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약력 쥘르들뢰즈 (G ill esDeleuse) 는 1925 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소르본느대학에서 철학을전공한뒤,파리 8 대학에서 미셸 푸꼬의 뒤를 이어 교수생활을 하다가 1987 년 은퇴했 다 1969 년 현실참여적인 정신분석학자펠릭스가따리와의 만남과공동저술작업을통해 그의 철학은폭넓게 전개되어, 현대의 가장풍요롭고도특이한철학자의 한사람으로 자리잡았다. 두사람의 첫 공동저서인 이 『 앙띠 오이디푸스』는 그들의 글중가장널리 읽혀진 책이다 주요저서로는 『 니체와철학 』 , 『 칸트의 비판철학 』, 『 차연과 반복 』, 『 의미의 논리 』, 『 프란시스 베이컨 : 감각의 논리 』 , 『 굴곡,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 등이 있다 펠 릭 스 가따리 (Felix G atta ri) 는 정 신 분석 학자로서 라깡의 영향을받아새로운집단주관성 개념과 정치사회적 요소가도입된새로운체계의 수립울모색하고있다 주요저서로는 r 정신분석학과횡단성 』 , 『분자의 혁명 』 , 『 가계론적 무의식 』 등이 있다 들뢰즈 • 가따리의 공저로 r 소수집단의 문학을위하여 』 , 『 천의 고원 』 등이 있다 역자약력 최명관은서울대학교철학과와동 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앙띠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정신분열증
L' ANTI- (E D IPE
앙띠 오이디푸스
I 차례 I
제 1 장 욕망하는 기계들1 욕망하는 생산 15정신분열자의 산책-자연과 산업-과정-욕망하는 기계, 부분적 대상들과 흐름 : ······과 ······과-첫째 종합 : 연결적 종합 혹은생산의 생산-기관들 없는 신체의 생산2 기관들 없는 신체 25반생산-반발과 편집병기계-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어떻게 반생산이 생산력들을 차지하는가-차지함 혹은 끌어들임, 그리고 기적을 행하는 기계-둘째 종합 : 이접적 종합 혹은 등록의 생산- ······이건 ······이건-정신분열증의 계보3 주체와 향유 35독신기계-셋째 종합 : 연접적 종합 혹은 소비의 생산-그러니까그것은 ······이다-물질, 알 그리고 強度들 : 나는 느낀다-역사상의 이름들4 유물론적 정신의학 43무의식과 생산의 범주-극장인가 공장인가?-생산의 과정으로서의 과정-욕망을 결여로 보는 관념론의 욕망관(환상)-현실과욕망하는 생산 : 수동적 종합들-유일의 동일한 생산인 사회적 생산과 욕망하는 생산-집단환상의 실상-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생산 사이의 체제의 차이들-사회체와 기관들 없는 신체-자본 주의 그리고 극한(상반된 경향)으로서의 정신분열증-신경증, 정신병 그리고 망상
5 기계들 61욕망하는 기계들은 기계들이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절단의 첫째 양식 : 흐름과 채취-둘째 양식 : 연쇄 혹은 규준, 그리고 이탈- 셋째 양식 : 주체와 잔여물6 전체와 부분들 69다양성의 규정-부분적 대상들-오이디푸스 비판, 오이디푸스적 기만-어린이는 이미······-고아인 무의식-정신분석에서 잘 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제 2 장 정신분석과 가족주의 : 신성가족1 오이디푸스 제국주의 83그 양식들-정신분석에서의 오이디푸스적 전회점-욕망하는 생산과 표상-욕망하는 기계들의 포기2 프로이트의 세 텍스트 91오이디푸스화-법원장 슈레버의 망상의 분쇄-정신분석이 아직도 경건한 점-결여의 이데올로기 : 거세-모든 환상은 집단의 것이다-흐름으로서의 리비도-흐름의 반항3 생산의 연결적 종합 108그 두 가지 사용, 전체적이고 특수한 사용과 부분적이고 비특수적인 사용-가족과 부부, 부자관계와 결연 : 삼각형화-삼각형화의 원인-정신분석의 첫째 오류추리 : 외삽법-초월적 사용과 내재적 사용
4 등록의 이집적 종합 119그 두 가지 사용, 배타적이고 제한적인 사용과 포함적이고 무제한적인 사용-포함적인 이접들 : 계보-배타적 분화들과 미분화상태-정신분석의 둘째 오류추리 : 오이디푸스적 이중구속-오이디푸스는 언제나 승리한다-상징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사이에 경계선이 있는가?5 소비의 연접적 종합 133그 두 가지 사용, 분리적이고 일대일 대응의 일의적 사용과 遊牧的이고 다의적인 사용-기관들 없는 신체와 강도들-여행, 이행 : 나는 ······이 된다-모든 망상은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이다-인종들-신원확인이 의미하는 것-어떻게 정신분석은 사회-정치적 내용들을 말살하는가-완고한 가족주의-가족과 사회 터전-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의 공급-유년기부터-정신분석의 셋째 오류추리 : 일대일 대응의 〈일치〉로서의 오이디푸스-역사 속에서의 정신분석의 실점-욕망과 하부구조-차별과 유목생활6 세 종합의 요약 164오이디푸스의 笑話集-오이디푸스와 〈신앙〉-의미란 용법에 달려 있다-욕망하는 생산의 내재적 기준들-욕망은 법률, 결여 그리고 시니피앙을 모른다-〈그대는 햄릿으로 태어났는가······?7 억압과 억제 175법률-정신분석의 넷째 오류추리 : 억압된 것의 옮겨놓기, 혹은 왜곡-욕망은 혁명적이다-억압을 위임받은 사람-오이디푸스를 발명하는 것은 정신분석이 아니다8 신경증과 정신병 189
실상-전도된 이성-<결정할 수 없는 〉 오이디푸스 : 반향-현실적 因子가 의미하는 것-정신분석의 다섯째 오류추리 : 〈 나중에 〉-욕망하는 생산의 현실성9 과정 201출발-화가 터너-과정의 중단들 : 신경증, 정신병 그리고 도착-탈토지화의 운동과 토지들제 3 장 야생인, 야만인, 문명인1 登記를 행하는 사회체 213등록-어떤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보편적인가-사회기계-사회체의 문제, 흐름들의 규준화-교환하는 일이 아니라, 표시하고 표시되는 일이 근본적인 일이다-기관들의 공급과 탈공급-잔인성 :인간에게 기억을 하게 하는 일2 原始土地機械 222대지의 충만한 신체-부자관계와 결연 : 그 불가환원성-마을의 도착자들과 지연집단들-부자관계적 저장과 결연의 부채덩어리들-기능적 불균형 : 규준의 잉여가치-그것은 스스로를 뒤를리게 하면서만작동한다-선분기계-탈규준화한 흐름들에 대한 큰 두려움-안으로부터 나타나지만 밖으로부터 오는 죽음3 오이디푸스 문제 234 근친상간-대지의 충만한 신체에 대한 포함적 이접들-强度들로부터 외연에로:기호-어떤 의미에서 근친상간은 불가능한가-경계선-규준화의 조건들-표상의 심층 속의 요소들 : 억압된 표상표현, 억압하는 표상작용, 옮겨놓아진 표상 내용
4 정신분석과 인류학 253오이디푸스 문제의 계속-아프리카에서의 한 치료과정-오이디 푸스의 조건들과 식민지화-오이디푸스와 인종말살-오이디푸스화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억압은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가?-문화주의자들과 보편주의자들 : 그들의 공통되는 공준들-어떤 의미에서 오이디푸스는 아주 보편적인가 : 극한의 다섯 가지 의미, 그중의 하나는 오이디푸스의 그것이다-사용 혹은 인류학에서의 기능주의-욕망하는 가계들은 아무것도 의미하는 바가 없다-큰 덩어리를 이루는 것과 분자5 야만스런 전제군주기계 291전제군주의 충만한 신체-새로운 결연과 직접적인 부자관계-편집병자-아시아적 생산-벽돌-국가의 기만-전제군주의 탈토지화와 무한한 부채-흐름들의 초규준화6 야만스런 혹은 제국적인 표상 301그 요소들-근친상간과 초규준화-심층의 요소들과 오이디푸스의 이동 : 근친상간이 가능하게 된다-표층의 요소들, 음성-문자표기의 새로운 관계-천상의 초월적 대상-탈토지화한 기호로서의 시니피앙-전제군주적인 시니피앙 그리고 근친상간의 시니피에들-공포, 법률-무한한 부채의 형식 : 잠재, 복수 그리고 회한-이것은 아직 오이디푸스가 아니다7 原國家 326오직 하나의 국가?-법주로서의 국가-시작과 기원-국가의 진화 : 구처적으로 됨과 내재적으로 됨8 문명자본주의기계 334
돈-자본의 충만한 신체-탈규준화와 탈규준화한 호름들의 연결-냉소주의-부자의 자본과 결연에 의한 자본-규준의 잉여가치의 흐름의 잉여가치에로의 변용-돈의 두 가지 형태, 두 가지 등기-경향적 하락-자본주의와 탈토지화-인간의 잉여가치와 기계의 잉여가치-반생산-자본주의 내부의 갖가지 다른 양상-흐름들9 자본주의의 표상 357그 요소들-형상들인가 혹은 흐름들-분열들인가-흐름-분열의 두 가지 의미 :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규준과 공리계의 차이-자본주의 국가, 원국가와의 그 관계-계급-계급의 양극성-욕망과 이익-자본주의의 탈토지화와 재토지화 : 이것들의 관계, 그리고 경향적 하락의 법칙-공리계의 양극 : 전제군주 시니피앙과 정신분열층의 형상, 편집병과 정신분열증-세 가지 큰 사회기계(토지기계, 전제군주기계 및 자분주의기계)의 요약(규준화, 초규준화, 탈규준화)10 결국은 오이디푸스 389적용-사회의 재생산과 인간의 재생산-심상의 두 질서-오이디푸스와 경계선들-오이디푸스와 세 가지 상태의 요약-전제군주의 상징과 자본주의적 심상들-양심의 가책-애덤 스미스와 프로이트제 4 장 정신분열자-분석 서론1 사회 터전 405아버지와 아이-오이디푸스, 아버지의 한 관념-순화과정으로서의 무의식-사회적 공급의 우위 : 그 두 극, 편집병과 정신분열증-큰 덩어리를 이루는 것과 분자
2 분자적 무의식 418욕망과 기계-생기론과 기계론의 저 너머-기계의 두 상태-분자적 기능주의-종합들-리비도, 큰 전체들과 소-다양성들-욕망의 거인증과 왜소증-인간적인 것 아닌 성 :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n개의 성3 정신분석과 자본주의 436표상-표상과 생산-신화와 비극에 대항하여-신화와 비극에 대한 정신분석의 애매한 태도-어떤 의미에서 정신분석은 표상을 파괴하고, 또 그것을 회복하는가-자본주의의 요구들-신화적, 비극적, 정신분석적 표상-극장-주관적 표상과 구조적 표상-구조주의, 가족주의, 결여의 승배-정신분열자 분석의 파괴작업, 무의식의 청소 : 적의 있는 활동-탈토지화와 재토지화 : 이것들의 관계, 그리고 꿈-기계적 지표들-정치화 : 사회적 소외와 정신적 소외-인위적인 것과 과정, 낡은 대지들과 새로운 대지4 정신분열자-분석의 첫째 적극적 임무 473욕망하는 생산과 그 기계들-부분적 대상들의 규정-수동적 종합들-기관들 없는 신체의 규정-시니피앙의 연쇄와 규준들-기관들 없는 신체, 죽음과 욕망-죽음을 정신분열증화하다-정신분석에 있어서의 죽음의 기묘한 승배 : 擬似 본능-큰 덩어리를 이루는 것과 분자의 친화력의 문제-정신분열자 분석의 기계기술적 임무5 정신분열자-분석의 둘째 적극적 임무 499사회적 생산과 그 기계들-양극이론-첫째 명제 :모든 공급은 큰 덩어리를 이루며 사회적이다-군집, 군집의 선별과 형태-둘째 명제 : 사회적 공급들 속에서 계급 혹은 이해의 선의식적 공급과욕망 혹은 집단의 무의식적인 리비도의 공급을 구별한다-사회 터전의 이 리비도 공급의 본성-두 집단-성욕의 역할, 〈성의 혁명〉-셋째 명제 : 사회 터전의 리비도 공급은 가족적 공급에 앞선다-프로이트의 〈하녀〉 이론, 오이디푸스와 보편적 가족주의-정신분석의 貧困 : 4, 3, 2, I, 0-반정신의학도······-정신분열증환자는 무엇을 앓고 있는가?-넷째 명제 :사회적 리바도 공급의 양극-예술과 과학-혁명적 운동들에 대한 정신분열자 분석의 임무
부록욕망하는 기계들을 위한 프로그램의 총괄적 검토 559역자 후기 • 589찾아 보기(인명) • 595제 1 장 욕망하는 기계들
1 욕망하는 생산 〈 그것 〉®은 어디서나 작동하고 있다. 때로는 멈춤 없이, 때로는 중단되 면서 〈 그것 〉 은 숨쉬고, 〈 그것 〉 은 뜨거워지고, 〈그것〉은 먹는다. 〈그것〉 은 똥을 누고 성교를 한다. 그것이라고 불러버린 것은 얼마나 큰 잘못인 가. 어디서나 그것들은 기계들인데, 결코 은유적으로가 아니다: 연결되고 연접해 있는 기계들의 기계들이다. 한 器官機械는 한 源泉機械에 연결되 어 있다: 하나는 흐름을 내보내고, 다론 하나는 그 흐름을 끊는다 . 유방 은 젖을 생산하는 기계요, 입은 유방에 연결되어 있는 기계다. 식욕상실 자의 입은 먹는 기계, 항문기계, 말하는· 기계, 숨쉬는 기계(瑞息의 發作) 중 어느 것이 될 것인지 망설인다. 이렇듯 우리는 모두 이것저것 긁어모 아 잘 꾸려내는 자들 0 이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작은 기계들을 가지고 있다. 에너지-기계에 대해서 기관기계가 있는 것은 언제나 흐름들이 있 고 단절들이 있기 때문이다. 법원장 슈레버는 엉덩이 속에 태양광선을 지니고 있다. 太陽江門. 그것이 작동함을 확신하시오; 법원장 슈레버는 ®여기서 〈 그것 〉 이라 옮긴 말은 불어 원서에 렌로 되어 있다 . 영역에서는 정신분 석에서 말하는 i&료 해석되고 있고, 독일어역에서는 Es 라고 옮기고 있는데, 이것 역시 프로이트의 개념인 i여t 가리킨다. 저자들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기계로 보고 있는데 이 〈그것〉은 기계로 파악된 사물, 제도를 가리키는 말이라 대체로 해석될 수 있겠다 . 좁게 해석하여 〈기계로 생각된 인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 석하면 우선 이해하기 쉽겠다. Q)b ric o leurs. br i cole 려는 사람들. br i cole 판 부스러기 갇은 것을 합하여 작품 을만드는일
무엇인가를 느끼고, 무엇인가를 생산하고 그리고는 거기에 관한 이론을 만들 수 있다. 무엇인가가 생산된다: 그것은 기계가 만들어내는 결과들 이요,은유가아니다. 정신분열자의 산책 : 이것은 소파 위에 누운 신경증 환자보다 나은 모 델이다. 거기엔 약간의 外氣, 의부와의 관계가 있다. 뷔히너 Buchner 가 재구성한 렌츠 Lenz 의 산책이 그 한 예다 .1) 산책하고 있을 때의 렌츠는 그를 돌보는 목사 집에 되돌아왔을 때의 렌츠와는 다르다. 그 목사는 종 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에 관련하여, 아버지와 어머니에 관련하여, 그를 사 회적으로 자리잡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산책할 때 그는 다른 신들과 함께, 혹은 숫제 신 없이, 가족도 없이,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이, 자연과 더불어 눈에 파묻혀 산 속에 있다. 〈내 아버지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그는 니에게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나 좀 내버려두세요.〉 모든 것은 기계를 이루고 있다. 하늘의 기계들, 별들 혹은 무지개, 알프스 산맥이라고 하는 기계들, 이것들은 렌츠의 신체의 기계들과 연결되어 있다. 기계들이 내는 끊임없는 소리. 〈그는 온갖 형 태의 오묘한 생명과 접촉하는 것, 돌들, 금속들, 물 그리고 식물들과 사 귀는 마음을 갖는 것, 마치 꽃들이 달이 차고 이지러짐을 따라 대기를 빨아들이듯 꿈꾸돗 자연의 모든 것을 자기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무한한 지복의 감정일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의 엽록 소 기계, 혹은 광합성 기계라고 하는 것, 혹은 적어도 자기의 신체를 한 부품으로서 이러한 기계들 속에 빠져들어 가게 하는 일. 렌츠는 인간과 자연의 구별 이전에, 이 구별을 결정짓는 모든 좌표축 이전에 자리잡고 있다. 그는 자연을 자연으로서가 아니고, 생산의 과정으로서 살고 있다. 이제 거기엔 인간도 없고 자연도 없으며, 오로지 이것이 저것을 혹은 저 것이 이것을 생산하고 그리하여 기계들을 연결시키는 과정이 있을 뿐이 다. 도처에 생산하는 혹은 욕망하는 기계들, 정신분열증적 기계들, 죽 類 的 생명 전체가 있다: 나와 나 아닌 것, 의부와 내부는· 여기서 이제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다. 1) Cf. le te: r te de Buchner, Lenz, tr. fr. Ed. Fonta ine .
베케트 Becke tt의 직품에 나오는 인물들이 외출하기를 결심할 때, 정 신분열자의 산책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보도록 하자. 먼저 그들의 갖가지 행동을 그 자체 하나의 정교한 기계인 양 보아야 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자전거인데: 자전거-警笛기계는 어머니-항문기계와 어떤 관계가 있는 가? 〈자전거들과 경적들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얼마나 우리를 편안케 하는가. 불행히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아니고, 내 기억이 정확하다 면 그 엉덩이의 구멍에서 나를 낳아준 여성이다.〉 흔히 사람들은 오이디 푸스는 간단하고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이디푸스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엄청난 억압을 전제하고 있다 . 그런데 그것은 무슨 까닭의 억압이며,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가? 그 런 억압에 순응하는 것은 정말 필요하며 바람칙한가? 그리고 무엇을 가 지고 억압하는가? 오이디푸스 삼각형 속에는 무엇을 집어넣어야 하며, 무엇을 가지고 그것을 형성해야 히는-가? 자전거의 경적과 내 어머니의 엉덩이만 있으면 그만인가? 더 중요한 문제들이 있지는 않은지? 어떤 결 과가 생긴 경우, 어느 기계가 그 결과를 잘 생기게 할 수 있는가? 그리 고 어떤 기계가 있는 경우, 그것은 무엇에 쓰일 수 있는가? 가령, 식탁 용의 나이프 걸이의 정확한 설명서를 읽어보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 지 짐직해 보시오. 또 혹은 다음과 같은 완비된 기계를 생각해 보시오. 내 의두의 오른쪽 호주머니(돌을 공급하는 호주머니) 속의 여섯 개의 돌, 내 바지의 오른쪽 호주머니 속의 다섯 개의 돌, 내 바지의 왼쪽 호주머 니(돌이 통과하는 호주머니) 속의 다섯 개의 돌, 그리고 디른 · 돌들이 지 나감을 따라 이미 사용된 돌들을 받아들이는 의두의 나머지 호주머니로 형성되어 있는 기계를 말입니다. 이런 경우 입이 그 돌들을 빨아들이는 기계로 끼여들기도 하는 이러한 配給回路의 효과는 어떤 것인가? 이때 관능적 쾌락의 생산은 어느 것인가? 『말론느 죽다 Malone meu rt』의 마 지막 부분에 보면, 페달르 PedaLe 부인이 정신분열자들을 산책에 데리고 나가, 의자가 달린 마차에 태우기도 하고, 배에 태우기도 하고, 자연 속 에 피크닉을 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하나의 지옥의 기계가 준비되고 있다.
피부 밑의 신체는 하나의 과열된 공장이요, 밖에서는, 환자가 빛나고 있고, 그의 모든 털구멍은 터져, 그는 번쩍이고 있다 .2)
2) Aitau d , Van Gog h le suic i d e de la socie t e .
우리는 정신분열증의 자연주의적 極點을 고정시켜 보려 하지는 않는 다. 정신분열자의 독특하고 類的인 생활은 자연의 독특한 극점이 전혀 아니고, 생산의 과정으로서의 자연이다. 여기서 과정이란 무엇인가? 어떤 차원에서는 자연이 산업과 구별될 수 있음직하다: 어떤 점에서는 산업이 자연에 대립하고, 또 어떤 점에서는 산업이 자연으로부터 원료를 얻어내 고, 또 어떤 점에서는 산업이 그 폐기물을 자연에게 돌려주는 등등으로. 인간-자연, 산업-자연, 사회-자연이라고 하는 이 구별적 관계는 사회 안 에서 흔히 〈생산〉, 〈분배〉, 〈소비〉라고 불리는 비교적 자율적인 영역들 울 구별하는 조건이 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런 수준의 구별들은, 그 발전된 형식적 구조에서 볼 때,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자본과 분업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자본가란 으레 전체의 진행에 있어 자기와 그 전체의 요소들이 굳어져 고정되어 있다고 보는 그릇된 의식을 전제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실__망상 속에 것들어 있는 명백하고 어두 운 전실이 보여주는 바와 걷이__상대적으로 독립해 있는 영역이나 회 로는 없기 때문이다: 생산은 곧바로 소비요 등록이며, 등록과 소비는 생 산을 직접 결정짓지만, 그러나 바로 생산의 한가운데에서 결정짓는다. 그 러니 모두가 생산이다: 생산들의 생산들, 죽 능동들과 수동들의 생산; 등 록들의 생산들, 죽 분배들과 배치들의 생산들; 소비둘의 생산들, 죽 향락 들, 불안들 및 고통들의 생산들이다. 모든 것이 바로 생산이기 때문에 등 록들은 곧바로 소비되고, 이 소비둘은 직접 재생산된다 .3) 이와 같은 것
3) 조르쥬 바따유 George s Ba tai lle 는 자연의 에너지와 관련하여 사치스럽고 비
생산적인 지출 혹은 소비를 논하고 있는데, 거기서 문제되고 있는 것은 〈유용한 것〉에 의하여 결정되는 한에서의 인간적 생산으로부터 독립해 있다고 여겨지는 영역 속에는 登記되지 않는 지출이나 소비이다. 그러므로 거기서는 우리가 소비 의 생산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문제되고 있다 (c f. La noti on de depe ~ la Part maudit e, Ed. de Mi n u it).
이 과정의 첫째 의미이다. 죽, 등록과 소비를 생산 자체 속에 집어넣고, 동일한 진행 속의 생산들로 삼는 것. 둘째로, 그 과정 속에는 인간-자연의 구별이 없다: 생산 혹은 산업으 로서의 자연에서는, 인간의 類的 생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지연 의 인간적 본질과 인간의 자연적 본질이 일체가 되어 있다. 이때 산업은 더 이상 유용성이라고 하는 의면적 관계에서 파악되지 않고, 인간의 생 산 그리고 안간에 의한 생산으로서의 자연과 근본적으로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4) 인간은 만물의 왕이 아니고, 오히려 온갖 형태 혹은 온갖 종류의 깊은 생명과 접촉하고, 별들 및 심지어 동물들과 연결 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기관-기계를 에너지-기계에 연결시키되, 나무를 자기의 신체에, 젖을 입에, 태양을 엉덩이에 연결시킨다: 우주의 기계들 울 영원히 떠맡고 있다. 이것이 과정의 둘째 의미이다; 인간과 자연은 서로 마주 대하고 있는 두 개의 項, 심지어 因果, 理解 혹은 표현의 관계 (원인-결과, 주관-객관 등)에서 파악되는 두 개의 항이 아니고, 생산자와 피생산자가 본질적으로 하나를 이루고 있는 동일한 실재다. 과정으로서 의 생산은 모든 관념적 범주를 넘어서며 내재적 원리인 한에서의 욕망에 관계하는 하나의 순환체계 c y cle 를 형성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하 는 생산은 정신분열자를 자연인 Homo na t ura 으로 보고 취급하는 유물 론적 정신의학의 실효 있는 범주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조건이 있고, 이 조건은 과정의 셋째 의미를 이룬다. 죽, 과정은 목표나 목적으 로 여겨져서는 안 되며, 또 그것이 무한히 계속되는 것과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과정의 목적이나 그 무한한 계속은, 엄밀하게 말하면, 돌연히
4) 마르크스에 의하면, 生産- 自然과 類的생명은 하나인데, 여기 관해서는 Gerard Granel 의 주석 L'Onto l og ie marxis t e de 1844 et la qu esti on de la coup u re in l'Endurance de la pe nsee, Plan, 1968, pp. 301-3 1 여t 참조 할것.
너무 일찍 그 과정을 정지하는 것과 같은 것이요, 병원에서 보는 바와 갇은 인위적인 정신분열자, 죽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어전 자폐증 환자를 생기게 하는 것이다. 로렌스 Lawrence 는 사링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 하고 있다: 〈하나의 과정을 우리는 하나의 목표로 삼았다 ; 모든 과정의 목적은 그 무한한 계속이 아니라, 그 완성이다…… . 과정은 그 완성에로 향해야 하지, 마음과 몸이 끝내 파멸해 버리는 어떤 끔찍한 증대 혹은 어떤 끔찍한 끝장에로 향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 5) 이와 같은 사태는 정신분열증의 경우에도 사랑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정신분열중의 특성 이란 것도 없고 臨床實體란 것도 전혀 없다 . 정신분열증은 생산하고 재생 산하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우주요, 〈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현실 〉 로서의 근원적인 보편적 생산이다.
5) D. H. Lawrence, La Verge d'Aaron, tr. fr. Ga llim ard, p. 199.
욕망하는 기계들은 二項規則, 죽 결합체제 아래 있는 二項機械둘이다: 언제나 다론 기계와 짝을 이루고 있는 기계이다. 생산적 종합, 생산의 생 산은 〈……과 ……>,〈 그리고 또 ……과 〉 라고 하는 연결의 형태를 가 지고 있다. 이것은 언제나 흐름을 생산하는 기계와 이것에 연결되어 흐 름을 끊고 흐름을 채취하는 다른 기계(유방-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 고 전자는 그것대로 또한 그것이 끊고 채취하는 다른 기계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二項系 11] 은 모든 방향에서 직선을 이루고 있다. 욕망은 계속하 는 흐름과 본질적으로. 단편적이고 단편화된 부분적 대상들의 철단을 실 현하는 일을 그치지 않는다. 욕망은 흐르게 하고, 흐르고 그리고 끊는다. 밀러 M ill er 는 욕망을 노래하면서, 〈나는 흐르는 모든 것을, 심지어 수정 하지 않은 난자를 나르는 월경의 흐름마저 좋아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6) 卵胞와 賢臘의 結石; 머리털의 흐름, 침의 흐름, 정자와 똥과 오 중의 흐름. 이것들은 부분적 대상들에 의하여 생산되고, 끊임없이 다론 부분적 대상들에 의하여 절단되는데, 이 후자는 다른 흐름들을 생산하고, 이것들은 또다시 다른 부분적 대상들에 의하여 철단된다. 모든 〈대상〉
6) Henry Mi ller, '.lropiqu e de Cancer, ch. XIII(<… •••그 리고 내 내장은 정신 분열중의 거대한 흐름이 되어 퍼져나간다. 이것은 나를 絶對者에게 對面시켜 주 는排池이다……〉).
(혹은 사물)은 하나의 흐름의 연속을 전제하며, 모든 흐름은 대상의 단 편화를 전제하고 있다. 툴림없이 각 기관기계는 세계 전체를 자기 지신 의 흐름에 비추어, 죽 자기에게서 흘러나가는 에너지에 비추어 해석한 다: 눈은 모든 것__말하는 것, 듣는 것, 똥 누는 것, 성교하는 것 을 보는 일을 통하여 해석한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의 횡단선에 의하여 다른 기계와 연결되어 있다. 이 횡단선에 있어서 한 기계는 다른 기계의 흐름을 끊으며 혹은 자기의 흐름이 다른 기계에 의하여 절단됨을 〈본 다〉. 그러므로 흐름-부분적 대상의 연결적 종합의 철단은 또한 생산하고 생산되는 하나의 다론 형태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생산하는 것은 언제 나 생산되는 것에 접목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하는 생산은, 모든 기계가 기계의 기계인 것처럼, 생산의 생산이다. 표현이라고 하는 관념론 적 범주는 만족스러운 것이 못 된다. 정신분열자의 작품을 생산의 과정 에 결부시키지 않고서 기술할 수도 없고, 또 기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서도 안 된다. 『野生的 美術 노트 Cah i ers de l'ar t bru t』는 이러한 사실의 살아 있는 증거다. (또 정신분열증이란 것이 있음을 부인한다.) 다른 예 를 들면, 앙리 미쇼 Henr i M i chaux 는 욕망의 진행인 생산의 전행에 대 응하는 정신분열자의 책상을 기술하고 있다: 〈그것을 눈여겨본 후로, 그 것은 계속하여 정신을 사로잡아 왔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도 모르.는 그 자신의 일을 그 책상은 계속해 왔다……. 놀라운 일은, 그 책상이 단순 하지도 않으면서 또한 정말로 복잡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처음 부터 복잡하지도 않았고, 의도적으로 또 복잡한 계획 때문에 복잡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것에 손이 감에 따라 단순성을 잃었다……. 그것은 본 래, 마치 정신분열자가 그린 그림들이 온갖 모양을 잔뜩 그려넣은 것처 럼, 온갖 것을 붙인 책상이었다. 그것이 완성되면 거기에 아무것도 보텔 것이 없고, 무엇인가가 더욱더 쌓아울려져서, 더욱더 책상 아닌 것이 되 고 말았다. 그것은 아무 쓸모도 없게 되었고, 책상에 기대하는 것으로는 아무 쓸모도 없게 되었다……. 그것은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되어 운반하 기도 힘들게 되었다. 그것을 무엇으로 보아야 할지 어떻게 취급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책상의 쓸모 있는 부분인 윗면은 차 츰 좁아지고 사라 져서, 거추장스럽게 된 전체 구조와는 거의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 되 어, 그 전체를 더 이상 책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게 되고, 무엇에 쓸지 알 수 없는 특별한 가구, 미지의 도구로 여겨지게 되었다. 비인간화된 책 상; 그것은 전혀 편안하지도 않고, 부르주아의 것도 아니고, 소박하지도 않고, 시골티가 나지도 않고, 요리용도 작업용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무 쓸모도 없게 되었고, 서비스와 커뮤니케이션을 거부하였다. 그 책상에는 모골이 송연해지게 하고 아연실색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작동 을 멈춘 모터를 상상케 할 수 있었다. 〉 7) 정신분열자는 보편적 생산자다. 그에게 있어서는 생산하는 일과 생산된 것을 구별할 자리가 없다. 적어 도 생산된 것은 자기가 있는 자리를 새로운 생산에로 날라간다. 책상은 그 〈자신의 일〉을 계속한다. 책상의 윗면은 전체 구조에 먹히고 만다. 책상의 미완성은 생산의 지상명령이다. 레비-스 E- 쿠 !::..Lev i -S t rauss 는 브리콜라주 br i cola ge 를, 여러 가지 특성이 찰 결부되어 있는 하나의 전 체라고 정의한다. 죽 그것은 다양하고 모양이 기괴하지만 제한된 자재와 규준의 소유요; 단편들을 항상 새로운 단편화 속에 들어가게 하는 능력 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생산하는 작업과 생산되는 것, 도구 전체와 만 들어지는 것 전체가 구별할 수 없게 된다 .8) 브리콜라주를 하는 사람이 어떤 물건에 전류를 대거나 물줄기를 바꿀 때에 느끼는 만족은 〈 아빠_ 엄마〉 놀이나 금지된 일을 저지르는 쾌락으로써는 잘 설명되지 못할 것 이다. 항상 생산을 생산하고 생산하는 일을 생산되는 것에 접목시칸다고 하는 규칙이야말로 욕망하는 기계들, 죽 생산의 생산이라고 하는 근원적 생산의 특성이다. 리처드 린드너 Ri ch ard L i ndner 의 그림 〈 소년과 기계 Boy wit h Mach i ne 〉는 아주 크고 부어오론 소년이 자기의 작은 욕망하는 기계들을 기술적인 사회적 기계에 접속시켜 작동시키고 있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것은 그 아이가 이미 실제로 행하고 있 7) Henri Mi ch aux, Les Grandes epr e uues de l'espr it, Ga llim ard, 1966, pp. 156-157. 8) Claude Lev i-S tr a uss, La pe nsee sauvag e , Plon , 1962, pp. 26 sq.
는 일이다.) 생산히는 일, 생산되는 것, 생산하는 일-생산되는 것의 일치 •••••• 이 일치야말로 직선적 계열의 제 3 항을 이룬다: 그것은 분화되지 않은 거대 한 대상이댜 모든 것이 한 순간 멈추고, 모든 것이 엉킨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다시 시작해 나아간다.) 어떤 면에서는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 고 아무것도 기능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윤회의 수레바퀴 밖에 나가 젖을 빠는 입도 없고, 똥 누는 항문도 없었을 것이다. 기계들이 아주 뒤틀어지고, 그 부품들이 몽땅 떨어져 나가 아주 없어져 버리고 또 우리들마저 없어지게 될는지? 에너지의 흐름들은 아직도 너무나 찰 연결되어 있고, 부분적 대상들은 아직도 너무나 유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자유롭고 철단 없는 상태에 있는 하나의 순수한 流體가 하나의 충만한 신체 위를 미끄러져 가고 있는 중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우리를 하나의 유기체가 되게 한다; 그러나 이 생산의 한가운데서, 그 생산 자체 속에서, 신체는 그와 같이 조직되는 데에, 다른 조직을 가지지 않는 데에 고통을 느낀다. 숫제 조직됨이 없이 유기체가 되지 않았던 것이 차라리 나울 법도 하다. 진행의 한가운데에, 제 3 의 시점으로서의 〈불가해한 전적인 일시 정지〉: 〈입도 없다. 혀도 없다. 이도 없다. 목구멍도 없다. 식도도 없다. 위도 없다. 배도 없다. 항문도 없다.〉 자동기계들은 한 순간 정지하고 그것들이 분절 해 둔 비유기적인 덩어리를 출현시킨다. 기관들 없는 이 충만한 신체는 바생산적인 것, 불모의 것, 태어나지 않은 것, 소비할 수 없는 것이다. 앙토냉 아르도: An t on i n Ar t aud 는 그가 아무 형태도 없이 또 아무 모습 도 없이 있었던 때 이 신체를 발견하였다. 죽음의 본능, 이것이 그 이름 이요, 죽음에는 모델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욕망은 또한 죽음을` 욕망하 기 때문이다. 죽음의 충만한 신체는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욕망울 움직이는 것이니 말이다. 이것은 마치 생명의 기관들이 작동하고 있는 기 겨 I worki ng mac hi ne 이기 때문에 생명을 욕구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러 한 상반되는 경향이 어떻게 함께 어우러지는지는 묻지 않기로 한다: 이 물음 자체가 추상의 소산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끊임없이 뒤틀어지면
서, 뒤들리고서만 작동한다. 법원장 슈레버는 〈 오랫동안 위 없이, 장 없 이, 폐도 거의 없이, 식도는 찢겨, 방광도 없이, 늑골은 꺾인 채 살았다; 그는 가끔 자기 자신의 목구멍의 살을 일부 뜯어 먹었다. 만사가 이런 식이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비생산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생산하는 일 과 생산되는 것의 일치로서, 연결적 종합 속에서 그것이 있을 곳에 그리 고 그것이 있을 그 시간에 생산된다. (정신분열자의 책상은 하나의 기관 둘 없는 신체이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근원적인 無의 증인이 아니요, 상실된 전체의 남은 찌꺼기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어떤 것의 두 영이 아니다; 그 자신의 신체를 가지고서는, 혹은 신체의 심상i ma ge¾ 가지고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비생산적인 그것은 그것이 생산된 그 곳에, 직선적- 2 항계열의 제 3 의 시점에 존재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생 산 속에 재투입된다. 긴창병을 앓는 신체가 浴櫓의 물 속에 생산된다. 기 관들 없는 충만한 신체는 반생산적인 것이다: 그러나 생산을 반생산에, 죽 반생산의 영역에 결부시키는 것 역시 연결적 즉 생산적 종합의 한 성 격이다.
2 기관들 없는 신체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관들 없는 신체 사이에 분명한 충돌이 생긴다. 기계들의 연결마다, 기계의 생산마다, 기계가 내는 소리마다, 기관들 없 는 신체에게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기관둘 밀 에 역겨운 애벌레들과 구더기들 그리고 그것을 유기체가 되게 하면서 그 것을 잡치거나 압살하는 神의 작용을 느낀다. 〈 그 신체는 신체다/그것 은 홀로 있다/그리고 기관이 필요치 않다/그 신체는 절대로 유기체가 아니다/유기체들은 그 신체의 원수다. 〉 9) 그 살에 박히는 못은 그 수만 큼의 고문이다 . 기관-기계들에 대하여, 기관들 없는 신체는 미끄럽고 불 투명하고 팽팽한 그 표면을 대립시킨다 . 결부되고 연결되고 다시 철단된 흐름들에 대하여, 그것은 꼴을 이루지 않고 미분화된 그 流體롤 대립시 킨다. 제대로 발음된 낱말들에 대하여 그것은 발음이 분명치 않은 입김 들과 소리 지름들을 대립시킨다 . 이른바 근원적인 억제 ®는 바로 이런 것 과 다론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우리는 믿는다. 죽 그것은 하나의 〈逆供給〉 0 이 아니고, 바로 욕망하는 기계들에 대한 기관들 없는 신체의 9) Arta u d, in 84, n~ 5 -6, 1948. G) refo u lement. 〈幽 ,lj 〉라고 옮겼는데, 일본거 번역에서는 〈押壓〉이라 옮기고 있 다. 정신분석의 용어인데, 전문가들이 어떻게 옮기는지 모르는 가운데, 전후의 맥락에서 〈억제〉라고 옮기기로 한다. © contr e -in v esti ss ement. B 譯에서는 〈逆備給〉이라 옮기고 있다. inv esti r 는 〈投資한다〉라는 뜻도 있지만 〈마련한다〉는 뜻도 있다. 〈供給〉이란 말이 꼭 들어맞는 譯語는 아니지만, 〈備給〉이란 말이 우리에게는 낯설어 〈공급〉이라 옮 기기로하였다.
반발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편집병에 걸린 기계가 의미하는 것이다. 죽 그것은 욕망하는 기계들이 기관들 없는 신체에 침입하는 작용, 또 욕 망하는 기계들을 전체적으로 迫 害 의 장치로 느끼는 기관들 없는 신체의 반발의 작용을 의미한다. 따라서 타우스크 Tausk 가 편집병에 걸린 기계 를 〈 환자 자신 〉 의 그리고 생식기의 단순한 投射로 볼 때 우리는 그를 따를 수 없다 .10) 편집병에 걸린 기계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생산의 진행 과 기관들 없는 신체의 비생산적 정지가 대립할 때 당장 발생한다. 그 기계의 무명이라는 성격과 그 표면의 미분화가 그 증거다. 두사는 껑}적 으로만 개입한다• 즉, 역공급과 마찬가지로, 기관들 없는 신체가, 박해하 는 기관 혹은 박해하는 의부적 집행자의 형태로, 逆內部 혹은 逆外部를 공급함에 따라 疾}적으로만 개입한다. 그러나 편집병에 걸린 기계는 그 자체로는 욕망하는 기계들이 변신한 것이다: 그것은 기관들 없는 신체가 욕망하는 기계들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이 양자의 관계의 결과로 생긴다•
10) Vi ct o r Tausk. De la gen ese de l'ap pa reil a influe ncer au cours de la sch izo p h ren ie, 1919, tr. fr. in la Ps yc hanalys e , n °4.
그러나 만일 우리가 중단되지 않는 과정 속에서 기관들 없는 신체가 계속해서 힘을 발휘하는 데 대한 관념을 가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욕 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 사이의 평행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평행관계는 현상학적인 것일 따름이다; 그것은 그 두 가지 생산의 본성 과 관계에 관하여, 또 심지어 정말 두 가지 생산이 있는지 아는 문제에 관하여 아무것도 미리 알려주는 바 없다. 단순히 그것은 사회적 생산의 형태들, 역시 발생된 것이 아닌 비생산적 정지, 진행과 짝을 이룬 반생산 의 요소, 社會體 ®로 규정되는 충만한 신체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충만한 신체는 大地라고 하는 신체일 수도, 專制君主라고 하는 신체일 수도, 혹은 자본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는 이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 하고 있다: 그것은 노동의 산물이 아니고, 노동의 자연적 혹은 신적 전 제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사실 생산력들 자체에 스스로 대립하는 일로써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생산에 관여하여, 생산력들과 생산자들이
G) soc ius . 사회를 하나의 신체로 보고서 쓴 말인 듯하여 〈社會體〉라 옮김 .
배치되는 표면을 이룬다. 그리하여 그것은 잉여생산물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이제는 準原因인 그것으로부터 나온 듯싶은 생산의 진행의 전체 와 무분결을 마음대로 주무른다. 생산력들과 생산자들은 기적적인 형태 로 그 힘이 된다. 이 양자는 기적을 받은 것들처럼 보인다. 요컨대, 충만 한 신체인 사회체는 모든 생산이 등록되는 표면을 형성하고, 모든 생산 은 이 등록의 표면으로부터 생겨나오는 듯이 보인다. 사회는 생산의 과 정을 등록함으로써 그 자신의 망상을 만들어낸다 ; 그러나 이 망상은 의 식의 망상이 아니다. 도리어 이 잘못된 의식은 잘못된 운동의 참된 의식 이요, 의견상의 객관적 운동의 참된 지각이요, 등록의 표면에 생산되는 운동의 참된 지각이다. 자본은 그야말로 자본가의 혹은 차라리 자본가라 고 하는 존재의 기관들 없는 신체다. 그러나 이런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저 돈이 流動하며 굳어전 실체가 아니고, 돈의 불모성에다가 돈이 돈 을 낳는 형태를 주게 된다. 기관들 없는 신체가 그 자신을 재생산하는 것처럼, 지본은 잉여가치를 생산하고구 스스로 발아하여, 우주의 끝까지 뻗는다. 그것은, 고정된 자본으로서 기계 속에서 전적으로 스스로를 구체 화시키면서, 그 기계로 하여금 상대적인 잉여가치를 만들어내게 한다. 그 리고 기계들과 생산지들은 자본에 매달리어, 그것들의 작용 자체가 자본 에 의하여 기적을 이루는 데까지 이른다. 모든 것은 (객관적으로는) 준 원인으로서의 자본에 의하여 생산되는 듯이 보인다.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처음에는 자본가들이 으레 노동과 자본의 대립의식, 그 리고 초과노동을 수탈하는 수단으로서의 자본 서용의 의식을 가지고 있 다. 그러나 자본기 모든 생산을 지배하는 등록의 표면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마술에 걸린 뒤집힌 세계가 금방 출현한다. (잉여가치를 공급하 거나 혹은 실제로 생기게 하는 것이 등록의 권리다.) 〈상대적인 잉여가 치가 자본주의의 특유한 체계 속에서 발전하고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이 증대함에 따라, 노동의 생산력들과 사회적 연관들은 생산과정으로부터 분리되어 노동으로부터 자본에로 넘어가는 듯이 보인다. 그리하여 자본 은 아주 신비스러운 존재가 된다. 왜냐하면 모든 생산력은 자본의 품안 에서 생기고 또 자본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11) 그리고 여기
서 자본주의에 특유한 것은 돈의 역할과 등기 혹은 등록의 표면을 형성 하기 위한 충만한 신체로서의 자본의 사용이다. 그러나 충만한 신체는 도대체, 대지의 신체이거나 전제군주의 신체이거나, 등록의 표면, 의견상 의 객관적 운동, 마술에 걸려 뒤집힌 物神的 세계요, 사회적 생산의 常數 로서 모든 유형의 사회에 속한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욕망하는 생산에 포개어져서, 그것을 끌어당기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 기관기계들은 펜싱 선수의 조끼에 달린 리본처럼, 혹은 레슬러가 앞으로 돌진함에 따라 혼들거리는 그 운동복에 매달린 메달처럼, 기관들 없는 신체에 매달린다. 끌어들이는 기계가 반발 하는 기계의 뒤를 잇고, 또 뒤를 이을 수도 있다: 편집병에 걸린 기계 다음에 기적을 행하는 기계가 뒤를 잇는다. 그런데 여기서 〈다음에〉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두 기계는 공존한다. 그리고 서글픈 유머가 떠맡 는 일은 모순들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모순이 없는 듯이, 혹은 모순이 전혀 없었던 듯이 꾸미는 것이다. 비생산적인 것이요 소비될 수 없는 것 인 기관들 없는 신체는 욕망의 생산의 모든 진행을 등록하는 표면의 역 할을 말고 있어서, 욕망하는 기계들을 그것에 관계짓게 하는 의견상의 객관적 운동에 있어서는 이 기계들이 그것에서 생겨나오는 듯이 보인다. 기관들은 신의 광선들을 자기에게 끌어들이는 법원장 슈레버의 신체 위 에서 재생되고 기적을 받는다. 아마도 편집병에 걸린 낡은 기계는 조소 하는 소리의 형태로 존속하는데, 이 소리는 법원장의 기관들 특히 항문 이 받은 기적을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모든 생산력과 생 산의 기관들을 자기에게 귀속시키고 이것들에다가 의견상의 운동을 전달 함으로써 준원인으로서 작용하는 등기 혹은 등록의 마법의 표면 확립이 다. 정신분열자가 경제학을 알고 있고, 또 모든 성욕이 경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사실이다. 다만 생산은 스스로를 생산하는 것과 갈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등록하 11 ) Marx, Le Capi tal , Ill, 7, ch. 25( Pleia d e, II , p. 1435) . Cf. Alth usser, Lir e le Cap ital , les commenta ire s de Ba liba r, t. II, pp. 213. sq. , et de Macherey, t. I, pp. 201 sq .( Maspe r o, 1965).
지는 않는다• 혹은 차라리 생산은 생산을 이루는 진행 속에서 스스로를 생산했던 것과 갇은 방식으로 의견상의 객관적 운동 속에서 스스로를 재 생산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등록의 생산의 영역에 옮겨가는데, 이 등록의 생산의 법칙은 생산의 생산과는 같은 것이 아니 기 때문이다. 생산의 생산의 법칙은 연결적 종합 혹은 철단이었다. 그러 나 생산적 연결둘이 (노동에서 지본에로 옮아가는 것처럼 ) 기계들로부터 기관들 없는 신체로 옮아갈 때, 그것들은 〈자연적인 혹은 신적인 전제〉 (이것은 자본의 離接 ®들 이다)인 한에서의 비생산적인 요소와 관련하여 분 배를 표현히는 다른 하나의 법칙 아래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겠다. 기계 들은 그 수만큼의 이접점들로서 기관들 없는 신체에 달라붙는대, 이 점 둘 간에는 새로운 종합들의 그물 전체가 짜여지고 또 이 점들은 표면을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짓는다. 정신분열중적인 〈……이거나 ……이거나 soit …… so it……〉가 〈 그리고 다음에는 e t puit〉과 교대하여 들어선다: 어떤 두 기관을 보더라도, 그것들이 기관들 없는 신체에 달라붙는 방식 은 그 두 기관 시이의 모든 이접적 종합이 미끄러운 표면 위에서는 결국 같은 것이 되고 마는 그런 것이 아닐 수 없다. 〈혹은 ou b i en 〉이 맞바꿀 수 없는 항들 간의 결정적 선택을 나타내려 하는 것이라면, 〈아거나 so it冷 자리를 바꿈으로써, 미끄러지면서 항상 같은 것에로 되돌아가는 서로 다른 것들 사이의 가능한 교환의 체계를 가리킨다. 베케트에게 있 어서의 말하는 입과 걷는 발이 바로 이런 경우이다 : 〈그는 아무 말 없 이 멈추어서게 되곤 하였다. 결국에는 그가 아무 말도 할 것이 없었거나, 무엇인가 말할 것이 있었지만 말하기를 그만 포기했거나…… 다른 두드 러진 경우들이 머리에 떠오른다. 금방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말이 금방 계속된다. 조금 있다가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또 말이 계속된다 . 금방 다 시 걷기 시작하면서 조금 있다가 말이 계속된다. 조금 후에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갇은 일이 되풀이된다. 금방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금방 말 이 끊긴다. 금방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같은 일을 되풀이한다. 금방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한참 있다가도 말은 계속되지 않는다. 또 조금 있다가 @ disj o n cti on . 論理的으로는 還言이라 옮겨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 12) 이렇듯, 말론느의 소유 물들마냥 가장 보잘것없고 가장 애처로운 자본의 소유자인 정신분열자는 자기의 신체에다가 길게 늘어놓은 選言(離接)들을 적으며, 또 자랑거리 들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이 세계에서는 가장 사소한 置換도 새로운 상 황에 혹은 무례한 질문자에게 대응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등록 의 이집적 종합이 생산의 연결적 려종합들을 내포하게 된다. 생산의 과정 으로서의 과정이 등기의 절차로서의 절차에로 연장된다. 혹은 오히려, 만 일 욕망하는 생산의 연결적 〈 노동〉을 리비도 li b i do 라 부른디편, 이 에너 지의 한 부분이 선언적 등기의 에너지(누멘 Numen) 에로 변형된다고 말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에너지의 변형. 그러나 무의식의 문제로 생긴 모든 애매함은 겉으로 보기에만 종교적인데, 어째서 이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 를 神的이라 혹은 누멘이라 부르는가? 기관들 없는 신체는 신이 아니다. 오히려 아주 그 반대다. 그러나 기관들 없는 신체가 모든 생산을 끌어들 이고 그 모든 이집들 속에 그것들을 등기함으로써, 모든 생산에 대하여 기적을 행하는 마법의 표면으로서의 역할을 말을 때, 이 신체를 꿰뚫고 있는 에너지는 신적이다. 이런 데서 슈레버가 신과 맺은 이상한 관계들 이 생긴다. 〈당신은 신을 믿고 있소?〉라고 묻는 사람에게 우리는 엄밀하 게 칸트 식으로 혹은 슈레버 식으로 다음과 같이 대답해야 한다: 물론이 지요. 그러나 다만 선언적 삼단논법의 대가에 대해서처럼, 이 삼단논법의 아 프리오리한 원리에 대해서처럼 믿고 있습니다. (이 삼단논법에서는 神이 실재의 총체 Om nitud o rea lit as 라 정의되고 있으며, 파생된 실체 들은 모두 분할에 의하여 생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집의 에너지의 성격만이 신적이다. 슈레버에게 있어서 신 적인 것은 그가 자기자신 속에서 자기를 분할하는 이집들과 불가분의 관 계에 있다. 죽 초기의 제국들과 후기의 제국들의 이점, 상위의 신의 후기 의 제국들과 하위의 신의 후기 제국들의 이접과 분리될 수 없다. 프로이 트는 특히 슈레버의 망상에 있어서의, 그러나 또한 일반적으로 모든 망 싱에 있어서의 이 이집적 종합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분 12) Beckett , ABsez, in T€tes -mort es , Ed. de Mi nu it, 1967, pp. 40-41 ..
할은 편집병적 정신병들에 아주 특징적인 것이다. 히스데리는 응축시키 는 일을 하는데, 이에 반하여 이 병들은 분할하는 일을 한다. 좀더 정확 히 말한다면, 이 병들은 무의식적인 상상 속에서 실현된 응축들과 同化둘 울 그 요소들에로 다시 분해한다.〉 13) 그런데 왜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부언하는 것일까? 찰 생각해 보면, 히스데리적 신경증이 근본적이고 이 집들은 맨 처음에 응축된 것의 두사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라고. 아 마 이것은 망상의 神 속에 그리고 정신분열증-편집병적 등록 속에 오이 디푸스의 권리들을 보존하는 방식이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점에 관하여 가장 일반적인 물음을 제기해야 한다: 욕망의 등록은 오이디푸스 적인 항들을 통하여 행해지는가? 이접들은 욕망하는 系譜의 형태이다; 그런데 이 계보는 오이디푸스적인 것이며, 오이디푸스적인 삼각형화 속 에 등기되는 것인가? 혹은 오이디푸스는, 사회적 재생산이 도처에서 자 기의 손을 벗어나는 계보를 가진 자료와 형상을 길들이려 하는 한에서, 이 사회적 재생산의 하나의 요구 혹은 하나의 결과인가? 왜냐하면 정신 분열자가 심문을 받되 끊임없이 받는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연과의 그의 관계는 특정의 한 국이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현 행의 사회적 규준의 말로써 심문을 받는다: 네 이름은, 네 아버지는, 네 어머니는?이라고. 욕망하는 과정을 수행하는 중에, 몰로이 Mollo y는 경 찰관에게 다음과 같은 심문을 받는다: 〈당신의 이름은 몰로이이지요, 라 고 경찰서칭이 말한다. 예, 금방 생긱이 났습니다, 라고 내가 말한다. 당 신 어머니는?이라고 서장이 묻는다. 나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녀의 이름도 몰로이입니까?라고 서장이 묻는다. 예, 라고 내가 말한다. 그녀의 이름이 몰로이입니까?라고 내가 말한다. 예, 라고 서장이 말한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본다. 당신의 이름은 몰로이이지요, 라고 서장이 말 한다. 예, 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면 당신의 어머니의 이름도 몰로이이지 요?라고 서장이 말한다. 나는 또 생각에 빠진다•〉 정신분석이 이 점에서 아주 혁신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정신분석은 정신병이라고 하는 현상 둘이 얼마나 그 기준 이론의 테두리를 벗어나고 있는지 느끼면서도, 오 13 ) Freud , Cin q psych analys e s, tr. fr. P.U.F., p. 297.
이디푸스 삼각형의 기초 위에서 그 문제들을 제기하고는 그 해석들을 계 속해서 전개하고 있다. 정신분석가는 슈레버의 상위의’ 신 아래에는 아빠 룰 발견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하위의 신 아래에는 왜 형을 발견해야 하 지 않겠는가고 말한다. 정신분열자는 가끔 참을 수 없게 되어 자기를 좀 조용히 내버려 두어달라고 요구한다. 때로는 장난을 일삼기 시작하여, 엉 뚱한 소리를 보태기도 하며, 그에게 주어진 모델 속에 자기의 처지들을 스스럼없이 다시 끌어들이고 또 안으로부터 이 모델을 깨부수기도 한다. (예, 그분은 제 어머니예요, 그런데 제 어머니는 정말 동정녀 마리아예 요.) 우리는 법원장 슈레버가 프로이트에게 대답하는 것을 상상해 본다: 아니, 예, 예, 말하는 새들은 젊은 아가씨들이에요. 그리고 상위의 신은 아빠이고요, 하위의 신은 제 형이에요. 그러나 슬그머니, 그는 모든 말하 는 새들에게서 젊은 아가씨들을, 상위의 신에게서 그의 아버지를, 하위의 신에게서 그의 형을 다시 잉태시킨다. 이 모든 신적인 형태들은 오이디 푸스 삼각형의 항들과 기능들을 뚫고 지나옴을· 따라 복잡하게 된다. 혹 은 〈단순하지 않게 된다〉. 나는 아버지를 믿지 않는다 어머니도 난 엄마-아빠의 것이 아니다 욕망하는 생산은 직선적 1 방적 체계를 형성한다. 충만한 신체는 이 계열 속에 셋째 항으로 도입되지만, 그 〈계열의 2, 1, 2, 1·… .. 의 성격 울 파괴하지는 않는다. 이 계열은 오이디푸스의 형태와 같은 전형적으로 세 항으로 되어 있는 삼각형의 형태에 그것을 옮아가게 하고 이 형태에 뜯어맞추게 하는 轉 :C 에 대해서 전적으로 저항한다. 기관들 없는 충만한 신체는 反생산으로서 생산된다. 죽 부모에 의한 생산을 의미하는 삼각형 화의 모든 시도를 거부하기 위해서만 반생산으로서 개입한다. 그것은 자 기의 자동-생산, 자기 자신에 의한 자기의 발생을 보여주고 있는데, 어
떻게 그것이 부모에 의해서 생산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누멘이 분배 되고 이접들이 모든 두사와는 관계없이 확립되는 것은 그 신체 위에서 요, 바로 그 신체가 있는 곳에서이다. 그래, 나는 내 아버지였고 내 아들이 었다 〈나, 앙토냉 아르또, 나는 내 아들이요, 내 아버지요, 내 어머니요, 또 나다.〉 정신분열자는 자기자신의 여러 가지 처지의 양식을 자기 멋대 로 사용한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는 사회적 규준에는 맞지 않는 혹은 이 규준을 우스운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만 이 규준에 맞는 등록의 독특한 규준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망상을 일삼는 혹은 욕망하는 규준은 비상한 유동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정신분열자는 한 규준에서 디론 규준에로 옮아가고, 그에게 던져지는 질문들을 따라 재빨리 태도를 바꾸면서 모든 규준을 뒤섞는다. 오늘은 어제와는 다른 설 명을 하며, 갇은 계보를 내세우지도 않으며, 동일한 사건을 같은 방식으 로 등록하지도 않으며, 오이디푸스의 전부한 규준이 그에게 강요될 때 화가 나 있지 않으면 그 규준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심지어 이 규준이 배제하려 했던 모든 이집들을 이 규준에 다시 틀어넣기까지 한다. 아돌 프 뵐플리 Adolf Wo lfli의 데생 (그림 )들은 큰 시계들, 터빈들, 발전기들, 天空-機械들, 家屋-機械들 등을 등장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의 생산 은 연속되는 충들 혹은 구역들을 지나 가장자리로부터 한가운데로 가도 록 연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가하는, 또 그의 기 분을 따라 달라지는 〈설명들〉은 데생의 등록을 구성하는 계보상의 계열 들에 근거를 두고 있다. 더구나 등록은 데생 자체에 포개지는데, 이때 그 것은 〈破局〉 혹은 〈沒落〉의 선들의 형태를 취한다. 그리고 이 선들은 螺 쩌銅 ~l 둘러싸인 그 수만큼의 이집들이기도 하다 .14) 정신분열자는 항상 뒤뚱거리지만 금방 바로 선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죽 그에게 있어서는 모든 이집에 있어서 모든 측면이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것은 기관-기계들이 기관들 없는 신체에 매달려도 소용없다는 이야기이 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어디까지나 기관들이 없는 채 있으며 보통 의미 의 유기체로는 되지 않는다. 그것은 유동적이고 미끄러운 그 성격을 지 14) W. Morge n th a ler, Adolf W 血lfli, tr. fr. L'Ar t bru t, n°2.
킨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산의 동인들이 슈레버의 신체 위에 자리잡고, 이 신체에 매달린다. 그가 끌어당기는 그리고 수천의 작은 정자를 지니 고 있는 태양광선 같은 것들이 말이다. 광선들, 새들, 소리들, 신경들이 신 그리고 신의 분할된 형태들과 복잡한 계보의 교환 가능한 관계들을 맺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생기고 등록되는 것은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 서이다. 동인들의 교집들, 신의 분할들, 바둑판 모양의 계보들과 이것들 의 치환들도 이 신체 위에서 생긴다. 사자의 갈기 속에 있는 이〔風〕들처 럼 모든 것은 창조되지 않은 이 신체 위에 있다.
3 주체와 향유 〈 과정 〉 이란 말의 뜻을 그대로 따르면, 등록은 생산에 포개진다. 그러 나 등록의 생산 자체는 생산의 생산에 의하여 생산된다. 이와 마찬가지 로 소바는 등록의 뒤를 잇는데, 소비의 생산은 등록의 생산에 의하여 그 리고 이 생산 속에서 생산된다• 그래서 등기의 표면에 주체의 질서에 속 하는 어떤 것이 나타난다 . 그것은 고정된 신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기묘 한 주체이다. 그것은 기관들 없는 신체 위를 헤매며, 욕망하는 기계들 곁 에 늘 있으며, 생산된 것에서 그것이 취하는 부분에 의하여 규정되며, 어 디서나 생성이나 변신에서 프리미엄을 따며, 그가 소비하는 상태들로부 터 탄생하며 또 어느 상태에서나 다시 탄생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 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 것이다……. 〉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고통을 겪는 것도 자기를 향유하는 것이다. 아마 모든 욕망하는 생산은 이미 그 대로 소비요 소모이다. 따라서 〈향락〉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주체에 대 해서는 아직 그렇지 않다. 주체는 등록의 표면의 이접들을 가로질러서만 분할된 각 구역의 나머지 부분들 속에 나타난다. 법원장 슈레버는 언제 나 이 점에 대해서 가장 생생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우주에는 향유의 일정한 율이 있기 때문에, 신은 슈레버가 여자로 변신하는 대신에 슈레 버에게서 향락을 얻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향락 중 법원장이 체험 하는 것은 그가 겪는 고통에 대한 보수 혹은 그가 여자로 되는 것에 대 한 프리미엄으로서의 나머지 한 부분만이다. 〈이 향락을 신에게 바치는 것은 내 의무이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관능적 쾌락이 조금 니에게
굴러 떨어진다면, 여러 해 전부터 내 운명이었던 지나친 고통과 궁핍에 대한 약간의 보상으로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나는 느낀다.〉 생산의 에너지로서의 리비도의 한 부분이 등록의 에너지(누멘)에로 변모 된 것과 마찬가지로, 후자의 한 부분은 소비의 에너지 (볼룹타스 Volup - t as) 에로 변모한다. 무의식의 셋째 종합, 죽 〈그러므로 이것은 ……이 다〉의 연접적 종합 혹은 소비의 생산에 활력을 주는 것은 이 나머지 에 너지 o] 다. 우리는 어떻게 이 종합이 형성되는지 혹은 어떻게 주체가 생겨나는지 고찰하여야 한다. 우리논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관들 없는 신체의 대립에 서 출발하였다. 이 양자간의 반발, 근원적인 억제의 편집병적 기계 속에 나타났던 바와 같은 반발은 기적을 일으키는 기계 속에서는 하나의 끌어 당김에로 바뀌었다. 그러나 끌어당김과 반발 사이에는 대립이 존속한다. 효력 있는 화해는 〈억제된 것의 되돌아음〉으로써 작동하는 새로운 기계 의 수준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듯싶다. 그런 화해가 실제로 있다 혹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주 많다. 전동의 편집병적 기계 들의 뛰어난 디자이너였던 로베르 지이 Rober t G i e 에 관하여, 더 이상 정 확한 것을 찾아볼 수 없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지고 있다: 〈그를 괴 롭힌 이 전류들로부터 해방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결국 강력하게 그 것들 편을 들어, 그것들의 전적인 승리, 그것들의 전적인 凱旋의 모습으 로 그것들을 그리는 대 열중했던 것 같다.〉 15) 프로이트는 좀더 정확하게 슈레버의 병의 韓機 죽 슈레버가 자기가 여자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연=생산의 일치(새로운 인간성의 생산)에 그롤 인도하는 自動-治惡의 과정에 들어갈 때의 그 병의 전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슈레버는 자기가 실제로 치유되고 그의 모든 능력을 되찾은 순간, 사실상 여자의 몸짓과 장치 속에 꼼짝 못하게 갇혀 있게 된다: 〈나는 가끔 상반신은 나체로, 여자처럼 리본들, 가짜 목걸이 등을 걸치고 거울 앞이나 딴 곳에 서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내가 혼자 있을 때에만 일어나는 일이다 …….> 이 기계를 가리키기 위하여 〈독신기계〉란 이름을 빌리기로 하자. 15 ) L' Ar t bru t, n3, p. 63.
이 기계는 편집병에 걸린 기계와 기적을 행하는 기계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요,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관들 없는 신체 간의 새로운 결합을 형성 궁阿 새로운 인간 혹은 영광스러운 유기체를 탄생시킨다. 주체가 욕망하 는 기계들 곁에 여분으로서 생산된다고, 혹은 주체는 이 제幸] 기계 및 이 기계가 이루는 잉여분의 화해와 하나가 된다고 말하는 것도 결국 위 에 말한 것과 같은 소리이다: 이것은 〈그러니까 이것은 그것이었다〉고 하는 놀러운 형태를 가진 소비의 연접적 종합이다. 미셸 까루쥬 Mi ch el Carrou g es 는 그가 문학에서 발견한 몇 개의 이상 야릇한 기계들을 〈독신 기계들〉이란 이름 아래 분리하였다. 그가 내놓는 예들은 아주 다양하여, 얼핏 보면 하나의 동일한 범주 속에 들어갈 수 없어 보인다: 뒤샹 Ducham p의 『벌거벗은 新婦』, 카프카 Ka fk a 의 『流刑 地』의 기계, 레이몽 루셀 Ray m ond Roussel 의 기계들, 쟈리 J arr y의 『超 男性』의 기계들, 에드거 포 Edg a r Poe 의 몇몇 기계, 빌리에 V illi ers 의 『 미래의 이브』 등 .16) 여기서 문제되는 예마다 중요성은 다르지만 그것들 을 한 묶음으로 볼 수 있게 하는 특칭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독신기 계는 그 體刑둘, 그 망령들, 그 낡은 법률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낡은 편 집병적 기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 자체는 편집병적 기 계가 아니다. 그 톱니바퀴 장치들, 견인차, 끌들, 바늘들, 자석들, 광선들 이 서로 다르다. 독신기계는 체형들에 있어서 혹은 그것이 주는 죽음에 있어서까지 뭔가 새로운 것, 태양의 힘 같은 것을 드러낸다. 둘째로, 이 변모는 그 기계가 자기 속에 간칙하고 있는 등기로 말미암아 기적을 행 하는 성격으로써는 설명될 수 없다. 그 기계는 가장 높은 등기들(미래의 이브 속에 에디슨 Ed i son 이 행한 등록들을 참조할 것 )을 효괴적으로. 간직 하고 있기는 해도 말이다. 거기에는 이 새로운 기계의 현실적 소비, 죽 自己色情 혹은 자동장치적이라 할 수 있는 쾌락이 있다. 이 쾌락에서는 새로운 結緣의 혼례가 맺어져, 마치 기계의 색정이 다른 힘들을· 무한정 하게 풀어놓은 듯 새로운 탄생, 눈부신 황흘감이 생긴다. 문제는 이렇게 된다: 독신기계는 무엇을 생산하며, 그것을 통해서 생 16) Mi ch el Carroug es , Les Machin e s celib a t ai r e s, Arcones, 1954.
산되는 것은 무엇인가? 강도 있는 量 들의 생산이라고 하는 것이 그 답이 될 듯싶다. 정신분열자에게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한 상태 의 강도 있는 양들의 경험이 있다- 죽 최고도로 체험되는 독신의 비 참함과 영굉이 있다. 그것은 마치 삶과 죽음 사이에 매달린 아우성, 강렬 한 옮겨감의 감정, 그들의 모양도 모습도 빼앗겨 없어졌다고 믿어지는 순수한 강도의 상태들과 같다. 사람들은 가끔 여러 가지 환상과 망상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환각의 所與(나는 본다, 나는 돋는다)와 망상 의 소여(나는 ……라고 생각한다)는 좀더 깊은 데 있는 나는 느낀 E 頃- 전 제한다. 이 느낌은 환각들에다가 그것들의 대상을, 그리고 생각의 망싱에 다가는 그 내용을 주는 것이다. 〈 나는 내가 여자가 된다고 느낀다 〉 , 〈 내 가 신이 된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 등은 망상도, 아니고 환각도 아니다 . 다만 환각을 투사하거나 망상을 내면화하게 되는 것이다 . 맨 처음에 강 도들, 생성들, 옮아감들만을 체험하는, 참으로 일차적인 情動에 비하면 망상과 환각은 疾}적인 것들이다 .17 ) 이 순수한 강도들은 어디로부터 오 는가? 그것들은 그것들에 앞서는 두 개의 힘, 죽 반발과 끌어당김의 힘, 그리고 이 두 힘의 대립에서 생긴다. 이 강도들은 그것들 자체가 서로 대립하여 하나의 중립상태 둘레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그것들은 기관들 없는 충만한 신체를 나타내는 강도 =O 의 상태를 기점으로 하여 모두 플러스의 값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 들은 그것들의 복잡한 관계를 따라 또 그것들의 원인이 되는 끌어당김과 반발의 비율에 따라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혹은 높아진다. 요컨대, 끌어당 기는 힘과 반발의 힘의 대립은 모두 풀러스인 강도 있는 영역들의 열린 계열을 생기게 한다 . 이 영역들은 결코 한 체계의 최종적 균형 상태를 나티내지는 않고, 한 주체가 지나가는 무수한 準安定的 정지상태를 나타 낸다 . 칸트의 이론에 의하면 강도 있는 양들은 빈자리가 없는 물질을 서 로 다른 여러 정도로 채우고 있다. 이 이론은 정신분열의 기질을 깊이 17) 비옹 W. R. B i on 은 이 냐三 느낀다의 중요성을 맨 처음에 주장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다만 幻想의 질서 속에 登記하고 있을 따름이요, 사실상 나 는 생각한다의 감정적 대웅물로 보고 있다 . Cf . Elements of Ps yc ho-analys is , Hein e ma nn, 1963, pp. 94 sq.
파악하고 있다. 법원장 슈레버의 교설에 의하면, 끌어당김과 반발은 서로 다론 여러 정도로 기관들 없는 신체를 채우는 강렬한 신경상태들을 산출 한다. 주체인 슈레버는 이 상태들을 거쳐감으로써 여자로 되고, 또 永遠 回歸의 円環을 따라 여러 가지 다른 것이 되기도 한다. 법원장의 벌거벗 은 상반신 위에 있는 젖가슴둘은 망상적인 것도 아니요 환상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무엇보다도, 그의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 있는 강도의 한 지대, 강도의 한 구역을 보여준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한 개의 알이 다: 그 알에는 軸線들과 역선들, 緯度들, 經度들, 測地綠들이 건너지르고 있다. 또 생성들과 移行들, 거기서 발전하는 것의 향방들을 나타내는 句 配線들이 건너지르고 있다. 여기에는 表象的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살아 있고 체험된다: 젖가슴들이 체험하는 情動은 젖가슴들을 닮고 있지 않으며, 젖가슴들을 표상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마치 알 속의 한 예정된 지대가 거기에 들어설 기관을 닮고 있지 않은 것과 갇다. 거 기에는 강도의 지대들, 잠재적인 힘들, 역선들, 그리고 구배선들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정신분열자가 물질에 가장 가까이, 물질의 강렬하고 살아 있는 중십에 가장 가까이 있게 되는 비통하고 너무나 감동적인 경험 : 〈이 정동은 정신이 그것을 찾는 특정한 지점 바깥에 있다……. 이 정동 은 정신에다가 물질의 뒤집히는 소리를 둘려주며, 魂 전체가 거기로 홀 러 그 白熱하는 불 속에 들어간다.〉 18)
18) Arta u d, Le Pese-nerf s, Ga llim ard, (Eu ures comp le te s , I, p. 112.
정신분열자를 현실에서 분리되고 생명에서 단절된 자폐증의 무기력한 인간으로 그려보는 일은 어떻게 가능하였던가? 더 나쁜 일인데 : 어떻게 정신의학은 그를 정말 이런 무기력한 인간으로 보고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기관들 없는 신체의 상태에 환원시킬 수 있었는가? 그는 정신이 물 질과 접촉하는 견딜 수 없는 점에 자리잡고 물질의 강도 하나하나를 살 아나가고 물질을 소비하지 않았던가? 이 물음을 다음과 같은 겉으로는 아주 다른 하나의 다론 물음과 관련시켜야 하지 않을까? 죽, 어떻게 정 신분석은 이번에는 신경중 환자를 아빠-엄마만을 영원히 소비하고 다른 것은 일체 소비하지 않는 불쌍한 피조물로 보려 하는가? 어떻게 〈이것
은 그것이었다! 〉 , 〈 그러므로 이것은 나다! 〉 의 연접적 종합을, 〈 그러므로 이것은 내 아버지요, 이것은 내 어머니이다…… 〉 라고 하는 오이디푸스의 영원하고 서글폰 발견에 환원시킬 수 있었는가. 우리는 아직 이 물음들 에 답할 수 없다. 다만 순수한 강도들의 소비는 어느 점에서 가족의 모 습들과는 상관이 없으며, 〈 그러므로 이것은 ……이다 〉 의 연접적 조직은 오이디푸스의 조직과는 얼마나 상관이 없는가를 볼 뿐이다. 이 생명의 운동 전체를 어떻게 요약하랴? 첫번째 길(짤막한 길)은 다음과 같다: 기관들 없는 신체 위의 이점점들은 욕망하는 기계들 둘레에 收敏하는 원 들을 형성한다; 이렇게 되면 기계 곁에 잔여물로서, 죽 기계에 부속한 혹은 인접해 있는 부폼-으로서 생산된 주체가 그 원의 모든 상태를 통과 하며 한 원에서 다론 원에로 넘어간다. 주체는 중심에 있지 않다. 기계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주체는 가장자리에 있으며, 고정된 자기동일성을 가지지 못하며, 항상 중심에서 벗어나 있으며, 자기가 지나가는 상태들에 의하여 끌어내어진다. 그리하여 그 원들은 베케트의 『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서 묘사된 고리들과 갇다. 그것들은 〈 왈츠를 추듯 때로는 급작스럽 게 그리고 짤막하게 또 때로는 완만하게 포물선을 그린다 〉 . 이 고리들은 머피 Murph y , 왓트 Watt , 메르시에 Mercie r 등을 그 상태로서 가지고 있지만, 가족은 거기에 아무런 관련도 없다. 좀더 복잡한 다른· 길이 있지 만, 결국 이것도 앞의 것과 갇다: 편집병에 걸린 기계와 기적을 행하는 기계를 가로질러, 기관들 없는 신체에 대한 반발과 끌어당김의 比例둘이 독신기계 속에 따녁객터 시작하는 일련의 상태들을 산출한다; 그리고 주체가 그 계열의 상태마다 태어나고, 한 순간 그것을 결정하는 다음 상 태로부터 항상 다시 태어나서, 그를 태어나게 하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이 모든 상태를 소비한다. (이 상태를 살아가는 주체에 비하면 생활되는 상태가근원적이다.) 이것은 클로소스키 Klossowsk i가 그의 니체 社釋에서 훌륭하게 보여 준 것이다: 그는 가장 高速한 사상과 가장 예리한 지각을 구성하는 실질 적 정동으로서 기분 S ti mmun g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19) 〈원심력들은 영 19) Pier re K.los sowski , Ni etz s che et le cercle u i c i e 따, Mercure de France, 1969.
원히 중심으로부터 도망가는 게 아니고, 중심으로부터 다시 도망가기 위 하여 다시금 중심에 접근한다: 이렇게 격렬하게 전동하기 때문에 그것들 은 개인이 자기 자신의 중십만을 찾고 그 자신이 부분을 이루고 있는 원 울 보지 못하는 한 그 개인을 곤두박질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 전동들이 그를 곤두박질하게 하는 것은 그 전동 하나하나가, 발견할 수 없는 중심 의 관점에서 보면, 그가 다른 개인이라고는 믿지 않는 어떤 다른 개인에 게 대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동일성이란 본질적으로 우연한 것이요, 이 개인 혹은 저 개인의 우연성이 그들을 모두 필연적인 것이 되게 하려면 일련의 개인들이 각 개인에 의하여 편력되지 않으면 안 된다• 〉 끌어당기는 힘과 반발하는 힘, 비약적 발전과 쇠퇴의 힘은 기 관들 없는 신체의 성격을 이루고 있는 강도=()ol]서 출발하는 일련의 강 도 있는 상태들을 산출한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그저 강도의 부재를 명시하기 위해서만도 거기에 하나의 새로운 合流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문헌학 교수인 니체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죽 갑자기 이성을 잃고 여러 이상한 인물들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니체의 자아란 없다; 일련의 상태둘을 통과하는, 그리고 이 상태들에다가 역사상의 이름들을 그대로 붙이는 니체의 주체가 있을 따름이다: 역사상의 모든 이름들, 그것이 나 다. 주체는 자아가 그 중심을 버리고 떠난 원의 원주 위에 펼쳐진다• 그 중심에는 욕망의 기계, 영원한 회기의 독신기계가 있다. 이 기계의 잔여 물인 주체, 죽 니체의 주체는 그 기계가 돌게 하는 모든 것, 독자가 니 체의 작품의 단편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든 것으로부터 행복감 이 넘치는 보상(볼룹터스)을 끌어낸다: 〈니체는 이제부터 한 체계의 실 현이 아니라, 한 계획의 실시를 추구한다고 생각한다……. 이 실시는 니 체의 言說들의 찌꺼기들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것들은 이를테면 그의 어릿광대 같은 짓의 레퍼토리가 된다.〉 자기를 역사상의 인물들과 동일 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의 이름들을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 있 는 강도의 여러 지대로 본다; 그리고 그때마다 주체는 〈이것은 나다, 그 러므로 이것은 나다!〉라고 의친다. 지금까지 정신분열자만큼 역사를 이 용하고 또 그가 역사를 이용한 방식대로 이용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
는 단숨에 세계사를 소비한다. 우리는 정신분열자를 자연인으로 규정하는 데서 출발했는데, 이제는 최종적으로 그를 역사인 Homo his t o r ia 으로 규 정해야 되겠다. 전자로부터 후자에로의 길은 횔덜린 Holder li n 으로부터 니체에 이르는 길인데, 여기서는 걸음이 빨라진다. 〈니체에게 있어서는 행복감이 횔멀린의 명상적 소의감만큼 오래 가지 못한다……. 니체에게 허락된 세계관은 (흰덜린의 경우처럼 ) 약 4 {JI,빈에 걸쳐 제법 한결같이 계속되는 풍경들과 정물들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사건을 희상하여 그것을 익살스럽게 흉내내는 짓거리이다: 단 한 사람의 배우가 한나절에 그것을 몸짓으로 흉내낸다-왜냐하면 단 하루 안에 모든 것이 말해지고는 다시 사라지기 때문이다-그 하루는 12 월 31 일 부터 2 월 6 일까지 지속되어야만 했기는 해도 말이다-여기서 하루라 하는 것은 보통 달력을 초월해 있다.〉
4 유물론적 정신의학 정신의학자 클레랑보 Clerambaul t의 유명한 주장은 충분한 근거가 있 어 보인다. 그 주장은 다음과 같다: 전체적이고 체계적인 성격을 지닌 망상은 세분되고 국부적인 자동적 현상들에 비하면 疾}적이다. 사실, 망 상은 욕망하는 기계들의 생산 진행을 모아들이는 등록의 성격을 띠고 있 다; 그리고 편집병과 심지어는 정신분열증의 편집병적 형태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이 그 고유한 종합들과 감정들을 가지고 있기는 하 지만, 그것은 자율적 영역을 구성하지는 못하며, 욕망하는 기계들의 작동 과 고장들에 비하면 疾回이다. 하지만 클레랑보는 그저 반복음, 무성음 의 유성화, 돌발음, 무의미음이라고 하는 어간형성 모음이 없는 음성현상 둘을 가리키는 데에 〈(정신적) 自動症〉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는 이 런 현상들에서 감염 혹은 중독의 기계적 결과를 보았다. 그래서 그는 망 상의 상당한 부분을 자동중의 결과라 설명하였다; 다론 부분, 죽 〈개인 적〉 부분에 관해서는 그것이 반응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고 〈성격〉에 관 계가 있는 것이라 설명하였다. 이 성격은 자동증에 앞서 여러 가지로 나 타날 수 있다 . (가령, 편집병적 성격 .)20) 이리하여 끌레랑보는 자동중에 서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신경학적 메커니즘만을 보았을 뿐, 욕망하 는 기계들을 작동시키는 경제적 생산의 진행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생 활 경력에 대해서는 타고난 혹은 후천적인 성격을 끌어댐으로써 만족하 였다. 클레랑보는 마르크스가 다음과 같이 말한 의미에서 정신의학의 포 20) G. de Clerambault, CEuure psych i atriqu e, P.U.F ..
이어바흐 Feuerbach 이다: 〈 포이어바흐가 유물론·자인 한, 역사는 그에게 서 만나지지 않으며, 그가 역사를 고찰하는 한, 그는 유물론자가 아니 다.〉 참으로 유물론적인 정신의학은, 이와는 반대로, 다음과 같은 이중의 작업으로써 정의된다: 메커니즘 속에 욕망을 도입하는 것, 욕망 속에 생 산을도입하는것. 가짜 유물론과 여러 전형적 형태의 관념론 사이에는 깊은 차이가 없 다 . 정신분열증 이론의 특칭이 되는 것은 그 三位一體의 定式을 구성하는 다음의 세 가지 개념이다: 觀念解離(크레펠린 Kraep e li n) , 자폐증(불로일 러 Bleuler), 時-空 혹은 世界內 存在(빈스방거 Bi ns wang e r). 첫쨋것은 설 명적 개념인바 정신분열증에 특유한 장애나 근본적인 矢損울 지적하려는 것이다. 둘쨋것은 이해를 도우려는 개념으로서 정신분열증 결과의 특수 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망상 자체 혹은 절단은 〈 현실로부터의 이탈이요 내적 생활의 상대적 혹은 절대적 우위를 수반하고 있다 〉 . 셋쨋것은 표현 적 개념인바, 망상하는 인간을 그의 특유한 세계에서 발견 혹은 재발견 한다. 이 세 개념은 〈신체의 心象〉을 매개로 하여 정신분열증의 문제를 자아에 관련시키는 것을 공통점으로 가지고 있다. (신체의 심상은 정신 의 마지막 化身인바, 이것은 유심론과 실증주의가 다 같이 요구하고 있 는 것이다.) 하지만 자아는 아빠-엄마와 마찬가지로 정신분열자가 믿지 않게 된 지 오래된 것이다. 그는 그 너머에, 혹은 그 뒤에, 혹은 그 아래 에, 혹은 이 밖의 딴 곳에 있지만, 이 문제들 속에는 있지 않다. 그리고 그가 있는 곳에는 몇 가지 문제, 극복할 수 없는 괴로움들-, 견딜 수 없 는 가난함들이 있다. 그러나 왜 그가 떠나온 곳에 다시 그를 데려가려 하는가, 왜 이제는 그의 것이 아닌 이 문제들 속에 그를 다시 던져넣으 려 하는가, 왜 그의 전실에 대하여 관념적으로 한 번 경의를 표하고는 충분히 경의를 표했다고 믿고서 그 전실을 우롱하려 하는가? 혹 어떤 이 는 다음과 갇이 말할지 모른다. 정신분열자는 이제 더 이상 〈나〉라고 하 는 말을 할 수 없다, 그에게 이 말을 할 수 있는 신성한 능력을 회복시 켜 주어야 한다고빼 여기에 대해서 정신분열지는 다음과 걷이 한 마디로 대꾸한다: 또 나를 잡치는구먼. 〈나는 더 이상 나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
다. 절대로 그 말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건 너무나 바보 같은 짓이야. 내가 그 말을 알아들을 때마다 나는 그 말 대신에 삼인칭을 쓸 것이다. 내가 거기 대해서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것이 저들을 즐겁게 해주면 말 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니러·고 다시 말한다 해도 이것 역시 아무것도 바꾸어놓지 않는다. 이만큼 그는 이 문 제들 밖에 있다. 이만큼 그 너머에 있다. 프로이트도 나라고 하는 이 좁 은 관점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로 하여금 이 관점에서 떠나지 못하게 한 것은 자아에 대한 그의 삼위일체적 정식-오이디푸스의 정식, 신경증의 정식 : 죽, 아빠-엄마-나의 정식이다. 프로이트는 자폐증이라고 하는 곤 란한 개념을 재발견하고 이것을 그의 권위로 보증하고는 정신분열증에 적용했는데, 여기로 그를 인도한 것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정신분석 적 제국주의가 아니었는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조금도 숨길 것이 없 는 일이거니와 결국 프로이트는 정신분열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오이디푸스화에 대한 그들의 저항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오히려 그들을 짐승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는 말하기를, 그들은 낱말 둘을 사물들이라고 생각하며, 무감동이고, 자기도취하고 있으며, 현실로 부터 단절되어 있으며, 轉移시킬 수 없으며, 철학자들을 닮고 있다고 한 댜 그들이 철학자들을 닮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유사성이다〉. 충동들과 그 徵候들의 관계, 상칭과 상칭되는 것의 관계를 정신분석이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은 가끔 문제되어 왔다. 그것은 인과관계인가, 혹 은 이해의 관계인가, 혹은 표현의 관계인가? 이 문제는 너무 이론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가 오이디푸스 속에 놓이게 되자마 자, 오이디푸스를 따라 헤아려지자마자, 계략에 말려들어, 생산이라고 하 는 유일의 전정한 관계는 배제되고 말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의 위대한 발견은 욕망하는 생산, 무의식의 생산들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오이디푸 스와 더불어, 이 발견은 하나의 새로운 관념론에 의하여 금방 가리위전 다: 工場으로서의 무의식이 옛날의 劇場으로 대체되고; 무의식의 생산 단위들 대신에 표상이 들어서고; 생산적 무의식의 자리에는 이제는 자기 룰 표현하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무의식(신화, 비극, 꿈……)이 들어
섰다• 정신분열중의 문제가 자아에 귀착시켜질 때마다, 정신분열지에게 속한 다고 상상되는 본질이나 특수성을 〈 맛볼 〉 수 있게 될 따름이다. 사랑과 연민으로서이건, 혹은 형오감 때문에 그것을 내뱉기 위해서이건 말이다. 정신분열자는 때로는 흩어진 자아로, 때로는 절단된 자아로, 때로는 가장 그럴싸한 소리인데, 존재하기를 그쳐본 적이 없고 독특한 모습으로 자기 의 세계에 존재해 온 자아로 여겨졌다. 이 마지막 경우는 빈틈없는 정신 의학자, 포괄적인 이해력을 가진 뛰어난 관찰자, 요컨대 현상학자에 의하 여 재발견된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마르크스의 경고를 상기해 보자: 밀의 맛에서 누가 그것을 재배했는지롤 알아맞힐 수 없고, 생산된 것에 서 생산의 체제와 관계들을 알아맞힐 수 없다. 생산물을 원인, 이해 혹은 표현이라고 하는 관념적 형식들에 관계짓고, 그것이 의존하는 현실적 생산의 진행에 관계짓지 않을수록, 그만큼 그것은 독특한 것, 말할 수 없이 독특 한 것으로 보인다. 〈정신과 신체가 마침내 멸망하는 무서운 極地 〉 (자폐 중)를 불러내려고 과정을 멈추게 하거나, 과정을 하나의 목표로 삼거나, 혹은 空虛 속에서 과정을 空轉시키거나 하면 할수록 정신분열자는 그만 큼 특수한 개인으로. 보인다. 크레펠린의 저 유명한 마지막 상태…… 이 와 반대로 생산의 실질적 과정을 설정하자마자 생산물의 특수성은 사라 지고, 동시에 또 하나의 〈完成〉의 가능성이 나타난다. 정신분열증은 자 폐증에 갇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인물로서의 정신분열자의 감정이기 전 에, 욕망과 욕망하는 기계들의 생산의 과정이다. 왜 사람들은 과정을 인 정하는 데서 감정을 인정하는 데로 옮아가는가? 이 문제는 지금도 여전 히 중요한 문제이다. 다른 점둘에 대해서도 그러했지만 야스퍼스 Jas pe r s 는 이 점에 대해서 가장 귀중한 지적들을 해주었다. 이것은 그의 〈관념 론〉이 유달리 틀에 박히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과정의 개념을 인격의 반응이나 발전의 개념들에 대립시키면서 이 과정을 단절, 침입으 로 생각한다. 그는 이 과정이 자아와의 虛構的 관계와는 상관없는 것으 로 보고, 이 관계를 자연 속에 있는 〈다이몬〉과의 관계로써 대체한다. 다만 그에게 결여되어 있던 것은 과정을 경제적 • 물질적 현실로, 자연=
산업, 자연=역사의 등식을 가전 생산의 과정으로 보는 것만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욕망의 논리가 처음부터 그 대상을 놓치고 있다: 여기 서 처음이란 생산과 획득 중 하나롤 우리로 하여금 선택게 하는 풀라돈 의 구분이다. 우리가 욕망을 획득 쪽에 두자마자, 우리는 욕망에 대하여 하나의 관념론적(변증법적 ·허무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 생각 은 욕망을 무엇보다도 결여, 대상의 결여, 현실적 대상의 결여로 규정한 다. 다른 쪽, 〈생산〉 쪽이 무시되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욕망의 이 론에서 비판적 변혁을 일으킨 것 역시 칸트이다. 그는 욕망을 〈그 표상 들을 통하여 이 표상들의 대상들의 현실성을 생기게 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이 정의를 명백하게 하기 위하여 칸트가 미신적 신앙 들, 환각들과 환상들을 援用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현실적 대상 이 인과관계와 의부의 메커니즘들에 의해서만 산출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앎은, 욕망이 그 대상을 낳는 내적인 힘을 가 지고 있다고, 우리가 믿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 내적인 힘이 비현실 적, 환각적 혹은 환상적 형태를 취해도 말이다. 또 이 앎은 이 인과관계 를 욕망 자체 속에서 표상하는 것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21) 그러므로 욕 망에 의하여 생산되는 한에서 대상의 實在는 心理的 實在이다. 그렇다면 칸트의 비판적 변혁은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달라지게 하지 않는다고 말 할 수 있다: 생산성을 이렇게 보는 것은 욕망을 결여로 보는 고전적인 생각을 다시 문제삼지 않고, 다만 이 생각에 의지하고 이것을 깊이 파고 드는 것으로 만족한다. 사실 욕망이 현실적 대상의 결여라면, 욕망의 현 실성 자체는 환상적 대상을 생산하는 〈결여의 본질〉 속에 있다. 이렇게 되면 욕망은 생산으로서 파악되고는 있지만, 환상의 생산으로서 파악되 고 있으며, 정신분석에 의하여 완전히 설명된 것이 된다. 해석의 가장 낮 은 수준에서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죽, 욕망이 결여하고 있는 현실적 대상은 의부의 지연적 혹은 사회적 생산에 관계하는 것인 데, 욕망은 내적으로 상상적인 것울 생산하고 이것이 현실의 대역을 하 게 된다. 이런 일은 마치 〈현실적 대상마다 그 배후에 夢想된 대상〉이 21 ) Kant, Criti qu e du jug e m ent, Intr o ducti on , § 3.
있고, 혹은 현실적 생산들 배후에 정신적 생산이 있는 것과 같다. 물론 이렇게해서 정신분석이 대상의 정신분석의 가장 보잘것없는 형태(국수 봉지, 자동차 혹은 〈이런 저런 것〉의 정신분석)에 있어서 기발한 가정 용 구들과 市場들의 연구에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환상기 이제는 더 이상 하나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욕망을 연출하는 특수한 기계로 아주 넓게 해석될 때에도 이 기계는 극장의 기계일 따름 이요, 그것이 분리하는 것의 보충물을 존속하게 한다: 이 보충물은 욕구· beso i n 이다. 이것은 상대적이고 그 자신의 고유한 대싱에 의하여 결정되 는 결여로 정의된다. 한편 욕망은 환상을 생산하고 대상에서 이탈함으로 써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욕망은 결여를 쌓아울려 이 것을 절대적인 것이 되게 한다. 죽, 〈존재의 치유할 수 없는 부족〉, 〈생 명이라 할 수 있는 존재의 결여〉가 되게 한다. 이런 까닭에 욕망을 욕구 들에 의하여 떠받쳐지는 것으로 제시하는 일이 생긴다. 욕망의 생산성은 욕구들 그리고 대상들을 이 욕구들이 결여하는 관계를 바탕으로 해서 계 속 생기는 것으로- 된다. (이것이 떠받침의 이론이다.) 요컨대, 욕망하는 생산을 환상의 생산에 환원하면, 관념론의 원리에서 모든 歸結울 끌어내 는 것으로 만족하고 만다. 이 원리는 욕망을 결여라 정의하고, 생산, 〈産 業的〉 생산이라 정의하지 않는다. 클레망 로세 Clement Rosse t는 이것 울 다음과 갈이 잘 말하고 있다: 욕망의 대상을 규정하기 위하여 욕망이 결여하고 있는 결여를 강조할 때마다, 〈세계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따라 어떤 세계인지 알 수 없으나 어떻든 또 하나의 세계와 더불어 이중의 세 계가 된다: 대상이 욕망에게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세계는 모든 대상 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적어도 한 대상은 결여되고 있는데, 그것은 욕 망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세계가 결여하고 있는) 욕망의 열쇠를 간직 하고 있는 어떤 딴 곳이 있다〉 .22) 욕밍이 생산한다고 하면, 그것은 현실적인 것을 생산한다. 욕망은 현실 에서만 그리고 현실을 가지고서만 생산한다. 욕망은 부분적 대상들, 흐름 들과 신체들을 움직이게 하고 생산의 단위들로서 작동하는 受動的 綜合들 22) Clement Rosset, Log iqu e du pire, P.U.F., 1 970, p. 37.
의 전체이다. 현실적인 것은 욕망에서 생긴다. 그것은 무의식의 자동적 생산인 욕망의 수동적 종합들의 결과이다. 욕망은 아무것도 결여하고 있 지 않다. 그것은 그 대상을 결여하고 있지 않다. 욕망에 결여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주체이다. 혹은 욕망은 고정된 주체를 결여하고 있다; 고정 된 주체는 억압을 통해서만 있다. 욕망과 그 대상은 일체를 이루는데, 그 것은 기계의 기계인 한에서의 기계이다. 욕망은 기계요, 욕망의 대상 역 시 연결된 기계이다 . 따라서 생산물은 생산하는 활동에서 떼내어지고, 생 산하는 활동에서 생산물로 옮아가는 도중에 어떤 것이 이탈하는데, 이것 이 遊牧하며 방랑하는 주체에다가 잔여물을 준다. 욕망의 객관적 존재는 그 자체 존재하는 현실적인 것이다 .23) 심리적 현실이라 부를 수 있는 특 수한 형태의 현실존재는 없다.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갇이 결여 는 없다. 다만 〈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對象存在 〉 로서의 情念이 있을 뿐이 다. 욕망이 욕구들에 의하여 떠받쳐지는 것이 아니고, 이와 반대로, 욕구 둘이 욕망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욕구들은 욕망이 생산하는 현실적인 것 속에 있는 逆生産物둘이다• 결여는 욕망의 逆結果요,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적인 것 속에 寄托되고규 整理되고, 空胞化되어 있다. 욕망은 언제나 대상의 현실존재의 조건들에 가까이 있다. 그것은 이 조건들과 하나가 되며 이것들을 따르며, 이것들이 사라지면 덩달아 사라지고, 이것들이 옮 겨가면 걷이 옮겨간다. 그래서 그것은 아주 쉽사리 죽음의 욕망이 된다. 한편 욕구는 이 조건들의 수동적 종합을 잃음으로써 욕망을 잃은 주체가 욕망에서 멀어져 가는 정도를 측정하는 척도이다. 공허한 것의 추구로서 의 욕구는 다음과 갇은 의미 이의의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수 동적 종합들이 머물러 있는 곳에 이것들을 찾아가, 이것들을 붙잡고, 이 23) 라깡 Lacan 의 훌륭한 욕망 이론은 우리에게는 두 개의 極울 가지고 있는 것으 로 보인다: 하나는 욕망하는 기계로서의 〈작은 대상 -a 〉에 관련된 것인바, 이 극은 욕망을, 욕구의 관념 및 환상의 관념을 넘어, 현실적 생산에 의하여 정의한 다; 다른 하나는 시니피앙으로서의 〈위대한 他者〉에 관련된 것인바, 결여의 어 떤 관념을 다시 끌어들인다. 〈 욕망의 實在〉에 관한 르끌래르 Lecl ai re 의 논문 (in Se 따 aL it e 加 ma i ne, Aubie r , lWO) 에서 이 두 극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것 울잘볼수있다.
것들에 기생하는 것.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우리논 풀이 아니다, 우리가 葉綠素 綜合둘을 잃은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우리 는 어떻든 먹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욕망은 바로 결여에 대한 이 비열한 공포가 된다. 그러나 바로 이 말, 죽 먹어야 한다는 말을 입 밖 에 내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재산을 잃은 사람둘이 아니다. 이와 반 대로, 이들은 자기들이 풀 가끼이에 있다는 것, 죽 풀과 동류라는 것, 욕 망은 아주 적은 것들을 〈 욕구 〉 한다는 것, 이 적은 것들은 이들에게 남겨 진 것들이 아니고, 이들이 줄곧 빼앗겨온 것들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 다. 이 빼앗겨온 것은 주체의 마음속에 어떤 결여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 고, 오히려 인간의 對象住 죽 인간의 대상적 존재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간에게 있어서는 욕망한다는 것은 생산한다는 것, 현실에서 생산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인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이와 반대로 현실적 인 것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다. 욕망은 주체 속의 큰 덩어리를 이루는 ° 결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큰 덩어리를 이루는 조직이 욕망으로부터 그 대상적 존재를 빼앗는다. 혁명가들, 예술가들, 先見者둘은 대성이 있는 것만으로, 그저 이것만으로 만족한다: 그들은 욕망이 생산적인 힘을 가지고서 생명을 품에 안으며, 욕망이 욕구를 적게 가질수록 그만큼 더 강렬하게 생명을 재생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라거니, 혹은 이것은 책 둘 속에나 있는 관념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딱한 일이다. 〈—지금생까명 지 의속 에나 가의장 적 깊은이 독沈서潛로하여부,터 생니명는 ·그 대다로음 과살 고같, 은생 명결 론자을체` 였얻던었 사다 람들은 거의 먹지도 않았고, 거의 자지도 않았고, 재산을 가졌다 해도 아 주 적게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의무, 생식 등 가족을 존속시키 고 국가를 수호하는 제한된 목적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착각도 품고 있지 않았다……. 환상들의 세계는 우리가 정복을 성취하지 못한 세계이다 . 그것은 과거의 세계이지, 미래의 세계가 아니다. 과거에 얽매이면서 전진 한다는 것은 苦役囚의 발에 다는 첫덩이룰 자기 발에 붙이고 끌고가는 (J) Molai re . 〈大興熙 〉라 옮겨도 좋겠다.
것이나 다름없다 .24 ) 살아 있는 선견자는 나폴리의 혁명가의 옷을 걸찬 스피노자이다. 우리는 결여가 어디로부터 오는지 안다- 또 그 主觀的 相關項인 환상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도 알고 있다. 결여는 사회적 생산 속에서 조정되고 조직된다. 그것은 생산력들에 포개져서 이것들을 자기 의 것으로 만드는 반생산의 決定機關 ® 에 의한 逆生産이다. 그것은 절대로 먼저 있는 것이 아니다: 생산은 결코 그것에 앞서는 결여에 따라 조직되 지 않는다. 오히려 결여가 그에 앞서는 생산의 조칙 속에 자리잡고, 空胞 가 되고, 번식하는 것이다 .25) 이것은 지배계급의 作態, 죽 空虛를 시장경 제로 조직하는 것이다: 풍부한 생산 속에 결여를 조직하는 것, 모든 욕 망을 결여에 대한 큰 공포 속에 던져넣어 뒤집는 것, 욕망과는 관계가 없다고 흔히 생긱하는 현실적 생산에 욕망의 대상만을 소속시키는 것(합 리성의 요구들)이다. 한편, 욕망의 생산은 환상의 영역(환상이 아니고는 아무것도 아닌 영역)에로 넘어가게 된다.
24) Henry Mi ller, Sexus, tr. fr. Buchet- C haste l , p. 업 7. 25) 모리스 클라벨 Maur i ce Clavel 은 사르트르에 관해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처 음부터 稀少선이란 개념을 끌어들이도록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 다 : 〈착취에 앞서는 稀少性이 근원적 차원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희소성은 需要와 供給의 法則을 영원히 독립된 것으로서 현실 속에 세운다. 그러므로 이 법칙을 마르크스주의 속에 포함시킨다든가 그 속에서 연역 한다든가 하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법칙은 마르크스 주의가 나오게 된 局面 위에서 미리 직접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 다. 마르크스는 엄밀하여 희소성이란 개념의 사용을 거부하고 있다. 또 거부해야 만 한다. 왜냐하면 이 범주는 그를 파멸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Q u i est alie n e?, Flammario n , l
한 쪽에 현실의 사회적 생산이 있고, 다른 한 쪽에 환상의 욕망하는 생산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두 생산 사이에는 투입과 투사의 疾臣] 유 대들만이 세워진다. 마치 사회적 실천들이 내면화된 정신적 실천들에 겹 쳐지거나, 혹은 정신적 실천둘이 사회체계들 속에 투사되는 것처럼. 그러 나 이때 어느 쪽도 다른 쪽에 구체적 작용을-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한 쪽에 돈, 황금, 자본 그리고 지본주의의 삼각형을 놓고, 다른 한 쪽에 리
비도, 항문, 男根 그리고 가족의 삼각형을 놓고서, 이 양자간에'평행관계 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한, 우리는 기분좋은 심심풀이를 일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돈의 메커니즘들은 돈을 조작하는 사람들의 항문에 투사 된다 해도 어디까지나 이 투사와는 상관이 없다. 마르크스-프로이트의 平行論은 어디까지나 불모이고 무의미하다. 그것은 서로 내면화하거나 서 로 투사하는 項둘을 등장시키고 있으나 이것들은 서로 낯선 것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돈=똥이라고 히는 저 유명한 방정식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다. 정녕, 사회적 생산은 무엇보다도 일정한 조건들 아래서의 욕망하는 생산 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 터전 ®은 직접 욕망에 의하여 편 력되고 있으며, 그것은 욕망의 역사적으로 결정된 생산물이며, 리비도는 생산력들과 생산관계들을 제공하기 위하여 아무런 매개나 昇華도, 아무런 심리적 직업도, 아무런 變形도 필요치 않다. 욕망과 사회가 있을 뿐, 이 밖 에는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사회적 재생산의 가장 억압적이고 가장 치명 적인 형태들도 욕망에 의하여 산출된다. 이런 저런 조건 아래 욕망에서 생기는 조칙 속에서 산출된다. 우리는 이 조건들을 분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철학의 근본 문제는 여전히 스피노자가 제기할 줄 , 알았던 (그리고 리이히 Reic h 7l- 재 발견한) 문제이다: 〈왜 사람들은 마치 그들 의 구원이 중요한 문제였던 것처럼 그들의 예속을 위하여 싸우는·가?〉 어 떻게 사람들은 더 많은 세금을! 더 적은 빵을!이라고 의치게 되는가. 라 이히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놀러운 것은 사람들이 도둑질한다는 것, 또 다른 사람들이 파업을 한다는 것이 아니고,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이 언제나 도둑질하지는 않는다는 것, 착취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언제나 파 업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여러 세기 동안 착취, 모욕, 노예상태를 견디되, 남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 자신을 위해서도 이런 일들을 바라는 데까지 이르는가? 라이히는 파시즘을 설명함에 있어 대중의 오해나 착각을 끌어대지 않고, 욕망에 의하여 욕망의 말로 설명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때만큼 그가 위대한 사상가였던 적은 없다: 〈아니다, 대중은 속고 있지 않았으며, 그때,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그 ® champ s socia l 일본어 번역에서는 〈社會野〉라 옮기고 있다.
둘은 파시즘을 욕망하고 있었으며, 설명해야 할 것은 이 군중심리적 욕 망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26) 하지만 라이히는 충분한 답을 주는 더 W} 지 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사회적 생산의 과정 속에 있는 혹은 있어야만 하는 합리성과 욕망 속에 있는 비합리적인 것을 구별하고 오칙 후자만을 정신분석의 정당한 주제로 봄으로써, 그가 무너뜨리고 있 던 것을 도리어 다시 세워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사회 터전 속의 〈부정적인 것〉, 〈주관적인 것〉, 〈금지되고 있는 것〉의 설명만을 정신분석에 할딩하고 있다. 어쩔수없이 그는 합리적으로 생산된 현실적 대상과 • .환상적이고 비합리적인 생산을 갈라보는 하나의 二元論에 되돌아 가고 있다 .m) 그는 사회 터전과 욕망에 공통되는 尺度 혹은 共外延性을 찾 아내는 일을 포기하고 있다. 그래서, 유물론적 정신의학의 기초를 올바르 게 다지는 데 있어, 그에게는 욕망하는 생산이라고 하는 범주가 결여되 어 있었다. 현실적인 것은 이른바 합리적인 형태의 것들이건 비합리적인 것들이건 다 같이 이 범주 아래 들어가는 것인데 말이다.
26) Reic h , Ps yc holog ie de masse du fasc is m e. 27) 문화주의자들이 합리적 체계들과 두사된 체계들을 구별하고 있음을· 우리논 볼 수 있다. 정신분석은 이 후자에만 적용된다(가령, 카디너 Kard ine r). 라이히와 또 마르쿠제 Marcuse 도 문화주의에 대해서는 반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二 元論의 어떤 것을 재발견하고 있다. 이들이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을 아 주 달리 규정하고 평가하고 있기는 해도 말이다.
욕망하는 생산에 대하여 대대적인 사회적 억압이 실제로 있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의 원리를 조금도 해치지 않는다: 우리의 원리는, 욕망은 현 실적인 것을 생산한다, 혹은 욕망하는 생산은 사회적 생산과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욕망에 대하여 하나의 특유한 존재형태, 사회적 생산의 물질적 현실에 대립되는 정신적 혹은 심리적 현실을 배정하는 것 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환상적 혹은 몽환적인 기계 들이 아니다. 이 후자는 技獅謝戒, 社創對硏들과는 구별되고 이것들의 대 역을 하게 되는 기계들이다. 환상들은 오히려 疾}적인 표현들로서, 주어 전 환경 속에서의 두 가지 기계의 동일성에서 생기는 것이다. 또한 환상 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집단의 환상인바, 제도의 분석
이 이를 잘 보여준 바 있다. 그리고 집단의 환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것은 위에 말한 두 가지 기계의 동일성이 두 방향에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욕망하는 기계들이 그것들이 형성하는 큰 群集의 덩어 리들로서 파악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기계들이 이것들을 형 성하는 욕망의 기본적인 힘들에 관계지어지는 방향이다. 그러므로, 집단 의 환상에 있어서는, 리비도가 현존하는 사회 터전을 마련하게 될 수 있 는데, 여기에는 그 가장 억압적인 형태들도 포함된다; 혹은 이와 반대로 리비도가 현존하는 사회 터전에 혁명적인 욕망울 연결하는· 反供給에 나 아가게 되는 수도 있다. (가령, l 양1 ] 기의 위대한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들 은, 이상적인 모델들로서가 아니라, 집단의 환성들로서, 죽 욕망의 현실 적 생산성의 動因들로서 작용하고 있다. 이 동인들은 욕망 자체의 革命的 機 위하여 현실적인 사회 터전의 脫供給 혹은 脫機構를 가능하게 한 댜) 그러나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술적인 사회기계들 사이에는 본성상의 차이가 절대로 없다. 구별은 되지만, 그것은 다만 크기의 比에 따른 체제 의 구별일 따름이다. 그것둘은 체제상의 차이를 제의하고는 똑같은 기계 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집단의 환상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앞서 사회적 생산과 욕망하는 생산 사이의 평행관계를 素描하 여, 두 경우에 반생산의 결정기관이 현존하며 이것이 생산형태들에 포개 져서 이것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밝혔다. 이 평행관계는 그 두 생산 간의 관계를 조금도 豫斷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만 체제의 구별 에 관하여 몇 가지 측면을 명확하게 할 수 있었을 따름이다. 첫째로, 기 술기계들은 고장이 나지 않는 조건 아래에서만 작동한다는 것이 분명하 다; 그것들 고유의 한계는 마멸이지, 고장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이 단순 한 원리롤 근거삼아, 기술기계들의 체제는 생산수단과 생산물이 엄밀하 게 구별되는 체제요, 이 구별의 덕택으로 그 기계는 생산물에다가 가치 를 전달해 주되 자기가 마멸됨으로써 잃는 가치만을 전달해 준다는 것을 밝혔다. 이와 반대로, 욕망하는 기계들은 작동하면서 끊임없이 고칭이 나 며, 고장을 일으키면서만 작동한다: 생산하는 활동은 언제나 생산물에 접목되며, 기계의 부품들이 또한 기계를 움직이는 연료이다. 예술은 가끔
이 특성을 이용하여 전정한 집단 환상들을 창조하는데, 이 환상들은 사 회적 생산과 욕망하는 생산을 가까이 왕래시키고, 기술기계들의 재생산 속에 고장의 기능을 끌어둘인다. 아와 갇은 것이 아르망 Arman 의 불탄 바이올린들, 세자르 Cesar 의 압축된 차체들이다. 더 일반적으로는 달리 Dal i의 비판적 편집병의 방법은 사회적 생산의 대상 속에서의 욕망하는 기계의 폭발을 확실하게 한다. 그러나 이미 라벨 Ravel 은 마멸보다 고장 울 선호하였고, 느린 움직임이나 천천히 끝나는 것 대신에 갑작스런 정 지들, 주저들, 진동들, 불협화음들., 파열음들을 사용하였다 .28 ) 예술가는 오 브제 ob j e t(대상)들을 통솔하는 주인이다; 그는 부서전 오브제들, 불탄 오브제들, 고장난 오브제들을 욕망하는 기계들의 체제 속에 들어오게 하 기 위하여 이 오브제들을 자기의 예술 속에 통합하는데, 이때 욕망하는 기계들의 고장은 그 작동 자체의 부분을 이룬다; 그는 기술기계들의 수 만큼의 편집병적 기계들, 기적을 행하는 기계들, 독신기계들을 제시하는 데, 이때 욕망하는 기계들이 기술기계들을 해치는 것을 개의치는 않는다. 더구나 예술작품은 바로 그대로 욕망하는 기계이다. 예술가는 자기의 보 물을 모아두어 쉬 있을 폭발에 대비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파괴둘이 너무 일찍이 찾아온다고는 정녕 생각하지 않는다.
28 ) Jan kelevit ch , Rcwel, Ed. du Seu il, pp. 74-80 .
체제의 둘째 차이가 여기서 생긴다: 욕망하는 기계들이 반생산을 생산 하는 것은 그것들 자체를 통해서인데, 한편, 기술기계들에게 고유한 반생 산은 오직 진행중인 재생산의 의적 조건들 속에서만 생산된다. (이 조건 둘이 〈 나중에〉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기술기계들은 하 나의 경제적 범주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의 사회체 혹은 사회기계를 반 영한다. 이 사회기계는 기술기계들과는 다론 것으로서 이 재생산의 조건 울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술기계는 원인이 아니라, 다만 사회적 생 산의 일반적 형태의 지표일 따름이다: 수동기계들과 원시사회들, 수력기 계, 아시아적 형태, 산업기계와 자본주의는 모두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회체를 기관들 없는 충만한 신체와 비슷한 것으로 제시했을 때, 거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없지 않았다. 왜냐하면 욕망하
는 기계들은 욕망의 경제학의 기본적 범주요, 그것들 자체를 통하여 기 관들 없는 신체를 생산하며, 그 동인들과 그것들 자신의 부 풍 널 을 구별 하지 않으며, 또 생산관계들과 그것들 스스로의 관계들을 구별하지도 않 으며, 또 사회성과 기술성을 구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욕망하는 기계들 은 기술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욕망하는 생산은 본래적 여제의 場이요, 한편 사회적 생산은 억압의 장이며, 또 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 사이에서는 〈 엄밀한 의미에서의 〉 疾}적 억제를 닮 은 어떤 것이 행해진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기관들 없는 신체가 내부의 결과인지 의적 조건인지에 따라 이 신체 혹은 이와 맞먹는 것의 상황에 의존한다. (특히 죽음의 본능의 역할을 바꾼다.) 하지만 욕망하는 기계들과 사회기계들은 서로 다른 두 체제 아래 있는 동일한 기계들이다――욕망에게 있어서 억압을 욕망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는 해도 말이다. 생산에는 현실적인 것의 생산이라고 하는 한 가 지 생산밖에 없다. 아마 우리는 이 동일성을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겠으나, 이 두 방식은 순환과정으로서의 무의식의 자동생산을 구성 한다. 모든 사회적 생산은 일정한 조건들 아래서의 욕망하는 생산에서 생긴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맨먼저 自然人이 등장한다 . 그러나 우리 는 또한 좀더 정확하게, 욕망하는 생산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적이요, 종국에 가서야 비로소 자기를 해방시키는 데로 기울어전다고 말하지 않 으면 안 된다. (여기서는 맨먼저 歷史人이 등장한다.) 이것은, 마치 한 위대한 편집병자, 원시 유목민의 首長이 사회 조칙의 根底에 있었던 것처 럼, 기관들 없는 신체가 그 자체 근원적으로 있었고 이것이 다음에 서로 다른 종류의 사회체 속에 두사되었던 것은 아님을 의미한다. 사회기계 혹은 사회체는 대지의 신체, 전제 군주의 신체, 돈의 신체일 수 있다. 그 것은 결코 기관들 없는 신체의 투사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脫土地化한 사회체의 맨 마지막 잔여물이다. 사회체의 문제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욕망의 흐름들을 규준화하고, 등기하고, 등록하여, 막거나 물 길을 따라 흐르게 하거나, 규제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흐름도 흐르지 못 하게 하는 것. 원시적 토지기겨까 더 이상 충분한 것이 못 되었을 때, 전
제군주기계는 일종의 超規準化를 세웠다. 그러나 자본주의기계, 그것이 전 제군주 국가로부터 얼마간 먼 폐허 위에 세워지는 한, 전혀 새로운 상황 속에 있다: 즉 흐름들을 탈규준화하고 탈토지화한다. 이 상황에 대하여 자본주의는 밖으로부터 대결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이 상 황으로써 살며, 이 상황 속에서 그의 조건과 그의 내용을 동시에 얻으며, 그의 강력한 힘 전체로써 이 상황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생 산과 그 극심한 억압둘은 이 대가를 치르고서만 행해진다. 실상 자본주 의는 두 종류의 흐름, 즉 돈-자본의 형태를 가전 생산의 탈규준화한 흐 름과 〈 자유 노동자 〉 의 형태룰 지닌 노동의 탈규준화한 흐름이 만나는 데서 생겨난다. 또, 그것에 앞서는 사회적 기계들과는 반대로, 자본주의 기계는 사회 터전 전체를 규제하는 규준을 제공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규 준이란 관념 자체를 추상적인 量 둘의 公理系로써 代替하여 이것을 돈에 서 찾았다. 이 공리계는 사회체의 탈토지화의 운동에서 타당하기를 계속 한다. 자본주의는 탈규준화의 경계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계는 사 회체를 파괴하여 기관들 없는 신체를 출현시키고, 또 이 신체 위에서 탈 토지화한 터전 속에 있는 욕망의 흐름을 해방시키는 그런 경계이다. 이 런 의미에서, 마치 조울증과 편집병이 전제군주기계의 산물이요, 히스데 리가 토지기계의 산물이듯이, 정신분열증이 자본주의기계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일인가 ?29) 그리하여 흐름들의 달규준화, 사회체의 탈토지화는 자본주의의 가장 29) 히스테리, 정신분열증 그리고 이것들과 사회적 구조들의 관계둘에 관해서는 George s Devereux의 분석들, Essais d'eth n op sy c h ia t rie gen erale, tr. fr. Gallim ard, pp. 67 sq. 및 J as pe r 떠 훌륭한 글, Str ind berg et uan Gog h, tr. fr. d. de Mi nu it, pp. 232-2 3~ 참조할 것 (우리들의 시대에 있어서 狂氣 는 〈 조리에 맞지 않는 생각을 적게 했던 시대에, 광기 없이 성실한 경험과 표 현을 할 수 있었던 영역들에서 모든 성실성의 조건인가?〉-야스퍼스는 다음 과 같은 말을 덧붙여 이 물음을 바로잡고 있다: 〈예전에는 히스테리가 되려고 애쓰는 존재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보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 아 광기에 빠지려고 애쓰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전자의 試圖는 십리 학적으로 어느 정도 가능하기는 해도, 후자의 시도는 전혀 가능하지 않으며 기 만에 빠질 수 있을 따름이다〉).
본질적인 경향을 이룬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그 극한에 접근하는데, 이 극한은 정녕 정신분열증적이다. 자본주의는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서 탈 규준화한 흐름들의 주체로서의 정신분열자를 전력을 다하여 생산하려 한 다-그 주체는 자본가보다도 더 자본주의적이고 프롤레타리아보다 더 프롤레타리아적이다. 이 경향을 항상 더 밀고 나아가면, 마침내 자본주의 는 그 모든 흐름과 더불어 달나라에 이르게 될 것이다: 물론 아직은 이 렇게까지 되지는 않았다. 정신분열증이 우리들의 병이요, 우리들의 시대 의 병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그저 현대 생활이 광기를 생기게 한다고 말하려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생활양식이 아니라, 생산의 진 행이다. 단순한 평행관계는 이제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 컨대 정신분열자에게 있어서 의미가 달라지는 현성들과 산업사회의 모든 단계에서 증대하는 불협화음의 메커니즘들 사이에는 규준둘의 파탄의 견 지에서 평행관계가 있음이 아주 명확하지만, 단순한 평행관계는 이제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다음과 갈이 말하고자 한다: 자 본주의는 그 생산의 과정에서 무서운 정신분열중의 폭약을 생산하는데 그 억압의 모든 무게로 이 폭약을 눌러보려 한다. 그렇지만, 이 폭약은 자본주의의 진행의 극한으로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는 자기의 극한에로 향하는 경향을 힘차게 밀고 나가는 동시에 끊임없이 이 경향에 반대하고 이 경향을 막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그 극한에로 달리는 동시에 끊임없이 이 극한울 거절한다. 자본주의는, 상상적인 토지 이건 상칭적인 토지이건, 온갖 殘海的인 模造의 토지들을 설립 혹은 수복 하여, 이 토지들 위에서, 抽象量들로 말미암아 생기는 인물들을 혹은 찰 혹은 시원찮게 재규준화하고 이들을 그 토지 안에 틀어넣으려 한다. 국 가들, 고향들, 가족들, 이 모든 것이 되돌아오고 소생한다. 이것이 바로 자터의가 그 이데올로기에 있어서 〈지금까지 믿어온 모든 것의 잡다한 색채의 그립〉이라 일컬어지는 까닭이다. 현실적인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더욱더 인공적이다. 마르크스는 이윤율의 경향성 저하와 잉여가 치의 대상량의 증대의 2 중 운동을· 相反傾向의 법칙이라 불렀다. 이 법칙 의 系로서, 흐름들의 탈규준화 혹은 탈토지화나 이 흐름들이 격렬하게
模造의 재토지화를 행하는 2 중의 운동이 있다. 자본주의 기계가 여러 흐 름으로부터 잉여가치를 끌어내기 위하여 이 흐름들을 탈규준화하고 공리 체계화함으로써 탈토지화하면 할수록, 관료조직과 경찰기구 같은 자본주 의의 부속장치들은 잉여가치의 증대하는 부분을 흡수하면서 더욱더 재토 지화를추전한다. 신경중환자, 도착자 및 정신병환자에 대한 현실적인 충분한 정의를 내 릴 수 있는 것은 확실히 충동들과의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총뭉들은 그저 욕망히는 기계들 자체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충분한 정의 는 현대의 토지의 개념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가능하다. 신경종환자는· 우 리들의 사회의 잔재적 혹은 모조적 토지들에 눌러 붙어 있는 채로 있으 며, 또 이 토지들 모두를 궁극적인 토지인 오이디푸스 위에 포개놓는다. 이 오이디푸스는 정신분석자의 진료실 안에서 그 분석자의 충만한 신체 위에서 재구성된다. (예, 보호자는 아버지예요, 국가의 우두머리도 그렇 고요, 또 선생님, 당신도…….) 도착자란 인위적인 것을 진정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당신이 그것들을 원한다면, 그것들, 즉 사회가 우리에 게 제안하는 것들보다도 무한히 더 인위적인 토지들, 무한히 인위적인 새로운 가족들, 바밀스러운 달나라의 사회들을 가지게 되겠지요. 정신분 열자에 관해서 말하면, 끊임없이 옮겨다니며, 헤매며, 비틀거리는 그의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보아, 그는 자기 자신의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 서 사회체의 붕괴를 끝없이 추구하여 항상 탈토지화의 길을 더욱더 멀리 전진해 가는 사람이다. 정신분열자의 산책은 아마 그가 자기에게 대지를 재발견하게 해주는 그 나름의 방식이다• 정신분열자는 자본주의의 극한 에 처해 있다: 그는 자본주의의 발전된 경향이요, 잉여생산물이요, 프롤 레타리아요 또 자본주의를 근절시키는 천사이다. 그는 모든 규준을 뒤죽 박죽으로 만들고, 욕망의 탈규준화한 흐름들을 몰아온다. 현실적인 것은 흐른다. 과정의 두 측면은 다시 합한다: 우리를 자연 속에 혹은 대지의 품안에 있는 〈다이몬〉과 접촉시키는 형이상학적 과정, 욕망하는 기계들 에다가 사회기계가 탈토지화함을 따라 자율성을 회복시켜 주는 사회적 생산의 역사적 과정 _-이 두 측면이 다시 합하여 하나가 된다 . 그러므
로 욕망하는 생산, 그리고 사회적 생산과의 그 체제상의 처이는 마지막 에 나타나는 것이지, 처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 두 생산 사이에는 현실의 생성이라고 하는 오직 하나의 생성만이 있다. 그리고 유물론적 정신의학이 욕망 속에 생산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으로써 정의된다 할진 대, 그것은 정신분석기계, 혁명기계 및 욕망하는 기계들 사이의 최종적인 관계의 문제를 終末論的으로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5 기계들 욕망하는 기계들이 모든 은유와는 관계없이 참으로 기계들인 것은 어 떤 점에서인가? 기계는 절단들의 체계로 정의된다. 현실로부터의 분리로 생각된 절단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절단은 고려되는 성격에 따라 달 라지는 여러 차원에서 행해진다. 모든 기계는 무엇보다도 연속하는 물질 의 흐름(휠레 h y le) 과 관계하며 이 물질을 자른다. 기계는 행을 절단하는 기계로서 작동한다: 절단은 연결되어 있는 흐름에서 채취하는 일을 한 다. 그래서 항문은 똥의 흐름을 절단한다. 입은 젖의 흐름을 철단하지만, 또한 공기의 흐름, 소리의 흐름을 절단한다; 陰莖은 오줌의 흐름을- 절단 하지만, 또한 정액의 흐름도 절단한다. 연결되어 있는 흐름마다 관념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큰 돼지의 넓적다리의 무한한 흐름이 그런 것이 다. 휠레는 사실 한 물질이 관념으로서 소유하고 있는 순수한 연속성을 나타낸다. 졸랭 J au li n 은 입사식®에서 사용되는 냄새 맡는 담배와 그 가 루를 서술하면서 다음과 같은 접을 밝히고 있다. 그것들은 〈이론적으로 오직 하나의 근원만을 가지고 있는 무한한 연속체〉, 우주의 끝까지 퍼져 있는 특이한 가루로부터 채취되는 것 전체로서 매년 생산된다 .30) 절단은 연속에 대립하기는커녕, 연속의 조건이 되며, 그것이 절단하는 것을 관념 적 연속으로서 포함하고 있거나 규정하고 있다. 우리가 앞서 본 바와 갇 이, 이것은 모든 기계가 기계의 기계이기 때문이다. 기계는 흐름을 생산 @) initiat i on 원시인들이 성장하여 사회의 一員이 될 때에 치르는 儀式 30) Robert Jau lin, La Mort Sara, Plon, 1967, p. 122.
한다고 여겨지는 다른 기계에 연결되어 있는 한에서만 흐름의 절단을 생 산한다. 그리고 이 다른 기계는 그 나름대로 실제로 절단을 행한다. 그러 나 이 기계가 절단을 행하는 것은 제 3 의 기계와의 관계에서만인데, 이 제 3 의 기계는 무한히 연속하는 흐름을- 관념적으로, 죽 상관적으로 생산 한다. 그리하여 항문-기계와 腸-기계, 장-기계와 胃 -기계, 위-기계와 입-기계, 입-기계와 가축의 떼( 〈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그리고 또…… 〉 ) 의 관계가 성립한다 . 요컨대, 모든 기계는 그것이 연결되어 있는 기계에 대해서는 흐름의 절단이지만, 그것에 연결되어 있는 기계에 대해서는 흐 름 자체 혹은 흐름의 생산이다. 이와 같은 것이 생산의 생산의 법칙이다 . 그렇기 때문에 횡단적 연결 혹은 超限的연결의 극한에서, 부분적 대상 과 연속적 흐름, 절단과 연결이 하나로 합쳐진다-도처에 흐름들-절단 들이 있어 거기서 욕망은 샘솟고, 또 이 흐름들-절단들은 항상 생산하는 활동과 생산물을 접목시켜 욕망의 생산성을 이룬다. (멜라니 클라인 Melan ie Kle i n 이 그녀의 깊은 동참게서 부분적 대상들을 발견하고 있음 에도 불구하고, 아 점에서 흐름의 연구를 소홀히 하고 이것을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연 결을 짧게 끊어버리고 있다 .)31)
31 ) Melan ie Klein , La Psy c hanalys e des enfa n ts , tr. fr. P.U . F., p. 226 : 〈 적극 적 측면에서의 오중은 母乳와 같은 값어치를 가진 것이다. 無意識은 신체의 구 성요소들간에 아무런 구별도 하지 않는다.〉
Connecti cu t, Connec t(연결하라)- I( 나는 )-cu t(자르다)이라고 어린 죠이 J oe y가 의친다. 베텔하임 Be tt elhe i m 은 이 아이의 그립을 그리고 있는데, 이 아이는 發動機들, 導線들, 램프들, 氣化器들, 프로펠러들 그리 고 핸들들을 갖춘 기계들에다가 자기를 연결시키지 않고서는 살지도 먹 지도 배설하지도 자지도 못한다: 이 기계들은 電動食傾機械 呼吸自動機 械 光源JII F 情炳 ~l 다. 이 예만큼 욕망하는 생산의 체제 그리고 파탄이 기 능 자체의 부분을 이루고 혹은 절단들이 기계의 연결들의 부분을 이루고 있는 그 양식을 찰 보여주는 것은 많지 않다. 혹 이렇게 말할 사람이 있 울는지 모른다-이 기계적이고 정신분열중적인 생명은 욕망보다는 오
히려 욕망의 부재와 파괴를 나타내고 있고, 부모의 극단적인 어떤 부정 적 태도들을 상상케 하는데 이런 태도들에 대하여 아이는 자기를 기계가 되게 함으로써 반발하고 있다고. 그러나 오이디푸스적 혹은 전오이디푸 스적 인과관계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베텔하임도 이 인과관계가 그 아이 의 생산성 혹은 활동의 자율적 측면들에 대응함으로써만 개입할 수 있음 을 인정하고 있다. 나중에 그 아이에게는 비생산적인 울적함이라든가 철 대적 후퇴의 태도가 생긴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해도 말이다. 그러므로 맨 처음에 있는 것은 〈 생명의 전체 경험에 대한 자율적 반응이요, 어머 니는 이 경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 .3 2 ) 그러므로 기계들 자체가 욕망 의 상실이나 억제(베텔하임이 자폐증으로써 설명하고 있는 것)를 나타내고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언제나 같은 문제에 되돌아온다: 어떻 게 욕망의 생산의 과정이, 어떻게 그 아이의 욕망하는 기계들이 무한히 空轄하게 되어, 아이-기계를 생산하게끔 되었는가? 어떻게 그 과정이 목 표로 변형하였는가? 혹은 어떻게 그 과정이 너무 이른 중단이나 끔찍한 惡化의 희생이 되었는가? 생산의 일부분을 이루면서도 모든 생산을 빗나 가게 하고 악화시키는 어떤 것이 있는데, 이것이 생산되고 逆生産되는 것은 오직 (눈은 감고 코는 막고 귀도 막고 있는) 기관들 없는 신체와 의 관계에서만이다. 그러나 그 기계는 어디까지나 욕망인 채로 있고, 욕 망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욕망은 처음의 억제와 억제되었던 것의 되돌아옴울 건너질러 편집병적 기계들, 기적을 행하는 기계들 및 독신기 계들의 繼起 속에 자기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베텔하임의 치료가 진전함 에 따라 죠이는 이 세 기계를 거쳐간다.
32) Bruno Bett elh eim , La Forleresse uid e , 1967, tr. fr. Gallim ard, p. 500.
둘째로, 모든 기계는 그 속에 끼여 들어가 있고 저장되어 있는 일종의 규준(코드 code) 을 가지고 있다. 이 규준은 기계가 신체의 어느 영역에 등록되고 전달되는가 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영역이 다른 영역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떻게 등록되는가 하는 것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한 기관은 서로 다른 여러 연결을 따라 여러 흐 름에 연결될 수 있다; 그것은 여러 체제 중에서 어느 것을 취할 것인지
망설일 수 있고, 또 어떤 다른 기관의 체제를 취하기까지 한다(식욕을 잃은 입의 경우). 여기서 기능에 관한 온갖 문제가 제기된다: 어느 흐름 을 철단하는가? 어디서 절단하는가? 어떻게 또 어떤 양식으로? 다른 생 산자들 혹은 반생산자들에게 어느 자리를 남겨둘 것인가? (동생의 자리 는 어디에 남겨둘 것인가?) 먹은 음식물로 질식하고, 공기를 들이마시고, 입으로 똥을 누는 것 같은 일은 할 것인가 안할 것인가? 도처에서 등록 둘, 정보들, 전달동기 지금까지의 연결들과는 모양이 다른 바둑판 모양의 이집들을 형성한다. 하나 혹은 여러 개의 시니피앙안] 연쇄를 감싸고 있 는 무의식의 규준의 풍부한 영역을 발견하고 그리하여 정신분석을 변모 케 한 것은 라깡의 공적이다. (이 점에 관하여 기초가 되는 텍스트는 『도둑맞은 편지』이다.) 그러나 이 영역은 그 다양성 때문에 얼마나 기묘 한 것인지, 하나의 연쇄 혹은 심지어 하나의 욕망하는 규준으로서 말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정도의 것이다. 이 연쇄들은 기호들로 되어 있기 때 문에 시니피%냥터라 말해지고 있지만, 이 기호들 자체는 시니피앙들이 아니댜 규준은 하나의 언어라기보다는 하나의 隱語, 죽 열려 있고 多義 的인 형성체를 닮고 있다. 기호들은 규준에 있어서 임의의 성질의 것이 요, 그것들을 밀받침히는 토대와는 무관한 것이다. (혹은 이 토대가 그 것들과는 무관한 것이겠다. 토대는 기관들 없는 신체이다.) 기호들은 아 무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단계에서 또 모든 연결에서 일하고 있다; 기호마다 자기자신의 언어를 말하며, 다른 기호들과 더불어 여러 가지 종합을 만들어내는데, 이 종합들은 요소들의 차원에서는 어디까지 나 간접적인 그만큼 횡단면에 있어서는 직접적이다. 이 연쇄들에게 고유 한 이집들은 아직 排他擇一의 작용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 이 작용들은 금지하는 것들과 억압하는 것들이 활동함으로써만 나타날 수 있다. 또 금지하는 것들과 억압하는 것들은 토대를 규정하고 특정한 개인인 주체 롤 고정시키게 된다 •33) 어떤 연쇄도 동질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알 ® sig nifian t. 勳終臣 일의 主體. 33) Lacan, Ecri ts, Remarqu e sur le rapp o rt de Da niel Laga c he, ed. du Seu il. p. 658 : 〈이 기호들부터 생기는 배타택일은, 構成하게 되는 하나의 연쇄 속의 整合性의 조건으로서만 행해질 수 있다: • 이 조건이 유지되는 次元은
파벳의 글자들이 줄을 지어 행렬을 이루고 있는 것을 닮고 있다. 그리고 이 행렬에는 갑자기 표의문자, 그립글자, 지나가는 코끼리의 작은 모습이 나 돋는 아침 해가 나타난다. 음소들, 형태소들 등을 (구성하지는 않고) 뒤섞고 있는 연쇄 속에 갑자기 아빠의 수염, 엄마의 쳐든 팔, 리본, 작은 소녀, 순경, 구두가 나타난다. 각 연쇄는 다른 연쇄둘의 단편들을 붙잡고, 마치 오르키스라고 하는 난초과의 실물의 규준이 말벌의 모양을 따오는 것처럼, 그 단편들로부터 잉여가치를 따온다. 이것은 규준의 잉여가치 현 상이다. 이것은 추첨에서 방향을 잡고 제비를 뽑는 일들과 전적으로 같 은 하나의 체계인데 이 제비 뽑는 일들은 마르코프 Marko ff의 연쇄와 비슷한, 부분적으로 서로 의존하는 우연한 현상들을 형성하는 것이다. 내 부의 규준들, 의부의 환경으로 말미암아 조직체의 한 영역으로부터 디론· 영역에로 등록들과 전달들이 행해지는데, 이것들은 이집적 대종합이 끊 임없이 분기해 감을 따라 서로 交鎔한다. 거기에 어떤 글 ecr it ure 이 있 다면, 그것은 바로 현실적인 것에 새겨진 글이다. 그것은 기묘하게도 다의 적이고, 결코 기호와 의미가 일대일의 대립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고, 선 울 이루고 있지 않은, 하나의 超言幽 9 이고 결코 言說的이 아닌 글이다. 그것은 수동적 종합들의 〈현실적 비조직〉의 영역 전체요, 거기서 시니피 앙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아보았자 헛된 일이다. 또 그 영역은 연쇄들을 기호들에로 끊임없이 구성하고 또 분해하는데, 이 기호들은 시 니피앙들이기 위한 아무런 사명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욕망을 생산하는 것, 이것이 기호의 유일의 사명이다. 그것이 스스로를 기계로서 작동시키 고 있는 모든 방면에서 그렇다. 이 연쇄들은 끊임없이 모든 방향에로 이탈이 행해지는 본거지요, 여기 서는 도처에 분열이 생기는데 이 분열들은 그것들 자체 가치가 있어서 특히 보완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런 접이 기계의 둘째 성 격이다. 죽 이탈-절단인데, 이것은 채취-절단과는 하나로 합쳐지지 않 그러한 연쇄에게 가능한 번역의 영역만이라는 것을 附言하기로 하자. 복권늘이 에 다시 한번 주의해 주기를 바란다. 복권들이 발매될 때 우리가 그것을 사는 것은 그 표들이 순서상 우연하게 뒤섞여 아주 비조직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임을 고찰하기 위하여…….〉
는 것이다. 후자는 연속하는 흐름들과 관계하며, 부분적 대상들과 연관되 어 있다. 전자는 이질적 연쇄들과 관계하며, 날아다니는 덩어리들이나 벽 돌들처럼, 이탈 가능한 線分들, 가동적인 저장물들을 통해서 행해진다. 벽돌마다 멀리 던져질 수 있고 그 자체 이질적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 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으면 안 된다: 벽돌마다 알파벳의 서로 다~ 기호 들에 의한 등기만 아니라, 또한 여러 가지 형상, 그리고는 하나 혹은 여 러 올의 지푸라기 그리고 아마도 하나의 시체에 의한 등기도 간직하고 있다. 흐름으로부터의 채취는 연쇄로부터의 이탈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 고 생산의 부분적 대상들은, 모든 종합의 공존과 상호작용에 있어서, 등 록된 저장물들과 벽돌들을 전제한다. 흐름의 정보를 제공하게 되는 규준 속에 단편적 이탈이 없다면, 어떻게 흐름에 대한 부분적 채취가 있을 수 있겠는가? 조금 전에 우리가 정신분열자는 욕망의 탈규준화한 흐름들의 극한에서 생긴다고 말한 것은 사회적 규준들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한 다. 사회적 규준들에 있어서는 전제군주 시니피앙이 모든 연쇄를 때려부 수고, 이것들을 하나의 선으로 만들고 , 기호와 의미를 일대일로 대응시키 고, 벽돌들을 그 수만큼의 부동의 요소로 사용하여 奏帝國의 長城을 쌓아 올린다 그러나 언제나 정신분열자는 이 벽돌들을 이탈시키고, 뽑아내고, 모든 방향으로 날라 새로운 다의성을 되찾는데, 이 다의성은 디름이닌 욕망의 규준이다. 모든 구성 그리고 모든 분해는 가동적인 벽돌들로 행 해진다. 모나코 Monakow 는 裂開 di asc hi s i s 와 裂離 d i as p as i s 를 말한 바 있다. 이것은 하나의 상해가 이것을 다른 영역들에로 연결시키는 신경섬 유들을 따라 번져, 거기서 순전히 기계론적인 (그러나 기계적이지는 않 은)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을 멀리서 생기게 하는 것이거나 혹은 체액의 이상이 신경 에너지롤 편류케 하여 본능들의 영역에 분단적 이고 단편적인 방향들을 창설하는 것이다. 벽돌들은, 등록의 절차의 관점 에서 보면, 욕망하는 기계들의 본질적 부품들이다. 죽 구성하는 부분들인 동시에 ,분해의 산물들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큰 시간생성기계, 죽 신경조 직과 관계하면서 일정한 순간에만 공간적으로 자리를 잡는다. (〈오르골〉 형의, 비공간적인 자리잡음을 가지고 있는 멜로디 생산기계가 이런 것이
다 .)34) 모나코와 무르그 Mour gu e 의 저서에 비길데없는 성격을 주고 있 는 것, 그것으로 하여금 그것이 착싱을 얻은 잭슨 J ackson 주의 전체를 무한히 능가하게 하고 있는 것은 벽돌의 이론, 벽돌들의 이탈과 단편화 의 이론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보다도 그러한 이론이 전제하고 있는 것 __ 즉 욕망을 신경학 속에 도입한 점이다. 욕망하는 기계의 셋째 절단은 殘餘잡 0 斷이다• 이것은 기계 곁에 하나 의 주체를, 기계의 인접해 있는 부분을 생산하는 절단이다. 그런데 이 주 체가 특정한 인물로서의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은, 또 그것 이 기관들 없는 신체의 未分化 상태를 파괴함이 없이 이 신체를 편력하 는 것은, 그것이 기계 결의 한 부분이기 때문만이 아니고, 또한 기계의 작동으로 말미암는 연쇄로부터의 이탈들과 흐름으로부터의 채취들에 대 응하는 부분들이 거기로 되돌아가는 그 자체 하나의 공유된 부분이기 때 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는 자기가 통과하는 상태들을 소비하고, 이 상태들로부터 탄생한다 . 항상 부품들로 되어 있는 한 부분으로서 이 상 태들의 결과로 출현한다. 이 부품들 하나하나는 한 순간 기관들 없는 신 체를 채운다. 이와 같은 것이 리깡으로 하여금 디움과 같은 설을 전개할 수 있게 한다. p arere 가 p rocurer( 획득한다)요, sep araren 가 se p arer( 분 리한다)요, se pa rere7} s'eng en drer so i -meme( 자기자신을 낳는다)인 것 은 語源的이기보다는 오히려 더 기계적인 놀이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놀이의 强度的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부분은 전체와 아무 관계도 없다. 〈부분은 전적으로 홀로 그 역할을 수행한다. 여기서 주체 (환자)가 자기 의 출산에 나아가는 것은 자기의 部分化에서이다……. 이런 까닭에 주체 는 여기서 자기에게 관계되는 것, 죽 우리가 시민의 상태라고 규정하는 상태를 획득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도 이 상태에 이르는 일만큼 집요하게 달러붙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부분 p ars 이기 위하여 주체는 자기의 이익의 대부분을 기꺼이 희생시킬 것이다.〉 35) 다른 두 절 34) Monakow et Mourgu e , Intr o ducti on bio l og iqu e ii l'etu d e de la neu- rolog ie et de la psyc ho-pa tho log ie, Alcan, 1928. 35) Lacan, Ecrits , Posit ion de l'inc onscie n t, p. 843.
단(採取-切斷과 離脫-切斷)과 마찬가지로, 주체를 생기게 하는 절단은 결여를 나타내지 않는다. 도리어 자기가 차지한 것으로서 주체에게 귀속 되는 부분, 잔여로서 주체에 귀속되는 수입을 나타낸다. (여기서 다시 한번, 오이디푸스의 모델이 얼마나 신통치 않은 모델인가를 알 수 있다!) 사실 이 절단들은 분석이 아니고 그것들 자체 종합이다. 그것들은 구 분둘을 생산하는 종합이다. 어린이가 트립할 때 젖이 되올리오는 예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그 젖은 연결되어 있는 흐름에서 채취한 것의 복구인 동시에, 시니피앙의 연쇄로부터 이탈한 것의 재생산이요, 주체 자 신의 몫으로 주체에 귀속되는 잔여물이다. 욕망하는 기계는 은유가 아니 다: 그것은 위에 말한 세 양식을 따라 절단하고 절단되는 기계이다. 첫 째 양식은 연결적 종합에 관련되며, 리비도를 채취의 에너지로서 동원한 다. 둘째 양식은 이집적 종합에 관련되며, 누멘울 이탈의 에너지로서 동 원한다. 셋째 양식은 접속적 종합에 관련되며, 볼룹타스를 전여의 에너지 로서 동원한다. 이 세 양상 아래 욕망하는 생산의 진행은 생산의 생산인 동시에 등록의 생산이요, 소비의 생산이다. 채취하고, 이탈하고, 〈잔여로 남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생산하는 것이요, 욕망의 현실적 활동들을` 실제로 있게 하는 것이다.
6 전체와 부분들 욕망하는 기계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동시에 작동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중단들과 단절들, 고장들과 작동 부실들, 斷續들과 짧은 회전들, 어긋남들과 분할둘의 한복판에서이다. 죽 결코 그 무 분둘을 하나의 전체 에로 통합하지는 않는 총화 속에서이다. 이것은 여기서 절단들이 생산적 이고, 그 자체 통합들이기 때문이다. 이집들은 이접들인 한, 포함적이다. 소비들도 移行이요, 生成이요, 回歸이다. 문자기계의 차원에서 다음과 같 은 문제를 아주 엄밀하게 제기할 줄 알았던 사람은 모리스 블랑쇼 Mauric e Blancho t이다: 서로간에 차이인 한에서의 차이의 관계들을 가 지고 있는 단편들, 그것들간에 그것들에게 고유한 차이를 관계들로서 가 지고 있는 단편들, 근원적이기는 해도 상실된 전체성과도 또 앞으로 있 게 될 결과로서의 전체성과도 아무 상관이 없는 단편들을 어떻게 생산하 고 또 생각할 것인가 ?36) 명사로서 사용된 多樣性이란 범주는 一도 多도 능가하는 것이요, 一이다 多이다 하는 술어적 관계를 능가하는 것인데, 오직 이 범주만이 욕망하는 생산울 설명할 수 있다: 욕망하는 생산은 순 수한 다양성, 죽 하나인 것에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부분적 대상들, 벽돌들 및 잔여물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고대의 影像의 파편들 마냥 보수되고 수리되어 본래의 것과 같은 통일체 롤 이루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파편들 갈은 가짜 파편들을 더 이상 믿 지 않는다. 우리는 근원에 있었던 전체성도 앞으로 있게 될 목적으로서 36) Mauric e Blanchot, L'ent re ti en inf i ni, Ga llim ard, 1969, pp. 451-452.
의 전체성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우리는 고리타분한 변증법적 발전이 라고 하는 灰色盡法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이 화법은 파편들의 모서리 롤 꺾아 두리뭉실하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지나가는 길 곁에 있는 전체 성들만을 믿는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부분들 곁에 있는 이러한 전체성 을 만난다고 하면, 그것은 이 부분들의 전체이기는 하나, 이 무 분 절 을 전 체로 묶지는 못하는 전체성이다. 그것은 이 부분들 전체의 통일체이기는 하나, 이것들을 정말 통일하지는 못하는 통일체이다. 그것은 따로 구성된 새 부분으로서 지금까지 있어온 부분들에게 첨가되는 것이다. 〈통일체는 출현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따로 구성된 한 단편처럼, 영감을 받아 탄생 하여, 전체에 부착해 있다〉라고 프루스트 Prous t는 발자크 Balzac 의 작 품의 통일에 대하여, 또 자기자신의 작품의 통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고 하는 문학기계에서, 어디서나 모든 부분 들이 비대칭적인 두 쪽, 중단된 방침들, 밀봉된 상자들., 連通되지 않은 관들, 칸막이들로서 생산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거기서는 인접해 있는 것들 간에도 거리가 있고 거리들은 긍정하는 역할을 말고 있고, 동 일한 퍼줄이 아니고 서로 다른 여러 퍼즐의 조각들이 언제나 위치는 정 해져 있지만 철대로 일정하지는 않은 장소에 서로 억지로 끼여넣어지고, 서로 맞지 않는 그 모서리들이 언제나 나머지 단편들과 함께 꼴을 맞추 기 위하여 억지로 뜯어고쳐지고 멋대로 겹쳐지고 있다. 이것은 더할 나 위 없이 정신분열중적인 작품이다: 죄책감이라든가 죄책감의 고백둘 같 은 것은 여기서는 한갓 농담이라 하겠다. (클라인의 용어로 말한다면, 우울증의 처지는 더 깊은 곳에 있는 정신분열증의 처지를 은폐하는 것이 라 하겠다.) 왜냐하면 법률의 엄격함들은 겉으로만 하나인 것을 단호히 내세우는데, 사실 그 전정한 목적은 조각이 난 지역들에다가 放罪를 선 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들에서 법률은 아무것도 전체 속에 통 합시키지 않고, 도리어 본래 광기였었기에 무죄인 것의 일탈들, 분산들, 파열둘을 헤아리고 배분한다-그렇기 때문에 프루스트에게 있어서는 죄책감이라고 하는 표면상의 데마가 이것을 부정하는 전혀 다른 데마와 얽혀 있다. 이 후자는 남녀 두 性울 식물처럼 갈라놓는 순전한 데마이다.
이것은 샤를루스 Charlus 의 만남들에서도 또 알베르틴느 Alber ti ne 의 졸 음들에서도 한결같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들에게 있어서는 꽃이 만 발하고 광기의 순전함이 드러나는데, 샤를루스의 명백한 광기도 그렇고 알베르틴느의 상상된 광기도 그렇다. 그러므로 프루스트는, 전체는 생산된다, 그것은 부분들 곁에 한 부분으 로서 그 자체 생산된다, 그것은 통일하지도 않고 전체화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부분들과 어울려 連通되지 않은 관들 사이에 엉뚱한 통로들만을 만들고, 자기의 고유한 차원 속에서 디론 것들과의 차이를 지키는 요소 들 사이에 횡단적인 통일들만을 세운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의 철도 여행에서는 전체를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 고, 관점의 통일도 없다. 전체나 통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다만 여행 자가 이 창에서 저 창으로 〈 정신없이 바라보면서, 斷續하며 대립하는 단 편들을 가까이 맞추어 보기도 하고 바꾸어놓아 보기도 하는〉 橫斷線에만 있다. 가까이 맞추어 본다, 바꾸어놓아 본다고 하는 것은 조이스J o y ce 가 〈 다시-꾸며 본다 (re-embod y) 〉 라고 부른 것이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하나의 전체인 양 생산되지만, 다만 생산의 과정에서의 자기의 자리, 죽 그것이 통일하지도 전체화하지도 않는 부분들 곁에서 생산된다. 그리고 그것이 부분들에 붙여지고, 부분들에 포개질 때, 그것은 자기자신의 표면 위에 횡단적 커뮤니케이션들, 超限的 總和化들, 多義的이고 超言說的인 등 기들을 생기게 한다. 이 표면에서는 부분적 대상들의 기능적 절단들이 시니피앙 연쇄둘의 절단들과 거기서 드러나는 주체의 절단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재절단된다. 전체는 그저 부분들과 공존하기만 하지 않는다. 그 것은 부분들에 인접해 있고, 그 자체 따로 생산되며, 그리고 부분들에 붙 여진다: 유전학자들은 이런 상황을 그들 나름대로 다음과 갈이 밝히고 있다. 〈여러 가지 아미노산은 세포 속에 개별적으로 동화되고, 그 다음 에 鑄型과 비슷한 메커니즘을 통하여 적당한 순서의 자리에 배치된다. 이 메커니즘에서는 각 아미노산에 특유한 횡적 연쇄가 자기의 고유한 위 치를 차지한다.〉지) 일반적으로 말하여, 부분들~전체 관계들의 문제는 고 37) J.H . Rush, L'Orig ine de la vie , tr. fr. Pay o t, p. 141.
전적 기계론과 고전적 生氣論에서는 전체를 부분들로부터 생긴 것으로, 혹은 부분들이 거기서 유출하는 근원적 전체성으로 또 혹은 변증법적 전 체화로 생각하는 한 어디까지나 찰못 제기되고 있다. 기계론이나 생기론 이나, 욕망하는 기계들의 본성을 파악하지 못하였고, 욕망 속에 생산울 끌어들이고 또 기계의 움직임 속에 욕망을 끌어들이는 이중의 필요를 파 악하지 못하였다. 총동들을 그 대상들과 함께 하나의 통합된 전체에로 전전하게 하는, 충동들의 전화란 없다. 또 충동들이 거기로부터 생겨나오는 원초적 전체 성이란 것도 없다. 멜라니 클라인은 놀랍게도 부분적 대상들, 즉 폭발들, 회전들, 전동들의 세계를 발견하였다. 그런데 그녀가 이 대상들의 논리를 찰못 파악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이것은 첫째로, 그녀 가 이 대상들을 환상이라 생각하고, 이것들을 현실적 생산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소비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부분적 대상들 에다가 인과관계의 메커니즘(가령 투입과 두사), 효과발생의 메커니즘 (만족감과 욕구불만), 표현의 메커니즘(善과 惡)을 배정하고 있는데, 이 메커니즘들은 그녀에게 부분적 대상에 대한 관념론적 견해롤 강요하고 있다• 그녀는 이 대상을 생산의 진정한 진행, 죽 욕망하는 기계들의 진행 에 결부시키지 않고 있다. 둘째로, 그녀는 정신분열一편집병적인 부분적 대상들이 하나의 전체, 이 전체가 원초적 단계의 근원적 전체이건, 니중· 에 우울증의 상태에서 생기게 될 전체(완비된 대상)이건, 어떻든 하나의 전체에 관련된다는 생긱울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는 부분적 대상들이 전체의 모습을 갖춘 인물들로부터 채취된 것으로 보 인다: 그것들은 나, 대상 그리고 충동들에 관련된 통합의 전체성들 속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또한 이미 나, 어머니, 아버지 사이의 대상적 관계 의 최초의 型울 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결국 모든 것이 결 정되는 셈이다. 부분적 대상들이 그것들 자체로는 오이디푸스를 날려보 내고, 오이디푸스로부터 무의식을 표상하고 삼각형화하여 모든 욕망하는 생산을 얻으려는 어리석은 야망을 빼앗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디는 것은 확실하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先오이디푸스적이라 부를 수 있
는 것이 오이디푸스와의 관계에 있어서 얼마만한 상대적 중요성을 지니 고 있는가 하는 점이 아니다. (왜냐하면 〈 先오이디푸스적 〉 이란 것은 발 생의 면에서 혹은 구조의 면에서 아직도 오이디푸스와 관련되어 있기 때 문이다.) 문제는 욕망하는 생산의 절대적으로 非오이디푸스적인 성격이다. 그러나 멜라니 클라인은 전체, 전체의 모습을 갖춘 인물들, 완비된 대상 들의 관점을 그대로 지켜나가고 있기 때문에―_그리고 또 아마도 그 문 에 〈 오이디푸스를 인정하지 않는 아무도 이곳에 들어오지 마라 〉 고 적어 놓은 국제 정신분석협회와의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피하려는 생각이 있 기 때문에__부분적 대상들을 이용하여 오이디푸스의 굴레를 벗어버리 려 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그녀는 오이디푸스를 회석화하고, 작게 그 려내고, 그 수를 늘리고, 低年層에게까지 퍼지게 하기 위하여 오이디푸스 롤 이용하고 혹은 이용하는 체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정신분석가들 중 가장 덜 오이디푸스화하고 있는 예로 서 클라인을 들고 있는 것은 오이디푸스를 욕망하는 생산의 척도로 삼으 려면 얼마나 무리를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정신분석의 〈 운동 〉 이 어떤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보통의 정신분석가들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것은 시사에 그치는 게 아니고 테러리즘에 속한다. 멜라니 클라인은 다음과 갇이 적고 있다: 딕크가 처음으로 내 집에 왔을 때의 일인데, 그의 간호원이 그를 니에게 맡겼을 때 그는 아 무 감정도 나타내지 않았다. 내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장난감둘을 그에 게 보여주었을 때, 그는 아무 홍미 없이 그것들을 쳐다보았다. 나는 큰 기차를 들어 작은 기차 옆에 놓고 이 기차들에다가 〈아빠 기차〉와 〈딕 크 기차〉란 이름을 붙여 가리켰다. 그러자 그는 내가 〈딕크〉라고 부른 기처를 들고, 그것을 창이 있는 데까지 굴러가게 하고는 〈정거장〉이라고 말하였다. 〈정거장, 그것은 엄마야; 딕크는 엄마 속에 들어간다〉라고 나 는 그에게 설명하였다. 그는 기차를 내려놓고, 방의 한 쪽 문과 바깥 쪽 문 사이에 뛰어들어가, 〈컴컴하다〉고 말하면서 틀어박히더니 금세 거기 서 뛰쳐나왔다. 그는 여러 번 이 짓을 하였다. 〈엄마 속은 컴컴해 ; 딕크 는 엄마의 컴컴한 속에 있는 거야〉라고, 나는 그에게 설명하였다……. 그
의 정신분석이 진전했을 때…… 딕크 역시 세면기가 어머니의 신체를 상징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몸이 물에 짖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였다 .38) 이건 오이디푸스다라고 말하라, 그렇지 않으면 따귀를 맞을 것이다. 정신분석 가는 이제는 이렇게 묻지 않는다: 〈네게 있는 네 욕망하는 기계들은 뭐 지?〉 그러지 않고 이렇게 소리 지른다: 〈내가 네게 말할 때에는 아빠 엄마라고 말하라!〉 멜라니 클라인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되면 모 든 욕망하는 생산은 짓눌리고, 부모의 모습에 대한 心像들에 포개지고 前오이디푸스적 단계들에 맞추어 늘어놓아지고, 오이디푸스 속에서 전체 화된다: 그리하여 부분적 대상들의 논리는 사라지고 만다. 그러므로 오 이디푸스는 이제 우리에게는 이 논리의 시금석이 된다. 왜냐하면, 처음에 우리가 예감했던 것처럼, 부분적 대상들이 전체의 모습을 갖춘 인물들로 부터 채취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만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사실은 인물이 아닌 하나의 흐름 혹은 質料로부터 채취됨으로써 생산된 다. 그것들은 다론 부분적 대상들과 연결됨으로써 이 흐름이나 질료와 연락을 취한다. 무의식은 인물들을 알지 못한다. 부분적 대상들은 인물로 서의 부모를 대표하는 것들%] 아니요, 가족 관계둘을 지탱시켜 주는 것 들도 아니다. 그것들은 욕망하는 기계들 속의 부품들이요, 다른 어떤 것 에로도 환원될 수 없는 생산의 전행과 생산관계들에 관련되며, 오이디푸 스의 형상 속에 등록되는 것에 비하면 근본적인 것들이다. 프로이트와 융 J un g의 不和에 관해서 말할 때,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그 출발접이 사소하고 실천적인 것이었음을- 잊어버린다: 융은 정신분석 가가 轉移에 있어서 자주 악마, 신, 마법사로서 나타나며, 그 역할들이 부모의 이미지들을 너무나 넘어선다고 지적하였다. 나중에는 모든 것이 나쁘게 돌아갔지만, 출발점은 좋았다. 어린이들의 놀이도 이와 마찬가지 이다. 어린이는 그저 아빠-엄마로만 놀지는 않는다. 그는 또한 마법사, 카우 보이, 순경, 도둑으로 놀며, 또 기차와 작은 자동차로도 논다. 기차 38) Melan ie Klein , Essai de psy c hanalys e , tr. fr. Pay o t, pp. 269-271( 고딕체 로 한 것은 저자들이다). @ rep re senta n ts . 〈表象表現〉이라 옮길 수도 있다.
는 으레 아버지인 것도 아니요 , 정거장이 으레 어머니인 것도 아니다. 문제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性的 성격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 성욕의 가 족적 성격에 관한 것이다 . 어린이가 크면 더 이상 가족적이지 않은 사회 적 관계들에 매이게 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 그런데 이 관 계들이 나중에 생긴다고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길은 둘밖에 없 다 : 하나는 성욕이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 나중에 〉 의 형태로 사회적 (또 형이상학적) 관계들 속에서 昇 華 되거나 中和된다고 보는 길이요, 다른 하 나는 이 관계들이 성적인 것이 아닌 에너지롤 작동시키며 , 성욕은 이 에 너지를 이번에는 신비적인 〈 彼岸 〉 으로서 상정화하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보는 길이다 . 여기서 프로이트와 융 사이에 사태가 악화한다 . 적어도 그 들은 다 같이 디음과 같은 것을 믿고 있다__리비도는 매개 없이 사회 적 혹은 형이상학적 영역을 마련할 수 없다. 사실 이렇지는 않다 . 놀고 있는, 혹은 기어다니면서 집안의 이 방 저 방을 뒤져보고 있는 어린이를 생각해 보자 . 그는 전기의 콘센트를 살펴보고 , 자기의 몸을 · 기계처럼 움 직이고, 다리 하니를 櫓처럼 사용하고, 부엌과 서재에 둘어가고 , 작은 자 동차들을 조작한다. 부모가 항상 거기에 있고, 부모 없이는 그가 아무것 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 그러나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다. 문제는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이 부모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체험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 출생 아래, 요람 , 어머니의 유방, 고무 젖꼭지, 배 설물은 그의 몸의 부분들과 연결된 욕망하는 기계들이다. 그 어린이가 부분적 대상들 가운데서 살고 있다고 말하는 동시에 또 그가· 부분적 대 상들에서 파악하는 것은 단편으로 되어 있는 인물로서의 부모 자체하고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모순된 일로 보인다. 유방이 어머니의 신체로부 터 채취된다는 것은, 아주 엄밀하게 말하면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 방은 하나의 욕망하는 기계의 부품으로서 존재하며, 어린이의 입과 연결 되고, 혹은 붉고 혹은 진한 그러나 인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젖의 흐 름에서 채취되기 때문이다. 욕망하는 기계, 부분적 대상은 아무것도 대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녕 관계들 을 밀받침하는 것이요 동인들을 배분하는 것이다 . 그러나 이 동인들은
인물들이 아니요, 또 이 관계들은 間主觀的인 것이 아니다. 이 관계들은 바로 생산의 관계들이요, 이 동인들은 생산과 반생산의 동인들이다. 브래 드베리 Bradbur y는 育兒室을, 생산하는 욕망과 집단 환상의 장소로 묘사 하고 있는데, 이때 그는 위의 사실을 찰 밝히고 있다. 이 장소는 부분적 대상들과 동인들을 결합시키는 일만 하는 곳이다 .39) 어린아이는 항상 가 정 안에 있다. 그러나 가정 안에서 그리고 처음부터 비가정적인 무서운 경험을 직접 하고 있는데 정신분석은 이 경험을 못 본 척한다. 린드너의 그립.
39) Bradbury, L'Homme illu . stre, La Brousse, tr. fr. Danoel.
어린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부모의 사랑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 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욕망하는 생산에 있어서 부모가 차 지하는 위치와 그들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요, 이와 반대로 욕 망하는 기계들의 모든 작동을 오이디푸스의 제한된 규준 속에 포개넣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부모가 디론 동인들과 관계하면서 특별한 동인 으로서의 자리를 차지하고 기능을 맡게 되는 것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 일인가? 왜냐하면 오이디푸스는 처음부터 사회 터전, 리비도에 의해서 직접 마련된 생산의 터전의 네 모퉁이에 열려 있는 限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욕망하는 생산의 등록의 표면에 나타난다는 것은 명백 해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오이디푸스의 문제 전체이다 : 어떤 힘들 이 작용하여 오이디푸스의 삼각형화가 닫혀지는가? 이 삼각형화가 자기 스스로는 이것을 가지고 있지 않는 표면에다가 욕망의 물줄기를 통하게 하는 것은 어떤 조전들 아래에서인가? 어떻게 이 삼각형화가 모든 면에 서 이것을 넘는 경험들과 기계적 작동들에 대한 어떤 유형의 등기를 형 성하는가? 이 방향에서, 오직 이 방향에서만, 어린이는 부분적 대상인 유 방울 어머니라고 하는 사람에 관계짓고, 끊임없이 어머니의 얼굴을 살핀 다. 〈관계짓는다〉는 것은 여기서 자연스러운 생산적 관계를 가리키는 것 이 아니고, 등기에서의, 누멘에서의 하나의 보고, 하나의 등기를 가리킨 다. 어린이는 아주 어릴적부터 전적으로 욕망하는 생활을 한다. 욕망의 대성들 및 욕망의 기계들과 더불어 온갖 비가정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
의 생활은 직접적 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부모와 관련이 없지만, 생산의 진행의 등록의 관점에서 보면, 이 등록의 아주 특수한 조건들 아래(사랑 이나 미움으로 더불어) 부모와 관련되어 있다. 이때 이 조건들이 생산의 진행 자체에 대하여 반작용(피드 백 fee d back) 을 하기는 해도 말이다. 어린이가 자기의 생활을 체험하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고 묻는 것은 부분적 대상들의 한가운데서요 또 욕망하는 생산의 비가족적 관계들 안 에서이다. 이 물음이 부모와 〈 관계지어져〉야 하고 가족적 관계들 안에서 만 잠정적 해답을 얻을 수 있기는 해도 말이다. 〈 나는 여덟 살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늘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인지, 왜 사는지 자문했 던 것이 생각난다. 나는 여섯 살 때 마르세유의 블랑카르드 街(정확히 말하면 5 약 1 지)의 어느 집에서 어머니라고 하는 어떤 여인이 내게 준 초 콜릿빵을 먹으면서, 존재한다는 것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숨쉬고 있음 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지 자문하였고, 살아 있다는 사실을 실 감하기 위하여 또 이 사실이 니에게 어울리는 일인지 그리고 어울린다면 어떤 접에서 어울리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숨을 쉬려 했던 것이 생각난 다.〉 40) 여기에 본질적인 것이 있다: 한 물음이 어린이에게 제기되고 있 는 것이다. 그 물음은 아마도 어머니라고 불리는 여인에게 〈관계지어질〉 수는 있으나, 그 여인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욕망하는 기계 들의 작동 속에서, 가령 입-공기기계 혹은 미각기계의 차원에서 생긴 다-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숨쉰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기관들 없는 내 신체에서 숨쉬는 기계란 무엇인가? 어린이는 하나의 형 이상학적 존재이다. 데까르트의 코기토 co git o( 나는 생각한다)에서처럼 부모는 이 물음 속에 없다. 이 물음이 (부모에게 던져지고 표현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 부모와 관계지어져 있다고 하는 사실과 이 물음이 (부 모와 더불어 자연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 부모와 관련 된다고 하는 생각을 혼동하는 것은 찰못된 일이다. 어린이의 생활을 오 이디푸스의 틀 속에 구겨넣음으로써, 가족적 관계들을 유년시철의 보편 적 매개물로 삼고, 무의식 자체의 생산과 무의식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40) Arta u d , Je n' ai jam a is rie n etu d ie. . ·, in 84, dee. 1950.
집단의 메커니즘들을 알아보지 못하게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관들 없는 신체의 최초의 억제작용 전체를 알아보지 못하게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孤兒요, 그 자체 자연과 인간이 하나 인 데서 생기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지동생산이 생기는 것은 바로 데까 르트의 코기토의 주체가 부모 없이 자기를 발견했던 지점에서요, 또 사 회주의 사상가가 생산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통일을 발견했던 지점에서 요, 순환현상이 부모에로의 무한정한 退行에 대하여 자기의 독립을 발견 하는지점에서이다. 난 아빠-엄마의 것 아냐 우리는 〈과정〉이란 말의 두 가지 의미가 어떻게 혼동되어 갔는가 하 는 것을 살펴본 바 있다: 자연 안에서의 다이몬의 형이상학적 생산으로 서의 과정과, 역사에 있어서의 욕망하는 기계들의 사회적 생산으로서의 과정이 혼동되어 왔음을 살펴보았다. 사회적 관계들과 형이상학적 관계 들은 〈나중에〉라든가 〈저편에〉라든가를 구성하지 않는다. 이 관계들은 모든 심리-병리학적 결정기관들에서 인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신병의 증후군이 가장 어리석고 가장 비사회화된 양상들을 띠고 나타나서 문제 가 되면 될수록 이 관계들의 중요성은 그만큼 더 커질 것이다. . 그런데 이 관계들이, 전체로서의 욕망하는 생산의 법칙들을 따라, 부분적 대상 둘, 생산의 동인들, 반생산의 요인들과 더불어 하나로 짜여지는 것은 이 미 어린이의 생활 속에서요, 젖먹이 때의 가장 기본적인 행동들부터이다. 이 욕망하는 생산의 본성이 어떤 것이지, 또 어떻게, 어떤 조건들 아래, 어떤 압력들 아래 오이디푸스적 삼각형화가 생산의 진행의 등록 속에 끼 여드는지롤 처음부터 보아두지 않으면, 우리는 널리 퍼져 일반화된 오이 디푸스주의의 올가미에 걸려들게 된다. 이 오이디푸스주의는 어린이의 생활과 그 후의 경과, 성인의 신경증과 정신병의 문제들 그리고 성욕 전 체를 근본적으로 왜곡한다. 정신분석에 대한 로렌스의 반발을 상기하고
잊지 않기로 하자. 적어도 그는 정신분석이 성욕을- 발견한 것을 보고서 여기에 두려움을 느껴 정신분석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는, 정신분석이 성욕을 부르주아의 장식들이 달린 괴상한 상자 속에, 몹시 역겨운 일종의 인공적 삼각형 속에 가두어버리고 있는 중인데, 이 삼각형은 욕망의 생산으로서의 성욕 전체를 질식시켜, 새로운 양식으로 성욕을 〈더러운 작은 비밀〉, 가족의 작은 비밀이 되게 하고, 자연과 생 산이라고 하는 굉장한 공장 대신에 私的인 집안의 극장을 꾸미는 것이라 는 인상, 순수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성욕이 더 많은 힘 혹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인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정신분석 은 〈그 더러운 작은 비밀을 소독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대의 폭군인 오이디푸스의 가없고 더러운 비밀이 씻겨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 러니 정신분석이 우리를 낮추고, 우리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우리를 죄인 이 되게 하는 낡은 시도를 다시 해보는 일이 가능한가? 미셸 푸꼬 Mi ch el Foucaul t는 어떤 접에서 광기와 가족의 관계가 1~➔ ] 기 부르주아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친 발전, 또 가족의 성원들의 책임과 그들이 품게 될지도 모를 죄책감을 평가했던 기능을 가족에게 떠맡긴 발전에 기초를 두고 있었던가를 지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신분석이 광기를 〈부모 콤플렉스〉 속에 집어넣고, 죄책감의 고백을 오이디푸스에서 유래하는 自 己刑罰의 모습들에서 다시 찾아냄에 따라, 정신분석은 혁신하는 일은 하 지 못하고, 19A1| 기의 정신의학이 시작했던 일을 완성하고 있다. 즉, 정신병 리학의 가족적이고 교화적인 言說울 높이고, 광기를 가족의 〈반현실적, 반상상적 변증법〉에 결부시키고, 〈아버지에 대한 끊임없는 침해〉, 〈견고 한 가족제도에 대한 그리고 가장 오래된 그 상칭들에 대한 본능들의 집 요한 암투〉를 이 변증법으로 解讀하는 일을 완성하고 있는 셈이다 .41) 이 렇게 되면, 정신분석은 실제적인 해방의 사업에 참여하는 대신, 가장 일 반적인 부르주아의 억압의 작업에 가담한다. 이 억압은 유럽의 인간성을 아타-엄마의 멍에에 묶고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데 성립하였다. 41 ) Mi ch el Foucault, Hi st o i r e de la foli e a l’ag e classiq u e, Plon , 1961.
재 2 장 정신분석과 가족주의 : 신성가족
1 오이디푸스 제국주의 한정된 오이디푸스는 아빠-엄마-나의 삼각형의 모양을 가지고, 인물 로 되어 있는 가족의 星座를 이룬다. 그러나 정신분석이 오이디푸스를 자기의 敎義로 삼을 때, 정신분석은 어린이에게는 이른바 前오이디푸스, 정신병자에게는 外오이디푸스, 다른 민족들에게는 抗오이디푸스의 관계들 이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교의로서의, 혹은 〈核을 이루는 콤플렉스〉 로서의 오이디푸스의 기능은 정신분석의 이론가가 일반화된 오이디푸스 란 생각에 도달하기 위하여 경주하는 대단한 노력과 분리될 수 없다. 한 편으로, 그는 남녀 두 성의 각 주체에 있어서의 충동을, 감정들 및 관계 들의 강도의 계열울 고려한다; 이것들은 콤플렉스의 정상적인 플러스의 형태와 그 역인 마이너스의 형태를 묶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 은 계열의 오이디푸스인바, 프로이트는 이것을 『自我와 이드』에서 제시 하였는데, 이것은 또한 필요에 따라 전오이디푸스적 단계들을 부정적 콤 플렉스에 결부시키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정신분석 의 이론가는 환자들 자신이 外延的으로 공존하고 다양한 상호관계를 맺 고 있음을 고려한다: 이것은 집단의 오이디푸스인바, 傍系 親族, 자손들, 조상들을 통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이디푸스화에 대한 정신분열자의 뚜렷한 저항, 오이디푸스적 유대의 명백한 不在가 祖父母를 포힘하는 오 이디푸스 星座에서는 희미해질 수 있다. 정신병환자를 하나 만들려면 三 代의 축적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이건 혹은 조부모가 정신병에 더욱더 직접 개입하는 메커니즘이 발견되어 오이디푸스의 제곱을 만들게 되어서
이건, 어떻든 오이디푸스화에 대한 정신분열자의 저항이 분명치 않게 될 수 있다: 신경증, 그건 아빠-엄마이지만, 할머니, 그건 정신병이디라고 하게 된다.) 끝으로 상상적인 것과 상칭적인 것의 구별은 입장들과 기능 둘의 체계로서의 오이디푸스적 구조를 끌어낼 수 있게 한다. 이 입장들 과 기능들은 일정한 사회적 혹은 병리학적 조직체 속에서 이것들을 갖게 되는 사람들의 가변적 형상과 합치하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구조의 오이디푸스 (3+1) 는 삼각형과 합치하지 않고, 도리어 일정한 영 역에서 욕망, 그 대상 그리고 그 법칙을 배분함으로써 가능한 모든 삼각 형화를 조직하는 것이다. 앞에 밀한 두 가지 일반화의 양식이 구조적 해석에서만 그것둘의 진정 한 타당성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바로 이 해석이 오이디 푸스를 일종의 보편적인 정통의 상징이 되게 하고, 모든 상상적 양상들 저편에 이 상칭을 세워놓는다. 이 해석은 또 오이디푸스를 前오이디푸스 적 단계들, 갖가지 모양의 抗오이디푸스적인 것들, 外오이디푸~ 현상 들의 좌표축들이 되게 한다. 가령, (라깡의) 〈排除〉란 개념은 본래 구조 적으로 비어 있는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비어 있는 곳을 이 용함으로써 정신분열자가 자연스럽게 오이디푸스의 축에 다시 놓이게 되 고, 오이디푸스의 궤도에 다시 울려놓아진다. 이것은 가령 삼대를 겨냥함 으로써 행해진다. 히 경우 어머니는 자기지신의 아버지에게 맞대놓고 욕 망을 드러낼 수 없었고, 아들은 아들대로 이때 이후 어머니에 대하여 맞 대놓고 욕망을 드러낼 수 없었다. 라깡의 한 제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쓸 수 있다: 우리가 고찰하려는 것은 먼저 〈오이디푸스적 조칙이 정신 병들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기 위히여 사용하는 수단들이다; 그 다 음엔 정신병의 前性愛期의 형태들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이 형태들이 오 이디푸스적 좌표를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위 에서 행한 오이디푸스 비판은 마치 그것이 상상적인 오이디푸스만을 문 제삼고 또 부모의 형상들의 역할을 다루어, 상칭적인 자리들과 기능들의 구조와 그 질서에는 전혀 손을 대지 못한 것 갈아, 피상적이고 보찰것없 다고 판단될 우려가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차이가 바
로 여기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진정한 차이는 상상적이기도 하지만 구조적이기도 한 오이디푸스와 모든 오이디푸스가 짓누르고 억압하는 다 른 어떤 것, 즉 욕망하는 생산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욕망하 는 생산은 욕망의 기계들인데, 이 기계들은 구조에도 인물들에도 환원될 수 없는 것이요, 상징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을 다 걷이 넘어 혹은 이것 둘 아래에서 현실 자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말리노스키 Malin o wski 는 고찰되는 사회 형태를 따라 오이디푸스의 형상이 달라전다는 것을 밝 혔는데, 우리는 이러한 시도를 다시 해보려고는 전혀 하지 않는다. 오이 디푸스가 일종의 달라지지 않는 것으로 제시될 때 우리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의 말을 믿기조차 한다. 그러나 문제는 아주 다른 곳에 있 다: 무의식의 생산들과 이 달라지지 않는 것 사이에(욕망하는 기계들과 오이디푸스적 구조 사이에 )는 합치하는 점이 있는가? 혹은 그 달라지지 않는다고 하는 오이디푸스는 그 모든 달라전 모습들과 양상들을 통하여 하나의 오랜 誤器의 역사를, 또 끝없는 억제를 나타내고 있을 따름이 아 닌가? 우리가 문제삼는 것은 정신분석이 실천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골몰 하고 있는 맹렬한 오이디푸스화이다. 정신분석은 심상과 구조가 결합된 수단들을 가지고 이 일에 골몰하고 있다. 그래서 라깡의 몇몇 제자가 최 근에 좋은 책을 몇 권 저술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라깡의 사상이 정 말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따져보려 한다. 정신분열자마저 오이 디푸스화하는 것만이 문제인가? 혹은 이와 다른 것, 심지어 이에 반대되 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정신분열중화하는 것, 죽 무의식의 영역을, 또 I ) 〈『토템과 터부』는 빗나가고 있다고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은 정말 내가 프로이 트에게로 돌아갈 것을 권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그렇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프로이트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무의식의 形成物둘기 어떤 것 인지를 아는 데 있어 나에게 도움을 준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는 오이디푸 스가 아무 쓸모도 없다고 말하고 있지도 않으며, 또 그것이 우리가 하고 있는 일과 아무 관계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정신분석가들에 게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신분석가들이 확실하게 정신분석가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다……. 이것은 그둘이 한창 날리고 있을 때에 내가 말했던 것들이다. 그때 나 는 바로 정신분석가돌로서 대해야 할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 차원
에서 아버지의 隱哈에 관하여 말하였지, 결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관하여 말 하지는 않았다… …> (L acan , sem .ina i re 1970) .
사회적 • 역사적 영역을 정신분열중화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그리하여 오이디푸스의 목을 조이는 쇠고리를 풀어제치고 도처에서 욕망하는 생산 둘의 힘을 다시 발견하고, 분석기계, 욕망 및 생산의 유대를 바로 현실에 다가 다시 결부시키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왜냐하면 무의식 자체는 더 이상 구조적인 것도 인물에 관한 것도 아니요, 상징하지도 상상하지도 않으며 형상을 그려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기계로서 작동 하며, 기계적이다. 그것은 상상적인 것도 상징적인 것도 아니며, 현실 자 체요, 〈 불가능한 현실 〉 또 그 생산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이 등장한 이래의 기간만을 두고 생각하더라도, 도대 체 이 긴 역사는 무엇인가? 이 역사에는 여러 가지 회의, 굴곡, 후회가 없지 않았다. 라뿔랑슈 La p lanche 와 뽕딸리스 Pon t a li s 는 프로이트가 189 '71;1에 자기분석을 하는 중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 발견하고 〉 있 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192 31;1에 가서야 『 自我와 이드 』 에서 최초의 일반화된 이론적 정식을 내어놓고 있다는 것, 또 189 '71;1에 서 1923 년에 이르는 어간에는 오이디푸스가 오히려 부슈쿠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가령 『性怒理論에 관한 세 論文』 속의 사춘기에 있어서의 대상 선택에 관한 따로 쓴 한 장 혹은 (『꿈의 解釋』 속의) 전형적인 여러 가 지 꿈에 관한 따로 쓴 한 장〉에 隔離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프로이트가 外儀性 精神障碑의 이론과 유혹에 관한 이 론을 어느 정도 포기함으로써 이것이 그로 히여금 오이디푸스의 _義的 규정에 나아가게 한 것이 아니고, 또한 내부성장의 성격을 띤 어린이의 자발적 성욕을 기술하는 데 나아가게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모든 것 은 마치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와 어린이의 성욕을 서로 연접시키는 데 이르지 못하였던〉 듯이 추이하고 있다. 어린이의 성욕은 발전 과정의 생 물학적 실재에 관계지어지고, 오이디푸스는 환상의 심리학적 현실에 관 계지어지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생물학적 실재론을 위하여〉 없어질 뻔 했던 것이다 .2)
그러나 사태를 이렇게 제시하는 것은 정확한 일인가? 오이디푸스의 제 국주의는 생물학적 실재론의 포기만을 요구하고 있었는가? 혹은 무한히 더 강력한 다른 어떤 것이 오이디푸스 때문에 희생되지는 않았는가? 왜 냐하면 프로이트와 최초의 정신분석가들이 발견하고 있는 것은, 모든 것 이 가능한 자유로운 종합들의 영역, 죽 끝없는 연결둘, 배타적이지 않은 이집들, 특수성이 없는 결합들, 부분적 대상들 및 흐름들이기 때문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무의식의 밑바닥에서 으르렁거리고 윙윙거리고 있다. 이르마 Irma 의 注射, 이리 사나이 ®의 똑딱거리는 고리, 안나 &ma 의 기 침하는 기계, 또 프로이트가 조립한 모든 설명장치들, 이 모든 신경생물 학적으로 욕망히는 기계들이 으르링거리고 있다. 그리고 생산적 무의식 의 이 발견은 두 개의 相關項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이 욕망 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 사이에, 症候學的 형성물들과 집단적 형성물들 사이에 직접적 대결이 있는데, 이것들은 그 본성이 같으면서 그 체제를 달리하고 있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사회기계가 욕망히~근 기계들을 억압 하고 있고, 이 억압이 억제와 관계하고 있는 점이다. 오이디푸스의 主權 의 확립과 함께 이 모든 것은 행방불명이 된다. 혹은 적어도 기묘하게 타협하게 된다. 자유로운 連想이 多義的인 연결들에 대해서 열리지 않고, 오히려 一義性의 막다른 골목에 다시 갇힌다. 무의식의 모든 연쇄는 일 대일로 대응시켜지고, 칙선화되고, 전제 군주인 시니피앙에 매달린다. 모 든 욕망하는 생산이 짓눌리고 表象의 요구들에 굴복하고, 표상 속의 표상 하는 것과 표상되는 것의 음침한 놀이들에 굴복한다. 여기에 본질적인 것이 있다: 욕망의 재생산이 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치료의 과정에서도 단순한 표상에 자리를 내어준다. 생산적 무의식이 이제는 자기를 표현할 줄밖에 모르는-신화, 비극, 꿈에서 자기를 표현할 줄밖에 모르는- 2) J. Lapl a nche et J. B. Ponta lis, Fanta s me orig ina i re , fan ta s mes des orig ine s et orig ine du fan ta s me, Thmp s modemes, n°215, avril 1964, pp. 1844-1846. CD l'H omme aux loup s. EJ료이르 훑j. 이 환자는 꿈속에서 자기집 창문 밖에 흰 이리가 예닐곱 마리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이 이리들은 그의 가족을상징한다.
