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지라르 Rene Gir a rd 192 3 년 프랑스 아바뇽에서 출생한 르네 지 라르 는 1947 년 파리 고문서 학교 Eco l e des Ch ar t e s de Par i s 를 졸업하고, 1950 년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인디애나 대학, 브린모 대학. 존스 홉킨스 대학, 뉴욕 주립 대 등의 교수를 거쳐, 1974 년부터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현대사상 및 프랑스 어문학, 프랑스 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그의 첫 저서 『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 에서부터 시작된 인간의 욕망의 구조를 밝혀내려는 작업의 결실인 『 폭력과 성스러움 』 은 1973 년 프랑스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김진식 1954 년 경남 마산 출 생으로, 서울대 불문 과 를 나와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현재 울산대 불문과에 재직하고 있으 며 . 논문에 「 까뮈 소설 속의 알제리 」 등이 있다 박무호 '-' O '< ! a 0 一-=, 기울대 즌亡뉴百 동 대학원에서 「 꼬르네이유 후기바극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울산대 불문과에 재직하고 있으며. 역서에 『 어떤 회상 』 (마그리트 뒤라스) 등이 있다.

폭력과 성스러움

La Vio l ence et le Sacre

Rene Gir a rd © Edit ion s Bernard Grasset, 1972

폭력과 성스러움

르네 지라르 지음 김전식 , 박무호 옮김 民音社

감사의 말 구겐하임 Gu gg enhe i m 재단의 연구비 지원과 버팔로의 뉴욕 대학교 문리대학의 시간적 도움이 없었다면 이 책은 나울 수 없었을 것이다. 진심으로 감사한다 . 동시에 모든 동료들, 특히 유제니오 도나토 Eu g en i o Dona t o 와 호수에 하라리J osue Harar i에 대한 감사의 말을 빠뜨릴 수 없다. 그들의 일상적 도움과 수많은 암시들은 이 책 도처에 녹아 있다.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차례

감사의 말 5

제 1 장 희생 9

제 2 장 희생위기 61

제 3 장 외디푸스와 희생양 105

제 4 장 신화와 제의의 기원 137

제 5 장 디오니소스 181

제 6 장 모방 욕망에서 무서운 짝패까지 215

제 7 장 프로이트와 외디푸스 콤플렉스 253

제 8 장 〈토뎀과 터부〉 그리고 근친상간의 금기 289

제 9 장 레비-스트로스, 구조주의와 결혼 관습 333

제 10 장 신, 죽은 자, 성스러움 그리고 희생대체 377

제 11 장 제의의 통일성 413

제 12 장 결론 467

참고문헌 487

역자해제 493

역자후기 503

찾아보기 505

제 1 장 희생 수많은 제의 속에서 희생은, 때로는 아주 무시하지 않는 한 느껴지기 마련인 〈 아주 성스러운 것〉으로, 때로는 그 반대로 아주 심한 위험에 처하지 않고서는 저지를 수 없는 일종의 〈죄악〉으로, 이처럼 상반된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위베르 Hube rt (j) 와 모스 Mauss ® 는 그들의 『희생 성격과 기능에 관한 시 론 Essai sur la natu r e et la fon cti on du sa crific e 』 l) 에 서 , 합당하면 서 동시 에 부당하고, 공공연하면서 동시에 거의 감추어져 있는 〈제의적 희생 sac- rifice r it uel 〉의 이같은 이중적인 면을 설명하기 위해서 희생물의 성스 러운 특성을 들고 있다. 희생물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다. 왜냐하면 그 1) /'Annee soc iolo g iqu e, 2(1899) ® 앙리 위베르 Henr i Hubert (1 s12-1927) : 프랑스 역사가, 민족학자 . 켈트족 연구 의 전문가인 그는 모스와 함께 종교사회학 연구에 공헌. ® 마르셀 모스 Marcel Mauss(1s12-1950) : 프랑스 사회학자 , 민족학자, 뒤르켕 Dur­ ke i m의 조카로서 뒤르켕 학파 확립에 공헌했으며 이 학파의 기관지인 《사회학 연보 Am 造 So ci olog i' q ue 》를 재편. 종교사 분야의 연구에 뛰어났으며 위베르와의 공저 『회생』이 유명함. College de France 교수, 고등연구원 원장 역임. * 이 책에서 원주는 1), 2), 3) 으로 역주는 ®, ®, ®으로 표시함 : 역자.

희생물이 성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희생물은 죽임을 당하지 않으 면 성스럽게 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오늘날 널리 쓰이고 있는 〈 양가성 amb i valence 〉이라는 이름을 받을 만한 순환논리가 둘어 있다. 2 0 세기에 들어와서 그토록 남용되고서도 아직도 우리에게 설득력을 갖고 있으 며, 심지어는 인상적으로까지 보이는 용어이건 하지만, 이제는 양가성 이라는 이 말로부터는 아무런 빛도 나오지 않으며, 사실 이 말은 어떠 한 참된 설명의 근거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될 때인 것 같다. 이 말은 단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어떤 문제를 지칭할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희생이 죄악적 폭력으로 보인다면, 역으로 가령 그리스 비극에 서 희생이란 말로 묘사될 수 없는 폭력은 아마 없을 것이다. 시안이 아주 추악한 현실 위에다 시적인 베일을 씌웠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이다• 구러나 만약 희생과 살인이 유사한 것이 아니라면, 이 둘은 이 러한 〈상호 대체작용j eu de substit ut i on s rec ip ro q ues 〉에 분명히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는 너무나도 자명하여 그것을 강조한다는 것 자 체가 우습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하는 것이 쓸모없지는 않은 사실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희생에 있어서 너무 자명한 사실들을 지나쳐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일단 희생을 〈본질적으로 〉 , 아니면 〈순수하게〉 하나의 상칭적인 제도로 여기기로 작정하고 나면 거의 모 든 것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이 주제는 사실, 어떤 유형의 추상적 고 찰에 잘 들어맞는 것이다. 희생에는 수수께끼 같은 신비가 있다. 고전적 휴머니즘의 신앙심은 우리 호기심을 잠재우지만, 옛 작가들은 그 호기심을 일깨워준다. 그러 나 이 신비는 오늘날에도 계속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다. 이에 대한 현대인의 접근방법으로는, 우리 호기심을 없애는 것이 우리의 해이함 인지 무관심인지 아니면 일종의 용의주도함인지를 알 수가 없다. 이것 은 또 다른 제 2 의 신비인가, 아니면 똑같은 애초의 신비인가? 왜 사 람들은, 예컨대 희생과 폭력의 관련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느 것일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폭력의 생리학적 메커니즘은 한 개인과 다른 개인 , 한 문화와 다른 문화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다. 안토니 스토르 Anth o ny S t orr 의 『 인간의 공격성 Human A gr ess i on 』 (A t heneum, 1968) 에 의 하면, 어떤 성난 고양이나 사람과 가장 닮은 것은 다른 성난 고양이나 사람이다. 만약 폭력이 희생에서, 적어도 제의적 존재의 어떤 단계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한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홍미로운 분석요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요소는 우리가 모르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거나, 아니면 우리 상상보다는 아마도 덜 알고 있는 문화적 변수에 대해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독립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일단 그것이 발생하면 폭력 욕망은 사람으로 하여금 육체적 변화를 일으켜 싸울 태세를 갖추게 한다. 여기서 자극이 사라지면 반응도 멈 추 어버리는 단순한 반사작용만을 보아서는 안된다. 특히 정상적인 사 회조건 속에서 폭력 욕망은 일으키기보다는 전정시키기가 오히려 더 힘들다고 스토르는 지저하고 있다. 흔히 〈 비이성적 〉 폭력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폭력에 이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폭력은 폭발하려 할 때에 충분한 이성을 찾을 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성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겨냥한 대상이 조금이라도 자기 능력 밖에 있으면서 자신을 계속 비웃기만 하면, 폭력은 곧 이성을 잊어버리려 하기 때문이다. 욕구불만의 폭력은 항상 대체용 희생물을 찾으며 결국 · 은 찾아낸다. 욕망을 유발한 대상이 정복/쟁취 불가능할 때 폭력은 그 대상을, 폭력을 초래할 아무런 명분도 없는 다른 대상으로 대체한다. 대체 대상을 만드는 이 경향이 인간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많은 연구결과들이 밝혀내고 있다. 로렌츠 Loren tz ® 는 『공격성Ag­ ress i on 』 (Flammario n , 1968) 에 서 , 영 역 싸움을 하던 숙적 을 떼 어 내 고 나면, ® 콘라드 로렌츠 Konrad Lorentz ( 1903-1989) : 오스트리아의 비교행동학자 자연환 경 속의 동물행동 연구로 비교행동학에 큰 공헌을 하여 1973 년 노벨상 수상. 사 회질서 밑바탕에 있는 생물학적인 토대를 연구 .

항상 자기 가족에게로 공격 성향을 돌려서 마침내 가족을 멸망시키고 마는 어떤 물고기 종류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번에는 제의적 희생이 이런 식과는 정반대인 역방향의 대체작용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나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가령 우리는, 제물로 동물을 바치는 것은 보호하려 애쓰는 존재에게로 향하는 폭력의 방향 울, 그것의 죽음이 썩 중요하지 않거나 아니면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존재에게로 돌린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조셉 드 메 스트르 Jos ep h de M ai s tr e © 는 『 희 생 론 Eclair c i sse ment sur !es s acrific es 』에서, 희생에 쓰이는 동물은 마치 폭력을 속이려고나 하려는 듯이 항상 어떤 인간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

® 조셉 드 메스트르J osep h de Mais tr e (1ss3- 1 921) : 프 랑스 작가 , 철학 자 , 정치가 . 대혁명에 대한 대표적인 반대자로 유명한 그는 인간역사는 항상 신의 섭리에 따 · 른다고 믿었다

동물 중에서 쓸모에 있어 가장 소중하면서 가장 온순하고 가장 순결하며 , 기질이나 습성이 인간과 가장 가까운 것이 항상 희생제의의 희생물로 선택 되었다. (……)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동물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hurna ins > 것 이 회생 물로 선택되었다. 현대 민족학에 오면 이런 직관은 더욱 확실해진다• 희생제의를 행하 는 유목집단에 있어 가축은 인간의 삶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예 컨대 나일강 상류의 두 유목민족, 죽 에반스-프리차드 Evans-P rit­ chard® 가 연구한 뉘 에 르 Nuer 족 ® 과 고드프리 리 인하르트 Godfr ey Lien -

® 에반스-프리차드 E. E. Evans-Pritc h ard(1902-1973) : 영국 인류학자 . 아프리카 , 특히 수단과 중앙아프리카 원주민사회 연구에 몰두 . 수단의 뉘에르족 혈통과 결 혼풍습 연구가 유명하다. ® 뉘에르 Nuer 족 : 아프리카 수단 남부에 사는 나일 제족(諸族)의 하나.

hard t가 최근에 연구한 딩카 D i nka 족 ® 에게는 인간사회와 유사하며 같은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진짜 소 사회가 있었다 . 2)

• 2) 에 반스-프리 차드 E. E. Evans-Pri tch ard, r 뉘 에 르족 The Nuer 』 , Ox for d Press, 1940. 고드프리 리 인하르트 Godfr ey Lie n hardt, 『 신성과 체험 : 딩카족의 종교Divi n ity and E쟈 erien ce, the relig ion of the Di nka 』 , Ox for d Press, 1961 . 홍 딩카Di nka 족 : 북아프리카 수단 납부에 사는 나일계의 목우민.

뉘에르족에게는 시나 제의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와 기술 분야에도 소와 관련된 어휘가 아주 많이 있다 . 이런 어휘를 통해서 우리는 그 집단과 가축 사이의 구체적이고 의미 있는 관계를 세울 수 있다. 이 동물의 색깔과 뿔 모양, 나이 , 성, 혈통 등은 때로는 5 대에까지 계속 구별되어, 그 무리의 지도자를 식별케 하는 진짜 문화적 차별화를 이 루면서 인간사회와 홉사한 복사판을 이루고 있다. 각 개체의 이름에는 인간사회의 지위에 일치하는 동물의 이름이 항상 있다. 부족들 사이의 분쟁은 종종 가축 때문에 일어나며, 모든 손으은 가 축의 머리 수로 결재되며, 결혼지참금도 가축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에 반 스 -프리 차드는 뉘 에 르족을 이 해 하기 위 해 선 〈암소를 찾아라 cher-chez la v ache 〉 리수근 경구를 이용해 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사람들과 짐승 사이에는 프리차드의 표현대로 일종의 〈공생〉 관계가 있는데, 유목사 회와 그 가축둘 사이의 특칭적인 유사성에 대한 극단적이면서 희화적 인 실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공생이라는 말이다. 희생을 설명하기 위해 현장조사와 이론적 연구를 하다 보면 〈대체 작용 〉 이라는 가설을 만나게 된다. 희생을 다루고 있는 고대문학 도처 에서 우리는 이 개념을 볼 수 있다. 많은 현대인들이 이 개념을 무시 하거나 도의시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예컨대 위베르와 모스도 이 생각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는데, 그들에게 있어 이런 생각은 과학에 어긋나는 정신적 • 종교적 가치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셉 드 메스트르 같은 사람이 제의의 희생물에서 어떤 〈 죄 인 coup ab le> 대신에 항상 대가를 치루는 〈무고한 존재 i nnocen t e 〉를 발 견하고 있는 것도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의 가설은 그러나 이런 식의 도덕적 차이에 연연하지 않는다. 죽 희생물이 될 뻔한 것과 실제 희생물의 관계가 유죄와 무죄라는 말로써 규정되어서는 안된다는 말 이다. 사회는 무슨 대가를 치루고서라도 보호하려고 애쓰는 자신의 구 성원을 해칠지도 모르는 폭력의 방향을 돌려서, 비교적 그 사회와 무 관한, 죽 〈희생할 만한〉 희생물에게로 향하게 한다. 맹목적인 난폭성이나 불합리성처럼 폭력을 무서운 것으로 만드는 모든 성질에는 그 대체물이 없는 것이 아니다. 대체 희생물울 향해 덤 벼드는 이상한 성향이 그것인데, 이것은 폭력을 만족시킬 만한 아주 적은 노획물을 적당한 때에 던져주어 이 폭력이라는 적을 속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탐내던 아이 대신에 커다란 돌을 물고 있는 늑대나 귀신, 용이 등장하는 요정 이야기는 분명히 이런 희생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수 있다. * 폭력을 속이는 것은 폭력의 배출구를 막지 않으면서 간간이 먹이를 던져줄 때에만 가능하다. 카인 C ai n 과 아벨 Abel 이야기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성서는 형제 각각에 대해 하나의 설명만을 하고 있다• 카인 은 농사를 지어 수확한 열매를 신에게 바치고 있으며, 그 반면 아벨은 목동으로 신에게 새끼양을 바치고 있다. 형제를 죽이는 자는 바로 동 물을 제물로 바치는 〈폭력 속임 tr om p e- vi olence 〉을 할 수 없었던 자이 다. 신에 대한 희생적 경배냐 비회생적 경배냐의 차이는 사실 신이 아 벨을 선택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신이 아벨의 희생은 수락하면서 카인의 공물은 수락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곧 카인은 동생을 죽 이고 아벨은 형제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신의 언어로 되풀이해서

말한 것에 다름아니다. 구약성서나 그리스 신화에서 형제는 거의 항상 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들이 서로에게 숙명적으로 행하는 폭력은 반드시 제 3 의 희생물이 있어야만 사라진다. 동생에 대한 카인의 질투는 바로 이 인물을 규정 하고 있는 희생제위적 배출구의 부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회교 전설에 의하면, 신이 아브라함 Abraham 에게 그의 아둘 이삭 Isaac 을 대신해서 희생시키도록 주신 것은 아벨이 제물로 바친 그 양 이다. 한 생명을 구해 준 바로 그 동물이 두번째 생명을 구해 준 셈이 다. 여기서 우리는 신비로운 몽상이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원전에서 추출한 자료에 근거한 희생의 역할에 대한 실질적 직감이 문제이다. 성서의 다른 유명한 장면도, 〈‘희생대체 substi tut i on sa crifici elle’ 의 목 적은 폭력을 속이는 것이다〉라는 이 관점에 의해 찰 해명되면서 동시 에 역으로 이 장면이 이런 관점의 새로운 면을 밝혀주고 있는데, 그것 은 바로 야곱J acob 이 아버지 이삭에 의해 축복받는 장면이다. 늙어서 곧 죽을 것에 대비하여 큰아들 에서 Esaii를 축복하려고 작정 한 이삭은 미리 에서를 불러 자기 대신 사냥 가서 〈맛있는 음식〉을 가져오라고 명령한다. 동생 야곱은 어머니 라셀 Rachel 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다. 그녀가 두 마리의 새끼양을 골라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 며, 야곱은 자기가 형 에서인 것처럼 아버지에게 서둘러 갖다바친다. 이삭은 그 당시 눈이 멀어 있었다. 그래도 야곱은 형처럼 털이 나지 않았기에 매끈한 손과 목의 살찾 때문에 둘킬까봐 두려워했다. 어머니 라셀은 꾀롤 내어 양의 털로 야곱의 살찾을 덮어주었다. 야곱의 손과 목을 만져본 그 노인은 둘째아들인 줄도 모르고 야곱에게 그의 축복을 내려주었다. 새끼양은 아버지를 속이는, 다시 말해서 이 아들을 위협하는 폭력의 방향을 돌려버리기 위한 서로 다론 두 가지 방법으로 쓰이고 있다. 저 주받지 않고 축복받기 위해서 이 동생은 아버지께서 드실 음식을 만든 그 제물 짐승을 이용해서 형보다 먼저 아버지에게 가야만 했다. 그리고

이 아들은 문자 그대로 희생된 동물의 털 뒤에 숨는다. 이렇게 그 동 물은 항상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위치하여 폭력을 유발할지도 모르는 칙접적인 접촉을 막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유형의 대체작용이 만나고 있는데,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대체하는 것과 동물의 인간 대체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성서는 두번째 대체를 가리는 일종의 장막 역할을 하는 첫번째 대체만을 명 시적으로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폭력은 계속해서 회생물만을 향하므로 애초의 대상을 시야에서 놓 쳐버린다. 희생대체에는 이렇듯 항상 어떤 〈인지불능 meconna i ssance 〉 이 내포되어 있다. 희생이 행해지는 동안 희생은 그것의 기반이 되는 〈 방 향전환〉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없다 . 애초의 대상과 마찬가지로 이것 없이는 대체작용도 불가능하고 희 생도 그 효력을 잃게 되는, 애초 대상이 실제로 제물로 바쳐지는 희생 물로 슬쩍 바뀌는 변화 현상도 완전히 무시해서는 안된다 . 이제 막 살 펴본 성서 대목은 이 두 가지 요구에 완전히 부응하고 있다. 이 대목은 희생대체를 규정하는 그 이상한 속임수를 직접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 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언급 없이 그냥 지나쳐버리고 있는 것은 아니 다. 이 대목은 그 속임수를 다른 대체작용과 섞어서 지나치면서 힐끗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이것은 이 성서 대목 자체가 아마 희생적 성질을 갖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리라. 이 대목은 대체현상을 보여 주려 하지만 그 뒤에 또 다른 대체현상이 반쯤 숨어 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희생제도라는 초석적 신화를 발견한 것이다. 야곱이라는 인물은 종종 희생적 폭력의 능란한 조작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 세계에서는 율리시즈 Ul y sse 가 때때로 이와 흡사한 역할을 하 는데, 「창세기 Genese 」에 나오는 야곱의 축복이야기는 『오딧세이 Ody- ssee 』에 나오는 의눈박이 거인 시클로프 이야기, 즉 주인공이 마침내 이 괴물을 피하는 멋진 계책과 비교될 만하다. 율리시즈와 동료들은 의눈박이 거인의 동굴 속에 갇혔는데, 거인은

하루에 한 사람씩 잡아먹었다. 생존자들은 궁리 끝에 마침내 불타는 말뚝으로 괴물의 눈을 멀게 한다. 고통과 분함으로 미친듯이 화가 난 의눈박이 거인은 그들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동굴 입구를 막고서 서는, 나가서 풀을 뜯어먹어야 하는 자기 양떼들만 밖으로 내보낸다. 눈먼 이삭이 아들의 손과 목을 만져보았으나 양털만을 느꼈듯이, 이 거인도 자기 양을 확인하기 위해 지나가는 양의 등을 만전다. 거인보다 더 꾀가 많은 율리시즈는 양의 배 밀 털에 달라붙어서 무사히 빠져나 와 생명과 자유를 되찾는다.

「창세기」와 『오딧세이』의 이 두 대목의 비교는, 이 대목들에 대한 희생제의적 해석을 한충더 그럴듯하게 만든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폭 력과 그 대상인 사람 사이에는 항상 동물이 중간에 위치한다. 이 두 대목은 서로를 설명해 주고 있는데, 예를 들어『오딧세이』의 의눈박이 거인은 「창세기」에는 희미하게 나타나 있는 주인공을 위협하는 위험을 강조해 주고 있으며, 「창세기」에서 새끼양을 제물로 바쳐 맛있는 음식 을 바치는 대목은 『오딧세이』의 양에서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 회생적 성격을 강조해 주고 있다. * 희생제의는 항상 제사장과 〈신성(神性) div i n i te > 사 이의 중개로 정의 되어 왔다. 우리 현대인에게 있어 이제는, 적어도 피를 요하는 희생제 의에 대해서는, 신이 어떤 현실감도 갖지 못한 까닭에 전통적인 해석은 결국 이 제도를 통째로 〈상상적인 것 l'im ag ina ire> 이라고 내팽개쳐 버 렸다. 위베르와 모스의 입장은 『야만적 사고 la Pensee Sauva ge 』에서의 레비-스트로스 Lev i -S t rauss 의 생각을 낳게 한다. 희생은 현실적인 어떤 것과도 일치하지 않으며, 그것은 단호히 〈거짓〉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는 식이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신과 희생을 연결짓는 정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누군가와 의사소통을 한다는 환상에 빠져 있을 때, 학식 있는 자가 예 술에 대한 사랑으로 행하는 순전히 유아론적인 행위가 시라고 규정한 폴 발레리 Paul Vale ry의 시에 대한 정의를 다소 연상시킨다. 위에서 살펴본 유명한 두 대목은 물론 희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 지만, 신에 대해서는 둘 다 조금의 언급도 없다. 만약 신이 언급되어 있었다면 그 책의 이해도는 증가하기는커녕 오히려 감소했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고대 후기와 현대에서처럼, 희생은 사회에서 어떠한 실 제적 기능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다시 빠져들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위에서 살펴본 무서운 배경은 폭력의 구조와 함께 완전히 사라져버리 고, 우리는 다시 우리 욕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단순한 형식주의 적인 해석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희생 작용은 어떤 〈 인지불능〉을 전제로 한다. 신자 들은 폭력의 역할을 알지 못하며 또 알아서도 안된다. 이런 인지불능 중에는 확실히 〈희생 신학t heolo gi e du sac rifi ce 〉 이 대표적 인 것이다. 희 생물을 요구한다고 여겨지는 자는 바로 신이며, 화형에 처한 희생물에 서 나는 연기를 줄기는 자도 원칙적으로 신뿐이며, 제단에 쌓인 고기를 요구하는 자도 바로 신이고, 희생의식을 되풀이하는 것은 신의 화를 전정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신을 무시하면서 읽는 것도 결국에는, 이런 식의 독서가 온전히 〈 상상적인 것 〉 속으로 던져 버린 ,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없는 신학의 포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의 실제적인 제도를 순전히 환상적인 본질 주위에다 세 우려고 한 것이기에, 그 환상이 이 제도의 가장 구체적인 면들을 점점 파괴하여 마침내 그 제도 자체를 없애버린다 해도 놀랄 건 없다. 추상적으로 한꺼번에 신학을 부정하면 그것은 결국 유순하게 그것을 수락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므로, 그 대신에 그것을 하나하나 비판, 검토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희생과 신학이 감추면서 동시에 전정 시키는 갇등 관계를 다시 찾아내야 하며, 위베르와 모스로부터 나온 형식주의 전통과 결별해야 한다. 『신성과 체험 Div in i ty and Exp eri ence 』에

서 딩카족을 연구한 고드프리 리인하르트와, 여러 저술에서 특히 『 비 탄의 북 The Drums of Aff liction 』 에 서 넴 뷔 족 Ndembu 울 연구한 빅 터 터 너 Vic to r Turner 는 희생제의에는 내적 갈등, 숨은 원한, 경쟁심 등 집단 안의 모든 상호 공격 의사에 근거하여 희생물을 제물로 삼아서 행해 지는 〈 집단 전이 〉 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희생제의는 여기서 실제적 기능을 가지며, 대체는 전체 집단의 차원 에서 행해진다. 여기서 희생물은 특별히 위협받는 어떤 한 개인을 대 체한 것도 아니며 특별히 피를 좋아하는 어떤 개인에게 봉헌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 사회 구성원 전체에 의해 전체를 대체하고 전체에게 봉헌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희생제의는 공동체 전체를 그들의 폭력으 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며, 폭력의 방향을 공동체 전체로부터 돌려서 의 부의 희생물에게로 향하게 한다는 말이다. 희생제의는 도처에 퍼져 있 는 분쟁의 씨앗둘을 희생물에게로 집중시키고, 분쟁의 씨앗에다 부분 적인 만족감을 주어서 방향을 딴 데로 돌려버린다. 희생을 신학이라는 자족적인 해석 속에서 고려하길 거부하면, 우리 는 곧 희생에 관한 다른 종교적 담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담 론은 그 신학 가까이에 있으면서 원칙적으로는 거기에 연관되어 있지 만, 그러나 실제로는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그것에서 독립되어 있으 면서 희생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말하고 있기에 훨씬 더 홍미로운 담 론이다. 비나 맑은 날씨를 요청하기 위해 항상 희생제의나 아주 엉뚱한 의 식에 의지해 왔기에 종교의 허영심은 더 확고해졌다 . 그런 것은 분명히 있다. 특히 이 제도의 사회적 성격이 되색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희생물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물건이든 어떤 일이든 제공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제도가 번성할수록 더 뚜렷이 드러나는 희생 효과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부의 폭력〉이다. 희생제의가 없애려 는 것은 무엇보다 먼첫것은 바로 가까운 사이끼리의 분쟁, 경쟁 상태, 질투심과 언쟁이며 다시 세우려는 것은 공동체의 조화이고, 강화시키

려는 것은 사회적 일치이다. 다른 모 든 것은 다 여기에서 나온다. 우리 앞에 이제 열려져 있는 폭력의 이 본질적 국면, 죽 폭력 이해의 왕도를 통해서 희생에 접근하며, 희생제의는 인간 존재의 모든 면과 참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인간끼리 뜻이 맞지 않더라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비가 오고 태양도 빛나는 것은 사실 이다. 그러나 벌판은 황폐해지고 수확도 영향을 받게 된다. 중국의 유명한 글은 희생에 이러한 기능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 정하고 있다. 희생 덕택에 백성은 동요하지 않고 계속 평정을 유지하 므로 이 희생제의가 국가의 단합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楚語』 , 下 篇 第 2 章). ® 『 禮記 』 에 의하면 희생과 음악, 칭벌, 법 등은 모두 민심을 하나로 묶고 질서를 세우는 똑같은 목적을 갖고 있다 . 3) 晶

3) 래드클리프-브라운A. R. Radcliff e-B rown, 『 원시사회의 구조와 기능 S t ruc t ur e and Functio n in Pr imi tive So ciety』 , New York, 1965, p. 158. ® 주(周)나라 좌구명(左丘明)이 편찬한 춘추시대 8 국의 역사서인 『國語』 에는 초나 라를 이야기한 『 초어( 楚 語)』가 들어있다 . 『초어 』 하편 제 2 장은 〈 제사의 의의는 국 가와 백성을 편안하게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 라고 제의의 역할을 말하고 있다.

희생이 어떻게 제의의 범주에 들게 되었는지를 밝히지도 않고, 심지 어 희생이 속해 있는 제의의 틀 밖에서 희생의 기본원칙을 세우는 것 은 단순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심리주의 〉 에 위협받 는 것 같다. 자신의 아내나 직장 상사에게는 감히 하지 못하는 발길질 울 개에게 하는 즉발적인 행동을 제의적 행동에 비교할 수는 없다. 그 러나 그리스 신화는 거의 이러한 사소한 이야기의 거대한 변형체에 불과하다. 아킬레스 Ac hi lle ® 의 군대를 자기에게 주기를 거부하는 그리

® 아킬레스 Ach ill e : 트로이 함락시에 가장 용감한 전사로 묘사되고 있는 호머의 주인공 .

스군 장군들에게 화가 난 아작스 A j ax ® 는 그 군대의 식량으로 쓰일 양 때를 학살한다. 흥분한 그는 무고한 동물을 복수하려는 병사로 혼동한 것이다 . 여기서 제물로 죽은 그 동물들은 당시 그리스인들이 전통적으 로 희생물로 사용하던 것이었다. 학살은 모든 제의적 툴 밖에서 일어 나며 아작스는 미친 사람으로 통한다 . 이 신화는 엄격한 의미에서 희 생제의는 아니지만 희생제의와 무관하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제도 화된 희생제의는 기실 아작스의 흥분과 아주 유사한 효과, 그러나 그 안의 고정된 틀에 의해 다듬어지고 정리된 효과에 기반을 두고 있다. 유태 사회나 고대 사회와 같이 우리에게 다소 익숙한 문자 그대로 제의적인 체제 속에서의 희생물은 거의 언제나 동물둘이었다. 물론 폭 력에 위협당하는 인간을 다른 인간으로 대체하는 제의 제도도 있었다. 5 세기 그리스의 위대한 비극 시인의 도시 아테네에서는 인간 회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도시가 때때로 특히 재앙을 당할 때 희생시키기 위해서 자체 경비로 존속시켰던 〈파르마코스p harmakos 〉 @ 의 형태로 인간 희생제도는 계속 존재했었다.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 기한다면 우리는 그리스 비극에서 충분히 인정할 만한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인간 희생제의란 면에서의 메데이아 Medee 신화 는 동물 희생제의 면의 아작스 신화와 분명히 유사한 것이다• 유리피 데스 Eur i pi de 의 『메데이아 Medee 』에서 인간에 의한 인간 대체의 원칙은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남편 이아손 Iason 에게 방금 버림받은 메데이아가 화가 난 것을 보고 질겁을 한 유모는 가정교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아이들을 그들 어머니로부터 멀리 떼어놓으라고 부탁 ® 아작스 Aj ax : 『 일리아드flli ade 』 에서 아킬레스 다음으로 용감한 전사로 묘사되는 호머의 주인공 . 아킬레스가 죽고 난 뒤 그의 군대를 자지하려 하지만 다른 장군 들이 반대하자 격분한 그는 양메들을 병사로 착각하고 학살한다. ([j) 파르마코스 Pharmakos : 고대 그리스에서 사회에 재앙이 덮쳤을 때, 그것은 그 원흉으로 몰아 처형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고 안정을 되찾기 위해서 도시가 스스 로의 경비로서 준비해 두고 있던 인간 회생물 제 4 장 원주 15) 참조 .

한다. 어떤 희생물을 때리고 나야만 그녀의 화가 누그러진다는 걸 난 잘 알아요. 아 ! 그때 그것은 바로 적이 된다니까요 ! 메데이아는 공격할 수 없는 증오의 대상 대신에 자신의 아이들로 대체한다 . 이런 정신착란 행위를 〈종교적 〉 이라는 수식어에 합당한 모 든 것과 갇이 비교할 바가 못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유 아살해는 제의의 범주에 둘 수 있다. 이 사실은 그리스와 유태 사회를 비롯한 많은 문화에서 확인될 수 있다. 메데이아의 행위가 제의적 유 아살해에 관계된 것처럼, 아작스의 가축살해는 동물 희생제의와 관련 이 있다. 메데이아는, 마치 사제가 희생제의를 준비하듯이 자기 아이둘 의 살해를 준비한다. 살해하기 전에 그녀는 관례대로 제의적인 통고를 한다. 죽 그 의식의 성공에 방해될지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이 접근하지 말도록 경고한다. 아작스와 마찬가지로 메데이아도 우리에게 폭력의 가장 기본적인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만족을 못 느낀 폭력은 계속 축적되어가다 마 침내 범람하여 주위에 재난을 가져다주는 결과를 낳는다. 희생제의는 이 순간에 즉발적으로 대체작용과 방향전환을 행하여 〈 좋은 〉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한다. 소포클레스 So p hocle 의 『아작스』에 나오는 몇 개의 디테일들은 동물 대체와 인간대체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양메를 공격하기 전 에 아작스는 참시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킬 뜻을 비친다 . 이 위험을 가 볍게 여기지 않은 어머니는 아이를 눈에 띄지 않게 숨겨버린다. 희생에 관한 일반 연구에서는 인간 희생물과 동물 희생물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 희생대체 원칙이 실제 희생물과 희생물이 될 뻔한 것 사이의 〈유사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이상 인간이라고 해 서 이 조건이 만족되지 않는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 다시말해 사회가

어떤 범주의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범주의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제도화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는 말이다. 인간희생이 있는 사회와 없는 사회 사이의 단절을 축소할 의도는 전혀 없다. 그러나 이 단절의 공통점을 감추어서도 안된다. 사실 말해 서, 인간회생과 동물희생 사이에 본질적안 차이라고는 전혀 없다. 많은 경우에 이들은 바로 상호대체가 가능하다. 희생제도에서 거의 현실감 없는 차이를 고집하는 경향, 예컨대 동물희생과 인간희생을 같은 차원 에서 다루는 것을 꺼려하는 거부감은, 지금까지도 인류 문화의 본질적 인 면을 감싸고 있는 극단적인 인지불능 현상과 결코 무관한 것이 아 니다. 모든 희생양식을 함께 취급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예컨대 조셉 드 메스트르는 대체작용의 원칙을 설명하고 난 뒤 ,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 원칙은 인간회생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거 침없이 주장하고 있다. 인간을 구하기 위해 인간을 제물로 처단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견해는 『메데이아』 같은 작품 속에서는 암시적으로, 유리피데스에게서는 완전히 명시적으로, 그리스 비국에 의해 영원히 반론을 제기받고 있다. 유리피데스의 클리뎀네스트라 Cl yt emnes t re 는 딸 이피제니 l p h ig en i e 의 희생이 여러 사람을 구하기 위해 선언됐다면 그 희생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듯 비극 시인은 등장인물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인 간회생의 〈 정상적인 〉 기능을 밝히고 있는데도 메스트르는 바로 이것을 시 인하길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아가메농 A g amemnon 이 자기 딸을 죽 이는 것을 허락한 것이, 도시의 약탈을 예방하고 가정을 구하고 아이들을 구제하고, 〈 모든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을 회생시켰다면〉 그를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이건 단지 음탕한 헬렌느 Helene 때문이다 라고 클리뎀네스트라는 의치고 있다. 특히 위베르와 모스 같은 현대의 연구자들은 인간 희생을 절대 배 제하고 있지는 않지만_사실 어떤 명분으로 배제할 수 있겠는가마 는――그들의 논리 전개에 좀처럼 이 문제를 거론하고 있지 않다. 그 반면에, 전적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들은 항상 이것의 〈사 디즘적〉이고 〈야만적인〉 양상에만 집착하여 이것을 나머지 희생제의와 한번 더 떼어놓고 있다. 희생을 인간과 동물이라는 두 범주로 나누는 구분 자체에 이미 제 의의 엄격한 의미에서의 희생적 성격이 녹아들어 있다. 이 구분은 사실 동물은 희생될 만한 것인 반면에 인간은 희생에 아주 부적절하다는 생각, 가치판단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 제도에 대 한 인지불능을 지속시키는 희생의 유물 surv i vance sac rifi c i elle 이 들어 있 다. 단순히 이 인지불능에 기반을 둔 가치판단을 거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일단 이것을 괄호 안에 넣고서 이것 자체가 아닌 전체 속에서 고려한 희생제도의 지평에서 이것이 자의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문제이다. 명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나 구분을 없애고서, 희생물 선택의 기준이 있다면 그 기준을 찾아내고, 보편적인 원칙이 있다면 그 원칙을 추출해내기 위해 인간회생과 동물희생을 같은 지평에 놓고서 이해해야 한다. 앞에서 우리는 탐욕스런 욕망에 적당한 먹이룰 제공해 주기 위해서 모든 희생물, 심지어 동물 희생물도 그것이 대신하고 있는 것들과 〈비 슷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 유사성이 너무 동일하여 혼동 울 일으켜 큰 재앙을 초래할 정도가 되면 안된다. 동물 희생물의 경우 에는 어떠한 혼동도 일어나지 않도록 항상 그 차이가 뚜렷이 드러난다. 뉘에르족은 사람과 짐승이 홉사하도록 모든 조처를 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사람과 소를 혼동하전 않는다. 그 증거는 바로 그들이 언제나 소

를 희생시키지 사람을 희생시키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원시 사고체계의 오류에 다시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이 원시인이 우 리보다 이런 구별을 잘하지 못했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어떤 생물체가 희생될 만한 것으로 보아기 위해 서는 혼동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그 구분이 명확하면서 동시에 가 능한 한 많은 유사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되풀이해서 말하면 동물의 경우에는 그 구별이 쉽게 눈에 띈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는 그렇지 않 다. 인간회생의 대상자들을 보면 우리는 아주 다양한 리스트를 대하는 듯하다 . 거기엔 전쟁포로도 있고 노예도 있으며 아이, 총각, 산체 장애 자도 있고, 그리스의 〈 파르마코스p hannakos 〉 처럼 인간 쓰레기도 있으 며 어떤 사회에는 왕도 있다. 이 리 스 트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것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까? 우선 여기에는 전쟁포로, 노예, 파르마코스처럼 사회에서 배 제됐거나 그 속에 거의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의 원시 사회에서 아이들이나 성인식을 거치지 않은 청년들은 그 사회에 속하 지 못했으므로 권리나 의무도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사회와 그 구성원 사이의 관계나 그와 유사한 관계를 그 사회와 갖지 못하는 사회 의부 혹은 주변의 사람만을 문제삼기로 한다. 그들은 이방인, 적이라는 자격 때문에 혹은 나이나 노예라는 신분 때문에 이 미래의 희생물들은 사 회에 대해 충분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왕은?〉 하고 의문을 품을 것이다. 그는 사회 핵심부에 있지 않은가? 그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는 핵심적이 ·고 중요한 그 지위 자체가 그를 타인들과 분리시키며 그를 진짜 〈사 회에서 배척된 자 hors-cas t e 〉로 만든다 . 마치 파르마코스가 〈낮은 것p ar le bas 〉으로 사회에서 유리되어 있듯이 왕은 〈높은 것 par le haut> 때문 에 사회에서 벗어나 있다. 게 다가 왕에 게는 궁정 광대 fo u 라는 신분의 말동무 re p ondan t@ 가 있다 . @ 말동무 re p ondan t : 복사 혹은 보미사. 죽 카톨릭 미사집전 중에 신부의 기도에 '

라틴어로 맞답을 하면서 신부의 미사집전을 돕는 사람. 여기서는 왕 가까이에서 왕의 시종 경 이야기 상대자가 되어주는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로 쓰였다 .

그는 주인인 왕과 함께 사실상 고립 상태에 처해 있다. 이 고립 상황은 우리가 혼히 그에게 부여하는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가치보다 더 중 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모든 점에서 이 궁정광대는 확실히 〈 희생될 만하며〉 왕은 그에게 자신의 노여움을 풀 수 있다. 그런데 때로는 아 프리카의 어느 왕처럼 왕 자신이 가장 제의적이고 가장 엄격하게 희 생되기도 한다 .4)

4) 제 4 장 참조.

희생할 만한 것과 희생할 만하지 않은 것을 사회에의 완전한 소속 여부로 규정짓는 것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런 규정은 아직 추상적이므로 크게 의지할 바는 못된다. 많은 문화 속에서 여자는 진정으로 사회에 속하지 않지만, 여자는 전혀 혹은 거의 희생되지 않 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아주 단순한 이유가 있다. 기혼 여자는 남편이나 남편 집안의 소유물이면서 어떤 점에서는 자신의 천정 혈연 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 그녀를 희생시킨다는 것은 그러므로 두 집안 중 한 집안에서 그 희생을 진짜 학살로 해석하여 복수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이 점을 조금이라도 연구하면 복수라는 이 주제가 여기서 많은 빛을 던져준다는 사실을 우리는 곧 알게 된다. 동물희생은 말할 것도 없고 앞에서 살펴본 인간희생의 경우에서도 모든 회생할 만한 것과 희생할 만하지 않은 것은 본질적인 특성에 의해 구별되는데, 이것은 모든 희생제의 사회 안에 언제나 있는 것이다. 제의적 희생물과 그 사 회 사이에는 어떤 유형의 사회적 관계가 결여되어 있다. 이 결여된 사 회적 관계는 가까운 사람의 원수를 갚는 것이 의무라고 여기는 다른 사람들의 복수 위험 때문에 어떤 개인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는 사회적 관계를 말한다. 희생제의란 단지 복수의 위험이 없는 폭력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는 제의에서 복수라는 주제가 갖는 상당한 위치를 확인하는 것과, 예

컨대 다음과 같이 양의 살해처럼 전혀 복수의 위험이 없는데도 끊임 없이 복수를 언급하는, 복수에 대한 진짜 강박관념의 우스운 모순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람들은 살해에 대해 용서를 빌고, 동물의 죽음을 슬퍼하여 마치 친척인 양 눈물로 죽음을 애도하기도 하였다. 죽이기 전에 먼저 동물에게 용서를 구 하기도 하고, 한 마리 짐승의 피해에 대해 그 씨족 전체에게 복수하지 않도록 비는 것처럼 나머지 짐승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이갇은 생각의 영향으로 짐승 학살의 장본인은 벌받거나 처단되거나 추방되기도 하였다 .5)

5) 위베르, 모스 공저, 『희생 성격과 기능에 관한 시론』 in M. Mauss, 『전집 Oeuvres 』 I, Paris, 1968, pp. 233 一 234.

제사장은 희생물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지 않도록 그 희생물의 〈씨 족으로 간주되는〉 같은 종류의 동물 전체에게 간청한다. 복수당할지 모르는 학살이라는 희생제의의 묘사를 통해서 이 제의는 의식의 역할 이 무언지, 대체해야 할 행위의 종류와 희생물을 선택하는 기준이 무 엇인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폭력 욕망은 피해자 측근들에게 도 영향을 주므로 그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욕망을 만족시킬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의 입장을 믿어줄 이 하나 없어 복수의 위험 없이 희생시킬 수 있는 소위 〈희생할 만한 희생물〉에게로 이 욕망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희생의 실제적인 본질에 관한 것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희생할 만한 것과 희생할 만하지 않는 것의 구분은 결코 그 특성을 곧장 공식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과 변화무쌍함이 이 런 구분의 논리성을 감추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집단 은 자체 구성원의 추방은 거론조차 않으면서 어떤 종류의 동물에 대 • 해서는 마땅히 추방되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런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대 사상은 희생제의의 문자 그대로의 편집광적인 면

만을 너무 중시함으로써 자기식의 인지불능을 계속하고 있다. 폭력의 폭발을 스스로의 요구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 요구사항이 아주 세밀할 뿐만 아니라 엄하기도 한 신의 명령과 갈은 절대적인 명 령의 결과로 볼수록 인간은 더욱더 잘 그들의 폭력을 분출시킬 수 있 게 된다. 희생을 완전히 현실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단정함으로써 현대 사상은 결국 희생제의의 폭력성을 계속해서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 이다. * 희생의 기능은 내부의 폭력을 전정시키고 분쟁의 폭발을 막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와 같이 엄밀히 말해 희생제의가 없는 사회에 서도 그것 없이 잘 지내고 있다. 그렇다고 분명히 내부의 폭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회 존립을 해칠 정도로 심한 것은 아니다. 희 생이나 다른 형태의 제의가 없어도 큰 재난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 실은 이 문화적 현상들에게 실제적 기능을 부여하는 것이 부적당하다 는 것과 아울러 이런 문제에 대한 민족학과 종교학의 부분적인 능력 부족을 말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제도를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와 종교 사회 사이에는 아마 차이가 있을텐데 제의 특히 희생제의가 이 점에 있어 보상자의 역할을 한다면, 제의는 이 차이의 결정적인 성격을 감추고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희생제의의 기능은 항상 우리를 피해 왔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희생제의에 의해 억압되 었던 내부의 폭력이 본성을 조금씩 드러낼 때, 앞에서 살핀 대로 우리 세계에서는 그 역할이 사소하거나 하나도 없는 혈투 blood f eud 라는 형 식의 피의 보복으로 이것이 나타난다. 바로 이 점에 관해서는 희생제 의는 그것을 확연히 멀리할 수는 없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고, 우리는 이제 거기서 벗어나 있는 그 특이한 운명과 함께 원시사회들의

차이점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왜 피의 복수는 그것이 유행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무서운 위협이 되는 것일까? 피에 대한 유일한 만족스런 복수는 죄인의 피를 홀리게 하는 것이다. 이때 복수를 받는 처음 행위와 복수 그 자체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없다. 복수는 스스로 다른 복수를 청하며 모든 복수는 새로운 복수를 부른다. 복수가 벌하는 그 죄악은 거의 항상 자신을 첫 번째 죄악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을 더 원초적인 죄악에 대한 복수로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복수는 끝나지 않는 무한한 연속과정이 된다. 한 집단 안 에서 복수가 일어날 때마다 복수는 전파되어 사회집단 전체롤 휩쓰는 경향이 있다. 작은 사회에서는 재빨리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 르는 진짜 연쇄반응을 촉발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복수의 확대는 사회 존립 그 자체를 위태롭게 한다. 어디에서나 복수가 엄격한 금지조항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복수가 여왕처럼 당당하게 보이는 곳도 바로 복수가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복수가 그늘에 가 려서 겉으로는 아무런 역할을 못하고 있을 때도 그것은 인간 관계의 많은 것울 결정한다. 그렇다고 복수의 금지가 은밀히 조롱받아야 한다 는 말은 아니다. 왜 복수의 의무가 부여되는가 하면 학살은 공포를 주 며 사람들이 살생하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절대로 피를 뿌리지 않는다는 의무는 정확히 말해 뿌려진 피에 대해 반드시 복수해야 한 다는 의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을 멈추는 것처럼 오늘날 복 수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폭력은 가증스런 것이라는 것 울 설득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그런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복수를 의무로 여기는 것이다• 복수가 계속 성행하는 세계에서 이 점에 대해 분명한 생각을 품고 일관성 있게 이야기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가령 비극에는 복수에 대한 일관된 태도는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비극에서 복수의 이론을 찾아내려 애쓰는 것은 이미 비극의 핵심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폭력의 각축장에서 각자는 자기가 차지하고 있 는 위치에 따라 똑같은 열정으로 복수를 기도하고 또 비난한다. 우리는 복수의 악순환이 원시사회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에겐 이 악순환이 없다. 이 특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해 우리는 제도적인 면에서 분명한 대답을 찾을 수 있다. 우 리가 복수의 위협을 피하는 것은 바로 재판제도 때문이다. 재판제도가 복수를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재판제도는 복수 를 단 한번만의 복수로 효과적으로 제한하는데 그 실행은 그 분야의 최고 관청에게 맡겨진다 . 이 재판 관청은 자신의 결정을 항상 복수의 〈 최종 결정 demi er mo t 〉 이 라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법이론보다 몇 개의 어휘 표현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연쇄적인 복수를 피하고 나면 사람들은 그것을 〈私 的인 〉 복수라고 부른다. 이 말은 〈공적인 〉 복수를 전제로 한 표현일텐데, 이 두번째 말은 전혀 명시되지 않는다. 원시사회에는 당연히 사적인 복수 만 있었다. 공적인 복수는 문명사회에서 볼 수 있는데 , 그 중에서도 사법제도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형벌제도의 사법 원칙은 모두 실질적으로는 복수의 원칙과 같다. 이 둘은 모두 폭력의 상호성, 대가의 원칙이라는 같은 원칙에 근거해 있 다. 이 원칙은 정당하여 이 정당성이 이미 그 복수에 나타나 있거나 아니면 어디에도 정당성이 없거나 하는,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자기 스스로 복수하는 자를 두고 영어에서는 〈그는 자신의 두 손 안에 법을 쥐 고 있다 He takes the law into his own hands> 라 고 말한다. 사적 인 복 수와 공적인 복수가 원칙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지만 사회적인 면에서 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죽 공적인 복수의 복수는 더 이상 복수당하지 않으므로 연속적인 복수도 끝나 확대의 위험을 피하게 된다. 원시사회에 사법 제도가 없었다는 것은 많은 학자들이 일치하고 있 는 견해이다. 『원시사회의 죄악과 관습 C ri me and Custa m in Savag e So-

c i e ty』 (London, 1926) 에서 말리노프스키 Mal i novsk i 0 는 다음과 같은 결론 에 도달한다. 〈원시사회에서는 민법 개념보다 형법 개념을 찾아내기가 더 힘들다. 이 사회에 우리식의 재판의 개념은 거의 적용할 수가 없 다〉 . 또한 『 안다만 섬 사람들 The Andaman Islanders 』 (Cambrid g e , 1922) 에 서 래드클리프-브라운 Radcl iff -Brown ® 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데, 이런 결론이 나오는 곳 모두가 그러하듯이 여기서도 연쇄적인 복수의 위협 이 모습을 드러낸다.

@ 말리노프스키 Bronis t aw Malin o wski( 1 884-1942) : 폴란드 태생의 영국 인류학자 . 멜라네시아 군도에서 현장조사. 모든 선입견을 배제하고 연구대상 민족의 언어를 습득한 후 그 사회 연구를 행 해 야 한다는 〈 참여조사〉라는 새로운 방법을 주장한 다 . ® 래드클리프-브라운 Radcl iff e-Brown(1881-1955) : 영국 인류학자 . 안다만군도와 오스트레일리아, 폴리네시아, 아프리카의 민족 연구. 말리노프스키보다는 뒤르켕의 〈 기능 〉 개념을 이용, 특히 오스트레일리아 원시사회 연구에 도입한 새로운 방법 으로 구조주의의 선구자로 인정하고 있다.

안다만 사람들은 선악에 대한 도덕적 관념체계라는 발전된 사회의식을 갖 고 있었다. 그러나 집단에 의한 징벌제도는 없었다 . 피해자가 복수하길 원할 때 복수도 바로 그 피해자가 했다 . 죄인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범행에 대한 형오보다는 복수당하는 죄인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을 더 강하게 나타내는 사람들도 항상 있었다. 『 원 시 사회 Pri mi tive So ci e ty』 (Ney York, 1947) 의 로버 트 로위 Robert Lo- jw usie tc e 같〉 에은 대몇해몇 민말족하고학 자있들다은. 로원위시사는회 이의 〈〈중재앙판관관청청 aaudtmo r i in teis t rca e tni o trn a lde e〉 이la 있는 사회와 없는 사회를 구별하고 있다. 이런 관청이 없는 경우 혈연

® 해리 로위 Robert Harry Lowi e( 1883-1957) : 오스트리아계 미국 인류학자 . 버클 리 대학 민족학 교수로서 북미 인디언의 사회구조와 풍습, 종교의 관계를 연구함 . 『 원시사회』 , 『사회구조』 등의 저서를 통하여 보편적인 사회구조에 관심을 가졌다 .

집단이 사법권을 갖고 있으며 〈이 집단은 마치 주권국가 E t a t souverain . 가 다른 국가를 대하듯이 다른 집단을 대한다〉라고 주장한다. 재판관 청도 재판제도도 없으면, 가장 강력한 집단 내부에 전권으로 결정할 수 있는 최고 결정기관이 있었다. 〈혈투〉나 연쇄적인 복수의 가능성에 종 지부를 찍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최고 결정기관뿐이었다. 그러나 이 조건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로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여기에선 집단의 연대의식이 최고의 법이다. 다른 집단의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한 사람을 자기 집단에서는 보호하려 애쓰는 반면, 피해자측 집단에서는 복수나 보상으로 그 희생물을 요구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태는 항상 연쇄적 복수나 내란을 일으키게 된다. (……) 척치족 Chukch i은 보통 단 한번의 복수로 평화를 유지하는데 이푸가오족If u g ao 은 분쟁이 거의 계속적으 로 이어진다. 이런 현상을 두고 사법제도라 한다면 그것은 이 말의 의미 남용일 것이다. 원시사회의 폭력 통제에 대해 우리 것과 같거나 더 나은 장점 울 인정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 본질적인 차이를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 로위 식으로 말하자면, 위의 예는 자주 통용되는 방식울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 이 방식에 의하면 사법제도가 없는 곳에서는 자유로운 복수가 그 제도를 〈대신한다〉는 것이다. 상식에 속하는 것 같은 이 주 장은 실은 완전히 틀린 것인데 이 주장은 많은 실수의 변명으로 쓰인 다. 이런 주장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법제도의 혜택을 받아왔으면서도 그 효과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무지를 반영하고 있다. 복수는 무한정으로 진행되는 것이기에, 복수에게 폭력을 자제하라고 부탁할 수는 없는 것이고 아예 복수 그 자체롤 자제해야 · 한다. 그 중 거는 로위 자신이 〈중앙관청〉을 가전 여러 사회의 〈사법제도〉의 예를 들 때마다 이야기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으로 밝혀진 것은 추상적 사법

원칙의 부재가 아니라, 소위 〈 합법적인 〉 행위는 항상 희생물 자신이나 그 측근의 편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피해자를 대신해 주고 〈복수 를 유보시키기 〉 위한 독립된 최고 기구가 없는 한 연쇄적인 폭력의 확대 위험은 계속 남아 있다. 복수를 다독거리고 억제하려는 노력은 일시적인 것으로서 결국 화해의지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의지 는 쉽게 생겨날 수도 있지만 또한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건대, 〈타협〉 혹은 〈결투 재판 duel j ud i c iair e 〉의 다 양한 변형태와 같은 제도를 〈사법제도〉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 다. 말리노프스키의 다음 결론으로써 이에 대한 논의는 그치기로 하자. 혼 란에 빠진 부족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서는 복잡하고 효과가 더딘 방법 밖에는 없었다 . 우리가 찾아낸 방법과 관습들 중 철대적인 법률과 규율에 따 르는 우리의 사법 관청과 유사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원시사회에서 평정이 위협받을 때 그에 대한 어떠한 결정적인 처방 이나 절대 확실한 치유책이 없다면 〈치유책〉보다는 〈예방책〉이 더 중 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제시한 희 생제의의 정의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폭력에 대한 예방 수단이 희생 제의라는 것이다. 혈우병 환자의 대수롭지 않은 출혈처럼 사소한 분쟁으로도 큰 재난 이 될 수 있는 세계에서는 희생제의가, 현실적이든 이상적이든 생물이 든 무생물이든 항상 복수할 능력이 없는, 죽 복수받을 위험이 없는 무 력한 희생물에게로 공격 성향을 집중시킨다. 이 희생제의는 조그만 만 족도 얻지 못하고 있던 폭력 욕구에다, 물론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것 이지만, 무한히 새로워질 수 있는 배출구를 제공한다. 이 효력에 대해 서는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증거가 많이 있다. 희생제의는 폭력의 싹 이 퍼지는 것을 막는다 . 죽 사람들이 함부로 복수하지 못하게 한다. 희생제의 사회에는 희생으로 대응하는 결정적인 상황은 없지만, 완

전히 이 희생과 연관된 어떤 위기가 있다. 사회의 단결과 연루되어 있 는 이 위기는 항상 분쟁과 불화로 나타난다. 위기가 심각할수록 당연히 희생물은 더 〈소중해〉진다. 특히 그리스와 로마와 같이 재판제도가 있던 곳에서는 희생제의가 약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희생의 다른 효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곳 에서는 희생의 존재이유가 없어진다. 물론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그러 나 거의 텅빈 형태로 지속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우려하는 것 이 바로 이런 상태인데, 이런 것은 우리로 하여금 종교제도는 실제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도록 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희생과 제의가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곳은 사 법제도가 없는, 그래서 복수의 위협이 있는 사회라고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고 희생제의가 사법제도를 〈대신한다〉고 말해선 안된다. 왜냐하 면 있지도 않던 것을 대신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며, 또한 모든 폭력에 대한 만인의 자발적인 포기 없이는 이런 영역에서 사법제도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수의 위험을 과소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희생제의가 과연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모르고 있다. 사법적 형벌이 없는 사회가, 우리가 더 이상 보지 못한 그런 폭력을 어떻게 막는지에 대해 우리는 의문조 차 제기하지 못한다. 우리의 이런 무지는 〈꽉 막힌 제도〉를 이루고 있 다. 우리의 무지는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것이 있는 것조 차도 모르고 있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종교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우리에게 아무런 존재이유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해결책은 그 문제를 감추고 있으며, 문제의 제거는 해 결책으로서의 종교를 감추고 있다. 원시사회가 우리에게 신비로워 보이는 것은 틀림없이 우리의 이 무 지와 관련이 있다. 이 사회에 대해 우리는 항상 극단적인 견해를 갖는 데 그것은 바로 이 신비 때문이다. 우리는 원시사회를 때로는 우리보다 아주 월등한 것으로, 때로는 아주 열등한 것으로 평가한다. 이처럼 우

리의 판단이 한결같이 양극단을 오락가락하는 것은 바로 이 사회의 사법제도의 부재 때문이다. 아무도 개인의 폭력이 많고 적음을 판단할 수 없는데 사회의 폭력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반면 우리는 사법제도가 없는 사회의 폭력이 우리 사회와 정확히 똑같은 위치, 같은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판단할 수 있다. 자기 주의 를 끄는 모습에 입각해서 우리는 이런 사회를 끔찍한 미개 상태에 내 팽개쳐져 있는 사회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이상화시켜서 그것을 따라야 할 본보기, 인류의 유일한 실제 모델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폭력이 행하는 피해는 너무나도 심각하지만 그 치 유책은 아주 불확실하므로 이에 대한 예방책이 강조된다. 그런데 예방 은 우선 무엇보다도 종교의 영역이다. 종교적 예방책은 폭력적인 성격 울 갖는다. 〈폭력과 성스러움은 뗄 수 없는 것이다〉. 희생제의라는 엄 격한 장치 뒤에는 특히 대상을 바꿔치기하는 폭력 속성의 〈교묘한 rusee> 조 작이 숨어 있다. 원시사회가 폭력에 완전히 내맡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사회가 우리 사회보다 반드시 덜 폭력적이라거나 혹은 덜 〈위선적〉이 란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려면 물론 특히 전쟁과 같이 가까운 사이의 위험을 멀리 있는 대상에게로 돌려버리는, 정도가 많든 적든 제의화된 모든 형태의 폭력을 고려 대상에 넣어야 할 것이다. 분 명히 전쟁은 어떤 단 하나의 사회 유형에만 한정되어 있는 건 아니다. 기술 수단의 엄청난 발달이 원시사회와 현대사회의 본질적 차이는 아 니다. 그 반면에 사법제도와 희생제의 같은 제도의 유무가 원시사회와 문명사회를 구분짓는 것 같다. 가치판단이 아니라 객관적인 앎에 도달 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제도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하는 것이다. 원시사회에서는 치유책보다 예방책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 종교에 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차이점을, 물론 보편적인 것은 아 니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환상적인 것은 아닌, 유럽의 초기 연구가들에

게 감명을 준 행동 혹은 심리의 일반적 특성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 이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세상에서의 인 간관계는, 지나칠 정도의 신중함과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되는 조심성 의 강요가 그 특칭이다. 우리에겐 위험스럽지 않아 보이는 게임이나 승부에 가담하길 거부하는 것을 우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방에서 치명적인 것이 위협할 때, 사람들은 때때로 분주한 우리 거동이 다소 우스울 정도로 〈고상한 신중성〉을 나타낸다. 이에 비하면 사업이니 정 치니 혹은 이념이니 하는 우리의 일상사는 모두 시시한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비폭력과 폭력 사이의 자동제어장치, 그 역할이 잘 안 알려져 있을 수록 더 직접적으로 우리를 결정하는 이 막강한 제도가 원시사회에는 없다. 우리가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아니 그에 대한 조금의 의구심도 없이 원시사회에서는 금지되었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항상 존재하는 바로 이 제어장치 덕분이다. 개화된 사회에서의 인간 관계의 특칭은, 때로는 완전히 이질적인 사이에서의 친근감, 유동성, 대담성이 다. 종교적인 것은 항상 폭력을 달래서 그것이 폭발하는 것을 막으려 한다.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가르침은, 일상 생활에서는 직접적으로, 의 식에서는 종종 역설적이게도 폭력의 중개를 통하여 간접적으르 비폭 력을 목표로 하고 있다• 희생은 아주 기이한 우회롤 거친 후에야 종교 적, 도덕적 세계로 되돌아온다. 아울러 우리는 희생이 효력이 있기 위 해서는 그 희생제의가 모든 종교적인 것의 특칭인 〈신앙심 pi e t as 〉의 정신 속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비로소 우리는 희 생이 왜 죄스러운 행위이면서 동시에 아주 성스러운 행위로, 합법적인 폭력이면서 부당한 폭력으로 보이는지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 만족스런 이해에는 아직 멀었다. 원시사회의 종교는 비폭력과 평정의 전체적인 분위기 속에서, 정말

참을 수 없는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항해서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 폭 력을 길들이고 통제하면서 한 방향으로 모은다. 그것은 폭력과 비폭력 의기묘한 결합을 잘 보여주는데 우리는 사법제도에 대해서도 거의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인간이 연쇄적 복수를 피하기 위해 지금까지 사용한 모든 방법들은 분명히 비슷한 것 갇다. 우리는 이 방법들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부 .류로 나눌 수 있는데, 첫번째는 복수심이 희생제의를 통해서 방향을 전환하게 되는 것인 예방조치이며, 두번째는 아직 치유 효과는 완전치 않은 타협이나 결투 재판과 같은 복수의 규제와 정리이며, 세번째는 그 치유 효과가 가장 뛰어난 재판 제도이다. 이 순서는 점점 효력이 커져가는 순서대로이다. 예방책에서 치유책 으로 변해 가는 것은 적어도 서양세계에서는 실제 역사와 일치한다. 초기의 치유책은 모든 점에 있어서 순전히 종교적인 상태와 효력 있는 재판제도의 중간단계로서 그 자체가 제의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종종 희생과 관련이 있다. 원시사회의 치유책은 우리가 보기에는 초보적인 단계로 사법제도를 향한 단순한 모색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의 실용적인 이점이 너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죄인이 아니라 복수받지 않은 희생물이다. 바로 이 희생물로부터 가장 직접적인 위험 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희생물이 다른 데서 복수를 분출하지 못하도록 이것의 복수 욕망을 참재워 줄 엄격히 절제된 만족거리를 이 희생물 에게 던져주어야만 한다. 선악에 대한 법률을 제정하여 추상적인 정의 롤 존중하도록 해서는 안되고, 되도록이면 타협에 기반을 둔 합의를 통해서 혹은 합의가 불가능할 때는 이 폭력이 주위로 확산되지 않도록 잘 조정된 무장 결투룰 통해서 복수에 종지부를 찍어 집단의 안녕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무장 결투는 분명히 결정된 적수 끼리 규제된 형식 아래 닫힌 공간 안에서만 행해지며 그것도 단 한 번으로 끝나야 한다.

모든 치유책들은 이미 사법제도를 향해 〈 가고 있는 중 〉 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변화가 있다면 이 변화는 연속적인 변화가 아니 다. 독립된 사법 관청의 중재가 구속력을 가지는 바로 그때 〈단절〉이 있다. 사람들은 이때에 비로소 무서운 복수의 의무감에서 해방된다. 사 법 중재는 이제 더 이상 위급한 성격은 갖고 있지 않다. 그 의미는 한 결 같지만, 그러나 이 의미도 흐려져서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이 제도는 우리가 그 기능에 대해 모를수록 역할을 더 잘 수행할 것이다 .. 그러므로 이 제도는 그럴 필요성과 또 그럴 능력이 있으면 곧 죄의 사필귀정, 간단히 말해 존중해야 할 추상적인 정의의 원칙으로 여기는 옹보법칙에 따라 항상 다시 조정될 수 있다. 처음에는 분명히 복수를 억제하려는 것이 치유책의 목표였다. 그러 나 이것들은 그 효력이 점점더 나아감에 따라 앞에서 보았듯이, 자신의 정체를 신비로 감싸게 된다. 이 제도의 초점이 종교적 예방에서 사법적 응보의 메커니즘으로 옮겨갈수록, 항상 희생제도를 도와주고 있던 우 리의 〈인지불능〉도 이 메커니즘 쪽으로 다가가 이번에는 이 메커니즘 을 감싸려는 경향이 있다. 사법제도 혼자만 있을 때는 그것의 기능이 눈에 찰 띄지 않는다. 희 생제도와 마찬가지로 사법제도는, 자신은 연쇄반응이 없어 복수당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다른 복수와 다를 뿐 다른 모든 복수와 똑같은 복 수란 사실을 숨기고 있다. 첫번째 경우, 회생물이 복수받지 않는 것은 그것이 〈선량하지 bonne> 않기 때문이다. 두번째 경우에는 〈선량한〉 회 생물에게 폭력이 가해진다. 이 폭력에는 집단의 힘과 권위가 있어서 아무도 이에 대해 반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법제도의 기능은 정말로 감추어져 있지 않다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재판이 추상적인 정의보다는 일반의 안전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사실이며, 우린 그 사실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시 우리는, 이 제도가 원시사회에는 없었던 그 자신의 사법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에 관한 연구서를 읽어보면

이 점을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원시사회와 문명사회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원시사회가 죄인을 규정하거나 유죄 원칙을 지켜나갈 수 없 다는 점이라고 상상하지만, 바로 이 점에 우리 자신이 속고 있는 점이 다. 원시사회가 우리가 보기엔 어리석게 아니면 사악하게까지 보일 정 도로 고집스럽게 죄인을 피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이 사회가 복수의 〈 먹이를 주는 것 〉 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제도가 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 왜냐하면 사실은 아것 이 복수의 원칙에 더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죄인에 대한 칭벌을 고집 하는 데는 다른 뜻이 없다. 모든 전정한 의미의 종교 방식들이 하는 것처럼 복수를 막고 규제하고 피하거나 아니면 제 2 의 다른 대상에게로 방향을 돌리려고 애쓰는 대신에, 사법제도는 복수를 〈 합리화하면서〉 동시에 뜻하는 대로 복수를 억제하고 근절시키는 데 성공한다. 죽 사 법제도는 복수를 아무런 위험 없이 다루어서 복수를 아주 뛰어난 치 유의 〈 기술 〉 로 만들며 부차적으로는 폭력의 예방책으로 만든다. 이 복수의 합리화는 그 집단의 더 직접적인 혹은 더 깊은 기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반면에 그것은 어떤 집단도, 비록 만장일치의 집 단이라도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그 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전권을 위임받은 사법 당국의 자율적인 독립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어떤 특정 집단을 대표하지 않고 단지 그 자신으로 완벽한 사법 당국 이기에 그것은 특정한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만인에게 ' 봉사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 결정에 모두가 승복하게 된다. 복수에 대해 완전 독점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법제도만이 거리낌없 이 폭력을 벌할 수 있다. 원시사회에서는 이런 유형의 행동이 복수를 더 격화시켜 전파시키거나 확대시킬 것이지만 사법제도는 이 독점권 덕분으로 복수를 정상적으로 진압할 수 있게 된다 . 그러므로 사법제도와 희생제의는 결국 똑같은 기능을 하는데 그 효 력에 있어서는 사법제도가 훨씬 앞선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 막강한 정치 권력과 관련되어서만 존재할 수 있다. 모든 기술의 진보가 그러

하듯이 이 제도도 해방과 억압이라는 상반된 효과를 동시에 갖춘 〈 양 칼날의 무기 anne a double t ranchan t 〉 와 같다. 원시 인도 이 제도를 그렇 게 보았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의 관점이 분명히 우리보다 더 객관적 이었다. 요즘에 와서 이 제도의 기능이 드러나 보인다는 것은, 이제는 이 제 도가 적철히 작용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그 기능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던 단계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 제도가 해 체될 위험의 위기에 처할 때 이 제도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지므로 이 런 제도에 대한 이해는 항상 그 제도가 치명적인 순간에 일어난다. 비 합법적 폭력과 합법적 폭력의 실제 정체를 감추고 있는 장치가 아무리 튼튼한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에는 하나씩 벗겨지고 툼이 생겨 마침내 는 붕괴하고 만다. 이때에 깊이 감추어져 있던 전실이 드러나게 되는 데, 그것은 순전히 ` 지적인 사실이 학자에게 드러나듯이 단지 논리적으 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서글폰 현실이나 우리가 피했다고 믿고 있지만 그러나 아직은 우리가 그 세력권 안에 있는 악순환이 나타나 듯이 다시 나타나는 상호복수가 그것이다. 폭력을 억제하는 방법들은 모두 폭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서 로 유사하다. 그것은 모두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해서 종교는 앞에서 살펴본 여러 방식의 예방책들과 같다 . 치유책 속에도 재판이라는 형태로서뿐만 아니라 희생제의에 거의 항상 나타나는 초보적인 형태로 종교가 스며들어 있다 . 넓은 의미의 종교는 틀림없이 치유책이든 예방책이든간에, 요컨대 인간 자신의 폭력에 대 한 모든 방책을 둘러싸고 있는 이 애매모호성, 희생을 매개로 할 때의 재판제도에까지 퍼져 있는 이 애매모호성과 분명히 관계가 있다. 이 애매모호성을 비합법적이고 유죄인 내재적인 폭력을 합법적이며 합당 하고 성스러운 폭력으로 효과적으로 극복하는 그 순간에 생겨난다. 희생제의의 희생물이 원칙적으로 신에게 봉헌되어 그에 의해 인정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판제도는 재판의 전실성을 보장해주는 어떤

신학에 근거하고 있다 . 그런데 오늘날 이 신학이 사라졌는데도 이 제 도의 탁월함이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이 신학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들의 재판 원칙과 복수의 원칙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몇 세기가 걸렸다. 만인에 의해 분명히 인정받고 있는 이 제도의 초월성만이, 어떤 체 제에서든지 합법적이고 성스러운 폭력을 구별해 줌으로써, 또한 그것 이 비난과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을 죽 복수의 악순환에 다시 빠져드 는 것을 막아줌으로써 치유나 예방책의 효과를 보장해 줄 수 있다. 점점 드러나면서 그 위에 선 구조물이 접점더 혼들린다 하더라도 항상 우리들 속에 감추어진 채로 자리잡고 있으므로 신학적이라기보 다는 더 깊은 의미의 종교적인 것이라 부를 만한 하나의 독특한 초석 적인 요소가 있는데, 이것만이 폭력과 종교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설 명해 줄 수 있다. 종교는 우리를 폭력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그리고는 폭력이 종교 뒤에 숨듯이 종교도 폭력 뒤에 몸을 숨긴다. 그러므로 우 리가 항상 종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그 밖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적어도 본질적으로는 그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의 죽음에 대한 호언장담식의 논란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이런 논란들 은 여전히 신학적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복수의 문제를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에 있어서 희생제의적이다. 이 복수 문제는 처음에는 완전히 구체적인 것이지만 그 다음부터는 전혀 철학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했듯이 모든 신을 학살하고 난 뒤 인간을 다시 위 협하는 것은 바로 연쇄적인 복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합법적 폭력을 규정하면서 모든 비합법적 폭력에 대한 합법적 폭력의 특수성을 보장 해 주는 종교적, 휴머니즘적인 모든 종류의 초월성이 일단 사라지고 나면, 폭력의 합법성과 비합법성의 구별은 완전히 각자의 견해에 맡겨 지게 된다. 죽 구별 기준이 어지럽게 혼들리다가 결국에는 없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폭력은 다 합법적인 폭력이 되는데, 그것은 결국 합법적 폭력이란 더 이상 하나도 없게 되는 것과 갇다. 단지 어떤

초월성만이, 희생과 복수 사이의 혹은 재판제도와 복수 사이의 차별을 믿게 만듦으로써 폭력을 계속해서 〈 속일 수 〉 있게 된다. 이런 까닭에 이 제도에 대한 이해와 탈신비화는 필연적으로 이 제 도가 붕괴되는 때에 일어나게 된다. 이 탈신비화는 적어도 그것이 완 료되기 전까지는 비폭력적인 것으로 아니면 적어도 그 제도보다는 덜 폭력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는 의미에서 계속 희생제의적이며 종교적이 다. 사실 이것은 점점더 폭력적인 것으로 되어가는데, 이 폭력이 덜 〈위선적〉인 것은, 더 능동적이고 더 지독해서 더 나쁜 폭력, 엄청난 개인적 폭력을 항상 예고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적이자 동시에 신화적인 차이 뒤에 있는 복수와 희생과 사법적 형벌의 이 분명한 일치, 즉 무차별을 확인하게 된다. 위기의 순간에 이것들은 항상 똑같은 무차별적 폭력 속으로 빠져드는데, 그것은 바로 이 세 현상이 모두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것을 추상적으로 규정하면 이 유사성은 과장된 것으로, 심지어는 사실인 것 같지 않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실례에서부터 검토하여 이 것의 명백한 효력을 시험해 보아야 하겠다. 우선 이것이 없을 때는 이 해도 분류도 안되어 〈엉뚱한 것〉으로 남아 있던 수많은 관습과 제도 둘이 이것을 통해서 해명이 된다. 폭력행위에 대한 집단반응을 연구한 『원시사회』에서 로위는 다음과 같이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척치족은 보통 단 한 번의 복수를 하고 난 뒤 평화를유지한다. (……) 이 · 푸가오족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들의 가족을 보호하려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해, 척치족은 종종 가족 한 명을 희생시켜서 분쟁을 피하려고 한다. 모든 희생이나 법적 징벌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복수의 순환을 막는 것이 문제인데, 로위가 이해한 것도 바로 이것이다. 그들 중의 한 사 람을 죽임으로써 착치족은 선수를 치는 것이다. 죽 그들의 가능한 적

에게 희생물을 제공하면서 그 적들로 하여금 복수하지 않도록, 다시 말해 한번 더 복수가 일어나지 않으면 안될 새로운 모욕이 될지도 모 르는 행위를 범하지 않도록 구슬린다 . 속죄의 이런 요소는 희생과 유 사한데, 이 유사성은 물론 그 희생물이 죄인과는 다르다는 희생물 선 택기준에 의해 더 강화되고 있다. 그렇다고 척치족의 풍습을 희생제의에 넣을 수는 없다. 사실 전정한 제의적 희생은 최초의 폭발적 성격의 유혈사태와는 직접적이고 공공 연한 관련이 전혀 없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어떤 행위에 대한 보상으 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연관성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희생의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으며 희생과 폭력의 관계가 잘 알려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 의미가 너무 분명히 드러나고 있으 므로 우리는 이 행위를 제의적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 행위를 법적 칭벌에 넣을 수가 있을까, 그리고 〈재판제도〉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두번째 살해의 희 생물이 첫번째 살해의 범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 물론 로위처럼 〈연대 책임 〉 이라 말할 수 있으나, 이 말로는 충분치 못하다. 연대책임이라는 말은 항상 존재하는 진짜 책임자를 대신하거나, 아니면 모든 개인들의 책임이 전체적으로 똑같은 경우에 쓰이는 말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연 대책임은 결코 진짜 죄인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는 이런 식의 배제가 일어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비록 모호하긴 하 지만 죄인의 배제가 너무 확실하기에 거기서 우리는 설명을 요하는 문화적 태도, 의미심장한 현상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원시인의 정신상태〉 속으로 도피하거나, 〈개인 과 집단 사이의 가능한 혼동〉을 핑계로 내세워서는 안된다. 척치족이 죄인을 면제해 준 것은 그의 유죄를 잘못 식별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 로 너무 완벽하게 그것을 식별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그 죄인은 죄인으로서 면제된 것이다. 척치족은 그들 행동이 합당한 이유가 있다 고 믿고 있는데, 우리가 알아내야 할 것은 바로 그 합당한 이유이다.

죄인을 희생물로 삼는다면, 그것은 복수가 요구하는 행위를 완수한 것이며 폭력의 요구에 충실히 따른 것일 것이다. 죄인 아닌 그 측근 중의 하나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너무 공개적인 복수라서 사람들이 원 하지 않는 폭력의 완전한 상호성을 피하게 된다. 반(反)폭력 그 자체가 폭력적인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바로 그 사실로 그것은 폭력적 성 질을 띄면서 더 이상 폭력과 구별되지 않게 된다. 그것은 이미 절도를 잃은 복수이며 예방하려던 것 속으로 뛰어든 것과 마찬가지이다.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폭력을 근절할 수 없다. 그러므로 폭력은 끝날 수가 없는 것이다. 모두가 폭력의 최종 결정판이라고 소리치지만, 바로 이 때문에 보복에 보복이 거듭되면서 전정한 결말은 결코 나타 나지 않는다. 모든 보복에서 죄인을 제의시킴으로써 척치족은 복수의 악순환에 빠지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조금 그러나 너무 심하지는 않게 그 흔적 울 지우려 한다. 왜냐하면 애초 살해에 대한 응수, 그들 중 하나가 진 빚에 대한 보답이라는 그들 행위의 원초적인 의미를 지워버리는 것은 원치 않기 · 때문이다. 살해로 인한 감정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상대방 이 바라는 복수와 너무 닮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다르지도 않은 행위를 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행위는 법적 징벌이나 희생과 혼동 되지는 않지만 유사한 것이 된다. 우선 이것은 폭력에 대한 대가와 보 상이란 점에서 법적 징벌과 유사하다. 척치족은 다른 집단에게 가한 똑같은 폭력적 피해롤 자신의 구성원에게 부과하는데, 그들은 이것을 기꺼이 감내한다. 그리고 두번째 살해의 희생물이 첫번째 살해의 죄인 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 행위는 또한 희생과 유사하다. 우리에게 이것이 합리성과는 거리가 멀고 부조리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유죄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바로 이런 점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이 유죄원칙은 이 것을 무시하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절대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원칙이 사라지면 항상 어떤 인식의 결핍이나 지적인 결함을 상상하게 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리의 합리성이 무시당하고 있다. 합리성이란 그 또 한 미래의 위험이 가득 차 있는 복수원칙을 엄격히 적용하는 것과 같 은 것이기 때문이다. 유죄와 징벌의 직접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요구하는 우리는 원시인 들은 몰랐던 사실을 알아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 순간 우리는 복 수의 〈 확대 〉 와 엄청난 폭력이라는 원시세계의 아주 실제적인 위험을 못 보고 있다. 기이하게 보이는 원시인의 풍습과 종교적 폭력이 몰아 내려 한 것이 바로 이 위험이었다. 특히 〈 저주받은 자 ana t heme 〉를 직접 손대지 않는 그리스 세계의 이 상한 풍습 속에는, 틀림없이 척치족 풍습의 원인이 되는 두려움과 비 슷 한 두려움이 들어 있다. 폭력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자신을 폭력에 오염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주받은 자를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 속에 그냥 내버려만 둔다. 그것은 바로 그 죽어가는 당사자 이의 에는 아무도 그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없으며, 또한 아무도 그에게 폭 력을 행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 불행한 사람은 망망 대해나 산꼭대기에 먹을 것 없이 홀로 내버려지거나 절벽 꼭대기에서 던져진다. 해로운 아이를 내버리는 것도 이런 식의 생각에서 나온 것 이라 할 수 있다. 이 모든 풍습이 우리에겐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 이유가 없는 게 아니며 또한 그 이유는 일관된 논리를 따르고 있다. 한 사슬에 또 하나의 고리가 덧붙여지는 식이 아닌, 이전의 폭력과는 질 적으로 다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항상 필요하다. 죽 사람들은 단 한 번으로 모든 폭력을 근절시키는, 진실로 결정적으로 · 끝을 내는, 근본적 으로 다른 폭력을 꿈꾸고 있다. 원시인들은 형식적인 수준에서 복수의 균형을 깨뜨리려 애썼다. 우 리와는 반대로 그들은 동일한 폭력의 반복을 잘 깨닫고서 〈다른〉 폭 력으로 끝을 내려 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폭력의 상호성을 두려워하 지 않는다. 모든 법적 징벌을 구조화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사법적

중재는 그것의 강제적 성격으로써, 자신이 복수의 악순환의 단순한 첫 걷음이 되는 것을 피하게 된다. 우리들은 순수한 복수의 상호성 속에서 원시인들이 무서워한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는 지경이다. 착치족의 행위나 저주받은 자에 대해 조심하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척치족의 해결책은 물론 복수와 비슷하지도 않을 뿐더러, 제의적 희 생이나 법적 칭벌과도 다르다• 그러나 또한 이 셋 중 어느 것과도 낯 설지는 않다. 이것은 복수, 희생, 법적 칭벌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같은 현상들이 서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 고서는 우리는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 척치족의 관습에서 우리는 아주 많은 심리학적 결과와 한정된 관심 거리를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예컨대, 척치족이 죄인이 아닌 그들 측근 중의 한 명을 죽임으로써 〈체면 잃는 것〉도 피하면서 상대측에게 화 해하는 것처럼 보이려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이런 것은 가능하 . 다. 하지만 완전히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전혀 다른 수천 개의 가 능성을 들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미궁에 빠져들 필요는 없다. 모든 심 리학적 가정들보다 종교적인 진술이 돋보이는데, 이것은 어떤 가정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어떤 가정도 제거해 버리 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종교의 본질적 개념은 제의적 불순i n pu rt e r it uelle 이라는 개 념이다. 지금까지의 지적들은 이 개념 연구에 대한 서론 역할을 한 셈 이다. 제의적 불순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폭력이다. 여기서 의심의 여 지 없는 확실한 사실이 드러난다• 두 사람이 주먹으로 싸우다가 피를 흘린다면 이 두 사람은 이미 〈불순〉하다. 이들의 불순에는 전염성이 있다. 죽 그들 옆에 있으면 곧

그 싸움에 말려들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 불순함 , 죽 폭력과의 접촉과 전염을 피하는 단 하나의 확실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거기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의무감이나 도덕적 금기의 개념 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오염된다는 것은 아주 무서운 위험이어서, 이미 물들었거나 이미 불순에 오염된 자들만이 스스럼없이 거기에 몸 울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 심지어 불순한 자와의 우발적인 접촉마저도 불순하게 만드는데, 적 의를 가진 폭력과의 접촉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어떻게 해서든 폭력 그 자체에 호소해야 하지만, 적어도 그 희생물은 순수해야 하며 해로운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어야 한다. 척치족이 생각한 게 바로 이것아었다. 우리들이 조사한 사례에 의하면 불순이나 전염이라는 개념들은 인간 관계의 여러 국면에 잘 나타나 있다. 끔찍한 현실은 이 개념들 뒤에 감추어져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종교민족학은 오랫동안 부정해 왔다. 특히 프레 이 저 Frazer ® 와 그의 제자들 시대 의 근대 학자들은 이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우선은 그들에게는 이런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며, 다음으로는 원시종교가 이런 사실을 은폐했기 때문 이다. 그러나 불순이나 전염과 같은 개념들은 그것들이 전제로 하는 〈 구체성 〉 으로 인해 역으로 본질적인 이 은폐 과정을 드러내고 있다. 순전히 인간 관계에서 유래하여 인간 관계를 위협하는 이 위험은 완 전히 〈 사물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제의적 불순이라는 개념은 그 성격 이 변하여 급기야는 물질적 접촉에 대한 불길한 공포에 사로잡힌 신 앙으로 바뀔 수도 있다 . 폭력은 전기나 혹은 발자크가 말하는 〈자기학〉 과 비슷한 순전히 물리적 법칙에 따라 확산하여 대상에 침두하는 일 종의 유체로 변하게 된다. 현대사상은 우리의 오해를 해소하고 그 왜곡 뒤에 감추어진 사실을 발견해 내기는커녕 종교를 모든 현실과 유리시 ® 프레이저 Jam es George Frazer(1s54-1941) : 영국 종교사학자, 인류학자, 원시인 의 신비신앙과 유럽의 전통적인 신비사상을 연구하여, 원시시대의 신비한 마법 ma gi e 이 후에 종교 re ligi on 로 변해가는 과정을 추적 조사한다 .

켜 싱거운 이야기로 만들어버려면서 폭력을 감추는 데 협조하여 오히 려 우리의 오해롤 더욱 심화시킬 따름이다. 한 사람이 목매달아 죽으면 그 시체는 불순한 것이며 또한 그를 매 단 끈도 그리고 그 끈을 맨 나무도 불순한 것이 된다. 이때 그 나무 주위의 땅도 불순한 것이 되는데, 시체에서 멀어질수록 불순의 정도는 줄어든다. 폭력이 행사된 장소와 대상으로부터 무언가 미묘한 발산물 이 생겨나와 주위의 모든 대상으로 침투하며, 시간/거리상으로 거기서 멀어질수록 그 침투가 약해진다고 믿어 왔다. 한 도시에서 무서운 참상이 일어났을 그 당시에, 만약 이 도시가 다 른 도시에 사철을 파견하고 있었다면 그 사절도 불순한 것이 된다 . 그 래서 사람들은 가능한 한 그들과 접촉하는 것, 얘기하는 것, 심지어는 그들이 있는 곳에 머무르는 것조차 피하게 된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사람들은 성수를 뿌리거나 희생제의를 하는 등 순화제의를 되풀이한다. 프레이저와 그의 학파는 불순한 감염에 대한 공포 속에서 종교사상 에서의 〈비합리적인 것〉과 〈미신적인 것〉의 뛰어난 기준을 발견했지 만, 다론 연구가들은 그것을 미완의 설익은 주장으로 간주하였다. 그런 데 이 관점은 과학적 예방과 제의적 예방의 놀라운 일치에 근거를 두 고 있다. 천연두 같은 전염병이 제각기 고유의 신을 가지고 있는 사회가 있다. 병이 창궐하는 동안에 그 병자는 이 신에게 바쳐진다. 그들은 집단에서 격리되어 〈입문자i n iti e〉 혹은 그 신의 사도, 죽 그 병에 걸렸다가 회 복한 사람의 보호하에 맡겨지는데, 이 사람은 그때부터 신의 권능을 가지게 되면서 그 신의 폭력 효과로부터 면역이 된다. 이런 유의 사실에 감명을 받은 학자들은 제의적 불순의 기원에서 병균 이론에 대한 희미하나마 실제적인 직관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그 러나 일반적으로 이 견해는 제의적 불순을 피하려는 노력의 방향이 현대 위생학의 방향과 정반대라는 이유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 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아직은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이 비판대로라

면 우리는 제의적 예방책을 아직은 초보단계지만 부·분적으로 이미 효 력이 있었던, 예컨대 지난 세기의 의학에 비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공포에서 일종의 〈초보단계의 과학〉을 보는 이 논리는 홍 미로운 사실을 알아내곤 있지만 아주 부분적이며 단편적인 것이므로 틀린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런 논리는 다만 병이 인간을 위협하는 유일한 운명으로, 극복해야 할 마지막 위협으로 여겨지는 ·사회와 환경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다. 원시인의 전염의 개념 속에는 분명히 전염 병도 들어 있다. 병은 물론 제의적 불순의 전체적 국면에 들어 있지만 단지 다른 것들 중의 한 영역일 뿐이다. 순전히 병리학적인 전염에 관 한 현대의 과학적 개념이 아주 넓은 의미를 가전 원시인의 개념과 일 치하는 유일한 부분이 이것이므로, 우리는 이 부분을 따로 떼어서 생 각해 보기로 한다.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전염이 우리에게 계속 실체로 남아 있는 영 역과 전염이 더 이상 없는 영역 사이는 구별이 안된다. 그렇다고 이 말이 프레이저나 레비-브릴 Levy - Bruh!@ 같은 사람들이 최근에 비난하 는 〈 혼동 〉 의 유형에 원시종교가 속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 역시 전영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형태의 폭력과 전염병의 일치는 이에 부응하는 지표들의 총체에서 나오는데, 이 지표들은 아주 일관성 있는 하나의 도식을 이루고 있다. 재판제도가 없는 〈원시〉사회는, 위에서 말한 복수의 확대와 우리가 지금부터는 〈본질적 폭력 vio l ence essen ti elle 〉이라 부를 순수하고 단순한 살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으므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어떤 태도 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다음과 갇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번째 이유는 우리는 이 본질적 폭력에 대해 © 레비 권 브륄 Le vy -Bruh!(1857 一 1939) : 프랑스 철학자 , 사회학자. 원시인과 현대인 의 사고체계 비교연구가 유명함 . 그에 의하면 , 원시인의 정신체계는 신비적인 〈논 리형성 이전단계 p relo giq ue 〉이며 현대인의 체계는 개념에 의한 결정과 요구로 특 칭지어지는 체계이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까마득히 모르고 있기 때문이며, 두번째는 원시인들조차 이 폭력을 단지 거의 완전히 비인간적인 형태로 , 즉 〈 성 스러움 le sacre 〉 이라는 다소 기만적인 양상으로서만 여기고 있기 때문 이다. 그 중에 어떤 것은 부조리하게도 보이지만 총체적으로 고려할 때 , 폭력에 대한 제의적 예방책은 전혀 환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희생에 대해 이미 확인한 것이다. 희생의 〈 순화작용 〉 이 폭력의 무한정한 파급울 막는 데에 성공한 것은 결국 그것이 일종의 〈 전염 co- n t a gi on 〉을 막는 데에 성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가 다시 살펴보면, 애초부터 폭력은 우리에게 아주 감염 되기 쉬운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 겨냥한 대상이 없을 때 대체용의 대상을 공격하는 폭력의 성향은 일종의 전염으로 묘사될 수 있다. 오랫동안 억압된 폭력은 결국 항상 그 주위로 번져 나가는데 이때부터 주변 사람에게 불행이 닥친다. 제의적 예방책은 한 편으로는 이런 식의 파급울 막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의적 불순, 즉 폭 력의 상황에 갑자기 말려든 사람을 가능한 한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다. 사소한 폭력도 대재난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 사실은 낡은 것도 아 니다. 적어도 우리 일상에서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폭력에는 〈 전염성의〉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때로는 이 전영을 벗어나기가 거의 불가능할 때도 있다. 폭력을 용인하지 못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용인하는 것만큼이나 치명적인 것으로 판명날 수도 있다. 폭력이 나타날 때 그 폭력에 기꺼이, 심지어는 열 광적으로 뛰어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폭력의 전개에 대해 대항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둘은 종종 폭력의 지배를 더 가능하게 해준다. 어떠한 규칙도 보편적으로 효력을 갖고 있지 못하며 어떤 법칙도 끝 까지 살아남지 못한다. 모든 처방이 효력이 있는 때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아무런 효용이 없을 때도 있다. 그때에는 처방이 역으로 작용 하여 병을 더 악화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폭력으로써만 폭력에 대항할 수밖에 없는 때가 언제나 있는 것 갇다. 이 경우에는 그 대항의 성공, 실패가 별로 중요치 않다. 왜냐 하면 승리자는 항상 그 또 다른 폭력이기 때문이다. 폭력은 때로는 적 접적이며 긍정적인 효과를 갖는가 하면, 때로는 간접적이고 부정적인 희한한 〈 모방 〉 효과를 갖기도 한다. 사람들이 그것을 억제하려 애를 쓰면 쓸수록 그것에게 먹이를 주는 셈이 되는데, 폭력은 사람들이 그 것을 억제한다고 믿는 장애물들을 오히려 자신의 작용 수단으로 바꾸 어버린다. 폭력은 그것을 끄기 위해 그 위에 던져지는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불길과 비슷하다. 우린 이제 막 불의 메타포를 사용했는데 마찬가지로 폭풍, 홍수, 지 진의 메타포를 둘 수도 있다. 페스트와 갇이 사실 그것은 메타포만이 아닌 실제 현실일 수도 있다 . 그렇다고 우리가 성스러움을 자연현상의 단순한 변모로 취급하는 주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성스러움, 그것은 바로 인간이 그것을 잘 지배할 수 있다고 믿을수록 더 확실히 인간을 지배하는 모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을 쓰 러뜨리는 폭풍, 산불, 전염병일 수도 있다. 그런데 깊이 감추어져 있는 인간 자신의 폭력과 인간 의부로부터 인간을 위협하는 인간 의적인 모든 세력에 들어 있는 폭력도 역시 성스러운 것일 수 있다. 이렇듯 성스러움의 진짜 핵심과 감추어진 본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폭력이다. 우린 아직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자신의 폭력을 자신 밖으로 돌리는 데 성공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그러나 일단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에 성공하고 나면, 즉 그들 주위를 배회하면서 둘러싸고 있는 전염 병이나 천재지변과 같이 그들을 괴롭히고 학대하는 신비로운 것의 실 체가 성스러움으로 판명되고 나면, 얼핏 보기에는 다른 것으로 보이지 만 실제로는 많은 유사성을 찾아낼 수 있는 현상들을 보게 된다. 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환자와의 접촉을 피하는 것이 좋다. 살인의 광같은란에 것 이연다루.되 왜거냐나하 자면신 전이자 죽는게 항되상는 후 것자을의 피원하인려이면 되_기__에 결 —국— 이 마 둘찬은가

지로 살인의 광란에 접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좋다. 우리가 보기엔 여기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유형의 〈전염〉이 있다. 그런데 현대과학은 이 중 첫번째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면서 명백하게 그 실체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원시시대, 죽 재판제도가 없던 사회 에서는 전염의 두번째 유형이 더 중요할 수 있다. 현대과학에서는 이질적이고 부조리한 것으로 보이지만, 모든 제도의 주요 근거와 궁극적인 기반을 제공하는 본질적 폭력과 비교해 보기만 하면, 죽각 그 실체와 유사성이 드러나는 모든 현상 종교적 사고는 제 의적 불순의 항목에 넣고 있다. 예를 들어 질병과 적에게 당한 폭력 사이에는 부인하지 못할 관계가 있다. 병의 고통과 부상의 고통은 유사하다. 환자는 죽음의 위험에 처 해 있는데, 죽음은 또한 능동적으로든 수동적으로든 폭력에 연루된 모 든 사람을 위협하고 있다. 죽음은 인간에게 닥치는 최악의 폭력일 따 롬이다. 질병에 대해서 우리가 단지 하나의 경우를 위해 따로 범주를 하나 더 만들었듯이, 요컨대 죽음을 낳는 다소 신비적이며 전염성이 있는 모든 원인들을 하나의 항목으로 묶어서 취급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종교적 사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형태의 경험론에 의지해 야 할 것이다. 이 사고와 현대 기술과학 연구는 실제적 효력이라는 똑 같은 목표를 갖고 있다. 구체적인 결과에 도달하길 원하지만 현실에 의해 억압받을 때마다 인간은 추상적 사념을 포기한다. 마찬가지로 그 가 지배하거나 억제하려는 세력이 그를 목철수록 인간은 더욱 더 신 중하고 엄격한 경험론으로 되돌아오는 법이다. 가장 초보적이고 가장 단순한 형식에 사로참힌 종교는 인간을 괴롭 히는 무서운 힘의 궁극적 속성에 대해선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다. 그 러면서 종교는 어떤 사실을 예측하여 인간에게 다음 행동을 결정할 수 있게 하는 지표를 제공해 주는 규칙적인 진행과 불변의 〈속성〉을 찾기 위해 단순히 그 무서운 힘들을 관찰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종교적 경험론은 항상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죽, 가능한 한 성스러 운 힘을 멀리하고 접촉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경 험론은 항상 어떤 점에서, 의학 경험론이나 과학적 경험론과 대개 일 치하게 된다. 어떤 학자들이 이것을 과학의 초기 형태로 인정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이 경험론은 우리가 보기에 아주 엉뚱한 결과에 이를 수도 있다. 그리고 너무 엄격하고 근시안적이어서 이것을 심리의 어떤 혼란 상태라고 설명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런 경험론에서 보면, 원시세계는 항상 온통 〈 병든 〉 세계이며, 그에 비해 우리 〈문명인〉은 〈건강한 사람〉 으로 보인다. 이런 식으로 사태를 설명하는 정신의학자들조차도 그러고 싶을 때는 주저하지 않고 그 범주를 전도시켜 버린다. 이렇게 되면 병든 사회는 〈 문명사회 〉 이며, 그에 비해 원시사회는 〈건강한 사회〉의 원형으로 나 타난다. 이 개념을 어떻게 취급한다 하더라도, 건강과 병이라는 개념으 로써 원시사회와 우리 사회의 관계를 밝히는 것은 적당하지 않는것 같다. 제의적 예방책들은 현대의 상황에서는 미친 짓으로, 아니면 적어도 〈 아주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스스로가 신성화시키고 있는 폭력에 대해 아주 모르고 있는 종교의 입장에서는, 사실 그것들은 합리적인 것이다. 목덜미에 『오딧세이』의 의눈박이 거인의 숨결을 느낄 때 사람 들은 가장 급한 것에 대비하게 되므로, 위기 상황에 대한 최선책을 마 음먹고 편안히 취할 수 없게 된다. 이때에는 충분치 않는 것보다는 지 나치더라도 아주 많은 대비책을 강구하는 편이 더 나은 것이다. 이런 종교적 태도는 갑자기 미지의 병을 직면한 의학적 태도에 비 유될 수 있다. 전염병이란 것은 밝혀졌지만 그 병원체 추출에는 성공 하지 못했을 때 취할 수 있는 소위 과학적인 태도란 어떤 것일까? 기존의 모든 병리학이 요구하는 예방책 중에서 단지 몇 개만이 아니라 예의없이 그 모든 조처를 취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상적인 것은 저항

해야 할 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므로 새로운 예방책을 발명하는 것일 데지만. 일단 전염병의 병원균이 확인되고 나면, 확인 전에 취해졌던 예방책 중 어떤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그것을 계속 되풀이한 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 병을 모를 때에만 그런 예방책을 쓰는 것이 합당하다 하겠다. 이 메타포가 끝까지 유효하진 않다. 원시인도 현대인도 결코 폭력이 라는 이 전염병의 병원균은 확인해 내지 못했다. 서양문화는 오늘날까 지 가장 극심한 형태의 폭력에 대한 확실히 아주 신비적인 보호를 누 리고, 또한 겉으로 보기엔 서양문화의 결과는 아니지만 서양문화 자신 이 그것의 결과일 수 있는 일종의 면역을 누려 왔다. 그럴수록 서양문 화는 폭력을 따로 메어서 분석하는 능력은 더 없어지게 되고 폭력이 라는 이 질병에 대해서 더욱 더 피상적인 관념만을 품게 되었다. * 널리 알려진 원시인의 〈금기〉 중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어 온 것은 아마도 여성의 월경 피에 관한 것일 것이다. 월경 피는 불순한 것이어 서 생리중인 여자는 격리되었다. 그녀들에게는 일상용품, 때로는 음식 도 혹시나 오염될까봐 건드리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왜 그것이 불순한 것일까? 월경의 피는 더 일반적인 출혈의 테두리 속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원시인들은 피와 연관되는 것을 피 하기 위해 온갖 기이한 예방책을 다 썼다. 예컨대 사고나 폭행 혹은 제의의 희생물에게서 흘러나온 피는 모두 불순한 것이다. 앞에서 든 〈폭력을 두려워하는 곳에는 어디든지 항상 제의적 불순이 있다〉라는 바로 그 정의에서 출혈의 이런 보편적인 불순이 나온다. 평정과 안정이 지속되는 한 피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폭력이 나타나면 피도 나 타나는데 이 피는 어디든지 침투하여 무한정 퍼져나간다. 이러한 피의

유동성은 폭력의 전 영성을 구현하고 있다. 피의 존재는 학살을 말해 주며 동시에 새로운 비극을 예고한다. 피는 폭력과 죽음의 색깔로 접 하는 것 모두를 더럽힌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 피는 복수를 부른다 〉 . 모든 출혈은 두려움을 준다. 그렇다고 월경의 피가 두려움을 준다는 사실에 대해 〈 그 이유도 따지기 전에 〉 놀라기만 해서는 안된다. 여기 에는 일반 법칙의 단순한 적용과는 다른 어떤 것이 있다. 물론 월경의 피와 학살이나 사고로 인한 피는 아주 쉽게 구별되어 왔다. 그런데 많 은 사회에서 월경 피의 불순은 아주 대단한 것이었다. 이 불순은 분명 히 성 ( 性)과 관계가 있다. 성은 인간이 그것을 이용한다고 여길수록 더 쉽게 인간을 농락하고 있는 힘들 중의 하나이다.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폭력은 집단적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는 성 적일 수 없다 . 집단은 모든 개인의 폭력이 겹쳐질 수 있다는 점에서 엄청나게 불어난 단 하나의 똑같은 폭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 그 반면 에 진정으로 집단적인 성은 없다. 이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성에 기반 을 두고 성스러움을 읽는 독서가 항상 폭력의 본질을 무시하거나 축 소하는 데 반해 폭력에 기반을 둔 독서는 왜 성에다가 스스럼없이 상 당한 비중을 주는가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 원시종교의 사 고에서 성은 결국 폭력으로 귀착한다 . 우리는 폭력이 성과 연관된 것 이기에 불순하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독서의 국면에 들 어가면 그 역의 주장만이 유효한 것으로 밝혀진다. 죽 〈성은 폭력과 연관된 것이기에 불순한 것이다〉. 여기에는 현대 휴머니즘과 상반되는 어떤 것아 있다. 현대 휴머니즘 은 궁극적으로는 , 비록 정신분석학이 죽음의 충동으로 장식되었다 할 지라도 그런 정신분석학의 〈범성욕주의 p an-sexual it e 〉와 한 통속이다. 그런데 그 칭표들은 분리시킬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고 또한 너무 집중되어 있다. 월경 피의 불순함은 성과 칙접 관계가 있다고들 말한 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무차별적 폭력과의 관계가 더 직

접적일 것이다. 학살된 자의 피는 불순하다. 그러나 이 불순함을 월경 피의 불순함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 반면 월경 피의 불순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범죄에 의한 출혈과 성에 동시에 비교해야 한다 . 여 성의 성기가 정기적인 출혈의 장소라는 사실은 항상 세상 모든 남자 들에게 큰 인상을 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 이 사실은, 그것 역시 출혈을 야기시킬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과 성 사이의 분명 한 연관성을 입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연관성의 속성과 그 범위를 알기 위해서는 이제 막 이야기한 그 경험론과 모든 종교적 사고 안에서 우리가 흔히 추측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평범한 상식〉으로 되돌아가 보아야 할 것 이다. 인간은 항상 똑같은 방식으로 이치를 따져 생각해 왔다. 모든 인류의 믿음은 단지 하나의 커다란 기만에 불과하며, 거의 우리만이 그 기만을 벗어났다는 생각은 적어도 너무 성급한 판단이다. 당장의 문제 는 서양 학문 혹은 그것의 〈제국주의〉의 오만함이 아니라 그것의 불 충분함에 있다. 종교에 관한 우리의 설명이 가장 부질없는 것이 되어 버리는 곳은 바로 우리 지식욕이 가장 강하고 가장 시급한 곳이다. 모든 종교의 공통된 유산인 성과 폭력의 밀접한 관계는 아주 놀랄 만한 일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유괴, 강간, 능욕, 새디즘 등의 폭력의 충동적인 발현과 폭력의 더 간접적 결과들에서 성은 종종 폭력과 사 이가 나빠진다. 성은 실제적이거나 상상적안 다양한 병을 유발한다. 성 은 때로는 산모나 유아 혹은 심지어 산모와 유아 둘 다의 사망 가능 성을 항상 안고 있는 출산의 피나는 고통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모든 혼인규칙과 금기들이 지켜지는 제의의 툴 안에서도 성은 폭력을 동반 한다. 그러다가 간음, 근친상간 등의 불법적 사랑으로 이 틀을 벗어나 게 되면 이 폭력과 그것의 결과인 불순함은 더 극심해진다. 성은 수많 은 갈등, 질투, 원한과 분쟁을 일으키므로 가장 조화로운 사회에서도 혼란의 영원한 원인인 것이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거의 아무런 반론 없이 수천 년 동안 인정되어

온 성과 폭력의 연관성을 인정하길 거부하면서 오히려 그들의 소위 〈폭 넓은 정신 〉 을 입증하려 애쓰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목해 야 할 〈 인지불능 〉 의 원인인 것이다. 폭력과 아주 홉사하게도 성욕도 자신을 유혹한 대상이 계속 접근불가능할 때는 대체대상으로 방향을 돌리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모든 종류의 대체작용을 기꺼이 받아들인 다. 폭력과 마찬가지로 성욕도 그것을 오랫동안 억제하면 축적되다가 마침내 온갖 혼란을 일으키고 마는 하나의 에너지를 닮았다. 다른 한 편으로는 어떤 〈 퇴폐 〉를 거론할 필요도 없이 아주 〈정상적인〉 사람들 에게서도 폭력이 성욕으로, 또는 성욕이 폭력으로 아주 쉽게 변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거부된 성은 폭력으로 터져 나오며, 역으로 사랑싸움은 속박으로 끝난다. 최근의 과학적 연구는 많은 점에 있어서 원시인의 관점을 인정하고 있다. 성적 흥분과 폭력은 거의 똑같은 방 식으로 나타난다. 이 두 경우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육체적 반응은 대 부분 같은 것이다 .6)

6) 안토니 스토 Anth o ny Sto r r, op. cit., pp. 1a-19.

월경 피와 같은 금기 앞에서 만사형통 식의 설명에 의지하기에 앞서, 그리고 예컨대 동키호테의 사고 속에서 〈마술사의 장난〉과 같은 역할 울 하고 있는 우리 사고 속의 이 〈환각들〉에 의지하기에 앞서, 우린 이미 직접적인 이해의 가능성들을 철저히 살펴보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결국 모든 성폭력과 월경 피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런 생각 에는 이해하지 못할 게 하나도 없다. 게다가 우리는 이 상칭화 과정이 모든 폭력을 여성에게만 덮어씌우려는 숨겨진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하고 자문해 볼 만하다. 월경 피를 핑계로 한 폭력의 전이가 일어나고 있으며, 여성을 희생시키면서 사실상의 독점이 일어나고 있 는 것이다.

* 불순을 항상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가장 세심한 예방책도 실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접촉으로도, 자기자신뿐만 아니라 오염 의 위험에 처한 공동체를 위해서라도 제거해야 될 오점을 낳을 수 있 다. 무엇으로 이 오점을 지울까? 불순한 피의 오염에 저항하여 그것을 순화시킬 수 있는 놀랍고도 기이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도 바로 피다. 그러나 이 피는 제의를 통해서 희생물이 흘린 피, 순수한 피다. 이 놀라운 역설 뒤에는 항상 폭력의 작용이 드러난다. 모든 불순은 결국 똑같은 위험, 죽 집단 가운데 끝나지 않는 폭력이 생겨나는 것으 로 귀결된다. 이 위험은 항상 똑같으며, 폭력의 방향을 뒤탈 없는 희 생물에게로 · 돌리기 위한 똑같은 방어책, 똑같은 희생작용을 일으킨다. 제의적 순화의 생각 밑바닥에는 순수하고 단순한 환상과는 다른 어떤 것이 있다. 제의의 기능은 폭력을 〈순화시키는 것〉에, 다시 말해 폭력을 〈 속여 서〉 복수받을 위험이 없는 회생물에게로 향하게 하는 데에 있다. 자신 의 효능의 비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므로, 제의는 상칭적인 칭표를 제공해 주는 사물의 수준에서 자신의 작용을 파악하려 한다. 확실히 피는 폭력의 전체적 작용을 상당히 밝혀주고 있다. 앞에서 얘기했던 부주의나 음모에 의해 홀리논 피는 바로 그 희생물에게서 흘러나와 응고되는 피인데, 그 피는 유동성을 곧 상실하고 색깔도 흐릿하게 탁 해지면서 딱지가 앉아서는 결국 그 딱지로 떨어져 나간다 . 곧 퇴색하는 이 피는 바로 폭력과 병과 죽음의 불순한 피와 같은 것이다. 쉽게 상 하는 이 나쁜 피는 갓 제물로 바쳐진 희생물에서 흐르는 선혈과 대조 를 이룬댜 왜냐하면 제의는 그 피가 액성이 많아서 찰 번져가고, 또한 빨리 지워질 수 있을 때만 그것을 희생물로 사용한다. 그래서 희생물의

피는 항상 유동성이 강하고 색깔도 선명한 진홍빛이다. 흐르는 피의 물리적인 변화는 폭력의 이중적인 성격을 의미할 수 있다. 어떤 종교 형식들은 이 가능성 중에서 기이한 한 부분을 끌어내 고 있다 . 똑같은 하나의 물체가 더럽히면서 동시에 씻어내고, 불순하게 하면서 동시에 순화시키고, 인간을 광란과 광기의 죽음으로 몰아넣으 면서 동시에 진정시켜서 인간을 회복시킨다는 것을 우린 이 피를 통 해서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유분방한 시적 줄거움인 가스통 바슐라르 Gas t on Bachelard 식 의 단순한 〈 물질적 메 타포 meta ph ore mate r i ell e> 만 을 보아서 는 안된다 . 그리고 로라 마카리우스 부인 Mme Laura Maka rius 이 그런 것처럼 7) 피의 이 애매모호성을 원시종교의 영원한 전도 뒤에 감추어져 있는 궁극적인 실체로 보아서도 안된다. 이 두 경우에 있어서는 폭력의 역설적인 작용이라는 본질적인 면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원시종교의 중요한 사실에서 결코 어떠한 실제적인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서 항상 〈 환각 〉 이니 〈 시 〉 니 하는 말만 읊어대고 있는 현대사상과는 달리, 종교 는 비록 피와 같은 유형의 상징물을 통해서만 접근하기에 폭력의 이 역설적인 작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현대 사상처럼 그것을 통째로 제거해 버리지는 않고 있다.

7) 예를 들어 「대장장이의 금기들J es Tabous du fo r g erons 」, 《디오니게네스 D i o g e­ ne>, 1 968 년 4-6 월호를 볼 것

종교사상의 가장 이상하고 엉뚱한 것들도 폭력에 있어서의 병과 치 유책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폭력은 때로는 인간에게 무 서운 얼굴을 보이면서 미친 듯이 큰 피해를 주지만, 또 때로는 온화한 빛으로나타나 그 주위에다 희생이라는 선행을 베풀기도 한다. 이 양면성의 비밀을 인간은 꿰뚫어보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좋은 폭력과 나쁜 폭력을 구별하여 후자를 없애기 위해 계속 전자만을 되 풀이하길 원하는데, 제의가 바로 그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희생 적 폭력 vio l ence sacri ficie l le> 이 효과가 있으려 면 가능한 한 비 희 생 적 폭

력과 많이 닮아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에겐 단순히 금기의 희한한 도 치로만 보이는 제의도 있는 것이다. 가령 어떤 사회에서는 월경의 피가 제의 밖에서는 해로운 것이 되는 그만큼 제의 안에서는 이로운 것이 될 수 있다. 피, 죽 폭력이 갖고 있는 이중적아면서 동시에 하나인 이런 성질은 유 리피데스의 비국 『이온 Ion J에서 매우 인상적으로 나타난다. 왕비 크 레우스 Creuse 는 고르곤느 Gor gone 의 똑같은 피 두 방울이라는 기이한 부적으로 주인공을죽이려 하는데, 한 방울은치명적인 독이며 다론 한 방울은 치유약이다. 이때 왕비의 늙은 노예가 다음과 같이 묻는다. 노인-그 여신의 이중 능력을 어떻게 거기에 담았습니까? 크레우스- 칼을 깊이 찔렀지. 그러자 저 깊이 있던 피가 한 방울 솟더군. 노인-그걷 어디에 쓸 겁니까? 그 효력이 뭡니까? 크레우스 . ― 이 피는 병을 낫게 하고 힘이 솟게 하지. 노인―그러면 두번째 피는 무슨 효력이 있나요? 크레우스― 이건 사람을 죽게 하지 . 고르곤느의 뱀 독이잖아. 노인-그 피두 방울을 따로가지고 왔습니까, 아니면 한데갖고 왔습니까? 크레우스-따로 가져와야지. 보약과 독약을 섞는 사람이 어디 있나 . 이 피 두 방울만큼 서로 다른 것도 없지만 또한 이처럼 서로 닮은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피 . 두 방울은 혼동하기가 쉬워서 아마 도 그것을 섞고 싶어질 것이다. 만약 이 둘의 혼합이 일어나면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의 구별은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좋은 폭력과 나 쁜 폭력의 차이도 더 이상 없게 된다.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이 뚜렷이 구별되는 한, 우린 아무리 큰 오점이라도 씻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그것이 뒤섞이게 되면 우린 더 이상 어떤 것도 순화시킬 수 없게 된다.

제 2 장 희생위기 이미 살펴보았듯이, 희생제의의 진정한 기능은 실제로 제물로 바쳐 지는 희생물과 그 희생물아 대체하는 인간 존재 사이의 연속성 _완 전한 단절 밀에 감추어져 있는 ― ―-을 요구한다. 이 두 가지 요구는 아주 섬세한 균형을 취하고 있는 인접상태에 의해서만 동시에 충족될 수 있다. 생물과 인간을 분류하고 위계질서를 매기는 방식의 모든 변화는, 아 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희생제도를 훼손시킬 위험이 있다. 희생제의를 계속 실행해 오면서, 언제나 같은 유형의 희생물을 제물로 바치다 보면 희생제의에 이러한 변화들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아주 무의미하게 희생제의를 느끼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이 희생제의 가 상당히 〈 훼손〉당했기 때문이다. 희생제의 속에는 관습에 의해서 엄격하게 고정되어 있는 것은 전혀 없다. 새로운 조건에 적응할 수 없다는 것이 종교의 일반적 특칭이다. 그 변화가 〈과다한〉 방향으로 이행되든 〈부족한〉 방향으로 이행되든 결국에는 동일한 결과에 도달할 것이다. 죽, 어쨌든 폭력의 제거는 이 루어지지 않고, 반면에 갈등은 증가되고 연쇄반웅의 위험도 증대된다.

만일 희생물과 폭력 사이에 지나친 단절이 있다면 희생물은 더 이상 공동체에 폭력을 끌어들일 수 없을 것이다 . 그렇게 되면 희생제의는 금속이 전기의 양도체라는 그런 의미의 〈 양도체 bon conduc t eur 〉 이기를 멈출 것이다. 반대로 만일 지나친 연속성이 존재한다면 폭력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너무 쉽게 전파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희생제의는 성스 러운 폭력이라는 특성을 상실하고 불순한 폭력과 〈 뒤섞이어 〉 불순한 폭력의 파렴치한 공범, 그 반영, 심지어는 일종의 기폭제가 되어버린다. 처음 결론에서 출발하여 우리들이 말하자면 〈 선험적으로 〉 공식화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바로 이런 내용이다. 또한 우리들은 문학 덱스트 둘이나 그리스 신화 특히 헤라클레스 신화의 비극적 각색을 통하여 이 가능성들을 〈입증할〉 수 있다. 유리피데스의 『 헤라클레스의 광기』에는 비극적 갈등, 죽 대치하고 있는 적수들 사이의 싸움이 없다 . 실질적인 주제는 회생의 실패, 즉 〈변질되어 가는〉 희생적 폭력이다. 헤라클레스는 시련을 끝낸 후 집으 로 돌아온다. 왕위를 찬탈한 리코스 L y cos 의 손에 그의 부인과 아이들이 잡혀 있었는데, 리코스는 그들을 희생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헤라클 레스는 리코스를 죽인다• 도시국가 안에서 행한 이 마지막 폭력 때문에 이 주인공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자신을 순화할 필요를 느끼고서 희생 물을 바칠 준비를 한다. 그때 그의 부인과 아이들이 옆에 있었다. 갑 자기 광적인 충동에 빠진 그는 그들을 새로운 혹은 오래된 적으로 여 기고 그들 모두를 〈희생시킨다〉. 이 드라마는 주인공을 증오하는 또 다른 두 여신 이리스 Ir i s 와 헤라 Hera 에 의해서 파견된 분노의 여신 리사 L y ssa 의 소행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 그러나 극적인 줄거리의 차원에 있어서 살인의 광기를 터뜨린 것은 바로 회생을 준비할 때였다. 시인도 느끼지 못한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시인은 폭력의 폭발 밑바닥에 있는 제의에게로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다. 학살이 끝난 후 다시 제 정신을 찾은 헤라 클레스에게 아버지 앙피트리온 Arnp h itry on 이 이렇게 묻는다.

―아들아, 도대체 무슨 짓이냐? 이런 미친 짓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 냐 ? 네가 정신이 나갔던 것은 아마 피를 흘렸기 때문일 게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헤라클레스는 이렇게 묻는다. ―격정이 저를 휘감아, 저를 파괴시킨 곳이 어디였습니까? 앙피트리온이 대 답한다. ―제단 근처였지 . 너는 성화에 손을 씻고 있었단다. 주인공이 행한 희생은 다시 주인공에게 폭력을 집중시킬 따름이다. 이 폭력은 너무 엄청나며 너무 지독하다. 앙피트리온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엄청난 시련과 그리고 그 도시가 최근에 흘린 피가 헤라클레스의 정신을 혼란시키고 있다. 폭력을 누그러뜨려서 밖으로 홑어버리는 대 신에 희생제의는 희생물에게 폭력을 끌어들여 결국은 폭력을 넘치게 하고 무시무시하게 주변으로 퍼지게 한다. 희생제의가 자신의 임무를 달성하기에는 이제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결국 이 희생제의는 더 이 상 일정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 없는 불순한 폭력을 증가시켰을 뿐이 다. 대체 메커니즘은 와해되고 희생제의가 보호하려던 인물이 그것의 희생물로 변한다. 희생적 폭력과 비희생적 폭력 사이의 차이가 절대적이기는커녕, 이 제 막 살펴본 바와 같이 자의적인 요소도 들어 있다. 따라서 차이는 언제나 사라질 위험이 있다. 전정으로 순수한 폭력은 없다. 최상의 경 우에 있어서 희생제의는 〈순화적 폭력 viol ence p u rifi ca t r i ce 〉이라고 규정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희생제의가 끝난 후에 제사장들도 자신을 순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희생제의의 과정은 원자력 설비의 오염방지 와 비교될 수 있다. 핵전문가가 작업을 마친 후에는 자신의 오영을 방 지해야만 한다. 그래도 사고는 언제나 가능하다·· · ·…. 희생으로 인한 파국적인 방향전환은 신화적 인물 헤라클레스의 본 질적인 특징처럼 보인다. 헤라클레스에 관한 또 다른 삽화인 소포클레

스 So p hocle 의 『트라키 니 의 여인들 !es Trach i n i ennes 』 속에 나타나 있는 네수스 Nessus ® 의 속옷에 관한 삽화 속에서, 이 특징은 그것을 가리고 있는 부차적인 모티브둘의 배후에서 아주 명백하게 드러난다.

® 네수스 Nessus : 반인반마의 괴물. 에 베노스강의 사공을 하다가 강을 건너는 헤 라클레스의 아내 데자니르를 범하려다 헤라클레스의 창에 찔려 죽으면서 데자니 르에게 그의 사랑을 차지할 수 있는 사랑의 묘책아라면서 그를 죽이게 될 계책을 가르쳐 준다.

헤라클레스는 데자니르 De j an i re 에게 구애하던 괴물 네수스에게 치명 적인 상처를 입힌다. 이 괴물은 죽기 전에 자신의 정액, 또는 소포클 레스에 의하면 레르느 Lerne 라는, 아홉 개의 머리를 가전 뱀의 피와 자 신의 피가 뒤섞여 묻어 있는 긴 속옷을 그 젊은 부인에게 준다(여기서 우리는 『이온』 속에서 둘로 나누어진 하나의 피와 아주 흡사한, 일체가 되는 두 피의 테마에 주목하자). 이 비극의 주제는 『헤라클레스의 광기』의 주제와 동일하다. 이번에 는 데자니르가 질투를 느끼는 아름다운 여자 포로를 데리고 주인공이 귀환한다. 부인은 남편을 위하여 선물로 네수스의 긴 속옷을 건네준다. 죽기 전에 그 괴물은 데자니르에게 남편의 영 ' 원한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 속옷을 헤라클레스에게 입히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또한 괴물은 사용하기 전에는 모든 열기를 피하여 그 속옷을 항상 불에서 먼 곳에 놓아두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 그 속옷을 입고서 헤라클레스는 순화적 희생제의를 기념하기 위하여 성대한 불을 피운다. 그러자 그 열기로 인하여 독기가 되살아난다. 이 것은 바로 이로움의 유약을 해로운 유약으로 변형시키는 제의와 같은 것이댜 헤라클레스는 고동을 못 이겨 몸을 비틀다가 아돌에게 명하여 준비한 화형대 위에서 곧 죽게 된다. 죽기 전에 그는 충실한 하인 리 샤스 L i chas 를 바위에 내던져 죽여버린다. 데자니르의 자살 또한 헤라클 레스의 귀환과 희생제의의 실패에 의해서 유발된 폭력 순환 속에 포 함된다. 희생제의가 보호했어야 할 사람을 향하여 다시 한번 더 폭력이

행사된 것이다. 이 두 작품에는 희생의 여러 모티브둘이 뒤섞여 있다. 자신도 얼마 전에 참가했던 살육에 여전히 도취된 채 도시로 되돌아오는 전사에게 는 아주 특별한 불순함이 달라붙어 있다. 무시무시한 시련둘로 인하여 마찬가지로 헤라클레스에게도 엄청난 양의 불순함이 축적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인정할 수 있다.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전사는 그에게 스며들었던 폭력을 공동체의 내부로 가져올 위험이 있다. 뒤메질 Du~ez il ® 이 연구한 오라스 Horace 의 “ 신화는 이 데마의 한 예이다. 오라스는 완전한 제의적 순화에 앞서 누 이동생을 죽인다. 헤라클레스의 경우에는 불순함이 제의 자체를 압도 한다. 두 비극 속에서 폭력의 메커니즘을 주의깊게 관찰해 보면, 희생 제의는 그것이 〈 변질된 〉 때면 언제나, 우리가 제 1 장에서 정의한 의미 의 연쇄반응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리피데스의 작품 속에서 리코스의 살해는 마지막 〈시련〉, 죽 피의 광란에 대한 아직은 합리적인 전주로 나타난다. 그러나 더욱 엄격한 제의의 관점에서 리코 스의 살해는 불순한 폭력연쇄의 최초의 고리일 수 있다. 이미 언급했 듯이, 이 사건과 함께 폭력은 도시의 내부로 침투한다. 이 첫번째 살 해는 『트라키니의 여인들』에서의 하인의 살해에 대응한다.

® 뒤메질 George Dumezil( 1 898— 1 986) : 프랑스 종교사학자 . 인구어족 신화 연구가. 언어학적 비교와 종교제의 연구를 통해 , 인구어족의 모든 종교가 정신적 절대권, 힘, 풍요로 계층화된 세 가지 기능이라는 공통된 구조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두 삽화 속에서, 우리는 본래 초자연적인 중재는 〈변질되는〉 희생제 의의 현상을 피상적으로 감추는 것 이의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여신 리사와 네수스의 건 속옷은 이 두 덱스트의 이해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원칙적으로 선한 폭력이 악한 것 으로 전도되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이 두 차폐막을 제거하는 것 으로 충분하다. 본래 신화적인 요소는 쓸데없는, 죽 덧붙여전 인물을 담고 있다. 사실상 분노의 여신 리사는 진정한 여신보다는 우화와 더

비슷하며, 네수스의 긴 속옷은 문자 그대로 불행한 헤라클레스의 피부 에 붙어 있는 과거의 폭력들과 같은 것이다. 전사의 귀환은 본래의 신화적인 의미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곧바로 사회학적인 또는 심리학적인 용어로 해석된다. 돌아옴 으로써 조국의 자유를 위협하는 개선장군은 이제 더 이상 신화가 아 니라 역사이다. 이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꼬르네이유 Corne i lle 가 우리에 게 반대의 해석을 제안하고 있다는 것을 제의한다면, 그가 『오라스 Ho­ race 』에서 생각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조국의 구원자인 이 개선용사 들은 후방의 비전투원들의 패배주의에 분개한다. 오라스와 헤라클레스 의 〈경우〉로부터 우리는 서로 모순될 수 있는 몇 개의 심리학적인, 혹 은 정신분석학적인 독서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석하려는 유혹, ’ 다시 말해서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제의의 진정한 위치가 첫번째의 해 석을 전제로 한다 하더라도, 갈등의 이편에 위치한 제의의 전정한 위 치를 감추고 있는 해석들의 분쟁 속으로 다시 떨어지려는 유혹에 빠 지지 말아야 한다. 제의적 독서는 모든 관념적인 해석들을 허용하며, 어떤 해석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다만 전사에게서 충만된 폭력 의 전염성만을 확인하고 제의적 정화의식을 처방하는 것으로 만족한 다. 그것은 폭력이 다시 튀어울라 공동에 퍼지는 것을 막는 목적뿐이 다. 우리가 방금 언급한 두 비극은 공동체 전체의 수준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현상들을 마치 예의적인 개인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삽화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희생제의는 사회적 행위이다. 정신착란의 결과가 〈운명〉에 의해서 정해전 이러저러한 인물에만국한될 수 없기 때 문이다. 역사가들은 그리스 비극을 구식의 종교 질서와 그 뒤에 오는 좀 더 〈근대적인〉, 죽 국가적이며 사법적인 질서 사이의 전환기에 위치시키 는 대 동의하고 있다. 구식의 질서도 쇠퇴하기 이전에는 틀림없이 어떤 안정성을 누렸다. 그런데 이 안정성은 종교적인 것, 다시 말해서 희생 의 위에서만 세워질 수 있다.

위대한 바극 시인들보다 연대기적으로 앞선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자들이라고 해서 비극의 철학자들이라고 평가하지 못할 것은 없다. 어 떤 덱스트들은 우리가 규명하려는 종교적 위기에 관해 아주 분명한 메아리를 들려주고 있다. 예를 들어 헤라클리트 Heracl it e @ 의 단장 5 에 서는 분명히 희생제의의 쇠퇴, 즉 불순한 것을 순화시키지 못하는 희 생제의가문제되고 있다. 종교적인 믿음은제의의 와해로혼둘리게 된다 .

® 헤라클리트 Heracl it e : 고대 그리스 이오니아 학파의 철학자. 만물의 근원을 불로 보며, 반대되는 것은 서로 대립과 결합을 번갈아가면서 나타난다고 주장하여 헤 겔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면서 현대 변증법적 사고의 아버지로 간주되고 있다.

진 흙 으로 목욕한 후에 진흙으로 몸을 닦으려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피로써 자신을 더럽히면서 그것으로 자신들을 순화시키려 애써 봐야 소용없 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얼마나 그를 어리석게 여길까 ! 이것은 바로 신 이 누군지도 모른채 막무가내로 벽에다 대고서 기도드리는 것이나 같다. 제의로 흘린 피와 범죄로 흘린 피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런 차이두 없다. 이것은 헤라클리트의 이 글을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태인 방랑시 절 이전의 선지자들의 유사한 텍스트들과 비교해 보면 더욱 두드러지 게 드러 난다. 아모스 &nos, 이 사야 Isa1e, 미 케 아 M i chee 0 는 극단적 인 폭 력의 용어로 희생제의를 비롯한 모든 제의가 효력없다는 것을 선언한 다. 그들은 인간 관계의 훼손을 아주 명백히 종교의 와해와 관련짓는다. 희생제도의 훼손은 언제나 상호적 폭력으로의 전락으로 나타난다. 제 3 의 희생물을 공동 제물로 바친 가까운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용서한다. 이때부터 그들은 서로를 제물로 바치려는 경향을 지닌다. 엠페도클레 스 Em pedocle ® 의 『정화 !es Pu rifi ca ti ons 』에도 이와 아주 유사한 것이 있다.

® 마케아 M i chee : 유대의 예언가. 이사야와 동시대인 . ® 엠페도쿨레스 Em pedocle : 고대 그리스 철학자. 두 편의 시 『 정화(淨化)』와 『 자

연에 대하여』를 저술했는데, 후자에 의하면 만물의 근원은 〈물, 불, 공기, 흙〉의 4 원소로 되어 있는데, 이 불생, 불멸, 불변의 4 원소가 〈사랑〉과 〈무쟁〉의 힘에 의해 결합, 분리되고 만물이 생멸한다는 것이다.

