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가(袁河) 중국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 출생 . 1940 년 아미산(峨眉山)의 사천대학(四川大學) 재학중 정치적 문제로 인하여 성도(成都)의 화서대학(華西大學)으로 전학. 1950 년 말 북경 상무인서관에서 간본(簡本) 『 중국고대신화』 를 출간. 작은 책자이기는 했지만 중국신화를 정리한 최초의 책이 됨. 계속해서 중국신화 정리작업에 몰두,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침묵을 지켰으나 사인방(四人幣)이 몰락하고 난 뒤에 다시 활발한 집필활동을 개시함. 이후 정리해 놓았던 자료들을 활용해 『 고신화선석 』 『 산해경교주 』 『 중국신화선석백제 』 『신화 논문집 』 『 중국신화전설사전 』 『 중국신화전설』 등을 연이어 출판해 중국신화 연구의 열풍을 불러일으킴 . 현재 사천(四川) 사회과학원 문화연구소 교수로 재직중 .

중국신화전설 Il

中固神話佳說 by 袁河 Co pyright © 1984 Yuan Ke c/o Sic h uan Academy of Socia l Sci en ce All rights reserved. Korean Translatio n Copy right © 1998 Minu msa Publis hing Co., Ltd. Korean transla ti on edition is pub lis he d by arrange m ent with Yuan Ke c/o Sic h uan Academy of Socia l Sci en ce throu g h Bardon-C hine se Me dia Ag en cy. 이 책의 한국어 판 저작권은 Bardon-C hine se Me dia A g enc y를 통해 Yuan Ke c/o Sic h uan Academy of Socia l S ci ence 와 독점 계약한 (주)민음사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으로 한국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중국선화전설 II 袁 河 지음 전인초·김선자 옮김 미Li° i 시

주 목왕(周穆王)이 서왕모(西王母)를 만나는 장면(주진편 • 상 제 1 장)

공자(孔子)가 항탁(項 案 )에게 질문을 하는 장면 (주진편 • 상 제 6 장)

소사( 蕭 史)와 농옥(弄玉) (주진편 • 하 제 6 장)

용모(龍母)의 전설(주진편 • 하 제 10 장)

중국신화전설(II)

차례

8 주진편(상)

제 1 장 747

주 소왕이 남방으로 흰색 꿩을 받으러 감―아교로 붙인 배의 비극―화인이 주 목왕에게 천하를 주유하고 싶은 생각을 갖게 함―조보가 길들인 여덟 필의 준마-주 목왕이엄자산에서 서왕모를 만남―언사의 정교한 손재주―서언왕 탄생 신화-주 목왕이 서 언왕의 반란을 평정함―곤오할옥도와 야광상만배

제 2 장 763

주 목왕의 신성―고분융이 사나운 호랑이룰 사로잡음―주 선왕이 무고한 두백을 죽임―좌유가 친구를 위해 자살함-두백의 원혼이 주 선왕을 쏘아 죽임―백기가 계모의 계략에 걸려듬―‘이상조'―물 위를 감도는 노래소리가 어리석은 아버지를 깨우침―백기가 새로 변함―윤길보가 후처를 쏘아 죽임

제 3 장 777

윤씨네 집안의 거대한 밥솥_주 유왕이 포사를 총애함―태자 의구가 호랑이를 놀라게 함―두 마리 이상한 용의 이야기―산뽕나무 활과 기초로 만든 화살통을 파는 부부―외로운 여자 포사의 기이한 운명―봉화대의 웃음소리―비극적 결말

제 4 장 788

주 영왕의 수염과 곤소대 -장홍이 강태공의 법술을 모방함―신인이 법술을 부려 더운 여름을 춥게 만듦―들고양이머리가 별 효험이 없게 됨 -‘지다성’이 이간책을 사용함一장홍이 거열형을 당함―‘벽혈단심'