무의식에 자리를 만들어준다. 그러나 이러한 변형의 작업을 고려한다 해 도, 누가 우리에게 꿈, 비극, 신화가 무의식의 형성물들에게 어울린다고 말하는가? 인간과 자연이 外延을 같이하는 영역에서 무의식이 자기 생산 울 한다는 데 대해서는 프로이트보다도 그로덱크 Groddeck 가 더 충실하 였다. 프로이트는 야생적 생산과 폭발적 욕망의 이 세계 앞에서 뒤로 물 러서고, 무슨 희생을 치르고서도 거기에 약간의 질서를, 고전적으로 된 그리스의 고대극장의 질서를 세우려 했던 것 갇다. 도대체 프로이트가 자기 분석에서 오이디푸스를 발견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정말 그의 자기 분석에서인가, 그렇지 않고 그의 괴테적 고전의 교양에서인가? 그는 자기 분석에서 어떤 것을 발견하고는 : 그래, 이건 오이디푸스를 닮았다!고 중얼거린다. 그런데 이 어떤 것을 그는 먼저 〈가족의 이야기〉의 한 변형으로 본다. 죽 욕망이 바로 가족의 규정들을 폭파시키는 수단으로 삼는 편집병적 등록의 한 변형으로 본다• 이와 반 대로, 가족의 이야기를 오이디푸스의 한갓 부속물로 삼는 일을 아주 조 금씩만 해나간다. 또 무의식 속의 모든 것을 오이디푸스화하는 동시에 신경증화하는 일, 무의식 전체에다가 가족의 삼각형을 덮어씌우는- 일도 조금씩만 해나간다. 정신분열자는 여기서 敵이다. 욕망하는 생산은 인물 화되고, 혹은 오히려 인물론화되고 상상화되고, 구조화된다. (앞서 우리 는 이 말들간에 진정한 차이나 경계는 없고, 이 말들은 아마도 서로 보 완한다는 것을 보았다.) 생산은 이제 환상의 생산, 표현의 생산일 따름이 다. 무의식은 참된 자기, 죽 하나의 공장, 하나의 작업장이기를 그치고, 하나의 극장, 죽 무대와 연출이 되고 만다. 그것도 프로이트의 시대에 있 었던 것 같은 前衛의 국장(베데킨트 Wede ki nd) 이 아니라, 고전적 극장, 표상의 고전적 질서가 되고 만다. 정신분석가는 생산의 단위들을 조립하 고 생산과 반생산의 집단적 동인들과 싸우는 기사나 기계 기술자가 되지 못하고 사적인 극장의 연출가가 되고 만다. 정신분석은 마치 러시아 혁명과 같아, 언제 악화될지 알 수 없는 것이 다. 줄곧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된 것은 미국 사람들 로부터인가? 제 1 인터내셔널부터인가? 비밀 위원회부터인가? 프로이트와
갈라진 사람들의 배반들 못지않게 프로이트 자신의 포기들을 보여주기도 했던 초기의 분열들로부터인가? 오이디푸스를 〈발견〉했을 때의 프로이 트 자신으로부터인가? 오이디푸스, 그것은 관념론에로의 전환점이다. 하 지만 정신분석이 욕망하는 생산을 무시하기 시작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욕망의 경제학의 근본적 개념들, 즉 노동과 두자는 그 중요성을 아칙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표현하는 무의식의 형태들에 종속하고, 더 이상 생산적 무의식의 형성물들에 종속하지는 않는다. 욕망의 생산의 無오이디푸스적 본성은 여전히 現前하고 있지만, 그것을 〈前오이디푸스 적〉, 〈抗오이디푸스적〉, 〈準오이디푸스적〉 등등으로 번역하는 오이디푸 스의 좌표들에 포캔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항상 현존하건만, 그것들은 이 제 정신분석 진료실의 벽 뒤에서만 움직인다. 최초의 환상이 모든 것을 오이디푸스의 무대에 포개놓을 때에는 벽 뒤나 무대 뒤가 이 환상이 욕 망하는 기계들에게 양보하는 장소이다 .3) 욕망하는 기계들은 여전히 지옥 의 소란을 피우고 있다. 정신분석은 이것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그 태도는 오히려 현실부정에로 기운다: 그건 모두 사실이지만, 바로 아빠 엄마에 관한 것이라고 정신분석은 말하는 것이다. 진료실 정면에는 다음 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네 욕망하는 기계들을 입구에서 내버리라, 네 고아기계들과 독신기계들, 네 테이프 레코더와 네 작은 자전거를 버리라, 둘어와서 너를 오이디푸스화하라. 모든 것은 여기서부터 생긴다. 죽 치료 의 이상한 성격에서부터 몹시 契約的인 치료의 성격, 돈의 흐름에 걸맞 는 말의 흐름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기서부터 생긴다. 이렇게 되면 정신 병의 에피소드라 불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정신분열증의 번득임만 있으 면 그만이다. 어느 날 우리가 테이프 레코더를 들고 정신분석가의 진료 실에 들어간다, 멈춰, 욕망하는 기계의 침입, 그러자 모든 것이 뒤집힌다. 우리는 계약을 쨌다. 우리는 제 3 자를 배제한다는 대원칙에 충실하지 않 았다. 우리는 제 3 지를 끌어들였다. 사람인 욕망하는 기계를 끌어들였 3) 〈최초의 환상〉 속에 하나의 작은 기계가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무 대 뒤에 존재한다는 점에 관해서는 cf. Freud, Un cas de pa ranoia qu i con- tred is a it la the orie psych analyt iqu e de cett e affect i on , 1915.
다? 하지만 정신분석가마다 오이디푸스 밀에서, 오이디푸스를 꿰뚫고, 오이디푸스의 배후에서 사실은 욕망하는 기계들과 상관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처음에, 정신분석가들은 오이디푸스를 끌어들이 고, 무의식 전체 속에 그것을 주입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디는 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오이디푸스는 마치 욕망의 모든 생산력이 자기에게서 생겨나오기나 한 양 욕망하는 생산에 포개어져서 이것을 자 거의 것으로 만들었다. 정신분석가는 오이디푸스의 시녀, 욕망 속의 반생 산의 큰 대리인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자본의 이야기, 마법에 걸리고 기 적을 받은 자본주의 세계의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이다• (마르크스는, 처음에는 최초의 자본가들도 역시 그러한 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고 말하였다…… . ) 4) Je an-Ja c q u es Abrahams, L'Homme au mag ne fo ph one, dial og ue ps y - chanalyt iqu e, 'lem p s modernes, n °274, avril 1969 :
2 프로이트의 세 덱스트 문제가 먼저 실천적인 것이요, 무엇보다도 치료하는 일에 관련되어 있 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맹렬한 오이디푸스화의 과 정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오이디푸스가 〈核을 이루는 콤플렉스〉로서 아직 이론적으로 충분히 정식화되지 않고 權外的 존재였던 때이기 때문 이다. 슈레버를 분석한 것이 살아 있는 그를 대상으로 하고서 행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치료하는 일의 관점에서 이 분석의 범례로서의 가치가 조 금이라고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다음과 같은 가장 위험한 문제에 부딪히는 것은 슈레버를 분석한 저 덱스트 (1911) 에서이 다: 그 법원장의 망상과 같은 그토록 풍부하고 그토록 특유하고 그토 록 〈신적인〉 망상을 어떻게 당치도 않게 아버지의 주제에 환원시키는 가? __ 그 법원장이 그의 회상록에서 아버지의 기억에 대해서는 아주 짧 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이미 주목되고 있으니 말이다. 프로이 트의 텍스트는, 여러 번 되풀이하여, 그가 어떤 점에서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가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로, 우연한 원인일지는 모르나, 의사 플레 히지히 Flechs ig의 인격에 대한 〈동성애적 리비도의 昴進〉을 그 병의 원 인으로 보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 의사를 아버지로써 代 置하고, 이 아버지에게 망상의 신을 설명하는 책임울 지울 때, 우리들 자 신은 이 상승훈동 을 따라가기가 힘들며, 우리논 망성을 이해하는 우리의 관접에서 여러 가지로 유리하기 때문에만 정당화되는 권리들을 요구한다 (296, 298). 하지만, 프로이트는 이러한 주저들을 분명히 말하면 말할수
록, 더욱 이 주저들을 물리치고, 이것들을 하나의 확고한 답 속에 쓸어넣 는다. 그리고 이 답은 이중으로 되어 있다. 정신분석이 하나의 큰 단조로 움에 빠져 도처에서, 플레히지히에게서, 신에게서, 태양에서 아버지롤 재 발견한다 해도 그것은 내 찰못이 아니다. 그것은 성욕과 성욕의 집요한 상칭성의 잘못이다 (301). 다른 한편으로, 아버지가 가장 알아보기 어렵고 가장 감추어전 형태들을 취하면서 줄곧 현실적인 망상들 속에 되돌아오 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그야말로 도처에 되돌 아오는데, 이것은 고대의 신화들과 종교들에서 더 뚜렷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 신화들과 종교들은 무의식 속에서 영원히 작용하고 있는 힘들과 메커니즘들을 표현하고 있다 (298, 323). 법원장 슈레버는 그 생존 시에 하늘의 광선에 의하여 男色을 딩하는 운명만 아니라 사후에는 프로 이트에 의하여 오이디푸스화되는 운명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확 인해야 한다. 슈레버의 막대한 정치적, 사회적 및 역사적 내용에 관해서 는, 마치 리비도가 이런 것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양, 한 □ 1-C-|도 언급되 고 있지 않다. 다만 성적 논의와 신화학적 논의만이 원용되고 있는데, 전 자는 성욕과 가족 콤플렉스의 용접을 조직히는 것이요, 후자는 무의식의 생산적인 힘과 〈신화들 및 종교들의 교화하는 힘들〉의 합치를 정립하는 것이다. 이 신화학적 논의는 매우 중요하며, 여기서 프로이트가 융과의 일치를 표명하고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어떤 접에서는 이 일치가 그들 의 결렬 후에도 존속하고 있다. 왜냐하면 무의식이 신화들과 종교들에서 적철하게 표현된다고 생각하더라도(물론, 거기에는 항상 변형의 작업이 있 다는 것은 고려하고서 말이다), 이 적절함을 규정하는 대에는 두 가지 방 식이 있지만, 이 두 방식은 무의식을 신화의 척도로 측정하고, 또 처음부 터 생산적 형성들을 단순한 표현 형태들로 대치한다고 하는 公準을 공통 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 신화로 되돌아가는가? 왜 신화를 모델로 삼는가? 하는 근본 문제는 무시되고 제쳐놓아지고 있다. 이렇게 되면 무 의식과 신화들 및 종교들과의 상상된 어울림은 〈높은 데〉를 지향하는 이른바 신비적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혹은 거꾸로, 〈낮은 데〉로
향하는 정신분석의 방식으로기 충동결요 신화에 관련시켜 해석할 수도 있 다_―그러나 충동들은 여러 가지로 변형됨을 고려하여 신화로부터 轉寫 되고, 신화로부터 差減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가 여기서 말 하고 싶은 것은 동일한 공준에서 출발하여 융은 가장 확산되고 가장 영 적인 종교성에로 인도되고, 프로이트는 가장 엄격한 무신론을 확고히 가 지게 된다는 점이다. 두 사립이 다 같이 공준으로 삼은 적합성을 해석하 기 위하여 융이 신적인 것의 본질을 긍정하는 것 못지않게 프로이트는 신의 현존을 부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종교를 무의식적인 것이 되 게 하거나 무의식을 종교적인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종교적인 것 울 무의식 속에 집어넣는 것이다. (사람들이 무의식에 돌리고 있는 저 유 명한 죄책감들이 없 E 는· 프로이트의 분석은 무엇이 되겠는가?) 그런데 정신 분석의 역사에는 무엇이 일어났는가? 프로이트는 마치 영웅처럼 자기의 무신론에 집착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위에서는, 더욱더, 사람들이 그로 하여금 경건하게 말하게 하고, 이 노인으로 하여금 자유로이 말하게 하 여, 그의 등뒤에서는 교회들과 정신분석의 화해를 준비하는 데로 나아갔 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그 자체의 정신분석가들을 형성하게 될 것이고, 또 정신분석의 역사 속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씌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아직도 우리는 경건하다! 마르크스의 위대한 선언을 상기하 자: 신을 부인히는 사람은 〈이차적인 일〉밖에 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의 현존을 내세우기 위하여, (변형을 인정하고서) 인간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기 위하여 신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5) 그러나 인간의 자리가 전혀 딴 곳에, 죽 인간과 자연이 의연을 걷이하고 있는 데에 있 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의 낯선 존재, 자연과 인간을 초월한 데 자 리잡은 존재〉에 관한 문제의 가능성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 제 더 이상 이 매개물, 죽 신화가 필요치 않다. 그에게는 더 이상 신의 현존을 부인한다고 하는 이 매개가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그는 무의식 5) Marx, Economi e et ph il o sop h ie , Pleia d e, II, p. 98. 그리고 이 접에 관한 Fran~ois Cha t ele 떠 훌륭한 주석, La Qu esti on de l'at h e is m e de Marx, in Etu d es ph il o sop h iq u es, juille t 1966.
의 자동생산의 영역들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 영역들에서는 무의식이 고아인 동시에 무신론자인데, 직접적으로 고아요, 직접적으로 무신론자이 다. 그리고 아마도 첫째 논의를 검토해도 우리는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 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욕을 가족 콤플렉스에 용접시킴으로써, 오이 디푸스를 정신분석에 있어서 성욕의 기준, 더할 나위 없는 정통성의 시 금석으로 삼음으로써, 프로이트는 그 자신 사회적 관계들과 형이상학적 관계들 전체를 나중에나 있는 것 혹은 피안에나 있는 것으로 정립하였 고, 이 관계들을 욕망은 직접 마련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 피안이 분석에 의하여 변형된 욕망의 가족 콤플렉스에서 유래하 는지 혹은 신비적 상칭화 속에서 그에 의하여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지에 대하여는 아주 무관심하게 된다 . 좀더 뒤에 나온 프로이트의 다론 텍스트, 『어린이가 매는 맞는다 』 (1919) 를 고찰해 보자. 여기서는 오이디푸스가 이미 〈 핵을 이루는 콤플 렉스〉로서 제시되고 있다. 이 덱스트의 독자는 불안케 하는 이상함이 있 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의 데마는 결코 희미하지는 않았 지만, 이렇게까지 열정과 결단을 가지고 긍정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여기서는 오이디푸스의 제국주의가 부재 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왜냐하 면 결국 소녀에게서 상정되는 환상의 세 시기 중, 첫째 시기는 아버지가 아직 거기에 나타나지 않는 시기요, 셋째 시기는 아버지가 이제는 더 이 상 나타나지 않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남는 것은 둘째 시기인데, 이 시기에는 아버지가 〈전혀 아무런 애매함도 없이 〉 환하게 빛나고 있 다__그러나 바로 〈이 둘째 단계는 결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의식에 머물러, 이 때문에 결코 기억을 통해서 상기될 수 없고, 정신분석에 의해서 재구성되는 데 지나지 않지만 이 재구성은 필연적이 다〉. 사실상 이 환상에서는 무엇이 문제인가? 소년들은 더러 어떤 사람 에게, 가령 선생에게, 소녀들이 보는 앞에서 매를 맞는다. 처음부터 우리 는 프로이트의 이중의 환원을 보게 되는데, 이 환원은 결코 환상에 의하 여 불가피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제로서 프로이트에 의하여 요 구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프로이트는 환상의 집단적 성격을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에 환원시키기를 일부러 바란다: 매를 맞는 어린이들은· 어 느 모로나 〈 환자 자신의 대리인둘 〉 이고 때리는 사람은 아버지( 〈 아버지의 대리인 〉 )이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환상의 여러 가지 다른 형태들은 엄밀하게 배타택일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는 소년들로 조직되어야 한다: 그래서 여기에는 소녀의 계열과 소년의 계열이 있게 될 터이지만, 이 계 열은 대칭을 이루지 않는다. 여자의 환상은 세 시기를 가지며 그 마지막 시기는 〈 소년들이 선생에게 매를 맞는 〉 시기요, 남자의 환상은 두 시기 만을 가지고 있는데 그 마지막 시기는 〈 내 어머니가 나를 때리는〉 시기 이다. 오직 하나 공통된 시기(소녀들의 둘째 시기와 소년들의 첫째 시기) 는 두 경우에 아버지의 우세함을 분명히 단정하고 있지만, 이 시기는 실 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시기이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는 사태가 항상 이렇다. 남녀 두 성에 공통되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하지만, 이것은 두 성에다가 다 갑이 결여를 주고, 대칭적이지 않은 두 계열에다 가 결여를 분배하여, 너는 소녀이든가 소년이다!라고 _ 하는 이집들의 배 타택일적 사용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이다. 오이디푸스와 그 〈해결〉은 소년들과 소녀들에게 있어서 서로 다르지만, 사태는 마찬가지이다. 두 경 우에 거세에 있어서 또, 거세와 오이디푸스의 관계에 있어서 사태는 마 찬가지이다 . 거세는 공동의 운명, 죽 지배적이고 초월적인 남근인 동시 에, 소녀들에게 있어서는 陰莖에 대한 욕망으로서, 그리고 소년들에게 있 어서는 음경을 잃는 공포나 수동적 태도의 거부로서 나타나는, 배타택일 적 분배이다. 이 공동의 어떤 것은 무의식의 이집들의 배타택일적 사용 의 기초를 다지고 우리들에게는 忍從울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오이디푸스에의 인종, 거세에의 인종, 소녀들에게 있어서는 음경에 대한 욕망의 단념, 소년들에게 있어서는 남성으로서의 반항의 단념, 요컨 대 〈자기의 性의 甘受〉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6) 이 공 6) Freud, Analys e ter m ine e et analys e int e r m ina ble, 1937(tr . fr. Revue fra n~is e de psy c h analys e , 1938-1939, n 언) : 〈서로 대웅하는 두 主題는, 여 성에게 있어서는 음경에 대한 茨望, 죽 남성의 성기를 소유하려는 적극적 갈망 이요; 남성에게 있어서는 다른 남성에 대하여 수동적 혹은 여성적 태도를 취하 는 데 대한 반항이다……. 여성들의 마음을 돌이켜 음경에 대한 그녀들의 욕망
은 실현될 수 없다고 하여 그 욕망을 버리게 하려 하거나, 혹은 남성들에게 다 론 어떤 남성에 대한 수동적 태도는 거세나 다름없는 것이 아니고 많은 인간관 계에서는 불가피하다는 것을 납득시키려 할 때만큼 마치 사막에서 설교하고 있 다고 하는 느낌을 강하게 가지는 일은 철대로 없다. 가장 강한 轉移抵抗둘 중의 하나는 남성의 완강한 過劍狀慣에서 생긴다. 남성은 자기 아버지를 대신하는 사 람에게 굴복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그에게 감사할 의무를 지기를 거부하며, 따라 서 의사에게 治應되기를 거부한다…….〉
동의 어떤 것, 거대한 남근, 서로 포갤 수 없는 두 면을 지닌 결여는 순 전히 신화적인 것이다: 그것은 否定神學의 一者와 감은 것이다. 그것은 욕망 속에 결여를 끌어둘이고, 배타적인 계열둘을 생기게 하여 이 계열 들에다가 하나의 목표, 하나의 기원 그리고 하나의 인종의 길을 고정시 켜 준다. 이와는 반대되는 것도 말해야 될 것이다: 두 성 사이에는 공통적인 것이 하나도 없는 동시에, 두 성은 횡단적 방식으로는 끊임없이 서로 교 통하는데, 이 방식에 있어서는 각 주체가 두 성을 가지고 있으나 이것들 이 구분되어 있고, 또 E 톤 한 주체의 이 성 혹은 저 성과 교통한다. 이와 같은 것이 부분적 대상들의 법칙이다. 어떤 것도 결여하고 있는 것이란 없고, 하나의 결여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무의식 속의 이 접둘은 결코 배타택일인 것이 아니고, 엄밀하게 포괄적인 사용의 대상이 다. 이 사용을 우리는 나중에 분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반대되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프로이트는 하나의 개념, 죽 兩性具有란 개념을 준 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이 개념에다가 그가 요구했던 정신분석상의 자리와 범위를 결코 줄 수 없었던 것, 혹은 주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여기까지 가지도 않고, 멜라니 클라인의 뒤를 이어, 몇몇 분석가들이 女性 性器의 무의식적인 힘들을 부분적 대상들과 흐름 들에 관련시켜 적극적 성격둘로서 규정하려 했을 때, 활발한 논쟁이 벌 어졌다: 이 약간의 관점의 이동은 신화적 거세를 말살하는 것이 아니고, 성기가 거세에 의존한다고 여겨지는 대신 거세롤 步}적으로 성기에 의존 하게 하였는데, 이 약간의 관점의 이동이 프로이트에게서 큰 반대를 사 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관점에서 볼 때, 성기는 결여로부터라
야, 혹은 처음의 결여로부터라야 이해될 수 있지, 이것의 逆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에는 본래 정신분석적인 하나의 誤謀推理가 있다. (이 오류추리는 시니피앙의 이론에서 상당한 정도로 다시 볼 수 있는 것이 다.) 이 오류추리는 분리시킬 수 있는 부분적 대상으로부터 분리된 것으 로서의 하나의 온전한 대상의 정립에로 이행하는 데에 성립한다 . 이 이 행은 남녀 중 어느 한 성을 가전 고정된 나로서, 결정된 주체에 관련되 어 있다. 이 주체는 하나의 결여로서 어쩔 수 없이 폭군적인 온전한 대 상에 예속하여 살고 있다. 부분적 대상을 그 자체를 위하여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 자리잡게 할 때에는, 죽 유일의 주체로서의 〈나〉와 더불어가 아니고, 그것과 함께 욕망하는 기계를 형성하는, 그리고 그 각 요소가 적 극적으로만 규정되는, 거기 대응하는 다양성의 한가운데서 다른 부분적 대상들과 연결, 이접, 결합의 관계에 들어가는 충동과 더불어 기관들 없 는 신체 위에 자리잡게 할 때에는 아마 사태는 더 이상 같지 않다 . 〈거 세 〉 에 대해서도 오이디푸스화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세는 오이디푸스화의 완성이다. 오이디푸스화란 정신분석이 무의 식을 거세하고 거세를 무의식 속에 주입하는 조작이다• 무의식에 대한 실천적 조작으로서의 거세는, 전적으로 적극적이고 전적으로 생산적인 욕망하는 기계들의 수천의 흐름들-철단들이 하나의 동일한 신화적 장소 에 시니피앙의 통괄구획 속에 투사될 때 성취된다. 우리는 무의식이 알 지도 못하는 것들에 대한 連禧를 노래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무의식은 오이디푸스도 모르지만 거세도 모른다. 부모도, 신들도, 법률도, 결여 도…… 모르는 것처럼. 여성 해방 운동들이 다음과 갇이 말하고 있는 것 은 옳은 일이다: 우리는 거세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당신들을 상대하지 많가요 .8) 여기 대해서 남성들은 그건 바로 여성들이 거세되어 있는 증거 다라고 응답하거나_-혹은 자기들이 여성들과는 아주 다른 모양으로 거 7) 이 논쟁의 중요성에 관하여는 cf. Andre Green , Sur la Mere ph a lliqu e, Reuue f ra 따 a i se de psych analys e , jan vie r 1968, pp. 8-9. 8) Cf. 가령 사회적이기도 하지만 성적이기도 한 〈女性 r. .' lfA1들〉에 대한 프로이트 的기고 정신분석적 인 생긱에 대한 Bett y Fr i edan 의 온건한 反論 : La Femme my stiftee , 1963, tr. fr. Gonth ier , t. I, pp. 114 sq.
세되어 있음을- 아주 좋아하면서 〈 남성들도 역시 거세되어 있소 〉 라고 말 함으로써 여성들을 위로하는데, 이런 너절한 술책으로써는 여성해방운동 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여성해방운동들은 좀 애매하기는 해도 해방의 요구 전체에 속하는 것을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죽 그것 둘은 무의식 자체의 힘, 욕망에 의한 사회 터전의 공급, 억압적 구조들의 제거를 간직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여성들이 거세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무의식 자체 가 〈그것을 믿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애매성이 온통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에 적용된 믿음이란 무엇인 가, 생산하지는 않고 이제는 〈믿기〉만 하는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무의 식에다가 〈믿음들〉―-비합리적이기는커녕 오히려 너무나 합리적이고 匠 成 秩序에 일치하는 믿음들-울 주입하는 조작들과 술책들이란 무엇인 가? 〈어린이를 때린다, 어린이들이 매를 맞는다〉라고 하는 환상에 되돌아 가보자: 이것은 전형적으로 집단의 환상이다. 이 환상에서는 욕망이 사 회 터전과 그 억압적 형태들 자체를 공급한다. 거기서 무엇인가가 出演 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회적으로 욕망하는 기계의 출연이다. 이 기계의 산물들을 추상적으로 생각하여, 소녀와 소년의 경우를 분리하고, 마치 각 자가 자기의 아빠, 자기의 엄마와 자기만의 문제로 씨름하는 작은 나였 던 듯이 보아서는 안 된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각 개인에게서의 또 동 시에 집단의 환상의 조직을 주도하는 사회체에서의 소녀-소년, 생산과 반생산의 동인들인 부모 전체와 이것들의 相補性울 고찰해야 한다. 소년 들이 어린 소녀(보는 기계)의 에로틱한 무대 위에서 선생에게 매를 맞고 어른이 되는 것과 업마(항문기계)에게 안겨 매저키즘적으로 향락하는 것 은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소년들은 어린 소녀가 되어야만 볼 수 있고, 소녀들은 소년들로 되어야만 체벌의 쾌감을 체험할 수 있다. 이 것은 온통 하나의 코러스요, 하나의 몽타주이다: 월남 전쟁에 출정했다 가 고향 마을에 돌아와, 눈물을 홀리고 있는 누이들 앞에서 해병대의 방 랑아들은 그 무릎 위에 엄마를 앉혀 놓은 교관들에게 매를 맞고, 그렇
게도 자기들이 고약했고대 그렇게도 몹시 고문했던 것을 좋아하게 된다. 얼마나 이것은 나쁜 일인가, 그러나 얼마나 이것은 좋은 일인가! 아마도 영화 〈 北 緯 17 度線 〉 의 한 장면이 생각날 것이다: 거기서 장군의 아들인 빠똥 대령은 자기의 전우인 젊은이들은 굉장한 놈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 그들의 어머니 그리고 그들의 조국을 사랑한다, 그들은 죽은 전 우들을 장사 지내는 종교 의식에서 운다, 그들은 좋은 젊은이들이다라고 선언한다__그러고 나서 대령은 그 안색이 변하고, 얼굴을 · 찌푸리고, 군 복을 입은 위대한 편집병자의 모습을 드러내고 마침내 소리 지른다: 〈 그러니, 이건 정말 살인자들이야 〉 라고… …. 전통적인 정신분석이 그 교 관은 아버지요, 그 대령 역시 아버지요, 어머니 역시 아버지라고 설명할 때 이 정신분석이 욕망 전체를 리비도에 의하여 공급된 사회 터전과는 이제 아무 관계도 없는 하나의 가족적 규정에 포개놓고 있다는 것은 분 명한 일이다. 물론 아버지의 혹은 어머니의 어떤 것, 가령 아버지의 수 염, 어머니의 들어올린 팔 같은 것이 시니피앙의 연쇄 속에 언제나 들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집합적 동인들 가운데에서 잘 눈에 띄지 않는 자 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이디푸스의 項들은 삼각형을 형성하지 않고, 사회 터전의 모든 구석에 흩어져서 존재한다. 어머니는 교관의 무릎 위에 있 고, 아버지는 대령의 곁에 있다. 집단의 환상은 사회체에 연결되어, 그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회에서 전달과 집행의 말단 의 동인으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기는 하나, 사회체에 의하여 男色울 당 한다거나 남색당하기를 욕망한다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유래하 는것이 아니다. 집단 환상의 개념이 (장 우리 Jea n Our y의 주위에, 라 보르드 La Bor- de 팀의 업적들 속에서) 제도적 분석의 관접에서 만들어졌을 때, 맨 처 음의 과제는 개인 환상과의 그 본성상의 차이를 밝히는 것이었다. 집단 환상은 사회 터전을 현실적인 것으로만 규정하는 〈상칭적〉 분절들과 분 리될 수 없는 데 반하여, 개인 환상은 이 사회 터전 전체를 〈상칭적〉 所 與들 위에 포개놓았던 것이 분명해졌다• 이 첫째 구별을 연장하면, 개인 환상은 그 자체 現存하는 사회 터전에 연결되어 있기는 하나, 이 사회
터전을 상상적인 성질들을 가전 것으로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상상적 성질들로 말미암아 사회 터전에는 일종의 초월성 내지 불멸성 이 주어지고, 이것들을 빙자하여 개인 죽 나는 자기의 가짜 운명을 살아 간다: 그래서 장군은, 軍은 영원하기 때문에 내가 죽는 것은 대수롭지 않다고 말한다. 현존하는 사회질서에 주어진 불멸성은 내 속에 모든 억 압하는 일, 身元確認과 〈超自我形成〉과 거세의 현상들, 모든 욕망-포기 (장군이 되고, 하층 간부, 중간 간부, 상층 간부가 되겠다는 욕망의 포기)를 끌어넣고, 또 여기에는 이 사회 질서를 위하여 죽겠다고 하는 체념도 포 함되고 있는 한, 개인 환상의 상상적 처원은 죽음의 충동에 대하여 결정 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한편 이 충동 자체는 밖으로 두사되어 타인들을 겨냥한다. (의국인에게는 죽음을, 우리 편이 아닌 자들에게는 죽음을!) 이와 반대로 집단 환상의 혁명적인 極은 제도들 자체를 可死的인 것으로 서 경험하며 살아가는 힘 속에, 죽음의 충동을 참된 제도적 창조성이 되 게 하면서 욕망과 사회 터전의 분절들을 따라 제도들을 파괴하거나 변화 시키는 힘 속에 나타난다 .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 혁명적 제도와, 법률이 기성 질서 안에처 제도들에게 주는 거대한 情性울 가르는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교회들, 군대들, 국가들, 이 모든 것들 중 죽고자 하는 것은 어느 것인가? 여기서 집단 환상과 개인 환상 사이의 셋째 차이가 생긴다: 이 차이는 후자가 〈나〉를 주체로서 가지고 있는 접이다. 이때의 니는 그 속에서 그것이 〈자기를 상상하는〉 합법적이고 합법화된 제도들에 의하여 결정된 한에 있어서의 나이다. 심지어 그 倒 緖들 속에서도, 〈나〉는 법률에 의하여 과해전 이집들의 배타택일적 사용 에 복종한다. (가령, 오이디푸스적 동성애.) 그러나 집단 환상은 이제 충 동들 자체, 그리고 이 충동들이 혁명적 제도와 더불어 형성하는 욕망하 는 기계들만을 주체로서 갖는다. 집단 환상은, 각 주체가 그 인격적 자기 동일성은 제거되었으면서도, 그 특이성들은 제거되지 않았으므로 부분적 대상들에게 고유한 커뮤니케이션을 따라 다른 주체와 관계하고 있는 점 에서 이집들을 포함하고 있다: 각 주체는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서 다른 주체의 신체 속에 이행한다. 클로소스키는 이 접에서 환상을 두 방향으
로 찢어 갈라놓는 거꾸로 된 관계를 훌륭하게 지적하였다. 이렇게 갈라 지는 것은 경제적 법칙이 〈 心理的 交換들 〉 속에 倒緖을 확립하거나 혹은 이와 반대로 심리적 교환들이 경제적 법칙의 전복을 촉전함을 따라서 생 긴다: 〈 群集의 제도적 수준에서 보아 시대착오적인 특이한 상태는 그 강 도의 더하고 덜함을 따라 제도 자체의 脫現實化에 영향을 끼치고 그러고 나서는 제도를 시대착오적이라고 고발한다.〉 9) 그러므로 두 가지 型의 환 상, 혹은 차라리 두 가지 체제는, 〈 財貨 〉 의 사회적 생산이 하나의 〈나 〉 를 매개로 해서 그 규칙을 욕망에 과함을 따라, 혹은 감정들의 욕망하는 생산이 제도들에다가 그 규칙을 과함에 따라 구별된다. 전자에 있어서 〈 나 〉 의 架空的 통일은 재화 자체에 의하여 보증되고, 후자에 있어서 제 도들의 요소들은 이제 충동일 따름이다. 이 후자의 방향에서 푸리에 Fourie r 식으로 아직도 유토피아에 관해서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물론 이상적인 모델로서가 아니라, 혁명의 能動과 受動으로서이다. 그리하여, 클로소스키는, 그의 최근의 저서들에서, 우리가 프로이트냐 마르크스냐 하면서 논쟁하고 있는 쓸모없는 평행론을 극복하는 유일의 수단을 우리 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죽 사회적 생산과 생산 관계들이 어떤 모양으로. 욕망의 한 기구이며, 감정들과 충동들이 어떤 모양으로 하부구조 자체의 부분을 이루고 있는가물 발견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감정들과 충동들은 경제적 형태들 속에서 그것들 자신의 억압만 아니라 또한 이 억압을 부 수는 수단들을 창조함으로써 하부구조의 부분을 이루고, 온갖 모양으로 거 기에 現前해 있기 때문이다• 집단 환상과 개인 환상 사이의 구별들을 발전시켜 보면, 결국에는 개 인 환상이 없다는 것이 잘 드러난다. 차라리 두 종류의 집단, 죽 主體~ 集團들과 隸屬-集團둘이 있다-오이디푸스와 거세는 상상적 구조를 형 성하는데 이 구조에서는 예속 집단의 성원들이 그 집단에 자기들이 속해 있음을 개인적으로 체험하면서 살거나 환상하게끔 결정되어 있다. 또 이 9) Pier re Klossowski , Ni etz s che et le cercle uic i e u x, p. 122. 충동들과 제도들 의 관계에 관한, 經濟的 下部橘造 속에 충동둘기 現存하는 데 관한 클로소스키 의 省察은 “Sade et Fourie r (Top iqu e, n°45) 에 관한 그의 논문, 그리고 특 히 La monnaie uiu a nte ( Losfe ld , 1970) 에 전개되어 있다.
두 종류의 집단은 끊임없이 서로간에 移行한다고 말해야 하겠다. 주체 집단은 항상 예속될 위험에 직면해 있고, 예속 집단은 어떤 경우 혁명적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도 있다. 프로이트의 분석이 얼마나 환상에서 배타택일적 이점의 방향들만을 끌어내고, 또 환상을 개인적 혹 은 가짜-개인적 차원들 위에서 박살내고 있는가 하는 점을 보는 것만큼 우려할 만한 일은 없다. 환상의 이 개인적 차원들은 그 본성상 환상을 예속 집단들에 관련시킨다. 죽 거꾸로 작업하여, 환상 속에서 그 밑에 깔 려 있는 집단의 혁명적 잠재력의 숨은 요소를 찾아내지 못한다. 군대의 교관, 선생이 아빠요, 대령도 엄마도 아빠라고 배울 때, 그리하여 사회적 생산과 반생산의 모든 動因(=遂行者)들을 가족적 재생산의 형상들 위에 포개놓을 때, 우리는 지나친 리비도가 감히 오이디푸스로부터 떠나려 하 지 못하고 오히려 오이디푸스를 내재화함을 이해한다. 리비도는 言表된 것의 주체와 언표의 주체 사이의 거세의 이원성이란 형태로 오이디푸스 ` 룰 내재화하는데, 이것은 가짜 개인의 환상의 특색이다. (〈나는 인간으 로서는 당신을 이해하지만, 재판관으로서, 보호자로서, 대령이나 장군으 로서는, 즉 아버지로서는 당신을 단죄한다.〉) 그러나 이 이원성은 인위적 이고 파생된 것이요, 집단 환상에서의 언표된 것과 언표를 집단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의 직접적 관계를 전제하는 것이다. 한편에는 억압적인 정신병원, 법률 제일주의의 공립 병원,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계약에 의한 정신분석, 이 둘 사이에서 제도적 정신분석은 자 기의 어려운 길을 걷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처음부터, 정신분석적 관계 는 가장 전통적인 부르주아 의학의 계약적 관계의 틀에 맞추어 꾸며져 있다: 제 3 자를 배제하는 척하는 것, 정신분석이 우스꽝스럽게 새로이 정당화한 돈의 위선적 역할, 소위 시간의 제한이 그런 틀이다. 시간의 제 한은 부채를 무한히 재생산하고 끝없는 轉移를 부추기고, 항상 새로운 〈갈등들〉을 길러내기 때문에 그 자체 자기 모순에 빠져 취소되기가 일 쑤이다. 어떤 분석이 끝났다는 것은 끝남으로써 실패한 것이디라고 말하 는 것을 둘을 때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명제는 분석가의 묘한 미소를 수반하기는 해도 말이다. 또 노련한 분석가가, 여러 해 동안 분석
한 후에, 마치 분석이 환자들을 조금도 비굴한 종속 상태에 몰이넣지 않 았던 듯이, 자기의 환자들 중 한 사람이 자기 집에 초대받아 식욕촉진제 를 맛보거나 먹기를 아직도 꿈꾸고 있다고 슬쩍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우 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치료할 때에는 사랑받으려는 이 비굴한 욕망, 무릎을 꿇고 소파에 누워 거기서 쉬려는 히스데리적이고 울먹이는 욕망 을 어떻게 쫓아버리는가? 프로이트의 셋째 덱스트, 『종결된 분석과 종결 할 수 없는 분석』 (1937) 을 끝으로 고찰해 보자. 이 책의 표제를 〈유한 한 분석, 무한한 분석〉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 최근의 제안을 우리는 따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유한이니 무한이니 하는 것은 대체 로 수학이나 논리학에 속하는 것이요, 여기서의 문제는 디음과· 같은 특 히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는 끝이 있는가, 하나의 분석으로써 이 이야기를 끝낼 수 있는가, 치료의 과정은 종결될 수 있는가,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치료는 성취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 고 무한히 계속될 운명에 놓여 있는가? 프로이트의 말을 옮긴다면, 현실 적으로 생긴 〈갈등〉을 근절할 수 있는가, 앞으로 생길 갈등들로부터 미 리 환자를 지킬 수 있는가, 예방할 목적으로 새로운 갈등들을 일깨워줄 수도 있는가? 대단한 매력이 프로이트의 이 텍스트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거기에는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없는 철망감, 환멸의 비애, 피곤함 그리고 동시에 완성된 작품의 차분함과 확신이 있다. 이것은 프 로이트의 유언이다. 그는 곧 죽게 되어 있고, 이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는 무엇인가가 정신분석에서 찰 되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다. 치료는 더욱더 종결될 수 없는 것으로 되어가고 있다. 그는 자기가 얼마 있지 않으면 거기에 없어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업적 중 귀중한 것이 무엇임을 느끼며 또 그 속에 끼여들어 간 유독물이 무엇임을 느끼는 사람의 평온한 마음 으로, 치료에 장애가 되는 것을 검토한다. 욕망의 경제적 문제가 그저 양 에 관한 것이기만 했다면 모든 것이 잘 되어갔을 것이다; 충동들에 대해 서 자아를 강화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 유명한 강하고 성숙 한 나, 〈계약〉, 어떻든 정상적인 나와 분석가 사이의 〈협정〉……이 등장
할 터이다. 다만, 욕망의 경제학 속에는 質的 因子들이 있다. 바로 이것들 이 치료의 장애가 되는데 프로이트는 자기가 이것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음을 뉘우치고 있다. 이 인자들 중 첫쨋것은 거세의 〈 바위〉이다. 이 바위는 대칭적이지 않 은 두 斜面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들 속에 고칠 수 없는 구멍을 생기게 한다. 정신분석은 이 바위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는다. 둘째 인자는 갈등 울 일으키는 성질을 가전 素質이다. 이 소질은 리비도의 양이 이성애와 동성애에 대응하는 두 개의 가변적인 힘으로 분배되지 못하게 하고, 대 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이 두 힘 사이에 어찌할 수 없는 대립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끝으로 셋째 인자는 그 위치를 결정할 수 없는 일종의 저 항들에 관련되어 있다. 이 인자는 動力學的 및 局所論的 考察로써는 파악 할 수 없을 만큼 경제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어떤 환자들은 아주 끈적끈적한 리비도를 가지고 있고, 혹은 이와 반대로 아주 호르는 듯한 리비도를 가지고 있어서 아무것도 그들을 〈휘어잡을 〉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프로이트의 이러한 지적이 세부의 관찰에 지나지 않으며 枝 葉末端에 속한다고 보는 것은 찰못된 일이겠다. 사실 여기서는 욕망의 현상 중의 가장 본질적인 것, 죽 여러 가지 質울 가전 리비도의 흐름들 이 문제되고 있다. 앙드레 그린 Andre Green 은 최근에 그의 훌륭한 저 서의 여러 페이지에서 세 가지 型의 〈面接〉의 표를 만들어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고 있다. 이 세 형 중 처음 두 가지는 분석에 대한 禁思롤 포함하고 있고, 셋째 것만이 분석에 있어서 이상적인 면접을 구성한다 .10) 제 1 형 (帖着性, 죽 히스데리 형태의 저항)의 표에 의하면, 〈면접은 무겁게 내리누르는 질퍽한 분위기에 지배되고 있다. 침묵들은 납덩이 같고, 말을 주고받을 때에는 일상적인 일에 관한 이야기가 지배적이다……, 그 이야 기는 한결갇다. 그것은 서술적이고, 과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것 온 쭉 이어전 실처럼 전개되며, 단절이 들어설 틈이 없다……. 꿈들이 이야기된다……. 수수께끼인 꿈은 이차적으로 가공되어서 문제된다. 이 가공은 이야기로서의 그리고 사건으로서의 꿈을, 생각들에 대해서 작용 10) Abdre Green. L'At fect , P.U.F., lWO, pp. 154-168.
하는 것으로서의 꿈보다 앞서는 것이 되게 한다……. 轉移는 끈으로- 움 아매어진다……〉. 제 2 형(유동성, 즉 강박관념 형태의 저항)의 표에 의하 면, 〈면접은 여기서 극단적으로 변덕스러운 온갖 표상들에 의하여 지배 된다……. 말은 매끄럽고, 빠르고, 급류같이 세차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지나간다……. 환자는 자기가 주장하는 것과 정반대되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분석하는 상황에는 근본적으로 아무 변화도 생 기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아무런 결과도 초래하지 않는다. 왜냐하 면 물이 오리의 깃털 위를 흐르듯 분석은 소파 위를 미끄러지듯 흘러가 기 때문이다. 무의식이 갈고리로 곁쇠질하여 뛰쳐나오는 법도 없고, 전이 속에 정박하는 법도 없댜 여기서 전이는 氣化하여 사라진다……〉으 이 제 남은 것은 제 3 형인데, 이 형의 성격들에 의하여 좋은 분석이 정의된 다: 환자는 〈 시니피앙둘의 연쇄의 진행을 구성하기 위해서 말한다. 의미 sig nifica ti on - i::- 言表된 시니피양들의 하나하나가 지시하는 시니피에 %1l 결부되어 있지 않다. 도리어 연쇄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의 진행, 鍵合, 連結에 의하여 구성된다……. (환자가) 내어놓는 해석 전체는 그 의미를 기다리고 있는 기성품의 시니피에로 주어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해 석은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회고적이다. 이것이 의미 했던 것은 그러니까 그것이었다……〉.
Q®) 파si리g n에if ie있. ~는정祠신는병 것원.
여기서 중대한 것은 프로이트가 치료의 과정을 절대로 의문시하지 않 았던 접이다. 아마 프로이트로서는 의문시하기에 너무 늦었을지도 모론 · 다. 그러나 그 후의 사람들에게는 어떤가? 프로이트는 질적 인자들을 치 료에 대한 장애로 해석하며, 치료 자체의 미비점으로서는 해석하지 않는 다. 죽 그의 치료의 절차의 효과들, 역효과들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분석 할 수 있는 상태 (혹은 분석할 수 없는, 궁극의 바위 )로서의 거세는 오히 려 정신분석적 행위로서의 거세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이디푸 스의 동성애(갈등을 일으키는 성질을 지닌 素質)는 오히려 오이디푸스화의 결과이다. 물론 치료는 오이디푸스화를 만들어내지는 않고, 치료를 실제
로 행하는 (轉移의 ) 인위적 조건들 속에서 촉진되고 강화된다. 그리고 거꾸로, 리바도의 흐름들이 더러 치료의 실천에 저항할 때 이것은 자아 의 저항이기보다는 오히려 욕망하는 생산 전체의 요란한 아우성이다. 우 리는 이미 倒緖者가 잘 오이디푸스화되지 않음을 알았다: 그는 오이디푸 스의 土地보다도 더 인위적이고 더 몽상적인 토지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데, 어째서 오이디푸스화되겠는가? 우리는 정신분열자가 오이디푸스화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 왜냐하면 그는 토지의 의부에 있고, 그의 흐름들 울 사막에까지 날라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스데리나 강박관념 형태 의 〈 저항들 〉 이 오이디푸스의 토지 위에서조차 욕망의 흐름들의 無오이 디푸스적 성질을 보여중을 우리가 알게 될 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리비 도의 질적 경제학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는 흐름들이 스며나오고, 삼각형을 건너질러 지나가, 삼각형의 정점들을 떼어놓는다. 오이디푸스의 마개는 이 흐름들을 벚게 할 수 없다. 이것은 잼 속에서나 물 위에서는 마개가 아무 소용도 없는 것과 갇다• 이 흐름들은- 용암의 저항할 수 없는 압력이나 물의 꺾을 수 없는 침두력을 가하여 삼각형의 내벽을 뚫고 밖으로 나간다. 흔히, 치료의 좋은 조건들은 무엇들인가 하 고 묻는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좋은 조건으로서 거론된다.) 오이디푸 스에 의하여 막아지는 흐름; 존재하지도 않는 완비된 대상, 거세의 남근 아래 포섭되는 部分的 對象들; 신화적 장소에 두사되는 흐름들-切斷들; 일대일로 대응시켜지고, 直線化되고, 하나의 시니피앙에 매달리는 多義的 連鎖들 ; 表現되는 無意識 ; 전체적이고 특수한 使用에서 파악되는 連結的 綜 ; 排他擇一的이고 제한된 사용에서 파악되는 離接的 綜合둘 ; 人物的 이고 분리적인 使用에서 파악되는 結合的 綜合들……. 도대체 〈이것이 의 미했던 것은 그러니까 그것이었다〉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니까〉를 오이디푸스와 거세 위에 짓눌러놓고는 덮어놓고 이것들을 결론으로 내세 우는 것이다. 安培의 한숨 :그렇지, 대령, 교관, 선생, 보호자 이 모든 이 것은 그것, 죽 오이디푸스와 거세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모든 역사는 새 롭게 해석된다…….〉 우리는 오이디푸스와 거세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오이디푸스화되기도 하고, 거세되기도 한다. 정신
분석이 이 조작들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다만 정신분석은 이 졸작들 에다가 그 나름의 새로운 수단들과 절차들을 제공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것이 욕망하는 생산의 T 늄과 같은 아우성을 잠잠게 하기에 충 분한가?: 〈우리는 모두 정신분열자이다! 우리는 모두 倒鎌者들이다! 우 리는 모두 너무나 끈적끈적한 혹은 흐르는 듯한 리비도이다……. 우리는 이렇게 되고 싶어서 이렇게 된 게 아니다. 脫土地化한 흐름들이 우리를 날라간 그곳에서 이렇게 되었다…….〉 어느 신경증환자 치고 그 증상이 좀 심한 경우 정신분열증의 바위, 이번에는 움직이는 것이니까 限石이라 할 이 바위에 떠받쳐지지 않는 자가 있는가? 오이디푸스의 어린이 공원 둘 저편의 도착의 토지들에 드나들지 않는 지는- 누구인가? 자기의 욕망 의 흐름들 속에서 용암과 물을- 느끼지 않는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특 히, 우리는 무엇으로 앓고 있는가? 과정으로서의 정신분열증 자체로 앓 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빠져든 맹렬한 신경중화로 앓고 있는 가? 이 신경중화물 위하여 정신분석은 오이디푸스와 거세라고 하는 새로 운 수단을 발명하였다. 우리는 과정으로서의 정신분열증으로 앓고 있는 가-혹은 이 과정이 공허 속에서 무한히 계속되어, 무섭도록 격화됨으 로써인가(臨床實體로서의 정신분열자의 생산), 혹은· 과정과 목표가 혼동됨 으로써인가(人爲的 倒緖者의 생산), 또 혹은 과정이 일찌감치 중단됨으로 써인가(分析에 의히여 생기는 神縮包患者의 생산)? 우리를 오이디푸스와 거 세라고 하는 십자가로 재어보기 위해서, 혹은 이 십자가로써 우리가 재 어질 수 없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억지로 오이디푸스와 거세에 대 질시켜지고 이것들에 포개진다. 어쨌든 여기에는 害惡이 생겼다. 치료는 오이디푸스화의 길을 선택했는데, 이 길에는 온통 오물이 뿌려져 있다. 차라리 정신분열증화의 길을 선택했더라면 우리는 (소위 정신분석의) 치 료로부터 치유(해방)되었을 터이다.
3 생산의 연결적 종합 무의식의 종합들이 주어져 있을 때, 실천적인 문제는 이 종합들의 사 용이 정당한가 정당치 않은가, 또 종합의 서용을 정당한 것으로 혹은 부 당한 것으로 규정하는 조건들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同性愛롤 예로 들어보자. (그런데 이 예는 하나의 예 이상의 것이다.) 우리는 프루스트 에게 있어서, 『소동과 고모라』의 유명한 페이지들이 어떻게 뻔히 모순되 는 두 테마, 죽 〈저주받은 人種〉의 근본적 죄상에 관한 데마와 꽃들의 근본적 무죄에 관한 데마를 서로 얽히게 하였는가를 지적한 바 있다. 프 루스트에게는 우울증이 지배하는 어머니에 대한 병적 애착과 사도매저키 즘적 죄책감이 있으므로 그에는 금방 오이디푸스적 동성애란 전단이 내 려졌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그 책을 읽고 있는 중에 나타나는 것들 속에서 모순들을 금방 발견하고는, 혹은 그 모순들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이라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모순들을 해결하거나 그 모 순들이 의관상의 것일 따름임을 밝히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이 사람들의 취향이 다름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사실은 의견상 으로나 실제로나 모순은 전혀 없고, 다만 유머의 서로 다른 여러 정도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 국에서 극에 이르는 여러 가지 정도의 유머를 가지고 있고, 읽는 것 속에 공존하는 유머들을 이 유머로써 평가하기 때문에, 여기서의 문제는 강도의 높고 낮음에 유머롤 배정하는 것뿐이다. 이 강도의 높고 낮음은 각 사물, 각 존재, 각 場景의 자리와 용법을 지정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것이 있고 그 다음엔 그
것이 있다, 우리는 이 정도로 족하다, 그게 우리 마음에 둘지 않아도 할 수 없는 노릇이지. 이 점에서 샤를뤼스의 다음과 같은 고약한 注意는 예 언적이라 하겠다: 〈우리는 자기의 늙은 할머니를 너무 잘 돌보고 있어, 그렇지, 꼬마 깡패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무한히 변화하는 오 직 하나의 동일한 이야기인데,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 인가?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사람이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 지 않고 있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는 하나의 기관들 없는 신체이다. 혹은 오히려 거미줄에 꼼짝 않고 웅크리고 있는 거미와 같다; 그는 아무 것도 살피고 있지 않지만, 아주 작은 조짐, 아주 작은 전동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자기의 먹이룰 덮친다. 모든 것은 星雲들, 죽 흐릿한 윤곽을 가 전 통계학적 집합들, 우연히 배치된 단일체들을 포함하는 큰 덩어리를 이 루는 조직체들 혹은 집합체적인 조직체들(살롱, 젊은 아가씨들의 그룹, 경치……) 에서 시작된다. 그 E 움에, 이 성운둘 혹은 집합체들 속에 〈側面둘〉이 드러 나고, 계열들이 조직되고, 이 계열들 속에 인물들이 모습을 나타내는데, 이 런 일들은 결여, 부재 불균형, 배제, 非커뮤니케이션, 악덕과 죄책의 기괴 한 법칙들 아래 이루어전다. 또 그 다음에, 모든 것이 다시 뒤섞여지고, 해체되지만, 이번에는 순전히 分子的인 다양성 속에서 이렇게 된다. 이 다양성에 있어서는, 부분적 대상들, 〈상자들〉, 〈그릇들〉이 모두 한결같 이 긍정적으로 규정되고, 횡단성을 따라 常軌를 벗어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이 횡단선은 작품 전체, 죽 각 부분적 대상이 생산하고 다시 절단 하고, 재생산하는 동시에 절단하는 거대한 흐름들을 건너지르고 있다. 악 덕보다도 광기와 그 무죄함이 불안케 한다고 프루스트는 말한다. 만일 정신분열증이 보편적인 것이라면, 위대한 예술가란 바로 정신분열중의 벽을 뛰어넘어 미지의 나라예 도달한 사람이다. 이 나라에서 그는 이제 더 이상 어떠한 시간에도, 어떠한 공간에도, 어떠한 유파에도 속하지 않 는다. 전형적인 한 구절, 알베르띤느에의 처음 키스에 있어서도 사태는 마찬 가지이다. 알베르떤느의 얼굴은 처음에는 젊은 아가씨들의 집합에서 가 까스로 끌어내어지는 하나의 성운이다. 그 다음에 그녀의 뚜렷한 모습들
같은 일련의 국면을 꿰뚫고 알베르띤느의 인물이 드러난다. 이야기를 전 개하는 사람의 입술이 그녀의 뺨에 접근함을 따라, 알베르띤느의 얼굴은 한 국면에서 다른 국면으로 달려간다. 마지막에, 입술이 뺨에 아주 가 닿 을 즈음, 모든 것은 모래 위의 그림처럼 해체된다. 알베르띤느의 얼굴은 터져서 분자적인 부분적 대싱들이 되고, 한편 이야기를 전개하는 사람의 얼굴의 부분적 대상들은 기관들 없는 신체에로 되돌아가, 눈은 닫히고, 코는 막히고, 입은 다물어진다. 그러나 사랑이란 그 전체가 더욱 이와 동 일한 이야기를 엮어가는 것이다. 남자-여자의 사랑의 통계적 성운으로부 터, 이 사람들의 집합 전체로부터, 죄를 지어 저주받은 두 개의 계열이 드러난다. 이 두 계열은 서로 배제하는 소돔의 계열과 고모라의 계열인 데, 이것들은 서로 포갤 수 없는 두 양상 아래 동일한 하나의 거세를 보 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식물의 테마, 꽃들의 무 죄는 우리에게 하나의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하나의 다른 규준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꽃들 하나하나는 兩性이어서 두 개의 성을 가지고 있지 만, 이 두 성은 서로 나뉘어 있어서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는다; 남성 은 그 속에서 수컷의 부분이 우세한 인간일 따름이요, 여성은 그 속에서 암컷의 부분이 우세한 인간일 따름이다. 따라서 기본적 결합들의 차원에 서는 두 남성과 두 여성을 참가시켜 하나의 다양성을 구성하여 이 다양 성 속에서 횡단적인 커뮤니케이션들, 죽 부분적 대상들과 흐름들의 연결 울 생기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남성의 수컷의 부분은 한 여성의 암컷의 부분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지만, 또한 한 여성의 수컷의 부 분과도, 혹은 디론 한 남성의 암컷의 부분과도, 또 혹은 다른 남성의 수 컷의 부분과도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 여기서 죄책감 전체는 없어 진다. 왜냐하면 죄책감은 이 꽃들에 달리붙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이거나 ……이거나〉의 배타택일 대신에 결합들과 順列들의 〈……이든 ……이든〉이 들어선다. 이 후자에 있어서는 差異들이 여전히 차이이면서 동일한것이 되고만다. 우리는 통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는 異性愛的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알게 모르게 同性愛的이요, 要素恥 分子的으로는 결국 橫斷性愛的이다. 그
렇기 때문에 자기자신의 해석들에 대한 오이디푸스화하는 모든 해석을 처음으로 거부한 사람인 프루스트는 동성애의 두 가지 型 혹은 차라리 두 영역을 대립시킨다. 이 두 영역 중 하나만이 오이디푸스적이고 배타 태일적이고 우울증적인 것이요, 다른 하나는 非오이디푸스적이고 정신분 열중적인 것으로서 포함하고 포함되는 형의 영역이다: 〈어떤 사람들, 아 마도 가장 수줍어하는 어린 시절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얻는 쾌락의 육체적 종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 쾌락을 어떤 남성의 얼굴에 결부시킬 수만 있으면 그만이다. 한편 아마도 더 격렬 한 관능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육체적 쾌락을 어쩔 수 없이 어떤 局部 에 한정시킨다. 이 사람들의 고백은 세상의 보통 사람들에게 쇼크롤 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土星의 星座 아래서만 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들에게 있어서는 앞서 말한 첫째 종류의 사람들처럼 여성들이 전적으로 배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둘째 종류의 남성들은 여성을 사랑하 는 여성들을 찾는다. 이 여성들은 저 남성들에게 하나의 젊은 남성을 얻 게 해주고, 저들이 이 젊은 남성과 더불어 얻게 될 쾌락을 증대시켜 줄 수 있다; 뿐더러 저들은 이 여성들과 더불어 한 남성에게서 얻는 것과 똑같은 쾌락을 똑같은 방식으로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저들이 이 여성들과 갖는 관계들에 있어서는 저들이 여자들을 사랑하는 여성에 대 해서 하나의 E 톤 여성의 역할을 맡으며, 이와 동시에 저 여성은 저들 이 남성에게서 맛보는 것과 거의 같은 것을 저들에게 제공하기 때문이 다…….〉 II)
11 ) Proust, Sodome et Gomorrhe, Pleia d e, II , p. 622 ( 강조표시를 한 것은 저자 들임).
여기서 대립하고 있는 것은 연결적 종합의 두 사용이다: 하나는 전체 적이고 특수적인 사용이요, 다른 하나는 부분적이고 비특수적인 사용이 다. 첫째 사용에 있어서는 욕망이 하나의 고정된 주체, 죽 남녀의 어느 한 성에 특수화된 〈나〉와 전체적 인물들로서 결정된 완비된 대상들을 동시에 받이들인다. 이러한 작업의 복잡함과 그 기초들은 어느 한 사용 울 따라 무의식의 서로 다른 종합들 사이의 상호반옹둘을 고찰할 때 더
잘 나타난다. 사실, 오이디푸스의 조건들 속의 등기의 표면 위에, 좌표축 으로 쓰이는 부모의 심상들(어머니, 아버지)과 관련하여 명확하게 구별될 수 있는 자아를 정립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등록의 종합이다. 여기 에는 하나의 삼각형화가 있는데, 이것은 그 본질에 있어 구성요소로서 금지를 내포하며, 또 인물들을 구별하는 조건이 된다: 이 삼각형화는 어 머니와의 근친상간 그리고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금한다. 그런 데 사람들은 이싱하게 추리하여, 이것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바로 이것 이 욕구되고 있었다고 결론짓는다. 사실, 전체적인 모습을 갖춘 인물들은, 또 심지어 이러한 인물들의 형태조차도, 그들이 등장하는 삼각형화 이전 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그들을 구성하는 금지 들 이전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욕망이 그 최초의 완비된 대상들을 얻는 것과 이것들이 금지되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다 . 그러므로 동일한 오이디푸스적 操作이 그 자신의 〈성공〉의 가능성의 기초가 되기도 하고, 그 실패 혹은 停瀋의 가능성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전자는 금지에 비추 어서 인물들을 구별하는 길을 통해서요, 후자는 금지가 만들어내는 구별 둘의 裏面으로서의 미분화 상태(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의 근친상간, 어머니의 자리에 들어섬으로써의 同性愛……)에 전락함으로써이다. 위반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의 형태와 마찬가지로 위반의 대상이 되는 개인의 實 質도 금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금지는 욕망을 옮겨놓고 있기 때문에 금지에 자기 자체를 옮겨놓는 특질이 있음은 분명 한 일이다. 금지가 자기 자체를 옮겨놓는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 서이다. 오이디푸스적 등기가 등록의 종합 속에 들어오면 반드시 생산의 종합에 대하여 반작용하고 전체적 모습을 지닌 새로운 인물들을 끌어들 임으로써 이 종합의 연결들을 크게 변형시킨다고 하는 의미에서이다. 아 버지와 어머니 다음에 나타나는 인물들의 새로운 십상들은 누이와 아내 이다. 사실, 금지가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해 왔다는 것이 가끔 지적되었 다. 하나는 무엇보다도 어머니에 관련된 소극적인 것으로서 구별을 강요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누이에 관련된 적극적인 것으로서 교환(내 누 이가 아닌 다른 여자를 아내로 취하는 의무, 내 누이를 어떤 다른 사람에게
주는 의무: 내 누이를 처남에게 주고, 丈人으로부터 아내를 받는 의무 따위 의 교환)을 명령하는 것이다 .12) 그리하여, 새로운 鬱血들과 類落둘이 근친 상간과 동성애의 새로운 형상들로서 이 차원에서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 고, 오이디푸스의 삼각형이 이 둘째 단계 없이 전파되고 재생산되는 수 단을 전혀 갖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첫째 단계는 삼각형의 형 태를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오직 둘째 단계만이 이 형태의 전파를 확실 하게 해준다. 나는 내 누이가 아닌 다른 여자를 취하는데 이것은 내 아 들을 정점으로 하는 거꾸로 된 새로운 삼각형의 구별된 저변을 구성하기 위해서이다__이것은 오이디푸스로부터 떠나는 것이라 일컬어지고 있지 만, 홀로 근친상간, 동성애의 귀신으로 지쳐 죽는다기보다는 또한 오이디 푸스를 재생산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12) Luc de Heusch , Essai sur le sym holis m e de l'in c este roy a l en Afriqu e, Bru:x e lle, 1959, pp. 13-16.
이리하여 등록의 종합의 兩親的 혹은 가족적 사용은 생산의 연결적 종 합들의 婚姬的 혹은 結緣的 사용에로 연장된다: 사람들의 혼인의 체제가 부분적 대성들의 연결을 대체한다. 전체 속에서는, 욕망하는 생산에 고유 한 기관 • 기계들의 연결둘이 가족적 재생산의 규칙들 아래 인물들의 결 합(혼인)에 자리를 내어준다. 부분적 대상들은 이것들 피차간에 넘나드 는 非人物的인 흐름들로부터 채취되지 않고, 이제는 인물들로부터 채취되 는 듯이 보인다. 이것은 흐름들 대신에 인물들이 抽象量들로부터 끌어내 어지기 때문이다. 부분적 대상들은 연결에 의하여 점유되지 않고, 어느 한 사람의 소유물들이 되고, 또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재산이 된 다. 칸트는 신을 이집적 (선언적 ) 삼단논법의 원리로 규정함으로써 몇 세기에 걸친 스콜라 철학적 사색의 결론을 끌어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그가 결혼을 한 사림이 다른 한 사람의 성적 기관들의 소유자가 되게끔 하는 유대라고 규정할 때 그는 여러 세기에 걸친 로마의 법에 관한 사색 의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13) 욕망하는 기계-기관들의 연결들이 인물들의 결합의 체제에서는 어떤 제약들 아래 허용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려면
13) Kant, Meta p h ys i q u e des mreurs, I, 1797.
성의 決疑法에 관한 종교편람을 참고하기만 하면 된다. 이 체제는 결합 에 의해서 아내의 신체로부터 무엇을 자기의 것으로 할 것인가를 법률적 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좀더 자세히 말한다면, 체제의 4 이가 나타 나는 것은 언제나 한 사회가 남녀 두 성이 뒤섞여 있는 小兒狀態롤 언제 까지 존속시키는가 하는 점에서이다. 이 상태에서는 젊은 남자가 어린이 둘의 사회적 생산을 규제하는 결합(혼인)의 원칙의 통제 아래에 들어가 는 연령에 도달할 때까지 모든 것이 허용된다. 아마 욕망하는 생산의 연 결둘은 하나의 二項 規則을 따랐다; 또 우리는 이 筑} 관계에 제 3 항이 끼여드는 것도 보았다. 이 제 3 항은 기관들 없는 신체인데, 이것은 생산 된 것 속에 생산의 활동을 다시 주입하여 기계들의 연결둘을 연장하고, 등록의 표면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표상하는 것들에다 가 생산울 포개놓은 일대일 대응의 조작은 전혀 생산되지 않는다; 이 차 원에서는, 욕망의 대성들을 전체적 모습을 갖춘 인물들에 관련시키고, 욕 망을 한 특수한 주체에 결부시키는 어떠한 삼각형화도 나타나지 않는다. 유일의 주체는 기관들 없는 신체 위의 욕망 자체이다. 이 욕망은 부분적 대상들과 흐름들을 작동시키고, 연결들과 점유들을 따라 부분적 대싱들 과 흐름들의 어느 하나를 다른 것에 의하여 채취하고 절단하며 한 신체 로부터 다른 한 신체로 옮아간다. 이런 限에서 유일의 주체는 욕망이다. 그리고 이때 연결들과 점유들은 소유자 혹은 점유자인 자아의 가짜 통일 울 언제나 파괴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삼각형은 양천적 사용에서 형성되고, 혼인적 사용에서 재 생산된다. 우리는 어떤 힘들이 이 삼각형화를 결정하는지 아직 모르고 있다. 이 삼각형화는 욕망의 등록에 간섭하여 욕망의 모든 생산적 연결 둘을 변형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적으로는 이 힘들이 작용하는 방식 울 추적할 수 있다. 부분적 대상들기 파악되는 것은 일찌감치 행해지는 전체의 직관에서이고, 이와 마찬가지로, 자아가 파악되는 것은 이 자아의 실현에 앞서는 통일의 직관에서라고 흔히들 말한다. (멜라니 클라인에게 있어서도 정신분열증적인 부분적 대상은 우울증의 단계에서의 완비된 대 상의 도래를 준비하는 하나의 전체와 관련지어져 있다.) 이러한 전체성-
통일성이 부재의 어떤 양상에서만 정립된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죽 부분적 대상들과 욕망의 주체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서만 정립된 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 초월적이고 공통되는 어떤 것을 外捕함으로써 성립하는 정신분석의 조작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어떤 것이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것은 오로지 욕망 속에 결여 롤 끌어들이기 위해서이다. 죽 이 보편적이고 공통되는 것의 부재의 어 떤 모습 아래 인물들과 〈나〉를 고정시키고 특수화하며, 남녀의 성의 이 접에 있어서는 어느 한 쪽을 배타태일적으로 강요하기 위해서만이다. 프 로아트에게 있어서는 사태가 모두 이렇다: 오이디푸스에 대해서나, 거세 에 대해서나, 한 어린이가 매를 맞는다고 하는 환싱의 둘째 시기에 대해 서나, 혹은 또 정신분석의 신비화가 절정에 달하는 저 유명한 잠복기에 대해서나 사태는 이렇다. 시니피앙 〈바로 그것〉은 기호화 작용의 효과들 울 연쇄의 전체 속에 분배하고, 거기에 배타택일하는 일들은 끌어들이는 것인데 (여기서 라깡주의의 오이디푸스화적 해석들이 생간다), 이 시니피앙 바로 그것을 지시하기 위하여 위에 말한 공통되는 초월적이고 부재하는 어떤 것을 男根 혹은 법률이라 이름 붙이게 된다. 그런데 삼각형화의 形 相因으로 작용하는 것, 죽 삼각형의 형태와 그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 시니피앙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오이디푸스도 3+1 의 정식을 위하여 초월적인 남근이라고 하는 一者롤 가지고 있다. 이 일자가 없으 면 관련된 항문기 하나의 삼각형을 형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14) 이른바 시니피앙의 연쇄는 그것들 자체는 시니피앙이 아닌 요소들, 죽 다의적인 글 ecr it ure 과 분리 가능한 단편들로 되어 있는데, 이 연쇄를 부수는 어 떤 특별한 처리를 하면 이 연쇄로부터 전제군주 시니피앙이라고 하는 분 리된 대상이 끌어내어진다. 모든 것은 마치 이 시니피앙의 연쇄가 이러 한 특별한 처리의 대상인 듯이 진행된다. 이때 이후 이 연쇄 전체는 이 전제군주 시니피앙의 법률 아래 매달리고, 연쇄의 고리마다 삼각형화되 14) M. C. et E. Orti gu es, (Ed ip e afr ic a in , Plon , 1966, p. 83 : 〈가족 제도 속 에서 혹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속에서 하나의 구조가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위 한 必要條f牛들을 충족시키려면, 적어도 네 개의 항이 있어야 한다. 죽 본래 필요 한 것 의에 한 項이 더 있어야 한다.〉
어 나타난다. 여기에는 무의식의 종합들의 초월적 사용을 내포하는 이상 야릇한 오류추리가 있다: 분리될 수 있는 부분적 대상들로부터 분리된 완 비된 대상에로의 移行이 행해지는데, 여기서 전체적 모습을 갖춘 인물들이 결여를 배정받아 출현한다. 가령, 자본주의의 규준과 그 삼위일체의 정식 에 있어서는, 분리될 수 있는 연쇄로서의 돈이 분리된 대상으로서의 자 본으로 바뀌는데, 자본은 저장과 결여의 物神的 양상을 띠고서만 존재한 다. 오이디푸스의 규준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채취와 분리의 에네르기로서의 리비도는 분리된 대상으로서의 남근에로 바뀌는데, 남근 은 저장과 부재라고 하는 초월적 형태로만 존재한다. (이 남근은 남성에 게나 여성에게나 다 같이 공통되고 부재하는 어떤 것이다.) 모든 성욕을 오이디푸스의 툴 속에 집어넣는 것은 바로 이 변환이다: 모든 흐름들― 철단들의 하나의 동일한 신화적 장소에의 이 두사, 시니피앙이 아닌 모 든 기호들의 하나의 동일한 大시니피앙에의 이 두사이다. 〈 실제의 삼각 형화는 성욕을 어느 한 성에 특수화하는 일을 허용한다. 부분적 대상들 은 그 유독성과 유효성의 아무것도 상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음경에 관 련시킴으로써 거세는 그 충만한 의미를 얻는다. 이로 말미암아 부분적 대상들의 矢之, 磨減 矢如에 결부된 모든 의적 경험이 사후에 의미를 얻 게 된다. 그 이전의 역사 전체는 거세의 빛에 비추어 새로이 씌어전 다 . 〉 1S)
15 ) Andre Green , L'A f fect , p. 167.
우리에게 우려를 안겨주는 것은 바로 이 역사의 개작, 부분적 대상들 에게 부여된 이 〈결여〉이다. 그런데 부분적 대상들이 그것들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근본적으로 부당한 종합의 사용에 일단 끌어넣어지면, 어떻 게 그것들이 그 유독성과 유효성을 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오이 디푸스적 성욕, 오이디푸스적 이성애와 동성애, 오이디푸스적 거세 __ 완 비된 대상들, 전체의 모습을 갖춘 심상들 그리고 특수한 자아들 __ 가 있다는 것을 부청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들이 무의식의 산물들이라고 하는 것을 부정한다. 뿐만 아니라, 거세와 오이디푸스화는 하나의 근본적 착각을 낳는다. 이 환상은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것을 믿게 한다.
즉, 현실적인 욕망하는 생산은 이것을 통합하고 이것을 초월적 법칙들에 종속시키고 이것으로 하여금 상위의 사회적 • 문화적 생산에 이바지하게 하는 더 높은 조직체들에 의하여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믿게 한 다: 이렇게 되면 욕망의 생산에 관련하여 사회 터전의 일종의 〈 刺離 〉 가 나타나서, 이 명목으로 모든 忍從이 미리 정당화된다• 그런데 정신분석은 치료의 가장 구체적인 차원에서, 전력을 다하여 이 분명한 오이디푸스화 운동을 강조한다. 정신분석은 그 자체 무의식의 이 변환을 보증한다. 정 신분석이 前오이디푸스적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 정신분석은 한 단계를 보는데 이 단계는 발전적 통합의 방향에서 (완비된 대상의 지배 아래 우울증의 자리에로) 超克되거나, 구조적 통합의 방향에서 (남근의 지배 아래, 전제군주 시니피앙의 자리에로) 조직되지 않으면 안 된다. 프로이 트가 논한 갈등을 일으키는 소질, 죽 동성애와 이성애 사이의 질적 대립 은 사실상 오이디푸스의 한 결과이다: 그것은 치료가 부딪치는 밖으로.부 터의 장애이기는커녕, 오이디푸스화의 한 산물이요, 오이디푸스화를· 강화 하는 치료의 한 역효과이다. 문제는 정녕 前오이디푸스적 단계들에 관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 단계들은 아직도 오이디푸스를 축으로 삼고 있다. 문제는 無오이디푸스적 성욕, 無오이디푸스적 이성애와 동성애, 無오이디 푸스적 거세가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 본성은 어떤 것인가 하는 데 있다: 욕망하는 생산의 흐름들--절단들은 하나의 신화적 장소에 투사되 지 않으며, 욕망의 기호들은 하나의 시니피앙 속에 外梧되지 않으며, 횡 단적 성욕은 局所的이고 非特殊的인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에 아무런 질적 대립도 생기게 하지 않는다. 이렇게 본래의 상태가 회복되면, 도처에 변 환으로 말미암는 유죄성 대신, 꽃들의 무죄성이 나타난다. 그런데 정신분 석의 이론과 실천은 무의식 전체를 욕망하는 생산의 無오이디푸스적 형 식과 내용에로 복귀시킬 것을 약속하지 않고, 또 약속하려고도 하지 않 고, 무의식의 형식과 내용을 오이디푸스에로 변환시키는 일을 추진하여 마지 않는다. (우리는 사실 정신분석이 오이디푸스를 〈해결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은 먼저 연결적 종합 둘을 전체적으로 또 특수하게 사용함으로써 이 변환을 추전한다. 이 사
용은 초월적이라 규정될 수 있으며, 정신분석적 조작 속의 첫째 오류추 리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다시 한번 칸트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단순한 이유에서이다. 칸트는, 그가 비판적 혁신이라고 부른 것 속 에서, 의식의 종합들의 정당한 사용과 부당한 사용을 구별하기 위하여 인식에 내재하는 기준들을 발견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先駿 的 哲學(기준들의 內在)이란 이름으로. 形而上學에 나타나는 따위의 종합 둘의 초월적 사용을 고발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정신분석이 그 형이상학 죽 오이디푸스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이 번에는 유물론적인 하나의 혁신은 오이디푸스 비판을 통해서만 일어난다 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오이디푸스적 정신분석에 나타나는 바와 같은 무의식의 종합들의 부당한 사용을· 고발함으로써, 무의식의 기 준둘의 내재로 규정된 선험적 무의식과, 이에 대응하는 정신분열증-분석 으로서의 실천을 되찾기 위해서이다.
4 등록의 이접적 종합 오이디푸스가 욕망하는 등록의 이점적 종합들 속에 슬그머니 들어갈 때 오이디푸스는 이것들에다가 어떤 제한적이고 배타택일적인 사용의 이 상을 강요한다. 이 사용은 삼각형화의 형태-아빠, 엄마 혹은 아이 와 일체가 된다. 이것은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區別機能에서의 〈……이거 나 …. .. 이거나 〉 의 지배이다: 거기는 먼저 엄마의 자리, 거기는 아빠의 자리 그리고 거기는 네 자리다라고 하는 식이다. 너는 네 자리에 있어. 오이디푸스의 불행은 바로 그가 이제는 어디서 누가 무엇이 되는지, 누 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부모인지 아이인지〉의 구 별은 삼각형의 邊들에 대한 다른 두 가지 구별, 〈남자인지 여자인지〉의 구별, 〈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의 구별울 수반한다. 오이디푸스는 자기가 부모인지 아이인지를 알아서는 안 되는 것에 못지않게 자기가 살아 있는 지 혹은 죽었는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알아서는 안 된다. 근친상간하는 날엔, 너는 귀신이 되고 남녀추니가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른 바 가족적인 세 가지 큰 신경중은 구별지능, 죽 이접적 종합의 오이디푸 스적 쇠되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공포증환자는 자기가 부모인지 아 이인지를 이제는 알지 못하며, 강박관념중환자는 자기가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를 이제는 알지 못하며, 히스데리환자는 자기가 남자인지 여자인 지 이제는 알지 못한다 .16) 요컨대, 가족적 삼각형화는 그 아래서 하나의 16) 히스데리중의 〈질문〉(나는 남자인가 여자인가?)과 강박관념 중의 〈질문〉(나 는 죽었는가 살아 있는가?)에 관하여는, cf. Serge Leclai re , La Mort dans
la vie de I'ob sede, in la psych analys e , n°2, pp. 129-130.
〈자아〉가 세대, 성 (生死의 ) 상태에 관하여 동시에 자기를 구별하는 座樣를 받아들이는 최소한의 조건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적 삼각 형화는 다른 모양으로 이 결과를 확인한다: 그리하여 삼위일체에 있어서 는, 남근의 상칭을 위하여 여성의 형상이 지워지는데, 이것은 어떻게 그 삼각형이 자기자신의 근거에로 옮겨지고 이 근거를 통합하려 하는가를 보여준다. 이번에는 그 아래서 인물들이 구별되는 최대한의 조건들이 문 제가 된다. 이런 까닭에 우리에게는 신을 이접적(선언적) 삼단논법의 아 프리오리한 원리로 내세우는 칸트의 정의가 중요하였다. 모든 것은 하나 의 더 큰 실재 (전체 om nitud o re alit as) 를 정의함으로써 신으로부터 파생 하는 한에 있어서 칸트는 神울 그렇게 정의하였다: 칸트의 유머가 神울 하나의 삼단논법의 주인이 되게 하고 있다. 오이디푸스적 등록에 고유한 특성은 이집적 종합의 배타택일적, 제한 적, 부정적 사용을 끌어들이고 있는 점이다. 우리는 너무나 오이디푸스에 의하여 형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다른 사용을 거의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세 가지 가족적 신경증도 더 이상 오이디푸스를 적용할 수 없음으로써 고통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오이디푸스를 떠나지 못하고 있 다. 우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어디서나 이 배타택일적 이집들에 대한 취향이 가동하고 있음을- 보았다. 하지만 정신분열증이 우리에게 오 이디푸스 의적인 하나의 특이한 교훈을 주고, 우리에게 이접적 종합의 미지의 힘, 하나의 내재적 사용을- 계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 내재 적 사용은 더 이상 배타택일적인 것도 아니고 제한적인 것도 아니라, 충 분히 긍정적, 무제한적, 포함적이다. 여전히 이집적이면서도 選言股들을 긍정하고, 이것들의 거리 전체를 뛰어넘어 이것들을 긍정하고, 어느 하나 룰 C.連 것에 의하여 제한하지도 않고 C.連 · 것을 어느 하나로써 배제하지도 않는 이집, 이것은 아마 최고의 패러독스이다. 〈……이거나 ……이거나〉 대신에 〈……이건 … ••• 이건〉. 정신분열자는 남자이고 또 여자인 것이 아니다. 그는 남자이거나 여자이지만, 분명히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 죽 남자들의 측면에서는 남자요, 여자들의 측면에서는 여자이다. 사랑스러운
제이예 Ja y e t(알베르 데지레 Albert Desir e , 등록번호 5416001) 는 남성적인 것 과 여성적인 것의 평행적 계열들울 길게 늘어놓고, 자기자신을 그 남녀 의 두 측면에 두고 있다 : 〈 마트 알베르 Mat Albert 남성 -동 록번호 5416 마천 로마인 술탄 〉 , 〈 마트 데지레 Mat Desir e e 여성 -등 록번호 1001 미친 로만인 술탄 妃 〉 .171 정신분열자는 죽어 있거나 살아 있거나 이 둘 중 한 상태에 있지, 동시에 두 상태에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양자 의 거리의 한 쪽 끝에서 그는 양자 중 어느 한 상태에 있고, 이 거리의 상공울 날아 다른 한 쪽 끝에 이른다. 그는 아이이거나 부모이거나이지 아이이면서 부모이지는 않다. 그러나 분해할 수 없는 공간 속에 있는 막 대기의 두 끝처럼 한 쪽 끝에서 다른 것이 된다. 이와 갈은 것이 베케트 가 그의 작품 중의 인물들과 이 인물들이 겪는 사건들을 등기할 때의 이 집들의 의미이다: 모든 것이 분해되지만, 다만 자기자신 안에서 분해된다. 이접둘이 포함적인 것이 됨과 동시에, 거리들마저 궁정적인 것이 된다. 헤겔學派의 마지막 철학자처럼, 정신분열자가 모순되는 것들을 동일화하 는 모호한 종합들로 이집들을 대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에 말한 사고 의 질서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정신분열자는 모순하는 것 둘의 종합들을 이접적 종합들로써 대체하는 것이 아니고, 이집적 종합의 배타택일적이고 제한적인 시용을· 하나의 긍정적 사용으로써 대체하는 것 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離接 속에 있다: 그는 모순하는 것들을 깊이 파 내려가 동일화함으로써 이집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반대로 분할 할 수 없는 거리를 날아다니면서 이접을 긍정한다. 그는 단순히 남녀 양 성도 아니요, 두 성 사이에 있지도 않으며, 男女交錢의 존재도 아니라, 男 女橫斷의 존재이다. 그는 生死橫斷 부모-아이 횡단의 존재이다. 그는 두 개의 모순하는 것을 동일한 것에로 하나가 되게 하지 않고, 그것들이 서 로 다른 한에서 그것들을 관련시키는 것으로서의 그것들의 거리를 긍정 한다. 그는 모순하는 것들에 대하여 마음을 닫지 않고, 도리어 마음을 연 다. 그는 마치 포지들로 부푼 주머니 갈아서, 지금까지는 그 포자들 하나 17) Ar t brut, n°3, p. 139(Je a n Our }'i근 그의 논문사서 제이예 Ja y e t를 〈영원히 상공을 나는〉, 〈경계가 정해져 있지 않은 자〉라 부르고 있다).
하나의 특이성을 살리지 않고 부당하게 가두어두고 있었는데, 이제는 이 것들을 풀어놓는다. 지금까지는 이것들 중 어떤 것은 배제되고 어떤 것 은 유보되었지만, 이제는 기호들-점들이 되어, 이것들의 새로운 거리에 의하여 모두 긍정된다. 포함적인 이집은 그 항들에 대해서 딛혀 있지 않 고, 반대로 무제한적이다. 〈나는 이 닫혀 있는 상자 때문에 잘 보존되어 왔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이 닫혀 있는 상자가 아니다• 칸막이가 무너 졌다.〉 이리하여 하나의 공간이 열리는데 이 공간에서 몰로이 Mollo y와 모랑 Moran 이 지시하는 것은 더 이상 인물들이 아니고, 사방에서 몰려 오는 단일체들, 덧없이 사라져버리는 생산의 동인들이다. 이것은 자유로 운 이집이다; 여기서는 차이룰 나타내는 위치들이 완전히 존속하고 하나 의 자유로운 가치를 취하기까지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얼굴 없는 位置 橫 主體에 의하여 점유되고 있다. 슈레버는 남자이자 여자이며, 부모 이자 아이이며, 죽었으면서 살아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하나의 특이성 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하나의 특이한 점을 지닌 모든 계열과 모든 分枝 속에는 어디에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체 그를 여자에로 변형 시키는 이 거리이기 때문이다. 이 거리의 끝에서 그는 이미 하나의 새로 운 인류의 어머니요 그리고 마침내 죽을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정신분열증의 신과 종교의 신은 동일한 삼단논법의 대상 이기는 하지만, 같은 점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클로소스키는, 『바호 메트』 속에서, 反그리스도를 신에 대립시켰다. 신은 그에게서 파생되는 현실 속의 배제들과 제한들의 주인이요, 반그리스도는 이와 반대로 한 주체가 가능한 모든 述語를 遣歷하는 것을 규정하는 變稅둘의 王子이다. 나는 神이고 나는 신이 아니며, 나는 신이고 나는 인간이다: 여기서는 파생된 現實의 부정적 이집들을 넘어 人間- 神이라고 하는 근원적 현실에 나아가는 종합이 문제가 아니라, 한 항에서 다른 항으로 표류하면서 거 리에 따라 그 자체 종합을 수행하는 포함적 이집이 문제이다. 근원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은 마치 저 유명한 몰로이의 다음과 같은 결론과 비슷한 상황이다: 〈지금은 한밤중이다. 비가 유리창을 때리고 있다 . 한 밤중이 아니었다. 비는 오고 있지 않았다.〉 니진스키 Ni jins k~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神이고 나는 神이 아니었고 나는 神의 어릿광대이다; 〈 나는 아피스 A pi s 요, 나는 이집트인이요, 피부가 빨간 인디언이요, 검둥 이요, 중국인이요, 일본인이요, 의국인이요, 미지의 사람이요, 바다의 새 요 또 육지 위를 니는 새요, 톨스토이의 나무요 그 뿌리이다. 〉 〈 나는 남편이면서 아내요,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하며, 나는 내 남편을 사랑한 다……. 〉 1 8 ) 중요한 것은 부모의 호칭도, 인종의 호칭들이나 신의 호칭둘 도 아니다. 다만 이 호칭들을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중요하다. 의미가 문 제가 아니라, 오직 사용만이 문제이다. 근원도 파생도 문제가 아니라, 표 류가 보편적으로 가능하게 되는 일이 문제이다. 정신분열자는 계보의 다 듬어지지 않은 자료를 무제한적으로 해방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여기서 그는 모든 分枝에, 모든 측면에 동시에 자기를 자리잡게 하고, 등기하고 드러낼 수 있다. 그는 오이디푸스적 계보를 홑날려버린다. 점점 더 관계 롤 늘려감으로써 그는 불가분의 거리들을 절대적으로 뛰어넘는다. 미친 계보학자는 기관들 없는 신체를 바둑판 모양으로 이집의 그물로써 구획 한다• 그래서 등록의 에네르기 이의의 디른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神 온, 편집병적 등기에 있어서는 최대의 적일 수 있지만, 기적을 일으키는 등기에 있어서는 최대의 벗일 수 있다. 어쨌든, 여기서는 자연과 인간보 다 우월한 존재의 문제는 전혀 제기되지 않는다. 등기되는 것도, 등기하 는 에네르기도, 모든 것은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 있다. 출산된 것이 아 닌 신체 위에서, 분해할 수 없는 거리들은 필연적으로 건너뛰어지고, 동 시에 離接의 항들은 모두 긍정된다. 나는 글자요 펜이요 종이이다. (니진 스키는 그의 일기를 이런 식으로. 적고 있다) __그렇다, 나는 내 아버지 였고 나는 내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등록의 이집적 종합은 우리를 연결적 종합과 동일한 결과에 나아가게 한다: 그것 역시 두 가지 사용, 하나는 내재적이고 다른 하나 는 초월적인 두 가지 사용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왜 정신분석은 아직 도 도처에서 이집의 그물 속에 배제들, 제한들을 끌어들이는 초월적 사 용을 뒷받침하고 무의식을 오이디푸스 속에서 움직이게 하고 있는가? 어 18) Ni jins ky , Jo urnal, tr. fr. Ga llim ard
째서 바로 이것이 오이디푸스화인가? 이것은 오이디푸스가 끌어들인 배 타택일적 관계가 구별하는 것들로 여겨진 갖가지 이점들 사이에서만 작 용하지 않고, 또한 그 관계가 강요하는 이 구별들의 전체와 이 관계가 전제 하는 하나의 未分化狀態 사이에서도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는 우리에게 말한다: 만일 네가 아빠-엄마-나를 구별하는 노선들을 따 라가지 않고, 또 노선들의 폿말이 되는 배타택일적인 것들을 따라가지 않으면, 너는 미분화상태의 캄캄한 밤 속에 떨어질 것이다. 배타택일적 이집들은 포함적 이집들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이해하자: 이 두 이접에 서 신은 동일하게 사용되지 않으며, 부모의 호칭들도 동일하게 사용되지 않는다. 부모의 호칭들은 더 이상 주체가 기관들 없는 신체 위를 지나가 면서 孤兒인 채로 있는 무의식 속에서 경험하는 강도 있는 상태들을 지 시하지 않고(그렇다, 나는 ……이었다), 전체적인 모습을 지닌 인물들을 지시한다. 이 인물들은 이들의 기초가 되고 이들을 서로 구별하고 아들 을 〈나〉하고도 구별짓게 하는 금지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금지사항을 위반하면 이에 따라 구별하는 규칙들이나 示差的 機能들이 없어져, 인물들이 혼동되고 나를 그 인물들과 동일시한다. 그런데 우리는 오이디푸스에 관하여 그는 그가 명하는 구별들과 그것으로써 그가 우리를 위협하는 미분화상태를 둘 다 창조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 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욕망을 삼각형화 속에 끌어들이는 것과 그것이 욕 망에 대하여 삼각형화의 항들과 더불어 만족하기를 금지하는 것은 동일 한 운동 속에서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욕망을 강요하여 구별된 인 물로서의 부모를 대상으로 삼게 하고, 또 이와 관련된 나에 대해서는 이 인물들에 대한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을 금한다. 이것은 구별을 요구하면 서도 미분화상태를 위협으로 내세워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미분화상태 를, 그가 창조하는 구별들의 裏面으로서 창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오이디푸 스 콤풀렉스이다. 오아디푸스는 우리에게 말한다: 너는 배타택일적 이집 둘을 총괄하는 시차적 기능들은 내재라, 이렇게 하면 너는 오이디푸스를 〈해결〉할 것이다__이렇게 하지 않으면 너는 상상적인 동일화들의 신경 중적인 밤 속에 떨어질 것이다. 또 혹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세 항을
구조화하고 구별하는 삼각형의 노선을 따르라一一이렇게 하지 않으면 너 는 한 항이 다른 두 항에 대해서 필요가 없는 여분의 것인 양 항상 그 항을 쓰지 않고 내버려둘 것이요, 미분화상태에서 일체화하는 二者關係둘 을 모든 방향에서 재생산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에나 오이디푸스가 있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이 오이디푸스를 해결한 E 庄· 것이 무엇임은 누구 나 알고 있다: 그것은 사회적 권위 속에 오이디푸스를 더 잘 회복하기 위하여 오이디푸스를 내재화하고, 그리함으로써 오이디푸스를 어린이들 에게 分蜂하고 移行시키는 것이다. 〈어린이는 오이디푸~ 콤플렉스를 해 결해야만 어른이 된다. 이 해결로 어린이는 사회에 들어간다. 거기서 어 린이는 권위의 형상 속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다시 체험해야 하는 의무를 발견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든 출구가 막혀 있다. 文化狀態에 앞서는 것에 되돌아갈 수 없는 처지와 문화상태가 일으키는 불안감이 증 대하는 처지 사이에서 균형잡힌 安定點울 찾을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 다.〉 19) 오이디푸스는 마치 미궁과 같다. 거기서 빠져나오면 반드시 그 속 에 되들어간다. (혹은 어떤 사람을 들어가게 한다.) 문제로서의 혹은 해 결로서의 오이디푸스는 욕망하는 생산 전체를 동여매어 멈추게 하는 끈 의 두 끝이다. 암나사들은 단단히 죄어져서, 아무것도 생산될 수 없고, 다만 소음만이 들릴 뿐이다. 무의식은 짓밟히고, 삼각형화되고, 스스로 선택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출구는 모두 막혀 있다: 이제는 더 이 상 포함적이고 무제한적인 이집들의 시용이 가능하지 · 않다. (고아인) 무 의식에 부모가생겼다!
19) A. Besanc;;o n, Vers une hist o i r e psy c b analyt iqu e, Annales, ma i 1969.
베이트슨 Ba t eson 은 서로 모순되는 두 질서의 메시지를 동시에 발신 하는 것을 二重拘束 double b i nd 이라고 부른다 . (가령 아버지가 자기 아 들에게 앞으로 나아가라, 나를 비판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유효한 비판, 적어도 어떤 종류의 비판은 환영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은연중 강 하게 암시한다.) 베이트슨은 여기에 특별히 정신분열중화히는 상황이 있 음을 보고, 이 상황을 러셀 Russell 의 階型理論의 관점에서 하나의 넌센 스라 해석한다 .20) 우리에게는 도리어 이 이중구속, 이중의 막다른 골목이
하나의 흔히 있는 상황, 더할 나위 없이 오이디푸스화하는 상황으로 보 인다. 그리고 이 상황을 형식화하게 되는 것을 각오하고 말한다면, 이 상 황은 러셀이 말하는 다음과 같은 다른 종류의 넌센스를 보여준다. 죽, 하 나의 二者擇一, 하나의 배타택일적 이집이 하나의 원리에 관련시켜져서 결정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원리 자체가 두 개의 항 혹은- 두 개 의 하부집합을 구성하고 그 자체 灰}택일 속에 들어가는 넌센스를 보여 준다(이것은 이집이 포함적인 경우에 일어나는 것과는 전혀 디른 경우이다). 여기에 정신분석의 . 둘째 오류추리가 있다· 요컨대, 〈 이중구속 〉 은 오이디 푸스 전체와 E 遷· 바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는 하나의 계 열, 혹은 두 극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것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 두 극 은 신경중적인 일체화와 이른바 규범의 내면화이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두 오이디푸스요, 이중의 막다른 골목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신분열 자가 실체로서 생산되는 것은 오로지 이 이중의 길을 벗어나는 유일의 수단으로서이다. 이 이중의 길에서는 규범성도 신경증도 다 같이 출구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 문제도 해결도 다 같이 길이 막혀 있다: 이때 사람 들은 기관들 없는 신체에 포개지고 만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이중의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었는데, 그 자신은 오이디푸스가 이 막디른 골목들과 분리될 수 없음을 뼈저리게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193 6\:!에 로맹 롤랑 Roma i n Rolland 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모든 것은 마치 성공의 요인이 아버지보다 훨씬 더 전전하는 것인 듯, 또 마치 아버지를 능가하는 일은 언제나 금지된 듯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프로이트가· 歷 史的-神話的 系列 전체를 해명할 때 더 잘 볼 수 있다: 한 쪽 끝에서 오 이디푸스는 부천을 살해한 것이 밝혀짐으로써 그 계열에 얽혀 있고, 다 른 쪽 끝에서는 부모의 권위를 회복하고 내면화함으로써 다시 그 계열에 얽혀 있다(〈새로운 국면에서의 옛 질서의 재건〉 ).21) 이 두 끝 사이에 潛伏 20) G. Bate s on et collab., Towards a Theory of Sch izo p h ren ia, Beha-vio r al Scie n ce, 1956, I(cf. les commenta ire s de Pier re Fed ida , Psyc h ose et pa rente , Cri tiqu e, oct. 1968). 21 ) Freud , Psy c halog ie collecti ve et analys e du moi, ch. 12, B.
期, 저 유명한 참복기가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정신분석의 가장 큰 默盛 이다: 이 잠복기의 사회는 〈 형제들 〉 의 사회인데, 이 형제들은 범죄의 결 과들이 자기들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고 필요한 모든 시간을 內面化하는 일로 보낸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게 된다: 이 형제들의 사회는 그야말로 음침하고, 불안정하고 위험스러우며, 부모의 권위와 맞 먹는 것의 재발견을 준비해야 하며, 우리를 다른 극에로 옮아가게 해야 한다. 프로이트의 한 시사에 부합되게, 미국 사회, 즉 무명의 경영과 개 인적 권력의 사라짐 등등을 특색으로 하는 공업사회는 우리에게 〈 아버지 들 없는 사회 〉 의 출현으로 나타나 있다. 물론, 이 사회는 독자적인 방식 으로 부모와 맞먹는 것의 부흥을 꾀할 임무를 띠고 있다• (가령, 영국의 왕실은 뭐니뭐니 해도 나쁜 것이 아니라 ……고 하는 미처리히 Mi ts- cher li ch 의 놀라운 발견 .)22) 그러므로 사람들이 오이디푸스의 한 국을 떠 나는 것은 오로지 다른 극에 옮아가기 위해서임이 분명하다. 신경증이건 규범성이건 오이디푸스 밖으로 나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형제들 의 사회는 생산과 욕망하는 기계들의 아무것도 되찾지 못한다: 도리어 잠복기라고 하는 덮개를 펼쳐놓는다.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이쪽 끝 에서나 저쪽 끝에서 오이디푸스화되지 않는 사람들에 관해서 말하면, 정 신분석가는 정신병원이나 경찰에 도움을 청한다. 〈경찰이 우리와 함께 있다!〉라고 하는 말만큼 정신분석이 사회적 억압의 운동을 지지하고 전 력을 다하여 그 운동에 참여하려 했음을 찰 보여주는 것은 없다. 여기서 우리가 정신분석의 별난 측면들을 년지시 언급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주기를 바란다. 이것은 라깡의 편에 서서 정신분석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품는 사림이 있다고 해서 가장 유명한 협회들에서 주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망델 Men del 박사 같은 사람, 스테판느 St ep h ane 박사 같은 사람들을 보라. 어떤 사람이 오아디푸스의 올가미에서 빠져나오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들이 빠지는 흥분상태, 그리고 그들이 정말 경찰을 불러들이는 것을 22) A. Mi tsch erli ch , Vers la socie t e sans pe res, 1963, tr.. fr. Ga llim ard, pp. 327-33 0.
보라. 오이디푸스는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을수록 그만큼 더 위험하게 되는 것들과 비슷하다; 이런 때에 大司祭들 대신에 경찰이 나타난다. 이 런 의미에서 이충 7 속을 깊이 분석한 최초의 예는 마르크스의 『유태인 문제』일 것이다: 가족과 국가 사이의__가족의 권위인 오이디푸스와 사 회의 권위인 오이디푸스 사이의一―이중구속이 거기서 깊이 분석되고 있다. 두 측면에서 무의식을 동여매는 것을 제의하고는, 오이디푸스는 엄밀 히 말하여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수학자들의 언어로 말하여, 어떤 의미에서 오이디푸스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인지 볼 것이다. 우리 는 오이디푸스로 해서 건강이 좋다느니, 오이디푸스로 해서 병이 들었다 느니, 오이디푸스 때문에 갖가지 병이 들었느니 하는 말에 아주 싫증이 나 있다. 때로는 어떤 분석가가 정신분석의 여물통이요 菓窟인 이 신화 에 진저리가 나서 그 원천에 되돌아가는 경우가 있다: 〈프로이트는 결 국 아버지의 세계로부터도, 죄책감으로부터도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 대한 관계의 논리를 구축하는 가능성을 줌으로써 인간에 대한 아버지의 지배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길을 연 최초의 사 람이다. 아버지의 법을 넘은 곳에서, 모든 법을 넘은 곳에서 사는 가능성 은 아마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가져다 주는 가장 중요한 가능성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또 아마도 인간 프로이트 때문에,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결론적으로 생각게 한다. 정신분석이 약속하는 이 해방은 정 신분석 밖에서 성취될 것이다, 혹은 이미 성취되었다.〉 23) 하지만 우리는 이 비관론이나 이 낙관론의 어느 것에도 가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신 분석이 오이디푸스의 진정한 해결을 가능케 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낙관 론이 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신과 같다; 아버지는 신과 갇다; 이 문제는 그 문제와 해결을 모두 없애버릴 때에라야 해결된다. 정신분열자 분석은 오이디푸스를 해결하겠다고 나서지 않으며, 오이디푸스적 정신분 석보다도 더 찰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자부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의 23) Marie - C la ire Boons, Le Meurtr e du pe re chez Freud, L'!n eo n- scie n t, n~S, jan vie r 1968, p. 129.
식을 脫오이디푸스화하여 진정한 문제들에 도달하려 한다. 그것은 고아 인 무의식의 영역들, 바로 〈모든 法의 彼岸〉에 도달하려 한다. 거기서는 그 문제가 제기도 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이 변화, 이 해방이 정신분석 밖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믿는 데 성립하는 비관론에 참가할 수도 없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정신분석 기계를 혁명 장치의 불가결의 한 부품이 되게 하는 내부에서의 역전의 가능성을 믿고 있다. 뿐더러, 이 가능성의 객관적 조건들이 현실적으로 주어져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마치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두 국을 가지고 있었던 듯이 일어나고 있다: 그 하나는 일체화하는 상상적 형상들의 극이요, 다 른 하나는 구별하는 상칭적 기능들의 국이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들은 오이디푸스화된다: 그것을 發作으로서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 것을 구조로서 가지고 있다. 이때 사람들은 발작을 다른 것들에 옮겨놓 는데, 이렇게 되면 그것은 다시 시작한다. 이와 감은 것이 오이디푸스적 이집이다. 그것은 振子의 운동이요, 배타택일적 역비례이다 . 이런 까닭에 사람들이 우리에게 부모의 심상에 기초를 두고 있는 단순한 오이디푸스 觀울 넘어 상칭적 기능들을 하나의 구조 속에서 규정할 것을 권할 때 그 둘은 쓸데없이 전통적인 아빠-엄마를 어머니의 기능, 아버지의 기능으로 써 대체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이와 갈이 함으로써 무엇을 얻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이 심상들의 가변성 너머에 오이디푸스의 보 편성의 기초를 세우고, 욕망을 법률과 금지사항에 더 잘 밀착시키고, 무 의식의 오이디푸스화의 과정을 끝까지 밀고 나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이디푸스를 그의 가변적 심상들의 분화되지 않은 가치에로 향하고 있 다고 보는가, 그렇지 않고 그의 상칭적 기능들의 구별하는 능력에로 향 하고 있다고 보는가에 따라, 오이디푸스는 여기서 그의 두 극단, 죽 그의 最小限과 그의 最大限울 발견한다 . 〈사람들이 質料的 想像에 접근할 때, 구별하는 기능은 감소되고, 그들은 等價物들에로 향한다; 사람들이 형성 적 요소들에 접근할 때, 구별하는 기능은 증대하고, 그들은 서로 구별되 는 原뀌貫들에로 향한다 . 〉 24) 구조로서의 오이디푸스가 그리스도교 삼위 24) Edmond Ortig u es, Le Dis c ours et le sym bole, Aubie r , 1962, p. 197.
일체요, 한편 발작으로서의 오이디푸스가 신앙에 의하여 충분히 구조화 되지 않은 가족적 삼위일체라는 것을 알게 되어도 우리로서는 별로 놀랄 것이 없다: 항상 역비례의 두 극이 있다. 오이디푸스여 영원하라 !25) 이 리하여 라깡주의의 얼마나 많은 해석들이 이 이중의 막다른- 골목을 형성 하여 봉쇄하고, 우리를 아버지의 문제에로 되돌아가게 하고, 심지어 정신 분열자를 오이디푸스화하기 위하여, 또 상징적인 것 속의 결함이 우리를 상상적인 것에로 되돌려 보내고, 거꾸로 상상적인 것들의 잘못된 접둘이 나 혼동들이 우리를 구조에로 되돌려 보낸다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공 개적으로나 은연중 경건하게 구조적인 오이디푸스를 援用했는가. 어느 유 명한 선배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당신들은 이미 거기 관하여 판에 박힌 말을 만들어내었소……〉라고 말하였다. 이런 까닭에 우리로서는 발작 오이디푸스와 구조-오이디푸스 사이에, 혹은 문제와 해결 사이에서와 마 찬가지로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 아무런 본성상의 차이도, 아무런 경계도, 아무런 한계도 인정할 수 없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오로지 상관적인 이중의 막다른 골목이다. 죽 무의식 전체를 싹 쓸어버 리고, 끊임없이 이쪽 끝에서 저쪽 끝에로 되돌려 보내는 임무를 띤 전자 운동만이다. 배타택일적 이집으로 무의식을 짓누르는 이중의 지렛대만 01 다. 본성상의 전정한 차이는 상칭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사이에 있지 않 고, 욕망하는 생산을 구성하는 기계적인 것의 현실적 영역과, 오로지 신 화와 신화의 변형된 것들만을 형성하는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의 구 조적 전체 사이에 있다. 차이는 오이디푸스의 두 가지 사용 사이에 있지 25) Cf. J. M. Pohler, La Pate r n ite de Di eu , L'Inconscie n t, n°5( 이 논문 은 二重拘束으로서의 오이디푸스를 완전히 定式化하고 있다: 〈인간의 심리적 생 활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생활 속에서 체험하는 두 가지 방식 사이의 일종의 변증법적 긴장 속에서 전개된다: 그 방식들 중 하나는 오이디푸스를 직접 체험 하는 데 성립하며, 다른 하나는 오이디푸스적이라 부를 수 있는 구조들을 따라 살아가는 데에 성립한다. 더구나 경험은 이 구조들이 이 콤플렉스의 가장 위급 한 국면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는, 인간이 결정적으 로 이 콤플렉스의 刻印을 받고 있다: 이 콤플렉스는 인간의 비참항만큼이나 인 간의 위대항을 이룬다〉 등등, pp. 57-58 .
않고, 포합적이고 무제한적인 이접둘의 無오이디푸스적 사용과 배타택일 적 이집들의 오이디푸스적 사용 사이에 있다. 이 경우 후자의 사용은 상 상적인 길들 혹은 상칭적인 것의 가치들을 빌린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신화에 대한 라깡의 다음과 같은 경고는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비극의 의미가 더욱더 상실되어 가는 사회형태들 속에서는(오 이디푸스에 관한 프로이트적 신화) 무한정하게 그 공연 포스터를 붙이지 는 못할 것이다……. 아무런 祭典도 갖지 않으면 신화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런데 정신분석은 오이디푸스의 제전이 아니다.〉 따라서 심상 둘을 거슬러 울라가 구조에 이르고, 상상적 형싱들을 거슬러 올라가 상 징적 기능들에 이르고, 아버지로부터 법률에로, 어머니로부터 위대한 他 者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도 실상 문제는 그저 후퇴했을 따름기다 26) 그 리고 사람들이 이 후퇴에 소비된 시간을 헤아려보려 하면, 라깡은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제들의 사회의, 죽 형제애의 유일의 기초는 〈分 離 11 〉이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 하고 있는가?) 어쨌든 라깡이 방금 암나사를 풀어놓고는 다시 죄고 있는 것은 적철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방금 신경증까지도 정신분열증화하여, 정신분석의 터전을 뒤집어엎울 수 있는 정신분열증의 흐름을 흘러가게 해놓고는 정신분열자를 오이디푸스 화한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었다. 라깡의 對象 底근 지옥의 기계, 죽 욕망 하는 기계의 방식으로 구조적인 평형의 한복판에 침입하고 있다. 라깡의 제지들의 제 2 세대가 뒤이어 동장했는데, 그들은· 오이디푸스라고 하는 가짜 문제에 대하여 더욱더 감각이 무디어지고 있다• 그런데 제 1 세대의 제자들이 오이디푸스의 질곡을 다시 고정시켜 보려는 생각을 했던 것은 라깡이 시니피양들의 연쇄를 하나의 전제군주 시니피앙에 두사하는 일종 의 두서를 주장하여 모든 것을 하나의 결여하는 항에 매달리게 한 것같 이 생각된 한에서가 아닌가? 이 결여하는 항은 스스로 결여하면서 욕망 의 계열 속에 결여를 다시 끌어들여 이 계열에다가 배타택일적 사용을 강요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를 신화라 하여 고발하면서 거세의 콤플렉 스는 신화가 아니라 오히려 이와 반대로 현실적인 어떤 것이었다고 주 26) Lacan , Ecrits , p. 813.
장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이것은 〈어떻든 멈춰서야 한다〉고 의친 아리스토텔레스의 외침을 되풀이하는 것, 프로이트가 말하는 아낭 케 Ananke, 죽 운명, 저 바위롤 다시 들먹이는 것이 아닌가?)
5 소비의 연접적 종합 소비의 연접적 종합이라고 하는 셋째 종합에서는, 어떻게 기관들 없는 신체가 정녕 하나의 알이었던가를 우리는 보았다. 이 알에는 軸線들이 관통하고 있으며, 여러 地帶가 띠처럼 이 알을 둘러싸고 있다. 이 알에는 평탄한 마당들과 들이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다. 또 이 알은 句配線들로 측정되며, 참재력들로 차 있고, 接境둘로 구획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약품들의 생화학과 연결된) 정신분열증의 생화학의 가능성을 믿 는다. 이 생화학은 더욱더 이 알의 본성과 터전-句配線-境界의 配 分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주체가 기관들 없는 신체 위를 지나가면서 생성, 몰락, 향상, 이동을 할 때의 强度둘의 관계 들이다. 레잉 La i n g이 정신분열의 과정을 (원시인이 사회에 들어갈 때의) 入社儀式의 여행, 죽 자이상실의 선험적 경험이라 규정하고 있는 것은 전 적으로 옳은 일이다. 이 경험은 주체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 다: 〈나는 이를테면 생명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기관들 없는 신체)에서 출발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나는 내 앞에 하나의 무서운 여행을 눈여 겨보아 왔다, 아니 느껴왔다〉 .m) 여기서 여행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방금 위에서 알에 관해서 또 알 속에서와 알 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 해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隱哈가 아니다. 알 속에서와 알 위에서 일 어나는 일은 형태 발생의 운동들, 세포집단들의 자리바꿈들, 잠재력들 의 櫓曲들과 移動들과 가치변동들이다. 내면적 여행을 의면적 여행들 27) Ronald La ing, La Politi qu e de !'exp e rie n ce, 1967, tr. fr. St oc k, p. 106.
에 대립시킬 것도 아니다: 렌츠의 산책, 니진스키의 산책, 베케트의 작품 의 등장인물들의 산책들은 실제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 산책들에 있어서 는 質料의 현실적안 것이 모든 연장을 떠나 있다. 이것은 마치 내면적 여행이 모든 형태와 신분 같은 것을 내버리고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밖에서나 안에서나 이제는 遊牧의 주체가 체험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짝지어전 순수한 강도들만이 눈에 띈다. 이것은 환각적 경험 도, 망상적 사교도 아니라, 하나의 느낌, 즉 강도량의 소비로서의 일련의 情動들과 感情들이다. 이 정동들과 감정들은 뒤이어 일어나는 환각들과 망상들의 재료가 된다. 강렬한 정동, 감동은 망성들과 환각들의 공통의 뿌리인 동시에 아것들을 분화시키는 원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것 은 이 생성들, 강도 있는 移行들과 이동들 속에 뒤섞여 있다고 생긱해도 좋겠다. 시간을 오르내리는 이 모든 표류가 그렇다―-나러들, 인종들, 가족들, 부모의 호칭들, 신의 호칭들, 역사의 인명들, 지명들, 심지어 갖 가지 사실들이 뒤섞여 있다. 나는 신이 된다, 나는 여자가 된다, 나는 쟌 느 다르고였고 헬리오가발루스 He li o g abale 이고, 또 그 위대한 몽고인, 한 중국인, 한 아메리카 인디언, 한 聖堂기사이고, 나는 내 아버지였고 나는 내 아들이었다(고 나는 느낀다). 또 모든 죄인, 리스트에 오른 모든 죄인, 성실한 죄인과 불성실한 죄인을 포함한 모든 죄인이었다: 프로이 트와 그 오이디푸스보다도 오히려 손디 Szond i의 경우가 그렇다. 〈아마 도 버러지이기를 원해서 나는 마침내 거인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 는 버러지이기만 하면 된다. 나는 ‘그 아무개'이고자 노력함으로써 아마 도 내가 되고자 하는 자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니는· ‘그 아무개'이 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모든 것이 이렇게 뒤섞인다고 하면, 그것은 강 도에 있어서이다. 여기에는 장소들과 형태들의 혼란이 없다. 왜냐하면 이 것들은 새로운 질서, 죽 강렬한 강도적 질서를 위하여 정녕 파괴되어 있 기 때문이다. 이 질서는 무엇인가?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 맨먼저 배치되는 것은 인종들, 문화들 및 그 신들이다. 어느 정도까지 정신분열자가 역사를 공 부하고, 세계사를 환각하고 망상하며, 인종들을 分封했는가 하는 것은 지
금까지 충분히 주의되지 않았다. 모든 망상은 인종에 관한 것이다. 이렇 게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인종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기 관들 없는 신체의 지역들이 인종들과 문화들을 〈 대표한다 〉 는 것을 의미 하지 않는다. 충만한 신체는 숫제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 로, 인종들과 문화들이 이 신체 위의 지역들, 죽 강도들의 지대둘, 참재 력들의 터전들을 지시한다. 이 터전들의 내부에서 개인화, 남녀의 성별의 현싱들이 생산된다. 한 터전에서 다른 터전에 넘어가려면 문턱 같은 경 계선들을 타고 넘어가야 한다: 사람들은 이동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이 개인이 저 개인으로 이 성이 저 성으로 바뀌기도 한다. 이리하여 출발하 고 떠나는 것은 출생하고 죽는 것마냥 단순하게 된다. 인종들이 서로 싸 우고, 문명들을 파괴하는 일이 생간다. 그 모양은 대이동이 있은 후 사람 둘이 지나간 자리에 풀 포기 하나 돋아나지 않는 것과 같다-나중에 고찰하는 바와 같이, 이 파괴들은 아주 다른 두 방식으로 행해지기는 해 도 말이다. 한 경계선을 넘어서면 딴 곳에 椿害를 주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살지 않게 된 곳들에는 기관들 없는 신체가 다시 자리잡는다. 우리는 殘忍性의 劇場을, 우리들의 문화에 대항하는 투쟁, 〈 인종 〉 둘 간의 대결, 멕시코 및 그 권력들과 종 교들을 향한 아르또의 대이동과 분리시킬 수 없다: 개체화들이 생산되는 것은 강렬한 진동들에 의하여 명백하게 규정되는 힘들의 터전에서만이 요, 또 이 터전이 잔인한 인물들을 부추기는 것은 그들이 욕망하는 기계 들의 誘導器官 혹은 부품(죽 마네킹)인 한에서이다 .28) 지옥의 계절은 어 떻게 유럽의 가정들에 대한 고발, 아무리 빨리 와도 너무 빨리 왔다고 할 수 없는 파괴들에 대한 호소, 갤리선을 것는 죄수들에 대한 찬탄, 역 사의 문턱들을 힘차게 넘어뛰는 것, 저 굉장한 이동과 분리될 수 있겠는 가. 굉장한 이동이란, 여자가 되는 일, 스칸디나비아인과 몽고인이 되는 일, 〈민족들과 대륙들을 옮겨놓는 일〉, 환각과 마찬가지로 망상을 지배 28) 잔인성의 극장에서의 인종들과 강도들의 활동에 관하여는, cf. Arta u d, (Eu vres comp le te s , t. IV et V( 가령, 『멕시코 정복계획』, IV, p. 151: 그리고 『 Les Censi 속의 전동들의 역할과 강도들의 회전』, V, pp. 46 sq .).
하는 야수적 강도의 감정, 특히 〈영원한 劣等人種 〉 이고자 하는 단호하 고 집요한 質科的 의지이다: 〈나는 명문 가정의 아들들을 모두 사귀었 다……. 나는 철대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크리스천이었 던 적이 한 번도 없다…… . 그렇다 나는 당신들의 빛에 눈이 감긴다 . 나 는 짐승이요 검둥이이다……. 〉 그런데 짜리두스트라 Zara t hus t ra 를 〈위대한 정치〉 및 인종둘의 활기 와 분리시킬 수 있겠는가. 인종들의 활기는 니체로 하여금 다음과 갈이 말하게 한다: 나는 독일인이 아니다, 나는 폴란드인이다. 여기서도 개체 화는 힘들의 복합체들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 힘들의 복합체란 인물들을 한 죄인 속에 體現되는 그 수만큼의 강도의 상태들로서 규정하는 것이 요, 가족과 〈나〉의 인위적 통일을 파괴하여 줄곧 경계선을 타고 넘기를 마지 않는 것이다: 〈나는 프라도 Prado 이다, 나는 프라도의 아버지이다, 나는 내가 레셉스 Lesse p s 라고 감히 말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파리 사람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관념, 죽 성실한 죄인이라고 하는 관념을 주고자 하였다. 나는 샴비쥬 Chambig e , 죽 또 하나의 성실한 죄인이 다……. 내 겸손함을 괴롭히는 불쾌한 일은 역사의 모든 이름이 E 博아닌 냐고 하는 것이다.〉 29) 하지만 자기를 〈……라고 생긱하고 있는〉 狂人 에 대해서 잘못 말해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서는 결코 어떤 인물과 자기 를 동일시하는 것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문제되는 것은 전혀 디~ 것이 다: 죽, 인종들, 문화들 및 신들을 기관들 없는 신체 위의 강도의 터전 들과 동일시하고, 인물둘을 이 터전들을 채우고 있는 상태들과, 또 이 터 전들을 번갯불갇이 횡단하는 효과들과 동일시하는 것이 문제다. 여기서 이름들이 그것들의 고유한 마술을 가지고 그 역할을 수행한다: 표상의 무대에서는 하나의 〈나〉가 자기를 인종들, 민족들, 인물들과 동일시하는 일이 없지만, 강도 있는 양들의 생산 속에서는 고유명사들이 인종들, 민 족들 및 인물들을 지역들, 경계선들, 혹은 효과들과 동일시하는 일이 더 러 있다. 고유명사들의 이론은 표상의 말로써 생각되어서는 안 되며, 〈효과들〉의 부류에 관련된다: 효과들은 한갓 원인들에 의존하는 것이 29) Ni et z s che, 188~ 1 월 5일 에 Burckhard t에게 보낸 편지 .
아니라, 한 영역을 채우는 것, 기호들의 체계를 현실화하는 것이다. 이것 은 물리학에서 찰 볼 수 있는 일이다. 물리학에서는 고유명사들이 참재 력들의 영역에서 그러한 효과들을 지시한다(줄J oule 효과, 제베크 Seebeck 효과, 켈빈 Kelvin 효과). 역사에 있어서도 물리학에서와 같은 일이 행해 지고 있다: 쟌느 다르끄 효과, 헬리오가발루스. 효과__ 역사상의 모든 이름들이 그렇고, 아버지의 이름은 그렇지 않다……. 빈약한 현실, 현실의 상실, 삶과의 접촉의 결여, 죽 자폐증과 감정 둔 화에 관하여 사람들은 모든 것을 말하였다. 정신분열자들도 기다려지는 病狀의 鑄型에 홀러들어가기를 서두르는 나머지 모든 것을 말하였다. 컴 컴한 세계, 증대하는 사막: 이 사막에는 原子工場이 세워져, 고독한 기계 가 바닷가에서 윙윙거리고 있다. 그런데 기관들 없는 신체가 바로· 이 사 막인 것은 그것이 분할할 수 없고 분해할 수 없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열자는 어디에나 존재하기 위하여, 죽 현실적인 것이 생산되는 어 디에나, 또 현실적인 것이 생산되었고 또 생산될 어디에나 존재하기 위 하여 이 거리를 뛰어넘는다. 현실이 하나의 원리이기를 그친 것은 사실 이다. 그러한 원리를 따라 현실적인 것의 현실성은 분할할 수 있는 추상 량으로서 정립되었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것은 질을 달리하는 개체들 속 에, 뚜렷이 질이 다른 형태들 속에 배분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현실 적인 것은 강도 있는 양들 속에 거리들을 싸안고 있는 하나의 생산물이 다. 분해될 수 없는 것이 그 속에 들어 있다. 그리고 분해될 수 없는 것 이란 그것을 싸고 있는 것이 본성과 형태를 바꾸지 않고서는 분해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정신분열자에게는 원리들이 없다: 그가 어떤 것이라면 이것은 오직 그가 다른 것임으로써이다. 그가 거인인 것은 오직 버러지 임으로써만이요, 또 버러지인 것은 오직 〈그 아무개〉임으로써이다. 그가 젊은 아가씨인 것은 오직 젊은 아가씨를 흉내내고 아가씨인 체하는 노인 임으로써이다. 혹은, 한참 젊은 아가씨인 체하고 있는 어떤 노인인 체하 는 어떤 사람임으로써이다. 혹은 차라리 어떤 사람인 체함으로써 ……이 다. 이것은 이미 저 로마의 황제들, 죽 수에토니우~ 전하는 열두 편집병자들의 전적으로 동양식의 기법이었다. 작그 베시 Jac q u es
Besse 의 놀라운 저서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정신분열자의 이중의 산 책을 볼 수 있다. 죽 분해할 수 없는 거리들을 더듬어가는 의계의 지리 적 여행과, 이 거리들을 감싸고 있는 강도들을 더듬어가는 내면의 역사 적 여행을 다시 볼 수 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춤추는 창녀인 체하 는 (가짜) 제독인 체함으로써만 그 배의 승무원의 반란을 진정시키고 다 시 제독이 될 수 있었다 .30) 그런데 이렇게 무엇인 체하는 것은, 앞서 말 한 신원의 확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강도들 속에 항상 감싸여 져 있는 분해할 수 없는 거리들을 나타낸다. 이 강도들은 형태를 바꾸어 야만 피차간에 딴 것 속에 분할되어 들어갈 수 있다. 신원의 확인이 命 名이요 指名이라고 한다면, 무엇인 체하는 것, 즉 흉내내는 것은 이 명명 에 대응하는 글 ec rit ure, 죽 심지어 현실적인 것에 대한 이상하게도 다 의적인 글이다 . 그것은 현실적인 것을 그 원리로부터 이탈시켜 현실적인 것이 욕망하는 기계에 의하여 실제로 생산되는 점에까지 현실적인 것을 날라간다. 이 점에서는 複製가 복제이기를 그치고 현실 및 현실의 모조품 이 된다. 강도 있는 현실적인 것을 그것이 자연 및 역사와 外延울 같이 하는 중에 생산되는 그대로 파악할 것, 로마 제국, 멕시코의 도시들, 그 리스의 신들과 발견된 대륙둘을 파헤치고 거기서 항상 증대하는 현실을 캐낼 것, 그리고 편집병적 고통과 독신의 영광 속에 있는 귀중한 것을 구성할 것-역사상의 모든 학살, 그것은 〈 나〉이다, 모든 승리, 그것 역 시 〈나〉이다. 이것은 마치 단순하고 一義的인 어떤 사건들이 극도로 다 의적인 것에서 풀려나온 것과 같다: 클로소스키의 정식을 따르면, 이와 같은 것이 정신분열자의 〈어릿광대짓 〉 아다. 죽 잔인성의 극장의 진정한 프로그램, 현실적인 것을 생산하는 기계의 등칭이다. 정신분열자는 삶과 의 뭔지 알 수 없는 어떤 접촉을 상실하기는커녕, 오히려 현실의 鼓動의 중심부에 기장 기-77 H 는 곳에, 현실적인 것의 생산과 일체를 이루는 강도 있는 점에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라이히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 30) Jac q ue s Besse, Le Danseur, in la Grande Paqu e , Ed. Belf on d, 1969 (이 책의 제 1 부 전체는 도시에서의 정신분열중환자의 산책을 묘사하고 있다: 제 2 부 「광기의 전설들표든 역사적인 에피소드들의 환각 혹은 망싱에서부터 시작하 고있다).
게 하고 있는 것이다: 〈 정신분열자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이 생기 있는 境域의 경험이다……. 생명의 감정에 관해서 말하면, 신경중환자와 도착자가 정신분열자에 대해서 갖는 관계는, 치사한 소매상인이 위대한 탐험가에 대해서 갖는 관계와 같다.〉 31)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되 돌아온다: 정신분열자를 현실과 단절된 자폐증의 입원환자들의 모습에로 몰아넣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정인가, 그렇지 않고 반대로 과정의 중단, 그 악화, 그 空轉인가? 정신분열자를 강요하여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 철수시켜 다시 귀머거리, 소경, 벙어리가 되게 하고 있는 것은 무엇 인 7}?
31 ) Reic h , La Foncti on de l'orga s me, 1942, tr. fr. L'Arche, p. 62. 자폐증 비 판에 관하여는, cf. Jes pa ge s de Rog er Genti s, Les Murs de I'as ile , Maspe ro, 1970, pp. 41 sq.
사람들은 말한다: 그는 자기를 루이 17 세로 여기고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루이 17 세 사건에 있어서,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여 가장 멋있게 왕위계승권을 주장한 리슈몽 R i chemon t의 경우에 있어서, 중심에 있는 것은 하나의 욕망하는 기계 혹은 독신기계이다: 왕태자를 태워서 도망 가게 할, 관절이 짧은 다리를 가전 말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온통 생산과 반생산을 해내는 자들이 있다. 逃走의 조직자들, 공범자들, 동맹한 군주들, 적의 혁명군들, 敵意를 가지고 질투하고 있는 숙부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인물들이 아니고 그 數만큼의 상태들, 죽 왕위계승권 주장자가 체험하는 順境과 逆境의 상태들이다. 뿐만 아니라, 왕위계승권 울 주장한 리슈몽의 천재적인 솜씨는 그저 루이 17 세의 〈內實을 밝히는 것〉도. 디른 왕위계승권 주장자들의 內實울 밝혀 그들이 가짜라고 고발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른 왕위계승권 주장자들을 떠맡고 그들을 진정 그렇다고 승인함으로써, 죽 그들로 하여금, 그들도 역시 그가 체험 한 상태들이라고 그들의 內實울 밝히는 것이다: 나는 루이 17세 이지만, 나는 또 자기가 루이 17세 라고 말한 에르바고 Herva g aul t요 마르뛰랭 브 뒤노 Marth urin Bruneau 이기도 하다 .32) 리슈몽은 자기야말로 루이 17세
32) Mauric e Gar\;on, Louis XVII ou la fau sse enig me, Hachett e, 1968, p. 177.
라고 우기지는 않는다 . 그는 루이 17 세롤 앗아가는 기계 주위에 몰려드 는 계열의 특이성들을 체험히는 자에게 귀속될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나〉가 중십에 있지도 않고, 주위에 인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도 아니 다. 陶鮮 그물 속의 일련의 특이성들, 혹은 연접적 조직 속의 강도 있 는 상태들, 그리고 円環전체 위에서 위치를 옮기는 주체밖에는 아무것 도 없다. 이 주체는 모든 상태를 체험하며, 그 敵들을 이기듯 이 상태들 의 어떤 것들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며, 다른 상태들은 그의 동맹자들을 즐기듯 이를 줄기며, 도처에서 자기의 轉身둘의 기만적 보상을 거둬들인 다. 위치는 정해져 있으나 다른 접은 모두 불확실한 傷療인 부분적 대상 은 왕위계승권 주장자가 결여하고 있는 유년시절의 모든 追憶보다 더 나 은 증거이다. 여기서는 연접적 종합이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그 러므로 왕은 나다! 그러므로 왕국은 내 차지이다! 그런데, 이 나는 円環 을 빙빙 돌고 그 전동들의 결과로 생기는 잔여의 주체일 따름이다. 모든 정신착란 죽 망상은 역사적-세계적, 정치적, 인종적 내용을 가지 고 있다: 그것은 인종들, 문화들, 대륙둘, 왕국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 긴 표류가 오이디푸스의 파생물만을 구성하는 것인지 따져보아야 한다. 가정의 질서는 깨지고, 가족들은, 아들, 아버지, 어머니, 누나 할 것 없이 모두 거부되고 있다一_ 〈나는 인권선언을 모두 지키는 가족들을 내 가족 이라고 본다!〉, 〈만일 내가 나에게 가장 심각하게 반대하는 자를 찾는다 면, 언제나 내 어머니와 내 누나가 언제나 그런 자이다; 내가 나와 비슷 한 독일의 賤民과 인척 관계가 있음을 아는 것은 신성에 대한 하나의 모 독이었고, ……내 志墓回歸思想에 대한 가장 심각한 異뱅였다!〉 여기서 문제인 것은, 역사적-정치적, 인종적 및 문화적인 것이 하나의 명백한 내용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명확히 하나의 구성에 의존하는지, 혹은 이 와는 반대로 가족들의 질서가 우리에게 숨기고 있는 잠재력인 것을 드러 내어 줄 실마리로서 추궁해 보아야 할 것인지를 아는 일이다. 가족들과 의 단절은 일종의 〈가족의 이야기〉, 죽 바로 우리를 가족들에게로 되돌 아가, 가족 자체에 내재하는 구조적인 하나의 사건이나 하나의 결정을 알아보아야 할 〈가정의 이야기〉로 여겨져야 하는가? 혹은 이 단절은 문
제가 전혀 달리 제기되어야 할 칭후인가? 왜냐하면 정신분열자는 자기를 가족 밖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 역사상의 이름들 〉 은 아버지의 이름에서 파생된 것인가? 그리고 인종들, 문화들, 대륙들은 아빠-엄마의 대용물이 요, 오이디푸스의 계보에 속하는 것들인가? 역사는· 죽은 아버지를 시니 피앙으로서 가지고 있는가? 다시 한번 법원장 슈레버의 망상을 생각해 보자. 물론, 인종들이 거론되고, 역사가 동원되고 있지만, 거기서는 이런 일이 앞서 우리가 문제삼은 저자들에게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해 지고 있다. 또 역사의 개념도 전혀 다르다. 남은 문제는 슈레버의 회생록 이 신에게 선택된 민족에 관한 이론과, 현재 선택받은 독일인들이 유태 인들 가톨릭 교도들, 술라브인들의 위협 아래 직면하고 있는 위험들로 가득 차 있는 점이다. 슈레버는 그의 탈바꿈들과 강렬한 移行들 속에서 제수이트파의 제자가 되고, 독일인들이 술라브인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어떤 도시의 시장이 되고, 프랑스인들에 대항하여 알지스를 지키는 어린 소녀가 된다; 마지막에 그는 아리아인의 句配線 죽 문턱을 뛰어넘어 몽 고의 왕자가 된다. 이와 같이 제자가 되고, 시장이 되고, 어린 소녀가 되 고 몽고인이 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인종 적인 것들을 무더기로 동원하지 않는 편집병적 망상은 하나도 없다. 여 기서, 가령 파시스트들이 단순한 편집병자들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잘못 된 일일 것이다; 이런 결론이 잘못인 것은, 사물들의 실제적 상태에서는 바로 그것이 역시 망상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내용을- 가족 내부의 결정 에 다시 끌어가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더욱 골치아픈 것으로 보 는 것은 이 막대한 내용이 프로이트가 행한 분석에서는 온통 사라지고 있는 점이다: 그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모든 것이 오이디푸스 속 에서 분쇄되고, 가루가 되고, 삼각형화된다. 모든 것이 아버지 위에 포개 져서, 오이디푸스적 정신분석의 불충분함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모오 마노니 Maud Manno ni가 보고하고 있는, 특히 아주 정치적인 성격을 띤 편집병적 망상을 고찰해 보자. 그 예가 아주 놀라운 것인 만 큼 우리는 모오 마노니의 저작과 그것이 제도적인 반정신의학적 문제들
을 제기하는 솜씨에 대하여 아주 경탄해 마지 않는다 . 여기에 마르티니 크 섬에서 온 한 사나이가 있다. 그는 망상 속에서 아랍인들괴는 알제리 전쟁으로, 백인들과는 6& J 5--%l의 사건 등등으로 관련을 가전 처지에 자 기를 둔다: 〈 나는 알제리 문제로 병들었다. 나는 그들과 똑같이 어리석 은 짓을 하였다(성적 쾌락). 그들은 나를 같은 인종의 형제로 대하였다. 내 몸 속에는 몽고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알제리인들은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나에게 반론하였다 . 나는 인종차별의 관념들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갈리아인의 왕조의 후손이다• 이 자격으로 나는 귀족의 신분을 가 지고 있다……. 내 이름을 확정해 주되 학문적으로 분명히 확정해 주었 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면 나는 부인방을 하나 만들 수 있을 것이다. 〉 그런데, 모오 마노니는 정신병 속에 〈 만인에 대한 전리 〉 와 〈 만인에 대 한 진리〉의 성격이 들어 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어서, 환자가 스스로 주 장하는 인종차별의 정치적 • 형이상학적 테마들을 위하여 가족관계들을 폭파하고 있는데, 이 폭파는 子宮인 한에서의 가족구조의 내부에 그 기 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 기원은 상징의 공허 속에, 죽 〈 아버 지의 시니피앙의 최초의 배제〉 속에 있다. 학문적으로 확정해야 할 , 그리 고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그 이름은 이제 아버지의 이름 이의의 다른 것 이 아니다. 다른 경우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배제라고 하는 라깡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반역자를 억지로 오이디푸스화하게 된다: 오이디푸스의 부재는 아버지측의 결여, 죽 구조 속의 결함으로 해석된 다; 그 다음에, 이 결여의 이름으로 우리는 오이디푸스의 다른 極, 죽 모체의 미분화상태 속에서 상상으로 신원을 확인하는 국에로 되돌려보내 진다. 二重拘束의 법칙은 사정없이 작용한다. 이 법칙은, 상칭적인 것 속 에서 배제되는 것이 환각의 형태로 현실적인 것 속에 다시 나타나지 않 으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 우리를 한 극으로부터 다른 극에로 되던진다. 그러나 이리하여 오이디푸스의 지배하에서는, 죽 오이디푸스화되기 위하 여 환자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는, 역사적-정 치적 테마 전체가 상상적인 신원확인의 집합으로 해석된다 .33) 그러니 물론 33) Maud Mrumon i, Le Ps ych ia tre, son fou et la psych analys e , Ed . . du
Seu ii 1970, pp. 104-107: 〈오이디푸스적 인물들이 여기에 있지만, 변환들의 놀이가 행해지면 빈자리 같은 것이 있게 된다……. 거부된 것으로 나타나는 것 은 모두 남근과 아버지에 관계되는 것이다……. 조르쥬 Geor g es 가 자기를 욕망 하는 자로 파악하려 할 때마다, 그는 어떤 형태의 신원들의 해체에 되돌려보내 진다. 그는 어머니의 심상에 사로잡힌 하나의 他者이다……. 그는 어머니의 모 습에 사로잡혀 있는 상상적 위치의 올가미에 언제까지나 걸려 있다; 이 장소로 부터 그는 자기를 오이디푸스 삼각형 속에 자리잡게 한다. 이 장소는 불가능한 신원확인의 과정을 의미하며, 또 언제나 순전히 상상적인 변증법의 방식으로 이 파트너 혹은 저 파트너를 파괴함을 의미한다.〉
문제는 가족적인 결정들과 비결정들이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가를 아는 데 있지 않다. 그것들이 어떤 역할을 맡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것 은 거기서 역사적 망상의 浮動하는 內容들이 想像의 거울의 그 수만큼의 파편으로서 派生되는 象徵의 組織者 혹은 파괴자라고 하는 주요한 역할인 가? 아버지의 자리가 비어 있고, 어머니와 누나가 戀마냥 발전해 나오는 것이 바로 정신분열자를 억지로 오이디푸스에게로 되돌아오게 하는 정신 분열자의 삼위일체적 정식인가? 그런데,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정 신분열증에서 제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신원확인의 문제이 다……. 따라서 병을 고치는 것이 오이디푸스화하는 것이라면, 〈병을 고 치기를 원치 않는〉, 그리고 정신분석하는 사람을 처음에는 가족과 한통 속이 된 자로, 다음에는 경 찰과 한통속이 된 자로 보는 환자의 蓮繼을 이해할 수 있다. 정신분열자는 오이디푸스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오이 디푸스 속의 어떤 것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병들고, 현실로부터 단절 되어 있는가? 혹은 이와 반대로 그가 병든 것은 그가 견딜 수 없는, 그 리고 모두가 덩달아 그에게 덮어씌우는 오이디푸스화(정신분석 이전의 사 회적 억압) 때문인가? 정신분열증이라고 하는 알은 생물학적인 알과 갇다: 이것들은 비슷한 역서를 가지고 있다. 이것들을 인식하는 일은 동일한 난점들과 동일한 착각들에 부딪쳐왔다. 사람들은 처음에, 알의 발육과 분화에 있어서는, 속에 있는 전정한 〈형성체들〉이 부분들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믿었다. 그 런데 한편으로 온갖 가변적 실체들(앞의 구성요소들)이 밖으로부터 받는 자극과 똑같은 작용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알의 부분들이 자극과는 상
관없는 권능과 특수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 다(移植實驗). 여기서 지국들은 형성체들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誘子들이라고 하는 관념, 죽 궁극적으로는 어떤 성질을 지닌 유도자들 이라고 하는 관념이 생겼다. 온갖 실체들, 온갖 質料들은, 파괴되고 끓여 지고 분쇄되어도, 결국 갈은 결과를 얻게 된다. 착각을 가지게 한 것은 발육의 發端이었다: 발단은 가령 세포분할에서와 같이 단순한 것이었는 데, 이 단순성이 유도되는 것과 유도하는 유도자 사이에 일종의 합치가 있다고 믿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물을 그 발단에 의하 여 판단할 때 언제나 찰못 판단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 런 때에는 그 사물이 나타나려면 구조적 상태들을 흉내내고, 그 假面으 로 사용되는 힘의 상태들을 흘러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발탠게서 부터 그 사물은 그 가면을 아주 달리 사용하고, 이미 그 가면 아래서, 그 가면을 꿰뚫고, 최종적 형태들과 특수한 上級의 상태들을 마련하고 장차 이것들 자체를 정립한다는 것이 인정될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이 오이디 푸스의 역사이다: 부모의 형상은 결코 형성체 내지 조직체가 아니라, 유 도자 혹은 어떤 값어치를 지닌 지국이다. 이 유도자들기나 자국들은 전 혀 다른 성질의 과정, 죽 자극에 대하여 일종의 무관심을 보여줄 수 있 는 과정을 始動시키는 것들이다. 아마, 발단(?)에서는 자극, 죽 오이디푸 스적 유도자가 전정한 형성체라고 믿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믿는 다는 것은 의식 혹은 前意識의 활동이요 의부적 지각이지 무의식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행하는 어떤 활동이 아니다. 따라서, 어린이의 인생의 발 단에서부터 이미 문제되는 것은 오이디푸스의 가면을 꿰뚫고 나타나는 전혀 디론 하나의 기도요 그 가면의 톰구멍들을 꿰뚫고 흐르는 하나의 다른 흐름이요, 하나의 다른 모험, 죽 욕망하는 생산이라고 하는 모험이 다. 그런데 정신분석이 어떤 면에서 이것을 알고 있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프로이트는, 근원적 환상, 매우 오래된 유전의 흔적 및 초자아 의 내부성장의 원천들에 관한 그의 이론에서는, 활동적 인자들은 현실의 부모도 아니고, 어린이가 상상하는 부모도 아니라고 줄곧 단언하고 있다. 라깡의 제자들의 경우에도 사태는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디음과 같은 일
을 할 때에는 더더구나 그렇다. 죽 상상적인 것과 상칭적인 것의 구별을 다시 거론하고, 아버지의 이름을 이마고i ma g o( 成像)에 대립시키고, 시니 피앙에 관한 배제를 인물로서의 아버지의 현실적 부재 혹은- 결여에 대립 시킬 때에는 말이다. 부모의 형상들이 어떤 유도자들이고, 전정한 형성체 는 딴 곳에, 즉 유도자 쪽이 아니라 유도되는 것 쪽에 있다는 것은 아주 명백한 일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생물학적인 알의 경우와 똑같은 문 제가 시작된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 속에서는, 前成이라고 하는· 系統發生 的 生得性의 형식으로건, 早熟에 결부된 문화적이고 상칭적인 아 프리오 리 a- p r i or i(先天性)한 형식으로건, (알의) 〈土質〉이란 관념을 부흥시키는 것 의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지 않겠는가? 더 나쁜 일이 있는데, 그것은 디음과 같다: 그러한 아 프리오리를 끌어들인다 해도 정신분석 전체에 무거운 부담을 지우는 가장 좁은 의미의 가족주의로부터 절대로 빠져나 올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도리어 이런 가족주의에 빠져 이것을 일반 화한다. 부모는 무의식 속의 그들의 제자리에, 죽 어떤 유도자들의 자리 에 들어앉혀졌지만, 형성체의 역할은 여전히 상칭적인 혹은 구조적인 境 域들에 계속하여 맡겨져 있다. 이 경역들은 여전히 가족의 경역이요, 가 족의 오이디푸스적 子宮의 경역이다. 다시 한번 사람들은 가정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다: 다만 가족을 초월적인 것이 되게 하는 수단이 발견 되었을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신분석의 고칠 수 없는 가족주의이다. 이 가족주의는 무의식을 오이디푸스의 툴 속에 집어넣고, 이쪽 저쪽에서 동여매고, 욕망 하는 생산울 분쇄하고, 환자로 하여금, 아빠-엄마라고 대답하게 하고 밤 낮 아빠-엄마를 소비하게끔 한다. 그러므로 푸꼬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 은 전적으로 옳았다: 정신분석은 1~] 기의 정신병원적 정신의학이 삐넬 P i nel 과 듀크 Tuke 와 더불어 계획했던 것을 어느 모로는 성취하였다: 그 계획이란 광기를 부모 콤플렉스에 溶接시키고, 〈가족의 半現實的, 半想像的 辨證法에 결부시키는 것__부르주아 사회와 그 가치들의 육중 한 큰 구조들, 죽 가족-아이들, 잘못-칭벌, 狂氣-無秩序가 상징화되는 소 우주를 구성하는 것__兩端에 오이디푸스를 놓고, 脫疏外에도 소리의 경
우와 똑같은 길을 걸어가게 하고, 그리하여 의사의 도덕적 권위를 아버 지이자 재판관, 가족이자 법률과 같은 것으로 확립하는 것-~그리고 끝 으로 다음과 감은 패러독스에 도달하는 것이다: 〈 정신병자가 자기 의사 의 현실적 인격 속에서 전적으로 소의되는 한편, 의사~근 정신병의 현실 울 광기라고 하는 비판적 개념 속에 해소시킨다. 〉 34) 이것은 빛나는 문장 이다. 다만 다음과 같은 것을 덧붙여 말하기로 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 석은 병을 환자 속에 있는 가족적 콤플렉스 안에, 그 다음엔 이 가족적 콤플렉스 자체를 轉移함으로써 죽 환자-의사의 관계 안에 싸넣음으로써 가족을 어느 의미에서는 강도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사용은 무의식 속에 있는 강도 있는 양들의 본성을 왜곡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이 양들의 생산이라고 하는 일반적 원리를 아직 존중하고 는 있었다. 이와 반대로, 그것이 다시 정신병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 울 때, 갑자기 가족이 外延的으로 다시 늘려져서, 정신병 자체에 대하여 소의와 탈소의의 힘들의 지침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정신분열자들의 가족들에 관한 연구는 오이디푸스로 하여금 늘려진 가족의 의연적 질서 룰 지배하게 함으로써 오이디푸스를 다시 살아나게 하였다. 이 질서에서 34) Mi ch el Foucault, Hi sto i r e de la foli e , Plon, 1961, pp. 607 sq. : 〈 바로 이 범위에서 19.-IJ]기의 정신의학 전체가 실제로 프로이트에게 집중된다. 그는 진지 하게 의사-병자라고 하는 짝을 생각하고 받아들인 최초의 사람이다……. 프로 이트는, 삐넬과 듀크가 감금요법에서 꾸민 모든 구조를 의사 쪽에로 슬그머니 이동시켰다. 병자의 ‘해방자들’은 병자를 정신병원에 가두고 소의시켰었는데 프 로이트는 병자를 정신병원의 생활에서 구출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신병원의 생 활 속의 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병자를 구출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 생활 속의 권 력들을 재편성하여 의사의 손에 취어중으로써 이것들을 최대한으로 뻗쳐놓았다; 그는 정신분석적 상황을 창조하였는데, 여기서는 천재적 短絡手法에 의하여 소 의가 탈소의로 된다. 왜냐하면 의사에게는 소의가 주제로 되기 때문이다. 의사 는, 소외시키는 인물인 한 어디까지나 정신분석의 열쇠이다. 아마 정신분석이 의 사-병자라고 하는, 이 최후의 구조를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 다른 모든 구 조를 이 구조에 환원시켰기 때문에, 그것은 非理性의 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미 친 칭조들을 그대로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도 못할 것이다. 정신분석은 광기의 형태들 중 몇 가지를 설명할 수는 있다. 그러나 非이성의 최고의 활동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생소하다.〉
는 각자가 자기의 삼각형을 다른 사람들의 삼각형과 어떻게든 결합시켰 울 뿐만 아니라, 또한 늘어난 가족 전체가 다음의 두 극, 즉 구조화하고 구별하는 〈 건전한 〉 삼각형화의 극과, 미분화상태 속에서 융합하는 작용 , 울 하는 倒緖된 삼각형들의 형태들의 극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것이 되 었다• 작끄 오슈망 Jac q u es Hochman 은 정신병 가족의 홍미 있는 變異相들 을 동일한 〈 融合公準 〉 아래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첫째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융합 가족인데, 여기서는 구별이 이제 안과 밖(가족에 속하지 않는 사립들) 사이에만 존재한다; 둘째는 분열 가족인데, 이 가족은 자기 속에 陣營들, 당파들 혹은 連合들을 세운다; 셋째는 管狀 家族인데, 여기 서는 삼각형이 무한히 증식하여, 각 성원이 자기의 삼각형을 가지고 있 고, 이 삼각형이 다른 삼각형들 속에 끼여 박혀 핵가족의 한계들을 분간 할 수 없다 ; 넷째는 배제 가족인데, 여기서는 그 성원들 중 한 사람이 제거되고 말살되고 배제되는데, 그런 중에 구별이 이 사람 속에 포함되 는 동시에 악마를 쫓아내는 것이 된다한 배제 같은 개념이, 여러 세대, 적어도 세 세대가 한 정신병자를 만들어내는 조건을 형성하는 가족의 의 연의 툴 속에서 작용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가령, 어 머니가 자기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골치아픈 존재가 되면, 이번에는 아 둘이 그 어머니에 대해서 〈 욕망을 일으킬〉 수조차 없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이상한 생각이 생긴다: 정신병자가 오이디푸스에게서 빠져나오는 . 것은 오직 그가 조부모를 포함하는 의연의 터전에서 오이디푸스가 제곱 되는 상태에서만이다. 치료의 문제는 미분계산의 조작과 아주 가까운 것 이 된다 . 이 조작에서는 먼저 乘幕울 적게 하여 최초의 함수들을 찾아내 고 그 다음에 특성 있는 삼각형, 죽 핵이 되는 삼각형을 재구성하는 철 차를 밟는다-여기에는 언제나 신성한 삼위일체, 삼항 상황에의 접근이 있다……. 外延울 가전 이 가족주의에서는 가족이 疏外와 脫疏外의 고유 35) Jac q ue s Hochman 끄, Pour une psych ia trie communauta i r e ; Ed. du Seu il, 1971, ch. IV(Et Le po stu l at fus io n nel, lnfo n na tion psych ia triqu e, sep t. 1969).
한 能力둘을 받는데, 이 가족주의가 정신분석의 용어를 형식적으로 보존 하고는 있으나, 성욕에 관한 정신분석의 기초적 입장들을 포기하게 한다 는 것이 명백하다. 가족들의 분류학을 위하여 정녕 후퇴를 하고 있다. 우 리는 이것을 공동체적 정신의학이나 소위 가족적인 精神療法의 試固들에 서 찰 볼 수 있다. 이 시도들은 정신병원의 존재를 실제로 파괴하지만, 여전히 그 모든 前提를 지키고, 근본적으로는 l~i l 기의 정신의학과 다시 결부되어, 오슈망이 내놓은 다음과 갇은 슬로건을 따르고 있다: 〈 가족에 서 病院 機情로, 병원 기구에서 가족 기구로, ……치료를 가족에게 돌려 보내라!〉 그러나, 한 쪽에는 제도적 분석, 다른 한 쪽에는 반정신의학이라고 하 는 진보주의 내지 혁명적 분야에서도, 外延을 가전 이 種族主義의 위험이 존속하고 있다. 이 위험은 늘어난 오이디푸스의 二重의 막다론 골목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가족들 자체 속에서 病源을 찾는 珍 浙에 서나 치료용의 擬似家族의 구성에서나 마찬가지이다. 가족적 및 사회적 적응과 통합의 틀을 다시 만드는 것이 더 이상 문제되지 않고 활동적인 집단들의 본래의 형태들을 세우는 것이 문제라고 할진대, 제기될 문제는 이 기초적인 집단들이 어느 점까지 인위적인 가족들을 닮고 있는가, 어 느 접까지 아직도 오이디푸스화에 응하는가를 아는 것이다. 이 문제들은 가장 우리에 의하여 깊이 분석되었다. 이 문제들은 혁명적인 정신의학이 공동체적 적응의 이상들과 관계를 끊으려 해도 소용이 없고, 모오 마노 니가 適應의 警察이라고 부르고 있는 모든 것과 관계를 끊으려 해도 그 렇게 할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혁명적인 정신의학도 여전히 끊임없이 구조적인 오이디푸스의 틀에 포개지는 위험에 처해 있다. 이 틀에 결함 이 있으면 금방 진단되어 완전히 수복된다. 죽, 욕망하는 생산의 목을 졸 라매고 이 생산에 관한 문제들을 질식시키기를 계속하는 신성한 삼위일 체가 수복된다. 정치적, 문화적, 역사적-세계적, 인종적 내용은 오이디푸 스의 야채 믹서 속에서 박살난 채로 있다. 이것은 정신의학자들이 가족 울 하나의 子宮으로서, 혹은 좀더 분명히 말히여, 하나의 소우주로 디루 기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우주란 자율적 가치를 지닌 表現의 세
계이다, 그런데 이 세계는 소의시키는 힘들의 작용을 표현할 수는 있으 나, 욕망의 기계들 속에 있는 생산의 진정한 범주들을 영락없이 말살함 으로써, 저 힘들을 〈階臣格으로 낮추고 있다〉. 우리에게는 이런 관점이 쿠퍼 Coo p er 에게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접에 관해서는 레잉이 동양 에 유래하는 흐름을 手段으로 삼은 덕택으로 가족주의로부터 더 자유롭 게 되어 있다). 쿠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족들은 사회적 현실과 그들의 어린이들 사이룰 媒介한다. 문제되어 있는 사회적 현실이, 소의된 사회 형태들에 있어서 풍부하다 해도, 그때 이 소의는 어린이에게는 格 이 낮추어지고 가족관계들 속의 이상한 것으로서 경험될 것이다……. 가 령, 어떤 사람은 자기의 정신이 전기기계에 의하여 혹은 다른 유성의 사 람들에 의하여 통제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된 기 계나 사람들은 대체로 가족적 과정의 化身둘이다. 이 과정은 실체적 현 실의 의관을 가지고 있지만, 가족 성원들의 행동 혹은 실천의 소의된 형 태 이의의 다론 아무것도 아니다. 이 실천이 정신병에 걸려 있는 성원의 정신을 문자 그대로 지배하고 있다. 이 隱兪的인 宇宙人둘은 문자 그대로 어머니요 아버지요 형제들이다. 이들은 정신병에 걸려 있다고들 말해지 는 사람과 함께 아침식사의 식탁에 앉아 있다.〉 36) 반정신의학의 본질적 주장은 궁극에 있어 사회적 소의와 정신적 소의가 본성에 있어 동일하다 는 것인데, 이 주장도 가족주의를 거부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가족주의 를 유지하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小宇宙-家族, 사 회의 이지러짐을 표시하는 計器-家族이 \ }회적 소의를 표현하는한, 이 가족이 그 가족의 성원들 혹은 정신병에 걸린 성원의 정신 속에 정신적 소의를 〈조직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모든 성원 중에 〈누가 온전한 사 람인가?〉). 소우주 mi crocosme- 대우주 macrocosm 려 관계들에 관한 일반적 인 생 각 속에 베르그송 Ber g son 은 눈에 잘 띄지 않는 하나의 혁명을 도입하 였다. 이 혁명은 다시 고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생물과 소우주를 36) David Coop er , Psy c hia tri e et anti psych ia trie, 1967, tr. fr. Ed. du Seu il, p. 64.
동일시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흔히 있어온 일이다• 그런데 생물이 세계를 닮고 있는 것은 그것이 본성적으로 닫혀 있는 고립된 체계이기 때문이 다, 혹은 이런 체계가 되려 하기 때문이다라고 흔히들 말해 왔다 : 그러 므로 소우주와 대우주의 비교는 두 개의 닫혀 있는 형상, 죽 그중의 하 나가 다른 것을 표현하고 다른 것 속에 자기를 登記하는 두 형상의 비교 였다. 『 創造的 進化』의 첫머리에서 베르그송은 이 둘을 모두 열어제침으 로써 비교의 범위를 온통 바꾸어놓는다. 생물이 세계를 닮고 있는 것은 열려 있는 세계에 대하여 자기를 열고 있는 한에서이다; 생물이 하나의 전체인 것은, 전체가, 세계의 전체나 생물의 전체가, 어떤 것에도 환원되 지 않고 닫혀 있지 않는 시간의 차원에서 항상 자기롤 형성하고 자기를 생산하거나 전보하고, 자기를 登記하는 한에서이다. 우리는 이와 똑같은 사태가 가족-사회의 관계에도 있다고 믿는다. 오이디푸스 삼각형이란 없 다: 오이디푸스는 열려 있는 사회 터전 안에서 언제나 열려 있다• 오이 디푸스는 사회 터전의 사방에, 그 모든 방향에 열려 있다 (3+ 匡서가 아 니라, 4+ 正료). 삼각형은 단단히 닫혀 있지 않고, 구멍도 많고 물도 새고, 폭파되어, 욕망의 흐름들이 다른 장소들에로 빠져나간다. 疑似삼각형의 정점들에서 엄마가 선교사와 충을 추고, 아버지가 微稅人에게 男色울 당 하고, 내가 백인에게 매를 맞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식민지화된 사 람들의 꿈을 기다려야 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야릇한 일아다. 바 로 이렇게 부모의 형상과 하나의 다른 본성을 지닌 動因들이 결부되고, 씨름꾼들처럼 얽힘으로써, 삼각형이 닫혀지고, 제대로 평가되고 무의식 자체 속에서 문제되는 동인들의 이 다른 본성을 표현하거나 표상하려고 하는 일이 방해를 받는다. 파농 Fanon 은 어머니의 죽음에 관련된 迫避害 妄의 정신병의 症例에 직면하여, 먼저 자기가, 〈프로이트가 『초상으로 인한 비애와 우울중』에서 기술하고 있는 바와 같이 무의식적 죄책감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지〉 자문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금방 환자의 어 머니가 프랑스 군인에게 살해되었다는 것, 또 환자 자신이 식민자의 처 를 죽였는데, 배를 갈라 죽인 이 여자의 환각이 줄곧 어머니를 추억하게 하고 이 추억울 갈기갈기 찢는다는 것을 깨닫는다.'SI) 다음과 같이 말하
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전쟁에서의 의상, 식민의 상태, 사회의 극심한 비참함 등의 한계상황들은 오이디푸스를 만들어내는 데 거의 도움이 · 되 지 않는다 -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계상황들은 정신병의 전전과 돌발을 돕는다__그러나 우리는 문제가 딴 곳에 있다고 강하게 느낀다. 왜냐하 면, 오이디푸스화된 환자들을 공급하려면 부르주아 가족의 어떤 안락함 이 있어야 한다고 흔히둘 고백하고 있는 것은 論外로 치더라도, 정상적 이라고 혹은 규범적이라고 여겨지는 하나의 오이디푸스의 안락한 조건들 속에 실제로 마련되어 있는 것을 아는· 문제는 언제나 소홀히 되고 있다. 혁명적인 사람이란 〈 오이디푸스, 그런 것은 인정하지 마라 〉 라는 말을 당연한 것으로 최초에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왜냐하면 오이디푸스를 형성하는 요소들은 흩어져 있는 파편들로서 역사적인 사회 터전의 모든 구석에 달라 붙어 있기 때문이다. 이 터전은 싸움터이지 부르주아 국장 의 무대가 아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정신분석가들이 화를 낸다면 사태는 더욱 악화된다• 그런데 파농이 지적한 것은, 動亂 L 의 시기에는 활 동적인 투사들에 대해서만 아니라, 중립적인 사람들과 사건에 관여하지 않고 정치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시대가 영향을 끼친 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평화스러워 보이는 시기들에 대해서 같은 말을 할 수 있겠다: 어린이의 무의식이 아빠-엄마밖에 모른다고 믿는 것, 또 그것이 아버지가 자기의 아버지가 아닌 사람을 보호자로 가지고 있다거 나 혹은 아버지가 자기가 아버지가 아닌 사람의 보호자라고 하는 것을 ·〈 자기 나름으로 〉 밖에는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은 기괴한 오 진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경우에 대해서 다음과 갇은 규칙을 세 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파편으로서만 존재하며, 무의식을 표상하는 동 시에 집단의 갖가지 동인(행동자)들을 그 속에 표상할 수 있는 하나의 형상 속에서도 하나의 구조 속에서도 절대로 조칙되는 일이 없으며, 다 만 항상 폭발하여 단편들이 되어 육탄전에서처럼 이 동인들과 접촉하고 대결하고, 적대하고 혹은 화해한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는 역사적 이고 정치적인 상황의 요소들, 죽 병사, 경관, 점령자, 협력자, 반체제자 37) Franz Fanon, Les Damnes de la ter re, Masp er o, 1961, p. 199.
혹은 레지스탕스, 보호자, 보호자의 처와 얽혀 있고 직접 결부되어 있다. 이들은 줄곧 모든 삼각형화를 깨부수고, 상황 전체가 가정적 콤플렉스에 포개지고 그 속에 내면화되는 것을 방해한다. 요컨대, 결코 가족은, 설사 더 큰 집단 속에 등기되어 이것을 격하시키고 이것을 표현한다 해도, 자 율적 형상이란 의미에서는 하나의 소우주가 아니다. 가족은 그 본성상 중심을 떠나 있고, 중심을 잃고 있다. 융합적, 분열적, 管狀恥 배제적 가 족에 관한 논의가 있다• 그런데 바로 가족을 하나의 〈 내부 〉 이게끔 하는 것을 방해하는 절단들과 이것들의 배분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언제나 아메리카에서 온 삼촌, 망나니가 된 형, 어떤 군인과 함께 떠난 숙모, 파 산했거나 공황의 여파로 실직한 사촌형, 무정부주의자인 할아버지, 미쳤 거나 노망이 들어 입원한 할머니가 있다. 가족은 이 절단들을 낳지는 않 는다. 가족들은 가족적인 것이 아닌 절단들에 의하여 절단된다: 파리 코 문, 드레퓌스 사건, 종교와 무신론, 스페인 전쟁, 파시즘의 대두, 스탈린 주의, 월남 전쟁, 6&;=! ~…… 이런 것들이 모두 무의식의 콤플렉스들 울 형성하는데, 이것들은 늙어빠진 오이디푸스보다 더 큰 영향들을 끼친 다. 따라서 바로 무의식이 문제이다. 구조들이 있다고 하면, 그것들은 정 신 속에, 무의식의 결여들, 이행들 및 분철들을 분배하는 환상적인 남근 의 보호 아래 있지 않다. 그것들은 불가능한 직접적 현실 속에 존재한다. 곰브로비츠 Gombro wi cz 가 말하고 있는 바와 길이, 구조주의자들은 〈그 둘의 구조들을 문화 속에서 찾고 있지만, 나는 직접적 현실 속에서 찾는 다. 내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당시의 사건들, 죽 히틀러주의, 스탈린주의, 파시즘…… 등등과 직접 관계하는 것이다. 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영 역에서 생겨 그때까지 존경받아 왔던 모든 것을 파괴한 기괴하고 무서운 형태들에 마음이 사로잡혔다〉 .38) 그리스 연구가들은 존경할 만한 오이디푸스 속에도 이미 〈정치적인 것〉이 있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옳은 일이다. 다만 거기서 리비도가 그때부터 오이디푸스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고 결론지은 것은 잘못이다. 사태는 이와 정반대이다: 리비도가 오이디푸스의 이접적 요소 38) Wi told Gombrow icz , L'Herne, n°14, p. 230.
들을 통하여, 또 바로 이 요소들이 결코 자율적이고 표현적인 정신의 구 조를 형성하고 있지 않는 한에서, 공급하는 것은 가족 의적, 가족하적 전 단들, 죽 욕망하는 생산과 관련된 사회적 생산의 이 형태들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열자-분석은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정치분석, 하나의 전투적인 정 신분석임을 스스로 숨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까지 허용되어 온 가소로운 조건들 아래 오이디푸스를 문화 속에서 일반화하려 하지 않 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그것이 무의식적인 리비도가 사회적이고 역사 적인 생산을 공급함을 밝히려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급하는 일은 이 것과 공존하는 의식적으로 공급하는 일과 뚜렷이 구별된다. 프루스트는, 자기는 內面派의 작품을 만드는 일과는 거리가 멀고, 〈의도적으로〉 표현 하는 작품들 속에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그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대중예술 혹은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주장자들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조금도 찰못된 점이 없는 말이다. 그는 그 나름대로, 드레퓌스 사건과 이에 뒤이은 1914년 의 전쟁이 가정들을 재질 단하고 거기에 새로운 절단들과 새로운 연결들을 도입했는데 이 철단들 과 연결둘이 (가령 게르망뜨 Guerman t es 집안의 붕괴된 환경 속에서) 이성애 및 동성애의 리비도를 개조한 그 방식에 홍미를 가지고 있다. 무 의식의 여러 가지 형태 아래 사회 터전을 마련함으로써 역사 전체에 대 하여 환각을 품고, 문명들, 대륙들 및 인종들을 망상하고, 세계의 변화를 강하게 〈느끼는〉 것은 리바도가 하는 일이다. 한 중국인, 한 아랍인, 한 흑인이 편집병에 걸린 백인의 머리에 떠오르고, 밤의 평안함을 깨는 일 이 없으면, 시니피앙의 연쇄란 전혀 있을 수 없다. 정신분열자-분석은 언제나 인위적이고, 억압하면서 억압받는, 가족에 의하여 격하된 오이디 푸스적인 표현적 무의식을 파괴하고, 직접적으로 생산적인 무의식에 도 달하려 한다. 그렇다, 가족은 하나의 자극이다_-그런데 그것은 어떤 가 치를 지닌 자극이요, 형성체 내지 조직자도 아니고 조직파괴자도 아닌, 하나의 유도자이다. 反應에 관해서 말하면, 그것은 언제나 딴 곳에서 온 다. 만일 언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반옹 쪽에 있지, 자극 쪽에 있지 硏. 오이디푸스적 정신분석도 부모의 실제의 심상들이 다른 심성들과
다른 특별한 것이 아니며, 이 심상들이 일으키는 자극에다가 반응을- 환 원시킬 수 없음을 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신분석은 번응을· 생산 자체의 무의식적 체계 속에서 해석하지 않고(즉, 분석적 경제학의 입장에 서지 못하고), 아직도 가족적인 표현적 상칭주의에서 출발하여 반응을 이 해하는 데 만족하고 있다. 가족주의의 주된 論操는 〈 적어도 처음에는 ……이다 〉 라고 하는 것이 다. 이 논거는 명백하게 정식화될 수 있으나, 그것은 또한 發生의 관점을 거부하는 이론들 속에도 은연중에 존속하고 있다. 적어도 처음에는, 무의 식이 현실적인 것, 상상적인 것 및 상징적인 것이 뒤섞여 있는 가족적 관계들과 星座둘 속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리라는 것이다. 사회적 및 형이 상학적 관계들은 나중에, 마치 彼岸처럼 출현한디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 이란 것은 언제나 두 개가 짝을 이루고 있으므로(이것이 바로 거기서 빠 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건이다), 먼저 전오이디푸스적인 첫째 처음, 죽 어머니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인격의 가장 미숙한 단계들의 원초적 미분 화상태〉를 끌어대고, 그 다음에 둘째 처음, 죽 아버지의 법률을 가지고 가족 안에서 배타태일적 구별들을 명하는 오이디푸~ 자신을 끌어댄 다-마지막에 저 유명한 潛狀期를 끌어대는데, 이것 E 淮에, 피안이 출 현한다. 그런데 이 피안은 다른 사람들(앞으로 울 어린이들)로 하여금 같 은 길을 다시 걸어가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또 첫째 처음을- 〈전오 이디푸스적〉이라 말하는 것은 이미 그것이 좌표축으로서의 오이디푸스에 속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만이기 때문에, 오이디푸스의 두 끝이 그저 닫혀버려, 피안이나 〈니중에〉라고 하는 것이 언제나 오이디푸스를 가지 고, 오이디푸스와의 관계에서, 오이디푸스의 툴 안에서 해석되리라는 것 이 아주 분명하다. 신경중환자의 유년기의 因子들과 현재의 현실적 인자 들의 역할을 비교하는 논의들이 증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모든 것은 오 이디푸스 위에 포개진다: 현재의 〈현실적〉 인자가 〈나중에〉란 형태로 생각되는 한, 어떻게 사태가 달라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실 우리는 현재의 현실적 인자들이 유년기부터 있고, 그것들이 가족 속에 도입하는 철단들과 연결들에 관련하여 리비도의 공급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
다. 가족 안의 사람들의 머리 위에, 혹은 발 아래에는 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이 있다. 이것들은 어린이의 경험에서 그 본성의 동일함과 그 체제의 다름이 체험된다. 유년기에 관한 다음의 세 권의 위대한 저서 를 고찰해 보기를 바란다: 쥘르 봐레스J ules Valles 의 『어린이 』 , 다리앙 Dar i en 의 『마음을 낮게 』 , 셀린느 Ce li ne 의 『信用울 전 죽음』. 이 책들 속에는 어떻게 빵, 돈, 집, 사회적 승진 , 부르주아의 가치들과 프롤레타리 아의 가치들, 부유함과 빈곤, 압제와 반항, 사회적 계급들, 정치적 사건 들, 숨쉰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가난한가? 왜 부지들이 있는가? 히는 형이상학적 문제들과 집단의 문제들이 공급들의 대상이 되는가가 서술되 어 있다. 이 공급들에 있어서 부모는 그저 생산과 반생산의 특수한 동인 둘의 역할을 맡고 있다. 그들은 항상 다른 동인들과 얽혀 있는데, 어린이 의 천국과 지옥에서 그들이 이 다른 동인들과 싸울수록 그만큼 이들을 적게 표현한다. 그래서 어린이는 왜?라고 말한다. 쥐 사나이 ®는 그의 강박관념의 현실적 인자를 구성하고 있는 부유한 여자와 가난한 여자를 차지함에 있어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유아기의 성욕이 부인되 는 것은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이지만, 이 성욕이 엄마를 욕구하고 아버지의 자리를 바라는 데에 환원되는 것도 도저히 드러내놓 고 말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이다. 〈 당신은 유아기 성욕의 오이디푸스적 성격을 인정하는가〉, 〈 그렇지 않고 성욕의 정립 전체를 포기하는가〉 하 고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것은 프로이트의 공갈이다. 하지만, 초월적인 男 根 힘을 빌린다 해도 〈 시니피에〉의 무의식적 효과들이 사회 터전의 결정들 전체에 미치지는 못한다. 이와 반대로, 이 결정들의 리비도적 공 급이 욕망하는 생산 속에서 이 결정들 하나하나의 사용을 고정시킨다. 그래서 욕망하는 생산의 체제가 사회적 생산과 비교되고, 여기서 욕망의 상태와 욕망의 억압, 생산의 동인들의 배분 그리고 성욕이 오이디푸스화 되는 정도가 생긴다. 러깡은 과학의 위기들과 단절들에 따라서 학자가 © l'H omme aux rats . 프로이트의 症例 극동에서 최수의 궁둥이에 쥐를 담은 항아리를 쏟아부어 체벌을 가하는 일이 있는데, 이 환자는 쥐들이 자기의 항문 에 뚫고 들어오는 데 대한 강박 신경중에 걸려 있다.
때로는 광기에까지 이르는 드라마가 생긴다는 것을 잘 말하고 있다. 학 자는 〈여기서 오이디푸스를 검토의 대상으로 삼지만 않는다면, 그 자신 이 오이디푸스에 말려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 .39) 여기에는 인과관계가 있 다. 어린이는 누구나 이런 의미에서 작은 학자요, 작은 칸토르 Can t or 이 다. 따라서 연령의 흐름을 아무리 거슬러 울라가도 소용이 없다. 자율적 인, 표현적인 혹은 시니피앙의 가족적 질서에 붙들려 있는 어린이란 절 대로 찾아볼 수 없다. 놀 때에나 먹을 때에나, 가만 있으나, 생각에 잠기 거나, 젖먹이도 이미 현실의 욕망하는 생산에 말려들어가 있다. 이 생산 에서는 부모가, 모든 면에서 그들을 넘어서는, 그리고 욕망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에 직접 관계시키는 하나의 진행의 흐름 속에서, 부분적 대상, 증인, 보고자 및 대리인의 역할을 맡고 있다. 사실 전오이디푸스적 인 것은 없으며, 오이디푸스를 그 가장 어린 시기까지 추궁해야 하지만 이것은 무의식을 억압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생산의 질서에서는 모 든 것이 무오이디푸스적이라 함은 어디까지나 전실이다; 비오이디푸스적 인 것이 있음도 사실이다. 무오이디푸스적인 것은 오이디푸스와 똑같이 일찍이 시작되고, 똑같이 오래 지속되는데, 오이디푸스와는 리듬, 체제, 차원을 달리하며, 무의식의 종합들을 달리 사용한다. 이 종합들의 사용은 무의식의 자동적 생산을 돕는데, 이렇게 자동적으로 생산되는 무의식은 孤兒생뚱意識 놀기를 좋아하는 무의식, 명성하는 사회적 무의식이다. 오이디푸스의 조작은, 한 쪽에는 사회적인 생산, 재생산, 반생산의 동 인들, 다른 한 쪽에는 이른바 자연적인 종교적 재생산의 동인들 사이에 일대일로 대웅하는 관계들 전체를 확립하는 데에 성립한다. 이 조작은 ' -!!1::(3)라고 불린다. 모든 것은 마치 책상보가 접혀, 그 네 (+n) 모퉁이가 세(접는 일을 조작하는 초월적 인자를 표시한다면, 3+1) 모퉁이에 접히는 것갇이 진행된다. 따라서 도처에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를 재발견하 는 一義的인 체계에서는, 집단적 동인들이 부모의 형상의 파생적, 혹은 39) Lacan, Ecrits , p. 870( 〈인색한 남자〉에게 있어서의 부유한 여자와 가난한 여 자의 특수한 역할에 관하여는 「신경증환자의 개인적 신화」, C.D.U. 속의 라깡 의 분석을 참조할 것. 이 논문은 Ecrits <>1l 재수록되어 있지 않음). a) ap plica ti on . 〈적용〉이라 옮길 수도 있겠다.
대용물로 해석되는 일이 강요된다. (이 경우, 체계 전체를 超越項, 죽 남 근에 의존하게 함으로써 체계 전체를 고찰한다 해도, 난점은 後退시켜질 따름기다.) 여기에는 연접적 종합의 잘못된 사용이 있는데, 이 사용은 〈그러니까 이것은 네 아버지였다, 그러니까 이것은 네 어머니였다〉고 말 하게 한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아버지요 어머니였음을 니중에 알게 되 었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울 것이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것 이 아버지요 어머니라고 想定되어 있고, 다만 이것이 그 후 잊혀지고-억 제되고 있을 따름이다. 나중에 이것을 재발견한다는 것은 각오하고 있는 일이다. 여기서 일대일 대응, 죽 두 음절 서이의 상칭적 관계를 위하여 다의적인 현실을 파괴하는 대응을 찰 나타내는 廣術的 定式: 〈그러므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저것이었다〉가 나온다. 일치에 의하여 모든 것을 오이디푸스에게 歸着시키면 시킬수록 그만큼 확실하게 모든 것을 설명에 의하여 오이디푸스로부터 출발시킨다. 歷史的 혹은 知歷史的 起原으로서이 건, 構造的 基礎로서이건, 오이디푸스가 〈처음〉인 것은 겉으로 보기에만 그렇다. 그것은 전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처음이요, 이데올로기를 위한 것이다. 사실, 오이디푸스는 언제나 사회조직체에 의하여 구성된 출발집 합점에 대응하는 도달집합접일 따름이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일치하는 데, 이것은 사회적 생산의 동인들과 관계들, 그리고 이것들에 대응하는 리비도의 공급이 가족적 재생산의 形象들 위에 포개전다는 의미에서이다. 출발집합점에는 사회조직체, 아니 복수의 사회조직체들이 있다; 인종들, 계급들, 대륙둘, 민족들, 왕국들, 주권들이 있다; 쟌느 다르끄와 저 위대 한 몽고인, 루터와 아즈테그인의 뱀이 있다. 도달집합점에는, 아빠, 엄마 그리고 나만이 있다. 그러므로 욕망하는 생산에 대해서와 0 던가지로 오이 디푸스에 대해서도 디옴·과 같이 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마지막에 있지, 처음에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동일한 방식으로 그런 것은 절대 로 아니다. 우리가 앞서 본 바와 걷이, 욕망하는 생산은 사회적 생산의 極限이고, 자본주의 조직체 안에서는 언제나 방해를 받고 있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脫土地化한 사회체의 극한에 있고, 사막은 도시의 성문들 바 깥에 있다……. 그런데 바로 디급하고 본질적인 것은 극한이 옮겨지고,
無害한 것이 되어, 사회조직체 자체의 내부에 실제로 移行하고, 혹은 이 행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다. 정신분열증이나 욕망하는 생산은 욕망의 큰 덩어리를 이루는 조직과 욕망의 분자적 다양성 사이의 경계선 이다; 탈토지화의 이 경계선(한계)이 이제 큰 덩어리롤 이루는 조직의 내부로 옮겨가서 模造의 온순한 토지에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우리는 오이디푸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감한다: 그것은 경계선을 옮 기고, 이것을 내면화한다. 자폐증에 걸리지 않고 좋은 결과를 얻은 단 한 사람의 정신분열자보다는 차라리 많은 신경중환자가 생기는 것이 바람직 한 일일지 모른다. 군중심리를 조작하는 비길 데 없는 도구인 오이디푸 스는 유럽인의 온순하고 私的인 최후의 토지이다. (더구나, 옮겨지고 멀 리 쫓아버려졌던 경계선이 오이디푸스의 내부로 옮아가서 그 두 국 사이 에 머무르게 된다 . ) 역사와 정치의 해석에 있어서 정신분석의 명예롭지 못한 점에 대하여 한 마디 하기로 한다. 그 수법은 잘 알려져 있다: 〈위대한 인간〉과 〈대 중〉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 역사는 이 두 실재물, 두 꼭두각시, 즉 위대한 갑각류 동물과 미친 무척추동물에 의하여 이루어전다고 주장된다. 오이 디푸스가 처음에 놓인다. 한편에는 오이디푸스적으로 규정된 위대한 인 간이 있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를 죽였다. 이 살인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이건, 아버지를 내면화하고 아버지의 자리 에 들어앉아 아버지와 화해하기 위해서이건 끝나는 법이 없다. (자세히 말하면, 이 살인에는 많은 변형이 있어, 여기 대응하여 신경중환자의 해 결, 정신병자의 해결, 도착자 혹은 〈정상인〉의 해결, 죽 昇華…… 등이 있다.) 어떻든, 위대한 인간은 이미 위대하다. 왜냐하면 그는 선으로나 악으로나 오이디푸스적 갈등에 대한 어떤 근원적 해결을 찾아냈기 때문 이다. 히틀러는 아버지를 죽이고 나쁜 어머니의 힘들을 자기 속에 풀어 놓는다. 루터는 아버지를 내면화하고 초지아와의 타협을 확립한다. 다른 한편에 군중이 있다. 군중 역시 둘째 차원의 부모의 심상, 죽 집단의 부 모라고 하는 심상에 의하여, 오이디푸스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루터와 1 데기의 크리스천들의 만남, 히틀러와 독일 국민의 만남이 서로
대응관계를 가지면서 이루어질 수 있는데, 이 대응은 반드시 동일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히틀러는 〈 同性愛의 輸血 〉 을 받아 , 여성적인 군중에 대하여 아버지의 역할을 놀고 있고; 루터는 크리스천들의 神에 대하여 여자의 역할을 놀고 있다.) 물론, 역사가의 정당한 분노에 대하여 자기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하여, 정신분석가는 자기는 어떤 차원의 원인들만을 문제삼으며 , 〈 다른 〉 원인들도 고려해야 하지만, 자기도 모든 일을 할 수 는 없디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는 디론 원인들도 제법 충분히 검토하여 우리에게 정신분석의 해석을 예측하게 해주고 있 다: 그는 한 시기의 제도들 (1 回]기의 로마교회, 2(),(사 기의 자본주의 권력) 을 고려하고 있다 . 이것이 다만 거기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결부시켜 새 로운 차원의 부모의 심상을 보기 위한 것이기는 해도 말이다. 또 이 부 모의 심상들은 위대한 인간과 군중의 행동에서 분해되고 달리 다시 편성 되기는 해도 말이다• 이런 것을 논한 책들의 論調가 정통적 프로이트파 의 것인지, 문화주의적 프로이트파의 것인지, 원형적 프로이트파의 것인 지는 아주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이런 책들은 구역질을 나게 한다. 이런 책들은 정신분석의 먼 과거에 속한다 하여 물리치지 않기를 바란다; 현 재도 이런 책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오이디푸스를 경솔하게 사 용하는 것이 문제다라고 말할 것도 아니다: 오이디푸스를 달리 또 어떻 게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는 〈응용 정신분석〉이라고 하는 애매한 영역은 더 이상 문제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낱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오이디푸스 전체가, 오이디푸스 자신이 이미 하나의 응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우수한 정신분석가들이 역사적-정치적 g용들을 스스로 금 할 때, 사태가 크게 호전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환원될 수 없는 〈 감당할 수 없는 眞理〉의 장소로서 제시된 거세의 바위에 들어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男根 中心主義 속에 갇혀 있다. 이 남근 중 심주의는 그들로 하여금 꼼짝없이 정신분석의 활동을 언제나 가족의 소 우주 속에서 전개되어야 할 것으로- 보게 한다. 그들은 리비도가 사회 터 전을 직접 공급하는 일들을 한갓 오이디푸스의 상상적 무속물들로 디룬 다. 이 부속물들에 있어서는 〈융합시키는 꿈〉, 〈一者에 되돌아가는 환
상〉 같은 것은 고발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말하기를, 거세는 바로 우리를 정치와 분리시키는 것이요, 우리에게 독창성을 주는 것이요, 우리 둘 정신분석가는 사회 역시 삼각형을 이루고 있고 상칭적인 것임을 잊지 않고있다고말한다. 오이디푸스가 포개는 일이나 일치시키는 일로 해서 얻어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오이디푸스 자신은 사회 터전의, 이 터전의 생산과 형성의 어떤 型의 리비도적 공급을 전제하고 있다. 개인적 환상이 존재하지 않 는 것처럼 개인인 오이디푸스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는 그 를 한 세대로부터 다른 세대로 넘어가게 하는 그의 고유한 재생산에 적 합한 형태로, 또 미리 조정된 막다른 골목에서 욕망을 저지하는 신경증 적 울적함의 여러 단계에서나, 집단에의 통합의 한 수단이다. 따라서 오 이디푸스는 예속집단들 속에서 開花한다. 이 집단들 속에서는 기성질서가 그것들 자체 억압적인 형태들로 공급되어 있다. 그래서 예속집단의 형태 들이 오이디푸스적인 投射들과 신원확인들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는 정반대이다: 오이디푸스의 적용들이 출발집합점으로서의 예속집 단의 결정둘과, 이 결정들의 리비도적 공급에 의존하고 있다. (열세 살 때부터 나는 일하고, 사회의 계단을 올리 - 승전하고, 착취자들의 편에 붙 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무의식 속에서의 연접적 종합들의 分離差 別的 使用이 있다. 이 사용은 지배계급에게는 비길데없는 무기가 되지만, 계급분열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아 사용은 〈우리는 모두 한편이다 〉 라고 하는 감정, 죽 의부로부터의 적의 위협을 받고 있는 優等 人種에 속해 있다고 하는 감정을 구성한다. 그래서 개척자들의 후손인 작은 백인, 자 기네 조상의 승리를 기념하는 프로테스탄트 아일랜드인, 主人 人種인 파 시스트가 등장한다. 오이디푸스는 이러한 국가주의적, 종교적, 인종주의 적 감정에 의존하는 것이요, 이런 감정이 오이디푸스에 의존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우두머리 속에 두사되는 것이 아니라, 우두머리가 아 버지에게 일치되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너는 네 아버지롤 능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 위해서건, 우리에게 〈너는 네 아버지를 능가하여 네 조상을 되찾으라〉라고 말하기 위해서이건 말이다. 리깡은 오이디푸스와
분리차별과의 유대를 깊이 있게 밝혔다. 하지만 그것은 분리차별이 오이 디푸스의 한 결과, 일단 아버지가 죽은 후 형제들의 우애의 밑바닥에 깔 려 있는 하나의 결과란 의미에서가 아니다. 이와 반대로, 분리차별적 사 용은 오이디푸스의 한 조전이다. 죽 사회 터전은 하나의 거대한 古代崇 尙, @ 인물이나 精靈울 인종의 화신이 되게 하는 고대승상을 전제함으로 써만 가족적 유대에 포개지는 한에 있어서 오이디푸스의 한 조건이다 ―그렇소, 나는 당신들과 하나요…….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사회 터전의 무의식적 인 리비도의 공급이 있다. 이것은 先 意 識的인 공급들과 더불어 혹은 선의 식적 공급들이 〈 으레 그래야 할 〉 것과 더불어 공존하기는 하지만 반드 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건 집단이건, 주체들이 자기 둘의 계급의 이익에 어긋니~ 행동을 분명히 취할 때, 그들 자신의 객관 적 상황으로 보아 당연히 대결해 싸워야 할 계급의 이익이나 이상에 동 조할 때, 〈 그들은 속았다, 대중은 속았다 〉 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 지 않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문제, 오해와 착각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 은 욕망의 문제인데, 욕망은 하부구조의 일부이다. 선의식적 공급둘은 적 대계급의 이해에 따라 행해지거나 행해져야 한다. 그런데 무의식적 공급 둘은 욕망의 위치들과 종합의 사용들에 따라 행해전다. 이것들은 개인이 건, 집단이건, 욕망하는 주체의 이해와는 크게 다르다. 사회 터전이 바로 욕망에 의하여 공급되고, 더 이상 이해에 의하여 공급되지 않는 한, 무의 식적 공급들은 절단들과 분리차별들을 사회 터전에 생기게 함으로써 지 배계급에 대한 보편적 복종을 확실한 것이 되게 한다. 사회의 생산과 반 생산의 형태는 그 경제적 및 금융적 메커니즘들, 그 정치적 조직체들 등 과 함께, 전체로서나 부분으로서나, 욕망하는 주체의 이해와는 상관없이 그 자체 욕망될 수 있다. 히틀러가 파시스트들을 단결시킨 것은 은유에 의해서가 아니며, 아버지의 은유에 의해서도 아니다. 은행거래, 주식거래, 유가증권, 배당권, 신용칭이 은행가가 아닌 사람들을 한데 묶는 것은 ® archa'ism e. 이 낱말의 形容詞는 archa iq ue 인데 〈古風스런〉이라 옮기기로 한 다.