136. 결국 당신들은 언짢은 소문을 내면서 이 살육을 멈출 겁니까? 당신 들은 냉담하게 서로를 감아먹고 있다는 것을 못보십니까? 137. 아버지는 모습이 변한 아들을 사로잡는다. 그는 기도하면서 정신이 나 간 채 아들을 죽인다. 아둘은 미쳐버린 이 사형집행인에게 애원하면서 소리 지른다 . 그러나 궁전에다 아주 가증스러운 향연을 준비하고 있던 그는 말울 듣지 않고 아들을 참살한다. 마찬가지로 아둘은 아버지를, 아이들은 어머니를 사로잡아, 그들을 죽이고 바로 그들의 살을 먹어치운다. 〈희생위기 cris e sacr ifi c i elle 〉라는 개념은 비극의 양상을 상당히 밝혀낼 수 있는 것 같다. 많은 부분에 있어서 종교는 비극에 그의 언어를 제 공하는데, 범죄자는 자신을 심판자라기보다는 제사장이라고 여긴다. 비 극의 위기는 언제나 붕괴중인 질서의 관점이 아니라 생성중인 질서의 관점에서 다루어져 왔다. 이러한 회피의 이유는 명백하다. 근대적 사고 는 결코 희생제의에 실질적인 기능을 부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고로는 그 본질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질서의 붕괴를 꿰뚫어볼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비극의 시대의 글자 그대로의 종교적 문제들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질서가 존재했었다라고 확신하는 것만으로 는 부족하다. 분명히 역사적인 관점을 취하면서 전체의 윤곽울 그리던 유태의 선지자들과는 달리, 그리스의 바극 작가들은 그 윤곽이 전통에 의해서 고정되어 있는 전설적인 인물들을 통해서 희생위기를 언급할 뿐이었다. 인간의 피를 갈망하는 모든 괴물들에서, 다양한 전염병과 독기에서 그리고 위에서 비국적 사건이 엮어져 나가는 안개 자욱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는 내전이나 의국과의 전쟁 속에서, 우리는 분명하게 그 시 대의 메아리들을 간파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정확한 정보는 아직 부

족하댜 예를 들어 유리피데 스 에 있어서 왕궁이 붕괴될 때마다­ 『 헤라클레스의 광기.!I, 『토리드의 이피제니 Jph ig en ie en Tau ri de 』, 『바카스 의 여신도들 Les Bacchan t es』 속에서 - 시인은 우리에게 주인공의 비국 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데, 우리도 그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 문제는 바로 공동체 전체의 운명인 것이다 . 『 헤 라클레스의 광기 』 에서 이 주인공이 가족을 살해할 때에 합창대는 이 렇게 노래한다. 자, 보십시오. 폭풍우에 집이 흔들리고 지붕이 무너집니다. 이러한 직접적인 정보들은 문제를 지적하고는 있지만 문제를 해결 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극의 위기를 무엇보다도 〈 희생위기〉라고 규정하고 나면, 비극 속 에서 이것을 반영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만일 분명하게 그것을 나타내는 대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희생위기를 찾을 수 없다면, 중요한 차원들 속에서 포착된 비극의 본질 그 자체를 통하여 간접적 으로 희생위기를 찾아야 할 것이다. 만일 비극이라는 예술을 단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면 우리는 대칭 요소들의 대립이라는 단 하나의 사실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비극의 플롯, 형식, 언어의 양상에서는 모두 이 대칭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 고 있다 . 예를 들어 제 3 의 인물의 출현이 그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 전과 마찬가지로 제 3 의 인물이 나타난 뒤에도 프 랑스 고전극 관객들이 『르 시드 Le C i d 』의 구절이나 데라멘느 Therame ne @ 의 이야기를 식별해 내는 것처럼 관객들이 식별해 내면서 주의깊게 보고 있는 것은 진짜 말싸움과 비슷한 똑같은 비난과 모욕을 점점더 빨리 주고받는 두 주역들만의 대립이다. 죽 비극적 갈등만이 여전히 ® 테라멘느 Th t ramene : 라신느의 비극 『페드로 Phedre J의 인물 .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다. 형식적인 면에 있어서 바극적 갈등의 완전한 대칭은 두 주역이 서 로 한 구절씩 서로 주고받는 〈문답체 시 sti ch omy thi e > 속 에 잘 나타나 있다. 비극적 갈등은 일대일 결투의 칼을 말로 대체한 것이다. 물리적인 폭력이든 말로된 폭력이든 그 비극적 서스펜스는 동일하다. 적수들은 서로 격돌하는데, 이들의 힘의 평형은 우리로 하여금 이 갈등이 앞으로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게 한다. 이러한 구조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우선 『페니키아의 여인들 les Phen ici ennes 』에 나오는 에데오클레스 E t e ode 와 폴리니스 Pol yni ce ® 사이의 일대일 결투를 살펴보자. 이 이야기에 는 동시에 이 두 형제에게 적용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행동, 모든 공격, 모든 위장, 모든 과시 등은 결투가 끝날 때까지 이 두 형제에게서 모두 똑같이 되풀이된다.

® 클라이드 클루콘 Cl y de Kluckhohn(1905-1960) : 미국의 인류학자.

한 사람의 눈초리가 방패 모서리를 스쳐 지나가자, 다론 사람은 공격을 피 하려 창을 들어올렸다. 폴리니스가 창을 떨어뜨리자 에테오클레스도 자기 창을 떨어뜨린다. 풀리니스가 부상당하면 에테오클레스도 똑같이 부상당한다. 모든 새로 운 폭력은 언제나 불균형을 일으킨다. 이 불균형은 또 다른 반격을 받을 때까지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반격은 단순히그 불균형을 바로잡을 뿐만 아니라 앞선 불균형과는 역방향의 불균형, 이 역시 잠 정적일 수밖에 없는 불균형을 또 다시 야기시킨다. 비극적 서스펜스란 결국 재빨리 벌충되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엄청난 이 간격들에 다 름아니다. 사실 그것들 중의 가장 사소한 것도 모두 결정적인 것이지 만, 실제로 결정은 나지 않는다.

각자의 손에서 창이 떨 어 졌 기 때문에 싸움은 현 재 대등하다 . 바로 이때 그 둘은 칼 을 뽑아들고, 몸에 두르고 있던 방패 를 격렬하게 부딪치면서 서로 공 격한다 죽음조차도 이 두 형제의 상호성을 깨뜨리지 못하는 것 같다. 입안 가 득히 먼지롤 물고서, 서로를 죽인 그들은 나란히 누워 있다. 결국 그 들 사이의 힘겨루기는 결판나지 못한다. 이 두 형제의 죽음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죽음은 그들 전투의 대칭을 영속시킨다. 이 두 형제는 두 진영의 일인자들이었다. 이번에는 이 두 군대가 곧 이상하게도 역시 대칭적인 전정한 비국적 논쟁인 순 전히 말로만 하는 싸움으로 서로 다두게 된다. 바로 여기서 소위 비극 이 생 겨 난다. 결국 비극이란 앞선 폭력의 끝없는 유동성 때문에 야기된 끝없는 분쟁인 물리적인 투쟁을 말로써 연장한 것이라 하겠다. 그때 병사들은 펄쩍 뛰며 언쟁을 벌인다. 서로 우리 왕이 이겼다고 주장한다. 풀리니스가 이겼다고…… 어떤 이들은 풀리니스가 먼저 때렸다고 말한다. 둘 다 죽은 마당에 누가 이겼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 첫번째 갈등의 유동성은 그것을 반복하면서 대중에게로 확대시키는 두번째 갈등에까지 아주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비극적 갈등은 해결책 없는 갈등이다. 쌍방 모두에게 언제나 똑같은 욕망, 똑같은 논거, 똑같 은 무게, 죽 횔멀린 Holderl i n 이 말하는 〈평형 Gle i ch g e wi ch t〉이 존재한다. 비극은 정의의 저울이 아닌 폭력의 저울의 평형이다. 한쪽 저울판 위에 아무것도 없으면 다른 쪽에도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똑같은 경멸

이 상호교환된다. 두 데니스 선수의 공처럼 적수들 사이에는 똑같은 바난이 날아다닌다. 갈등이 지속되는 것은 적수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 가 없기 때문이다. 갈등의 평형은 때때로 소위 비극적 공평성 i m p a rti al it e 의 탓으로 돌려 지기도 한다. 횔덜린도 이것을 〈 Im parti al it a t 〉 라고 부른다 . 그러나 이런 해석은 만족스러운 것 같지 않다. 공평성은 선입견에 대한 단호한 거 부, 죽 적수들을 똑같이 취급하려는 확고한 의지이다 . 공평성은 딱 잘 라 해결하려 하지 않으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이것은 또 그렇게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고 단언하지도 않는다. 거짓 우월성에 불과한 공평성의 과시는 언제나 있는 법이다. 사실 모든 해결책은 다음 둘 중의 하나이다. 적수들 중의 하나는 옳고 하나는 틀리기 때문에 우리의 입장을 정해야 하거나, 아 니면 틀린 것과 옳은 것이 양쪽에 아주 똑같이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 입장을 정할 수 없거나 하는 것이다. 자신을 과시하려는 공평성은 두 해결책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려 하지 않는다. 공평성은 한쪽에서 밀리면 다른 쪽으로 도망치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쌍방이 모두 〈옳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폭력은 이유가 없다 〉 는 것을 인정 하기를 꺼려하고 있다. 당파성과 공평성에 대한 환상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바로 그곳에서 비극은 시작된다. 예를 들어 『의디푸스 대왕』 속에서 의디푸스, 크레 온 Creon, 티레시아스 T i res i as 는 모두 스스로 공평하게 심판할 수 있다 고 믿었던 갈등 속으로 차례로 빠져든다. 비극 작가들이 언제나 공평성을 나타내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예 를 들어 유리피데스는 『페니키아의 여인들』 속에서 에테오클레스가 자신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을 감추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의 관 객들에게 그것을 믿게 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목인 이 불공 평은 여전히 피상적이라는 것이다. 어떤 인물을 편애한다고 해서 그것 이 비극 작가로 하여금 매순간마다 모든 적대자들의 대칭을 강조하는

것을 결코 막지는 못한다. 시인들이 공평성의 미덕을 위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도, 그들 은 관객들이 어느 한편을 지지하게 할지도 모를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온갖 일을 다한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이 대칭, 이 동일성, 이 상호성을 말해주기 위하여 세 사람의 위대한 비극 시인들, 죽 에스킬 로스, 소포클레스, 유리피데스는 서로 유사한 방식과 도식들을 사용하 고 있댜 현대비평이 거의 주목하지 않는 비극 예술의 양상이 바로 이 것인데, 때로는 말없이 이것을 지나쳐버리기도 한다. 현대사상의 영향 으로 현대비평은 예술작품의 특이함을 그 우수성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다. 독점적으로 특별한 한 작가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닌 일반적인 테마나 문체적 특성, 그리고 미학적 영향들을 인 정하고 나면 이 비평은 목표를 상실하는 것 같다. 미학의 영역에서 개 인의 특성은 종교적 도그마의 힘을 지닌다. 물론 그리스 비극은 그들 스스로가 차이 작용을 흉내내고 있는 현대 작가들만큼이나 심한 것은 아니다. 심한 개인주의도 비극에 대한 이해 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론 그리스의 위대한 비극 작가들 사이에는 공통된 특칭둘이 있으 며, 이들이 창조해 낸 다양한 등장인물들 사이에도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항상 그것을 〈상투적인 것〉이 라고 취급하여 그것의 가치를 떨어뜨릴 때에만 이 유사성을 인정해 왔다. 〈상투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몇몇 작품들이나 등장인 물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특칭이 아무런 중요성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반대로 그리스 비국에 있어서의 소위 〈상투적 인 것〉은 어떤 본질적인 것을 폭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비극 울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이 〈동질적인 것〉을 완전히 망각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국 작가들은 최소한의 가치판단이나 〈선과 악〉의 구별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폭력의 메커니즘과 싸우는 인물들을 보여주고 있

다. 현대의 해석 대부분이 심한 부정확과 부족함을 보이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현대의 해석들은 이미 낭만주의 연극에서 유행하고 난 뒤에 더 한충 심해진 〈선악이원론 man i che i sme 〉으로부터 결코 완전히 벗어나 있지 못하다. 비극의 적대자등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은 폭력이 그것들을 모두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차이날 수 없다는 이 불가능이 에데오클레 스와 풀리니스의 분노를 더욱 증폭시킨다. 이미 보았듯이 『헤라클레스 의 광기』 속에서, 주인공은 왕위 찬탈자가 제물로 바치고자 하는 자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리코스를 죽인다. 폭력처럼 언제나 아이러니 컬한 〈운명〉으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헤라클레스는 바로 자기 경쟁자의 계획을 완수하고 만다. 결국 자신의 가족을 희생시키는 것은 바로 그 다. 바극적 경쟁 상태가 확대되면서 경쟁이 폭력의 〈모방〉을 더 촉진 할수록 이 경쟁 상태는 적수들 사이의 거울 효과를 더욱 증대시킨다.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현대의 과학적 탐구는 원칙적으로 가장 상이한 개인들에게서 폭력에 의해서 생겨난 반응들의 동질성울 확인하고 있다. 비극의 줄거리를 특징짓는 것은 바로 보복, 다시 말해서 폭력 모방의 재현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원칙적으로 계급적 차이와 존경이 가장 큰 곳에서, 차이의 파괴는 특별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파렴치한 차이소멸은 유리피데스의 『알쎄스트 Alces t e 』에서 잘 나타 나고 있다. 아버지와 그 아둘은 비극적 분쟁 속에서 서로 대치한다. 이 둘은 자신이 죽는 것은 피하면서 여주인공을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서로를 비난한다. 대칭은 완벽하다. 그 역시 대칭적인 중재를 통해서 합창대장은 이 대칭을 강조하고 있다. 첫번째 중재는 아버지에 대한 아둘의 비난을 멈추게 한다. 〈젊은이, 자네는 지금 바로 자네 아버지 에게 말하고 있네. 아버지를 자극하지 말게〉. 두번째 중재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비난을 멈추게 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충분히 많은 말을 했습니다. 영감님, 아드님을 그만 욕하십시오〉.

『의디푸스 대왕』에서 소포클레스는 의디푸스에게 그의 욕망과 그의 의혹이나 그가 시도하는 행위들 중에서 어떤 점이 아버지와 동질적인 가를 드러내는 말을 많이 시킨다. 주인공은 자신의 파멸을 초래하게 될 〈 수사 〉 에 무분별하게 뛰어드는데 그것은 왕국의 어디엔가 암살자, 다 시 말해서 데베의 왕권과 조카스트J ocas t e 의 침대를 지배하는 왕 자리 를 차지하고자 하는 한 남자가 숨어 있다는 경고에 대해 그 또한 아 버지와 똑같은 식의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의디푸스가 라이오스 La 1. os 를 죽이지만 애초에 의디푸스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은 바로 라이오스였으며, 찬부살해의 현장에서 의 디푸스를 향해 먼저 팔을 들어울린 사람도 바로 라이오스였다. 구조적 으로 볼 때 이 친부살해는 상호교환에 포함된다. 보복의 세계 속에서 이것이 하나의 보복일 뿐이다. 소포클레스가 해석하는 바 대로의 의디푸스 신화 속에서 모든 남성 들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상호적 폭력의 관계이다. 신탁에 의해서 영감을 받은 라이오스는, 의디푸스가 테베의 왕위와 조카스트의 침대 속에서의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까 두려워 폭력으로 그를 내쫓는다. 신탁에 의해서 영감받은 의디푸스는 라이오스를, 다음에는 스핑크스 룰 폭력으로 물리친 다음 그 자리를 차지한다. 신탁에 의해서 영감받은 의디푸스는,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꿈 꿀지도 모르는 어떤 남자의 파멸을 계획한다……. 신탁에 의해서 영감받은 의디푸스, 크레온, 티레시아스는 서로를 내 쫓으려 한다……. 이러한 모든 폭력들은 가족뿐만 아니라 도시국가 전체의 차이를 없 애는 것으로 귀착된다. 의디푸스와 티레시아스의 논쟁은 대립하고 있 는 두 인물을 보여주고 있다. 분노한 의디푸스는 경쟁자를 〈탈신비화 dem y s tifi er 〉하려고, 죽 그가 가짜 예언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도대체 당신이 언제 전정한 예언가였던가? 그 천한 노래하는 이가 우리 성에 왔을 때, 당신은 왜 시민들을 구원할 말울 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것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오. 거기에는 예언술이 필 요하오. 그런데 당신은 어디서 이 기술을 배웠다고 말한 적이 없소 . 이번에는 티레시아스가 응수한다. 자신의 수사가 잘 진척되지 않아 점점더 혼미에 빠진 의디푸스 앞에서 티레시아스는 의디푸스와 똑같은 역할을 한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재확인하기 위하여 적수의 권위를 공격한다. 〈수수께끼를 풀던 그 능란한 솜씨로 당신은 과연 무엇을 했 단 말이오?〉라고 소리친다. 언쟁에서 각자는 적수와 똑같은 전략을 이용하고 똑같은 방법을 사 용하며 똑같이 파멸을 향한다. 티레시아스는 전통 옹호자의 태도를 취 하여, 의디푸스를 공격하는 것도 의디푸스가 경멸했던 신탁의 이름으 로 한다. 왕의 권위에 저항해서 발칙하게 손을 내뻗기도 한다. 개인을 겨냥하지만 제도들이 침해받는다. 모든 합법적인 권력들이 그 밑바탕 에서부터 동요된다. 모든 적수들은 결국 그들이 공고히 한다고 주장하 는 그 질서의 파괴에 공헌한 셈이다. 합창대가 말하는 신앙심 부족이나 신탁의 망각, 종교적 타락은 분명 가족의 가치와 종교적, 사회적 위계 질서의 붕괴와 일치하고 있다. 〈희생위기〉, 다시 말해서 희생의 파멸은 불순한 폭력과 순화적 폭력 의 차이의 파멸이다. 이 차이가 상실될 때, 더 이상 순화작용은 존재 하지 않으며 해롭고 전염성이 강한 폭력, 죽 상호적 폭력이 공동체에 퍼져 나간다.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의 차이인 희생제의의 차이가 사라질 때는 항상 다른 모든 차이들도 소멸하게 된다. 거기에는 폭력의 상호성에 의한, 유일하며 동일한 침투과정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희생위기〉는 〈차이 의 위 기 cri se des dif fer ences>, 다 시 말해 서 총체 적 인 문화 질서 의 위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 사실 문화 질서는 차이들의 조칙된 제도에

다름아니다. 모든 개인들이 타인과의 관계에 따라 자신의 자리를 잡는 것은, 〈 자기동일성 i den tit e 〉을 부여해 주는 바로 이 차별적 편차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희생제의가 쇠퇴할 때 공동체를 위협하는 위험이 제 1 장에서는 복수 의 악순환과 같은 물리적 폭력으로만 나타났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것의 더욱 은밀한 모습둘을 발견할 것이다. 종교적인 것이 와해될 때, 위협당하는 것은 단지_혹은 죽각적으로――육체적 안전만이 아니다. 문화 질서 그 자체도 위협받는다. 제도는 생명력을 상실하고 사회의 기반은 쇠약해져서 붕괴된다. 처음에는 완만하던 모든 가치의 침식이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문화 전체가 붕괴될 위험에 처하며 언 젠가는 모래성처럼 와해되고 말 것이다. 처음에는 감추어져 있던 희생위기의 폭력이 차이들을 파괴하면, 이 번에는 이 파괴가 폭력을 가속시킨다. 결국 우리는 공동체의 균형과 조화가 달려 있는 근본원칙들을 위협하지 않고서는 희생의 문제를 다 룰 수 없는 것이다. 희생에 관한 고대 중국의 금언이 말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백성들이 평온함을 누리는 것도 바로 이 덕덱이다. 전 면적인 혼란을 야기시키기 위해서는 이 관계를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예기(禮記)』는 말하고 있다 .I)

1) 래드클리프-브라운 Radcl iff e-Brown, 『원시사회의 구조와 기능 S tructu re and fun - ctio n in Pri mi t ive So ciety』, New York, 1965, p. 159.

晶 원시종교와 바극 속에는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근본적인 똑같은 원 칙이 언제나 작용하고 있다. 질서와 평화와 풍요로움은 모두 문화적 차이에 근거한다. 광란의 경쟁 관계, 죽 같은 가족이나 같은 사회의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극단적인두쟁은 이 차이들 때문이 아니라 이 차이의 소멸 때문에 일어난다.

현대사회는 인간의 평등을 열망한다. 그래서 개인들의 경제적, 사회 적 신분과는 전혀 무관한 차이들도 본능적으로 인간 조화의 장애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이 현대의 이상은 때때로 명백한 원칙이라기보다는 기계적 습관의 수준에서 민족학 연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희미하게 드러나 는 이 대립은 너무 복잡하고 너무 많은 오해를 갖고 있기에 그 윤곽 조차 그릴 수 없을 정도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반-차별적〉 선입견이 종종 불화와 갈등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 문제에 대한 민족학의 관점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대부분 암시 적으로 나타나는 이 원칙을 빅터 터너의 『제의 과정 The Ri tua l Process 』 은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수직적이며 수평적인 구조적 차별화는 경쟁, 파벌주의 그리고 높은 신분의 소유자들이거나 높은 신분에 대한 경쟁자들 사이의 이중적 투쟁의 근거이다. 차이들이 드러나면 이것들은 거의 언제나 경쟁관계의 원인으로, 죽 경쟁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것들이 언제나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폭력을 막을 수 없게 되면 폭력의 물결을 더 증 폭시키는 희생재의처럼 모든 차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지적이며 게다가 완전히 합법적인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세익 스피어의 『트러일러스와 크레시다 Tro i lus and Cress i da 』를 살펴보자. 율 리시즈의 그 유명한 말은 차이의 위기가 바로 그 주제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폭력과 차이에 대해서 자유롭게 전개된 원시종교와 그리스 비 극의 관점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트로이의 성벽 아래서 야영하며 무위도식 속에서 해체되는 그리스 군대가 그 핑계이다. 그러나 이 웅변가의 말은 인간사에 있어서의 〈등 급 de gr ee 〉, 죽 차이의 역할에 대한 전면적인 고찰로 번져나간다. 등급, 죽 〈gra dus 〉는 모든 자연적, 문화적 질서의 원칙이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관계 속에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해주고, 조직화되어 위 계질서를 갖춘 총체 가운데서 사물들이 의미를 갖도록 해주는 것, 그 것이 바로 등급이다. 인간들이 변형시키고 교환하고 조정하는 대상과 가치들을 형성하는 것이 바로 등급이다. 악기의 현에다 비유하는 것은 곧 이 질서를 현대적 의미에 있어서의 〈구조 s t ruc t ure 〉로, 죽 상호적 폭력이 사회 내부에 자리잡으면, 당장 뒤혼둘리는 변별적 편차들의 체계 로 규정짓는 것이다. 이 위기는 때로는 차이의 동요로 또 때로는 차이 의 은폐로 지칭된다. 오, 모든 지고의 계획에 도달하는 사다리인 등급이 흔들리면, 사회와 학위와 도시의 동업조합, 다른 나라와의 평화로운 교역, 상속권, 신분에 따른 임무, 나이, 왕관, 월계수의 특권, 등급이 없다면 어떻게 제대로 되겠는가? 등급을 없애고, 현을 엉터리로 맞추면, 제대로 되겠는가? 만사는 모두 비난으로 오가고, 뒤어오른 바닷물은 해안보다 더 높이 가슴을 들어올려, 아 마른 대지를물바다로 만들 것이며, 힘센자가 우둔한 자들의 군주가 되고, 난폭한 아들이 아버지를 때려죽이고, 힘만이 옳은 것이 될 것이로다, 아니 옳고 그름이 명분도 없어지며, 이 끝없는 분쟁 사이에서 정의도 명분을 잃게 될지로다 . 따라서 원시종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비극에서도 폭력적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차이 때문이 아니라 차이의 소멸 때문이다. 위기는 인 간들을 그들로부터 모든 변별적인 특성, 모든 〈동질성〉을 볘앗아버리 는 영원한 시련 속으로 던져넣는다. 언어 자체가 위협받는다. 〈만사〉는 순전히 비난 속에서 교차된다. 우리는 더 이상 이 말의 온전한 의미의 적수라고는 말할 수 없으며, 다만 폭풍우에 강타당한 선교의 밧줄에서 떨어진 물건들처럼 어리석고도 고집스럽게 서로 충돌하고 있는 〈사물 chose 〉이라고 겨우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견고한 대지를 일종의 죽처럼 변형시키면서 모든 사물들을 쓸어가는 홍수의 메타포는, 「창세기」의 희생위기와 똑같은 폭력적 무차별 현상 을 묘사하는데 세익스피어에게서 자주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논리 적인 계획도, 합리적인 행동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 모든 형태의 협동은 해체되고 격동에 휘말리며 정신적, 물질적 모든 가치들도 상실 된다. 그것 자체도 〈등급〉에 , 불과하며 차별화 현상이라는 일반 원칙에 서 그 효력이 나오기에, 이 원칙이 무너지면 그 효력도 상실하기 때문 에 대학의 졸업장들도 다른 것들과 함께 사라져버린다. 독선적이며 보수적인 군인이지만 세익스피어의 율리시즈도 역시 그 가 전적으로 보호하려고 애쓰는 이 질서의 이상한 면을 인정한다. 차 이의 종말, 그것은 약한 자를 억압하는 힘이며 아버지를 때려 죽이는 아들이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 정의의 종말이다. 그런데 이 인간 정의 도 논리적으로는 예상의로 차이라는 말로써 정의된다. 그리스 비극에 서처럼 만일 균형 상태가 폭력이라면, 인간 정의에 의해서 보장되는 상대적 비폭력은 불균형으로, 죽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의 희생제의적 차이와 갇은 〈선〉과 〈악〉 사이의 차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고방식에 서 볼 때 언제나 평평한 저울, 전혀 동요되지 않는 공평성을 정의의 개념으로 보는 것보다 더 이상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인간적 정의는 차 이의 질서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이 질서가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고 만다. 끈질기고 무시무시한 비극적 갈등의 평형 상태가 자리잡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정의니 부정이니 하는 말이 틈입할 여지가 없는 법이다 . 결국 이런 상황에 이르렀을 때 〈서로 화합하십시오, 아니면 서로 벌하십시오 〉 라는 말 말고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만일 우리가 방금 살펴본 이중적이면서 하나인 이 위기가 근본적안 민족학 사실이라면, 문화 질서가 상호적 폭력 속에서 해체된다면, 그리 고 또한 이 해체가 폭력의 확산을 촉진시킨다면, 우리는 희랍이나 세 익스피어의 비극을 통하지 않고서도 틀림없이 이 사실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이 원시사회와 접촉할수록 원시사회는 사라진다. 그러나 적어도 몇몇 경우에는 이 사라짐 자체가 〈희생위기〉를 통해서 행해진다. 이러한 위기들이 연구의 직접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민족학 의 문헌을 검토해 보면, 이러한 연구가 실제로 존재하며 또한 충분히 확산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정으로 일관성 있는 연구는 드물다. 그것들은 글자 그대로 구조적 질서에 대한 연구와 뒤섞인 채, 아주 빈 번하게 단편적인 채로 남아 있다. 브라질의 산타 카타리나 San ta Kata - rin a 주의 카인강 Kain g a n g 인디 언들(보토쿠도 Bo t ocudo) 을 연구한 쥴스 헨리 Jul es Hen ry의 『 정글 사람들 ]ung l e Peop le 』은 특기할 만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2 ) , 잠시 이 책을 살펴보자. 이 민족학자는 그들이 보호 구역에 정착한 직후, 환경 변화가 그들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시기에 인디언들의 집에서 같이 살았다. 따라서 그는 여기서 우리들이 〈희생위기 〉 라고 부르는 것을 직접 관찰하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한 직 접적인 증거둘을 얻을 수 있었다. 기술뿐 아니라 다른 모든 면들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면 에서의 카인강 문화의 빈약함 때문에 가까운 친척들 사이의 〈혈두〉, 2) Jul es Henry , 『 정글 사람들 ]un gl e Peop le 』, New York, 1941 . 이 책은 1964 년에 Ra- ndom House 의 Vin t a g e Books 로 다시 간행되는데, 인용은 아 재간본에서 했다.

다시 말해서 연쇄복수의 결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본 쥴스 헨리는 커 다란 충격을 받았다. 이 상호적 폭력의 영향을 묘사하기 위하여 이 민 족학자는 본능적으로 거대한 신화적 이미지, 특히 〈페스트〉에 의지한 다. 〈무시무시한 도끼처럼 사회를 가르고, 마치 페스트가 유행하듯 그 사회의 많은 사람을 죽이는 복수가 널리 퍼져 나갔다(p .50) 〉.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바로 〈희생위기〉 또는 〈차이의 위기〉 의 징후들이다. 오로지 복수의 악순환에만 근거하고 있는, 얼핏 보아 아주 정확한 것으로 보이는 이야기들 때문에, 카인강족은 더욱 오래된 모든 신화를 망각한 것 같다. 그들이 가족 살해롤 논의할 때 〈그들은 그 복잡한 기능을 완전히 알고 있는 어떤 기계의 톱니바퀴를 조정하는 것 같다. 수많은 폭력 교차가 그들 영혼 속에 분명하게 새겨져 있는 것처럼, 그들 자신의 파괴에 관한 이야기가 그들을 매혹시키는 것 같다 (p. 51) 〉라고. 안정된 제도의 타락이긴 하지만 카인강족의 복수에는 어떤 〈희생적 인〉 것이 둘어 있다. 이 복수는 〈좋은〉 폭력, 죽 질서를 잡아주고 보 호해 주는 폭력을 보유하기 위한 언제나 더욱 폭력적인 그래서 언제나 더욱 무익한 노력인 셈이다. 이리하여 해로운 폭력은 아주 제한된 집 단, 죽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의 경계 밖에서 오랫동안 머무른다. 이 상대적인 평화지역은, 그 저쪽에서 다시 말해서 집단들 〈사이에서〉 판 울 치고 있는 폭력의 또 다른 얼굴, 그리고 그 보상으로 보아야 한다. 집단 내부의 화해 의지는 최대치에 이른다. 그래서 가장 대담한 도 발도 않으며 간통도 묵인한다. 그러나 그것이 적대 집단의 구성원에서 발생하면 죽각적인 유혈의 반격을 초래한다. 폭력이 어떤 한계내에만 있는 한 이 폭력은 사회의 필수적 기능의 완수, 다시 말해서 그 사회의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비폭력의 어떤 내적 범위를 보장해 준다. 그런데 도 기본집단이 오영되는 순간이 온다. 그 사회가 일단 안전지역에 정 착하고 나면 그 구성원들끼리 서로를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더 이상 〈타인들〉, 〈다른 사람들〉, 죽 의부의 적들에 대해서 폭력을

집중시킬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카인강족은 i) 모든 종류의 차이들, ii) 언제나 가까운 친척들인 집단내의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들, iii) 똑갇이 적인 브 라질 사람들, iv) 일반적으로 〈다른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죽은 자와 악마 이든 신이든 신화적인 모든 존재들, 이 모두를 묘사할 때 단 하나의 똑갇은 용 어를 사용한다.) 따라서 연쇄적인 살인은 마침내 이 기본집단의 한가운데에까지 침 두하게 된다. 모든 사회 원칙 자체가 위태롭게 된다. 그러나 카인강 족의 경우에는 의적 요인의 개입, 특히 무엇보다 브라질의 영향이 카 인강 문화의 전체적인 소멸과 함께 남아 있는 카인강족의 물리적 생 존을 보장해 주는 과정과 겹쳤던 것 같다. 이러한 비극 속에서의 백인 세계의 역할을 무시하거나 축소하지 않 고서도 자동파괴의 내적 과정의 존재는 확인될 수 있다. 인디언들이 아주 신속하게 서로를 파괴하지 않았을 때, 이주민들이 그들을 완전히 파멸시키기 위하여 청부살인자들을 고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브라질 의 책임문제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카인강 문화의 해체의 기원에는, 그리고 특히 숙명적인 이 메커니즘의 돌이킬 수 없는 특성 속에는 외래문화의 압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않은지 따져보아야 한다. 우리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렇듯이 연쇄폭력은 물 론 사회 전체에 대해 위협이 된다. 그러나 그 원칙은 지배문화의 압력 이나 혹은 모든 형태의 의부 압력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 원칙은 내부적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카인강족이 연출해 내는 무시무시한 광경 앞에서 쥴스 헨리가 내린 결론이다. 그는 그들의 동기에 대해 〈사회적 자살〉이란 말을 쓴다. 그러한 자살의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인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회들이 단지 그들 자신의 폭력에 굴 복하여 아무런 혼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고 우리는 가정할 수 있다. 그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구체적인 실례에 대해서는 우리가 상당

한 유보를 표명한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이 민족학자의 결론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인간집단들에게는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 특성들로 인하여 자연환경의 가혹함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 집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문화를 무너뜨리는 내부의 힘에는 저항할 수 없었으며, 이러한 힘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떠한 정확한 방법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집단은 진짜 사회적 자살을 범했던 것이다(p. 7). 남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즉 현대인 의 〈예방전쟁 gue rre p reven ti ve 〉과 유사한 〈선수를 치려는〉 경향은 심 리학의 용어로는 묘사될 수 없다. 〈희생위기〉라는 개념은 심리적인 환 상을 깨끗이 지워버린다. 그래서 자신의 언어가 심리학에 물들어 있을 때에도 쥴스 헨리는 이 환상을 갖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법적 초월이 없는 그리고 폭력에 내맡겨진 세계 속에서 각자는 최악의 것을 걱정 하는 것이 당연하다. 〈편집광적인 주관투영〉과 냉정한 객관적 상황판 단 사이의 모든 차이는 소멸되기 때문이다(p. 54). 차이가 일단 상실되면 모든 심리학과 사회학은 사라진다.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개인과 문화에 부여하 는 이 관찰자는, 〈살해당할 위험이 없는〉 관찰자라고 규정지어져야 한 다. 일반적으로 심리학을 비롯한 모든 사회과학들은, 아주 자명하기 때 문에 그 존재 자체도 의식되지 않는 어떤 평화로운 기반을 가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스스로가 완전히 〈탈신비화〉되기를 바라고 강철처럼 견고하여 모든 이상주의적 신중함이 없기를 바라는 그들 사고 그 자체 속에서도 이러한 기반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살인자가 닫힌 체제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단 한번의 살인으로 충분 하다. 언젠가 그들 부모의 죽음에 복수할지 모르는 모든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해, 그는 죽이고 또 죽이는, 죽 전정한 대학살을조성하기만 하면 된다(p. 53).

이 민족학자는 카인강족 속에서 특히 유혈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만 났지만, 성공은 못했지만 이 파괴의 메커니즘을 피하려고 애썼던 평화 적이며 통찰력 있는 사람들도 만났다. 〈 카인강의 살인자들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 죽 한번 시작되기만 하면 그 결과를 막을 수 없는 진짜 자연법칙의 포로들과 유사하다(p .53) 〉. * 비록 쥴스 헨리만큼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비극도 언제나 문 화 질서의 파괴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 파괴는 비극의 적대자 들의 폭력적 상호성과 일체를 이룬다. 희생에 관한 우리의 문제제기에 의해 비극은 제의적인 것과 모든 차이들의 위기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 보답으로 비극은 이 위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원시종교의 모든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사실 종교는 단 하 나의 목적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상호적 폭력의 재발을 막는 것이다. 따라서 비극은 종교민족학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아주 우수한 접 근로를 제공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단언하는 것은, 소위 과학적인 주장을 펴는 탐구자들로부터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휴머니즘 의 옹호자들에서부터 니체와 하이데거의 제자에 이르는 고대 그리스에 심취한 사람들로부터도 배척당할 위험에 빠지는 것이다. 학자들은 엄 격함에 대한 그들의 의지가 이론적인 것일수록, 문학작품 속에서 〈나 쁜 교제〉를 보려는 경향이 더 많다. 고대 그리스와 원시사회들 사이에 아주 사소한 접점이라도 암시할라치면 언제나 이 헬레니즘 학자들은 대뜸 모독이라고 야단천다. 비극에 기댄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연구에 있어서의 어떤 타협이거나 혹은 사물을 바라보는 어떤 〈미학적인〉 방법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생 각은 단호히 불식시켜야 한다. 마찬가지로 문학작품을 사소한 규율이 라 하더라도 과학적 규율과 관계짓는 것은 필연적으로 손쉬운 〈환원〉

으로 귀결한다고, 즉 작품의 고유한 홍미를 감추는 것으로 귀결한다고 보는, 문학하는 사람들의 선입관도 없애야 할 것이다. 소위 문학과 문 화과학 사이의 갈등은 문예비평가들과 종교학자의 동일한 실패와 동 일한 부정적 공모에서 나온다. 어느 쪽도 그들 대상들이 기초하고 있는 원칙을 찾아내지 못한다. 비극의 영감으로 이 원칙을 분명히 밝혀내려 애써봐야 헛수고이다. 이 영감은 부분적으로만 성공하는데 이 철반의 성공도 구때마다 해설가들이 애써 강요하는 차별화된 독서에 의해서 막혀 버리고 만다. 민족학도 제의적 불순함이 차이의 해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모 르는 것은 아니다인 그러나 민족학은 이 해체와 관련되어 있는 위협은 이해하지 못한다. 현대적 사고는 무차별 현상을 폭력으로, 또 그 역으 로도 생각하는 데 실패하고 있음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다. 만일 우 리가 비극을 근본적인 방법으로 읽는다면, 비극은 현대적 사고로 하여 금 그렇게 생각하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바극은 아주 미묘한 주 제를, 죽 의미 있고 변별적인 구조들 가운데서는 당연히 직접적으로 문제삼지 않는 주제를 취급하는데, 그 주제는 바로 상호적 폭력 속에 서의 동일한 구조들의 해체이다. 문학비평이 비극적 대립의 상대적 무 차별 현상을 그 자신의 차별의 그물로 덮어버리는 것은 이 주제가 금 기이기 때문이며, 나아가서는 차이를 신봉하는 언어 속에서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금기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3) 매 리 더글라스 Ma ry Doug la s, 『순수함과 위 험 Puri ty and Dang er 』, London, 1966.

현대적 사고와는 달리 원시적 사고에 있어서 폭력과 무차별화의 동 일시가 진짜 강박관념으로까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직접적인 증 거이다. 자연적 차이가 문화적 차이의 용어로 생각되어지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보기에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영향이 없기 때문에 차이소멸이 순전히 자연적인 특성만을 지니고 있는 것처 럼 보이는 곳에서조차 이 소멸이 나타날 때는 항상 진짜 공포가 생겨

난다. 차별화 현상의 다양한 양태둘 사이에는 차이가 없기 때문에 무 차별 현상의 다양한 양태들 사이에도 또한 차이가 없다. 따라서 어떤 자연적 차이의 소멸은 그 안에 인간들이 분포되어 있는 여러 범주들의 해체, 죽 희생위기를 야기시킬 수 있다. 일단 이것을 이해하기만 하면 전통적인 관점들로써는 결코 해명할 수 없었던 많은 종교적 현상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비극에 서 나오는 이 진정한 영감의 설명 능력을 종교민족학의 측면에서 확 인하기 위하여 이제 우리는 가장 눈부신 것들 중의 하나를 간단히 살 펴보기로 하자. 많은 원시사회에서 〈쌍둥이〉는 특별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래 서 둘 중의 하나를 죽이거나 더욱 혼하게는 둘 모두를 차례로 하나씩 제거하는 일이 일어난다. 여기에는 오래전부터 민족학자들의 능력을 시험하는 수수께끼가 들어 있다. 오늘날 이 쌍둥이 수수께끼 속에 분류의 문제가 들어 있다고 여기고 있다. 이 문제는 실제로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단 하나가 예상되던 곳에 두 개인이 나타난 건 사실이다. 그들이 생존하도록 허 용하는 사회에서 쌍둥이는 종종 하나의 사회적 인격만을 지닌다. 그렇 다고 해서 이 식별의 어려움이 전혀 극복될 수 없는 게 아니다. 구조 주의가 정의하는 바와 같은 분류의 문제가 쌍둥이의 살해롤 정당화하 기에는 불충분하다. 인간들을 부추겨 자기 자식을 죽이도록 만드는 이 유는 분명히 나쁘며, 또 그 이유가 사소한 것일 수는 없다. 문화의 작 용이, 그림이 완성된 후 남은 조각들을 냉정하게 버리는 퍼즐과 같은 것일 수 없다. 만일 분류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라면, 그것은 그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것에 의해서 그러하다. 쌍둥이 는 문화 질서의 측면에서 조그만 차이도 없으며, 때로는 육체적인 면 에서도 특별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차이가 빠진 곳에는 언제나 폭력의 위협이 있다. 생물학적인 쌍둥이와, 차이가 위기에 처하자마자 급속도 로 번식하기 시작하는 사회적 쌍둥이 사이에 혼란이 생긴다. 쌍둥이가

두려움을 조장한다고 해서 놀 랄 필요는 없다. 그들은 모든 원시사회의 중대한 위험 , 즉 무차별적인 폭력을 야기시키고 또한 예고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폭력의 쌍둥이는 출현하자마자 희생위기를 만들어내는 번식에 의해 서 급속도로 전파된다. 필요한 것은 이 급속도의 전염을 막는 것이다. 따라서 생물학적인 쌍둥이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첫번째 조처는 전염을 피하는 것이다. 쌍둥이룰 살려두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사회가 그 둘을 내쫓는 것만큼 쌍둥이의 위험성을 더 잘 말해 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 사람들은 쌍둥이를 〈 버린다 〉 . 다시 말해서 그들을 공동체 밖 으로, 그들이 죽음과 직면할 수밖에 없는 장소와 상황 속으로 내던진 다. 그러나 〈저주받은 자 〉 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 행사는 신중하게 삼 가한다. 해로운 전염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쌍둥이에 대 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 그것은 이미 끝없는 복수의 악순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해로운 폭력이 쌍둥이를 탄생시키면서 공동체에 쳐 놓은 함정에 빠지는 길일 것이다. 쌍둥이를 몹시 두려워하는 사회에서 이것과 관련된 관습이나 규칙 그리고 금지사항의 총목록은 아마도, 불순한 전염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을 것이다. 문화의 차이는 앞에서 살펴본 종교적 사고의 해로운 폭력에 대항하는 예방책들의 아주 경험적인 특성으로써 쉽게 설명할 수 있다 . 쌍둥이의 경우 이 예방책들은 분명히 근거가 없다. 그러나 이 위협, 경우에 따라 다소 다르게 설명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언제나 동일한, 그리고 모든 종교 규율이 대비하려고 애쓰는 이 위협을 알고 나면 이 예방책들은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니아큐사 N yakyu sa 족처럼 쌍둥이의 부모는 처음부터 해로 운 폭력에 오염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조리하지 않다. 죽 부모들 스스로가 해로운 폭력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 부모들은 쌍둥이들과 똑 같은 어휘로, 죽 몹시 두렵고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모든 존재들에게 붙여지는 말로써 지칭된다. 전염을 피하기 위하여 부모들은 격리되어

순화적 제의를 따르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 사회에 다시 편입되었다 .4 ) 쌍둥이를 낳은 부부의 부계 혈족들과 인척들도, 가까운 이웃과 마찬 가지로 전염에 의해서 가장 직접적으로 위협받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부조리하지 않다. 해로운 폭력은 육체적이든 가족적이든 사회적이든 아주 다양한 국면에 영향을 미치는 힘, 그리고 그것이 뿌리내리는 곳 이면 어디서나 동일한 방식으로 번식하는 어떤 힘이라고 여겨진다. 그 것은 기름얼룩을 만들며 〈야금야금〉 먹어치운다.

4) 모니 카 윌슨 Monic a Wi lso n, 『니 아큐사족의 혈 연의 식 Rit ua ls of Kin s hip amo ng the Ny aky usa 』 , Oxfo r d, 1957.

쌍둥이는 학살에 도취된 전사, 근친상간을 범한 죄인 또는 월경중인 여성과 똑같은 이유로 불순하다 . 그리고 모든 형태의 불순함은 폭력으 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차이소멸과 폭력의 원초적인 일치를 알아차리 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치가 논리적이라는 것을 납득하기 위해서는, 원시적 사고가 쌍둥 이의 존재에다가 어떤 형태의 불행을 결부시키고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으로도 족하다 . 쌍둥이는 몹시 두려운 전염병, 즉 여성들과 동물들의 생식불능을 가져올 이상한 질병을 야기시킬 위험이 있다고 여간다. 또 한 더욱 의미 있는 것으로 근친들의 불화, 제의의 숙명적인 쇠퇴, 금 기의 위반, 달리 말해서 희생위기가 뒤이어서 언급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성스러운 것은 인간을 해칠지도 모르는, 그리고 인간의 평온함을 위협하는 모든 힘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과 공동체의 내부 에서 자연의 힘과 질병은 폭력적 혼란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 았다. 원래 인간의 폭력이 은밀히 성스러움의 작용을 지배하면서도, 그 리고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묘사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닌데도, 인간의 폭력은 인간 밖에 위치해 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항상 뒷자리로 숨으려는 경향이 있다. 마치 장막 뒤에 숨듯이 실제로 인간 의부에 있는 힘 뒤편으로 숨으려고 애쓰는 것 같다•

쌍둥이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다양한 형태이지만 동시에 단 하나의 힘인, 해로운 성스러움의 총제이다. 희생위기는 공동체에 대한 폭력의 전반적인 공격, 죽 쌍둥이의 탄생이 그것을 예고하는 공격으로 모든 불순한 폭력은 이로운 것으로 전도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쌍둥이가 살해되지 않는 사회에서, 그들은 종종 특권적인 지위를 누 린다. 이 전도는 우리가 앞서 월경 피에서 확인했던 전도와 같은 것이 다. 불순한 폭력은 모두 이로운 것으로 전도될 수 있다. 물론 엄격히 규정된 제의의 틀 속에서 그러하다. 폭력의 순화적이고 평화적인 면이 파괴적인 면보다 우위에 있다. 그래서 어떤 사회에서는 정확하게 취급 되는 쌍둥이가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한 이로움의 근원으로 간주된다. * 만일 앞의 사실들이 정확하다면, 극단적으로 말해서 두 형제가 그들 의 유사성을 근심하기에는 그들이 쌍둥이가 아니라도 될 것이다. 단순 한 부계혈족의 유사성이 수상쩍은 것이 되는 사회들이 존재한다는 것 울 우리는 거의〈선험적으로〉 가정할 수 있다. 이 가정을 입증함으로써 우리는 쌍둥이에 대한 상투적인 주장의 불충분함을 확인하게 될 것이 다. 만일 쌍둥이 공포증이 다른 부계혈족들에게까지 퍼질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더 이상 〈분류의 문제〉만을 내세울 수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단 한 사람만이 예상되는 곳에 두 사람이 나타 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 원인이 되는 것은 바로 육체적인 유사성 이며 해로운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형제자매들 사이의 유사성과 갇이 아주 혼한 유사성 이, 그렇게 불편함을 야기시키지도 않고 사회의 기능을 불가능하게 만 들지도 않는데 어떻게 금기의 대상이 되는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요컨 ' 대 완전히 참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어떤 사회도 그 구성원들을 버림받은 자들로 만들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분명히

사실이지만 유사성에 대한 공포증 또한 사실이다. 말리노프스키의 『원 시 심리학에 있어서의 아버지 The Fath e r in Pri mi tive Psy cholo gy.II(런던, 1926) 는 여기에 대한 뚜렷한증거를제시하고 있는데,처참한 결과를 초 래하지 않는데도 어떻게 이 공포증이 지속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인 간들의 정교함, 아니 오히려 문화적 제도들의 정교함으로 인하여 그 난점을 쉽게 피할 수 있게 된다. 그 해결책은 두려움을 주는 현상의 존재 그리고 그 가능성 자체를 단호하게 부정하는 데 있다. 모계친척들은 모두 〈 똑같은 하나의 육체〉에 속한다고 여기고, 아버지를 오 히려 〈 이방인 〉 으로 여기는 트로브리앙 Trobr i and 군도와 같은 모계사회 속에 서는 얼굴과 육체의 유사성들은 단지 어머니 가문과만 결부되어 있을 것이 라고 예상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이다. 이 사실은 사회적인 차원에 서 확실하게 입증된다. 아이는 어머니 형제자매들 또는 모계의 어떤 친척들 과도 결코 닮지 않았다고 여기는, 말하자면 일종의 관습적인 교리가 있을 뿐 만 아니라 이런 유사성을 암시한다는 것은 사태를 아주 잘못 본 것이며 심 지어는 심각한 모욕이 되기도 한다. (……) 내 스스로가 과오를 범하면서 고전적 인 방법으로 예절규칙을 깨우쳤던 경 우가 하나 있다. (……) 어느 날 나는 모라데다 Moradeda( 이 민족학자의 경 호원 중의 하나)의 복제품처럼 보이는 어떤 사람을 보고 충격을 받아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먼 마울에 살고 있는 내 친구의 형이라고 밝혀주었 다. 나는 탄성을 질렀다. 〈아 정말이군요. 당신 얼굴이 모라데다와 하도 똑같 기에 물어보았던 겁니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침묵이 하도 오래 흘러, 나는 곧 알아차렸다. 그는 발뒤꿈치로 돌아서서 우리를 떠났으며, 그러는 동안에 어색해 하면서 모욕받은 것 갇던 거기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돌려버 렸다. 그러다가 그들도 가버렸다. 그때 나와 친한 사람들이 다음과 갇이 말해 주었다. 요컨대 내가 관습을 어겼다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은 〈어떤 · 사람을 불순하게 만드는 것, 그의 얼굴을 찬척의 얼굴과 비교함으로써 그를 오염시

키는 것 〉 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표현인 〈 타무타키 마질라t a p u t ak i ma gi la 〉라 불리는 것을 범했다는 것이다. 더욱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두 형제가 놀랄 정 도로 아주 닮았는데도 불구하고 나와 친한 사람들조차 그것을 부인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마치 어느 누구도 형이나 모계의 어떤 친척들과도 절대 닮울 수 없는 것인 양 생각했다. 그래서 그 반대를 주장하던 나는 내 대화자 들의 분노와 적대감을 샀울 뿐이다. 이 사건은 내게 당사자들 앞에서는 결코 유사성을 언급하지 말 것을 가르 쳐 주었다. 곧이어 나는 많은 원주민들과 이 문제를 철저하게, 그리고 이론적 인 차원에서 토론했다. 트로브리앙 군도에서는 그 유사성이 아무리 명백하다 하더라도 언제나 모계와의 유사성을 부인할 태세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나는 확인했다 . 가장 분명한 경우를 말한다 하더라도 트 로브리 앙 사람들을 화나게 하고 모욕하는 것일 뿐이다. 이 것은 흡사 우리가 그게 아무리 명백한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의 정치적, 도덕적, 종교적 선임관 이나, 더 나아가 물질적 이해관계와 상충되는 사실을 둘이댐으로써 같은 총에 사는 이웃을 화나게 하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부정은 긍정의 의미를 갖고 있다. 유사성이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면 그 유사성을 언급하는 것이 수치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이 두 형제에게 유사성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그들을 공동체 전체에 대한 위협으로 보는 것이며 그들이 해로운 전염병을 퍼뜨린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모욕은 전통적인 것이라고 말리노프스키는 말하고 있다. 모욕 은 그런 식으로 분류되는데, 트로브리앙 사회에서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없다. 이 민족학자는 이 사실을 풀지 못한, 거의 온전한 수수께 끼인 채로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이 증인이 어떠한 주장도 옹호하고 있지 않고 어떠한 해설도 제안하고 있지 않을수록 그의 증 언은 더 많은 신뢰감을 불러일으킨다. 반대로 트로브리앙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아이들 사이의 유 사성은 언제나 허용될 뿐만 아니라 환영받는 일이며 심지어 요구되기

까지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알다시피 인간의 번식에 있어서 아 버지의 역할을 단호하게 부정하는 사회에서도 그러하다. 아버지와 아 이들 사이에는 어떤 혈연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와의 유사성은 역설적으로 〈 차이의 언어〉로 읽혀져야 한다는 것을 말리노프스키는 보여주고 있다. 부계혈족들 사이를 구별짓는 것 은 바로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무엇보다도 정신분석학이 밝힌 문자 그 대로의 남근숭배의 특성과 같은 차이의 소유자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서 어머니와 함께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이 얼굴의 툴을 만든다 〉 라고 말해진다. 말리노프스키는 〈쿨리 Kuli, 죽 ‘응 고시키다, 주조하다, 지형을 뜨다’라는 의미의 말〉이 그가 받은 답변 속에 항상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아버지는 형태이고 어머니는 질료인 것이다. 형태를 제공함으로써 아버지는 아이들을 어 . 머니와 구별짓고, 아이들 서로서로를 구별짓는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 공통적인 아버지와의 유사성이 아이들 서로간의 유사성을 의미하지 않으면서 〉 , 아버지와 닮아야 하는 그 이유이다. 사람들은 내게 자주, 오마라카나 OmaraKana 족의 족장인 토오루와 To' oluwa 의 아들들 하나하나가 그들 아버지와 어 떤 점 에서 닮았는가를 주목하도 록 만들었다. 한 아버지에 대한 공통적인 유사성이 형제 자신들 사이의 유사 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내게는 허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즉시 나 는 이 이상한 관점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 신화의 본질적 인 데마, 죽 〈원수 형제〉 데마를 쌍둥이 공포증과 모든 형제의 유사성과 바교해야 할 것이다. 클라이드 클루콘 Cl y de Kluc- khohn 은 신화 속에서 형제의 갈등보다 더 자주 나타나는 갈등은 없 다고 단언한다. 이 갈등은 일반적으로 형제살해로 귀결된다• 혹인 아프

리카 여러 지역의 신화에 나타나는 경쟁의 주역들은 언제나 하나 뒤에 곧바로 다른 하나가 태어난, 죽 〈연달아 태어난 〉 형제들이다. 정확하게 말해서 이 정의는 쌍둥이룰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한정되는 것 은 아니다전 쌍둥이의 데마와 일반적인 형제 모티브 사이의 연속성은 트로브리앙 군도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쌍둥이가 아닐 때라도 형제 사이의 차이는 다른 모든 친척들 사이 보다 더 적다. 그들은 아버지도 같고 어머니도 같고 성도 같으며, 대 부분의 경우 가장 가까운 친척에서부터 가장 먼 친척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문의 구성원들에 대한 상대적인 지위도 같다. 형제들 사이에는 가장 많은 공통된 특성, 권리, 의무들이 존재한다 . 어떤 의미에 있어서 쌍둥이는 더 응축된 형제에 불과하다. 이들에게는 최종적인 객관적 차 이, 죽 나이의 차이가 제거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을 구별하기가 불가 능해진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형제관계는 · 다정한 결합이라고 상상하는 경향이 있지만, 얼핏 떠오르는 신화적, 문화적, 역사적 예들은 거의 모두 갈등 관계이다. 죽 카인과 아벨, 야곱과 에서,에데오클레스와폴리니스, ( 만 · 로 물루스 Romulus 와 레 무스 Remus,® 리 샤르 꿰 르 드 리 옹 Ric h ard Coeur de ® 에데오클레스 E t eocle, 풀리니스 Pol yn i ce : 의디푸스와 조카스트의 근찬상간적 결 합으로 태어난 두 아들. 두 형제는 교대로 데베를 다스리기로 했으나 형인 에테 오클레스 E t eocle 는 자신의 통치기간이 끝난 뒤에도 동생에게 왕위 를 물려주기를 거부한다. 결국 이 둘은 서로 를 죽이게 된다 . ® 로물루스 Romulus , 레무스 Remus : 로마의 전설상의 건국자인 쌍둥이 형제. 태어 나면서 티베르강에 던져졌다가 늑대에 의해 구조되어 늑대의 손에서 성장한 두 형제는 팔라틴 언덕 위에 나라를 세우기로 결정한다. 제비뽑기에 의해 왕으로 결 정된 로물루스 Romulus 가 미래의 성벽 자리에서 손수 쟁기로 밭고랑을 파다가 이를 조롱하면서 밭고랑을 뛰어넘던 동생 레무스 Remus 를 죽여버린다 . 5) 클라이드 클루콘 Cl yde Kluckhohn, 「신화와 신화창조의 혼한 데마들 Recurren t Themes in My ths and My thm akin g J , 『신화와 신화 ·창 조 My t h and My t hmak i n g』, Henry A. Murray ed., Bosto n 1968, p. 52.

L i on ® 과 장 상 떼르J ean sans Terre® 등이 그러하다. 많은 그리스 신화와 그것을 각색한 비극 속에서 원수 형제가 늘어 나는 과정은 어떤 상징적 메커니즘이 계속 은연중에 지적하고 있는 희생위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형제 데마는, 그것과 불가 분의 관계에 있는 해로운 폭력과 마찬가지로 덱스트 그 자체에서 그것 역시 〈 전염성이 강한 〉 테마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폭력인 것이다. 형이 통치하도록 하가 위하여 테베를 통치할 차례를 기다리면서 퐁 리니스가 테베를 떠날 때, 그는 마치 자기 존재의 어떤 속성인 양 형제 갈등도 같이 몰고 간다. 이 신화의 다른 곳에서 카드모스 Cadmos 가 용 의 이빨을 땅에 뿌려 서로를 향해 몸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머 리부터 발끝까지 무장한 전사들을 땅에서 솟아나도록 하던 것과 마찬 가지로 , 폴리니스는 지나가는 곳 도처에서 문자 그대로 자신을 거부하 게 될 형이 땅에서 솟아나게 한다. 신탁은 아드라스트 Adras t e 에게, 그의 두 딸 중 하나는 사자와 다론 하나는 멧돼지와, 죽 의견상으로는 다르지만 폭력에 있어서는 동일한 두 동물과 결혼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유리피데스는 『애원하는 여인 들 !es Suf p l i an t es 』 속에서, 이 왕이 어떻게 두 사위를 발견하는지롤 이 야기하고 있다. 어느날 밤, 그의 문간에서 불행에 빠진 두 사람, 풀리 니스와 티데 T y dee @ 가 야영 침대의 소유문제를 놓고 격렬하게 다투고 있었다. ® 리샤르 꾀르 드 리옹Ri chard Coeur de Lio n (1157-1199) : 영국왕. 프랑스 왕 Phill i p e Au gu s t e 와 동맹을 맺어서 아버지 헨리 2 세를 무너뜨리고 왕위를 계승 함. @ 장 상 때르J ean sans Terre(1161-1216) : 영국 왕 (1199-1216). 처음에는 아버지 헨리 2 세에 대해, 다음에는 형 리차드 왕에 대해 음모를 꾸며 결국 형의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 티데 Ty de e : 고대 그리스 에톨리아의 영웅. 어떤 살인을 저지른 후 방랑생활을 하다가 아르고스의 왕 아드라스트 Adras t e 곁에서 우연히 풀리니스 Pol yni ce 와 함 께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

아드라스트 一갇은 날 밤에 두 추방자가 우리 문간에 왔었지요 . 테제 一그들이 누구였습니까? 아드라스트―티데와 폴리니스였어요. 드디어 그들은 손찌검을 하더군요 . 테제 - 그들에게서 당신의 두 딸에게 약속된 맹수를 알아보 셨 습니까 ? 아드라스트-그들 싸움은 마치 두 동물의 싸움 같았어요. 테제 -그들은 왜 그들 조국에서 그토록 멀리 떨어져 나와 있었나요? 아드라스트 — 티데는 친척을 죽였기 때문에 추방당했지요. 테제 - 의디푸스의 그 아들은 왜 테베를 떠났고요? 아드라스트- 아버지가 그를 저주했답니다. 형을 죽일까봐 두려워했던 거 지요. 잔인하고 무차별적이던 이 싸움의 특성, 가족 상황의 대칭, 문자 그 대로 〈형제의 frat e r nel> 조전을 가져다주는 두 자매와의 결혼, 이 모든 것둘이 일화를 에데오클레스와 폴리니스의 관계 그리고 모든 형제대 립의 복사판으로 만들어버린다. 형제갈등의 변별적 특칭들을 알고 나면, 우리는 거의 모든 신화와 비극 속에서 이것들이 따로따로 나타나거나 아니면 다양한 방법으로 결합되어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정확한 의미의 형제, 죽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니스의 곁에는 처남매부들, 다시 말해서 폴리니스와 티데, 의디푸스와 크레온과 같은 준형제들과, 또는 예를 들어 디오니소스 D i on y sos 와 펜테우스 Pen t hee 와 같이 같은 세대의 또 다른 근친들, 죽 사촌형제들이 있다. 결국 가까운 친척은 가족적 차이의 소멸을 상칭하고 있기 때문에, 달리 말해서 차이를 〈 탈상징화 하고 des ym bol i se 〉 있기 때문에, 어떠한 특수성도 지니지 않는다. 가까운 친척은 결국 갈등의 대칭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대칭은 항상 모든 주 제에 깔려 있는 것이지만, 신화에서는 좀처럼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러나 비극은 이것을 부각시키고 있다. 바극은 신화의 데마에서 폭력의 무차별 현상을 찾으려 하는데, 신화의 테마는 이것을 〈재현한다〉는 의

미에서라도 이 무차별 현상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 다. 따라서 오늘날의 혼한 생각, 죽 비국은 가족의 차이 속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보편적인 것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보다 더 틀린 것도 없을 것이다 . 쌍둥이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공포처럼 형제 갈등에서 문제가 되는 것도 바로 이 차이의 결핍이다. 이 두 테마는 결국 하나의 데마인 것과 같지만, 그래도 여기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차이가 있다. 쌍둥이는 희생위기를 특징짓는 갈등적인 대칭과 동일성의 상징인 셈이다. 그러나 유사성은 순전히 우발적인 것이다. 생물학적인 쌍둥이 와 사회학적인 쌍둥이 사이에는 실질적인 관련이 없다. 쌍둥이가 다른 모든 인간들보다 아니면 적어도 다른 모든 형제들보다 폭력의 경향을 더 많이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희생위기와 쌍동이 탄생의 특성 사이에는 자의성이 있다. 그러나 이 자의성은 언제나 존재하는 전형적인 언어기호의 자의성과는 종류가 다론 자의성이다. 희생위기와 쌍둥이의 관계는 오히려 상징의 고전적 정의 0 가 더 적합한 것같다.

@ 원래 하나인 것을 둘로 쪼개어, 언젠가 그 두 조각을 붙여보아 서로의 신분을 확인하는 〈칭표〉가 상징의 본래 뜻이었다.

원수 형제에는 전형의 의미가 흐려져 있다. 형제 관계는 가족 안의 정상적인 관계이다. 따라서 형제 사이에는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언 제나 차이가 있다. 쌍둥이에서 형제로 넘어갈 때, 우리는 상징적인 전 형이라는 면에서는 후퇴하지만, 사회적 진실에는 한걸음 다가선다. 즉, 현실에 다시 확실한 기반을 두게 되는 것이다. 형제 사이에는 실제로 아주 작은 차이만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회에서 이들은 폭력의 무 차별화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는 차별적 체계의 약점이 될 수 있다. 쌍 둥이 공포증이 정말 신화적이라 하더라도, 만연해 있는 형제 대립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왕위, 한 여자, 더욱 일반적으 로는 아버지의 유산과 같이, 둘 모두가 열렬하게 욕망하지만 그것을

나누어 갖기를 원치 않고 또 나눌 수도 없는 그런 대상에 대한 똑같은 매력에 의해서, 형제들이 합쳐지고 동시에 분리되는 것이 비단 신화 속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쌍둥이와는 달리 원수 형제는 순전히 상칭적인 탈상칭화와 진짜 회 생위기인 실질적인 탈상칭화에 걸쳐 있다. 많은 아프리카 왕국들에서 왕의 죽음은 아들들을 〈원수 형제〉로 만드는 왕위계승전의 도화선이 된다.이 전쟁이 어느 정도로 상칭적이고 제의적인지, 그리고 이것이 불확실한 미래와 실제 현실에 대해 얼마만큼 열려 있는가를 결정한다 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어려운 일이다. 달리 말해서 이것이 진짜 갈등인지 아니면 단지 그 갈등이 너무 직접적으로 표현한 위기를 이것의 정화적 효과로써 피하려는 희생의 흉내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를 모른다는 말이다. 쌍둥이나 혹은 심지어는 원수 형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것이 의미하는 현실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쌍둥이나 원수 형제의 아주 사 소한 싸움도 전체적인 희생위기를 예고하고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형 식적인 수사학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아주 실질적인 폭력의 수준에서 언제나 〈전체라고 간주되는 일부〉이다. 죽 모든 폭력의 무차별 현상은 처음에는 제한적이지만, 길게 뿌린 화약 도화선처럼 퍼져나가서는 사 회 전체를 파괴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전적으로 우리 탓만은 아니다. 신화 데마들 중의 그 어느 것도 우리들을 진정으로 희생위기의 진실로 데 려다주지 않는다. 쌍둥이의 경우에는 대칭 관계와 동일성이 아주 정확 하게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무차별은 무차별로서만 존재하지만, 너무 나 예의적이어서 그 자신이 새로운 차이가 되는 어떤 현상 속에 이 무차별은 구현되어 있다• 〈재현된〉 무차별은 결국 아주 두드러진 차이, 죽 기괴한 것의 속성이자 성스러움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차이로 나타난다.

원수 형제는 아주 일상적인 가족 속에서는 발견된다. 이제 더 이상 불길하거나, 혹은 유쾌한 어떤 별난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 갈등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 시각은 언제나 이것의 상징적인 중요성을 제거하려는, 다시 말해서 이 갈등을 단순히 일화적인 것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언제나 상칭은 감추고 있으므로, 모든 상칭체계의 파괴가 상징이라는 역설이 성립한다. 차이들을 파괴하는 것은 바로 도처에 산 재된 폭력적 상호성의 작용인데, 이 작용은 결코 확실히 드러나지 않 는다. 아직 차이가 남아 있어 문화질서에는 언젠가 소멸될 의미들만 있든가, 아니면 이젠 더 이상 차이는 없고 이 무차별이 예컨대 쌍둥이 의 기괴함처럼 극도의 차이로만 나타나고 있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이미 차별화된 언어는 모든 차이의 소멸을 표현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을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바 있다. 무엇을 말하전간에 이 언어는 언제나 지나치게 많이 말하지만 충분치는 않다. 비록 이 언 어가 〈 순전히 바난 속에서 교차되는 것〉이나,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 는 소리와 격분〉에 만족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일화적인 이야기가 기괴한 것에 의해서 언제나 위협받고 있는 희생 위기의 현실은 항상 말들 사이에 스며둘기 마련이다. 신화는 항상 후 자의 위험 속으로 빠져들며 비극은 전자의 위험에 위협받고 있다. 기괴한 것은 신화 도처에 나타난다. 신화는 끊임없이 희생위기에 관 하여 말하지만, 그것은 희생위기를 위장하기 위해서 말할 때만 그러하 다. 신화는 희생위기에서 나온다. 신화는 이 위기에서 나온 문화 질서 에 비추어서 이 위기를 다시 해독하는, 위기에 대한 회고적인 변형이 라고 가정할 수 있다. 신화에서는 비극에서보다 희생위기의 흔적들을 판독해 내기가 더 어렵다. 아니 오히려, 비극은 언제나 신화 모티브의 부분적인 해독이며, 비극 시인은 회생위기의 싸늘한 불씨를 살리기 위해 입김을 불고 있는 자이다. 시인은 흩어져 있던 죽은 상호성의 · 조각들을 다시 결합시켜 신화의 의미들이 흐트려 놓았던 대립 양상을 다시 세운다. 그는 폭력적

상호성의 소용돌아를 발생시키는데, 차이들이 예전에는 신화가 변형시 킨 위기 속에 녹아들었듯이 이제는 이 소용돌이 속에 차이들이 녹아 든다. 비극은 모든 인간 관계를 똑같은 비극적 대립으로 이끌고 간다. 비 극에서는,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니스와 같은 〈 형제 〉 갈등이나 『알쎄스 트 』 나 『 의디푸스 대왕』에서의 부자 갈등, 또는 예를 들어 의디푸스와 티레시아스와 같이 아무런 인척관계도 없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아 무런 차이도 없이 나타난다. 두 예언자의 적대 관계도 형제들의 적대 관계와 구별되지 않는다. 비극은 원초적 폭력에다가 신화의 테마들을 용해시키는 경향이 있다. 비극은 원시인들이 쌍둥이의 면전에서 느끼 던 두려움을 부분적으로 이어받고 있다. 비극은 해로운 전염병을 퍼뜨 리고 폭력의 쌍둥이를 무한히 증가시킨다. 비극이 신화와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결국 비 극이 신화와 똑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비극의 기술 울 그러므로 상징화가 아니라 탈상칭화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비극은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신화 생성의 반대방향으로 작용한다 . 특히 원 수 형제와 같은 대부분의 희생위기의 상징들이 제의와 비극적 사건이 라는 이중작용에 아주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아프리 카의 왕위계승에 관하여 이미 말했던 것이다. 거기서 왕위계승이 제의 적인 원수 형제를 이용하는지, 아니면 역사와 비극의 원수 형제를 이 용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여기서 상칭화된 현실은 모든 상징체계의 소멸이다. 이 차이의 소멸은 차별화된 언어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왜곡되기 마련 이다. 여기에는 아주 특수하기 때문에 관습적인 상칭체계의 개념으로 는 생각할 수 없는 현상이 존재한다. 단지 비국의 독서 , 죽 비극의 영 감을 재발견하는 근본적으로 〈대칭적인〉 독서만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 비극 시인이 언제나 신화에 내재해 있는 폭력적 상호성을 발견해 내는 것은, 점점 약해지는 차이와 점점 중가하는 폭력이라는 맥락에서

신화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비국은 우리가 이 장의 첫머리에서 이야기 했던 새로운 희생위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폭력에 관한 모든 지식과 마찬가지로 바극도 폭력과 관련되어 있다. 비극은 희생위기의 산물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비극과 신화 사이의 관 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와 유사한 관계, 죽 이스라엘 선지자 들과 그들이 인용하는 모세 5 경 안 기 몇 대목들 사이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여기에 예레미야J erem i e 의 한 대목이 있다.

® 모세 5 경 Penta t e u q ue : 구약성서의 첫 다섯 편. 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 기, 신명기를 말한다.

형제를 믿지 말지니, 모든 형 제는 야곱과 같은 짓을 하며, 모든 친구는 모략을 퍼뜨리기 때문이니라 . 부정에는 부정으로, 속임수에는 속임수로 서로 속고 속이니…… 야곱에서 나타나는 원수 형제의 개념은 에테오클레스와 풀리니스의 비극적 독서와 완전히 같은 것이다. 형제 관계를 규정짓는 것은 바로 갈등의 대칭인데, 여기서 이 대칭은 더 이상 소수의 비극 주인공들에 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대칭은 모든 일화적인 성격을 상실하게 되고 그 사회 자체가 전면으로 나서게 된다 . 야곱을 암시하는 것은 희 생위기를 말하려는 중요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사회 전체는 폭력 속에서 분해되고 모든 관계들은 원수 형제의 관계와 유사해진다. 〈부 정에는 부정으로, 속임수에는 속임수로 서로 속고 속이니…… 〉라는 대칭의 문체론적 효과는 폭력적 상호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구약성서의 위대한 텍스트들은 서로 별개일 뿐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떨어져 있는 위기이지만 적어도 어떤 점에서는 모두 유사한 희 생위기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처음 위기들은 뒤에 오는 위기들에

의해서 재해석되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앞선 위기들의 증거는 뒤에 오는 위기에 관한 연구에 계속 유효한 근거를 제공한다. 예레미야가 암시하는 야곱이라는 인물의 해석 속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창세기와 예레미야 자신이 겪고 있던 6 세기의 위기 사 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데, 이 공통점이 사정을 명백히 밝혀준다. 비극과 · 마찬가지로 예언자의 금언도 폭력적 상호성으로 귀착한다. 따 라서 예언자의 금언도 신화적 차이의 해체인 셈인데, 이 해체는 사실 비극의 해체보다 더 완벽한 해체이다. 그러나 이것은 따로 취급할 만한 주제이다. 더 간접적이고 일시적이지만 비극의 영감도 예레마야의 텍스트와 똑같은 모델 위에서 이해될 수 있다. 우리가 방금 인용한 구절은, 야 곱과 에서 등 창세기의 원수 형제들에 관한 어떤 비극의 희미한 윤곽 이 될 수 있다. 비극이나 혹은 예언자의 영감의 힘은 역사적이며 철학적인 지식, 즉 백과사전적인 박학의 덕랙이 아니다. 이 힘은 문화적 무질서 속에서뿐 아니라 질서 속에서 그리고 희생위기 속에서뿐 아니라 신화 속에서 폭력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직접적안 직관에서 생겨난다. 마찬 가지로 『트러일러스와 크레시다』에서 세익스피어에게 영감을 제공한 것은 바로 종교적 위기로 가득 차 있던 영국이었다. 박학의 진보가 실 증주의의 소중한 개념인 지속적인 정보 축적에 의해서 이 독서를 개 선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서는 안된다. 아무리 실질적이고 소중하다 하 더라도 이 전보는 바극의 해석과는 다론 차원에 있다. 예전의 위기 때 에는 그토록 널리 퍼지던 비극의 해석 정신이 문화적 안정기에는 완 전히 사라져버리고 만다. 폭력의 무차별화 과정은 어떤 순간에 가서는 전도되어 신화 생성이 라는 반대 과정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신화 생성은 피극의 영감 속에서 새롭게 전도된다. 이러한 변형들의 원동력은 무엇이며 문화적 질서와 무질서의 주기는 어떤 메커니즘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러한

것이 우리에게 제기되는 문제이다. 이 문제에는 희생위기의 결말에 근 거하는 또 다른 문제가 함께 둘어있다. 일단 폭력이 공동체 속으로 침 두하면 그것은 계속해서 증식되면서 강화된다. 공동체의 무조건적인 소멸에 앞서 보복의 사슬이 어떻게 끊길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 고 있다 . 희생 위기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것은 제어장치를 갖고 있 어서, 모든 것이 소멸하기 이전에 이떤 자동조절장치의 메커니즘이 작 동해야 할 것이다 . 희생위기의 결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인간 사회의 〈 가능성 〉 이다. 이 결말은 도대체 어떠하며 또 이 결말을 가져 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한다. 이 희생위기의 결말은 신화와 제의의 전정한 출발점인 것 같다. 이것들을 알게 됨으로써 우리는 산 화와 제의의 이해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갇 것이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에 대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의디푸스 신화라는 하나의 신화를 살펴볼 것이다. 지금까지의 분석으로 미루어볼 때, 우리 는 이 산화를 〈 의디푸스 대왕〉이라는 바국 작품을 통해서 접근하는 것이 유리한 것 같다.

제 3 장 외디푸스와 희생양 문학비평은 형식이나 구조에 대한 탐구라고, 죽 아주 정밀하고 미묘 한 차이들과 갈수록 더 섬세한 〈뉘앙스〉의 총체, 체계, 일람표 또는 법규라고 여겨진다. 문학비평이 〈일반적인 관념들〉과는 관계가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찾는 방법은 차이의 방법이 아니다. 비극의 영감이 차이들을 갈등의 상호성 속에 부식시켜 용해시키는 것이 사실이지만, 비극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이런 사실을 알아보지 못하는 현대비 평 양식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특히 심리학적 해석들이 그러하다. 『의디푸스 대왕』은 특히 심리학적 연구의 여지가 풍부하다. 전통문학적인 의미에서의 심리학적 관점은 그 원칙에서부터 이 작품의 해석에 틀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 소포클레스는 의디푸스라는 아주 특칭적인 인물을 창조했다고 찬양 받고 있다. 사실 이 주인공은 그에게 적합한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의 성격은 어떠한가? 이 질문에 대해 사람들은 옛부터 의디푸스는 〈관용적〉이지만 〈충동적〉이라고 대답해왔다. 작품의 첫부분에서는 그 의 〈고상한 침착성〉이 찬양받는다. 신하둘의 소원을 들어주면서, 이

왕은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 그 수수께끼에 몰두하기로 작정한다. 그러 나 신하들이 아주 사소한 실패를 하거나 일이 조금만 늦게 되어도 그 리고 옆에서 약간만 충동질해도 이 군주는 냉정을 잃고 만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분노 성향〉을 진단해 낼 수 있다. 의디푸스 자신도 이것 울 치명적인 약점 -—-이 것이 없다면 그는 전정한 비극의 주인공이 아 닐 것이다―― 이라고 칭하면서 이 성향을 뉘우친다. 처음에는 〈고상한 침착성〉이 나타나지만 그 다음에는 〈 분노 〉 가 온 다. 티레시아스가 첫번째의 폭발을 야기시키고 크레온은 두번째 폭발 의 원인이 된다. 자신의 과거로 되어 있는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의디푸스가 늘 같은 〈약점〉 아래 행동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예전에 공허한 말에다가 너무 과도한 중요성을 부여했던 것을 후회한다. 코린 트 Co ri n t he 에서는 어느 술 친구가 그를 아이로 취급했었는데, 이때에도 이로 인해 의디푸스가 코린트 밖으로 쫓겨난 것도 그의 분노 때문이 었다. 그리고 갈림길에서 길을 막는 낯선 노인을 폭행하게 되는 것도 역시 그의 분노 때문이었다. 이 묘사에 의하면 우리는 충분히 이 주인공의 〈개인적인 〉 반응들을 분노라는 용어로 지칭할 수 있다. 다만 이 모든 분노들이 의디푸스를 다른 등장인물들과 진정으로 구별짓는지롤 자문해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성격 carac t ere 〉이라는 이 개념 자체가 상기시키는 변별적인 역 할을 이 모든 분노들에게 부여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좀더 자세히 관찰하면 신화 속에는 도처에 〈분노〉가 존재하고 있음 울 알 수 있다. 코린트의 친구를 자극하여 주인공의 출생을 의심하도록 만든 것도 틀림없이 어떤 은연중의 분노였다. 숙명의 갈림길에서 라이 오스로 하여금 먼저 아들에게 채찍을 . 들게 만드는 것도 분노이다. 그 리고 우리는 자신의 아들을 내쫓으라는 아버지의 결정을, 비록 그것이 진정으로 원초적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의디푸스의 모든 분노에 선행하는 맨 처음의 분노 탓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비극 속에서 의디푸스가 분노를 혼자 독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전간에, 다른 주역들도 덩달아 분노하지 않는다 면 비극적 갈등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분노들은 확실히 상당히 늦게서야 주인공의 분노를 뒤따른다. 우리는 이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일차적이며 용서할 수 없는 의디푸스의 분노에 대한 〈전정한 보복〉으 로, 즉 부차적이며 용서할 수 있는 분노로 보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방금 의디푸스의 분노가 결코 전정으로 일차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하 보았다. 언제나 더욱 원초적인 분노가 그것에 앞서면서 그것을 결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 또한 진정으로 원초적인 것이 아 니다. 불순한 폭력에 관한 모든 기원의 탐구는 본래 신화적이다. 이런 종류의 연구에 뛰어들게 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폭력적 상호성과 맞닥뜨리게 되고 동시에 비극이 거기서 벗어나려 하는 신화적 차이에 다시 빠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티레시아스와 크레온은 한순간 그들의 냉정을 유지한다. 그러나 1 장 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의 침착성 저편에는 의디푸스의 침착성도 있다. 사실상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침착성과 분노의 교대이다. 비국의 연극적 차원에 있어서 의디푸스와 적수들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의디 푸스가 맨 먼저 그 승부에 참여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따라서 그는 늘 적수들보다 조금씩 앞선다. 동시적인 것이 아니라고 해서 그 대칭이 실제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다. 모든 주역들은 동시적으로가 아니라 차 례차례로 어떤 동일한 대상에 대해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이 대상은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비극적 갈등에 다름아니며, 뒤에 가서는 그것 이 페스트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각자 모두가 폭력을 제압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폭력은 모든 주역들을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상호적 폭력의 작용 속으로 끌어넣음으로써 그 들 하나하나를 연달아서 제압한다. 그러나 이 주역들은 우발적이고 일 시적인 의부의 것을 영구적이고 필연적인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 둘 자신들은 언제나 상호적 폭력을 모면한다고 믿고 있다. 세 주역들은 스스로 이 갈등에 끄떡없다고 믿고 있다. 의디푸스는

테베 출신이 아니고, 크레온은 왕이 아니며 티레시아스는 꼭대기에서 초연하게 바라보고만 있다. 크레온은 테베에서 마지막 신탁을 받아온 다. 의디푸스와 특히 티레시아스는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예언자적 재 주를 많이 지니고 있다. 그들은 현대판 〈 숙련자 〉 , 즉 우리가 어려운 경우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 전문가 〉 의 명성을 지 니고 있다. 이들은 모두 초연한 방관자로서,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 는 상황을 밖에서 구경하고 있다고 믿는다 . 각자는 공정한 심판관 , 지 고의 재판관의 역할을 맡고 싶어한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다른 두 사 람의 침묵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들의 명성을 해치는 것을 보게 되면 이 세 현자들의 침착성은 곧 맹목적인 분노로 바뀌고 만다. 이 세 사람을 갈등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은 그들이 갖고 있는 우월 성 의 환상, 혹은 그들의 휴브리스 hubr i s( 자기 과신)와 같은 것 이 다. 달리 말해서, 그 누구도 〈소프로수네 so p hrosune( 분별심) 〉 를 지니고 있지 않 다. 바로 이 측면에서 재빨리 지워지는 차이들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침착성에서 분노로의 이행은 매번 동일한 필연성에 의하여 일어난다. 이것이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비극 텍스트 속에 드러나고 있다 . 그리고 이 점에 근거한 해석이 모든 심리학적 해 석보다 더 뛰어난 논리적 일관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모두에게 똑 갇이 속하는 이것을 임의적으로 〈성격의 특징〉이라 명명하면서 의디 푸스에게만 부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인공들은 서로 대립함으로써 엄격하게 개인적인 존재의 모서리들 을 날카롭게 하면서 모두 똑같이 폭력의 동질성으로 빠져든다. 그들을 휩쓸고 있는 이 회오리바람은 모두를 아주 정확하게 똑같은 사람으로 만든다. 〈대화하자고〉 그를 초대한 의디푸스가 이미 폭력에 취하여 있 다는 것을 첫눈에 알아본 티레시아스는 자신의 실수를, 죽 그를 이용 하기에는 너무 늦었음을 알아챈다. 아아 , 안다는 것이 그 사람에게 아무 소용도 없을 때, 안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 ! 어쩌자고 내가 그걸 알면서도 잊었단 말인가 ! 그렇지 않 았던둘 여기 오지도 않았을 것을 ! * 이 비극에는 갈등다운 데가 전혀 없다. 비극 영감의 한계들을 드러 내게 될지라도, 분명히 갈등적 대칭에 집착해야 한다. 비극의 적대자들 사이에는 차이가 없으며, 〈진짜〉 예언가와 〈가짜〉 예언가 사이에도 차 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럴듯하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는 생각할 수조차도 없는 것이 있다. 의디푸스가 자기에게 가증스러운 욕을 퍼부울 때, 의디푸스의 전실을 제일 먼저 주장한 사람이 바로 티레시아스가 아니었던가? 티레시아스가 무대에 나타나자 비극의 대칭은 단숨에 무너진다. 이 고상한 인물을 알아보자마자 합창대는 이렇게 소리지른다. 저기 유명한 예언가, 가슴에 진실을 간직한 유일한 그분이 오시고 있습 니다. 그는 실수 없는 전능한 예언가이다. 그는 완벽한 진실, 죽 오랫동안 신중히 계획되고 축적된 비밀을 지니고 있다. 이번만은 차이가 두드러 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몇 줄 뒤에 가서 이 차이는 또 다시 지워지며 그 어느 때보다 더 분명한 상호성으로 되돌아온다. 티레시아스는 자기 역할에 대한 전통적 해석, 즉 합창대가 방금 의쳤던 그런 식의 해석을 스스로 거부한다. 그의 예언자적 재능의 기원에 대해 조롱하는 두로 묻는 의디푸스에게 대답하면서, 그는 바로 그 적수로부터 어떤 사실도 얻기를 자제하고 있다. 의디푸스―그 전실을 누구에게서 알았느냐? 아니면 너의 그 예언가로서

의 재능에서 나온 것아냐 ? 티레시아스- 아니오 . 그것은 싫다는 데도 억지로 말하게 한 바로 당신에 게서 알았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이 구절을 전실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티레시아스가 조금 전에 의디푸스에게 던진 엄청난 저주, 죽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비난은 초자연적인 계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 된다 . 기원에 대한 또 다른 암시가 있다. 이 비난은 보복을 이끄는 유혹과 같은 것 인데, 이것은 비극적 싸움의 적대적인 상호 공방 속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티레시아스를 강요하여 억지로 말하게 함으로써 자신 도 모르는 사이에 이 승부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바로 의디푸스 자 신이다. 의디푸스는 티데시아스가 라이오스의 살해 음모에 가담했다고 먼저 비난한다. 그는 티레시아스에게 그에게 응수하도록, 즉 자신에게 다시 비난을 돌려보내도록 강요한다. 여기서 의디푸스의 비난과 티레시아스의 응수 비난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티레시아스의 이 응수 비난이 파라독스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 역설은 어떤 약점이 될 수도 있지만 또한 그것은 일거에 뒤집히기도 한다. 〈당신이 죄인이야〉라는 의디푸스의 말에, 티레시아스 는 동일하지만 반대 방향의 〈당신이 죄인입니다〉라는 단순한 말로 대 답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볼 때 자신을 비난하는 파렵 치함, 죽 비난하는 자가 바로 죄가 있다는 파렴치처럼 보이는 것을 다 음과 같이 강조한다. 〈나를 비난하면서 스스로는 결백하다고 믿는 당 신이 바로 죄인입니다. 당신이 찾는 자는 다름아닌 바로 당신 자신입 니다〉라고• 물론 이 논쟁의 모든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라이오스의 살인죄로 타인을 비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희생위기의 유일한 책임자로 본다 는 것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감이, 모두가 문화 질서의 파괴에 참여 하고 있기 때문에 〈모두〉 다 똑같이 책임이 있다. 원수 형제들이 서로

에게 가하는 공격이 항상 사람들을 해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것은 왕국과 종교를 동요시킨다. 모두들 자신이 비난하는 타인의 실상 은 잘 폭로하면서도 거기서 자신의 실상은 결코 알아차리지 못한다. 모두들 자신이 옹호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합법성의 찬탈자를 타인 으로 보지만 , 실은 그 자신도 그 합법성을 끊임없이 약화시키고 있다. 두 적수들 중의 어느 한쪽울 긍정하거나 부인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 가지로 다른 쪽도 역시 긍정하거나 부인해서 안된다. 상호성을 파괴하 기 위한 쌍방의 노력에 의해서 그 상호성은 그때마다 더 강화된다. 비 극의 언쟁은 바로 원수 형제, 죽 에데오클레스와 폴리니스의 말로 하는 결투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그 누구도 시원한 해석을 제시하지 못한 다음 대사 들 속에서 , 티레시아스는 의디푸스에게 다가울 불행 다시 말해서 각자 가 상대방에게 가하려 하는 공격에 담겨 있는 순전히 상호적인 성격을 환기시킨다. 문장의 리듬과 대칭의 효과가 비극의 언쟁을 예고하고 또 한 점화시킨다. 여기서는 폭력적 상호성의 작용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모든 차이가 지워져버린다. 자, 집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만일 폐하께서 저의 말을 듣는다면, 저는 저의 운명을, 폐하께서는 폐하의 운명을 감당하는 것이 덜 고통스러울 것입 니다. 아 ! 폐하의 말씀은 사리에 어긋납니다. 그뿐 아니라 이번에는 제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천만에, 제가 폐하의 불행을 둘추어내지 않기 위해 저의 불행을 들추어 낼 거라고는 기대하지 마십시오……. 저는 저 자신이나 폐하를 괴롭히고 싶지 않습니다……. 폐하께서는 폐하의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은 저의 완고한 고집을 비난하시지만, 저의 말을 듣고 나면 곧 바로 저를 비난 하게 될 겁니다.

폭력의 무차별 현상, 적대자들의 일치 현상은 비극적 관계의 진실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는 이 대사들을 순식간에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 만든다. 오늘날까지도 이 대사들이 모호해 보인다는 사실은 이 관계에 대한 우리들의 무지를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 무지가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계속 비극적 대칭을 파고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신화의 근본적인 여건들과 만나 게 될 것이다. 신화는 드러내놓고 차이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문제 룰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해결하고 있다. 그 해결책이 바로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이다 . 엄밀한 의미의 신화 속에서는, 의디푸스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동질성과 상호성의 문제는 없다. 적어도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해당되지 않는 어떤 것을 우리는 의디푸스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우선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유일한 죄인이다. 우리에게 그는 엄청난 예의처럼 보인다. 죽 그는 어느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으며 또한 아무도 그와 비슷하지 않다. 비극의 해석은 신화의 내용과 근본적으로 대립되어, 신화 자체를 거 부하지 않고서는 비극을 계속 따를 수 없을 정도이다. 『의디푸스 대왕』 의 해설자들은 언제나 조치를 취하여 결국 이 모순을 숨기는 일종의 타협을 체결하였다. 오래된 이 타협을 존중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타협 울 찾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길은 다른 데에 있다. 죽 비극의 관점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지롤 알기 위해서라도 이 관점을 끝까지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이 비극의 관점은 신화의 기원에 대해 우리에게 전해 줄 어떤 중요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우선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으로 되돌아가서 특정한 주역에게만 이 죄악들을 독점적으로 부여하는 것에 대해 따져보기로 하자. 이미 보았 듯이 비극은 라이오스의 살해와 친부살해, 근친상간 자체를 비극적 저 주의 공방으로 변형시킨다. 의디푸스와 티레시아스는 그 도시를 괴롭

히는 재난의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시킨다.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은 이 처럼 상호유발 행위의 특별히 과장된 한 변이체에 불과하다. 이 단계 에서는, 저 사람이 아니라 이 사람이 죄가 있다고 단정지을 어떤 근거 도 없다. 어느 쪽이나 모두 똑같다. 무엇으로도 딱 잘라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신화는 단호하게 결정하려 한다. 비극적 상호성에 견주어서, 신화가 어떤 근거에서 그리고 어떤 조건 속에서 이 문제를 단호히 해결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 이 점에 관해서 거의 환상적이라 할 수 있는 이상한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만일 우리가 이 비극의 제 2 부에 많이 나타나고 있는 의디푸스에게 불리한 증거들을 제거한다면, 우리는 다 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울 것이다. 죽 이 신화의 결말은 죄인에게 벼 락을 때리고 모든 인간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진실이 기는커녕, 기실은 다른 편에 대한 한쪽 편의 승리를 위장한 것, 죽 한 논쟁적 해석의 반대 해석에 대한 승리를 위장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 각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건에 대한 해석을 공동체가 선택 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이 해석은 처음에는 티레시아스와 크레온 만의 것이지만 나중에 가서는 신화 그 자체의 진실이 되어 모두의 것 이면서 동시에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해석이 되어버린다. 이 점에 관해서 사람들은 지금 설명하고 있는 이 덱스트들의 〈역사 적인 〉 잠재력에 대해서 그리고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정보의 유형 에 대해서 우리가 이상한 환상을 품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 러나 독자들은 그 근심이 근거없는 것임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계속 밀고 나가기 전에 우리의 이 해석이 당연히 불러일으킬 또 다른 유형의 이의 제기에 대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문학비평은 비극에만 관심이 있고, 신화는 문학비평에 있어서 건드 릴 수 없는 불가침적인 가치를 지닌 어떤 영원한 조건으로 주어져 있 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반면에 신화학은 비극을 무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 학문은 스스로를 비극에 대해 어떤 불신감을 표할 수밖에 없는 것

으로까지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일종의 분업의 기원은 아리 스 토텔레스 Ar i s t o tl e 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시학 Po e tiq ue 』 속에서 그는 모든 사람이 신화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훌륭한 비극 작가는 신화에 손을 대지 않으며, 또한 손댈 필요도 없다고 가르친다. 작가는 신화에서 〈 소재 〉 를 차용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바로 이 금지조항 때문에 아직도 우 리는 비극의 대칭을 신화적 차이에다 비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 또 이렇게 됨으로써 〈 신화학 〉 뿐 아니라 〈 문학 〉 이, 그리고 이 두 분야의 전문가들이 이 비교가 가져올 기지의 것이 근본적으로 전도되는 그 결과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비교에 전념하려 한다. 사실 우리는 『의디푸스 대왕』 울 읽던 주의력 있는 독자들이 과연 어떻게 그것을 피 할 수 있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비극적 갈등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소포클레스는 자신의 텍스트 속에 우리에게는 매우 충격적으로 보이는 두 대사를 년지시 내비쳤다. 충격적이라는 말은 이 대사들이 앞에서 우리가 암시 했던 그 가정을 다시 한번 더 상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디 푸스의 전락은 예의적인 기괴함과는 상관없으며 오히려 비극적 대치 에서의 실패의 결과로 보아야만 한다. 크레온을 용서할 것을 간청하는 합창대에게 의디푸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도대체, 당신들이 그렇게 요구하다니 ! 그것은 결국 , 당신들이 나의 죽음 아니면 나의 추방을 원하는 것임을 명심하시오. 그러나 합창대는 계속 고집을 부린다. 크레온은 의디푸스가 명하는 운명을 받울 가치가 없는 자이므로, 자유롭게 떠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디푸스는 마지못해 합창대의 간청에 따르지만, 출구 없는 이 두쟁의 성격을 다시 한번 더 합창대에게 환기시킨다. 원수 형 제를 추방하거나 죽이지 않는 것, 그것은 바로 자기자신이 추방이나

죽음을 당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좋소 ! 그렇다면 그 자를 풀어주어라 ! 틀림없아 내가 살해당하든지, 아니 면 치욕을 당하면서 테베로부터 추방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대사들을 〈비극적 환상ill us i on t ra giq ue 〉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전통적인 해석은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바로 이 비극 전체와 이 비극이 계속 유지하고 있는 놀랄 만한 평형상태를 바 로 그 환상의 탓으로 돌리고 싶다. 이제는 비극의 관점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는 소포클레스가 우리를 거기에 말려들게 한 희미한 그 감정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이제 소 포클레스는 몰래 빠져나갈 것이다. 비극의 전복에도 한계가 있다. 비국 의 전복이 신화의 내용을 문제삼는 것은 오로지, 희미하고 간접적으로 만 그렇게 한다. 스스로 말을 멈추고 신화의 틀-전복은 이 틀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__- 울 명백히 밝히지 않고서는, 비극 의 전복은 더 이상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안내자도 모델도 없다. 우리는 무어라 규정지울 수 있는 어떤 문화활동에 관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우리는 내 세울 만한 어떤 인정받은 원칙을 갖고 있는 것도 없다.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은 민족학이나 정신분석학뿐 아니라 비극이나 문학비평에 대 해서도 낯선 것이다. 다시 한번 더 라이오스의 아들의 〈죄악들〉로 되돌아가 보자. 〈도시 국가〉의 영역에서 시역죄인이라는 것과 가족의 영역에서 친부모 살해 범이라는 것은 정확히 같은 것이다. 그 어느 경우에서나 이 죄인은 가 장 본질적이고 가장 기본적이며, 영원불멸의 가장 엄격한 차이를 위반 한것이다. 문자 그대로 그는 차이의 살해범이다. 친부살해,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폭력의 상호성이 자리를 잡 는 것, 죽 부자 관계가 대립적인 〈형제 관계〉로 환원되는 것이다. 이

바극 속에는 이런 상호성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이미 말했듯이 라 이오스는 항상 의디푸스가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전에 먼저 의디푸 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폭력의 상호성이 부자 관계조차 없애버리게 되면, 그 다음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머니에 대해서, 다시 말해서 가장 절대적으로 아버지에게 유보되어 있어서 아들에게는 가장 엄격하게 금지된 대상인 어머니에 대해서도 부자 관계를 경쟁 관계로 변화시키면서 이 폭력의 상호성은 완벽하게 이 부자 관계를 삼켜버린다. 근친상간도 극단적인 폭력이다. 이 폭력의 결과는 국단적 인 차이의 파괴인데 가족 속에서 중대한 차이, 죽 어머니와의 차이의 파괴가 그것이다. 이 두 가지에 이르러 천부살해와 근친상간은 폭력의 무차별화 과정을 완성시킨다. 폭력을 차이의 소멸과 동일시하는 생각 은, 그 궁극에 가면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서는 어떠한 차이의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으며 삶의 어떠한 영역도 더 이 상 폭력을 피할 수 없게 된다.I) 1) 장-피에르 베르낭J ean - P i erre Vernan t은 『 모호성과 반전 : 〈 의디푸 스 대왕 〉 의 불 가사의 구조론 Amb igu'it e et renversement : Sur la stru ct ur e enig m atiq u e d' Oedip e ro i』이라는 시론 속에서 〈천부살해와 근친상간은, 도시국가라는 장기판 위에서 모든 말들이 다론 말들과의 관계에 따라 정해지는 자리 를 차지하는 체커 chegu er 놀이의 기본규칙에 대한 침해이다〉라고 문화적 차이의 소멸을 아주 잘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이 두 죄악의 결과들은 언제나 차이의 소멸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외디푸스와 그의 아들들 사이의 동등화 e g al i sa ti on 〉 는 일련의 야만스런 이 미지들로 나타나고 있다. 죽 아버지는 자기 자신의 씨가 뿌려졌었던 바로 그곳에 자기 아들의 씨를 뿌린다 . 조카스트는 아내이긴 하지만, 자기의 밭고랑에서 아버 지와 아들이라는 이중의 수확을 거두어들인 어머니이지 아내는 아닌 것이다. 의 디푸스는 자신의 씨가 뿌려졌던 , 그래서 자신을 생산했던 바로 그 여인에게 씨를 뿌려 바로 그 밭고랑, 죽 〈동등한 e ga le 〉 밭고랑에서 자기 아이들을 얻는다. 그러나 의디푸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동등 e g al it e 〉이라는 이 말이 가진 모든 비국적 무게를부여한자는티레시아스 T i res i as 이다 .〈 당신을 당신의아들들과 동등 하게 만듦으로써, 당신을 당신 자신과 동등하게 만들 불행이 닥칠 것입니다〉 .(425)

따라서 친부살해와 근찬상간은 그 결과에 따라 명확하게 밝혀질 것 이다 . 의디푸스의 기괴함은 전염성이 있다. 그래서 우선 그것은 그가 만들어내는 모든 것으로 퍼져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분 리시켜서 떼어내어야만 하는 가증스러운 피의 혼합이 생식과정을 통 해서 계속 반복되고 있다. 근친상간에 의한 분만은 조잡한 분화, 같은 것의 끔찍한 반복, 상스러운 것들의 불순한 혼합으로 귀결된다. 근친상 간에 의해 태어난 자는 결국 공동체를 쌍둥이 때와 똑같은 위험에 처 하게 한다. 원시종교가 근친상간의 결과들을 나열할 때 언제나 언급하 는 것은, 바로 다름아닌 희생위기의 실질적인 결과들이다. 쌍둥이의 어 머니둘은 근친상간을 통해서 임신한 것은 아닌가 하고 종종 의심받는 것은 이런 점에 대해 많은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소포클레스는, 결혼 규칙과 가족의 모든 차이룰 관장하면서 이 일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는 신 히멘 H y men 에게 의디푸스의 근친상간 을 결부시킨다. 오오, 히멘, 나를 생기게 한 결혼의 신이시여 ! 나를 낳으신 후 똑갇은 씨를 한번 더 자라게 만드셨으니, 그로 인해 모두 갇은 피로 이루어진 아버지, 형 제들 아이들과, 그리고 부인이면서 동시에 어머니인 여인을 이 세상에 만들 었도다. 천부살해와 근친상간은 희생위기 속에서만 그리고 그것과의 관련하 에서만 진정한 의미를 획득한다. 세익스피어는 『트러일러스와 크레시 다』 속에서, 특별한 개인이나 일반적인 모든 개인들이 아니라, 차이 위기라는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다가 친부살해의 데마를 결부시킨다. 폭력의 상호성은 아버지 살해에 이른다;죽 〈그리고 난폭한 아들은 아 버지물 때려죽인다〉. 그 반면에 의디푸스 신화 속에서는――비국이 아니라一―친부살

해와 근친상간이 그 어떤 것과도 무관하게, 심지어는 라이오스에 의해 서 버려진 영아살해와도 아무런 관계도, 그리고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것처럼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갈등의 대칭 요소들과 함께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어떤 별도의 것이 존재 한다. 여기서는 우연 때문인지 아니면 〈운명〉 또는 다른 신성한 힘들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모든 맥락과 단절되어서 의디푸스에게만 타격을 주는 재난이 나타나고 있다. 많은 원시종교에서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은 쌍둥이의 경우와 사정이 똑같다. 의디푸스의 범죄는 모든 차이의 종말을 의미하지만, 이 범죄는 특정한 한 개인에게 전가된다는 점에서 외디푸스만의 기괴함이라는 새로운 차이가 된다. 그것은 아마도 모든 사람들과 관계되거나 혹은 아무와도 관련되지 않을 것인데도, 여기서는 한 개인의 문제가 된다. 따라서 의디푸스 신화 속에서 천부살해와 근친상간은 이미 앞 장에 서 살펴본 바 있는 신화적이며 제의적인 다른 모티브둘과 아주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들은 희생위기에 대해서 묘사하는 것보다는 감 추는 게 더 많다. 이것들은 물론 폭력의 상호성과 동질성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 상황이 두려움을 줄 정도로 너무 국단적이어서 그것을 특정한 한 개인의 전유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결국 이러해서 우리는 희생위기의 속성이자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공통적으로 작용하 고 있는 이 상호성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친부모살해와 근친상간만큼이나, 희생위기롤 묘사하는 것 이상으로 그것을 감추고 있는 또 다론 데마가 있는데, 그것은 페스트이다. 우리는 이미 희생위기의 〈상칭 s ym bole 〉으로서 다양한 전엽병에 관 하여 살펴본 바 있다. 소포클레스는 430 년의 그 유명한 페스트를 생각 했다 하더라도, 테베의 페스트 속에는 동명의 세균성 질병 이상의 다론 것이 들어 있다. 도시의 모든 활동 기능을 단철시키는 이 전염병은 폭 력이나 차이의 소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신탁이 이를 분명하게 . 해주는데,신탁은 이 재난울 전염성이 강한 〈암살자〉 때문이라고 전한다.

비극은, 전염병은 상호적 폭력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차례차례로 폭력에 빨려들어간 이 세 주역들은 그것을 극복하려 는 사람들을 언제나 신속하게 쓰러뜨리는 이 재앙의 확산에 휩쓸려 들어간다. 이 둘을 드러내놓고 동일시하고 r 있지는 않지만, 이 덱스트는 이둘의 유사성에 대해 우리의 주의를 끈다. 의디푸스와 크레온에게 화 해할 것울 간청하면서 합창대는 이렇게 의친다. 이제 당신 두 분에게서 나온 재앙이 어제의 재앙에 덧붙여지게 되면 분명 히 죽어갈 이 나라 때문에 우리 마음은 괴롭습니다. 비극 속에서나 비극 밖에서나 페스트는 희생위기, 다시 말해서 친부 살해와 근친상간과 똑같은 것을 상칭한다. 왜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테마가 필요한지, 그리고 이 두 데마는 진정으로 똑같은 역할을 하는 지를 살펴보자. 어떤 접에서 이 두 데마가 서로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이 차이가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롤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 아주 실제적인 희생위기의 다양한 양상들이 이 두 테마 속에 존재하지만 그 양상은 서로 다르게 분포되어 있다. 페스트에서는 단 하나의 양상이 두드러지는데 그것은 전면적인 전염이라는 재앙의 집단적인 성격으로서, 여기서는 폭력과 무차별이 빠져 있다. 반대로 친 부살해와 근친상간 속에는 아주 격양되고 농축된 폭력과 무차별이 존 재하지만 그것은 단 한 개인에게만 존재한다 . 이번에는 집단적인 차원 이 빠져 있다. 한번은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에서 다른 한번은 페스트에서 우리는 동일한, 죽 희생위기의 위장술을 두 번씩이나 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 은 똑같은 위장술이 아니다.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이 위기를 충분히 드 러내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페스트는 잘 보여주고 있다. 반대로 페스

트가 이같은 위기를 분명히 의미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을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이 보유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이 두 테마 를 하나로 합친다 면, 그래서 그 본질을 공동체의 〈 모든〉 구성원들에게 똑 같 이 나누어준 다면, 우리는 위기 그 자체를 다시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한 개인의 모든 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려면, 그것은 필히 다른 모든 사 람들의 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게 된다. 즉 책임 이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분담될 것이다. 위기가 사라지고 보편적 상호성이 제거된다면 그것은 아주 실제적인 이 위기의 양상들이 골고루 분배되지 않은 덕분일 것이다. 어떤 것도 진정으로 감추어지지 않으며 또한 아무것도 덧붙여지지 않는다. 모든 신화 조작은 테베 사람들로 하여금 의디푸스라는 한 개인에게로 집중 하게 하는 폭력적 무차별 현상으로 낙착된다. 이때 이 개인은 데베 사 람들을 괴롭히는 모든 해로운 것의 처리장이 되는 셈이다. 신화는 도처에 홀어져 있는 상호적 폭력을 단 한 개인의 끔찍한 범 죄로 대체시킨다. 의디푸스는 현대적 의미의 죄인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도시의 불행에 대해 책임은 있다. 그는 진짜 인간 〈 희생양 bouc emi - ss air e 〉의 역 할을 하고 있다 . 결말 부분에 가서 소포클레스는 의디푸스로 하여금 테베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납득시키기에 가장 적합한 말을 하게 한다. 그 도시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그 희생양만이 책임이 있으며 그래서 그 희생양만이 그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자 ! 나를 믿으시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시오. 나의 재앙은 내가 책임질 거요. 다른 사람은 아무도 나의 재앙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소. 사실 의디푸스는 다른 어느 누구도 책임질 수 없을 정도로 혼자만 책임이 있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페스트라는 개념은 이 결핍에서 나온 다. 희생위기에서 모든 폭력을 제거시켰을 때, 거기에 남는 것이 페스

트이댜 페스트라는 말이 벌써 우리들을 현대 세균의학의 분위기 속으 로 이끌고 간다. 환자들만 있을 뿐이다. 물론 의디푸스를 제의하고는 어느 누구도 변명할 것이 없다. 도시를 짓누르는 책임감으로부터 도시 전체를 구출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희생위기로부터 폭력을 제거하여 희생위기를 페스트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 폭력을 의디푸스에게로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단 한 사람의 개인에게로 전이시키는 데 성공해야 한다. 비극의 언쟁 속에서 이 주역들은 모두 이 전이룰 실행하려 애쓴다. 이미 보았듯이 라이오 스의 살해범을 찾는 수사는 바로 희생위기의 원인에 대한 수사이기도 하다. 특정한 한 개인에게 재난의 책임을 돌리는 것, 죽 전형적인 신 화적 질문인 〈 누가 먼저 시작했는가?〉에 답하는 것이 언제나 문제인 것이다. 의디푸스는 티레시아스와 크레온에게 이 비난을 돌리는 데 실 패하지만, 크레온과 티레시아스는 의디푸스에게 비난을 돌리는 데 성 공한다. 이 수사는 또한 희생양을 찾는 추적이다. 그런데 이 추적은 결국 그것을 처음 시작했던 사람에게 불리하게 되어 되돌아온다. 세 주역들 사이룰 왔다갔다 하던 결정적인 비난은 결국 그들 중의 하나에 고정된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고정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 니 전혀 고정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고정시키는 그 신 비한 메커니즘은 과연 무엇일까? 장차 〈전실된〉 것으로 여겨지게 될 비난은 이에 항의하는 소리가 전혀 없다는 점 말고는 장차 〈거짓된〉 것으로 여겨지게 될 비난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사건들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이 요구되는데, 이 해석이 논쟁적 성격울 상실하고 나면 신화의 진실, 신 화 그 자체가 된다. 신화의 정착은 만장일치의 현상이라고 규정해야 한다. 대칭적인 둘, 셋 또는 수많은 상반된 비난들이 만나는 바로 그 곳에서, 단 하나의 비난만이 득세하고 주위의 모든 것은 침묵하게 된 다. 이리해서 각 개인끼리의 적대관계가 일인에 대항하는 만인의 단합 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 기적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희생위기에 의해서 완전히 해체 된 공동체의 단합이 어떻게 갑작스럽게 회복될 수 있단 말인가? 위 기가 정점에 달했을때는 상황들도 이 갑작스러운 전도에는 아주 불리 한 것처럼 보인다. 무슨 일에 대해서든 서로 뜻이 맞는 두 사람을 발 견하기란 불가능하다. 사실 모두 다 자기의 원수 형제에게 집단의 짐을 씌우려 애쓴다. 완전히 흥분한 전 공동체 안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이 지배하여, 이 모든 갈등과 증오의 어떠한 길잡이도 관계를 맺 어주고 있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이 상실된 것처럼 보이는, 즉 무한히 다양한 상반되는 의미들 속에서 넌센스가 판을 치는 바로 그 순간 의의로 해결책은 아주 가까 이에 있다. 폭력의 만장일치 속에서 도시 전체는 단 한번의 폭발로 뒤 흔들리게 되는데, 바로 이 만장일치가 도시를 해방시키게 된다. 이 신비로운 만장일치는 어디에서 오는 걷까? 희생위기 속에서 적 수들은 엄청난 차이에 의해서 서로 단절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차이들이 조금씩 소멸된다. 그래서 어디서나 동일한 욕 망, 동일한 증오, 동일한 전략, 언제나 완벽한 일치상태에 있으면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믿는 동일한 환상이 존재한다. 위기가 심해질수 록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모두 폭력의 쌍동이가 된다. 우리는 앞으로 이둘을 서로서로의 〈짝패 <:l ouble 〉라고 부르기로 하자 . 낭만주의 문학, 원시종교의 애니미즘 이론, 그리고 현대의 정신의학 속에서 〈짝패〉라는 이 말은 언제나 본질적으로 상상적이고 비현실적인 현상을 지칭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짝패〉의 관계가 앞으로 문제가 될 환각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완 벽하게 표현하고 있는 비극의 대칭관계가 그러하듯이 상상적인 것은 전혀 들어있지 않다. 폭력이 인간을 정말로 획일화시키고 모두가 자기 적수의 짝패나 〈쌍둥이〉가 되어 모든 짝패가 똑같게 된다면 누구나 언제든지 모든 다른 사람들의 짝패, 죽 타인들의 매력과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참재적 희생물들, 모두가 추방하려 하는 모 든 원수 형제들, 다시 말해서 공동체 내부의 모든 사람들을 단 하나의 희생물로 대체할 수 있게 된다. 서로에 대한 서로의 의구심이 단 한 사람을 부정하는 모두의 확신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필 요치 않다. 가장 사소한 징후나 가장 하찮은 추측도 엄청난 속도로 사 람들 사이로 전파되어서는 거의 순식간에 부인할 수 없는 증거로 변 하게 될 것이다. 거의 즉각적인 〈모방〉의 영향으로 만인이 모두 다른 사람들의 확신을 자기 것이라고 결론짓기 때문에 이 확신은 눈덩이처 럼 불어난다. 모든 사람들의 확고한 이 믿음은 내부~ 대항 하는 어쩔 수 없는 만장일치라는 확인절차만을 필요로 할 뿐이다. 증오를 더 증폭시키면서 또한 이 증오들을 서로 완전히 교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차이소멸과 짝패의 일반화가 폭력적 만장일치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질서가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무질서가 국 . 도에 달해야 하고 신화가 재구성되기 위해서는 우선 완전히 해체되어 야 하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개별적인 갈등들과 수많은 쌍의 원수 형제들이 존재하던 바로 그곳에 이제는 또다시 하나의 공동체, 죽 구 성원들 중의 단 한 사람에 대한 증오로 완전히 하나가 되는 공동체가 존재하게 된다. 수많은 개인들에게 분산되어 있던 모든 원한들과 모든 증오들은 이제부터는 단 한 사람의 개인, 즉 〈희생물vi c ti me emi ss ai re> 울 향하여 수렴될 것이다. 이제 우리 가설의 대체적인 방향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폭력에 사로 잡혀 있던, 혹은 불가항력적인 어떤 재앙에 시달리던 공동체 전체는 이른바 〈희생양〉을 찾아내는 데 무조건 기꺼이 달려든다. 참을 수 없는 폭력을 당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즉각적이고 효력이 강한 치유책을 찾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그들 불행이 쉽게 제거할 수 있는 단 한 여사기람서에 게우서리 는나 오당는장 것사형이(라私刑고) ,믿 고유 태싶인어 한박다해•, 〈인민재판j us tic e ex pe

dit ive > 등과 같이 위기에 처한 공동체 안에서 충동적으로 미쳐 날뛰는 집단 폭력을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집단 폭력은 종종 의디푸스와 같이 천부살해, 근친상간, 영아살해 등의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대한 비난함 으로써 그 집단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 비교의 유효성에는 물론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우리의 무지를 밝혀주었다. 이것은 겉으로는 서로 무관한 듯이 보이는 바극 덱스트들의 감춰진 유사성을 밝혀준다. 우리는 소포클레스가 『의디푸 스 대왕』을 쓸 때 이런 사실을 얼마만큼 짐작하고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앞에서 인용한 텍스트들은 우리 주장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 기도 한다. 그러나 비극의 영감은 신화적 데마들의 진정한 기원에 관한 의혹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 예로서 우리는 『의디푸스 대 왕 』 이 아닌 다론 비극과 소포클레스가 아닌 다른 시인, 특히 유리피데 스를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앙드로마크 Androma que 는 피루스 P y rrhus 의 정부이고 에르미온느 He­ rm i one 는 그의 법적 아내이다. 진짜 원수 자매인 이 두 여인은 비극적 갈등을 겪고 있다. 모욕받은 이 아내는 울분이 점점 커져가자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 티레시아스가 의디푸스에게 말했던 것과 똑같이 이 경쟁 자에 대해서도 〈천부살해와 근친상간〉이라는 비난의 말을 퍼붓는다. 이 불쌍한 여인이여 ! 어찌 감히 그럴 수 있었단 말인가? 남편을 죽인 자의 아들(헥토르 Hec t or 를 죽인 아킬레스의 아들 피루스)과 함께 잠을 자 그 살인자의 아이를 갖다니 . 하긴 야만족이 모두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지. 거기 서는 아버지는 딸과, 아둘은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오빠와 함께 자고, 가장 가까운 자들끼리 서로를 죽이지만 그걸 금하는 법은 없지. 여인이여, 제발 우 리들에게 그러한 풍습을 가져오지 말아라 . 〈두영〉은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 이 이방의 여인은 여기서 도시를 위협하는 모든 희생위기를 혼자 구현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 여자가

능히 그럴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는 이 죄들은 신화 테마들 , 그러므로 그리스 바극 주제들의 진짜 목록이다. 〈 우리들에게 그러한 풍습을 가 져오지 말아라 〉 라는 이 마지막 문장은 벌써 앙드로마크에 대한 에르 미온느의 증오가 유발할지도 모르는 집단적 테러를 암시한다. 여기서 희미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 바로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유리피데스가 이 비극을 쓰면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으며 자 기 작품의 테마와 여기서 암시되고 있는 집단 메커니즘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았으며, 그 실체를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또 그렇다고 그것을 없애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부인하고만 있는, 어떤 위기를 은연중에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우리는 집단 폭력의 메커니즘들을 잘 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우 리는 단지 의디푸스 신화와 같은 신화의 생성을 가능케 하는 집단 원 동이력제의는 〈쇠폭락 력한적 모만습장과일 치희 미un한an im그 it 립e 자 v i o만le을n t e 〉알가고 원 있시을종 교따의름 이근다본.적 그 러현나상 으로 나타날 것이다. 폭력적 만장일치가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곳 에서는 항상 이 만장일치가 자신이 만들어낸 신화 형태들의 배후로 거의 완벽하게 사라진다. 우리는 신화와 제의에서 부수적이고 쇠락한 별로 신통치도 않은 현상들만 보게 되는 것이다. 집단적 폭력과 그리고 특히 단 하나의 희생양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단합은 사회 양상에 있어 그 연구가 사회학에 그다지 별 기여도 할 것 갇지 않은 다소 병적인 탈선일 뿐이라고 우리는 쉽게 생각한다. 우리 들의 합리주의적인 순진성_이에 대해서는 할말이 많을 것이다一 -은 일시적이거나 제한적이지 않은 다른 효력, 죽 적어도 앞의 희생 제의에서 우리가 이미 인정했던 효력과 유사한 〈순화적〉 효력을 집단 적 폭력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인정치 않는다. 외디푸스 신화가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어 왔다는 사실, 세월이 지 나도 소멸되지 않는 그 테마들의 특성, 현대문화도 계속해서 그것을

거의 종교적인 경의감으로 감싸고 있다는 사실, 이 모든 사실들은 이미 집단적 폭력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상호적 폭력의 메커니즘은 , 공동체가 그곳으로 한번 빠져 들어가기 만 하면, 거기에서 빠져 나울 수 없는 일종의 악순환으로 묘사될 수 있다. 이 순환은 복수와 보복이라는 용어로 규정될 수 있으며 거기에다 다양한 심리학적인 묘사들을 더 보탤 수도 있다. 공동체의 한복판에 축적된 증오와 불신이라는 자본금이 있는 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거기 서 필요한 것을 꺼내어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있을지 h 도 모르는 이웃의 공격에 대비하면서 상대방의 이러한 준비를 그들이 공격성향아 있다는 증거로 해석한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폭 력에는 모방의 특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모방은 하도 강 렬한 것이기에 공동체 안에 일단 자리잡은 폭력은 스스로 사그라들지 않는다. 이 악순환을 피하려면 잘 참아온 위험을 미래를 건 폭력으로 청산 하려는 모험을 그만두어야 하며, 끊임없이 증가하면서 새로운 복제품 울 만들어내는 폭력의 모든 모델을 없애야 할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그들 중의 단 한 사람이 모든 폭력 〈 모방 〉 에 책임이 있다고 확신하고, 그 한 사람을 모든 사람을 오염시키는 〈 오점 〉 으로 보고, 또한 무엇보다도 그들이 이 믿음에 대해서 전정으로 만장일치한 다면 이 믿음은 정당화될 것이다 ` 왜냐하면 이제 공동체 안의 아무 곳 에도 따르거나 거부해야 할, 다시 말해서 불가피하게 그것을 모방하면 서 증대시켜야 할 폭력의 모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 이다. 희생물을 파괴함으로써 사람들은 그들의 악을 몰아낸다고 믿을 것이며 또 효과적으로 몰아낼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들에게는 이 제 그들을 유혹하는 폭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희생양 법칙의 효력을 인정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희생물이 갖 고 있다고 여겨지고 있는 〈악〉이나 〈죄악들〉을 우리가 규정한 의미의

〈 폭력 〉 으로 대체해 놓고 보면, 아주 어마어마한 모든 인간사가 들어 있는 환상과 신비화가 항상 우리의 문제란 것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 을 것이다. 아는 것은 언제나 좋은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폭력의 진실을 감추고 있는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해 거의 아무런 중요성도 부여하고 있지 않다. 이 낙관론은 아주 큰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집단 전이의 결과가 문자 그대로 어마어마한 것은, 이 전이가 사람들로 하 여금 폭력에 대해 잘 알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희생위기가 지속되는 동안은 의디푸스와 티레시아스가 보여주었듯 이 폭력에 관한 지식은 계속 불어난다. 그러나 이 지식은 평화를 가져 다주기는커녕 언제나 다른 지식 위에 투영되어 다론 지식에서 기인하 는 위협으로 인식되면서 갈등을 북돋우고 더 악화시킬 뿐이다. 집단적 폭력으로 인해 해롭고 전염성이 강한 이 지식, 그 자체도 폭력에 불과 한 이 명석함은 가장 완전한 무지로 변하게 된다. 이 무치는 단번에 과거의 기억들을 지워버리는데, 바로 이 때문에 신화와 제의 속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희생위기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앞의 두 장에서 우리가 여러 번 확인했던 것이지만, 의디푸스 신화를 통해 우 리는 다시 한번 더 그것을 입증할 수 있다. 인간 폭력은 언제나 인간 의적의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그것은 성스러운 것 속에 용해되고, 죽음, 질병, 자연현상 등과 같이 실질적으로 의부에서 인간을 억누르는 힘과 뒤섞이게 된다. 폭력에 뛰어들지 않고서는 폭력의 본모습을 볼 수가 없는 법이다. 사람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언제나 그것을 잘못 알아왔는데, 바로 이 잘못 아는 것 덕택에 진짜 인간사회의 존립이 가능했던 것이다. 앞에서 해체하여 설명한 의디푸스 신화는 희생양 메커니즘과 같은 구조의 메커니즘에 근거한다. 이제는 이 메커니즘이 의디푸스 신화 이 의의 다른 신화들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자. 이 메커니즘은 폭력을 단 한 사람의 〈죄인〉에게 통째로 전가시킴으로써 현재와 미래

까지 물들게 할지도 모르는 자신의 과거 폭력의 진실을 몰아내는 유 일한 방법이라고, 우리는 마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결국 테베 사람들의 치유책은, 신화를 채택하여 이 신화를 이제는 지나간 위기에 대한 유일하고도 이론의 여지없는 설명, 즉 혁신된 문 화질서의 헌장으로 삼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 사회는 단지 페스트 때문에만 병들었다고 확신하게 하는 것이다. 이 조작은 그 희생물이 전적인 책임이 있다는 확신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 조작에 의해 단 숨에 회복된 평화는 이 유일한 죄인의 정체를 더욱 견고하게 한다. 그 래서 이 위기는 이 죄인이 의부로부터 갖고 들어온 불가사의한 악이며, 그리고 이 씨앗을 갖고 들어온 자를 추방시키는 것만이 그 악의 전파 를 막을 수 있다는 식의 해석을 언제까지나 믿게 된다. 구원의 메커니즘은 실제적이다. 그리고 좀더 세밀히 관찰해 보면 이 것은 감추어져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상 이것 은 끊임없이 문제가 되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 속에서 그리고 그 것이 드러내는 테마들 속에서 그러하다. 이 메커니즘은 물론 크레온이 가지고 돌아온 신탁과 같은 것이다. 도시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도시 전체를 오염시키는 불순한 존재를 색출하여 추방해야 한다. 달리 말해 서 모든 사람이 그가 유일한 죄인이라는 데에 뜻이 일치해야 한다. 샤 머니즘의 샤먼들이 환자의 몸에서 뽑아내서는 만병의 근원이라고 주 장하는 어떤 물체의 역할을 사회에서는 이 희생물이 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뒤에서 우리는, 두 경우 모두 똑같은 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 게 될 것이다 .2) 그러나 비교대상인 이 둘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폭력 적 만장일치의 메커니즘은 샤먼들의 기술을 본뜬 것이 아니며 전혀 비유적이지도 않다• 그 반면에 샤먼둘의 기술은 부분적으로는 신화적 으로 개조되고 해석된 만장일치의 메커니즘을 본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 것 같다. 2) 제 9 장 참조.

