들보 다 훨씬 뛰어난 고대 문화에 매혹되었지만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가 서는 그들의 역할이 뒤닙評]었다. 침략자들이 이베리아 반도 구석구 석까지 그들의 정복사업을 펼치자 수많은 기독교도들이 침략자들의 수중에 들어왔으며 대부분 무슬림들의 보호를 받고 살아갔다. 이들 기독교도들은 정부로부터 대우를 잘 받아 종교적 자유를 누리고 때 로는 군대나 궁전에서 고위직까지도 등용되었다. 많은 기독교도들이 급속히 이슬람 문명에 물들어 갔다. 그리하여 9 세기 중반경에는 코 르도바의 주교인 알바로 Alvaro 조차도 그의 신자들이 아랍인들의 시 와 이야기 또는 이슬람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작품을 반박하려고 읽는 것이 아니라 아랍어의 정확하고 우아한 표현법을 배우기 위해 그것들을 읽는다는 것을 알고 불만을 털어 놓을 정도였다. 그는 다 음과 같이 묻고 있다. <요즈음, 성서에 관한 라틴어 주석을 읽을 줄
아는 평신도를 어디서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복음서나 예언자서, 사도행전을 공부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가? 아, 슬프도다. 재능이 뛰 어난 젊은 기독교인들이 모두 아랍어와 아랍인들이 쓴 글만을 익히 려고 한다. 그들은 아랍어 문헌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며 막대한 돈 을 들여 도서관에 보관할 아랍어 서적을 수집하여 서재가 훌륭하다 는 것을 만방에 알린다. 반면에, 그들과 기독교 문헌에 대해 얘기를 나누어보면 그 책들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경멸조로 답하기 가 일쑤다. 아, 슬프도다.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잊었으며 많은 기독교도들 중에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그런대로 라틴어 로 써서 보낼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도다. 반면 훌륭 한 아랍어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오히려 아랍인들보다도 훨씬 뛰 어난 솜씨로 아랍어 시를 지을 수 있는 기독교도들은 많도다. >15)
15) Dozy , 앞의 책 , vol. ii, p. 103.
이 선량한 주교의 말이 과장일지 모르지만, 이슬람 문화는 스페인 의 기독교도들에게는 커다란 매력으로 비추어졌음이 분명하다. 또한 모국어인 히브리어와 친족어인 아람어로 시와 철학, 과학 분야에서 지대한 공헌을 한 유태인들에게도 이슬람 문화는 관심의 대상이었 다. <배교자>들 즉, 스페인의 이슬람 개종자들은 몇 세대를 거치면 서 완전히 아랍화되었으며 바로 이 계층에서 스페인의 아랍 문학을 더욱 빛나게 한 문인들이 배출되었다. 스페인 아람인들의 시 대체로 유럽의 무슬림들이 지은 시는 동부 아람 시인들의 작품에 서 나타난 것과 동일한 특성을 보여 준다. 바그다드와 알렙포의 계 관시인들도 끊올 수 없었던 구태의연한 인습이 코르도바와 세비야 에서도 여전히 성하였다. 그러나 동부의 아랍 시가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으로 변형된 것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도 아리아족과 셈족이
점차 융합됨으로써 새로운 요소가 도입되어 양 민족의 문학에 영향 을 미쳤다. 아마도 스페인에서의 아라비아 시의 가장 홍미로운 특징 은 연애시에서 흔히 나타나는 열렬한 사랑과 로맨틱한 분위기, 죽 중 세 기사도를 연상케 히는 분위기일 것이다. 둘째로는 자연의 미에 대 한 새롭고도 섬세한 감각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스페인의 아랍시 는 무알라까트나 무타납비의 시 정신속에 쉽게 빠져 들지 못하는 유 럽의 많은 독자들의 홍미를 끄는 것이다. 지면이 넉넉하여 명시선집 의 편자들에 의해 수집된 매혹적인 서정시나 묘사시 중 일부를 번역 할 수 있다면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폰 샤크 Von Schack161 가 그의 저술 『스페인과 시칠리아에서의 아람인들의 시와 예술 Poesie 따 Klf flSt der Araber in S]X JJ1l.e n 따 S ici li en 』 (2 판, Stu - ttgart, l 'im년)에서 일련의 훌륭한 번역시를 제공하고 있으므로 여기 서는 생략해도 별로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16) [역 주] Adolf Fri ed rich Graf Von Schack(l815-1894) : 독일의 동양학 자. 아랍 문학 특히 안달루시아 문학에 관십을 갖고 연구한 문학사가 이자 시인이다.
까즈위니 Q-aZWinI는 포르투갈의 쉴브 S hil b(S il ves) 마을에 관해 언 급하면서 다움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였듯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소수의 예외 룰 제외하곤 거의 모두 시인들이며 문학에 심취해 있다는 사실이다. 지나가다가 쟁기로 밭을 갈고 있는 농부를 발견하고 그에게 시를 몇 구절 낭송해 달라고 한다면 죽석에서 그는 어떤 주제이든 요구 하는대로 시를 읊어 줄 것이다 .>17) 이러한 민요 중에서 <무왓샤흐 Muwashs hab>와 <자잘 Zaj al> 이 스페인의 무슬림들이 특히 좋아 하는 유형의 민요이다 .18) 둘 다 모두 스페인에서 발생된 것으로 구 조는 매우 비슷하다. 즉 몇개의 연(聯)으로 이루어지는데, 주 각운
17) Qa zwi inI, Ath a r al-Bi/ ad , ed. by Wi .ist e n feld , p. 364, I. 5 이 하.
18) Schack, Poesie und Kunst der Araber in Sp anien und Sic ilie n , vol. ii, p. 46 이 하 참조.
mas ter -rh yrre이 매 연의 끝에 오면서 시 전체에 후렴처럼 쓰여지 며 다음 표에서 보듯이 다양한 일련의 하위 각운에 의해 연속적으 로 끼어들게끔 각운이 잘 배열된다. aa bbba ceca ddda 이들 시나 민요는 대개 일반 민중이 사용하는 방언으로 지어졌으 며 고전적인 시의 운율법을 고려하지 않았다. 음유시인 이븐 꾸즈만 lbn Q끄 mm(1lOO 년 사망)은 최초로 <자잘>을 문학적 수준으로 끌 어올렸다. 다음에 <무왓샤흐>의 예를 들어 본다. <이리 와서 그 소중한 잔을 나에게 다오- 거기에 황금빛 바다가 넘치게 가득 부어 다오! 거품이 가슴 위에 진주처럼 번쩍일 때 오래 묵은 술을 손님들에게 돌리면, 그날은 어둠을 빼앗긴 밤, 희희낙락속에 거품이 일고 반짝거리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은 묘성(昴星)의 성단(星團)에서 가져온 것 감미로운 음악에 맞추어 술잔을 돌려 다오. 선선한 향기 풍기며, 조용히 이슬 내려 땅을 적시고, 내 팔다리를 상쾌히 적시는 곳, 여기 이 둥근 꽃 무늬 양탄자 위에서. 푸르른 정원에서 나와 단 둘이
가희는 자연의 풍경을 매혹한다. 그녀의 미소는 빛나는 광채를 띤다. 염탐하는 이 없으니, 나는 수치심을 던져버리고 소리친다, ‘자, 홍겹게 놀자 !'>1 9 1
19) 아랍어 원문은 무함마드 븐 하산 알-나와지 M u.bamrna d b. ijasa n al- Nawajr (145.5년 사망)의 술을 예찬한 시집 Ifalbat al-Ku mayt 제 11 장 에 소재하며 그랑쥐 레 드 라그랑쥐 G rang ere t de Lagrang e 의 Anth o- Zog ;,e Arabe, p. 202 에 도 원문이 실 려 있다.
압둘 라흐만 1 세의 시 스페인의 우마이야조는 그들 가문의 전통에 맞게 꾸란보다 시와 음악 , 순 문학을 더 애호하였다. 심지어 <꾸라이쉬의 송골매>인 압 둘 라흐만 1 세의_ _ 一야자나무에 관한 유명한 시가 그가 지은 것이 틀림없다면 근엄한 외모의 내면에는 부드러움과 인자함이 감추 어져 있었다. 코르도바의 그의 정원에는 시리아에서 옮겨 심은 한 그루 야자나무가 쓸쓸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어느날, 압둘 라호만이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향 생각을 하며 귀양살이의 쓰라림 올 느껴 다음과 같이 큰 소리로 말했다 . <야자여, 너도 나처럼 복이 없어서 동방의 고향으로부터 아득히 먼 이곳 서빙에 와서 이방인 신세구나. 울거라! 하나, 그렇게 할 수도 없겠구나. 말 못하는 기죽은 나무신세. 너 역시 나에게 동정할 처지가 아니구나. 아, 아직도 너에게 흘릴 눈물이 남아 있다면, 유프라테스 강변의 네 친구들을 위해 슬피 울 수 있으련만.
그러나, 너는 그곳의 큰 숲도 기억 못한다. 적을 미워하느라 내가 오랜 친구들을 망각하였듯이 .>m l
20) Al-]J ul lat al-Siy a ra of Jb n al-Abbar, ed. by Dozy, p. 34. 마지 막 구절에서 원문에는 <적> 대신에 <압바스의 아들들>로 되어 있다. 압둘 라호만이 이 야자 나무에 대해 말한 다른 시구는 Maqa m, vol. ii, p . 37 에 인용되어 있다.
가수 지르야브Ziry ab 압둘 라호만 2 세 (822 - 852) 의 궁전에는 한 페르시아인 음악가가 총 애를 받고 있었다. 그는 유명한 가수이던 이스하끄 알-마우씰리 Is 函 al-Ma~ ili의 제자로서 칼리파 마흐디의 <피보호민 mawla> 이였던 지르야브였다. 2 ” 이스하끄는 이 젊은이가 자신에게 위험한 경쟁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바그다드를 떠나 스페인으로 가서 입신 출세의 길을 찾도록 설득하였다. 이에 스페인으로 건너간 지르야브는 압둘 라흐만으로부터 진심어린 환영을 받았다. 호화 저 택과 후한 급료를 제공받는 등 환대를 받았다. 이 다재다능하고 기 예를 갖춘 예술가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기호(暗好)와 예법에 관련된 모든 것에 유행을 만들어냈다. 죽 여자의 화장술과2'2 1 요리법을 개발하였으며 Zll 일 년 중 철 따라 무슨 옷을 입어야 하는
21) 지르야브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Maqq ari, vol. ii, p. 83 이하를 참 조. Dozy, Hi st . des Mus. d'E s pa gne , vol. ii, p. 89 이 하 비 교. [역 주] 본래 지르야브는 날개가 겁고 꾀꼬리 같은 울음소리를 내는 작은 새 이름이다 . 그의 살색이 검은 색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양병 우(1 982) 외, 『아시아의 중세·이슬람 세계』(삼성출판사), p. 350 참조.
22) [역주] 코르도바 시내에 미장원을 열고 화장 방법, 흰머리 뽑기, 칫 솔 사용법, 머리털을 둘로 가르더라도 이마나 귀 위에 늘어뜨리지 않 고 밀을 깎아내어 눈썹이나 목덜미, 귀 따위를 가리지 않게 하는 것 도 가르쳤다. 양병우 외, 같은 책, p. 351 .
23) [역주] 전에는 요리가 순서 없이 아무렇게나 날라 오던 것을 먼저, 수프를 내오고 그 다음 고기요리, 고상한 맛을 내는 새고기 요리, 그 다음이 호도·편도·꿀 둥으로 만든 단 것, 또는 개암나무 열매를 넣거 나 바닐라를 친 과일·과자 동의 순서로 내오도록 가르쳤다. 식탁에는
그때까지 베헝깊을 깔던 것을 보드라운 가죽을 깔게 하였고, 술잔도 금은으로 만든 것보다 질 좋은 유리로 만든 것이 식탁에 어울린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 양병우 외, 같은 책 , p. 351.
지를 가르쳐 주었다. 2'1 1 스페인의 왕들은 백성들에게 그를 귀감으로 삼고 본받게 하였다. 그의 권위는 그곳에서 무슬림 통치가 끝날 때 까지 지속되었으며 널리 인정받았다 .251 지르야브는 동부에서 스페인 으로 온 많은 재주 있고 학식 있는 사람들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배움의 길을 찾아fi talab al-'il rn> 아프리카와 이집트, 아라비아 의 성도, 시리아와 이라크의 대 도시, 쿠라산, 중앙 아시아의 트란스 옥사니아, 어떨 때는 중국까지 여행한~ ) 스페인 학자들의 명단에는 마까리 역사서의 제 윤상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무슬림 스페인이 배출한 저명한 학자와 문인들이 거의 모두 망라되어 있다. 이처럼 사상의 교류가 계속 활발하게 이루어짐에 따라 지방색은 거 의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동부의 비평가들이 이븐 하니 lbn Harn 와 이븐 자이둔 Ibn 7.ayd un 같은 유명한 안달루시아의 시인들을 <서부의 부흐투리와 무타납비>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24) [역주] 6 월 초부터 9 월 말까지는 흰옷을 걸치고 봄에는 가벼운 비단 의 느슨한 옷이나, 빛깔이 산뜻한 소매 없는 웃옷을, 겨울에는 솜올 넣은 망토나 모피 동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까지 가르쳤다. 그리하여 코르도바는 지르야브 때부터 풍속이 바뀌어졌다. 양병우 외, 같은 책, p. 351.
25) Maqq a n, 앞의 책, p. 紅 I. 10 이하.
26) [역주] 이는 <배울 수만 있다면 멀리 중국까지 가서라도 배워 와라. 사람이 비록 적은 지식이라도 배워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만 있다면, 그에게는 70 명의 $i d diq(정의로운 사람)가 받는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라는 하디쓰 구절에서 암시받아 인용한 것이 분명하 다 . Mulnmmad En cycl o{X led ia of Seera h, v. I, p. 없 3 참조.
하캄 2 세의 도서관 10 세기는 스페인 역사에서 운이 좋았던 시기이다. 이제까지 내전 으로 분열되었던 스페인은 압둘 라흐만 3 세와 그의 후계자 하캄 2
세 밑에서 그 단결된 힘을 물질적, 지적 문화의 발전에 쏟았다. 하 캄은 열렬한 애서가였다. 그는 사방으로 대리인을 보내 고본(稿本) 을 구입하였으며 그의 궁전에는 사십만 권의 책이 수집되었다. 궁전 은 사서와 복사자, 제본업자들로 붐몄다. 하캄 2 세는 그 많은 책을 직접 통독하였다고 하며 자신이 직접 대부분의 책에 주석을 달았다 고 한다. 학자들에 대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후하게 대했다 . 그는 이쓰파한의 아부 알-파라즈가 당시 집필중이던 명저 『 노래의 책 』 의 초판을 구하기 위해 그에게 천 디나르를 선불로 주었다. 학자들을 환대해주고 학문을 장려한 것 외에도 하캄은 가난한 백성들이 교육 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그는 수도에 刃개의 무료 학교를 세우고 사비(私 費 )로 교시들의 급 료를 지불하였다. 기독교권의 유럽에서 학문 발전의 싹은 성직자들 에게서만 엿보인 반면, 스페인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읽고 쓸 줄알았다. 코르도바 대학 <코르도바 대학은 당시 세계에서도 유수한 명문 대학 중 하나였다. 강의 가 이루어진 대 모스크에서 꾸라이쉬 부족 출신의 아부 바크르 븐 무아위 야 Abu Bakr b. Mu'a wiy a 는 무함마드에 관한 전승을 논하였다 . 바그다드 출신의 아부 알리 알-깔리는 고대 아랍인들과 그들의 속담, 언어, 시에 관 한 방대한 분량의 진기한 자료가 포함된 대작을 구술하였다. 이는 후에 『구 술서 .AmalI 』 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다. 문법은 아부 알리 알-깔리가 스페인 의 대표적인 문법학자로 꼽았던 이븐 알-꾸띠야 Ibn al - Qot:iyy a 가 강의를 맡았다. 다른 학문에도 그에 못지 않은 유명한 학자들이 있었다. 따라서 강 의실에 출석하는 학생들은 수천 명 단위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른바 ‘피끄흐 fiqh ' 학도 죽, 이슬람 법학도들이었는데 이는 당시 그 학문이 가장 돈벌이가 되는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 >m) 'Xl) Dozy, Hi st o i r e des Musulmans d'Espa gne , vol. iii, p. lfJ7 이 하.
동시대의 주목할 만한 학자들 중에는 압둘 라호만 3 세의 계관 시 인이자 『진기한 목걸이 al-‘ I qd al-Far jd 』 라는 제목의 유명한 선집의 저자인 이븐 압디 랍비히 Ibn 'Alxii Rabb ihi (940 년 사망)와 파띠마조 의 칼리파 무엇쯔 Mu‘ i zz 에게 불경한 찬양시를 읊은 이스마일 파의 개종자인 세비야 출신의 이븐 하니 (973 년 사망)가 있다 .28) 스페인의 역사가들로는 페르시아의 라이이가 고향인 아부 바크르 알-라지 Abo. Bakr al 一 Ra 띠(없刃년 사망)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고트족의 공주 후손인 이븐 알-꾸띠야 Ibn al- Qiltiyy a( 이 7 년 사망)가 있다. 또 한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마드리드 출신의 마술라마 븐 아흐마 드 Maslarna b. Abmad(l r::ffl년 사망), 마술라마와 거의 비슷한 시기 에 사망하였으며 유럽에는 알부카시스 Albucas i s 라는 이름으로 알 려진 명의(名 醫 )인 코르도바의 아부 알-까심 알-자흐라위 Ab o. al- Qa sim al-Zahra Wi가 있다.
28) lbn al-At hir, vol. viii, p. 457 에 인용된 시구를 참조.
압바디조 ‘Abbadid s (1a23-1001) 11 세기 전반에 스페인의 우마이야조가 멸망하자 코르도바는 일개 지방도시로 전락하였다. 코르도바는 여전히 스페인의 문학의 수도라 고 자처하지만 왕년의 영광은 이제 세비야, 알메리아Alrreria, 바다 호스 Bad aj oz, 그라나다 Grana da, 톨레도 Toledo, 말라가, 발렌씨아 Valenci a 등의 도시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독립 왕조들의 명성에 가 려 빛을 잃게 되었다. 이들 경쟁관계인 군소 왕국들 중에서 군사력 이 가장 막강하고 예술이 가장 찬란하게 발전된 곳은 바로 세비야 를 통치하던 압바디조였다. 그들의 권력 기반은 판사인 아부 알-까 심 무함마드 Abu al-Q asim M..tl).amrmd에 의해 다져졌다. <그는 백 성들을 정의와 중용으로 다스렸으므로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고 모든 사람들의 진실된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므로
판사의 직책은 기꺼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판서는· 그가 탐내던 군주 자리를 얻기 위하여 간교한 책략을 사용하였다. 우마이야조의 마지막 칼리파인 히샴 2 세는 오래 전에 신비에 쌓인 채 종적을 감 추었다. 히샴 2 세는 코르도바가 베르베르족의 습격을 받자 (1013 년) 그 도시에서 탈출한 후 아시아로 도망하였다고 하는데 그 후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가 여전히 생존해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가 사라진 지 幻년만에 어 느날 갑자기 칼라프 Khal af라는 이름을 갖고 왕위를 요구히~즌 자가 나타나 자신이 칼리파 히샴이라고 주장하였다 . 그는 이 사기극을 그 럴듯하게 만들 만큼 히샴과 아주 닮았다. 아무튼, 판사는 그것을 부 추길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우마이야조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정통성 있는 군주를 중심으로 다시 모이자고 호소 하였다. 코르도바와 몇몇 다른 국가들이 이 사이비 칼리파의 권위를 인정하였고 아부 알 - 까심은 그를 앞잡이로 삼았다. 믿을 수 없고 잔인한 압제자였지만 문학 애호가이기도 한 그의 아들· 압바드 ‘Ab 悼 d 는 정체를 드러내고 무타디드 al-Mu' tac;li d 라는 이름으로 통 치하였다 (1042-l ffi9년). 이어서 그의 아들 무타미드 al-Mu' tami d 가 뒤를 계승하였는데 그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아라비안 나이트』에 자주 나오는 다음 구절을 연상케 해준다. <눈동자의 구석을 바늘처 럼 뾰족한 조각칼로 새겨 놓으면, 누구든 경고받을 사람에게는 경고 가된다.> 세비야의 무타미드 (1069-1091 년) 그는 스페인을 통치한 모든 왕 중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가장 대접이 극진하며, 가장 후하고 가장 강력한> 왕으로 묘사된다. 그 의 궁전은 여행자들의 휴식처이자 시인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또 그 곳은 모든 희망이 집중되는 곳이며 재주꾼들의 사랑방이었다 .29) 무 타미드는 그 자신이 유명한 시인이었다. 이븐 밧삼 lbn Bassam 은
29) lbn Khall ikan , No. 697; 드 슬란의 번역서, vol. iii, p. 186.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는 꽃이 꽃망울을 터뜨릴 때처럼 아름다운 시 몇편을 남겼다. 설혹 그의 시가 시작( 詩作 )을 전문으로 하거나 장시속으로 하는 사람들에 의해 지어진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여전 히 매혹적이고 경탄할 만하며 각별히 독창적인 시로 여겨졌을 것이 다.> JO) 세비야에서의 무타미드의 호화생활에 대해서는 수없이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과두뀌비르 Guadu quivir 강둑을 따라 저녁 산책을 나선 것이라든지 관능적 파티를 연 것, 그의 대신이자 시인인 이븐 암마르 Ibn 'Ammar 를 대동하고 변장을 한 채 고요히 잠든 도시의 거리로 바람 쏴러 나가 겪은 체험담 , 평생을 헌신적으로 사랑한 루 마이키야 Ruma ykiyy a 란 이름으로 흔히 알려진 노예 소녀 이티마드 I 넙 mad 에 대한 연정에 관한 것들이다.
30) lbn Kha llika n, 같은 책 .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서운 재앙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되기 까지의 원인을 이븐 칼리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1)
31) 같은 책, p. 189. 보다 명확성을 기하기 위해 필자는 드 슬란이 번역 한 위 인용문을 약간 요약하거나 재구하였다.
스페인의 알모라비드조세 mra vi des < 당시 카스티야 @s til e: ri' 왕국의 군주이며 스페인 프랑크족의 왕이던 페 르디난드 Ferd inan d 의 아들 알폰소 Al pho nso 6 세는 세력을 한창 떨치고 있 었다. 그래서 군소 무슬림왕들은 그와 화평을 맺고 공물을 바칠 수밖에 없 었다. 무타미드 븐 압바드는 그의 세력이나 제국의 크기에 있어서 타의 추 종을 불허하였지만 그 역시 알폰소에게는 공물을 바쳐야했다. 톨레도를 함 락한 후 (1005 년 5 월 29 일) 이 기독교 군주는 무타미드에게 협박조의 서신을 보내 요새를 내놓고 항복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럴 경우 땅은 그대로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말에 화가 치민 무타미드는 사신을 때리고 그의 수 행원 모두를 처형하였다 .331 코르도바로 진군하고 있던 알폰소는 이 소식을
32) [역주] 스페인 중부의 옛 왕국 .
33) 이 사건에 대해 다소 상이한 해석이 Dozy , Hi st o i r e des Musulmans d' Espa gne , vol. iv, p. 189 이 하에 있다.
듣자마자 세비야 를 포위 공격하기 위해 무기 공급을 받고자 톨 레도로 돌아 갔다. 셰이크들과 이슬람 학자들이 이 계획을 알고 모여서 말했다. ‘보라, 우리 군주들이 서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동안에 무슬림 들 의 도시가 프랑크 족의 손에 어떻게 넘어가고 있는 지 를 ! 이런 사태가 계속된다면 프랑크족이 전 지역울 정복하고 말 것이다.’ 그런 다음 그들은 코르도바의 '판사’인 압 둘라 븐 무함마드 븐 아드함 ‘Alxlullah b. Mu1)amrnad b. Adham 에 게 가서 무슬림들에게 닥친 불행과 그들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숙의했다. 각자 나름대로의 의견이 있었지만 ‘물랏싸문 M 며 a ththamiln ' 3 왕국의 왕이자 모로코의 군주인 아부 야꿉 유수프 븐 타쉬핀 Abu Ya 'qu b Yusu f b. Tas hifi n 에게 원조를 청하는 편지 를 보내자는 데 최종적으로 의견이 모아졌 다 . 그 후 ‘판사’는 무타미드를 방문하고 그간의 경과를 보고하였다. 무타미 드는 그와 같은 편법을 쓰자는 그들 의견에 동의하고 ‘판사’가 직접 친서를 휴대하여 유수프 븐 타쉬핀에게 전달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세우타에서 회 담이 열렸다. 유수프는 모로코 시에 그가 남겨 두고 온 병력을 소집하여 이 들을 먼저 스페인으로 파견하였고 곧이어 일만 명의 병력을 추가로 보냈다. 역시 병력을 모은 무타미드가 그를 마중나갔다 . 그러자 무슬림들은 이 소식 을 듣고 이교도들과 싸우기 위해 각지에서 급히 모여들었다. 당시 톨레도에 있던 알폰소는 그에게 합류하러 온 다른 군대 를 제외하고 4 만 필의 군마를 이끌고 출전했다. 그는 장문의 협박 편지를 유수프 븐 타쉬핀에게 보냈는데 유수프는 그 뒷면에 다음 문구를 적어 되돌려 보냈다 . ‘어찌될지는 두고보 면 알 것이다!'. 이 회답을 읽고 난 알폰소는 이 자야 말로 각오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겁을 잔뜩 먹었다.
34) 직역하면 <리쌈lit ham( 얼굴의 아랫부분을 가리는 덮개)을 쓴 사람 들>을 의미하는 <물랏싸문>은 사하라의 베르베르 부족민들, 이 당시 북부 아프리 카를 지 배 하던 이 른바 알모라비 드족 al-Murab it un 을 지 칭한다.
잘라까 Zalla qa전투 (1006 년 1~ 23 일) 양 군대는 바다호스 근방의 잘라까에서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무슬림들 이 승리를 거두었으며 알폰소는 그의 군대가 전멸하는 것을 보고 몇몇 부 하만을 데리고 도망하였다. 이 해를 ‘잘라까의 해’라고 하며 스페인에서의 새로운 시대의 출발점으로 삼게 되었다.> 포로가 된 무타미드와 그의 죽음 무타미드는 신임이 없던 알모라비드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생 각을 했을 때부터―――몇년 후 그가 말한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면_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판>셈이었다. 유수프에게 스페인의 아름 다움과 부, 막대한 자원은 아프리카의 황량한 사막과 야만적인 문명 과는 너무나 대조가 되었다. 그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매혹적인 광경 올 멀리서 감탄만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이듬해 그는 스페 인으로 돌아와 그라나다를 점령하였다. 그 다음 계속하여 무타미드 에게 싸움을 걸었다 . 베르베르족의 군대가 세비야를 포위하였고 이 에 무타미드는 사력을 다해 용감하게 맞섰지만 그의 수도가 함락되 는 것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l ffi l 년 9 월). 이 불운의 왕은 쇠사슬 에 묶여 꾸쿠구쿠 이송되었다. 유수프는 무타미드의 목숨만은 살려 주었지만 아그마트Ag hma t의 감옥에 투옥시켜 결국 그곳에서 10C6 년 사망하였댜 그가 포로 신세가 된 동안 심금을 울리는 시를 써서 국가의 불행과 자신과 가족들이 감내해야 할 고통, 어느날 갑자기 자신에게서 친구와 재산, 권력을 박탈해 간 비극적 운명을 한탄하였 다. 13 세기의 한 역사가는 말했다. <모두가 무타미드를 사랑하고 그 에게 동정을 느끼며 지금까지도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35) 도지의 말대로, <야만적인 침략자들의 지배에 굴복하고,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민족과 문화를 훌륭히, 아니 찬란하게 대표했던 최후의 스페인 35) lbn al-Abb 값(D o zy, Loc i de Abbadid i s , vol. ii, p. 63).
태생 왕 (le dem ier roi indigtne)이였으므로 >36) 그런 평가를 받을 만 하였다 .
36) Hi st o i r e des Musulmans d'Espa gne , vol. iv, p. 287
이븐자이둔 < 압제자들의 시대 > 는 그리스 역사에서 동 시대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명칭을 빌려오자면 문학과 학문적 명성에서 다른 어 느 시대에도 뒤지지 않는댜 시는 모든 안달루시아의 궁전에서 장 려되었다. 세비야가 무타미드와 그의 대신 이븐 암마르를 뽐낸다면 그에 맞서 코르도바는 그 두 사람 못지 않게 유명한 이븐 자이둔 (1003-lITTl) 과 우마이야 칼리파 무스타크피 al 一 Mus takfi의 딸 왈라다 Walla c:Ia를 내세울 수 있다. 이븐 자이둔은 정치에 뛰어들어 코르도 바의 지사인 이븐 자흐와르 lbn J ahwar 의 심복이 되었지만 눈 밖에 나고 말았다. 그것은 아름답고 재능 있는 공주를 이븐 자이둔이 사 랑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을 읊은 시의 아름다운 곡조 에 감탄해마지 않은 유럽 전기학자들은 이븐 자이드를 티불루스 Ti bullus -.r1 )와 페트라르카 Pe trar ch3 8) 에 비유하였다. 그는 그녀를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지만 공공연히 모습을 드러내 놓지는 못하고 압 둘 라흐만 3 세가 지은 코르도바의 왕궁 주변인 알_자호라 al _ .2ahra 를 하릴없이 서성댈 뿐이었다 . 마침내, 그는 떠돌이 생활 끝에 세비 야에서 안식처를 구했다. 그곳에서 무타디드로부터 절친한 친구로 대접받으며 <두 알 - 위자라타인 Dhu al-WIZara tayn> 39 1 이란 칭호도 받는 둥 환대를 받았다. 그가 왈라다에게 보낸 다음 시는 알-자흐 라의 아름다운 정경을 묘사하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스페인 아
37) [역주] 로마의 시 인 (54-19 B. C.).
38) [역 주] 이 탈리 아의 시 인 • 학자 (1304-1374) .
39) 여기서는 <두 개의 대신직을 보유한 자>라는 의미인데, 죽 문무(文 武)를 총괄하는 총리대신을 말한다 . 이븐 칼리칸의 역사서에 대한 드 슬란의 번역서, vol. iii, p. 130, n. I 참조 .
라비아 시의 일반적 특성인 자연에 대한 심오한 느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4 01
40) 이븐 카깐 Ibn Kha qan 의 Qala 'id al-'l qy an 에 나오는 동 시의 아랍어 I원b n문 은Ze iWd o euyn eo r(sL, eSypd ee nci, m 3 e1n), cprpi.t ic2u4 m-2 5e 에xh i소be 재ns 한 l다o.co s Ibn Khironis de
< 오늘, 이곳에 오니 그대 보고픈 생각에 그대 얼굴 떠오르네. 화려한 풍경과 청명한 하늘, 서쪽에서 불어 오는 산들바람은 힘 없이 산들거리고 나의 슬픔을 불쌍히 여겨 바람도 약해진 듯하네. 소녀의 하얀 목에서 부서진 목걸이의 진주가 홀러내리듯 은빛 분수가 활짝 미소짓고 있다네. 오늘은, 마음씨 좋은 세월속에서 쾌락을 훔치며 고개를 이슬방울 밑으로 숙인 매력적인 색깔의 꽃속에서 노닐던 그 줄거웠던 청춘시절의 어느 날 같구나. 아아, 슬프도다. 그것들도 내게서 잠이 달아난 것을 알고, 내 기분 맞추느라 눈물을 흘린다 . 여기 양지 바른 곳에 장미꽃이 활짝 피어 태양의 빛에 빛을 더하네. 아직도 몸은 나른한데 아침 햇살에 눈을 뜨니 연꽃이 향기를 내뿜고 있네. 고통받는 가슴속에서 꺼지지 않는 그 불꽃에 대한 기억을 모든 것이 나에게 돌이켜 주네. 우리의 이별 전에 죽음이 먼저 온다면, 그것은 이 세상 최고의 날이리라. 당신이 전부인 이 가련한 마음은 연정의 날개를 타고 두근거리지 않으리라. 아! 고뇌에 지친 이 몸을 서풍이 둥실둥실
그대에게 날라줄 수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보물을 가질 수 있다면, 그대는 나의 보물! 오, 그대 가장 소중하고 여왕 같은 존재! 옛날, 그 옛날, 우리는 사랑의 빚을 몽땅 갚았고 열심히 공평한 경주를 하였지. 나의 사랑은 그 얼마나 진실되고 부끄럼 한 점 없는 것이었던가 . 그대는 날 잊었겠지만, 그대는 아직도 내 사랑! > 이본 하즘 (004- 1004) 스페인 무슬림 중 가장 위대하고 독창적인 재주를 지닌 사람은 銅년 코르도바에서 출생한 아부 무함마드 알리 븐 하즘 Abu Mu-hammad ‘AlI lbn I:Jazm이다. 그는 < 배교도 > 집안 출신이지만 자 신의 기독교 조상들을 존경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혈통이 초대 우마이야 칼리파 무아위야의 형제인 야지드 븐 아비 수프얀 Ya zi d b. AbI S ufy如의 해방 노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행세하 였다. 기독교에 대한 그의 경멸감은 이슬람에 대한 그의 광신적인 신앙에 비례하였다. 그의 부친 아흐마드는 만쑤르 븐 아비 아미르 밑에서 대신을 지냈고 이븐 하즘은 그가 강한 애착을 갖고 있던 우 마이야가의 __― 가짜 족보에 의해 피보호민으로 정치에 열정 을 갖고 뛰어들었다. 30 세 이전에 이미 압둘 라흐만 5 세 (1023- 1024) 의 총리대신이 되었지만 우마이야 정권이 붕괴되자 그는 공직에서 물러나 문학에만 전념하였다. 스페인의 저명인사에 관한 전기사전인 『안달루스 지도자들의 소식에 관한 이야기 al-S.la fI akhb 젊 a' imm:it al 一A ndal. us 』의 저자 이븐 바쉬쿠왈 Ibn Bashkuwal 은 이븐 하즘에 관해 다움과 같이 말하고 있다. <스페인 태생의 인물 중 이 븐 하즘이 무슬림들이 장려한 학문들에서 그의 학식의 보편성과 깊 이 때문에 가장 유명하였다. 그 밖에도 아랍어에 관한 해박한 지식 과 훌륭한 작가, 시인, 전기작가, 역사가로서의 그의 비상한 능력으
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아들은 이븐 하즘이 직접 저술한 팔만 쪽의 분량에 달하는 약 사백 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다 .>41’ 그는 <지 식을 추구하는 데 있어 나의 유일한 소망은 내세와 후세에 높은 학 문적 위치를 달성하는 데 있었다>껏l ) 고 말한 것으로 기록에 전해진 다. 그는 동시대인들로부터는 아무런 격려의 말도 듣지 못했다. 그 가 자히리파에 속했다는 사실 자체는 문제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이슬람의 가장 덕망 있는 권위자들을 통렬히 공격하고 나선 것이 정통파 신학자들 사이에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그들에 의해 사실상 파문당한 것이다 . 그와는 일절 교제를 하지 말도록 일반인들에게 주 의가 내려졌다. 세비야에서는 그의 작품들이 엄중히 소각되었다. 이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41) 이븐 칼리칸이 이븐 하즘에 관해 쓴 논문에서 인용하였음(드 슬란의 번 역 서 , vol. ii, p. 268).