은유에 의해서가 아니다 . 그렇다면 발아하는 돈, 즉 돈을 낳는 돈에 의해 서인가? 거기에는 경제적-사회적 〈 콤플렉스들 〉 이 있는데, 이것들 역시 무의식의 전정한 콤플렉스들이요, 그 위계질서의 상충에서 하층에로 관 능의 향락을 전달한다(산업, 군사 콤플렉스). 이데올로가, 오이디푸스, 남 근은 여기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원리가 아니라 원리에 의존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인 것은 흐름들., 저장 들, 절단들 그리고 흐름의 유동이다: 무엇인가가 유통되고 흐르는 곳에 는 어디에나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은 이해에 눈을 뜬 주체들만 아니라 , 또한 취해 있거나 졸고 있는 주체들까지도 죽음의 구렁팅이로 몰아간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것이 정신분열자-분석의 목적이다. 경제와 정치 의 리비도 공급들의 특수한 본성을 분석하는 것 ; 이것을 통해서 어떻게 욕망이 욕망하는 주체 속에 자기자신의 억압을 욕망하게끔 결정될 수 있 는가를 밝힐 것(여기서 욕망과 사회적인 것을 연결시키는 일에 있어서의 죽 음의 충동의 역할이 생간다). 이 모든 것은 이데올로기에서가 아니라 이데 올로기 밀에서 생긴다 • 파시스트형의, 혹은 반동형의 무의식의 공급은 의 식적인 혁명적 공급과 공존할 수 있다. 거꾸로, 혁명적 공급이, 욕망의 차원에서, (드물게) 의식적 이해에 따라 반동적 공급과 공존할 수 있다. 어떻든 의식적 공급과 무의식적 공급은, 이것들이 일치하고 중첩될 때에 도, 같은 형에 속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반동적인 무의식적 공급을 지 배계급의 이해에 합치하는 것으로 규정했지만, 이 공급은 그 자체로는 욕망의 말을 따르며, 연접적 종합들을 분리차별적으로 사용해 나아간다• 이 사용에서 오이디푸스가 나온다: 냐는 우등인종에 속한다고 말하는 따 위가 바로 그런 사용이다. 혁명적인 무의식의 공급은 다음과 같은 것이 다. 즉, 욕망이 여전히 자기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착취당하는 피지배계 급들의 이해를 재절단하여, 모든 분리차별과 동시에 이것들의 오이디푸 스적 적용을 깨부술· 수 있는 흐름을 흐르게 하는 공급이다. 모든 분리차 별과 그 오이디푸스적 적용은 역사를 환각하고, 인종들을 망상하고, 대륙 둘을 불태워버린다. 아니야, 나는 너희들과 한패가 아니야, 나는 밖에 있 는 사람이고 탈토지화한 사람이야, 〈나는 영원히 열등인종에 속해 있
어…… 나는 짐승이요, 검둥이야 〉. 여기서도 문제되는 것은 무의식 속에 공급하고 반대급부하는 강한 능력이다. 오이디푸스는 비약하고 있다. 왜 냐하면 그의 조건들 자체가 비약했기 때문이다. 연접적 종합들의 遊牧的 多義的 使用은 分離差別的이고 -對― 對應的 使用에 대립한다. 망상은 두 국, 인종주의자의 분리차별적-편집병적인 극과 유목적-정신분열중적인 극을 가지고 있는 듯싶다• 그런데 이 두 국 사이에는 미묘하고 희미한 유동이 있댜 거기서는 무의식 자체가 그 反動的 電荷들과 그 혁명적 잠 재력들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다. 슈레버도 아리아인의 분리차별을 건 너뛰어 자기를 위대한 몽고인으로 재발견하고 있다. 여기서 위대한 저자 둘이 인종의 테마를 다룰 때면 텍스트의 애매성이 생기는 것이다. 인종 의 데마는 문명의 테마처럼 애매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여기서 정신분열 자-분석은 이 점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덱스트를 읽는다 는 것은 결코 몇 가지 시니피에들을 찾아 博識을 겨루는 것도 아니요, 시니피%년t 찾아 텍스트를 아주 충실하게 따르는 훈련도 아니라, 문학 기계의 생산적 사용이요, 욕망하는 기계들의 조립이요, 텍스트에서 자기 의 혁명적 능력을 끌어내는 정신분열증적 훈련이기 때문이다. 인종에 관 한 〈 그러니까 이것은 ……이다!〉라고 하는 감탄, 즉 이지뛰르 l git ur 의 사색은 광기와 본질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6 세 종합의 요약 오이디푸스 笑話集은 무궁무진하고 언제나 살아 있다• 아버지들은 〈수 천 년 동안 내내〉 죽어왔고(저런, 저런) 이에 대응하여 아버지의 심상의 〈內面化〉는, 〈약 없J 년 전〉, 신석기시대가 시작될 때까지 구석기시대 동간 내내 있어왔다는 말을 우리는 듣고 있다 .40) 이런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실, 아버지의 죽음의 소식은 빨리 전해지지는 않는다. 이 역사에 니체를 끌어들이는 것은 잘못일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니체는 아버지의 죽음을 反錦히는 사람도 아니고, 이것 울 내면화하기 위하여 구석기시대 전체를 편력하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 이다. 사실은 이와 반대이다: 니체는 아버지의 죽음, 신의 죽음을 둘러싸 고 만들어진 모든 이야기(내지 역사)에는 아주 싫증이 나서, 이 주제에 관한 끝없는 논의, 그가 살던 헤겔적인 시대에 이미 유행하고 있던 이런 논의에 종지부를 찍고자 한다. 아아, 슬픈 일이지만 그는 잘못 알고 있었 고, 그 논의는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니체는 사람들이 마지막에 가서는 중대한 일들을 깨닫게 될 것을 바랐다. 신의 죽음에 관하여 그는 열두 가지 내지 열세 가지 해석을 내놓는다. 이것은 여러 가지 해석을 넉넉하 게 내놓아서 사람들이 거기 관하여 더 이상 말하지 않게 하고, 또 그 사 건을 우스운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그는 (神의 죽음이란) 이 사건이, 엄밀하게 말해서, 아무 중요성도 지닌 바 없고, 그야말로 마 지막 교황만이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신이 죽었는지 죽지 않 40) Gerard Mendel, La reuolt e contr e le per e, Payo t , 1968, p. 422.
았는지, 아버지가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는 결국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 있다면 살아 있는 신, 혹은 살아 있는 아버지를 위하여, 죽었다면 내면화된 죽은 사람 혹은 죽은 아버지롤 위하여 똑같은 억압과 똑같은 억제가 뒤이어 행해지기 때문이다. 니체는, 중요한 것은 신이 죽었다는 소식이 아니라, 그 소식이 열매를 맺게 되는 때라고 말한다. 여기서 정신 분석가는 귀를 기울이고, 그건 자기의 생각과 같다고 믿는다: 무의식이 하나의 소식을 소화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이집트의 무덤마냥 시간을 무시하고 자기의 대상들을 보존하는 무의식에 관한 프 로이트의 몇몇 텍스트롤 인용할 수도 있다. 다만 니체는 이런 것들을 모 두 말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는 신의 죽음이 무의식 속에 들어오는 데에 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말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가 말하려는 것 은, 意識에 도달하는 데에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신의 죽음이 무의식에 대하여 아무런 중요성도 지니지 않는다는 소식이라고 하는 점이 다. 이 소식의 열매들은 신의 죽음으로 생기는 결과들이 아니라, 신의 죽 음은 아무런 결과도 생기게 하지 않는다고 하는 다른 소식이다. 달리 말 하면 신이나 아버지는 한번도 현실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런 적 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주 오랜 옛날, 아마 구석기시대 동안이었다.) 신 이 죽었다고 떠들지만, 사람들이 죽인 것은 옛날부터 언제나 죽어 있는 자를 죽였을 따름이다. 신의 죽음의 소식의 열매는, (신의 ) 생명의 싹만 큼이나 그 죽음의 꽃도 없애버린다. 왜냐하면, 살았거나 죽었거나 그것은 다만 신앙의 문제요, 여기서 사람둘은 신앙의 세계를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는 것은 마지막 신앙, 죽 〈不信仰〉에 기초 를 둔 〈信仰〉을 구성한다. 이 신앙에 관하여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 다: 〈이 暴力은 언제나 하나의 신앙, 하나의 支柱, 하나의 構造……가 필 요하다고 선언한다.〉 죽 오이디푸스-構造가 필요하다고 선언한다는 것 이다. 엥겔스 En g els 는 바흐오펜 Bacho feii이 神話 속에 毋權과 父權의 여러 모순, 이것들의 두쟁들과 이것들의 관계들이 있음을- 확인한 데 대하여 그의 천재를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비난을 슬쩍 비쳐
사태를 일변시킨다: 바흐오펜은 신화들을, 에리뉘에스를, 아폴론을., 아테 네를 믿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41) 이와 동일한 비난을 좀더 심하게 정신 분석가들에게 할 수 있다: 그들은 신화를, 오이디푸스를, 거세를 믿는다. 그들은 다음과 갇이 대답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것들을 믿는가에 있 지 않고, 무의식 자체가 그것들을 믿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다. 그 런데 무의식이 신앙의 상태에 환원된다면, 도대체 그런 무의식이란 무엇 인가? 누가 무의식에다가 신앙을 주입하는가? 정신분석은 신앙을 괄호 속에 넣어야만, 죽 이데올로기적 형태로서의 오이디푸스를 유물론적으로 환원시켜야만 엄밀한 학문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오이디푸스가 하 나의 그릇된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란 것이 필연적으로 그릇된 어떤 것이요, 실제의 생산울 빗나가게 하고 질식시킨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투시력이 있는 사람은 가장 덜 믿는 자이다. 우리가 욕망을 오이디푸스에게 관련시킬 때, 우리는 어쩔수없이 욕망의 생산적 성격을 무시한다. 우리는 욕망을 그 의식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 막연한 꿈이나 상상이라고 斷罪한다. 우리는 욕망을 독립적 존재자들, 죽 生殖者 인 아버지, 어머니에 관련시키는데, 이들은 자기들의 요소들을 아직 욕망 의 내적 요소들로서는 파악하고 있지 않다. 아버지의 문제는 신의 문제 와 같다: 그것은 추상의 산물로서, 인간과 자연의 유대, 인간과 세계의 유대가 끊겼다고 상정한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산출되는 것은 자 연과 인간 밖에 있는 어떤 것에 의해서라고 생각한다. 이 점에 관해서 니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한 말과 아주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인 간과 세계가 이웃이면서 과라고 하는 작은 낱말의 숭고한 특권에 의하여 갈라져 있음을 보기만 해도 우리는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 42) 인간의 外延과 자연의 의연이 같은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의연이 같다 함은, 무의식이 항상 주체로 있으면서 자기지신을 생산하고 또 재생산하 는, 순환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한 신체로부터 다른 신체 41 ) Enge l s, L'Or igine de la fam i lle , Ed. Socia l es, p. 19, pre fa c e. 42) Ni et z s che, Le Cai Sauoir , V, § 346(Et Marx, Economi e et ph il o sop h ie , Pleia d e, II, pp. 88-90 ) .
예로, 죽 네 아버지, 네 아버지의 아버지에로 등등 前進하는 (혹은 뒷걷 음치는) 生殖의 길들을 더듬어가지 않는다. 유기적 조직을 가전 신체는 생식에 의한 재생산의 대싱이다: 그것은 재생산의 주체가 아니다. 재생 산의 유일의 주체는 생산의 순환 형태를 고수하는 무의식 자체이다. 성 욕은 생식에 봉사하는 수단이 아니다• 도리어 신체의 생식이 무의식의 自動生産인 성욕에 봉사한다. 성욕은 생식과정에 종속하는 대신에 자아에 대한 보성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반대로 생식이 자아를 위로하 고 자아를 신장시킨다. 생식은 자아를 한 신체로부터 다른 신체로 移行 시키는 것인데, 이 이행을 통하여 무의식은 자기자신 속에 자기자신을 재생산할 따름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무의 식은 언제나 고아였다. 죽, 무의식은 자연과 인간, 세계와 자연의 일체화 속에서 스스로 출생하였다. 이제 아버지의 문제, 신의 문제는 불가능한 것,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 된다. 그런 존재를 긍정하거나 부정하 거나, 살리거나 죽이거나 결국 마찬가지 짓거리이다: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은 무의식의 본성에 대하여 유일의 동일한 오해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신분석가들은 인간을 추상적으로, 죽 이데올로기적으로, 문화 롤 위하여 생산하는 데에 집착한다. 이렇게 인간을 생산하고, 무한한 전 전, 혹은 되행의 거짓 운동에다가 하나의 구조를 주는 것이 오이디푸스 다: 네 아버지, 네 아버지의 아버지, 이런 식으로 따지는 오이디푸스의 눈덩이는 유목민의 아버지, 신 그리고 석기시대에까지 부풀며 거슬러 울 라간다. 〈 우리를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하건 더 나쁜 사람이 되게 하건, 어떻든 우리를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오이디푸스이다〉라고 그 笑話集은 말한다. 이 접에 있어, 음조는 달리질 수 있으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너는 오이디푸스에게서 빠져나갈 수 없다, 너는 〈神經症의 出口〉와 〈신 경중 아닌 出口〉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음조는 화가 난 정신분석가, 경찰관-정신분석가의 그것일 수 있다: 오이디푸스의 제 국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사회와 경찰의 억압에 내맡겨야 할 위험 한 이단자들이요, 좌익분자들이다, 그들은 너무 많이 지껄이고, 旺 F 邪톄 7 결여하고 있다(망델 박사, 스테판느 박사들). 말장난을 얼마나 불안스럽게
한 다음에야 정신분석가는 항문성의 추진자가 되는가? 정신분석가~근 司 祭-精神分析家, 죽 존재의 불충분함은 고칠 수 없는 것이라 노래하는 경 건한 정신분석가이든가, 技術者-精神分析家, 죽 삼각형에 골몰하고 있는 修正主羲者기든가이다• 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은 오이디푸스가 우리를 오이디푸스로부터 구출해 낸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 우리가 그 를 신경증적으로 살아가는가 , 혹은 그 구조를 살아가는가에 따라, 그는 우리의 비참함이지만 또한 우리의 위대함이기도 하다, 그는 거룩한 신앙 의 어머니이다라고(뽀이에 J. M. Pohie r ). 후자는 오이디푸스 속에 문명 의 빛나는 선물들, 죽 신원확인, 操鬱症, 무한히 전전하는 자유를 집어넣 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오이디푸스 속에서, 개인은 三角形 狀況, 자 기의 신원보증을 살아갈 줄 알게 되는 동시에, 때로는 우울하게 때로는 신바람나게, 근본적 소의, 죽 자유의 대가인 그의 치유할 수 없는 고독을 발견한다. 오이디푸스의 근본 구조는 시간 속에서 어린이가 그 부모와 더불어 갖는 모든 삼각형적 경험에 일반화되어야만 할 뿐만 아니라, 또 한 공간 속에서 부모-어린이의 관계들 아닌 다른 삼각형적 관계들에 대 해서도 일반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 43)
43 ) Jac q ue s Hocbmann, Pour une psych ia tri e communauta i r e , p. 38.
무의식은 의미에 관한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 오로지 사용에 관한 문제들만을 제기한다. 욕망의 문제는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 아니고, 그것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이다. 네 것이나 내 것을 막론 하고, 욕망하는 기계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어떤 고장으로써 이 기계 둘의 사용의 일부로 삼는가? 어떻게 그것들은 한 신체로부터 다른 신체 로 옮아가는가? 어떻게 그것들은 기관들 없는 신체에 달러붙는가? 어떻 게 그것들은 자기들의 체제를 사회적 기계들에 대결시키는가? 은순한 돕 니바퀴에 注油룰 하게 되는가 하면, 반대로 지옥의 기계가 준비된다• 어 떤 연결들, 어떤 이점들, 어떤 연접둘이 여기에 있는가? 이 세 가지 종 합은 어떻게 사용되는가? 〈그것〉은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지만, 생산한 다. 〈그것〉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지만, 작동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 미하는가?〉란 문제가 일반적으로 몰락해 갈 때 욕망이 등장한다. 언어의
문제를 제기할 줄 알게 된 것은 언어학자들과 논리학자들이 의미를 제거 한 범위에서만이다: 따라서 언어의 가장 고도의 능력이 발견된 것은 작 품이 어떤 용법을 따라 어떤 효과들을 생산하는 기계로 여겨졌던 때의 일이다. 맬콤 로리 Malcolm Lowr y는 자기의 작품게 대하여 다음과 같 이 말하고 있다: 그것이 작동하는 순간부터 이것이 당신들이 바리는· 것 의 전부입니다, 〈 그것은 작동하고 있어요, 틀림없어요, 왜냐하면 나는 거 기 대해서 경험했으니까요 〉 ――그것은 하나의 機械圈幣기다.”) 다만, 의미 란 용법 이의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 확고한 원리로 되는 것은, 정당한 용법들을 결정할 수 있는 內在的 基準들을 우리가 자유로이 사용 할 수 있을 때만이다. 정당한 용법이란 부당한 용법에 대립하는 것인데, 후자는 전자와는 반대로 의미를 전제하고서 이 의미에 용법을 관계시키 는 것이요 일종의 超越을 再建하는 것이다. 이른바 超越論的(先驗的 tra n- scendant al e) 分析은 바로 이 기준들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 기준들은 〈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따위의 물음을 초월적으로 제기하는 것을 禁하는 한에서 무의식의 場에 內在한다. 정신분열자-분석은 선험적인 동 시에 유물론적인 분석이다. 그것은 오이디푸스비평을 인도한다는 의미에 서, 혹은 오이디푸스를 인도하여 그 자신의 자기 비판에까지 인도한다는 의미에서 비판적 분석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무의식 대신에 선험적 무 의식을 탐구하려 한다: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고 질료적인 무의식 : 오이디푸스적인 것이 아니고 정신분열중적 무의식 : 상상적인 것이 아니 고, 비형상적인 무의식 : 상칭적인 것이 아니고 현실적인 무의식 : 구조적 인 것이 아니고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무의식 : 큰 덩어리를 이루는 것, 혹은 군집적인 것이 아니라 分子的』敬/j v 心理的, 微小物硏究的인 무의식 : 표현적인 것이 아니고 생산적인 무의식을 탐구하려 한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치료〉의 방향둘로서의 실천적 원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서 어떻게 욕망하는 생산의 내재적 기준들이, 오이 디푸스적 사용들과는 전혀 다른 종합들의 정당한 사용들을 정의할 수 있 게 하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욕망하는 생산에 관하여, 오이디푸스 44) Malcolm Lowry, Chaix de lett res , tr. fr. Denoel, pp. 86-87.
적인 부당한 사용들은 여러 가지로 많은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우 리에게 보였으나, 언제나 동일한 誤器 주위를 빙빙 돌고 있고, 또 이론적 및 실천적 오류추리들을 내포하고 있는 듯싶었다. 첫째로, 연결적 종합들· 의 부분적이고 비특수적 사용은, 전체적이고 특수적인 오이디푸스적 사 용에 대립하는 것이었다. 이 전체적-특수적 사용은 두 영상, 죽 부모의 양상과 혼인의 양상을 띠고 있었는데, 부모적 양상에는 오이디푸스의 삼 각형 형태가, 혼인적 양상에는 이 형태의 재생산이 대응하고 있었다. 그 것은 外推法의 오류추리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이 오류추리는 결국 오 이디푸스의 정식의 원인을 이루는 것이었고, 그 부당성은 다음과 갇은 조작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죽, 시니피앙의 연쇄로부터 전제군주 시니 피앙으로서의 초월적인 완벽한 대싱 ~7 추출하는 조작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때 시니피앙 연쇄 전체는 이 전제군주 시니피앙에 의존하고 있는 듯싶었다. 전제군주 시니피앙은 욕망이 있는 곳마다 결여를 배정하 고, 욕망을 법률에 溶接시키고, 시니피앙 연쇄의 고리가 떨어져 나간 듯 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였다. 둘째로, 이접적 종합들의 포함적 내지 무제 한적 사용은 이 종합들의 오이디푸스적, 배타택일적, 제한적 사용에 대립 한다 . 이 제한적 사용은 이번에는 두 극, 죽 상상적인 극과 상칭적인 극 울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사용은 오이디푸스에 의하여 상관적으로 규정된 두 항, 죽 배타태일적인 상징적 구별들과 미분화상태의 상상적인 것의 둘 중에서 하니를 선택하는 일밖에는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 그것은 어떻게 오이디푸스가 나오며, 오이디푸스의 수법은 무엇인가 를 보여준다: 이 수법이 二重拘束, 이중의 막다른 골목의 오류추리이다. (무의식을 두 극에 움아매어 꼼짝못하게 하는 취급을 더 잘 나타내기 위 해서는 앙리 고바르 Henri Gobard 의 示竣롤 따라 double b i nd 를
은 정신분열증의 과정이 아니고, 이와 반대로 바로 오이디푸스이기 때문 이다. 이중구속이 이 괴정을 멈추게 하거나 공전하게 하는 한, 오이디푸 스 자신이다.) 셋째로, 연접적 종합들의 遊牧的 多義的 使用은 분리차별적 일대일 대응적 사용에 대립한다. 여기서도, 무의식 자체의 시점에서 보아 부당한, 이 일대일 대응적 사용은 두 계기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인종 주의적, 국가주의적, 종교적 등의 계기요, 다른 하나는 가족적 계기이다. 전자는 분리차별을 통하여 언제나 오이디푸스에 의하여 전제되고 있는 출발집합점을 구성한다. 이 경우 그 구성은 아주 은연중에 행해지기가 일쑤다. 후자, 죽 가족적 계기는 일치를 통하여 도달집합점을 구성한다. 여기서 셋째 오류추리인 일치의 오류추리가 생긴다. 이 오류추리는 사회 터전을 규정하는 것들과 가족을 규정하는 것들 사이에 일대일의 대응관 계 전체를 설정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또한 리비도를 영원한 아빠-엄마 에 포개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또 불가피하게 함으로써, 오이디푸스의 조건을 고정시킨다. 아직 우리는 실제로 治療룰 미치광이 같은 오이디푸 스화의 방향으로 잡아가는 오류추리들을 모두 살펴보지는 않았다. 이 오 이디푸스화는 욕망에 대한 배반이요, 무의식을 탁아소에 맡기는 것이요, 지껄이기를 좋아하며 교만한 작은 자아를 위한 자기 도취적인 기계요, 자본주의의 잉여가치를 부단히 흡수하는 것이요, 돈의 흐름에 말의 흐름 으로 대하는 것이요, 끝없는 이야기요, 정신분석이다. 욕망에 대한 세 가지 오류는, 결여, 법률, 시니피앙이라 불린다. 이 세 가지는 결국 하나의 동일한 오류, 즉 경건한 무의식관을 형성하는 관념 론이냐 그래서 결여는 공허한 자리이지 더 이상 결핍이 아니요, 법률은 놀이의 규칙이지 더 이상 명령이 아니요, 시니피앙은 분배자이지 의미가 아니라고 結合術의 용어로 이 개념들을 해석해 보았자 소용없는 일이다. 이것들이 자기들 뒤에 神學的 수행원들, 죽 존재의 불충분함, 죄책감, 記 號化作用울 거느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구조적 해석은 모든 신앙을 물리치고, 心像들을 넘어서며, 아버지와 어머니에 관해서는 기능 만을 고려하고, 禁止와 犯罪를 구조의 操作者들로 규정한다: 그러나 어떤 沼切 0 l- 이 개념들로부터 그것들의 背景, 그것들의 背後世界, 죽 宗敎性
울 씻어버릴 수 있겠는가? 無信仰으로서의 과학적 인식은 참으로 신앙의 마지막 피난처이다. 그리고 니체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거기에는 지 금까기 오직 하나의 心理學, 즉 司祭의 心理學만이 있었다• 욕망 속에 결 여가 다시 도입되자마자 욕망하는 생산은 모두 파괴되고, 환상의 생산에 지나지 않는 것에 환원된다. 그러나 기호는 환상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 라, 현실적인 것을 생산하며, 욕망을 현실 속에 자리잡게 한다. 법률이 없으면 욕망도 없다고 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잘 알려진 일임을 상기 하여 이런 것을 새삼스레 들먹거릴 생각은 없지만, 욕망울 법률에 결부 시키자마자, 실상 영원한 억압의 영원한 조직이 다시 시작된다. 이 조작 은 무의식을 금지와 범죄, 흰 미사와 검은 미사의 円環 속에 가두어놓는 조직이다. 그러나 욕망의 기호는 결코 법률의 기호가 아니라, 능력의 기 호이다-~ 욕망은 그 능력을 정립하고 발전시키며, 그것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여러 가지 흐름을 흐르게 하고 실체들을 절단한다는 사 실을 누가 감히 법률이라 부르겠는가? ( 〈 낱말은 정신상의 뒷맛을 지니 고 있기 때문에 나는 化學의 法則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한다. 〉 ) 욕 망이 시니피앙에 의존하게 되자마자, 욕망은 다시 전제군주의 굴레 아래 들어간다. 전제군주의 효과는 去勢인데, 여기서 시니피앙 자체의 특질을 알게 된다. 그런데 욕망의 기호는 결코 시니피앙이 아니다• 그것은 수천 의 생산적인 흐름들- 절단들 속에 존재하는데, 이것들은 거세라고 하는· 단 하나의 특질에 의하여 기호화되지 않는다. 욕망의 기호는 언제나 많 은 차원을 가전 점-기호요, 정밀한 기호학의 기초로서의 多義性이다. 無意識은 검다고 흔히들 말한다. 라이히와 마르쿠제 Marcuse 는 그들의 〈루소주의〉, 그들의 자연주의 때문에 가끔 비난을 받는다: 무의식을 너 무 牧歌的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에 대한 공 포감들일 수밖에 없는 공포감들, 자기자신에 대하여 너무 자신만만한 신 앙에 대한 공포감들을 바로 무의식에 돌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무의식 속에는 으레 유산 상속자, 군인 혹은 국가원수의 의식 속에서보다는 적 은 잔인성과 무서운 것이 있고, . 그 유형도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諦張일 까? 무의식은 공포감둘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들은 인간의 형태를 가지고
나타나지는 않는다. 무의식은 형태를 가지고 나타나지는 않는다. 무의식 은 루소주의자요, 인간-자연이다. 그런데 루소 속에는 악의와 술책이 있 다. 범죄, 죄책감, 공포. 이것들은 무의식이 규정하는 것들인가, 그렇지 않고 司祭가 사물을 보는 方式인가? 아마 정신분석 의에도 무의식을 오이 디푸스화하고 그것에 죄책감을 주고 그것을 거세하는 다른 힘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정신분석은 이러한 동향을 뒷받침해 주고, 최후의 사제를 발명한다. 오이디푸스적 분석은 무의식의 모든 종합에다가 하나의 초월 적 사용을 강요하여 이 종합들을 확실하게 變換시킨다. 따라서 정신분열 자-분석의 실천적 과제는 이 변환을 역전시키는 일이다. 죽 무의식의 종 합들을 내재적으로 사용하는 일이다. 脫오이디푸스화하는 것, 아버지-어 머니의 거미줄을 없애버리는 것, 신양들을 깨부수어 욕망하는 기계들의 생산에 그리고 경제적 및 사회적 공급들에 도달하는 것이다. 여기서 전 투적 분석이 전개된다. 욕망하는 기계들울 문제삼지 않는 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욕망하는 기계들을 문제삼는 것은 그야말로 아주 구체적 으로 사태에 개입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만을 원하고 또 이해하는 오이디푸스적 분석가의 호의적인 가짜 중립성 대신에 공공연하게 冷情을 표방하여 냉정한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다-너는 오이디푸스를 가지고 나를 역겹게 한다, 만일 네가 그 일을 계속하면 분석을 중단시키거나, 너 에게 전기 쇼크를 줄 데다, 아빠-엄마라 말하는 것을 집어치워-그렇 고 말고요, 〈베르테르가 당신 속에 살아 있는 것같이, 햄릿이 당신 속에 살아 있어요〉, 그리고 오이디푸스도 살아 있어요, 이것이 당신이 원하는 것 전부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同母異父의 팔과 다리, 동모이부의 입술, 동모이부의 수염을 나게 하고 있소: 回想되는 죽음 둘을 다시 살고 체험 함으로써, 당신의 자아는 생명의 허무함을 부단히 증명하는 一種의 鑛物 的 定理가 되오……. 당신은 햄릿으로 태어났소? 그런 게 아니고 햄릿을 당 신 속에 출생시킨 게 아니오? 왜 神話로 되돌아가려는 거요?〉) 여기서는 신화를 포기함으로써 정신분석 속에 약간의 기쁨, 약간의 발견을 회복하 는 것이 문제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미리 정해져 있기 때문에 45) Henry Mi ller, Hamlet, tr. fr. Correa, p. 156.
정신분석은 아주 음침하고, 아주 서글프고, 아주 끝없는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정신분열자도 기쁘지 않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겠는가? 그의 서글품은 그를 사방에서 죄어드는 오이디푸스화와 행릿화를 그가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기관들 없는 신 체에로 도주해서, 그 속에 숨고, 자기 안에 들어박혀 있자. 작은 기쁨은 과정으로서의 정신분열중화 속에 있지, 임상실체로서의 정신분열자 속에 있지 않다. 〈당신은 과정을 목적으로 만들었소…….〉 만일 정신분석가를 강요하여 생산적 무의식의 영역들에 들어가게 한다면, 거기서 그는 꼬미 디 프랑세즈의 女侵가 공장 속에, 中世의 司祭가 연쇄적 작업장에 옮겨졌 울 때처럼, 그의 극장과 함께 옮겨졌다고 느낄 것이다. 생산의 단위들을 조립하고, 욕망하는 기계들을 연결시켜야 한다: 이 공장 안에서 일어나 는 일, 거기서의 괴정, 그 고민과 그 영광, 그 고통과 그 기쁨, 이런 것 둘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채로 있다.
7 억압과 억제 우리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의 형태, 그 재생산, 그 (형식상의) 원인, 그 수법, 그 조건을 분석하려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삼각형화가 의존하 는 현실적인 힘들, 현실적인 원인들의 분석을 뒤로 미루었다. 여기 대한 답의 일반적 방향은 단순하고, 라이히에 의하여 素描되었다: 그것은 사 회적 억압 그리고 이 억압의 세력들이다. 하지만 이 답은 두 가지 문제 룰 그대로 존속시키고 있고, 또 이 문제들을 다급한 것이 되게 하고 있 다. 한편으로 柳荷 I] 와 仰壓의 특유한 관계: 다른 한편으로 억압-억제의 체계에 있어서의 오이디푸스의 특수한 상황. 이 두 문제는 분명히 결부 되어 있다. 왜냐하면 만일 仰制가 近親相蟲의 욕망들에 영향을 주는 것이 라면, 바로 이 영향을 통하여 그것은 교환이나 사회 전체를 구성하는 조 건으로서 억압에 대하여 독립성과 우위를 획득하게 되겠기 때문이다. 이 억압은 이제 억제된 것이 기성 사회에 되돌아오는 데에만 관계하게 된 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둘째 문제를 고찰해야 한다 : 억제는 무의식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것으로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영향을 주는가? 프로이트와 더불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그 두 극을 따라, 억제되든 가, 말살된다고까지 말해야 하는가? (억제된다 해도 흔적들과 되돌아오 는 일들이 남아, 이것들은 여러 가지 禁止에 부딪친다. 말살된다 해도 어 린이들에게 옮겨가 똑갇은 역사가 다시 시작한다.)”) 오이디푸스는 정말 46) Freud, La Disp a rit ion du comp le xe d'CEd ipe , 1923, tr. fr. in la Vi e sexuelle, P.U.F., p. 120.
욕망을 표현하고 있는가고 사람들은 묻는다: 만일 오이디푸스가 욕구되 고 있다면, 확실히 억제는 그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이 논의에는 무엇인가 생각게 하는 점이 있다: 프로이트는 프레이저 Frazer 의 지적을 다시 거론하고 있는데, 이 지적에 따르면 〈 법률은 인간 들이 그들의 본능들의 어떤 것들의 압력 아래 할 수 있는 것만을 금지한 다; 따라서, 법률이 근친상간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근 친상간에로 몰아가는 자연적 본능이 있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 .47) 바꾸어 말하면, 근친상간이 금지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욕망되고 있기 때문이라 는 것이다(욕망되고 있지 않는 것을 금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면, 법률에 대한 이 신뢰, 법률의 술책들과 수법들에 대한 무지 가 우리를 어리둥철케 한다.
47) Freud . '.lbtem et tab ou, 1912, tr. fr. Pay ot , p. 143.
『信用을 건 죽음』에 등장하는 不死의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의친다: 그러니 너는 나를 죽게 하고 싶은 거지, 네가 바라는 것은 바로 이거지, 자, 말해 봐. 하지만, 우리는 이 비슷한 것을 전혀 원하지 않았다. 우리 는 아버지가 기차이고, 어머니가 정거장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우리가 바 란 것은 다만 무죄와 평화였고, 또 우리가 우리의 작은 기계들을 움직이 도록 사람들이 우리를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오오, 욕망하는 생산이여. 물론, 어머니와 아버지의 신체의 조각들이 연결들 속에 넣어지고, 부모의 이름들이 인쇄의 이집들 속에 나타난다. 부모는 거기서 뜻밖의 일들, 인 종들 및 대륙둘의 生成을 始動시키는 어떤 자극으로서 존재한다. 그런데 책들에 관한 幻覺과 學習에 관한 妄想(敎師는 아버지의 代理요, 책은 가 족의 이야기이다……)을 위시하여, 모든 면에서 오이디푸스의 틀을 넘는 것을 오이디푸스에게 관련시키는 것은 프로이트의 아주 이상한 고집이 다. 융은, 野生의 사람도 자기의 어머니나 할머니보다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정말 현실적으로 존재했을 리 가 없다고 말했는데, 프로이트는 융의 이 단순한 농담을 참아내지 못했 다 . 설사 융이 모든 것을 왜곡했다 해도, 그것은 이 농담 때문이 아니다. 이 농담은 다만 아름다운 아가씨가 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그만큼 어머니
도 아름다운 아가씨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시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중 요한 것은 야성의 사람에게나 어린이에게나 자기의 욕망하는 기계를 형 성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이요, 그의 흐름들을 흐르게 하고 그의 절단들 을 행하는 것이다. 법률은 우리에게 말한다: 너는 네 어머니와 결혼해서 는 안 되며, 네 아버지를 죽여서도 안 된다라고. 그래서 우리들, 온순한 固곳인 우리들은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바라고 있던 그것이다! 라고. 법률이 유죄로 추정하는 사람, 법률이 유죄이기를 바라는 사람, 자 기자신이 유죄라고 스스로 느끼기를 법률이 바라는 사람을 법률이 그 명 예를 훼손하고, 그 명예를 훼손하여 망신시키려 한다는 의심이 우리에게 생길까? 사람들은 마치 억제로부터 억제된 것의 본성을, 또 금지로부터 금지되고 있는 것의 본성을 직접 결론지을 수 있는 듯이 행동한다. 여기 에 또 하나의 전형적인 오류추리가 있다. 그것은 넷째 오류추리인바, 옮 겨놓기 % 杓고 이름 붙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법률이 욕망 혹은 〈本能 들 〉 의 次元 속의 완전히 허구적인 어떤 것을 금지하고는 그 臣下들이 이 허구에 대응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그 신하들을 설득하는 일이 생 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법률이 의도를 비난하고 무의식을 유죄로 치는 유일의 방식이기도 하다. 요컨대, 二項體系에서는 형식적인 금지로부터 실제로 금지된 것을 결론지울 수 있지만,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이러한 이항체계가 아니다.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삼항체계요, 여기서는 그러한 결론이 전혀 부당한 것이 된다. 우리는 다음의 세 항울 구별해야 한다: 억제를 조작하는 억제하는 表象作用 @ ; 억제가 실제로 對象으로 삼는 억 제된 表象表現 ® ; 옮겨놓아전 表象內容.® 이 셋쨋것은 억제되는 것에 관하 여 명백히 속임수의 心像을 주며 욕망은 이 심상에 매이게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속임수의 심상, 이것이 오이디푸스이다. 억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은 오이디푸스 속에서가 아니다. 또 억제의 대성이 되어 있는 것 도 오이디푸스가 아니다. 그것은 억제되었던 것이 되돌아온 것도 아니 (j) dep la cement. @ rep re senta t i on . ® rep re senta t i on . @) rep re sente .
다. 그것은 억제의 모조품이다. 오이디푸스는 억제에 의하여 끌어내어진 한에 있어서 표상된 것일 따름이다. 억제는 욕망을 옮겨놓지 않고는 행 해질 수 없다. 죽 억제가 행해질 때에는 반드시 원리적으로나 현실적으 로 억제의 대상이 되어 있는 처음의 욕망은 시리지고, 그 대신 罰 이 아주 단단히 준비되어 있는 後續의 욕망이 고개를 쳐들게 된다( 〈 아아, 그러니 까 이것은 그것이었구나! 〉 ). 로렌스는 이상의 권리들을 내걸고 프로이트 에 반대하는 싸움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욕의 흐름들 - , 무의식 의 强度들에 기초하여 말하고 있으며, 또 프로이트가 성욕을 오이디푸스 적 育兒室에 가두어놓을 때 하고 있는 일에 마음이 상하고 當惑하여, 정 신분석의 옮겨놓는 조작을 예감하고 전력을 다하여 이것에 항의하고 있 다: 아니다, 오이디푸스는 욕망과 충동들의 한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하 나의 觀念이다, 억제가 욕망에 관하여 우리에게 鼓吹하는 하나의 관념일 따름이다, 또 하나의 타협도 아니다, 그렇지 않고 억제에 이바지하는, 억 제의 宣傳 및 전파에 이바지하는 하나의 관념이다. 〈 近親相값의 動機는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논리적으로 연역된 것이요 이성이 자기자신을 구 출하기 위하여 이 마지막 수단에 호소하여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먼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성의 논리적 演擇인데, 이것이 무의식적으로 행해지고 나서 情念의 영역에 도입되어 여기서 행동의 원리가 된 것이다 ……• 이런 것은 활동적인 무의식, 번득이고 전동하고 여행하는 무의식과 는 아무 관계가 없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은 무의식이 관념적 인 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問念의 세계에 유래하는 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인격적인 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격둘의 형태는 자아와 마찬가지로, 무의 식인 ‘나', 죽 정신적으로 주관적인 ‘나'에 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 므로 맨 처음의 분석들은 인격과는 상관없는 것이요, 또 이래야만 한다. 여기서는 소위 人問的인 관계들은 작용하고 있지 않다. 최초의 접촉은 인 격적인 것도 아니요, 생물학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정신분석이 이해하 는 데 성공하지 못한 사실이다.〉) 48) D.H. Lawrence, Psy c hanalys e et in consc ien t, 1920, tr. fr. (modif iee ),
in Homme d'abord, bib l . 10-18, pp. 219-256.
오이디푸스적 욕망둘은 조금도 억제되어 있지 않고, 또 억제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하나의 디른 방식으로는 억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덫이다. 죽 왜곡된 심상이다. 이 심상을 통하여 억제는 욕망을 함정에 빠뜨린다. 욕망이 어머니를 욕구하고 아버지의 죽 음을 욕구하기 때문에 욕망이 억제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욕 망이 억제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욕망이 억제에 지배되어서만 이 가면을 쓴다. 억제가 욕망의 가면을 만들어주고 이 가면을 욕망에게 씌운다. 물론 交換主義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근친상간이 사회의 창립에 전정한 장애가 된다는 것을 의심할 수는 있 다. 다른 장애들이 있었던 것도 분명한 일이다……. 진정한 위험은 딴 데에 있다. 욕망이 억제되는 것은, 아무리 작은 욕망이라도 일단 욕망이 생기면 사회의 기성 질서가 의문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욕망이 非社歸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고 욕망은 사회를 뒤집어엎는다: 욕망 하는 기계들이 세워지면 사회의 구석구석이 온통 폭파된다. 몇몇 혁명가 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욕망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다-혁명적인 것은 욕망이지, 左翼의 祭典이 아니다! __ 그리고 어떠한 사회도 참된 욕망의 定울 허용하면 그 착취, 예속 및 위계질서의 구조가 반드시 위험에 처 하게 된다. 만일 어떤 사회가 이 구조들과 일체를 이루게 되면(이것은 재미있는 假定이다), 그때에는 그렇다, 욕망이 그 사회를 본질적으로 위협 한다. 그러므로 욕망을 억압하고, 심지어 억압보다도 더 나은 것을 찾아 내어, 억압, 위계질서, 착취, 예속이 그 자체 욕망되도록 하는 것이 사회 에 대해서는 그 死活이 걸린 중대한 일이다. 다음과 갇은 아주 초보적인 것들을 말해야 된다는 것은 정말 화가 나는 일이다: 욕망은 그것이 어머 니와 동침하려는 욕망이기 때문에 사회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혁명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회를 위협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욕망이 성욕과는 다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욕과 사랑은 오이디푸스의 침실에서는 살아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오히려 더 넓은 外 海 꿈꾸고, 기성 질서 속에 저장되지 않는 낯선 흐름들을 흐르게 한다.
욕망은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원함으로써 혁명적이다. 이 硏究의 처음부터, 우리는 사회적 생산과 욕망하는 생산은 일체를 이루고 있으나 체제를 달리한다는 것과, 따라서 생산의 사회적 형태는 욕망하는 생산에 대하여 본질적 억압을 가 하며, 또 욕망하는 생산(하나의 〈 참된 〉 생산)은 잠재적으로- 사회 형태를 폭파하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주장하여 왔다. 그런 데 〈참된 〉 욕망이란 무엇인가? 왜냐하면 억압도 욕구되고 있으니 밀이 다―_우리는 아주 천천히 분석하는 권리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오해하 지 말아주기를 바라거니와, 이 두 가지 욕망은 종합들의 사용에 있어서 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지만, 동일한 종합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오이디푸스가 억제의 대상이면서 또한 超自我롤 매개로 하 여 억제의 주체이기도 하다는 관계를 내세우는데, 정신분석이 이런 관계 에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명백하다• 정신분석은 이런 관계로부터 억제의 문화적 정당화를 기대하고 있다. 이 정당화는 억제를 가장 중요 한 것이 되게 하고 억압의 문제를 무의식의 관점에서는 이차적인 것으로 만 본다. 이런 까닭에 프로이트의 비판자들이 프로이트의 보수 반동에의 전환점을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근친상간의 충동들에 대항하여 작용하는 문화의 조전으로서의 자율적 가치를 억제에게 준 때부터이다. 라이히는, 프로이트주의의 대전환점이 되는, 성욕의 포기라고 하는 주장 이 나오는 것은 프로이트가 內因性의 억제를 시동시키게 될 처음의 불안 이라는 관념을 받아들이는 때에라고까지 말한다. 〈開化한 性道德 〉 에 관 한 190 8':i回 논문을 검토해 보기를 바란다: 거기서는 오이디푸스가 아 직 命名되지 않고 있으며, 억제는 옮겨놓기를 생기게 하는 억압에 관련하 여 고찰되고 있다. 이 억압은 근친상간의 충동이나 정당한 결혼을 위협 하는 다른 충동들에 대해서 작용하기 전에는, 부분적 충동들이 그 나름 대로 일종의 욕망하는 생산을 대표하는 한 이 부분적 충동들에 대해서 작용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 분명한 것은, 오이디푸스와 근친상간의 문제 가 무대의 전면을 차지하게 되면 될수록, 억제와 그 相關項들인 금지와 승화가 더욱더 문명의 효괴적 요소들 속에 근거를 두게 되고, 동시에 정
신분석은 더욱더 가족주의적이고 이데올로기적 견해에 빠지게 된다. 우 리는 프로이트주의의 반동적 타협들과 심지어 그 〈 理論的 變節〉에 관하 여 새삼스레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이 작업은 여러 차례, 깊이 있 게, 엄밀하고도 미묘하게 행하여졌다 .49) 理論的인 동시에 賀錢的인 한 敎 說 속에 혁명적, 개량적, 반동적 요소들이 공존한다고 해서 우리는 어떤 특수한 문제가 하나라도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이론이 실천에서 나왔으 면 실천을 정당화한다든가 〈 治療 〉 의 과정에 대한 이의 제기는 바로 그 치료에서 끄집어낸 요소들에서 출발할 때에만 가능하디든가 하는 구실 아래 〈취하든가 버리든가 〉 를 결정하는 처지방식을 우리는 거부한다. 다 음의 두 가지 경우밖에 없는 듯이 일이 처리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마치 모든 위대한 敎說이 하나의 集成된 形成體가 아니었던 듯이 일이 처리되 는 경우이다. 집성된 형성체란 단편들과 조각들, 갖가지 뒤섞인 規準들과 흐름들, 부분적인 것들과 파생된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들은 형성체 의 생명 자체 혹은 생성을 구성한다. 다른 하나는, 마치 정신분석이 그것 이 발견하는 것과 그것이 다루는 힘들과,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애 매한 관계를 가지고 성립하고 있음을 먼저 언급하지 않고, 어떤 사람이 정신분석과 애매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그 사람을 비난할 수 있 는 듯이 일이 처리되는 경우이다. 프로이트적 이데올로기의 비판적 연구 는 행해지고 있고, 또 잘 행해지고 있지만, 그 대신 그 운동의 역사는 소묘조차 되지 않고 있다: 정신분석 그룹의 구조, 그 정책, 그 경향들과 撮點둘, 그 自己향軒춘, 그 자살행위들과 광기들, 거대한 집단적 초자아, 창시자 프로이트의 충만한 신체 위에서 일어난 모든 것__이런 것들이 소묘조차 되지 않고 있다. 존스J ones 의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만한 저 서도 檢問機構를 무너뜨리지는 못하고, 오히려 成文化하고 있다. 어찌된 49) Cf. les deux exp o ses classiq u es, de Reic h (La Foncti on de l'org a sme, pp. 165-181) et de Marcuse(Eros et ciu i l is a t ion , tr. fr. Ed. de Mi nu it, les pre m ier s chap itre s). 이 문제는 좀더 최근에는 Part isa ns, n°46, fev rie r 196 핵 훌륭한 논문들에서 다시 다루어졌다 : Francois Ganth e ret, Freud et la qu esti on socio -p lo it iqu e ; Je an-Marie Brohz n, Psyc h analys e et revoluti on (pp . 85, 97).
일인지 정신분석에는 세 요소가 共存한다: 욕망히는 생산을 발견한 探險 的이고 開拓的인, 혁명적 요소; 오이디푸스 劇場의 表象 舞臺 위에 모든 것을 포개놓는 古典文化的 要素(神話에로의 回歸!); 끝으로 셋째 요소흰 . 데, 이것은 가장 憂慮할 만한 것이다• 이것은 尊荷 k 에 굶주리고 있는 일종 의 공갈단으로서 자기가 인정받고 제도화될 때까지는 만족하지 않는 요 소이다. 이 공갈단의 기도는 끝없는 치료를 성문화하고, 돈의 역할을 파 령치하게 정당화하여, 기성 질서에 모든 保證을 제공함으로써 잉여가치를 흡수하는 무서운 기도이다. 프로이트에게는 이 세 요소가 모두 있었다. 죽, 공상적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괴테 • 셰익스피어 • 소포클레스의 천 재적인 부르주아 독자, 가면을 쓴 알 카포네. 라이히의 강점은 어떻게 억제가 억압에 의존하는가를 밝힌 데 있다. 이것은 이 두 개념의 혼동을 조금도 내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억압은 온순한 신하들을 만들어내고, 억압적 구조들을 포함하는 사회조직체의 재생산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바로 억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 회적 억압은 文明과 外延을 같이하는 가족적 억제에서 출발하여 이해될 수는 없는 것이요, 도리어 이 후자, 죽 가족적 억제가 주어전 사회적 생 산의 형태에 內屬하는 억압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 억압은 비단 필요 둘이나 이익들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욕망과도 관계한다• 다만 이것은 성적 억제를 통해서만이다. 가족은 〈한 사회의 경제적 체계를 집 단심리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을 확실하게 하는 한에 있어서, 이 성적 억 제를 위탁받은 動因이다. 물론 이 때문에 욕망이 오이디푸스적이라고 결 론지을 것은 아니다. 이와 반대로, 오이디푸스를 현실화하고 억압적 사회 에 의하여 조칙되어 願해진 막다른 골목에 욕망을 몰이넣는 것은 욕망의 억압 혹은 성적 억제, 죽 리비도적 에네르기의 鬱積이다. 라이히는 욕망 과 사회 터전의 관계의 문제를 맨 처음에 제기한 사람이다. (그는 이 문 제를 가병게 다룬 마르쿠제보다 더 앞서 나아가고 있다). 그는 유물론적 정신의학의 전정한 창시자이다. 그는 이 문제를 욕망의 말들로써 제기함 으로써, 대중은 속았고 기만당했다고 너무 성급하게 말하는 조잡한 마르 크스주의의 설명들을 맨 처음에 물리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욕망하는
생산의 개념을 충분히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욕망을 경제적 하부구·조 자체 속에 捕入하고, 충동 걸 을 사회적 생산 속에 삽입하는 것을 결정짓 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어, 혁명적 공급은 욕망이 거기 서 단순히 경제적 합리성과 일치하는 것으로만 그에게는 보였다; 또 대 중의 반동적 공급들은 이데올로기에 관계되는 것으로만 보였다. 따라서 정신분석의 유일의 역할은 주관적인 것, 부정적인 것 및 금지된 것을 설 명하는 데 그치고, 정신분석 자체로서는 혁명적 운동이나 욕망하는· 창조 성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어느 모로 오류나 착각을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었던가?) 한 마디 더 한다면, 라이히는, 욕망 의 이름으로 , 정신분석 속에 생명의 노태를 건네주었다. 프로이트주의를 최종적으로 단념함에 있어, 그는 생명에 대한 공포, 금욕적 이상의 재등 장, 良心의 가책이라고 하는 文化의 수프롤 고발하였다.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정신분석가이기를 계속하느니보디는 차라리 〈 오르곤 Or g one 〉을 찾아 나서, 욕망의 활기 있고 우주적인 境域에로 출발하는 것이 훨씬 낫 다고, 그는 말하였다• 아무도 그를 용서하지 않았으나, 프로이트는 그를 크게 용서하였다. 그는 정신분석기계와 혁명기계를 함께 작동시키려 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최후에, 그는 그의 욕망히는 기계들밖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양털과 무명의 천으로 장식된 금 속내벽을 가전, 독신의 기적을 일으키는 편집병적 상자들밖에는 아무것 도가지고있지 않았다 . 억제는 그 작용과 그 작용의 결과의 무의식적 성격 때문에 억압과 구 별되는데(忠亢의 禁止도 무의식적인 것이 되었다), 이 구별은 바로 본성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로부터 이 양자가 실제로 서로 독립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전혀 없다. 억제는, 억압이 의식적이기를 그치 고 욕망되어전 것이나 디름없는 것이다; 그리고 억제는 후속하는 욕망을 끌어들이는데, 이 욕망은 억제가 억제할 대상의 거짓 심상이요, 이 심상 이 억제에다가 독립의 외관을 주고 있다. 본래의 의미에서의 억제는 억 압에 봉사하는 수단이다. 억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또한 억압의 대싱이 기도 하다. 죽 욕망하는 생산이 억제되기도 하고 억압되기도 한다. 그런
데 억제는 바로 두 가지 근원적 조직을 포함하고 있다. 하니는 · 억압적인 사회조직체로 하여금 그 권력을 억제의 결정기관에 위탁시키는 조작이 요, 다른 하나는, 앞의 것과 상관적으로, 억압된 욕망을 옮겨놓아전 거짓 심싱에 의하여 덮어버리는 것과 같은 조작이다. 이 심상은, 억제가 억압 된 욕망에서 생기게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사회조직체에 의하여 억제가 위탁되는 동시에, 이 억제에 의하여 욕망하는- 조직체가 왜곡되고 옮겨놓 아지는 일이 생긴다. 억제를 위탁받은 動因(代理人), 혹은 차리리 억제에 파견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動因은 가족이다; 억제된 것의 왜곡 된 심상, 이것이 근친상간의 충동들이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오이디푸스화는 이중 조작의 결과이다. 억압적인 사회적 생산이 억제하는 가족에 의하여 代行되고, 또 이 후자가 욕망하는 생산에 관하여 하나의 옮겨 놓아진 心像을 주고 이 심상이 억제된 것을 가족적 근친상간의 충동들로서 表하는 것은 하나의 동일한 운동 속에서이다. 그리하여 모든 정신분석으 로 하여금 길을 잃어 갈팡질팡하게 하는 전환과정 속에서, 가족과 충동 들 사이의 관계가 두 가지 생산(죽 사회적 생산과 욕망하는 생산) 사이의 관계 대신에 들어선다. 그래서 사회적 생산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조 작의 이익은 분명한 바 있다. 사회적 생산은 욕망이 가지고 있는 반항과 혁명의 능력을 다른 방법으로는 없애버릴 수 없다. 욕망에다가 근친상간 의 이지러진 거울을 들이댐으로써(홍, 이것이 네가 원했던 거지?) 사람 둘은 욕망을 부끄러운 것이 되게 하고, 어리둥절하게 하고, 출구 없는 상 황에 몰아넣으며, 문명이라고 하는 보다 우월한 이익둘을 위하여 욕망이 〈자기자신〉을 단념하도록 쉽사리 욕망을 설득한다. (그러니 만일 모든 사람이 그런 일을 한다면, 죽 모든 사람이 자기의 어머니를 아내로 삼고, 혹은 자기의 누나를 자기가 취하려고 시집 보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게 되면 더 이상 區g 1J 이란 것도 없고, 交換도 가능하지 않 울 것이다…….) 빨리 곧 행동해야 한다. 근칭상간은 그다지 깊지 않은 개울인데, 공연히 비난받고 있다 . 그런데 사회적 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조작의 이점은 분명하지 만, 욕망하는 생산 자체의 관점에서 보면 이 조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 대한 답의 요소 가 되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 . 사회적 생산은 사회체의 登錄의 표면 위에 서 하나의 결정기관, 즉 욕망의 등록의 표면에 작용할 수도 있고 또 이 표면 위에 등기될 수도 있는 결정기관을 자유로이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결정기관이 실제로 하나 있다 . 그것은 가족이다. 가족은 생산자들 울 재생산하는 체계로서, 사회적 생산의 등록에 본질적으로 속한다. 그런 데 확실히, 다른 극에서는,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서의 욕망하는 생산의 등록은 家族的이 아닌 계보의 그물을 통해서 행해전다: 부모는 이 그물 에 하나의 진행 속의 부분적 대상들 , 흐름들, 기호들 및 동인들로서만 개 입한다. 그런데 이것들은 모든 면에서 부모의 틀을 넘어 넘치는 것들이 다. 기껏해야 어린이가 그의 욕망과 더불어 갖는 놀라운 생산적 경험의 어떤 것을 천전난만하게 부모와 〈 관련시킬 〉 따름이다; 그러나 이 경험 은 부모들 지신에게 관련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저 操{투이 등장한다. 사회적 억압이 일찌감치 작용하여, 가족이 욕망하는 계보의 그 물에 슬그머니 들어가, 이것에 간섭하고는, 계보 전체를 소의시키고, 〈누 멘 〉 을 흡수해 버린다. (그런데 잘 보자, 神, 그건 아빠야…….) 사람들은 마치 욕망하는 경험이 〈 자기를 〉 부모에게 관련시키는 듯이, 그리고 마치 가족이 이 경험의 최고의 법률인 듯이 행동한다. 사람들은 부분적 대상 둘을, 〈 결여하고 있는 것 〉 으로서 작용하는 통일체를 이루는 전체성이라 고 하는 저 유명한 법률에 예속시킨다. 사람들은 이집들을 미분화상태냐 배타태일이냐 하는 양자택일에 예속시킨다. 그러므로 가족은 욕망의 생 산 속에 도입되어, 아주 어릴 때부터 욕망의 옮겨놓기 내지 바꿔놓기, 뭔 지 알 수 없는 억제를 조직하게 된다. 가족은 사회적 생산에 의하여 여 제에 파견된다. 그런데 이렇게 가족이 욕망의 등록 속에 슬그머니 들어 가는 것은, 이 등록이 행해지는 장소인 기관들 없는 신체가, 앞서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이미 그 나름대로, 욕망하는 생산에 대하여 根源的 揮制를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근원적 억제를 이용하고 거기에 본래의 의미에 있어서의 二次的 柳制룰 더하는· 것이 가족의 하는 일이다. 이 이치적 억 제는 가족에게 위탁되었거나 혹은 가족이 이 억제에 파견되어 있다. (정
신분석은 이 두 억제 간의 차이를 찰 밝혔으나, 이 차이의 범위 혹은 이 두 억제의 체제의 구별을 밝히지는 못했다.) 이런 까닭에 본래의 의미에 있어서의 억제는 현실적인 욕망하는 생산을 억제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억제된 것에 대하여 겉으로 보기에 옮겨놓아전 심상을 주고 욕망의 등록 을 가족적 등록으로 대체한다. 욕망하는 생산의 집합이 잘 알려진 오이 디푸스적 형상을 취하는 것은 욕망하는 생산의 등록이 가족적으로 번역 될 때만이다. 즉 背信의 번역에서만이다. 우리는, 어떤 때에는 (욕망하는 생산의 次元에서는, 어린이에게서조차) 오이디푸스는 아무것도 아니다, 거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또 어 떤 때에는 {무의식을 복종시키고, 욕망과 무의식을 표상하는 企圖에 있 어서는) 오이디푸스가 어디에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정신분석이 오이디푸스를 발명했다고 말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모든 것은 이와 반대되는 것을 보여준다: 정신분석의 환자들은 아주 오이디푸스화되었 고, 오이디푸스를 요구하고, 거듭 요구한다. 신문기사를 오려낸 데에 다 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스트라빈스키 S t rav i nsk y는 죽기 전에 다음 과 같이 단언하고 있다: 〈나는 확신하거니와, 내 불행은 내 아버지가 나 를 떠나고 내 어머니가 나에게 애정을 거의 베풀지 않았던 데서 왔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는 이것을 그들에게 밝히리라 결심하였다……. 〉 예술 가들마저 이런 상태에 있다면, 열심 있는 정신분석가가 거북하게 생각하 고 세심하게 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어떤 음악가는 우리에게 말하기 를, 음악기 證示하는 것은 能顧성인 정복하는 힘들이 아니고, 反動的인 힘 들, 즉 야서지-어머니에게 反作用하는 힘들이라 하는데, 만일 이것이 사 실이라면, 니체가 좋아하는 패러독스를 별로 고치지 않고 써먹을 수 있 다-프로이트는 음악가이다. 사실, 정신분석가들은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는다. 하기는 그들이 다른 방식으로는 많은 것을 발명했고, 많은 법률 울 제정했고, 많은 것을 강화했고, 많은 것을 주입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정신분석가들이 하고 있는 일은 그저 정신분석의 운동을 강조하고, 무의 식 전체의 옮겨놓기에 최후의 비약을 더하게 해주는 것일 따름이다. 그 둘이 하고 있는 것은 그저 종합의 초월적 사용들을 따라 무의식으로 하
여금 말하게 하는 것일 따름이다. 이 초월적 사용들은 다음과 같은 다른 힘들에 의하여 무의식에 강요되고 있다__전체로서 한 인간의 모습을 지닌 인물들, 완결된 대상, 위대한 男根, 想像的인 것의 무서운 미분화상 태, 상징적 구별들, 分離差別……• 정신분석가들이 발명하고 있는 것은 다만 轉移, 전이의 오이디푸스, 독소를 아주 많이 품은, 治療室의 오이디 푸스라고 하는 한 오이디푸스이다. 이 전이에서 환자는 마침내 그가 원 하는 것을 얻게 되어, 정신분석가의 충만한 신체 위에서 그의 오이디푸 스를 핥아댄다• 이만큼 되면 이미 상당한 전전이 있은 셈이다. 그러나 오 이디푸스가 만들어지는 것은 가족 안에서이지, 정신분석가의 치료실 안 에서가 아니다. 이 치료실은 배후의 土地로서만 작용한다. 그리고 오이디 푸스는 가족에 의하여 만들어지지 않는다. 종합의 오이디푸스적 사용, 오 이디푸스화, 삼각형, 거세, 이 모든 것은 정신분석보다도, 가족보다도, 이 데올로기보다도, 아니, 이것들이 합한 것보다도 조금 더 깅력한, 조금 더 밑바닥에 있는 힘들과 관계가 있다. 거기에는 사회적 생산과 반생산 및 사회적 억압의 모든 힘이 있다. 이것은, 욕망의 힘들을 정복하여 斷念시 키고, 또 무의식 자체 속에서 본질적으로 능동적, 공격적, 예술적, 생산적 그리고 정복하는 것을 어디서나 아빠-엄마 型의 반작용들로 대체하려면, 정말 아주 강력한 힘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이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는 하나의 적용이요, 가족은 하나의 위탁된 동 인이다. 그런데 적용이 된다 하더라도, 어린이에게는 오이디푸스 삼각형 의 한 각으로서 산디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이 어린이, 그는거기 있지 않다, 그는 한 角일 따름이다, 앞으로올 한 角, 그런데 角은 없다…… 아버지-어머니의 이 세계는 바로 사라져야 할 세계다, 이것은 그 세계가 두 가지 성격을 지닌 二重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항상 통일되기를 원하면서도, 항상 흩어지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 상태 둘레에 이 세계의 체계 전체가 돌고 있다 가장 음침한 조직에 의하여 빈틈없이 지탱되어 .50) 50) Anto n in Arta u d, .. Ains i done la que sti on … , in 'Thl que l, 1967.
8 신경증과 정신병 프로이트는 1924 년에 신경증과 정신병을 구별하는 간단한 기준을 제 시하였다: 신경증에 있어서는 자아가 현실의 요구들을 따르고 〈그것〉의 충둥들을 억제하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한편 정신병에 있어서는 자아가 〈그것〉에 사로잡혀 있고, 현실과 단절하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프로.이 트의 사상들이 프랑스에 들어오는 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걸렸다. 하지 만 신경증과 정신병의 구별에 관한 사상은 그렇지 않았다; 같은 해(즉 1924년 ) 에 까쁘그라 Ca pg ras 와 까레뜨 Care tt e 는 신통하게 닮은 사람들 의 착각을 가전 정신분열증의 症例를 제시하였다. 이 症例에서는 환자가 어머니에 대한 강한 증오와 아버지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그러나 이것은 현실의 상실이라는 조건들 속에서였다. 여기서 부모는 가짜 부모, 죽 〈신통하게 닮은 사람들〉로서 체험되고 있었다. 까 쁘그라와 까레뜨는 이것으로부터 억제의 방향이 다음과 같이 거꾸로 되 어 있음을 證示하였다: 신경증에 있어서는 현실의 對象機能이 보존되고 있으나, 다만 이 신경증의 원인인 콤플렉스가 억제되는 조건 아래에서 요; 정신병에 있어서는 콤플렉스가 의식 속에 침입하고 그 대상이 되는 데, 다만 이것은 현실 자체 혹은 현실적인 것의 기능이 〈억제〉되는 대가 를 치르고서이다. 분명히 프로이트는 이 구별의 도식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신경증에 있어서 현실과의 단절은 억제된 것의 되돌아 음과 함께 나타나며(히스테리의 記憶喪失」鮮病經症的 取消), 정신병에 있 어서 현실의 회복은 망상적 재구성과 함께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남는 문제는 프로이트가 이 간단한 구별을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 이다 .51) 그런데 프로이트가 독창적인 길을 따라, 전통적 정신의학에 잘 알려져 있는 관념을 재발견하고 있는 것은 중요한 일로 여겨진다: 그 관 념은, 광기가 근본적으로- 현실상실과 결부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사태는 觀念解離나 自閉症이란 개념을 정신의학적으로 잘 만들어내는 것 에 집약된다. 아마 이 때문에 프로이트의 설명이 그렇게 빨리 보급되었 을것이다.
51) 192 짜의 두 논문은 〈신경중과 정신병〉 그리고 〈신경증과 정신병에 있어서의 現實喪失〉이다. Cf. aussi Capg r as et Carett e, Illusio n des sosie s et comp lixe d'(E dipe , Annales medic o -ps ych olog iqu es, ma i 1924. 〈물신숭배 > 에 관한 프로이트의 논문 (1927) 은 가끔 이 구별에 대해 언급하고는 있지만, 이 구별을 재검토함이 없이 확인하고 있다(i n la Vi e sexuelle, P.U.F., p. 137) : 〈이리하여 나는 내 가정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홍미가 있는 것은 이러한 집약의 과정에서 오이디푸 스 콤플렉스가 정확히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가족적 테마들이 가끔 정신병자의 의식 속에 침입하는 것이 사실이라 할 지라도, 라깡의 지적을 따라 다음과 같은 사태를 알게 되면 될수록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죽, 오이디푸스가 〈발견〉된 것은 그것아 명백하다고 여겨지는 신경증에서보다도 오히려 반대로 그것이 잠재적이 라 여겨진 정신병에서라고 하는 사태 말이다 .52) 그러나 이것은, 정신병에 있어서는, 가족적 콤플렉스가 바로 어떤 가치를 지닌 자극으로서 나타난 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죽 조직자의 역할을 갖지 않는 단순한 誘導子로 서 나타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조칙자의 역할은 현실의 강도 있는 공 급들인데 이것들은 전혀 디른 것(사회적, 역사적 및 문화적 터전)에 관계 하는 것이니 말이다. 이와 동시에 오이디푸스는 의식에 침입하고, 스스로 해체하고, 하나의 〈조직자〉일 수 없음을 드러낸다. 이렇게 되면 현실상 실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정신병을 저 속임수의 척도에 의해서 재고, 저 거짓 기준, 즉 오이디푸스에로 다시 끌어오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것 은 추상적 직업이 아니다: 이 작업은 정신병환자 속에 缺如가 있음을
52) Lacan, La Fami lle, En cycl op e die fr a 따i se, VIII, 1938.
보여주겠지만, 이 환자에게 오이디푸스적 〈 조직 〉 을 강요한다. 이것은 환 자의 몸 전체에, 그 혼 전체에 작용한다. 그는 자폐증과 현실상실로써 반 응한다. 현실상실이 정신분열중적 과정의 결과가 아니고, 이 과정의 강요 된 오이디푸스화, 죽 그 과정의 중단의 결과라고 하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는 조금 전에 우리가 밀한 것을 바로집아,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 들보다 오이디푸스화를 잘 견디지 못한다고 상정해야 할까? 정신분열자 는 〈 그의 > 무의식의 상징적 조직 속에 오이디푸스를 결여하고 있으면 있을수록 환각적 의식 속에는 그만큼 더 오이디푸스가 등장할지 모르지 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오이디푸스로 인하여 오이디푸스 속에서 병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마치 사람들이 대륙들과 문화들을 편 력하고 있는 사람을 끊임없이 〈 고향의 등대 〉 로 다시 데려오는 것처럼, 먼 여행을 떠난 정신분열자로 하여금 사람들이 오이디푸스화(가장 음침 한 조직화)를 겪게 하고 그가 더 이상 이것을 견디지 못하여 병자가 될 는지도 모른다 . 그가 고통을 겪는 것은 자아가 분열해서도 아니고, 오이 디푸스가 폭파되어서도 아니다. 이와 반대로 그가 버리고 떠난 이 모든 것에 다시 이끌려오기 때문이다. 강도가 기관들 없는 신체 =Ooll 까지 떨 어지면, 그것이 자폐증이다 : 오이디푸스의 억압-억제의 체계는 정신분열 자에 대하여 울타리를 치고, 이 울타리 안에서 그의 모든 현실적 공급들 울 행하게 하려 하는데, 환자는 이 울타리에 대응하는 다른 수단을 가지 고 있지 않다. 레잉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공급둘은 여행에서 중 단된다. 이것들은 현실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언제 현 실을 상실하였는가? 여행중엔가 그렇지 않고 여행의 중단에서인가? 그러므로 (정신병과 신경증에 관하여는) 거꾸로 된 관계의 다른 定式 化가 가능하다: 정신병자들과 신경증환자들의 두 그룹이 있다 하겠는데, 전자는 오이디푸스화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요, 후자는 오이디푸스화 롤 견디며, 심지어 그것에 만족하고 그 속에서 성장하는 사람들이다. 전 자는 오이디푸스화가 刻印되지 않는 사람들이요, 후자는 각인되는 사람들 이다. 〈나는 내 친구들이 新時代의 처음에 그룹을 이루어 정말 폭발적인 힘을 가지고 출발했다고 믿는다. 이 힘이 그들을 내가 악한 것으로 보는
家父長的 偏向 속에 던졌다……. 내가 속해 있는 고독한 자들의 둘째 그룹 은 실상 몇몇 鎖骨둘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고독한 사람들은 선천적인 지식을 다루는 학문에서 힘든 연구들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그들은 개인적 성공의 가능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다. 나 자신에 관 해서 말하면, 첫째 그룹의 家父長主義에 대한 내 반항이 둘째 해부터 나 룰 사회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몰아넣어 나를 더욱더 숨막히게 하였다. 그래, 당신은 이 두 그룹이 결합될 수 있다고 믿습니까? 나는- 사나이다운 가부장주의의 저 녀석들을 그다지 탓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렇게 복수심 이 강하지 않다……. 어떻든, 내가 이긴다면,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은 더 이상 있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으레 신의 位格들에 관해서 말하 고 있는 것이지 자기를 ……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웃 사람들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53) 이 두 그룹을 통하여 대립하고 있는 것은, 창조된 것이 아닌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서의 욕망의 등록과, 사회 체 위에서의 가족의 등록이다• 또 정신병 속의 선천적 지식과 신경증의 실험적 지식들이다. 이것은 정신분열증 기질의 홉it,r,,p:]과 신경종의 삼각형 의 대립이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종합의 두 가지 사용 사이의 대립 이다. 한편에는 욕망하는 기계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나르시스적 오이 디푸스 기계가 있다. 이 싸움의 자세한 내용을 이해하려면, 가족이란 것 이 욕망하는 생산 속에서 裁斷하고 또 재단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욕망의 등록 속에 자기를 등기하고, 거기에 자기의 발판 울 슬그머니 마련함으로써, 가족은 생산력들을 대규모로 거머쥐고, 욕망 의 기계들을 톡칭짓는 절단들 전체를 자기의 방식대로 옮겨놓고 재조직 한다. 가족은 이 모든 절단들을 가족 자체의 조건인 보편적 거세의 장소 속에 떨어지게 하지만(〈하늘의 天井에 매어달린 죽은 쥐의 궁둥이〉라고 아 르또는 말한다), 또한 가족은 이 절단들을 자기자신의 고유한 법률들과 사회적 생산의 요구들을 따라 재분배한다. 가족은 자기의 삼각형을 따라 절단하여, 가족에 속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한다. 가족은 또한 그 내부에서도, 전체의 모습을 갖춘 인물들을 형성하는 구별의 노선들을 53) Jac q u es Besse, La Grande Paqu e , pp. 업, 61.
따라 철단한다: 저기에 있는 것은 아빠다, 저건 엄마다, 저건 나다, 그리 고 네 누이다. 여기서 젖의 흐름을 절단하라, 이젠 네 동생의 차례다, 여 기서 똥 누지 마, 저기서 똥 줄기를 끊어. 가족의 첫째 기능은 보류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족이 욕망하는 생산에서 무엇을 버 리려 하고 있으며, 무엇을 보류하려 하고 있는가, 그 자신의 미분화상태 (하수구)에 통하는 출구 없는 통로들에 무엇을 인도하려 하고 있는가, 이와 반대로 分封增殖이 가능한 분화의 길들에는 무엇을 인도하려 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족은 그 恥辱둘과 동시에 그 영광둘 을, 겉으로 보기에만 구별되는 그 신경증의 미분화와 그 理想의 분화를, 동시에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시간 동안에, 욕망하는 생산은 무 엇을 하고 있는가? 욕망하는 생산의 보류된 요소들이 이것들을 아주 깊 이 변형시키는 종합의 새로운 사용 속에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삼각형 전체에 反響을 일으킨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고, 이것들이 들어가면 모든 것을 진동시킨다. 더구나, 들어가지 않는 것도 아마 더욱 전동시킬 것이다. 이것들은 이것들의 이상한 절단둘을 다시 끌어들이거나 끌어들이려 한다. 어린이는 그에게 전해지는 일을 알아차 린다. 그러나 삼각형 속에는 무엇을 넣을 것이며,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아버지의 코와 어머니의 귀는 소용이 될까? 그것은 보류될 수 있는가? 그것은 오이디푸스적 절단을 잘 해낼까? 그리고 자전거의 경적은 어떠한 가? 가족의 부분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삼각형이 보류하고 있는 것이 나 그것이 물리치고 있는 것의 압력을 받아 진동하고 반향하는 것이 삼 각형의 운명이다. 반향은 숨통이 막히거나 크게 열려지거나 하며, 부끄 러운 것이 되거나 영광스러운 것이 되는데, 어떻든 반향은 가족의 둘 째 기능이다. 가족은 보류하는 .III門이요, 반향하는 소리인 동시에, 소비 하는 입이다: 이 세 가지 종합이 가족에 속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생산 의 이미 만들어진 대싱들에다가 욕망을 결부시키는 일이 문제이기 때문 이다. 반향들을 얻으려면 꽁브래 Combra y의 마들랜느(회개한 매춘부)들 울사라. 위에 말한 두 그룹의 단순한 대립은 신경증을 오이디푸스내의 장애로,
정신증을 오이디푸스의로의 도주로 규정하게 하는데, 그러나 이제 우리 는 이 대립에 만족할 수 없다. 이 두 그룹이 〈 접합될 수 있다 〉 는 것을 확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치 않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이 그룹들 울 직접 식별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가족적 재생산아 욕망하 는 생산에 대해서 가하는 압력과, 욕망하는 생산이 가족적 재생산에 가 하는 압력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오이디푸스 삼각형은 전동하며 떤 다. 그런데 이것은 이 삼각형이 욕망의 기계들을 토대로 해서 收獲物을 줄곧 확보하고 있는 것과 관련된 것인가, 그렇지 않고 이 기계들이 이 삼각형의 각인을 벗어나 삼각형으로 하여금 수획물을 내어놓게 하는 것 과 관련되어 있는가? 이 삼각형의 반향은 어디서 극한에 도달하는가? 가 족의 이야기는 오이디푸스적 계보를 살리려는 노력을 표현하고 있지만 또한 비오이디푸스적인 계보의 자유로운 昴進도 표현하고 있다. 환상들은 결코 안정된 心理狀態가 아니다. 그것들은 경계선이나 邊境의 現象들이요, 쉽사리 어느 쪽으로나 기울어질 수 있다. 요컨대, 오이디푸스는 엄밀하게 는 결정될 수 없다. 그것이 결정될 수 없는 만큼 그것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는 엄밀하게는 아무 소 용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네르발 Nerval 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생 각해 보자: 그는 사랑하는 여인 오렐리 Aure li e 가 그의 어린 시절의 소 녀 아드리엔느 Adr i enne 와 같은 사림이기를 바란다; 그는 이 두 사람이 동일하다고 〈知覺한다〉. 그리고 오렐리와 아드리엔느는 두 사람이 한 사 람으로 되어 있고, 그것은 어머니이다. 〈知梵의 同一性〉으로서의 동일시 가 여기서 정신병의 징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안가? 이때 현실성의 기준 이 다시 문제된다: 콤플렉스가 정신병적 의식에 침입하는 것은 현실적인 것과의 단절이라고 하는 대가를 치르고서만이요, 한편 신경증에 있어서 는 동일성이 무의식적 표상들의 그것에 머물러 있고 지각을 해치지 않는 다. 그러나 모든 것을, 심지어 정신병을 오이디푸스 속에 登記함으로써 무엇을 얻었는가?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오렐리, 아드리엔느, 그리고 어 머니, 이 셋은 결국 聖母 마리아이다. 네르발은 삼각형의 전동의 극한을 찾고 있다. 〈당신은 하나의 드라마를 찾고 있어요〉라고 오렐리는 말한
다. 모든 것이 오이디푸스 속에 등기된다면, 극한에서는 모든 것이 반드 시 오이디푸스 밖으로 도망간다. 동일시는 지각의 관점에서의 인물들의 동일시가 아니었고, 强度의 영역으로의 이름들의 동일시였다. 이것은 더 욱 강렬한 다른 영역들을 향하여 출빌하는 힘을 준다. 이것은 전혀 다른 여행을 떠나게 하는 자극이요, 이제는 어머니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와 신을 만나는 다른 돌파구, 다른 운동을 준비하는 鬱積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세 번 勝利者로서 아케론 Acheron 을 건넜다. 이렇게 정신분열자는 모 든 것이 어머니에게로 환원되는 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것은 아무런 중요성도 띠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을 어머니 밖으로 다시 나가게 하고, 어머니 속에 집어넣어졌던 모든 성모 마리아들을 그의 비밀의 사용을 위하여 다시 끄집어낼 수 있다고 확신하 고있다. 모든 것은 신경증에로 변환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신병에로 기운다: 그러므로 그렇게 문제가 제기되어서는 안 된다. 신경증에 대해서는 오이 디푸스적 해석을 지키고, 정신병에 대해서는 오이디푸스 의적 해석을 취 하는 것은 정확한 일이 못 된다. 두 그룹이 있는 것이 아니요, 신경중과 정신병 사이에 본성상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왜 L 固면 하여간 原因 은 욕망하는 생산이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를 파괴하거나 침몰시키는 精 麟的 轉覆이건, 오이디푸스를 구성히는 神經症的 反響이전, 궁극의 원인 은 욕망하는 생산이다. 이러한 원리는, 이 원리를 〈現實的 因子들〉의 문 제와 관련시켜 보면, 그 의미를 온전히 얻는다. 정신분석의 가장 중요한 점들 중의 하나는 이 현실적 인자들의 역할을 평가한 점이다. 즉, 신경증 에서도, 현실적 인자들이 어린 시절의 가족적 안자들과 구별되는 한에 있어서, 이 현실적 인자들의 역할을 평가한 점이다; 정신분석 내부에서 의견이 크게 갈라지는 것들은 모두 이 평가와 결부되어 있다. 그래서 난 점들은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먼저, 이 현실적 인자들의 본성은 무 엇인가. (그것은 신체적인 것인가? 사회적인 것인가? 형이상학적인 것인 가? 또는 정신분석 속에 性的인 성격을 排除한 아주 순수한 觀念論울 다 시 끌어들인 저 유명한 〈인생의 문제들〉인가?) 둘째로, 이 인자들의 樣
態는 어떤 것인가: 그것들은 단순한 욕구불만 때문에 부정적으로, 矢之 되어서 작용하고 있었는가? 끝으로, 그것들이 작용하는· 순간, 그때는 언 제인가: 어린 시철의 인자, 죽 가장 오래된 인자가 가족적 콤플렉스에 의하여 충분히 설명되었던 데 반하여, 현실적 인자는 나중에 생겼고, 〈최 근의 일〉을 의미하였던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었던가? 라이히 같은 저 자도 욕망을 사회적 생산의 형태들과 관련시키고, 이렇게 함으로써 동시 에 현실적 신경증이 아닌 정신-신경증은 없다는 것을 열심히 증명하려 하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현실적 인자들을 억압적 결핍(〈性的 鬱積〉)에 의하여 작용하는 것이요, 나중에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를 계속하고 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초점이 흐려진 오이디푸스주의를 주장하게 한 다. 왜냐하면 울적 죽 穴之의 현실적 인자는 신경증의 에네르기만을 규 정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는 어린 시절의 오이디푸스적 갈등에 관계되 는 내용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오래전의 갈등은 현실적 울적에 의하여 다시 활성화되는 것이다 .54) 그런데 오이디푸스주의자들이 현실적 결핍이나 욕구불만은 더 오래된 내부의 질적 갈등의 한복판에서 만 체험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할 때 그들은 딴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내부의 질적 갈등은 현실에 의하여 금지된 길들만을 막지 않 고, 또한 현실이 열어놓게 하고 있는 길들마저 막는다. 이 후자의 경우, 자이는 스스로 자기에게 이 길을 막아버린다. (이것이 二重의 막다른 골 목의 定式이다) : 현실적 신경증의 도식을 例示하는 〈實例들을 죄수나 수 용소에 수용된 사람이나 노동에 지친 노동자에게서 볼 수 있을 것인가? 이들이 많은 실례를 제공하리라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 우리의 체계 적 경향은 철저하게 조사하지 않고서는 현실에 분명히 죄가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다. 세계의 혼란이 時問과 더불어 다소간 不可逆的인 구조들 속 에 등기된다 해도, 이 혼란이 어떤 점에서 주관적 혼란 속에 다시 나타 나는가 하는 것을 밝히지 않고서는 현실에 죄가 있다고는 보지 않는 것 54) Reic h , La Foncti on de l'org a s me, p. 94: 〈신경증환자의 모든 공상은 부모에 대한 어린 시철의 성적 애착심에 그 뿌리가 있다. 그러나 어린이와 부모의 갈등 은, 처음에 이 갈등 자체가 만동거낸 현실적 울적에 의하여 계속 養分이 주어지 지 않았다면 정신적 안정을 영속적으로* 깨지는 않을 것이다…….〉
이다 〉 .55) 우리는 이 말을 이해하지만, 좀 겨정스러운 면이 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선택을 강요한다: 현실적 인자를 전혀 의적인 矢芝으로 생각하거나(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 지 않고 오이디푸스와 필연적으로 관계하는 내적인 질적 갈등 속에 뿌리 를 내리고 있다고 생각하든가(오이디푸스는 정신분석가가 거기서 세계의 죄악들로부터 손을 씻는 셈이다)……. 아주 다른 노선에서 정신분석이 관념론적으로 빗나간 것들을 고찰해 보면, 거기서 하나의 재미있는 시도를 볼 수 있다. 그것은 현실적 인자들 에다가 缺芝的이고 後續 的이라고 하는 것과는 디른 地位롤 주고 있다. 이 것은 겉으로는 패러독스로 보이는 것 속에 두 가지 배려가 결부되어 있 기 때문이다. 융에게서 그런 예를 볼 수 있다: 그 배려의 하나는 눈앞에 있는, 즉 현실적인 장애에 육박하여 끝없는 치료를 단축시키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오이디푸스보다도, 심지어 先오이디푸스적인 것보다도 더 멀리 아주 위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것이다-마치 가장 현실적인 것 은 또한 가장 근원적인 것이고, 가장 짧은 것이요, 가장 먼 것이었던 듯 이 .56) 융은 원형들을 전이에 있어서 바로 가족적 심상들을 넘는 현실적 인자들인 동시에, 어린 시철의 인자들 자체보다도 무한히 오래된, 다론 질서에 속하는 장구함을 지닌 인자들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현실적 인자가 결핍적이기를 그치는 것은 오직 理想의 권리들을 향유한다는 조건에서만이요, 또 〈 나 55) Jea n Lap la nche, La Realite dans la neurose et la psy c h ose(con fere nce a la Socie t e fran i;a i s e de psy c h analys e , 1961 ) . Cf. aussi Lap la nche et Ponta l i s, Vocabulair e de la psych analys e , les arti cle s Frustr a ti on et Nevrose ac tue lle. 56) 똑같은 지적을 랑크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출생의 정신적 의상은 오이디푸스 와 先오이디푸스적인 것을 넘어 거슬러 올라가는 것만을 내포할 뿐만 아니라, 또한 치료를 단축시키는 하나의 수단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프로이트는 『끝있 는 분석 , 끝없는 분석』에서 여기 대하여 신랄하게 평하고 있다: 〈랑크는 분석에 의하여 이 원시적인 정신적 의상을 나중에는 깨끗이 없앰으로써 모든 신경증을 치료할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분석의 작은 한 단편이 분석의 나머지 모든 작업을 면제해 줄 터였다……. 〉
중에〉라고 하는 것을 그치는 것은 오직 彼岸이 된디는 조건에서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안은 분석적으로 오이디푸스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 니라 오이디푸스에 의하여 신비적으로 의미가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중에〉라고 하는 것은, 융이 제안한 저 놀라운- 배분이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시간성의 차이 속에서 필연적으로 재도입된다: 가족과 사랑이 문제인 젊은이들에게는 프로이트의 방법 ! 사회적 적응이 문제인 덜 젊은 사람들에게는 아들러 Aedler ! 그리고 이상에 관한 문제 둘이 문제인 어른들과 노인들에게는 융…… .57) 우리는 프로이트와 융 사 이에 공통점으로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았다. 그것은 무의식이 언제나 신화에 의하여 측정된다고 하는 점이다(생산의 단위로써 측정되지 않는 점이다). 다만 그 측정은 서로 반대되는 두 방향으로 행해지고 있는 점이 다르다. 그런데 도덕이나 종교가 오이디푸스에게서 분석적이고 후 퇴적인 의미를 발견하는가, 혹은 오이디푸스가 도덕이나 종교 속에 신비 적이고 예견적인 의미를 발견하는가 하는 것은 결국 대수롭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57) Ju ng, La Gueris o n psych ologi qu e, Georg, 1953, ch. 1-4.
우리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신경중이건 정신병이건 장애의 원인이 언 제나 욕망하는 생산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즉, 욕망하는 생산과 사회 적 생산의 관계, 이 두 생산 사이의 체제의 차이나 갈등 그리고 욕망하 는 생산이 사회적 생산 속에서 전개하는 공급의 양식들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관계, 이 갈등 그리고 이 양태들에서 파악되는 한에서의 욕망 하는 생산, 이런 것이 현실적 인자이다. 따라서 이 인자는 결핍적인 것은 아니요, 後來的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욕망으로 차 있는 생명으로 구성 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어린 시절과 때를 길이하는 것이요,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생명에 동반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이디푸스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오이디푸스적 조직도, 선오이디푸스적 先組織도 전혀 전제 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오이디푸스가 현실적 인자에 의존하고 있다. 어 떤 값을 지닌 자극, 즉 욕망하는 생산의 無오이디푸스적 組織을 어린 시절부 터 만들어나가게 하는 단순한 誘導子로서이건, 또는 사회적 재생산이 가족
을 통하여 욕망하는 생산에 가하는 억제-억압의 결과로서이건, 하여간 오이 디푸스가 현실적 인자에 의존한다. 따라서 〈 現實的 〉 이란 말은 보다 〈 최근 〉 이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또 오래되었거나 어린 시절의 것에 반 대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 잠재적 〉 인 것과 다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잠재적인 것이 E 還아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즉 잠 재적인 것이 현실적 인자에서 파생된 결과로서 신경증의 형성 속에서 현실화 되어야 하는 한에서이건, 또는 이 동일한 현실적 인자의 직접적 결과로서 정 신병의 형성 속에 解體되고 용해되는 한에서이건, 이 잠재적인 것이 오이디 푸스 콤플렉스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 나중에 〉 란 관념이 우리에게는 정신분석의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의 마지막 오류추리로 보였다; 능동적 인 욕망하는 생산은, 그 진행 자체에 있어서, 처음부터 신체적, 사회적 및 형이상학적 관계들의 집합을 공급하는 것이요, 이 관계들은 오이디푸 스적인 심리학적 관계들 다음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이와 는 반대로, 반작용으로써 규정되는 오이디푸스적 하부집합에 자기를 -致 시키거나, 이 히부집합을 자기들이 활동하는 공급의 터전에서 배제하든가 한다 . 결정할 수 없고, 잠재적이고, 반작용적 혹은 반동적인 것, 이런 것이 오이디푸스이다• 그것은 반동적 형성물일 따름이다. 욕망하는 생산에 반 동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다: 이 형성과 공존하고 이 형성이 거기 대해 서 반동하고 있는 현실적 인지를 떠나서 이 형성을 그 자체로 추상적으 로 고찰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그런데 정신분석은 자기를 오이디푸스 속에 가두고, 오이디푸스에 따 라서, 혹은 심지어 오이디푸스와 관련시켜 前進들과 退行들을 규정함으로 써 바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여기서 선오이디푸스적 되행이라 고 하는 관념이 생기는데 이 관념을 통해서 정신병을 특칭짓는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 이것은 마치 管 속에서 오르내리는 潛水人形과 같다; 여 기서는 퇴행들과 전진들은 인위적으로 닫힌 오이디푸스의 병 속에서만 행해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변화하되 무오이디푸스적인 욕망하는 생산 속 에서 항상 현실적이고 동시적인 힘들의 상태에 의해 지배된다. 욕망하는 생산은 현실적으로만 현존한다; 전전들과 되행들은 참재성이 실제로 나
타나는 것일 따름이다. 이 잠재성은 욕망의 상태들에 의하여 가능한 한 언제나 완전히 채워진다. 어른이건 어린이이건 정신분열지들과 정말 호 흡이 맞는 직접적 관계를 세울 줄 일았던 정신의학자와 정신분석가는 극 히 드물었는데, 이들 가운데 쥐줄라 빵꼬우 G i sela Pankow 와 브루노 베 텔하임 Bruno Be tt elhe i m 은 그들의 이론의 힘과 유효한 치료법에 의하 여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이 다 같이 퇴행의 개념을 문 제삼고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한 정신분열지에게 행해진 신체 적 치료, 마사지, 목욕, 찜질의 예를 들고서 쥐즐라 빵꼬우는 다음과 같 은 물음을 제기한다. 간접적인 상칭적 만족들은 환자로 하여금 다시 전 전할 수 있게 하고 전전하는 걸음을- 회복시켜 주는데, 이러한 만족들을 환자에게 주기 위하여 그의 되행 지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중요 한 일인가? 그런데 〈정신분열자가 갓난아기였던 때에 받지 못했던 보살 핌들을 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그녀는 말한다. 〈 그렇지 않고 환자에게 그의 신체의 한계를 깨닫게 하는 촉각적인 신체 감각들과 이 밖의 감긱들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의식적 욕망을 깨닫 는 일이 중요하지, 이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다•〉 58) 욕망 을 깨닫는 것은, 정신분열자가 억눌리어 욕망하는 생산을 침묵시키고 질 식시키고 있던 바로 그곳, 죽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서 욕망하는 생산을 다시 시작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욕망을 깨닫고, 이렇게 욕망을 세워놓으면, 이것은 記號가 되어,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생산성의 차원을 알게 된다. 이 생산성은 간접적이고 상칭적인 만족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요, 또 그것이 정지하고 있을 때에나 진행중에 있을 때에나, 선오이 디푸스적 퇴행과도, 또한 오이디푸스의 전전의 회복과도 구별되는 것 01 다. 58) Gi se la Pankow, L'Homme et sa psy c h ose, Aubie r , 1969, pp. 24-2 6 (Str uctur at ion dyn ami qu e dans la schiz o p h renie , Huber, 1956ol] 서 쥐즐라 빵 꼬우가 전개한 아주 훌륭한 記號理論을 참조하는 것이 좋겠다). 브루노 베텔하 임에 의한 되행비판에 관해서는, cf. La Forter esse vid e , pp. 369-374.
9 과정 신경증과 정신병 사이에는 본성, 종류, 소속의 차이가 없다. 정신병과 마찬가지로, 신경중도 오이디푸스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오히려 반대 로, 오이디푸스를 설명해 주는 것은 신경증이다. 그러면 정신병-신경증 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그런데 이 관계는 다른 관계들에 의 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정신병을 과정 자체라 부르는가, 혹은 반대로 과정의 중단이라 부르는가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뀐다. (그런데 어 떤 종류의 중단인가?) 과정으로서의 정신분열증은 욕망하는 생산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마지막에 가서 그렇게 되는 욕망하는 생산이다. 그것은 지본주의의 조건들 속에서 결정된 사회적 생산의 극단이다. 정신분열증 은 우리들의 〈병〉이요, 현대인의 병이다. 역사의 종말은 다른 의미를 가 지고 있지 않다. 자기의 脫土地化롤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회적 생산의 운동과 새로운 大地에 욕망을 나르고 거기서 욕망을 재생산하는 형아상 학적 생산의 운동은 과정의 두 방향인데, 역사의 종말에 가서는 이 두 방향이 합한다. 〈사막이 증대하고…… 칭조는 가깝다…….〉 정신분열자 는 脫規準化한 흐름들을 나르고, 이 흐름들로 하여금 기관들 없는 신체의 사막을 건너지르게 하고, 이 사막에 그는 그의 욕망히는 기계들을 설치 하고 활발한 힘들의 끊임없는 流出울 생산한다. 그는 극한, 분열을 넘어 섰다. 이 분열은 언제나 사회적 생산의 변두리에서 욕망의 생산울 유지 하고 있었던 것인데, 사회적 생산은 욕망하는 생산에 접해 있으면서 언 제나 이것에 의하여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정신분열자는 출발할 줄을
알고 있다: 그는 출발을 출생하고 죽는 것만큼이나 단순한 어떤 것이 되 게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여행은 이상하게도 그 자리에서의 여행 이다. 그는 다론 세계에 관하여 말하지 않으며, 다른 세계에 속하지도 않 는다: 설사 공간 속에서 자기를 이동시킨다 해도, 그것은 강도에 있어서 의 여행이요, 그 자리에 세워져 머물러 있는 욕망하는 기계 둘레의 여행 이다. 왜냐하면 이 자리에서야말로 사막이 우리의 세계에 퍼지고, 또한 새로운 대지가 전개되며, 또 윙윙거리는 기계가 있어 그 둘레를 정신분 열자들이 새로운 태양에 대한 遊星들처럼 돌기 때문이다• 이 욕망의 사 람들(어쩌면 이들은 아직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은 찌리두-스트라 와 갇다. 그들은 엄청난 고동들, 현기증, 병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그들 의 망령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몸짓 하나하나를 새로이 발명하지 않 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나타난다. 그는 책임을 지지 않는, 고독한 그리고 명랑한 사람이요, 마침내는 누구의 허 가도 구하지 않고 자기자신의 이름으로 단순한 어떤 것을 말하고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결여하고 있지 않는 욕망, 장애물들과 規 準들을 타고 넘는 흐름, 더 이상 어떤 자아도 지시하지 않는 이름을 말 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사림이다. 그는 미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 을 깨끗이 버렸다. 그는 그 숭고한 병이 더 이상 그롤 괴롭히지 않는 양 살아간다. 여기서 정신과의사는 어떤 가치가 있는가? 또 앞으로 어떤 가 치를 지니게 될까? 정신의학 전체에서 오직 야스퍼스, 그 후에 레잉만이 과정과 그 성취가 의미하는 것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정신분석과 정신의학이 평소에 사용하는 침대인 家族主義에서 벗 어날 수 있었다.) 〈만일 인류가 살아남는다면, 미래의 인간들은 우리의 이 밝은 시대를 정말 蒙昧의 세기로 보리라고 나는 상상한다• 그들은 아 마 이 상황의 아이러니(장난)를 우리들보다 더 재미있게 즐길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우습게 볼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정신분열증이라고 부르 고 있었던 것이 사실은 빛이-가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매개로 하 여-우리들의 닫힌 정신들의 틈바구니들 속에 비쳐 들어오기 시작한 형태들 중의 하나였다고 하는 것을 알 것이다……. 광기는 반드시 붕괴
breakdown 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파괴 break t hrou g h 일 수도 있 다……. 자아상실이라고 하는 초월론적 경험을 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평형을 잃을 수도 있고 잃지 않을 수도 있다. 이때 그는 미친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미쳤디는 것과 병들었다는 것, 이 두 말이 우리들의 세계에서는 相補的인 것이기는 하나, 미친 것이 반드시 병든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가짜 정신적 건강을 출발점으로 삼으 면, 모든 것이 애매하다. 이 건강은 참된 건강이 아니다. 남들의 광기는 정말 광기인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환자들의 광기는 우리들이 그들에게 강요하는 그리고 그들이 그들 자신에게 강요하는 파괴의 산물이다. 아무 도 우리가 전정한 광기를 만날 수 있다거나, 우리의 정신은 정말 말찡승} 다고 상성하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가 우리들의 환자들에게서 문제삼는 광기는 이 이상한 統合이 자연스레 나온 것일 수 있는 것의 하나인 엉성 한 위장, 거짓 꾸밈, 기괴한 戱盡이다. 참된 정신적 건강은 이런 모로, 혹 은 저런 모로 정상적 자아의 해체를 전제한다…….〉 59)
59) Ronald Lain g , La Politi qu e de l'exp e rien ce, pp. 89, 93, 96, 100. 이와 비슷 한 의미에서 미셸 푸꼬는 다음과 걷이 말하고 있다: 〈아마 언젠가는, 사람들이 광기가 어떤 것일 수 있었는지를 더는 잘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르또는 우리들의 언어와 단절된 곳에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언어의 土壤에 속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이 오늘날 극한이라든가, 이상한 것이라든가, 견딜 수 없 는 것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체험하는 모든 것은 적국적인 淸明함과 디시 합쳐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지금은 저 外部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언젠가는 바로 우리를 가리키게 될 것이다, 우리를……. 광기는 정신적 질환과의 친족관계를 청산한다……. 광기와 정신적 질환은 동일한 인간학적 단위에는 속하지 않게 된 다〉( La Foli e, l'ab sen: ce d'revre, La Thble ronde, ma i 1964).
런던울 방문하면 우리는 으레 피티아 P yt h i a 를 방문한다. 거기에는 터 너 Turner 가 있다. 그의 그림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벽을 돌파하며 그 러면서도 이쪽에 머물러 있다는 것, 흐름들을 흐르게 하되 그 흐름들이 우리를 다른 곳에로 날라가는지, 혹은 그 흐름들이 이미 우리들에게로 되돌아왔는지를 이제는 알지 못한디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한 다. 그 그림들은 세 시기로 나뉘어 전시되어 있다. 만일 정신의학자가 말 할 것이 있다면, 그는 처음의 두 시기에 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시기는 정말 가장 이성적인 시기이다. 맨 처음 시기의 그 림들은 세계의 종말의 재난둘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눈사태와 폭풍우가 그려져 있다. 터너는 이런 것들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둘째 시기의 그림 둘은 妄想的 再建과 같다. 여기서는 망상이 숨겨져 있다. 혹은 망상이 뿌 쌩 Pouss i n 이나 로랭 Lorrain , 혹은 네덜란드의 전통에서 이어받은 고도 의 기술과 어울려 있다고 하겠다: 세계는 현대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擬 古超床열卜 통하여 재건되고 있다. 그런데 비길 데 없는 어떤 것이 셋째 시기의 그림들의 차원에서 나타난다. 그 그림들은 터너가 보여주지 않고 비밀스레 숨겨놓고 있던 그림들의 계열이다. 우리는 터너가 그의 시대보 다 아주 앞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조차 없다: 다만 거기에는 어느 시대에도 속하지 않는, 그리고 영원한 미래로부터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혹은 영원한 미래에로 도망 가는 어떤 것이 있다. 캔버스는 그 자체 속 에 처넣어져서 구멍, 호수, 불꽃, 회오리바람, 폭발에 의하여 관통되어 있 다. 그 전의 그림들의 주제들은 여기서도 다시 나타나고 있지만, 그것들 의 의미는 달라지고 있다. 캔버스는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것에 의하여 그야말로 부서지고 찢겨 있다. 안개 낀 금빛의 배경만이 살아남아 있다. 이 배경은 강한 강도를 가지고 있고, 캔버스를 크게 찢으러 오는 것에 의하여 깊숙이 관통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정신분열이다. 모든 것이 흐 릿하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붕괴가 아니고) 突破가 나타난다. 기묘한 영미 문학: 토머스 하디 Thomas Hard y로부터, 로렌스로부터 로리 Lowr y에 , 밀러로부터 긴스버그 G i nsber g와 케루악 Kerouac 에 이르 기까지 이들은· 출발하여, 규준들을 흐리게 하고, 흐름들을- 흐르게 하고, 기관들 없는 신체의 사막을 횡단할 줄을 알고 있다. 그들은 한계를 뛰어 넘으며 壁, 죽 자본주의의 빗장을 부셔버린다. 물론 그들은 과정을 완수 하는 일에는 실패하되, 계속 실패한다. 신경증의 막다른 골목이 다시 닫 힌다-오이디푸스화를 하는 아빠-엄마, 아메리카, 고국에의 귀환―_그 렇지 않으면 이국적인 土地둘의 倒鎌 그리고는 마약, 알콜-더 나쁜 일 ® archa ism e ½ '¾!oi l 서는 〈古代示 섭〉이라고 옮겼는데 여기서는 이렇게 옮겨보았 다. 〈擬古主義〉라고 옮기기도 한다.
로는 낡은 파시즘의 꿈. 지금까지 망상이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에로 이만큼 잘 왔다갔다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막다른 골목들과 삼 각형들을 꿰뚫고, 정신분열증의 흐름이 저항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흐 른다. 그것은 梧子, 큰 강, 하수구, 임질, 規準化되게 하지 않는 말의 홍 수, 아주 유동적이고 아주 끈적끈적한 리비도이다: 構文法에 대한 폭력, 시니피앙을 계획적으로 파괴하는 일, 흐름으로서 세워진 무의미, 모든 관 계에 거듭 달러붙는 多義性이다. 문학의 문제가, 문학이 지니고 있는 이 데올로기나 사회 질서에 의한 문학의 回收에서 출발하여 제기된다면 그 것은 얼마나 잘못 제기된 것인가. 사람들은 회수되지만, 작품들은 회수되 지 않는다. 작품들은 참든 젊은이룰 항상 새로 찾아내어 그의 잠을 깨게 할 것이요, 또 그것들의 불을 더 멀리 날라가기를 그치지 않는다. 이데올 로기에 관해서 말하면, 그것은 가장 혼란스런 개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文學機械와 생산의 터전의 관계를 우리가 파악하는 것을 방해하고, 또 발 신된 기호가 시니피앙의 질서 속에서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려 한 〈내용의 형식 〉 을 돌파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 래전에 엥겔스는 이미 발자크에 관하여, 위대한 작가란 어떤 작가인가를 밝혔다. 위대한 작가는 자기의 작품의 정통적이고 전제군주적인 시니피 양을 무너뜨리고 필연적으로 지평선에 혁명의 기계를 키우는 흐름들을 묘사하여 이 흐름들을 흐르게 하기를 마지 않는 사람이다.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문체요, 혹은 도리어 문체의 不在, 즉 反構文法, 反文法이다: 이 순간 언어는 그것이 말하는 것에 의하여 규정되지 않으며, 언어를 시 니피앙이 되게 하는 것에 의해서는 더군다나 규정되지 않고, 언어를 흐 르게 하고, 유통시키고 또 폭발시키는 것 __ 죽 욕망―_에 의하여 규정 된다. 왜냐하면 문학은 전적으로 정신분열증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하나의 과정이지 목적이 아니요, 하나의 생산이지 표현이 아니다. 문학을 기성 질서에 순응하는 그리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칠 수 없는 소비의 대상으로 환원시키는 데서도 역시 오이디푸스화가 가장 중요한 인자들 중의 하나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작가나 독자들의 개인적 오이 디푸스화가 아니라, 사람들이 작품 자체를 거기에 종속시키려 하는 오이
디푸스의 形式이다. 이러한 시도는 작품을, 지배적인 사회 규준들 을 따라 이데올로기를 分秘하는 대수롭지 않은 표현활동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 래서 예술작품은 오이디푸스의 두 극, 죽 문제와 해결, 신경증과 昇華, 욕망과 진리 사인에 등기되는 것으로 여겨진다-한 쪽의 극은, 거기서 예술작품이 어린 시절의 해결되지 않는 갈등들을 뒤섞고 재배분하는 되 행의 극이요, 다른 한 쪽의 극은 거기서 예술작품이 인간의 미래에 관한 새로운 해결의 길들을 발명하는 先見의 극이다. 내면적인 것이 직품에로 전환됨으로써 작품이 〈 문화적 대상 〉 으로서 구성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 이런 관점에서는 정신분석을 예술작품에 적용시킬 여지조차 이제는 없 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예술작품 자체가 집단의 전형적인 잠재성들을 희 한하게 〈전이〉하고 있어서, 정신분석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 셈이기 때 문이다. 위선적인 경고가 다음과 같이 울려퍼진다: 약간의 신경증은 예 술작품을 위해서 좋은 것인바, 좋은 소재인 때문이요, 그러나 정신병, 특 히 정신병은 좋지 않다; 우리는 경우에 따라 창조적인 신경증적 양상과 소외시키며 파괴하는 정신병적 양상을 구별한다……. 마치 문법과 구문 법을 돌파하여, 언어 전체를 하나의 욕망이 되게 할 줄 알았던 위대한 소리들이 정신병의 밑바닥으로부터 말하지는 않았고 또 현저하게 정신병 적인 혁명적 도주 지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던 듯이. 기성 문학 을 오이디푸스적 정신분석과 대비시켜 보는 것은 옳은 일이다: 이것은 기성 문학이 자기에게 고유한 超自我의 形式, 글로 적히지 않은 초자아보 다도 더 해로운 초자아를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실상 정신 분석적이기에 앞서 문학적이다. 언제나 아르또.에 대해서는 브르똥 Bre- ton 같은 사람, 렌츠에 대해서는 괴테 같은 사람, 횔멀린에 대해서는 쉴 러 Sch ille r 갇은 사람이 있어, 문학을 초자아화하고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주의하라, 지나치지 마라! 〈서두른 짓〉 하지 마! 베 르테르는 좋아, 렌츠는 못써 ! 오이디푸스적 형식의 문학은 장사꾼의 문 학이다 . 이러한 문학보다는 정신분석 속에 결국은 불성실성이 덜하다고 생각해도 괜찮을 법하다. 왜냐하면 아주 갑작스런 신경중환자는 고독하 고, 무책임하고, 읽기 힘들고 팔리지도 않는 작품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
작품 (죽 신경증이라고 하는 병 )은 읽히기 위해서만 아니라, 번역되고 축소시켜지는 데에도 돈을 지불해야 한다 . 그는 적어도 경제적 과오를 저지르고, 재치가 없어, 자기의 가치를 퍼뜨리지 못한다. 아르또.는 다음 과 같이 잘 말하였다: 모든 글은 돼지의 똥이다__즉 문학이 〈 존재의 똥과 자기의 언어의 똥을 움푹· 패게 하고 〉 약한 사람들, 실어종환자들, 문맹자들을 운반해 가는 과정이 되지 않고, 자기를 목적으로 보거나 목 적들을 고정시키거나 할 때 그런 문학은 모두 돼지의 똥이다. 적어도 우 리를 昇 華 시키지 말아주시오. 모든 작가는 팔린 자이다. 유일의 문학은 자기의 꾸러미 속에 폭발물을 장치하여, 가짜 돈을 만들고, 자기의 표현 형식인 초자아와 자기의 내용형식인 상품가치를 폭파시키는 문학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답한다: 아르또는 문학에 속하지 않는다, 그 는 문학 밖에 있다, 왜냐하면 그는 정신분열자이니까. 다론 사람들은 이 렇게 답한다: 그는 정신분열자가 아니야, 왜냐하면 그는 문학에, 그것도 문자 그대로 가장 위대한 문학에 속하니까. 이 양자는 적어도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정신분열증에 대해서는 다 같이 유치하고 반동적인 생각을 하고 있고, 문학에 대해서는 다 같이 신경중적이고 상 품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점이다. 악의 있는 어떤 비평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아르또의 언어가 정신분열자의 그것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하 기 위해서는 〉 시니피앙에 관해서 아무것도 이해할 필요기- 없다; 〈정신 병자는 본의 아닌, 족쇄가 채워진, 고분고분한 言語를 만들어낸다: 그러 므로 그것은 모든 점에서 문자 그대로의 글 ecr it ure 에는 반대되는 것이 다 . 〉 그러나 이 문자 그대로의 거대한 의고주의란 무엇인가? 죽 문학을 거세의 각인 아래 종속시켜 그 오이디푸스적 형식의 두 측면을 신성한 것이 되게 하는 시니피잉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누가 이 악의 있는 비평 가에게 정신병자의 言說은 〈본의 아닌, 족쇄가 채워진, 고분고분한〉 것이 라고 말했는가? 다행히도, 사태는 이와 반대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 않 고 이 대립둘 자체가 기이하게도 거의 아무런 타당성도 갖고 있지 않다. 아르또는 정신의학을 산산조각이 나게 한다. 이것은 그가 정신분열자가 아니 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정신분열자이기 때문이다. 아르또는 문학의 완성이
다. 이것은 그가 정신분열자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바로 정신분열자이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그는 시니피앙의 벽을 타파하였다: 정신분열자인 아 르또가 말이다. 그의 고뇌와 영광의 밑바닥으로부터, 그는 욕망의 흐름들 울 한창 털규준화하고 있는 정신병지에 대하여 사회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사회의 自殺者 반 고흐)을 고발하고, 또 사회가 신경증 혹은 도착의 재규준화란 명목으로 문학을 정신병에 대립시킬 때 사회가 문학에 대해 서 하고 있는 것 (루이스 캐롤 Lewi s Caroil 혹은 純文學의 卑法者)을 고발 하는권리를갖는다. 레잉이 정신분열증의 벽 혹은 경계선의 돌파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실 현하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적다: 하지만 그들은 〈 아주 보통 사람들 〉 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벽에 접근하고는, 겁이 나서 후퇴한다. 혹은 오 히려 시니피앙의 법률 아래 다시 떨어져 내려가, 거세의 각인을 받고 오 이디푸스 속에서 삼각형화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경계선을 옮겨놓는다. 그들은 경계선을 사회조직체 내부에 이행시킨다. 죽 그들이 제공하는 사 회적 생산 및 재생산과 그들이 모든 공급을 포개고 일치시키는 가족적 재생산 사이에 이행시킨다. 그들은 오이디푸스가 선을 그은 영역 내부에, 즉 오이디푸스의 두 극 사이에 경계선을 이행시칸다. 그둘은 이 두 극 사이에서 말려들고 왔다갔다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마지막 바위인 오이 디푸스 그리고 果穴인 去勢: 이것이 정신분석가의 소파에 환원된다 해도 이것이 궁극의 토지인가? 逃走하여 흘러나가 우리를 어디론가 이끌어가 는 욕망의 탈규준화한 흐름들보다도 더 궁극적인 토지인가? 이런 것이 신경증이요, 이 신경증은 경계선을 옮겨놓아, 자기자신의 조그마한 식민 지를 만둘려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좀더 실제로 異國的인 處女地, 좀더 인공적인 가정, 좀더 바밀스런 사회를 원한다. 이 사람들은 이런 것 들을 倒緖의 장소들 속에서 벽을 따라 설계하고 설립한다. 또 다른 사람 둘은 오이디푸스의 道具裝置에 또 倒緖된 租惡品과 審美主義에 구역질이 나서 벽에 부딪히면 튀어오르고, 때로는 극렬한 폭력을 가지고 벽에 공 격을 가한다. 이때 그들은 움칙이지 않고, 침묵하고, 기관들 없는 신체에 후퇴한다. 이 신체 역시 하나의 토지이기는 하나, 전혀 불모의 토지요,
그 위에서는 모든 욕망하는 생산이 정지되고, 혹은 漏固하여, 정지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것이 정신병이다. 이 굳어버린 신체들은 납처럼 깅물 에 빠져 꼼짝 않는 거대한 하마들처럼 표면에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 . 그 신체들은 신경증을 만들어내는 억압-여제의 체계를 피하려고 도리어 전 력을 다하여 근원적인 억제에 자기들을 내어말겼다. 그런데 더 노골적인 억압이 그 신체들 위에 내리덮혀, 이것들을 병원에 입원해 있는 정신분 열자와 동일하다고, 죽 대단한 자폐증환자, 오이디푸스를 결여하고 있는 臨床 實 體와 동일하다고 확인한다. 왜 정신분열자라고 히는 같은 말이 경 계선을 뛰어넘는 한에서의 과정과, 경계선에 부딪혀 거기서 몸부립치는 한에서의 과정의 결과를 동시에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가? 왜 간혹 있을 수 있는 돌파와 으레 있는 붕괴를 동시에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가? 또 이 두 가지 것이 서로 推移하고 서로 뒤얽히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 는가? 이것은 앞서 문제삼은 세 가지 모험 기운데에서는 정신병의 모험 이 과정과 가장 친근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갇 은 것울 지적하고 있는 야스퍼스의 말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평소 에는 억압적 1 제되고 있는 〈 다이몬〉이 그런 상태를 이용하여 갑자기 뛰 쳐나오거나, 끊임없이 다이몬을 뒤흔들어 붕괴시키고 와해시키는 상태들 을 생기게 한다. 이렇게 되면 정말 광기라고 불러야 하는 것은 과정이요, 병은 이 과정의 僞裝 혹은 戱畵예 지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혹은 병이 유일의 광기요 과정은 이 광기로부터 우리를 치유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어떻든 과정과 병의 친근한 관계는 직 접적으로 逆比例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생산의 과정이 그 진행하는 길에 서 벗어나 갑자기 중단되면 될수록 임상실체로서의 정신분열자가 더욱 특유한 산물로서 나타난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이와는 반대로, 정신병 과 신경증 사이에 어떠한 칙접적 관계도 세울 수 없었다. 신경증, 정신병 그리고 도착 등 세 가지 것둘 간의 관계는 이것들 각자가 과정에 대하여 갖는 자세, 또 이것들 각자가 과정의 중단의 양태를 표入~하는 방식에 의 존한다. 즉 욕망의 脫土地化한 흐름들에 의하여 운반되어 가지 않기 위하 여 아직도 달라붙어 있는 토지를 표성하는 방식에 의존한다. 오이디푸스
의 신경증의 토지, 인위적인 도착자의 토지, 기관들 없는 신체의 정신병 의 토지 : 때로는 과정이 덫에 걸려 삼각형 속에서 빙빙 돌고, 때로는 그 것이 자기자신을 목적으로 보고, 때로는 그것이 공전을 계속하여 자기를 완성하는 대신 끔찍스런 악화를 초래한다. 이 세 형태는 각기 그 밑바닥 에 정신분열증을 가지고 있다. 과정으로서의 정신분열중이야말로 유일의 보편적인 것이다. 정신분열증은 벽인 동시에 벽의 돌파요, 또 동시에 이 돌파의 실패이다: 〈어떻게 이 벽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가, 왜냐하면 강 하게 두드려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이 벽의 밑을 파고 줄로 뚫 어야 한다. 내 생각으로는 천천히 참을성 있게. 〉 f,()) 따라서 내것돈은 예술 이나 문학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藝術機械 分析機械, 革命機械는 억압적 1 제 체계의 弱體化된 틀 속에서 이것들을 가동시키는 의적인 관계에 머물 러 있든가, 그렇지 않고 오칙 하나의 동일한 욕망하는 기계에다가 양분 울 주는 흐름 속에서 서로서로 부폼이 되고 톱니바퀴가 되고, 보편적인 폭발을 위하여-정신분열이, 시니피앙이 되지 않기 위하여-한 장소 에서 참을성 있게 켜진 그 수만큼의 불이 되든가, 이 둘 중의 하나가 내 기에 걸려 있다. 60) Van Gog h, Lett re du 8 sep t. 1 888.
제 3 장 야생인,야만인,문명인
1 登i B 를 행하는 사회체 보편적인 것은 결국, 자본주의에 의하여 결정되는 조건들에서의 기관 둘 없는 신체와 욕밍히는 생산인데, 자본주의가 명백히 정복자일진대 어 떻게 세계사를 아주 천전난만하게 배울 수 있겠는가? 욕망하는 생산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이 있기 시작한 때 부터 욕망하는 생산이 있다. 그런데 사실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기계들이 아주 뚜렷한 의미에서 욕망과 본질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그것들은 욕망 울 규준화하고, 욕망의 흐름들을 규준화한다. 욕망을 규준화하는 것 탈규준화하는 흐름들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규준화하는 것-이 社會體 가 히는 일이다. 나중에 고찰하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는 탈규준화한 흐 름들 위에 구축된 유일의 사회기계이다. 그것은 내재적인 규준-둘 을 돈의 형태를 지닌 抽象量의 公理系로써 대체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욕망의 흐름들을 해방시키지만, 이것은 자본주의의 한계와 자본주의 자체의 해 체의 가능성을 규정하는 사회적 조건들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자 본주의는 자기를 이 한계에로 밀어붙이는 동향에 대하여 필사적인 힘을 다하여 항거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극한에서는, 사회체가 탈 토지화하여 기관들 없는 신체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흐름들은 탈규준화 햐겨 욕망하는 생산에 뛰어든다.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정식화한 규칙들 울 정확하게 따르는 조건 아래, 역사 전체를 자본주의에 비추어 回顧的 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세계사는 우발적 사 건들의 역사이지, 필연의 역사가 아니다; 切斷들과 국한들의 역사이지,
연속의 역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흐름들이 규준화를 벗어나, 이렇게 벗어 나면서 그래도 자본주의의 사회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기계를 구성하려 면 큰 우연들, 죽 딴 곳에서, 전에, 생길 수 있었던 또는 절대로 생길 수 없었던 놀라운 만남들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사유재산과 상품생산의 만 남이 있었다. 하지만 이 양자는 私企業化룰 통하여 또 抽象化를 통하여 아주 다른 두 형태의 탈규준화로서 나타난다. 또는 사유재산 자체의 관 점에서는, 자본가들이 소유하고 있는 환산 가능한 부의 흐름들과 노동력 만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흐름들의 만남이 있어야 했다(여기서도 탈 토지화의 두 형태는 명백히 구별된다). 어느 모로는, 자본주의가 모든 사회 형태에 달라붙어 왔는데, 그러나 그것은 무서운 악몽으로서 달러붙어 왔 다. 죽 어떤 흐름이 모든 사회형태의 규준들을 넘어서는 데 대한 이 사 회형태들의 까닭 모를 갑작스런 공포로서 달라붙어 왔다. 디른 한편, 자 본주의가 세계사의 조건들과 가능성을 규정한다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 로 자기자신의 극한, 죽 자기자신의 파괴에 이르는 한에서만 전실이다: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가 (적어도 어느 점까지; 국한에로 향하는 경향에 거역하는 운동 속에서조차, 극한이 나타나는 점 에까지) 자기자신을 비판할 수 있는 한에서만 진실이다.!) 요컨대, 세계 사는 회고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발적이고, 기이하고, 아이 러니컬하고, 위기적이다. I ) Marx, Intr o ducti on gen erate a la criti qu e de l'eco nomi e po liti qu e, 1857, Pleia d e, I, pp. 260-261. 모리스 고들리에 Mauric e Gode li er 는 다음과 갇이 주석하고 있다: 〈西歐의 發展路線은, 그것을 어디서나 볼 수 있기 때문에 보편 적이다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아주 먼 것이요, 그것을 어디서도 볼 수 없기 때문 에 보편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것은 독특하게 전개됨으로써 보편 적인 결과를 획득했기 때문에 典型的이다• 그것은 그 자체 이 노선에서 떠나고 또 모든 사회로 하여금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의 가장 오랜 형태나 가장 최근 의 형태로부터 떠나게 하기 위한 실천적 기반(산업경제 )과 이론적 착상(사회주 의 )을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서구의 발전노선의 진정한 보편성은 그 독특함 에 있지, 이것 바깥에 있지 않다. 즉, 다른 進化路線들과 다른 데 있지 비슷한 데에 있지 않다〉 (Sur le mode de pro ducti on asia tiqu e, Ed. Socia l es, 1969, pp. 92-96).
욕망과 생산의 야생의 原始統一體가 大地이다. 왜냐하면 대지는 노동의 다양하고 분할되는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 분할될 수 없는 독특 한 실체, 죽 충만한 신체이기 때문이다. 충만한 신체란 자연적인 또는 신 적인 전제로서 생산력들 위에 포개져 이 생산력들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 신체이다. 土壤은 생산의 境域이요 소유의 결과일 수 있으며, 대지는 산 출되지 않고 처음부터 있는 큰 鬱積이요, 생산보다 우월한 경역이요 토 양의 공동 소유와 공동 사용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대지는 그 위에 생 산의 모든 진행이 登記되고, 노동의 대상들, 수단들 및 힘이 등록되고, 노동의 動因들과 생산물들이 분배되는 표면이다. 여기서 그것은 생산의 準原因 및 욕망의 대상으로서 나타난다. (그 위에서 욕망과 욕망 자신의 억압이 결부된다.) 그러므로 토지기계는 사회체의 최초의 형태요, 원시적 등기의 기계요, 사회 터전을 덮는 〈 메가머신 me g amach i ne( 大聯戒)〉이다. 그것은 기술기계들괴는 뒤섞이지 않는다. 기술기계는, 그 가장 단순한 수 동적 형태둘에서도 움직이고, 전달하고 움직이게 하는 비인간적인 요소 룰 이미 내포하고 있다. 이 요소는 인간의 힘을 확대시키고 인간을 어느 정도 해방시킨다. 이에 반하여 사회기계는 인간들을 부품으로서 다룬다. 인간들을 그들의 기계들과 함께 고찰하고, 그들을 행동, 전달 및 動力性 의 모든 단계에서 하나의 제도적 모델 속에 통합하고 내면화할 때에 바 로 인간들을 부품으로서 다룬다. 그런데 기억이 없으면 인간과 그 (기 술)기계들의 共信託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사회기계는 기억울 형성한다. 기술기계들은 실제로 그들의 재생산의 조건들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 둘은 사회기계들에 관계지어져 있다. 사회기계들은 그것들의 조건이 되 며 그것들을 조직하지만, 또한 그것들의 발전을 제한하고 또는 제지한다. 半自律的인 기술적 생산체제롤 찾아보려면 자본주의를 기다려야 할 것이 다. 이 생산체제는 기억과 재생산울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을 착취하는 형태들을 변모시킨다: 그런데 바로 이 체제는 지금까지의 큰 사회기계들의 해체를 전제하고 있다. 하 나의 동일한 기계가 기술기계요 사회기계일 수 있으나, 동일한 양상에서 는 아니다: 가령, 시계가 그런 것인데, 시계는 等質時間을 측정하는 기술
기계일 수도 있고, 법규로 정한 시간들을 재현하여 나라의 질서를 보증 하는 사회기계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루이스 맘포드 Lew i s Mum fo rd 가 집합적 실체로서의 사회기계를 가리키기 위하여 〈 메가머신 〉 이란 낱말을 만들어낸 것은 그야말로 옳은 일이다. (하기는 그가 이 낱말의 적용을 야만적인 전제군주제도에 국한시키고 있기는 해도 말이다) : 〈 만일, 로일 로 Reuleaux 의 고전적 정의를 다소간 따라서, 하나의 기계를 단단한 요 소들의 결합체요 그 각 요소가 자기의 전문의 기능을 가지고 인간의 통 제 아래 가동하여 운동을 전달하고 노동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 다면, 인간기계는 바로 하나의 참된 기계였다• 〉 2 ) 사회기계는, 그것이 부 동의 始動者의 양상을 띠고, 갖가지 切斯울 행하는· 한, 모든 은유의는 상 관없이, 문자 그대로 하나의 기계이다: 여기서의 절단이란 흐름으로.부터 의 채취, 연쇄로부터의 이탈, 할당분의 배분이다. 흐름들을 규준화하는 것은 이 모든 조직을 포함한다. 이것은 사회기계의 최고의 임무이다. 죽 생산의 생산, 등록의 생산, 소비의 생산을 조직하여 욕망과 운명을 하나 의 전체로 묶은 체계에 있어서는, 생산으로부터의 채취가 연쇄로부터의 이탈에 대응하고 여기서 각 성원에서 잔여의 할당분이 결과하기 때문에, 이런 한에서 흐름들을 규준화하는 것은 사회기계의 최고의 임무이다. 여 자들과 어린이들의 흐름, 양떼와 낱말의 흐름, 정자와 똥과 월경의 흐름, 이것들 어느 하나 치고 규준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원시 토지기계는, 그 부동의 시동자인 토지와 함께, 이미 사회기계 죽 메가머신이요, 이 기계 는 생산의 흐름들, 생산수단의 흐름들·, 생산자와 소비자의 흐름둘을 규준 화한다. 여신인 〈토지〉의 충만한 신체는 자기 위에서 재배 가능한 종자 들, 농업용구들 및 인간의 기관들을 결합시킨다. 메이어 포티스 Meye r For t es 는 무슨 말 끝에 유쾌하고 의미심장한 지 적을 하고 있다: 〈문제논 여자들의 순환에 관한 것이 아니다……. 여자 는 그 스스로 순환한다. 여자는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손에 대해서는 법률상의 권리들이 정해져 있어 이 때문에 어느 특정 인물이 이득을 보게 되어 있다.〉 3) 실상 우리는 교환주의적 사회관들 믿 2) Lew is Mu mfor d, La Prem ier e mega m ach ine , Di og e n e, ju il let 1966.
에 깔려 있는 公準울 받아들일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사회는 무엇보 다도 먼저 순환하고 순환시키는 것이 그 본질인 교환의 칭이 아니라, 표 시하고 (D 표시되는 것이 그 본질인 登記의 社會體이다 . 순환은 등기가 그 것을 요구하거나 허용할 때에만 생긴다. 이런 의미에서, 원시토지기계가 해야 할 일은 器官들을 집합적으로 공급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흐름들의 규준화가 행해지는 것은 흐름들을 제각기 생산하고 절단할 수 있는 기관 둘 자체가 부분적 대상들로서 명확하게 구분되고 설치되며, 사회체 위에 배분되고 달러붙어 있는 한에서이기 때문이다. 가면은 기관들을 그렇게 설치한 것이다. 入社式울 행하는 사회들은, 감각기관들이기도 하고 해부 의 조각들이기도 하고 관절이기도 한 신체의 파편들을 합성한다. 어떤 상태에서 또는 어떤 경우에 공동으로 공급된 어떤 기관을 향수하지 못하 는 사람들에게는 (보아서는 안 된다,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금지사 항등기 적용된다. 신화들은 부분적 대상들인 기관들, 그리고 이것들을 물 리치거나 끌어당기는 충만한 신체와 이것들의 관계를 노래하고 있다: 여 자들의 신체에는 脫이 못박히듯 달라붙어 있고, 남자들 사이에는 거대한 페니스가 나누어지고, 항문이 없는 신체에는 독립된 항문이 할당된다. 대 식가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입이 죽자, 신체의 다른 무분들은 어느 부분이 그 매장의 임무를 말을 것인가 하고 의논하였다 …….> 여기서의 단위는 본래의 의미에서나 私的인 의미에서나 결코 인 물들이 아니고, 기관들의 연결들, 離接들 및 連接들을 결정하고 있는 系 列둘이다. 이런 까닭에 환상들은 집단의 환상이다. 욕망을 사회체에 연결 시키고, 사회적 생산과 욕망히는· 생산울 大地위에서 하나의 전체에로 묶는 것은 기관들의 집합적 공급이다 . 이와 반대로 우리들의 현대 사회들은 기관들의 방대한 사유화를 행하 였다. 이 시유화는 흐름들이 탈규준화하여 추상적인 것이 된 데에 대웅 한다. 사유화되어야 할, 죽 사회 터전 밖에 두어야 할 최초의 기관은 항 문이었다. 돈이 흐름들의 추상의 새로운 상태를 나타냈던 때와 동시에, 3) Mey er Forte s , in Recherches volt arq u e s, 1967, pp. 135-137. (i) marqu er. 물건이나 신체에 어떤 기호나 그립을 아로새겨 표시하는 일.
사유화에 대하여 그 모델을 제공한 것은 바로 항문이었다. 통화경제의 항문적 성격을 정신분석이 지적한 것들이 상대적 진리성을 지니는 것은 이로 말미암는다. 그러나 〈논리적 〉 순서는 다음과 같다: 規準化되어 있 는 흐름들을 抽象量으로써 대체히는 것 : 그 다음에 항문을 모델로 심아, 기관들의 공동의 공급을 철회하는 것 : 추상량에서 派生된 기관들과 기능 들의 개인적 중심으로서 私的 人物들을 구성하는 것. 다음과 같은 말도 해야 할 것이다: 남근이 우리들의 사회에서 이탈된 추상의 자리를 차지 하여 남녀 두 성의 사람들에게 결여를 분배하고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조 직한 것은, 항문이 남근을 그렇게 이탈시키고, 일종의 止揚 A ufh ebun g을 통하여 페니스를 끌어내어 이것을 승화시켜 남근을 구성한 때문이다. 승 화는 항문성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항문성에 디론· 용도 가 없어 항문성이 승화시킬 재료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항문 성은 가장 높은 것에서 전환시켜야 할 가장 낮은 것이 아니다• 항문 자 체가 높은 데로 옮아가는 것은, 우리가 나중에 분석하게 될 조건들, 죽 그것이 사회 밖에 두어진다고 하는 조건 아래서인데, 이 조건들은 승화 를 전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와 반대로 승화가 이 조건들에서 유래 하기 때문이다. 항문적인 것이 승화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고, 승화 전체 가 항문적인 것이다; 그래서 승화에 대한 가장 단순한 비판은 그것이 우 리로 하여금 똥 밖으로는 조금도 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오직 정 신만이 똥을 눌 수 있다). 항문성은 항문이 탈공급될수록 더욱 위대하다. 욕망의 본질은 분명히 리비도이다; 그러나 리비도가 추상량이 될 때 높 아지고 탈공급된 항문은 전체로서 한 사람의 모습을 갖춘 인물들과 특정 한 자아들(〈나〉들)을 산출하는데, 이것들은 바로 이 추상량을 측정하는 단위의 구실을 한다. 아르또는 다음과 갇이 잘 말하고 있다: 이 〈하늘의 천장에 매어달린 죽은 쥐의 엉덩이〉라고. 여기서 아빠-엄마-나의 삼각 형이 나온다. 죽 〈미천 항문의 씨 다른 어머니-아버지〉가 나오는데, 이 들에게서 생긴 아이는 삼각형의 한 각일 따름이다. 〈나라고 히는 어떤 것 위에는 영원히 이런 덮개가 덮여 있다〉. 오이디푸스는 그 전체가 항문 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동의 탈공급을 보상하기 위하여 기관의 개인적
超供給울 내포하고 있다 . 이런 까닭에 오이디푸스의 보편성에 대하여 가 장 호의적인 주석자들도 이렇게 호의적이기는 하지만, 우리들의 사회에 서 오이디푸스를 실현시키는 메커니즘과 태도를 원시사회에서는 전혀 찾 아볼 수 없디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원시사회에는 초자아도 없고, 죄책 감도 없다. 특정한 나를 전체로서 한 사람의 모습을 갖춘 인물들과 동일 시하는 일도 없다-그러나 언제나 집단의 부분과 동일시한다; 이것은 조상들이 밀집하여 밀착되어 있는 계열을 따라서 행해지기도 하고, 친구 들이나 사촌둘의 단편화된 계열을 따라서 행해지기도 한다. 원사사회에 는 항문성도 없다__있다면 차라리 그것은 공동으로 공급되는 항문성이 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를 만드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4) 구조, 즉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잠재성이 있는가? 자본주의가 모든 사회에 달라붙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오이디푸스가 모든 사회에 달라붙어 있다고 믿어야 하는가? 즉 흐름들이 탈규준화하고 기관들의 공 동의 공급이 철회되는 것에 대한, 욕망의 흐름들이 추상적인 것이 되고 기관들이 사적인 것이 되는 것에 대한 악몽 내지 불안한, 죽 예감으로서 모든 사회에 달라붙어 있다고 믿어야 하는가? 원시토지기계는 흐름들을 규준화하고, 기관들을 공급하고, 신체에다가 표시를 한다, 다른 모든 임무를 집약하는 이 임무, 죽 대지에 속해 있는 신체에다가 표시를 하는 이 임무에 비할 때, 순환시키고 교환한다는 것 은 어떤 점에서 이차적인 활동인가. 등록하고 등기하는 것인 사회체가 생산력들을 자기에게 귀속시키고 생산의 동인들을 배분하는 한에 있어 서, 그 본질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몸에 文身울 넣는 일, 切除하는 4) Paul Parin et coll., Les Blancs pe nsent trop , 1963, tr. fr. Payo t : 〈어머 니들과의 先對象的 關係둘은 갇온 나이의 천구들의 그룹과 일체화하는 관계들에 로 옮아가고 이 관계들 속에서 배분된다. 아버지들과의 갈등은 兄들의 그룹과 --fflt하는 관계들 속에서 中和된다……〉(pp. 428-436). 비슷한 분석과 결과들 은 M.C. et E. Orti gu es, CEdip e afr ic a in , Pio n , 1966(pp . 302-305) 에도 있 다. 그러나 이 저자들은 오이디푸스의 문제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다는 것 울 주장하기 위하여 이상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주장과는 반대되 는 것에 대하여 온갖 근거를 제시하고, 또 오이디푸스가 〈臨床治療롤 할 수 있 는〉 것이 아니라 말하면서도 말이다.
일, 째는 일, 자르는 일, 제물을 바치는 일, 팔다리를 철단하는 일, 명확 하게 구분하는 일, 사회체에 入社시키는 일. 니체는 〈 습속의 도덕성, 죽 인류의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인간이 자기자신에게 행한 진정한 작업, 인간의 先歷史的 작업 전체 〉 를 규정하였다: 그것은 신체의 갖가지 股體 와 부분들에 관하여 법의 힘을 지니는 평가의 체계를 세우는 것이다. 죄 인만이 공동의 공급들의 질서에 따라 기관들을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요, 먹혀야 할 사람만이 쇠고기를 자르고 분배하는 규칙들만큼이나 정확한 규칙들을 따라 그 기관들을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의 권리들과 의무들을 십분 누리고 있는 사람도 그의 기관들과 이 기관 들의 사용을 집단에 맡기는 체제에서는 그 신체 전체에 표시를 하게 된 다. (기관들의 사유화는 인간이 다른 사람이 자기를 보고 있다고 느껴 부끄러워할 때에 비로소 시작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기초를 놓는 행위 이기 때문이다. 이 행위를 통하여 인간은 생물학적 유기체이기를 그치고, 하나의 충만한 신체, 죽 하나의 대지가 되고, 이 위에 그 기관들이 사회 체의 요구들에 따라 달라붙고, 끌어당겨지고, 거절되고, 기적을 일으키기 도 한다. 기관들이 사회체 속에 짜넣어지고, 흐름들이 사회체 위를 흘러 야 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기억울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생물학적 기억을 억제함으로써 망각의 적극적 능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인간은 하나의 E 連 기억을 얻어야만 한다; 이 기억은 집 단적인 것으로서, 말들의 기억이지 사물들의 기억이 아니며, 기호둘의 기 억이지 결과들의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잔인성의 체계요, 무서운 알파벳 이요, 기호들을 신체에까지 아로새기는 조직이다: 〈아마 인간의 선사시 대에서 그의 기억술보다도 더 무섭고 더 우려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 다……. 인간이 하나의 기억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때 그것은 피비린내나는 體刑들, 순교들, 희생들 없이 있어본 적이 없다; 가 장 끔찍스러운 播祭들과 가장 추악한 抵當둘, 가장 역겨운 필다리 절단 들, 모든 종교적 종파들의 가장 잔인한 의식들 없이 있어본 적이 없 다……. 사상가들로 구성된 한 민족을 키우는 데에는 이 지상에서 얼마 나 많은 고난을 치러야 하는지는 이제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5) 여기
서의 잔인성은 인간의 역사를 설명할 때 거론하는 어떤 지연적 폭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 그것은 신체들 속에서 작용하고 신체들 위에 아로새 겨지고, 신체들을 상처두성이가 되게 하는· 문화의 운동이다. 잔인성이 의 미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 문화는 이데올로기의 운동이 아니다: 반 대로, 그것은 생산을 억지로 욕망 속에 집어넣고, 또 거꾸로 욕망을 사회 적 생산과 재생산 속에 집어넣는다. 왜냐하면 죽음도, 징벌도, 체형들도 욕구되는 일이 있고, 이것들도 생산이기 때문이다(운명론의 역사를 참조 하라)• 문화는 사람들이나 그들의 기관들을 사회기계의 부품들·과 톱니바 퀴둘로 만든다. 기호는 욕망의 정리이다; 그런데 최초의 기호들은 그것 둘의 깃발들을 신체들 속에 꽂는 토지기호들이다• 그래서 맨살에 이렇게 아로새기는 것을 〈 글 ecr it ure 〉 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말은 글을 전제하 며, 인간에게 언어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그에게 말들의 기억울 주는 것 은 이 아로새겨진 기호들의 잔인한 체계라고 실제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5) Ni et z s che, Genea/ ,og i e de la morale, II , pp. 2- 7 .
2 原始土地機械 토지의 개념은 걷으로 보기에만 애매하다. 왜냐하면 토지를 住居나 지 리적 분포의 원리로 이해한다면, 원시사회기계가 토지적인 것이 아님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엥겔스의 정식을 따르면, 오직 국가장치만이 토지적 인 것이다. 이 국가장치는 〈국민을 세분하지 않고 토지를 세분하는〉 것 이요 부족 조직을 지리적 조직으로써 대체한다. 하지만, 친족관계가 대지 에 우선하는 듯이 보이는 곳에서도 地緣의 중요성을 證示하는 것은 어렵 지 않은 일이다. 이것은 원시기계가 국민을 세분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나뉠 수 없는 대지 위에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이 대지에서는 각 선분이 다른 선분들과 連結的, 離接恥 連接的 관계들을 맺고 이 관계들이 登記된 다. (그래서, 가령, 선분의 首長과 대지의 관리자가 공존하거나 서로 보 완한다.) 地所나 주거에 관한 행정조직에 의하여 분할구분이 토지에까지 미칠 때에도, 그렇다고 금방 거기에 토지의 형성이 촉진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지 않고 정반대로 그것은 탈토지화의 최초의 큰 운동이 원 시공동체들에게 미치는 결과이다. 부동의 시동자로서의 대지의 내재적 통일이 전혀 다른 본성의 초월적 통일, 죽 국가의 통일에 자리를 비킨 다; 충만한 신체는 이제 더는 대지의 그것이 아니라, 전제군주의 그것이 다. 이것은 〈발생하여 생기지는 않은 것〉이요, 이제 토양의 비옥함과 하 늘의 비를 책임 말고, 생산력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야생 의 원시사회체야말로 . 엄밀한 의미에서의 유일의 토지기계였다. 그러한 기계의 기능은 다음과 갇은 것이다: 국가가 있기 전에, 대지의 신체 위
에서 結緣과 부자관계를 내세우는 것, 즉 家系들을 내세우는 것. 이 원시토지기계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단순히 固敍울 부자관계로부 터, 결연둘을 부자관계의 혈통들로부터 연역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 이다. 결연이 한 가계의 사람들을 개별화하는 힘만을 가지고 있다고 보 는 것은 잘못된 일이겠다; 그것은 오히려 일반화된 식별 가능성을 생기 게 한다. 리츄 Leach 는 서로 아주 다른 갖가지 혼인제도의 실례를 들고 있는데, 이 실례들로부터 그 혼인제도들에 대응하는 그룹둘의 부자관계 가 다르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많은 분석들에 있어서, 〈강조되고 있 는 것은 단일계통의 연대적 집단 내부에서의 유대들 또는 공동의 부자관 계를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그룹들 간의 유대들이다. 서로 다른 그룹들 의 성원들 간의 결혼에서 생기는 구조적 유대들은 대부분 무시되었거나, 아직도 부자관계라고 하는 보편적 개념에 흡수되고 있다. 그래서 포티스 는 부자관계의 유대의 중요성에 비길 만한 중요성을 결연의 유대에 대해 서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후자를 보완적 혈통이란 표현 아래 숨기고 있 다. 이 개념은, 로마인들이 부계 친족과 모계 친족을 구별한 것을 상기시 키는데, 모든 개인이 그의 부모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 부모의 지손인 때 문이지, 그 부모가 결혼한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본질적으로 內含하고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부계들을 측면적으로. 결합시키는 縱的 유 대들은 토착인들 자신에게는 부자관계의 유대로 생각되고 있지는 않다. 수직적 구조의 시간상의 연속성은 부계의 이름이 부계 친족에 전해짐으 로써 정확하게 표현된다. 그러나 측면적 구조의 연속성은 이런 식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 그것은 오히려 채무자와 채권자 사이의 경제적 관계 들의 연쇄에 의하여 유지된다……. 결연관계의 연속성을 드러내는 것은 이 공공연한 부채의 존재이다〉 .6) 부자관계는 행정적이고 위계적이지만, 결연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이요, 위계질서와 뒤섞이지 않고 이것으로부터 연역되지 않는 한에 있어서 권력을 표현하며, 또 행정과 뒤섞이지 않는 한에 있어서 경제를 표현한다• 부자관계와 결연은 원시지본의 두 형태라 6) E. R. Leach, Criti qu e de l'an th r op o log ie, 1966, tr. fr. P.U.F., pp. 206;-- 207.
하겠다. 그것은 고정 자본, 죽 부자관계의 저장과, 순환 자본 죽 부채의 可 덩어리들이다. 이것들에는 두 가지 기억이 대응하는데, 그 하나는 부자관계의 생물학적 기억이요, 다른 하나는 결연의 그리고 말들의 기억 이다. 생산이 사회체 위에서 부자관계의 이집들의 그물 속에 등록되면, 노동의 연결들은 생산 과정에서 이탈하여, 準原因으로서 이 연결둘을 자 기의 것으로 삼는 등록의 境域에 移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등록 의 경역이 이 연결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結緣의 統帶, 죽 부자관계의 이집들과 양립할 수 있는 인물들의 혼인이라고 하는 형식 아래 연결의 체제를 자기의 수중에 되찾을 때만이다• 이런 의미에서 경 제는 결연을 經由한다. 어린이들의 생산에 있어서, 어린이는 그의 아버지 나 어머니의 이집적 家系에 관계시켜 등기되지만, 거꾸로 이 가계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에 의하여 나타내어지는 연결을 매개로 해서만 어린이를 등기한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결연이 부자관계로부터 파 생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고 이 양자가 모두 본질적으로 열린 순환과 정을 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체는 생산에 영향을 미치지만, 또한 생 산이 사회체에 영향을 미친다. 마르크스주의지들은 원시사회에서 친족관계가 지배적이기는 하지만 그 것이 경제적 및 정치적 인자들 때문에 지배적이게끔 결정되어 있다는 것 울 상기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옳은 일이다. 그래서 부자관계는 전적으로 결정되어 있으면서 지배적인 것을 나터내고 있지만, 결연은 결정하고 있 는 것, 혹은 차라리 결정하는 것이 지배의 결정된 체계에 되돌아옴을· 나 타내고 있다. 이런 까닭에 일정한 土地의 표면 위에서 결연이 어떻게 구 체적으로 부지관계와 더불어 구성되는가를 고찰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다. 리츄는 地緣的 家系둘이라고 하는 결정기관을 끄집어내었는데, 이것들 은 부자관계의 가계들과 구별되며 또 작은 線分(部分)의 차원에서 작동 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감은 장소 혹은 가까운 장소들에 살면서 결혼을 기계적으로 해나가며 구체적인 현실을 형성하는 사람들의 그룹들이다. 이때 이 현실은 부자관계의 체계들 및 추상적인 결혼 계층들보다도 훨씬 더 구체적이다. 친족관계의 체계는 하나의 구조가 아니라, 하나의 관례,
하나의 실천, 하나의 절차, 심지어 하나의 전략이다. 베르뜨 Ber t h 탸근, 결연과 위계질서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한 마을이 제 3 자로서 개입하여, 구조의 엄밀한 관점에서는 두 개의 반쪽의 이접이 결혼을 금지할 성원들 간에 결혼을 허용한다는 것을 잘 밝히고 있다 : 〈第 3 項은 구조적인 전정 한 요소로서보다는 하나의 절차로서 훨씬 더 찰 해석된다.〉“ 원시공동체 안의 친족의 관계들을 정신 속에서 전개되는 構造에 따라서 해석하면, 그때마다, 큰 線分들의 이데올로기에 빠지게 된다. 이 이데올로기는 結緣 울 主要한 부자관계에 종속시키지만,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일은 이 이데 울로기에 모순된다. 〈 균형을 이루고 있지 않는 結緣體系들 속에 交換이 일반화되는, 즉 사이클(순환)이 닫히는 데 대한 근본 경향이 있는지 없 는지 自「내해야 한다. 나는 므루 .Mru 族의 사람들에게서 이와 비슷한 것을 하나도 찾이볼 수 없었다……• 그들은 각자 마치 순환이 닫히면 그 결과 생기게 될 補償 같은 것을 숫제 모르는 듯이 행동하며, 債權者-債務者의 행동을 강조하면서, 불균형한 관계를 증대시킨다.〉 8) 親族關係의 體系가 닫힌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경제적 및 정치적 좌표들로 부터 切斷하는 限에서만이다. 이 좌표들은 이 체계를 열린 채 유지하는 것이요, 또 결연을 결혼 계층들 및 부자관계의 가계들의 조정과는 다른 것이 되게 하는것이다. 거기서는 흐름들을 규준화하려는 일 전체가 행해지고 있다 . 시니피앙 의 연쇄와 생산의 흐름이 서로 適應하고 각각 결부되는 것을 어떻게 보 증하는가? 遊牧民의 위대한 狩 1 i人은 흐름들을 따라가며, 한 자리에서 흐 름들을 몽땅 말리고 그리고 흐름들을 따라 이동한다. 그는 加速하는 속 7) Louis Berth e , Ai ne s et cadets , !'allian ce et la hier arch ie chez les Badu, L'Homme, juille t 1965. Cf. la for mule de Luc de Heusch, in Lev i-S tr a uss, l'A rc, n°26: 〈친족관계의 체계는 역시 무엇보다도 먼저 하 나의 실천이다〉(p. 11). 8) L.G. Loff ler , L'Allia n ce asym e tr i q u e chez les Mru, L'Homme, jui l let 1966, pp. 78-79. 리츄는 『人類學 批判』에서 카친 kac hi먀伊 1 결혼에 관하여 이데올로기와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일의 차이를 분석하고 있다(pp. 140- 141) ; 그는 닫힌 體系로서의 親族關係라고 하는 見解둘을 아주 철저히 비판하 고 있다(pp. 153-154).
도로 그의 부자관계 전체를 재현하고 이것을 한 접에 集杓하는대, 이 점 은 그를 조성이나 神과 직접 관계시키는 점이다• 삐에르 클라스트르 Pie r re Clas t res 가 묘사하고 있는 고독한 수렵인은 이제 그의 힘과 그의 운명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 더욱 빨라지고 일그러지는 언어로 그의 노래 를 내어던진다 : 나, 나, 나 〈나는 힘있는 自然이다, 성난 공격하는 자연 이다!〉 9) 흐름들과 더불어 실제로 이동하는 것, 神과 직접적 부자관계를 갖는 것: 이와 같은 것이 그 수렵인, 즉 가시덤불이 무성한 곳이나 숲 속에 사는 위대한 파라노이아인(편집병자)의 두 가지 성격이다. 遊牧 空 間에서는, 社會體의 충만한 신체가 이를테면 생산에 隣接해 있고, 아직 생산에 포개져 있지는 않다. 野尉也 空間은 숲의 공간에 인접해 있는 채 로 있고, 생산의 과정 속에서 줄곧 재생산되지만, 아직 이 과정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지는 못하고 있다. 登記의 外見上의 객관적 운동의 遊牧生活 의 현실적 운동을 말살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순수한 遊牧民이란 것은 없다. 언제나 이미 야영지가 있고, 거기서는 아무리 적더라도 저장 하는 일이, 또 등기하고 분배하고 결혼하고 영양을 취하는 일이 문제이 다. (클라스트르는 구이야키 Gua y ak i族에게 있어서 어떻게 수렵 인들과 살아 있는 짐승들 간의 연결이 야영지에서는 죽은 짐승들과 수렵인들 간 의 離接에로 바뀌고 있는가 하는 것을 훌륭하게 밝히고 있다. 이 離接的
關係는 近親相값의 禁止와 비슷하다. 왜냐하면 수렵인은 자기가 잡은 것 울 소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가 다른 기회에 밝히게 되 는 바와 같이, 파라노이아인에 뒤이어 혹은 그와 同行하여 언제나 도착 자가 있다-때로는 同一人이 두 상황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가령 가시덤불이 무성한 곳의 파라노이아인이 마울의 도착자가 된다. 왜냐하 면, 社針출가 固定되고, 生産力들에 포개지고, 이것들을 제것이라 주장하 게 되자마자, 흐름들의 관점에서의 移動과 連鎖의 관점에서의 加速된 재 생산이 동시에 생겨, 규준화의 문제가 더 이상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흐름들은 採取들의 대상이어야 하는데, 이 흐름들은 최소한의 저장을 구 성한다. 그리고 시니피앙의 연쇄는 離脫들의 대상이어야 하는데, 이 이탈 9) Pie r re Clastr e s, L'Arc et le panier , L'Homme, avril 1966, p. 20.둘은 최소한의 調停울 구성한다. 하나의 흐름이 규준화되는 것은 연쇄로 부터의 이탈과 흐름으로부터의 채취가 서로 대응하면서 행해지고, 서로 합하겨 一體롤 이루는 限에서이다. 그래서 원시토지 위에서 結婚울 기계 처럼 조작히는 것은 이미 地緣 集 團들의 高度로 도착적인 활동이다: 그 것은, 앙리 애이 Henry E y가 〈 選別하고 洗練하고 計算하는 心理的 作業〉 이 드러나는 다른 경우들에 관하여 말한 것처럼, 正常的인, 즉 非病理的 인 도착이다. 그러니 사태는 처음부터 이런 것이다. 왜냐하면 흐름들을 타고앉아 칙접적 부자관계를 노래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순수한 유 목민이란 없고, 이미 채취하며 이탈하면서 포개져 들어가는 것을 기다리 고 있는 사회체가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흐름으로부터 채취된 것들은 시니피앙의 연쇄 속에서 부자관계의 저장 물을 구성한다 ; 그러나 거꾸로 연쇄로부터 이탈한 것들은 結緣의 可動的 負 債 를 구성한다. 이 부채둘은 흐름들의 방향을 정하고 흐름들을 통제한 다. 가족의 저장물인 식탁보 위에서 사람들은 결연의 돌들, 죽 조개들을 순환시킨다. 이 순환에는 이를테면 큰 순환과 작은 순환이 있다. 큰 순환 은 생산의 흐름들과 등기의 연쇄들의 순환이요, 작은 순환은 흐름들을 연쇄 속에 얽어매거나 박아넣는 부자관계의 저장물들과 연쇄둘을 유동시 키는 결연의 블록들- 사이의 순환이다. 혈통은 생산의 흐름인 동시에 등 기의 연쇄요, 부자관계의 저장물인 동시에 결연의 유출이다. 모든 것은 마치 이 저장물이 동키가 등록의 표면의 에네르기, 죽 외견상의 운동의 潛在 에네르기인 듯이 일어난다; 그런데 부채는 이 운동을 현실적으로 指令하는 것, 죽 운동 에네르기이다. 이 에네르기는 등기의 표면 위에서 贈與와 返禮-贈與의 각각의 길에 의하여 결정된다. 쿨라 Kula 에 있어서 는, 목걸이와 팔찌의 순환이 어떤 장소들에서, 어떤 경우에 정지되어 다 시 저장물이 된다. 생산적 연결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부자관계의 이집들이 없이는 생산적 연결둘이 없으나, 결연과 인물들의 혼인을 통하 여 횡적인 연결들을 재구성하지 않는 부자관계의 이점은 없다 . 흐름들과 연쇄들만 아니라, 고정된 저장물들과 가동적인 블록들도구 그 차례가 와서 두 방향에서 연쇄들과 흐름들 간의 관계를 가지게 되는 한, 영속적인 상
대성의 상태에 있게 된다: 이것들의 요소들 , 죽 여자들 , 消費財, 祭具, 權 利, 威信, 地位는 달라진다• 어디에선가 代價의 일종의 균형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요청하게 되면, 관계가 분명히 불균형인 데서는 그것이 병 리학적 결과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병리학적 결과를, 사람들은, 닫 혀 있는 것으로 생각된 체계가 補償給付를 더 크게 늘리고 더 복잡하게 함을 따라 어떤 방향으로 확대되고 열린 것이 된다고 말함으로써 설명한 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원시적인 〈 찬 經濟 〉 와는 모순된다. 이 경제에 는 명확한 투자도 없고, 돈이나 시장도 없고, 교환하는 장사의 관계도 없 다. 그러한 경제의 탄력성은 도리어 規準의 전정한 잉여가치에 있다: 연 쇄로부터의 이탈마다, 생산의 흐름둘의 이쪽이나 저쪽에, 초과와 부족, 결여와 축적의 현상을 생기게 하는데, 이 현상들은 威信울 얻든가 소비 가 분배되든가 하는 교환불가능한 型의 요소들에 의하여 상쇄된다( 〈 首長 은 화려한 축제를 벌여서 소멸하는 가치를 소멸하지 않는 위신에로 바꾼다; 이런 식으로 財物의 소비자가 결국에는 최초의 생산자이다 〉 ).10) 규준의 잉여 가치는, 그것이 모스 Mauss 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定式에 대응하는 한에 서, 잉여가치의 원시적 형태이다: 증여는 욕망과 권력의 土地的 記號요, 재물의 풍부함과 결실의 원리아므로 高利로 갚아져야 하는대, 이렇게 되 게 하는 것은 증여된 물건의 靈 , 즉 그 물건들의 힘이다. 불균형은 병리 10) E. R. Leach, Criti qu e de l'an th r op o log ie , p. 153. 리츄가 레비-人 E 쿠 人 에게 가하고 있는 비판은 다음과 같다: 〈 레바-人뜨쿠人의 다음과 갈은 주장은 정당 하다-결혼이 구조적으로 의미하는 것들은, 결혼을, 친족관계의 그룹들 간의 去來의 전체적 계열 속의 요소들의 하나로 볼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여기까지 는 모두 옳다• 그러나, 그의 저서가 제공하고 있는 例둘 중의 어느 하나에서도, 그는 이 원리를 충분히 전개하지 않고 있다… … . 결국, 그는 그가 다루고 있는 체계들에 있어서 여자의 等價物이 되는 返禮-給付둘의 본성이나 意 義에 대해서 정말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第_原理들에서 출 발하여 어떻게 균형이 얻어지는가를 미리 말할 수는 없다 .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특수한 사회 에서 서로 다른 범주의 給付둘이 어떻게 평가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 소비할 수 있는 재물들과 그렇지 않은 재물을 구별하는 것은 본질적인 일이다; 또한 권리들과 위신 같은 전혀 만져불 수 없는 요소들기 교환되는 물건들의 전 체 목록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pp. 154, 169-171).
학적 결과이기는커녕, 기능을 발휘하는 중요한 것이다. 체계가 열린다는 것은, 처음에는 닫혀 있는 체계가 확대되는 것이기는커녕, 補償給付롤 구 성하고 불균형을 옮겨놓음으로써 불균형을 보상하는 요소들의 이질성 속 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요컨대, 결연의 관계를 따라 시니피앙의 연쇄로 부터 이탈하는 것들은 흐름들의 차원에서 규준의 잉여가치룰 낳는다. 여 기서 부자관계의 혈통둘 간에 지위의 처이가 생긴다. (가령, 여자를 주 는 자와 취하는 자의 身分의 上下•) 규준의 잉여가치는 원시토지기계의 갖가지 조작을 실현한다__연쇄로부터 線分둘을 이탈시키는 것, 흐름으 로부터의 채취를 조직하는 것, 각자에게 귀속되는 몫을 분배하는 것. 원시사회들에는 역사가 없고, 그 사회들이 원형들과 이것들의 ·반복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고 하는 관념은 아주 근거가 박약하고 부적절한 관 념이다. 이 관념은 인류학자들에게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데올로그.들에게 서 생겼다. 죽 유태교 • 그리스도교의 비극적 의식에 애착심을 가져 역사 룰 〈 發明 〉 한 공적을 이 의식에 돌리려 한 이데올로그들에게서 생겼다. 불균형이 기능하거나 균형이 동요하는 상태에서 불안정하지만 항상 보상 되고, 제도적인 갈등들만 아니라 또한 변화 • 반란 • 단절 • 분열을 생기게 하는 갈등들을 내포하는, 사회의 동적이고 열린 현실을 역사라고 부른다 면, 원시사회들은., 전적으로 역사 속에 있으며, 전원이 의견을 같이하는 것이 우선된다는 명목 아래 사람들이 이 사회들에 돌리고 있는 안정이나 심지어 조화와는 거리가 멀다. 모든 사회기계에서의 역사의 現前은 부조 화들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레비-人뜨쿠스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양격둘 속에서는 〈 事件의 무시할 수 없는 표적을 찾아볼 수 있다〉 .11) 그 러한 알력들을 해석하는 방식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관념적으로 는, 현실적 제도와 상상되는 그 이상적 모델 사이의 간격에 의하여 해석 하는 방식 ; 도덕적으로는, 법률과 그 위반의 구조적 연관을 끌어대어 해 석하는 방식 : 물리적으로는, 마치 사회기계가 더 이상 그 素材롤 처리할 능력이 없게끔 하는 磨滅現象이 문제인 듯이 해석하는 방식. 그러나, 여 기서도 역시, 정당한 해석은 무엇보다도 현실적이고 기능적인 해석일 듯 II ) Lev i-St r a uss, Anth r op o log ie str u ctu r ale, Pio n , 1958, p. 132,
싶다: 어떤 사회기계가 잘 作動하지 않아야 한 E 臣· 것은 작동하기 위해서 이다. 이것은 바로 線分 體系에 관하여 보여줄 수 있었던 일이다. 이 체 계는 언제나 자기자신의 폐허 위에 자기를 재구성하도록 운명지어져 있 다. 이와 동일한 사태를 이 체계들에 있어서의 정치적 기능의 조직에서 도 볼 수 있다. 이 조칙은 자기자신의 무능력을 나타냄으로써만 자기를 실제로 작동시킨다 .12) 인류학자들은 친족관계의 규칙들이 실제의 결혼에 서는 적용되지도 않고 또 적용될 수 없다고 줄곧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 규칙들이 이상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그것들이 위험스런 점들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위험스런 점들에서는 裝置가 限止되 는 조건 아래에서 다시 작동하기 시작하며, 또 필연적으로 집단과는· 부 정적 관계에 놓이게 된다. 사회기계와 욕망하는 기계의 동일성이 나타나 는 것은 여기에서이다: 사회기계의 한계가 되는 것은 磨滅이 아니라, 고 장이다; 사회기계는 삐걱거리면서만, 뒤들리면서만, 작은 폭발들을 터뜨 리면서만 작동한다__機能障害는 그 작동 자체의 일부를 이루는대, 이것 은 잔인성의 체계의 가장 적은 측면이 아니다. 알력이나 기능장애가 사 회기계의 죽음을 알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와 반대로 사회기계는 자 기가 유발하는 모순들, 자기가 초래하는 위기들, 자기가 낳는 불안들, 그 리고 자기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지옥의 시련둘로써 자기를 가꾸는 습관 이 있다. 자본주의는 이것을 깨달아, 자기에 관하여 의심하는 일을 그쳤 고, 한편 사회주의자들도 마멸에 의하여 사회기계가 죽는 가능성을 믿는 일을 포기하였다. 모순들 때문에 죽은 사람은 있어본 적이 없다. 그것이 뒤틀어질수록, 그것이 정신분열중화할수록, 그것은 미국식으로 더 잘 작 동한다. 그런데 비록 같은 방식으로는 아니더라도 이미 이 관점에서 원시사회 체, 죽 결연과 부자관계를 거부하는 토지기계를 고찰해야 한다. 이 기계 는 綠分機檢기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족과 가계라고 하는 이중의 장치를 통하여 가변적인 길이의 線分들을 잘라내기 때문이다. 이 선분들은 큰 12) Jea nne Favret, La Segm e nta r it e au Magh reb, L'Homme, avril 1966 : Pie r re Clastr e s, Echange et Pouvoir , L'Homme, jan vie r 1962.
家系, 작은 가계, 最小의 가계의 系譜的 부자관계의 단위들인데, 여기에는 이것들의 位階秩序, 各單位의 首長들, 나이 많은 저장 관리자들 및 결혼의 조직자들이 곁들어져 있다; 또 이 선분들은 제 1, 제 2 제碑] 地區의 部族 的 土地 單位들인데, 여기에도 역시 이것들의 지배영역들과 結緣들이 곁 들어져 있다. 〈 부족지구들 간의 分割點은 各地區에 결부된 ~ 家系들의 氏族 構造의 分岐點이 된다: 氏族들과 家系둘은 뚜렷이 구별되는 疑集的 集團 둘이 아니라, 地緣 共同體에 합체시켜져서 이 공동체 내부에서 구조적으 로 작동한다. 〉 1 3 ) (부족과 가계의) 두 체계는 다시 잘라져서, 각 선분이 흐름들과 연쇄들에, 흐름의 저장들과 통과하는 흐름들에, 흐름으로부터의 채취들과 연쇄들로부터의 이탈들에 결합된다. (어떤 生産作業들은 部族體 系의 들 안에서, 다른 어떤 생산작업들은 家系體系의 틀 안에서 행해전 다.) 부자관계의 양도할 수 없는 것과 결연의 가변적인 것 사이에는 온 갖 相互浚透가 생기는데, 이것들은 선분들의 가변성과 상대성에 유레한 다. 이것은 각 선분이 서로 간에 서열을 이루는 일련의 段階系列 속에서 다른 선분들과 대립함으로써만 자기의 길이를 재고 또 특정한 선분으로 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線分機賊는 부자관계가 변동하고 결연이 유동하 는 동안, 경쟁 • 갈등 • 단절을 碩造한다. 체계 전체는 두 극 사이룰 왔다 갔다한다. 이 두 극의 하나는 디론 집단들과 대결함으로써 융합하는 융 합의 극이요 , 디론 하나는 결연과 부자관계를 자본으로 삼아, 독립을 갈 망하면서 새로운 가계를 끊임없이 형성함으로써 생기는 분열의 극이다. 한 극에서 다른 극에 이르는 全域에 걸쳐, 자기자신의 알력들로부터 끊 임없이 다시 태어나는 체계 안에서 온갖 고장과 온갖 좌절이 생건다. 쟌 느 파브레 Jea nne Favre t는, 다른 인류학자들과 함께 〈線分組織의 완강 함은 逆說的으로 그 메커니즘들이 충분히 유효하지 못하여 이 두려움이 조직 전체의 원동력으로 있어주기를 요구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데, 이때 그녀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도대체 어떤 두려움인가? 사회조 직체들은 그것들에 들이닥치는 것을, 이것이 비록 언제나 의부로부터 들 13) E.E. Evans- P rit ch ard, Les Nouer du Soudan merid i o n al, in Sy s- tem es po liti qu es afr ic a in s , 1962, tr. fr. P.U.F., p. 248.
이닥치고 또 그 開口部分속에 밀려들기는 해도 이것을 치명적이고 우울 한 예감을 가지고 예감한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아마 이런 이유로 해서 그것이 의부로부터 그들에게 둘이닥치는지도 모른다; 사회조직체들은 기 능장애라고 하는 희생을 치르고서 그 내부적 참재력을 질식시킨다. 이 기능장애는 이때부터 사회조직체들의 체계의 작동의 필요불가결한 부분 울이룬다. 線分土地樓刺논 분열에 의하여 융합을 쫓아버리고, 웁長制의 器官들을 집단과의 관계에 있어서 무력하게 함으로써 권력의 집중을 막는다: 마치 야생인들 자신이 帝國의 야만인의 등장을 예감했던 듯싶은데, 이 야만인 은 밖으로부터 와서 야생인들의 모든 規準울 超規準化한다. 그러나 가장 큰 위험은 분산, 분열인데, 분열은 규준의 모든 가능성을 없애버린다: 脫 規t한 흐름들은 맹목적이고 말없는 사회체 위를 흐르면서 脫土地化하 는데, 이와 같은 일은 원시기계가 전력을 다하여 그 모든 선분조직을 가 지고 쫓아버리는 악몽이다. 원시기계는 교환, 싱업 및 공업을 모르는 바 아니며, 이것들을 쫓아버리고, 局地化하고, 지구별로 나누·고, 제한하고기 상 인과 대장장이를 종속적 지위에 묶어둔다. 이것은 교환과 생산의 흐름이 자기들의 추상적인 혹은 허구적인 量의 이익이 되도록 규준둘 을 파괴하 러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또한 오이디푸스, 즉 근친상간에 대한 공포가 아닌가?: 즉 탈규준화한 흐름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가? 자본주의가 보편적 진리라면, 이것은 자본주의가 모든 사회조직 체의 陰畫라고 하는 의미에서이다; 자본주의는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것, 反對推論에 의하여 모든 사회조직체의 秘密을 이해하게 해주는 흐름들의 일반화된 탈규준화이다. 이 탈규준화는 어떤 것이 규준화에서 빠져나간다기보다는 오히려 흐름들을 규준화하고 심지어 초규준화하기도 하는 것이다. 원시사회들은 역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야말로 역사의 종말에 존재한다. 자본주의는 우발적인 우연한 사건들의 오랜 역 사의 결과로 생기며, 이 종말을 도래하게 하는 것이다. 그 이전의 사회조 칙체들이 이러한 사태를 예견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사태는 안에서 생김으로써만, 또 그것이 생기는 것이 방해를 받기 때문에만 밖
으로부터 온다. 이런 까닭에 역사 전체를 자본주의와의 관계에서 회고적 으로 읽는 가능성이 생긴다.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들에서 계급둘의 칭조 를 찾아보는 것은 이미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인류학지들은 이 原階級 둘을 帝國機械에 의하여 조직된 카스트들과, 原始線分機械에 의하여 배분 된 신분들과 구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지적하고 있다. 계급, 카 스트 및 신분을 구별하는 기준들은 고정성이나 침투성, 상대적으로 닫혀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열려 있는가 등에서 찾을 것이 아니다; 이 기준들 은 언제나 믿을 수 없고 아주 기만적이다. 그런데 身分은 원시토지기계 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데, 이것은 마치 키스트가 帝國의 國家的 超規準 化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과 갇다; 한편, 계급은 자본주의의 조건들 아래서의 상공업 ' 생산의 과정과 상관적이다. 그러므로 계급들의 칭조 아 래 歷史 전체를 읽을 수는 있으나, 이것은 마르크스가 가르쳐준 규칙들 울 지킴으로써, 또 계급들이 카스트둘과 신분들의 陰畫인 한에서만 가능 한 일이다. 왜냐하면 확실히 脫規準{t의 체제는 조직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음침한 조직, 가장 힘든 計量化 活動울 의미하는 것이 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언제나 反對推論에 의하여, 규준들을 대체하며 규 준들을 내포히는 公理系를 의미한다.
3 오이디푸스 문제 大地의 충만한 신체에는 구별이 없는 바 아니다. 참고 견디며, 위험스 러우며, 독자적이고 보편적인 그것은 생산과 하나가 된다. 죽 생산의 動 因들 및 연결들과 하나가 된다. 그런데 이 신체 위에는 또한 모든 것이 달라붙고 登記되고, 모든 것이 끌어당겨지고 기적을 일으킨다. 그것은 離 接的 綜合의 境域이요, 또 이 종합의 재생산의 경역이다. 거기에는 부자 관계나 계보의 순수한 힘, 죽 누멘이 있다. 이 충만한 신체는 발생된 것 이 아니지만, 부자관계는 이 신체 위에 자국을 남긴 등기의 최초의 성격 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强度 있는 부자관계, 이 包含的 이집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분할되지만, 다만 그 자체 안에서 분할되 며, 또 여기서는 - 强度의 · 差異를 제외하고는 동일한 존재가 도처에, 모든 측면에, 모든 차원에 있다. 이 포함된 동일한 존재는 충만한 신체 위에서 분할될 수 없는 거리들을 편력하며, 모든 단일체, 죽 移行하면서 자기를 재생산하는 종합의 모든 강도를 지나간다. 계보적인 부자관계가 사회적 인 것이고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리는 것을 상기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 그것은 대지의 충만한 신체의 우주적인 알 위에 등기되어 있는 만큼 생물적-사회적이다. 그것은 신화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 기원은 一者(죽 하나인 것), 혹은 오히려 원초적인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그것을 쌍둥이들이라 할까, · 쌍둥이라 할까? 이 쌍둥이는 분할 되어 있으면서도 그 자신에 있어서 결합되어 있다. 또 그것을 놈모 Nommo 라 하랴, 놈모들이라 하랴? 이집적 종합은 최초의 조상들을 배분
하지만, 각 조상 자신은 수컷이면서 암컷인 완벽한 충만 신체요, 모든 부 분적 대상을 다만 강도만을 달리하여 자기에게 응집시키고 있다. 이렇게 강도를 달리하는 것은 도공 do g on 族의 알의 내부에서의 지그재그(갈짓 자)에 대응한다. 각 조상은 그 나름으로 계보 전체를 강도 있게 되풀이 한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일은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인데, 분할될 수 없는 거리들의 두 끝에서나, 또 모든 측면에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쌍둥이들 의 連 l 요, 강도 있는 부자관계이다. 마르셀 그리올르 Marcel Gr i aule 와 제르맨느 디떼를랑 Germa ine D i e t erlen 은 『창백한 여우』의 첫머리에서 하나의 훌륭한 記號理論을 묘사하고 있다: 부자관계의 기호들은 指針記號 둘이며 으뜸가는 기호들인데, 무엇보다도 강도 있는 욕망의 기호들이다. 그것들은 圖像들, 圖形들 및 圖面들 속에 퍼지기 전에 나선형을 그리면서 떨어져 일련의 폭발을 횡단한다. 충만한 신체가 생산의 연결들과 하나가 되고 이것들을 강도 있고 포함 적인 이접들의 그물 속에 동기하면 그것은 이 그물 자체 속의 측면적 연 결들을 재발견하고 이것들에다가 다시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이 또한 필요하며, 자기가 이것들의 원인인 양 이것들을 자기에게 귀속시키는 것 이 또한 필요하다. 이것들은 충만한 신체의 두 양성이다. 그것은 마법에 걸린 동기표면이요, 환상적인 법칙 혹은 의관상의 객관적 운동이지만, 또 한 마술적 혹은 物神的 動因이요, 準原因이다. 충만한 신체에게는 모든 것 울 등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을 생산 하듯기 일을 꾸려가야 한다. 설사 연결들이 등기된 이점들에 반발하는 일이 있다 해도, 이 연결둘은 이 이집들과 양립할 수 있는 형태로 다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것이 등기의 둘째 특성으로서의 결 연이다: 결연은 생산적 연결에다가 인물들의 혼인이라고 하는 의연적 형 태를 강요하는데, 이 형태는 등기의 이집과 양립할 수 있다. 그러나 거꾸 로 결연은 등기에 발발하여 이 동일한 이접들의 배타적이고 제한적인 사 용을 결정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결연은 어느 순간 갑자기 부자관계의 혈통 속에 일어나는 것으로서 신화적으로 표상하는 일이 강요된다. (다 른 의미에서는 결연이란 것이 이미 언제나 있어온 것이기는 해도 말이
다.) 그리울르는 도공족에게 있어서, 어떤 것이 어느 순간 여덟번째 조상 의 차원과 측면에서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집들이 常 軌를 벗어나 포함적이기를 그치고 배타적으로 된다 ; 이렇게 되자마자 충 만한 신체는 해체되고, 쌍둥이는 숫제 없어져 버리고, 성이 둘로 나뉘어 割禮에 의하여 표시된다. 그러나 또한 연결이나 혼인의 새로운 모델을 따라 신체가 재구성되고, 신체들이 그 자체로 혹은 피차간에 뼈를 관절 에 잇고, 이렇게 잇는 역할을 하는 결연의 돌들을 가지고 측면적 등기를 한다. 요컨대, 결연의 方舟가 있게 된다 .14) 결코 결연은 부자관계에서 파 생되지도 않고, 연역되는 것도 아니다 . 그런데, 이 원리가 정립되면, 우리 는 두 관점을 구별해야 한다: 하나는 경제적 및 정치적 관점이다. 이 관 점에서는 결연이 넓혀진 부자관계의 家系돌과 결합되며 또 이 가계들을 내세우면서 언제나 있어왔다. 이 가계둘은 外延울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체계 속에 결연에 앞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관점은 신 화적 관점이다. 이 관점은 어떻게 體系의 外延이 강도 있는 최초의 부자 관계의 가계들에서 출발하여 형성되고 제한되는가를 밝힌다. 이 가계들 은 필연적으로 그것들의 포함적인, 즉 비제한적인 사용을- 상실한다. 바로 이 관점에서 보면 넓혀진 체계는 결연과 말의 기억처럼, 부자관계의 강 렬한 기억에 대한 적극적 억제를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계보와 부자 관계들이 언제나 세심한 기억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것들이 이미 넓혀지 는 의미에서 파악되는 한에서이다. 결연이 이러한 의미를 계보와 부자관 계들에게 주는 규정이 있기 전에는 확실히 이것들은 이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부자관계들이 강도 있는 것인 한, 이것들은 특별한 기억, 밤의 생물적-우주적 기억의 대상이 되며, 넓혀진 새로운 기억이 들어서려면 정녕 억제를 당해야 하는 기억이다. 왜 문제가 부자관계로부터 결연에로 가는 데에 전혀 있지 않고, 혹은 후자를 전자로부터 끌어내는 데에도 전혀 있지 •않 는가를 우리는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에네르기의 강도의 질서로부터 의연의 체계에로 옮아가는 데에 있다. 이 체계는 자격에 관계가 있는 결연과 넓혀진 부자 14) Marcel Gria u le, Di eu d'eau, Fay ar d, 1948, 특히 pp. 46-5 2.
관계를 동시에 포함한다. 강도의 질서의 최초의 에네르기-누멘 __ 가 부자관계의 에너지라고 하는 것은 사태를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왜 냐하면 이 강력한 부지관계는 아직 넓혀져 있지 않고, 아직 인물들의 구 별도 심지어 성의 구별도 내포하고 있지 않고, 다만 인물 이전의 강도에 있어서의 변동만을 내포하고 있고 서로 다른 여러 정도로 파악된 쌍둥이 의 상태나 男女兩性 狀態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질서의 기호들은 (라이프니쯔가 +일 수도 _일 수도 있는 記號롤 가리 키기 위하여 사용한 표현을 따르면) 근본적으로 중성이거나 兩義的이다. 문제는 어떻게 이 최초의 강도에서 출발하여 다음과 같은 사태들을 생기 게 하는 외연의 체계에 옮아갈 수 있는가를 아는 일이다. 1) 부지관계가 가계의 형태로 넓혀진 부자관계가 되어, 부모의 인물의 구별과 호칭의 구별을 내포하게 되는 사태 ; 2) 결연이 동시에 자격과 관련된 관계가 되는데, 이 관계가 넓혀진 부자관계를 전제하는 만큼 이 부지관계가 또 한 이 관계를 전제하는 사태 ; 3) 요컨대, 양의적인 강력한 기호들은 이 런 것이기롤 그치고 플러스나 마이너스로 되는 사태. 레비-人― E루 ^가 결혼의 단순한 형태로서 平行 사촌 형제자매 간의 결혼의 금지와 交又 사촌 형제자매 간의 결혼의 권장을 설명하고 있는 여러 페이지에서 이러 한 사태를 분명히 볼 수 있다: 두 가계 A 와 B 서이의 결혼마다 이 부 부가 A나 B 에게 있어 여자를 획득한 결과인지 혹은 잃은 결과인지에 따 라 <+ > 혹은 〈― 〉 의 기호가 매겨진다. 이 점에서는 부자관계의 체제가 부계인가 모계인가 하는 것은 거의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 가령 부계이 며 아버지 집에 사는 체제에 있어서는, 〈親族의 여자들은 잃어진 여자들 이요, 姬咸의 여자들은 획득된 여자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결혼에서 생 긴 가족마다, 아이들의 어머니가 그 집단에 대해서 딸인지 혹은 며느리 인지에 따라 결정되는 기호를 얻게 된다……. 형제에서 자매에로 옮아가 면 기호가 달라진다. 왜냐하면 형제는 아내를 획득하는데 한편 자매는 그 자신의 가족에 있어서 잃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비-스 트로스는 세대가 바뀜에 따라 기호 역시 바뀐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 자신의 집단의 관점에서 보아, 아버지가 아내를 받았는지 혹은 어머
니가 밖으로- 내보내어졌는지에 따라, 그 아들들은 한 여지에 대하여 권 리를 가지거나 혹은 누이를 하나 내보내야 한다. 아마 이 차이는, 현실에 서는, 사촌 형제들의 절반이 독신생활을 해야만 한다는 것으로 해석되지 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경우에나, 한 남자는 선행하는 세대에 한 자매나 한 딸을 주었기 때문에 한 여자를 요구할 수 있는 상대방의 집단 으로부터만 아내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법칙을 표현하고 있다. 한편 한 형제는 선행하는 세대에서 한 여자를 획득했기 때문에 한 자매를 바깥 세상에 내어주어야 한다. (혹은 아버지는 딸을 하나 내어주어야 한다.) …… 한 남자 a7} 한 여자 協} 결혼하여 형성된, 主軸울 이루는 부부에 관해서 말하면, 이 부부는, 사람들이 이 부부를 A 의 관점에서 보는가 B 의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분명히 두 가지 기호를 갖는다. 그 아이들에 게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 혹은 ‘--’의 관계에 있는 것 은 모두 평행이고, ‘+-’ 혹은 ‘-+'의 관계에 있는 것은 모두 교차라 고 하는 것을 확인히는 데에는 이제 사촌들의 세대를 보는 것으로 충분 하다.〉 IS) 그런데, 문제가 이렇게 제기되면, 레비-스뜨-쿠스가 바랐던 것처 럼, 교환하는 일을 규제하는 논리적 결합술을 실제로 해보는 것이 문제 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본래는 負債로써 표현되어야 할 자연체계의 설립 이 문제가 된다. 레비-人드쿠人는 이 자연체계를 하나의 은유로만 보지 만, 그 자신이 이 체계의 좌표를 援用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 여겨진다. 의연을 가전 의연체계에서는, 에네르기의 흐름 의 질서에 속하는 어떤 것(+- 혹은 -+)은 流通하고, 어떤 것은 유통 하지 않거나 저지된 채로 있다. 어떤 것은 유통을 저지하고, 혹은 이와 반 대로 유통을 생기게 한다. 어떤 물건 혹은 어떤 사람을 그렇게 한다. 그 래서, 의연을 가진 이 체계 안에는 최초의 부자관계도 없고, 최초의 세대 죽 처음의 교환도 없다. 그렇지 않고 언제나 또 이미 결연둘이 있고, 동 시에 부자관계들은 넓혀진다. 이 결연둘은 부자관계에서 저지된 채로 있 어야 하는 것과 결연에로 이행해야 할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15 ) Lev i-S t ra uss, Les Str u ctu r es elementa i r e de la pa rente , 2 °ed., Mont on , 1967, p. 152.
본질적인 것은 기호들이 성과 세대에 따라 변화한디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강도 있는 것으로부터 의연적인 것에로 이행한다는 것, 죽 양 의적인 기호들의 질서로부터 변화는 하지만 일정한 기호들의 체제로 이 행한다는 것이다. 신화에 의지하는 것이 불가결하게 되는 것은 바로 여 기에서이다. 이것은 신화가 의연에 있어서의 현실적 관계들을 그대로 옮 겨놓은 표상이거나 심지어 이것들을 뒤집은 표상인 때문이 아니고, 신화’ 만이(생산의 체계를 포함하여) 체계의 강도 있는 상태들을 土着人의 사 상과 행동에 대응시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어머니 편 의 숙부가 우선권을 갖는) 叔權制를 설명하는 원리를 신화에서 찾는 마 르셀 그리올르의 텍스트는 우리에게는 결정적인 것으로- 보이며, 또 이런 종류의 시도에 대해서 항용 가해지는 관념론의 비난에서 벗어나 있는 것 으로 보인다 ; 아들러 Adler 와 카트리 Car t r y가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고 있는 최근의 논문에서도 사태는 마찬가지이다 .16) 이 저자들이 다음과 같 은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옳은 일이다- (형제-자매, 남편-아내, 아 버지-아들, 外叔父-妹妹의 아들의 네 가지 관계를 가지고 있는) 레비 人뜨쿠人의 親族原子는 완전히 다 되어 있는 하나의 전체로서 주어져 있 는데, 여기서 어머니는, 그 아이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경우에 따라 다소 간에 〈 親族 〉 이거나 〈 姬咸 〉 일 수는 있으나, 이상하게도 제의되고 있다. 그런데 신화의 뿌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신화는 사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태의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울르가 보고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자기가 그 한 조각을 훔천 胎盤속에 깊숙이 들어가는 유루구 Yourou g ou( 神의 아들)는 이렇게 어머니와 하나가 됨으로써 마치 어머니 의 형제와 같다: 〈 이 인물은 실상 영양을 주는 태반의 일부, 죽 그 자신 의 어머니의 일부를 가지고 세상에 나온다. 그는 또 이 器官이 본래 자 기에게 속하고 그 자신의 인물의 일부가 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그는 자기를 낳은 어머니와 동일시하고, 특히 이 경우에는 세계의 子宮과 동 16) Marcel Gria u le, Remarqu es sur l'on cle ute r in au Soudan, Cahie r s int e r natio n aux de socio lo g ie, jan vie r 1954; Alf red Adler et Mi ch el Cartr y , La Transgr e ssio n et sa deris i o n , L'H o mme, juille t 1971.
일시하고, 世代의 관점에서는 어머니와 동일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상징적으로 자기의 어머니의 세대에 속 하고 자기의 현실적 세대로부터는 이탈되어 있다고 느끼고 있다……. 그 에 의하면 그는 그의 어머니와 같은 實體로 되어 있고 같은 세대에 속한 다. 그는 자기를 자기를 낳은 어머니의 남성 쌍둥이로 본다. 또 부부가 되는 두 사람의 결합에 관한 신화적 규칙은 그를 이상적인 남편으로 내 세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를 낳은 어머니의 擬似 兄弟의 자격으로 그의 外叔父의 자리에 있어, 이 여자의 지정된 남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 이 차원에서는 등장할 인물은 모두, 죽 어머니, 아버지, 아들, 어머 니의 형제, 아들의 자매가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등장인물들이 사실 은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며,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들의 이름 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인물들이 아니라, 〈진동하는 나선형 운동 〉 의 강 도 있는 변동들, 포함적 이집들, 필연적으로 쌍둥이인 그리고 兩性인 상 태들이다. 이 상태를 통하여 한 주체는 우주적인 알에로 이행한다. 모든 것은 강도로써 해석되어야 한다. 알과 태반은 〈增減하는〉 무의식의 힘찬 에네르기에 의하여 편력된다. 아버지는 결코 부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 버지요 낳는 자인 암마 &nrna 는 그 자신 태반에 내재하는 강도 있는 높 은 부분이요, 그를 그의 여성적 부분에 관계시키는 쌍둥이의 성격과 나 눌 수 없다. 그래서 아들인 유루구가 이번에는 태반의 일부를 가지고 나 오는 것은 그 자신의 자매 혹은 쌍둥이인 자매를 포함하는 태반의 다른 부분과의 강도 있는 관계 속에서이다. 그런데, 그가 가지고 나온 부분은 너무 높은 데를 바러봄으로써, 그를 그 어머니의 형제가 되게 하며, 이 어머니는 뛰어나게 자매의 자리를 차지하므로 그는 암마 대신 어머니와 맺어지게 된다. 요컨대, 이것은 온통 양의적인 기호들, 포함적 구분들· 및 남녀 양성상태들의 세계이다. 나는 내 어머니의 아들이요 또한 형제이며, 내 자매의 남편이요, 나 자신의 아버지이다. 모든 것은 대지가 된 태반에 지탱되어 있다. 이 태반은 발생한 것이 아니요, 反生産의 충만한 신체인 데, 회생된 놈모의 부분적 대상들인 기관들은 이 신체에 부착되어 있다. 이것은 태반이 어머니와 아이에게 공통되는 실체인 한에서, 그들 신체의
공통의 부분이요, 이 신체들을 원인과 결과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두 신체가 다 같이 이 동일한 실체에서 파생되는 두 개의 생산물이 되게 하 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동일한 실체와의 관계에 있어 아들은 자기의 어 머니의 쌍둥이이다. 바로 이런 것이 그리울르가 보고한 도공족의 신화의 樞軸이다. 그렇다, 나는 내 어머니였고, 나는 내 아들이었다 . 신화와 과학 이 아주 먼 거리를 피차간에 두면서도 똑같은 것을 말하는 일은 혼치 않 은 일이겠다 : 도공족의 이야기는 신화의 바이스만 We i smann 주의를 전 개하고 있다. 바이스만주의에서는 發茅的 플리스마가 連綿하는 不死의 혈 통을 형성하고 있고, 이 혈통은 신체들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부모의 신체와 아이들의 신체는 다 같이 이 플러스마에 의존하고 있다. 여기서 두 개의 혈통의 구별이 생간다. 하나는 旺種의 연속하는 혈통이 요, 디론 하니는 육체의 비연속적 혈통이다. 이 후자만이 世代의 繼起에 지배된다. (뤼센코 L y ssenko 는 본질적으로 도공족의 것이라 볼 수 있는 酷麟 바이스만에 반대하고, 바이스만이 아들을 어머니의 遺傳的旺種的 인 형제가 되게 한 것을 비난하였다: 바이스만의 뒤를 이어, 모간 Mor g an 주의자들과 멘델 Mendel 주의자들은, 부모가 유전적으로는 그들의 아 이들의 부모가 아니라고 하는 觀念에서 출발한다: 그들의 敎說을 믿는다 면, 부모와 아이들은 형제요 자매이다…… .)17)
17) La Sit ua ti on dans la scie n ce bio l og iqu e, Ed. Fran~a ise , Moscou, 1949, p. 16.