친부살해와 근찬상간은 공동체가 희생위기를 제거하는 데에 필요로 하는 것울 아주 정확하게 제공한다. 신화는 여기서 문화 속에는 새로운 진실을 만들어내는 아주 실질적이고 영속적인 어떤 조작이 있다는 것 울 보여주고 있다. 이 조작은 희생위기의 여건에 대한 의식적인 저속한 위장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폭력은 만장일치적이기 때문에 질서와 평화를 회복시킨다. 그러므로 폭력에서 나온 이 의미들이 막강한 힘을 획득한다. 만장일치의 해결책은 희생위기와 함께 이 의미들의 배후로 사라진다. 이것은 신화를 구조화하는 원동력인데 그 구조가 그대로 있 는 한 드러나지 않는다. 〈저주〉을 구조화하는 힘이 없다면 〈데마들〉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 테마들 중의 하나에 불과한 의디푸스가 〈저주〉할 진짜 대상아 아니다. 모든 접촉과 모든 시선을 피해야만 그 효력을 유지하는 만장일치야말로 진짜 〈저주〉의 대상이다. 이 〈저주〉 는 오늘날에도 계속 행해지고 있는데, 망각이나 혹은 폭력에 의한 무 차별의 형태로 아니면 폭력이 드러나는 무의미라는 형태로 행해지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신화의 구조는 혼들리지 않고 있다. 상상적인 것 속에 전체 구조를 완전히 투영시킨다고 해서, 이 구조가 뒤흔들리는 것이 아니며 그 어느 때보다 더 잘 분석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의 어떠 한 해석도,그 핵심에 도달할 수 없었다. 가장 독창적이며 또한 그만큼 많이 틀린 프로이트 Freud 의 해석도, 친부살해와 근찬상간의 욕망처럼 잘 드러나 있는 이런 테마들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폭력안 희생양 메 커니즘이 감추고 있는 전반적인 파괴의 위험처럼 신화에서는 진정으로 〈억압되어 있는 것 re fo ule 〉을 보지는 못했다. 지금 우리의 가정이, 신화 텍스트 속에는 초석적 폭력을 상기시키는 데에 적합한 비난이나 추방의 〈데마〉가 꼭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어떤 책에서는 이 데마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세운 이 가정이 위태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집 단적 폭력의 흔적들은 제거될 수 있으며 또 제거되기 마련이다. 그렇

다고 해서 그 효과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효과는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더 생생하다. 저주가 이 모든 효과들을 낳기 위해서는 스스로 사라져서 저주가 잊혀지도록 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우리가 비극의 영감이 신화의 부분적 해체를 가져온다는 것을 이해 하지 못했던 것은, 저주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 비극이 종교적 저주를 둘추어내는 것을 고대 모방의 칭후로 볼 게 아니라 오히려 어떤 〈 고고학 〉 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의디푸스 대왕』의 저주는 아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일 , 소포클레스의 신화 비평의 핵심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시인은 주인공 의 입을 동해 다음과 같이 아주 시사적인 말을 하고 있다. 신들의 이름으로 간청하나니, 어서 나를 멀리 감추어 주시오. 나를 죽이시 든지, 아니면 절대로 못 보게 바다에다 내던져 주시오 . 신화와 그 기원에 관하여 이 시인이 도달한 이해의 수준은 , 여기서는 이 신화 해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단지 부차적인 문제일 뿐 이다. 이 해석은 비극을 접근방법으로 이용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전 적으로 상호적 폭력 속에서 데마들을 해체해서는 만장일치적인 폭력, 다시 말해서 희생양 메커니즘에 따라서 그것들을 재구성하는 그의 타 고난 재능에 근거하고 있다. 이 메커니즘은 어떤 다른 데마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이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테마 비평적인 관점이나 혹은 구조주의적 인 해석으로는 이 메커니즘에 도달할 수 없다. * 지금까지 우리는 의디푸스를 부끄러운 오점이나 모든 수치로운 것의 집결체로만 보았다. 집단 폭력 앞의 의디푸스인 『의디푸스 대왕』의 주

인공이 사실 본질적으로 그러하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면 폭력의 과 정에는 또 다른 의디푸스가 나타나고 있다. 소포클레스의 의디푸스에 관한 두번째 비극인 『콜로노스의 의디푸스』에서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외디푸스의 결정판이다. 처음 몇 장에서는 언제나 본질적으로 해로운 의디푸스가 나타나고 있다. 콜로노스인들은 그 도시의 영내에서 천부살해를 발견하고서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친다. 그러나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난다. 외디푸스는 여전히 위험하고 두려운 존재이긴 하지 만 그는 또한 그만큼 매우 소중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그의 시체는 콜로노스와 테베가 심하게 다투는 일종의 부적이 된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처음의 의디푸스는 위기의 해로운 면들 과만 결부되어 있었으므로 그에게는 어떠한 긍정적 미덕도 없었다. 그 의 추방이 〈좋 은 〉 것이었던 것은, 환자의 부패한 사지 절단이 좋은 것 처럼 순전히 부정적인 의미에서 그러했다. 그 반면에 『콜로노스의 의 디푸스』에서는 관점이 확대된다. 그 도시에 불화를 가져다주었던 그 희생양이 떠나면서 질서와 평화가 회복된다. 앞의 모든 폭력들이 폭력 울 증가시키는 역할만을 수행한 것에 반해 희생양에 대한 폭력은 신 비롭게도 모든 폭력을 멈추게 했다. 종교적 사고는 이 비상한 차이의 원인에 대해 당연히 의문을 품게 되는데, 이 의문은 아주 의미 있는 의문이다. 이것은 공동체의 안녕과 심지어는 그 존폐여부에까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의문이다. 모든 인간 사고가 그러한 상징적인 사고는 폭력적 만장일치의 메커니즘을 찾아내는 데 이르지 못한다. 그 래서 이러한 사고는 불가피하게 희생물에게로 관심을 돌려서, 이 희생 물이 자신의 파괴나 추방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문을 품 게 된다. 이리하여 이 사고는 폭력의 뚜렷한 특칭과 예를 들어 만장일 치를 불러일으키는 살해 유형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이 희생양의 신분 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이로운 결과를 회생양의 덕택으로 돌리는 것은, 이 희생양에게 가하는 폭력이 질서와 평화를 회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을수록 더욱더 논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 절정에 도달한 상호적 폭력이 단숨에 〈평화적인 만장일치 〉 로 변모 되는 위기의 절정에는 폭력의 양면이 나란히 놓여 있는 것 같다. 죽 양국은 서로 통한다. 이 변모는 희생양을 그 중심으로 삼는다. 따라서 희생양은 자신 속에 폭력의 가장 해로운 양상과 가장 이로운 양상을 함께 갖고 있는 것차럼 보인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 희생양을 그것 과는 완전히 무관한 것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그들 자신들의 폭력이지 만 확실하게 그것의 중요한 법칙은 알 수 없는 그리고 자신은 전혀 무관하다고 믿고 싶어하는 그런 폭력의 화신으로 보는 것이 비논리적 인 것이 아니다 .3 )

3) 우리는 좀더 뒤에서, 이 신성화 현상은 원시종교 경험 속에 있는 환각요소들에 의해 조장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그러나 이 원칙들이 모든 종교제도의 주요원칙을 이해하는 데 꼭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 우리는 지금 벌써 이 제도의 논리에 도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희생물이 상호적이며 파괴적인 폭력으로부터 〈 초석적(礎 石 的) fon dat- rice > 만장일치에로의 이행을 〈상칭한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 이 이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 희생물이며, 희생물 과 이 이행은 사실 한몸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사고는 당연 히 희생물을, 정확히 말해서 마지막 희생물을, 즉 폭력을 당하지만 새 로운 보복을 유발시키지 않는 희생물을, 뒤이어 평화 를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폭력을 씨뿌리는 초자연적인 존재, 즉 인간들을 병들게 만들었 다가는 곧이어 치료해 주는 두렵고도 신비로운 구원자로 보게 된다. 현대적 사고로 생각해도, 이 주인공은 해로운 역할을 그만두어야만 이로운 존재가 될 수 있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이유를 깊 이 이해하지도 않은 채, 모든 사건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만 기록하는 종교적 경험론과는 사정이 다르다. 의디푸스는 처음에는 해롭지만 나 중에는 이로운 존재가 된다. 그를 〈사면시킬〉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 말의 현대적이며 교화적인 의미에 있어서 그를 벌한 적이 결코 없

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시대에 있어서 모든 교화적인 관점을 버렸 다고 공식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 비책을 행하고 있는 그 멋둘 어전 〈 복권 rehab i l it a ti on 〉 을 행할 필요도 없다 . 종교적 사고는 너무 겸 손하고 너무 겁에 질려 있기 때문에 그처럼 높은 곳의 것을 판단할 수가 없다. 종교적 사고는 스스로를 시대에 뒤진 것이라고 자인한다. 가장 해로운 것과 가장 이로운 것의 신비로운 결합은, 그것을 부정하 거나 무시하는 것이 문제가 안되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공동체 와 분명히 관련은 있지만 인간의 판단력과 이해력을 완전히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추방 이후의 이로운 의디푸스는 이전의 해로운 의디푸 스보다 우위에 서지만, 그렇다고 해로운 의디푸스를 없던 것으로 만들 지는 않는다. 폭력의 시작을 야기시킨 것이 바로 〈죄인〉의 추방인데, 어떻게 그를 없던 것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이 결과는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을 의디푸스에게 만장일치로 전가시켰음을 입증하고 있다. 의 디푸스가 구원자인 것은 친부살해와 근찬상간을 범한 아들이라는 그의 자격 때문에 그러하다. 의디푸스에 관한 소포클레스의 두 비극으로부터 전문가들에게는 친 숙한 위반과 구원의 도식이 도출된다. 수많은 신화, 민담, 요정이야기, 전설 그리고 문학작품들 속에서도 , 이 도식은 수없이 발견된다. 인간둘 속에 머무는 동안에는 폭력과 무질서의 선동자이던 주인공이 제거되 자마자一―그것도 언제나 폭력에 의해서-그는 일종의 속죄자로 나타난다. 계속 어떤 계율을 위반하던 주인공이 무엇보다도 괴물파괴자로 나 타나는 경우가 많다. 스핑크스 삽화에서의 의디푸스의 경우가 바로 그 러하다. 괴물은 테베의 페스트와 거의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괴물은 공동체를 공포에 떨게 하면서 제물들을 정기적인 공물로 바칠 것을 요구한다. 즉각적으로 우리는 의디푸스 신화의 중요한 이 삽화에 대한 이러한 설명이 모든 텍스트에 똑같이 적용될 수는 없는지, 달리 말해서 이것은

혹시 항상 단 하나의 똑같은 조작, 죽 희생물 조작의 뚜렷한 흔적들이 아닌지 따져보고 싶어진다. 사실 이 모든 신화 주인공들은 공동체 전 체에 영향을 미치는 폭력, 죽 그의 죽음이나 그의 승리가 질서와 평화 로 변화시킬 해롭고 전염성이 강한 폭력을 자기에게로 유인하고 있다. 다른 테마들도 희생위기와 그것의 폭력적 해결을 감추고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단 하나의 희생물을 바쳐서 신이나 악마로부터 얻어낸 집단 구원의 테마나, 잔인한 괴물이나 악마에게 먹이로 던져지거나, 자 신의 〈복수〉나 반대로 자신에 대한 〈재판〉 요청에 몸을 내맡긴 무고한 사람 혹은 죄인의 데마가 그것이다. 희생양 메커니즘은 의디푸스 신화의 중요한 테마들울 설명해 준다 . 이것은 구조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기원의 측면에 대해서도 효과적 이다. 지금까지의 분석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런 사실들이다. 우리는 또한 이 분석은 수많은 신화에까지 쉽게 적용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우리는 이 메커니즘이 바로 모든 신화를 구조화 하는 원동력으로 밝혀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성스러움과 그것을 특칭짓는 초월성이 희생물 〈추방〉이라는 폭력적 만장일치 속에서 만들어지거나 복원되는 사회적 통일성에서 나오는 것은 또 다른 더욱 본질적인 어떤 . 것이 있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신화 뿐만 아니라 종교와 제의도 ·모두 문제가 된다. 지금으로서는 그 중 어떤 요소들은 거의 빠져 있을지도 모르는 단 순한 가정만을 세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뒤에 가서 우리는 이 가정을 명확히 밝혀내고 동시에 검증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으로서 는 추측밖에 할 수 없는 이 가정의 해명 능력을 부각시킬 뿐이다. 때가 되면 우리는 현재로서는 희미한 윤곽만 나타나 있는 그 중요한 역할을 이 가정이 수행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우선은 이 가정의 핵 심에 대해서 그리고 현대의 학문의 맥락에서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는 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이 텍스트들은 현재 우리의 해석으로 거의 모든 부분들이 해

명되고 있다. 헤라클리트가 비극의 철학자라면 그는 그 나름대로의 신 화의 철학자가 아닐 수 없으며 그 또한 우리들이 밝히려고 애쓰는 구 조적인 원동력을 찾아 나섰울 것이다. 너무 지나친 말인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불두명하여 해석하기 어렵던 헤라클리트의 단장(斷章)들의 의미가 갑자기 명백히 드러나는 것을 어떻게 못 알아볼 수 있단 말인 가? 다음 단장 60 번에 요약되어 있는 것은 결국 신화의 발생, 폭력에 의한 신과 차이의 발생, 요컨대 이 장 전체의 내용이 아닐까? 전투는 모든 것의 아버지이며 왕이다. 이것은 어떤 자들은 신처럼, 또 어 떤 자들은 사람처럼 만든다. 어떤 자들은 노예로 또 어떤 자들은 자유인으로 만든다 .

제 4 장 신화와 제의의 기원 원시종교에 대한 연구에는 오래전부터 두 가지 학설이 있어 왔다. 첫번째 학설은 제의적인 것을 신화에 귀결시키는 것으로서 신화 속에 서 실제의 사건이나 제의적 관습을 가능케 한 사고체계를 찾는다. 두 번째 것은 이와 반대이다. 이것은 신화와 제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문 화적 형태도 심지어는 그리스의 비극까지도 제의적인 것으로 귀결시 키는 것이다. 위베르와 모스는 두번째 학파에 속하는데, 그들은 희생을 〈 신성(神性 )d i v i n it e 〉의 기원으로 본다. 관습에 따라서 혹은 다른 이유로 하나의 똑같은 회생물이 주기적으로 나 타나는 이런 의식의 반복은 일종의 지속적 특성을 만들어냈다. 희생은 부차 적인 결과를 갖고 있는데, 신성의 창조는 그에 앞선 희생들의 결과이다 .I) 여기서 희생은 모든 종교적인 것의 기원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희생 그 자체의 기원에 대해 위베르와 모스에게 물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른 현상을 이용한 순간부터, 사 1) Marcel Mauss, op. cit. , p. 288

람들은 대개 그 현상은 설명 안해도 되는 것인 양 믿고 있다. 이때의 자명함은 말로 표현되지 않은 일종의 교리가 된다 . 자명한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위베르와 모스는 희생의 기원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을 뿐만 아 니라 그것의 〈 속성 〉 이나 〈 기능 〉 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 두 단어가 그들 책의 제목에 나타나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희생의 목표가 〈신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라는 생각을 인정할 수 없 다는 것을 확인했다. 만약 신들이 희생의 기나긴 되풀이 끝에 가서야 생성되는 것아라면 희생을 반복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그리고 〈교집할 commun iq uer 〉 신이 아직 없었을 때 제사장은 과연 무 엇을 생각했을까? 누구를 위하여, 그리고 왜 , 그들은 텅 빈 하늘 앞 에서 희생제의를 되풀이했단 말인가? 인류문화의 모든 것을 〈 신들 〉 의 탓으로 돌리고 싶은 유혹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 이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희생은 인간의 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의 말로써 설명되 어야만 한다. 위베르와 모스의 업적이 기원과 기능의 측면에서는 부족하지만 희생 조작에 관한 체계적인 묘사는 여전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희생제도는 아직 완전히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체계적이라는 특성을 이 분 석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는 〈선험적인〉 관념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여러 문화권 속에서 이 회생제의는 놀랄 만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의 차이가 아무리 크더라도 이 제의의 고유한 특성은 결코 사라 지지 않는다. 그래서 위베르와 모스는 희생을 모든 문화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단지 일종의 기술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이 두 학자의 말대로라면 사회 현실의 측면에서 이 기술 은 어떠한 실질적 대상도 어떠한 종류의 기능도 갖고 있지 않다. 이럼 에도 불구하고 이들 연구의 그 환상적인 통일성은 어디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 ? 〈확산주의자 d iffu s i on i s t e〉 ® 의 주장에 도움을 청 할 성 질의 ® 확산주의 dif fus io n i sm e : 문화는 어느 한 지접어]서 다른 곳으로 전파되어 간다고

간주했던 20 세기초 인류학의 한 일파 .

문제는 아니다. 이 주장은 위베르와 모스의 시대에 이미 가치가 떨어 졌 었다 . 그렇다고 그것이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지받울 만하지 는 못했기 때문이다. 이 이상한 구조적 통일성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더 이것을 놀랄 만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신기한 것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위베르와 모스의 설명을 존중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 이전 학자들의 호기심에 대해서도 애석하게 여긴다 . 물론 연구형식을 체계화하기 위 해서 다른 문제들을 잠시 제쳐놓는 것이 필요하다. 이 두 사람이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조사범위의 잠정적인 축소는 그때까지 뒤섞여 있 었던 문제와 영역들을 구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군대의 활기를 불어놓기 위한 군사전략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탐구 에서도 , 긍정적인 관점에서 전략상 후퇴를 전개하는 것은 좋다. 그렇다 고 해서 후퇴를 전면적인 승리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모든 사 회과학에는 위베르와 모스에게서 보여지는 바로 이런 경향이 득세하고 있다. 제의적인 것을 신화에게 돌리거나 신화를 제의적인 것으로 돌리 는 것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사고가 그 안에 사로잡혀 버리는 어떤 원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사고는 그 원 둘레의 어느 한 점에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그 원을 벗어난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이 환상을 버렸는데 옳은 일이었다. 우리는, 해결책은 원 둘레가 아니 라 그 중심에 있다는 걷 확인했는데 그것 또한 잘한 일이었다. 중심에 도달할 수 없다거나 아니면 중심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전혀 옳지 않다. 과거의 실패에 근거한 이 비관적인 가정이 초과학적인 것처럼 보이 지만 사실은 철학적이다. 과거의 실패는 그것 이의예는 아무것도 증명 하지 않는다. 일시적인 답보상태의 연구에 대해서 세계관을 세울 필요 는 없는 것이다. 반(反)형아상학울 한다는 것은 계속 형이상학을 한다 는 것이다. 결국에 가면 희생뿐 아니라 일반적 종교의 기원, 본질 그

리고 기능에 관한 질문에 만족할 만한, 다시 말해서 과학적으로 응답 하게 될 새로운 가설이 끊임없이 생겨날 것이다.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순전히 〈 상칭적인 〉 축복의 끝에 가서 어떤 문 제들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과학은 철학적 야망의 퇴각진지나 현명 한 체념이 아니라 그것을 만족시키는 또 다른 방식이다. 가장 위대한 발견의 기원에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 유치한 것 〉 이라고 경멸하는 호기심과 이제는 〈고지식한 것〉이라고 비난받는 언어에 대한 신뢰가 존재한다. 스탕달이 풍자한 멋쟁이 부르조아둘 dand y s bour geo i s 이 즐겨 하던 일종의 〈닐 아드미라리 nil adm i rar i 〉 ® 가 대단한 재치로 여겨 질 때 그때가 바로 걱정해야 할 때이다. 프레이저 Frazer, 프 로이트 Freud, 로버 트슨 스미스 Robe rt son Smi th 일파들이 상대적인 실패를 했다고 해서 그들의 왕성한 지식욕이 시대에 뒤전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된다. 제 의의 실질적인 본질과 기원에 관해 곰곰이 따져보는 것이 아무런 의 미가 없다고 단정짓는 것은, 종교적 언어는 사어가 되어 분명 아주 체 계적이긴 하지만 의미는 하나도 없는 아브라카다브라 abracadabra 와 같 은 주문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단정짓는 것과 같다.

® 닐 아드미라리 패 admi rari : 아무것도 아닌 것에 경탄하는 것.

때때로 희생제의 같은 제도의 기이함과 그 제도의 실질적인 기원을 찾고 싶은 그 거역할 수 없는 욕망을 상기시키는 목소리도 있다. 『원 시 인 의 신 화와 관습 My the s et coutu m es des peu p les pri m itifs 』 에 서 과거 의 주요한 의문을 언급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아돌프 젠슨 Adolph e J ensen 의 목소리 가 바로 그러 한 목소리 이 다. 인간이 잔인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아주 엄청난 경험이 필요했을텐데,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 (……) 다른 것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본능만을 따르는 반동물적인 야만인들의 부도덕하고 경솔한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계의 궁극적인 본질을 이해하

여 그것을 연국적 형상화를 통해서 후 세에 전달하려고 애쓰는 등, 문화 형식 을 창조하는 의식적인 인간들에게 같은 인간을 죽일 정도로 충격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 신화적 사고는 언제나 〈처음으로〉 일 어났던 것, 죽 창조행위로 되돌아가서 어떤 사진에 대해 가장 생생한 증거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이 창조행위라고 정당하게 평가하고 있다. (……) 살해가 제의에서 아주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세상 설립의 순간 에도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음에 틀림없다 .2)

2) Adolph e Jen sen, My the s et coutu m es des peu p les primi tifs, Pa ris, 1954, pp. 206— 207

이제는 〈 처음에 〉 정말로 결정적인 어떤 것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 닌가 하고 다시 생각해 볼 때인 것 같다. 현대의 정확한 방법론에 의해 새로워진 툴 속에서 전통적인 문제를 다시 제기해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연구 원칙을 일단 인정하고 나면, 모든 가정이 만족시켜야 하는 〈선 험적인 〉 조건들에 대해 따져보아야 한다• 실제 기원이 있어 신화는 신화대로 끊임없이 그 기원을 회상하고 또 제의는 제의대로 끊임없이 그 기원을 기념한다면, 결국 잊혀질 터이므로 지울 수 없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매우 강력한 인상을 인간에게 심어준 어떤 사 전과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인상은 종교 그리고 아마도 모든 문화적 형식의 중개를 통해서 영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어떤 무의식적인 형태를 굳이 가정할 필요는 없다. 죽음으로 이루어져 있는 많은 제의를 보더라도, 원초적 사건은 당연 히 살인일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토뎀과 터부 To te m et Tabou 』의 프 로이트 같은 사람은 이러한 필연성을 분명히 느꼈을 것이다. 놀랄 만한 희생의 동일성은 모든 사회에서 동일한 유형의 살인이 문제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고 이 살인이 단 한번의 완결로 끝맺었다거나 일종의 선사시대에 갇혀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이 그 사회의 출발이나 재

출발을 가리키는 사회에서는 예의이겠지만 비교적 이 사건은 아주 진 부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희생위기와 희생양 메커니즘 속에는 여기에 필요한 모든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유형의 사건이 있을 것이라 고 생각한다. 만약 그런 사건이 있었다면 과학이 발견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 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정말 이상한 과학의 태만을 고려 하지 않은 것이다. 모든 인간사회의 근원에 종교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근본적인 것이다. 모든 사회제도 중에서 과학이 그것의 실질적인 대상과 진정한 기능을 밝혀내지 못했던 유일 한 것이 바로 종교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적인 것의 대상은 희생양 메커니즘이며 그 기능은 이 메커니즘의 효과를 영속시키거나 새롭게 하는 것, 다시 말해 폭력을 공동체 밖에 유지시키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 처음에 우리는 희생의 정화 기능을 발견했다. 그리고 희생위기를 정 화 기능과 모든 문화적 차이의 소멸이라고 규정했었다. 만약 희생물에 대한 만장일치의 폭력이 정말 위기를 종결짓는다면, 이 폭력은 분명히 새로운 희생체계의 기원에 위치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희생물만이 구조 파괴 과정을 중단시킬 수 있다면, 이 희생물은 모든 구조화의 기 원에 속할 것이다. 이제는 문화질서의 본질적인 규칙들, 예를 들어 축 제, 근친상간 금기, 통과제의 등에서도 이 주장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를 살펴보자. 우리는 벌써 희생물에 대한 폭력은 분명히 근본적으로 초석적인 fon datr ice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타당한 이유를 가진 셈이 다. 이 희생물에 대한 폭력이 폭력의 악순환을 끝내지만 동시에 또 다 른 악순환, 죽 문화 전체의 악순환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희생제의의 악순환을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런 식이라면 초석적 폭력은 인간이 보존하고 있는 모든 소중한 것들의 실질적인 기원을 이루게 된다 . 다른 신화적 인물에 의해 한 신 화적 인물이 살해되는 것으로 끝나는 모든 기원신화가 은연중에 단언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 이 사건이야말로 문화 질서의 창립자로 여겨진다. 죽은 신성으로부터 제의뿐 아니라 결혼 규칙, 금기, 인간에게 인간성을 부여하는 모든 문화 형식들이 나온다. 신화적 인물들은 어떤 때는 인간들에게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 한 모든 것을 주려 하지만 또 어떤 때는 거부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 간은 필요한 것을 탈취하여 획득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항상 다론 신화 인물들로부터 떨어져 나온 한 신화 인물의 기이한 운명적인 모험이 일어나고 난 뒤에야 가능하다. 겉으로는 별것 아닌 것 같은 이 모험에 서 우리는 폭력적 해결의 어령풋한 암시를 볼 수 있다. 이 신화 인물은 대항하기 위해 집단을 벗어나 달아났다가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거나 또는 단지 상처입거나 구타당하는 것으로 그치기도 한다. 혹은 그 스 스로 자신을 때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하는데, 이때는 그가 맞을 때마다 이로운 일이 일어나 문화 질서의 조화 기능과 비슷한 풍요로운 번영을 낳는 신기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 산화 이야기는 때때로, 당연히 희생위기의 경쟁 관계를 상기시킬 스포츠나 전두의 일종의 경쟁이나 시합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데마들 의 배후에서 우리는 항상, 처음에는 상호적이던 폭력이 만장일치적인 것으로 변해 가는 변모의 흔적들을 읽을 수 있다. 인간의 모든 활동과 자연계도 공동체 안의 이 폭력의 변모에 종속되어 있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여러 관계들이 뒤흔둘리면서 사람들이 더 이상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할 수 없울 때 모든 생명력이 타격받게 된다. 농작, 사냥, 고기잡이의 결과와 그 수확의 질과 양까지도 영향을 받는다. 이리하여 초석적 폭력에 둘어 있는 이로운 것은 놀랍게도 인간 관계의 틀을 넘 어선다. 집단 살해가 모든 풍요로움의 원천으로 나타나, 생식원칙도 이 것의 덕택으로 돌려지며 인간에게 ‘ 유용한 모든 식용 작물들도 최초

희생물의 시체로부터 솟아난다. * 위베르와 모스도 우리의 〈혁명적인 revoluti on nair e > 과학으로 하여금 사회현실을 상기하게 하는 사실들을 매번 인용하고 있다. 사실 초석적 폭력의 존재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신화가 있는가 하면 그것의 존재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신화들도 있다. 거의 비슷한 이런 신화들이, 서구 인문주의가 〈조잡한〉 것이라고 항상 간주해 온 그러한 문화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저자는, 다음과 같이 그리스의 예를 인용하고 있다. 트레젠느 Trezene 에서는 이뿔리뜨 H ipp ol yt e 사원의 경내에 서 연례축제 를 통 하여 〈리토볼리아!it hobol i a 〉, 죽 폭동 속에서 돌에 맞아 죽었던 크레테 Crete 에서 온 전설상의 의국 여신인 다미아 Dam i a 와 옥세시아 Auxes i a 의 죽음을 기 념하고 있었다. 이 의국 여신들은 추수제에 자주 등장하는 이방인 나그네인 데, 이들을 돌로 쳐죽이는 것이 하나의 희생제의였다 .3 )

3) Marcel Mauss, op. ciL, p. 290.

의디푸스 신화 말고도, 위 예문에 의해 진정한 의미가 밝혀지는 〈 파 르마코스p harmakos 〉나 〈카타르마 ka t harma 〉와 같은 제의가 있다. 선견 지명이 있는 아데내 같은 도시는 이런 시기의 희생제의를 위하여 이 불쌍한 사람들을 여러 명 돈을 들여 보유하고 있었다. 필요한 경우, 죽 전염병이나 기근, 의세 침입, 내부 불안 등의 어떤 재해가 그 도시를 덮치거나 덮치려 할 때 언제나 집단의 의사대로 처분할 수 있는 파르 마코스가 있었다• 의디푸스 신화를 완전히 이해하면, 죽 희생양 메커니즘을 알게 되면 제사장들이 겨냥하는 목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희생양 메

커니즘을 통해서 해결되었던, 앞에 있었던 위기의 모델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재생산하고자 한다. 실제적이거나 상상적인 모든 위험들은 한 사회가 직면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위기인 희생위기에 동화된다. 제의는 공동체 내부에 질서를 회복시킨 최초의 자연발생적인 사형(私 刑)의 되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희생물과 그 주위에 대해서 일어난 상호적 폭력 속에서 상실되었던 일체감을 다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의디푸스와 칼은 희생물은 주위의 모든 것을 오염시키는 오점으로 간 주되고, 공동체의 평정을 되찾아주는 그의 죽음은 효과적으로 공동체 를 정화시킨다. 사람들이 파르마코스를 곳곳에 끌고다니면서 모든 불 순한 것을 그 한 사람에게 덮어씌워서는, 모두가 참여한 의식을 통해서 그를 죽이거나 추방하는 것은 모두 이런 이유에서이다. 우리의 주장이 정확하다면 의디푸스와 마찬가지로 파르마코스도 이 중적 의미룰 지니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는 비통하고 경멸할 만하며 비난받아 마땅한 인물로서 모든 형태의 조롱, 모욕 그리고 물론 폭력의 대상이 된다. 다론 한편으로 그는 거의 종교 적인 숭배의 대상이 되면서 일종의 신앙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이 이중성은 본래의 희생물이 제의적 희생물로 바뀐 변형을 반 영하고 있는데, 이 제의적 희생물은 해로운 폭력을 이로운 폭력, 평화 그리고 풍요로 변형시키기 위해서 모든 해로운 폭력을 자신의 죽음으 로 끌어모은다. 고대 그리스에 있어서 〈파르마콘p hannakon 〉이라는 단어가, 독과 동 시에 그 해독제, 병과 치료제, 경우나 상황 혹은 사용된 복용량에 따 라서는 아주 이롭거나 아니면 아주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실체를 동시에 의미한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파르마콘〉은 잘 알려 지 지 않은 〈조제 ph armaceutiq u e> 약으로서 , 보통사람들은 사제 나 마술사, 샤먼, 의사 등 아주 유별난 지식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그 취급을 일임해야만 하는 그런 약이다 .4) 4) 제 10 장 참조.

의디푸스와 파르마코스를 이렇게 비교한다고 해서 우리가 영국의 박학자들, 특히 비극을 제의로 정의하는 캠브리지 의식주의자(儀式主 義 者 )Cambr i d g e rit ua li s t s 들의 관점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의디푸스 신화가 파르마코스식의 제의와 밀접하다 는 것은 명백하지만, 신화와 제의적인 것을 그 영감이 본질적으로 반 신화적이며 반제의적인 비극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캠브리지 의식주의자들과 그 제자들의 파르마코스에 대한 해석은, 계절 변화와 자연의 죽음과 소생이 제의의 원래 모델, 죽 본질적인 의미영역을 이 룬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 속에는 실제로 파르마코스 만큼 잔인한 유형의 제의적 희생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암시라도 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보기엔 희생위기와 그 해결책이 유 일한 가능한 모델인 것 같다. 자연은 항상 그 뒤에 온다. 제의적 사고는 자연의 리듬 속에는 사회의 질서와 무질서의 교체와 유사한 교체가 있다고 믿고 있다. 이리하여 어떤 때는 상호적이며 해롭고 또 어떤 때 는 만장일치적이며 이로운 폭력의 작용은 우주 전체의 작용이 된다. 바극을 일종의 봄 축제와 같은 계절의식의 되풀이나 그 각색으로 본다는 것은 분명히 비국을 비국으로 만드는 모든 것을 잘라내는 것과 갇댜 설사 비극의 〈해체작업〉이 실패하여 마침내 비극에 서구문명의 제의적인 의미가 부여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것이지만, 〈캠브리지 의식주의자들〉의 생각과는 무관한, 심한 중개화 과정이 문제가 된다 .5) 5) 프랑스에서도 많은 연구가들이 의디푸스 신화와 소포클레스의 외디푸스에서 파 르마코스와 〈회생양〉을 확인하고 있다. 마리 델쿠르 Mar i e Delcou rt에 의하면 , 희 생양 풍습을 통해서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은 어린 의디푸스의 운명이 다음과 갇이 설명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외디푸스는 라이오스 L ai os 라는 이름의 아버지, 죽 ‘인민의 대표'라는 의미의 Pub li us 에 의해, 속죄양의 자격으로 유기된 것이다〉 . 불구나 기형아의 유기는 아주 만연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모든 희 생제의의 만장일치의 기반인 희생물과 연관시켜 보아야 한다. 마리 델쿠르 부인이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도 바로 집단적 만장일치의 한 징후인 것이다(『그리스의 영웅 전설과 영웅 숭배 Lege n des et c ult es de heros en Grece 』, Pari s, 1942, p. 102 ; 『의디푸스와 정복자 전설 Oedip e et la lege n de du con q ueran t 』 , 1944). 더욱 최근에는 장-피에르 베 르낭J ean-P i erre Vernan t이 이러한 입장을 이어받아 『의디푸스 대왕 Oed ipe r oi』 의 데마분석 측면에서 아 입장의 다산성을 입증하고 있다. 〈‘신이자 동시에 파르 마코 스 인 왕 Ro i div i n - ph armakos', 이것이 바로 이중 의미의 경구와 감이 서로 반대되는 두 양상을 결합시킵으로써 그에게 수수께끼 같은 양상을 부여하는 의디 푸스의 두 얼굴이다. 의디푸스의 이 성격 전도에 소포클레스는 보편적인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이 주인공은 인간조건의 모델이 된다(『모호성과 반전 : 〈의디푸스 대 왕〉 불가사의 구조론 Ambig u'ile e t r enversement : sur la stru ctu r e enig n1a ti qu e d' Oedip e roi, p. 1271)>. 실제로 이 작품과 신화적, 제의적으로 중요한 이 테마들 사이의 관 계보다 더 실질적인 것은 없다. 그러나 이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 한 테마분석을 초월해야 하며 그리고 〈속죄양〉을 어떤 근거없는 미산으로 보는 것, 죽 어떠한 조작의 의마도 없는 〈비-메커니즘 non-mecan i sme 〉으로 보는 선입견 울 버려야만 한다. 이 첫번째 데마의 뒤에서 우리는 상호적 폭력이 만장일치적으 로, 그래서 질서 회복적인 폭력으로 변해 가는 실질적인 변화를 간파해야 한다. 그런데 이 변화는 바로 무엇보다도 아직까지는 전실에 가장 가까운 모든 문화적 가치들과 신화와 제의의 모든 이중적 의미의 경구들을 구조화하면서 자신은 그 뒤로 숨어버리는 유일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소포클레스는 이 〈속죄양〉 데마에 아무것도 〈부여하지〉 않는다. 죽 그 〈보편적인 중요성〉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 극 작가가 의디푸스를 〈 · 인간조건의 모델〉로 보는 것이 임의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 조건의 진정한 토대에 도달할 때에만 우리는 비록 부분적이나마 신화를 해체할 수가 있는 것이다.

* 우리의 가정은 분명해지고 확대되었다. 이 가정을 통해서, 우리는 그 의미가 결코 밝혀진 적이 없었던, 파르마코스를 죽이는 등의 종교적 행위에 감추어져 있던 아주 분명한 의도를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바 로 이 가정이 총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아주 작은 단편에 이르기까지 제의들을 설명하고 있음을 우리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이 희생물인 희생제의들만을 언급했었다. 여기서는 제의와 폭력적 만장일치 메커니즘 사이의 관계가 아주 잘 드러났다. 왜냐하면 애초의 희생물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제의와 원초적 사건 사이의 모방 관계가 쉽게 이루어졌다. 이제는 동물의 희생제의들도 초석적 집단 폭력의 〈모방〉으로 규정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자. 제 1 장에서 우리는 인간의 희생과 동물의 희생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바 있다. 따라서 〈선험적으로〉 이 대답은 긍정적일 것임에 틀림없다. 고대 유태교의 유 명한 〈속죄양〉과 이같은 유형의 모든 동물 희생으로 미루어보더라도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도 또한 희생물의 죽음을 그 모델로 한 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 고전적 〉 이라 칭할 만한 동물 희생을 좀더 오랫동안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 희생이 재생산 하려고 애쓰는 것이 진정으로 폭력적 만장일치의 메커니즘이며 희생 물이 실질적으로 모든 제의의 열쇠라면, 이 희생의 모든 양상들에 대 해서 우리는 아주 생생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가정의 운명을 결 정짓는 것은 물론 이 설명 능력의 존재 여부가 될 것이다 . 오늘날까지 희생제의가 생생하게 남아 있는 한 희귀한 사회로 눈을 돌려보자. 『신성(神性)과 체험(體驗 )D i v i n ity and Exp eri ence 』에서 고드프 리 리 인하르트 Godfr ey L i enhard t는 딩 카 D i nka 족에 게 서 관찰한 몇 개 의 희생의식들을 상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본질적인 것에 역접을 두면서 동시에 개괄적으로 이 이야기를 요약해 보기로 하자. 합창으로 반복되는 주문 속에서 처음에는 한눈팔고 산만하던 군중 둘이 점점더 주의깊게 된다. 참가자들은 모의전쟁에 빠져들게 된다. 이 와중에서 이돌은 서로에게 타격을 가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적대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예바단계 동안 폭력은 물론 제의적이긴 하지만 아직은 상호적인 형태로 이미 존재하고 있다. 제의적 모방은 무엇보다도 희생위기 그 자체, 죽 만장일치적 해결 이전의 혼돈상태에 근거하고 있다. 때로는 누군가가 그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말뚝에

매여 있는 암소나 염소 등의 동물을 욕하면서 때리기도 한다. 정태적 이거나 정형화되어 있지 않는 이 제의는 희생물에게 폭력을 집중시킴 으로써 분산과 와해의 기운을 점진적으로 물리치는 집단의 역동성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상호적 폭력에서 일방적 폭력으로의 변화가 제의 속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면서 되풀이되고 있다. 간혹 찰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상호적 폭력이 만장일치의 폭력으로넘어가는 징후들에 주의한다면, 다른 수많은 제의들과 마찬가지란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진 예로, 그리스의 부포니아 Bou p hon i a 에서도 집단 전체가 희생물을 향해 달려들기에 앞서 먼저 자기들끼리 서로 싸운다. 보통 희생의식의 처음에 행해지는 이 모의전투, 그리고 영원한 대치라는 그 형식적 대칭 속에 무엇보다도 갈등의 요소가 들어 있는 제의 무용, 이것들은 모두 희생위기의 모방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딩카족 희생제의의 절정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앞서 행 해지는, 충분히 그 희생물울 죽일 수 있다고 여기는 제의적 주술과 함 께 나타난다. 따라서 비극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희생물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말로써〉 처형되는 것이다. 이 말이 제의적인 것 속에 항상 나타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것은 티레시아스가 의디푸스에게 한 비 난과 근본적으로 똑같은 것이다. 때로 이 살해는 희생 동물을 향한 전 짜 〈집단적〉 돌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특히 생식기가 공격 목표가 된다. 나무막대에 생식기를 두들겨 맞는 파르마코스의 경 우가 그러하다. 동물 제물은 의디푸스와 같은 친부살해, 근친상간 또는 모든 차이의 제거, 죽 문화적 질서파괴의 원흉인 모든 성적 금기의 위 반자라고 비난받는 원초적 희생물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 다. 제물 처형은 죄의 속성에 따라 그 처벌의 양상이 결정되는 일종의 칭벌이지만, 그것의 반복은 단순한 징벌과는 다론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이익을 기대하고 예상하는 제의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이익은 실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제의적 사고는 그 이익이 발생하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제의적 사고가 내놓는 설명들은 모두

신화적이다. 그렇지만 제의적 사고는 어떻게 하면 아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는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이로운 작업을 꾸준히 반복하려 한다. 처형하기 전에 희생물에게 행하던 적의와 경멸의 징후들과 그것에 대한 잔혹함은 곧 글자 그대로 종교적인 존경의 표시로 바뀌게 된다. 이 존경은 확실히 희생제의에서 나온 〈정화적인〉 긴장완화와 일치한 다. 만일 제물이 자신의 죽음과 함께 상호적 폭력을 앗아가 버린다면 이 제물은 사람들이 그에게 가대하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때부터 이 희생물은 악의적인 모습뿐 아니라 호의적인 모습도 갖고 있는 폭 력의 여신, 죽 아주 높은 곳에서 인간을 다스리는 전지전능한 신을 구 현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폭력의 신을 학대하고 난 다음에 특 별한 경의를 표한다는 것은 그래서 사리에 어긋나지 않다. 마찬가지로 의디푸스가 저주를 사는 것 같을 때 그를 추방하는 것도, 그리고 그가 떠남으로써 복을 가져왔을 때 그를 존경하는 것도 합당한 것이다. 비록 이 두 태도가 상호모순적이긴 하지만 뒤이어서 두번째 태도를 취하기 위해서는 첫번째 것을 취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더욱 합리적인 것이다. 리인하르트 자신도 제물을 〈속죄양 sca p e g oa t〉, 즉 〈인간 정념의 전달 체〉가 되는 속죄양이라고 규정짓는다. 실제로 소나 송아지 갇은 이 전 짜 동물 파르마코스는 불확실한 어떤 〈죄악〉을 대신하는 게 아니라, 비록 종종 감추어져 있긴 하지만 실제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에 대해 갖고 있는 아주 구체적안 적대감을 담고 있는 것이다. 자발적인 집단 폭력의 반복과 모방이라는 이 정의는, 제 1 장에서 밝혀진 기능과 모순되기는커녕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모든 것과 아주 잘 맞아떨 어지고 있다. 사실 이 자발적 폭력에는 욕구충족적인 요소가 들어 있 는데 이것은 희생제의 속에도 약화된 채로 들어 있다. 첫번째 경우, 그것은 억압당하면서도 동시에 부분적으로는 충족되고 있는 격양된 폭력이지만, 두번째 경우 그것은 다소 〈참재적인〉 공격성향이다. 공동체는 자기자신의 기원에 의해 유혹당하면서 동시에 배척당한다.

공동체는 감추어지고 변모된 형태의 그 기원을 다시 체험하려는 욕구 룰 끊임없이 느끼고 있다. 이때 제의는 해로운 힘들을 진정시키고 속 여서 그것을 모면해 지나간다. 이 해로운 힘은 바로 그 공동체에서 나 오고 있기 때문에 공동체는 그것의 진정한 본질과 실체를 볼 수 없으 며 또 그럴 수밖에 없다. 폭력으로 하여금 〈마치 처음인 것처럼〉, 지 나치지 않을 정도로 약간 격분하게 내버려둠으로써, 다시 말해서 엄격 하게 고정되고 한정된 대상들에 대한 어떤 틀 속의 집단 추방울 회상 시킬 수 있는 것을 반복함으로써, 제의적 사고는 자기에게 부여된 엄 밀하면서도 동시에 모호한 이 임무를 완수할 수 있게 된다. · 희생제의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곳에서 이 희생제의는, 제 1 장에서 우리가 확인한 바 있는 정화 효과를 갖고 있다. 그런데 아 정화 효과는, 너무 통합적인 폭력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이 통합적 폭력의 정확하전 않지만 세밀한 모방으로밖에 볼 수 없는 어떤 구조 속에 편입되어 있다. 晶 제의를 자발적인 만장일치적 폭력의 모방과 반복이라고 보는 우리의 이 주장은, 어떤 제의에 대해 한정해서 보면 변덕스러우며 환상적인 것으로까지 비추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야를 넓혀서 보면, 우 리는 거의 도처에서 우리 주장의 증거둘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사 실 이 가설을 세움으로써 우리는 여러 제의와 신화들에서 지금까지는 그것들이 과연 어떠한 공통된 의미를 가지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종종 그냥 지나쳐버렸던 어떤 유사성들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대략적인 검토로도 모든 종교나 제의적 관습, 그리고 모든 신화생성에는 〈만장 일치〉의 데마가 아주 자주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데 마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각양각색의 문화와 아주 다양한 성격의 글 속에 나타나고 있으므로 이것을 두고 영향의 전파 때문이라고는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앞에서 우리는 청년들이 돌진해서 그 동물을 짓 밟아 질식시켜 버리 는 딩카족의 희생물 처형을 살펴보았다. 그 동물이 너무 크고 사나워서 이런 식으로 죽일 수가 없을 때면, 물론 정식 제물처형의 대상은 그 동물이지만, 그것은 항상 집단 돌진의 흉내가 있고 난 뒤에 그러하다 . 집단 참여의 요구는 적어도 상칭적인 형태로나마 충족되어야 한다. 살 해의 집단적인 특칭은 수많은 희생제의에서 특히 조금 뒤에 살펴보게 될 디 오니 소스의 〈스파라그모스 s p ara gm os 〉 ® 에 서 다시 나타난다 선 여 기 서는 모든 참석자들이 예의없이 그 살해에 참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셈족의 종교 Rel igi on of Sem it e s 』 속에서 로버트슨 스미스 Robert so n Sm it h 가 묘사한 아랍의 유명한 낙타 희생제의와, 일일이 열 거할 수 없는 수많은 제의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6) 제 5 장 참조. ® 스파라그모스 spa r agm o s : 바카스제 에서 여제관들 무리가 황소나 송아지 처 럼 살아 있는 회생물에 달려들어 찢는 행위.

율리시즈와 그의 동료들은 〈모두 함께 〉 의눈박이 거인의 눈에 불타 는 말뚝울 박는다. 수많은 창조신화 속에서 신성한 공모자들은 자신들 중의 한 명 을 〈모두 함께 > 희 생 시 킨다. 인도의 야주르 베 다 Yadjo u r- Veda 는 신들이 행하던 희생제의를 언급하고 있는데 , 여기서 처형의 대 상은 소마 Soma 라는 또 다른 신이다. 처음에 마트라 M it ra 는 동료들에 가담하는 것을 거부하지만 동료들은 마침내 그의 저항을 꺾는다. 전체 의 가담이 없으면 희생제의가 효력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신화는 희생제의가 지켜야 할 모델을 아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만장일치는 필수적이라는 사실과, 구성원 중 단 한 사람이 빠지더라도 이 희생제의는 쓸모없는 것으로, 아니 그보다 더 나쁘게 위험한 것으로 되고 만다는 것이 그것이다. 세람 Ceram 섬 © 의 건국 영웅인 하이누월레 Ha i nuwele 의 살해 신화 속

® 세람 Ceram : 인도네시아의 한 섬.

에는 제사장들이 임무 를 완수한 후에 그 제물을 매장한 다음 그들 모 두 무덤을 짓밟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은 희생제의의 만장일치적이고 집단적인 특징을 잘 강조하고 있다. 신화의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는 만 장일치의 징후들은 다른 사회의 제의에서도 완전히 동일한 형태로 다 시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루네오의 느가주-다야크 N g ad j u-Da yak 족에게는 마지막에 희생물이 제의적으로 매장되는 노예 희생제의가 있는데 여기서도 모든 참가자들은 무덤을 짓밟아야 한다. 게다가 비단 이 희생제의에서뿐만 아니라 느가주-다야크족의 다론 모든 희생제의 에서도 이런 만장일치적 참여가 요구되고 있다. 기둥에 묶인 노예들에 대한 가혹한 고문을 심리학적인 해석으로 풀어서는 안된다. 그 희생제 의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은 제물이 죽기 전에 그 제물을 때려야만 한 다. 되풀이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만장일치이다. 이 의식은 문화적 질서 속의 계급적 차이에 연관된, 제의적으로 정착된 질서 속에서 전 개된다. 동물 희생제의도 똑같은 방식으로 전개된다 . 7)

7) H. Scharer, Di e Bedeutu n g des Menschenop fer s im Daga kisc hen Tote n Kult , Mi tteil u ng en der deuts c hen Gesellschaft fur Volkerkunde 10, Hambourg, 1940. Ado!- phe E. Jen sen, op. cit., p. 108 에 서 재 안용.

카인강 Ka i n g an g족과 같이 상호적 폭력에 의해 분열된 사회에서도 만장일치의 요구는 이 폭력의 수준에서 보자면 약간 퇴화된 형태로 다시 나타날 것이다. 〈살인자들은 결코 따로 행동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은 전체 구성원들의 협력을 바라고 있었다. 제물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속시원히 처리되기를 바라는 것은 카인강족의 살해에서는 흔한 일이다 〉 .8 ) 이러한 사실들의 심리학적인 의미를 부인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반대로 집단이라는 구조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받아들일 수밖 에 없으며 또한 이렇게 되면 제의를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 할 때 해로운 폭력은 무제한으로 폭발할 것이다.

a) Jul es Henry , op. cit., p. 123.

*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제 1 장에서 제시한 희생제의의 기 능이 희생물을, 다시 말해서 폭력적 만장일치의 토대를 허용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제의적 희생에서 실 제로 희생당하는 제물은 공동체 내부에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대상 둘로부터 폭력의 방향을 돌리게 한다. 그런데 더 구체적으로 이 제물은 누구를 대체하는 걷까? 지금까지 우리는 개인의 심리적 메커니즘에 서만 이 대체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분명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 다. 만일 개인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집단 그 자체의 수준에서 희생 제의를 유발하는 희생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희생물은 몇몇 개인 들, 죽 희생집행자에게 개인적인 적대감을 불어넣는 사람들을 대신하 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만일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것처럼 이 전이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라면, 희생제의가 전정으로 사회적인 제 도가 되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을 연루시키기는 불가능할 것이 다. 그런데 우리는 희생제의가 계속되는 동안 이것은 필연적으로 그 사회의 제도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제도의 정신과는 다르 게 이 제의를 〈개별화〉할 수 있게 해주는 변화과정은 아주 느리게 일 어난다. 왜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는가흘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의의 희생물은 공동체의 성원이나 아니면 전체 공동체를 직접적으로 대체 하는 것이 아니다 , 죽 〈제의의 희생물은 언제나 속죄양을 대신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희생물은 그 자체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을 대신하기 때문에 희생대체는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잘 수행한다. 희생대체는 각자의 폭력으로부터 공동체 전체 구성원들 울 보호하는데, 그것은 언제나 희생양이라는 중개를 통해서 그러하다. 여기서 우리는 심리주의의 모든 의혹에서 벗어나 우리의 회생대체

이론에 대한 반론을 해소해 보기로 하자 . 만일 공동체 전체가 이미 단 한 사람, 즉 그 희생양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앞에서 우리가 부여했 던 중요성을 희생대체에다가 부여하기가 힘들 것이며, 희생제의를 사 회적 제도로 설정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원초적 폭력은 단 하나의 자발적인 폭력이다. 그러나 제의적 희생들 은 여러 가지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여러 번 반복된다. 초석적 폭력에 서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곳에 있던 모든 것, 즉 제물처형의 장소와 시간이나 제물의 선택과 같은 것들이 희생제의에서는 인간 스스로에 의해 결정된다. 제의의 기도는 모든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을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실제로 이 제의의 기도는 초석적 폭력으로부터 순화 평정이라는 이른바 일종의 〈기술〉을 끌어내려고 애쓴다. 제의적 희생 이 아주 작은 효력을 발휘하더라도 그것이 결함이 되는 것은 전혀 아 니다. 제의는 반드시 격심한 위기의 시대가 아닐 때 작용하도록 되어 있다. 알다시피 이것은 치료가 아니라 예방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 이다. 만약 이 제의를 지금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되게 하려 한다면, 다시 말해서 보통 공동체 밖에 있는 희생시킬 만한 범주 속에서 제물 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초석적 폭력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구 성원을 제물로 선택한다면, 이 제의는 오히려 모든 효력을 상실할 것 이다. 그렇게 되면 이 제의는 희생위기를 피하는 것이 본디 임무인데도 바로 이 희생위기 속으로 다시 빠져드는 사태를 초래할 것이다. 집단 살해가 〈비정상적〉이자 〈규법적인〉 임무에 잘 적응하는 만큼이나 희 생제의도 그의 〈정상적〉인 임무에 잘 적응되어 있다. 희생제의의 작은 카타르시스는 집단 살해에 의해서 규정된 큰 카타르시스에서 파생한 다고 생각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 제의적 희생은 이중의 대체에 근거하고 있다. 결코 눈에 띄지 않는 첫번째 대체는 공동체 모든 구성원들의 단 한 사람으로의 대체이다. 이것은 희생물 메커니즘에 근거한다. 원래 의미 그대로 유일하게 제의

적인 두번째 대체가 첫번째 대체에 포개전다. 이것은 원초적인 제물을 희생시킬 만한 범주에 속하는 제물로 대체하는 것이다. 희생물은 공동 체 내부에 있고 제의적 제물은 의부에 있다. 이는 만장일치의 메커니 즘이 저절로 유리하게 작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하다. • 어떻게 두번째 대체가 첫번째 대체에 접목될까? 어떻게 초석적 폭 력이 제의에다 원심력을 새겨 넣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 희생제의의 기술이 생겨날까? 이러한 것들이 앞으로 우리가 해결하려는 문제들 이다. 희생제의가 초석적 폭력에 대한 근본적인 모방이라는 것을 인정 하는 데에 망설여서는 안된다. 이 모방적 요소 덕분에 우리는 제의적 ' 사고에다가 통찰력이나 조작능력을 부여하지 않고서도 희생제의에는 아직도 우리가 완전히 알지 못하는 기술적인 측면과 그리고 이것 또한 본질적인, 기념적인 측면이 동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제의를 무의미한 공휴일로 보거나 정신분석학처럼 단순한 신경증적 충동으로 환원시켜서는 안되고 실제 사건의 기념식으로 보 아야 한다. 제의에서는 약간의 실질적인 폭력이 조금 지속된다. 희생제 의가 효력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자산의 진지를 조금 튼튼히 구축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질서와 평화를 향한 것이다. 가장 폭력적인 제의들도 실제로는 폭력을 추방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다. 제의에서 인간의 가장 병적이고 비정상적인 것만을 본다면 이는 아주 큰 잘못이다. 제의가 폭력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더 나쁜 폭력을 방어하는 보다 작은 폭력이다. 그것은 언제나 공동체가 인정하는 가장 큰 평화, 죽 살해 이후에 희생물에 대한 만장일치에서 유래하는 평화를 되살리려고 애쓴다. 언제나 공동체 속에 축적되는 악취들을 제거하는 것과 기원의 신선함을 되찾는다는 것은 실은 똑같은 것이다. 질서가 지배하든 아니면 질서가 위태롭든간에, 따라야 하는 것은 언제나 똑같 은 모델이며 되풀이해야 하는 것도 똑같은 도식이다. 그것은 바로 끗 끗하게 극복하는 위기, 희생물에 대한 만장일치적인 폭력이라는 모델

과 도식이다. * 이제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고 있는 것은 신화와 제의, 죽 총체적으로 말해서 종교적인 것에 관한 이론이다. 앞의 분석들은 너무 급히 행해 졌고 너무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가 희생물과 폭력적 만장일치에 부 여한 놀랄 만한 역할을 아직은 하나의 가정으로밖에 볼 수 없을 것 같다 . 종교적인 것을 〈실질적인〉 기원이라고 간주하는 우리의 가정이 일반적인 통념과 너무 거리가 멀고 여러 분야에서 너무 많은 근본적인 영향들을 야기시키기 때문에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이댜 그뿐 아니라 이 주장아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검증을 허용하 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 단계에서 독자의 납득을 바랄 수도 없는 노롯이다 . 제의적 모방이 자신이 무엇을 모방하는지도 모르는 우리의 이 가실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그 원초적 사건의 비밀이 밝혀지지 않는 것은 그 제의 자체가 일종의 무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후세의 사상도 이 무지를 없애지 못했지만 우리도, 적어도 지금 그것을 찾을지도 모르는 우리의 이 가설을 제의하고는 어디에서도 이 무지를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모든 제의의 출발점이라고 가정한 그 작용을 어떠한 제의도 일일이 되풀이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무지는 종교적인 것의 근본적 인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무지의 근거는 바로 희생물, 죽 결코 ` 밝혀지지 않은 희생물의 비밀에서 나온다. 제의적 사고는 경험적으로 폭력적 만장일치의 작용을 재생산하려고 애쓴다. 우리의 가정이 정확 하다면 우리는 이 비밀을 완전하게 밝혀줄 어떠한 종교 형태도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껏해야 어떤 때는 이런 양상 을, 또 어떤 때는 다른 양상을 밝혀주게 될 여러 가지 종교 형태들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뿐 아니라 표면상의 내용에 의해서도 아주 떨어져 있는 아주 다양한 새로운 형 태의 제의와 신화를 우리의 가정을 통해서 판독해 냄으로써 우리의 가정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겠다. 만일 우리의 가정이 정확하다면 제의의 가장 복잡한 영역에서 이 가정은 가장 눈부시게 입증될 것이다. 사실 복잡한 제도일수록, 앞서 분석한 그 작용 속에서 이 제도가 재생산하려고 애쓰는 요소들이 더 많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이론상으로 이 요소들의 대부분은 이미 우리 손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문제들도 쉽게 해결될 것이다. 이 제도의 흩어진 조각들은 일목요연한 총체를 이루게 될 것이며 , 그 어둡던 미궁도 단숨에 완전히 밝혀질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판독하기 어려운 제도들 가운데 하나로 아프리카의 신성한 왕국이 항상 언급되고 있다. 난해한 복잡성으로 인하여 이 제 도들은 오랫동안 〈이상한〉 또는 〈비정상적인 〉 이라는 수식을 받아왔으 며, 다소 논리적안 범주를 통해 제의가 분류될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 에는 〈예의〉로 분류되어 왔었다. 파라오 시대의 이집트와 스와질랜드 가운데에 위치한 이 왕국들의 주요 그룹에서는, 어떤 엄숙한 경우에 특히 취임식이나 주기적인 〈희 생제의〉 중간에 왕은 실제로나 아니면 상칭적으로라도 근친상간을 범 해야만 했다. 이때 여러 사회에서 왕의 가능한 상대자에는 당시 결혼 규칙에 의해 단호하게 금지되어 있던 거의 모든 여성들, 죽 어머니, 누이, 딸, 질녀, 여사촌 등등이 있었던 것 같다. 친척 관계란 것은 때로 는 실제 적 이 기도 하지 만 때 로는 〈분류상의 classif ica to i r e > 것 이 기도 하 다. 실질적으로 근친상간이 범해지는 것이 종식된 어떤 사회에서는, 결 코 근친상간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구것의 상칭성은 남아 있다. 드 의 쉬 Luc de Heusch 가 이 미 보여 주었듯이 종종 왕태 후 rein e -me- re 의 중요한 역할은 근친상간의 관점에서 읽혀질 필요가 있다 .9)

왕의 근친상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희한한 특성 때문예 혼 히 우리가 그러하듯이 그것을 상황으로부터 떼어서 생각해서는 안된 다. 우리는 근친상간을, 그것을 포함하고 있는 총체적인 제의 속에서 그리고 우선은 특히 즉위시에 그 왕이 저질렀던 또 다론 위반사항들과 관련시켜서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은 왕에게 금지된 음식을 먹게 하고 폭력행위를 저지르게 하거나 피로 목욕하도록 하고 심지어는 으깨진 성기나 피흐르는 시체, 온갖 종류의 쓰레기들로 되어 있는, 그 성분이 그것의 해로움을 잘 말해 주는 그런 마약들을 마시게 하기도 한다. 어 떤 사회에서는 즉위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유혈이 낭자한 광란적인 분 위기 속에서 전개되기도 한다. 왕이 위반해야 하는 것은 따라서 특별한 하나의 금기사항, 즉 금기 중에서 가장 절대적인 하나의 금기사항이 아니라, 상상 가능한 모든 금기사항들이다. 근친상간 위반이라는 절충 적인 성격과 위반사항들의 거의 백과사전적인 특성들은, 〈자기과신 hu­ br i s 〉 의 모든 양상들을, 심지어는 가장 잔인한 양상까지도 갖고 있으면 서 어떤 규칙도 지키지 않는 전형적인 위반자라는 왕이 구현해야 할 인간유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는 공적인 성격은 전혀 없으면서 아마도 감탄 섞인 묵인의 대상이었을 루이 14 세의 정부들과 유사한 왕의 단순한 〈과실〉 정도가 문제가 아니다. 아프리카 사람둘은 못본 체하지 않는다. 반대로 눈을 아주 크게 뜨고 주목한다. 때때로 근친상간 행위는 왕위 계승의 〈필요 불가결한 s i ne qua non> 조건이 되기도 한다. 왕이 범하게 되면 그 위반 은 비난받아 마땅한 성질을 잃게 된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계속 비난의 성격을 간직하고 있는 이 위반행위는 농축된 불순을 왕에게 떠넘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불순과 왕위즉위의 상칭체계는 여전히 연관을 맺고 있다. 〈예를 들어 쥐가 ‘혐오 n y ec' 의 대상이며 국민적 터 부인 뷔숑 Bushon g족의 즉위식에서 왕은 이 설치류가 가득 들어 있는 9) Luc de Reusch, Essai sur le sym bolism e de l' inc este roy a l en Afr iqu e, Bruxelles, 1958.

바구니를 받는다 〉 ,10 ) 때때로 문둥병이라는 테마는 왕의 선 조 인 신화의 시조가 처음으로 차지하였던 왕위와 연관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11 )

10) Vansin a, J., Init iat io n Rite of the Bushong , Afr ica, XXV, 1955, pp. 149 -150. Laura Makariu s , Du roi magi qu e au roi div in , p. 677 에 서 재 인용 . 11) L. Maka rius , op. cit. , p. 670.

왕의 근친상간에 대한 켜 1 계묵은 〈 관념론 i deolo gi e 〉 이 있는데, 왕이 가까운 친척 가운데서 신부를 선택하는 것은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 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설명은 제의시켜야 한 다. 근친상간과 다른 위반행위들은 우선 왕을 극도의 〈 불 순 함 〉 의 화신 으로 만든다. 즉위식이나 희생의식 때, 왕이 국민들로부터 제의적 성격 의 모욕과 학대를 감수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불순함 때문이다. 적의 에 가득 찬 군중은 아직까지는 만인으로부터 배척당하는 진짜 죄인, 비열한 한 인물에 불과한 이 사람의 비행을 규탄한다. 어떤 경우에는 왕의 군대가 왕이나 왕의 측근에 대한 모의공격을 당하기도 한다. 왕을 위반자로 만들고 왕에게 가장 신성한 율법, 특히 의 혼 제의 규 칙을 위반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그를 〈 용서하기 〉 위한 것이거나 아니 면 그에 대한 관용을 나타내기 위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것은 반대 로 아주 엄격하게 그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다. 원래 왕이 제물이기 때 문에 왕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이 희생의식에서는 모욕과 학대가 그 절정을 이룬다. 우리는 위에서 근친상간을 제의의 문맥 속에 다시 위치시켜야 한다고 말한 바 있지만, 이 문맥이 규율 위반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실질적이거나 상징적인 희생제의까지 포함되어 있다. 왕의 희생제의를 위반에 대한 처벌로 보는 것을 주저 해서는 안된다. 왕이 힘과 생식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희생된다는 생각 은 혈통의 순수성으로 근친상간을 설명하려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생각이다 . 이 두번째 생각 역시 아프리카 왕국에 대한 다소 케케묵은 〈관념론〉의 일부임에 틀림없다. 이런 생각을 받아둘이는 민족학자는 드물다. 그리고 실제 민족학적 사실들에 의해서도 그러하다. 예를 들어

루안다 Ruanda 에서는, 분명히 근친상간의 한 쌍인 왕과 왕태후는 재임 기간 동안 근친상간에 대한 상칭적 처벌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희생 제의를 여러 차례 감수해야 한다. 그 왕들은 포로나 사형수들처럼 묶인 채로 대중 앞에 세워졌다. 사람들은 그들의 대체물인 황소와 암소를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 그리고서는 왕을 황소 옆구리에 울려 태워서 〈 가능한 한 가장 비슷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왕을 그 소의 피로 홈뻑 적셨다 .12)

12) Luc de Reusch, Aspe c t s de la sacralite du pou voir en Afriqu e, in le Pouvo ir et le Sacre, Bruxelles, 1962. L. de Lagg e r, I. Ruanda, le Ruanda anc ien, Namur, 1939, pp. 209-216 에서 재 인용. •

왕이 어떤 각본을 따라야 하는지 그리고 거기서 근친상간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이제 우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각본은 의디푸스 신화의 각본과 아주 흡사하다. 이야기의 줄거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두 경우에 있어 신화적인 혹은 제의적인 사고가 따르는 모델이 똑같은 모델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 렇듯이 아프리카 왕국에도 초석적 폭력의 만장일치에 의해서 완전히 해소되는 희생위기가 존재한다. 제의적 사고는 이 작용을 언제나 해체 될 위기에 처해 있는 문화 질서를 영속시키고 갱신하는 방법으로 보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왕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신화를 다시 재연 해야 하는 또 다른 의디푸스이다. 여기에는 또한 원초적인 사형(私刑) 과 연관되어 그 사형을 정당화시키면서 집단 폭력의 다행스런 결과에 의해서 추인받는 것 같은, 근친상간에 대한 비난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왕으로 하여금 〈처음에〉 그가 비난받았던 그 위반을 행하도록 강요하는데, 왕은 군중의 박수 갇채가 아니라 〈첫번 째처럼〉 비난의 야유 속에서 그것을 행하게 된다. 원칙적으로 취임식 때마다 근친상간은 구원의 살인, 죽 〈첫번째처럼〉 문화 질서가 당당하

게 회복되는 것으로 끝나는 증오와 집단 폭력이라는 똑같은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왕의 근친상간과 원초적인 근친상간의 상관성은 때때로 그것이 나 타나는 기원신화에 의해서 증명되고 있다. E. J. 크리즈 E . J. Kr ig e 와 J. D. 크리즈J. Q. Krig e 는 로브두 Lovedu 족의 이러한 신화를 이야기한다 .1 3) 여기서는 근친상간이 사회의 탄생을 주재한다. 인간들에게 평화와 풍 요를 가져다주는 것도 바로 이 근친상간이다. 그렇다고 근친상간이 최 우선적인 것도 아니며 본질적인 것도 아니다 . 처음에는 근친상간이 희 생제의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근본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근친상간을 정당화하는 것이 희생제의이다. 왕은 미래의 자신 의 죽음에 의해서만 통치한다. 왕은 이제 막 행하려는 희생제의의 제 물, 죽 처형을 기다리는 사형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희생제의 그 자체 는 진정으로 첫번째 것이 아니라, 〈 처음에〉 저절로 획득되었던 폭력적 만장일치의 제의화된 형태에 불과하다.

13) The Lovedu of Transvaal .. , in Afr ican Worlds, London, 1954.

왕에게 해로운 물약을 잔뜩 먹이고 모든 폭력적 위반 중에서도 무 엇보다 먼저 근친상간을 범하도록 하는 것은, 전위연극이나 현대의 반 문화의 정신과는 정반대되는 정신 속에서 그러하다. 팔을 벌린 채 그 해로운 힘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쫓아내는 것이 문제 이다. 애초의 추방당한 사람이 겉으로 그랬던 것처럼 , 왕도 그에게 부 여되는 처벌을 〈받을 만해야 〉 한다. 미학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가 모든 전염성의 악취둘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또한 그것을 문자 그대 로 자기를 띠게 하여 뒤에 가서 안정과 풍요로 전환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참재된 악을 완전히 표출시켜서 그를 어두운 힘으로 가득 찬 괴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에 있는 이 변 형 법칙은 곧 그 집단의 모든 존재에게로 퍼져나간다. 서아프리카의 모시 Moss i족의 모로-나바 Moro-Naba 라는 취임 축가는, 아주 고전적인 단순함으로 구원의 메커니즘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희생양

가설로써만 해독할 수 있다. 똥이고 쓰레기인 년, 우릴 죽아려고, 그리고 동시에 우릴 구원하러 오는구나 . 14 )

14) Theuws, Natt re et mourir dans le ritu e l Luba, Zair e, XIV(2, 3), Bruxelles, 1960, p. 172 . L. Makariu s s, op. cit., p. 685 에서 재인용.

왕에게는 실질적인 역할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온전한 희생물로서의 역할이다. 그는 꼬리물고 일어나는 부정적인 폭력을 긍정적인 문화적 재산으로 바꾸는 기계장치와도 같다. 이 왕국들은 보통 거대한 도시의 외곽에 위치하여 가정의 쓰레기들을 농업용 비료로 바꾸는 공장들에 비교될 수 있다. 이 공장에서 나오는 결과물은 언제나 너무 유독하기 때문에 그것을 직접적으로나 혹은 다량으로 사용할 수가 없고, 진짜 바옥한 비료에 함께 넣어서 완화시키거나 아니면 그것들을 중성 물질 과 섞어서 사용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왕이 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나 가면 비옥하게 되는 땅도, 왕이 직접 그곳을 산책하게 되면 완전히 불 타 버리거나 황폐하게 된다. 외디푸스 신화와 총체적으로 살펴본 아프리카의 사례들 사이의 유 사성은 너무나 뚜렷하다. 모든 신화와 비극의 테마는 다른 데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어떤 경우에는 왕과 그의 아들을 영원한 앙숙으로 만 들지도 모를 이런 금기에서와 같이, 근친상간의 바로 옆에서 영아살해 와 친부살해라는 이중적 모티브가 적어도 암시적으로 나타나기도 한 다. 다른 사회에서도 의디푸스 신화의 모든 분신들이 희미하게 나타나 고 있다. 라이오스 La i os 의 아들과 마찬가지로, 니오로 N y oro 족의 왕은 〈사랑스러운 두 어머니〉를 갖고 있으며 주쿤J ukun 족의 추장은 두 명

의 아내를 갖고 있다 .1 5) 의디푸스 신화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의 〈파르마코스〉에도 실질적 인 폭력, 즉 속죄양에 대한 만장일치적인 살해로 끝이 나는 상호적 폭 15) J. Rouch 와 D. Zahan 의 영화, Moro-Naba, Comi te du film ehnog ra p h iq u e de I' I. F. A. N. L. Makariu s , Du roi mag iqu e au roi div i n , Annales, 1970, p. 685 에서 인용 . 분명 이 비교는 그리스에도 아프리카 식의 신성한 왕국이 오래전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을 것이다. 의디푸스 신화에 대한 이 역사적인 가정이 아무리 합법적이고 필연적이라 하더라도, 이 가정이 아칙은 진정한 해명 울 이루고 있지 않다. 아프리카 왕국과의 비교뿐 아니라 신화, 제의, 비극 등의 모든 총체를 설명해 내기 위해서는 특히, 물론 이 분석의 막다른 끝은 아닌, 신 성한 왕국을 비롯한 〈모든〉 문화적 유물들 뒤에 필연적으로 감추어져 있는 〈 실 제의 〉 메커니즘을 포착해야 한다. 죽 마지막 희생물에 대항해서, 그리고 그 주위 에서 형성되거나 재생되는 만장일치 속에서 상호적 폭력이 끝난다는 사실을, 다 시 말해 〈희생물의 역할 〉 을 이해해야 한다. 『모호성과 반전 : 〈 의디푸 스 대왕 〉 의 불가사의 구조론』(pp. 1271-1272) 에서 장-피에르 베르낭은 다음과 같 이 , 이 작품 에 대해서 〈속죄양〉과 그에 연관된 모든 현상들을 옳게 해독하는 데에는, 심리 학적 개념들로는 불가능하며 심지어는 방해가 된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는 아주 수많은 신화제의적인 사실들을 열거하고 있다. 〈 왕과 속죄양 사이의 자성인력 p olar it e( 비국에서는 의디푸스 한 인물에 부여된 자성인력)을 소포클레스는 굳이 만 들어낼 필요가 없었다 . 종교적 관습과 그리스인들의 사고 속에 그것이 이미 새 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 시인은 이것을 인간과 인간의 본질적인 모호성으로 간주함으로써 단지 이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소포클레스가 우리가 전도의 테마라고 부르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tur annos-ph armacos’ 의 짝을 선택 한 것은, 이 대립 속에서 이 두 인물은 대칭적으로, 그리고 어떤 접에서는 서로 교환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둘다 사회의 ‘집단적' 구원에 책 임 있는 ‘개인들'인 것처럼 제시되고 있다. 호머 Homer 와 헤시오드 Hes i ode 에 있어서 대지와 가축 그리고 여성들의 생산성은 바로 왕에 달려 있었다. 왕이 정 당한 통치자, 죽 비난할 데 없는 ‘amumOn’ 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그 도시국가의 모든 것은 번창하지만, 왕이 올바른 방향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 한 사람의 과오 에 대해 도시 전체가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Cron i de 는 모든 불행, ‘lim os-loi- mos', 죽 기근과 질병에 한꺼번에 빠지게 한다. 남자들은 죽고 여자들은 생산하 지 못하며 대지는 불모지가 되고, 가축들은 더이상 번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신의 재앙이 백성에게 닥쳤을 때 그 당연한 해결책으로 왕을 희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 풍요로움이 고갈되었다면,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풍요의 주재자인 그 왕 의 힘아 전도되었기 때문이다. 죽 그의 정의가 죄악으로 변하고 그의 미덕이 오 점으로, ‘최선의 것 ar i s t os' 이 ‘최악의 것 kak i s t os’ 으로변화됐기 때문이다 .L y­ curgu c , Ath a mas, O i noclos 의 전설에는 'lo i mos’ 를 추방하기 위하여 왕을 둘로 쳐죽이거나 제의적으로 처형하거나, 그것이 여의치 못하면 그 아들을 희생시키는 이야기가 있다. 거꾸로 그 사회 한 구성원에게 그 나쁜 왕이나 군주의 역할을 맡는 임무를 부여하는 일도 있다. 왕은 뒤집은 자신의 모습을 한, 한 개인에게 자신의 모든 부정적인 이미지들을 떠넘긴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바로 〈파 르마코스 〉 이다. 이것은 질서가 뒤죽박죽되고 사회의 모든 위계질서가 전도될 때, 축제 기간중 사람들이 왕관을 씌우는 카니발의 왕과 흡사한, 왕의 짝패 그러나 거꾸로 된 짝패인 것이다. 이때에는 성적 금기도 제거되고 철도도 합법적인 것이 되고 , 노예가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여성들이 남자들과 옷을 바꿔입는다 . 그러 므로 왕위도 가장 비열하고 가장 더럽고 가장 우스꽝스럽고 가장 사악한 사람이 차지하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축제가 끝나고 나면 이 대역왕(代役王 )con tr e-ro i은 그가 구현하고 있는 무질서를 한 몸에 안은 채로 추방당하거나 처형됨으로써 그 사회를 정화하게 된다〉 . 여기서 Vernan t이 열거한 모든 것은 의디푸스와 아프리 카 왕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제의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바로 폭력의 실질적인 작용을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속죄양에 의한 만장일치 의 메커니즘을 인정하는 것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이것이 어떤 근거없는 미신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포클레스의 역할을 새로운 의미의 부여자나 보완자로 보아서는 안되고, 그 반대로 옛 신화 에서뿐만 아니라 현대 심리학과 사회학에서도 여전히 신화적으로 남아 있는 그런 의미의 박탈자 혹은 부분적인 해체자라고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이 시인은 왕의 희생양에 대해 어떠한 새로운 의미도 부여하지 않으면서 이 의미들의 보편적인 원천에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력의 작용이 들어 있다. 왕의 실질적이며 결정적인 죽음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어디서나 취임이나 회춘의 의식에는 항상 두 무리 사아의 모 의전두가 있게 마련이다. 이런 제의적 대립이나 만인의 참여는 갖가지 분열과 혼란스런 동요를 상기시키는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동요는 속죄양 메커니즘만이 종식시킬 수가 있다. 속죄양에 대한 폭력이 보편

적인 모델 구실을 하는 것은 이 폭력이 실질적으로 평화와 통일을 회 복시켰기 때문이다. 집단 폭력의 사회적 효능으로써만, 끊임없이 이 과 정을 반복하면서 속죄양을 모든 갈등의 중재자로, 다시 말해서 모든 절대 권력의 전정한 화신으로 보는 정치적, 제의적인 이 의도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 왕위계승은 아들과 아버지, 혹은 아들들끼리의 제 의적 투쟁을 내포하고 있다 . 다음은 이 갈등에 대한 뤽 드 의쉬 Luc de Heush 의 묘사이 다. 지배자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는 왕위계승의 제의적 성격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왕자들은 경쟁자인 형제를 제거하기 위해서 서로가 똑같이 강력한 마약을 사용한 것 같다. (……) 느콜 Nkole 의 저 신기한 왕위경쟁에는 〈형제 원수 〉 의 테마가 있다 . 왕위를 바라는 사람 주위에 당파가 결성되었으며 그 중의 생존자에게 왕위계승이 허용되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제의적인 것을, 현실에서 그 변화추이가 더 이상 그 모델과 부합하지 않는 어떤 갈등이 역사 속에서 분해되는 것과 구별 하기는 불가능하다. 바로 이 불분명함 그 자체가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다. 제의는, 실제로 존재하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갈등을 어떤 한 방향으로 몰아갈 때에만 유효하다. 죽 그것은 엄격하게 규정된 형태 속에서 갈등을 계속 표현할 수 있을 때에만 제의로 남는다. 令 회춘제의에 관한 모든 상세한 묘사들을 보면, 이 제의들 역시 다소 변형된 희생위기와 초석적 폭력의 각본을 재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스와질랜드의 〈인쿠알라 lncwala 〉라는 왕의 의식이 철저하게

연구되었다 .1 6 )

16) T. 0. Beid e lman, Swazi Roy al Rit ua l, Afr ica, XXXVI, 1966, pp. 33-405. P. A W. Cook, The Inq w ala Ceremony of the Swazi , Bantu Stu d ie s, N, 1930, pp. 205-210. M. Gluckman, Rit ua ls ofR ebellio n in South - East Afr ica, Mancheste r , 1954 H. Kup e r, A Rit ua l of kin g s h ip among the Swazi , Afr ica, XIV, 1944, pp. 230- 256. H. Kup er , The Swazi : a South Afr ican Kin g d o m, New York, 1964. E. Nor- beck, Af.ri ca _ n Rit ua ls of Confl ict , Amen·c an Anth r opo lo g ist, LXV, 1963, pp. 1254 -1279

제의가 시작될 때 왕은 그의 성역 속에 피해 있으면서, 묘약을 취하 게 마시고 분류상의 누이동생과 근친상간을 범한다. 이 모든 것은­ 〈 야수 같음 〉 이라고 번역되는 말인――왕의 실완느 s i lwane 를 증가시키늪 ­ 것을 목적으로 한다. 원래 왕의 것은 아니었지만 이 실완느가 어쩔 수 없이 왕의 인격을 특칭짓게 된다. 왕의 실완느는 언제나 그의 전사 중 에서 가장 용감한 전사의 실완느보다 뛰어나다. 이 준비기간 동안 군중은 왕에 대한 증오와 그를 추방하려는 욕망을 표현하는 〈 시메모 s i memo 〉라는 노래를 읊조린다. 그 어느 때보다 야수 같이 된 왕이 때때로 알몸인 채로 그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알몸과 . 그 알몸에 나타나게 되는 검은 색깔은 도발을 상칭한다. 이때 군중과 왕족 사이에는 모의전두가 일어난다. 서로 왕을 쟁탈하려 한다. 그들의 우두머리였던 왕보다는 덜하다 하더라도 묘약에 의해서 강해지고 실 완느로 충만해전 무장한 전사들은 왕의 성역을 포위한다. 그들은 왕의 측근들이 호위하는 왕을 탈취하려 한다. 지금 우리가 아주 간략하게 살펴본 이 제의 안에는, 폭력의 화신이 그의 실완느를 전영시켜서 몽둥이로 때림으로써 〈성난 황소〉로 변하게 한 암소라는, 왕에 대한 상칭적인 처형도 들어 있다. 딩카족의 희생제 의 때와 마찬가지로 전사들은 〈모두 함께〉, 그리고 〈맨몸으로〉 그 동 물에게 덤벼들어서 주먹으로 때려눕힌다. 의식 중에는 왕, 측근들, 전사들, 그리고 전체 군중들 사이의 거리가 일시적으로 소멸되지만, 이 차이의 소멸은 결코 우애로운 〈형제화fra-

t ern i sa ti on 〉 와는 다른 성질의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모든 참가자들을 에워싸고 있는 폭력과 같은 것이다. 베들만 T. 0. Be i delman 은 제의의 이 부분을 〈차이의 용해 dis so lvi ng of d i s ti nc ti on 〉 라고 규정짓는다 .1 7) 빅터 터 너는 〈인쿠알라〉를 세익스피어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일종의 〈 왕위연 극 pla y of Kin g s h ip >이 라고 묘사한다.

17) op. cit, p. 391, n. 1.

이 의식은 계속 커져가는 흥분의 메커니즘을 불러일으키고 그리고 왕이 이용하는 힘들, 죽 처음에는 왕이 그것의 제물인 것 같다가 뒤에 가서는 그것의 절대적 주인인 것처럼 보이는 힘의 역동성을 불러일으 킨댜 처음에는 그 자신이 그 제의의 희생자이던 왕이 뒤에 가서는 바 로 자신이 가장 뛰어난 제사장이 되어 그 제의를 집행한다. 이 역할의 이중성에 놀랄 필요는 없다. 이것은 속죄양이 〈 총체적인 〉 폭력 작용과 일치함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가 제물일 때에도 왕은 결국 이 작용 의 주체이다. 그는 이 작용이 진행되는 과정의 어느 순간에도 개입할 수 있다. 그는 모든 역할을 다한다 . 어떤 방향으로 변하든간에, 어떤 폭력의 변모도 그에게는 낯설지 않다. 전사들과 왕 사이의 제의적 갈등이 절정에 다다룰 때, 다시 한번 울 타리 속으로 숨었던 왕은 호리병울 들고 다시 나타나서 그것을 한 전 사의 방패를 향해 던진다. 그러고 나면 모든 사람들은 흩어진다. 쿠퍼 H. Ku p er 가 만난 사람들은 그에게, 만약 전시였다면 호리병을 맞은 전 사는 죽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 민족학자는 호리병에 맞은 이 전 사를 일종의 민족적 속죄양으로 보도록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결국 이 전사를, 앞서 얘기한 암소와 마찬가지로 왕 대신에 상 칭적으로 죽은 왕의 〈짝패 double 〉로 보는 것이다. 〈인쿠알라〉는 한 해가 끝나는 순간에 시작하여 새해가 시작되는 순 간에 끝맺는다. 제의가 기념하는 위기와 시간적 주기의 끝 사이에는 어떤 상응이 존재한다. 제의는 자연의 리듬을 따른다. 그러나 우리는 더 본질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신화와 제의가 위장하고 우회시키고 배

출시키는 폭력보다 자연의 리듬이 두드러져 보인다 해서 이 자연의 리듬을 더 본질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의식이 끝나면 사람들은 큰 불을 지피고서 그 위에서 제의 동안, 그리고 흘러간 한 해 동안 쌓 였던 불순한 것들을 모두 불태운다. 결정적인 단계에 가면 청소와 정 화에 관한 모든 상징 이 나타난다. * 왕의 근친상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바로 그 왕국의 제도라 는 제의의 문맥에서 그것을 보아야 한다. 왕이 바로 마래의 희생자, 다시 말해서 속죄양의 대리자라는 것을 알아채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 은 희생제의의 효과를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자발적인 집단 폭력을 이야기하는 글 속에서, 근친상간 없는 희생제의는 이해하기 쉽지만 희 생제의 없는 근친상간은 이해하기 힘들다. 많이 변화된 형태에서는, 근친상간아나 혹은 근친상간의 상칭이 계 속 남아 있더라도 희생제의는 완전히 사라져버릴 수가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희생제의는 근친상간에 비하여 부차적이고 근친상간은 희생제 의의 중개 없이도 해석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결 론지어서는 안된다. 그 후부터는 주요 당사자들이 그 기원으로부터 멀 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서구의 학자들-〈불건전한구경거리를좋아 하는 사람들 〉 이라고 부르고 싶은-―접과 똑같은 시각으로 자신들의 제 의를 바라본다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근친상간은 〈그것이 갖고 있 는 기이함 그 자체 때문에〉 지속되고 있다. 본래의 무지를 연장시키고 강화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붕괴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을, 제 의의 붕괴상태에서도 근친상간만은 살아남는다. 다른 것들은 잊혀지지 만 근친상간만은 기억된다. 그래서 이것은 아프리카 왕국의 민속 관광 의 대상이 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근대 민족학도 거의 언제나 근 친상간을 본래의 그 맥락에서 떼어놓고 생각했다. 근대 민족학은 근친

상간을 어떤 자율적인 사실, 즉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 맥락에 대 한 참고 없이 단지 그 자체가 의미하기 마련인 엄청난 것으로만 보았 기 때문에 근친상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신분석학도 계속 이 오 류에 빠져 있는데, 심하게 말하자면 정신분석학이 이 오류의 최고 절 정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근친상간은 왕에게 위엄 있는 특성을 부여하는데, 그것은 다른 이유 가 아니라 이 위반이 원초적 희생물을 환기시켜서 그 죄인의 죽음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 사실은 특히 왕에게 금천상간을 강요하 는 사회들 중에서 아주 주목할 만한 예의적인 유형을 살펴보게 되면 곧 명백해진다. 이 예의는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왕의 근친상간에 대한 단호하고 절대적인 거부로 되어 있다. 이 거부는 결국 일반 규칙, 다시 말해서 어떤 예의도 허용되지 않는 순수하고 단순한 근친상간 금지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전혀 그렇지가 않 다. 이 사회는 대부분의 사회가 그것을 거부하는 그런 의미에서 왕의 근친상간을 단순하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특별한 예방책 을 강구하고 있다. 왕의 측근자들은 그를 가까운 인척들에게서 멀리 떼어놓고서, 그에게 원기를 보강하는 약이 아니라 원기를 약화시키는 물약을 마시게 한다. 이것은 곧 왕좌의 주변에는 다른 왕국들에서와 똑갇은 근친상간의 기운이 떠돌고 .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18 ) 근친상간 18) 〈니오카 N i oka 족은 추장에게 여생 동안 금욕을 강요한다. 그는 자기의 모든 부 인들을 돌려보내야 하며, 사람들은 그에게 벗어버릴 수 없는 페니스 케이스를 입히며, 정력을 떨어뜨리는 약을 억지로 먹게 한다. 카사이 Kasai 강의 느중바 Nj umba 족은 여추장이나 추장의 첫번째 부인에게, 근본적인 불임뿐 아니라 월경 까지도 완전히 멈추게 하는 아주 효력이 센 약을 먹인다. 아런 가혹한 관습둘은 의혼(外婚) 금기에 어떠한 톰도 허용치 않으려는 의지와 왕의 근친상간 전통 사 이의 갈등에 비추어 설명될 수 있다 . 실제로 팡드 Pende 족은 추장의 근친상간에 대해 절대적인 냉업함을 보이는데, 어떤 추장은 자기 누이동생의 살에 난 종양을 치료했다는 이유로 추장직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너는 누이의 속살을 보았어. 그래서 너는 더 이상 우리 추장이 될 수 없어〉라는 말을 들으면서 . L. Makariu s ,

op. cit. , p. 671 . 팡드족에 대해서는 L. Sousbergh e , Etu i s pen i en s OU gaine s de chaste t e chez !es ba-Pende, Afr ica, XXIV, 1954 ; Str u ctu r es de par ente et d' allia n ce d' apr e s Jes for mules Pende, Memoir es de I'Ac ademi e r oy a le des sci’ etice s colonia le s beig es , t. IV, fas c. 1, 1951, Bruxelles, 1955. 등을 참고할 것.

에 대한 특별한 대책들은, 왕이 특히 이런 위험에 계속 노출되어 있을 때만 정당화된다. 따라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왕의 존엄성에 대한 근 본적인 규정은 여전히 똑같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근친상간을 엄 격하게 배척하는 사회에서도 왕은 의혼제 규칙을 위반했다고 간주되는 본래의 희생물을 대신하고 있다. 왕이 특히 이 근친상간의 경향을 계 속해서 갖고 있는 것은, 그가 바로 이 희생물의 계승자이자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복사본 속에서 원본이 갖고 있던 모든 특성들을 다시 발견하기를 기대한다. 여기서 근친상간이 절대적 금기라는 일반 법칙이 재확인되지만, 그 것은 너무 특별하게 그러하기 때문에, 우선 여기에서는 예의를 예의로 보고서 근친상간의 거부를 그것을 강요하는 문화의 툴 속에서 해석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본질적인 문제는, 원초적 추방자, 선조 혹은 건국신화의 영웅들에게 부여된 근친상간의 끊임없는 반복이, 서로 유 사한 사회들 속에서 어떤 때는 지극히 이로운 것으로, 또 어떤 때는 지극히 해로운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하는 문제이다. 왕의 근친상간에 관한 것을 제의하고는 종교적 관점이 아주 유사하던 사회들이 유독 왕의 근친상간에 대해서만은 이토록 큰 차이를 나타내 는 수수께끼는 소위 모든 합리적인 해석의 노력으로는 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우선 상당히 넓은 문화권에 걸쳐서 왕의 근친상간과 같은 종교적 테마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 말의 전통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어떤 〈영 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에 유의하자. 그러므로 각각 의 문화 속에 나타나는 근친상간 데마는 〈본래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여기에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곧 우리의 일

반 가정이 이제는 더 이상 효력이 없다는 것 울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초석적 폭력이 산화와 제의의 〈 모든 〉 의미의 모태라고 주장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극단적인 경우인 완전히 자발적인, 말하자면 절대 적인 폭력일 때는 문자 그대로 전실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완 전히 본래의 것과 이 제의의 완벽한 반복 사이에서 행해지는 집단 행 위에 대해 문자 그대로 무한히 많은 중간 단계가 있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문화적으로 공통적인 데마가 광범위한 지역에 존 재한다고 해서 어느 한 지역에 실제 창조적인 힘을 갖춘, 신화와 종교 적 측면의 중간 형태가 존재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렇게 해서 우리 는 똑같은 신화와 똑같은 제의에 대한 개작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 그 리고 그 많은 도시에서 똑같은 신이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다 양한 변이체와 다양한 탄생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신화와 제의가 세부사항에서는 무한히 변화할 수는 있지만, 언제나 몇 개의 중요한 데마들을 빠뜨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 중의 하나가 근친상간 테마이다. 고립된 한 개인이 희생위기, 다시 말해서 모든 차이소멸의 책임자로 간주되면 , 곧 그는 반드시 결혼 규칙 감은 기본적인 규칙의 파괴자, 달리 말해서 본 질적인 〈근친상간자〉라고 규정지어지게 된다. 근친상간자 추방이라는 테마는 보편적인 것은 아니지만, 서로 완전히 독립된 문화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 테마가 아주 상이한 지역들에서 저절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문화적 확산이라는 생각을 가능케 한다. 우리의 속죄양 가정은 한편으로는 확산주의가 지니고 있는 지나치게 절대적인 연속성이나 수동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 역시 너무 절대 적인 현대의 모든 형식주의의 불연속성 사이에 하나가 아닌 수많은 중간항들을 설정할 수 있게 해준다 . 우리 가정은 또한 모문화 cul t ure mere 로부터의 차용이라는 가설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자 문화 cul t ure fille 속에 들어있는 차용된 요소들에 일어나는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이것은 아주 비슷한 문화권 속에서 일어나 는, 우리가 이제 막 살펴본 왕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똑같은 근친상간에 대한 절대적 요구와 단호한 금지라는 그 기이한 모순을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근친상간이라는 데마는 계속 어느 한 지역의 의식 수준에서 재해석되고 있다. 제의적 사고는 건국의 메커니즘을 반복하려 한다. 질서를 잡고 평정 시키고 화해시키는 만장일치는 언제나 반대의 것, 다시 말해서 분리시 키고 평준화하고 파괴시키는 폭력의 절정에 뒤이어 나타난다. 악한 폭 력으로부터 질서와 평화라는 지고의 선으로의 이행은 거의 순간적으로 행해진다. 애초 사건의 상반된 이 두 측면은 한순간 병렬로 놓이게 된 다. 공동체가 다시 만장일치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짧은 순간의 무시 무시한 〈 상반된 것의 결합〉 속에서이다. 따라서 모든 희생제의는 어떤 형태의 폭력을 구현하고 있으며, 희생위기의 치유보다는 오히려 그 희 생위기에 직접 연관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다. 근친상간은 하나의 예일 뿐이다. 왕의 근친상간을 강요하는 체제 속에서 왕의 근친상간은 구원 의 한 과정으로 그래서 계속 되풀이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 리는 이것을 충분히 이해할 · 수 있다. 그러나 제의에는 희생위기의 재발을 피한다는, 고유의 본질적인 기 능이 있다. 근친상간은 희생위기에 속한다. 속죄양에게 적용될 때에는 은연중에 온통 이 위기를 의미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때에는 제의적 사고가 이 근친상간을 집단 구원의 한 요소로 보기를 거부할 수도 있 다. 이렇게 되면 제의적 사고는 완강하게 근친상간을 지극히 나쁜 행 위로, 죽 비록 그것이 원초적 희생물의 상속자나 대리인에 의해서 행 해진다 하더라도 공동체 전체를 전염성이 강한 폭력 속으로 빠뜨릴 위험이 있는 행위로 보기를 고집하게 된다• 근친상간은 예방해야 하는 병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병과 뒤얽혀 있는 어떤 치유책을 반복함으로써 이 병을 예방하려 한다. 제의적 사고는 해결할 길 없는 어떤 구분의 문제, 아니 어떤 해결이든

어쩔 수 없이 그 안에는 어떤 독단적인 요소가 들어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문제에 직면해 있다 하겠다. 선과 악은 동일한 현실의 양면에 불 과하다는 것을 제의적 사고는 우리들보다 훨씬 더 기꺼이 인정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무한정 인정하지는 않는다. 다른 인간문화의 양태보다 덜 차별화된 제의아지만 거기에도 차이는 분명히 있기 마련 이다. 제의는 일거에 위기를 제거한 다음에 바로 이 차이를 복원하여 더 공고히 하려 한다. 폭력과 비폭력의 차이에는 임의적인 것이나 상 상적인 것은 전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나 그런 것을 폭력의 차 이로 취급한다. 제의는 나쁜 상호성과 연관되어 있는 〈 나쁜 〉 폭력에 대해서, 분명히 공동체의 일치에 필요한 어떤 형태의 폭력을 〈 좋은 〉 폭력으로 선택한다. 따라서 제의는 다른 〈나쁜〉 근친상간에 비해서, 예를 들어 왕의 근친상간과 같은 근친상간을 〈 좋은 〉 근친상간으로 선 택할 수 있다. 또한 제의는 근친상간은 모두 나쁜 것이라고 결정지울 수도 있다. 이 말은 왕의 근친상간을, 글자 그대로 희생적인 것은 아 닐지라도 어쨌든 희생효과에는 기여할 수 있는 왕의 행위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 모든 인간사회에 있어서 해로운 폭력의 변신이 본질적으로 중요한 특성울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회도 이 변신의 비밀을 알아낼 수 없다는 그 역시 본질적인 무능 때문에 사람들은 결국 제의에 이르게 되었고, 이 제의는 아주 유사하면서도 동시에 아주 다른 형태로 나타 나지 않울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있었던 왕의 근친상간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놓고서 제의적 사고가 두 개의 정반대적인 해결책을 채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악한 폭력과 선한 폭력의 차이란 것이 실은 임의적이며 동시에 근본적이라 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채택된 해결책 뒤에는 반드시 반대의 해 결책이 나타난다. 근친상간이 강요되는 곳에서는, 심지어 왕의 근친상 간도 그것이 어떤 처벌을 요구하고 왕을 처형하는 것을 정당화해 주기 때문에, 근친상간은 여전히 해로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반면에 근친

상간이 금지되어 있는 곳에서는, 왕은 특별한 존재이며 그리고 그것을 인간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폭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왕의 근친상간은 여전히 이로운 것으로 통하고 있다. 이처럼 상반된 의미를 갖는다 해서 근친상간을 장기판 위의 어떤 칸이라도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단순한 졸로 보아서는 안된다. 또한 이 것은, 속물근성과 유행에 의해 보태어질 수 있거나 아니면 반대로 이 것들의 구성요소로부터 떼어낼 수도 있는 그런 싸구려 장신구도 아니 다. 순전히 형식적인 구조주의를 둘이대어 이것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 로 만들어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정신분석학을 둘이대어 아주 거창 한 것으로 만들어서도 안된다. * 정통 프로이트주의가 가장 취약한 곳이 바로 이런 일반인류학적인 분야이다. 왕의 근찬상간, 혹은 심지어는 의디푸스 신화에 관한 어떤 정신분석학적 해석도 없다. 아프리카 왕국들과 의디푸스 신화 사이의 그 희한한 관계에 대한 해석도 없다.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에 관한 프 로이트의 멋진 색인이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그런 것도 전혀 없었다. 근찬상간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무능력을 확인하는 대신에 대부분의 연구자들, 심지어는 정신분석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가진 연구자들 도, 가깝든 멀든 근친상간 데마와 관계가 있는 것은 모두 넌지시 정신 분석학에게 떠넘겨버린다. 우리 시대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프로이트 에게 정중하게 모자를 들어 울리지 않고서는 왕의 근친상간이라는 문 제를 언급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전혀 아무것도 말한 적이 없었으며, 지금도 왕의 근친상간에 대한 결정적인 것아나 우리의 이해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나 프로이트의 가장 뛰어난 점을 상기시켜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있다. 19 세기말 서구문화에 있어서 근친상간 데마의 거의 완전한 부재는

프로이트로 하여금 모든 인간문화는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을 범하고 싶다는 보편적인, 그러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으로 억압되어 있는 이 욕 망에 의해 굴절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원시신화와 그리고 제의 들 속에 근친상간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 가정의 명백한 증거라고 해석되었다. 그러나 정산분석학은 어떤 특별한 문화에는 근친상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른 문화 속에서 근친상간이 존재하는 것과 어떻게, 그리고 왜 똑같은 것을 의미할 수 있는가를 밝혀내는 데는 결 코 성공하지 못했다. 분명히 프로이트의 생각은 틀렸다. 그러나 그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듯이 그가 틀린 것에도 종종 일리가 있다. 프로이트는 의디푸스 신에 나타나는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에는 모든 인간문화의 본질적인 어떤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예감하였다. 그가 책을 쓰던 그 당시의 문화적 맥락에서 그는 희생양에게 전가된 죄악들 속에서 모든 인간들의 감추어전 욕망, 모든 인간 행동의 열쇠를 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당시의 몇몇 문화적 증거둘을, 부분적으 로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부재라고 정의될 수 있을 어떤 부재에 비 추어 해독할 수 있었다. 이것이 아무리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신화와 종교에 관해서 아마도 이것과 견줄 만한 정신분석학 의 업적은 없을 것이다. 백일하에 드러난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은 과연 무엇을 감출수 있단 말인가? 더 잘 감추어전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일 까? 사람들은 기꺼이 그렇다고 할지도 모론다. 그러나 제의 속에서 이것이 실질적인 형태로 나타나면, 거기에서 신화의 다른 테마들이나 심지어 근친상간 그 자체마저도 밝혀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9) 19) 정신분석학의 가정들이 가장 기분 좋아하는 것은 틀림없이 전 지구상의 신화나 제의의 전집 속에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일 것이다. 이 부재가 없을 때, 죽 천부살해와 근친상간에 대한 언급이 계속 존재할 때, 이 사실을 정신분석학이 어떻게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실제는 그러나 이런 국단적인 경우들과는 무관하다. 친부살해는

다른 범죄와 거의 같은 수준으로 존재한다. 근친상간도 마찬가지이다. 누이나 다 른 친척과의 근친상간이 그 속에 있는 어떤 무의식의 조작을 드러낼 정도로 그 렇게 심하고 전면적이지 않는 한,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이란 것도 기껏해야 이런 다른 근친상간들 중의 〈 군계일학p r i mus int e r pa res> 정도일 뿐이다. 자신의 원 칙과도 모순되는 온갖 수단과 〈지명도〉만 믿고 99.8% 아니면 0 . 3% 의 지지를 예 상하고 선거에 참여했다가 다음날 똑딱 〈낙선〉하고 만 독재정당의 우스운 상황과 똑같은 상황에 처 해 있다. 머독 Murdock 이 규정했던 6 개의 주요 문화권 속에 비교적 고루 분포되어 있는 50 개의 문화 속에서 찾아낸, 수많은 〈외디푸스 유형〉의 신화 속에 있는 측근간의 폭력에 관한 통계조사의 끝에 가서, 클루콘 Cl y de Kluckhohn 은 다음과 갇이 결 론을 내린다 . 〈측근 사이의 적대관계를 본질적인 신화 모티브로 보는 이 주장은 훌륭한 논거로 뒷받침되고 있다. 그리고 같은 가족 사이의 물리적 폭력에 기초를 둔 이 주장도 물론 지지할 만하다. 그렇지만 부모살해의 모티브나 래글런 경 Lord Ra g lan 의 시역죄는 상당한 억지해석 없이는 변호될 수 없을 것이다〉. Recurrent Themes in My th and My thm akin g , in My th and My thm akin g , Hen ry A. Murray ed., Bosto n , 1968. 물론 우리는 이 통계자료에 상대적인 중요성을 부여할 뿐이다.

어떠한 해석도 정신분석학이 하지 못한 것을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정신분석학에만 매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신화나 제의의 근친상간에 대해 프로이트의 원리와는 다른 감추어져 있던 원리를 적용시켜 정신 분석이 한번도 해명해 내지 못한 데마들이 해명되는 것을 보게 되면, 우리는 당연히 그의 이론의 밑바닥이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의디푸스 신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왕국들에서도 근친상간 이 환원할 수 없는, 즉 가장 원초적인 사건인 것은 아니다. 근찬상간은 친부살해, 죄악, 퇴폐 그리고 신화를 가득 채우고 있는 모든 형태의 잔인무도함이나 괴상망측함과 같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암시라고 보 아야 한다. 이 모든 데마들은 폭력의 무차별화 현상을 나타내기보다는 더 많은 부분을 다론 것처럼 가장하여 숨기고 있다. 신화 속에 있는 억압된 전실이 바로 이 폭력의 무차별화 현상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욕망이라기보다는 공포, 즉 절대적 폭력에 대한 공포이다. 욕망 너머에,

욕망보다 더 강하여 욕망을 침묵시키고 제압할 수 있는 이 이름모를 공포가 있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일반화된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은 희생위기의 완전한 종말을 나타낸 다.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이 한 사람에게서만 일어날 때는 이것이 온통 그 희생양에게만 전가되기 때문에, 이것은 완전히 감추어져 있는 바로 x이u al위ite 기 이 의 아 니반다투.명 그한것 가은면 드인러 셈나이기다 .때 문신에화 의전 정감한추 어토진대 가토 대아는니다 성. 욕성 s욕e­ 은 폭력과 서로 경쟁함으로써 폭력이 폭발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제 공한다는 그 정도의 의미에서 토대의 일부를 이룬다. 자연현상과 마찬 가지로 성욕도 신화 속에 실질적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성욕은 자연보 다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결정적인 것은 아 니다 . 왜냐하면 희생양이라는 무지에 의해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지 못 함으로써 인류가 파멸할지도 모를 때, 상호적 폭력이 위험을 막기 위해 순전히 개인적인 한 폭력의 모습으로 친부살해와 근친상간 속에 나타 나는 것이 바로 이 성욕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데마들이 자연현상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감추고 있다는 생각이, 20 세기에 들어와서는, 그들 욕망의 순전히 성적이며 〈 근친상간 적〉인 진실을 마주한 인간의 두려움을 감추고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된다. 이 두 생각은 모두 신화적이다. 그것은 이 생각들도 지금까지 나온 다른 주장들과 마찬가지로 항상 신화가 감추었던 것을 한번 더 감추기 때문에, 이것들 또한 신화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신화의 작용 울 계속해 나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생각을 동일한 차원 에 놓고 보아서는 안된다. 프로이트는 그의 선배들보다 〈덜〉 신화적이 다. 천둥이나 지전에 비해 성생활은 인간의 폭력에 더 많이 관련되어 있으며, 모든 신화생성의 감추어진 토대에도 더 가깝기 때문이다. 〈있 는 그대로의〉, 〈적나라한〉 성욕은 폭력의 연속선상에 있다. 따라서 성 욕은 폭력을 숨기고 있는 마지막 가면이자 동시에 폭력이 드러나는 출발점이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것은 언제나 사실이다. 종종 〈성의

해방 〉 시기 다음에는 어떤 폭력의 분출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프로이 트의 책 속에서도 그러하다 . 이 책의 역동성은 이리하여 초기의 범성 욕주의 p a n- sexual i sme 를 초월해서 죽음 본능과 갇은 『 토템과 타부 Tote m et Tabou 』의 모호한 계획으로 향하려 한다. 따라서 우리는 프로이트에 게도, 그가 어령풋이 찾고 있던 어떤 억압, 죽 희생제의적인 무지에 의해 항상 감추어져 있던 절대적 폭력을 폭로하려는 단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제 5 장 디오니소스 거의 모든 사회에는 오랫동안 제의적 성격을 갖고 있던 축제가 있 다. 그 속에서 현대 학자들은 특히 금기의 위반을 본다. 거기에서는 성적 혼란이 허용되며 때로는 요구되기도 하는데, 심지어 어떤 사회에 서는 그 정도가 전면적으로 보편화된 근찬상간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금기의 위반은 차이의 전면적 소멸이라는, 보다 더 큰 틀 속에 넣고 보아야 한다. 일시적으로 가족과 사회의 위계질서는 없어지거나 전도 된다. 아이들은 더 이상 부모에게 복종하지 않고, 하인은 주인에게, 신 하는 군주에게 더 이상 굴복하지 않는다. 축제의 미학적 부속물이라 할 만할 광대들의 어울리지 않는 갖가지 색깔의 옷이나 변장술 그리고 그들의 끊임없는 횡설수설 속에서도 차이의 소멸 혹은 전도라는 이 테마가 다시 나타난다. 축제 기간에는 사리에 어긋나는 접합이나 얼토 당치 않는 만남이 참정적으로 용인되거나 때로는 조장되기도 한다. 우리 예상대로 차이소멸은 폭력이나 갈등과 관련이 있다. 아랫사람 은 윗사람을 무시하며 다른 무리들은 서로에게 악의에 찬 조소를 보 내고 불화와 분쟁이 창궐한다. 많은 경우 적의에 찬 경쟁이라는 이 데 마는 놀이나 경쟁이나 다소 제의화가 되기도 한 스포츠 시합 등의 모

습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되면 어디서든 사람들은 생업을 멈추고 오랫 동안 모아두었던 양식을 다량으로, 또 집단적으로 소모하게 된다. 축제가 희생위기를 기념하는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토록 끔찍한 사건을 잔치 분위기 속에서 기념한다는 게 이상하게 보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는 쉽게 해소될 수 있다. 시종 축 제를 주도하면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소위 축제적인 요소가 축 제의 존재이유인 것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축제는 그 절정과 결 말에 나타나는 희생의 준비이다. 로제 카일루아 Ro g er Ca i llo i s

1) Rog er Ca illo is , L'Homme et le Sacre, Paris , 1950, p. 121. ® 로제 카일루아 Rog er Ca illo is ( 1913-1978) : 프랑스 에세이스트. G. Ba ttai lle 와 함 께 College de soci ol og ie 설립 . 인문과학 잡지 Dio g e n e 주도

우리는 이미 이런 종류의 해석들을 여럿 보았지만, 그것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축제의 툴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제 의적 근친상간도 끝에 가서는 희생과는 거의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이로운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어떤 사회에서는 귀족이나 장인(匠人)들 까지도 은밀하게 근친상간을 범하기도 한다. 그것은 이 행위가 그들이 어떤 힘든 일을 준비할 때 그들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왕들의 즉위식과 회춘제의는 종종 축제와 유사한 성격을 갖 고 있다. 역으로 진짜 왕이 직접 연루되지 않은 축제에는 그 역시 곧 희생제의에 쓰일 희생물인 일시적 왕 혹은 〈광대 왕 ro i du fo u 〉이 있다.

축제의 끝에 가서 왕이나 이 대역자는 처형되고 만다. 실질적이든 환 상적이든 일시적이든 지속적이든간에, 모든 최고 권력은 항상 이 희생 양에 대한 이 초석적 폭력에 근거하고 있다. 축제는 다른 희생제의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뒤르켕 Durkhe i m 이 잘 이해했듯이 이것은 초석적 경험을 되풀이하고 모든 생명력과 생산 성의 원천인 그 기원을 다시 생산하여 문화질서를 되살리고 다시 갱 신하려 한다. 사실 집단의 응집력이 가장 단단해지면서 폭력에 대한 불안이 가장 커지는 때가 바로 이때이다. 원시인에게 있어 문화질서는 소중하지만 깨어지기 쉬운 재산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보존하고 강화해야지 그것을 거부하거나 변 형시키거나 심지어는 어떤 면에서건 그것을 약화시켜서는 안되는 것 으로 여겼다. 축제에는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그러하므로 우리가 원시 종교 사상에 두영하는 〈금기〉에 관한 회의주의나 원한 같은 것이 하 나도 없었다. 현대 심리사회학의 상투어인 〈긴장완화〉니 영원한 〈이완〉이니 하는 말들은 제의의 원래 정신과는 전혀 낯선 정신 속에서 제의의 단 한 면만을 그것도 불완전하게 포착하고 있을 뿐이다. 축제는 희생위기와 그 해결 사이의 연속성을 가정하는 폭력 해석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때부터 그것의 좋은 결말과 분리될 수 없는 위기 그 자체가 축제의 소재가 된다. 그러나 이 해석만이 유일한 것은 아니 다. 왕의 근친상간에서 우리는 이미 위기와 그 결말의 관계에 대한 종 교적인 사고는 두 개의 상반된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거기 서는 때로는 연속성이 때로는 불연속성이 드러났다. 이 두 해석은 모두 부분적으로 옳고 부분적으로 틀린 것이다. 사실인죽 위기와 초석적 폭 력 사아에는 실제로 어느 정도의 연속성과 얼마만큼의 불연속성이 있 다. 종교적 사고는 이 두 해결책 중 하나를 택하여 처음에는 그것이 비록 다른 쪽으로 향하더라도 끈질기게 그것에 집착한다. 두번째 선택은 어떤 사회의 선택일 거라고 우리는 거의 선험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막 언급한 식의 축제 옆에는 항시 〈 반(反)-축제 an ti-f Ne 〉가 존재해야 한다. 희생적 추방제의는 방종 과 문란의 시기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엄격한 금기준수의 시 기 다음에 울 것이다. 그때에 공동체는 상호적 폭력의 재발을 피하기 위해서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사실 이것이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사회들은 축제와 아주 유사하면서-감은 주기성, 일상행위의 중단 그리고 물론 희생 적 추방제의-동시에 아주 다른 제의를 갖고 있는데, 이 제의는 인 류학적 해석의 측면에서 때로는 요구되고 때로는 그 반대로 거부되는 왕의 근친상간과 유사한 수수께끼를 이루고 있다 . 여기서는 모든 문화 적 금기들이 일시적으로 허용되기는커녕 더 강화된다. 스와질랜드와 인쿠알라 제의들은 많은 점에서 반축제의 정의와 일 치하고 있다. 이 제의 기간에는 내내 가장 합법적인 성관계도 금지된 다. 아침 식사에 육식도 금지된다. 각 개인들은 십지어 그들 자신들과 의 육체적 접촉도 피해야 된다. 그래서 그들은 세수하거나 머리를 긁 적이는 것 등도 해서는 안된다. 불순한 것의 전염, 즉 폭력의 급작스런 위험이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게 된다 . 노래와 고함소리도 금지된다 . 아 이들이 놀면서 너무 소리를 쳐도 야단맞게 된다. 『황금가지』에서 프레이저는 반축제의 좋은 예를 들고 있는데, 황금 해안에 있는 케이프 코스트 Cap e Coas t의 예가 그것이다. 4 주 동안 칭과 총은 절대 소리를 내지 않는다. 장황한 야의연설도 금지된다 . 혼란을 야기시켜 이야기소리가 높아지면 그들은 추장 앞에 끌려가는데, 추장 은 그들 모두에게 많은 벌금을 부과하게 된다. 잃어버린 가축 때문에 일어나는 분쟁을 피하기 위해 버려진 동물은 누구든 먼저 발견한 자의 것으로 되며 실제 주인은 이에 대해 고소도 할 수 없게 된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이 모든 조치들은 폭력 갈등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프레이저는 이에 대해 해석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논리적 시야보다 더 뛰어난 그의 민족학적 직감으로 이런 현상을 축제의 대

열에 끼워 넣었다. 반축제의 논리도 축제의 논리만큼이나 명백하다. 그 것에 앞선 끔찍한 단계를 생략하면서도 폭력적 만장일치의 이로운 효 과를 재생산한다. 이 두 순화제의 사이에 걸리는 시간이 어떠하든, 첫 번째에서 두번째로 다가갈수록 폭력 폭발의 위험이 더 커진다는 것은 명백하다. 불순함은 누적된다. 제의의 찬양 바로 앞에 오는 시기, 죽 희생위기와 연관된 이 기간에는 각별히 조심하면서 나다녀야 한다. 사 회공동체는 진짜 탄약고 같아진다. 소란은 그 반대인 적막으로 변하게 되고 바카스제는 사순절로 되지만 제의의 목적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축제와 반축제의 이쪽에, 더 복합적이면서 위기와 질서의 관계가 더 담겨 있는 〈 혼합형 m ixt es 〉의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 이 해석은 연속성 과 불연속성을 다 고려하는 해석이다. 적어도 어떤 경우든 이들을 구 분하는 것은 본질적 폭력을 회피하는 것, 죽 한충 더 진행된 신화 생 성에서 나온 그 뒤의 현상일 수 있다. 현대의 학자들은 자신의 선입견 과 일치하는 새로운 차별화를 환영하고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그 자 신이 이 차별화를 강조하거나 혹은 스스로가 이것을 만들어낼 때도 있다. 우리가 축제의 진정한 독성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은 제의 뒤에 감추 어진 사건들이 갈수록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 대상은 사라 지고 부수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보다 앞서게 된다. 이리하여 하나의 제의가 여러 개의 시각들로 분해되는 것이다. 종교적 사고를 이해하지 못할 때, 제의에서 뒤늦게 파생되어 나온 부수적인 성질을 두고 우리는 제의의 본질적이고도 고유한 특성이라고 여기게 된다. 금욕과 고행이 축제와는 정반대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기원은 같다. 그리고 제의가 아직 행해지는 곳에서, 이것들은 종종 〈변증법적인 d i a­ lectiq u e> 균형을 취하고 있다. 그들의 참된 기능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이들은 서로 분리되며 또 그럴수록 이 제의둘은 항상 그것을 더 차별 화시키려는 스콜라풍 논의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과학적 묘사도 당연 히 이같은 범주에 속한다.

어떤 축제 속에는 옛부터 인간회생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특히 프 레이저 이후의 현대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런 관습의 모든 변별적 특칭과 그것의 수많은 변형체들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 으로든 초석적인 집단 폭력과 구원의 린치와 관련되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모든 희생의 처형이 사라지고 난 곳에서도 이런 사 정을 설명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니다. 이런 처형이 사라지더 라도 악령추방제의와 같이 희생적 성격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다른 제의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 많은 경우에 있어 이 제의들은 그것의 결말이기도 한 축제의 클라이맥스 부분에 위치해 있다. 이것은 이 제 의들이 축제 속에서 희생 바로 그 자체의 위치에 있으며, 희생과 직접 관련이 없는 곳에서는 회생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잘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제의둘이 희생을 대신한다고 다시 한번 단언할 수 있다. 악마나 나쁜 귀신을 어떻게 쫓아내는가? 고함치면서 팔을 마구 휘짓기도 하고 무기나 부엌용기들로써 부닥치는 소리를 내면서 허공을 막대기로 치기도 한다. 악마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을 정도로 어리석을 때 비질로 악마를 내쫓는 것보다 사실 더 자연스럽고 더 확실한 것은 없을 것이다. 프레이저 같은 현대 학자는 미신은 악령을 겁주면 도망가 버리는 어떤 야비한 짐승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합리론은 그것을 하찮은 것으로 여길수록 더욱 더 명백하게 드러나는 이런 관습에 대해서 거의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고 있다. 많은 경우에서와 같이 지금 이 경우에서도 만족한 이해와 〈아주 자 연스런 것〉이 아주 홍미로운 사실을 감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원칙적 으로 귀신추방 행위는 악마나 그 관련자에 대해 행해지는 일종의 폭 력이다. 어떤 축제에서는 이 최종적 폭력에 앞서 〈귀신추방자 자신들 사이의〉 모의투쟁이 행해진다. 우리는 여기서 많은 희생제의와 아주 유사한 장면을 다시 보게 된다. 제물을 바치기에 앞서 제사장들 끼리의 제의적인 분쟁이 있는 것이 그러하며, 실제적이거나 아니면 모방된 대 립이 있는 것도 그러하다. 이런 현상은 모두 다 이같은 유형으로 설명

되어져야 한다. 프레이저가 들고 있는 한 사례에 의하면, 마울의 젊은이들이 (각기 훈어져 있는)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각각의 집에서 마귀를 쫓아낸 다. 이 순방은 처음 찾아갈 적당한 집에 관한 논쟁으로부터 시작된다 (뛰어난 실증주의자인 프레이저는 그의 이론으로써 설명해 내기 힘든 세세한 것까지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이 접에 있어서만은 그는 우리의 존경을 받을 만하다). 이 예비 논쟁은 희생위기를 모방하고 있다. 이 논쟁 다음 에 오는 희생이나 귀신추방은 만장일치의 폭력을 모방하고 있는데, 곧 장 상호적 폭력에 접목되는 이 만장일치의 폭력은 사실 그것의 놀라운 효력에 의해서만 상호적 폭력과 구별이 된다. 이 논쟁이 끝나자마자 만장일치가 생겨나는데 이 순간이 바로 희생 양, 죽 그 제의의 순간이다. 이 논쟁의 목적은 바로 이 제의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추방할희생물의 선택이 그 목적이었던 것이다. 사 실, 위기 동안에는 누구나 결정적인 폭력으로써 적대자를 찍소리도 못 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모두들 그 다음에는 어떤 보복도 뒤 따를 수 없을 직접적인 일격을 가하기를 원하는데 이것이 바로 제의의 모델이다. 그리스의 어떤 문헌은 한 마울이나 군대와 같은 집단이 어떤 신에게 봉헌하는 인간회생에 대해 어령풋이 얘기하고 있다. 여기서 구성원들 은 희생의 원칙에 대해서는 뜻이 일치하지만 희생물의 선정에는 일치 하지 못한다. 문제가 무언지 정확히 이해하려면 사건의 순서를 뒤바꿔 보아야 한다. 먼저 폭력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아무 이유도 없다. 그 다음으로 희생제의적인 설명이 나타난다. 이것은 정말로 어처구니 없 는 특성인 폭력의 이유없음을 감추고 있다는 의미에서 진짜로 희생제 의적이다. 희생제의적 설명은 분쟁을 끝나게 하므로 결국 회생적인 것 으로 밝혀지는 최후의 폭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조그만 신화 조작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질서를 다시 세우는 집단 살해는 집단 구성원들을 사로잡고 있는 서로를 죽이려는 원시적인 욕망에다가

회고적으로 간단한 제의의 틀을 두사한다. 그러면 살해는 희생제의가 되고, 그에 앞선 혼란은 가장 나은 희생물, 죽 신자들의 신앙심 혹은 신의 선택이 요구하는 희생물이 무엇인지에 대한 제의적 성격인 셈이 다. 사실 〈누가 누구를 희생시킬 것인가? 〉 라는 문제만 남게 된다. 〈귀신을 추방할 첫번째 집〉에 대한 논쟁은 이와 유사한 어떤 것, 죽 위기와 그것의 폭력적 해결의 전체과정을 숨기고 있다. 귀신추방은 연 쇄복수의 마지막 고리에 다름아니다. 상호적 폭력에 몸을 내말기고 난 뒤 그 가담자들은 모두 함께 〈 허 공〉을 친다. 여기서 하나의 사실이 뚜렷해지면서 모든 제의와 공통된 것이 되지만, 결코 이 귀신추방 유형에서만큼은 명백하지 않다. 제의적 폭력은 어떤 적대자도 부추기지 않으며 더 이상 어떤 반대자도 만나지 않는다. 아무도 반격하지 않을 타격을 〈 모두 함께 〉 가하고 있는 한, · 귀신추방자들은 적어도 〈전심으로는〉 서로에게 다시 타격을 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제의는 그것의 기원과 기능을 잘 드러내고 있다. 희생양 메커니즘 덕택에 다시 만들어전 만장일치는 다시 파괴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공동체는 〈악령〉에 대항해서 단결해 있기를, 즉 서로 간에 끊임없는 적대관계에 다시 빠져들지 않을 해결책을 계속 고수하 기를 바란다. 제의는 이 해결책을 강조하고 또한 그것을 강화시킨다. 종교적 사고는 끊임없이 경이로운 것 중의 경이로운 것으로, 폭력의 마지막 결정판으로 되돌아온다. 그런데 이 결정판 폭력은 항상 너무 늦게 그리고 너무 비싼 대가를 치루고 난 뒤에야 나타나므로 사람들은 이것을 초월적 폭력이 가르고 파괴하는 폭력, 즉 더 이상 〈농담〉이 아 닌 상호적 폭력에 다시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보존하고 상기하고 기념하고 되풀이해야 할, 죽 어떤 수를 써서라도 다시 생명을 불어넣 어야 하는 가장 소중한 것으로 본다.

* 희생위기와 폭력의 만장일치에 대한 우리의 일반 가설을 통해서, 앞 에서 보았다시피 지금까지 희미한 채로 그럭저럭 지나쳐온 축제의 몇 가지 양상이 분명히 드러났다. 그 대신에 축제는 이 가설의 설명력을 확인해 준다 . 그러나 축제에 대한, 일반적으로 말해 제의에 대한 현대 인의 무지가 종교적인 것의 변천과정을 계속 연장하고 유지하기만 한 다는 것을 지적해야겠다. 제의적인 면모가 사라질수록 축제는, 현대의 학자들이 그렇게 보는 것처럼 점점더 긴장완화의 허용이라는 면으로만 한정되게 된다. 제의의 점차적인 소멸과 더해만 가는 그에 대한 오해는 사 실 똑 같 은 것이다 . 신화와 제의, 죽 총체적인 종교적 사고의 붕괴는 아무런 거짓없는 전실의 등장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희생위기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다 . 희생양과 그것이 재건하는 일치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는 탈재의 화된 축제의 우호적이고도 즐거운 겉모습 뒤에는 희생위기와 상호적 폭력이라는 모델이 있다 . 오늘날 진정한 예술가들이, 갈수록 휴가로 변 해 버리는 축제의 무미건조함, 〈여가의 세계〉라는 유토피아적인 싱거 운 약속 뒤에서 비극을 예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휴가가 성겁고 무기력하고 통속적일수록 사람들은 그 속에서 드러나는 공포와 끔찍함을 예견하게 된다. 쉽게 볼 수 있으며 이미 다른 데에서 여러 형태로 다루어전 〈변질되기 시작한 휴가〉라는 주제는 펠리니 Fellin i® 같은 이의 영화를 지배하고 있는 주제이다. 변질된 축제가 매력적인 모순이 가득찬 데카당스의 미학적 주제일 ® 펠리니 Federico Fell ini ( 1 920- ) : 이탈리아 영화감독 . 〈 8 과 1/2 Huit et dem i)이 라는 유명한 영화 이후로, 환상적이며 통찰력 있는 영화를 제작. 최근에는 끈질기 게 인간조건의 문제에 매달리고 있다.

뿐 아니라 모든 〈‘데카당스〉의 실제 지평에 있다. 이 를 확실히 알기 위 해서는 지속적인 전쟁이 창궐하는 야노마모 Yanomamo 족과 같이 병든 사회나, 더 나쁜 경우인 카인강족처럼 전면적인 폭력적 분해가 일어나 는 문화권의 축제가 어떠한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축제는 그것의 모든 제의적 성격을 상실하고 그것의 폭력적 기원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에서 변질되고 있다. 그것은 폭력을 종식시키기는커 녕 새로운 복수의 순환을 유발하고 있다. 우리가 회생에서 보았던 그 리고 모든 제의에 들어 있는 과정과 유사한 전도된 과정에 의해서, 축 제는 더 이상 해로운 힘에 대한 제어장치가 아니라 동맹군이 된다. 사람들은 장차 희생양이 될 사람을 축제에 초대해서 마시게 하고는 살해해 버린다. 카인강족은 축제 개념에 항상 전쟁과 학살을 결부시킨다. 매번 그들 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결코 초대 를 거절하지 않는다. 잔치를 위해 부족 대부분이 모인 축제를 통해서 동족관계는 쇄신되고 강 화되며 서로가 느끼는 호의의 감정은 일체감 속에서 싹튼 들뜬 분위기 속에 서 더 발전되어 간다고 그들은 믿었을 것이다 . (……) 이런 식으로 진행되던 카인강족의 축제에는 그러나 종종 온정이나 단결만 큼이나 자주 분쟁과 폭력이 나타나곤 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 도취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들의 피흘린 무훈담을 자랑하였다 . 그들은 자신의 창 이나 몽둥이를 공중에 휘둘러 바람소리를 내면서 자랑스럽게 나다니는 등, 자신을 과시하곤 했다 . 그들은 과거의 승리를 떠들썩하게 자랑하면서 장차 저지를 살해를 예고하고 다녔다. 점점 더해 가는 흥분과 도취 속에서 남들이 자기 부인을 소유했을 거라는 의심에서, 아니면 역으로 그가 그들의 아내를 소유하여 그들 증오의 대상이 됐을 거라는 추측 때문에 그들은 이웃을 적대 시하면서 싸움을 걸었다. 카인강족의 민속에는 학살로 끝이 나는 축제이야기가 많이 있는 데, 〈누군가를 위해 맥주를 준비한다〉라는 말은 설명이 필요없을 정

도로 아주 끔찍한 의미를 갖고 있다 . 2)

2) Jun g le Peop le , pp. 56-57.

晶 우리가 축제에 관해서 터득한 일반적인 지식은, 『바카스의 여신도들 Les Bacchan t es 』이라는 두번째 비극을 통해서 두번째 희랍신화인 디오 니소스 Dio n y so s 신화의 해독에 접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이 새로운 분석은 부분적으로 의디푸스 신화를 되풀이할 것이다 . 그것 은 폭력 작용에 대한 우리들의 근본가설을 확인시켜 주면서 그것의 어떤 면모를 밝혀줄 것이며, 우리를 새로운 문제로 이끌고 갇 것이다. 바카스제는 앞에서 규정한 의미에서 하나의 축제이다. 거기에는 우리 가 거론했던 본질적 요소들이 모두 들어 있다 . 『바카스의 여신도들』은 우선 하나의 제의적 바카스제로 나타난다. 여기서 이 비극 시인은 차 이의 소멸을 강조한다. 이 신은 성과 나이뿐 아니라 빈부를 비롯한 사 람들 사이의 장벽을 헐어버린다. 모두가 디오니소스의 예배에 불려 나 가는대 합창대에서 노인은 젊은이와 섞이며 여자는남자와 똑같아진다. 유리피데스의 바카스제는 데베 여인들의 바카스제이다. 아시아에 그 의 예식을 전파하고 난 뒤 고향으로 돌아온 디오니소스는 젊은 후계 자의 모습옹 하고 있는데, 이 모습은 대부분의 남자와 여자들을 끄는 이상한 매력으로 작용한다. 진짜로 이 신에 사로잡힌 자들, 죽 아가베 Ag av e 아주머니와 사촌 이노 Ino 와 테베의 모든 여자들은 그들의 가정 울 박차고서 시테롱 C it heron 을 방랑하면서 거기서 첫번째 바카스제를 울린다. 처음에는 목가적이던 이 여제관들의 방랑이 곧 유혈의 악몽으로 변 하게 된다. 흥분한 여자들은 남자들이나 짐승을 향하여 무차별적으로 달려든다. 단지 아가베의 아둘이면서 데베의 왕이던 펜테우스 Pen th ee 만이 그런 행동에 저항한다. 그는 완강하게 그의 사촌의 신성을 부인

한다. 『외디푸스 대왕』의 데레시아스와 크레온처럼, 펜데우스는 밖에서 돌아와 지독한 어지럼증으로 쓰러지기 직전에 이렇게 상황을 정확히 규정한다. 우리 도시를 엄습해 오는 예기치 않았던 악을 알려주기 위해 나는 여행에서 돌아왔도다. 〈예기치 않았던 일〉, 이것은 분명히 희생위기이다. 이것은 그 희생 자들에게 엉뚱한 행동을 암시하기도 하고, 두 노인들처럼 신중함이나 기회주의 때문에 그에게 굴복하는 자들이나 헌신하는 자들을 쓰러뜨 리면서 아주 빠른 속도로 번져나간다. 그런데 이에 대해 홀로 부정하고 나선 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이 불행한 펜데우스였다. 왜 불행하냐 하면 복종하거나 반항하거나간에 폭력의 승리는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바카스신의 정령은 해로운 감염과 같은 것이 된다. 그를 이상한 잔치에 끌고가려는 할아버지를 떨치면서 펜테우스는 〈 날 감염시키려 들지 말고, 가서 바카스 제관 노릇이나 해요〉라고 의친다. 디오니소스적인 분출, 그것은 제도의 파멸이며 이 아야기 절정 부분에 나오는 왕궁 파괴가 의미하는 문화 질서의 붕괴이다 . 이 폭력의 신울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펜데우스는 디오니소스가 화한 그 젊은 선 동자를 두옥하려 하지만, 모든 것이 화염 속에서 산화하는데도 이 신은 그 잔해 속을 유유히 빠져나간다. 비극 『바카스의 여신도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변질된〉 축제이다 . 그러나 우리는 이런 유감스러운 변화에 대해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우리가 살펴보는 이 바카스제야말로 사실 원래의 바 카스제, 죽 희생제의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비극은 우리식의 축제 해석을 추인해 주는데, 그것은 비극이 축제를 상호적 폭력이라는 폭력 의 기원으로 끌고가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소포클레스가 의디푸스 신화를 취급한 것과 같이 유리피데스도 디오니소스 신화와 예식을 취

급했다는 의미이다. 그는 제의와 신화적 의미 뒤에서 갈등의 대립을 다시 발견하였는데 이것들은 겉으로 드러내는 것보다 더 많은 부분을 감추고 있는 것들이다. 바카스제가 차이소멸이라는 희생위기의 본질적인 모습을 계속 보여 줄수록 우리는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처음에는 평화롭던 디오 니소스적인 무차별이 곧 폭력적인 무차별로 변하게 된다. 바카스제에 서는 사랑과 우애의 잔치처럼 보이던 성적인 차이의 소멸이 비극의 이야기 속에서는 적대관계로 나타난다. 여성들이 사냥이나 전쟁처럼 가장 폭력적인 남자들의 행위를 하게 된다. 그녀들은 여자다운 연약한 남자들에게 창피믈 준다. 긴머리의 멋쟁이 청년 모습으로 변신한 디오 니소스는 혼란과 파괴를 선동한다. 그의 여자 같은 용모를 비난하던 펜데우스도 야릇한 욕망에 사로잡혀, 시데롱 언덕의 그 여자들을 엿보 고 싶어서 자신도 여제관으로 가장한다. 『바카스의 여신도들』에서는 또한 사람과 동물 사이의 차이소멸도 일어나는데 그것은 항상 폭력과 연관되어 있다. 여제관들은 그들 손으 로 풀어놓은 소떼들을 그들을 방해하는 남자로 여기고서 그 소떼들을 향해 달려든다. 그리고 미친듯이 화가 난 펜데우스는 디오니소스를 묶 는다는 것이 수소 한 마리를 축사에 매어버린다. 아가베는 그 반대의 실수를 범하는데, 여제관들이 염탐하던 그의 아들 펜데우스를 잡았을 때, 그롤 〈새끼 사자〉로 여기고서 그녀들 중 맨 처음으로 그를 때린다. 이 비극 속에는 소멸해 가는 또 다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디오니소스와 펜데우스, 즉 신과 인간 사이의 차이이다. 디오니소스에 게는 펜테우스와 유사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디오니소스는 양면 적이다. 한편에는 메나데스 Menades ® 들이 보는 디오니소스, 죽 인간과 신의 법칙과 평등을 지키는 수호자 디오니소스가 있으며,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가 이제 막 살펴본 이 비극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미 ® 메나데스 Menades : 바카스신의 무녀.