42) Maqq a n, vol. i, p. 511, I. 21.
<종이는 소각할 수 있으나, 종이가 담고 있는 것은 소각할수 없도다. 그것은 내 가슴속에 온전하도다.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오며, 내가 앉는 곳에 따라 앉으며, 마침내 내 무덤 속까지 따라 오리라.>4.' Il
43) Maqq a n, 앞의 책 , p. 515, I. 5 이 하 .
『종교와 종파의 서 KittiJ al-Mia / ~-'/- Ni t:e/』 스페인의 몇몇 지방 주에서 쫓겨난 후, 이븐 하즘은 자신의 소유 인 한 시골마을로 물러나 그곳에서 사망할 때까지 머물렀다. 그의 수많은 저서 중에서 몇권만이 소실을 면했지만 그 중 다행히 가장
귀중한 저술인 『 종교와 종파의 서』 44) 가 전해오며 이 책은 최근 카이 로에서 최초로 발간되었다. 이 책은 (1) 유태교, 기독교, 조로아스터 교 등의 비이슬람적 종교 체제, (2) 이슬람과 그 교리 ――구 이는 물 론 자히리파의 관점에서 본 교리이다― 一— 와 이슬람의 4 대 교파, 죽 무타질라파, 무르지파, 쉬아파, 카리지파에 관해 잘잘못을 가리는 식으로 다루고 있다. 저자는 이들 교파들이 발흥한 것은 승승장구하 는 이슬람에 보복을 꾀하던 페르시아인들 때문이라고 주장한다.'15)
44) 본서 p. 462, 각주 145) 참조.
45) 『 종교와 종파의 서 』 의 내용에 관해서는 Dozy , Leyd en Cata lo g u e, v도ol. iv ',s pMp.i /2a3l0 -w2a3-7 '에l -N잘i 回요 약b되y 어Is ra있e다l .F rci fe. d Zlauern dKeorm ipn o sthite i onN ovlodne Ikben- Fests c hrift (G i es sen, 1906), vol. i, p. 267 이 하.
11 세기 스페인의 문학 다음에서는 동시대 가장 저명한 스페인 학자들 중 일부만을 언급 하고자 한다. 역사가인 코르도바의 아부 마르완 븐 하이얀 Abu Ma- rwan lbn J:Iayy an(l
46) 필자가 아는 한, 사본이 튀니지의 대 사원에 보존되어 있다는 보고 는 확인되지 않았다 .
47) [역주] 스페인 말라가 태생의 유명한 시인이자 철학자 (1020-1058). 특히 종교시는 신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신비주의적 경향을 명.
다 . 그 중 『근원의 이력 Fons Vit.ae』은 중세 사변신학의 발달에 중 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무엘 하_레비는 그라나다의 군주 바디스 Ba di s 의 대신이었다. 아랍인들은 그의 탁월한 업적만을 경탄한 나머 지 그가 유태인이며 이스라엘의 왕자 N aghi d 였음을 잊을 뻔하였다.戊 l 서무엘은 그 나름대로 국가 문서를 작성할 때 <알라에게 찬미를>, < 알라께서 우리의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축복을 주시기를>과 같은 일상적인 무슬림들의 상투어를 서슴없이 사용하며 성실한 무슬림이 그러하듯이 이슬람을 찬양하였다. 그는 히브리어와 아랍어를 완벽히 구사하였다. 그는 5 개 국어에 정통하였으며 고대 학문 특히 천문학 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또한 학식을 겸비한 온순한 외교가이며 세 상물정에도 밝은 사람이었다. 그 시절에는 (이븐 알-이다리에 따르면) < 유태인들이 힘깨나 쓰는 것처럼 행세하고 무슬림들에 대해 거만하 게 굴었지만> 그는 언제나 기품 있고 겸손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Ol
48) 그의 아랍어 이름은 이스마일 븐 나그달라 Is n:i a' il b. N ag hdala 이다. 도지가 편집한 이븐 알 - 이다리 Ibn al-'Idhan 의 저서 서문, p. 84, n. 1 참조.
49) 사무엘 하_레비에 관해서는 Doz y, Hi st des M us. d'E s pa gne , vol. iv, p. 없 이하에서 홍미롭게 언급되고 있다.
12 세기와 13 세기 전반에 걸쳐 스페인은 두 아프리카 왕조, 알모 라비드조와 알모하드조 Alrmhades 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 두 왕조의 기원은 그 명칭에서 나타나듯이 사하라 사막 베르베르족의 종교적 광신에서 비롯되었다. 알모라비드 왕국의 기원에 대해 이븐 알-아 씨르 Ibn al-A thtr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iO l
50) Kami ! of lbn al-At hir, ed. by Tomberg, vol. ix, p. 425. 다음의 이 야기는(이는 가능한 최대로 요약된 것이다) 몇몇 주요 대목에서 이븐 칼둔 Ibn Khaldun(His t o r y of the Berbers, 드 슬란의 번역서, vol. ii, p. 64 이 하)과 이 븐 아비 자르아 Ibn Ahr Zar'(T omberg, Anr 입 es Re- gu m Maurita nioe , p. 100 sqq . of the Lati n vers i on) 의 기 술과는 다 른 점이 있다 . A. MUi ler , Der Islam, vol. ii, p. 611 이하 참조.
알모라비드조의 기원 <이 해(히즈라 448l=l
후 압둘라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말했다 . ‘여러분은 진실의 적들과 싸워야 하므로 여러분의 지도자를 임명하시오’ . 자우하르는 ‘당신께서 우리의 지도 자이십니다’고 대꾸하였다. 하지만 압둘라는 자신은 단지 선교사에 불과함 을 분명히 하고 그의 충고에 따라 상당한 권위와 영향력을 갖고 있는 람투 나의 족장 아부 바크르 븐 우마르에게 지도자를 맡아달라고 권했다. 마침내 그 를 설득한 압둘라는 성전(聖戰)에 관해 설교하고 그의 추종자들에게 ‘무라 비뜬 al-M 따 ab iton’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5'.l)
53) <무라비뜨 Murab it>를 직역하면 변경의 초소인 <리바뜨ri ba t>에 거 주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곳에는 수비대 외에도 개인적으로 신앙적 동기에서 불신자들과의 성전jih ad 에 가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거 주하였다 따라서, <무라비뜨>는 점차 <성인> , <귀의자>란 종교적 인 의미만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 의미의 현대적 어형은 marabou t이 다. <무라비뜨>를 본래의 알모라비드인들에게 적용할 경우 그것은 여전히 현저하게 군사적인 뉘앙스를 띠게 된다.
알모라닌 |드조 (1~-1147) 이 작은 공동체는 숫자나 세력면에서 급속히 팽창되었다. 1cm 년 지휘권을 이어받은 유수프 븐 타쉬핀은 모로코 시를 세우고 이를 중심지로 하여 사방으로 새로운 정복사업을 펼쳤다 . 그리고 이내 알 모라비드 왕국이 세네갈로부터 알제리에 이르는 아프리카 북서부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미 앞에서 압바드인들이 유수프에게 스 페인으로 군대를 끌고 들어가도록 권유한 과정과 그가 잘라까에서 알폰소 6 세를 패배시키고 수년 뒤에는 동맹국으로서가 아니라 정복 자로서 그라나다와 세바야를 점령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나 머지 무슬림 스페인 지역은 별로 힘 안 들이고 정복되었다. 평신도 와 성직자 모두 이슬람의 열렬한 개혁자이며 기독교도 적들을 막아 주는 강력한 방패인 베르베르인 출신 군주를 환호하며 맞이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않았다. 스페인 문명은 베르베르족을 무력하게 만들었어도 그들을 세련되게 하지는’ 못했다 . 유수프와 그
의 후계자들의 편협성 밑에서 자유 사상은 불가능해졌고 문화와 학 문은 쇠퇴하였다. 한편, 백성들은 기 근 과 도둑질에 시달리고, 힘 없 고 부패된 행정으로 인해 온갖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이븐 투마르트 lbn TOrrart 알모라비드조 는 또 다른 아프리카 왕조인 알모하드조의 손으로 넘어갔다 . !>1) 이 왕조의 창건자인 무함마드 븐 투마르트 Mubarnrrnd ibn Tu mart는 모로코 남서부에 자리한 산악 지 대인 수스 Sus 태생 이었다. 젊은 시 절 메카 순례 를 하였고(약 llOO 년경) 또한 바그다드 에 가서 그곳 니자미야 대학에서 수학하고 유명한 신학자인 가잘리 롤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 그는 신학에 대한 열망과 거창한 계획을 마음속에 품고 귀향하였다. 이 시점부터 그 스스로 마흐디임을 선포 하기까지의 그의 경력을 길게 논하거나, 그가 베르베르인 들 로 하여 금 자신을 신봉하도록 만든 낯 익은 방법들을 그 중 어떤 것은 충분히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이지만 기술할 필요는 없겠다 . 그러나, 그의 교의( 敎義 )에 대해서는 간략히 언급하겠다. 그의 전기 작가는 말한다. $) <대개의 문제들에 있어 그는 아부 알 - 하산 알 - 아 쉬아리의 체계를 따랐지만 ‘신의 속성’을 부인하는 점과 그 밖의 몇 가지 문제에서는 무타질라파와 견해를 같이 하였다. 노골적으로 내 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쉬아파 쪽으로 약간 기울고 있었 다 .> 56) 그의 교의의 요점은 자신의 칭호로 사용하였고 그의 후계자 들이 왕조의 이름으로 채택한 <무와히드 Muw alJ}:ii d( 일신론자)>란 칭호에서 알 수 있다판 이븐 투마르트는 신의 유일성을 강조하였다.
54) 골트치 어 의 논문 Mate r ia li en zur Kenntn iss der Almo!r ide nbewe- gung in Norda frika (ZDMG, vol. 41, p. 30 이 하) 참조 .
55) 'Abdu ' 1-Wa bid, Hi st o r y of the Almofr ide s, ed. by Dozy , p. 135, I. 1 이하 .
56) 이 당시 베르베르인들은 순니파로서 파띠마조에게는 적대적이었다 .
57) Almohade 는 아랍어인 al-Muw abb.i d 를 스페인어식으로 만든 어형이다.
바꾸어 말하면, 서부 이슬람 세계에 팽배하던 신인동형(神人同形) 사 상을 비난하고 그것을 신에 대한 순전히 영적인 개념으로 대체하려 고 하였다. 이와 같은 주요한 신조에 두번째 신조인 <무오류의 이 맘 al-IIram al - Ma‘S um>을 덧붙혔다 . 물론 그는 그 이맘이 바로 알 리 븐 아비 딸립의 후예인 무함마드 븐 투마르트 자신이라고 주장 하였댜 알모하드조 (11 :I) -1 2:i}) 마흐디가 죽자 (11 3)년) 최고 지휘권은 그의 충복으로 알모라비드조 와 성전을 벌여 점차 승리를 거두고 있던 부장(副將) 압둘 무민 'Alxlu 'I-Mu' min 에게 넘어갔다. 마침내 그는 1158 년 <무어족 Moors ’만 )의 스페인을 포함하여 이집트 전선으로부터 대서양에 이르 는 전 해안지역을 그의 왕권하에 통일하였다>으 이 신왕조는 알모 라비드조보다 훨씬 문명화되었으며 문화에 호의적이었다. 압둘 무민 의 아들인 유수프는 훌륭한 학자로 평을 받는데 그의 머리속에는 이슬람 이전과 이후의 전투, 전승, 역사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어 있 었댜 그러나 그는 철학을 연구하고 장려하는 데서 가장 큰 줄거움 을 발견하였다.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학자인 이븐 뚜파일 이 그의 대신이자 시의(侍閃)였다. 또한 유수프와 그의 후계자인 야 꿉 알-만쑤르 Ya‘ qub al_M 如 sE 는 이븐 루쉬드의 비위를 맞추느라 온갖 예우를 다해주었다. 야꿉은 정통파의 왓김에서 한동안 그를 유 형에 처한 적도 있지만 이 철학자와 학문적 주제를 놓고 담론을 나 누기 좋아하였다.fll l 이처럼 관대함과 편협함이 묘하게 뒤섞여 있는
58) [역주] <검은 피부>를 뜻하는 그리스어 mauros 와 라틴어 maurus 에서 유레 전통적으로 유럽인들이 북부 아프리카의 아랍인과 베르베 르인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59) Sta n ley Lane-Poole, The Molr immad an Dyn asti es , p. 46. 60) Kenan, Averroes et l'A v errois m e, p. 12 이 하.
것이 알모하드인들의 톡성이다. 그들이 적당한 경우에 사색을 장려 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율법과 신학은 순전히 자히리파를 본따 만들 어진 것이다. <꾸란과 예언자의 전승이냐 그렇지 않으면 칼이냐!> 는 말은 야꿉 알-만쑤르가 한 말이다. 또한 그는 그의 조부에 의해 금지되었던 <이단자의 화형 au to s-da- fe >6” 을 부활시켜 말리키파의 서적을 비롯 다른 비위에 거슬리는 책들을 소각시켰다 .’ ;l) 알모하드 인들의 기질은 이븐 뚜파일의 유명한 철학 이야기로 주인공의 이름 을 딴 『하이이 븐 야끄잔J:byy ibn Ya q?,aTZ(깨어 있는 자의 아들, 살 아 있는 자)』 63) 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던컨 맥도날드 의 명저 『무슬림 신학 Musl im Theolog y』(p. 2i1)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되고 있다.
61) [역주] 아우토다페;스페인 종교 재판소의 판결 선언으로 그에 따른 처형, 특히 이단자의 화형을 뜻한다.
62) 골트치어의 ~riten , p. 174 에 번역되어 있는 압둘 와히드의 Hi - sto r y of the Almolr. zd es, p. 201, I. 19 이 하에 서 의 인용문을 참조.
63) 포코크 E . Pocock 의 라틴판과 함께 아랍어 원문은 1671 년에 발표되 었다. 또한 1700 년에 는 Ph ilo sop h us Au t od i dac t us 라는 제목으로 발표 되었다 사이먼 오클레이 S i mon Ockle y의 영어 번역판은 1708 년에 나 왔으며 그 후 수차에 걸쳐 재판되었다. [역주] 원제는 Ris a /at lfayy b. Yaq ~ fl asrar al-b ik m a al-mushr iqiyy a 이 다 동 일 주 제 의 이 야 기로 이븐 시나의 Qi$~t Jfayy b. Ya q껑 n 이 전해지는데 19 세기 말까 지는 이븐 뚜파일의 이야기가 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븐 뚜파일이 이븐 시나 이야기의 제목과 둥장 인물들의 이름을 그대로 본딴 것으 로보인다.
『하이이 본 야끄잔의 이야기./l <거기에서 그는 두 개의 섬, 죽 유인도와 무인도 를 상상속에 그리고 있 다. 유인도에는 인습적인 삶을 살아가며 재래 종교에서 말하는 상과 벌의 제약을 받는 보통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곳에 살던 살라만 Salaman 과 아살 Asa1’ 악)은 보다 높은 수준의 자치(自治)로 발돋움했다. 살라만은 겉으로는 민
64) 이 이름의 원형은 자미의 유명한 시에서와 같이 아브살 Absal 이다 . Cf. De Boer, The Hi st o r y of Ph ilo soph y in Islam, 존스 E. R. Jon es
번역, p. 144.
간 종교에 적응하여 사람들을 통치하지만 홀로 자기 완성을 추구하는 아살 은 다른 섬으로 간댜 그러나 그곳에서 혼자 어릴적 부터 살아 점차 직관적 이고 부패하지 않은 이성의 힘에 의해 최고의 철학적 수준까지 자기 발전 을 하고 신을 환상으로 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하이이 븐 야끄잔이라는 사람을 만난다 그는 모든 지식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우주카- 그의 눈앞에 뚜렷이 보이게 된 것이다. 이제 하이이 븐 야끄잔은 자신의 철학이 예언자 나 계시 없이 그 경지에 도달하였음을 알게 되며 아살의 순화된 종교는 그 와 동일한 것임을 알게 된다. 어둠속에서 아살이 들려 주는 다른 섬에 사는 사람 들 에 관한 이야기는 하이이 븐 야끄잔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고 마침내 하이이는 선교사로 그들에게 가게 된다. 그러나 그는 곧 무함마드의 방법이 대중에게는 진실된 것이며 심미적인 바유와 구체적 사물에 의해서만이 그 들에게 도달되고 견지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고독한 삶을 살기 위 해 다시 자기 섬으로 돌아간다 . > 65)
65) [역주] 고티어 Gau thi er 에 의해 더 잘 요약된 이야기가 El2, 1:Iay y b. Yaq? an, pp. 333-334 에 나온다 < 적도 근방에 있는 한 무인도에서 흙 이 발효하여 아기가 태어났다(또 다른 이야기로는 이웃 섬의 박해받 던 공주가 아기 를 낳게 되자 아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궤에 아기를 넣어 조류에 밀려 무인도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 아기가 하이이 븐 야끄잔이었다 . 그는 무인도에서 가잘의 젖을 먹고 자란다 . 그곳에 서 그는 생존의 방법을 터득하고 자연의 법칙과 형이상학적 실체를 발견한다. 그가 전개한 철학체계는 신비의 무아경에서 신과의 결합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는 40 일 동안 동굴 속에서 칩거하고 단식하며 신에 대한 명상을 통해 그의 이성을 외부세계와 자신의 육체에서 분 리하는 데 성공한다 . 이때 이웃 섬에서 금욕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무 인도로 생각하고 온 신실한 아살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아살은 하이이의 철학체계에서 모든 계시 종교의 초월적인 해석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아살은 그를 살라만이라는 경건한 왕이 통치하는 섬으 로 데리고 가서 하이이의 숭고한 진리를 전파하도록 부탁한다 . 그러 나, 순수한 진리는 감각에 의해 노예가 된 세속민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음을 알고 두 사람은 본래의 자기 섬으로 돌아가 그들 나름대로의 신앙생활을 계속하며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여기서 하이이는 철 학을, 아살은 신학을, 살라만은 단순한 신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고티어에 따르면, 이 이야기의 기본 목적은 종교 특히 이슬람과 철학
의 조화를 보여 주려고 한 데 있다. 하이이 본 야끄잔의 이야기를 일 종의 모험담으로 파악하고 이 이야기를 영국의 소설가 다니엘 디포 Da niel De f oe(1660-1731) 의 Robin s on Crusoe 와 연관지으려 하는 비 교연구가 시도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특히 마다니 살리흐 MadanI Sa lih 의 Ibn Tii fay l : Qa day a wa-Mawaq if(B ag h dad : Dar al-Rash id lil- Nashr, 1980), pp. 167-178 참조.
알모라비드조와 알모하드조에서의 문학 (1100-1250) 베르베르 왕조하에서 활동한 학자 중 본서와 같은 책에서 언급할 만한 학자는 많지 않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따로 분류될 만하다. 이 븐 바짜 Ibn Bajj a( 라틴어명 Abvem pace ), 이븐 루쉬드、 이븐 뚜파일, 무사 븐 마이문 MU 옆 b. Ma yrni1n은 스페인의 국경을 넘어 멀리까 지 영향울 미쳤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유럽 사람이다. 신비주의 대가 무흐이 알-딘 븐 알-아라비 (12A0 년)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고찰한 바 있다 .661 그와 동향인이자 같은 유형의 사싱-가인 이븐 사 브인 Ibn Sab 'm(1269 년 사망)은 철학적인 주제로 호엔슈타우펜 Ho hens taufe n 가( 家 )oll 의 프리드리히 2 세 (1194-1 23) ) 61” 에게 편지를 썼다. 스페인 문학사에 관한 귀중한 저술이 이븐 밧삼 (1147 년 사망), 이븐 바쉬쿠왈 (1183 년 사망)에 의해 집필되었다. 지리학자 이드리시 Idr isI (1154 년 사망)는 세우타에서 출생하여 코르도바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시칠리아의 군주 로저 Roge r 2 세의 보호를 받았다. 이븐 주바이르 Ibn J ubay r는 그라나다부터 메카까지의 홍미로운 순례기와 1183- 1185 년까지의 그라나다 귀향기를 발표하였다. 알모라비드조에서 대신이 되었던 이븐 주호르 Ibn J uhr( 라틴명 Avenzoar) 는 명의(名醫) 중에서도 일인자였다. 말라가의 이븐 알-바이따르 Ibn al-Bay tar (12A8 년 사망)는 식물학에 대한 지식을 넓히기 위해 이집트, 그리스, 소아시아를 차례로 여 행하고 나서 『약종 Ma t e ria Me di, cn 』을 편찬하
66) [역 주] 본서 p. 533 이 하 참조. 67) [역주] 독일에서 1138-1208 년, 1215-1254 년, 시칠리아에서 1194-1266 년까지 지배한 독일의 왕가.
68) [역주] 시칠리아 왕.
고 이룰 이집트의 술탄 말리크 알-카밀에게 헌정하였다. 페르디난드 양1 I 에 의한 스페인의 재정복 이제까지 스페인의 무슬림 제국이 앉1 ] 기에 일어나 기독교 세력이 도처에서 승리를 올리는 알모하드조의 말기까지를 거의 개관하였다. 알모하드인들은 1 幻 0 년경에는 반도에서 쫓겨나 그후 40 년 가량 아 프리카를 계속 통치하였다. 전멸의 지경에서도 무어족이 피난처를 구할 수 있는 곳이 한 곳 남아 있었다. 바로 그라나다였다. 그라나다의 나쓰리조 Na$ri d s(1~-1492) 1Z32 년 이곳에서 무함마드 븐 알-아흐마르 Mubammad Ibn al- 도는 < 신의 은총에 의한 정복자 Ghal i b b illah>라는 거만한 칭 호를 사칭하고 나쓰리조를 일으켜 2 세기 반 동안 기독교도들을 곤 경에 빠뜨렸다. 이 소 무슬림 왕국이 그토록 오랜 기간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왕국의 위력 때문이 아니라 난공불락의 요새에 위 치해 있었던 점과 정복자들의 분열 때문이었다 . 최근 유럽에서 꽃 피고 있는 아랍 문화는 그것이 과거의 영광에 필적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코르도바와 세비야의 영광에 대한 추억을 되살려 주 는 것이다. 이 시기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알함브라 Alhambra 궁전, 죽 나쓰리 왕들의 <붉은 궁전 al- 1:Iamra>과 아직도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 훌륭한 유적들이 많이 세워졌다. 그러나 무어족의 건축 과 같은 매혹적인 주제라 할지라도 지엽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 문 학 자료에 관한 것은 의외로 빈약한데 이는 기독교도들이 그라나다 롤 정복하여 자행한 비 문화적 만행 때문이었다 . 그것은 (마치 알렉 산드리아 도서관이 칼리파 우마르의 지시에 따라 불타버렸다는 것처럼) 미심쩍은 데가 있는 전설이 결코 아니며 m ’ 무자비한 대주교 히메네 69) 그러나 주르지 자이단J u rj I Za y dan 은 이 이야기를 근거가 없지는 않 은 것으로 간주하고 싶어한다 . 그의 논저 『 이슬람 문명사 Ta'rlkh al-
Tamaddun al-Isl 찮 nI』 , Part ill, pp. 40-46 에서 그에 대한 증거를 홍 미롭게 논하고 있음을 참조 .
스Jiire nez70) 가 아랍어 고본을 있는대로 찾아내어 불태워버 렸다는 것은 충분히 입증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는 단 하루 동안에 7 백 년 에 걸친 이슬람 문화의 기록을 파괴시키고자 하였다.
70)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Ji menez( 또는 Xim enez) de Cis n eros0436- 1517) : 스페인의 추기경 • 정치가.
이븐 알-카법과 이븐 칼둔이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동 시대의 대 표적인 문학가이며 역사가이다. 동양의 역사가 중에서 이븐 칼둔에 필적할 만한 역사가는 없다. 이븐 알-카멉 (1313-1 '314 년) 리산 알-딘 븐 알-카멉 Lisa n al-D in lbn al-Kha p b7 은 당대의 중요한 정치가이다. 그의 경력은 무슬림들의 시와 문학이 공직생활 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뚜렷이 보여 주는 예가 된다. < 아랍인 들은 오늘날 널리 유포되어 있는 견해, 죽 시에 재능 있는 사람은 떠들썩한 속세와는 격리되어야 그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공무를 집행하는 데 필요한 투철한 통찰력이 흐려진 다는 것에 대해 동조하지 못한다. 오히려 아랍의 왕들은 국가의 주 요 공직을 시인들에게 위촉하였으며 시는 흔히 외교 각서로 얻는 것 이상의 눈부신 성과를 달성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 T21 문학 의 전 분야를 섭렵하고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세련된 솜씨로 즉흥적인 송시를 읊거나 운을 단 서간문을 지은 이븐 알-카땝 같은 젊은이는 왕의 총애를 받을 만큼 두각을 나타냈다. 마침내 그는 나 쓰리 궁전의 대신이 되었다. 1~1 년 그의 적들이 꾸민 음모 때문에
71) 이븐 알-카멉의 일대기는 그의 친구이자 동시대인인 이븐 칼둔 (His t of the Berbers, 드 슬란의 번역서, vol. iv. p. 390 이하)에 의 해 쓰여 졌으며 Maqq a n, Nq fb al-µ b(v ols. iii , iv of the Bulaq edition ) 의 주제를 이룬다.
72) Schack, 앞의 책, vol. i, p. 312 이하.
그라나다로부터 도망치게 될 때까지 그 사이 단 한 번 잠깐 눈 밖에 난 때를 제외하곤 대신의 자리에 있었다. 그는 페즈 Fez 에 피신처를 구해 당시 술탄인 압둘 아지즈 ‘Alxlu '1-' Aziz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 그러나 1~4 년 아부 알-압바스Abo. al-' Abbas 가 죽 위하자 이 추방당한 대신은 투옥되고 이단 zan daq a 의 혐의로 재판을 받았댜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광신적인 군중이 감옥을 습격하여 그 를 살해하였다. 마까리에 따르면, 이븐 알-카법은 불면증에 시달려 서 대부분의 그의 작품들을 밤에 집필하였으며 이 때문에 그는 <두 인생의 사나이 Dhu al - 'Urma yn> 731 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는 다양 한 문학 장르에서 활동한 다산(多産) 작가였지만 그의 많은 동족민 들이 그러하였듯이 역사학에서도 뛰어났다. 그라나다의 군주와 학자 들에 관한 그의 논저들(그 중 하나는 전기도 포함된다)은 이 불확실한 시대에 관해 흥미로운 자료를 상세히 제공해 준다. 이븐 칼둔 (1n2-1400 년) 이슬람 최대의 역사 사싱-가인 이븐 칼둔을 마치 그 출신이나 성 장 배경이 스페인인 것처럼 본 장에서 다루게 된 데 대해 먼저 독 자들의 양해를 구하고자 한댜 그는 본래 바누 칼둔 Bann Khaldun 가(家) 출신인데 이 가문은 오래 전부터 스페인에 정착하였으며 처 음에는 카르모나 Caronna 에서, 나중에는 세비야에서 오랫동안 거주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13 세기 중반경 아프리카로 이주하 였고 이븐 칼둔은 튀니스에서 출생한 것이다. 더욱이 그는 전 생애 를 거의 아프리카에서 보냈는데 이는 우연에서라기보다 그곳이 마 음에 들어서였다. 1362 년 그라나다의 술탄인 아부 압달라 븐 알-아 흐마르 Abu 'Abdallah Ibn al-Abrnar 밑에서 봉직하였으며 옛 친구 인 이븐 알-카엽의 시기 때문에 스페인을 뒤로하고 떠나지만 않았 73) 필자 소장본인 Slndlnrat al-D fr:Jmb에 인용됨. JR AS(l899), p. 911 이 하 및 JR AS(l906), p. 797 참조.
다면 아마도 그라나다는 그의 고향이 되었을 것이다. 1400 년, 카이 로의 판사로서 끝나게 되는 그의 다사다난한 경력에 대해서는 여기 서 기술하지 않겠다. 이븐 칼둔은 정치인들이나 왕들과 어울려 지냈 다. 즉 그는 카스티야 @s til e7~1 의 페드로 Pedro 궁전에 파견된 대사 였으며 막강한 타메를란 Tarrerlane7 5 1 에게서는 귀빈 대접을 받았다. 그의 노련한 체험의 성과는 『훈계서 Ki t ab al,-' Jbar』라는 제목의 방 대한 일반 역사서의 제 1 권인 『역사 서설 Mu qxldi. 1111 』에서 훌륭히 드러나고 있다 .7 6 1
74) [역 주] 스페 인 중부의 옛 왕국 .
75) [역주] 티무르 T im our 의 별칭;쌍각(雙脚)[절름발이]의 티무르라는 뜻.
76)d e역s 사m a서nu설sc의ri ts 아 d랍e어 l a 원B문 i b은l i o t꽈函트 u르e 메Jm르 p 에e r ia의l e해, vNolso.t i c1e6 s- 1e8t( B eexyt rr aoui tt s, 1879, 1886, 1900) 에 발행되었다. 드 슬란의 불어역은 Not. et Extr a- its, vols. 19-21 에 소재 .
역사 철학자로서의 이본 칼둔 이븐 칼둔은 역사가의 역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역사의 진정한 목적은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를 이해하고자 하는 데 있 다. 죽 세계의 문명과 거기에 나타나는 자연적인 현상들, 예컨대 미개한 삶, 예절의 순화, 가족과 부족에 대한 애착, 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에 대해 갖 는 다양한 종류의 우월감, 그렇게 해서 발생하는 왕국들과 다양한 왕조들, 생계를 세우기 위해 사람들이 매달리는 여러 가지의 상업과 고된 직업들, 학문과 예술 같은 자연적인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요컨대 문명의 발달 과정에서 당연히 발생하는 모든 다양한 상황을 알고자 하는 데 있음을 알 라 .>TII 이와 같은 역사는 보편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이 법칙이 역 사적 진실에 대한 유일하고 확실한 기준이 된다고 주장한다.
77) Muqa ddim a(Bey rou t ed. of 1900), p. 35, I. 5 이하=드 슬란의 번역 서, vol. i , p. 71.
그의 역사비판의 기준 < 역사에서 진실과 오류를 구분하는 법칙은 그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에 기 초한다. 죽 우리는 인간 사회(또는 문명) 를 엄밀하게 관찰하여 본래부터 본 질적이고 고유한 특성과 부수적이며 참작의 여지가 없는 것을 구별하고 그 것에 도저히 속하지 않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역 사적 진리와 오류를 아무런 의혹의 여지도 없는 논증적인 방법을 통해 구 별할 수 있는 법칙을 갖게 된다 . 그것이야말로 역사가들이 자신들의 역사 기술을 실증하는 진정한 시금석이다 . >78 )
78) Muqa ddim a, p. 37, 1. 4 fr.fo o t=드 슬란의 번역서, vol. i, p. 77.
여기서 사실 이븐 칼둔의 주장은 지나친 점이 있다. 또한 여기서 인정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가 때로는 자신의 원칙을 현학적으로 적용할 때도 있었으며, 순전히 연역적인 고찰에 의해 그가 믿었던 바대로 반드시 정당하지만은 않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그러 나, 이는 원칙 그 자체의 가치나 독창성과 비교할 때 매우 사소한 문제이다 . 이븐 칼둔이 새로운 역사 기술 방법을 발견했다고 주장하 는 것은 타당하다. 이제까지 그만큼 포괄적이고 철학적인 견해를 피 력한 무슬림은 없기 때문이다. 죽 어느 누구도 일어난 일의 깊이 숨 겨진 원인을 추적하려고 하거나 심층에서 작용하는 도덕적 정신적 힘을 드러내고 국가의 발달과 쇠퇴의 불변의 법칙을 예측하려 하지 않았다. 이븐 칼둔은 그의 선배학자들 중 어떤 학자들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하기도 하지만 그들 덕을 본 것도 거의 없었다. 그는 나이 에 비해 훨씬 능력이 뛰어나 그의 동향인들은 그를 따른다고 하기 보다 그를 숭배할 정도였다. 그의 학풍을 이은 후학들로는 유럽의 중세 및 근대 역사가들인 마키아벨리M:achiav elli7 9) 나 비코Vico, m) 기 번 Gibb on811 등이 있다.
79) [역주] 이탈리아의 정치가 · 정치학자· 저술가 (1469-15Z7) .
80) [역주] 이탈리아의 철학자· 법학자(1 668-1744).
81) [역주] 영국의 역사가 (1737-1794) .
이븐 칼둔의 역사발전 이론 이븐 칼둔이 그의 『역사 서설』에서 주장하고 있는 역사발전의 독 특한 이론은 이는 실제 상황과 과거지사 또는 눈앞에 전개되는 사건들에 대한 연구에 근거한 이론이다 __三 그 개요를 기술할 만한 가치가 있다 .82) 그는 우선 이슬람 제국의 거의 전역에는 건조하고 경작이 불가능한 모래 황무지나 돌이 많은 고원들이 비옥한 경작지 사이사이에 끼여 있다는 자연의 조건에 충격을 받았다. 아득한 옛날 부터 불모지에는 유목민들이 살았고 경작지에는 농업이나 산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거주하였다. 아라비아의 경우, 메카와 히라 같은 도시들이 베드윈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며 그들을 문명화시킬 수 있게끔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보았다. 아프리카에서도 이와 똑같은 대조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러므로 이븐 칼둔이 전 인류를 두 부류_유목민과 도시민_으로 구분한 것도 결코 무리가 아 니다. 유목 생활은 당연히 도시 생활에 선행하며 도시 생활을 낳는 다. 유목 생활의 특성은 생활 방식이 단순하고 순박하며 호전적 기 질이 있고, 특히 친족과 부족의 이익을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다 바 치는 데 있다. 유목민들이 점차 개화되면서 그들은 정착하여 국가를 형성하고 정복 사업을 벌인다. 이쯤되면 그들은 최고로 발전된 단계 에 도달한 셈이다. 그러다가 허영과 사치로 부패되고 그들을 출세케 해준 미덕들을 상실하면 이내 한층 더 야만적인 민족에게 전멸당하 고 만다. 이것이 이븐 칼둔이 보는 대략적인 역사의 흐름이다. 그러 나 그의 사고의 바탕을 이루는 철학 사상에 관해 좀더 기술해야만 하겠다. 그는 부족이나 민족의 생활에서 그들의 운명을 형성하는 두 82) 폰 크레머 Von Kremer 는 Sit z. der Kais . Akad der Wi ss ensch iften , vol. 93(Vi en na, 1879) 에 기 고한 공감할 만큼 훌륭한 논문, lbn Chald un und sein e Cultu r ge sch ich te der isl an isc hen Reic h e” 에 서 이 븐 칼 둔의 사상을 보다 상세히 논하였다. 필자는 그의 많은 고찰에서 혜택 을 받았으며 수많은 다른 경우에서처럼 이번 경우에도 그에게 힘입은 바 큰 점을 인정하고 감사를 표하고자 한다.