그런데 이들은 육체적으로는 어머니의 형제도 아니고 쌍둥이도 아니 다 . 이런 까닭에 아들은 어머니와 결혼할 수 없다. (이 〈이런 까닭에〉란 말의 뜻은 우리가 조금 전에 설명한 바 있다.) 그러므로 어머니와 결혼 했어야 했던 사람은 의숙부이다. 여기서 나오는 첫째 귀결은 다음과 갇 다: 자매와의 근친상간은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의 대용물이 아니고, 이와 반대로 旺種의 혈통을 - 드러내는 것으로서 근친상간의 강도 있는 모델이 다. 그 다음의 귀결은 다음과 같다: 햄릿은 오이디푸스의 하나의 연장, 죽 둘째 단계의 오이디푸스가 아니다; 이와 반대로 오이디푸스와 관련시 켜 말하면 부정적인 혹은 뒤집힌 햄릿 같은 사림이 오이디푸스보다 근원
적이다. 이 주체는 자기가 하기를 원했던 것을 숙부가 한 것에 대하여 숙부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그는 아들인 자기가 할 수 없었던 것을 숙부 가 하지 않은 데 대해서 숙부를 비난한다. 그런데 숙부는 어머니 죽 그 의 육체상의 자매와 결혼하지 않았는가? 그 까닭인죽 그는 쌍둥이 상태 와 男女兩性의 양의적 기호로 표시된 旺種의 부자관계의 명목으로만 결 혼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배종의 부자관계를 따른다면 아들· 역시 어 머니와 암만이고 결혼할 수 있었고, 또 그 자산이 쌍둥이인 어머니와의 강도 있는 관계에서는 이 숙부일 수 있었다. 배종의 혈통의 순환론법은 닫힌다(原始的 二重拘束): 숙부도 그의 자매, 죽 아들의 어머니와 결혼할 수 없다; 또 이 순간부터 아들은 자기자신의 자매와 결혼할 수 없다―― 유루구의 여자 쌍둥이는 잠재적 인척으로서 놈모들에게 내맡겨질 것이 다. 육체의 질서는 강도 있는 모든 단계를 다시 倒~壤시킨다. 그러나 이 점에서 아들이 그의 어머니와 결혼할 수 없는 것은 아들이 육체적으로 다른 세대에 속하고 있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말리노스키에 반대하여 레비-人E 쿠 스가 잘 지적한 것은, 세대의 혼합은 세대의 혼합으로서는 결코 두려워할 것이 아니었고, 근친상간의 금지는 이런 것으로는 설명되 지 않는다는 것이다 .18) 이것은 아들-어머니의 경우에 있어서의 세대의 혼합은 세대의 대웅관계에 있어서 숙부-자매의 경우와 마찬가지이기 때 문이다. 즉 아들-어머니의 세대의 혼합은 강도 있는 배종의 오직 하나의 동일한 부자관계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요, 이렇게 되면 두 경우의 어 느 경우에 있어서나 그런 부자관계를 억제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요컨 대, 의연을 가진 육체적 관계는, 측면적 결여들이 제도적으로 확립되는 것과 상관적으로, 부자관계들이 넓혀지는 한에서만 구성될 수 있다. 측면 적 결연이 이루어지는 것은 자매와의 근친상간의 금지에 의해서요, 부자 관계가 확대되는 것은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의 금지에 의해서이다. 여기 에는 아버지의 억제가 전혀 없고, 아버지의 이름의 배제도 전혀 없다; 친족 혹은 인척으로서의 어머니나 아버지의 각각의 위치, 부자관계의 부 계적 혹은 모계적 성격, 결혼의 아버지 편의 혹은 어머니 편의 성격은 18) Lev i-S tr auss, Les Str u ctu r es elementa i r e s de la pa rente , pp. 556-560.
억제의 능동적 요소들이지만, 억제되는 대상은 아니다• 결연의 기억에 의 하여 억제되는 것은 부자관계의 記憶 一般도 아니다 . 의연을 가진 육체적 기억은(父系系이거나 母系的이거나) 확대된 부자관계들과 이것들이 전제 하는 결연들로 형성되어 있으므로, 이 기억을 위하여 강도 있는 배종의 부자관계의 위대한 밤의 기억이 억제된다. 도공족의 신화 전체는 두 계 보, 두 부자관계 사이의 대립에 대하여 부계적 입장에서 설명한 것이다. 이 두 가지 것의 한 쪽은 강도 있는 계보, 죽 강렬한 배종의 질서요, 다 론 한 쪽은 의연적인 계보, 죽 육체적 세대들의 의연적 체제이다. 외연을 가전 체계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강도 있는 상태들에서 생기 지만, 이것들에 반작용하고, 이것들을 無效하게 하고, 이것들을 억제하여 신화적으로만 표현하게 된다. 동시에 기호들은 양의적이기를 그치고 넓 혀진 부자관계와 측면적 결합과의 관계에서 규정된다. (이것이거나 저것 이거나의 택일이 강렬한 〈 ……이건 ……이건 〉 대신에 들어선다); 이름 들, 호칭들은 더 이상 강도 있는 상태들을 가리키지 않고, 식별 가능한 인물둘을 가리킨다. 식별가능성이, 배우자로서 금지된 자매와 어머니에게 정착한다. 이제 그들을 가리키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은 그들을 그런 인물로서 구성하는 금지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머니와 자 매는 아들을 배우자로 금지하기 전에는 어머니와 자매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로베르 졸랭 Robert J aul i n 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잘 말하고 있 다: 〈 신화적 언설은 근친상간에 대한 무관심으로부터 그 금지에로의 이 행을 주제로 삼고 있다: 은연중에 혹은 명백하게, 이 주제는 모든 신화 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 언어의 정식의 재산이 다.〉 19) 근친상간에 관하여는, 문자 그대로 그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 할 수도 없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근친상간의 이쪽에 있거나, 저쪽에 있다; 이쪽이라 함은 식별 가능한 인물들을 알지 못하는 일련의 강도 속이요, 저쪽이라 함은 그 인물들을 알아보고 구성하지만 성의 파트너가 될 수는 없는 것으로서 구성하는 하나의 의연 속이다. 근 친상간을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우리를 근친상간에서 멀어지게 하는· 19) Robert Jau lin , La Mort s ara, p. 284.
일련의 대체지를 통해서만이다. 죽 어머니나 자매가 아니기 때문에만 어 머니나 자매와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인물과만 근친상간을 할 수 있 다. 이 여자는 배우자가 될 수 있다고 식별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우선적 결혼의 의미이다: 허용되는 첫번째 근친상간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혼이 마치 아직은 현실적으로 거의 존재할 수 없는 듯 드물게만 실현 된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가령, 도공족에 있어서의 숙부의 딸 과의 우선적 결혼. 이 경우 이 딸은 숙모와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고, 숙모는 숙모대로 어머니와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울르의 논문 은 아마도, 인류학 전체에서, 정신분석의 영향을 가장 깊이 받은 텍스트 이다. 하지만 그의 논문은 오이디푸스 전체를 폭파시키는 결론들을 내포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논문은 문제를 넓게 제기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었다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들러와 카트리 는 바로 이 결론들을 끌어낼 수 있었다 : 〈사람들은 신화 속의 근친상간 적 관계들을, 그러한 관계들이 가능한 혹은 그러한 관계들에 무관심한 세계에 대한 욕망 내지 향수의 표현으로기 혹은 사회적 규칙을 전환시키 는 구조적 기능, 즉 금지와 그 위반을 생기게끔 하는 기능의 표현으로 흔히 본다……. 이 두 경우의 어느 것에 있어서나, 사람들은 신화가 이 야기하고 설명하고 있는 질서가 그야말로 출현했디는 것을 이미 굳어진 사실로 인정한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들은 마치 신화가 아버지, 어머니, 아들 및 자매로 규정된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있는 듯이 추론한다. 그런 데 이 친족적 역할둘은 금지에 의하여 구성된 질서에 속한다……. 근친 상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근친상간은 순전히 하나의 한계이다. 여기서 한계라 하는 것은 두 가지 그릇된 믿음을· 피해야 하는 조건하에서이다: 20) Adler et Cartr y , La Transgr e ssio n et sa deris i o n , L'Homme, jui l let 1971 . 작 데리다J ac q ues Derr i da 는 루소를 주석하면서 다음과 갇이 적었 다 : 〈축제 전에는 근친상간이 없었다. 왜냐하면 근친상간의 금지가 없었기 때문 이다. 축제 후에는 이제 더 이상 근친상간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금지되고 있 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어떤 것이-그 자체-있게 될 수 있다면 축제 가 그 자체 근친상간 자체일 것이다〉 (De la gram ma tol og ie, Ed. de Mi nu it, 1967, pp. 372-377).
그릇된 믿음의 하나는, 마치 금지가 사물이 〈 먼저 >그 런 것으로서 욕망 되었다는 것을 증명이나 한 듯, 한계를 자궁이나 근원으로 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욕망과 법률 사이의 〈 근본적 〉 이라 여겨지는 관계가 금지에 대한 위반에서 이루어지는 듯, 한계를 구조적 기능으로 보는 것이다. 여 기서 한번 더 다음의 두 가지 것을 상기해야 되겠다: 첫째는, 법률이 욕 망의 근원적 현실에 대해서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 면 법률은 본질적으로 욕망을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위반 이 법률의 기능적 현실에 대해서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위반은 법률에 대한 조소이기는커녕, 그 자체 법률이 실제로 금지하고 있는 것에 대한 조소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혁명들은 위 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요컨대, 한계는 이쪽에도 없고, 저쪽에도 없 다: 그것은 이쪽과 저쪽의 경계선이다; 근친상간이 이 경계선인데, 이것 은 그다지 깊지 않은 개울로서 공연히 비난을 받고 있다; 이 개울은· 언제 나 이미 건넜거나 아직 건너지 않은 개울이다. 왜냐하면 근친상간은 이 개울을 건너는 운동과 같은 것이어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현실이 그렇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상징으 로서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런데 근친상간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의 자 매나 자기의 어머니와 동침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닌가? 또 근친상간 은 금지되어 있으니까 그것은 아주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낡은 논의를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 그러나 문제는 딴 곳에 있다. 근친상간이 가능하 려면, 아들, 자매, 형제, 아버지라고 하는 인물들과 이름들기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근친상간의 행위에서 우리는 아무하고나 교집할 수 있으나, 이때 이들의 이름이 이들을 파트너로 하지 못하게 하는 금지사항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한 이들은 자기의 이름을- 잃는다; 혹은 이름들이 존속하는 경우에는, 그 이름들이 이제는 인물 이전의 강도 있는 상태들만을 가리 키며, 사람들이 자기의 합법적인 아내를 마망(엄마)이라고 부르고 혹은 자기의 배우자를 누이 혹은 누나라고 부르듯이 이 안물 이전의 강도 있 는 상태둘이 다른 인물들에게 암만이고 〈확대〉될 수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근친상간의) 이쪽이나 저쪽에 있다 〉 고 우리가 말한 것은 이 의 미에서이다. 우리들의 어머니들, 우리들의 자매들은 우리들의 팔 사이에 서 溶鮮한다; 그들의 이름은 너무 젖은 우표처럼 그들의 이름 위를 미끄 러져 지나가버린다. 이것은 인물과 이름을 동시에 향수할 수는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_그런데 이 동시 향수야말로 근친상간의 조건이다. 설 사 근친상간이 있다 해도, 그것은 하나의 울가미요, 불가능한 것이다. 그 러나 문제는 후되했을 따름이다. 불가능한 것을 욕망하는 것이 욕망의 고유한 성질이 아닌가? 적어도 이 경우, 이러한 전부한 소리는 전혀 가 당치 않다.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금지되어 있는 것의 본성을 결 론으로 끌어내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가를 우리는 상기한다; 왜냐하면 금 지는 금지사항을 어긴 사람을 불명예스럽게 함으로써 시작되기 때문이 다. 즉, 실제로 금지되어 있거나 욕망되고 있는 것에 대한 왜곡되고 옮겨 놓아진 심상을 끌어넣음으로써 시작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억 압은 억제를 통하여 자기의 힘을 신장시킨다. 이 억제가 없으면 억압이 욕망을 장악하지는 못할 것이다. 욕망되고 있는 것은 강렬한 배종의 발 아적인 흐름이요, 이 흐름 속에서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 자매 등등으로 식별될 수 있는 인물들을 찾아보아도 헛수고다. 왜냐하면 이 이름들이 거기서 가리키고 있는 것은 배종으로서 규정된 대지의 충만한 신체 위에 있는 강도의 변동들만이기 때문이다. 포함적 이집들을 따라 강도가 변동 하는 이 유일의 동일한 존재, 즉 흐름의 체제는 언제나 근친상간이라 부 를 수도 있고, 근친상간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바 로 다음의 두 가지 근친상간을 혼동할 수는 없다. 죽, 근친상간을 제도적 으로 인정하는 非人物的인 강도의 체제 속에 있는 것 같은 근친상간과, 근친상간을 금하고 근친상간을 인물에 대한 위반이라고 규정하는 상태에 서 의연적으로 표상되는 것 감은 근친상간을 혼동할 수는 없다. 그러므 로 융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그것 자체와는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 며, 어머니는 거기서 대지이기도 하고, 근친상간을 무한히 재생해 가는 운동기라고 밀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그의 찰못은 이렇게 함으 로써 성욕을 〈극복했다〉고 믿은 점만이다). 육체적 콤폴렉스는 旺種的 임
플렉스 i m p lexe( 複合內容)에 귀착된다. 근친상간은 콤플렉스 속에서는 근 친상간으로 표상될 수 없는 〈 이쪽 〉 에 귀착된다• 왜냐하면 이 콤플렉스는 이 〈 이쪽 〉 의 억제에서 파생된 요소이기 때문이다. (식별 가능한 인물들 의 형태의) 금지되어 있는 근친상간은 (강렬한 大地라고 하는 밑바닥인) 욕망된 근친상간을 억제하는 데 이바지한다. 강도 있는 배종의 흐름은 욕망을 대표하는 것이요, 억제는 바로 이 흐름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의연적인 오이디푸스의 형상은 이 흐름이 옮겨놓아져서 표상된 것이요, 울가미 내지 거짓 심상이다. 이 심상은 억제에 의하여 생겨, 욕망을 은폐 하러 오는 것이다. 이 심상이 〈 불가능하다 〉 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 심상은 욕망이 불가능한 것 자체에 사로집히듯이 심상에 사 로집히는 순간부터 그 임무를 수행한다. 너 알지, 네가 바랐던 것은 바로 그거야! … …하지만, 억제로부터 억제된 것에, 금지로부터 금지된 것에 곧장 나아가 결론을 끌어내는 일은 이미 억압에 관한 오류추리 전체를 내포하고있다. 그런데 임플렉스, 죽 배종의 流體는 대지에서 욕망을 대표하는 것인데, 왜 이것이 억제되는가? 이것은 … … 대표하는 것으로서 그것이 귀착하는 것은 규준화될 수도 없고 규준화되지도 않는 흐름__바로 원시사회체의 공포-이기 때문이다. 이 흐름에서 이탈하는 연쇄는 하나도 없고, 아무 것도 이 흐름으로부터 채취될 수 없다; 아무것도 부자관계로부터 자손에 로 이행하지 않고, 도리어 자손이 자기자신을 다시 낳는 행위 속에서 끊 임없이 부자관계와 하나가 되어간다; 시니피앙의 연쇄는 아무런 규준도 형성하지 않고, 다만 양의적인 기호들만을 발신할 것이요 또 그 에네르 기의 뒷받침에 의하여 끊임없이 부식될 것이다; 대지의 충만한 신체 위 를 흘러가는 것은 기관들 없는 신체의 사막 위를 미끄러져가는 규준화되 지 않은 흐름만큼이나 사슬에서 풀릴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는 풍부함이 나 적음의 문제, 샘솟음이나 고갈(고갈하는 것도 하나의 흐름이다)의 문 제라기보다는 규준화할 수 있는 것과 규준화할 수 없는 것에 관한 것이 기 때문이다. 배종의 흐름이란 모든 것이 이것과 함께 이행하거나 흘러 간다고 말하는 것이나, 이와 반대로 모든 것이 저지당한다고 말하는 것
이 결국 똑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 되는 그런 것이다 . 흐름들이 규준화할 수 있는 것이 되려면, 그것들의 에너지가 晟 化되고 또 質化되어야 한 다一_흐름들로부터의 채취는 연쇄로부터의 이탈들과 균형 있게 행해져 야 한다-어떤 것이 옮아가야 하지만, 또한 어떤 것이 저지당하여야 하며, 또 어떤 것은 저지하거나 옮아가게 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일은 인물들을 식별할 수 있게 하는, 그리고 기호들을 일정한 방식으로 사용 하고, 이접적 종합들을 배타택일적으로 사용하고, 연결적 종합들을 혼인 에 관하여 사용하는, 延長울 가진 체계에서만 가능하다. 이와 같은 것이 연장을 가전 자연체계의 設立으로서 생각된 근친상간 금지의 의미이다: 결혼의 아버지 편 혹은 어머니 편의 성격에 따라, 가계의 부계적 혹은 모계적 성격에 따라, 넓혀진 부자관계과 횡적인 결연의 일반적 체제에 따라, 각각의 경우에 무엇이 강도의 흐름으로부터 이행하는지, 무엇이 이 행하지 않는지, 무엇이 이행하게 하거나 이행하는 것을 방해하는가를- 탐 구해야 한다. 그리울르가 분석한 도공족의 우선 결혼을 다시 생각해 보 자: 저지당하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대신으로서의 숙모와의 관계인데, 이 관계는 겉으로 보기에는 친족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행 하는 것은 숙모의 대신으로서의 숙모의 딸과의 관계인데, 이 관계는 최 초의 가능한 혹은 허용된 근친상감이다; 저지하거나 이행하게 하는 것은 의숙부이다. 이행하는 것은, 저지당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서, 진정한 規 準 잉여가치를 낳는다. 이 잉여가치는 의숙부가 이행하게 하는 일을 하 고 있는 한에서 의숙부에게 귀속된다. 한편 의숙부는 그가 저지하는· 정 도에 따라 일종의 減價를 당한다. (이렇게 해서 의숙부의 집에서 의식적 인 도둑질이 조카들에 의하여 행해지지만,^ 또한 그리올르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조카들 중 최연장자가 의숙부 집에 와서 살게 될 때에는 의 숙부의 재산이 〈늘고 결실하게 되는〉 셈이다.) 〈이러저러한 체계에서 혼 인에 대한 보상급부는 누구에게 귀속되는가?〉 하는 근본문제는 복잡하게 얽힌 移行線들과 限迫泉들에서 독립시켜 해결될 수는 없다-~마치 저지 되거나 금지되었던 것이 자기의 몫을 요구하러 와서 〈유령으로서 결혼식 에〉 다시 나타나는 경우처럼 21) 뢰플러 Lo ffl er 는 정확하게 여기 들어맞는
경우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므루 Mru 족에게 있어서는, 부 계의 모델이 모계의 전통보다 우세하다: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어머니 로부터 딸에게 옮아가는 형제-자매의 관계는 아버지 - 아들의 관계에 의 하여 무한정하게 그렇게 될 수 있지, 딸의 결혼에 의하여 끝나는 어머니 딸의 관계에 의하여 그렇게 될 수는 없다 . 결혼한 딸은 자기자신의 딸에 게 새로운 관계, 죽 그 딸을 자기자신의 형제에게 결합시키는 관계를 전 한다. 이와 동시에, 결혼하는 딸은 자기의 형제의 가계로부터 이탈하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자기의 어머니의 형제의 가계로부터 이탈한다. 자기 의 조카딸의 결혼에 즈음하여 그 어머니의 형제에게 지불하는 일들의 의 의는 젊은 딸이 자기의 어머니의 옛 가족 그룹을 떠난다는 것으로밖에는 이해될 수 없다. 조카딸은 그녀 자신 어머니가 되고 형제-자매의 새로운 관계의 출발점이 된다• 이 관계 위에 새로운 결연의 기초가 놓인다.〉 22) 연장되어 가는 것, 정지하는 것, 이탈하는 것 그리고 이 능동들·과 수동들 의 분배의 기준이 되는 여러 가지 다른 관계들은 흐름의 모든 규준화에 불가결한 부품인 한에서의 규준의 잉여가치의 형성의 메커니즘을 이해하 게 해준다.
21) Lev i-S tr a uss, Les Str uc tu re s elementa ir e s de la pa rente , p. 356( 레비-스트 로스는 혼인으로 말미암는 給付의 受惠者들의 걷으로 보기에 非正常的인 혹은 逸인 경우들을 분석하고 있다). 22) L. G. Loff ler , L'Al lian ce asy m etr i q u e chez les Mru, L'Homme, p. 80.
우리는 이제부터 원시사회체에서의 土地表象의 갖가지 결정기관을 素 描할 수 있다. 첫째로, 强度의 旺種의 流體는 모든 표상의 조건을 이룬다: 그것은 욕망의 表象表現 re p resen t an t이다. 그런데 그것이 표상표현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그것이 규준화할 수 없는, 규준화되지 않은 혹은 탈규준 화한 흐름들과 맞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그 나름대 로 사회체의 한계, 사회체 전체의 한계와 부정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이 한계를 억압하는 일은 이 표상표현 자체가 억제를 당하는 한에서만 가 능햐가. 이 억제는 의연을 가진 체계에 있어서 流體로부터 무엇이 이행하 고 무엇이 이행하지 않는지, 넓혀진 부자관계들에 있어서는 무엇이 저지되 고 혹은 저장된 채로 있는지, 이와 반대로 결연관계들을 따라 무엇이 움직
이고 유통하여 흐름둥의 체계적 규준화를 실현하는가를 결정한다 . 우리는 결연을 둘째 결정기관이라 부른다. 결연은 억제하는 表象作用 Rep re sen- tat i on refo u lante 자체이다. 왜냐하면 부자관계는 그 가변적 선분을 측정 하는 횡적 결연과 관련해서만 넓혀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리츄가 확인한 〈 幽 果 距系 〉 의 중요성이 생긴다—―이 지연가계들은 둘씩 결연을 조직하고 결혼을 기계처럼 조작한다. 우리가 이 지연가족들을 정상적이면서 도착적 인 활동을 하는 가족들로 본 것은, 이 지연 집단들이 억제의 대리인, 죽 위대한 규준 작성자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 남자들이 서 로 만나 결합하겨 여자들을 취하고 홍정하고 나누고 하는 등의 일을 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지연집단들 간에, 즉 처남 매부, 공동의 남편들, 어렸 을 때의 짝 사이에 최초의 동성애의 도착적 유대를 볼 수 있다. 조르쥬 데바루 George s Devereux 는, 결혼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연이 아니고 〈 두 가족 간의 결연 〉 이요, 〈 여자들에 관한 남자들 간의 거래 〉 라고 하는 보편적 사실을 강조하면서, 여기서 근본적인 집단적 동성애의 동기에 관한 정당한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23) 여자들을 통하여 남자들은 자기들 자신의 연결을 확립한다; 남자-여자의 이접적 관계는 그때마다 부자관계의 귀결 인데 , 이 관계를 통하여 결연은 서로 다른 부자관계의 남자들을 연결시킨 다. 〈왜 여성의 동성애가 남지들을 홍정할 수 있는 아마존 집단들을 출현 시키지 않았는가?〉라는 문제는 아마도 여자들과 배종의 유체 사이의 친화 력 속에서, 따라서 넓혀진 부지관계들의 한복판에서 그녀들이 닫힌 입장을 지키고 있는 데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결연의 파라노이아에 대립하는 부자관계의 히스데리 . ) 그러므로 남성의 동성애는 결연을 표상하는 작용이 요, 이 표상작용은 남녀 양성적인 강렬한 부자관계의 양의적 기호들을 억 제한다. 그렇지만, 데바루는 두 번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 는 보인다: 한 번은 그가 그의 말을 따르면 아주 중대한 동성애의 표성이 라고 하는 이 발견을 앞에 놓고 오랫동안 주저했다고 언명하고 있는 때이 다. (여기에는 〈모든 남지는 男色家다〉라고 하는 공식의 원시적 설명 23) George s Devereux, Consid e rati on s eth n op s yc hanalyt iqu es sur la no- tion de pa rente , L'Homme, juille t 1965.
만이 있을 뿐이다. 물론 남자들은 결혼을 기계처럼 조작하는 때보다도 더 남색가가 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두번째로 그가 다른 면에서 특히 잘못 울 저지르고 있는 것은, 그가 이 결연의 동성애롤 억제된 한에서의 오이디 푸스 콤플렉스의 산물로 보려 하고 있는 때이다. 결연이 오이디푸스를 매 개로 하여 부자관계의 가계로부터 연역되는 일은 철대로 없다. 도리어 결 연이 지연가계들의 행동과 이 가계들의 비오이디푸스적인 최초의 동성애의 행동을 통하여 이 가계들을 연접시킨다. 그래서 설사 오이디푸스적 동성애 죽 부자관계의 동성애가 있디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처음에는 비오이디푸스적인 이 집단적 동성애에 대해서 이차적인 반응에 지나지 않 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이디푸스 일체에 관해서 말하면, 오이디푸스는 억제된 것이 아니다. 죽 욕망의 표상표현이 아니다. 이 욕망의 표상표현은 〈이쪽〉에 있고 아빠_ 엄마를 전혀 모른다. 또 오이디푸스는 억제하는 표상작용도 아니다. 이 표 상작용은 〈저쪽〉에 있고, 인물들을 결연의 동성애적 규칙들에 따르게 함 으로써만 인물들을 식별할 수 있게 한다. 근친상간은 억제되는 표상표현에 대하여 억제하는 표상작용이 미치는 週沈제果일 따름이다: 이 억제하는 표 상작용은 자기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이 표상표현을 왜곡하고 옮겨놓는 다; 그것은 그것 자체가 세운 식별가능하게 된 범주들을 표상표현에다가 투사한다; 그것은 바로 결연이 의연을 가전’ 체계 속에 플러스와 마이너스 룰 조직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용어들을 표상표현에 적용한다 __ 그 것은 이 체계 속에서 저지된 것에 표상표현을 포캔다. 그러므로. 오이디푸 스는 그야말로 한계이지만, 옮겨놓아진 한계요, 이제 사회체 내부에 이행 한다. 오이디푸스는 올가미에 걸린 심성이요 욕망은 이 울가미에 걸린다. (네 가 바랐던 것은 그거지! 脫規準化한 흐름들, 그것이 근친상간이었다!) 이 렇게 되면 하나의 긴 이야기, 오이디푸스화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바로 모든 것은 라이오스 LaIo 려 머리에서 시작된다. 라이오스는 집단의 늙은 동성애자요, 욕망에다가 덫울 놓는 도착자이다• 왜나하면 욕망 역시 덫이기 때문이다. 토지의 표상은 억제되는 표상표현, 억제하는 표상작용, 옮
겨놓아진 표상내용 rep re sente dep lace 이라고 하는 세 결정기관을 내포하고 있다.
4 정신분석과 인류학 우리의 걸음은 너무 빠르다. 우리는 마치 오이디푸스가 야생의 土地機 械 속에 이미 설립되어 있는 듯이 일을 진행시키고 있다. 하지만, 니체가 양심의 가책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오이디푸스. 갇은 식물이 자 라는 것은 이 야생의 토지기계의 토양 위에서가 아니다. 이것은 정신의 학과 정신분석에 고유한 가족주의의 틀 안에서 파악된 〈가족 콤플렉스〉 로서의 오이디푸스의 조건들은 분명히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야생 의 가족들은 결연과 부자관계의 실천, 정치, 전략을 수행한다; 그것들은 분명히 사회적 재생산의 동력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그것들은 표현의 작 용을 하는 소우주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아버지, 어머니, 자매는 거기서 언제나 이버지, 어머니, 자매와는 다른 것으로서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또 거기에는 아버지, 어머니 의에 인척이 있다. 이 인척은 능동적인 구체 적 현실을 구성하며 또 가족들 간의 관계들을 사회 터전의 의연과 같은 것이 되게 한다. 가족적 규정들이 사회 터전의 모든 구석에 명백히 나타 나고 본래의 사회적 규정들에 어디까지나 결부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도 정확한 일은 못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가족적 규정들과 사회적 규정들은 토지기계 속의 유일의 동일한 부품이기 때문이다. 가족적 재생산은 성질 울 달리하는 사회적 재생산에 이바지하는 단순한 수단이나 재료기· 아니 므로 후자를 전지에 포개고 이 °g} 간에 일대일의 대웅관계를 세울 가 능성은 전혀 없다. 이러한 대웅관계는 어떠한 가족 콤플렉스에 대해서도 표현적 가치와 의견상의 자율적 형태를 줄 터이다. 이와 반대로 가족 속
의 개인이, 아무리 작더라도, 사회적 • 역사적 • 경제적 및 정치적 터전을 직접 제공한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이 터전은 어떠한 정신적 구조에 도 어떠한 감정의 星座에도 환원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원시사회들에 서의 病理學的 症例들과 치료의 과정들을 고찰할 때 이것들을 어디까지나 정신분석에서 빌린 채로 있는 규준들에 관계시켜 정신분석의 과정과 비 교하는 것은 전혀 불충분한 일이라고 우리에게는 생각된다: 가령 우리들 의 것과는 다르다 하더라도 가족 콤플렉스의 개념을 사용하든가, 어떤 종족적 무의식에 관계지어전다 해도 문화적 내용들이라고 하는 개념을 사용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런 일이다. 이와 같은 것을 우리는 정신분석 의 치료와 샤머니즘의 치료 사이에 평행관계를 보려는 시도에서 볼 수 있다(데바루, 레비-人드로~). 우리는 정신분열자-분석을 두 양상에 의하 여 규정하였다: 하나는 무의식을 표현하는 擬似-形態들의 파괴요, 다른 하나는 욕망에 의한 사회 터전의 무의식적 공급들의 발견이다. 이 관점 에서 원시적 치료들의 많은 것을 고칠해야 한다; 이와 갇은 것들이 실제 로 행해져야 할 정신분열자-분석이다. 빅타 터너 Vi ct o r Turner 는 느뎀부 Ndembu 족에게 있어서의 그러한 치료의 주목할 만한 예를 제공하고 있다 .24) 이 예는, 우리들의 도착된 눈 으로 보면, 우선은 모든 것이 오이디푸스적으로 보일 만큼 놀랍다. 환자 K는 그의 모든 企圖에 있어서 나약하고, 견딜성이 없고, 허세를 부리고, 실패하며, 그를 호되게 꾸짖곤 한 그의 의숙부의 망령에 시달리고 있다. 느뎀부족은 母系制이어서 어머니 편의 부모 집에서 살아야 하지만, K 는 예외적으로 그의 아버지의 모계에서 오랫동안 지냈고, 그의 아버지가 그 롤 총애하여, 그는 아버지 편의 사촌 자매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죽자, 그는 쫓겨나 어머니의 마을로 되돌아온다. 여기서 그의 집은 두 영역, 죽 아버지 편의 그룹의 성원들의 집들과 그 자신의 어머 니 편의 성원들의 집들 사이에 끼여 있는 그의 처지를 잘 나타내고 있 다. 그런데 병의 원인을 지적해야 할 占術과 병을 고쳐야 할 의료는 어 24) Vic t o r W. 'Turne r, Magi c, Fait h and Hea ling , An Ndembu Docto r in Practi ce , Coll ier -M acm illa n , 1964.
떻게 시작되는가? 원인은 이〔齒〕이다. 그것은 사냥꾼이었던 조상의 두 개의 위의 앞니인데, 거룩한 자루에 들어 있지만, 이 자루에서 빠져나와 환자의 몸 속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그 앞니가 일으키고 있는 결과 둘을 전단하고 이것들을 쫓아버리기 위히여, 점쟁이와 의사는 領地와 그 인근, 족장과 副族長들, 가계들과 그 선분들, 결연들과 부자관계들에 관하 여 사회적 분석에 專念한다: 그들은 정치적 및 경제적 단위들과 관계시 켜 욕망을 밝히기를 마지 않는다-그런데 한편 이 점에 대해서 증인들 은 점쟁이와 의사를 속이려 든다. 〈 占은 사회 분석의 형태를 취하게 되 는데 이 과정에서 개인과 당파 간의 숨은 투쟁들이 드러나, 전동적인 의 식의 절차에 의하여 이 투쟁들을 다룰 수 있게 한다……. 신비적 신앙의 막연한 성격은 이 무쟁을 많은 사회적 상황과 관련시켜 다룰 수 있게 한 댜 〉 병의 원인인 앞니는 주로 다름아닌 의숙부의 앞니라는 것은 명백하 다. 그런데 그는 위대한 족정이었다; 그의 후계자인 〈 실제의 족장〉은 마 법에 걸릴 것이 두려워 그 지위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후계자의 상속인이 되리라 추정된 자는 지적이고 기업 정신이 왕성하지만,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현재의 족장은 좋은 족장이 아니다; 환자 K 에 관해 서 말하면, 그는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할 줄을 몰랐다. 이 역할은 그를 족장 후보가 될 수 있게 했을 터이다. 모든 일은 植民者와 被植民者의 관 계 때문에 복잡하게 된다. 영국인들은 족장제를 인정하지 않았고, 가난해 전 마을은 哀類해 버렸다. (마을의 두 구역은 영국인들에게서 도망쳐 나 온 두 집단이 합침으로써 생겼다; 노인들은 현재의 퇴폐를 한탄하고 있 다.) 의사가 계획하고 있는 것은 사회 드라마가 아니라, 환자를 중심으로 한 집단의 진정한 분석이다. 환자에게 물약을 주고, 앞니를 빨아올리기 위하여 그의 몸에 몇 개의 뿔피리를 비끄러매고, 북을- 두드리면서, 의사 는 하나의 의식을 시작한다. 이 의식은 간간이 중지되었다가 다시 시작 된다. 거기에는 말의 흐름을 포함하여 온갖 흐름이 있고, 또 절단이 있 다. 마을사람들이 와서 이야기하고, 환자도 말하고, 망령을 불러내고, 그 러다가는 의식이 벚고, 의사가 설명하고, 의식이 다시 시작되어, 북을 두 드리고, 노래하고, 실신상태에 빠진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그저 利害
에 의한 사회 터전의 先意識的인 공 급들 을 발견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렇 지 않고 더 깊이 욕망에 의한 사회 터전의 선의식적인 공급들을 발견하 는 것이다. 죽 환자의 결혼, 마울에서의 그의 지위, 그리고 족장이 집단 속에서 강도 있게 차지하고 생활하는 그의 모든 지위를 통하여 행해지는 무의식적 공 급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출발점이 오이디푸스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다만 우리들을 위한 출발점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가 이야기될 때마다 우리는 오이디푸스를 밀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실상, 느뎀부족에 관한 분석은 결코 오이디푸스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 회의 조직과 이 조직의 파괴에 칙접 연결된 것이었다; 성욕도 여자들과 의 결혼을 통하여 욕망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부모들은 거기서 자극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지, 족장과 그 주변의 인물들이 떠맡고 있는 집단 의 조직자(혹은 조직 파괴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아버지나 의조부의 이름에 포개지지 않고, 오히려 이 후자가 역사상의 모든 이름에 대해서 열려 있었다. 모든 것이 거세의 기괴한 절단에 투사 되는 대신, 모든 것이 족장제, 가계, 식민지화의 관계들의 수천의 흐름 철단 속에 분산되어 있었다. 인종, 씨족, 결연과 부자관계의 행태 전체, 역사적이고 집단적인 표류 전체. 이것은 바로 오이디푸스적 분석에 반대 되는 것이다. 이 분석은 망상의 내용을 집요하게 분쇄하여, 기어코 이것 을 〈 O 河지의 상칭적 공허〉 속에 쑤셔넣으니 말이다. 처라리 문제를 다 음과 같이 제기하는 것이 낫겠다. 우리들에 대한 경우를- 제의하고는 이 분석이 오이디푸스적으로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 이 오이디푸스적으로 되는 것은 어느 정도로 그런가, 또 어느 정도까지 인가? 그렇다, 그것은 식민지화의 결과로 부분적으로는 그렇게 된다. 가 령 식민자는 자기의 목적들을 위하여 족장제를 폐지하거나 이용한다. (또 다른 많은 것을 이용한다: 족장제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식민자 논 말한가: 〈네 아버지, 그는 네 아버지이지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네 의조부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을 족장으로 보지 마라……. 너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너를 삼각형화하고, 네 집을 아버지 편의 집들
과 어머니 편의 집들 사이에 두어도 괜찮다……. 네 가족은 네 가족이지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사회적 재생산은 더 이상 네 집을 경유하지 않는 다. 재생산의 새로운 체제에 종속하게 될 인재를 공급하기 위하여 네 가 족이 틀림없이 필요하게 된다 해도 말이다…….〉 그렇다, 이렇게 되면 쫓겨난 야생인들을 위한 오이디푸스의 틀이 소묘된 셈이다: 판잣집 거리 의 오이디푸스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피식민자들이 어디까지나 오이디 푸스에 대한 저항의 전형적인 실례라는 것을 보았다: 실상, 여기서는 오 이디푸스의 구조가 닫히는 데에 이르지 않고 있으며, 그 세 항이, 두쟁하 고 있건, 타협하고 있건, 압제적인 사회적 재생산의 대리자들에게 눌러붙 어 있다(즉, 백인, 선교사, 세금 칭수인들, 물자 수출업자, 행정관이 된 마을의 명사, 백인을 저주하는 노인들, 정치투쟁에 두신하는 젊은이들 등 에 눌러붙는다). 그러나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피식민자는 오이디푸스화에 저항한다는 것, 그리고 오이디푸스화는 피식민자를 끌어 들여 삼각형을 닫으려 한다는 것. 오이디푸스화가 있으면, 이것은 곧 식 민지화가 사실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졸랭은 『白色의 平和』에서 식민지 화의 모든 절차를 묘사했는데 여기에는 오이디푸스화를 추가해야 할 것 이다. 〈피식민자의 상태는 인간답게 사는 장소의 축소로 이어지게 될 수 있다. 거기서 추구되고 있는 해결 전체는 개인이나 가족에 한정된 것이 요, 그 결과, 집단의 차원에서는 극단의 무정부상태 내지 무질서가 생긴 다. 개인은 언제나 이 무정부상태의 희생이 된다. 여기서 제의되는 것은 그러한 체계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들인데, 이 경우 그것은 식민자들 이다. 이들은 피식민자가 자기의 살 곳을 축소하는 바로 그때에, 자기의 살 곳을 확대한다.〉 25) 오이디푸스는 民族虐殺에서의 안락사와 같은 것이 25) Robert Ja uli n, La Paix blanche, int r o ductio n a l'eth n ocid e , Ed. du Seu il, 1970; p. 309. 카푸천회의 수도사들은 인디언들에게 공동의 집을 포기하고 개인 둘의 작은 집들을 마련할 것을 〈설득〉했는데, 졸랭은 이 인디언들의 상황을 분 석하고 있다(pp. 391-4 00). 공동의 집에서는, 가족의 住居와 개안적 친밀감이 同盟者로 규정된 이웃과의 관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가족들 간의 관 계는 사회 터전과 같은 넓이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새로운 상황에서 는 〈부부 각자가 자기자신에 대하여〉 또 아이들에 대하여 〈지나치게 發薛하는
일〉이 생긴다. 그래서 좁게 제한된 가족은 表現作用올 하는 소우주 속에 갇혀 여기서 각자 자기자신의 家系를 반영하며, 동시에 사회적 및 생산적 생성은 더 욱더 각자에게서 빠져나간다. 왜냐하면 오이디푸스는 이데올로기의 과정일 뿐더 러, 또한 환경과 居住形態의 파괴 등의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 사회적 생산이, 그 본성에 있어서나 그 의연에 있어서 집단의 성원들 에게서 빠져나가면 나갈수록 그것은 이 성원들 위에 내리덮쳐, 이들 자 신을 제한되고 신경중화된 가족적 재생산에 몰아붙인다• 오이디푸스는 이러한 가족적 재생산의 집행인이다. 결국, 인디언이나 아프리카인의 오이디푸스를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들은 우리들에 대한 우리들의 오이디 푸스(우리들에 대한 우리들의 가짜 오이디푸스)를 구성하는 메커니즘들과 태도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한 사람들이 다. 이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오이디푸스의 구조 가 〈臨床軫斷기 접근할 수 있는〉 현실적 존재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해도, 그 구조는 거기에 있다고 한다. 혹은 그 문제의 전개와 해결이 우 리들의 것과는 전혀 다르기는 해도, 문제와 출발점은 아주 오이디푸스적 이라고 한다(패린 Parin , 오르띠그 Orti gu es). (식민지화를 제의하면) 오이디푸스가 존재하기 시작하는 데 필요한 조 건들을 오이디푸스가 아칙 가지고 있지 않는 때에, 그들은 말하기를, 오 이디푸스는 〈줄곧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그 사상이 오이디푸스화의 정 도에 따라 평가된다면, 그렇다, 白人둘은 지나치게 생각하고 있다. 이 저 자들은 아프리카 전문의 정신분석가들인데, 이들의 자격, 성실성 및 재능 은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서나 우리들 중의 몇몇 정신요법 의사에게 있어서나 사태는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어린이룰 삼각형화하는 새 로운 방식을 적용함으로써 진보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전심으로 믿고 있 는 정신요법 의사들이 더러 있다. 주의하라, 이것은 구조의 오이디푸스이 지 상상의 오이디푸스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전문의 정신 분석가들은 전보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구조적인, 즉 문제 있는 오이디푸스의 멍에를 조작하고 있다. 거기서나 여기서나 사태는 마찬가
지이다: 오이디푸스는 언제나 다른 수단들을 통하여 추구된 식민지화이 다. 그것은 내부의 식민지이다• 우리들 유럽인 자신들에게 있어서도 그것 은 우리들의 마음속 깊이 형성된 식민지임을 우리는 볼 것이다. M.C. 오 르띠그와 E. 오르띠그가 그들의 저서를 끝맺고 있는 문장을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병은 초자연적 능력에 의하여 선택받고 특별한 주목을 받 고 있는 표적으로, 혹은 마술적 성격을 지닌 공격을 받고 있는 표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쉽사리 세속적인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분석적인 정신요법은 환자가 어떤 요구를 표명할 수 있게 되어야 비로소 개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탐구 전체는 정신분석의 한 분야를 새롭게 확립하는 가능성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환자가 전적으로 전통적 규범들에 매달려 자기지신의 이름으로 말할 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는, 그는 전통적 치료법을 사용하는 의사들과 가족 그룹 혹은 ‘藥劑 의학에 그의 치료를 맡기고 있었다. 가끔, 그는 우리들에게 전통적 치료 에 관하여 말하고 싶어하는데, 이 사실은 정신요법의 실마리에 대응하는 것이었고, 그에게는 자기자신의 사회 안에 자기를 인간으로서 자리잡게 하는 수단이 되었다……. 다른 때에는, 정신분석의 대화가 더욱 폭 넓게 전개될 수 있었는데, 이 경우에는 오이디푸스의 문제가 通時的인 양상을 띠고 세대들 간의 갈등을 드러내기가 일쑤였다.〉 26) 왜 초자연적 능력과 마술적 공격은 오이디푸스보다 못한 신화를 형성한다고 생각하는가? 이 와 반대로, 그것들은 사회 터전의 조직에 있어서나 이 조직을 파괴함에 있어서나, 욕망으로 하여금 사회 터전을 더욱 강렬하게 더욱 적절하게 공급하게끔 하는 것이 아닌가? 적어도 마이어 포티스는 오이디푸스 곁에 욥 J ob 의 자리가 있음을- 밝혔다. 그런데 환자가 전통적 규범들에 집착하 고 있는 한 자기의 이름으로 말할 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 는 것은 어떤 권리에서인가? 느뎀부족의 치료는 이와 정반대의 것을 보 여주는 것이 아닌가? 오이디푸스 역시 하나의 전통적 규범, 우리들의 규 범이 아닐까? 다론 쪽에서는 오이디푸스의 해결이 〈존재의 고칠 수 없 는 결함〉과 보편적 거세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고 분명히 말하면서, 어 26) M.C. et E. Orti gue s, CEdip e afr ic a in , p. 305.
떻게 오이디푸스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이야기하게 한 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오이디푸스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끌어대는 저 〈요구〉란 무엇인가? 하기는 환자가 아빠-엄마를 요구하고, 또 거듭 요구한다. 그러나 어떤 환자가, 어떤 상태에서 그렇게 하는가? 이것은 〈자기를 자기자신의 사회에 인간으로서 자리잡게 하는〉 수단인가? 그렇 다면 그 사회는 어느 사회인가? 환자에 대해서 만들어전 새로 식민지화 된 사회인가? 식민지화가 대체적 윤곽을 잡았던 것을 마침내 완성시킨 사회인가? 욕망의 힘들을 실제로 오이디푸스와 죽 아버지의 이름과 하나 가 되게 하고 기괴한 삼각형 속에 가두어놓는 사회인가? 문화주의자들과 정통적 정신분석가들 간에 한정없이 계속된 유명한 논 쟁에 되돌아가 보기로 하자: 오이디푸스는 보편적인 것인가? 그는 모든 교회를 통합히는 가톨릭의 위대한 아버지의 상징인가? 이 논쟁은 말리노 스키와 존스 간에 시작되고, 한편에는 카디너와 프롬, 다른 한편에는 로 하임 Roheim 간에 계속되었다. 그 논쟁은 아직도 몇몇 인류학자들과 라 깡의 몇몇 제자들 간에 계속되고 있다 (이 사람들은 라깡의 敎說울 오이 디푸스화하여 해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해석을 인류학적으로 확대 시키고 있다.) 오이디푸스를 보편적이라고 보는 측에는 두 극이 있다: 하나는, 시대에 뒤진 것으로 보이지만, 오이디푸스를 근원적인 감정의 성 좌요, 국한적인 현실의 사건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사건의 결과들은 系 統發生的 遺傳에 의하여 전해전다고 본다. 디른 하나는 오이디푸스룰 하 나의 구조로 본다. 그리고 이 구조는 生物學的 早熟이나 幼形成熟과 관계 가 있는 환상의 극한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본다. 이 두 입장은 극한에 대해서 아주 디론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극한을 근원적인 자궁으 로 보며, 다른 하나는 극한을 구조적 기능으로 본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 방향에서 보편적인 것을 〈해석〉하러는 권유를 받고 있다. 왜냐하면 오이디푸스가 잠재적으로 현존한다는 것은 그가 명백히 부재해도 이것은 억제의 결과라고 이해되어야만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혹은 다음과 갇이 말하는 것이 더 나을 법도 하다. 왜냐하면 구조적 불변항으로서의 오이 디푸스는 심상으로서는 여러 가지로 변화하지만 필요하면 상칭적 배제
(빈자리로서의 아버지)를 나타냄으로써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오이디 푸스를 보편적이라 보는 견해는 부정을 하나의 결핍, 하나의 결여로 해 석하는 데 성립하는 낡은 형이상학적 조작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죽은 아버지의 상징적 결여, 위대한 시니피%J-o l 다시 등장하는 셈이다. 해석한 다는 것은 우리들이 믿고 경건한 태도를 취하는 현대적 방식이다. 이미 로하임은 幼形成熟의 구조적 불변항을 향하여 收敗하는 일련의 가변항 속에 야생인들을 조직할 것을 제안하였다.27) 만일 사람들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찾지 않았더라면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유머 없 이 밀한 것은 바로 그다• 또 사람들이 자기지신을 정신분석시키지 않았 더라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찾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것도 그다. 바로 여기에 당신들의 딸이 침묵을- 지키는 까닭이 있다. 즉 인류학자의 딸들이라 할 수 있는 부족들이 오이디푸스란 말을 하지 않는데도 오이디 푸스가 이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하는 까닭이 있다. 로하임은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檢閔에 관한 프로이트의 이론이 프란츠-요제프 제국에서 의 억압의 체제에 의존하고 있었다고 믿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그는 프 란츠-요제프가 하나의 적절한 역사적 절단이 아니었다고 생각한 것 같 지는 않다. 그렇지 않고 언론이나 문서를 마음대로 사용하고 심지어 〈자 본주의적〉이기까지 한 문명들이 아마 그런 절단들이었으며 이것들과 함 께 억압의 본성, 억제의 의미와 射程이 달라진다고 보았던 것 같다 .
27) Geza Roheir n, Ps yc hanalys e et anth r op o log ie, 1950, tr. fr. Gallim ard, pp. 417-41 8.
이 억제의 역서는· 매우 복잡하다. 만일 리비도나 감정이-소위 오이 디푸스적 표상과 동시에―-그 낱말의 가장 넓은 의미에서 억제(말살, 柳 止, 변형)되어 있었다면, 사태는 좀더 단순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 지 않다: 대부분의 인류학지는, 원시사회의 공공의 상징들 속의 감정들 의 性的 성격을 잘 지적하였다; 이 사회의 성원들은 정신분석을 받지 않 았는데도, 또 표상이 옮겨놓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의 이 성적 성격을 전면적으로 체험하고 있다. 머리털과 性의 관계에 관하여 리츄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男根울 상징적으로 옮겨놓는 일은 항용 있는 일이지
만, 남근의 근원은 결코 억제되고 있지 않다〉 .28) 야생인들은 표상을 억제 하고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한다고 말해야 할까? 그리고 이것은 우리들의 父權制的 조직에서의는 정반대되는 것일까? 이 조직에서는 표상은 명석 한 채로 있는데, 감정들은 말살되고재 仰止되고 혹은 변형되고 있다• 야생 인의 경우와 우리들의 경우가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 역시 표상 울 억제한다고 정신분석은 우리에게 밀하고 있다. 또 모든 것은 우리에 게, 우리들 역시 가끔 감정의 전적으로 성적인 성격을 간직한다고 말한 다; 우리는 정신분석을 받지 않아도 무엇이 문제인지를 완전히 알고 있 다. 그런데 무슨 권리로 오이디푸스적 표싱이 억제의 대상이 된다고 말 하는가? 이것은 근친상간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인가? 우리는 언제나 이 성거운 이유, 근친상간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욕망된다고 하~근 이유를 다시 끌어대곤 한다. 이렇게 되면 근친상간의 금지는 오이디푸스적 표상 을 전제할 터이고, 이 표상의 억제와 이 표상의 되돌아옴에서 근친상간 의 금지가 생기는 것이 될 터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것이 명백하다. 그래서 오이디푸스적 표상이 근친상간의 금지를 전제할 뿐만 아니라, 근 친상간의 금지가 오이디푸스적 표상에서 생긴다든가 결과한다고 말할 수 조차 없다. 라이히는 말리노스키의 주장들에 동조하면서도, 하나의 깊이 있는 지적을 보태고 있다: 단순히 근친상간만이 금지되지 않고, 전혀 다 른 型의 성적 관계들이 금지되어, 근친상간 이의의 길들을 막아버리면, 그만큼 욕망은 오이디푸스적인 것이 된다 .29) 요컨대, 근친상간의 억압이 억제된 오이디푸스적 표상에서 생기지 않는 것은 이 억압 자체가 이 억 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과 똑같은 정도에서이다. 그러나, 사태는 전혀 다 르다. 억압작 1 제의 일반적 체계가 억제된 것의 왜곡으로서 오이디푸스의 심상을 생기게 한다. 바로 성적 억압이 근친상간과는 E론· 것을 대상으로 하는 데 따라, 이번에는 오이디푸스의 심성이 억제되고, 이 심성이 억제 된 것 혹은 실제로 욕망되고 있는 것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 이것이 28) E. R. Leach, Mag ica l Ha ir, in My th and Cosmos, Natu r al Hist o r y Press, 1967, p. 92. 29) W. Reic h , Der Ein b ruch der Sexualmoral, Verlag 血 Sexualpo li tik, 1932, p. 6.
우리들의 사회의 역사인 하나의 긴 역시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오이디푸스적 표상이 억제되는 것은 아니다. 억제되는 것은 욕망하는 생 산이다. 이 생산으로부터 사회적 생산이나 사회적 재생산에 이행하지 않 는 것이 억제된다.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에 무질서와 혁명을 끌어들이기 쉬운 것, 즉 욕망의 규준화되지 않은 흐름들이 억제된다. 이와 반대로, 욕망하는 생산으로부터 사회적 생산에 이행하는 것은 이 사회적 생산의 직접적인 성적 공급을 형성한다. 그것에는 상칭체계와 이에 대응하는 감 정둘의 성적 성격을 억제하는 일이 전혀 없고, 또 그것은 특히 근원적으 로 억제되었거나 구조적으로 배제되었다고 흔히 생각하는· 오이디푸스적 표상과는 아무 관련도 없다. 동물은 利害의 선의식적 공급의 대상일 뿐 더러, 또한 욕망의 리비도 공급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 리비도 공급이 동 물로부터 아버지의 심상을 끌어내는 것은 이차적으로만이다. 음식물의 리비도 공급에 있어서도 사태는 마찬가지이다. 이 공급은, 굶주림에 대한 공포와 굶주리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쾌감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데, 이 공급은 이차적으로만 어머니의 심상에 관계지어진다 .30) 우 리는 앞서 어떻게 근친상간의 금지가 오이디푸스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 고 욕망을 구성하는 규준화되지 않은 흐름들에, 또 이 흐름들의 표상표 현인, 인물-이전의 강렬한 흐름에 관계되는가를 보았다. 오이디푸스에 관해서 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규준화할 수 없는 것을 규준화하고, 규준을 벗어나는 것을 규준 속에 집어넣는 하나의 방식, 혹은 욕망과 그 대상을 옮겨놓고, 이것들을 함정에 빠지게 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문화주의자들과 인류학자들은 제도가 감정과 구조에 비하여 일차적인 것임을 잘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구조들은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사 물들 속에, 생산과 재생산의 형태들 속에 있기 때문이다. 아첨할 줄을 모 르는 마르쿠제 같은 저자마저 문화주의가 제일보를 잘 내디렀음을 인정 하고 있다. 즉, 문화주의는 욕망을 생산 속에 도입하였고, 〈본능적 구조 30) 카디너는 마르케사스 諸島에 관한 연구에서 공동의 음식이나 경제에 관한 不安 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잘 밝혔다. 이 불안은, 무의식의 관접에서 보더라도, 어머니와의 가족적 관계에 환원될 수 없다: The Indiv i d u al and his Socie ty , Columbia Un iv. Press, 1939, pp. 223 sq.
와 경제적 구조〉를 결부시켰고, 〈동시에 父權中心의 착취적 문화를 넘어 서서 전보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지적하였다〉는 것이다 .31) 그렇다면, 문 화주의를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그것이 출발 울 잘 했다는 것과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것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아마 이것을 이해시켜 주는 것은 오이디푸스 상대주의와 오이디푸스 절 대주의에 공통되는 公準일 것이다. 죽, 도처에 荒廢를 몰고 오는 가족주 의의 관점을 완고하게 지키는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제도가 무엇 보다도 먼저 가족 제도로 이해된다면, 가족적 콤플렉스가 제도들과 함께 변화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이와 반대로 오이디푸스는 중핵을 이루는 불 변항이요, 그 주위를 가족들과 제도들이 돌고 있다고 말히는 것이나, 거 의 아무런 중요성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화주의자들은 다른· 삼각형 들, 가령 의숙부-숙모-조카 따위의 삼각형을 원용한다. 그러나 오이디푸 스주의자들은 이런 삼각형들이 하나의 동일한 구조적 불변항을 상상에 의하여 변형시킨 것들이요, 하나의 동일한 상칭적 삼각형화의 서로 다른 형상들이라는 것을 힘들이지 않고 지적한다. 이 상칭적 삼각형화는· 이 삼각형화를 실현시키게 되는 인물들과 일체가 되지도 않고, 또 이 인물 들을 서로 관계시키게 되는 어떤 태도들과도 일체가 되지 않는다. 그런 데, 거꾸로, 이러한 초월적 상칭체계를 원용하는· 것이 구조주의자들을 가 장 편협한 가족주의의 관점에서 떠나게 하는 일은 철대로 없다. 〈그게 아빠인가? 그게 엄마인가?〉에 관한 끝없는 논쟁들에 있어서도 사태는 마찬가지이다. (당신은 어머니를 무시하고 있어요! 아니야, 당신은 견에 있는 아버지롤 공허한 장소로 보고 있지는 않아요!) 문화주의자들과 정 통적 정신분석가들 간의 갈등은 가끔 어머니와 아버지, 선오이디푸스와 오이디푸스의 각각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환원되었다. 그런데 이 갈등을 통하여 사람들은 가족 밖으로도 오이디푸스 밖으로도 나가지 못하고, 밤낮 저 유명한 두 국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이 두 극은, 상상계 의 선오이디푸스적인 어머니의 극과, 구조적인 것인 오이디푸스적 아버 지의 극이다. 이것들은 다 같이 동일한 축 위에 있으며, 다 같이 가족화 31 ) Herbert Marcuse, Eros et ciu i li s a t ian , p. 209.
된 사회현상인 동일한 언어를 말한다. 그렇지만 한 극에서는 어머니로 말미암는 일상적 방언을 사용하는 것이, 다른 극에서는 아버지의 언어의 딱딱한 법칙을 지킬 것이 지시되고 있다. 카디너가 〈일차적 제도〉라 부 른 것의 양의성이 여기서 잘 드러난 셈이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는 욕 망이 어린 시절부터 또 어른으로부터 받는 가족적 자극 아래 사회 터전 울 공급하는 방식이 문제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리비도를 가족의 테두리 밖에서 적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모든 조건이 주어진다. 그러나 더 자주, 가족의 조직 자체만이 문제된다• 이 기족의 조직은 먼저 소우주 로서 어린이에 의하여 체험되고, 그 디음에 성인이 되고 사회인이 되는 생성 속에 두시된다고 여겨진다 .32) 이 관점에서 보면, 가족이라 하는 이 동일한 조칙을 문화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상칭적 혹은 구조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간의 논쟁은 빙빙 돌 기만 할 따름이다.
32) 미켈 뒤프렌느 Mi ke l Du fre nn~ 카디너의 견해둘을 분석하면서, 다음과 갇은 본질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一次的인〉 것은 가족이고, 정치적인 것, 경제 적인 것, 사회적인 것은 그저 二次的인 것일 따름인가? 리비도의 관접에서는, 가 족적 공급이 일차적인 것인가, 사회적 공급이 일차적인 것인가? 그리고 方法論 的어린으로이에는 게어로린 이나로아부가터야 하어는른에가 게(L로a P나er아so가na야li te하 는de가 ,ba s그e, 렇P지.U .않F.고, 1 9어5른3, 으p로p. 부2터87 sq. )
문화주의자들과 상징주의자들에게 공통되는 둘째 공준을 추가하기로 하자. 적어도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죽 우리들의 부계적 자본주의 사회에 서는 오이디푸스가 확실한 것임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바이다. (프롬처럼 새삼스레 모계의 요쇼겨닭끌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해도 말이다.) 누 구나 우리들의 사회를 오이디푸스의 강력한 操点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 거점에서 출빌하면 도처에서 오이디푸스적 구조를 다시 찾아볼 수 있다. 혹은 반대로 그 항들과 관계들을 오이디푸스적인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 고 〈가족적〉인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콤플렉스들에로 변형시켜야 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지금까지의 우리의 비판은 우리들에게서 가치를 지 니며 작동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오이디푸스를 대상으로 하였다: 오이디
푸스를 공격함에 있어서는 가장 약한 점(야생인들)에서 공격할 것이 아 니라, 가장 강한 점에서, 가장 강한 쇠사슬의 고리의 차원에서 공격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문화적 및 사회적 환경 속에서 오이디푸스가 욕망 하는 생산에 대하여, 무의식의 종합들에 대하여, 리비도 공급에 대하여 어떤 왜곡을 내포하며 조직히는가를 밝혀야 한다. 오이디푸스가 우리들 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 사람들은 오이디푸스를 요구하고 또 계속 욕구한다고 우리는 줄곧 말해 왔다; 오이디푸스의 멍에를 떨쳐버리 려는 라깡의 깊이 있는 시도도 여전히 오이디푸스를 무게 있는 것이 되 게 하고, 오이디푸스를 갓난아기와 정신분열자에게 덮어씌우는 수단으로 해석되었다. 물론, 인류학적 혹은 역사적 설명이 우리들의 현재의 · 조직과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혹은 이 조직이 그 나름대로 인류학적 가설 의 기초적 요소들을 내포해야 한다는 것은 정당한 일일 뿐더러 또한 절 대로 필요한 일이다 . 이것은 마르크스가 세계사를 재구성할 것을 요구하 면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현재의 조직이 자기자신을 바판할 수 있다고 하는 조건이 있다고 그는 부언하였다. 그런데 오이디푸스의 자기비판은 정신분석이 그 부분을· 이루고 있는 우리들의 조직에서는 전 혀 볼 수 없는 것이다. 어느 점에서는, 모든 사회조직체를 오이디푸스에 서 출발하여 문제삼는 것이 정당하다. 그러나 이것은 오이디푸스가 특별 히 우리들에게서 밝혀낼 수 있는 무의식의 전리인 때문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이것은 오이디푸스가 · 무의식을 흐리게 하는 기만이기 때문이다. 이 기만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예전의 사회조직체들로부터 그 부품들과 톱니바퀴들을 긁어모아 조립함으로써만 성공할 수 있었다 : 이런 의미에 서 오이디푸스는 보편적이다. 그러므로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죽 오 이디푸스가 가장 강한 차원에서는, 오이디푸스 비판이 언제나 그 출발점 울 재검토하고, 그 도달점을 재발견해야 한다. 오이디푸스는 하나의 극한이다. 그러나 극한이란 말은 많은 의미를 지 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궁의 역할을 하는 發端事象으로서는 처음 에 있을 수 있고, 사람들의 관계를 조정하고 그들의 관계의 기초를 다지 는 구조적 기능으로서는 중간에 있을 수 있고, 종말론적 규정으로서는
마지막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이디푸스가 하나의 극한인 것은 이 마지막 의미에서만임을 우리는 보았다. 욕망하는 생산도 역시 그렇다. 그런데 바로 이 셋째 의미도 서로 다른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욕망하는 생산은 사회적 생산의 국한에 있다: 脫規準化한 흐름들은 규준들의 극한에 또 토지들의 극한에 있다; 기관들 없는 신체 는 사회체의 극한에 있다 . 정신분열증의 흐름들이 장애의 벽을 뚫고 지 나가면서, 모든 규준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사회체의 토지를 붕괴할 때 마다 絶對的 極限이 이야기된다: 기관들 없는 신체란 탈토지화한(즉 토지 가 붕괴된) 사회체요, 욕망의 탈규준화한 흐름들이 흐르는 광야요, 세계 의 종말, 황량한 풍경이다. 하지만 둘째로, 相對的 極限은 다름아닌 자본 주의적 사회조직체이다. 왜냐하면 이 조직체는 실제로 탈규준화한 흐름 둘을 기계로서 조작하고 흐르게 하되, 규준둘을 더욱 壓制的인 計量化的 公理系로 대체함으로써 그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그 자신의 경향에 반대되는 운동과 하나가 되어, 끊임없이 벽에 접근하는 동시에 벽으로부터 후퇴한다. 정신분열증은 철대적 극한이지만, 자본주의는 상대 적 극한이다. 셋째로, 사회조직체에 극한이 들이닥치려 하면 사회조직체 는 전력을 다하여 이를 쫓아버리거니와, 이러한 사태의 현실적 형태를 예감하거나 예견하지 못하는 사회조직체는 없다. 이로부터 자본주의 이 전의 조직체들이 집요하게 상인과 기술자를 하나의 카스트 속에 가두어 놓고, 돈의 흐름과 생산의 흐름을 막아 조직체의 규준둘 을 파괴하게 될 자율성을 얻지 못하게 하는 일이 생긴다. 이와 같은 것이 現實的 極限이 다. 그래서 그러한 사회들이 이 현실적 극한에 부딪히면, 이 극한이 그 사회 내부에서는 억제되지만 밖으로부터 되돌아오므로, 그 사회들은 자 기들의 임박한 죽음의 칭조를 우울한· 기분으로 바리본다. 가령, 보하난 Bohannan 은 세 가지 흐름, 죽 消費財의 흐름, 威信財의 흐름, 여자와 어 린이들의 흐름을 규준화하는 티브Ti v 족의 경제를 기술하고 있다. 돈이 갑자기 등장했을 때, 그것은 위신재로서만 규준화될 수 있었으나, 상인들 은 돈을 이용하여, 전통적으로 여자들이 차지했던 소비재의 분야를 빼앗 는다. 이렇게 되자 모든 규준이 뒤흔들린다. 확실히 돈을 가지고 시작하
고 돈을 가지고 끝내는 것, 이것은 규준의 말들로써는 표현될 수 없는 조작이다; 수출풍을 싣고 떠나는 트럭둘을 바라보면서 , 〈 티브족의 가장 연로한 사람들은 이 상황을 한탄하고,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고 있지만, 누구를 바난해야 할지 모른다 〉 . 33) 가혹한 현실이다• 그런데, 넷째 로, 내부에서는 억압받은 이 극한이 이미 근원적인 발단, 즉 신화적 자궁 에서는 象徵的 極限으로서 두사되어 있었다. 규준화되지 않은 흐름들이 용암처럼 흘러 들어와 사회체를 침범하는· 이 악몽울 어떻게 상상할 것인 가? 그것은 푸르브 Fourbe 족의 신화에서처럼 억누를 수 없는 똥의 波動 인가, 아니면 유루구의 신화에서처럼 강렬한 배종의 유체, 죽 근친상간의 〈 이쪽 〉 인가. 이런 유체는 욕망의 표상표현으로서 작용하여 세계 속에 무 질서를 끌어들인다. 이로부터, 마지막으로 디섯째, 극한을 옮겨놓는 일의 중요성이 생긴다: 이 일이란 극한을 사회체의 내부에, 결연의 〈 저쪽 〉 과 부자관계의 〈 이쪽 〉 의 중간에, 결연의 표상작용과 부자관계의 표상표현 사이의 중간에 이행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큰 강에 인공적인 河床 울 파거나 그다지 깊지 않은 많은 작은 개홀에 물줄기를 돌리거나 하여 그 큰 강물의 무서운 힘을 쫓아버리는 것과 같다. 오이디푸스는 이 옮겨 콩)턴 @!O] 다. 그렇다, 오이디푸스는 보편적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 자택일을 믿어버리는 것은 찰못이다: 오이디푸스가 억압-억제 체계의 산물기고, 이때에는 그가 보편적이 아니다. 혹은 그렇지 않고 그는 보편 적이고 욕망의 정립이다. 실상, 오이디푸스가 보편적인 것은 그가 모든 사회에 찾아드는 극한을 옮겨놓은 것, 죽 옮겨놓아전 표상내용이기 때문 이다. 이 표상내용은, 모든 사회가 그들의 가장 깊은 부정적인 것으로서, 죽 욕망의 탈규준화한 흐름들로서 절대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을 왜곡한 것 0] 다. 그러나 이것은 이 오이디푸스의 보편적 극한이 모든 사회조직체 속에 서 〈바쁘게 일하고〉 있으되, 전략적으로 바쁘게 일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카디너의 다음과 같은 지적을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 33) Laura et Paul Bohannan, 'Ihe Tiu of Cent ra l Nig e ria , Inte r nati on al Afric a n Insti tut e , 1953.
힌두인이나 에스키모인은 오이디푸스를 꿈꿀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해 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사로집히거나 〈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지거 나〉 하는 일은 없다 .34) 오이디푸스가 바쁘게 일하기 위해서는 몇 개의 조건이 불가결하다: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터전이 가족적 재생산에서 독립하여야 한다. 죽 결연과 부자관계를 거부하는 토지기계에서 독립되 어야 한다; 이 독립성을 이용하여, 연쇄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단편들은 이 단안들을 파괴하는 하나의 이탈한 초월적 대상에 귀속되어야 한다. 이탈한 대상(남근)은 일종의 집는 일, 적용 혹은 포개는 일, 죽 出發集合 點으로 규정되는 사회 터전을 이제는 到達集合點으로 규정되는 가족의 터전에 포개는 일을 조작하여, 이 양자 간에 일대일 대응관계들의 그물 울 設置해야 한다. 오이디푸스가 바쁘게 일하기 위해서는, 그가 표상체계 에서의 하나의 극한 혹은 옮겨놓아전 표상내용임으로써는 충분치 않다. 그렇지 않고 그가 이 체계의 한복판에 移住하고, 그 자신이 욕망의 표상 표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야 한다. 무의식의 오류추리들과 멜 수 없 는 이 조건들은 자본주의적 조직체 속에서 실현된다__하기는 이 조건 들이 야만적인 帝國組織體들로부터 받은 어떤 古風模微들, 특히 초월적 대상의 정립을 내포하고 있기는 해도 말이다. 자본주의의 모양새는 로렌 스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잘 묘사되어 있다: 〈우리들의 민주적, 산업적 사태의 질서, 그 모양새는 내가-보고-싶어하는_귀엽고-사랑스러운 내 꼬마의 그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原始組織體둘기 이 조건들을 전혀 채우지 못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 이것은 바로 가족이 결연에 열려 있어 서, 역사적인 사회 터전과 의연이 같고 완전히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며, 가족기 사회적 재생산 자체에 활력을 주기 때문이며, 가족이 이탈 가능 한 단편들을 동원하거나 이행시키지만 절대로 이것들을 이탈한 대상에 귀속시키지는 않기 때문이다一_오이디푸스의 정식 3+1 에 대응하는 아 무런 포갬, 아무런 일치도 가능하지 않다 . (3+1 이란 식탁보의 네 귀퉁 이가 삼각형의 세 귀퉁이가 되도록 접혔을 때의 세 항과 이렇게 접는 일 울 조작하는 초월적인 항이다.) 패린 지신은 원시적인 흐름들과 규준들 34) Abram Kardin e r, 'Ihe Indiv i d u al and his Socie t y , p. 248.
의 유동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인간들의 공동체의 한복판에서 이야기하고, 춤추고, 교환하고, 흐르는 대로 흘러가게 하고 게다가 오중을 누고……. 〉 35) 원시사회 안에서는 사람들이, 조상들과 배우 자들의 체계 속에서, 언제나 4+n 에 머물러 있다. 오이디푸스가 여가서 쭉 존재해 왔다고 주장할 수 있기는커녕, 오이디푸스.는 존재하기 시작하 지도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3+1 보다 훨씬 앞선 데 있었고, 원 시적 오이디푸스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네그- 엔트로피 neg -e n t ro pi e 와 갇은 의미에서의 네그-오이디푸스이다. 오이디푸스는 정녕 극한이요 옮 겨놓아전 표상내용이지만, 바로 이 때문에 집단의 각 성원은 언제나 〈 이 쪽〉이나 〈저쪽〉에 있고, 오이디푸스의 자리를 차지하는 법이 없다. (이 것은 카디너가 우리가 앞서 인용한 정식에서 잘 간파한 것이다.) 오이디 푸스를 존재하게 하되, 그 본래의 모습이 뚜렷한 오이디푸스, 즉 순수한 압제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식민지화이다. 이와 같은 일은 오이디푸스가 다음과 같은 것을 전제하는 데 따라 생긴다. 즉 이 야생의 사람들이 그 들의 사회적 생산을 관리히는 권한을 빼앗겨, 그들에게 남은 유일의 것 에, 더군다나 알콜과 병약함에 못지않게 억지로 오이디푸스화되는 고통 을 주는 가족적 재생산에 포개지는 때가 익는 데 따라 생긴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이디푸스가 바쁘게 일할 조건들이 실 현되는 때가 오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오이디푸스가 옮겨놓아전 표상내 용이라고 하는 그 본래의 모습을 떨쳐버린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35) Paul Parin et coll. Les Blancs pe nsent tro p, 1963, tr. fr. Pay o t, p. 432. 결혼이 원시적 사회 터전과 外延이 갇은 점에 대해서는 Jau li n, la Paix blanche, p. 256 9-1 지적을 참조할 것 : 〈결혼은 친족관계의 법칙들에 의하여 지 배되지 않는다. 그것은 무한히 더 복잡하고 덜 굳어져 버린 하나의 動力學에 따 라 행해진다. 이 동력학의 독창적인 점은 다른 중요성을 지닌 많은 座標軸을 순 간마다 이용하는 데 있다……. 결혼은 과거에 대한 投機이기보다 더 쉽사리 미 래에 대한 루기이다. 어쨌든 이 결혼들과 그것들의 두기는 복집한 · 것에서 유래 하는 것이지, 기본적인 것에서 유래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굳어져 버린 것에서는 철대로 유래하지 않는다. 그 이유인죽, 인간은 결코 법칙들을 어기기 위해서만 법칙들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 이렇게 되면 違反이란 개념은 어리 석은것이 되고만다.
표상내용은 무의식을 그 오류추리들의 함정에 빠뜨려, 욕망하는 생산 전 체를 짓밟고, 이것을 신앙둘의 체계로 대체하여, 욕망의 표상표현의 자리 를 빼앗게 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결코 원인이 아니다: 오이디푸스 는 선결되어야 할 어떤 형의 사회적 공급, 죽 가족의 규정들에 포개지는 데 적합한 사회적 공급에 의존한다. 이런 원리는 아마 어른에게는 타당 할지 몰라도 어린이에게는 분명히 타당치 않다고 하는 반성이 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바로 아버지의 머리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그 것은 절대적인 시작이 아니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가 역사적인 사회 터 전을 실현시키는 공급들로부터만 형성된다. 따라서, 오이디푸스가 아들에 게 넘어가는 것은, 가족적 유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들의 커뮤니케이션에 의존하는 훨씬 더 복잡한 관계의 힘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이에게 있어서도, 가족적 자극둘을 통하여 공급되는 것은 역시 사회 터전이요, 가족 밖의 절단들과 흐름들의 체계 전체이다. 아버 지가 아들에 대해서 우선한디는 것은, 다론 우선, 죽 사회적 공급들과 역 공급등기 가족적 공급들에 대해서 우선한다는 것에 관련해서만 분석적으 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나중에 망상들의 분석의 차원에서 고 찰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오이디푸스가 하나의 결과임이 분명하다면, 이것은 오이디푸스가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이 포개지는 도달집합점 (소우주가 된 가족)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생산과 재생산의 器官 둘 및 동인들은 이제 더 이상 결연과 부자관계의 규준화를 경험하는 일 은 전혀 없고, 다만 탈규준화한 흐름들의 공리계를 경험할 따름이다. 이 렇게 되면 자본주의의 主權形成體는 자기에게 응답하는 친밀한 식민지적 형성체를 필요로 하고, 이 형성체와 일체를 이루게 된다. 이 후자가 없으 면 전자는 무의식의 생산들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조건들 속에서, 인류학과 정신분석의 관계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 할 것인가? 양자가 모두 상칭체계의 환원 불가능한 두 분야를 대립시키 면서 서로 당황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불확실한 평행관계로 만족해야 하 는가? 대립하는 두 분야란 상칭들의 사회적 분이와, 일종의 私的인 보편, 즉 개인적 보편을 구성하는 성적 분야인가? (이 양자 사이에는 몇 개의
횡단선이 있다. 왜냐하면 사회의 상정체계는 성적 소재가 될 수 있고, 성 욕은 사회적 자격을 인정하는 의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 제가 이렇게 제기되는 것은 너무 이론적이다. 실제로는, 정신분석가가 가 끔 인류학자에게 상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상칭은 남근, 거세, 오이디푸스를 의미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인류 학자는 딴 것을 문제삼으며, 정신분석적 해석들이 자기에게는 무슨 소용 이 있는지 마음속에서 자문한다. 그러므로 二元性은 옮겨놓아진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두 분야 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두 종류의 물음 사이에 있다: 〈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와 〈 그것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 사이에 있다. 인류학자에게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 가 중요한 것 이 아니라, 상칭을 사용하는 조직체에서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고 어 떻게 작동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36) 어떤 것이 무엇을 의미한다 해 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가령, 오이디푸스가 정 신분석가들에게도 무의식에 대해서도 아무 소용이 없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남근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거세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이 남근은 도대체 무엇에 소용이 되는가? 물론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을 혼동 해서는 안 된다는 말둘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시니피앙은 우리를 〈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란 물음 밖으로 나가게 해주는가? 그것은 이 동일한 문제 속에 들어박히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여전히 표상의 영역이 다. 인류학자들(혹은 그리스 연구가들)과 정신분석가들 간의 전정한 오 해들, 실천상의 오해들은 무의식을, 성욕을, 상칭체계의 남근의 본성을 이해하고 있는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가에서 생기지는 않는다. 모든 것 이 끝에서 끝까지 성적이고 성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 는 누구나 원리적으로. 의견을 같이할 수 있다 . 상칭체계를 사용하는 사 람들을 위시하여, 누구나 이것을 알고 있다. 실천상의 오해들은 오히 36) 로제 바스띠드 Rog er Bas ti de 는 상칭의 두 분야에 관한 이론을 체계적으로 전개하였다. Socio lo g ie et Ps yc hanalys e , P.U.F., 1950. 그런데, 리츄는 처음에 는 비슷한 관점에서 출발하면서, 이 二元性울 옮겨놓고, 이것을 의미의 문제와 사용의 문제 사이로 옮아가게 하고, 마침내는 문제의 시야를 바꾸어놓는 데 이 르고 있다: Cf. Magi ca l Ha ir.
려 두 종류의 물음 사이의 깊은 차이에서 생긴다. 언제나 분명하게 정식 화하고 있지는 않지만, 인류학자들과 그리스 연구가들은, 상징은 그것이 의미하는 것에 의하여 규정되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사 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지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생각한다. 그 것은 언제나 남근 혹은 이와 비슷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 다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에 소용되는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인류학적 자료가 없다고 하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류학적 해석이 없는 것이다: 오직 사용들과 작동들만이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인류학자들이 정신분석가들에게서 많이 배운다 고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즉 〈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 이 중요하지 않디는 데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리스 연구가 둘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을 취할 때, 그들이 정신분석적 해석에 대하여 다른 해석들을 대립시키고 있다고 믿는 일은 피해야 할 것이다. 인류학자들과 그리스 연구가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결 국에는 정신분석가들로 하여금 억지로 자기들의 발견과 비슷한 발견을 하게 하는 일은 있을 수 있다: 그 발견이란, 이제는 무의식의 소재도 없 고 정신분석적 해석도 없으며, 다만 사용들, 즉 무의식의 종합들의 분석 적 사용들만이 있으며, 이것은 시니피앙을 지정함으로써도 시니피에들을 규정함으로써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것이 유일의 문제이다. 정신분열자-분석은 일체의 해석을 포기한 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의석의 소재를 발견하는 일을 일부러 포기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대신, 무의식은 기계 둘을 이루는데, 이 기계들은 욕망의 기계들이요, 정신분열자-분석은 이 기계들이 사회기계들 속에 내재하면서 어떻게 사용되고 어떻게 작동하는 지를 발견한다. 무의식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다만 기계로서 작동한 다. 그것은 표현하는 것도 아니요, 표상하는 것도 아니라, 다만 생산하는 것이다. 상칭은 오로지, 욕망하는 기계로서 작동하는 하나의 사회기계요, 사회기계 속에서 작동하는 욕망하는 기계이며, 욕망에 의한 사회기계의 공급기다.
제도는 기관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의하여 설명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흔히 말해지고 증명되었다. 생물학적 조직체, 사 회적 조직체는 이것들이 작동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지는 않다. 그래서 명확하게 규정된 큰 집합들의 차원에서는, 생물학적, 사회 학적, 언어학적 등의 기능주의가 없다. 그러나 분자적 요소들로서의 욕망 하는 기계들에 있어서는 사태가 같지 않다: 이것들에게 있어서는 사용, 작동, 생산, 조직이 하나가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욕망의 종합이야말로, 어떤 일정한 조건들 아래, 생물학적, 사회적 혹은 언어학적 분아에서의 전체적 집합들과 이것들의 특정한 사용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큰 덩어리를 이루는 큰 기계들이 미리 설정된 연결둘을 전제하는데 이 연결둘은 이 기계들의 작동에 의하여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이렇 게 설명되지 않는 까닭은 작동이 이 연결들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 아 니기 때문이다. 오직 욕망하는 기계들만이 이 연결들울 낳는데, 이 기계 둘은 이 연결들을 따라 작동하되, 이 연결들을 즉석에서 만들어내면서, 이것들을 발명하면서, 이것들을 형성하면서 작동한다. 그러므로 큰 덩어 리를 이루는 것에 관한 機能主義는 갈 데까지 충분히 가지 못한 기능주 의, 욕망이 기계로서 작동하고 있는 영역들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기능주 의이다. 이 기능주의가 기계로서 조작하고 있는 것은 거시적인 것인데, 욕망은 이런 성질의 것과는 무관하게 작동한다: 욕망이 작동하고 있는 영역들에서는 유기적, 사회적, 언어학적 요소들이 모두 함께 같은 냄비에 넣어져서 요리되고 있다. 기능주의는 욕망하는 기계들 자체 이의의 다의 성을 이루는 단위들을, 또 이 기계들이 생산의 터전의 모든 분야에서 형 성하는 여러 가지 모양의 것들을 알 필요가 없다. (〈전체적 시실〉을 알 필요가 없다.) 魔術的 連鎖는 식물들, 기관의 단편들, 옷자락, 아빠의 심 상, 정식들과 낱말들을 연결시킨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그것이 무엇 을 의미하는가가 아니고, 이렇게 해서 어떤 기계가 조립되는가, 어떤 흐 름들과 어떤 절단들이 다른 흐름들 및 다른 절단들과 관계하는가 하는 것이다. 빅타 터너는, 느멤부족에게 있어서의 갈라진 나뭇가지의 상칭체 계를 분석하면서, 이 나뭇가지에 붙여진 이름들은 한 연쇄의 부분을 이
루는데 이 연쇄는 나뭇가지롤 뜯어낸 나무의 종류들과 특성들만 아니라, 이 종류들의 이름, 그 나뭇가지를 다루는 기술적 수법을 동원한다는 것 을 밝히고 있다. 사람들은 물질의 흐름들에서만 아니라 시니피앙의 연쇄 들에서도 채취한다. 해석적 의미(사람들이 사물에 관해서 말하는 것)는, 다른 요소들 중의 한 요소일 따름이며, 조작적 사용(사람들이 그 사물을 가지고 하는 일)이나 단위적 기능(같은 복합체 속에서의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보다 덜 중요하다. 조작적 사용이나 위치적 기능에 있어서는 상칭 이 결코 그것이 의미하는 것과 일대일의 관계에 있지 않고, 언제나 다양 한 것을 지시하고 있다• 즉 〈언제나 多聲的아고 多義的〉이다 •37) 삐에르 보나페 Pi er re Bonn af e 는, 콩고의 쿠쿠야 Kuku ya 족의 마술적 대상 부티 bu ti를 분석하면서, 어떻게 이 부티가 이것을 생산하고 등록하고 소비하 는 실천적 종합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가를- 밝혔다: 이 종합들이란 당사자의 신체의 단편둘을 동물의 신체의 단편들로써 구성하는 부분적이 고 비특수적인 연결; 이 연결의 대상을 당사자의 신체 속에 등록하고, 당사자를 인간-동물에로 변형시키는 포함적 이접; 〈殘余〉를 埋沒하거나 7 Jtjq_시키기 전에 이 잔여로 하여금 긴 여행의 시련을 겪게 하는 잔여적 연접이다 .38) 인류학자들이 오늘날 物神이라고 하는 가설적 개념에 대해서 37) Vic t o r W. Turner, Themes in the Sy m bolis m of Ndembu Hunti ng Ri tua l, in My th and Cosmos, Nat ur al Hi st o r y Press, 1967, pp. 249 - 38) 26P9i. e r re Bonnafe , Obje t mag iqu e, sorcellerie et fet ic h ism e?, Nouvelle reuue de psyc hanalys e , n °2, 1970( 〈쿠쿠야족은 대상의 본성은 중요하지 않고, A본d질le적r, 인L ' 것Et은h n o그log것 ie이 e t 움 Le칙s f인et다i c는h es . 것《이新라精고神 分주析장雜한誌다》〉의). 이 C號f. 는a u〈ss物i 神A崇l f拜re의d 대상들〉을 特輯하고 있는데, 이 호의 관심은, 인류학자들이 여기서 어떤 이론에 다른 이론을 대립시키고 있는 데 있지 않고, 그들 자신의 인류학적 실천과 그들 는이 데연 구있하다는. 에사 릭회 적로 랑실 천E들ric에 La관u련re하n여t은 ,정 『신터분너석 의解 釋해 F석ac들u의lt e 有 de效 N範a園n t를 er re문 』제이삼란 제목의 回想에서, 이 접에 관하여 매우 깊이 있게 方法의 문제를 제기할 줄을 알고 있었다. 죽, 일련의 逆轉을 조작하는 것, 해석이나 正當化보다는 使用을, 表 現보다는 生産性울, 宇宙論的 神話들보다는 사회 터전의 現狀울, 構造的 모델 들보다는 분명한 儀式을, 親族關係의 圖表들보다는 〈사회적인 드라마〉, 정치적
전술과 전략을 더 중요시하는 것이 필요함을 제시하였다.
강한 홍미를 되찾고 있는 것은 확실히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은 때문이 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그들에게 이 개념에 주의를 기울일 근거 못지않 게 이 개념을 의심할 근거를 주고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정신분석은 물신에 관해서 말한 데 못지않게 남근-오이디푸스-거세를 말했기 때문 이다. 한편 인류학자는, 물신의 사용이 개인적이고 사적인 때에도, 물신 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정치 권력, 경제력, 종교적 세력의 문제가 있다 고 느끼고 있다. 가령, 머리털이 그렇다. 머리털을 자르고 머리를 맣는 의식을 생각해 보자: 이러한 의식들을 〈분리된 물건〉을 의미하는 것으 로서의 실체인 남근에 관련시키고, 이 분리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것으 로서의 아버지를 어디서나 생각해 낸다고 하는 것은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인가? 이것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 이 아닌가? 인류학지는 머리털의 흐름, 그런 흐름의 절단들, 절단을 통해 서 한 상태가 다른 상태로 옮아가는 사태에 직면해 있다. 리츄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갇이, 머리털은 신체의 부분적 대상 내지 분리될 수 있는 부 분인 한에서 공격하는 분리된 남근을 대표하지 않는다; 머리털은 그 자 체 하나의 물건이요, 공격장치 속의, 분리시키는 기계 속의 하나의 물질 적 부품이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문제는 의식의 根底가 성적인가 아닌가, 혹은 성욕의 틀을 넘는 정치적, 경제적 및 종교적 차원들을 고려해야 하는가 에 있지 않다. 문제를 이렇게 제기하는 한, 리비도와 누멘 사이의 선택을 강요하는 한, 인류학자들과 정신분석가들 간의 오해는 커질 뿐이다 __ 오 이디푸스에 관하여 그리스 연구가들과 정신분석가들 간에 오해가 줄곧 커지는 것과 똑갇이 말이다. 오이디푸스, 이 안짱다리 전제군주, 이것은 분명히 온통 정치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전제군주기계를 낡은 원시 적 토지기계에 대결시킨다. (여기서 토착원주민이 부정되는 동시에 존속한 다는 것이 도출되는데 레비-人 E쿠 _는 이것을 잘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 드라마의 성적 성격을 제거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반 대이다. 사실상, 문제는 성욕과 리비도 공급을 어떻게 보아아: 하는가에
있다. 이것들을 어떤 사건 혹은 어떤 〈 깊은 정감 〉 에 관련시켜야만 하는 가? 이 정감은 순수한 시니피앙의 이름으로, 구조적으로 해석될 때에도, 어디까지나 가족적이고 친밀한 것, 친밀한 오이디푸 스 적 정감인데, 이런 정감에 관련시켜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성욕과 리비도 공급을 역사적 인 사회 터전을 결정하는 것들에 관련시켜야 하는가? 이 터전에서는 경 제 • 정치 • 종교가 리비도에 의하여 이것들 자체를 위하여 공급되지, 아 빠」김마 따위의 것으로부터 파생되지 않는다. 첫째 경우에는, 큰 덩어리 를 이루는 집합들, 큰 사회기계들―_경제, 정치 등 __ 이 고찰되기는 하 지만, 이 집합들은 리비도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추 상적인 가족적 집합에 일치시켜져서 ,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탐구· 된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표상의 테두리 안에 머문다• 둘째 경우에는, 사람들이, 가족을 포함히여 , 이 큰 집합들을 넘어서서 분자적 요소들에로 나아가는데, 이 요소들은 욕망하는 기계들의 부품들과 톱니바퀴둘을 형 성하는 것들이다. 여기서는 이 욕망하는 기계들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 기계들이 큰 규모로 구성하는 사회기계들을 이 기계들이 어떻게 공급하 며 세부적으로 규정하는가가 문제된다. 이때 사람들은 생산적, 분자적 微 ,J~究的 혹은 微/J心理的 무의식에 도달하는데, 이 무의식은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는다. 성욕은 이제 더 이상 큰 집합들에서 파생된 인물들을 결합시키는 특수한 에네르기로 생각되지 않고, 부분적 대싱들인 분자들을 연결시키고(리비도), 기관들 없는 신체라고 하는 거대한 분자 위에서 포함적 이점들을 조직하고(누 멘), 現前하는 영역들이나 강도의 地帶들에다가 상태들을 분배하는(불룹 타스) 분자적 에너지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욕망하는 기계들이란 바로 무의식의 미소물리학, 미소무의식의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것인 한, 그것들은 그것들이 통계학적으로 구성하는 큰 덩어리를 이루는 역사적 집합들, 거시적인 사회조직체들로부터 독립해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과 사회적인 것만이 존재한다. 경제적 • 정치 적 • 종교적 등등의 조직체들의 의식적 공급들 밀에는 무의식의 성적 공 급, 미소공급들이 있다. 이것들은 욕망이 사회 터전 속에 현전하는 방
식, 욕망이 자기에게 결부된 통계학적으로 결정된 영역으로서의 이 사회 터전에 참가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사회기계들 속에 서 작동한다. 마치 그것들이 다른 한편으로 큰 數들의 차원에서 형성하 고 있는 큰 덩어리를 이루는 집합에서 그것들 자신의 체제를 지키고 있 는 듯이 작동한다. 상칭, 물신은 욕망하는 기계의 의지표시들이다. 성욕 은 결코 가족적 집합 속에서 표상할 수 있는 큰 덩어리를 이루는 것의 규정이 아니고, 본래 사회적이고 이차적으로- 가족적인 집합들 속에서 작 동하는 분자적 세부규정이다. 이 집합들은 욕망이 현전하고 생산하는 터 전, 죽 비오이디푸스적인 무의식 전체를 구획짓는다• ` 이 무의식은 그 이 차적인 통계학적 형성물들(콤플렉스들)의 하나로서만 오이디푸스를 산출 한다. 그것도 사회기계들의 연방 생성시키는 역사의 마지막 단계에서, 욕 망하는 기계들의 생성에 맞먹는 사회기계들의 체제를 등장시키는 역사의 마지막 단계에 가서야 산출한다. 표상이 언제나 욕망하는 생산의 억압- 억제라 해도, 그것은 고찰되는 사회조직체를 따라 서로 아주 다른 갖가지 방식으로 행해진다. 표상의 체계는 그 심층에, 억제된 표상표현, 억제하는 표상작용 및 옮겨놓아전 표상내용이라고 하는 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을 현실화시 키는 결정기관들은 가변적이며, 체계 속에는 이동들이 있다. 우리는 사 회-문화적 억제의 유일의 동일한 장치의 보편성을 믿을 근거를 전혀 가 지고 있지 않다. 사회기계들과 욕망하는 기계들 간의 천화력의 係數에 관하여는 다음의 여러 경우를 따라 그 크고 작음을 말할 수 있다: 이 두 기계의 각각의 체제가 더 비슷한가 덜 바슷한가에 따라; 욕망하는 기 계들이 자기들의 연결들과 상호작용들을 사회기계들 속에 이행시키는 기 회를 많이 가지고 있는가 적게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전자가 후자로부 터 떼내는 운동을 많이 조작하는가 적게 조작히는가에 따라; 치명적인 요소들이 욕망의 메커니즘 속에 붙들려, 사회기계들 속에 갇혀 있는 채 로 있는가, 그렇지 않고 반대로 사회기계 전체에 퍼져 욕망을 짓부수는 죽음의 본능에 합류하는가에 따라. 이 모든 점들에서의 주요한 인자는 사회적 등기의 형 내지 종류, 죽 그 알파벳, 그 문자들이다: 사회체 위
에의 등기는 사실상 이차적인, 죽 억제의 집행자인데, 이 억제는 반드시 기관들 없는 신체의 욕망하는 등기와 또 이 기관들 없는 신체가 이미 욕 망의 영역에서 행하고 있는 일차적 억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 관 련은 본질적으로 가변적이다. 사회적 억제는 언제나 존재하지만, 억제의 장치는 변동한다. 특히 무엇이 이 장치의 대상이 되는 표상표현의 역할 울 맡는가에 따라 변동한다. 이런 의미에서 원시적 규준들이, 욕망의 흐 름들을 잔인성의 체계 속에 단단히 묶어놓으면서, 최대한으로 경계하며 폭 넓게 이 흐름들에 영향을 미치는 때에도, 탈규준화한 흐름들을 풀어 놓는 자본주의의 공리계보다는 무한히 더 많은 친화력을 욕망하는 기계 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욕망이 아직 올가미에 걸리지 않고, 막다른 골목들 속에 끌려 들어가지 않고, 흐름들이 그 다의성을 조 금도 잃지 않고, 또 표상작용 속의 단순한 표상내용이 아직 표상표현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경우에 억제장치 의 본성과 욕망하는 생산에 대한 이 장치의 작용들을 평가하려면, 심층 에서 조직되는 표상작용의 요소들만 아니라, 표상작용 자체가 표면에서 죽 사회체의 등기의 표면에서, 조직되는 방식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는 교환주의자가 아니며, 사회체는 등기자이다: 교환하는 것이 아 니라, 신체에 표시를 하는 것이 그 임무이다; 신체는 땅에 속해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앞서 본 바와 같이, 負債의 체제는 이 야생적 등기의 요 구들게서 직접 유래한다. 왜냐하면 부채는 결연의 단위요, 결연은 표상작 용 자체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흐름들을 규준화하고, 부채를 통하여, 인 간에게 말들의 기억울 하게 하는 것은 결연이다. 결연은 강렬하고 말없 는 부자관계의 위대한 기억, 모든 것을 水沒시키는 규준화되지 않는 흐 름들의 표상표현으로서의 배종의 유체를 억제한다. 부채는 확대된 부자 관계와 더불어 결연을 구성하고, 밤의 强度들을 억제하고는 그 위에 의 연을 가진 체계 (표상작용)를 형성하고 벼려서 만든다. 부채로서의 결연 은 니체가 인류의 有史以前의 노고로서 기술한 것에 대응한다. 즉 맨 살 에 새겨넣는 가장 잔인한 기억술에 의하여, 생물적-우주적인 오래된 기
억을 억제하고 그 위에다가 말들의 기억을 강요하는 것에 대응한다• 그 러므로 부채(와 등기들 자체)를 보편적인 교환의 간접적 수단으로 보지 않고, 원시적 등기의 직접적 결과로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모스가 적 어도 해답을 내놓지 않은 채 남긴 다음과 같은 물음을- 생각해 보자: 부 채는 교환보다도 근원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고 교환의 한 양식, 교환을 위한 한 수단인가? 레비 -A-드 루 A- 는 다음과 같이 단정적으로 이 물음에 답하겨 이 물음을 해결한 듯했다: 부채는 하나의 상부구조, 죽 교환의 무의식적인 사회적 현실이 돈으로 바뀌는 의식적 형태이다 .39) 여기서 문 제되는 것은 근거들에 관한 이론적 논의가 아니다; 사회적 실천관 전체, 이 실천에 의하여 전파되는 公準둘이 여기서 문제되고 있다. 그리고 무 의식의 문제 전체가 문제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교환이 사태의 근저 라고 하면, 왜 부채는 유달리 교환의 양상을 띠어서는 안 되는가? 왜 부 채는 증여 혹은 返禮내曾與이고, 교환이 아니어야만 하는가? 또 왜 증여 하는 사람은 나중에 반례품을 받는 교환을 기대하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히여, 또한 도둑맞은 사람의 위치에 있어야 하는가? 도둑질 은 증여와 반례-증여가 교환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다. 욕망은 교환을 모른다. 욕망은 도둑질과 증여만을 안다. 가끔 이 양자는 원초적 동성애의 영향을 받아 서로 얽히기도 한다. 여기서 반교환주의적인 사랑 의 기계란 것이 출현하는데, 이것을 조이스는 『亡命者들』에서, 클로소스 키는 『로베르트 Rober t e 』에서 추적하고 있다. 〈구르망체족의 이데올로기 에서는, 모든 것이 마치, 한 여자가 주어질 수만 있거나(이것은 리튀아티 엘리 lityu a ti e li이다), 빼앗기거나, 납치되어, 따라서 어떤 모로 도둑 맞는 39) Lev i-S tr a uss, Intr o ducti on a !'oeuvre de Marcel Mauss, in Mauss, Sdeo cilao l o pga ier e n ette , a npt. h r2o 0p9 o: l og〈 i왜e, 一P.般U.化F.된, p交p.換 3體8系-3가9 . 밑E바t 닥St에r u c깔tu r린 es 채ele로m e있nt는a 가i r ,es 이 분명한 체계가 아주 다론 말들로써 定式化되는 사실은 무슨 원인들로 말미암 는지, 설명할 것.〉 이 원리에서 출발하여, 레바-人드로_ 가 어떻게 욕망의 충동 들과는 관계가 없는 공허한 형식으로서의 무의식이란 생각에 도달했는가에 관하 여는, Anth ro p ol og ie s 如 c tu. rale, p. 224 참조. 『神話硏究 My t holo giques 』의 連 作이 원시적 규준들, 흐름의 규준화와 器官들의 규준화에 관한 이론을 만들어내 고 있는데, 이 이론은 모든 면에서 교환주의의 생각을 넘어서고 있다.
(이것은 립워탈리 lip wo t a li이다) 듯이 진행된다; 두 가계 혹은 가계의 분 가들 간의 직접적 교환의 결과로 너무 명백하게 보일 수 있는 모든 결합 은 이 사회에서 금지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널리 시인되지는 않고 있다 .〉 4 0 ) 욕망이 교환을 모르는 것은 교환이 욕망의 무의식인 때문 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교환의 일반화가 요구된 데서 이렇게 말해지 는 것인가? 그러나 어떤 권리를 가지고 부채의 절단들은 〈 더 현실적인 〉 전체에 대해서는 이차적인 것이라 언명할 수 있는가? 하지만, 교환은 알 려져 있으며, 잘 알려져 있다―-그러나 추방되고 봉해지고, 엄격하게 제 한될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이것은 어떤 유통가치도 교환가치로 발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교환가치는 시장경제라고 하는· 악몽을 끌어 들이겠기 때문이다. 원시적 매매는 같은 값을 매기는 일보다는 오히려 값을 깎는 일로써 행해진다 . 같은 값을 매기는 일은 흐름들을 탈규준화 하고 사회체에 대한 등기양식을 붕괴시키겠기 때문이다. 우리는 출발점 에 되돌아왔다: 교환이 금지되고 추방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근원적 현실이라는 것의 증거가 전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본질적 인 것은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등기하는 것, 표시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교환을 하나의 무의식적 현실로 보고, 구조의 권리들을 끌어대도 소용없는 일이다. 이 구조에 관련된 태도들과 이데올로기들은 으레 교환 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구조의 권리들을 끌어대는 것은 제 도들을 설명하는 교환주의 심리학의 원리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상 정하는 것일 따름이요, 다른 한편으로 이 제도들이 교환적인 것이 아님 울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여기서 사람들은 무의식 자체를 어떤 것으로 보려는 것인가? 무의식을 분명히 하나의 공허한 형식, 죽 욕망 자 체가 거기에 부재하고 거기서 추방되는 공허한 형식에로 환원시키고 있 을 따름이 아닌가? 그러한 형식은 先 意 識울 규정할 수는 있어도, 무의식 울 규정할 수 없음은 확실한 일이다. 왜냐하면 설사 무의식이 소재나 내 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확실히 무의 40) Mi ch el Cartr y , Clans, lign age s et gro up e ments familiau x chez les Gourmant ch e, L'Homme, avril 1966, p. 74.
식이 공허한 형식이기 위해서가 아니고, 무의식이 언제나 이미 작동하는 기계, 욕망하는 기계이기 때문아지 無欲望症的 구조인 때문이 아니다• 기계와 구조의 차이는 사회체에 대한 교환주의의 구조적인 생각을 은 근히 북돋워주는 공준들에 나타나는데, 구조가 작동할 수 있으려면 이 생각에는 몇 가지 조건이 도입되어야 한다. 첫째로, 친족의 구조들에 있 어서는 마치 결연들이 부자관계의 가계들과 이들의 관계들에서 생기는 듯이 일을 전행시켜 나가지 않을 수 없는데, 사실은 횡적안 결연들과 부 채 더미가 외연을 가진 체계에서 확대된 부자관계를 좌우하지, 이 관계 가 거꾸로 되지는 않는다. 둘째로, 의연을 가전 체계를 있는 그대로, 죽 자연체계로 보지 않고, 논리적 결합장치로 보기가 쉽다. 자연체계에서는 강도들이 할당되는데, 그중의 어떤 것들은 相殺되고 흘러가는 것을 막으 며, 다른 어떤 것들은 흘러가는 것을 흐르게 하는 등의 일을 한다. 우리 의 이러한 생긱에 대하여는 디움과 같은 반론이 있다: 의연을 가전 체계 에서는 자연적 대상들만 아니라, 〈또한 존엄성, 책임, 특권 〉 같은 것들도 전개되고 있다. 이 반론은 이 체계의 조건들 속에서 不可通約的인 것들과 不等價한 것들이 맡고 있는 역할을 오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가 한다. 바로, 셋째로 교환주의의 구조적인 생각은 그 원리들에 있어서 근본적인 가격의 균형, 등가 혹은 상등을 요청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하기는 결과들 속에는 반드시 부등한 것들이 있음을 설명할 각오는 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카친 Kach i n 족의 결혼에 관하여 레 비-스'E로 A 와 리츄 간에 전개된 논쟁만큼 깊은 의미를 지닌 것은 없 다; 레비一`탸구 A 는 〈일반화된 교환의 평등주의적 조건들과 이것들의 귀족주의적 결과들 간의 갈등〉을 끌어대면서, 리츄가, 체계가 균형을 지 니고 있다고 믿은 듯이 보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전혀 다른 데 있다: 레비-스드로人가 믿은 것처럼, 불균형이 병리적이고 결과에 속하는 것인 지, 그렇지 않고 리츄가 생각한 것처럼 불균형이 기능적이고 원리에 속 하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 문제이다 .41) 균형의 불안정한 것은 교환의 이 41) Lev i-- S t r a uss, Les Str u ctu r es elementa i r e s de la pa rente , pp. 306-3 08. 그 리고 그가 리츄의 주장을 제시하고 있는 방식에 관하여는 cf. pp. 276 sq. 그러
나, 이 주장 자체에 관하여는, cf. Leach, Criti qu e de l'ant h r op o log ie, 1966, tr. fr. P.U.F., pp. 152-154, 172-174.
상과의 대비에서 파생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고 전제들 속에 이미 주어 져 있는 것인가? 죽 급부와 반대급부를 구성하는 항들의 이질성 속에 들 어 있는 것인가? 결연이 행하게 하는 경제적 및 정치적 거래, 여자들의 급부의 불균형을 메우게 되는 반대급부의 본성, 일반적으로 급부 전체가 특정 사회에서 평가되는 방식-이런 것들에 주의를 많이 하면 할수록 의연을 가전 체계의 필연적으로 개방적인 성격이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마치 잉여가치의 원시적 메커니즘이 규준의 잉여가치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그러나 여기에 넷째 점이 나타나는데-교환주의의 생각 은 통계학적으로- 닫힌 폐쇄적 체계를 내세우고, 구조를 심리적 확신(〈円 環기 닫히리라는 安心感 〉 )으로써 뒷받침하지 않을 수 없다. 횡적인 결연둘 과 繼起하는 세대들에 따른 부채덩이의 본질적 개방성만 아니라, 특히 통계학적 조직체들과 이것들의 분자적 요소들 간의 관계는 구조적 모델 에 일치하지 않는 단순한 경험적 현실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된다 . 42) 그 런데 끝으로, 이 모든 것은, 부르주아 경영학을 규정한 데 못지않게 교환 주의 인류학에 무거운 짐이 되는 하나의 공준에 의존하고 있다. 그 공준 이란, 사회적 재생산을 순환의 영역에 환원시켜야 한디는 것이다. 사람들 은 사회체 위에 나타나는 의견상의 객관적 운동에는 유의하지만, 이 운 동을 등기하는 현실적 결정기관과 이 운동을 등기하는 데 쓰이는 경제적 인 힘과 정치적인 힘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결연이란 사회체가 그 등기 들의 이접적 체제에서 노동의 연결둘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형식임을 보지 않는다. 〈사실, 생산관계의 관점에서는, 여자들의 순환이 노동력의 재분배로 나타나지만, 사회가 그 경제적 기반에 관해서 갖는 이데올로기 적 표상에 있어서는, 이 양상이 교환관계 앞에서 사라전다. 하지만, 이 교환관계는 노동력의 재분배가 순환의 영역에서 취하는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학은, 재쟁산의 과정에서의 순환의 괴정을 고립시킴으로써, 이 표상을 비준하고〉, 이 표상의 식민지적 의연 전체를 부르주아 경제학
42) Levi -S tr a uss, 앞의 책, pp. 222-223(cf. 〈循環論者들〉과의 동계학적 비교).
에 준다 .43)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이 보기에, 본질적인 것은 등기의 요구 들에 엄밀하게 종속하는 교환이나 순환이 아니라, 등기 그 자체, 즉 신체 속의 불줄기, 알파벳 및 부채 덩이를 지닌 등기 자체이다. 등기를 主宰하 는 단단한 기계적 경역이 없으면, 생기없는 구조는 결코 작동하지 않으 며, 순환시키는 법도 없다. 야생의 조직체들은 구두의 음성에 의존하지만, 이것은 그것들이 문자 의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大地 위에서의 춤, 칸막이 벽 위에 그린 소묘, 신체 위의 표시는 하나의 문자체계, 하나의 土地-字 體, 하나의 지리학이다. 야생의 조직체들이 구두의 음성에 의존하는 것은 바로 그것들이 음성에서 독립해 있는 문자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자체계는 음성에 추종하지도 않고 음성에 종속하지도 않는다. 그렇 지 않고 다차원적인 〈 이를테면 방사선 모양의 조직 속에서 〉 연결되고 알맞게 동합되어 있다 . (그래서 이 문자체계는 直系型의 글에 반대되는 것이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文明들이 구두의 음성에 의존하기를 그 치는 것은 문자체계의 獨立性과 그 固有의 次元들을 상실함으로써만이다; 字體가 音聲 대신에 들어서고 虛構의 음성을 끌어내는 것은 字體가 음성 에 충실하게 추종함으로써이다 ..) 러루와-구랑 Lero i -Gourhan 은 야생의 등기 내지 토지의 표상의 이질적인 이 두 극―_음성-청취와 손-표기의 짝―-을 훌륭하게 묘사하였다.”) 그런 기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사실 이 기계는 작동한다: 음성은 결연의 음성과 같은 것인데, 확대된 부자관 계 편에서는, 이 음성을 닮지 않은 하나의 耆法이 이 음성과 찰 어우러 져 있다. 젊은 여자의 몸에는 割禮 때에 쓰이는 호리병박을 붙인다. 남편 의 가계에서 제공된 이 호리병박은 결연의 음성의 지휘자의 구실을 한 다; 그런데 거기에 적히는 자체는 그 젊은 여자의 씨족의 성원에 의하여 적히지 않으면 안 된다. 음성과 자체라고 하는 이 두 요소의 分節은 신 체 위에서 행해지고, 기호를 이루는데, 이 기호는 유사나 모방이 아니 43) Emmanuel Terray, Le Marxis m e devant les socie t e s pr im i tive s, Mosp e ro, 1969, p. 164. 44) Andre Leroi- G ourhan, Le Geste et la _pa role, tec hniq u e et lang u ag e , Alvin - M i ch el. 1964, pp. 업 0 sq. , 290 sq.
요, 또 시니피앙의 효과도 아니라, 욕망의 정립과 생산이다: 〈젊은 여자 의 변모가 충분히 효과적이려면, 이 여자의 배와, 호리병박 및 그 위에 등기된 기호들 간에 직접적 접촉이 조작되어야 한다. 그 젊은 여자는 생 식의 기호들을 육체적으로 受胎하고 이것들과 합체하지 않으면 안 된다. 表意文字둘의 意義는, 이 여자들이 성년식을 치르는 동안, 절대로 가르쳐 지지 않는다. 기호는 신체에 등기됨으로써 작용한다……. 신체에 표시를 하는 등기는 여기서 메시지의 가치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신체 자체에 작용하는 行動器具이다……. 기호들은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들을 명령하며, 기호를 만드는 匠人은 단순한 모방자이기는커녕, 신적인 일에 견줄 만한 일을 성취하고 있다.〉 45) 그런데 말하는 사람의 얼굴을 주시함 에 있어서나 손으로 쓴 글을 읽을 때 쓰이는 시각의 역할은 러루와-구 랑에 의하여 지적되었는데, 이 역할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혹은 좀더 정확하게 말하여 : 무슨 힘으로 눈은 손해를 입히며 의무를 지게 하는 결 연의 음성과, 손이 신체에 새기는 기호에 의하여 고통을 받는 신체 사이 의 무서운 균형을 파악할 수 있는가? (음성-청취, 손-표기라고 하는) 두 측면에 셋째 측면, 죽 기호의 셋째 요소, 죽 눈-고통이라는 요소를 추가해야 하지 않을까? 인내심이 강한 사람은 고통을 겪는 의식에서 말 하지 않고, 다만 말을 받이들인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글을 적는 행동 울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기호의 스탬프가 찍히는 대로 몸을· 내어말긴 다 . 그렇다면 그의 고통은 그것을 지켜보는 눈에 대해서는 쾌락이 아니 고 무엇인가? 이 눈은 집합체의 눈 혹은 신의 눈이다. 이 눈은 복수할 생각으로 생기를 얻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몸에 새겨진 기호와 얼굴 에서 니온 음성 사이의_一새겨진 표시와 얼굴의 표정 사이의_미묘한 관계를 파악할 능력이 있는 유일의 눈이다. (記號와 음성이라고 하는) 기준의 이 두 요소 사이에서 생기는 고통은 눈이 끌어내는 잉여가치와 갇은 것이다. 눈은 신체에 작용하는 말의 효과만 아니라, 또한 작용을- 받 는 한에서의 신체의 반응도 파악한다. 부채의 체계 내지 토지의 표상 45) Mi ch el Cartr y , La Calebasse de !'exci si o n en pay s go urmantc h e, Jo urnal , de la Socie t e des afr ic a nis t e s , 1968, 2, pp. 223-2 25.
이라 불러야 할 것이 나타니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이다. 죽 여기서 말하 거나 味唱하는 음성, 맨 살에 표시된 기호, 고통을 즐기는 눈이 나타난 다- 이것들은 反방과 殘響의 영역을 형성하는 야생의 삼각형의 세 변 이다. 이 영역은 분철된 음성, 문자를 쓰는 손 그리고 평가하는 눈이라고 하는 각각 독립해 있는 세 가지 것을 내포하고 있는 誠忍性의 劇場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토지의 표상이 표면에 조직되는데, 이 표상은 욕망하 는 기계, 죽 눈-손-음성에 아직 아주 가까운 곳에서 조직된다• 이건 마 술적 삼각형이다. 이 체계에서는 모든 것 __ 죽 결연의 음성의 행동, 부 자관계의 신체의 情念 이 두 가지 것의 偏差를 評定하는 눈의 반작용—_ 이 능동적이다. 죽, 능동적으로 작용하고, 작용을 받으면 반작용한다. 등 을 길게 쌤으로써 충분히 아픔과 고통을~ 주어 구아야끼족의 젊은이를 한 사나이가 되게 하는 돌의 선택에 관하여 클라스트르는 그의 훌륭한 덱스 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돌은 예리한 측면을 가지고 있어 야 하지만, 너무 쉽사리 베는 대나무 조각 같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 러므로 적당한 돌을 고르려면 판됴fO I 빠른 눈이 있어야 한다. 이 새로운 예식의 장치 전체는 결국 . 하나의 작은 돌에 환원된다……. 상처투성이의 피부, 회생된 대지, 이것들은 유일의 동일한 標識이다.〉 46)
46) Pie r re Clastr e s, Chroniq u es des Indie n s Guaya k i, Pio n , 1972.
현대 인류학의 위대한 저서는 모스의 『贈與論』이기보다 오히려 니체의 『道德의 系譜』이다• 적어도 그렇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道德의 系 譜』의 둘째 논문은 〈영국식으로-〉 교환이나 이익을 고찰하는 일을 온통 집어치우고 원시경제를 부채의 말로, 채권자-채무자의 관계로 해석할 것 을 시도하여 비길 데 없이 성공한 책이기 때문이다. 교환이나 이익을 심 리학에서 제거하는 것은 이것들을 구조 속에 집어넣기 위해서가 아니다. 니체는 옛 게르만의 법률과 약간의 힌두 법률 같은 빈약한 자료밖에 가 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모스처럼 교환과 부채 사이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하여 망설이지 않는다. (바따유도 니체의 영향을 받 고 니체를 따르므로 이 선택에 있어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등기, 규준, 표시 (刻印)라고 하는 원시사회의 ‘ 근본문제를 그토록 날카롭게 제기한 사
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다. 인간은 강렬한 배종의 유체를, 죽 집합체의 모든 노력을 휩쓸어갈 생물적-우주적인 큰 기억울 억제함으로써 자기를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동시에, 어떻게 인간에게 하나의 새로 운 기억, 죽 집합체의 기억을 가지게 할 수 있는가? 이 기억은 말과 결 연의 기억이다. 즉 반향하고 殘響하는, 또 채취하고 이탈하는 능력을 인 간에게 주고, 그리하여 사회체의 조건으로서의 욕망의 흐름의 규준화를 조작하는 기억이다. 이러한 기억울 어떻게 형성하게 해야 하는가라는· 물 음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부채를 통해서이다. 열려 있는, 可動的 인 그리고 유한한 부채덩이를 통해서이다. 다시 말하면, 말하는 음성, 표 시가 각인된 신체 그리고 즐기는 눈一_이 세 가지 것의 이상야릇한 복 합체를 통해서이다. 아주 어리석고 窓意的인 법률들, 사회에 들어가는· 의 식을 치를 때의 모든 고통, 억압과 교육의 도착된 장치 전체, 시뻘갛게 달군 쇠와 끔찍한 절차-이것들은 인간을 엄하게 E 년[.臣- 의미, 죽 맨 살에 표시를 각인하고, 인간에게 결연을 가능하게 하고, 채권자-채무자 의 관계 속에서 인간을 형성한다고 하는 의미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채권자-채무자의 관계는 그 두 측이 다 같이 기억할 사항이다. (未來롤 향하여 뻗은 기억이다.) 부채는 교환이 취하는 의견이기는커녕, 토지의 등기와 신체의 등기의 직접적 결과 혹은 직접적 수단이다. 부채는 등기 에서 곧바로 생긴다. 여기서도 다시 한번 복수나 원한울 끌어대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복수나 원한은 이 토지 위에서 자라지 않는다 . 이것은 오이디푸스가 이 토지 위에서 자라지 않는 것과 같다.)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사람들이 그 몸에 표시의 각인을 받는다는 것은, 음성과 字體가 각각 자율성을 가지고 있고 거기서 쾌락을 맛보는 눈이 있는 데서 생기는 일이다. 이것은 사람마다 장차 못된 채무자가 되리라 미리 의심받고 있는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와 반대이다. 못된 채무자 라 표시한 각인이 그의 몸에 충분히 〈새겨지지〉 않은 듯이, 그의 몸에서 각인이 떨어져 나가거나 혹은 이미 떨어져 나간 듯이 이해되어야 한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결연의 음성과 부자관계의 신체 사이를 가르는 간격 울 허용된 한도를 넘어 넓힌 것뿐인데, 이 때문에 그는 고통의 증대에
의하여 균형을 다시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니체는 이것을 말하지 않았 지만 이 사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서 그는 부채 의 무서운 방정식, 〈생기게 한 손해=받아야 할 고통〉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묻는다: 죄인의 고통이 그가 생기게 한 손해의 〈等價物〉 의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어떻게 고통으 로써 〈갚을〉 수 있는가? 여기서는 고통에서 쾌락을 얻는 눈을 援用해 야 한다. (이것은 복수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 이 눈은 니체가 평가하 는 눈이라 부른 것이요, 잔인한 광경을 줄기는 신들의 눈이다. 〈벌이 크면 그만큼 축제 기분은 고조된다!〉 고통이 클수록 활기 있는 생명과 즐기는 눈초리가 있게 마련이다. 손해=고통의 방정식은 교환주 의적인 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극한적인 경우에 부채가 교환과 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보여준다. 간단히 말하여, 눈은 자기가 바라보는 고통으로부터 규준의 잉여가치를 끌어내며, 이 잉여가치는 죄인이 어긴 결연의 음성과 그의 몸에 충분히 파지지 않은 표시의 각인 사이의 깨어 진 관계를 보상한다. 죄란 音-文字의 연결을 파괴하는 것이요, 이 연결 은 벌의 광경을 통해서 회복된다: 이것이 원시적 정의인데, 토지의 표상 은 모든 것을 豫見하고 있었다. 토지의 표상은 고통과 죽음을 규준화하면서, 모든 것을 예견하고 있었 다-다만 자기자신의 죽음이 밖으로부터 자기에게 오는 방식은 제의하 고서. 〈그들은 운명마냥, 원인 없이, 까닭 없이, 염치 없이, 핑계 없이 들 이닥친다. 그들은 번개처럼 빨리 거기 와 있다. 너무 무섭고, 너무 갑작 스럽고, 너무 자신만만하고, 너무 낯설어, 증오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형식들을 본능적으로 만들어내고, 자국들을 남기는 것 이다. 그들은 예술가들 중 가장 기계적이고 가장 무의식적인 예술가들이 다: 그들이 나타나는 곳에는 참깐 동안 새로운 어떤 것, 살아 있는 주권 기구가 있다. 이 주권기구에서는, 각 부분, 각 기능이 규정되고 그 경계 가 정해져 있으며, 먼저 전체와의 관계에서 자기의 의의를 지니지 못하 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자기의 자리를 얻을 수 없다. 조직자로 태어난 그들은 잘못, 책임, 敬意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 속에서는 靑銅의
눈초리를 가진 예술가의 저 무서운 利己主義가 세력을 떨치고, 또 이 이 기주의는, 어머니가 그 아이에게서 정당화되듯, 그 작품에서 영원히 정당 화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양심의 가책이 싹튼 것은 결코 그들에게서 가 아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잘 알려진 일이다-그러나 그들이 없었더 라면 양십의 가책은 조금도 성칭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망치의 타 격 아래, 그들의 예술가적 압제의 충격 아래 상당한 양의 자유가 세계에 서 혹은 적어도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사라져 잠재적 상태로 옮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일이 없었더라면 양심의 가책이라고 하는 이 무서운 식 물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 47) 여기서 니체는 절단, 파괴, 바약에 관 해서 말하고 있다. 숙명마냥 들이닥치는 그들은 누구인가? (〈먹이를 찾 는 불론드의 머리털을 가진 짐승들의 한 떼거리, 전두조직과 조직력을 두루 갖추고, 數에 있어서는 아마 무한히 우세하지만 아직 조칙을 가지 지 못하고 있는 주민에게 거리낌없이 그 毒手를 뻗치는…… 정복자들과 지배자들의 한 종족이다. 〉 ) 아프리카의 가장 오래된 신화들마저 불론드 의 머리털을 가진 사나이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고 있다. 그들은 國 家의 創設者둘이다. 니체는 다른 절단들도 밝히게 된다. 죽, 그리스의 도 시국가, 그리스도교, 민주주의적인 부르주아의 휴머니즘, 산업사회, 자본 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에 의한 철단들을 밝히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절 단둘은, 저 최초의 위대한 절단을 물리치고 이것을 메운다고 주장하지만, 갖가지 명목으로 저 위대한 절단을 전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敎會國 家이건 世俗國家이건 專制國家이건 民主國家이건, 자본주의 국가이건 사회 주의 국가이건, 지금까지 있어온 것은 오직 하나의 국가였다. 〈죽 불을 토 하며 으르링거리며 이야기하는〉 개-국가였다. 그래서 니체는 이 새로운 社針률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暗示한다: 그것은 전례가 없는 공포인데, 이 것에 비하면 고대의 잔인한 체계, 죽 원시적인 버릇 고치기나 벌의 형태 둘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원시적 규준화를 집중적으로 파괴하 기도 하고 혹은, 더 고약하게 되면, 이 규준화들을 가소롭게도 보존하고, 이것들을 새로운 기계들 속의 이차적 부품이 되게 한다. 또 그것은 새로 47) Ni et z s che, Genealog ie de la morale, II, 17.
운 억제장치이기도 하다. 원시등기기계의 본질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可 動的이고 열린 유한한 부채덩이, 죽 〈 운명의 작은 조각들 〉 이었는데, 이 것들은 모두 하나의 거대한 톱니바퀴 장치 속에 집어넣어진다. 이 장치는 負債를 무한한 것이 되게 하고 이제는 오직 하나의 동일한 억제의 숙명만 울 형성한다: 〈이때부터 해방의 전망은 연원히 비관의 안개 속에 사라 지고, 절망한 눈초리는 철의 불가능성 앞에서 낙심한다……. 〉 대지는 소 의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된다.
5 야만스런 전제군주기계 전제군주기계 혹은 야만스런 사회체의 창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새로운 결연과 직접적 부자관계. 전제군주는 고대 공동체의 횡적 결연들과 확대된 부자관계둘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새로운 결연을 강 요하고 신과의 직접적 부자관계에 들어간다: 인민은 복종해야 한다. 새 로운 결연에로 비약하는 것, 옛 부자관계와 단철하는 것 ; 이것은 異園 機 속에서 표현된다. 혹은 이국인의 기계 속에서 표현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 기계는 광야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가장 힘들고 가장 가혹한 시련을 강요하며, 또 낡은 질서의 저항과 새 질서의 정당성을 동시에 드 러낸다. 이국인 기계는 낡은 체제와의 투쟁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위 대한 偏執病的 機械요, 동시에 새로운 결연의 승리를 준비하는 한에 있어 서 이미 영광스러운 獨身機械이다. 전제군주는 편집병자(파라노이아인)이 다. (정신분석과 정신의학의 파라노이아觀에 고유한 家族主義롤 집어치우 고, 파라노이아가 사회조직체를 공급하는 型임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이 명제는 이제 더 이상 나무랄 데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倒緖者둘의 새 로운 그룹들이 전제군주의 방책을 선전하고(아마 이 그룹들기 전제군주를 위하여 그 방책을 꾸며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이 세우거나 정복하는 都 邑들에 그의 영광을 드러내고 또 그의 권력을 강요한다. 전제군주와 그 군대가 지나가는 곳마다 의사, 승려, 서기, 공무원 들이 수행한다. 서로 보완했던 옛것이 지나가 버리고 새로운 사회체가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숲속의 편집병자와 마을이나 야영지의 도착자들은 사라지고 광
야의 편집병자와 도시의 도착자들이 등장한다. 원리적으로는, 전제군주의 야만스런 조직체는 원시토지기계와는 대조 적으로 생각되어야 하며, 이 토지기계의 폐허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 나, 현실적으로는 한 제국이 그것에 앞선 제국에서 이탈할 때에도, 혹은 세속적 제국들이 되폐하여 멸망한 곳에 종교적 제국의 꿈이 등장할 때에 도, 이 조칙체의 운동을 파악할 수 있다. 그 기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군 사적이고 정복하려는 것일 수 있고, 무엇보다도 먼저 종교적이어서, 군대 의 규율이 내면적인 고행과 응집력에로 변환되는 것일 수 있다. 편집병 자가 그 자신 온순한 피조물이거나 사슬이 풀린 야수일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는 이 편집병자와 그의 도착자들, 정복자와 그의 엘리트의 떼거리, 전제군주와 그의 관료들, 성인과 그 제지들, 隱者와 그의 수도자 들, 그리스도와 聖 바울을 다시 보곤 한다. 모세는 이집트기계에서 도망 쳐 광야로 나아가, 거기에 자기의 새로운 기계, 죽 거룩한 언약의 궤와 이동시킬 수 있는 성전을 설치하고, 그 민족에게 종교적 군사적 조직을 준다. 세례자 성 요한의 기도를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밀하는 사람도 있 다: 〈요한은 유태교의 중심교의, 죽 아브라함에 거슬러 울라가는 부자관 계를 통하여 하느님과 결연한다고 하는 교의를 근본적으로 공격하고 있 다.〉 48) 여기에 본질적인 것이 있다: 죽, 새로운 결연의 범주와 직접적 부 자관계의 범주가 동원될 때마다 우리는 야만스런 제국의 조직체, 즉 전 제군주기계에 관하여 이야기하게 된다. 따라서, 이 동원의 문맥이 어떤 것이든간에, 선행의 제국들과의 관계가 있건 없건, 사태는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이 變遷들을 꿰뚫고 제국적 조직체는, 언제나, 토지의 원시적 규준화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어떤 型의 규준과 등기에 의하여 규정되기 때문이다. 결연의 數는 대수롭지 않다: 새로운 결연과 직접적 부자관계 는 새로운 사회체를 證示하는 특수한 범주들이요, 원시기계가 결부시켰던 횡적 결연과 확대된 부자관계에는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편집병을 규 정하는 것은 이 投射能力, 제로에서 다시 출발하여, 완벽한 변형을 객체 48) Je an Ste i n m an n, Sain t Je an-Bap tiste et la spi rit u a lite du desert , Ed. du Seu ii 1959, p. 69.
화하는 이 능력이다: 이 주체는 결연-부자관계의 교차점 밖으로 뛰쳐나 가, 극한에, 지평선에, 광야에 자리잡는다. 이 주체는 탈토지화한 앎의 주 체인데, 이 앎은 주체를 하느님에게 직접 다시 결부시키고 또 그 민족에 게 연결시킨다. 처음으로 생명과 대지로부터 생명을 심판하고 대지 위를 비약하는 것을 허용하는 어떤 것, 즉 편집병적 인식의 원리가 끌어내어 졌다. 결연과 부자관계에 상관되는 놀이 전체가 이 새로운 결연과 이 새 로운 직접적 부자관계 속의 絶對에로 넘겨진다. 이제 남은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야만스런 조직체를 이해하려 면, 세속적인 것이거나 종교적인 것이거나, 이 조직체와 경쟁하는 같은 종류의 다른 조직체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원시적인 야생의 조직체와의 관계를 밝혀야 한다. 같은 종류의 조직체들과의 관계를 주목하면 본질적 인 것이 흐려진다 . 또 원시적인 야생의 조직체는 야만스런 조직체에 의 하여 법적으로 대체되지만 계속해서 이것에 달라붙어 있다. 바로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는 아시아적 생산을 정의하고 있다: 국가의 高度의 통일 은 원시전원공동체들을 기초삼아 그 위에 확립되는데, 이 공동체들은 토 양의 소유권을 보유한다. 한편 의견상의 객관적 운동은 잉여생산물을 국 가에 귀속시키고, 큰 공사들에서 생산력을 국가가 쥐게 하고, 그리하여 국가 자체를 소유의 집단적 조건들의 원인으로 보이게 하므로, 이 운동 에 비추어보면 국가야말로 토양의 전정한 소유자이다 .49) 사회체로서의 충 만한 신체는 대지이기를 그치고, 전제군주의 신체, 전제군주 자신 혹은 그의 神이 충만한 신체가 된다. 가끔 전제군주로 하여금 거의 행동할 수 없게 하는 규정들과 금지들은 이 충만한 신체를 기관들 없는 신체가 되 게 한다. 이 전제군주야말로 의견상의 운동의 유일의 準原因, 源泉 그리 고 이 운동이 홀러가는 河口이다. 시니피앙의 연쇄의 가동적 이탈들 대 신에, 이탈한 하나의 대상이 연쇄 밖으로 뛰쳐나갔다; 흐름으로부터의 채취둘 대신에 모든 흐름이 하나의 큰 강에 모여드는데 이 강은 주권자 의 소비를 구성한다: 물신이나 상칭에서 체제의 근본적 변화가 생긴 것 49) Marx, Prin c ip es d'une criti qu e de l'eco nomi e po liti qu e, 1857, Pleia d e, II, p. 314.
이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권자의 인물도 아니고, 그의 기능도 아니다. 이 기능은 제한될 수도 있다. 사회기계가 깊은 변화를 입은 것이다: 토 지기계 대신에, 국가라고 하는 〈 거대기계 〉 , 즉 기능적인 피라미드가 등 장한 것이다. 이 피라미드의 정점에는 不動의 始動者인 전제군주, 側面傳 動官으로서는 官僚裝置 底邊에는 勞動部品으로서의 마을사람들이 있다. 저장물은 축적의 대상이 되며, 부채덩이는 年貢의 형식으로 무한한 관계 가 된다. 규준의 모든 잉여가치는 소유의 대싱이다. 이러한 전환은 모든 종합에 침투한다. 죽, 水力機械 鑛山機械롤 갖춘 생산의 종합, 計算機械 筆記機械 記念碑機械를 갖춘 등기의 종합, 끝으로 전제군주, 그 궁정 및 관료 카스트를 갖춘 소비의 종합에 침투한다. 우리는 국가에서 사람들을 주거에 따라 등기하는 토지화의 원리를 볼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거의 원리에서 탈토지화의 운동의 효과를- 보아야 한다. 이 운동은 하나의 대 상으로서의 대지롤 분할하고, 사람들을 새로운 제국적 등기에, 새로운 충 만한 신체에, 새로운 사회체에 종속시킨다. 〈그들은 운명처럼 둘이닥친다……. 그들은 번개같이 빨리 거기 와 있 다, 너무 무섭게, 너무 갑자기…….〉 이것은 원시적 체계의 죽음이 언제 나 밖으로부터 오며, 역사가 우연한 일들과 만남들의 역서이기 때문이다. 굉야로부터 오는 구름처럼, 정복자가 들이닥친다: 〈어떻게 그들이 침투 해 들어왔는지〉, 어떻게 그들이 〈그렇게도 많고 높은 굉어의 평원들과 광활하고 비옥한 평야롤〉 지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에 엄연히 있고, 아침마다 그 수는 불어나는 것만 같다……. 그들과 얘기를 .나누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우리의 말을 알지 못한다〉 .50) 그런데 밖으로부터 오는 이 죽음은 또한 안으로부터 나타난 것이기도 하 다: 일반적으로 부자관계를 결연에 환원시키는 일의 불가능성, 결연 집 단들의 독립성, 이 집단들이 경제적 및 정치적 관계들에 대하여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 원시적 신분들의 체계, 잉여가치의 메커니즘 —이 모든 것이 이미 전제군주의 조직체들과 카스트 질서를 素描하고 있었다. 그리고 원시공동체가 그 자체의 족장제에 대하여 경계하고 그 50) Ka fka, La Murail le de Chin e .
한복판에서 分秘할 가능성이 있는 전제군주의 심성을 추방하고 단단히 묶어버리는 방식과 원시공동체가 오래전에 밖으로부터 강요된 옛 전제군 주의 이제는 하찮은 것이 된 상칭을 묶어버리는 방식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한 원시공동체가 내부에서 생기는 경향을 억제하는 공동체인 지, 밖으로부터 오는 무서운 재해를 겪고 가까스로 지탱해 가는 공동체 인지롤 아는 것은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다. 결연의 놀이는 양의적이다: 우리는 아직도 새로운 결연의 이쪽에 있는가, 혹은 이미 저쪽에 있는가, 또 이쪽에 되돌아온 듯 변형되어 남아 있는가? (관련된 문제 : 봉건제란 무엇인가?) 우리는 다만 제국적 조직체의 정확한 계기가 外因性의 새로 운 결연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다만 이 새로운 결 연은 낡은 결연둘을 제쳐놓고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고, 이 낡은 결연들과도 관련을 맺고 있다. 그래서 이 새로운 결연은 조약이나 계약 같은 것과는 전혀 디른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살되고 있는 것은 횡 적인 결연과 확대된 부자관계의 낡은 체제가 아니라, 이것들이 사태를 결정하는 성격만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위대한 편집병자에 의하여 다 소간에 변형되고, 다소간에 정비되어 존속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잉여 가치의 實質울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아시아적 생산의 특수한 성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土着의 전원 공동체들이 존속하여, 생산하 고 등기하고 소비하기를 계속하고 있다; 국가는 이 공동체들하고만 관계 한다. 토착적 家系機械의 톱니바퀴 장치는 존속하지만, 이제는 국가기계 의 작동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 대상들, 기관들, 인물들 및 집단둘은 적 어도 그것들의 내재적 규준화의 일부를 지키지만, 낡은 체제의 규준화된 흐름들은, 잉여가치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초월적인 통일체에 의하여 초규준화된다. 낡은 등기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국가의 등기에 의하여 그리고 이 등기 속에 벽돌 모양으로 쌓여 있다. 덩어리들은 존속하고 있 지만, 박아넣고 끼워넣어전 벽돌들이 되어, 관리되는 가동성밖에 지니지 못하고 있다 . 토지적 결연들은 딴 결연들에 의하여 대체되지 않고, 다만 새로운 결연에 연결된다; 토지적 부자관계들도 다른 부자관계들에 의하 여 대체되지 않고, 다만 직접적 부자관계에 합쳐질 따름이다. 이것은 마
치 모든 부자관계에 대하여 長子가 굉장한 권리를 가지며, 모든 결연에 대하여 첫날 밤이 굉장한 권리를 가지는 것과 같다. 부자관계의 저칭물 은 다른 부자관계에서의 축적의 대성이 되고, 결연의 부채는 다른 결연 에서 무한히 갚아가는 관계가 된다. 원시적 체계 전체는 상위의 권력에 의하여 동원되고 칭발되며, 의부의 새로운 힘들에 의하여 굴복되어, 다른 목적들에 봉사하게 된다; 니체가 말한 바와 같이, 사실 어떤 일의 진전 이란 〈 다소간에 폭력적인, 또 디소간에 피차 독립해 있는 예속화 현상들 의 끊임없는 繼起인데, 반항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이 반항들에 대하여 자기를 지키기 위한 반작용이 일어나 변신이 시도되고 마침내는 반대 방 향의 행동의 다행한 결과들이 생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 국가가 디움의 두 가지 法令게 의하여 시작된다(혹은 다시 시작된다) 고 하는 것은 자주 지적된 바이다: 하니는 주거를 고정시키는 토지법령 이요, 디론 하나는 사소한 부채들의 폐기에 관한 해방법령이다• 그런데 국가는 腕曲語法으로 일을 처리한다• 효과 있는 탈토지화는 대지의 기호 들을 추상적인 기호들로써 대체하고, 대지 자체를 국가의 소유 혹은 국 가의 가장 부유한 공무원들과 관리들의 소유의 대성이 되게 하는데. 이 러한 탈토지화의 산물이 가짜-토지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國家가 국가 와 구별되는 지배계급의 사유재산울 보호하는 일밖에 하지 않는 때에도, 큰 변화는 없다.) 부채들의 폐기는, 이것이 실시되면, 토지를 재분배하는 수단, 그리고 새로운 토지기계의 등장을 막는 수단이다. 이 토지기계는 때로는 혁명적인 것이어서 토지 문제를 아주 큰 규모로 제기하고 처리할 수 있다. 재분배가 행해지는 다른 경우들에 있어서는, 채권의 순환은 국 가가 설정한 새로운 형태 __ 돈――아래 유지된다 . 왜냐하면, 확실히 돈 은 상업에 도움이 되기 위하여 쓰이기 시작된 것이거나, 혹은 적어도 자 율적인 시장 모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제군주기계는 다음과 같은 점을 원시기계와 공통으로 가지고 있으며, 또 이 점에서 후 자를 追認한다: 탈규준화한 흐름들에 대한 공포. 생산의 흐름만 아니라 교환과 싱업의 시장의 흐름이 탈규준화하면, 이 흐름들은- 국가의 독점, 그 틀, 그 마개에서 빠져나간다. 에띠엔느 발라 E ti enne Balazs 가 〈과학
적 및 기술적 조건이 모두 갖추어져 있던 것으로 보이는 1 양 1] 기의 중국 에서 자본주의가 생기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 고 물을 때, 그 答은 金屬의 보유가 충분하다고 판단되자마자 광산들을 폐쇄하고 상업을 독점 하거나 엄격하게 통제한 국가 속에 있다(공무원으로서의 상인)안 상업에 있어서의 돈의 역할은 상업 자체보다는 국가에 의한 상업의 통제와 더 관계가 있다. 상업과 돈의 관계는 종합적인 것이지, 분석적인 것이 아니 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돈이 不可分離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상업이 아니라, 국가장치의 유지비로서의 세금이다. 지배계급이 이 국가장치와 구별되고 자기들의 사유재산울 위하여 이 장치를 이용하고 있는 바로 그 곳에서는, 돈과 세금의 전제군주적 유대는 뚜렷한 바가 있다. 윌 W ill의 연구에 의지하여, 미셸 푸꼬는 어떻게, 그리스의 몇몇 潛主政治에서, 귀족 들에 대한 과세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돈의 분배가 돈을 부자들에게 되돌아가게 하고, 이상하게도 부채의 체제를 확대하고 이 체제를 더욱더 강화하는 수단이 되어, 농업 문제의 경제적 여건들을 통해서 생길 수 있 었던 모든 再土地化롤 예방하고 억제하였는가를 밝히고 있다 .52) (이것은 마치 그리스인들이 뉴딜 New- Deal 후에 미국인들이 재발견하게 된 것을 그들 나름으로 발견한 듯한 일이다: 그들이 발견한 것이란, 국가에 의한 중과세가 사업들에 유리하다고 하는 것이다.) 요컨대, 돈, 돈의 순환은 부 채를 무한하게 하는 수단이다. 바로 이것이 국가의 두 법령이 숨기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주거와 토지는 모든 원시적 부자관계를 전제군주기계에 종속시키는 탈토지화의 큰 운동의 발단이 된다(農地問題) ; 부채의 폐기 혹은 부채를 計量可能하게 변형시키는 일은 국가에 대한 끝나는 법이 없 51) Et ien ne Balazs, La Bure 叫 cra ti e celeste , Gall im ard, 1968, ch. XIII, La Nais s ance du cap italism e en C hi ne (특히 園家와 돈 및 싱인 둘이 자율성 울 획득하는 일의 불가능성, pp. 229-300). 가령 검은 아프리카에서의, 큰 工事 들보다도 오히려 상업의 동제에 기초를 둔 帝國組織體들에 관하여는, cf. !es remarqu e s de Godelie r et de Suret- C anale, Sur le mode de pro ducti on asia t iq u e, Ed. Socia l es, 1969, pp. 87-88 , 120-122. 52) Mi ch el Foucault, La uolonte de sauoir , cours au College de France, 1971 .
는 의무의 길을 열게 되는데 모든 원시적 결연은 이 의무에 종속한다(負 債問題). 무한한 채권자, _ 무한한 채권이 가동적이고 유한한 부채덩이 대 신에 들어섰다. 전제주의의 지평에는 언제나 一神敎가 있다: 부채는 생존 의 부채가 된다. 죽 臣民들 자신이 생존하기 위한 부채가 된다. 채권자가 더 이상 꾸어주지 않았는데 채무지는 계속해서 갚아가는 때가 온다. 왜 냐하면 갚는다는 것은 의무이지만, 꾸어주는 것은 하나의 권한이기 때문 이다―-마치 루이스 캐롤의 노래 속의, 무한한 부채에 관한 건 노래처 럼: 물론 빚을 갚으라고 요구할 수 있으나, 꾸어주는 것이 문제일 때에는, 물론 자기에게 가장 좋은 때를 선택할 수 있다 .53)
53 ) Lew is Caroll, Sy lv ie et B,u n o, ch. XI .
소위 아시아적 생산의 가장 순수한 조건들 속에서 나타니는· 바와 같은 전제군주국가는 두 가지 상관적 양상을 띠고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토 지기계를 대체하며, . 랄토지화한 새로운 충만한 신체를 형성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낡은 토지들을 유지하고, 이것들을 생산의 부품- 혹은 기관의 자격으로 새로운 기계에 통합한다. 그것은 흩어져 있는 전원공동 체들의 기초 위에서 작동함으로써 마침내 완성된다. 이 공동체들은., 생산 의 관점에서 보면, 미리 존재하는 自律的 혹은 半自律的인 기계들이다; 그러나, 역시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이것들에 영향을 끼쳐 큰 공 사들의 조건들을 만들어내는데, 이 공서들은 개개의 공동체들의 능력을 넘는 것들이다. 전제군주의 신체 위에서 생산되는 것은 낡은 결연들을 새로운 결연에 연결시키는 연결의 종합이요, 낡은 부자관계들을 직접적 부자관계로 내뻗게 하여 모든 신민을 새로운 기계 속에 결합시키는 이집 적 종합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본질적인 것은 제 2 의 등기의 창조이다. 이것을 통하여 不變不動의 거대한 충만한 신체는 생산의 모든 힘과 動因 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국가의 이 등기는 낡은 토지 등기들
울 새로운 表層 위의 〈 벽돌들 〉 의 자격으로 존속시킨다. 여기서 결국 두 부분을 연접시키는 방식이 생긴다. 이 두 부분이란, 소유권을 가전 상위 의 통일체와 점유자인 공동체들, 초규준화와 내재적 규준들, 소유되는 잉 여가치와 사용되는 用益權, 국가기계와 토착기계들이다. 카프카의 『萬里 長城』에서처럼, 국가는 상대적으로 고립해 있고, 따로따로 작동하는 하부 집합들을 통합하는 초월적인 상위의 통일체이다. 국가는 이 하부집합들 에게 벽돌들로서의 발전과 단편들로서의 건설공사에의 참여를 할당한다. 흩어져 있는 부분적 대상들이 기관들 없는 신체에 매어달린 셈이다• 법 률이 조화 있는 내재적이고 자연적인 전체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지만, 뛰어난 형식적 통일체로서 작용하고, 이 자격으로 단편들과 부분들을 지배 한 E 岳 것을 카프카만큼 잘 밝힌 사람은 없다(壁과 塔). 따라서 국가는 원시적인 것이 아니라, 근원 혹은 추상이다. 국가는 근원적인 추상적 본 질인데 이 본질은 현실적인 시작과는 같은 것이 아니다. 〈 황제는 우리들 의 모든 생각의 유일의 대칭이다. 현재 통치하고 있는 황제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 황제를 알고 있다면, 만일 우리가 그에 관하여 조금이라도 정확한 것을 알고 있다면, 그는 우리의 모든 생각의 대상이다! ……인민은 어느 황제 가 통치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며, 왕조의 이름조차 그에게는 불확실하 다……. 우리들의 마을들게서는 죽은 지 오래된 황제들이 옥좌에 오르 고, 이제는 전설에서나 살아 있는 황제가 방금 전에 勅令울 發布하고 승 려가 제단 앞에서 그 칙령을 봉독하고 있다. 〉 하부집합들 자체, 원시토지 기계들에 관해서 말하면, 그것들은 그야말로 구체적인 것, 구체적인 기반 이요 구체적인 시작이다 . 그러나 그것들의 線分들은 여기서 그 본질에 어울리는 관계들 속에 들어간다. 그것들은 바로 벽돌의 형태를 취하는데, 이 형태는 그것들이 상위의 통일체에 통합되고(큰 공사들, 잉여가치의 收 奪 年貢 일반화된 노예상태 같은), 이 동일체의 전체적 계획들에 따라 자 기에게 配定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보증한다. 제국적 조직체 속에는 두 가지 등기가 공존하며, 하나가 다른 것 속에 벽돌로 끼워넣어지고 이 와 반대로 다른 것아 전체를 시멘트로 접합시키고 생산자들·과 생산물들
을 서로 관계시키는 한에서 서로 화해한다. (이 두 가지 등기는 동일한 언어로 말할 필요가 없다.) 제국적 등기는 모든 결연과 부자관계를 다시 절단하고, 이것들을 존속시키며, 이것들을 신과 전제군주의 직접적 부자 관계, 전제군주와 인민의 새로운 결연에 집중시킨다. 원시기계의 규준화 된 흐름들은 이제 모두 하구에까지 밀려가, 거기서 전제군주기계에 의하 여 초규준화된다. 이 초규준화야말로 국가의 본질을 이루는 조작이요, 국 가가 낡은 조칙체들과 연속하는 동시에 단절하는 일을 조정하는 조작이 다: 여기에는 규준화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욕망의 흐름에 대한 공포감만 아니라, 또한 초규준화하는, 그리고 욕망을, 그것이 죽음의 본능이라 할 지라도 주권자의 것이 되게 하는, 새로운 등기의 설립이 있다. 카스트들 은 초규준화와 분리될 수 없고, 또 지배〈계급들〉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 지배계급들은 아직 계급으로서 드러나지는 않고, 국가장치와 일체를 이 루고 있다. 누가 주권자의 충만한 신체를 만질 수 있는가? 여기에 카스 트의 문제가 있다. 초규준화는 탈토지화한 충만한 신체를 위하여 대지롤 빼앗고, 이 충만한 신체 위에서 부채의 운동을 무한한 것이 되게 한다. 국가들의 창립자들과 더불어 시작되는 이러한 초규준화의 중요성을 지적 한 것은 니체의 역량이다. 이 창립자들은 〈靑銅의 눈초리를 가전 예술가 들이요, 무자비한 殺數의 둡니바퀴 장치를 만들어내어〉, 해방의 모든 전 망 앞에 鐵의 불가능성을 세운다. 정확히 말하여, 이 無限 {k는 , 니체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조싱들, 먼 옛날로 거슬러 올리·가는 계보 및 확 대된 부자관계가 작용한 결과로 이해될 수는 없다__그렇지 않고 도리 어 이 후자들이 새로운 결연과 칙접적 부자관계에 의하여 短絡시켜지고 유괴된다고 생각할 때 이해될 수 있다. 이런 때에는 가동적이고 유한한 덩어리들의 주인인 조상이, 벽돌들과 벽돌들의 무한한 回路의 不動의 조 직자인 신에 의하여 추방된다.
6 야만스런 혹은 제국적인 표상 자매와의 근친상간과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은 아주 다른 것이다• 자매 는 어머니의 代用品이 아니다: 한 쪽은 결연의 연결적 범주에 속하고, 다른 한 쪽은 부자관계의 이집적 범주에 속한다. 한 쪽이 금지되는 것은 토지적 규준화의 조건들이 결연이 부자관계와 뒤섞이지 않는 것을 요구 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다른 한 쪽이 금지되는 것은, 토지적 규준화 의 조건들이 부자관계의 자손이 그 조상과 포개지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이런 까닭에 전제군주의 근친상간은 새로운 결연 과 직접적 부자관계 때문에 이중으로 되어 있다. 그는 먼저 그 누이와 결혼한다. 그러나 이 동족결혼은 금지되어 있으므로, 그는 종족 밖으로. 나가서, 그 자신이 종족 밖에 있는 한에서, 즉 그 영지 밖으로 혹은 경 계 밖으로 나가서 결혼한다. 삐에르 고르동 Pier re Gordon 은 이것을 그 의 기묘한 저서에서 밝혔다: 근친상간을 금지하고 있는 그 동일한 규칙 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근친상간을 명령하고 있다는 것이다. 異族結婚은 종족 밖의 남자들의 지위를 정립하는 데 귀착되어야 한다. 이 남자들은 동족결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고, 이 결혼의 무서운 힘에 의 하여, 이족결혼을 하는 남녀에 대하여 선도자 구실을 하는 자격을 가지 고 있는 남자들이다(〈처녀를 범하는 聖者〉, 山 위의 혹은 뭉 저편의 〈儀式 책者〉)안 광야는 婚約의 땅이다. 모든 흐름은 이런 남자에게로 집중되 54) Pie r re Gordon;~'Init iat i on sexuelle et l'eu oluti on relig ieu se, P.U.F., 1946, p. 164: 〈거룩한 인물은…… 작은 농촌에서가 아니라, 칼데아의 敍事詩에 나오
는 엔키뒤 갇은 숲속에서, 혹은 聖域 안의 산 위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직업은 牧 사냥꾼의 일이었지, 농사짓는 일이 아니었다. 거룩한 결혼은 여성을 높이 는 유일의 결혼이었는데, 이러한 결혼을 하려면 이 거룩한 인물의 힘을 빌려야 만 했다. 그러므로 이 義務는 사실상 族外婚을 생기게 하였다. 이런 조건들 아래 그때 族內婚을 할 수 있었던 것은 儀式으로써 처녀성을 빼앗는 자와 같은 집단 에 속하는 젊은 처녀들만이었다.〉
며, 모든 결연은 이것들을 초규준화하는 이 새로운 결연에 의하여 다시 裁斷된다. 종족 밖에서의 동족결혼은 이 영웅을 종족 내의 모든 族外婚을 초규준화하는 상황에 놓이게 한다. 그 어머니와의 결혼이 전혀 다른 의 、 미를 지니고 있음은 명백하다: 이번에는 종족의 어머니, 종족 속에 현실 적으로 존재하는 어머니, 영웅이 첫번 결혼 후 자기의 종족 속에 들어가 면서 발견하는 혹은 거기 되돌아가 다시 발견하는, 그런 어머니가 문제 이다. 그는 확대된 부자관계들을 직접적 부자관계로써 재절단한다. 이 영 웅, 秘傳울 받아 혹은 비전을 줌으로써, 왕이 된다. 두번째 결혼은- 첫 번째 결혼의 결과들을 발전시키며, 첫번째 결혼의 성과들을 끌어낸다. 영 웅들은 먼저 자매와 결혼하고, 그 다음에 어머니와 결혼한다. 이 두 가지 행위가 惡着되거나 동화될 수 있다는 것은 거기에 두 요소의 연속, 즉 妹妹-王女와의 결합, 여왕-어머니와의 결합의 연속이 있는 것을 방해하 지 않는다. 근친상간은 짝을 이루며 진행된다. 영웅은 말을 타고 두 집단 서이를 疾走한다. 이 두 집단 중 하나는 그가 자기의 자매를 찾기 위하 여 거기서 떠나는 집단이요, 다른 하나는 자기의 어머니를 되찾기 위하 여 거기로 되돌아오는 집단이다. 이 이중의 근친상간이 목적삼고 있는 것은 하나의 흐름, 마술적이기까지 한 흐름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현 존하는 모든 흐름을 초규준화하고, 어떠한 내재적 규준도, 밑바닥에 깔려 있는 어떠한 흐름도 전제군주기계로부터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다; 그래서 근친상간은 그 不毛性을 통하여 일반적 多産性울 보증한다 .55) 자매와의 결혼은 종족 밖으로 나가서 행해전다. 그것은 광야의 시련이요, 원시기계와의 공간적 벌어짐을 표현한다; 그것은 낡은 결연들을 종결시
55) Luc de Heusch , Essai sur le sym bolis m e de l'in c este roy a l • en Af riq u e, 1958, pp. 72-74 .
킨다; 그것은 결연의 모든 부채를 온통 자기의 부채가 되게 함으로써 새 로운 결연의 기초를 다진다. 어머니와의 결혼은 종족에로의 되돌아감이 다; 그것은 원시기계와의 시간적 벌어짐(세대의 차이)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부자관계의 저장물을 보편적으로 축적함으로써, 새로운 결연에서 생기는 직접적 부자관계를 구성한다. 이 두 결혼은 모두, 전제군주제의 매듭울 연결시키는 두 끝으로서, 초규준화에는 필수적인 것이다. 여기서 참깐 멈추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생각해 보자. 어떻게 근친상간은 〈가능〉하게 되었으며, 또 전제군주의 명백한 소유권이나 玉 靈는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가? 이 자매, 이 어머니-전제군주 자 신의 자매와 어머니는 무엇인가? 혹은 이 문제는 달리 제기되어야 하는· 가? 왜냐하면 표상체계 전체가 토지적인 것이기를 그치고 제국적인 것이 될 때, 이 문제는 이 표상체계 전체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는 심층에서의 표상의 요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였음을 예감한다: 세포의 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 이동은- 오이디푸스의 세포를 표상의 한 장소로 부터 다른 장소로 옮겨놓게 된다. 제국적 조직체에서는, 근친상간이 욕망 의 옮겨놓아진 表象內容이기를 그치고, 억제하는 表象作用 자체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의심의 여지 없이, 전제군주가 근친상간을 하고 이것을 가능하 게 하는 방식은 억제-억압의 장치를 제거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그 방식은 이 장치의 일부를 이루고 있 으며, 다만 이 장치의 부 품 둘을 바꾸고 있다. 따라서 근친상간이 이제 억 제하는 표상작용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은 언제나 옮겨놓아전 표상 내용의 자격으로서이다. 總計로서는 더 많은 것을 얻게 되어, 억압하며 억제히는 장치에서의 새로운 절약, 새로운 표시의 긱인, 새로운 엄격함이 더해진다. 억제하는 일과 억압의 도움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는 근친상간 울 가능하게 하고 주권자가 근친상간을 실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일 은 쉽다. 너무 쉽다. 왕의 야만스런 근친상간은, 욕망의 흐름을 초규준화 하는 수단일 따름기요, 결코 욕망의 흐름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오! 칼리굴라 Cal ig ula 여, 오오! 헬리오가발루스 He li ogabalus 여, 오 오! 사라전 황제들의 미천 기억이여. 근친상간은 결코 욕망이 아니었고,
다만 억제의 결과로 생긴 옮겨놓아전 표상내용일 따름이었다. 여기서 억 압은, 근친상간이 표상작용 자체의 자리를 차지하고 이 자격으로 억제하 는 기능을 말을 때에만 성과를 울릴 수 있다. (이것은 이미 정신병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정신병에 있어서는, 콤플렉스가 意識 속에 침입해 도, 전통적 기준을 따르면, 욕망의 억제가 정녕 제거되지 않았다.) 그러 므로 제국적 조직체에서의 근친상간의 새로운 위치에 관하여 우리가 말 하는 것은 표상작용의 심층에 있는 요소들이 이동하고 있다고 하는 점만 이다. 이 이동은 이 표상작용을 욕망하는 생산에 대하여 더 낯설고, 더 냉혹하고, 더 결정적인 혹은 더 〈무한한〉 것이 되게 한다. 그러나 표상 작용의 디론 요소들, 죽 등기하는 사회체의 표충에서 활동하는 요소들 속에 적지 않은 변화가 상관적으로 생기지 않는다면 이러한 이동은 절대 로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표상작용의 표충의 조직에서 유달리 변화하는 것은 음성과 문자표기법 의 관계이다: 가장 오래된 저자들은 이것을 찰 알고 있었다: 글 ecr i t ure 을 만드는 자는 전제군주요, 문자표기법을 소위 글이 되게 하는 것 은 제국적 조직체이다. 입법, 관료기구, 경리, 칭세, 국가의 전매, 제국의 정의, 공무원의 활동, 修史――이것들은 모두 전제군주의 수행원들 속에 서 적힌다. 러루와-구랑의 분석에 의하여 드러난 패러독스에 되돌아가보 자: 원시사회들이 구두로 말하는 데 의존하는 것은, 그 사회들에 문자표 기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와 반대로 문자표기법이 거기서는 음 성으로.부터 독립해 있고 신체 위에 기호들을 표시하여 각인하기 때문이 다. 이 기호들은 음성에 대응하고 음성에 반응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율적 이어서 음성을 충실히 따르지는 않는다. 한편, 야만적인 문명들이 글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그것들이 음성을 상실한 때문이 아니다. 그렇지 않 고 문자표기법의 체계가 그 독립성과 그 고유한 차원들을 잃고, 음성을 충실히 따르고 음성에 종속하게 된 때문이다. 그래서 이 체계는 탈토지 화한 추상적인 흐름을 이 음성으로부터 추출하여 글의 직선적 규준화 속 에 이 흐름을 보존하고 반향시킨다. 요컨대, 하나의 동일한 운동 속에서, 문자표기법이 음성에 의존하기 시작하고, 또 천상 혹은 피안의 말없는
음성을 끌어내는데 이 음성은 문자표기법에 의존하기 시작한다. 글이 음 성의 자리를 빼앗는 것은 음성에 종속함으로써이다. 작그 데리다 Jac q u es Derr i da 는, 모든 언어가 근원적인 글을 전제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로써 그가 어떤 문자표기법(넓은 의미에서의 글)의 現存과 연결을 이해 하고 있다면, 이 말은 옳다. 또 그는, 좁은 의미에서의 글에서는 그립문 자, 표의문자, 표음문자 간의 절단을 전혀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데, 이것도 옳은 말이다: 여기에는 언제나 그리고 이미 음성의 代用(代 補性)과 동시에 음성에 대한 추종이 있으며, 또 〈음성조칙은 철대로 전 능하지 않고, 언제나 그리고 이미 말없는 시니피앙을 활동하기 시작하게 하고 있다 〉. 그가 이상하게도 글을 근친상간에 결부시키고 있는 것도 옳 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억제장치가 音素들 못지않게 상형문자 들을 통해서도 始動하는 문자기계의 양상으로 恒存한다고 결론지울 아무 런 이유도 찾아볼 수 없다 .56) 왜냐하면 좁은 의미의 글과 넓은 의미의 글 사이에는 표상 세계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단절이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글은 서로 아주 다른 두 개의 등기체제이다. 하나는 전적으 로 지배적인 음성에 연결되면서 이 음성으로부터 독립함으로써 이 음성 울 殘存시키는 문자표기법이요, 다른 하니는 갖가지 방법으로 음성에 의 존하고 종속함으로써 이 음성을 지배하고 혹은 이 음성의 자리를 빼앗고 그 자리에 들어앉는 문자표기법이다. 원시토지기호는 그 자체로써 타당 성을 갖는다. 그것은 다양한 연결 속에서 욕망을 정립한다• 그것은 기호 의 기호가 아니며 혹은 욕망의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직선적 종속도 모 르며, 상호 종속도 모른다. 그것은 그립 문자도 아니요 표의문자도 아니 다. 그것은 리듬이지 形象이 아니며, 지그재그이지 직선이 아니며, 가공 물이지 관념이 아니며, 생산이지 표현이 아니다. 토지의 표상과 제국의 표상이라고 하는 이 두 형태의 표상 간의 차이점들을 요약해 보자. 토지의 표상은 먼저 이질적인 두 요소, 죽 음성과 문자표기로 되어 있 56 ) Jac q u es Derri d a, De la Gramm atol og ie, Ed. de Mi nu it, 1967 : et L'Ecritu r e et la dif fere nce, Freud et la scene de l'ec rit ure , Ed. du Seu il, 1967.
다: 하나는 횡적인 결연 속에서 구성된 낱말의 표상이요, 다른 하나는 확대된 부자관계 속에 설정된 사물(身體)의 표상이다. 아 두 표상의 한 쪽은 디론 쪽에 작용하고, 다른 쪽은 반작용을 한다. 이것들은 각기 그 고유한 힘을 가지고 있는데, 이 힘은 서로 다른 쪽의 힘을 함축하고 있 어서 강렬한 旺種의 억제라고 하는 큰 임무를 수행한다. 여기서 실제로 억제되고 있는 것은 강도 있는 대지의 기반으로서의 충만한 신체이다. 이 신체는 외연을 가전 사회체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 되는 강도들은 이 사회체 안에 이행하기도 하고 이동하지 않기도 한다 . 대지의 충만한 신체는 사회체에서 또 사회체로서 연장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원시사회체는 하나의 그물로 뒤덮이는데, 이 그물에서는, 체계 가 길이와 넓이에서 의연을 넓히려는 요구에 따라, 사람들은 끊임없이 낱말들로부터 사물들에로, 신체들로부터 호칭들에로 비약한다• 우리가 함 축의 체제라고 부르는 것은, 음성기호로서의 낱말이 어떤 사물을 지시하 지만, 지시된 사물이 이 낱말 못지않게 기호인 체제이다. 이와 같은 일이 생기는 것은 그 사물 자체에 음성에 함축된 문자표기가 새겨지기 때문이 다. 음성과 문자표기라고 하는 두 요소의 여질성, 엇갈림, 불균형은 셋째 요소, 죽 시각적 요소-눈_-에 의하여 보완된다. 이 눈에 대해서는, 그것이 문자표기가 주는 고통을 평가하는 한에 있어서 낱말을 본다(낱말 울 보지, 낱말을 읽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다. 리오따르J .F. Ly o ta r d 는 다른 문맥에서 이런 체계를 기술하려 하였다. 이 체계에 있어서는 낱 말이 지시하는 기능만은 가지고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기호를 구성하 지 않는다; 기호가 되는 것은 오히려 사물 혹은 사물로서 지시된 신체이 다; 이것은 이 신체가 그 위에 명시된 미지의 한 면을 드러내되 이 면 이 낱말에 대응하는 문자표기로 적혀 있는 한예서 생기는 일이다; 두 요 소 간의 벌어짐은 눈에 의하여 채워진다. 눈은 맨 살에 새겨진 문자표기 에서 유출되는 고통을 평가하는 한, 낱말을 읽지 않고 낱말을 〈본 다〉: 눈은 비약한다 .57) 함축의 체제는 잔인성의 체계인데, 이런 것은 우 57) 장 프랑수아 리오파르 Je an-F rancois L y o t ard 는 순수한 指示의 아론의 너무 나 무시되었던 권리들을 되찾아주고 있다. 그는 낱말과 사물을 함축하는 지시관
계에서 이 양자가 피차 환원될 수 없게 벌어져 있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이 벌 어침 때문에, 지시된 사물이 未知의 한 면을 숨은 내용으로서 드러냄으로써 오 히려 기호가 된다(낱말들은 그것들 자체로 기호인 것은 아니다. 낱말들은 그것 들이 지시하는 사물이나 신체를 기호로 변형시킨다). 동시에, 지시하는 낱말은 보1체9에이71서기, p는독p . 하립4하지1여-만8 2 볼(— 읽수히 〈지있낱는는말 은않것 는이기) 호된기가다묘 . 한아C니 f.능 다 D.력i 을 s그c o 렇드ur지s러, 냄fi않으gu로고 re써 , 낱,e말d 글. 이 K이 l나있 in 게c 읽k s기되ie 면c 전k, , 그 죽시로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기호가 된다: 어떤 대상이 기호가 된다는 것 은, 바로 그것의 명백한 正體 속에 숨은 내용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 그것을 보 는 다른 눈에 대해서는 다른 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다른 면은 아마 절대로 파악될 수 없을 수도 있지만〉, 그 대신 낱말 자체에서 파악될 것 01 다.
리에게 음성-청취, 문자표기-신체, 눈-고통이라고 하는 세 변을 가전 마술의 삼각형으로 보였다: 이 삼각형에서는 낱말이 본질적으로 지시하 는 것이지만, 문자표기 자체가 지시되는 사물과 함께 기호를 이루며, 또 눈은 낱말에서 문자표기에 옮아가, 문자표기의 고통에서 낱말의 가시성 을 끌어내고 측정한다. 이 체계에서는 모든 것이 능동적이다. 죽 작용하 고 반작용한다. 모든 것이 사용되고 있고,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토지의 표상 전체를 고찰할 때, 이 표상이 사회체를 덮고 있는 그물의 복잡함을 확인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토지기호들의 연쇄는 한 요소로부터 다 른 요소에로 끊임없이 비약한다. 죽 모든 방향으로 확산하며, 채취할 흐 름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탈둘을 생기게 하며, 이집들을 포함하며, 잔여물들을 소비하며, 잉여가치들을 끌어내며, 낱말들과 신체들과 고통둘 울 연결시키며, 공식들과 사물들과 감정들을 연결시킨다__음성, 문자표 기, 눈을 언제나 다의적으로 사용하면서 함축한다: 이것은 하나의 飛躍方 式인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한다는 것 속에도, 또 시니피앙 속에도 들어 있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 관점에서 근친상간이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 것은, 그것이 반드시 실패하는 비약 이의의 아무것도 아니 기 때문이다. 이 비약은 호칭에서 인물에로의, 이름제서 신체에의 비약이 다: 한편으로, 호칭의 억제된 〈이쪽〉은 아직 인물을 지시하지 않고 다만 배종의 강도 있는 상태들만을 지시한다. 다른 한편으로, 억제하는 〈저
쪽〉은 자매, 어머니, 아버지……란 이름에 대응하는 인물과의 교집을 금 지함으로써만 인물들에 호칭둘을 적용한다. 이 두 가지 것 사이에는 그 다지 깊지 않은 개울이 흐르고 있는데, 이 개울을 건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개울에서는 호칭이 인물에 固着하지 않으며, 인물들은 문자표기 롤 피하며, 눈은 이제 아무것도 볼 것이 없고, 아무것도 평가할 것이잡i 다: 근친상간은 한갓 옮겨놓아진 한계요, 억제된 것도 억제하는 것도 아 니며, 다만 욕망의 옮겨놓아전 표상일 따름이다. 여기서 디움과 같은 것 이 분명해진다. 표상의 두 차원-음성-문자표기-눈의 세 요소를 지닌 그 표충의 조직과, 욕망의 표상표현-여제하는 표상작용-옮겨놓아진 표 상내용의 세 결정기관을 가지고 있는 그 심층의 조직-이 공통되는 운 명을 짊어지고 있다. 그 운명이란 주어진 사회기계의 한복판에서 서로 대응하는 관계들을 갖는 복잡한 체계의 운명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전제군주기계와 제국적 표상이 등장함으로써, 새 로운 운명 속에서 뒤집혀진다. 첫째로, 문자표기가 음성을 충실히 따르고 음성에 포개져서 글이 된다. 동시에 그것은 더 이상 결연의 음성으로서 음성을 끌어내지 않고, 새로운 결연의 음성으로서 음성을 끌어낸다. 이 음성은 피안의 허구의 음성인바, 직접적 부자관계로서의 글의 흐름 속에 서 표현된다. 전제군주의 이 두 근본적 범주는 또한 문자표기의 운동이 기도 하다. 이 문자표기는 음성에 종속하는 동시에, 음성을 종속시키고 음성의 자리를 빼앗는다. 이렇게 되자마자 마술적 삼각형이 파괴된다: 음성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고, 명령하고 공포한다; 문자표기는 더 이상 춤추지 않고, 신체에 생기를 주기를 그치고, 板이나 돌이나 책에 적혀 굳 어진다; 눈은 읽기 시작한다. (글은 일종의 失明, 죽 視覺과 鑑識의 상실 울 생기게 하지는 않지만, 이것을 內包하고 있으며, 눈은 이제 다른 기능 둘을 획득하기는 해도 병들어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마술적 삼각 형이 완전히 파괴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토지의 체계가 새로운 기계의 틀 안에서 작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는, 기반으로서, 벽돌로서 존속하고 있다. 이 삼각형은 하나의 피라미드의 底邊이 되었다. 이 피라미드의 세 측면은 발성, 문자표기, 시각을 전제군주의 뛰어난 통
일체에로 收敏시킨다. 사회기계 속의 표상체제를 구성국면이라고 부른다 면, 이 구성국면이 변화한 것은 명백하며, 또 이 구성국면이 종속의 국면 이 되었지, 함축의 국면이 되지는 않았다는 것도 명백하다. 그래서 바로 여기에 둘째로 본질적인 것이 있다: 문자표기가 음성에 포개점으로써 하 나의 초월적 대상을 연쇄 밖으로 비약해 나가게 한다. 이 초월적 대상은 연쇄 전체가 이제 거기 의존하며 이것에 직선적으로 관계하는 소리 없는 음성이다. 문자표기가 음성에 종속함으로써 天上의 虛構의 음성이 끌어내 어졌는데, 이 음성은, 거꾸로, 그것이 내놓는 글의 기호들(계시)을 통해 서만 표현된다. 아마 이것이 오이디푸스에 이르는 정식의 조작들을 처음 으로 꾸며낸 것이겠다(外括法의 誤證推理) : 이 조작은 포개거나 일대일 대웅관계 전체를 세우는 것이요, 이탈한 대상을 높이고, 이 대상으로 말 미암는 연쇄를 직선화하기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아마 여기서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란 물음이 시작되며, 또 해석의 문제들이 사용의 문 제와 유효성의 문제에 우선하게 된다. 황제, 신은 무엇을 의미하였던가? 언제나 이탈할 수 있는 연쇄의 선분들이 아니고, 연쇄 전체가 거기 의존 하는 이탈한 대상이다; 현실적인 것에 직결되는 다의적인 문자표기가 아 니고, 하나의 직선적 관계가 거기서 나오는 초월자를 형성하는 일대일 관계의 수립이다; 토지의 연쇄의 그물을 구성하는 비시니피앙적 기호들 이 아니고, 모든 기호가 거기서 흘러나와 글의 탈토지화한 흐름 속에 한 결같이 들어가는 전제군주 시니피앙이다. 인간들이 이 흐름들을 - 마시기 조차 한 것을 볼 수 있다. 장뿔레니 Zem p le ni는, 어떻게 세네갈 Seneg al 의 몇몇 지역에서, 이슬람교가 종속의 국면을 物活論的 가치들의 옛 含홈 局面에 포개놓고 있는가를 밝히고 있다: 〈적혔거나 암송되었거나, 신의 말씀이나 예언자의 말씀은 우주의 토대이다: 물활론적인 祈禧의 두명성 은 아라비아어의 딱딱한 唱句의 불투명성에 자리를 비킨다; 동사는 틀에 박힌 말두들 속에서 굳어진다; 이 말두들의 힘은 계시의 진리에 의하여 보중되는 것이지, 상칭적인 呪文의 유효성에 의하여 보증되는 것이 아니 다……. 이슬람교 道士의 지식은 실상 이름들, 창구들, 암호들 및 이것들 에 대응하는 존재들의 위계질서에 관한 것이다〉_―만일 필요하다면, 사
람들은 창구를 깨끗한 물이 차 있는 병 속에 넣고, 이 창구의 물을 마실 것이요, 그 물을 몸에 문질러 바를 것이요, 그 물로 손을 씻을 것이다 .58) 글, 죽 탈토지화한 최초의 흐름인 글은, 이러한 이유로, 마실 수 있는 것 이다: 그것은 전제군주 시니피앙으로부터 흘러나온다. 도대체 첫째 결정 기관인 시니피 %b] 란 무엇인가? 이 시니피앙이 비시니피앙적인 토지기호 들의 연쇄 밖으로 비약해 나가, 이것들의 내재적 함축의 국면에 종속의 국면을 강요하고 포개놓을 때 이 시니피앙은 바시니피앙적 토지기호들에 대하여 무엇인가? 시니피 %k] 란 기호의 기호가 된 기호요, 토지기호를 제쳐놓고 그 자리에 들어선 그리고 탈토지화의 문턱을 뛰어넘은 전제군 주적 기호이다; 시니피앙이란 그 자신 탈토지화한 기호일 따름이다. 굴자가 된 기호이다• 욕망은 이제 더 이상 감히 욕밍하지 않는다. 욕망은 욕망의 욕망, 전제군주의 욕망의 욕망이 된다. 입은 이제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글자를 마신다. 눈은 이제 더 이상 보지 않고, 읽는다. 신체는 더 이상 대지처럼 글자를 새기게 하지 않고, 전제군주의 影版畵 앞에 엎드려 절 한다. 전제군주는 大地밖에 있는 자요, 새로운 충만한 신체이다.
58) Andras Zemp le n i, L'I n te rp r e ta tion et la the rap ie tra dit ion nelles du d1e9s6o8r,d prep . m3e8n0t,a l 5 0c6h. ez les Wolof et Les Lebou, II, Un ive rsit e de Paris ,
어떠한 물로도 시니피앙에게서 그 제국적 기원을 결코 씻어내지 못할 것이다: 시니피%}a l 시니피앙인 주인, 즉 〈주인인 시니피앙〉임을 씻어내 지 못할 것이다. 시니피양을 언어의 내재적 체계 속에 잠기게 하려 해도, 그것을 이용하여 의미와 의의의 문제를 깨끗이 해결하려 해도, 시니피에 가 표음적 요소들 상호간의 각각의 示差的 價値의 집약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는 이 요소들의 공존 속에 시니피앙을 용해시키려 해도 소용이 없다; 언어와 교환 및 돈의 비교를 가능한 한 밀고 나아가, 언어롤 지금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본주의의 파라디그마p arad ig ma 들에 종속시키려 해도 소용이 없다―-이렇게 해봤자 시니피앙이 그의 초월성을 다시 끌 어들이고 사라진 전제군주를 위하여 유리한 증언을 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이 전제군주는 아직도 현대의 제국주의 속에서 그 기능을 발휘
하고 있다. 언어학이 스위스어나 미국어로 말할 때에도, 그것은 東方의 전제주의의 망령을 토닥거리고 있다. 소쉬르 Saussur ei근 다음과 같은 정, 죽 〈대중〉이 겪고 있는 예속상태, 죽 일반화된 노예상태가 주권의 기초 가 되는 것처럼 언어의 자의성이 그 주권의 기초가 되고 있다고 하는· 점 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소쉬르에게는 두 가 지 차원이 존속하고 있는가를 밝힐 수 있다: 하나는 수평적 차원인데, 이 차원에서는 시니피에가 공존하는 最小項둘의 가치에 환원되는데 시니 피앙은 이 항들 속에서 해체된다; 다른 하나는 수직적 차원인데, 이 차 원에서는 시니피에가 청각적 심상에 대응하는 개념에까지, 죽 시니피앙 울 재구성하는 그 최대한의 의연에서 파악되는 음성에까지 상승한다(두 차원이란 공존하는 항들의 보완물로서의 〈價値〉와 聽梵的 心像의 補完物로서 의 〈槪念〉이다). 요컨대, 시니피앙은 두 번 나타난다. 한 번은 요소들의 연쇄 속에 나타나는데, 이 요소들에 대하여 시니피에는 언제나 다른 시 니피앙을 위한 시니피앙이다; 두번째는 이탈한 대상 속에서 나타나는데, 연쇄 전체가 이 대상에 의촌하며 또 이 대상온 연쇄 위에 기호화 작용의 효과들을 퍼뜨린다. 이 둘째 의미의 시니피앙 자체에 의하여 조작되는 초규준화가 없으면, 첫째 의미의 시니피앙에 대하여 작동하는 음운론의 규준도 표음의 규준도 없다. 표의적 가치와 표음적 가치 사이에, 혹은 記 號素와 音素라고 하는 서로 다론 수준의 分節作用 사이에 일대일 대응관 계가 없으면 언어학이 설 자리가 없다; 이 일대일 대웅관계는 탈토지화 한 기호들의 독립성과 직선적 성격을 보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학의 터전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초월적인 것에 의하여 규정되어 있다. 설사 이 초월적인 것을 부재 혹은 빈자리라 생각해도 그렇다. 이 초월적인 것 온 접는 일, 포개는 일, 종속시키는 일 같은 필요한 일들을 조작하며, 이 초월적인 것으로부터 분철되지 않은 질료의 흐름이 체계 전체 속으로 홀 러들어 가는데, 이 흐름 속에서 이 초월적인 것은 재단하고 대립시키고, 선택하고 결합시킨다: 이 초월적인 것이 바로 시니피앙이다. 그러므로 시니피앙의 초월성을 통하여 또 이 초월성 속에서 어떻게 지배가 행해지 는가를 밝힘이 없이, 언어의 내재성 속에서 기호의 최소한의 요소들에
대하여 대중이 예속하고 있다는 것을 잘 밝힌디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 이다언 하지만 여기서도 다른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fiEllli이란 것의 어 김없는 외래성이 확인된다. 왜냐하연 설사 언어 자체는 정복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씌어진 언어를 구성하는 포개는 조작들은 동일한 언 어로 밀하지 않는 두 가지 등기, 두 가지 언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언어의 하나는 주인의 언어요, 다른 하나는 노예의 언어이다. 누 개롤 Nou g a yr ol 은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 수메르 인들에게 있어서, (그런 記號는) 물이다; 수메르인들은 이 기호를 a 라고 읽는데, 이것은 수메르어로 물을 의미한다. 어떤 아카드 Akkad 인이 뜻밖 에 나타나 그의 수메르인 주인에게 묻는다: 이 기호는 무엇입니까? 수메 르인은 그에게 대답한다: 그건 a 야. 아카드인은 이 기호를 a 로 받아들 인다. 이 시점에서 이 기호와 아카드어로 무 mu 라고 히는 물 사이에는 이제 아무 관계도 없다……. 나는, 아카드인들의 출현이 글의 음성화를 규정하였다고 믿는다……. 또 새로운 글의 閃光이 퉁겨나오려면 두 민족 의 접촉이 거의 不可缺하다고 믿는다. 〉 60) 어떻게 일대일 대응의 조작이 전제군주 시니피앙 주위에 조직되고, 거기서 알파벳의 음성의 연쇄가 홀 러나오는가 하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밝힐 수는 없다. 알파벳의 글은 문 맹자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문맹자들에 의하여 있는 것이다. 그 것은 무의식적 노동자들인 이 문맹자들을 통해서 존재한다. 시니피앙은 하나의 다른 언어를 초규준화하는 언어롤 내포하고 있는데, 한편 이 다 른 언어는 전적으로 음성요소들로 규준화되어 있다. 그래서 무의식이 실 상 이중동기를 전제하는 체제를 지니고 있울전대, 무의식은 하나의 언어 59) 베르나르 뽀트라 Bernard Pau t ra t는 지배와 예속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니체 와 소쉬르를 정근시키려 한다 (Vers i ons du Soleil , Fig u res et sys te m e de Ni et z s che, Ed. du Seu il, 1971, pp. 207 sq .). 그는 니체가, 헤겔과는 달리, 주 인과 노예의 관계를 노동을 동해서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본 점을 썩 잘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소쉬르와 비교하는 데 이르러서는, 言語롤 大] 예속하는 체계라 보고, 주인들의 언어가 이 예속을 조작하는 媒介라고 보는 니체의 생각을 虛椿라 하여 물리치고 있다. 60) Je an Noug a yr ol , in L'Ecritu re et la psyc holog ie des pe up le s, Armand- Coli n, 1963, p. 90.
로서가 아니라 두 개의 언어로 구조화된다. 시니피앙은 우리로 하여금 언어의 현대적이고 기능적인 이해에 접근시켜 주겠다고 하는 약속을 지 킬 것 같지는 않다. 시니피앙의 제국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 그것은 무엇 을 의미하는가?〉라고 하는 물음 밖으로 나가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물음을 미리 차단하고, 모든 답을 단순한 시니피에의 차원에 되돌림으로 써 이 답들을 불충분한 것이 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것은 暗fili, 순수한 原典尊重, 우월한 학문성의 이름으로 注釋울 거부한다. 이것은 마 치 왕궁의 어린 개들이 너무 성급하게 창구의 물을 마시고 다음과 같이 의쳐대기를 그치지 않는 것과 같다: 시니피앙이여, 너는 아직 시니피앙 에 이르지 못하였다, 너는 아직 시니피에에 머물러 있다! 시니피앙 밖에 는 이 개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이 주인-시니피앙은 멀리 사라진 시대에 가졌던 모습대로 있다. 죽 연쇄의 모든 요소에 결여를 분 배하는 초월적 저장, 공통되는 부재를 위한 공통의 어떤 것, 모든 흐름 절단을 유일의 동일한 절단의 유일의 동일한 장소로 향하게 하는 창설자 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이탈한 대상, 남근군도-거세, 기 운을 잃은 신하들을 편집병자인 위대한 왕에게 복종하게 하는 막대기이 다. 오오! 시니피앙이여, 그대는 전제군주의 무서운 복고주의이다. 여기 서 사람들은 여전히 빈 무덤, 죽은 아버지 그리고 이름의 秘義를 찾고 있다. 아마 이것이 오늘날 라깡에 대하여 또 그 신봉자들의 열광에 대하 여 몇몇 언어학자들로 하여금 분노하게 하고 있는 것이겠다: 라깡은 힘 차게 그리고 침착하게 시니피%낼 7 그 원천, 그 진정한 기원, 죽 전제군주 시대에까지 다시 끌고 가, 욕망을 법률에 용접시키는 지옥의 기계를 조 립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생각으로는, 모든 것을 살펴볼 때, 시니피앙 이 무의식과 어울리고 무의식 속에 시니피에의 효과들울 낳는 것은 바로 이 형태 아래에서이기 때문이다 .61) 억제하는 표상작용으로서의 시니피앙 61 ) 라깡에 관한 엘리자베드 루디네스꼬 Eli sa beth Roud i nesco 의 훌륭한 논문, 「隱兪의 활동」 참조. 이 논문에서 그녀는 분석적인 시니피앙의 연쇄와 이 연쇄 가 의존하는 초월적 시니피앙의 二重의 양상을 분석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리깡의 이론이 무의식의 언어학적 파악이라기보다 무의식의 이름으로 언어학을 비판한 것으로서 해석되어야 함을 밝히고 있다 (La Pensee, 1972).