풍양속 파괴자로서의 디오니소스가 있다. 이같은 양면성은 펜테우스에 서도 찾을 수 있다. 이 데베의 왕은 우리에게 전통적 질서의 경건한 수호자로 나타난다. 그 반면 코라스의 노래 속에서는 펜테우스가 그의 행동이 데베인들에게 강한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무도한 이교도나 위 반자로 나타난다. 사실 펜테우스는 그가 막으려던 혼란을 결과적으로 도와주게 된다. 그 자신이 바카스제의 제관 역할을 하는 등, 디오니소 스에 사로잡혀 버린다. 다시 말해 〈사람〉과 〈신〉을 포함해서 아주 다른 모든 존재들을 아주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폭력에 사로잡힌 자 가 된다는 말이다. 모든 인물의 특칭들이 그 상대방에게도 나타나거나 아니면 적어도 희미하게나마 암시되어 있다. 예를 들어 디오니소스의 신성에는 젊은 미청년이라는 그의 의모가 암시하듯 인간성이 은근히 들어 있다. 이와 함께 펜테우스의 인간성에는 신성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마지막에 가서 디오니소스의 혼령에 빠져들 때에 나타나는 초인간적인 야망 속 에 분명히 드러나는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들어 있다. 시데롱과 그 소굴, 그리고 그 여제관들까지 내 등에 업고 갈 수 있을까 ? 디오니소스적인 엑스타시에서는 신과 인간의 모든 차이가 소멸되고 있다• 이 연극에서 정통적인 디오니소스의 목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리 디아인인 메나데스들인데 그들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광란이 모든 숭 배자들을 또 다른 디오니소스로 만든다고. 춤추는 자는 브로미오스 Bromi os © 같은 자가 된다 ! 펜데우스와 테베의 여제관들의 엑스타시는 범죄적인 휴브리스 hub ri s ® 브로미오스 Brom i os : 디오니소스의 다른 이름.

(지나친 자기과신)에서 나온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와 그의 메나데스의 편에서 보자면 모든 것은 전정으로 신성한 것아라고, 그래서 신은 신 이며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심지어는 가장 나쁜 폭력마저도 합당한 것이라고 물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사실이다. 전체적인 골격에 있어서 신과 인간의 차이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비극의 시초와 결 말에서 그것은 더욱 더 단단해전다. 그러나 비극 사건이 진행되는 동 안에는 그렇지 않다. 거기서는 인간성과 신성의 차이를 포함하여 모든 차이들이 뒤섞이고 무너진다. 알다시피 비극 속에 담긴 정신은 『바카스의 여신도들.II에서도 『의디 푸스 대왕』과 똑같은 결과를 지향한다. 그것은 신화제의적인 의미를 상호적 폭력 속에 융해시켜 버린다. 그것은 모든 차이들의 자의성을 폭로하고 있다. 그것은 신화와 문화 질서라는 총체적이고도 결정적안 문제로 우리를 어김없이 인도한다. 소포클레스는 이 문제를 제기하면 서 잠시 멈춰서지만 위협받던 신화의 의미는 결국 다시 확립된다. 『바 카스의 여신도들』에서도 똑같은 것이 일어난다. 이제 막 보았듯이 아 주 튼튼히 잡혀 있는 균형은 인간과 신의 차이를 없애버린다. 이때 신 성은 두 경쟁자 사이의 내기에 다름아닌 것이 되고 만다. 온 도시 사람들이 성문 앞에서 펜데우스님, 펜테우스님 하면서 그대를 공 경한다면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카스도 공경받으면 기뻐할 것 입니다. 그러나 극의 끝에 가서 신성은 아주 엄하게 다시 확립된다. 디오니 소스의 전능함과 펜데우스의 나약함의 차이가 하도 커서 결코 이 둘은 경쟁이 되지 않는 것 같아진다. 이처럼 크게 부각된 차이는 비국의 균 형을 다시 뒤엎어버린다. 이렇듯 이 비극은 우리에게 대담함과 소심함 의 동요처럼 보인다. 소포클레스에게서 나타나는 비극의 균형과 신화 이야기의 불균형이라는 모순을 통해서 우리는 이 시인이 더 큰 대담성

앞에서 움츠러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카스의 여신도들』에서도 똑같은 대조가 나타나는데, 같은 식의 분석으로 우리는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해 유리피데스 역시 더 큰 대담성 앞에서 물러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은근슬쩍 물러서지는 않았다. 구분하기 힘들 정도 로 끈질기게 되풀이되는 수많은 비극들 속에는, 이 시인의 이런 결정을 드러내 주면서 또한 이런 결정을 정당화시키려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 이 있다. 순전히 광기인 총명함이 있어 분수 넘친 사색이 생명을 단축시키니 너무 높은 것을 추구하면 눈앞의 것마저 잃기 때문이도다. 이런 짓은 미친 자, 어리석은 자의 소행일 뿐. 분에 넘친 사색을 피하고 마음 건전하게 지키면서 많은 이가 좋다고 행해 온 것을 우리 또한 따르리라. 비평가들은 우선 이런 구절의 궁극적 의미에 동의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리피데스에 관한 대부분의 토론도 이 문제를 비켜가고 있다. 이처럼 이 문제는 모든 해설자들의 공통된 가설, 죽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어서 그것을 표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되는 어떤 가설에 의해 통째로 왜곡되어 있는 것 같다. 이 가설은 이 비극 시인이 그 앞 에서 움츠러들었던 어떤 지식의 본질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이때의 지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지식이다. 유리피데스처럼 〈현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한 시인이, 우리가 까마득히 모르고 있는 어떤 위험 을 가까스로 모면하거나 우리도 완전히 모르고 있는 진리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너무 터무니없는 생각이라서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 같 다. 현대인들은 그 들 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회의론, 즉 종 교적인 것에서 어떤 실제 대상도 알아내지 못하고서 그것을 단순히 〈상상적 인 것 〉 이라고 규정해 버리는 회의론 앞에서 유리피테스가 움 츠러들었다고 믿고 있다. 유리피데스가 도의적인 형편이나 단순한 선 입견 때문에, 종교는 순전히 단순한 신비화이거나, 〈위안하는〉 혹은 경우에 따라서 〈 진정시키는 〉 환상이거나 혹은 하나의 〈 환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망설였다는 것이다 . 현대의 낭만적인 지식인은 자신들을 역사상 가장 끈질긴 우상파괴 자라고 생각한다 . 그들은 그래서 유리피데스가 너무 〈 부르조아적〉이라 서 지금껏 그에게 전통적으로 부여되어 왔던 명성이 합당치 않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품게 된다. 그러나 유리피데스는 현대인들처럼 종교적인 〈신앙〉의 말로써 이야 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한계 위반, 그리고 그 한계 너머에 있는 무서운 지식의 말로써 이야기하고 있다. 한결같이 관념적인 〈신앙〉이 니 〈 무신앙 〉 이니 하는 말의 쓸데없는 선택이 진짜로 중요한 것은 아 니다. 여기서는 신에 대한 공허한 회의론보다는 더 본질적인 다른 어떤 것이 작용하고 있다. 이 〈다른 것 〉 은 아직 밝혀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 바카스의 여신도들』 같은 텍스트 속에서는 완전히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 펜테우스의 살해는 신에 의해 야기된 위기의 절정이자 위기의 청산 인 동시에 테베인들 특히 펜데우스 가족의 불경스러움에 대한 〈복수〉 처럼 나타난다. 펜테우스를 죽이고 난 뒤 신은 마을에서 그의 나머지 가족들을 쫓아낸다. 평화와 질서가 데베에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하기 위해, 테베는 이때부터 새로운 신에게 그가 요구하는 예식을 드리게

된다. 이 살인은 신의 행위의 결과인 동시에 자연발생적인 폭발의 결과처 럼 보인다. 이때 신의 행위는 이미 제의화된 희생의 툴 속에 들어 있다. 제사장 역할울 하는 자는 바로 신 자신으로 그는 미래의 희생물을 준 비한다. 그가 수락한 희생은 결국에는 희생을 전정시킬 복수와 같은 것이다. 머리칼과 옷을 정돈한다는 핑계로 디오니소스는 펜테우스의 머리와 몸체와 발을 제의적으로 만진다. 이 살인은 디오니소스의 예법 에 따라 진행된다. 우리는 여기서 이미 언급한 여러 희생과 똑같은 특 칭을 가전 스파라그모스 s p ara gm os( 제 4 장 역주 ® 참조)를 보게 된다. 1) 여신도들은 모두 살해에 가담한다 . 우리는 여기에서 많은 제의에 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만장일치의 요구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기2서· )- -도어- - 떤-스 .. 파무라기그도모 사스용. 만. 되이. .지 . - -이 -않런 . ..는. . `다 .종.•..류. 의희 생유물일들한은 것맨은손 으아로니 다찢 . 겨우진리다는. 여이 미 비무장 집단의 공격에 대한 두 가지 예를 보았는데, 하나는 딩카족 의 희생제의이며 다른 하나는 스와질랜드 인쿠알라 제의에 나오는 왕 울 대신한 소의 살해이다. 이와 유사한 수많은 사례를 들 수 있을 것 이다.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제는 전적으로 기이한 것을 이루고 있다는 루돌프 오토 Rudo lf Ott o® 같은 사람의 주장은 전혀 근거없는 것이다. 우리는 원시사회에서 디오니소스 신화와 축제의 모든 특칭을 찾을 수 있댜

® 루돌프 오토 Rudo lf Ott o( 1860-1937) : 독일 철학자이자 종교역사가.

비극으로의 각색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제의의 사전모의 뒤에 있는 자연스러움을 드러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유 리피데스에 의해 부분적으로 복원된 전혀 상상적인 것이 아닌 본래의 모습과 제의 사이의 참된 관계를 거의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무장한 만장일치의 참석자들에 의해 살아 있는 희생물이 해체되는 것의 그 참된 의미가 여기서 드러난다. 본래의 모습을 나타내는 비국의 원본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조직적인 행동이 문제가 아니다 . 우선 처음에는 평화적인 의도를 가전 조직화되지 않은 군중들이 나타난다. 이 군중들은 우리가 모르는 어떤 미지의 이유로 극도의 집단 히스테리 현상을 나타낸다. 이 군중들은 마침내 한 개인에게로 달려드는데, 이 개인은 공격받은 만한 어떤 필 연적인 이유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동료들의 회의와 번뇌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한 사람이다. 그의 급작스런 죽 음은 그 군중등에게 평정을 되찾는 데에 필요한 배출구를 제공한다 .3 )

3) 차이가 소멸된 군중에 대해서는 Eli as Canett i, Masse et p u iss ance(Gall im ard) 가 가 장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제의적 스파라그모스는 아주 세밀하고 정확하게, 분쟁과 무질서를 종결시키는 사형(私刑)의 모습을 되풀이해서 모방하고 있다. 집단은 구 원을 가져다주는 그 행동들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한다. 그러므로 역 설적이게도 재의는 이 완전한 자연스러움을 정착시키려 애쓴다. 다른 데서와 같이 여기서도 비극은 제의적인 것과 그 제의적인 것이 재현 하려 애쓰는 자연스런 모델 사이의 애매한 중간에 위치해 있다. 기존의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펜테우스를 죽음으로 몬 것은 바로 디오니소스 이다. 이 조작을 주재하는 이 신은 오래전부터 분열된 집단을 진정으로 구원하는 희생, 가장 끔찍하지만 가장 효력 있는 회생, 죽 첫번째 희 생을 준비한다. 막 형성되고 있던 중인 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펜테우 스의 죽음은 누구도 예견하거나 준비할 수 없는 자연발생적인 해결책 이다. 집단 폭력이 완전히 드러나는 것 같지만, 자의적인 희생물 선택이라 든지 다시 일치를 이루는 희생대체라든지 하는 본질적인 것들은 계속 감추어져 있다. 본래적인 의미의 추방은 사라지지만 제도적인 희생의 모습으로는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의 효력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 회 생위기의 관점에서 보면 디오니소스와 펜데우스라는 짝패 사이의 관 계는 쌍방으로 상호적이다. 동료를 희생시키는 것이 펜테우스가 아니 라 꼭 디오니소스여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그 반면에

기존 종교의 입장은 비록 상호성이 밑에 깔려 있고 제사장과 그의 희 생물이 짝패의 관계에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더 본질적인 어떤 점에 서는 이같은 상호성이 사라진다고 본다. 희생의 〈 방향 〉 은 뒤바뀔 염려 없이 한번 정해지면 영원히 고정된다는 것이다. 추방도 항상 〈 이미〉 일어났다는 것이다. 제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심리적 동기가 아닌 다른 어떤 것과 결부시켜야 한다. 겉보기와는 달리 제의는 근거없는 새디즘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제의는 폭력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와 평정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것이 만들어내려고 애 쓰는 독특한 유형의 폭력은 〈폭력은 추방하는 폭력 〉 이라는 유형의 폭 력이다 . 그런데 현대 심리주의가 스파라그모스와 같은 제의의 잔혹성 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보다 더 순전하고 공허한 생각은 없을 것이다. 『 바카스의 여신도들』은 우리가 앞에서 내린 희생의 정의를 모든 면 에서 입증하고 있다. 신화와 제의를 초석적인 만장일치에까지 다시 오 르게 하는 우리의 생각이 곧 유리피데스의 비극과 디오니소스 예식 속에서 명백한 증거를 찾게 될 것이라는 걸 우리는 벌써 예견할 수 있다. * 니체나 루돌프 오토 식으로 『바카스의 여신도들』을 접하지 않는, 아 무런 준비가 없는 독자는 항상 디오니소스의 기이한 성격에 놀라게 된다. 비극이 진행되는 동안 이 신은 가는 곳마다 폭력의 씨를 뿌리고 노련한 염색가와 같은 솜씨로 죄를 유발하면서 그 도시롤 배회한다. 지금의 세상만큼이나 본질적 폭력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던 세상에서 마조키스트적인 동키호테적 경향만이 『 바카스의 여신도들』의 디오니 소스에서 어떤 홍미를 느낄 수 있었다. 분명히 유리피데스는 덜 불안한 것일수록 완전히 우스운 것이 되고 마는 이 환상들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고 있었던 것 같 다. 신의 본질은 폭력에 있다. 그렇다고 신이 폭력의 직접적인 속성 중의 하나인 것은 아니다. 델포이와 의디푸스 신화에 나오는 아폴로처럼 디 오니소스가 예언의 영감과 관련이 있는 것은, 이 예언의 영감이 희생 위기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포도나무나 포도주의 신으로 나타 나는 것은 분명 무서운 취기와 살인적 광기의 신이라는 그의 본래의 의미를 부드럽게 한 것일 것이다. 디오니소스의 옛날이야기에 포도 재 배나 포도주 제조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 4 ) 대단원예 앞서 단 한번 위엄을 갖추고 나타나는 이 신의 등장은 펜테우스의 궁전 파괴가 의미하는 희생위기의 가장 파국적인 결과들과 한데 뒤섞여 나타난다.

4) H. Jea nma ire , Diony s o s, Payo t , 1951, p. 23 참조.

디오니소스一땅의 신이시여, 땅울 진동시키소서. 코라스 대장―곧 펜데우스의 궁전은 혼들려 무너질 것입니다. 디오니소스 께서 저기 계십니다. 삼가 신께 예배드립시다. 코라스―삼가 예배드립시다. 저기 보세요. 대리석이 무너집니다. 저 안에 서 브로미오스님께서 당당히 고함을 치시겠죠 . 디오니소스 — 번갯불을 일으켜서 펜테우스 궁전을 태워 없애소서 ! 코라스 대장― 아아 ! 저기 보세요 . 안 보여요? 세멜레 Semele 의 무덤 옆에 불이 일고 있는 것이. 세멜레가 옛날 제우스의 벼락맞고 타다 남은 그 불이 ! 자, 메나데스여, 떨리는 가슴 땅에 엎드리세요 ! 그래, 우리 주 제우스의 아드님께서 지금 저 궁전을 부수고 계십니다. 디오니소스가 가장 끔찍한 폭력의 화신일 때, 그가 공포의 대상일 뿐 아니라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놀랍고도 터무니없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순진한 사람은 이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아 니라 반대로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신이 관련된 특수한 유형의 폭력을 좀더 자세히 조사해 보면 전체 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그것은 디오니소스의 희생제의와 관련되어 체 포, 학살된 펜데우스의 죽음이 빚은 결말과 아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큰소리 치는 자, 두려움을 주는 자라는 의미의 브로미오스라는 이름을 가전 디오니소스는 많은 재앙들을 주재한다. 그런데 이 재앙은 다른 세기의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폭풍이나 지전과는 거의 관계가 없으며 대신 그 이치를 따질 수도 없는 두려움 때문에 기이한, 거의 초자연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군중의 존재를 항상 필요로 하는 것 같 다. 그래서 티레시아스는 디오니소스를 갑작스런 변동, 뜻밖에 둘이닥 치는 집단적인 공포의 신으로 규정한다. 대오를 갖추고 싸우려던 군사들이 난데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미처 싸우기 도 전에 전멸되는 수가 있는데, 이것도 디오니소스가일으킨광기 탓이랍니다. 이런 사실을 지금까지 조사한 다른 모든 사실들, 죽 다른 제의에서 조사한 증거들과 함께 생각하면 〈디오니소스는 성공한 사형(私刑)의 신이다〉라는 데 대해 어떤 의문도 생길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왜 신이 있으며 또 그 신은 왜 숭배되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 었다. 신의 합법성은 그가 평화를 깨뜨리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그가 깨뜨린 평화를 스스로 다시 복구함으로써 그것을 〈사후에〉 정당화시 키는 데에서 드러난다. 신성모독적인 휴브리스에 대한 합당한 분노로 나타나는 신의 행위로써 여기서 신성모독적인 휴브리스와 그에 대한 신의 합당한 분노는 초석적 만장일치로도 서로 잘 구별되지 않는다. 텍스트 분석은 디오니소스 숭배를 격심했던 정치사회적 변동의 결 과로 보는 가설둘을 더욱 확실히 해준다. 에르빈 로데 Erw in Rohode ® 의 저서와 같은 책에는 현실에 대한 불완전하지만 깊이 있는 직감이 담겨 ® 에르빈 로데 Erw in Rohode(1845-1898) : 독일 고전학자. 그리스 문헌과 종교 연 구.

있댜 이같은 주장에 동조하는 자들이 내세우는 역사적인 논증에는 분 명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 반대편의 주장도 마찬가지 이다. 새로운 자료가 없기 때문에 전통적인 역사적 방법은 거의 제자리 걸음을 할 수밖에 없다. 로데에게서 아직은 제한된 형식으로서만 행해 지고 있는, 텍스트와 주요 종교현상 사이의 비교분석만이 우리의 의문 울 해소해 줄 수 있을 것이다 .5)

5) E. Rohde, Psyc h e, Seelencult und Unte rb lich k ez'tsg la ube der Griec hen, 1983. 그런데 H. J eanma i re 는 그의 뛰 어 난 저 서 Dio n ys o s, His toir e du cult e de Bacchus(Payo t , 1 910) 에 서, 이런 사회학적인 주장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황홀경과 정신이탈 현상 을 말하는 그의 주장이 어떤 점에서 로데 Rohde 와 갇은 생각과 양립할 수 없는지를 찰 이해하지 못하겠다.

『 바카 스 의 여신도들』과 같은 신화 뒤에는 그리고 어떤 이야기 내용 너머에는, 폭력의 급작스런 폭발이 있으며 또한 그 폭력은 사회의 존 립을 위해서 무서운 협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 다 . 모든 사람이 거기에 가담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화해시킬 수 있는 사형(私刑) 덕분에 이 위협은 나타날 때만큼이나 재빨리 사라전 다. 그 온순하던 시민들이 포악한 짐승으로 변하는 것은 너무나 끔찍 하고 또한 순간적이기 때문에 그 사회집단은 그것을 알아볼 수도 없 으며, 게다가 얼핏 보이든 이 기이하고도 무서운 얼굴을 자신의 얼굴_ 로 인정할 수도 없게 된다. 이 폭풍이 정말 기적처럼 평정되자마자, 그것 은 곧 전형적인 신의 내방 v i s it a ti on div ine , 강복처럼 여겨지게 된다. 자 신이 잘 알려지지 않기를 열망하던 신은 그의 불만을 그야말로 신의 식으로 인간들에게 알렸다. 아마도 그 속에는 자신의 화신이 들어 있 울지도 모르는, 자신이 직접 선택한 유일한 그 마지막 희생물을 기꺼이 수락하고 나서 그는 조용히 물러가는데, 그토록 무섭게 나타났던 것만 큼이나 아주 우호적으로 물러간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것은 결코 〈쓸모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폭력 울 비인간화시키며 인간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안간에게서

폭력을 떼어내어 그것을 항상 있어 온 초월적 위험으로 만든다. 구런데 이 초월적 위험은 겸허하고 신중한 처신을 요하는 제의롤 통해서 전 압할 수 있다. 〈종교적인 것은 진정으로 인류를 해방시킨다 〉. 왜냐하면 인간들이 실제 일어났던 이 위기를 기념하면, 종교적인 것은 인간을 사로잡고 있던 그 의혹으로부터 안류를 해방시켜 주기 때문이다 종교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도시의 운명을 폭력에 의거해서 생각 한다는 것인데, 이 폭력은 사람이 그것을 지배한다고 믿을수록 더 가 차없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폭력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국 폭력을 멀리 하고 단념하기 위해서 이 폭력을 초인간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두려운 공경이 약해지고 차이가 사라지기 시작하면 제의적 희 생은 효력을 잃게 되고 그것은 더 이상 용인되지 않게 된다. 각자는 스스로 상황을 회복하려 하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다. 초월성의 약 화, 그 자체로 인하여 도시를 구하겠다는 욕망과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엉뚱한 야망 사이의 차이, 가장 경건한 신앙심과 스스로를 신격화시키 려는 욕망 사이의 최소한의 차이점들도 더 이상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각자는 모두 상대방의 계획을 무례한 욕망의 소산으로 보게 된다. 디오니소스와 펜테우스의 모든 차이가 소멸하는 것도 바로 이 순간이 다. 사람들은 신에 관해서 논쟁하게 되는데 그들의 회의주의는 새로운 만장일치 폭력에 비추어 돌이켜보면 신의 새로운 내방이자 새로운 복 수인 새로운 희생위기와 같은 것이다. 희생물이 없다면 그리고 폭력도 사람들에게, 말하자면 그것 역시 새 로운 출발이자 폭력 주기 다음에 오는 제의적 주기의 미끼인 휴식을 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아마 그들의 폭력을 밖으로 분출할 수가 없을 것이다. 폭력을 잠재우는 폭력의 최종 결정판이 있게 하기 위해서, 그 리고 그 최종 결정판이 신성한 것으로 통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 비결 인 만장일치의 메커니즘은 계속 알려지지 않아야 한다. 종교적인 것은 그것의 궁극적 토대가 드러나지 않을 때에만 사람들을 보호한다. 마지 막 은신처에 숨어 있는 악마를 격퇴하려다간 잘못하면 그 악마를 영

원히 날뛰게 만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무지를 없 애다가는 그들을 엄청난 위험에 빠뜨리게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것은 잘 모르는 것이 바로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일지도 모를 그들의 보호망을 박탈하는 것이며, 인간 폭력의 유일한 제어장치를 풀 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희생위기는 결국 상호적 폭력이 강해질수 록 점점더 불어나는 지식, 그러나 완전한 진실에는 결코 이르지 못하는 지식과도 같은 것이다. 마침내 추방에 의해서 폭력이 〈저 너머로〉 내 던져질 때 폭력의 전실도 항상 함께 내던져진다. 비극이 신화의 의미를 해체한다는 바로 그 사실로써 비극은 시인의 발 아래에 심연을 여는데, 앞에서 시인은 항상 주저하게 마련이다. 시인을 유혹하는 휴브리스는 모든 등장인물의 그것보다 더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대의 모든 철학사상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대 혹은 원시의 모든 종교의 문맥 에서도 아주 파괴적인 것으로만 이해되는 어떤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현대사상이 어길 엄두도 못내고 있고 우리 자신도 그 영향하에 있는 어떤 금기가 있다 . 유리피데스에 의해 이 금기가 거의 공공연하게 지적되었다는 사실은, 이 비극 작품 속에 서는 이 금기가 엄청난 동요의 상황에 굴복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린 결코 법 이 상은 상상하지도 않는다네. 신의 타고난 힘을 인정하는 게 당연치 않은가 ? 진실로 인정된 것에는 항상 자연의 힘이 있는 법. * 의디푸스와 같이 디오니소스의 경우에도 신화생성의 요체는 어떤 주어진 여건들의 재구성으로 귀결된다. 이 여건들은 사실 신화 이면에 있는 집단 현상에 속하는 것인데, 만약 이것들이 모든 구성원들에게 골고루 배분되면서 상호적 폭력이 존중된다면 이것들의 신화적 의미는

하나도 없게 될 것이다. 의디푸스와 디오니소스의 경우 모든 상호성은 사라지고 차이가 나타난다. 어때부터 이 본질적 차이야말로 모든 폭력 울 한몸에 안고 있는 신이나 신화 주인공과, 순전히 희생제의적인 폭력 바깥에서 위기에 가담했다가 수동적인 감영 —— 의디푸스 신화의 페스 트――을 당하거나 아니면 화해로운 무차별__디오니소스의 바카스 제一一만을 얻는 일반 공동체 구성원들을 구별하는 지표가 된다. 신화의 모든 구성 요소들은 위기에서 그대로 빌려온 것들인데, 여기 에는 어떠한 의식적 조작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신화생성은 그것의 폭력적인 모습이 가려져 있는 희생양에 근거하고 있는 무의식적인 과 정이다. 이때 이 폭력의 진실은 〈억압되는〉 게 아니라 아예 인간에게서 떨어져 나가 신격화되어 버린다. 비극은 상호적인 폭력 속에서 허구적 차이들을 해체해 버린다. 포악 한 신, 선량한 공동체라는 이중적 환상의 신비를 벗겨버린다. 디오니소 스제의 코라스가 남녀혼성이란 사실과 한시적으로 여자의 음주가 허 락된다는 사실들은 훨씬 더 무서운 취기 i vres _ se 를 드러내고 있다. 비극 은 바카스제를 〈탈신비화〉한다. 죽 결과적으로 〈잘못 인지하기〉라는, 제의의 정수를 지탱하고 있는 토대를 파괴해 버린다. 제의는 폭력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 평화를 지향하고 있다. 비극의 탈신바화는 바카스 제를 순수한 광란, 폭력에의 방기로 보이게 한다. 비극의 탈신비화는 불가피하게 재의를 약화시키거나 아니면 그것이 잘 작동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비극 스스로가 폭력적이다. 이런 반종교적인 탈신비화 는 인간사회에서의 폭력의 역할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평화와 보편적 이성의 방향으로 작용하기는커녕, 이것 역시 종교만큼 이나 애매모호하다. 이것이 어떤 유형의 폭력에 대해 저항한다면, 그것 은 틀림없이 항상 그보다 더 무서운 또 다른 폭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다. 유리피데스는 현대인과는 달리 이러한 애매모호성을 예감했다. 그래서 그는 한 방향으로 나갈 때, 언제나 그 다음에는 다른 방향으로 향하곤 했다. 죽 그는 〈대담함〉과 〈소심함〉 사이를 왕복했다. 그래서

그가 때로는 바카스제의 옹호자로, 또 때로는 고발자로 보이는 것이다. 처음의 잔잔한 묘사와 디오니소스를 위하는 두 노인의 격려에서는 바 카스제가 우호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유리피데스는 디오니소스의 무차 별을 혼란과 폭력에 연관시키는 자들에 대항하는 예배를 옹호하려 애 쓰는 것처럼 보인다. 여제관들은 품위와 상냥함의 본보기처럼 묘사되 고, 이 신을 경배하는 데에 대한 의혹들은 과감히 거부당한다. 이런 주장들은 아주 이상하다. 그것은 이것이 실제 사건들에 위배되 기 때문이다. 마리 델쿠르 Mar i e Delcourt -C urvers 부인이 그의 책머리에 서 지적했듯이 우린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게 된다. 〈처음에는 다소 우스울 정도로 무구했다가, 다음엔 불안해 하다가 , 마침내 살인까지 저 지르는 아가베와 그의 동료들의 광란에다가 이 시인은 과연 무슨 의 미를 부여하려 했을까 ? 『바카스의 여신도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었는데도 우린 다시 이 문제에 사로잡히면서, 이것은 난해한 문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폭력에서 나온 것이라 폭력의 흔적이 남아 있긴 하지만 제의는 평 화를 지향하고 있다. 아니 집단 구성원들간의 조화를 촉진하는 데에 사실 이것만큼 적국적으로 이용되는 것도 없다• 유리피데스는 회생위 기와 비극의 사고가 모든 종교적 가치들을 붕괴시켜 버린 이른바 난 파상태에서 제의를 구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헛수고이 다. 왜냐하면 비극의 사고방식이 시인의 의도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괴물 고르곤느의 피 두 방울처럼 일단 희생적인 것과 비희생적인 것이 섞이고 나면, 인간의 어떤 의지도 그것을 분리해 낼 수가 없기 때문 이다. 만약 유리피데스가 폭력의 기원과 폭력의 완전한 역할 그리고 제의 속에 보존되어 온, 폭력의 상호성 속에서는 사라지지만 희생양 메커니 즘에서는 되살아나는 초석적 만장일치에 완전히 도달할 수 있었다면, 소위 〈『바카스의 여신도들』의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는 우리에게 바카스 축제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은 초석적 폭력의 두 측면

과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희생위기 속에서 서로 싸우는 사람이나, 예전과 갇이 그 후에도 제의질서의 상대적 조화 속에서 살 아가는 사람은 똑같은 한 사람이다. 만약 유리피데스가 원시종교의 입장에 따라 성스러운 것으로 결연히 돌아와 인간들의 폭력을 떼어내어 그것을 완벽하게 신성화시킬 수 있 었다면 역시 『바카스의 여신도들』에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폭력의 작용을 통째로 신에게 돌려버리는 종교적인 태도와, 이것을 모 든 사람에게 되돌려주는 온전한 진실이라는 국단적인 두 해결책 사이 의 어느 한 중간단계에다 그의 생각을 고정시킬 수 있었더라도 역시 『바카스의 여신도들』에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체계인 이 중간체계 속에서는 폭력적 분열과 평화로운 조 화 사이의 대립이나 시간, 죽 통시적인 영역에서 전개되는 차이가 공 시적인 차이로 변하게 된다. 이리하여 우리는 정말 우리에게 친숙한 세계인, 〈선과 악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이런 구조가 이미 『바카스의 여산도들』에 묘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신에 대한 〈불손한 반항〉이라는 생각과, 리디아의 메나데스처럼 공인된 여신도와 데베 여인들처럼 공 인되지 않은 여신도로 이 신의 추종자를 구분하는 데에서, 이런 구조의 전개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이 거기에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비극 사건에서는 디오니소스적인 〈좋은〉 열광과 〈나쁜〉 열광, 믿는 자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신들림〉과 악한 자에 대한 벌로서의 〈신들립〉 사이의 모든 구별이 사라진다. 마니교적 인 선악의 구분은 생겨나자마자 곧 무너지고 만다. 이 구분은 사실 시테롱 C it heron 언덕 위에서 사라지고 난 한참 뒤에 문화와 이데올로기 속에서 계속되어 온 희생양 추적과도 같은 것이라 는 것을 지적해야겠다. 〈『바카스의 여신도들』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바로, 겉으로 볼 때 무너져 있지 않으면서 이 작품이 문학적, 심리학적, 정신적 일관성

을 띠게 해주는 차별화 체계를 발견하는 것일 것이다. 이 체계 또한 〈 자의 적 인 arb it ra i re 〉 폭력 에 기 반을 두고 있는 것 같다. 『 바카스의 여 신 도들』 속에 있는 초석적 요소는 둘추어져 있지는 않지만 심하게 동요 되어 있다. 이 비극의 비일관성과 유리피데스가 〈 대담함〉과 〈소심함〉 사이에서 망설였던 것의 궁극적인 원인은, 유리피데스의 〈심리〉 때문 에 아니라 우리가 얘기하는 바로 이 동요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폭력 의 진실이다. 그런데 유리피데스는 이 진실을 포착하길 원하지 않았다. 아니 포착할 수가 없었다 . 이것은 너무나 가깝게 있었기 때문에 모든 차이룰 소멸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그리고 그는 이 차이가 고정 되는 것을 막음으로써 의미의 가능성을 다양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비극은 어디서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정착할 곳도 없다. 바로 여 기서, 소위 칭찬을 받고 있는 그 혼한 지적, 미학적 구조의 일관성이 라는 불모성보다 더 나은 이 작품의 비옥한 비일관성이 나오는 것이다. 『의디푸스 대왕 』 에서 비극 사건의 균형과 신화적 메시지의 불균형 사 이의 대립을 해결하려 애쓸 필요가 없듯이 『바카스의 여신도들』의 문 제도 〈 해결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건 결국 똑같은 단 하 나의 문제인 것이다. 별것 없는 우리의 초라한 일관성에다 그 비극을 끌어맞추기보다는 비극이 마침내 신화 속으로 들어갈 때 나타나는 논 리적 단절을 헤아리면서 이 신화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아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카스의 여신도들』의 문제는 종교적이거나 비종 교적인 , 그리고 원시적이거나 서구적인 문화의 모든 차원으로 확대시 켜야 한다. 이 문제는 전에도 있었지만 오늘날 서구문화 속에서 희생 관습이 빠르게 해체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폭력의 기원〉에 관한 문 제이다. * 디오니소스 예식에서 여성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데 대해 생각해

보자.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지 않고서도 우리는 , 여자들에게 펜테우스 를 죽이도록 임무를 보여한다거나 원래의 바카스제, 죽 희생위기 동안 여성의 특칭처럼 나타나고 있는 살인의 광기는 모두 그 전에 있었던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바카스제인 시테롱 산의 야유회만큼이나 똑같이 허구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두 주인공은 남성이지만 그들 뒤에는 여자와 노인들뿐이다. 위기 속 에 살인의 광기는 실제로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집단 전체에 확산되어 있으므로 희생양에 대한 만인의 폭력이지 순전히 여자들만의 폭력이 라고 볼 수가 없다. 여성들의 주도권아란 것도 , 위기의 분명한 당사자 혹은 적어도 책임자이기에 그 위기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길 가장 바 라고 있는 성인남자들로부터 그들의 폭력을 제거해 버리는 제 2 의 신 화 전이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른 한 편으로 볼 때, 집단을 다시 상호적 폭력에 빠뜨릴지도 모르는 자들도 바로 이 성인남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폭력의 남성이 여성으로 대체되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시테롱 산의 여자들을 설정한 것이 순전히 그 리고 단순하게 조작해 낸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신화는 어떤 것도 조 작해 내지 않았다. 그러나 아마도 아이들과 노인들을 동반했을 여자들 의 이 집단 이동의 진짜 의미는, 목가적인 이상화만큼이나 비극의 탈 신비화에 의해서도 똑같이 왜곡될 수 있었을 것이다• 집단으로 그 도 시를 나서는 것은 디오니소스에 대한 도취, 즉 신의 영감에 의해 유발 된 것같다 . 이렇게 나서는 것은 위기와는 관련이 있지만, 장엄한 종교 행렬이나 거역할 수 없는 소명 따위와는 분명 아무런 관련이 없다. 여 기서 우리가 상상해야 할 것은, 노인과 여인들처럼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자들의 도피이다. 다시 말해 약한 자들이 공동체 안에서 공포를 떨치던 강한 자들에게 전쟁을 맡기는 것이다 . 민족학적인 연구에 의해서도 우리 가설의 정당성이 드러나고 있다. 『 Yanomammo, The Fie r ce Peo p le 』 (1968) 에 서 샤농 N. A. Cha gn on 은 가까

운 집단들을 결합시키는 〈축 제 〉를 묘사하고 있는데, 이 축제의 유홍 프로그램에는 가슴울 주먹으로 난타하는 , 원칙적으로 우호적인 결두가 들어 있다. 두 진영이 싸우다가 한 진영의 절박한 패배가 살인으로까지 확대되려 할 때, 〈 여자와 아이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서 마 울 입구 가까이에 있는 집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울면서 모여든다〉. 조금 있다가, 항상 〈 마을 안에 있는〉 두 진영의 병사들이 독화살과 활 로 무장하면서 전투 준비를 할 동안, 여자와 아이들은 날카로운 고함과 비명을 지르면서 밀림 속으로 도망간다 .6 )

6) p. 116

종교나 문화에서의 여자의 일반적인 역할, 아니 오히려 그들의 역할 부재에 대해서는 예컨대 보로로 Bororo 마을과 같은 남미 마을들의 가 옥 배치만큼 많은 것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도 아마 드물 것이다.” 이 마을은 거의 완전한 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 원형은 여러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마을 중심에는 남자들의 집이 있는데 여자는 절대로 거기에 들어갈 수 없다. 문화나 종교와 같은 것은 전적으로 남자들에게 맡겨져 있는 복잡한 제도에 포함되었는데, 이런 행위는 마을 광장의 집에서 행해졌다. 여자들은 변두리 집에 거주하면서 절대 거길 떠나지 않았다. 여성의 이런 부동성은 예전에 〈모권제 ma tri arca t〉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요소들 중의 하나이다. 이것이 여자들의 우월성을 의 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거의 가담하지 않은 비/희극에 대한 여자들의 다소 방관자적인 구경꾼의 모습을 드러내 주고 있을 뿐이다. 질서가 유지되는 평화기에 행해지는 우아한 제의의 춤은, 모든 제도가 탈이 나는 무질서 시대에 일어날 폭력을 피하기 위한 총체적인 조치들 중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보로로 마울의 가옥 배치는 중심부가 남성 폭력의 전용 싸움터로 변할 때 힘이 약한 여성들의 원심적 · 경향 울 실제로 보여주고 있다. 이 경향은 일반적인 것인데 샤농은 야노마 뫼족의 축제기간 중에 이 경향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관찰했지만

7) Claude Levi- S tr a uss, Tris /e s Tropi qu es, 1955, Ch. X 자I.

디오니소스 신화의 그럴 듯하지 못한 면 뒤에서도 우리는 이 경향을 찾을 수가 있다.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는 여자들이 이루고 있는 이 부동의 원형은 공공장소에서 싸움판과 감은 〈볼거리〉가 있자마자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현상을 연상케 한다. 곧 난무하게 될 주먹질로부터 거리를 조금 유지하면서도 그 광경을 조금도 놓치지 않으려는 욕망으로 구경 꾼들은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장면 주위로 불가피한게 원형을 이루면서 배열하게 된다. 심리분석학은 남자들의 집이 여성의 원형 가 운데 남근처럼 박혀 있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 심리분석학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성적인 상징체계 너머에는 그 요소들을 적 당한 자리에 배치하는 폭력이 있다. 그런데 이 폭력은 처음에는 문화 질서로, 다음에는 이 질서 뒤에 있는 성욕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모든 가능한 의미들 뒤에 있으면서 어떤 다른 의미에 의해 감추어져 있었 기에 해독할 수 없었던 폭력이라고 〈묘사되어〉 왔다. 디오니소스로 되돌아와 보자. 도시 밖에 여자들을 위치시키는 것은, 우리가 이미 분석한 신화 조작과 유사한 신화 조작에 의해 변형된 원 초적 위기의 〈실재〉 사건을 감추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신을 낳는 폭력의 전이와 유사한, 그러나 그보다는 덜 중요한 부차적인 변화로서 의 어떤 폭력의 전이를 상상할 수 있다. 여기에는 희생위기의 가장 폭 력적이고 가장 거친 모습둘이 신성한 것에 의해 아직 지워지지 않았던 때에 행해지던 본래의 신화조작이 분명히 들어 있을 것이다. 위기의 특징적인 반웅들은 아직 충분히 뒤섞여 흐릿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반응들을 기꺼이 수용하지 않고 있다. 아직은 아주 의심스러운 디오니소스제의 여성 쪽으로의 폭력 이동 현상은, 『바카스의 여신도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성 차별의 소멸이라는 테마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희생위기의 현상 중에는 여성의 남성화뿐 아니라 남성의 여성화 현상도 있다. 남

자가 여자처럼 행동하고 여자가 남자처럼 행동한다는 생각이 종내에는 디오니소스제의 이 시끄러운 야단법석은 순전히 여자들의 일이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된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성 차이의 소멸도 상호 적인 현상이다. 항상 그러하듯이 바로 이 상호성을 희생시키는 데서 신화의 의미가 생겨난다. 위기 동안에 소멸되었던 이 차이들을 신화가 다시 재배치하게 된다는 말이다. 디오니소스제의 혼란을 거의 전적으 로 여자들만의 것이라고 전가시킴으로써 남성의 권위와 존엄을 공고 히하는 불균형적인 형식으로 이 균형적인 요소들이 재구성된다는 것 이다. 여기서 비극은 무너진 상호성을 복구하지만 그것은 단지 부분적으로 그러하다. 디오니소스제의 기원에서 여자들의 주도권을 문제삼을 정도 는 아니기 때문이다. 성적 차이의 소멸이 폭력의 여성으로의 이행을 용이하게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완전히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동 물이나 아이처럼 여자도 그 나약함과 상대적인 주변성으로 인해 희생 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여성이 욕망되어지면서 동시에 거부당하고 멸시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조각대〉 위에 세워지는 등, 부 분적으로 신성화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이다. 성의 전도에 주의하면 서 그리스 신화와 비극, 특히 유리피데스의 비극을 읽게 되면 틀림없이 놀라운 사실들이 드러날 것이다.

제 6 장 모방 욕망에서 무서운 짝패까지 『 바카스의 여신도들』에서의 신의 내방은 초석적 만장일치가 사라지 면서 상호적 폭력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초월성이 인간에게 내려울 때는 항상 신의 내재성으로 나타나거나 아니면 그야말로 〈불 결한 〉 유혹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상호적 폭력은 만장일치적 폭력이 구축했던 모든 것을 파괴한다. 초석적 만장일치에 근거한 제도와 금기 가 무너지면서 활개치지만 누구도 이 폭력을 영구히 손에 넣지는 못 한다. 겉으로는 누구에게라도 기꺼이 자신을 내던질 것 같던 신은 항상 폐허의 씨를 뿌리면서 사라져버리고 만다. 신을 소유하고자 하는 자는 모두 마침내 서로를 죽이게 된다 . 『 의디푸스 대왕.JI의 비극적 갈등은 데베의 왕위나 어머니이자 아내인 왕비와 같이 한정된 대상에 관련이 있다. 그러나 『바카스의 여신도들』 의 디오니소스와 펜데우스는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는 전혀 논쟁하지 않는다. 경쟁 관계는 신성에 관한 것이지만 신성 뒤에는 바로 폭력이 있다 . 신성 때문에 경쟁한다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로 경쟁 하는 것이다. 일단 폭력이 추방되고 나면, 다시 말해서 완전히 인간들 의 손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신성은 초월적인 현실성만을 갖게 된다.

치열한 경쟁 관계가 직접 신성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신은 만장일치 적인 폭력의 중개에 의해서 생겨난다. 신성이 실제적일수록 그것은 내 깃돈이 아니다. 사람들이 신성을 내깃돈으로 간주할수록 이 내깃돈은 결국 모든 사람들로부터 빠져나가고 말 속임수가 된다. 요컨대 모든 비극 주인공들이 집착하는 것이 바로 이 속임수이다. 누군가가 이 폭력을 구현하려 하면 그는 경쟁자를 부추기게 되고 그 래서 폭력은 상호적으로 된다. 죽 쌍방의 공방만 있을 뿐이다. 이 비 극적 갈등에 말려들지 않기를 바라는 코라스가 말해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갈등을, 그것의 본질적인 의미가 아무리 소중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왕위라든지 왕비라든지 하는 그 대상으로부터 출 발하여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바카스의 여신도들 』 은 비극 적 경쟁 관계를 해석할 때에는 현상의 일상적인 순서를 뒤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처음에 대상이 있고 다음에 이 대 상을 향해 집중되는 별도의 욕망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이 집중의 우 연적이고 부수적인 결과로서 폭력이 생겨난다고 사람들은 흔히 생각 한다. 희생위기에 가까워질수록 폭력은 점점더 뚜렷해진다. 경쟁적인 탐욕울 부추김으로써 갈등을 야기시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그 대상이 갖고 있는 내재적 가치가 아니다. 대상들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도 더 잘 분출할 핑계를 만들어내는 것도 바로 폭력 그 자체이다. 이때부터 폭력이 주도하게 된다. 폭력은 바로, 모든 이가 그것을 지배하려 애쓰 지만 모든 사람을 하나하나씩 조롱하는 신성이자 바카스 여신도들의 디오니소스이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보면, 희생위기의 초기 단계에서도 이미 은밀하 게 폭력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폭력의 관점에 서는 『바카스의 여신도들』보다 덜 명백하게 드러나던 『의디푸스 대왕』 의 데마들이 『바카스의 여신도들』의 관점에서는 더 근본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의디푸스와 라이오스가 네거리에서 처음 만날 때는 아버지

도 왕도 없었다. 처음에는 주인공의 길을 막는 낯선 자의 위협적인 몸 짓만이 있었으며 그 다음에 이 낯선 자를 때리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는 곧 왕위와 왕비를 향한 욕망, 즉 폭력적 대상을 향하는 욕망이 있 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폭력적인 것이 아버지와 왕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확인과정이 있다. 달리 말하자면 폭력적인 것의 대상들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폭력이다. 라이오스가 아버지이기 때문에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폭력적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왕으로 인정 받는 것이다. 헤라클리트가 〈폭력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자 왕〉이라고 단언할 때, 그가 의미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욕망에서의 폭력의 우선권보다 더 진부한 것도 없다. 이것을 우리는 새디즘, 매저키즘 등으로 부른다. 우리는 거기에서 폭력과는 무관한 기준에서의 병리학적인 현상이나 일탈을 보면서, 그 반면에 이 기준에 맞는 자연스런 욕망,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비폭력적인 욕망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만일 희생위기가 보편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관점들이 틀렸 다고 말할 수 있다. 위기의 절정에서는 폭력이 모든 욕망의 수단이자 동시에 주체이며 대상이다. 바로 이 때문에 희생물이 없다면 그리고 위기 후에 이 폭력이 문화질서로 변하지 않는다면 모든 사회질서는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창조적이며 사회보호적인 제의적 폭력의 악순 환은 상호적이며 전면적으로 파괴적인 폭력의 악순환을 대체하게 된 다. 희생위기 속에서는 욕망이 폭력 이의의 다른 대상을 지니지 않는다 는 사실이나 폭력은 어떻게 해서든지 언제나 욕망에 뒤섞여 있다는 사실처럼 수수께끼 같은 이 사실들은, 일단 〈인간은 폭력 본능의 포로〉 라고 단정하고 나면 정반대로 어떠한 보충 설명도 필요없을 만큼 분 명해진다. 오늘날 우리는 동물들은 모두 제어 메커니즘을 갖고 있으며, 싸움을 하더라도 이 메커니즘으로써 패자가 죽음에까지 이르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종족 보존을 위한 이러한 메커니즘을 두

고서 본능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아주 적합한 것 같다. 그러나 인 간에게는 이와 유사한 메커니즘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 똑 감은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좀 계면쩍은 것 같다. 인간을 폭력이나 죽음으로 인도하는 본능 혹은 충동이라는 생각―― 프로이트의 저 유명한 죽음의 충동-은 기껏해야 신화의 퇴각 진지이거나,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폭력을 의부로 발산시키게 하면 서 발산시킨 그 폭력을 신이나 운명 혹은 〈 본능 〉 으로 보게 함으로써 인간은 더 이상 그것들에 책임이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이 인간을 의 부로부터지배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대대로 내려오는 환상의 후미부 · re- gar de 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서는 폭력을 정면으로 대적하지 않으면 서 여기서 벗어날 새로운 핑계를 찾는 것, 즉 점점더 위태로워지는 상 황 속에서 희생대체의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이 다시 한번 더 문제가 되고 있다. 희생위기 속에서는, 그 대상이 아무리 특권이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 도 욕망을 어떤 한정된 대상에 결부시키는 것을 피하면서 욕망을 폭력 그 자체 쪽으로 돌려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의 본능이나 폭력의 본능을 가정할 필요는 없다. 제 3 의 길이 있는 것이다 . 우리가 관찰했던 모든 욕망둘 속에는 대상과 주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 3 항, 죽 경 쟁자ri val 가 있었는데 이번만은 이 경쟁자에 우선권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 경쟁자를 너무 일찍 인정하는 것, 죽 프로이트와 함께 그것은 〈아버지이다〉라고 말한다거나 비극들처럼 그것은 〈형제 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경쟁자와 대상과 주체가 함께 형성하는 전체적인 체계 속에서 이 경쟁자가 차지하는 위상을 규정짓 는 것이 문제이다. 경쟁자는 욕망주체와 동일한 대상을 욕망한다. 경쟁 자의 우선권을 인정하는 것과 대상과 주체의 우선권을 포기한다는 것 은 같은 의미이다. 경쟁 관계는 동일한 대상에 대한 두 욕망의 우연한 일치의 산물이 아니다. 〈경쟁자가 대상을 욕망하기 때문에 욕망주체는 그 대상을 욕망한다〉. 어떤 대상을 욕망함으로써 경쟁자는 욕망주체에

게 그 대상은 욕망할 만한 것이란 것을 알려준다. 존재방식이니 관념 이니 하는 피상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욕망의 좀더 본질적인 측면에서 경쟁자는 욕망주체의 모델이다. 현대의 이론가들은 인간은 그가 욕망하는 것을 완전하게 알고 있는 존재 , 아니면 적어도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 무의식 i nconsc i en t〉을 항 상 지니고 있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불확실 성이 뚜렷이 드러나는 그런 영역을 빠뜨리고 있는 것 같다. 기본적인 욕구들이 일단 충족되기만 하면, 아니 때로는 그 이전에도, 인간은 강 렬하게 욕망하면서도 무엇을 욕망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욕망하는 것은 존재, 정확히 말해 자신에게는 결핍되어 있는데 타인은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욕망주체 는 이 〈 타인 〉 이 이 존재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길 기대한다. 만일 이미 뛰어난 존재를 부여받은 모델이 어떤 것을 욕망한다면, 더욱 총체적인 존재의 완전함을 부여할 수 있는 대 상일 것이다. 모델은 말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욕망으로써 욕망주체에 게 진짜 욕망할 만한 대상을 가리킨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 욕망은 본질적으로 모방적이다. 그러므로 모델 의 욕망을 흉내내어 그 모델과 똑같은 대상을 선택한다〉는 오래된 생 각, 그러나 그 논리적 결과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는 것 같은 생각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 어린이 욕망의 모방성은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우리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어른들은 대체로 타인을 본보기로 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는 것만 제외하면, 어른의 욕망도 어린이의 욕망과 전혀 다를 바가 없 다. 어른은 자기 존재의 결함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아주 만족한다고 선포하면서 자신이 타인들의 모델이라고 자처한다. 모두들 자신의 모방울 감추기 위하여 갈수록 더 〈나를 모방 하십시오〉를 되풀이한다. 같은 대상을 향하는 두 욕망은 서로의 장애물이 된다• 욕망에 기반을

둔 모든 〈모방〉은 자동적으로 갈등으로 귀착된다 . 사람들은 언제나 이 경쟁 관계의 원인에 대해서는 눈이 멀어진다. 인간 관계에서 〈같은 것〉, 〈유사한 것〉은 〈조화〉라는 개념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같은 취미 를 지니고 있고 유사한 것들을 사랑하며 서로 이해하고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들이 진정으로 〈동일한 욕망〉을 지니고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몇몇 뛰어난 작가들만이 이런 유형의 경쟁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I ) 프로이트에 있어서도 이러한 부류의 사실들은 간접적이고 불완전하게만 다루어졌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그것을 보 게 될 것이다.

1) Menson ge romantiq u e et Ve rite romanesqu e , 1961.

이상하게도 그들의 관계 때문에 모델도, 추종자도, 그들 서로가 경쟁 관계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비록 모델이 모방울 부추긴다 하더라도 모델은 스스로가 그 대상인 경쟁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추종자가 자신을 배반했다고, 즉 자신과 〈경쟁한다〉고 생각한다. 추종자는 비난받고 모욕당했다고 믿는다. 추종자는 자기의 모델이 자 신을, 그 모델이 누리고 있는 탁월한 존재를 공유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자라고 판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오해의 이유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모델은 자신을 추종자보 다 너무 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추종자는 또한 자신이 모델보다 너무 아래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래서 경쟁 관계, 다시 말해 두 욕망이 일치한다는 생각을 둘다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상호성을 완벽하 게 보여주기 위해서 추종자도 때로는 그 자신의 모델에 대해서도 모델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모델도 아무리 자신에 만족해 있는 것 같아도 여기저기서 추종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들을 덧붙여 말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물론 여기서 본질적인 것은 추종자로서의 입장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추종자의 입장에 서서 인간의 근본적인 상황 울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비록 추종자가 모델에게 떠둘썩한 욕설을 · 퍼봇고 자기를 비난하는 판정의 부당함과 부조리를 고발한다 하더라도 , 추종자는 속으로는 이 바난이 혹시 정당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고 번뇌한다. 그에게는 그 것을 반박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모델의 권위는 시험을 겪고 나면 축 소되기는커녕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추종자는 자신의 눈을 통하여 또는 모델의 눈을 통하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은 그 경쟁 관계와 그 경쟁 관계가 그에게 부여 한 이 모델에 대한 거짓 이미지를 통해서 자산울 바라본다. 인간의 욕망에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것에서 유래하는 모방 경향 이 있다. 그런데 이 모방 경향은 종종 라인에 의해 촉발되거나 강화되 기도 한다. 도처에서 울려퍼지는 〈 날 모방하라 〉 는 명령에 따를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을 마음에 없는 노예로 만들어버리면서 절망감만 안겨 주는 〈나를 모방하지 말라 〉 는 명령을 곧 만나게 된다. 이렇듯 욕망과 인간은 영원히 서로 어긋나는 신호들을 보내고 있는데, 이들은 함정에 빠져 있을수록 자신이 상대에게 함정을 파고 있다는 것을 더 의식하지 못한다. 이것을 미국의 심리학자들처럼 어떤 병리학적인 케이스로 치 부해서는 안된다. 이 모순적인 복수의 명령, 아니 오히려 인간들이 끊 임없이 서로를 그 속에 가두는 모순된 명령둘의 그물망인 이 〈이중명 령 double b i nd 〉은 우리 에 게는 아주 혼한, 아마도 가장 혼한 현상이 며 모든 인간관계의 토대처럼 보인다 . 2 ) 우리가 방금 말한 심리학자들은 〈이중명령〉에 노출되어 있는 어린 이에게 이중명령의 효과가 특히 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전 적으로 옳다. 〈우리들을 모방하라〉, 〈나를 모방하라〉, 〈전실된 삶, 전정 한 존재 등의 비밀을 쥐고 있는 것은 바로 나다〉라는 식의 말을 되뇌 2) Grego r y Bate s to n , Don D. Jac kson, Jay Haley and Joh n Wealdand, Toward a Theorey of Schiz o p hr enia , in Inte rpe rsonal Dyn ami cs, Warren G. Ben nis eds., Dorsey Press, Homewood, Illin o is , 1964, pp. 141-161.

고 있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필두로 한 모든 어른들, 적어 도 우리 사회의 모든 교양 있는 사람들이다. 어린이가 이러한 유혹적인 말에 귀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어린이는 도처에서 나오는 이 충고를 더 욱 신속하게 그리고 더욱 열렬하게 따를 것이며 필히 생기게 될 대립 의 결과는 더욱 지독해질 것이다. 어린이에게는 이 모델들의 권위를 거부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떠한 지표, 어떠한 거리감, 어떠한 판단 근 거도 없다. 모델들이 그에게 되돌려 보내는 〈아니 non 〉라는 대답은 무 시무시한 선고처럼 울려퍼진다. 진짜 공동체 추방이 그를 짓누른다. 그 의 욕망의 방향 설정, 다시 말해서 앞으로의 모델 선택은 이런 경험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된다. 다시 말해 그 아이의 인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욕망이 스스로 원하는 곳으로 자유롭게 갈 수 있다면, 모방 본 성으로 인하여 욕망은 거의 항상 〈이중명령〉의 곤경에 빠질 것이다. 자유로운 모방은 경쟁적 욕망의 장애물을 향하여 맹목적으로 돌진한 다. 모방은 자신의 실패를 낳을 것이며, 이 실패는 역으로 모방 경향을 더 강화할 것이다. 여기서는 자기자신으로부터 자양분을 취하는 과정 이 있는데, 이 과정은 항상 갇수록 더 단순화되면서 더 격해전다. 자 기가 지향하는 존재를 발견할 때마다 그 추종자는 타인이 그에게 가 르쳐 준 것을 욕망함으로써 그 존재에 도달하려고 애쓴다. 그때마다 그는 상대방의 욕망이라는 폭력을 만난다. 그러자 그는 논리적이지만 지나친 비약으로 폭력 그 자체가 언제나 그를 피하는 그 존재의 가장 확실한 칭후라고 섣불리 결론을 내려버린다. 이때부터 폭력과 욕망은 서로에게 묶이게 된다. 욕망주체는 폭력을 당할 때마다 항상 욕망이 눈뜨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의디푸스 대왕』 속에서 왕 위나 여왕같이 그 존재를 상징하는 귀중한 것들이 왜 네거리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이 때리려고 든 팔 〈뒤에서〉 그 모습을 나타내는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폭력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자 왕이다〉. 조카스 트는 〈의디푸스는 그를 불행이나 공포나 재산이나 해로운 폭력, 죽 포

보스 Phonos ' 라고 말하는 자의 뜻대로 되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바로 이런 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라이오스와 크레온과 티레시아스 의 신탁둘이나 연속되는 메신저들의 나쁜 소식들은, 신화의 모든 인물 이 그 속에 들어 있는 〈포보스의 원리 Log os Phobous 〉에서 나오는 것이 다 . 요컨대 이 포보스의 원리란 말이 필요없이 전파되는 모방 욕망과 폭력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 포보스 Phobos(Phobous)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공포의 신으로, 전쟁의 신 아레 스 Ares 의 수행원.

폭력은 완전히 욕망할 만한 것, 신의 자족, 즉 폭력이 계속 불가지의 것이고 난해한 것일 때만 그렇게 보이는 〈멋진 모든 것 belle t o t al it e 〉의 시니피앙 s ignifi an t이 된다. 욕망주체는 이 폭력을 숭배하며 동시에 증 오한다. 그는 폭력으로써 폭력을 제압하려고 애쓴다. 다시 말해 욕망주 체는 폭력과 싸운다. 어쩌다가 그가 폭력을 이기고 나면 그 폭력이 누 리고 있던 마력은 곧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욕망주체는 다른 곳에서 더욱 폭력적인 폭력, 진정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을 찾아나서야한다. 모방 욕망은 불순한 전염병과 같은 것이어서, 만일 이것을 멈추기 위한 희생물과 이것이 다시 가동되는 것을 막는 〈제의적 모방〉이 없 다면, 희생위기의 원인인 이것은 공동체 전체를 파괴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모든 종류의 규칙과 금기들은 욕망이 아무렇게나 떠다니다가 아 무 모델에나 가서 정착하는 것울 막는 것이란 것을 뒤에 가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제의 형식과 제의가 허용하는 행위 쪽으로 에 너지를 집중시킴으로써, 문화 질서는 동일한 대상에 대한 욕망의 집중 울 막는다. 그리고 특히 어린이룰 〈이중명령〉의 고약한 피해로부터 보 호한다. * 알다시피 나는 지금까지, 어떤 것도 비국 주인공들을 구별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심리학적, 사회학적, 도덕적, 종교적 측 면에서 그들 중의 어느 하나를 특징지을 수 있는 모든 것, 죽 분노, 폭정, 휴브리스 등은 역시 모두에게 해당되며 또한 그것만으로는 불충 분하다. 이러한 속성들이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똑같이 해당된다는 것 울 연구자들이 결코 지적하지 않은 것은, 분명 이 속성들 모두가 어느 정도 번갈아 나타나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분 노는 영속적일 수가 없다. 분노는 급작스럽게 일어난다. 그것은 평온한 심층에서 솟아오르며 없다가 갑자기 나타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 는 이것을 언제나 갑작스러운,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폭정 또한 본질적으로 그것의 불안정성에 의해서 특징지어진다. 맨 첫번째 사람은 순식간에 권력의 정상에 도달하지만, 그의 한 적수에 의해 대 체되면서 똑같은 속도로 거기에서 굴러떨어진다. 결국 언제나 한 사람 의 폭군과 피압박민들이 있고 그 역할들만 교대될 뿐이다. 마찬가지로 언제나 분노는 있지만, 원수형제들 중의 하나가 격분할 때면 다른 형 제는 자신의 평온을 유지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비극속에서는 이렇듯 모든 게 교대되지만, 우리에게는 이 교대를 한 순간에다가 고정시키려는 끈질긴 경향이 있다. 주인공들에게 교차되는 대립을 확고부동한 차이로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들의 그야말로 신화 적인 바로 이 경향 때문이다. 교대의 개념은 비극에 나타나지만 그것의 상호성은 배제되어 있다. 역설적으로 그것은 어떤 인물의 특칭이 된다. 예를 들어 의디푸스는 스스로를 운명의 여신 혹은 행운의 여신의 아들이라 칭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더 〈개별화i nd i v i dual i ser 〉하고 상호성을 몰아내기 위 하여 , 이 를 장엄 하게 〈운명 Destin >이 라고 말한다. 의디푸스가 운명의 여신 Tukhe 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은 일련의 〈높은 것〉과 〈낮은 것〉에 의해서 드러나고 있다. 〈내 어머니는 운명의 여신 인데, 내가 살아온 나날은 나를 번갈아가면서 미천하고 또 위대한 존 재로 만들었다〉는 말이 그것이다. 이 비극의 마지막 문장에서 코라스

는 〈 운명 역 전 rev i remen t 〉 으로, 즉 다시 한번 더 교대로써 이 주인공의 존재를 정의한다. 이 정의는 정확한 것이지만, 다른 비극 주안공들에 대해서도 마찬가 지이다 . 단 한 편의 비극으로 국한해서 보는 것보다는, 비극의 총체적 인 〈 전집 cor p us 〉을 살펴보면 이것은 명백해진다. 알다시피 우리는 비 국의 주인공들을 다론 주인공들과의 관계에 의해서는 규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는 차례차례로 동일한 역할을 맡도록 운명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 의디푸스 대왕』에서 의디푸스는 지배자이지만, 『 콜로 노스의 의디푸스 』 에서 그는 피지배자이다. 크레온은 『의디푸스 대왕』 에서는 피지배자이지만, 『안티고네 An tigo ne .JI에서는 지배자이다. 결국 그 누구도 지배자의 정수이거나 피지배자의 화신이 아닌 것이다. 그런 데도 이것을 단순히 낭만적 드라마나 미국 서부활극으로 변형시켜 온 우리 시대의 관념적인 해석은 말하자면 비극정신에 대한 극도의 배반 인 셈이다. 지금껏 마니교적인 엄격한 선악 이원론과 희생물을 절대로 놓아주지 않으려는 사무친 원한이 비극의 교대되는 대립과 끝없이 반 복되는 〈 운명역전〉의 자리를 완전히 대신해 온 것이다. 비극에는 〈 운명역전〉이 많지만 비극은 이 〈운명역전〉이 영향을 미 치는 영역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의디푸스의 경우 그를 행운의 여신의 아들로 보는 정의에는 분노와 평온의 교대는 추방과 왕권의 교대만큼 중요하다. 교대의 리듬과 특히 여기저기서 교 대가 일어나는 영역이 우리에게는 하도 다르게 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둘을 비교해 볼 생각을 품을 수도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알기로는 전통적인 비평도 결코 그렇게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교대 현상을 발견한 지금 우리는, 비극의 모든 테마가 이 현상을 따른다는 것을 쉽 게 예측할 수 있으며 또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풍부한 이 현상은 득 별한 설명을 요구한다. 교대는 분명히 관계이다. 심지어 이것은 비극 관계의 근본적인 여건 울 구성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대로써 어떠한 특별한 인

물을 규정지울 수가 없는 이유이다. 언뜻 보기에 교대는 원수형제가 서로 다투는 대상의 엇갈린 소유와 상실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대상은 아주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소유와 상실은 곧 번갈아 일어나는 신분의 완전한 전도, 죽 존재에서 무로 그리고 무 에서 존재로의 이행과 같은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에데오클레스와 풀 리니스는 동시에 공유할 수 없는 왕권을 번갈아가며 차지하기로 결정 한다. 에테오클레스가 왕일 때 폴리니스는 신하이며 또 그 역도 마찬 가지이다. 이 대상의 교대는 그러나 그 리듬이 더욱 빠른 비극 줄거리와는 구 체적인 관계가 거의 없다 . 비극 줄거리의 근본적인 전동은 비극의 논 쟁이나 〈대화 s ti chom yt h i e 〉 속에서, 다시 말해서 일대일의 결투에서 두 적수가 서로에게 가하는 엇갈린 주먹과 같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모 욕과 비난의 교환에서 볼 수 있는 진동이다 . 이미 살펴본 『페니키아의 여인들』에서,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니스의 결투 이야기는 비극의 논쟁 울 대신하여 그것과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물리적인 폭력이든 말의 폭력이든, 모든 공격 사이에는 시간적인 간 격이 있다. 적수가 상대방울 때릴 때 그는 항상 결투나 논쟁을 성공리 에 결말짓기를,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를 , 다시 말해 자신의 폭력이 결 정적인 최종의 폭력이기를 희망한다. 충격 때문에 일시적으로 당황한 회생물이 〈정신을 되찾아〉 응수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유예 기간이 필요하다. 반격이 나올 때까지, 방금 때렸던 사람은 자신이 전 정으로 결정적인 타격울 가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디에도 정착하 지 못하고, 갈등이 지속되는 내내 이쪽저쪽 사이를 진동하고 있는 것은 결국 승리라는 저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이다. 알다시피 집단 추방만이 이 폭력을 공동체의 바깥에 위치시킬 수 있다. 알다시피 욕망은 이 의기양양한 폭력에 집착한다. 그래서 욕망은 필 사적으로 이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을 제압하고 또 구현하려고 애쓴다. 욕망이 폭력을 그립자처럼 따르는 것은 바로, 폭력이 존재와 신성울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장일치의 폭력, 즉 스스로를 제거하는 폭력이 초석적인 것은, 폭 력이 고정시키는 모든 의미들과 폭력이 정착시키는 모든 차이들이 이 미 폭력에 응집되어 있으며 또한 그것들은 희생위기 내내 한 적수에 게서 다른 적수에게로 폭력과 함께 진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언의, 혹은 디오니소스적인 그 〈현기증 ve rtig e 〉 은 어떤 때는 이쪽을 또 어떤 때는 다른 쪽을 이롭게 하는 것 같은 폭력에 의해 좌우되는 〈세상 mo­ nde> 그 자체의 무시무시한 전동에 다름아니다. 두번째 폭력은 첫번째 폭력이 설립한 것을 다시 설립하기 위해서 그것을 전복해 버린다. 인간 사회에 폭력이 있는 한, 그리고 신성과 마찬가지로 폭력도 전부이자 아무것도 아닌 내깃돈 같은 것인 한, 폭력은 절대로 자신을 가만히 내 버려두고 있지 않을 것이다. 『바카스의 여신도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신성을 가는 곳마다 파괴의 씨를 뿌리면서 이쪽저쪽으로 건너다니는 내깃돈과 같은 것으로 보는 생각은 본질적으로 비극 데마들의 이해에 속한다. 이 테마들은 구조화는 비극 줄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따로 떼어서 생각해야 하며, 모든 점에서 폭력과 똑 같은 내깃돈과 같은 것으로 신을 보는 생각은 비극 텍스트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비극과 무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런 생각보다 더 그리스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호머에게서, 다시 말해 비극보다 더.오래된 문학 텍스트에서 이런 생각은 아주 명확하게 나 타나있다. 호머에게는 폭력, 욕망 그리고 신성의 관계를 뚜렷이 보여주는 몇 개의 용어가 있다. 현재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 중 가장 특칭적인 것은 아마도 〈거의 신적인 마력〉 그리고 전두의 승리와 연관된 〈신비 로운 선택〉이란 말로 정의되어야 할 〈쿠도스 kudos 〉라는 명사일 것이 다. 〈쿠도스〉는 전무의 내기 그리고 특히 그리스인들과 트로이인돌 사 이에 있었던 일대일 결투의 내기였다.

『 인구제 도사전 Dic t io n nair e des ins ti tut i on s i ndo-europ e e nnes 』 에 서 방 브니스트 Benven i s t e ® 는 〈 쿠도 스〉 를 〈 절대 권의 부적 tal is m an de sup re ma ti e 〉이라고 번역한다. 쿠도스는 폭력이 행사하는 마력이다. 폭력은 모습을 드러내는 곳마다 인간들을 유혹하고 동시에 소름끼치게 한다 . 그런데 그것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신의 발현 e pip han i e 이다. 폭력이 나타나자마자 만장일치는 이것에 대항해서 혹은 이것의 주위에서 결국 그것과 똑감은 것이 되려 한다 . 그것은 불균형울 야기시키며 운명을 어느 한쪽으로 기울게 한다 . 폭력의 아무리 작은 성공도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저항할 수 없는 것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 쿠도스를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이 커진다고 여기며 그것을 박탈당한 사람들은 손이 묶이고 마비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강한 공격을 가한 사람 , 그 순간의 정복자, 즉 타인들로 하여금 그의 폭력이 결정적으로 승리했다 고 믿게 하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언제나 쿠도스 룰 차지한다. 승리자의 적수들은 저주를 피하고 쿠도스를 되 찾 기 위하 여 각별한 노력을 하게 된다.

® 방브니스트 Em i le Benven ist e ( 1902-1976) : 소쉬르와 프라그학파 계열의 프랑스 언어학자 .

경쟁이 모든 것을 파괴하거나 흐트릴 정도로 격심해질 때, 이 경쟁 관계는 · 항상 어떤 대상을 향하고 있는데 그 대상이 바로 쿠도스이다. 쿠도스가 영광으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이때는 방브니스트가 지적하 는 것처럼 이 낱말의 여러 의미들 중에서 마술-종교적 ma 엉 co-rel igi eux 인 의미가 상실된다. 오늘날 이 낱말은 사라졌지만 그 내용은 남아 있다. 에로티즘, 모든 종류의 경쟁, 스포츠, 운수를 건 승부에서 의기양양한 폭력의 심리적 효과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 이다. 그리스인들에 있어서의 신성이란 결국 폭력의 이 절대적인 효과 일 뿐이다. 형용사 쿠도스는 신들이 항상 갖고 있는 어떤 의기양양한 존엄성을 가리킨다. 인간들은 다만 일시적으로, 그리고 항상 〈서로를 희생시킴으로써〉만 이것을 누릴 수 있을 뿐이다. 신이 된다는 것, 그

것 은 영원히 쿠도 스를 소 유하면서 계속 그것의 확실한 주인이 되는 것 인데 이런 일은 인간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때는 어느 한 쪽 에, 또 어떤 때는 다른 쪽에 이 쿠도스를 부여 하는 것은 바로 신이며 이것을 빼앗는 것은 다른 적수들이다 . 〈갈등의 측 면에서 〉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너무나도 잘이 상호침두되어 있기 때문에 , 방브니 스 트 자신도 이 두 영역을 분리시키기를 단념한다. 그러나 이 상호침두가 우리가 살피고 있는 이 문제의 주요 관심사이 거 나, 이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격화 과정의 본질적 양상을 찾아낼 수 있거나 하는 경우에는 그도 이 혼합체를 분 리시키려고 애쓴다 . 3)

3) 제 10 장을 참고할 것 .

인 간등 이 끊임없이 서로 빼앗는 지고의,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내깃 돈과 같 은 이 쿠도스가 존재하는 한, 평화를 회복시킬 수 있는 효과적 인 초월 은 없다 . 쿠도스의 작용을 통하여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상호적 폭 력 속에서의 신적인 것의 해체이다. 전투에서 불리해질 때 호머의 전사들은 〈 오늘은 제우스가 ‘쿠도스’를 적들에게 주었지만 내 일은 아마 그것을 우리에게 줄 것 〉 이라고 확신하면서 그들의 〈전략적 후 퇴 rep l i s t ra t e giq ue 〉 를 정당화시킨다. 두 진영 사이의 쿠도스의 교대는 비극의 교대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 우리는 『 일리아드 Ill i ade 』에서 신들이 양쪽 진영으로 분리됨으로써 사건이 느리게 전개된 것은 아닌 가 하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분명 교대되는 승리와 함께 한 진영에서 다른 진영으로 옮겨다니던 인격화된 쿠도스라 할 단 하나의 신만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유리피데스의 여러 작품에는 〈높은 것〉과 〈낮은 것〉 사이의 교대가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물리적 폭력이 아닌 정신적 폭력에서 나오는 이 교대는 승자와 패자를 전도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앙드로마크 Andro­ ma q ue 』에서 헤르미온느 Herm i one 는 처음에는 이 여주인공에게 아주 품 위 있게 처신한다. 이리하여 그녀는 앙드로마크로 하여금 피루스Pyr-

rhus 의 합법적인 부인이자 왕비인 자신과, 정복자들의 희롱에 놀아나 야만 하는 불쌍한 포로인 단순한 정부 사이의 거리를 스스로 느끼도록 . 만든다. 그러나 참시 후 비극의 운명역전이 일어난다. 즉 헤르미온느가 붕괴된다. 앙드로마크가 새 왕비이며 헤르미온느는 몸종인 것이다. 비탄에 빠진 저는 어떤 신에게 빌어야 하나요? 몸종의 발밀에 꿇어 몸종으로 전락해야 한다는 것인가요? 유리피데스는 이 상황에 들어 있는 실제 변화보다는, 유모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는, 헤르미온느의 지나친 반응에 더 관심을 갖는다. 얘야, 전에는 그 트로이 여인을 지나치게 증오하더니, 이번에는 또 지나치게 공포에 빠져들고 있는 너의 말을 , 나는 믿을 수가 없단다. 이 지나친 반응들은 운명역전의 일부를 이룬다. 우리는 이 힘의 변 형을 다른 지나친 반응들과 결부시켜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피루스도 거기에 없어 어떠한 결정도 일어나지 않지만, 앙드로마크를 죽이고자 하는 헤르미온느의 아버지 메넬라스 Menelas 와 앙드로마크의 옹호자로 서 그의 적수를 제압한 늙은 펠라이 Pelee 사이에 비극적 논쟁이 있었 다. 여기서 쿠도스를 획득한 것이 바로 펠라이였던 것이다. 쿠도스의 이동이 단순히 〈주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객관 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역전되는 승자와 패자 사이의 관 계로서 심리학 용어나 사회학 용어로 해석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이 것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귀결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것에는 어떠한 불변성도 없을 뿐 아니라 어떠한 종합적인 해결책도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쿠도스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승리, 죽 곧

다시 위태롭게 될 우월성의 공허한 기호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승 자들에게 차례로 전수되는,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존재할 필요가 그다 지 없는 스포츠 경기의 트로피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신 화적이며 제의적인 굴절이다. 『호모 루덴스 Homo Ludens 』에서 호이징가 Hu i z i ng a · t 가 그랬던 것처럼 종교적인 것을 유희의 범주에 넣기보다는, 유희를 종교적인 것, 다시 말해 희생위기의 범주에 넣어야 할 것 같다. 유희는 그것이 어떤 희생위기의 양상을 재생산한다는 의미에서 종교 적인 기원을 지니고 있다. 내기의 자의적인 성격은, 경쟁 관계가 그 자신 이의의 다른 대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 나 이 경쟁관계는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어떤 무자비한 무쟁으로 악화 되지 않도록 조절된다.

® 호이징가J ohan Huiz in g a ( 1s12-1945) : 네덜란드 역사가. 『중세의 가울 D¢cl i n du Maye n A g e 』 (1919) , Erasme(I924), Homo Ludens(193s) 등의 저서가 있다.

우리는 아마 그리스어에서도 신화 쪽으로 굴절되어 있는 말을 발견 하지 못할 것이다. 쿠도스에 폭력의 상호성이 들어 있긴 하지만 그것은 경쟁이나 승부와 같은 툴 속에서만 그러하다. 우리는 내기를 사소한 것으로 보고, 그 싸움이 아무리 위험하다 하더라도 단순한 오락에 불 과하며 그 인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바로잡기 위하여, 그 또한 부분적으로는 신화적이지만 같은 방식은 아닌 다른 말들을 살펴보아야 겠다. 예를 들어 〈티모스t h­ y mos 〉는 정신, 영혼, 분노(의디푸스의 분노)를 의미한다. 의견상 〈티모 스 〉 는 아주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과 교대적아라는 특칭을 제 의 하고는 〈 쿠도스 kudos 〉와 아무런 공통점 이 없다. 어 떤 때는 사람들 이 〈 티모스 〉 를 소유하여 왕성한 생명력을 나타내지만, 또 어떤 때는 반대로 〈티모스〉를 상실하여 의기소침하며 괴로워한다. 〈티모스〉는 〈연기를 만들다〉, 〈희생시키다, 죽 폭력으로 행동하다〉, 〈격노하다〉를 의 미 하는 이 라는 말에 서 나온 말이 다. 〈티모스〉는 〈t h y e i n 〉의 폭력 정도에 따라서 왔다갔다 한다. 사실 〈쿠

도스〉와 〈 티모스 〉 는 모두 어떤 하나의 관계에 대한 부분적인 두 개의 관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적대자들이 빼앗는 것은 스 포츠의 트로피 나 값싼 신성이 아니다. 단 하나의 대상으로 모방 욕망들이 수령한다는 사실로 볼 때 모두 자신의 영혼이나 생명의 숨결이나 자기 존재 자체 를 타인의 폭력으로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번갈아 나타나는 〈티모스〉의 존재와 부재는, 정신의학이 조울증 e y e­ J o t hy m i e 이라고 이름붙인 것을 잘 규정해 주고 있다. 모든 조울증의 배 후에는 언제나 모방 욕망과 경쟁의 강박관념이 존재한다. 조울증을 본 질적으로 개인적인 현상으로 본 것은 정신의학의 잘못이다. 이 환상은 신화적인 범주에 속한다. 그것은 『의디푸스 대왕 』 에서 〈 운명 〉 , 〈 행운〉 또는 〈분노〉의〈방향전환〉을 단 하나의 주인공에게 전담시키는 환상과 같은 것이다. 모든 개인적인 조울증은 교대되는 차이의 관계인 타인과 의 관계의 절반에 불과하다. 모든 조울증에는 두 상대자들 중의 하나가 높은 곳에 있을 때 다른 상대자는 낮은 곳에 있고, 또 그 역도 성립되 는 시소 작용이 있다. 현대의 정신의학이 조울증의 병리학적 형태 속에서 어떤 길항작용 an tag on i sme 의 구조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흔적들이 모두 지워져 버 렸기 때문이다. 물리적 폭력이나 비극적 두쟁의 떠들썩한 저주조차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타인〉 자체가 사라졌거나 아니면 그 다양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단 하나의 형태로만 나타나고 있는 등의 현상이 그것이다. 그래서 길항작용이 들어 있는 영역들은 모두 경쟁과는 낯선 것처럼 표현되고 있다. 예를 들어 유행의 불가항력이 일찍이 이처럼 전면적이던 적이 없었던 오늘날의 ' 세계에서, 아무도 모 방하지 않고 자신의 밑바닥으로부터 끌어내어 〈자신만으로〉 실천한다 고 주장하는 문학 또는 예술의 창조가 그것이다. 만일 아무것도 그것울 중단시키지 않고 내버려두면 비극적 조울증은 언제나 더욱 많은 개인들을,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공동체 전체를 광 증과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심한 불안에 떨면서 아

무것과도 섞이지 않음으로써 전염으로부터 보호받으려 하는 합창대의 욕망을 이해할 수 있다. 보통사람들이 찬양하는 절도와 균형은 비극적 관계의 교대와 대립되는 것이다. 현대의 낭만적인 지식인들은 거기에 서 그들을 분개시키는 어떤 소심함을 본다. 확고한 규칙위반의 의지만 이 그들의 동의를 받을 만한 것처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 합창대의 신중함을, 모든 부르조아의 소심함 이나 혹은 어떤 〈초자아 surmo i〉의 격렬하고 자의적인 억압으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합창대를 불안에 떨게 한 것은 〈위반〉 그 자체가 아 니라 상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는 그 위반의 절과들이라는 것을 유의하지 않고 있다. 비극적 관계의 이 어지러운 진동은 마침내 아주 튼튼한 집도 뒤흔들어 무너뜨려 버릴 것이다. 그렇지만 현대인들 중에는 그야말로 비국적인 〈순응주의〉 때문에 우리가 방금 말한 경멸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그 들의 불행과 천성에 힘입어서, 운명역전이라는 비극적 개념이 암시하 고 있는 모든 것을 예감하는 뛰어난 사람도 있다. 거의 광기 상태에서 횔덜린 H 1> lderl i n 은 『안티고네』와 『의디푸스 대 왕』을 조사한다. 소포클레스의 주인공들처럼 똑같은 어지러운 변화에 흥분된 그는 합창대들이 집착하던 그 절도를 되찾으려 애쓰지만 허사 이다. 비극과 횔덜린의 정신착란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인이 자신의 시, 소설, 수필, 편지에서 자신에 대해 쓴 묘사들을, 엄격히 문 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리스 특유의 어떤 비 극적 감수성과의 특별한 접촉이나 혹은 초인간적으로 고양되다가 공 허와 바탄만이 진짜인 것처럼 보이는 시간으로 바뀌는 점점더 무서운 교대가 광기의 칭조가 되곤 했다. 신은 다시 자신의 정신을 차리기 위 해서만 시인을 방문한다. 존재로부터 부재의 시기까지 그리고 부재로 부터 존재의 시기까지 기억은 지속된다. 이것은 개인적 존재의 지속성 울 보장하는 데에 충분하여 소유의 즐거움을 더욱 열광적인 것으로

만들며 상실의 쓰라립을 더욱 혹독한 것으로 만든다. 어떤 때는 영원히 타락했다고 믿고 있던 사람이 홀연히 자신의 부활을 목격하며, 또 어떤 때는 반대로 자신을 신이라고 여기던 사람이 끔찍하게도 자신이 속고 있었음을 발견한다. 신은 〈 타인〉이며 시인은 모든 존재이유를 영원히 박탈당한 〈산 죽음〉, 죽 제사장의 칼 아래에서 말 못하는 암양과 같다. 신은 종종 고유명사의 이름을 갖는다 . 어떤 때는 횔덜린 자신의 이 름을 또 어떤 때는 다론 사람의 이름을 갖는데, 대개 처음에는 여성이 지만 나중에는 시인 쉴러 Sch i ller 와 같은 남성이름을 갖는다. 『 횔덜린과 아버 지 의 문제 Hvlderlin et la que sti on du p ere 』 에 서 장 라플랑슈 Jea n Lap- lanche 가 생각하던 것과는 반대로 여성에 결부시키는 것과 남성에 결 부시키는 것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 처음에는 절대적인 우상 의 여성 화신이 있으며 다음에는 남성 화신이 있을 뿐이다. 시인의 편 지는 이 대체가 성적인 문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보여준다. 차 라리 그 반대이다. 사랑의 성공은 성의 영역에서 자아와 타인 사이의 모든 〈시합 e p reuve 〉의 의미를 제거시킨다. 횔덜린과 타인의 관계에서 신과 아무것도 아닌 것 사이의 교대는 시적이고 신화적이며 준종교적인 형태로, 그리고 또한 가장 기만적이 면서 동시에 가장 계시적인 완벽하게 합리적인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 쉴러에게 보낸 편지들은 욕망의 모델이 장애자와 경쟁자로 변모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 추종자의 상황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먼저 『히페리온 Hy p玩 on 』의 초고인 탈리아 단장 Fra gm en t Thal i a 의 한 부분을, 그 다음 실러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해 보자. 나는 존재의 모든 악이 원시적 통일성의 단절에서 유래하는 것인 양, 이 미천한 사람들 중의 두 사람이 한 마음을, 죽 뗄 수 없는 단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기만 한다면, 우리들 마음의 궁색함도 풍성함으로 변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였다 . (……) 그러면 나는 어떤 애정어린 미소를 구결하는 것과 아무에게나 내 자신을

내맡가는 것만을 생각하면서 , 우울한 기쁨과 함께 스스로를 되돌아본다. 아 ! 내 사랑에 빠져들기 위해서 얼마나 여러 번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발견했다고, 그리고 소유했다고 믿었던가 ! 얼마나 여러 번 성스러운 교환을 얻었다고 믿었던가! 나는 부르고 또 불렀다. 거기엔 당황하고 혼란 되고 심지어는 가끔씩 약간은 공격적인 가없은 자가 있었다—一그는 오로지 약간의 줄거움만을 원했지, 그토록 심각한 것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 (……) 나는 눈먼 아이였었다. (……) 나는 나보다 더 가난한 거지들에게 진주를 사러 갔었다. 너무나 가난하여 불행에 완전히 파묻힌 채 그들 불행의 정도조 차 헤아리지 못하면서 괴상하게 입고 있던 누더기 속에서 즐거워하던 그런 거지들에게. (……) 사실, 상실된 내 존재의 마지막 남은 것이 문제일 때, 그리고 나의 자존심이 되살아났을 때, 그때에 나는 단지 넘쳐 흐르는 활력 그 자체였으며, 내 속에서 절망의 전능함을 발견하곤 했다. 시들고 쇠약해진 나의 본성이 한모금의 행 복이라도 되찾기만 하면, 나는 거대한 군중 속으로 격렬하게 돌진하여 영감에 가득 찬 말을 하면서, 눈에는 지극한 행복의 눈물이 방울지는 것을 느끼곤 했다. 또는 내 영혼의 밤 속에 아직 어떤 영웅에 대한 생각이나 이미지가 녹 아내릴 때면, 마치 신이 내 박복한 영혼을 꿰뚫고 지나가는 양 나는 놀라 홍 겨워했다. 이미 어떤 세계가 내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잔잔하던 힘이 갑자기 깨어날수록 그것의 재추락은 더 깊었으며 분에 차지 못한 나의 본능은 더 큰 고통을 겪곤 했다. 쉴러에게…… 저는 다른 거장들과 비평가들의 말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이 점에 있어서 침착하게 저의 길을 추구할 만한 충분한 용기와 판단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에 관한 저의 의존 관계는 극복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것은 제가 작업하는 동안 불안에 빠지지 않으려고 당신을 잊으려고 애쓸 정도로 당신의 한 마디 말이 얼마나 저에게 영향을 주는지를 저가 잘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 불안, 이 부자유스러움이 바로 예술의 죽음이 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며, 예술가는 살아 있는 세계 앞에 홀로 있을 때 보다 걸작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가 편안하게 자연을 표현하기가 왜 더 어려 운지를 저는 아주 찰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술가는 자연과 거의 구별되지 않으며 자연과의 관계는 너무 밀집하기 때문에 그 권위에 반항하거나 복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강력하고 더 분명한, 그래서 더욱 압도 적이고 더욱 능동적인 거장들의 완벽한 재능이 젊은 예술가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때, 이 무서운 궁지는 거의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이와 함께 노는 것은 어린이가 아니며, 자신의 세계와 함께 최초의 예술가가 처해 있던 애초의 안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그들의 우월성을 망각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그다지 절찬하지 않은 어른들을 상대로 합니다. 그러다가 그 우월성을 느끼면 그는 고집부리거나 아니면 복종적이 되게 마 련입니다 .4) *

4) Holderlin , Oeuvres, Pari s, 1967, pp. 114, 415-416.

차이들이 동요하기 시작하면 문화 질서 속의 어떤 것도 더 이상 항 구적일 수가 없으며 모든 입장들은 끊임없이 서로 뒤바뀐다. 따라서 비극의 적대자들 사이의 차이는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전 도될 뿐이다. 〈원수형제들〉이 구성하는 불안정한 체계 속에서 그들은 결코 동시에 똑같은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기억하고 있듯이, 위에서 우리는 이 체계를 차이소멸, 대칭, 상호성이라는 말로써 정의했었다. 그런데 방금 우리는, 차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두 정의는 모순되는 것일까? • 상호성은 실질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비상호적인 순간들의 총체이다. 두 주역둘이 동시에 동일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짜 사실

이다. 그러나 그 들 은 뒤 를 이어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충분히 기다리 기만 한다면 , 우리는 체계의 한편에 있던 것을 마침내 다른 편에서 다 시 찾 아낼 수 있다. 되받아치는 리듬이 빨라질수록 기다릴 필요는 그 만큼 더 작아진다. 타격이 점점 빨라질수록 타격을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에는 분명히 아무런 차이도 없어진다. 욕망, 폭력, 전략뿐만 아니라 교대되는 승리와 패배, 흥분과 절망 모두가 쌍방에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도처에 있는 똑같은 조울증인 셈이다. 그러므로 첫번째 정의는 계속 유효하다. 우리는 동요하는 차이의 작 용으로써 이것을 분명히 밝힐 수 있다. 우리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차이의 소멸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그것의 전도일 뿐이 다 . 상호성 역시 동시에 지각할 수는 없다. 이 체계에 연루된 사람들은 언제나 엄청난 차이에 의해서 그들의 상대방과 분리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 형제들 〉 중의 하나가 아버지와 왕의 역할을 수행 할 때, 다른 형제는 상속권을 박탈당한 아들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적대자들은 그들 자신이 그 속에 들어 있는 관계들의 상호성을 지각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들은 모두 너무 강한 비상호적인 순간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관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여러 순간을 한눈에 포착할 수도 없다. 이 처럼 여러 순간들을 비교할 수가 없는 이들은 모두, 자신은 아주 독특 하다는 생각, 즉 모든 것이 전부하고 획일적이며 단조로운 이 세상 속 에서 자산만이 유일한 예의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 사실 상호성에 말려들었을 때는 〈똑같은 사람 〉 이 되어 눈이 멀어서 그 상호성을 알아보지 못하던 사람도 일단 거기에서 떨어져 나오면 그것을 아주 잘 알아차린다. 모든 사람들이 희생위기 때에는 예언자의 재능과 당당한 지혜를 갖고 있다가도 위기 가 흔들리면 이 재능과 지혜도 붕괴되어 버리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 에서이다. 의디푸스, 크레온 , 티레시아스가 번갈아가면서 모두 〈페스트를 치유

할 수 있다 〉 고, 즉 테베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있는 갈등들을 타개할 수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것은 그들 모두가 의부 출신이라서 내부의 차이, 즉 적대자들 사이에서 동요하는 차이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떠한 차이도 그 적대자들을 분리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강한 전염력을 갖고 있는 갈등 속으로 차례로 흡수되고 만다. 체제의 안에서 보면, 차이들밖에 없다. 반대로 밖에서 보면 동질성 밖에 없다. 안으로부터는 동질성이 보이지 않으며, 밖으로부터는 차이 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두 관점이 대등한 것은 아니다. 안으 로부터의 관점은 언제나 밖으로부터의 관점에 통합될 수 있지만, 밖으 로부터의 관점은 안으로부터의 관점에 통합될 수 없다. 이 체제에 대한 설명은 안으로부터와 밖으로부터라는 두 관점의 화해 위에 근거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비극 혹은 희극에 대한 진정한 독법 속에 이미 어느 정도 나타나 있다. 밖으로부터의 관점, 즉 상호성과 동질성을 보며 차이룰 부정하는 이 관점만이, 희생물에 대항해서 그리고 희생물의 주위에 다시 만들어지 는 만장일치의 비결인 폭력적 해결의 메커니즘을 발견할 수가 있다 . 이미 살펴보았듯이 차이가 전혀 없을 때, 결국 동질성이 완벽할 때 적 대자들은 〈짝패〉가 되었다. 희생대체를 보장해 주는 것은 그들의 바로 이런 상호호환성이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우리가 제안했던 『의디푸스 대왕』의 독법이다. 이 독서는 〈밖으로부터〉의 관점, 죽 동질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객 관적인 시선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초석적 만장일치는 밖으로부터 실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제 3 자의 시선과는 전혀 무관한 적대자들 그 자신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의 설명으로서는 충분치 못하다. 폭력적 만장일치가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그리고 희생대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동질성과 상호성이 적대자들에게 부여되어 서 체제의 내부에서 이 기운이 팽배해야 한다. 안으로부터의 시선과

밖으로부터의 시선이 어떤 의미로는 일치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하고 두 시선은 구분되어야 하고 체제의 내부에는 오해가 계속 남아 있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떤 희생물에 대한 폭력의 집중은 있을 수 없을 것이며, 이 희생물 선택의 자의적인 성격이 너무 명백하 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석은 다시 시작해야겠다. 위기에 처한 공동체 내부에서 행 해지는 희생대체를 가능케 하는 메커니즘을 안으로부터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거듭 말하지만 위기가 격렬해질수록 적대자들을 분리시키는 차이는 점점더 빠르게 , 그리고 점점더 강하게 동요한다 .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비상호적인 순간들이 서로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교차되어 나 타난다. 이것들은 서로 중첩되어 혼합된 이미지를 구성한다. 〈높은 것 들 〉 과 〈 낮은 것둘〉, 즉 지금까지 한번도 뒤섞이지 않은 채 서로 대립 되면서 교대로 나타나던 모든 〈극단적인 것들〉이 여기서는 뒤섞이어 나타나게 된다 . 이렇게 되면 언제나 한결같이 독특한 욕망주체는 더 이상 자신과 자신의 라이벌을 이 구조의 어떤 한 순간의 화신으로 보 지 않고, 영화와 같은 효과로 거의 동시에 두 개의 화신을 한꺼번에 보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독특한 차이, 죽 〈신 d i eu 〉과 〈신 아닌 자 non -di eu 〉 사이의 차이라는 말로써 이 체계를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화한 것이다. 동요하는 것은 이 차이만이 아니다. 이미 보았듯이 〈디오니소 스의 현기증〉은 가족적, 문화적, 생물학적, 자연적인 모든 차이들에게 까지 전파될 수 있으며 또 전파된다. 모든 현실은 이것의 작용에 사로 잡혀서, 정상적이라면 분리되어 있을 존재들이 종합이 아니라 조잡하 고 기형적이고 괴상한 혼합인 환각적인 실체를 이루게 된다. 실제 경험자들뿐만 아니라 신화학에서나 정신의학에서 이것을 연구 하는 연구자들의 주목을 끄는것은 이것의 괴이한 성격인데, 이것은 실로 구경거리가 될 만한 기이함이다. 사람들은 이 괴물들울 분류하려

고 애쓴다. 그것들은 모두 다르게 보이지만 결국은 모두 서로 닮았다. 그것들을 서로 구분지어주는 확고한 차이는 없다. 이런 환각적인 양상 둘은 말하자면, 우리를 〈짝패〉라는 본질로부터 떼어놓기 위한 것에 불 과하다. 언제나 잘 알려져 있지 않는 근본원칙, 그것은 짝패와 괴물은 하나 라는 것이다. 물론 신화는 두 극단 중의 하나를, 일반적으로는 괴물 같은 것을 강조하여 다른 쪽을 감추어버린다. 모든 괴물은 짝으로 갈 라지려는 경향이 있으며, 또한 모든 짝패는 은밀히 괴물 같은 성질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괴물을 무시하지는 않으면서 바로 이 짝패에게 우선권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괴물이 분리되는 데에 서 진정한 구조가 드러나게 된다. 적대자들이 끈질기게 인정하지 않던 그들 관계의 진실도 마침내 모든 차이들의 광적인 동요 속에서 〈 환각 의 형태로〉 인정받게 된다. 원수형제가 부인하던 형제의 우애나 이웃 의 정과 같은 동질성과 상호성도 그들 내부와 의부에서 괴물의 양분 처럼 아주 엉뚱한 형태로, 요컨대 가장 불안한 형태로 인정된다. 의학이나 문학작품에게, 〈짝패〉에로 우리를 안내해 달라고 요구해서 는 안된다. 의사들은 종종, 괴물 같은 것들의 증식을 즐기면서 본질적 인 양상들인 도처에 있는 동질성과 상호성을 없애는 데에 환자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종교 연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신질환 연구에서도 활개치고 있는 현실감 상실 dereal i sa ti on 의 분위기에 젖어 있는 정신분석 학자들과 신화학자들은 환각 현상 모두를 순전히 그리고 완전하게 〈상상적인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달리 말해서 미친 듯한 현상 속에 서 실제의 대칭들이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신화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 현실감각 상실은 인간의 폭력을 감추는 신성화 과정의 직접적인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괴물 같은 짝패가 신이라고 말 하는 것이나 그것은 순전히 상상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말하는 방식은 달라도 그 결과는 똑같다. 우리들의 종교적인 것에 대한 완전한 이해 부족이나 부여된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던 예전의 종교적인 것이

나 그것의 궁극적인 효과는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알기로는 도스토예프스키만이 처음에는 소설 r 분신 le Double 』에 서 그리고 나중에는 보다 더 원숙한 위대한 작품들 속에서, 무수한 괴 물 속에서 구체적안 상호성의 요체를 진정으로 발견한 것 같다. 〈 괴물 같은 짝패 double mons t rueux 〉의 집단 경험 속에서는, 차이들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뒤섞이고 혼합된다. 〈짝패들〉은 그들의 동질성 이 분명하게 인식되지 않더라도 서로 교환될 수 있다. 따라서 짝패들은 차이와 동일성 중간에 위치해 있으면서 희생대체에 필수불가결한, 죽 다른 모든 것들을 대표하는 유일한 제물로서 폭력 집중을 받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모호한 중간항을 제공한다. 어떤 것으로도 그들이 분리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할 수가 없는, 다시 말해서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적대자들에게 이 괴물 같은 짝패는, 이렇게 하여 초석적 추방이 라는 만장일치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것을 정확히 제공한다. 만장일치 적 폭력의 대상은 바로 괴물 같은 짝패이며, 이것은 또한 『바카스의 여신도들』에 등장하는 천의 머리를 가진 용처럼 하나의 몸뚱이 안에 있는 모든 괴물 같은 짝패들이기도 한다. 신이시여 ! 황소로, 혹은 천의 머리를 한 용으로, 혹은 불뿜는 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소서 ! 자 ! 젊은 바카스여, 메나데스를 잡으려다 체포된 저 자에게, 미소를 머금고서 죽음의 그물을 던져 주소서. 괴물 같은 짝패의 표식을 통해서 우리는 원시종교가 어떤 환각과 공포의 분위기 속에서 전개되는가를 엿볼 수 있다. 폭력적인 히스테리 가 최고조에 달할 때, 괴물 갑은 짝패는 여기저기에서 동시에 생겨난 다. 아주 해로운 망령에 〈대항〉해서, 그리고 동시에 그것의 보호 아래 에서 결정적인 폭력이 행사된다. 날뛰던 폭력은 잔잔한 평온으~ 바뀌

게 되고 환영들이 사라지면 간장도 완화된다. 이 긴장완화는 또한 이 모든 경험을 더욱 더 신비롭게 만든다. 순식간에 모든 국단들이 상통 하며 모든 차이들은 용해되어 버린다. 똑같이 초인간적인 폭력과 평화 가 동시에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현대의 병리학적 체험에는 어떠한 카타르시스도 들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체험을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서로를 비• 교•해야 할 것이다. 고대와 현대의 많은 문학 텍스트들 속에는 짝패, 짝패화, 짝패적 관 점에 대한 언급이 많이 들어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판독해 내지는 못 했다. 예를 들어 『바카스의 여신도들』에는 괴물 같은 짝패가 도처에 있다. 이미 보았듯이 이 작품의 시초에서부터 동물성, 인간성, 신성은 격렬한 동요에 사로잡혀 있다. 어떤 때는 동물들이 인간이나 신과 혼 동되며, 또 어떤 때는 반대로 신과 인간이 동물과 혼동되기도 한다. 펜테우스의 살해 직전, 그 결과 원수형제가 괴물 같은 짝패의 배후로 사라져야 하는 바로 그 순간에, 가장 홍미로운 장면이 디오니소스와 펜데우스 사이에서 전개된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일어난다. 펜데우 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디오니소스의 현기증에 사로잡힌 그는 〈짝패를 보았던〉 것이다. 펜테우스一어쩐지 해가 두 개로 보이는 것 같구나 . 아니, 해뿐만 아니라 이 데베와 일곱 대문의 성벽마저도 이중으로 보이는구나 . 앞장선 네 모습은 황 소로구나, 머리에 뿔이 두 개 솟아난. 디오니소스―이제야 당신께서도 사물을 바르게 볼 수 있게 되셨군요. 이 이상한 구절에서 일반화된 현기증이나 대상이 둘로 보이는 것처 럼, 짝패 데마는 주체에 대해서는 완전히 의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여

기서는 환각적인 요소들만이 나타나 있다. 분명히 그것들도 경험의 일 부를 이루지만, 경험의 전체도 아니며 경험의 필수적인 요소도 아니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텍스트는 좀더 계시적으로 된다. 펜테우스는 괴물에다가 예의 둘로 보이는 현상을 결합시킨다. 디오니소스는 이리 하여 동시에 인간, 신, 황소이다. 황소 뿔에 대한 언급은 두 테마를 이 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 짝패들 〉 은 언제나 괴물 같으며 괴물들 은 언제나 짝패화된다. 디오니소스의 〈 이제야 겨우 당신께서도 사물을 바르게 보실 수 있게 되셨군요 〉 라는 말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두 개로 봄으로써, 즉 디오 니소스를 이원성과 동물성의 이중적 특칭을 지닌 괴물로 봄으로써, 펜 데우스는 자산을 사로잡고 있는 어떤 작용의 엄격한 규칙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이 작용을 주도하는 신은, 모든 것이 자신이 세운 계획에 적합하게 전개되는가를 확인한다. 이 계획이란 물론, 우리가 앞에서 아 야기한 그 과정, 즉 만장일치적인 해결 바로 직전의 위기 결정에 나타 나는 〈 괴물 같은 짝패 〉 의 출현과 같은 것이다. 방금 우리가 인용했던 것을 다음 구절과 비교해 보면 더욱 홍미로울 것이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더 이상 환각이나 현기증이 아니다. 아주 분명히 표현된 〈 짝패 〉 의 실재, 적대자들의 동질성이 문제이다. 여기서 도 펜데우스가 디오니소스에게 말을 건다. 펜데우스―한데 내 모양이 어떻게 보이느냐? 이노를 닮았느냐 아니면 어 머니 아가베를 닮았느냐? 디오니소스―정말 당신은 그 두 분을 똑같이 닮으셨습니다. 여기서 동질성, 즉 진실은 오로지 가족의 유사성이나 펜데우스의 가 장을 통해서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 다른 것들도 있 다. 모든 〈짝패들〉의 동질성, 희생양과 그것을 추방하는 공동체의 동 질성, 회생집행자 sacr ifi ca t eur 와 희생자 sac rifi e 의 동질성이 분명히 드러

나고 있다. 즉 모든 차이들이 소멸된다. 〈정말 당신은 그 두 분을 똑 같이 닮으셨습니다〉. 이 과정의 주모자로서 이 과정의 본질적 여건들 울 공고히 한 자는 다시 한번 더 신 자신이다. * 괴물 같은 짝패에 대해서 우리가 필수적으로 언급해야 할 또 다른 덱스트는, 그에 대해 어떤 만족할 만한 해석도 제시된 적이 없는, 괴물 탄생을 묘사하고 있는 엠페도클레스 Em p edocle 의 텍스트인 것 같다. 만 일 이 철학자가 묘사하는 순환현상이, 초석적 폭력에 의해 생겨나고 제의에 의해 유지되며 새로운 희생위기에 의해 파괴되는 문명세계와 일치한다면, 괴물 탄생이 〈괴물 같은 짝패〉의 출현을 상기시킨다는 것 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사상가는 사랑과 증오라는 근본적인 두 힘 의 교대를 일종의 순환운동으로 간주한다. 새로운 세계 탄생 이전의, 사랑이 아닌 증오의 상태에서, 똑같은 것에 대한 똑같은 유혹에 의해 괴물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57- 그때에 목 없는 머리가 많이 생겨나기 시작하며 몸통에서 분리된 어깨 없는 팔들, 얼굴 없는 눈알둘, (증오 세계의) 행성들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 다. 58- 증오심에 불타는 몸체 없는 사지들이 분리된 채, 결합되기를 바라면서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59- 그러나 어떤 신성이 다른 신성에 더 가깝게 결합되자마자, 우연히 만 나는 대로 사지들이 조립되며, 수많은 다른 사지들도 연쇄적으로 그렇게 되 었다. 60 ―걷는 동안에 발길을 돌리는 수많은 손을 가전 사람들. 61- 두 개의 얼굴, 두 개의 가슴을 가진 존재들, 인간의 얼굴울 가진 소 • 또는 소의 머리를 가진 인간, 그리고 불확실한 성기를 지닌 자웅동체가 생겨

나곤 했다 . 우리가 제시하는 해석은, 〈신화란 무엇보다도 먼저 자연현상의 설명 이다〉라는 생각에 뿌리박고 있는 소크라데스 이전 사고의 〈물리적〉 해석들을 거부하는 요즘의 경향을 취하고 있다. 〈물리적〉 해석들이 아 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최근 해석들은 아직 엠페도클레스와 소크라 테스 이전 사상가들의 종교적 요소들에게 충분히 중요한 자리를 내주 지 않고 있다. 만일 우리가 〈 괴물 같은 짝패 〉 체험을, 앞에서 이미 인용했던, 그리 고 이제 와서는 그 개개의 세목들이 그것의 총체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 정 화 Pu rifi ca ti on 』 의 다음 대 목과 비 교해 보면, 우리 가 앞에 서 제 시한 엠페도클레스의 대목과 〈괴물 같은 짝패〉 체험을 관련짓는 것이 그렇게 무모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아버지는 〈 모습이 변한 〉 아돌을 사로잡는다. 기도하면서 그는 정신이 나간 이 아들을 죽인다. 아들은 미쳐버린 이 사형집행인에게 소리쳐 애원한다. 궁 전에다 아주 가증스러운 향연을 준비하고 있던 그는 그러나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채 아들을 참살하고 만다 . 마찬가지로 아들은 아버지를, 아이들은 어머 니를 사로잡아 그들을 죽이고 바로 그들의 살을 먹어치운다. 이 대목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하느냐 하는 것은 사실 그다지 중 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쨌든 이 대목은 엠페도클레스가 이 글을 쓰던 당시의 극심했던 희생위기의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아버지는 〈모습 이 변한〉 아들을 사로잡는다. 마찬가지로 아가베도 〈모습이 변한〉 자 기 아들을 죽인다. 그녀는 그를 새끼 사자로 찰못 보고, 펜데우스는 디오니소스를 황소로 잘못 본다. 『바카스의 여신도들』에서와 마찬가지 로 여기서도 우리는 제의가 퇴화하면서 폭력의 상호성 속으로 미끄러 져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 이때의 폭력은 너무 미쳐 있는 폭력으로,

소크라데스 이전의 사상가들을 매혹시켰던 종교의 구성-해체라는 순환 의 고리를 한번 더 만듦으로써 〈 괴물 같은 짝패 〉 , 다시 말해서 제의의 기원 그 자체에 이르고 있는 폭력이다. * 〈괴물 같은 짝패〉의 출현에는 사실, 직접적인 검증도 없을 뿐 아니라 원시종교의 심층에 있는 모든 현상들도 들어 있지 않다. 우리들이 방금 인용했던 텍스트들 이후에도, 〈괴물 같은 짝패 〉 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현상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계속 가설의 양상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 가설적인 양상이 바로 이 메커니즘의 특성이기도 하다. 이 가설의 가 치는 그 해석의 질에 의해서, 죽 오늘날까지 판독할 수 없는 채로 남아 있던 현상들에다가 이 가설이 부여하는 논리적 일관성에 의해서, 그리 고 신화, 제의, 철학, 문학 등 그것이 해석해 낼 수 있게 될 대상의 풍 부함에 의해서 검증될 것이다. 이미 현재의 가정에 유리한 증거가 되고 있는 근거둘 의에 또 다른 근거둘을 덧붙여보자. 우리는 이 가정에 힘입어, 모든 인간문화 중 가 장 애매모호한 채로 남아 있는 두 가지 현상인 〈신들림 pos sessio n > 현 상과 〈가면 mas q ue 〉의 제의적 관습에 대해 어렵풋한 해석의 윤곽을 잡 울 수 있을 것이다. 위기 절정의 순간, 미지의 상호성에 의해서 유발되는 모든 환각현상 둘을 〈괴물 같은 짝패〉라는 항목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전 단 계에서는 언제나 동요하는 차이에 의해서 분리된 〈타아 au t re 〉와 〈자아 moi〉가 있던 바로 그곳에서 〈괴물 같은 짝패〉가 생겨난다. 두 개의 대 칭적인 근원이 있어 거기에서 거의 동시에 같은 부류의 이미지가 나 오는 것이다. 『바카스의 여신도들』처럼, 이것들은 연달아 일어날 수 있고 서로 오갈 수도 있으며 다소 섞일 수도 있는 두 가지 유형의 현 상들인 것이다. 물론 그 안에는 또 다른 현상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바카 스 의 여신도 들 』에서, 주체는 우선 이런 두 가지 종류의 모습을 모두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여긴다. 이것은 〈짝패 관점 vis io n dou- ble 〉 의 현상이다. 곧 이어서, 둘 중의 하나는 〈비자아〉로, 다른 하나는 〈 자아 〉 로 이해한다. 이 두번째 경험이 소위 〈 짝패〉의 경험인데, 이것은 앞선 단계들의 직접적인 연장선상에 있다. 여기에는 〈신들립〉 현상을 해독하는 데 필수적인 생각인, 〈적대자는 주체 의부에 있다〉라는 생각 이 녹아 있다. 주체는 자기 내부와 의부에서 동시에 이 괴물성이 나타나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 어떻게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해석해야 하는데, 그는 이 현상의 원인을 당연히 자신의 의부에 있는 것으로 돌릴 것이다. 다 시 말해 , 그 출현이 너무나 엉뚱하기 때문에 그것을 인간세계와는 무 관한 의적인 원인에다 결부시키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 경 험은 전부 괴물의 근본적 인 이타성 al t e rit e 에 의해서 지배된다. 주체는 물론 자신을 괴롭히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의부로부터 자기의 가장 내밀한 곳에까지 뚫고 들어와 자신을 사로잡는다고 여기게 된다. 그는 겁에 질린 채 이중경쟁에 가담하지만 결국 그는 그 경쟁의 무력 한 희생물일 수밖에 없다. 안과 밖 사이의 장벽윤 아랑곳하지 않는 적 수에 대해서는 어떠한 방어도 불가능한 것이다. 동시에 아무 데나 존 재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마음대로 신, 유령, 악마가 되어서 사람을 사로잡을 수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소위 〈신들림〉이라는 현상은 〈괴물 같은 짝패〉에 대한 단지 특별한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 신들립의 체험이 종종 히스데리성의 〈모방〉으로 나타난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이럴 때 주체는 마치 어떤 의부의 힘에 복종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꼭두각시와 같이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안으로는 산이나 괴물이나 혹은 그를 유린하는 또 다른 것에 의해 농락당하고 있다. 욕망들은 모두, 모델/장애물의 함정에 빠져 폭력의 악순환에 이 르게 된다. 위기의 초기 단계에 상대방을 매혹시켰던 모든 ' 것을 대신 해서 〈괴물 같은 짝패〉가 나타난다• 이것은 모두가 원하면서 동시에

파괴하기를, 구현하고 또한 추방하기를 바라는 모든 것을 대신한다. 신 들림은 타인의 욕망에 대한 소의 al i ena ti on 의 극단적인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신들린 사람은 황소로 변한 디오니소스처럼 노호하거나, 아니면 사 자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을 잡아먹을 것이다. 그는 또한 사물의 모습으 로 변할 수도 있다. 그는 하나이며 동시에 여럿이다. 그는 집단 추방과 함께 모든 차이가 어지럽게 뒤섞이는 단계 바로 직전에 나타나는 히 스데리성의 황홀경을 경험한다. 또한 집단의 참여 속에서 거행되는 신 들림의 예식들이 있다 . 홍미로운 것은 피식민지나 피압박 집단에서는 때로는 총독이나 수용소 보초처럼 통치권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그 모 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원시종교에서 나온 것이 모두 그러하듯이, 신들림도 제의적인 성격 을 가질 수 있다. 제의적인 신들림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 강력한 집단적 신들림과 감은 어떤 것이 〈 애초에〉 일어났었다는 것을 암시하 고 있는데, 본래 의미의 종교예식이 재생하려고 애쓰는 것이 바로 이 것이다. 제의적 신들립은 무엇보다도 그것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희생 제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종교예식은 원칙적으로, 그것이 재현하 려는 폭력순환중에 일어났던 사건들의 순서에 따라 계속해서 되풀이 된다. 이것은 특히, 예를 들어 딩카족에서처럼 신들림이 나타나는 희생 제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노래, 춤, 모의전두, 제의적 주술에 의해서 야기된 흥분이 아주 심한 정도에 이르게 되면 신들림 현상으로 표현 된다. 고드프리 리인하르트에 의하면, 맨 처음으로 이 현상의 영향을 받는 것은 젊은이들이며 그 다음이 남녀 어른들인데, 이들은 동료들 사이에서 비틀거리다가 땅에 넘어져서는 땅위를 구르면서 으르렁거리 거나 날카로운 고함을 지르기도 한다 .5) 신들립을 이로운 것으로 간주하는 예식들이 있는 반면에 해로운 것 s) Godfr ey Lien hardt, Di.vin i ty and E쟈 erie nce .

으로 간주하는 예식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이로운 것으로 또 어 떤 때는 해로운 것으로 간주하는 예식도 있다. 이렇듯 다양하게 인식 하는 데에는 우리들이 제의적 근친상간과 축제에서 살펴보았던 문제와 유사한 해석의 문제가 존재한다. 종교적 사고는, 해방 폭력과 모호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너무나 특칭적인 이 위기 현상들을 충실히 반복해야 하는지 아니면 반대로 단호하게 등을 돌려야 하는지 를 판단할 수 있다. 신들림 현상은 어떤 때는 치유책의 역할을, 또 어떤 때는 질병의 역할을, 혹은 상황과 경우에 따라서는 동시에 두 역할을 다 수행할 수도 있다. 제의가 해체될 때, 그 안에 들어 있던 요소들 중 어떤 것은 사라지고 또 다른 것은 독립되어 고립된 개체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다른 많은 원초적 경험의 양상들과 마찬가지로, 신들립도 우리 관심의 중요한 대상이다. 〈신들린 예배 culte s de p ossess i on 〉가 생겨나는 것이 바로 이때이다. 집단 예배는 그 절정에 이르러서는 회생물 처형을 행 하게 된다 .6 ) 그러다가 더욱 발전하게 되면 희생 자체가 사라지고, 샤 먼들은 마술-의학적 목적에서 신들림을 조작하려 애쓴다. 그들은 신돌 립의 진짜 〈전문가〉인 체한다.

6) Jea nmair e , Dio n ys o n, pp. 119 一 131 . , 〈 bor i〉에 대한 묘사 참조.

* 괴물 같은 짝패에 비추어보면 또 다른 제의관습인 〈가면〉의 관습도 해명된다. 가면은 원시예배에 있어서의 많은 필수적인 소도구 중의 하나이지만 우리는 이것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 하나도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 었다. 그것들은 무엇을 표현하며 어디에 쓸모가 있으며 그것들의 기원 은 무엇일까? 스타일과 형태의 그 수많은 다양성의 이면에는, 비록 우리가 그것을 규정하지는 못하지만 지각할 수는 있는 가면들의 통일

성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 사실 우리들이 어떤 가면을 대면할 때, 우리는 그것을 단번에 가면으로 확인한다. 가면들의 통일성이 의부로 부터 온 것은 아니다. 공간적으로 아주 먼, 죽 서로 완전히 낯선 사회들 속에도 가면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면을 단 하나의 발원지에 서 나온 것이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때로는 가면이 거의 보편 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미학적인〉 욕구에 부합한 것이라고 주 장되기도 한다. 원시인들에게는 〈도피〉의 갈망이 있다든가 원시인등은 〈형체를 만들지〉 않고 지낼 수는 없다는 주장 등이 그것아다. 예술에 대한 이런 견해의 이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벗어나게 되면, 우리는 곧 이런 것이 진정한 설명이 아니란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원시예술에는 종교적인 목적이 들어 있다. 모든 사회에서 가면은 모두 유사한 목적에 쓰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가면은 〈발명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문 화에 따라서 분명히 달라질 수는 있지만 그 특징들은 어떤 지속적인 모델을 갖고 있다. 가면이 인간의 얼굴을 표현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면이 인간의 얼굴을 덮고, 대신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것을 대체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는 점에서 가면은 거의 언제나 인간의 얼 굴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신화와 제의의 통일성 /다양성과 가면의 통일성 /다양성 은 마찬가지다. 그것은 단지 대부분의 인류에게 공통된, 그러나 우리는 완전히 모르고 있는 어떤 실질적인 경험과 관련 있을 것이다. 가면이 종종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축제〉와 마찬가지로, 가면은 자연의 질서는 아니지만 문화 그 자체의 질서인 차별화된 질서와 모 순되는 형태와 색깔의 조합을 표현하고 있다. 가면은 사람과 동물, 신 과 무생물을 결합시킨다. 빅터 터너 Vic t o r Turner 는 그의 한 저서에서 인간의 모습과 초원을 동시에 나타내는 넴뷔족의 가면에 대해 언급하 고 있다.” 가면은 차이에 의해 분리된 사람과 사물들을 병렬시키고 혼 7) The Forest of Sym b ols ; Aspe ct of Ndembu Rit ua l, I th a ca, N.Y. and London, 1970, p. 105.

합시키고 있다. 그것은 차이들 너머에 있으며, 차이를 위반하거나 소멸 시키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것들과 합쳐져서 원초적인 방식으로 그것 울 재구성한다. 다시 말해서 〈 괴물 같은 짝패 〉 와 갇은 것이다. 가면을 사용하는 제의들은 원초적인 경험을 반복한다. 의식 속에서 적어도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참여자들이 이 가면을 쓰는 것은 바로 절정의 순간, 죽 희생 바로 직전이다 . 제의는 참여자들에게 원초 적 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그들의 선조들이 계속적으로 담당했던 모든 역할둘을 다시 체험하도록 한다. 모의 전두와 대칭적인 춤 속에서, 처 음에는 원수형제가, 다음에는 그 추종자들이 가면 뒤로 사라지면서 〈 괴물 같은 짝패〉로 변하게 된다. 가면이 〈무(無)에서 무 ex n ihil o 〉의 출현 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적대자들의 정상적 모습을 변형시킨다. 제의의 양태와, 그 안에 가면이 들어가는 그 구조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 사용자들 스스로가 가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 제의의 어떤 순간에 모든 사람의 얼굴을 감추기 위하 여 가면이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처음에〉 그런 식으로 되었기 • 때문이다. 우리는 가면이 우리 스스로가 조금 앞에서 순전히 이론적으 로 묘사했던 그 현상들에 대한 해석이자 그것의 재현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가면이 여전히 사람이나 혹은 혼령이나 초인간적인 존재들을 재현 하고 있는가를 따질 필요는 없다. 이 질문은, 더 심한 차별화 때문에, 다시 말해서 반대로 제의적인 가면 착용 때문에 더욱 더 이런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굼뜬 사람들에게서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가면은 인 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경계선에, 그리고 붕괴되고 있는 차별화의 질서와 모든 차이의 저장소이자 새로운 질서가 거기에서 나오게 될 질서 너머의 괴이한 총체 사이의 모호한 경계선에 위치한다. 가면의 〈본질〉에 대해서도 따질 일이 아니다. 가면은 모든 본질을 갖고 있으 므로 어떤 본질도 없다는 게 그것의 본질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은 축제나 다른 모든 제의둘과 마찬가지로, 무엇보다도

희생위기와 초석적 폭력의 재현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그리스 연극 속 에서의 가면 착용은 어떠한 특별한 설명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것의 사용과 완전히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괴물들이 다시 사람 으로 될 때, 그리고 물론 그렇다고 광의에 있어서의 희생제의의 역할을 멈추는 것은 아니지만 비극이 그것의 제의적 기원을 완전히 망각할 때, 가면은 사라진다. 반대로 비극이 제의를 완전히 대신하게 된다.

제 7 장 프로이트와 외디푸스 콤플렉스 우리가 앞 장에서 그 작용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던 모방 욕망과, 프 로이트의 의디푸스 콤플렉스 분석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는 만큼 유 사성도 존재한다. 우리가 제시한 설명은 갈등의 근원을 도출해 내고 있다 . 모방 경향은 욕망을 또 다른 욕망의 복사로 만들며 더 나아가서 는 궁극적으로 경쟁 관계에 이르게 한다. 또한 이것은 욕망을 타자의 욕망에 고정시킨다. 얼핏 보면 프로이트는 이 갈등의 원인을 못 보고 지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그는 그것에 아주 가까이 접근해 있 었다 . 주의깊게 읽어보면 우리는 그가 왜 그것을 이끌어내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욕망의 모방적 특성이 프로이트 사고에서 하나의 중심을 이루고는 있었지만, 그것의 구심력이 모든 것을 당길 만큼 충분한 힘을 가지지 못한 그런 중심이었다. 모방울 찾아내는 직관은 아주 드물게 나타남으 로써, 이 텍스트 안에서 겨우 나타나는 한 부분을 이룬다. 그나마 이 것도 아주 예민한 향기와 같아서, 프로이트로부터 제자에게로 혹은 프 로이트의 텍스트로부터 그 뒤에 오는 텍스트로 그의 사상이 전달될 때마다, 이 직관들은 사라지거나 소멸되는 경향이 있다 . 그러므로 그

후의 정신분석학이 우리에게는 홍미로운 이 직관 들 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가장 상반되던 당파들도 이 〈 소탕작전 〉 에는 암암리에 일치하고 있다. 이 것 이 프로아트주의의 교과 서적인 체계를 흐트러뜨린다고 모든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들의 확신만을 주장하면서, 프로이트의 분석 중에서도 가장 명백하고 가장 구체적인 이것을 〈심리주의 p s ycholo gi sme 〉 에 오염된 것 이라고 은근히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프로이트에게 모방 개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있더라도 그것 은 대단한 정도가 아니다. 그런데 이 개념은 , 프로이트 욕망 사상의 또 다론 중심을 이루는, 어머니에 대한 리비도적인 충동을 인정하고 있는 프로이트의 주장과는 반대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두 원칙 사 이의 긴장이 심해지면, 프로이트나 그 제자들은 그 긴장을 항상 두번째 원칙에 유리하게 해결한다. 그의 욕망 사상은 그 정의도 모호하고 그 정체도 불확실하며 그 기능도 일시적인 그런 개념들을 낳을 때가 있다. 모방에 서 잘못 도출된 개 념 가운데 에 는 〈동일 화 ide nti fica ti on > 라 는 것 이 있다. 프로이트의 동일화 가운데 오늘날에는 가장 잊혀져 있지만 , 〈 동일화 Iden tifi ca ti on 〉라는 표제 가 붙은 『집 단심 리 학과 자아분석 Psyc h olog ie colle- ctive et analyse du mo i J 의 7 장에서 제일 먼저 규정된 것은 아버지에 대한 동일화이다. 어린 아들들은 아버지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나타낸다. 그는 현재의 아버 지처럼 되고 또 그렇게 존재하기를, 모든 점에서 아버지를 대신하기를 원하게 된다 . 그는 아버지를 그의 이상으로 삼는다고 유유히 말한다. 아버지에 대한 (아니면 일반적으로 모든 다른 남자에 대한) 이 태도에는 수동적이거나 여 성적인 면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이 동일화는 이로 인해 생겨난 의디푸스 콤플렉스와 아주 잘 일치하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동일화와 위에서 정의된 모방 욕망 사이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둘다 모델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 선택은 한 가족에 만 국한되지 않는다. 아들 쪽에서 보자면, 이 선택은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아버지에게 부여된 자리, 즉 모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모든 남자들에게까지 미칠 수 있다. 앞 장에서 우리는, 모델은 스스로가 어떤 것을 추종자에게 욕망함으 로써 그의 욕망대상을 가리킨다는 것을 명확히 밝혔다. 그래서 우리는 모방 욕망은 욕망주체나 욕망대상에 뿌리박은 것이 아니라, 욕망주체 가 그의 욕망을 모방하는 제삼자에 뿌리박은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가 있다. 우리가 방금 인용한 덱스트만큼이나 분명한 것도 없을 것이다. 이 텍스트롤 조금만 깊이 파고들어 가다 보면, 앞에서 이야기한 우리의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동일화에는 수동적이거나 여성적인 것은 전 혀 없다고 프로이트는 단언한다. 만약 수동적이며 여성적인 동일화라 면 아둘은 스스로가 아버지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렇 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능동적이며 남성적인 동일화는 어떤 것일 까? 이것은 어떠한 실제성도 지니지 않거나, 그게 아니라면 어떤 대 상에 대한 욕망으로 구체화된 것일 것이다. 이 동일화는 어떤 것을 가 지는 것으로써, 다시 말해서 아버지의 욕망대상을 소유함으로써 아주 자연스럽게 자기실현을 하려고 애쓰는 존재의 욕망이다. 아들은 모든 점에서 아버지를 계승하려고 애쓴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따라서 아 들은 욕망에서도 아버지를 계승하려고, 죽 그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 려고 애쓴댜 프로이트가 적어도 은연중에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는 마지막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동일화는' ’이로 인해 생겨난' 의디푸스 콤풀렉스와 아주 잘 일치하고 있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이 구절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거나, 아니면 이 동일화가 욕망을 아버지의 욕망대상 쪽으로 향하게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분명, 자식의 모든 욕망을 〈미메시스 m i mes i s 〉의 영향으로 돌 리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볼 때 프로이트의 사고 속

에는 이미, 아버지와의 동일화라는 〈 미메시 스〉 와 어머니에 대한 리비 도의 충동이라는 대상에 근거하는 욕망이라는 자율성 사이의 잠재적인 갈등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에 대한 동일화가 〈모든 선택에 앞서 〉 는 것으로 나타날수록 이 갈등은 더욱 더 명백하게 드러난다. 『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 7 장 의 의디푸스 콤플렉스의 설명으로 이어지는 분석의 서두에서, 프로이 트는 이 점을 강조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처음에는 독자적으로 나타 나서 발전되는 어머니에 대한 리비도 경향p enchan t li b i d i nal 이 온다. 이 단계에서의 어머니에 대한 욕망은 두 개의 기원을 갖 고 있다 할 수 있다. 첫번째 기원은 아버지에 대한 동일화라는 모방이며, 두번째 기원 은 직접적으로 어머니에게 고정되는 리비도가 그것이다 . 이 두 힘은 같은 방향으로 작용하면서 서로를 강화시키기만 하는데 몇 줄 뒤에 가서 프로이트가 명백히 밝히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얼마 동안 독자적으로 발전하던 동일화와 리비도 경향은 〈 서로 만나는데〉, 이때 리비도 경향은 〈보강을 받는다〉. 우리가 방금 그러했던 것처럼 아버지 의 욕망에 근거하는 미메시스의 의미로 동일화를 해석한다면 , 거기에 는 아주 자연스러우며 아주 논리적인 일관성이 생겨나면서, 다른 해석 울 허용하거나 생각해 내기가 어렵게 될 것이다. 우리들이 방금 논했던 모든 것들은 이것에 바추어보면 합리적이고 일관성이 있어 보이지만 이것 없이는 난해하고 부조리한 것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프로이트에게 그가 결코 말한 적이 없는 것을 말하라고 강 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모방 욕망의 길이 자기 앞에 열려 있는데도 〈프로이트가 거기에 뛰어들기를 거부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가 모방 욕망에서 등을 돌린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방 금 우리가 인용했던 구절의 거의 바로 뒤에 나오는 소위 의디푸스 콤 플렉스에 대한 다음 정의를 읽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정의는 어린 아들은 어머니로 향하는 자신의 길을 아버지가 막고 있다고 느낀다.