개의 지배적 힘을 구별한다. 그가 <아싸비야 ‘益 ab iyya>라고 부르 는 원시적이고 주요한 힘은 사회의 <통합> 요소로서 동일 가족의 구성원이나 부족, 국가, 제국을 결속시켜주는 감정, 죽 넓은 의미로 현대적 용어인 <애족 • 애국심>에 해당된다. 그것은 자기 보존의 본 능에 의해 강한 친족 의식에 눈뜨게 되며 주민들 상호간에 공동 전 선을 펼 수밖에 없는 유목민들 사이에서 특히 활발히 나타난다. 이 <아싸비야>가 국가의 활력소가 되며 이것으로 국가가 세워지고 발 전하는 것이다. 그것이 약화되면 국가도 쇠퇴한다. <아싸비야>의 약화는 국가가 몰락할 징조인 것이다. 기 언급된 힘의 두번째 요소 는 종교이댜 이븐 칼둔은 그가 무슬림이라는 점에서 기대되는 만큼 의 영향을 종교에 끼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종교야말로 결속을 가져 오는 유일한 수단으로 그것 없이는 어떤 국가도 존립할 수 없 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와 같이 그의 『무캇디마』 제 刃장에서 <아 랍인들은 예언자나 성자에 의해 종교적 열광에 물들지 않으면 제국 을 세울 수 없다>는 명제를 세우고 있다. 그는 <역사>란 마치 인간의 삶의 현상과 흡사하게 진보와 후퇴 를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왕국이 창건되면 원숙기에 이 르다가 3 세대 즉, l a)년을 넘지 못하고 일정 기간 내에 소멸하는 것 이다 .83) 이 기간에 발전과 쇠퇴의 5 단계룰 지나게 된다 .84) 이본 칼둔 이 유목민들의 도덕적 우월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문명이란 반드시 부패와 타락을 수반한다고 보는 것이다. 만약 그가 보다 고차원의 목표를 향해 인류가 점진적인 발전을 한다고 믿지 않았다면 그의 비관론은 경험에 의한 교훈과 이슬람 세계가 처한 애처롭고 비참한 상태에 의해 정당화되었을 것이다. ll5) 8.3) Muqa ddim a, Bey ro ut ed., p. 170= 드 슬란의 번역서, vol. i, p. 347 이하 . 84) Muq a ddim a, p. 175= 드 슬란의 번역서, vol. i, p. 356 이하. 8.5) 로버트 플린트 Robe rt F lint의 『역사 철학의 역사 Hi st o r y cf the
Ph ilo soph y of H i s to ry』, vol. i, pp. 157-171 에서 역사학자로서의 이 븐 칼둔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라나다의 함락 (1 49'2년) 1492 년, 유럽의 아랍인들 최후의 보루는 마침내 페르디난드 Fer di nan d:')와 이사벨라 Isabella 에게 성문을 열어 주고 <그라나다의 망루 에는 초승달 대신 십자가가 걸렸다>. 정복자들은 무슬림들의 종교 와 고유성을 존중한다는 엄숙한 서약을 위반하고 스페인의 기독교 도들이 무슬림 통치하에서 누렸던 관대한 대접과는 정반대로 무슬 림들을 대함으로써 한층 증오스러운 야만적인 광신을 보여 주었다. 배교와 추방이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많은 사람들이 후자를 택하였 다. 잔류자들 역시 지독한 박해를 받다가 l fffi년 필립Philip 3 세의 명령으로 무어족은 모두 스페인 땅에서 추방되었다.
86) [역주] 이는 페르디난드 5 세로서 아내 이사벨라와 함께 카스티야의 공동 통치 자 (1474-1504) 였다.
시칠리아Si c i l y의 아람인들 이슬람 문화가 기독교 땅에 전파된 곳은 스페인만이 아니었다. 시 칠리아는 9 세기 초 튀니스의 아글라비조에 의해 정복되었다가 l (J/ 1 년 노르만족 Nonnans 의 손에 넘어갔지만 팔레르모 Palerrm 궁전은 준 동양적인 성격을 보존하였다. 그곳에서는 호엔슈타우펜가의 프리드 리히 2 세 (1194-1 2,!j)의 치세 동안 <길게 기른 수염에 옷자락을 휘날 리는 바그다드 출신의 점성학자들과 아랍어 저술을 번역하여 왕과 같은 후한 급료를 받고 있던 유태인들, 사라센의 꾸 g수 들과 무희들, 축제 때면 은나팔을 불던 무어족들을 볼 수 있었다 >.871 프리드리히 자신과 그의 아들 만프레드Manfred는 열렬한 아랍 애호가들이었는 데 이들은 이슬람 철학과 학문에 관심을 쏟고 <이교도적>인 태도 를 취함으로써 기독교계를 분개시켰다. 이들의 후원하에 아랍의 학 문은 남부 이탈리아의 인접 도시에 전해졌다.
ITT) Schack, 앞의 책 , vol. ii, p. 151.
제 10 장 몽골 침략으로부터 현재까지 동시대의 일반적 특징 서아시아 전역을 폐허와 황폐로 몰아넣은 끔찍한 대격변에 관해 말하기 앞서 이 마지막 장에서 간략하게 기술할 동 시대의 일반적 특징에 관해 몇 가지 예비적 언급을 해두려고 한다. 우선 이 시기 에 영광스런 역사가 음울한 종말을 장식함을 인정해야 한다. 또 예 언자를 배출한 민족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칼리파제가 무너진 것도 바로 이 시대에서였다. 몽골족, 터키족, 페르시아인들이 차례로 대 이슬람 제국을 건설하는 동안 아람인들은 주역을 맡았던 왕년의 모 습은 찾아볼 수 없고 겨우 지방을 무대로 조연급 배우로서 등장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1517 년 오토만 통치하에 들어갈 때까지 터키족의 마몰루크 Man 티 ukes 가 점하고 있던 시리아와 이집트가 아랍의 중심지가 된다. 16 세기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베르베르족의 소 왕조들인 하프씨조표曲i ds,” 지야니조Ziyani ds,2) 마리니조 M~ ni ds: “ 가 오토만 터키에 자리를 내주었다. 1 49'2년까지 그라나다의 나 1) [역주] 알모하드조의 튀니스 지방 총독이 독립하여 세운 왕조이다. (12 28-1534). 2) [역주] 알모하드조의 알제리 지방 총독이 독립하여 세운 왕조로 수도 는 틸 림 산 T ili msan 이 었다. 모로코의 마리 니 조에 멸 망하였다(123.5 -1393).
3) [역주] 모로코의 고원 지대를 통치하다 후에 서부 알제리의 지야니조 영토까지 세력을 뻗쳤다 (1195-1470) .
쓰리조 N lli;iri ds 가 존속되었던 스페인과 1544 년 샤리프 가〈家 )S harif s (알리 븐 아비 딸립의 후예들)가 통치를 맡았던 모로코, 그리고 일부 아라비아 반도 본토에서만 겨우 아랍인들은 그들의 정치적 독립을 보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의 문학이나 문화와 어깨를 겨룰 만한 문학과 문화의 커다란 발전을 모색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인 것이다. 이 시기는 모방과 편찬의 시대이다. 이 세상에 모르는 것이 라곤 없는 박학다식한 학자들이 즐비하였다 . 저술은 양적으로 눈에 뛸만큼 줄어들지 않았고 그 대부분은 가치 있고 귀중한 저술이었다. 그러나 역사학자 이븐 칼둔과 신비주의자 샤라니 Sha 났回처럼 두각 올 나타낸 한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새로운 출발이나 결실을 이룬 시상 또는 독창적이고 계몽적인 사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 다. 서양의 15-16 세기는 <르네상스로 알려진 저 경탄할 만한 운동 이 일어나 극치를 이루게 되었지만 서양의 지적, 도덕적 삶의 전체 흐름을 변화시킨 대변혁의 파문은 이슬람 국가까지는 밀려오지 못 했다>? 이집토와 시리아가 처음으로 유럽 문명에 문호를 개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랍은 중세의 면모와 관습을 고수하고 있었으며 압 바스 시대의 그들 조상들보다 어떠한 점에 있어서도 전연 계몽되어 있지 못했다. 몽골의 침략 이후 아랍인들은 옛 길을 따라 전진해 나 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사건들에 몰려 불가피하게 후퇴할 수밖 에 없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유프라테스 강 동부 지역에서 몽골 족은 파괴 행위를 철저히 자행하였으므로 문명이 꽃 필 수 있는 소 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더욱이 아랍어는 페르시아어로 인해 급속히 희망을 잃게 되었다. 스페인에서는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아랍 인들의 세력이 이미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아프리키~ 야만적이고 미개한 베르베르족의 지배를 받고, 이집트와 시리아는 터키의 지긋
4) E. J. W. Gib b , A Hi st o r y of Ot tom an Poetr y, vol. ii, p. 5.
지긋한 군사독재의 지배하에 들 어갔다. 이 시기의 역사 중 어느 곳 에서도 위대한 문학 산물을 가장 많이 만들어 내는 두 요인 _ _ 一 한 차원 높은 문화의 자극적인 영향력이나 자유롭고 활기찬 국민 생활 의 고취 ―_ ―중 어느 것도 발견할 수 없다 . 5 )
5) 근대 문명의 영향이 아랍 문학에 작용한 것에 관한한 19 세기는 예외 이다.
몽골의침략 11 세기 중반과 14 세기 말 사이에 옥수스 강 건너에 거주하던 유 목 민족이 연속 세 차례에 걸쳐 서아시아로 밀려왔다. 맨 먼저 셀 주끄 터키족 Selju q Turks 이 왔고, 그 다음 칭기즈 칸Chingiz Khan 과 훌라구Hi1lagii6 l 휘하의 몽골인들이, 그 후 주로 터키계인 티무르 Tunur 의 유목민들이 몰려왔다. 셀주끄에 관해서는 앞 장에서 기술 한 바 있다. 티무르의 정복사업은 소름끼치는 일이지만 그 영속적인 결과(그 들 로 인한 막대한 피해는 제쳐놓고)가 하찮은 것이므로 이 시 기의 역사 기술에서 생략해도 무방하리라. 티무르의 후손인 바부르 區b ur 가 16 세기 전반에 세운 인도의 대 무갈 제국Mogul 표npire 7) 은 번영의 길을 달렸지만 그 문화는 거의 오로지 페르시아 문화에 서 차용한 것이었으며 이는 본서의 범위에서는 연구 영역 밖이므 로 다루지 않겠다. 그러므로 본서에서는 몽골족이 칭기즈 칸과 훌 리구의 지휘하에 중국의 초원 지대와 타타르 지방 T江 臼 w81 에서부터 지중해까지 진출하게 되는 제 2 차 아시아 대이동에만 국한해 개관
6) [역주] 칭기즈 칸의 넷째 아들 톨루이 Tol ui의 여섯째 아들로서 일 · 칸 국 창시 자 . 몽골어 의 영 문 전사 방법 에 따르면 Huleg u 또는 Hi lleg U 로 표기되는데 본 번역에서는 니콜슨의 영문 표기를 그대로 따랐다 .
7) [역주] 1526 년 무갈족이 인도에 세운 이슬람 제국으로 1 8.5 7 년 영국에 의해 멸망됨.
8) [역주] 유럽 동부와 아시아에 걸친 지역을 가리키는 역사적 명칭; 13 세 기 이후 타타르족 T artar s 이 지배한 지역을 말한다. 여기서 중국의 초 원 지대는 몽골의 초원 지대로 고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하겠다. 칭기즈칸과훌라구 1219 년, 극동에서 세력을 구축한 칭기즈 칸은 서쪽으로 향해 당시 크와리즘 조의 역대 왕들 Shahs 이 통치하던 광대한 영토 중 일개 주였던 트란스옥사니아로 진격하였다. 크와리즘 조의 왕인 알라 알 딘 무함마드 ‘Ala' al-D in Mu l:tamma d 는 이렇다할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용맹스러운 그의 아들 잘랄 알-딘J al 회 al-Dn 이 12 년 동 안 끈질기게 게릴라전을 벌였지만 침략자들은 쿠라산과 페르시아를 공격하여 겁에 질려 있던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그들이 지나간 자 리는 황폐해졌다. 지금까지는 바그다드가 심각할 정도로 위협받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1 2ffi년 1 월 1 일-이 날은 새 시대를 여는 날이다―――칭기즈 칸의 손자인 훌라구는 마침내 압바스 수도를 점령할 작정으로 옥수스 강을 건넜다.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디야 르바크리 Diyarbakri (lo14 년 사망)의 『목요일의 역사 Ta'ri kh al- K 뇨 mE』 의 고본에서 다음 이야기를 옮겨본다 . 바그다드 이전의 훌라구 히즈라 654 년 (=1253 년), 완고한 폭군이자 <제 민족의 파괴자 Mub i d al- Um am> 훌라구는 전열을 가다듬고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이스마일파9 1 로부 터 알라무트 Al amut 성을 빼앗고 이스마일파 사람들을 학살하고 라이이 지 방울 폐허로 만들었다. 히즈라 f£6년에는 바그다드에서 순니파와 쉬아파 사 이에 폭동이 발생하여 약탈이 자행되고 재물이 파괴되었다. 수많은 쉬아파 교도들이 살해되었고 이에 격분한 재상 이븐 알-알까미 lbn al-'Al qarni는 9) 이들 이스마일 파가 하산 븐 쌉바흐I:I asan b. $abb al;i에 의해 조직된 공포의 교파, 이른바 암살단파 Assass i ns 이며(브라운 교수의 『페르시아 문학사』, vol. ii, p. 201 이하 참조) 결국 훌라구에 의해 궤멸되었다. 그 들은 수많은 요새를 갖고 있었는데 그 중 까즈윈Q azw in 근방의 지발 Jiba l 지방에 위치한 알라무트 요새가 가장 유명하였다.
타타르인들을 사주하여 이라크롤 공격하도록 함으로써 순니파에 대한 복수 를 마음껏 하고자 하였다 .IOI
10) 여기서 독자는 이븐 알-알까미의 배신적인 태도에 관한 위와 같은 기술이 쉬아파 역사가들에 의해 정면으로 반박되고 있다는 점에 유의 하여 야 한다. 예 컨 대 al-FakhrJ(e d. by Derenbourg, p. 452) 의 저 자는 이 대신이 헛되기는 하였지만 그의 유약한 상관으로 하여금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우려 노력한 선견지명의 애국자로 평한다.
바그다드의 함락 히즈라 G 沿년 초, 폭군 훌라구 븐 툴리 본 칭기즈 칸Hi1lago b. 1ulI b. ChingiZ Khan 은 그루지야 사람들 al - Kurj과 모술의 병사들이 포함된 그의 군대를 이끌고 바그다드에 도착하였다. 다위다르 Da 펴 &rl” 는 시외로 전군 하여 바주 Euu) 2 ) 가 지휘하는 훌라구의 선발대와 마주쳤다. 이 전투에서 숫 적으로 열세인 무슬림들이 패배하였다. 이에 바주는 계속 진격하여 바그다 드 서쪽에 진을 쳤고 훌라구는 동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재상 이븐 알一 알까미가 칼리파 무스타씹 빌라 Musta넣 m B ill ah 에게 말했다. <최고 통치 자인 칸囚函 11 : ” 에게 가서 화친을 맺도록 해보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사냥 개 M) 는 컨에게 가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고 돌아와 칼리파에게 다음과 같 이 전했다. <칸은 자기 딸을 폐하의 아들과 결혼시키고 셀주끄 왕들처럼 폐하께 신하로서의 충성을 맹세한 다음 떠나고 싶어합니다.> 무스터썸은 결혼식에 증인으로서 서명하기 위해 궁전의 고관대작들을 데리고 출발하였 다. 이 결혼식 사절은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고 칼리파는 짓밟혀 죽었다. 타
11) Da wi dar( 직역하면 ‘잉크 스탠드를 들고 있는 사람') 혹은 Dawadar (이것이 보다 정확한 표기이다)의 다양한 기능에 관해서는 Quatremere, Hi st o i r e des Sultan s Mamlouks, vol. i, p. 118, n. 2 참조.
12) 고본에 는 Y 척血 as 로 적 혀 있다.
13) [역주] 중앙 아시아 제국(諸國)의 통치자의 존칭 또는 몽골· 터키 지 방의 군주의 칭호.
14) 개는 페르시아어로 sag , 아랍어로는 al-kalb 라고 한다. 무슬림들은 개를 불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역주] 그러나, 사냥개는 불결하지 않 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라비아의 사냥개인 Sal uki는 유목민들이 소중 히 여긴다. 그러나, 여기서의 사냥개는 이븐 알-알까미를 개에 빗댄 경멸조의 비유이다.
타르인들은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도시 곳곳에 때를 지어 흩어졌다. 34 일 동 안 칼은 칼집에 넣어지지 않았다. 극소수만이 피난하였고 사망자만 lOO 만 명에 달했다. 그러고 나서 귀영나팔이 울리고……. 이처럼 『이슬람 국가들 Duux.d a/,-Js lan 값에는 기술되어 있다. 이렇게 칼리파위는 바그다드를 떠났 다.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15) 샴스 알-딘 알-다하비 Shams al-Din al-DhahabI(l348 년 사망) 지 음 .
알바아니다. 전 이슬람 세계에서 아람어 시대가 끝나다 훌라구 시대 이래 티그리스 강 유역 동서에 걸친 영토는 점차 깊 은 골이 파이고 갈라지게 된다. 페르시아와 아람 민족은-그간 이들 양대 민족의 협력으로 사마르칸트에서 세바야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중세의 세계가 최고의 문학 및 학문적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터였지만 이제 마침내 그들의 협력 관계를 청산하게 되었 댜 사실 양 민족간의 톰은 그보다 수세기 전부터 벌어지기 시작하 였으며 이미 바그다드 함락 이전에 페르시아적 기풍은 훌륭한 국민 문학속에 표현되었다. 이때부터 실제로 페르시아인들의 아랍어 사용 은 신학이나 철학서의 저술에 국한된다. 페르시아어가 그 숙적을 경 쟁에서 물러나게 하였던 것이댜 따라서 이제부터는 이집트와 시리 아가 우리의 관심을 주로 끌게 되는데 특히, 동시대에 속하는 그라 나다의 아랍인들에 관한 역사는 이미 앞 장에서 기술한 바 있으므 로 더더욱 그렇다. 이집트의 마믈루크조 (1 척 )-151 7) 이집트의 마물루크 16) 술탄 왕조는 1 2:il년 아유비조의 말리크 쌀리 호 나즘 알-딘 M 或 k 요恥 Na jm al-D ih 밑에서 관직에 첫발을 내 딛은 터키계 노예 아이박 Ay bak 에 의해 창건되었다. 그의 후계자들 은 17) 이집트와 시리아가 오토만 제국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통치하 였다. 마물루크인들은 세련미나 품위와는 거리가 먼 거친 군인들이 16) 마물루크 Mamlak 는 <노예>를 뜻한다. 이 용어는 아유비 왕들의 경 호를 맡았던 용병들, 주로 터키와 쿠르드인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17) 각기 바흐리 <바흐리 Babn( 강) 마몰루크>와 <부르지 B urj I( 탑) 마 몰년까루지크,> 로후 자불는리 1는38 2두 년 부마터물 루15크1 7 년왕까조지가 지있다배.하 였전다자.는 1250 년부터 1390
었지만 카이로 를 방문하면 아직도 볼 수 있듯이 건축에 대한 훌륭 한 심미안을 갖고 있었다. 반란과 살육이 빈번하여 불안하기는 하 였지만 그들의 통치 는 대체로 순조로왔으며 그들이 몽골족에 승리 룰 거두고 십자군에 치명타 를 가함으로써 이슬람은 체면이 서게 되 었다. 술탄 바이바르스 Bayb ars (1200-1'2 77) 마물루크 중 가장 유능한 자는 말리크 알 -자 히르Malik al-Z- ahir, 죽 <승리의 왕>이라는 칭호에 걸맞는 바이바 르스였 다 .181 그의 이름 은 전설속의 주인공이 되어 뭇 아랍 민중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며 그가 세운 무공을 바탕으로 하여 꾸며진 구어체의 < 바이바르스 이 야기>가 오늘날까지도 이야기꾼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댜 1 91 간혹 난 폭하고 야만적인 행위 를 저질러 그는 위험한 상태에 있다고 생 각될 때에는 죄악을 범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주위에 모여든 야심적인 귀족에게는 공포의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공정한 통치자 라는 그의 명성은 훼손되지 않았다 . 그가 선왕( 先王)을 자기 손으로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하였지만 외견상으로는 자신의 왕위 찬탈에 정통성을 부여하려고 하였다 .
18) [역주] 1260 년 아인 잘루트에서 이집트로 진격하는 몽골군을 격퇴하 ’ 여 명성을 떨쳤다.
19) Lane, The Modem Eg yptian s, ch. 22 참조.
이집트의 압바스 칼리파들 그리하여 자칭 압바스 가문의 후손임을 내세우는 아부 알_까심 아흐마드 Ab o. al-Q as im Abroad 를 칼리파로 인정하고 그를 카이로 로 초대하여 정식으로 그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다. 이에 칼리파 는 술탄에게 이집트, 시리아, 아라비아와 그가 장차 정복사업에서 손에 넣게 될 모든 지빙에 대한 지배권을 주었다. 무스탄씨르 al-
Mus tan$ir라는 칭호를 가진 칼리파 아흐마드는 마물루크 술탄들에 의해 임명되어 카이로의 성채에 갇혀 엄중한 감시를 받던 일련의 사이비 칼리파들 중 최초의 칼리파였다. 마지막 칼리파가 칼리파위 룰 오툐료만 술탄 셀림 Selim 1 세에게 승계함으로써 터키 술탄들이 칼 리파 칭호와 위엄을 지니게 되었다는 무라지 돗송 Mo uradg ea d' Ohsson 이 처음 제기하고 (17ITT 년) 그 후 다른 학자들에 의해 되풀이 된 이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 20)
20) Sir T. W. Arnold, The Calipl r:zte, p. 146 참조 .
몽골 침략 이후의 아람시 동 시대의 시인들은 유럽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충분한 관심 을 갖고 연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그들 중 어느 누구가 출중한 시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리라. 동시에 필자의 생각은 (이는 그들의 작품에 대한 단편적이고 불완전한 나의 지식에 근거한 것 임을 고백한다), 그들 중 가장 뛰어난 시인일지라도 겨우 단어나 구 절을 가지고 말 재주나 부리며 그 밖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못하는 우아하고 재능있는 예술가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인위성 의 이면에 무타납비의 힘과 마아리의 진지함, 또는 이븐 알-파리드 의 열정이 숨어 있다고만 한다면 그것은 저명한 시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한 특징이 없기 때문에 겨우 고대 의 시 가락에 변화를 주거나 재생시키는 기교만을 감탄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싸피이이 알-딘 알-힐리 莘fi w al-Di n al-HII
일 예로 lZ78 년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대 도시인 힐라ijill a 에서 출생하여 마리딘 M 函din의 우르투끼조 Ur tuqi d 의 계관시인이 되고 1 39J년 경 바그다드에서 세상을 떠난 싸피이 알-딘 알-힐리를 예로 들어보자. 그는 단연 <당대의 시인>으로 묘사되는데 쿠투비Kutubi의 『파와트 알 오 와파야트 Faw tit al-Wa faytit,』 2 ” 에 인용된 그의 시를 볼 때 그는 신비스런 상상력을 매우 쉽고 감미로운 작시로 연결시 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지은 대부분의 시들은 151 개 의 비유를 사용하는 예언자 송시나 모든 명사가 축소형인 또 다른 시의 경우처럼 재치 있는 말장난J e tDC d'es pri~녁 2 되어 있다 . 22) 다 음에 예로 든 시는 너무 짧아 그롤 공정하게 평가하기는 어렵다.
21) Ed. of Bulaq (A. H. 1283), pp. 356-366.
22) 같은 책 , p. 358.
<그대 나의 눈요기, 한시라도 보이지 않으면 어찌 참고 견딜 수 있으랴! 그대가 낙일진대, 나에게서 만인의 마음속으로 달아나면 내 마음은 무엇으로 기뻐할까! 그대를 태양도 시샘할 모습으로 만들어 준 그 분에 걸어 맹세하니, (그 분은 그대를 아름다운 햇빛으로 아주 우아하게 옷 을 입혀 주었다) 그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던 그 날, 마치 ‘세월’의 축 처진 눈썹 위로 별빛이 반짝거리는 듯 하였다. 나의 열정을 비웃는 그대여,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가 견뎌내는 모든 고통, 모욕, 경멸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 신의 뜻을 보라! 그 분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진드기 한 마리라도 죽일 만큼의 무게도 감딩히지 못한다 !> Z i)
23) 위 시 는 lfad rqa t al-A r fab( Brockelmann, Gesch d Arab. Lit t., ii , 562 참조), Calcutt a, 1229 A. H. p. 280 에 인용되 어 있다 . 마지 막 2 행 은 꾸란 4 장 40 절을 암시하고 있다. <참으로 알라께서는 그 누구에게 도 개미 한 마리의 무게 만큼도 부당하게 다스리지 않으신다.>
대중人| 스페인에서 발생한 민요 <무왓샤흐>와 <자잘>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들 간단한 속요들은 이상야릇한 운율과 부정확한 언어와 함께 고전학파, 죽 거의 모든 현학적인 무슬림들로부터 의면 당했다. 그러나 그 인기는 대단하여 궁정 시인들까지도 때로는 부끄 럼을 무릅쓰고 이 문체로 시를 짓는 정도였다. <자잘>과 <무왓샤 후 이외에도 <두바이트 d o. ba yt>, <마왈리야 maw aliyya>, <칸와칸 kanwakan>, <히마끄坤따q>가 있는데, 정형시와 더불어 이것들이 <일곱 종류의 시 al-fu no.n al-sab 'a>를 구성하였다. 아랍 민요에 관 한 독특한 논문을 쓴 싸피이 알-딘 알-힐리는 무슬림들의 금식월인 라마단의 이른 새벽에 부르기 위해 바그다드 주민들이 만들었다고 눙눈 두 개의 다른 변형을 언급하고 있다안 일부 소수의 문인들이 소극적이나마 아람 시를 지배하고 있던 무감각한 진부한 체계로부 터 벗어나 아랍 시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으려 시도했다는 사실은 홍미롭댜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주목할 만한 시는 1 閔 7 년 쉬르비 니 S hirb回가 쓴 <하쯔 알 _ 꾸후프I:Iaz z al- Qt.tl:io.f>이다. 25) 여기에는 이집트 방언으로 된 시가 나오는데 더욱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은, 작자가 농부들의 거친 태도와 난폭한 말버릇을 비꼼과 동시에 이슬람 신학자들의 학식과 도덕성을 신랄하게 공격한 점이다단 이 같은 목적을 위해 아부 샤두프 Abu S hado.f라는 이름의 한 전형적인 이집트 농민 Fellahw 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이 농민의 역은 롱랜드 Lo ng lan f l 의 『환상 Vi si on 』에 나오는 농부 피어스Pi ers 의 역할과~) 24) Ha rtma nn, Das Muwa 寧 (We im ar, 1897), p. 218. 2265)) V직a역lle하rs면, B
같은 것이댜 어쨌든 19 세기 말까지 이러한 고립적인 파생물은 활발 한 대중시의 유파를 세우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번즈 Burnsm) 가 스코틀랜드 민요에 기여한 것과 마찬가지로 장차 아랍인들 중에 서 자신들의 민요를 위해 이바지할 수 있는 재주꾼이 나올지는 두 고 볼 일이다.
30) [역주] 로버트 번즈 Robe rt Burns(l759-1796): 영국의 시인 . 스코틀랜 드 태생으로 스코틀랜드 서민의 소박하고 순수한 감정을 그들의 방언 을 써서 표현한 점에 특징이 있다.
이본 칼리칸 lbn Khallik a n(1211-1282) 전기와 역사 분야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학자들에 의해 탐구되었 다. 이 분야의 많은 저술 중에서 영예의 최우수 작품상은 마땅히 앞 에서 자주 인용된 바 있는 샴스 알-딘 븐 칼리칸 Shams al-D in Ibn Khallikan의 『저명 인사들의 사망기록 Wa fay젊 al-A 泣 m 에 주어진 다. 작자는 바르메시드가3 ” 의 야흐야 븐 칼리드 Y al)y a b. Khali d 의 명문 후손으로서 1211 년 아르벨라 Arbela 에서 출생하였다. 알렙포와 다마스쿠스에서 교육을 받고 난 후(12'29 - 1238) 카이로로 건너가 1256 년 그곳에서 전기(傳 記 ) 사전의 초고를 완성하였다. 5 년 후 술탄 바이바르스에 의해 시리아의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죽기 얼 마 전까지(문학 및 전기 연구에 몰두한 7 년간의 공백은 빼고) 이 고위 직에 있었다. 『와파야트』의 서문에서 이븐 칼리칸은 연대순보다 더 욱 편리한 알파벳 순서를 채택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사전의 연구 범위와 성격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1 ) 이에 대해서는 본서 p. 361 이하 참조 .
이븐칼리칸의 전기 사전 <본서는 지식인 , 왕, 에미르, 와지르(대신), 시인 등 어느 특정 계충 사람 들의 전기에만 국한하지 않고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이름과 누구든 궁
금하게 여겨지는 인물 들 에 대해 언급하였다 . 그러나 본서의 부피가 너무 크 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간략하게 그들에 관해 확인할 수 있던 사실만을 기술 하였다. 가능한 그들의 정확한 출생일과 사망일을 기록하였다. 또한 그들의 족보를 될 수 있는 한 끝까지 추적하였다. 또 틀리게 적을 수 있는 이름들 의 철자에 주의하였다. 독자들이 본서를 읽으면서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지 루하게 획일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도록 개인별로 품위 있는 행동과 특이한 일화, 시와 서간문 같은 각 개인을 특징짓는 데 가장 적절한 특성들을 기술 하였다. 왜냐하면 책을 읽게끔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문체의 다 양성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꼬)
32) Ibn Kha llika.n, 드 슬 란의 번 역 서 , vol. i , p. 3.
이븐 칼리칸 이전의 학자들이 각계 각충의 저명한 무슬림들의 전 기를 단행본으로 엮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었므로 이븐 칼리칸이 자신이야말로 <민족적 전기 사전>을 계획한 최초의 무슬 림 작가라고 말하고 싶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으리라프 이 책의 장점에 대해서는 아랍인들은 물론 유럽 학자들도 충분히 인정하였 다. 평이하고 우아한 언어로 쓰여졌으면서도 그 서술은 매우 정확하 다. 또한 잡다한 사료와 문학 관련 자료가 놀랄 만큼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은 무미건조하게 분류되지 않고 무슬림의 삶의 전모를 보여 주는 일화나 인용문으로 재미있게 전달된다. 그것이 지금까지 의 전기 중 가장 훌륭한 전기서라는 윌리암 존스 S ir Wi lliam Jon es 경의 견해에 본 저자도 동의하는 바이며 범위나 규모의 차이는 있 지만 이와 여러 모로 홉사한 영국의 유명한 전기인 보즈웰의 『존 슨』과 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
33) [역주] Wq fay a t가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음을 지적해 두어야 한다 . 인명의 항목 총수는 865 개에 불과하다. 칼리파, 예언자의 동료, 다음 세대의 계승자들 Tabi‘ U n 외에도 저자는 사망 일자를 알 수 없어서 많은 유명인사를 생략하였다. Wq fay a t의 유용한 부록 및 속편이 쿠투 비 al-Ku tu bI(l363 년 사망)에 의 해 『파와트 알-와파야트 Fawat al- W여 ay a t』라는 제목으로 편찬되었다.
34) Wc fay a t의 아랍어 원문은 뷔스텐펠트 W il s t en f eld(Go tti n g en, 1835- 1 距 0) 에 의해 편찬되었다. 4 권으로 된 훌륭한 영어 번역판이 맥구킨 드 슬란 남작 Baron MacGuck in de Slane(1842-1871) 에 의 해 나와 있 다.
마믈루크 시대의 역사가들 마믈루크 시대의 수없이 많은 재능 있는 역사가들을 제대로 기술 하자면 본서와 같은 개설서의 경우와는 달리 좀더 많은 지면을 필 요로 한다. 술탄 바르꾸끄Barq u q (l 38'2一 1 :m) 밑에서 교수직과 카이 로의 판사직을 맡았던 이븐 칼둔에 관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상세 히 언급하였다. 이 비상한 천재는 역사학에 대변혁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되었던 법칙과 방법을 발견하였지만 그 자신은 그것을 실용화 하지 못하였다. 결국 나중에 입증되었듯이 그의 후계자들 역시 전통 적 방법을 포기할 만한 신선한 자극을 그의 법칙과 방법론에서 받 지 못했다. 이처럼 이슬람이 지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빠졌음을 보 여 주는 결정적인 증거도 없으며 또한 위대한 작가들이 당대의 시 대 분위기에 맞서보려고 하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것을 보다 명확하게 보여주는 예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지방에 국한된 보편적인 역사서를 편찬한 학자들은 많이 있었다. 그들의 근 면성 덕택으로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는 귀중한 자료들을 고 려할 때 그들이 기존 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한 것을 탓하기보다는 근면하고 박식한 그들 학자들을 칭찬해 주어야 할 것이다. 마끄리지 Maqr izi 그 중 가장 유명한 학자는 타끼이이 알-딘 알-마끄리지 Taqi yy al-D in a1-Ma 야iZI (l364-1442) 이다. 카이로 출신의 그는 이집트 역사 와 고고학의 연구에 전념하여 『키따뜨 Kh if;at.!J : 안)와 『술루크 Sulak 』 : ~j)
35) 원 제 목은 al-Mawa'ii wa-'l -I't iba r fl dh ikr al-K h itat wa-'l- A t ha.r 이다. 히츠라./ 1 없 0 년 불라끄 Bula q에서 인쇄되었다 . 〔역주] 불라끄는 나일 강 동쪽 강변의 지역 이름이다.
36) 이는 아유비조와 마몰루크조의 왕조사인 Al-Sulak li-r na'rif at Du- wal al-Mulak 이다. 마물루크 왕조에 관련된 부문은 꽈트르메르Qu a tr e mere 의 훌륭한 불어 번역판에서 접할 수 있다 (H i s t o i re des Sultan s Mamlouks •d e l'Eg ypte, Pa ris, 1845).
같은 그 방면의 권위서를 저술하였다. 그가 매우 빈번히 감사의 말 이나 주석을 달지 않고 베낀다든지 자신의 목적에 적합하면 대대적 인 표절을 일삼는 둥 비양심적이고 무비판적인 면이 있었지만 동시 대의 특성을 나타내는 이러한 잘못은 쉽게 양해될 수 있다. <마끄 리지는 그가 아니었더라면 망각속으로 사라질 뻔하였던 방대한 양 의 자료를 수집하여 일정한 상태로 정리하였다. 그는 대체로 근면하 며 빈톰이 없고, 가능한 한 당대의 현존하는 증거에 의존하였다. 또 한 그는 명쾌한 문체로 편견 없이 어느 쪽에도 두드러지게 치우침 이 없이 글을 쓴다 . > 371 동시대의 다른 유명한 역사서에는 이븐 알_ 띠끄따까 Ibn al-Ti qtaq a 의 『파크리 Fa khri』 38) 가 있는데 이는 1 印 2 년 모술에서 쓰여진 이슬람 정치에 관한 흥미로운 입문서이다. 하마트 도t의 왕 아부 알-피다 Abu al - F i cla(1331 년 사망)의 『일반 역사 개요 』 , 다하비 Dhaharn(1348 년 사망)의 방대한 『이슬람 연대기』, 이븐 아람샤 Ibn 'Arabshah(14EO 년 사망)의 티무르 전기에 관한 야심작인 『운명의 경이( 驚異 ) ‘Aj a 'ib al, -M띠 d ill'.』, 무슬림 통치하의 이집트 연대기가 포함되어 있는 아부 알-마하신 븐 타그리비르디 .Abo. al- M 蟲 s i n b. T aghli b irdi의 『빛나는 별 N대 am al, -Z助i ra 』이 있다. 틸 림산 T 油 nsan 의 마까리 (l 63'2년 사망)가 지은 『무슬림 스페인의 정치 및 문학사』는 바로 앞 장에서 언급하였다. 39)
37) A. R. Guest, A Lis t of Write rs , Books, and oth e r Auth o r ities menti on ed by El Maq r iz I in his Kh itnt, ]RAS for 1902, p. 106.