이 시니피앙이 끌어내는 새로운 옮겨놓아전 표상내용, 저 유명한 은유들 과 換麻 이 모든 것이 초규준화하고 탈토지화되는 전제군주기계를 구성 한다. 전제군주 시니피앙은 그 효과로서 토지의 연쇄를 초규준화한다. 시니 피에는 바로 시니피앙의 효과이다. (시니피앙이 표상하고 있는 것도 아 니요, 시니피앙이 지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시니피에는 경계 끝의 자 매요, 국내의 어머니이다. 자매와 어머니는 위대한 청각적 심상, 새로운 결연과 칙접적 부자관계의 음성에 대응하는 개념들이다. 근친상간은, 경 계의 끝에서 중앙에 이르기까지, 전제군주가 지배하는 全領土 안의 연쇄 의 두 끝에서 초규준화하는 조작 자체이다: 결연의 모든 부채는 새로운 결연의 무한한 부채로 전환되고, 모든 확대된 부자관계는 직접적 부자관 계에 포섭된다. 그러므로 근친상간 내지 왕실의 삼위일체는 초규준화를 시작하는 한에 있어서 억제하는 표상작용 전체이다. 종속의 체계 내지 기호화의 체계가 함축의 체계 대신에 들어선 것이다. (얼마 전에는 바로 신체에 등기되었던) 문자표기가 음성에 포개지는 데 따라, 신체의 표상 은 낱말의 표싱에 종속하게 된다: 자매와 어머니는 음성의 시니피에둘이 다. 그런데, 이 포개집이 이제 직선적인 흐름에서만 표현되는 천상의 허 구의 음성을 끌어내는 데 따라, 전제군주 자신이 이 음성의 시니피앙이 된다. 이 시니피앙은 그의 두 시니피에를 거느리고 연쇄 전체의 초규준 화를 조작한다. 근친상간을 불가능하게 했던 것-죽 우리가 (어머니, 자매라고 하는) 호칭둘을 가지고 있을 때면 그 인물이나 신체를 가질 수 없고, 우리가 그 신체를 가지고 있을 때면 그 호칭들로 말미암는 금지롤 어기자마자 그 호칭들이 떨어져 나가는 사태 __ 은 이제 존재하기를 그 쳤다. 근친상간은, 친족의 신체가 친족의 호칭과 짝을 이루고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들과 결합하는 중에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전제군 주가 그의 〈정말〉 자매와 정말 어머니와 결합하는가의 여부를 아는 데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정말 자매는 어떻든 굉어의 자매요, 그의 정말 어머니는 어떻든 종족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일단 근친상간이 가능하 게 되면, 그것이 위장된 것인지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못 된다.
왜냐하면 어떻든 다른 어떤 것이 또 이 근친상간을 동하여 위장되기 때 문]다. 앞서 우리는 위장과 진짜의 상보성을 본 바 있는데, 만일 이 진 짜가 천상의 대상의 그것이라면, 이 상보성에 따라, 위장(한 것)은 바로 이 진짜에 대응하는 글, 즉 이 대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흐름, 그 음성으 로부터 흘러나오는 문자표기의 흐름이다. 위장은 현실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고, 현실로서의 값어치를 가지고 있지도 않으나, 전제군주의 초규준 화를 조작하는 중에 현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대지의 자리를 차지 하는 새로운 충만한 신체 위에 현실을 산출한다. 그것은 하나의 準原因 에 의하여 현실적인 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일과 현실적인 것을 산 출하는 일을 표현한다. 근친상간에 있어서, 자기의 시니피에들과 사랑을 하는 것은 시니피앙이다• 위장의 체계란, 기호화작용과 종속의 다른 이름 이다. 그러므로 위장된 것은 위장된 근친상간 자체를 통히여 위장된 그 만큼 현실적인 것이요, 또 거꾸로 현실적인 그만큼 위장된 것이다. 이것 은 마치 강도의 극단적인 상태들이 재구성되고 재창조된 것과 같다. 자 매와 더불어, 전제군주는 〈 거기서 남근의 힘이 솟구치는 제로의 상태〉를 위칭히는데, 이것은 마치 〈 바로 신체의 내부에 숨어 있는 것을 신체의 의부의 끝에 자리잡게 하는 〉 약속과 갇다; 그의 어머니와 더불어 그는 두 性이 최대한으로 각각의 성격을 의부화하는 초능력을 위장한다: 음 성으로서의 남근을 위장한다 .62) 그러므로 왕실의 근친상간에 있어서는 언 제나 다른 것이 문제가 된다: 兩性具有 同性愛 去勢 服裝倒緖 같은 것이 문제된다. 이것들은 강도들의 순환 속의 그토록 많은 句百t와 이행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전제군주 시니피앙이, 원시기계가 억제했던 것, 죽 강 렬한 대지의 충만한 신체를 재구성하려 하지만, 이 재구성이 전제군주 자신의 탈토지화한 충만한 신체 속에 주어전 새로운 기반과 새로운 조건 들 위에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근친상간은 그 의미와 그 장 소를 바꾸어, 억제하는 표상작용이 된다. 왜냐하면 근친상간을 통한 초규 준화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 문제되기 때문이다: 모든 신하의 모든 기 관, 즉 모든 눈, 모든 입, 모든 陰莖 모든 證, 모든 귀, 모든 항문이, 마 62) Guy Rosalato , Essais sur le sym boliq u e, Gallim ard, 1969, pp. 25-2 8.
치 왕의 옷자락의 孔雀의 꼬리에 달리붙듯-, 전제군주의 충만한 신체에 달라붙고, 거기서 그것들의 강도 있는 표상표현을 한다는 것. 왕실의 근 찬상간은 기관들의 강렬한 증가 및 이것들이 새로운 충만한 신체 위에 등기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사드 Sade 는 근친상간이 언제나 이러한 왕실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잘 간파하였다.) 억압-억제의 장치, 죽 억제 하는 표상작용은 이제 자기가 억제해야 할 표상표현을 표현하는 최고의 위험에 따라 규정된다: 이 위험이란 오직 하나의 기관이 전제군주의 신 체 밖으로 홀러나가 신체에서 떨어져 나가거나 빠져나가는 것이다. 전제 군주는 자기 앞에, 자기에 대항하여 적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본다• 이 적에 의하여 죽음이 그에게 들이닥칠 것이다-너무 뚫어지게 疑視하는 눈, 너무 드물게만 미소짓는 입술 등, 기관마다 저항할 가능성이 있다. 반쯤 귀머거리가 된 카에사르는 이제는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된 귀를 한 탄하는 동시에, 〈마르고 굶주린〉 카시우스 Cass i us 의 시선과 〈자기자신 의 미소를 비웃는 듯한〉 카시우쓰려 미소가 자기에게 쏠리고 있음을 본 다. 암살되고, 해체되고, 분해되고, 줄질하여전 전제군주의 신체가 도시의 공동변소로 운반되는 건 이야기. 天上의 對象울 離脫시키고 뛰어난 음성 울 낳은 것은 이미 그 항문이 아니었던가? 남근의 초월성은 항문에 의존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항문은 사라전 전제군주의 마지막 유물로 서, 그의 음성의 裏面으로서, 마지막에 가서야 드러난다: 전제군주는 이 제 〈하늘의 天井에 매어달린 죽은 쥐의 엉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폭군 에 대항하여 일어선 시민의 器官둘이 전제군주의 신체로부터 이탈하기 시직하였다. 그 다음에 이 기관들은 私人의 기관들이 된다. 죽 악취의 강 박관념 때문에 사회 터전 밖으로 추방된 失堅한 항문을 모델로 섬아 또 이 항문을 기념하여 스스로 사인이 된다. 원시적 규준화, 전제군주의 초 규준화, 사인의 탈규준화의 역사 전체는 디음과 같은 흐름의 운동들 속 에 들어 있다: 강렬한 배종의 內流 왕실의 근친상간의 超流, 排池物의 還流 이 환류는 죽은 전제군주를 공동변소로 나르고, 우리들을 모두 오 늘날의 〈사인〉이 되게끔 한 것이다-아르또가 그의 걸작 『헬리오기발 루스』에서 소묘한 것은 바로 이런 역사이다. 문자표기의 흐름의 역사 전
체는 精子의 물결로부터 폭군의 요람에로, 마침내는 그의 하수구-무덤속 의 똥의 물결에까지 이른다―-〈그 글 전체는 돼지의 똥이다〉, 모든 글 은 이러한 위장, 죽 정자요 배설물이다. 제국의 표상의 체계는 어쨌든 토지의 표상의 체계보다는 훨씬 더 온건 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기호들은 이제 더 이상 맨 살에 등기되 지 않고, 돌, 앙피지, 돈, 명부 위에 등기된다. 위트포겔 W ittfog el 의 〈行政收益의 減少〉란 법칙에 따르면, 넓은 분야들이 국가권력과 타협하지 않는 한에서, 半自律性울 누린다. 눈은 이제 더 이상 고통의 광경으로부 터 잉여가치를 끌어내지 않는다; 눈은 평가하기를 그찬다: 눈은 오히려 〈예방하고〉 감시하며, 잉여가치가 전제군주기계의 초규준화를 빠져나가 지 못하게 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모든 기관과 이것들의 기능은 이것 둘을 전제군주의 충만한 신체에 관계시키고 모여들게 하는 i固沿옮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체제는 더 이상 온건하지도 않다. 공포의 체계 가 잔인성의 체계 대신에 들어선 것이다. 옛 잔인성은 존속하고 있다. 특 히 자율적인 혹은 準자율적인 분야들 속에 존속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 은 이제 국가장치 속에 벽돌로 쌓인다. 이 국가장치는 이 잔인성을 때로 는 조직하고, 때로는 묵인 혹은 제한하여, 자기의 목적들에 봉사하게 하 며, 더 무서운 고도의 重層的 統一 아래 포섭한다. 법률이 전제주의에 대 립하는 것은 혹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상 나중에 생긴 일이 다(국가가 그 자체 자기와는 구별되는 계급들 간의 外見上의 調停者로 모습을 드러내고, 그 결과 자기의 主權의 형태를 수정해야만 하는 때에 생긴다 ).63) 법률은 그것이 나중에 될 것 혹은 되리라고 주장하는 모습으 로 처음부터 존재하지는 않는다. 죽 전제주의에 대한 대항을 보증하는 것, 무 분 결 을 하나의 전체에 결합시키고 이 전체를 일반적 인식과 일반 적 의지의 대싱이 되게 하는 하나의 내재적 원리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63) 마술적 -종교적인 말씀을 근거로 삼는 王의 正義로부터 對話-말을 근거로 삼는 都帝의 正義에로의 移行에 관해서, 그리고 이 이행에 대웅하는 〈主權〉의 변화에 관해서는, cf. L. Gernet, Droit et pre droit en Grece ancie n ne, L'Annee socio lo g iqu e 1948-1 949 ; M. Deti en ne, Les Mait re s de uerit e dans la Grece archaiq u e, Masp er o, 1967: M. Foucault, La Volon te de savoir .
이 인식과 의지의 裁可는 반항하는 부분들에 대한 판단과 적용을- 통해서 만 이루어진다. 야만스런 제국의 법률은 오히려 이러한 법률에 반대되는 두 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카프카는 이 두 가지 성격을 아주 강렬 하게 전개해 보여주었다: 그 하나는 이 법률의 정신분열적-편집병적 특 칭이다(換~) ; 이 특칭에 의하여 법률은 전체화할 수도 없고 전체화되지 도 않은 무분걸을 지배하며, 이것들을 갈라놓고, 이것들을 벽돌들로서 조 칙하며, 이것둘의 거리를 재고 이것들의 교제를 금하며, 이렇게 하고 나 서부터는 하나의 무서운 그러나 공식적이고 공허한, 뛰어난, 공동체적이 지 않고 분배적인 통일체로서 작용한다; 다른 하나는 우울증적이고 광적 인 특징이다(隱~) ; 이 특칭 때문에 이 법률은 아무것도 알리지 않고 또 알 수 있는 대상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배심원의 평결이 제재에 선행하 지 않으며, 법률의 條文이 평결에 선행하지 않는다. 神明裁判은 이 두 가 지 특칭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카프카의 『 流刑地에서 』 에 나오는 기계에 서처럼, 평결과 규칙을 글로 적게 하는 것은 제재이다. 신체는 함축의 체 계에서는 자기에게 고유한 것이었던 문자표기에서 이제 해방되었다 해도 이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 신체는 이제 돌과 종이, 板과 돈이 된 다. 이것들 위에 새로운 글이 자기의 형상들, 자기의 음성조직 및 자기의 알파벳을 아로새길 수 있다. 초규준화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법률의 본질 이요, 신체의 새로운 고통의 기원이다. 결연과 부자관계의 마술적 삼각형 에서는 눈이 축제로부터 잉여가치를 끌어내는데, 형벌은 이제 축제이기 를 그쳤다. 刑罰은 하나의 復讐가 된다. 이 복수는 전제군주에게서 통합된 음성, 손, 눈의 복수이다. 이것은 새로운 결연의 복수인데, 그 공적 성격 은 秘密울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니는 너에게 결연의 복수의 복수하는 검을 내리치게 하겠다…….〉 왜냐하면, 다시 말하거니와, 법률은 전제주 의에 대항하는 것을 보증하는 척하기 이전에, 전제군주 자신에 의하여 발명된 것이기 때문이다: 법률이란 무한한 負債가 취하는 法的 形式이다. 로마제국의 후기의 황제들에 이르기까지 법률가가 전제군주에 수행하고 법적 형식이 제국적 조직체에 수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가이우스와 콤모두스, 파피니아누스와 카라칼라, 울피아누스와 헬리오가발루스 갇은
괴물에는 입법자가 붙어 있다 . 〈 열두 황제의 착란과 로마법의 황금시대. 〉 (무한한 부채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면 채권자에 반대히여 채무자 의 편을 든다.) 복수, 미리 행해지는 하나의 복수로서, 제국의 야만스런 법률은 능동적 으로 행동하고 작용하고 반작용하는 원시적 생활의 활동 전체를 짓밟는 다. 이제 수동성은 전제군주의 신체에 매어달린 신하들의 德이 되어야 한다. 니체가 제국적 조직체에서 어떻게 형벌이 복수가 되는가를 정확히 밝히면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 제국적 조직체의 망치가 내리쳐지는 충격, 그 예술가적 포학의 충격 아래, 굉장한 양의 자유가 세계로부터, 혹은 적어도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潛在的 상태로 이행하지 …… >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의 본능의 뼈易이 생킨다. 이 본능은 야생의 행동들과 이에 대한 반작용들이 있는 곳에서 규준화되기를 그친다• 이 행동들과 반작용들이 있는 곳에는 숙명을 믿는 일이 아직 살아 있았는 데, 이제 죽음의 본능은 초규준화의 음울한 집행인이 되며, 모든 신하를 내려다보는 이탈한 대상이 된다. 이것은 마치 사회기계가 욕망하는 기계 둘로부터 떨어져 니온 것과 같다. 죽음의 본능, 그것은 죽음이요, 욕망의 욕망이요, 전제군주의 욕망의 욕망이요, 국가장치의 가장 깊은 곳에 동기 된 참재성이다. 오직 하나의 기관이라기보다 오직 하나의 살아남은 자도 이 장치로부터 흘러나갈 수 없고, 혹은 전제군주의 신체 밖으로 빠져나 갈 수 없다. 이것은 이제 자기의 시니피에들과 관계하는 시니피앙의 필 연성 이의에 디른 필연성(다른 운명)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공포 의 체제이다. 법률이 의미하는 것이라 여겨지는 것은 나중에야, 즉 법률 이 발전하고 전제주의에 대항하는 듯한 새로운 모습을 가지게 된 후에라 야 인식된다. 그런데, 처음부터, 법률은 시니피앙의 제국주의를 표현한다• 이 제국주의는 그의 시니피에들을 자기의 효과들로서 낳는데, 이 효과들 은 인식하는 일을 피하고 모든 것을 자기들의 뛰어난 원인으로부터 얻을 수록 더 유효하고 必須的이다. 법률이 자기가 의미하는 것을 설명하려 하며, 자기의 시니피에의 독립성을 주칭하려 하는(이것은 전제군주에 저 항해서 하는 일이라고 법률은 말한다) 반면에서는, 어설픈 개둘이 주석도
해석도 없이 덮어놓고 전제군주 시니피앙에게로 되돌아가자고 요구하는 일이 아직도 심심치 않게 있다. 왜냐하면, 카프카의 관찰에 따르건대, 이 개들이 좋아하는 것은 사실상 위선적인 박사들이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을 듣는 것보다는 욕망이 죽음의 본능의 순전한 고갈 속에서 법률과 밀접하게 결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주적인 시니피에 의 발전이나 전제군주적 시니피앙의 감아버리는 일은 모두 때로는 열리 고 때로는 막히는 동일한 문제의 부분을 이룬다. 그것은 추상하는 일의 연속이요, 우리를 언제나 욕망하는 기계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억제의 기계적 조작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오직 하나의 국가만이 존재했기 때 문이다. 〈 그것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 란 물음은 차츰 희미해지고, 비관 주의와 허무주의의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간다, 나다, 나다! Nada, nada!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 따라서, 사실, 제국적 조직체 아래서 나타나 는 것 같은 법률체제와 나중에 발전하게 되는 것 같은 법률체제 사이에 는 공통되는 어떤 것이 있다: 지칭에 대한 무관심이 그것이다.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고 의미하는 것이 법률의 고유한 성질이다. 법률은 아무것도 누구도 지칭하지 않는다. (법률의 이 민주적인 생각은 법률의 基準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앞서, 원시적 함축의 체계에서는 음성, 문자표기, 눈을 이용하여 지칭의 복잡한 관계가 만들어졌던 것을 보았거니와, 이 관계는 여기서 야만스런 종속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기호가 욕 망의 정립이기를 그치고 제국적 기호, 죽 욕망을 법률에 용접시키는 저 보편적인 거세가 될 때 지칭은 어떻게 존속할 것인가? 지칭들을 자의적 인 것이 되게 하는 것(혹은 지칭들을 옛 체계에 남아 있는 벽돌들로 존속 하게 하는 것)은 옛 규준의 파괴요, 기호화의 새로운 관계요, 초규준화 속에 기초를 둔 새로운 관계의 必然性이다. 왜 언어학자들은 끊임없이 전제군주 시대의 전실들을 재발견하고 있는가? 이것은 결국, 기호화의 필연성과 表裏를 이루고 있는, 지칭들의 자의성이 전제군주의 신하들과 奉仕者들에게만 미치지 않고, 전제군주 자신, 그의 왕조 및 그의 이름에 ® 이 Nad& nad 파란 낱말은 사전에도 없어, 앞뒤 文脈으로 이렇게 옮겼는데, 誤 譯인지도모르겠다.
까지 미치고 있는 때문이 아닐까? ( 〈 인민은 어느 황제가 통치하는지 알 지 못하며, 왕조의 이름은 인민에게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 ) 이것 이 의미하는 바는 죽음의 본능이 흔히 생각되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국가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또 참재성이 거기서 신하들에게만 작용 하지 않고 가장 높은 톱니바퀴 장치들 속에서도 작용한다는 것이겠다. 복수는 전제군주에 저항하는 신하들의 복수가 된다. 공포의 잠재성의 체 계 속에서, 이제 더 이상 활동하지도 않는, 죽 작용하거나 반작용하지 않 는 것, 〈 힘으로 죄고, 억제되고, 내부에 갇히어, 참재적인 것이 된 것 〉 은 이제 뼈저리게 느껴진다: 臣民들의 영원한 원한은 전제군주들의 영원한 복수에 대한 응답이다. 등기가 더 이상 작용하지도 않고 반작용하지도 않을 때 그것은 〈 뼈저리게 느껴진다 〉 . 탈토지화한 기호가 시니피앙이 될 때, 무서운 양의 반동이 잠재상태로 옮아가, 이것이 반향 전체, 잔향 전 체를 일으켜, 음량과 박자를 변화시킨다. (이것은 〈 나중에 되는 일 〉 이 다.) 복수와 원한, 이것은 물론 정의의 시작이 아니고, 니체가 분석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제국적 조직체 안에서의 정의의 생성과 그 운명이다. 그 러니 니체의 예언을 따르면, 국가는 그 자체가 죽기를 원하는 저 개, 그 러나 또 그 재에서 다시 태어나는 저 개일 것인가? 왜냐하면 체계의 유 지롤 확실하게 하고, 이름에 이름을, 한 왕조 다음에 다른 왕조를 계속 이어가게 하되, 시니피에들을 바꾸지도 않고, 시니피앙의 벽이 무너지지 도 않게 하는 것은 바로 새로운 결연이나 무한한 부채의 집합 전체이기 때문이다―_죽 시니피앙의 제국주의이기 때문이다. 이 제국주의는 지칭 둘의 자의성과 더불어, 시니피에들의 은유적 혹은 환유적인 필연성이다. 이런 까닭에 아프리카, 중국, 이집트 등의 제국에서는 참재성의 체제가 끊임없는 반항과 離坂의 체제였으나, 혁명의 체제는 아니었다 . 여기서도 여전히 죽음은 안으로부터 느껴지는 것이 아닐 수 없었으나, 죽음이 찾 아오는 것은 밖으로부터가 아닐 수 없었다. 제국의 창설자들은 모든 것을 참재상태로 옮아가게 하였다; 그들은 복 수를 생각해 냈고, 원한 죽 逆復 讐 롤 생기게 하였다. 그래서 니체는 이미 원시체계에 관하여 말했던 것을 이들에 관하여 다시 한번 말하고 있다:
〈良心의 가책 〉 -오이디푸스라 이해하자-一즉 저 무서운 식물이 뿌리 를 내리고 자라기 시작한 것은 이들에게서가 아니다• 다만, 이 방향으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갔을 따름이다: 오이디푸스, 양심의 가책, 내면성, 제 국의 창설자들은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 ” ) 니체는 전제군주 시 니피앙으로서의 황제와 이 황제의 두 시니피에, 죽 그 자매와 그 어머니 를 질질 끌고 다니고, 이들을 더욱더 무거운 짐으로 느끼면서 광기에 접 근해 갔는데, 이러한 니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이디푸스가 제 국의 표상 속에서, 자기의 세포의 旺珠의 이동을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그는 욕망의 옮겨놓아진 표상내용에서 억제하는 표상작용 자체가 되었 다 .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점유되지 않았던 한계가 이제 전제 군주에 의하여 점유된다. 오이디푸스는 자기의 이름을- 얻었다. 그는 안짱 다리 전제군주요, 초규준화에 의하여, 언어표상에 종속하는 신체표상으로 서 그의 자매 및 그의 어머니와 이중의 근친상간을 행히는 · 자이다. 더군 다나 바로 이 오이디푸스는 자기를 가능하게 하는 다음과 감은 공식적 조작들을 하나하나 해간다: 이탈한 대상의 外括; 초규준화 혹은 왕실 근 친상간의 二重拘束; 일대일 대웅관계의 수립, 적용, 주인과 노예 사이의 연쇄의 직선화; 법률을 욕망 속에 끌어들이는 일과, 욕망을 법률 밀에 끌어들이는 일: 그의 〈나중에〉 혹은 그의 〈 시기를 놓치고 〉 같은 상황으 로 말미암는 무서운 잠재성 . 이렇게 되면 다섯 가지 오류추리의 모든 부 품이 갖추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정신분석에서 말히는 오 이디푸스로부터는 아주 먼 데에 있다. 그리고 그리스 연구가들이 정신분 석이 기어코 그들에게 들려주려 하는 이야기를 귀딤이· 듣지 않는 것도 옳은 일이다. 그것은 바로 욕망의 이야기이요, 성적인 욕망의 이야기이 다. (다른 이야기는 없다.) 그런데 그 모든 부품들은 여기서 국가의 톱 니바퀴 장치로서 작동하고 있다. 물론 욕망은 아들, 어머니 그리고 아버 지 사이에서 작용하지 않는다. 욕망은 국가기계의 리비도를 공급한다 . 이 국가기계는 토지기계를 초규준화하고, 보조적인 나사를 한 번 돌려, 욕망 하는 기계들을 억제한다. 근친상간은 이 리비도 공급에서 생기는 것이지, 64) Ni et z s che, Genealog ie de la morale, II, § 17.
이것의 逆이 아니다. 근친상간은 맨먼저 전제군주, 자매 그리고 어머니만 을 등장시킨다: 그것은 초규준화하며 억제하는 표상작용이다. 아버지는 낡은 토지기계의 표상표현으로서만 개입하지만, 자매는 새로운 결연의 표상표현이요, 어머니는 직접적 부자관계의 표상표현이다. 아버지와 아들 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모든 성욕은 기계들 간에 작동한다. 죽 기계들 의 갈등에서, 기계들이 포개지고 벽돌처럼 쌓이는 데서 작동한다. 다시 한번 프로이트가 보고한 놀라운 이야기를 둘어보자. 『 모세와 一神敎』에 서 그는 잠재성이 국가에 관한 일임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런데 이때 잠재성은 〈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 에 뒤이어 나타나는 것이어서는 안 되 게 되어 있다. 죽 이 콤플렉스의 억제나 제거를 나타내는 것이어서는 안 되게 되어 있다. 참재성은 근친상간 표상을 억제하는 행동의 결과로 생 기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근찬상간 표상은 아직 결코 억제된 욕망으 로서의 콤플렉스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와 반대로 그것은 욕망 자체에 대하여 억제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잠재성에서, 참재성이 있은 후에 생길 것이요, 욕망을 왜곡하 고 옮겨놓고 심지어 탈규준화하는 조건들 속에서, 억제된 것이 되돌아오 는 것을 의미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잠재성이 있고 난 후에야 나 타난다; 프로이트가 잠재성에 의하여 분리되는 두 시기를 인정할 때, 콤 플렉스의 이름에 합당한 것은 둘째 시기만이요, 첫째 시기는 전혀 다론 조직 속에서 전혀 다른 관점에서 작동하는 잠재성의 부품들과 톱니바퀴 장치들만을 나타내고 있을 따름이다. 여기에는 정신분석의 모든 오류추 리와 그 偏執이 나타나 있다: 죽, 콤플렉스를 결정적으로 세워놓는 것 혹은 내면적으로 세워놓고는 이것을 콤플렉스의 해결 혹은 해결의 시도 로 제시하고, 아직은 이 콤플렉스에 반대되는 것을 이 콤플렉스로서 제 시하고 있다. 오이디푸스가 오이디푸스 槪念,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되 려면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사실 많은 것이 필요하다―一이것들을 니체 는 무한한 부채의 발전에서 부분적으로 예감하고 있었다. 오이디푸스의 세포는 그 이동을 성취해야 할 것이요, 옮겨놓아진 표상 내용의 상태로부터 억제하는 표상작용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으로 만족해
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억제하는 표상작용으로부터 마침내 욕 망 자체의 표상표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 옮겨놓아전 표상내용의 자 격으로서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부채는 그저 무한한 부채가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무한한 부채로서 내면화되고 정신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 리스도교와 이에 뒤이어 일어난 것.) 아버지와 아들이 형성되어야 할 것 이다. 즉 왕실의 삼위일체가 〈남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이제 내 면화된 무한한 부채의 직접적 결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65) 전제군 주-오이디푸스가 臣民-오이디푸스, 예속한_오이디푸스, 아버지-오이디 푸스, 아들-오이디푸스에 의하여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공식적 조 작은 탈규준화한 사회 터전에서 다시 전개되고, 내면성 즉 내면적 재생 산의 순전히 私的인 境域에서 메아리쳐야만 할 것이다• 억압-억제장치가 완전히 재조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은 그 이동을 완성한 후 에는 자기자신에게 적대한다고 하는 극도의 비참함을 경험해야 할 것이 다. 죽, 욕망 자체에 대한 적대, 양심의 가책, 죄책감―_이것은 가장 탈 규준화한 사회 터전과 가장 병적인 내면성에 욕망을 동시에 결부시키는 것이다――욕망의 함정, 욕망의 有毒植物울 경험해야만 할 것이다. 욕망 의 역사가 이러한 종말을 경험하지 않는 한, 오이디푸스는 모든 사회에 달라붙는다. 그러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악몽으로서 달라붙는다-종말 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정신분석의 운명이 결부되었던 무리한 오이 디푸스화로부터 정신분석을 救出한 것, 비록 退行이란 대가를 치르기는 했지만, 어떻든 이러한 救出울 실지로 행한 것은 라깡의 힘으로 된 일이 다. 여기서 퇴행이란 무의식을 전제군주장치의 重壓아래 두고, 이 장치 65) 宗史家돌과 정신분석가들은 帝國의 三位一體 속에 도입되는 아버지 -아돌의 관계를 따라 이 삼위일체가 남성화된다고 하~근 문제를 찰 알고 있다. 니체가 이 남성화를 무한한 부채의 발전의 한 본질적 계기로 보고 있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리스도교의 天才性의 발휘였던 이 慰安…… 하느님은 자기자신을 희생한다. 오직 하느님만이 인간 자신의 힘만으로는 속죄할 수 없게 된 것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다. 債權者인 하느님이 債務者인 인간을 위하여 사랑(누가 이것을 믿겠 는가?)으로써 자기를 희생 제물로 바친다. 자기의 채무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 !> (Genealog ie de la morale, II, § 21)
에서 출발하여 무의식을 재해석한 것이다. 법률과 시니피앙, 男根과 去 勢__이것은 괜찮다. 오이디푸스는 괜찮지가 않다! 이것은 무의식의 전 제군주 시대이다.)
7 原國家 우르 바란 마을은 아브라함의 출발점이다. 죽 새로운 결연의 출발점이 다. 국가는 점진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고, 주인의 출현과 함께 완전 무 장하여 단숨에 나타났다. 이것이 기원으로서의 原國家 Urs t aa t요, 모든 국가가 그렇게 되고자 욕망하는 영원한 모델이다. 이른바 아시아적 생산 은, 이 생산울 표현하는, 죽 이 생산의 객관적 운동을· 구성하는 국가에서 행해지지만, 이 생산은 하나의 뚜렷한 조직체가 아니다: 그것은 기반을 이루고 있는 조직체요, 모든 역사의 지평을 이루는 것이다. 도처에서 우 리는 제국기계의 역사적으로- 전통적인 형태들에 선행하는· 제국기계들을 발견한다. 이 제국기계들의 특칭은 국가의 재산, 죽 벽돌처럼 쌓인 공공 의 점유물과 집단들이 거주하는 영토를 가지고 있는 점이다. 이보다 더 〈전화한〉 국가형태는 모두 씌어 있던 글자를 지우고 다시 글자를 써 넣 은 양피지와 같은 것이다: 이 국가형태마다 전제군주의 등기, 미케네 M y kena i의 사본을 덮어 숨기고 있다. 흑인마다 그리고 유태인마다 그 밑에는 이집트인이, 그리스인들 밑에는 미케네인이, 로마인들 밀에는 에 트루리아인이 있다. 그런데 이 기원은 망각되고, 참재성이 국가 자체를 탓하여, 국가에서는 가끔 글이 사라진다. 국가가 자기의 쇠약해짐을 깨닫 게 되는 것은 사유재산의 타격, 이것 다음에는 상품 생산의 타격을 받음 으로써이다. 대지는 사유재산의 영역 그리고 상품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다. 지배계급들이 더 이상 국가장치와 일체를 이루고 있지 않는 한에서, 계급물기 나타나지만, 이 계급둘은 이 국가장치를 변형시켜 자기의 뚜렷
한 결정들에 이용한다. 사유재산은, 처음에는 공유재산에 인접해 있고, 다음에는 공유재산을 구성하거나 좌우하고, 또 그 다음에는 더욱더 이것 을 결정짓는 것이 되어, 채권자-채무자의 관계를 적대하는 계급들의 관 계들 속에서 내면화한다 . 66) 그런데 전제주의 국가가 빠져 들어가는 참재 상태와 이 국가로 하여금 변모한 기초들 위에서 자기를 재건하고 그 이 전의 어느때보다도 더 〈 기만적 〉 이고, 더 〈 잔혹 〉 하고, 더 〈 위선적 〉 으로 설치게 하는 힘을 어떻게 동시에 설명할 것인가? 이 망각과 이 회귀. 한 편으로, 고대의 도시국가, 게르만 공동체, 봉건제는 大帝國울 전제하며, 이것들의 지평을 이루는 원국가와의 관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형태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자기들의 새로운 뚜렷한 결정들의 요구들을 참작하여, 가능한 한 원국가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도 대체 사유재산, 부, 상품, 계급 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규준둘의 파산 이다 이렇게 되면 탈규준화한 흐름들이 불쑥철쑥 나타나 사회체 위를 흐르고 사회체의 이쪽 끝에서 다른 쪽으로 횡단한다. 국가는 이제 더 이 상 이미 규준화한 토지의 요소를 초규준화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 고, 더욱더 탈토지화한 흐름들을 위한 특수한 규준둘을 생각해 내지 않 으면 안 된다. 죽, 전제주의를 새로운 계급관계들에 이바지하게 하고, 부 유와 빈곤의 관계, 상품과 노동의 관계를 융화시키고; 시장의 돈과 收稅 의 돈을 조정하고: 도처에서 원국가를 새로운 사태에 거듭 불어넣지 않 으면 안 된다 . 그래서 도처에, 똑같을 수는 없겠으나 흉내낼 수는 있는 잠재적 모델이 있다. 그리스인들에 대하여 이집트인의 우울한 경고가 메 아리친다: 〈 너희들, 그리스인들이여, 너희들은 영원히 어린아이들일 수밖 에 없을 것이다!〉 66) 전제군주 국가 자체 속에 이미 있는 私有財産 體借tj에 관하여는 Karl Wi tt- foge l, Le Despo ti sm e orie n ta l , 1957, tr. fr. Ed. de Mi nu it , pp. 140- 1 49, 315-404. 중국 제국에서의 사유재산 체제에 관하여는, Et ien ne Balazs, Bu- reaucrati e celeste , ch. XII-IX . 전제군주 국가가 봉건제로 이행하는 데에는 상 품생산이 사유재산과 결부되는가 결부되지 않는가에 따라, 두 개의 길이 있는데, 이 점에 관하여는, Mauric e Godeli er, Sur le mode de pro ducti o n asia t i qu e, pp. 90- 9 2.
범주로서의 국가의 특별한 상황은 망각과 회귀였는데, 이 상황이 설명 되어야 한다. 이것은 근원적인 전제군주 국가가 다른 절단들과 같은 하 나의 절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설립물들 가운데, 그것은 아마 그것 울 설립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완전 무장하여 출현한 유일의 것이겠 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너무 몰랐 다: 그것은 저 유명한 디섯 단계, 원시공산주의, 고대도시국가, 봉건제, 자본주의, 사회주의에는 끼여 있지 않다 .67) 그것은 다른 조직체들 가운데 한 조직체가 아니요, 한 조직체로부터 E 遷· 한 조직체로의 옮아가는 것도 아 니다. 그것은 그것이 절단하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재절단하는 것에 대 하여, 마치 하나의 디론 차원인 듯이, 뒤에 처져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여기서 다른 차원이란 사회들의 실질적 발전에 첨가되는 머릿속의 이념, 부분들과 흐름들을 하나의 전체 속에 조직하는 規制理念 혹은 反省原理 (테러리즘)이다. 전제군주 국가가 철단하는 것, 즉 超切斷하고 초규준화 하는 것은, 그 이전에 있었던 것, 즉 토지기계이다. 전제군주 국가는 이 토지기계를 벽돌들, 노동 무 품들의 상태로 몰아넣고, 이렇게 한 후로는 이 것들을 머릿속의 관념에 따라 마음대로 처리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제군 주 국가는 바로 기원이로되, 추상적인 기원이다. 이 기원이 구체적인 시 초와 다르다는 것을 잘 이해하여야 한다. 신화는 언제나 이행과 벌어짐 울 표현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시초에 관한 原始土地神話 는 그야말로 강렬한 에네르기 (그리올르가 〈신화의 형이상학적 부분〉이라 부른 것, 죽 전동하는 소용돌이)와 이것이 좌우하는 의연적 사회체계의 벌 어짐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회체계는 결연과 부자~ 왔 다갔다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원에 관한 제국신화는 디론· 것을 표현 67) 소위 아시아적 생산과 다섯 단계를 일치시킬 수 있는가 혹은 없는가에 관하여, 엥겔스가 『가족의 기원』에서 이 범주를 거부하게 된 이유들에 관하여, 러시아와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범주에 대하여 저항한 일들에 관하여는, cf. Sur le mode de pro ducti on asia tiqu e. 위트포겔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물음을 제기 하였는데, 이 때문에 그가 당한 중상기 생각난다: 동양의 전제군주 국가의 범주 가 거부되지 않은 것은 그것이 현대 사회주의 국가들의 地平으로서 특별한 範例 的 地位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는 이유들· 때문이 아닌가?
한다. 즉, 시초와 기원 자체의 벌어짐, 의연과 관념의 벌어짐, 생성과 질 서 및 권력(새로운 결연)의 벌어짐, 그리고 부자관계로부터 결연에로 다 시 이행하는 것, 부자관계에 의하여 되찾아지는 것을 표현한다. 그래서 베르낭J .P. Vernan t은 제국신화들이 우주에 내재하는 조직법칙을 개념 으로써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 그것들은 기원과 시초둘의 차이, 주권과 세계의 생성의 처이룰 정립하고 내면화해야만 한다 ; 〈 그 신화는 이 거리 속에서 구성된다. 그것은 이 거리를 그 이야기의 대상 자체로 삼는다. 그리하여 신들의 세대들이 嫌起함을 따라 주권이 榮柏盛 哀하고 마침내 결정적인 최고의 권력이 王朝를 극적으로 만들어내는 시 점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추적한다. 〉 68)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어느 것이 먼저인지, 또 토지의 同族機械가 전제군주기계를 전제하는지 않는지를 정 말 알 수는 없다. 전자가 후자로부터 벽돌들을 뽑아내거나 이번에는 후 자를 선분화하는 일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느 모로는, 근원적 국가 다음에는 무엇이 나타나는가, 이 국가가 절단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말할 필요가 있다. 이 국가는 자기 이전에 있었던 것을 초 절단하지만, 자기 뒤에 오는 조직체들은· 재절단한다. 여기서도 이 국가는 마치 다론 차원에 속하는 하나의 추상과 같다. 이 추상은 언제나 뒤에 처져 있으면서 잠재성에 침식되어 있지만, 후속하는 국가들· 속에 파문을 일으키면서 곧잘 되돌아오는데, 아 국가들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존재하 게 한다 • 국가는 갖가지 형태를 나타내지만, 지금까지 국가는 오직 하나 만 있었다. 이런 까닭에 변형들, 새로운 결연의 모든 變種둘은 동일한 범 주에 속한다. 가령, 봉건제는 추상적인 전제군주 국가를 전제하며 사유재 산 체제와 그 상품 생산의 躍進에 따라 이 국가를 선분화하기만 하는 것 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또한 서유재산 체제와 상품 생산의 약전이 거꾸 로 本來的으로 봉건적인 국가를 구체적으로 존재하게 한다. 이 국가에는 전제군주가 절대군주로서 되돌아온다. 왜냐하면 상품 생산의 발전이 봉 건제를 폭파시키는 데 충분하다고 생긱히는 것(많은 점에서 이와 반대로 68 ) Jea n-P ie r re Vernant, Les Orig ine s de la pe nsee grec q ue , P.U.F., 1962, pp. 112-113.
상품 생산이 봉건제를 강화하고, 봉건제가 현실로 존재하고 살아남는 새로운 조건들을 봉건제에 준다)과, 봉건제가 스스로 국가에 대립한다고 생각하 는 것(이와 반대로, 봉건국가로서의 국가는 商品이 흐름의 탈규준화를 생기 게 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데 흐름의 탈규준화만이 그때의 봉건체계를 파 괴한다)은 이중의 잘못이다 .69) 좀더 최근의 예를 들면, 위트포겔이 현대 의 자본주의 및 사회주의 국가들이 어떤 점에서 근원적인 전제군주 국가 에 가담하고 있는가를 밝혔는데, 우리는 그의 이 견해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국가들게 관해서 말한다면, 어떻게 거기서 전제군주가 더 위선적으로 되고, 더 냉혹하게 되고, 더 타산적으로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가? 왜냐하면 거기서는 전제군주가 經理룰 초규준화하는 대 신 스스로 경리하고 규준화하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양십적인 역 사가들의 방식을 따라, 여기에는 시골 사람들의 공동체, 저기에는 산업사 회 등의 차이의 일람표를 만들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 차이들이 결정 적인 것이 되는 것은, 전제군주 국가가 다른 구체적 조직체들 가운데 한 조직체요, 이 조직체들 간의 비교가 가능한 경우만일 것이다. 그런데 전 제군주 국가는 추상이요, 이 추상은 물론 제국적 조직체들에서 실현되지 만, 거기서 추상(초규준화하는 뛰어난 통일체)으로서만 실현된다. 그것은 뒤에 일어나는 국가형태들 속에서만 그 구체적인 현실적 존재를 획득한 다. 이 국가형태들은 그것을 다른 모습으로 또 다론 조건들 속에서 再來 시킨다. 그것은 그 이전에 있었던 것과 나중에 일어나는 것의 공통되는 地平인데, 그것은 역사의 밖에 있지 않고 언제나 역사 곁에 있는 조건 0 념서만 세계사를 좌우한다. 그것은 역사가 〈머리〉 속에, 〈두뇌〉 속에 있는 방식을 다시금 보여주는 냉혹한 怪物 죽 원국가이다. 69) 모리스 돕 Mauric e Dobb 은 상업, 시장 및 돈의 발전이 어떻게 봉건제에 서로 0 뮤 다른 갖가지 효과를 미쳤으며, 또 때로는 農奴의 예속과 봉건적 구조 전체 를 강화했는가를 밝혔다: Etu d es sur le deuelopp em ent du cap ital ism e, tr. fr. Maspe ro, pp. 48-8 2. 프량합 힝커 Franc;o is H i ncker 는 〈국가의 봉건제도〉 란 개념을 만들거내어, 특히 프랑스의 철대군주제가 어떻게 1 8-11]기에 이르러서 야 문난 봉건제의 데두리 안에서 생산력과 상품 생산을 유지했는가를 밝혔다 (Sur le feo dalism e, Ed. Soc ial es, 1971, pp. 61-66).
마르크스는, 역사가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것에로 나아가는 방식이 정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 단순한 범주들은 그 속에 서 불충분하게 발전한 구체적인 것이 아마도 실현되는 관계들을 표현하 지만, 가장 구체적인 범주 속에서 이론적으로 표현되는 더 복잡한 관계 나 관련을 아직까지는 정립하지 못했다. 한편 더 발전한 구체적인 것은 바로 이 범주를 하나의 종속된 관계로서 존속시킨다• 〉 70) 국가는 먼저 따 로따로 작동하는 하부집합들을 통합하는 추상적 통일체였다: 그것이 이 제는 힘들의 場에 종속하여 이 힘들의 흐름을 조정하고, 이 힘들이 혹은 지배하고 혹은 종속하는 자율적 관계들을 표현한다. 그것은 벽돌들처럼 모아져 유지되는 토지들을 초규준화하는 데 더 이상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은 돈, 상품 및 사유재산의 탈규준화한 흐름들을 위한 규준둘을 구 성하고 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더 이상 지배계급들 중의 하나 혹은 여럿을 스스로 형성하지 않는다. 그것은 독립을 얻게 된 이 지배계 급들에 의하여 그 자체가 형성된다. 이 지배계급들은 자기들의 권력을 지키고 자기들의 모순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또 피지배계급들과 자기들 의 두쟁을 해결하고 그들과 타협하기 위하여 그것(국가)이 자기들에게 봉사하게끔 한다. 그것은 더 이상 斷片들을 통치하는 초월적인 법률이 아니다: 그것은 잘하건 잘못하건 하나의 전체를 설계하고 이 전체에 자 기의 법률을 내재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그의 시니피에둘의 질서를 바로잡는 순수한 시니피앙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시니피에들의 배후에 나타나 자기가 의미하는 것, 즉 시니피에에 의존한 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하나의 초규준화하는 통일체를 산출하지 않는 다. 그것은 그 자체 탈규준화한 흐름의 장 속에서 산출된다. 기계인 한에 서,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사회체계를 결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기능들 을 수행하는 중에 일체화하는 사회체계에 의하여 결정된다. 요컨대, 그것 은 인위적이기를 그치지 않으나, 구체적인 것이 된다. 죽 〈구체화로 향 한다〉. 동시에 그것은 지배하는 힘들에 종속한다. 技術機械에 있어서는 70) Marx, Intr od ucti on gen erale a la criti qu e de l'eco nomi e po liti q u e, Pleia d e, I, p. 256.
이와 비슷한 전전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이 기계가 다음과 같이 될 때 밝힐 수 있는 일이다. 죽, 이 기계가 하나의 추상적 통일체, 죽 분 리된 하부집합들을 지배하는 知的 體系이기를 그치고, 구체적인 자연체계 로서 작용하는 힘들의 장에 종속하는 관계가 될 때에 말이다 .71) 그런데, 기술기계 혹은 사회기계에 있어서의 구체화에의 이 경향은, 여기서 바로, 욕망의 운동 자체가 아닌가? 우리는 항상 다음과 같은 괴이한 패러독스 에 거듭 빠지곤 한다: 국가는 전제군주의 머리에서 臣民들의 마음에, 또 지적인 법칙에서 자연 체계 전체에 이행하는 욕망이다; 자연 체계는 지 적 법칙에서 벗어나거나 지적 법칙에서 해방되어 있다. 국가를- 찾는 욕 망, 죽 가장 이상아롯한 押壓圈戒인 국가를 찾는 욕망 역시 욕망이다. 국 가는 욕망하는 주체요 또 욕망의 대상이다. 욕망은 언제나 근원적인 원 국가를 새로운 사태 속에 거듭 불어넣고 이 원국가를 가능한 한 새로운 체계의 내부에 내재화시키는 작용이다. 이 밖의 일에 있어서는, 제로에서 다시 출발하는 것이 문제이다. 죽 국가가 자연 체계 속에서 더 이상 국 가로서 작동할 수 없게 되면 또 이러한 형태들을 가지게 되면, 하나의 정신의 제국을 세우는 것이 문제된다. 크리스천들이 제국을 탈취했을 때 뗄의 두 鬪의 사呼 현 이러한 禪的 二元性이 다시금 있었다. 한 쪽의 사람들은 가능한 한 원국가를 그들이 로마의 객관적 세계의 내 부에서 보았던 요소들과 함께 재건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이요, 다른 한 쪽 사람들은 순수한 사람들로서, 다시 광야로 나아가, 새로운 단결을 다 짐하고 이집트와 시리아로부터 초월적 원국가의 靈感울 다시 찾아보기를 원했던 사람들이다. 이 무슨 기괴한 기계들이 円柱記念碑들 위에, 나무들 의 줄기에 나타나는가! 그리스도교는 이런 의미에서 편집병기계들과 獨 身機械들의 작동 전체, 편집병자들과 도착자들의 무리 전체를 전개시키는 일을 알고 있었다. 이 편집병자들과 도착자들 역시 우리들의 역사의 지 평의 일부를 이루며 우리들의 달력을 가득 채우고 있다 .72) 이것은 국가 71 ) Gi lbe rt Sim ondon , Du mode d'exis te n ce des obje ts tec hniq u es, Aubie r , 1969, pp. 25-49 . 72) 작그 라까리에르 Jac q ue s Lacarr i ere 는 이 점에 관하여 判]기부터 이집트, 팔 레스티나, 시리아에 있는 그리스도교 금욕주의의 여러 형태와 여러 계기를
잘 밝혔다: Les Hommes iure s de Di eu , Arth aud, 1961. 먼저 온유한 편집병 자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들은 마을 근처에 정착했다가 멀리 광야로 나 가, 거기서 놀라운 금욕기계들을 발명한다; 이 기계들은 옛 결연들과 부자관계 들에 대한 그들의 투쟁을 표현한다(聖 안토니우스의 단계 ) ; 다음에는 제자들의 공동체들, 죽 수도원들이 형성되는데, 그 주요한 활동들 중의 하나는 創立者인 聖者의 傳i C 를 쓰는 일이다; 수도원들은 軍除의 규율을 가지고 있는 독신기계 들인데, 거기서 수도사는 〈자기 주위에, 공동의 금욕의 강제란 형식 아래, 옛 박 해들을 생각나게 하는 공격적 세계를 재건한다〉(聖 빠꼼 Pacome 의 단계); 끝 으로 도시 혹은 마을로 되돌아가는 일 ; 무장한 도착자들의 그룹들이 消減해 가 는 異敎에 대한 두쟁을 자기들의 임무로 삼는다(슈누디 Schnou di의 단계). 좀 더 일반적으로, 수도원과 도시의 관계에 대하여는 루이스 맘포드를 참조할 것. 맘일)포ol드 I 는관 하수겨도 원논들하에고 관있련다하 (여La, C〈it e새 로 a운 t ra형u e태rs의 l'h도i s시 t o의 i r e , 구E조d화. 를du 만Se들u 어il, 내 p는p. 315 sq. , 330 sq .).
생성의 두 양상이다: 하나는 더욱더 탈규준화해 가는 사회적인 힘들의 장 속에 국가를 내재화시켜 하나의 자연 체계를 형성하는 양상이요; 다 론 하나는 더욱더 초규준화하는 超地旦성인 장 속에 국가를 정신화하여 하나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형성하는 양상이다. 무한한 부채가 내재화하 는 것과 정신화되는 것은 동시에 있어야 한다. 양심의 가책의 시간이 가 까워오고 있다. 이 시간은 또한 위대한 冷笑主義 c yni sme 의 시간일 것이 다. 〈 자기의 내면 생활에서 억제되어, 두려워 자기 개인 속으로만 후퇴 한 동물-인간의 다시 돌아온 저 잔인성 ;국가 속에 갇혀 길들여질 수밖 에 ••• ….>
8 문명자본주의기계 탈토지화의 최초의 큰 운동은 전제군주국가의 초규준화와 함께 나타났 다. 그러나 이 운동은 다른 큰 운동, 즉 흐름들의 탈규준화를 통해서 일 어나려 하고 있던 운동에 비하면,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절단이 사회체를 횡단하고 변형시키는 데에는, 죽 자본주의가 탄생하는 데에는 흐름들이 탈규준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탈규준화한 흐 름들은 잠재상태의 전제군주 국가를 때리고, 폭군을 水沒시키지만, 또한 뜻밖의 형태로 폭군을 再來시킨다_―폭군을 민주화하고, 霧頭制ft하고, 선분화하고, 군주제화하고서, 또 그 멸망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는 잠재적 인 원국가를 지평선에 바라보면서 항상 폭군을 내면화하고 정신화하고 서. 이제 국가는, 잘하건 잘못하건, 규칙적인 혹은 예의적인 조작들에 의 하여 탈규준화한 흐름들의 산물을 재규준화한다. 로마를 예로 들어보자: 재산의 사유화에 의한 부동산의 흐름들의 탈규준화, 큰 재산들의 형성에 의한 돈의 흐름들의 털규준화, 상품 생산의 발전에 의한 상업의 흐름들 의 탈규준화, 재산상실과 프롤레타리아화에 의한 생산자들의 털규준화, 이 모든 것이 거기에 있고, 다 갖추어져 있으나, 본래의 의미에서의 자본 주의를 낳지 않고 오히려 노예제도를 낳고 있다 .73) 혹은 봉건제를 예로 들어보자: 여기서도 사유재산, 상품 생산, 돈이 많이 모여든 일, 시장의 확장, 도시들의 발전, 領主에게 돈으로 地代룰 바치는 일이나 契約勞貨의 출현은 자본주의 경제를 전혀 낳지 않고, 오히려 봉건적인 부담과 관계 73) Marx, Repo nse ii Mi lk hail o uski, nov. 1877, Pleia d e, II, p. 1555.
롤 강화하여, 때로는 봉건제의 더 원시적인 단계에로 되돌아가게 하고, 때로는 일종의 노예제도를 재건하기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길드들과 단체들에 유리한 독점행위는 자본주의적 생산 울 발전시키지는 못하고, 도리어 도시와 국가의 봉건제 속에 부르주아 계급을 끼여들게 하고 있다. 이 봉건제는 탈규준화한 흐름들 자체에 대 하여 규준들을 다시 만들고, 마르크스의 정식을 따르면, 사회기계의 낡은 충만한 신체의 〈氣 孔둘 자체 속에 〉 상인을 꽉 붙들어두는 것이다. 그러 므로 자본주의가 봉건체계를 해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봉건체 계의 해체가 자본주의를 생기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데에는 시간 이 필요했다. 이 점에서 전제군주 시대와 자본주의 시대 사이에는 큰 차 이가 있다. 왜냐하면 국가의 창설자들은 번개같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전제군주기계는 共時的인데, 자본주의기계는 通時的이다; 자본가들은 이 를테면 역사를 창조적으로 구축해 가는 과정 속에서 번갈아 등장하는데, 이것은 이상야릇한 구경거리이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적 절단의 정신분 열적 시대이다 . 봉건체계들의 해체는 흐름들의 단순한 탈규준화에 의하여 명확해지는 데, 이 해체들은 국가가 살아남거나 변형됨으로써 언제나 메워진다. 죽음 이 안으로부터 나타나고, 또 욕망 자체가 죽음의 본능, 죽 잠재성임이 느 껴지지만, 또한 이 욕망 자체가 실질적으로는 새로운 생명을 지니고 있 는 흐름들 쪽으로 옮아가고 있다는 것도 느껴진다. 탈규준화한 흐름들, 누가 이 새로운 욕망에 이름을 붙일 것인가? 팔리는 재산들의 흐름, 유 통되는 돈의 흐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준비되는 생산과 생산수단들의 흐름, 탈토지화하는 노동자들의 흐름: 자본주의가 탄생하는 데에는 이 탈규준화한 흐름들이 모두 만나고 連接되고, 서로 반작용하되, 이 만남, 이 연접, 이 반작용이 동시에 일어나야 할 것이다. 또 낡은 체계가 이번 에는 밖으로부터 오는 힘 때문에 죽고, 동시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며, 욕망이 그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는 데에는 위에 말한 흐름들의 만남이 필요할 것이다. 세계사는 우연의 역사요, 이 밖에 다론 역사는 없다. 현 대의 역사가들은 〈왜 중국이 아니고, 유럽이냐?〉 히는 물음을 제기할 줄
안다. 매우 우연한 일에 관한 이 물음에 되돌아가 보자• 遠洋航海에 관하 여 브로델 Braudel 은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왜 중국이나 일본의 배가 아니냐, 혹은 회교도의 배도 아니냐? 왜 船員 신밧드는 아니냐? 결여되 어 있는 것은 기술이 아니다. 기술기계가 아니다. 도리어 욕망이 전제군 주 국가의 올가미에 걸려들어, 전적으로 전제군주의 기계 속에서 공급되 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서양의 장점은 아시아의 좁은 禪에 가로막 혀, 넓은 세계가 필요하여, 자기의 울타리 밖으로 나갈 필요가 있었던 것 일까?〉 74) 정신분열증적인 항해 이의의 다른 항해는 없다. (좀더 뒤에는, 미국의 프론티어의 意味가 이런 것이다. 죽, 넘어설 어떤 것, 돌파해야 할 境界線들, 통과시켜야 할 흐름들, 침입해 들어가야 할 규준화되지 않 은 地帶들.) 탈규준화한 욕망들, 탈규준화에 대한 욕망은 언제나 있었고, 역사는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탈규준화한 흐름들이 하나의 욕망, 즉 그저 꿈꾸거나 결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욕망하는 기계, 사회기 계, 기술기계를 동시에 생산하는 욕망을 형성하는· 것은 그 흐름들이 한 곳에서 만나고 시간을 들여 한 장소에서 연접함으로써만이다. 이런 까닭 에 자본주의와 그 절단이 명확하게 되는 것은 흐름들이 그저 탈규준화함 으로써만이 아니고, 흐름들이 전반적으로 탈규준화하고, 새로운 탈토지화 가 크게 행해지고, 탈토지화한 흐름들이 연접됨으로써이다. 자본주의를 보편적이게끔 한 것은 이 연접의 특이성이다. 크게 단순화하여 말하면, 야생의 토지기계는 생산의 연결들로부터 출발했고, 야만스런 전제군주 기계는 뛰어난 통일체에 입각한 등기의 이점들을 근거로 하여 확립되었 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문명기계인 자본주의기계는 무엇보다도 먼저 연접 위에 세워진다. 이때 이 연접이 생기게 하는 것은 더 이상 규준화 롤 벗어나는 잔여물들도 아니요, 원시적 축제에서와 같은 消盡하는 소비 도 아니며, 혹은 전제군주와 그 대리인들의 사치스러운 〈최대한의 소비〉 도 아니다. 이 연접이 사회기계의 으뜸가는 지위로 옮아가면, 오히려 그 것이 한 계급의 향락과 지나친 소비에 결부되기를 그치며, 사치 자체를 74) Fernand Braudel, Ciu i l is a ti on ma ter ie ll e et capi tal ism e, I, Armand-C oli n, 1967, p. 313.
두자의 한 수단으로 삼고, 탈규준화한 모든 흐름을 생산에 포개어, 〈생 산을 위한 생산〉을 생기게 한다. 이 생산을 위한 생산은 노동의 원시적 연결둘을 탈토지화한 새로운 충만한 신체인 자본에 결부시키는 조건 아 래 이 연결들을 되찾는다• 이 조건은 유일의 조건이다. 생산울 위한 생산 은 전정한 소비자인데, 이 소비자로부터 노동의 원시적 연결둘이 생기는 듯싶다. (이것은 마치 마르크스가 묘사한 〈産業宮官〉의 악마의 계약에서 와 같은 일이다. 이 官官은 〈만일 네가 원한다면, 그러면 네가 가져라〉라 고 말하고 있다 .)75)
75) Marx, Economi e et p h il os op h ie , 1844, Pleia d e, II, p. 92.
『자본론』의 핵심부분에서 마르크스는 두 〈주요한〉 요소들의 만남을 밝히고 있다: 한편에는 탈토지화한 노동자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탈규 준화한 돈이 있다. 이 노동지는 자기의 노동력밖에는 팔 것이 없는 자유 로운 벌거숭이 노동자가 된다. 한편 돈은 자본이 되어 노동력을 살 수 있다. 이 두 요소는 봉건제 속에서 전제군주 국가가 선분화하고, 봉건체 계 자체와 그 국가가 붕괴됨으로써 생기는데, 이렇게 되어도, 이 두 흐 름, 죽 노동자들의 흐름과 돈의 흐름이 아직은 의적으로 연접되지는 않 는다. 자유노동자들과 돈-자본은 〈실질적으로〉 따로따로 떨어져 존재하 면서, 이 양자의 만남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두 요소의 하나는 낡은 社會身體를 구성하는 農地構造의 변모에 의존하고, 다른 하 나는 이 낡은 사회신체의 氣孔들 속에 蘭外的으로 존재하는 것 감은 상 인과 고리대금업자를 경유하는 전혀 다른 계열에 의존한다 .76) 뿐만 아니
76) Cf. le commenta ire de Balib a r, in Alth usser et Coll., Lir e le Cap tial, p. 288: 〈일단 구성된 자본주의 구조가 가지고 있는 統―선옷· 그 이전의 시대 로 거슬러 올라가 다시 찾아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들의 連接의 결과에 입각하여 그것들의 身元이 확인되는 요소들과 그 한복판에서 이 요소들의 고유 한 역사를 생각해야 할 역사의 터전의 만남이 생겨나야 하고, 또 엄밀하게 생각 (되어야 한다). 이 역사의 터전은 그 개념에 있어서 이 요소들의 연집의 결과와 는 아무 관계도 없다. 왜냐하면 이 결과는 다른 생산양식의 구조에 의하여 규정 되기 때문이다. 선행하는 생산양식에 의하여 구성된 이 역사의 터전에서는 이 요소들기 계보는 가지고 있으나 바로 橘外的인 상황, 즉 결정하는 힘이 없는 상 황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다.〉
라, 이 두 요소는 각각 서로 아주 다른 털규준화와 탈토지화의 많은 과 정을 진행시킨다: 자유노동자에게 있어서는, 私企業 {k 에 의한 토양의 탈 토지화: 사유에 의한 생산용구들의 탈규준화: 가족과 협동조합의 해체에 의한 소바재의 상실 : 끝으로 노동 자체나 기계에 도움이 되는 노동자의 탈규준화가 진행된다-그리고, 지본에 있어서는, 돈의 추싱에 의한 부 의 탈토지화, 상업자본에 의한 생산의 흐름들의 탈규준화, 금융지본괴- 공 공의 부채에 의한 국가들의 탈규준화, 산업자본의 형성에 의한 생산수단 들의 탈규준화 등이 진행된다. 이 두 요소가 어떻게 새로 만나고 그 모 든 과정을 연접시키는가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이제 시대는 더 이상 잔인성의 시대가 아니고, 냉소주의의 시대요, 이 시대에는 이상 야릇한 敬炭울 수반하고 있다. (냉소주의와 경전은 휴머니즘을 구성한 다: 냉소주의는 사회 터전에 지연적으로 내재하며, 경건은 원국가를 精 神{t하여 유지한다; 냉소주의는 刺餘勞動울 수탈하는 수단으로서의 지본 이지만, 경건은 모든 노동력이 거기서 흘러나오는 듯싶은 神 - 貸本으로서 의 자본이다.) 이 냉소주의 시대는 자본 축적의 시대이다. 이 시대는 탈 규준화하고 탈토지화한 모든 흐름들을 연접시키기 위하여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모리스 돕 Maur i ce Dobb 이 밝힌 바와 같이, 이 시대에는 두 시기가 있다: 처음의 시기에는 財貨가 그다지 비싸지 않아 그것을 모 으는 것이 유리한 때에 재산, 가령 토지의 權利證 書 를 축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봉건체계의 붕괴); 둘째 시기에는 이 재화의 값이 크게 올라·, 여 러 가지 조건들 아래 비싸게 팔려 산업투자를 유리하게 한다. ( 〈 價格革 命〉, 풍부한 일손의 확보, 프롤레타리아의 형성, 原料에로의 쉬운 接近, 도구와 기계들의 생산에 유리한 조건들이 그런 조건들이다 .)77) 온갖 우 연한 요인들이 이 연접둘을 돕는다. 얼마나 많은 만남들이 이 사태를 형 성케 하는 것일까! 그런데 이러한 연점의 효과는 자본에 의한 생산의 통 제가 더욱더 깊은 충에까지 미치는 점이다: 자본주의나 자본주의에 의한 절단, 달규준화하고 탈토지화한 모든 흐름의 연접은, 다른 흐름들 중의 한 흐름이요, 다른 요소들 중의 한 요소인 상업자본에 의해서도 또 금융 77) Mauric e Dobb, Etu d es sur le deuelop pe ment du cap ital is m e, pp. 189-199.
자본에 의해서도 명확하게 되지 않고, 상업자본에 의하여 명확하게 된다. 아마 상인은 상업을 기반으로 하는 직종들에서 자기자신을 산업가가 되 게 하거나, 혹은 장인들을 자기의 고유한 중매인 혹은 고용인이 되게 함 으로써 아주 일찍부터 생산에 대하여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길드들과 濁占들에 대한 두쟁). 그러나 자본주의가 시작되고 자본주의기계가 조립되 는 것은, 자본주의가 직접 생산울 제 것으로 만들고, 금융자본과 상업자 본이 자본주의의 일반적 생산양식에 있어서 분업에 대응하는· 특수한 기 능들밖에 수행하지 않는 때의 일이다. 이때 생산들의 생산, 등록들의 생 산, 소비들의 생산을 다시 볼 수 있다-그런데 이런 일들은 바로 탈규 준화한 흐름들의 연접에서 일어난다. 이 연접은 자본을 새로운 사회적인 충만한 신체가 되게 한다. 한편, 상업적 및 금융적 자본주의는 그 원시적 형태들에 있어서는 오직 낡은 사회체의 氣 孔둘 속에만 자리잡고 있었으 며 이 사회체의 예전의 생산양직을 변화시키지는 못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생산기계가 조립되기 전에도、 상품과 돈은 추상에 의하여 흐름들의 탈규준화를 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와 갇은 방식 으로 행해지지는 않는다. 먼저, 단순교환은 시장제품들을 추상적인 노동 단위의 특정한 定 量 으로서 등기한다. 교환관계 속에 설정된 추상적 노동 이야말로 상품의 의견상의 운동의 이접적 종합을 형성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일정한 정량에 대응하는 질적 노동들로 분할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 一般的等價物 〉 이 돈으로 나타날 때에만 사람들은 抽象量의 지 배 아래 들어간다. 이 추상량은 온갖 특정한 가치를 지닐 수 있고 혹은 온갖 정량의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이 추싱랑은 온갖 특정한 가치를 지 니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그것은 역시 정량들 간의 크기의 비 례로서만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교환관계는 이 교환관계와는 관계 없 이 독립해서 생산되고 심지어 등기되기까지 한 부분적 대상들을 정식으 로 결합시킨다. 특수한 생산양식 아래 고찰되는 사회체, 즉 추상적 노동 울 알지 못하며 또 인정하지도 않는 사회체가 미리 해두어야 할 등기들 의 성격과 양식에 따라서는, 상업등기와 돈의 등기는 초규준화된 채로 있고, 또 심지어 억제되기도 한다.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추상적 노동은 생산활동의 가장 단순하고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 그것은 근대자본주의기계 속에서만 그런 것으로 나타나며 또 실제로 현존하게 된다 •18) 이런 까닭에, 돈의 상업등기는 전작부터 하나의 고유한 신체를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기존의 사회 신체의 틈바구니들 속에 끼여들 어 갈 따름이다. 상인은 토지를 간직해 두었다가 물가가 쌀 때 사들이고 물가가 비쌀 때 파는 토지 두기를 그치지 않는다. 자본주의기계 이전에 는, 상업자본이나 금융자본은 자본주의적인 것이 아닌 생산과 결연관계 를 가질 뿐이다. 그것들은 前資本主義的인 국가들의 특칭을 이루는 새로 운 결연에 들어간다. (여기서 상인 및 은행가의 부르주아 계급과 封建制 와의 결연이 생긴다.) 요컨대, 자본주의기계는 자본이 결연자본이기를 그 치고 부자관계자본이 될 때 시작된다. 자본은 돈이 돈을 낳고 가치가 잉 여가치를 낳을 때 부자관계의 자본이 된다. 이 가치는 〈增進하는 가치요, 항상 發茅하며 성장하는 돈이요, 그런 것으로서 자본이다……. 이 가치는 그 자신 움직이는 실체로서 갑자기 나타나며, 이 실체에 대하여 성품과 돈은 한갓 순수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가치는 자기 속에서 그 原 價値와 그 잉여가치를 구별한다. 이것은 마치 신이 그 位格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하되 이 양자가 일체를 이루며 갇은 연령인 것과 같다. 왜냐 하면 처음에 꾸어준 100 파운드는 10 파운드의 잉여가치에 의해서만 자 본이 되기 때문이다〉 .79) 오직 이 조건들 아래에서만 자본이 충만한 신체, 죽 새로운 사회체 혹은 모든 생산력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準原因이 된 다. 우리는 더 이상 정량이나 추상량의 영역 속에 있지 않다. 그렇지 않 고 연집인 한에서의 微分의 比의 영역 안에 있다. 이 미분의 비는 자본 주의에 고유한 내재적인 사회 터전을 규정하고 추상 자체에 실제로 구체 적인 가치와 그 구체화의 경향을 주는 것이다. 이 추상은 추싱이기를 그 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독립해 있는 항들 간의 가변적인 비로 서의 단순한 양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항들 간의 질이요 비둘 78) Marx, Intr od ucti on gen erale a la criti qu e de l'ec onomi e po liti qu e, Pleia d e, I, p. 259. 79) Marx, Le Ca pital , I, 2, ch. 4, Pleia d e, I, p. 701 .
의 양으로서 독립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추상적인 것은 스스로 더 복 잡한 관계를 정립하고 이 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어떤 것 〈 으로서 〉 자기 롤 발전시키게 된다. 그 복잡한 관계란 微分의 比 D y /DxO] 다. 이 미분 의 비에 있어서 D 0,:큰 노동력에서 유래하여 가변적 자본의 유동을 구성 하며, Dx 는 자본 자체에서 유래하여 불변히는 지본의 유동을 구성한다. (〈不變資本이란 槪念은 그 구성 부분들의 가치의 변회를 어떤 모로든 배 제하지 않는다. 〉 ) 탈규준화한 흐름들의 유출, 이 흐름들의 연접에서, 자 본의 부자관계적 형식 인 x+dx7} 생간다. 이 미분의 비는 規準의 잉여가 치가 흐름의 잉여가치로 변형한 것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 변형은 자본주 의의 근본적 현싱이다. 여기서 낡은 규준들 대신에 수학적 표현을 빌린 것은 다른 종류의 기계가 아주 달리 작동할 수 있게끔 규준들과 지금까 지 존속해 온 토지의 개념이 파탄해 버린 사태에 우리가 직면하고 있음 을 의미할 따름이다. 이제 여기에는 더 이상 생명의 잔인성도 없고, 한 생명에 대한 다른 생명의 공포도 없다. 그렇지 않고 죽은 후에도 나타나 는 전제주의, 항문과 흡혈귀가 된 전제군주이다: 〈자본은 죽은 노동이 다. 이 죽은 노동은 흡혈귀를 닮아 산 노동의 피를 빨아먹어야만 생기를 얻는다. 그 생명은 산 노동에서 피를 더 많이 빨아올릴수록 더욱 활발하 다.〉 이리하여 산업자본은 자본주의기계를 구성하는 새롭고-새로운 부자 관계를 제공하며, 이 부자관계에 대하여 상업자본과 금융자본은 이제 특 수한 기능들을 맡고 새롭고-새로운 결연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利潤率의 傾向的 低下, 죽 자본 전체에 대한 잉여가치의 경향적 저하라 고 하는 유명한 문제는, 자본주의의 내재성의 터전 전체에서만, 또 규준 의 잉여가치가 흐름의 잉여가치로 변모하는 조건들 아래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먼저 분명히 (발리바르 Bal i bar 의 지적에 따르면) 이윤율이 저 하하는 경향은 끝나는 법이 없다. 도리어 이 경향에 반대되는 인자들을 재생산하면서 자기자신을 재생산한다. 그런데 왜 이 경향은 끝나는 법이 없는가? 아마 자본가들과 이들의 경제학자들이 잉여가치는 수학적으로 규정될 수 없음을 확인했을 때 이들을 웃게 하는 이유들과 똑같은 이유 들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좋아할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
다. 도리어 그들은 자기들이 숨기려 하는 것을 거기서 결론지어야 할 것 이다. 즉, 봉급생활자의 호주머니에 뚫어가는 돈과 기업의 장부 속에 등 기되는 돈은 같은 돈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야만 할 것이다. 한 쪽에는 교환가치에 무력한 통화기호들, 소비재와 사용가치에 대한 지불수단~의 흐름, 통화와 公定區域의 생산물 간의 일대일의 대응관계. ( 〈 내가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 나에게 귀속되는 것, 그러니까 그것은 내 것이다……. 〉 ) 다른 한 쪽에는 지본의 힘의 기호둘, 융자의 흐름들, 추상량의 公理系로 서 작동하는 生産微分係數 體系. 이 체계는 앞을 내다보는 힘, 즉 여기서 지금 실현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장기적 견적을 보여준다. 한 쪽에서는 돈이 소비의 흐름에 대해서 가능한 채취-절단을 나타내고; 다론 한 쪽 에서는 생산의 흐름이 자본의 이집들에 적응하는 방향에서 경제적 연쇄 둘이 이탈-절단하고 다시 분절되는 가능성을 나타낸다. 자본주의 체계에 있어서의 은행의 이원성은 지불수단의 조직체와 융자의 구조 사이에, 통 화관리와 자본주의적인 축적 및 융자 사이에, 교환통화와 신용통화 시이 에 존재하는데, 이 이원성의 중요성은 이미 지적된 바 있다 .80) 은행이 융 자와 지불의 두 가지 것에 참여하고, 이 양자의 접합점에 있다고 하는 것은 이 양자의 다양한 상호작용을 보여줄 따름이다. 그리하여, 상업상의 혹은 은행의 모든 채권을 포함하는 신용통화에 있어서는, 순전히 싱업상 의 신용은 지불수단으로서의 돈이 전개하는 단순한 순환 속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志虹月 B 이 정해져 있는 어음은 有限負債의 通貨形式울 이루 는 것이다.) 거꾸로, 은행의 신용은 통화의 非貨幣化나 非物質化를 조작하 고, 돈의 순환 대신에 어음의 순환에 근거를 두고, 독자적인 회로를 통과 한다. 이 회로에서 은행의 신용은 먼저 그 교환도구로서의 가치를 획득 하고 다음에 이 가치를 상실한다. 또 이 회로에서는 흐름의 조건들이 還 流의 조건들을 내포하며, 無限負債에다가 자본의 형태를 준다. 그런데 국 가는 조정자로서 이 신용통화가 원리적으로 현금과 바꿀 수 있는 것을 80) Suzanne de Brunhoff , L'Of fre de monnaie , cri tiqu e d'un concept , Mas- per o, 1971. Et La Monnaie chez Marx, Ed . Socia l es, 1967(cf. la crit iqu e des the ses de Hilfer din g , pp. 16 sq .).
보증한다. 칙접 금과 바꾸든가 혹은 간접적으로 중앙관리방식에 의하여 免換하는 것을 보증한다. 이 후자에는 신용의 보증인, 균등이율, 통일 자 본시장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불과 융자라고 하는 돈의 두 형 태, 죽 은행의 실제 업무의 두 양상의 이원성이 깊이 僞裝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런데 이 위장은 미처 알지 못한 데 의존한 다기보디는, 그것이 자본주의의 내재적 터전, 거기서 하위의 종속된 형태 가 다른 형태 못지않게 필요한 의견상의 객관적 운동을 표현하고 있는 데 의존한다• (돈은 두 場 面에서 노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의견 상의 객관적 운동에서는 이 免換가능성이라고 하는 아직 적용되지 않은 원리의 그림자가 없으면 피지배계급을 전체 속에 통합시키는 일은 전혀 생길 수 없다. 하지만 이 원리만 있으면 가장 불리하고 어려운 입장에 있는 피조물의 욕망이, 경제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건 가지고 있지 않 건, 이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전력을 다하여 자본~ 사회 터전 전체 롤 공급하기에 충분하다. 흐름들에 관해서 말하면, 누가 흐름들, 흐름들 간의 관계들, 그리고 흐름의 절단들을 욕밍하지 않겠는가__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던 돈의 이 조건들 아래 이 흐름들을 흐르게 하 고 절단할 줄을 알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그 본질이나 생산양식에 있어 서 산업적이라 함이 사실일전대, 그것은 시장의 자본주의로서만 작동한 다. 그것이 그 본질에 있어서 부자관계적인 산업자본이라 함이 사실일전 대, 그것은 상업자본 및 금융자본과의 결연을 통해서만 작동한다. 어느 모로는, 욕망의 체계와 공급 전체를 관리하고 있는 것은 은행이다 .8 1) 케 인즈 Ke y nes 가 공헌한 것들 중의 하나는 통화의 문제 속에 욕망을 다시 도입한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의 필요조건들로 들 81) Suzanne de Brunhoff , 위의 책, p. 124: 〈通貨 總 量 이란 개념 자체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서로 다른 통화들을 결부시키는 信用體系의 작용과 相關해서 만이다. 이런 체계가 없으면 支掃手段의 총체만이 있게 되는데, 이 수단들은 一 般 等價物의 사회적 성격을 가지게 되지 못할 것이요, 또 지방의 私的 回路들 에서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통화들이 等價的인 것으로. 되고 연집된 전체의 구성요소로 나타나는 것은 오직 중앙집권적 체계에서만이다〉(이 체계 속의 객관 적 위장에 관하여는, cf. pp. 110, 114) .
어야 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이 대부분 생산양 식의 고찰과 『자본론 』 의 처음 부분에 나타나는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통 화논리의 고찰에 머물고, 은행 업무, 금융조작 및 신용통화의 특수한 순 환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 중 요성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마르크스에게로 돌아가는, 즉 마르크스의 通貨理論에 돌아가는 방향이다.) 돈의 이원성, 두 개의 명세표, 두 가지 등기, 죽 봉급생활자의 가계 속 의 돈과 기업의 대차대조표 속의 돈에 되돌아가 보자. 이 두 질서에서의 크기를 동일한 분석의 단위로 재는 것은 순전히 하나의 허구요, 희극적 기만행위이다. 그것은 마치 은하계들 간의 혹은 원자들 간의 거리를 미 터나 센티미터로 재는 것과 같다. 기업들의 가치와 봉급생활자들의 노동 력의 가치 사이에는 공통의 척도가 전혀 없다. 이런 까닭에 傾向的 저하 에는 끝이 없다. 總生産高의 관점에서 생산의 흐름의 변화의 극한이 문제 라면 미분들의 商은 확실히 계산 가능한 것이지만, 생산의 흐름과 잉여 가치의 원천인 노동의 흐름이 문제라면 그 상의 계산은 불가능하다. 그 리하여 이 차이는 본성의 차이로서 이 차이를 구성하는 관계에서도 없어 지지 않는다. 그 〈경향〉에는 끝이 없다. 죽 그것이 도달할 수 있는 혹은 접근할 수 있는 의적 극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경향은 내적 극한만 을 가지고 있고, 끊임없이 이 극한울 넘어서는데, 그러나 이 극한을 옮겨 놓음으로써, 죽 이 극한울 재구성함으로써, 옮겨놓음에 의하여 다시 넘어 서야 할 극한으로서 재발견하면서 넘어선다. 그리하여 항상 옮겨놓아진 철단의, 이 절단의 속에서 죽 분단과 흐름이 이렇게 하나가 되는 중에, 자본주의의 진행의 연속성이 생긴다• 원국가가 물러가고 변형되는 중에 볼 수 있는 사회의 내재적인 터전이 끊임없이 ' 확대되고 아주 독특한 견 고성을 지니는 것은 이미 이러한 양상 아래에서이다. 이 견고성은, 일이 뒤틀려지는 조건 아래에서만 사태가 잘 돌아간다고 하는 일반적 원리를 자본주의가 그 나름대로 해석할 줄 알고 있었고, 위기를 〈자본주의적 생 산양식에 내재하는 수단〉으로 볼 줄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본주의 가 모든 사회의 의적 극한인 것은, 자본주의가 그 자신 의적 극한울 가
지고 있지 않고 다만 내적 극한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내적 극 한은 자본 자체이다. 자본주의는 이 내적 극한울 만나지 않으나, 그것을 항상 옮겨놓음으로써 재생산한다 .82) 장-조젭 구우J ean- J ose p h Goux 는 切線 없는 곡선의 수학적 현상과, 이 곡선이 경제학에서나 언어학에서도 지닐 수 있는 의미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다: 〈 만일 그 운동이 어떠한 극한에로도 향하지 않는다면, 만일 그 미분의 상이 계산할 수 없는 것이 라면, 현재란 이제 더 이상 아무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미분들 의 상은 수령하지 않으며, 차이둘은 미분들의 관계 속에서 없어지지 않 는다. 어떠한 극한도 듬바구니, 이 톰바구니의 툼바구니에 대립하지 않는 다. 이 경향에는 끝이 없다. 動體는 바로 뒤의 미래가 그에게 마련해 주 는 것의 끝에 절대로 이르지 못한다. 동체는 불의의 사건들과 逸脫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늦어진다……. 절대적인 뭄바구니 속에서 연속한다고 하는 복잡한 생각• 〉 83) 체계의 확대된 내재성 속에서, 극한은 그 처음의 敷地에서는 낮추려 했던 것을 그 옮겨놓음에서는 재구성하려 한다.
82) Marx, Le Cap ital, III, 3, conclusio n s : (.A~주의적 생산은 그것에 내재하 논 한계들을 끊임없이 넘어서려는 경향이 있지만, 자기 앞에 동일한 장벽둘을 또다시 더 큰 규모로 세워놓는다고 하는 수단을 사용함으로써만 넘어선다〉 (Pleia d e, II, p. 1032). 83) J ean 급Jo se p h Gou .x, Deriv a ble et ind eriv a ble, Criti qu e, jan vie r 1970, pp. 48-49.
그런데 이 옮겨놓음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의 탈토지화에 속한 다. 사미르 아민 Sam ir Ami n 이 밝힌 바와 같이, 탈토지화의 전행은 여 기서는 중심으로부터 주변에로 나아간다. 즉, 선진국들로부터 저개발국들 로 옮아간다. 저개발국들은 따로 떨어져서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지 않고, 세계자본주의기계의 본질적인 한 부품을 구성한다. 하지만 중심은 그 자 체 저개발의 조직된 지역들, 보호지구들 및 빈민가들을 내부의 주변들로 서 가지고 있음을 부언해야겠다. (삐에르 무사 P i erre Moussa 는 미국을 저 개발의 광대한 지역들을 보존하는 데 성공한 제 3 세계의 한 부분이라 규정한 바 있다.) 그리고 이윤율의 저하 혹은 평균화에로의 경향이 중심에서 적 어도 부분적으로 생겨, 이것이 경제를 가장 선전적이고 가장 자동화한
분야들에로 향하게 한다는 것이 사실일진대, 주변에서의 전정한 〈 저개발 의 개발〉은 중심의 프롤레타리아에 비하여 주변의 프롤레타리아를 크게 착취함으로써 잉여가치율을 높인다. 왜냐하면 주변으로부터의 수출이 무 엇보다도 전통적 분야들이나 구식의 토지들로부터 이루어진다고 생각하 는 것은 큰 잘못이겠기 때문이다: 그 수출들은 오히려 강력한 잉여가치 를 낳는 근대적 산업들과 대농장들로부터 이루어지며, 저개발국들에 자 본을 공급하는 것은 선전국들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 정반대이다. 원시적 축적이 자본주의의 여명기에 대번에 생기지 않고 줄곧 행해지고 끊임없 이 재생산된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자본주의는 부자관계의 자본을 수 출한다. 지본주의적 탈토지화가 중심으로부터 주변에로 행해짐과 동시에, 주변에서의 흐름들의 탈규준화는 〈脫分節化〉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 탈분절회는 전통적 분야들의 파멸, 의향적 경제회로들의 발전, 제 3 차 산 업의 특별한 비대, 생산성과 수입의 분배에 있어서의 극단적인 불평등을 반드시 생기게 한다 .84) 흐름의 이동마다 탈토지화요, 옮겨놓아전 국한마 다 탈규준화이다. 자본주의는 더욱더 주변에로 정신분열중화해 간다• 중 십에서는 경향적 저하가 한정된 방향을 지키고 있다, 죽 생산성, 자동화, 불변자본의 발전에 보증되어, 총자본에 대한 잉여가치의 상대적 감소의 방향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이 문제는 최근에 모리스 클라벨 Mauric e Clave! 이 일부러 문의한인 체하면서 내놓은 일련의 물음들에서 다시 제기되었다. 이 물음들은 다음 과 같은 점을 잘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에게 던전 형식을 취하고 있다: 기계들 역시 〈노동하고〉 혹은 가치를 생산하 며, 항상 노동해 왔고, 인간에 비하면 더욱더 많이 노동하고 있으니, 인 간은 생산의 전행의 구성부분이기를 그치고 이 진행에 그저 곁붙이기로 붙어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하면서, 어떻게 인간에 의한 잉여가치를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반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85) 그러므로 불변지본 84) Sa mir Am in, L'Accumulati on a l'echelle moru i.ial e, Anth rop o s, 1970, pp. 373 sq. 85) Mauric e Clavel, Qu i est al i國, pp. 110-124, 320-327(cf. le gra nd chap itre de Marx, sur l' auto mati on , dans les Pri nc ip e s d'une criti qu e de
l'ec onomi e po li tiqu e, 1857-1858, Pleia d e, II, pp. 2W sq.
에 의하여 생산된 기계에 의한 잉여가치가 있다. 이 잉여가치는 자동화 및 생산성과 더불어 발전하며, 경향적 저하를 방해하는 요인둘(인간의 노 동을 착취하는 강도의 증대 , 불변자본의 요소들의 가격의 저하 등)에 의해 서는 설명될 수 없다 . 왜냐하면 이 요인들은 도리어 자동화와 생산성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쩔수없이 우리도 문의한으로서 말해야 되 겠지만, 이 문제들은 규준의 잉여가치가 흐름의 잉여가치로 변모하는 조 건들 아래서만 검토될 수 있을 성싶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본주의 이전 의 체제들을 규준의 잉여가치에 의하여 규정하고, 자본주의를 규준의 잉 여가치를 흐름의 잉여가치에로 변환시킨 보편적 탈규준화에 의하여 규정 한 한 , 우리는 사태를 총괄적으로 제시했으며, 또 마치 자본주의의 여명 기에는 사태가 대번에 결말이 나서 지본주의가 규준의 모든 가치를 상실 한 듯이 논하여 왔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 한편으로는, 규준들이 옛것이란 명목으로 존속하고 있지만, 인물이 된 자본(자본가, 노동자, 도 매상인, 은행가……) 속에서 완전히 실제적이고 상황에 적응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 그러나 ,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고 더 깊은 데서는, 모든 기술기계는 특수한 형의 흐름둘, 즉 규준의 흐름들을 전제한다. 이 흐름 들은 기계의 내부와 의부에서 동시에 흐르며, 공학 및 심지어 과학의 요 소들을 이룬다.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들에서는 이 규준의 흐름들 역시 카스트화되고, 규준화되거나 초규준화되어, 결코 독립성을 획득하지 못하 고 있다(대장장이, 천문학자 ... …). 그러나 자본주의에서의 흐름들의 보편 적 탈규준화는 다른 흐름들과 같은 명목으로 규준의 흐름들을 해방하고 탈토지화하고 탈규준화하였다一―그래서 자동기계는 힘들의 장으로서의 그의 신체나 구조 속에서 항상 흐름들을 내재화하고, 동시에 과학과 공 학에, 죽 노동자의 육체노동과 구별되는 소위 두뇌노동에 의존하기에 이 르렀다(技術對象의 進化).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를 만든 것은 기계들 이 아니라, 반대로 지본주의가 기계들을 만들고 끊임없이 새로운 철단들 울 도입한다. 이 철단들을 통하여 자본주의는 생산의 기술적 양식을 혁 신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수정해야 되겠다. 왜냐하면 이 절단들은 시간을 요하고 또 넓은 범위에 걸쳐 행해지기 때문이다. 통시적인 자본 주의기계가 하나의 혹은 몇 개의 공시적인 기술기계에 의하여 그 자신이 혁신되는 일은 절대로 없고, 또 그 이전의 체제들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 던 독립을 그 학자들과 기술자들에게 주는 일도 절대로 없다. 아마 그것 은 학자들 가령 수학자들을 그들의 분야에서 〈정신분열중화〉하고, 사회 적으로 탈규준화한 규준의 흐름들을 통과시켜 이 학지들이 소위 기본적 인 연구의 공리계들을 조직하게는 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공리계는 거 기에 없다• (어느 점까지는 학자들을 가만히 놓아두고, 그들의 공리계를 그들 나름으로 만들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중대한 사태가 벌어지는 순간 이 온다. 가령 非決定論的 物理學이, 徵粒子들의 흐름들에 관해서는, 〈決 定論〉과 和解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정한 공리계는 사회기계 자체의 공리계이다. 이 공리계는 낡은 규준화들을 대신하고, 또 탈규준화한 모든 흐름을 조직한다. 여기에는 과학과 기술의 규준의 흐름도 포함된다. 이렇 게 조직함으로써 자본주의 체계의 이익을 도모하고 그 목적들에 봉사한 다. 이런 까닭에 산업혁명은 기계와 과학에 대하여 상당히 불신하면서도 높은 수준의 기술의 전보와 〈廢物化한〉 대량의 원료의 보유를 결부시켰 다고 자주 지적되었다. 혁신은 그 두자가 생산비를 줄임으로써 얼마나 이윤을 울리는가 하는 관점에서만 채택된다; 이윤율이 크지 않으면, 자 본주의는 현재 있는 장비를 그대로 두고, 이와 동시에 디른 영역의 장비 에 두자한다 .86) 그러므로 인간에 의한 잉여가치는 중심에서도 또 고도로 산업화된 분야들에서도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기계에 의한 잉여가 치로 말미암는 가격의 저하와 이윤율의 상승을 규정하는 것은 혁신 자체 가 아니다. 혁신 자체의 가치는 인간에 의한 잉여가치와 마찬가지로 측 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따로 떼어 고찰된 기술의 수익성도 아니다. 그렇지 않고 그것은 시장과의 관계 및 상업 금융자본과의 관계 속에서 그것이 기업의 전체적 수익성에 끼치는 효과이다. 이런 효과가 생기려 86) Paul Baran et Paul Sweezy, Le Cap ital ism e monop o lis t e, 1966, tr. fr. Masp e ro, pp. 96-98 .
면, 가령 l 양 1] 기 초부터 증기기계가 직물기계 혹은 철의 생산기술과 결 부된 것에서 보는 바와 갇이, 이런 기계들이 통시적으로 만나고 재절단 되는 것이 전제된다. 일반적으로 혁신의 도입은, 언제나, 시장을 예견하 여 대규모로 개발할 만하다고 인정될 때까지, 과학적으로- 필요한 시간을 넘겨 늦추어지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도, 結緣資本이 산업자본에서의 기 계의 혁신들의 선택에 대하여 강력한 압력을 가한다. 요컨대, 흐름들이 탈규준화한 곳에서는, 공학적이고 과학적인 형식을 취한 규준의 특수한 흐름들은 바로 사회적인 공리계에 종속한다. 이 사회적 공리계는 모든 과학적 공리계보다도, 또 모든 낡은 규준들이나 사라전 초규준화들보다 도 훨씬 더 엄혹하다: 이 사회적 공리계는 세계 자본주의 시장의 공리계 이다. 요컨대, 자본주의 체제에 의하여 〈해방〉된 과학과 기술의 규준의 흐름들이 기계에 의한 잉여가치를 낳는데, 이 잉여가치는 과학과 기술에 직접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존하는 것이요, 또 인간에 의한 잉 여가치에 덧붙여져서, 이 잉여가치의 상대적 저하를 수정하게 된다. 그리 하여 이 (기계에 의한 잉여가치와 인간에 의한 잉여가치의) 양자가 이 체계의 특징을 이루는 흐름의 잉여가치 전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지식, 정 보, 자격을 부여하게 되는 교육은 노동자의 가장 기본적인 노동 못지않 게 자본의 부분(〈知識資本〉)이다. 탈규준화한 흐름들로부터 결과하는 한 에 있어서의 인간에 의한 잉여가치의 측면에서, 우리는 육체 노동과 자 본 사이에, 혹은 돈의 두 가지 형태 사이에, 不可通約性, 죽 기본적인 非 對稱을 발견한 바 있는데(아무런 外的 限界도 지정할 수 없었다), 이와 마 찬가지로 여기서도, 과학과 기술의 규준의 흐름들로.부터 결과하는 기계 에 의한 잉여가치의 측면에서도, 우리는, 높은 보수를 받는다 하더라도, 과학적 혹은 기술적 노동과 디른 文書 ecrit ur e 속에 등기되는 자본의 이 윤 시이에 어떠한 통약성도 어떠한 의적 한계도 발견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지식의 흐름과 노동의 흐름은 자본주의적 탈규준화 혹은 탈토지 화에 의하여 결정된 동일한 상황 속에 있다. 그러나, 혁신은 그것이 생산비의 저하에 의하여 이윤을 증대시키는 한 에서만, 또 혁신을 정당화하는 고도의 생산수준이 존재하는 한에서만 받
아들여진다는 것이 참이라면, 여기서 나오는 귀결은, 혁신에 대한 두자가 위에 든 두 가지 경우의 어느 것에 의해서든 생산된 흐름의 잉여가치를 현실화하거나 흡수하는 데 절대로 충분치 않디는 것 이다 .87 ) 마르크스는 이 문제의 중요성을 잘 지적하였다: 자본주의의 줄곧 확대되는 円環은, 언제나 더 큰 규모로 그 내재적 극한들을 재생산하기 때문에, 잉여가치 가 그저 생산되거나 수탈될 뿐만 아니라, 또한 흡수되고 현실화되어야만, 완결된다 .88 ) 자본가가 享有에 의하여 규정될 수 없는 것은, 그의 목표가 잉여가치를 낳는 〈 생산을 위한 생산 〉 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이 잉 여가치의 현실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실화되지 않은 흐름의 잉여가 치는 생기지 않은 잉여가치나 마찬가지요, 조업 중지와 불황으로 나타난 다. 소비와 두자 이의에 잉여가치를 흡수하는 주요한 방식들을 드는 것 은 쉬운 일이다: 광고선전, 시민행정, 군국주의 및 제국주의가 그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국가의 역할은, 자본주의 공리계에 있어서, 그것이 홉수 하는 것이 기업들의 잉여가치에서 떼어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 잉 여가치에 보램을 주는 것으로 - 보인다. 이것은 지본주의 경제를 그 주어 전 한도들 안에서 최대한의 생산량에 접근시키고, 또 때가 오면 특히 사 기업과 전혀 경쟁하지 않는 군사비의 차원에서 이 한도들을 확대함으로 써 되는 일이다. (오직 전쟁만이 뉴 딜이 못해 낸 것을 해내는 데 성공 하였다.) 정치-군사-경제 복합체는 주변에서 또 중앙에 소속된 지역둘 에서 인간에 의한 잉여가치의 추출을 보증하지만, 또한 그 자체가 지식 과 정보의 자본 자원을 동원하여 기계에 의한 막대한 잉여가치를 낳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해서 생긴 잉여가치의 최대의 부분을 흡수하는데 이 럴수록 그것은 더욱 중요하다• 국가, 그 경찰 및 그 군대는 반생산의 거 대한 기업을 형성하지만, 생산 자체의 한복판에서 생산의 조건을 이룬다. 우리는 여기서 본래적인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터전의 새로운 규정을 발 견한다: 그것은 달규준화한 흐름들의 미분의 비와 미분 계수의 작용만도 87) 이 명제가 내포하는 債却이란 개념에 관해서는, cf. Paul Baran et Paul Sweezy, Le Cap ital ism e monop o lis te , pp. 100-104. 88) Marx, Le Cap ital, III, 3, conclusio n s, Pleia d e, II, p. 1026.
아니고, 자본주의의 극한들이 내적 극한인 한에서 줄곧 더 큰 규모로 재 생산된디는 것도 아니라, 생산 자체 속에 반생산이 현존한다는- 것이다. 이 반생산 장치는 이제 더 이상 생산에 대립하고 생산을 한정하거나 억 제하는 초월적인 결정기관이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생산하는 기계 속에 도처에서 끼여들어가, 이 기계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그 기계의 생산성을 조정하고 그 기계에 의한 잉여가치를 현실화한다. (여기서, 가령, 전제군 주의 官僚機構와 자본주의 관료기구 사이의 차이가 생긴다.) 반생산 장치 가 생기는 일은 자본주의 체계 전체의 특징이다; 자본주의가 전파된다는 것은 그 진행의 모든 단계에서 생산 속에 반생산이 생긴다는 것이다. 한 편으로는, 이 반생산의 출현만이 자본주의의 최고의 목표를 실현시켜 줄 수 있다. 이 최고의 목표란 큰 전체들 속에 결여를 만들어내고, 언제나 너무 많이 있는 곳에 결여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반생산이 과잉 자원을 흡수함으로써 되는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반생산의 현존만이 지본 및 지식의 흐름을, 자본 및 어리석은 짓과 同價인 흐름으로써 倍加 한다. 이 후자 역시 흡수와 현실화를 수행하여 집단들과 개인들을 체계 에 확실하게 통합시킨다. 과잉의 한가운데에 있는 결여만 아니라 지식과 과학 속의 어리석은 짓도 반생산에서 생긴다: 국가와 군대의 차원에서, 과학 및 기술의 가장 전보한 분이:들과 현실적 기능들을 가장 잘 떠맡고 있는 보잘것없는 구식 추종들이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가를 여기서 똑똑 히볼수있다. 앙드레 고르쯔 Andre Gorz 가 〈과학 기술 노동자〉를 묘사하고 있는 이중의 초상화는 의미가 심장하다. 이 노동자는 지식, 정보, 교육의 흐름 의 주인이지만, 자본 속에 너무나 잘 흡수되어 있어서, 조직되고 공리계 화한 어리석은 짓의 還流에 완전히 말려들어가 있다• 그래서 그는 저녁 이 되면 집에 돌아가 텔레비전의 채널을 이리저리 돌립으로써 자기의 작 은 욕망하는 기계들을 되찾는다. 오오 절망이여 .89) 물론, 학자는 학자인 한에서는 혁명적인 힘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통합기업에 통합 된 최초의 계원이요, 양심의 가책에서 도피한 자요, 자기의 창조성을 강 89) A. Gorz, Str a te g i e ouurie r e et neo-cap it따i sme, Ed. du Seui! , p. 57.
요에 의하여 파괴한 자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미국식이라 할, 급변하게 돌연변이하는 〈 경력 〉 의 훨씬 더 놀라운 예를 들어보자: 그레고리 베이 트슨 Gre gor y Ba t eso I?,은 인류학자가 되어 원시적 규준들과 야생의 흐름 둘을 따라, 문명세계로부터 도피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 그 다음에 그는 더욱더 탈규준화한 흐름들, 죽 정신분열증의 흐름들로- 향하여, 이것들로 부터 하나의 홍미 있는 정신의학 이론을- 끌어낸다; 더 나아가 그는 피안 울 탐구하고, 돌파할 다른 벽을 찾아 , 돌고래들, 돌고래들의 언어, 즉 더 욱 이상하고 더욱 탈토지화한 흐름들의 연구로 향한다. 그러나 돌고래의 흐름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우리를 전쟁 준비와 잉여가치의 흡수에로 몰아가는 미군의 기초적 연구들이 아니었던가? 자본주의 국가 에 비하면, 사회주의 국가들은 어린애들이다. (더 말한다면 국가의 공리 계화하는 역할에 관하여 그들의 아버지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운 어린애들 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들은, 직접 폭력을 쓰는 경우를 제의하고는, 흐름이 엉뚱한 데서 누출하는 것을 막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와 반대로 자본주의 체계의 復原力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그 공리계가 그 본성상 더 柔軟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공리계가 더 광범하고 더 포 괄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한 체계에서는 아무도 반생산의 활동에 결 부되지 않을 수 없다 . 이 활동이야말로 생산체계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 는 것이다. 〈군사장치를 움직이고 공급하는 사람들만이 반인간적 기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쓸데없는 재화와 서비스들(또 이것들에 대한 需要롤 창조하는 것)을 생산하는 수백만의 노동자들도, 정도는 갖가지로 다르지만, 똑걷이 이 반인간적 기업에 관여하고 있다. 경제의 갖가지 분 야와 부문은 아주 긴밀하게 상호 의존하고 있어서 거의 전세계가 혹은 이런 모로 혹은 저런 모로 반인간적 활동에 말려들어가 있다; 베트남 인 민과 싸우는 군대에 식료품을 공급하는 농부, 자동차의 새 모델을 창조 하는 데 필요한 복잡한 도구들을 만들어내는 제조업자들, 그 제품들이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부패하게 하는 종이, 잉크 혹은 텔레비전 수 상기들의 제조업자들, 이 밖에 수두룩한 것이 그렇다.〉 90) 그리하여 항상 90) Paul Baran et Paul Sweezy, 앞의 책 , p. 303.
확대하는 지본주의적 재생산의 세 선분들은 한데 묶여 円環울 이루는데, 이 선분들은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다음의 세 가지 양상을 무척 잘 규정 한다: 1) 노동의 탈규준화한 흐름과 생산의 탈규준화한 흐름의 미분의 비의 관계로부터 인간에 의한 잉여가치롤 끌어내고, 중심으로부터 주변 으로 옮겨가면서도 중심에 방대한 殘存地帶둘을 남겨두는 樣相; 2) 과학 및 기술의 규준의 흐름들의 공리계에 입각하여, 중심의 〈최첨단〉의 여러 곳에서, 기계에 의한 잉여가치룰 끌어내는 樣相; 3) 흐름의 잉여가치의 이 두 가지 형태의 출현을 보증하고, 생산장치 속에 끊임없이 반생산울 집어넣음으로써 이 두 가지 형태의 잉여가치를 흡수하고 현실화하는 양 상. 사람들은 주변에서 정신분열중화하거니와, 또한 이에 못지않게 중심 에서도 중간에서도 정신분열증화한다. 잉여가치의 정의는 가변자본의 인간에 의한 잉여가치와 구별되는 불변 자본의 기계에 의한 잉여가치, 그리고 흐름의 잉여가치 전체의 측정 불 가능한 성격을 따라서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잉여가치는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력에 의하여 창조되는 가치 사이의 차이에 의해서는 정의될 수 없다. 그렇지 않고 이 두 흐름이 서로 내재하면서도 通約될 수 없는 성격에 의하여, 이 두 흐름을 나타내는 돈의 두 양상 간의 부조화에 의 하여, 또 이 두 흐름의 비에 대해서 의적 극한이 부재한다는 것에 의하 여 정의될 수 있다. 한 쪽의 흐름은 진정한 경제력을 측정하는 것이요, 다른 한 쪽의 흐름은 〈수입〉으로서 규정된 구매력을 측정하는 것이다. 전자는 자본의 충만한 신체를 구성하는 탈토지화한 거대한 흐름이다. 베 르나르 슈미트 Bernard Sch mitt 같은 경제학자는 無限負債의 이 흐름을 특칭짓기 위하여 순식간의 창조적인 흐름이라고 하는 서정적인 묘한 말 을 생각해 내고 있다. 이 흐름은 은행들이 자기들 자신에 대한 부채로서 자발적으로 창조하는 것인데, 이 창조는 無로부터의 창조이다. 이 창조는 지불수단으로서 미리 준비된 통화를 이동시키는 대신에, 충만한 신체의 한 쪽 끝에 마이너스의 통화(은행의 債務로 등기된 부채 )를 파묻어놓고, 다른 한 쪽 끝에서는 플러스의 통화(은행이 보증하는 先탸鄧釋一 위한 信用 狀)를 내어놓는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돌연변이하는 힘을 지닌 흐름인
데 이 흐름은 收入 속에는 들어가지 않고 賜買에는 향하지 않는 흐름이다. 죽, 순수한 유동자금인바, 점유물도 아니고 부도 아니다 〉 . 91 ) 通貨의 다른 양상은 환류를 드러낸다 . 즉 통화가 노동자들이나 생산의 요인들에게 분 배되고 수입으로서 배분되어 구매력을 획득하자마자 재화와 가지게 되는 관계, 그리고 이 수임들이 실제의 재화에로 변환되자마자 재화와의 관계 를 상실하는 사태를 드러낸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은 새로운 생산으로 다시 시작하게 되는데 이 새로운 생산은 무엇보다도 먼저 통화의 첫째 양상 아래 생겨날 것이다…….) 그런데 흐름과 환류라고 하는 두 양상의 불가통약성은, 이름뿐인 봉급들이 국민의 수입 전체를 포괄한다 해도 소 용없고, 봉급생활자들은 수입의 큰 양이 기업들에 의하여 교묘하게 가로 채져서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볼 뿐임을 보여준다. 이 수임들은 연접에 의하여 하나의 합류, 죽 이 기회에 연속하는 것이 된 총체적 이익의 흐 름을 형성하고, 이 합류는 〈 단 한 번만 흘러 〉 , 그 할당은 갖가지로 다르 되 (利息 配當金 管理職 手當 生産財 腦入 등으로) 충만한 신체 위를 흐 르는 하나의 共有 量 울 구성한다 .9 2 ) 문의한인 관찰자는 이 경제적 도식 전 체, 이 역사 전체가 깊이 분열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모든 도덕적 관심을 스스로 금하는 이 이론의 목적은 분명하다. 〈 누가 도둑을 맞았는 가?〉란 물음은 년지시 암시된 중대한 문제요, 클라벨의 〈 누가 소외되어 있는가?〉란 아이러니컬한 물음에 메아리친다• 그런데 아무도 도둑을 맞 지 않았고 또 도둑 맞을 수도 없다 . (이것은 클라벨이 누가 소의되고 있 는지 또 누가 소의하는지 이제는 전혀 알 수 없다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 이다.) 누가 도둑질하는가? 확실히 순식간의 창조적인 큰 흐름의 대표자 로서의 금융자본가는 아니다. 이 큰 흐름은 점유물도 못 되고, 구매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 누가 도둑을 맞았는가? 확실히 노동자도 아니다. 노동 자는 돈을 주고 산 존재가 아니다. 노동자가 도둑 맞지 않은 것은 구매 력을 창조하는 것이 환류, 죽 임금으로의 분배이지, 환류가 구매력을 전 91 ) Bernard Scrunit t, Monnaie , salair e s et pro fi ts, P.U.F., 1966, pp. 234- 236. 92) 위의 책, p. 292.
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누가 도둑질할 수 있을 것인가? 확실히 이윤의 합류의 대표자로서의 산업자본가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윤둘은 환류 속 을 흐르지 않고, 수입을 창조하는 흐름과 나란히, 이 흐름으로부터 逸脫 하고 이 흐름을 裁可하지 않음으로써 흘러나온다〉. 자본주의의 공리계는 어찌 그리 유연한가. 자본주의는 그 고유한 한계들을 넓혀 그 이전의 砲 和된 체계에다가 새로운 공리를 추가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 여러분 은 봉급생활자들, 노동계급 그리고 노동조합을 위한 공리를 원하지요. 그 러면 잘 봅시다. 이제부터는 이윤이 임금 쪽으로 흐르고, 이 두 가지가 다 나란히 환류도 되고 합류도 될 거예요. 심지어 돌고래의 언어를 위한 공리조차 발견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그 자체의 냉소주의를 숨기지 않는 그 황금시대가 오리라고 자주 넌지시 말하곤 했다: 적어도 처음에는 자본주의가 자기가 하고 있는 일, 죽 잉여가치의 수탈을 모르 는 척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야, 아무도 도둑 맞고 있지 않 아〉라고 선언하게쯤 되면, 이 냉소주의는 얼마나 커진 것인가. 왜냐하면 이때에는 모든 것이 마치 이윤과 잉여가치가 생기는 측량할 수 없는 소 용돌이 속에 던져진 듯 두 종류의 흐름 간의 부조화에 근거하여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종류의 흐름의 하나는 시장자본의 경제력의 흐름 이요, 다른 하나는 조롱하노라고 〈구매력〉이라고 명명된 흐름이다. 이 후자는 그야말로 無力化된 흐름이요, 산업자본가에게 상대적으로 의존하 는 것으로서 봉급생활자의 절대적 무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에 있는 것은 통화와 시장인데, 이것들은 자본주의의 전정한 경찰이다. 마치 경제는, 공급과 수요를 따라 언제나 밖으로부터 통화를 불어넣어 야만 하는 것인양,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은 경제를 끊임없이 〈화폐화〉해 야 할 것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느 모로는 잘못이 아니다• 왜냐 하면 바로 이렇게 해서 체계 전체가 유지되고 隊動하며, 또 끊임없이 자 기자신의 내부를 충실하게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해서 체계 전체 가 욕망 공급의 전체적 대성이다. 임금노동자의 욕망, 자본가의 욕망, 이 것들은 모두 하나의 동일한 욕망으로 鼓動하고 있는데, 이 욕망은 外的 限界를 지정할 수 없는 흐름들의 微分의 比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여기서 자
본주의는 항상 확대되고 항상 더 포괄적으로 되는 규모로 자기의 內在的 限 界들을 재생산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것은 흐름 들의 일반적 이론의 차원에서이다: 어떻게 사람들은 힘을 욕망하면서 또 한 자기자신의 無力울 욕망하게 되는가? 어떻게 그러한 사회 터전이 욕 망에 의하여 공급될 수 있었는가? 또 흐름을 흐르게 할 것인가 절단할 것인가가 문제일 때, 욕망은 얼마나 소위 객관적 이해를 넘어서는가. 아 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속의 특수한 관계로서의 통화의 형성이 경제를 통화경제가 되게 히는 생산양식에 의존한디는· 것을 상기할 것이 다. 더 말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자본의 의견상의 객관적 운 동은, 결코 의식의 오해도 착각도 아니요, 자본주의의 생산의 본질이 그 자체 필연적으로 상품이나 통화의 형식으로만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형식은 자본주의의 생산의 본질을 지배하고, 이러한 형석의 흐름들과 이 흐름들 간의 관계들이 욕망의 공급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욕망의 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은 흐름들의 차원, 통화의 흐름들의 차원에서이지,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해결, 어떠한 혁명의 길이 있는가? 정신분석은 돈과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으면서도 이 문제 에 대해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정신분석은 스스로는 인정하기를 거 부하면서 사실은 경제적-금전적 의존의 체계 전체를 자기가 다루는 모든 환자의 욕망의 핵심에 등록하고 자기를 위해서는 잉여가치룰 흡수하는 거대한 기업을 조직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혁명의 길이 있는가? 혁명의 길이 하니라도 있는가-그것은, 사미르 아민이 제양]계의 나라들에게 충고하고 있는 것처럼, 세계시장에서 물러나, 파시스트적인 〈경제해결〉을 이상야릇하게 부활시키는 것인가? 혹은 이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 인가? 죽 시장의 운동, 탈규준화와 탈토지화의 운동을 더욱더 밀고 나아 가는 것인가? 왜냐하면 아마도 고도로 정신분열증적인 흐름들의 이론과 실천의 관점에서 보면, 흐름들은 아직 충분히 탈토지화되지도 않았고, 탈 규준화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전행에서 물러서지 않고, 더 앞으로 나아 가야 할 것이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진행을 가속화하는 것〉이 중요하 다: 사실,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9 자본주의의 표상 글 ecr it ure 은 결코 자본주의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본주의는 깊 이 文盲이다. 글의 죽음은 신이나 아버지의 죽음처럼, 이미 오래전에 있 었던 일이다. 하기는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도래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 이 걸리고, 또 사라전 기호들의 기억은 우리 속에 살아남아 있고 우리들 은 늘 이 기호들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기는 해도 말이다. 이렇게 된 이 유는 간단하다: 글은 언어 일반의 사용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용법을 따라 표기는 음성에 자기를 일치시키지만, 또한 음성을 초규준 화하고 시니피앙의 기능을 수행히는- 天上의 허구적 음성을 끌어낸다. 지 시된 것의 자의성, 시니피에의 종속, 전제군주 시니피앙의 초월성, 그리 고 끝으로 전제군주의 은퇴에 의하여 나타나게 되는 내재하는 터전에서 전제군주 시니피앙이 최소의 요소들에로 분해되는 것, 이 모든 것은 글 아 제국의 전제군주의 표상에 속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구텐 베르크 星雲〉이 폭발했디는 것이 알려질 때, 이것은 바로 무엇을 의미하 는가? 물론, 자본주의는 글을 많이 이용해 왔고, 또 지금도 이용하고 있 다; 글은 일반적 等價物인 通貨에 걸맞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자본 주의에서의 특수한 기능들은 글과 인쇄술을 經由해 왔고, 일부는 지금도 계속해서 이것들을 경유하고 있다. 글은 여전히 지본주의 속에서 舊式維 持의 역할을 전형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여기서 구텐베르크 인쇄술은 구 식유지에 실제적 기능을 부여하는 요소로 되어 있다. 그러나 직접적 형식 으로나 간접적 형식으로나 전제군주의 초규준화에 되돌려 보내지지 않고
흐름들의 일반적 탈규준화에 대응하는 표현의 기술적 수단들이 나타날 때에는, 언어의 자본주의적 사용은 당연히 하나의 디론 성질을 지녀야 하며, 자본주의 자체에 고유한 내재의 터전에서 실현되고 구체적인 것이 된다, 우리에게는 이런 것이 맥루한 McLuhan 의 분석들의 의미로 보인 다. 죽, 그는 흐름들을 속박하고 초규준화하는 시니피앙에 대항하는 것 으로서, 달규준화한 흐름들의 언어가 어떤 것인지를 밝혔다. 먼저 비시니 피앙적인 언어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좋다: 이 언어에서는 어떠한 음성, 문자, 몸짓 등의 흐름도 특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언어는 無定形의 연속체이므로 그 실질이나 그 소재에는 어디까지나 무관심하다; 電氣의 흐름도 임의의 어떤 흐름을 실현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 나 어떤 흐름이 다른 흐름과 관계를 가지게 될 때에는 실질이 형성되었 다고 말하게 된다. 이때 전자는 내용을” 규정하고, 후자는 표현을 규정한 다 .93) 내용과 표현의 탈토지화한 흐름들은 서로 연접 혹은 전제하는 상 태 속에 있고, 이 상태는 이 양자의 궁극의 통일체들인 形象둘을 구성한 댜 이 형상들은 결코 시니피앙이 아니요, 또 시니피앙의 최소의 요소들 인 기호도 아니다: 그것들은 비기호들이다, 혹은 차라리 비시니피양적인 기호들, 여러 차원의 기호-점들, 흐름의 절단들, 분열들이다. 이것들은 하나의 전체 속에 통합됨으로써 心像들을 형성하지만, 디~ 하나의 전체 에 대해서 하나의 전체로서의 자기동일성을 지니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형상들, 즉 분열들 혹은 흐름-절단들은 전혀 〈형식적인 것들〉이 아니 다; 그것들은 다른 배치를 위하여 무너지는 특수한 배치 속에서만 형상 적인 것이 된다. 텔레비전에 의하여 전달되는 매초 얏식만 개의 점 중 몇 개만이 기억에 남는다. 電子言語는 음성이나 글을 경유하지 않는다; 情報 93) Marshall Mac Luhan, Pour comp re ndre les media , 1964, tr. fr. Ed. du Seu il, p. 24: 〈電光은 순수한 정보이다. 사람들이 말에 의한 표명이나 선전을 한 자 한 자 읽기 위하여 이용하지 않는 한, 전광은 메시지 없는 媒體라 하겠다. 모든 매체의 특칭을 이루는 이 사실은, 한 매체의 내용은, 그것이 무엇이든 언제 나 하나의 다른 매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굴의 내용은 입으로 하는· 말이다. 이것은 글로 쓰인 낱말이 印副된 것의 내용이고, 인쇄된 것은 電信의 내용인 것 과똑갇다.〉
科學은 음성도 글도 없이 일을 해나간다; 이 학문은 噴出氣體로 작동하 는 神秘荒體라 이름 붙일 만하다; 컴퓨터는 순간적이고 보편적인 탈규준 화기계이다. 미셸 세르 Mi ch el Serres 는 이런 의미에서, 생산이 정보에 의하여 엄밀하게 규정되어 있는 곳에서, 언어의 새로운 기술기계들의 기 호들에서의 절단과 흐름이 어떻게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명확히께 밝히고 있다: 〈 도로의 입체교차점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그물처럼 되어 있는 공간의 정상적 차원을 따라, 다양한 走査作業에 의하여, 자기 가 받아들이는 흐름의 선들을 분석하는 하나의 점 같은 것이다. 입체교 차점에 있으면 어느 방향에서 들어왔건 어느 방향으로나 나갈 수 있고, 또 어느 지점에 있거나 다른 방향들의 어느 것과도 충돌하지 않는다. 설 사 내가 바란다 해도, 나는 절대로 갈은 지점에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같은 지점이라 해도 말이다……. 그것은 地勢의 매듭이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혼란 없이 연결되고, 모든 것이 합류하고 갈라전 다…… . 이것은 매듭이, 하나의 점이라면 점이지만, 많은 차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흐름들을 없애기는커녕 흐름들을 거두어들이고 통과시킨다 .94) 정보에 의한 생산의 이러한 바둑판 모양의 장치는 다시 한번 디움과 같은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자본주의의 생산적 본질은 시 장지본이나 시장의 공리계가 이 본질에 강요하는 언어로만 그 기능을 수 행하고 혹은 〈말한다 〉 •
94) Mi ch el Serres, Le Message r , Bulleti n de la Socie t e f ra n~is e de ph i- losop h ie , nov. 1967.
그러한 흐름의 언어학과 시니피앙의 언어학 사이에는 큰 차이가 몇 가 지 있다. 가령 소쉬르의 언어학은 〈 價値 〉 에 의하여, 즉 시니피앙의 궁극 적 요소들 간의 관계의 체계에 의하여 구성되는 내재의 터전을 잘 발견 하고 있다. 그러나, 전제군주가 은퇴해서이건 이 내재의 터전을 드러내는 것은 전제군주의 초월성이므로, 이 내재의 터전은 어디까지나 전제군주 의 초월성을 전제한다. 뿐만 아니라, 이 내재의 터전에 들어 있는 요소들 은 최소한도의 자기동일성을 기준으로서 가지고 있다. 이 자기동일성은 그 요소들이 대립관계에 있기 때문에 확보되는데, 그 요소들은 자기들에
게 영향을 주는 모든 型의 변화를 통하여 자기동일성을 지킨다. 뚜렷이 구별되는 단위들인 시니피앙의 요소들은 시니피앙이 초규준화하게 되 는 〈규준화된 벌어집들〉에 의하여 규제되고 있다. 여기서 갖가지로 다 르지만 한 군데로 收紋되는 다음과 같은 결과들이 생긴다: 언어를 놀이 와 비교하는 일, 시니피에가 본성상 시니피앙에 종속하는 시니피앙-시니 피에의 관계, 시니피앙 자신의 효과들로서 규정되는 형싱들-, 글 자체가 비밀의 특권을 준 音聲實體와의 관계에 의하여 규정되는 시니피앙의 형 식적 요소들. 이 모든 관점에서 볼 때, 겉으로는 몇 가지 점에서 그렇지 않을지 모르나, 옐름슬레우 H j elmslev 의 언어학은 소쉬르나 소쉬르 이후 의 기도와 깊이 대립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옐름슬레우의 언 어학은 특권적인 좌표를 모두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代數的인 순수한 내재의 터전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터전은 초 월적 결정기관이 설사 은퇴했다 해도 이런 것은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싱공을 날아다니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터전에서 形相과 실질의 흐름, 내용과 표현의 흐름을 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것은 시니피앙-시니피에의 종속관계를 표현-내용의 상호적 전제관계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二重分節이 더 이상 언어의 위계질서 지어전 두 차원 사이에서 행해지지 않고, 내용형식과 표현형식 사이의 관계에 의하여 구성된, 변환 가능한 탈토지화한 두 국면 사이에서 행해 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관계 속에서는 더 이상 시니피앙의 효 과들이 아니고 분열들, 기호-점들 혹은 흐름의 절단들인 形象들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것은 시니피앙의 벽을 뚫고, 이 벽을 지 나 피안에 이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기호들~ 탈토지화의 새로운 문 턱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형상들은 시니피앙 자체의 요소들 을 규정하고 있었던 최소한도의 자기동일성의 조전들을 결정적으로 상실 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요소들의 질서는 거기서 흐름들 및 형상들 의 공리계에 대해서 이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화폐의 모델은, 자기동일성을 잃은 기호-점이나 절단-형상에서, 이제는 浮動하는 자기동 일성만을 가지기 때문에, 놀이의 모델을 대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언어학에 있어서의 옐름슬레우의 매우 특수한 상황, 그리고 그가 일으키고 있는 반응은 다음과 갇은 것으로 설명된다고 우리들에게는 보 인다: 그는 순전히 내재적인 언어이론을 세우려 한다; 이 이론은 음성 표기 지배의 이중의 놀이를 깨부수고, 욕망의 흐름들을 따라 形相과 실 질, 내용과 표현을 흐르게 하고, 기호一압둘기나 분열-形象들에 따라 이 흐름들을 절단한다 .95) 옐름슬레우의 언어학은 구조주의의 그리고 시니피 앙에 대한 그 애착의 다원적 결정이기는커녕, 오히려 이런 것들을 신중 하게 파괴할 것을 지시하고, 언어들의 탈규준화한 이론을 구성한다. 이 이론에 대하여는 그것이 자본주의의 흐름과 정신분열증의 흐름의 본성에 동시에 적합한 유일의 이론이라 하여 兩義的 敬意를 표할 수 있다고 말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유일의 현대적인(구식이 아닌) 언어이론이다.
95) 예컨대 니콜라스 뤼베 Ni co las Ruwe t는, 옐름슬레우가 L. 캐롤의 『재버워키 J용a 될bb en수uo c 있ky을』 나 법조한이 스이 J론. 을Jo y만 e 팩들 어『내피고네 건있스다 웨고이 비크난 F한in다 n (egIa nn ts r oWdaukc tei o』n에 나a 적la gra mmair e gen erati ue , Plon, p. 54: 〈요소들의 질서〉에 대하여 무관심한 대 대 해서는, cf. p. 345) . 앙드레 마르띠네 Andre Mar ti ne t는 옐름슬레우의 이론 속 에는 자기동일성의 조건들이 결여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Au suje t des
리오따르 J. F. L y o t ard 의 최근의 저서가 극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시 니피앙에 대한 최초의 일반적 비판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가장 일반 적인 命題에서, 그는 시니피앙이 形象的 心像들에 의하여 밖울 향하여 극 복될 수 있고, 또 이 심성들을 구성하는 순수한 형상들, 좀더 정확히 말 하여 〈 移象形態 〉® oJ] 의하여 안을 향하여 극복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형상형태는 시니피앙의 규준화된 벌어집들을 뒤집어엎고, 이것들 가 운데 개입하여, 이 벌어집들의 요소들의 자기동일성의 조건들 밑에서 활 동한다. 언어와 글 자체에서, 때로는 문자들이 절단들로서, 죽 파편이 된 . 부분적 대상들로서, 때로는 낱말들이 公有의 흐름으로서, 죽 깅력한 가치 룰 지닌 분해할 수 없는 덩어리들 혹은 충만한 신체로서, 욕망의 질서에 응하는 비시니피앙적인 기호들, 죽 한숨, 외침 같은 것을 구성한다. (특
fon dements de la the or ie l in g uisti q u e de Louis Hj el msleu, 1946, reed. Paulet) . ® fi伊 ral.
히 손으로 쓴 글이나 인쇄된 글에 관한 形式的 硏究들은 文字의 성격이 나 낱말의 성질이 시니피앙에 봉사하는가, 혹은 반대로 이것들이 이 벽 을 넘어서서 흐름들을 흐르게 하고 절단들을 設立하는가에 따라 方向울 바꾼다. 문자나 낱말이 시니피앙에 봉사하는 경우, 이것들은 解釋의 규칙 둘을 따라 시니피앙의 효과들을 표현하며, 이 벽을 넘어서는 경우, 그 절 단들은 기호의 자기동일성의 조전들의 틀을 벗어나 이 조건들을 파괴한 다. 이 절단들은 〈 책 〉 속에 그 절단들의 數만큼의 책들을 흐르게 하고 폭발시켜 다양한 모습을 지니게 된다. 인쇄에서 말라르메 Mallarme 가 한 일들은 아미 이런 모습둘을 보여주고 있다-언제나 시니피앙의 밑으로 파고들어가 그 벽을 줄질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글의 죽음이 안으로부 터 둘이닥치는 限에 있어, 그 죽음이 無限함을 보여준다.) 이와 마찬가지 로, 조형예술에 있어서는, 능동적인 선과 다차원의 점에 의하여 형성되는 순수한 형상형태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동적인 선과 이 선이 낳는 표면에 의하여 형성되는 다양한 모습들이 있다• 이 모습들은, 파울 클레 Paul Klee 에게서 보는 바와 같이, 〈 아마 어린애들, 미친 사람들, 원시인 들만이 볼 수 있는 中間世界들〉을 開示하려는 것이다. 혹은 꿈에 있어서 는, 리오따르는 몇 페이지의 아주 아름다운 글에서, 거기서 일하고 있는 것이 시니피앙이 아니고 그 밀의 형상형태임을 밝히고 있다. 이 형상형 태는 십상 속에 여러 가지 모습들을 생기게 하는데, 아 모습둘은 언어학 적인 것이 아닌, 죽 시니피앙에도 이것에 규제되는 요소들에도 의존하지 않는 흐름들과 점들을 따라 낱말들을 사용하고 흐르게 하고 절단한다. 그러므로 리오따르는 어디서나 시니피앙과 형상의 순위를 뒤집어놓고 있 다. 형상들은 시니피앙과 그 효과들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 시니피앙의 連鎖가 형상형태의 효과들에 의존하고 있다. 그 자체 비시니피앙적인 기 호들로 되어 있는 시니피앙의 연쇄는 시니피양들이나 시니피에들이나 다 갇이 파괴하고, 낱말들을 물건들처럼 다루고, 새로운 통일체들을 만들어 내며, 형상적인 것이 아닌 형상들을 나타났다가는 없어지는 심상 속의 모습들이 되게 한다. 그래서 이 성좌들은 점들로 절단하려는 흐름들과 같고, 점들이 흐르게 하거나 새어나가게 하는 것을 유출시키려는 흐름들
과 같다: 자기동일성이 없는 유일의 통일체는 분열-흐름 혹은 흐름구설 단의 그것이다. 리오따르는 순수한 형상형태의 요소, 죽 〈 子宮-形象 〉 을 욕망이라고 잘 명명하고 있다. 이 욕망은 우리를 過程으로서의 정신분열 증의 문들로 인도한다 .96) 그러나 독자는 리오따르가 끊임없이 과정을 중 단시키고 그가 방금 떠나온 강변들, 죽 규준화되거나 초규준화된 토지들 에 분열둘을 다시 포캔다는 인성을 받는다: 이 강변둘이나 토지들은 분 열들이 고작해야 이차적인 〈 違反 〉 , 障홉 줍曲 같은 것들을 생기게 하는 장소들과 구조들이다; 여기서는 분열들이 구조들에 대립하는 욕망하는 기계들, 장소들에 대립하는 强度둘을 형성하여 앞으로 밀고 나아갈 수 없다. 이런 인상은 어디서 오는가? 이것은, 리오따르가 욕망을 근본적인 긍정에 결부시키려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욕망 속에 矢女 U 와 不在룰 다 시 끌어둘이고, 거세의 法과 함께 시니피앙 전체를 다시 모셔오는 冒險 울 무릅쓰고 욕망을 거세의 법 아래 두고 있으며, 형상의 자궁을 환상 속에서, 즉 욕망하는 생산을, 실제의 생산인 욕망 전체를 은폐하기 위하 여 생기는 단순한 환상 속에서 찾아내고 있는 데 말미암는다. 그러나 적 어도 한동안 시니피앙의 低當權은 없어전 셈이다: 이 거대한 전제군주의 복고주의는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을 신음하게 하고 굴복시키며, 다른 사람둘은 이 복고주의를 가지고서 하나의 새로운 데러리즘을 수립하여, 라깡의 帝王的인 言說울 순수한 과학성을 지닌 대학적 言說로 편향시킨 다. 바로 이 과학성은 우리들의 신경증에 다시 영양분을 주어, 다시 한번 과정을 속박하고, 거세에 의하여 오이디푸스를 초규준화한다. 그리하여 우리를 사라전 옛 전제군주의 오늘날의 구조적 기능들에 얽어맨다. 왜냐 하면, 확실히 자본주의도, 혁명도, 정신분열중도, 시니피앙의 길들을 밟 0} 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극단적인 폭력을 사용할 때에, 그리고 특히 이런 때에, 시니피앙의 길을 밟아가지는 않는다. 문명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있어서의 탈규준화와 탈토지화로써 규정된 다. 다음과 같은 일들은 이 보편적 달규준화를. 확실하게 해내는 데 도움 울 준다: 재화, 생산수단만 아니라 또한 〈私人〉 자신의 기관들에게까지 96) Jea n-F ran~ois Ly ot a r d, Di sc ours, figu re, p. 326.
영향을 주는 사기업화: 통화의 양만 아니라, 노동의 양의 추상화: 지본 과 노동력의 비, 또 융자의 흐름과 수입 죽 지불수단의 비의 무한정성 : 규준의 흐름들 자체가 취하는 과학기술적 형식 ; 식별할 수 있는 자기동 일성이 없는 선들과 점들로 이루어지는 부동히는 모습들의 형성. 최근의 통화의 역사에서 두드러진 현상은, 달러의 역할, 단기로 이동하는 자본 들, 통화의 변동, 융자와 신용의 새로운 수단들, 特別通貨發行權 위기와 투기의 새로운 형태들인데, 이것들은 탈규준화한 흐름들이 지나온 길의 標識가 된다. 우리들의 사회들은 모든 규준, 외국 규준들이나 이국적 규 준들에 대해서 강한 홍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홍미는 파괴적이고 죽음을 몰아오는 것이다. 탈규준화 decoder 한다는 것은, 으레 어떤 코드 (규준)를 이해하고 해석함을 의미하기는 해도, 오히려 더욱 코드를 코드 인 한 파괴하고, 코드에다가 고풍스런, 민속적인 혹은 殘海的인 역할을 할당하는 것이다. 이 역할이 우리의 현대사회들에서 정신분석과 인류학 을 두 개의 널리 사랑받는 학문이 되게 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흐 름들과 정신분열증의 흐름들을 욕망의 흐름들의 탈규준화란 일반적 주제 아래 동일시하는 것은 큰 잘못이겠다. 물론 이 양자의 친근성은 크다: 도처에서 자본주의는 정신분열증의 흐름들을· 흐르게 하는데, 이 흐름들· 은 의고하여 〈우리들의〉 환자들, 죽 정신분열자들을 우리들의 사회에 만 들어내지만, 이에 못지않게 〈우리들의〉 예술과 〈 우리들의〉 과학에 생기 를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정신분열증과 자본주의의 관계는 생활양식, 환경, 이데올로기 등의 문제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요, 오직 하나의 동일한 경제의 가장 깊은 치원에서, 오직 하나의 동일한 생 산과정의 차원에서 제기되어야 할 문제이다. 우리들의 사회는 돕 Dobb 의 샴푸나 르노 Renaul t의 자동차를 생산하듯, 정신분열자들을 생산하고 있 다. 오직 하나 다른 것은 정신분열자들을 팔 수 없는 점이다. 그런데 바 로 다음과 같은 것들은 어떻게 설명하면 좋은가? 마치 자본주의적 생산 이 정신분열증적 과정에서 안으로부터 둘이닥치는 자기자신의 죽음의 심 상을 본 듯, 자본주의적 생산이 끊임없이 정신분열증적 과정울 정지시키 고, 환자를 臨床實體로 감금하는 일. 자본주의적 생산이 말로만 아니라
실제로도 정신분열자를 병자로 취급하는 일 자본주의적 생산이 그의 狂 人둘을 자기자신의 영웅들, 자기자신의 성취로 보지 않고 오히려 감금하 는 일. 자본주의적 생산이 이들의 병을 더 이상 단순한 병으로 인정할 수 없을 때, 마치 그 예술가들과 또 그 학자들마저 시장의 법칙들에 의 하여 회수되거나 흡수되지 않는 한, 이들이 혁명을 일으킬 잠재력을 가 지고 그것에 대하여 위험천만한 흐름들을 흐르게 하는 모험을 감행하기 라도 하는 듯 그것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이들을 감시하는 일. 탈규준 화한 흐름들은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의 현실인데도, 이 흐름들에 대하여 억압-억제의 거대한 기계를 형성하는 일. 앞서 본 바와 갈이, 이것은 자 본주의가 디론 사회조직체들이 규준화하고 초규준화했던 흐름들을- 탈규 준화하는 한에서, 그야말로 사회 전체의 국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본· 주의는 사회 전체의 相對的 極限 혹은 相對的 切斷들이다. 왜냐하면 자본 주의는 규준둘을 극히 엄격한 공리계로써 대체하기 때문이다. 이 공리계 는 흐름들의 에네르기를 탈토지화한, 그러나 다른 사회체 전체만큼 혹은 그 이상 무자비한 사회체로서의 자본의 신체에 결부된 상태로 유지한다. 이와 반대로 정신분열증은 그야말로 절대적 극한이요, 흐름들을 脫社會化 한 기관들 없는 신체 위의 자유로운 상태에 이행시킨다• 그러므로 정신 분열증은 자본주의의 外的 극한 즉 가장 깊은 경향의 終着點이지만, 자본 주의는 이 경향을 억제하고, 혹은 이 극한을 밀어젖히고 옮겨놓는 조건 아래에서만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정신 분열증의 철대적 극한을 자본주의 자체의 內在的인 상대적 국한들로써 대체하고 이 극한들을 확대된 규모로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자본주의는 한 손으로 탈규준화시키는 것을 다른 손으로 공리계화한다. 자본주의와 는 반대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법칙은 이런 식으로- 재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정신분열증은 지본주의의 터전 전체의 이쪽 끝 에서 저쪽 끝까지 침두해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터전 전체에 있어서 문제인 것은 하나의 세계적 공리계 속에 정신분열중의 電荷와 에네르기 를 결부시켜 놓는 일이다. 이 공리계는 언제나 내부의 새로운 극한들을 由화한 흐름들의 혁명적인 힘에 대립시킨다. 이러한 체제에 있어서
는 탈규준화와 사라진 규준들 대신에 들어서는 공리계를 구별하는 일은, 두 시기로 구별하기만 하는 것이라 해도, 불가능하다. 흐름들이 자본주의 에 의하여 달규준화하는 것과 공리계화되는 것은 동시에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열증은 자본주의와 동일한 것이 아니고, 차이가 있고, 벌 어짐이 있고, 자본주의의 죽음이다. 통화의 흐름들은, 완전히 정신분열증 적 현실들이지만, 이 현실을 쫓아버리며 밀어젖히는 내재적 공리계 속에 서만 존재하며 그 기능을 다한다. 은행가, 장군, 산업가, 중급 혹은 상급 의 간부, 장관의 언어는 완전히 정신분열증적 언어이지만, 언어를 자본주 의의 질서에 봉사하게 하는 연결의 단조로운 공리계 속에서 통계적으로 그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과학으로서의 언어학의 上位의 차원에서, 옐름슬레우는 언어들의 방대한 달규준화를 조작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수가 有限한 것으로 여겨진 고찰되는 形象들에 근거한 하나의 공리계기 계를 처음부터 작동시킴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벽 죽 절대 적 극한울 통과하게 되는 〈참으로 〉 정신분열증적인 언어와, 〈 참으로 〉 탈 규준화하고, 해방된 흐름들은 어떻게 되는가? 자본주의의 공리계는 아주 풍부하여, 공리를 하나 더 보태면, 위대한 작가의 저서들의 어휘와 문체 의 중요한 특징들을 電子工學의 기계로 언제나 연구할 수 있고, 狂人둘의 言說에 대해서는 병원, 행정 및 정신의학의 공리계의 틀 안에서 언제나 그것에 귀를 기울여 둘을 수 있다. 요컨대, 분열-흐름 혹은 흐름-절단의 개념은 정신분열증 못지않게 자본주의로 잘 규정하는 것으로 우리에게는 보였다. 그러나 같은 방식으로는 전혀 아니다. 또 이것들은 전혀 같은 것 도 아니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은 다음과 같은 상황들에 따라 서로 다르다: 탈규준화들이 하나의 공리계 속에서 되찾아지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통계학적으로 작동하는 큰 집합에 머무는가 혹은 이 집 합들을 묶여 있다가 풀린 분자들의 입장들과 분리시키는 장벽을 타고 넘 는가에 따라; 욕망의 흐름들이 저 절대적 극한에 도달하는가 혹은 내재 97) 〈全體 管理〉를 위한 기능적 언어 (특히 略字들, 죽 形象- 文字에 의하여 형성되 는 浮動的인 모습들)에 대한 하버트 마르쿠제의 분석 참조: L'Homme unid i - mensio n al, 1964, tr. fr. Ed. de Mi nu it , ch. IV.
하는 상대적 국한울 옮겨놓고 더 먼 데서 재구성하는 것으로 만족하는가 에 따라; 탈토지화의 과정들이 이 과정들을 통제하는 再土地化롤 수반하 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돈이 그저 터는가 혹은 타오르는가에 따라. 왜 자본주의는 하나의 규준을 다른 규준으로 대체한다, 자본주의는 하 나의 새로운 型의 규준화를 실현한다고만 말해서는 안 되는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도덕적으로 불가능한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논리 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이전의 조직체들 속에서는 온갖 잔인성과 공포가 둘끓는다. 시니피앙의 연쇄의 단편들은 바밀에 쌓여 있 다. 죽 비밀 단체들이나 社會加入式 집단들이 있다_-그러나 정확히 말 해서 부끄러워할 일은 한 가지도 없다. 자본주의와 더불어 부끄러워할 일이 시작된다: 규준의 말로 옮겨놓고는 있지만, 그 부끄러워할 성격, 죽 그 내부의 倒錢이나 그것의 본질적인 냉소주의를 드러내지 않는 경제나 금융의 조작은 하나도 없다. (양심의 가책의 시대도 순수한 냉소주의의 시대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작들을 규준화하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하 다: 규준이란 것은 첫째로 사회체를 통과하는 흐름들의 성질 하나하나를 규정하는 것이다(가령, 消費財威信財 여자와 어린이들의 세 回路를 규정한 다); 그러므로 규준의 고유한 목적은 서로 通約될 수 없는 성질을 지닌 흐름들 간에 필연적으로 간접적인 관계들을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 둘은 분명히 서로 다른 종류의 흐름들에서의 景的 채취를 내포하지만, 이 양들은 한정되지 않은 〈 어떤 것 〉 을 전제하는 等價關係들을 가지지는 못한다. 이 양들은 그 자체 질적인 복합물들을 형성할 따름인데, 이 복합 물들은 본질적으로 가동적이고 또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요소들의 챠가는 불균형을 相殺한다. (有限負債덩이에서의 위신과 소비의 관계가 그렇다.) 간접적, 질적, 한정적이라고 하는, 규준의 관계의 성격들은 모 두, 규준이란 것이 결코 경제적인 것이 아니며 또 경제적일 수도 없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준다: 도리어 규준은 의견상의 객관적 운동을 표현하는 데, 이 운동에 따라 경제력이나 생산적 연결이 마치 이 운동에서 생긴 듯, 經濟外的 決定機關에 귀속시켜진다. 이 결정기관은 동기의 토대 및 동
인의 구실을 한다. 이것은 알뛰세르 Al t husser 와 발리바르가 잘 밝힌 것 이다: 이들은 가령 봉건제의 경우 어떻게 법률적 및 정치적 관계들이 지 배적인 것으로 규정되는가를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거기서 잉여가치의 형태로서의 잉여노동은 질적으로 또 시간적으로 노동의 흐름과는 판이한 흐름을 구성하며, 따라서 진작 그 자체 바경제적인 인자들을 내포히는 질적 복합물 속에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98) 또 혹은 소위 원 시적인 사회들에서 어떻게 결연과 부자관계의 토착적 관계들이 지배적인 것으로 규정되는가를 밝히고 있다. 이 사회들에서는 경제력과 경제적인 흐름동기 대지의 충만한 신체 위에 등기되고 또 이 신체에 귀속되어 있 다. 요컨대, 반생산의 결정기관으로서의 충만한 신체가 경제 위에 포개지 고 경제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곳에만 규준이 있다. 이런 까닭에 흐름 둘을 흐르게 하고 절단하는 데 성립하는 경제적 기호인 한에서의 욕망의 기호는, 경제 속에 그 원인들과 결과들을 가지고 있기는 해도, 필연적으 로 경제의적인 힘의 기호를 수반하고 있다. (가령, 결연의 기호는 債權者 의 힘과 관련되어 있다.) 혹은, 결국 같은 이야기이지만, 잉여가치는 여 기서 규준의 잉여가치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규준의 관계는 간접적, 질 적, 제한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런 성질들을 통해서 또한 경제의적 인 것이요, 이런 자격으로 질이 다른 흐름들 간에 연결둘을 맺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문제되는 사회가 존재하고 존속하는 조건으로서 하나의 集團的 鑑定내지 평가의 체계, 지각기관들, 혹은 좀더 정확히 말 하여 信仰器官들의 집합을 전제한다: 인간들이 직접 규준화되게 하는, 기 관들의 집단적 공급과, 원시체계에서 우리가 분석한 바와 같은, 평가하는 눈이 그런 것이다. 규준을 특칭짓는 이러한 일반적 특칭들을 바로 오늘 날 遺傳의 규준이라 불리는 것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유전의 규준이 시니피앙의 효과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와 반대로 이 규준이 구성하는 연쇄 자체가 이차적으로만 시 98) Cf. Marx, Le Ca pital , III, 6, ch. 24, Pleia d e, II, p. 140: 〈이러한 조건들 아래에서는, 그들로 하여금 명목상의 토지소유자를 위한 노동을 하게 하려면, 어 떤 성질의 것이건간에, 경제의적 이유들이 있어야 한다.〉
니피앙이기 때문이다. 이 규준이 이차적으로 시니피앙인 것은, 그것이 질 을 달리하는 흐름들 간의 연결, 오로지 간접적인 상호작용, 본질적으로 한정된 질을 지닌 복합물, 세포의 연결을 선택하고 자기의 것으로 만드 는 지각기관과 化學外的 인자들을 이용하는 데 따라 되는 일이다 . 이것들은 자본주의를 모든 점에서 규준들에 대립하는 하나의 사회적 공리계에 의하여 정의하는 근거들이 되기도 한다. 먼저, 일반적 등가물로 서의 통화는 흐름들의 질적 본성과는 무관한 抽象 景 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등가관계 자체는 한정되지 않은 자리를 차지한다: A-M-A( 화 폐-싱품-화폐)의 정식에 있어서, 〈 자본으로서의 돈의 순환은 그 자체 속에 그 목적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항상 갱신되는 이 운동에 의해서 만 가치가 계속해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의 운동에는 한계가 없다 〉 .99) 니제르 Nig e r 강의 티브족에 관한 보하난의 연구나, 뉴 기니아의 시아스족에 관한 솔즈베리 Sa li sbur y의 연구는, 동가물로서의 통화의 도입이 돈과 함께 시작되고 돈과 함께 끝나므로 끝나는 법이 없 는데, 이러한 통화의 도입은 질을 지닌 흐름의 회로들을 교란하여, 부채 의 유한한 덩어리들을 분해하고 규준들의 기초 자체를 파괴하기에 충분 하다는 것을 밝혔다. 둘째로 문제되는 것은 한정되지 않은 추성량으로서 의 돈이 구체적으로 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이런 관계가 없으 면 돈이 자본이 되지 않고 생산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점이 다. 이미 본 바와 같이 이 구체적으로 되는 일은 微分의 比에 나타나 있 었다. 그러나 바로 이 미분의 비는 질이 있는 혹은 규준화된 흐름들 간 의 간접적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달규준화한 흐름들 간의 직접적 관계 요 이 흐름들의 각각의 성질은 이 칙집적 관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다. 이 흐름들의 성질은 오직 이 흐름들의 연집에서 탈규준화한 흐름으 로서만 결과한다; 이 흐름들은 이 연접 밖에서는 순전히 잠재적인 데 머 물러 있울 것이다; 이 연접은 또한 추상량의 이집이기도 한데, 이 이집 에 의하여 연접은 구체적인 것이 된다. Dx와 D~ 근 이것들의 비를 떠나 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 비가 한 쪽을 노동의 흐름의 순수한 성질로서, 99) Marx, Le Cap ital, I , 2, ch. 4, Pleia d e, I, p. 698.
다른 한 쪽을 자본의 흐름의 순수한 성질로서 규정한다. 그러므로 사태 의 이러한 전행은 규준의 진행과는 거꾸로 된 것이요, 자본주의에 있어 서 규준의 잉여가치가 흐름의 잉여가치로 변모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힘의 체제에 근본적 변화가 생긴다. 왜냐하면, 흐름들 중의 하나 가 다른 흐름에 종속되고 예속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 양자가 동일한 힘에 속해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요(가령 x 와 y2) , 또 그 비가 하나 의 힘과 하나의 주어진 양 사이에 세워짐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융자의 흐름과 지불수단 혹은 수입의 흐름 간의 미분의 비의 차원에서 지본과 노동을 분석했을 때 분명해졌던 일이다; 이러한 확대 해석은 다만 시장자본, 금융자본, 상업자본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 는 것 의에는 자본의 산업적 본질이 없으며, 여기서 돈은 等價形態러는 기능 의에 다른 기능을 수행하지 않음을 의미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되 면 힘의 기호들은 규준의 관점에서 보았던 것과는 전혀 디론- 것이 된다: 그것들은 직접적으로 경제적인 係數가 되고, 욕망의 경제적 기호들의 代 役울 하지도 않고 그것들 자신을 위하여 지배적인 것으로 규정된 비경제 적 인자들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융자의 흐름이 지불수단의 흐름과 전혀 다른 힘에 속한다는 것은 힘이 직접적으로- 경제적인 것이 되었음을 의미 한다. 또, 심을 받는 노동이라고 하는 다른 측면에서는, 잉여노동도 유일 의 동일한 單純量인 점에서 노동 자체와 질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구별 되지 않으므로 (이것이 흐름의 잉여가치의 조건인데) 잉여가치를 확보하 기 위한 규준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자본이 그 자체로서 직접적으로- 경제적인 결정기관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또 하나의 규준 속에 등기된 經濟 의적 인자들을 개입시 키지 않고 생산에 포개지는 한에서, 지본은 사회체 혹은 충만한 신체로 서 다른 모든 사회체 혹은 충만한 신체와는 구별된다. 자본주의와 더불 어 노동자 자신이 벌거숭이가 되어 충만한 신체에 매달리듯, 충만한 신 체도 아주 벌거숭이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반생산 장치는 초월적인 것 이기를 그치고, 생산 전체에 침투하여 이것과 의연이 갇온 것이 된다. 셋 째로, 구체적인 것으로 되는 중에 규준 전체에 파괴에서 발전된 아 조건
둘은 극한의 부재가 하나의 새로운 의마를 지니게끔 한다. 이 극한의 부 재는 이제 더 이상 그저 추상량이 한정되지 않는디는 것을 가리키기만 하지 않고, 추상적인 것이 구체적인 어떤 것이 되는 미분의 비에 있어서 는 국한이나 종착점이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자본주의에 관하여 우리는 그것이 의적 극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동시에 또 의적 극한을 하나 가지고 있다고도 말한다 : 이 하나의 의적 극한은 정신분열증, 죽 흐름들의 절대적 탈규준화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이 극한을 밀어내고 내쫓음으로써만 작동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또한 내적 극한들을 가지 고 있지 않으며 또 가지고 있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순환의 특수한 조건들 속에, 죽 자본 자체 속에 내적 극한들 울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항상 더 커지는 규모로 이 국한들을 재생산하고 확대시킴으로써만 작동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공리계가 포 화상태에 이르는 법이 없고, 전에 있었던 공리들에다가 언제나 새로운 공리를 추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힘이다. 자본주의는 내재 의 터전을 명확하게 하고, 이 터전을 채우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 이 탈토지화한 터전은 하나의 공리계에 의하여 규정되어 있고, 원시적 규준 들에 의하여 규정되는 토지의 터전에 반대되는 것이다. 잉여가치에 의하 여 메워지는 미분의 비, 내적 극한들의 확대에 의하여 〈메워지는〉 의적 극한들의 부재, 잉여가치의 흡수에 의하여 메워지는 생산 속에의 반생산 의 傳播는 자본주의의 내재적 공리계의 세 양상을 구성한다. 그런데 도 처에서 貨幣化가 자본주의 내부의 深淵을 메우게 되어, 슈미트기·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심연에, 〈 亞曲, 理崇,爆發, 요컨대 극단적인 폭력의 운 동潘「 도입한다. 여기서 끝으로, 공리계를 규준들에 대립시키는 넷째 성 격이 나온다. 이것은 공리계가 맨 살에 등기하는 것, 죽 신체와 기관둑에 다가 각인할 필요가 전혀 없고 또 사람들에게 기억을 만들어내어 줄 필 요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규준들과는 반대로, 공리계는 자기의 서로 다 른 양상 속에서 집행하고 지각하고 기억하는 자기자신의 기관들을 발견 한다. 기억은 니쁜 것이 되었다. 특히, 이제 더 이상 신앙은 필요 없다. 자본가는 오늘날 사람들이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통탄하고 있는데, 이
것은 입끝으로만 하는 소리이다. 〈 왜냐하면 당신들은 ‘우리에게는 신앙 도 없고 미신도 없어. 그래 우리는 온전하고 현실적이야'라고 말하고 있 는데, 이것은 목구멍도 없는 새가 목을 내밀고 뽐내는 것과 같기 때문이 다! 〉 언어는 이제 더 이상 믿어야 할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 지 않고 행해야 할 것을 지시한다. 악의가 있거나 재치가 있는 사람들은 남의 말을 절반만 듣고서 탈규준화하고 이해할 줄 안다. 더군다나, 신분 증명서, 분류용 카드 및 관리수단이 혼해빠지도록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 본주의는 신체에서 사라진 긱인을 보충하기 위하여 장부에 적을 필요~ 차 없다. 님아 있는 것은 유물들, 현실적 기능을 하는 옛것 존중이다. 인 물은, 추상량들에서 파생하고 이 양들이 구체적인 것으로 되는 중에 구 체적으로 되는 그만큼 실제로 〈 사적인 〉 것이 된다. 각인되는 것은 이 추 상량들기지, 더 이상 인물들 자신이 아니다: 네 자본 혹은 네 노동력이 각인되지, 나머지 것은 중요하지 않다. 비록 너만을 위한 공리를 만들 필 요가 있다 해도, 사람들은 체계의 확대된 극한들 속에서 언제나 너를 되 찾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기관들을 공동으로 공급할 필요도 없다. 이 기관들은 자본주의에 의하여 끊임없이 생산되는 浮動하는 심상들에 의하 여 충분히 메워진다. 앙리 르페브르 Henr i Le fe bvre 의 지적에 따르면, 이 심상들은 사적인 것을 공공화하기보다 오히려 공공의 것을 사기업화 한다: 세계 전체가 가정 속에서 전개된다; 사람들은 자기의 텔레비전 앞 에서 떠날 필요가 없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것은 사적인 인물들에게, 체 계 속에서 아주 특수한 역할을 준다: 이 역할은 -致의 역할인데, 이것 은 더 이상 규준 속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때가 가까워 지고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가 규준에 의하여 진행되지 않고, 공리계에 의하여 진행되기는 해도, 자본주의가 사회체, 죽 사회기계를 기술기계들의 집합 으로써 대체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두 가지 형의 기계들은, 정확 히 말해서, 다 같이 은유 없이 틀림없는 기계들이지만, 양자간의 본성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 자본주의의 독창성은 오히려 사회기계가 불변 자본으로서의 기술기계들을 부품으로. 가지고 있지, 인간을 부품으로써
가지고 있지 않는 점에 있다. 불변자본은 사회체의 충만한 신체에 달라 붙어 있고, 인간은 기술기계들에 달러붙어 있다. (여기서 原則的으로 登 記는 이제 더 이상 직접 인간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혹은· 대상으로 할 필요가 없다는 결과가 생긴다.) 그런데 공리계는 결코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단순한 기술기계가 아니요 자동기계 혹은 사이버네틱한 기계도 아니다. 부르바끼 Bourba ki는 이것을 과학의 공리계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찰 말하고 있다: 과학의 공리계들은 테일러 Tayl o r 체계를 형성하 는 것도 아니요, 고립된 공식들의 기계적 기능을 형성하는 것도 아니라, 구조들의 반향과 연접에 결부된, 그리고 오직 기술의 〈강력한 지렛대〉의 도움만을 받는 〈直觀들〉을 전제한다. 이것은 사회의 공리계에 대해서는 더욱 들어맞는 말이다: 이 공리계가 자기의 내부를- 충실하게 하는 방식, 자기의 극한들을 밀어젖히거나 확대시켜 가는 방식, 공리들을 더 추가하 여 체계가 포화하는 것을 막는 방식, 삐걱거리며, 뒤툴리며, 원상을 회복 하면서만 작동하는 방식, 이 모든 것은 결정하며 관리하며 반응하며 등 기하는 사회기관들을 전제한다. 죽, 기술기계들의 작동에는 환원되지 않 는 테크노크라시와 관료제를 전제한다. 요컨대, 탈규준화한 흐름들의 연 접, 이 흐름들의 미분의 비 및 이 흐름들의 분열들 혹은 톰바구니들은 하나의 전면적 조정을 요구하는데 이 조정의 主要器官은 국가이다. 자본 주의 국가는, 탈규준화한 흐름들이 자본의 공리계 속에 붙들어매지는 한 에 있어서 이러한 흐름들의 조정자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구체적인 것이 되는 일을 잘 성취하고 있다. 구체적인 것이 되는 일은 전제군주의 추상적인 원국가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우리 에게는 생각된다. 자본주의 국가는 초월적 통일체로부터 사회적인 힘들 의 장에 내재하게 되고, 이 힘들에 봉사하며, 탈규준화하고 공리계화된 흐름들에 대해서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자본주의 국가는 구체적인 것이 되는 일을 너무나 찰 성취하고 있어서, 디론 의미에서는, 이 국가만 이 원국가와의 진정한 단절, 절단을 나타내며, 원국가의 殘核 위에 세워 졌던 디론 형태의 국가들과 대조를 이룬다. 왜냐하면 원국가는 초규준화 에 의하여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국가로부터 파생된 것들
은 달규준화한 혹은 한참 탈규준화하고 있던 흐름들에 이미 직면해 있었 는데, 이 흐름들은 아마도 국가를 현실의 유력한 힘들의 장에 내재하게 하고 종속시켜 갔다. 그러나 바로 이 흐름들이 연접하기 위한 상황이 주 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는 초규준화의 단편들과 규준들을 그냥 놓아 두거나, 다른 규준들을 발명해 내는 것으로 만족하고, 전력을 다하여 연 집이 생기는 것을 방해하기까지 하였다. (좀더 말한다면 가능한 한 원국 가를 소생시켰다.) 자본주의 국가는 이와는 다른 상황 속에 있다. 그것은 탈규준화한 혹은 탈토지화한 흐름들의 연접에서 산출되었다. 그리고 이 국가가 내재적인 것이 되는 일을 최고도로 실현하는 것은, 그것이 규준 들과 초규준회들의 보편적 파탄을 인정하는 한에서요, 또 그것이 지금까 지는 알려져 있지 않던 성질을 지닌 아 새로운 연접 공리계 속에서 전면 적으로 발전하는 한에서이다. 다시 한번 말한다면, 이 공리계는 이 국가 가 발견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공리계는 자본과 일체를 이루고 있 기 때문이다. 도리어 이 국가가 이 공리계로부터 태어난다. 이 국가는 이 공리계의 결과이다. 이 국가는 이 공리계의 조정을 보증할 따름이다. 이 국가는 공리계의 작동의 조건이 되는 作動 不實둘을 조정하거나 심지어 조직까지 한다. 이 국가는 공리계의 포화의 진행과 이에 따른· 극한의 확 대를 감시하거나 지도한다. 어떠한 국가도 경제력의 徵候에 봉사하기 위 하여 이렇게까지 힘을 들인 적은 없다. 따라서 사람들이야 어떻게 말하 든, 자본주의 국가는 아주 일찍부터, 처음부터, 아직 절반은- 봉건적이 거나 군주제적인 형태로 자라고 있을 때부터 이 역할을 가지고 있었 다: 〈자유로운〉 노동자의 관접에서는, 일손과 임금의 통제가 그런 역할 이요; 싱공업 생산의 흐름의 관점에서는, 자본축적의 좋은 조전이 되는 專賣特權의 부여와 과잉생산에 대한 탄압이 그런 역할이다. 자유로운 자 본주의란 있어본 적이 없다; 전매특권들에 대한 저항운동은 무엇보다도 상업자본과 금융자본이 아직도 낡은 생산체계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禪, 또 바야흐로 태어나려 하고 있는 산업자본주의가 이 전매특권들의 폐지를 획득해야만 생산과 시장을 확보할 수 있는 시기와 관련이 있다. 국가가 적절하게 행동한다는 조건 아래서는, 전매특권에 저항하는 행동
속에, 국가에 의한 통제라고 하는 원리 자체에 대한 투쟁이 전혀 없다. 이것은 重商主義가 생산에서 칙접 이익을 확보하는 자본의 새로운 상업 적 기능을 표현하고 있는 한에서, 중상주의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이 다. 일반적 규칙으로서, 국가에 의한 통제나 조정이 없어지거나 감소하게 되는 것은 일손이 넘쳐나고 시장이 평소에 없이 확장되는 경우만이다 .100) 죽 자본주의가 충분히 큰 상대적 극한들 속에서 아주 적은 수의 공리들만으 로 작동하는 때이다. 이 상황은 오래전에 없어졌다. 이렇게 된 결정적 인 자로 보아야 할 것은 강력한 노동계급의 조직화이다. 이 계급은 안정된 고도의 扇用水準울 요구하고, 자본주의를 강요하여 그 공리들을 늘리게 하는데, 이와 동시에 자본주의는 항상 확대되는 규모로 자기의 극한들을 재생산하지 않을 수 없다. (中心으로부터 周邊으로- 향하는 옮겨놓음의 公 理.)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새 공리들, 죽 노동계급을 위한 공리, 노동조 합들을 위한 공리 등을 낡은 공리들에 추가함으로써만 러시아혁명을 소 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다른 사정 때문에, 아주 사소하고 하 찮은 일들 때문에도 새로운 공리들을 추가할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 고유의 정열인데 이 정열은 자본주의의 본질을 ·조금도 바꾸지 않는다. 이리하여 국가는 공리계화한 흐름들을 조정하는 데 있어 서, 즉 생산과 그 기획에 대해서나 경제와 그 〈화폐화〉에 대해서나, 잉 여가치와 (국가장치 자체에 의한) 잉여가치의 흡수에 대해서나 더욱더 중요한 역할을 맡게끔 규정된다.
100) 이 모든 점에 관해서는, Mauric e Dobb, Etu d es sur le deuelop pem ent du cap ital is m e, pp. 34- 3 6, 173-177, 212-214.
국가의 조정기능들은 계급들 간의 어떤 종류의 중재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국가가 전적으로 소위 지배계급에 봉사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이 사실에 대한 이론적 군거둘은 아직 제시되지 못하고 있 다. 이 이론적 근거둘은 단순하다. 죽 자본주의의 공리계의 관점에서는, 오직 하나의 계급만이 있는데 그것은 보편주의를 사명으로 삼는 부르주 아 계급이다-이것이, 국가가 전적으로. 지배계급에 봉사한다~ 사실에 대한 이론적 근거이다. 플레하노프 Plekhanov 는 계급투쟁과 역사에 있어
서의 이 투쟁의 역할의 발견은 생-시몽 Sa i n t -S i mon 의 영향 아래 있었 던 1 양1 ] 기의 프랑스학파의 공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귀족과 봉 건제에 반항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투쟁을 찬양하고 있는 바로 이 사람들 자신이 프롤레타리아 계급 앞에서는 멈추어서서 산업가나 은행가와 노동 자 간에 계급의 처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다만 이윤과 임 금 사이에서처럼 이 삼자가 하나의 동일한 흐름에 통합될 따름이라고 보 고 있다.J O I) 여기에는 이데올로기로 말미암는 무분별이나 현실부정과는 다른 것이 있댜 계급이란 바로 카스트와 신분의 陰畵요, 탈규준화한 질 서, 죽 탈규준화한 카스트와 신분이다. 계급투쟁을 통해서 역사 전체를 다시 읽는 것은 탈규준화하며 또 탈규준화된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 계 급에 관련하여 역사를 읽는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이 규준들에 대한 두 쟁을 벌이고, 흐름들의 보편적 탈규준화와 일체를 이루고 있는 한에 있 어서, 이 계급은 유일의 계급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계급은 자본주의의 내재의 터전을 채우는 데 충분하다. 그런데, 사실, 새로운 어떤 것이 부 르주아 계급과 함께 생긴다. 새로운 어떤 것이란, 목적으로서의 향락의 사라짐, 추상적인 부를 유일의 목적으로 보는 새로운 連接觀, 소비와는 다른 형태로 이 연접을 실현하는 것이다. 전제군주 국가의 보편적인 노 예상태는 적어도 주인들 그리고 생산의 영역과는 구별되는 반생산 장치 룰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탈규준화한 흐름들의 연접, 초월성 전체나 외적 극한의 부정, 생산 자체 속에의 반생산의 전파로 규정되는 부르주 아의 내재의 터전은 비길 데 없는 노예상태, 전례 없는 종속상태를 세운 다: 거기서는 이제 더 이상 주인도 없고, 다만 노예들이 다론 노예들에 게 명령을 내리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밖으로부터 동물에게 짐을 지울 필요가 없다. 동물이 스스로 짐을 전다. 인간은 결코 기술기계의 노예가 아니다. 그렇지 않고 사회기계의 노예이다. 부르주아가 이것의 실례이다. 부르주아는 목적들 전체에서는 자기의 亨愛와 아무 관계도 없는 목적들 울 위하여 잉여가치를 흡수한다: 부르주아는 가장 천한 노예보다도 더 101 ) G. Plekhanov, Aug us ti n Th ier ry et la concep tion mate r ia l i st e de l'hist o r e, 1895, in Les Qu esti on s fon dament al es du marxis m e, Ed. Socia l es.
천한 노예요, 굶주린 기계의 우두머리 종이요, 자본을 재생산하는· 짐승이 요, 무한한 부채의 내재화이다. 〈 나도 역시 종이오 〉 라고 하는 것이 주인 이 하는 새로운 말이다. 〈 자본가가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자본이 인 간이 된 한에서이다. 이러한 역할 속에서 그는, 菩財家로서, 추상적인 부, 죽 가치를 위한 맹목적 情念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그런데 축재가에 게 있어서는 개인적 偏執으로 보였던 것이 자본가에게 있어서는 사회의 메커니즘의 결과요 자본가는 이 메커니즘의 한 돕니바퀴에 지나지 않는 다. 〉 102 ) 여기 대해서는 잉여가치에 의하여 규정되는, 죽 자본의 흐름과 노동의 흐름의 구별, 융자의 흐름과 貨金收入의 흐름의 구별에 의하여 규 정되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어디까지나 존재한다고 말할 사람이 있 울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부분적으로만 참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이 두 흐름이 미분의 비로 연접하는 데서 태어나며, 끊임없이 자기자신 의 경계선을 확대하는 재생산 속에 이 양자를 모두 통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르주아는 이데올로기의 말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공리계의 조 직 속에서 말할 권리가 있다: 여기에는 오직 하나의 기계와 오직 하나의 계급만이 있다; 오직 하나의 기계란 財貨로부터 절단되어 탈규준화한 돌 연변이하는 큰 흐름의 기계요, 오직 하나의 계급이란 종들의 계급, 죽 탈 규준화하는 부르주아 계급이다. 이 계급은 카스트와 신분을 탈규준화하 고, 또 수입이라고 하는 공유의 흐름을 기계로부터 뽑아내어 소비재와 생산재에로 변환한다 . 그래서 이 흐름에서는 임금과 이윤이 일체를 이룬 다 . 요컨대, 이론적 대립은 두 계급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계급이란 개념이 규준둘의 〈 陰 畵〉 를 가리키는 한, 이 개념 - -자체가 오직 하나의 계급밖에 없음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론적 대립은 딴 곳 에 있다. 죽 다음과 같은 탈규준화한 두 흐름 간에 있다. 자본의 충만한 신체 위에서 계급의 공리계 속에 들어가는 탈규준화한 흐름들과, 전제군 주 시니피앙만 아니라 이 계급 공리계로부터도 해방되는 털규준화한 흐 름들 간에 있다. 이 후자는 이 벽과 이 벽의 벽을 타고 넘어, 기관들 없 는 신체 위를 흐르기 시작하는 흐름들이다. 이론적 대립은 계급과 계급- 102) Marx, le Cap ital, I, 7, ch. 24, Pleia d e, I, p. 1096.
바깥 사이에 있다• 기계의 종노릇을 하는 사람들과 기계나 톱니바퀴 장 ’ 치를 폭파하는 사람들 사이에. 사회기계의 체제와 욕망하는 기계들의 체 제 사이에 . 상대적인 내적 극한과 절대적인 의적 극한 사이에. 혹 누가 원한다면 다음과 갇이 말해도 좋겠다: 자본가들과 정신분열자들 시이에. 이 양자는 탈규준화의 차원에서는 근본적으로 친밀한 관계에 있지만, 공 리계의 차원에서는 근본적으로 적대관계에 있다. (이런 사정 때문에 1 양1 ] 기의 사회주의자들의 프롤레타리아 階級像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과 완전한 정신분열자의 類似性이 생겼다.) 이런 까닭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실천의 문 제이다. 사회 터전의 兩極化, 죽 계급들의 양극을 조직하는 것은 혁명적 인 사회주의 운동의 임무였다. 물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론적 규정을 생산의 차원(잉여가치를 收命당하는 사람들) 혹은- 돈의 차원( 貨 金收入)에 서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규정들은 때로는 너무 좁고 때로는 너 무 넓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이 규정들이 階級의 利益이라 정의하고 있는 객관적 존재는 이 존재가 의식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한 어디 까지나 순전히 잠재적인 것이다; 물론 의식은 이 객관적 존재를 창조하 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고 의식은 국가장치를 정복하겠다고 나서기가 일 쑤인 조직된 정당 속에 이 존재를 현실화한다. 자본주의의 운동이, 그 미 분의 비둘의 상호작용에 있어서, 지정할 수 있는 고정된 한계 전체를 교 묘히 피하고, 그 내적 극한들을 옮겨놓고 항상 절단의 철단을 조작하는 것이라면, 사회주의 운동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구별하는 경계선을 고정시키거나 지정하기에 이르는 것 갇 다. 이 경계선은 경제적이고 재정적일 뿐더러 또한 정치적 투쟁에 활기 를 주게 되는 큰 절단이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국가장치의 정복이란 것 o.l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은 언제나 문제였고 지금도 문제이다. 사 회주의를 표방히는 국가는 생산, 생산단위들, 경제계획의 변형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변형은 이미 정복된 국가로부터 출발해야만 이루 어진다. 이 국가 역시 잉여생산물이나 잉여가치의 유출, 축적, 흡수, 시장 과 통화계획이라고 하는 공리계에 관한 동일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그 객관적 이익을 지켜서 승리를 거두든 가, 혹은 부르주아 계급이 국가의 통제를 지키든가 하는 사태가 벌어진 다. 그런데 전자의 경우, 그 작전들은 그 前衛意識이나 前衛政黨의 지배 아래 행해진다• 즉 관료기구와 전문 기술기구에게 이익이 되게끔 행해지 는데 이 기구둘은 〈부재하는 위대한 계급〉인 부르주아 계급의 대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부르주아 계급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승인하고 통합하기 위해서 그 자신의 전문 기술적-관료기구를 눈에 띄 지 않게 하고, 특히 몇몇 공리를 더 추가할 각오가 되어 있다. 이러한 二者擇一이 시장과 계획경제 간에는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말 이다. 계획경제는 자본주의 국가에도 필연적으로 도입되며, 시장은, 국가 의 독점시장으로서이기는 해도 사회주의 국가 속에서도 존속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바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전정한 灰}택일이라 하겠는가? 레닌과 러시아 혁명의 거대한 성 과는 객관적 존재, 즉 객관적 이익에 합치하는 계급의식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 계급이 양극으로 갈라지는 것을 자본주의 국가들로 하여금 승 인하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레닌주의의 이 위대한 절단은 사회주의 자 체 속에 국가 자본주의가 되살아나는 것을 막지도 못했고, 또 고전적 자 본주의가 그야말로 두더지 갇은 일을 계속하여 줄곧 철단들을 절단함으 로써 레닌주의의 절단을 회피하는 것을 막지도 못했다. 이렇게 절단들을 줄곧 절단함으로써 고전적 자본주의는 통제되지 않는 (자본주의에 의해 서도, 또 公式的 社會主義에 의해서도 통제되지 않는) 혁명적 요소들을 주변으로 혹은 의딴 곳들로 더욱 멀리 몰아내고, 승인된 계급의 地區들 을 자기의 공리계 속에 통합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니, 선택은, 사회주 의 국가의 빨리 能和하여 공포정치의 양상을 띤 엄격한 새로운 공리계 와, 자본주의 국가의 유연하고 포화하는 법이 없는, 그러나 그런 만큼 위 험하고 냉소적인 낡은 공리계 사이에만 남았다. 그러나, 사실, 가장 직접 적인 문제는, 산업사회가 잉여생산물, 잉여생산물의 흡수, 기획자이며 시 장인 국가, 심지어 부르주아 계급에 맞먹는 것 없이 지낼 수 있는가를 아는 일이 아니다: 이 물음에 대해서는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지만, 동시
에 이런 말들로써 제기된 물음이 잘 제기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 하다. 가장 칙접적인 문제는 당이나 국가 속에 구체화된 계급의식이 객 관적인 계급이익을 배반하는 일이 있는가 혹은 없는가를 아는 것도 아니 다. 이 객관적인 계급이익은 흔히 일종의 자발성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고 있지만, 이 이익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결정기관들에 의하여 질식되어 있다• 『 변증법적 이성비판 』 에서의 사르트르의 분석에 의하면, 계급의 자발성이란 것은 없고, 오직 〈 집단 〉 의 자발성만이 있는 데, 우리에게는 이 분석이 아주 옳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 융합된 집 단들 〉 과, 당이나 국가에 의하여 대표되어 〈 系列的 〉 인 데 지나지 않는 계 급을 구별할 필요가 생긴다. 이 양자는 동일한 차원에 속하지 않는다. 이 것은 계급의 이익이 어디까지나 큰 덩어리를 이루는 집합들의 ,· 차원에 속 하기 때문이다; 계급의 이익은 하나의 공동의 先 意 識울 규정할 따름이 다. 이 선의식은 반드시 判明한 의식 속에 표상되므로 이 차원에서는 이 의식이 배반하는가 안 하는가, 소의하는가 안 하는가, 왜곡하는가 안 하 는가 하는 것은 물을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이와 반대로, 전정한 무의식 은 집단의 욕망 속에 있는데, 이 욕망은 욕망하는 기계들의 분자적 차원 울 움직인다 . 문제는 바로 여기에, 즉 집단의 무의식적 욕망들과 계급의 선의식적 이익둘 간에 있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런 점에서 출발해야만, 여기서 간접적으로 파생되는 문제들, 즉 계급의 선의식과 계급의식의 대 표적 형태들에 관한, 이익들의 본성과 이 이익들을 실현하는 과정에 관 한 문제들을 제기할 수 있다. 라이히는 욕망과 이익을 미리 구별하는 권 리들을 요구하면서 줄곧 이 문제들에 되돌아온다: 〈 지도계층은, 객관적 인 역사적 과정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 이의에는, 다음의 두 가지 문제 를 이해하는 것보다도 더 다급한 과제를 가져서는 안 된다 : 1) 사회계 충, 직업, 연령층, 性의 다름에 따라 어떤 전보적 관념, 어떤 전보적 욕망 이 존재하는가: 2) 어떤 욕망, 불안 및 관념이 전보적 양상의 발전에 족 쇄를 채우는가-전통적 固着들.〉 103) (지도계층은 오히려 〈난 욕망이란 103) Reic h , Qu 'est- c e que la conscie n ce de classe?, 1934, tr. fr. Ed. Sin e l- niko ff , p. 18.
말을 들으면 권총을 뽑아 든다〉고 대답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욕망이란 것이 절대로 속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익은 잘못 생각될 수도 있고, 인지되지 않거나 놓치게 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욕망 에는 이런 일이 없다. 그래서 라이히는 다음과 같이 의친다: 아니다, 대 중은 속지 않았다, 대중은 파시즘을 원했다, 바로 이것을 설명해야 한 다…….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에 반대되는 것을 욕망하는 수가 있다: 자 본주의는 이것을 이용히는데, 사회주의, 당 및 당의 지도충도 역시 이것 울 이용한다. 욕망은 沒認識에서가 아니라, 완전히 반동적인 것들을 무의 식적으로 공급하는 일에 몰두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 는가? 또 라이히는 〈傳統的 固着둘〉이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 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전통적 고착들 역시 역사적 과정의 일부를 이 루며, 또 우리로 하여금 국가의 현대적 기능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현 대의 문명 사회들은 탈규준화와 탈토지화의 진행에 의하여 규정된다 . 그 러나 이 사회들은 한편에서 탈토지화하는 것을 E連· 한편에서는 再土地化한 다. 재토지화된 새로운 토지들은 가끔 인공적이고, 殘海的이고, 古風스럽 다: 다만, 이것들의 고풍스러움은 완전히 현대에 통용되는 기능을 갖추 고 있다. 우리들은 규준의 단편들을 〈벽돌처럼 끼워 맞추고〉, 네모 반듯 하게 배치하여 재도입하고, 그리하여 낡은 규준들을 소생시키고 擬似-規 準들이나 隱語들을 발명해 내는데, 우리의 이러한 현대적 방식은 바로 고풍스러운 것이다. 에드가 모랭 Edg ar Mor i n 의 공식을 따르면, 이것이 新古風主義 neo-a rch ai smes 이다. 이 현대의 토지들은 극히 복잡하고 변 화가 심하다. 어떤 것들은 차라리 민속적인 것이라 하겠는데, 그러나 이 것들도 제법 사회적인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적인 힘을 나타낸다. (이 토지는 在鄕軍人의 조직을 통하여 룰레트 놀이꾼에서 브랜디 密造者 에까지 이른다.) 다른 어떤 것들은 외딴 곳들인데, 이것들의 고풍주의는 현대의 파시즘을 기르기도 하고 혁명적인 힘을 발휘하게도 한다. (小數 民族, 바스쿠 地方의 문제, 아일랜드의 가톨릭 敎徒 인디언 居留地.) 어떤 것들은 탈토지화의 운동의 흐름 자체 속에서 자발적인 듯이 형성된다(特 殊地帶 密集地帶 〈깡패 도당〉). 다른 것들은, 비록 一轉하여 국가에 반항
하고 심각한 문제들을 국가에 안겨주기는 해도, 국가에 의하여 조직되고 우대된다(地方分權主義, 내셔널리즘). 파시즘 국가는 아마도 지본주의 중 에서는 경제적 및 정치적 재토지화의 가장 환상적인 企圖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 역시 그 고유한 소수파와 그 고유의 토지들을 가지고 있 다. 이것들은 자기들을 개혁하여 국가에 적대하기도 하지만, 국가가 이것 들을 생기게 하고 조직하기도 한다. (러시아의 내셔널리즘, 당이라고 하 는 꾜步} 이런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人工的인 새 토지들의 기 반 위에서만 자기를 계급으로서 구성할 수 있었다; 이 사태와 平行하여, 부르주아 계급은 가끔 가장 고풍스런 형태로 자기를 재토지화한다.) 권 력의 인격화라고 하는 유명한 일은 기계의 탈토지화의 대역을 하러 오는 토지와 갇다. 현대 국가의 기능이 탈규준화하고 탈토지화한 흐름들을 조 정하는 것이라 하는 것이 참이라면, 이 기능의 주요한 양상들 중의 하나 는 재토지화를 행하고, 그리하여 탈규준화한 흐름들이 사회의 공리계의 어떤 말단으로부터도 도망가는 것을 막는 일이다. 자본주의 국가가 자본 의 흐름들을 지상으로 끌어오기 위하여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본 의 흐름들은 쉽사리 달에까지 미치리라는 인상을 가끔 받는다. 가령, 융 자의 흐름들이 탈토지화하면, 구매력과 지불수단에 의하여 재토지화가 행해진다(中央銀行들의 역할). 혹은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향해 가는 탈 토지화의 운동은 주변의 재토지화, 주변의 일종의 경제적 및 정치적인 자동적 중십화를 수반한다. 이것은 때로는 국가의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의 현대적 형태들로, 때로는 지방의 전제군주들의 고풍스런 형태로 생기 는 일이다. 극한에서는 탈토지화와 재토지화를 구별하는 일이 불가능하 다. 이 양자는 서로 넘나들고 있고 혹은 하나의 동일한 과정의 표리와 같다. 국가에 의한 조정의 이 본질적 양상이 자본주의 자체의 경제적 및 사 회적 공리계 속에 직접 그 근거를 가지고 있음을 알면 이 양상은 더 잘 이해된다. 고풍스런 혹은 인공적인 새 토지들의 윤곽을 뚜렷이 그려내고 있는 것은 탈토지화한 흐름들의 連接 자체이다. 마르크스는 본래의 의미 에서의 경제학의 기초가 무엇인가를 밝혔다: 그것은 노동이나 생산에 있
어서―一욕망에 있어서라 해도 괜찮겠다-의 富 의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본질의 발견이다. (아담 스미스는 부를 - 창조하는 활동에 대한 규정을 모 두 거부하고 그저 노동만을 그러한 활동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큰 전보였 다: 工 業勞 動도 아니고 상업노동도 아니고 농업도 아니라, 아무런 구별 없이 모든 활동……, 즉 부를 - 창조하는 추상적인 普返性이 파악되었 다.)昭 ) 이러한 발견은 탈규준화 혹은 탈토지화의 큰 운동에 대응하는 것 이다: 부의 본성은 이제 더 이상 대상의 측면에서, 죽 토지기계나 전제 군주기계 같은 의부적 조건들에서 팀구되지 않는다 . 그런데 마르크스는 금방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한다: 본질적으로 냉소적인 이 발견은 새로 운 물신숭배나 새로운 〈 위선 〉 으로서의 새로운 토지화에 의히여 수정된 다.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본질로서의 생산은 재산의 형태들로만 발견된 다. 그런데 재산은 생산을 다시 대상화하고, 생산을 재토지화함으로써 생 산을 소의한다. 부의 주관적 본성을 예감하면서 이 본성을 아직 〈 돈을 만드는 〉 전제군주기계에 결부된 특수한 활동이라 규정한 것은 중상주의 자들만이 아니다; 이 예검을 더욱 밀고 나아가, 이 생산의 주관적 활동 울 농업과 토지재산의 형태로 토지기계나 재토지화한 기계에 결부시킨 것은 중농주의자들만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아담 스미스도 부의 위대한 본질이 추상적이고 주관적이며, 산업적이고 탈토지화한 것임을 그가 발 견하는 것은 이 본질을 금방 생산수단의 사유재산 속에 재토지화함으로 써만이다 . (그래서 이 점에서 소위 公有財産도 이 운동의 의미를 바꾼다 고는 말할 수 없다.) 더구나, 경제학의 역사를 쓰는 일이 아니라, 이에 대응하는 사회의 현실적 역사를 쓰는 일이 문제일 때에는, 왜 자본주의 가 처음에 탈토지화한 것을 끊임없이 재토지화하는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다음과 같은 이중의 운동의 참된 근거를 분석하고 있 는 것은 『자본론』에서이다. 한편으로, 자본주의는 추상적인 부의 주관적 본질, 죽 생산을 위한 생산, 다시 말하면 목적 자체로서의 생산,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의 절대적 발전을 끊임없이 발전시킴으로써만 진행될 수 104) Marx, Intr o ducti on gen erale a la criti qu e de l'economi e po liti qu e, Pleia d e, I, pp. 258 sq. Et Economi e et ph il o sop h ie , Pleia d e, II, pp. 71-75.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고 동시에, 자본주의는 〈지본을- 위한 생산〉, 〈현존하는 자본의 유리한 이용〉을 추구하는 일정한 생산양식인 한에서, 자기 고유의 제한된 목적의 틀 안에서만 진행될 수 있다 .105) 첫째 양상에 있어서는, 자본주의가 항상 더욱더 탈토지화하면서, 자기자신의 한계들을 넘어서며, 〈모든 칭애와 모든 속박을 뒤집어엎는 보편적 코스모폴리탄의 에네르기를 가지고 팽창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상보적인 둘째 양상에 있어서는, 자본주의가 내재하는 내적 한계들과 장애들을 끊임없이 가전 다. 이 한계들과 장애들은, 내재적이라고 하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확 대된 규모로 자기를 재생산하지 않고서는 극복될 수 없다. (항상 더 地 方的, 世界恥 遊星的 再土地化가 행해진다.) 이런 까닭에 경향적 低下의 법칙, 죽 극한들이 항상 극복되고 항상 재생산되기 때문에 국한에 도달 하는 일이 절대로 없다고 하는 법칙은, 그 系로서, 아니, 그 직접적 표시 로서, 탈토지화와 재토지화의 두 운동의 동시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는 생각되었다.
105) Marx, Le Cap ital , III, 3, conclusio n , Pleia d e, II, pp. 1031-1032.