이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동일화는 적대적인 뉘앙스 를 띠게 되며, 마침내는 어머니에 대해서 조차도 아버지 를 대신하려는 욕망과 뒤섞이게 된다. 게다가 시초부터 이 동일화는 양면적 amb i valen t이었다 . 이 덱스트 속에는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하나의 지적이 있다. 아둘이 아버지라는 장애물과 충돌할 때 , 그의 동일화는 마침내 〈 어머니에 대해서조차 〉 아버지를 대신하려는 욕망과 혼합된다고 프로 이트는 적고 있다 . 이 〈 어머니에 대해서조차〉라는 표현이 아주 이상하 다 . 앞에서 프로이트는 이 동일화를 아버지를 대신하려는 욕망이라고 규정지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는 이것을 다시 한번 더 그렇게 정의한 셈이다. 어머니는 이 프로그램에서 명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 빠져 있 다는 것일까? 동일화의 정의를 살펴보면, 프로이트는 그런 식으로 말 하거나 암시한 적이 결코 없었으며 오히려 그 반대임을 알려주는 이 대목을 상기해 보자. 〈 어린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커다란 홍미를 나타 낸다. 그는 현재의 아버지처럼 되고 또 그렇게 존재하기를, 죽 ‘모든 점에서’ 아버지를 대신하기를 원하게 된다〉. 주의가 깊지 않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어머니에 대해서조차〉는 우선 부주의한 실수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일 동일화의 단계에서, 아들 이 이미 〈 모든 점에서〉 아버지를 대신하길 원한다면, 아들이 〈어머니 에 대해서조차 〉 적어도 은연중에 아버지롤 대신하고자 원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이 사소한 모순에는 그러나 아주 중요한 어떤 사실이 숨겨져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동일화에 대한 프로아트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언제나 아버지를 욕망의 모델로 삼는 모방 구 조에 이르게 된다. 자신이 무엇을 욕망함으로써 아들에게 욕망할 만한 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아버지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다른 것뿐 아 니라 어머니도 가리킬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이 해석의 의미로 진행 되는데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결코 그것을 표명하지 않는다. 이 해석 이 실제로 그의 생각 속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7 장 서두

부분에서는 이 생각에서 그렇게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은연중에 모방적 해석을 암시한 다음에 〈 어머니에 대해서조 차〉라고 적음으로써 프로이트는 역시 은연중에 그것을 부인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에 대해서조차〉의 숨은 의미이다. 이 말은 본질적인 대상인 어머니에 관한 한, 동일화에 대한 모든 모방적 해석을 거부하고 있는 것 같다. 의디푸스에서 늘어나기 시작했던 모방 요소들을 피하려는 의지가 그 뒤의 텍스트 속에서는 더 강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자아와 이드 le Mai et le (;a 』에 나오는 의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정의 를 들어 보자. 일찍부터 아이는 그의 리비도를 어머니에게 집중시키며…… 아버지에게서 는 동일화에 의해 자신에 대한 지배력을 확인한다. 이 두 태도는 얼마 동안 공존하다가, 마침내 어머니에 대한 성적 욕망이 커지면서, 아이에게는 아버지 가 욕망 실현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고 느끼는 소위 〈의디푸스 콤플렉스〉가 생겨나게 된다. 이때에 아버지와의 동일화는 적대적인 성격이 되면서, 어머니 에 대해서 아버지를 제거하고 아버지를 대신하려는 욕망울 낳게 한다. 이때 부터 아버지에 대한 태도는 양면성을 띠게 된다. 본래부터 동일화에 들어 있 었던 양면성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우리는 여기에서 『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의 충실한 요약만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좀더 세심하게 읽어보면, 아주 작은 것 같지만 사실은 매우 중요한 차이들이 드러난다. 우리들의 앞선 분석은 첫번째 덱스트의 모방적 요소들을 강조했기 때문에 그것을 보 여줄 수 있었다. 바로 이 콤플렉스에 대한 첫번째 정의에서 그가 이미 어렵풋이 거부하던 바로 이 요소들을 프로이트는 마침내 완전히 제거 하고 있는 것이다. 첫번째 덱스트에서 프로이트는 아버지에 대한 동일화를 강조했었다.

두번째 덱스트에서 그는 이 교리 를 분명하게 단념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첫번째로 언급한 것은 이제 더 이상 동일화가 아니라 어머니에 대한 리비도적 경향이었다. 요컨대 그는 우리가 단 하나의 동일한 힘, 죽 〈모든 점에서〉 아버지를 대신하려는 의지가, 모델에 대한 동일화를 낳을 뿐 아니라 욕망으로 하여금 어머니를 향하게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한다. 애초의 순서 전도가 우발적안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그것이 이같은 결과들 이후에, 그리고 이 결과와 함께 연이어서 다시 나타난다는 것 이다 . 두번째 텍스트에서 〈콤플렉스〉의 형성 직전에 리비도적 경향의 〈 강화 〉 가 다시 나타나는데, 프로이트는 이 강화를 동일화와의 처음 접 촉의 결과로 표현하지 않고 현상들의 순서를 전도시켜 버리고 만다 . 이것은 바로, 첫번째 텍스트가 암시하던 인과관계를 단호하게 거부하 는 것이다. 이리하여 〈 리비도〉의 강화는 완전히 이유없는 어떤 것이 되고 만다. 결과는 지속되지만 그것은 그 원인에 선행한다. 그래서 그 둘 모두 이제는 더 이상 아무 뜻도 없게 된다. 보다시피 『 자아와 이드』 는 모방의 모든 결과들을 제거해 버리는데, 그것은 『 집단심리학과 자 아분석』의 뛰어난 직관들을 희생시킨 결과이자 또한 어떤 비논리의 대가이다. 프로이트가 왜 이런 식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거부하는 길을 끝까지 밀고나가 보는 것일 것이다. 모방 효과가 그의 초기 분석에는 많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정작 이 콤플렉스에 대 한 정의가 문제가 되는 순간에 가서는 정말 마술처럼 사라져버린다. 자, 그렇다면 이 모방 효과를 거부한 프로이트가 과연 어디에 이를 것 인지 살펴보자. 그러자면 우리는 〈어머니에 대해서조차〉라는 말에 의 해서 은밀하게 반박되고 부인된 그 문장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아버지에게 동일화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대신하기를 바라 는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했었다• 어린 아들은 〈현재의 아버지처럼 되기를 또 그렇게 존재하기를, 죽 ‘모든 점에서 그를 대신하기를' 원

하게 된다 〉 고 말이다. 이 〈 모든 점에 서〉 에서 어머니 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아들은 그 인물 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갖기 전에 이미 〈 법 〉 을 알고서 그 법을 준수 하고 있다는 가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들에게 이 〈법 〉 을 가르쳐주는 것은 원칙적으로 아버지의 중재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거기에서 어머 니를 제의시키기 위해서는, 콤플렉스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 할 것이 다 . 따라서 어머니를 포함시켜야 하는 것이 명백한 사실일 뿐 아니라 , 또한 프로이트도 처음에는 그렇게 했었다. 〈 아들은 ‘모든 점에서’ 아 버지를 대신하기를 원한다 〉 는 프로이트 문장의 〈 애매한 〉 보편성은 매 우 적절하다. 왜냐하면 아들은, 어머니도 아버지의 욕망대상이기에 어 머니까지 포함한 아버지의 욕망대상들에 대해 명백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의 욕망대상들을 향하는 것은 모든 것 을 모델을 본받아서 행하기 때문인데, 이 모델은 당연히 이미 자신의 것이거나 아니면 그가 소유하려는 〈 그의 〉 욕망대상 쪽으로 향하게 된 다. 어머니를 포함한 모델의 모든 욕망대상들을 향하는 추종자의 움직 임은 이미 동일화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프로이트가 규정지은 동 일화의 개념에도 들어 있던 것이다. 프로이트가 이런 해 석 을 거부한다 기보다 처음에는 그것을뒷받침하기 위하여 이렇게 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추종자와 모델이 동일한 욕망대상을 향하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충 돌이 생길 수도 있다 . 물론 〈의디푸스적인 〉 경쟁 관계는 존속하지만,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이것은 모델 선택 때부터 이미 예정된 것이다. 따라서 이 경쟁 관계는 전혀 우발적인 것이 아니며, 일반적 의미의 찬탈의지와도 무관한 것이다. 추종자는 〈전혀 악의 없이〉 자기 모델의 욕망대상을 향하며, 아무런 저의 없이 〈어머니에 대해서조차〉 아버지를 대신하기를 원한다. 그는 모든 문화의 소리가, 그리고 모델 자신이 그에게 전해 주는 모방 명령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모델에 대한 추종자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근본적으로 모방적인 우

리 생각에 의해 재해석된 소위 〈 외디푸스적 〉 인 경쟁 관계는 논리적으 로, 프로이트가 말한 이 〈 콤 플 렉스 〉 의 결과들과 아주 유사하면서 동시 에 아주 다론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모방적 경쟁 관계의 결과들을 살펴보았는데, 이 결과 둘은 결국 상호적 폭력으로 귀착되었다. 그러나 이 상호성은 어떤 과 정의 결과이가. 한 개인의 일생 중에서 상호성이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보복이 불가능한 시기가 있다면, 그것은 유년기일 것이며 특히 어른들 과의 관계 속에서 그러할 것이다. 유년기가 그토록 상처받기 쉬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어른은 신속하게 폭력을 예상하며 폭력으로 그 폭 력에 대응한다. 즉, 사납게 말대꾸한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결코 폭력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모델의 욕망대상들을 향하여 최소한의 경계 심도 없이 접근한다. 어른만이 아이의 그러한 행동을 찬탈의 욕망이라 고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아이가 그것에 대해 어떠한 개념도 갖 고 있지 않는 문화적 의미에서 출발하여, 아직 아이의 것이 아닌 문 화체계 속에서 어른은 아이의 행동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모델과 추종자와의 관계는 당연히 추종자의 관점에서 이 경쟁 관계 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형평성을 잃고 있다. 추종자는 신에 대한 신자의 입장과 같아진다. 추종자는 모델의 욕망을 모방하지만, 거기에 서 자신의 욕망과 유사한 것을 분간해 내지 못한다. 결국 그는 자신이 모델과 〈 경쟁할 〉 수도 있으며, 자신이 모델에게는 위협이 될 수도 있 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원초 적인 모방 욕망에 대해서는 어린이보다 어른이 훨씬 더하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온갖 예방책들을 갖 추고 있다 하더라도, 닫혀진 첫번째 문, 막힌 첫번째 출입구인 모델의 이 첫번째 〈거부〉는 불가항력의 파문 혹은 캄캄한 의부로의 추방으로 보일 수가 있다. 그것은 처음에는 아이가 폭력으로 폭력에 대응할 수 없가 때문이며, 또한 아이는 폭력에 대한 어떠한 경험도 없기 때문이

며, 모방적 〈 이중명령 〉 에 의해서 야기된 첫번째 장애물이 아이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인상으로 남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 아버지 〉 는 이제 막 시작한 아둘의 행동을 확대 해석하여 , 아이가 왕좌와 어머니를 향 하여 똑바로 나아가고 있다고 쉽사리 단정지어 버린다. 친부살해와 근 친상간의 욕망은 아이의 관념일 수 없으며 그것은 분명히 어른의 관념, 죽 모델의 관념이다. 신화에서 보자면 의디푸스가 무엇이든 욕망할 수 있기 훨씬 이전에 신탁이 라이오스에게 암시한 관념이다. 그것은 또한 프로이트의 관념이기도 하며, 그의 관념은 라이오스의 경우와 마찬가 지로 그릇된 것이다. 아들은 자신이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을 향하여 가 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가장 뒤늦게야 알게 된다. 그에게 그것을 알려 주는 자는 바로 그 뛰어난 전도자, 즉 어른들이다. 추종자와 욕망대상 사이에서의 모델의 첫번째 중재가 특별히 〈심리 적 외상을 입히는t rauma ti san t 〉 체험이 되게 마련인 것은, 어른이나 특 히 프로이트 자신이 추종자에게 부여한 지적 작용을 추종자가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추종자인 이 아이에게는 모델을 경쟁 자로 보는 의식이 없기 때문이며 찬탈의 욕망도 없기 때문이다. 아이인 추종자는 말할 것도 없고 어론인 추종자조차도 이 경쟁 관계를, 경쟁 관계, 대칭, 동등성으로 해독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모델의 분노에 직 면한 추종자는 어쩔 수 없이 자신과 모델 사이에서 선택을 하게 되는 데 당연히 그는 모델을 선택하게 된다. 물론 이 우상의 분노도 정당화 된다. 그런데 이 분노는 추종자의 불충분함에 의해서만, 다시 말해서 신으로 하여금 가장 신성한 것에의 접근을 금지시킬 수밖에 없도록, 낙원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추종자의 감추어전 허물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따라서 그 이후에 보복울 받아서 신성의 마력이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강화되게 된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렇 게 판단받는지롤 정확히 알지도 못한 채 추종자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믿고, 자신이 욕망하는 대상을 자신은 소유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이 대상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욕망할 만한 것으로 비치게

된다 . 〈 타인 〉 의 폭 력에 의해서 보호받는 대상을 향하는 욕망의 방향 결정이 시작된 것이다 . 여기서 맺어지는 욕망할 만한 것과 폭력 사이의 결합은 아마 결코 풀어지지 않을 것이다. 욕망에 있어서 아이와 부모 사이의 초기 관계가 지울 수 없는 특징 울 남겨놓는다는 것을 프로이트도 처음에는 보여주려 하긴 했지만, 결 국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에는 막연하게 예감한 가능성 때문에 마음이 끌렸던 모방 효과를 결국에 가서는 제의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한다는 말일까? 『집단심리학 과 자아분석』의 그 구절을 다시 한번 더 살펴보자. 어린 아들은 어머니로 향하는 자신의 길을 아버지가 막고 있다고 느낀다. 이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동일화는 적대적인 뉘앙스를 띠게 되며, 마침내는 어머니에 대해서조차 아버지를 대신하려는 욕망과 뒤섞이게 된다. 프로이트의 말을 따르자면 어린 아들은 아버지가 전통적 보드빌(가 벼운 희극)의 의미로서의 경쟁자, 혹은 귀찮은 사람이란 것을 쉽사리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비록 경쟁 관계를 야기시키는 것이 아버지 욕 망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하더라도 아들은 정확히 말해서 어떤 경쟁 관계만이 문제라는 사실을 계속 보지 못해야 할 것이다. 야망과 질투와 같은 감정들에 대하여 평범하게 관찰해 보더라도, 어른 적대자들은 그 둘의 적대감을 경쟁 관계라는 단순한 사실로 실질적으로 환원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프로이트는 어린아 이에게 어른들의 식별력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나은 식별 력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그럴 듯하지 않다는 것〉 은 다른 것들과 함께 어른들과 유사한 리비도적 욕망이 어린아이에게 도 있다는, 프로이트가 우리에게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는 전제사항들과 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프로이트의 가정이 형성하고 있는 그 체계 안

에서조차 아들에게 경쟁 관계에 관한 〈 명백한 의식 〉 이 있다고 주장하 는 것은 정말로 그럴 듯하지 않다. 여기서 사람들은 아마 유명한 〈임상자료 〉 나 정통의학의 막강한 논 거를 들어 반박할지도 모론다.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의 권유 앞에서 문 의한은 수그러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우리가 언급하는 덱스트들은 어 떠한 특별한 임상적 자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어서 그것들의 사변적 인 성격은 명백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처럼 그것들을 신성화할 필요 도 없지만, 그렇다고 또 다른 사람들처럼 그것들을 은밀히 제거할 필 요도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모두 매우 값진 직관들――비록 그 실제 대상이 항상 프로이트가 도달하려는 그 대상은 아니라 하더라도_―을 포기하는 것이며, 한창 작업중에 놀란 프로이트의 영혼, 즉 프로이트의 사고의 망설임들이 이루는 멋진 구경거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임상자료〉는 좋은 구실은 되지만 알다시피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 〈임상자료〉라고 해서 아주 사소하나마,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욕망에 대한 〈의식〉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유리한 증언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가 이것을 처리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빨리 무의식이 니 억압이니 하는 혼란스럽고 의심스러운 개념들에 기댈 수밖에 없었 던 것은, 어디에서도 이 의식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프로이트 비판의 핵심 부분이 바로 여기이다. 우리가 오랫동 안 주장한 바와 같이 프로이트주의의 신화적 요소는 개인의 심리상태 를 결정짓는 본질적 여건들에 대한 의식 부재 non-co _ nsc i ence 에서 나오 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데마에 대한 우리의 비판을 사람들은 틀림없 이 프로이트주의에 대한 소급적인 비판이라 하겠지만, 하여튼 우리는 그것의 기만성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프로이트를 비난하 는 것은,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끈질기게 이 의식의 논리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주의의 신화적 요소, 그것은 바로 친부살 해와 근친상간의 욕망에 대한 〈의식〉, 그것도 초기 동일화의 암흑과 무의식적 암흑 사이에서 분명 돌을하게 생겨나는 의식, 그러면서도 동

시에 실제적인 의식이다. 이 의식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프 로이트는 부득이 모든 논리와 그럴 듯함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 이다. 처음에는 이 의식을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랬고, 그리고 두번째는 잘 알려진 흡입펌프와 배기펌프의 시스템과 무의식 이라는 집합소를 생각하면서 이 의식을 취소하기 위해서 그러했다. 친 부살해와 근친상간의 욕망, 예전에 이것을 진정으로 원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욕망을 억 압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 Ergo sum 〉는 식 이 다. 프로이트가 그 위에다 모든 정신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명백한 의식 의 순간 속에는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 의식은 완 전히 쓸모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이것이 없을 때 프로이트의 본질적인 직관이 더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이 직관은 아이와 부모, 더욱 일반적으로 추종자 욕망과 모델 욕망의 초기 관계 속에 들어 있는 결 정적인 그리고 참재적으로는 파국적인 요소에 관한 직관이다. 우리는 본질적인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의 〈콤플렉 스 〉 보다 상당히 나은 맥락 속에서 모든 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힘에 부칠지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 뛰어드는 것이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모방적인 우리의 욕망 개념이 정신 의학 이론에 제삼자의 길을 열어줄 것이다. 이 길은 분명코 실존적 정 산분석으로 가장된 의식에 관한 모든 철학에서뿐만 아니라 프로이트 주의의 무의식이라는 집합소와도 아주 거리가 멀다. 또한 이 길은 대 부분의 현대사상에 나타나고 있는 전도된 〈부패〉의 물신(物神) 속으로 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특히 〈적응 ada pt a ti on 〉이라는 물신도 피하고 있다. 〈적응한 ada pt e 〉 개인이란, 이중명령의 이율배반적인 두 명령­ 모델처럼 되라, 모델처럼 되지 마라-에 대해 상이한 두 영역을 제 시하는 데 성공한 개인이다. 다시 말해, 적응한 자는 현실을 분할함으 로써 〈이중명령〉을 희석시킨다. 원시문화 질서들이 하고 있는 것이 바 로 이것이다. 개인적이거나 혹은 집단적인 모든 적응의 기원에는 어떤 불법적인 폭력의 은폐가 있다. 적응하는 자는 자기 스스로 이 은폐를

실현하는 자이거나, 아니면 문화질서가 이미 이 은폐를 행했을 때에는 그것에 순응할 줄 아는 자이다. 부적응자i nada pt e 는 순응하지 못한다. 희생위기와 마찬가지로 〈정신병〉))과 반항은 그 개인을, 문제의 이 은 폐를 실현하는 데에 적합한 대부분의 희생형태들보다 분명히 훨씬 더 나쁜 그렇지만 더 〈진실된〉 거짓과 폭력의 형태로 나아가게 한다. 많 은 정신질환의 원인에는, 정신분석학도 당연히 헤아리지 못한 전실에 대한 갈증, 그리고 모든 〈인간 질서〉라는 것 속에 들어 있는 폭력과 기만에 대한 막연하지만 근본적인 항의가 있다.

1) 여기서 꺾쇠 표시는, 많은 의학서에서처럼 〈정신병〉의 개념 자체에 문제가 많음 을 의미한다.

적응이라는 진부한 순응주의와 신화적으로 아이에게 친부살해와 근 친상간의 욕망을 부여함으로써 시작되는 거짓 스캔들 사이를 더 이상 헤매지 않게 된 정신의학은 무미전조한 관념론에는 다시 빠지지 않으 면서 전통적인 위대한 직관들과 다시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구약성 서에서와 같이 그리스 비극에서도 대개의 경우 〈가장 좋은〉 아들은 〈가장 나쁜〉 아들과 일치한다. 이 아들은 에서보다는 야곱이며, 성실한 아들보다는 방탕한 아들로, 의디푸스와 같은 인물이다 . 가장 좋은 아둘 은 너무나도 열심히 아버지를 모방하여, 자신에 대해서는 아버지를, 아 버지에 대해서는 자신을 끊임없이 서로 충돌하게 되는 장애물로 여기 게 될 정도이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은 우리도 모르고 있는 그 기원에 관한 프로이 트의 생각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모방적 〈이중명령〉은 프로이트의 생각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우리가 본질 적인 것으로 가정하는 이율배반적인 이중명령, 죽 〈아버지처럼 해라〉 와 〈아버지처럼 하지 마라〉 하는 명령은 정신분학적인 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생각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에만 내맡길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 우리들이 뒤쫓고 있는

이 발자취는 상상의 것 이 아니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 자아와 이드 』 에 나오는 〈초 자아 surmo i 〉 나 〈 이상적 자아 mo i i deal 〉 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초자아 〉 와 〈자아〉의 관 계는 그에게 〈( 너의 아버지처럼) 그렇게 되어라 〉 하는 충고를 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또한 〈 (너의 아버지처럼) 그렇게 되지 마라 〉 하는 금 지, 다시 말해서 〈 그가 하는 것 모두를 하지 마라. 많은 것들은 오직 그에게만 허용되어 있다 〉 하는 금지도 내포하고 있다고 프로이트는 말하고 있다 . 이 구절을 보고서도 프로이트는 이중명령에 관심이 없었다고 주장할 수 있 을 까? 프로이트는 이 메커니즘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울 뿐만 아니라, 그것의 모든 참재성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그것을 정확한 위치 에 위치시켰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초자아〉에 대한 정 의 는 경 쟁 관계에 대한 신화적 의식과는 전혀 다른 것을 가정하고 있 다. 분명히 그것은 추종자는 발견하지 못하는 모델과 장애물의 일치에 근거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 초자아 〉 는 의디푸스 콤플렉스 〈이전〉이 아니라 그 〈 이후 〉 에 일어나는 아버지에 대한 〈동일화〉의 . 되풀이에 불 과해 진다. 이미 보았듯이 프로이트는 아마도 자기가 한 말을 취소하 기가 싫어서인지 앞에서 말한 이 동일화를 진정으로 제거하지는 않지 만, 그것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잘라냄으로써 그것을 슬그머니 부차적 인 차원으로 격하시켜 버린다 . 하여튼 아버지에 대한 동일화가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의디푸스 콤플렉스 〈이후〉이다. 이 〈동일화〉가 〈초자 아 〉 로 된 것이다• 우리가 방금 읽었던 정의를 곰곰이 따져보면, 이 정의는 모방적 〈이 중명령〉의 관점으로 읽혀질 수 있다. 그 반면에 우리는 프로이트의 〈 억압된〉 의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관접, 다시 말해서 처음에는 의식적 이었다가 다음에는 의식적이지 않는 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욕망이라 는 관점으로는 이 정의를 해독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프로이트의 불확실과 애매모호한 분위기 속에서 이율배반적인 〈초

자아 〉 의 두 명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열렬하게 모방할수록 더 큰 실망으로 보답받는 아들의 모방울 상상해야 할 것이다. 〈 아버지처럼 되어라 〉 하는 긍정적인 명령은 아버지 행동의 전체 영역을 포함하고 되있지는 마것라처〉럼 하보는인 다뒤.이 이어 최오초는의 반명대령 명속령에 —서—는 이 어 또떤 한것 모도 든〈 아가버능지한처 럼영 역을 포함하는 것처럼 보인다-울 예고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그러 한 해석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프로이트에게는 또한 차별화의 모든 원리가 빠져 있는데, 이것은 엄 청난 무지의 소치이다. 아돌은 무엇 때문에 그가 벌을 받았는지 궁금해 한다. 그는 두 명령에 대해서 각각의 적용 영역을 알아내려고 애쓴다. 그에게는 위반자라는 느낌이 전혀 없다. 그가 알고 있던 기존의 법을 위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행동을 위반이라고 규정짓는 그 법을 알아내려 애쓴다. 이 정의에서 어떤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애초에 그것에 관 심이 있었으나 의디푸스에서는 거부했던 바로 그 〈 모방 〉 효과들을 프 로이트는 왜 다시 거론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분명히 하 나의 대답밖에 없는 것 같다. 프로이트는 동일화에서 드러나고 있는 〈모방〉 효과들을 거부하기를 전혀 원하지 않는다. 그는 〈 초자아〉에서 그곳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자아와 이드』에서 〈초자아〉에 대한 정 의는 위에서 인용한 의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두번째 정의, 즉 『집단 심리학과 자아분석』에 자주 나타났던 모방 효과가 완전히 제거된 정 의를거의 직접적으로 뒤따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1921 년의 『집단 심리학과 자아분석』과 1923 년의 『 자아와 이드』 사이의 프로이트 사고 의 변천과정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첫번째 저서 에서 프로이트는 우선 모방 효과를 주개념인 의디푸스 콤플렉스와 화 해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모방개념과 관 련된 직관들이 이 첫번째 저서의 견해를 장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러나 프로이트는 이 책의 편집과정에서부터 이 두 테마 사이의 모순을

예감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 모순은 완전히 실재적인 것이었다. 모 방 개념은 모든 대상으로부터 욕망을 분리시키지만, 의디푸스 콤플렉 스는 욕망을 어머니라는 대상에 뿌리박게 한다. 모방 개념은 친부살해 와 근친상간이라는 생각, 심지어는 모든 실재적인 욕망조차 제거시키 는 반면에, 반대로 프로이트의 문제 제기는 온통 이런 생각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프로이트는 콤플렉스를 따르기로 결심한다. 모방 효과와 충 분히 개화된 친부살해와 근찬상간의 욕망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을 때, 그는 단호하게 후자를 선택했다. 그렇다고 그가 〈모방〉의 유망한 가능성들을 탐색하는 것을 단념했다는 말은 아니다. 프로이트에 있어 서 감탄할 만한 것은 그는 결코 무엇이든지 단념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점이다. 그가 〈 모방 〉 효과를 제거한 것은, 단순히 이것 때문에 생 겨날지도 모르는 콤플렉스에 대한 공식적인 해석의 혼란을 피하기 위 해서였다. 〈 모방〉 효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그는 의디푸스 문 제를 완벽하게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다가 일단 의디푸스 콤플렉스가 해결되고 나면, 그는 이 콤플렉스 〈이전의〉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려 할 것이다. 요컨대 프로이트는 우선, 〈반(半)대상적이며 mi- o bje c ta l 반(半)모방적 인 m i -m i me tiq ue 욕망〉이라는 기반 위에서 의디푸스 콤플렉스를 이해하 려 했다. 바로 여기에서 의디푸스에 대한 처음 해석과 두번째 해석에 있던, 아버지에 대한 동일화와 어머니에 대한 리비도적 경향이라는 기 이한 이중성이 유래한다 . 프로이트가 의디푸스의 근거를 순전히 대상 욕망에다 두고, 모방 효과는 또다른 심리구성체인 초자아의 전유물로 삼은 것은, 바로 이 절충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 〈심급i ns t ances 〉 0 의 이중성은, 대상에 뿌리박은 의디푸스적 욕망 과 모방 효과라는 프로이트 욕망론의 두 축을 분리시키려는 노력의 ® 심급(審級) ins ta n ces : 국소론적 역동적 견지에서 본, 심적 장치 하부구조의 각 영 역으로서 초자아 surmo i, 검열 censure 등이 그것이다.

소산이다. 그러나 이 완전한 분리의 노력은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에 앞선 종합의 노력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실패로 귀착된다. 모방 욕망에서 동일화와 대상선택 그리고 경쟁 관계는 완전히 분리 될 수 없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사고가 언제나 모방에 관한 직관에 의 하여 영향받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는, 그에게서도 이 세 항목이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는 데에 있다. 그것들 중의 하나가 나타나자마자 다른 둘도 뒤따라오고 있다. 의디푸스 콤플렉스에서 프로이트는 겨우 그리 고 아주 부자연스럽게 모방에서 벗어난다. 원칙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동일화와는 어떤 것도 모순되지 않는 〈초자아〉에서, 필연적으로 어머 니라는 대상에 대한 경쟁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 보인다. 프로이트가 〈초자아〉에게 〈(아버지처럼) 되지 마라. 많은 것들은 오 로지 그에게만 허용되어 있다〉 하고 말하게 할 때는 어머니만이 문제 될 수 있으며, 또한 실제로 어머니만이 문제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도 〈초자아의 이중적 양상(아버지처럼 되라, 아버지처럼 되지 마라)은, 초자아 는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억압하려 한다는 사실과 그리고 이 억압에서 태어났다는 두 가지 사실에서 기인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억압하면서 동시에 억압받는, 그리고 〈억압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후에야 태어난다는 이 초자아는 분명히 많은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심지어 부정적으로까지 〈그것은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사실 〈초자아〉 를 규정하는 아버지에 대한 동일화는 즉시 의디푸스적인 삼각구조를 야기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갇이 프로이트가 모방의 세 항목 중 어느 하나를 언급하면,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곧이어 나머지 둘도 다시 나타난다. 이러한 의디푸스적인 삼각형의 출현은 '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정신분석학의 설립자 중의 하나인 이 의디푸스 콤플렉스는 이미 정신분석학의 은행에 있는 무의식의 금고 속에 이중으로 감금되 어 있는 셈이다. 프로이트가 아들이 자신의 의디푸스를 억압하기가 아주 힘들 것이 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의디푸스적 삼각형의 뜻하지 않은 출현 때

문이다 . 사실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프로이 트 자신이다. 모방이라는 것의 형체가 늘 머리를 떠나지 않던 그는 언 제나 어떤 삼각형을 그리면서 그것을 영원한 콤플렉스의 삼각형이라고 여기고 있었으나 , 그것은 항상 당연히 그를 난처하게 하는 〈모방〉의 삼각형이었다. 그것은 바로 프로이트가 언제나 〈말할 듯하면서도 말하 지 않던 〉 , 그러면서도 결코 해결하지 못한 모델과 장애물의 작용이다. 우리는 여기서 소위 〈 임상〉 사례를 포함해서 다른 많은 결정적인 사례들울 둘 수도 있겠지만 , 이들을 비교함으로써 많은 것을 암시받을 수 있는 중요한 두세 개의 구절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구절들 속에는 프로이트 문제 제기의 중요사항인 〈양면성〉이라는 말이 여러 번에 걸 쳐 나타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프로이트의 생각 안에는 모방의 형체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이 형체의 세 요소인 모델, 추종자 그리고 〈 공통된 〉 대상이기에 모델과 추종자가 서로 다두게 마련인 욕망대상 사이의 관계를 프로이트가 정확하게 연결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은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사실은 욕망 속에 있는 모든 〈공통적인〉 . 것은 조화가 아니라 갇 등을 의미한다. 〈 양면성〉이라는 말은 우리가 인용한 바 있는 의디푸스 콤플렉스의 두 정의, 죽 『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과 r 자아와 이드』의 정의 끝에 나온다. 다시 한번 그 구절을 인용해 보자. 아버지에 대한 동일화는 적대적인 뉘앙스를 띠게 되며, 마침내는 어머니에 대해서조차 아버지를 대신하려는 욕망과 혼합된다. 〈게다가 동일화는 시초부 터 양면적이었다〉 .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동일화는 적대적인 성격이 되며, 아버지를 제거하여 어머니에 대해서 아버지를 대신하려는 욕망을 낳게 한다. 이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태도는 양면성을 지니게 된다. 본래부터 동일화 속에 내포되어 있던 양 면성이 표면에 나타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아버지에 대한 동일화가 어떻게 규정되었는지 를 뚜렷이 기 억하고 있다. 죽 〈 그것은 수동적이거나 여성적인 면은 전혀 갖 고 있지 않다…… 〉 고 되어 있었다 . 그때에는 아주 분명하여 애매함이 전혀 없 는 것 같았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분명히 그때까지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던 중요한 〈양면성 〉 을 왜 이제 와서 동일화에 부여하는 걸까? 그것은오로지 처음 동일화의 긍정적 감정들 __- 모방 , 존경, 숭배―― 은 반드시 절망, 죄의식, 원한 등등의 부정적인 감정으로 바뀌게 마 련이란 것을 프로이트가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의 직관은 틀리 지 않았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사태가 〈 왜 〉 그런 식으로 되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욕망의 전정한 모방 개념에 도달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동일화의 모델이 〈 욕망의 모델 그 자체, 따라서 욕망의 강력한 장애자〉라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모방적 욕망의 모순이 프로이트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밝 힐 수도 없 는 그 모순이 어령풋이 그에게 다가설 때마다 프로이트는 항상 〈 양면 성〉이라는 개념 속으로 피신해 버린다. 그러나 이 양면성은 전통 철학 의 주체인 고립된 주체에게, 이해할 수 없는 〈 이중명령 〉 이라는 관계의 모순을 되돌려줄 뿐이다. 일단 고립된 개인 속에 자리잡게 되면 그 모순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 결과 사람들은 모순이 그 〈 육체〉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프로이트는 〈양면성〉을 말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가 정신과 육체가 만나는 미지의 영역을 향하여 기막히게 멋진 참수를 하고 있다고 믿게 하며 또한 자신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다. 사실 해독할 수 있는 것을 해독하기를 단념하는 것이 언제나 문 제이다. 말없는 〈육체〉가 이의를 제기할 위험도 없다. 오늘날은 모두가 프로이트를 따라서 〈육체〉를 청취한다고, 죽 육체의 메시지를 해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프로이트의 저서 속에 나타나는 모든 〈양면성〉의 예들은 한결같이 궁극적으로 모델-장애자의 도식으로 귀결되고 만다.

갈등을 주체의 육체 깊숙한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곧 그의 무력 함을 미덕으로 간주하는 것이며, 해독할 수 없는 관계는 해독할 수 없 는 것일 뿐만 아니라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이 것°] 바로 주체의 〈육체〉, 즉 모델 욕망의 장애물을 자주 만나는 다소 체질적인 성향을 가진 심리의 가장 육체적인 영역이다. 그것이 정신계 룰 배양한다는 점에서, 이 양면성은 육체성의 근원적인 한 미덕이 되 는데, 그것은 욕망에 대한 현대판 스콜라 철학 식의 따분한 미덕이다. 이 개념을 비롯한 다른 여러 개념들을 동해서, 정신분석학은 자신이 해결해야 할 개인 신화에다가 〈집행유예〉를 부여하며, 심지어는 그것 을 더 〈 구현〉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생의 새로운 모습을 제시하 기도 한다. 프로이트에 있어서는 적어도 〈양면성〉의 배후에 모방적 욕망에 대한 부분적이긴 하지만 실질적인 직관이 존재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사정이 그러하지 않다. 우리는 프로이트가 어떻게 했기에 그토록 단순 한 이 메커니즘을 하나도 찾아낼 수 없었는가를 따져보아야 한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바로 이 극도의 단순성 때문에 이 메커니즘이 은폐 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 다른 것이 있다. 그런데 이 다른 것을 발견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처음 서부터 그것을 매번 만나고 있었다. 물론 이 다론 것은 〈의디푸스 콤 플렉스〉의 핵심, 다시 말해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욕망이 아이의 명 백한 의도가 된다고 간주하는 그 짧은 순간의 의식이다. 프로이트적 의미의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은 근본적으로 모방적인 욕망의 행로에 결정적인 장애물을 이루고 있다. 친부살해의 욕망, 근친상간의 욕망이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확신하기 위하여 프로이트는 욕망을 가리키는 모델을 제거하고서 이 욕망은 순전히 그 대상에만 뿌리박힌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전통적이며 되행적인 욕망 개념 을 고수한 것으로서, 근본적인 〈모방〉을 향한 프로이트 사고의 움직임 이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에 대해 그가 품고 있던, 의무와도 같은 그 이

상한 강제 조항에 의해 줄곧 제동이 걸린 것 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모방적 경쟁 관계가 프로이트의 콤플렉스보다 모든 영역에 있어서 더 유리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 경쟁 관계는 친부 살해와 근친상간의 욕망에 대한 의식뿐 아니라 억압과 무의식이라는 성가신 필연성을 제거시켜 준다. 이것은 또한 의디푸스 신화를 해독하 는 독서체계 속에 포함되어 있으면서, 프로이트주의는 불가능했던 설 명에 있어서의 논리의 일관성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프로이트는 생각 지도 않았던 방법의 절약도 가져다준다. 이런 상황인데도 프로이트는 왜 모방적 욕망이라는 막대한 유산을 내팽개치고서 천부살해와 근친 상간이라는 초라한 렌즈콩 접시로 게걸스럽게 달려든 것일까? 쉽게 무엇을 잘 믿지 않는 우리가 비록 〈 외디푸스 콤플렉스 〉 라는 멋진 교리가 담고 있는 진수의 일부분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 하 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들이 제안하고 있는 이 콤플렉 스를 대체하는 독법을 프로이트가 진정으로 거부했다고는 말할 수 없 을 것 같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그가 진정으로 이것과 만났다면 이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설령 이것을 거부하기 위해서라도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이것에 이르지 못했다. 우리 독법은 많은 양상들을 설명해 주면서 프로이트의 작품 속에 홑 어져 있는 많은 맥락둘을 총망라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 독법은 프로이트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그가 할 수 없었던 것을 완성시키기 때문이며,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이라는 신기루 때문에 도중에 중단되었 던 그곳에서 다시 끝까지 나아가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그에게 결정 적인 발견처럼 보이는 것에 너무 현혹되어 있었다 . 그 발견이 그의 지 평을 가로막은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의디푸스 신화와 정신분석의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신화적 본질을 밝혀낼 근본적인 〈모방〉의 길로 그가 단호하게 뛰어들지 못하게 막았다는 말이다 . 사실 정신분석학은 천부살해와 근친상간이라는 테마로 완전히 요약

되는 것처럼 보인다. 오랫동안 세상사람들의 눈에 정신분석학을 스캔 들처럼 보이게 만들고 그래서 모든 영광을 만들어냈던 것이 바로 이 테마둘이다. 정신분석학에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엄청난 희생뿐 아 니라 이해 부족과 거의 박해에 가까운 대접을 받게 한 것도 바로 이 테마 때문이며, 이 교리의 효력에 대해 최소한의 의심을 제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 반대 〉 를 입증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완전하고 즉각적인 바로 이 무기를 통해서이다. 프로이트에 있어서 모방적 욕망의 직관이 결코 우세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이 사상가를 편히 쉬게 내버려두지도 않았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는 언제나 똑같은 테마들에 다시 매달렸으나 욕망이 대상에서 출발한다는 입장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에, 진정으 로 만족할 만한 결과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집요하게 욕망의 조건들을 재구성하려고 애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거세〉, 〈의디푸스 콤플렉 스 〉 , 〈 초자아〉, 〈무의식〉, 〈억 압〉, 〈양면성〉 같은 다양한 심급이론의 개념들은 결코 완수되지 않았기에 항상 다시 애쓰다가 만난 뜻밖의 발전물들에 불과하다. 우리는 프로이트의 분석을 완전한 체계로서가 아니라, 거의 언제나 동일한 주제에 대한 일련의 시도로 보아야 한다. 가령 〈초자아〉는 의 디푸스의 재탕에 불과하다. 그 기원을 꿰뚫어보면 이것과 의디푸스의 차이는 단지 환상적인 것이란 것을 이해하게 된다. 진짜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진짜 프 로이트도 프로이트주의자가 아니다. 조잡스런 반대세력을 집할수록 그 는 더 무용한 논쟁적인 교조주의의 길로 점점 집어들게 되었는데, 이 교조주의를 신봉자들은 맹목적으로 따르고 불신자들 역시 맹목적으로 거부했다. 그래서 그의 텍스트와의 소박한 만남이 어렵게 된 것이다• 후기프로이트주의의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주의를 체계화하기 위하 여, 다시 말해서 그것의 살아 있는 뿌리로부터 그것을 떼어내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주 찰 알고 있었다. 근친상간 욕망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 외디푸스에서 모방울 완전히 제거하는 것으로 충 분하다. 그렇게 하면 아버지에 대한 동일화는 완전히 잊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 자아와 이드』에서 프로이트는 이미 이 방법을 보여주고 있 다. 역으로, 단단한 기반 위에 〈초자아 〉 의 절대적인 지배권을 세워주기 위해서는 대상과 경쟁 관계를 〈초자아〉의 정의에서 완전히 제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양식〉의 질서인, 프로이트가 흔 들어놓았던 사물들의 질서를 이제 완전히 회복시켜 보자. 의디푸스에서 아버지는 모욕받는 경쟁자이다. 따라서 그를 존경받는 모델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역으로 〈초자아〉 속에서 아버지는 존경받는 모델이기에 그를 모욕받는 경쟁 자로 간주해도 안된다 . 〈양면성〉, 그것은 정신분석학자들이 아니라 환 자들에게나 유익한 것이다 ! 이리하여 우리는 선행하는 동일화(의디푸스 콤 플 렉스) 없는 경쟁 관계 와 그 뒤에 나타나는 경쟁 관계(초자아) 없는 동일화를 상정할 수 있다. 그의 초기 평론인 「정신분석의 공격성 I' Ag res siv i t e en p s y chanal y se 」 속 에서 자크 라캉J ac que Lacan 은 〈만일 우화의 차원에서가 아니라면, 경 쟁자에 대한 동일화의 구조적 효과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 하고 이것 의 특성을 지적했다. 우화는 일단 옆으로 제쳐놓자. 참시 후에 우리는, 우화는 그 누구로부터 받아들여야 할 교훈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라캉이 말하는 그 효과도 진짜 프로이트에의 것 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차가운 정신분석학의 교리를 특칭짓는 것 이다. 프로이트 분석의 유익한 점은, 그 결과에, 장중한 〈심급〉둘의 더미에, 다시 말해 잘 길들여진 추종자들이 민첩하게 기어올랐다가 다시 굴러 떨어지곤 하는 그 덧없는 축적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체계의 〈실패〉에 있다. 프로이트는 모델, 추종자 그리고 그들의 공통 대상 사 이의 관계들에 유기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데는 결코 성공하지 못했지 만, 그렇다고 그것을 한번도 포기하지는 않았다. 흰 가운 입은 간호원 들이 〈쓸모 있는 거라고 믿으면서〉 힘들여 상자 속에 넣으려 애쓰는

용수철 장난감처럼, 그가 이 세 항목 중 어느 두 개를 다룰 때마다 항 상 그 옆에서 제삼의 것이 불쑥 튀어오른다. 신성화된 이 위대한 사상 가에게 있어서 아마 이보다 더 근본적인 거세는 없을 것이다. * 프로이트 이후에, 사람들은 〈의디푸스 콤플렉스〉가 서구세계에만 한 정된 것인지, 아니면 원시사회 속에서도 존재하는 것인지를 많이 자문 해 보았댜 말리노프스키 Mal i nowsk i의 저서 『원시사회의 아버지 The Fa- the r in Pri mi tive So ci e ty』는 이러한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현재 우리가 시도하는 이 관점에서 그를 살펴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우선 말리노프스키는 트로브리앙 Trobr i ando i s 족이 서구인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단언한다. 이 미개인들은 문명인들이 겪는 그런 긴장과 갈 등은 겪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다론 긴장과 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이 다. 트로브리앙족의 사회에서는 의삼촌이 우리 사회에서의 아버지 역 할의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중의 몇몇 역할을 수행한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아니라 이 의삼촌으로부터 상속받고 그들 부족의 교육도 그 에게 위임된다. 그러므로 당연히 아버지가 아니라 이 의삼촌과의 사이 에서 긴장과 갈등이 생겨난다. 오히려 아버지는 여기서 다정하고 관대 한 동료, 일종의 피난처처럼 보인다. 말리노프스키는 프로이트와의 대화라는 형식을 통해서 자신의 의견 을 제시하지만 우리는 이 덱스트로부터 아주 혼란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는 우선 콤플렉스에는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보편성이 없다고 주장 한다. 그러나 뒤이어 외삼촌에 대한 고찰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정신분 석학에 더 유리한 결론들이 암시되고 있다. 여기서는 더 이상 프로이 트를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다른 예증을 많이 제공해 주는 것 처럼 되어 있다. 트로브리앙족에게 있어서 외삼촌은 우리들에게 있어 서 아버지의 역할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처럼 유동적인 형태

하에서도 의디푸스 콤플렉스는 어떤 보편적인 것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 책을 환대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 책에서 정신분석학이 너무 특수한 가족의 틀에 사로잡혀 있다고 여기면서 정 신분석학에 대해 계속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던 다른 민족학자들 에 대한 반박만을 보았다. 오히려 말리노프스키의 프로이트 이해는 피 상적이며 , 트로브리앙족의 의삼촌에 대해서는 겉으로 드러나 있는 의 식적인 긴장들만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정신분석학자들은 전혀 유의하고 있지 않았다. 정신분석학에서 볼 때, 그 어느 것으로도 의삼촌이 주인공인 무의식의 드라마 속에 이 긴장들이 뿌리박고 있다 고 단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이 책의 결론이 정신분석학에 불리 한 것이었다면 이 모순은 틀림없이 그들의 눈에 띄었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시도하는 관점에서 보면 말리노프스키의 견해는 본질 적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의디푸스 콤플렉스의 모든 실질적인 것들이 항상 거기로 귀결되는 그러한 관계들을 그가 직접 언급하고 있기 때 문이다. 자신은 그것에 `충분한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으면서 , 말리노프 스키는 원시사회들 아니면 적어도 트로브리앙족은 모방적 경쟁 관계와 〈이중명령〉을 대신하여, 우리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는 속박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본질적인 것은 아버지의 관용이나 외삼 촌의 엄격함이 아니며 권위가 한 남성으로부터 다른 남성에게로 옮겨 간다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다. 더욱 홍미로운 차이는 다음과 같은 사 실들이다. 죽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혈통이 아니며 , 아버지 그리고 일 반적인 부계문화는 모델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여 기서는 아버지로부터 유래하는 〈나를 모방하라 〉 는 명령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법적으로 볼 때 자신은 그곳의 이방인인 그런 공동체 속에서 성 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토지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없으며 , 마울의 영광으로

부터 어떠한 자존심도 느끼지 못하며, 그들의 진정한 거주지, 애국심의 중심, 유산, 선조들의 영광은 다른 곳에 있다. 이 이중의 영향으로부터 이상한 결합 과 혼란이 생겨나게 된다. 여기서 아들들은 〈이상적 자아〉나 〈초자아〉라는 프로이트적 의미에 있어서의 그들의 〈이상형〉을 구현하고 있지 않는 그들의 아버지와 함 께 살아간다. 그 이상형은 다른 데에 존재한다. 즉 문화에 의해서 제 공된 모계에서 가장 가까운 어른인 외삼촌이라는 모델이 존재하지만 〈아이들은 이 모델과 함게 살아가지는 않는다〉. 우선 외삼촌은 아주 뒤에 가서야 아이들의 삶 속으로 끼어든다. 그때에도 그의 존재는 지 속적인 것이 아니다. 흔히 그는 다른 마울에서 산다. 말하자면 그에게 는 아이들의 어머니인 자신의 누이룰 멀리해야 한다는 엄격한 터부가 있는 것이다. 〈이중명령〉이란 말을 비롯한 많은 프로이트적인 용어와 마찬가지로, 회삼촌 쪽으로 의디푸스 콤플렉스가 방향을 돌렸다는 말 은 현실성이 없다. 의삼촌에 대한 의디푸스란 기껏해야 농담일 뿐이다. 사실 삼촌과 조카들 사이의 긴장은 아이룰 모순 속에 가두어 넣지 않기 때문에 그 긴장은 그만큼 더 잘 드러난다. 이때에는 장애물이 모 델로 될 수 없으며 모델 또한 장애물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또한 〈모 방〉은 한 방향으로만 집중되기에 욕망은 자신의 장애물을 욕망대상으 로 보지 않게 된다. 또 다론 원시제도들을 연구해 보더라도 문화적인 모델-이 모델은 언제나 특정한 한 인물로 구현된다고 가정할 때-의 활동영역과 추 종자의 영역은 그들 두 욕망이 한 대상에게 수렴한 정도로 충분히 서 로 교차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이 두 영역은 때가 되어 추종자가 그 문화의 한가운데로 〈입문inti a ti on 〉하는 지접에서만 서로 만난다. 말리노프스키의 고찰로 미루어볼 때, 원시사회들이 서구사회보다 〈이중명령〉으로부터 더 찰 보호받고 있는 것 같다. 트로브리앙족의 사

회와 비교한다면 서구사회는 정말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 트로브 리앙족에서는 먼 옛날 가부장제 때부터 아버지와 의삼촌 사이에 분담 되어 있던 역할들이 단 한 사람에게 수령되어 있었다. 따라서 가부장 제도는 트로브리앙족의 제도보다 덜 차별화되어 있는 것이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무리 자의적인 구조화의 〈정점〉인 것 같고 또 그 렇게 보이는 게 틀림없다 하더라도, 원시사회의 관점에서는 그것은 이 미 하나의 기호에 의해서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 이제 우리는 끝없는 실수와 오해의 원천인 〈의디푸스 콤플렉스〉라는 표현은 그만 쓰고, 정신분석학이 이 콤플렉스의 결과라고 이야기하는 실재 현상들을 갈등적 〈모방〉을 중심으로 재편성해야 할 것이다. 여기 서 이 현상들은 일관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다른 한편 으로 이러한 현상들을 통시적인 도식 속에 끼워 넣는 것, 죽 이 현상 들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생겨나는 이론들, 물론 무엇 보다도 우선은 정신분석학을 역사적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의디푸스 콤플렉스와 같은 이론이 생겨날 수 있으려면, 그 사회 속에 이미 상호적 〈모방〉이 존재해야 하고, 거의 언제나 그것의 폭력은 드 러나지 않는 모델/장애물의 메커니즘이 존재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이 메커니즘의 기원과 출발점은 당연히 아버지여야 할 것이다. 만일 〈이중명령〉의 기원에 아버지가 있다면 그 욕망주체가 살아 있는 내내 그로 하여금 모방하도록 부추기는 매력 속에는 항상 아버지의 그립자 가 들어 있을 것이다. 집단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에게 있어서도 모방의 매력은 항상 한층 더 심해지는 경향이 있고, 이 매력은 언제나 본래의 형태들을 재생산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달리 말해서 첫번째 의 것과 유사한 새로운 모델들(새로운 장애물들)을 찾는다. 만일 첫번째 의 모델이 아버지라면, 욕망주체는 아버지와 유사한 새로운 모델들을 선택할 것이다. 서구사회에서는 가부장제 때에도 아버지는 이미 모델이었다. 〈이중

명령 〉 이 존재하기 위해 서는 아버지가 장애물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장애물이 되면 항상 아버지의 힘은 축소되고 모든 면에서 아들과 비교가 되며 아들과 똑같은 세계에서 살게 된다. 〈 외디푸스 콤 플렉스 〉 의 황금기는 아버지의 입장이 약화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상 실되지는 않은 세계, 다시 말해서 최근 수세기 동안의 서구 가정 속에 있었댜 이때에는 차이들의 소멸로 인해 〈 이중명령〉의 계기가 많아지 기 시작하는 세계 속에서 아버지는 첫번째의 모델이자 첫번째의 장애 물이 된다 . 이러한 사태는 그 자체가 설명을 요하는 것이다. 만일 현대사회의 역사적인 변화를 차이의 해체라고 한다면, 그것은 여기서 우리가 희생 위기라고 명명한 모든 것과 아주 홉사할 것이다. 〈현대적〉이라는 말은 사실상 많은 점에서 희생위기의 동의어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우라는 이 현대세계는, 항상 더욱 강렬하지만 세계를 파괴할 정도는 아닌 경쟁 관계를 동반하는 상대적 무차별화의 측면에서 볼 때 분명 일시적인 평정을 회복하는 데 계속 성공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앞 장 들의 분석으로 미루어볼 때 우리는, 원시사회들은 이러한 상황을 별로 거부하지 않았던 것 같다. 폭력은 모든 대책을 무용한 것으로 만들지만 그와 동시에 이것은 아주 차별화된 어떤 제도를 회복시키면서 절정의 순간에 초석적 만장일치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현 대의 서구세계 속에서 그런 식의 것은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점진 적이며 지속적으로 차이들의 소멸이 일어나겠지만, 점점 지구 전체가 연결되어 하나가 되어버린 공동체에 결국 그럭저럭 흡수되고 동화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당면하고 있는 긴장과 소의의 책임은 어떤 형태의 〈법률〉 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모든 법률의 더욱 완전한 부재에 있다. 계속해서 행해지는 법률의 고발은 전형적인 현대판 〈원한〉에 속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겉으로 내세우는 것처럼 법률에 부딪친 것이 아니라, 욕망주체가 그것의 지배적인 입장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모델 / 장애물에 부딪쳐서 일어나는 욕망의 반사 파도와 같 은 것이다 . 계속되는 〈 양태들 〉 의 혼잡 속에서 〈 모방 〉 이 더 강렬해지고 그래서 더 절망적이 될수록 인간들은 그들이 모델을 장애물로 보고 장애물을 모 델로 본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그만큼 더 거부한다 . 진정한 〈 무의식 〉 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그것은 분명히 많은 방식으로 변조될 수 있을 것 이다. 여기서 우리의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는 프로이트가 아니다 . 또한 이 원한울 〈 약자들〉만의 것이라고 단정하고서는 이 원한과 진정 으로 〈 자발적안〉 욕망 사이의 변치 않는 차이를 회복하려고 헛되이 애쓰는,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의도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원한의 극단적 인 표현을 결코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가 〈 그의 것 〉 이라고 말할 권력 의 의지를 회복하려고 헛되아 애쓰는 니체도 우리의 안내자가 될 수 없다. 우리의 안내자는 법률의 부재 속에서 광적으로 변한 법률과 같은 현상, 죽 인간을 짓누르는 진짜 질곡을 알아차린 몇 안되는 사람들 중 의 하나인 카프카일 것이다. 다시 한번 더 이 뛰어난 안내자는 우리의 과학자라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직관이 경멸당하고 있는 작가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억압하는 경쟁자에 불과한 아버지에게 법전을 요구한 이 아들은, 그 대답으로 빨라서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을 들을 것이다. 원시사회에 비해 가부장제는 아직 덜 구조화된 것이라고 규정한다 면, 그 후에 일어났던 것을 생각해 볼 때 〈서구문명 〉 은 일종의 소명과 도 같은 미(未)구조화 또는 구조 해체의 원칙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 고 볼 수 있다. 어떤 힘이 처음에는 서구를, 다음에는 인류 전체를, 전 대미문의 강렬한 상대적 무차별화 상태로, 죽 우리들이 정확하게 현대 적이라고 이름붙이고 있는 이상한 종류의 비문화 또는 반문화 쪽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출현은 역사적으로 〈현대적인 것〉의 도래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비록 그것들의 기원이라고 간주되는 것이 신화적이고 공

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 외디푸스 콤플렉스 〉 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대부분의 현상들에는 우리의 모방 독법으로 밝혀낼 수 있는 통일성과 이해 가능성이 실제로 들어 있다. 〈 의디푸스 콤플렉스〉는 가부장제에 서 파생된 가족 구조를,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 부분적으로 유지하는 가운데 일어난 상호모방의 전파이다. 그것은 원시 회생위기 속에서와 똑같은 해체이다. 그러나 이 해체는 진짜 폭발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폭력, 파국에까지 이르는 폭동 혹은 어떠한 종류의 분해도 없이, 절제 속에서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해체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현대인을 괴 롭히는 점점 증대되는 긴장들과 똑같이, 현대인의 놀랄 만한 유동성과 그것의 굉장한 효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속박으로부터 언제나 자유로우면서도 언제나 아버지에게 집중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어떤 평정과 안정의 형태로 되돌아갈 수 있는 모방의 욕망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 고갈시키는 것이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것이듯이 의디푸스 콤플렉스도 서구적이며 현대적인 것이다. 만일 정신분석학이 어떤 이야기에 적용된다면 그것은 그 이야기가 절대로 말할 수 없는 것, 죽 아버지의 역할이 완전히 소멸해 버리는 극심한 무차별화를 말해 줄 것이다. 모든 신화적 사고와 마찬가지로 정신분석학도 닫힌 체계라서 그 어 느 것으로도 그것을 반박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만일 아버지와의 갈등 이 없다면 콤플렉스의 무의식적인 성격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식으 로 설명하고, 만일 갈등이 존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또한 콤플렉스 때 문이라는 것이다. 〈드러나는〉 것도 콤플렉스며, 〈제대로 되지〉 않을 때는 그것 또한 다시 한번 더 콤플렉스가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식이다! 정신분석학은 언제나 그 정확성아 입증되고 있지만 모방이 전파되 면서 심해질수록, 구조 해체가 점점더 결정적인 상태에 이를수록, 그리 고 〈이중명령〉이 많아질수록 더 찰 입증되고 있다. 아버지의 존재가 덜할수록 〈의디푸스〉는 더 활개를 친다. 이때부터 많은 정신장애들을

그의 라이오스를 알 수 없는 의디푸스 같은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는 식은죽 먹기가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짜 아버지에게서 뼈와 살을 지닌 삼촌에게서 또는 모든 특정한 개인에게서 의디푸스 를 다시 회상 하는 심리주의의 환상이 있을 거라고 단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로 되었다 . 지금 정신분석학은 완전히 활개치고 있다 . 도처에 정신 분석학이 있는데, 이것은 결국 정신분석학은 아무 곳에도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정신분석학이 통속적인 거짓 증거들의 진부함에서 벗어 나더라도 그것은 불가사의한 형식주의 속으로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 만일 의디푸스 콤플렉스가 〈이중명령〉에 대한 틀린 해석이라면, 친 부살해와 근친상간 욕망의 선동자는 바로 아버지, 아니 정 확 히 말해 아버지라는 · 모델일 것이다 . 오늘날 회의주의자들에게 있어서조차 프로이트의 신화는 아주 강렬 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재미있는 현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 분야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작가인 소포 클레스를 말벗으로 삼아보자. 다시 한번 더 우리는 『의디푸스 대왕』을 살펴볼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은 너무 많이 써먹었으며 또 그 결말도 · 너무 각양각색이므로 예증으로서의 가치는 낡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 서 우리는 다소 덜 알려진 작품인 『트라키니의 여인들 /es Trach i n i ennes 』 로 시선을 돌려보자. 마지막 막에서 주인공 헤라클레스는 독이 묻은 긴 웃옷을 입고서 고통으로 몸을 비틀고 있고, 그의 곁에서 그의 아들 힐로스는 정중하게 아버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아들에게 복종할 것을 상기시킨 후에, 헤라클레스는 아들에게 큰 불을 피우고 자신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산 채로 불 속에 던지라고 요구한다. 힐로스는 거부하며 ,, 의친 다. 아버지가 자기를 천부살해범으로 만든다고. 헤라클레스는 계속 고

집을 부려 다음과 같이 자신을 친부살해의 선동자 , 냉혹한 〈 이중명령 〉 의 책임자로 보게 하는 말을 한다 . _난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시키고 있는 거야. 〈 그게 싫다면, 넌 내 아들이 아니야, 차라리 다론 사람의 아들이 되어라 〉 . ―아아 ! 슬프도다 ! 아버님은 절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아버님의 살해 자 , 아버님의 암살자가 되라니요 ! 그 뒤가 더욱 놀랍다. 헤라클레스는 첫번째 부탁보다 덜 중요하다고 확신하는 〈 두번째 부탁 〉 을 아들에게 명한다. 적어도 현대적인 맥락에 서 보자면 이 텍스트는 정신분석학적인 현학적 태도가 가득 찬 강한 희극적 색채를 갖고 있다. 이 아버지의 죽음은 그가 마지막 〈시련〉에서 획득한 그의 마지막 부인인 젊은 이올레 Iole 에게서 그녀의 보호자인 남편을 앗아갈 판국이다. 헤라클레스 - 아들아, 내 부탁은 이런 것이다. 내가 죽었을 때 네가 효성을 보이고 싶다면 나에게 선서한 맹세들울 지켜 그 여인 이올레를 너의 부인으 로 삼아다오 . 〈 거절하지 말아다오. 그녀는 나와 함께 참을 잔 여인이야. 나의 소원은 너 아닌 다른 자가 그녀를 소유하지 않는 것이란다〉. 자 아들아, 그 녀와 그러한 관계를 맺는 것은 너만이 할 수 있단다. 나를 믿어라. 중대사에 대해선 너는 내게 맹세했다 . 그런데 하찮은 것들 때문에 그것을 저버리는 것 은 지금껏 네가 행한 효행마저 무효로 하는 것이다. 힐로스― 아아 ! 죽어가는 자에게 화를 내는 것은 튤립없는 죄악일 테지 만, 그렇다고 그의 이런 생각을 알면 도대체 누가 그의 편을 들어줄 수 있단 말인가? 몰리에르적인 이 대답 다음에 더욱 주목할 만한 대화가 나타난다. 힐로스는 피상적으로는, 이올레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 죽 국에 달한

가족 비극 속에서 젊은 여성에게 맡겨진 역할―― 더구나 완전히 수동 적인-에 대한 최초의 거부에 대하여 근거를 대지만 사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게 아니다. 아버지의 욕망과 아들의 욕망 사이의 〈진정한〉 관계, 죽 그는 아버지의 의지에 충실하게 복종하고, 어떤 때는 교활하 고, 또 어떤 때는 〈내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라〉는 위압적인 아버지 라는 모델의 권유를 충실히 복종하는데도 세상사람들의 눈에는 부도 덕한 저항으로 간주되는 그 신분 관계가 진짜 문제인 것이다. 힐로스―아아 ! 불쌍히 여기소서 ! 저는 너무나도 괴롭나이다. 헤라클레스_그건 다 네가 아버지의 말을 안 듣기 때문이니라. 힐로스一제게 불효를 가르쳐 주시는 분이 바로 아버지가 아니십니까 ? 헤라클레스一나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은 결코 불효가 아니니라. 힐로스_그렇다면 그건 돌이킬 수 없는 명령이십니까? 헤라클레스―그렇다. 신에게 약속하마. 힐로스―〈그렇다면 아버님을 따르겠습니다. 아버님을 거역하고 싶지는 않 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이 행동은 아버님 때문이라는 것을 널리 알 릴 것입니다. 저는 아버님께 복종합으로써 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헤라클레스―그래, 아주 잘 생각했구나……. 보다시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신분석학보다 〈우화〉 가 더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여기에는 현대적 사고에 대한, 겸손 이尹 훌륭한 교훈이 들어 있다. 25 세기라는 나이를 먹은 소포클레스 이지만, 그는 우리가 신화 중에서도 가장 성가신 신화인 의디푸스 콤 플렉스 신화의 멍에에서 벗어나는 데 아직도 도움을 줄 수가 있다 .2) 2) 여기서 또 다른 문학 덱스트들의 승리, 죽 〈문학〉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는 옹 호자들의 무기력과 어느 정도의 신념 결핍에 대해서뿐 아니라, 어리동절케 하는 〈신화파괴자들 dem y s tifi ca t eurs 〉의단순성에 대해서도 총체적으로 압도하고 있는, 그러면서도 여전히 떠벌리지 않고 있는 승리에 대해 말해야겠다 . 천부살해에 대한

아버지의 충동 문제를 다룬 것 중에서, 칼데론 Calderon 의 뛰어난 걸작『L a Vida es sue fl o 』는 특별히 언급되고 따로 연구될 가치가 있는 것인데 , Cesareo Bandera 가 지금 이 연구에 헌신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프로이트의 내세 l' au-dela 와 함께 Calderon 을, 겉으로는 단지 〈법률〉의 영역에 불과한 것 갇지만, 욕망과 장애물의 영역에 넣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도 모두 그의 덕분이다.

제 8 장 〈토템과 터부〉 그리고 근친상간의 금기 현대비평은 『토뎀과 터부 To t em et t abou 』에서 전개되고 있는 주장들 에 대하여,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에 거의 만장일치를 보이고 있는 것 같다. 프로이트는 사전에 이 책이 설명할 모든 대상을 다루었 었다. 다윈 Darw i n 의 원시 유목민 이야기는 가족의 풍자화이다. 지배적 인 남성의 성적 독점은 미래의 근친상간 금기와 이미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그것을 전제로 하여 생겨나는 행동방식으로부터 사 회적 신분이 생겨나게 하는 악순환〉이 존재한다고, 『친족의 기본구조 Les Str u ct ur es elementa ir e s de la Paren t e 』 에 서 레 비 -스트로스 Lev i -S t rauss 가 주장하고 있다. 이런 반박둘은 이 작품의 직접적인 내용과 그 큰 줄거리에는 들어 맞는다. 그러나 『토템과 터부』에는 이 정의를 벗어나는 것이 있다• 예 를 들어 우리는 이 저서에 대한 전형적인 서평둘 속에 집단 살해가 〈포함되어〉 있다는 인상을 갖지만 그것은 완전히 사실이 아니다. 그래 서 우리는 결코 그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어 이상한 시 론에서 제일 기이한 것이며 약간은 매력적인 구경거리처럼 보인다. 우 리는 지금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안내자들과 함께

이 바로크적 기념물 주위를 산책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그토록 거대한 것을 구상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역으로 이 천재가 과연 어떤 나쁜 습관 속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우리는 이 이상 한 괴물 앞에서 노년의 위고가 그의 후기 소설 속에서 만들어냈던 것 과 감은, 본의 아닌 거창한 소극(笑劇)과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약간 주의깊게 읽으면, 이 기이함은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에는 분명 살해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분명 소용되어야 하는 데에는 정작 아무런 소용이 안되고 있다. 만일 이 책이 성적 금기의 기원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면, 살해는 프로이트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으며 오 히려 그에게 어려움만을 줄 것이다. 사실 살해가 없다면 우리는 엄한 아버지가 젊은 남성들에게 과하는 성적인 절제로부터 아무런 단절 없 이 정말 문화적인 금기로 쉽게 옮겨갇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살해가 이 연속성을 단절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그다지 확신도 없으면서 이 틈을 메우려고 애쓰지만, 그의 최종 생각은 예상보다 훨씬 더 복잡해 진다 . 따라서 살해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죽 그것은 〈 문제 를 추스리기는〉 커녕 흐트러뜨린다. 아버지의 독점으로부터 금기가 나온다는 가정은 프로이트적인 것이 거의 아니며 프로이트 특유의 것은 더욱 아니다. 프로이트 자신도 자신이 그런 가설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댜 애트킨슨 A tki nson © 은, 다윈이 원시 유목민의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 제로는 의혼제만을 유리하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최초의 사람인 것 같다. 추방된 사람들(아버지에 의해서 쫓겨난 젊은 남성들)은 제각기 유사한 유목민 집단을 만들 수 있었는데, 그 집단 내부에서의 성관계의 금지는 우두 머리의 질두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러한 조건들은 토 뎀의 성관계가 아니라 마침내 의식적인 법으로 존재하는 규칙을 낳게 되었다. ® 애트킨슨 Thomas Wi tlam Atk ins on(!799-1861) : 영국의 건축가, 화가, 여행가 .

집단 살해는 전실로 프로이트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뚜렷이 드러 나고 있는 그의 지나친 엉뚱함 때문에, 비평가들은 그가 『토템과 터부』 에서 과연 무얼하려 했는지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질문에 대해 어 떤 정신분석학자들은 대답을 제시했는데, 그 대답은 분명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이에 따르자면 『토뎀과 터부』에서 프로이트는 자신 이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충 분히 예상된 대답이기도 하지만, 또한 프로이트 자신만을 문제삼고 있 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대답이기도 하다. 이 거장의 모든 저서 중에서 이 『토템과 터부』야말로 정신분석을 행할 수 있고 또 정신분석을 행할 만한 유일한 저서이다. 프로이트주의자들은 흔히 이 권위자의 사소한 말에도 금방 찬양하 면서 미온적인 모든 의혹에 대해서는 맹렬히 비난하는 자들이기 때문 에, 『토템과 터부』에 대한 처형은 문의한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다 시 말해 이 책이 그러한 취급을 받는 걸 보고 사람들은 이 책이 정말로 지독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민족학자들이 정산분석학자들보다 더 관용적인 것은 사 실이지만, 사실은 민족학자들이 정신분석학자들보다 약간 덜 엄격할 뿐이다. 1913 년의 민족학 지식은 그 직후의 지식 수준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프로이트가 널리 전파시킨 이론 특히 프레이저와 로버 트슨 스미스의 이론들은 그 매력을 상실하고 있었고, 토뎀숭배의 개념 도 거의 포기되다시피한 실정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프로이트가 제시하고 있는 이 책의 주장은 실제로 그럴 듯하지 못하였다. 『토템과 터부』를 비난하기 위하여 모두가 결탁하고 있는 것 같다. 프로이트가 진정으로 분별을 잃었다면, 그의 사상이 중요할수록 우리 는 왜, 어떻게 그러한지를, 그리고 그 무분별이 어느 정도인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이 오류의 출처와 곡절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 한다면 그의 탓으로 돌려지고 있는 『토템과 터부』의 이 오류 때문에 우리는 오류가 없다고 보고 있던 나머지 부분도 다시 문제를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신프로이트주의도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그렇게 하는 것을 경멸하기도 하였다. 형식주의자의 선입견 은 아주 끈질긴 것이라서 뒤에 가서 이것은 제 2 의 본성과도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어떤 사조가 자신에 대해 항변하는 모든 것을 정선착란의 〈선험적 인〉 증거라고 간주한다면 우리는 항상 거기에 살아있는 사고, 실질적 인 미래가 있는지롤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당시의 전실로부터 가 장 동떨어져 있거나, 당시 소중한 관습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수치스 러워 보이는 불쾌한 가정들을 용인하지 않는 것을 두고서 과학정신이 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유쾌하거나 불쾌한 가정이란 존재하지 않 으며, 다만 다소 타당성이 많거나 덜한 가정들만 존재할 뿐이다. 마치 프로이트가 저속한 세익스피어나 소포클레스 또는 유리피데스에 불과 한 것인 양 그에게 환각아라는 비난을 가하기 이전에 적어도 그의 말 을 들어보기는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정신분석학과 민속학의 교차점에 서 있기를 바라는 탐구자들이 그의 말을 들어보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토템과 터부』를 우스꽝스러운 것, 무관심 그리고 망각 속으로 빠뜨 리는 데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이 공모했던 셈이다. 우리는 분명코 이런 비난을 그대로 인정할 수가 없다. 사실 · 집단 살해와 그것을 암시하는 논증들은 본 시론의 데마들과 밀접한 것이므로 더욱 상세한 조사를 필요로 한다. 우선 민족학적 이론 특히 토뎀숭배 이론은 이것이 모두 해석해 내려 애쓰던 모든 여건들을 무로 돌리지 않고서도 이 이론 자체가 동요하 거나 붕괴될 수도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토뎀숭배가 별개의 존 재를 가전 것이 아니고 본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 단지 아주 일반적인 활동의 특정한 한 분야일 따름이라고 해서, 지금껏 그것을 통해서 설 명해 왔던 종교 현상들을 없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현상들을 더 큰 문맥에서 보아, 종교와 총체적인 분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사물들이 서로서로 변별적이며 그 구별이 항상 확고부동하다는 것이 원시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토 뎀숭배는 환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환상은 적어도 종교적인 것아 이루고 있는 수수께끼를 잘 보여주고 있는 환상이다. 토뎀숭배 사상에 관한 수집과 구성의 시도들이 갖고 있던 허술한 면을 프로이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것의 근원을 맹목적으로 믿 기보다는 〈 토뎀숭배 속에서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이다〉라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그것들을 조사한다. 그는 제시된 해결책들 중에서 어느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 속에는 그가 〈 명목론 nom i nal i sme 〉이라고 이름 붙인 , 그것을 극단으로 확대하는 것만으로도 사실 그 개념의 현대적 해체에 도달할 수 있는 해결책도 들어 있었다 . 이 모든 이론들은 왜 원시종족들이 동물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가를 설명해 주 고 있긴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여긴 이 명명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 없이 인정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그것들은 토뎀숭배 제도를 설명하고 있지 않다 . 여기서는 토템이나 다른 항목에 대한 참조가 아니라 〈모든 자연적인 것 〉 의 겉모습 뒤로 사라져서는 안될 종교적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과 학은 영혼으로부터 어떤 사실에 대한 정당한 놀라움을 빼앗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감정적인 측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너무 합리적인〉 관점들을 모두 거부한다. 프로이트의 주의를 끄는 사실들은 동일한 부류에 속하는 것인대, 때 때로 앞서 우리들의 주의를 끌었던 것도 바로 이와 똑같은 부류의 것 이었다. 종교적인 것 속에는 선과 악, 슬픔과 기쁨, 허용과 금지 등 가 장 근본적인 대립둘이 공존하고 있음을 프로이트는 알아보았다. 예를 들어 축제는 〈어떤 금지에 대한 당당한 위반, 허용되고 게다가 또 명 령된 과도한 행위〉라는 것이다. 축제에서 볼 수 있는 합법적인 것과

비합법적인 것의 만남은 희생제의에서 관찰되는 것 - ~ 〈 동물이 제의적 으로 희생될 때 그것은 엄숙하게 애도된다 〉 ――울 정확하게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축제와 희생제의는 결국 똑같은 하나의 제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죽 〈 모든 민족들에 있어서 희생제의와 축제는 동시에 일어났다. 그래서 모든 희생제의에 는 축제가 들어 있었고 축제에는 항상 희생제의가 있었다 〉 . 희생제의적 요소가 분명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의 이같은 만남은 동물 취급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우연히 죽은 동물에게 장례식을 치러주며, 감은 종족에게 하는 것과 똑갇은 경의를 표하면서 매장한다. (……) 평소에 아끼던 동물을 죽여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사람들은 동물에게 사과하면서 온갖 기술과 수단을 다 동원하여 터 부의 위반, 죽 살해의 도를 완화시키려고 애쓴다. 지구상의 모든 원시종교의 제의에서 이같은 희생제의의 기이한 이 중성이 나타나고 있다. 제의는 언제나 비난받아 마땅한 동시에 필수적 인 살해의 형태로, 죽 결국 그것이 더 불경한 것일수록 더욱 욕망할 만한 위반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로버트슨 스미스는 우리가 여기서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희생적인 것〉이라 이름붙이는 것의 통일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는데, 그것을 그 는 〈토뎀숭배〉라고 이름붙였다. 이 명칭의 유행은 어떤 민족학적 지식 상태와, 우리와는 다른 어떤 지적 태도들과 관련되어 있다. 매번 능숙 하게 하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은 원시종교의 여건들과 그들의 통일정 울 알리려 애써왔다. 이 통일성에 대한 배려 때문에 로버트슨 스미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프로이트는 모든 것을 토뎀숭배에서 나온 것으로 보게 되었다• 때때로 소위 토뎀신앙은 가장 역설적이고 가장 수수께끼 같은 종교적인 양상들, 죽 가장 절실히 해석을 요하는 특칭들에 대한 가장 분명한 해석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전실에 도달할

가능성도 가장 높다. 토뎀숭배 본래의 종교적인 면에서 프로이트는 다 론 어느 곳보다 더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대립적인 것들의 공존, 양 립불가능한 것의 만남, 그리고 실제 종교적인 것을 총체적으로 규정짓 , 고 있는 이 계속되는 전도들을 재발견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그 자체의 절정기에 가서 집단 살해라는 중재에 의해서 전도되는 똑같은 폭력의 작용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이 집단 살해의 필연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희생물 메카니즘을 보지 못 했기 때문에 그것의 작동 원리까지는 알지 못했다. 우리는 이 메커니즘에 의해서만, 처음에는 죄가 되던 희생적 처형이 왜 그 살육이 진행됨에 따라 문자 그대로 신성한 것으로 〈변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변화와 토뎀숭배 사회의 특정한 토템에 대한 각 집단들의 태도 사이에는 아주 밀접한 관계, 심지어는 근본적인 동일성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집단 전체가 평 상시에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던 행위를 범해야 하는, 언제나 규칙에 대한 애매한 전도인 공식적인 축제 기간을 제의하고는, 이 토템을 사 냥하고 죽이고 먹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희생양 메커니즘을 재현하려는 의지는 사실 〈고전적〉 희생제의에서 보다는 이 토뎀숭배에서 더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드디어 전실이 드 러나고 있다. 비록 전체적인 전실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프로이트가 여기서 토뎀숭배를 중요시한 것은 옳았다. 모든 수수께끼들을 실질적 인 살해에 관련시키기를 암시할 때 그의 직관은 옳았지만 이 본질적인 메커니즘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발견을 만족할 만한 정 도로 완성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역사시대 이전의 단 한번의 살해라는 주장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아버지의 살해를 꿈꾸면서 무의식의 지시에 따라 받아 쓰고 있다고 단정짓기 전에 우리는 『토템과 터부』에 들어 있는 임청난 주장둘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프로이 트도 여기서 제의에의 만장일치적 참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만

일 위반이 일치적으로 행동하는 만인의 행위가 아니라면, 그것은 단순 히 범죄적이고 파괴적인 것일 것이다. 만장일치의 이로운 효과를 발견 하는 데 는 이 르지 못하지 만, 프로이 트는 신 성 화 san ctifi ca ti on 가 합의 에 서 나온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여러 문화 속에서 토템을 숭배하는 괴물인 인간이라는 이 동물은, 동포들에 의해서 학살 되는 희생물, 동물 중에서 아직 신화적인 공동체 공격을 처음으로 받는 존재, 재판관이자 지도자, 〈선조〉로 규정되고 있다. 거기에는 생각할 만한 지표가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집단 살해 의 과정을 도출해 내는 것을 두고서 소위 과학적이라는 사고방식으로 획일화된 저주를 퍼붓는 것은, 지적인 차원에서 볼 때 아주 우려할 만 한 사실이다. 아울러서 정신분석학이 인간정신의 가장 유감스런 경향 들에다가 계속해서 프레미엄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과, 여기서는 사람 둘이 늘 말하고 있는 오해보다는, 부주의나 단순한 태만과 같이 사람 둘이 결코 말하지 않는 것들을 더 중시하고 있다는 것 또한 심각한 사실이다. 특히 여기에는 그 내용을 모르면 모든 논증을 단번에 비난해 버리고, 더욱 나쁘게는 그 속에 유행이 조금이라도 들어 있기만 하면 단번에 칭찬해 버리는 우리의 일반적 경향도 들어 있다. 희생제의와 토뎀숭배 신앙을 비교한다는 것은, 곧 모든 것들을 집단 살해로 집중시키는 힘의 작용을 드러내는 것이다. 모든 징후들이 암시 하듯이 모든 신성과 공동체의 기원은 바로 내부의 만장일치 폭력으로 부터, 죽 그 공동체의 일원인 희생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모든 구성원들의 동의와 참여에 의해서만 희생시킬 수 있는 생명체는 그 씨족 구성원들의 생명과 동일한 지위를 갖고 있다. 희생제의의 식사에 참여한 회식자 모두에개그 동물의 고기를 맛보도록 명령하는 규칙은, 실수를 범한 구성원은 종족 전체에 의해서 처형되어야 한다는 규칙과 동일한 의미를 지 닌다. 달리 말해서 희생된 동물은 그 종족의 구성원처럼 취급되었는데, 〈희생 제의를 행하는 공동체, 신 그리고 동물은 동일한 혈통에 속하며 공동체의 동

일한 구성원 〉 들인 셈이었다. 물론 토템이론의 이 몇 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본질적인 추론을 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여기서는 토뎀숭배가 문제가 안된다. 『토뎀 과 터부』의 역동적 힘은 희생의 일반이론을 향하고 있다. 이미 로버트 슨 스미스도 그랬지만 프로이트는 더 그러하다. 왜냐하면 민족학의 이 론 논쟁들은 그를 무관한 것으로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많 은 사실들이 어떤 특유한 설명, 즉 무엇보다도 희생이론으로 제시될 일반이론을 필요로 하고 있다. 로버트슨 스미스는 제단 위에서 행해지는 희생제의가 고대 종교제의의 본 질을 이루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고대 종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똑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도처에서 똑같은 효과를 내고 있 는 아주 보편적인 이 원인들로써 희생의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의 원형적인 희생은 낙타의 희생제의인데 이는 이미 로버 트슨 스미스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제의이다. 기원 후 4 세기경의 자료를 보면, 그 당시 시나이 사막에서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이 희생제의가 행해지고 있었다. 제물 낙타는 돌로 만들어진 계단 위에 묶인 채 누워 있다. 족장은 참가자 들에게 노래 부르면서 제단을 세 바퀴 돌게 한 다음에 그 동물에게 상처를 내고서 거기서 솟아나오는 피를 게걸스럽게 마신다. 뒤이어 모든 부족이 이 동물에 달려들어, 각자의 칼로 아직 꿈틀거리고 있는 살점을 도려내어 똑같이 아주 신속하게 먹어치웠기 때문에, 이 제의가 시작되던 새벽 별이 뜰 때부터 태양으로 별빛이 희미해질 때까지의 짧은 시간 사이에 이 희생물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로버트슨 스미스가 이 희생제의 속에서 그 흔적들을 찾아냈다고 믿 고 있는 소위 〈 토뎀숭배의 유물들 〉 은, 내 생각으로는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불완전하나마 희생양에 관한 직관으로 귀착하고 있는 것 같다. 집단 살해와 관련될 때에만 토뎀숭배의 유물들은 프로 이트의 관심을 끈다. 방금 살펴본 시나이 사막의 이야기를 앞에 두고 서, 이 살해라는 가정을 구상하게 된 이 사상가를 진정으로 조롱할 수 있을까 ? 여기서는 모든 전지한 탐구가 빠져 있다고, 그리고 이 가정은 온통 개인적인 신기루, 즉 정신분석학의 환상 위에 세워져 있다고, 너 무나 단연한 듯이 당언할 수가 있을까 ? 자신의 자료에 입각한 프로이트는 낙타 희생만 언급하고 있다. 만일 그가 서로 다른 수많은 문화 속에 들어 있던 유사한 시나리오둘을 고 려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비교했더다 면 그는 여기서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시나이의 희생에서 낙타는 죄인처럼 묶여 있으며 군중은 무장하고 있다. 그런데 디오니소스의 〈디아스파라그모스 d i as p ara gm os 〉 . 라는 제의 에서는 제물은 묶여 있지 않고 무기도 없지만 언제나 군중의 집단 공 격은 있다. 어떤 데에서는 희생물로 하여금 처음에 도망치도록 부추기 기도 하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제의 참가자들이 도망치는 등의 절차가 있기도 한다. 이렇듯 〈언제나 사형(死刑)의 장면이 모방되었지 만 정확하게 똑같은 장면은 아니었다〉. 이러한 차이를 제의의 부정확 한 기억 탓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기억의 정확성 여부가 문제가 아니 라, 종교에 따라 그 양태가 다르게 나타나는 집단 살해 그 자체가 문 제이기 때문이다. 이 조그만 차이들이 특히 계시적인데, 그것은 이 모 습들이 모델의 존재를 암시함으로써 형식주의적 해석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토템과 터부』에 은연중에 암시되어 있는―― 명시적일 수 가 없었다-이 조그만 차이들은 프로이트의 직관에 도움이 되었다 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유일한 살해라는 주장으로는 이 차이들을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전정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 거듭 되풀이해서 하는 범죄사건­ 픽션에 자주 등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허구적인 것은 아닌-에 대한 수사와 마차가지로 제의적인 것에 대한 연구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범인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능숙 하다 하더라도 범행을 되풀이하면서 영역을 넓힐 때마다 범인은 추적 자에게 단서를 남기게 마련이다 . 전혀 나타나지 않던 징후나, 처음에는 주목하지 않던 세세한 것이 약간 다른 형태로 다시 나타날 때면 그 중요성이 드러나게 된다. 어떤 동일한 원형에 대한 여러 개의 연속 복 사본들은 단 하나의 복사본에서는 판독할 수 없던 것을 판독할 수 있 게 해준다. 이 연속 복사본둘은 그 변화 법칙이 결국 포착되므로, 훗 설의 현상학적인 의미에서, 마침내 그 대상에 대한 확실하고도 확고부 동한 인식을 가능케 해주는 항상 서로 다른 부분적인 이해, 죽 민족학 에 대한 압샤퉁겐 Abscha tt un g en 을 제공해 준다. 일단 대상이 정확하게 파악되면 어떠한 회의도 생겨날 수 없게 된다. 인식은 확실한 것이 되 며, 모든 새로운 정보는 명확하게 인식된 그 틀을 더 공고히 하고 강 화시켜 나갈 뿐이다. 프로이트는 잠꼬대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제사장들도 꿈꾸지 않았 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희생을 하나의 꿈으로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민족학의 물증에 포위당한 형식주의의 되 각 진지이다 . 그러나 프로이트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롤 형식주의자로 만들고 싶어하지만, 그러나 적어도 그는 여기서 꿈을 구조화하려는 노력은 바람을 구조화하려는 노력만큼이나 헛되다는 것 을 잘 알고 있었다. 회생을 어떤 환각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결국 상상 적인 것의 낡은 헛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엄격하게 규정된 인상적인 사실들뿐 아니라 그것을 가볍게 취급하지 말고 그 속에 들어 있는 현실의 무게를 인정하라고 말하고 있는 그에 대한 연 구결과들을 결국 아무것도 아닌 혼동의 뒤죽박죽 속으로 내팽개치는 셈이 된다. 이 현상들을 꿈으로 용해시켜 바리는 것은, 결국 사회제도

로서의 이 제의를 포기하는 것이며 사회적 통일성 그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희생에는 너무나도 구체적인 요소들이 아주 풍부하게 들어 있다. 그 러므로 그것은 단순히 그 누구도 결코 범한 일이 없는 어떤 죄악의 환영일 수가 없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희생을 환영이나 이차적인 만 족으로 본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희생은 정상적인 문화 조건에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범하지 못하는, 아니 범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행위를 정확히 대신해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 게도, 문자 그대로 기원 문제에 〈사로잡힌〉 프로이트는 이 사실을 완 전히 못 보고 있다. 그야말로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토템과 터부』에서 그는 비록 그가 작품의 다른 부분에서 끊임없이 그것을 변형시키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가 접근할 수 있는 이 유일한 유형의 전실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희생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그것 자체나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기원에 대한 직관과는 완전히 다른 스케일의 사건으로 거슬러 울라가야 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 직관은 끝까지 일관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완성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로 하여 금 기능 감각을 완전히 잃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희생이 〈제의 속 에〉 들어 있는 것은, 그것은 처음에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지만 지금은 이 다른 것을 모델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능과 기원을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그리고 이 중의 하나로써 다른 하나를 완전하게 밝히기 위해서는 프로이트가 끝내 찾지 못했던 만능열쇠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희생양이다. 죽 회생양만이 이 모든 요구사항 들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역시 프로이트는 엄청난 발견을 했다. 그는 모든 제의적 관 습, 모든 신화적 의미의 기원이 〈실제적인〉 살해에 있다는 것을 제일 먼저 주장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이 주장으로부터 무한한 에너지 를 얻어내지는 못했고, 단지 이 주장으로 가능해진 글자 그대로 현기 증나는 합산을 겨우 시작했을 따름이다. 그 이후로는, 이 발견이 완전

히 쓸모 없는 것이 된 것이다. 언제나 부차적이던 고찰에 의거해서, 그의 후기 사고는 『토뎀과 터부 』를 정정하면서 이 작품을 〈뒤떨어전〉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후기 사고의 이런 성향을 통해서 이 오해가 부 분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우선 이 사고는 프로이트와 다른 사람들이 이미 정복했던 영역을 공고히 하는 데 전념한다. 그런데 이 과업은 훨 씬 더 근본적인 『토템과 터부』의 경이적 성공과는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저서는 아예 씌어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내팽개쳐져 있었다. 프로이트의 진정한 발견, 죽 그의 이름을 〈학문〉의 대열에 들어가도록 해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이 발견은, 이리하 여 언제나 없었던 것처럼 무시당해 왔었다. 프로이트는 서투른 아마추어처럼 민족학 자료를 취급한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자료의 체계화를 크게 비약시켰다. 그런데 그 비약이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자신도 균형을 잃었으며, 그래서 그의 업 적도 별 효과 없는 것이 되었다. 그는 자기 이론의 정신과 민족학 자 료들을 연결시킬 수가 없었는데, 그 이후의 어느 누구도 이 연결이 가 능하다고는 전정 믿지 않았다. 너무 대담한 척후병이 그의 본대로부터 단절된 셈이었다. 그는 목표에 제일 먼저 도달하였으나 통신수단이 두 절되어 완전히 길을 잃은 꼴이다. 그는 고지식한 역사주의의 희생물이 라고 생각된다. 그 반면에, 그의 보편적인 방향설정과 연구방법론은, 완전치도 못한 기원과 그리고 그 당시 유행하던 반구조주의적인 계보 에 대한 쓸데없는 관심으로부터 그를 해방시키면서, 동시에 지금 흔히 일어나고 있는 그 반대 방향의 지나친 부작용에도 빠지지 않게 해주 었다. 그는 모든 기원 탐구에 대해 문을 열어 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과거의 실패로부터 형식주의적이고 반발생론적인 어떤 선입견도 물려받지 않았다. 총체적인 공시태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위해서는 기 원에 관한 전대미문의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곧 알게 되었다.

* 『토템과 터부』에는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구절이 있다. 그것은 비극에 관한 구절로서, 비극 장르에 대한 프로이트의 총체적인 해석이 들어있다. 똑갇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 비슷하게 옷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단 한 사람의 주위에 있는데, 이들 모두는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따르고 있다. 이 들은 바로 원래 주인공의 역을 맡았던 단 한 사람 주위에 배열한 합창대이다. 비극 속에 재 2, 제 3 의 배우가 등장하여 주인공의 상대 역할을 하거나 그의 이러저러한 특징적인 성격을 나타내게 된다. 그러나 합창대의 성격과 주인공 과 합창대와의 관계는 계속 변하지 않았다. 비극의 주인공은 고통받게 마련 인데, 이것은 오늘날에도 비국의 주요 특징이 되고 있다. 그는 〈비극적 과오〉 라 불리는 것으로 가득차 있는데, 그 이유는 언제나 알 수 없다. 대개의 경우 이 과오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과오와는 다른 것이다. 대개 이 과오는 신적, 혹은 인간적인 권위에 대한 반항으로 되어 있다. 합창대는 항상 주인공 주위 룰 떠나지 않으면서 주인공을 도와주거나 주인공을 만류하기도 하고, 조심시 키기도 하고, 억제시키려고 애쓰기도 하며, 또한 그가 대담한 시도를 하다가 그에 마땅한 처벌을 당하게 됐을 때는 그를 동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비극 주인공은 왜 고통받아야 하며, 〈비극적〉 과오는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일까? 빠른 대답으로 이 토론을 끝맺자. 그는 고통받아야 한다. 왜 냐하면 그는 최초의 아버지, 죽 우리가 이미 언급한, 위대한 최초의 비극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비극적 과오로 말하자면, 그것은 합창대를 구해내기 위 하여 그가 떠맡아야 하는 과오이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은 진짜 역 사 사건들의 교묘하게 진짜처럼 만든 변형체를 나타낸다 할 수 있다. 고대의 현실 세계에서는 주인공의 고동의 원인이 바로 합창대원들인 데 반해, 여기

(바극)에서 는 그 반대로 마치 주인공이 그 자신의 고통의 원인인 것처럼, 합 창 대원들이 그에 대해 슬퍼하고 동정심 을 표명하느라 야단이다. 사람들이 그 에게 전가시키고 있는 거대한 권위에 대한 반항이나 무례함이라는 죄악은, 사실 합창대원들과 형제들을 억압하고 있는 죄악에 다름아니다. 이렇게 해서 비극의 주 인공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합창대의 속죄자로 추대되는 것 이다. 많은 점에서 이 텍스트는 희생물과 그리고 그 희생물에 대해 행해 지는 신화적 구조화에 관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프로이트에게서 보았던 모든 것 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이 전체 문장 속에는 이미 우리들의 독법이 녹아들어 있다. 여기서 주인공은 자연발생적인 비국의 희생물 울 재현하고 있는 자이다. 그가 비난받는 비극적 과오는 시민 전체의 것이지만 도시를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이 과오를 그에게 떠맡겨 야 했다. 따라서 주인공은 희생물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 구절 약간 앞에서 프 로이트는 〈 디오니소스의 양〉을 암시한다. 이리하여 비극은 〈 저의가 있는 재현〉, 죽 실제 사건의 그야말로 신화적 전도로 규정된 다 . 죽 〈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은 진짜 역사적 사건들의, 교묘 하게 진짜처럼 만든 변형체를 '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단 하나의 인물에게로 향하는 집단 폭력의 진행과정은, 앞에서 우리 가 그토록 강조했던 무차별화의 맥락 속에 있다는 본질적인 면에 다시 한번 주의해야 한다. 원시 유목민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사라지고 나면 모두가 〈 원수형제들 〉 이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고유한 정체도 없을 정도로 서로 닮아 있다. 그들 서로를 구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모두 똑같은 이름을 가전, 비슷하게 옷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두 해석, 죽 프로이트의 해석과 우리 해석의 일치를 과장할 필요는 없다. 어떤 점을 넘어서면 다시 차이가 나타난다. 프로 이트는 다시 전형적인 차이로 되돌아간다. 고립무원의 주인공과 짝패

무리가 대립하게 된다. 주인공은 순수함을, 그리고 그 짝패 무리는 죄 악을 독점하고 있다. 주인공에게 전가된 과오는 전혀 그의 것이 아니며 순전히 그 무리들의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과 오를 책임진 순수한 희생물이다. 이처럼 단순히 단 하나의 〈투영적인〉 의미만을 지닌 이 생각은 충 분치 않을 뿐 아니라 또한 옳지도 않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 프가의 형제들.JI에서 그러는 것처럼, 비록 부당하게 비난받는 것을 사 실이라 하더라도 그 희생물 역시 〈타인들과 마찬가지로〉 죄가 있다는 것울 소포클레스는 우리에게 년지시 알려주고 있다. 신학을 영속시켜 왔던 〈과오〉라는 이름의 케케묵.은 개념을 과거, 미래 그리고 특히 현 재의 폭력, 죽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공유하고 있는 폭력이라는 개념 으로 바꿔야 한다. 의디푸스 역시 인간사냥에 참가했다. 다른 데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그의 꼼꼼한 기질과 과학적 속물근성 때문에 프로이트는 여전히 신화의 안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프로이트식의 해석은, 그것이 제시하는 신화의 전도란 점에서 전형 적인 현대적 해석이다. 이 죄없는 희생물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과 동 일시하는 이 희생물의 운명 덕분에, 가짜로 결백한 모든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볼테르가 이미 그의 『의디푸스』 속에서 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으며, 현대의 모든 반연극이 점점 증대 되는 혼란과 히스데리 속에서 행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사람 둘은 이웃에 대한 무기를 만들려고 끊임없이 이웃의 〈가치들〉 · 울 전도 시키지만, 그것은 결국 적대감정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불균형과 신 화구조를 영속시킬 뿐이다. 항상 차이는 소멸되려 하지만 결국 전도만 될 뿐이다. 그래서 이 전 도 속에서도 차이는 영속하게 된다. 플라본에서 니체에 이르기까지, 결 국 모든 철학에 대해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것도 바로 이 차이이다. 이 들 속에서도 분명히 이 전도가 발견된다. 철학적 개념의 이면에는 언 제나 인간들의 숨겨져 있는 투쟁이 있으며, 그리고 언제나 비극적 적

대관계가 있다. 자신의 생각이 이 투쟁 안에 있다는 것과, 비극에 대한 그의 해석도 그가 발견하지 못한 이 왕복운동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바로 프로이트가 보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해석의 경직성은 진짜 아버지, 진짜 주인공의 살해, 결정적인 단 한번의 살해 라는 생각에서 나오고 있다 . 살아 생전에는 지긋지긋한 괴물이던 무시무시한 아버지는 죽을 때 그리고 사후에 가서는 박해받는 주인공이 된다. 프로이트는 결국 이것 울 완전히 해명해 내지 못하고 넘어갔지만 여기서 누가 과연 이 〈성 스러운 것 메커니즘 〉 을 부인할 수 있을까? 반도덕적으로까지 변형된 도덕, 반형이상학으로 변화되기조차 한 형이상학을 진정으로 피하기 위해서는 가장 전도되어 판에 박힌 선 1 악의 개념을 단호히 포기해야 한다. 오해는 도처에 있고 폭력도 누구에게나 있으며 억제하지 못한다 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많든 적든 그 결과들을 곧찰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주인공은 합창대와 유사하며, 그 리고 합창대와 마찬가지로 특칭적인 것의 부재에 의해서만 주인공은 특징지어지게 될 것이다. 프로이트는 여기서 우리보다 더 비극의 구조에 충실하다고들 말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말이 . 사실이다. 신화와 제의적인 것에서 나 온 비극 형식 속에서 주인공은, 프로이트가 그에게 부여한 주도적이고 중심적인 지위를 실제로 오랫동안 차지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분석의 초반부에서만 그러하다. 소포클레스는, 붙잡으려 할 때마다 사라지고 마는 주인공의 차이를 계속 비꼬면서, 결국에는 언제나 〈똑같은 것〉으 로 밝혀지는 〈타인〉에 대한 폭력적 대립 상태에서 개인이 스스로를 가장 절실히 필요한 존재, 가장 정당한 존재라고 믿는 바로 그 순간이 가장 문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 해석은 프로이트의 모든 것을 고려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프 로이트는 못 보았지만 소포클레스는 보았던 것을 모두 고려한다. 마지 막으로 그것은 소포클레스가 못 보았던 모든 것, 총체적으로 신화를

결정짓는 것, 그리고 정신분석학과 비극을 포함하여 신화에 대해서 취 할 수 있는 모든 관점들, 죽 희생물 메커니즘을 고려한다. 그리스 비극에 관한 모든 〈현대적인〉 텍스트들 중에서 프로이트의 텍스트는 틀림없이 그 이해에 있어서 가장 깊이 있는 덱스트이다. 그 러나 실패작이다. 이 실패는 〈문학〉을 과학적으로 접근하여 그것을 〈탈신비화〉하겠다는 현대적 야망의 공허함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준다. 이러한 야망둘을 탈신비화하는 것이 바로 위대한 걸작들이다. 인간 관 계에 대해 소포클레스나 세익스피어 같은 사람은 이 프로이트가 이해 할 수 없는 것을 많이 알고 있다. 프로이트의 요체는 정신분석학이 소 화해 내지 못하는 프로이트이다. 정신분석학은 우리 눈앞에 있는 이 낯선 훌륭한 텍스트를 소화해 낼 수 없다. 분명 잘못이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정신분석학보다는 진실된 덱스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실성이 문제가 아니다. 프로이 트의 비극 해석은 사실 그 전체 효력에 비해서 그리고 그 효력 때문에 그 실제 대상에 대해서는 더욱 그롯되고 더욱 부당한 것이 되었을 따 름이다. 프로이트가 바국에 대해서 제기하는 소송은 분명 무미전조한 전통적인 칭찬들보다 더 아름다운 찬사이다. 그것은 정신분석학이 문 학에 제기하는 관습적인 소송보다 훨씬 더 〈자료에 의해 입증되어〉 있으며 훨씬 더 전실에 근거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릇되고 부 당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 해석들도 그 그릇됨과 부당성을 계속 지적은 해왔지만 그것을 측정할 수는 없었다. 비극을 〈저의가 있는 것〉이란 말로 규정하는 것도 틀리지 않다. 결국 비극은 완전히 해체되지 않은 신화의 틀 안에 위치한다. 이 저의가 있 다는 특징은 그러나 비국보다는 신화적인, 그리고 모든 문화적인 형식 들 속에 더 많이 존재할 것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비극적 영감의 속 성은 보복의 상호성을 재발견하고 폭력의 대칭을 회복시키는, 다시 말 해서 〈저의가 있는 것〉을 되살리는 . 것이다. 프로이트의 해석도 이와 똑같은 방향으로 진행된다. 그는 상호적인 요소들을 발견하지만, 비극

의 해석에는 이르지 못한다. 프로이트의 해석은 타인들의 폭력을 비난 하는 현대적 〈 원한 〉 으로 가득 찬 비국보다 더 저의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 스스로가 반복되는 보복 속에, 다시 말 해서 모델과 장애물의 이중작용, 모방적 욕망의 악순환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너무 잘 밝혀져 있기 때문에 자기자신에 대해 잘 알 지 않을 수가 없고, 자신에게는 어떠한 폭력도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바로 거기에서, 현대적 원한은 언제나 그리스 비극 작가들에게는 그 개념조차도 없었던 어떤 이상적인 비폭력을, 모든 판단과 소위 비판적 평가라는 것에 대한 기준 , 그러나 안으로는 폭력적인 기준으로 삼게 된다. 모든 의도적인 비난이 그러하듯이 그리스 비국에 대한 비난도 그 비난자에게 되돌아간다. 〈 정교한 위선〉을 나타내고 있는 자는 바로 프 로이트 자신이다 . 현대사상은 종교적, 도덕적, 문화적인 모든 차이들을 비판하면서 이 차이들을 결국 비평가이자 예언가인 그의 탓으로 돌려 버리고 있다. 그런데 이 예언가는 그 자신만의 고유한 전대미문의 명 석함 을 소유하고 있으며, 사라지고 없는 예전의 모든 차이들을 자신 속에 요약해서 간직하고 있는 완전히 틀림없는 어떤 〈방법론〉을 갖고 있는, 그야말로 〈부활한 티레시아스〉와 같은 예언가이다. 본래 〈 저의가 있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강탈하여 제것으로 삼기를 원하는, 그리고 경쟁적인 〈명석함〉의 대립상태 속에서 점점더 빠르게 진동하는 성스러운 차이와 같은 것이다. 『의디푸스 대왕』이 문제가 되 고 오늘날 정산분석학을 비롯한 여러 방법론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여기서 이 해석을 규정짓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 때문일 것이 다. 이 대립상태의 대상은 바로 문화위기인데 모두들 자기만이 이 위 기를 걱정하는 양 우쭙해 한다. 모두 그 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진단하 려 애쓴다. 그러나 그 병은 언제나 〈다른 것〉인데, 엉터리 진단과 실은 독인 처방약이 바로 그 병인 것이다. 실질적인 책임이 없을 때 그 효 과는 항상 같다. 그것은 아무런 목적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모두들 이웃을 희생시켜 가면서 자신만이 가장 생생한 광채로 빛나려 고 애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을 밝히려고 애쓰기 보다는 오히려 그 경쟁자의 명석함을 감추려고 애쓴다는 말이다. 총체적으로 볼 때, 현대의 위기는 모든 희생위기와 마찬가지로 차이 의 소멸로 규정할 수 있다. 차이를 소멸시키는 것은 적대적인 왕복운 동이지만 그것은 결코 올바로, 다시 말해서 갈수록 더 비극적으로 되 어가는 병적인 차이의 작용으로, 이해되고 있지 않다. 이 병적인 차이 는 언제나 커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가로채려고 애쓸 때면 반 대로 사라져버리고 만다. 모든 적대자들로부터 번갈아가며 도움을 받 아서 일어나는, 갈수록 더 일시적인 것으로 되어가는 이것의 부분적인 재등장에 의해 모두가 속고 있는 것이다. 신화적인 것의 전면적인 타 락은, 끊임없이 서로를 파괴하면서 신화에 대해서는 모두 애매모호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경쟁 형태들의 증가로 나타나고 있다. 신화에 대해서 왜 애매모호한 관계냐 하면, 이 경쟁 형태들은 항상 신화적이면서 탈 신화적이고 분명히 환상적이지만 동시에 〈다론〉 신화에 한정되어 있 으므로 어떤 탈신화의 운동 속에서도 신화적이기 때문이다. 탈신화의 신화들은 거대한 집단 신화의 시체에서 먹이를 찾는 벌레들처럼 급속 도로 증식된다. 분명히 그리스 비극은 자신과 관련되어 있는 이 과정에 대해서, 그 것을 못 보았다고 믿고 있는 정신분석학보다 할 이야기가 더 많을 것 이다. 정신분석학은 그것을 전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자신의 근거가 뒤 혼릴지도 모르는 그러한 텍스트들의 추방 위에서만 자신의 확실성을 세울 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술작품이 비난받는 동시에 찬양받는 이유이다. 한편으로는 나무류} 데 없으며 미적 관점에서 우상화되는 것 이 예술작품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가 그 굳건한 엄격성을 구현하기를 원하는 어떤 절대적인 지식에 의해 파악되는 확고한 과학 적 진실에 대한, 상상적이고 기만적인 반대 명제로 상정되어져서 근본 적으로 부정되고 거세되어지고 있는 것이 또한 예술작품이다.

내가 알기로는, 작가들만이 이 기만적인 탈신비화 과정을 담지해 냈 을 뿐 , 정신분석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은 결코 그러하지 못했다. 여기 서 주목할 만한 것은 소위 문학비평도 지금까지 이 대열에 들어 있었 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소위 문학비평이라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해 사실상의 묵인과 찬동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문학비평은 그것이 옹 호하려는 걸작 속에 들어 있는 정말 날카로우면서도 완강히 비판받고 있는 어떤 학설의 〈기 꺽인〉 주장을 묵인한 게 아니라, 〈문학〉은 아무 의미도 없을 뿐더러 아무런 해도 없다는 일반적인 법칙, 죽 〈문학〉이 라는 이름이 붙은 작품은 어느 것도 어떤 현실에 대해서도 아무런 영 향력을 가질 수 없다는 〈선험적인〉 신념을 묵인하고 동의해 왔다는 것이다 . 여러 번에 걸쳐 우리는 소포클레스가 정신분석학을 탈신화화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결코 정신분석학이 소포클레스를 탈신화화 하는 것은 보지 못할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결코 전정으로 소포클레스 에게 비난을 가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여기의 프로이트처럼 그에게 가 까이 다가갈 뿐이다. 어떤 텍스트를 희생물과 메커니즘의 관점에서 검토하고, 집단적 폭 력과 연관해서 〈문학〉을 고찰한다는 것은, 곧 그 텍스트는 과연 그것이 나타내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어떤 것을 〈빠뜨리고〉 있지 않 는가를 따져보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근본적으로 비판적인 이 시도의 필수적인 과정이다. 언뜻 보기에 이것은 불가능하며 실현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이 시도를 실행하면 아주 국단적인 일 반화나 추상화에 이르게 되어 별로 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텍스트로 한번 더 돌아가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속해 있는 그 문맥을 생각만 하더라도, 거기에는 아주 주목할 만한 그리고 깜짝 놀랄 만한 어떤 부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그리스 비극이라고 말할 때면 명시적이든 암

시적이든 거의 언제나, 모든 작품 중에서 대표격이며 진정한 리더이자 모든 비극의 대변인 격인 특별한 한 작품에 의거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에서 시작된 이 전통은 우리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전동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Sig mu n_d Freud 라고 해서 이 전통을 거부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이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 여기서 우 리가 문제삼는 것은 물론 『 의디푸스 대왕』이다. 우리는 『 의디푸스 대 왕』을 떠올렸지만, 프로이트는 앞에서 인용한 텍스트에서나 그 이전이 나 이후에도 의디푸스를 조금도 암시하지 않고 있다. 그에게는 아티스 Att is® , 아도니 스 Adonis ,® 타무즈 Tammuz,© 미 트라 M it hr 군 타이 탄 les T it an 군 디오니소스 D i ony sos, 그리고 물론 기독교 —— 얼마나 탈신화를 필요로 하는 것들인가? ――가 문제이지, 비극의 주인공으로서의 의 디푸스는 결코 문제가 아니며, 작품 『의디푸스 대왕』도 결코 안중예 없는 것 같다 . 궁극적으로 『의디푸스 대왕』은 많은 비극둘 중의 하나에 불과하므 로, 일부러 프로이트가 그것을 꼭 언급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 프로이트의 덱스트 속에서 특정하게 언급되어 있지 ® 아티스 Attis : 마 남 목동 청 년으로 풍요로움의 신 . ® 아도니스 Adon i s : 페니키아 출신의 아주 아름다운 미남 청년인 그리 스 신. ® 타무즈 Tammuz : 바빌로니아의 풍요의 신 목동의 왕으로, 그의 생사는 식물의 주기에 연관되어 있으며 시리아-페니키아의 Adon i s 에 비교된다 . ® 미트라 M it hra : 인도의 M it ra 에서 나온 고대 이란의 신 황소 무리의 주인으로, 그에 대한 숭배가 조로아스트교에서는 사라졌다가 헬레니즘 세계와 로마에서 다 시 나타난다 . 12 월 25 일 거행되는 이 신의 축제는 크리스마스의 기원이기도 한다. ® 타이탄 T it ans : 그리스 신화의 주류를 이루는 올림포스 신들 이전에 있었던 천공 (天空) 우라노스 Ouranos 와 대 지 (大地) 가이 아 Gaia 사이 에 서 태 어 난 여 섯 아들 둘로 모두 가이아의 권고에 따라 우라노스로부터 지배권을 빼 앗아 막내 인 크로노 스 Cronos 를 지배자로 삼았다 . 그러므로 주신 제우스는 이 크로노스의 아들인 셈 이다 .

않은 이 비극은, 또한 그 속에서 특정하게 배제된 것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비극은 단순하게 하나의 평범한 비국으로 되돌아가서, 비극 〈 문집 〉 의 나머지 비극들과 뒤섞여졌다고 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반박은 설득력이 없다. 일단 원형적인 비극의 부재에 주 목하면, 이 덱스트의 디테일들이 금방 눈에 드러나는데, 이 디테일들은 이 부재가 전혀 우연한 것이거나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암시해 준다. 이제 〈 과오 〉 에 대한 정의를 다시 읽어보면, 이 정의는 『의디푸스 대 왕 』 에 절대로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인공은 〈그 이유도 알 수 없는 소위 ‘비극적 과오'로 가득 차 있는데, 대개의 경우 이 과 오는 일상 속에서 우리가 과오라고 여기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 정의는 다른 비극들에는 적합할지 모르지만, 분명히 의디푸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적어도 프로이트의 이 담론이 위치하고 있는 거대한 신화 구조의 측면에서 볼 때, 의디푸스의 과오에는 애매하거나 정체불 명의 것은 전혀 없다. 여기서 프로이트가 정말로 의디푸스를 생각하지 않고, 순수하게 그 리고 단순하게 의디푸스를 망각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의디푸스가 문자 그대로 그의 정신에서 빠져버릴 수가 있었을까? 빽빽하게 무리 지어 『 토템과 터부』의 발자취를 향해 달려드는 현대 신정신분석학의 예민한 불릿하운드 사냥개들이 이 망각을 칭조의 차원에서 어떻게 이 용할 건지 우리는 알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관례적인 진단에 따라 『토템과 터부』 속에서 〈억압〉의 고전적인 〈재발 re t our 〉을 보기보다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가장 깊은 밑바닥으로 깊이 파고드는 것을, 혹은 전정 놀랍게도 의디푸스가 이 프로이트의 시니피앙의 미로 속을 방황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 토뎀과 터부』에서의 프로이트는 무의식적으로 의디푸스를 삭제하 고 억제할 정도로 너무나 그답지 않아 보인다.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우리 주위에 다채로운 환영의 다채로운 광채가 질게 펼쳐지면서 참시

어질어질해지게 된다. 이때 다행히 또 다른 가능성이 나타난다. 우리가 위에서 두번째로 인용했던 문장 속에는, 의미심장한 조그마한 예외규 정이 있다. 〈대개의 경우〉 바극적 과오는 우리들이 일상에서 과오라고 여기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하고 있다. 여기서 〈대개 의 경우〉라고 말하는 것은 이 주장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아마도 여러 개의 아니면 최소한 단 하나의 예 의적인 비극의 가능성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 최소한의 것이 아주 적절해 보인다. 〈하나의〉 비극에는 분명히,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과오라고 여기는 것과 생소하지 않은 비극적 과오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의디푸스 대왕』에서의 친부살해와 근찬상간이다. 그러므 로 이 예의규정은 의디푸스를 겨냥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의디푸 스만을 겨냥한다고 생각할 충분한 근거도 있다. 문제의 이 텍스트 도처에서, 의디푸스는 그의 부재로 인하여 빛나고 있다. 이 부재는 자연스럽거나 무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의식적 인 것이며 계산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콤플렉스가 아니라 일반적인 모티브둘이다(게다가 모티브들은 콤플렉스보다 훨씬 더 홍미로우며 다양하다). 그리고 우리는 프로이트의 텍스트 속에서 의디푸 스가 왜 느닷없이 완전히 배제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이 배제를 단순히 그 문맥뿐 아니라 그 텍스트와의 관련 아래 살펴 보면 그것은 더욱 놀랄 만한 것으로 나타난다. 『토템과 터부』에서는 누가 그리고 무엇이 문제일까? 언젠가 살해되었다고둘 말해지는 원시 유목민 아버지가 문제이며 따라서 친부살해가 문제이다. 프로이트가 이 그리스 비극 속에서 발견했다고 믿는 것은 바로, 그 범인들 자신에 의해 그들의 희생물에 두영된 바로 그 범죄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티 레시아스가 다음에는 테베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이 불행한 의디푸스를 비난하는 이유는 그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완벽한 일치, 『토템과 터부』에서 말하는 비극의 개념과 『의디푸스 대왕』의 주

제 사이의 일치보다 더한 일치는 없을 것이다. 의디푸스의 이야기가 나와야 될 곳이 바로 여기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계속 말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소맷자락을 끌면서, 〈의디푸스 콤플렉스〉의 유명 한 창시자인 이른바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 진짜 친부살해의 비극이 〈자 ! 여기 이렇게 있다〉고 환기시켜 주고 싶을 정도이다. 프로이트는 이 완전한 논증, 이 명백한 예증을 왜 스스로 포기한 것 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다. 그것은 프로이트가 『의디푸스 대 왕』울 어떤 실제 학살에다 연관시키는 해석을 따를 수 없었기 때문이 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필히 그의 관례적인 해석, 죽 『의디푸 스 대왕』을 욕망 실현이 단호히 배제되어 있는 단순한 어떤 무의식적 욕망의 반영으로 취급하던 정신분석학의 공식적인 해석에 이의를 제 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디푸스는, 그 자신의 콤플렉스와 비 교해 볼 때 아주 이상하게 보인다. 최초의 아버지라는 자격이라면 그는 아버지를 가질 수 없으며, 게다가 그에게 아버지 콤플렉스를 부여한다 는 것은 그것이 비록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아주 어색할 따름이다. 이 콤플렉스에 의디푸스란 이름을 붙임으로써 프로이트는 한층 더 공 교롭게 되었다. 더 보편적이고 더 본질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의디푸스 문제를 밝혀 내고,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을 아직은 애매모호한 〈속죄양〉 현상으로 보게 되면, 우리는 필히 모든 정신분석학적 사고에 이의를 제기하는 숱한 문제들, 죽 이 시론에서 우리가 지적하려는 많은 문제들을 언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의문점이 있지만, 프로이트로서는 아무런 해답이 없기에 그는 그것을 제거하려 하였다. 신중한 작가였다면 비극에 대한 〈모든〉 텍스트를 철회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프로이트가 신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덱스트의 풍부 함과 자기 직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그 덱스 트를 계속해 나가기로 마음먹고서, 『의디푸스 대왕』에 대한 모든 언급

울 조심스럽게 삭제함으로써 난처한 질문들을 회피하였다. 정신분석학 적 의미가 아니라 이 말의 통속적인 의미에 있어서, 프로이트는 의디 푸스를 〈검열〉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우릴 속이려 했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는 정신분석학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서도, 어떠한 문제 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처럼 그는 서둘러 결론을 맺었다. 그는 우선 추월해 놓고 그 후에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결코 알지 못했을 것 이다. 만일 프로이트가 이 난점을 피하지 않으면서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면, 아마도 그는 의디푸스에 대한 그의 첫번째 해석이나 두번째 해석이 전정으로 의디푸스 비극과 신화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 했을 것이다. 억압된 욕망도, 실질적인 친부살해도 전정으로 만족할 만 하지 못하다. 여기서뿐만 아니라 거의 도처에 나타나고 있는 프로이트 주장의 한결같은 이 이중성은 하나의 똑같은 왜곡을 반영하고 있다 .. 진짜 문제를 도의시함으로써, 프로이트는 참재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길, 죽 끝까지 따라가면 희생물에 이르게 되는 길로부터 벗어나게 된 다. 의디푸스의 배제 배후에서, 즉 우리들이 방금 읽었던 텍스트 속에 있던 완전히 의식적이고 전략적인 이 첫번째 배제 뒤에는, 무의식적인 것으로서 보이지는 않지만, 그 구조를 지배하고 있는 덱스트의 차원에 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두번째 배제가 있다. 이것에 대해서도 정신분석학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정신분 석학〉 그 자체의 근거가 되고 있는 이 배제에 대해 정신분석학에게 이룰 해명해 달라고 요구해서는 안된다. 이처럼 『의디푸스 대왕』 주위를 괄호치는 것은, 정신분석학 이론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인 미결정, 일종의 보호선을 치는 셈이다. 앞에서 우리는 모방 욕망의 경우와 아주 유사한 것을 확인한 바 있다• 거기서 도 역시 의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가능한 위협을 피하는 것이 문제 였었다. 우리는 이 콤플렉스의, 문자 그대로 범집할 수 없는 특성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한 셈이다. 프로이트의 서열에서 이 콤플렉스는 절 대적인 우선권을 가지고 있는데, 이 우선권은 바로 거기서부터는 신화 해체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 사상가 프로이트의 역사적 한계와 일 치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프로이트와 그의 후손들 사이에서, 앞 장에 서와 똑같은 상대적인 차이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그 위 험한 직관들을 격리시키고 약화시켜서 그것들이 교리를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하려 하지만, 그것을 포기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많은 재능과 정열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탐구적 사고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자 신의 대담성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의 후손들은 그 와 같은 입장울 취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호한 조치를 취하여 한편으 로는 모방 욕망의 날카로운 칼끝을, 다른 한편으로는 『토템과 터부』 전체를 거부함으로써, 프로이트의 검열을 더 심화시키고 확대해 나간 다. 지금껏 비극에 대한 그의 텍스트는 별로 명성이 없었던 것 같다. 프로이트를 추종하는 문학비평가들조차 그것을 그다지 이용하지 않았 던 것을 보더라도 말이다 . 그렇지만 우리가 프로이트가 비극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은, 바로 이 저서에서 뿐이다. * 『토템과 터부』의 앞으로의 도약은 또한 옆으로의 도약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정신분석학이라는 기존의 교리, 그 교리의 무게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상가는 이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지도 못하고 그냥 짊어진 채로 그 짐을 자신의 가장 소중한 재산이라고 믿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중 요한 장애물은 무엇보다 먼저 그의 중요한 이 발견을 되색시키면서 집단 살해를 〈친부살해〉로 변형시키는 아버지의 의미이다. 이리하여 이것은 정신분석학의 적수들에게 이 주장의 신용을 떨어뜨리는 논거를 제공하게 된다. 비극 해석과 충돌하는 것도 바로 이 아버지의 의미 때

문이며, 프로이트가 근친상간 금기 문제를 탁월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것도 또한 이 때문이다. 이미 보았듯이, 프로이트는 살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서도 금기 문 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업한 아버지에 의한 성의 독점과 금기의 역사적 효력의 연속성을 깨뜨려 놓았다가 이제와 서는 아주 순진하게도 그 자신도 만족해 하지 않는 어떤 요술 같은 것으로써 이 연속성을 다시 회복하려 한다. 전에는 아버지에 의해서, 심지어는 아버지의 존재 그 자체 때문에 금지되던 것을, 이때에는 정신분석학에 의해 밝혀진 〈과거에 대한 복종〉이라는 특수한 심리상태에 의해서 아들들 스스로가 금했다. 그들은 아버지를 대신하는 것은 도저히 그들이 할일이 아니라고 믿으면서, 아버지를 대체하는 토템의 처형마 저 금했다. 그리고 그들이 해방시킨 여성들과 성적 관계를 맺기를 거부함으 로써, 그들은 그들 행동의 결과를 수확하는 것마저 포기했다. 이렇듯 아들의 〈죄의식〉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억압된 두 욕망과 뒤섞이게 마련인 토뎀숭배의 근본적인 두 가지 터부를 생겨나게 하였다. 여기서의 모든 논리는 한탄할 정도로 빈약하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미봉책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그 스스로가 누구보다 먼저 느끼고 있었 다. 그래서 그는 바로 즉시 보충 작업에 들어간다. 보충 증거를 찾으려 했지만, 의욕은 왕성하지만 성미가 급한 사상가가 종종 그러하듯이, 그 는 앞의 논거에 덧붙이거나 보태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은연중에 정 신분석학의 전제를 문제삼는 전혀 새로운 이론을 내놓는다. ·… .. 근친상간의 금기는 또한 실제로 커다란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성적 욕구는 인간들을 결합시키기보다는 분리시킨다. 아버지롤 제거할 때는 결합 되었던 형제들도, 여자를 차지하는 것이 문제가 되면 곧 경쟁자가 되고 만다. 아버지의 예를 따라서 각자는 모든 여성들을 자기가 차지하려 했을 것이며,

거기서 기인될 전반적인 싸움은 사회의 전반적인 파멸을 야기시켰을 것이다. 힘에 있어서 다른 모든 사람들을 능가하면서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 었던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 함께 살기를 원할 때, 그들이 취할 방도는 하나밖에 없었다 . 그것은 아마도 국심한 불화를 극복한 이후에 근친상간의 금기를 제정하는 것이다 . 그들이 아버지를 살해한 주목적이 이 소유를 확보하기 위해서였지만, 역으로 이 금기 때문에 모두 다 욕망하는 여 자들에 대한 소유를 단념해야 했다. 첫번째 인용문에서는 방금 죽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가장 돋보 이고 있다. 그러나 두번째 인용문에서는 그 죽음이 빠져 있다. 이번 에는 프로이트의 생각 속에서 아버지가 다시 죽는 것 같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집단 살해 〈이후의〉 유목민의 흥망성쇠를 추적한다고, 즉 유목민과 함께 시대를 따라 내려온다고 믿고 있다. 사실, 그는 그가 사로잡혀 있던 서구적 가족의 틀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데, 모든 가족의 의미들이 흐려지고 지워지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친척 관계의 가까운 정도에 따라 욕망의 열기를 조절하는 것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모든 여성들은 동일한 차원 위에 있다. 죽 〈모두 아버지의 예를 따라서 모든 여성들을 차지하려 했을 것이다〉. 〈어머니〉와 〈누이〉가 경쟁을 유발하는 것은 그녀들이 본질적으로 더 욕망할 만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녀들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욕망에는 더 이상 특별히 우선권을 가진 대상이 없는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성적 욕구와 연관되어 있던 이 갈등이, 이 욕구 만으로는 충분히 정당화될 · 수 없는 격렬한 경쟁 관계로 귀착된다고 프로이트는 주장한다. 그 누구도 이 선조의 놀라운 업적을 되풀이할 수 없을 것이다. 〈힘에 있어서 다론 모든 사람들을 능가하면서 아버 지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남자는 더 이상 아무도 없었다〉. 경쟁 관계에는 수많은 구실이 있는 법인데, 그것은 다름아닌 최고의 폭력 . 만이 그 대상이기 때문이다. 한편에는 여성들이, 다른 한편에는 그

여성들을 공유하여 나눠가질 수가 없는 남성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원칙적으로 프로이트의 묘사는 처음에는 엄한 아버지의 죽음에 의 해서 야기된 것 같다가 , 여기서부터는 모든 것이 〈마치 아버지가 전 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진행된다. 이제 어떠한 차이로도 구분 되는 않는 〈원수형제 〉 가 주대상이 된 것이다 . 프로이트는 이 순간 상호적인 폭력의 순환, 회생위기의 대칭을 발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는 기원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프로이트는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바극의 과정인 무차별화 과정인데, 그것은 『토템과 터부』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었다. 왜냐하 면, 비극 분석에 있던 〈모두가 똑같은 이름을 가진, 바슷하게 옷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라는 합창대의 묘사, 다시 말해서 일 종의 형제들의 묘사에서 · 나타나듯이 , 프로이트는 이것을 무차별화 과정으로 귀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금기는 〈정신분석학에 의해 밝혀진 어떤 심리상태 〉 와 관 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파멸〉을 야기시킬지도 모르는 〈전반적인 싸움〉을 막는다는 철실한 필연성과 연관되어 있다. 마침 내 우리는 〈성적 욕구는 인간들을 결합시키기보다는 분리시킨다〉는 구체적 사실을 터득했다. 프로이트는 첫번째 이론을 조금도 암시하지 않는다. 제대로 알아 차리지도 못한 채, 금기에 어떤 〈실질적인 기능〉울 부여하기 위하여 그는 콤플렉스와 환상들을 내팽개치고 있는 중이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적인 것에 대한 오해에 그토록 기여했던 그는 『토템과 터부』에 서 금기의 전정한 역할을 최초로 공표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일단 『토템과 터부』에서 벗어나면서 스스로 자신의 발견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최초의 사람이기도 하다.