38) Fakhrl는 알바르트(1 860) 와 데 렌부르그(1 895) 에 의 해 편찬되 었다. 그 문체의 간결성과 내용이 갖는 다양한 재미 때문에 마땅히 인기를 얻 을만 하였다. 꾸란은 제쳐놓고 필자로서는 아랍 문학의 입문서로 그 보다 더 적합한 서적은 없다고 본다.
39) 본서 p. 550 각주 13) 참조.
잘랄 알-딘 알一수유띠 J al 하 al-D in al-Su yuti(14 45-1ff i5) 아랍 문명에서 알렉산드리아 시대의 문학적 경향을 가능한 한 완 벽하게 보여 줄 인물을 한 사람만 꼽으라고 한다면 1445 년 상 이집 트의 수유뜨 Su yut(또는 Us yut)에서 태어난 잘랄 알-딘 알 - 수유띠 를 반드시 지목하게 된다. 그의 가문은 본래 페르시아 출신이지만 다하비나 이븐 타그리비르디 등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처럼, 그 역시 모계는 터키 계였다. 여섯 살도 채 못되어 (5 년 7 개월) 이때쯤 그 의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一 이 조숙한 어린 아이는 꾸란의 제 ffi 장 < 금지의 장 Sura t al - Ta bnm>을 이미 암송하고 있었으며 여 덟 살에는 꾸란 전부를 암송할 수 있었다. 그는 이슬람 학문의 전 분야 에 걸쳐 가장 이름난 대 학자들 밑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l f() l 년 그가 관리하던 장학금을 유용한 사건 때문에 교수직을 박탈당할 때 까지 카이로에서 교수직을 역임하였댜 그는 여생을 하느님을 위해 바친다는 구실로 칩거하고 있던 나일 강의 라우다 Rawoa 섬에서 4 년 뒤 사망하였다. 그가 저술한 5 백 권 이상의 책 제목 들 이 남아 있 는데 그 중 대부분은 온갖 난해한 주제에 대한 저자의 호기심 어린 해박함――급즉 예언자가 바지를 입었는지 또는 그의 터번에 점이 있었는지, 자기 부모가 지옥 또는 천국에 있는지 등 울 보여 주는 짤막한 소책자라는 사실만 아니면 이 숫자는 믿기 어려운 것 이리라. 수유띠의 지칠줄 모르는 필력은 꾸란, 전승, 법, 철학과 역 사, 언어학과 수사학 등 방대한 학문 분야를 섭렵하였다 . 옛 알렉산 드리아의 학자들 처럼, 그 역시 다작으로 평판이 나는 것을 자랑으 로 여겼던 듯하며 그롤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가 다른 사람들의 저 서들을 약간씩 가필하여 자기 것으로 발표하곤 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유띠는 오히려 <셰이크 알-이슬람 Shay kh al - Isl am> 40) 에 40) [역주] 이슬람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중세 이집트에서는 이슬람법 해 석자인 무프티 Mu fti 중 최고 무프티의 칭호였으며 후에는 점차 오토 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의 무프티에게만 이 칭호가 사용되었다.
게 당대의 고명한 신학자인 까스딸라니Q-astall aru 를 표절 혐의로 정 식 고발하였다. 그는 허영심과 거만함 때문에 자주 싸움에 말려들었 으며 동료 학자들에 의해 < 난도질 > 당했다고 한댜 아무튼 그는 일 반 대중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 간명하고 읽기 쉬 운 그의 소책자들은 그의 자랑대로 인도에서부터 모로코에 이르는 전 이슬람 세계에 걸쳐 명성을 떨쳤고 당대의 학문을 대중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여기서는 꾸란 주해서인 『이트깐 It q m 』과 그와 동명(同 名 )의 잘랄 알-딘 알-마할리 J al 히 al-D in al - Maballi에 의해 저술이 시작되고 수유띠가 완성한 『두명의 잘랄에 의한 꾸란 주석 Ta /sir al-Ja l ala yn.!I , 언어학에 관한 논저 『무즈히르 Muzh i r( 또는 Mi zrar) 』, 구 카이로와 신 카이로의 역사서인 『후슨 알-무하다라 底 n al-M虐 c;lara』, 『칼리韓의 역사 Ta'n1ch al- Khulafa 』 정도 만 언급해도 족할 것이다 . 동시대의 다른학자들 동 시대의 문학에 관해 좀더 길게 논하는 것은 동 시대의 현학적 이고 비창조적인 특성을 강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의 목적 Ni hayat al-Arab 』의 저자인 백과사전학자 누와이리 Nuwa yrt(l3.'32년 사망)와 이븐 알-와르디 Ibn al-Wa rdi (1349 년 사망) 는 거명하고 넘어갈 만하다. 싸파디 $afa di (l :3@년 사망)는 幻권으로 된 방대한 전기 사전 『와피 빌_와파야트 W~ _ b i -'l-Wq fay따를 편 찬하였고 해박한 전승 연구자인 아스칼론 A 오최 on 의 이븐 하자르 Ibn 圈 ar 는 수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그중 『예언자 교우들의 생애 I寧 fi tamyi2 야 8 曲 lxz 』를 지적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4 ” 현대 적 개념으로 이슬람 중 • 고교와 대학의 표준 교과서라고 할 수 있 는 몇권의 명저를 소개하는 것으로 본 주제를 마칠까 한다• 많은 신 41 ) A Bi og rap h iaz l Di ct i on ary of Persons who knew Mofn rnrood, ed. by Sp re ng e r and oth e rs(Calcutt a, 1&56-1 얽 3).
학서와 법률서 중에서 ――- 이에 대한 초록과 주석서, 재주석서가 줄비하다 ___ 유럽의 학도들에게 가장 알려져 있는 것이 아마도 아 부 알 - 바라카트 알-나사피 Abu al-Barakat al - Na safi 0310 년 사망), 아두드 알-딘 알 - 이지 ‘Aoud al-D in al - l ji O~ 년 사망), 시디 칼릴 알-준디 Sidi Khalil al- Jundi(13ffi년 사망), 타프타자니 Ta ftazani(13 00 년 사망), 샤리프 알 - 주르자니 Sh artf al- Jurj aru0413 년 사망), 무함마 드 븐 유수프 알-사누시 Mubammad b. Yusu f al - Sanusr0 4ffi년 사 망)의 저술이다. 언어학과 사전 편찬 분야에서 이븐 말리크 Ibn Malik (1273 년 사망)가 지은 운문으로- 된 문법서 『 알피야 A /fi.Y.}U JJ , 싼 하지 요마面i (l3Z3 년 사망)의 극히 인기 있는 개요서인 기초 문법서 『아주루미야心山刀 muu 』 , 자말 알-딘 븐 무카람J amal al-D in b. Mukarram(1311 년 사망)의 『아랍인들의 언어 lisan al,- ' .Arob』와 피 루자바디 Fm 四此迎 (1414 년 사망)의 『사전 Qa mus 』 등의 유명 한 아랍 어 사전이 있다. 터키인이지만 위대한 서지학자인 핫지 칼리파I:Jajji Khalif a(l ffi8년 사망)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의 저서 『숨김없이 털 어놓은 이야기 Kash /aJ, -Zunan 』에는 그가 알고 있던 아랍어, 페르시 아어, 터키어로 쓰여진 모든 책들의 제목이 알파벳 순서로 정리되어 있다. 『천일야화』 꾸란이나 다른 어느 아랍 문학작품보다 유럽에서 훨씬 인기가 있 었던 『천일야화 A lf lay/a un lay/a』가 오늘날의 형태를 갖춘 것은 마물루크 시대에 와서 였다 . 이 책의 제목으로 오늘날 알려진 『아라 비안 나이트 Arab ian Ni ghts』는 진실의 일부분만을 말해 줄 뿐이다 마스우디(있 3 년사망)는 <일반적으로 1001 의 밤이라 불리며, 왕과 그 의 대신의 이야기이며, 대신의 딸 쉬라자드 S hiraza d 와 그녀의 여자 노예인 디나자드 D 떠효 d 의 이야기 > 4 2) 인 고대 페르시아의 작품 『하 자르 아프산 Hazar Afs an( 천 개의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앗 8 년
42) MurOj al-Dw 따 ed. by Barbie r de Meyn ard, vol. iv. p. 90. 쉬 라 자드와 디나자드란 이름은 분명히 페르시아어이다. 아마도 전자는 <종 족이 고귀한>을 의미하는 Ch i hrazad 의 전와(轉曲)이며 후자는 <신앙 를이 쉽고게귀 한식>별을할 뜻수한 다있으 . 리독라자.들 은 낯익은 Scheherazadae 와 Din a rzade
에 쓰여진 『피흐리스트』(p. 2m) 의 저자는 <이야기꾼들과 우화 작가 들 또한 그들이 지은 책의 이름에 관한 장>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 고있다. 『천일야화』의 페르시아 기원설 < 우화를 지어내어 그것을 책으로 만들어 보존하고 때로는 동물들을 등장 인물로 내세운 사람들은 고대 페르시아인들이었다. 역대 페르시아 왕조 중 3 번째 왕조인 파르티아 Parthi an'. "왕국의 왕들이 이 일에 가장 열의를 보였 다. 사산조 시대에는 이러한 종류의 책들의 수가 많아지고 널리 보급되었으 며 아랍인들은 그 책들을 아랍어로 옮겼다. 그리고 이 번역서들은 언어학자 들과 수사학자들의 손에 의해 고쳐지거나 또는 미문체로 가다듬어졌다. 또 다른 책들을 그와 같은 문체로 저술하기도 하였다 . 바로 이런 식으로 만들 어진 최초의 책이 『천 개의 이야기』이다. 페르시아에 어떤 왕이 있었다. 그는 매일 밤 한 여자와 결혼하고 나선 그 다음 날 아침 바로 그녀를 죽여버리곤 했다. 언젠가 샤흐라자드 Shahraz 따라 는 지혜롭고 꾀 많은 공주가 그에게 시집을 왔는데 그녀는 왕에게 어떤 이 야기를 들려 주기 시작하였다. 동 틀 무렵쯤 이야기가 한창 클라이맥스에 이르렀을 때 이야기를 끝내었다 . 그렇게 함으로써 왕이 공주의 목숨을 살려 주고 다음 날 밤 이야기를 계속하게끔 만들었다. 그리하여 공주는 천 일 밤 이 지나도록 이야기를 계속하여 그에게서 아들을 낳는 축복을 받았다…… 그리고 왕에게는 디나르자드 D 따 m 되라는 시녀q ahra 따 ma7} 있었는데 그 녀는 왕비와 한편이었다. 또한 이 책은 바흐만 Bahman 의 딸인 후마니 I:Iurr효퍼를 위해 지어진 것으
43) [역주] 카스피 해 남동쪽에 있던 고대 왕국으로 226 년에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함.
로 전해지며 그에 관한 여러 가지 전승이 있다. 역사상 최초로 야화를 즐긴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이며 _~ 그가 재미로 이야기를 들었다기보다는 단지 그것을 <기억속에> 남기고 싶어서였겠지만 - 그에게 웃음과 줄거움을 안겨 주는 이야기꾼이 있었다는 것은(신의 뜻이라면 아마도) 사실일는지도 모른다 . 『하자르 아프산』 그의 뒤를 이어 여러 왕들이 그러한 목적에 『하자르 아프산』을 이용하였다. 시간상으로는· 천 개의 밤이지만 한 가지 이야기를 말하 는데도 때로는 몇일 밤이 걸리는 경우도 있으므로, 실제로 이야기는 2 백 편이 안 된다. 필자는 몇번 이 책의 전집을 본 적이 있는데 실 로 그것은 통속적이며 싱겁기 짝이 없는 책이다(ki뎨 bun gh ath thu n barid al-bac lith). 441
44) 이상할지 모르지만, 이와 같은 비평은 『아라비안 나이토』를 읽은 거 의 모든 무슬림 학자들의 견해를 대표하는 것이다.
『대신들의 서 Book of Vizi. ers 』의 저자인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븐 압두스 알-자흐쉬 야리 Abu ·Abdallah Mubarnmad b. ·Abdo.s al- J ah shiy an(942-943 년 사망)는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그리스인 등 여 러 민족들의 이야기 일 천 개를 정선한 다음 각 이야기를 독립적으 로 엮어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이야기꾼들을 모아놓고 그들이 각자 알고 있는 이야기 중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취합한 다음 자 기 마음에 드는 우화만을 골라냈다. 그는 능란한 재주꾼이었다. 이 자료에서 400 일의 밤을 엮고 히릇 밤의 분량이 印페이지에 달하게 하여 완벽한 이야기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의도대로 천 개의 밤 올 완성하기도 전에 죽음을 맞고 말았다.> 『아러비안 나이트』의 다양한 소재 그렇다면 『하자르 아프산』의 이야기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핵심
인 것이 분명하며 이 페르시아 원본에는 현재의 전집 중에서 가장 섬세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이야기들인 r 어부와 악마』, r 카마랄자만 Gm 四김盆 m 如과 부두르 Bud (trJ, 『마법에 걸린 말』 등이 들어 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원본에 많은 이야기들이 첨가되었는데 이 이야 기들은 그 성격상 셈족의 특징을 지닌 두 종류로 분류된다. 첫째는 바그다드가 무대로서 주로 유명한 칼리파 <하룬 알-라쉬드>가 자 주 등장하는 해학적인 일화와 연애담들이며, 둘째는 카이로를 중심으 로 벌어지는 이야기로서 짓궂고 풍자적인 익살과 『알라딘과 요술 램 프』에서 처럼 완벽하게 나타나는 무의식적인 초자연력 숭배로 특징 지어진다 . 그러나 이 세 가지 원천과는 별도로 『아라비안 나이트야는 수세기를 거치면서 기원과 문체가 다양한 수많은 동양의 민담을 받 아들였다. 가장 오래된 갈랑 Gall ancf회 불어 번역본(파리, 1704-1717) 은 매우 재미있게 번안된 작품이며 어떤 면에서 레인 Lane46) 이나 버 튼 Bu rto n~1) 의 현학적인 번역보다 원본에 더 충실하다.
45) [역 주] Anto i n e Galland(1646-1715) : 프랑스의 동양학자.
46) [역주] Edward Wi lliam Lane0801-l 'o7 6) : 영국의 동양학자. 주요 저 서로 『근대 이집트인들의 관습에 대한 이야기 An accou nt of the Ma- nners and Custo m s of the Modem Eg yptians .,(1836) 과 『아랍어-영 어 사전 An Arabic -E ng li s h Lexic o nA 이 있다.
47) [역 주] Sir Rich ard Bu rton (l821-1890) : 영 국의 동양학자. 주요 저 서 로 영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메카를 순례하고 돌아와 쓴 『메카와 메 디나 순례 Pi lg r ima g e to Meca :z & Med i na.,(l &53)가 있다. 그가 번 역한 16 권의 『아라비안 나이트』 (1885-1888) 는 완역본으로 알려져 있 댜 특히 버튼 판에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각주가 붙어 있다.
『안타르의 전기』 『안타르의 전기 Sir at ‘Antar』는 하룬 알-라쉬드의 재위시 활동한 대 언어학자 아쓰마이 48) 의 저술로 전해진다. 그러나 본래 이 이야기
48) 아쓰마이 Asma'I 와 아부 우바이 다 Abo 'Ubayd a, 와흡 븐 무납비 호 Wahb b. Munabb ih를 근거로 해서 많은 에피소드가 전해 온다.
는 직업적 암송자들이 동양식 카페 앞에 앉아 실감나게 낭송하여 청중을 즐겁게 해주던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4 시 i 브로켈만에 따 르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이 작품은 십자군 시대로 그 기원 이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 주인공은 일곱 무알라까트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미 기술한 바 있는 유명한 이교도 시인이자 전사인 안타라 븐 샷다드이다. 『안타르의 전기』 이야기는 민간 전설의 시대 착오와 과장을 드러내고 있지만 동시에 유목민들의 변화무쌍한 생 활상을 경탄할 만큼 충실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동양의 보고(寶庫) Mi ne s de l'On' ent』 (1 00'2)의 서평에서 유럽 독자들에게 『안타르의 전기』를 소개한 폰 함머는 그것의 엄청난 분량 때문에 완역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각각 아라비아I:Iijaziyy a 와 시리아 S hamiyy a 판으로 불리는 이 이야 기의 개정판이 둘 있는데 후자인 시리아 판이 훨씬 축소판이다 .511
49) 『안타르의 전기』를 암송하는 사람들은 <아나티 라 ‘Ana ti ra( 단수는 안 타리 ‘An tari)>로 불린다. 레인의 『근대 이집토인들의 관습에 대한 이 야기』, 23 장 참조.
50) 이것이 1150 년 이전에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 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cf. the jo urnal Asia t i qu e for 1838, p. 383 ; Wi lste n feld , Gesch der Arab. Aerzte , No. 172.
51) Antn r, a Bedoueen Romance, 테릭 해밀톤 Ten ick Ha mi l t on 이 아 람어로부터 번역함 (London, 1820), vol. i, p. 23 이하. 그러나 플뤼겔 의 Catalo gu e of the Kais . Kort Bi bi . at Vie n na, vol. ii, p. 6 참조 . 『안타르의 전기』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Thorbecke, 'Antn ra h (Leip z ig , 1867), p. 31 이하에 소재. 전집은 32 권으로 카이로에서 발간 되었다
정통교파와신비주의 저간의 수세기 동안 아랍 문학이 쇠퇴하게 된 까닭은 바람직하지 못한 사회상과 정치 상황에 직접적으로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병페의 실질적인 원인은 보다 깊은 데 있으며 필자의 견해로는 이 미 오래 전부터 이슬람에 닥쳐오고 있었던 정신적 황폐함, 특히
l ax:J년경 아쉬아리파, 죽 사변 신학자들의 완전한 승리로 자명해진 도덕심의 마비에 그 원인이 돌려져야 한다고 본다. 철학과 합리주의 는 이후부터 소멸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며, 정통 교파와 신비주의파 두 종파가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당연히 정통 교파는 자유 사상에 근접하는 그 어느 것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의견의 일치 또는 합의 l j따亡 > 는 (실제로는 자신들에 의해 의견 조정이 되는 것이지만) 이교에 대항할 수 있는 유력한 무기가 되었댜 그들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그 무기를 사용했는지는 샤라니의 『야와끼트 Yaw aq恥에 나오는 다 음 인용문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바야지드, 두 알-눈 등의 고 대 수피주의자들이 앙심 품은 <울라마>둘로부터 당한 박해의 예를 들고 난 다음, 보다 최근에 발생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 고 있다 . r오 1
52) Sha'ranI, Yawaq lt(e d. of Cair o , 1 업 7 A. H.), p. 18.
이교도의 박해 < ‘울라마'들은 이맘 아부 바크르 알-나불루시 Imam Abu Bakr al- NabulusI 의 공적과 박식함, 곧은 신앙심에도 불구하고 그를 마그리브에서 이집트로 끌고와 ‘진디끄'임을 증명하였다. 술탄은 그를 거꾸로 매달리게 하 고 산 채로 그의 살가죽을 벗기도록 명령하였다. 판결이 집행되는 동안 그 는 꾸란을 낭송하였는데 차분하고 겸허한 그의 태도에 감동한 군중들이 폭 동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나시미 N asimi도 알렙포에서 살가죽을 벗기는 형에 처하게 했다 .all 그의 논법에 말문이 막힌 그들은 그
53) 이는 1417 년의 일이다. 터키 시인이자 후루피파 Hura fi s 의 신비주의 자로서 주목할 만한 나시미에 관한 상세하고 가장 홍미로운 기술은 E. J. W . Gib b , Hi st o r y of Ot tom an Poetr y, vol. i, pp. 343-368 에 소 재한다. 여기서 기술되고 있는 이야기가 그가 비난받는 진실한 이유 를 제공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법신론적 발언들이 그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또 터키의 전기학자 라띠피 La tiff는 그의 목숨을 앗아간 구절을 자세히 열거하고 있다. S frJ바r.zr a t al- D fr:ilnb의 저자는 그를 타브리즈 Tabm 의 나심 알-딘 Nas im al- Din으
로 부르며(그는 바그다드 지방의 나심 Nas i m 태생으로 널리 알려짐) 그의 추종자들이 많았고 그의 이단 교리가 널리 보급, 전파되어 있던 알렙포에서 거주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점을 필자는 덧 붙 일 수 있다 . [역주] 후루피파는 9 - 15 세기에 이란과 터키에서 발생한 쉬아파의 분 파로서 이단이었다 .
롤 파멸로 몰아넣기 위해 다음과 같이 계략을 쌌다 . 그 들 은 ‘수라트 알-이 클 라쓰 Sura t al-Ikhl~ ' 를 써놓은 종이 쪽지 를 미리 매수한 구두 수선공에 게 주며 말했다. ‘그것은 오직 사랑과 기쁨만이 담겨져 있으므로 그것을 구 두창 안쪽에 넣어 주시오 . ’ 그런 다음 그들은 그 구두 를 셰이크 나시미에게 선물로 보내어 영문을 모르는 나시미로 하여금 그 구두 를 신게 하였다. 그 의 적 들 은 알렙포 지사에게 가서 일러 바쳤다 . ‘나시미가 r 말굽t라, 신은 오 직 한 분뿐이니』 를 적어서 그의 신 안창에 넣었다는 확실한 정보 를 갖고 있다. 우리를 못 믿는다면 그 를 불러 들여 알아봅시다!' 지사~ 즌 그들이 바 라는대로 행하였다. 종이가 구두 안창에서 나오자 셰이크는 하 느 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고 그러한 비난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는 그것을 구 실로 죽음을 당하리라는 것 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그의 제자들 밑에서 공 부한 어떤 사람으로부터 들 은 바로는 그가 살가죽을 벗기는 체형을 받는 동안 내내 신의 유일성을 찬미하는 ‘ 무왓샤흐’ 를 읊었으며 그가 읊은 시는 5 백여 편에 달했다고 한다. 그 는 형 집행자들을 쳐다보며 미소까지 지었다고 한다. 또한 ‘울라마'들은 셰이크 아부 알-하산 알 - 샤딜리 Abu al-I :J asan al- S 넒陣'저 ’ 를 서쪽에서 이집트로 데리고 와서 그가 이단임 을 입증하려 하였 지만 신은 그러한 음모로부터 그 를 구해 주었다 . 또 그 들 은 셰이크 잇쯔 알 - 딘 븐 압드 알-살람 'Izz al-D in b. 'Alxl al-Salan{맨 ’ 을 불신자로 몰아 그의 저서 『신조 ‘A q lcb 』 중 몇 가지 표현을 문제삼아 그 를 재판에 회부하
54) 꾸란 112 장.
55) 이슬람교 수도승 Derv i shes 들 인 샤딜리야 Sh a. dh iliyy a 교단의 창시자 이다 . 튀니지 태생의 그는 흔히 이맘 알 - 샤딜리로 알려졌다(1 196- 1258). [역주] 그는 환상으로 하늘에 <보존된 명판>에 그의 제자들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 을 보고 자신의 교리 를 따르는 자는 지옥의 시 련을 면한다고 주장하였다. CEI, al-Sha.d hIII, p. 358 참조 . 56) <신학자들의 술탄>이란 명예 칭호를 받은 저명한 법학자이자 인문 학자였다 .
고 술탄에게 그의 처벌 을 촉 구하였다 . 그러나 그 후 그는 술탄의 총애 를 회 복하였다. 또 ‘울라마' 들 은 셰이크 타즈 알-딘 알-수브키 Taj al-U n al- Sub kf1 1 도 똑같은 혐의로 비난하였는데 그가 음주를 합법적인 것으로 여겼 디는 것이며 밤에는 불신자의 휘장ghiy찮과 띠 zunnar5 8 1 를 두르고 다닌다고 주장하였다 . 그들은 그에게 수갑과 족쇄 를 채워 시리아에서 이집트~ 호송 해 왔다. >
57) 저 명 한 교회 법 학자였다 (1370 년 사망) .
58) 허리에 띠를 두르는 것은 조로아스터교도들의 관습이었다. 무슬림들 은 기독교를 비롯한 다른 이교도들도 그랬다고 믿는다 .
위 묘사는 너무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정통 교파 신자들이 폭 력을 거의 쓰지 않았다는 점은 <울라마>들의 공임을 인정해야 된 댜 이슬람은 다행히 조직적인 이단자 탄압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댜 한편 < 울라마 > 들의 권위가 이제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므로 도덕적, 지적 자유에 대한 진전은 모두 외견상 중단되거 나 간헐적으로 나타날 뿐이었다. 수피주의가 어느 정도는 그러한 경 향의 대표적 일례였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들은 사변 신학과 승리의 기쁨울 공유하며 거기에 따른 반동에 기여했다. 이제 더 이상 신앙 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억압받는 소수가 아닌 그들은 모든 분파 롤 수용할 만큼 넓은 강단에 덕망 있는 신학자들과 나란히 앉게 되 었으며, 수피주의의 대중적 영웅들이 정통 교파의 성인으로 변모해 있음을 발견하였다 . 이러한 타협이 늘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 지만―—_사실 마찰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대체로 팽팽한 긴 장 관계를 썩 잘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앙심 깊은 사 람들이 이슬람교 수도승들의 무법성에 충격을 받았으며 완고한 신 앙을 가진 사람들이 이븐 알-아라비와 이븐 알_파리드의 책들을 기 꺼이 불살라 버린 데 비해, 일반 신학자들은 성인과 관련된 문제에 는 판정을 보류하거나 그들을 인간이 바판할 수 없는 상위 존재로
간주하는 성향을 보였다. 동시대의 신앙 생활을 대표하는 전형적 인물로서 서로 반대 진영 에 속하는 타끼이이 알 - 딘 븐 타이미야 Ta qiyy al-D in lbn Tayr ni- yy a 와 압둘 와합 알-샤라니 ‘Alxiu ' 1-Wahhab al-S ha 'ram 두 사 람을들수 있다 . 이븐 타이미야 (1 2fil- 1328) 이븐 타이미야는 1 幻 3 년 하란에서 출생하였다. 몇년 후 몽골족을 피해 그의 부친은 그를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와 그곳에서 정식으로 훌륭한 교육을 받게 하였다. 그는 일단 무엇이든 배우면 잊어버리는 일이 없으며 <이븐 타이미야가 인정하지 않는 전승은 전승이 아니 다>라는 말까지 들을 만큼 신학과 법률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였다. 그 자신 열렬한 한발리파 신자로서 꾸란은 이성에 의하지 않고 문 자 그대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대담하게 종교 개혁 의 과업을 단행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요컨대, 그의 목적은 예언자 가 교시한 원시적 일신론을 회복하고 이슬람의 존재를 위협하~근 이 단과 타락을 이슬람으로부터 제거하는 데 있었다. 그가 누구를 적으 로 간주하고 공격하고 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신비주의자, 철학자, 사변 신학지들 모두가 그로부터 비난의 화살을 받았다. 어 떠한 권위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논법을 초대 교회의 전통과 관 례로부터 끌어내어 결과에 아랑곳없이 가장 설득력 있게 자신의 신 념을 표현하였다. 몇차례 투옥되었지만 오랫동안 그의 입을 틀어 막 을 수는 없었다. 그의 비난의 목소리는 민간 신앙의 미신인 성자 숭 배, 성지 순례, 서원( 팔 願), 제물, 주문(呪文)에 대해 목청을 돋구어 비난하고 나섰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열렬하고 엄격한 믿음을 가진 신자라면 순전히 우상 숭배로 비난하였을 이런 것들은 고대 관습에 서는 신성한 숭배 의식의 일부였으며 이슬람에 이르러 깊이 뿌리내 리게 된 것이다. 대다수 무슬림들은 여전히 성자들을 맹신하여 그들
의 기적을 인정하며 그들이 남긴 유물을 숭배하고 묘소에 참배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 이븐 타이미야는 심지어 예언자의 도움을 기 구(祈求)하거나 그의 묘에 순례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하였 다. 그것은 부질없는 항의였다. 그는 다마스쿠스에서 체포되어 최후 를 마쳤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군중의 숫자에서 당시 이십 만 명의 남자와 만 오천 명의 여자가 참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담한 개혁자가 얼마나 널리 존경을 받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 다. 묘하게도 그는 교리상 그토록 반대하던 수피주의자의 묘지에 묻혔는데 사람들은 그를 성자(!)로 추모하였다. 이븐 타이미야에게 영감을 준 원리들은 즉각적인 효력이 극히 제한된 범위에서만 나타 나긴 하였지만 완전히 실패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1 앙1 l 기의 와하비파 Wahhab ite 운동에서 의기양양하게 재등정하게 된다. 가잘리가 교조 신학과 신비주의를 조화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지 만 이 두 분파는 본질상 화합할 수 없는 것임이 이내 분명해졌다. 꾸란의 권위와 전승을 굳게 지키는 정통 교파는 신비주의자들에게 있다는 비교적(秘敎的)인 계시가 자신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됨을 인 식하였다. 한편, 신비주의는 외형적으로는 이슬람의 계율을 따르면 서도 신에 대한 참 앎은 신학에서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나 또는 하늘의 계시인 <내적인 빛 Inner Light> 591 을 제외한 어떤 근원에서 얻을 수 있디는 생각을 경멸하였다. 따라서 <파끼흐faqih(신학자)> 와 <파끼르faqtr(수도승)>는 서로 대조적이다. 전자는 정권과 밀접 하게 결탁하여 강력한 관료 계급제도를 형성하는 계급인데 반해 수 피주의자들은 일반 대중, 특히 빈민충의 지지를 받았다. 여기서 이 들 두 라이벌간에 상존해 온 이슬람 근대사의 현저한 특징인 어쩌면 당연하기도 한一—-반목에 대해서는 길게 논하지 않겠다. 59) [역주] 본래는 퀘이커 교회에서 말하는 <내적인 빛>으로 각 사람의 영혼속에 있어서 인간을 영적·도덕적으로 인도한다고 생각되는 신의 빛을 뜻한다.
샤라니 (1 또 5 년 사망) 그보다는 최후의 이슬람 견신론자였던 압둘 와합 알-샤라니에 관 해 잠깐 논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다. 그는 온갖 결점에도 불구하 고 독창적인 시상가였으며 그의 저서에 대한 수요가 착실히 증가되 고 있는 것에서 보여지듯이 오늘날까지도 그의 영향력이 강하게 느 껴진다. 그는 16 세기 초쯤 태어났다. 그의 외형상의 삶에 관해서는 그가 베를 짜서 팔며 카이로에 거주하였다는 사실 외에는 거의 알 려진 바가 없다. 당시 이집트는 오토만 제국의 일개 지방주였다. 샤 라니는 새 정권하에서 농민들이 처한 비참한 운명과 마물루크 시대 의 농민들이 비교적 형편이 더 좋았던 것을 대비하여 그 차이를 뚜 렷이 나타냈다. 세리(稅吏)들의 세금 징수가 어찌나 가혹한지 농민들 은 경작한 수확물을 모두 내다 팔아야 했으며 심지어는 농민 자신 과 그의 가족이 투옥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밭을 가는 소까지도 팔아 치워야 했다. 또 이익이 남는 장사는 모두 몰수되어 망해버렸다. 그 러나, 샤라니가 이같은 세속적인 문제에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였다 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는 환상과 불가사의한 경험의 세계에서 살 았다. 그는 그보다 앞선 유명한 학자로서 『메카 계시록 Meann Re- ve lati ons 』 샤라니는 이를 연구하고 그 개요서를 썼다 의 저자인 무호이 알-딘 븐 알 - 아라비처럼 천사들이나 예언자들과 담 화하였다. 그의 자서전 『라따이프 알-미난 La 臣'if al-M im n 』은 정 장한 신비 의식의 사제 모습을 보여 준다. 이 책은 그의 타고난 독 특한 영적 재능과 장점을 기록하고 있으며 부끄럼 없는 자화자찬의 걸작품으로 손꼽을 만하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모든 특이한 자질 이 신의 축복이며 그 축복의 수혜자에 의해 <하느님의 크신 영광을 위하여 ad rnajor em D:척 glo ri am> 기꺼이 나타나는 것임을 거듭 확 신시켜 주지는 못했다. 샤라니를 이 책만으로 평가하려 든다면 그를 부당하게 대하는 것이리라. 이 거만스럽고 기적을 행한다고 자칭하 는 사기꾼은 당대의 가장 뛰어난 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사변 신
학자들을 오히려 그들 특유의 무기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써 물리 칠 수 있었다. 그는 진정 신학fiq h 을 수피주의에 이르는 첫 걸음으 로 생각하고 실제로는 그것들이 동일 학문의 다른 면면임을 보여 주려고 하였다. 또한 그는 4 대 법학파의 상이점을―――학파간의 견 해 차이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말한 것으로 전해지는 <우리 동족민 들의 불일치는 신의 자비로운 행위이다 ikhtilaf umnati rabmatu n> 라는 명언에 의해 신성시된다 잘 조화시키려고 하였다. 일반적 으로 아라비아의 수피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샤라니는 자신의 신비 주의를 한정된 범위내에서 견지하였으며 자신은 바그다드의 주나이 드J unay d(003-910 년 사망)를 추종하는 온건파의 지지자로 자처하였 다. 그의 엉뚱한 주장과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치기어린 믿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교 교파와의 접촉을 끊지는 않았다. 무함마드 븐 압둘 와합 Mu t:i ammmad b. 'Abdu '1-Wahhab 과 그의 후계자들 13 세기에 이븐 타이미야는 이슬람의 단순한 교리를 모호하게 만 드는 폐단을 근절시키려고 노력한 적이 있다. 그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작업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어 오래 시간이 지난 후 와하비 운동으로 성취되었다 .60) 1 72/J년 아라비아의 고원지 대인 나즈드에서 태어난 무함마드 븐 압둘 와합6 ” 의 이름에서 이 개 혁 운동의 명칭이 유래된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지금까지도 그 60) 부르크하르트J. L. Burckhard t의 논저 『베드윈족과 와하비에 관한 기 록 Note s on the Bedouin s and Wa h:Jby s 』 (London, 1831) 의 제 2 권 에 발표된 r 와하비 역사 자료 Ma teri als for a Hist o ry of the Waha- b y」 참조. 부르크하르트는 터 키 인들이 와하비 파 Wahhab i s 로부터 히 자즈 지방을 재탈환하던 때에 아라비아에 있었다. 그의 생생하고 지극 히 홍미로운 이야기는 도지에 의해 『이슬람 역사에 관한 소론 Essai sur l'his to i r e de l'Is lam is me 』의 13 장에 요약되었다. 61) 부르크하르트의 예를 따라 대부분의 유럽학자들은 그를 압둘 와합 'Abdu 'l-Wahhab 으로만 부른다.