제 5 장 800

검은 학이 춤을 추다가 구슬을 떨어뜨림―사광이 거문고를들어 진 평공에게 던짐―숙향을 난처하게 만듦―사광이 전각에서 발을 동동 구름-하동의 왕교와 건위의 왕교-학을 탄 선인이 구씨산 꼭대기에 머묾―최문자가 왕자교에게 신선의 도를 배움-왕자교 무덤의 보검

제 6 장 811

‘공자가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음’―숙량흘이 천근이나 나가는 철문을 듦-공자의 신발에 관한 이야기―공자의 힘과 활쏘는 기술-공자가 사양자에게서 거문고를 배움-'석달이나 고기맛울 잊게 만드는' 소악이라는 음악―준양은양이 아니라 개-방풍씨의 거대한 뼈―‘하늘이 비를 내리려면 상양이 춤을 춘다’―아는 것이 많았던 공자-일곱 살 먹은 항탁이 공자를 난처하게 함

제 7 장 831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물음―머리 세 개 달린 이주가 경지수를 지키고 있음-양호와 닮은 공자가 재앙을 만남―공양유가 큰 나무를 뽑음-공자와 자로가 서어의 요괴를잡음―두삼낭이 구곡명주에 실을 꿰게 해줌―공자 무덤주위의 나무들―공자와 72 제자들이 선도에서 유유자적하게 노님

제 8 장 848

다리가 없는 솔의 형상이 배와 같음―안연이 칼을 휘둘러괴물을 벰―배회산 위의 그물-학생과 스승이 눈싸움을함-처음으로 공자의 문하에 들어간 자로 ―제일 낮은

선비는 사람을 죽일 때 돌을 가슴에 품음’―죽음에 직면해서도 모자를 떨어뜨리지 않음―자공의 모습과 말재주-자공이 명을 받들어 ‘거문고를 조절함(정을 조절함)'―야인이 재주있는 말로 잡혀있는 말을 찾아옴

제 9 장 866

증삼과 그의 어머니가 정신적으로 통해 있음-작은 회초리는 참아도 되지만 큰 몽둥이는 도망쳐야 함―돼지롤 잡은가정교육―새와 짐승의 말을 알아들은 사람들―공야장이 새의 말을 알아들어 감옥에 갇히게 됨―참새가 군사들의 동향을 알려줌_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잘못―담대자우가 하백의 위세를 꺾음―자로가 재여를 수레에서 발로 차버림

제 10장 884

태어나자마자 백발_석자 짜리 나무송곳으로 · 다섯자 짜리돌판을 뚫음―쇠절구공이를 갈아 수놓는 바늘을 만듦’一노자가 푸른 소를 타고 함곡관을 지남―청양사의 청양관―묵자가 만든 나무새가 하늘에 사흘을 떠있음-금골리가 성을 지키는 재주를 배움―양주 제자들의 궤변―묵자가 홀연히 ‘선인’이 됨

제 11 장 899

공수반이 초나라 왕을 위해 ‘구’와 ‘거’를 만듦―나무로 만든까치가 날아 다니는 것은 수레 바퀴 비녀장을 만드는 것만 같지 못함_공수반이 나무 새를 타고 송나라 도성을 정탐함―열흘 낮 열흘 밤의 긴 여정―초왕이 권고를 듣지않고송나라를 공격하려 함―전각에서 허리띠와 나무조각으로모의전쟁을 함_목자가 공수반을 설복시킴―송나라 성루아래에서 비를 피하다가 쫓겨남_노반의 재주―문고리는본래 우렁이를 흉내낸 것_촌류신이 감히 머리를 내밀어 노반을 바라보지 못함_돈황의 노반이 무술로써 부친의 원수를 갚음―노반과 여동생이 조주교를 만드는 내기를 함

9 주진편(하)