* 기능의 차원에 있어서, 두번째 이론이 첫번째 이론보다 낫다. 이제 기원의 차원에서 검토해 보자. 이 이론은, 형제들은 마침내 모든 여 성을 포기하기로 협상을 통해 합의하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금기의 절대성 속에는, 협상을 통한 협정이니 만들어진 금 기니 하는 성격은 어디에도 전혀 암시되어 있지 않다. 만일 남자들이 서로 합의할 수 있다면, 여성들에게는 이 절대적 금기가 과해지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불특정한 소비자들끼리 어떤 처분 가능한 자원 울 나누어 갖는다고 하는 것이 더 그럴 듯해 보이겠다. 여기서는 분명히 폭력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프로이트는 잘 알 고 있었다. 그가 형제들에게 상황의 심각성을 깨우쳐주는 분명한 논 거를, 결정적인 합의에 앞서 일어나는 〈국심한 불화〉라고 부르고 있 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 다. 만일 폭력이 맹위를 떨친다면, 금기는 분명히 필수적인 것이 되 면서 금기 없이는 사회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아니 인간사회가 아예 없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이 화해, 특히 프 로이트 자신의 말대로 근친상간의 금기처럼 〈비합리적〉이고 〈감정 적인 〉 어떤 금기에 대한 화해가 왜 필수적인 것이며 왜 가능해지는 지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 반-근친상간 사회계약론은 아무런 설득력도 없게 된다. 그토록 시작이 좋았던 이 이론은 이리하여 아주 빈약한 하나의 메모로 끝나게 된다. 프로이트는 두번째 이론에서, 기능적 측면에서는 획득했던 것을 기원의 측면에서는 다시 상실하고 있다. 진정한 결론이라면 형제들 울 회피해야 했을텐데 여기서는 프로이트 자신을 회피하고 있다. 우리는 첫번째 이론으로부터 두번째 이론으로 변해 가는 과정을 추적하여 보았는데, 그것은 가족적, 문화적 의미들로부터 조금씩 벗

어나는 한 사상의 움직임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과정이 아 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겠다. 비극에 대한 텍스트에서 와 같이, 근친상간에 대한 두번째 이론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형 제들과 여성들은 익명의 동일인으로 환원되지만, 아버지는 이와 아 무런 상관이 없다. 아버지는 이마 죽은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는 무차별 과정의 의부에 남아 있다. 그는 도중에 가족이라는 껍 질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유일한 인물, 불행하게도 주요인물이다. 굳 이 말하자면, 프로이트는 아들들을 〈자식이 아닌 것으로 만들지만 defi ali s e r>, 거기서 멈춘다. 우리는 중단된 이 궤도를 완성시켜서 아 버지를 〈아버지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야 de p a t ermal i ser 〉 할 것이다. 프로아트에 의해서 시작된 이 궤도를 완성시킨다는 것은, 수많은 민족학적 자료들에 의해서 확인되어 완전히 필연적인 것으로 증명된 이 살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거부하고 가족의 틀과 정신분석학의 의미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항상, 마지막 순간에 속셈을 숨기고 산성한 것의 메커 니즘을 감추어버리는 한결같은 아버지의 존재 때문에 희생제의, 축 제, 그리고 다른 모든 여건들에 대한 실질적인 언급을 빠뜨리고 있 다.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정신분석학이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등으로 시작되는 모든 문장들은 이제 아주 근사한 설 명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정신분석학이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토뎀숭배의 동물은 실질적으로 아 버지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것은 그 동물을 죽이는 것의 금지와 그 것을 죽이고 난 뒤 슬픔을 폭발하고 난 뒤에 오는 축제라는, 위에서 우리가 지적했던 그 모순을 설명해 준다. 아버지로써는 어떤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설명하기 위해 서는 아버지를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집단 살해에 의해서 공동체 안에

형성된 엄청난 느낌은 그 희생물의 신분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 희생물이 통합적이라는 사실, 즉 이 희생물에 대항해서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일어나는 만장일치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성 스러운 것의 〈 모순둘 〉 , 죽 희생물이 아무리 신성한 것이라 하더라도, 아니 바로 그것이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둘이 늘 또 다시 희생물 울 죽여야 하는 필요성을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이 〈대항해서 contr e > 와 〈 대해서 au t our 〉 의 만남이다. 『 토뎀과 터부』를 망치고 있는 것은 집단살해가 아니라, 이 살해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막고 있는 모든 것이다. 만일 프로이트가 살해에 앞서서 살해의 동기를 부여하는 이유들과 의미들을 포기한다면 그리고 특히 정신분석학적인 의미를 제거한다면, 그는 폭력에는 아무 런 의미가 없으며, 의미에 관한 한, 이 살해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일단 아버지라는 겉모습을 벗겨내고 나면 이 살해는 틀림없이 그것 이 공동체에 야기시키는 엄청난 충격의 원인, 그것의 효능과 그것이 제의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의 비밀, 그것에 대한 판단이 왜 항상 이중적인지의 이유 등을 밝혀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면, 두번째 이론 속에서 원수형제들을 파악하지 못했던 결론이 〈이미〉 나 왔고, 살해는 순수한 희생물 메커니즘이며 이 살해의 진정한 자리는 희생위기 이전이 아니라 그 끝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단지 희생물만이 미완의 두번째 이론을 완성시키고 폭력을 종결시 키며 근친상간에 관한 이 두 이론을 하나로 통일시킬 수가 있다. 이제 살해는 결정적인 폭력에 앞서 일어나는 쓸모없고 심지어 성가시기까지 한 단순한 서곡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프로이트 자신이 언급했던 위 기의 결말일 뿐 아니라 문화질서의 출발점이며, 모든 근친상간 금기의 절대적이자 상대적인 기원이다.

* 우리는 지금까지 『토템과 터부』를 통해서만 근친상간 금기를 살펴 보았다. 당연히 우리는 문화적 질서의 다론 양상들과 마찬가지로 이 금기도 초석적 폭력 속에 뿌리박고 있다고 추측은 하지만, 우리 스스 로의 방법으로 이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단지 『토템과 터부』에 대한 역동적인 독서를 통해서 거기에 도달한 것이다. 금기 문 제를 희생 문제와 관련지어서, 그의 집단 폭력에 대한 해석에 힘입어서 이 두 문제를 해결하려 한 최초의 사람도 바로 프로이트이다. 만일 희 생의 경우에 있어 이 프로이트의 해석을 희생물 쪽으로 수정해야 하는 것이 옳다면, 근친상간의 금기에도 또한 그래야만 한다. 이 문제를 그 자체로 고려하기보다는 프로이트의 이 저서에 대해서 최종적으로 고 찰하게 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제 안하는 수정이 우리 연구와 같은 방향이라 하더라도 이 수정은 우리가 검토하는 이 저서와 별개의 것이 아니며 이 저서 밖에서 들어온 것도 아닐 뿐더러, 작품 자체 속에 들어 있는 더 역동적이며 잠재적으로 더 풍부한 것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요구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토뎀과 터부』에서 원시 유목민이 수행하던 역할로 되돌아가 보자. 위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다윈의 가정은 근친상간 금기의 알기 쉬운 기원을 암시하고 있다. 처음에 프로이트가 이 가정에 혹하게 된 것은 분명히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의혼제에 대한 최초의 논의 가운데 • 에 이 가정이 나타난다. 이 책의 두번째로 중요한 가정이며 순수하게 프로이트적인 가정인 이 집단 살해는, 이 작가의 민족학에 대한 독서로 뒤늦게 나타났음에 틀림없다• 처음에 이 두 가정은 서로 독립적인 것 이었다. 다윈에게는 살해라는 개념이 없었으며, 집단 살해라는 개념은 전적으로 민족학 자료에서만 나타나고 있었다. 그 반면에 민족학적 자 료에는 분명히 원시 유목민을 암시하는 대목은 하나도 없었다.

이 두 가정을 서로 접합시킨 것이 바로 프로이트이다. 역사와 선사를 뒤섞는 이 작업, 그리고 모두가 비교적 유사한 문화적 자료들로부터, 원칙적으로 독자적이면서 시간적 거리가 큰 사건에서 정보를 얻어내 려는 이 작업의 자의적인 성격은 종종 지적되어 왔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럴 듯하지 않을 뿐 아니라 조금만 살펴보면 아무 런 근거도 없는 것이란 걸 알 수 있다. 죽 그것은 그것의 전정한 실체 인 이 저서의 중요한 직관에 있어서 어떠한 실질적인 요구에도 부합 하고 있지 않다. 프로이트가 무엇보다도 금기 쪽으로 열려 있는 가능 성들 때문에 유목민을 택했다면, 우리는 일단 살해가 엄한 아버지의 성적인 특권과 금기 사이의 연속성을 파괴하면서 실질적으로 이같은 가능성들을 소멸시키고 났는데도, 그가 왜 이 가정을 포기하지 않는가 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프로이트가 살해의 가정을 발전시키기를 원한다면 유목민을 고수할 아무런 이유도 없으며, 바꾸어서 만일 그가 유목민을 고수한다 면 살해는 차라리 성가신 것일 것이다. 결국 두 가정은 양립할 수 없 으며 둘 가운대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 선택을 분명하게 인식했다면, 프로이트는 살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토템과 터부』의 기창 뛰어난 부분은 살해 가정을 도입한 데에, 그리고 종교적 이며 민족학적인 여건들이 모두 이 가정을 요청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있다. 그 반면에 유목민은 아무것도 그것을 요청하지 않는다. 처 음에 유목민이 나타냈던 아주 상대적인 유일한 관심은 곧 사라져버리 고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살해를 고수 하지만 그렇다고 유목민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유목민이 더 이상 존재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 맹목의 이유는 분명 하다. 죽 집단 살해를 아버지의 의미 속에 가두어버리는 것이 바로 유 목민이며, 집단 살해 테마의 다산성을 앗아가는 것도, 그리고 이 테마 를 선사시대의 것으로 격리시킴으로써 그것을 부조리한 것으로 보이

도록 만들면서 정신분석학의 개념들을 보호하는 것도 바로 이 유목민 이기 때문이다. 원시 유목민은 정신분석학 신화의 완벽한 화신이다. 프 로이트의 사고가 극복하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한계가 여기서 한번 더 확실히 드러난 셈이다. 여기서도 정신분석학의 후손들은 아마 프로이트 사고의 퇴행적인 요소를 강조할 것이다. 『 토템과 터부』의 〈 살해당한 아버지 〉 는 옹호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사실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 살해당한 as­ sass in e 〉이 아니라 〈아버지 p ere 〉를 강조해야 한다. 문자 그대로 볼 때는 타당하다 하더라도, 이 저서를 거부하는 근거가 1 는 이유들은 옳 굿 못하다. 모든 것이 기만적인 혼합에 근거하고 있 7 · 1 rll 문 i 다. 결점을 비난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장점을 질식시키고 났는 것이다. 역설 적이게도 프로이트의 후계자들――〈아들들〉――은 그 〈 아버지 〉 의 실제 결접과 그들과 유사한 소심한 점을 이용하여, 『토템과 터부 』 속에 있는 그들과 닮지 않은 것과 그들에게 거슬리는 것들을 모두 제거하려 한다. 사람들은 진실과 거짓을 선별하기를 원하는데, 사실 이 선 별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두드러지는 것은 언제나 결점이며 전실은 항상 바닥 깊이 남아 있는 법이다. 결점은 아버지이며 정산분석학이며, 진실온 집단 살 해이며 너무나 특이해서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민족학자 프 로이트이다. 진보적인 독자라면 틀림없이 정신분석이 고수하는 것은 모두 거부하고 정신분석학이 거부하는 것은 모두 고수할 것이다. * 이 장에서 우리는 『토뎀과 터부』라는 책을 살펴보고 있는데 이 책은 현대의 모든 저서 중에서, 여기서 우리가 개진하고 있는 모든 문화 질 서의 기초로서의 〈희생물 메커니즘〉이라는 명제에 가장 가깝게 접근해 있는 저서이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이 명제의 실제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었으며,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난점을 안고 있는 프로이트 가

정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프로이트의 직관이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프로이트의 사고를 교정한다고 해놓고는 실제로는 그것을 추월하고 있다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의도하는 교정은 자의적인 왜곡이 아니며, 그것 역시 다른 것에 동화될 수 없는 독특한 다른 주관을 〈합병시키는〉, 〈주관적〉 비평과는 전혀 다른 것이 다 . 우리가 여기서 주장하는 명제, 죽 〈희생물 메커니즘〉은 더 좋거나 덜 좋거나 하는 그러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종교적인 것의 진 정한 기원이자 곧 자세히 알게 될 근친상간 금기의 기원이다. 희생물 메커니즘은 프로이트의 모든 저서둘이 놓치고 있는 목표인데, 그것은 도달되지는 않았지만 이 저서의 일관성과는 아주 가까운 지접에 있다. 이 저서 속에서 논리가 분열되고 산만해지고 다양해지는 것은 이 목 표에 도달할 수 없는 무력함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이 희생물 메커 니즘을 도입하여 이 저서 속에 퍼져 있던 단편들을 이 개념을 통해서 보게 되면, 이 단편들은 서로 결합하고 어울리면서 모두 완전한 형태를 취하여,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던 퍼즐 조각처럼 정연하게 배열된다. 분 열되어 있을 때는 미약하던 프로이트의 분석이 우리 가정으로 생겨난 일관성 속에서는 강해전다. 그렇다고 일관성이 의부로부터 주어전 것 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프로이트의 사고를 절대 확실한 불변의 도그마로 보지 않게 되면, 우리는 곧, 그의 사고는 언제나 아주 날카롭게 희생양 메커니즘을 향하고 있으며 어령풋이나마 한결같이 이 목표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른 덱스트에 대해서도 이 논증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의 설명을 빨리 진척하기 위해서는, 제의에 대해 했던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처리하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문화적 해석은 결국 제의의 또 다른 형태이며 그러한 점에서 그것은 희생양 메커니즘에 속하므로 이 메커니즘에 비추어 완전히 해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교를 동해서 모든 작품들로부터 정확하게 반복되거나 겹치지 않

으면서 〈짝을 이루고 있는 〉 공통분모를 끌어내야 한다. 이 텍스트의 〈짝패들〉의 모든 요소들 사이에는, 즉각적으로 그 통일성이 드러나기 에는 너무 많은 차이들이, 또 그렇다고 그 통일성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적은 차이들이 있다. 여러 가지 점에서 『토템과 터부』와 〈짝을 이루고 있는 〉 한 저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모세와 일신교 Mo 'is e et l e mono t he i sme 』라는 저서이 다. 첫번째 책에서 살해 이전에 이미 아버지와 아들들, 즉 가족이 존 재하듯이 두번째 책에서도 살해 이전에 이미 모세의 역사와 모세의 종교, 죽 사회가 존재하고 있다. ‘모 세는 유목민의 아버지에 해당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모세가 살해되고 난 뒤의 선지자 없는 헤브라이 민 족은 『토템과 터부』에 나타나는 살해 이후의 아버지 없는 형제들 집 던과흡사하다. 이 해석자는 다시 한번 더, 집단 폭력에서 나오게 될 모든 의미를 미리 헤아리게 된다. 한편으로는 『토템과 터부』에만 들어 있고, . 또 다 른 한편으로는 『모세와 일신교』에만 둘어 있는 모든 의미들을 제거한 다면 다시 말해서 이 두 저서에서 가족, 유대교와 감은 민족, 국가를 제거한다면, 우리는 어떤 특정인이 아닌 〈그 누구의 〉 살해에 의해서라 도 상호적 폭력이 초석적 폭력으로 바뀐다는, 이 두 작품의 유일한 공 통분모가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근친상간 금기의 기원에 관한 프로이트의 두 이론을 종 합하기 위해서는, 첫번째 이론의 가족의 틀에서 집단 살해를 떼어내어 그것을 두번째 이론 속에 넣어보면 될 것이다. 우리 주장은 바로 이 이중적인 종합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여기서 제시된 프로이트에 대한 모든 해석들의 수렴점에 위치하고 있 다. 프로이트의 역학이 보편적임을 암시하기 위해서는, 프로이트 역학 의 연장선 위에 초석적 폭력이 나타나기만 하면 될 것이다. 초석적 폭 력은 모든 구조화의 보편적인 동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는 인상주의적인 문화비평이 아니다. 객관적인

탐구가 문제이다. 실제로 프로이트가 걸어간 길을 그보다 앞질러 나아 가면 지금까지 결코 밝혀진 바 없었던 깊이까지 이 저서를 해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이 저자에 의해서 시 작된 문장을 완성시킬 수도 있으며, 그가 어떤 순간 왜, 그리고 어느 정도로 빗나갔는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게 되며, 이 저자를 정확하게 자리매길 수 있을 것이다. 『토템과 터부』나 『모세와 일신교』에서 초석 적 폭력에 가까이 접근했던 것처럼, 『정신분석학 시론 Essa is de psy c h a- naly se 』 에 서 프로이 트는 욕망 모방의 개 념 에 가까이 접 근하고 있다. 이 둘다 그 목표와의 거리도 똑같으며 실패의 여지도 똑같고 작품의 위 치도 변하지 않았다. 대상에만 집착하는 욕망 개념을 완전히 포기하고 폭력 〈모방〉의 무 한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잠재력을 · 갖고 있는 이 폭력은 희 생양 메커니즘 속에서 억제될 수 있다는 것을 동시에 이해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사회생활과 양립할 수 없는 어떤 욕망이 존재한다~ 것을 가정한다면, 필히 그 욕망을 꼼짝 못하게 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도 당연히 가정해야 할 것이다. 결국 휴머니즘에 대한 환상을 피하기 위한 단 하나의 필요조건은, 인류의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종속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현대인들이 수락하기를 거부하는 단 하나의 조건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도 이 조건을 수락하려 하지 않 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쇠퇴해 가던 휴머니 즘에 사로잡힌 그는 이리하여 자신이 예고하고 준비하던 어마어마한 지적 혁명을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 금기의 발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은 다른 모든 문화적인 것의 발생과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신이 나타나듯, 아니 접선을 따라 순식간에 잔가지를 내뻗치며 나타나는 번개처럼, 어디에나 나타

나는 이 〈괴물같은 짝패 〉 는 공동체를 감싸고 있다. 수많은 번갯불 가 지들이 뒷걸음질치고 있는 금지된 원수형제 들 사이를 지나가고 있다. 양식, 무기, 토지, 〈 여자 〉 등 갈등의 핑계가 무엇이든간에 적대자들은 그것들을 붙잡지 못하고 포기해 버린다. 신성한 폭력과 접촉했던 것은 모두 그때부터 신의 것이 되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절대적인 금기의 대상이 된다. 미망에서 깨어나면서 공포에 질린 적대자들은 이제 다시는 상호적 폭력에 빠지지 않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게 된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완전하게 알게 되는데 신의 분노가 그것을 알려준다. 폭 력이 타올랐던 곳에서는 항상 금기가 생겨난다 . 경쟁의 목표였던 모든 여성들, 결과적으로 가까운 모든 여성들에게 는 금기가 부여된다. 그런데 그것은 그 여성들이 본질적으로 더 욕망할 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며 경쟁 관계에 등 장했기 때문이다. 이 금기에는 언제나 가까운 배다른 자매들도 포함되 는데 이 의적 범주가 꼭 실제의 친척 관계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 원리나 양상으로 볼 때 금기는 〈 무익한 것 〉 이 아니다. 그것은 몽 상이 아니라 가까운 자들이 폭력 〈 모방 〉 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고 있다. 앞 장에서 보았듯이 애초의 금기에는 우리는 모르고 있는 폭력과 그 결과에 대한 정보가 나타나 있는데, 그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금기란 결국 과거와 같은 폭력의 재발을 막기 위해 도처에 세 워놓은 성벽, 문자 그대로 그 자리에서 응고된 위기의 모든 폭력 혹은 폭력 그 자체에 다름아니다. 금기가 폭력과 똑같은 예민함을 나타내는 것은 결국 폭력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공동체가 혼미에 빠졌을 때 금기가 폭력의 효과를 내면서 그 소요를 더 가중시키는 이 유가 되기도 한다. 모든 희생제의의 안전장치와 마찬가지로 금기도 그 것이 보호하는 것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이 시론의 첫머리에서 우리가 이미 발견했던 〈성 (性)도 성스러운 폭력에 속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주면서 더

완벽하게 해주고 있다. 다른 모든 금기와 마찬가지로 성적안 금기도 희생제의적이다. 그러므로 합법적인 모든 성은 희생제의적이다. 이는 결국 엄밀하게 말하자면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에〉 합법적인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합법적인 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울 의미한다. 근친상간 금기와 공동체 내부의 모든 살해와 제의적 희 생에 근거하고 있는 금기는 그 기원과 기능이 같다. 이것이 바로 그것 둘이 서로 유사한 이유이다. 로버트슨 스미스가 관찰한 바와 같이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것들은 정확하게 서로 겹친다. 유혈이 낭자한 희생제의와 마찬가지로 합법적인 성, 죽 결혼에 의한 결합도 절대로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제물〉을 선택하지 않 는댜 근친상간 금기의 역인 결혼 규칙과 복수 금기의 역인 희생제물 결정 규칙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규칙들은 성과 폭력을 똑같은 원 심력의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성이 희생 쪽으로 굴절하는 것과 폭력이 그렇게 굴절하는 것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결혼의 교환에는 보통 다른 형식의 제의적 전쟁과 유사하게 제의화된 폭력이 뒤따르기도 한다. 이 체계화된 폭력은 만일 그것이 의부로 옮 겨가지 않으면 공동체 내부에서 창궐하게 되는 끝없는 복수와 유사하 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의 욕망을 의부로 향하게 하는 의혼제와 같은 것이다. 결국 문제는 폭력이며 해결책은 이 폭력을 의부로 향하게 하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서 성적 욕망과 마찬가지로 이중적이면서도 하나 인 폭력이 공동체와 양립할 수 없는 곳에 뿌리내리는 것을 막아야 한 다 . 오늘날에도 특히 서구의 가정에서 합법적 성의 모든 양상들은 희생 제의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부부의 성은 바로 가족의 기원이기 때 문에 가장 중심적이며 가장 근본적인데도 그것은 결코 드러나지 않으 며 진정 가족 생활과 무관한 것처럼 된다. 가까운 혈족들, 특히 아이 둘의 눈에는 그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때때로 그것은 가장 잘 감추 어진 초석적 폭력만큼이나 잘 감추어져 있다.

합법적인 성의 주위에는 모든 성적 금기들이 이루는 진짜 금지 구 역이 펼쳐져 있는데 가장 본질적인 근친상간 금기도 이것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이 금지 구역 안에서는 성적인 행위, 자극, 때로는 성적인 암시조차 모두 금지되어 있다. 게다가 사원의 주위나 희생제의가 전개 되는 장소 근처에서는 다른 어떤 곳보다도 더 엄격하게 폭력이 금지 되어 있다. 이롭고 생산성이 풍부하지만 또한 언제나 위험하기에 규제 되고 있는 성의 폭력은 희생의 폭력과 마찬가지로 진짜 금줄로 둘러 쳐져 있다. 제멋대로 퍼져 나가다가는 파괴적이고 해로운 것이 될 것 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원시사회는 현대사회보다 더 많은 금기로 둘러싸여 있 다. 그렇지만 현대사회에는 원시사회에는 없던 금기들도 몇 개 있다 . 그렇다고 원시사회의 상대적인 이 자유로움을,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 나 성이 그 대상이 되는 소위 〈억압〉이란 것과 대립되는 어떤 관념론 적인 흥분이라고 해석해서는 안된다. 성에 대한 휴머니즘적 또는 자연 주의적인 가치 부여는 현대에 들어와서 서구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 이다. 성행위가 합법적이지도 않고, 다시 말해서 이 말의 협의에 있어 서나 광의에 있어서나 제의적이지도 않고 금지되어 있지도 않던 원시 사회에서는 분명히 성행위는 아주 단순하고 무의미한 것 또는 거의 의미가 없는 것, 달리 말해서 사회 내부의 폭력을 퍼뜨리기에 부적당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는, 아이들과 미혼 청년의 성행 위 혹은 의국인과의 관계 그리고 물론 의국인들 사이의 관계들이 바로 이런 식이었다. 금기에는 또한 아주 중요한 기능이 있다. 아이들이 살아남는 것, 아 이들에 대한 문화적 교육을 행하는 것 그리고 인간성을 만드는 것 등 의 중대사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비폭력 보호구역을 공동체 가운데에 확보해 둘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금기 덕택이다• 이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금기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속에서 자연의 여신이 주신 혜 택, 죽 역사적인 기독교의 해체에 의해서 발생된 낙관론적 신학의 마

지막 후계자인 만족한 휴머니즘의 섭리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때부터 희생양 메커니즘은 인간성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본질적인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이제 우리는 동물의 폭력에는 각각의 제동장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같은 종의 동물들은 결코 서로를 죽일 정도로 싸우지는 않는다 . 승자는 패자의 목숨은 살려준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러한 안전장치가 없다. 결국 동물의 개인적인 생물학적 메커니즘이 인간에게는 희생양이라는 문화적인 집단 메커니즘으로 바 뀐 셈이다. 종교 없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종교 없이는 어떤 사회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민속학적 자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금기의 기능은 물론 그 기원도 밝혀주고 있었다. 제의와 축제에 나타나는 위반은 명백히 기원을 가리 킨다. 왜냐하면 이 위반은 희생제의 혹은 소위 〈토뎀숭배〉라는 의식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비제의적안 위반으로 인한 처 참한 또는 단순히 유감스러운 결과들을 살펴보면 그것들은 언제나 희 생위기의 반쯤 신화적이며 반쯤 실제적인 징후들로 귀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항상 폭력이다. 이 폭력이 전염 병이나 혹은 가뭄과 홍수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해서, 우리는 〈미신〉을 내세우거나 이것을 이미 해결난 문제라고 여겨서는 안된다. 현대사상 은 언제나 종교적인 것 속에서 모든 합리적 해석에 어긋나는 것 같은, 적어도 겉으로는 가장 불합리한 것처럼 보이는 요소들을 선택해서, 결 국 종교에 관한 자신의 근본적인 입장의 정당성을 확인하려 한다. 죽 종교는 현실과 어떠한 관계도 없다는 식이다. 이런 오해는 그러나 더 이상 오래가지 않는다. 이미 프로이트가 발 견했으나 곧 잊혀졌던 금기의 진정한 기능이 죠르쥬 바따이유 Geor g es Ba t a i lle 의 『에로티즘 L 'Ero ti sme 』 속에서 새롭게, 그리고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바따이유는 분명히 이 폭력을 마비된 현대의 의식을 각 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마지막 자국제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것의 국단적 표현인 이 작품은 퇴폐적 탐미주의의 저쪽으로 기울기도 한다.

금기는, 그것 없이는 인간의 의식 을 생각할 수도 없는 평온한 질서 를 파괴 하는 폭력 충동(특히 성적 자극에 의한 폭력 충동)과 폭력 을 몰아낸다 . I ) 1) George Bata ille , L'E ro tis me , Pio n , 1965, p. 43

제 9 장 레비-스트로스, 구조주의와 결혼 관습 혈연제도가 시작되는 구조 단위는, 내가 〈기본가족·f am ill e elemen tair e 〉이라 고 명명하는 집단인데 이 집단은 한 남자와 아내와 아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기본가족으로부터 특별한 세 종류의 사회적 관계가 나타나는데 부모와 아 이들 사이의 관계, 같은 부모를 가진 아이들(형제 , 자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양천으로서의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가 그것이다. 기본가족 속에 존재하는 이 세 유형의 관계가 바로 내가 제 1 열 le pre mi er ran g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제 2 열의 관계는 할아버지, 의삼촌, 처제 등과 같이 두 기본가족이 집합되면서 한 공통 구성원의 매개에 의해서 생겨나는 관계이다. 제 3 열은 사촌, 의숙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혈통에 관한 필요한 정보만 있다면, 우리는 이런 식으로 제 4 열, 제 5 열 혹은 제 n 번째 열의 관계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혈연에 대한 자신의 탐구 원칙을 도출해 내면서, 래드클리프-브라운 Redcl iff e-Brown 은 클로드 레 비 -스트로스 Claude Le vi -S tra uss 의 작업 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필수적인 전제사항을 밝히고 있다. 「언어인류학의 구조분석 L' Analys e stu c tu r ale en ling u ist iq u e et en an t hro p olo gi e 」 이 라는 논 문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이 텍스트롤 재수록하면서 이에 대한 반론으

로서 자신의 구조주의적 혈연 연구방법의 기초를 제시한다 .l )

1) Word, 1, 2, 1945, pp. 1-21. Anth r op olo g ie stru ctur ale, Paris, 1958) , pp. 37-62 에 재수록.

기본가족은 요지부동의 단위가 아니다. 그것은 결혼에 근거하고 있 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타고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은 이미 하나의 합 성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출발점이 아니라 종점이다. 다시 말해 그것 은, 생물학적인 어떤 필연성에 의해 결합된 것이 아니라 집단간의 교 환의 결과이다. 특정한 결합 양식에 의해서만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만 혈연 관계가 성립되 고 지속될 수 있다. 바꾸어 말해서 래드클리프-브라운이 말하는 〈 제 1 열 〉 의 관계들은 그가 말하는 이차적, 파생적 관계들에 의해 결정된다 . 인간 혈연 관 계의 근본적인 특성은 존재 조건과 마찬가지로 래드클리프-브라운이 〈 기본가 족〉이라고 부르는 것의 관계 설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진정으로 〈기본적인〉 것은 따로 독립된 가족들이 아니라 이것들 사이의 관계이다. 래드클리프-브라운의 〈기본가족〉의 배후에 있는 진정한 생물학적 관계들을 절대 잊지 않으면서 제도를 제도로서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상식이란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생물학적인 가족이 존재하고, 그것이 인간사회 속에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혈연관계에 사회적 사실로서의 특성을 부여하는 것 은 혈연관계에 들어 있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연적인 것에서 벗어나 있는 본질적인 태도에 있다. 혈연제도는 개인들 사이에 부여된 친자 관계나 혈족이라는 객관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의식 속 에만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실제 상황의 자연발생적인 전개가 아니라 자 의적 인 하나의 표현제도인 것이다.

이 자의적 요소는 여기서 이 제도의 소위 〈 상징적〉 특성과 동화된다. 상징적 사고는 예를 들어 의사촌과 같은 두 개체를 문자 그대로 〈결 혼시키는 〉 등 스스로 실체들을 결합시키고 있다. 이것이 흔히 행해지 는 곳에서는 이 결합이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실 제로 정말 어떠한 필연성에도 부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증거는 어떤 사회에서는 허용되거나 아니면 심지어 강요되기조차 하는 결혼의 형태가 반대로 다른 사회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혈연제도는 일종의 반(反)자연을 이루고 있다고 결론지어 야 하는 것일까? 이 점에 있어서 앞의 인용문은 레비-스트로스의 생 각이 많은 해석들이 가정하는 것보다 더 신중하고 더 사려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혈연제도는 〈실제 어떤 상황의 자연발생적인 전개〉가 아니라고 지적하고 난 다음에, 그는 다음과 같이 이어 나간다. 그렇다고 자동적으로 어떤 실제적인 상황이 부인당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무시당한다는 뜻은 아니다 . 오늘날 고전이 된 그의 연구 속에서 래드클리프­ 브라운은 오스트레일리아의 결혼 등급제도처럼 가장 엄격하고 가장 인위적인 형식의 제도들조차 생물학적 혈연 관계를 세심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보 여주었다 . 여기서 강조하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레비 - 스트로스는 자기가 발견한 극단적이면서도 쉽게 이해되는 어떤 개념으로 인해 바로 이 점을 못 볼 수도 있었으며, 또한 실제로 그의 사상을 원용하던 사람들 은 경우에 따라 그의 사상이 조금 불분명해지면 이 점을 종종 못 보곤 했다.· 몇 줄 위에서 그토록 당당하게 비판하던 래드클리프-브라운에 대한 이 칭찬은 의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밀고 나아가서 이 태도 수정이 충분한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가장 엄격하며 가장 인위적인 모습의 혈연제도조차 생물학적 혈연 관계를

세심히 고려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단언은 분명히 옳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로 여기에 만족할 수 있으며 더 이상의 어떤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일까? 인간은 그들 정신 속에 있는 기존 여건들만을 〈고려할〉 수 있다. 그 러므로 위의 문장은 인간정신 속에서 생물학적인 혈족 관계는 혈연제 도의 밖에, 다시 말해서 〈문화의 밖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여기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a) 인간의 생식 여건인 생물학적 혈연이라는 〈사실〉과, b) 이 생식과 혈연을 〈인식〉하는, 바로 이 여건 들에 대한 〈지식〉이라는 두 개의 사실들은 충분히 섞일 수 있는 것이 다. 생물학의 법칙을 위배하고서는 번식될 수 없다는 의미에 있어서 인간들은 분명히 결코 a) 와 무관하지 않다. 이것은 잡다하게 섞여 있는 〈자연상태〉에서뿐 아니라 〈문명상태〉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생물학적 법칙들에 대한 〈지식〉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자연 상태와 자연의 혼잡한 상태는 생물학적 법칙들을 찾아내는 데에 필요한 식별 작업을 못하게 한다. 우리들이 쓸데없는 관념적 사변에 빠져 든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오히려 그 반대로 총체적으로 현대의 자연주의 신화에 연관되어 있으면서, 항상 감추어져 있고 전혀 근거없는 어떤 전제조건을 사변적인 영역에서 끌어내려 하고 있는 중 이다. 〈자연상태〉와 생물학적 전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일반적인 과학 적 진실 사이의 유사성과 관련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생식의 생물학적인 〈사실〉에 관한 한, 되풀아하건대 문화와 자 연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반대로 〈지식〉이 문제라면 분명히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는 자연에는 불리한 결과를 낳은 차이이다. 이 사실을 인청하기 위해서는 한 배에서 난 고양이 새끼들을 몇 세대 동안 마음 대로 번식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얼마 안 가서 그 것들의 결합, 친자 관계, 혈족 관계가 하도 복잡하게 뒤얽혀져서 〈기 본가족〉에 관한 가장 뛰어난 전문가도 그것을 풀지 못하는 혼란상태가 오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예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광경이 아무리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세 가지 유형의 관계들은 계속 변별적이며 〈실질적으로 존재하고 있 다 〉 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진보적인 현대사상 가라 하더라도 아버지, 아들, 형제, 어머니, 딸, 자매 사이의 구분을, 우 리 감각이 속고 있는 환상이거나 아니면 어떤 크나큰 환상의 결과 혹 은 독선적이고 멋대로 이름붙이는 강압적인 사람의 헛된 꿈이라고 강 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생식의 기본적 여건들은 한번 식별되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그것을 몰라본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생물학적 기본 여건들을 식별하기 위해서는 ' 물론 우리가 방 금 살펴보았던 세 가지 유형의 관계 __ 결합, 친자 관계, 부계혈족 관 계 - 가 〈 뚜렷하게 〉 구별되어야 하는데, 이 구별은 단지 〈실질적인 구분 〉 의 기반, 다시 말해 근친상간 금기와 혈연제도의 기반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엄격하고 인위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혈연제도만이 생물학적 여건들을 확실히 식별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레비-스트로스가 단 언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모든 제도들의 공통된 기초는 결합과 부계혈 족 관계 사이의 엄격한 구별에 있기 때문이다. 바깥쪽 경계 부분에서는 혈연 관계가 가변적으로 예측하기 힘들지만 중심부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즉 한편으로는 부모자식 사이의, 다른 한편으로는 형제자매 사이 의 결혼은 언제나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그 예의들은 아주 드물면서도 대부분 아주 독특한 제의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예의 가 역으로 이 규칙을 아주 정확히 반증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증적인 어떤 결혼 규칙들이 우리에게는 아무리 지나치고 엄격해 보 인다 하더라도, 그리고 이러한 규칙들의 이면에 있는 금기들이 우리에 게는 아무리 자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이 제도의 핵심은 그 대로이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근본적인 효과들은 언제나 그대로 있다. 모든 혈연제도는 성의 영역에서의 합법적인 것과 비합법적인 것을 구

분하여, 부자 관계와 형제 관계의 생식기능을 분리시킨다. 이리하여 이 제도는 이것에 의해 그들의 성관습이 지배받는 사람들에게 생식의 기 본적인 여건들을 찾아낼 수 있도록 해준다. 자연적인 혼란상태 속에서는 성행위와 아이의 탄생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심지어는 임신 사실조차 관찰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근친상간 금기만이 모든 것을 명백히 밝혀낼 수 있는 대조와 바교 작업에 꼭 필요한 안전장치 요소와 체계적인 배제를 성에 도입함으로써,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경험적인 조건들을 제공해 줄 수 있 다. 다시 말해 이 금기만이 성행위를 단순한 금욕과 대조시킴으로써 성행위의 결과를 명확히 규정지울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이러한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어떻게 이렇 게 되었는지 따져볼 필요도 없다. 지금 우리가 하려는 것은 전적으로 기본가족에 대한 레비 - 스트로스의 비평을 더 밀고 나가보려는 것이다 . 기본가족을 구성하는 세 가지 유형의 관계는 결국 생물학적인 여건들 울 찾아내기 위해선 따로 떼어내어 구별되어져야 하는 관계들이다 . 실 제로 이 관계들은 모든 혈연제도 속에서 따로 떨어져 구별되어 있다. 혈연제도가 없다면 기본가족이라는 개념 자체도 생각할 수 없었을 것 이다. 사실 우리는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어떤 혈연제도든 언제나 그 속에 이것을 규정하는 구분이 들어 있기만 하면 이 개념을 이끌어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기본가족이 구성의 핵이 아니라 혈연제도의 결과라는 것을 그리고 더 나아가 이것은 민족학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실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장 엄격하고 가장 인위적인 혈 연제도도 생물학적인 혈족 관계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생물학적인 혈족 관계를 발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 혈연제도이며, 존재가 생물학적 혈 족 관계의 모든 〈지식〉을 조건짓는 것도 바로 이 제도이다. 결국 우리는 이 제도는 이것이 만들어내는 모든 관계들보다 우선한 다는 것을 끝까지 인정하면서 그 중요성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모든

것울 이 제도와 관련지어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이 제도가 실제로 다 론 것보다 심지어 생물학보다도 더 우선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지 결국에는 그렇게 되지 않을지라도 부득이한 경우에 이 제도가 생물학 과 상반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적어도 이것이 결합과 부계혈족 관계의 엄격한 구분인 한, 사실 그렇게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제도에 의해 생겨나 이것에 밀접하게 종속되어 있는 사실 에서 출발하여 이 제도를 생각해서는 안된다. 생물학을 출발점으로 보 기를 거부하는 것은 생물학이 〈자연〉에 속하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완전히 〈 문화〉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생물학은 기본가족이 그것들의 가장 작은 공통점을 이루고 있는 제도들에서 추론되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생물학은 초석적인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제도 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제도가 야기시키기는 했지만 그것에 의해 규정받지 않는 다양한 가능성들에 한눈팔지 말고 이 제도를 그 자체 로서 해독해야 할 것이다. 기본가족을 구성하는 세 가지 관계들이 생물학적인 생식의 실제 여 건들을 정확히 포함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구별하는 근친상간 금기가 없다면 이 세 가지 관계들은 지금처럼 뚜렷이 구별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만일 근친상간 금기가 없다면 생물학도 더 이상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생물학적 사실을 취소하는 것이 이 제도의 존재이유인 것은 분명 아니다. 적어도 은연중으로는 생물학적 사실만 이 제거되어야 할 유일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더 거대한 총체의 한 부분일 따름이다. 이것이 바로 생물학적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아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지금 우리가 개진하고 있는 이 생각 속에는 오늘날 논의되고 있는, 임신이라는 생물학적 사실에 대한 무지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 표명도 담겨 있지 않다. 우리의 입장은 원주민의 증거자료에 대해서 과거의 신뢰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한층더 현대의 회의주의도 기 꺼이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겠다.

근친상간 금기가 있더라도 어떤 문화에서는 성행위와 분만의 관계를 결코 발견할 수 없을 수도 있다. 말리노프스키를 비롯한 많은 민족학 자들의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 주장은 오랫동안 원주민들과 같이 생활하고 난 뒤에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이 오늘날 제기되는 논 거에 정말 위배되는지는 의심스럽다. 예전의 연구자들아 그들의 정보 제공자들에게 속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임신에 관한 무지에 대해 항의 해야 하는 것은 바로 〈쿰 그라노 살리스 cum gran o sal i s 〉 이다. 그것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이 회의주의는 보란듯이 원시 인들의 지적 능력을 복권시키려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더 음흉하게 그 자신의 또 다른 형태의 자민족중심주의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이런 분야에서는 아무리 신중하다 하더라도 상식에 호소하는 것 은 필연적으로 약간의 민중 선동적인 태도를 취하게 마련이다. 설마 그럴리가 ! 성행위와 분만 사이의 관계를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 들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서로 다른 사람들로 되어 있는 우리 문화의 지방색 그 자체의 모습이다 ! 되풀이하지만, 이 시론의 문제 제기는 도중에 이런 논쟁에 말려들려 는 것이 아니다 . 여기서 궁극적인 대답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는 임신의 무지라는 주장에 부여했던 예전의 믿음이 오늘날에는 〈아주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비판당하고 있다는 것을 환기시키고 싶을따름이다, 오늘날의 이 분위기에 의해서 기본적인 생물학적 사실 둘을 〈문화〉에서 빼내어서 〈자연〉에 되돌려주려는 경향은 지속적으로 강화될 것이다. 이론의 여지가 없이 〈명백한〉 상식적인 사실들은, 앞 에서 행한 〈기본가족〉이 충분치 못한 개념이라는 지적과 일치하고 있 으며, 더 일반적으로는 문화보다는 소위 과학적 인 진실들을 더 많이 담고 있는 자연이라는 신화적인 사고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모든 것 들과도 일치하고 있다. 아무리 기본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문화에 의해 서 중개되지 않은 전실이란 없다. 그러므로 모든 행들이 뒤얽혀 있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책〉을 우리는 문자 그대로 읽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생물학적 사실을 혈연제도 안에 위치시키면서 모든 망설임과 애매 모호함을 떨쳐버리려 할 때 레비-스트로스가 느꼈던 어려움은 물론 과학을 만들어내는 사고와 신화/제의/혈연제도의 사고는 같은 범주 에 속할 수 없다는 느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느낌은 그러나 오늘날에 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느낌이다. 여기서 우리는 항구적이지도 못한 명시적 인 교리보다는,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1945 년의 논문에 담겨 있는 암묵적인 원칙에 더 관심이 간다. 사실 이 점에 있어서 레 비-스트로스 그 자신보다는 그가 이 논문과 래드클리프-브라운의 텍 스트에서 기본가족의 전제조건울 끌어낸 것과 같이 지금 우리가 도출 해 내려는 어떤 보편적인 전제조건이 더 중요하다 . 더군다나 이 전제 조건의 연장선 위에는 우리의 탐구대상이 그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혈연제도가 생물학적 혈족 관계를 〈무시하지 않고〉 그것과 〈상반되 지 않으면서〉, 반대로 그것을 〈세심하게 고려한다〉는 것이 현대사상의 눈에는 자명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기본적인 생물학적 사실에 대한 우리 지식이 가장 엄격하고 가장 인위적인 혈연제도의 구별이 똑같은 사고방식에서 나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기서는 지금 유사하게 작용하는 똑같은 지적 메커니즘, 죽 자연 속에서는 그 결합과 분리가 행해지지 않는 그런 실체들을 비교 하고 구별짓는 상징적 사고가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분명 상칭적 사고의 결과들이 모두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 다. 〈틀린〉 상칭적 사고와 〈참된〉 상칭적 사고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a) 아이의 출생은 여자들이 귀신에 씌인 데서 기인한다 . 는 〈틀린〉 상징적 사고이며, b) 아이의 출생은 여성과 남성의 성적 결합에서 기인한다. 는 〈참된〉 상징적 사고이다. 구조주의적 의미에 있어서 〈상칭적〉이지 않은 사고는 없다. 그러므 로 예전에 〈상칭적〉이라는 형용사를 은연중에 〈참된〉의 동의어로 간 주하던 것이 찰못이듯이, 오늘날에 그것을 은연중에 〈잘못된 〉 와 동의 어로 간주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레비-스트로스는 모든 문화적 경험 속에는 사실에 근거하기 때문에 유용하며 그것 없이는 문화가 살아남 을 수 없기에 참된 것임에 틀림없는 많은 지식이 들어 있다는 것을 강조한 최초의 사람이다. 따라서 모든 혈연제도는 어떤 방식으로든 생물학적 사실의 관점에서 보자면 본질적인 구분작업을 행하고 있다. 원시문화 속에서는 이 제도 가 종종 필요 이상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 본질적인 생물학적 관계들은 〈최대한울 할 수 있는 자는 최소한도 할 수 있다〉는 원칙에 의해서만 도출되는 것 같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관계들도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천사촌과 의사촌 사이의 구별 또는 씨족들 사이의 구별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모든 구별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서로 인접해 있다 . 다시 말 해서 그것들은 제도를 이루고 있다. 생물학에 절대적인 우선권을 부여 하려는 우리의 입장은 완강한 이 제도와 충돌하게 된다. 우리 입장을 따르게 되면 설명할 수 없는 〈나머지들〉, 죽 그 구조를 잘 알 수 없는 탈선과 예의들을 거의 도처에서 부추기게 되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구조주의가 민족학자들로 하여금 생물학적 사실들을 출발점으로 여기 는 이 입장과 싸우도록 요구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그런데 이 경향은

마치 우리의 제 2 의 천성처럼 작용한다. 왜 그러할까? 그것은 우리 자 신의 제도가 기본가족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장 간단하게 축소된 의혼제도 원칙과 같은 것이어서, 생식의 측면에서 보면 필요충 분한 최소한의 금기와 같은 것이 된다. 이 일치를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이 일치는 언제나 미묘한 문제 인 , 우리 사회가 원시사회에 비하여 특이한가 특이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의 진정한 문맥을 제공해 줄 것이다. 오늘날 현대 가족은 흔히 다 른 혈연제도들만큼이나 자의적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것은 전실이며 동시에 틀린 것이다. 어떤 현상은 어떤 제도에서 보면 자의적일 수도 있지만 다른 제도에서 보자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모든 제 도들울 오로지 생식의 〈 사실 〉 에만 입각해서 보는 한, 우리 제도도 다른 제도들만큼이나 자의적인 것은 분명하다. 사실, 실제 생물학적 기능의 차원에서 보자면 한 남자가 어떤 제도에 의해서, 1) 그의 어머니, 누이, 딸 그리고 그 씨족의 모든 여성들과 결혼하는 것이 금지되는 것이나 2) 오로지 그의 어머니, 누이, 딸과 결혼하는 것만 금지되는 것에는 별 차이가 없다. 여기서 생물학적 메커니즘은 두번째 경우보다 첫번째 경우에서 더 잘 작동할 것이다. 웨스트마크 Wes t ermark (i) 에게는 안됐지만, 만일 전혀 금기가 없다면 이 생물학적 메커니즘들은 틀림없이 아주 더 잘 작동할 것이다. 따라서 생식의 실질적인 여건들에 관해서는 그 이유가 이해된 다. 죽 모든 제도들은 똑같이 자의적인 것이다 . 그러나 모든 제도들에 의해서 은연중에 드러나는 소위 · 〈지식〉의 관 점에서 보지 않고, 바로 이 지식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차이는 분명 있다. 모든 제도들이 생물학적 차원에서 교훈적인 가치를 지니고 ® 웨스트마크 Edward Weste r mark(1862-1939) : 핀란드 태생의 스웨덴인 사 회학자. 유명한 『 인류혼인사 』 (1891) 에서 사회 단위의 가장 초보적 형태로 부 계가족제를 주장하여, 모계제가 부계제에 선행한다는 설을 부인한다 .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제도에는 아주 뛰어난 교훈적 가치가 있다. 모든 금기는 항상 근본적인 관계를 드러내며 역으로 모든 생물 학적 근본 관계는 언제나 금기에서 나온다. 생물학적 지식에 국한해서 보면, 우리 제도와 다론 제도들의 차이는 부차적인 것으로 보인다. 금기의 극단적인 축소는 이미 밝혀진 지식을 강조하거나 더 두드러지게는 하지만 어떤 새로운 지식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생물학의 예증둘은 우리 제도의 상대적 특수성을 암시 는 할 수 있어도 증명은 하지 못한다. 앞에서 우리는 사실과 지식의 혼동이 야기하는 뜻밖의 걸림돌을 피 하기 위하여 생물학을 강조했다 . 그래서 우리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죽각적인 예에 의거해서, 상징적 사고는 비록 그것이 가장 신화적인 사고라 하더라도 어떠한 산화적 /문화적 상대주의도 찾지 못한 차이들 의 관계, 그 진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 차이의 관계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었다 . 그러나 생물학의 예는 우리가 의도하는 문맥에 비해서 너무 초보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 다른 예 , 죽 문화에 관한 예로 넘어가 앞에서 행한 고찰들의 연장선 위에서 우리들의 특수성이 민족학이라는 학문에 특별한 길을 열어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레비-스트로스적인 의미에 있어서 혈족 관계라는 말은 이족결혼 집 단둘 사이의 교환회로를 규정짓는 시스템이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게 한 여성을 건네줄 때마다 건네받는 쪽 집단은 이 시스뎀에 따라서 원래의 첫번째 집단이나 아니면 제 3 의 집단에게 또 한 여성을 건네중 으로써 이에 보답할 것이다. 이 보답은 똑같은 식으로 다시 보답받게 될 새로운 요청을 이루게 되는데 이런 식으로 계속 순환될 것이다. 아 무리 커더라도 결국 이 순환의 원은 닫히게 마련이다. 바로 이 시스뎀 으로부터 의문과 해답이 나오는데 그것들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언 제나 같은 순서로 일어난다. 전통 구조주의적인 의미에서의 언어는 존 재하지만 아직 촘스키적인 의미의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새

로운 문장을 만들어내고 결코 말해전 적이 없는 것을 말하는 능력, 전 정한 언어의 무한한 창조성인 본질적안 특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편으로는 혈족 관계라는 이 말이 불완전하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사회에는 이 말이 없으며 특히 우리 사회 에는 이 말이 쓰이지 않고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우리 제 도가 그러하듯이 금기를 심하게 제한하는 제도는 일상생활에서 사람이 정한 모든 규칙들을 없애는 경향이 있다. 달리 말해서 이런 제도는 결 혼 교환이라는 말도 없애버린다. 현대사회에서 결혼은 이제 더 이상 특정한 결혼회로 속에 편입될 수가 없다. 물론 이족결혼이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다. 이족결혼은 존재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것은 인종, 경 제, 국가에 의한 끈질긴 구분에도 불구하고 전례가 없는 아주 다양한 • 사람들 사이의 혼합을 실행하고 있을 정도이다. 만일 정보가 충분하다 면, 옷의 유행이나 스펙타클 등과 같은 아주 다양한 문화적 중개를 통 하여 이러한 결합을 결정짓는 요인들을 추적해낼 수도 있울 것이다. 과학적 결정론의 의미에 있어서 이족결혼은 분명히 규정되어 있다. 하 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을 사회종교적 규칙들의 중개 에 의한 규정은 아니다. 결합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이 오로지 결혼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혈족관계에 대한 특수의 언어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만인이 해야 할 행동을 알려주고 만인에게 다른 모든 타인의 행위를 알려주는 그러한 규범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예상 은 기껏해야 동계적인 것이지 개인의 수준에까지는 미치지 않는다. 언 어의 메타포 때문에 이 본질적인 차이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 제도의 툴 안에 있는 한, 그것이 아무리 불완전하다 하더 라도 또 심지어 원시제도에서도 제도가 어떤 언어에 동화되는 현상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게다가 이 동화는 이 제도들과 우리들의 상대적인 제도부재 상태의 차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사실, 의국어

습득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모국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 이다. 우리가 모국어를 소유하고 있는 것만큼, 그리고 그보다 더, 우리 는 모국어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국어는 의국어에 대한 우리의 언 어구사 능력을 박탈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지배하면서 동시에 어떤 질투를 나타낸다고 할 수도 있다. 언어에 대해서 · 아이들은 망각능력에 따라 동화능력을 나타낸다 . 그리고 종종 위대한 언어학자들은 더 이상 그들의 진정한 고유 언어를 갖고 있지 않기도 한다 . 결혼에 관한 말의 마지막 흔적까지 제거했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그 러한 말들을 계속 쓰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갖고 있는 관심과 무관하 지 않으며, 또한 그것들을 판독해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우리의 예 의적인 능력과도 무관할 수가 없다. 우리 사회는 혈족관계의 모든 언 어를 배울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는 그것에 관한 어떠한 언 어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제도들을 해석할 뿐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제도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이족결혼 언어의 애초 원칙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존재 가능한 무수한 제도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모든 제도와 그 제도 의 체계 사이에는,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혈연관 계의 〈언어들〉과 『혈족관계의 기본구조 Les Str u ctu r es elementa i r es de la p aren t e 』 에 나오는 레비-스트로스 자신의 언어 사이에는, 언어에 대한 전통구조주의적인 개념과 촘스키적인 개념의 차이와 똑같은 유형의 차이가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의 민족학의 본질은 민족학자로서의, 그리고 문화연구가 로서의 우리 임무와 절대로 무관하지 않다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단지 혈연재도 때문에 민족학적 탐구로 돌아선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여러 현상들을 병행해서 보고 있는 것이다. 민족학적 탐구를 끈질기게 행하고 있는 사회는 또한, 금기체계를 기본 가족에게만 국한시키고 있는 사회이다. 이 사실을 우연의 일치나 한낱

단순한 일치로 보아서는 안 된다. 광의에 있어서의 〈 문화 활동 〉 의 중개를 통한 연구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제의와 혈연관계의 언어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양식과 그 다음 양식 사이에 단절은 없으며, 〈희생제의적인〉 오해의 요소들은 어떠한 단계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것 이 우리의 이해가 심오해지고 다양해지거나 조직화되는 것을 막지는 . 못한다. 민족학이 전정한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그 스스로의 기반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민족학자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낭만 적 주인공을 만들어내듯이 여러 유형 중에서도 특히 민족학자를 만들 어내는 그 사회에 대한 성찰이어야 한다. 민족학 문헌 속에서 민족학 자들의 사회는 그것에 대해 말한다고 할 때에도 언제나 괄호 안에 있 다. 원시사회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고 주장되던 예전에는 이 괄호가 명시적이었다. 그 반면에 이 사회는 여러 사회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여러 사회들이 서로 구별되는 바로 그 정도로 이 사회도 다른 사회들 과 구별된다고 주장하는 오늘날에 와서는 이 괄호가 암시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됐다. 민족학에서 우리 특권층의 오만 울 나무랄 채찍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혈연제도가 오스트레 일리아의 제도나 크로-오마하 Crow-Omaha 족 ® 제도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날이 언젠가는 오고 말 것이다. 우리의 제 도는 우리들과 밀접한 그런 형태의 지식에 관해서는 전혀 자의적이지 않다. 이런 점에서 우리들을 본질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회생제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반(反)자민족중심주의의 협박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이 반자민족중심주의는 어떤 자민족중심주의의, 모순되지만 그러나 논 리적인 최후 술책이기 때문이다. ® 아메리카 인디언족. 특히 크로 Crow 족은 부계의 사촌과 모계의 사촌을 구별 해서 부르는 독특한 혈연제도를 갖고 있다.

* 현대적 사고는 문화제도 속에서 자의적인 것들을 수 없이 많이 발 견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를 구성하고 있는 대부분의 명제들은, 앞에서 얘기한 b) 명제의 의미에 있어서의 〈 참된 것 〉 의 범주에도 들 수 없으 며, a) 명제의 의미에 있어서의 〈틀린 것 〉 의 범주에도 들 수 없는 것 이다. 이것들은 거의 언제나 그 문화 밖에서는 어떠한 현실에도 부합 되지 않는 제 3 의 범주의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면, c) 외사촌둘은 결혼에 의해서 ' 특별한 인척 관계 를 갖는다. 와 같은 명제이다. 이 엄청난·양의 자의적인 것들은 결국 우리가 그 목록을 만들고 그 것을 판독할 수 있을수록 언제나 더 많이 드러나는 인간 사고의 〈 원 죄〉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의적인 것 옆에 있지만 깊이 파묻혀 있는 진실과 진실의 씨앗을 축소시키거나 심지어는 시야에서 완전히 • 놓쳐버리는 사상가들을 나무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총체적으로 〈상 칭적 사고〉는 신화적인 것에 동화된다. 현실에 직면하면 그것은 자율 성을 부여받는데, 이 자율성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영광스럽게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현실과 더 이상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실망만 안겨주는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리하여 인류의 문화유산 전체가 전면적인 의혹의 대상이 된다. 우리가 인류 문화유산에 관심있 어 하는 이것을 〈탈신비화〉 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이 단순한 이해 관계의 결집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내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인류는 우리가 그 원인을 처음으로 밝혀낼 거대한 속임수의 희생물이다. 문화의 이 허무주의에는 당연히 〈과학〉에 대한 물신숭배 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가 인간들을 사로잡고 있던 인간 사고의 원죄를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거기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며, 우리는 예전의 모든 사고에 들어 있던 부조리를 발견할 수 있는 〈과학〉이라는 근본 적으로 다른 사고를 구사하고 있다는 식이다. 아주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 허위는 아무런 결함이 없었기 때문에, 이 과학은 분명히 과거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 속에서 평범한 인간, 혹은 심지어 자신의 과거와도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어떤 초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우리들을 과거의 허위로부터 단번에 빛나 는 과학적 진실로 옮겨놓기 위하여 이 인간성 해방자는 우리에게서 모든 신화적 사고의 뎃줄을 끊어내야만 했다. 엄격하고 순수한 우리의 과학은 분명 아무런 예고나준비도 없이 아루어전 어떤 〈인식론적 단 절 〉 의 결과임 에 틀림 없다. 과학의 이 순결주의는, 〈진실된 것은 자의적 인 것과 공존할 수 있으 며 나아가서는 이 자의적인 것에 근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꺼려하는 깊은 불쾌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의 사고습 관에 비추어볼 때 사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진실된 사고와 소위 신화적 사고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터무니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주 합리적이 고 분명한 기원을 찾으려 하는 것은, 아마도 문화에 관해서 우리가 확 실히 알고 있는 것이 얼마 없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과 비과학이라는 이원론의 기원은 과학시대 초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형태는 아주 다양하다. 문화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면서 그것에 접근할수록 이 이원론은 더 심해전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인위적인 혈연제도가 생 물학적 사실들을 〈세심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생각에 레비-스트로스가 놀랐던 것도 바로 이 이원론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야만적 사 고.e에서, 하나에는 〈야만적인 잡일의 사고〉라고 또 다른 하나에는 〈기 술자의 사고〉라고 이름을 붙이는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는 아주 유연 한 형태로 이 이원론을 해명하려 애썼다. 결국 우리는 레비-스트로스에게는 전실을 따로 떼어내어서 그것을

〈자연〉이나 사고의 〈기술자〉에게, 아니면 그 자신이 〈 자연주의적 사 고〉라 부르고 있는 이 둘의 애매한 결합에다 부여하려는 끈질긴 경향 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구조주의적 분석에 관한 논문에서 그는 혈연제도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 자연주의적 사고〉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이 사고가 틀려서가 아 니라반대로 너무 지나치게 전실되어서 〈상칭적 사고〉의 환상들을 고 려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구조주의 민족 학에는 일시적이며 과도기적인 어떤 것이 있으며 , 이 민족학은 상징적 사고에 의한 우회적인 방법에 불과하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상징 적 사고를 더 잘 〈해체하기〉 위하여 말하자면 우리 문화의 헛된 꿈을 없애고 자연과 과학이 손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바로 이 상칭적 사고로부터 그 무기를 빌려오고 있다. 물론 이 모든 문제들은 상칭적 사고의 기원이라는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로 수령한다. 만일 상칭체계가 결코 〈어떤 실제 상황의 자연발생 적인 발전〉이 아니라면 그리고 자연과 문화 사이에 단절이 있다면 기 원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것도 긴급하게 제기된다. 레비-스트로스와 일 반적인 구조주의는 기원의 문제를 계속해서 순전히 형식적으로만 고 려하려 한다. 자연으로부터 문화로의 전의는 〈인간 본성의 영원한 조 건〉 속에 뿌리박고 있다. 이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있다면 진정한 과학이 등을 돌릴 거짓 문제만 있을 따름이다. 무시무시한 사건이나 거대한 가공의 대재앙이 나타나는 곳은 바로 신화인데, 그런 구절에 신경쓸 필요는 없다. 『토템과 터부』는 다른 것들과 유사한 기원 신화일 뿐으로 단지 우리의 호기심만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다론 신 화들처럼 취급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인용한 『언어인류학의 구조분석 』 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 문장이 우리가 살펴보려는 관 점들을 반영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의 관심을 끄는 망설임을 반영 은 안하지만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아주 예의적으로 상칭

적 사고의 출현으로 제기된 이 문제가, 이미 해결된 것인지 아니면 아 직 해결해야 할 것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하여튼 실질적인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 그런데 상징적 사고의 출현을 이해하려고 자연주의적 해석에 의지하는 것 이 합법적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일단 상칭적 사고가 주어지게 되면, 그 해석은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 그것보다 앞선 현상 들과 차이가 나는 것만큼이나 근본적으로 그 본질이 변하게 마련이다. 만일 상징적 사고가 하나의 주어지는 여건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그 것의 출현을 포착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반대로 우리가 그것을 포착하 지 못하기 때문일까? 이 출현은 눈에 띄지 않으면서 그 뒤의 구절들 이 가정하고 단정짓는 것처럼 소리없이 조용히 변화하는 것일까, 아니 면 반대로 진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일까? 앞의 문장은 두번째 가능 성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죽 이 상칭적인 출현에서 우리가 당 연히 따져보아야 할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출현보다 〈앞선〉 현상 둘은 무엇일까? 그리고 〈자연주의적 해석〉에 대한 연구는 어떻게 해 야 하는 걸까? 비록 그것이 간접적으로 그리고 거의 무심코 한 것이라 하더라도 여기서 레비-스트로스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한 최초의 사람이다. 우 리가 지금 이 문제에 답하려 한다는 것과 그리고 그 대답이 무엇인지 를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대답만이 원초적 폭력 주변을 맴돌면서도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아니 형식주의에 빠져서 폭력을 극복하는 것을 스스로 금하고 있는 현대사상의 모순과 진되유곡의 실 상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상칭적 사고의 기원은 희생물 메커니즘에 있다. 우리가 특히 의디푸 스와 디오니소스 신화 분석에서 보여주려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기본적인 〈중재〉에 입각해서, 상칭체계에는 〈자의적인 것〉과 〈진실된

것〉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집단 살해는 그에 앞서 나타났던 극도로 흥분된 절정기와는 아주 대조적인 평정을 되돌려준다. 어떤 사고에 적합한 조 건은 그 사고를 유발하기에 적합한 대상과 동시에 나타난다. 인간은 기적을 새롭게 하고 지속시키기 위해서 기적의 힘을 빌린다. 따라서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기적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사고의 첫번째 결과들이 바로 신화, 제의, 혈연제도 등이다. 상칭적 사고의 기원은 동시에 언어의 기원이다. 죽 거기에서 모든 명명과 폭력과 평화의 거대한 교차가 나오는 진정한 기원이다. 희생양 메커니즘이 언어를 부추겨서 스스로가 그것의 첫 대상으로 인정받을 때 이 언어가 무엇보다 먼저 최악의 것과 최선의 것의 결합과 신의 현현 그리고 그것을 기념하고 회상하는 제의와 신화를 말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언어에는 오랫동안 성스러운 것이 녹아들어 있었기 때문 에 언어가 이미 성스러운 것처럼 그리고 성스러운 것에 의해 수여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문화적 의미들은 완전한 대칭이 지배하는 곳에 차이를 설정하고 같 은 것 속에 차별을 만들며 그리고 상호적 폭력의 혼란을 안정된 의미 로―― 예를 들어 한편에는 〈페스트〉, 다른 한편에는 〈천부살해〉와 〈근친상간〉――바꾸기 때문에 이러한 문화적 의미들 속에는 어쩔 수 없이 〈자의적인 것〉이 들어 있게 마련이다. 이 구별 메커니즘은 어떠한 것으로도 구별되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잘못 작용하게 된다. 아니,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공동체 전체의 뚜렷이 구별된 통일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잘못 작용할 수밖에 없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메커니즘으로부터 의미들이 생겨날 때, 이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은 그 의미의 자의성을 깨닫지 못하는 법이다. 초석적 과정에 뿌리박고 있는 이 구별, 배제, 결합의 메커니즘들은 우선 초석적 과정에 영향을 미치며 그래서 종교적 사고가 생겨나게 한다. 그렇다고 이 메커니즘들이 종교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 이것은 모든 사고의 메커니즘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거부하거 나 경멸하는 호기를 부릴 수도 없다 . 왜냐하면 우리에게 이것 말고 다 른 메커니즘은 없기 때문이다 . 다른 한편으로 이것들은 그렇게 나쁜 것만도 아니다 . 원초적 과정 아닌 다른 곳에서 행해지게 되면 그것들은 실질적인 차이들을 도출하여 현상들을 분석하고, 인간의 생식과 같아 상대적인 것이 전혀 없는 여건들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최근 실험실에서 〈 확인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 때문에 어떤 여건들이 과학적 진실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과학적이라면 과거에도 언 제나 과학적이었다. 따라서 어떤 근본적인 발견들은 분명 순전히 단순 한 〈 자질구레한 것 〉 이다. 종교적 명제에도 물론 오류가 많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현대의 거만한 합리주의와 같이 순전히 상상적이며 전혀 근거없는 것은 둘어 있지 않다. 원시종교라고 해서 터무니없는 생각이나 유령이나 환상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우리가 실패해 온 것과 마찬가지로 원시종교도 단지 희생양 메커니즘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실 질적으로는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원시적 사고는 우리 사고와 전혀 다르다고 여기도록 하는 것은 우리 사고와 원시 사고의 공통점이기도 한, 바로 이 똑같은 실패 때문이다. 원시적인 것을 멸시 하는 것은 결국 계속되는 원시성에서, 죽 계속해서 이 희생양을 몰라 보는 것에서 나온다. 우리들에게서는 그 모습이 희미해져 있지만 초석적 과정이 원시적 삶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이 우리의 삶과 인식을 크게 변화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폭력과 이 폭력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면서 동시에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이 근 본적 오해는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모르 는 것을 밝혀줄지도 모를 것을 우리로 하여금 모두 환상이라고 부르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원시성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며, 종교적인 차원에서 거짓은 사소한 실수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란 것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이런 원시성의 계속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인간의 상호파멸을 막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희생물과 연관되어 있다. 인간의 현실 정복 충동도 희생물에서 나오며, 또한 폭력에 대한 필수 적인 보호책을 제공해 주면서 모든 지적 승리의 수단을 주는 것도 바 로 희생물이다. 상칭적 사고의 신화들은 애벌레가 짜는 고치 를 연상시 키는데, 이 피난처가 없다면 애벌레는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원시문화 속에 있는 엄청난 양의 자의적인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원시문화는 우리보다 초석적 중재에 훨씬 더 가깝다고 가 정 해야 하는 데 이 가까움은 그 문화의 최소한의 역사성과도 같 은 것 일 것 이다. 이 중재는 지나친 면이 있다. 그리고 역사상 사회들이 혼 란의 격동기를 겪고 난 다음에 급변하여 완전히 구분되고 분할되어 단단하고 응결된 형태로 정착할 때마다 이 중재는 어령풋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많은 차이들을 만들어낸다고 가정해야 할 것이다. 제의와 혈연의 언어를 되 풀이하는 복잡하게 끼워 맞춰진 문화라고 해서 , 사회질서의 체계적 요 소가 많이 소멸되어 더 유동적안 사회보다 질서정립적인 폭력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아 간격을 순전히 시간적 의 미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어디에나 있는 이 엄격한 차이 때문에 사 회의 안정이 가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지적 모험에 그 리고 더욱 특별하게는 문화의 기원을 향하여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의 탐구에는 분명히 불리한 것도 사실이다· 안간들이 자신들의 문화에 관한 발견을 하기 위해서는 제의적인 엄 격한 사고 그 대신에 종교와 같은 메커니즘을 유연한 방법으로 이용 하는 어떤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 문화적 질서는 해체되고 지나친 차이들은 소멸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이 소멸이 새로운 차별화의 격동 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심한 폭력을 야기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이유 때문에 원시사회들은 이 조건들을 결코 충족시키지 못했다. 폭력의 악순환이 시작되면 이 순환은 너무 빨리 끝이 나서, 느끼기에는

어떠한 중요한 결과도 생겨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이미 암시했듯이, 그 반면에 서구 현대사회는 아주 폭넓고 지속적인 위기의 순환으로 규정되어져야 할 것이다. 현대사회의 핵심 은 한총 더 격심해진 희생위기 속에 정착할 수 있는 그 능력에 있을 것이댜 그러나 이 정착은 물론 평화롭고 근심없는 안주와 같은 것은 아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자연과학에, 다음에는 문화적 의미에, 마지막 으로는 초석적 중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 가능성을 열어준다. 원시사회에 비해서 우리의 혈연제도가 아주 축소되어 있는 것은 그 것 자체로 위기의 요소를 이룬다. 서양은 언제나 위기에 처해 있으며 이 위기는 계속해서 확대, 심화되고 있다. 그리고 사회의 민족학적인 본질이 붕괴될수록 서양은 점점더 서양 자체로만 되어간다. 예전에도 서양은 광의에 있어서의 어떤 인류학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성향은 우리에게서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 현대의 위선적 요소가 심해질수록 점점더 절대적인 것이 된다. 논쟁적 성격이니 진보의 리듬이니 하는 지식의 모든 양상은 바로 이 현대의 위기에서 나온다. 우리의 인류학적 성향을 서양사회의 일반적 본질이 암시하고 있는데, 비극의 위기와 함께 의디푸스의 의문이 더 심해지듯이 우리의 이 성향도 이 위기가 심해질수록 더 강화되어 간다. 이 위기는 모든 탐구 단계들과 그 발견들 그리고 이론적 전제조건들이 서로 대체되는 순서 등을 알려줄 것이다. 그것이 엄격한 의미에 있어 서의 탐구이든 아니든간에, 모든 지식 영역에서는 근본적인 역사적 사 실의 가치가 최우선권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여느 문화와 마찬가지로 우리 문화도 주변에서부터 중심 쪽으로 풍 화되어 가고 있다. 사회과학은 이 풍화를 합리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이 용하고 있는데, 객관적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항상 이 해체의 파편 들이다. 실제적인 혈연 규칙들 그리고 더욱 일반적으로는 의미체계들 이 이런 식으로 구조주의 민족학의 실증적인 인식의 대상이 된다. 구조주의 민족학을 본질적으로 특칭짓는 것은, 그것이 실증적인 규

칙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금기와 규칙이 동일한 대상의 상반된 두 면을 이루고 있을 때 어떤 것이 더 본질적인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문제를 제기하고서 규칙 쪽으로 딱 잘라 결론짓 는다. 이족결혼제도에는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더 많다 . 이것은 타 인의 사회적 존재를 긍정한다 . 동족결혼을 금하는 것은 단지 생물학적 가족 이외의 다른 집단과의 결혼을 유도하기 위해서이다 . 그것은 근친결혼이 생물 학적인 위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족결혼이 사회적으로 득이 되기 때문이다. (『혈족 관계의 기본구조』, p. 595) 이 의에도 많은 구절을 들 수 있지만, 이 저서 내용을 대신하는 최 소한의 이 고백으로도, 레비-스트로스의 이 저서에서는 〈 근찬상간의 열정〉이 아니라 이 문제를 가라앉히는 방식이 주목할 만한 것이란 것 울 우리는 충분히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금기가 금기로, 죽 부정적인 모습으로 인식되지 않고, 단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어떤 실제적인 의무의 이면이나 아니면 그것의 반대급부에 불과한 것으 로 여겨진다. (……) -· 결혼의 금기들은 부차적으로 파생된 금기들이다. 이 금기들은, 인간을 대상 으로 하기 이전에 다른 것을 겨냥하도록 규정된 것이었다. 이 점에 있어 원 주민의 논리가 현대의 수많은 주석보다 얼마나 더 통찰력이 있는가 ! 누이, 어머니 혹은 딸이라고 해서, 그것 자체로 그녀둘이 배우자 대상에서 탈락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근친상간은 도덕적으로 죄가 되기에 앞서, 우선 사회적으로 부조리한 것일 뿐이다. (……) 근찬상간은 어머니나 누이나 딸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칙이라기보다 는 어머니 누이, 혹은 딸을 주도록 강요하는 규칙이다. (『혈족 관계의 기본

구조』, p. 569)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금기가 우선한다고, 레비-스트로스와는 반대 방향으로 이 문제를 이미 결론지었었다. 금기가 우선한다는 사실은, 앞 서 제기한 우리의 해결책이 총체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긍정적 인 교환이란 기실 금기의 이면, 죽 남성들 사이의 경쟁을 피하기 위한 〈기피 터부 avo i dance t aboos 〉라는 조작의 결과일 뿐이다. 동족결혼의 나 쁜 상호성에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이 이족결혼의 좋은 상호성으로 빠 져든 것이다. 조화 기능을 가진 제도에서 위협이 희미해질수록 그 규 칙의 긍정적인 면이 전면에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렇지만 원칙적으로 결혼 규칙들은, 질투나 사랑의 원한과 같이 무용 기술과는 전혀 무관한 감정 속에서 고전 희극의 인물들이 그들도 모르는 사아에 행하는 완전히 기하하적인 발레의 피겨와 유사하다. 레바-스트로스는 이것들 역시 〈위기〉를 나타내는 하나의 문화적 현 상인 공포증과 거기서 나오는 간지러운 듯한 쾌감의 역할을 과소평가 하고 있는데, 그것은 분명 일리가 있다. 그렇다고 금기가 먼저가 아니 라는 의미는 아니다. 규칙이 우선한다는 가정으로는 우리 사회를 전체 적인 민족학의 파노라마 속에 끼워넣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 하는 것만으로도 금기가 우선한다고 충분히 결론지울 수 있을 것이다. 규칙을 본질적인 요소로 간주하게 되면, 긍정적인 규칙은 없고 단지 사실상 의혼제라는 본질적인 금기로 한정되어 있는 우리 사회를 인류 라는 전체에서 따로 떼어내는 결과가 된다. 구조주의는 보통 우리 사 회에는 특이한 것이 전혀 없다고 스스로 단정하지만, 규칙을 강조함으 로써 결국 우리 사회에다 아주 특이한 것을 부여하고 있다. 이 사회를 가장 낮게 평가하려고 애쓰는 것은 또한, 결국 성스러운 것에서 나오는 자기 배제를 통해서 자신을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둘을 다른 인간들과 같은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레비-스트로스가 주장하는 우선 순서를 거부하고 우리 사회가 〈상대적으로〉 특이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왜 규칙에다 우선권을 부여하였을까? 혈연 관계 구조를 체계화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 그는 민족학을 인상주의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은연중에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금기보다 제도가 우선한다는 이 주장은, 바로 이 민족학자가 스스로 민족학을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이유들을 들 수 있지만, 결국 이 이유들은 모두 초기단계 학문의 역사성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귀결될 수 있다. 실증적 규칙이 제일 먼저 두드러질 것이다. 구조주의의 시대는 도처에서 제도들이 조금씩 무너져가는 시 대이다. 모래 속에서 드러나는 바위처럼 금기가 백일하에 나타나기 이 전에, 그 속의 본질적인 것 속에서 금기가 절실히 요구되기 이전에, 이 학문은 이 폐허를 말끔히 치워버려야 할 것이다 . 금기가 먼저라는 증거는, 또한 이것이 최후의 것이기도 해서 제도가 사라졌을 때에도 가장 결정적인 위기 순간까지 금기가 존속한다는 사 실이다. 금기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해명되어 있지 않다. 오늘날 계속 금기 위반은 늘어나지만 본질적인 차이룰 보호하고 있는 희생제의의 퇴조 속에서도 금기는 여전히 남아 있다. 금기에서 출발하여 문화의 본질과 기원에 도달하려는 모든 노력은 지금까지 항상 실패했었다. 실패하지 않은 경우라도 그 노력은 보람도 없이 이해받지도 못했다. 우선 『토템과 터부.J1가 그런 경우이다. 이 책 에서 프로이트는 이족결혼에 있어서 규칙보다 금기가 우선한다는 것을 분명히 주장한다. 레비-스트로스 식의 접근방법은 그래서 단호히 거부 된다. 제도 설립자의 의도를 성의 의혼제적인 제한이라 간주하면, 어떤 이유에서 이러한 제도들이 만들어졌는지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 결국 여기에서 마땅히 이족결혼의 근원이라고 보아야 할 근친상간어] 대한 공포증이 나오는 것이다.

금기가 우선하는데, 이 우선은 언제나 〈 공포증 〉 이라는 말로 나타나 있다. 최근 연구 결과를 통해서 금기의 기원을 따지기 위해 우리는 구 조주의적인 관점을 유지한 채 〈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행해야 할 것이 다. 자크 라캉 Jac q ue s Lacan 과 그 주위 사람들이 〈프로이 트로의 복귀 > 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들이 의도하는 것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이 작업은 분명 필요한 것이며 그것을 구상한다는 사실 그 자체도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의 견해로는, 이 작업이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정신분석학에로의 복귀로 동일시함으로써 이미 실패를 예정하고 있었 던 것 같다. 레비-스트로스는 혈연제도에서 출발하여 기본가족을 생각해야 한다 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더 이상 제도에다 우선권을 부여하지 않고 금기에다 우선권을 부여하는 한, 이 방법론적인 전도는 계속 유효할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금기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금기와의 관련하에서 가족을 생각해야 한다. 본질적인 구조주 의가 존재한다면 그곳은 바로 여기이며, 따라서 우리는 정신분석학에 대한 구조주의적 해석은 없다고 생각한다. 앞의 두 장에서 우리가 밝 히려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의 대조는 정 신분석학의 분열과 청산을 가져옴과 동시에 〈동일화〉의 모방, 『토템과 터부』의 집단 살해와 같은 프로이트의 본질적인 직관들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줄 것이다. 그 반면에 라캉은 정신분석학의 주요한 개념들, 특히 의디푸스 콤플 렉스 쪽으로 향하는데 그는 이 의디푸스 콤플렉스를 모든 구조화와 상칭적 범주로 들어가는 원동력으로 삼으려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것은 어떻게 치장하든간에 프로이트가 전혀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프 로이트의 사소한 말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충성을 맹세하지만, 이렇게 나가다가는 결국 이 콤플렉스를 규정하고 있는 모든 텍스트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더더욱 찰못인 것은, 이 텍스트들에 가득 차 있는, 전혀 〈의디푸스적〉이지는 않지만 뛰어난 프로이트의 직관들을 놓쳐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게서 바로 이 텍스트와 이와 유사한 텍스트들 의에는, 의 디푸스 콤플렉스에다가 〈 만능해결사 〉 의 역할을 부여하는 텍스트가 전 혀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대가의 텍스트나 분명하고 일관성 있게 행한 이 덱스트에 대한 수정이나, 그리고 어떠한 종류의 민족학적 해석에도 의지하지 않고서, 우리는 아주 희미해져서 말라르 메의 시처럼 되어 결국은 포착할 수 없을 정도가 된 〈 의디푸스 콤플 렉스〉를 왜 여전히 모든 것의 〈왕이자 아버지 〉 로 보고 싶어하는지롤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첫번째이자 근본적인 이 실패는 물론 거의 도처에서 그 영향이 나 타난다 . 참 애석한 일이다. 왜냐하면 현대세계에서 늘어나고 있지만 대 개는 눈에 띄지 않고 넘어가던 거울 효과가 여기서는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이 효과를 〈 상상적인 것 〉 이라고 규정 짓고서 나르시시즘 이론, 죽 도처에서 자기자신의 반영을 찾으려는 욕 망과 결부시키고 있다. 우리는 그에게 영향을 준 19, 20 세기의 문화적 나르시시즘에서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 속에서도 대상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항상 자신의 실패를 감추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실제로는 그것을 〈타인〉에게서 철망적으로 찾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항상 그 찬란한 자율성을 이미 갖고 있는 것처럼 가장해야 한다는 것 울 알고 있는 어떤 욕망에 의해 널리 유포된 신화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나르시시즘은 그러나 전실과는 정반대이다. 사람들은 〈바로 그것〉에 의해서 유혹받고 〈전혀 다른 것〉에 의해서 실망당한다고 주 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롤 유혹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며 그를 실망시키는 것은 〈바로 그것〉, 아니 오히려 그가 그러리라고 간주하는 모든 것일 따름이다. 모방이 일단 상호적 폭력에 갇히면서 순전히 적 대자에게만 집착하게 되면 이때부터는 그것을 방해하는 것만이 그것을 억제할 수 있다. 인간을 폭력의 무한한 〈모방〉 속에 빠뜨립으로써 모든 초월을 깨뜨

려 지워버리고 파괴하는 사회에서가 아니라, 아직 사회의 통일성이 구 현되어 있던 모든 초월 속에서 사회구조의 열쇠를 찾아야 할 것이다. 현대의 영원한 위기에서 볼 때 신프로이트주의의 관점에도 부분적이고 간접적인 상대적 진실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볼 때 이것도 역시 사태를 거꾸로 보고 있다. 이것은 공시적인 구조들조차 포착할 수 없지만, 아마 제대로 파악하게 되면 그 자신의 이면뿐 아니 라 『토뎀과 터부』와 같은 시도의 타당성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형 식주의에 대한 교조주의적인 집착은 언제나 형식을 완전히 해독해 낼 수 없음을 드러낼 뿐이다. 우리는 계속 정신분석학에 충실하면서 혈연 관계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혁명의 이쪽에 머물러 있거나, 아니면 정신분석학을 포기하고 이 혁명을 금기의 핵심문제로 삼고서 기원을 실질적 문제로 인식하면서 『토템과 터부』가 시작한 이 시도를 계속해 나가야 할 것이다. 오늘날 사고는 병들어 있다. 그것은 그것이 〈살아 있는〉 얼마 안되는 곳에서 분명한 병리학적 징후들을 나타내고 있다. 사고는 원 (圓) _ 비극에서 유리피데스가 이미 묘사했던 원――속에 사로잡혀 있다. 사 고는 원 밖으로 나가려 하지만 실제로는 점점더 깊이 거기에 빠져든다. 그 반경이 줄어들수록 이 사고는 언제나 더욱 축소된 강박관념의 원 속에서 더 빨리 순환한다. 그러나 만연해 있는 소심한 반(反)주지주의 가 상상하는 것처럼 〈순수하고 단순한〉 강박관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고가 이것을 피하려면 이 원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 다면 광기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그 중심에 도달해야만 가능할 것이다. 당장에 사고는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면서 밖으로부터 이 원을 제압하기 위하여 원에서 나오려 할 것이다. 신화의 원을 벗어나기 위해 계속 자기 사고를 순화시키려 하는 〈전위적인〉 시도가 바로 여 기서 나온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자산을 완전히 비인간적으로 만들 것 이다. 회의에 시달리는 사고는 언제나 〈과학성이라는 계수〉를 강조하 려 한다. 그래서 사고는 자기 기반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 아주 난해한

정리 (定理)들로 자신을 뒤덮고 이해할 수도 없는 약호들을 많이 만들 면서 이해하기 쉬운 가설 같은 것을 모두 없애버린다. 이렇게 해서 사 고는 낙심해 있는 마지막 정직한 사람을 엄축한 광장에서 무자비하게 내쫓아버린다. 사고가 중심에 도달하게 되면 이전에 행한 희생제의들이 덧없었다는 것을 간파하게 될 것이다. 또한 신화적 사고는 신화를 비판하면서 그 신화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고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비록 이 사고가 신화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해 내지 못했다 해서 원칙적으로 이 사고가 의심스러운 것이라는 뜻은 ' 아니며, 또한 그 거슬러 올라감이 실질적이지 않다는 의미도 아니다. 새로운 말을 만들어낼 필요는 없다. 불안해 하지 말자. 우리의 〈탐구〉 는 결국 목표에 도달할 것이며 우리의 방황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진실을 감추고 있는 희생의 차폐막은 계속 낡아가고 있으며 그것들을 강화하여 다시 세우려는 데에 반대하는 우리들의 노력 때문에 그 효 력이 쇠되하고 있다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아마도 그렇게 생각 안하는 것이 더 힘들 것이다. 우리의 탐구는 이제 곧 끝날 것이다. 그것은 어떤 집적과정이 진행되면서 논쟁의 결과들이 정성껏 모아져서 체계화되고 합리화되어서 실증적 지식의 바벨탑이 하늘을 기어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은 바로 이 바벨탑이 와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서 예전에는 사람들 스스로가 자제해 왔기 때문에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자유조작 수단들이 초석적 폭력을 효력 있게 만들면서 진실의 폭로를 막아왔기 때문에 금지되어 왔던 폭력의 진상에 대한 완전한 폭로를, 이제부터는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구의 의디푸스가 자신에게 파둔 함 정은 물론 이 〈탐구〉가 끝나는 바로 그 순간에 다시 닫히게 된다. 왜 냐하면 여기서 함정과 탐구는 일체가 되기 때문이다. 거대하고도 끔찍한 기술로 무장된 폭력은 이제부터는 공공연하게 우리 모두를 지배한다. 바로 이 폭력이 세상사람 전부를 꼼짝 못하게

휘어잡고 있다고, 〈 전문가 〉들 은 마치 당연한 것인 양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하고 있다 . 서구 전문가들이 오랫동안 무시하면서 인정치 않던 폭력의 〈 무제한성 〉 이 전혀 예기치 못한 모습으로 오늘의 지평선에 다 시 나타난 것이다. 전에는 신이 행하던 절대적인 복수가 과학이라는 날개를 타고서 정확하게 계산되고 측정되어서 우리에게 되돌아온 것 이다. 흔히들, 바로 이것이 최초의 사회가 자동파괴되는 것을 막았으며 전인류를 한데 모으는 것이 사회라고 말하고 있다. 갈수록 인간은 자기 스스로에 의해서 혹은 인간 자신이 밝혀낸 폭 력과 그 진실에 의해서, 바로 이 폭력과 전실 앞에서 전면적인 파괴를 택할 것인지 아니면 폭력의 전면적 포기를 택할 것인지 하는, 처음으로 분명하고도 완전히 과학적인 선택의 기로 앞에 처하게 된다. 인문과학이 실질적으로 진보하면서 느리지만 엄정하게 희생물과 인 류문화의 모든 폭력의 기원들을 거슬러 울라가다가 이런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닐 것이다. * 구조주의 민족학은 어디서든 차이를 찾아낸다. 피상적으로 보더라도, 우리는 구조주의 민족학에서 어디에서도 차이를 보지 못한 레비-브륄 Le vy -Bruhl 간 의 민족학과 같은 이 전의 민족학에 대 한 순수하고 단순한 반대 주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신화와 종교 속에서 원시인의 사고방 식 〉 을 발견했다고 믿은 레비-브륄은, 예를 들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 민들은 영원히 대상을 구별할 수 없다고 가정한다. 그는 원주민들이 인간과 캥거루를 겨우 구별할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 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캥거루에 대해서 민족학자들에게 가르쳐줄 것을 많이 갖고 있다고, 구조주의는 반박하고 있다. 우리는 가끔 20 세기 민족학은 미학이론들이나 일반적인 유행과 비 ® 레 비 -브륄 Levy -B rehl. 제 1 장 역 주 @ 참조.

슷하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 신비로움에 놀라 환상 속에서 방황하던 레비-브륄의 원시인들은, 『젊은 파르크』를 쓰던 폴 발레리처럼 차분하 게 구조주의라는 장기를 두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우 리는 항상, 실제로는 그다지 변화하지 않으면서도 갈수록 더 쉽게 나 타나는 과도함 때문에 변화하고 있다는 환상을 주는 극단들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 원시 사고에 차별과 무차별이라는 양국단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은 항상 이 둘 중의 하나에만 집착하면서 다른 것은 모두 철저 히 거부한다. 그러나 민족학에서는 이 교대가 단순하게 되풀이되는 것 이 아니다. 레비-브륄과 구조주의를 동일한 차원에 놓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스러운 것은 문자 그대로의 현실성과 구체적인 자율성을 갖고 있지 않거나, 아니면 있더라도 의면상으로만 갖고 있는데 비해 차별화된 구 조들은 그것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구조적 분석은 모든 것을 읽을 수는 없지만, 자신이 읽고 있는 것은 아주 잘 읽는다. 그래서 이것은 레비-브륄의 작업은 분명 자부할 수 없을 독자적인 과학적 가치를 갖 고 있다. 왜 그러할까? 성스러움은 무엇보다도 우선 차별의 폭력적인 파괴 인데, 이 무차별은 있는 그대로 구조 속에 나타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제 2 장에서 이미 보았듯이 이 무차별은 아마도 모호하고 이중적이며 공상적이고 기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심장한 새로운 차별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신화학』에서 괴물들은 마치 서로 유사한 종 인 것처럼 맥과 멧돼지와 함께 나란히 나타난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다른 것은 전혀 문제가 안된다. 신화 속에서 의미를 파괴하고 또 만들어내는 폭력의 작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모두 그대로 읽어 서는 안된다. 탄생의 이야기가 신화로 되어 있는 것은 모두 수수께끼 같은 암시로 짜여전 직물일 뿐이다. 구조주의로는 이 수수께끼를 이해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구조주의는 변별적 체계에만 관심이 있는데,

여기에는 문자 그대로 변별적 체계들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가 〈 잘 드러날 〉 때는 성스러운 것이 사라진다. 그것은 구조 밖에 있기 때문이다. 구조주의 민족학은 성스러운 것과 만나지 않는다. 구조 주의는 성스러운 것을 사라지게 한다. 성스러운 것을 사라지게 했다고 구조주의를 비난해서는 안된다. 이 사라짐은 실질적인 진보를 이룬다. 왜냐하면 처음으로 이것이 완전하고 체계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것에 이념적 선입견이 들어 있다 하더라도 이 선입견 때문에 이 사라 짐이 일어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성스러운 것의 발견에 있어서 구조 주의는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필수적인 계기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지 난날의 뒤얽힌 혼란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 구조주의 덕분에 우리는, 모든 차이들이 스러지고 또 거기에서 다시 생겨나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성스러운 것의 무한성에 관해서, 그 의미와 구조의 유한성을 조 목조목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이제 우리는 문화 질서가 없거나 그 작용을 멈춘 곳에서는 항상 성 스러운 것이 군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성스러운 것은 구조를 만들어내어 그것을 명령하고 감시하고 영속시키거나, 아니면 반대로 그것을 난폭하게 다루고 해체시키고 변형시키거나 파괴시키기도 하면 서 구조를 지배하고 있긴 하지만, 이것이 다른 곳에서는 어디에나 존 재한다는 그런 의미에서는 성스러운 것은 구조 속에는 존재하지 않 는다. • 구조주의는 이 모든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 울 말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구조주의는 구조 속에 갇혀서 공시태의 포로가 된 셈이기에 그 변화가 폭력과 폭력의 공포란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구조주의가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구조 주의가 성스러운 것의 사라짐을 아주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도 바로 이 한계 때문이다. 구조주의가 이분법적인 대조를 너무 남용한다고 비난 하는 사람들이나 〈성스러운 것이 어디로 가버렸나?〉라고 묻는 사람 둘에게 구조주의는 아무런 대꾸룰 할 수 없다. 갈등 속에는 두 적대자

들이나 적대적인 두 당파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제 3 자가 나타나자마자 이 둘은 이 제 3 자에 대항하여 타협 하거나, 아니면 이 제 3 자가 이 둘 중의 하나와 타협할 것이다 . 문화제도가 탐미주의자들의 심심풀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 양, 그리고 구조주의자둘이 항상 튕기는 두 현으로 그 음역을 제한해서는 안되는 그런 종류의 기타가 문제인 양, 사람들은 구조주의의 〈단조로 움〉을 비난하고 있다. 구조주의는 문화라는 기타를 잘못 연주한다는 바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구조주의는 아무 대꾸도 못한다. 왜냐하면 구조주의는 문화제도와 기타의 차이룰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구조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예컨대 쌍동이, 질병, 온갖 형태의 전영이나 오염, 설명할 수 없는 의미전도, 모든 형태의 중가와 감소, 이상 생성물과 변형체, 무시무시한 것, 환상적인 것과 같이 많은 것을 의미하지만 충분한 뜻은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의심스러운 의미 둘을 신중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 물론 성적인 위반을 비롯한 여러 위 반과 폭력 행위, 그리고 물론 예의도, 특히 공동체의 만장일치 앞에서 일어나는 예의들도 빠뜨려서는 안될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날것과 구운 것 le Cru et le Cu it.[)에서는 처음부터 신화생성의 칭후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즉 근친상간, 복수, 형제나 처남의 손에 의한 반역, 건국과 창조 행위에 앞서 일어나는 집단적인 변신과 파괴와 같이 침해당한 문화적 주인공들에게 부여되고 있는 모 든 것이 바로 그 칭후이다. 보로로 bororo 신화 (M3) 에 서 태 양은 모든 마울 사람들에 게 아주 약한 구름다리를 통해서 강을 건너가라고 명령한다. 〈다리가 기형이었기 때 문에 걸음이 느렸던〉 문화적 주인공을 제의하고는 모든 사람이 죽는 다. 혼자 살아남은 이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희생자들을 소생시킨다. 〈소용돌이에 말려든 사람은 머리카락이 물결 모양으로 굽이쳐져서 동그랗게 말려 컬이 되어 있었고, 잔잔한 물속에 빠진 자는 머리카락이 곱고 매끈하였다. 그는 이들을 따로 구

분해서 선별된 받침돌 위로 되돌아오게 한다. 테네데하라t ene t ehara 신 화 (M15) 에서 자신과 친척 관계가 되는 마을사람들이 자신의 대자(代 子)를 추방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난 문화적 주인공은 그 대자에게 〈깃 털을 모아 마을 주위에 쌓아라〉라고 명한다. 충분히 쌓아졌을 때 그는 거기에 불을 붙인다. 화염에 싸여 도망치지도 못한 채 사람들은 우왕 좌왕한다. 점점 그들의 고함소리는 꿀꿀거리는 소리로 변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멧돼지를 비롯한 야생 돼지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 중 숲에 까지 도망치는 데 성공한 것이 바로 오늘날 야생 돼지들의 선조들이 었다. 두판 Tu p an 은 자신의 대자인 마라나 야와 Marana yw a 를 돼지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홍미로운 한 이본에 의하면, 문화적 주인공이 〈속에서 자욱한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그러자 주민들은 아연실색해진다. 이때 이 조물주가 ‘너희 음식을 먹어라 ! ’라고 고함치자, 교미하라고 명령한 줄 알고는 ‘그들은 꿀꿀거리는 소리를 내지르면서 사랑행위에 탐닉한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모두 야생 돼지로 변모한다〉. 샤마니즘을 비롯해서 다른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담배의, 그 리고 일반적으로는 약물의 〈신비로운〉 의미가 여기에 잘 나타나 있다. 담배의 효과는 희생위기의 현기증을 강화해 주고 있다. 첫번째 신화의 〈우왕좌왕하는〉 폭력적 상호성에, 두번째 신화에서의 명백한 의미상실 의 결과인 성적인 혼합이 덧붙여진 것이다. 여기서 레비-스트로스가 희생위기를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는 의 · 미들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을, 그게 아니면 의미를 〈다시〉 만들어내 야 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비교했던 이 신화들이 연속량 qua nti te con ti nue 에 서 분리 량 qua nti te d i scre t e 으로의 이 행 문제 를 해결하는 데에 참신한 해결책을 많이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p .61) 그러므로 결국 의미기구 mach i ne a s ignifi er 가 문제이 다. 왜냐하면 〈어떤 영역에서든지 우리는 분리량으로부터서만 의미 체 계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p .61)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의미 발생을 오로지 논리적인 문제나 상징 적인 중개로만 이해한다. 폭력의 작용은 그래서 계속 감추어진 채로 남아 있다. 이 작용을 찾아내야 하는 것은 그것의 공포나 신비와 같은 신화의 〈감정적인 〉 측면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점에 있어서 그리고 논리와 의미에 있어서도 제 1 의 역할 울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주제들은 이것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만 이 그 주제들을 진정 삼차원적인 해석 속에 편입시킴으로써 절대적인 일관성을 부여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이 삼차원적 해석은 그 구조를 상실하지 않으면서 기원을 찾아낼 수 있으며, 이것만이 신화에 근본적 인 기능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리스 비극에서 출발하여 처음 몇 장에서 우리가 행한 분석방법은 지금까지 이 비극둘이 이미 그것들에 대한 최초의 해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신화의 해석에만 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 장을 끝내면서 우리는 이 방법이 비극과 그리스 신화 밖에서도 똑같은 효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앞 두 장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근친상간 금기와 결혼 규칙들一―· 이것들 역시 초석적 폭력에 관련되어 있다고 가정되는-에 바쳐져 있는 이상, 이 기원과 가정을 총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신화 룰 발견한다는 것은 홍미로운 일일 것이다. 우리가 분석하게 될 캐나 다의 태평양 연안에 살고 있는 트심쉬안 Ts i msh i an © 족 인디언들의 다음 신화는 우리를 이 이중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간 2) Franz Boas, Tshim shia n My tho logy (Rep ort of the Bure~u of Americ a n Eth n o- log y, XXXI, 1985, No. 25). 그리고 Sti th Thomp so n ed., Tales of the No rth Ame ri- can India n s, Bloomi ng ton , India n a, 1968, pp. 1 78-186 울 참조할 것. 이 신화는 또 한 Claude 냐 v i -S t rauss, La Geste d'A s diw a l, Annuair e .. de !'Ecole pra tiq u e des

Haute s Ete d es, VI secti on , 1958-1959 와 /es Temp s modernes, 1081-1123 . 에 요약 되어 있다.

한 젊은 왕자가 외삼 촌 의 딸, 즉 의사촌에게 반한다. 이 의사촌은 허영에 찬 매 정 함으로 그에 게 얼굴을 흉하게 만듦으로써 사랑을 증명 하라고 강요한다. 이 젊은이는 왼쪽 뺨과 오른쪽 뺨에 연달아서 칼자국을 낸다. 그러자 공주는 그의 추함을 조롱하면서 그를 거부한다. 절망에 빠진 왕자는 죽음만을 꿈꾸 면서 거기서 도망쳐 버린다. 마침내 그는 〈 불구자의 지도자 , 페스트 추장〉의 해역에 도달한다 . 이 추장의 견에는 모두 기형이며 불구인 신하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 그들은 그들이 부르는 소리에 응답하는 사람들을 자신들과 〈유사하 게 〉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가능한 한 그들과의 접촉을 피해야 했다. 왕자는· 조심해서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자 페스트 추장은 그 왕자에게 그가 상실했던 미모보다 더 뛰어난 미모를 다시 만들어주는 것을 승낙한다. 그 손님을 마법 의 솥 에 넣고 끓이자 거기에는 깨끗하고 희게 된 해골만이 남는다. 이 해골 위 를 추 장의 딸이 여러 번 되풀이해서 뛰어오르자 그 왕자는 눈부시게 아름 다운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이번에는 그 공주가 그녀의 사촌에게 반한다 . 그래서 처음에 공주가 그에게 강요했던 것을 이번에는 왕자가 공주에게 강요한다. 공주는 얼굴의 양쪽에 칼자국을 냈고 그러자 왕자도 그녀를 경멸하면서 거부한다. 그녀 역시 자신의 아름다움을 되찾기를 갈망하면서 페스트 추장에게로 가지만, 추장 신하들이 부르는 소리에 대답을 하고 만다. 그러자 이 불구자들은 그들 마음대로 이 불행한 공주를 그들과 〈 유사하게〉 그리고 더 나쁘게 만들어버린다. 그들은 그녀의 뼈를 분지르고 사지를 찢어 밖으로 내던져 그냥 죽도록 내버려둔다. 독자들은 지나는 길에, 앞서서 행한 여러 분석들로 인하여 친숙해졌 울 많을 데마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신화의 모든 인물둘은 다른 인물들의 모습을 흉하게 만들거나, 다른 인물이 스스로를 흉하게 만들 도록 강요하거나, 그들을 흉하게 만들려고 헛되어 노력하거나, 아니면

® 트십 쉬 안 Tsim shim : 북아메 리카 인디 언족의 하나 .

그들 스스로가 흉해지는데 이 모든 것은 〈결 국에는 같은 것이다 〉 . 폭 력을 행사하게 되면 자신도 필히 당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상호성의 법칙이다. 이 신화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서로 〈 유사하게 〉 된다 . 불구 자들 무리의 손에 맡겨진, 페스트 추장의 방문객들을 위협하는 위험은 두 사촌 사이의 관계를 되풀이하고 있다 . 여기서 페스트와 불구는 희 생위기라는 똑같은 현실을 가리키고 있다. 왕자와 공주 사이의 관계에서 처음에는 여자가 위에 그리고 남자가 아래에 있다. 이 여자는 아름다움을, 남자는 추함을 구현하고 있으며 여성은 욕망하지 않고 남성이 욕망하고 있다. 이 관계는 곧 전도된다. 거기에서 차이가 사라지면서 대칭이 생겨나지만 공시태적인 순간에서 출발하면 이 대칭을 결코 알아차릴 수 없다. 죽 연속적인 여러 순간들 을 덧붙임으로써만 포착할 수 있다 . 이것이 바로 희생위기의 무차별이 라는 것인데, 이것은 차별 교차의 관계를 겪고 있는 이 두 상대방은 영원히 알아차릴 수 없는 사실이다. 차례로 칼자국이 난 양 쪽 얼굴의 대칭은 전체적인 대칭 관계를 강조하면서 반복되고 있다 . 그 결말을 예의로 하면, 똑같은 순간은 아니더라도 쌍방에서 모두 정확히 똑같은 사실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 두 사촌과 페스트 추장의 신하들 사이에는 『 의디푸스 대왕』의 주인공들과 페스트에 병든 데베 시민 사이의 관계와 똑같은 관계가 존재한다. 원수형제들의 부름에 1 대답하지 않아야만 전염을 피할 수 있 다. 신하들 죽 집단의 수준에서 이 신화는 공평하게 말하고 있다. 이 신화는 우리가 처음 몇 장에서 했던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신화는 교차하는 차이를 〈뛰어넘는데〉, 이 차이는 결국 같은 것으로 귀결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괜찮다. 서로가 신체를 불구로 만드는 것은 직접 적인 차이소멸처럼, 그리고 폭력에 의해서 이미 그렇게 된 사람들의 손에 의해 〈유사하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유사하게 되는 것〉은 동 시에 괴물같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분명 회생위기가 문제이 다. 불구자들이 서로서로의 〈짝패들〉이라면 희생위기 법칙에서처럼 그

둘은 또한 〈 괴물들 〉 이다. 신체 절단은 특별한 방법으로 위기의 시련을 상칭하는 것이다. 사실 절단은 불구와 끔찍함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차이나는 모든 것, 넘치거나 돋보이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 이다. 문제의 이 과정은 존재들의 차이를 제거하여 획일화하지만 〈 조 화에 이르지는 못한다 〉 . 보기 흉하게 만들고 추하게 하는 이 절단이라 는 개념 속 에 상호적 폭력의 작용이 너무 강하게 표현되고 압축되어 있기 때문에 , 그것은 다시 엉뚱하고 난해한 신화적인 것이 된다. 'la Ge ste d 'A sd i wal J 에서 이 신화를 인용하고 있는 레비-스트로스는 이 신 화 를 〈 무시무시한 작 은 소설〉이라고 부른다 . 하지만 우리는 오히 려 상호적 폭 력 속의 인간 관계의 공포에 대한 기이한 소설이라고 부 르고 싶 댜 〈소 설 〉 이라는 낱말을 기억해야 한다. 서구세계와는 이질적 이지만 , 이 신화는 두 사촌 사이에서 고전극에 나오는 바극적 적대 관 계 와 희극 적 오해의 동인이자 동시에 스탕탈, 프루스트, 도스토예프스 키와 같 은 현대소 설 의 사랑/질투의 동인을 작동시키고 있다 . 이처럼 신화 테마들의 의면적인 기이함 뒤에 감추어져 있는 교훈둘을 우리는 끝없이 들추어낼 수 있을 것아다. 왕자와 공주는, 추장 신하들이 그들과 합류할 정도로 충분히 광적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과 똑같은 차이의 폭력적 상실을 서로에게 요 구하며 또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신화에서 모든 차이들은 제거되고 사라지지만 ,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은 온전히 남아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사실 이 신화는 그 신하들과 두 사촌 사이에, 특히 두 사촌 자 신들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결코 하고 있지 않다. 신화는 이런 식으로 결코 말하지 않고 있다가 결말에 가서 왕자와 꽁 주 사이의 대칭을 결정적으로 깨뜨려 놓고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왕자와 공주 사이에는 대칭의 소멸이나, 혹은 의디푸스와 갇이 〈공 주가 먼저 시작했다〉라는 주장을 정당화해 주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불순한 폭력의 기원에 대한 이런 탐구는 결코 진정으로 만족스

러운 수준이 되지 못한다. 다시 한번 더 『의디푸스 대왕』과 『바카스의 여신도들』의 모순을 살펴보자. 관계들을 분석해 보면 모든 차이들이 지속적으로 소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화의 이야기는 무 차별화된 관계들의 완벽한 대칭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끝에 가서 신 화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심지어는 정반 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이런 비대칭은 다른 모든 측면에서 는 문자 그대로 많이 나타나고 있는 대칭과 여기서 한번 더 상반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이 모순을, 신화의 결말 뒤에 감추어져 있는 사건, 즉 분명히 희생양 역할을 하고 있는 공주의 살해와 관련지어서 생각 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도 집단적 폭력의 만장일치는 신화적 차이들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데, 이 차이들은 또한 신화의 여 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는 폭력적 무차별화의 산물이기도 하다. 페스트 추장의 신하들에게서 공주가 받은 폭력은 이보다 앞선 모든 폭력들과 유사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것이므로 그것둘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이 두 주인공 사이를 계속해서 진동했던 차이를 결정적으로 고정시킨다. 공주에게 달려들어 손으로 그녀를 찢는 것은 신하들 전체, 다시 말해서 위기에 처한 공동체 전체 이다. 여기에는 디오니소스적인 스파라그모스의 모든 특칭이 들어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기서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만장일치적인 초석적 사형(私刑)이기 때문이다. 차별화된 조화로의 복귀는 자의적인 희생물에 대한 추방에 근거하고 있다. 왕자의 변신은 신화의 줄거리 진행상 〈먼저〉 나오지만 부분적으 로 상호성의 작용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 역시 초석적 폭력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로운 것의 절정 〈다음에〉 이로운 것으로 복귀하는 것이야말로 초석적 폭력의 또 다론 얼굴이다. 그러므로 이 변신에도, 희생물 메커니즘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감추고 있는 요소들 이 많이 들어 있다. 이 행복한 변신의 기법은 샤머니즘적 입문의식의 꿈과 유사하다. 미국 민담에도 사람들이 시체나 해골 위에서 뛰거나

걷어서 되살아나는 죽은 자들의 예가 있다 인 아마도 이런 기법은 앞에 서 보았듯이 직접 그 희생물이나 아니면 방금 매장한 무덤을 밟는 어 떤 희생제의의 필수적인 관습과 비교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그 변신이 깨끗하게 희게 된 해골로부터 다시 말해서 모든 해 로운 것의 해체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4) 왕자의 변신 은 죽음을 통과한다. 그의 변신은 최고의 폭력, 여기서 다시 등장한 만장일치적 폭력의 다행스런 결과이다. 아름다움을 되찾는 것은 문화 적 질서의 소생과 일체를 이룬다. 페스트 추장은 연속해서 나타나는 폭력의 모든 양상을 구현하고 있다. 기형과 변신의 주재자이자 절대 지배자인 그는 『바카스의 여신도들』의 디오니소스에 해당한다. 명확히 나타나는 이 신화의 모든 차이들, 즉 우선 주인공들과 신하들 사이의 차이, 주인공 자신들의 성의 차이 그리고 그들을 의사촌으로 규정한 데서 오는 차이, 이 차이들은 모두 초석적 폭력에 근거하고 있 다. 이 신화의 줄거리는 결국 폭력적 무차별화의 과정으로서 성이 다른 두 의사촌을 결혼시킨다는 신화 스스로가 만든 규범을 어쩔 수 없이 위반하고 있다. 무차별화와 차별의 불안정한 결합인 이 신화는 결과적 으로, 그것이 설립하는 규칙의 위반임과 동시에 그것 스스로가 위반하 는 규칙의 설립으로 나타난다. 프란츠 보아즈 Franz Boas ® 에게 그의 정 보제공자가 말해 준 것이 바로 이것이다. 공주에게 불행이 일어나고 난 다음부터 사람들은 개인적인 의사는 무시한 채 딸들을 그들 사촌들에 게 시집보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트심쉬안족 왕족의 의사촌간의 결혼관습을 방금 살 펴본 이 신화와 비교해 보는 것도 아주 홍미로울 것이다• 3) Sti th Thomp so n, op .c it. , note 261 / 3, p.1 45. ®4) 보제 1아0 장즈 F원r주an z2 )B 를oa s참(1조85할8 — 것1 9. 4 2) : 독일 태생의 미국 인류학자. 북미 인디언에 대한 실지조사가 유명하다.

왕자와 공주가 결합할 때 그 청년의 아저씨 종족도 들 고 일어나고 동시에 처녀의 아저씨 종족도 둘고 일어나서, 두 종족 사이에 전두가 벌어진다. 두 진영은 서로 돌을 던져 양편 모두 많은 사람들이 머리에 상처 를 입게 되는데, 그 상처자국들은 그 결혼계약의 증거와 같은 것이다 .5 )

5) Boas, op. c i.t.; 불어판은 레비-스트로스의 La Geste d' Asd i wal 에 나오는 텍스트이 다.

신화 뒤에 희생위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지금까지는 우리에게 있어서 단지 하나의 가정, 즉 시체 철단이라는 시니피앙 뒤에 있는 것으로 상 정할 수밖에 없었던 실질적인 시니피에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이 결혼 신화는 문제의 이 폭력, 즉 물론 제의적인 폭력이기도 하지만, 〈 두 전 영은 서로 돌을 던져 양편 모두 많은 사람들이 머리에 상처를 입게 된다〉에서처럼 신화의 신체 절단 데마와 분명히 연관되어 있는 완전히 실질적인 이 폭력을 인정함으로써, 우리의 가정을 확인해 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메타포가 다른 메타포보다 더 인상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트심쉬안족의 투석전 한가운데에 순수한 시니피앙을 믿는 현대의 신봉자를 설정할지도 모를 20 세기의 세르반테스나 몰리에 르 같은 사람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인디언들은 그것을 의심 하지 않는다. 죽 〈상처자국들은〉 기꺼이 축성할 그 결합의 〈 계약의 증 거와 같다〉는 것을. 이 폭력의 희생적 성격은 두번째 원주민 정보 제 공자가 프란츠 보아즈에게 알려준 보충사실에 의해서 명백하게 확인 되고 있다. 결혼관습이 트심쉬안족과 유사한 니가 N ig a 족에서는, 두 집 단 사이의 전투가 너무 강렬해져서 때때로 싸우던 남자측의 한 노예가 진짜로 살해될 정도에 이르기도 한다. 물론 명확하게 합당한 방식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역시 사정을 나름대로 잘 드러내주고 있는 암시 적인 방식으로, 여기서 이 모든 디데일들은 희생을 드러내고 있다. 이 두 진영 중에서 희생물이 어디에서 나올지 우리는 미리 예측할 수 있 다. 또한 우리는 그는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 다시 말해서 그 사회의

〈 완전히 의딴 〉 구성원일 것이라는 것도 미리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죽음은 복수될 필요가 없으므로 〈 진짜〉 위기를 폭발시킬 위험도 없다. 예견되는 죽음이지만 이 죽음에는 언제나 예견할 수 없는 희생양 메 커니즘의 촉발을 불러올 어떤 위태로운 것이 들어 있다. 사람이 항상 죽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사람이 죽게 되면, 그것은 곧 그 새로운 부 부가 결코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유리한 칭후로 여겨진다. 트심쉬안족의 신화와 제의에 나타나는 여러 신체 절단에서 정신분 석학적 독서는 분명 언제나 〈거세〉만을 볼 것이다. 우리 또한 거세를 본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모든 차이의 상실과 결부시킴으로써 그것 울 근원적으로 해석한다. 폭력적 무차별화의 테마는 거세를 이해하지 만, 그 반면에 거세는 폭력적 무차별화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이해하 지 못한다. 제의적 폭력은 원초적 폭력을 재생산하려 한다. 원초적 폭력에는 신 화적인 것이 전혀 없지만 그것의 제의적인 모방은 필연적으~ 신화적 인 요소들을 내포하게 된다. 원초적 폭력은 확실히 앞에서 이야기한 두 아저씨 종족처럼 분명하게 구별되는 두 집단을 대립시키지 않았다. 본 래의 한 집단이 이족결혼의 두 절반으로 분리되거나, 서로 다론 두 집 단이 결혼이라는 교환으로 하나로 결합하기에 앞서 폭력이 선행하는 것이라고 이론적으로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원초적 폭력은 희생양 메커니즘이 그 집단을 분리되도록 강요하거나 아니면 다른 집단과 결 합하도록 강요하는 규칙을 부여하는 어떤 특정 집단 안에서 전개되었 다. 이에 반해 제의적 폭력은 이미 틀이 잡힌 〈집단들 사이에서〉 전개 된다. 제의적 폭력은 원초적 폭력보다 인제나 〈덜〉 내부적이다. 이 폭력이 신화-제의적인 것이 되면서 바깥쪽으로 이동하는데, 이 이동 자체에 희생적 성격이 들어 있다. 즉 이것은 그 안에서는 기필코 평화가 지속 되어야 하는 이 기본집단을 원초적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면서 동시에 그 폭력에 관해 아는 것을 막음으로써 원초적 폭력을 감추고 있는 것

이다. 여성의 교환을 동반하는 이 제의적 폭력은 양쪽 집단에 대해서 모두 희생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결국 〈각 집단 안에서의 합의가 더 잘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두 집단 사이에는 결코 합의하지 않기로 하 는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모든 〈의국과의〉 전쟁의 원칙이기도 하다. 이미 보았듯이 여기서는 집단의 단결에는 치명적인 잠재적 공격 성향둘을 안에서 밖으로 그 방향을 돌린다. 역으로 우리는 신화 이야기 속에서 의국과의 전쟁인 것처럼 표현되고 있는 많은 전 쟁들은 오히려 〈더 내부적인〉 폭력을 감추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많은 텍스트들이 테베와 아르고스, 로마와 알베 Albe, 헬라데와 트로이처럼, 원칙적으로는 서로 독립된 두 도시나 국가 사이의 전쟁을 묘사하고 있지만, 이 속에는 희생위기와 그것의 폭력적 결말의 특징들 이 아주 많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이 텍스트들은 결국 〈의국〉이라는 주제 뒤에 부분적으로 감추어져 있는, 우리의 홍미를 끄는 신화 조작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제 10 장 신, 죽은 자, 성스러움, 그리고 희생대체 우리가 지금까지 만나본 신들과 주인공들, 그리고 성스러운 왕에서 부터 트심쉬안족 신화의 페스트 추장에 이르는 모든 신화적 인물들은 초석적 만장일치와 같은 폭력의 작용을 총체적으로 구현하고 있었다. 처음에 우리는 의디푸스를 살펴보았다. 『의디푸스 대왕』의 주인공 의디푸스는 처음에는 거의 전적으로 해로운 폭력의 화신이었다. 소포 클레스의 『콜로노스의 의디푸스』에 와서야 비로소 이 주인공의 역할이 긍정적인 이로운 빛으로 나타났다. 만장일치의 폭력에는 초석적 성격 이 들어 있다.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이 용의자는 건국의 주인공으 로 간주된다. 그래서 그는 동시에 대중적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이 두 비극을 통해서, 우리는 이 신성화 과정 안에서 대립적이면서 연속적인 두 개의 계기를 추출해 낼 수가 있을 것이다. 『바카스의 여신도들』에서 이 두 계기가 발견되는데, 해로우면서 동시 에 이로운 디오니소스의 이중적 인격을 낳는 것이 바로 이 계기들이다. 신성에는 이 두 계기가 융합되어 병치되어 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소포클레스의 의디푸스 비국들에 대한 검토에서부터, 그리고 그 종교 적 조작이 완벽하게 끝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칙접적으로는 희생양

메커니 즘 에 더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의 종교적 조작이 더욱 분 명히 드러나는 의디푸스 신화에 대한 검토에서부터 출발하지 않고서는 그 계기들의 역사적 측면과 기원을 찾 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 『 바카 스 의 여신도들』의 신화에서, 디오니소 스 는 제물 역할이 아니라 제사장 역할을 수행한다 . 의견상으로는 엄청나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종교적인 차원에서 별것도 아닌 이 차이 때문에 혼란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폭력을 구현하고 있는 신화적인 또는 신적인 인물의 역할이 희생물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인물의 가장 본질적이면서 핵심적인 임무는 바로 해로운 것으로부터 이로운 것 으 로의 변신이다. 진정 그를 숭배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도 바로 이 변신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이 인물에게는 또 정반대의 변신도 있다. 폭력과 관련된 것은 모두 그와 무관하지 않다 . 따라서 그는 이 절대적인 작용의 어디에나 개입할 수 있다. 그는 어떤 역할이 라도 담당할수 있거나 아니면 모든 역할들을 연속해서, 그리고 동시에 담당할 수 있다. 어떤 삽화 속에서 디오니소스는 더 이상 제사장이 아 니라 〈디아스파라그모스 d i as p ara gm os 〉 의 제물이다. 그는 , 예 를 들어 단 합해서 그를 죽이려는 타이탄 T it an 족과 같이 미친 듯이 날뛰는 군중에 의해 산 채로 갈갈이 찢길 수도 있다. 이 삽화는 우리들에게 자그레우 스 Za gr eus 0 나 디오니소스와 같이 만장일치 집단에 의해 희생되는 신화 의 인물들을 보여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모든 기원신화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인쿠알라 제의에서 스와질랜드의 왕이 제물 역할과 제사장 역할을 동시에 맡는 것을 앞에서 보았었다. 시페-토덱 X ip e-To t e 뿐 이라 ® 자그레우스 Zag reu s : 그리스 신화의 소년신으로 뒤에는 디오니소 스 와 동일시되 었다 . 헤라의 질두로 타이탄 일족에게 쫓기던 중 사자 , 뱀, 호랑이 등으로 변신하 다 황소로 변했을 때 잡혀서 찢겨서 먹힌다 . 그러나 제우스가 그의 심장을 삼켜서 뒤에 제 2 의 디오니소스로 다시 태어난다. 디오니소스 제의에서 생육을 먹는 의식 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전해진다 . ® 시 페 - 토텍 Xipe- Tote c : 옛 멕 시 코 지 방 아즈텍 인들의 신 .

는 아 즈 텍의 신이 있는데, 그에 대한 제의는 특히 그 체제 내의 모든 입장을 취할 줄 아는 성스러운 이 화신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 아 신은 때로는 그롤 대체하는 제물의 형태로 살해당하거나 가 죽이 벗겨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반대로, 그 자신이 제사장 역할을 하기도 한다 . 그 가죽을 쓰기 위하여, 말하자면 그것으로 변신하기 위 하여 이 신은 제물들의 가죽을 벗긴다. 이 사실은 종교적 사고는 어쨌 든 폭력에 참여하는 가담자들을 모두 서로서로의 〈짝패들〉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페-토덱은 〈살가죽이 벗겨진 우리의 주인 〉 이란 뜻이다. 이 이름은, 우리들이 확인한 것과 같이 그 것의 근본적인 역할은 희생물의 역할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때로는 상호적이고 때로는 만장일치적이며 초석적인 폭력이라는 가 정은, 전정 처음으로 모든 원초적인 신성함의 이중적 성격, 죽 인간사 회의 모든 신화적 존재들을 특칭짓는 해로운 것과 이로운 것의 결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최초의 가정이다. 디오니소스는 모든 신들 중에서 〈 가장 무시무시하며 〉 동시에 〈가장 부드러운〉 신이다. 마찬가지로, 벼 락을 때리는 제우스가 있는가 하면 〈꿀처럼 달콤한〉 제우스도 있다. 고대의 신들은 모두 이처럼 이중의 얼굴을 하고 있다. 로마의 야누스 J anus 가 그의 신하들에게 평화적인 얼굴과 무서운 얼굴로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것은, 그 또한 이 폭력의 작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가 결국 의국과의 전쟁을 상칭하는 것은, 의국과의 전쟁 역시 희생(제의) 적 폭력의 특수한 양태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원시사회에서 폭력의 완전한 작용을 찾아내는 것은, 곧 신화적이며 초자연적인 모든 존재들의 기원과 구조에 접근하는 것이다. 우리는 희 생물이 〈 괴물 같은 짝패〉의 모습으로 살해당한다는- 것을 앞에서 보았 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신성한 존재들이 갖고 있는 드러나거나 감추어져 있는 괴물 같은 특성울 이 〈괴물 같은 짝패〉와 비교해야 할 것이다. 해로운 것과 이로운 것의 결합은 물론 기본적이고 근원적인 기괴함을 이룬다. 이것은 또한 다른 차이들은 아마 모두 여기에 종속될

근본적인 차이라 할 수 있는, 〈선한〉 폭력과 〈악한〉 폭력의 차이를 초 인적 존재가 모두 홉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의디푸스의 기괴함과 디오니소스의 기괴함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디오니소스는 동시에 신이자 인간이자 황소이다. 그 리고 의디푸스는 같은 인간으로서 동시에 아들아자 남편이며 아버지 이자 형제이다. 이 두 괴물에게는, 정상적이라면 변별적으로 분리된 존 재들을 특징지울 차이들이 뒤섞여 있다. 종교적 사고는 모든 차이들을 동일한 차원에 둔다. 그리하여 가족적, 문화적인 차이를 자연적인 차이 와 동일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화학의 차원에서, 육체적인 기괴함과 정신적인 기 괴함을 분명하게 구분짓는 것을 단념해야 할 것이다. 우리둘 역시 이 두 경우에 대해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이미 보았듯이 종교적 사고는 생물학적인 쌍둥이와 문화적 질서의 붕괴에 의해서 생 겨난 폭력의 쌍둥이를 구별하지 않고 있다. 의디푸스 신화의 삽화들은 모두 사실상 서로의 복사본들이다. 일단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우리는 모든 신화의 인물들은 괴물이며 그들 모 두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서로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등장인물둘은 짝패들이며 따라서 모두 괴물들이다. 이미 보 았듯이, 의디푸스는 괴물이며 티레시아스도 괴물이다. 자웅동체인 그는 남녀 양성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다. 스핑크스도 괴물인데 여자의 머 리, 사자의 몸뚱이, 뱀의 꼬리, 그리고 독수리의 날개와 같이 차이들의 . 진짜 복합체이다. 의견상으로는 이 공상의 존재와 신화의 등장인물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그 차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조금만 더 세밀하게 살펴보는 것만으로 충분 할 것이다. 의디푸스가 만난 스핑크스는 다론 모든 등장인물들과 똑같 은 입장을 취한다. 죽 그것은 그의 통행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매혹적 인 방해물이자 내밀한 모델이며 무서운 논리의 소지자이자 불행의 신 탁이다. 그보다 앞서 나타나는 라이오스와 티레시아스와 마찬가지로

스핑크스는, 의디푸스가 먼저 그와 경쟁하지 않으면 그가 의디푸스와 경쟁한다. 스핑크스는 이 주인공에게 신탁의 성격을 띤 함정을 판다. 따라서 이 삽화는 다른 모든 삽화들의 복사판이다. 의디푸스가 나중에 그렇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핑크스는 해로운 폭력을 구현하고 있 다. 페스트가 아폴로에 의해 보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스핑크스는 테 베를 벌하기 위하여 헤라가 보낸 것이다. 의디푸스의 손에 의해 추방 되어 이 도시가 해방될 때까지, 스핑크스는 점점 더 많은 제물들을 먹 어치운다. 희생물의 역할인 괴물로 나타나기 이전에는 의디푸스가 괴 물의 암살자, 다시 말해서 제사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의디푸스가 다른 모든 성스러운 폭력의 화신들 과 같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죽 그는 연속해서 모든 역할둘을 수행할 수 있으며 또 수행하고 있다. 성스러운 왕도 역시 괴물이다. 그는 신이자 동시에 인간이며 그리고 야생동물이다. 비록 단순한 수사학으로 떨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그를 사자나 표범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다른 모든 종교적 의미들과 마찬가 지로 괴물 같은 짝패와 초석적 만장일치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거 기에는 역시 정신적인 기괴함과 육체적인 기괴함이 함께 뒤섞여 있다. 의디푸스와 마찬가지로, 이 왕은 이방인인 동시에 합법적인 아들이며 가장 내부의 사람인 동시에 가장 먼 의부의 사람이고, 비할 데 없는 온화함의 모델인 동시에 극도의 야만성의 모델이다. 범죄와 근친상간 울 범한 그는 자신이 만들어 지키도록 한 모든 규칙들의 그 너머에 그리고 그 위에 존재한다. 그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현명한 동시 에 가장 광적이며, 가장 맹목적인 동시에 가장 명석하다. 어떤 제의의 노래들은 왕이 이렇게 모든 차이들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을 잘 표현 하고 있는데, 이 독차지 때문에 왕은 이 말의 모든 의미에 있어서의 〈성스러운 괴물〉이 되는 것이다• 왕에게는 특별히 더 좋아하는 것이 따로 없고,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없도다. 손님(나그네)도, 시골 사람도 현자도 미찬 자도 모두 그가 좋아하는 것이로다 .I ) * 그리스 신들의 익히 알려진 정신착란이나 잔인함은 논의로 치더라도 그들이 강간, 살상, 친부살해, 근친상간을 수없이 행하는 존재들이라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또한 이들이 인간, 동물, 물질, 우주의 다양한 범주에서 빌려온 단편들과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이 괴물들 사이의 불변의 차이들을 찾으려는 것보다, 그 리고 특히 이 차이로부터 개인 심리학이나 소위 〈집단 무의식 〉 의 차 원에서 의미 있는 결론을 연역해 내려는 것보다 더 헛된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서구 역사에 나타난 모든 학풍 중에서 아마 이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것도 물론 없을 것이다 . 괴물 같은 것을 유사-합리적으 로 취급하면서 또 그것을 〈원형〉으로 분류하는 등의 태도는, 멋적게도 오비디우스 O vi de ® 의 『변신 이야기 Les Me t am orp hoses 』 © 에 나타나 있는 미묘한 동적 작용 혹은 신화 조작을 계속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괴 물에 대해 의식을 집행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놀라거나 아니면 그 것을 즐긴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결국 그 괴물에 속고 있는 것이며 항상 이 괴물 뒤에 숨어 있는 그것의 본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1) T. Theeuws, Na itre et mouri r dans le ritue 1 Luba, Zair e, X N, Bruxelles, 1960, p. 172. L. Makariu s , Du roi magi qu e au roi div i n , op. cit. , p. 686 에서 재 인용. ® 오비디우스 O vi de : 고대 로마의 시인. ® 『변신 이야기 Me ta m 따 'hoses 』 : 세상 기원의 카오스에서부터 시저 시대까지의 역 사를 노래한 250 여 개의 전설로 된 대서사시로서 동물, 식물, 십지어는 광물로 변 신하는 주인공들을 노래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까지 걸작으로 꼽히던 이 시는 많은 시인들(위고 등)과 화가들(루벤스 등)의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이런 다양한 유형의 신화적 존재들의 차이들은, 이것 들 을 그들의 공 통된 기원인 초석적 폭력과 비교함으로써 거기에서 이 폭력에 의해 생겨난 여러 가지 여건들에 대한 해석의 차이나, 아니면 그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 여건들 자체의 차이를 찾아낼 때에만 홍미로운 것이 된다. 많은 종교적 차이들은 그것의 기초가 되는 폭력의 여러 양상들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아프리카 왕국의 제의적 근 친상간이나 디오니소스의 스파라그모스와 같은 희생제의에서 아주 분 명히 드러난다. 이 밖에도 많은 예들을 둘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신화 에서 신, 귀신 또는 신화적 인물들은, 한편은 〈 진지한 〉 그리고 다른 한편은 〈 희극적인 〉 두 범주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리스인들에게 있 어서의 헤르메스 Hermes , ® 죽 라틴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머큐리 Mer- cur y는 희극적인 신이다. 어떤 사회에는 신성화된 어릿광대와 익살 광 대들이 있다. 북아메리카인들에게는 〈 장난꾸러기 요정〉이 있다. 왕의 역할울 하는 궁정광대나 광대 왕처럼 짧은 득세 끝에 한결같이 회생 되고 마는, 희극적이자 동시에 비극적 인물인 다양한 종류의 일시적인 왕들도 있다. 이 인물들은 모두, 아프리카 왕과 이유는 같지만 그러나 그 양상은 다르게, 성스러운 폭력을 구현하고 있다 . 물론 이 모든 것을 집단적 폭력과, 더욱 특별하게는 이 폭력의 어떤 특정한 양상과 비교해 보아야 할 것이다. 〈 진지한〉 추방에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우스꽝스 러운 추방이 항상 같이 존재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오늘날까지도, 완 화되고 일상화되고 진부해진 형태의 사회적 도편추방이 우스운 양상 으로 흔히 행해지고 있다. 상당량의 현대문학도 명시적으로든 묵시적 이로든 이 현상을 다루고 있다. 부랑자 , 가난한 자, 불구자와 같이 제 의에서 희생물 역할을 맡았던 파르마코스와 같은 사회계층에 대해 약 간이라도 생각해 보면, 〈순화되고〉 〈배설되기〉 위해 희생제의중에 밖 ® 헤르메스 Hermes : 제우스의 아들로 상업 , 학술, 체육 따위를 관장하며 도둑, 나 그네 , 양떼둘의 수호신. 로마 신화의 머큐리 Mercu ry에 해당한다 .