지방 사람들의 관습이 그러하듯이 >62) 아람 동부지방의 주요 도시를 돌아다녔는데 여행을 통하여 이슬람이 완전히 부패하였음을 확신하 였다. 이븐 타이미야를 본보기로 삼은 이븐 압둘 와합은 그의 책을 직접 자기 손으로 베끼고6 3 ) 이슬람교를 초기 형태의 순수한 이슬람 교로 다시 세울 것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고향에 돌아와 가족 과 함께 당시 무함마드 븐 사우드 Mubammad b. Sa‘Ud 가 촌장으로 있던 디라이야])ira‘iyy a 로 칩거하였댜 무함마드 븐 사우드는 압둘 와합의 첫 개종자가 되어 곧 그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무함마 드 븐 사우드의 아들 압둘 아지즈 ‘Abdu 'l_‘ Aziz휘하의 와하비파 가 최초의 대승리룰 거두게 되는 것은 18 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 lOO1 년 그들은 바그다드 근방의 마울인 이맘 후사인 Imarn Husa yn어 ) 을 공략하여 오천 명을 학살하고 후사인 묘의 천정을 파괴하였다. 부르크하르토의 말대로, 모든 쉬아파 교도들이 그 묘에 참배한 것이 와하비파를 분노케 한 발단이 되었다. 2 년 뒤에 그들은 메카와 메디 나를 포함한 전 히자즈 지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같은 해에 압둘 아 지즈가 암살되자 그의 맏아들 사우드가 정복사업을 계속하여 아라 비아 거의 대부분의 지역을 와하비파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마침 내 1811 년, 터키는 성도를 회복하기 위하여 함대와 육군을 파견하였 다 . 이 과업은 이집트의 파샤 무함마드 알리 M 떠四 mmmd ‘AlI 에 의해 달성되었으며 (1812-1813), 5 년간에 걸친 치열한 격전 끝에 결국 오토만 터키 측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하여 1818 년 오토만 터키는 와하비파에 참담한 패배를 안겨 주고 그들의 수도인 디라이야를 급 습하였다. 그러나 이 분파는 아직도 중앙 아라비아에서 세력을 유지 62) Burckhardt, 앞의 책 , vol. II, p. 96. 63) 이븐 압드 알-와합이 복사한 이븐 타이미야의 필사본은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다 (Goldz ih er in ZDMG, vol. 52, p. 156). 64) 이 곳이 카르발라 Karbala 혹은 마쉬 하드 후사인 Mashhad I:I usa yn으 로 불리는 곳이다.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정치적 중요성도 지니게 되었다. 와하비운동 오토만 터키는 와하비파를 불신자들이나 신홍 종교를 만들어낸 장본인들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순례자들의 카라반을 가로막고, 존 경받는 성인들의 잘 꾸며진 묘소를 파괴하며(예언자의 묘소도 예외가 아니었다) 카바 신전의 <흑석>을 부숴버렸다. 따라서 오토만 터키인 들의 눈에 그와 같이 비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 모든 일은 쇄 신자로서가 아니라 개혁가로서 행한 것이었다. 와하비파는 그들이 행한 행위에 관한 한 카르마쓰파와 홉사하였다. 부르크하르트가 다 음과 같이 말한 것은 일리가 있다. <와하비파의 법전에 단 하나의 새로운 계율도 들어 있지 않았다. 압둘 와합은 꾸란과 순니샨科함마드 의 전승에 기초한 계율)를 유일한 지침으로 삼았다. 와하비파와 정통 교파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__三 그렇게 말하는 것이 부적합하다 할지라도 와하비파의 경우 다른 교파가 무시하거나 전혀 지키 지 않은 계율을 엄격히 따르는 점이다. >65) 도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 다. <와하비파는 무함마드를 우상 숭배하는 식으로 경배하는· 것을 비난하였다. 그들은 무함마드를 신의 뜻을 알리기 위해 파견된 예언 자로 인정하긴 하였지만 그가 여느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에 불과하 며 그의 주검은 하늘에 올라가기는커녕 메디나의 묘지에 안장되었 다고 믿었다. 성자 숭배도 마찬가지로 강력히 반대했다. 그들은 모 든 인간이 신 앞에 평등함을 선포하였댜 또 아무리 덕망이 뛰어나 고 신실한 자라도 신에게 중재를 해달라고 말할 수 없으며 따라서 성자의 가호를 기원한다든지 그들의 유적을 숭배하는 것은 죄악이 라고 주장하였다 .>66) 청교도와 같은 정신으로 그들은 담배를 피우는· 것과 화려한 의상을 입는 것, 염주로 기도룰 올리는 것을 금하였다. 65) Burckhardt, 앞의 책, vol. ii, p. 112. 66) Essai sur /'hist o i r e de l'lsla mi sm e, p. 416.
<또 커피 마시는 것도 금하였다고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언제나 과할 정도로 그것을 애용하였다 .>67) 아프리카의 사누시파 SanOs i s 와하비 운동은 유럽의 종교 개혁과 곧잘 비교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영국과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지만 전자는 어떤 커다란 정 치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것은 이슬람 전역에 걸친 전반적인 종교 부흥, 특히 트리폴리와 사하라, 북부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세 력을 한창 떨치고 신자가 수백만으로 추산되던 신비에 쌓인 <사누 시야 Sanus iyy a 형제단>에서 결실을 맺었다. 이 방대하고 무시무시 한 조직의 창건자인 무함마드 븐 알리 븐 사누시 Muhammad b. ·AII b. Sanus i는 1791 년 알제리에서 출생, 메카에서 수년간 살다가 이집트와 트리폴리의 중간 지점인 리비아 사막의 자그붑Jag hb 머에 서 1 8ffi년 사망하였다. 사누시파의 실제 목표에 관해서는 셀 목사 Rev. E. Sell 68) 의 홍미로운 논문 「이슬람 소론 Essa y s on Islam 」 (1~1) p. l'Z l 이하를 참조하기로 한다. 그들은 서구나 근대 문명에 전적으로 반대하였으며 7 세기에 예언자와 그의 후계자들이 메디나 에 세운 신정(神政) 국가를 모델로 독립적 신정 국가를 건설하여 이 슬람을 쇄신코자 하였다.
67) Burckhardt, 앞의 책 , p. 115. 68) [역주] 영국의 동양학자이자 신학자 . 왕립 아시아학회의 회원 역임 .
이슬람과 현대 문명 1700 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으로 시리아와 북 아프리카의 무 슬림들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의 무슬림들도 더욱 유럽의 영향권에 들어오게 되었다 .69) 키디브 Kh edi ve10) 왕조를 세운 무함마드 알리와
69) 이 문제에 관해서는 필자로서 더 이상 상세한 기술을 할 수 없다. 현대 아랍문학에 대한 고찰은 Brockelmann, Gesch der Arab. Lit t,
그의 후계지들은 서구의 우월한 문화에서 얻을 수 있는 실질적인 이득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한 측면에서 그들의 정책은 신중하 기보다는 열의가 대단한 것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결 코 헛되지 않았다. 1821 년에 인쇄소가 들어온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 었댜 거의 잊혀져 가던 많은 고전 작품의 발간은 아랍인들의 민족 문학에 대한 열정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발전의 토대는―一-발전 이라는 어휘를 편견 없이 사용하겠다-아랍어가 사용되는 모든 국가에서 오늘날에도 정기적으로 발간되는 수많은 시사지, 문예지, 학술지등에· 의해 조장되었다 .711 단명했던 이들 잡지 의에도 카이로, 불라끄 B 띠aq, 베이루트의 아랍 인쇄소나 유럽인 인쇄소에서 온갖 종류의 고서와 새로운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유럽의 학문 이나 문화는 번역물이나 번안물을 통해 접할 수 있었는데 이 를 모두 목록으로 작성하면 책 한 권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아랍인은 모국어로 라신Racin eTl) 의 비극, 몰리에르 Mo li ere T.I I 의 희극广 라 퐁텐 La Fon tain e75) 의 우화들인 r 폴과 버지니 어 Paul and Vi rgini a 」, r 부적 Ta li sman 」, r 몽테 크리스토 Mon te Cr i- s t.o」(그 밖에 수십 편의 단편은 물론이고)와 심지어 호머의 『일리어 드.!l 7 6 ) 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모방 활동과 병행하여 과거의 문학 방식과는 달리 활력이 넘치는 운동이 나타났다. <근대 아랍
vol. II, pp. 469-511 및 Hua rt, Arabic Li ter atu re , pp.4 11-443 에 소재 한다 70) [역주] 1867 년부터 1914 년에 걸쳐 터키 정부가 이집트 태수에게 부여 한 칭호. 71) M. Ha rtma nn, The Arabic Press ·of Eg ypt(L ondon, 1899) 참조 . 72) [역 주] Jea n Raci ne 0639-1699) : 프랑스 고전 비 극의 대 작가. 73) [역주] 프랑스의 배우· 희극작가 (1622-1673). 74) Brockelmann, 앞의 책 , p. 476. 75) [역주] Jea n de La Fonta ine (1621-1695) :프랑스의 시인 • 우화작가. 76) 술라이만 알-비스타니 Sulaym an al-B i s tanI에 의해 번역됨(카이로, 1904). 이 작품에 대해 마구리우쓰 교수의 홍미로운 비평을 ]RAS for 1905, p. 417 이 하에 서 참조.
문학은 제한된 범위에서 옛 ‘고전’ 아람 문학의 후계자이지만 그 문학적 유산을 완전히 포기하려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 근대 아람 문학의 주창자들은 대부분 다론 원천에서 지식을 흡수하고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과거는 여전히 그들의 지 적 배경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그들 가운데는 새로운 영향력 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을 만큼 과거에 집착하는 분파도 있다. 수십 년 동안, ‘전통파’와 ‘근대파’가 아랍 문학의 정신을 놓고 투쟁을 벌이고 있으며 어느 한편도 상대방에 대한 승리를 아직 장담할 수 없다. 7) 그 주역들은 (그들을 실제적 목적으로 분류한다면) 한쪽은 유 럽에서 교육받은 이집트인들과 시리아인들이며 다른 한쪽은 전통적 인 교육을 받은 이집트와 후진 아랍 국가의 작가들이다. 궁극적으로 결과는 어찌 되었든 간에 갈등은 아랍 세계를 고대라는 정신적 지 주로부터 분열시켰으며 이집트, 시리아의 현대 문학에는 좀더 새로 운 발전의 일환으로 고대 전통에 낯설은 기풍이 주입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78)
77) [역주] 아람의 문예부홍은 서구와의 접촉으로 자극받은 아랍 지식인 들이 이제까지 침체기에 빠져 있던 아랍 문학의 고전을 연구하는 작 업에서 시작되었다. 이미 서구와의 접촉은 유학단의 파견, 여행, 이주 를 통해 가속화되고 있었고 서구의 영향 또한 점중하고 있었다 . 그러 므로 아랍 문예부흥은 <전통파>와 <근대파>의 갈등 속에서 이루어 질 수밖에 없었다. 송경숙 외, 『아랍 문학사.!I, pp. 305-306 참조 .
78) H. A. R. Gib b , Stu d ie s in Conte m p o rary Arabic Lit er atu re , Bullei tin of the School of Or ien ta l Stu dies , vol. IV, pt. 4, p. 746, cf. vol. V, pt. 2, p. 311 이하. 깁 G i bb 은 동 주제에 대한 주요 참고 문헌 을 언급하고 있는데 아람어나 러시아어롤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그와 유사하거나 버금가는 것을 찾아볼 수 없는 그의 개관을 영어로 옮겨 주기를 바란다.
이제까지는 서양 문화가 이슬람의 겉으로 드러난 면만을 접촉하 였다• 그것이 종국에는 무슬림들의 정서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형 식적 규율과 문학 전통의 내적 장애를 뚫고 보다 깊이 침투할 것인
지, 아니면 항상 계몽되고 해방된 소수의 이국적이고 소중한 성취로 만 남을 것인지, 아니면 전 무슬림들에게 경멸과 증오의 대상이 될 것인지는 앞으로도. 수세기 동안 완전하게 풀 수 없는 문제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한편 그러는 사이에도, 지나간 < 과거>는 광대하고 훌륭한 연구의 장을 제공해 줄 것이댜
권말해설 P. 2'2: 아랍어는 A D. 3 세기에 북부 아라비아의 비문에서 나타나 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랜 비문은 자우센Ja ussen 과 사비냑 Sa vignac에 의해 공개된 乃 3 년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M 函i m ardzeologi que en /'Arabie, vol. i, p. 172). 이 비문은 아람어 문자로 쓰여져 있지만 하로비츠 Haro vitz 교수가 Isla mic OJlture (Hy oo-a- bad, 도), April 1 懿 3, vol. iii, No. 2, p. lffi , note 2 에서 제시한 전사에서 알 수 있듯이 거의 모든 단어들이 아랍어이다. P. 39 이하: 사바 왕국과 남부 아랍어 비문에 관한 풍부하고 귀한 자료가 『이슬람 백과사전Ency do] X12dia cfIs lam.o에 트카치J. Tka- tsch가 집필한 논문 Saba' 에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4차 례에 걸친 여행 (lm-1~) 을 통해 었 H) 개 이상의 비문을 수집한 바 있는 글레이저 E. Glaser 의 비문 발견이 갖는 특별한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 또한 D. Niels e n, Handbuch der altar abiscnen Alter tumsku- nde, vol. i (Coi:en}백e n and Paris, l
의해 편집된 단편적인 Bo d< cf the Hi myari.te s( 시리아어 원문과 영 어 번역본)을 참조 또 Tor Andrae, Der Urspn mg des Islams und das Ou-istentum( Up psala, 1926), pp. 10 -13 참조 P. 76. : 쿠파의 무팟달 븐 살라마 M 며a d c;lal b. salarna 가 지은 아 랍어 속담집 Ki tab al. -Fa khi. r 는 스토리 C. A Sto re y ( Ley d en, 1915) 의 훌륭한 편저로 나와 있다 . P. 77, 각주 7) : 비평적 주석이 달린 A 성齒正7 } 카이로에서 발간중 에 있다. P. 103, 12 행 이하. : 여기서 언급된 전투는 호 3 년 하리쓰 븐 자 발라 I:Iarith b. J abala 의 아 들 하리쓰 I:Iarith와 히 라의 문디르 Mu- nd hir 때 l 사이에 일어난 아인 우바그 ‘Ay n Ubag h 전투는 아니다 (Guidi, L 辱i e anteisla mique, p. 'lJ). P. lff i. : 송시Banat Su‘초 는 졸저 『동양의 시와 산문의 번역 Trons/at ,,.a ns cf Easte r n Poetr y and Prose.!I, pp. 19 - 23 에서 영어로 번역한바 있다. P. 200. : 전해지는 이 슬 람 이전 시의 진위 여부에 관해서는 이 분 야의 권위자인 찰스 라이 얼 경 Sir Charles J. L y all 의 견해가 돋보 이는 것으로 생각된다 (In tr oduc ti on to the Ml /ft.띠中Iy책 vol. ii, pp. xvixxvi). 그는 <대체로 이들 고대 유산을 면밀히 검토하고 받는 느 낌은 그것들을 실명( 質 名)인들의 작품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고 결론짓고 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마구리우쓰Ma.rg o li ou th 교수는 여느 때처 럼 박식하게 통렬히 반박하였다 (The Origins cf Arobic Poetry , ]RAS, 1925, p. 417 이하) . P. 219, 11 행 : 꾸란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주해서는 요zbfb (ed Krehl, vol. iii, w. 1 9:3웅印)의 제 ffi장에 있는 부카리 B ukhari의 것이 다. P. 2'21 각주 13) : 최근의 연구자들 (Cae tani and 냐 mmns) 은 보다 훨씬 회의적이다. Snouck Hurgr onje, Mc hurmedanism, p. 2'2 이하
참조 P. 2'29 각주 ~) : 리처드 벨Ri chard 政沮 (The Origin cf Islam in its 야ri s tian erwi ro nment, p. 犯)이 지적한 바와 같이 단어 ruj z 는 십 중팔구 분노를 뜻하는 시리아어인 rug za 와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꾸란의 이 구절은 <다가오는 분노로부터 피하라>를 의미한다. P. 249, 15 행 이하 : 이는 필자가 생략하고 싶었던 구절 중의 하나 이댜 본문에 실려 있는 것에도 필자가 오래 전부터 오류로 간주해 온 관점을 담고 있다. P. 2f6, 11 행 이하 : 스누크 후르그론즈 Snouck Hurgr onje (Molr:t-- mmed anism, p. 44) 교수는 <과연 무함마드가 그의 포교 과업의 보 편성을 인식하고 있었느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무함마드는 그 렇지 않았다고 단정하고 있다. 필자는 <처음에는 무함마드가 자신 의 포교 활동을 보편적인 과업 중 아랍인들이 맡아야 할 몫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데 동의한다. 이 경우 본문에서 인용한 꾸란 구절 clhi.kr un li-'l -' a!amtn은 <(메카 혹은 아라비아)의 모든 주민들 에 대한 경고>를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메디나 장들에 나오는 그 와 비슷한 표현들은 좀더 광범위한 의미룰 지닌다고 필자는 생각한 다. 세계 종교로서의 이슬람이라는 개념은 유태교와 기독교의 성서 들이 틀린 곳이 많고, 꾸란이야 말로 무함마드 이전의 모든 예언자 들이 차례로 설파한 바 있는 참된 신앙을 나타낸다는 무함마드의 후기 신앙 ___ 그가 거기까지 이르는 데는 점진적이었다――-에서 잘 드러난다. 따라서 무함마드는 일단 그러한 신념에 도달한 이상 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 과업을 수행하도록 맡길 그럴 사람은 아니 었다. P. 315, 12 행 : Ri vis ta deg l 函끄五 orie nt.ali, 1916, p. ~ 이하에 발표한 논문에서 날리노C. A Na llino 교수는 <무타질라파>란 명칭 의 기원에 대한 본 기술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스우디 (M며 al-Dra h:Jb, vol. vi, p. 22 및 vol. vii, p. Z34)의 말대로 이 단어
는 i‘1izal의 파생어이다. 이 단어는 중죄를 범한 자는· 그럼으로써 진 실한 신자들로부터 떨어져나와(i'tazal a) 그들과 이교도들의 중간 위 치(이를 fisq, 죽 불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를 차지한다는 교의를 뜻한 다. 무르지파에서는, 이와 같은 사람을 여전히 진실한 신자로 간주 하며 무르지파의 반대파인 와이디파 Wa‘I dites나 카리지파는 그러한 사람을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 여긴댜 P. 317, 12 행 : <이슬람에 수도승 생활 rahb aniyy a 은 없다>는 하 디쓰는 히즈라 3 세기 경부터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꾸란 험장 刃 절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기독교 수도승들이 수행한 <수 도생활>은 하느님의 율법에서 허가되지 않은 새로운 제도로 비난받 는다. 그러 나 마시뇽 Mass ign on( .Essw sur les orig i.ne s du lex iqu e tedrnique de la myst iq ue musulrrune, p. 1Z3 이하) 교수는 일부 초기 꾸란 해석자들과 히즈라 3 세기의 수피들이 이 꾸란 구절을 고행에 전념한 그들 기독교도들을 정당화시켜 주며 칭송하는 그들이 의무를 소홀히 한 점을 빼고― ―- 것으로 간주하였음을 지적하고 있 다. P. 318, 10 행 : 바스라의 하산에 대한 일대기와 교의에 대해서는 마시뇽, 앞의 책, p. 152 이하 참조 P. 33J 이하 : <수피>라는 명칭은 히즈라 2 세기 쿠파에서 기원하 였으며 처음에는 이라크의 신비주의자들에게만 사용되었음을 여기 서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수피주의는 __― 정확히 말한다면 그렇게 부를 수 있다一 __ 초기에는 쉬아파와 헬레니즘(기독교와 영 지주의) 사상의 온상에서 발달되었다. P. 328, 16 행 : 마거리트 스미스:Mi ss Marga ret S mith는 그녀의 저서 『신비주의자 라비아 R /Jbi a the My st i c.! )(Cambri dge, 1928) 에서 이 유명한 성녀의 생애와 전설, 교의에 관해 학구적이고도 동정적인 기술을 하고 있다. 그녀가 예루살렘에서 죽고 그곳에 묻혔다는 기술 은 틀린 것이다. 무슬림 학자들은 동명이인이며 시기상 그녀보다 앞
서는 라비아 빈트 이스마일탸 lb i 'a bin t I 頭쿄녑 (1 3.5년 사망)과 혼동 하였다 . P. 430 이하: 『 루주미야트 』 에서 발췌한 332 개의 인용 시구의 원문 과 번역이 졸저 『이슬람 시의 연구 S tudi es in Isla mic P oetry』의 2 장 pp. 43 집앙에 실려 있다 . P. 434, 3 행 : <악한>과 <바보>는 반의어가 아니므로 다음과 같 이 옮기는 것이 더 충실한 번역이 된다(졸저, 앞의 책, p. lol). 一무슬림이든 기독교도이든, 유태교도이든 마기교도이든― 그들도 모두 잘못을 저지른다. 둘은 <인간>의 보편적인 분파를 이루고 하나는 신앙심은 없이 똑똑하고 또 하나는 똑똑하지는 않고 신앙심이 있다네 . P. 434, 각주 88) : 셰이크 이브라힘 알 - 야지지 Shayk h Ibrahim al - Ya ziji가 펴낸 Ris a/at al- Gf나끊年은 1 <.JJ'/년 카이로에서 발행되었 다. P. 434, 9 행 : Al-F떠 따 ux:z 'l-G hiiyat. 이 작품의 사본은 그 앞 부 분이 발견된 1919 년 이전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RAS, 1919, p. 449). P. 434, 18 행 : Ris alat al-GI 니끊 n 에 대한 답신인 알리 븐 만쑤르 알-할라비 ‘A1I b. Man$Or al-I:Ia labi(Ib n al -Qarib)의 서간문은 무함 마드 쿠르드 알리 Mubarnrnad Kmtl 'AII( Cairo ,1913) 가 펴 낸 Rasa.'il al-Bu laghaoJl 발행되 었다. P. 451, 각주 124) : 11, 12 번째의 마까마에 대한 각운을 살린 번역 온 졸저 『동양의 시와 산문의 번역 』 , pp. 116-124 참조. P. 494, 2 행 : 쉬아파의 자유 사상가인 이븐 알-라완디 Ibn al- Ewan야 (본서 p. fffi 참조)를 겨냥한 3 세기 (A D. 9 세기)의 논저인 무
타질라파 카야뜨 al-Kha yy a t의 『 승리의 서 Ki t曲 al, - J따$Iir.n(ed. H S. Ny be rg, Cairo, 1 9'm)가 최근 발행됨으로써 무타질라파 운동의 성 격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 여기서 이 <이단>의 분파가 시리아의 무 슬림과 기독교도들 사이에 발생한 초기 논쟁에서 뿐 아니라 압바스 시대 초기 백 년사이에 페르시아, 특히 이라크의 마니교도들과 <진 디끄>둘로부터의 보다 위협적인 공격으로부터 이슬람을 지켜주는 전사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음이 명백하다(I. Cu idi, La Lott a tra l'Isla m e ii Ma ni따ism o(Ro rre, 國). 무타질라파는 이들 적과 맞서기 위해 그리스 철학과 논리학으로 무장했으며 그럼으로써 이 슬람 신학의 토대를 쌓게 되었다. H H Schaeder, Der Orient und die Gr iec fu sc he Erbe in W. Jae ge r's Di e Anti ke , vol. iv, p. ml 이하 참조. P. 4CJ 7, 1 행 이하 : 앞의 주석에서 언급한 내용에 비추어, 무타질라 파와 <이크완 알-싸파>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이와 같은 견해는 상 당한 수정을 요하게 된댜 정통 교파와는 대조적으로 무타질라파를 <이성주의자>나 <진보적 신학자>로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무 타질라파의 교리는 <이크완>의 반 이슬람적 절충주의와는 전적으 로 대립되었다. P. fD3, 각주 35) : 셰더 Schaeder 교수는 중세 페르시아어 의 <진 디크zi n dik>는 아람어의 <잣디끄 zad diq>와는 관련이 없다고 한다 (ZDMG, vol. 8'2, Heft 3-4, p. lxxx). Pp. 512-5% : 지난 幻년 동안 초기 수피주의에 대한 우리의 지식 은 본서에서 기술된 내용을 모두 부적절한 것으로 만들 만큼 증대 되었다. 이는 주로 마시뇽 교수의 철저한 연구 덕택이다. 이러한 주 제는 본서와 같은 종류의 저술에서 상세히 다루기에는 너무 난해하 고 부적합하므로 필자로서는 약간의 설명과 문학도들이 좀더 자세 한 자료를 구할 수 있는 참고문헌을 언급해 두는 것으로 만족하겠 다.
P. 513 : 마시뇽의 견해는, (히즈라 4 세기까지의) 수피주의가 외 래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으며, 꾸란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의 산물이자 그것의 의미와 본질적 속성에 관한 내적인 성찰의 산물로서 근본적 으로 이슬람적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도 설득력이 있긴 하지만, 필자로서는 신비주의의 발달이 이슬람 사상의 다른 부문의 그것처 럼 사산과 비잔틴 제국의 헬레니즘 문화와 접촉함으로써 극히 중요 한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점을 믿지 않을 수 없다. A J. Wensin c k, 霞 Book cf the Dove(Leyd e n , 1919) 와 My s tz.c T r 죠i ses by 1후 cf Ni nive h (Amste rdam, 1923) 참조. P. 514, 2 행 : 호르텐 M Ho rten은 3 세기 수피주의를 베단타 Ve danta 철학과 동일시하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In dis che Str0 771.JT1ge n in d.er Islam i.sch en My st ik , Heide lbe rg, l
P. 5a> , 9 행 : 『성자 히에로테우스의 서 The Bo d<. cf the Holy Hi ero the as 』는 영어 번역과 함께 마쉬 F. S. Marsh 에 의해 최근 시 리아어로 처음 편찬되었다 (Te xt and Translatio n Socie t y , lW). P. 52'2 : 비스땀의 바야지드에 관해서는 Massig no n, 앞의 책, p. 243 이하 참조. 가장 오래된 아랍어판인 그의 저술 『승천 MTr창 』――― 이는 영 적 인 환상의 체험 이 다 이 Islan ia:z, vol. ii, fas c. 3, p. 402 이하에 영어로 편역되었다. P. 5척 6 행 : 이에 대해서는 K 노 mm.a 의 번역과 Ta'i.Y. ),Ot al- Kubra 의 4 분의 3 의 분량이 번역되어 있는 졸고 「이븐 알_파리드의 송시 』 (Stu dies in Isla mic My s tic ism, pp. 162-266) 참조. P. 533, 각주 CJ7) : 할라즈I:Ial1척에 관해서는 마시뇽의 기념비적인 저서 (La Passio n d 'al-I:b/, l 청, 2 vols, Par is, 192 '2) 덕택에 여타 무슬림 신비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해박하다 . 그의 교의는 기독교와 다소 주 목할 만한 유사점을 보여주며 후세의 수피주의자들이나 폰 크레머 를 비롯한 유럽의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범신론의 흔적을 그의 교의에서 찾아볼 수 없다. 조세프 마레샬 신부의 요약, 앞의 책, pp. 249-281 및 『수피주의에서의 인성의 개념 The Id R.끄 cf Perso- mlity in Sf /is西 (Cambri dge , 192 '2), pp. 26-'57 참조 P. 536 아래 : 이븐 알-아라비의 <완전한 인간>론에 관해서는 Tor Anbdrae, Die Person Mu fummed s, p. 339 이하 참조 또한 이븐 알-아라비의 추종자인 압둘 카림 알-질리 ‘Abdu 'l- 氏 mm al- J由 (1410 년경 사망)가 그의 유명 한 논저 『완전한 인간 al-Ins 年 al-K 玩 l 』에서 설파한 동일한 이론에 관해서는 『이슬람 신비주의의 연구 St udi es in Isla nic My s tic isrrl.JJ, pp. 77-142 참조 P. 001, 19 행 이하 : 이븐 밧뚜따가 여기서 기술하고 있는 학자들 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일지 몰라도 그에 대한 언급은 반드시 하 고 넘어가야 겠다. 거의 전 세계를 일주한 솔직하고 홍미진진한 여 행기록인 『투흐파트 알-눗자르 Tu lfat al-NT J.U81갑는 이룰 최근에
번역한 깁 H A R G i bb 에 의해 <몽골 침공 이후의 이슬람 사회사 및 문화사의 권위서>로 묘사되고 있다. P. 613 아래 : 와하비파의 교의와 역사에 관한 요약은 해스팅 Ha- s ting의 『 종교 및 윤리학 백과사전Encyc lo[ X1£dia cf Relig ion and Et hi. cs 』 에 실려 있는 마구리우쓰 교수의 논고 『와하비파 Wa hhabi s 」 참조 P. 617 : 주로 시리아의 기독교도 아람인들의 문학을 다루·고 있는 체이코L. Ch eikh o 의 『 19 세기의 아람 문학La. litterotwe arobe au xix s i ecle 』 (Be yro u th, 1 寒 -1910) 은 유럽 언어로 쓰여진 이 분야 몇 안 되는 저술 중의 하나로서 특기할 만하다. 서양 사상이 이슬람 신 학에 미친 영향은 위대한 이집트 신학자 무함마드 압두 M 址四 mE 퍼 'Abdu(1842-1 懿)의 『리살라트 알-타우히드 R isal.at a/,-taw}.m야에서 고찰할 수 있다. 이 저서는 미첼 B. Mi chel 과 무스타파 압드 엘 라 지크 Mus tapha 'Abel el Razik에 의해 불어로 번역된 바 있다(Paris, 19'2 5).
유럽 학자들이 저술한 참고문헌 목록 다음 목록은 본서와 같은 저술 속에 포함되는 다양한 주제에 관 해 보다 상세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수단인 아랍어를 모르는 일반 인들과 아랍어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함이다. 완벽하 게 문헌 목록을 작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아랍어에서 영 어나 불어, 독일어, 라틴어 등의 언어로 번역된 것 중 가장 중요한 몇몇 참고문헌만을 언급하였다. 또한 필자는 (1) 브로켈만 B rocke- 1rnann 의 역저 『아랍 문헌사 Hi s t o ry cf Arobic lite ratur e 』에 나오 는 특정 아랍 학자들에 관한 유럽 학자들의 연구서들과 (2) 학생보 다는 전문가들에게 더 적합할 다수의 저술이나 논문들은 본 목록에 서 제외시켰다. 그 밖에 브라운 E. G. Browne 의 『페르시아 문학사 litera ry His to r y cf Pers ia』, 제 1 권 pp. 48i.- 4 0 034 D. B. l'v1acdo- nald 의 『이슬람 신학의 발달 Develop ment cf Muslim Theolog y』 (London, 1003), pp. 3.:8-劣에서 자료를 제공받았다• 한편 깁 H A R Gi bb 의 『아랍 문학 Arob i c lit e ratur e 』 (Oxfor d Un ive rsity Press, 1926) 의 부록에는 정선된 참고문헌과 번역서둘의 목록이 포함되어 있 다. 보다 상세한 참고문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쇼뱅 V. Cha uvin의 『 1810 년부터 l m:5년까지 유럽에서 발행된 아랍의 참고문헌 목록 Bi bl io g r aphi.e des ouvra ge s arobes ou rela tifs a ux Arobes pu bL clans !'Eu rop e chrl!t ien ne de 1810 a 1&:n (Liege, l ffi'2 -1003) 과 뮐러
A Muller, 쿤 E. Kuhn, 셰르만L. Scherman 이 편집한 『동양의 참고 문헌 목록 Oriental.isc he B i b li og raphi. e 』 (Berlin , l'B fil-) , D. G. Pfa- nnmiill er 의 『이슬람 문학의 개요 Handbuch der Islam- litt e ratur 』 (Berlin & Leipzig, 19'2 3), 엘리스A G. Elli s 의 『 영국 박물관 소장 아 람어 도서 목록 Catalog u e cf the Arabic Books in the Br itish Muse 따 (2vols . London, 1894-1@) 과 이 책의 보유(補 遺 ) 편인 풀 톤 A S. Ful to n 과 엘리스의 『추가 목록 S upp l ementary Catal og ue』 (London, 1 9'26)을 참고하기 바란다. 일반적으로, 각주에서 이미 제시된 전문적 성격의 논저나 저술들 의 제목은 본 참고문헌 목록집에서는 재인용하지 않기로 한다. 언어학 1. Th Noldeke, Die Se mitisdzen Sp ra chen(2nd ed. Leipzig, 1~). 이는 본래 독일어로 쓰여지고 『 대영 백과 사전Ency doµ 認 ua Br ita- nnia:z 』 (9th editon) 에 발표된 그의 논문 r 셈 언어들Semiti c l.anguag es J의 중보판으로 나온 것이다. 2. W. Wr igh t, A Gramrrur cf the Arobic Lang inge, 3rd ed, revi se d by W. Rore rtson Sm ith & M J. d e Goeje , 2vols.(C ambticlge , 1 磯 1~). 고급 수준의 학생에게 가장 적합한 아랍어 문법서 . 초보자는 이의 요약 본인 뒤 프리 손튼의 F. du Pre Thornto n, Elem entary Arobic : a Gra- mror{Cambticlge Un ive rsity Press, 1005) 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3. E. W. Lane, Arobic -English Lexi띠z, 8 IE 팍 Londo n, 1 綴 1893). 이 기념비적인 저술은 유감스럽게도 완벽하진 않다. 다른 사전 중에서는 프라이타크 Fre ytag의 사전(아랍어 -라틴어, 4vols., Halle, 183 0-l'o 3 '/), 드 비버스타인 카지미르스키 A de Bib e rste in Kazirnirski의 사전(아랍어-불어, 2vols., Paris, 1846-10 0), and 4vols., Cairo, 1875) 과 도지 llizy의 『아랍어
사전의 보유편 Su pp/tment aux Di.ctionroire s arabes.!l( 2vols., Leyd en, 1 &3 1) 이 특기할 만하다 . 일상적인 용도에 적합한 소사전으로는 벨로 Belot 의 『 아랍어 - 불어 사전 Di.ctionroire arabe-franmi,s』 (Be yrout, 1928) 과 워터 베 Wo rtab e t와 포터 Por ter의 『아랍어-영어 사전 Arabic -F,ng[ish Did:icn - ary 』 (3rd ed., Bey rou t, 1913) 이 있다. 4. Ignaz Goldz iher, Ablvndlung e n zur Arabis dlen Ph i.lo log ie, Part I (Leyd en, 1~). 아람 시가의 기원에 관한 훌륭한 연구 논문들과 문학사와 관련된 내용 이 포함되어 있다 . 5. A F. Mehren, 댜 Rheto ri k der Arab er{.Cq:en뉵t e n, lffi 3). II 아람의 역사, 전기, 지리, 문학 등에 관한 개괄서둘 6. The Encyd o[X Jedia cf lslam(I..e yden, 1913- ) . 수많은 동양학자들이 이 귀중한 저술에 논문을 기고하였다. 현재까지 전 반부 (A-L) 가 완성되었다. [역주] 1 00:>년 이래 발간되고 있는 신판 『이슬람 백과사전./l (EI2) 은 1 99.3년까지 제 7 권 (MIF-NAF) 이 발간되었다. 7. H Z.Otenb erg, Orron ique de 1bbarI, troduite sw -l a ve rsiaz ,l}e1Y1l'le de. Bel'am J, 4vols.(Pa ris, l 'ool - 1 紹). 8. The M며 al-Dlurob of Mas'odr (M따Jdi :Les Prairies d'Or), 바비에 드 메이나르 Barb i er de Me ynard와 빠베 드 쿠르테이유 Pa vet de C.Ourteill e 의 불어 번역과 함께 아랍어 원문이 실려 있다. 9vols.(P aris, 1001-1 얽 7). 따바리 Ta bari와 마스우디 M 益 'odr 의 저술이 아랍어로 쓰여진 일반 역사서 중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것이다. 9. J. J. Reisk e, Ab 내퍄 Anrrzles Musler rid arabic e et latine, 5vols. (Hafnire, 1 證 1794). 10. Augus t M 血 er, Der Islam im Morge n-und Abendland, 2vols.< Berlin, 1835-1 函). 11. C. Hu art, Hi stoir e des Arobes, 2vols.(Pa ris, 1912).