제 1 장 957

오자서가 소관을 지키는 관리를 놀라게 함―밤새 머리가하얗게 되었지만 결국 소관을 지나감_‘갈대 숲에 있는 사람’과 ‘어부 노인―율수에 빠져죽은 빨래하는 처녀-‘만인의 위에, 단 한 사람의 아래에만 존재하는' 용사―오시의피리부는 걸인―전저가 오왕 료를 찌름―치구혼이 수신과 싸움―요리가 치구혼을 승복하게 함―-요리가 왕자경기를 죽임

제 2 장 980

합려가 사람을 시켜 학춤을 추게 해 자기 딸 무덤에 순장시킴―풍호자가 칼에 대해 논함―오자서가 채찍으로 평왕의시체를 침-부차가 아버지의 원수를 잊지 않음-구천의와신상담-구멍 앞에 꿇어앉아 개짖는 소리를 흉내내던 범려-부차가 고소대를 만듦 -40 길이나 되는 한 쌍의 신목―서시에 관한 여러 가지 전설 ―관와궁과 향섭랑―남림처녀가 원공과 칼싸움을 하여 이김―진음이 활과쇠뇌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함

제 3 장 997

조당에 가시나무가 자랄 것이라는 오자서의 경고―오자서의 머리가 오나라 도성 동문에 걸림―월나라 군사들이 폭풍우 때문에 오나라에 들어가지 못함―문종이 범려의 충고룰 듣지 않음―문종과 오자서가 함께 조수의 신이 됨흰수레와 백마를 타고 밀려오는 조수 위에 서있는 오자서―동정호의 범려어―도주공이 아들을 구하려 함―축계옹이 닭을 기르다가 선인이 됨―축계옹과 도주공

제 4 장 1015

간장과 막야가 보검을 만듦―오홍와 호계의 피를 섞어 금구를 만듦―왕비가 낳은 쇠와 쇠를 먹는 점승의 쓸개―

초왕이 구실을 붙여 간장을 죽임―미간척이 보검을 찾아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 함―검은 옷을 입은 사나이의 계책-삶아도 물러지지 않는 용사의 머리-세 개의 머리가 서로 물어뜯는 광경-‘삼왕묘’

제 5 장 1031

‘ 오왕회여’, ‘회잔’과 왕여어-동해 조기의 기원-자옥과한중―창포를 먹은 한종과 한종리―송 강왕이 무두관을만듦-열두 글자의 수수께끼―청릉대의 나비춤-‘오작가'-상사수와 한붕조

제 6 장 1045

동물도 음악듣는 것을 좋아함-바다에 사는 '방자춘선생’―아와 종자기―영척이 소를 먹이며 밤에 노래를 부름―제 환공의 용인술―다섯 장의 양가죽으로 백리해를 데려움-화려한 당상에 울려퍼진 노파의 노랫소리―피리소리가 백학과 공작을 불러움-봉황대의 피리소리―화산 옥녀의 세숫대야

제 7 장 1060

귀곡선생의 문하생들―소진과 장의가 힘써 스승을 찾음―이상한 졸업시험―두명의 동자가 꿩으로 변하여 날아감―커다란 가래나무에서 푸른 소가 뛰쳐 나옴―‘새의머리는 하얗게 하고 말의 머리에 뿔이 돋게 하라'-연태자단이 모험을 거쳐 자기 나라로 돌아옴-전광선생이 용사를평함-형가가 작은 모욕을 능히 견디어 냄―태자 단이예로써 형가를 대함―가가 진시황을 살해하려 함―기이한 거문고 노래 소리가 진시황을 구함―‘하얀 무지개가해를 꿰뚫었는데’ 겨우 절반만 뚫음

제 8 장 1077

아득한 선산에 관한 전설―안기생이 커다란 대추를 먹음—불사초가 궁정 뜰의 억울한 영혼을 살려냄―완거국의나주―서복이 신선을 찾으러 떠나 돌아오지 않음―대핵

산과 소핵산-신녀가 진시황의 얼굴에 침을 뱉음-산을헐어 바다를 메운 왕은―기가다의 신이 진시황 대신 기둥을세움―‘지시’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