으로 분출되는 부정적인 감정들 속에는 온갖 종류의 조롱과 냉소가 많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상세한 분석을 요하는 사실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일반 가정을 적용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어떠한 어려움도 제기하지 않기 때문에 일단 이것은 그대로 두고, 이것 역시 바로 우리 가정에 의해서 해명되어야 할 다른 종교적 형태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우 리는, 얼핏보면 지금까지 우리들이 보아 온 것과는 아주 다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것들과 아주 가까운 종교적 형태인 〈선조들〉 또는 아주 단순히 〈죽은 사람들〉에 대한 숭배에 대해 살펴 보자. 어떤 문화에는 신이 없거나 아니면 있더라도 희미하게 지워져 있다. 거기에서는 신화적 선조들이나 죽은 사람들이 총체적으로 모든 신성을 대신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건국자일 뿐 아니라 질두심 많은 수호 천사로,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문화질서의 교란자로 간주되고 있다. 간 통, 근친상간, 그리고 모든 종류의 위반이 만연하거나 친척들 사이의 분쟁이 증가될 때, 이를 못마땅히 여긴 죽은 사람들이 나타나 산 사람 들을 따라다니면서 달라붙는다. 그들은 산 사람들에게 악몽, 광기, 발 작, 전염병을 전파하거나 친척과 이웃둘 사이에 논쟁과 갈등을 부추긴 다. 죽, 그들은 온갖 퇴폐를 야기시킨다. 위기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차이 소멸로, 죽 정상적일 때는 분 리되어 있던 두 왕국의 혼합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죽은 자는 질 서가 지배할 때에는 의적이고 초월적인 폭력을 구현하다가, 사태가 악 화되어 나쁜 상호성이 공동체 내부에 다시 나타날 때에는 내재적인 똑력을 구현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죽은 자들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것인 질서의 완전한 파괴를 원하지 않는다. 어떤 절정기를 지나면, 죽 은 자들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베푸는 숭배를 다시 수락하기 시작하면 서 산 사람들에게 달라붙는 것을 멈추고 평상시의 거주지로 되돌아간 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 떠나가거나 아니면 그 사회의 제의적인 부추

김에 의해 추방된다. 이리하여 죽은 자와 산 자의 왕국 사이에는 다시 차이의 골이 파전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이런 상호침투는 어떤 때는 위기의 결과로, 또 어떤 때는 위기의 원인으로 나타난다. 죽은 자가 산 자들에게 가하는 징벌은 위반의 결과와 구별되지 않는다. 조그만 사회에서 휴브리스의 전염은 재빨리 모든 참여자들에게 퍼진다는 것을 상기하자. 따라서 신 의 복수와 마찬가지로 죽은 자들의 복수는 집요할 뿐 아니라 실제적 이다 . 죽은 자의 복수는 폭력 그 자신에게로 폭력이 되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는 죽은 사람들이 신을 대체하고 있다. 이들에 관한 숭배는 앞에서 묘사한 의디푸스, 디오니소스 등에 관한 도식으로 귀결된다. 단 지, 하나의 의문이 있을 수 있는데, 죽은 사람들은 왜 신과 같은 자격 으로 폭력을 구현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죽음은 산 사람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폭력이다. 따라서 죽음은 지 극히 해로운 것이다. 죽음과 함께 공동체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것은 전염성의 폭력인데, 산 사람들은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그들은 죽은 자를 격리시켜 놓음으로써 죽은 자 주위에 차단막을 만 든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예방책을 강구하는데, 특히 순화와 해로운 폭력의 추방을 목표로 하는 다론 제의들과 유사한 장례라는 제의를 행한다. 죽음의 원인과 상황이 무엇이건간에, 죽는 자는 언제나 전체 공동체 에 대하여 희생물과 유사한 관계에 있다. 생존자들의 슬픔에는, 대단한 행동을 하기를 결심하는 데에 적절한, 공포와 격려가 기이하게 혼합된 감정이 뒤섞여 있다. 의따로 혼자인 자의 죽음은 막연히, 집단의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치르는 공물처럼 보인다. 단 한 사람의 죽음으로써 살아 있는 모든 이들의 연대성이 강화된다는 말이다. 희생물이 죽는 것은, 죽음의 위험에 처한 공동체가 새로운, 문화 질 서 속에서 재생하기 위한 것 같다. 신이나 조상이나 혹은 신화 주인공

은 도처에 죽음의 씨앗을 뿌리고 난 다음에 스스로 죽거나 아니면 그 들이 선택한 제물을 죽임으로써, 인간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 준 다. 결국, 죽음이 모든 생명의 원천이며, 그리고 어머니는 아니라 하더 라도 모든 생명의 누님처럼 여겨진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닌 것이다. 죽음울 생명의 근원으로 보는 이런 믿음을, 어떤 사람들은 항상 계절 순환이나 해마다 식물 수액이 다시 올라가는 현상 탓으로 돌리고 있다. 이것은 바로 신화 위에 또 신화를 쌓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다시 한 번 더 인간관계 속의 폭력작용을 정면으로 직시하기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과 부활의 데마는, 계절 변화가 없거나 아니면 있더라도 최소한으로 제한된 지역에서도 널리 퍼져 있는 데마이다. 유 사성이 있다 하더라도, 자연을 이 데마의 본래 영역, 죽 이것이 근거 하고 있는 곳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계절의 주기성은 단지, 항상 희생물의 죽음을 그 축으로 하는 인간관계의 변형에 리듬을 붙일 따름이다. 따라서 죽음 속에는 분명히 죽음도 있지만 또한 생명도 있는 것이다. 공동체의 차원에서 볼 때 죽음에서 출발하지 않는 생명은 없다. 이렇게 해서 죽음은 진정한 신성, 즉 가장 이로운 것과 가장 해로운 것이 결 합되는 곳으로 보일 수 있다• 헤라클리트 Heracl it e 가 〈디오니소스는 하 데스 Hades ® 와 같은 것〉이라고 말할 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헤라클리트라는 대단한 사상가가, 단순히 의견상으로 디오니 소스 신화와 지옥의 신화를 연결하고 있는 일화적인 관계를 언급하려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 갇다. 이 철학가가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것은 바로 이 관계들의 촌재이유이다. 해로운 것과 이로운 것의 이중 성은 죽음의 물질성 속에서도 발견된다. 부패과정중의 시체는 매우 불 순한 것이다. 사회의 폭력적 붕괴와 마찬가지로 생리학적인 부패는 복 ® 하데스 Hades : 타이탄 T it an 형제 중의 막내이자 실권자인 크로노스 Cronos 와 레 아 Rhea 사이에서 난 아들, 명부(冥府)를 다스리는 신으로서, 천상을 다스리는 제우스와 바다를 다스리는 포세이돈과 함께 우주를 관장하는 세 신들 중의 하나.

잡하게 차별화된 체계를 점차 무차별의 먼지로 환원시킨다. 살아 있는 유형의 것들이 무형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언어도 살아 있는 것의 〈 잔해 res t es 〉 를 더 이상 명확히 밝혀 말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 이다 . 부패하는 육체는 〈어떤 언어에서도 그 이름이 없는 것〉이 된다. 그러다가 이 과정이 끝나 가공할 만한 부패의 힘이 다하게 되면, 불 순함도 끝난다. 그래서 어떤 사회에서는, 하얗게 마른 해골이 유익하고 풍요로운 힘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 2)

2) 제 9 장 원주 4) 부분을 볼 것.

모든 죽음이 초석적 추방의 방식으로, 다시 말해서 폭력의 근본적인 신비의 방식으로 행해지고 또 그렇게 제의화되어 있다면, 역으로 초석 적 추방은 죽음의 방식으로 회상될 수 있을 것이다. 신의 역할을 죽은 자가 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폭력은 특별한 한 조상이나 아 니면 고인들 전부에게 흡수되어 버린다. 건국선조가 종종 어떤 동물의 화신이라는 사실과 그의 괴물 같은 성격은, 제의의 기원에는 언제나 〈 괴물 같은 짝패〉가 존재한다는 증거로 읽혀야 한다. 신의 숭배와 마 찬가지로 죽은 자의 숭배도, 그것이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의 미에서, 폭력작용에 대한 하나의 독특한 해석이다. 사실 이 해석은, 만 장일치 메커니즘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제의한다면 모든 해석 중 에서 가장 분명한 해석이며, 〈처음에〉 실제로 일어났던 것에 가장 집 근한 해석이다. 이 해석은, 문화 질서의 기원에는 언제나 인간의 죽음 이 있으며 결정적인 죽음은 그 공동체 구성원의 죽음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 우리는 지금까지 신화적 주인공, 성스러운 왕, 신, 신격화된 조상들 처럼 폭력을 구현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존재를 통해서 폭력의 작용을

살펴보았는데, 이런 존재들은 폭력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었다. 이들을 통해서 우리는 희생물의 역할과 근본적인 폭력적 만장일치의 역할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폭력의 작용이 만인에게 해당된다는 점에서, 바꾸어 말해 특정한 개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 폭력 의 화신들은 항상 현실성이 없다. 물론 희생물을 제의한 모든 이들이 똑같은 역할을 수행하지만, 역으로 누구든지 희생물 역할을 맡을 수도 있다.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희생물을 구별짓는 차이들 속에서 구원 의 비밀을 찾아서는 안 된다. 여기서는 자의적인 것이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종교적 해석들의 잘못· `· 희생물이나 이번 존재들이 절대적인 폭력을 구현하고 있는 것 같다는 j 때문에, 이들이 이로운 것으로 변모하는 것을 이들의 조인간적인 특성의 탓으로 돌리 는 데에 있다. 폭력의 작용에 대한 이처럼 〈개인차를 두는〉 독서말고 비개성적인 독서도 있다. 이 독서는 〈성스러운 sacre 〉이라는 말과 라틴어의 라는 말에 담긴 모든 의미에 일치하는 독서이다. 라틴어의 이 말은 이 로운 것뿐 아니라 해로운 것도 포함하고 있어, 때로는 〈성스러운〉으로 도 해석되고 때로는 〈저주받은in aud it〉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말이다. 대부분의 언어에는 이와 유사한 말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멜라네시아 인들의 유명 한 라 든가, 수 Sio u x 족 露 의 , 이 로쿠와 Iroq uo is 족 ® 의 등 이 그것 이 다. 적어도 어떤 점에서는 〈 sacer 〉라는 이 말은 모든 말 중에서 가장 덜 기만적이며 가장 덜 신화적인 말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작용에 대한 어떠한 주재자도 어떠한 초인적 존재의 특권적인 개입도 가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sacer 〉라는 말이 인간과 유사한 존재가 전혀 없더라도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은, 신인동형론이나 애니미즘을 ® 수 Sio u x 족 : 북미 인디 언족의 하나. ® 이로쿠와 Iro q uo i s 족 : 북미 오대호 연안에 있던 인디언족으로 프랑스인들이 붙인 이름.

통해서 종교적인 것을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가 헛된 것임을 잘 반증해 주고 있다 . 만일 종교적인 것이 비인간적인 것을 〈 인간화하거나 〉 영혼 울 부여하는 데에 있다면, 성스러운 것에 대한 비개성적인 이해는 있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모든 주제들을 요약해서 이 책의 제목을 붙인다면, 우리는 당연히 『 폭력과 성스러움 la Viole nce et le sacre 』 이라는 제목을 붙이지 않을 수가 없다 . 이러한 비개성적인 이해는 근본적인 것이다. 다른 데서와 마찬가지로 , 예를 둘어 제물로 바쳐지는 아프리카 의 근친상간 왕의 한결같은 드라마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문화적인 질 서와 무질서, 소멸되었다가 다시 나타나는 차이, 죽 성스러운 것의 두 얼 굴 을 지칭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단어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단어는 , 한 편으로는 금지되어 있지만 합법적이기도 한 모든 성행위를 포 함한 왕의 모든 위반행위와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분쟁, 원한, 질투 등 온 갖 모습의 폭력과 더러운 것들을 지칭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창조적이며 질서확립적인 기운과 안정과 평온함을 지칭하기도 한다. 모든 상반된 의미들이 왕권 속에서 발견되는데, 왕권은 성스러운 것의 구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성스러운 작용은 또한 왕권 밖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 왕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스러운 것과 비교해야 하는데, 성스러운 것은 왕권 밖에 존재한다. 성스러움의 역할, 즉 희생물에 집중되어 있다가 처형을 통해서 이로 운 폭력으로 변하거나, 아니면 결국은 똑같은 것이지만 의부로 추방되 어 버리는 해로운 폭력의 역할, 즉 성스러운 역할을 하는 신성을 참조 하지 않고서도, 우리는 희생을 명확하게 밝혀낼 수 있다. 공동체 내부 에서는 나쁘던 성스러운 것이 다시 의부로 돌아갈 때에는 좋은 것이 된다. 순수한 성스러움이라는 말은 신화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속에 있는 본질적인 것을 담고 있지만, 이것은 인간에게서 폭력을 따로 떼 어내어 그것을 비인간적인 실체로 제시한다. 이것은 폭력을, 쉽사리 분 리되지 않으면서 단순히 접촉하기만 하더라도 대상을 적실 수 있는

일종의 〈유체〉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이 말은 당연히 전염이라는 개 념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 개념은 경험적으로는 대개 옳다. 그러나 이 것은 폭력의 상호성을 무시하므로 이 역시 신화적인 개념이다. 게다가 이 개념은 인간관계의 생생한 폭력을 글자 그대로 〈사물화하여 reif ie> 폭력을 거의 하나의 물질과 같은 것으로 변형시킨다. 순수한 성스러움 이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신이라는 말보다 덜 신화적이지만 또 달리 보면 그보다 더 신화적인 것 갇다. 왜냐하면 이것은 실제 희생물의 혼 적들을 제거하여 모든 성스러움에는 항상 희생물이 있다는 사실을 감 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에서 〈폭력 '과’ 성스러움〉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똑같이 〈폭력 ‘또는' 성스러움〉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스러운 것의 작용과 폭력의 작용은 같은 것이다. 민족학적 사고는 분명 성스러운 것 속에는 폭력이라는 말에 포함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찰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이 사고는 곧바로 성스러운 것 속에서, 다른 것 심지어 폭력과 정반대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덧붙일 것이다. 무질서뿐 아니라 창조도 있다. 성스러운 것 속에는, 전문가들도 그 혼 란을 풀기를 단념했을 정도로 이질적이고 대립적이며 이율배반적인 것들이 아주 많이 있다. 전문가들은 성스러운 것에 대해 단순한 정의를 내리는 것을 포기했다. 초석적 폭력에 대한 암중모색은 아주 단순한 정의를 내리는 것으로 그치는데, 그렇다고 이 정의가 현실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정의는 복합성을 감추지 않은 채 통일성을 드러내 주 고, 성스러운 것의 모든 요소들을 이해하기 쉬운 하나의 총체로 구성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초석적 폭력을 들추어낸다는 것은, 성스러운 것 안에는 모든 대립적 인 것들이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성스러운 것이 폭력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폭력 그 자체가 한결같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폭력은 어떤 때는 인간들을 구원하고 문 화를 설립하기 위하여 자신의 주위에 만장일치를 만들다가도, 또 어떤

때는 반대로 자신이 설립했 던 것을 애써 파괴하려 하기 때문이다. 인 간들은 있는 그대로의 폭력을 경배하지 않는다. 죽 인간둘은 현대적 의미의 〈폭력 숭배 〉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이 인간들에게 그들이 예전에 향유했던 유일한 평화를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폭력을 숭배한 다. 그들에게 공포를 주는 폭력 너머에서 신자들의 숭배가 겨냥하는 것은, 그러므로 언제나 비폭력적이다. 비폭력은 폭력이 거저 주는 무상 의 선물처럼 보아는데, 이렇게 보아는 것도 일리가 있다. 왜냐하면, 인 간들은 제 3 자를 희생시킴으로써만 서로 화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 폭력의 질서 속에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희생물 〈한 사 람 〉 만 빠진 회생물에 대한 만장일치이다. 원시 종 교의 사고가 폭력을 신격화한 것은 틀렸지만, 사회적 통일의 원리 를 인간 의지의 탓으로 보지 않은 것은 툴리지 않았다. 현대 서구 세계는 오늘날까지 본질적인 폭력, 다시 말해서 그 세계를 완전히 소 멸시킬 수 있는 폭력을 피해 왔었다. 이런 식의 특권은 이상주의 철학 자둘이 무척 즐겨 하는 〈 초월〉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적 사고는 폭력의 본질이나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적 사고는 심지어 폭력의 존재까지도 무시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현대 적 사고는 사회의 기원을, 〈이성〉, 〈양식〉, 〈상호적 호의〉, 〈양해된 이 해관계 〉 등에 근거하는 명시적이거나 암시적인 〈사회계약〉으로 본다. 따라서 이 사고는 종교적인 것의 본질을 발견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 에 실질적인 기능을 부여할 수도 없다. 이 무능력은 신화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무능력은 종교적안 무능력 , 다시 말해서 인간 폭력의 은 폐와 이 폭력이 모든 인간사회에 가하는 위협에 대한 무지를 계속 연 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조잡한 종교적인 것도 비종교적인 사고의 모든 사조들, 심지어 가장 〈비관적인〉 사조들도 모르고 있는 전실을 담고 있다. 그것은 인 간사회의 기반이 안간들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자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원시 종교에 대한 현대적 사고의 관

계는 우리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거기에 는 우리와 종교적 사고가 다 갇이 갖고 있는 폭력에 관한 근본적인 오해가 들 어 있다. 그 반면에, 종교적인 것 속에는 바로 이 폭력에 대한 이해가 들어 있다. 완전히 실질적인 것인데도 우리는 이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 종교적인 것은 파괴적인 폭력의 재발을 피하기 위해서 〈 해야 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 〉 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인간들이 제의를 게 울리하고 금기를 위반하면, 문자 그대로 초월적 폭력을 부추기게 되어, 그 폭력이 악마 같은 유혹자, 죽 어마어마하면서도 별 것 아닌 내기가 되어 다시 그들 가운데로 내려오도록 하는 결과를 낳울 것이다. 그러 다가 희생양 메커니즘이 다시 나타나 그들을 구원하지 않으면, 달리 말해서 이 최고 폭력이 이 〈죄인들 〉 이 충분히 〈 처벌받았다 〉 고 판단하 고서 자신의 초월성을 다시 회복하여 인간들에게서 적당히 떨어져서 인간의 구원을 가져다 줄 경의감을 불러일으키면서 밖에서 인간들을 감시하기로 마음먹어 주지 않는 한, 인간들은 어마어마하면서도 별것 이 아닌 이 내기 주위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서로를 파괴하여 전체의 파멸에까지 이를 수도 있다. 분노의 신은, 무지한 부자들이나 경솔한 특권총들이 원하는 것처럼 현실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현실성을 갖고 있다 . 그 심판은 정말로 냉혹하며 그 공정성은 진정으로 신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 든 적대자들에게 차별 없이 달려둘기 때문이다. 이 분노의 신은, 불행 하게도 폭력을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서 이 폭력에 호소한 사람 들에게 자동적으로 되돌아오는 폭력의 상호성과 같은 것이다. 현대의 서구사회는 그 차원도 아주 복잡하고 그 조직도 뛰어나기 때문에 폭 력의 자동회귀라는 이 법칙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서구사회는 이 법칙은 존재하지 않으며 결코 존재한 적도 없다고 생 각하면서, 이 법칙이 현실성이 있는 것으로 보는 사고를 공상적이며 환각적인 사고라고 규정짓는다. 이러한 사고는 분명 신화적이다. 왜냐 하면, 이 법칙의 작용을 인간 의부의 어떤 힘에게 전가시키고 있기 때

문이다. 그러나 이 법칙 그 자체는 완전히 실질적이다. 인간 관계 속 에서 그 출발점으로 폭력이 자동적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전혀 상상적 인 것이 아니다 . 만일 우리들이 거기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면 그것 은 아마도 우리들이 이 법칙에서 결정적으로 벗어났거나 그것을 〈초 월했기 〉 때문이 아니라, 현대세계에서는 우리들도 모르는 이유에 의해 그 실제 이행아 오랫동안 〈 지연되어 왔기〉 때문이다. 현대 역사가 발 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 보통의 피 그리고 특별하게는 월경 피의 이로우면서 동시에 해로운 이중효력에서부터 그리스 비극이나 『토템과 터부』의 구조에 이르기까 지, 우리가 본 시론에서 살펴본 현상들은 모두 〈폭력과 성스러움의 일 치〉로 귀결되고 있다. 이 일치가 환상적이고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 여서 이것을 거역하고 싶지만, 우리 주위를 살펴볼수록 이것의 설명 능력이 비범하다는 것을 더 알 수 있게 된다. 즉 이것을 확실한 것으로 만드는 어떤 일치의 그물이 짜여지는 것을 보게 된다 . 이 점에 있어서, 이미 제시한 예들 의에 아주 적당한 예를 하나 더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왜 금속 제작이 아주 엄격히 금기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왜 대장장이들에게는 성스러움이 배어 있 었을까? 바로 여기에 성스러움의 광범위한 수수께끼들 중에서 우리의 가정이 즉각적으로 그 해답을 암시해 주는 하나의 수수께기가 들어 있다 . 금속은 하나의 엄청난 혜택이다. 그것은 수많은 작업들을 용이하게 한다 . 그것은 공동체가 의부의 적을 막는 것을 도와준다. 그러나 이러 한 이점들에는 무서운 반대급부가 있게 마련이다 . 모든 무기에는 항상 상반되는 효과가 동시에 있다. 그것은 사회가 내부불화로 겪게 되는 위험을 더 가중시킨다. 좋을 때에 벌어둔 것은 나쁠 때에 그 이상으로

다시 잃을 수 있다. 인간들로 하여금 어떤 때는 단결과 조 화로, 또 어떤 때는 불화와 갈등으로 몰아넣는 이 이중의 경항은 금속의 획 득에 의 해서 그 효과가 더 강화된다 . 대장장이는 이 최선과 최악의 폭력의 주재자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 서 그는 이 말의 이중적 의미에 있어서의 〈 성 스 러운 것 〉 이다. 그는 어 떤 특권을 향유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약간은 불길한 인물로 여겨 접 촉을 피한다. 그래서 대장간은 항상 공동체 의부에 위치하고 있다. 어떤 현대적 해석들의 어조로 마루어볼 때, 우리는 대장간의 그 무 서운 마력은 〈뛰어난 문명들〉이, 특히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현대문명이 독차지하고 있는 정복을 나누어 가지려는 원주민들의 막 연한 의식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금속기술은 인간행 동에 끼칠 그것의 내재적인 위험 때문이 아니라, 〈 백인 〉 의 공적으로 독차지되어 있기 때문에 금지되고 있는 것 같다. 결국 대장간 숭배는 적어도 간접적으로, 그것의 궁극적이고 유일한 실적적 대상안 양 , 바로 우리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기술문명의 자만과 그것의 특칭적인 휴브리스를 볼 수 있다. 이 자만은 신비롭게도 오랫동안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다 보니까, 너무나도 부풀어오르고 강 화되어 그 사실 자체도 의식하지 못하게 되어 휴브리스를 가리키는 어휘마저 없을 정도가 되었다. 금속 제작을 지배했던 민족들은, 진정 기술적인 차원에서 그것에 놀 랄 이유가 없으며 막연하게 우리들에게 경의를 표할 이유는 더욱 없다. 왜냐하면, 그 민족들은 스스로가 그것을 지배해 보았기 때문이다. 대장 간에 성스러움이 배어든 이유는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어떠한 독점권도 갖고 있지 않다. 현대의 원자탄과 산업 공해의 위협이란 것도 사실은, 우리는 상상적인 것이라고 믿는 반면에 원시인들은 비록 그것을 반만 알았지만 그러나 . 실질적인 것이라고 믿 었던 어떤 법칙의 결과들 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폭력을 조작한 사람은 누구든지 마침내 이 폭력에 조작당하게 마련이다.

대장간을 변두리에 위치시키고 있는 사회는 우리 사회와 그렇게 다 르지 않다. 그 사회는 대장장이나 마술사의 행위로부터 이익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들을 내버려둔다. 그러나 반대로 폭력의 피드백 fee dback 현상이 일어나면 사회는 자신을 나쁜 일에 끌어넣었던 사람들을 책임 자로 몰아세운다. 사건이 나면 우선 사회는 성스러운 폭력의 조작자들 울 비난한다. 사회는 반쯤만 그 사회에 속해 있는 그들이 자신들을 배 반한다고, 그리고 익히 알고 있는 그 의심스러운 힘을 사회에 불리하게 사용한다고 그들을 의심한다. 금속이나 금속 제작과 전혀 무관한 불행 이 마을을 덮치더라도 대장장이들은 위협받는다. 죽 사람들은 그를 나 쁜 편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성스러움, 다시 말해 폭력이 공동체의 내부에 나타나면 곧, 희생물 구조가 나타난다. 평화시에도 대장장이는 마술사뿐 아니라 결국 그것 과 같은 것인 성스러운 왕과 똑같이 취급된다. 어떤 사회에서는, 대장 장이는 계속 따돌림받는 사람이면서도 최고 심판관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끝없는 갈등이 일어나면 그는 〈원수와 형제를 가려내도록〉 요구 받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그가 어떤 때는 해롭고 또 어떤 때는 반대로 질서회복적이며 평화적인 성스러운 폭력을 구현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대장장이나 마술사가 그들의 폭력행위에 의해 히스테리가 진정된 공 동체의 손에 의해 죽는 것은, 희생물과 성스러움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더 확연히 드러내 주는 것이다. 희생에 기반을 둔 모든 사고체계들이 그러하듯이, 대장장이를 산성화하는 체계도 거의 닫혀 있는 체계인 것 같다. 대장장이, 마법사, 마술사, 그리고 일반적으로 성스러움과 특별한 관 계가 있다고 간주되는 모든 인물들의 폭력적인 죽음은, 자발적인 집단 폭력과 제의적 희생의 중간에 위치될 수 있다. 이 둘 사이에는 아무런 단절도 없다. 이러한 애매성을 이해하는 것은, 바로 초석적 폭력과 제 의적 희생 그리고 이 두 현상의 관계를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 종교에 대한 현대인의 무지는 종교를 계속 지속시키게 한다. 본질적 폭력에 더욱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던 세계 속에서 종교가 행하던 역할을 현대에 와서는 바로 이 무지가 이행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폭력이 인간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여전히 찰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폭력과 성스러움의 일치를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는 것 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치를 믿어야 한다. 특히 어휘에 있어서 그 러하다. 사실 많은 언어에는, 그리고 특히 그리스어에는 폭력과 성스러 움의 일치를 분명히 보여주는, 그러면서 우리의 설명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될 만한 어휘둘이 있다. 일반적인 문화적 전보, 그리고 특히 어휘학자들의 노력은, 거의 언제나 원시언어가 결합시키고 있는 것을 분리하려는, 즉 폭력과 성스러움의 결합을 무조건 제거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 언어를 통해서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질적인 면에서 우리의 고증에 더 많은 신뢰를 보태 줄, 에밀 방브니 스트 Emi le Benve ni s t e 의 『 인구제 도사전 Di ct i on air e des ins ti tut i on s ind o-eu- ro p eennes 』에서 그 예를 찾아 보기로 하자. 〈성스러운〉이라는 뜻의 로부터 물려받았을 애매함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전혀 지적하지 않은 채,

〈 h i eros 〉 는 폭력과는 전혀 무관하며 언제나 〈성스러운〉이라고 번역되어 야 한다고 방브니스트는 단언한다. 이 언어학자의 견해로는 〈 h i eros 〉가 폭력을 함축하고 있는 낱말들과 자주 연관된다는 사실에 어떠한 중요 성도 부여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그에게 있어 이 말의 용법은 항상, 그것이 직접적으로 수식하는 단어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과 가까이 있 다는 사실에 의해서, 즉 덱스트 속에 폭력과는 전혀 무관한 특별히 종 교적인 의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정당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그럴듯하지 않고 그래서 용인할 수 없다고 여기는, 성스러움에 관한 말들 속에 있는 이 이중성을 제거하기 위하여, 방브니스트는 중 요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우리가 이제 막 살펴본 첫번째 방법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약해진 두 〈대립적인 것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문화가 발전해도 이중성이 사라지지 않고 대립되는 두 의미가 계속해서 살아 있는 드문 경우에는, 그는 서슴없이 한 낱말 속에 별개의 두 단어가 우연히 결합된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만다. 〈 kra t os 〉 와 거기서 파생된 형용사 〈kra t eros 〉의 경우에는 이 두번째 방법이 쓰인다. 〈 kra t os 〉는 일반적으로 〈신의 힘〉이라고 번역된다. 〈 kra t eros 〉 는 어떤 때는 신을 수식하여 〈신과 같이 강한〉, 〈초자연적으 로 힘센 〉 이라고 번역되기도 하지만, 또 어떤 때는 반대로 신적인 것이 거의 없는 사물을 수식하기도 해서, 그리스인들이 다음과 같이 생각하 는 것을 이 어휘 연구가는 못마땅해 하기도 한다. 〈 kra t os 〉 로부터 〈 kra t eros 〉로 이행할 때 우리는 이 형용사에서 그 명사에서 와 감은 개념을 기대하게 된다. 〈 kra t os 〉는 언제나 영웅, 용감한 사람, 지도자 들의 툭칭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그 형용사 〈 kra t eros 〉가 찬사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며 또 실제로 증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전혀 찬사의 의미는 없으면서 오히려 비난이나 질책을 함축한 〈 kra t eros 〉의 또 다른 용법에 대해 마땅히 놀라게 된다. 프리 암 Pr i am 의 아내 해쿠베 Hecube ® 는, 자기 아들 헥토

르를 죽인 아킬레스에게 말하면서 그 를 ( 2 ,5 15) 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 신에 관한 또 다른 수 식어들, 죽 살인자 m i a ip honos , 인간 살해자 andro p honos, 인간에게 치명적인 broto l oig o s, 파괴자 a i delos 등과 비교해야 한다 . 그 어느 것도 이 신을 호의적 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다. 이 불일치는 다른 데서도 드러난다 . 〈 kra t os 〉 가 순전히 신과 인간들을 지칭 하는 반면에, 〈 kra t eros 〉 는 동물이나 사물들도 수식할 수 있는데 이때 그 의 미는 언제나 〈무자바한, 잔인한, 폭력적인 〉 등이다. 헤시오드 Hes i ode @ 에게서도 우리는 호메로스적인 〈 kra t eros 〉 에 의해 구분되 는 이 두 개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 죽, 이 말은 〈 amunon 〉( 나무랄 데 없 는)이라는 말이 수반될 때는 호의적인 의미이며 (Theo g . 1013), 살인자 아레스 (Bouclie r 98, 101) 와 용, (Th. 322) , 에 리 니 에 스 Erin y es 0 등을 수식 할 때 는 비 호의적인 의미이다. ® 헤쿠베 Hecube : 유리피데스 비극의 주인공으로, 트로이 전쟁에서 아들들을 거의 잃고 자신도 노예로 끌려가게 되자 상대방 왕의 눈을 파고 그의 아들들을 죽임으 로써 복수한다. ® 풀 마종 Paul Mazon(1s74-1955) : 프랑스의 헬레니즘 문화연구가로서 고대 그리 스 문헌의 소개에 큰 업적을 세웠는데, 특히 일리아드의 소개는 귀중한 것으로 남아 있다. ® 아레스 Ares : 제우스와 헤라의 아들로 전쟁의 신. 로마 산화의 마르스 Mars 에 해 당한다. @ 헤시오드 Hes i ode : 고대 그리스 서사 시인 . 천지창조, 신의 탄생을 소박한 세계 관으로 묘사한 1,022 행의 서사시인 그의 대표작 『신통기 Theog on i e 』가 유명함. @ 에리니에스 Er i n y es : 알렉토 Ale ct o, 티시포네 Tis ip h o~e. 메가에라 Me g ere 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복수의 여신들로서 그녀들은 도덕 법칙을 상징했는데 , 특히 가문, 씨족 안의 살인자들에게 복수했다. 아데네인들은 이 여신들을 무서워하여 에우메니대스(착한 여신들)라고 불렀다.

여기서 의미론 적 구 분 의 기준은 〈 찬사의 의미 〉 , 〈 호의적인 기색 〉 , 달리 말해서 〈 이로운 것〉이다. 방브니스트는 여전히 성스러운 폭력 속 의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의 결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확실성〉들이 물러가고 아주 분명한 완전히 일의적인 의미들이 나타날 때까지 선별작업을 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여기는 것 같다. 하여튼 이 일은 벌써 시작되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미 종교적인 해석들은 위기에서 나오는 현상들을 어느 한쪽 아니면 다른 한쪽으로 몰고 가 려는 경향이 있었다. 갈수록 성스러운 것의 두 측면을 독립된 두 개의 실체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점점 더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라틴어의 〈 sacer 〉는 본래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것의 이로 운 면만을 표현하는 낱말의 필요성이 느껴져서 같은 어원의 라는 자매어가 나타났다. 알다시피, 현대 어휘학의 경향은, 초석적 경 험의 흔적들을 조금씩 제거하고 폭력의 진실을 갈수록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지속적인 신화 조작으로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의 작가들은 이에 반대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다음 인용문은 장메르 H . J eanma i re 가 그의 『디오니소스』에서, 바카스의 여승 혹은 일 반적 으로 바카스의 여 신도를 의 미 하는 〈t h yi en 〉의 파생 어 〈 t h yi as 〉 라는 말에 대하여 하고 있는 주목할 만한 언급인데, 우리는 〈 t h yi en 〉 의 다른 파생어인 〈t hy mos 〉에 대해서는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그럴 듯한 어원을 통해서 우리는 이 말을 그 의미에 상당한 애매모호성이 담겨 있는 어떤 동사와 관련지울 수 있을 것이다. 그 의미가 애매모호하다는 것은, 이 동사가 한편으로는 〈희생을 치르다〉를 의미하며 , 다른 한편으로는 맹 렬하게 〈분출하다〉 , 혹은 폭풍우나 강물, 바닷물처 럼 〈소용돌이 치다〉, 땅 위에 뿌려진 피처럼 〈솟아나다〉 , 분노 • 격분이 〈끓어오르다〉 등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폭풍과 갇은 소용돌이는 바카스의 여신도들의 특징이라 할 만한 최 면 상태 에 도달하기 위 한 홍분의 한 방법 에 해 당하며, 에 의하든 혹은 다른 방법에 의하든간에 희생은 이런 의식에 따라오는 당연 한 부속물이며, 나아가서 희생이 그 집행자에게는 입장에서의 황홀한 의식이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 두 개념을 어근이 서로 다론 별개의 낱말로 구분하고 분할할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현대의 연구가둘은,

신의 존재와 영향력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해석되는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의 희생물의 경련과, 신들린 사람의 발작적인 동요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느 껴지며 또한 그 유사성이 분명히 표현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3 )

3) H. Jea nmair e , op. cit., p. 158.

晶 희생양 메커니즘에 의한, 폭력과 성스러움의 일치에 힘입어서 우리 는 앞에서 원칙을 제시했던 희생 이론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앞에 서 우리는 희생을 산에 대한 봉헌으로, 죽 그 초월자가 〈먹고 사는〉 양분 풍부한 선물로 간주하던 전통적인 해석을 거부했었다. 이 해석이 신화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단순히 상상적인 것이라고 결론지어서는 안된다. 이제,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도 종교적인 담론 이, 현대 학자들의 모든 것보다 더 전실에 가깝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폭력이 희생제의적 처형에 집중함으로써 폭력은 진정되고 가라앉는 다. 그래서 폭력은 추방되어서 그것과 완전하게 구별되지 않는 신의 실체에 덧붙여지는 것 같다. 왜냐하면 모든 희생은 초석적 만장일치의 순간에, 다시 말해서 신이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던 순간에 만들어졌던 거대한 평정을 좀더 축소해서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 간의 육체가 음식물을 살과 피로 변형시키는 장치이듯이, 초석적 만장 일치는 나쁜 폭력을 안정과 풍요로 변형시킨다. 한편, 만장일치가 생겨 남으로써 이 만장일치는 조금 완화된 형태로 자신의 작용을 무한정으 로 되풀이하는 기계장치, 죽 제의적 희생을 적당한 자리에 위치시킨다 . 만일 신이 바로 최초에 집단적으로 추방된 폭력이라면, 제의적 희생이 신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항상 다름아닌 그 신의 실체의 일부, 죽 신 자신의 폭력의 일부이다. 희생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때마다, 그래서 나쁜 폭력이 좋은 평정으로 변할 때마다, 우리는 신이 이 폭력의 봉헌

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또한 그것을 먹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신학이 희생작용을 신성의 . 권한 밑에 두는 것이 일리가 없는 것 이 아니다. 성공한 희생은 폭력이 다시 내재적, 상호적으로 되는 것을 막는다. 이것은 곧 외적이고 초월적이며 이로운 폭력을 강화한다는 것 울 의미한다. 희생은 신의 힘을 보존하고 증가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신에게 가져다 준다. 바로 이 신은 나쁜 내재성을 〈소화하여〉 그 것을 좋은 초월성으로, 다시 말해서 자신의 고유한 실체로 변하게 한 다. 이런 음식에 대한 비유는, 희생물은 아주 종종 인간들이 먹어 본 적이 있는 실제로 식용으로 쓰이는 동물이라는 사실에 의해서 정당화 된다. 이 영양섭취 과정 뒤에는 완전한 폭력의 작용과 그 변형체들이 있다. 따라서 과학적 전실의 차원에서는 틀린 것이라 하더라도, 폭력으 로부터 인간관계를 보호해야 하는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희생에 대한 이 종교적 담론은 완전히 옳은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신을 공양하기를 게을리한다면 신은 굶주리고 화가 난 채 시들어 가든지, 아니면 비할 데 없이 잔인하고 격렬해져서 인간들에게서 직접 자신의 먹이를 찾으 러 올 것이다. 희생물은 파괴되어서 언제나 공동체 밖으로 추방된다. 이때 폭력도 진정되어서 그 희생물과 함께 추방된 것으로 간주된다. 말하자면 폭력 은 의부로 던져졌다고 간주된다. 그리고 공동체 내부에서 문화질서가 지켜지고 있을 동안에는 이 폭력이 그 공동체에서 제의된 모든 존재들 속에 영원히 스며들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서면 거기는 바로 끝도 경계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성스러운 세계이다. 이 성스러운 왕국에는 신이나 초자연적 인 모든 존재, 온갖 괴물들이나 죽은 사람들뿐 아니라 문명과는 낯선 자연이나, 우주, 그리고 다른 인간들까지 있다. 우리는 종종 원시인들은 〈성스러움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말한다는 것은 곧, 자신들만이 성스러운 것에서 나왔으며 성스 러운 것이 명하는 규칙들을 자신들만이 따르고 있다고 믿고 있는 원

시인들과 똑같은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이같은 규칙들 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온전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때는 아주 해로운 것처럼, 또 어떤 때는 아주 이로운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죽 그들은 성스러운 것 속에 참겨 있다. 모든 공동체는 스스로를, 때로는 잔잔하고 고요하며 때로는 무섭게 동요하는 막막한 대양 위에서 조난당한 의로운 한 척의 배라고 여기고 있다. 침몰하는 것을 막는 데 충분하지는 않지만 필요한 첫번째 조건 은, 그 대양 자체가 명하는 모든 항해 법칙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가라앉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는 없다. 죽, 선체 에 물이 스며드는데, 이 물은 쉬지 않고 감쪽같이 스며든다. 이렇게 되면 제의를 반복함으로써 배에 물이 가득 차는 것을 막아야 한다. 만일 어떤 사회가 두려워해야 하는 성스러운 것을 갖고 있다면, 그 사회는 또한 그 성스러운 것에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 자신만이 성스 러운 것 밖에 있다고 여길 때, 그 사회는 분명 자신은 성스러운 것에서 생겨났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방금 사회는 성스러운 것의 밖에서 생 겨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옳다. 앞에서 보았듯이 초 석적 폭력은 인간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추방울 수락함으로 써 사회가 자신 밖에 존재하도록 내버려두는 성스러움의 사건이다. 성스러운 것의 절대권, 성스러운 것과 공동체 사이의 모든 차원에 존재하는 이상한 불균형을 살펴보면, 우리는 모든 영역의 주도권이 이 성스러운 것에서 나온다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사회의 창조는 우 선 무엇보다도 하나의 분리이다. 건국 제의에 단절의 메타포가 자주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예를 들어 인쿠알라 왕의 제 의의 본질적인 행동은, 새로운 한 해를 단절하고, 물어뜯고 자르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공동체에 배어들어 당연히 해로운 것이 되어 버린 그 성스러운 것과의 단절을 통해서 새로운 주기를 시작하는 데 있다. 사람들이 카타르시스, 순화, 정화, 귀신추방이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항상 배설과 분리의 개념이 둘어 있다. 현대적 사고는 성스러운 것과의

관계를 중개라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대적 사고는 해 로운 요소가 부분적으로 제거된 종교적인 것에서부터 최초의 사실을 해석하려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우리는, 신이나 신화적 영웅들, 혹은 죽은 자들의 매개를 통해서 개입하는 성스러움과 사회의 모든 혼합은 전적으로 해롭다는 것을 보았다. 모든 초자연적인 것의 방문은 우선 복수의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성스러움이 떠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이로운 것이 나타나는 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개의 요소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만약 이런 것이 정말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면, 사회와 성스러움의 완전한 분리는 그 것들의 완전한 결합만큼이나 무서운 것일 것이다. 너무 심한 분리는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성스러운 것이 전면적으로 재발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일 성 스러운 것이 너무 멀어지면, 그것이 우리들에게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가르쳐 준 규칙들을 우리가 게을리하거나 망각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항상 인간의 존재는 계속 성스러운 것에 의해서 지배되고 조정되고 감시되며 또한 풍요롭게 된다. 하이데거 철 학의 존재 I' ex i s t ence 와 존재 자 I' etre 사이 의 관계 가 여 기 서 말하는 사 회와 성스러움의 관계와 아주 유사한 것 같다. 이는 단순히 만일 인간들이 폭력 속에서 살 수 없다면, 그들은 또한 폭력의 망각 속에서도, 혹은 제의나 금기를 무시하면서 폭력을 단순한 도구나 충실한 하인으로 여기는 환상 속에서도 그리 오래 살 수 없다 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회가, 전혀 해이해지지 않고 근면하면서도 질서 있는 평화 속에서 번영하기 위해서 성스러움과 유지해야 하는 관계의 복합성과 그 뉘앙스는, 〈적정거리〉라는 말로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는 성스러운 것에 너무 접근해서도 안 되지만――그렇게 되면, 공동체는 성스러운 것에 의해 먹힐 것이다――그렇다고, 이 이 로운 위협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서 그 비옥한 존재의 효과를 상 실할 위험에 빠져서도 안된다.

이러한 공간적인 해석은,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성스러운 왕과 같은 예외적인 인물 속에 성스러운 것이 구현되어 있다고 보는 사회에서 볼 수 있다. 사회 안에 성스러움이 완전히 배어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물론 이상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때로는 그런 왕은 절대로 땅과 접촉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땅은 곧 전염성이 있게 되어 〈그 때 문에〉 그의 신민들이 죽게 되기 때문이다. 때때로 왕은 스스로 음식을 먹는 것도 금지된다. 만일 그가 자신의 손으로 무슨 음식이든 건드리 기만 하면, 그 음식은 곧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위험한 음식으로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성스러운 괴물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시 선과 닿으면 벼락에 맞는 것처럼 죽게 될 신민들을 위해서, 완전히 눈 에 띄지 않게 숨어 있어야 하기도 한다. 이 모든 예방책들은 지나친 직접 접촉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그 러나 이 예방책들은 이상한 인물을 환대하는 것이 사회를 위해서 나 쁘다고는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알다시피, 왕은 아주 해로우면서 동 시에 아주 이로운 존재이며, 폭력과 평화의 〈역사적인〉 교대는 시간에 서 공간으로 이전된다. 그 결과들은 현대 기술 사회의 에너지의 변모와 유사성이 없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종교적 사고가 어떤 자연의 모델 에서부터 이미 작동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왕 앞에서는 그의 권 력 죽 〈실완느〉의 과도함에 불쾌감을 느끼던 신하들도, 만일 왕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면 무서움에 떨 것이다. 우리들의 〈소심함〉과 〈존경〉은 사실, 이러한 현상의 완화된 형태에 불과하다. 성스러움의 화신 앞에는, 해로운 효과를 피하면서 이로운 효과를 있게 해 주는 어 떤 적정거리가 있다. 절대적인 것과 불은 똑같다. 너무 가까이에 있으 면 불타버리지만 너무 멀리 있으면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한다. 따뜻 하게 데워 주고 밝게 밝혀 주는 불은 두 극단 사이에 있는 불이다.

晶 앞에서 보았듯이, 모든 희생제의는 두 가지 대체에 근거하고 있다. 첫번째 대체는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을 단 하나의 희생물로 대체하 는 초석적 폭력에 나타나는 대체이며, 글자 그대로 제의적인 두번째 대체는 속죄의 제물 v i c ti me em i ss ai re 을 희생될 수 있는 제물 v icti me sac- rifi able 로 바꾸는 대체이다• 희생될 수 있는 제물들의 본질적인 특징은 보통 그 사회 밖에 떨어져 나가 있다는 것인데, 그 반면에 속죄의 제 물은 사회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제의적 희생을 초석적 폭력의 부정확한 모방이라고 규정지었었다. 이제 우리는 희생제의가 왜, 본래 의 제물과 많이 닮은, 가장 적합해 보이는 제물과 그 사회의 다른 구 성원들에게는 전혀 피해를 주지 않는지 그 이유에 대해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방금 지적한 본래의 제물과 제의의 제물 사이에 있는 차이의 필연 성은, 기능적 측면에서 완전하게 설명될 수 있다. 만일 속죄의 제물과 마찬가지로 희생제의의 제물이 그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그 희생은 폭 력을 억압하기는커녕 오히려 폭발시킬 것이다. 그것은 초석적 폭력의 효과를 재생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희생위기를 열게 될 것이기 때문 이다. 그러나, 어떤 조건들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조건 둘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둘의 존재가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다. 두번째 희생대체는 이 점에 대해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인간이성의 개입으로써, 죽 공동체의 내부로부터 의부로의 이행을 쉽게 해 줄 수 있는 기본적인 상식으로써, 원본과 복사본 사이의 차이, 죽 원초적 제물과 제의적인 제물들 사이의 차이를 설명해 보자. 이 두 제물 사이의 이로운 차이는, 현대적 휴머니즘의 의미에 있어서 희생제 의의 〈인간적인〉 요소라고 쉽게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희생제의의 〈속임수〉라고 불렀던 것은 사실, 제의적 〈모방〉의 요구를

어느 정도 무시하고서 종교적인 그 유사의무조항둘을 마음내키는 대로 행해 버렸을 그 제사장들의 〈속임수〉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마 도, 우리 현대인들이 제일 처음으로 알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모든 제 의의 헛됨과 무용성을 이미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번째 회생대체와 함께, 이미 우리들의 태도를 예고하는 아직 설익은 회의론 앞에서 , 이런 광신적 태도는 벌써 그 입지점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싶 다 . 그러나 우리는 이 가정을 억제할 수가 없다. 우선 사람이 제물이 되 는 사회가 많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전쟁포로, 노예, 아이들이거나 아 니면 성 스 러운 왕이거나 이와 유사한 희생제의에서는 심지어 〈그 사회 구성원들 〉 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두번째 희생 대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속죄의 제물을 대상으로 삼는 원초적 폭력과 그것을 계승하는 제의적 모방 사이의 관계가 성스러운 왕의 경우에서 특히 눈에 잘 띄는 이유이다. 제 4 장에서도, 우리는 희생물과 제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원초적 제물과 제의적 제물 사이의 유사성 때문에 바로 이 성스러운 왕을 살펴보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이 성스러운 왕의 경우에는 두번째 희생 대체가 빠져 있 다고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초석적 폭력의 전정으로 정확한 반복은 이론상으로 불가능하다. 미래의 희생자는 단지 속죄의 제물을 대신하 기 위하여 선택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 주위의 모든 인간들과는 다른 존재가 된다. 그는 정상적인 인간 관계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단 한 사 람 , 그만을 포함하는 어떤 부류에 들게 되는데, 이 부류는 다른 사회 에서는 소나 양과 같은 부류로서 〈희생될 만한〉이라는 수식어를 받는 부류이다. 희생제의의 미래의 제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대상을 변형시키는 데에 죽 그를 이미 성스러운 존재로 만드는 데에 충분하다 . 여기서 우리는 원초적 제물과 제의적 제물 사이에 거의 항상 존재하는 단절과 차이의 원칙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제물은 희생당할

때 성스러운 것이 된다. 그래서 성스러운 것은 자기 자신을 추방되도록 내버려두거나 아니면 스스로 자신을 추방해 버린다. 따라서 희생양에 게는 괴물 같은 성격이 있으므로, 사람들은 더 이상 이것을 그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같은 것으로 보지 않는다. 희생될 수 있는 부류들은 종종 그 사회에 속하지 않는 존재들로 구 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그 희생물이 성스러운 것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사회는 이미 이 성스러운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희생물을 대신하기에 가장 부적합하다. 이렇게 해서, 제의의 희생물들은 사회 밖 에 있는 동물이나 이방인들처럼 항상 성스러운 것에 젖어 있는 존재들 가운데에서 선택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원초적 제물에 가장 유사한 것 으로, 그래서 정확한 모방이라는 점에서 볼 때 희생되기에 가장 적당한 것으로 보이지만, 원초적인 종교적 경험 죽 초석적 폭력 그 자체의 관 점에서 보면 사정은 다르다. 이 관점 속에서는 희생물이 정말 변모되 는데, 바로 이 변모가 폭력으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해 주고, 신도들이 서로 상대방을 이 원초적 제물을 대신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기는 것을 막아 주며, 그럼으로써 이들이 상호적 폭력 속으로 다시 떨어지는 것을 막아 준다. 제물들이 그 사회의 의부에서 선택된다거나 혹은 제물로 선택됐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 제물들에게 어떤 외재성을 부여하는데, 그것은 회생물이 더 이상 진짜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더 이상 〈다른 구성원들과 갇은〉 그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번째 희생대체의 원심력은 바로 종교적인 것 그 자체 죽 이로운 무지 속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지, 설익은 회의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 다. 두번째 희생 대체의 원칙은, 종교적인 것 밖으로의 도피와는 무관 하다. 공동체가 피해를 입지 않는 것은, 공동체가 정확한 모방 규칙으 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규칙을 세심하게 준수하기 때문이

다. 결국 두번째 희생 대체에는 우리들의 회의주의와 관련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보면, 희생제의의 속임수는 이 제도 자체의 속 임수이지 제사장둘의 속임수는 아니다. 그렇다고 이 때문에, 희생물을 단순히 공동체와 무관한 것으로 치부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괴물 같은 짝패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모든 차이들, 특히 의부와 내부의 차이를 없애버린다. 그래서 그것은 내부로부터 의부로 자유롭게 왕래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그것 은 그 사회와 성스러운 것 사이의 연결선인 동시에 분리선이다. 이토록 바범한 희생물을 대신할 수 있기 위해서 제의의 희생물은 그 사회에 속하면서 동시에 성스러운 것에도 속해야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이제 우리는 왜 제의의 희생물들이 거의 언제나 명확하게 의부적인 것이 아니라, 노예, 아이들, 가축처럼 그 사회의 경계지역에서 선택되 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주변성이 희생제의의 기능을 가능케 해 준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살펴본 바 있다. 희생물에게로 공격성이 집중될 수 있도록 하고 그 전이가 실현될 수 있기 위해서는, 거기에는 단절이 없어야 하고 공동체가 구성원들로부 터 제의적 희생물에로의 〈환유법적인〉 완만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 달 리 말해서 희생물은 공동체와 너무 낯설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또 너무 친근해서도 안 된다. 이 애매성이 희생제의의 카타르시스 효능에 필수적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구체적으 로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또한 우리는 그 제도를 만들어내고 또 사용하는 자들조차 그 비결을 모르고 있는 희 생제의와 같이 복잡하고도 미묘한 제도가 도대체 어떤 기적에 의해서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적어도 지금 우리의 관심 부분에 관한 한, 기적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제의적 사고는 가능한 한 〈괴물 감은 짝패〉와 가장 닮은 제물을 회생시키려 한다. 거기서 자주 희생의 제물들이 충당되는 주변 부의 부류들은 이 요구에 완전히 부응하지는 않지만, 가장 나은 근사

치를 이룬다. 내부와 의부 사이에 위치한 그것들은 동시에 양쪽 모두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제의적 사고는 살아 있는 자들 중에서 제의의 희생물 역할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부류들을 찾는 데 만족하지 않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개 입해서는, 이 희생물을 원초적 희생물의 개념에 더 적합한 것으로 만 들고 동시에 그 희생물의 가타르시스 효과를 크게 한다. 우리는 이러한 유형 의 개 입 을 모두 〈희 생 예 비 작업 pre pa r ati on sacri ficiell e> 이 라 칭 하고 자 한다. 이 말은, 여기서 이 표현은 일반적인 의미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 〈희생 예비작업〉은 항상 희생 직전의 제의적 행위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희생물은 내부와 의부에 동시에 속해야 한다. 내부와 의부 사이의 완벽하게 중간적인 범주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희생물로 삼으려는 모든 존재는! 그것에 요구되는 이 상호 모순적인 특성들 중에서 어느 한 편에 대해서 항상 어느 정도는 부족할 것이다. 즉, 그것은 의재성의 측면과 내재성의 측면에서 둘 다 동시에 결핍되는 경우는 결코 없지만, 어느 한 측면에서는 항상 부족할 것이다. 어쨌든 그 희생물을 완전히 희생될 만한 것으로 만든다는 목표는 항상 같은 것이다. 따라서 광의에 있어서의 희생 예비작업은 아주 다른 두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 첫번 째는 희생물을 더욱 낯선 것으로, 다시 말해서 공동체와 너무 가까운 희생물에게는 성스러움이 배어들게 하려는 것이며, 두번째는 그 반대 로 너무 낯선 희생물은 그 사회에 더 통합시키려고 애쓰는 것이다. 성스러운 왕은 첫번째 유형의 예비작업을 보여준다. 왕으로 선택되 었다는 사실만으로, 이 미래의 희생자를 그가 구현해야 하는 〈 괴물 갇 은 짝패〉로 보기는 어렵다. 사람들이 그에게 근친상간을 범하게 하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해로운 성스러움을 소유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에게 존재하는 너무 많은 인간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즉 그를 공동체로부터 멀리 때어내기 위해서이다. 이 예비작업을 거치고 나면 왕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를 성스러운 괴물로 만드는 내재성과 의

재성을 동시에 소유하게 된다. 희생물이 내재성이 아니라 의재성이 지나치다는 결점이 있을 때, 이 와 유사한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이와 반대의 방법에 의지해야 할 것 이다. 고드프리트 라인하르트가 『신성과 체험』에서 묘사하고 있는, 딩 카족의 거대한 가족 희생은 이 두번째 유형의 희생 예비작업을 잘 보 여준다 .4 )

4) 제 4 장 참조.

딩카족은 어떤 동물을 그 무리에서 끄집어내자마자 곧 희생시키지 않는다 . 그들은 사전에 미리 그 동물을 선택하여 무리에서 떼어내어 사람 거주지 가까이의 특정한 장소에 둔다. 그것울 붙잡아 매는 고삐는 희생에 쓰이는 동물들 전용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동물이 공동 체에 접근하고 공동체에 더욱 밀접하게 통합되도록 기원한다. 우리는 본 시론의 첫부분에서, 희생물을 완전히 인간에 동화시키는 이 같은 유형의 기원을 인용한 바 있다 .S)

5) 제 1 장 참조 .

이를 통해 우리는, 결국 평상시의 딩카족과 그들 가축 사이의 관계가 대단히 친밀하다 하더라도, 아직 희생제의를 가능케 할 정도로 충분히 가까운 것으로는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축이 애초의 추방 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죽 상호적 적대감을 자신에게 수령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요컨대 그것이 결국 〈아주 성스러운 것〉으로 변하기 전에라도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그것을 그들의 원한울 풀 만한 대상으로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과 가축의 동일시는 더 강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희생 예비작업은 아주 다양하며 때로는 상반된 행위들로 되어 있지만 그것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같다. 종교적 사고는 확실한 . 예지를 갖고서 이 목표를 향하고 있다. 종교적 사고는 모르는 사이에 카타르시스 효과의 모든 조건들을 실현시키고 있다. 그것은 가능한 한, 정확하게 초석적 폭력을 재현하려고 애쓴다. 그것은 자신이 원초적 희

생물 속에서 알아보았다고 믿고 있는 그 애매한 존재와 가능한 한 가 장 닮은 희생제의의 제물을 손에 넣으려고, 그리고 필요하다면 만들어 내려고 애쓴다. 따라서 그것이 모방하는 모델은 진정한 모델이 아니다. 그것은 〈괴물 같은 짝패〉 경험에 의해 변형된 모델이다. 이러한 변형 요소 죽 중대한 이 〈차이〉는, 본성 때문인지 아니면 그 희생 예비작업 때문인지는 몰라도, 하여튼 원초적 희생물과는 아주 달라전 이 희생물 쪽으로 종교적 사고를 향하게 하여 이 사고가 원초적인 집단 폭력에 관한 희생제의를 뒤로 미루고 연기할 정도에 이르게 한다. 이렇게 해서 기념 의식이 그 사회의 요구에 합당한 카타르시스의 효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주목할 만한 상응에 유의해야 한다 .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종교적 무지는, 희생 제의와 일반 종교가 사회에 부여하는 아주 실질적인 보 호책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제 11 장 제의의 통일성 지금까지의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그 끔찍한 성격 때문에 종종 〈엉 뚱한 것〉으로, 그래서 해독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 온 제의둘을 우 리의 일반 가정에 통합할 수 있었다. 이 제의들은 사실 〈초석적 폭력이 없는〉 다른 제의와 마찬가지로 해독되지 못하였던 것인데, 우리의 가 정은 이것을 완전하게 해독하였다. 본래부터 인간사회와 낯선 어떤 희 생물을 그 사회에 통합시키는 희생 예비작업의 이 두번째 유형을 통 하여 우리는, 아주 유명하고 또 장관인 브라질 북서해안의 두피남바 Tu pi namba G:: 족의 제의적 식인풍습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두피남바족의 식인풍습은, 알프레 메트로Alf red Me tr aux ® 가 『남미 인 디 언의 종교와 마법 Relig ion et magi es ind ie n nes d'Ame riqu e iu Sud 』 속에 서 언급한 서구 학자들의 텍스트에 의해 알려져 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해석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점들만을 언급하고, 나머지에 대 해서는 이 책과 함께 이 저자의 더 오래된 저서인 『두피남바족의 종 교와 투피 -구아르니 족 종교의 관계 la Relig ion des Tup ina mba et ses rapp o - rts avec celles des autr es tribu s Tu pi -Gua ri n i』 1) 라는 책 을 직 접 참조해 보자. 1) Bib li o th e qu e de l'Ec ole des Haute s Eludes, Scie n ces relig ieu ses, XLV, Pa ris, 1928.

이 두피남바족은 서구 근대 문학과 사상 속에도 나타나고 있다. 『수 상록』의 유명한 한 장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몽테뉴가 루앙에서 만났 던 두 인디언도 바로 이 종족이다. 18 세기 이전 서구 휴머니즘의 기나 긴 역사 속에서 행운을 누린 유명한 〈선량한 미개인〉이라는 초상화를 제시했던 것도 바로 이 투피남바족이다. 자신들이 체포한 모든 적들을 먹어치우는 이 식인풍습은 그들 사이 의 만성적인 전쟁 상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이 풍습은 서 로 다른 두 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그들은 전쟁 도중에 죽은 적을 간 단히 죽석에서 먹어치운다 . 이처럼 이 사회와 사회제도 밖에서는 단지 무차별적인 폭력만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 제의적인 식인풍습은 산 채로 마울로 끌려온 적에게 행해지는 것이었다. 이 포로들은 , 결국은 자신들을 먹게 될 이 부족 사람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수개월, 때로는 수년 동안 함께 지내게 된다. 이 포로들은 그들의 행동에 참여하고 그들의 일상에 뒤 섞이어 그 부족의 여인과 결혼도 하게 된다. 결국 그들은 그둘의 미래 의 제사장들과 함께 그 제사장들끼리의 관계와 거의 똑같은 관계를 형성한다• 요컨대 이 포로는 모순된 이중의 대접을 받는다. 때로는 그 는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된다. 그의 성행위도 다시 행해진다. 또 다론 때에는, 그는 모욕당하고 경멸받으며 폭력을 당하게 된다. 처형 예정일을 조금 앞두고서 이 포로에게는 도주의 기회가 제의적 으로 조장된다. 이 불행한 자는 곧 되잡혀 와서, 처음으로 그의 발목 에는 굵은 밧줄이 채워진다. 그에게는 음식 제공도 중단된다. 그 결과, 그는 음식물을 훔쳐야만 한다. 메트로가 언급하고 있는 학자들 중의 하나는, 〈이 때에 포로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으면서 싸우고 때리고 암닭이나 거위를 훔칠 수 있고,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나쁜 짓을 다 할 수 있는 허가를 받고 있었다〉고 말 ® 두피남파족 Tu pi namba: 아마존강 유역의 두피 Tu pi계 인디언의 인류학자. ® 알프레 메트로Alfr ed Metr a ux(1902-1963) :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인류학자.

하고 있다. 결국 미래의 제물의 비합법적인 행동들이 조장되어, 그것이 규율위반에 이르게 한다. 이 단계는 그 포로를 〈속 죄양 bouc emi ss air e > 으로 변형시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는 것에 현대의 연구가들은, 대 부분 동의하고 있다. 포로의 다양한 역할과 운명을 헉슬리 Francis Huxle y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모순된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하고 구현하는 것이 이 포로의 운명이다. 그 는 사람들이 택한 적이다. 그는 존경받으면서 또한 그 때문에 살해될 처지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의형제인 동시에 사회에서 배척된 자이다. 그는 존경받 는 동시에 경멸당하며 희생물인 동시에 영웅이다. 사람들은 그를 겁먹게 하 려고 애쓰지만 만일 그가 겁먹는 것을 보면 그들은, 그롤 예정된 죽음을 받을 가치 가 없는 자라고 판단한다. 이 모든 사회 적 역 할들을 수용함으로써 그는 이 사회가 야기하는 모순둘, 죽 죽음에 이룰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주면서 ,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의 한 인간이 된다. 제의가 그에게 신화적 영웅의 힘과 속성을 부여할 때, 이런 상황은 더 강화된다 . 그는 그 신화적 영웅의 가슴 속에 있는 다른 세계의 대표자가 되며, 너무 성스럽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와 함께 살 수 없는 야누스와 감은 인물이 된다 .2) 사회의 모든 모순의 원인으로 돌려지는 희생물이 결국 〈인간성이 충만한 . 존재〉로서가 아니라 〈괴물 같은 짝패〉와 성스러움으로 나타나 는 것을 제의하고는, 여기서는 모든 것이 훌륭하게 정의되어 있다. 헉 • 슬리도 옳게 보았다시피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관계와 사회의 진 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전실이기에 사람들은 이 진실 울 몰아내 버린다. 이처럼 이 전실을 몰아내어 인간사 밖에 설정하는 것이 바로 초석적 폭력의 본질적인 기능이라 하겠다. 공동체 일치의 기초가 되는 실제 과정인 희생양 메커니즘에 의지하 2) Aff able Savage s , New York, 1966.

지 않고서는 여기서 일어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 〈 실질적 인〉 이 메커니즘만이 제의적 식인풍습을 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심리학의 열쇠를 통해서 〈희생양〉 현상을 읽는다면, 식인종들은 그들이 저지롤 폭력에 대하여 미리 도덕적 변명을 찾는 것이라고 생 각할 수 있다. 사실 포로가 나쁜 짓을 더 많이 저지를수록 그에 대한 복수도 그만큼 더 합법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떤 노 이로제를 전정시키거나 어떤 〈죄의식 〉 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결과들을 획득하는 것이 문제이다. 만일 현대의 사고가 희생양과 모든 희생대용물들이 갖고 있는 이 엄청난 〈 조작적 〉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인간문화의 가장 본질적인 현상들을 계속 해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희생양 메커니즘은 이중의 구원자이다. 이 메커니즘은 만장일치를 실현시킴으로써 모든 차원의 폭력을 침묵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가까 운 사람들끼리 싸우는 것을 막고 인간의 진실이 드러나지 못하게 하 면서 그 진실을 이해할 수 없는 성스러움인 양 인간세계 밖에 위치시 킨다. 포로는 누적된 증오와 원한과 같은 사회 내부의 모든 갈등을 자신 에게 집중시켜야 한다. 그는 그의 죽음을 통해서 모든 해로운 폭력을 이롭고 성스러운 것으로 변형시키고, 그의 활력을 쇠약해지고 지친 문 화질서에 되돌려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제의적인 식인풍습은·우리들이 앞에서 살펴본 모든 제의들과 유사한 하나의 제의이다. 두피남바족이 이처럼 행동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 그들이 아니라 그 제의제도가 어떤 모델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또한 〈처음에 일어났었던 것〉을 재현해 내려고, 죽 희생물 주위에서 여러 번 일어났었던 만장일치를 다시 한번 더 부활시키려고 애쓴다. 포로가 이중적인 대접을 받으면서 어떤 때는 비방당하고 또 어떤 때는 존경받는 것은, 원초적 희생물의 표본이라는 그의 역할 때문이다. 폭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을 뿐 아직 그 폭력을 변형시키지 않았을 때는 증오를 받던 그가, 그 폭력을 변형

시켜 희생양 메커니즘이라는 통합적 메커니즘을 한번 더 작동하게 할 때는 아주 존경할 만한 것으로 변한다. 처음에 희생물이 더 증오스러운 것으로 보일수록, 그 희생물에게 집중되는 정념들은 더 강렬하며 이 메커니즘은 더 완벽하게 작용할 것이다. 결국, 투피남바족의 포로는 아프리카의 왕과 같은 것이다. 이미 미 래의 죽음이라는 영광으로 완전히 둘러싸인 그는, 성스러운 것의 두 측면을 연속적으로 그리고 동시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그는 바로 폭력 전체를 구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그러하다. 왜 냐하면 그는 모든 시간성을 벗어난 영원 속에서 그것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 자료에 의하면 제의적으로 처형당하고 먹힌다는 점에 있어서, 이 포 로는 포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신화적 영웅을 실제로 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따라서 이 제의적 식인풍습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에 게는 어떤 원초적 사건의 재현으로 여겨진다. 아프리카 왕의 근친상간처럼, 사람을 먹는다는 이 양상이 연구자의 시야를 흐리게 하여 이 두피남바족 제의에서 〈다른 제의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 〉 , 죽 무엇보다도 희생제의를 알아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은 근친상간만큼은 크지 않다. 왜냐하면 이 식인풍 습에 관해서는 프로이트같은 사람이 아직 없으며 현대의 주요 신화의 대열에 이것이 아직 들어가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식인풍습을 유행시키려고 애썼지만 그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먼저 나타나는 것은 성스러움이며 마지막에 가면 아마 식인풍습도 자연적인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미르치아 엘리아데 Mi rc ea E li ade 댜 는 매우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전 달리 말하자면, 그것을 먹기 위해서 제물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희생시켰기 때문에 먹어야 하 3) The sacred and the Profa n e, New York, 1961, p. 103. ® 미르치아 엘리아데 Mi rc ea Elia d e(1907-1986) : 루마니아 종교사학자. 2 차대전 이후 프랑스에서 거주하다 만년에 사카고 대학 교수가 됨.

는 것이다. 똑같이 먹히는 모든 동물 제물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식인이라고 해서 그다지 특별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 면에서 이것은 더 난해한 제의들을 해명해 준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희생물의 살을 먹어치우는 것은 모두, 결국에는 언제나 다른 폭력 죽 타인의 폭력에 기반을 둔 인간 영혼의 전정한 식인풍습인 모방욕망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열렬한 모방욕망은 항상 그 존재에 성 스러움이 녹아들어 있는 모델-방해자가 구현하고 있는 폭력을 파괴하 고 동시에 흡수하기를 원한다. 이래서 우리는 그들의 희생물을 진짜 폭력의 화신으로 보려 하는 석인종들의 욕망을 이해할 수 있다. 희생물의 살을 먹어치우는 것은 당연히 그 제물을 희생에 처하고 난 다음에, 다시 말해서 일단 해로운 폭력이 이로운 실체로 완전히 변모하여 평화와 신선한 생명력과 풍요 로움의 원천으로 완전히 개종하고 난 다음에 일어난다. 제의적 식인풍습도 다른 제의와 같이 희생제의라는 것을 일단 알고 나면, 포로를 선택하는 것이나 그 포로가 그를 먹어치울 종족과 동화 되는 것은 이제 쉽게 이해가 된다. 미래의 제물은 밖으로부터, 즉 무차별적인 성스러움으로부터 나오는 데 그 상태로는 공동체와 너무 낯설기 때문에 그대로 곧장 희생제의에 사용될 수는 없다. 제물을 원초적 희생물의 정확한 재현에 적합한 것 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에 결핍되어 있는 그 사회의 소속감을 부 여하여 그것을 〈내부〉의 존재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그것의 본 질적 특성인 기존의 성스러운 의재성인 〈의부〉의 존재라는 속성을 완 전히 제거해서는 안된다. 이 희생 예비작업은 희생물울 폭력의 〈자연적이고〉 직접적인 목표인 주변 사람들과 충분히 유사하게 만들어 공격성향을 그쪽으로 옮기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이 희생물을 〈구미 당기는〉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댜 그와 동시에 이 희생물은 계속해서 충분히 낯설고 무관한 것이어 서, 그가 죽더라도 공동체가 복수의 악순환에 빠져들 위험이 없다. 그

포로의 입장을 지지할 수 있는, 또 아마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그의 아내일 것이다. 만약 그녀가 이 역할을 너무 중시하게 되면 그녀는 간단히 처형될 것이며, 그 부부의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도 역시 처형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희생양 메커니즘의 모방, 즉 항상 세심하게 모방하지 만 그러나 변형이 일어나므로 어쩔 수 없이 애초의 희생물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이 모방이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 고 너무 매력적이지도 않은 회생물, 다시 말해 그 공동체에서 폭력을 제거하고 〈 순화 〉 하는 데 가장 적합한 유형의 희생물에게 폭력을 발산 하는 이른바 폭력 〈 배설 〉 이라는 그 사회의 〈욕구〉에 부응하는 이런 유형의 제의를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했는가를 찰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희생물의 〈 효과 〉 를 증대시키는 데 기여하는 희생 예비작 업과 이 제도가 , 진정 아무도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공동체의 통일을 만들어내고 재생하는 원초적 살해에 대한 모방만으로도 생겨날 수 있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포로의 선택을 앞에서 정의한 두번째 유형의 희생 예비작업의 한 예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미래의 제물이 살아 있을 때 신성화된다는 점에서 제의적 식인풍습은 아프리카 왕 제의와 아주 흡사하다. 이 두 제의의 유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장 쥬네의 『사형수 감시 Haute Surve i llance 』라는 연극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작 품은 한 사형수와, 곧 집행될 그의 사형집행에 매료된 두 〈원수형제〉라 할 수 있을 별로 대단찮은 두 불량배에 대한 이야기이다. 쥬네는 여기 서 이 두 불량배가 그 사형수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서로 경쟁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그러나 유사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해서 이 제의적 관습이 이 현대극과 정신이 갇다고 성급하게 결론지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아프리카 왕국과 투피남바족의 식인풍습 사이의 밀접한 관 계를 찰 보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전자는 〈내부〉에서 후자는 〈외부〉에서 희생물을 끌고 온다는 희생물 출처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이 둘이 똑같은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희생 예비작업이 서로 반 대방향으로 행해져야 한다. 두피남바족이 포로 를 그 사회에 통합시키 는 것은 딩카족이 희생에 쓰일 가축을 그 무리로부터 떼어내어 그들 가까이에 두는 것과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투피남바족의 경우는 이 원칙의 실천이 훨씬 더 진행되어 있다. 이 기이한 포로 선택은, 희생 물을 내부의 존재로, 즉 살해할 자들과 가까운 존재로 만든다는 우리의 주장을 도와줄 아주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 다. 두피남바족의 식인풍습은 특히 원초적 희생물과의 〈 유사성 〉 에 아 주 민감한 것 같다. 희생물의 희생 효과를 해치지 않으면서, 원초적 희생물과의 유사성을 재생산하기 위하여 이 식인풍습은 그야말로 아주 철저하게 이 방법을 따르고 있다. *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모두 기존의 견해와 물론 상반된다. 이 견해에 의하면, 공동체 전체가 미워하면서 괴롭히고 또 먹어치우는 것은 가까운 자가 아니라 대대로 내려오는 원수 이방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제의적 식인풍습은, 부족간의 규모로 펼쳐지는 끝없는 보복으 로 간주된다. 이 해석아 틀렸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이 제도에는 이런 독법으 로는 해독할 수 없는 어떤 본질적인 면들이 있다. 그 반면에, 우리들이 제안하고 있는 해석은 이런 독법을 쉽게 통합할 수 있다. 이 독법은 〈불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기도 하다 . 이것은 이 제도의 진실에서 당연히 어긋난, 우리가 소위 제의적 식인풍습의 〈이데올로 기〉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의 본질울 이루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트심쉬안족 인디언에서와 같이, 여기에도 사회 내부 에서 의부로 향하는 폭력의 이동이 존재한다. 이 이동이 바로 희생제 의적인데 단순히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공동체들

은 서로 전쟁을 하면서 상대방 종족을 서로 먹어치우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 종족들 사이에서는 서로 합의하지 않기로 합의한다〉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구적인 전쟁은 식인 의식에 필요한 희생물 울 제공하는 본질적인 기능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쌍방의 포로 숫자는 거의 균형을 이루어 상호 공물 제공이라 할 만하다. 이는 트심쉬안족 처럼 그 역시 종종 적대감이 깃든 여성 교환 제도와 다소 관련된 돗 하다. 포로를 교환하든 여자를 교환하든, 분쟁으로 제의화된 교환이나 교 환으로 제의화된 분쟁은 모두 내부에서 의부로 이동하는 똑같은 희생 제의적 전이의 변이체들일 뿐이다. 이 전이는 상호에게 유익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로 폭력이 분출되어서는 안 될 곳인 기본집단 안에서 폭력이 분출되는 것을 막아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 종족으로 부터 다른 종족에로의 끝없는 복수는 각각의 공동체 내부에서 효과적 으로 〈 지연되었던〉 복수의 희미한 메타포로 읽혀져야 한다. 이 차이, 아니 오히려 이 〈차별화〉, 이 이동에는 물론 위장적인 것은 전혀 없다. 이 제도가 효력이 있는 것은 바로 상이한 집단 사이에는 경쟁심과 적 의가 실제로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분명히 이런 유형의 갈등이 언제나 참을 수 있는 한계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 그 다양한 의미로써 제 의 적 식 인풍습의 구조를 요약하고 있는 〈토바자라 t obaj ara 〉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우선 대립체계, 적대적 대면 속에 있는 한 인물의 입 장을 지칭한다. 이 말은, 〈대면하다〉, 〈반대의 입장에 있다〉를 의미하는 동사와 뿌리가 같은 말이다. 우선 포로의 살해는 가능한 한 일대일 결투와 유사하게 전개된다는 것을 언급해야겠다. 그 희생물은 밧줄에 묶여져 있지만 얼마 동안은 언제나 단 한 사람인 그의 상대자, 죽 그의 〈토바자라〉가 가하는 공격 울 피할 수 있는 여지가 주어진다. 〈토바자라〉라는 말이 식인향연의 희생물을 특별히 지칭한다고 해서 놀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 단어에는 또한 〈처남-매부 beau- fr ere 〉라는

세번째 의미가 있다. 〈 처남 - 매부 〉 는 가장 자연 스 러운 적대자 형제를 대신하고 있다. 자기 아내를 얻는 대신에 사람들은 또한 자기 가족 중 의 한 여성을 〈처남-매부 beau - fr ere 〉 에게 양도한다. 이 때의 여성은 너 무 가까운 여성이라서 만약 같은 기본집단의 남자들이 그녀를 아내로 삼으려 하다가는 거의 필연적으로 정말 형제경쟁의 목표가 되고 말 그런 여성이다. 이 희생적 변화는 적의의 대상을 형제에서 〈 처남-매 부 〉 로 대체한다. 이 제도의 모든 구조는 〈 토바자라 〉 의 삼중의 의미 속 에 함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에데오클레스와 폴리니 스 , 의디푸 스와 크레온 등과 같은 원수형제와 〈 처남-매부 〉 가 들 어 있는 그리스 비극과 그렇게 먼 것이 아니다. 제의적 식인풍습의 이데올로기는 근대 민족주의의 투사 신화와 유 사하다. 물론 연구자들이 원주민들의 설명을 왜곡시켰 을 수도 있다. 이 러한 왜곡이 실제로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이 해석의 전체적인 방향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전쟁과 상호적인 포로살해 에 기반을 둔 이 희생의식은 〈 대대로 내려오는 원수들 〉 등이 들어 있 는 우리들의 〈민족주의〉와 그 신화적 양식에 있어서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같은 유형의 이 두 신화가 서로 다르다고 고집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이 신화에 빠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말하자면 진정으 로 중요한 하나의 사실로부터, 죽 두피남바족의 신화와 마찬가지로 근 대 민족주의의 뒤에도 있는 항상 같은 사실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경우 모두에 있어서 의국과의 전쟁과 그리고 그것에 수 반되는 다소 구경거리가 될 만한 제의 속에는, 폭력을 공개적으로 논 의하고 실행하거나 때로는 부추기기도 함으로써 당연히 이보다 더 내 면적인 폭력의 위험을 물리쳐서 그 사회의 균형과 안정을 유지하려는 본질적인 기능이 들어 있다. 『 1984 년』이라는 제목의 미래공상소설에서 조지 오웰 George Orwell 은 두 개의 초독재국가의 지배자가 뻔뻔스럽게도 그둘이 기만하고 있는 인민에 대한 지배를 더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 사이의 분쟁을 계

속하기로 결정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의부와의 지속적인 전쟁에 근 거하여 내부의 안정을 지속시키는 이 식인의식을 볼 때, 우리는 현대 세계만이 아런 제도를 독점하고 있지 않다는 것과 그리고 이런 제도가 아주 머리좋은 몇몇 주모자나 혹은 선량한 군중을 기만하는 파렴치한 지배자 때문에만 생겨나는 게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 이미 보았듯이 우리는 투피남바족의 식인풍습을 희생물에 기반을 둔 제의의 일반 이론과 쉽게 관련지을 수 있다. 투피남바족의 이 풍습에서 지금까지 해독할 수 없었던 것들은 이 관련성을 통해서 밝혀지게 될 것이다. 또 거꾸로 두피남바족의 이 풍습은, 앞에서 살펴보았던 제의들 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던 우리 일반 이론의 어떤 양상들을 드러내 줄 것이다 . 비록 단편적이건 하지만, 우리가 살펴본 제의에 대한 개관은 그 지 리적 분포에서 뿐만 아니라 그 내용과 형태에서도 아주 다양한 제의 둘을 다루었다. 따라서 드디어 희생물을 모든 종교 형식의 기본 원리로 보는 우리 가정이 명확히 입증될 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우 리는 이 결론을 내리기 전에 신중을 기해야 하며, 그리고 우리가 앞에 서 구상한 이런 식의 독법을 완전히 벗어나는 범주의 제의를 혹시 우 리도 모르는 사이에 제의시키지는 않았는지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 지금까지 우리의 관심을 끌어온 제의들을 한 마디로 특징짓는다면, 이 제의들은 모두 가족적, 종교적, 혹은 어떤 문화적 질서를 지속시키 고 강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의 목적은 현상태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제의들은 한결같이 모든 문화적인 정착과 안정화의 모델에, 죽 희생물 에 대한 만장일치적 폭력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제의둘은 안정, 혹은 부동의 제의라고 규정될 수 있다. 그

렇지만 소위 〈통과제의 〉 란 것도 있다. 거기에는 아마도 우리들이 생각 하는 결론과 일치하지 않는 사실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 그러므로 우리 는 희생물이 모든 제의의 기원이라고 주장하기 전에 희생물은 또한 통과제의의 모델 역할도 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통과제의는, 예를 들어 청년들에게 공동체에 대한 완전한 소속감을 부여하는 많은 사회의 〈입문 의식〉과 같은 새로운 신분 획득과 관련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의 한 신분으로의 변화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단지 직접 당사자들에게만 사소한 적응 문제 를 제기할 뿐이다. 얼마 전부터 이러한 생각들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긴 하지만, 우리들의 사고 와 행동에 영감을 주고 있는 것은 여전히 이런 생각들이다. 반대로 원시사회는, 한 개인의 사소한 변화도 그 사회에 중대한 위 기를 야기시킬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우리에게는 가장 정상적이 고 예상 가능하며 사회 존속에 아주 필수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 통과 의 이면에는 문자 그대로 요한묵시록과 같이 끔찍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민족학자들 사이에 이 표현을 널리 퍼뜨린 『 통과제의 Les Rit es de pas - s age 』라는 책에서, 반 게넵 Van Genne p © 은 신분 변화를 두 시기로 나눈 다. 첫번째 시기 동안 그 인물은 그때까지 그가 지니고 있던 신분을 상실하며, 두번째 시기 동안에는 새로운 신분을 획득한다. 이 분석을 단순히 데카르트적이고 프랑스적인 명백하고 분명한 관념에 대한 편 집증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종교적 사고는 실제로 이 두 시기를 구분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시기들을 서로 완전히 독립적인 것으로, 심지어는 문화 전체가 거기에 완전히 빠져 버리고 마는 진짜 심연으로 변할 수도 있을 간극을 사이에 두고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 하고 있다• 반 게넵의 구분을 통해서 우리는 통과의 〈중요한〉 면을 이해할 수 ® 반 게넵 Van Gennep (1 s73-1957) : 프랑스 인류학자 , 민속학자.

있다. 〈 신분의 소멸 〉 을 따로 떼어놓음으로써, 우리는 앞에서 규정한 〈 차이 〉 의 소멸을 여기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결국 그의 이 구분이 우리들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낯익은 곳으로 되돌려보내 준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폭력이 차이의 소멸을 가져오는 것과 마찬 가지로 모든 차이의 소멸은 폭력을 가져온다. 게다가 이 폭력은 전영 성이 강한 폭력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결국 쌍둥이의 경우에서와 똑 같은 공포가 생겨난다. 종교적 사고는 자연적인 차이와 문화적인 차이 를 구별하지 않는다. 종교적 사고를 생겨나게 하는 각 대상의 수준에서 볼 때는 이 사고가 항상 합당한 것은 아니지만 이 공포는 원칙적으로 상상적인 것이 아니다. 통과의식을 치를 개인은 전염병의 희생물이나 혹은 폭력을 퍼뜨릴 위험이 있는 죄인과 동일시된다. 아무리 지엽적이고 사소한 차이 상실 로도 공동체 전체가 희생위기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아무리 작 은 홈도 제때에 수선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 천에서 한 코가 빠지면 옷 전체가 망가질 수 있는 것과 같다. 이같은 상황에서 취해야 할 첫번째 조치는 물론 그 희생물을 고립 시켜서 공동체의 건강한 구성원들과의 모든 접촉을 금지시키는 것아 다 . 전염을 예방하는 것이다. 의심스러운 사람들은 즉각 쫓겨난다. 그 둘은 공동체의 변두리에 거주하거나 아니면 때때로 아주 멀리 숲이나 정글 혹은 사막으로 추방된다. 이들이 추방되는 이곳이 바로 확고한 차이와 특정한 신분이 상실된 모든 존재들이 속해 있는, 무차별 폭력이 지배하고 있는 성스러움의 왕국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성스러 움의 왕국 밖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희생물이 상실당한 확 고한 차이와 특정한 신분 때문이었다. 현대인은 세균성 질병에서만 전영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신분 상실을 특정한 한 분야에 국한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원시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무차별화 현상은 점점 번져 가 는데, 새 입문자가 바로 이 전염의 최초의 희생물이다. 어떤 사회에서

는 곧 통과의식을 치를 사람은 더 이상 이름도 , 과거도, 혈연관계도, 또 어떠한 권리도 지니지 않는다. 그는 어떠한 형태도 없고 어떠한 이름도 없는 사물과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된다. 같은 나이의 청년집단이 같은 통과의식을 겪어야 하는 집단 입문의식의 경우, 그들은 더 이상 무엇 으로도 구분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완전한 평등과 혼합 속에서 살게 된다. 알다시피 성스러움 속에서는 차이둘이 혼합된 상태로, 즉 혼 돈된 형 태로만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소멸되고 지워져 있다. 성스러움에 속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형에 관여한다는 것이다. 차이 를 잃거나 너무 많은 차이를 갖거나, 혹은 차이를 모두 상실하거나 아니면 부당 하게 차이를 갖는다는 것은 결국 언제나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 개종 자는 성이 없는 무성의 존재로서뿐 아니라 혹은 자웅동체의 괴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통과제의가 항상 무시무시한 경험인 것은, 처음에는 그것을 단순히 통과제의의 문제라고만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현재 무엇 을 잃고 있는지는 알고 있지만, 앞으로 무엇을 얻게 되는지는 모르고 있다. 괴물 감은 차이들의 이 혼합이 과연 어디에 이를지 전혀 모른다. 이런 것을 결판내는 것이 바로 최고 폭력인데, 이것과 관련을 맺는다는 것이 썩 줄거운 것은 아니다. 요컨대 그 〈구조〉는 변화에다 그 〈 자리 〉 를 내줄 수 없다. 예측할 수 있는데도 그 변화는 당연히 제어할 수 없 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적 혹은 자연적인 법칙에 따른다는 생각은 원 시종교와는 거리가 먼 생각이다. 〈보수적〉이라는 말로써 성스러움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들을 특칭짓 는 부동의 정신 ,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규정짓기에는 너무 약하다. 사 회-종교적인 질서는 성스러움이 항상 도로 앗아갈 수도 있는 엄청난 혜택, 뜻밖의 은총처럼 여겨진다. 이 질서에 가치판답을 개입시켜 제도 룰 비교 선택하거나 그것을 개선하기 위하여 이 〈제도〉를 아주 조작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사회에 대한 모든 현대적 사고는

폭력의 보복을 부르기에 정말 적합할 정도로 아주 발칙하고 정신 나간 것 같다. 사람들은 숨을 죽여야 한다. 앞뒤 재지 않는 무분별한 변화가 갑작스러운 돌풍, 즉 모든 인간사회를 삼켜 버릴 해일을 초래할 수 있 기 때문이다. 통과제의에는 그래도 희망이 들어 있다. 다시 말해, 전면적인 차이 소멸과 전면적인 폭력을 통해 즉 희생위기와 그 매개를 통해서, 예전의 사회들은 차별화된 질서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위기는 똑같다. 우리는 그러므로 이 위기가, 예컨대 입문자들의 새로운 신분 획득과 같은 결 과, 죽 차이의 창설이나 재건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이 유리한 결과는 우선 무엇보다도 최고 폭력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공동체는 자신이 거기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는 해로운 에너지를 그들이 터 놓은 길로 집중시키려 한다. 최종 결과가 〈첫번째〉 와 똑같은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모든 가능성이 그 공동체에 유리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그 멘처음에 일어났던 모든 것을 그 때그때 재현해야 한다. 또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희생위기의 모든 단 계를 입문자들이 두루 거치도록 해야 하며, 과거 시험회 틀에 맞추어 현재 시험을 주조해야 한다. 그 제의가 원초적 위기의 과정을 정확하게 되풀이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똑같은 식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이 통과제의의 기본 구도이다. 이것을 알고 나면 겉으로 보기에 아주 이상한 양상들, 즉 우리들이 〈병적〉이거나 〈비정상적〉이라고 생 각하는 디 데 일들은 사실 종교적 사고가 따르고 있는 아주 단순한 논 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입문자는 위기를 피하기는커녕 완전히 그 속에 빠져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선조들 이 거기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상호적 폭력의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무시무시한 결과들로부터 도망가는 대신에 그것들을 하나하나 감내해 야 한댜 왜 사람들은 입문 지원자들에게서 쾌적한 설비와 심지어 음 식마저도 빼앗아 버리는 것일까? 왜 그를 학대하고 때로는 진짜 고

문으로 괴롭히는 걸까? 그것은 바로 〈 맨 처음에 그런 식으로 그런 일들이 일어났었기 〉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폭력을 감내하는 것만으 로도 충분하지 않아 입문자 스스로 폭력을 행사해야 하기도 한다. 이 이중요구는 곧 희생위기의 〈 나쁜 〉 상호성을 상기시킨다. 게다가 어떤 〈축제〉에서와 같이 그리고 그것과 똑같은 이유로, 상징적이거나 실제 적인 성적 위반, 절도, 음식물 섭취와 같이 다른 때에는 금지되어 있던 행동들이 요구된다. 평소에는 항상 금지되던 식인풍습이 입문의식 과 정의 일부로서 행해지는 사회들도 있다. 투피남바족에 있어서 포로를 살해하는 것은 그것을 행하는 자에게는 입문의식의 의미를 갖고 있다. 동물이나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전형적인 입문의식 행위인 사회는 많이 있다. 신분이 제거된 그 개인이 〈괴물 같은 짝패 〉 로 변형되는 경향은 완 전히 의연화되어야 한다. 때때로 그는 동물로 변하는 데, 사람을 보자 마자 이 입문자는 달려들어 먹어치울 듯한 행동을 취한다. 디오니소스 나 성스러운 왕과 같이 그는 황소나 사자, 표범이 되지만 , 그것은 단지 입문의식의 위기 동안에만 그러하다• 인간의 말도 빼앗긴 그는 꿀꿀거 리는 소리나 포효소리로써 자신을 표현한다. 어떤 제의들에서는 최고 위기 단계에서 폭력장악의 모든 특징들이 발견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제의들의 연속적인 요소들을 통해서 이러한 위기의 실질적인, 혹은 짐 작되는 그 변화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위기와 그 해결책을 모방한 것이라는 증거는, 우리가 열거한 위기모방의 모든 제의둘 다음에 결국 희생물에 대항해서 실현되는 만장일치를 재현하는 의식, 즉 절정을 이루는 의식 들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 가면이 나타나는 것 은 입문자들의 변형에 의해 이미 증명된 〈괴물 같은 짝패〉의 존재의 직접적인 증거이다. 이 의식들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그것들은 항상 위 기의 끝, 질서회복, 입문자의 최종 자기신분 획득과 같은, 폭력에 의한 해결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통과제의의 목표는 차이 소멸에 의해 야기될 모든 잠재적 위기를 원초적 위기의 모델에 따라 구조화하는 것이다. 전염성이 강한 폭력이 나타날 때마다 갇이 나타나는 무서운 불안을 안정으로 변형시 키는 것이다. 통과제의가 언제나 성공하여 항상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되면, 그것들은 점점 더 〈 상징적인 〉 단순한 〈 데스트〉로 변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제의의 중심요소인 회생의 핵심도 희미해져서 우리는 도 대체 이 〈 상징 〉 이 어디서 나온것인지도 모르게 된다. * 보았다시피 앞에서 우리가 안정의 제의라고 명명했던 제의들과 통 과제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그 모델은 항상 똑같다. 제의 적 행위는 완전한 안정 혹은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최소한의 변화라는 목적 을 갖 고 있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그 너머에서 폭력과 혼돈이 배회하는 문을 반쯤 열어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어른이 되고 결혼하고 병들고 죽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생성이 그들을 위협할 때마다 원시사회들은 분출하는 힘을 문화 질서가 인정하는 한 계 안으로 집중시키려고 애쓴다. 많은 사회에서는 계절의 변화에 대해 서도 같은 식이다. 문제가 무엇이든간에 그리고 위험이 어디서 나오든 간에, 그 치유책은 제의에서 나오며 모든 제의들은 결국 원초적 해결 책의 반복과 새로운 차별적 질서의 생산으로 귀착한다. 모든 문화적 안정의 모델은 또한 파국에까지는 이르지 않는 모든 변화의 모델이기 도 하다. 끝에 가면 통과제의와 다른 제의들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없어전다. 그렇지만 통과제의에는 상대적인 특수성이 있다. 다른 제의들보다 통과제의에서는 위기의 결말과는 상반되는 위기 그 자체에서 따온 핵 심요소가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 제의에 정말 〈입문의식적인〉 양상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 요소이다. 그래서 다른 본질적인 것들은

이 제의가 해체되면서 사라지지만 이 요소들은 계속 행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다른 제의들에서 확인했던 과정이다. 초석적 결말 은 언제나 첫번째로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 이것은 말하자면 모든 제 의와 초석적 폭력을 이어 주고 있던 탯줄이 끊어진 셈이다 . 그래서 이 제의들이 절대적인 특수성을 가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제의들이 계속 행해지는 동안은 그들의 일치가 그들의 차이보다 더 강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통과제의의 경우, 입문의석의 테 스 트는 몇 몇 개인들에게 한정되어 있지만 공동체 전체가 거기에 연루되어 있다. 모든 제의는 초석적 만장일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통과제의의 효력은 원칙적으로 일반적 희생제의의 효력과 같다 . 그 러나 여기에는 어떤 미묘한 차이가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원초적인 위기에 의해서 생겨난 공포는 사라전다. 새로운 세대들은 그들의 선조들과 똑같은 이유로 금기를 준수하고 종 교질서의 공명정대함에 대해 주의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해 로운 폭력의 경험이 전혀 없다 . 신참자들에게 통과제의를 부과함으로 써, 다시 말해서 원초적 위기의 시련과 가능한 한 가장 유사한 시련을 부과함으로써 문화는 차별적 질서의 유지를 위한 정신상태를 재생산 하려 한다. 그리하여 제의와 금기를 조심스럽게 지키던 선조들 사이에 만연해 있던 성스러운 공포와 숭배의 분위기를 다시 만든다. 희생위기와 초석적 폭력의 도식이 보여주는 것과 갇이 인간사회에 서의 폭력의 확산과 예방의 메커니즘을 통해서, 우리는 적어도 그것이 고통스럽고 무시무시하며 때로는 거의 참을 수 없는 〈시련 〉 이라는 특 칭을 상실하지 않는 한, 통과제의는 계속해서 실제적인 효력을 발휘한 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청년들이 그들의 무기와 혈기로써 폭발시킬 위험이 많은 위기, 죽 희생위기를 당하지 않고 그냥 〈때우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통과제의는 또한 입문자들에게 만일 그들이 금기를 위반하고 제의를 게울리하고 종교적인 것을 무시할 때, 그들에게 닥칠 것이 무엇인지 그

맛보기 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제의 덕분에 후세대들은 성스러움의 무시무시한 효력에 대한 경이감에 젖어 신앙생활에 참여 하고, 온 힘을 다하여 문화 질서의 강화에 헌신하게 된다. 육체적 데 스 트는 어떠한 지적 이해도 짐작할 수 없을 대단한 구속력을 갖고 있 다 . 바로 이 때문에 사화종교적 질서가 특별한 혜택처럼 보이는 것이 다. 통과제의는 종교적 사회적 보수체제의 훌륭한 수단이 된다. 그것은 신세대에 대한 구세대의 지배를 확실히 해 준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젊 은이들 〉 에 대한 〈 늙은이들〉의 공모, 또는 빈자들에 대한 부자들의 공모로 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다른 제의들과 마찬 가지로 사실 이 통과제의에 대해서도, 이것하 작동시키는 메커니즘을 어느 누구도 완전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순전히 사회적 효력의 차원에서만 그것들을 생각하지 않는 한, 그리고 그것들도 실질적으로 최초의 위기를 모방하고 있는 한, 실제로 그것들은 계속 효력이 있다. 제의의 효력은 일반적인 종교적 태도의 결과이다. 이 태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그런 사회 조직에 대해서 우리가 흔히 생각해보게 마련인 계산이니 심사숙고니 〈궁리〉니 하는 것들을 모두 거부하는 그런 태도 이다. * 성년 통과제의, 비밀결사, 종교집회, 샤머니즘 등의 모든 유형의 입 문의식에는 본 시론에서 줄곧 추적해 온 우리의 도식이 희미하게 나 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샤머니즘 입문의식은 그 시험의 강렬하고 극 적인 특칭이나 그리고 그 무시무시하고도 기묘한 모험이 희생양 메커 니즘을 연상케 하는 신이나 귀신과의 동일화를 제의하고 나면, 평범한 입문의식과 구별이 잘 안된다. 샤먼은 어떤 초자연적인 힘을 조정하려 한다. 예를 둘어 다론 사람

둘을 치료하는 샤먼이 되려는 이 미래의 샤먼은 미래의 환자들의 병, 다시 말해 해로운 폭력에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 당당하게 그 병을 이 겨내기 위하여 그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오랫동안 그리고 더 완전히 그 병에 빠져들어야 한다. 결국 그는, 자신은 폭력으로부터 보호를 받 는 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 힘을 갖고 있으며 어느 정도까지는 해로운 것의 이로운 것으로의 변형도 주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 어야 한다. 샤머니즘 입문의식의 가장 환상적인 면들도 실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초석적 폭력에 대한 제의적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때때로 오스트레일리아와 아시아처럼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문화권 속에서, 입문의식은 사지가 절단되는 꿈에서 그 절정에 도달하는데 그 꿈의 끝에 가서 입문자는 완성된 샤먼의 모습으로 깨어난다. 아니 부 활한다. 이 최후의 시험은 디오니소스의 〈 디아스파라그모스 〉 를 비롯한 다른 많은 제의에서 집단적으로 달려들어 회생물을 조각내는 것과 유 사하다. 사지 절단이 소생과 당당한 승리의 징표가 되는 것은, 그것이 희생양 메커니즘 즉 해로운 것의 이로운 것으로의 변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샤먼은 자기 임무를 수행할 때 도움을 청하게 될 신화적 인 물들과 똑갇은 변형을 겪는다. 그러므로 샤먼이 신화적 인물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전혀 꿀리지 않고 대등한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샤머니즘의 관습은 연극의 재현과 유사하다. 샤먼은 동시에 모든 역 할을 수행하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그는 마침내 해로운 힘을 몰아낼 이로운 힘들을 모으고 인도하는 자의 역할을 한다. 마지막 추방에는 흔히 물질적인 상칭체계가 수반된다. 그는 잔가지나 솜털 조각 같은 것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면서 그것이 바로 자기가 병자의 몸에서 꺼낸 병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민족학자들이 세계 여러 곳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샤머니즘의 수술 과 분명 아주 유사한 제의적안 수술중에 끄집어내어지는 해로운 물건

울 그리스인들은 〈 카타르마 ka t harma 〉 라고 불렀다. 〈 카타르마 〉 라는 이 말은 또한 무엇보다도 〈 파르마코스 〉 의 변형체라 할 수 있는 희생제의 의 인간 제물을 지칭하기도 한다. 샤머니즘적인 카타르마 추출을 분쟁 장면의 연출과 비교하면 이 수 술의 의미는 명확히 밝혀진다. 병은 위기와 동일시된다. 병은 죽음에 이룰 수도 있지만, 〈악령〉처럼 정신적인 것이든 혹은 샤먼이 꺼내는 물건처럼 물질적인 것이든, 어쨌든 항상 이런 〈불순한 것〉의 추방으로 해석되는 치유에 이룰 수도 있다. 예전의 사회가 집단폭력 속에서 그 폭력을 지배하는 질서를 만들어낸 것처럼, 여기서도 원초적 사건을 되 풀이하여 환자 스스로 자신의 치유책을 만들어내는 것을 도와주고 있 다. 카타르마는 인체 속으로 들어와서는 안 되었을 것이다. 의부로부터 무질서 를 가져온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 희생물이 되고, 그 반면에 이 가상의 침입자에 대항하여 인체는 총동원되어 집 단의 역할을 한다. 항상 일컬어지듯이 원시 의술이 제의적인 것이라면 그 의술은 초석적 과정의 재현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실 제로 그렇게 이루어져 있다. 〈 카타르마 ka t harma 〉 라는 단어는 우선 그 도시국가가 인간 카타르마 의 처형을 통해서 얻는 신비로운 이득을 의미한다. 보통 이 말은 종교 적인 순화로 번역된다. 수술은 배설처럼 이해된다. 이 카타르마는 처형 되기 전에 마치 주부가 진공청소기를 아파트 구석구석으로 밀고 다니 듯이 엄숙하게 도시의 여러 거리로 끌려다닌다. 이 희생물은 모든 나쁜 싹둘을 자신에게 모아서는 자산울 제거함으로써 그것들 모두를 완전히 배설해 버려야 한다. 가까이 접근한 것 같지만 이것이 바로 수술의 진 실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미 신화적 해석이기 때문이다. 분명 희생 물에게로 폭력이 집결하지만 그것의 추방이나 배설은 일어나지 않는 다. 이런 식의 해결에 나타나는 추방이라는 요소가 아닌 〈욕구만족적 인〉 요소나 이런 해결의 자의성과 같은 본질적인 것들은 여전히 감추 어져 있다. 폭력을 어떤 〈불순한 것〉으로, 되도록이면 사람이나 혹은

사물로 된 카타르마에 모여드는, 죽 폭력도 이것 들 에 대하여 특별한 관련성을 느끼듯이 이것들 역시 폭력과 특별한 관련이 있는 사람이나 사물에게로 모여드는 일종의 〈 더러운 것 〉 으로 간주하는 것은 바로 폭 력을 〈 사물화하는 re ifi er 〉 것이다 . 샤먼이 어떤 물체의 형태로 병을 추 출한다고 주장할 때, 그는 이미 이 신화적인 해석을 그 병자의 육체와 비난받는 그 작은 물체에게 전이시키고 있는 것이다. 〈 카타르시스 ka t hars i s 〉 라는 말에는 종교적인 용법과 중간의 샤머니즘 적 용법 의에도 의학적인 용법이 있다. 카타르시 스 의 약은 나쁜 기질 이나 물질의 배설을 부추기는 강력한 약이다. 이 약은 흔히 그 병과 똑같은 성질을 가진 것으로, 아니면 적어도 그 병의 증세를 더 악화시 킴으로써 병에서 회복되는 어떤 이로운 위기를 유발시킬 수 있는 것 으로 여겨지고 있다. 요컨대, 이것은 위기를 절정에 이르게 하여 자신 과 함께 병의 원인들을 추방하도록 유발하는 병의 보충물 역할을 한다. 이것은 우리가 추방이라는 말로써 신화적이라고 말한 그 해석의 인간 카타르마와 같은 역할이다. 이것은 또한 전혀 신화적이지 않은 〈 하제 (下劑) p ur g e 〉 의 원칙이기도 하다 . 인간 카타르마가 의학적인 카타르시스로 변하는 것은, 인간 파르마 코스가 독과 약을 동시에 의미하는 〈파르마콘p harmakon 〉 이라는 말로 변화하는 것과 아주 홉사하다. 이들은 모두 희생물로,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해로우면서 동시에 유익한 이중적인 약, 즉 이중성을 가진 성 스러운 물질로 변하고 있다. 플루타크 Plu t ar q ue 는

에서부터 무장분쟁의 결정적 승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위기에 대한 자연적이거나 인위적인 해 결이라 할 수 있을, 아프지만 동시에 그 때문에 병에서 낫게 해주는 고통이 있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점인 것 같다. 그리고 이 의미 총체는 치료 행위를 지칭한다 . 이 제의에서 왕은 동쪽과 서쪽으로 마술적이고 의학적인 물질을 뱉어낸다. 〈 인쿠알라 Incwala 〉 라는 말 자체가 배설에 의한 청결, 청소라는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제의적 수술의 배설물과 지나간 한 해의 불순한 찌꺼기들을 모두 다 태워버리는 큰 불과 함께 제의가 끝난다는 것을 상기하자. 제의의 일반적인 효과를 묘사하기 위 하여 막스 글루크만 Max Gluckman ® 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롤 원용하고 있다 .

® 글루크만 Mak Gluckman(1911-1975) : 영국 인류학자.

카타르마, 카타르시스는 모두 〈카타로스 ka t haros 〉에서 나온 말이다. 이 어원 주위를 맴도는 데마들을 모아보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폭력 과 성스러움 〉 이라는 제목의 본 시론에서 취급하는 주제의 진짜 목록이 될 것이다. 카타르마는 단지 제물이나 속죄물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또한 신화나 비극의 주인공의 전형적인 행동을 지칭한다. 헤 라클레스의 12 가지 시련을 가리켜서 플루타크는 〈폰티아 카타르마p o­ nti a kath a rm~> , 즉 바다를 순화시킨 배설이라 칭한다. 〈카타이로 ka­ t ha i ro 〉는 무엇보다도 지상에서 괴물들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러한 맥락에서 〈회초리로 때리다〉라는 이 말의 두번째 의미는 다소 의의의 것으로 보이지만 파르마코스의 생식기를 회초리로 때리던 관 습을 상기하면 이것도 수긍이 간다. 카타르시스의 의미와 관련해서 입문의식의 지원자가 치러야 했던 어떤 정화의식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월경이라는 카타르시스의 또 다른 의미도 빠뜨려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 이질적인 것의 총체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며, 바로 이 희생물이 겉으로 기이해 보이는 이것들을 폭력에 근거하고 있다. 자의적인 것과 비자의적인 것, 그리고 특히 정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해 주면서 이것들의 통일성을 드러내준다고 독 자들이 생각한다면, 우리의 임무는 다한 것이다. 우리가 추방, 하제, 정화 등의 말로써 초석적 과정이나 거기서 파생 된 희생제의적인 것들을 묘사하지만, 사실 이것은 폭력에서 나왔기 때 문에 〈자연적인 것〉은 전혀 들어 있지 않는 이 현상들을 자연의 모델 울 이용해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 속에는 추방, 하제, 배수 등이 실재한다. 그러므로 자연의 모델은 실재의 모델이다. 이 모델이 실재적 이라 해서 제의적 사고와 샤머니즘적 의료술에 대한 인간의 사고 속 에서 이 모델이 오늘날까지 행한 그 기이한 역할에 대해 따져보는 것 울 그만두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8 장에서 대강의 윤곽e 을 잡았던 그 도식에 따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모델을 찾으려 는 충동과 그것을 폭력에게는 신화적으로 적용하고 다른 자연현상에는 비신화적으로 적용하려는 충동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이 폭력의 작용 때문이다. 그것의 첫번째 생성은 초석적 폭력에서 나오며 그래서 이 신병리학적인 면에서 유익한 것과 무익한 것, 의미심장한 것과 하찮은 것을 오늘날까지도 식별해내지 못하면서 자연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에서 그 모델을 생각해내어 그것을 아무데나 적용시키는 것은, 항상 만장일치의 그 신비로운 마력이 우리 사고를 유혹하고 있기 때문 이다. 나쁜 체액을 〈배설〉하려는 한결같은 의도에서 나온 17 세기의 관장과 사혈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의학 테마로서 추방과 정화가 항상 있어 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것들은 결국 물화된 카타르마를 추출 하던 샤머니즘의 치료에서 약간 세련된 하나의 변형체에 불과하다. 푸르공 M. Pur g on 의 관장은 쉽게 비웃을 수 있지만, 하제는 실질적인 효력이 있다. 그러면 현대의 〈면역〉과 〈예방접종〉 조치들은 과연 무엇 일까? 똑같은 하나의 모델이 이 두 경우 모두에 작용하면서, 어떤 때 는 유사한 발견에 어떤 때는 진짜 발견에 지적인 틀과 도구를 제공하 고 있는 것이 아닐까? 환자의 방어력을 보강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세균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이로운 수 술 은 언제나 침 입자의 격퇴, 해로운 불청객의 축출과 갇은 식으로 구상된다. 아무도 비웃을 수가 없는 것이 이런 식의 수술이 과학적으로 효력아 있기 때 문이다. 이 의학적 조치는 〈 약간의 〉 병을 감염시키는 것인데 , 이것은 제의가 사회라는 신체에다 〈약간의〉 폭력을 주입시켜 그 사회가 폭력 에 저항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아주 흡사하다. 이같은 유사점들은 숫 자도 많을 뿐더러 아주 정확하게 서로 일치하고 있다. 〈여러 번에 걷 쳐서 하는 예방접촉 〉 은 희생제의의 반복과 일치한다. 물론 여기에서도 모든 〈희 생제의적 〉 방어 방식과 마찬가지로 파국적인 역전의 가능성은 있다. 너무 독한 백신, 즉 너무 강한 파르마콘은 막아야 할 전염병을 오히려 전파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희생제의와 일치하는 이러한 양상 둘을 밝히기 위하여 우리는 앞에서 예방접종이라는 〈메타포〉를 사용 했는데, 이제 우리는 이 메타포의 전이는 바로 새로운 희생대체와 같은 것이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과학적 사고 속에도 신화와 제의를 만들어내던 옛날 사고의 유산이 들어 있다. 분명히 효력이 있는 어떤 기술적인 도구 속에서 우리는, 물론 세련되기는 했지만 분명히 옛날 사고에서 나온 아주 조잡한 의 료-제의적 관습이 계속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이런 제의적 관습을 우리와는 다른 사고방식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한 형태와 다른 형태 사이에는 물론 대체작용이 일어나고 항상 새로운 전이가 있는 법이다. 그렇다고 이 작용의 다양한 결과들을 별개의 것으로 취 급하여 각각에서 어떤 결정적인 차이를 보려고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 면 이런 현상은 애초부터 미래의 전이와 이미 유사한 전이와 그리고 이 동일한 현상을 이해하지 못해 그 본질을 파악하지 못할수록 더 복 잡해전 은유적인 대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생각에서 카타르시스라는 말의 다양한 의미 일람표를 완성 하기 위해서는 희랍비극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 아리 스토 텔레스가 그의 『 시학』 속에서 이 말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우리는 아직 명확히 살펴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작업을 할 차례이다. 기존의 해석 들을 연장하고 있으면서도 지금 형성되고 있는 총체적인 이해도 가능 케 해주는 새로운 해석을 위한 우리의 모든 채비가 끝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에서 비극은 신화-제의적인 형식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알았 다. 비극 장르의 〈 기능 〉 을 규정지울 필요는 없다 . 그것은 아리스토텔 레스가 이미 해놓은 것이다 . 카타르시스라는 말로써 비극의 효과를 묘 사함으로써, 그는 비극은 제의가 사라전 세계에서 이전에 제의의 역할 들 중 적어도 몇가지 역할을 완수할 수 있고 또 완수해야 한다고 주 장하고 있다. 비극적인 의디푸스가 고대의 카타르마와 같다는 것은 이미 보았다. 실제로 희생물을 제단이나 사원에서 처형함으로써 원초적 집단 폭력을 대체하는 대산, 이제 사람들은 연극과 무대를 통해서 배우가 흉내내는 그 카타르마의 운명으로써 관객들의 〈정념〉을 〈 순화 〉 시킴으로써 이 역시 공동체를 구원하는 개인적이자 집단적인 새로운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만일에 희생제의를 드라마나 일종의 예술작품으로 묘사하는 민족학 자- 예를 들어, 『비탄의 북 The Drums of Af jli ca ti on;, 에서 (p. 269) 〈이 제의의 통일성은 드라마의 통일성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것은 일종 의 예술작품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빅터 터너 Vic t o r Turner 의 말이 옳 다면, 그 역도 또한 진실이다 . 다시 말해,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연극은 일종의 제의를 이루고 있다. 종교적 현상을 어렵풋이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라는 말은 지금까지 끝없는 논쟁의 대 상이 되어 왔다. 이 철학자에게 있어서 이 말이 무슨 의미로 쓰여졌느 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사람들은 흔히 실상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

말의 종교적 의마는 제외시켜 버렸다. 이때 내세우는 핑계는 , 그 시대 에 는 이런 의미가 그렇게 유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현대와 마찬가 지로 그 시대에서도 이것은 애매모호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아리 스 토텔레스가 이 원초적인 작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해서, 『 시 학』 의 〈 카타르시스 〉 라는 말이 희생제의적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 아니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 오히려 그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 하는 것 이 더 나울지도 모른다. 비국이 일종의 제의 역할을 하기 위 해서 는, 종교나 의학적인 관습 속에 희생이 감추어져 있듯이, 연극이나 문학의 용법에도 희생이 감추어져 있어야 한다 . 그의 비극적 카타르시 스는 결 국(적어도 어떤 접에 있어서는) 다른 희생제의와 유사한 또 다른 하나의 희생전이에 불과할 뿐 아니라,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희생의 파노라마에 속한다. 이것은 다름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처럼 희생 의 비밀 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 카타르시스도 초석적 폭 력 주 위 를 맴돌고 있는데, 이 폭력은 물러나더라도 그 영향력은 거기에 계속 남아 있게 된다. 아리 스 토텔레스의 텍스트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점에 있어 서 이 텍스트는 희생에 관한 진짜 개론서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 비국에 〈 합당한 〉 주인공의 특성은 제의의 희생물들에게 요구하 던 특성과 유사하다. 앞에서 보았다시피 , 희생물이 〈 정념들〉을 집중시 키고 〈 순화 〉 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과 닮으면 서 동시에 달라야 하며, 가까우면서 동시에 멀어야 하고, 〈같은 것〉이 자 〈 다른 것 〉 , 〈 짝패〉이자 동시에 〈성스러운 차이〉여야 한다. 마찬가 지로 비극 주인공은 〈 오로지 선해서도〉 안되며 그렇다고 〈오로지 악 해서도 〉 안된다. 관객과의 부분적인 동일화를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 선 〉 이 필요하다. 그뿐 아니라, 〈선〉을 효력없는 것으로 만들고 관객 으로 하여금 그 주인공을 마침내 공포와 죽음에 내던질 수 있게 하는 어떤 약점, 즉 〈비극적 결함〉도 필요하다. 『토뎀과 터부』에서 프로이 트가 보았던 것이 바로 이것인데, 그러나 완전하게는 보지 못했다 . 주

인공을 따라가던 관객은 마침내 그에게서 〈 타인 〉을 발견하고서 평화 롭고 안정된 자산의 삶에 대한 감사의 마음아 분명 섞여 있는 , 소위 〈공포와 애련 〉 으로 전율하면서 그 주인공을 〈 위대함과 불명예 〉 라는 초인간적인 운명의 탓으로 돌려버리고 만다. 우리 를 감동시키는 진짜 예술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폭력을 예측하게 하고 그 결과 를 두려워하 게 한다는 점에서, 죽 신중하게 처신하게 하여 휴브리스 를 피하게 한 다는 점에서 , 약하나마 〈 입문의식적인 〉 효과 를 갖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아 순화시키는 정념에 대해서는 분명한 생각 울 갖고 있지 않는 것 같다. 그렇지만 비극에서 이열치열 feu com batt an t le f eu 의 예를 보면서 , 공동체를 그들 자신의 폭 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그는 분명히 알았던 것 같다. 이 철학자가 〈 비극 적 사건에는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폭력이 적합하다 〉 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말이다. 만약 어떤 박학 이론의 주장처럼 비극아 〈 제의의 직접적 표 현 〉 이라 면, 비극 그 자체는 박학의 한 산물이며, 비국의 미학적 • 순화적 가치 도 〈캠브리지 의식주의자 Cambrid g e r it ua li s t s 〉 의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이 못되어야 할 것이다. 비극에 〈 순화적인〉 힘이 있는 것은, 비국의 모델 속에 있던 반(反)제의적인 것 때문이다. 비극은 상호적 폭력에 자신을 던지면서 그리고 그 폭력과 마찬가지로 위태로운 상태에서 진실을 향 해 나아가지만, 결국에 가서는 언제나 물러서고 만다. 한순간 동요되었 던 신화제의적 차이는 〈문화적〉, 〈미학적〉 차이의 모습으로 다시 복원 된다. 따라서 비극은 차이들이 함몰되는 심연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또한 계속해서 그 시련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다는 점에서 제의와 같은 것이다. 만일 비극이 희생제의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면, 비극은 필연적으로 . 해로운(니체 식으로는, 디오니소스적인) 측면과 문화적 영역에서의 이로운 (아풀로적인) 측면을 지닌다(대체적으로는 니체의 분석이 탁월한 것은 사실 이지만, 이런 구분만은 아직 신화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 왜냐하면

이것은 모 든 신 들 이 동시에 두 얼굴 을 갖 는다는 것 을 보지 못하거나 , 아니면 잘 못 보고 있기 때문이다). 비극에 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상반 된 견해는 바로 이 초석적인 양면성과 결부시켜서 생각해야 한다. 아 리스토텔레 스 가 〈 순화적 효력 〉 으로 비극을 규정한 것은 여러 가지 점 에서 〈 옳다 〉 . 그는 〈 항상 옳다 〉 . 그가 그토록 위대하지만 단 하나의 의미로만 그러하고 또 그만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바극의 위기 저편에 있다. 따라서 그는 바극의 위 기를 잘 알지 못하는 모든 이성주의의 선조다 . 그를 자기들의 선조로 모시는 형식주의 문학바평은 결코 툴리지 않았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그것이 기여하는 질서라는 관점 속에서만 고찰한다 . 비극 예술 은 확 립되고 , 강화되고 보존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확립하고 강화 시키고 보존한다는 것이다. 그 반면에, 풀라돈은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위기를 더 잘 이해 하고 있다. 『의디푸스 대왕 』 에서 그가 해독해낸 것은, 위대한 문화 제 의들의 고상하고 평온한 질서가 아니라, 차이들의 동요, 비극적 상호성 그리고 형식적인 해석이나 너무 직접적인 제의 해석들이 놓치고 있는 것, 죽 윌리엄 애로우스미스 W ill i am Arrowsm it h 의 표현처럼 바극적 〈소 용돌이 〉 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4 ) 이 철학자에게 적대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 역설적이게도 다름아닌 비극의 모델에 대한 더 직접 적인 이해였다. 플라돈은 바극 속에는 모든 사회 가치의 무서운 근원 으로 통하는 무시무시한 통로가 있으며, 그리고 비극은 그 도시국가의 건국 자체를 희미하게나마 문제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 의디푸 스대왕』을 보는 관객의 주의력은 〈카타르마〉를 추방하는 도시로부터, 때로 그 시인의 정서와 같은 입장인 〈카타르마〉에게로 이동하게 된다. 현대의 많은 지식인들처럼 이 비극 시인도 막연한 동정심으로, 죽어가 4) Wi lliam Arrowsmi th, The Criti cism of Greek tra ge d y , Tulane Drama Revie w , Ill, 3, March, 1959.

는 도시가 통일성을 다시 찾 기 위해 그 사회에서 추방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다. 이 시인은 이 오래된 전설을 완전히 믿지 않고, 약간의 의문을 제시한다. 도시의 전복을 막기 위해서는 그 전복의 기운도 축 출하여 소포클레스를 의디푸스의 유배지로 함께 보내야 한다는 것이 다. 이는 결국 이 시인을 또 다른 〈 카타르마 〉 , 혹은 또 다른 〈 파르마 코스〉로 만드는 것이다. 합리주의적, 휴머니즘적인 비평은 이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이 비평은 말하자면 어떤 맹목에 빠져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비극의 모 델인 무차별적 폭력과는 반대방향으로, 이를테면 〈 의미의 방향으로 dans le sens du sens>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것은 모든 차이돌을 강화하고 공고히 하여, 폭력과 성스러움이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는 모 든 틈새들을 막아버린다. 이것은 마침내 모든 〈 순화적인 〉 힘을 없애버 린다. 이리하여 이 비평은 결국 〈 문화적 가치들 〉 의 진부함 속으로, 속 물에 대항하는 속물적인 투쟁 속으로, 단순한 박학이나 등급매기기로 떨어져버리고 만다. 이 비평은 작품을 사랑과 증오와 폭력과 평화의 비국인 인간 본연의 드라마와 무관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 자신이 유 감스럽게 생각하는, 도시에 폭력을 몰고 오는 그 경향을 결국 스스로가 더 강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바카스의 여신도들』의 무서운 공포를 감지할 수 있는 독법을 찾을 수가 없다. g 5) 고대와 현대의 휴 머니즘 세계가 어떻게 해서 고대 그리 스 문화가 갖고 있던 무 시무시한 양상들을 과소평가하고 심지어는 완전히 제쳐놓을 수가 있었는지를 자 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장메르J eanma i re 의 『 디오니소스 D i ony sos 』 가 이 길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이 무시무시한 양상을 아주 드문 자료를 통해서만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은 우 연이 아니다. 종교와 신들로만 가득 차 있는 사고 속에서, 특히 문학, 미술, 철학 의 도움을 받아서, 과거 야만시대에 생겨난 대부분의 종교에 들어 있는 잔인함 이라는 오래된 분위기에 항거한 것은 그리스 정신의 영광이다. 인간 희생제의의 신화로밖에 해석될 수 없는 흔히 소녀나 어린이를 희생하는 신화들이 있는데, 이 신화들은 예전에 이러한 야만스런 전례가 실제로 있었다는 데에 대한 충분한 증

거가 될 것이다. 문명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그 지방관습과 전통 저1 의 속에 이런 전례들의 많은 흔적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갖 고 있는 습관, 조심성,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무지, 헬레니즘에 관한 기 존의 생각과 상반되는 것을 말하기를 내키지 않아 하는 마음들 때문에 이 흔적 들이 가려져 있었다. 희생양처럼 취급되던 불쌍한 악마인 파르마코이 pha rmakoi 를 추방할 때 행하던 잔인함은 페리클레스와 소크라테스의 아테네에서는 아마 일반적인 관습이 되어 가벼운 잔인성 정도를 의미했을 것이다 . 그러나 언제나 그런 식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헬레니즘의 변방지역인 마르세 이유나 아브데라 같은 곳에는 파르마코이룰 바다에 내던지거나 둘로 때려죽이는 아야기가 남아 있다. (……) 믿을 만한 자료에 의하면, 4 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아카디 Arcadie 고지의 리세 Lyc e e 산 제의에서는 식인의식과 어린아이의 살을 먹는 풍습이 있었다. 이러한 고찰은 어려운 문제를 일거에 딱 잘라 해결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유 혈희생에 대한 협오감을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지방의 자료를 편집했었던 철학 자들의 글에서 기독교 작가들이 이교도와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끌어모은 물론 오래된 이 정보들을, 가볍게 처리하지 않게 해준다. 이 정보들은 한결갇이 디오 니소스에 대한 인간회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제우스에 대한 인간회생도 릭토스 L y c t os 에서 행해졌을 것이다. 살라미스 해전에 앞서 한 예언가의 말을 듣고서 데 미스토클레스 Them i s t ocle 가 승낙한 두 페르시아 청년의 희생을 디오니소스 같은 섬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의 사실성(史實 性)은 분명치 않다. 그것은 한참 뒤에, 그러나 이 지역 고대사를 조사하기에는 아주 좋은 위치에 있던 한 사가의 기록에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침묵은 고의적 묵비권이 아니라면 속임수인 것처럼 보인다. (……) 디오니소스 예식 속에 들어 있는 예전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그것이 비록 완벽하진 못하다 하더라도, 이 신이 아테네 연국의 수호신이자 헬레니즘 시대에 는 연극과 연극인의 신이라는 영광을 누리게 된 상황을 이해하는 유용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 pp. 228-230)

위대한 작가에 있어서는 전부한 것이 동요한다. 그리고 문학에 관한 모든 〈 찬반의〉 논쟁도 애매모호하게 된다. 예를 들어 『두사 삼손 Sam­ son A g on i s t es 』 의 서 문에 서 밀 턴 M il t on 은 〈카타르시 스〉 이 론을 다시 거 론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에도 분명히 있었지만 희미하게만 있던 이

이론의 가장 의심스러운 면모를 부각시킨다. 밀턴은 자연의 매개를 통 해 병과 약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주의깊게 관찰해 보면 이 자 연의 모델은 〈짝패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 모델에 의해 짝패들은 이 시인의 다른 작품 진정 국적인 작품의 거의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비극은 고아하게 ancie n tl y 구성되었기 때문에 모든 시 중에서 가장 엄숙하 고 가장 도덕적이며 가장 유익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 스는 이것이 소위 〈 애련〉과 〈공포 〉 를 일으키는 힘이 있으며 마음속에서 그와 갇은 정념들을 씻어낸다고, 죽 그 정념들이 잘 모방된 것을 읽거나 봄으로써 일어나는 일종의 줄거움으로 그 정념들을 전정시키고 변하게 한다고 말한다. 자연이 자신의 효과로써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필요는 없다 . 왜냐하면, 의술 에서 우울한 경향을 지닌 것들이 우울증 치유에 쓰이듯이, 소 금기 를 없애는 데 소금이 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풀라톤/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유형의 대립을 모두 도덕 군자풍 모더니즘의 일의적인 틀에 가두어 버리지 않도록, 그리고 예술, 철학, 정치 등의 범주에다가 그 징조를 부여하고 싶어하는 차이와 추 방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의미십장한 태도는 제의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풀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립은 예의가 아 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 한편으로는 요구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 과 함께 거부되는 근친상간과 같이, 하나의 문제에 대하여 상반된 해 결책을 쓰고 있는 제의적 제도와 유사하다. 해로운 양상들을 계속 엄 격하게 해로운 것으로 여기면서 그 사소한 흔적마저도 제거하려고 애 쓰는 이 제도들은 풀라톤과 비슷하다. 그는 비극적 무질서와 폭력이 조화와 평정의 동의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와 정신분석학을 포함한 모든 서구문명이 그것을 〈문 화적 의미〉로 다시 보게 되는 천부살해와 근친상간을, 풀라톤은 반대

로 겁에 질 려 배척하게 되는 이유아다. 오늘날에 있어서 디오니소스적 인 감정 폭발은 하나의 전형적인 판박이에 불과하다. 그래서 가장 대 담한 선동이나 가장 〈 소름끼치는 〉 추문들도 이제는 어떠한 의미에 있 어서전 어떠한 힘도 지니지 않는다. 그렇다고 폭력이 우리들을 위협하 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반대이다 . 다시 한번 더 희생제도는 훼손될대로 훼손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제도를 폭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확 고부동한 풀라톤의 대립이나 차이룰 포착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곧 그 것 이 전도되는 것을 보게 된다. 비국적 폭력에 대한 풀라본의 거 부는 , 그 자체가 폭력적이다 . 왜냐하면 이 거부는 시인추방이라는 새로 운 추방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문학적, 도덕적인 주장의 배후에 내재 하는 , 이 시인에게 보내는 플라톤의 비난에 비추어보면, 풀라톤은 이 시인의 〈 원수형제 〉 , 즉 모든 진정한 〈짝패들 〉 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잘 모르는 〈 짝패 〉 라고 규정되는 데 부족함이 없는 것 같다. 도시가 스스 로에게 폭력을 행사하도록 요청하는――불경건한 자를 때리는 것 그 자체가 오점이 될 수 있으므로――소크라테스에 대한 플라톤의 동정 은 〈 파르마코스-주인공 〉 에 대한 소포클레스의 동정과 마찬가지로 의심 스럽다. 비극으로 빠져드는 오늘날의 세계처럼, 그때에도 이미 〈적대자 들 an ti - heros 〉 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 시대의 적대자에게 대 항하면서 차례차례로 동화되는 그 도시국가는 사실, 의디푸스와 티레 시아스의 도시국가 데베처럼 기만당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시 의 보호니 이해관계니 하는 것이 그 도시의 감정폭발의 허울과 핑계로 쓰일 때, 도시국가는 바로 그 적대감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이중성에서, 죽 깨뜨리려 할수록 깨어지지 않으면서 사 실을 더 찰 반영하고 있는 이 모든 거울들 속에서 우리들이 명백하게

판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폴리스〉의 해체이다. 아울러 우리는 비 극의 전후사정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왜냐하면 희화적으로 강조된 이같은 현상들이 우리들에게서도 다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접에서 보면, 비극과 마찬가지로 철학 덱스트도 영원히 되풀이 되는 추방의 시도처럼 작용한다. 그러나 이 시도는 결코 완수될 수 없 다. 내 생 각으로는 『플라톤의 조제 실 la Pharmacie de Plato n .n 이 라 이 름 붙인 쟈크 데리다의 ® 에세이가 바로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6) 그 논증은 아주 의미심장한 〈파르마콘p harmakon 〉이라는 단어의 용법 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6) Tel Quel, 32 호, 1968. ® 쟈크 데리다J ac q ues Derr ida (1930— ) : 알지에 태생의 프랑스 철학자 . 파리 고 등사범학교 철학과 졸업 후 모교에서 철학교수 역입 훗설의 현상학에 영향을 얻 어 구조주의를 철학 연구방법에 도입. 언어의 기호체계가 자의적이라는 사실에 입각해서 언어 위에 서 있는 논리학을 재검토한다. 〈시차성 d iff erence 〉이라는 개 념을 도입하여 실체와 직결되어 있다고 믿어 온 개념들은 모두 시차적 특칭에 의 해서만 뜻을 가지며 이 차이를 확인하고 그 행위에 의한 지연과 우회를 거친 뒤에 현실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풀라톤의 파르마콘은 인간 파르마코스와 같은 작용을 한다. 그리고 그 결과도 비슷하다. 이 단어는 나쁜 궤변론자와 훌륭한 철학자를 구 분하는 180 도로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결정적인 축이지만, 이것은 살해하기 전에 인간 회생양을 아데네의 거리로 제의적으로 끌고다니던 폭력만큼이나 정당하지 않으며 또 정당화될 수도 없다. 파르마콘이 궤 변론자들에게 쓰일 때는 대개 〈독〉이라는 해로운 의미로 쓰인다. 반대 로 소크라테스와 그의 행위에 적용될 때는 〈치료제〉라는 이로운 의미 로 쓰여진다. 모든 차이를 제거하여 아예 없었던 것으로 여기기를 거 부하는 것 같으면서도, 데리다는 소크라데스와 궤변론자들 사이에는, 파르마콘의 상반된 두 의미가 구분짓는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말로 표현된다는 사실이 은밀하게 암시하고 있는 동일성이 존 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학설과 태도의 차이들은 폭력적 상호성 속에

용해되어 버린다. 사실들의 심층에 있는 일치에 의해서, 그리고 〈 파르 마콘 〉 아라는 단어의 계시적인 〈 자연스러운 〉 용법에 의해서 차이는 은 밀하게 사라져 간다. 이 단어는 도시로부터 임의적으로 추방당한 〈 짝 괘 〉 에게 해로운 폭력을 집중시킨다. 플라돈으로부터 니체 이전까지의 모든 철학적 전통은 여기서 공표된 차이의 절대성을 경건하게 재확인 해 왔다. 그러다가 니체에서부터 이 차이는 전도되고 동요하기 시작하 여 예정된 결정적인 소멸을 향하게 된다. 풀라톤에 있어서의 〈 파르마콘 〉 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의 〈카타 르시스〉와 같다. 이 두 철학자의 정확한 생각이 무엇이든간에 그들의 작가로서의 직관 때문에 그들은 암시적이고 비유적인 이 단어들을 향 하게 된다. 둘 다 이 메타포에 의지하는 것은 〈순전하기〉 때문인데, 이 순전함은 모든 희생제의의 인지불능을 특칭짓는 그런 순진함이다. 만 약 이 비유들과 그 대상 뒤에 똑같은 것이 감추어져 있다면 , 그것은 바로 이런 비유과정은 결국 어떤 것도 전혀 바꾸지 않으며 모든 비유 둘 그리고 서로 교체될 수 있는 모든 사물들 뒤에는 항상 똑같은 조작, 물리적으로나 정산적으로나 똑같은 폭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아다. 데리다의 분석은 플라톤의 작품 속에서 철학적 조작의 어떤 폭력적 독단은 그 방법을 제공해 주는 어떤 한 단어에서부터 이루어지고 있 다는 것을 매우 인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단어가 그 방법을 제공 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그 조작의 더 노골적이며 결국 그것과 유사한 또 다른 하나의 변형체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서로에게서 파생된 희생의 형태둘 뒤에는 철학이나 사회학이나 정신분석학 같은 서구사상이 추구하는 의미에 있어서의 〈고유한 것〉은 없으며, 그 대신 서구사고의 특칭인 온갖 비유적 해석과 탈선 때문에 항상 그 본질이 왜곡되어 있는, 실제적이며 원초적인 어떤 실제 사건이 존재한다. 플라톤에 대한 현대의 해석은 〈파르마콘〉의 양분된 통일성을 파괴 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파르마콘-치료제〉와 〈파르마콘-독〉을 표현하기

위하여 서로 무관한 다론 용어들에 의지함으로써 , 항상 초석적 작용의 흔적들을 더욱 완전하게 지우고 있다고 데리다는 말하고 있다. 이러한 소멸 작업은 우리 자신이 『인구제도사전』에 대한 이야기에서 특 기했던 그 작업과 유사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데리다의 저서가 그 중 요한 계기라 할 수 있을 폭력과 그 작용에 대한 폭로의 움직임 갇이 소멸과는 반대방향의 움직임도 오늘날 시작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 본 시론에서 우리는 초석적 폭력이라는 가정이 계속해서 신화제의 적인 모든 형태에까지 확대되어 나가는 것을 보았다. 8 장 이래로 우리 는 이 확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회생양 메 커니즘이 모든 상칭화의 원초적 메커니즘과 일체를 이루고 있다면, 인 간문화 속에는 그것을 어떤 유형에 결부시키든간에 폭력적 만장일치에 뿌리내리지 않은 것, 결국 희생물과 만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제의에서 파생된 다양한 형태의 문화적 활동에서 이제 막 확인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는 우리의 가정을 아주 크게 확대할 수밖에 없게 됐다. 결국 문제는 본래의 희생제의도 이것의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한 확 대된 희생적인 것 속에, 모든 문화 형태들을 위치시키는 것이다. 이 확대가 독단적인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제의적인 처형이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아예 존재한 적이 없었던 곳에도 이것을 대신 하거나, 계속해서 초석적 폭력과 연관되어 있는 또 다른 제도들이 존 재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우리와 같은 사 회에서 이미 제의적인 처형을 제거시킨 후기 고대 사회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제 1 장에서 우리는, 이러한 소멸과 어떤 사법제도의 설립 사이에는 어떤 밀접한 상관관계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받

았다. 후자는 전자에서 유래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의 우리의 논증은 초석적 만장일치에 근거하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희생물의 발견은 그 뒤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당연히 우리의 분에 차지 않았다. 이제 이 공백을 채워야 하겠다. 만일 형벌제도도 초석적 폭력이 그 기원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없다면, 사법제도는 합리적 인간의 일반협 약, 죽 일종의 사회계약과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아다. 그렇게 되면 인간들은 합리주의 속에서 흔히 그러하듯이 순진한 의미 에 있어서의 사회의 주인이 다시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주장은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 고대 그리스 인류학 An t hro p olog i e de la Grece an tiq ue 』에서 루이 제르 네 Louis Gerne t는 그리스인들의 사형제도의 기원에 관해서 문제를 제 기하고는, 희생물과의 관련성을 명백히 하면서 여기에 답하고 있다. 우 리는 아마도 이 독특한 논증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사형은 서로 아무런 관계도 지니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형태, 죽 첫번째는 순전히 종교적인 형태로, 두번째는 종교적인 형태와의 전혀 무관한 형 태로 나타난다. 첫번째 경우는 다음과 같다. 사형은 오점 제거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유혈의 책임이 집단에서 희석되고 때로는 사라져버리는(돌로 쳐죽이는 형벌의 경우가 그러하다) 집단 정화적인 해방으로 나타난다 . 폭력적 추방, 즉 비열하고 저주받은 구성원을 죽음 속으 로 추방하는 것에는 〈 봉헌 〉 이라는 생각이 수반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사실 사형은 경건한 행위로 보인다. 이는 무법자를 죽이는 것이 순결을 해치는 것 이 아니라고 명시되어 있는 고대의 법조항이나 이런 살해를 의무로 보고 있 는 게르만족의 법규정을 상기해 보면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같은 경 우에 처형받는 사람은 진짜 종교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 역할은 그 역시 처 형당하는 〈 왕사제 ~o i - p re t re 〉의 역할과 유사하며, 로마의 〈성스러운 자 homo sacer>, 그 리스의 〈파라마코스〉라는 이 죄인에 대한 호칭 속에 충분히 나타나

있는 역할이다 . 7)

7) 「사형론 Sur !'executi on ca pit ale 」, in Anth r opo lo g ie d e la Grece anti qu e, Maspe r o, 1968, pp. 326-327.