12. Sy ed 도 Ali, A Short Hi st o r y cf the Saracens(London, 1921). 13. R Tuzy , Esroy sur l'Isla mism e, transl at.e d from the Out.c h by Victor Chauv in(L eyd e n and Pa ris, l'iS7 9 ). 14. T. W. Arnold, The Pr,@cfing cf Isla m, a Hi sto r y cf the ProJX Jgati.on cf the Muslim Fa ith( 2nd ed., London, 1913( 15. Th Nolde ke, Ske t야 es from F.astem Hi stor y , trans lat.e d by J. S. Black(London, lffi' -2). 16. Sta nley Lane-Poole, The Molumrmdan J)ymsties (London, lffi 4). 이슬람 역사학도에게는 필독서이다 . 17. F. Wi .ist e nfeld , Genealog isd le Tabellen der Arob i s 玩 Sta mme und Fa milien mit histo r i sd len und g eo graphis函 Bemerkung e n in ein e m alp 油 e tis函 Regi ster ( G ott ingen, 18. 52 -18. 53). 18. Ibo Khallikan, B i og raphi따 Dictionary, trans lat.e d from the Arabic by Baron MacGuck in de Slane, 4vo ls.(O rien ta l Translatio n Fund, 1842-l'iS ll) . 아랍 문학에서 가장 독특하고 유익하며 홍미로운 저술 중 하나이다. 19. Reinau d & Guya rd, Goog raphie d '.Ab o 매年 m 平t e de l'ar abe , 2vols.(P a ris, 1848-1~). a)_ C. M Tuug h ty , Trovels in Arobia Deserta , 2vols.(C a mbridge, 1888). 베드윈들의 생활과 관습에 관해 충실하고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21. Sir . R F. Bu rton, Persom l. Na rrative cf a Pil grinn g e to al - Ma di따 and Me a:ah, 2vols.(Pa ris, 1848- 1 ~). 2'2. D. G. Hogarth, The Penetr ation cf Arobia : a rerord cf the develcr pment cf Weste r n knavledge CU1Ce ming the Arobia n Pe nins ula (Lo- ndon, 1 懿) . .Z 3. H 작j I Khalifah, Lexico n bib l i og r aphiru m et ency do] Xle야.QJTrl, Arabic t.ext and Latin transl atio n by G. F1ti gel , 7vols.(Le ipzig and London, 24.1 綴F. -W18u58s)te. nfeld , Die Gesd'd dJtsc hreib e r der Arober und ihr e Werke (aus dem xxviii. und xxix. Bande der Abhand d Kon igl. Ges. d Wiss . zu Gott inge n), (Gott ingen, 1&3 '2). 25. J. von Harnrrer-Purgs ta ll, literoturgeschichte der Arober bis zum Ende des 12. Jah rhundert s der Hi ds dvet, 7vols.(Vi enna, 180 0-18 f i3).
방대한 양의 저술이지만 비과학적이고 지극히 부정확한 데가 있다. a3. Carl Brockel mann, Geschi.d?te der Ambis chen literatur, 2vols. (We i- mar, 1~-1 0 02). 참고문헌과 전기가 돋보이는 저술이다 . [역주] 중보판 (Suwl errent bande), 3vols0 <£7 -1942) 과 아랍어 번역판 Ta'rikh al-Adab al-‘AmbI, tr. ‘ Ab d al- 뚜 al-N 척返 @iro (l OCi>)이 나왔다. Zl. E. G. Browne, A litera ry Hi stor y cf Persia, vol. i from the earlie s t tirres to Fir daw sI(Lonclon, 1002), and vol. ii clown to the Mx,go l lnva-
sio n (Lonclon, 1 寒). 특히 1 권에는 아랍 문학사에 관한 많은 자료를 담고 있다. 28. Clerrent Hu art, A Hi stor y cf Ambic literature( L on clon , lro :l). 아랍 문학도에게는 참고 문헌으로 적합한 입문서이댜 29. H A R Gibb , Ambic literature : an Jntr,따다m (London , 19' m). 아랍 문학에 관한 신뢰할 만한 개설서이다. 30. Amburn Proverbia , Arabic text with Latin translaion , by G. W. Freyt ag, 3vols.(Bonn , 1838-1813). 31. J. L. Burckh arc:lt, Ambic Proverbs(2nd ed., London, 1875). 111 이슬람 이전의 역사, 문학, 종교 32. A P. Caus sin de Perceval , 표-&Ii sur l'histoi r e des Arobes axJT11: l'Isla misrne, 3vols.(Pa ris, 1847-1848). 이슬람 이전의 전설과 전승을 훌륭하게 개설하고 있다. 33. Gesch ichte der Perser und Arober zur Ze it der Sasaniden, transla- t:erl from the Annals of Tab ari, by Th Nolcleke(Leyd en, 1879). 본 번역판에 딸려 있는 풍부한 주석이 매우 중요하고 유용한 것이다; 34. Th. N6lde ke, F며 Mo'a l/afJat iibe rsetz t und erklar t(Vienna, 1~ 1001). 본서에 빠진 무알라까트는 이므루 알-까이스와 따라파의 것이다.3.5. The Seven Golden Odes cf Pagu n Ambia , trans late d from the orig inal Arabic by Lady Anne Blunt and done into En glish verse by Wt lfrid Scaw e n Blunt( L ondon, 1 懿) . 36. Fri edrich Rock ert, Hamas2 oder die 짊te.st en arabis c hen Volkslie d er iibe rsetz t und erlau ter t , 2vols.(S tu ttgart, 1846). 고대 아라비아 시가를 훌륭히 운을 맞추어 옮겨놓고 있다 . '51. C. J. Ly al l, Transla tion s cf ancient Arobia n poetry, diefly Prei- sla rn.ic; with an introduc tio n and note s(L ondon, 1885). 38. Th. Noldeke, Beit rage zur Ke nntniss der Poesie der alten Amber (Hannover, 1864). 39. G. Jac ob, Stu dien in arabis ch en Di.ditem , Heft iii , Alta rabisch es Bedu ine nleben rx 댜 den Quell en ge s야 il de rt( Ber lin, lW). 40. W. Rob ertson Sm ith, Kin s hi p and Mamage in F.arly Arobia (2 nd ed., London, 1 懿) . 41. _ , Lectures on the Relig icn cf the Se mi.te.s, Fir st Series , 3rd ed., revi se d by S. A C.ook (London, lrfZ l). 42. J. Wellhause n, Re .ste Arobis c hen Heid entums(2 nd ed., Berlin , lW). IV 무함마드와꾸란 43. Das Leben Morammed's , transl ate d from the Arabic bio graphy of lbn Hish am by G. We il, 2vols.(Stu ttgart, 1004). 44. J. Wellhause n, Mu lrJnvned in Medi na (Berlin , 1~). 무함마드의 활약에 관한 와끼디 W탸 야의 저술을 요약, 번역한 것이다. 45. A Sp renger , Das Leben und die Lehre des MoJ;o mrrr;u:1, 3vols. (Berlin , lff il- lffi5 ). 46. Sir W. Muir, Life c f Ma ha-net, ed. by T. H We ir(F.dinburgh, 1923). 47. Th. Nolcle ke, Das Leben Mu h:Irrmed 's rah den Quell en popu lar arrge ste l lt(H annover, 1003).
48. Sy ed 도 Ali, The Sp irit cf Isl.a mL ondon, 1922). 49. H Grirnrre, Mo furnmed, 2vols.(M i.ins te r, 100 '2- l~ ). 印. — , Die wel tge sd 끄. cht li dte Bedeut ung Arobie n s : Molrorr 函 (M 떠 c h, 岡) . 51. D. S. M 或 o li ou th, Molnrnmed and the Ris e cf Isla m, in 'Heroes of the Natio n s' Series (London and New York , 1 었 5). 52. A A Bevan , Morammed and Islam , in The Cambri dg e Me dineool Hi stor y , vol. ii , ch. IO(C ambridge, 1913). 53. Tor Andrae, Die Person Mu fumned s in Lehre und Glauben se iner Gemein d e( U~a, 1918). 54. R Bell, The ori gin cf Islam in its Ouistian erw ir;이 m 쿄 (Lorx lon, lg2 (3). 55. Leone Caeta ni, Anroli dell' Isl 玩 Princi~ di Teano, vol. i (:tvJi.lan, l 寒) . 이 격조 높은 저서는 사실에 바탕을 둔 매우 충실하고 재미있는 해설 외에도 히즈라력 초기 6 년(62'2---628년)동안의 무함마드 생애를 상세히 기 술 하고 있다. f:6. The Kora n, trans late d int.o English with note s and a preliminary disc our se, by G. Sale(London, 1734). 재판을 거듭한 세일 Sale 의 번역본은 아직도 유용하다. 이밖에 영어 번 역으로 J. M Rodwell(Lori do n and Hertford, 1861) 의 번역과 『동양의 성 서들 The Sacred Bocks cf the Eas t』 의 6 권 및 針간에 나오는 팔머 E H P al:r효의 번역을 언급할 수 있다. 이는 『세계의 고전 The Worlds Oa- ss i cs 』 , vol. 328 에 재발간되었다. 짜 . Th. Nolde lre, Geschichte des Q?ra ns, 2nd ed., revi se d by F. Schwally (Leipzig, 1003-1 9 19). Sketc fies from Easte r n His tor y , pp. 21- 印에 나오는 뉠데케의 논문 The Koran” 이나 Encyd oJX Jedia Br itanniai(l lth ed.)에 실린 그의 논문 올참조바람 $ H w. Sta nt.on, The Te aching cf th Qur'm (London, 1m>.
V 칼리파 시대의 역사 59. T. W. Arnold, The Calip h:rte( O xford , 19'2 4). 00. G. We il, G esmc hte der Onlife n, 3vols(IV Jannheim, 1846-1& 51). 이 책은 동 저자의 Gesdi i,chte des Ablx iside n-drdifa ts in Eg ypten , 2vols.(Stu ttgart, 1860 - 1862) 에 의해 보완 , 완결됨 61. Sir W. Muir, Annals cf the &rrly Calip rate( London, 188 .3). 6'2. _ , The Calip rate, its rise, declin e , coui fall (2nd ed., London, 19'2 4). 63. A J. Bu tler, The Arob Conquest cf Eg ypt coui the last thirty ye ars cf Rorrm domi.nion (London, 100 '2). 64. J. Wellhause n, llis Arobis d ze Re i야 und sein Stw z(B erlin , 100 '2). 따바리의 역사서를 토대로 우마이야조를 기술한 훌륭한 역사서입 ffi. H F. Arre:lroz and D. S. Margo lio u th , The Eclip se cf the Ablx isid Caliph :rte, 7vols.(O xford , l~-19 '2 1 ). 히츠라 때]기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아람어 원문과 번역이 실 려 있다. ffi. H Bowe n, The life c oui time s cf '.All b. 'lsa, the Good Vizier (Ca- mbridge, 1928). ol. F. Wi .ist .e nfel d, Gesdi i,chte der Fa tirnide n-Onlife n, md1 arobis c i ,en Quell en(Gotti ngen, 1881). VI 이슬람문명사 68. Baron M 퍄ckin de Slane, Prolego mines d'I bn K 닙 do l.01, 3vols.(in Noti ce s et &traits des Manuscr its de la Bib l i oth eque Jmperiale, vols. xix-xxi, Paris, la'. i3-1 008). 이븐 칼둔의 『일반 역사서 Un i v 타ml, Hi sto ry』의 서설 (Mu qaddirna)을
불어로 번역한 것입 ffi. Avon Kre 函 Cultw gesctdchte des Orients unter den 야'liife n (Vi一 enn a, 1875 - 1 얽 7) . 70. , CuJ mg 국cht li che Str ei fz ii g e 떠 elem Gebie t e des Islams (Lei函g, 1ITT3). 쿠다 부크쉬 S. Khuda Bukhsh 가 그의 저서 『 이슬람 문명사에의 공헌 Contribu t ion to the Hi stor y cf Isla mic av i li .za t i on ,/J(역cutta, 1005; 2nd ed., 1~) 에서 영어로 옮긴 바 있다. 71. _ , Gesd 끄.cht e d.er 一 ldeen des Islams( l.J.函g, 1 綴) . 유명하며 동시에 가장 계몽적인 저술이다. 72. G. Le Bon , La ci v il函ti on des Arobes(Pa ris, 1 寧). 73. Ignaz Goldz ihe r, M u h::o冠cbnis che s따 . en(Hall e, 1~ 國). 본문에서 자주 인용되었던 이 책은 이슬람 문명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는 중요한필독서이다 . 74. C. H Becker, Islams tudi en( I..ei函g, l9'2 A), vol. i . 75. D. S. Margo lio u th , Um :I)l}Ods and '.Abb as ids (E. J. W. Gibb Merrnrial, vol. iv, 100 1). 이는 주르지 자이단Jurji Zay dan 의 『 이슬람 문명사 H 泣 ·0 ry dIs/am i,c av i l 효. on 』를 번역한 것임. 76. A Mez, 댜 R 따쵸 U1Ce des /slams(He ide lbe rg, lw- 2). Tl. G. le Str ange, 13<.짤따 during the Ablx isid Cal iph따Oxford, lro >). 78. R Levy , A Ba,짜뇨 1 야 roni de( Cambridge, 1~). 79. G. le Str ange, The Lands cf the 恥te m Cal ip/-ate ( 도dge, 1 안). 00. _ , Pa l.es n·n e under the Moslem s(L ondon, 1ml). 81. T. W. Arnold, Pa inting in Jsl a m(Oxford , 1928). 8'2. G. T. Rivo ira , Moslem Arctd ted ure, transl ate d by G. M Rushforth (Oxford , 1919). 83. E. W. Lane, Arobia n Societ y in the Middl,e Ages , edit.eel by Sta nley Lane-Po ole(London, 1~). 84. G. Dierc ks, Die Arober im Mittela lte r und ihr Eir ll,us s 떠 die Cultw Ewo[X ls( 2nd ed., Leil)'lig, 1882). 85. E. W. Lane, An account cf the Manners and D.Lsta n 저 the Modem
Eg yptians(5 th ed., London, lITTl). VII 이슬람의 종교, 신학, 법학, 철학, 신비주의 ffi. D uncan B. Macdonald, Developm ent cf Muslim Theology , Jurispr u-dence, and Ca7.stituti아 theo ,y (L ondon, 1003). 동 주제에 대한 개략적인 기술이 가장 뛰어난 책이다. ITT. Asc fr Scmhros 따 's Reli gion s[X 1lthe ie n und Ph ilo soph en-S chulen , trans late rl by T. Haarbri.ick er(Halle, lBE D--1& 5 1 ). 88. A Guillaurre, The 1l따 .ti ons cf Islam(O xford , 19'2 4). 또한 No. 73, Pt. 89. ii0. . 참H조ou dan and W. Mar 혼 Les tradition s islamiques trod de la- robe (Paris, 1003-1914). 부카리 B 마中記의 유명한 예언자 언행집을 번역한 것임 . 00. A J. Wensi nck, A Handbook cf early Mu f-amrrodan Tra dition (Le- yden, lc: fl7). 91. C. Snouck Hu rgronje, Molrrrnmeda nism (Arrerica n lec tures on the histo ry of religion s, 1916). 9'2. 1 Goldz iher , Vorlesung e n iibe r den Islam( Hei del 函, 1910; 2nd ed., 1925). 93. D. S. Margo lio u th , The Early Developm ent cf Molrrrnmecb nism (Lo- ndon, 1914 ; re-is s ued , lc:f l7). 94. H Larrnrens, L' Isla m, crO), tl11CeS et ins tit ution s(Beyr out, 1926) ; tra- nslatio n by E. Tuniso n Ross(Lond on, 1~). ffi. T. W. Arnold, The Isla mic Fa i.싹 Benn's Six penny Librazy, No. 42). 00. T. J. de Boer, The Hi stor y cf Ph ilo sopl ry in Isla m, transla函 by E. R Jon es(London, 1003). fll. H Ste iner, Di.e Mu taziliten oder 야. e Freid e nker im Isl.a nil..eipzig, 18: o).
00. F. Diet e rici, Die Ph i.lo soph ie der Arober im X.]ah rhundert n Ou: aus den Schriften der lautem Bruder herausge g e ben(Be rli.n and Lei- 函g , 1001-1879). 93. E. Rena n, Averroes et L'.A v errois me(Paris, 1001). 100. S. Mu nk, Melang e s de Ph ilos oph ie Juive et Arobe (Paris, 1859). 101. S. Guy ar d, Fragm enJ;s, rela tifs a la doctrine des Jsr raelis( Paris, 1859). 10'2 . Sil ve stre de Sacy, Exposaie la Relig icn des Druzes, 2vols.(P aris, 1ITT4). lo:3 . R A Nich olson, The My st i cs cf Isla m(Lo ndon, 1914). 104. D. B. Macdonald, The Relig iou s Attitude and Life i n Islam (Chi- cago , 1003). lCn. L. M 후ign o n, E펙 sur !es ori gine s du lex ique ter.玩que de la 17!Ys ti qu e musulrrr: :rne( Pa ris, 1922). 100. _ , La Passio n d'a J- Hal/4 i, 2 vols.(Pa ris, 1922). 1(J7 . Rich ard Hartmann, Al- 도 rf s Darste l lun g des S(fi tums(Berlin, 1914). 100. H S. Ny b erg, Klein e re Schriften des Jbn al-'.A robi(Leiden, 1919). 103 . R A Nich olson, Stu dies in Isla mic My s tid s mC ambridge, 1921). 110. _ , The Idea cf Personality in $[/ism(Cambridge, 19Z3). 111 . Joh n P. Brow n, The Derois h es or Oriental. Sp iritwlism, ed. by H A Rose(London, lrfl :1). 112. 0. De 函t and X Copp .:>la n i, Les @{reries relig ieu ses rru.JSUlrrunes (Algier s, lW). VIII 무어족의 역사와문학 113. R D:Jzy, Hi stoir e des Musubrans d 'Es,滋 ne jus qu a la 따따 le de l'A nrblusie Jm les Almorovid es(71 1-1110), 4vols. (Le x 뇨 L l%l).
스토크 F . G. S to kes 가 『스페인의 이슬람 SJX ITUs h Is l£:rrrlJJ이라는 제목 으로 영어로 옮긴 바 있다( Londo n, 1913). 114. S. P. Scott, His t o r y cf the Moori sh Empire in Europe , 3 vols.(New York, 1004). 115. H C. Lea, The Mori sro s cf S[X iin, the ir co,we rsio n and expu lsio n (Philad elph ia, 1001). 116. Pascual de Gaya ngo s, Hi stor y cf the Mof-a rnrrzedan. dymsties cf S[X iin, 2vols.(L ondon, Orien ta l Translatio n Fund, 1840-1843). 마까리 M 頭q arI 의 Nq fb al- µb를 번역한 것임. ll7. ‘Abdu 'l-W函 d al-M arrakos hI, The Hi stor y cf the Almohl 쏙 transl ate d by E. Fa gnan(Algier s, 1003). 118. R Tozy , Redzerdzes sur l'histoir e et la l itten.如 re de l'Es[X 1gne pencbnt le moyen age, 2vols.(3rd ed., Leyd en , 1881). 119. A F. von Schack, Poesie und Ki函 der Arober in S]X ITUe n und Sic ilien, 2 vols.(2nd ed., Stu ttgart, l'ifT 7). 12D. A F. Calver t, Moori sh rer rains in S[X iin(L ondon, 國). 121. M Amari, Sto r ia dei musulrra ni 야’ S 函퍄(:firenze, 1&5 4-1 ID2). 개정판이 발간중에 있다. IX 13A11 기 몽골 침공부터 현재까지의 아랍의 역사 12'2 . Hi stor i e des Sultan s Ma ml,ou ks de l'E gypte, frrite en arohe p:;rr Ta ki-ddin Ahmed Mt.函남, t:radui.te en 區四 s ... 酉 M Quatrerrere, 2vols.(O rien ta l Translatio n Fun d, 1845). 1Z3. Sir W.. 도 The Mameluke cf S!a ve dyrristy cf Eg ypt(Lo ndon, 1~). 124.n Cgo. l Hs ujuasr tq, u Ha uis rtomi rs es :dicer eJ 3daegsr bMd a dmelp,ou u ikss (lPa adrios,m 1im00t1io).n des KJr:rns mo- 125. A A Pato n, Hr. stor y cf the Eg yptian revolut ion fran the period 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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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해제 본 역서는 마시뇽 Mass ign on” 이후 가장 위대한 이슬람 수피주의 연구가로 손꼽히는 레이놀드 알렌 니콜슨 Reyn o ld Alleyn e Nich ol- son(l 綴 -1945) 의 A litera ry Hi story cf the Al 먀遷 번역한 것이 다. 1 언 7 년에 초판이 나온 이 래 1914 년, 1 꼬 3 년에 재판(再版)이 나왔 으며 1930 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 의해 발행되기 시작하 여 1941 년, 1%3 년, 1%2 년 , 1 00)년에 각각 재발행되었다. 역자는 1ITT6 년판을 번역본으로 삼았다. 총 xxix + fOO페이지에 달하는 본서 는 저자의 해설에 해당되는 서설과 본문 10 장, 부록, 참고문헌 목록, 색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역주] Lou is Mass ign on(l883-1962) : 프랑스의 위대한 동양학자로서 이슬람 수피주의 연구의 대가이다. 특히 수피주의자 <할라츠 H 책치> 의 연구로 유명하다.
저자 니콜슨은 저명한 생물학자였던 헨리 알렌 니콜슨Herny Alle- yne Ni cholson(1844-1~) 의 아들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 학한 그는 처음에는 그리스 • 라틴의 고전문학을 전공하였으나 곧 동양학으로 전공을 바꾸었으며, 스미스 Rob ertson S mith의 문하에서 아랍어를 배우면서 특히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에 관심을 갖게 되 었다. 또한 『페르시아 문학사 A literary H 函ory cf Pe rsia.J를 저 술한 브라운 E. G. Browne 에게서 페르시아어를 익혔다. 브라운과의 만남은 결국 니콜슨의 평생의 연구 주제가 된 수피주의 사상에 대 한 연구와 후술하겠지만 본 저서를 집필하게 되는 동기를 제공하였
다. 네덜란드의 라이덴 Le i den 으로 가서 당대 최고의 동양학자들인 드 괴제 De Goeje , 뉠데케 Noldeke 등과 학문적 교분을 가졌으며, 이 후 수년 동안 그는 가장 위대한 무슬림 신비주의자인 잘랄 알-딘 알-루미 J al 혀 al-D in al- R.orrn (1273 년 사망)의 시와 교리에 몰두하였 다. 이 초기 노력의 결실은 1 앙 8 년 그의 첫번째 저술인 Select ed Poems from the Di w쵸 Srarnsi Tabru’ 로 나타났다. 이 책에서 니 콜슨은 이 전의 어느 학자보다도 신플라톤주의 Neo p la toni sm 와 이슬 람의 신비주의 사이의 관계를 명쾌하고도 과학적으로 입증하였다. 여기서 니콜슨은 심오하고 난해한 시구를 풍부한 주석과 명료한 문 장으로 번역하였을 뿐 아니라 운을 달아 옮겼다. 브라운은 후에 이 번역시에 대해 <이제껏 동양의 시를 그처럼 적절하고 아름답게 운 올 실어 영시로 옮긴 것을 보지 못했다>고 평하였다. 니콜슨은 런던 대학 (l~l) 과 케임브리지 대학 (1002-1926) 의 페르 시아어 교수를 거쳐, 동 대학 아라비아어 교수를 역임하였다 (1926- 193 .3). 브라운 교수의 주선으로 소망하던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가 된 그를 두고 깁 Sir Hamilton G i bb 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니콜슨은 금세기 초 4 반세기 동안 케임브리지를 장식할 위대한 동 양학자들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특히 브라운과는 사제관계에서 뿐 아니라 동학(同學)으로서도 친분을 유지하였다. 바록 니콜슨이 학자 로서의 서열은 브라운보다 아래였고 이미 명성이 나 있던 브라운의 그늘에 가려 있었지만, 그의 동료들은 니콜슨이 브라운에게 미친 영 향력과 학문적인 기여를 잘 알고 있었다. 연장자로서 더 자유분방하 고 온아하며 보다 이해심있는 브라운은 그보다 젊은 니콜슨의 심오 하고 고행자다운 집중력과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 니콜슨은 첫번째 저술 이후 이슬람 신비주의에 관한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1003 년에는 이슬람 신비주의에 관한 가장 중요한 논문 으로 인정받는 기다란 논문 ‘'A Histo rica l Enq uiry conce rning the Origin and Develop rren t of $o.fii sm 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 발표이
후 그에게는 < 신비주의 연구의 대가>라는 타이틀이 늘 따라다니게 되었으며 후에 이들 논분들을 한데 묶어 S tu야. es in lslar ni.c My sti.- dsm(Cambric lge , 1 9'2 1) 平즌 제목의 단행본으로 발간하였다. 한편, 니콜슨은 이 시기에 페르시아 시인 파리듯딘 앗따르 Fan- du'dd in 'At tar의 T따 函 rat al-Awl iy a 에 대한 비평 및 주해서를 준 비하였댜 이 책은 신비주의자였던 작자의 작품인데 A D. 1 었 D 년 이 전의 무슬림 신바주의자들의 생애와 탈속직인 언행을 기록하고 있 어 신비주의 연구의 가장 중요한 자료의 원천이 된다. 이는 브라운 이 편집 한 Persia n Hi s t o ri따 Te xts 시 리즈 중 2 권으로 발행되었다. 이 방대한 작업을 완료한 1007 년에 니콜슨은 바로 브라운의 『 페 르시아 문학사』와 자매편 격인 『아랍 문학사 A literwy His t o r y cf the Arabs 』 를 펴냈다. 그 후 잘랄 알-딘 알-루미의 시집 Ma tln lwi Ma 'mwi를 번역 • 해설하여 8 권으로 깁의 시리즈 안에 발표하였는데 (1925-1940) 이는 우수한 학문적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그 밖에도 아람과 페르시아의 약 印여 작가들의 시와 산문을 골라 번역하고 해설을 붙인 TrCD1Sla tion s cf F.astem Poetr y and Prose (192'2)등의 주요 저서가 있댜 니콜슨이 『아람 문학사』를 집필하는데 있어 모델로 삼은 것은 브라 운의 _또 브라운은 그린 Green2 ) 의 Short Hi stor y cf the Engii- sh Peop l 遷 그의 문학사 모델로 삼았다―一_『페르시아 문학사』였 다. 니콜슨이 『아랍 문학사』를 집필하게 된 것은 그리스와 라틴 문 학이 서양 고전 문학의 핵심을 이루듯이 이슬람 문화의 양대 축이 자 원천인 아랍 문학과 페르시아 문학이 상호보완적으로 기술되어 야 한다는 그의 신념과 브라운 교수와의 학문적 동반자 관계에서 니온 것으로 보인다. 아마 그로서는 페르시아어와 아랍어의 교수를 통해 브라운의 『페르시아 문학사』에 필적할 만한 본서와 같은 개설 2) [역주] Joh n Rich ard Green (lB.37 -1883) :영국의 역사학자.
서 정도의 아람 문학사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아랍 의 고대 문학과 페르시아 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니콜 슨이야말로 아랍 문학사의 집필에는 가장 적임자였다고 할 수 있다. 19 세기 이래 활동한 낭만주의적인 동양학자들이 대부분 순수 학 술탐사룰 목적으로 하든 혹은 단순히 이국적인 호기심 때문이든 간 에 중동 지방에 가서 일정 기간 거주하거나 여행한 것과는 아주 대 조적으로 니콜슨은 단 한 차례도 중동 지역을 다녀온 적이 없다. 영 국의 동양학자 아베리 A J. Ar berry3 ) 가 그를 가리켜 이슬람교의 수 도승인 <다르위쉬 DarWi s h>라고 별칭하였듯이 니콜슨은 오직 저술 활동과 연구만을 위해 칩거한 전형적인 학자였다. 니콜슨이 그의 저 서에서 고대부터 18 세기에 이르는 유구한 아랍 역사와, 동으로는 페 르시아, 서쪽으로는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종황무진 하며 문학을 비롯 역사, 철학, 종교, 지리, 사상 등의 방대하고 찬란 한 지적 유산울 섭렵하고 있는 것도 모두 그러한 학문적 자세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3) [역주] A 떠 1ur Joh n Arben y(1 905-1969) : 영국의 동양학자로서 니콜 슨과는 사제관계였다 . 이슬람 수피주의와 페르시아 문학 연구로 유명 하다. 꾸란을 번역하는 둥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와 관련하여 니콜슨을 비롯한 동시대 동양학자들을 특징짓는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야겠다. 먼저 첫번째 특징은 서양의 거의 모든 동양학자들이 아랍 문학이나 페르시아 문학의 작품을 자 신들의 모국어로 번역해 낸 번역가들이었디는 점이다. 뤼케르트 Riick er t, 존스Jo nes, 니콜슨의 문학사에서 자주 인용된 A 四.ent Arobia n Poe try의 편자인 라이 얼 Ly al l 둥이 그러하다. 두번째 특징 은 전통적인 오리엔탈리즘Ori en tali sm( 이는 오늘날의 지역학 연구의 원조이다)에 종사한 학자들은 언어학, 역사, 철학 등의 제학문 분야 를 넘나들며 일종의 학제간i n terdi sc iplinary 연구를 수행하였다는 점이다. 19 세기 동양학자 중에서도 가장 명망있는 독일의 동양학자
골트치어 I gnaz Gol dziher 의 연구 영역도 언어학, 문학, 종교현상의 학제간 분석에 걸치었다. 니콜슨의 문학사 기술의 목적이나 경향도 그와 같은 범주에서 해석될 수 있다. 니콜슨 스스로 밝혔듯이, <아 랍 문학에서 나타나는 사상은 민족사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고 그들 이 성장한 주위 환경과 분리되어서는 이해가 어려우므로, 우리의 특 별한 관점에서 매우 특징적이고 중요한 사실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역사적 관심사룰 상세히 고찰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니콜슨의 『아랍 문학사 』 가 서양에서 나온 아랍 문학사 중 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며 학적 가치를 지니는지를 가~쵸}기 위 해 니콜슨 이전까지의 아랍 문학사 연구 동향을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서양에서 나온 최초의 아랍 문학사는 오스토리아의 동양학자 인 폰 함머 Jos eph von Harnrrer - Purg s tall (1774-1~) 의 『아랍의 문 학사lit e ratur ge sch i,chte der Amber 』 (7 권)이다. 이 저술에는 9315 명의 전기와 함께 표본적인 시의 번역을 싣고 있는데, 아랍 시의 모 든 것을 담아내려는 의욕은 대단하고 인상적이지만 심미안의 결여 로 부적절하게 선정된 자료를 그나마 잘못 이해함으로써 실패작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로 아랍 시의 연구에는 정밀한 언어학적 방법이 새로이 도입되었다 . 그리하여 어느 정도 문학사라고 할 만한 저술과 주해가 딸린 번역서들이 서서히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무 엇보다 아랍 시의 역사를 시인들의 목록 정도로 생각하던 문학사의 개념을 포기하게 된 것이 큰 수확이었다. 폰 함머의 신랄한 비평가 이면서 동시에 그의 저술을 훌륭히 번역해 낸 독일의 동양학자 알 바르트 W. Ahl wardt (1829-1~) 는 아랍 시를 언어학적으로 연구한 이들 초기 세대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꼽히지만 여전히 낭만주의적인 문학관올 견지한 점에서는 폰 함머와 공통점이 있었 다 (Uber Poesie und Poetik der Arober, p. ffi).