여기서 중대한 결과가 생긴다. 그것은 현대사회들의 사회적 공리계가 두 극 사이에 매달려 있고, 끊임없이 한 극에서 다른 극으로 왔다갔다 한다는 것이다. 이 사회들은, 전제군주기계의 폐허 위에서, 탈규준화와 탈토지화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 사회들이 초규준화하고 재토지화하는 통일체로서 되살아나게 하고 싶어하는 원국가와 이 사회들을 하나의 절 대적인 문턱에로 몰아가는 고삐 풀린 흐름들 사이에 매달려 있다. 이 현 대사회들은 자기들의 자본과 자기들의 인구의 유동량을 탈규준화하거나 탈규준화하게 하는 한편, 세계적 규모의 독재, 지방의 독재지들- 그리고 전능한 경찰을 동원하여 전력을 다하여 재규준화한다. 이 현대사회들은 두 방향 사이에 붙들려 있다: 고풍주의와 미래주의, 신고풍주의, 선미래 주의 편집병과 정신분열증 사이에 놓여 있다. 이 현대사회들은 두 극 사 이를 왔디갔다한다: 한 극은 편집병적인 전제군주적 기호, 즉 이 사회들 이 규준의 통일체로서 다시 생기를 불어넣으려고 하는 전제군주의 시니 피앙-기호요; 다른 한 극은 탈규준화한 흐름의 통일체로서의 정신분열
자의 形象-記號, 즉 분열, 기호-점, 흐름-절단이다. 이 현대사회들은 한 쪽 국에 울타리를 치지만, 다른 한 쪽 극을 통해서는 흐르거나 흘러나온 다. 이 현대사회들은 끊임없이 자기로부터 후퇴하는 동시에 자기보다 앞 서간다 .106) 원국가에 대한 향수 및 원국가의 필연성과 흐름들의 流出에 대한 요구 및 흐름들의 유출의 불가피성을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 체 계를 구성하는 탈규준화와 탈토지화가 공리계에서 빠져나가 기계를 당황 케 하는 이 말단 혹은 저 말단을 통해서 도망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좋은가. (地平線上의 한 중국인, 쿠바의 미사일 發射裝置, 아랍人 비행기 납치범, 領事 誘持 1E, 블랙 팬더 Black-Panth er 죽 혹표범 단원, 6 碑 5 月, 혹은 심지어 마약에 중독된 히피들, 화를 내고 있는 男色家들 등이 이런 末端이다.) 사람들은 반동적이고 편집병적인 위로부터의 짐과, 혁명적이고 정신분열증적인 아래로부터의 짐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더구 나, 사람들은 그것이 어떻게 이쪽으로 오는지 혹은 저쪽으로 가는지를 너무나 모른다 : 妄想의 두 극은 애매하여, 변모하기도 하며, 고풍주의나 민속의 방식은, 이런저런 상황에서 갑자기 위험천만한 진보주의적 가치 롤 지닐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이 파시즘이나 혁명적인 것이 되는가 하는· 것은 보편적인 망상의 문제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나 입을 다물 고 있다. 누구보다도 특히 정신의학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다. (이들은 이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왜 이들이 이 문제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자본주의는, 또 사회주의 역시, 이것들이 숭배하는 전 재군주 시니피앙과, 이것들을 끌고 가는 정신분열증적인 形象 사이에서 찢겨 있다시피 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대립되어 있는 듯이 보 였던, 앞서 말한, 두 결론을 주장할 권리를 갖는다. 한편으로, 현대국가는 내재적으로 되는 일을 완성하고, 일반화된 흐름을 탈규준화하고, 규준 106) Suzanne de Brunhoff , La Monnaie chez Marx, Ed. Socia l es, 1967, p. 147 : 〈따라서 자본주의에 있어서는, 체계로 구성된 신용도 혼합된 요소들, 죽 자본주 의 이전의 요소들-(통화, 돈 거래 )과, 자본주의 이후의 요소들(우위의 순환인 신용 의 회로 ... …) 을 결합시킨다. 신용은 자본주의의 필요에 옹하는 것이지만, 결코 정말 자본주의와 동시적인 것은 아니다• 자본의의 생산양식에서 태어난 융자의 체계는 어디까지나 사생아이다.〉
들과 초규준화들을 공리계로써 대체함으로써, 전제군주국가에 비하여 더 욱 전정한 절단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지금까지 오직 하나의 국가 , 죽 아시아적 전제군주의 조직체인 원국가밖에 없었고, 또 지금도 이 국가만이 있는데, 이 국가는 뒤로 물러서서 역사 전체에 대한 유일의 철단을 구성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대사회의 공리계는 자기자신 울 절단하겨 두 국을 가지고 있는데, 이 공리계조차 원국가를 두 극 중 의 하나로 소생시킴으로써만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이건, 파시즘이건, 혹은 사회주의이건, 어느 것인들 필적할 것이 없는 이 원국 가의 유령에 사로잡히지 않은 것이 있는가? 지방의 독재자 뒤발리에 Duva lli er 의 경찰의 우두머리는 그 이름이 데지르 Des y r( 욕망)였다. 간단히 말해서, 어떤 일이 되살아나는 경우와 처음에 생기게 되는 경 우, 일이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야생, 야망, 문명에 대응하는 세 개의 큰 사회기계를 구별하였다. 첫쨋것은 밑에 깔려 밖에 나타나지 않는 토지기계인데, 이것은 대지의 충만한 신체 위의 흐름들을 규준화한다. 둘쨋것은 초월적인 帝國機械인데, 이것은 전제군주와 그 장 치, 죽 원국가의 충만한 신체 위의 흐름들을 초규준화한다; 이것은 탈토 지화의 최초의 큰 운동을 전개하지만, 이렇게 하는 까닭은 이것이 토지 공동체들을 집합시키고, 초규준화하고, 잉여노동을 자기의 것으로 만듦으 로써 자기가 보유하는 토지공동체들에게 고도의 통일을 주기 위해서이 다. 셋쨋것은 내재하는 현대기계인데, 이것은 돈-자본의 충만한 신체 위 의 흐름들을 탈규준화한다: 이것은 내재성을 실현하고,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이 되게 하고, 인공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이 되게 하여, 토지 의 규준들과 전제군주의 초규준화 대신에 탈규준화한 흐름들의 공리계를 채용하고 이 흐름들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이 기계는 탈토지화의 두번째 의 큰 운동을 전개하지만, 이것은 이번에는 규준들과 초규준둘 을 하나도 존속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 기계는 자기가 존속시키지 않는 것을 자기자신의 독자적인 수단들을 통해서 되찾는다; 이 기계는 자기가 토지들을 잃은 곳에서 재토지화하고, 낡은 고풍주의를 파괴한 곳에 새로 운 고풍주의들을 창조한다―-그리고 이 둘은 하나가 된다. 역사가 말한
다: 〈아니야, 현대국가, 그 관료제, 그 데크노크라시는 옛날의 전제군주 국가와는 달라〉라고. 이것은 분명히, 한 쪽에서는 탈규준화한 흐름들~ 재토지화하는 것이 문제인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토지의 흐름들을 초 규준화하는 것이 문제인 때문이다. 패러독스는 자본주의가 그 재토지화 들을 위하여 원국가를 이용하는 데 있다. 그러나 현대의 공리계는 태연 하게 그 내재성의 밑바닥에 초월적인 원국가를 재생산한다. 이 원국가~t 내적인 것이 된 자기의 극한으로서, 혹은 자기가 왔다갔다하게끔 운명지 어진 두 극의 하나로서 재생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리계의 태연하 고 냉소적인 성격 밀에서는, 이 공리계의 다른 극을 형성하는 큰 힘들이 이 공리계를 움직이고 있다. 이 힘들은 이 공리계에 사고들, 고장들 및 붕괴의 기회들을 주고, 이 공리계가 탈규준화하는 것으로 하여금 이 공 리계를 초월적으로 부활시키는 것들로서의 이 공리계의 내재적 조정들의 벽을 통과시킨다. 모든 형의 사회기계는 각각 어떤 종류의 표상을 산출 하는데, 이 표상의 요소들은 사회체의 표면에서 조직된다: 야생의 토지 기계에 있어서는 連接-調整의 체계가 그것인데, 이것은 흐름들의 규준화 에 대응한다; 야만스런 전제군주기계에 있어서는 離接 -1 쌉곱의 체계가 그 것인데, 이것은 초규준화에 대응한다; 문명화한 자본주의기계에 있어서 는 연접-조정의 체계가 그것인데, 이것은 흐름들의 탈규준화에 대응한 다. 탈토지화, 공리계 및 재토지화, 이런 것들이 현대의 사회체에 있어서 의 욕망표상의 표충의 세 요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 에 다시 부딪힌다: 사회적 생산과 욕망하는 생산 시이에는 언제나 본성 의 동일성이 있지만 또한 체제의 차이가 있다고 일단 말할 때, 모든 경 우에 이 양자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이 본성의 동일성은 내재성 속에 서, 또 탈규준화한 흐름들의 유출 속에서 〈보편적으로〉 실현되어 있으니 까, 그것은 현대의 자본주의적 표상의 체제에서는 최고도에 달하고 있다 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또, 反生産이, 그 내재성과 탈규준화를 이용 하여 체계의 몇 군데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생산 전체에 걸쳐 퍼져서, 욕망 속에 침투하여 이제는 욕망을 파괴하는 환상적인 죽음의 본능을 해 방하였으므로, 두 가지 생산의 체제의 차이는 현대 자본주의의 표상체제
에 있어서 가장 큰 것이고, 또 이 표상은 욕망에 대하여 다른 어떤 것보 다도 더 강력한 억제-억압의 조작을 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 항상 안에서 생기지만 밖으로부터 와야만 하는 이 죽음__자본주의의 경우에는, 죽음을 오게 하는 이 〈 밖 〉 이 무엇인지 찰 모르는 그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나타나는 이 죽음은 무엇인가? 요컨대, 일반적인 사회이론 은 흐름들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라 사회적 생산과 욕 망하는 생산의 관계,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의 이 관계의 변화들, 지본주 의 체계에 있어서의 이 관계의 한계들을 평가해야 한다.
10 결국은 오이디푸스 토지기계나 심지어 전제군주기계에 있어서는, 경제적인 사회적 재생산 이 결코 인간의 재생산, 이 인간의 재생산의 사회적 형태에서 독립해 있 지 않다. 그러므로 가족은 사회 터전에 대해서 열린 하나의 실천, 죽 사 회 터전 전체에 걸친 하나의 전략이다; 부지관계와 결연의 관계들은 규 정하는 작용을 한다. 혹은 오히려 〈지배적인 것이게끔 규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社會體 위에 각인되어 표시되고 등기되는 것은, 사실, 직접 적으로는 생산자들(혹은 비생산자들)인데, 이러한 각인이나 등기는 이들 의 가족의 서열과 가족에서의 이들의 서열에 따라 행해전다. 재생산의 진행은 직접적으로는 경제적인 것이 아니고, 친족관계의 비경제적인 인 자들을 경유한다. 이것은 토지기계와, 경제적인 사회적 재생산에 있어서 의 각자의 위치를 부자관계와 결연의 관점에서의 그의 서열에 따라 규정 하는 地緣 集團들에 대해서만 참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 결연과 부자관 계에 새로운 결연과 직접적 부자관계의 관계들을 추가하는 전제군주기계 에 대해서도 참이다. (여기서 전제군주에 의한 초규준화에 있어서의 주 권자의 가족의 역할과 〈왕조〉의 역할이 생긴다. 이 가족과 왕조는, 아무 리 交代變{t하고 불안정해도, 그 역할에는 변함이 없다. 주권자의 가족과 왕조는 언제나 새로운 결연이라고 하는 동일한 범주 속에 등기된다.) 자 본주의 체계에서는 사태가 이제 더 이상 이와 전혀 동일하지 않다 .l rfl) 表 107) 엠마누엘 떼래 Emmanuel Terra y에 의한 생산양식들의 미분적 분석 참조. Le Marxis m e deuanl Les so ci翰 prim i tives , pp. 140-155( 왜 자터의 이전의 사
회들에서는, 〈경제적 및 사회적 구조의 재생산이 집단의 물질적 재생산이 행해 지는 조건들에 크게 의존하는가〉).
象作用은 이제 더 이상 뚜렷한 한 대상에 관계하지 않고, 생산활동 자체 에 관계한다. 충만한 신체로서의 사회체는, 돈-자본인 한에서, 직접적으 로 경제적인 것이 된다; 이 사회체는 다른 어떠한 전제도 용납하지 않는 다. 등기되거나 각인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생산자들이나 비생산지들이 아니라, 추상량으로서의 생산력과 생산수단인바, 이 추상량은 이것들에 관계지어지고 연접됨으로써 실제로 구체적인 것이 된다. 죽 노동력이나 자본, 不變資本이나 可變資本, 부자관계의 자본이나 결연의 자본……이 된다. 결연과 부자관계의 관계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간 것은 바로 자본 이댜 여기서 가족의 私企業化가 생기고, 이 사기업화에 의하여 가족은 자기의 사회적 형태를 경제적 재생산에 주는 일을 그친다: 가족은 공급 울 못 받게 되다시피 되어, 터전 바깥에 놓이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처 럼 말하면, 가족은 이제 경제적 재생산의 지율적인 사회적 형태에 종속 하고 이 사회적 형태가 할당하는 장소에 있게 되는 인간의 質料, 즉 인 간의 소재의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즉 생산과 반생산의 요소들이 인간 둘 자신으로서 재생산되지 않고, 인간들에게서 단순한 소재를 얻는다. 경 제적 재생산의 형태는 이 소재를, 이 소재가 인간의 재생산으로서 가지 고 있는 형태와는 전혀 다론 방식으로 미리 조직한다. 이 소재의 형태 혹은 인간의 재생산의 형태가 사기업화되고 터전 밖에 놓이게 되었다고 하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이 소재의 형태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쉽사리 믿는 사람들을 생기게 한다• 그러나, 자본으로부터 파생된 기능으 로서의 자본가 자체, 노동력으로부터 파생된 기능으로서의 노동자 자체 등을 각각 필요한 곳에 생겨나게 하기 위하여, 사회의 경제적 재생산의 형태는, 터전 자체 속에, 소재의 형태를 이미 미리 형성하고 있었다. 따 라서 가족은 계급들의 질서에 의하여 미리 再切斷되어 있다• (바로 이 의미에서 隔離가 平等의 유일의 起源이다…… .)108)
108) 자본가여 > 생산 등에 관해서는 Marx, Pri nc ip e s d'une criti qu e de l'ec o- nomi e po lit iqu e, Pleia d e, II, pp. 357-358. Et Le Cap ital , I, 7, ch. 24, Pleia d e, I, pp. 1095-1096.
이렇게 가족이 사회 터전 밖에 놓이는 일은 또한 가족의 가장 큰 사 회적 행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 터전 전체가 가족에 일치 할 수 있게 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개개의 인물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적인 인물들, 죽 추상량들로부터 파생된 기능들이다; 이 인물들은 그들 자신이 이 추상량들의 관계 속에 혹은 이 추상량들의 공리계 속에, 이 추상량들의 연접 속에 놓이게 됨으로써 구체적인 것이 된다• 이것들 은 바로 자본주의의 기호들-점들, 흐름들-절단들, 죽 자본주의의 순수한 〈 形象들 〉 에 의하여 산출된 모습둘 혹은 심상들이다: 인격화된 자본인 자 본가, 즉 자본의 흐름에서 파생된 기능으로서의 자본가, 인격화된 노동력 으로서의 노동자, 노동의 흐름에서 파생된 기능인 노동자가 이것들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그 內在의 터전을 심상들로 가득 채운다: 비참함, 절 망, 반란도 심상이 되며, 또 이에 반대되는 측면인 자본의 폭력과 압제도 바참함, 절망, 반란, 폭력 혹은 압제의 심상이 된다. 그런데 형상적이지 않은 형상들 혹은 이 형상들을 산출하는 흐름들-철단들로부터 출발하여, 이 심상들은 인간의 소재에 형태를 줌으로써만 그것들 자체가 형상화하 며 재생산하게 된다. (인간의 素材를) 재생산하는 특수한 형태(가족)는 사회 터전 밖에 다시 놓이게 되지만 이 특수한 형태를 규정하는 것은 사 회 터전이다. 그러므로 私的 人物둘은 둘째 차원의 심상들, 죽 심상들의 심상들, 다시 말하여 첫째 차원인 사회적 인물들의 심상들을 표상하는 소질을 갖는 幻影들이다. 이 사적인 인물들은 제한된 가족의 장소 안에 서 아버지, 어머니, 아이로서 정식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 가족은 하나 의 전략이 아니라, 하나의 단순한 전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전략 이란 결연들과 부자관계들을 수단으로 사용하여, 사회 터전 전체에 자기 룰 열고, 이것과 의연을 같이하면서 이것의 좌표들을 재절단하는 것이요, 단순한 전술이란 사회 터전에 의하여 닫혀지고, 사회 터전의 재생산의 자율적인 요구들이 적용되어, 사회 터전의 모든 차원에서 사회 터전에 의하여 재절단되는 것이다. 결연과 부자관계는 이제 더 이상 인간을 경 유하지 않고 돈을 경유한다. 이렇게 되면 가족은 자기가 더 이상 지배하 지도 못하는 것을 표현하기가 일쑤인 소우주가 된다. 어느 모로는, 상황
이 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가족을 통해서 공급되는 것은 언제나 경 제적 • 정치적 • 문화적인 사회 터전이요, 이 사회 터전의 절단들과 흐름 들이기 때문이다. 사적 인물들은 하나의 감각, 심상들의 심상들 혹은 派 生物들의 파생물들이다. 그러나 다른 어느 모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왜냐하면 가족은 사회적 재생산의 지배적인 인자들을 구성하고 발전시키 지 않고, 이 인자들을 자기자신의 재생산 의식 속에 일치시키고 감싸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버지, 어머니, 아이는 지본의 심 상들의 환영(貸本氏, 大地夫人, 그리고 이들의 아이 勞動者)이 된다. 따라서 이 심상들은 이제 욕망 속에서는 전혀 찾이볼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욕 망은 이 심성들의 환영만을 공급한다. 가족적 규정들은· 사회적 공리계의 적용이 된다. 가족은 사회 터전의 집합이 적용되는 하부집합이 된다. 사 램回 사적인 자격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 하부집 합은 각자에 대하여 사회적 인물들의 전체 집합을 위장하여 이것을 각자 에게 배분하고, 이 사회적 인물들의 영역을 하나로 묶어, 이 인물들의 심 상들을 흐리게 한다. 모든 것은 아버지-어머니-아이의 삼각형에 포개지 고, 이 삼각형은 사람들이 자본의 심상들을 가지고 그것울 자극할 때마 다 〈아빠-엄마〉라고 대답하면서 반향한다. 요컨대, 오이디푸스가 도래한 다: 오이디푸스가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탄생하는 것은 첫째 차원의 사 회적 심싱들이 둘째 치원의 가족적 심상들에 일치하는- 데서이다. 그는 도달집합점이요, 이 집합점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출발집합점에 대응한다. 그는 우리들의 친밀한 식민지적 사회조직체요, 이 조직체는 사회적 주권 의 형태에 대응한다. 우리들은· 모두 작은 식민지들이요, 우리들을 식민지 화하는 것은 오이디푸스이다. 가족이 생산과 재생산의 단위이기를 그칠 때, 연접이 가족에게서 한갓 소바의 단위라고 하는 의미만을 다시 보게 될 때, 우리가 소비하는 것은 아버지-어머니이다. 출발집합점에는 보호 자, 족장, 사제, 경찰관, 세무관, 군인, 노동자 등, 모든 기계와 토지, 우 리들의 사회의 모든 사회적 심상들이 있다. 그러나, 도달집합점에는, 죽 국한게는, 이제 아빠, 엄마 그리고 나만이 있다. 죽 아빠가 물려받은 전 제군주기호, 엄마가 인수한 잔여의 토지, 그리고 분할되고 절단되고 거세
된 나만이 있다. 이렇게 포개고 접고 일치시키는 조작은, 적용된 공리계 인 정신분석의 비밀을 의도적으로 폭로한 라깡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 것이 아닌가: 〈 소위 정신분석의 대화라 하는 것에서 더 자유 로이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은 본질적이고 공식화할 수 있는 몇몇 分節에 완전히 환원될 수 있는 기반에 의존한다〉 .109) 모든 것은 미리 형성되고, 정리되어 있다. 각자가 거기서 언표의 공동의 동인 으로서, 생산과 반생산의 동인으로서 작용을- 끼치고 작용을· 받는 사회 터전은 오이디푸스에 포개진다. 이 오이디푸스에게서 각자는 이제 자기 의 모퉁이에 붙들려 있게 되어, 그를 개체적인 언표된 내용의 주체와 개 체적인 언표하는 행위의 주체로 분할하는· 線울 따리- 절단된다. 언표된 주체는 사회적 인물이요, 언표하는 주체는 사적 인물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네 아버지요, 그러므로 이것은 네 어머니요, 그러므로 이것은 너 다: 자본주의의 연접들이 사기업화된 인물들에게 적용되는 한에 있어서, 가족의 연접이 이 자본주의의 연접둘로부터 결과한다. 확실히 아빠-엄 마-니는 도처에서 재발견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그것에 일 치시켰기 때문이다. 심싱들에 의한 동치는, 자본주의가 분열둘을 이용하 여 흐름들을 偏向시키는 새로운 방식이다: 심상들을 혼합하고, 심성들· 위에 심상들을 포개는 조작은, 이 조작의 결과로 자기의 아버지-어머니 에 관계지어전 각자의 작은 나를 참으로 세계의 중심이 되게 하는 것을 목적삼고 있다. 대지의 物神들에 의한 지하의 통치나, 전제군주의 우싱들· 에 의한 천상의 통치보다도 훨씬 더 음험하게, 나르시스적인 오이디푸스 기계가 여기에 출현한다: 〈이제는 그립문자도 필요 없고, 상형문자도 필 요 없다……. 우리는 그야말로 현실적인 객관적 현실을 원한다……. 죽 코닥(카메라)의 착상을 원한다……. 각 남자, 각 여자에게 있어서, 우주 는 그 자신의 혹은 그녀 자신의 절대적인 작은 심상(그림)을 두르는 (사진) 틀에 지나지 않는다 ... …. 하나의 심상! 전세계에 널려 있는 스냅 사전 필름 속의 코닥의 스냅사전 한 장.〉 110) 삼각형화한 작은 소우주로서 109) J. Lacan, Lett re s de l'ecole freu die n ne, 7 mars lWO, p. 42. 110) D.H. Lawrence, Art et mora lite, 1925, tr. fr. in Eros et Les chie n s,
Ed . Bourgo i s , pp. 48-50( 혼합되고 울긋불긋한 심상으로서의 현대인의 〈實相〉 에 관하여는, cf. Ni et z s che, Zaroth o ustr a, II,
의 각자, 죽 나르시스적 지이는 오이디푸스적 주체와 하나가 된다. 결국은 오이디푸스……, 이것은 결국 이주 단순한 조작, 사실 쉽게 공 식화할 수 있는 조작이다. 이 조작은 세계사와 관계가 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정신분열증이 사회 전체의 절대적 극한인가를 보았다. 죽 그것 이 탈규준화하고 탈토지화한 흐름들을 통과시키고 이것들을 사회적 생산 전체의 〈극한에서〉 욕망하는 생산이 되게 하는 한에서 절대적 극한임을 보았다. 또 자본주의가 탈규준화한 흐름들을 공리계화하고, 탈토지화한 흐름들을 재토지화하는 한에서, 상대적 극한임을 보았다. 그래서 자본주 의는 정신분열증이 자기자신의 외적 극한임을 발견하고, 이것을 끊임없이 밀어내고 쫓아버리지만, 한편으로는 그 자신 자기의 내재적 극한들을 생 산하고는 이것을 끊임없이 옮겨놓고 확대시킨다. 그런데 지본주의는 옮 겨놓아진 내적 극한을 또 하나의 다른 방식으로 필요로 한다: 바로 절대 적인 의적 극한, 즉 정신분열중적 국한을 중성화하거나 밀어내기 위해서 는, 자본주의는 이번에는 그것을 구속하면서, 죽 더 이상 그것이 사회적 생산과 이 사회적 생산에서 이탈하는 욕망하는 생산 사이를 통과하지 못 하게 하면서, 그것을 내재화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사회적 생산의 내부 에 집어넣고, 사회적 재생산의 형태와 이것이 포개지는 가족적 재생산의 형태 사이를 사회적 집합과 이것이 일치하게 되는 사적인 하부집합 사이 를 통과하게 함으로써 내재화할 필요가 있다. 오이디푸스는 이 옮겨놓아 진 혹은 내재화된 극한이요, 욕망은 이것에 붙들린다• 오이디푸스 삼각형 은 친밀한 사적인 토지요, 이 토지는 자본주의의 사회적 재토지화의 모 든 노력에 대응한다. 오이디푸스가 사회조직체 전체에 대해서 옮겨놓아 전 극한인 것은, 이 옮겨놓아전 극한이 욕망의 옮겨놓아전 표상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시 조직체들에 있어서는 이 극한이, 할 일이 없는 채 로 있다. 이것은 흐름들이 규준화되고 또 결연과 부자관계의 상호작용이 대가족을 사회 터전을 규정하는 척도로서 유지하여, 사회 터전의 규정들
울 대가족 위에 이차적으로 포개는 것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전제 군주의 조직체들에 있어서는, 오이디푸스의 극한이 할 일을 가지고 있되, 상징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에 의하여 생활되고 체험되지는 않는 다. 이것은 황제의 근친상간이 초규준화를 조직하고 이 초규준화가 사회 터전 전체를 上空에서 사찰하기 때문이다(억제하는 표상작용) : 나중에 오 이디푸스에게 속하게 되는, 포개는 일, 外活法 등의 공식적 조작들은 이 미 윤곽이 집혀 있으나, 이것은 천상의 대상이 구성되는 상징적 공간에 서 되는 일이다. 오직 자본주의적 조직체에서만 오이디푸스의 극한이 비 단 할 일을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체험되기도 하고 생활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탈규준화한 흐름들에 의하여 산출된 사회적 심상들이 욕망에 의 하여 공급된 제한된 가족적 심상들에 실제로 포개진다고 하는 의미에서 이다. 오이디푸스가 구성되는 것은 바로 想像界의 이 時點에서인데, 이와 동시에 오이디푸스는 표상의 심층의 요소들 속에서 그의 이동을 완성한 다 : 옮겨놓아진 표상내용이 그대로 욕망의 표상표현이 된다. 그러므로. 이렇 게 되는 일 혹은 이 구성이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조직체들 속에서는 심 상의 모습들로는 이루어友]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상상적 인 오이디푸스는 이렇게 되는 일의 결과로 생기지, 이것의 逆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똥의 흐름이나 근친상간의 물결을 타고 도래하 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 돈 - 자본의 탈규준화한 흐름들을 타고 도래한다. 근친상간과 똥의 물결은 자본의 흐름들이 포개지거나 일치하는 이 사적 인 인물들을 몰아가는 한에서, 돈-자본의 탈규준화한 흐름들로부터 이차 적으로만 파생된다. (여기서 똥=돈이라고 하는 아주 일그러진 정신분석 의 방정식이 복잡하게 발생한다: 사실, 여기서 문제인 것은 탈규준화한 흐름들의 만남들 혹은 연점들의 체계, 죽 탈규준화한 흐름들 간에 파생 된 것들과 결과한 것들의 체계이다.) 오이디푸스의 개념 속에는 세 가지 상태 혹은 세 가지 기계의 요약이 있다. 왜냐하면 토지기계에서는 오이디푸스가 아무도 살지 않는 빈 극한 으로서 준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제군주기계에서는 오이디푸스가 상칭 적으로 점유된 극한으로서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의 개념은
자본주의기계의 상상적인 오이디푸스의 개념이 됨으로써만 그 온전한 모 습을 드러내고 현실화한다. 전제군주기계는 원시적 토지들을 보존하고 있었고, 자본주의기계는 原國家를 그 공리계의 두 극의 하나로 소생시키 고 있으며, 또 전제군주를 그 심상들 중의 하나로 삼고 있다. 이런 까닭 에 오이디푸스 개념은 모든 것을 긁어 모으며, 모든 것은 오이디푸스 개 념 속에서 다시 발견된다 . 이 오이디푸스 개념은 실로 세계사의 결과이 거니와, 이것은 자본주의가 이미 세계사의 결과라고 히는 독특한 의미 에서아다. 거기에서는 물신들, 우상들 십상들 및 환영둘이라고 하는 계열 전체가 있다: 토지의 물신들, 우성들- 혹은 전제군주의 상징들,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의 심상들에 의하여 다시 끌어들여지는데, 자본주의는 이 것들을 밀어붙이고 오이디푸스의 환영에 환원시킨다. 라이오스를 지연집 단의 대표자, 이오카스데를 토지 , 오이디푸스 자신을 전제군주로 보면, 〈지금까지 믿어져 온 모든 것을 합친 잡색의 그림 〉 이 성립한다. 프로이 트가 소포클레스 속에서 전제군주-오이디푸스라고 하는 중심적 심상, 죽 비극이 된 신화를 찾아가지고, 이것을 서로 반대되는 두 방향, 죽 『토뎀 과 터부』의 원시 의식의 방향과 꿈꾸는 현대인의 사적인 방향으로 放射 하려 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이디푸스는 하나의 신화, 하나의 비극, 하나의 꿈일 수 있다: 그는 언제나 극한의 옮겨놓음을- 표현하고 있다.) 접고 포개는 조작은 오이디푸스를 현대의 사회 터전에서 구성하 는 삼각형화의 원인인데, 만일 전제군주기계에 있어서 천상의 대싱이 상 칭적으로 정립됨으로써 이러한 조작이 가능하게 되지 않았더라면, 오이 디푸스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정신분석에 있어서 의 가장 깊이 있는 개혁자의 주장, 죽 옮겨놓아진 극한을 상칭계와 상상 계 사이, 상칭적인 거세와 상상적인 오이디푸스 사이로 동과시키려는 주 장이 국히 중요하지만 또한 규정할 수도 없고 확정할 수도 없는 것이라 고 하는 사태가 생긴다. 왜냐하면 전제군주 시니피앙의 질서 속에서의 거세는, 전제군주의 법률로서 혹은 천상의 대상의 효과로서, 사실상 오이 디푸스적 심상들의 正式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오이디푸스적 심상들은 시니피앙의 隱退에 의하여 드러나는 내재의 터전 속에서 펼쳐
진다. 내가 거세에 이를 때 나는 욕망에 도달한다……! 욕망-거세라고 하는 방정식은, 욕망을 전제군주의 법률 아래 다시 들어가게 하고, 그 가 장 깊은 곳에 결여를 끌어들이고 환상적인 후퇴를 통해서 우리를 오이디 푸스로부터 구출한다고 하는 굉장한 조작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의 미하는가. 환상적이고 천재적인 후퇴 : 라깡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기 〉 때문에, 오이디푸스의 멍에를 뒤흔들고 이 멍에를 그 자기비판에까지 인도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후퇴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레지스탕스를 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같다. 이 사람 둘은 비행장의 답을 파괴하려 하여 플라스틱의 폭약을 아주 찰 조합했으 므로 탑이 폭파되었지만 이 폭발에 의하여 생긴 구덩이에 탑이 다시 떨 어졌다. 상칭적인 것으로부터 상상적인 것에로의, 거세로부터 오이디푸스 에로의, 전제군주 시대로부터 자본주의에로의 전전에는 후퇴가 아니라 오히려 전진이 있다. 이 전전은 상공을 날며 초규준화하던 천상의 대상 이 은퇴하여, 내재하는 사회 터전에 자리를 양보하고 이 사회 터전에서 는 탈규준화한 흐름들이 심상둘을 출산하고 이것들을 포개게 한다. 여기 서 시니피앙의 두 양성이 생긴다 . 그 하나는 최고지점에 孤高하게 선 초 월적 대상의 양상인데, 이 대상은 결여를 분배한다. 다른 하나는 최저의 요소들의 관계들로 이루어지는 내재적 체계의 양상인데, 이 요소들은 드 러나게 된 사회 터전을 채우게 된다. (전통을 따라서 말한다면, 이것은 파르메니데스 Parmen i des 의 존재로부터 데모크리토스 Demokr it os 의 원 자들에로의 이행과 약간 비슷하다.) 더욱더 내재화하고 내면화하는 힘들의 장에 대하여, 초월적 대상은 더 욱더 靈化된다: 이와 같은 것이 무한한 부채의 발전이다-가톨릭교를 거쳐, 다음에는 종교개혁을 거쳐. 전제군주국가의 극단적인 靈化, 자본주 의의 터전의 극단적인 내면화는 양심의 가책이 무엇인지롤 명확하게 해 준다. 양십의 가책은 냉소주의에 반대되는 것이 'o} 니다; 그것은, 私的 人 物들에게 있어서, 사회적 인물들의 냉소주의의 相關項이다. 니체, 뒤이어 로렌스와 밀러 같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의 모든 냉소적 수법을 분석하 여, 유럽의 문명인을 정의하였다―一심상들이 군림하여 최면상태가 생기
고, 심상들을 통하여 무기력이 만연한다__생명에 대한 증오, 지유로운 모든 것과 지나가며 흘러가는 모든 것에 대한 증오; 죽음의 본능의 보편 적 전파-전염의 수단, 즉 흡혈귀의 입맞춤으로 이용되는 우울증 즉 죄책감 : 너는 행복한 게 부끄럽지 않니? 나를 본받아, 너도 〈 그건 내 잘 못이야 〉 라고 밀하기 전에는 나는 널 놓아주지 않을 거야, 오 우울자들의 더러운 만연, 다른 병들을 생기게 하는 유일의 병인 신경증――관용의 구조: 나는 속이고, 훔치고, 우려먹고, 죽였으면 좋겠다! 그러나 사회의 질서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으면! 그리고 아빠-엄마가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면 한다――회한에 주어지는 이중의 방향, 하나는 자기에게로 다 시 향하고, 다른 하나는 남에게 두사된다: 아버지는 죽었다, 그건 내 잘 못이다, 누가 아버지를 죽였지? 그건 네 잘못이야, 그건 유태인이야, 아 랍인이야, 중국인이야, 인종적 편견과 인종차별의 모든 원천―—사랑받고 싶어하는 비열한 욕망, 충분히 사랑받고 있지 못하다, 〈 이해되고 〉 있지 않다는 넋두리, 동시에 성욕이 〈더러운 작은 비밀 〉 에 환원된다, 이것은 모두 성직자의 심리학이다-이 수법들 중의 어느 하나도 오이디푸스 개 념에서 그 양분과 영양을 찾아내지 않는 것이 없다. 또 이 수법들 중의 어느 하나도 정신분석 속에서 봉사하고 발전하고 있지 않는 것은 없다: 정신분석은 〈금욕의 이상 〉 의 새로운 화신이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오이디푸스를 발명하는 것은 정신분석이 아니다: 정신분석은 오이디푸스 에게 최후의 토지, 죽 소파를, 최후의 법률로서, 전제군주적 분석가요 돈 울 거두어들이는 자로서 줄 따름이다. 자본주의가 다른 사회조직체들에 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조작을 행하는 한에서, 토지의 환영인 어머니, 전제군주의 법률의 환영인 아버지, 그리고 절단되고 쪼개지고 거세된 나 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자본주의 이의의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가족의 입장은 욕망에 의한 사회 터전의 공급을 자극하는 것이다: 가족적 심상 둘은 사회적 심싱들에 대하여 자기를 엷으로써만 작동하는데, 두쟁하고 타협하는 과정에서 전지는 후자와 혹은 결합하고 혹은 대결한다. 따라서, 가족들의 절단들과 선분들을 통하여 공급되는 것은 가족들이 던져져 있 는 사회 터전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철단들이다(느뎀부족에 관한 정신
분열자 분석을 참조할 것). 이러한 사태는 자본주의의 주변지대들에 있어 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지대들에 있어서는, 토착민을 오이디푸스화하려 는, 즉 아프리카인 오이디푸스를 만들려는 식민자의 노력은, 사회적 착취 와 사회적 압제의 노선을 따라 가족이 붕괴됨으로써 반대에 부딪힌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만만한 중심에서는, 즉 온건한 부르주아들의 지역들 에서는 식민지가 각자에게 친밀하고 사적인 것, 즉 내적인 것이 된다: 이렇게 되면 욕망의 공급의 흐름은, 본래 가족적 자극으로부터 사회를 조직하는 (혹은 파괴하는) 방향으로 흐르는데, 여기서는 이를테면 사회 적 공급을 擬似 組織者인 가족적 공급에 포개는 還流에 의하여 다시 덮 어져 자취를 감추게 된다. 가족은 모든 사회적 규정이 메아리치고 반향 하는 장소가 된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어디서나 이제는 아버지-어머니밖 에 볼 수 없게 하기 위하여, 모든 사회적 심상들을 제한된 가족의 환영 들에 일치시키는 것이 자본주의의 사회 터전의 반동적 공급에 속한다: 이것은 우리의 피부에 달라붙는 오이디푸스적 부패이다. 그렇다, 나는 내 어머니를 욕망했고 내 아버지를 죽이기를 원했다; 자본주의의 모든 언표 내용에 대해서, 언표행위의 유일의 주체는 오이디푸스이다. 이 언표내용 과 연표행위 사이에 포개는 일의 절단, 죽 거세가 있다. 마르크스는 말하였다: 루터의 공적은 종교의 본질을 대상의 측면에서 가 아니라, 내면적인 종교감정으로서 규정한 것이요; 아담 스미스와 리 카도 R i cardo 의 공적은 부의 본질 혹은 본성을 더 이상 객관적 본성으 로서가 아니라, 추상적이고 탈토지화한 주관적 본성, 죽 생산활동 일반으 로서 규정한 것이다라고. 그러나, 이 규정은 자본주의의 조건들 안에서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스미스와 리카도는, 생산수단들의 사유재산이라고 하는 형태 아래, 이 주관적 본질을 다시 대상화하고 소의하여 재토지화 하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아마 모든 사회에 보편적인 것이지만, 이 것은 자본주의가 어느 접까지 자기자신을 비판할 수 있는 한에서만이다. 죽 자본주의 속에서 해방되거나 자유로이 나타나려 하고 있던 것을 자본 주의가 다시 얽어매는 수법들을 비판할 수 있는 한에서만이다 .Ill) 프로이 111 ) Marx, Intr o ducti on gen erale a la criti qu e de l' economi e po liti qu e, Pleia d e, I,
pp. 258-261.
트에 대해서도 똑같은 것을 말해야 한다: 그의 위대함은 욕망의 본질이 나 본성을, 더 이상 대상들, 목표들 및 심지어 원천들(영역들)에 관계시 키지 않고, 추상적인 주관적 본질, 죽 리비도나 성욕으로서 규정한 것이 다. 다만, 그는 이 본질을 역시 私的인 인간의 최후의 토지인 가족에 다 시 관계시키고 있다. (여기서 처음에는 『性怒理論에 관한 세 논문 』 에서 橘腦 位쭙에 있던 오이디푸스가 다음에는 더욱더 욕망을 둘러싼다.) 모 든 것은 마치 프로이트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성욕에 관한 자기의 심 원한 발견을 변명하는 듯이 경과하고 있다: 적어도 그것은 가족 밖으로 는 나가지 않을 것이다! 어령풋이 보였던 크고 넓은 공간 대신에, 더러 운 작은 비밀이 나타난다. 욕망의 환류 대신에 가족주의의 포개는 일이 나타난댜 탈규준화한 큰 흐름들 대신에, 엄마의 침대 속에서 재규준화되 는 작은 시냇물. 바깥과의 새로운 관계 대신에 내면성. 정신분석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양십의 가책과 죄책감에 관한 이야기가 목소리 를 크게 하고 자기의 영양(병이 나았다고 사람들이 부르는 것)을 얻는다. 그래서,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는, 프로이트가 의적인 현실적 가족을 모 든 과오로부터 해방시켜, 과오와 가족을 가장 작은 멤버, 죽 어린이 속에 더 찰 내면화하고 있다. 두 가지 점의 하나는 그가 억압에서 독립해 있 는 자율적 억제를 정립하고 있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성인에 의하여 어 린이가 유혹된다고 하는 주장을 포기하고, 그 대신에 실제의 부모가 아 무 죄도 없거나 혹은 심지어 피해자다라고 하는 개인적 환상을 내세우고 있는 점이다 .112) 왜냐하면 가족은 다음의 두 형태로 나타나야만 하기 때 문이다: 하나는 가족에게 아마도 죄가 있겠지만, 이것은 다만 어린이가 가족을 깅렬하게 내면적으로 살고 또 가족이 어린이 자신의 죄와 일체를 이루는 형태요, 다른 하나는 가족이 책임의 결정기관으로 머물고, 이것 앞에서는 사람들이 죄 있는 어린이요 또 이것에 대하여는 사람둘이 책임
112) 에리히 프롬은, 특히 작은 한스 Hans 의 분석에 관하여 프로이트가 어린이의 최책감을 정립하고 부모의 권위를 용서하는 방향으로 더욱 더 분명히 나아간 것 울 찰 밝혔다 : La Crise de la psy ch 야 al y se, tr. fr. Anth r op o s, pp. 79-82, 126-132.
있는 어른이 되는 형태이다. (병으로서의 오이디푸스와 건강으로서의 오 이디푸스, 소의의 인자로서의 가족과 탈소의의 동인으로서의 가족은, 가 족이 郞靑轄移에 의하여 재구성되는 방식에만 달려 있다.) 이것은 푸꼬가 그의 저서에서 아주 훌륭하게 밝힌 것이다: 정신분석에 본질적으로 속해 있는 가족주의는 고전적인 정신의학을 파괴한다기보다 오히려 이것에 왕 관을 씌워준다• 대지의 광인과 전제군주인 광인 다음에는 가족이라고 하 는 광인이 나타난 셈이다; 1 양1 ] 기의 정신의학이 정신병원 속에서 조직하 고자 했던 것-~〈가족이라고 하는 강제력을 가전 허구〉, 아버지의 이성 과 미성년자인 광인, 그들 자신 어린 시절부터만 병들어 있는 부모 __ 이 모든 것은 정신병원 밖에서, 즉 정신분석과 분석가의 진찰실에서 완 성된다. 프로이트는 정신의학의 루터요 아담 스미스이다. 그는 신화, 비 극, 꿈의 모든 자료를 동원하여, 욕망을 내면에서 다시 얽어멘다. 죽 내 면의 극장을 만들어낸다. 그렇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욕망의 보편적인 것이요, 세계사의 산물이다__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는데, 프 로이트는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 조건이란 오이디푸스가 적어도 어느 점까지는 자기비판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세계사가 그 우연성, 그 특이성, 그 아이러니와 그 자신의 비판의 조건들을 채취하 지 못한다면, 세계사는 하나의 신학일 따름이다. 그런데 이 조건들, 이 자기비판점은 무엇인가? 가족에 포개는 일 밀에 무의식의 사회적 공급들 의 본성을 발견하는 것. 개인적 환상 밀에 집단의 환상들의 본성을 발견 하는 것. 혹은, 결국은 같은 것이지만, 환영이 심상의 십상이기를 그치는 접까지 환영을 밀어붙여, 환영이 숨기면서 包藏하고 있는 추상적인 형상 들, 죽 분열들-흐름들을 찾아내는 것. 한갓 인물의 심상들의 두 차원에 지나지 않는 연표행위의 주체와 언표내용의 주체로 갈라전 거세된 사적 주체를 그들 나름으로 기계를 움직이는 동인이 되는 집단의 동인들로 바 꾸어놓는 것. 표상의 극장을 욕망하는 생산의 질서 속에 다시 옮겨놓는 것 : 이런 것들이 모두 정신분열자-분석의 과제이다.
제 4 장 정신분열자-분석 서론
1 사회 터전 어느 것이 먼저인가, 암닭이냐 달걀이냐, 또 아버지와 어머니인가 그렇 지 않고 아이이냐? 정신분석은 마치 아이가 먼저인 듯이 말하고 있다. (아버지가 병드는 것은 그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만이다•) 그러나 정신분 석은 동시에 부모가 먼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아 이가 아이인 것은 오직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관계를 통해서만이다.) 이것은 유목민의 아버지를 근원적인 것으로 정립하는 일에서 잘 볼 수 있는 일이다. 아이들에 대하여 부모의 신분을 확인하는 일이 없으면 오 이디푸스는 그 자신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또 모든 것이 아버지의 머릿 속에서 시작된디는 것을 숨길 수도 없다: 네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거 지, 나를 죽이고 네 어머니와 동침하는 것이지? ……이것은 먼저 아버지 의 생각이다: 그래서 라이오스가 등장한다. 지옥의 소란을 일으키고, 법 률을 휘두르는 것은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오히려 상냥스럽다: 어머 니에 관한 이야기를 지으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의 꿈, 하나의 土地이 다…….) 레바-스드쿠스는 썩 찰 말하고 있다: 〈문제되고 있는 신화의 최초의 동기는 어머니와의 근친상간 속에 있다. 이 근친상간으로 말미암 아 영웅은 죄 있는 자가 된다. 하지만, 이 죄책감은 특히 아버지의 정신 속에 있는 듯이 보인다. 아버지는 자기의 아들의 죽음을 욕망하고 어떻 게 죽일까 궁리하고 있다……. 결국, 아버지가 죄 있는 유일의 인물이 다: 복수하고자 했기 때문에 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살해된 다. 근친상간에 대한 이 기묘한 무관십은 다른 신화들에도 나타나 있
다.〉“ 오이디푸스는 신경증의 어린 시절의 감정이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편집병에 걸려 있는 어른의 관념이다. 그래서 정선분석은 다음·과 같은 무 한소급에서 좀처럼 떠날 수가 없다: 아버지는 아이여야 했지만, 아버지 에 대해서만 아이일 수 있었고, 또 이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자신이 아이였다.
1) Levi- St r a uss, Le Cru et le cuit , Plon, 1964, p. 56.
妄想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영화가 광기의 운동을 파악하는 능력을 가 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분석적이 고 소급적인 것이 아니라, 공존의 전체적인 場을 탐색하기 때문이다. 니 콜라스 레이 Ni co las Ra y의 한 영화는 코티슨 Cor ti son 에게서 보는 바 와 같은 망상의 형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과로한 아 버지요 대학 교수인 그는 남은 시간을 無線택시의 주차장에서 일하고 있 는데, 심장병의 치료를 받고 있다. 그는 교육체계 일반, 純血人稽 再興의 필요성, 도덕적 • 사회적 질서의 구원에 관하여 망상하는· 일부터 시작하 여, 그 다음에는 종교로 넘어가, 聖書에로 돌아갈 時機 아브라함에 관하 여 떠들어댄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무엇을 했는가? 아뿔싸, 바로 그는 자 기의 아들을 죽였거나 죽이고자 했다. 그리고 그의 팔을 멈추게 한 것은 神의 유일의 과오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인 그는 자신도 아들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아뿔싸, 아뿔싸…… 이 영화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정신의학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 죽 모든 망상은 무엇보다도 먼 저 사회 터전, 죽 경제적 • 정치적 • 문화적 • 인종적 및 안종차별적 • 교육 적 • 종교적 터전의 공급이라고 하는 것이다 : 이 妄想者는 모든 면에서 자기의 가족과 자기 아둘의 범위를 넘는 망성을 자기의 가족과 자기 아 들에게 적용하고 있다. 요제프 가벨 Jos ep h Gabel 은, 강렬하고 정치적 에로틱하고 고도로 사회개혁의 내용을 가전 편집병적 망상을 제시하면 서, 이런 症例는 어디까지나 드물고, 또 그 원인들은 재구성할 수가 없다 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신의학과 정신분석의 믹서 속
2) Jo sep h Gabel, MDeli re po li tiqu e chez un pa rno1de, L'Euoluti on psy- chia triqu e, n°2, 1952.
에서 짓눌러져 가루가 되기 전에는, 이러한 성격을 고도로 지니고 있지 않는, 그리고 근원적으로 경제적, 정치적 등등이 아닌 망상은 하나도 없 다. 슈레버는 이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판기므나스티콘 Pan gym nas ti con 과 일반 교육체계의 창안자인 그의 아버지도 역시 그럴 것이 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달라진다: 무한한 소급은 아버지의 우위를 우 리에게 억지로 전제하게 했지만, 이 우위는 언제나 상대적이고 가정적인 것아다; 이 우위는, 절대적으로 최초인 아버지의 자리에까지 뛰어오르지 않는 한, 우리를 무한히 거슬러 울라가게 한다 . 그러나 소급의 관점이 추 상의 산물임은 분명한 일이다. 우리가 〈 아버지는 아이보다 먼저다 〉 라고 말할 때, 이 명제는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디음과 갇 은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공급둘은 가족적 공급들보다 먼저요, 후자는 전자의 적용 혹은 포개는 일에서만 생긴다. 아버지가 아이보다 먼저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은 욕망의 공급이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 터전의 공급 이요, 아버지와 아이는 이 사회 터전 속에 동시에 던져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카디너가 분석한 마르케사스인들의 실례를 다시 생각해 보자: 그는 풍토성의 기근에 결부된 성인의 식량 불안과, 모친의 돌봄의 부족 에 결부된 식량 불안을 구별한다 .3) 전자를 후자로부터 파생시킬 수 없을 뿐더러, 카디너가 생각한 것처럼, 전자에 대응하는 사회적 공급이 후자의 어린 시절의 가족적 공급 E 움에 있게 된다고 볼 수도 없다. 왜냐하면 후자 속에 공급되는 것은 이미 사회 터전의 하나의 규정, 죽 여성들의 희소성이기 때문이다• 이 희소성은 어른들도 어린이들 못지않게 〈여성둘 울 경계한다 〉 는 것을 설명한다. 요컨대, 어린이가 어린 시절의 경험, 죽 모친의 가슴과 가족의 구조를 통해서 공급하는 것은 이미 사회 터전 전 체의 절단들과 흐름들, 죽 여성들과 식량의 흐름, 등록들과 분배들이다. 결코 어른이 어린이 다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가족 안에서 이 양자는 다 겉이 사회 터전의 규정들을 겨냥하고 있으며 이 사회 터전 3) Abram Kardin e r, The Indiv id u al and his Socie ty , Columbia Un ive rsit y Press, 1939, pp. 223 s q.(어린이로부터 어른으로 혹은 어른으로부터 어린이에 로의 두 길이 가능한 데 관하여는, cf. Les commenta ire s de Mi ke l Du- fren ne, La Personnalite ' de base, P.U. F. , 1953, pp. 287-320).
안에 가족과 어른과 어린이는 동시에 잠겨 있다. 여기서 세 가지 결론을 주장할 필요가 생긴다. 1) 가설적인 의미밖에 지니지 않는 소급의 관점에서는, 아버지가 아이보다 먼저이다. 아들을 오 이디푸스화하는 것은 편집병자인 아버지이다. 죄책감은, 아들이 체험하는 내면적인 감정이기 이전에, 아버지에 의하여 투사된 관념이다. 정신분석 의 첫째 과오는 마치 사태가 아이와 더불어 시작된 듯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분석으로 하여금 환상에 관한 부조리한 이론을 전개 하게 한다. 이 이론에 의하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이들의 실제의 행 동과 정념은 무엇보다도 먼저 아이의 〈환상들〉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프로이트는 부모가 아이룰 유혹한다는 주장을 버렸다.) 2) 소급을 절대 적인 의미에서 받아들이면 그것은 부적절한 것임이 분명한데, 이것은 소 급이 우리를 단순한 재생산이나 생식 속에 가두어놓기 때문이다. 또, 기 관들을 가지고 있는 신체들과 유기적 조직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에게 있 어서도, 이러한 절대적 소급은 재생산되는 대상에 도달할 따름이다. 오직 순환의 견지만이 定言的이고 절대적이다• 왜니하면 이 관점은 재생산의 주체인 생산에, 죽 무의식의 지동-생산의 과정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역사와 자연의 통일, 자연인 Homo na t ura 과 역사인 Homo h i s t or i a 의 통일.) 물론 성욕이 생식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고, 전전적인 혹은 소급적 인 생식이 순환운동으로서의 성욕에 봉사한다. 이 순환운동을 통해서 무 의식은 언제나 〈주체〉로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자신을 재생산한다. 그렇 다면 아버지가 먼저인가 그렇지 않고 아이가 먼저인가 하는 것은 물을 필요가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물음은 가족주의의 툴 안에서만 제기되기 때문이다. 아이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먼저이지만, 이것은 다만 가족적 공급에 대해서는 사회적 공급이 먼저이기 때문에만 그런 것이요, 또 사회 터전의 공급이 먼저이기 때문에만 그런 것인데, 아버지, 아들, 하부집단인 가족은 이 사회 터전에 동시에 던져져 있다. 욕망의 공급의 약속의 땅인 사회 터전의 우위가 순환 및 한 주체가 경험하는 상태들을 규정한다. 정신분석의 둘째 과오는, 그것이 성욕과 재생산을 아주 분리시 켰을 때에도, 여전히 완미한 가족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점이다. 이 가족
주의가 정신분석으로 하여금 소급이나 전전의 운동에서만 일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반복이라고 하는 정신분석의 생각도 여전히 이러 한 운동에 사로집혀 있다.) 3) 끝으로, 공동체의 관점은 離接的이다. 즉 순환에 있어서의 이집들을 설명해 준다. 비단 생식만이 순환에 대하여 이차적이어서 나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遠傳이 정보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는 이차적이다. 정확히 말해서 흐름의 유전은 없고, 흐름들에 정보 를 전달하는 규준이나 공리계, 즉 결합장치의 커뮤니케이션이 있을 따름 이리는 것이 발견되었을 때 遺傳學의 혁명이 이루어졌다. 사회 터전에 있어서도 사태는 마찬가지이다: 그 규준화나 그 공리계는 무엇보다도 먼 저 사회 터전 안에서 무의식들의 커뮤니케이션을 규정한다. 프로이트는 神秘術울 고찰하는 중에 이 커뮤니케이션의 현싱을 부수적으로 만났는데, 이 현상은 사실은 규범이 되는 현싱이요, 프로이트와 융의 논쟁의 불씨 가 된 世襲的 迫傳의 문제들을 뒷자리로 밀어내는 현성이다.4) 공동체의 사회 터전에서는, 아들이 억제하는, 혹은 억제해야 하는, 혹은 억제하려 하는 첫쨋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의식으로 보인다. 이 억제에 실패하~근 것이 신경중들의 기반이다. 그러나 부모와 아들의 무의식 간의 커뮤니케 이션은 원칙적으로 결코 가족에서 행해지지 않고, 원칙적으로 공급의 대 싱인 한에서의 사회 터전의 공동체 안에서 행해진다. 모든 점에서 보아, 가족은 결코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규정되기만 하는 것이다 . 첫째로는 출발점의 자극으로서, 그 다음에는 도달집합점으로서, 끝으로는 커뮤니케 이션을 중개 혹은 방해하는 것으로서 규정될 따름이다. 만일 가족적 공급이 사회 터전의 무의식적 공급들에 의존하거나 이 공 급둘의 적용일 따름이라면-그리고 이것이 어른에 못지않게 어린이에 대해서도 참이라면; 어린이가, 엄마인 토지, 아빠인 법률을 통해서 이미 사회 터전의 분열들 및 규준화되었거나 공리계화된 흐름들을 지향한다는 것이 참이라면_-우리는 이 (사회적 공급의) 영역의 한복판에 본질적 4) 역시 神秘術의 부수적인 현상들이라고 하는 견지에서이기는 하지만, 무의식들의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는 먼저 스피노자에 의하여 볼링 Ball i n g에게 보낸 편지 17 에서, 그 다음에는 마이어츠 M y ers, 제임스, 베르그송 등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차이를 보여주는 금을 그어야 한다. 망상은 무의식적인 사회적 공급 전 체의 子宮 일반이다. 무의식적 공급 전체는 脫供給하며, 逆供給하며 超供 給하면서 망상하는 작동을 동원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사회 적 공급의 두 가지 큰 型, 즉 망상의 두 極인, 분리차별형과 유목형이 있 음을 보았다: 전자는 파시즘화하는 편집병적인 형 내지 극이다. 이 형은 중앙주권의 조직체를 공급하며, 이 조직체를 역사상의 다른 모든 사회형 태들의 영원한 목적으로 삼고서 이 조직체를 초공급하며, 욕망의 자유로 운 형상 전체를 탈공급한다__그렇소, 나는 당신들과 한패요, 상류사회 에 속해 있고 우등 인종의 피를 이어받았소• 후자는 혁명적-정신분열증 적인 형 내지 극이다. 이 형은 욕망의 도주선을 따라가며, 벽을 뚫고 지 나가 흐름들을 통과시키며, 자기의 기계들과 자기의 융합집단들을 외딴 곳들이나 변두리에 설치하는데, 이런 일은 전자와는 거꾸로 일을 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들 축에 들지 않아요, 나는 영원히 열등인종에 속해요, 나는 침승이요, 껌둥이에요. 성실한 사람들은, 도망 가서는 안 됩니다, 그 전 좋지 않아요, 소용도 없고요, 개혁하려면 열심히 일해야 합니디라고 말한다. 그러나 혁명가는, 도망 가는 것이 체계의 식탁보를 잡아당기고 체계의 한 끝을 도망 가게 하는 것이기만 하다면, 도망 가~근 것은 혁명 적인 일이요, 철수 wi thd rawal, 변덕 fr eaks 도 혁명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존 브라운J ohn Brown 식으로 스스로 껌둥이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해도, 벽을 뚫고 지나가야 한다. 조르쥬 잭슨 George J ackson 은 말 한다 : 〈내가 도망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도망 가는 도중 내내 나는 무기를 찾는다!〉 아마도 무의식에는 놀라운 진동, 망상의 한 극에서 다른 극에로 왔다갔다하는 전동이 있다: 가끔 최악의 고풍주의둘 의 한복판에서도, 뜻밖의 혁명적인 힘이 발산되기도 하고, 거꾸로, 그것 이 파시즘으로 향하거나 파시즘에 빠져버려, 다시 고풍주의에 되돌아가 기도 한다. 문학의 예에서만 본다면, 셀린느 Cel i ne 의 경우, 이 위대한 망 상자는 아버지의 편집병과 더욱더 깊이 사귀는 중에 망성을 진전시킨다. 케루악의 경우, 가장 간결한 수단들을 구사하는 이 예술가는 혁명적인 〈도주〉를 했지만, 위대한 아메리카라고 하는 큰 꿈을 다시 품게 되고,
마침내는 우등인종인 브르따뉴의 자기의 조상을 찾는다. 아메리카 문학 의 숙명은 경계지대들과 프런티어들을 뛰어넘고, 욕망의 탈토지화한 흐 름들을 통과시키지만, 또한 언제나 이 흐름들로 하여금 파시즘화하며, 도 덕화하며 퓨리턴적이고 가족주의적인 토지들을 휩쓸어가는 것이 아닌가? 무의식의 이 전동들, 리비도의 공급의 한 형으로부터 다른 형에로의 이 은밀한 이행들이야말로, 가끔 이 두 가지가 공존하기는 해도, 정신분열 자-분석의 주요한 대상들 중의 하나이다. 아르또는 이 두 극을 무정부주 의자-헬리오 7} 발루스라는 마술적 공식으로 결합시키고 있다. 이 공식 은 〈인간의 모든 모순, 원리에 있어서의 모순의 심상〉이다. 그러나 어떠 한 이행도 유목생활과 인종차별이라고 하는 두 형 사이의 본성상의 차이 를 막거나 없애지 못한다• 우리가 이 차이를 편집병과 정신분열증을 가 르는 차이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정신분열증의 과 정(〈돌파〉)과, 이 과정을 방해하거나 중지시키는 우연한 사건들 및 퇴조 들(〈좌절〉)을 구별한 때문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편집병을 정신 분열증 못지않게 가족적인 擬似 病因 전체와 무관한 것으로 보고, 이 양 자를 사회 터전에 직접 관계시켰기 때문이다. 즉 이 양자를 역사상의 이 름들에 관련시켰지, 아버지의 이름에 관련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가족적 공급들의 본성은 사회 터전의 절단들과 흐름들에 의존한 다. 이 절단들과 흐름들은 공급의 형이 다름에 따라 각기 다른 극에서 공급된다. 따라서 어린이는 아버지-어머니의 슬하에서 경제, 금융, 사회, 문화의 문제들을 파악하기 위하여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 문제들은 가족을 꿰뚫고 있다. 어린이는 우등인종이 아니면 열등인종에 속해 있고 혹은 속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가족집단은 반동적인 성 향이 아니면 혁명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어린이는 가족집단과 함께 이미 그의 결렬과 순응을 준비하고 있다. 가족은 이 무슨 수프, 무슨 코 아세르베이트 0 인가. 가족은 소용돌이처럼 휘저어지고, 이 방향 저 방향으 로 끌려가, 밖으로부터 가족을 꿰뚫고 들어가는, 성질이 전혀 다른 지시 둘을 따라 오이디푸스의 세포가 가족에 달라붙어 그 鑄型을 누르기도 (i) coacervat.
하고 누르기에 실패하기도 한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이디푸스 란 개념이 생기는 것은 이것이 인물들의 심상들에 적용되거나 포개짐으 로써인데, 이렇게 되는 것은 편집병형의 사회적 공급을 전제한다는 것이 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무엇보다도 먼저 편집병에 관하여, 가족의 이야 기와 오이디푸스를 발견하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편집병의 한 潟領이다. 한편 정신분열증적 공급은 가족에 대한 전혀 다른 규정을 요구한다. 다 시 닫히지도 않고 포개지지도 않는 사회 터전의 차원들을 따라 헐떡거리 며 갈기갈기 찢긴 가족이라는 규정을 요구한다. 이 가족은 탈인물화한 부분적 대상들을 위한 지궁-가족인데, 부분적 대상들은 역사적 우주의, 역사적 혼돈의 때로는 격류를 이루고 때로는 물이 마르는 흐름들 - 속에 뛰어들고 또 거듭 뛰어든다. 정신분열증의 자궁의 갈라전 톰은 편집병적 인 거세에 대항하며, 도주선은 〈푸른 선〉(우울증)에 대항한다. 오오 어머니, 안녕 긴 검은구두를신고 안녕 공산당과 함께 찢어진 스 E~ 을 신고…… 당신의 축 늘어진 부른 배를 부등켜안고 히틀러를두려워하면서 입으로는 서툰 농담을 하면서…… 스트라이크를 한 듯 공장 굴뚝 같은 배를 부등켜안고 턱으로는 트로츠키와 스페인 내란을 이야기하면서 썩다시피 지친 노동자들을 위하여 노래하는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눈 당신의 눈은 러시아의 눈 돈 없는 당신의 눈…… 당신의 눈은 굶주린 인도의 눈……
당신의 눈은 로봇들이 공격한 체코슬로1::t P| 아의 눈…… 순경들이 야전병원으로 데려다 준 당신의 눈 수술대에 묶인 당신의 눈 췌장이 七形令된 당신의 눈 유산한 당신의 눈 전기 쇼크를 받은 당신의 눈 뇌엽 절제수술을 받은 당신의 눈 이혼당한 당신의 눈… … 5)
5) Allen Gi ns berg, Kaddis h , 1967, tr. fr. Bourgo i s , pp. 61-6 3.
왜 파라노이아p arano i a( 偏約丙)와 스끼조프레니 Sc hi zo phren i e( 정신분 열병)라고 하는 낱말들은 말하는 새들 그리고 젊은 아가씨들의 이름들 같은가? 왜 사회적 공급들은 이것들에 그야말로 망상하는 (역사를 망상 하는) 내용을 주는 분수령의 선을 따라가는가? 이 선은 무엇으로 되어 있으며, 어떻게 이 선 위에서 정신분열증과 편집병을 규정할 것인가? 우 리는 모든 일이 기관둘 없는 신체 위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기관들 없는 신체는 이를테면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엘리아스 카네 티 El ias Cane tti는 어떻게 편집병자가 대중과 〈사냥개의 떼 〉를 조직하 는가를 잘 밝혔다. 편집병자는 이 양자를 결합시키고, 대립시키고, 조종 한다 .6) 편집병자는 대중을 기계처럼 움칙이게 한다. 그는 큰 덩치, 죽 통 계학적인 조직체들이나 떼거리들, 조직된 군중의 현상들을 다루는 예술 가이다. 그는 모든 것을 큰 數의 형태로 공급한다. 전두가 있었던 날 저 녁에 로렌스 Lawrence 대령은 사막의 충만한 신체 위에 젊은 사람들의
6) Eli as Canett i, Masse et pu is s ance, 1960, tr. fr. Gallim ard, p. 460 : 〈네 종류의 財産이 그의 마음속에서 작용하고 있다: 그의 군대, 그의 돈, 그의 晟體 둘 그리고 그의 首都를 거느리고 있는 宮廷이 그것이다. 그는 항상 이것들을 가 지고 일을 꾸민다: 이들 중의 하나가 다른 것을 희생시켜 가면서 커진다……. 그가 무슨 일을 企圖하든, 그는 언제나 이 재산들 중의 하나를 보존하도록 조처 한가. 어떤 경우에나, 그는 죽이는 일을 단념하지 않는다. 그의 宮殿 앞에 쌓아 올린 시체들은 하나의 永久한 機情기다•〉
벌거벗은 시체들을 줄지어 늘어놓는다. 법원장 슈레버는 그의 몸에 작은 사람들을 수천이나 달리붙게 한다. 물리학의 두 방향 중에서, 즉 큰 수들 과 군집현상들로 향하는 큰 덩어리의 방향과, 이와 반대로 특이체들, 이 것들의 상호작용과 이것들이 거리를 두거나 차원을 달리하면서 연결되는 일들에 몰두하는 분자적 방향 중에서, 편집병자는 전자를 선택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는 마크로 macro- 物理學을 일삼고 있다. 이에 반하여 정신분열자는 다른 방향, 죽 미크로mi cro- 物理學의 방향을 간다. 이 방 향은 더 이상 통계적 법칙들을 따르지 않는 한에서의 분자들의 방향이 다; 더 이상 큰 수들과는 관계가 없는 파동들과 미립자들, 흐름들콰· 부 분적 대상들을 향하는 방향이다. 큰 집합들을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無 限小의 도주선이다. 이 두 차원을 집합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으로서 대 립시키는 것은 아마 잘못일 것이다. 한편으로, 미크로-무의식은, 그 조정 들이 독자적인 형의 것이기는 하지만, 조정들, 연결들 및 상호작용들을 적지않게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개별적인 인물들의 형태는 미크로 무의식에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크로-무의식은 부분적 대상들과 흐름들만을 알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인물들의 형태는 큰 덩어리를 이루 는 무의식 죽 미크로-무의식의 통계학적 분배의 법칙들에 속한다. 프로 이트가 무의식 속에서는 모든 것이 주민의 문제디라고 말했을 때, (또, 다양한 것들을 고찰하는 중에 정신병의 칭후를 보았을 때,) 그는 다윈주 의자, 신다윈주의자였다.” 그러므로 오히려 두 종류의 집합 혹은 주민, 죽 큰 집합들과 미크로-다양성들을 구별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 두 경우에, 공급은 집합적이요, 집합적인 터전의 공급이다; 단 하나의 입자 도 흐름으로서 결부된 파동을 가지고 있는데 이 흐름이 이 입자의 현전 들과 공촌하는 공간을 규정한다. 모든 공급은 집합적이요, 모든 환상은 집단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들은 현실을 정립한다. 그러나 공급의 두 형은, 한 쪽이 분자들을 자기에게 종속시키는 큰 덩어리를 이루는 구조 7) 〈무의식〉에 관한 191 :M의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정신병은 작은 다양한 것들 올 介入시 7'] 는데, 이에 반하겨 신경증에는 전체적안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예컨대, 구멍의 多樣性이 그런 것이다(그러나 이 정신병적 현상을 프로이트는 言語的인 表象能力만을 끌어들여 설명하고 있다).
둘을 대상으로 삼고, 이에 반하여 다른 한 쪽이 군집의 구조화된 현상들 을 자기에게 종속시키는 분자적 다양성들을 대상으로 삼는 데 따라 근본 적으로 구별된다. 한 쪽은, 주권의 형태를 취하고 있을 때나 군집의 집합 인 식민지적 조칙체들에 있어서나, 사람들의 욕망을 억누르고 억제하 는 〈예속-집단〉의 공급이요, 디른 한 쪽은, 분자적 현상으로서 욕망을 가지고 있는 횡단적 다양성들 속에서의 〈주체-집단〉의 공급이다. 분자 적 현상이란 부분적 대싱들과 흐름이요, 이것은 집합들과 인물들에 대립 히는것이다. 사실, 사회적 공급들은 충만한 신체인 한에서의 사회체 자체 위에서 행해지며, 이 공급들의 각각의 극은 필연적으로. 이 사회체, 죽 대지, 전 제군주 혹은 돈-자본의 성격이나 〈모양〉에 관계된다. (각 사회기계에 대하여, 편집병와 정신분열증의 두 극은 가변적으로 분배되어 있다.) 그 런데 본래의 의미에 있어서의 편집병자, 본래의 의미에 있어서의 정신분 열자는 사회체 위에서가 아니라, 순수한 상태의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 서 작동한다. 그렇다면 편집병이란 낱말의 임상적 의미에 있어서, 편집병 자는 우리를 큰 덩어리의 현상의 상상적 탄생에 입회시키며, 또 이것을 여전히 현미경적 차원에서 하게 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기관들 없는 신 체는 우주의 알과 같은 것, 거대한 분자이다. 이 알에서는 구더기들, 세균 들, 小人國의 잘난 사람들, 극미동물들, 난쟁이들이, 그들의 조직과 그들 의 기계들, 죽 미소한 끄나풀둘, 밧줄들, 치아들, 손톱 발톱, 지레들과 도 르레들, 誓砲들을 가지고 우글거리고 있다. 그래서 슈레버에게 있어서는 하늘의 光線둘 속에 수백만의 精子가, 혹은 짤막한 생을 사는 작은 인간 들을 그 신체 위에서 마음대로 조종하는 영혼들이 나타난다. 아르또는 禪다: 이 미생물들의 제계는 疑結한 無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러므로 기관들 없는 신체의 두 면은 큰 덩어리의 현상과 이에 대응하는 편집병 적 공급이 현마경적 규모로 조직되는 면과, 또 하나는 분자적 현상들과 이것들의 정신분열중적 공급이 현미경 이하의 규모로 꾸며지는 면이다. 편집병과 정신분열증 간의 분수령이 생기는 것은 큰 덩어리를 이루는 것 과 분자적인 것 사이의 접합정, 죽 경계인 한에서의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서이다. 그렇다면 마치 원시 유목민의 아버지인, 두 얼굴을 가전 위 대한 정신분열 편집병자가 사회체 일반의 기반인 양, 사회적 공급들은 이차적인 投射둘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는 보았다. 사회체는 기관들 없는 신체의 하나의 투사가 아니라, 오히려 기관들 없는 신체가 사회체의 극한, 사회체의 탈토지화의 접선, 탈토지화 한 사회체의 최후의 잔재이다. 사회체, 죽 대지, 전제군주의 신체, 돈-자 본은 옷을 입은 충만한 신체들이요, 기관들 없는 신체는 벌거벗은 충만 한 신체이다. 그러나 기관들 없는 신체는 극한에, 종국에 있는 것이지, 기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마도 기관들 없는 신체는 모든 형태 의 사회체에 눌러붙어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공급둘 이 편집병적이라 혹은 정신분열증적이라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이 공급둘 이 자본주의의 일정한 조건들 아래 편집병과 정신분열증을 그 궁극의 산 물로서 산출하는 한에서이다. 보편적인 임상의 관점에서는 편집병과 정 신분열증을 충만한 신체로서의 사회체의 자리 둘레를, 극한에서는 기관 들 없는 신체의 자리 둘레를 진동하는 珪의 전폭의 두 가장자리로 제시 할 수 있다. 이 두 가장자리의 한 면은 큰 덩어리를 이루는 집합들에 의 하여 점령되어 있고, 다른 한 면은 분자적 요소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 나 서로 다른 사회체들, 이것들의 국면 및 이것들의 큰 집합들을 꿰뚫고 지나가는 단 하나의 선을 제시할 수도 있다; 이 국면들 하나하나에는, 편집병의 한 차원, 어떤 다른 도착, 어떤 형의 가족적 위치가 배정되고, 또 도주선 죽 정신분열 기질의 돌파선이 점선으로 표시된다. 軸綠은 기 관들 없는 신체에 도달한다. 거기서 그것은 벽을 통과하든가 혹은 벽에 부딪쳐 퉁겨 되돌아오든가 한다. 전자의 경우, 그것은 분자적 요소들에 이르는데 여기서 그것은 참으로 그 본래의 모습에 돌아가, 정신분열증적 과정, 죽 탈토지화의 순수한 정신분열중적 진행이 된다. 후자의 경우, 그 것은 현대 세계의 가장 비침하게 정리된 토지, 즉 선행하는 국면들의 환 영인 토지에 되돌아온다. 그리하여 임상실체로서의 편집병과 정신분열증 의 정신병원적 집합 속에, 도착에 의하여 세워진 인공적인 집합들이나 사회들 속에, 오이디푸스적 신경병의 가족적 집합 속에 붙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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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분자적 무의식 한 쪽에는 分子의 영역, 다른 한 쪽에는 큰 덩어리를 이루는 것의 영 역, 한 쪽에는 미크로-심리적 혹은 微小物 연구의 영역, 다른 한 쪽에는 통계학적이고 군집심리적인 영역이라고 하는 두 영역을 구별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原子 내부의 현상들과 집합의 법칙을 따르는 통계학 적 누적에 의한 군집 현상들을 대립시킬 때, 거기에는 물리학을 근거로 한 구별을 무의식에 적용한 은유와 다른 것이 있는가? 그런데, 사실, 무 의식은 물리학에 속한다; 기관들 없는 신체와 그 강도들이 물질 자체라 고 하는 것은 전혀 은유가 아니다. 우리는 개인심리학과 집단심리학의 문제, 또 이 둘 중 어느 것이 우선하는가 하는 문제를 여기서 되살릴 생 각도 없다; (프로이트의) 『집단심리학과 자아의 분석』에 나오는 이 구 별은 어디까지나 전면적으로 오이디푸스에 관하여 거론되고 있다. 무의 식 속에는 주민들, 집단들 및 기계들밖에 없다. 우리가 한 편에 사회기계 와 기술기계의 無意志를, 다른 한 편에 욕망하는 기계들의 무의식을 정 립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복잡하게 결부된 힘들 간의 필연적 관계이다. 이 힘들 중의 하나는 무의식을 만들어내는 기본적인 힘들이요, 다른 하 나는 이 기본적인 힘들에 대하여 반작용하는 合力들, 죽 통계학적인 집 합들기다. 이 집합들을 통해서 무의식은 자기를 표상하고, 이미 자기의 생산적인 기본적인 힘들의 억제와 억압을 당한다. 이 미크로 물리학 혹은 미크로 심리학의 영역은, 바로 욕망이 존재하는 영역이요, 여기서는 욕망이 작동할 뿐만 아니라, 또한 형성도 하고 자기
생산도 하는데, 어떻게 이러한 영역에서 기계들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가? 기계는 그 구조의 미리 정해전 연결들과 그 부분들의 위치의 질 서를 따라 작동하지만, 자기자신을 배치하지도 못하고 또 자기를 형성하 거나 생산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흔히 生氣論과 機械論사이에 논쟁을 불 러일으키는 점이다: 기계로써 유기체의 기능들을 설명할 수는 있으나, 유기체의 형성이나 발육을 설명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는 데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칸다. 기계론은 기계들로부터 하나의 구조적 통 일을 추상하여 이것을 따라 유기체의 기능을 설명한다. 생기론은 생물에 특유한 개체적 통일을 끌어대고 모든 기계는 이것을 전제한다고 주장한다. 기계는 유기체가 존속히는 성질에 의거하며, 유기체가 지율적으로 자기 형성하는 이 성질을 밖으로 연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위의 두 경우의 어느 경우에나, 기계와 욕망이 어디까지나 그런 식으로 의적인 관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욕망이 기계적인 인과체계 에 의하여 결정되는 결과로서 나타나전, 기계가 그 자체 욕망의 목적에 대한 수단체계이건 의적 관계에 머물러 있다. 욕망이 자기의 수중에 넣 는 새로운 수단들에 있어서나 기계들이 일으키는 파생된 욕망들에 있어 서나, 욕망과 기계 사이의 유대는 어디까지나 이차적이고 간접적이다. 그 런데 〈기계들의 책 〉이라고 하는 사뮤엘 버틀러 Samuel Bu tl er 의 깊이 있는 텍스트는 이 관점을 넘어서게 한다 .8) 이 텍스트가 처음에는 흔히 있는 두 가지 주장을 그저 대립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사실 이다. 두 가지 주장의 하나는, 유기체들이 우선 가장 완전한 기계들일 따 름이라고 하는 것이요. (〈순전히 정신적인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 들도 일련의 지레들 속의 균형이 깨진 것 이의의 아무것도 아니며, 다만 이 지레들 중 너무 작아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것들로부터 시작하는 것들일 따름이다.〉) 다른 하나는 기계들이 유기체의 연장일 따름이라고 하는 것이다. (〈히등동물들은 그들의 지체를 그들 속에, 그들 자신의 신 체 속에 간직하지만, 인간의 지체들은 대부분 자유로워서, 때로는 여기 에, 때로는 저기에, 세계의 서로 다른 곳들에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에 8) Samuel Butl e r, Erewhon, ch. 24 et 25.
는 버틀러의 방식이 있다. 그것은 대립하는 두 주장을 각각 그 극단에까 지 밀고 나가, 더 이상 서로 대립할 수 없는 점, 즉 무차별지점 혹은 四 散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버틀러는, 〈기계들은 유기체의 연장이지만, 사실은 한 사회의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 존재하는 지체들 과 기관들이요, 인간들은 그들의 힘과 부를 따라 이 지체들과 기관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며, 가난하면 마치 팔다리가 잘린 유기체들인 양 이 지체들과 기관들을 빼앗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다 론 한편으로, 그는 〈유기체들은 기계들이지만, 너무나 많은 무 분 툐 을 지 니고 있어서, 이 무 분들은 서로 관련하며 서로 기계화하는 뚜렷이 다른 기계들의 서로 다른 부품들에 비길 만하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여기서 본질적인 것은 버틀러가 기계와 유기체를 각각 그 극한 에까지 이행시키는 이중의 운동이다. 유기체에 득유한 개체적 통일을 의문 시하여 생기론의 주장을 폭파하고, 또 기계의 구조적 통일을 의문시하여 기 계론의 주장을 폭파해야 한다. 기계들은 스스로 재생산하지 않는다, 혹은 인간을 매개로 해서만 재생산한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꿀벌 수컷이, 오 직 꿀벌 수컷만이 빨간 클로버의 재생산을 매개한다고 해서, 빨간 클로 버 자체는 재생산의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누가 주장할 수 있는가? 꿀벌 수컷은 클로버의 재생산체계의 일부를 이룬다 . 우리들은 각자 무한 히 작은 극미동물들로부터 나왔다. 이 극미동물들의 본체는 우리들의 본 체와는 전혀 달랐지만, 이 극미동물들은 우리들 자신의 재생산체계의 일 부를 이루고 있다. 왜 우리들이 기계들의 재생산체계의 일부를 이루지 않는단 말인가? ……우리가 찰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복합기계 전체를 단 하나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점이다. 사실상, 복합기계란 하나 의 도시 혹은 하나의 사회로 이 도시나 사회의 각 성원은 자기의 방식을 따라 직접 생겨난다. 우리는 하나의 기계를 하나의 전체로 보며, 그것에 이름을 붙여 개별화한다;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지체를 바라보고는 이 지체들의 결합이 한 개인을 형성하며 개인은 재생산의 활동을 하는 단 하나의 중십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결론은 반과학적이다. 증 기기계가 같은 종류의 다른 한 증기기계 혹은 두 증기기계에 의하여 만
들어진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해서 이 단순한 사실이 우리에게 증기기 계들은 재생산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권위를 주지는 않는다. 실제에 있어, 어떤 증기기계이건, 그 각 부분은 그 기계 자체의 독자적이 고 특수한 생식자들에 의하여 생식되는데, 이 생식자들의 기능은 이 부 분 하나, 그리고 저 부분 · 하나만을 생식하는 것이다. 한편 무 분들을 하나 의 전체에로 결합시키는 일은 기계적인 재생산체계라고 하는 하나의 다 른 부분을 이룬다……. 〉 덧붙여 밀한다면, 버틀러는 여기서 규준의 잉여 가치의 현싱을 만나고 있다. 이것은 기계의 한 부분이 자기자신의 규준 속에 다른 기계의 규준의 단편을 받아들여 이 디론 기계의 한 부분의 덕 택으로 자기를 재생산하는 경우이다: 빨간 클로버와 꿀벌 수컷이 이런 경우이다. 혹은 난초과의 식물인 오르쉬드와 이것이 끌어당기는 말벌 수 컷이 이런 경우인데, 오르쉬드는 그 꽃에 말벌 암컷의 모습과 냄새를 지 님으로써 말벌 수컷을 불러들인다 .• 두 주장이 이렇게 四散하는 지점에서는, 기계들이 기관들이다, 혹은 기 관동기 기계들이디라고 말하는 것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 된 다. 인간은 〈 기계화된 척 추동물 〉 이라 하는 정의와 〈 기계들의 진디 같은 기생충 〉 이라 하는 정의는 동가이다 . 본질적인 것은 무한 자체에로의 이 행, 죽 기계부품들로 구성된 무한성 혹은 극미동물들의 시간적 무한성 속에 있지 않고, 오히려 이 이행에 힘입어 지면에 나타나는 것 속에 있 다. 일단 기계의 구조적 통일이 파괴되면, 일단 생물의 특유한 개체적 통 일이 없어지면, 기계와 욕망 사이에 직접적 유대가 나타나고, 기계는 욕 망의 핵심에 이행하여, 기계는 욕망하는 것이 되고, 욕망은 기계화된다. 욕망은 주체 속에 있지 않고, 기계가 욕망 속에 있다-잔재인 주체는 다른 쪽에, 죽 기계 쪽에 속한다; 기계의 주위 전체에, 기계들의 기생충, 기계화된 척추동물의 욕망의 부속품으로 존재한다. 요컨대, 전정한 차이 는 기계와 생물, 생기론과 기계론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물의 두 상태이기도 한 기계의 두 상태 사이에 있다. 구조적 통일 속에 갇힌 기 계, 그 특유의 개체적 동일 속에 갇힌 생물은- 덩어리 혹은 큰 덩어리를 이루는 집합들의 현상이다; 이런 자격으로는 기계와 생물이 서로 외적으
로 관계한다. 그래서 설사 이 양자가 서로 구별되고 서로 대립한다 해도, 그것은 다만 동일한 통계학적 방향에서의 두 국면으로서만이다. 그런데, 다양한 것들의 더 깊은 혹은 내적인 다른 방향에는, 분자적 현싱들과 생 물의 단일체들 간에, 죽 기계 전체 속에 흩어져 있는 작은 기계들과 有 機 전체 속에 널려 있는 작은 조직체들 간에, 相面菱透, 직접적 커뮤니 케이션이 있다: 이 영역에서는 미크로 물리학과 생물학이 구별되지 않으 며, 기계 속에 생물들이 있는 그만큼 생물 속에 기계들이 있다. 이 영역 에는 본래의 의미의 기계가 존재하지 않아 보이는데(구조적 통일도, 미리 형성된 기계적 연결들도 없는데), 왜 기계들에 관하여 이야기하는가? 〈그 러나 그러한 기계들이 형성되는 가능성이 있다. 이 기계들은 무한정하게 중계를 거듭하고, 작동의 순환 속에서 서로 맞물린다. 이 기계들은 일단 조립되면 熱力學의 법칙들을 따르지만, 조립되는 과정에서는 이 법칙들에 의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조립의 연쇄는 정의상 아직 통계학적 법칙들 이 없는 영역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차원에서는, 작동과 형성이 분자 속에서처럼 아직 일체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차원으로부터, 서로 다론 방향으로 가는 두 길이 열리는데, 그중의 하나는 다소간에 균형잡 힌 주체군에 이르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주체적 조직의 완성들에 이르 는 길이다. 이 완성의 가장 단순한 도식은 氣管의 형성이다…….〉 9) 그러 9) Ray m ond Ruy er , Genese des for mes uiu a nte s , Flammesio n , 1958, pp. 80 - 81 . 보아 Boha, 슈뢰딩거 Schrodin g er , 요르당J ordan, 릴리 Lil lie9-l 몇 가지 주 장을 다사 거론하면서, 뒤이예 Ru y er 는, 생물이, 外的인 技術的 活動들에 못지 않게 유기체의 內的인 機械機潘의 回路들에서도 나타나는 群集의 효괴들을 념 어, 原子의 個個의 현상들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다: 〈古典物理學은 군집의 현상들만을 다룬다. 이에 반하여 미크로 物理學은 본래 生物學에로 나아간다. 원 자의 개개의 현상들에서 출발하여, 실제로 두 방향으로 니아갈 수 있다. 이 현상 들의 統計學的 集積은 보통의 물리학의 법칙들에 이른다. 그러나, 이 개개의 현 상들이, 分子의 한 가운데서, 그 다음에는 마크로分子의 한 가운데서, 그 다음에 는 비루스의 한가운데서, 그 다음에는 單細胞의 한가운데서 군집의 현상둘을 자 기에게 종속시키면서, 자기들의 개체성을 온전히 지키고, 체계적인 상호작용들을 통해서 복집해지면, 마침내 유기체가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유기체는, 아 무리 덩치가 커도: 어디까지나 顯微鏡的이다〉(p. 54). 뒤이예는 이 主題를 『新 寧目的論』에서 광범하게 전개하고 있다 (Neo- fi nal i sme, P.U.F., 1952).
므로 진정한 차이는 사회기계이건, 기술기계이전 혹은 유기체기계이건, 한 쪽의 큰 덩어리를 이루는 기계들과, 다른 쪽의 분자적 질서에 속하는 욕망하는 기계들 사이에 있다. 욕망하는 기계들이란 다음과 같은 것들이 다: 먼저 자기형성하는 기계들인데, 이 기계들에 있어서는 고장도 어떤 기능을 수행하며, 또 그 작동은 그 자기형성과 식별되지 않는다. 다음에 는 그것들 자체의 조립과 일체를 이루면서 시간적으로 생성하는 기계들 인데, 이 기계들은 위치를 정할 수 없는 연결들과 흩어전 국지화들을 통 하여 작동하며, 규준의 잉여가치와 함께 시간화의 과정, 죽 단편들과 이 탈한 부품들에로 자기를 형성하는 과정을 개입시킨다. 그래서 이 기계들 에 있어서는 전체가 그 자체, 따로 떨어져 있는 한 부분처럼, 부분들 곁 에서 산출된다. 버틀러의 말을 빌리면 , 전체를 다른 부분들 위에 포개 는 〈 하나의 디른 구획 속에서〉 산출된다. 셋째로는 본래의 의미에서의 기계들이다. 이 기계들은 절단들과 흐름들, 결합된 파동들과 입자들, 결 합 가능한 흐름들과 부분적 대상들을 통해서 始動하는데, 언제나 멀찌감 치 橫斷的 連結둘, 包含的 離接들, 多義的 連接들을 끌어넣고, 그리하여 개 체성을 전이시켜, 채취들, 이탈둘, 잔여들을 생기게 하면서, 정신분열자의 발생을 보편적으로 실현한다. 이 발생의 경역들은 분열들-흐름들이다. 그 다음에, 혹은 오히려 또 디론 한편으로, 기계들이 이것들에다가 강 철의 뼈대처럼 볼 수 있는 존재를 주는 기술들과 기구들의 구조적 국면 에서 통일되어 있을 때, 생물둘이 또한 그들의 개성, 그들의 종류, 변종 과 서식지대의 통계적 단위들에 의하여 구조화되어 있을 때-하나의 기계가 하나의 단일한 대상으로서, 하나의 생물이 하나의 단일한 주체로 나타날 때-연결둘이 전체적이고 특수한 것이 되고, 이집들이 배타택 일적인 것이 되고, 연결들이 一對一的인 것이 될 때, 욕망은 불투명하게 된 이 형태들에 자기를 투사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 이 형태들은 욕망과 욕망 자체의 기계들이 직접 큰 덩어리로 나타난 것들이요, 통계적 으로 규정된 것들이다. 그것들은 동일한 기계들이다. (본성의 차이는 없 다) : 한 쪽에서는 유기체기계들, 기술기계들 혹은 사회기계들이 그것들의 덩어리 현상 속에서 이해되고 있는데 그것들은· 이 현상에 종속해 있다:
다른 한 쪽에서는 욕망하는 기계들이 그것들의 현미경 이하의 단일체들 속에서 이해되고 있는데 이 단일체들은 덩어리 현성을 자기에게 종속시 키고 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처음부터 욕망하는· 기계들이 꿈이나 상 상적인 것의 영역에 속하여, 다른 기계들의 대역 노릇을- 한다는 생각을 거부하였다. 욕망과 환경들, 터전들, 군집의 형태들만이 있다. 즉, 분자적 인 욕망하는 기계들은 그들 자체가 큰 덩어리를 이루는 기계들이나 이것 둘의 변이체들을 마련하는데, 전자는 후자를 큰 數둘의 법칙 아래 형성하 되, 한 쪽이 디론 쪽에 종속하는 방향에서 형성한다. 한 편에 욕망하는 기계들 다른 한 편에 유기체기계들, 기술기계들 혹은 사회기계 : 이것들 은 일정한 조전들 아래에서는 동일한 기계들이다. 일정한 조건들이란 말 로써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그 기계들이 큰 重集合둘을 이루어 통일시 키고 구조화하고 작동하면서 그 수만큼의 안정된 형태들이 되어가는 통 제학적 형태둘이다; 어떤 부폼은 그대로 두고 어떤 부폼은· 배제하여 군 집들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의 선별의 압력들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똑 같은 기계들이지만 체제는 같지 않다. 죽 크기의 관계들, 종합의 사용들 은 전혀 다르다. 기능주의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현미경 이하의 치원, 죽 욕망의 기계적 배열들, 욕망의 工學 en gi neer i n g의 차원에만 있다. 왜냐 하면, 오직 거기서만 작동과 자기형성, 사용과 조립, 산물과 생산이 일체 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큰 덩어리를 이루는 것에 관한 기능주의는 모 두 거짓이다. 왜냐하면 유기체기계들이나 사회기계들은· 작동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자기형성을 하지 않으며, 또 기술기계들은 사용되는 것 처럼 조립되지 않고, 이것들 자신의 생산활동과, 이것들 자체와는 뚜렷이 다른 이것들의 생산물을 구별하는 일정한 조건들을 분명히 전제하기 때 문이다. 오직 자기가 작동하는 것처럼 자기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만이 어떤 의미, 어떤 목표, 어떤 의도를 갖는다. 이에 반하여 욕망히는 기계 둘은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기호화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바로 사람들이 그것들을 재료삼아 만드는 그것이요, 사람들이 그것들을 도구삼아 만드는 그것이요, 그것들 이 그것들 스스로 만드는 그것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큰 집합들에서는 동가물을 볼 수 없는 종합들의 체 제들을 따라 작동한다. 작그 모노 Ja cq u es Monod 는 이 종합들의 독자성 울 분자적 생물학 혹은 〈현미경적 사이버네틱스〉의 관점에서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이 관점은 기계론과 생기론 간의 재래의 대립에는 관심이 없다. 여기서 이 종합의 근본적 특징들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화학적 신 호들의 자의적 성질, 기질에 대한 무관심, 상호작용들의 간접적 성격이 다. 이런 양상들은, 집합의 법칙둘에 비추어보면 소극적인 것이지만, 이 것은 겉으로만 그렇고, 힘의 관점에서는 적극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 다. 〈알로스데릭 효소의 기질과 이 효소의 활동을 촉진 혹은 저해하는 리간드들 간에는, 구조나 반응의 화학적으로- 필연적인 관계가 전혀 존재 하지 않는다……• 알로스데릭 단백질은 분자공학의 독특한 산물로 간주 되어야 한다. 그것은 화학적 친화력이 없는 물체들 간에 상호작용을 하 게 하고 그리하여 화학적으로는 아무 관계도 없는 화합물들을 개입시켜 어떠한 반응이든지 마음대로 제어하게 한다. 그러므로 (간접적인) 알로 스데릭 상호작용들의 작동원리는 제어들의 선택에 있어서 완전한 자유를 허용한다. 이 제어들은 모든 화학적 구속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런 만 큼 생리학적 구속들에만 매이게 된다. 이 생리학적 구속들· 때문에 알로 스테릭 상호작용들은 이것들이 세포나 유기체에 대하여 지금보다도 얼마 나 더 漏集性과 유효성을 주는가에 따라 선택된다. 이 체계들의 無根撮性 이야말로 결정적으로, 분자의 전화에 대하여 실제로 무한한 탐구와 실험 의 분야를 열어주고 이 분자전화가 사이버네틱적 상호연결들의 그물을 짤 수 있게 해준다…….〉 10) 이 우연의 영역 혹은 현실적인 비조직의 영 역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큰 변이체들이 조직되는가. 이것들은 DNA 와 그 線分들, 즉 유전자들의 작용 아래 필연적으로 하나의 구조를 재생산 10) Jac q u es Monod, Le Hasard et la necessit e, Ed. du Seuil , 1970, p. 91 (Et pp. 104-112: 〈球形의 强白質은, 分子의 규모에 있어서, 영릭없이 하나의 기계이다. 이것은 그 기계의 특성들에 의해서이지, 그 기분적 구조에 의해서가 아니다. 이 구조 속에는 盲 目的인 結合들의 놀이밖에 없다. 우연이 불변하는 機 械] 의하여 붙들리고, 보존되고 재생산되면, 秩序, 規則, 必황폐로 變換된 다〉).
하고, 그야말로 제비뽑기 같은 조작을 함으로써 海洙線 혹은 進化線 같은 진로를 형성한다. 이렇게 되어가는 모습은 바로 분자적인 것이 큰 덩어 리를 이루는 것에로 이행하는 모든 단계가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이 행은 유기체기계들에서 나타나지만, 또한 다론 법칙들과 다른 형상들을 가지고 있는 사회기계들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문화와 생물의 종족들에 공통되는 특칭 , 즉 〈 마르코프 Marko ff의 연쇄 >같 은 특 징(부분적으로 의존하는 우연한 현상들)에 대해서 강조하는- 일도 가능하 였다. 왜냐하면, 사회적 규준들에 있어서처럼 유전학의 규준에 있어서도, 시니피앙의 연쇄라 일컬어지는 것은 하나의 언어라기보다 하나의 은어로 서, 시니피잉이 아닌 요소들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요소들은 이것들 이 연쇄적인 제비뽑기, 부분적 의존관계 및 거듭되는 중계에 의하여 형 성하는 큰 집합들 속에서만 기호화 작용의 의미나 효과를 얻는다 .11) 인 간의 역사를 생물학화하는 것도 문제가 아니요, 자연의 역사를 인간화하 는 것도 문제가 아니라, 사회기계들과 유기체기계들이 다 같이 욕망하는 기계들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밝히는 것이 문제이다. 인간의 심총에는 그것이 있다: 그것이란 정신분열중적 세포, 분열분자들, 이것들의 연쇄둘 과 이것들의 은어들이다. 여기에는 정신분열증의 생물학 전체가 있고, 분 자적 생물학은 (미크로 물리학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 정신분열중적이 다. 그런데, 거꾸로, 정신분열증, 정신분열증 이론은 생물학적이고 생물문 화적이다. 이 이론이 분자의 질서의 기계적 연결둘, 기관둘 없는 신체라 고 하는 거대한 분자 위의 강도의 지도 속에의 이 연결들의 재배 분, 큰 집합들을 형성하고 선택하는 통계학적 집적을 고찰하는 한에서 그렇다. 손디 Szond i는 이 분자의 길에 들어서서 유전적 무의식을 발견하고, 이것을 프로이트의 개인적 무의식에 또 융의 집단적 무의식에 대립시켰 다 .12) 이 유전적 내지 계보적 무의식을 그는 가끔 가족적인 것이라 부론 11) 마르코프 連鎖들과 이것들을 文化의 형성들에 대해서처럼 生物의 種들에 대해 서 적용하는 데 관하여는, cf. Ray m ond Ruy er , La Genese des form es uiu a n tes , ch. VIII. W駒 잉여가치의 현상들은 이 〈뛰點柚 連鎖들〉의 관정 에서 잘 설명된다. 뒤이예는 이것을 정신분열중적 언어와 거듭 비교하고 있다.
다; 손디 자신, 측정의 단위로서, 가족적 집합들로부터 정신분열증 연구 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가족적이라 하지만 유전적 무의식은 그다지 가족 적이지 않다. 그것은 프로이트의 무의식보다 훨씬 더 가족적이다. 왜냐하 면 진단이, 흔히들 하는 것처럼 욕망을 아빠-엄마의 심상들에 포개지 않 고, 욕망을 兩性同體의 半陰陽둘의 사진들, 살인자들의 사전둘과 관계시켜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의부와의 관계가 약간 있다……. 알파 벳 전체, 공리계 전체가 광인의 사진들과 함께 있다: 〈 부천감정의 필요〉 를 살인자들의 초상사전들에 견주어 검사해야 한다. 이런 일은 오이디푸 스 개념 속에 머무는 것이라 말해도 소용없다. 실상 이런 일은 오이디푸 스 개념을 독특하게 개방한다……. 그러므로 충동들의 상속유전자들은 단순한 자국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 자극둘은 역사적인 사회 터전 전 체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벡터들을 따라 갖가지로 결합된다-이런 것 을 밝히는 것이 운명분석이다. 사실, 정말 분자적인 무의식은 재생산의 단위로서의 유전자들로 만족할 수 없다; 유전자들은 아직 표현적인 것이 요, 큰 덩어리를 이루는 조직체들에 귀착하는 것이다. 분자생산학은 우리 에게 재생산되는 것은 DNA 만이요 단백질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단백질 은 생산되는 것들인 동시에 생산의 단위이다. 단백질은 순환으로서의 무 의식 혹은 무의식의 자동생산울 구성한다. 죽, 욕망히는 기계들 및 욕망 의 종합들의 배열 속의 궁극적인 분자적 요소이다. (가족적으로 혹은 유 전적으로 규정된) 재생산과 그 대상들을 꿰뚫고, 언제나 무의식은 고아 적인 순환운동 속에서, 죽 무의식이 항상 주체로 머무는 운명의 순환 속 에서 자기자신을 생산한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성욕이 생식에 대하여 독립을 주장할 권리를 가지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근거를 두고 있 다. 그런데 큰 덩어리를 이루는 것을 넘어서서 분자적인 것에로 향해야 한다고 하는 이 방향을 손디는 절실히 느껴 사람들이 그의 〈검사〉라고 12) L. Szondi, Dia gn osti c exp e rim enta l des pu lsio n s, 1947, tr. fr. P.U. F .. 손디 가 한 일은 정신분석과 유전학의 근본적 관계를 처음으로 확립한 것이다. 分子 生物學의 진보에 관하여는 앙드레 그린 Andre Green 의 최근의 試圖를 참조할 것 wRep e ti tion et ins ti nc t de mort , Reuue /ran 언i se de psyc hanalys e , mai 1970).
잘못 부르고 있는 것의 모든 통계학적 해석을 물리친다. 뿐만 아니라, 그 는 내용들을 넘어서서 기능들에로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넘어서는 데 있어서 다만 집합들이나 계급들로부터 〈 범주들 〉 에 로 나아가고 있을 따름이다. 그는 이 범주들의 체계적으로 닫힌 리스트 를 만들고 있는데, 이 범주들은 여전히 환자가 선택하고 자유로이 결합 시켜야 하는 생존의 표현형식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는 욕망 의 내적 혹은 분자적 요소들, 이것들의 기계적 선택, 배열 및 결합을 잘 못 파악하고 있다__또 다음과 같은 정신분열자-분석의 참된 문제를 제 대로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 네게 속해 있는, 네 충동적인 욕망하는 기 계들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어떤 기능을 갖고 있으며, 어떤 종합들 속에 들어가며, 어떻게 작동하는가? 분자적인 것에서 큰 덩어리를 이루는 것 에로, 또 거꾸로 큰 덩어리를 이루는 것에서 분자적인 것에로 옮아가는 모든 이행에서, 또 무의식이, 주체로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자신을 생산 하는 순환을 구성하는 모든 이행에서 너는 욕망하는 기계들을 무엇에 사 용하는가? 우리는 욕망하는 기계들에게 고유한 에네르기를 리비도라 부른다; 이 에네르기가 변형된 것들(누멘 Numen 과 볼룹타스 Volup tas )은 결코 탈성 욕화한 것도 아니요 승화도 아니다. 그런데 바로 이 용어법은 극히 자의 적인 것으로 보인다. 욕망하는 기계들을 고찰함에 있어서는, 이것들을 이 것들 자신의 질서인 분자적 질서에 관련시켜 고찰하거나, 혹은 이것들이 그 속에서 유기체기계들이나 사회기계들을 형성하고 유기체나 사회의 환 경을 마련하는 큰 덩어리를 이루는 질서에 관련시켜 고찰하거나, 어떻든 이 두 가지 방식으로 고찰해야 하는데, 이렇게 고찰한다 해도 이것들이 본래의 의미에서 성적인 에네르기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이 분명 치 않다. 사실, 성적인 에네르기를 직접 우주적이고 원자 내적인 것으로 서, 또 직접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서 제시하기는 어렵다. 사랑이 단백질과 또 사회와 관계하는 것이라 말해도 소용없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리비도를 온갖 탈바꿈이 가능한 막연한 우주에네르기나 온갖 공 급이 가능한 일종의 사회화한 에네르기로써 대체함으로써 프로이트주의
를 청산하는 낡은 방식을 다시 한번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혹은 〈생물 발생〉에 관한 라이히의 최후의 시도가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이 생물발 생론을 까닭없이 정신분열중적-편집병적인 것이라 규정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라이히가 원자내의 우주에네르기, 죽 오르곤이 현실적으로 존재 한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을 상기한다. 이 오르곤은 전기의 흐름을 생기 게 하며 또 현미경 이하의 입자들인 비온돌을 지니고 있다. 이 에네르기 는 분자의 관점에서 고찰되는 신체 위에서는 電位의 차이들이나 배분된 강도들을 산출했지만, 같은 신체 위에서라도 큰 덩어리를 이루는· 것의 관점에서 고찰되면 유체역학에 결부되었다• 그러므로 리비도를 성욕으로 규정했던 것은 큰 덩어리를 이루는 것과 분자적인 것이라고 하는 두 극 의 연속상태 속에서의, 역학적 작동과 전기적 작동의 결합이다. (역학적 긴장, 전기의 충전, 전기의 방전, 역학적 이완.) 이렇게 봄으로써 라이히 는 기계론과 생기론의 二者擇一을 넘어섰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이 역학적 기능과 전기적 기능은 물질 일반 속에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었 지만, 생물의 체내에서는 독특한 연속상태 속에서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 이다. 그래서 특히 그는 정신분석이 근본적으로 전리라고 주장하였고, 프 로이트가 이 진리를 극도로 버렸다고 고발할 수 있었다: 정신분석의 전 리란, 성욕이 재생산에 대하여 독립해 있고, 전전적 혹은 되행적 재생산 은 순환으로서의 성욕에 종속한다는 것이다 .13) 러이히의 최후의 이론의 13) 生物宇宙論的 내지 生物發生論的인 라이히의 마지막 연구들은 모두 La Foncti on de l'org a sme, ch. IX 의 말미에 요약되어 있다. 발생과 재생산에 대한 田堅 우위는 거기서 細胞의 分裂울 생기게 하는 성욕의 순환(力學的 緊張 電 氣的 充電 등)을 근거로 하고 있다(pp. 224-227). 그런데 라이히는 아주 일찍 이 그의 저서에서 프로이트가 性的인 입장을 포기했다고 비난하였다• 性的인 입 장을 단념한 것은 프로이트의 反對派만이 아니다• 어떤 점에서는 프로이트 자신이다: 처음에는 그가 죽음의 본능을 끌어들여, 성욕 대신에 에로스에 관하여 이야기하 기 시작하고 있는 때에 그렇고 (Re i ch, pp. 103-104), 다음에는, 그가 불안을 性的 仰制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으로 보고 있는 때에 그렇고 (Re i ch, pp. 113 - 114), 그리고 좀더 일반적으로는, 그가 여기서 더 나아가 성욕에 대한 生殖의 優하고 하는 전통적 견해에 되돌아갈 때 그렇다 (Re i ch, p. 225) : 〈생식은 성 욕의 한 기능이지, 흔히 주장되고 있는 것처럼 이 逆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성적 인 것의 개념과 生殖的인 것의 개념을 갈랐을 때, 십리적 성욕에 관련하여 이미
이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들 때 문에 그는 생식에 봉사하는 思養期 속에 生殖期를 다시 집어넣었다 .〉 러이히는 분 명히 프로이트의 쇼펜하우어적 혹은 와이스만적 텍스트들을 생각하고 있다. 이 텍스트들에서는 성욕이 種生殖貿에 의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가령 Pour int r o du ire le nasci ss im e, in La Vi e sexuelle, P.U.F., pp. 85-86.
자세한 점을 고찰할 때, 우리는 정신분열중적인 동시에 편집병적인 그 이론의 성격이 우리에게는 조금도 잘못된 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 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성욕을 〈 전기의 천둥 〉 , 〈 푸르 스름한 안개와 푸른 하늘 〉 , 오르곤의 푸르름, 〈 생엘므 Sa i n t -Elm~ 불 과 태양흑점들 〉 , 유체들과 흐름, 질료들과 입자들 같은 형의 우주적 현상 들과 관련시키는 것이 모두 우리에게는 성욕을 한심스러운 가족주의의 작은 바밀에 환원하는 것보다는 궁극적으로 더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로렌스와 밀러가 저 유명한 과학성의 관점 에서도 프로이트보다 성욕을- 더 정딩하게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 리에게 사랑에 관하여 이야기해 주는 것은 소파에 누운 신경중환자가 아 니라, 정산분열자의 침묵의 산책이요, 별들 아래 산 속을 뛰어다니는 렌 츠의 구보이다. 이것은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서 강도들 속을 움직이지 않으면서 여행하는 것이다. 라이히의 이론 전체에 관해서 말하면, 그 비 길 데 없는 장점은 리비도의 두 극을, 현미경 이하의 규모의 분자적' 조 직형성으로서, 유기적 집합들과 사회적 집합들의 규모의 큰 덩어리를 이 루는 조칙형성의 공급으로서 밝힌 점이다. 부족한 것은 양식의 확인들만 이다: 성욕은 왜 있으며,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사랑에 관하여, 냉소주의는 모든 것을 말하였다. 혹은 모든 것을 말했 다고 주장하였다. 즉, 큰 규모에 있어서의 유기체기계들과 사회기계들의 교집이 문제라고 밀하였다. (사랑의 근저에는 기관들이 있고, 또 경제적 규정들, 죽 돈이 있다.) 그러나 냉소주의의 특성은 스캔들이 없는 곳에서 스캔들이 있다고 주장하고, 용기가 없는데도 용기가 있다고 우기는 것이 다. 이것은 양식의 저속함이기보다는 차라리 그 망상이다. 왜냐하면 첫째 로 분명한 것은 욕망이란 인물들이나 사물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 라, 그것이 편력하는 환경 전체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자기
가 합류하는 온갖 성질의 전동들과 흐름들을 대상으로 한다. 욕망은 이 것들 속에 절단들과 포획을 끌어들인다. 욕망은 항상 유목하며 이동하는 데 그 성격은 무엇보다도 먼저 〈거인증〉이다: 이것을 샤를르 푸리에 Charles Four i er 보다 더 찰 밝힌 사람은 없다. 요컨대 , 생물학적 환경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이 무의식의 공급둘의 대상을 이룬다. 이 공급들은· 필연적으로 욕망적인 것, 즉 리비도적인 것이요, 필요해서 요구하게 되는 것이나 이익의 선의식적인 공급들과는 대립되는 것이다.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는 직접 대중, 큰 집합들 및 유기체와 사회의 터전을 마련한다. 정 신분석은 리비도가 사회적 공급을 하려면 탈성욕화하든가 심지어 자기를 승화시켜야 하며, 또 거꾸로 리비도가 병리적 퇴행의 과정에서만 사회적 공급걸을 再性悠{t한디는 것을 전제하는데, 우리는 어떤 원리들로 정신분 석이 이러한 욕망관을 뒷받침하고 있는지 잘 이해할 수 없다 .14) 이러한 생각의 公準이 여전히 가족주의가 아니고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가족주의는 성욕이 가족 속에서만 작동하며, 더 큰 집합들을 마련하려면 변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성욕은 어디에나 있다: 관료가 자기 의 서류롤 애무하는 거동 속에, 재판관이 재판하는 거동 속에, 실업가가 돈을 유통시키는 거동 속에, 부르주아 계급이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男色 하는 거동 속 등등에. 리비도가 탈바꿈할 필요가 없었듯이, 여기서도 은 유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히틀러는 파시스트들을 발기시켰다. 기, 발, 국 가, 군대, 은행은 많은 사람들을 발기시킨다. 혁명기계가 적어도 이 강제 기계들과 같은 만큼의 절단과 흐름의 힘을 획득하지 못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리비도가 큰 집합들을 마련하는 것은 탈성욕화하는 확대에 14) Freud, Cin q psych analys e s, Le pre sid e nt Schrehes, tr. fr. P.U.F., p.3 07: 〈나르시시즘(자기도취)의 단계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않아, 거기에 매어 病이 발생할 素因을 가지고 행동하기 쉬운 사람들은, 리비도의 아주 강한 물결 이 다른 데로 흐를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자기들의 사회적 본능을 성욕화하고 그 리하여 心的 發達 過程 중에 얻은 昇華둘을 없애버릴 때, 이 리비도의 아주 강 한 물결에 휩쓸릴 위험에 빠진다. 리비도의 逆流(退行)를 일으키는 모든 것이 다음과 갇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편집병지들은 그들의 사회적인 본능적 공급들의 그러한 성욕화예 대하여 자기들을 지켜려 한다.〉
의해서가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리비도가 그 흐름들을 억제하여 이 흐 름들을 〈부부〉, 〈가족〉, 〈인물둘 〉 , 〈대상들 〉 같은 형의 좁은 세포들 속 에 가두어놓게끔 되는 것은 억제, 저지 및 포개는 일을 통해서이다. 아마 도 이러한 저지는 필연적으로 정당하다고 여겨질 터이다: 리비도는 자기 가 대상으로 삼는 그러한 신체, 그러한 인물과 관계함으로써만 의식 속 에 들어온다. 그런데 우리들의 〈대상 선택 >자 체는, 우리가 똑같이 던져 져 있는 혹은 그것과 더불어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생물적 • 사회적 • 역사 적인 장 속에서 언제나 이 신체, 이 인물이 도단하고, 수용하고 방출하는 생명의 흐름과 사회의 흐름의 연접에 관련되어 있다. 부모를 포함하여, 우리가 사랑을 바치는 사람들은 그들이 본래 무의식적인 공급의 리비도 적 내실을 이루는 흐름의 연결, 단점, 연접의 점들로서만 개입한다. 그렇 기 때문에, 사랑의 도단이 아무리 정당하다 해도, 그것이 억압하는 기계 들에 봉사하여 욕망을 부부와 가족의 오이디푸스적인 막다른 골목에 몰 아넣는가, 혹은 이와 반대로 그것이 혁명기계를 키울 수 있는 자유로운 에너지롤 응집하는가에 따라, 그것은 그 기능을 크게 바꾼다. (여기 관 하여도, 푸리에가 情念의 〈籠絡〉과 〈기계 기구화〉라고 하는 반대되는 두 방향을 밝혔울 때, 모든 것이 말해졌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세계들과 사랑을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사랑받는 존재의 리비도적 특성에 따라, 자기 속에 갇히든가 혹은 더 넓은 세계들, 죽 대중과 큰 집합들에 대하여 자기를 열든가 한다. 우리들의 사랑 속에는 언제나 통계학적인 어떤 것, 큰 수의 법칙들에 속하는 것이 있다. 그러니 마르크스의 다음과 갇은 유명한 定式 15) 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남 자와 여자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의 직접적, 자연적, 필연적 관계이다〉. 죽 두 성(남성과 여성) 간의 관계는 이 관계가 큰 집합들(인간과 인간) 울 공급하는 한에서 성욕 일반의 관계의 척도일 따름이다. 이런 까닭에 사람들은 성욕을 두 성에 특정화할 수 있었다. 또 남근은 하나의 성이 15) Marx, Crit ique de la philo sop hie de l'Et a t de Heg el , in (Eu ures ph il o sop h iq u es, IV, tr. fr. Coste s , pp. 182-184. 마르크젝 텍스트에 대해서 는 J- F. 리오따르의 훌륭한 주석이 있다: Di sc ours, figu res, pp. 138-141 .
아니고, 성욕 전체다, 죽 리비도에 의하여 마련된 큰 집합의 기호다, 이 기호로부터 두 성이 분리되어 생겨나거나(남자와 남자의 동성애, 여자와 여자의 동성애의 두 계열), 이 집합의 한가운데서의 그것들의 통계학적 관계들로 생겨나거나간에, 필연적으로 동시에 생겨난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마르크스는 훨씬 더 신비스러운 말을 하고 있다: 진정한 차이 는 인간에게 있어서의 두 성 간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의 성과 〈인간 아 닌 것의 성 〉 간의 차이다라고.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짐승 둘, 동물들의 성욕이 아니다. 전혀 다른 것이 문제되고 있다. 성욕이 큰 덩어리를 이루는 큰 집합들을 무의식적으로 공급하는 것은 성욕이 다른· 면에서는 일정한 조건들 아래 이 집합둘을 구성하고 있는 분자적 요소들 의 활동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욕망에는 그 거인증의 상관항으로서 홍J'-1iE이 있다. 욕망하는 기계들이 사회기계들 속에, 이것들의 영역, 이것 들의 형성, 이것들의 작동 속에 현존하고 활동하는 한에 있어서, 성욕은 욕망히는 기계들과 엄밀하게 하나를 이룬다. 인간 아닌 것의 성이란 바 로 욕망하는 기계들, 이것들의 분자들의 기계적 요소들, 이것들의 배열 들, 이것들의 종합들이다. 이것들이 없으면 큰 집합들 속에서 남녀의 어 느 하나로 특정화되는 인간의 성도 없을 것이요, 이 집합들을 마련할 수 있는 인간의 성욕도 없을 것이다. 성욕이 문제될 때 마르크스는 말수 적 게 그것도 주저하면서 몇 마디 말을 하고 있는데, 이 몇 마디 말은 프로 이트와 정신분석 전체가 영원히 사로잡혀 있는 것, 죽 성을 인간의 형태 로 표상하는 것을 폭파시켰다. 우리가 인문형태적 표상이라 부르는 것은 두 성이 있다고 하는 관념이기도 하고 성은 하나밖에 없다고 하는 관념 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주의가 어떻게 이 기묘한 관념, 죽 결국은 하나의 성, 죽 남성밖에 없고, 남성에 대하여 여자는 결여로서 여자의 성은 부재 로서 규정된다고 하는 관념에 의하여 관동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잘 알 려져 있는 일이다. 이러한 주장은 남성의 동성애가 편재해 있다는 사실 의 근거가 된다고 우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 다. 여기서 근거가 되는 것은 오히려 남녀 간의 사랑의 통계학적 집합이
댜 왜냐하면 여자가 남자에 대하여 결여로 규정된다면, 단순히 거꾸로,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가 결여하고 있는 것의 결여로 규정된다: 오직 하 나의 성이라고 하는 관념은 필연적으로 천상의 대상으로서의 남근의 발 기에로 나아간다. 이 발기는 포갤 수 없는 두 측면으로 결여를 분배하고, 두 성을 공통의 부재, 즉 거세 속에서 커뮤니케이션하게 한다. 정신분석 울 하는 여자들이나 정신분석을 받는 여자들이나, 하여간 여자들은 이때 남자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고, 차이 속에 평등을 되찾아 좋아할 수 있다. 여기서 거세를 통하여 욕망에 나아간다고 하는 정식들의 어처구니없는 웃기는 일이 생긴다. 그러나 결국은 성이 실제로 둘 있다고 하는 관념도 더 나은 것이 못 된다. 이번에는 멜라니 클라인처럼, 여자의 성을, 그 성 격들이 무서운 것이라 해도, 하여간 적극적인 성격돌을 지닌 것으로서 규정하는 일이 생긴다• 이렇게 되면 인문 형태주의롤 벗어나지는 못한다 해도, 적어도 남근 중심주의를 벗어나기는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 성 간의 커뮤니케이션의 근거를 다지기는커녕, 오히려 역시 통계학적인 두 계열의 동성애의 근거를 다지게 된다. 그래서 전혀 거세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다만, 여기서 거세란, 남자의 성으로서 생각된 성의 원리 (잘려서 上空울 날아다니는 위대한 男根)인 대신에, 여자의 성으로서 생각된 성의 결과(흡수되어 피묻힌 작은 陰莖)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세는 성욕 을 인간의 형태로 또 큰 덩어리로 표상하는 근거라고 말한다. 거세는 남자 들과 여자들을 의식의 동일한 하나의 착각의 멍에 아래 결합시키는 동시 에 흩어지게 하며, 또 이둘로 하여금 이 멍에를 숭배하게 하는 보편적 신앙이다. 거세의 신화를 그대로 두고서 성의 인간적인 것이 아닌 본성, 가령 (라깡의 ) 〈위대한 타자〉를 규정하려는 모든 노력은 처음부터 빗나 간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텍스트에 대한 매우 깊이 있는 주석에서 리오따르는, 인간적이지 않은 것에로의 통로는 〈주체가 거세를 통하여 욕망 속에 들어가는 것〉이어야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때 그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욕망이 강하기 위하여 거세가 만세를 부르는 것인가? 사람들은 환상들만을 욕망한다는 것인가? 이 무슨 도착된, 인간 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관념인가. 욕망을 인간 형태의 큰 덩어리로 표상
하는 것은 이 표상의 근거를 이루는 것, 죽 결여의 이데올로기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이에 반하여 분자적인 무의식은 거세를 모른다. 왜냐하면 부분적 대성들은 아무것도 결여하고 있지 않으며 이런 것들인 한에서 자 유로운 다양성들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다양한 절단들은 흐름 둘을 고갈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동일한 독자적인 절단으로 이 흐름들을 억제하지 않고, 끊임없이 흐름들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종합들 은 국지적이고 비특수적인 연결들, 포함적 단점들, 유목적 연점들을 구성 하기 때문이다; 어디에나 현미경적인 횡단-성욕이 있다. 이 횡단-성욕 은 여자 속에 남자만큼 남자들이 들어 있게 하고 또 남자 속에 여자만큼 여자들이 들어 있게 하되, 남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또 여자들이 다른 사 람들과 욕망 생산의 관계들 속에 들어가게 한다. 이 욕망 생산의 관계들 은 남녀 두 성의 통계학적 질서를 뒤집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 만을 이룬디는 것도 아니요, 둘을 이룬다는 것도 아니라 수천 수만을 이 룬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욕망하는 기계들 혹은` 인간적이지 않은 성 이다: 하나의 성이 아니요, 두 성도 아니라, n …·게의 성이다. 정신분 열자-분석은 한 주체 속의 n ……개의 성의 분석이다• 사회는 주체에 대 하여 성욕을 인간의 형태로 표상할 것을 강요하고, 또 주체 자신도 자기 자신의 성욕에 대해서 이러한 표상을 자기에게 주지만, 정신분열자-분석 은 이러한 표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욕망하는 혁명의 정신분열자-분석의 정식은 무엇보다도 먼저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각자에게 그의 여 러 성을.
3 정신분석과 자본주의 정신분열자-분석의 주장은 단순하다: 욕망은 기계요, 기계들의 종합이 요, 기계적 배열이다―_죽, 욕망하는 기계들이다. 욕망은 생산의 질서에 속하며, 모든 생산은 욕망하는 것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분석이 이 생산의 질서를 박살내고, 이 질서를 表象속에 옮겨놓은 것을 비난한다. 무의식의 표상이란 관념은, 정신분석의 대담함이기는커 녕, 처음부터 그 파탄과 그 단념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무의식이란 이 제 더 이상 생산하지 않고, 믿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는 무의식이 다. 그 무의식은 오이디푸스를 믿고, 거세를 믿고, 법률을 믿는다……. 신앙은, 아주 엄밀하게 말하여, 무의식의 행위가 아니다라고 처음에 말한 것은 아마도 정신분석가일 것이다; 믿는 것은 언제나 先 意 鐵이다. 믿는 것은 정신분석가이다, 혹은 우리들 속의 정신분석가이다라고까지 말해야 하지 않을까? 신앙이란 무의식의 표상이 멀리서 영향을 끼치는 의식의 내실에 대한 효과일까? 그러나, 거꾸로 무엇보다도 먼저 생산들의 자리 률 차지하게 된 신앙들의 체계가 아니라면, 무엇이 무의식을 이 표상의 상태에 환원하였는가? 사실, 사회적 생산이 자율적이라 상상되는 신양들 속에서 소의되는 것과, 욕망하는 생산이 무의식적이라 상상되는 표상들 속에로 漏年病] 되는 것은 동시에 일어난다. 그리고 앞서 본 바와 같이, 이 이중의 조작을 행하여, 욕망하는 사회적 생산울 변질시키고 그 모습 울 흉하게 만들어 막디론 골목에 들어가게 하는 것은 동일한 결정기관, 죽 가죽기다. 따라서 신앙-표상과 가족이 결부되어 있는 것은 우연한 일
이 아니다. 표상이 가족적 표상이라고 하는 것은 표상의 본질에 속한다. 그러나 생산은 이 때문에 억압되어 없어지지는 않는다. 생산은 생산을 질식시키는 표상의 결정기관 밑에서 으르링거리며 윙윙거리기를 계속한 다. 그리고 생산은 이 決定機關으로 하여금 도리어 반향을 일으키게 하여 파괴한계점에까지 몰이붙인다. 이렇게 되면 표상은, 生産地帶들에 효과적 으로 파고들기 위하여 신화와 비극의 힘 전체를 부풀게 하여 이것을 휘 두르지 않을 수 없고, 가족을 신화적으로 또 비극적으로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신화와 비극을 가족적으로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신화와 비극도, 역시 생산들, 생산의 형태들이 아닌가? 그렇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신화와 비극이 생산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들이 실제의 사 회적 생산, 실제의 욕망하는 생산에 관계할 때만이다. 그렇지 않을 때에 는, 신화와 비극은 생산의 단위들의 자리를 차지한 이데올로기의 형태들 이다. 오이디푸스, 거세 동을 누가 믿는가? 그리스인들인가? 그러나 그리 스인들은 그들이 믿었던 것처럼 생산하지는 않았다. 그리스인들이 그렇 게 생산했다고 믿고 있는 그리스 연구가들인가? 적어도 1~] 기의 그리스 연구가들은 그러했다. 이들에 관하여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들은 신화와 비극……을 믿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오이디푸스, 거세 롤 표상하는 것은 무의식인가? 혹은 그렇게 무의식을 표상하는 것은 정 신분석가, 우리들 속에 있는 정신분석가인가? 사실, 엥겔스의 말이 이토 록 깊은 의미를 되찾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엥겔스의 말을 따라, 정신 분석가들은 신화와 바극을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스 연 구가들은 오래전에 신화와 비극을 믿기를 그쳤는데, 정신분석가들은 계 속해서 믿고 있다.) 슈레버의 경우에 되돌아가 보자: 슈레버의 아버지는 아이들로 하여금 바론 거세를 가지도록 강요하기 위하여 사디스트적-편집병적인 놀라운 작은 기계들을 발명하고 제작하였다. 금속 막대로 된 머리띠와 가죽으로 된 허리띠가 그런 기계들이다 .16) 이 기계들은 프로이트의 分析에서는 아 16) 슈레버의 아버지의 기계들을 발견하고 재현한 것은 니더란드 W.G. Ni e- derland 이다: cf. 특히 Schreber, Fath er and Son, Ps yc hoanalyt ic Qu ar-
ter ly, 1959, t. 28, pp. 151-169. 거기에는 세귀르 Se gur 백작 부인의 경우에서 와 아주 비슷한 교육적인 고문 도구동기 있다: 〈등에는 등의 근육을· 바르게 하 는 철판, 그리고 턱을 바르게 하는 철 막대가 달린〉, 〈자세교정 띠 > 같은 것이 그런 도구들이다(『회국과 격언』, 이렇게 해서는 파리를 잡을 수 없다……).
무런 역할도 맡고 있지 않다. 슈레버의 아버지의 이 욕망하는 기계들과 이 기계들이 사회적인 교육기계에 분명히 참여하고 있는 것을 고려했더 라면 아마도 슈레버의 망상의 사회적-정치적 내용을 온통 박살내는 것 은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문제 전체는 다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는 아이의 무의식에 대하여 작용하지 만__그러나 그는 가족적인 표현전달에서 가부장으로서 작용하는 것인 가, 그렇지 않고 기계적인 정보나 커뮤니케이션에서, 기계의 대행자로서 작용하는 것인가? 슈레버 법원장의 욕망하는 기계들은 그의 아버지의 욕 망하는 기계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슈 레버의 욕망하는 기계들은 어린 시절부터 사회 터전에 대하여 리비도를 공급하고 있다. 여기서 아버지는 생산과 반생산의 동인으로서의 역할밖에는 맡고 있지 않다. 이에 반하여 프로이트는 첫째 길을 택하였다. 죽 아버지 가 기계들에 관련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와 정반대로, 기계들이 아버지 에 관련지어지고 있다. 따라서 욕망하는 기계들로서이건, 사회기계들로서 이건, 도대체 기계들을 고려할 여지가 이제는 없다. 그 대신 아버지는 〈신화와 종교의 힘〉 및 사랑을 낳는 힘 전체로 부풀어 올라, 작은 가족 적 표상이 망상의 터전과 의연을 같이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욕망하는 기계들과 사회 터전이라고 하는 생산의 짝은 신화-가족이라고 하는., 성 질이 전혀 다른 표상의 짝에 자리를 비킨다. 다시 한번, 당신은 어린이가 노는 것을 보았소라고 묻고 싶다: 어떻게 어린이는 자기에게 속하는 욕 망하는 기계들과 함께 기술적 사회기계들을 이미 자기 속에 들어앉게 하 는가? 오오 성욕이여-아버지와 어머니는 배경에 있다; 어린이는 아버 지와 어머니에게서 필요에 따라 부품들과 톱니바퀴 장치를 빌린다; 아버 지와 어머니는 발신하고 수신하고 가로막고 하는 동인으로서, 생산의 친 절한 동인 혹은 반생산의 의심 많은 동인으로서 거기에 있다. 왜 신화적이고 비극적인 표상에 이렇게 몰상식한 특권이 주어졌는가?
왜 생산의 터전, 작업장, 공장, 통일장치가 있던 바로 그곳에 표현형식들, 하나의 극장 전체를 세웠는가? 정신분석가는 어리둥절해 있는 무의식 속 에 그의 서커스를 심으며, 터전들에 그리고 공장 속에 흥행사를 고스란 히 심어놓는댜 밀러가, 또 이미 로렌스가 정신분석에 반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믿는 자들이 아니요, 똑똑히 보는 사람들은 신화나 비극을 믿지 않는다): 〈생명의 영 웅적인 시대에 거슬러 올라가, 당신은 영웅적 행위의 원리들 자체를 파 괴하고 있다. 왜냐하면 영웅은· 자기의 힘을 의심하지 않으며, 절대로 뒤 룰 돌아다보지도 않기 때문이다. 햄릿은 아무런 의심 없이 자기를 영웅 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햄릿으로 태어난 자기 전체에 있어서, 따 라야 할 오직 하나의 길은 셰익스피어가 그롤 위하여 깔아놓은 그 길이 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햄릿 같은 인물로 태어났는가를 아는 것이 다. 당신은 햄릿으로 태어났소? 도리어 당신은 햄릿을 당신 속에 태어나게 한 것이 아니오? 그러나 나에게 가장 중요해 보이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왜 神話로 되돌아가는가? ……세계가 그 文化體系를 세우기 위하여 이용 해 온 이 이데올로기적인 싸구려 상품은 막 그 시적 가치, 그 신화적 성 욕을 상실해 가고 있다• 왜냐하면 병을 치료하고 따라서 병을 낫게 하는 가능성들을 보여주는 일련의 글들을 통하여, 부지가 깨끗이 整地되고, 새 건물들이 세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새 건물들이란 관념은 나에게는 역겨운 것이지만, 이것은 이 관념이 과정 자체가 아니라, 과정의 의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에는, 내 과정은, 마침 내가 쓰고 있는 이 글 한 줄 한 줄이 모두 그렇지만, 오로지 자궁을 정력적으로. 청소하여, 이를테면 자궁이 槿礎룰 받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를 새로운 건물이 란 관념, 문화를 의미하는, 따라서 허위를 의미하는 새로운 上部構造들의 관념에 인도하지 않고, 끊임없는 탄생의, 재생의, 생명의 관념에 인도한 다……. 신화 속에는 생명의 가능성이 없다. 신화 속에서 살 수 있는 것 은 신화만이다……. 신화를 낳는 이 능력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은 意識으로 부터이며, 이 의식은 끊임없이 발전한다. 이런 까닭에, 우리들의 시대의 정 신분열증적 성격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과정이 끝나지 않는 한, 세계의 배 (l 良)가 제 삼의 눈이 될 것이다. 이 말로 내가 말하려 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허우적거리고 있는 이 관념 들의 세계로부터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나와야 한다는 것 아니고 다른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이 세계는 잉태되어야만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잉태하려면, 먼저 욕망해야 한다……. 욕망은 본능적이고 신성하다. 우리 는 오직 욕망을 통해서만 순결한 잉태를 할 수 있다. 〉 !” 밀러의 이 글 속에는 모든 것이 있다: 오이디푸스(혹은 햄릿)를 자기비판의 점까지 몰 아가는 일, 표현형식들인 산화와 비국을 의식의 신앙둘 혹은 착각들, 죽 관념들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고발하는 일, 무의식을 청소하는 일의 필요성, 무의식의 소파로서의 정신분열자-분석, 자궁의 틈새를 去勢 路에 대립시키는 일, 고아이며 생산자인 무의식에 대한 눈부신 긍정, 새로운 대지들을 생산하게 될 탈토지화의 정신분열중적 과정으로서의 과 정에 대한 찬양,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비국에 대항하고, 〈 인물의 불길한 드라마〉에 대항하고, 〈 가면과 배우의 불가피한 혼동 〉 에 대항하는 욕망하 는 기계들의 작동이 있다• 밀러와 교신한 미카엘 프렌켈 M ich ael Fraen- kel 이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정신분석가 처럼, 혹은 1 양1 ] 기의 그리스 연구가처럼 말하고 있다 : 그렇다, 신화, 비 극, 오이디푸스, 햄릿은 좋은 표현들이요, 함축성 있는 형식들이다; 이것 들은 욕망과 인식의 그야말로 영원한 드라마를 표현하고 있다……. 프렌 켈은 혼해빠진 것들을 모두 근거삼고 있다. 쇼펜하우어, 『비극의 탄생』 의 니체를 근거삼고 있다. 그는 밀러가 이 모든 것을 모르고 있다고 생 각하며, 왜 니체 자신이 『비극의 탄생』과 손을 끊었는지, 왜 니체가 비 극적 표상을 믿기를 그만두었는지는 한 번도 문제삼고 있지 않다. 미셸 푸꼬는, 어떤 절단이 표상의 세계에 생산을 돌입시켰는가를 깊이 있게 밝혔다. 생산은 노동의 생산이거나 욕망의 생산일 수 있고, 사회적 생산이나 욕망하는 생산일 수 있으며, 이제는 더 이상 표상 속에 자기를 포함시키지 않는 힘들에 대하여 호소하며, 또 모든 측면에서 표상을 꿰 뚫고 횡단하는 흐름들과 철단들에 호소한다: 표상 밑에 퍼져 있는 〈그 17) Henry Mi ller, Hamlet, tr. fr. Correa, pp. 156-159.
늘진 광대한 충 〉 에 호소한다 .18 ) 표상의 고전적 세계가 이렇게 파탄하고 소멸하는 날짜를 푸꼬는 l~ i l 기 말과 l~ il 기로 잡고 있다. 그러므로 상 황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해 보인다. 왜냐하면 생산 의 단위들은 가능한 모든 표싱을 자기에게 종속시키는 것이지, 이 표상 들에 종속하지 않는 것인데, 정신분석은 이 생산의 단위들의 발견에 최 고도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카도가 표상 가능한 모든 가치의 원 리로서 양적 노동을 발견함으로써 정치적 혹은 사회적 경제학의 기초를 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욕망의 대상들과 목표들의 표상 전체 의 원리로서 양적 리비도를 발견함으로써 욕망하는 경제학의 기초를 세 우고 있다. 표상은 욕망이나 노동을 그 대상들, 그 목표들 혹은 특히 그 근원들에 결부시키는 것인데, 리카도는 이러한 모든 표상을 넘어, 노동의 주관적 본성 혹은 추상적 본질을 발견하고 있거니와, 아와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욕망의 주관적 본성 혹은 추상적 본질을 발견하고 있다. 그 러므로 리카도가 〈 단적으로 노동 자체 〉 를, 따라서 또한 표상을 실제로 넘어서서 넘쳐흐르는 생산의 영역을 최초로 찾아낸 사람이듯이, 프로이 트는 단적으로 욕망 자체를 최초로 찾아낸 사람이다. 그런데,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노동과 꼭 마찬가지로,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욕망도 탈토지화 의 운동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이 운동이 시작되기 전에는 욕망이 나 노동은 개별적으로 한정되어 있어서 표상의 틀 속에서 특정한 인물 혹은 특정한 대성에 아직 얽매어 있었는데, 이 운동은 모든 개별적 한정 들 밀에 기계둘과 동인들이 활동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욕망하는 기계들 과 욕망하는 생산, 욕망의 심리적 장치들과 욕망의 기계들, 욕망하는 기 계들과 이 기계들을 해독하는 능력이 있는 분석기계의 설치 : 이 모든 것 은 자유로운 종합들의 영역인바, 이 영역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죽 부분적 연결둘, 包含的 離接들, 遊牧的 連接들, 多義的인 흐름들과 連鎖둘, 轉的 切斷둘이 가능하다 __ 그리고 무의식의 조직체들인 욕망하는 기계 18) Mi ch el 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 Gall im ard, 1966, pp. 221-224 (욕망이나 욕망하는 생산과 표상의 대립에 관하여 ) ; p. 265-268 (아담 스미스 와 특히 리카도에 있어서, 사회적 생산과 표상의 대립에 관하여).
들과 이 기계들이 조직된 군집들 속에서 통계학적으로 구성궁 R 근 큰 덩어 리를 이루는 조직체들과의 관계, 이 큰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조직체들 로부터 생겨나는 억압적 1 제 장치……. 이런 것들이 분석의 칭을- 구성한 다; 표상 밀에 있는 이 장은 오이디푸스마저 꿰뚫고, 신화와 비극마저 꿰뚫고 계속하여 살아남아 그 기능을 다한다. 그런데 신화와 비극은 정 신분석과 표상의 화해의 표적이다• 남은 문제는 신화적이고 비극적인 가 족적 표상과 욕망하는 사회적 생산 간의 갈등이 정신분석 전체를 꿰뚫고 있는 점이다. 왜냐하면 신화와 비국은 상칭적 표상들의 체계들이요, 이 체계들은 욕망을 여전히 일정한 의적 조건들이나 특수한 객관적 규준 둘―_대지의 신체, 전제군주의 신체―_에 되돌아오게 하여, 이렇게 함 으로써 욕망의 추상적 혹은 주관적 본질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 미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었다: 프로이트가 심리적 장치들, 욕망하는 기계들과 사회기계들, 충동의 메커니즘과 제도 의 메커니즘에 대한 고찰을 첫째 가는 것으로 다시 볼 때마다, 신화와 비극에 대한 그의 관심은 감소하는 경향이 있었고, 동시에 그는 융에게 서, 그 다음에 랑크 Rank 에게서, 욕망의 본질이 신화나 비극 속에 객관 화되고 소의되어 의적 표상으로서 재건되고 있는 것을 고발하고 있다 .19) 정신분석의 매우 복잡한 이 양면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들은 여러 가지 것을 구별해야 한다. 첫째로, 상칭적 표상은 욕망의 본질을 잘 파악하고는 있으나, 다만 욕망의 본질을 특정한 영역들인 큰 對象體들에 관계시켜서만 파악한다. 이 영역들은 욕망의 대상들, 목표들 및 근원들을 고정시킨다. 그래서 신화는 욕망을 충만한 신체인 대지의 영역에, 또 금 지들과 명령들을 분배하는 토지의 규준에 관계시키고: 비극은 욕밍을· 전 제군주의 충만한 신체와 이에 대응하는 제국의 규준에 관계시킨다. 따라 19) 디디에 앙지의 Di di e r Anz i eu 는 특히 두 시기를 구별한다: 1906-192 0,민의 시기는 〈정신분석의 역사에 있어서 신화학적 業續들이 나온 위대한 시기 〉요, 그 다음의 시기는 제疾 1 국소론의 문제들로 방향을 바꾸어, 욕망과 제도들 간의 관 계들을 다루고, 신화들에 대한 체계적 담구게는 갈수록 관심을 잃어가는 데 따 라, 평판이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 시기이다( Freud et la my tho log ie, in Incid e nces de la psy c hanalys e , n°1, 1970, pp. 126-129) .
서, 상징적 표성들의 이해는 이 경역들과 대상체들의 체계적 현상학으로 서 성립할 수 있는가. (낡은 그리스 연구가들이나 심지어 융의 방식 ) ; 그렇지 않으면 이 대상체들을 이것들의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사회적 조 건들에 관계시키는 역사적 연구로서 성립할 수 있다. (최근의 그리스 연 구가들의 방식.) 이 후자의 관점에서는, 표상은 어떤 괴리를 포함하고 있 고, 안정된 영역보다도 오히려 한 영역으로부터 다른 영역으로의 조건부 의 이행을 표현한다: 신화적 표상은 대지의 영역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 라, 오히려 이 대지의 영역이 전제군주의 영역 앞에서 사라지게 되는 조 건들을 표현한다. 그리고 비극적 표상은 정확히 말하여 전제군주의 영역 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가령 기원전 맑 1] 기의 그리스에서 이 전제군주 의 영역이 도시국가의 새로운 질서를 위하여 사라져가게 되는 조건들을 표현한다 .20) 그런데 신화나 비극을 이렇게 다루는 것은 그 어느 것이나 정신분석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명백하다. 정신분석의 방법은 전혀 다 르다: 그것은 상징적 표성을 일정한 대상체들과 객관적인 사회적 조건들 에 관계시키지 않고, 이것들을 리비도로서의 욕망의 주관적이고 보편적 인 본질에 관계시킨다. 그래서, 정신분석에 있어서의 해독의 조작은 이제 더 이상 인간에 관한 과학들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을 의미할 수 없다. 즉 이런저런 규준의 비밀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할 수 없다. 그렇지 않고 규준들을 무너뜨리고, 신화, 비극 및 사회조직체들만 아니라, 꿈, 환상, 병리학적 조직체들을 꿰뚫는 리비도의 양적 및 질적 흐름들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분석적 해석은 규준과 경쟁하여, 이미 알려져 있는 규준들에다가 하나의 규준을 추가하는 데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방식으로 탈규준화하여, 多形多義여서 규준화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끌어 내는 데 성립한다 .21) 그렇다면 신화(나 비국)에 대한 정신분석의 관심이 20) 대지를 억제하는 전제군주의 권력의 조칙하는 것으로서의 신화에 관하여는, cf. J-P . Vernant, Les Orig ine s de la pe nsee gre cqu e , pp. 109-116; 몰락하는 전제군주를 억제하는 도시국가의 조직을 표현하는 것으로서의 비극에 관하겨는, (Edipe sans comp le xe, in Rais o n pre sente , aout 1967. 21 ) 그러므로 정신분석은 역사가들과 신화학자들이 신화들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는 사회적 규준들에다가 심리학적 규준을 하나 추가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프로이
트는 이미 꿈에 관하여 이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하나의 규준을 따라 해독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라고뺀 이 점에 관해서는 Ja cq u es Derrid a , L'Ecritu re et la d i罪 rence, pp. 310 s q.의 주석을 참조할 것 : 〈아마도 꿈 속의 글은 개인 혹은 집단의 역사의 推移 속에서 규준화된 일군의 요소들을 가지고 직업한다. 그러나, 이 조작들, 그 어휘와 그 統辭法에서는, 순전한 사두리가 어떤 것에도 환원되지 않은 채 님아 있다. 무의식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는 이 잔존물이 해석 울 좌우하는 중요성을 띠고 있다. 꿈꾸는 사람은 자기자신의 문법을 발명한다.〉
이 본질적으로 비판적인 관심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객관적으 로 이해하면, 신화의 특수성은 리비도의 주관적인 태양 볕에 녹아 없어 지겠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너져 내리는 것, 혹은 막 무너져 내리려 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표상의 세계이다. 둘째로 말할 것은, 정신분석과 자본주의의 관계가 경제학과 자본주의 의 관계 못지않게 깊다고 하는 점이다. 탈규준화하고 탈토지화한 흐름들 울 발견하는 일은, 경제학에서는 그리고 사회적 생산에 있어서는, 추상적 이고 주관적인 노동의 형태 아래 행해지고, 정신분석에 있어서는 그리고 욕망하는 생산 속에서는,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리비도의 형태 아래 행해 진다.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본주의에서는 본질이 주관적인 것, 죽 생산활동 일반이 되며, 추상적인 노동이 현실적인 어떤 것이 된다. 이 현실적인 어떤 것에 입각하여 탈규준화나 일반화된 탈토지화의 진행 의 관점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조직체를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가장 단순한 추상을 근대경제학은 첫째 가는 자리에 놓는데, 이 추상은 모든 사회형태에 타당하는 조상 전래의 현상을 표현하지만, 그것이 추상 으로서 실제적으로 참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가장 근대적인 사회의 범 주인 한에서만이다.〉 리비도로서의, 주관적 본질로서의 욕망에 있어서도 사태는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의 사회적 생산과 욕망히는- 생산 간에, 혹 은 돈-자본의 흐름들과 욕망의 똥의 흐름들 간에 단순한 평행관계를 세 울 것이 아니다. 이것들의 관계는 훨씬 더 밀접하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사회기계들 안에 있지, 딴 곳에 있지 않다. 따라서 자본주의기계 속에서 털규준화한 흐름들의 연접은 보편적인 주관적 리비도의 자유로운 모습들 을 해방시키는 경향이 있다. 요컨대,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은
구별없는 생산활동 일반의 발견은 경제학 및 정신분석의 발견과 불가분· 의 관계에 있고, 표상의 한정된 체계들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자본주의적 인간이, 혹은 자본주의 속의 인간이 노동하 기를 욕망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으며 또 자기의 욕망을 따라 노동한 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욕망과 노동의 일치는 오히려 하나의 신 화가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적극적인 유토피아이다. 이 유토피아~근 자 본주의가 욕망하는 생산에로 가기 위하여 뛰어넘어야 할 극한이다. 그런 데, 왜, 바로, 욕망하는 생산은 자본주의를 항상 괴롭히는 국한인가? 왜 자본주의는 욕망과 노동의 주관적 본질_생산활동 일반인 한에서의 공 통되는 본질_울 발견함과 동시에, 금방 이 본질을 다시 押壓機械 속에 서 소의하기를 그치지 않는가? 이 억압기계는 이 공통되는 본질을 둘로 갈라, 한 쪽에 추상적 노동, 다른 한 쪽에 추상적 욕망으로 어디까지나 갈라놓는다: 그래서 경제학과 정신분석, 경제학과 리비도적 경제학이 있 게 된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정신분석이 전적으로 자본주의에 속한 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앞서 본 바와 같이, 자본주의는 욕망 하는 생산의 탈규준화한 흐름들을 국한으로서 분명히 가지고 있지만, 이 것들을 규준들의 자리를 차지하는 공리계 속에 묶음으로써 이것들을 몰 아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탈토지화의 운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 만, 자본주의는 模造의 인공적인 재토지화들을 통하여 이 운동을 쫓아버 린다. 자본주의는 토지적이고 전제군주적인 표상들의 폐허 위에 건설되 지만, 이 표상들을 자본의 심상들이란 자격으로, 하나의 다른 형태로 재 건하여 이용한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요 약하고 있다: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본질이 자본주의에 의하여 발견되는 것은 다시 쇠사슬에 묶이고 소의되기 위해서요, 또 이렇게 되는 것은 대 상체로서의 의적이고 독립된 영역에서가 아니라, 사유재산이라고 하는 주관적인 영역에서라고 하는 것이 사실이다; 〈예전에는, 인간이 자기자 신에 대하여 의적이었고, 인간의 상태는 실제로 소의된 상태였다: 지금 은 이 상태가 소의의 행위, 몰수의 행위로 바뀌었다.〉 사실, 자본가들의 재산인 생산수단들의 흐름이 노동자들의 〈재산〉인 소위 자유로운 노동
의 흐름과 관계하는 체계 속에서 탈규준화한 흐름을 연접시키는, 죽 공 리계화하는 조건이 되는 것은 사유재산의 형태이다. (따라서 사유재산의 실질과 내용에 대한 국가의 제한들은 이 형태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 한다.) 자본주의의 모조적인 재토지화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도 사유 재산이라고 하는 형태이다. 끝으로 자본주의의 내재의 터전을 채우고 있 는 심상들, 자본가 〈 자체 〉 , 노동자 〈 자체 〉 등을 만들어내는 것도 사유재 산이라고 하는 형태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본주의는 보편적인 내적 본 질로서의 생산을 위하여 일정한 큰 객관적 표상들을 붕괴시킨 것이 사실 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表象의 세계에서 떠나지는 않고, 다만 이 세계의 광대한 전환을 조작하여, 이 세계에 무한한 주관적 표상이라고 하는 새 로운 형태를 준다 .22)
22) 푸꼬는, 〈인간과학들〉이 표상의 파탄이 있은 후 그것들의 원리를 생산에서 찾 음으로써 구축되었지만, 금방 무의식적 표상 따위의 새로운 형의 표상을 재건하 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Les Mots et les choses, pp. 363-378).
우리는 정신분석의 관심사들로부터 멀어진 듯하지만, 본래 우리는 결 코 이것들에 아주 가까이 있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여기서도, 앞서 본 바와 같이, 정신분석의 운동의 내부에서 자본주의는 하나의 사회적 공리 계만을 요구하고 세우지 않고, 사기업화한 가족에 대하여 이 공리계를 적용할 것을 요구하고 또 실제로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상을 파헤 쳐 둘로 쪼개어 표상을 표상 자체에 포개는 이 적용이 없으면, 표상온 결코 자기자신의 변환을 확실히 해내지 못할 것이다 . 이렇게 되면 사유 재산에서 표상되는 바와 같은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노동은 사기업화된 가족에서 표상되는 바와 같은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욕망을 상관항으로 가전다. 경제학은 첫째 항을 떠맡고, 정신분석은 둘째 항을 떠맡고 있다. 정신분석은 경제학을 공리계로 삼는 적용기술이다. 요컨대, 정신분석은 자본주의에 고유한 운동 속의 둘째 국을 되찾는바, 이 운동은 일정한 크 기의 객관적 표상들을 무한한 주관적 표상으로써 대체한 것이다. 사실 욕망하는 생산의 탈규준화한 흐름들의 경계선은 두 번 쫓겨나고, 두 번 옮겨져야만 한다. 한 번은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더욱더 큰 규모로 재생
산하는 내재적 경계선들을 세움으로써요, 또. 한 번은 이 사회적 재생산 울 제한된 가족적 재생산에 포개는 내부의 경계선을 그음으로써이다. 따 라서 신화나 비극에 관한 정신분석의 애매성은 디음과 같이 설명된다: 정신분석은 신화와 비극을 객관적 표상들로서는 파괴하고 그것들 속에서 보편적인 주관적 리비도의 형상들을 발견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신화 와 비국을 주관적 표싱둘로서 되찾아내어 승격시키는데, 이 주관적 표상 둘은 신화와 비국의 내용을 무한히 높인다. 정신분석은 신화와 비극을 다루되 , 이것들을 私的인 인간, 죽 가족인 Homo fami li a 의 꿈이나 환상 으로서 다룬다_~그런데 사실 꿈과 환싱이 신화와 비극에 대해서 갖는 관계는 사유재산이 공유재산에 대해서 갖는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신화 와 비극에서 객관적인 영역의 상태에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정신 분석에서 다시 거론되고 높여지되, 주관적 표상의 무의식적 차원으로서 문제되고 높여전다. ( 인류의 꿈으로서의 신화로 높여진다.) 객관적이고 공적인 영역의 자격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것 __ 대지, 전제군주-이 이제 다시 거론되되, 주관적이고 사적인 재토지화의 표현으로서 거론된 다: 오이디푸스는 폐위되고, 추방되고 탈토지화한 전제군주이건만, 오늘 날 사람들은 누구나 아빠-엄마-나로서 생각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위 에서 재토지화를 한다. 정신분석, 그리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모든 신 앙, 즉 어느 시대에나 인류가 믿었던 것 전체를 긁어모으되, 믿지 않으면 서 신앙을 유지하는 현실부인의 상태로 이것을 끌고 가기 위해서 긁어모 은다. (그건 꿈에 지나지 않아……: 오늘날, 가장 업격한 신앙심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이중의 인상이 생긴다: 정신분석은 神話學이나 신화학자들에 대하여 다 같이 반대하지 만, 동시에 신화와 비극을 주관적인 보편자의 처원들에 옮겨놓는다: 오 이디푸스 자신이 〈콤플렉스 없이 〉 존재한다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 없이 존재한다• 이것은 마치 나르시시즘이 나르시스 없이 존 재하는 것과 같다 .23) 이와 갇은 것이 정신분석에 스며들어 있는, 그리고 23) Di dier Anzie u , Freud et la my tho log ie, Incid e nces de la psyc hanalys e , n°1, lfJT O , pp. 124 et 128: 〈프로이트는 신화에 아무런 특수성도 부여하지
지 않는다. 이 점은 정신분석가들과 인류학자들 간의 그 후의 관계들에 가장 무 거운 짐을 지운 것들 중의 하나이다……. 프로이트는 신화를· 그야말로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 출발한다……. 「나르시시즘 入門」이란 논문은 충동 이론의 수정을 향한 중요한 단계를 이루는 것인데, 이 논문은 나르시스의 신화 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신화와 비극의 객관적 표상들의 체계(신화, 비극)를 파괴하고, 다른 손으 로는 이 욕망하는 생산을 주관적 표상들의 체계 속에 옮겨놓는다. (즉, 이 욕망하는 생산을 꿈이나 환상으로 보는데, 신화와 비극은 꿈이나 환상기 발전한 것 혹은 투사된 것으로 정립된다.) 여기에는 심상들 이의에 아무것 도 없다. 결국 남는 것은 친밀한 가족적 극장, 私人의 극칭이다. 이 국장은 욕망하는 생산도 아니요, 객관적 표상도 아니다. 무대로서의 무의식이다. 하나의 극장이 생산의 자리를 온통 차지하여, 바극과 신화가 옛날의 밀천 만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생산을 이지러지게 한다. 신화, 비극, 꿈, 환상-―꿈과 환성에 관련시켜 재해석되는 신화와 비 극__이런 것들이야말로 정신분석이 생산 라인, 죽 사회적인 욕망하는 생산 대신에 채용하는 표상계열이다. 생산의 계열 대산에 극장의 계열이 들어선다. 그런데, 바로, 왜 주관적인 것이 된 표성이 이렇게 극장의 형 태를 취하는가? (〈정신분석과 극장 사이에는 신비로운 연줄이 있다 …….>) 최근의 몇몇 저자들은 여기 대하여 아주 현대적인 답을 다음과 갇이 내놓았다: 국장은 무한한 주관적 표상에서 유한한 구조를 끄집어낸 다. 여기서 〈끄집어낸다〉라는 말의 의미는 아주 복잡하다. 왜냐하면 구 조란 그 자체의 부재밖에는 결코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 표상 속에 표상되지 않은 어떤 것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흔히 둘 말하는 것처럼, 극장의 특권은 은유적이고 환유적인 인과관계를 등장 시키는 것인데 이 인과관계는 그 결과들 속에 구조의 현전과 부재를 동 시에 나타낸다. 앙드레 그린은, 구조가 충분히 나타나 있지 않다고 유보 할 때에도, 구조를 현실화하기에 필요한 극장, 죽 開示하는 역할을 하며, 구조가 가시적인 것이 되는 장소인 극장을 위해서만 유보하고 있다 •24)
24) 앙드레 그린은 표상-극장_구조-무의식의 관계들의 분석에 있어 아주 앞서 가 고 있다: Un a!il en tro p , Ed. de Mi nu it , 1969, Prolo g ue( 특히 p. 43, sur
la rep r esenta t i on du non-rep r esente dans la rep r esenta ti on ). 하지만, 그린이 구조에 대하여 가하고 있는 비판은 생산을 위해서가 아니고 표상을 위해 서요, 또 구조 의의 인자들의 필요성을 내세우는데, 이 인자들은 구조를 밝히되 오이디푸스적인 것으로서 밝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
옥따브 마노니 Oct av e Mannon i는, 신앙현상의 훌륭한 분석에서, 역시 극장의 모델을 사용하여, 극장이 구체화하거나 등장시키는 하나의 구조 의 효과에 의해서, 신앙의 현실부인이 사실상 어떻게 신앙을 변형시키는 가 하는 것을 밝히고 있다한 우리는, 표상이 객관적인 것이기를 그칠 때, 표상이 무한히 주관적인 것 죽 상상적인 것이 될 때, 표상은 하나의 구조에 의하여 지탱되지 않는다면 실제로 모든 정합성을 잃는다. 구조는 표상의 주체의 자리와 가능들만 아니라, 심성들로서 표상되는 대상들 및 주체와 대상들 간의 공식의 관계들을 규정한다. 이때 상징적인 것은 영 역으로서의 대상체에 대한 표상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표상의 궁극의 영역들, 죽 순수한 시니피앙들, 표상되지 않는 순수한 表 象現들을 가리킨다. 이 표상표현들로부터 주체들, 대상들 및 이것들의 관계가 동시에 생겨난다. 그래서 구조는 주관적 표상의 무의식을 가리킨 다. 이 표상의 계열은 이제 드러난다: 그것은 무한한 주관적 (상상적) 표상―극장의 표상-구조적 표상이다. 따라서, 바로 극장은 숨은 구조의 영역들과 관계들을 구상화하는 동시에 이 구조 자체를 등장시킨다고 여 겨지기 때문에, 극장은 이 구조의 보편성을 드러내기에 알맞다. 객관적 표성들의 경우도 여기에 포함된다. 국장은 숨은 표상표현들, 이것들의 이 동과 가변적 관계들에 관련하여 이 객관적 표상들을 되찾고 재해석한다. 사람들은 모든 신양을 무의식의 구조의 이름으로 모아들이고 되찾는다: 우리는 아직도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 도처에서, 상칭적인 시니피앙의 위 대한 활동이 전개되고, 이 시니피앙은 상상계의 시니피에들에게서 구체 화된다__보편적인 은유로서의 오이디푸스가 이렇게 해서 등장한다. 왜 극장인가? 극장의 이 무의식과 混疑紙의 이 무의식은 어찌 그리 기 묘한가. 극장이 생산의 모델로 여겨지고 있는 것 말이다. 알뛰세르에게
25) Octa v e Mannon i, Clef s po ur I'ima gina ir e OU l'A utr e Scene, Ed . Seuil , 1969, ch. I et VII.
있어서조차 다음과 같은 조작을 볼 수 있다: 먼저, 객관적 표상 Vorste l- lu ng의 세계에 환원될 수 없는, 〈 기계 > 혹은 〈 機械圈溝 〉 로서의 사회적 생산이 발견된다. 그러나 금방 기계가 구조에 환원되고, 생산이 구조적 및 극장적 표상 (Dars t ellu ng上演)과 동일시된다 . 26) 그런데 욕망하는 생산 에 있어서도 사태는 사회적 생산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생산이 그 근 원에서, 그 실상에서 파악되지 않고 표상의 공간에 포개질 때마다, 생산 은 이제 그 자체의 부재를 통해서만 가치를 지닐 수 있고, 또 이 표상의 공간에서 결여로서 나타난다. 무스타파 사푸앙 Mousta f a S af ouan 은 정 신분석 속의 구조를 탐구하여, 구조를 〈 矢 ?n 의 이론에의 기여 〉 로 제시할 수 있었다. 욕망과 불가능한 것이 밀접하게 결부되는 것은 구조 속에서 이며, 거기서 결여는 거세로 규정된다. 가장 엄숙한 노래가 거세에 경의 를 표시하기 위하여 불려지는 것은 구조로부터이다: 그렇다, 그렇다, 우 리가 욕망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거세를 통해서이다__욕망하는 생산이 표상의 공간 속에 펼쳐지고 이 공간이 욕망히는 생산울 그 자체 에 대한 결여로서만 존속시키게 되자마자 이렇게 된다. 이것은 욕망하는 기계들에 대하여 하나의 구조적 통일이 강요되고 이 통일은 욕망하는 기 계들을 하나의 큰 덩어리를 이루는 집합 속에서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분적 대상들은 하나의 전체와 관계하게 되는데, 이 전체는 부 분적 대상들이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서만, 또 부분적 대상들에 결여되어 있음으로 해서 그 자체에도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서만 나타날 수 있다. (〈시니피양들의 집합에 대한 一者의 내재에 의하여 상칭화할 수 있는 〉 위대한 시니피앙으로서만 나타날 수 있다.) 구조를 꿰뚫고 있는 결여의 결여를 어디까지 발전시킬 참인가? 결국은 구조적 조작에 이르고 만다: 이 조작이 큰 덩어리를 이루는 집합 속에서 결여를 정리한다. 이때, 욕망 하는 생산의 경계선-큰 덩어리를 이루는 집합들과 이것들의 분자적 집합들을 갇러놓는, 객관적 표상들과 욕망의 기계들을 갈라놓는 경계 선―-은 이제 전적으로 옮겨놓아진다 . 이 경계선은, 큰 덩어리를 이루는 26) Lou is Alth u sser, Lir e le Capi tal , II, pp. 170-177( 현전-부재로서의 구조에 관하여).
집합이 거세의 자국에 의하여 파헤쳐져 있는 한에서, 이 집합 속만을 통 과한다• 구조의 正式의 조작들은 外抵 적용, 일대일 대응의 조작인데, 이 것들은 출발점의 사회적 집합을 도착점인 가족적 집합에 포캔다. 그리하 여 가족적 관계는 〈 다른 모든 관계의 隱兪 〉 가 되고, 분자적인 생산요소 둘이 그들 자신의 도주선을 따라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그린은 정신 분석과, 극장적 표상 및 이 표상이 가시적인 것이 되게 하는 구조의 친 근성의 기초를 이루는 근거들을 찾으면서 특히 두드러진 두 가지 근거를 둘고 있다: 하나는 극장이 가족적 관계를 보편적인 은유적 구조관계의 상태에 끌어올리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인물들의 상상적인 활동과 자리 가 생기게 된다고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거꾸로, 극장이 기계들의 활동과 작용을, 무대 뒤로, 죽 넘어갈 수 없게 된 경계선 뒤로 밀어넣는 다고 히는 것이다• (환상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기계들이 있기는 있지만, 벽 뒤에 있다.) 요컨대, 옮겨놓아전 경계선은 이제는 더 이상 객관적 표 상과 욕망하는 생산 시이를 통과하지 않고, 무한한 상상적 표상과 유한 한 구조적 표성이라고 하는 주관적 표상의 두 극 사이룰 통과한다. 따라 서 규정되지 않은 것 혹은 분화되지 않은 것의 밤을 향하는 상상계의 갖 가지 모습들과, 분화의 길을 더듬어가는 상칭계의 불변항이라고 하는 두 양상을 대립시킬 수 있다: 거꾸로 된 관계의 규칙, 즉 이중구속의 규칙 에 따라 동일한 것을 이쪽이나 저쪽에서 볼 수 있다. 생산 전체가 주관 적 표상의 이중의 막다른 골목에 끌려 들어간다 . 오이디푸스를 상상계로 돌려보내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러나 그가 결여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로부터 그는 더 힘있게, 더 전면적으로, 더 결여하여 더 승리하면서 되돌아온다. 그는 상칭적 거세 속에서 전면적으로 되찾아진다. 따라서 확 실히 구조는 가족주의에서 빠져나갈 수단을 우리에게 전혀 주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이 그 문자 그대로의 객관적인 가치들을 잃었을 때에도 구조 는 가족을 단단히 묶고, 가족에다가 보편적인 은유적 가치를 준다. 정신 분석은 그 야심을 자백하고 있다: 그 야심이란, 쇠퇴해 가는 가족에다가 구원의 손길을 펴는 일, 부서진 가족의 침대를 정신분석의 소파로 바꾸 어 놓는 일, 〈分析의 상황〉이 그 본질에 있어서 近親相蔡的인 것이 되게
하고, 그 상황이 그 자체에 대한 증거 혹은 보증이 되어 현실로서의 가 치를 지니게 하는 일이다 . m) 옥따브 마노니가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결 국 문제는 디음과 같은 것이다: 어떻게 신앙을 버린 후에도 신앙이 계속 될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는 계속해서 신앙심을 가질 수 있는가? 우리 는 객관적 표상들을 경유한 우리의 모든 신앙을 버리고 또 잃었다 . 대지 는 죽었고, 사막은 늘고 있다: 늙은 아버지, 즉 토지의 아버지는 죽었고, 아들인 전제군주 오이디푸스도 죽었다. 우리는 우리의 양심의 가책 및 우리의 권태와 더불어 홀로 있고, 우리의 삶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 는다; 무한한 주관적 표상 속에서 회전하는 심상들이 있을 따름이다. 그 런데 우리는 이 심상들을 믿는 힘을 하나의 구조의 밑바닥에서 되찾는 다. 이 구조는 이 심상들과 우리의 관계들을 또 우리의 신원들을 하나의 상칭적 시니피앙이 낳은 갇은 수의 성과로서 관리한다 . 〈 좋은 신원 〉 이 다……. 우리는 극장에서는 모두 애지중지되는 아기로서, 오이디푸스 앞 에서 다음과 같이 의친다: 여기엔 나와 비슷한 사람들만이 있다, 여기엔 나와 비슷한 사람들만이 있어요! 모든 것, 즉 대지의 신화, 전제군주의 비극이 국장에 투사된 그림자들이란 자격으로 되찾아진다. 큰 토지들은 와르르 무너졌으나, 구조가 주관적이고 사적인 모든 재토지화를 행한다 . 정신분석은 이 무슨 도착된 조작인가? 정신분석에서는 저 新觀念論이, 저 되살아난 거세숭배가, 저 결여의 이데올로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 性 이 인간의 모양으로 표상되고 있다. 사실, 이것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억압의 메커니즘에 봉사하고 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것 들의 의도는 가끔 진보주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아무도 적어 도 모든 것이 미리 꾸며져 있다는 것을 모르고서 분석가의 진료실에 둘 어설 수는 없다: 모든 것이란, 오이디푸스와 거세, 상상계와 상징계, 존 재의 결함이나 몰수를 주장하는 대단한 교설……이다. 기발한 상품인 정 신분석, 재토지화로서의 오이디푸스, 현대인을 거세의 〈바위〉 위에 다시 심논자인 오이디푸스. 라깡은 전혀 다른 길을 밟았다. 그는, 분석하는 다람쥐인 양, 상상계와 27) Serge Leclai re , Demasqu e r le reel, Ed. du Seuil , 1971, pp. 28-31 .
상징계로 되어 있는, 오이디푸스적 상상계와 오이디푸스화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 인물들의 상상적인 신원들과 기계들의 구조적 통일로 되어 있는 바퀴 속을 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가족이 그 자체의 주위에 둘러친 큰 덩어리를 이루는 표상의 막다른 골목들에 도처에서 부 딪친다. 만일 상징계의 제 3 항(혹은 제 4 항)이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일을 하고, 상상계의 두 항이 일대일로 대응시켜지는 것이라면, 상상계의 두 항으로부터 상칭계의 제 3 항(혹은 7 제 4 항)으로 이행하는· 것이 무슨노 소용이 있는가? 부분적 대상인 한에서의 욕망히는 기계들은 두 가지 전체화를 겪는다. 하니는 출발집합점에서 부재 혹은 결여로서 작용하는 상칭적 시 니피앙 밑에서 사회체가 욕망하는 기계들에다가 구조적 통일을 줄 때요, 다른 하나는 도달집합점에서 결여를 분배하고 〈 空胞를 만드는 〉 상상계의 시니피에둘로써 가족이 욕망하는 기계들에다가 인물적 동일을 강요할 때 다: 구조가 욕망하는 기계들로 하여금 자기의 分節을 지니게 하는· 한, 부모가 욕망하는 기계들에 간섭하는 한, 이 두 가지 전체화는 욕망하는 기계들을 유괴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만일 구조가 그 표면으로서 욕망의 현실적 생산이란 면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심심H 둘로부터 구조로 거슬러 울라간다 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요, 또 우리로 하여금 표상 밖으로 나가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표면은 분자적 요소들의 〈현실적 無組 織 〉 이다: 여기에는 디음과 같은 것들이 속해 있다. 첫째, 간접적 종합들 이나 간접적 상호작용의 관계에 있는 부분적 대상들. 왜냐하면 이것들은 의연적 부분들이란 의미에서 부분적인 것이 아니요, 오히려 강도들로 서 〈편파적 〉 이란 의미에서 부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물질은 언제나 이 강도들을 따라 갖가지 단계로 공간을 채우고 있다. (눈, 입, 항문은 물질 의 단계들이다.) 둘째, 적극적인 순수한 다양성들. 이것들에 있어서는 배 제도 부정도 없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것들은 계획 없이 조작하는 종합들이다; 이 종합들에 있어서는 연결둘이 횡단적이요, 이집들은 포함 적이며, 연집들은 다의적이며, 이 종합들은 그 토대와는 관계없이 조작한 다. 왜냐하면 이 종합들에 대해서 바로 그 토대로 쓰이는 물질은 어떠한 구조적 통일에 의해서도 또 어떠한 인물적 통일에 의해서도 한정되지 않
고, 기관들 없는 신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의 강도가 이 기 관들 없는 신체를 채울 때마다 이 신체는 공간을 채운다. 셋째, 욕망의 기호들 이것들은 시니피앙의 연쇄를 구성하지만, 이것들 자체는 시니피 앙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언어학의 체스 놀이의 규칙들을 따르지 않고, 복권 놀이의 제비 뽑기를 따른다; 이 놀이는 어떤 때에는 한 낱말, 어떤 때에는 한 데생, 어떤 때에는 한 물건이나 물건의 한 조각이 나오게 한 다; 이 기호들은 제비 뽑기의 우연의 질서를 통해서만 서로 관계하며 연 줄의 부재를 통해서만 합쳐진다(합쳐지는 장소는 확정되지 않는다) ; 이 기호들은 그것들 자체 분산되어 있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분산된 요소들 이라고 하는 신분만을 갖고 있다 .28) 리깡은 구조의 이 표면 전체를 기계 로서의 〈 a 〉와, 인간의 것 아닌 성으로서의 〈 A 〉로 발견하고 있다: 정신 병의 영역을 오이디푸스화하는 대신, 정신분석의 영역을 정신분열중화하 고있다. 어떻게 구조는, 구성국면이나 구조화국면, 선택의 선들을 따라 그 표면 으로부터 떠나가는가? 이 국면들과 선들은 통계학적인 큰 집합들., 죽 큰 덩어리를 이루는 조직체들에 대응하며, 연계들을 규정하여 생산을 표상 28) Jac q ue s Lacan, Ecri ts, pp. 657-659. 세르쥬 르끌래르 Ser g e Lecla i re 는 이 런 견지에서 구조의 이면을 〈욕망의 순수한 존재〉라고 깊이 있게 정의하려 하 였다 (La Realite du desir , in Sexualite humain e , pp. 242-249). 그는 욕 망에서 인물 이전의 다양한 단일체들과 임의의 요소들이 바로 연줄의 부재에 의 하여 규정됨을 보고 있다. 그런데 이 연줄의 부재 및 의미의 부재는 적극적인 것이요, 〈이 집합 전체의 긴밀한 결합의 특별한 힘을 구성한다〉. 물론, 의미와 연줄을 재건하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다. 잊어버렸었다고 생각하는 단편들을 삽 입함으로써만이라 해도 말이다. 그런데 〈만일 분석이 두 요소 간에 연줄을 다시 발 견한다면, 이것은 이 두 요소가 무의식의 환원 불가능한 궁극의 항들이 아니라고 하는 징조이다〉. 르끌래르는 여기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쯔에게 있어서의 실제적 구별 의 정확한 기준을 이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 기준은, 궁극의 요소들(무한한 속성들)은, 서로 의존하지 않으며 그것들 간에 아무런 대립관계도 아무런 모순 관계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오직 신에게만 귀속시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직접 적인 연줄이 없다는 것은 그 요소들이 神의 실체에 속함을 보증하는 것이다. 부 분적 대상들과 기관들 없는 신체에 있어서도 사태는 마찬가지이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실체 자체요, 부분적 대상들은 실체의 속성들 죽 궁극적 요소들이다.
에 포개는 것들이다: 여기서는 이집들이 배타태일적인 것이 되고, (연결 둘은 전체적인 것이 되고, 연접둘은 일대일 대응적인 것이 되고,) 동시에 토대는 구조적 통일 아래 명확하게 한정되고, 記號둘은 그 자체 전제군 주의 상칭의 활동 아래 시니피앙들이 된다; 이 상징은 그 자신의 부재 혹은 은퇴의 자격으로 기호들을 전체화한다. 왜냐하면 사실 사태가 이러 하기 때문이다. 죽 욕망의 생산은 外括된 하나의 기호와의 관련에서만 표상될 수 있는데 이 기호는 모든 기호의 요소들을 하나의 집합 속에 통 합하되, 그 자신은 이 집합의 부분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연줄의 부재 가 반드시 하나의 부재로 나타나며, 더 이상 적극적인 힘으로서는 나타 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욕망이 반드시 하나의 결여항에 관계시켜지는데, 이 항의 본질 자체는 결여한다는 것이다. 욕망의 기호들은, 시니피앙들이 아니므로, 결여 혹은 부재의 시니피앙과의 관련에서만 표상 속에서 시니 피%비 된다. 구조는 결여로서 규정되는 상징항과의 관련에서만 형성되 고 나타난다. 인간의 것이 아닌 성으로서의 위대한 타자는, 표상 속에서 는, 항상 결여하는· 항으로서의 위대한 타자라고 하는 시니피앙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시니피앙은 너무나 인간적인 성이요, 큰 덩어리를 이루는 거세의 남근이다 .29) 그러나 라깡의 생각의 걸음이 아주 복잡하게 되는 것도 여기에서이다. 왜냐하면, 확실히, 그는 오이디푸스적 구조로 무의식 울 가두어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오이디푸스가 상상적인 것이 요, 하나의 심상, 하나의 신화에 지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또 이 심상 혹은 이 심상들은 오이디푸스화하는 구조에 의해서 생겨났음을 밝히고 있다. 또 이 구조는 거세의 요소를 재생산하는 한에서만 작동하는데, 이 29) 위의 책, p. 819( 〈이 시니피앙이 없으면, 다른 모든 시니피앙은 아무것도 나타 내지 않을 것이다……〉). 세르쥬 르끌래르는 어떻게 구조가 결여항의 주위에, 혹은 차라리 결여의 시니피앙의 주위에 조직되는가를 밝히고 있다: 〈우리가 결 여의 본질에 대한 그 관계에 있어 유일의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다시 보게 되는 것은, 연줄이 부재하는 선택된 시니피앙, 죽 남근이다. 이것은 더할 나위 없이, 환원 불가능한 차이, 죽 남녀의 성의 차이의 표식이다……. 인간이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언어체계의 한 점에 어떤 것에도 환원될 수 없는 결여를 보중 하는 것, 죽 남근의 시니피앙이 있기 때문이다……〉 (La Realite du desir , p. 251). 이 모든 것은 얼마나 기묘한 것인가…… .
요소는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임을 밝히고 있다. 바로 이것 들이 구조화의 세 개의 큰 국면인데, 이것들은 큰 덩어리를 이루는 집합 들에 대응한다: 오이디푸스는 私人의 상상적인 재토지화로써 나타나며, 이 재토지화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조건들 속에서 생겨나며, 또 이것은 지본주의가 제국적 상징 혹은 사라진 전제군주의 고풍주의를 재생산하고 되살아나게 하는 한에서이다. 이 세 가지는 동시에 필요하다: 바로 오이 디푸스를 그의 자기비판의 지점에 인도하기 위해서• 이러한 지점에 오이 디푸스를 인도하는 것이 리깡이 기도한 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엘리 자베스 루디네스꼬 El isa beth Roud i nesco 는 라깡에게 있어서 무의식이 언어라고 하는 가설은 무의식을 언어학적 구조 속에 가두어놓는 것이 아 니라, 어떻게 시니피양들의 구조적 조직이 여전히 고풍주의로서 작동하 는 위대한 전제군주 시니피%}ol] 의존하는가를 밝힘으로써, 언어학을 그 자기비판의 지점에 인도하는 것이라 함을 잘 보았다 .)30) 자기비판의 지 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구조가 구조를 채우고 있는 심상들과 구조를 표상 속에서 좌우하는 상칭계를 넘어, 구조를 용해시키는 非構成의 적국 적 원리로서의 구조의 표면을 발견하는 지점이다: 이 지점에서는 욕망이 생산의 질서에 다시 옮겨지고, 그 분자적 요소들에 관계시켜진다. 또 욕 망은 아무것도 결여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욕망은 자연적이고 감각적 인 것으로 규정되며, 동시에 현실적인 것은 욕망의 객관적 존재로 규정되 기 때문이다. 사실, 정신분열자-분석의 무의식은 인물들, 집합들 및 법률 들을 모른다; 심상들, 구조들 및 상칭들을 모론다. 무의식은 무정부주의 자요 무신론자이듯이, 또한 고아이다. 무의식이 고아인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 하나의 부재를 가리킨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역시싱의 이름들 (〈고유명사의 바다〉)이 현전하는 강도들을 가리키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 서나 무의식이 자기자신을 생산한다는 의미에서이다. 무의식은 형상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표상형태는 추상적인 것, 분열-형상이기 때문 30) Eli sa beth Roud ine sco, WL'Ac tion d'une meta p h ore, La Pensee, fev rie r 1972(Ecri ts, p. 821 에서 러깡이 언어학적 의미에서 파악된 〈제로象徵〉보다 〈이 상칭의 결여의 시니피앙〉이란 관념을 더 높은 것이 되게 하고 있는 방식을 참 조할것).
이다. 무의식은 구조적인 것도 아니요 상칭적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현실성은 그 생산에 있어서, 그 無組織 자체에 있어서 실재의 현실성 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표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기계적이고 생산적 01 다. 파괴하라, 파괴하라: 정신분열자一분석의 일은 파괴를 통해서 행해전 다. 죽 무의식을 깨끗이 청소하고 깨끗이 소화함으로써 행해전다. 파괴하 라, 오이디푸스를, 自我라고 하는 착각을, 超自我라고 하는 꼭두각시를, 죄책감을, 법률을, 거세를……. 정신분석이 분석가의 친절한 중립 아래 조작하는 것 같은, 경건한 파괴둘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헤겔식의 파괴요, 보존하는 방식들이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중립 이 어떻게 우리를 웃기지 않을 수 있는가? 또 정신분석이 오이디푸스의 시라짐이니 해소니 부르고 있는 것, 혹은 감히 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 어떻게 우리를 웃기지 않을 수 있는가? 흔히 말하기를, 오이디푸스는 불 가결한 것이요, 가능한 모든 구별의 원천이요, 우리를 미분화의 무서운 어머니로부터 구출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 무서운 어머니, 스핑크스 는 그녀 자신이 오이디푸스의 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녀의 미분화는 오 이디푸스가 창조하는 배타택일적 구별들의 표면에 지나지 않으며, 그녀 자신 오이디푸스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필연적으로 이 이중의 막다른 골목의 형태로 작동한다. 또 흔히들 말하기를, 오이디푸스 는 극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오이디푸스가 극복되는 것은 거세, 참재기, 성의 배제 및 승화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거세란 역시 아주 힘있게 되어 그만큼 유독한 상칭이 된 오이디푸스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참재기, 순전히 우화인 잠재기는, 오이디푸스가 우리들 속에서 발전하고 강하게 되고 그 유독한 정액을 축적하기 위하여 욕망하는 기계들에게 강 요된 침묵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이디푸스가 우리들의 미래의 아이들에 게까지 전파되고 이행할 수 있게 되는 시간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 거세 의 불안의 제거, 성의 배제 및 승화란, 양심의 가책을 신에 유래하는 것 으로 받아들이고 무한히 감수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양심의 가책 은, 여자에게 있어서는 〈陰莖에 대한 자기의 욕망을 남편과 아이에 대한
욕망으로 바꾸는〉 데서 생기며, 남성에게 있어서는 수동적 태도를 취하 여 〈아버지의 대리인에게 굴복하는〉 데서 생간다 .31) 우리의 아이들을 오 이디푸스 안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하나의 살아 있는 본, 하나 의 분류카드, 하나의 실제로 활동하는 정리가 되면 될수록 우리는 오이 디푸스 〈밖으로 나가게〉 된다: 우리는 오이디푸스 안에서 발달하였고, 오이디푸스 안에서 구조화되었다. 대리인의 친절한 중립의 눈초리 아래 서, 우리는 거세의 노래, 죽 바로 그것이 인생인 존재의 결여를 배웠다; 〈그렇다 우리가 요요요욕망에 /이르는 것은/거세를 통해서이다…….〉 흔히 오이디푸스의 시라짐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하나의 관념이 된 오 이디푸스이다. 여기에는 독액을 주입하기 위한 관념만이 있다. 오이디푸 스는, 그의 팔과 그의 다리, 그의 입술과 그의 수염을 재생시키기 위해서 는, 그때마다 하나의 관념이 되어야 한다: 〈죽은 자들을 회상하며 되살 립으로써, 그대의 자아는 인생의 덧없음을 끊임없이 증명하는· 일종의 鑛 獅 定理가 된다.〉 32) 우리는 오이디푸스 속에서 삼각형화되었는데, 앞으 로는 오이디푸스 속에서 스스로 삼각형화할 것이다. 가족으로부터 부부 에로, 부부로부터 가족에로, 길은 열려 있다. 사실, 정신분석가의 친절한 중립은 아주 제한된 것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아빠-임마라고 대답하기 를 그치자마자 그 중립도 그친다. 사람들이 조그마한 욕망하는 기계, 죽 테이프레코더를 하나 정신분석가의 軫療室에 가지고 들어가자마자, 그 중 립은 그친다. 사람들이 삼각형으로 표시되는 오이디푸스에 의하여 막아 지지 않는 흐름을 통과시키자마자 그 중립은 그친다. (당신의 리비도는 너무 끈적끈적하고, 너무 미끄러운데, 이것은 정신분석가에게는 치료를 중지해야 할 금기칭후예요, 하는 말을 듣는다.) 프롬이 정신분석의 관료 기구가 있음을 고발할 때 그는 이것을 충분히 행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 하면 그는 이 관료기구의 쐐기가 무엇인지 보지 못하고 있고, 또 이 쐐 기를 피하기 위해서는 先오이디푸스적인 것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 치 못하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先오이디푸스적인 것은 31 ) Freud , Analys e ter mi ne et 야 aly se int e r mi na ble, pp. 36-37 . 32) Henry Mi ller, Hamlet, p. 156.
後오이디푸스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역시 욕망하는 생산 전체-無오 이디푸스적인 것――룰 오이디푸스에게로 다시 인도하는 하나의 방식이 다. 랴기히는 정신분석이 사회적 억압에 봉사하고 있는 방식을 고발하고 있지만, 이 일을 충분히 해내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정신분십과 자본주의의 유대가 그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고, 그보다 무한히 더 밀접하고 긴밀하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정신분석이 경제적 메커니즘에 직접 의존하고, (여기서 정신분석과 돈과의 관계들이 생기고,) 자본주의의 공리계 속에 들어가 매이게 되는 욕망의 탈규준화 한 흐름들은 이 경제적 메커니즘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가족의 터전에 포 개지지 않을 수 없고 이 가족의 터전에서는 자본주의의 공리계가 실제로 적용된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자본주의적 소비의 최후의 밀이요, 정신분석가의 진료실의 소파 위에서 아빠-엄마를 할짝이며, 거기에 봉쇄되고 삼각형화되어, 〈 그러니까 이건 … … 지요〉라고 뇌까린다. 관료기구나 군사기계의 자치 못지않게 정신분석도 잉여가치를 흡수하는 메커니즘이다; 정신분석은 밖으로부터 이렇게 되게끔 조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 형태와 궁극 목적 자체가 이러한 사회적 기능을 드러내 고 있다. 도착자도, 자폐증환자도 정신분석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정신 분석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도착이요, 마약이요, 욕망의 현실을 비롯하 여, 현실과의 근본적 단절이요, 하나의 나르시시즘이요, 기괴한 자폐증이 다 : 자본기계에 고유한 자폐증이요 이 기계의 본질적 도착이다. 정신분 석은, 그 극한에 있어서, 더 이상 어떠한 현실과도 공통의 척도를 가지지 않고, 더 이상 밖에 대하여 자기를 열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 그 자체가 현실의 증거가 되고, 자기자신의 증거를 스스로 보증한다. 거기서의 현실 은 결여로서의 현실이요, 밖이나 안이나, 출발점이나 도달점이나, 모두 이러한 현실에 되돌아오게 하게 마련이다: 정신분석은 自己指針이요, 자 기자신 죽 〈정신분석적 상황〉 이의에는 아무것도 참조하지 않는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적 표상이 이것이 입는 왜곡, 위장들 혹은 옮겨놓음 들과 독립해서는 결코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잘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의식적 표상은 본질적으로, 그 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옮겨놓는 일을
하는 결정기관을 위하여 옮겨놓아전 표상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부당한 결론이 나온다: 하나는 옮겨놓아전 표상내용에서 출발하겨 이 결정기관을 찾아낼 수 있디는 것이요• 그리고 이것은, 이 결 정기관 자체가, 표상되지 않는 표상표현의 자격으로, 죽 〈 너무나 충만한 표상 속에서 돌출해 있는 〉 결여의 자격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 이것은 옮겨놓는 일이 서로 아주 다른 운동들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욕망하는 생산이 끊임없이 경계선을 뛰어넘고, 자기를 탈토지화 시키고, 그 흐름들을 도주시키고, 표상의 문턱을 넘어서 지나가게 하는 운동이 문제이고, 때로는 이와 반대로 경계선 자체가 옮겨놓아져서, 표상 의 내부로 이행하는데 이 표성이 욕망의 인위적인 재토지화를 조작하는 운동이 문제이다. 그런데, 옮겨놓아전 것으로부터 옮겨놓는 것을 결론으 로 끌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둘째 방향에서만이다. 이 방향에서는 큰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표상이 표상된 내용을 옮겨놓는 표상하는 것(표상 표현)의 둘레에 조직된다. 물론 이것은 첫째 방향에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 방향에서는 분자적 요소들이 끊임없이 그물의 눈을 뚫고 지나간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표상의 법칙이 무의식의 생산력들을 왜곡 하고, 무의식의 구조 자체 속에 욕망을 그 올가미에 얽어매는 거짓 심상 울 끌어들였는가를 보았다. (금지사항으로부터 실제로 금지되고 있는 것 울 결론으로 끌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다, 오이디푸스는 그야말로 옮겨놓아전 표상내용이다; 그렇다, 거세는 그야말로 표싱하는 자요, 옮겨 놓는 자요, 시니피앙이다__그러나 이 모든 것의 어느 하나도 무의식의 質 구성하지 않으며, 무의식의 생산들에 관여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오히려 두 가지 절단의 조직이 교차하는 데서 나타난다. 이 조작의 하나는 신앙들이 억압적인 사회적 생산울 대체하여 들어서는 조작이요, 다른 하니는 표상들이 억제된 욕망하는 생산울 대체하여 들어서는 조작 이다. 물론 정신분석은 우리에게 신앙을 주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오 이디푸스와 거세를 요구하고, 또 거듭 요구하거니와, 이 요구들은 더 깊 은 어떤 다른 곳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정신분석이 발견한 수 법, 정신분석이 수행한 기능은 신앙둘을 부인한 후에도 신앙들이 살아남
게 하는 것이었다! 즉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된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 고, ……이런 사람들에게 사적인 토지, 사적인 原國家, 사적인 자본을 다 시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자본으로서의 꿈……이란 말을 하 였다.) 이런 까닭에 정신분열자-분석은 거꾸로 전력을 다하여 필요한 파 괴에 전념하여야 한다. 신%벽늄} 표상들, 극장의 무대들을 파괴하여야 한 다. 이 일을 위해서는 아무리 적의 있는 활동을 해도 결코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오이디푸스와 거세를 폭파하라. 환자가 신화의 노래나 비극 의 구절들을 뇌까릴 때마다 언제나 난폭하게 멈추게 하고 그를 언제나 工場으로 다시 데리고 가라. 샤를뒤스 Charlus 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 정말 사람들은 자기의 늙은 할머니를 잘 돌보고 있어, 그렇지, 이 작은 깡패야! 〉 오이디푸스와 거세는 반동적인 조작물, 저항하는 것, 차단하는 것, 방어하는 것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을 파괴하는 것 은 아무리 일찍 한다 해도 너무 이르다고 할 수 없다. 라이히는 이러한 저항들을 파괴하는 데에는 무의식의 내실을 발견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 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때 그는 정신분열자-분석의 근본원리를 예 감하고 있다 .33) 그런데 이것은 그가 생각했던 이유보다도 더 근본적인 이유에서이다: 그 이유는 무의식의 내실이란 것이 숫제 없고, 따라서 정 신분열자-분석은 해석할 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저 항들, 그리고는 기계들, 죽 욕망하는 기계들만이 있다. 오이디푸스는 하 나의 저항이다. 만일 우리가 정신분석의 본질적으로 도착된 성격에 관하 여 이야기할 수 있다면, 이것은 도착 일반이 욕망의 흐름들의 인위적인 재토지화요, 이에 반하여 욕망하는 기계들은 탈토지화한 생산의 지표들 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소파 위에서, 오이디푸스와 거세의 표상 속에 서 재토지화한다. 이에 반하여 정신분열자-분석은 욕망의 탈토지화한 흐 름들을 욕망하는 생산의 분자적 영역들 속에 풀어놓아야 한다. 리깡의 뒤를 이어 르끌래르가 내세운 실천적 규칙, 죽 연출의 부재 못지않게 그 무의미에 대해서도 권리를 부여하는 규칙을 상기했으면 좋겠다: 두 요소 33) Reic h , La Foncti on de l'orga s me, pp.1 37-139. Et L'Analys e caracte r ie l le, tr. fr. Pay o t.