여기서 사형은 초석적 폭력의 제의적 연장선상에 있다. 이 덱스트는 아주 분명하여 어떠한 해설도 필요없을 정도이다 . 단지 우리는 물론 제르네에 따라, 자주 언급되는 또 다른 형벌로서, 도시의 거리를 치욕 스럽게 행전하는 경범죄인들의 〈 전시 ex p os iti on 〉 를 덧붙일 수 있을 정 도이다. 제르네에 의하면, 글로츠 Glo t z 는 이미 이 행전을 〈 카타르마 〉 제의와 비교하고 있다. 『법률 !es Lo i s 』 제 9 권 (855c) 에서 풀라톤은 도시 국가의 모델로서, 〈국경선에서 경범죄인들을 치욕스럽게 ‘전시할 것' 〉 을 추천하고 있다. 루이 제르네는 이 국경선으로의 후퇴를 아주 의미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회생물과 그 파생물에 게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종교적 의미가 있는 형벌에 나타나는 경향둘 중의 하나는 추방 경향 , 그리 고 더욱 특별하게는-왜냐하면 이 단어는 그것의 어원적인 의미와 함께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__ 〈 경계선 밖으로의 추방 경향 〉 이다. 사람들은 신성모독자들의 유골을 이런 식으로 추방했다 . 풀라본도 잊지 않으려고 주의 했을 정도로 잘 알려진 어떤 종교적인 소송철차에서도 인간의 죽음을 야기 시킨 것이나 사람을 죽인 동물의 시체가 이런 식으로 추방되었다 . 8 )

s) G. Glotz , Soli da rite de la fam i lle dans le droit crim i ne l , p. 25. Qu elqu es rap - por t s entr e la pen alite et la relig ion dans la Grece anc ien ne, op : cit. , pp. 288- 290 에서 재인용. ® 구스타브 글로츠 Gus t ave Glotz ( 1862-1935) : 프랑스 역사학자. 소르본느 그리스 사 교수. 특히 박사 논문 「원시 그리스의 신명심판과 그리스 형법에서의 가족의 연대 성 L'Ordalie dans la Grece pri m i tive et la Solid a rite ' de la fam klle dans le droit crim i ne l en Grece 」 이 유명 함.

사형집행의 이 두번째 방식은 종교적인 것은 전혀 없는 최소한의 형태로 둘러싸여 있다. 이것은 〈 아파고즈 a p a g o g e 〉 라는 것인데 이것의 대중적인 성격은 미국 서부영화에 나오는 〈 재판 〉 을 연상케 한다. 이것 은 특히 명백한 범법행위의 경우에 작용하며, 또한 이것은 언제나 〈 그 집단에 의해서 승인받는다 〉 고 제르네는 단언하고 있다. 제르네의 말에 의하면 만일 그 죄인이 〈 이방인 〉 이 아니라면, 죽 그의 죽음이 공동체 내에 끝없는 복수를 유발할 위험이 있을 때에는, 그 죄의 공공연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집행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집단의 승인을 받는 데에는 충분하지 못한 것이다. 형식 때문에, 아니 오히려 형식의 부재 때문에 서로 낯설어 보이지 만, 사형집행의 이 두번째 방석이 첫번째 것과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 다. 종교 형석의 기원에서 희생물의 역할을 일단 찾아내게 되면, 여기 서 어떠한 〈 제도 〉 도 아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초석적 만장일치가 작용하고 있다. 첫번째 경우 그것은 제의형석의 중개를 통해서 사형을 낳으며, 두번째 경우 그것은 자연발 생적이며 자연스럽게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약화되고 훼손된 채로 스스로를 〈 드러낸다 〉 . 이 두번째 방식은 점차 체계화되고 합법화된 일 종의 린치〔私刑〕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두 경우 모두 합법적 형벌이라는 개념은 초석적 메커니즘과 분리될 수 없다. 이 개념은 공동체 전체가 단 하나의 책임자를 적대시하게 하 는 저항할 수 없는 확신 죽 자발적 만장일치에까지 거슬러 울라간다. 그러므로 이 개념에는 〈 요행 〉 의 성격이 들어 있는데, 이런 특성은 종 교적인 것과 엄밀한 의미의 사법적인 것 사이에 있는 많은 중간 형태 속에, 특히 중세의 〈신명심판 ordal i e〉 ® 에서 공공연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특성이다. ® 신명심판(神命審判 )ordal i e : 불이나 열에 닿아도 다치지 않는 자 혹은 이기는 자 등을 무죄로 간주하던 중세의 심판제도.

* 이제 우리는 모든 요청에, 즉 모든 징후들이 일치하는 데 대해 대답 해야 한다. 의견상의 국단적인 다양성 너머에는 모든 신화와 모든 제 의의 통일성 뿐만 아니라, 종교적이든 반종교적이든 모든 인간문화 총 체의 통일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통일성 중의 통일성인 이 통 일성은, 항상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작용한 수 있는 단 하나의 메커니즘, 죽 희생물에 대한 공동체의 만장일치 ;,, 자연 스럽 게 일어날 수 있게 하는 그 메커니즘에 완전히 달려 있다는 ’. i %확하게 입증 해야 할 것이다. 이 일반적 결론이 너무 지나치고 엉뚱하게 보일지도 모론다. 그러므 로 이 결론을 도출해낸 그 분석으로 되돌아가서 지금까지의 해석의 연 장선상에서 이 제의들과, 그리고 겉으로는 이것들과 무관한 것처럼 보 이는 제도들 사이의 완전한 지속성과 · 아울러 모든 제의의 통일성을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예를 둘 필요가 있다. 물론 어떤 제도를 선택 해야 하는데, 우리는 첫눈에 보아 가능한 한 가장 근본적인 제도를 선 택해 보자. 많은 사회에서 중앙집권 같은 것이 있울 수 있다는 점에서, 있는 그대로의 왕국과 더욱 일반적으로는 소위 정치 권력인 모든 절 대권력을 살펴보자. 아프리카 왕국에 대한 설명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제의적 근친상간을 너무 지나치게 떼어놓음으로써, 다시 말해 그것을 이 제도의 가장 인 상적이고 가장 뚜렷한 특징으로 삼음으로써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 적이 있다. 사람들은 제의적 . 근친상간을 마치 하나의 독 립적인 현상인 것처럼 해석하려 드는데 그렇게 하면 어쩔 수 없이 어 떤 형태의 심리주의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므로 희생을 전면에 부각시 켜야 하며 이 희생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것을 해석해야 한다. 설사 이 희생이 너무 평범하고 너무 혼하여 제의적 근친상간과 같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여기서 희생은 중심이며 근본적인 것이며 가장 평범한 제의이다. 바 로 이런 이유로, 그 기원의 소멸을 완전히 해 준 현대적 해석들아 있기 이전에도 이 제의의 전화과정 중에 그것이 사라지거나 변형될 수 있 었던 것이다. 어떤 특징이 진기하게 보일수록 그 뚜렷한 성격은 더 강한 인상을 주게 되므로 만일 그것을 그것의 진정한 맥락 속에서 보지 못하면 우 리는 본질적인 것을 못 보게 될 위험이 많다. 그 반면에, 어떤 특징이 혼한 것일수록 그것에 몰두할 가치는 더 있으며, 그 구분이 완전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본질적인 것에 도달할 수 있는 확률은 더 높은 것 이다. 우리는 이미 똑같은 제의 범주의 두 가지 변형체 사이의 대립을 살 펴보았다. 예를 들어 〈축제〉와 우리가 〈반축제〉라 부르는 것, 혹은 왕 의 근친상간에 대한 둘 다 아주 엄격한 강요와 금지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대립들이 위기의 해석 속에서 차이로 귀결되 고 있음을 확인했다 . 제의가 해로운 폭력과 이로운 폭력의 근본적인 통일성을 인정하면서도, 명백한 실용적인 이유로 둘 사이의 차이룰 찾 아내려고 애쓰는데 이러한 구분은 필연적으로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이 구분에 의해 생겨난 해로운 폭력이 그 절정에 이르러서는 이로운 폭력으로 전도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비슷한 제의둘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 역시, 겉으로 대 단한 것만큼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확인했다. 어떤 민족은 왕의 근친상간을 요구하는 반면 이웃한 다른 민족은 그것을 금지하고 있는 데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이에 대해 어떤 민족은 환각에 사로잡혀 있고 반대로 또 다른 민족은 그 환각에서 해방되어 있다고 결론내리는 연구자는 아마 완전히 찰못 생각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우리들이 이미 확인했듯이 많은 부류의 제의들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의 자율성은 의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것 역시

초석적 메커니즘의 해석 속에서는 차이들 , 즉 제의는 결코 〈 꼭 들어맞 지 않는다 〉 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문자 그대로 무한한 차이들로 귀 결된다. 바로 이 어긋남이 다양성을 만들어낸다. 신화들이 언제나 겨냥 하지만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이것을 스스로 보지 못하는 한, 아 다양 성을 통일성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기존의 방법을 따르는 연구가에게는 아프리카 왕국, 투피남바 족의 식인풍습, 그리고 아즈텍족의 희생제의와 같아 서로 다른 사실들 을 같이 비교할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을 것이다 . 아즈텍족의 희생제의에서는 희생물 선택과 그 처형 사이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는데 그 동안에 이 미래의 희생자의 욕망을 만족시켜 주기 위한 모든 것이 행해진다. 사람들은 그의 발 아래 몸을 던져 그를 숭 배하며 그의 옷을 만지기 위하여 밀어닥친다. 이 미래의 희생자는 〈진 짜 신〉처럼 취급된다든지, 또는 〈 일종의 명예 왕 〉 역할을 하고 있다고 단언하더라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러다가 참시 후 급작스러운 사형집행으로 이 모든 것은 끝난다. 투피남바족의 포로에서 아즈텍족의 희생물이나 아프리카 왕과의 상 당한 유사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 세 경우에서 미래의 희생물이 처한 상황은 모두 위대함과 비천함, 명성과 치욕을 함께 갖고 있다. 요컨대 이들에게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요소들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그러 나 그 배합비율은 서로 다르다. 이 모든 유사성들은 그러나 너무 모호하고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을 결합시키기에 충분한 근거를 제공해주지는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즈텍의 희생물의 경우, 그가 향유하는 특권들은 너무 일시적이 며 또한 그 성격이 너무 수동적이고 의례적이기 때문에 이것을 아프 리카의 왕이 행하는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정치권력과 비교하기는 사실 어렵다. 두피남바족의 포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의 상황을 〈왕과 같다〉고 규정하려면 현실을 무시할 정도의 대단한 상상력이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이것들의 유사성이 아주 명백하더라도 이 유사성이 아

프 리 카 왕의 제의 적 근친 상 간 이나 , 두피남바 족 의 식인 풍습 , 아 즈 텍족의 인간 회 생과 같 이 이 제도 들 의 개별적 특징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면, 이 셋의 비교는 아주 무모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 그토록 인상적인 민 족 학적 기념물들, 즉 전문가들뿐 아니라 등산가들도 이제 더 이상 〈 함 께 〉 오 르 리라고 꿈꾸지 않는 몽 블 랑과 히말라야 같은 가파른 산봉우 리 들 을 데면데면하게 결합시켜버리면 , 우리는 인상주의적이고 자의적 이라는 비난울 받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리고 이번에는 최근 연구의 성 과인 공시태적인 전체 를 우리가 고려하고 있다는 것울 보지 못한 채, 사 람 들은 우리가 프레이저와 로버트슨 스미스에게로 되돌아가고 있다 고 비난 할지 도 모른다. 신 중 한 사람은 여기서, 고양이는 고양이인 것처럼 희생물은 희생물 이 고 왕 은 왕이라는 수천 번 확인된 교리에 만족할 것이다. 어떤 왕들 은 희 생되 고 어떤 희생물들은 〈 왕처럼 〉 대접받는다는 사실도 그들에 게 는 단지 귀여운 호기심, 홍미로운 역설일 뿐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 호 기 심 이나 역설에 대한 심사숙고는, 과학도 아주 멋지지만 문학은 현 실 과 전 혀 관계가 없기 때문에 훨씬 더 좋은 것이라고 아침마다 입 울 모아 합창하는 온순한 문학바평이라는 엉클 톰 아저씨들의 비호를 받으면서 어떤 문학적 게토g he tt o 속에 얌전히 들어박혀 있는 윌리엄 세익 스피 어와 같은 뛰어나고 민첩한 정신의 소유자들에게나 일임할 성 질 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해롤 갈망하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신중함은 사실 썩 달가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신중함은 우리가 어떤 통합적인 가설을 쓰지 않는 한 계속해서 주장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다가 우리가 〈희생양〉 같은 유형의 현상들 뒤에는, 어떤 모호한 심리학적인 〈심리적 가짜 진정제 pla cebo> 같은 것이나 아니면 어떤 〈죄의석 콤플렉스〉의 빈혈증이나 〈 정신분석학이 흔히 말하는 어떤 상황〉이 있는 게 아니라, 모든 문화의 똑같은 원동력 죽 모든 제의와 종교의 기본원리가 감추어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상황은 완전히 딴판으로 변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앞에서 이야기한 세 가지 제의의 차이들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게 된다 . 이 차이들은 황산나트륨과 일산화탄소를 구별짓 는 차이와는 전혀 다른 유형의 차이이다 . 이 차이들은, 처음에는 상실 되어 있지만 그 다음에는 다양하게 해석되어지는 단 하나의 똑같은 메커니즘 덕분에 다시 회복되는 통일성의 똑 같 은 드라마를 서로 다른 세 사회가 해석하고 재현하는 서로 다른 세 가지 방식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 여기서 이 세 제의의 차이들뿐 아니라 그 유사점들도 판독할 수 있게 되는 만족할 만한 설명을 얻게 되는 것은, 투피남바족 포로의 이상한 특권이나 아즈텍의 희생물에 대한 일시적인 진짜 숭배만이 아 니다. 결국 해독되어 하나로 기결되는 것은 바로 그것들의 지배적인 특칭 그 자체이다. 만약 독자들이 우리들의 분석에 대해 미심쩍어하면서 이 세 제의의 텍스트 사이의 차이에 대해 계속 미련이 남는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여기저기에서 이 차이를 수많은 그 중간형태로써 채울 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가 있다. 우리가 희생물과 그리고 언제나 한번도 제대로 이해된 적이 없기 때문에 사실 온갖 다양한 해석을 받을 수밖에 없었 던 희생물 효능에서 이 〈변형체들 〉 을 읽어낼 수 있다면, 차이 사이에 있- 는 이 중간형태들은 겉으로 보기에 아주 멀어보이는 이 제의들의 모든 단절을 마침내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회에 있어 왕은 있지만 희생되는 것은 그가 아니다. 아니 이 제 더 이상 그가 아니다. 또한 동물은 더 이상, 혹은 아직은 희생물이 아니다. 흔히 경범죄인, 적응하기 어려운 자, 그리스의 파르마코스와 같이 사회에서 배척된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된 왕을 대신하는 인간 제물이 희생된다. 제사장의 칼 아래에서 진짜 왕을 대신하여 처형되기 전에 이 〈가짜 왕〉은 왕좌에서 짤막하게 진짜 왕을 대신한다. 실제 권 력은 전혀 없는 아 짧은 통치는 이 제의 유형을 아즈텍의 희생제의와 유사한 것으로 만들지만, 계속 그 전체적인 문맥은 분명히 진짜 왕에 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은 희미해져가는 아프리카 왕과 아즈텍의 희생

물 사이의 차이점인데, 앞에서 말한 이 희생물은 이 둘로부터 반반씩 따온 정확히 이 둘 가운데 있는 희생물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 가짜 왕〉은 자신의 죽음으로써 적절하게 희생제 의적으로 끝나게 되는 어떤 〈 축제〉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겠다 . 예를 들어 스와질랜드의 인쿠알라 제의에서처럼 〈축제〉라는 테 마와 진짜 왕이든 가짜 왕이든 왕의 희생이라는 데마는 항상 붙어다 니는데, 이는 조금도 놀랄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 축제〉는 희생양 메 커니즘으로 해결되는 희생위기를 항상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통 일성의 회복이 그의 덕택으로 돌려질 때마다 이 희생양은 항상 〈신과 같고〉, 〈 왕과 같으며〉, 〈지고의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왕, 지배자, 신, 희생양 등 희생물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모든 단어들은 모두 서로서로에 대한, 특히 이 말둘이 모두 포착하려고 애쓰던 초석적 만 장일치 메커니즘이라는 하나의 메커니즘에 대한 다소 변형된 메타포에 다름아니다 . 제의들은 희생물에 대한 해석의 연속체이다 . 그러나 제의는 희생물 의 공허한 모습만 그릴 뿐 결코 그 핵심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따 라서 제의들을 그것들의 차이에 따라 분류하려는 모든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떤 범주에서나 둘 또는 몇 개의 범주 사이에 위치하는 제의들을 항상 발견하게 될 것이다. 원초적 사건에 대한 제의적 해석에는 초석적 폭력의 기억에서 멀어 짐에 따라 그것들을 완전히 지워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축제 속에서 그것은 부분적으로 변형된 어떤 희생위기에 대한 줄거운 기념으로 나 타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미 보았듯이 최후의 희생은 사라진다. 그리고 악령추방제의가 희생과 함께 나타나거나 그것을 대신하는데, 이로써 초석적 폭력의 마지막 흔적은 사라지게 된다. 이제서야 비로소, 우리는 현대적인 의미의 〈축제〉를 만나게 된다. 이 제도는 그것이 아 무리 변화되었더라도 그것을 완전히 해독하게 해주는 그 제의의 기원 에서 멀어지고 단절될 때에만, 문화 연구가의 대상이 될 만한 특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 제의둘은 계속 행해질수록, 이들의 공통된 기원에 점점 더 접근 하며 그 차이는 더 작아지며 그 구분도 모호해져서 분류도 더 힘들게 된다. 물론 제의에는 애초부터 차이가 존재한다 . 왜냐하면 차이를 회복 시키고 정착시키는 것이 희생물의 중요한 기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 나 애초의 이 차이는 그다지 발전되지 않았으며 아직 그 주위에 차이 들을 많이 만들어내지도 않았었다. 초석적 폭력에 대한 최초의 해석인 제의는 , 상호적인 요소들 사이에 죽 해로운 것과 이로운 것이라는 성스러운 것의 두 측 면 사이에, 초석 적 신비로부터 멀어져감에 따라 점점 더 크게 번져가며 증가해가는 최초의 불균형을 만들어낸다. 이리하여 모든 제의 속에 있는, 이 최초 의 불균형에 의해서 생겨난 두드러진 특징들은 갈수록 다른 특징들을 뒤견으로 물러나게 하여 결국에는 그것들을 제거해 버린다. 우리의 추 리력은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의 결합을 단순한 논리적인 〈 모순 〉 이라 고 여긴다. 이때 우리는 두드러진 특징과 그렇지 않은 특징 중에서 하 나를 택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우리의 추리력은 이 두드러지지 않은 약화된 특칭을, 당연히 잘못 끼어들어 쓸데없이 추가 로 덧붙여진 것이라고 간주하게 된다. 그것들이 아직 잊혀지지 않고 있는 곳에서 그것들은 항상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제 의견상 서로 낯선 것처럼 보이는 두 제도의 문제를 해결할 순간이 왔 다. 서양 학문의 원칙, 죽 자연과학에 의해서 자국된 서두른 모방의 산물인 차이라는 절대법칙은 우리로 하여금 동질성을 인정하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금기는 아주 단호하기 때문에, 모든 제의들의 똑같은 기 원을 밝혀내려는 지금 우리의 노력을 분명 근거없는 〈주관적인〉 것으 로 여기도록 사주할지도 모른다. 아프리카 왕의 근친상간은 희생제의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기원에 있어서나 그리고 〈군주제도〉로 변한 마지막 단계의 관점에서 나, 진정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이런 왕국의 본질적인 특칭은, 분명

항상 소급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그의 죽음의 힘 때문에 이 미래의 희 생물인 살아 있는 왕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권위는 점차 정착되어 영속적인 것이 된다. 그 리고 이 권위와 상충되는 특징들은 중요성을 잃어간다. 인간이든 동물 이든 또 다른 제물이 전정한 왕에 대체된다. 규칙위반과 그로 인한 비 열함이나 왕 개인에게로 해로운 · 폭력이 모이는 것과 그리고 희생제의 적인 징벌과 같이 최고 권위의 〈 이면 〉 을 이루는 이 모든 것들은 이리 하여 내용없는 공허한 〈 상징 〉 이나 시간이 지나면 틀림없이 사라지고 말 비현실적인 코메디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제 의의 유물은 애벌레의 몸에 붙어 있는 번데기의 잔해와도 같은 것이다. 성스러운 왕권이 이제는 순수하고 단순한 왕권, 순전히 정치적인 권력 으로 변모된 것이다. 프 랑 스 앙시엥 레짐의 군주제나 전통적인 모든 왕권을 생각할 때, 우리는 당연히 왕권에 대한 우리의 현대적 이미지를 원시세계에 투영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원시세계의 성스러운 왕권에 비추어 모든 것을 생각하는 것이 더 풍요롭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왕권신수설은 신민을 다루기 쉽게 만들기 위하여 완전히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다. 특히 프랑스에 있어서, 왕의 성스러움과 궁정광대, 왕의 몸에 손만 대 어도 병이 완쾌된다든가 하는 것과 물론 마지막에 가서는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왕 등의 왕권사상은 여전히 성스러운 폭력의 작용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는 어떤 총체를 이루고 있다. 지배자이자 희생물이라는 그의 정체, 죽 왕의 성스러운 특성은, 그것이 완전히 잊혀져 있울수록 그래서 왕이 심지어 조롱거리로밖에 여겨지지 않을수록 더 되살아나 려고 한다. 사실, 이 때가 바로 왕이 가장 위협받을 때인 것이다. 이 모든 역설적인 것에 대한 대가이며, 이미 우리와 비슷한 군주제 원칙에 대한 가장 철저한 해설가가 바로 세익스피어이다. 그는 마치 가장 원시적인 것과 가장 현대적인 것 모두에 대해 우리가 그 중 하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찰 알고 있는 것 같 다. 그는 가장 원 시적인 것과 가장 현대적인 것 사이의 모든 간격을 채우고 있다. 『 리차드 2 세』 속에 나오는 유명한 폐위 장면은 흡사 정반대인 즉위 장면처럼 전개된다. 페이터 Wate r Pa t er 는 ® 합당하게도 여기서 전도된 제의를 보았는데, 왕은 거의 종교적인 하나의 희생물로 변모한다는 것 이다산 그는 자신의 적들을 유다J udas 와 빌라도 P i la t e 같은 사람들에게 비유하지만 곧이어 자신이 그리스도와 동일시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그는 결백한 제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역시 〈 반역자 〉 이며,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 .

9) Ap pre ci ation s, London, 1957, p. 205. ® 페이터 Watt er Pate r (1s39-1894) : 영국의 비평가.

내 눈은 눈물이 가득 차 볼 수 없으나 그들은 여기서 반역자를 볼 수 있도다 . 아니, 나 스스로에게 눈을 돌리면, 나 또한 그들과 같은 반역자도다. 왕에게서 치장을 떼어내는 데에 나 또한 내심으로 동의했기에. (N. i. 244) 칸토로비 치 Ernst S. Kan t orow i cz 는 중세 의 합법 적 왕의 신분에 나타나 는 이중성에 관한 연구서 『왕의 두 신분 The Ki ng 's Two Bod i es 』 속에 『리차드 2 세』에 대한 분석을 포함시키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다론 어디에서보다 여기서 그것이 드러나면 아마도 더 놀랄 만한 것이 될 희생양 메커니즘에까지는 비록 이르지 못했지만 그는 세익스피어의 왕의 이중성을 아주 훌륭하게 묘사한다. 하나이 면서 또한 동시 에 활동하는 리 차드 R i chard 의 여 러 분신들은 ——. 그 러므로 나는 한 몸이면서 여러 사람의 역할을 한다 (V. v. 31) —— 왕, 궁중광

대 , 그리고 신 속 에 잠 재 적으 로 존 재하는 것들 이다 . 그 것들 은 필 연 적 으로 거 웅 속에 녹 아든다. 이 둘 〈 쌍둥이 〉 의 세 원형은 계속해서 서 로 엇갈리고 겹치 면 서 서로 간섭한다. 그러나 우리 는 이 모든 장면에서 영원한 동료이자 적대 자 인 인간의 추한 모습과 함께 , 웨일 즈 해안의 장면에서는 〈 왕 〉 이 (III , ii), 프 린트성 장 면에 서 는 〈 신 〉 이 ( N, i) 지배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 게다가 우리 는 이 들 세 장면 모두에서 똑 같 은 추락을 만나게 되는데 , 산성한 왕권으로부 터 왕권 이라는 〈 이름 〉 으로 , 또 한 그 이름으로부터 인간의 적 나라 한 참 상으로 의 추락 이 그 것 이다 .10 )

10) The Kin g ' s T wo Bodie s , New York, 1957, ch. ii.

좀 더 밀고 나가 소위 왕국에서 중요한 것은 희생물로부터 나오는 〈절 대권 〉 이라는 개념과 모든 형태의 중앙집권쳐인 권력이란 것을 잊지 말 아야 한다 .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서로 혼합될 수 있는 두 개의 근 본 적 인 사회유형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는 본질적으로- 군주 제적 이며 당연히 제의적인 기원에서 나온 중앙집권적 권력의 사회들 이며 , 두번째 유형은 그러한 것이 전혀 없는 사회로서 그 사회 내부에 서도 소 위 대결 구조라는 초석적 폭력의 정치적인 흔적이 하나도 남아 있 지 않 은 사회들이다. 첫번째 유형의 사회에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는 모르지만 사회 전체가 항상 원초적 희생물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 에게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대리인은 그의 수중에 종교적인 권력뿐 아니라 정치적인 권력도 장악하고 있다. 뒤에 가서 이 권력이 양분되고 분산되더라도 이 집중화 경향은 계속된다. 홍미롭게도 구조주의 민족학은, 그것의 명확한 차이를 판독해내는 이항 대립을 더 이상 발견할 수 없는 유형의 사회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여기서 〈양극단〉 사이의 대립은 내재화 되어 있다. 이 대립은 예를 둘어 왕과 궁정광대 사이의 대립과 같은 형태로 의재화될 수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이차적이고 부차적으로만 그러하다 .

〈 역사적 〉 인 사회들의 두드러진 불안정은 왕의 이러한 차이의 내재 화에 잘 반영되어 있는데 , 이 내재화 덕택에 비극은 점차 희생양 왕을 영원한 위기 속에서의 차이의 동요에 희생되는 인류의 전형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 모든 종교적 제의들은 희생물에서 나오며 종교적인, 그리고 세속적 인 인간의 주요 제도들은 제의에서 나온다. 우리는 지금까지 정치권력, 사법권력, 의술, 연극, 철학, 나아가 인류학에서 이 점울 확인했었다. 그런데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사고의 메커니즘 그 자체인 〈 상칭 화〉 과정이 바로 희생물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증들이 전부 다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들의 일치는 아주 인상 적이다 . 사실 이 논증은 의견상 가장 소박한 기원 신화들, 죽 원초적 희생물의 육체 그 자체로부터 종교적, 가족적, 사회적 제도들뿐 아니라 인간에게 유용한 모든 식물, 모든 자양둘이 나온다고 말하는 신화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인상적이다. 제의의 모 체인 희생물은 〈교육 e-duca ti on 〉 이라는 이 말의 어원적 의미에 있어서 인류의 훌륭한 〈교육자〉인 것이다. 제의는 안간들을 성스러운 것으로 부터 조금씩 벗어나게 한다. 제의는 인간성을 규정짓는 모든 제도와 사고를 인간들에게 부여함으로써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폭력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며 폭력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우리가 기원신화들에게 보았던 것이 희생에 관한 인도의 한 텍스트 에서는 조금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처음에 신들은 한 인간을 제물로 처형했는데 그 인간이 처형될 때 그 속에 있던 제의의 효력은 그에게서 나와 말(馬) 속으로 들어갔다. 신들은 말을 희 생시켰다. 말이 희생당할 때 그 속에 있던 제의의 효력은 그것에서 나와 암소

속으로 들어갔다. 이같이 해서 이 암소가 처형될 때 그 속에 있던 제의의 효 력은 암양 breb i s 속으로 들어갔다. 또 그 암양을 희생시키자 그 속에 있던 제의의 효력은 숫양 bouc 속으로 들어갔다. 신들이 숫양을 희생시키자 그 속 에 있던 제의의 효력은 땅속으로 들어갔다. 신들은 그 효력을 찾기 위하여 땅을 팠으며 결국 그것을 찾아냈다. 그것은 쌀과 보리였다. 그래서 오늘날에 도 우리는 당을 파서 그것들을 얻고 있다 .11)

11) Gata p a th a -Brahmana, 1, 2, 3, 6-7, in Syl v ain Levi , op. cit., pp. 136-138.

뒤르켕은 사회는 하나이며 그 통일성은 우선 종교적인 것이라고 단 언한다. 여기서 자명한 이치니 논점 절취의 오류니 하는 것을 볼 필요 는 없다. 사회적인 것 속에 종교적인 것을 용해시키거나, 또는 종교적 인 것 속에 사회적인 것을 희석시켜서는 안된다, 문화의 차원에 있어서 인간의 현상태는 종교적인 것 속에 들어 있는 교육적 원칙 덕분이라는 것을 뒤르켕은 이미 예측했었다. 그는 공간과 시간의 범주조차 종교적 인 것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뒤르켕은 어떤 점에서 자신이 옳은지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폭력이 인간사회의 형성에 얼마 나 거대한 장애물이 되는지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이 장애물을 보았을 것이라고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헤겔같은 사람 보다는 어떤 점에 있어서 이 보이지 않는 장애물을 더 정확하게 보았 다. 종교적인 것은 우선 무엇보다도 모든 인간사회의 창조에 대항해서 폭력이 설치한 거대한 장애물의 제거이다. 뒤르켕이 본 바와 같이 인 간사회는 주인 앞에 선 〈노예〉의 공포와 함께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과 함께 시작된다. 뒤르켕의 직관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것은 희생물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해서 일어나~ 집단의 통일성의 기반이 되는 바로 그 희생물과 같은 것이란 것을 이 해해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과 화해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상호적

폭력 속에서, 단지 이 희생물만이 우리들에게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 한 진정 필수적인 이 차별화된 통일성을 가져다줄 수 있다 . 공간적인 차원에서도 우리는 이 희생물의 역할을 아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 공동체의 구조 안에서 거기로부터 모든 것이 나오고 항상 집단 통일성의 상징적인 장소를 이루고 있는 어떤 중심지점들 속에 진실이 담겨 있다고 우리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 우리는 이 집단의 통일성에 대해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고고학적 조사에 의해 자주 확인되고 있는 그것의 원초적인 성격을 〈이유를 따지지도 않고 〉 의심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스에 있어서 이러한 장소는, 영웅둘의 무덤이나 지구 중심의 표 시인 〈옴팔로스〉라는 돌이나 그 도시의 상칭이자 집회장소인 〈 아고라 〉 의 돌 등이었다. 루이 제르네는 이러한 상칭적인 장소들에 대해 한 시 론을 썼는데 이 글을 지금까지 우리가 분석한 그 맥락에서 읽으면, 이 장소들은 모두 희생물이 죽었거나 죽었다고 간주되는 바로 그 장소를 가리킨다는 것을 분명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장소에 관한 전통이나 이것과 관련되어 있는 제의적 기원의 역할은 항상 성스러운 사형(私刑)을 〈도시국가p ol i s 〉의 기원으로 간주 하는 우리의 가정을 확인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여기서 여러 번 언급되었던 부포니아 bou p hon i a ® 와 같은 아주 명백한 희생형식들이 나 또는 파르마코스를 연상케 하는 위반자들의 전시나 또 다른 유형의 형벌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 희생양 가설로 방향을 설정하고 들어가 보면 여기에서 더 분명한 사실들이 밝혀질 것이다. 뒤르켕이 이해한 것처럼, 바로 이 통일성의 상칭적 장소로부터 모든 종교형식이 태어나고 예식이 생겨나며 공간이 조직화되고 역사적 시 간성이 창설되어 첫 사회생활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시작되고 모든 것이 거기서 출발하며, 불화가 나타날 때 모 ® 부포니 아 Boup ho nia , Boup ho nie s : 암소를 제 물로 처 형 하여 제 우스 신을 기 리 던 고대 그리스 제의 , 제 4 장 참조 .

든 것이 거기로 되돌아가고 모든 것이 완성되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우리에게 전해오는 아낙시만드로스 Anax i mandre

그런데 상황은 필연적으로 그것이 생겨난 바로 그곳 가까이에서 소멸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해진 시간에 따라 그것이 저지론 행위에 대한 벌과 속죄를 서로에게 베풀어주기 때문이다 . 12 ) 12) M. Heid e gg e r, Chemi ns qui ne menent nulle par t , tra d. . p ar Wolf gan g Bio k me ier, ed. pa r Franc; ois Fedie r , Gallim ard, 1962.

제 12 장 결론 산화와 제의적인 것에 대한 우리둘의 조사는 이제 끝이 났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제 원시종교 이론의 근거가 되는 확고한 가설을 표명할 수 있게 됐다. 이 이론은 벌써 유태-그리스도교 문화 전반으로 확대되 기 시작하였는데,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이론의 기초에 대해 몇 가지 원칙적인 지적을 해야겠다. 자연발 생적인 폭력과 그것의 종교적인 모방 사이에 수많은 중간 형식들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우리가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그것의 종교 적인 모방뿐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초석적인 사건이 존재했었다는 것 은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의 탈(脫)제의적이며 탈덱스트적인 특 수성을 희석시켜서도 안된다. 이 사건을 다소 이상적인 일종의 극단적 사례나 어떤 조절적 개념으로, 단순한 어떤 언어의 효과나 구체적인 지칭대상도 없는 어떤 상징의 요술로 보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것을 비인간적인 것의 인간적인 것으로의 변화라는 절대적 기원으로뿐 아 니라 동시에 각 개별사회의 기원이라는 상대적 기원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의 이 이론은, 이것의 경험적인 특성이 경험적으로는 전 혀 확인될 수 없다는 점에서 다소 모순적인 면을 갖고 있다. 우리는

단지 텍스트를 통해서만 이러한 사실을 접 할 수 있을 따름인데, 이 텍 스트마저도 훼손되고 변형되어 간접적인 자료만을 제공하고 있을 뿐 이다. 이 이론이 생성되는 곳이자 동시에 검증되는 장소인 항상 수수 께끼 같은 이 자료들 사이에서 일련의 왕복운동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이 초석적 사건에 도달하게 되었다 . 이상이 우리의 이 이론에 〈 과학적 〉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못하는 이유들일 것이다 . 그런데 방금 우리가 언급했던 모든 제약들이 꼭 들 어맞는 , 그래서 아무도 〈 과학적 〉 이라는 수석어 를 붙이는 것을 거부하 지 않을, 예컨대 생물의 진화이론 같은 것이 있다. 우리 가정의 종교적, 문화적 텍스트에 해당하는 생물체의 남아 있는 화석과 같은 자료들의 비교, 검증 작업을 거친 후에야 우리는 이 진화라는 개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따로 떼내어 연구된 해부학적 사 실 로는 이 진화개념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직접적인 관찰도 불가 능하며, 어떠한 경험적인 검증도 아예 생각해 볼 수 없다. 이 진화라는 메커니즘은 개인적인 삶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이 지속적으로 작용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따로 떼어서 놓고 보면, 신화나 제의나 혹은 비극의 어 떠한 텍스트에서도 우리는 폭력적 만장일치의 메커니즘을 볼 수가 없 울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비교가 필수적인 방법이다. 이 방법이 여태 껏 실행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너무 많은 요소들이 가변적이어서 이 모든 변이체들로부터 단 하나의 원칙을 찾아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 다. 게다가 변형은 다시 한번 더 가설로 처리해야 할 것이다. 사실 희생이론은 변화이론보다 . 분명히 뛰어나다. 여기에서 초석적 사건의 〈잘 드러나지 않는다 〉 는 특칭은 이론적인 면에서 아무런 의미 도 없는 단지 피치 못할 필연성 같은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이 이론의 본질적인 차원이다. 구조화하는 힘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초석 적 폭력은 계속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된다. 무지는 종교의 구조화와 종교 이후의 구조화 모두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다. 근거가 없어 보이는

것은 연구자들이 종교에다 만족할 만한 기능을 부여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지금 이 이론은 원시사회에서의 종교적 인 것의 기본적 역할뿐 아니라 이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증명하는 최 초의 이론일 것이다. 〈 무지 meconna i ssance 〉라는 말에 현혹될 필요는 없다. 정 신분석 학자들 이 이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분석에서 밝혀진 분명한 사 실이, 정신분석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의심스러운 것이라고 결론을 내 려서는 안된다. 그리스 바극에 비추어본 신화와 제의의 비교는 희생물 과 폭력적 만장일치라는 우리의 주장을 〈증명하고 있다 〉 고 단언할 수 있다. 우리의 이 단언은 가령 실수한 말을 갖고 〈억압〉이 니 〈무의식〉 이니 하는 것의 〈증거〉로 삼는 그러한 단언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 이다. 이러한 실수들은 분명히 억압이나 무의식을 들먹이지 않고서도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그 반면에 우리가 언급했던 모 든 문화적 유물들은 희생물 명제라는 단 하나의 명제로써만 설명될 수 있다. 또한 이 명제는 중요한 테마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며 불투명한 찌꺼기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 이런 것은 정신분석학에서는 결코 생각 해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가능하고 또 실제로 이런 식안 것은, 종교적인 이 무지는 결코 억압과 무의식 같은 식으로 생각되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초 석적 폭력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화와 제의에 관한 문헌에서 우리는 항상 이 폭력을 논리적으로 추론해 낼 수 있다. 갈수록 종교적 사고는 더 분명해지면서 그 안에 감추거나 억압할 것이 더 이상 아무것도 없어진다. 실제로 종교적 사고는 희생물 메커니즘을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고 종교적 사고가 자신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앎울 회피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앎은 아직 종교적 사고를 위협하고 있지 않다. 이 앎이 위협하고 있는 것은 실은 우리 자신이며, 그것을 회피하고 있는 것도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지금 밝혀져도 늦지 않을 것을 감추가 위해서 폭력이 우리 코앞에서 혼들어대는, 문

화적으로 이 시대의 마지막 딸랑이라 할 수 있을 천부살해와 근친상간 욕망을 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피하는 것은 바로 이 앎이다. 만일 종교적인 무지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속에는 프 로이트의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억압에 해당하는 것이 있을 것이며, 항상 감추어진 것이 있을 것이고, 지금도 여전히 감추어진 어떤 것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 대부분의 경우 분명히 한 개 혹은 몇 개의 필수적인 톱니바퀴가 빠져 있거나 변형되고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의 신화적 혹은 제의적인 재생산 을 거치면서 진실이 온전하게 드러날 수가 없는 것이다. 간극이 아무리 크게 벌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 변형이 아무리 심하다 하더라 도, 이것들이 무지라는 종교적 태도의 진정으로 필수적인 요소는 아닌 것 같다. 이 메커니즘의 모든 톱니들과 대조해 보더라도 결코 종교적 사고는 해로운 것으로부터 이로운 것으로의 변형이나, 폭력으로부터 문화적 질서로의 전도 속에서 어떤 자연발생적인 현상을 보지 못할 것이다. 가장 잘 감추어져야 하는, 즉 분명하고 명확하게 나타나서는 절대 안되는 초석적 과정의 양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가장 중요한 양상, 적어도 서구인이 보기에 가장 〈비 밀을 누설할 수 있는 것〉이라고들 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구체적 인 양상을 지목하라 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우리 독자들은 틀림없이 희생물선택의 자의적인 요소를 지명할 것이다 . 이 자의성을 의식한다 는 것과 바로 그 희생물을 신격화한다는 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 같다. 주의깊게 살펴보면 이 양상도 감추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무엇을 찾을 것인지를 미리 알고 있으면 우리는 여러 세목들 중에 서도 그것을 쉽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 신화와 제의는 우리 주의를 제물 선택의 〈우연적인〉 요소로 이끌지만 우리는 그것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이해불능은 유사하면서도 상반 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죽 어떤 때는 아주 분명한

사실에 대해서도 놀라고 경악하면서 그것을 〈 엉뚱한 것 〉 으로 여기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오랜 습관에 따라 그런 사실들을 〈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다시 말해 그에 대해 어떠한 의문도 제기할 여지가 없는 〈 자 명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희생물 선택에서의 우연의 역할을 밝혀주는 몇 가지 제의들의 예를 들었지만, 아마도 그 본질적인 측면을 충분히 강 조하지는 못한 것 같다. 예전의 사고와 마찬가지로 현대적 사고도 차 이라는 말로써 폭력과 문화의 작용을 설명하려 한다 . 이것이 바로 모든 신화적 사고의 기반이 되는 가장 뿌리깊은 선입견이다. 이 선입견은 원시종교에 대한 정확한 해석으로서만 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으로 이 종교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총체적으 로 파악된 우리 이론의 타당성과 정확성을 보여주고, 겉으로는 가장 불투명해 보이는 사실들을 간단하면서도 조리 있게 판독해 내면서 그 것들에게 유기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이 이론의 능력을 입증하~근 마지 막 기회가 될 것이다. * 흔히 〈 엉뚱한 것〉으로 규정되거나 그렇게 취급받는 제의들 속에는, 분명 스포츠 승부나 도박으로도 볼 수 있는 제의들이 둘어 있다. 예를 들어 위토토 U it o t o 인디언에게는 공놀이가 제의 속에 들어 있으며, 보 르네오의 카얀 Ka y an 족에게는 그 역시 종교적 의식인 괭이놀이가 있 다. 더욱 주목할 만하며 적어도 겉으로 더욱 엉뚱한 것은 카늘로스 Ca­ nelos 인디언의 초상집 밤샘중의 주사위놀이이다. 남자들만 참가하는 이 놀이에서 고인의 양쪽에 도열한 두 편은 차례로 시체 위로 주사위 롤 던진다. 죽은 자에 것들어 있던 성스러운 것이 한 수 한 수를 결정 한다는 것이다. 이긴 편은 각자 고인의 가축 한 마리씩을 받는데 이것

은 곧 도살되어 여자들에 의해 전체의 식사로 마련된다. 이 런 사실들을 언급하던 젠슨 J ensen 은 이 런 유형 의 놀이 들은 이 미 존재하던 예식에 추가로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J ) 예를 들어 〈카늘로스 인디언들이 친척의 초상날 밤샘에서 주사위놀이를 한다〉라 고 말한다면, 이 말은 근본적으로 오해롤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다. 문 제의 이 놀이는 장례식에서만 행해진다. 그러므로 이 놀이에는 불경스 런 개념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단지 우리가 그런 개념을 이 제의에다 투영할 뿐이다. 그렇다고 이 놀이가 그 제의와 무관하다는 말은 아니 다. 이 놀이는 바로 그 제의에서 나온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나 그 러하듯이 의미작용의 순서를 전도시킨다. 우리는 초상집 밤샘은 신성 한 놀이인 반면에 그 반대로 이 주사위 놀이는 다소 탈신성화된 제의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결국 독자들이 이미 짐작하듯이 호이 징가 Hu i z i ng a 의 주장을 뒤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다시 말해 이 놀이가 신성한 것을 감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것이 이 놀 이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1) Adolph e Jen sen, op. cit. , pp. 77-g3

알다시피 모든 통과와 마찬가지로 죽음도 폭력이다. 공동체 구성원 중 하나가 저승으로 가는 이 통과는 무엇보다도 남아 있는 사람들 사 이에 분쟁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 우선 고인의 소유물들을 나누어 가 져야 한다. 이 해로운 전염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초석적 폭력이라는 보편적인 모델에 의지하여 성스러움이 공동체에 전해 준 그 가르침을 이용해야 한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 경우에 있어, 공 동체는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우연의 역할을 눈치채고는 이 우 연을 이용했다. 만약 폭력을 그대로 방치해 두었을 때, 마침내 이 갈 등을 해결하는 것은 바로 이 우연이다. 폭력이 분출되는 계기가 오기 전에 이 우연이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제의인 것이다. 사람들은 지체없이 성스러운 것이 뚜렷이 나타나게 함으로써 그것의 행운과 도 움을 얻으려 한다. 다시 말해 제의는 최종 목표로 곧장 직행함으로써

중간의 폭력울 건너뛰는 것이다. 카늘로스 인디언의 주사위놀이는 신화, 우화, 민담 속에 우연이라는 데마가 왜 그렇게 자주 나오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의디푸스가 스스로를 행운, 우연의 신인 두케 Tukhe 의 아들이라고 선언하던 것을 상기하자. 어떤 고대 도시에서는 집정관을 제비뽑기로 선출했는데, 이 렇게 제의적 우연에서 나온 권력에는 항상 〈상반된 것의 결합〉이라는 어떤 성스러운 요소가 들어 있었다. 이 우연이라는 데마를 더 널리 살 펴보면 우리는 이것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민간 풍습이나 동화 속에서 〈왕을 뽑을 〉 때나 그 반대로, 하지만 실은 거의 〈 똑같은 것〉인, 아주 위험한 힘든 임무를 수행하면서 집단 전체의 이 익을 위해 희생되는 사람, 한마디로 희생물 역할을 수행해야 할 사람을 뽑을 때에는 언제나 이 우연이 이용되고 있다. 누가 먹힐 것인지를 알기 위해 사람들은 짧은 밀짚을 뽑았다 . 이 우연의 데마는 폭력적 해결의 자의성에까지 거슬러 울라간다. 여 기서 우리가 증명하려 하는 것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떠 한 종교 덱스트도 우리가 제안하는 이 해석에 대한 이론적 확증은 제 공하지 않을 것아다. 그러나 〈제비뽑기〉가 그것의 너무나 명백한 총체 적 의미와 연관이 있는 텍스트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구약에 나오는 요나J onas 기가 그 중의 하나이다. 하느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니니베 N i n i ve 라는 도시가 파괴될 것이란 걷 알려주라는 임무를 요나에게 내 린다. 이 임무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이 선지자는 어쩔 수 없이 배를 탄다. 이때 여호와 Yahve 는 바다 위로 세찬 바람을 불었다. 그러자 바다 위에는 거센 폭풍이 몰아쳐서 배가 부서질 정도이더라. 선원들은 몹시 놀라 모두 각

자의 신을 향해 애원하며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점들을 바다에 내던졌다. 그때에 요나는 배 밑바닥에 내려와 있었다. 그는 누워서 깊이 잠자고 있었는 데 선장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 도대체 참을 자다니, 어서 일어나 당신의 신에게 애원하시오. 그러면 신은 아마 우리를 생각해 주실 데고 우리는 죽지 않을 데니까.〉 그런 다음에 그들은 서로에게 말했다. 〈이 불행이 우리 중의 누구에게서 유래하는지를 알기 위해 제비뽑기를 합시다.〉 그래서 제비를 뽑 았는데 그 제바는 요나에게 떨어졌다. 배는 공동체를, 폭풍우는 희생위기를 나타낸다. 배에서 집어던지는 짐둘은 차이가 빠져나간 문화적 질서이다. 각자는 개별적인 각자의 신 에게 애원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종교의 분쟁적인 붕괴이다. 조 조난당한 배라는 이 테마는 니니베의 테마와 비교되어야 하는데, 똑같은 위기 이다. 그들은 이 위기의 책임자를 가려내기 위해 제비뽑기를 하는데, 신과 도 같은 것이기에 실수할 리가 없는 우연은 요나를 지명해낸다. 자신 울 심문하던 선원들에게 요나는 사실을 밝힌다. 커다란 두려움에 자로잡힌 그들은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했 소 ? > 그의 말을 듣고 난 그들은 결국 그가 여호와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있 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이 그에 게 물었다. 〈바다룰 잠잠하게 하기 위 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왜냐하면 물결이 점점더 높아지고 있었기 때 문이다. 그가 대답했다. 〈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시오 . 그러면 당신들을 위 하여 바다는 참참해질 것이오. 왜냐하면 이 거센 폭풍이 당신들을 괴롭히는 것은 바로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오.〉 선원들은 온갖 힘을 기울여 자신들 힘으로 해안에 도달하고 나서 요나를 구해 내려 애썼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러자 이 의 인들은 그들의 신도 아닌 여호와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 아, 여호와시여, 제발 이 사람 목숨 때문에 우리가 안 죽어도 되게 하여 주시고, 또한 이 무고한 피를 우리의 탓으로 지우지 마시길 빕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 뜻에 따라 바로 당신께서 행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선 그들은 요나에 게 달려들어 그롤 바다에 내던졌다. 그러자 바다의 분노가 가 라앉았다 . 이 일이 있고부터 사람들은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에게 희생을 봉헌하고 빌었다. 아 귀절은 희생위기와 그 해결을 연상케 한다. 제비뽑기가 희생물을 지명하는데 그것의 추방을 통해서 어떤 공동체, 여기서는 새로운 신이 나타난 선원 공동체가 구원된다. 왜냐하면 희생을 봉헌하는 데서 볼 수 있듯아 그들은 여호와에게로 개종했기 때문이다. 이것만 따로 떼어 놓 고 보면 이 텍스트의 분명한 뜻이 드러나지 않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행한 분석의 결과를 배경으로 놓고 살펴보면 이것의 의미는 거의 완 전히 드러난다. 현대 세계에서는 우연의 테마가 신의 개입과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시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우연에는 성스러운 것의 거 의 모든 특징둘이 들어 있다. 어떤 때는 인간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또 어떤 때는 선행을 베풀기도 한다. 우연만큼 변덕스러운 것도 없으 며, 이것만큼 성스러움이 내방할 때마다 일어나는 급변과 동요에 일치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우연의 성스러운 특성은 신명심판(神命審判 ordalie ) 속에서도 나타 난댜 희생제의에서의 신명심판적 데스트에 의한 희생물 선택은 우연 과 초석적 폭력 사이의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정치적 상칭 론 : 공공집 회 소 Sur le sym bolism e poli t iqu e : le Foye r commun 』 라는 시 론에 서 루이 제 르네 Louis Gerne t는 제 우스 축제 때 코스 Cos 라는 도시 에 서 행해지던, 특별히 아주 많은 것을 암시해 주고 있는 어떤 제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희생물 선택은 각 종족의 각 부족이 〈 따로따로 〉 내놓는, 그래서 나중에 전 체 무리에 〈 뒤섞아는 〉 황소들 중에서 신명심판 식으로 결정되었다. 최종 결 정된 황소는 그 다음날에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 황소는 우선 〈 집회소 Hes ti a 앞에 끌려나갔는데 〉 , 많은 제의들 경우가 이러하였다. 처형되기 직전에 헤스 티아 Hes ti a 가 동물희생을 수락하는 것아었다 . 2)

2) Louis Gemet, op. cit. , p. 393.

앞 장 마지막에서 우리는 공공집회소인 헤스티아는 초석적 사형私刑 이 일어났었던 바로 그 장소를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지적했었 다. 여기서 신명심판적 데스트에 의한 희생물 선택이 원초적 폭력을 되풀이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희생물 선택은 인간들에게 위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우연이라는 하나의 〈폭력〉에 위임되어 있다. 또한 여기에는, 처음에는 각 종족과 부족에 의해 구별되던 황소들이 모두 뒤섞이는 〈혼합 〉 이라는 아주 의 미심장한 사실도 들어 있다. 이렇게 한 무리로 뒤섞이는 것은 신명심판 테스트의 필수적인 선결조건을 이룬다. 여기에서 제의가 동물 치환을 통해서 정확하게 원초적 사건의 질서를 재생산하려 한다는 것을 어찌 못볼 수 있을까? 신명심판 데스트의 원래 모델인 자의적인 폭력적 해결은 희생위기의 절정에서만 개입한다. 다시 말해서, 처음에는 문화 적 질서에 의해 차별되고 구별되어 있던 인간들이 상호적 폭력에 의 하여 일단 〈전체 무리 속에 뒤섞였을 때〉에만 개입한다는 것이다. * 여기서 우리가 주장하는 이론을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여기 서 나오는 지식과 우리가 지금껏 종교적인 영역에서 만족해 왔던 지 식의 유형을 비교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디오니소스에 대해 말했던 것은 그가 아폴로나 다른 신들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폴로와 디오니소스를 비교하기 전에, 설사 그 렇게 하는 것이 이 비교를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왜 이 둘을 접근시 켜서 똑같은 신의 범주에 놓는 것일까? 왜 디오니소스를 소크라데스 나 니체가 아니라 아폴로에게 비교하는 것일까? 신들의 차이 이편에 는, 그 속에서는 신들의 차이가 뿌리내리고 있지만 그 바깥에서는 이 차이가 유동적이 되어 현실성이 없어지는 그러한 공통된 바탕이 있다. 종교학은 여러 신들과 신적인 것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기에 이 대 상들을 엄격하게 잘 규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인데도, 실제로는 그러하지 못하다. 종교학은 자기 영역에 속하는 것과 속하지 않는 것을 결정 대 상구분이라는 한 학문의 중요한 과업을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말, 즉 소문에 맡겨버리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그렇다고 여기 고 있는 것을 성스러움의 개념 속에 넣는 것이 비록 적합하다 하더라 도, 그리고 이런 태도가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소위 종교의 과학은 이런 방식의 근거를 대지도 못할 뿐 아니라 또한 그렇다고 이것을 단 념하지도 못하고 있다. 종교의 과학이나 문화의 과학이란 없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그리스 비극과 관련지어 생각해야 할 것을 언제나 특별한 숭배의식으로만 생 각하고 있다. 고대로부터 단정되어 온 것처럼 그것이 진정 디오니소스 에 속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신에 속하는 것인지를 따지는 것은 분 명 실질적인 문제이긴 하다 . 그러나 이것도 사람들이 잘 말하고 있지 않는 비극과 신, 연극과 종교의 일반 관계라는 더 본질적인 문제에 비 하면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자연발생적인 연극은 왜 항상 종교적 인 데서 출발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이 문제를 접할 때 너무 일반적 인 관념을 사용하고 너무 순수한 휴머니즘의 분위기에서 접근했기 때 문에, 구체적인 지식의 측면에서는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옳든 그르든간에 우리의 이 가설은 〈과학적〉이라는 수식어를 받을 만하다. 왜냐하면 이 가설은 신성, 제의적인 것, 성스러운 것 등과 같은 중요한 용어에 대한 엄격한 정의를 내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회

상, 기념제 그리고 항상 희생물 살해에서 나온 만장일치의 영속화와 관련된 현상들은 모두 〈 종교적인 것 〉 으로 불려지게 된다 . 희생물에서 출발하여 그 틀을 갖춘 이 체계는, 독단적으로 〈 환원시 키는〉 정신분석학의 도식뿐 아니라 실증주의의 의도가 결국 귀착하게 마련인 인상주의에서도 벗어나 있다. 이 희생물 이론이 통합적이고 〈 총체적 〉 이라 해서 인간이 종교에 대 해 만들어놓은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단 하나의 공식으로 대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선 이 많은 양상들이 흔히 말하듯이 그렇 게 엄청난 것인지를 자문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제안하 는 이 메커니즘만이 유일하게 폭력을 막을 수 있으며, 그다지 중요치 않는 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신화와 제의가 무한히 다양한 것은 그것들이 모두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어떤 사건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은 단 하나뿐이며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도 단 하나뿐이지만, 그것에 도달하 지 못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 희생물 이론은 제의와 문화에 대한 모든 해석학의 직 , 간접적 대상인 그 사건을 찾아내려 한다. 그리고 이 이론은 이 모든 해석학을 완전히 설명해 내고 또한 〈 해체하려 〉 한다. 그러므로 이 희 생물 이론은 새로운 해석학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텍스트를 동해서만 이 명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것은 해석학이 아니다. 이 명 제는 현대비평이 이 말들에 부여할 수 있는 모든 의미에 있어서, 신학 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다. 그 반면에 이 명제는 과학적 가설의 모든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심 리학과 사회학의 주장과는 일치하고 있지 않다. 심리학과 사회학은 자 신들은 명확해지기를 바라지만 신학과 형이상학이 해명하지 못한 것을 그들 역시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 그것은 왜냐하면 심리학과 사회학은 결국 신학과 형이상학의 전도된 아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언어 속에서 진실이 포착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언어는 진실에 도

달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현대 조류와는 반대로, 우리의 이론은 언어에 대한 상대적인 신뢰 속에서 행해지는 매우 실증적인 유형의 탐구에 속한다. 현대처럼 전체적인 신화 파괴 시대에서의 언어에 대한 절대적 인 불신은, 언어가 진리에 도달할 수 없던 시대에 있어서의 언어에 대 한 절대적인 신뢰와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 그러므로 이 이론을 취급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많은 것들과 마 찬가지로 이 속에서 과학적인 가설을 알아차리고서, 이 이론이 설명한 다고 주장하는 것을 이것이 실제로 설명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것을 이용했을 때 원시제도들에게 그 문맥에서만큼이나 서로의 관계에서 만족할 만한 기원과 기능과 구조를 부여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 이론 이 〈 예의 〉 니 〈 착오〉니 하는 케케묵은 두 버팀대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간편한 방법으로 많은 민족학적 사실들에 유기적 형태를 부여하고 그 것들을 합산할 수 있게 해주는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이 이론에 대해 무슨 반론이든지 제기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반론 때문에 이 제도는 이곳 혹은 저곳뿐만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작동하는가 하는 진짜 중요 한 문제가 가려져서는 안된다. 희생물이라는 것이 집짓는 사람들이 쓸 모없다고 내버리는 돌,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신화와 제의라는 건축물 의 요체이자 주춧돌로 밝혀지는 돌과 같은 것일까, 그래서 어떤 종교 텍스트든지 그 위에 이것을 올려놓기만 하면 그 덱스트의 의미가 속 속들이 밝혀지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는 그러한 만능 암호해 독기와 같은 것일까? * 종교에 관한 앞뒤 안맞는 편견은 특히 〈희생양〉 개념과 관련된 모든 것 속에 집요하게 나타난다. 프레이저는 이것과 이것에서 파생된 문제 에 대해 그가 생각하는 바를 몇 권의 책으로 썼는데 이 책들은 명확한 이해의 측면에서는 부족한 접이 있지만 서술의 측면에서는 아주 주목

할 만한 것들이다. 프레이저는 종교적인 의미 뒤에 감추어져 있는 그 엄청난 작용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서문에서 이 무 지를 당당히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연구 능력과 명석한 표현력을 두루 갖춘 연구자는 언제나 드문 법이다. 그 반면에 프레이저 식의 무지를 다른 형식으로 고백한 연구가는 수없이 많다. 우리가 툴리지 않다면 이 희생양 개념은 결국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사이의, 실제의 짐을 다른 사람 어깨로 떠넘기는 실질적인 가능성과 우리 의 육체적, 정신적 괴로움을 다론 사람에게 전가시키는 가능성 사이의 단순한 혼동으로 귀결된다. 이 비극적인 실수가 원시상태에서 거칠게 행해지던 때부 터 문명국가의 사변적인 신학 속에서 완전히 개화되고 있는 그 역사를 살펴 보면서, 되색한 미신 찌꺼기에다 반짝이는 가짜 금빛 광채 를 부여하는, 인간 정신 속에 있는 그 기이한 능력을 확인하고서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 희생 이데올로기를 조롱함으로써 그것을 전복시킨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프레아저도 그들의 공범자로 남아 있다. 그가 하 는 일이란 사실 희생 속에 들어 있는 폭력을 감추는 것뿐이지 않은 가 ? 최초의 신학자들처럼 그도 〈짐〉, 〈육체적, 정신적 괴로움〉만 이 야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희생대체를 마치 단순한 공상, 즉 〈실제 현상이 아닌〉 어떤 것으로 취급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뒤의 사람들도 모두 똑같은 실수를 했지만 그 핑계는 갖가지였다. 비록 불 충분한 것이간 하지만, 그래도 프로이트의 〈전이 t rans f e rt〉라는 개념은 분명 우리를 더 사려깊게 만들어주었다. 이 개념은 어쩌면 우리가 어떤 것을 못 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을 수 있게 해주었기 때 문이다. 현대적 · 사고는 아직까지, 단 한번의 작동으로 상호적 폭력을 종식시 키고 사회를 구조화하는 기계장치의 중요한 기계부품을 찾을 생각을

않고 있다. 이러한 눈먼 덕택에 모든 사회가 지금까지 그래왔고 지 금도 그러하듯이, 현대적 사고는 만인의 책임을 어떤 별개의 존재, 〈 상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어떤 미개사회, 혹은 우리 사회에서는 특 별히 어리석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여겨지는 어떤 종교에다가 전가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것은 특히 합리주의자인 그의 동료와 제자 들과 함께 모든 인간사고의 〈희생양〉으로 취급받는 종교의 제의적 추 방에 공감하는 제 임 스 조지 프레 이 저 Jam es George Frazer 경 이 라는 이 름을 가진 젠틀맨 민족학자의 저서 속에서도 계속 행해지고 있다. 다른 많은 현대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프레이저도 계속해서 자신은 어떠한 〈 미신 〉 과도 무관하다고 주장하면서 종교가 즐겨 하는 이 구차한 조작 으로부터 손을 씻는다. 그러나 그는 이 손씻기라는 것이 오래된 인류 관습의 순전히 지적인 표현 목록에 오래전부터 들어 있는 것이란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마치 자신은 그 어떤 것의 공범자도 아니 며 자신은 어떠한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프레이저는 생애 대부분을 바쳐 연구한, 그의 말마따나 그 모든 〈 광신 〉 과 〈 조잡한 것〉을 조롱하는 듯한 해석을 남발한다. 그의 이러한 〈희생적인〉 성격은, 이 무지가 종말을 고할 시간이 임 박한 오늘달에도 이 · 니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에 더, 프로이트주의가 말하는 것과 유사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엄청난 〈저항〉을 받고서야 이 무지가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지 금은 모두가 쉽사리 드러내 보여주는 부차적인 억압이 문제가 아니라, 충분히 신화로 볼 수 있는 아주 생생히 살아 있는 〈현대성〉이라는 신 화들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바로 과학에 있다. 여기에는 지금 우리가 하는 말 에는 〈신비주의〉나 〈철학〉의 의미는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신화와 제 의들, 다시 말해 진정 종교적인 이 해석들은 초석적 폭력의 주위를 배 회하고 있긴 하지만 결코 그것울 전정으로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아제 막 프레이저를 읽으면서 우리가 확인했던 것이다.

종교에 대한 탐구는 모두 해석에 대한 해석이며 결국 제의에 의해 중 개화된 폭력적 만장일치라는, 제의와 똑같은 기반에 근거하고 있다. 우 리의 해석은 제의에서 나온 제도에 의해, 더 나아가서는 이 제도에서 나온 다른 제도들에 의해 이중, 삼중으로 중개화될 수도 있다. 종교적 해석에서는 초석적 폭력이 무시되긴 하지만 그러나 그 존재 만은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적 해석에서는 이 존재마저 부정되고 있다. 마치 행성들뿐 아니라 그것들의 위성 그리고 그 위성의 위성들도 그 주위를 돌고 있는 보이지는 않지만 멀리 있는 대양과 같이, 보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초 석적 폭력이다 . 이 태양의 본질이 잘 알려지지 않거나 더 바람직스럽게는 그 존재 자체가 아예 없었던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닐지라도 필수적이기는 하다. 본질적인 것이 남아 있다는 증거는 바로 프레이저 의 텍스트 같은 데에 희생적 효과가 들어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 데 이 희생효과는 물론 갈수록 더 허술하고 더 일시적안 것으로 되어 가면서, 더 계시적이기는 하지만 많은 것을 보지 못하는 다른 덱스트 에게로 옮아간다. 그러나 희생효과는 분명히 실재한다. 진짜 제의의 희 생처럼 어떤 특정한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 모든 해석들이 제기하는 문제들, 예컨대 프레이저의 문제와 오늘날 그의 뒤를 잇고 있는 문제들은 언제나 해답이 없는 채로 남아 있다. 해답 없는 문제가 남아 있는 한, 해석 또는 해석학이 존재하기 마련아 다. 해답이 없다는 것은 그 문제가 제의적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해석 은 제의의 파생된 한 형태이다. 제의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대답은 없 지만 문제는 전정으로 제기되고 있다. 제의적 사고는 초석적 폭력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의문을 제기하지만 대답은 찾을 수 없다. 최초의 민족학은 제의적 사고가 어떤 건지 진정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프레이 저도 종교의 기원에 대해 진정으로 의문을 제기하지만 대답은 그를 피한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해석은 옳은 해답을 불러울 수 없다는 자신의

불가능을 마침내 인정하였고 또 그것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해석은 스스로를 〈 끝없는 것 i n t erm i nable 〉 이라고 선언한다. 해석은 이미 실제로 존재하는 그곳에 당연히 자리잡고 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 해석은 끝 없는 것 속에서 평온하게 자리잡고 있울 수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툴 렸다. 해석은 언제나 틀린다. 끝없는 것 속에 있으면서 줄곧 진실을 포착하고 있다고 믿는 것도 잘못이며, 끝없는 것 속에 있다고 자처하 면서 끝에 가서는 전실을 포기하는 것도 잘못이다. 만일 해석이 그것이 행사하는 제의적 기능을 실제로 밝혀낸다면, 밝혀졌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이 기능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게 된다. 이 종말의 칭후가 우 리 주위에서 점점 많이 나타나고 있다. 해석은 점점더 〈 비현실적〉으로 되어가면서 난해한 말로 변하고, 동시에 〈격해져서〉 신랄한 논쟁처럼 되어간다. 상호적 폭력이 스며든 것이다. 이 해석이 폭력을 추방하기는 커녕 시체가 파리를 꾀듯 폭력을 유인하는 꼴이 되었다. 요컨대 모든 희생형식과 같이 해석도 쇠퇴하기 시작하면 이로운 효과들이 해로운 것으로 전도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어떤 대답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질문이 찰못 제기됐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 질문이 〈성스러움〉에 근 거하고 있으므로 현대적 해석의 근본적인 〈실수〉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제 이 문제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겨져 있다. 우리는 일찍이 단 하 나의 사회만이 성스러운 것에서 생겨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시사 회는 〈 성스러운 것 속에서〉 살았다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보았다시피 어떤 사회도 〈 성스러운 것 속에서〉, 죽 폭력 속에서 살 수 없다. 사회 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폭력을 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 성스러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진정한 화해 속에서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항상 폭력에 종속되어 있는 어떤 무지 속에서, 폭력을 피하고 있다. 이미 보았듯이 스스로를 성스러운 것에서 생겨난 유일한 사회라고 믿지 않는 사회는 하나도 없다.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은 결코 사

람이 아닌 이유이다. 우리라고 해서 이 보편법칙 , 보편적 무지에서 벗 어나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원 안에 있다. 성스러운 것을 없애고 제거하 려는 경향은 초월적이 아닌 내재적인 형태로, 즉 폭력과 폭력에 관한 지식의 형태로 성스러운 것의 귀환을 은밀히 준비한다 . 폭력의 기원으 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사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그 가원에 다가가고 있다. 이 사고는 자신의 방향전환을 결코 모르고 있다. 모든 사고는 초석적 폭력 주위에 원을 그리고 있는데, 특히 민족학적 사고 에서는 이 원의 빛이 다시 약해지기 시작하고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 이에 민족학은 초석적 폭력에 다가서고 있는데 희생양이 그 대상이다. 프레이저의 자서가 그 좋은 예이다. 겉으로 볼 때 아주 잡다해 보이는 이 수많은 관습들은 독자들에게 골라잡을 수 있는 제의적 해석의 완 벽한 목록을 제공하는 것 같다. 이 책에는 통일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저자 자신이 위치시킨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민족학에 대한 그의 열정이 그 자신을 비껴가듯이 그토록 많은 신화와 제의를 주위섬긴 그 진정한 의미도 그를 비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프레이저의 이 · 책을 〈신화학의 신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데마들의 실질적인 공통분모를 찾는 민족학적 비평과, 이 성론이라는 신화를 넘어서서 〈희생양〉이라는 프레이저의 강박관념의 감추어전 매듭에 도달하려는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우리의 〈 정신분석 학적〉 비평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우리가 프로이트에 대해서 했던 말은 현대적 사고 전반에 대해서도, 그리고 더욱 특별하게는 프로이트의 마음을 끌었던 민족학에 대해서도 사실이다. 전통적 해석 방식들은 시들어가는 반면 〈민족학〉과 같은 것 이 우리 가운데에 생생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특히 현재에 있어 많은 점에서 그 추이가 예전의 위기들과 유사한 새로운 희생위기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칭후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위기는 〈똑같은〉 것은 아니다. 다른 사회보다 더 완벽하게 성스러운 것에서 벗어나서 초석적

폭력을 못 볼 정도로 그것을 〈 망각하게 〉 되면, 우리는 다시 그것을 발 견하게 될 것이다. 이 〈 본질적 폭력 〉 은 역사적인 측 면에서 뿐만 아니라 지식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아주 거창한 모습으로 지금 우리에게 되돌 아오고 있다 . 이것이 바로 이 위기가 헤라클리트와 유리피데스도 감히 범하지 못했던 금기를 우리가 치음으로 범하도록, 죽 인간사회에서의 폭력의 역할을 완전히 합리적인 빛 속에서 명확하게 밝혀내도록 우리 를 부추기고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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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해제 르네 지 라르 Rene Gir a rd 는 1923 년 아비 뇽 Av ign on 에 서 태 어 나서 파리 고문서 학교 Ecole des Chart es de Paris 를 졸업 하고 미국에 유학하여 1950 년 인디애나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문학평론가이자 인 류학자이다. 그는 인디애나 대학 프랑스어 강사를 시작으로 듀크 대학, 브린모 대학, 존스 홉킨즈 대학, 뉴욕 주립대학 등의 강사와 교수를 거쳐서 1974 년부터 스탠포드 대학에서 현대 사상 및 프랑스 사상, 프 랑수 문학, 프랑스 문화 담당교수로 재직중이다. 이 저서 『폭력과 성스러움 La Viole nce et le sacre 』 (1972) 은, 『낭만적 거 짓과 소설적 진실 Mensong e ramanti qu e et Vi函 le romanes que 』 (1961) 과 『프 루스트론 Prous t : A Collecti on of Cri tica l Essay s 』 (1962), 『도스토예프스키론 Dosto ie v ski : du double a l' un it e 』 (1963) 등과 같이 소설 속에서 인간 욕망 의 구조를 밝혀내려는 문학비평적인 그의 초기 작업에서 후기 작업인, 그가 기본적 인류학이라 부르고 있는 제의-종교적인 것의 사회인류학 적인 연구로 넘어가는 전환점이자, 그리고 이것으로 1973 년 프랑스 아 카데미상을 수상한 지라르에 있어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저서 이다.

그의 관심은 소설 속의 인물들이 어떻게 욕망하느냐 하는 인간 욕 망의 구조를 밝혀내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그것이 그의 첫 저서인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동키호테』에서부터 스탕달의 『적과 혹』, 풀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여러 소설에 걸친 서구의 여러 소설을 통해서, 그는 이 소설의 인물들이 대 상을 직접 욕망하는 게 아니라 어떤 제삼자의 중개를 통해서 대상을 욕망한다는 것을 밝혀낸다. 이 제삼자는 『동키호테』에서와 같이 아주 뛰어난 전설상의 인물처럼 주인공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이일 수 도 있으며, 『적과 혹』의 레날 시장과 발르노 씨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영원한 남편』의 경우처럼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아주 가까운 사아일 수도 있다. 결국 자기 스스로 어떤 대상을 욕망한다고 믿고 있지만 사 실은 이 제삼자의 중개에 의해 욕망하므로, 이 제삼자는 욕망의 중개 자 med i a t eur 이 자 전 범(典範) modele 이 되 며 , 그 욕망은 낭만주의 자가 믿 는 것처럼 〈자발적 욕망 des i r volon t a i re 〉이 아니라 타인의 매개에 의해 일어나는 〈비자발적 욕망 des i r i nvolon t a i re 〉이 된다. 이처럼 매개된 욕망은 욕망주체와 욕망대상 사이에 욕망의 중개자가 존재 하는 〈삼각형 적 인 욕망 desir tria n g la ir e > 이 그 기 본구조이 다. 그러 나 자신의 욕망의 비자발성, 모방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면서 자신의 독 창성을 애써 주장하는 태도가 있는데, 이것을 지라르 식으로 말하자면 〈낭만적 거짓 Mensonge roman tiq ue 〉의 태도라 할 수 있으며, 몇몇 뛰어 난 소설처럼 욕망의 비자발성을 인정하고서 그 실상을 보여주는 태도 는 〈소설적 전실 Verite romanes q ue 〉의 태도라 할 수 있다. 자기 의사에 따라 독창적으로 어떤 대상을 욕망한다고 믿지만 실상 은 중개자라는 〈모델〉이 욕망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데 불과 하다는 것이다. 결국 모델의 욕망을 모방한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은 모방된 욕망이며 이러한 현상은 〈욕망모방〉이다. 끝없는 욕망모방은 그 모델(중개자)이 욕망주체와 가까운 사이에 있

을 때 주 체와 중개자 사이에는 은연중에 경쟁관계가 생겨나면서 질투, 원한, 선망과 같은 미묘한 감정을 낳게 한다. 이렇게 너무나 가까워서 욕망주체와 거의 같은, 그래서 그의 분신과도 갇은 중개자를 지라르는 〈 짝패 double 〉 라고 부른다. 이 짝패는 그러므로 욕망주체의 욕망을 생 겨나게 하는 욕망의 유발자인 동시에 그 실현을 막는 경쟁자 혹은 방 해자로 여 겨지게 된다. 모델 / 장애물 modeleIobs tacle 인 이 짝패 때문에 인간 사이의 갈등이 빚어지게 되는 것이다. 현대에서처럼 개인 사이의 차이가 점점더 없어져가는 상황에서는 숨은 원한, 질투, 숨겨져 있는 선망, 시기 등의 짝패 갈등은 더 심해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짝패 갈등 속에서 우리 인류는 어떻게 문화질서를 이루며 살아왔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지금까지 문학 작품 속에서만 확인한 이 짝패 갈등을 다른 문화적 덱스트에서도 확 인하면서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선 결과가 바로 이 저서 『폭 력과 성스러움』이다. 짝패 갈등은 모방을 본능으로 타고난 인간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숙명적인 한계와 같은 것이기에, 어떤 지라르 연구가는 이것을 인간인 이상 싫든 좋든 거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인류 문명의 영도( 零 度) the deg ree zero of human cul t ure 〉라고까지 부르기도 한다. 그 러므로 이것은 인류가 그 위에서 출발해야 하는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폭력, 죽 잠재적인 폭력 혹은 폭력의 잠재태라고 볼 수 있다. 지라르는 이것이 가장 본질적이면서 근본적인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이것을 〈 초석 적 (礎石的) 폭력 viol ence fon datr ice > 혹은 〈본질적 폭력 viol ence es- sen ti elle 〉이라고, 그리고 상대방의 보복을 수반하면서 끝없이 계속 모 방되면서 되풀이된다는 점에서 〈상호적 폭력 viol ence rec ip ro q ue 〉이라고 부른다. 결국 모든 것은 모방되고 있는 것이다. 애초의 욕망모방에서 출발한 지라르는 이렇게 해서 폭력도 모방되고 있다고 말한다. 인류가 이렇듯 짝패 갈등에서 빚어전 폭력 모방을 어떻게 예방하여 왔는가, 아니면 어떻게 그 효과를 감소시켜 왔는가를 이 책 속에서 숱

한 역사적 텍스트를 통해서 검토하다가 지라르가 발견한 것이 바로 〈 희생제의 rite sacr ifi c i el 〉 라는 문화적 장치이다 . 그 이전까지의 문학비평 가의 입장을 넘어서서 지라르는 인류학자들도 그 본질을 찰못 알고 있는 이 희생제의라는 현상을 그 특유의 방법으로 자세하게 검토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이 제의는 모든 종교적 , 문화적 활동의 기본골격 이라는 것이다. 이 희생제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것의 본질에 대해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해야 하는 〈 인지불능(認知 不 能) 혹은 무지(無知) meconnais s ance> 가 전제조건으로 주어져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희생제의의 본질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지라르는 이 인지불능을 뛰어넘어, 아니 당연한 것으로만 여겨져 온 피상적인 통설에 만족치 않고, 이것을 다른 문화제의와 비교, 검토함으로써 이 제의와 더 나아 가서는 아 제의로써 설명할 수 있는 모든 인류 문화제의둘의 본질을 파헤치게 된다. 전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이 제의는 어떤 한 사회가 동물이나 인간 과 같은 희생물을 바쳐서 신의 노여움울 풀고 신의 은혜를 기대하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통설에 만족하지 않고, 지라르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아니 그것을 거슬러 읽어, 이 제의는 그 사회 내부에 실제로 존재하는 폭력을 실제로 행한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물론 이때 이 폭 력은 축소되어 있고 또한 그 대상도 보복의 두려움이 전혀 없거나 거 의 없는 대상을 사회 안이나 밖에서 구하고 있다. 이 희생물은 여러 텍스트에서 다양하게 발견되는데, 인간과 유사하거나 아주 밀접한 관 계에 있는 소나 양을 죽임으로써 인간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던 풍습 속의 소나 양들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파르마코스p harmakos 〉라 든지 스와질랜드의 〈인쿠알라 In qwala 〉 제의와 같은 아프리카 왕국에서 의 왕이나 옛 궁정에 있던 왕의 역할을 대행하는 〈궁정 광대 fou >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희생물들은 모두 그 사회의 문화적 체계가 뒤흔들려 서 붕괴의 위험에 처하여서 그 위기를 벗어나려 할 때 나타나던 것으

로서, 진짜 갈등과 진짜 폭력을 〈 속이고 있다t rom p er 〉 는 공통된 특성을 갖고 있다. 우선 희생제의를 행하는 집단 구성원과 희생물이 이 폭력을 폭력이 아닌 것으로 〈 속여야 〉 하는데,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 이 폭력은 이 로운 폭력이며 이 제의는 성스럽다 〉 라는 차별화된 생각이다. 폭력에는 〈 이로운 benefiq u e 폭력 〉 과 〈해로운 malefiq u e 폭력〉이 있다는, 폭력 에 대 한 이러한 차별화는 종교제의에서 처럼 흔히 〈성스럽다 sacre 〉라는 속 성으로 나타난다. 〈 순교자〉에게 부여되는 성스러움이나, 〈다수결〉이라 는 〈폭 력적 만장일치 unanim it e v i olen t e 〉에 부여되는 성스러움이나, 〈 제 비뽑기 〉 라는 〈 우연 〉 에 부여되는 성스러움 등이 바로 폭력의 차별을 조장함으로써 〈 이로운 〉 폭력의 폭력성을 감추고 있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지라르는 이 희생물들에게서 여러 가지 중요한 공통점을 찾아낸다. 우선 동물 희생물들은 〈희생양〉이라는 말에서 연상되듯이 인간과 아주 홉사하거나 아니면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인간 희생물은 그가 폭력을 당하더라도 보복의 위험이 없는 연고자가 거의 없는 자이거나 의국인 중에서 선택된다는 희생물 선택에서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지라르는 여러 신화와 인류학적 자료를 통해서 입증해 낸다. 또한 이 희생물들은 〈 아주 나쁜 것〉과 〈아주 좋은 것〉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성질을 순차적이거나 아니면 동시적으로 갖는다는 것이다. 〈 피 〉 도 해로운 피와 이로운 피가 · 있고, 대부분의 인간 희생물들은 처 형되기 직전에 아주 극전한 대우와 숭배를 한몸에 받는다는 사실 등이 그것인데, 그 대표적인 성질이 가장 두려움울 주면서 동시에 가장 .〈성 스럽다 〉 는 성질이다. 이런 상반된 요소의 혼합은 병을 치료하는 치료 제인 약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지라르는 여러 텍스트에서 확인 하고 있다. 약은 그것이 치유하려는 병과 같은 성질을 갖고 있지만 해 로운 그 요소가 아주 극심하게 활동하는 혼돈의 위기를 겪고 나면 애 초의 병마저 물리치고 쾌차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열치열(以熱治熱)〉

과 같은 〈 이병치병 (以病治病)〉 이 약인 셈인데, 결국 그것은 폭력으로써 폭력을 이겨내는 메커니즘이다. 이런 점에서 희생제의는 카타르시스적 이기도 하다. 이때에 나타나는 〈 성스러움〉은 그러므로 희생제의에 수반되는 폭력 의 또 다른 한 겉모습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라르는 폭력을 담고 있는 신화와 제의의 발생구조를 살핀 이 책을 〈폭 력 〉 과 〈 성스러움 〉 이 라는 단 두 마디로 축약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회 문화체계의 위기는 결국 짝패의 위기인데 , 그 것은 모든 개체들 사이의 차이가 소멸되면서 개체 사이에 짝패 갈등이 심화되어 본질적 인 폭력이 폭발하려 하는 위기이다. 이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복수에 복수를 거듭하는 끝없는 폭력의 연속만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는 어떠한 폭력도 그 정당성 여부를 판단할 근거가 없 어진다. 사회질서와 체계가 유지되려면 부당한 폭력과 정당한 폭력의 구별이 있어야 하는데, 지라르는 .전 자를 〈 불순한 폭력 vio l e nce ·im p ur > 후자를 〈순수한 폭력 vio le nce pu r> 혹은 〈 순화적 폭력 vio l ence pu rifi ca t- rice > 이 라고 부론다 . 결국 사회를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폭력을 폭력이 아닌 것처럼 속여 그 폭력에 대한 보복이라는 또 다른 폭력을 유발하지 .않으면서 앞선 〈불순한 폭력〉을 응칭하는 〈 순수한 폭력〉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폭력에도 이로운 폭력과 해로운 폭력이 있는 것으로 만인이 여기도록 함으로써, 죽 무차별화된 폭력을 차별화된 폭력으로 만듦으로써 폭력 의 악순환을 중단시킨다는 말이다. 지라르에 있어 〈차이 d iff erence 〉와 〈무차별 ind if fer ence> , 혹은 무차별 의 〈차별화 d iff erenc i a ti on 〉라는 말은 아주 각별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앞의 경우에서처럼 무한히 증폭되는 폭력, 그래서 구별이 되지 않는 무차별적 폭력을 벗어나기 위해 폭력을 선한 폭력과 악한 폭력으로 〈차별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 무엇보다도 이런 폭력을 생겨나게 한 원인인 짝패의 갈등이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서로 유사하거나

같다는 안식을 없애야 할 것이다 . 그것이 바로 〈 나는 남과 다르다 〉 라고 느끼게 하는 〈 차별화 d iff erenc i a ti on 〉 과정이다. 타인의 소유나 상태에 대한 시기나 질투도 알고 보면 〈 나도 저 사람과 같이 저런 것을 가질 수도 있다 〉 라든가 〈 나도 저 사람처럼 될 수 있다 〉 라는 차별을 두지 않는 무차별적인 의식에서 싹트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겨나는 것이 바 ’ 로 짝패 갈등이며 거기에서 모든 폭력이 연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 므로 사회 를 계속 평정과 질서 속에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항상 개인과 개인 사 이, 혹은 계층과 계층 사이의 단절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끔 〈 조작 〉할 필요가 있다. 그것아 바로 〈 차별화 〉 의 본질이다. 이렇게 볼 때 〈 희생양 메커니즘 〉 이 바로 이러한 차별화의 대표적인 장치라고 볼 수 있다. 〈 폭력을 속이는 폭력 〉 , 이것이 바로 희생제의에 나타나는 폭 력이다 . 이런 점에서 인간사회의 문화적인 질서체계는 모두 희생제의 적인 것 이다. 지라르는 이러한 희생제의적 해석을 인류의 모든 문화적인 면에다 적용시키는데 , 종교적인 제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요컨대 지라르 는 희생제의라는 것을 신의 뜻에 따라 희생물을 신에게 바쳐서 신의 은 총 을 받는 장치로 보는 게 아니라, 그 집단 속에 드러나 있지는 않 을지라도 분명히 내재하고 있다가 마침내 분출하려 하는 폭력을, 집단 의부의 대상이나 아니면 복수에 휘말릴 염려가 거의 없는 희생물이라 는 집단 내부의 특정한 대상에게 분출시킴으로써, 내연하고 있던 갈등 과 폭력을 없애고 다시 질서와 평정을 유지해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문화적 장치로 해석하고 있다. 지라르의 이런 관점은 기존의 종교 해 석과 아주 큰 차이를 보여 심지어는 이단적으로 비칠 정도이다. 특히 예수에 대한 해석이 그러하다. 요컨대 예수는 하느님의 뜻에 따른 인 간구원의 상징이 아니라 당시 유태인 사회 안에 내연하고 있던 갈등과 반목, 폭력을 해소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희생물에 불과하 다고 보는 것이 지라르의 해석이다. 지라르가 설명하는 이러한 해석은 결국 기존의 해석에 대한 도전이

자 새로운 해석 방법론의 시도이다. 이 책 여러 곳에서 지라르가 이 책을 이 〈시론(試論) essa i〉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 서이다. 이 시론의 방법론을 지라르 자신은 〈 희생 가설 hyp o th e se sacri- fi c i elle 〉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런 표현은 결국 〈인류 문화제도는 모두 희생제의적이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 희생제의는 결국 짝패 갈등을 해소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기에 이러한 관점의 출발점이자 근본적인 토대는 인간의 〈모방 본능〉에 있 다고 할 수 있다. 모방에다 인간행위의 근본 원칙을 부여하는 지라르의 이런 입장은 기존 입장, 특히 프로이트와는 큰 시각 차이를 드러낸다. 신화, 종교, 비극, 제의 등 모든 문화제도를 살피던 지라르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의디푸스 대왕』을 검토하면서 〈 의디푸스 콤플렉스 〉 라는 프로이트의 해석을 비판한다. 요컨대 아들은 아버지를 모방하여 아버지의 욕망대 상인 어머니를 함께 욕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욕망을〈자연발생적인 s p on t ane 〉것으로 보는 프로이트와는 달리 지라르 는 아버지를 통해 중개화된 아들의 비자발적인 욕망을 제시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 욕망의 방해물임을 알고서 아버지를 적대시한다. 아들은 아버지보다도 더 뛰어난 감지력으로 아 버지를 제거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의디푸스는 그가 아버지를 죽이는 것울 스스로 감지하지 못한다. 단지 나중에 신탁에 의해서 알게 될 뿐이다. 이렇게 볼 때 프로이트 해석의 신화적 요소는, 의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갖는다는 욕망을 자기 스스로 의식하고 있다고 보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해석은 마치 신탁 이 라이오스에게 아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듯이 이 아들을 유죄인 것처럼 만들려는,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회, 즉 테베의 안녕과 질 서가 무난히 회복될 것으로 기대하는 〈아버지〉라는 현실 유지의 보수 세력으로 대변되는 집단 전체의 이중 중개가 아니냐는 것이 지라르의 생각이다.

지라르에 의하면 의디푸스와 어머니 사이에서 아버지라는 중개자가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욕망을 모방함으로써 어머니를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아들은 모방 욕망의 대상인 어머니를 순전한 차원에서만 대한 다. 그러므로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폭력의 교환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러다가 차츰 아버지의 욕망이 자신과 상충된다는 것을 알고서 죄의식 울 느끼면서 어머니를 포기하게 된다는 것一一마치 의디푸스가 뒤늦 눈게 을티 멀레게시 아하스고를서 통영해원서히 신데탁베의를 진떠실나을는 알것고처서럼 —자—괴 감이에 지 빠라져르 의자 신견의해 이다. 결국 프로이트는 욕망주체 자신의 내부에서 나오는 〈리비도 l i b i do 〉 를, 지라르는 〈모방 본능 〉 을 우선적으로 보고 있는데, 그로 인해 빚어 지는 해석의 차이를 지라르 석으로 말하자면 욕망주체(아들)가 스스로 대상(어머니)을 욕망한다고 믿고 있는, 즉 〈자발적 욕망〉이라는 환상을 믿고 있는 프로이트의 〈낭만적 거짓〉과 , 욕망주체가 중개자(아버지)를 통해서 대상을 욕망한다는 〈비자발적 욕망〉을 인정하는 지라르의 〈소 설적 진실〉이라는 태도의 큰 차이, 본질적인 차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신화나 종교 제의, 더 나아가서 모든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한 해석은 지금까지 항상 지배자의 시각에서 행해진 해석이 통용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 해 지금까지의 희생양 메카니즘에 대한 통설은 〈희생시키는 집단이라 는 다수 〉 의 시각에서 나온 해석이었지, 〈희생당하는 희생물이라는 소 수〉의 입장을 대변하는 해석은 결코 아니었다는 말이다. 희생시키는 집단 전체나 그 제의로 인해 커다란 이익을 보는 집단의 논리로 보면, 희생제의는 집단을 위해서 〈해로운〉 부분을 도려내는, 그래서 다시 평 화와 질서를 그 집단에게 가져다주는 문자 그대로 〈유익한〉 제의이겠 지만, 회생당하는 희생물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처형하는 희생제의 그것도 분명히 또 다론 하나의 〈폭력〉에 다름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생제의라는 폭력을 폭력으로 보지 못하던 기존의 관점이 다수인 집 단의 논리만을 고수한 것이라면, 그것의 폭력성을 발견한 지라르의 관 점은 다수 집단의 논리뿐 아니라 소수인 희생물의 입장도 포괄하고 있는 관점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역자후기 르네 지라르를 처음 만난 것은 아마 〈욕망의 삼각형〉이니 〈중개화〉 니 하는 말들이 자주 언급되던 70 년대 무렵인 것 같다. 물론 그 당시의 지라르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전실』의 지라르가 거의 전부이던 시 절이다 다시 말해 지라르를 막연히 소설 주인공의 욕망구조라는 테마 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문학비평가로만 여기고 있던 때였다. 그러다가 문화인류학자, 혹은 문화비평가라는 전면목의 지라르를 처 음 만난 것은 지금은 안 계신 김광남 선생님의 87 년 세미나에서였다. 이 만남은 또한, 〈대우재단〉의 공고문에서 이 책의 이름울 보는 순간 나로 하여금 겁없이 신청서를 내게 한 튼튼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폭력과 성스러움』은 우리 사회 도처에 숨겨져 있는 많은 폭력을 새삼 절감하게 하곤 했다. 지라르를 옮기는 동안 많은 추억들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즐겁기도 했고 아쉽기도 했다. 그 추억은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다. 첫번째 생각은 지라르와의 두번째 만남의 계기에 관한 것이다. 언젠 가 사석에서 〈내가 문학하는 사람인지, 사회학을 하는 사람인지 모르 겠다〉시던 말씀처럼,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던, 문학을 문학 안에만 가두어 생각하길 거부하시던 선생님의 또 다른 속마음, 선생님께서 줄 겨 쓰시던 융의 표현을 빌자면 선생님의 아니마가 선생님을 지라르로 향하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 각이다. 두번째로 떠오르는 생각은,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은 마치 금 기의 금줄을 끊고서 그 내부 실상을 보여주는 그야말로 래디칼한 생

각을 담고 있는 책이라는 느낌을 받던 때의 생각이다 . 박세곤 형의 발 표를 통해 사회의 감추어전 비밀이 폭로되는 대목을 둘을 때 긴장 섞 인 흥분과 동시에 아슬아슬한 칼날을 맛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옮겨놓고 다시 보니 처음의 감동과 흥분은 모두 다 빠져나간 듯하다 서둘게 자기를 빚어놓고 〈 다음엔 잘 만들어야지 〉 라 고 다짐하는 서툰 도공의 마음이 지금의 우리 심정이다. 너무 많은 짐을 지워드린 민음사 박맹호 사장님과 편집부 여러분들 께 다시 한번 미안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라르의 참모습을 전해 주시고 지금은 안 계신 김광남 선생님께 이 서툰 자기를 보여드리고 싶다 . 〈 지라르를 계속 읽 어나갈 사람은 같이 상의해서 해나가자 〉 시던 선생님께 , 고마움이 고 인 물이라면 그 둑을 터서 선생님 발치의 강에까지 펼 쳐드리고 싶다 . 〈고마움이 흐르는 물이라면 둑을 막아 시선 끝간 데까지 호수를 보여 주고 싶다〉시던 선생님의 언젠가의 말씀을 훔쳐서 말이다 . 1992 년 10 월 역자

기 강박관념 361, 484 강화 259 『고대 그리스 인유학』 449 고르곤느 Gorgo n e 60, 207 공격성 11 관념론 160 구조 79 궁정 광대 fou 25, 459, 460, 461 귀신추방 186 근친상간 inc este 112, 113, 116- 120, 124, 129, 133, 149, 158- 163, 167, 169, 110-111, 173, 175, 176, 178, 181-183, 249, 262, 264-269, 273-274, 284, 312-313, 320, 329, 352, 356, 358, 366, 377, 381, 383-384, 389, 410, 417, 444, 452-453, 455, 458, 409-410, 412, 415, 428 근친상간 금기 142, 289, 316-319, 321-330, 337-340, 368 글로츠 Glotz , G. 450 글루크만, 막스 Glukmann, Max 435 기본가족 333-340, 343, 346, 359 기 피 터 부 avoid a nce tab oos 3 5 7 긴장완화 183, 189, 242

길항작용 232 꼬르네 이 유 Corneil le 66 L 『날 것과 구운 것』 366 『남미 인디 언의 종교와 마법』 413 네수스 Nessus 64-66 넴뷔족 Ndembu 19, 250 노예 희생제의 153 뉘에르족 Nuer 12, 13, 24 느가주-다야크족 Ng a dju -Day ak 153 느중바족 Nju m ba 170 느콜 Nkole 166 니가족 N ig a 374 니니베 Nin i v e 473-474 니 아큐사족 Ny ak y u sa 88 니오로족 N y oro 163 니오카족 Nio k a 170 니체 85, 200, 282, 304, 447, 477 닐 아드미 라리 Ni l admi ra ri 140 C 다미 아 Dami a 144 다윈 289-290, 322 대체작용 substi tut i on 13, 16, 22, 23, 57, 437 데 자니르 Deja nire 64

데카당스 189 델포이 201 도스트예프스키 241, 304, 371 동일화 254-260, 263-264, 267- 272, 276 동적 작용 382 동질성 80 뒤르켕 Durkheim 183, 463- 4 64 뒤 메 질 Dumezil 65 드 의쉬 Luc De Heusch 158 등급 78, 80 디 아스파라그모스 di as p a rag m os 298, 378, 432 디오니소스 Di on y so s 96, 152, 191- 195, 198-216, 242- 2 48, 298, 310, 351, 373, 377-385, 428, 432, 443, 476, 477 디오니소스 신화 212 디오니소스제 206, 212 딩카족 D i nka 13, 19, 148-149, 152, 167, 248, 411, 420 己 라셀 Rachel 15 라이오스: Lio s 75, 106, 110, 112, 115-116, 118, 121, 163, 216- 217, 223, 262, 284, 380 래글런 Rag la n 경 177 레드클리프-브라운 Radclif fe- Brown

31, 333- 3 35, 341 레르느 Lerne 64 레무스 Rems 94 레비-브륄 Levy - Bruhl 49, 363- 364 레비-스트로스 Levi- S t ra uss 17, 298, 333, 335, 337, 341-342, 344, 346, 349-351, 356-361, 366-367, 371 로데 Rohde, E. 203 로라 마카리 우스 Laura Makariu s 59 로렌츠 Konrad Lorentz 11 로물루스 94 로버트 로위 Robert Lowi e 31-32, 42-43 로버트슨 스미스 Robert so n Smi th 140, 152, 291, 294, 297, 329, 455 로브두족 Lovedu 162 로제 카일루아 Rog e r Cail lo is 182 루돌프 오토 Rudolf Ott o 198, 200 루안다 Ruanda 161 루이 14 세 159, 399 뤽 드 의 쉬 Luc de Heush 166 『르 시드』 69 리 바도 lib i d o 254, 256, 25s-259, 263, 269 리 사 Ly ss a 62, 65 리 샤르 꿰르 드 리 용 Ri ch ard Coeur

de Lio n 94 리샤스 64 리 세 Ly ce e 山 443 리 인하르트, 고드프리 Lie n hardt, Go-defr ey 12, 19, 148, 411 『리챠드 2 세』 460 리코스 62, 65, 74 리 토볼리 아 !itho dolia 144 릭토스 443 □ 마라나야와 367 마리 델쿠르 Marie Delcourt 207 마종 Paul Mazon 398 만장일치 메커니즘 204, 387 말동무 repo ndant 25 말라르메 Mallarme 360 말리노프스키 Malin o wski 31, 33, 91-93, 277-279, 340 머독 Murdock 177 머 큐리 Mercure 383 메나데스 Menades 193-195, 201, 208, 241, 메 넬라스 Menelas 230 『메데이아 M威 ee 』 21-23 메저키즘 217 멜라네시아 388 모권제 matr i a r cat 211 모로-나바 Moro-Naba 162

모방욕망 223, 232, 255-256, 261, 270, 314, 315, 418 『모세와 일신교』 326, 327 모스 Marcel Mauss 9, 13, 11-18, 24, 137-139, 144 모시족 Moss i 162 모의공격 160 모의 전두 165, 167, 186, 248, 251 몰리에르 285, 374 몽테뉴 424 무의식 219 무차별 현상 in dif fer encia t i on 86, 87, 97, 98, 112, 120, 177, 182, 283, 425 문등병 160 물질적 메타포 59 미르치아 엘리아데 Mi rc ea Eli ad e 417 미메시스 M i mes i s 255 미 케 아 Mi ch ee 67 미트라Mit hra 152, 310 밀턴 M ilt on 따 仁i 바슐라르, 가스통 Bachelard, Gasto n 59 『바카스의 여신도들 Les Bacchan tes』 69, 191-197, 200, 203, 207- 209, 212, 215, 216, 227, 241,

242, 245, 246, 372, 373, 377, 378, 444 바카스제 185, 191-194, 206, 207, 210 반 게 넵 Van Gennep 424 반근친상간 사회계약론 319 발자크 Balzac 47 방브니스트 Benven i s t e, Emi le 228, 229, 396, 399 범성욕주의 pa n-sexualite 55, 179 베들만 Be i delman 168 『변신이 야기 Me t am orp hoses 』 382 보드빌 baudevil le 263 보고 마을 bororo 211 닌 쿠 쿠 신화 366 복권 133 본질적 폭력 viol ence essenti el le 49 ff 볼테르 304 부르조아 140 부적응자 266 부조리 221 부포니 아 Boup h onia 149, 464 『분신 le Double 』 241 불손한 반항 208 뷔숑족 Bushon g 159 브로미오스 Brom i os 184, 201, 202 비극적 공평성 72 『비탄의 북』 19, 428 빅 터 터 너 Vit or Turner 19, 78,

168, 250, 438 빌라도 460 人 사회적 자살 83 살라미스 해전 443 상호 대 체 작용 jeu de substi tut i on s recit oq u es 1off 새디즘 217 샤농 Chagn o n 210, 211 샤먼 128 선악 이원론 manic h eis m e 74 성스러움 le sacre so, 5l ff 성욕 178ff 세람 Ceram 섬 152 세르반테스 374 세 익스피 어 78, 80, 89, 102, 292, 306, 455, 459, 460 『셈족의 종교』 152 소마 Soma 152 소의 248 소크라테스 67, 245, 443, 445, 446, 447 소포클레스 22, 63, 64, 73,75, 105, 114-116, 118, 120, 124, 130, 131, 133, 192, 195, 233, 284, 286, 292, 304-306, 309,' 377, 442, 445 소프로수네 sop h rosune 108

속죄 양 150, 154 『수상록』 414 순응주의 233, 266 순화작용 50ff . 순화적 폭력 vio l ence pu rifi ca tr i c e 63 쉴러 234, 235 스와질랜드 184, 198, 378, 434, 457 스탕달 140,371 스파 라그모스 sp ar ag mo s 152, 19s- 200, 372, 383 스핑크스 75, 133, 380, 381 시니피앙 223, 311, 374 시메모 S i memo 161 시소작용 232 시 클 로프 C y clohe 16 시테롱 Cit he ron 191, 194, 20s, 210 시 페 -토텍 Xip e -T ote c 378, 379 『시학』 114, 438, 439 시합 ep re uve 234 신들립 po ssessio n 246-249 신명재판 ordal i e 451, 475, 476 신성 div i n i t e 11, 137, 215, 216, 226-228, 232, 242, 296 『 신성과 체험』 18, 148, 411 신의 내 방 vis i t at i on div i n e 203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 388 신화전이 210

신화조작 212, 382 『신화학 Les My t holog iques 』 364 실완느 Sill w ane 167, 405 심급 ins ta n ces 269, 275, 276 심리주의 psy ho log ism e 254 。 아가메농 Ag am menon 23 아가베 Ag av e 191, 193, 201, 243, 245 아고라 Ag or a 464 아낙시만드로스 Anaxim andre 465 아도니스 Adon i s 310 아돌프 젠센 Adolph e Jen sen 140 아레스 Ares 398, 399 아르고스 Argo s 376 아리스토텔레스 114, 310, 438- 441, 443, 444, 447 아모스 &nos 67 아벨 Abel 14, lS, 94 아브데라 443 아브라카다브라 abracadabra 140 아작스 Aj ax 21, 22 아츠텍 379, 4S4-4S6 아카디 Arcadie 443 아킬 레 스 Achil le 20, 124, 398 아티스 At tis 310 아파고즈 Ap ag og e 451 아풀로 201, 381, 476, 477

악령추방 제의 exorcis m e 186, 457 『안다만 섬 사람들』 31 안토니 스토르 Anth o ny Sto rr 11 『안티고네』 225, 233 알베 Albe 376 『알쎄스트 Alces t e 』 74, 100 알프레 메트로 Alfr ed Metr a ux 413, 414 압샤퉁겐 Abschatt un g e n 289 앙드로마크 124, 125, 129, 230 앙시엠 레짐 459 앙피트리온 62, 63 『애원하는 여인들』 95 애트킨슨 A t k i nson 290 야곱 15, 16, 94, 101, 102, 266 야노마모 Yanomamo 190, 210, .21 1 야누스 379, 415 『야만적 사고 Pensee sauv ag e 』 17, 349 아우구스두스 399 야주르 베다 Yad j our i -Veda 152 양가성 ambiv a lence • 10 양도체 bon conduc teu r 62 양면성(양가성) 211-213, 275, 276 『언어인류학의 구조분석』 333, 350 『에로티즘 Ero tism e 』 331 . 에르미온느 124, 125 에르빈 로데 Erbin Rodhe 202 에리니에스 E ri n i es 398 에 반스-프리 차드 Evans-Pric h ard

12, 13 에서 15, 94, 102, 266 에스킬로스 73 에테오클레스 Et eo cle 70, 72, 74, 94, 96, 100, 101, 111, 226, 422 엠페도클레스 Emedocle 76, 204, 245 여호와 473-475 영아살해 22, 124, 163 『예기(禮記)』 20, 77 예레미아J erem i a 101, 102 예방전쟁 gue rre pre venti ve 84 오딧세이 16, 17, 53 오라스 Horace 65, 66 오마라카나족 OmaraKana 93 오비디우스 Ov i de 382 옥세 시 아 Auxesia 144 옴팔로스 464 왕권신수설 459 왕위 연극 pla y of King sh ip 168 『왕의 두 신분.II 460 의디푸스 Oedip e 72, 75, 95, 100, 103, 105, 106-112, 114, 116, 11s-121, 123·- 1 25, 121, 12s, 131, 134, 149, 161, 205, 216, 224, 237, 258, 262, 266, 283, 351, 371, 377, 380, 381, 385, 422, 438, 445, 473 『의디푸스 대왕 le Roi Oed ip e』 72,

75, 100, 103, 105, 112, 114, 124, 130, 192, 195, 209, 215, 216, 222, 225, 232, 233, 238, 284, 307, 310, 311-314, 370, 377, 441 의디푸스 콤플렉스 253, 256, 258, 261-211, 273, 274, 277-281, 283-284, 286, 313, 359 의혼제 290 요나J onas 473-475 욕망대상 255, 260-262, 271, 279 욕망의 모방성 219 욕망주체 218, 219, 223, 239, 255, 280, 281 운명 역 천 revir e ment 225, 230, 233 원수형 제 frer e ennemi 236 『원시사회의 아버지』 277 『원시사회의 죄악과 관습』 30 『원시 인의 신화와 관습』 140 원초적 제물(희생물) 407, 408, 415, 461, 462 원초적 폭력 155, 407, 476 월경 피 90, 393, 435 웨스트마크 Weste r mark 343 위고 Hu g o 280 위베르 Hubert 9, 13, 17, 18, 24, 137-139, 144 위 토토 Uit ot o 인디 언 471 윌리엄 애로우스미스 W illi am Arro-wsmi th 441

유리피데스 21, 23, 60, 62, 65, 69, 12-14, 95, 124, 125, 191, 192, 196-198, 200, 205-209, 213 율리시즈 16, 17, 78, 80, 152 이노 loo 191, 243 이 로쿠와족 Iroq uo is 388 아리스 Ir i s 62 이뿔리트 H ipp ol yt e 144 이 사야 Isaie • 67 이삭 15, 17 이아손 ‘ason 21 이온 Ion 60, 64 이올레 Iole 285 이중명령 double bin d 221-223, 247, 262, 265-261, 272, 278-280, 283-285 이 타성 alte r it e 241 이푸가오족Ifug ao 32, 42 이피제니 lph ig e nie 23 『인간의 공격성』 11 인간회생 186, 187 『인구제도사전』 228, 396, 448 인쿠알라 Incwala 166, 168, 184, 198, 378, 403, 434, 435, 457 일리아드 229 大 자그레우스 Zag reu s 378 자기학 47

『자아와 이드 le Mai et le ca 』 258, 259, 267, 268, 271, 276 자크 데 리 다 Jac qu e s Derrid a 446- 448 자크 라캉J ac q ue Lacan 276, 359 장 라플랑슈 Jea n Lap la nche 234 장 상 떼르J ean sans Terre 95 장 쥬네 Jea n Genet 419 장메르J eanma i re, H. 400, 442 적응 265, 266 전도 90, 181, 236, 237, 295, 304, 305, 445, 447, 470, 472 전위연극 162 『젊은 파르크 le jeu ne Par q ue 』 364 『정신분석의 공격성 Ag res siv ite en p s y chanal y se 』 276 정신분석학 시론』 327 『정치적 상정론 : 공공집회소 Sur le sym bolism e poli ti qu e:le com- mun 』 475 정화 67, 245 제르네, 루이 Louis Gernet 449- 451, 464, 475 제우스 229, 379, 475 제의 무용 149 제의적 갈등 168 제의적 모방 148, 157, 223, 406, 407 제의적 불순 46-50 제의적 사고p ensee ritue lle 149,

151, 156, 157, 161, 173, 174, 409, 410, 436, 482 제의적 희생 9, 155, 204, 395, 401, 406, 409 제의적 희생물(제물) 145, 154, 155, 406-408 젠슨 Jen sen 472 조르쥬 -바 타이유 George s Bata i ll e 331 조셉 드 메스트르J ose p h de Mais - tre 12, 14, 23 조울증 232 조지 오웰 422 조카스트J ocas t e 75, 222 주쿤족J ukun 163 쥴스 헨리 Jul es Henry 81-85 집단 전이 19, 127 집단(적) 폭력 125, 127, 129, 161, 166, 169, 186, 199, 303, 309, 322, 326, 383, 395, 412, 433, 438 집단무의식 382 집단살해 155, 187, 289, 291, 292, 295, 296, 298, 315, 317, 320~ 326, 352, 359 『 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 254, 256, 258, 259, 263, 268, 271 집 단적 신들립 248 집단추방 151, 226, 248 짝패 double 122, 123, 168, 199,

200, 238, 240-242; 244; 247, 303, 326, 370; 379, 380, 439, 444, 445, 447 괴 물 같은 짝패 double monstr e ux 241, 243-249, 251, 328, 379, 381, 387 天; 『창세기』 16, 17; 80, 102 척 치족 Chukchi 32, 42, 43 초석적 메커니즘 451, 454 초석적 만장일치 unain i m i te fon dat- ric e 143, 144, 155, 156, 161, 166, 172, 183, 207, 244, 252, 322, 326, 327, 329, 362, 368, 372, 379, 383, 390, 395, 403, 406-408, 411, 413, 415, 430, 432, 436, 439, 448-450, 457, 458, 461, 468, 469, 472, 475, 481-484 촘스키 Chomsky 344, 346 친부살해 112, 113, 115, 111-120, 124, 129, 131, 133, 149, 163, 175-178, 262, 264-267, 269, 273, 274, 284, 285, 312, 313, 315, 352, 377, 444, 470 『친족의 기본구조』 289

겨 카늘로스 인디언 Canelos 471-473 카드모스 Cadmos 95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304 카얀족 Kay an 471 카인 14, 15, 94 카인강족 Kain g an g 81-83, 85, 153, 190 카타르마 Kath arma 144, 433-438, 441-, 442, 450 카타르시스 kath a rsis 434, 435, 438, 439, 443, 447 카프카 Kafka 282 칸토로비 치 Ernst S. Kanto r ow icz 460 캠브리지 의식주의자 Camb ri dg e ri- tua lis t s 146 『콜로노스의 의디푸스』 131, 225, 377 쿠도스 Kudos 227-231 쿠퍼 Kup e r 168 . 쿨리 Kuli 93 쿰 그라노 살리 스 cum gran o sa lis 340 크레온 Creon 72, 75, 96, 106-1os, 113, 114, 119, 121, 128, 192, 223, 225, 237, 422 크레우스 Creuse 60 크로-오마하족 Crow-Omaha 347

크리즈 Krig e 162 클라이드 쿨루콘 Clyd e Kluckhon 93, 177n 클리뎀네스트라 Cly tem nestr e 23, 24 E 타무즈 Tammuz 310 타이탄 T it an 310, 378 『탈리 안 단장 Frag me nt Thal i a 』 234 탈상칭화 des y mbol ifi er 96, 98, 100 탈신비화 demy st i fier 42, 75, 84, 206, 210, 306, 309, 348 탈제의화 189 데 네 테 헤 라 신화 ten ete h ara 367 데 라멘느 Theram~ne 69 『토리드의 이피제니 Iph i g en ie en Tau ri de 』 69 『토템과 터부 Tote m et Tabou 』 141, 179, 289, 292, 295, 297, 298, 300-302, 311, 312, 315, 318, 321-327, 350, 358, 359, 361, 393, 439 통과제 의 142, 424 투사 삼손 Samson Ag on is t e 443 무판 Tu pan 367 두피남바족 Tu pi namba 413, 414, 416, 417, 419, 422, 423, 428,

454-456 『두피남바족의 종교와 투피-구아르 니족 종교의 관계 』 413 『 트라키니의 여인들 Les Trachin i e n - nes 』 64, 65, 284 『트러 일러스와 크레시다 Troil u s and Cressid a 78, 102, 117 트로브리앙 군도 Trobr i and 91, 92, 94, 277- 2 79 트심 쉬 안족 Tsim shia n 368, 373- 375, 377, 420, 421 티데 Ty de e 95, 96 티레시아스 T i res i as 72, 75, 76, 100, 106- 1 13, 121, 124, 127, 149, 192, 202, 223, 237, 307, 312, 380, 445 티모스 thy m os 231, 232 立 파르마코스 ph armakos 21, 25, 144-150, 164, 383,~:. 433-435, 442, 446, 449, 456, 464 파르마콘 ph armakon 145, 434, 437, 446, 447 팡드족 Pende 170n 『페니키아의 여인들 Les Phenic ien - nes 』 70, 72, 226 페리클레스 Per i cles 443n 페스트 82, 101, 118-121, 128,

133, 237, 381 페 이 터 Pate r 460 펜데 우스 Penth e e 96, 191-204, 210, 215, 242-245 펠라이 Pelee 230 펠리니 Fellin i 189 포보스 ph obos / ph obous 223 폭력 속임 14 『폭력 과 성스러움 la Viole nce et le Sacre 』 388 폭력의 전이 57, 212 폭력 적 만장일치 unanim i te viol ente 125, 128, 134, 148, 154, 157, 162, 185, 189, 215, 238, 372, 388, 448, 468, 469, 482 폴 발레리 Paul Valery 18, 364 폴리 니스 Polyn ic e 70, 71, 74, 94- 96, 100, 101, 111, 226, 422 푸르공 P. Purgo n 436 프란츠 보아즈 Franz Boas 373, 374 프레 이 저 Frazer 47-49, 140, 184- 187, 291, 455, 479-484 프로이트 Freud 129, 140, 141, 175-178, 218, 220, 253, 262, 271, 290-293, 297, 301-305, 310, 314-319, 322-325, 358, 439, 470, 480 신프로이트주의 282, 361 프루스트 Proust 371

풀라톤 304, 441, 444-446, 450 『풀라돈의 조제실 la Pharmacie de Plato n J 446 플루타크 Pluta r qu e 434, 435 피드백 현상 395 피루스 P y rrhus 124, 229, 230 끈 하이누월레 Hain u wele 152 하이데거 85, 304, 404, 465 헉슬리 Huxley 415 헤라 62, 381 헤라클레스 62-66, 74, 284 『헤라클레스의 광기』 62, 64, 69, 74 헤라클리트 G7, 135, 217, 386, 485 헤 쿠 F 뚜 ~ Herodote 443n 헤르미온느 Hermi on e 229, 230 헥토르 Hecto r 124, 397 헬렌느 24 『혈족관계의 기본구조 Les St ru ct ur es 십 emen ta i res de la Paren t e 』 346 호머 227, 229 『호모 루덴스 Homo Ludens 』 231 호이칭가 Hu i z i n g a 231 확산주의 자 dif fus io n is t e 138 『황금가지』 184 회춘제의 166, 182 횔덜린 Holderlin 71, 72, 233, 234

『횔덜 린과 아버지의 문제 Hvlderlin et la que sti on du p ere 』 234 휴브리스 hubris 108, 194, 202, 205, 224, 385, 394, 440 희 생 대 체 substi tut i on sacrifi ci e l le 15, 16, 154, 199, 218, 238, 241, 406-409, 437, 480 희생신학 18 희생 양 120, 123, 125, 154, 155, 162, 178, 183, 187, 189, 190, 206, 208, 210, 243, 298, 300, 372, 408, 416, 443, 446, • 451, 455, 461, 464, 479-484 희생 양 메커니즘 127, 129, 130, 134, 142, 144, 188, 207, 246, 295, 306, 321, 324, 325, 327, 331, 351-353, 372, 375, 377, 392, 401, 415-419, 431, 432, 448, 457, 460, 469 희 생 위 기 cri se sacrifi ci e l le 68, 76, 81, 82, 84, 87-89, 95ff , 142- 148, 155, 161, 166, 172, 173, 182, 183, 187, 189, 192, 193,

199, 201, 204, 205, 207, 210, 212, 216-218,-. 223, 227, 231, 237, 244, 245, 252, 266, 281, 283, 308, 318, 321, 331, 355, 367, 370, 374, 376, 399, 406, 425, 427, 428, 430, 457, 474- 476, 484 『희생 의 성격과 기능에 관한 시론 Essai sur la natu r e et la Jon e- tion du sa crifi ce 』 9 희생적 추방제의 184 희생적 폭력 59 희생 제의 rite sacrifi cie l le 17, 19- 27, 33, 35, 61ff , 138-202, 248, 294-297, 320-331, 358, 362, 373,. 383, 406-409, 411, 417, 418, 430, 433, 436, 437, 439, 442, 447, 448, 454, 457, 458, 475 희생집행자 154, 243 히멘 Hy me n 116 『히페리온 Hy p函 on 』 234 힐로스 284, 285

역자 김진식은 195 4 년 경남 마산 출생으로, 서 울 대 불문과 를 나와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 현재 울산대 불문과에 재직하고 있으며, 논문에 「카뮈 소설 속의 알제리」 등이 있다. 역자 박무호는 1953 년 영 천 출생으로 , 서울대 불문 과 를 나온 뒤 동 대학원에서 「꼬르네이유 후기비극연 구」로 박사 학위 를 받았다 . 현재 울산대 불문과에 재 직하고 있으며 , 역서에 『어떤 회상』(마그리트 뒤라스) 등이 있다 .

폭력과 성스러움 대우학술총서 • 번역 59 초판 찍음 ___ 1993 년 2 월 10 일 초판 펴 냄 ___ 1993 년 2 월 20 일 지은이 • 르네 지라르 옮긴이·김전식,박무호 펴낸이·朴孟浩 펴낸곳· (주)民音杜 출 판등 록 1991 . 12. 20. 제 1 6 ― 490 호 우편대체번호 010041-31-0523282 135— 15210 5 -서2울00 0강~2남은(행구 영 지업신부로사)번 동, 호5 1 5503—60 072강708 0남33 출~5판( 편문집화부센)터 5 층 515-2007, 2101( 팩시밀리) 값 12,500 원 © 김진식 • 박무호 1993 Prin t e d in Seoul, Korea 사회과IS학B , N풍 속89— • 3민7속 4학-4,0 5민9족-s학 9 4K38D0 C / 389 ISBN ·89 -374-3000-2 (세트)

대우학술총서(번역 )

1 유목민족제국사 관텐/송기중 2 수학의 확실성 클라인/박세희 3 중세철학사 와인버그/강영계 4 日本語 의 起源 밀러/김방한 5 古代漠語音 韻 學槪要 칼그렌/최영애 6 말과 사물 푸코/이 광래 7 수리철학과 과학철학 와일/김상문 8 기후와 진화 피어슨/검준민 9 이상진리·역사 파트남/김효명 10 사 회과학에서의 場 理論 레빈/박재호 11 영국의 산 업혁명 딘 / 나경수 이정우 12 현대과학철학논쟁 쿤 外/조승옥 김동식 13 있음 에 서 됨으로 프리고진/아철수 14 비교종교학 바하 /김종서 15 동물행동학 하인드/장현갑 16 현대우주 론 시아마/양종만 17 시베리 아 의 샤머니즘 디오세지 外/최길성 국가의 진화 하식최몽룡 버트 내현 이츤 / 서석봉 29 유럽의식의 위기 I 가자르조한경 30 일반국가학 31 일반언어학 강의 소쉬르최승선32 일반체계이른 버를란피/현승일 33 현대문명의 위기와 기술철학거시/이군현 34 언어에 대한 지식 촘스키/이선우35 음운학원론

37 수학적 발견의 논리 라카토스/우정호 38 텍스트 사회학 지마/허창운 39 현대물리학의 철학적 테두리 40 과학과 가치관의 우선순위 스페리/이남표 41 신화의 진실 휘브너/이규영 42 대폭발 실크/홍승수 43 大同 書 강유위/이성애 44 표상 포더/이영옥 45 과정과 실재 화이트헤드/오영환 46 그리스 국가 에렌버그 / 검진경 47 거대한 변환 풀라니/박현수 48 법인류학 포스피실/이문웅 49 언어철학 올스톤/곽광제 50 중세 이슬람 국가와 정부론 랭톤/김정위 51 전 통 쉴즈/김병서 신선순 52 몽 골 문어문법 뽀뻬/유원수 53 중국신화전설 l 袁f u j/전인초 김선자 54 중국신화전설 ll 〈근간〉 55 사회생물학 l 윌슨/이병훈 ’ 박시룡 56 사회생물학 l 윌슨 / 이병훈·박시룡 57 일반언어학의 제문제 l 벤배니스트 / 황경자 58 일반언어학의 제문제 l 밴베니스트 / 황경자 59 폭력과 성스러움 르네 지라르 / 김진식·박무호 60 갑골학 OO 년 作賓 /이 형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