시 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 를 역사적 • 문화적 기록으로 서 해석하는 것이 긴요하였다. 또 거꾸로, 적절히 잘 번역된 시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되었다. 이 연구 방법의 개척자는 『 이슬람 이 전 아랍역사에 관한 소론E 逸꼬 Sur l'histo i r e des Arobes avant l'Is !amis me 』을 저술한 프랑스의 동양학자 꼬생 드 퍼시벌A P. Caussin de Perceval(lN5 - 1ITT1) 과 독일의 동양학자 뉠데케(1 836- 1930) 였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번역 시를 문화사적 사료로 인식하 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 학자가 벨하우젠 J. Wellhausen (1844-1918) 과 야콥 G. J acobo 綾 - 1 田 7) 이다. 장차 이러한 연구의 전 망은 보다 엄격한 의미에서의 문학적 연구를 중단시킬 지경에 이르 게 하였다. 언어학적 방법에 의해 이슬람 이전 문학의 이질성과 다소 산문체 적이고 단조로운 특성이 드러나게 되자 전반적으로 낭만적인 분위 기가 지배적이던 고대 아랍시의 연구 열기도 한풀 꺾이게 되었다. 그러나 중세의 허식과 기사도 정신에 대한 향수에 깊이 젖어 있는 문학도에게는 아랍 시의 미적 가치는 여전히 연구해 볼 만한 것이 었다. 바로 독일의 동양학자 폰 샤크 A F. van Schack(1815- 18 94) 가 타고난 언어적 재능과 화려함을 좋아하는 그의 기질을 살려 스 페인과 시칠리아에서의 아랍 시를 홍미롭게 묘사해냈다 (Poes i e und Kunst der Amber in SJm zi.en und Siz i.lie n , Berlin , 100 -5). 샤크는 나름 대로 이들 시가 미적 가치를 지니며 서양과 아랍의 사고방식을 그대 로 반영해 주는 것으로서 역사적 중요성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는 스페인에서 무어족이 축출된 이후 지어진 마까리 al- Maqq an (16 3'2 년 사망)의 저술 중에서 이미 지나간 찬란한 영화의 보고인 스페인 에서의 아랍 문명을 주로 회상하면서 코르도바와 그라나다의 삶을 묘사하고 있는데 어떤 것은 실제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묘사로 비추 어지기도 한다. 마침내, 언어학자로서 세심한 데가 있는 알바르트(위 Uber Poesie )
와 통찰력 있는 폰 크레머 A von Kr errff(1 828-1 8.ffi)가 그의 『칼리 파 치하의 동양 문화사 a.dturgeschi.chte des Orients unter den 떠ife n 』(Vienna, 1875) 에서 최초로 아랍 시의 전반적 발달 과정을 적절히 개략적이나마 그려냈다. 그러나 알바르트의 노련미나 크레머 의 통찰력도 압바스 시대(7fJ)一 1258) 와 관련된 자료의 공백을 메워 주지는 못했다. 아쉽게도 이 두 문학가는 더 이상 후속 연구서를 내 지 못했댜 실제로 알바르트가 나중에 베를린 왕실 도서관 소장 아 람어 고본들의 분류작업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나 뉠데케가 고대 아 랍 시의 예술적 가치에 대해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은 모두 같은 맥락에서이다. 죽 1%4 년의 뉠데케는 고대 아랍 시의 절묘하고 풍부 한 표현에 감동을 받은 바 있지만 l m:J년에 와서는 심미적 쾌감이 라는 측면에서 과연 고대 아랍 시를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 문을 표시하고 있다. 이후 점차 그는 아랍 시를 줄거움의 원천으로 서 보디는 아랍인들의 성격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브로켈만C. Brockelmann (l ~ - 1~) 이 마치 잘 정리된 도서 목록 과도 같은 그의 『아랍 문헌사 Gesch ichte der Arabis d?en Iiterotz.o-,』 (Weim ar, 1 綴 1 00'2)를 발행함으로써 문학 연구에서 매우 새롭고도 과학적인 출발의 토대를 쌓은 것은 겨우 19 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 브로켈만은 당시의 연구 수준이 일부 제한된 영역을 제외하고는 아 직 내면적인 발달과정을 고구할 만한 형편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 <외형적 역사 aussere Gesc hi ch te>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자 하였 다 (Pre fac e of vol. I, p. iii). l c:Hl년, 브로켈만은 그의 아랍 문학사 보유판(Lei de n, 1 <557 -1942) 이 나오자 종래의 입장을 되풀이 하며 그 의 저술은 오직 근대적 의미에서 아랍 문학 연구를 위한 전기적, 서 지학적 자료를 제공하는 데 목적이 있음을 밝혔다 (Su pp l ement, I, Prefa ce, w. 2 군). 브로켈만이 제공한 이와 같은 광범위한 문헌 자료를 토대로 그
자신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이 재미있고 쉽게 읽혀질 수 있는 아랍 문학시를 내놓고자 시도하였다. 오스트리아의 동양학자 폰 그륀바움 Gusta v e E. van Grunebaum (l寒 -1 切 2) 은 그 중 가장 성공적이고 잘된 문학사로 니콜슨의 『아랍 문학사』를 꼽았다 (Near F.astem Cultu re and So ciety , p. 51). 니콜슨의 문학사 초판에 나온 서문은 저 술 목적과 당시의 문학사 연구 경향에 대한 그의 견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아랍 문학을 비평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 였다. 브로켈만의 귀중한 저술――一이는 빽빽하게 인쇄해서 천 페 이지가 넘는 분량이다 은 전기와 참고문헌의 목록에 불과하고 사상의 역사적 전개는 디루지 않고 있댜 그러나 이 사상의 역사적 전개야말로 문학사의 진정 중요한 본질적인 요소라고 나는- 생각한 다. 나의 주 목적은 아랍인들이 무엇을 사고하였는지를 개략적으로 기술하고, 가능한 한 그들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미친 제영향을 최 대로 적시(摘示)하는 데 있다.> 이와 같이 니콜슨의 아랍 문학사는 순 문학의 장르뿐 아니라 아랍인들의 역사, 시令E 철학, 종교, 신비 주의, 관습, 전기, 지리 동 문화적 배경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총체적 문학사의 기술인 것이다. 니콜슨의 문학시는 저자가 천명하였듯이, 비평주의 Cr itici sm 의 관 점에서 쓰여진 문학사가 아니라 전통적인 역사주의Hi s tori c i sm 의 기술 방법을 토대로 쓰여진 문학사이다. 일반 역사학이 아닌 문학사 에서 시대구분의 필요가 있느냐는 논쟁이 될 수도 있으나, 문학사의 기술에서 문학 속에 열거된 사회사 또는 사상사 혹은 연대순으로 정돈된 작품들에 대한 기술을 위해서는 시대구분이 역사 기술 방법 의 최소 이론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아랍 문 학자인 스테트케비치 Jar oslav S tetkevyc h 는 문학사의 기술법에 대 한 고찰과 반성을 통해 아랍 문학사의 기술법이 전통적인 역사주의 에 치우쳐 있음을 지적하고 비평주의와 역사주의 기술법의 조화가
긴요함을 역설하였댜 1) 특히 이 경우에도 만약 우리가 추구하는 것 이 문학상의 사건들이 아니라 문학적인 가치의 연대기적 개관이라 고 한다면 형식상 문학사라고 하는 것에서는 어디까지나 역사~玉의 가 보조적 역할에 머물러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서양에서 쓰여진 아랍 문학사들이 모두 역사주의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그 중 사실적 인 포괄성 fac tu al co mpre hens i veness 이 돋보이는 니콜슨의 문학사 를 훌륭한, 또는 < 꽤 괜찮은> 문학사로서 평가하고 있다.
4) [역주] 우크라이나 태생의 아랍 문학자 . 현재 미국 시카고 대학교의 근동 언어 및 문명과의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의 논문 Jo urnal cfN e- ar Easte r n Stu d ie s (l969), Arabis m and Arabic Lit er atu re. Self Vie w of a Profe s sio n , vol. 28, p. 152 참조 .
지금까지의 아람 문학사는 이슬람 왕조 중심의 단위 분절법을 받 아들여 이슬람 초기, 우마이야조, 압바스조, 오토만 터키, 근대문학 의 구분이 통념화되었다. 본서 역시 시대구분에 있어서는 예언자 무 함마드와 정통 칼리파시대 이후의 시대를 왕조별로 시대구분하고 있는데 특기할 점은 이슬람 출현 이전의 시대를 남부 아랍어 최고 ( 最古) 의 비문 연대인 B. C. 800 년부터 A D. EOO 년까지 걸치는 사바 및 힘야르 시대와 이슬람 이전 시대(fffi -622) 로 구분함으로써 아랍 문학사가들에 의해 도의시되어 온 남부 아라비아의 역사 기술에 큰 관심을 나타낸 점이다. 저자는 본서의 전체 470 페이지 중 140 페이지 죽, 전체의 약 30% 에 해당되는 분량을 자힐리야 시대에 할애함으로 써 다른 어느 시대보다 더 비중을 두고 있는데 이는 저자가 밝혔듯 이 동시대를 아랍 역사의 핵심으로 인식한다면 지나치게 많은 분량 은 아닐 것이다. 본서는 모두 10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1 장 <사바와 힘야르>에 서는 남부 아라비아의 역사로서 비문과 전설의 자료를 토대로 주로 고대 예멘 왕국의 몰락 과정을 살펴보았다. 제 2 장 <이교도 아랍인 들의 역사와 전설>에서는 부족간의 불화와 반목이 반복되던 이슬람
이전 아랍인들의 삶의 단면과 시대적 상황을 구전으로 전래되어온 시와 속담, 전설 둥의 구전 문학 자료를 토대로 기술하였다. 제 3 장 <이슬람 이전의 시와 관습, 종교>에서는 무슬림 사기들에 의해 무 지 또는 야만의 시대로 불리는 자힐리야Jahiliyy a 시대의 문학을 고 찰하였다. 동 시대에는 시가( 詩 歌) q益 Icla 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시가는 고도의 완벽한 예술 작품으로서 후에 아람 시의 전형 이 되었으며 <시는 아랍인들의 등기부>라고 할 만큼 거기에는 아 람인들의 족보와 유명한 전투, 사건들이 기록됨으로써 동시대의 사 회상을 반영하는 중요한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제 4 장 <예언자와 꾸란>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생애와 이슬람의 경전 이 된 꾸란의 계시를 통한 이슬람 전파 과정을 살펴보았다. 제 5 장 <정통 칼리파와 우마이야조 > 에서는 이슬람 문학의 시대적 배경으 로 종교적 • 정치적 변혁을 개관하였다. 우마이야조하에서의 아랍 문 학 특히 시 문학에서는 각 정파를 옹호하는 시나 자힐리야 시의 경 향이 엿보이는 풍자시와 연애시들이 나타났다. 제 6 장 < 바그다드의 칼리파들>에서는 우마이야조가 압바스인들에 의해 멸망하고 (749 년) 몽골족이 바그다드를 점령(1 258 년)하기까지의 약 5 세기 동안의 정치 적 발전 과정을 더돔어 보았다. 제 7 장 < 압바스조의 시와 문학과 학문>에서는 아랍 문학의 황금시대인 동시대에 활약한 위대한 시인 둘과 학자, 역사가, 철학자, 과학자들의 저술이나 작품을 기술하였다 . 제 8 장 <정통 교파, 자유 사상 및 신비주의>에서는 동시대에 공존 하였던 이슬람의 제 종파들 정통 교파와 무타질라파, <진디끄>라 불린 이단과 수피주의를 살펴보았다. 특히 수피주의 연구자답게 수 피주의의 기원과 발달 과정을 상세히 고구하였다. 제 9 장 <유럽의 아랍인들>에서는 아랍의 지배하에서 발생한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 방의 문학현상과 정치사적 전개 과정을 고찰하였으며, 제 10 장 <몽 골 침공 이후 현재까지>에서는 1 2:B년 훌라구에 의해 바그다드가 함락된 후, 아랍 민족이 역사의 주역에서 물러나고 오토만 터키가
지배하던 암흑기의 아랍 문학을 다루었다 . 본서에서 저자는 많은 아랍 시를 번역하여 놓고 있는데 번역한 영시에도 운을 맞추었을 뿐 아니라 이슬람 이전의 시인인 타압바따 샤란의 번역 시에서 보듯이 아랍어 원문에 실려 있는 운율을 모방 하려고까지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아랍인들이 고대 아랍 시를 큰 자랑으로 여기고 또한 서양의 일부 문학비평가들·도 이를 격찬한 바 있지만 대부분의 번역된 아랍 시들이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지 못하는 까닭은 그 주제나 내용이 우리들의 시적 정서나 심미안에 맞지 않는디는 것이 주된 이유일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번역 과정 에서 아랍 시만이 갖고 있는 언어적 문체와 원문이 갖고 있는 미적 인 가치를 온전히 옮길 수 없는 데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니콜슨은 시 번역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였다. < 시를 옮기는 데 있어 니는 원문이 지니고 있는 시의 정신과 느낌 을 살리려고 노력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축역을 해서는 안 된다. 전통적인 아랍 시 예컨대, 무알라까트 Mu'all aq at 를 영어권의 독자들 이 이해할 수 있고 매력을 느낄 만큼 재생해 낸다는 것은 아마도 어느 번역가도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작업일 것이다. 묘사의 대상에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시구에서도 독특한 민족적 기질과 이국 적이고 생소한 아라비아 고유의 이미지와 문체에 우리는 번번이 당 혹하게 된다> . 역자 또한 아랍 문학의 정수인 아랍 시를 우리 말로 옮기는 데 있어 니콜슨이 번역 시에서 훌륭하게 재생하려고 한 시 의 운율은 고사하고라도 아랍어 원문에서 풍겨나오는 시적 향취나 의미를 우리 말로 제대로 살릴 수가 없었다. 이는 역자의 능력으로 는 불가능한 작업이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니콜슨이 케임브리지에 입학하여 잠시나마 접한 그리스와 라틴 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역서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죽 어떤 아 랍 문학가나 작품이 나오면 거기에 견줄 만한 서양의 문학가나 작
품을 인용하여 기술하고 있댜 예컨대 아부 알-알라 알 - 마아리 Abo. al-'Ala al - Ma'am 의 『 용서의 서간문 』 에 나오는 < 믿는 자들의 천국>은 저속한 소극( 笑~ I])의 분위기와 정교한 묘사가 마치 2 세기 의 그리스 작가인 루키아노스 Luc i an 의 작품을 - 연상케 한디~ 식이 다. 물론, 그러한 비교 서술 방법이 서양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 한 것이겠지만 우리의 일반 독자 들 에게는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불 필요하며 무의미한 사족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잘난 체>하는 데서 나오는 현학이 아니라 독자의 편에서 독자들 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임을 인정한다면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어 갈수 있을 것이다. 한편 니콜슨의 문체는 앞서 그륀바움의 표현을 빌리면 <매우 매 혹적이고 평이해서 순 문학의 심미안적 탐구 사이사이에 주변적인 주제들이 끼어 있어도 독자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 . 그와 더불어 본서의 기술 방법상의 주요 특징을 이루는 것은 풍부한 일 화와 고사, 전설, 속담을 적절히 전거로서 인용하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홍미를 느끼게 해주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신뢰를 더해주고 있는 점이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독자들은 일단 책을 펼치면 처 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흥미를 잃지 않고 니콜슨의 문학사를 탐독 할수 있게 된다. . 또 본문이나 풍부하고 상세한 주석을 통해 뉠데케, 드 사시, 골트 치어, 폰 크레머를 비롯, 깁에 이르기까지 18 세기에서 幻세기 중반 까지 활동한 기라성 같은 많은 동양학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학문적 성과를 접할 수 있는 것도 아랍 문학도에게는 다른 아랍 문학서에 서 찾기 어려운 줄거움이자 유익함이다. 역서에서의 아랍어 표기는 몇몇 경우를 제외하곤 니콜슨이 채택 한 방식을 거의 수용하였다. 정관사
sha'b/). 또 아랍어 연결형에 나타나는 정관사는 <'l- >을
저가 될 것으로 기대됐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필자들이 집필에 참 여함으로써 1 권의 경우 24 장을 2'2명이 나누어 집필하였다_ 일관성 있는 기술이 되지 못하고 백화점식의 지식 나열에만 그쳐 당초 야심찬 편찬 계획에 크게 기대를 걸고 있던 많은 아랍 문학 비평가들로부터 실망어린 혹평을 받은 바 있다. 아랍의 유명한 경구에 <완전무결한 벗을 구하는· 자, 벗이 없다> 는 말이 있다. 그렇듯이 <흠잡을 데 없는 책을 쓰는 자, 결국 아무 것도 쓰는 것이 없게 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 스스로 솔직하 게 인정하였듯이 이 책 역시 전혀 홈잡을 데 없는 완벽한 저술은 아니다. 예를 들면, 고대 아랍 문학의 주류가 시 문학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힐리야 시대의 산문에 대한 언급이 거의 전무한 점이라든지 자힐리야 시대에 바해 산문이 두드러지게 발달 된 우마이야 시대에서조차 산문 문학을 소홀히 다루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개별적인 산문 작가의 기술에서도 니콜슨은 인색 함을 드러내고 있는데 고대 아랍의 가장 위대한 산문 작가인 알-자 히즈에 대한 기술도 단 몇 줄에 불과할 뿐이다 . 여기서 우리는 니콜 슨의 아랍 시 문학에 대한 개인적인 편애로 인해 보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위치에 있어야 할 문학사가로서의 자세를 흄잡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본문 중에 인용된 많은 아랍 시중에서 아주 짧은 인용 시구 는 음역하여 동시에 병기하고 있지만 대개는 번역문만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원문과의 대조를 통해 보다 정확한 의미 파악이 가능 한 경우도 있으므로 아랍어이든 음역이든간에 부록에서라도 제시되 는 것이 바람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부분적 결점에도 불구하고 본서는 아랍어로 재 번역되었을 뿐 아니라 비교적 출판 연도가 오래되었음에도 아직까 지도 고대 아랍 문학의 입문자들에게 개론서로서 꾸준히 읽혀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니콜슨의 『아랍 문학사 』 는 서양에서 나온 고대 아랍 문학사 중에서는 여전히 가장 훌 륭한 고전이며, 아랍 문학도에 게는 귀중한 참고문헌이고, 일반 독자에게는 독서의 즐거움을 안겨 주는 교양서이다. 앞으로도 니콜슨의 저술을 압도할 만한 문학사가 나오지 않는 한, 비평적인 시각을 갖고 고대 아랍 문학을 연구하는 전문 학자나 관심 있는 일반인들에게 니콜슨의 『아랍 문학사』는 영 원한 고전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
옮긴이후기 역자가 니콜슨의 The Lit era ry Hi st o r y of the Arabs 를 처음 접 한 것이 70 년대 말 학부 시절이니 상당히 오래 전의 일이다. 당시만 해도 아랍어나 아랍 문학 관련 서적을 시중에서 구하기란 대단히 어려웠던 때였다 . 그런 까닭에 우연찮게 구한 이 책은 역자에겐 마 치 보물덩어리(?)나 되는 것처럼 소중하게 생각되었고 그냥 들고만 다니는 것으로도 흐못하고 괜히 가슴 뿌듯해 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 후 카이로 아메리칸 대학교 (AUC) 유학 시절, 고대 아랍 문학에 심취하면서 본서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 책을 통해 고대 아 랍의 찬란하고 풍부한 문학 유산에 눈뜰 수 있었다. 이제 지난 일 년 동안 교육부 파견 AUC 연구교수로 연구 활동을 하면서 이 책의 번역을 마무리하고 나니 감회가 새롭고 후련한 감마저 든다. 돌이켜 보면, 번역 과정 내내 역자는 니콜슨의 깊은 통찰력과 동 • 서양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적 편력에 <눈먼 말이 종 소리만 돋 고 끌려다니는> 그런 처지였던 것 같다. 실로 역자의 능력으로는 본서의 번역이 힘에 부치는 작업이었음을 고백지 않을 수 없다. 워 낙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광범위하고 양적으로도 방대하여 도중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고 실제로 한동안은 번역 원 고를 서재 한쪽 구석에 처박아두고 거들떠 보지도 않은 적도 있었 다. 하지만 끝까지 번역 작업을 밀고나갈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본서 에 대한 애착심과 아직도 <아라비안 나이트> 정도로만 알려져 있 는 고대 • 중세 아랍의 광대한 문학세계를 일반 독자들이나 아랍 문 학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소개하는 데 이만큼 적합한 책도
없다는 역자의 믿음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본 역서에는 일반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원서에는 없던 주요 사건 연대표와 역대 왕조의 칼리파 계보, 부족명과 주요 지명을 넣 은 아라비아와 중동 전도를 역자 부록으로 제시하였다. 색인 역시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인명과 지명, 전문용어로 구분하였으며 원서 의 항목 수가 워낙 많아 역서 색인에서는 주요한 항목만을 간추렸 다. 꾸란 구절의 우리말 번역은 이미 나와 있는 『성 꾸란』(김용선 역 주)과 『꾸란 해설』(최영길)을 많이 참고하였음을 밝혀둔다. 역자로서는 번역에 충실을 기하고자 노력하였지만 미흡한 점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혹 본 역서에서 발견될지도 모를 모든 오역 과 잘못은 역자의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선배 • 동학 그리고 독자들의 질정(比正)과 지도 편달이 있기를 바란다. 역자는 이 책을 번역하고 나서 번역을 한다는 것이 자신의 글을 쓰는 것보다 얼마 나 더 어려운 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니콜슨이 머리말에서 인용한 <저술보다 편찬이 더 어렵다>란 말에 한 마디 덧붙혀서 <번역은 저술이나 편찬보다도 더 어렵다>란 말로 번역의 어려움을 토로해 본다. 본서를 번역하는 데는 여러분들의 격려와 도움의 손길을 거쳐야 했다. 우선 본서의 학술적 가치를 인정하고 오래 전부터 이 책의 우 리말 번역을 적극 권유해 주신 한국외국어대학교 손주영 교수께 깊 은 감사를 드린다. 또한 본 역서의 초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 게 읽고 여러 귀중한 조언과 지적을 해주신 명지대학교 조희선 교 수와 번역 과정에서 늘 관심을 갖고 격려해 준 동료 황병하, 송경근 교수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菜J의 라틴어 구절을 번역해 준 AUC 도서관 사서 레즐리 트웨들 Lesle y Twedle 여사와 8 장의 <청정 형 제단>에 관한 프랑스어 구절을 우리말로 옮겨준 조선대 불어불문학 과 박성수 선생에게도 감사 드린다. 온갖 궂은 일과 마지막 색인 작 업에 팔 걷어붙이고 도와준 한국외대 아랍어과 최진영 선생과 AUC
대학원 과정의 서정민 군, 이은경 양에게도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또한 지난 한 해 카이로에서의 나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물심양 면으로 본서의 번역 작업에 격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은 카이로의 모든 선배들과 지기(知己)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룹 드린다. 본서의 번역을 수락하고 책이 나오기까지 오랜 기간 인내해 준 대우재단과 역자가 해외에 나가 있던 탓에 여러 모로 번거로움과 불편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감내하고 편집 • 교정 작업을 도 맡아 주신 민음사 편집부 이경열 선생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끝으 로 지난 일 년간 헤어져 지내야 했던 나의 가족들과 본 역서가 출 판되는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 1 寒년 3 월 빛고을에서 역자씀
부록 이슬람 왕조의 칼리파 계보 주요사건 연대표 지도
이슬람 왕조의 칼리파 계보
스페인의 신 우마이야조 칼리과 계보
압바스조의 칼리파계보
압바스조의 칼리과 계보예속)
주요사건 연대표 다음은 이 책에 동장하는 주요 역사 • 문학사적 사건들을 발생 연 대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기원전 800 년경 남부 아랍어(사바어 또는 힘야르어) 비문 쓰여지다 . 7| 원후 l
528 아누쉬르완, 마즈닥 추종자들을 학살하다. 540 년경 시인 이므루 알-까이스 죽다. 5.54 <할리마의 날> 전투에서 라큼 왕국 문디르 3 세 전사하다. 아므르 븐 힌드, 히라의 왕위 계승하다( -f.68). 568 년경 하란 비문 쓰여지다. 570 년경 <코끼리의 해>. 이 해에 아브라하가 메카를 공격하고 예언 자 무함마드가 탄생하다. 문디르 븐 하리쓰, 히라의 왕 까부 스 븐 힌드에게 승리를 거두다. 572 년경 예멘, 페르시아의 속국이 되다. 580 마리브 댐의 붕괴 : 남부 아라비아 왕국시대의 종말울 예 고하다. 610 년경 두 까르 전투에서 바누 바크르족이 페르시아 군을 격퇴하다. 612 무함마드, 처음으로 하늘의 계시를 받다. 614 페르시아,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다. 615 부아쓰 전투 일어나다. 619 <슬픔의 해>. 이 해 무함마드의 첫 부인 카디자와 숙부 아 부 딸립 죽다 . 62 '2 무함마드, 신자들과 함께 야쓰리브(메디나)로 옮겨가다(히즈 라). 이슬람력 원년이 되다. 624 바드르 전투 일어나다. 625 우흐드 전투 일어나다. 630 비잔틴 황제 헤라클리우스, 시리아로부터 페르시아인들을 몰 아내다. 무함마드, 메카에 입성하여 우상들을 파괴하다. 632 무함마드, 메디나에서 승천(사망)하다. 아부 바르크, 초대 칼 리파에 선출되다. 63.3 야마마 전투 일어나다. 634 우마르, 제 2 대 칼리파에 취 임하다. 63.5 갓산의 마지막 왕 자발라 븐 알-아이함 죽위하다. 636 칼리파 우마르, 회계장부 격인 <디완>을 만들다.
懿 바스라와 쿠파 건설되다. 644 우마르가 죽고 우쓰만이 제 3 대 칼리파가 되다. 651 칼리파 우쓰만, 꾸란 정본을 만들다 . 656 칼리파 우쓰만 암살되고 알리가 제 4 대 칼리파가 되다. 657 씨핀 전투 벌어지댜 658 나흐라완의 전투 일어나다. 661 알리 암살되고 우마이야조 일어나다. 이즈음 시인 라비드 죽다. 衍 7 샤비브가 일으킨 반란, 핫자즈에 의해 진압되다. 680 카르발라의 비극. 알리의 둘째 아들 후사인 살해되다. 칼리파 야지드 1 세의 통치 시작되다. 683 우마이야 총독을 쫓아낸 메디나, 시리아 군에게 약탈되다 . 압 둘라 븐 주바이르가 칼리파로 자처하고 있던 메카, 포위 공 격을 받고 카바 신전이 페허화되다. 684 <회개자들 al-Tawwabun> 반란을 일으키다 . 칼브족과 까이 스족 서로 대적하여 싸우다 . 685 무크타르, 반란을 일으키다. 압둘 말리크 칼리파에 죽위하다. 686 무크타르, 쿠파를 차지하다. 696 칼리파 압둘 말리크, 아랍어를 재무 행정의 공용어로 삼고 최초의 이슬람 독자적인 금화와 은화를 주조하다 . 역마제도 를도입하다. 700 년경 시를 기록하는 관습이 시작되다. 7ff i 왈리드, 칼리파에 죽위하다( -715). 711 따리끄 장군이 이끄는 이슬람군, 스페인 침입하다. 714 이라크의 총독 핫자즈 븐 유수프 죽다. 716 하쉼파의 이맘 아부 하쉼 죽다. 717 우마르 븐 압둘 아지즈 죽위하다( -霞 0). 719 시인 우마르 본 아비 라비아 죽다. 7?. 8 시인 파라즈다끄 죽다. 신학자이자 수도승인 바스라의 하산
죽다 . 732 쁘와띠에 전투에서 아랍군 패배하다. 743 왈리드 2 세 즉위 하다( -744). 748 무타질라파의 창시자 와씰 븐 아따 죽다. 749 압바스가의 아부 알-압바스 알_사파흐 칼리파로 즉위하다. 7f> () 자브 전투에서 마지막 우마이야 칼리파 마르완 2 세가 압바스 가에 패하다 아부 알-압바스 알-사파흐 즉위하고 압바스조 일어나댜 754 칼리파 만쑤르 즉위하다( 一 n5). 755 스페인의 압둘 라흐만, 압바스 칼리파로부터 독립을 선포하 고 신 우마이야조 세우다. 760 『 칼릴라와 딤나』를 지은 이븐 알-무캇파 살해되다. 762 바그다드에 새 도읍 건설이 시작되다. 7o / 아부 하니파 죽다. 768 무함마드 전기 작가 이븐 이스하끄 죽다. 770 일곱 이맘파의 마지막 이맘 무함마드 븐 이스마일 사라지다. 772 유명한 음유시인 함마드 알-라위야 죽다. 783 맹인 시인 밧샤르 본 부르드와 <진디끄> 쌀리흐 븐 압드 알 -끗두스가 칼리파 마흐디에 의해 처형되다. 786 하룬 알-라쉬드, 칼리파가 되다. 이 해 시집 『무팟달리야트』 의 편찬자인 무팟달 알_답비 죽다. 788 스페인의 신 우마이야조 칼리파 히샴 븐 압둘 라흐만 즉위하 다( -700). 791 문법학자 칼릴 븐 아흐마드 죽다. 795 이슬람 법학자이자 『무왓따』의 저자 말리크 븐 아나스 죽다 (713 - ). 796 신 우마이야조 칼리파 하캄 죽위하다( -8'22). 800 아글라브조의 지사가 까이라완을 점령하다. 고대 시가의 전 7 승자 칼라프 알-아흐마르 죽다 .
803 바르메시드가 멸망하다 . 810 시 인 아부 누와스 죽다 . 813 칼리 파 마문 즉위 하다( -8. 33). 815 신바주의자 마루프 알-카르키 죽다 819 이슬람 이전 역사에 정통한 히샴 븐 무함마드 알 - 칼비 죽다. 햏 역사학자이자 『 전쟁의 서 』 의 저자 와끼디와 쿠파의 언어학자 알-파라 죽다 . 쿠라산 총독 따히르 , 따히리조 세우다. 신 우 마이야조의 압둘 라흐만 2 세 죽위하다( -852). 塗 문법학자 아부 우바이다 죽다. 828 시인 아부 알-아타히야 죽다 (748 - ). 830 문법학자 알-아쓰마이 죽다 . 수피주의자 아부 술라이만 알 다라니 죽다 . 832 칼리파 알-마문이 바그다드에 <지혜의 집 > 을 세우다 . 833 무함마드 전기 작가 이븐 히샴 죽다. 칼리파 마문 죽다 . 칼리 파 무타씹 즉위하다( -8 42). 845 무함마드 전기학자 이븐 사드 죽다. 847 칼리파 무타와킬 죽위하다( -861). 849 스페인의 무슬림 신학자 야흐야 븐 야흐야 죽다. 850 압바스 시대 시인이자 시집 『 하마사 』 의 저자 아부 탐맘 죽 다. 철학자 알-킨디 죽다. 860 수피주의자 두 알-눈 알 - 미쓰리 죽다. 869 바스라 태생의 문호 알-자히즈 죽다. 'if/0 무함마드 언행록 『알 - 싸히흐』의 저자 부카리 죽다. 열두 이 맘파의 마지막 이맘 무함마드 븐 알-하산 사라지다. 印 '2 따히르조가 점령하고 있던 쿠라산, 싸파르조의 창건자 야꿉 븐 라이쓰의 수중에 넘어가다. 印 '4 사만조 일어나다( -999). 무함마드 언행록 『알-싸히호표기 저 자 무슬림 죽다. 수피주의자 바야지드 죽다. 889 『 시와 시인들의 서』의 저자인 문학자 이븐 꾸타이바 죽다 .
8역사학자 발라두리 죽다. 細99285890890 년 경 쿠아역자『리뜨『다파 카키 파부드힐사띠밀탑죽농학 의학리마 업』다 탐 파 자야의조알서 .맘주 의 -』디과 시저나바일 나어 대문자저이디동나와 술 법드아무속시다하리학 』담 바대(다죽의 자다.죽 집 라. 다- 저시 드1쌀 .1편자인 7 라1죽찬 으,브 다이자로튀. 븐 죽니 무 시다지알.팟)집- .달 이무고Ii ' 븐하타븐명 마쯔 한알살 사 -죽라수 .!I 아다의마피흐 ( 8저쉬죽6셰1다 자야-이 . 크『)부 .나 호 바바투그 9압둘 라흐만 3 세 죽위하다( -OOl). 0수피주의자 할라즈 죽다. 4백과 사전적 역사학자 따바리 죽다 (838- ). 의학자 알-라지 909299329죽함3다4단.9조 4 0일9어45나9다4(6 94-1909053)0. 9 56961965 8부와이호조 일어나다( . -la:£ ). 9언어학자 • 족보학자 • 시인인 이븐 두라이드 죽다. 0『 진기한 목걸이』의 저자 이븐 압디 랍비히 죽다. 92929219g969 973 『시『파지문이역철띠 노황쓰리사법학인마금래 파 자학학•조무의의 한 자지자, 타파의책 초리 납라무아이 원』학 비비함의캇흐』집자 자다의마트죽저인죽 시드 다남다자 저정 . 함부 (자출알복 9아다 1생인-하5아부니하-나 고라 지다하알죽 )비..리카 스다- 아 . 이파문•죽 역로라역학다즈사 사사 .시 학서가 알자건인 -알 설이마『-하쓰스연쑬다파대리우하 .기 드죽니 』 다 죽완.죽다성 다.하. 다 . 2세비야 출신 시인 이븐 하니 죽다. 3
CJ76 가즈네브조 일어나다( -1186). 하캄 2 세 죽다. 984 전문적 설교가 이븐 누바타 죽댜 988 알-아즈하르 모스크에 대학 세우댜 『 피흐리스트 』 쓰여 지다. 995 『 피흐리스트 』 의 저자 이븐 알-나딤 죽댜 1000 아부 자이드 무함마드 알一꾸라쉬, 시집 『 잠하라트 아쉬아리 알-아람 』 편집하다. 1002 칼리파 히샴 2 세 대신 만쑤르 븐 아비 아미르 섭정하다 (ITT6- ). 1rm <마까마>의 산문작가 바디아 알 - 자만 알-하마다니 죽다 . 1020 『샤흐나마』의 저자 피르다우시 죽다. 1023 압바디조 일어나다( -lOO1). 신 우마이야조 압둘 라호만 5 세 통치 하다( -10 '2 4). 1031 코르도바의 우마이야조 망하고 군소 왕국의 시대가 열리다 . 1cm 셀주끄조 일어나다( -1300). 1038 『야티마』의 저자 싸알리비 죽다. 1042 압바디조의 무타디드 통치하다( -1009). 1048 과학 • 고고학 • 인도 관습에 박식한 학자 비루니 죽다(언 3 - ). 1049 쿠라산의 수피주의자 아부 사이드 본 아비 알-카이르 죽다 . 1 懿 셀주끄조 바그다드로 들어가다. lff i6 알모라비드조 일어나다( -1147). lff i7 시 인 아부 알-알라 알-마아리 죽다 (ITT3- ). 1E8 『통치술의 서』의 저자이자 샤피아파의 법학자인 마와르디 죽다. 1064 스페인의 무슬림 학자 이븐 하즘 죽다 (994- ). lff il 바그다드에 니자미야 학원 설립되다. 1069 압바디조의 무타미드 통치하다( -1001). lCTlO 년경 『움다』의 저자 이본 라쉬끄 죽다. lCTll 스페인의 시인 이븐 자이둔 죽다(1 003- ). 시칠리아, 노르만 족에 다시 넘어가다.
1ITT3 의학자 • 철학자인 이본 시나 죽다 (900 - ). 수피주의의 최고 권위자인 꾸샤이리 죽다. 1086 잘라까 전투 벌어지다 . 1111 이슬람 신학자 가잘리 죽다. 1120 <라미야트 알-아잠>의 시인 뚜그라이 죽다. 11Z <마까마>의 산문작가 하리리 죽다. 1124 자힐리야 속담집 편찬자 마이다니 죽다 . 1130 알모하드조 일어나다( -1269). 1143 꾸란 해석학자 자마크샤리 죽다 . 1153 『 종교와 종파의 서 』 의 저자 샤흐라스타니 죽다. 1160 스페인의 음유시인 이븐 꾸즈만 죽다. 1171 살라딘, 파띠마조 를 멸망시키고 아유비조 세우다. ( - 1 책) . 이집트, 정통파 손에 되돌아 오다 . 117l 「 힘야르 송시 _J 의 시인 나쉬완 븐 사이드 알-힘야리 죽다. 11 없 살라딘, 예루살렘을 십자군으로부터 탈환하다 . 1191 수피의 범신론자인 수흐라와르디 처형되다 . 1203 시인 니자미 죽다. 1219 칭기즈 칸의 서정(西征) 시작되다. 1229 스페인의 지리학자 야꾸트 죽다 . 1230 페르시아의 유명한 신비주의자 파리듯딘 앗따르 죽다 . 1232 그라나다의 나쓰리조 일어나다( -14! 12). 알함브라 궁전 세우 기 시작하다. 12. 34 역사학자 이븐 알-아씨르 죽다 . 123 .5 신비주의 시인 우마르 본 알 - 파리드 죽다 (1181- ). 1240 이슬람 신비주의자 이븐 알-아라비 죽다(llffi- ). 12. 50 이집트에 마물루크조 일어나다( -1517). 1258 몽골군, 바그다드를 공략하다. 1260 아인 잘루트 전투 벌어지다. 이 전투의 영옹 술탄 바이바르 스 통치하다( -l'm ).
1'?:/3 페르시아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잘랄 알-딘 루미 죽다 . 운 문으로 된 아랍어 문법서 『 알피야 』 의 저자 이븐 말리크 죽다 . 1282 전기학자 이븐 칼리칸 죽다 (l211- ) 1286 꾸란 해석학자 바이다위 죽다. 1296 『외투송.!l의 시인 부씨리 죽댜 1300 유명한 역사서 『 알-파크리』의 저자 이븐 알-띠끄따까 죽다. 1311 아랍어 사전 『 리산 알-아랍 .!l 의 저자 자말 알-딘 븐 무카람 죽다. 1328 신학자 이븐 타이미야 죽다. 1332 백과사전적 학자 누와이리 죽다. 1350 우르투끼조의 계관시인 싸피이이 알-딘 알-힐리 죽다(1 278- ). 13. 58 오토만 터키, 헬레스폰트를 건너 유럽에 진출하다 . • 1363 티무르, 트란스옥사니아를 통일하다 . 전기학자 싸파디 죽다. 1374 시인 이븐 카땝 죽다. 1375 이븐 칼둔 『역사 서설』 저술하다. 1406 이슬람 최대의 역사 사상가 이븐 칼둔 죽다 (1 3.32- ). 1414 아랍어 사전 『알-까무스』의 저자 피루자바디 죽다. 1442 역사학자 마끄리지 죽다 (1364- ). 1 懿 . 오토만 터키,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다. 15 ffi 역사학자 잘랄 알-딘 알-수유띠 죽다(1 445- ). 1517 시리아 • 이집트 • 아라비아 반도가 오토만 터키 세력권에 들 어오다. 1565 이슬람 견신론자 압둘 와합 알-샤라니 죽다. 1682 『키자나트 알-아답』의 저자 압둘 까디르 죽다. l 函 이집트 대중시인 쉬르비니 <하쯔 알-꾸후프> 짓다. 1720 이슬람 개혁 운동가 압둘 와합 태어나다. 1798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하다. 1m1 와하비파 카르발라를 공략하다. 1803 와하비파 메카와 메디나를 점령하다.