간에 어떤 연줄을 찾으려 하거나 회복하려 하는 한 당신은 무의식의 궁 극적이고 어떤 것에로도 환원될 수 없는 항들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 다…… . (그런데 왜, 그 다음계 , 이 극도의 분산, 즉 기계 전체 속에 기 계들이 분산되어 있는 사태에서 하나의 순수한 〈 픽션 〉 만을 보는가? 이 픽션은 결여로서 규정된 실재에 자리를 비켜주어야 하는데, 이 실재란 전속력으로 되돌아온 오이디푸스나 거세이다. 동시에 연줄의 부재가 부 재의 〈 시니피앙〉에 포개지는데 이 시니피앙은 연줄의 부재를 표상하고 이 부재 자체를 묶어놓고, 옮겨놓는 일의 한 쪽 극에서 디론 쪽 극으로 우리를 다시 옮아가게 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사람들은 현실적인 것을 드러낸다고 주장하면서 큰 덩어리를 이루는 구덩이 속에 다시 떨어지고 있다.) 모든 것을 복잡하게 하고 있는 것은, 욕망하는 생산이 표상으로부터 끌어내어지고 그 도주선을 따라 발견되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정신분석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해져야 한다. 욕망의 탈규준화한 흐름들은 욕망하는 기계들의 자유로 운 에네르기 (리비도)를 형성한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표상의 영역들을 건너질러, 기관들 없는 신체의 옆을 따라 뻗어 있는 탈토지화의 접선 위 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방향을 집아간다. 떠난다, 도망 간다, 그러나 도 망 가게 하면서…… 욕망하는 기계들 자체가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서 철단하는 동시에 흐르는 분열들-흐름들, 죽 흐름들-절단들이다: 이것은 거세에서 표상되는 큰 裂傷이 아니라, 수천의 작은 연결들, 이집들, 연접 들이다 . 이런 일들을 통하여 각 기계는 하나의 다른 흐름에 의하여 절단 되는 흐름을 이 디론 흐름에 관련시켜 생산하고, 다른 흐름이 생산하는 흐름을 절단한다. 그런데 욕망하는 생산의 이 탈규준화하고 탈토지화한 흐름들은 어떻게 어떤 표상의 토지 위에 포개지지 않겠는가? 어떻게 이 흐름들기, 설사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서일지라도, 표상의 토지를 형성하 지 않겠는가? 기관들 없는 신체는 최후의 표상과는 관계가 없는 토대이 기는 해도 말이다. 심지어 가장 잘 〈떠날〉 줄 아는 사람들, 떠나는 것을 출생하는 일이나 죽는 일과 꼭 같이 자연스러운 어떤 것이 되게 하는 사
람들, 인간의 것 아닌 성을 탐구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 죽 로렌 스, 밀러도, 어딘가 먼 곳에 아직도 인간의 형태를 지닌 남근의 표상을 형성하는 토지를 세워놓고 있다. 오리엔트, 멕시코, 페루가 그런 곳이다. 정신분열자의 산책이나 여행도 토지의 회로들을 빌리지 않고는 큰 탈토 지화들을 조작하지 못하고 있다: 몰로이와 그의 자전거의 비틀거리는 걸 음걸이는 목표의 흔적으로서 어머니의 방울 보존하고 있다; (베케트의) 〈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 의 뒤뚱거리는 나선상의 걸음걸이는 불확실한 중십으로서 가족의 탑을 지키고 있으며 여기서 그는 발을 구르며 계속해 서 빙빙 돌고 있다; 병렬해 있기는 하지만 장소들이 정해져 있지 않은 와트 Wa tt의 무한한 계열을 이루고 있는 공원들은 아직 노트 Kno tt씨 의 집과 관련이 있다; 이 집만이 〈 혼령을 밖으로 밀어낼〉 수 있으나, 또 한 혼령을 제자리에 다시 불러들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작은 개둘이다. 그래서 뛰어다닐 곳이 있어야 하고 산책에 데려다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연줄이나 연결을 가장 잘 끊을 줄 아는 사람들도 작은 토지들을 다시 꾸미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연결들 속에 들어간다. 쥐즐라 빵꼬 Gi se la Pankow 의 위대한 탈토지화한 사람들도 그둘의 기관들 없는 신 체를 관통하고 있는 토지 바깥에 있는 나무의 뿌리들 밀에, 가족의 城의 심상을 발견하는 데 나아가고 있다민 우리는 앞서 망상의 두 극을, 정신 분열증의 분자적 도주선과, 편집병의 큰 덩어리를 이루는 공급으로서 구 별한 바 있다. 그런데 바로 倒緖의 극 역시 정신분열증의 극에 대립하고 었다. 이것은 토지들의 재구성이 탈토지화의 운동에 대립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가장 좁은 의미에서의 도착이 아주 특수한 어떤 형의 재토지화를 인공물 속에서 조작하는 것이라면, 가장 넓은 의미의 도착은 모든 형의 재토지화, 인위적인 재토지화만 아니라, 또한 외래적인, 고풍스런 , 잔여 의, 사적인 등등의 재토지화를 포함하고 있다. 이리하여 도착으로서의 오 이디푸스와 정신분석이 등장한다. 레이몽 루셀의 정신분열증적 기계들도 34) Gi se la Pankow, L'Homme et sa psych ose, Aubie r , 1969, pp. 68-72. 집의 역할에 관하여는, La Dy n a miqu e de l'es pa c e et le tem p s vecu, in Cri tiqu e, fev rie r 1972.
아프리카롤 표싱히는 극장의 도착된 기계들로 변환되어 있다. 요컨대, 정 신분열증적 욕망의 흐름들의 탈토지화들은 전체적인 혹은 국지적인 재토 지화를 수반하지 않고는 생기지 않는다. 이 재토지화들이 언제나 표상의 해변을 다시 형성한다. 뿐만 아니라, 탈토지화의 집요한 힘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이 탈토지화를 표상하는 재토지화의 형들을 통해서만이다; 탈 토지화와 재토지화는 표리의 관계에 있다. 우리들의 사랑은 탈토지화와 재토지화의 복합물이다. 우리들이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어떤 흑백혼혈 의 남자, 흑백혼혈의 여자이다. 탈토지화는 그 자체로는 절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토지의 표상들을 위한 탈토지화의 지표들 만이다. 꿈을 예로 들어보자: 그렇다, 꿈은 오이디푸스적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놀랄 것이 없다. 왜냐하면 꿈은 수면과 악몽의 탈토지 화에 비하면 도착된 재토지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꿈은 초자아의, 즉 초강력하고 초고풍스런 자아의 발현인데, 왜 꿈에 되돌아가는가? 왜 꿈을 욕망의 또 무의식의 왕도로 삼는가? (왜 원국가의 原光景으로 삼는가?) 하지만 환상과 망싱에서처럼 꿈 속에서는 기계들이 탈토지화의 지표들인 한에서 작동하고 있다. 꿈 속에는 손에서 손으로 이동하고, 도망 가는가 하면 또 유통하게 하고, 운반하는가 하면 또 운반되는 따위의 기묘한 특 성을 갖춘 기계들이 언제나 있다. 부모의 교집의 비행기, 아버지의 자동 차, 할머니의 재봉틀, 동생의 자전거, 볼레 Voler 의 이중의 의미 (〈난다〉와 〈훔친다〉)에서의 볼 vol 의 모든 대상들……, 기계는 기족의 꿈에서 언제 나 지옥 같다. 기계는, 꿈이 자기의 무대에 틀어박히고 자기의 표상 속에 서 자기를 체계화하는 것을 방해하는 절단들과 흐름들을 끌어들인다. 기 계는, 딴 곳에서 또 밖으로 발전해야 할 무의미의 환원 불가능한 인자를 그야말로 현실적인 것의 연접둘 속에서 의미 있는 것이 되게 한다. 정신 분석은 오이디푸스를 고집하고 있어서 이 무의미의 인자를 아주 서툴게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재토지화가 인물들과 환경들에 대해서 행해지지 만, 탈토지회는 기계들에 대해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슈레버의 아버지는 기계들을 매개로 하여 행동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고 이와 반대로 기계 들이 이 아버지를 매개로 하여 작동하고 있는가? 정신분석은 재토지화의
상상적이고 구조적인 표상표현들에 집착하지만, 정신분열자-분석은 탈토지화 의 기계적 지표들을 추구한다. 궁극의 불모의 대지, 죽 기진맥전한 최후의 식민지인 진료실의 소파에 앉은 신경중환자와, 탈토지화한 순환로를 산 책하는 정신분열자 간에는 언제나 대립이 있다. 채플린 Cha p l i n 에 관한 미셸 꾸르노 M i chel Courno t의 논문을 발췌해 보기로 한다. 이 논문은 정신분열증적인 웃음이 어떤 것인지를 그 웃음 의 기계적 지표들로써 잘 이해시켜 준다. 그 웃음은 정신분열증의 도주 선 혹은 돌파선이요, 또 탈토지화로서의 과정이다. 〈찰스 채플린이-정 신병적 몸짓으로-두번째로 머리 위에 널반지를 떨어지게 하는 순간, 그는 관객의 웃음을 자아낸다. 그렇다, 그러나 어떤 웃음이 문제인가? 또 어떤 관객이 문제인가? 가령, 관객이 불의의 사건이 생기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하는지, 혹은 불의의 사건에 놀래야 하는지롤 아는 것은 영화의 이 순간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마치, 관객이, 바로 이 순간에, 더 이상 그의 좌석에 있지 않았고, 더 이상 사태를 관찰할 상황 에 있지 않았던 듯이 일어나고 있다. 일종의 知梵訓練이 관객으로 하여금 ‘모던 타임스’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에 자기를 차츰 일체화하게 한 것은 아니고, 사건들이 주는 충격을 즉각적으로 경험하여 이 인물과 동행하고, 이 인물이 가졌던 것과 똑같은 놀람, 똑같은 예감을 가지게 하고, 똑같이 익숙해지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 유명한 食事機械는, 기상천의하여, 어느 의미에서는 그 영화와 상관이 없는 것이지만(채플린은 이 기계롤 이 영화 보다도 2 灰 1 앞서 발명하였다), 기계 속에 끼여넣어진 노동지에게 정신병 적이기까지 한 행위를 준비하게 하는 정식의 절대적인 훈련일 따름이다. 이 노동지는 치켜든 머리만을 기계 밖으로- 내밀고, 식사시간이 되면 채 풀린이 점심을 먹여주게 한다. 웃음이란 것이 어떤 회로들을 이용하는 반작용이라고 하면, 채플린은, 영화의 화면의 진행에 따라, 점차적으로 이 반작용들을 옮겨놓고, 이 반작용들을 한 단계 한 단계 후퇴시켜, 관객 이 더 이상 자기의 회로들의 주인이 아니게끔 되는 순간에까지 몰고 가 고 있다고 하겠다. 이쯤 되면 관객은 차단되어 통행할 수 없는 더 가까 운 길을 기계적으로 가려 하거나, 아주 명백하게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고 고시된 길을 가려 한다. 채플린은 관객 자체를 배제하고 나서, 웃음을 변질시킨다. 웃음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기계장치의 短絡들의 수만큼이나 터전다. 사람들은 가끔 ‘모던 타임스’의 비관주의와 마지막 화면의 낙관 주의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이 두 용어는 이 영화에 알맞는 것이 못 된다. 찰스 채플린은, ‘모던 타임스’에서, 오히려 허다한 압제적 현성들 의 설계도를, 아주 작은 규모로, 퉁명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이 현상들은 근본적인 것이다. 채플린이 그 역을 맡고 있는 주연인물은 수동적일 필 요도 없고 능동적일 필요도 없고, 동조적일 필요도 없고 반항적일 필요 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설계도를 그리는 연필의 첨단이요, 그 선 자체이 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마지막 화면은 낙관주의를 지니고 있지 않 다. 이 화면이 증명하는 결론으로서 낙관주의가 무엇인가를 주장하고 있 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등을 보이고 있는 저 남자와 저 여자는, 아주 새까맣고, 그 그립자는 전혀 태양 광선에 의해서 투사되어 있지 않고, 어 느 쪽도 향하고 있지 않다. 도로 좌측에 서 있는 전선 없는 전주들과 도 로 우측에 늘어선 잎이 없는 니무들은 지평선에서 만나고 있지 않다. 지 평선이 없는 것이다. 정면에 있는 풀 없는 언덕들이,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는 虛空과 하나가 되어, 가로지른 한 선을 아루고 있을 뿐이다. 이 남 자와 이 여자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 이것은 누구의 눈에나 분명하 다. 이것은 바관주의도 아니다. 일어날 것이 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살해 된 것도 아니다. 경찰에 의하여 타살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사건의 알리 바이를 찾으러 갈 필요도 없다. 찰스 채플린은 이 점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는, 여느때처럼, 빨리 사라졌다. 그는 설계도의 선을 그은 것이다.〉 35)
35) Mi ch el Cournot, in Le Nouvel Observa teu r, 1er nou. 1971 .
정신분열자 - 분석은, 파괴하는 일에 될수록 빨리 칙수해야 하지만, 아 주 참을성 있게 또 아주 조심스럽게 일을 해나가면서, 환자가 그의 개인 의 역사에서 경험하는 표상의 토지들과 재토지화들을 차례로 파괴해야 한다. 왜냐하면 안에서 생기거나 밖으로부터 강요되는 저항의 많은 충과 국면이 있기 때문이다. 과정으로서의 정신분열증, 과정으로서의 탈토지화 는 울적중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 울적증둘은 정신분열증을 혹은
중단시키고 혹은 악화시키고, 또 혹은 공전시켜, 신경증에로, 도착에로, 정신병에로 재토지화한다. 이 시점에서 정신분열증의 과정은 창조하는 일을 할 수 있는 한에서만 자기를 해방시키고, 자기자신을 추구할 수 있 고, 자기를 성취시킬 수 있다―_그러면 무엇을 창조하는가? 하나의 새 로운 대지이다. 어느 경우에나 낡은 대지들에 되돌아가, 그것들의 본성, 그것들의 밀도를 연구하고, 어떻게 낡은 대지 하나하니에서 이 대지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기계적 지표들을 모을 수 있는가를 탐구하지 않 으면 안 된다. 신경증의 오이디푸스적인 가족의 대지들, 도착의 인공적인 대지들, 정신병의 격리된 대지들, 이 대지들 위에서 어떻게 그때마다 과 정을 되찾고, 줄곧 여행을 다시 떠날 수 있는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서』는 정신분열자-분석의 위대한 試圖이다: 모든 국면은 분자적 도주선, 죽 정신분열중적 돌파구에까지 횡단된다. 그래서 입맞춤에서도 알베르띤 느 Alber ti ne 의 얼굴은 한 구성국면에서 디른 구성국면으로 비약하고 마 침내는 분자들의 星雲 속에서 해체된다. 독자는 언제나, 어느 국면에서 읽기를 멈추고, 〈그렇구나, 프루스트가 자기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는 것 은 바로 여기구나〉라고 감히 말한다. 그러나 거미인 화자는 끊임없이 거 미집들과 국면들을 해체하고, 여행을 다시 떠나고, 기계로서 작동하며 화 자를 더 멀리 가게 하는 기호들과 지표들을 살펴본다. 이 운동 자체는 익살, 쓰디쓴 익살이다. 오이디푸스의 가족적이고 신경증적인 대지들에는 전체적인 인물들의 연결둘이 수립되는데, 오오, 화자는 여기에 정착하지 않으며, 머물지도 않는다. 그는 그 연결둘을 횡단하고, 이것들을 모독하 고 이것들을 돌파한다. 그는 구두끈을 매는 기계로 그의 할머니를 처치 하기까지 한다. 동성애의 도착된 대지들에서는 여자들과 여자들, 남자들 과 남자들의 배타태일적 이집들이 확립되는데, 이 대지들도 역시 그 밀 울 파동거가는 기계들의 지표를 따라 붕괴한다. 자기의 연집들을 그 자 리에 지니고 있는 정신병의 대지들은(그러므로 샤를뒤스는 확실히 미쳤고, 그러므로 알베르떤느도 아마 미쳤었다!), 문제가 더 이상 제기되지 않는, 더 이상 그렇게는 제기되지 않는 지점에까지 횡단되고 있다. 화자는 자 기자신의 일을 계속하여, 미지의 나라, 미지의 대지에까지 이른다. 이 미
지의 대지는, 오칙 진행중인 그 자신의 작품, 즉 〈진행중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의해서만 창조되며, 이 작품은 모든 지표를 모으고 처 리할 수 있는 기계로서 작동한다. 그는 연결둘이 언제나 부분적이고 비 인물적이며, 연접들이 유목적이고 다의적이며, 이집들이 포함적인 새로운 영역들을 향하여 간다. 이 영역들에서는 同性愛와 異性愛가 더 이상 구별 될 수 없다: 이곳은 횡단적인 커뮤니케이션들의 세계요 여기서는 마침내 획득된 인간의 것 아닌 성이 꽃들과 하나가 된다. 이곳은 새로운 대지요 여기서는 욕망이 그 분자적인 요~ 흐름들을 따라 작동한다. 이러한 여행은 반드시 의연에 있어서의 큰 운동 둘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 방에서 또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서, 움직이지 않으면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자기가 창조하는 대지를 위하여 다른 모든 대지를 파괴하는 강도 의 여행이다. 과정의 참을성 있는 계속과 이에 반대되는 과정의 중단은 아주 밀접하 게 얽혀 있어서, 피차 디른- 것 안에서만 평가될 수 있다. 정신분열자의 여행은, 어떤 회로들과 관계없이 어떻게 가능한가? 어떻게 그것은 대지 없이 가능한가? 그러나, 거꾸로, 이 회로들이 정신병원, 인위적 토지 혹 은 가족기라고 하는 너무나 잘 알려진 대지들을 다시 형성하지 않는 것 이 어떻게 보증될 수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똑같은 문제에 되돌아온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정신분열자는 도대체 무슨 고 통을 겪고 있는가? 정신분열자가 오이디푸스의 대지 위의 가족 속에서 신경증환자로 취급될 때, 오이디푸스화되지 않는 자가 정신병원의 대지 속에서 정신병자로 취급될 때, 정신병원과 가정을 빠져나온 자가 인위적 인 환경 속에서 도착자로 취급될 때, 그는 과정 자체 때문에 고통을 겪 고 있는가, 혹은 과정의 중단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가? 아마 오직 하나의 병, 신경증이 있을 뿐이다. 이 병은 오이디푸스적 부패라 하겠는 데, 과정의 모든 병적인 중단은 이것에 비추어 측정된다. 현대적 치료의 대부분의 기도__의래환자 병원, 입원병원, 환자들의 사교 클럽, 자택요 법, 환지용 시설 및 십지어 反稽神醫學__는 장 우리 Jea n Our y가 깊이 있게 분석한 위험에 여전히 처해 있다-어떻게 환자용 시설이 정신병
원의 구조를 다시 형성하거나, 개량주의의 도착된 인위적 사회들, 죽 잔 재적인 부권적이고 모권적인 擬似家族울 구성하거나 하는 일을 피할 수 있는가? 우리는 소위 공동체적 정신의학의 기도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 는 것이 아니다. 이 기도들의 공공연한 목적은 세계 전체, 죽 사람들, 짐 승들 및 사물들을 삼각형화하고, 오이디푸스화하여, 마침내는 환자들의 새로운 종족으로 하여금 정신병원을 다시 주시오, 혹은 베케트식의 작은 대지롤 다시 주시오、 쓰레기통을 하나 주시오 하고 애원하게 하고, 이들 로 하여금 이런 것들의 한 귀퉁이에서 꼼짝않고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 데, 이렇게 공공연히 억압적인 방식으로.는 아니지만, 탈토지화한 정신분 열지에게는 가정이 좋은 곳이다, 좋은 회로디라고 말하는 자는 누구인 가? 〈 가정환경의 치료적 잠재력……〉 운운하는 것도 놀리운 일이다. 이 렇게 되면, 마을 전체가 특정지구인가? 어떠한 큰 덩어리의 통일체가 충 분히 유목적인 회로를 형성하겠는가? 지정된 통일체가 설사 특수한 환자 용 시설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통일체는 하나의 관대한 倒緖社會, 죽 전 정한 문제들을 숨기는 相互 扶助團體롤 구성하게 마련인데, 어떻게 이렇 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가? 환자용 시설의 구조가 이 통일체를 살려 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떻게 이 구조가 신경증, 도착증, 정신병을 생 기게 하는 거세와의 관계를 단절할 것인가? 어떻게 이 구조가 예속집단 과는 다른 것을 낳을 것인가? 이 구조의 큰 덩어리를 이루는 조직 전체 가 분자적 과정을 구속하는 기능을 하는데, 어떻게 이 구조가 과정에다 가 자유로운 흐름을 주겠는가? 그러니 정신분열증의 돌파구와 강도 있는 여행에 특별히 민감한 反精神醫學도, 주체집단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지만, 이 주체집단은, 가장 최근에 정신분열자가 된 사 람들을 지도할 책임이 있는 오래된 정신분열자들과 함께, 작은 예배당들, 혹은 기껏해야 실론의 修道院울 중계지점으로 하여 금방 도착에 되돌아 간다. 오직 정신의학의 유효한 정치화만이 이 막다른 골목들로부터 우리를 구출할 수 있다. 반정신의학이 레잉 및 쿠퍼와 더불어 이 방향에서 아주 많이 전진한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들이 아직 이
정치화를 과정 자체로써보다도 구조와 사건으로써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사회적 소의와 정신적 소의를 동일선상에 위치시키고, 어떻게 가족이라고 하는 결정기관이 이 두 소외의 한 쪽을 다른 한 쪽에로 연장시키는가를 밝힘으로써 이 두 가지 소의를 동일시하 려 하고 있다 .36) 하지만, 이 두 가지 소의 간의 관계는 오히려 포함적 이 접의 관계이다. 이것은, 흐름들의 탈규준화와 탈토지화가 자본주의의 과 정 자체, 즉 그 본질, 그 경향 및 그 의적 경계선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 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과정이 주관적인 재토지화들과 표상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중단되고, 혹은 이 경향이 방해를 받고, 혹은 이 경계선이 옮겨 지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재토지화들과 표성들은 주체로서의 자본(공리 계)의 차원에서나 이 주체를 현실화하는 안물들의 차원(공리계의 적용) 에서나 다 같이 작용한다. 그런데 우리가 사회적 소의와 정신적 소의 간 에 배타택일적 관계를 세우려 하는 한, 이 두 가지 소의를 어느 한 쪽에 배정하려 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흐름들의 탈토지화 일반은 그것이 재 토지화들을 포함하고 있는 한, 정신적 소의와 실제로 일체를 이루고 있 다. 이 재토지화들은 탈토지화 자체를 하나의 특수한 흐름, 죽 광기의 흐 름의 상태로만 존속시킨다. 이 광기의 흐름이 광기의 흐름으로서 명확하 게 되는 것은, 이 흐름이 다른 흐름들 속에서 공리계들과 재토지화의 적 용들을 빠져나가는 모든 것을 표상하는 일을 떠맡게 됨으로써이다. 거꾸 로, 자본주의의 모든 재토지화에서는, 사회적 소의의 현실적 형태를 볼 수 있다. 이 재토지화들이 흐름들이 체계를 빠져나가는 것을 방해하고, 노동을 재산의 공리계의 툴 안에, 욕망을 가족에 적용되는 틀 안에 가두 36) David Coop er , Alie n ati on menta l e et ali en ati on socia l e, Recherches, decembre 1968, pp. 48-49: 〈사회적 소의는 대부분 갖가지 형태의 정신적 소 의와 겹쳐지게 된다 .•• …. 정신과 병원에 입원이 허용되는 사람들은· 그들이 병자 이기 때문에 허용된다기보다는 그들이 사회의 질서에 대하여 다소간에 적철한 방식으로. 항의하기 때문에 허용되는 것이다. 사회체계는 그들을 붙들어놓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사회체계는 그들이 그 속에서 자란 가족체계에 의하여 생겨난 비행들을 강조하게 된다. 그들이 미크로 사회에 대하여 긍정하려 하는 자율성은 사회 전체에 의하여 생기는 대량소의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어두는 한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 사회적 소의는 이번에는 정신적 소의 룰 포함하고 있다• 이 정신적 소의 자체는 신경증, 도착, 정신병 (정신질 환들)으로서 표상되거나 재토지화된다. 그러므로 정신의학 혹은 반정신의학의 참된 정치는 다음과 같은 두 가 지 일로 성립한다. 1) 광기를 정신병으로 변형시키는 모든 재토지화를 파괴하는 일 2) 모든 흐름에서 이 흐름들이 탈토지화하는 정신분열중적 운동을 해방시키는 일. 이때 이 정신분열증적 성격은 더 이상 어떤 특수 한 잔여물을 광기의 흐름으로 규정해서는 안 되고, 노동, 욕망, 생산, 인 식, 창조의 흐름들을 이것들의 가장 깊은 경향에로 인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광기는 이제 더 이상 광기로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광 기가 〈 정신병 〉 에 변형되어지겠기 때문이 아니고, 이와 반대로 광기가, 과학과 예술을 포함하여 모든 다른 흐름의 지지를 받겠기 때문이다-~ 광기가 광기라 불리고 또 광기로 나타나는 것은 광기가 이 지지롤 얻지 못하고 아주 혼자서 탈토지화를 보편적 과정으로서 證示하려 하는 한에 서만이다 . 광기를 광기이게 하는 것은 오로지 광기의 자기의 힘을 넘는 부당한 권리 남용이다 . 이런 의미에서 푸꼬는 광기가 시러지게 될 시대 롤 예고하였다. 그 이유는 단지 광기가 정신병을 관리하는 공간 (〈미지 근한 큰 어항 〉 ) 속에 쏟아넣어지겠기 때문이 아니고, 이와 반대로 광기 의 의곽을 긋는 경계선이 모든 측면에서 관리를 벗어나고 우리를 선도하 는 다른 흐름들에 의하여 돌파되겠기 때문이다 .37) 그러므로 탈토지화의 방향으로 아무리 전진한다 해도 지나치게 전전했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그대들은 저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을 아직 전혀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도착된 재토지화들 속에만 아니라, 병원의 정신병이나 가족의 신 경증의 재토지화에도 깊이 인위적인 것이 있음을 고찰하게 되면, 우리는 〈더 많은 도착을 있게 하라! 더 많은 人爲的인 것을 있게 하라!〉고 의 치지 않을 수 없다. 대지가 아주 인위적인 것이 되어, 탈토지화의 운동이 37) Mi ch el Foucault, La Foli e, l'ab sence d'rnuvre, La '.lhb le ronde, ma i 1964( 〈 우리가 오늘날 극한이라든가, 야릇함이라든가, 견딜 수 없는 것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체험하는 모든 것은 다시 적극적인 안온함이 될 것이다……〉).
그 자체에 의하여 하나의 새로운 대지를 창조할 때까지 이렇게 의치지 않을 수 없다. 정신분석은 이 점에서 특히 만족스럽다: 그 도착된 치료 전체는 가족적 신경증을 (전이라고 하는) 인위적 신경증으로 변형시키 고, 사령관, 죽 정신분석가가 있는 작은 섬인, 진료실의 소파를 자율적인 궁극의 인위적 토지에로 승격시키는 데 성립한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 이 거꾸러지고 마침내 우리를 아주 먼 별천지에 인도하는 데에는 아주 적은 노력으로 충분하다. 여기서 정신분열자-분석이 약간의 충격을 가하 면 탈토지화의 운동을 다시 일으키고, 과정의 경향을 부활시키고, 환영들 울 밀어붙이되 이것들이 인위적인 심상들이기를 그치고 새로운 대지의 지표들이 되기에까지 밀어붙이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과정의 완성이다: 여기에 도래하는 것은 미리 존재하는 약속의 대지가 아니라, 자기의 경 향, 자기의 刺編 자기의 탈토지화 자체를 따라 창조되는 대지이다. 이러 한 대지를 실현하는 것은 잔인성의 극장의 운동이다. 왜냐하면 이 극장 만이 생산의 극장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흐름들이 탈토지화의 문턱을 뛰어넘어 새로운 대지를 생산한다. (이것은 하나의 희망이 아니라, 단순 한 〈확실한 사실〉이요, 하나의 〈설계도〉이다. 여기서는 도주하는 자가 도주하게 하며, 스스로 탈토지화하면서 대지에 금을 그으면서 전전한다.) 이런 것이 능동적인 도주점이다. 여기서는 혁명기계, 예술기계, 과학기계, (정신분열자)-분석기계가 피차 다른 것의 부품과 부분이 된다.
4 정신분열자-분석의 첫째 적극적 임무 정신분열자-분석의 부정적인 혹은 파괴적인 임무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적극적인 임무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이 두 가지 임무는 반드시 동 시에 행해져야 한다). 첫째, 적극적 임무는, 모든 해석을 떠나 환자의 욕 망하는 기계들의 본성, 그 自己形成 혹은 作動울 발견하는 것이다. 네 욕 망하는 기계들은 무엇인가? 네가 네 기계들 속에 들어가게 하는 것, 거 기서 나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그것은 돌고 있는가? 인간의 것 아닌 네 性둘은 어떤 것인가? 정신분열자-분석가는 하나의 機械困giji 요, 정신분열자-분석은 오로겨 기능적이다. 이런 점에서 정신분열자-분 석은, 환자가 톱니바퀴 장치로서 혹은 시용자로서 그 속에 붙들려 있는 사회기계들에 대한, 또 환자가 좋아하는 혹은 부스러기들을 뜯어맞춰 만 들거나 완성하는 기술기계들에 대한, 또 환자가 그의 꿈들과 그의 환상 들 속에서 기계들을 사용하는 데 대한, 여전히 해석적인 검토에 머무를 수는 없다. 사회기계와 기술기계는 역시 너무나 표상적이요, 너무나 큰 통일체들을 표상한다-사디스트나 매저키스트의 도착된 기계들, 편집병 자의 영향력 있는 기계들마저 표상한다……. 우리는 〈對象〉의 擬似分析 들이 정녕 가장 낮은 단계의 분석활동이라는 것, 이 분석들이 현실적 대 상에 상상적 대상을 포캔다고 주장할 때에도, 또 특히 이런 때에 그렇다 는 것을 일반적으로 보았다. 그래서 꿈들을 해독하는 일이 市場의 정신 분석보다 값어치가 더 있다. 하지만 현실적 기계이건, 상칭적 기계이건 혹은 상상적 기계이건, 하여간 모든 기계들에 대한 고찰은 아주 일정한
어떤 방식으로 행해져야 한다. 그러나 욕망하는 기계들의 길에로 우리를 인도하는 機能的 指標들로서 고찰되어야 한다. 그 기계들은 다소간에 욕 망하는 기계들에 가까이 있고 또 이 기계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 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실상 分散의 어떤 문턱을 넘어 상상적인 동일성 도 구조적인 통일도 존속하지 않게 되어야만 도달된다(상상적인 동일성과 구조적인 통일이라고 하는 決윅朗射본 아직 解釋의 질서, 죽 시니피에 혹은 시 니피앙의 질서에 속해 있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부분적 대상들을 부품들 로 가지고 있다; 부분적 대상들은 분명히 작동하는 기계 work ing ma-chin e , 죽 일하고 있는 부품들인데, 이것은 한 부품이 끊임없이 전혀 다 른 기계의 부폼과 관계하는 분산의 상태에서 그렇다. 이것은 빨간 클로 버와 꿀벌 수컷, 말벌과 난초과 식물의 꽃, 자전거의 경적과 죽은 쥐의 엉덩이 등의 관계에서 보는 바와 같다. 집합을 구조화하고 무풍들을 인 물화하여 통일하고 전체화하는 男根 같은 항을 서둘러 끌어들이지 말자• 어디에나 기계의 에너지인 리비도가 있으며, 경적도 꿀벌 수컷도 남근으 로 존재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남근이 개입하는 것은 구조적 조 직과 이 조직에 유래하는 인물들 간의 관계들 속에서만이다. 이 조직에 서는 각자가, 전쟁에 소집된 노동자처럼,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의 동일 한 처벌, 하나의 동일한 어처구니없는 상처, 죽 거세를 당하고, 자기의 기계들을 버리고 위대한 부재라고 하는 트로피를 획득하기 위하여 싸우 기 시작한다. 찰못 이해된 힘에의 意志요, 인간의 형태를 취한 性의 표상 인 남근을 위한 싸움 전체는 로렌스에게 공포감을 안겨준 性燃觀 전체이 다. 이것은 바로 이 성욕관이 하나의 견해일 따름이요, 〈理性 〉 이 무의식 에 강요하여 충동의 영역에 끌어들인 하나의 관념이요, 결코 이 영역의 形成物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욕망이 통일되고 하나가 된 큰 덩 어리를 이룬 집합 속에서 올가미에 걸려, 인간의 性으로 특수화된다. 그 러나 욕망하는 기계들은 이와 반대로 분자적 요소들의 분산의 체제 아래 서 산다. 그래서 거기서 한결같이 단편화한 부분들 대신에 그러한 요소 들을 보지 못한다면, 부분적 대상들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로렌스 가 말한 바와 걷이, 분석은 개념이나 인물을 닮은 것에는 어떤 것에나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 〈거기서는 소위 인간적인 관계들이 작용하고 있지 않다. 〉 38) 분석은 오로지 (부정적 임무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分子的 分散의 영역에서 파악되는 기계들의 배치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38) D. H. Lawrence, Psy ch analys e et inc onsci en t, in Homme d'abord, bib l . 10-18, 1920, pp. 255-25 6.
세르쥬 르끌래르는 그가 아주 훌륭하게 표명한 디음과 같은 규칙에서 욕망의 현실 대신에 하나의 픽션을 보고 있기는 하지만, 어떻든 이 규칙 에 되돌아가 보자: 욕망하는 기계들의 부품들이나 요소들은 서로 독립해 있고, 한 쪽 기계 속의 어떠한 것도 다른 기계 속의 어떤 것에 의존해서 는 안 되며 혹은 실제로 의존하지 않는다. 욕망하는 기계들의 부품一들은 인간의 성에 있어서의 남성과 여성같이, 동일한 실체의 反對規定둘이어서 는 안 되고, 또 유일의 존재의 분화들이어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고 인 간의 것 아닌 성의 분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로 다른 것들, 실제로 서 로 다른 것들, 뚜렷이 다른 〈 존재들〉이어야 한다(클로버와 꿀벌 수컷처 럼). 정신분열자-분석이 분산되어 있는 것들에 도달하지 않는 한, 그것은 무의식의 궁극적 요소들인 부분적 대상들을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르끌래르는, 유기체의 한 細片이 아니라, 개체 이전의 또 인물 이전의 단일체들의 분포상태를 〈性感帶〉라 불렀다. 그것은 하나의 분산되고 無政府的인 순수한 다양성이요, 통일도 전체성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 요소들은 실제로 구별됨으로써 혹은 세대의 부재 자체에 의 하여 접합하고 밀착해 있다. 이와 같은 것이 베케트가 묘사하는 정신분 열증의 연속장면이다: 조약돌들, 호주머니, 입; 구두, 파이프 담배의 통, 일정하지 않은 작은 젖은 짐꾸러미, 자전거의 벨의 뚜껑, 핸들의 절반 ……. (순수한 단일체들의 동일한 집합에 무한정하게 부딪치면, 환자의 욕망의 단일체에 접근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39) 물론, 이 요소들 간에 어떤 유대를 설정하거나 복구하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다. 죽, 간혹 다양 성의 부분을 이루고 있는 기관들 혹은 이 기관들의 단편들 간에 유기적 유대들을, 결국에는 이 요소들이 나온 인물들 및 장면들과 관계하~곤 심
39) Serge Leclai re , La Realite du desir , p. 245. Et Semi na ir e Vi nc ennes, 1969, pp. 31-34( 〈性感帶〉와 유기체의 대립) .
리적이고 가치론적인 유대들__善과 惡의 유대들―_을; 이 요소들에 대응할 수 있는 관념둘 혹은 개념들 간에 구조적 유대들을 설정하거나 복구할 수 있다. 그러나 부분적 대상들이 무의식의 요소들인 것은 이러 한 양상 아래서가 아니다. 우리는 부분적 대성들을 생긱해 낸 멜라니 클 라인이 부분적 대상들에 대하여 제시하고 있는 心像을 따를 수도 없다. 이것은 기관들 혹은 기관들의 단편들이 상실된 통일이나 장차 있게 될 전체성으로 환각적으로 기능하게 될 하나의 유기체를 전혀 지시하지 않 기 때문이다. 기관들 혹은 기관들의 단편들이 분산되어 있다고 하는 것 은 矢女 o 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요, 다양성 속에서의 그것들의 現前의 양식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다양성을 그것들은 통일이나 전체화 없이 형성한다. 구조 전체가 제거되고, 기억 전체가 포기되고, 유기체 전체가 破棄되고, 유대 전체가 파괴되어, 그것들은 벌거숭이 부분적 대성들, 분 산된 기계 자체의 분산된 일하는 부품들의 구실을 한다. 요컨대, 부분적 대상들은 무의식의 分子的 機能들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조금 전에 욕 망하는 기계들과 큰 덩어리를 이루는 기계들의 모든 형성들· 간의 차이를 주장했을 때, 우리는 그 한 쪽이 디른 한 쪽 속에 있고 다른 한 쪽 없이 존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두 종류의 기계 간의 체제 및 규모 의 차이를 강조해야만 했다. 오히려 어떻게 이 분산, 현실적 구별 및 유대의 부재라고 하는 조건들 이 어떤 기계적 체제롤 허용하는가고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 다__어떻게 이렇게 규정된 부분적 대상들이 기계들과 기계들의 배치를 형성할 수 있는가? 여기 대한 답은 종합들의 수동적 성격 속에 있다. 혹 은, 같은 얘기지만, 고찰되는 상호작용들의 간접적 성격 속에 있다. 모든 부분적 대상이 하나의 흐름을 생기게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흐름 은 또한 하나의 다른 부분적 대상에 결부되어 있으며, 이 대상에 대하여 다양한 潛在的 現前 자체의 터전을 규정한다. (똥의 흐름에 대한 항문의 다양성이 그렇다.) 부분적 대상들의 연결의 종합들은 간접적이다. 왜냐하 면 하나의 부분적 대상은, 그 터전 안에서의 그의 현전의 각 점에서, 언 제나 하나의 흐름을 절단하는데, 이 흐름은 상대적으로 다른 부분적 대
삼네 의하여 생기게 되고 생산되며, 또 이 다른 부분적 대상 자체도 자 기가 생기게 하는 흐름이 다른 부분적 대상들에 의하여 철단되는 것을 각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흐름들은 두 개의 머러롤 가지고 있는 흐름 둘기라 할 수 있겠다. 우리가 분열-흐름이나 흐름-철단이라고 하는 개 념으로써 설명하려 했던, 생산적 연결 전체는 이 두 개의 머리를 가진 흐름들에 의하여 행해전다. 따라서 흐르게 하고 절단하는, 무의식의 진정 한 활동들은, 수동적 종합이 흐르게 하고 절단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기능을 상관적으로 공존시키고 옮겨놓는 일을 보증하고 있는 한에서, 이 수동적 종합 자체 속에서 행해진다. 이제 두 개의 부분적 대상에 결부된 각각의 흐름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서로 겹쳐 있다고 가정하자: 이 흐름 둘의 생산의 활동은 이 흐름들을 생기게 하는 대상들 x 와 y에 대하여 어디까지나 뚜렷이 달라 구별되지만, 이 흐름들이 현전하는 터전은 이 흐름들에 눌러붙어 있으면서 이 흐름들을 철단하는 대상들 a 와 b 하고는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부분 a 와 부분 b 는, 이 점에서, 구별할 수 없 게 된다(입과 항문, 죽 식욕부진 환자의 항문-입이 그렇다). 또 부분 a 와 부분 b 는 단지 混成領域에서만 구별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이 영역에서 그 기능을 맞바꾸었으므로, 두 흐름이 겹쳐지지 않는 곳에서도 배타택일적으로 더 이상 구별될 수 없다고 언제나 생각되 기 때문이다: 이때에는 a 와 b 가 포합적 이집의 역설적 관계 속에 있는 하나의 새로운 수동적 종합이 성립한다. 끝으로 남는 문제는, 흐름들이 겹쳐지는 가능성이 아니라, 흐름들을 내보내는 대상들의 배치전환의 가 능성에 관한 것이다: 현전의 각 터전의 가장자리에는 干涉무늬둘이 발견 되는데, 이것들은 하나의 흐름의 잔여물이 디론 흐름 속에 있음을 증명 하는 것이요, 하나의 흐름으로부터 다른 흐름으로의 實感되는 이행이나 생성을 유도하는 전여적인 연접적 종합들을 형성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개, 세 개, n 개의 기관들에의 배치전환이 있다; 형상적인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조롱하고 끊임없이 이 삼각형을 파괴하는 변형 가능한 다각형 둘기 있다. 二項性, 겹쳐짐 혹은 배치전환을 통한, 이 간접적인 수동적 종합들은 모두 욕망의 유일의 동일한 기계기구이다. 그런데 누가 각자의
욕망하는 기계들을 말할 것인가? 충분히 정밀한 분석은 어떤 것이겠는 가? 모짜르트의 욕망하는 기계는? 〈당신의 엉덩이를 당신의 입에까지 집아당기시오, ……아아, 내 엉덩이는 불같이 나를 태워요,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아마 똥이 나오려는 건가? 그렇지, 그렇지, 똥이다. 나 는 너를 알고, 너를 보고 너를 느끼고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가능한가… …? >4 0)
40) 마르셀 모레 Marcel More 가 인용한 모짜르트의 편지, Le Di eu Mozart et le monde des o i se 叫 x, Ga llim ard, p. 124: 〈成年의 연령에 도달하자, 그는 冀屈 譯의 농담에 열중함으로써 그의 神的 本質울 숨기는 수단을 찾아내었다 ... ….> 모레는 어떻게 冀辰譯機械가, 오이디푸스의 〈새장〉 아래서, 또 이 새장에 대항 하여 작동하고 있는가를 찰 밝히고 있다.
이 종합들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기관들 없는 신체의 정립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기관들 없는 신체가 조금도 부분적 대상들三기관들에 반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그 자체 욕망의 두 가 지 활동, 욕망의 두 개의 머리를 중화시키거나, 혹은 이와 반대로 작동시 키게 되는 것으로서, 연결의 최초의 수동적 종합에서 산출된다. 왜냐하 면, 앞서 본 바와 같이, 기관들 없는 신체는 흐름의 생산울 자기의 것으 로 만드는 토대로서만 아니라 또한 반생산의 꼴을 이루지 않은 流體로서 도 산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대상들-기관들을 밀어 젖힐 수도 있고, 이것들을 끌어당기고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 러나 밀어젖히거나 끌어당기거나, 기관들 없는 신체는 대성들-기관들에 대립하지 않는다. 다만 유기체에 대하여 자기자신이 대립하고 대상들-기 관들이 대립하는 것을 확실하게 한다. 기관들 없는 신체와 부분적 대상 들-기관들은 유기체에 대해서 함께 대립하고 있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사실상 하나의 전체로서 산출되지만, 부분들 곁에 있는 하나의 전체로서 산출된다. 이 전체는 무분둘을 통일하지도 전체화하지도 않으며, 실제로 구별되는 하나의 새로운 부분으로서 부분들에 곁들여진다. 偏執病機械가 조립될 때처럼, 기관들 없는 신체가 기관들을 밀어젖힐 때에는, 그것은 기관들 자체가 형성하는 순수한 다양성의 의적 극한을 이룬다. 이때의 다양성은 유기적인 것도 아니고 유기적으로 조직되어 있지도 않다. 또
기관들 없는 신체가, 기적을 행하는 物神機械의 과정 속에서, 기관들을 끌어당기고 이것들에 포개질 때에는, 그것은 이것들을 유기체의 방식으 로 전체화하지 않으며, 또 통일하지도 않는다: 부분적 대상들-기관들은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 부착하여, 이 신체 위에서 包含的 離接과 遊牧的 連接 죽 겹쳐짐과 배치전환의 새로운 종합들 속에 들어간다. 이 종합들 은 유기체와 유기체의 조직에 반발하기를 계속한다. 욕망이 체험하는 것 은 바로 신체요, 바로 기관들이지, 유기체가 아니다. 이런 까닭에 부분적 대상들은 폭발하여 단편이 된 하나의 유기체의 표현이 아니다. 이 유기 체는 하나의 파괴된 전체성 혹은 하나의 전체로부터 해방된 무분들을 전 제한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다시 接合된 혹은 〈區別울 떠난〉 하나의 유 기체의 표현도 아니다. 이 유기체는 자기자신의 무 분 들 을 넘는 것이겠기 때문이다. 根底에 있어, 부분적-기관들과 기관들 없는 신체는 유일의 동 일한 것, 유일의 동일한 다양성이다. 정신분열자-분석에서는 이 디앙정 이 이러한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부분적 대상들은 기관들 없는 신체의 직접적인 힘들이요, 기관들 없는 신체는 부분적 대상들의 가공되지 않는 質 W) I 다 .41) 기관들 없는 신체는 강도의 어떤 한 정도로 공간을 항상 채우 고 있는 질료요, 부분적 대상들은 이 정도들, 이 강도 있는 부분동기다. 이 부분들은 강도 =0 인 질료에서 출발하여 현실적인 것을 공간 속에서 41 ) 삐에르 보나페는 「마술적 대상, 마법 및 物神崇拜」 (Nouvelle revue de psy- chanalys e , n°2, 1970) 에서 이 점에 관하여 細分된 신체란 개념 같은 것이 불 충분함을 잘 밝히고 있다: 〈신체의 세분이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거기에는 상 실이라든가 박탈이라든가 하는 감정은 곁들여져 있지 않다. 이와는 정반대로, 신 체의 보유자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신체가 단편화되는 것은 증식을 통해서이 다: 다론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한 인물과 관계하지 않고, x+y +#l 힘을 가진 사람과 관계한다: 이 사람의 생명은 자연의 다른 힘들과 결합되면서, 엄청나게 증식하며 분산한다……. 왜냐하면 그의 현실존재는 이제 더 이상 그 인물의 중심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 모습을 바꾸어 멀고 손댈 수 없는 곳들에 나타나기 때문이다〉(pp. 166-167). 보나페는 마술적 대상 속에 세 가지 욕망하 는 종합들이 있음을 인정한다. 첫째는 연결적 종합인데, 이것은 인물의 단편들과 동물 혹은 식물의 단편들을 합성한다• 둘째는 포함적인 이집적 종합인데, 이것은 동물-인간의 복합체를 등록한다. 셋째는 연접적 집합인데, 이것은 잔여나 잔재 의 진정한 이동을 내함한다.
생산한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내재적 실체, 이 낱말의 가장 스피노자적 인 의미에서 내재적 실체이다• 그리고 부분적 대싱들은 이 실체의 궁극 적 속성들과 같은 것이다. 이 속성들은 실제로 뚜렷이 구별되고 이 때문 에 배타 혹은 대립의 관계에 들어갈 수 없는 한에서 기관들 없는 신체에 속한다. 부분적 대상들과 기관들 없는 신체는 정신분열중적인 욕망하는 기계들의 두 가지 질료적 요소이다. 한 쪽은 일하는 부품들로서의 요소 요, 다른 한 쪽은 - 부동의 動者로서의 요소이다. 한 쪽은 미크로-분자 둘로서의 요소요, 다른 한 쪽은 거대한 분자로서의 요소이다__이 둘은 욕망의 분자적 연쇄의 두 끝에서 연속의 관계를 가지고 집합을 이룬다. 이 연쇄는 욕망하는 기계에 있어서의 전달 혹은 재생산의 장치와 같은 것이다. 이 연쇄는, 기관들 없는 신체와 부분적 대상들을 (_令읽七함이 없 이, 통일함이 없이) 결합시키는 한에 있어서,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 부 분적 대상들을 분배하는 동시에, 기관들 없는 신체를 부분적 대싱들 위 에 포개는 일과 하나를 이룬다. 이렇게 포개는 일에서 기관들 없는 신체 가 부분적 대상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 생긴다. 그래서 이 연쇄 는 흐름들과는 다른 형의 종합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기계의 생산적 무 풍 툐 g 꿰뚫고 있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연결선들이 아니라, 기관들 없 는 신체의 登錄의 표면 위의 離接의 그물 전체이다. 아마도 우리는 사태 를 하나의 논리적 질서로 제시할 수 있었다. 이 질서에서는 등록의 이집 적 종합이 생산의 연결적 종합의 뒤를 잇고, 생산의 에네르기 (리비도)의 한 부분이 등록의 에네르기 (누멘)에로 변환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사 실상 기계 자체의 관점에서는 기관들 없는 신체와 부분적 대상들 간에나 연쇄들과 흐름들 간에나 엄밀한 공존의 관계를 보증하는 계기는 전혀 없 다; 에네르기의 한 부분의 변환은 어떤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 고, 체계에 미리 있는 恒常的 條件이다. 연쇄는 포합적 이집들이 생산적 · 연결들을 다시 절단하는 한에 있어서,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 형성되는 이 포함적 이집들의 그물이다; 이 연쇄는 생산적 연결들을 기관들 없는 신체 자체에로 이행시키고, 이렇게 함으로써 흐름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거나 〈규준화한다〉. 하지만, 문제 전체는 욕망의 이 분자적 연
쇄의 처원에서 規準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규준은 두 가지 것-그중의 하나 혹은 두 가지 전부 울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충만한 신체가 토대인 대지로서 특수화되어 있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연쇄 전체가 의존하고 있는 전제군주 시니피 앙의 勃起이다. 이 점에서 公理系는 아무리 깊이 규준들에 대립해도 소용 이 없댜 왜냐하면 공리계는 탈규준화한 흐름들에 대하여 작용하고, 그 자체 재토지화들을 조작하고 시니피앙의 통일을 되살림으로써만 작동하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규준이란 개념과 공리계란 개념은 큰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집합들에 대해서만 타당해 보인다. 죽 시니피앙의 연쇄가, 특수화한 토대 자체 위에서, 또 이탈한 시니피앙에 관련하여, 일정한 모 습을 형성하는 곳에서만 타당해 보인다. 이 조건들은 (연결선들이 전체 적이고 특수한 방향을 취하는 동시에) 배타태일하는 일들이 이접의 그물 속에서 형성되어 나타나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본래 분자적 인 연쇄에서는 사태가 전혀 다르다: 기관들 없는 신체가 특수하지도 않 고 특수화되지도 않은 토대이고 이 토대가 큰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집 합들의 분자적 극한인 한에서, 이 연쇄는 흐름들을 탈토지화하고 흐름들 로 하여금 시니피앙의 벽을 통과하게 하는 것 이의의 다른 기능을 더 이 상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규준걸 을 파괴하는 것 이의의 기능을 가 지고 있지 않다. 이 연쇄의 기능은 더 이상 대지의, 전제군주의 혹은 자 본의 충만한 신체 위에서 흐름들을 규준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반대 로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서 흐름들을· 탈규준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逃 走의 연쇄이지, 더 이상 규준의 연쇄가 아니다. 시니피앙의 연쇄는 탈규 준화와 탈토지화의 연쇄가 되었다. 이 연쇄는 규준들과 토지들의 裏面으 로서만 파악되어야 하고 또 이렇게만 파악될 수 있다• 이 분자적 연쇄는 욕망의 기호들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시니피앙이다. 그러나 이 기 호들은, 모든 것이 가능한 포함적 이집들의 체제 아래 있는 한에서, 더 이상 전혀 시니피양들이 아니다. 이 기호들은 그저 어떤 본성을 지닌 점 둘이요, 추상적인 기계의 형상들이다. 이 형싱들은 기관들 없는 신체 위 에서 자유로이 노닐며, 이직 아무런 구조화된 모습을 형성하지 않는다.
(혹은 더 이상 형성하지 않는다.) 모노가 말하고 있는 바와 걷이, 우리 는 〈맹목적인 결합들의 장난 이의에는 아무것도 식별되지 않는 〉 그 구 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기능적 특성들에 의해서 그런 기계가 되는 하 나의 기계를 머리에 그려보아야 한다 •42) 바로, 생물학자들이 유전의 규준 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의 애매함은 우리에게 그러한 상황을 잘 아해시켜 준다. 왜냐하면 거기 대응하는 연쇄가, 배타택일적인 큰 덩어리를 이루는 모습들 속에 말려들어가는 한에서, 실제로 규준들을 형성한다고 하면, 이 연쇄는 가능한 모든 형상을 포함하는 분자적 織維롤 따라 말렸던 데서 풀려나감으로써 규준결을 파괴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라깡에게 있어서 도, 구조의 상칭적 조직은, 시니피앙의 기능에서 생기는 배타택일의 작용 울 하면서도, 그 이면으로서 욕망의 현실적인 비조직을 가지고 있다. 유 전의 규준은 결국 유전자의 탈규준화라 말할 수 있겠다: 탈규준화의 기 능과 탈토지화의 기능이 모든 공리계와 동시에 모든 규준과 뚜렷이 다 른, 연쇄의 準安定的이고 특수한 한 상태를 포함하고 있는 한에서, 이 기 능들을 그 본래의 적극성을 지닌 것으로서 파악하기에 충분하다. 분자적 연쇄는, 유전자의 무의식이, 항상 주체로 머물면서, 자기자신을 재생산하 는 형식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이것은 정신분석의 맨 처음의 발싱이었 다: 정신분석은 이미 알려진 모든 규준에다가 규준을 또 하나 추가하지 않는다. 무의식의 시니피앙의 연쇄, 죽 누멘은 욕망의 규준둘을 발견하는 데에도 또 해석하는 데에도 소용이 없고, 이와는 반대로 절대적으로 탈 규준화한 욕망의 흐름들, 즉 리비도를 동과시키고, 모든 규준을 뒤죽박죽 으로 만들고 모든 토지를 파괴하는 것을 욕망 속에서 발견하는 데에 소 용이 된다. 오이디푸스가 가족의 토지와 거세의 시니피앙으로써 정신분 석을 하나의 단순한 규준의 지위에 다시 인도하게 된다는 것은 사실이 다. 더 나쁜 일은, 정신분석이 그 자체 하나의 공리계의 가치를 지니려 하는 일이다: 이것은, 정신분석이 더 이상 가족의 무대에도 관심을 가지 지 않고, 오로지 자기자신의 진리를 보증한다고 여겨지는 정신분석의 무 대와 자기자신의 성공을 보증한다고 여겨지는 정신분석적 조작에만 관심 42) Jac q ue s Monod, Le Hasard et la necessit e, p. ll2.
울 쏟게 되는 저 유명한 전환점이다-정신분석은 이제 공리계화한 대 지인 소파, 성공한 거세인 〈 치료 〉 의 공리계에만 관심을 쏟는다! 그러나, 욕망의 흐름들을 이렇게 재규준화하거나 공리계화함으로써, 정신분석은 시니피앙의 연쇄를 큰 덩어리로 사용하는데 이러한 사용은 무의식의 모 든 종합을 부인하는 데 이르게 한다 . 기관들 없는 신체는 죽음의 표본이다• 공포의 이야기를 쓴 사람들이 잘 이해하고 있던 것처럼, 緊張病의 표본이 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죽 음에다가 자기의 표본을 주는 것은 긴장병적 정신분열증이다. 强度 -0. 죽음의 표본은 기관들 없는 신체가 기관들을 거절하고 폐기할 때 나타난 다__입도 없고, 혀도 없고, 이도 없고 … … 스스로 수족을 자르고, 자살 하는 데까지 이를 때 나타난다. 하지만 기관들 없는 신체와 부분적 대상 들인 한에서의 기관들 간에는 현실적 대립이 없다; 유일의 현실적 대립 은 이것들의 공통의 적인 큰 덩어리를 이루는 유기체와의 대립이다. 욕 망하는 기계에서는, 동일한 긴장병환자가 부동의 動者에 의하여 영감을 얻기도 하고 , 활동하는 부품들에 의하여 멀어지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 댜 부동의 동자는 긴장병환자를 강요하여 그 기관들을 폐기하게 하고, 마비시키고, 침묵하게 한다. 가동하고 있는 부품들은 이때 자율적인 방식 으로 혹은 판에 박힌 방식으로 작동하여 기관들을 재활성화하고, 기관들 에다가 국부적 훈 동 들 을 불어넣는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기계의 서로 다른 부품들, 공존하면서 서로 다론, 공존 자체 속에서 서로 다른 부품들 이다. 그래서 삶에 대한 욕망들에 질적으로 대립하는 죽음에 대한 욕망 을 논하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다. 죽음은 욕망되지 않는다. 기관들 없는 산체나 부동희 동자의 자격으로 , 욕망하는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또 일 하는 기관들의 자격으로, 욕망하는 삶이 있다. 여기에는 두 욕망이 있지 않고, 기계 자체의 분산 속에, 욕망하는 기계의 두 개의 부폼., 두 종류의 부품기 있다. 하지만, 디음과 같은 문제가 존속한다: 어떻게 그것은 함께 작동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아칙 작동이 아니고, 다만 분지적 작동의 (구조적인 것이 아닌) 조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작동이 나 타나는 것은, 부동의 동자가, 선행하는 조건들 아래서, 죽 부동이기를 그
치지 않으며 또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함이 없이, 기관들을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 끌어당기고, 의견상의 객관적 운동 속에서 가관들 없는 신체 로 하여금 기관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게 하는 때이다. 반발은 기계의 작동의 조건이지만, 끌어당기는 것은 작동 자체이다. 뒤틀어져야만 작동 이 되는 한에서 작동이 이 반발이라는 조건에 의존한다는· 것은 아주 분 명한 일이다. 이때 이 核動이나 작동이 무엇으로써 성립하고 있는지 우 리는 말할 수 있다: 여기서는 욕망하는 기계의 순환 속에서 죽음의 표본 을 죽음의 경험이라고 하는 전혀 다론 것에로 끊임없이 번역하고 끊임없 이 변환시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안으로부터 (기관들 없는 신체 속에 서) 생기는 죽음을 밖으로부터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 도래하는 죽음 에로 변환시키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모호함이 누적되는 듯싶다. 왜냐하면 죽음의 표본과 구별되는 죽음의 경험이란 무엇인가? 여기에도 여전히 죽음에 대한 욕망이 있는 가? 죽음을 향한 하나의 존재가 있는 건가? 혹은 投機的인 것일지라도, 죽음의 공급기 있는 · 건가? 이런 것은 전혀 없다. 죽음의 경험은 무의식 의 가장 통상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 속에서 삶을 위하여, 經過 전체나 生成 전체 속에서, 경과와 생성으로서의 강도 전체 속에서 생기 기 때문이다. 각 강도의 본성은 자기자신 속에 강도- 어t 공급하는 것이 다. 이 강도 -Ooll 서 출발하겨 각 강도는 무한한 정도들로 증대하거나 감 소하는 것으로서 어느 순간에 산출된다. (클로소스키가 말한 바와 걷이, 〈많이 모여든다는 것은 오직 강도의 부재를 의미하기 위해서만 필요하 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어떻게 끌어당김의 관계와 밀어젖힘의 관계 가 에네르기의 새로운 변환을 내포하며 셋째 종류의 종합, 연접의 종합 둘을 형성하는 상태들, 감각들, 감동들을 산출하는가를 밝히려 하였다. 현실적 주체인 무의식은 그 순환의 둘레 전체에 의견상의, 잔여적이고 遊인 주체를 分封하고 있고, 이 주체는 포함적 이집들에 대응하는 모 든 생성을 편력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주체는 욕망하는 기계의 마지 막 부품이요, 隣接部品이다. 망싱들과 환각들을 북돋우는 것은 이 생성들 과 강렬한 감정들, 이 강도 있는 情動들이다. 그러나, 이 정동들은, 그 자
체, 물질의 가장 가꾸}o l 에 있고, 물질의 0 도의 단계를 자기 속에 공급한 다. 죽음기 모든 감정 속에서 느껴지는 것인 한에서, 이 정동들은 죽음의 무의식적 경험을 이끌어간다 . 죽 모든 생성에서 到來하기를 그치지 않고 또 도래하기를 끝내지 않는 것인 한에서 이렇게 한다――모든 생성이란 다른 性이 되는 것, 신이 되는 것, 인종이 되는 것 등인데, 이것들은 기 관들 없는 신체 위에 강도의 지대들을 형성한다. 모든 강도는 자기자신 의 생명 속에 죽음의 경험을 끌고 다니며 싸안고 있다. 아마도 모든 강 도는 마침내는 사라지며, 모든 생성은 그 자체 죽음에의 생성이다! 그때 죽음은 실제로 당도한다. 블랑쇼는 죽음의 이 이중의 성격, 환원할 수 없 는 이 두 양상을 찰 구별하고 있다. 하나는 의견상의 주체가 사람들 (On) 로서 살고 여행하기를 그치지 않는 양상인바, 〈 사람들은 죽기를 그치지 도 않고 끝내지도 않는다 〉. 다른 하나는 이 동일한 주체가 나로서 고정 되어 실제로 죽는 양상이다. 즉 마침내 죽기를 그치는 양상이다. 왜냐하 면 이 주체는 마지막 순간의 현실 속에서 마침내 죽기 때문이다. 이 현 실은 이 주체를 나로서 고정시키고 강도를 온통 파괴하여 이 강도가 싸 안고 있는 ()oll 로 이 강도를 다시 끌어간다 . 43) 한 양상으로부터 다른 양 상에로 넘어가는 데에는, 人物論的 深化가 전혀 없고, 전혀 다른 것이 있 다: 욕망하는 기계들의 순환 속에서, 죽음의 경험이 죽음의 표본에로 되 돌아가는 일이 있다. 이 순환은 닫혀 있다. 이것은 하나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것인가? 왜냐하면 나는 하나의 타자이니까. 죽음의 경험은 그야말 로 넓은 경험을 우리에게 충분히 주어, 욕망하는 기계들은 죽지 않는다 는 것을 체험하고 알게 하는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또 인집부품으로 서의 주체는 언제나, 죽음의 경험을 해나아가는 〈 사람들〉이지, 죽음의 표본을 받는 〈 나 〉 가 아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표본 자체는 〈나〉가 아니 라, 기관들 없는 신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죽음의 표본이 다시 죽음의 경험을 향하여 재출발하지 않고서는, 죽음의 표본에 합류하지 않 는다. 언제나 표본으로부터 경험에로 나아가고, 재출발하고, 표본으로부 43) 〈 二 重 의 죽음 〉 에 관하여는, cf, Mauric e Blanchot, L'Espa ce litt er air e , Gallim ard, pp. 104, 160.
터 경험에로 되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죽음을 정신분열중화하는 것이 요, 욕망하는 기계들의 실지로 행하는 일이다.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저 자들이 찰 이해한, 욕망하는 기계들의 비밀.) 욕망하는 기계들은 바로 이것을 말하며, 망상보다도 더 깊이 또 환각보다도 더 넓게 우리로 하여 금 이것을 체험하며 느끼게 한다: 그렇다, 반발에로의 되돌아감이 다른 끌어당김들, 다른 작동들을 생기게 하는 조건들을 이룰 것이요, 가동하는 부품들을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서 작동시킬 것이요, 주위에 있는 다른 인접부품들을 일하게 할 것이다. 이 부품들은 우리들 자신 못지않게 우 리들이라고 말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 前代未聞의,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을 보고 그가 뛰어오르고 뒤]지는 것이 좋겠다 : 다른 무서운 노동자 들이 오리라; 이 노동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넘어전 地平들에서 시작하리 라.〉 죽음의 경험으로서의 영원한 되돌아옴 그리고 욕망의 모든 순환의 탈토지화한 回路(는 이런 것이다). 정신분석의 모험은 어찌 그리 기묘한가, 정신분석은 삶의 노래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가치도 없다. 실제로, 그것은 우리에게 삶의 노래를 가르쳐주어야 한다. 그런데 정신분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은 가장 슬픈, 가장 주눅든 죽음의 노래, 에이아포페이아 e i a p o p e i a 이다. 프 로이트는, 처음부터, 충동에 관한 그의 완고한 二元論에 의하여, 끊임없이 리비도로서의 욕망의 주관적 내지 생명력 넘치는 본질의 발견을 제한하 려 하였다. 그런데 이 이원론이 에로스에 반대하는 죽음의 본능에로 옮 아갔을 때, 그것은 그저 리비도의 제한에 그치지 않고, 리비도의 淸 算이 되고 말았다. 라이히는 여기서 잘못 생긱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정신 분석의 산물은 행복하고 줄거운 사람, 생명의 흐름을- 지니고 이 흐름들 울 광야에까지 날라가 이 흐름들을 달규준화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 장한 유일의 사람이다一一이런 생각은, 정신분석이 밟아온 길을 고려할 때, 필연적으로 하나의 미친 생각으로 보이기는 해도 말이다. 그는 프로 이트가 융과 아들러 못지않게 性的인 입장을 포기했음을 밝혔다. 사실, 죽음의 본능을 설정함으로써, 적어도 불안이 생간다고 하는 본질적인 점 에서, 성욕으로부터 그 원동력의 역할을 빼앗고 있다. 왜냐하면 불안이
생긴다는 것은 성적 억제의 결과가 아니라 성적 억제의 자율적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욕망으로서의 성욕이 더 이상 문명에 대한 사회 적 비판에 생기를 주지 못하고, 이와 반대로 문명이 죽음의 욕망에 대립 할 수 있는 유일의 결정기관으로서 신성화되는 사태가 생긴다-문명은 어떻게 죽음의 욕망에 대항할 수 있는가? 원리적으로는 죽음을 - 반전시켜 죽음에 대항시킴으로써요, 아 반전된 죽음을 욕망의 힘이 되게 함으로써 요, 罪 責 感情의 문화 전체를 통하여 이 욕망의 힘을 擬似生命에 봉사하게 함으로써이다……. 정신분석은 禁怒의 이싱이라고 하는 낡은 과제를 다 시 거론하는 문화이론에서 정점에 도달하는데, 여기서 이 이야기를 다시 시작할 필요는 없다. 이 이상은 니르바나 N i rvana( 열반)인데, 이것은 문 화의 거품이요, 생명을 심판하고, 생명의 가치를 낮게 보고, 죽음을 척도 로 하여 생명을 재고, 생명에서 우리에게 남겨주는 것이라고는 죽음의 죽음, 죽 숭고한 체념이다. 라이히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정신분석이 에로스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안도의 숨을 쉬었고,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었고, 또 모든 것 이 고행의 삶 속에서 지나가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타나토스 (죽음)는 이제, 더 나쁘게 되는 일을 위해서만 아니라, 또한 더 좋게 되 는 일을 위해서도 에로스의 짝이었기 때문이다산 정신분석은 새로운 형 의 성직자들, 죽 양심의 가책을 고무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게 된다: 정 신분석에 의하여 사람들은 환자가 되고, 또 정신분석에 의하여 병이 낫 게 된다! 프로이트는 죽음의 본능에서 정말 문제되는 것이 무엇인지롤 숨기지 않았다: 어떤 사실이건 사실은 문제가 아니고, 오직 원리만이 문 제이다. 원리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죽음의 본능은 순수한 침묵, 순수한 소멸이요, 경험에서는 주어질 수 없고 주어지지도 않는다. 이 점 자체는 아주 주목할 만한 것이다: 프로이트가 죽음을 초월적 원리로 삼고 있는 44) Reic h , La Foncti on de l'orga s me, p. 103( 프로이트의 문화이론, 죄책감에 관 한 이 이론의 破局的 展開에 대하여는 뿔 리꾀르 Paul R i creur 에게서 하나의 정당한 해석을 발견할 수 있다 . 이 해석은 아주 관념론적이기는 해도 말이다. 죽 음 및 〈죽음의 죽음〉에 관하여는, cf. De l'i n t e rp re t叫 on, Ed. du Seu il, 1965, pp. 299-303).
것은, 그에 의하면, 죽음이 표본도 경험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45) 따라서 죽음의 본능을 부인한 정신분석가들은- 이 본능을 인정한 정신분 석가들과 똑같은 이유에서 그리하였다: 전자는, 무의식 속에는 표본도 경험도 없기 때문에 죽음의 본능은 없다고 말하였고, 후자는 표본과 경 험이 없다고 하는 바로 이 이유로 해서 죽음의 본능은 있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이와 반대로 무의식 속에는 죽음의 표본과 경험이 있기 때문에 죽음의 본능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때 죽음은 욕망하는 기계의 한 부품 이댜 이 부품은 기계의 작동과 그 에네르기의 변환 체계에서 판단되고 평가되어야지 추상적 원리로서 평가될 것이 아니다.
45) Freud, Inhib i t ion , Sy m p tom e et ang o is s e, 1926, tr. fr. P.U.F., p. 53.
프로이트에게 죽음이 원리로서 필요한 것은, 충동들 간의 질적 대립을 주장하는 이원론의 요구들에 응하기 위해서이다. (너는 갈등에서 빠져나 오지 못할 거다) : 성적 충동과 자아의 충동의 이원론이 局部的 射程밖에 가지지 못할 때, 질적 혹은 動力學的 二元論이 에로스의- 타나토스 사이룰 통과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욕망의 기계적 요소, 욕망하는· 기계들을 제거 한다고 하는 동일한 기도가 계속 강화되고 있다. 리비도가 기계 속에서 에네르기의 변환 가능성 (리비도一누멘-볼룹타스)을 내포하고 있는 한에 서, 리비도를 제거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모든 것을 무차별적인 중성적 에네르기를 경유하지 않을 수 없게 함으로써 기계의 변형들을 불가능하 게 하는 에네르기의 이원성의 관념을 강요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중성 적 에네르기는 오이디푸스에게서 나오는 에네르기요, 서로 환원될 수 없 는 두 형태의 어느 것에나 합류될 수 있는 것이요, 생명을 중성화하고, 괴롭히는 것이다씬 국부적이고 동역학적인 이 이원성은 機能的 多衝生
46) 칙접적인 질적 변환의 불가능성과 중성 에네르기를 경유하는 필연성에 관하여 는, cf. Freud, Le Moi et le ,;a, 1923, in Essai de psy c hanalys e , tr. fr. Pay o t, pp. 210-215. 장 라쁠랑슈와 함께, 〈죽음의 충동은 고유한 에네르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 불가능성과 이 필연성은 더 이상 이 해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에게는 보인다 (V i e et mort en psyc hanalys e , Flam-mario n , 1970, p. 211). 이렇게 되면 죽음의 충동은 전정한 이원론 속에는 들 어갈 수 없을 것이다. 혹은 중성의 에네르기 자체와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중성의 에네르기를 부인하고 있다.
의 관점을 물리치는 것을 목적삼는데, 오직 이 관점만이 경제적 관점이 다. (손디는 다음과 갇이 문제를 잘 제기하고 있다: 왜 기계적으로 작동 하는 n 개의 충동 유전자, 가령 여덟 개의 분자적 유전자보다도 오히려 신비적으로, 즉 오이디푸스적으로 작동하는, 큰 덩어리의 성질을 지닌 두 종류의 충동인가?) 프로이트가 초월적인 죽음의 본능을 원리로 세운 궁 극의 근거를 이 방향에서 찾는다면, 프로이트의 실천 자체에서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원리는 사실들과 아무 관계가 없을지라도, 사람 들이 실천에 관해서 품고 있는 생각, 또 사람들이 강요하려 하는- 생각과 는 많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욕망의 추상적인 주관적 본 질을 가장 깊이 있게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본질을 자아의 표상의 주관적 표상 속에서 다시 소의시켜 다시 공급했기 때문에, 이 본질을 오 이디푸스의 잔여의 토지 위에서 거세라고 하는 전제군주 시니피앙 아래 재규준화하였기 때문에, 삶의 본질을 자아에 대항하는 반전된 형태로, 죽 음 자체의 형태로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삶에 대한 이 중성화, 이 반전은 아직 쇠약하고 기진맥전한 리비도가 계속해서 살아남을 수 있 고 살아남기를 꿈꿀 수 있는 마지막 방식이다: 〈 금욕의 이상은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미봉책이다······. 그렇다, 이 파괴의 敎師, 자기자신의 파 괴자가 자기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때에도, 그 상처는 여전히 그롤 살아 가게끔 강요한다……. 〉 47) 부패와 죽음의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것은 오 이디푸스, 죽 질퍽한 大地이다. 그리고 이 죽음을 오이디푸스적인 삶의 溫室이 되게 하는 것은 거세, 죽 금욕의 경건한 상처요, 시니피앙이다. 욕망은, 그 자체로는, 사랑하려는 욕망이 아니고, 사랑하는 힘이다. 죽 주 고 생산하고 기계로서 움직이는 힘이다. (왜냐하면 삶 속에 있는 것이 어떻게 또한 삶을 욕망할 수 있겠는가? 누가 이것을 욕망이라 부르겠는 가?) 그러나, 무서운 아낭케 Ananke( 운명 ), 약자들과 쇠약한 자들의 아 낭케, 전염히는 신경증의 아낭케의 이름으로, 욕망은 반전하여 자기에게 대항하고, 자기의 그림자나 자기의 원숭이를 만들어내고, 空虛 속에서, 죽 자기자신의 矢如 속에서 자라나는 기묘한 인위적인 힘을 발견한다. 47) Ni et z s che, Genealog ie de la morale, II, § 13.
이것은 더 좋은 날들을 위함인가? 그런데 욕망은 사랑받으려는 욕망이 되어야 한다. 좀더 나쁜 경우에는, 사랑받고 싶었다고 훌쩍거리는 욕망, 아빠-엄마는 나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다……고 자기자신의 욕구불만 에서 다시 생겨나는 욕망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어찌 그리 비열하여 이렇게 말하는가? 병든 욕망은 소파 위에, 인공적인 늪지 대, 작은 대지, 작은 어머니 위에 눕는다. 〈 보세요, 당신은 걸을 수 없어 요, 당신은 비틀거리고 있어요, 당신은 이제 당신의 다리를 쓸 수가 없어 요……. 그 유일의 원인은 사랑받고 싶어하는 당신의 욕망, 감상적이고 훌쩍거리는 욕망이에요• 이 욕망이 당신의 무릎에서 튼튼한 힘을 온통 빼앗고 있는 거예요.〉 48) 왜냐하면, 反蜀翻物에게 두 개의 胃가 있듯이, 병 든 욕망에게는 두 번의 닉태, 두 번의 거세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가정에서 뜨개질하는 여자가 있는 가족의 무대 위에서요; 또 한 번 은 사치스럽게 살균된 사립병원에서, 죽음의 본능을 디물 줄 알고, 거세 룰 〈찰 해내고〉, 욕구불만을 〈잘 처리할〉 줄 아는 전문적 기술자들이 있는, 정신분석의 무대 위에서. 정말, 이것은 좀더 좋은 날들을 위한 좋 은 수단인가? 또 정신분열자-분석이 행하는 모든 파괴는 이 정신분석의 온실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더 긍정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 이 아닌가? 〈그러므로 정신분석가가 당신에게 제공하는 폭신한 소파 위 에 누워, 다른 것을 생각하도록 해보세요……. 만일 당신이, 정신분석가 도 당신과 같은 한 사람이요, 근심, 결함, 야심, 약점 등을 가지고 있고, 보편적 지혜(=規準)를 가지고 있는 寶庫가 아니라, (탈토지화한) 당신 과 같은 방랑자라고 하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아마 당신은 당신의 하수 관의 물 소리가 당신의 귀에 아무리 음악적으로 들릴지라도, 그 물을 토 하기를 그칠 것이오; 아마 당신은 당신의 두 발로 서서 (守護神인) 하느 님이 당신에게 준 목소리를 온통 돋우어 노래하기 시작할 것이오. 고백 하고, 자기 생긱을 위장하고, 하소연하고, 슬퍼하고 하는 일은 언제나 많 은 돈이 드는 일이에요. 노래하는 것, 이건 공짜지요. 공짜일 뿐더러, 노 래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병을 전염시키지 않고) 도리어 다른 사람들의 48) D. H. Lawrence, La Verge d'Aaron, p. 99.
삶을 풍요롭게 해주지요……. 환상의 세계는 우리가 정복을 채 마치지 못한 세계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세계이지, 미래의 세계가 아니에요. 과 거에 집착하면서 전진하는 것은 苦役囚의 발목에 단 첫덩이를 끌고 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들 중에는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죽 삶을 충실하게 살지 않는다고 하는 큰 죄를 범 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49) 당신은 오이디푸스로 태어나 지 않았소. 당신은 오이디푸스를 당신 속에서 자라게 하였소. 당신은 환 상에 의히여, 거세에 의하여 오이디푸스에게서 빠져나오려 하지만, 거세 는 당신이 오이디푸스 속에서, 죽 당신 자신 속에서 자라게 한 것이오. 무서운 순환 그것은 상상적인 혹은 상징적인 당신의 고행의 극장을 가 득 채운 똥이다. 정신분열자-분석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외부와의 악칸 의 참된 관계, 약간의 현실적 실재 이의의 다른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다. 그래서 우리는 철저히 가벼운 마음과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태도 룰 취하는 권리, 죽 정신분석가의 진료실에 들어가, 여기서는 악취가 나 는군요라고 말하는 권리를 요구한다. 거기서는 큰 죽음과 작은 자아라고 하는악취가난다.
49) Henry Mi ller, Sexus, pp. 450-452( 괄호 속] 있는 것은 우리가 추가한 것이 다). 『섹서스』 속에 있는 희극적인 정신분석의 실시들을 참조하는 것이 좋겠다.
1914-191 S1;1의 전쟁은 자본주의의 전쟁의 표본인데, 프로이트는 그의 죽음의 본능의 〈발견〉과 이 전쟁이 관련이 있음을- 잘 말한 바 있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죽음의 ·본능은 정신분석과 자본주의의 혼례를 거 행하는 것이다; 전에는, 그것이 아직 주저하는 혼약이었다. 자본주의에 관하여 우리가 밝히려 한 것은, 어떻게 자본주의가 고행적인 초월적 결 정기관, 죽 전제군주 시니피앙을 相續하였고, 그러나 이 결정기관을 그 자신의 체계 속 전체에 유출시켰는가 하는 것이다: 돈-지본의 신체가 된 충만한 신체는 생산과 반생산의 구별을 소멸시킨다; 자본주의는 줄곧 확대해 가는 그 자체의 경계선둘을 내재적으로 재생산하는 중에 (공리계 언서), 도처에서 반생산울 생산력들 속에 섞는다. 죽음의 기도는 자본 주의에 있어서의 잉여가치 흡수의 주요한 특유의 형식둘 중의 하나이다.
정신분석이 죽음의 본능에 의하여 재발견하고 다시 하는 일은 바로 이러 한 전전이다: 죽음의 본능이 삶과 초월적으로 구별되면 그것은 이제 순 수한 침묵일 따름이지만, 그것이 동일한 삶과 더불어 형성히~근 모든 내 재적 결합들을 통해서만 순수한 침묵을 유출시킨다. 내재적이고, 보급되 고, 흡수된 죽음, 이런 것이 자본주의 속에서 시니피앙이 취하는 상태이 다. 그것은 정신분열증의 진로들을 틀어막고 도주를 막기 위하여 사람들 이 도처에서 옮겨놓는 빈 오두막집이다. 현대의 유일의 신화는 좀비족 Zomb i s 의 신화이다一_좀비족의 사람들은 일을 잘 하고 이성을 되찾은, 고행의 정신분열자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을 규준화하는 자기들의 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野生人과 야만인은 현대인과 그 공리계에 비하면 어린아이들이다. (이 공리계에서는, 많은 실업자가 있어야 하고 많은 死 者가 있어야 한다. 알제리의 전쟁은 주말의 자동차 사고, 벵골에서의 계 획된 죽음 등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다.) 현대인은 〈더 많 은 망상을 한다. 그의 講姜定은 열세 개의 전화를 가전 교환대이다. 그는 세계에 그의 명령을 내린다. 그는 부인들을 사령하지 않는다. 그는 용감 하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를 까짓것 장식한다. 인간의 놀이에서, 죽음의 본능, 침묵의 본능은, 아마 이기주의와 나란히, 결정적으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룰레트에서 제로 (0) 의 자리에 있다. 카지노는 언 제나 이긴다. 죽음도 역시 그렇다. 큰 數의 법칙이 죽음의 편을 들고 있 다…….〉 50) 우리에게는 지금이 우리가 未決인 채로 남겨두었던 문제를 다시 거론할 때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바로 탈규준화한 흐름들에 작용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것이 지만, 어떻게 해서 자본주의는 흐름들을 규준화하고 초규준화하는 原始體 系들보다도 혹은 심지어 野營體系돌보다도 욕망하는 생산으로부터 무한히 더 멀리 떨어져 있는가? 욕망하는 생산이 탈규준화하고 탈토지화한 생산 이라는 것을 앞서 말했거니와, 자본주의가 그 공리계, 그 통계학을 가지 고서, 억압수단들을 결여하고 있지 않았던 先行體制들보다도 이 생산울 무한히 더 광범하게 억입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회적 50) L.F. Celin e , in L'Herne, n°3, p. 171 .
생산의 큰 덩어리를 이룬 동계적 집합들이 욕망하는 생산의 분자적 조직 체들과 가변적인 親和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보았다. 설명해야 할 것은, 자본주의적 집합이 힘껏 탈규준화하고 탈토지화하는 바로 그때 에, 이 집합이 욕망하는 생산의 분자적 조직체들과 가장 덜 친화적인 관 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점이다 . 여기 대한 답은 죽음의 본능이다. 여기서 본능이란, 일반적으로, 한 체 계 속에서 생산과 반생산의 관계들에 의하여 역사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생활조건들이다. 큰 덩어리를 이루는 사회적 생산과 분자적인 욕망하는 생산은 이것들의 본성이 동일하디는 관점과 동시에 이것들의 체제가 다르다는 관점에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본성과 체제라고 하는 이 두 양상은 이를테면 잠재적이요 역비례 의 관계로만 현실화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체제들이 가장 가까운 곳에 서는, 이와 반대로 본성의 동일성이 최소한으로 - 되고, 본성의 동일성이 최소한으로 나타나는 곳에서는 체제들이 극도로 다르게 될 때에만 현실 화한다. 원시적인 집합들이나 야만인의 집합들을 고찰해 보면, 생산으로 서의 욕망의 주관적 본질이 큰 대상체들, 죽 토지의 신체나 전제군주의 신체에 다시 관련시켜져 있음을 보게 된다. 토지나 전제군주의 신체는 자연적으로 혹은 신적으로- 전제된 것으로서 작용하며, 따라서 욕망의 흐 름들을 객관적인 표상체계들 자체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이 흐름들의 규 준화나 초규준화를 보증한다. 그러므로 사회적 생산과 욕망하는 생산 간 의 본성의 동일성은 여기서 아주 숨겨져 있다뇨 말할 수 있다. 때로는 욕망하는 생산의 객관적인 사회체와 이 생산의 주관적인 충만한 신체 간 의 차이에 의하여, 때로는 사회적 생산의 특징적인 규준화들 및 초규준 화들과 욕망하는 생산의 탈규준화나 탈토지화의 연쇄들 간의 차이에 의 하여, 또 때로는 野生人의 금지 사항들, 야만인의 법률 및 반생산의 권리 들에서 표상되는 억압장치 전체에 의하여. 하지만, 이렇게 되면 체제의 차이는 뚜렷이 드러나고 깊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이와 반대로 최소한으 로 된다. 왜냐하면 절대적 극한으로서의 욕밍하는 생산은 의적 극한으로 머물거나, 내재화하고 옮겨놓아진 극한으로서 할 일 없는 상태에 머물며,
따라서 욕망의 기계들은 사회체와 그 규준들의 데두리 안에 있는 그것들 의 극한의 이쪽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원시적 규준들과 심지어 전제군주의 초규준화들은 이것들을 욕망의 탈규준화의 연쇄에 기 능적으로 접근시키는 다양성을 보여준다: 욕밍히는- 기계들의 부품들은 사회적 기계의 톱니바퀴 장치 자체 속에서 작동하며, 욕망의 흐름들은 규준들 속을 들락날락한다 . 이 규준둘은 욕망하는 사회적 장치의 통일체 속에서 만들어지는 죽음의 표본과 죽음의 경험에 똑같이 끊임없이 생기 롤 주는 것이다. 그래서 욕망하는 기계들을 끊임없이 사회적 기계에 접 목시키고 사회적 기계를 욕망하는 기계들 속에 심는 회로 속에서 죽음의 표본과 죽음의 경험이 더 잘 규준화될수록 죽음의 본능은 적어전다. 죽 음은 안에서 규준화될수록 그만큼 더 밖으로부터 온다. 이것은 특히 잔 인성의 체계에서 참이다. 이 체계에서는 죽음이 부채의 유한한 덩어리들 의 운동 속에도 또 잉여가치의 원시적 메커니즘 속에도 등기된다. 그러 나, 부채가 무한하게 되고 죽음이 죽음을 잠재적인 본능이 되게 하는 경 향이 있는 洞湯을 알고 있는 공포의 체계에서도, 죽음의 표본이 초규준 화하는 법률 속에 존속하며, 죽음의 경험이 초규준화된 臣下들에 대해서 존속하며, 이와 동시에 반생산이 領主의 몫으로서 분리된 채로 있다. 이런 사태는 자본주의에서는 아주 다르다• 자본의 흐름들은 탈규준화 하고 탈토지화한 흐름들이기 때문에, 생산의 본질은 자본주의 속에서 발 견되기 때문에, 국한은 자본주의에 대해서 내적인 것이 되는데, 자본주의 는 내재화되고 옮겨놓아진 극한으로서 극한울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또 이 극한을 차지하기 때문에, 사회적 생산과 욕망히는· 생산 간에는 본성 의 동일성이 그 자체 나타나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 본성의 동일성이 두 생산 간의 체제의 친화력을 촉진시키기는커녕, 파국적인 방 식으로 체제의 차이를 증대시키며, 野生狀態도 野蜀閃態도 우리에게 그 관념을 줄 수 없었던 억압장치를 조립한다. 이것은, 큰 대상체들이 붕괴 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달규준화하고 탈토지화한 흐름들이 되찾아지거나 회복되지 않고, 금방 규준 없는 공리계 속에 붙들리게 되는데, 이 공리계 는 이 흐름들을 주관적 표상의 우주에 되돌려 보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우주는 주관적 본질(본성의 동일성)을 두 기능으로 쪼개는 것을 그 기능으로서 가지고 있다. 하나는 줄곧 확대하는 내적 극한들을 재생산하 는 사유재산 속에서 소의되는 추상적 노동의 기능이요, 다론 하나는 줄 곧 더 좁아지는 내재화한 극한들을 옮겨놓는 사기업화된 가족 속에서 소 의되는 추상적 욕망의 기능이다. 본성의 동일성의 한복판에서 끊임없이 체제의 차이를 증대시키고 깊어지게 하는 것은 욕망-노동의 이중의 소 의이다. 죽음이 탈규준화됨과 동시에, 죽음은 죽음의 표본 및 죽음의 경 험과의 관계를 상실하고, 본능이 된다. 즉 하나의 내재적 체계 속에 전파 된다. 이 체계 속에서는 생산의 행위마다 자본으로서의 반생산의 결정기 관에 不可分離하게 섞여 있다. 규준들이 파괴되어 있는 곳에서는, 죽음의 본능이 억압장치를 탈취하고, 리비도의 순환을 관리하기 시작한다. 이것 은 장례의 공리계이다. 이때에는 욕망들이 해방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 으나, 사실은 시체들처럼, 심상들로써 양분을 취하고 있다. 사람둘은 죽 음을 욕망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이 죽었고, 이 미 죽어 있다• 여기 있는 것은 심상들이다. 모든 것은 죽음 안에서 일하 고, 모든 것은 죽음을- 위하여 욕망한다. 사실, 자본주의는 되찾을 것이 하나도 없다. 혹은 차라리, 자본주의의 되찾는 힘들은 아주 자주 되찾아 져야 할 것과 공존하고, 심지어 이에 앞서 있기도 하다. (얼마나 많은 혁명 집단들이 그런 집단들인 限에서 미래에라야 되찾아질 것을 위하여 이미 자기의 부서를 맡고, 아직 생산되지도 않은 잉여가치롤 흡수하기 위한 장치를 형성하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그들에게 의견상의 혁명적 입장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 안에는, 이 체계를 폭파시키기에 충분 한, 혹은 모든 것이 마침내 말려들고 휩쓸려 들어가게 되는 末端을 통하 여 이 체계를 도망 가게 할, 살아 있는 욕망은 단 하나도 없다-체제 의 문제. 욕망하는 기계들에는 세 개의 部品들, 세 개의 에네르기, 세 개의 종합 이 있다: 그 부품들은 일하는 부품들, 不動의 動者, ·隣接部品이요-그 에네르기들은 리비도, 누멘 및 볼룹타스요―-그 종합들은 부분적 대상 들과 흐름의 연결적 종합들, 單一者돌과 연쇄둘의 이집적 종합들, 강도들
과 생성들의 연접적 종합들이다. 정신분열자-분석가는 해석자도 아니요, 연출자도 아니다. 그는 기계기사, 미크로-기계기사이다. 무의식 속에는 發堀이나 考古學이 없으며, 影像들도 없다; 베케트式의 핥아대기 위한 돌 들과 탈토지화한 집합들의 다른 기계적 요소들 의에는 아무것도 없다• 문제는 어떤 사람의 욕망하는 기계들이 어떤 것이며, 그것들이 어떻게 움직이며, 어떤 종합들을 행하며, 어떻게 흥분하며, 어떤 故障들로 구성 되며, 어떤 흐름들, 어떤 연쇄둘을 지니고 있으며, 각각의 경우에 어떤 생성들이 있게 되는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사실 이 적극적 임무는 불가 결한 파괴들, 기계의 작동을· 방해하는 큰 덩어리를 이룬 집합들, 구조들 및 표상들의 파괴와 분리될 수 없다. 분자들을 재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 다. 先意識을 가득 채우고 있고, 그 대표자들을 무의식 자체 속에 파견하 여 기계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침묵시키고, 올가미에 걸리게 하고, 窓業하게 하고, 쐐기를 박아 꼼짝못하게 하는 큰 덩어리들을 건너질러, 심지어 거대한 분자들, 이것들이 지나가는 길들, 이것들이 현전하는 지대 들과 이것들의 고유한 종합들을 재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무의식의 壓迫線들이 아니라, 이와 반대로 그 逃走線들이다. 무의식이 의식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무의식에 압력을 가하여 제 지하고, 무의식이 도주하는 것을 방해한다. 무의식은 자기에게 반대되는 것에 접근해 가는 풀러돈의 반대자와 같다: 그것은 도망 가거나 없어진 다. 우리가 처음부터 밝히려 한 것은, 어떻게 무의식의 생산들과 형성들 이 이것들과 타협하는 억제의 결정기관에 의하여 물리쳐지는가 하는 것 만 아니라, 또한 反形成들에 의하여 정말 감추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이 반형성들은 무의식을 그 자체 속에서 변질시키고, 무의식에게 인과관계 들, 이해들, 표현들을 강요하는데, 이런 것들은 무의식의 실제의 작동과 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리하여 모든 影像이 나타난다. 죽, 오이디푸스적 심상들, 환상적인 연출들, 거세의 상칭체계, 죽음의 본능의 전파, 倒緖된 재토지화들이 나타난다. 따라서 해석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억제되는 것을 억제를 통해서나 억제 속에서 읽을 수는 철대로 없다. 왜냐하면 억 제는 자기가 억제하는 것의 거짓된 심상을 끊임없이 끌어들이기 때문이
다. 종합들의 부당한 초월적 사용들이 이런 경우인데, 이 사용들에 따르 면 무의식은 더 이상 자기자신이 구성하는 기계들에 맞추어 작동할 수 없고, 다만 억압장치가 무의식에게 표상하도록 주는 것을 〈표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해석의 형식 자체는 무의식에 도달할 수 없음이 드러난 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 불가피한 착각들을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 (이 착각들 속에는 구조와 시니피앙도 들어 있다). 이 착각들을 통하여 의 식은 무의식에 대하여 자기가 원하는 것들에 일치하는 심상을 만든다 __ 우리는 아직 경전하고, 정신분석은 비판 이전의 시대에 머무르고 있다. 만일 이 착각들이 무의식 자체 속에 이것들에 동조하고 이것들을 떠받 쳐주는 것의 혜택을 받지 않는다면, 아마 이 착각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을 것이다. 무의식 속에서 착각들에 동조하고 착각들을 떠 받쳐주는 것이 〈포획물〉을 보증한다. 우리는 착각들을 떠받쳐주는 것이 무엇인지 앞에서 보았다: 여기서 문제인 것은 根源的 억제이다. 이 억제 는 분자적인 욕망하는 생산의 한가운데서, 기관들 없는 신체에 의하여 반발의 순간에 행해진다. 이 근원적 억제가 없으면, 본래의 의미의 억제 가 큰 덩어리를 이루는 힘들에 의하여 무의식 속에 보내어쳐서 욕망하는 생산을 파괴할 수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소위 억제는, 어떤 기회가 없으 면 욕망의 기계기구에 개입할 수 없으므로, 이런 기회를 이용한다 .51) 정 신분석은 무의식을 그 함정에 빠지게 함으로써 그 자신 함정에 빠지거니 와, 이와 반대로 정신분열자-분석은 逃迫泉들과 기계적 지표들을 추적하 여 욕망하는 기계들에게까지 이른다. 정신분열자-분석의 파괴적 임무의 본질이, 〈症例〉에 적합한 방식으로, 그때마다 소위 억제의 오이디푸스적 인 함정과 그 모든 屬領울 파괴하는 것이라면, 그 적극적인 첫째 임무는, 여기서도 가변적으로 적응하는 방식으로, 근원적 억압을 확실하게 기계 적인 것으로 변환하는 것이다. 죽, 소위 억제의 근거를 이루고 있는 閉塞 이나 동조를 파괴하고, 의견적으로 반발하고 있는 대립 (기관들 없는 신체 와 부분적 대상들인 기계들의 대립 )을 실제로 작동하는 조건에로 변형시 키고, 이 작동을 끌어당김 및 강도들의 생산의 형태들로 확실하게 실현 51 ) Cf. Supr a , ch. II, p. 7.
시키고, 따라서 생산된 강도들 속에 제로 (O) 의 단계를 포섭하는 동시에, 끌어당기는 작동 속에 고장들을 통합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욕망하는 기 계들을 다시 가동시키는 것이다. 이와 갈은 것이 정신분열자-분석에서 轉를 위하여 중요한 핵심적이고 까다로운 점이다.
5 정신분열자-분석의 둘째 적극적 임무 하지만 체제의 차이가 우리로 하여금 본성의 동일성을 잊어버리게 해 서는 안 된다. 근본적으로 두 극이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두 극 을 큰 덩어리를 이루는 조직체들과 분자적 조직체들의 이원성으로서 제 시해야만 한다면, 이런 식으로 제시하는 것에 우리는 만족할 수 없다. 왜 나하면 그 자체를 통하여 큰 덩어리를 이루는 조직체를 공급하지 않는 분자적 조직체는 없기 때문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큰 규모로 사회기계 들을 형성하고 있으므로 사회기계들의 의부에 존재하는 욕망하는 기계는 하나도 없다. 또 욕망하는 기계들이 없는 사회기계도 없다. 따라서 큰 덩 어리를 이루는 규준이나 공리계의 무더기들 전체를 가로막고 재생산하지 않는 분자적 연쇄는 없고, 분자적 연쇄의 단편들을 자기 속에 보유하거 나 봉쇄하지 않는 무더기 같은 것도 없다. 욕망의 連續狀態가 社會系制롤 통하여 연장되거나, 혹은 사회기계가 그 톱니바퀴 장치 속에 욕망하는 기계들의 부품들을 가지고 있다. 욕망하는 미크로-多樣性들은 · 큰 사회 적 집합들 못지않게 집합적이요, 이것들은 본래 분리될 수 없고 또 유일 한 동일한 생산울 구성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두 극의 이원성은 큰 덩어리를 이루는 것과 분자적인 것 간에 성립한다기보다 큰 덩어리를 이 루는 사회적 공급들의 내부에 이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쨌든 분자적 조칙체들은 그러한 공급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두 극에 관하여, 우리들의 용어는 크게 달라졌다. 어떤 때에는 우리는 큰 덩어리를 이루 는 것과 분자적인 것을, 시니피앙의 구조화된 편집병적 統合線들과, 기계
적이고 분산된 정신분열증적 逃迫奈둘로서, 또는 더 나아가 倒緖된 재토 지화들의 흔적과 정신분열중적 탈토지화들의 운동으로서 대립시켰다. 어 떤 때에는, 이와 반대로, 우리는 이 양자를, 하나는 반동적이거나 파시스 트적인 경향을 떤 定住的이고 일대일 대응적인 공급이고, 디론 하나는 혁명적인 경향을 띤 遊牧的이고 多義的인 공급인, 똑같이 사회적인 두 가 지 큰 型의 공급으로서 대립시켰다. 사실 〈 나는 영원히 劣等人種에 속한 다 〉 , 〈 나는 짐승이다, 껌둥이이다 〉 , 〈 우리들은 모두 독일의 유태인이다 〉 등의 정신분열증적 언명들에는, 〈 나는 당신들과 같은 족속이요, 한 핏줄 이요, 니는 순수한 아리아인이요, 영원히 優等人種에 속한다 〉 …… 등등이 편집병적 공식 못지않게 역사적_사회적 터전이 공급되어 있다. 그래서 무의식의 리비도 공급의 관점에서 보면, 한 쪽 공식에서 다론 쪽 공식으 로는 모든 振動이 가능하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가? 分子的으로 분산하 는 정신분열증적 도주는 어떻게 편집병적 공급만큼 강하고 일정한 공급 을 형성할 수 있는가? 그리고 왜 두 극에 대응하는 두 가지 형의 사회 적 공급이 있는가? 이것은 도처에 큰 덩어리를 이루는 것과 분자적인 것 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의 離接은 포합적 이집의 관계요, 이 관계는 다 만 종속의 두 방향에 따라, 죽 분자적 현성들이 큰 집합들에 종속하는가, 혹은 이와 반대로 이 집합들이 분자적 현상들에 종속하는가에 따라 달라 진다. 두 극의 한 쪽에서, 큰 집합들, 큰 군집형태들이 자기들을 날라가 는 도주에 대능k 1 편집병적 공급을 〈 도주 앞의 도주〉로서만 대립시킨다. 그러나 다른 극에서, 정신분열증적 도주 자체는 그저 사회적인 것에서 떠나, 橘外에 사는 것으로만 성립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인 것을 감아먹고 뚫는 다양한 구멍들을 통하여 이 사회적인 것을 도주시킨다. 이 도주는 언제나 사회적인 것에 직접 작용하면서, 도처에서 분자들의 임무를 배치하고, 각 지점에서 정신분열중의 변환을 실제적으로 혁명적 인 힘에로의 과정으로서 확실하게 실현한다. 분자들의 임무는 파열해야 할 것을 파열시키고, 몰락해야 할 것을 몰락시키고, 도주해야 할 것으로 하여금 도주시키는 것이다. 나전스키는, 정신분열자란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들 모두〉, 죽 돈, 지갑, 죽음의 힘들-가치들, 도덕, 조국, 종교
및 사적 확신들-울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말하였다. 정신분열자와 혁명가 간에 다만 도주하는 자와 도주하는 것을 도주하게 할 줄 아는 자 간의 처이가 있을 뿐이다• 혁명 가는 더러운 管울 깨부수고, 洪 7k 를 통과시키고, 흐름을- 풀어놓고, 分裂울 다시 절단한다. 정신분열자는 혁명가가 아니지만, 정신분열증적 과정은 혁명의 潛在力이다. (정신분열자에게서는 이 과정이 中斯 혹은 空轉할 따 름이다.) 도주는 용감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다음 과 같이 대답한다: 도주하고서, 동시에 사회적 공급을 하지 않는 사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선택은 두 극 간에만, 죽 lI 廊想主義的이고 反動的이고 파시즘화시키는 모든 공급에 활기를 불어넣는 편집병적인 도주 반대와, 혁명적 공급에로 변환할 수 있는 정신분열증적 도주 간에만 있다. 불랑 쇼는, 이 혁명적 도주에 관히여, 가장 적극적인 것으로 생각되고 또 다루 어져야 하는 이 몰락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말하고 있다: 〈이 도주는 무엇인가? 이 낱말은 찰못 선택되어 있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용기는 허위의 피난처에서 조용하게 위선적으로 사느니보다는 차 라리 도주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가치들, 도덕, 조국, 종교 및 우리들 자 신의 허영심과 자기만족이 우리에게 후하게 주는 사적 확신들은 적지않 게 기만적으로 정착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안정된 처지에서 편히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세계가 마련해 주는 것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더 빨라지는 자기들의 발걸음의 단조로운 森音 속에서, 자기들 자신도 모르는 채, 자기들을 날라가는 저 거대한 敗走에 대해서 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의 발걸음은 그들이 사람들이 아닌 양 큰 不動 의 운동으로써 그들을 날라간다. 도주의 앞의 도주. (이런 사람들 중의 하나가) 신비스러운 潔流의 啓示를 받아, 더 이상 거짓된 정착 속에서 살기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자. 먼저 그는 자기 나름으로 이 운 동을 해보려고 시도한다. 그는 한 인물로서 떠나기롤 바랄 것이다. 그는 權外에서 산다……. (그러나) 아마도 몰락은, 이제는 더 이상 개인적 운 명일 수 없고, 모든 사람 속에 있는 각자의 운명이다.〉 52) 이 점에서, 정 52) Mauric e Blanchot, L'Ami tie, Gall im ard, 1971, pp. 232-233.
신분열자-분석의 첫째 명제는 다음과 같다: 모든 공급은 사회적인 것이 요, 어떤 모로나 사회적, 역사적 터전을 대상으로 한다. 큰 덩어리를 이루는 조칙체 혹은 군집형태의 큰 특징들을 상기해 보 자. 그것들은 큰 수들의 법칙들을 따르는 통계학적 集積에 의하여, 분자 적인 힘들을 통일하고 전체화한다. 이 · 통일체는 어떤 種의 생물학적 통 일체일 수도 있고, 혹은 어떤 사회체의 구조적 통일체일 수도 있다. 사회 적인 혹은 살아 있는 한 유기체가 하나의 전체로서, 죽 하나의 전체적 대상 혹은 완비된 대상으로서 구성되어 있다. 이 새로운 질서에 대하여, 분자적 질서의 부분적 대상들의 하나의 矢女 U 로 나타나며, 동시에 전체 자체는 부분적 대상들에서는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말해진다. 그리하여 욕망은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만 말해진다• 그리하여 욕망은 결여에 鎔接 된다. 분자적 다양성에 있어서의 적국적 분산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무수 한 흐름들-절단들은 결여의 空胞둘 위에 포개지고 이 공포들은 큰 덩어 리를 이루는 질서의 통계학적 집합 속에서 욕망과 결여를 용접한다. 프 로이트는 이런 의미에서 어떻게 절단들이나 분열들에 기초를 둔, 분산의 정신병적 다양성들로부터, 신경병 및 거세 형의, 전체적으로 규정된 큰 공포들에의 이행이 행해지는가를 잘 밝혔다: 신경종환자에게는 하나의 전체적 대상이 필요한데 이 전체적 대상에 대하여 부분적 대성들은 결여 로서 규정될 수 있고 또 이 逆도 성립한다 .53) 그러나,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분자적 다양성이 큰 덩어리를 이루는 집합으로 변형하는 것은 결여를 큰 규모로 조직하는 것이다. 이렇게 조직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생물학적인 혹은 사회적인 유기체, 죽 種혹은 社會體에 속한다. 자기에 게 고유한 갖가지 수단을 통하여, 자기의 한복판에 결여를 가지고 있지 않는 사회란 하나도 없다. (이 수단들은, 가령 전제군주형의 사회와 자 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동일하지 않다. 후자에 있어서는 시장경제가 이 수단들을 지금까지 있어 본 적이 없는 완전도에 이르게 한다.) 이렇게 53) Cf. Freud, L'in c onscie n t, 1915, in Meta p s ych olog ie, tr. fr. Gallim ard, pp. 152-154: 양말의 두 가지 사용이 있는데 하나는 정신병적인 것이고` 다론 햐 R 는 신경중적인 것이다. 전자는 양말을 실밥둘의 분자적 다양성으로 다루고, 후자는 전체적 대상 및 전체적 결여로 다룬다.
욕망이 결여와 용집되면, 바로 이것이 욕망에 목적들, 목표들 혹은 의도 둘을 준다; 이 목적들, 목표들 혹은 의도들은 개인적인 경우도 있고 공 동의 것인 경우도 있다-그 대신, 생산의 현실적 질서 속에서 파악되 는 욕망, 죽 목표도 없고 의도도 없는 분자적 현상으로서 처신하는 욕망 은 사라진다. 따라서 통계학적 집적은 우연의 결과, 즉 우연에서 오는 결 과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와 반대로 그것은 우연의 요소들에 대하 여 행하는 선택의 결과이다• 니체가 선택은 가장 빈번하게 큰 數를 위하 여 행해진다고 말할 때, 그는 현대 사상에 영감을 주게 될 하나의 근본 적 직관을 던져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려는 것은, 큰 수들이나 큰 집합들이 먼저 있고 나서 이것들로부터 단일체들의 선들을 풀어놓게 될 선택의 압력이 있게 된다는 것이 아니고, 이와 전혀 반대로, 큰 수들과 큰 집합들은 단일체들을 파괴하고, 제거하고 혹은 정리하는 선택의 압력 에서 생겨난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택은 최초의 군집을 전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군집이 선택을 전제하고, 선택에서 생겨난다. 각인하거나 등기하는 선택의 과정으로서의 〈문화〉는 큰 수들을 발명하는데 또한 이 큰 수들을 위히여 일한다. 이런 까닭에 통계는 기능적인 것이 아니고, 구 조적인 것이요, 또 선택이 이미 부분적 종속의 상태에 둔 현상의 연쇄둘 을 대상으로 한다(마르코프 연쇄). 이런 일은 遺傳의 규준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군집들은 결코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적 선택에 의하여 그것들을 생산하는 일정한 성질을 지닌 형태들이다. 순서 는 다음과 같다. 군집一선택이 아니고, 이와 반대로 분자적 다양성一 선택을 행하는 군집의 형태들一선택으로 말미암는 큰 덩어리의 혹은· 군 집의 집합들. 니체가 〈主權形成組織體들〉이라고 부른, 전체화하고, 통일하고, 시니피 앙의 일을 하고, 조직체들, 결여들 및 목표들을 고정시키고 정하는 대형 체들의 역할을 하는, 이 일정한 성질을 지닌 형태들이란 무엇인가? 그것 둘은 사회체의 서로 디른 양식들, 죽 대지, 전제군주, 자본이라고 하는 참으로 묵적한 집합들을 규정하는 충만한 신체들이다. 충만한 신체, 죽 옷을 입은 물질은 기관들 없는 충만한 신체, 죽 분자적인 욕망하는 생산
의 벌거숭이 물질과는 구별된다. 사회체의 이러한 권력형태들이 어디서 생겼는가고 따져보면, 그것들이 어떠한 목표, 어떠한 목적에 의해서도 설 명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목표들과 목적둘을 정하는 것은 이 권력형태들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 사회체, 즉 大地의 신체, 전제군주의 신체, 돈-지본의 신체의 형태나 성질은, 생산력들의 모든 사회조직체로 부터 독립해 있는, 혹은 차라리 모든 사회조직체에 공통되는, 자연인을 규정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 이 생산력들의 강도 있는 발전의 상태 혹은 단계에 의존한다. (자연인이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유용한 노동의 필연 조건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체의 형태나 성질은 그 자체 산출되는 것이지만, 발생하지는 않는 것으로서, 죽 어떤 단계에 대응하는 생산의 자연적인 혹은 신적인 전제로서 산출된다. 이 생산에 대하여 사회체의 형태나 성질은 구조적 통일과 의견상의 목표들을 주고, 이 생산에 포개지고, 선택, 축적, 끌어당김을 결정하여 이 생산력들을 자 기의 것으로 만든다. 선택, 축적, 끌어당김이 없으면 생산력들이 사회적 성격을 띠지 못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생산은 ―定한 조건들 아래에서의 욕망하는 생산 자체이다. 그러므로 이 일정한 조건들은 사회 체 혹은 충만한 신체로서의 군집형태들이다. 이 형태들 아래 분자적 조 직체들이 큰 덩어리의 집합들을 구성한다. 이제 우리는 정신분열자-분석의 둘째 명제를 명확하게 말할 수 있다: 사회적 공급둘은 집단 혹은 욕망의 무의식적인 리비도 공급과 계급 혹은 이해관계의 先意識的 공급으로 구별된다. 이 후자는 사회의 큰 목표들로 해서 행해지며, 또 유기체와 그 기관들 전체와 관계하는데, 이 기관들에 는 배치된 결여의 空胞들도 포함된다. 한 계급은 종합들의 체제, 죽 전체 적 연결들, 배타택일적 이집들, 殘余的 連接둘의 상태로써 정의된다. 이 연결들, 이집들, 연집들은 문제되는 집합의 특칭을 이루는 것둘이다. 한 계급에 속한다는 것은 결국 생산 혹은 반생산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등 기에 있어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주체들에 되돌아오는 몫을 차지한다 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급의 선의식적 이익은 그 자체 흐름으로부터의 採取둘, 규준들로부터의 이탈들, 주체의 잔여들 혹은 수입을 의미한다.
그래서 , 이 관접에서 보면, 사실상 한 집합은 실제로 오직 한 계급, 죽 어떤 한 체제에서 이해관계를 갖는 계급만을 포함한다• 다른 계급은 반 공급에 의해서만 구성될 수 있다 . 이 반공급은 사회의 새로운 목표들, 새 로운 기관들과 수단들, 사회적 종합들의 가능한 새로운 상태들에 관련하 여 그 자신의 이익을 창조한다. 여기서, 이 다른 계급이 黨이라고 하는 장치에 의하여 표상되는 필연성이 생긴다. 이 장치는 이 목적들과 수단 들을 정하고, 선의식의 영역에서 혁명적 절단(가령, 레닌주의적 철단)을 조작한다. 그러므로 계급이나 이익의 선의식적 공급둘의 이 영역에서는, 반동적인 것, 혹은 개량적인 것, 혹은 혁명적인 것을 구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는, 이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이익 이, 이를테면, 남에 의하여 〈 가져지는 〉 혹은 표상되는 사람들보다 언제 나 그 수가 더 제한되어 있다: 실천의 관점에서의 계급은 이론적 규정에 서 파악되는 계급보다 그 인원이 무한히 적고 크지 않다. 여기서 지배계 급, 죽 그저 계급이라 할 수 있는 계급의 한복판에 존속하는 모순둘이 생긴다.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분명한데, 가령, 이 체제에서는 원시 적 축적이 지배계급 전체 중의 한정된 일부의 이익을 위해서만 행해전 다민 그런데 이런 일은 당의 장치라고 하는 자기의 조직체를 가지고 있 던 러시아 혁명에서도 아주 분명히 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푸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 혁명의 객관적 이익을 가지고 있는 혹은 가지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는 사람들 중의 많은 사람이 反動型의 선의식적 공급을 고수하고 있는가? 그리고 좀 드문 일이지만, 어떻게 객관적으로 반동적인 이해관 계를 가지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혁명적인 선의식적 공급을 수행하는가? 후자의 경우에는 정의에 대한 갈망, 올바론 이데올로기적 입장이 좋고 옳은 견해로서 작용하고 있고, 전자의 경우에는 이데올로기에 속아 눈이 어두워진 탓이라 할 것인가? 혁명가들은, 사람들이 혁명을 원하고 일으 54) Mauric e Dobb, Et ud es sur le deuelop pe ment du cap itali sm e, p. 191 : 〈자본 주의가 만개하는 데에는, 비단 부의 권리중서둘이 부르주아 계급의 수중에 넘어 갈 뿐만 아니라, 부의 소유권이 훨씬 더 제한된 집단의 수중에 집중되는 것이 필요하였는데, 이렇게 되는 근거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키는 것이 의무 때문이 아니라 욕망 때문이러는 것을 가끔 잊어먹거나, 혹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딴 데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이데올로기 란 개념은 신통치 않은 개념이다. 그것은 언제나 조직의 본성에 관한 진 정한 문제들을 숨긴다• 라이히가 〈왜 대중은 파시즘을 욕망했는가?〉라고 하는 다시없이 깊이 있는 문제를 제기했으면서도, 이데올로기적인 것, 주 관적인 것, 바합리적인 것, 부정적인 것 및 억제된 것을 가지고서 답하는 것으로 만족한 것은, 그가 부차적 개념들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 副次的 개념들은 그로 하여금 그가 바라던 유물론적 정신의학을 얻지 못하게 하였고, 어떻게 욕망이 하부구조의 부분을 이루고 있는가를 보지 못하게 하였고, 또 그를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의 이원성 속에 가두 어놓았다. (그 후, 정신분석은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규정되는 주관적인 것의 분석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모든 것은, 사람들이 흔히 바라듯, 객 관적이거나 주관적이다. 구별은 여기에 있지 않다: 구별해야 할 것은 경 제적 하부구조 자체와 그 공급들에 관해서이다• 리비도 경제학은 정치경 제학 못지않게 객관적이요, 정치경제학은 리비도 경제학 못지않게 주관 적이다. 하기는 이 두 가지가 다 사회적 현실로서의 동일한 현실의 서로 다른 두 공급양식에 대응하는 것이기는 해도 말이다. 욕망의 무의식적 리비도 공급이란 것이 있으며 이 공급은 반드시 이익의 선의식적 공급~ 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또 어떻게 이익의 선의식적 공급들이, 이데올 로기 전체의 지배를 받아, 〈가장 음침한 조직〉 속에서 혼란하게 되고 도 착되어질 수 있는가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리비도 공급은 사회적 종합들을 대상으로- 삼지 않고, 이 종합들이 의 존하는 힘들이나 에너지들의 발전단계를 대상으로 삼는다. 그것은 이 종 합들에 의히여 조작되는 채취둘, 이탈들 및 잔여들을 대상으로 삼지 않 고 이 종합들의 조건인 흐름들과 규준들의 본성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 것은 사회의 목표들과 수단들에 관여하지 않고, 사회체로서의 충만한 신 체에, 주권형성조칙체나 자기지신을 위한 권력형태에 관여한다. 이 형태 는 의미와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의미와 목표가 이 형태에 서 생기는 것이지, 이것의 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익둘은 우리
를 어떤 한 리비도 공급을 하게끔 미리 정해 놓지만, 이 공급과 일체가 되지는 않는다. 더구나, 무의식적인 리비도 공급은 우리로 하여금 어느 한 쪽에서보다 오히려 다른 한 쪽에서 우리의 이익을 추구하게 하는 것 이요, 거기에 우리의 모든 기회가 있다고 생각게 하고서 그런 방향으로 우리들의 목표들을 정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우리를 거기로 밀어붙이기 때문이다. 명백한 종합들은 다만 발전 단계의 선의식적 表示 計둘일 따름이요, 분명한 이익들과 목표들은 다만 사회적인 충만한 신체 의 선의식적 지수들일 따름이다. 클로소스키가 니체를 깊이 있게 주석하 는 중에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권력의 형태는 그것이 그 부조리 자체 로 말미암아 행사하는 폭력과 일체를 이루고 있으나, 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목표들과 의마들을 그 자신에게 설정해 줌으로써이 다. 이 목표들과 의미들 속에는 인간을 극도로 노예화하는 요소들도 들 어 있다: 〈 주권형성조직체들은 자기들이 창조하는 조직적 목표에 의하여 자기둘의 지상권의 목표와 의미가 없음을 숨기는 것밖에는 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 , 그리하여 그 부조리를 靈性에로 변환시키는 것밖 에는 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55) 이런 까닭에 한 사회 안의 합리 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을 구별하려 하는 것은 아주 헛된 일이다. 물론, 사람들이 한 사회 안에서 갖는, 그리고 사회적 재생산의 법칙들을 따라 얻는 역할, 자리, 몫은 리비도를 몰아 충만한 신체인 한에서의 사회체, 부조리한 권력을 공급하게 한다. 우리들은 목표들과 이익둘을 구실삼아 이 권력에 참여하거나 참여하는 기회들을 갖는다. 남는 문제는 사회기계, 권력형태 및 발전단계를 이것들 자체를 위하여 사랑하는 이해를 초월 한 사랑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것들에 대하여 이해관계가 없 는―_또 자기의 이익에 대한 사랑과는 다른 사랑으로써 이것들을 더욱 사랑하는-―-사람에게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이것들에 대해서 이해관계가 없고, 또 이 反利害롤 색다른 사랑의 힘으로써 대체하는 사 55) Pie r re Klossowski , Ni etz s che et le cercle uic i e u x, pp. 174-175. 니체가 말 하는 주권조직체들 Herrscha ftsg e b il de , 이것들의 부조리한 혹은 목표 없는 권 력, 그리고 이것들이 에네르기의 발전단계에 관련하여 자기들을 위하여 발명하 는 목표들과 의미들에 관한 클로소스키의 주석은 모든 점에서 본질적이다.
람에게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사회체의 多孔的인 충만한 신체 위를 흐 르는 흐름들, 이것들이야말로 욕망의 대상이요, 모든 목표보다 더 높은 목표이다. 그것은 아무리 흘러도 결코 충분히 흐른다고 할 수 없고, 아무 리 절단해도 결코 충분히 절단한다고 할 수 없고, 아무리 규준화해도 결 코 충분히 규준화한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그것은 바로 그 나 름의 방식으로 이렇게 한다! 그 기계는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카프카의 『浦Uf!J地에서』에 나오는 장교는, 단순히 기술적이기만 하지 않고 또한 사 회적이기도 한 기계, 그것을 가로질러 욕망이 자기자신의 억압을 욕망하 는 기계의 강렬한 리비도 공급이 어떤 것일 수 있는가를 밝히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자본주의기계가, 점유하지도 접유되지도 않는, 그리고 자 본의 충만한 신체 위를 흐르면서 부조리한 권력을 형성하는, 돌연변이하 는 어떤 큰 흐름에 둘러싸인 內在의 체계를 구성하는가를 본 바 있다. 이 큰 흐름이 給料收入이나 企業收入에로 변환되되, 이것들이 목표들이나 이해의 범위, 채취들, 이탈들, 몫들을 규정하는 한에서, 사람마다 자기의 계급 안에서 또 자기 개인으로서 이 권력으로부터 어떤 것을 받거나, 이 권력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다. 그런데 이 흐름 자체와 그 공리계의 공급 은 물론 정치경제학의 아무런 정확한 인식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목표 들에 의하여 미리 전제되어 있는 한에서 무의식적 리비도가 하는 일이 다. 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가장 배제되어 있는 사람들이 자기 들을 압제하는 체계를 열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본다. 그 리고 이 사람들은 이 체계에서 언제나 어떤 이익을 얻는다. 왜냐하면 그 둘은 바로 거기서 이익을 찾고 이익을 측정하기 때문이다. 이익은 언제 나 나중에 생긴다(고 그들은 본다). 반생산은 이 체계 속에 전파된다: 사람들은 반생산울 그 자체 때문에 좋아한다. 이것은 마치 자본주의의 큰 집합 속에서 욕망이 스스로를 억제하는 것을 닮았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만 아니라, 자기자신 속에서 욕망을 억제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 자기자신을 감시하는 경관 노릇을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을 결속 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학의 문제이다. 자본주의는 목표와 이익을 실현하는 힘(권력)을 거두어둘이고 소유하고
있지만, 기계의 부조리하고 점유되지 않는 힘에 대해서는 이해를 초월한 사랑을 품고 있다. 오오, 물론, 자본가는 자기를 위해서 일하지도 않고 자기의 자녀들을 위해서 일하지도 않는다. 그렇지 않고 체계의 불멸성을 위해서 일한다. 여기에는 목표 없는 격렬한 힘, 기쁨이 있다. 흐름들이 횡단하고, 분열들에 의하여 절단되는 기계의 한 톱니바퀴 장치라고 스스 로 느끼는 순수한 기쁨이 있다. 이것은 이렇게 사회체에 의하여 횡단되 고 절단되고 男色되는 위치에 자기를 두는 것이요, 우리에게 할당된 목 표들과 이익들을 따라, 이익도 목표도 갖지 않는 것이 지나가는 것을 느 끼는 좋은 자리를 찾는 것이다. 이것은 리비도에 있어서의 일종의 예술 울 위한 예술이요, 은행가, 경관, 군인, 테크노크라트, 관료기· 각자 자기 자리에서 일을 잘하는 데 대해서 가지고 있는 취미이다. 노동자, 노동조 합원인들 이렇지 않겠는가……. 욕망은 어리둥절한다. 그런데, 사회 터전의 리비도 공급만이 이익의 공급을 방해할 수 있고, 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착취를 가장 많이 당하고 있는 사람들 로 하여금 억지로 壓制機械 속에서 그들의 목표들을 찾게 할 수 있게 하 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이익의 선의식적 공급 속의 반동적이거나 혁명적인 것은 무의식적인 리비도 공급 속의 반동적이거나 혁명적인 것 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혁명적인 선의식적 공급은 새로운 목 표들, 새로운 사회적 종합들, 하나의 새로운 권력을 겨냥한다. 그러나 무 의식적인 리비도의 적어도 일부는 계속해서 낡은 신체, 낡은 권력형태, 이 권력형태의 규준들과 흐름들을 공급한다. 세력들 중의 하나가 낡은 세력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게 될 때에는 으레 낡은 충만한 신체를 잔여 의 從屬土地로서 보존하거나 되살리는 법인데, 이럴수록 무의식적인 리비 도의 일부가 낡은 신체를 공급하기가 더 쉽고, 모순이 잘 숨겨진다(이것 은 자본주의기계가 전제군주의 원국가를 되살아나게 하는 방식, 혹은 사회주 의기계가 국가와 시장의 독점 지본주의를 보존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더 중대한 것이 있다 : 리비도가 선의식의 관점에서 실제로 혁명적인 종합들 에 대응하는 새로운 신체, 새로운 권력과 결합할 때에도, 무의식적인 리 비도 공급이 그 자체 혁명적인가 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 왜냐하면 무
의식적 욕망들과 선의식적 이익둘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절단들은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의식의 혁명적 절단은, 사회체가 승격하여 새로 운 목표들을 갖는 충만한 신체, 새로운 조건들 아래 욕망하는 생산을 자 기에게 종속시키는 권력형태나 주권형성조직체로 됨으로써 충분히 명확 해진다. 그러나, 무의식적 리비도도 이러한 사회체를 공급할 임무를 띠고 있기는 하나, 그 공급은 반드시 선의식적 공급과 같은 의미에서 혁명적 인 것은 아니다. 사실, 무의식의 혁명적 절단은 그 자체로는 사회체의 극 한으로서의 기관들 없는 신체를 생기게 한다. 여기서 욕망하는 생산은 이번에는 역전된 권력, 역전된 종속관계의 조건 아래 사회체를 자기에게 종속시킨다• 선의식적 혁명은 사회적 생산의 새로운 체제에 관심을 갖는 다. 이 체제는 새로운 목표들과 이익둘을 창조하고, 분배하고 만족시킨 다. 그러나 무의식적 혁명은 이 변화를 권력형태의 조건이 되게 하는 사 회체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체 안에서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서 역전된 힘으로서의 욕밍히는- 생산의 체제에 관심을 갖는다. 선의 식적 혁명과 무의식적 혁명에 있어서 흐름들괴- 분열들은 동일한 상태에 있지 않다: 전자에 있어서는 절단이 두 사회체 간에 있는데 이 둘 중 둘째 사회체는 이익의 새 규준이나 새 공리계 속에 욕망의 흐름들을 끌 어들이는 자기의 능력에 의하여 자기를 측정한다; 후자에 있어서는, 절 단이 사회체 자체 안에 있는데, 이것은 사회체가 적극적인 도주선들을 따라 욕망의 흐름들을 통과시키고, 또 생산적 절단들의 절단들을 따라 다시 절단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한에서 그렇다. 정신분열자-분석의 가장 일반적인 원리는, 언제나, 욕망이 사회 터전을 구성한다고 하는 것 이다. 어쨌든, 욕망은 하부구조에 속해 있지, 이데올로기에 속해 있지 않 다: 생산이 욕망하는 생산으로서 욕망 속에 있는 것처럼, 욕망은 사회적 생산으로서 생산 속에 있다. 그런데 이 定式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 될 수 있다. 한 가지는 욕망이 권력의 형태나 군집의 형태로 구성하는 구조화된 큰 덩어리의 집합에 종속하는 데 따르는 방식이요, 다른 한 가 지는 욕망이 그 자체 분자적 규모로 형성하는 기능적 다양성들에 큰 집 합을 종속시키는 데 따르는 방식이다(이 두 경우의 어느 것에서도 인물들
이나 개인들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 선의식적인 혁명 적 철단이 첫째 처원에서 나타나고, 또 새로운 집합의 특징들에 의하여 규정된다면, 무의식적 절단 혹은 리비도적 절단은 둘째 차원에 속하고, 욕망하는 생산의 동력의 역할과 이 생산의 다양성들의 정립에 의하여 규정된다. 그러므로 한 집단이 계급의 이익과 그 선의식적 공급들의 관 점에서는 혁명적일 수 있지만, 그 리비도 공급둘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못하고, 심지어 파시즘적이고 경찰적인 채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 말 선의식적인 이익들은 같은 성질의 무의식적 공급들을 반드시 생기 게 하지는 않는다. 이익장치가 욕망의 기계의 가치를 지니는 일은 철대 로없다. 선의식에 관해서 말하면, 혁명적 집단은, 설사 권력을 장악한다 해도, 이 권력 자체가 욕망하는 생산을 예속시키고 파괴하기를 계속하는 한, 어디까지나 隸屬集團인 채로 있다• 이 집단이 선의식적으로- 혁명적일 때, 이런 집단은 예속집단의 모든 무의식적 성격을 이미 보여준다. 이 성격 둘은, 생산력들을 차지하고, 아것들로부터 잉여가치를 뽑아내고 홉~하는 고정된 토대로서의 사회체에의 종속; 더욱 불멸이라고 스스로 느끼고 또 더욱 불멸이고자 하는 체계 속에 반생산울 전파하고 치명적인 요소들을 전파하는 것 ; 〈超自我化〉, 나르시시즘 및 집단의 位階의 현상들, 욕망의 억압의 메커니즘둘이다. 이와 반대로, 主體集團은 그 리비도 공급들 자체 가 혁명적인 집단이다; 이 집단은 욕망을 사회 터전 속에 침두시키고, 사회체나 권력형태롤, 욕망하는 생산에 종속시킨다; 욕망의 생산자요 생 산하는 욕망인 이 집단은 언제나 可死的인 조직체들을 만들어내는데 이 조직체들은 이 집단 속에 죽음의 본능이 전파되는 것을 막는다; 이 집단 은, 예속의 상칭적 규정들에 대해서, 위계질서도 집단의 초자아도 없이, 횡단성의 현실적 係數들을 대립시킨다. 모든 것을 복잡하게 하고 있는 것은, 사실, 동일한 사람이 갖가지로 다른 관계들 아래 두 종류의 집단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생구서스뜨 Sa i n t-J us t, 레닌). 또 혹은 갖 가지로 다른 그러나 공존하는 상황들 속에서 동일한 집단이 두 가지 성 격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혁명적 집단이 이미
예속집단의 형태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해도, 어떤 조건들 아래서는 아직 주체집단의 역할을 수행하게끔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어떤 형의 집단에 서 다른 형의 집단으로 이행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주체집단들은 단절을 통하여 예속집단들로부터 끊임없이 파생된다: 주체집단들은 욕망을 통과 시키고, 항상 더 멀리서 욕망을 다시 절단하여, 경계선을 넘고, 사회기계 들을 이것들을 형성하는 욕망의 기본적인 힘들에 관계시킨다 .56) 그러나 거꾸로 이 집단들은 또 끊임없이 자기들을 폐쇄시키고, ' 예속집단들의 이 미지를 따라 자기를 재편성하기도 한다: 내부의 경계선들을 다시 세우 고, 흐름들이 통과하지 못할, 넘을 수 없을 큰 절단을 다시 형성하고, 욕 망하는 기계들이 큰 규모로 구성하는 押壓集合에 욕망하는 기계들을 종 속시킨다 . 횡단성의 계수들에 대립하는 예속화의 속도가 있다; 어느 혁 명이 무정부주의나 무책임의 성질을 떤 자기의 주체집단들에 등을 돌리 고, 이 집단들을 숙청하려는 유혹을 받지 않을 것인가? 어떤 집단을 혁 명적인 리비도 공급들로부터 이제는 선의식적이거나 이익에 관여하기만 하는 혁명적 공급들에로, 그리고는 이제는 개량주의적이기만 한 선의식 적 공급들에로 이행하게 하는 불길한 斜面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그 렇지 않으면, 이러저러한 집단을 어느 위치에 자리잡게 할 것인가? 이러 저러한 집단은 도대체 지금까지 혁명적인 무의식적 공급들을 한 적이 있 는가? 환상적인 예속, 나르시시즘 및 초현실주의 집단은 어떠했는가? (오직 한 사람만이 자기를 거기서 제의시키거나 제의되는 예속집단과 결 렬함으로써, 分裂-흐름으로서, 주체집단으로서 작동하는 일이 있다: 정 신분열자 아르또의 경우가 그렇다.) 그렇게 복잡한 사회적 공급들 속에 서, 정신분석의 집단을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 사태가 언제부터 악화 되기 시작했는가가 문제될 때마다, 언제나 더 멀리 근원에 거슬러 울라 가야 한다. 집단의 초자아요, 오이디푸스화의 시조인 프로이트는 오이디 푸스를 내부의 경계선으로 세우고, 그 주위에 온갖 작은 나르시스들을 56) 집단과 決裂 혹은 분열에 관햐겨는, cf. Chang e , n°7, 장-뼈에르 푀 Je an- Pier re Fa y e 의 논문, Eclats , p. 217: 〈 우리들이 보기에 중요한 것, 유효한 것은, 이러저러한 집단이 아니라, 그것들의 파편들을 생기게 하는 분산이나 이산 이다〉(또, pp. 212-213, 주체집단들 및 이 집단들의 글의 다의적인 성격).
배치하고 있다. 그리고 桐外者인 라이히는 탈토지화의 접선을 긋고, 욕망 의 흐름들을 통과시키고, 경계선울 깨부수고, 벽을 넘어서고 있다. 그러 나 여기서 문제인 것은 바단 문학이나 심지어 정신분석도 아니다. 문제 는 정치에 있다. 비록, 나중에 고찰하겠지만, 그 網領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열자-분석의 임무는 사회 터전의 무의식적 욕망의 공 급들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공급들이 이익의 선의식적 공급들과 구별되 고, 또 이익의 선의식적 공급들에 대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립하는 양상들을 띠면서도 공존할 수 있는 한에서, 이 무의식적 욕망의 공급둘 에 도달하는 것이다 . 世代 간의 갈등에서 노인들이 아주 악의에 차서 젊 은이들을 비난하기를 젊은이들은 그들의 이익 (일, 저축, 좋은 결혼)보다 도 그들의 욕망(자동차, 신용, 借用, 자유로운 남녀관계)을 앞세운다고 하 는 말을 우리는 흔히 듣는다. 그러나 남에게는 동물적인 욕망으로 보이 는 것 속에도, 욕망과 이익의 복잡한 얽힘이 있고, 이 양자의 분명히 반 동적이고 막연하게 혁명적인 형태들의 혼합이 있다. 상황은 그야말로 얽 히고 설켜 있다. 정신분열자_분석은 집단이나 개인의 차원에서, 사회 터 전의 리비도 공급들을 밝힘에 있어서 指標들_기계적인 지표들_밖 에는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 점에서, 지표들을 구 성하는 것은 성욕이다. 혁명의 능력은 개인이나 집단에게 활기를 불어넣 는 성적 충동들의 대상들, 목표들 및 원천들로써 판정되는 것은 전혀 아 니다; 확실히, 성욕이 어디까지나 〈더러운 작은 비밀〉의 틀 속에 갇혀 있는 한은, 도착들 그리고 심지어 성의 해방도 아무런 특권적 지표가 되 지 못한다. 비밀을 공개하고, 공개에 대한 권리를 요구해도 소용이 없다 . 비밀을 소독할 수 있고, 과학적이고 정신분석적인 방식으로 비밀을 치료 할 수 있다. 처리리 욕망을 죽이게 되거나, 욕망을 위하여 가장 억압적인 감옥보다도 더 음침한 해방의 형태를 발명하게 될지도 모른다_-비밀이 공개되거나 소독되거나 간에, 비밀의 범주로부터, 죽 나르시스적-오이디 푸스적 기원으로부터 성욕을 떼어내지 않는 한, 그렇게 될 위험이 있다. 이 나르시스적 -오이디푸스적 기원은 지어낸 이야기로서 성욕에 강요된
된 것이요, 이 이야기에서는 성욕이 추잡스럽고 부끄럽고 혹은 굴욕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오이디푸스적 규준의 경계선 내부에, 성욕에 대응 하는 흐름들(오이디푸스의 갈등, 退行,解決, 昇華……)을 고스란히 존속시 키면서, 또 미리부터 해방의 모든 전망을 헛되게 하는 가족주의 및 手器 의 형태나 동기를 성욕에 강요하기를 계속하면서, 성욕을 해방한다고 주 장하고、 성욕을 위하여 대상, 목표 및 원천을 요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지 어낸 이야기이다. 가령, 동성애와 이성애가 배타택일적인 이접의 관계에 서 파악되는 한, 어떠한 〈동성애 전선 〉 도 가능하지 않다. 이 배타택일적 관계는 동성애와 이성애를 다 같이 오이디푸스의 그루터기와 공동의 거 세에 관련케 하는 것이요, 이 그루터기는 이 두 가지 사링을 서로 소통 할 수 없는 두 계열로 확실하게 구별하기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욕망 의 탈규준화한 흐름들 속에서 그것들이 서로 포함하고 횡단적으로 소통 하지 못하게 한다. (즉 포함적 이집들, 局所的 連結들, 遊牧的 連接들을 못하게 한다.) 요컨대, 나르시스의, 오이디푸스의, 거세의 좌표축들은 가 장 엄격한 검열자들, 로렌스가 이야기하곤 한 灰色 영감둘의 승리를 확 실하게 하기에 족한 것인데, 성의 대상들, 원천들 및 목표들에 관하여 公 表, 表明, 公言 言明이 마음대로 행해진다 해도 성욕이, 의식적으로건 그 렇지 않건, 이 좌표축들 속에 붙들려 있는 한, 성적 억압은 전의 어느때 보다도 세차게 모든 자유로운 발언들 후에도 남아 있을 것이다. 로렌스는, 정조를 포함하여 성욕이 흐름에 속하는 것이요, 〈 서로 다르 고 대립하기도 하는 무한한 흐름〉임을 깊이 있게 밝히고 있다. 모든 것 은 이 흐름들이, 그 대상, 원천 및 목표가 어떤 것이든간에, 불변의 형상 들을 따라 규준화되고 절단되는가, 혹은 이와 반대로 非形象的인 가동적 점들을 따라 이 흐름들을 다시 철단하는 (분열들-흐름들인) 탈규준화의 연쇄둘 속에서 파악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로렌스가 탓하는 것은. 변함 없는 동일한 심상들의 빈곤함이다. 이 심상들은 성욕의 흐름들에 대한 止血帶라 할 형상, 죽 〈약혼녀, 주부, 아내, 어머니〉_一〈동성애자들, 이 성애자들〉 등을 여기 포함시킬 수도 있겠다一_의 역할둘을 논다. 이 역 항들은 모두 아버지-어머니-나라고 하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의하여
분배된다. 나라고 하는 표상은 아버지-어머니의 표상과 관련하여, 固 着 , 退行, 昇天, 昇華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런데 이 모 든 것은 어떤 규칙 아래 행해지고 있는 것인가? 아무도 소유하고 있지 않는 위대한 남근의 규칙 아래에서이다 . 이 납근은 가장 비참한 싸움을 부채질하는 전제군주 시니피앙이요, 모든 相互排除에 대한 공동의 부재이 다. 여기서는 양심의 가책과 회한으로 흐름들이 끊기고 말라빠진다• 〈 여 자를, 가령 받침대 위에 세워놓는다, 혹은 이와 반대로 아무 중요성도 없 는 것으로 여긴다: 모범적인 주부, 모범적인 어머니 혹은 아내가 되게 한 다. 이런 일들은 모두 여자와의 모든 접촉에서 빠져나가는 수단들일 따름 이댜 여자란 어떤 것의 형상이 아니며, 뚜렷하고 명확한 인격이 아니다……. 여자란 공기의 묘하고 부드러운 진동이다. 이 전동은 무의식적으로 또 알려지지 않으면서, 자기에게 응답하는 진동을 찾아 전전한다. 그렇지 않 으면 여자란 조화를 깨어 귀에 거슬리는 고통스러운 전동이다. 이런 진 동은 그 射程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 전진한다. 남자에 게 있어서도 사태는 0 만가지이다 〉 5 7) 이런 글들 속에 있는 흐름의 沮神論 을 너무 서둘러 廟笑해서는 안 된다 . 로렌스가 할 수 있었던 정도로 자 연마저도, 풍경들마저도 탈오이디푸스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 신분석과 정신분열자-분석 간의 근본적 차이는 다음과 같다: 정신분열 자-분석은 비형상적이고 비상징적 무의식에 도달한다. 죽 추상화와 같은 의미에서의 순수한 추상적 형상형태, 분열들-흐름들 혹은 동일성의 최초 의 조건들을 밀도는 데서 파악된 욕망의 현실에 도달한다. 정신분석은 무엇을 했는가? 먼저 프로이트는 무엇을 했는가? 성욕을 작은 비밀이라고 하는 치명적인 멍에 아래 얽어매어, 고작해야 그것을 공연한 비밀이 되게 하고 어릿광대의 비밀이 되게 하는 의학적 수단을 찾아낸 것 이의에 무엇을 했는가?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보세요, 이건 아주 정상적이지요, 모든 사람이 이렇습니다라고• 그러나 사람들은 57) D. H. Lawrence, Nous avons besoin Jes uns des autr e s, 1930, tr. fr. in Eros et les chie n s, Ed. Bourgo i s , p. 285. Et Pornogr a ph ie et obscenit e, p. 1929.
성욕에 관하여 계속해서 부끄럽고 품위가 없는 것이리는- 생각, 죽 검열 자들의 생각과 똑같은 형상적인 생각을 품고 있다. 확실히 정신분석은 뚜렷한 혁명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프로이트가 몹시 집착하고 있는 명제 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리비도는 그 자체 자기를 탈성욕 화하고 승화시키는 조건 아래서만 사회 터전을 공급한다. 그가 이렇게 이 명제에 집착하는 것은, 그가 무엇보다도 먼저 성욕을 - 나르시스와 오 이디푸스, 자아와 가족의 좁은 툴 속에 가두어놓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적 차원의 성적인 리비도 공급 전체는 그에게 하나의 病原的 상태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병원적 상태란 나르시시즘에의 〈 고착 〉 , 혹은 오이디푸스와 선오이디푸스적 단계들에로의 퇴행인데, 이런 것들을 통하여 편집병은 방위수단으로서 또 동성애는 강화된 충동으로서 잘 설 명된다 .58) 이와 반대로 우리는 사랑들과 성욕을 통하여 리비도가 공급하 는 것은 경제적, 정치적, 역사적, 인종적, 문화적 등등으로 규정되는 사회 터전 자체라는 것을 보았다: 리바도는 끊임없이 역사, 대륙둘, 왕국들, 인종들, 문화들을 망상한다. 역사적 표상들을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가족 적 표상들이나, 심지어 공동의 무의식의 원형들의 자리에 놓는 것은 온 당한 일이 아니다. 우리들의 사랑의 선택이 〈 전동 〉 의 교차점에 있다는 것, 죽 한 사회를 관통하는 흐름의 연결들, 이집들, 연접들을 표현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이 문제이다. 이 연결들, 이집들, 연점들은 그 사회에 들락날락하면서, 리비도의 지하의 끈에 의하여 그 사회를 다른 사회들에 다시 묶는다. 이 사회들은 고대사회일 수도 있고 현대사회일 수도 있으 며, 먼 사회일 수도 있고 사라전 사회일 수도 있으며, 죽은 사회일 수도 있고, 바야흐로 탄생하려는 사회일 수도 있으며, 아프리카와 동방의 사회 일 수도 있다. 지리-역사적 형상들이나 影像들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학습은 우리들의 엄마와 더불어 행해지기보다는 이 형상들 및 조상들과 더불어, 죽 책들, 이야기들, 複製들과 더불어 더 쉽게 행해지기 는 해도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것도 형성하지 않는 사회체의 흐름 들과 규준들에 있다. 이 흐름들과 규준들은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서 리 58) Freud, Cin q psych analys e s, p. 307.
비도의 强度地帶들을 지시할 따름이며, 우리가 그때 사랑하게끔 운명지어 전 존재, 하나의 기호-점 같은 것에 의하여 발해지고, 포착되고, 차단된 다. 이 존재는 역사에 응답하며, 역사와 함께 전동하는 강도 있는 신체의 그물 전체 속의 단일한 점이다. 프로이트는 『 (W. 옌젠의) 그라디바 Grad i ua 에 있어서의 망상과 꿈』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 요컨대, 사회 터전에 대한 우리들의 리비도 공급들은, 반동적인 것이건 혁명적인 것이전, 아주 잘 숨겨져 있고, 아주 무의식적이고, 선의식적 공 급들에 의하여 아주 잘 덮여져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성적인 사랑의 선 랙에서만 나타난다. 사랑은 반동적이거나 혁명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리비도의 사회적 공급들의 반동적인 혹은 혁명적인 성격의 지표이 다. 남자와 여자의 (혹은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의 ) 욕망하는 성적 관계들은 인간들 간의 사회적 관계들의 지표들이다. 사랑과 성욕은 사회 터전에 대한 리비도 공급들의 무의시적인 지표 혹은 표시계이다• 사랑을 받거나 욕망되는 존재 전체는 공동의 言表行爲의 動因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프로이트가 龜 생각했던 것처럼, 사회와 그 흐름들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리비도가 탈성욕화하고 승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 히 옳은 생각이 아니고, 이와 반대로 사랑, 욕망 및 이것들의 흐름은 승 화되지 않은 리비도와 그 성적 공급둘의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성격을 드 러내고 있다. 정신분석에 관한 논문의 주제를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신분석의 인식론에 관한 광범한 고찰을 권할 것이 아니라, 프로이트의 사상 속에 있는 하녀나 하인에 관한 이론 같은 자그마하고 엄밀한 주제들을 권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야말로 진정한 지표들이 있다. 왜냐하면, 프로이트가 연구한 증례들의 어디에나 있는 하녀들에 관한 주제에서는, 프로이트 사 상 속의 전형적인 주저가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저는 정신분석의 敎篠가 생성되어 가기 위해서 너무 빨리 해결되고 있다. 필립 지라르 Phil ippe G i rard 는, 큰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는 생각되 는 未刊 1T 의 고찰들에서, 이 문제를 여러 가지 차원에서 제기하고 있다. 첫째로, 프로이트는 〈그 자신의〉 오이디푸스를 복잡한 사회적 문맥에서
발견하고 있는데 이 문맥은 부유한 分家의 異父의 형과 가난하여 도둑질 하는 하녀를 등장시킨다. 둘째로, 가족에 관한 이야기와 환상적 활동은 대체로 프로이트에 의하여 사회 터전의 진정한 潔流로 제시되어 있는데, 이 표류에서는 부모 대신에 신분이 높은 혹은 신분이 낮은 인물들(보해미 아 사람들에게 유괴된 왕비의 아들, 혹은 부르주아들에게 받아들여진 가난한 집의 아들)이 등장한다; 오이디푸스가 보잘것없는 출생과 머슴살이하는 부모를 필요로 했을 때, 그는 이미 이런 일을 하고 있었다. 셋째로, 쥐 사나이는 자기의 신경종을 끝에서 끝까지 군사적인 것으로 규정된 사회 터전에 자리잡게만 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기의 신경증을 동방에서 유래 하는 체형의 둘레를 돌게만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고 바로 이 터전 안에서, 아버지의 무의식과의 기묘한 무의식적 소통 아래, 자기의 신경증 을 부유한 여자와 가난한 여자에 의하여 구성되는 두 극의 한 쪽에서 다 론 한 쪽으로 왔다갔다하게 한다• 오이디푸스의 개념 전체를 의문시하기 에 충분한 이 주제들을 처음으로 강조한 사람은 라깡이다; 그는 〈사회 적 콤플렉스〉가 실제로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 콤플렉스에서는 환 자가 때로는 자기지신의 역할을 떠맡으려 하지만, 이것은 성적 대상을 부유한 여자와 가난한 여자로 이중화하는 희생을 치르고서 하는 일이다. 환자는 때로는 대상의 단일성을 확보하는데, 이것은 이번에는 연쇄의 다 론 끝에서, 〈자기자신의 사회적 기능〉을 이중화하는 희생을 치르고서 하 는 일이다. 넷째로, 이리 사나이는 가난한 여자를 결정적으로 좋아하는 취미를 보여준다. 가령 손을 땅에 짚은 자세로 옷가지를 빨고 있는 農婦, 혹은 마루를 닦고 있는 하녀를 좋아한다 .59) 그런데 이 덱스트들에 관한 근본적 문제는 다음과 같다: 리비도의 이 모든 사회적-성적 공급과 이 59) 첫째 점에 관해서는, Ernest Jo nes, La Vi e et l'reu ure de Sig m und Freud, tr. fr. P.U.F., t. I, ch. 1. 둘째 접에 관해서는, Freud, Le Roman fam i lia l des neuroses, 1909. 셋째 점에 관해서는, L'Homme aux rats , pas sim 및 Lac 타 덱스트, Le My the ind iu i d u el du neurose, C.D.U., pp. 7-18( 그리 고 〈오이디푸스 개념의 도식 전체에 대한 비판〉의 필요성에 관해서는, p. 25). 넷째 접에 대해서는, L'Homme aux loup s , Cin q psy c h analys e s, pp. 336, 396, 398.
대상선택은 그저 가족적인 오이디푸스에만 의존한다고 보아 0 하는가? 이 공급들과 선택들을 근친상간에 반대하는 자위수단으로 해석하여 어떻 게 해서든지 오이디푸스 개념을 살려야 하는가? (이렇게 해서 가족의 이야기, 죽 자기자신의 무죄를 증명해 줄 가난한 부모에게서 출생했다고 하는 오이디푸스 자신의 소원이 생겨난다.) 이 공급들과 선택둘은 근친 상간과의 타협이요 근친상간의 대용품이라 이해하여야 하는가? (이렇게 해서 『이리 사니이』에서는 누이동생과 동일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누이 동생의 대용품으로서의 농부, 혹은 교접하는 것을 둘킨 어머니의 대용품 으로서의, 손을 땅에 짚은 자세로 한참 일하고 있는 여자가 등장하고; 『쥐 사니이』에서는, 부천의 상황이 위장되어 반복되는데, 이런 반복이 있게 되면 〈상칭계의〉 넷째 항으로써 오이디푸스 개념을 풍부하게 하고 부풀어오르게 하는데 이 넷째 항은 리비도가 사회 터전을 공급할 때의 방식인 이중화들을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단호 하게 이 방향을 선택한다: 그 자신의 고백에 의하면, 그가 융 및 아들러 에게 따지고 싶은 일이 있을수록 더욱 단호하게 이 방향을 선택하고 있 다. 그래서, 이리 사나이의 증례에서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여자를 〈낮은 지위에 두는 경향〉이 있음을 확인한 후에, 그는 유일의 문제는 합리화이 며, 또 〈현실적이고 깊이 있는 규정〉은 언제나 우리를 유일의 〈순전히 에로틱한 동기들〉로 여겨지는 누이, 어머니에게 다시 돌아가게 한다고 결론짓는다! 그래서 오이디푸스의 영원한 노래, 영원한 자장가를 되풀이 하면서, 그는 다음과 갈이 적는다: 〈어린이는 사회적 차이들에 사로잡히 지 않는다. 어린이에게는 이 차이들이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어린이는 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그의 부모만큼 그롤 사랑할 때에는 이 사람들을 부모의 계열에 분류한다.〉 60) 언제나 우리는,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에 의하여 거기로 인도되고, 그 다음게 아들러 및 융과의 논쟁을 통해서 확신을 얻은 그릇된 二者擇一에 다시 빠진다: 그는 말하기를, 당신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권력의지롤 인정하여(아들러), 혹온 공동의 先史的인 무의식을 인정하여(융), 리비도 60) Freud, Cin q psyc hanalys e s, p. 400(et pp. 336-337, 397).
를 성적인 것으로 보는 입장을 버리든가-그렇지 않으면 오이디푸스를 인정하여, 오이디푸스를 리비도의 성적인 주거로 삼고, 아빠-엄마를 〈 순 전히 에로틱한 동기들〉로 보아야 할 것이라 한다. 오이디푸스는 거세를 성공시키는 거룩한 칼을 갈기 위한 순수한 정신분석가의 숫돌이다• 하지 만 오이디푸스의 함정이 닫혀지기 전에 프로이트가 한순간 알아차린 다 른 방향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필립 지라르가, 적어도 가설적으로 재발견하고 있는 방향이다: 이 방향에는, 空胞들이 배치되어 있지 않는, 그리고 가족 의의 절단들이 통과하지 않는 가족이란 없다; 리비도는 이 절단들을 통하여 흘러 들어가서 비가족적인 것을 공급한다; 여기서 바가 족적인 것이란 〈가장 부유한 자 혹은 가장 가난한 자 〉 의 경험적인 종류 들, 그리고 때로는 이 양자를 동시에 포함하는 검험적인 종류들로 규정 되는 다른 계급이다. 욕망의 정립에 불가결한 위대한 他者는 사회적인 타 자, 가족 자체의 한복판에 비가족으로서 이해되고 공급되는 사회적 처이 가 아닐까? 다른 계급이 리비도에 의하여 파악되는 것은 결코 어머니의 훌륭한 혹은 비참하게 된 심상으로서가 아니다 . 그렇지 않고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가 아닌, 가족이 아닌, 낯선 사람으로서이다. 죽 性 속에 인 간적이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의 지표로서이다 . 이 인간적이지 않은 것이 없으면 리비도는 자기의 욕망하는 기계들을 조립하는 일이 없을 것 이다. 계급두쟁은 욕망의 체험의 핵심에로 옮아간다. 가족의 이야기가 오 이디푸스의 파생물이 아니고, 오이디푸스가 가족의 이야기의 파생물이요, 따라서 사회 터전의 파생물이다. 부모의 교집의 중요성, 그리고 어머니의 입장을 부인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 않고, 이 입칭이 어머니를 마루를 닦는 여자나 동물을 닮았다고 보게 할 때, 프로이트에게 어머니 는 어머니 아닌 것으로서도 기능하며, 또 어린이의 리비도 속에 인간적 이지 않은 성적 관계와 개개의 사회적 공급· 전체를 생기게 한다고 결론 짓지 않고, 동물이나 하녀는 사회적인 혹은 種屬的인 처이들과는 상관 없이 어머니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권위를 주는 것은 무 엇인가? 왜냐하면 어머니가 일을 하고 있는가 일을 하지 않고 있는가,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더 부유한 집안의 출신인가 더 가난한 집안의 출신
인가 등등은 가족을 꿰뚫고 있는 절단들과 흐름들이기는 하지만, 이것들 은 모든 면에서 가족을 넘어서는 것들이요 가족적인 것이 아닌 것들이기 때문이댜 처음부터 우리는 리비도가 아버지-어머니를 알고 있는가, 혹 은 리비도가 부모를 전혀 다른 것으로서, 죽 욕망하는 사회적 생산 속의 다른 동인들과 관계하는 생산동인들로서 작동시키고 있는가를 자문하고 있다. 리비도의 공급의 관점에서 보면, 부모는 그저 타자에게 열려 있기 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는 그들 자신 사회적 생산과 욕망하는 생산의 법칙들을 따라 그들을 탈가족화하는 타자에 의하여 재절단되고 갈라지게 된다: 어머니는 그녀 자신 부유한 여자나 가난한 여자로, 하녀 나 왕비로, 이쁜 여자나 늙은 여자로, 동물이나 거룩한 처녀로, 그리고 동시에 이런 것들의 양자로 작동하고 있다. 모든 것은 고유한 의미에서 가족적 규정들을 폭파시키는 기계 속으로 옮아간다. 고아인 리비도가 공 급하는 것은 사회적 욕망의 터전이요, 철단들과 흐름들을 지니고 있는 생산과 반생산의 터전이다. 여기서는 부모가 다른 역할들과 다른 기능들 에 직면하여 非父母的인 기능들과 역할들에서 파악된다. 이것은 부모가 부모로서의 무의식적인 역할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물론, 부모는 그런 역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모로부터 그들 의 想定된 자율성을 더욱더 빼앗는 아주 명확히 규정된 두 가지 방식에 서이다. 胎生學者둘이 알에 관하여 자극과 형성체를 구별하고 있는 것에 비추어서 말하면, 부모는 기관들 없는 신체 위에 句配들이나 强度地帶둘 의 재배분을 일으키는 어떤 가치를 지닌 자극이다: 각각의 경우에 부와 빈곤, 죽 상대적으로 가장 부유한 자와 가장 가난한 자가 사회적 차이의 경험적 형태들로서 자리잡게 되는 것은 부모와의 관계에서이다-따라 서 부모는 그들 자신이 차이의 내부에서 다시 이러저러한 지대 속에 재 배분되어 출현하지만, 부모의 종류와는 다른 종류로 출현한다. 그리고 형 성체는, 욕망의 사회 터전이다. 이 터전만이 강도지대들에 사는 존재들로 써 이 지대들을 지시하고, 이 지대들의 리비도 공급을 결정한다. 둘째로, 부모로서의 부모는 리비도에 의하여 공급되는 사회 터전이 도달점의 유 한한 집합에 포개지는 것을 표현하는 적용의 항들이다. 이 집합 속에서
리비도는 이 터전에서 행해지는 억제-억압의 메커니즘들을 따라 막다른 골목들과 限止들만을 본다: 오이디푸스는 바로 이러한 막다른 골목이다. 부모가 파악되는 이 방향둘의 각개에 있어서, 정신분열자-분석의 셋째 명제는, 권리의 관점 못지않게 사실의 관점에서도, 가족적 공급에 대한 사회 터전의 리비도 공급들의 우위를 내세운다. 가족은 출발점에서는 어 떤 자극이요, 도달점에서는 外因에 의하여 생기는 결과이다. 사회적 생산 에 있어서의 사회 터전의 성욕의 형태로나, 욕망하는 생산에 있어서의 인간적이지 않은 성의 형태로나, 비가족적인 것과의 관계는 언제나 첫째 가는 것이다. (巨샤足에 있어서나 倭人症에 있어서나.)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멀리서도 혹은 선천적으로 가족들이 정신분석 의 교훈을 너무 잘 이해한다는 인상을 우리는 자주 받는다 : 가족들은 오 이디푸스 개념을 가지고 놀고 있다. 이 개념은 숭고한 알리바이이다. 그 런데 그 배후에는 경제적 상황이 있다. 어머니는 가사노동 즉 힘들고 외 부에 대해서 이해관계가 없는 노동을 하게 되어 있고, 아이들은 그 미래 의 상태가 불확실한 채로 있으며, 아버지는 가족 전체를 먹여 살리는 데 신물이 나 있다-요컨대, 정신분석가는 의부와의 근본관계에 대해서는 손을 끊고, 자기의 고객들이 찰 놀고 있는가에 대해서 너무 주의를 기울 이고 있다. 그런데 경제적 상황, 의부와의 관계야말로 리비도가 성적 리 비도로서 공급하거나 반공급하는 것이다. 성적 흥분은 흐름들-과 흐름들 의 철단들을 따라 일으켜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정신분석을 받게 되 는 동기들을 한번 잘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문제는 욕망에게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된, 욕망의 공급에 대해서 갈등으로 차 있는 경제적 의존의 상황에 있다. 치료에는 돈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정신분석가는., 〈누가 돈을 내는가?〉라는 질문에는 어디까지나 아주 무관심하다. 가령, 정신분 석은 어떤 부인이 자기 남편과 무의식적인 갈등을 가지고 있는 것을 드 러내는데, 부인의 정신분석비를 지불하는 것은 남편이다. 의적인 융자의 구조와 내적인 지불수단으로서의 돈의 이원성을 우리가 만나는 것은 한 두 번이 아니댜 이 이원성은 객관적으로 〈위장〉되어 있지만, 자본주의 체계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본질적인 위장이 정신분석가의
진료실에서 소형화하여 군림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은 홍미 있는 일이다 . 정신분석가는 오이디푸스에 관하여, 거세와 남근에 관하여, 또 프로이트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성을, 인간적인 성을 떠맡아야 하는 필 연성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또 여자는 음경에 대한 자기의 욕망을 포기 해야 하고 남자 역시 수컷의 주장을 포기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 가 말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 안에는 자기의 상황을 떠맡을 수 있는 여자나 특히 어린이는 하나도 없다고 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의 정확한 이유는, 이 상황이 남근과 거세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도리어 견 딜 수 없는 경제적 의존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점이다. 따라서 자기 의 상황을 〈 떠맡는 〉 데 성공하고 있는 여자들과 어린이들은 辻回하는 길 들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들이 여자이고 어린이라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규정들을 통해서만 그리하고 있는 것이다. 남근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히려 욕망과, 즉 욕망으로서의 성욕과 많은 상관이 있다. 왜냐하 면 남근은 욕망의 대상이나 원인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고, 그 자체 거 세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욕망 속에 결여를 집어넣고, 모든 흐름을· 고갈 시키고, 밖으로부터의 그리고 현실적인 것으로부터의 모든 절단을 밖과의, 현실적인 것과의 유일의 동일한 절단이 되게 하는 기계이기 때문이다. 밖으로부터, 그것은 정신분석가의 뜻대로 언제나 너무 그의 진료실에 파 고든다. 가족의 닫힌 무대도 정신분석가에게는 아직 지나치게 의부로 보 인다 . 그는 순수한 정신분석의 무대, 죽 진료실의 오이디푸스와 거세를 추전한다. 이 무대는 그 자체 그 지신의 현실, 그 자신의 증거이어야 하 고, 또 운동괴는 반대로, 분석이 전전하지 않고 끝나지 않음으로써만 그 정체가 드러난다. 정신분석가는 사람을 아주 바보로 만드는 약물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는 아주 이상한 개인적 의존관계 때문에, 환자들은., 소파 위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동안, 자기들을 거기 몰아넣은 경제적 의존관 계들을 잊어먹고 있다. (이것은 흐름들의 탈규준화가 예속을 강화하게 되는 것과 얼마간 비슷하다.) 여자들, 어린이들, 흑인들, 동물들을 오이디 푸스화히는 이 정신분석가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가? 우리도 그들의 집에 들어가 창문들을 열고, 〈곰팡내가 나는데요, 바
깥 공기를 좀 넣어야 되겠어요…… 〉 라고 말할 것을 꿈꾸어본다. 왜냐하 면 욕망은 밖으로부터 절단되어,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그 공급들과 반공 급들로부터 절단되어,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이트처럼 말하겨, 〈 순전히 에로틱한 동기 〉 가 있다 해도、 물론 이 동기를 키우는 것은 오이디푸스가 아니며, 이 동기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남근이 아니 며, 이 동기를 전파하는 것은 거세가 아니다 . 에로틱한 동기, 순전히 에 로틱한 동기는 사회 터전의 구석구석 어디에서나 돌아다니고 있다. 욕망 하는 기계들이 사회기계들 속에서 응집하거나 분산하는 곳에서는 어디에 나, 또 도주선이나 공급선을 따라, 욕망하는 기계들과 사회기계들이 교착 하고 사랑의 대상의 선택이 행해지는 곳에서는 어디에나 돌아다닌다 . 아 론 Aaron 의 플루트는 남근이 아니고 욕망하는 기계요 탈토지화의 呼出令 狀인데, 아론은 그의 플루트를 들고 떠날 것인가? 우리가 밀하는 것은 모두 옳다고 인정된다고 상정하자: 그러나 나중에 야 인정된다. 리비도가 사회 터전을 공급하고, 사회와 형이상학을 〈 배우 게 되는〉 것은 나중에 되는 일이다• 이것이, 리비도가 그러한 공급둘을 행하려면 탈성욕화해야 하지만, 오이디푸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에서부 터 시작한다고 하는 프로아트의 근본적 입장을 살려주는 것이다. (선오 이디푸스적 단계들은 구조적으로 혹은 종말론적으로- 오이디푸스적 조직 에 결부되어 있다.) 우리가 앞서 본 바와 갈이 〈 나중에 〉 라고 하는 이 생각은 현실적 인자둘의 본성에 관하여 근본적 오해를 내포하고 있다 . 왜냐하면, 리비도가 분자적인 욕망하는 생산 속에서 파악되고, 〈 나 〉 라든 가, 심지어 나르시시즘의 거의 미분화된 〈 나〉 갇은 인물을 알지 못하든 가, 혹은 리비도가 인물들과 〈 나 〉 를 공급하고는 있지만, 이미 사회적 생 산과 사회기계들 속에서 파악되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는 리비도의 공 급들이 이미 분화되어 있지만, 그 분화가 부분적 대싱들, 단일체들, 강도 둘, 욕망하는 기계들의 톱니바퀴들과 부품들이라고 하는 先人物的 체제를 따라 이루어지며 이 체제에서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나도 알아보기가 어 렵다(부분적 대상들을 끌어들이고, 이것들을 부모의 인물의 표상표현이나 가 족관계들의 토대로 삼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가 히는 것은 위에서 살펴
본 바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사회적 생산과 사회기계들이 인물들과 〈 나 〉 를 가족적 존재들로서만 아니라 이 인물들과 〈나 〉 가 이 다른 체제 아래에서 속하고 있는 큰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집합의 파생물들로서도 구별한다. 사회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은 정녕 동시에 도래한다. 하나 는 사회적 생산의 역사적 과정으로서 다른 하나는 욕망하는 생산의 형이 상학적 과정으로서, 고망의 동시적인 두 방향에 따라 도래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나중에 도래하지는 않는다. 린드너의 그립은 여기서도 시사하 는 바가 있다. 그 그림에서 뚱뚱한 작은 소년은 이미 부모를 따돌리고 욕망하는 기계를 사회기계에 연결시켜 놓고 있다. 그 부모는 어떤 경우 에나 생산과 반생산의 동인으로서만 개입할 수 있을 따름이다. 여기에는 사회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밖에 없다. 설사 어떤 것이 나중에 뜻밖 에 생긴다 해도 그것은 물론 리비도의 사회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공급둘, 무의식의 종합들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그것은 오히려 바로 오이디푸스` 요, 나르시시즘이요 또 정신-분석적 개념들의 全系列이다. 생산의 요인들 은 언제나 〈 현실적 〉 이요, 이것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의 일이다 : 현실적 이라 함은 어린 시절에 대립하는 〈 최근〉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 고 참재적인 것, 죽 어떤 조건들 아래 도래하는 것에 대립하는 現勢的인 것을 의미한다. 오이디푸스가 도래하는 조건들을 실제로 생각해 보자: 욕망하는 사회적 생산의 모든 대상, 동인, 관계로 구성되어 있는 출발점 의 집합이 도달점의 집합으로서의 유한한 가족적 집합에 포개져 있다. (이 가족적 집합은 최소한 세 항으로 되어 있고, 이 항은 늘릴 수 있고 또 늘려야 하는 것이지만, 무한히 늘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포개짐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致는 外描되는 가동적인 넷째 항을 전제 한다 . 이 넷째 항은 상칭적인 추상적 남근인바, 이 남근은 포개는 일이나 대응을 실현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그런데 이 일치는 최소한의 가족적 집합을 구성하는 세 인물-아버지, 어머니, 아이-혹은 이들의 대리 인들에 대하여 실제로 작용한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버지 가 아둘을 죽이는 거세의 무대에서이건,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근친상 간의 무대에서이건, 어머니가 아들이나 아버지를 죽이는 무서운 어머니
의 무대에서이건, 이 세 항은 두 항으로 환원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두 항으로부터 나르시시즘에 있어서의 한 항에로의 이행이 있게 된다. 이 항은 결코 오이디푸스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이디푸 스의 산물이댜 이런 까닭에 우리는 나르시스-오이디푸스 기계를 이야기 하게 되는데, 이 기계가 종말에 이르면 자아는 그 자신의 죽음을 만난다. 이 죽음은 순수한 폐기의 제로 항인바, 이 항은 처음부터 오이디푸스화 한 욕망 속을 드나들며, 이제는 최후로 타나토스(죽음)로 확인되는 것이 다. 4, 3, 2, 1, 0, 오이디푸스는 죽음계의 행로이다. 1 양1 ] 기 이래로, 정신병과 광기의 연구는 가족주의의 公準과 그 상관항 들, 즉 인물론적 공준과 자아의 공준에 사로잡혀 왔다. 우리는 푸꼬룰 따 라, 어떻게 1 양1 ] 기의 정신의학이 가정을 병의 원인인 동시에 판정자로 여겼고, 또 폐쇄적인 정신병원을 인위적인 가정, 죽 죄책감을 내면화하고 책임감을 생기게 하는 임무를 맡은 인위적인 가정으로 여겨, 광기와 그 치료를 몽땅 어디에나 현존하는 아버지-아들의 관계 속에 집어넣었는가 룰 보았다. 이 점에서, 정신분석은 정신의학과 갈라지기는커녕, 정신의학 의 요구들을 정신병원 밖으로 옮겨놓고, 무엇보다도 가정을 〈자유로이〉, 내면적으로기 강도 있게, 환상적으로 사용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사 용은 신경증이라 하여 따로 떼어내어 생각되어 온 것에 특별히 잘 어울 리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정신병의 저항이 있고, 다른 한편 으로, 사회적 病源學을 고려할 필요가 있고 해서, 정신의학자들과 정신분 석가들은 언제나 병과 치료의 비밀을 거머쥐고 있다고 여겨지는, 확대된 가족의 질서를 열려진 조건들 속에서 다시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 정을 오이디푸스 속에 내재화한 후에는, 오이디푸스를 상징적 질서, 제도 적 질서, 공동체 질서 등 속에서 의면화한다. 여기에는 현대의 모든 시도 의 한결같음이 있다. 그래서 만일 이 경향이 적응성의 회복을 추구하는 공동체적 정신의학 속에서 가장 소박하게 나타나면-〈치료는 가정에 돌아가 하여라〉, 인물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자아를 완전히 실현하는 데 에 돌아가 하여라 하는 주장은 모두 거룩한 삼각형이란 형식으로. 성공한 거세에 의하여 축복되고 있거니와__동일한 경향이 좀더 숨은 형태로
다른 흐름들 속에서도 작용한다. 라깡의 상징적 질서가 왜곡되고 이용되 어, 정신병에 적용할 수 있는 구조의 오이디푸스를 확립하고, 가족주의의 좌표축들을 이것들의 실제의 영역과 심지어 상상적 영역에까지 확대한다 해도,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제도적 분산이 인위적인 가족들을 재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 해도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위적인 가 족들에서는 상칭적 질서가, 제도 속에서 구체화되어, 예속집단들의 모든 치명적 성격들을 띠고서, 집단의 오이디푸스들을 다시 형성한다. 그런데,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반정신의학이, 다시 전개된 가족들 속에서 사회적 인 동시에 정신분열중을 발생시키는 원인을 찾은 일이다. 아마 여기서 반정신의학의 기만이 가장 잘 나타난다. 왜냐하면 반정신의학은 그 몇몇 양상에 의하여 전통적인 가족적 관심을 파괴하는 경향을 가장 많이 지니 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정신의학자들이 다시 문제삼고 따르고 있는 미국 의 가족주의적 연구들에는 사실 무엇이 있는가? 거기서는 아주 보통인 가족들, 아주 보통인 가족적 메커니즘들, 보통의 즉 가까스로 신경중화하 는 논리가 세례를 받아 정신분열증을 생기게 하는 유전자라 명명되고 있 다. 소위 정신분열증의 가족의 전문적 연구들에서는, 환자마다 자기자신 의 아빠, 자기자신의 엄마를 쉽사리 알아보고 있다. 가령 〈이중의 막다 른 골목〉 혹은 베이트슨의 〈 이중구속〉이 있다고 하자: 다음과 같은 모 순되는 두 명령을 동시에 내리지 않는 아버지는 누구겠는가?―-〈내 아 들아, 친구가 되자, 나는 네 가장 좋은 친구다〉, 그리`고 〈내 아들아, 주 의해라, 나를 네 천구로 다루지 마라.〉 여기에는 정신분열자를 만드는 것 이란 아무것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중의 막다른 골목이 정신 분열증을 생기게 하는 특수한 메커니즘을 결코 명확하게 하지 못하고, 다만 오이디푸스를 그 의연 전체에서 톡칭지어 주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보았다. 만일 진정한 막다른 골목, 전정한 모순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연구자 자신이 빠지는 모순이요 막다른 골목이다. 연구자는 정신분열증 울 생기게 하는 사회적 메커니즘들을 알았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이 메커 니즘들을 가족의 질서 속에서 발견할 때 모순에 빠진다. 사회적 생산이 나 정신분열증적 과정은 다 같이 이 질서를 벗어나 있다. 아마도 이 모
순은 레잉에게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가장 혁 명적인 반정신의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정신의학의 실천에서 손을 끊고, 정신병이 정녕 사회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과정인 한에서의 〈여행〉의 계속과 〈정상적인 자아〉의 해체가 치료의 조건으로 서 필요함을 요구하는 바로 그때, 그는 최악의 가족주의적, 인물론적 및 자아적 공준들게 다시 빠지고 있다. 따라서 그가 내세우고 있는 구제책 은 이제 〈부모 간의 관계를 솔직하게 확인하고〉, 〈 인물들을 알아보고 〉 , 마르틴 부버 Marti n Buber 식으로 참된 자아나 자기를 발견하는 것일 따름기다 .61) 전통적 권위들의 반감을 사고 있는 것 의에, 아마도 위와 같 은 접에 반정신의학의 시도들과 그들의 회복의 노력이 실제로 실패하고 있는 근원이 있다. 이 실패 때문에 가정적 정신요법과 지구 정신의학의 개조된 형태들, 그리고 레잉 자신의 東方에의 隱退가 있게 되었다. 그런 데 이것은 사람들이 러깡의 가르침을 밀고 나아가려 하여, 그 가르침을 가족적 및 인물론적 樞軸 위에 다시 놓을 때의, 다른 차원의 그러나 비 슷한 모순이 아닌가? 그런데 러깡은 욕망의 원인을 인간적이지 않은 대 상 속에서 보고 있다. 이 대상은 인물과는 이질적인 것이요, 최소한의 자 기동일의 조건들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요, 기호화들의 세계로부터도 間主觀的 좌표축들로부터도 벗어니는 것이다.
61 ) Ronald La ing , Soi et les autr e s, 1961 et 1969, tr. fr. Gallim ard, pp. 123- 124, 134.
느뎀부족 万才 왜냐하면, 인류학자 터너의 자세한 보고에 의하면, 오 직 느뎀부족의 의사만이 오이디푸스를 겉으로 보기에만 그런 것으로, 즉 겉치레로서 다를 줄 알았고, 또 사회 터전의 무의식적인 리비도 공급들 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적 가족주의 는 가장 현대적인 형태들에서도 그리고 특히 이런 형태들에서, 사람들이 오늘날도 찾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 죽 정신분열증이 사회적으로 생겨난다고 하는 것의 발견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첫째로, 가족은 더 깊은 사회적 모순들을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사람 들은 가족에게 ' 소우주의 가치를 부여하며, 사회적 모순을 정신적 모순에
로 병형시키는 데 필요한 중계점의 역할을 부여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 둘은 마치 리비도가 사회적 모순둘을 이것들 자체로는 직접 공급하지 않 고, 그것이 일어나려면 사회적 모순둘이 가족의 규준을 따라 번역될 필 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생각 때문에 사람들은 이미 사회적 생 산울 가족적 인과관계나 가족적 표현으로 바꾸어놓고, 또 관념론적 정신 의학의 범주들에 되돌아간다. 불가불, 이렇게 해서 사회는 無罪한 것으로 된다: 사회를 고발하기 위해서 이제 남은 것은 가족의 병적 성격에 대 한, 혹은 더 일반적으로 현대의 생활양식에 대한 막연한 고찰들밖에 없 다 . 그러므로 본질적인 것을 놓치고 있다. 본질적인 것은 다음과 갇다: 사회는 그 하부구조, 그 생산양식, 그 가장 정확한 자본주의적 경제 순환 의 차원에서 정신분열중화를 행한디는 것 : 그리고 리비도가 이 사회 터 전을 공급하는 것은, 사회 터전이 미더쿠구A?A 인 가족에 의하여 표현 되고 번역되는 형식에서가 아니라, 사회 터전이 가족적인 것이 아닌 그 절단들과 그 흐름들을 이런 것으로서 공급하며, 가족 속에 통과시키는 형식에서라고 히는 것: 그러므로, 가족적 공급둘은 언제나 욕망하며-사 회적인 리비도 공급들의 결과요, 이 후자의 공급들만이 일차적인 것이라 는 것: 끝으로, 정신적 소의는 이 공급들과 직접적인 · 관계가 있고, 사회 적 소의 못지않게 사회적인 것이요, 사회적 소의는 그 나름대로 이익의 선의식적 공급들과 관계가 있다는 것. 이렇게 해서 사회적 생산울 그 병원적 성격에서 정확하게 평가하는 일 울 못할 뿐만 아니라, 둘째로 이에 못지않게 정신분열증적 과정 및 병자 로서의 정신분열자와 이 과정의 관계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신경중화하는 것이 시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 가족의 사명에 순응한다. 이 사명은 그 오이디푸스화에 의하여, 그 막다른 골목들의 체 계에 의하여, 그 委託된 억제에 의하여 신경중환자들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 위탁된 억제가 없으면 사회적 억압은 결코 온순하고 체념한 신하들을 찾아보지 못할 것이요, 또 흐름들의 도주선들을 막아버리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정신분석이 신경증을 고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조금도 고려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정신분석에 있어서 고친다고 하는 것은 이야
기를 무한히 나누는 것, 무한한 체념, 거세에 의하여 욕망에 도달하는 것 으로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환자가 독선, 성교불능, 수음으로 죽느니보다는 차라리 자기의 병을 자기의 자손에게 니누어주고 옮겨줄 수 있는 조건들을 확립하는 데 성립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마도 고칠 수 없는 유일의 것, 그것은 신경증이다라고 하는- 것이 언젠가는 발견 될 것이다(그래서 정신분석에는 끝이 없다). 한 사람의 정신분열자를 편집 병자나 신경증환자로 변모시키게 되면 이렇게 한 사람은 기뻐한다. 아마 . 여기에는 많은 오해가 있다. 왜냐하면 정신분열자란 오이디푸스적, 가족 적 및 인물론적 관계 전체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나는 이제 더는 〈나〉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제 더는 아빠-엄마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그리고 그는 약속을 지킨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런 것이 정신분열자의 병인지, 혹은 이와 반대로 그것이 정신분 열중적 과정인지를 아는 것이다. 정신분열증적 과정은 아무리 걱정스럽 고 모험적인 것이라 해도, 병이나 〈붕괴〉가 아니라, 하나의 〈 돌파구 〉 이 다. 이 과정은 우리를 욕망하는 생산으로부터 갈라놓는 벽이나 경계선을 뛰어넘고, 욕망의 흐름들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레잉의 위대함은 야스퍼 스에게서 애매한 채로 있던 몇 가지 직관에서 출발하여, 이 여행의 엄청 난 범위를 지적할 줄 알았던 데에 있다. 따라서 소위 정상적인 자이를 해체시키는 끊임없는 파괴의 임무를 자기의 적극적 임무에 섞지 않는 정 신분열자-분석은 없다. 로렌스, 밀러, 뒤이어 레잉은 이것을 깊이 있게 밝힐 줄 알고 있었다: 확실히, 남자도 여자도 명확하게 규정되는 인물들 이 아니다__차라리 전동들, 흐름들., 분열들, 그리고 매듭들이다. 자아란 거기서 그것이 결과하는 인물론적 좌표들에 관련되어 있고, 인물들은 가 족적 좌표들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가족적 집합이 인물들을 생산하기 위하여 무엇과 관계하는지를 나중에 볼 것이다. 정신분열자-분석의 임무 는 자아들과 이것들의 전제들을 꾸준히 파괴하는 것, 자아들이 가두어놓 고 억제하고 있는 인물 이전의 단일체들을 해방시키는 것, 자아들이 發 源하게 하고 수용하고 혹은 차단할 수 있는 흐름들을 흐르게 하는 것, 자기동일의 조건들에 미치지 못하는 바로 그곳에서 분열들과 절단들을
언제나 더 멀리 더 세밀하게 확립하는 것, 한 사람 한 사람 재절단하고 다른 사람들과 묶어 집단을 이루게 하는 욕망하는 기계들을 조립하는 것 이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하나의 소집단이요, 또 소집단으로서 살아야 하 기 때문이다. 혹은 차라리 갈라진 많은 龜裂이 하나하나 金으로 접합되 어 있는 禪의 茶器처럼, 또 혹은 그 틈바구니 하나하나가 페인트나 석회 에 의하여 메워지고 있는 교회의 타일처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 은 통일되고, 큰 덩어리를 이루고, 숨겨지고, 유착시켜져, 비생산적인 거 세에 반대되는 것이다.) 정신분열자-분석이란 명칭은 그 치료의 방법 전 체에서, 정신분석처럼 신경증화하지 않고 정신분열중화함을 보여준다. 정신분열자는 무엇을 앓고 있는가? 그가 앓고 있는 것은 과정으로서의 정신분열증이 아니니 밀이다. 무엇이 돌파구를 붕괴로 변모시키는가? 그 가 앓고 있는 것은 이런 것과는 반대로 과정의 강제된 정지, 혹은 과정 의 공전의 계속, 혹은 과정이 억지로 목적으로 여겨지는 방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회적 생산이 병든 정신분열자를 생기게 하는 가를 보았다: 탈규준화한 흐름들은 자본주의의 심층의 경향 혹은 그 절 대적 경계선을 이루고 있는 것인데, 이 흐름들· 위에 세워져 있는 자본주 의는 끊임없이 이 경향에 거역하고 이 경계선을 제거하여, 이것들 대신 에, 자기가 언제나 더 큰 규모로 재생산할 수 있는 내부의 상대적 경계 선들 혹은 그 심층의 경향을 전제군주와 가장 확고한 억압에 종속시키 는 공리계를 세운다. 이런 의미에서 모순은 사회 터전을 관통하는 흐름 들의 치원에서만 아니라, 또한 사회 터전을 구성하는 부분들인 흐름들의 리비도 공급들의 차원에서도 자리잡는다_즉, 전제군주의 원국가의 편 집병적 재건과 적극적인 정신분열증적 도주선 사이에 자리잡는다. 여기 서 다음과 갈은 세 가지 사태가 뚜렷이 나타난다. 첫째로, 과정이 정지되 고, 욕망하는 생산의 경계선이 옮겨지고 왜곡되어, 바야흐로 오이디푸스 적 부분집합 속에 옮아간다. 이때 정신분열자는 실제로 신경증화시켜지 는데, 이 산경증화가 그의 병을 구성한다• 왜냐하면, 어쨌든 신경증화는` 신경증에 先行하며, 후자는 전자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정신분열 자가 신경증화, 오이디푸스화에 저항하는 수가 있다. 현대적 수단들, 죽
순수한 정신분석의 무대, 상칭적인 남근, 구조적 배제, 아버지의 이름의 활용도 정신분열자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 데 이르지 못한다. (여기서 도, 죽 이 현대적 수단들에서도, 라깡의 발견들이 어찌 그리 이상하게 이 용되고 있는가. 라깡은 이와 반대로 정신분석의 터전을 정신분열증화한 최초의 사람인데…….) 이 둘째 경우에는, 과정이 신경중화예 저항하지 만 신경중화는 모든 면에서 과정을 차단하기에 충분한 것이므로, 과정이 신경증화와 대결하게 되면, 자기자신을 목적으로 여기게 된다. 여기서 정 신병자가 생긴다. 정신병자는 소위 위탁된 억제에서 빠져나가지만 이것 은 오칙 근원적 억제 속에 피난하여, 자기 위에다 기관들 없는 신체를 가두어놓고 욕망하는 기계들을 침묵시키기 위해서이다. 이 정신병은 신 경증이기보다 오히려 긴장병이요, 오이디푸스와 거세이기보다 오히려 긴 장병이다__그러나 그것은 역시 신경증화의 한 효과, 유일의 동일한 병 의 역효과이다. 셋째 경우는 다음과 같다: 과정이 공전하기 시작한다. 여 기서는 탈토지화의 과정이 더는 자기의 새로운 대지를 찾을 수 없고 창 조할 수도 없다. 이 과정은 오이디푸스적인 재토지화, 죽 고풍스럽고, 잔 여적이고, 우스꽝스럽게 제한된 대지와 대결하여, 더욱 인위적인 대지들 을 형성하게 된다. 이 대지들은 우연한 일을 배제하고, 기성질서에 잘 순 응하기도 하고 잘못 순응하기도 하지만 어떻든 순응한다. 이것이 도착증 이다. 그래서 어떻든 오이디푸스는 이미 하나의 인위적인 대지였다. 오오 가족이여 ! 또 오이디푸스에 대한 저항, 기관들 없는 신체에의 회귀 역시 하나의 인위적인 대지였다. 오오 정신병원이여. 따라서 모든 것은 도착이 다. 그러나, 또한 모든 것은 정신병이요 편집병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모 든 것은 정신병자를 생기게 하는 사회 터전의 반공급에 의하여 시동하기 때문이다. 또 모든 것은 신경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과정에 대립하는 신경증화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모든 것은 과정이요, 과정으로서의 정신분열증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정신분열증을 척도로 하여 측정되기 때문이다. 과정 자체의 진행, 그 신경증적 정지들, 그 도 착적 공전의 연속들, 그 정신병적 목적화들-―이 모든 것은 정신분열중 을척도로측정된다.