1810 울리히 야스퍼 제첸, 남부 아랍어 비문 발견하다. 1818 와하비파, 오토만 터키에게 패배하고 수도 디라이야 파괴되다. 1821 이집트에 인쇄소가 세워지다. 1837 사누시파 창건되다 . 1843 아르노, 싸나를 출발 마리브의 유작 발굴하다 . 1859 사누시파 창건자 무함마드 븐 알리 사누시 죽다(1 791- ). l'ir /0 알바르트 『여섯 시인의 디완 』 발행하다 . 1885 쏘르베크, 세번째 『무팟달리야트』 발행하다.
RE
찾아보기·인명 다음에서는 이 책에 등장한 주요한 인명과 지명, 전문 용어를 색인으 로 구분, 정리하였다 . 특히 전문 용어에서는 가능한 한 아랍어 원어와 그 의미까지도 병기하고자 하였다. 정관사
기 가잘리 459-461, f:ffi-5 13 갈랑 ros 골트치 어, Ign az 47, 75, 396- 泊7 , 499 괴제 , M J. de 2fiO 글레이저, E. 46 깁, H. A R 78, 48'2 까따리 본 알-푸자아 303 까이스 븐 알-카땀 157-160 까이스 본 주하이르 115-116 까즈위니(지리학자) 또 3 까흐딴 16 꼬생 드 퍼시벌 78 꽈트르메르, M 26 꾸샤이리 458 꾸싸이 이 119-120 L 나비가 알-두브야니(시인) 1(6 , 191-lffi 나쉬완 븐 사이드 알-힘야리 49- 었
나자쉬 (the Neg us ) 68, 71 뉠데케, Th 24 누만 1 세( 라큼 왕국) 얽 -88, 213 누만 3 세(라큼 왕국) 99-100 누만 븐 알-문디르 아부 까부스 191, 누만 3 세 참조 누만 알-아와르(라큼 왕국) 누만 1 세 참조 누만 알-아크바르 누만 1 세 참조 누쉬르완(사산 왕) 72 니부어,카르스텐 43 C 다합 알-이즐리 93 도지 304 두 나파르 121-12' 2 두 누와스 68-70, 240 두 루아인 히-ffi 두 알-까르나인 57 두 알-눈 알-미쓰리 517-5 19 두 알-룸마{시인) 344
두라이드 본 자이드 븐 나흐드 132 드사시 44 드 슬란 170 디나와리(역사학자) 472 디에테리시, F. 498 따라파 173-175 따바리 219, 473-475 . 뚜그라이(시인) 443-444 2 라디(칼리파) 504 라비드(시인) 188-lOO 라비아 알-아다위야 320, 328-329 라이스코 lo ! 라이얼,찰스 77 라일라(알-마즈눈의 애인) 334 라지(아부 바크르: 역사학자) ffi9 라지(아부 바크르 :’ 의 학자) 369 레디거, 에밀 44 레인, E. W. 003 레인-풀, 스탠리 368, 498 루끄만 븐 아드(왕) '57, 52 뤼케르트, 프리드리히 lff i 레 스트란쥐, G. 48'2
□ 마구리우쓰 교수, D. S. 266, 42.8 마끄디시 무캇다시 al-Mu q addas i 참조 마끄리지(타끼이 알-딘) 598-599 마니 4OO 마루프 알-카르키 515-516 마르주끼 201 마르키온 4았) 마리야(하리쓰 븐 아비 샤미르의 어머니) 1.01 마문(칼리 파) 356, 36.5- 366, 484, 495 마스우디 473, 476-478, fJJ2 마와르디 458 마이다니 76 마즈눈 3.34 마흐디(칼리과) . 'S/9- 380 만쑤르 본 아비 아미르 549- 또 D 만쑤르(칼리파) 359-361 말리크 븐 아나스 391, 457, 544 말리크 샤(셀주끄) 382 말리크(아즈드족의) 81 맥도널드, D. B. 512 맨데빌, 존 26 메륵스, A 514 · 모르트만 46 무캇다시(지리학자) 481 무낫칼(시인) 99
무띠아 븐 이야스(시인) 400-401 무바라드(문법학자) 319, 465 무사일리마 2ffi 무스타썸(칼리파) 589 무스탄씨르(압바스조) 593 무슬림(예언자 언행록 al- 요 Hh 의 저자) 457 무아위야 븐 아비 수프얀(칼리파) 'Z/6- 281 무아위야(칸사의 동생) 198 무이르, w. 266 무크타르 2.85, 300-312 무타납비(시인) 었 4, 416- 心 6 무타미드(압바디조) 500-%3 무타씹(칼리파) 366 무타와킬(칼리파) 3ol, 391 무팟달 븐 살라마 76 무팟달 알-답비(언어학자) axl, 465 무할힐 븐 라비아 133 무함마드 븐 알-아흐마르 577 무함마드 븐 알리 븐 알-사누시 616 무함마드 븐 압둘 와합 613-6 1 5 무함마드 븐 이스하끄 븐 아비 야꿉 알_나딤 알-와라끄 알-바그다디 선 3 무함마드 알리 파샤 614, 616 무함마드(예언자) 28, 215-2. ffi, 330 무흐이 알-딘 이븐 알-아라비 533 무흐타디(칼리파) 劣 7
문디르 1 세(라큼 왕국) 89 문디르 3 세(라큼 왕국) 89-9 3 문디르 4 세(라큼 왕국) 94, CJl 문디르 븐 마 알-사마 문디르 3 세 참조 문디르 본 알-하리쓰(갓산 왕국) 100 뮐러, D. H 46 t:I 바디아 알-자만 알-하마다니 446-447 바르디산 坐 D 바비에 드 메이나르 473 바수스 1 (J7 _IOO( 전쟁), lOO 바야지드(비스땀의) 522-5 %, 바이바르스 술탄(마물루크) 또 E 바히라(수도승) 끄 3 반 불로텐 313 발라두리(역사학자) 472 발레리아누스 79 밧샤르 븐 부르드 342, 효 B, 印 1 버튼, 리차드 6a5 베반 교수, A A %-OO, 껴 5 f D1 벨하우젠,J. ~ 부르크하르트 613 부싸이나 333 부씨리(시인) 444-445 부카리 끄 0, 心 7 부흐투리(시인) :m-~ 4.31 , 442
뷔스텐펠트 482 브라운 E. G. 72 브로켈만, C. 꼬 3 비루니(아부 라이한) 487 빌끼스 58 人 사마우알 본 아디야 144-145 사무엘 하-레비 fffl-56 9 사부르 1 세 79 사우드 븐 압드 알-아지즈 븐 무함마 드 본 사우드 614 사이프 븐 디 야잔 71 사이프 알-다울라(함단조) ~4-375, 415 -t!W 살라딘 381 샤끼끄(아부 알리, 발크 출신) 3'Z7 샤라니 586, f:/J7, 612-6 13 샤리프 알-라디(시인) 429 샤크 ,AF. 폰 困 3 샤피이 391 샤흐라스타니 462 샨파라 1'51 - 139, 444 샴시야(아라비아의 여왕) 40 솔로몬븐가비롤 印 8 수유띠(잘랄 알-딘) l
쉬라이너 508 슈타이너 4% 슈프랭거, A 끄 5 슈핏타 508 시바 여왕 58 시바와이히 465 싸알리 비 'El, 415, 42'2- 426, 471 싸크르(알-칸사의 동생) 198 싸피이 알-딘 알_힐리(시인) 593-5% 쌀라브 466 쌀라흐 알-딘 븐 아유브 살라딘 참조 。 아놀드, Fr. 171 아누쉬르완 븐 칼리드 447 아누쉬르완{사산 왕) 91, 94, 48.3, 누 쉬르완참조 아두드 알-다울라(부와이호조) 371 아디 븐 자이드 94-98, 211-212 아르야뜨 69-71 아므르 븐 아미르 마 알-사마 알-무자 이끼야 54 아므르 븐 알-아쓰 訂 7 아므르 븐 쿨씀(시 인) 176-180 아므르 본 힌드(라큼 왕국) 93 . 아민(칼리파) 356, 365 아부 누와스(시인) 394, 40'2-4 C6
아부 라합 Z37 아부 무슬림 3.51 -3.5 2 아부 미호잔 199 아부 바크르 븐 아비 알-아즈하르 466 아부 바크르 알_라지(의학자) 487 아부 바크르(칼리파) 265 아부 술라이만 알-다라니 516 아부 아므르 븐 알-알라 荀 5 아부 알-마하신 븐 타그리비르디(역사 학자) 365, 599 아부 알一아스와드 알_두일리 464 아부 알-아타히야(시인) 400-415 아부 알겨알라 알-마아리 4'Z1_ 441, 印 3 아부 알_압바스 알-사파흐 3.52 아부 알-파라즈(이쓰파한 출신) Tl, 470 아부 알-하산 알一아쉬아리 앉 5- 앉)9, 아부 압달라 알-크와리즈미 487 아부 우바이다(문법학자) 466 켜히 아부 자이드 坐0 아부 탐맘(하마사의 저자) 1~, a) l- 었)'2, 442 아부 피라스 알-함다니(시인) 幻 5, 416 아부 하니파 391 아브라하 70-72, 121-12A 아비드 븐 샤르야 51 아비드 븐 알-아브라쓰(시인) 얽 아비센나 이본시나참조 아샤(시인) 55-f fi, 194 一 1~
아스아드 카밀(툼바아) 58-f fi 아쓰마이(문법학자) 465, 4ol, fffi 아이히호른 13 아크딸(시인) 334, 336-339 아호마드 븐 뚤룬 478 아흐마드 븐 한발 391 아흐마드 알-나하스 lol 안바리(언어학자) 201 안타라(시인) 183-18. 5 알까마 븐 아바다〈시인) lOO 알리 븐 아비 딸립(예언자의 사위) Z75- Z78 알바르트, w. 199 알프 아르슬란(셀주끄) 38'2 압둘 라흐만 1 세(스페인 우마이야직 여 1_ 여 3, 또 압둘 라흐만 양 1] (스페인 우마이야좌 혀 7- 549 압둘 말리크(우마이야조 칼리파) 泊 7- 288 압둘 무딸립 12'2 - 124 , 2Z3 압둘 무민 573 입둘 와합(와하비파의 창건자) 무함마드 븐압둘와합참조 압둘 하미드 ~l 압둘라 본 마이문 었6 , 378- 앉 D, 쏘 B 압둘라 븐 알—무타쯔 이븐 알무디쯔 참조
압바드 由 0 압바스 347 야꾸비 472 야꾸트 481 야꿉 알-만쑤르 573 야루브 52 야지드 븐 무아위야(우마이야조 칼리파) 2ID, 283- 었活 야콥, G. 131 야흐야 븐 야호야(베르베르인) 544-546 야흐야 븐 칼리드 362-363, 탔沿 오데나쑤스(우다이나) 79_80 와 븐 아따 315-316 왈리드 2 세 294 왈리드 븐 압드 알-말리크(우마이야조 칼리파) 29, 290 왈리드 븐 야지드 204 우마르 븐 아비 라비아(시인) 3.32 우마르 본 알-카땀(칼리파) 216, 幻 4, 268-'n 4 우마르 븐 알-파리드(시인) 443, 526- 었 우마르 븐 압드 알-아지즈(우마이야조 칼리파) 29'2- 294, 391 우마르 본 하프쑨 546-547 우마이야 븐 아비 알-쌀트(시인) 12.5 , Z25 우쓰만 븐 아판(칼리파) 'n4
우팅,줄리우스 46 웰스테드, J. R 44 유수프 븐 타쉬핀(알모라비드조) 562- 56.3, oil 유스티누스 69, 103 유스티니아누스 91, 102 이므루 알-까이스(시인) 00, 169-171 이브라힘 븐 아드함 326 이븐꾸즈만 閔 4 이븐 꾸타이바 8'2, 100, 13.5 - 136, 3ffi, 398, 469 이븐 누바타(설교가) 375 이본 두라이드 뽀 7, 46.5 이븐 뚜파일 486, 574, 576 이븐 라쉬끄 얏 7 이븐 루쉬드 486, 573, o/6 이븐 밧삼 500-561, 576 이본 사바 앉沿 이븐 시나〈아비센나) 486 이븐 알-무캇파아 468, 471 이븐 얄무타쯔(시인) .442 이븐 알-바이따르 576 이븐 알 - 아라비 533-539, 576, 무흐이 알-딘 븐 알-아라비 참조 이븐 알-아미드 '571 이븐 알-아씨르 479, 500 이본 알-카멉 578-579 이븐 알-파리드 593, 우마르 븐 알-파
리드참조 이븐 압드 랍비히 470, 559 이 븐 이스하끄 124, 218, 225, 233, 472 이븐 자이둔(시인) f:E1, 由 4- 또5 이븐 주바이르 576 이븐 칼둔 77, 322-323, 383-385, 579 웃沼 3 이븐 칼리칸 201, 593-5CJ 7 이븐 쿠르다드비 480 이 븐 타이 미 야 499, 610-611 이븐 투마르트 572 이븐 하니 5.57 이븐 하우깔 481 이븐 하즘 462, 566-由 7 이븐 히 샴 118, 219, 233, 472 이쓰따크리 481 그 자디마 알-아브라쉬 81-83 자르까 알-야마마 66- 衍 자리르(시인) 334-339, 341- 34 3 자마크샤리 3fJ7, 456 자미 32'2, 517 자밀 333-334 자발라 본 알-아이함(갓산 왕국) 101- l
자이드븐 아디 % 자코 487 자흐다르 본 두바이야 113 자히즈 低 B 잘랄 알-딘 루미(페르시아 시인) 4R 443, 525 잡바 8'2- 84, 제노비아 참조 찻사스 본 무라 lOO-110 제노비아 OO, 8'2 제첸, 울리히 야스퍼 44 존스, 윌리엄 lo! 주나이드(바그다드) 321, 3Z3, 호 4 주하이르 븐 아비 술마(시인) 185-1~ 지르야브(가수) 또 b -fEl 지야드 븐 아비히 었 D * 칭기즈 칸 閔 7+ 잤} = 카디자 끄 3, 幻 O , 234- 幻 5 카브 븐 주하이르(시인) 1~ 카사노바, P. 400 카에타니 왕자 23 카홀란 52-5 3 칸사〈여류 시인) 1'57 - 1~
칼라프 알-아흐마르 161, 2CJ 7, 4fi6 칼리드 븐 왈리드 266 칼릴 븐 아흐마드 132, 394, 465 코저가르텐 200 쿠싸이르 '2fJ7 쿨라이브 븐 라비아 41, 100-110 큐르턴 463 크레머, 알프레드 폰 51, 58'2 키사이(문법학자) 465 E 타압바따 샤란(시인) 1'57 , 140, 161 티브리지(주해자) 幻 2 끄 파띠마(예언자의 딸) 2ffi 파띠마(알-쿠르습의 딸) 149 파띠마(쿠싸이이의 어머니) 119 파라비(아부 나쓰르) 486 파라즈다끄(시인) 334-336, 3.39- 343 파르베즈(후르무즈의 아들) 98 파리듯딘 앗따르 318, 321, 517 푸카이하 lfx) 프라이타크 G. W. 76 프리도, W. F. 48 핀드 112
층 하룬 알-라쉬드(칼리파) 31, 364 하리리(마까마트의 저자) 447-456 하리쓰 븐 아므르(킨다 왕국) OO 하리쓰 본 자발라(갓산 왕국) 102 (절 름발이 알-하리쓰) 101 하리쓰 븐 힐리자〈시인) 181-182 하산(바스라 출신) 315, 318-320 하이 이 븐 야끄잔 574-575 하자르(아브라함의 부인) 117 하팀 따이 이 145-147 할레비, 죠셉 45 할리마(예언자의 유모) 2'21 -22 '2 할리마〈절름발이 알-하리쓰의 딸) 101 함다니(지리학자) 42, 49 함마드 알-라위 야 168, 204, 200, 466 함머, J. 폰 421 함자(이쓰파한 출신 역사가) 52 핫산 븐 싸비트(시인) 104 핫자즈 븐 유수프 塗 9- 았沿 홈멜, F. 3.5 후드(예언자) 36 후따이아(시인) 199 후사인 븐 만쑤르 알-할라즈 489, 52'2 , 5.33 후사인(알리 본 아비 딸립의 아들) 2.8'2- 285
후츠마, Th. 472 훌리구 588-591 하캄 1 세 545 하캄 2 세 5.57 -558
히샴 1 세(스페인 우마이야조) 54.5 히샴 븐 무함마드 알-칼비 拓-얽 히샴(우마이야조 칼리파) 294 힘야르 52-53
-1 가즈나 幻 2 갓산 79, 100 까히라(카이로) 300, 5 刃 까이라완 앉 B 굼단(성) OO 그라나다 합 7-579, 엿 4 L 나이사부르 꼬 3 나즈드 15, 173 나즈란 ffi--ffi 나흐라완(전투) 幻 7 C: 다라야 516 다르 알-름 Dar al-Rom( 콘스탄티노플) 懿 두 까르(전투) 1~ 디라이야 614 따바리스탄 473 따이프 幻 5 뚜르(전투) 幻 2
2 라이이 361 루브아 알-칼리(사막) 15 a 마다인 쌀리흐 짜 마다인(크테시폰) 72 마디나트 알-살람 3.'xi, 바그다드 참조 마리브(댐) 53- 었 마쉬하드 후사인 614, 카르발라 참조 마아라트 알-누만 427 마코라바 116, 메카 참조 마흐라 21 메디나 116, 234-236, 249-251, 253 메르프 351, 4ffi 메카 116, la> -12 1, 123, :rn-2 31, 234- 2 모술 '514 무캇땀 5'Z7 , 529 미쓰르M i합(구 카이로) 5'Z7 t::t 바그다드 3ffi-'3S7, 心 8- 心 9, ~- 또 n 바드르(전투) 254-2515 바스라 刃 3, 464
발크 없沿 보카라(또는 부카라) 291 밧까〈성) 幻 비스땀 52'2 人 사루즈 忠) 사마라 앉沿 사마르칸트 291, 初 2, EBl 세비야 534 세우타 542 소코트라(섬) 21 수스 田 2 수유뜨 an 쉬라즈 '571 쉬흐르 21 시칠리아 15, 584 싸나 45 싸파{비문) Z 씨핀(전투) 'l:16 。 아비시니아 41, Z31-232 아부씨르 444 아인 우바그(전투) lOO 아인 잘루트(전투) 또 D 아자르바이잔 %
아흐와츠 '516 , 402 안달루시아 549 안티오크 91 알라무트(성) 땄 B 알렙포 Z2, '514 -375 야마마(전투) Z3, 216 야쓰립 116, 메디나 참조 에뎃사 쏘 B 예멘 16 옥수스 :?A>, 463, 호 3 와시뜨 515 오만 40 우카즈(시장) 있 B 우흐드(전투) 2:i), :BJ 이쓰파한 71 , 자발 따리끄(지브롤터) 231 자울란(시리아 골란고원) 105 자파르(예멘의 도시) 44, 由, 62 잔지바르 476 잘라까(전투) 었었 주르잔 400 자바드(비문) 2 준데 샤푸르 心 3
E 타르서스 487 탑수스 왓 O 트란스옥사니아 30 티하마 39, 116 틸림산 5ffi = 카르발라 28'2, 284, 'ST, '2ifl, 340, 614 카바(신전) 117 카와르나끄(성) ITT-~ 카이바르(메디나 북부의 마을) 101 코르도바 542, fi떴_由 0 콘스탄티노플 31 쿠라산 348, 앉幻 쿠지스탄 '510 쿠파 25, 273, 4ffi 크테시폰 72, 이-%, 었 3, 마다인 참조
工 팔미라 79-OO 페즈 579 페트라 26, 40 파라브 心 5 궁 하드라마우트(지방) 35, 40 하란 2'2(바문), 312, 483 하마단(에크바타나) Wl, 446 헬레스폰트 31 히 라 8.5-안 , 21l 히라(산) 226 히자즈 116, 210 -21 1 히즈르 2'2(비문), 初(무덤) 힐라 , 59.3 힘쓰 417
거 가이바 g hay b a( 자취를 감춤) '2IJ7 가잘 Ghazal( 연애시) 332 가즈와 g hazwa( 약탈을 위한 전투) lOO 굴라트 Ghula t(과격 쉬아파) 汶 B 까씨다 q짝d a( 송시) 134-l'r/ 꾸라 q urra( 꾸란 독경사) 384 꾸란 Qur’an 16, 幻 6 • 끼야스 qiy as( 유추) 4('f1 L 나까이드 naq a' i d( 욕지거리 시) 었 5-336 나디르 nadhir(경고자) 242 나시브 na si b( 에로틱한 서두) 135, 心 3 나우루즈 Nawruz( 페르시아 축제) 348 나흐우 na}:i w( 문법) 었3 니스바 ni sba( 관계 형용사) 쏘 9 C 다르위쉬 darw1 sh(수도승) 400, 003 다이 沮‘ I( 선교사) 347, 'S18 다킬 dakhil 1£:B 따와프 taw 핵종교적 순행) 1&5 뺀 al 一ta때(운율의 한 종류) 13'2 , 138 두바이트 dnba yt(시의 한 종류) 였E
디 야 diy a( 위자료) lff i 디완 di wan{ 시집) l ffi-었 D, __ (우 마르의 회계장부) 'l:71 디흐깐 clihq an( 페르시아의 지주) 94-!E , 401 딘 din(종교) 258-::f fl, 앉沿 따르디야트 tardiyy at (사냥 노래) 404 E! 라마단 比 m 꼬迫 n( 금식월) 317, 또 E 라위 m 찌( 전송자) ID!-'2fJ1 라자즈 m i az( 운율) 131-1:£ 라즈아 raj 'a( 재림) 앉 B 라트 al-La t(여신) '2fJ1, 乃 2 라피다파 타-Rafi cla( 쉬아파의 분파) 37'2 리쌈 litham(얼굴 아랫부분을 가리는 덮 개) 였況 Cl 마가지 maghazI(약탈을 위한 전투) 1 따, 34.5 마까마 m직 a ma( 마까마트 m 직如효) 446, —449, 4바46 디-4아4 7 , 알알--자하만리 리알의- _함_다 니44의7 -449 마나트 al- Manat(여신) 었 R 幻 2
마디드 al_m펴 Id( 운율) 161 마디흐 m최 山(칭송) 136, 404 마뜰라아 ma tl a‘( 시 첫 행의 대구) 423 마라씨 m江 a thi(애가) 404 마리파 ma' rif a( 영지주의) 516 마물루크 mamlOk 첵 마쌀 ma thal(속담) 77 마쓰하프 m최 函(꾸란 경전) 404 마왈리 maw 曲(피보호민) 346, 호 5 마왈리야 ma waliyy a( 시의 일종) 었沿 마튼 ma1n( 주문) 218 마흐디 Mah di(메시아) '2iJl-앉 B 모스크 mas jid ( 이슬람 사원) 254 무나피꾼 rrrun 函qOn(위선자들) 251- 252 무라비뜬 al-M 따曲i mn 571 무루와 rnuruw 隣짜남성의 덕목) 128 , 141, 2:B, :R> 무르지 rrrurji'(무르지 파) 313-314 무리드 IID..II1 d( 수도사) 525 무브타디아 mub tadi‘(이단자) 4ff1 무슬림 Muslim __의 의미 :rn, 최초 의 _z9ZD 무알라까트 라 -Mu'all aq a t 165-191 무와히드 mu v.핵ibi d( 일신론자) 田 2 무왈라둔 muw 데 adon( 혼혈계 아랍인) ~544 무왓샤흐 mu washshal;t(시의 일종) 또 3
-554 무카드라문 mukhaoramun( 시인들의 한 부류) l!E 무타까리브 mu taqarib( 운율) 또 무타질라파 al-Mu'taz ila 314-317, 494 14% 무트아 mu t ‘a( 계약결혼) 沃 B 무하지룬 m 며탸irun(이주자들) 251 미라즈 mi넓j(예언자의 승천) 248 미쓰라아 mi$}강(시의 반구(半句)) 131 미흐나 떠虹펙종교재판소) 4% 미호르간 M 加꿍如(페르시아 축제) 348 민바르 minb ar( 설교단) 285 닌 바까 baq a( 신비주의 용어) 5Z2 바시뜨 ba sit(운율의 한 종류) 132 바얀 al-ba y an( 수사학) 왓 D 바이트 ba yt(시구) 131 바라니스 barani s( 금욕주의의 특징인 길 다란 외투) 었 B 人 사나드 sanad( 전거) 218 사딘 sadin(마기교도 고위 성칙자 칭호) 36'2
사마아 책 ma‘( 수피주의에서의 음악적 감 홍) 5'1:1 , ——(구전) 4(fl 사브이야 al-Sab' iyy a( 일곱 이맘파) 앉 B 사이흐 책'ih(은자) 88 사즈아 책i‘(각운 산문) 130 -13 1, 445 샤라프 s haraf(명 예) 128 샤리아 shana( 이슬람법) 52A 샤이르 s 넒‘ir(시인) 129-130, 幻 7 수라 sura( 꾸란의 장) 217 수피 $00 명칭의 유래 :ID-32 1 수피주의 SQ fiism 였 5, 3'l2-호 0, 低 8 순나 al-sunna( 무함마드의 관행) 218, 았 순니 파 Sun nis 200 쉬 아 s hi:- 'a( 분파) 304 쉬아파 30, 304-312 슈우비야파 3ffi-沼 7 시 야하 siya}Ja(은둔 생활) 5Zl 싸나위 thanawt(이신교도) 었 E 싸하바 휴넒뇨(예언자의 교우들) 323 。 아답 adab( 문학) 앉 D, 低 B 아뜰랄 a tl김(야영지) 394 아라비 a‘rabI( 베드윈) 았 B 아리프 ‘arif(영지주의자) 516 아미르 알-무미닌 amir al-rm'mi nln
(칼리파 칭호) 였땄 아싸비야 ~iyya ( 애족심) 583 아야트 ay at (꾸란 구절, 기적, 중거) 245, 2 아얀 싸비타 a'ya n thabita(관념) 民沿 아와일 awa' il(기원) 345 아울리야 aw liy a( 성인) gE 아잠 ‘Aj am( 비아랍인) 호 3 암살단파 Assasins m, 였 3 와씨 曲덕(집행자) 었 B 와이드 wa 'I d( 위협적인 옹보) 心 7 와즈드 w 적 d( 무아경) 517, 호 7 와지르 wajir( Vi zier:대신) 조 8 와피르 al- waffr(운율의 한 종류) 132 와흐다트 알-우주드 wabdat al 가 m i따 (일원론) $沿 울라마 'tn ama( 이슬람 법학자들) 쏘氏 493 웃짜 al-Um i(여신) 었 R 幻 2 이만 iman(신앙) 314 이맘 irnarn(종교사회의 지도자) :m, 숨 겨진 이맘 al-im am al-zr astar ':Jll- 었 忠, 무오류의 이맘 573, 일곱 이맘파 외 R 쉬아파 이맘 3)4-3 12 , 열두 이맘파었 B 이스나드 i snad( 일련의 중거) 21& 호 4 475 이슬람 Islam , __ 의 의미 저)
이즈마아 ij ma‘( 합의 ) ffJ7 이티하드 ittibad(인간과 신의 일치) 536 x: 자브르 j abr( 강요) 316, 一_(운명예정 설) 400, 자바리파 al-Ja bariyya 316 자잘 zaj al( 시의 일종) 조 3- ffi4 자홀 j ahl( 무지) 75 자히드 zahi d( 고행자) 3'2A 자힐리야 al- Jahiliyy a( 무지의 시대) 28, 75-76, 236 주흐디야트 zuhdiyy at (종교시) 心 4 주흐드 zuhd( 고행) 3'2A 지하드 jihad(성전) 5'11 진 jinn(마신) 129 진디끄 zind rq 4ffi-fffi 지즈야 jizy a( 인두세) '251 E 타끌리드 taqli d( 권위) 따 5 타나수크 tanasukh(윤회사상) 었 2 타비운 al-Tab i 'On( 계승자) 없 B, 印 7 타타와싸쿨우 프ta w taa$k8k.W• u Wl(I 신 표(에수게피 주의의지)함 )호 '3 4Z 7 타윌 ta'wtl(온유적 해석, 숨겨진 의미) 311 타지야 ta'ziy a( 수난극) 었 B
타한누쓰 tal:iann u th(종교적 금욕생활) 226 구 카르마쓰파 Qaramita '377, 379 카리 지 kharijI 았 8 카리지 파 293-30 .3 카람 karam( 관대함) 128 카므리야트 khamriyy a t(주시) 404 카밀 al- kamil(운율의 한 종류) 13'2 카비라 kab tra(대죄) 301 카스브 kasb( 획득) 앉 B 카팁 ka ti b( 서기) 358, 443 카피프 al- khafif(운율의 한 종류) 13'2 카힌 kahi n( 사제 또는 예언자) 130 칸와칸 造 nwakan( 시의 일종) 또 E 칼람 al-kal 하 n( 사변적 신학) 쏘 9 칼리파 khalifa 24, 정통 칼리파 al- Khulaf a al-Rash ido n 24, 29, 2fil--1'l78 쿠뜨바 khu t ba( 설교) 앉沿 쿤야 kuny a ( 존칭} 94, 179 프 파끄르 faqr( 청빈) 324 파끼르 faqir(수도승) 3'24, 611 파끼흐 faqih(신학자) 611
파나 f ara( 자아소멸) 328, 52'2 파나 와_바까 far a wa- baq a( 신비주의 적 결합) 52'2 파트라 fatra(무함마드가 계시를 받지 않 은 시기) 228 피끄흐 al- fiqh(이슬람 법학) 300, 400 (신학), fffl, 613( 신학) 푸훌 和 h 더(일급 시인) 212 페흘레비 PehlevI( 중세 페르시아어) 449, 468 페트와 fe twa ( 법적 견해) 493 궁 하끼까 }Jaqiqa( 실재) 52A 하끼까트 알_하까이끄 }Jaqiqa t al-
}JaQ a' iq(실재 중의 실재) 538 하니프 畑 m f(유일신론자) 2'2A- Z26, 4.l3 하디쓰 al- l)adith(예언자의 전승) 217- 220 하마사 }Jamasa(불요불굴의 정신) l'J' l, All 깊꿨 2( 시집), 442( 시집) , 444 하사브 }Jasab ( 명성) lff i 하킴 畑虹 m( 철학자) 518 할 悼 l( 상태 : 복수는 abwal) 324, 518, 5Z3 후르 HE( 요정) 246 훌 hul 비(신자성육) 었 D, 따 6 히다 柚 da’( 낙타 모는 사람의 노래) 131 히마끄 坤댜q(시의 일종) 앉石 히자 hij a'( 풍자시) 13) , 404 히즈라 hij ra( 성천) 刃, 幻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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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소개 니콜슨R. A. Ni ch olson •… • 지온이 영국의 동양학자이자 이슬람 신비주의 연구의 대가 런던 대학(19) 1) 및 케임브리지 대학 페르시아어 교수 (1002-1926) 케임브리지 대학 아랍어 교수 (1926-1 93.3) 역임 주요 저서 『 아랍 문학사 A litero ry Hi stor y cf the Arobs 』, 『 이슬람 신비주의 연구 St udi es in Isla mic M y st id 5 rnJJ, 『 성 인 회고록 Ta dhkirat al-Awli ya.,i 둥 사회만… ..• 옮 긴이 한국외국어대학교 아랍어과 졸업 동 대학교 통역대학원 아랍어-영어과 졸업(문학석사) 동 대학교에서 문학박사 취득 카이로 아메리칸 대학교 연구교수 현재 조선대학교 아랍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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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문학사 대우학술총서 • 번역 80 1 판 1 쇄 찍음 lro5 년 2 월 25 일 1 판 1 쇄 펴냄 1 年년 3 월 5 일 지은이 R. A. 니콜슨 옮긴이 사회만 펴낸이 *卜孟浩 펴낸곳 (주) 민음사 출판둥록 1991. 12. ~- 제 1 6- 400 호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또 B 강남출판문화센터 얽t 515-m J< 대표전화)/5 1 5-'2f/.Jl(팩스) 값 21, (XX)원 Printed in Sroul, Korea ®사회만 1 寒 문학 • 기타 제문학, 셈족 문학/KOC &D ISBN 89-'5/4- 4C B)--6 寧 ISBN 印꿉 74 선(XX)- 2 (세트)
13
대우학술총서(번역) 1 유목민족제국사 관텐 / 송기중 41 신화의 진실 휘브너 / 이규영 2 수학의 확실성 클라인 / 박세회 42 대폭발 실크/ 홍승수 3 중세철학사 와인버그 / 강영계 43 大同書 康有爲 / 이성애 4 日本語의 起源 밀러 /김 방한 44 표상 포더/이영옥정성호 5 古代漠語音韻學槪要 45 과정과 실재 화이트헤드/오영환 칼그렌/최영애 46 그리스 국가 에렌버그/김진경 6 말과 사물 푸코/이광래 47 거대한 변환 풀라니/박현수 7 수리철학과 과학철학 와일/김상문 48 법인류학 포스피실/이문옹 8 기후와 진화 피어슨/김준민 49 언어철학 올스튼/곽강제 9 이성진리·역사 파트남/ 김 효명 50 증세 이슬람 국가와 정부론 10 사회과학에서의 場理論 램론 / 김정위 레빈 / 박재호 51 전통 쉴즈 / 김병서·신현순 11 영국의 산업혁명 52 몽골문어문법 뽀뻬 / 유원수 딘 / 나경수이정우 53 중국신화전설 I 袁河 / 전인초검선자 12 현대과학철학논쟁 54 중국신화전설 I 〈 근간 〉 쿤 外/조승옥검동식 55 사회생물학 1 윌슨/이병훈·박시룡 13 있음에서 됨으로 프리고진/이철수 56 사회생물학 l 윌슨/이병훈·박시룡 14 바교종교학 바하/검종서 57 일반언어학의 제문제 1 15 동물행동학 하인드/장현갑 밴베니스트/황경자 16 현대우주론 시아마/양종만 58 일반언어학의 제문제 I 17 시베리아의 샤머니즘 밴베니스트 /황경자 디오세지·호팔 / 최길성 59 폭력과 성스러움 18 조형미술의 형식 지라르 / 김진식박무호 힐대브란트 / 조창섭 60 갑골학 a) 년 董作賓 / 이형구 19 힐버트 리드 / 이일해 61 현대수학의 여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