오이디푸스가 사회 터전 전체를 유한한 가족적 형상에 일치시킴으로써 탄생하는 한에서, 오이디푸스는 이 사회 터전에 대한 리비도의 공급을 전혀 내포하고 있지 않고, 이 일치를 가능하게 하고 필연적인 것이 되게 하는 아주 특수한 공급만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오이디푸스는 우리에게 신경중환자의 감정이기에 앞서 편집병자의 관념으로 보였다. 사실, 편집병적 공급은 분자적인 욕망하는 생산이 기관들 없는 충만한 신체의 표면에서 형성하는 큰 덩어리의 집합에 이 분자적인 욕망하는- 생 산을 종속시키고, 또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일정한 조건들 아래 충만한 신체의 기능을 수행하는 사회체의 한 형태에 분자적인 욕망하는 생산을 예속시키는 데 성립한다. 편집병자는 대중을 기계처럼 조작하며, 끊임없 이 큰 집합들을 형성하고 重壓裝置들을 발명하여 욕망하는 기계들을 툴 에 집어넣고 억압한다. 물론, 공동의 목표들과 이익둘, 수행해야 할 개혁 들, 때로는 심지어 일으켜야 할 혁명들을 제시함으로써 자기를 합리적이 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편집병자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개혁주의 적 공급들, 혹은 반동적 공급들 및 파시스트적 공급들은 선의식의 어령 풋한 빛 아래서만 합리적인 의관을 보여주며, 이상한 사회조직론에 생기 롤 주거니와, 광기는 이런 공급툐 2 돌파하여 그 밀에 도달한다. 여기서 는 언어마저 미쳐 있다. 장관 , 장군, 기업주, 기술자가 하는 말을 들어보 시오……. 말 없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남들을 위하여 말하는 이성의 소 리 밀에 숨은 편집병자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를 들어보시오. 왜냐하면, 내세워진 목표들과 이익들 밑에, 아주 무의식적인 공급이 있고, 이 공급 은 목표 전체와 상관없이, 하나의 충만한 신체 자체 때문에 이 충만한 신체를 지향하고, 근거 전체와 상관없이, 어떤 발전 단계 자체 때문에 그 발전 단계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급은 바로 이 발전 단계를 지향하지, 디른 발전 단계를 지향하지 않으며, 거기서 한 발자국도 더 나 아가지 않는다. 또 이 사회체를 지향하지, 디론 사회체를 지향하지 않으 며, 다른 사회체에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 이것은 큰 덩어리를 이루는 기 계에 대한 이해를 떠난 사랑이요, 진정한 향락이다. 이 향락은 큰 덩어리 룰 이루는 기계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증오를 품는다. 리
비도 전체가 여기에 걸려 있다. 리비도 공급의 관점에서 보면, 개혁가와 파시스트 간에, 때로는 심지어 혁명가들과 이들 간에 거의 아무 차이도 없음이 분명하다. 이들이 구별되는 것은 선의식의 방식에서만이요, 이들 의 무의식적 공급들은 똑같은 형에 속해 있다. 이들이 동일한 신체와 하 나가 되어 있지 않을 때에도 그렇다. 모오 마노니는 190 2¼민의 軫 斷에서, 법원장 슈레버에게 착란의 관념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자유와 책임감을 귀속시키고 있거니와, 그녀가 자기의 이 진단을 반정신의학의 최초의 역사적 행위로 볼 때 우리는 그녀를 따를 수 없다 .62) 왜냐하면 그 법원장이 편집병자이기보다 오히려 정신분열자였고, 자기 를 순수한 아리아인으로보다 오히려 흑인이나 유태인으로 보았고, 자기 의 재산 관리에 상당한 능력을 보여주지 않았고, 또 그의 망상 속에서 사회체에 대하여 이미 파시즘화하는 공급을 보여주지 않았어도 전단이 똑같았을까 의심해 볼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예속시키는 기계로서의 사 회기계들은 이해로써는 설명될 수 없는 비길 데 없는 사랑을 불러일으킨 다. 왜냐하면 이해들은 오히려 이 사랑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사회의 밀 바닥에는 망상이 있다. 왜냐하면 망상은, 목표들을 넘어 사회체 자체를 공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집병자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망하는 것 은 그저 전제군주의 신체만이 아니라, 돈-자본의 신체, 혹은· 새로운 혁 명적 신체이다. 이 신체가 권력과 군집의 형태일 때 그렇다. 이것은 이 신체를 소유하는 그만큼 이 신체에 의하여 소유되는 것이요, 사람들 자 신이 부품과 톱니바퀴를 이루고 있는 예속집단들을 기계로서 조작하는 것이요, 마침내 자기자신을 그 기계 속에 집어넣어 거기서 욕망을 분쇄 하는 메커니즘들을 즐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상대적으로 해가 없는 것, 죽 정신분석가의 진료 실에서 다루어지는 私的 規定이란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오 이디푸스가 바로 어떤 형의 무의식적인 사회적 공급을 전제로 하는가를 문제삼는다―_왜냐하면 오이디푸스를 발명하는 것은 정신분석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오이디푸스를 생활의 양식으로 삼고, 오이디푸스 62) Maud Mannon i, L e Psyc h ia tre, son fou et la psych analys e , ch. VII.
를 발전시키고, 오이디푸스를 확인하고, 오이디푸스에게 하나의 의료 상 품의 형태를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편집병적 공급이 욕망하는 생 산을 예속시키는 한에 있어서, 이 공급에게 아주 중요한 것은, 이 생산의 경계선이 옮겨져서, 두 개의 큰 덩어리를 이루는 집합, 죽 출발점의 사회 적 집합과 이것에 대응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도달점의 가족적 부분집합 간의 경계선으로서, 사회체 내부에 이행하는 것이다. 이 이행에 의하여 욕망은 가족적 억제의 올가미에 걸리고 이 억제는 사회적 억압을 倍加하 기에 이른다. 편집병자는 자기의 망상울 가족에, 그것도 자기자신의 가족 에 적용하지만, 그 망상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종들, 신분들, 계급들, 세계 사에 관한 망싱이다. 요컨대, 오이디푸스는 무의식 자체 속에 사회 터전 의 반동적이고 편집병적인 공급 전체롤 내포하고 있으며, 이 공급은 오 이디푸스화하는 인자로서 작용하고, 또 선의식적 공 급들 을 북돋울 수도 방해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정신분열자-분석의 관점에서 볼 때, 오이디 푸스 개념의 분석은 아들의 혼란해진 감정들을 거슬러 올라가 망상하는 관념들에까지, 죽 부모나 부모를 내면화하여 표상하고 있는 것들이나 부 모의 대체자들의 공급선들에까지 이르는 데에 성립한다: 이것은 어디까 지나 일치와 재생산의 장소에 지나지 않는 가족의 집합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리비도 공급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단위들에 도달하기 위 한 것이다. 따라서 누구보다도 정신분석가를 포함하며, 가족주의적 정신 분석 전체는 정신분열자-분석의 관할 아래 놓여야 한다. 소파 위에서 시 간을 보내는 유일의 방식은 정신분석가를 정신분열자-분석하는 것이다. 우리는 욕망의 무의식적 공급들이 이익의 선의식적 공급들과는 본성을 달리하기 때문에 그 사회적 射程 자체에서는 성욕을 지표로 삼고 있음을 말한 바 있다. 물론 혁명적인 사랑들을 가지기 위해서는 가난한 여자, 죽 하녀나 매춘부를 공급하는 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혁명적인 사랑이나 반동적인 사랑이란 것은 없다. 죽 사랑이란 그 대상에 의해서도, 또 욕망 이나 충동의 원천과 목표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 다만 리비도에 의한 역사적인 혹은 지리적인 사회 터전 공급의 반동적 혹은 혁명적 성 격의 지표들인 사랑의 형태들이 있을 따름이다. 사랑받고 욕망되는 존재
둘은 이 성격에 의하여 그들의 규정을 받는다. 오이디푸스는 이 형태들 중의 하나요, 반동적 공급의 지표이다. 그래서 아주 명확히 규정된 형상 들, 찰 확인된 역할들, 뚜렷이 다른 인물들, 요컨대 로렌스가 얘기하고 있던 모델-심성들, 죽 어머니, 약혼녀, 여주인, 아내, 성녀와 매춘부, 왕 비와 하녀, 부유한 여자와 가난한 여자는, 그들의 뒤집힌 형태들과 그들 울 대체한 것들에서까지, 오이디푸스의 부 속물결이다. 이 심상들의 형태 자체, 이것들의 각 장면과 이것들의 가능한 관계들의 전체는 하나의 규 준 혹은 하나의 사회적 공리계의 산물이요, 리비도는 이것들을- 통해서 이 사회적 공리계를 지향한다. 인물들은 사회적 집합에서 파생된 환영둘 이요, 이 사회적 집합의 규준은 그 자체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공급된다. 이런 까닭에 사랑이나 욕망은 반동적인 지표들이나 혁명적인 지표들을 보여준다. 이 후자, 죽 혁명적인 지표들은 오히려 형상적이지 않은 지표 들로서 출현하는데, 여기서는 인물들이 욕망의 탈규준화한 흐름들에, 振 動線들에 자리를 비켜주며, 또 심상들의 절단들이 분열둘에 자리를 비켜 주는데, 이 분열들은 흐름들을 없애지 않고 오히려 많은 차원에서 흐름 둘을 통과시키면서 단일점들, 기호-점들을 구성한다• 형상적이지 않은 사랑들, 즉 사회 터전의 혁명적 공급의 지표들은 오이디푸스적인 것도 아니고 선오이디푸스적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들은 혁명가에게 〈 오이디푸스, 난 그런 거 몰 라〉라고 말할 권리를 준다. 인물들과 자아의 형태를 파괴하는 것은 선오 이디푸스의 미분화상태롤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오이디푸스적인 단일체 노선들, 죽 욕망하는 기계들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성 의 혁명이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혁명이 관심을 갖는 것은 대상도 아니요, 목표도 아니요, 원천도 아니라, 오직 형태 죽 기계적 지표들만 01 다. 그러므로 정신분열자-분석의 넷째, 죽 마지막 명제는 사회적인 리비도 공급의 두 극을 구별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 하나는 반동적이고 파시즘 화하는 편집병적인 극이요, 다른 하나는 혁명적인 정신분열적인 극이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우리는 무의식의 사회적 공급들의 성격을 정신의
학에서 이어받은 용어들로써 규정하는 데 있어 아무런 지장도 느끼지 않 지만, 이것은 이 용어들이 사회적 공급들을 단순한 두영둘이 되게 하는 가족적 함축을 지니기를 그치는 한에 있어서요, 또 망상이 직접적으로 적절한 일차적인 사회적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정되는 때부터이 다. 두 극은 다음과 같이 명확히 드러난댜 하 L 는 욕망하는 생산과 욕망 하는 기계들이 어떤 권력 형태나 선별적 주권형태 아래 큰 규모로 구성 하는 군집적 집합들에 스스로 예속함으로써요, E론· 하나는 위의 경우와 는 종속관계가 거꾸로 되고 권력이 전복됨으로써다; 하나는 단일체들을 짓부수고 선별히여 자기들의 규준들과 공리계들 속에 붙잡아두는· 것들만 울 정규의 것으로 인정하는, 큰 덩어리를 이루고 있고 구조화된 집합들 울 통해서요, E 른 하나는 이와 반대로 큰 집합들을 자기들이 정교하게 꾸미기에 알맞는 수만큼의 재료로 다루는 단일체들의 분자적 다양성들을 통해서이다. 하나는 통합선과 토지화선을 통해서 나타니는대, 이 선들은 흐름들을 멈추게 하고, 흐름들에 울타리를 쳐, 체계 내부의 경계선들을 따라 흐름들을 역류시키거나 재절단하여, 흐름들이 심상들을 생기게 하 며 이 심상들은 이 체계나 이 집합에 고유한 내재의 터전을 채우게 된 다; E 른 하나는 탈규준화하고 탈토지화한 흐름들이 따라가는 도주선들 울 따라 나타나는데, 이 도주선들은 새로운 흐름들을 생기게 하는 형상 적이지 않은 그것들 자체의 절단들과 분열둘을 발명하며, 그것들을 욕망 하는 생산과 갈러놓는 규준화한 벽이나 토지의 경계선을 언제나 뛰어넘 는다; 위에 말한 모든 규정을 요약하면, 하나는 예속집단들을 통해서, 다 른 하나는 주체집단들을 통해서 나타난다. 사실 우리는 이 구별들에 관한 온갖 문제에 아직도 부딪친다. 어떤 의미에서 정신분열증적 공급이 다른 공급에 못지않게, 단순한 유토피아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회 터전을 실제 로 공급하는가? 어떤 의미에서 도주선들은 집단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 적인가? 무의식의 두 극은 피차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또 이익의 선의식적 공급들괴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무의식의 편집병적 공급은, 사회가 할당하고 배분하는 선의식적 목표 들과 이익둘을 넘어, 기관들 없는 신체인 한에서의 사회체 자체를 대상
으로 삼는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남은 문제는, 이러한 공급이 백일하 에 드러내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급은 일반적인 것으로서 제시되는 할당 가능한 목표들이나 이익들 밑에 언제나 숨어 있 어야 한다. 이것은 이 목표들이나 이익둘이 지배계급이나 그 끄내기의 목표들이나 이익들만을 나타내고 있을 때에도 그렇다. 어떤 주권형성조 직체, 확고하고 안정된 어떤 군집집합이 그들의 막돼먹은 권력, 그들의 폭력 및 그들의 부조리를 위해서 공급되어 있다고 하면 어떻게 그것들이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는가? 그것들은 이러한 사태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가장 노골적인 파시즘도 목표들, 권리, 질서 및 이성의 언어를 이야기한다. 가장 미친 자본주의도 경제적 합리성의 이름으로 이야기한 다. 그래서 이런 일은 강요된 일이다. 왜냐하면 이성들의 질서가 이 질서 를 결정짓는 규준 아래 혹은 공리계 아래 착잡하게 정칙하고 있는 것은 바로 충만한 신체의 불합리성 속에서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무의식 의 반동적 공급을 아무 목표도 없는 것으로 백일하에 드러내는 것은 그 것을 완전히 변모시켜 리비도의 다론 극, 죽 정신분열증적-혁명적인 극 으로 이행시키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드러내는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권력을 전복하고, 종속관계를 역전시키고 생산 자체를 욕망베게 둘 려주게 되기 때문이다. 실상 오직 욕망만이 목표 없이 존재하면서 살아 있다. 분자적인 욕망하는 생산은 권력이나 주권의 형태를 뒤집고 이제는 큰 덩어리를 이루는 집합을 예속시키는 자유를 되찾게 된다. 이런 까닭 에 클로소스키는 공급의 두 극에 관한 이론을 가장 멀리 밀고 나아갔으 면서도 언제나 적극적인 유토피아의 범주 안에서 그리했기 때문에 디~ 과 갇은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리하여 모든 주권형성조직체는 자기의 해체가 원해지는 순간을 예견하게 될 것이다……. 어떠한 주권형성조직 체도 확고한 것이 되려면, 결코 이러한 자각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왜 냐하면 주권형성조직체를 구성하는 개인들 속에서 이 조칙체의 해체의 순간이 바래지고 있다는 것이 자각되자마자 이 개인들이 이 조직체를 해 체하기 때문이다……. 과학과 예술이라고 하는 辻廻를 통해서, 인간존재 는 여러 차례 이 조칙체의 고정화에 대하여 반항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군중의 충동은 과학에서 또 과학을 통하여 이러한 조직체의 파괴를 좌절시켜 왔다. 인간존재가 의도 없는 현상들처럼 행동 할 줄 알게 되는 날-―- 인간존재의 수준에서는 모든 의도가 언제나 그 보존과 지속에 복종하니까__바로 이날, 하나의 새로운 피조물이 생존 의 완전상태를 선언할 것이다……• 과학이 그 자체의 걸음을 통하여 증 명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과학이 끊임없이 꾸며내는 수단 둘은 그것들 자체 아무 목표도 목적도 없이 힘들의 작용들- 의부에 재생산 하는 것 이의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요, 이 힘들의 결합들에서 이런 저런 결과가 얻어진다……. 하지만, 기성의 사회적 통합 밖에서 발전할 수 있는 과학은 하나도 없다. 과학이 사회집단들을 다시 문제삼지 못하 게끔 사회집단들은 과학을 자기의 수중에 거머쥐고……, 갖가지 산업계 획 속에 (통합하고 있어), 과학의 자율성이란 엄밀한 의미에서는 생각할 수 없어 보인다. 예술과 과학의 결탁은 우리의 모든 제도의 파괴와 생산 수단의 전체적 전복을 예상한다……. 어떤 결탁이, 니체의 소원을 따라, 매우 수상쩍은 목적들을 위하여 과학과 예술로 하여금 음모를 꾸미게 한 다 해도, 산업사회는 과학과 예술을 演出시켜 미리 이 결탁을 따돌리는 것 같아 보인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산업사회는 이 결탁이 자기에게 주 는 벌을 받게 마련이다: 이 벌이란, 산업사회롤 뒤덮고 있는 제도적 구 조들을 파열시켜, 결국에 가서 현대의 본래적 모습을 드러내는 많은 실 험적 영역들을 생기게 하는 것일 수 있다-이것은 니체가 사회들의 전 화가 도달하는 궁극적 국면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런 시야에서 보면, 예 술과 과학은 바로 니체가 자기의 반사회학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말한 주 권형성조직체로서 나타난다-과학과 예술은 제도들의 폐허 위에 지배 적인 권력으로서 확립된다.〉 63) 학자들과 기술자들, 심지어 예술가들, 과학과 예술 자체가 아주 강력하 게 匠成主權들에 봉사하고 있는 세계에서(이것이 融資의 구조들에 의해서 63) Pi err e Klossowski, Ni et z s che et le cercle uic i e u x, pp. 175, 202-203, 213- 214( 群衆의 집합들과 단일체들의 다양성의 대립은 이 책 전체에서, 그리고는 『살아 있는 돈 La Monnaie u i uan t e 』에서 전개되어 있다).
만 그렇다 해도 말이다), 왜 이렇게 예술과 과학이 원용되고 있는가? 이 것은 예술이 그 자체의 위대성, 그 자체의 천재에 도달하자마자 탈규준 화와 탈토지화의 연쇄둘을 창조하고 이 연쇄들이 욕망하는 기계들을 설 치하고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회화에 있어서의 베네치아파롤 예로 들어 보자: 베네치아에게 큰 自治룰 허용한 原國家의 데두리 안에서 베네치아 가 가장 강력한 싱업 지본주의를 발전시키고 있을 때, 그 회화는 분명히 비잔틴의 규준 속에 술그머니 들어가고 있다. 이 규준에서는 색채들과 선들이 하나의 시니피앙에 종속하고, 이 시니피앙은 색채들과 선들을 하 나의 수직적 질서로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l 양 1] 기 중엽쯤에, 베네치 아의 자본주의가 그 쇠되의 최초의 칭후에 직면하자, 무엇인가가 이 회 화에서 터져버리고 만다. 새로운 세계, 하나의 다른 예술이 열리고 있다 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예술에서는 선들이 탈토지화하고, 색채둘이 탈규 준화하여 이제는 이것들이 피차 유지하고 있는 관계들만을 보여준다. 도 주선이나 돌파선이 있는 그림의 수평적 혹은 횡단적 조직이 탄생한다. 그리스도의 신체는 모든 측면에서 집아당겨져서, 모든 부분에서 온갖 모 양으로 기계처럼 움직여지고, 기관들 없는 충만한 신체의 역할을 놀고 있는데, 이 신체는 욕망의 모든 기계들이 달리붙는 장소요, 예술가의 기 쁨이 터져나오는 사디-매저키즘의 활동의 장소이다. 男色의 그리스도들 마저 나타난다. 기관들은 기관들 없는 신체의 직접적인 힘들이고, 이 신 체 위에서 흐름들을 흘려내보내는데, 성 세바스천을 사살한 무수한 화살 같은 수없이 많은 상처가 나타나서, 이 흐름들을 절단하고 또다시 절단 하여 다른 흐름들을 생산한다. 인물들과 기관들은 위계질서를 가진 공동 의 겅급걸을 따라 규준화되기를 그친다; 각 인물, 각 기관은 그 자신으 로 가치 있는 것이 되고, 그 지신의 일을 하게 된다. 어린이인 예수가 한 쪽을 주시하고 있는 한편, 동정녀 마리아는 다른 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예수는 모든 욕망하는 어린이들과 같은 자가 되고, 동정녀 마리아 는 모든 욕망하는 여자들과 걷게 되어, 濱神의 즐거운 활동이 이 일반화 된 사기업화 아래 펼쳐진다. 틴토레토 같은 사람은 세계의 창조를 긴 경 주로 그리고 있는데, 여기서 신 자신은 맨 뒷줄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으
로 출발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갑자기 로토 Lo tt o 의 그림이 나타나는데, 이 그림은 충분히 l~➔ l 기에 속한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회화의 흐름들의 이 달규준화, 욕망하는 기계들을 지평선에 형성하는 정신분열 기질의 이 도주선들은 옛 규준의 단편들 속에 다시 들어가게 되거나, 새 로운 규준들 속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본래의 의미에서의 회화의 공리계 속에 끌어넣어전다. 이 공리계는 도주를 막고, 회화 전체가 선들 과 색들 간의 횡단적 관계들에 들어가는 길을 닫아버리고, 그것을 고풍 스런 혹은 새로운 토지들에 포 7센 다(가령, 원근법). 따라서 탈토지화의 운 동은 토지들의 襄面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다. 이 토지들이 잔여의, 혹은 인공적인, 혹은 模造의 토지라 해도 그렇다. 그러나, 적어도 무엇인가가 출현하여 규준들을 깨부수고, 시니피양들을 파괴하고, 구조들 밀을 통과 하면서, 흐름들을 통과시키고 욕망의 극한에서 절단들을 행한다: 이것은 하나의 돌파구이다. 1 양1 ] 기가 이미 1 앙1 ] 기의 한복판에 있다고 말하는 것 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lM] 기에 대하여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해 야 되겠기 때문이다. 또 해방된 기묘한 흐름들이 이미 그 밀을 통과하고 있던 바잔틴의 규준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했어야 되겠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일을 화가 터너에게서, 사람들이 가끔 〈미완성의〉 그림들이 라 부르지만 사실은 가장 완성된 그의 그림들에서 본 바 있다: 天才가 있게 되자마자, 더 이상 어느 파에도, 어느 시대에도 속하지 않고, 하나 의 돌파구롤 여는 어떤 것이 있게 된다__그것은 목표 없는, 그러나 그 자체로서 완성되어 있는, 과정으로서의 예술이다. 규준들과 이것들의 시니피앙들, 공리계들과 이것들의 구조들 , 이것들을 채우게 되는 상상적 형싱들만 아니라, 또한 이것들을 측정하는 순전히 상징적인 관계들이 목표, 유파, 시대에 의하여 특칭지어지는 이른바 미적 인 큰 덩어리를 이루는 집합들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것들을 더 넓은 사 회적 집합들에 관계시키는데 이 사회적 집합들은 미적 집합들에서 어떤 적용을 찾아내며, 또 도처에서 거세하는 주권의 큰 기계에 예술을 예속 시킨다. 왜냐하면, 예술에 있어서도 반동적인 공급의 극, 죽 편집병적-오 이디푸스적-나르시스적인 음울한 조직화가 있기 때문이다. 더러운 작은
비밀 주위에서 회화가 더럽게 사용된다 . 이것은 공리계가 형상들 없이 서 있는 추상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비밀의 본질이 萊屈 諱 的인 회화, 오이디푸스적 심상으로서의 성 삼위일체와 관계를 끊었을 때에도 오이디 푸스화하는 회화, 과정을 목표가 되게 하거나 멈추게 하거나, 중단시키거 나 혹은 계속해서 공전시키는, 신경종적이고 신경증화하는- 회화가 그런 것들이다. 이러한 회화가 오늘날 현대적이라 1 탉~하면서 꽃피고 있다. 그 것은 독이 있는 꽃이요, 로렌스의 주인공으로 하여금 디음과 같이 말하 게 하고 있었다: 〈 이것은 이를테면 일종의 살인이다……. 그러면 누가 살해되었는가? ……사람들이 자기 속에 느끼는 자비심이 온통 살해되었 다……. 살해된 것은 아마 어리석음, 감상적인 어리석음이다라고 예술가 는 냉소하였다-당신은 믿소? 나에게는 이 모든 簡 그리고 물결치는 함석의 전동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더 바보스럽고 아주 감상적이라 생각 된다. 이것들은 자기자신에 대한 많은 연민, 많은 신경질적 허영심을 보 여준다고 나에게는 생각된다. 〉 생산적인 절단들이 거세의 비생산적인 큰 절단에 두사되고, 흐름들은 물결치는 함석의 흐름이 되고, 돌파구들은 어 디서나 막힌다. 그래서 앞서 본 바와 같이, 아마 이런 것이 예술과 문학 의 상품가치이다: 편집병적인 표현형식이 그러한데, 이 표현형식은 이제 자기의 반동적인 리비도 공급결g 〈 기호화〉할 필요조차 없다. 왜냐하면 이 표현형식에 대해서는 이 공급들이 오히려 시니피앙의 역할을 하고 있 기 때문이다. 또 오이디푸스적인 내용형식이 그러한데, 이 내용형식은 이 제 오이디푸스를 형상화할 필요조차 없다; 왜냐하면 〈 구조 〉 만 있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분열적-혁명적인 다른 극에서는, 예술의 가치가 이제는 탈규준화하고 탈토지화한 흐름들과의 관계에서만 헤아려 지며, 예술은 이 흐름들을 沈默하게 된 시니피앙 밀에서 特質들의 동일성 의 조건들에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무력하게 된 구조를 꿰뚫고 통과시 킨다; 글 ecr it ure 이 공기, 전자 혹은 가스 같은 무차별 미분화의 토대들 울 가지게 되어, 약자들, 문맹자들, 정신분열자들이 가까이할 수 있는 것 이 될수록 지식인들에게는 더욱 어렵고 지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흐르는 것 전부와 재절단하는 것 전부를 결부시키면서, 의미도 목표도
모르는 자비심의 모태를 이룬다(아르또의 실험, 바로즈 Burrou g hs 의 실 험). 여기서 예술은 그 본래적인 현대성에 도달한다. 이 현대성은 모든 시대의 예술 속에 들어 있었으나, 설사 미적이었다 하더라도 목표들과 대상들 밀에, 재규준화들이나 공리계들 믿에 숨겨져 있었던 것을 해방시 키는 데에만 성립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를 완성시키는, 그리고 전진 하는 한 끊임없이 완성되는, 순수한 과정이요, 〈 실험 〉 으로서의 예술이 다 .64)
64) 존 케이쥬 Jo hn Ca g려 저작 전부와 」 그의 저서 Sil e nce(Wesleya n Un ive r-sit y Press, 1961) 참조: 實駿的이란 낱말은, 성공이나 실패로써 판단될 운명에 있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결과가 미지인 행위를 가리키는 것 으로 이해된다면, 이 낱말은 적절한 것일 수 있다(p. 13). 달규준화, 탈구조화 및 과정으로서의 작품의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개념들에 관하여는, 케이쥬에 대한 다 니M엘u si샤q u를 e 르e tD aanniae rl chC ihe,a r lBesu 의lle ti다 n 음de과 la같 S은oc ie훌 t e륭 f한ra n주~i석s e들 d을e p참h i조l o 할sop h것 ie. , juille t 1971( 이제는 규준이란 것이 없다고 하는 생각에 반발하여, 몇몇 토론참 가자는 맹렬한 분노를 표시하였다……).
과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말을 할 수 있겠다: 인식의 달규준화한 흐 름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본래의 의미에서의 과학적인 공리계들 속에 묶 여 있지만, 이 공리계들은 두 극 사아에서 동요하는 주저를 나타내고 있 다. 이 두 극의 하나는 사회적인 큰 공리계인데 이 공리계는 市場의 요 소들과 기술혁신의 영역들에 관련하여 고려되어야 하는 것을 과학에 대 해서도 고려하는 공리계이다. 이 국은 큰 사회적 집합이기도 한데, 이 집 합은 과학적인 하부집합들을 자기에게 고유한 그리고 자기에게 대응하는 그 수만큼의 적용이 되게 하는 집합이다. 요컨대, 이 극은 학자들을 〈이 성〉에 되돌아오게 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그들이 자기들의 역할 에서 일탈할 것을 내다보고 그들에게 목표들을 課하고, 또 과학과 학자 둘을 주권형성조직체에 완전히 예속시키는 결정기관이 되게 하는, 절차 둘의 집합이다• (예컨대, 비결정론이 어느 점까지만 용납되고, 이 점을 넘어서면 결정론과 화해하게끔 정해지는 방식.) 그런데 다른 극은 정신 분열증 경향의 극이다. 이 극의 언저리에서는 인식의 흐름들이 정신분열 중화하고, 사회적 공리계를 가로질러서만 도주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 자
체의 공리계들을 가로질러 지나가며, 더욱더 탈토지화하는 기호들을 낳 는다. 이 기호들은 더는 형상적이지도 않고 구조화되지도 않는, 그리고 목표도 없고 목적도 없는 현성들의 놀이를 재생산하거나 생산하는 분열 둘형상約다. 이 극은 앞서 규정된 의미에서의, 실험으로서의 과학이 다. 다른 영역들에서와 같이 이 영역에서도, 과학의 편집병적-오이디푸 스화하는 境域과 정신분열적-혁명적 경역 간에 본래 리비도적인 갈등이 있지는 않는가? 이 갈등 자체는 라깡으로 하여금 학자의 드라마가 존재 한다고 말하게 하고 있는 갈등이다. (〈메이어, 칸토르, 나는 가끔 광기에 이르는 이 드라마들의 受賞者名簿를 작성할 생각은 없다……. 여기서 학자는 오이디푸스 개념을 끌어넣지 않았더라면, 자기자신을 이 개념 속 에 말려들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 오이디푸스는 가족적 형상으로서도 또 정신적 구조로도 거기에 개입하지 않고, 오이디푸스화 하는 인자로서의 공리계의 형태로 개입하여, 이 결과로 특별히 과학적인 오이디푸스가 생기기 때문이다 .)65) 그래서 오오 엄밀한 수학들이아…··. 산술! 대수! 기하학! 웅대한삼위일체여! 빛나는삼각형이어!라고 하는 로 트레아몽 Lau t reamon t의 노래가 편집병적-오이디푸스적-나르시스적인 극의 둘레에서 울려퍼지는데, 이 노래에는 오오 정신분열증의 수학들, 통 제할 수 없는 미천 욕망하는 기계들이어 !라고 하는 노래가 대립한다.
65) Jac qu e s Lacan, Ecri ts, p. 870.
자본주의의 주권형성조직체(사회체로서의 돈-자본의 충만한 신체)에서 는, 사회적인 큰 공리계가 선행의 조직체들의 특칭을 이루고 있던 토지 의 규준들과 전제군주의 초규준화들 대신에 들어섰다; 그래서 큰 덩어리 를 이루는 군집의 집합이 형성되었는데, 이 집합의 예속시키는 활동은 유례를 볼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앞서 이 집합이 어떤 기초둘 위에서 작동하는가를 보았다: 첫째 기초는 내재의 터전 전체이다; 이 터전은 언 제나 더 큰 규모로 재생산되며, 또 필요한 만큼 자기의 공리를 끊임없이 증가시키며, 심상들 및 심상들의 십싱들로 자기를 채워, 이 심상들을 통 해서 욕망은 자기자신의 억압을 욕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제국주의). 둘째 기초는 전례 없는 털규준화와 탈토지화이다; 이것들은 탈규준화하
고 탈토지화한 흐름들 간에 微分의 比의 체계로서 하나의 접합을 설립하 는데, 이 때문에 사회적 등기와 사회적 억압은 이제 더 이상 신체들과 인물들에 직접 관계할 필요조차 없고, 오히려 신체들과 인물들에 선행한 다(공리계, 조정과 적용). 셋째 기초는 흐름의 잉여가치로서 규정되는 잉 여가치이다; 이 잉여가치룰 강탈하는 일은 동질적이고 동일한 규준에 속 하는 두 양 간의 단순한 산술적 차이에 의하여 행해지지 않고, 바로 동 일한 힘을 지니고 있지 않는 이질적인 양둘 간의 미분의 비에 의하여 행 해진다. 여기서 이질적인 양둘이란, 자본주의의 산업적 본질 속의 자본의 흐름과 인간적인 잉여가치로서의 노동의 흐름이요, 자본주의의 通貨登記 에 있어서의 융자의 흐름과 지불 혹은 수입의 흐름이요, 자본주의의 상 업 및 은행의 기능에 있어서의 기계적 잉여가치로서의 시장의 흐름과 기 술혁신의 흐름이다(내재의 첫째 양상으로서의 잉여가치). 넷째 기초는 무자 본비주한의 지 17]배 계계의급 이머다슴;이 이될 수계록급 은더 기욱계 무를자 자비기하에게게 된봉다.사 하:이 게런 하의지미 에않서고 자특 이한 이 계급은 막대하기는 해도 노동자들의 임금수입과 산술적 처이밖 에 없는 수입을 자기에게 끌어들이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한편으로는 자 기에게 어울리지도 않고 자기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는 그리고 임금 및 이윤과는 通約될 수 없는 큰 흐름의 창조자, 조정자 및 관리자로서 더 깊이 작동한다. 이 큰 흐름은 순간마다 자본주의의 내적 경계선들, 이 경 계선들의 끊임없는 옮겨놓기 및 확대된 규모에서의 이 경계선들의 재생 산을 보여준다. (자본주의의 내재의 터전의 둘째 양상으로서의 내적 환 경선들의 작용. 이 작용은 〈융자의 큰 흐름-임금~ 환류-순이익의 합류〉의 순환관계이다.) 다섯째 기초는 생산 속에 반생산이 전파하는 일 이다; 이것은 잉여가치룰 실현하거나 흡수하는 것인데, 이 결과로 군사 적, 관료적 및 경찰의 조직이 경계 자체 속에 기초를 두게 되고, 경제는 욕망의 억압의 리비도적 공급들을 직접 생산한다. (자본주의의 내재의 셋째 양상으로서의 反生産 이것은 생산울 위하여 생산하지만, 자본의 조 건들 아래서 생산하는 자본주의의 이중의 본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 양 상들 중의 어느 하나도, 그 가장 작은 조작도, 그 가장 작은 산업적 혹
은 금융적 메커니즘도 자본주의기계의 發狂狀態와 그 합리성의 병리적 성격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없다. (그릇된 합리성 전체가 아니라, 이 병 리의, 이 발광상태의 참된 합리성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없다. 〈 왜냐하면 기계는 작동하고 있으니, 안심하세요. 〉 ) 이 기계는 미치게 되는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처음부터 미 쳐 있고, 거기서 그 합리성이 나온다. 『자본론 』 의 원천안, 마르크스의 우 울한 기분은 그가 이러한 기계에 정신이 팔린 데서 생긴 것이다: 어떻게 이 기계는 조립될 수 있었는가; 탈규준화와 탈토지화의 어떤 기초 위에 서 조립될 수 있었는가; 어떻게 그것은 항상 더 탈규준화하고 항상 더 탈토지화하여 작동하는가; 어떻게 그것은 공리계를 통하여, 흐름들의 접 합을 통하여 더 가혹하게 작동하는가; 어떻게 그것은 기계를 유지하는 灰色의 아저씨들이라고 하는 무서운 특이한 계급을 생기게 하는가; 어떻 게 그것은 혼자서 죽는 모험을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죽게 하는 모 험을 감행하는가; 그것은 욕망의 공급들을 끝까지 불러일으키는데, 이 공급들은 기만적이고 주관적인 이데올로기를 알지도 못하고, 우리로 하 여금 끝까지 자본의 현실 만세, 자본의 객관적 위장 만세!라고 부르짖게 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에서만을 제의하고는, 인간적인, 자유로운, 아버 지 같은 등의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있어본 적이 없다• 자본주의는 잔인 성의 원시체계와는 공동의 척도를 가지고 있지 않는 잔인성으로써 정의 되며, 공포의 전제군주체제와는 공통의 척도를 가지고 있지 않는 공포로 써 정의된다. 임금의 증가, 생활수준의 개선은 현실이다. 그러나 이 현실 둘은 이런 저런 보조적 공리에서 파생하는 것이요, 자본주의는 그 경계 선들을 확대함에 따라 이 공리를 자기의 공리계에 추가하는· 능력을 언제 나 가지고 있다. (뉴 딜을 수행하자, 강력한 조합들을 만들고 인정하자, 참여를 촉진하여 단 하나의 계급을 만들자, 러시아가 우리에게 다가왔으 니 우리도 러시아를 향하여 한 발자국 다가가자 동등.) 그러나, 이 작은 섬들을 좌우하는 커진 현실 속에서, 착취는 끊임없이 가혹해지고, 矢芝은 가장 과학적인 방식으로 조정되어, 〈유태인 문제〉형의 최종적 해결둘은 아주 세밀하게 준비되며, 제삼세계는 자본주의의 필요불가결한 부분으로.
서 조직된다. 항상 더 큰 규모로 자본주의의 내적 환경선들을 재생산하 는 일은 디음과 같은 많은 결과를 생기게 한다: 중심부에서 수준의 증진 들과 개선들을 허용하고, 중심부의 가장 가혹한 착취의 형태들을 변두리 로 옮기지만, 또한 중심부 자체에서 超押取의 구석전 곳들을 증가시키고, 소위 사회주의 조직체들을 쉽사리 허용한다. (키부츠 식 사회주의가 시 오니즘의 국가를 괴롭히지 않는 것처럼, 러시아의 사회주의는 세계 자본 주의를 괴롭히지 않는다.) 〈 공장들은 감옥이다, 공장은 감옥을 닮고 있 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감옥이다 〉 라고 하는 것은 은유로써 확인되는 것 이 아니다. 이 체계 안에서는 모든 것이 마쳐 있다: 이것은 지본주의기계가 탈규 준화하고 탈토지화한 흐름들에서 양분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 의기계는 이 흐름들을 더욱더 탈규준화하고 탈토지화하지만, 이 흐름들 을 공리계 장치 속을 통과시킴으로써 그렇게 한다. 이 장치는 이 흐름들 울 접합시키고, 또 이 접합점들에서 擬似-規準들과 인공적 재토지화들을 생산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공리계는 항상 새로운 토지들을 생 겨나게 하고 새로운 전제주의 원국가를 다시 생겨나게 하지 않고서는 마 지 않는다. 자본의 돌연변이하는 큰 흐름은 순수한 탈토지화이지만, 그것 이 지불수단들의 환류로 변환될 때에는 그만큼의 재토지화를 조작한다. 제삼세계는 자본주의의 중십부와 관련되어 있음으로써 탈토지화하고 있 지만, 지본주의에 속하며, 자본주의의 순전히 변두리 토지를 이루고 있 다. 계급과 이익의 선의식적 공급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그래서 누구보다 도 먼저 자본가들이 자본주의에서 이익을 얻고 있다. 이렇게 뻔한 것을 확인하는 것은 다른 것 때문이다: 자본가들이 자본주의에서 이익을 얻는 것은 그들이 자본주의에서 끌어내는 이윤의 칭수를 통해서만인데, 이 이 윤의 징수는, 아무리 막대하더라도, 자본주의를 명확하게 밝혀주는 것이 못 된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명확히 밝혀주는 것에 대해서는, 이윤을 좌 우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본가들이 무의식적-리비도적인, 전혀 다른 성 질의 욕망의 공급을 행한다. 이 공급은 좌우되는 이윤에 의하여 단순하 게 설명되지 않고, 도리어 작은 자본가가 큰 이윤도 희망도 없이 자기의
공급둘 전체를 전면적으로 유지해 간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이 공급을 행하는 것은 큰 흐름을 공급하는 리비도인데, 이 리비도는 그 자체로는 어떤 것에도 변환되지 않고, 그대로로는 領有되지도 않는, 〈 소유물도 아 니고 부도 아닌〉 큰 흐름을· 공급하는 리비도이다―_이것은 현대 경제학 자들 가운데서 베르나르 슈미트가 말한 것인데, 그는 우리에게는 그야말 로 망상적안 경제체계에 대하여 망상적인 해석을 주는 데 있어 비길 데 없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그는 끝까지 갔다.) 요컨대, 참으로 무의식적인 리비도는 이해를 초월한 사랑이다: 이 기계는 정말 엄청난 기계이다. 따라서 방금 위에서 언급한 동어 반복적 확인에서부터 따져보 면, 그들의 이익의 선의식적 공급들이 자본주의의 방향으로 가지 않는 혹은 가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어울리는, 혹은 자본주의를 전혀 위협하지 않는 무의식적 리비도 공급을 유지하고 있디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경우가 있다. 첫째 경우에, 이 사람들은 자기의 선 의식적 이익을 임금의 증액과 생활수준의 개선에만 국한시킨다; 깅력한 조직들이 그들을 대표하지만, 이 조직들은 그 목표들의 성질이 문제되자 마자 아니꼬운 것이 되고 만다. (〈정말 당신들은 노동자가 아니에요, 당 신들은 실제의 투쟁들에 대해서 아무런 관념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체 계를 더 찰 경영하기 위하여 이득을 공격합시다. 깨끗한 파리가 되도록 두표하세요, 어서 오십시오 브레즈네프씨.〉) 사실, 어떻게 지본주의 체계 의 한복판에서 자기자신이 파서 자기의 이익을 묻어놓은 구멍 속에서 그 이익을 찾지 않겠는가? 둘째 경우에는, 돈-자본의 신체의는· 다른 신체를 전제하는, 새로운 이익, 새로운 목표들의 공급이 정말 있다 . 착취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선의식적 이익을 자각하고 있다. 이 이익은 참 으로 혁명적인 것이요, 선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큰 절단이다. 그런데 리비 도가, 무의식의 차원에서, 선의식의 절단과 같은 양식을 갖게 되는 혁명 적 절단을 행하려면, 리비도가 이 새로운 목표들에 대웅하는 하나의 새 로운 사회적 신체를 공급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정녕, 무의식과 선 의식의 두 차원은 동일한 양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리비도에 의하여 충 만한 신체로서 공급된 새로운 사회체는 자율적 토지로서 아주 잘 작동할
수 있으나, 이 토지는 자본주의기계 속에 붙들리고 끼워넣어지고, 또 그 시장의 터전 안에 위치가 정해질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돌연변이하 는 자본의 큰 흐름은- 그 경계선들을 더 먼 데로 밀어붙이고, 새로운 공 리들을 추가하고, 욕망을 자기의 확대된 경계선들의 · 가동적인 테두리 안 에 유지하기 때문이다 . 실제로 리비도의 무의식적이고 혁명적인 철단 없 이, 선의식의 혁명적 절단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사태의 순서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겠다: 먼저 실제의 리비도의 혁명적 절단이 있고, 그 다음에 이 절단이 목표들과 이익의 단순한 혁명적 절단에로 이행하고, 마지막에, 이 절단이 오로지 특수한 것인 재생된 토지, 즉 자본의 충만한 신체 위의 하나의 특수한 신체를 다시 형성한다. 예속집단들이 혁명적인 주체집단들로부터 끊임없이 파생한다. 공리가 하나 더 생긴다. 이것은 추 상회화의 경우보다 더 복잡하지 않다. 모든 것은 마르크스와 더불어 시 작되고, 레닌으로 더불어 이어지고, 〈 어서 오십시오, 브레즈네프씨〉로 끝 난다. 혁명가들은 아직도 이런 식으로 혁명가에게, 혹은 새 지사의 등장 울 요구하는 마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가? 또 누가 언제부터 사태가 악 화되었는가고 묻는다면, 어디까지 거슬러 울라가야 하는가? 레닌까지인 가, 마르크스까지인가? 갖가지 서로 다른 그리고 대립하는 많은 공급들· 이 콤플렉스들 속에 공존할 수 있다. 이 콤플렉스들은 오이디푸스 콤플 렉스가 아니고, 역사적인 사회 터전, 이 터전의 선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갈등들과 모순들에 관련된 콤플렉스들이다. 이 콤플렉스들에 대하여는, 이것들이 오이디푸스, 아버지-마르크스, 아버지-레닌, 아버지_브레즈네 프에 포개진다고만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점점 덜 이런 것을 믿지만, 이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그리人 F 집두의 종교 와 같아서, 바로 신앙의 결여로써 생명을 유지하고 있고, 신앙이 필요 없 는 것이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믿어져 온 것 전부의 얼룩진 그립. 그런데 여기서 역도 역시 침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端末을 통하여 도 주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생산들, 그 예술, 그 과학은 탈규준 화하고 탈토지화한 흐름들을 형성한다. 이 흐름들은 거기 대응하는 공리 계에 복종할 뿐만 아니라, 공리계의 그물의 눈둘을 뚫고, 재규준화들과
재토지화들 밑으로, 자기의 물줄기의 몇 개를 통과시키기도 한다. 이번에 는 주체집단들이 예속집단들의 파괴를 통하여 파생한다. 자본주의는 끊 임없이 이 흐름들에 대하여 울타리를 치고, 이 흐름들을· 절단하고, 철단 울 넓혀가지만, 이 흐름들은 자본주의에 대항하고 자본주의를 찢는 분열 들을 따라 흘러넘치고 자기들 자체를 서로 교감시키기를 그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항상 자기의 내적 경계선들을 확대할 준비가 되어 있으나, 여전히 의적 경계선에 의하여 위협을 받고 있다. 이 의적 경계선은 내적 경계선들이 확대되면 될수록 그만큼 내부로부터 자본주의에 더욱 들이닥 쳐 자본주의를 금가게 하는 위험을 몰아온다. 이런 까닭에 도주선들은 기이하게도 창조적이고 적극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사회 터전의 공급을 구성하는데, 이 공급은 이것에 반대되는 공급 못지않게 완벽하고 전체적 이다. 편집병적 공급과 정신분열 기질의 공급은 이를테면 무의식적인 리 비도 공급의 대립하는 두 극이다. 이 두 극의 하나는 욕망하는 생산울 주권형성조직체와 이 조직체에 유래하는 군집집합에 종속시키며, 다른 하나는 이 종속관계를 뒤집어 역전시키고, 권력을 전복하여 군집집합을 욕망의 생산들의 분자적 다양성들에게 종속시킨다. 그래서 망싱이 사회 터전과 의연을 같이한다는 것이 사실일전대, 모든 망상에는 두 극이 공 존하고, 혁명적인 정신분열 기질의 공급의 단편들이 반동적인 편집병적 공급의 무더기들과 동시에 생기는 것을 보게 된다. 두 극 사이를 왔다갔 다하는 운동이 망상을 구성하기조차 한다. 하지만, 이 전동은 등질적인 것이 아니고, 정신분열 기질의 극은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편집병적 극 에 비하여 차라리 잠재적인 것으로 보인다. (예술과 과학의 현실성이 주 권형성조직체들에 의하여 쉽사리 통제되는 터에, 어떻게 과학과 예술을 잠재적인 것 이의의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가?) 이것은 무의식적인 리비 도 공급의 두 극이 이익의 선의식적 공급들과는 동일한 관계도 동일한 관계의 형식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한편으로 이익의 공급 은 욕망의 편집병적 공급을 근본적으로 숨기고 있고, 또 숨기고 있는 그 만큼 편집병적 공급을 강화한다: 이익의 공급은 욕망의 편집병적 공급의 비합리적 성격을 이익둘의 현존하는 질서, 죽 원인들과 수단들, 목표들과
근거들의 현존하는 질서 밀에 숨간다. 혹은 이익의 공급 자체가 편집병 적 공급을 합리화하는 이익둘을 생기게 하고 창조한다. 또 혹은 새로운 사회체가 혁명의 우월한 이익들의 이름으로 또 인과관계의 불가피한 연 계들의 이름으로 욕망의 생산 전체를 자기에게 종속시키기를 계속하는 한, 실제로 혁명적인 선의식적 공급이 리바도의 차원에서 편집병적 공급 울 모두 유지한댜 다른 경우, 이와 반대로 선의식적 이익이 다른 종류의 공급의 필연성을 발견하고, 인과관계의 일종의 단절을 행하여 목표들과 이익들을 문제삼아야 한다. 이 경우 문제는 앞의 경우와 동일하지 않다: 충만한 신체로서의 새로운 사회체를 건설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고 사 회의 충만한 신체의 다른 국면으로- 옮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 국면에 서는 욕망의 분자적 조직체들이 자기를 작동시키고 자기를 등록시키고 큰 덩어리를 이루는 새로운 집합을 자기에게 예속시켜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리비도의 무의식적인 혁명적 절단과 공급에 도달한다. 그런 데 이렇게 되는 데에는 인과관계의 단절이라고 하는 희생을 치러야만 하 고, 또 이 단절의 덕택으로 그것이 가능하다. 욕망은 하나의 流配이다. 욕망은 기관들 없는 신체를 횡단하는 하나의 굉야, 우리로 하여금 이 신 체의 한 국면에서 다른 국면으로 옮아가게 하는 하나의 광야이다. 그것 은 결코 개인적 유배가 아니고, 결코 개인적 광야가 아니라, 공동의 유배 요 공동의 광야이다. 혁명의 운명이 착취딩하고 지배받고 있는 대중의 이익에 전적으로 결부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그 런데 문제는 이 결부의 성질에 있다. 그것은 일정한 인과적 결부인가 그 렇지 않고 다론 종류의 연결인가. 중요한 것은 혁명의 참재력이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은 착취당하고 있는 대중과의 관계 자체 에서 실현되는가 그렇지 않고 주어전 체계의 〈가장 약한 고리들〉과의 관계에서 실현되는가. 착취당하고 있는 대중이나 가장 약한 고리들은 새 로운 사회체를 추진하는 원인들과 목표들의 질서 속에서 자기들의 활동 울 전개하고 있는가, 혹은 이와 반대로 욕망이 뜻밖에 갑자기 돌입하여 원인들 및 목표들과 손을 끊고 사회체를 그 다른 국면으로 되돌리는 그 돌입의 장소요 동인인가? 예속집단들에서는 욕망이 아직도 원인들과 목
표들의 질서에 의하여 규정되며, 주권형성조직체 아래 큰 집합들을 결정 짓는 거시적 관계들의 체계 전체를 짜고 있다. 이와 반대로 주체집단들 은 원인관계의 단철, 혁명적인 도주선을 유일의 대의명분으로 삼는다. 그 래서, 이러한 단절을 가능하게 한 객관적 인자들, 가장 약한 고리들 같은 것을, 인과적 계열들 속에서 찾을 수 있고 또 찾아야 되겠지만, 욕망과 그 돌입의 질서만이 어떤 순간에, 어떤 장소에서 그 단절이 취하는 현실 성을 설명해 준다 .66) 어떻게 모든 것이 공존하고 뒤섞이는가 하~즌 것은 쉽사리 알 수 있는 일이다: 〈 레닌주의의 절단 〉 에서는, 볼셰비키 집단 혹 은 적어도 이 집단의 일부가, 세력들 간의 관계들의 예측된 인과적 질서 . 를 따르지 않고 (도주나 〈 혁명적 패배주의 〉 같은) 톰바구니에 빠짐으로써 사태를 유달리 급전전시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임박한 가능성을 알 아차릴 때, 모든 것이 정말 공존한다: 이 가능성을 믿지 않는 몇몇 사람 들에게 있어서의 아직 주저하는 선의식적 공급둘, 새로운 사회체의 가능 성을 〈보고는 있으나〉 이 사회체를 이미 딩을 새로운 주권형태로 삼는 큰 덩어리를 이루는 인과관계의 질서 속에 꽉 붙들어두는 사람들에게 있 어서의 혁명적인 선의식적 공급둘, 끝으로 욕망의 질서 속에서 인과관계 를 정말 단절하는 무의식의 혁명적 공급들이 공촌한다. 그래서 동일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갖가지로 서로 아주 디른 형의 공급들이 이런저런 순 간에 공존할 수 있고, 두 가지 형의 집단이 서로 침투할 수 있다. 이것 은 이 두 집단이 칸트에게 있어서의 결정론과 자유 갇은 것이기 때문이 다: 이 집단들은 그야말로 동일한 〈대상 〉 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적 생산 은 결코 욕망하는 생산과 다른 것이 아니며, 또 거꾸로, 욕밍하는· 생산이 결코 사회적 생산과 다른 것이 아니지만, 이 두 집단은 동일한 법칙이나 동일한 체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혁명적 참재력의 현실화는· 이 참재력 이 들어 있는 선의식적 인과관계의 상태에 의하여 설명되기보다는 오히 려 어떤 정확한 시간에 실제로 생기는 리비도적 절단에 의하여 더 잘 설 명된다. 이 절단은 그 유일의 원인이 욕망인 분열, 죽 인과관계의 단절이 66) 주체집단들의 분석, 욕망 및 인과관계와 이 집단들의 관계들에 관하여는 cf. J.P . Sartr e , Criti qu e de la rois o n dia l ectiq u e.
다. 이 단절은 현실에 입각하여 역사를 다시 쓰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 이요, 또 모든 것이 가능한 이상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을 생산한다. 물론, 이 분열은 원인들, 목표들 및 이익들이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숨은 곳에 서 작용함으로써 준비되었다. 물론, 원인들의 이 질서는 새로운 사회체와 그 이익들의 이름으로 다시 닫혀지고 터전 틈을 막아버릴 위험성이 있 다. 물론, 역사는 집합의 법칙 및 큰 수의 법칙과 동일한 법칙둘에 의하 여 지배되기를 그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우리는 언제나 사후에 말할 수 있다. 남은 문제는 분열이 목표도 없고 원인도 없는 욕망에 의해서만 현실적으로 존재하게 되고 욕망은 분열에 길을 열어주고 분열과 일체를 이룬다고 하는 것이댜 분열은 원인들의 질서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분열 이 현실적인 것이 되는 것은 다른 질서에 속하는 어떤 것에 의해서만이 다. 죽 욕망, 광야-욕망, 혁명적 욕망의 공급에 의해서만이다. 그리고 이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믿을 파헤쳐 자본주의를 서서히 파괴하는 것이 다: 혁명은 어디로부터, 또 어떤 형태로 착취당하고 있는 대중 속에 도 래할 것인가? 그것은 마치 죽음과 같다: 어디에, 언제? 그것은 탈규준화 한, 탈토지화한 하나의 흐름인데, 이 흐름은 너무 멀리 흐르고, 너무 가 늘게 절단하여, 자본주의의 공리계를 빠져나간다. 그것은 카스트로 같은 사람, 어떤 아랍사람, 미국의 어느 흑표범단원(흑인 과격파), 지평선 위의 어느 중국인인가? 681 ;1 ~의 한 사나이, 공장 굴뚝 위에 隱者처럼 버티 고 서 있는 프랑스 태생의 모택동주의자인가? 이미 있는 터진 틈을 틀어 막기 위하여 언제나 공리를 하나 추가한다. 파시스트의 연대장들이 모택 동의 책을 읽기 시작한다. 이제 사람들은 불의의 습격을 당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카스트로는 그 자신에게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空胞둘 을 분리시킨다; 게토(격리된 집단의 거주지구)를 만든다; 노동조합들에 도 움을 호소한다; 〈설득〉의 가장 음험한 형태들을 발명한다; 이익의 억압을 강화한다-그러나 욕망의 새로운 돌입은 어디로부터 올 것인가 ?al) 여기까지 이 책을 읽어온 사람들은 아마 우리를 비난할 것이 많을 것 67) 앙드레 글위스망 Andre G lii cksmann 은 Le Di sc ours de la gue rre, (L'Heme, 1967) 에서 반혁명적인 이 특별한 공리계의 본성을 분석하였다.
이다; 예술과 심지어 과학의 순수한 참재력을 너무 믿고 있다; 계급 및 계급투쟁의 역할을 부인하거나 과소평가하고 있다; 욕망의 비합리주의를 옹호하는 일에 열성을 다하고 있다; 혁명가와 정신분열자를 동일시하고 있다;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이 따위의 모든 함정에 빠지고 있다――이 런 비난들을 할는지 모른다• 이렇게 비난하는 것은 이 책을 잘못 읽은 릿이겠다. 찰못 읽은 것과 숫제 읽지 않은 것 중 어느 것이 더 니온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들이 미처 생각 못 한 더 중대한 다른 비난들 도 틀림없이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앞의 비난들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길이 말하련다. 첫째로, 예술과 과학은 혁명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이 밖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전문가들이 불가피하게 사용하는 시 니피에들과 시니피앙의 관점에서 예술과 과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덜 따질수록 이 참재력은 그만큼 더 많이 나타난다; 예술과 과학은 더욱더 탈규준화하고 탈토지화한 흐름들을 사회체 속에 통과시킨다; 이 흐름들 은 모든 사람이 느껴 알 만한 것이요, 사회적 공리계를 더욱더 복집하게 하고 더욱더 포화상태에 이르지 않을 수 없게 하여, 마침내 예술가와 과 학자는 예술과 과학에 대하여 무지하고 특히 이것들을 거세하려 드는 국 가의 권위주의적인 계획들에 반항하여 혁명적인 객관적 상황에 참여할 결심을 할 수 있게 된다. (국가가 거세자인 것은 국가가 그야말로 예술 의 영역의 오이디푸스, 그야말로 과학의 영역의 오이디푸스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부구조 자체 속에 근거를 두고 있는 계급 및 이익의 선의식적 공급둘의 중요성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이 공급들이 하平구조 속에서 다른 본성을 지닌 리비도 공급들의 지표가 되 는 그만큼, 또 이 리비도 공급들과 화해하거나 대립할 수 있는 그만큼 계급 및 이익의 선의식적 공급들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어떻게 혁명은 배신을 당하는가?〉란 문제를 제기하는· 한 방식이다. 배신은 기회를 기다리지 않고 처음부터 거기 있다고 하는 것 은 이미 말한 바 있는 것이다. (혁명 집단들 속에는 무의식적인 편집병 적 공급들이 존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욕망을 혁명의 결정기관 으로서 끌어댄 것은, 자본주의가 이익의 데모들은 잘 견디어낼 수 있지
만 욕망의 어느 데모도 견디어내지 못한다고 우리가 생각하고 있기 때문 이다. 욕망의 데모는 자본주의의 기초 구조들을 유치원의 차원에서조차 폭파시키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모든 합리성이 불합리한 것임을 믿는 것 처럼 욕망을 믿고 있다. 이것은 욕망이 결여, 즉 갈망이나 열망이 아니 고, 욕망의 생산이요 또 생산하는 욕망이요, 욕망의 현실 내지 그 자체 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우리는 혁명가가 정신분열자이다, 혹 은 역으로 정선분열자가 혁명가이다라고는 절대로 생각궁}지 않는다. 오 히려 우리는 끊임없이 임상실체로서의 정신분열자와 과정으로서의 정신 분열중을 구별하여 왔다. 그런데 전자는 억압이 과정 자체에 강요하는 과정의 중단, 공전 혹은 목적론적 착각들과의 관련에서만 규정되는 것이 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정신분열적 과정과 정신분열자의 생산을 혼동하 는 일을 될수록 피하기 위하여, 비리도의 사회 터전 꽁급의 정신분열 기 질의 극에 대해서만 논하였다. 정신분열증적 과정 (정신분열 기질의 극) 은, 편집병적 수법이 반동적이고 파시스트적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 에서, 혁명적이다; 가족주의에서 전적으로 벗어났다고 해서, 이 정신의학 적 범주들이 우리로 하여금 정치-경제적 규정들을 이해하게 하지는 못 할 터이다. 사태는 이와 정반대이다. 다음으로, 특히 우리는 정신분열자-분석이 그 자체로는 엄밀한 의미에 서 아무런 정치적 강령도 제안할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도망 갈 궁리를 하고 있지 않다. 만일 정신분열자_분석이 정치적 강령을 하나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기괴하기도 하고 불안케 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정신분열자-분석은 자기를 하나의 당파로 보지도 않고, 하나의 집단으로 보지도 않으며, 대중의 이름으로 이야기한다고 주장하지도 않 는다. 어떤 정치적 강령이 정신분열자-분석의 테두리 안에서 꾸며진다고 는 생각되지 않는다. 끝으로 정신분열자-분석은 무엇이든 어떤 것의 이 름으로는, 더군다나 정신분석의 이름으로는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인 상에 지나지 않지만, 정신분석에서는 일이 잘 되고 있지 않다. 처음부터 그렇다는 인상을 받는다. 우리는 아직도 너무나 전문가처럼 이야기하고 있는데, 오히려 비전문가로서 말하고 싶다. 어떤 이가 우리에게 지금까지
정신분열자를 한 사람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고 묻는다면, 아닙니다, 아닙 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소라고 대답하겠다. 만일 어떤 이가 정신분석에 서는 일이 잘 되고 있다고 본다면, 우리는 이 사람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또 우리가 말한 모든 것을 철회한다. 그렇다면, 정신분열자-분석이 한편으로 정치에 대해서, 디론 한편으로 정산분석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 는 어떤 것인가? 모든 것은 욕망하는 기계들과 욕망의 생산 주위를 돌고 있다. 정신분열자-분석은 그 자체로는 혁명으로 말미임아 생기는 사회체 의 본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혁명 자체와 같은 가치 를 지니고 있다고는 철대로 주장하지 않는다. 어떤 사회체가 주어졌을 때, 정신분열자-분석은 다만, 그 사회체가 욕망하는 생산에 대해서 어떤 자리를 남겨두는가, 욕망은 거기서 어떤 동력의 역할을 맡고 있는가, 욕 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은 체제를 달리하되 생산인 점에서 모든 면에 서 동일한 생산인 터에, 이 두 가지 체제의 생산은 거기서 어떤 형태들 로 화해를 하고 있는가__그러므로 충만한 신체로서의 이 사회체 위에 서 한 국면으로부터 다른 국면으로 옮아가는 가능성, 죽 사회적 생산의 큰 덩어리를 이루는 집합둘이 조직되는 국면으로부터 욕밍하~근 생산의 분자적 다양성들이 형성되는 덜 집합적인 다른 국면으로 옮아가는 가능 성은 있는가-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이 체제를 달리히는· 동일한 생산인 터에, 그러한 사회체는 욕망하는 생산이 사회적 생산을 예속시키 기는 하되 파괴하지는 않는 권력의 전복을 견딜 수 있는가, 또 어느 점 까지 견딜 수 있는가__주체집단들의 형성이란 것이 도대체 있는가, 또 있다면 어떻게 있는가 등을 문제삼는다. 그래서 누가 우리에게 우리가 게으름에 대한, 혹은 비생산성에 대한, 혹은 꿈의 생산과 환상의 생산에 대한 저 유명한 권리들을 요구하고 있다고 반박한다면 , 다시 한번 우리 는 만족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이와 반대되는 것, 그리고 욕망 하는 생산은 현실적인 것을 생산한다는 것, 또 욕망은 환상 및 꿈과 아 무 관계도 없다는 것을 말했기 때문이다. 라이히와는 반대로, 정신분열 자-분석은 정치경제학과 리비도경제학 간에 아무런 본성상의 구별도 짓 지 않는다. 정신분열자-분석은 사회체 위에서 사회적이고 기술적인 기계
적 지표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만을 묻는다. 이 지표들은 욕망하는 기계 둘에 대하여 자기를 열고, 이 기계들의 부품들, 돕니바퀴 장치들 및 동력 둘 속에 들어가는데, 이것은 이 지표들이 이 기계들을 그 자체의 부품들-, 즉 톱니바퀴 장치들과 동력들 속에 들어가게 하는 한에서이다 . 누구나 한 정신분열자가 한 기계임을 알고 있다 ; 모든 정신분열자가 이것을 말 하고 있다. 작은 죠이 J oe y만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정신분 열자들이 죽은 노동의 살아 있는 기계들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인데, 이 때 사람들은 이 기계들에 대하여, 자본주의 속에서 조직하는 바와 같은 살아 있는 노동의 죽은 기계들을 대립시킨다. 혹은 이와 반대로 욕망하 는 기계들, 기술기계들 및 사회기계들이 정신분열증적 생산의 과정 속에 서 일체를 이루고 있는가를 아는 것인데, 일체가 되어 있으면 이 과정은 더 이상 정신분열자를 생기게 하지 않는다. 모오 마노니는 『長官들에게 의 편지』 속에서 〈 공부할 능력이 없다는 선언을 받은 청년들 중 한 사 람은 역학을 공부한다는 조건에서는, 셋째 단계의 클래스를 훌륭하게 따 라가고 있다. 역학이 그를 열중시킨다. 자동차 정바공이 그의 가장 좋은 치료자였다. 만일 우리가 그에게서 역학을 제거한다면 그는 다시 정신분 열자가 될 것이다 〉 라고 적고 있는데, 이때 그녀는 作業療法을 찬양하려 하고 있는 것도 아니요, 이 요법이 사회적 적응에 이바지한다는 것을 찬 양하려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사회기계, 기술기계, 욕망하는 기 계가 밀접하게 일체를 이루어 자기들의 체제를 서로 소통시키고 있는 점 울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이 사회가 이렇게 할 수 있는가, 또 이렇 게 할 수 없다면 이 사회가 무슨·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를 묻고 있다. 그래 서 사회기계들, 기술기계들, 과학기계들, 예술기계들이 혁명적일 때, 이것들 의 방향은 다음과 갇다: 이것들이 자기들 자신의 체제 속에서 이미 그 지 표가 되어 있는 욕망하는 기계들을 형성하는 것, 동시에 욕망하는 기계들이 욕망의 정립으로서의 자기들의 체제 속에서 이것들을 형성하는 것. 끝으로 정신분열자-분석의 부정적 및 적극적 임무의 전체에 있어서, 정신분열자-분석과 정신분석의 대립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두 종류의 무의식 혹은 무의식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대립시켰다; 하나
는 정신분열자-분석적, 다른 하나는 정신분석적 : 하나는 정신분열중적, 다른 하나는 오이디푸스적-신경병적 : 하나는 추상적이고 비형상적, 다른 하나는 상상적이다. 그러나 또한, 하나는 정말 구체적, 다른 하나는 상징 적 : 하나는 기계적, 다른 하나는 구조적 ; 하나는 분자적, 미크로 심리적, 微小物硏究賜 다른 하나는 큰 덩어리를 이루는 혹은 통계적 ; 하나는 유 물적, 다른 하나는 이데올로기적 : 하니는 생산적, 다른 하나는 표현적이 다. 우리는 어떻게 정신분열자-분석의 부정적 임무가 격렬하고 거칠어야 하는가를 보았다. 죽 탈가족화하고, 탈오이디푸스화하고, 탈거세하고, 탈 남근화하고, 극장 • 꿈 • 환상을 파괴하고, 탈규준화하고, 탈토지화해야 하 는가를 보았다-이것은 끔찍한 t勤쁜요, 악의에 찬 활동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동시에 행해진다. 왜냐하면, 동시에 과정이, 죽 욕망하는 생산 의 과정이 정신분열자-분석자의 機械技師的 임무를 규정하는 분자적 도 주선들을 따라 해방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주선들은 여전히 큰 덩어리 를 이루는 공급둘로 가득 차 있으며, 이 공급들은 사회 터전 전체에 얽 혀 있다. 따라서 정신분열자-분석의 임무는 결국 각 경우에 사회 터전의 리비도 공급들의 본성, 이 공급들의 가능한 내부적 갇동들, 이 공급들과 동일한 사회 터전의 선의식적 공급들과의 관계들, 이 두 가지 공급들 간 의 가능한 갈등들, 요컨대, 욕망하는 기계들과 욕망의 억압 간의 상호작 용 전체를 발견하는 것이다. 과정을 완수하는 것이지, 과정을 멈추게 하 는 것도 아니요, 과정을 공전시키는 것도 아니요, 과정에다가 목표를 주 는 것도 아니다. 흐름들의 탈토지화, 탈규준화는 지나치게 행해진다는 일 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새로운 대지(〈진실로 대지는 언젠가는 치료의 장 소가 될 것이다〉)는 과정을 멈추게 하거나 과정에다가 목표들을 고정시켜 주는 신경증적 혹은 도착적인 재토지화들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새 로운 대지는 이제 더 이상 뒤에 있지도 않고 앞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의 완성과 일치한다. 이 과정은 전진하고 있는 한, 그리고 전전하는 그만큼 언제나 이미 성취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어떻게 정신분열자-분석의 이 갖가지 임무가 효과적으로 동 시에 수행될 수 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다.
부록 욕망하는 기계들을 위한 프로그램의 총괄적 검토 1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발한 가정 용구들 간의 상대적 차이들-환상들 즉 상상의 투사체계들과의 차이들-道具들 측 현실적인 투사체계들과 의 차이들――우리로 하여금 욕망하는 기계들을 알아보게 하는 도착기계 들과의 차이들 욕망하는 기계들은 레뻔느 Le pi ne 콩쿠르의 기발한 가정용구들 혹은 작은 발명품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 혹은 오히려 관계가 있다고도 하겠 는데, 이것은 다만 역방향에서이다. 왜냐하면 기발한 가정용구들, 새로운 고안물들 및 幻想둘은 욕망하는 기계둘의 殘餘物이요 밖에 있는 지본주 의 시장 혹은 안에 있는 정신분석 시장의 득수한 법칙들에 종속하고 있 기 때문이다. (환자의 체험상태들을 축소하여 환상들로 옮겨 표현하는 것은 정신분석의 〈계약〉에 속한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실제의 기계들이 나 이 기계들의 단편들을 개조하여 상징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것이라 생 각될 수도 없고, 상상적으로- 작동하는 환상적인 기계들의 꿈이라 생각될 수도 없다. 전자처럼 생각되거나 후자처럼 생각되거나, 거기서는 생산의 境域이 개인의 소비의 메커니즘으로 변환되는 것을 보게 된다. (심리적 소비 혹은 정신분석적 授乳로서의 환상들이 이렇다.) 기발한 가정용구들· 과 환상들의 영역에서는 정신분석이 느긋해져서, 그 모든 오이디푸스적 거세의 강박관념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예술적 및 문학적 상상은 부조리한 기계들을 많이 생각해 낸다: 이
기계들이 부조리한 것은 발동기나 에네르기源이 분명히 결정되어 있지 않음으로써, 혹은 작동하는 부품들의 조직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함으로써, 혹은 傳動 메커니즘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함으로써이다. 가령 〈불가능성〉 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맨 레이 Man Ra y의 『댄서-위험』은 두 단계의 부조리를 제시한다: 운동을 전달하기 위한 큰 車輪도 작동할 수 없고, 톱니로 맞물려 있는 바퀴의 그룹들도 작동할 수 없다• 이 기계가 스페인 인 댄서의 旋回를 나타낸다고 여겨지는 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이 기계는 그 부조리를 통하여, 한 기계가 그 자체 댄서의 운동을 실현할 수 없음을 기계의 메커니즘으로 옮겨 나타내고 있다(댄서는 기계 가 아니다). 그러나 또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이 기계에는 한 댄 서가 기계의 부품으로서 있어야 한다: 기계의 이 부폼은- 한 댄서일 수 밖에 없다; 이 기계에서 댄서는 한 부품이다. 이제 여기서는 인간과 기 계롤 비교 대조하여 양자 간에 대응, 연장, 대용의 관계가 가능한가 가능 하지 않은가를 평가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 이 양자 간 에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하여 어떻게 인간이 기계와 더불어 부품이 되는 가, 혹은 다른 것과 더불어 부품이 되어 하나의 기계를 구성하는가를 밝 히는 것이 문제된다. 여기서 다른 것이란 도구, 혹은 심지어 동물, 혹은 다른 사람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기계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隱唯로써가 아니다: 아주 명확하게 규정된 조건들 아래 인간이 그 부분 을 이루고 있는 전체에 회귀함으로써 이 성격이 전달되자마자 인간은 기 계가 된다. 大草原의 조건들 아래에서는 인간 • 말 • 활 전체가 유목민의 한 戰明親硏룹 형성한다. 대제국들의 관료기구의 조건들 아래에서는 인간 들이 하나의 노동기계를 형성한다. 고대 그리스의 密集軍團의 조건들 아 래에서는 그리스의 보병이 그의 무기와 함께 기계가 된다. 사랑과 죽음 의 위험한 조건틀 아래에서는 댄서가 발놀립과 함께 기계가 된다……. 우리는 기계란 낱말의 은유적 사용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기 계의 기원에 관한 (확실치 않은) 가설에서 출발하고 있다: 임의의 요소 들이 기계가 되도록 결정되는 것은 회귀와 커뮤니케이션에 의해서라고 하 는 가설, 죽 〈기계의 門〉의 존재의 가설에서 출발한다. 인간공학이 이
맨 레이, 〈댄서-위험(불가능성)〉
관접에 접근하는 것은 그것이 더 이상 일반적인 문제를 적응이나 대 용―크기계에의 인간의 적응__인간에의 기계의 적응-으로써가 아니 라, 인간들-기계들의 체계들에서의 회귀하는 커뮤니케이션으로써 제기할 때이다. 사실, 인간공학이 이렇게 하면, 순전히 공업기술적인 어프로치를
지키려고 생각하고 있을 때에도, 적응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경우보다는 무한히 더 큰 뜻밖의 힘을 가지고 권력, 압제, 혁명, 욕망의 문제들을 제 기한다. 도구에서 착성을 얻는 고전적 도식이 하나 있다: 도구는 생물의 연장 및 두사요, 인간이 점차 자기를 자유로워지게 하는 操作이요, 기계는 도 구로부터 전화한 것이요, 기계는 더욱더 인간으로부터 독립해 가는 역전 이다……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도식에는 꼭 들어맞지 않 는 점이 많이 있다. 이 도식은 욕망하는 기계들의 실상 그리고 이 도식 이 전개되는 과정 전체에 욕망하는 기계들이 나타나 있다는· 것을 파악궁} 는 수단을 우리에게 하나도 주지 않는다. 이 도식은 생물학적이고 전화 론적인 도식이다. 이 도식은 기계를 도구에서 시작되는 기계의 계보의 어떤 시점에서 출현하는 것으로써 규정한다. 이 도식은 인간중심주의적 이고 추상적인 것이요, 생산력들을 이것들을 실현시키는 사회적 조건들 로부터 따로 떼어놓고, 모든 사회형태에 공통되는 자연-인간이라는 차원 울 끌어대고는 이 사회형태들에다가 진화관계들을 부여한다. 이 도식은 상상적이고, 환상적이고 唯我論的이다. 그것이 현실의 도구들, 현실의 기 계들에 적용될 때에도 그렇다. 왜냐하면 이 도식은 전적으로 投射의 假說 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도식을 채택하고 있는 로하 임 Rohe i m 은 도구의 물리적 투사와 환상의 심리적 투사의 類比롤 잘 지적하고 있다 .W 우리는 이와 반대로 처음부터 도구와 기계 시이의 본 성의 차이를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구는 접촉의 동인이요, 기계 는 커뮤니케이션의 인자이다; 도구는 투사적이요, 기계는 회귀적이다; 도구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에 관계하며, 기계는 덜 있을 법한 것의 있을 법함에 관계한다: 도구는 전체의 기능적 종합에 의하여 작동하고, 기계는 하나의 전체 속에서의 실제적 구별에 의하여 작동한다. 어떤 것 과 더불어 부품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연장하거나 무사하는 것, 혹은 자 기를 대체시키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후자는 커뮤니케이션이 없는 경우이다). 삐에르 오제 Pi er re Au g er 는 아무리 덜 있을 법해도 가능하 I ) Roheim , Psy c hanalys e et anth r op o log ie, tr. fr. Gall im ard, pp. 190-192.
기는 한 하나의 체계에서 의부세계의 실제로 구별되는 두 부분 간에 커 뮤니케이션이 있게 되자마자 거기에 기계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2) 하나의 동일한 것이, 〈 기계의 문 〉 이 그것을 차지하는가 차지하지 않는가 에 따라, 그것과 관계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따라, 도구가 될 수도 있고 기계가 될 수도 있다: 그리스의 장갑 보병의 무기는 먼 옛날부터 도구로 서 존재하고 있지만, 밀집군단과 그리스의 도시국가의 조건들 아래에서 는, 그것을 조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한 기계의 부품들이 된다. 전통적 도식을 따라 도구를 인간에 관계시키면, 어떻게 인간과 도구가, 실제로 기계화하는 결정기관과 관련하여, 기계의 뚜렷이 다른 부품들이 되는가 혹은 이미 그런가를 이해하는 가능성을 온통 배제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 는 도구에 선행하는 기계가 언제나 있다. 죽 일정한 시점에 어느 도구, 어느 인간이 문제되고 있는 사회체계 속에 기계의 부품으로서 들어가는 가를 결정짓는 문들이 언제나 있다고 생각한다.
2) Pie r re Aug er , L'homme mi cr oscop iqu e, Flammario n , p. 138.
욕망하는 기계들은 환상의 형태의 상상적 투사도 아니고, 도구의 형태 의 현실적 투사도 아니다. 두사의 체계 전체는 기계에서 파생하는 것이 요, 이것의 역이 아니다 . 그렇다면 욕망하는 기계를 일종의 내부투사로 써, 기계의 어떤 도착적 사용으로써 정의할 것인가? 전화망의 비밀을 예 로 들어보자: 자동응답 전화에 연결되어 있으나 개인이 사용하게 되어 있지 않은 전화번호로 호출하면 ( 〈 이 번호는 사용되지 않습니다……〉) 많은 소리가 겹쳐서 들린다. 이 소리들은 서로 부르고 응하며, 교착하며, 꺼지며, 지동응답 전화의 내부에서, 그 위로, 그 아래로, 이주 짧은 메시 지를 통과시킨다. 이 메시지들은 빠르고 단조로운 규준들 2 따라 言表된 다. 전화망에는 호랑이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심지어 오이디푸스 같 은 사람이 있다고도 말한다; 소년들이 소녀들을 불러내고, 소녀들이 소 년들을 불러내고 있다. 인위적인 도착된 사회들 혹은 미지의 사람들의 사회의 형태를 거기서 찾아볼 수 있다. 재토지화의 과정이 기계에 의하여 보증된 탈토지화의 운동에 접목되어 있다. (무선 송신자들의 사적인 그룹 둘은 이와 동일한 도착된 구조를 보여준다.) 공공의 기관들이, 干涉무늬
의 현상들 속에서, 기계의 사적 사용의 이 이차적 이익에 대해서 아무런 불편도 느끼지 않는디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거기에는 집단적인 것이기는 하나 한갓 도착된 주관성보다도 더한 무엇이 있다. 정상적인 전화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기계가 되려 해도 소용이 없다. 그 것은 기계의 일정한 부분으로서 작용하지 않는 소리를 투사하거나 연장 하는 일을 하고 있는 한 하나의 도구로서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소리가 기계와 더불어 부품을 이루고, 지동응답 전화에 의하여 우연한 방식으로 분배되고 보내져서, 기계의 부품들이 되는 한, 커뮤니케이션은 최고의 단계에 도달한다. 가장 있을 법하지 않은 것이 서로 相殺하는 소 리들의 집합의 엔트로피를 기반으로 하여 구성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저 기술적인 사회기계의 도착된 사용이나 적용이 있을 뿐만 아니 라, 또한 전정한 객관적인 욕망하는 기계가 겹쳐지는 일, 죽 기술적인 사 회기계의 한복판에 욕망하는 기계가 구성되는 일이 있다. 그리하여 욕망 하는 기계들이 한 사회의 인위적인 橫外에 탄생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이 기계들이 처음에 탄생했을 때와는 아주 다르게 발전하고 처음에 탄생 했을 때의 형태들을 닮지 않기는 해도 말이다. 이 전화망의 현상을 託釋하면서 장 나달 Je an Nadal 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는 가장 성공하고 가장 완벽한 욕망하는 기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거기서는 욕망이, 우연과 다의성 속에서, 부분적 대상으로서의 소 리의 에로틱한 인자 위에서 자유로이 작동하며, 하나의 흐름에 자기를 연결시키는데, 이 흐름은 망상이나 표류를 무한정하게 전파함으로써 커 뮤니케이션의 사회 터전 전체를 사방으로 넓혀나간다.〉 이 주석자가 전 적으로 옳다고는 할 수 없다: 더 좋은 그리고 더 완벽한 욕망하는 기계 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착기계들은 일반적으로 기술적인 사회기 계의 주관적 개조, 죽 이 기계를 따돌리는 일과 욕망하는 기계를 객관적 으로 창설하는 일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끊임없는 운동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이점을 지니고 있다_-만일 당신들이 공화국 시민이고자 한다면 한번 더 노력을……. 미셸 드 뮈장 M i chel de M'Uzan 은 매저키즘에 관
하여 쓴 가장 훌륭한 덱스트들 중의 하나에서, 어떻게 본래의 의미에서 기계인 매저키스트의 도착기계들이 환상이나 상상이란 것으로써는 이해 될 수 없고 오이디푸스나 거세를 기점으로 하는 투사를 통해서도 설명될 수 없는가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그는, 거기에는 환성이 있지 않고, 전 혀 다른 것이 있다고 말한다. 죽 〈본질적으로 오이디푸스적인 문제제기 밖에서 구조화되어 있는 〉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정신분석 속 에 맑은 공기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도착자들을 조금은 이해할 것이다 .)3)
3) Mi ch el de M 1Jza n , in La sexualite pe rverse, Pay ot , pp. 34-3 7.
2 욕망하는 기계와 오이디푸스 裝置: 퇴행-억압에 대항하는 回婦 욕망하는 기계들은 무의식의 비오이디푸스적인 삶을 구성한다. 오이디 푸스는 기발한 가정용품 혹은 환상이다. 삐까비아 P i cab i a 는 대조적으로 기계를 〈 어머니 없이 태어난 딸〉이라고 명명하였다. 바스터 키턴 Buste r Kea t on 은 모든 방이 한 방에 들어 있는 그의 집-기계를 어머니 없는 집으로서 제시하였다: 이 집에서는 모든 것이 욕망하는 기계들에 의하여 행해지고 있다; 독신자들의 식사도 그렇다(1 92 01;:回 영화 〈소름끼치도록 추한 사람〉). 기계에는 아버지만이 있고, 또 기계는 완전무장한 아데나 A t hena 처럼 남자의 두뇌에서 태어난다고 생각해야 될까? 르네 지라르 Rene G i rard 는 우리를 오이디푸스 밖으로 나오게 하는 데에는 家父長의 溫情主義로 충분하며, 〈擬態的 敵對〉는 콤플렉스와는 정말 E 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와 함께 이것을 믿으려면 많은 善意7 } 필요하다. 정신 분석은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일을 하였다: 오이디푸스를 분산시키는 일, 죽 다수로 만드는 일 ; 혹은 오이디푸스를 분할하여 그를 그 자신에 게 대립시키는 일; 혹은 그롤 승화시키고, 보통의 척도를 넘는 것이 되 게 하고 그롤 시니피앙에로 높이는 일. 선오이디푸스, 후오이디푸스, 상 칭적 오이디푸스를 발견하는 일. 이 세 오이디푸스는 바퀴를 탄 다람쥐 마냥 우리를 가족 밖으로 나가게 하지 않는다. 흔히들 다음과 같은 말
울 한다: 그러나 잘 봅시다, 오이디푸스는 아빠-엄마와 아무 상관이 없 어요, 그것은 시니피앙이에요, 그것은 이름이에요, 그것은 문화입니다, 그 것은 유한성이에요, 존재의 결여인 생명이에요, 그것은 거세입니다, 그것 은 인물의 형태를 취한 폭력이에요……. 웃기는 일이다. 사람들은 상상 적이고, 상징적이고, 언어학적이고,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숭고한 아 빠-엄마에 욕망을 더 찰 포개기 위하여 욕망의 모든 연결을 절단함으로 써 낡아빠진 일을 계속하고 있을 따름이다. 사실 우리는 정신분석, 욕망 에 대한그怨恨, 그횡포와 그 관료주의에 반대하여 말해야 할 것의 4 분 의 표: l0 약떡 l5:. 말하지 않았다. 욕망하는 기계들을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은 모든 방향에서 또 모든 방 면에서 그것들이 무한한 것과 연결되는 능력이다. 바로 이 힘에 의하여 그것들은 많은 구조를 동시에 횡단하고 지배하는 기계가 된다. 왜냐하면 기계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성격 혹은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 나는 연속체의 힘, 죽 기계의 문이라고 하는 성격인데, 이 문에서 어떤 부폼이 다른 부품과 연결된다; 증기기관의 실린더와 피스톤이 그런 것이 요, 더 멀리 발생의 경로를 거슬러 울라가면 기관차의 차륜도 그런 것이 다; 다른 하나는 방향의 급변인데, 이것은, 증기기관에 대해서 가스 모터 가 가지는 관계처럼, 각 기계가 자기가 대체해서 들어서는 기계에 대하 여 절대적인 절단인 것 같은 돌연변이이다• 이 두 힘은 하나롤 이룬다. 왜냐하면 기계는 그 자체 흐름-철단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철단은 언제 나 한 흐름의 연속성에 인접해 있고, 이 흐름에다가 하나의 규준을 줌으 로써, 이 흐름으로 하여금 이런저런 요소를 나르게 함으로써 다른 흐름 들과 분리시킨다 .4) 그러니 기계에는 어머니가 없다고 하는 것은 두뇌로 서의 아버지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공동의 충만한 신체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이다. 이 충만한 신체는 그 위에서 기계가 자기 의 연결들을 세우고 자기의 절단들을 수행하는 기계화의 결정기관이다. 기계를 그리는 화가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강조하였다: 자기들은 정물 4) 기계의 연속성과 비연속성에 관하여는, Leroi- G ourhan, M ilie u et tec hni- que s, Albin Mi ch el, pp. 369 sq.
이나 나체의 대용물로서 기계를 그리지 않는다는 것 : 기계의 데생이 표 상이 아닌 것처럼 기계는 표상된 대상이 아니라는 것. 기계라고 하는 요 소를 도입하여, 설사 그립 자체와 함께 부품이 되더라도 어떻든 캔버스 의 충만한 신체 위에서 다른 것과 함께 부품이 되게 하는 것이 문제인 데, 이것은 바로 그림 전체가 욕망하는 기계로서 작동하게 하기 위해서 이다. 끌어내어전 기계는 표상된 것으로 보이는 것과는 언제나 다른 것 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기계가 그러한 〈뒤틀어지는 일〉에 의하여 일을 시작하며, 그리하여 본래적인 의미에서 기계적인 탈토지화 를 보증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유도적 가치, 혹은 차라리 轉導的 가치는 회귀를 규정하는 것이요, 또 투사-표상에 대립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적 투사에 대항하는 기계의 회귀는 투쟁의 장소요, 이접의 장소이다. 우리 는 이것을 빅또르 브로네 Vi ct o r Brauner 의 『아에로플라프(르)아 Aero- p lap (l) a 』나 『오토모마 Au t omoma 』, 또 『어머니 모양의 認識機械』에서 볼 수 있다? 삐까비아에게 있어서는, 기하학적 도형이 불규칙한 등기와 함 께 부품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 도형은 자기를 닮지 않은 기계를 끌 어들이면서, 이 규준들과 함께, 이 프로그램과 함께 그 기능을 다하지 않 으면 안 된다. 뒤샹과 더불어 기계라고 하는 현실적 요소가 도입되는데, 이 요소는 그 자체로서 혹은 그 그림자에 의하여 혹은 우연한 메커니즘 에 의하여 가치가 있다. 이때 이 메커니즘은 표상둘을 그 역할과 자격을 바꾸어 존속시킨다: 『너는 나를』이란 작품이 그런 것이다. 기계는 표상 전체와 구별된다(하기는 아무 관심도 끌지 않는다는 방식으로는 언제나 기 계를 표싱하고 복사할 수는 있어도 말이다). 기계가 표상과 구별되는 것은 기계가 비형상적이고 비투사적인 순수한 추상이기 때문이다. 레제 Leg er 는 기계가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되, 특히 자기자신을 표상하지 않는데, 이것은 기계가 그 자체 조직된 强度狀態들을 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는 것을 잘 밝혔다: 기계는 형태도, 연장도, 표상도, 투사도 아니고, 순 수하고 회귀하는 강도라는 것이다. 때로는 삐까비아에게서처럼, 추상적인 것의 발견이 기계적 요소들에로 나아가는 일이 생기고, 때로는 미래파에 5) 로하임도 오이디푸스-두사-표상의 連帶를 잘 밝히고 있다.
속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처럼 이와 반대되는 길을 취하는 일이 생긴다. 표상적 상태들과 아무것도 표싱하지 않는 정동적 상태들 간에 철학자들 이 설정한 오래된 구별을 생각해 보자: 기계는 정동적 상태이다. 현대의 기계들이 지각기억울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기계들 자체 는 정동적 상태들만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욕망하는 기계들을 오이디푸스에 대립시킬 때, 우리는 무의식 이 기계적이라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도 아니요(기계들은 오히려 超기계 적이다), 오이디푸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너무 많은 세력과 사람들이 오이디푸스에 집착하고 있고, 너무 많은 관심이 오이디푸스에 기울어지고 있다: 오이디푸스가 없으면, 무엇보다도 먼저, 나르시시즘이 없을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더욱 많은 탄식과 울음을 터뜨 릴 것이다• 그는 더욱더 비현실적인 탐구를 鼓舞할 것이다. 그는 꿈과 환 상을 묻돋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4, 3, 2, 1, 0… …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벡터이다. 4 는 저 유명한 象微의 넷째 항이요, 沃븐 삼각 형화요, 2는 두 개의 심상이요, 1 은 나르시시즘이요, 錢본 죽음의 충동이 다. 오이디푸스란 욕망하는 기계의 엔트로피요, 의계에서 소멸해 가는 그의 경향이다. 오이디푸수늪 - 기계 속에 슬그머니 미끄러져 들어간 심상 혹 은 표상이요, 연결둘을 정지시키고, 흐름들을 고갈시키고, 죽음을 욕망 속에 끌어넣어, 절단들을 일종의 고약으로써 메워버리는 진부한 생각이 다-오이디푸스는 追斷機이다• (정신분석가들은 욕망의 방해자들이다.) 명백한 내용과 숨은 내용의 구별, 억제하는 것과 억제되는 것의 구별 대 신에, 우리는 무의식의 두 극, 죽 욕망하는 정신분열자 기계와 오이디푸 스적인 편집병 장치, 욕망을 연결시키는 것들과 욕망을 억압하는 것들을 설정해야 한다. 그렇다, 그대가 원하는 그만큼 그대는 오이디푸스를 찾을 것이요, 기계들을 침묵시키기 위하여 오이디푸스를 설정할수록 그대는 더욱 오이디푸스를 찾아보게 될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것은 오이 디푸스가 억제하는 자인 동시에 억제되는 자, 죽 욕망을 정지시키는 동 시에 욕망을 떠믿아 정지된 것으로 욕망을 표상하는 진부한 생각-심상 이기 때문이다. 심상이란 그저 그것을 볼 수만 있는 것이다……. 그것은
타협이다. 그러나 이 타협은 타협하는 두 쪽을 똑같이 이지러지게 한다. 즉 반동적 억압자의 본성과 혁명적 욕망의 본성을 다 같이 이지러지게 한다. 이 타협에서는, 타협한 두 쪽이 한군데 몰려가 욕망에 대립하고, 욕망은 타협 밖에 있으면서 홀로 있게 된다.) 쥘르 베르느J ules Verne 에 관한 두 권의 저서에서 모레 More 는 두 주제를 연달아 다루었는데, 그는 이 두 주제를 그저 서로 뚜렷이 다른 것으로 제시하였다. 그 두 주제란, 쥘르 베르느가 아버지로서도 또 아들 로서도 체험한 오이디푸스의 문제, 그리고 오이디푸스의 파괴 및 여성의 대용물로서의 기계의 문제이다 . 6) 그러나 욕망하는 기계의 문제는, 이 기 계가 본질적으로 에로틱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결코 한 기계가 언젠 가 〈 여성으로 완전히 착각되는 것 〉 을 줄 수 있을 것인지의 여부를 아는 것이 아니다 . 도리어 이와 반대이다: 문제는 어느 기계 속에 여성을 넣 울 것인가, 어느 기계 속에서 여성은 욕망의 비오이디푸스적인 대상, 죽 인간적이지 않은 성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모든 욕망하는 기계에 있어서, 성욕은- 오이디푸스의 대용물로서의 기계-여성이라고 하는 상상 적인 한 짝 속에 있지 않고, 어머니 없이 태어난 딸, 죽 (그녀 자신에 대해서도 또 디론 사람들에 대해서도 오이디푸스적이지 않은) 비오이디 푸스적인 여성을 실제로 생산하는 것으로서의 욕망-기계의 짝 속에 있 다 . 오이디푸스의 원천을 소설 일반에 돌리는 일이 행해지고 있는데 사생아들, 찾아낸 어린이들을 테마로 하는 소설둘은 정신분석적 비판을 하고 있고 나르시스적이고 재마도 있어서 이런 소설에 사람들이 싫증을 느끼는 칭조는 전혀 없다. 가장 위대한 저자들이 이런 어수룩한 일을 하 고 있다고 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바로 오이디푸스가 문학의 위조 지폐, 혹은· 같은 얘기지만, 문학의 참된 시장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오이디푸스 속에, 죽 영원한 엄마의 탄식, 영원한 아빠의 잔소리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것으로 보이는 바로 그때, 그들은 사실 고아마냥 전 혀 다른 기도에 던져져서, 지옥의 욕망하는 기계를 조립하고, 욕망을 연 6) Marcel More, Le tre s cur ieu x Ju les Verne et Nouuelles ex p lor 叫 ons de Ju les Verne, Ga llim ard.
결들과 절단들의 리비도 세계, 죽 흐름과 분열들의 리비도 세계와 관계 시킨다. 이 흐름과 분열들은 성의 인문적인 것 아닌 境域울 구성하는데, 이 경역에서는 물건마다 〈 욕망 모터 〉 와 더불어, 〈 음란한 톱니바퀴 장 치 〉 와 부품을 이룬다. 그들은 또 광물적, 식물적, 동물적, 소아적, 사회적 인 구조들과 질서들을 횡단하고, 뒤섞고 뒤집으며, 그때마다 오이디푸스 의 가소로운 형상들을 파괴하며, 언제나 탈토지화의 과정을 더 멀리 추 전한다. 왜냐하면 어린 시철조차 오이디푸스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은 전혀 오이디푸스적인 것이 아니며, 또 오이디푸스적인 것이 될 가능성도 없다. 오이디푸스적인 것은 어린 시절의 비루한 추억이요, 그 스크린이다. 그래서 결국, 어떤 저자가 오이디푸스의 공허함과 부질없 음을 밝히는 가장 좋은 방식은 어린 시절의 진정한 회귀의 블록들을 자 기의 작품 속에 집어넣는 일이다• 이 회귀의 블록들은 욕망하는 기계들 울 다시 불러들인다. 이것은 기계를 能和시키고 어린이에 관해서 늙은 어린이들다운 되행적 환성을 만드는 낡은 사전들, 추억-스크린들에 욕망 하는 기계들을 대립시킴으로써이다. 이것은 카프카에게서 잘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오 이디푸스적인 대지요, 그 두드러진 예이다. 바로 이 대지에서, 그리고 특 히 이 대지에서, 카프카가 독자의 코 밑에서 혼들어대고 휘두르는 오이 디푸스의 극은 더 깊숙이 숨은 기도의 가면이다. 이 국은 아주 새로운 문학기계를 인문적이지 않게 창시한 것이다. 이 문학기계는 정확히 말하 여 글을 지어 너무나 인문적인 사랑을 탈오이디푸스화하는 기계요, 또 도착적인 관료 및 테크노크라트기계, 죽 이미 파시스트적인 기계의 예감 에 욕망을 연결시키는 기계이다. 이 새로운 문학기계에서는 가족의 이름 들이 그 견고함을 잃고 城館圈船 1 얼룩덜룩한 오스트리아 제국, 확실한 신원이 없는 유태인들의 상황, 러시아, 아메리카, 중국, 가족주의의 인물 들과 이름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전 곳에 위치하고 있는 대륙들을 향하 여 자기를 개방한다. 프루스트에 관해서도 이와 비슷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이 두 위대한 오이디푸스적 인간, 프루스트와 카프카는 우스갯소 리를 잘 하는 오이디푸스적 인간들이다. 오이디푸스를 사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의 국도로 슬픈 이야기나 회상들을 언제나 자기들에 게 접목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알아 보면 되기 때문이다: 그둘은 초인의 우스꽝스러움, 정신분열자의 웃음을 잃고 있다 . 이 우스꽝스러움과 이 웃음은 오이디푸스의 찌푸린 얼굴 배 후에서 프루스트나 카프카를 뒤흔들고 있고-거미가 되는 일이나 초시 류의 벌레가 되는 일을 행하게 한다. 로제 디등· Rog e r Dadoun 은 최근의 덱스트에서 꿈의 두 극의 원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 두 극의 하나는 프로그램국군, 기계-꿈, 혹은 기계기 구국군, 공장-꿈이다 . 여기서 본질적인 것은 욕망하는 생산, 기계의 작동, 연결들의 확립, 인간적이지 않는 분자적 경역에 흘러들어가는 리비도의 도주점 혹은 탈토지화점, 흐름의 이행 강도들의 주인이다. 다른 한 국은 오이디푸스적인 극이다 . 이 극은 국장국군, 스크린-꿈이요, 큰 덩어리콜 이루는 해석의 대상일 따름이다. 여기서는 꿈의 이야기가 이미 꿈 자체 보다 우세하고, 시각적 및 언어적 심상들이 비형식적이거나 질료적인 화 • 면의 연속보다 우세하다.” 다등은, 어떻게 프로이트가 『科學的 心理學草 稿 』 (1 895) 에서는 아직 가능했던 방향을 『꿈 判斷』 (1900) 에서 포기하고, 이때부터 정신분석을 막디론 골목들에 몰아넣었는가를 밝혔다. 이 막다 른 골목들은 정신분석이 그 수행의 조건으로서 확립하게 된 것이다. 게 라짐 루카 Gerasim Luca 와 트쿠스트는 이상하게도 그 가치가 잘 인식 되지 않은 저자들인데, 이들에게는 아주 훌륭하다고 우리에게 생각되는, 꿈에 대한 반오이디푸스적인 생각이 있다. 뜨쿠人 E 는, 프로이트가 오이 디푸스의 획일성을 지키기 위하여 꿈의 명백한 내용을 무시한 점, 의계 와의 커뮤니케이션의 기계로서의 꿈을 잘 파악하지 못한 점, 꿈을 망상 보다도 오히려 추억과 결부시킨 점, 꿈으로부터나 徵陶諒犬으로부터나 이 것들에 내재허는 혁명적 射程울 제거하는 타협이론을 만들어낸 점을 비 난한다. 그는 〈사회의 반동적 요소들〉의 대표자들로서의 억압자들과 되 7) Rog er Dadoun, MLes ombil ics du reve, in L'espa ce du reue, Nouuelle reuue de psyc hanalys e , n ° 5( 프로그램 -꿈에 관해서는 cf. Sarane Alexan- dria n , MLe reve dans le surreali sm e, 위의 책
행자들을 고발하고 있는데, 이 요소들은 선의식에서 오는 聯想들과 일상 생활에서 오는 스크린둘-추억들의 도움을 받아 꿈속에 도입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상들이나 이 추억둘은 꿈에 속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꿈 이 이것들을 상칭적으로 다루도록 강요되고 있는 이유아기도 하다. 오이 디푸스가 실제로 존재하고, 연성들이 언제나 오이디푸스적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말자. 그러나 이것은 바로 이 연상들이 의존하고 있는 메커니 즘이 오이디푸스의 메커니즘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의 생 각과 낮 동안의 생각이 둘 다 뚜렷한 억압자들의 영향을 받고 있는 한 일체를 이루고 있으므로, 이 둘 중에서 꿈의 생각을 다시 찾아보려면 바 로 연상들을 깨부숴야 한다: E 로,._-트는 이 목적을 위하여 바로즈식의 일종의 절단 cu t -u~ 제안한다. 이것은 꿈의 한 단편을 성욕병리학 교 본의 임의의 한 구절과 관련시키는 것이다. 이 절단은 꿈을 해석하는 대 신에, 꿈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 꿈을 강화하며, 꿈의 기계의 문에 새로 운 연결들을 공급한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모험을 전혀 하지 않는다. 왜 냐하면 우리의 도착은 많은 형태를 지니고 있으므로, 우연히 선택된 구절 이 언제나 그 꿈의 단편과 함께 기계를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연상들은 다시 형성되고, 교본의 한 구절과 꿈의 단편이라고 하 는 두 방 사이에 다시 갇히지만, 욕망을 비전기적이고 비기억적인 성격 을 띠고서 나타나게 하고 미리 정해져 있는 욕망의 오이디푸스적 규정들 을 저쪽으로나 이쪽으로 넘어서기 위해서는, 아무리 짧더라도, 연상들이 해체하는 순간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E루 人드나 루카가 훌륭한 텍스트 들에서 가리키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방향이다 . 이 방향은 혁명적인 무의 식을 해방시키는 방향이다. 이 무의식은 하나의 존재에로, 즉 오이디푸스 적이지 않은 여자와 남자에로 향한다. 이 존재는 〈자유롭게 기계적인〉 존재, 〈발견해야 할 인간집단의 투사〉인데, 이것의 신비는 작동의 신비 이지, 해석의 신비가 아니다. 또 이 존재는 〈종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욕망의 강도〉이다(정신분석의 권위주의적이고 종교의 냄새를 풍기는 성격을 이렇게 찰 고발한 일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다 ).8) 이런 의미에서 M.L.F. 8) Trost, Vi si o n dans le cri sta l (ed. de l'O ubli ), Vi si b l e et inu is i b l e(AI-
canes), Lib r ement mecaniq u e(Mi no ta u re) ; Gerasim Luca, Le uamp ire pa ssi/( e d. de l'Ou bli ).
(여성해방운동)의 지상목표는 모성과 거세로 엉뚱스레 열광히는· 대신, 바 오이디푸스적인 여성을 기계적으로 또 혁명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겠 는가? 연상들을 깨부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에 되돌아가 살펴보..A}. 죽 정신 분열증의 성격으로서만 아니라 정신분열자-분석의 원리로서의 연상들의 해체를 다시 생각해 보자. 정신분석에 대해서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연상들을 확립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인데, 이것은 오히려 정신분열자-분 석의 조건이다__즉, 우리가 마침내 욕망하는 기계로서의 무의식의 작동 집합 속에 들어가는 요소들에 도달한 징조이다. 소위 자유연상의 방법이 우리를 줄곧 오이디푸스에게로 인도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방 법은 이 일을 위해서 만들어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방법은 자발성을 證 示하기는커녕, 적용이나 포개는 일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적용이나 포개 는 일은 출발점의 임의의 집합을, 오이디푸스적인 것으로 미리 상칭적으 로 규정된 도달점의 인위적인 혹은 회상적인 집합에 대응시킨다. 정녕, 우리가 연상할 수 없는 요소들에 도달해 있지 않는 한, 혹은 우리가 이 요소들을 이것들이 더 이상 연상할 수 없는 형태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 는 한,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한 셈이다. 세르쥬 르끌래르가 다음 과 같은 문제를 제기할 때 그는 결정적인 일보를 내디디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정면에서 고찰하지 못 하게 하고 있다……. 요컨대 문제는 그 요소들이 바로 모든 유대의 부재 때문에 서로 결합하고 있는 체계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유 대란 것으로서 내가 이해하는 것은 자연적, 논리적 혹은 의미적 유대이 다.〉 〈순수한 단일체들의 집합〉이 문제이다 .9) 그런데, 그는 정신분석의 좁은 한계들 안에 머무는 것을 소중히 여겨, 자기가 방금 내디딘 걸음을 역방향으로 다시 내디딘다: 그는 유대가 끊긴 집합을 하나의 허구로, 또 이 집합의 출현들을 神格의 나타남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신격의 나타
9) Serge Leclai re , La rea lite du desir , in Sexualite hu.m ain e , Aubie r .
남은 부재의 시니피앙으로서의 남근이라고 하는 통일체에 의해서만 등기 되는 것이기는 해도, 어떻든 , 재구조화된 새로운 집합 속에 등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욕망하는 기계가 출현하고 있었다. 욕 망하는 기계를 오이디푸스적 장치의 심리적 연관들과 또 사회기계 및 기 술기계들의 기구적 혹은 구조적 연관들과 구별케 하는 것이 출현하고 있 었다: 실제로 구별되는 한에서 (유대의 부재에 의하여 결합되어 있는 한 에서) 함께 작동하는 실제로 구별되는 부품들의 집합이 출현하고 있었 다. 욕망하는 기계들과 비슷한 것은 초현실주의의 예술품들에 의해서는 주어지지 않는다 . 이 예술품들은 국장에서의 산격의 나타남들 혹은 오이 디푸스적인 기발한 용구들인바, 연성들을 재도입해야만 작동하는 것이 다-사실 초현실주의는 선행의 -오동들을 오이디푸스화하는 거창한 기 도였다. 그런데 욕망하는 기계들과 비슷한 것을 우리는 오히려 몇몇 다 다이스트 기계에서, 줄리어스 골드버그 Ju li us Goldber g의 데생들에서, 혹은 오늘날 팅켈리 T i n gu el y의 기계들에서 볼 수 있다: 모든 연상을 분 쇄하면서 작동하는 집합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 ( 〈 뮤대의 부재에 의하여 결합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팅켈리에게 있어서 실제로 구별하는 기법이 획득되는 것은 회귀의 수 법으로서의 일종의 〈뒤틀리게 하는 일〉에 의해서이다. 한 기계는 많은 동시적 구조들을 작동시키고 이것들을 횡단한다 : 첫째 구조는 자기에 대 해서 기능하지 않고 오직 둘째 구조 속에서만 기능하는 요소를 적어도 하나 포함하고 있다. 팅켈리가 본질적으로 유쾌한 것으로서 제시하는 이 놀이야말로 기계의 탈토지화의 과정, 그리고 가장 탈토지화한 부분으로 서의 기계기술자의 입장을 확보하는 것이다. 어린이―—그 눈 자체가 기 계의 부분을 이루고 있는 비오이디푸스적인 어린이一―의 놀란 눈길을 받아 자동차 안에서 페달을 밟고 있는 할머니는 차를 앞으로 가게 하지 는 않지만, 재목을 돕으로 켜는 둘째 구조를 움직인다. 회귀의 다른 수법 둘이, 무분늘을 하나의 다양성 속에 감싸는조작으로서 개입하거나추가 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도시기술기계들의 기구적 기계가 등장하는데, 이 도시는 그 모든 집이 한 집에 들어 있다. 혹은 바스터 키턴의 집-기
계가 등장하는데, 이 집의 모든 방은 한 방에 들어 있다•) 또 혹은 기계 룰 폐품들 및 잔여물들과 본질적으로 관계시키는 계열에서 회귀가 실현 될 수 있다. 이때 이 기계는 팅겔리의 로토자자 Ro t ozaza 처럼 그 자신의 대상을 파괴하는 경우도 있고, 뒤샹의 變堅機의 시도에서처럼 잃었던 강 도들이나 에네르기둘을 다시 얻는 경우도 있고, 스탄키비츠 St a nkie w icz 의 賤物藝術, 혹은 슈비터스 Schw itt ers 의 메르츠 Merz 와 집-기계처럼 기계가 자기자신을 폐물들로써 구성하는 경우도 있고, 끝으로 기계가 스 스로 태업하거나 자기자신을 파괴하여, 〈 기계의 구축과 그 파괴의 시작 이 구별될 수 없는 〉 경우도 있다: 이 모든 경우에(여기에 욕망하는 기계, 죽 폐물기계로서의 조잡한 물건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본래의 의미에서의 기계적인 죽음의 충동이 나타난다. 이 죽음은 오이디푸스적인 퇴행적인 죽음, 죽 정신분석의 안락사에 대립한다 . 그래서 사실 깊이 탈오이디푸스 화하지 않는 욕망하는 기계란 하나도 없다. 또 우연한 관계들이란, 기계의 혼란으로부터 적어도 가장 있을 법하지 않은 것에로 나아가는 벡터, 즉 사람들이 〈 미친 벡터 〉 라 부르는 벡터를 따라, 실제로 구별되는 요소들 자체들 간에, 혹은 이 요소들의 자율적인 구조들 간에 유대가 없이 연결을 확실하게 가지는 관계들이다. 이것은 여기서 욕망하는 기계들을 기계 자체 안에서의 그러한 . 우연한 관계들의 현존에 의하여, 또 散策이나 浚深 型의 브라운 운동들을 생산하는 것으로 서 정의할 수 있게 하는 방드리에스 Vendr y es 의 이론들이 중요하다는
루브 골드버그, 〈이 멍청이야, 이 편지 부치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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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의미한다 .10) 그래서 골드버그의 데생들이 실제로 구별되는 요소들의 기능성을 그 나름으로 확보하려고 팅겔리에게서와 같은 기쁨, 죽 정신분 열자의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것은 바로 우연한 관계들의 실현에 의해서 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단순한 기억회로 혹은 사회회로를 미친 벡 터를 따라 욕망하는 기계로서 작동하는 하나의 집합으로써 대체하는· 것 이다. (첫째 예, 〈자기 0 回에게 편지를 가져가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하여〉, 욕망 하는 기계는 스포츠, 원예 및 새장이라고 하는 자동화된 세 구조를 횡단 하고 이것들을 프로그램에 넣는다; 둘째 예, 단순한 살 빼는 기계 Si m p le Reduc ing Mac hi ne 에서는, 볼가 강의 뱃사공의 수고, 식사하고 있는 억 만장자의 배의 압력감소, 권두선수가 링에 뛰어내리는 일 및 토끼의 도 약이 음반을 통해서 프로그램에 끼어넣어져 있다. 이것은 이 음반이 가 장 있을 법하지 않은 것 죽 출발접과 도달점의 동시성을 규정하고 있는 10) 우연한 것, 〈미친 벡터〉 및 이것들의 정치적 적용에 관하여는, cf. Vendrye s 의 저서둘, Vi e et pro babil it e ( Albin Mi ch el) , La pro babil ite en his to i r e (id . ) 및 Dete n nin i s m e et au ton omi e( Armand Coli n) . 브라운 운동 형의 〈浚深機 械써 관하여는, Guy Hocq u eng he m, Le desir e homosexuel(ed. Un ive r-sit aire s).
한에서 o] 다.) 이 기계들은 모두 실재하는 기계들이다. 옥강감 Hoc quen g hem 이 〈욕 망이 작동하고 있는 곳에는 상상적인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말하 고 있는 것은 옳은 일이다. 상칭적인 것이 들어설 자리도 없다 . 이 기계 둘은 모두 이미 거기에 있으며, 우리는 끊임없이 이 기계들을 생산하고, 만들어내고, 작동시키고 있다 . 왜냐하면 이 기계들이 욕망, 욕망 그 자체 이기 때문이다__하기는 이 기계들이 지율적으로 현존한다는 것을 확증 하기 위해서는 예술가들의 힘을 빌려야 되기는 해도 말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우리들의 머리 속에, 우리들의 상상 속에 있지 않다. 그것들은 사회기계들과 기술기계들 자체 속에 있다 . 이 기계들과 우리들의 관계는 발명 의 관계도 아니고 모방의 관계도 아니다. 우리들은 기계의 아버지인 두 뇌도 아니요, 기계한데서 훈련을 받은 기계의 아들도 아니다. 기계와 우 리의 관계는 들어가 사는 관계이다: 우리는 욕망하는 기계들을 사회기계 들과 기술기계들 속에 들어가 살게 한다. 우리는 이와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동시에 말해야 한다: 기술적인 사회기계 둘은 큰 덩어리를 이루며 역사적으로 결정된 상태로 욕망하는 기계들이 결집한 것들일 따름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사회기계들과 기술기계들이 결정을 행하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분자적 상태들에 되돌려진 것들이다. 슈비터스의 작품 〈메르츠 〉 는 이 그립에 그려져 있는 코메르츠 Komerz ( 〈 상업은행 〉 )의 마지막 음철이다. 이 욕밍하는 기계들이 유용한가 무용한 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를 묻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 불가능성(이것은 드문 일이다), 무용성(이것도 드문 일이다)은 자율적인 예술적 제시에서만 나타난다. 욕밍하는 기계들이 분명히 우리 눈 앞에 있고, 우리들이 그것 둘과 더불어 작동하고 있으니, 당신은 그것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지 않으시오? 그것들은 아주 유용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두 방향에 서 기계와 인간의 관계, 죽 이 양자의 커뮤니케이션을 구성하고 있기 때 문이다. 당신이 〈그 기계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바로 그때, 당신은 당 신 자신이 그 부품들 중의 하나임으로써 그 기계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당신은 댄서-위험이라는 기계가 전작 작동하
기 위해서 결여하고 있다고 당신이 생각한 바로 그 부품이다. 당신은 가 능성이나 유용성을 따지고 있지만, 당신은 이미 기계 속에 있고, 기계의 부분을 이루고 있고, 기계 속에 손가락, 눈, 항문 혹은 간칭을 집어넣고 있다. (이것은 〈당신은 말려 들어 있다……〉고 하는 표현을 노골적으로 말한 것이다.) 기술적인 사회기계들과 욕망하는 기계둘 간의 처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크기나 적응의 문제요, 욕망하는 기계들은 작은 기계들 혹은 작은 집단 들에 적응하는 거대한 기계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전혀 기발한 용구들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의 데크놀로지의 경향은 열역학의 우위를 정보의 확실한 우위로써 대체하고 있는데, 이 경향은 으레 기계 들의 크기의 축소를 수반한다. 여전히 아주 줄거운 한 텍스트에서 이반 일리히 Ivan Ill i ch 는 다음과 같은 것을 밝히고 있다: 거대한 기계들은 자본주의적 혹은 전제군주적인 형의 생산관계들을 전제하는데, 이 생산 관계들은 소비자나 하인의 처지에 놓아게 된 사람들의 예속, 착취, 무력 을 생기게 한다. 생산수단들의 공동소유는 이러한 사태를 조금도 변화시 키지 않고 그저 스탈린적 전제군주 조직을 더 커지게 할 따름이다. 그래 서 일리히는 〈會食的 사회〉, 죽 비오이디푸스적인 욕망하는 사회에서 각 자가 생산수단들을 이용하는 권리를 생산수단들의 공동소유에 대립시키고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의미한다: 가능한 한 최대다수의 사람 둘이 기계들을 가장 광범하게 이용하는 것 ; 작은 기계들을 많아 만들고 큰 기계들을 작은 단위들에 적응시키는 것 ; 조립되어야 할 기계의 요소 둘을 생산자-이용자들 자신이 독점적으로 판매하는 일; 지식의 전문화 나 직업의 독점을 파괴히는· 일. 의학적 지식의 대부분을 독점하거나 전 문화하는 일, 자동차의 모터를 복잡하게 만드는 일, 기계들을 거대화하는 일 같은 서로 아주 다른 것들이 전혀 테크놀로지의 필요에 응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권력이나 통제력을 지배계급의 수중에 집중시키려 하는 경 제적이고 정치적인 요청에 응하는 것임은 아주 명백한 일이다. 도시에서 는 자동차가 기계로서는 근본적으로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 자동차가 기발한 생각으로 만들어낸 용 풍들을 갖추고 있지만 그 성격은 이제 낡아
빠진 것이 되었다는 것, 자전거가 베트남 전쟁에서만 못지않게 우리들의 도시에서도 현대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런 것들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은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꿈꾸는 것이 아니다. 욕망하는 〈회식적 혁명〉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작은 기 계들의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기계의 혁신 자체의 이름에서이다. 자본주 의 사회 혹은 공산주의 사회는 경제적 및 정치적 권력과 관련하여 전력 울 다하여 이 혁신을 억압하고 있다.11)
11 ) Ivan Illic h , Re-to o li ng Socie t y , Nouuel Obserua teu r, 11 sep tem bre 1972( 기계에 있어서 큰 것과 작은 것에 관하여는, cf. Gi lbe rt Sim ondon , Du mode d'exis t e n ce des obje t s tec hniq u es, Auber, pp. 132-133).
욕망하는 기계들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들 중의 한 사람인 바스터 키턴 은 〈航海者의 바다 여행〉에서 거대한 기계를 개인적 목적들 혹은 두 사 람이나 작은 집단의 목적들에 적응시키는 문제를 제기할 줄 알고 있었 다. 이 영화에서는 두 사람의 주인공이 〈일반적으로는 수백 명의 사람이 사용하는 가사 설비와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배 안의 매점은 지렛대 들, 滑車들, 전선들의 숲이다)〉 .12) 사실, 기계들의 축소나 적응의 주제는 그것들 자체로는 충분한 것이 못 되고, 다론 것을 위해서 가치가 있다. 가령 모든 사람이 기계들을 이용하고 관리하는 권리를 요구하는 경우에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기술적인 사회기계들과 욕망하는 기계들 간의 참 된 차이는 분명히 크기에 있지도 않고, 목적들에 있지도 않으며, 다만 크 기와 목적들을 결정하는 체제에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기계는 다 : 같 이 기계이지만, 그 체제는 같지 않다. 이것은 데크놀로지가 해방되고 또 해방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체제를, 테크놀로지를 압제적인 경제와 정치에 포개는 현행의 체제에 대립시켜야 한다는 것이 전혀 아 니다. 테크놀로지는 사회기계들과 욕망하는 기계들을 전제하되, 전자가 후자 속에 또 후자가 전자 속에 있는 것으로서 전제한다. 또 테크놀로지는 무 엇이 기계를 만들어내는 결정기관이 될 것인지, 욕망이 이 결정기관이
12) David Robin s on, Buste r Keato n, Reuue du c i nema( 이 책에는 키턴의 기계들의 연구가 들어 있다).
될 것인지 아니면 욕망의 압제가 그것이 될 것인지를 결정짓는 힘을 그 자체로는 가지고 있지 않다. 테크놀로지가 자기자신만으로 행동하려 할 때마다 그것은, 기술구조에서처럼, 파시스트의 색채를 띠게 된다. 왜냐하 면 데크놀로지는 비단 경제적 및 정치적 공급들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리비도 공급들 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 공급들은 온통 욕망 의 압제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의 체제와 반욕망의 체제 같은 두 체제의 구별은 집합체와 개체의 구별에 귀착되지 않고, 두 가지 형의 대 중 조직에 귀착된다. 이 두 형에서는 개체와 집합체가 동일한 관계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 두 형 간에는 마크로 물리학과 미크로 물리학 간에 서와 동일한 차이가 있다―-미크로 물리학의 결정기관은 기계-엘렉트론 이 아니라, 기계를 형성하는 분자적 욕망이다; 한편 마크로 물리학의 결 정기관은 덩어리를 이루는 기술적 대상이 아니라, 반욕망적, 반생산적인, 큰 덩어리를 만들어내는 사회구조이다• 이 사회구조가 기술적 대상들의 사용, 관리 및 소유를 실제로 좌우하고 있다. 우리들의 사회의 현행체제 에서는, 욕망하는 기계가 도착으로서만, 죽 기계들을 진실되게 서용하는 일의 餘臼에서만, 또 사용자들, 생산자들, 혹은 반생산자들의 공언할 수 없는 이차적 이득으로서만 용인되고 있다 .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이나, 문서 꾸러미를 어루만지고 있는 한 관료가 경험하는 성적 향릭이 이런 것이다…….) 그러나 욕망하는 기계의 체제는 일반화된 도착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에는 행복하게 되는 일반적이고 생산적인 정신분열증이다. 왜냐하면, 욕망하는 기계에 대해서 는 팅겔리처럼 다음과 갇이 말해야 되기 때문이다: 참으로 기쁨에 넘쳐 있는 기계. 기쁨에 넘쳤다는 말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자유롭다는 것 01 다 . 3 기계와 충만한 신체 : 기계의 공급들 자세한 점에 관심을 가지게 되자마자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관한 마르
크스의 테제보다 더 애매한 것은 하나도 없다. 대충 말해서 사람들은 이 테제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도구들에서 기계들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생산수단둘은 사회적인 생산관계들을 전제하지만, 이 생산관계들 은 생산수단들에 대해서 외적이고, 생산수단둘은 생산관계들의 지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과 자연의 관 계를 고립시켜 이것만을 생각하면, 기계는 도구를 기점으로 하여, 또 도 구는 유기체 및 그 욕구들과 관련하여 파악되는데, 이러한 고립된 관계 를 표상한 것으로 여겨지는 추상적인 전화노선은폐 그려졌는가? 이렇게 되면 사회적 관계들이 도구나 기계에 대하여 의적인 것으로 보이고, 도 구와 기계에다가 의부로부터 하나의 다른 생산학적 도식을 강요하여 이 질적인 사회조직들에 따르는 전화노선을 깨부순다. (부르주아 계급이 한 때에는 혁명적이었다고 하는 이상한 관념을 설명해 주는 것은 특히 생산 력과 생산관계 간의 이 상호작용이다 .)13) 이와 반대로 우리에게는 기계 가 한 사회적 신체와의 관계에서 직접적으로 생각되어야지, 생물학적인 인간의 유기체와의 관계에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된다. 그렇다 면, 기계를 추상적인 인간을 출발점으로 하는 선상에서 도구의 선분을 뒤잇는 새로운 선분으로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과 도구는 문제 되는 사회의 충만한 신체 위에서 이미 기계의 부품들이기 때문이다. 기계 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사회기계요, 이 사회기계는 기계를 형성하는 결정기관으로서의 충만한 신체에 의하여, 또 이 신체 위에 배분되어 있 는 한에서 기계가 되어 있는 인간들과 도구들에 의하여 구성된다. 가령 대초원의 충만한 신체가 있는데 이 신체는 인간一말-활을 기계로 작동시 킨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라고 하는 충만한 신체는 인간들과 무기들을 기 계로서 작동시킨다. 공장이라고 하는 충만한 신체는 인간들과 기계들을 작동시킨다……. 유어 Ure 가 내리고 마르크스가 인용한, 공장에 대한 두 가지 정의 중 첫쨋것은 기계들을 이것들을 감독하는 인간들에 결부시키 고, 둘쨋것은 기계들과 인간들, 죽 〈기계적 기관들과 지적 기관들〉을 이 13) 組織의 型들에 기초를 둔 이 다른 생물학적 도식에 관하겨는, cf. Postf ac e, 2e ed. du Cap ital (Pleia d e, I, pp. 557-558).
것들을 기계로서 움직이게 하는 충만한 신체로서의 공장에 결부시킨다. 그런데 문자 그대로 구체적인 것은 둘째 정의이다. 공동의 장소들, 공동의 설비들, 커뮤니케이션의 수단들, 죽 사회적 신 체들이 기계들로 혹은 기계의 부품들로 생각되는 것은 은유에 의해서도 아니요, 의미의 확장에 의해서도 아니다. 이와 반대로, 기계가 하나의 기 술적 현실만을 가리키게 되는 것은 그 의미가 제한되거나 파생되는 때문 이다. 이런 일은 바로 아주 특수한 충만한 신체, 죽 돈-자본의 신체의 조건들 아래에서만 생긴다• 또 이것은 이 신체가 도구에게는 고정자본의 형태를 주고, 죽 도구들을 자율적인 기계적 표상표현 위에 배분하고, 인 간에게는 가변자본의 형태를 줌으로써, 죽 인간들을 노동 일반의 추상적 표상표현 위에 배분하는 한에서 생간다• 동일한 계열에 속하는 충만한 신체들, 죽 자본의 신체, 공장의 신체, 메커니즘의 신체……는 피차 끼워 넣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스 도시국가의 신체, 고대 그리스의 전두 부대의 신체, 두 개의 손집이가 달려 있는 방패의 신체도 그렇다.) 우리 는 어떻게 기술기계가 단순한 도구들의 뒤를 이어 출현하는가를 물을 것 이 아니라, 어떻게 사회기계가, 또 어느 사회기계가 인간들과 도구들을 기계로서 움직이게 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기술기계들의 출현을 가능하 게 하는 동시에 필연적이게끔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자본주의에 앞서 많은 기술기계들이 있지만, 기계의 문은 이것들을 통해서 지나가지 않는 다. 이것은 바로 이 문이 본질적으로 인간들과 도구둘을 기계화함으로써 만족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조직체 전체 속에는, 기계가 되지 않는 도구들이 있다. 이것은 기계의 문이 이것들을 통해서 지나가 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사회조직체들 안에는 기계가 되어 있는 혹은 앞으로 기계가 될 도구들이 있다: 예컨대 重裝步兵의 무기들.) 이렇게 이해된 기계가 욕망하는 기계로 규정된다: 그것은 기계로서 작 동하는 충만한 신체와 이 신체 위에서 기계화되는 인간들 및 도구들의 집합이다. 여기서 많은 귀결이 따라나오는데, 우리는 이것들을 그저 프로 그램으로서만 내놓을 수 있다. 첫째로, 욕망하는 기계들은 정녕 사회기계들 및 기술기계들과 동일한
기계들이지만, 이것들의 무의식으로서 존재한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실 상 리비도 공급들(욕망의 공급들)을 드러내고 동원하는데 이 공급들은 일정한 사회 터전의 경제 , 정치 및 기술의 의식적 혹은 선의식적 공급둘 (이익의 공급들)에 〈 대응한다 〉 • 여기서 대응한다는 것은 닮았다는· 것을 전혀 의미하지 않는다: 리비도 공급에서는 하나의 다른 분배, 하나의 다 론 〈 지도 〉 가 문제된다: 이 분배나 지도는 이제 더 이상 한 사회 안에서 구성되는 이익들에 관계하지도 않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강제와 자유의 분배에 관계하지도 않는다. 죽 한 사회의 근거를 구성하는 모든 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런데, 이 근거들 밀에는, 이싱야릇한 형태들을 지 닌 하나의 욕망이 있는데 이 욕망은 흐름들 자체와 이것들의 절단을 공 급한다. 이 욕망은 이 사회의 근저에서 우연한 인자들, 가장 있을 법하지 않은 형상들 및 서로 독립해 있는 계열들 간의 만남들을 끊임없이 재생 산한다. 또 이 욕망은 〈 자기자신에 대한 〉 사랑, 자본 자체 때문에 자본 울 사랑히는 일, 관료제 자체 때문에 관료제를 사랑하는 일, 억압 자체 때문에 억압을 사랑하는 일을 생기게 한다 . 〈 한 자본가가 마음속 깊은 데서 욕망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 그리고 〈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 대 해서만 아니라 자기자신에 대해서도 억압을 바라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가? 〉 등의 의문을 일으키게 하는 온갖 이상한 사태는 이 사랑으로 말미 암아생간다. 둘째로, 욕망하는 기계들이 기술적인 사회기계들의 내적 경계선으로서 존재한디는 것은, 한 사회의 충만한 신체, 즉 기계화하는 결정기관이 결 코 그 자체로는 주어지지 않고 이 사회 안에서 작용하는 항들 및 관계들 울 기점으로 해서 언제나 추론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 더 잘 이해된다. 발아하는 신체, 죽 돈을 낳는 돈으로서의 자본의 충만한 신체는 결코 그 자체로 주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극한에의 이행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 극한에서는 항들이 절대적으로 파악된 단순한 형태들에로 환원되고, 관 계들은 유대의 부재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대체된다 . 자본주의의 욕망 하는 기계에 있어서는, 자본과 노동력의 만남, 죽 탈토지화한 부로서의 자본과 탈토지화한 노동자로서의 노동력의 만남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op }-i= 서로 독립해 있는 두 계열 혹은 단순한 형태들인데 자본주의에서 는 이 양자의 우연한 만남이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어떻게 유대의 부재 가 〈적극적〉일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르끌래르가 욕망의 패러독스 를 분명히 제시하면서 제기한 다음과 같은 물음에 부딪친다: 어떻게 요 소들이 바로 유대의 부재를 통해서 결합되는가? 어느 모로는, 데까르트 주의가, 스피노자나 라이프니쯔와 더불어, 끊임없이 아 물음에 답해 왔다 고 말할 수 있다. 이 데카르트주의는 하나의 특수한 논리학을 내포하고 있는 한에서, 실제적 구별의 이론이다. 궁극의 요소들이나 단순한 형태들 이 동일한 존재나 동일한 실체에 속한디는 것은 이것들이 실제로 구별되 며, 또 피차 전적으로 독립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실체 적인 충만한 신체는 하나의 유기체로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니 다. 따라서 욕망하는 기계는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뚜렷이 구별되는 요소들 혹은 단순한 형태들의 다양성 ; 이 요소들이나 단순한 형태들은, 이것들이 한 사회의 충만한 신체 〈위에〉 있는 한 혹은 이것들이 실제로 구별되는 한, 이 사회의 충만한 신체 위에서 결합되어 있다. 이것이 극한에 까지 이행한 것으로서의 욕망하는 기계이다: 여기서는 충만한 신체가 추 론되고, 단순한 형태들이 나타나고, 유대의 부재들이 설정되고 있다: 마 르크스의 『자본론』은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변증법적 전제들이 하부 구조의 부분을 이루는 욕망에까지 도달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셋째로대 생산관계들은 기술기계의 의부에 머물러 있으나, 이와 반대로 욕망하는 기계에 있어서는 그 내부에 있다. 이것은 관계라고 하는 자격 으로서가 아니라, 기계의 부품들이라고 하는 자격에서 그렇다. 이 부품들 의 어떤 것은 생산의 요소들이요, 다른 어떤 것들은 반생산의 요소들이 다 .14) 르벨 J. J. Lebel 은 쥬네 Gene t의 영화의 영상들을 인용하고 있는 데 이 영상들은 감옥의 욕망하는 기계를 형성하고 있다: 인접해 있는 두 독방에 갇혀 있는 두 사람이 있는데, 그중의 한 사람이 벽의 작은 구멍 14) 〈기계의 현상이 침입함으로써 생기는 斷絶마다 反生産體系라 부를 수 있는 것 에 連接된다. 이 체계는구조의 특수한 表象樣式이다……. 反生産이란 무엇보다 도 생산관계들의 登錄簿 밀에 놓여져 있던 것이다.〉
에 끼운 빨대를 통해서 디론· 한 사람의 입 속에 연기를 불어넣고 있는 한편에서, 看 守는 이것을 지켜보면서 수음을 하고 있다. 간수는 기계 속 의 반생산의 요소인 동시에 보는 일을 하는 부품이다: 욕망은 모든 부품 들을 거쳐간다. 이것은 욕망하는 기계들이 평온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욕망하는 기계들 속에는 지배들과 예속들, 치명적인 요소들이 있고, 사디 스트적 부품들과 매저키스트적 부품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바로 욕망하 는 기계에 있어서는, 이 부폼들이나 요소들이 다른 모든 부품들이나 요 소들과 마찬가지로 본래 성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 오이디푸스적 규준 은 사회조직체들의 대역을 하고, 심지어 이 조직체들의 정신적 생성과 조직을 주재하려 하는 것인데(돈과 항문성, 파시즘과 사디즘 등이 그렇다), 정신분석이 바라는 것처럼, 성욕이 이 규준을 사용한다는 것은 전혀 있 을 수 없는 일이다 . 성의 상칭주의는 없다; 성욕은 하나의 다른 〈 경제〉, 하나의 다른 〈 정치 〉 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 자체의 리비도적 무의식을 지시한다. 욕망하는 기계의 에네르기인 리바도는 계급, 인종 등 의 모든 차이를 성적인 것으로서 공급한다. 무의식 속에서 성적 구별의 벽을 유지하기 위해서 공급하는 경우도 있고, 이와 반대로 이 벽을 폭파 하여, 인간적이지 않은 性속에서 이 벽을 폐기하기 위해서 공급하는 경 우도 있다. 욕망하는 기계는, 그 격렬한 힘 자체에 있어서, 욕망에 의한 사회 터전 전체의 시련이요, 욕망의 승리로 끝날 수도 욕망의 압제로 끝 날 수도 있는 시련이다. 이 시련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성립한다: 하나 의 욕망하는 기계가 존재할 때, 어떻게 이 기계는 생산관계나 사회적 차 이를 자기의 부품들의 하나로 만들며, 또 이 부품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 가? 골드버그의 데생 속의 억만장자의 배, 쥬네의 영상에서 수음하는 간 수는 무엇인가? 은퇴한 공장주는 공장이라고 하는 욕망하는 기계의 한 부품, 시련에 응하는 한 방식이 아닌가? 넷째로, 무의식의 에네르기인 성욕이 욕망하는 기계들을 통하여 사회 터전을 공급하는 것일진대, 기계들 일반을 마주 대하는 태도는 결코 단 순한 이데올로기를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부 구조 자체 속의 욕망의 상태, 죽 사회 터전을 횡단하는 절단들과 흐름들을 따라 생기는 욕망의
변화들을 표명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까닭에 기계라고 하는· 주제는 아주 강하게 아주 공공연하게 성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다• 제 1 차 세계대 전을 전후해서 기계를 둘러싸고 네 가지 태도가 대결하고 있었다: 이탈 리아 미래주의의 큰 덩어리를 이루는 큰 열광은 기계에 기대를 걸고 국 가의 생산력을 발전시켜 새로운 국가적 인간을 생겨나게 하는데, 생산관 계를 문제삼지 않는다; 러시아의 미래주의와 건설주의의 태도는 공동소 유에 의하여 규정되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따라 기계를 생각한다. (티틀 린 Ta tli n 이나 몰리 -네이지 Moholy -N a gy의 사령탑기계는 저 유명한 당의 조직을 민주적 중앙집권으로서, 죽 정점 • 傳 導 벨트 • 저변을 갖춘 螺旋型 모델로서 표현하고 있다; 생산관계들은 〈 지표 〉 로서 작동하고 있 는 기계에 대하여 의적이기를 계속한다) ; 다다이즘의 분자적 기계기구는 그 자체로는 욕망의 혁명으로서 轉覆을 행한다; 이것은 그것이 생산관계 들에게 욕망하는 기계의 부폼들이 되는 시련을 課하고, 이 욕망하는 기 계로부터 국민과 당의 모든 토지의 저편에 탈토지화의 즐거운 운동을 끌 어내기 때문이다; 끝으로 휴머니즘의 반기계주의는 상상적인 혹은 상칭 적인 욕망을 살리고 이 욕망을 다시 기계에 대립시키려 하는데, 이롤 위 해서는 욕망을 오이디푸스 장치에 포개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다다 이즘에 대항하는 초현실주의, 혹은 다다이스트인 바스터 키턴에 대항하 는 채플린이 그렇다 .)15)
15) 미래주의와 다다이즘에 있어서의 기계의 역할에 관하여는, cf. Noem i Blumen-kranz, L'esth e ti qu e de la machin e (Socie t e d'esth eti qu e), La Sp ira le(Re- vue d'est he ti qu e, l':J ll) .
여기서는 이데올로기가 문제가 아니라, 그 시기와 집단의 무의식 전체 믈 작동시키는 기계화가 바로 문제이기 때문에, 이 태도들과 사회 및 정 치 터전과의 유대는,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복집하다. 이탈리아 의 미래주의는 파시스트적인 욕밍하는 기계의 조직의 조건들과 형태들을 잘 표명하고 있으나, 거기에는 국가주의적이고 호전적인 〈좌익〉의 모든 애매함이 있다 . 러시아의 미래파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무정부주의적 요 소들을 박살내는 당의 기계 속에 이 요소들을 슬그머니 미끄러져 들어가
게 하려 한다. 정치는 다다이스트들의 장기가 아니다. 휴머니스트는 욕망 하는 기계들의 탈공급을 행하는데, 이 기계들은 휴머니즘 속에서 여전히 작동을 계속한다. 그런데 이 태도들을 둘러싸고 욕망 자체, 욕망의 위치 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즉, 욕망의 국단적인 두 국 간에, 욕망하는 기계 들과 기술적인 사회기계들 간의 내재적 관계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두 극의 한 쪽에서는 욕망이 파시스트적인 편집병적 조직체들을 공급하 고, 다른 한 쪽에서는 정신분열 기질의 혁명적인 흐름들을 공급한다. 욕 망의 패러독스는, 이 국들을 파헤치고 집단의 혁명적 시련둘을 극복하여 욕망하는 기계들에 이르기 위하여 무의식의 아주 긴 분석, 죽 무의식 전 체의 분석을 해야 하는 데 있다.
역자후기 유이스망 Denis Hu i sman 이 편찬한 『철학자 사전 Di cti on nair e des ph il - oso p es 』에 보면, 질 둘뢰즈(1 925- )가 현대철학에서 마르크시즘, 정신분 석, 구조주의 같은 사상의 큰 흐름의 주변에 있으면서 이상야릇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 이상야릇 〉 이라 옮긴 말의 원어 는 i nso lit e 인데, 〈 엉뚱한 〉 , 〈 괴상한〉, 〈 별난〉, 〈색다른〉이라고도 옮길 수 있다. 요컨대, 들뢰즈는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 고 있다고하겠다. 『철학자 사전』에 의하면, 들뢰즈의 저작은 세 시기로 구별될 수 있다 고 한다. 첫 시기는 195 3\:回 「경험론과 주관성」에서 196 81-;빈의 「스피노 · 자와 표현의 문제」에 이르는 논분들을 발표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그는 홈, 베르그송, 니체 및 칸트에 관한 저서를 내었다 . 이 시기의 저작들에 서는 그 자신의 사상이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둘째 시기는 196~ 터 시작된다. 이 시기에 그는 『차이와 반복 D iffe r ence et rep e titi on 』 그리고 『감각의 논리 Log iqu e du sens 』를 발표한다. 전자에서는 니체의 깊은 영향이 엿보이고, 후자에서는 루크레티우스의 자연주의에 심취한다 할까 자연주의를 따르는 경향이 엿보인다. 197~ 에 출판된 r 앙띠 오이디푸스 .L'An ti -CEd ipe 』와 더불어 셋째 시기 가 열리는데, 이 책은 정신과 의사인 펠릭스 가따리와의 공저이다. 이 두 사람은 이 책에 이어 198 ()1-j에는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중』이란 연작의 속편으로. 『 千의 高原 Mi lle Pl at eau 』을 내놓았다. 들뢰즈는 계속해서 저 서를 내놓고 있는데, 『니체』라고 하는 작은 책도 있고 Le Pl i라고 하는 중편의 저서도 있다. 이 책의 제목은 우리말로 옮기기가 어려운데 〈라이
프니쯔와 바로크 양식 Leib n iz et le baro q ue 〉 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어떻든 들뢰즈도 현대 프랑스의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다작 하는철학자이다. 공저자인 가따리는 좌익의 정치활동을 하기도 하면서 정신병원에서 오 랫동안 일해 온 정신과 의사인데, 혼자서 낸 책으로는 『정치와 정신분 석』, 『기계적 무의식』 등이 있다• 저자인 두 사람은 196~ 반대에 만나 얘기를 나누는 중에 의기투합했다 할까 사상의 일치를 느꼈다 할까 하여 공저를 내게 되었던 것 같다. 『앙띠 오이디푸스』는 도깨비 같은 소리를 늘어놓은 책이란 인상을 받는 다.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다. 생소한 말이 많이 나오는 것이 그 첫째 이 유이겠다. 〈 욕망하는 기계들 〉 , 〈 기관들 없는 신체 >, 〈 토지기계 >, 〈 충만 한 신체〉 등 그 의미를 분명히 파악하기 힘드는 낱말들이 많다. 또 두 사람이 대화한 것을 책으로 편찬한 듯도 하여, 대화체의 문장들도 많은 데, 이 점은 표현을 활기 있게 하기도 하지만, 문맥의 흐름을- 흐리게 하 는면도 없지.않다. 이 책에는 〈흐름들〉, 〈절단〉이란 말이 수없이 나온다. 이 점은 〈 만물 은 흐른다〉고 갈파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연상 시킨다. 저자들 역시 만물의 현상을 흐름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겠다. 결 론적으로 말해야 할 일이지만, 저자들은 현대에 만연하고 있는 정신적 질환이 흐름의 막힘으로 말미암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 책은 유물론적 정신의학의 전략이라 할까 방향이라 할 것을 제시한 다. 마르크스에 대하여는 비판보다도 많이 따르는 인상을 주고 있으나, 프로이트에 대하여는 매우 날카로운 혹은 근본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우선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기계로 보는 견해가 유물론적이다. 저 자들은 인간을 욕망하는 기계로 본다. 이미 1 앙1 ] 기에 라메뜨리가 인간기 계론을 주장했는데, 이 책에는 라메뜨리에 관한 언급이 없어서, 저자들에 게 미친 라메뜨라의 영향을 알 수는 없다. 인간만 기계가 아니라, 〈원시 토지기계〉, 〈전제군주기계〉, 〈문명자본주의기계〉 같은 말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어떤 사물기나 제도 같은 것들도 기계로 보고 있다. 이런 것
들이 기계인 것은 〈 기계 〉 란 낱말의 본래의 의미에서는 아니다. 말하자면 확대된 의미로 〈 기계 〉 란 낱말을 쓰고 있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것들이 은유적으로 기계인 것이 아니라, 정말 기계라고 주장한다. 이런 데에도 이 책을 이해하기 어렵게 하는 점이 도사리고 있다. 이 책의 적극적 의도는 정신분열자-분석이다. 저자들은 정신분열증을 욕망의 분출로서 창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 긍정적으로 평가 하는 것 같다. 많은 천재들이 정신분열자였다. 이에 반하여 파라노이아, 죽 편집병은 큰 덩어리를 이루는 집단을 형성하여 민족이나 국가를 지배 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보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저자들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맹렬히 비판한다. 프로이트는 리비도 를 가족주의의 틀 안에 가두어놓았다• 소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 빠-엄마-나의 삼각형화를 통하여 무의식이 꼼찍없이 병적 증세롤 나타 내는 정신질환이다. 이것이 저자들의 프로이트 해석이요 비판이다. 저자 들에 의하면, 정신질환은 이런 것이 아니고, 욕망의 좌철에서 생기는 것 이요, 욕망은 처음부터 사회적인 것이다. 즉 욕망은 정치적 경제적 상황 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현대 사회에는 욕망의 좌절로 인한 정신질환이 도처에 만연하고 있다 고 저자들은 보는 것 같다.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사회 이다. 저자들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돈-자본의 형태를 갖춘 탈규준화한 생산의 흐름과 자유로운 노동자의 형태를 지닌 노동의 흐름이 만나는 곳 에서 발생한다. 여기서 규준이란 말은 code 를 옮긴 것인데 그냥 코드라 하는 것이 더 좋을는지 모르겠다. 달규준화란 기존의 틀이나 형식, 죽 규 준을 깨고 그 규준에서 벗어니는 것이다. 〈 자본주의는 규준이란 관념을 抽象 量 의 公理系로 바꾸고, 이것을 돈에서 찾았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탈규준화의 경계로 향하는 것이라 〉 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그들은 또 본 질적인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점둘도 지적한다. 죽, 사회는 그 하부구조, 그 생산양식, 그 가장 정확한 자본주의적 경제순환의 차원에서 정신분열 증화를 행한다. 그리고 리비도가 이러한 사회 터전을 공급하는 것은 , 이 사회 터전이 소우주로서의 가정을 통해서 표현되고 번역되는 형식에서가
아니라, 사회 터전이 그 자체의 흐름들과 절단둘을 가정 속에 통과시키 는 형식에서이다. 쉽게 말하면, 정신분열증이 만연하는 사회를 리비도가 공급하는 것은 가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회 자체의 흐름들·과 절단들 때문이다. 여기서 〈 공급 〉 이라 옮긴 말은 원어에 i nves ti ssemen t이라 되 어 있고, 그 동사인 i nves ti r 란 말도 많이 쓰이고 있는데, 〈 공급 〉 이라 옮기는 것이 꼭 적절한지는 역자도 잘 모르겠다. 더 좋은 譯語 가 생각나 지 않아 그렇게 옮기기로 하였다 . 일본어 번역에서는 〈 備給 〉 이라 옮기고 있다. 또 〈 사회 터전 〉 이란 말은 원어에 champ soc i al 이라 되어 있고, 일본어 번역에서는 社會野라고 옮기고 있다. 여하튼 〈 사회 터전의 리비 도 공급이 가정적 공급보다 우위에 있다 〉 . 사회적 생산에 있어서의 사회 터전의 성욕의 형태로나, 욕망하는 생산의 인간적이지 않은 性의 형태로 나, 비가정적인 것과의 관계가 언제나 근본적이다. 저자들은 신경증이건, 정신병이건, 모든 장애의 원인이 언제나 생산하 는 욕망 속에 있다고 주장한다. 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의 관계, 그 갈등이 현실적 인자이다. 그리하여 정신분열자-분석의 가장 일반적인 원 리는 욕망이 언제나 사회 터전을 구성한다고 하는 것이다. 저지들이 제시하는 정신분열자-분석의 임무는 끊임없이 자아와 그 전 제들을 파괴하는 것 ; 자아에 의하여 갇혀 있고 억제되어 있는, 인물 이 전의 단일체들을 해방시키는 것 ; 자아에 의하여 중도에 막혀지는 흐름들 울 자유로이 흐르게 하는 것 ; 자기동일의 조건들에 이르지 못하는 그 이 하의 곳에서 분열과 절단을 더욱 멀리 더욱 세밀하게 끊임없이 확립하는 것 ; 각 사람을 다시 裁斷하여 다론 사람들과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는 욕 망하는 기계들을 조립하는 것이다 . 저자들에 의하면, 오이디푸스는 무의식 자체 속에 사회 터전의 모든 반동적인 파라노이아적 공급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정신분열자-분석 의 견지에서 보면, 오이디푸스 개념을 분석한다는 것은 아들의 헝클어진 감정들을 거슬러 올라가 착란된 관념, 죽 부모를 내면화하여 표상하고 있는 관념에까지 도달히는 것이다. 정신질환의 원인을 가정의 테두리에 서 찾는 데에 무엇인가 찰못이 있다.
또 저자들에 의하면, 오이디푸스화란 정신분석이 무의식을 거세하고, 거세롤 무의식 속에 주입하는 조작이다. 그런데 무의식은 실상 고아이다. 무의식 자체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인 데서 생간다. 여기에도 들뢰즈의 자연주의의 경향이 엿보인다. 저자들은 〈우리는 부분적 대상들, 벽돌들, 殘餘의 시대에 살고 있다〉 고 말함으로써 무의식이 고아인 현대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또 인류 의 역시는 우발적인 일들로 구성되며, 현대의 부르주아 계급의 상황을 주인이 하나도 없는 예속상태라고 전단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자 들이 바라보는 자유와 해방의 길은 유목자의 생활이다. 『앙띠 오이디푸스』 의 속편인 『천의 고원』이 이를 시사하고 있다. 저자들은 〈욕망은 流摘의 땅이요, 無人의 광야다〉라고도 말한다. 이러한 광야와 같은 현대 세계에서 그래도 그둘은 예술과 과학에서 한 줄기 구원의 샘을 찾는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술과 과학만이 혁명적 잠 재력을 가지고 있고, 이 의의 어떤 것도 이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회화에 있어서의 베네치아파의 예를 들고 있다. 베네치아에 싱업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던 즈음에는 그 회화가 비잔틴의 규준을 따르고 있어서, 그 선이며 색이 위계질서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런데 1 핵]기 중반쯤 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전과는 다른 예술이 나타난다. 이 예술에서는 선들이 탈토지화하고, 색들이 탈규준화 하여, 逃迫泉내지 突破線과 함께 수평적인 조직이 생간다. 요컨대, 이 책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상황과 정신분열증의 깊은 관 련성을 파헤치고, 심신의 건강한 생활의 가능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시사 하고있다고하겠다. 역자로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들과 용어들이 많아, 잘못 옮긴 것이 적지 않을 줄 안다. 독자들의 질정을 바란다. 譯注는 번호에 0 표를 하였다. 1994 년 1 월 lOO길 옮긴이
-I 가르쏭 (M.Gar,;on) 139 가벨(J .Gabel)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406 가이우스 (Ga i us, 110?- 18 0?) : 로마의 법률학자 318 강뜨레 ( F. Ganth e ret ) 181 고들리에 (M.Godelie r , 1934-) : 프랑스의 인류학자 214, 297 고르동 (P.Gordon) : 프랑스의 문화인류학자 301 고르쯔 (A. Gorz) : 프랑스의 경제학자 351 고바르 (H.Gobard) 170 골드버그(J. Goldberg, 1883-1970) : 미국의 만화가 574, 575, 576, 585 곰브로비츠 (V.Gombrow i cz, 1904-1969) : 폴란드의 작가 152 괴 테 ( J. W. Goeth e , 1749-1832) : 독일의 시 인 • 작가 182, 206 구우(J.- J. Goux) : 프랑스의 경제학자 345 구텐베르크(J. Gut en berg, 1399?-1468) : 독일의 조판인쇄술 발명자 357 그라넬 ( G. Granel) 19 그로덱크 (G. Groddeck, 1866-1934) :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88 그리올르 (M. Gr iau le, 1898-1956) : 프랑스의 문화인류학자 235, 236, 239, 241, 244, 248, 328 그린 (A.Green, 1927-) :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97, 104, 448 글뤽스망 (A.Gl ii cksmann) : 현대 프랑스의 사상가 553 긴스버그 (A. Gi ns berg, 1926-) : 미국의 시인 204, 413 까레뜨(J . Carrett e) :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189 까루쥬 (M.Carrou g es, 1910-) : 프랑스의 비평가 • 작가. 『獨身機械』 37 까쁘그라(J. Capg r as, 1873-1950) :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189 꾸르노 (M. Cournot, 1922-) :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 작가 465, 466 L 나달(J. Nadal, 1820-1910) : 프랑스의 사진가 • 氣球稽乘者 564 네르발 (G.de Nerval, 1808-1855) : 프랑스의 시인 ·작가 194 누개롤(J. Noug ay ro l, 1900-) : 프랑스의 아시리아 수학자 312 니더란드 (W.N i ederland) 437
니진스키 (V.N iji nsk y, 1889-1950) : 폴란드계의 러시아의 댄서 122, 134, 500 니체 (F. Ni et z s che, 1844-1900) : 독일의 철학자 41, 164-166, 186, 220, 253, 286, 288, 289, 296, 300, 319, 321-323, 356, 440, 503, 507, 539 C: 다둥(R. Dadoun) : 정신분석학자 571 다리앙 (G.Dar i en, 1862-1921) :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 작가 155 달리 (S. D ali , 1904- ) : 스페인의 쉬르레알리슴 화가 55 데띠엔느 (M.De ti enne) 317 데리다(J .Derr i d a, 1930- ) : 프랑스의 철학자 305 데모크리토스 (Democ rit e, 460?-? 370 B. C.) : 그리스의 철학자 397 데바루 (G.Devereux, 1908-) : 미국의 정신분석학자 57, 250, 254 돕 (M.Dobb, 1900-1976) : 영국의 경제학자 338 뒤발리에 (F. Duvall ier, 1909-1971) : 하이티의 정치가 • 독재자 386 뒤샹 (M.Ducham p, 1887-1968) : 프랑스의 화가 37, 575 뒤프렌느 (M.Du fr enne, 1910- ) : 프랑스의 철학자 • 미학자 265 디떼를랑 (G. Di e t erle n, 1903- ) : 프랑스의 인류학자 235 떼래 (E.Terra y) 284, 389 2 라까리에르(J. Lacarrie r e) : 『神에 취한 사람들』의 저자 332 리깡(J .Lac an, 1910-) :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64, 67, 84, 85, 127, 131, 142, 144, 155, 160, 190, 260, 266, 313, 393, 397, 434, 452, 454- 456, 461, 482, 518, 527, 528, 532, 544 라벨 (M. Ravel, 1875-1937) : 프랑스의 인상파 작곡가 55 라뿔랑슈(J .La p lanche, 1924- ) :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86, 197 라슈(J. Rush) 71 라이오스 (Laf o s) : 데베의 왕.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251, 396, 405 라이프니쯔 (W.von Leif niz, 1646-1716) : 독일의 철학자 • 수학자 237, 584
라이히 (W.Reic h , 1897- 19 57) :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프로이트의 제자. 미국에 망명 52, 53, 138, 172, 180, 182, 183, 196, 262, 380, 381, 429, 459, 461, 487 랑크 (0.Rank, 1884-1939) :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197, 442 러루와 - 구랑 (A.Lero i -Gourhan, 1911-) : 프랑스의 인류학자 • 고고학자 284, 285, 305 러셀 (B.Russell) : 영국의 철학자 125, 126 레닌 (V.Len i ne, 1870-1924) : 러시아의 혁명가 379 레비 -人 뜨 쿠 ::::'.::( C. Levi- S t ra uss, 1908-) : 프랑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자 22, 229, 237, 238, 239, 242, 254, 276, 282, 405 레이 (N.Ra y, 1911-) :미국의 영화감독. 『理由 없는 反抗』 406 레잉 (RD.L ai n g, 1927- ) : 영국의 정신의학자 133, 149, 191, 202, 208, 469, 528, 530 레제 (F. Lege r , 1881-1955) : 프랑스의 뀌비승화가 567 렌츠(J .Lenz, 1751-1792) : 독일의 시인 • 극작가. 뷔히너의 同名의 작품의 주인공 16, 134, 206, 430 로랑 (E.Lauren t) : 문화인류학자 275 로랭 (C.G.Lorra i n, 1600-1682) : 프랑스의 화가 • 판화가 204 로렌스 (D.H.Lawrence, 1885-1930) : 영국의 시인 • 소설가 20, 78, 178, 204, 269, 397, 413, 430, 439, 463, 474, 514, 515, 530, 536, 542 로렌스 (T. E. Lawrence, 1888 一 1935) : 영국의 장교 • 작가. 아라비아의 로렌 스 430 로리 (M.Lowr y, 1909-1957) : 영국의 소설가 169, 204 로세 ( C. Rosset, 1939-) : 프랑스의 철학자 48 로일로 (F. Reuleax, 1829-1905) : 機械의 정의를 내린 독일의 공학자 216 로졸라토 (G.Rosola t o, 1924-) : 정신분석학자 315 로트레아몽 (Lau t reamon t, 1846-1870) : 프랑스의 시인. 쉬르레알리스트의 선구자 544 로하임 ( G. Roheim , 1891-1953) : 헝가리 출신의 미국의 정신분석학자 • 인류 학자 260, 261, 562 뢰플러 (L. Loff ler ) : 문화인류학자 225, 248
루디네스꼬 (E.Roud i nesco) : 정신분석학자 313, 456 루셀(R. Roussel, 1877-1933) : 프랑스의 작가. 죽은 후 쉬르레알리슴의 선 구자로 평가됨 37, 463 루이 17 세 (Louis X VII ) : 프랑스왕. 혁명 후인 197 :M에 즉위 139, 140 루카 (G.Luca) 571, 572, 573 루터 (M.Luth e r, 1483-1546) : 독일의 종교개혁자 157-159, 399, 401 르끌래르 (S. Leclair e , 1924-) :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49, 119, 452, 454, 461, 475, 573, 584 르벨 ( J. J. Lebel) 584 르페브르 (H.Le fe vre, 1910-) : 프랑스의 철학자 • 사회학자 372 리슈몽 (R i chemon t) : 루이 17세 를 자칭한 인물 139 리오따르(J .F.L y o t ard, 1924-) : 프랑스의 철학자 306, 361, 363, 434 리츄 (E. R. Leach, 1910-) : 영국의 문화인류학자 223, 224, 250, 276, 282 리카도 (D.R i cardo, 1772-1823) : 영국의 경제학자 399, 441 린드너(R. L i ndner, 1901-) : 독일 태생. 미국의 화가 22, 76, 525 뤼베 (N.Ruwet) 361 뤼센코 (T.L y ssenko) •2 41 뒤이예(R. Ru y er, 1902-) : 프랑스의 철학자 422 □ 마노니 (M.Mannon i) : 현대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 反精神醫學울 제창 141, 142, 148, 557 마노니 ( 0. Mannoni ) 449, 452 마르띠네 (A.Mar ti ne t) 289, 361 마르코프 (A. A. Markoff , _18 56-1922) : 러시아의 수학자 65, 426 마르쿠제 (H. Marcuse, 1898-1979) : 독일 태생 . 미국의 철학자 172, 182, 263 마르크스(K. Mar x, 1818-1883) : 독일의 경제학자 • 철학자 18, 26, 27, 35, 43, 46, 49, 52, 54, 58, 90, 93, 101, 128, 166, 213, 214, 233, 266, 293, 331, 335, 337, 339, 344, 350, 382, 383, 432-434, 444, 445, 546,
549 , 580, 581, 584 마슈레이 (P. Macherey ) 28, 말라르메 (S. Mallarme, 1842- 18 98) : 프랑스의 상정파 시인 362 말론느 (Malone) : 베케트作 『 말론느 죽다 』 의 주인공 17, 30 말리노스키(B. Mal i nowsk i , 1884-1942) : 폴란드 태생. 영국의 인류학자 85, 242, 260, 262 맘포드 (L. Mum for d, 1895-) : 미국의 建築 • 文明評論家 216 망델 (G. Mendel) 127, 164, 167 맥루한 (M.McLuha n. 1911- 19 81) : 캐나다의 文化史家 • 사회학자 358 메이어 (J. R.M ay e r) 544 모간 (T . H. Morga n , 1866-1945) : 미국의 생물학자 241 모나코 (C.von Monakow, 1853- 19 30) : 러시아 태생. 스위스의 神經學者 66, 67 모노(J .Monod, 1910- 19 76) : 프랑스의 分干物理學者 425, 482 모랑 (Moran) 122 모랭 (E. Morin , 1921-) : 프랑스의 사회학자 381 모레 (M.More) : J. 베르느 연구가 478, 569 모르겐탈러 (W.Morge n th a ler) 33 모세 (Mo i se) : B.C. l~- l]기경의 히브리 입법자 292 모스 (M.Mauss, 1873- 19 50) : 프랑스의 사회학자 • 인류학자 228, 280, 286 모짜르트 (W.Mozar t ; 1756-1791)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478 몰로이 (Mollo y) : 베케트의 同名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31, 122, 463 몰리 - 네이지 (Mohol y- Na gy, 1895-1946) : 헝가리의 화가 • 사전가 • 조각가 586 무르그(R. Mourgu e) : 프랑스의 신경정신의학자 • 철학자 67 무사 (P.Moussa, 1922-) : 프랑스의 경제학자 345 뮈장 (M.de M'Uzan) : 정신의학자 564 미쇼 (H.M i chaux, 1899-) : 벨기에 태생. 프랑스의 시인 21, 22 미처리히 (A.Mi tsch erlic h , 1908-1982) :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127 밀러 (H.Mi ller, 1891-1980) : 미국의 소설가 20, 204, 397, 430, 439, 440,
463, 530 1::1 바따유 (G.Ba t a ill e, 1897-1962) : 프랑스의 작가 286 바랑 ( P. Baran ) 348, 350 바로즈 (W.Burrou g hs, 1914-) : 미국의 소설가 543 바스띠드(R. Basti de , 1898- 19 74) : 프랑스의 종교사회학자 • 인류학자 272 바울 (Sa i n t Paul) : 그리스도교의 전도자 292 바이스만 (A.We i smann, 1834-1914) : 독일의 동물학자 241 바흐오펜 (J. J. Bachofe n , 1815-1887) : 스위스의 法制史家 • 神話學者 165, 166 반 고흐 (V.Van Gog h ) 208, 210 발라 (E.Balazs) : 헝가리 태생. 프랑스의 中國學學者 296 발리바르 (E.Ba li bar, 1942- ) : 프랑스의 철학자 341, 368 발자크 (H.de Balzac, 1799-1850) : 프랑스의 작가 70, 205 베데킨트 (F. Wedek ind , 1864-1918) : 독일의 시인 • 극작가 88 베르그송 (H.Ber g son, 1859-1941) : 프랑스의 철학자 149, 150 베르낭(J. P. Vernant, 1914-) : 프랑스의 그리스철학 연구가 329 베르느(J. Verne, 1828-1905) : 프랑스의 작가 569 베르뜨 (L.Ber t he) : 문화인류학자 225 베르데르 (Wer t her) : 괴테作 『젊은 베르테르의 고뇌 』의 주인공 173, 206 베시 (J. Besse) 137 베이트슨 (G . Ba t eson, 1904-) :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125, 352, 527 베케트 (S. Beckett , 1906-) : 아일랜드 태생 . 소설가 • 국작가• 『몰로이 』 • 『 말론느 죽다』 17, 29, 40, 121, 134, 463, 469, 475, 496 베텔하임 (B.Be tt elhe i m, 1903-) :오스트리아 태생. 미국의 정신의학자 62, 63, 200 보나페 (P.Bonna fe ) : 문화인류학자 275, 479 보하난 (P.Bohannan, 1920-) : 미국의 사회인류학자 267 봐드리에스 (P. Venchy es , 1908-) : 프랑스의 생물학자 576 봐레스(J. Valles, 1832-1885) : 프랑스의 작가 155
뵐풀리 ( A. Wolfli ) 33 부르바끼 (N . Bourba ki) : 193 31;:터 창립된 프랑스의 數學者 그룹의 筆名 373 부버 ( M. Buber, 1878 一 1965) : 오스트리아 태생 . 이스라엘의 철학자 528 분스 (M.C.Boons) 128 뷔히너 (G.Buchner, 1813-1837) : 독일의 시인 • 소설가. 『렌츠』는 同名의 實在人物울 題材로 한 그의 작품 16 브라운(J. Brown, 1800-1859) : 미국의 정치가. 노예제에 반대 410 브래드베리 (R. Bradbury, 1920- ) : 미국의 SF 작가 76 브렁호프 (S. de Brunhoff ) 342, 385 브레즈네프 (L. Brezhnev, 1906-1982) : 소련 공산당 서기장 548, 549 브로네 (V. Brauner, 1902-1966) : 루마니아 태생 . 프랑스의 화가 567 브로델 (F. Braudel, 1920 一 1985) : 프랑스의 Annales 파의 역사학자 336 브롬(J. M. Brohm) 181 브뤼노 (M.Bruneau) :루이 17 세를 자칭한 인물 139 브르똥 (A.Bre t on, 1896-1966) : 프랑스의 시인 • 소설가. 쉬르레알리슴의 창 시자 206 브장송 (A. Besan<;on) 125 블랑쇼 (M. Blanchot, 1907-) : 프랑스의 사상가 • 소설가 69, 485, 501 불로일러 (E.Bleuler, 1857-1939) : 스위스의 정신병리학자. 프로이트의 영향 을받음 44 비옹 (W. R. Bio n , 1897-1979) : 인도 태생 .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38 빈스방거 (L. Bi ns wang er , 1881-1966) :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44 빌리에 드 릴라당 (P. Vi llier s de l'Isle -Adam, 1838-1889) : 프랑스의 작가 37 빵꼬우 (G.Pankow) :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200, 463 뽀이에 (J. M. Pohie r ) : 정신분석학자 130, 168 뽀트라(B. Pau t ra t) : 『太陽의 解釋. 니체의 形象과 體系』의 저자 312 뽕딸리스(J. B. Ponta l i s, 1924-) :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86 뿌쌩 (N. Poussin , 1594-1665) : 프랑스의 화가 204 삐까비아 (F. Pic a bia , 1879-1953) : 프랑스의 화가 • 작가 565, 567
삐넬 (Ph.P i ne], 1745- 18 26) : 프랑스의 近代精神醫學의 창시자 145 人 사드 (D.A.F.de Sade, 1740- 18 14) : 프랑스의 작가 316 사르트르(J .P.Sar t re, 1905-1980) : 프랑스의 철학자 • 작가 380 사푸앙 (M.Sa fo uan) : 정신분석학자 450 생 -세 바르천 (Sain t - S ebasti en ) 540 생 -시몽 (Sa i n t -S i mon, 1760- 18 25) : 프랑스의 철학자 • 경제학자 376 생-쥐스뜨 (L.A.de Sain t Ju st, 1769-1794) :프랑스 혁명의 정치가 511 샤뜰레 ( F. Chate l et, 1925- ) : 프랑스의 철학자 93 샤를르( D. Charles ) 543 세귀르 백작부인 (Com t esse de Segu r) 438 세례자 성 요한 (Sa i n t Je an- B ap tist e ) 292 세르 (M.Serres, 1930-) :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359 세자르 (Cesar, 1921-) : 프랑스의 조각가 55 셀린느 (L.-F. Celi ne , 1894-1961) : 프랑스의 작가 155, 410 셰익스피어 (W.Shakesp e are, 1564-1616) : 영국의 극작가 • 시인 182, 439 소쉬르 (F. de Saussure, 1857-1913) : 스위스의 언어학자 311, 359, 360 소포클레스 (So p hocle, 496-406 B.C.) : 고대 그리스의 비극시인. 『오이디푸 스王』 182, 396 손디 (L.Szondi, 1893-) : 헝가리의 정신의학자 134, 426, 427, 489 솔즈베리 (Sali sb ury) : 문화인류학자 369 쇼펜하우어 (A.Schop e nhauer, 1788-1860) : 독일의 철학자 440 수에토니우스 (Sue t o ni us, 70?-128?) : 로마의 傳記作家 • 역사가 137 쉬레-까날르(J .Sure t- Canale) 297 쉴러 (J. C. F. von Schil ler, 1759-1805) : 독일의 시인 • 극작가 206 슈레버 (D.P.Schreber, 1842-1911) : 그의 『回顧錄』울 프로이트가 정신분석 적으로 고찰하여 「슈레버症例」를 보고 15, 24, 28, 30, 32, 34-36, 39, 91, 92, 122, 141, 163, 407, 414, 415, 437, 438, 464, 534 슈미트(B. Sch mitt) : 프랑스의 경제학자 353, 371, 548 슈비터스(K. Schw itt ers, 1887-1948) : 독일의 화가 • 시인 575, 577
슈타인망(J. Ste i n m ann) 292 스미스( A. Smi th, 1723- 1 790) :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의 창시자 383, 399, 401 스위 지 ( P. Sweezy ) 350, 352 스탄키비츠 (S t ank i ew i cz, 1922-) : 미국의 조각가 575 스테판느 (A.S t e p hane) : 프랑스의 전두적인 정신분석의 127, 167 스트라빈스키 (J.S tr a vin s ky , 1882- 19 71) : 소련의 작곡가. 미국에 귀화 186 스피노자(B. S pi n~z a, 1632-1677) : 네덜란드 태생 . 유태계 철학자 51, 52, 480, 584 시몽동 (G.S i mondon) 332, 579 。 아들러 (A.Adler, 1870- 19 37) : 오스트리아의 정신과의사. 프로이트의 제자. 나중에 대립 198, 239, 244, 486, 519 아론 (Aaron) : 聖書의 인물. 모세의 형. D.H. 로렌스의 소설에 등장 524 아르또 (A. Arta ud, 1896- 19 48) : 프랑스의 극작가 23, 33, 135, 206-208, 218, 316, 411, 415, 543 아르망 (Arman, 1929 一 ) : 프랑스의 造形 美術家 55 아리스토텔레스 (Ar i st o t e, 384-322 B. C.)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132, 390 아민 (S. Ami n, 1931-) : 이집트의 경제학자. 『不均等發展』 345, 356 아브라함 (Abraham) : 히브리 민족의 始祖 292, 326, 406 아브람스(J. J. Abrahams) 90 아테나 (A t hene) : 그리스神話. 제우스의 딸 565 아폴론 (A p ollon) : 그리스神話. 제우스의 아들 166 알뛰세르 (L. Alth usser, 1918-) : 프랑스의 철학자. 『資本論울 읽다』 • 『마 르크스를 위하여』 28, 368, 449 앙지의 (D.Anzie u , 1923-) :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442, 447 애이 (H.Ey , 1900-1977) :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227 야스퍼스(K.J as p ers, 1883-1969) : 독일의 철학자 46, 202, 209, 530 에디슨 (T. A, .E di son, 1847-1931) : 미국의 발명가 37
에르바고 (Herva g aul t) : 루이 17 세를 자칭한 인물 139 에리뉘에스 (Er y nn i es) : 그리스神話 복수의 여신 166 에반스-프리챠드 (E. Evans-P rit ch ard) 231 엥겔스 (F. Eng el s, 1820-1895) : 독일의 경제학자 • 철학자. 사회주의자 165, 166, 205, 222, 437 옐름슬레우 (L. Hj eh nsleu, 1899-1965) : 덴마크의 언어학자 360, 361 오르띠그 (E. et M. C. Orti gu es) : 『아프리카인의 오이디푸스』의 저자 258, 259 오슈망(J. Hochmann) : 프랑스의 공동체적 정신의학을 주장한 사람 147, 148 오제 ( P. Aug er ) : 프랑스의 물리학자 562, 563 옥강감 (G. Hocq u eng h em) : 『同性愛의 욕망』의 저자 576, 577 의슈 (L. de Heusch) 113, 225, 302 욥(J ob) : 히브리族長. 『구약성서』에 나오는 전설적 인물 259 우리 (J. Oury) :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 制度分析家 99, 468 울피아누스 (Ul pi en, ?-228) : 로마의 법학자 318 위트포겔(K. A.W ittfog el, 1896-) : 독일 태생. 사회학자 • 경제학자. 미국 에 망명 317, 330 유 (A.Ure, 1778-1857) : 영국의 화학자 • 경제학자 581 융 (C.G. J un g, 1875-1961) :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 심리학자 74, 75, 92, 176, 198, 409, 442, 443, 486, 519 이오키스테 (Jo caste ) : 라이오스왕의 后로서 오이디푸스를 낳음, 나중에 아들 의 아내가 됨 396 일리히(I. I lli ch, 1926-) : 오스트리아의 사회사상가 578 x: 장쁠레니 (A. Zemp le n i) : 프랑스의 인류학자 309 잭슨 (F.G. Jackson, 1860-1938) : 영국의 極地探險家 410 쟈리 (A.Ja rry, 1873-1907) : 프랑스의 작가 37 챤느 다르끄(J eanne d'Arc, 1412-1431) : 百年戰爭時, 영국군을 격파하여 조국을 구한 오를레안의 소녀 134, 137, 157
쟝켈레비츄 (V. J ankelev it ch) : 프랑스의 철학자 55 쟝띠 ( R. Genti s ) 139 제베크 (T. J .Seebec k, 1770-1831) : 독일의 물리학자 137 제이예 (A.J a ye t ) 121 조이스(J.J o y ce, 1882-1941) : 아일랜드 태생. 영국의 작가 71, 280 존스 (E. J ones, 1879-1958) :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傳 :C 를 씀 181, 260, 518 졸랭 (R. Ja ulin ) : 프랑스의 문화인류학자 61, 243, 257 줄(J. P. Jo ule) 137 쥬네 (J. Genet, 1910-1986) : 프랑스의 작가 584, 585 지라르 (P.G i rard) :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517, 520 지라르(R. Gir a rd) : 프랑스의 게르마니스트 렌츠연구가 565 지이 (R. Gi e) 36 찌리두스트라 (Zara t hus t ra) 136, 202 大 채플린 (C.Cha p li n, 1889-1977) : 영국 태생. 영화감독 • 배우 465, 466, 586 =' 카네티 (E.Cane tti, 1905-) : 불가리아 태생. 스페인계 유태인, 독일의 작 가 413 카디너 (A.Kar di ners, 1891-) : 미국의 정신분석학자 • 문화인류학자 260, 265, 268, 270 카라칼라( Caracalla, 188-217) : 로마 황제 318 카스트로 (F. Castr o , 1927-) : 쿠바의 혁명가 • 수상 553 카시우스 (Cass i us, ?-42 B.C.) : 로마의 장군. 케사르 암살의 주모자 316 카트리 (M.Cartr y ) : 정신의학자 239, 244 카포네 (A.Ca p one, 1889-1947) : 미국의 갱 182 카프카 (F. Kafk a , 1883-1924) :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37, 299, 318, 320, 508, 570, 571
칸토르 (G.Can t or, 1845-1918) : 러시아 태생. 독일의 수학자 156, 544 칸트(I. Kant, 1724-1804) : 독일의 철학자 30, 38, 47, 113, 118, 120, 552 칼리쿨라 (Cal ig ula, 12-41) : 폭학했던 것으로 유명한 로마 황제 303 캐롤(L. Carol, 1832-1898) : 영국의 수학자 • 동화작가 208, 298 케루악(J. Kerouac, 1922-1969) : 미국의 소설가 204, 410 케이쥬(J. Cage , 1912-) : 미국의 작곡가 543 케인즈(J .M.Ke y nes, 1883-1946) : 영국의 경제학자 343 켈빈 (Kelv in, 1824-1907) : 영국의 물리학자 137 콜럼버스 (C.Colombe, 1451-1506) : 이탈리아의 大航海者 138, 182 쿠퍼 (D.Coo pe r) : 현대 영국의 정신의학자. 反精神醫學울 제창 149, 469 크레펠린 (E.Krae p el i n, 1856-1926) : 독일의 정신의학자 44, 46 클라벨 (M.Clavel, 1920-1979) :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 극작가 346, 354 클라스트르 (P.Clas t res) : 프랑스의 문화인류학자 226, 286 클라인 (M.Kle i n, 1882-1960) : 오스트리아 태생. 영국의 정산분석학자 62, 70, 72-74, 96, 114, 434, 476 클레 (P.Klee, 1879-1940) : 독일의 화가 362 클레랑보(0- -de Clerambeau, 1872-1934) :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43 클로소스키 (P. Klossowsk i, 1905-) : 프랑스의 작가 • 비평가 40, 100, 122, 138, 280, 484, 507 키턴 (B.Kea t o n, 1895-1966) : 미국의 無朗映畫의 喜劇俳優 565, 574, 579, 586 E 타우스크 (V.Tausk, 1877-1919) :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26 타틀린 (V.Ta tli n, 1885-1953) : 소련의 造形美術家 586 터너 (J. M. W. Turner, 1775-1851 ) : 영국의 풍경화가 203, 204, 541 터너 (V.W.Turner, 1920-) : 영국 태생. 미국의 인류학자 254, 274, 528 테일러 (F.W.Ta y lor, 1856-1915) : 미국의 기술자 373 톨스토이 (L. N. Tolsto i , 1829-1910) : 러시아의 소설가 123 듀크 (W.Tuke, 1732-1822) : 영국의 정신병원 개혁자 145 흐쿠 ~(Tros t) 571, 572
트로츠키 (L.Trot sk y , 1879- 19 40) : 러시아의 혁명가 • 공산당 지도자 412 고 파농 (F. Fanon , 1925- 1 961) :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 혁명가 150, 151 파르메니데스 (Parmen i des, 544?- 4 50? B. C.) : 그리스의 철학자 397 파브레(J .Favre t) : 문화인류학자 231 파피니아누스 (Pa pi n i e n, ?- 2 12) : 로마의 법률학자. 카라칼라 황제에게 죽으 라는 명을 받음 318 패린 (P.Par i n) : 문화인류학자 219, 258, 269 페디다 (P. Fedid a ) 126 포 (E.A.Poe, 1809-1849) : 미국의 시인 • 비평가 • 소설가 37 포이어바흐 (L. A. Feuerbach, 1804-1872) : 독일의 철학자 43, 44 포티스 (M.For t es, 1906- ) : 남아프리카 태생. 영국의 인류학자 216, 223, 259 푀 (J. -P. Faye ) 512 푸꼬 (M. Foucault, 1926-1984) : 프랑스의 철학자 79, 145, 297, 401, 440, 441, 526 푸리에 (C.Four i er, 1772-1837) : 프랑스의 철학자 • 경제학자 101, 431, 432 프레이저 (J. Frazer, 1854-1941) : 영국의 사회인류학자. 『 황금가지』 176 프렌켈 (M.Fraenke l) 440 프로이트 (S. Freud, 1856-1939) : 오스트리아의 의사.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30, 32, 36, 45 52, 74, 75, 83, 86-88, 91-96, 101-105, 117, 120, 126- 128, 131, 134, 141, 144, 146, 150, 155, 165, 175, 176, 178, 180-183, • 186, 189, 190, 198, 261, 273, 323, 396, 399-401, 408, 409, 412, 414, 418, 427, 430, 437, 438, 441, 442, 461, 486-4 89, 491, 502, 512, 515, 516, 517, 519, 520, 523, 524, 571 프롬 (F. Fromm, 1900-1980) : 독일 태생 . 미국의 정신분석학자 260, 265, 458 프루스트 (M.Prous t, 1871-1922) : 프랑스의 작가 70, 71, 108, 109, 111, 153, 467, 570, 571
프리단(B. Fr i edan) 97 플리돈 (Pla t on, 427?~347? B. C.) : 그리스의 철학자 47, 496 플레하노프 (G. Plekhanov, 1856-1918) :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 정 치학자 375 플레히지히 (Flechsig ) : 슈레버의 주치의 91 궁 하디 (T.Hard y, 1840-1928) : 영국의 소설가 • 시인 204 햄 릿 ( Hamlet ) 173, 439, 440 헤겔 (F.He g e l, 1770-1831) : 독일의 철학자 121, 457 헬리오가발루스 . ( Helio g ab ale, 204-222) : 로마의 황제 134, 137, 303, 316, 318, 411 횔덜린 (F. Holderlin , 1770-1843) : 독일의 시인 42, 206 히틀러 (A. Hi tler, 1889-1945) : 독일의 정치가 • 독재자 158, 159, 161 힝커 (F. Hi nc ker) 330
옮긴이 최명관 서울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아이오와주립대학, 노스웨스턴대학, 하이델베르크대학, 소르본느대학에서 철학을 연구했다. 숭실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동 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이다. 저서로 『의미의 철학』, 『허무와 영원』· 『사상과 인간의 문제』 등이 있으며, 역서로 『서양사상사』, 『플라돈의 대화』, 『예수의 생애 』·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 『인간이란 무엇인가』· 『국가의 신화』, 『혁명의 해부』 등이 있다. 앙띠 오이디푸스 •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대우학술총서 • 번역 66 1 판 1 쇄 찍음 1994년 3 월 5 일 1 판 1 쇄 펴냄 1994 년 3 월 IO 일 지은이-들뢰즈·가따리 옮긴이-최명관 펴낸이__朴孟浩 펴낸곳―― (주)民音社 출판등록 1991 . 12. 20 제 1 6- 490 호 135-120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06 강감출판문화센터 5 층 515-2000( 대표전화) 515-2007( 팩시밀리) Prin t e d in Seoul, Korea © 최명관, 1994 철학, 관념론 및 연관철학 KDC/ 131 값 17,000 원 ISBN 89-374 -40 66 -0 94130 ISBN 89-374 -30 00 -2 (세트)
대우학술총서 번 역
1 유목민족제국사 관텐/송기중 2 수학의 확실성 클라인/박세희 3 중세철학사 와인버그/강영계 4 日本語의 起源 밀러/김방한 5 古代漠語音韻學槪要 칼그렌/최영애 6 말과 사물 푸코/이광래 7 수리철학과 과학철학 와일/김상문 8 기후와 진화 피어슨/김준민 9 이성 • 진리 • 역사 파트남/김효명10 사회과학에서의 場理論 레빈/박재호 11 영국의 산업혁명 딘/나경수·이정우 12 현대과학철학논쟁 쿤 外/조승옥·김동식 13 있음에서 됨으로 프리고진/이철수 14 비교종교학 바하/감종서 15 동물행동학 하인드/장현갑 16 현대우주론 시아마/양종만 17 시베리아의 샤머니즘 디오세지 • 호팔/최길성 18 조형미술의 형식 힐데브란트/조창섭
37 수학적 발견의 논리 라카토스/우정호 38 텍스트 사회학 지마/허창운 39 현대물리학의 철학적 테두리 보음/전일동 40 과학과 가치관의 우선순위 스페리/이남표 41 신화의 진실 휘브너/이규영 42 대폭발 실크/홍승수 43 大同書 康有爲/이성애 44 표상 포더/이영옥정성호 45 과정과 실재 화이트헤드/오영환 46 고리스 국가 에렌버그/김진경 47 거대한 변환 폴라니/박현수 48 법인류학 포스피실/이문웅 49 언어철학 올스튼/곽강제 50 중세 이슬람의 국가와 정부 램톤/김정위 51 전통 쉴즈/김병서 · 신현순 52 몽골문어문법 뽀뻬/유원수 53 중국신화전설 l 袁fii)/전인초검선자 54 중국신화전설 Il 〈근간〉 55 사회생물학 I 윌슨/이병훈·박시룡 56 사회생물학 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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