제 9 장 1093

구산탁과 간산편―만희량-‘한 사람의 목숨으로 만 명의목숨을 대신함'―박 속에서 나온 여자아이―잘못하다 물에 빠져 맺어진 남녀―맹강녀가 남편을 찾아 가다가 강물을 손바닥으로 쳐서 말려버린 이야기―까마귀가 맹강녀에게 길을 가르쳐줌―울어서 무너진 장성 아래에 백골이 묻혀있었음―진시황이 맹강녀를 위해 했던 세 가지 일들―맹강녀가 남편을 위하여 압록강에 빠져죽은 이야기

제 10 장 1109

아방궁, 장적과 옹중―진시황 무덤을 만드는데 필요한 커다란 돌―매장된 기술자들이 ‘원비’를 세움-유권현이 물에 잠겨 호수가 됨―단계현의 용모―진시황에 관한 여러 가지 신화전설들

역자 해제 • 1157

참고문헌 • 1173

찾아보기 인명, 지명 • 1179

획순 • 1187

중국신화전설( I )

차례

책 머리에 • 19

일러두기 • 22

저자 서문 · 35

1 도론편

제 1 장 45

신화는 공상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신화의 기원과 노동의 관계`~신에게 반항하는 신의 출현

제 2 장 50

신화와 종교의 관계-종교의 기원―원시인의 종교관념―토템주의__무술-신화와 종교의 구별과 그 상호변화

제 3 장 58

중국신화가 단편적으로 남게 된 이유-신화의 역사화_신화의 보존과 변화에 대한 시인, 철학가의 역할-역사가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신화를 보존함

제 4 장 66

신화자료를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고서 : 산해경의 저작 시기-산해경은 〈고대의 무서〉――-산해경의 그림과 문자―一산해경에는 산만함과 생략된 부분이 많다는 결점이 있음―산해경의 문자 부분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함

제 5 장 79

신화는 과학의 선구-어떤 신화들은〈환상적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음-이 방면에 있어서의 보기 들―――〈항아분월〉―신화의 객관적 진리에 대한 탐구가 과학 문명의 진보를촉진시킴

제 6 장 86

중국신화의 몇 가지 특색 : 신화 속에 울리는 노동의 메아리―자기 희생, 강인한 정신-폭군의 전제에 대한 반항, 혼안 자유의 추구는 계급사회에 들어와서 신화의 두 가지 특색

제 7 장 93

선화가 신화에 끼친 영향-〈항아분월〉은 최초로 선화화된 신화-황제, 우와 서왕모 신화의 선화화-동방과 서방선화의 기원-선화는 신화의 정신과 다르다-상황에 따라 선화도 구별됨 : 신화의 범위에 넣을 수 있는 선화

제 8 장 103

좁은 의미의 신화에서 넓은 의미의 신화로__-후세에 신화가 생기는 원인-고전학파의 신화와 전설에 대한 구분――—전설이 신화와 구별되지 않는 것은 넓은 의미의 신화개념으로 나아가는 첫걸음-넓은 의미의 신화는 신화발전의 필연적 추세-그것이 포함하는 내용-신화에 대한 간단한 정의와 그것의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발전 상황

제 9 장 108

중국신화의 후대에 대한 영향-시경과 초사――-목천자전—송옥의 고당부와 신녀부-한부-한위육조의 시가―당나라 소설――-이백, 이하, 이상은 동의 시-송, 명의 소설-서유기와 봉신연의――-이여진의 경화연一이랑신에 대한 세 가지 신화극-신화에서 소재를 취한 근대희곡-곽말약의 시극과 노신의 소설-모택동의 시사

제 10 장 119

신이 지상으로 내려오고 인간이 하늘로 올라가는 문제―-―신화

는 역사화로 인해 내용이 더 늘어났다-고대사의 일부분은 신화로 환원되어야 함-신화 정리작업에서 생기는 문제들―역사의 물줄기를 따라 신화를 정리함-정리작업은 연구 작업의 일부분-신화정리의 두 단계 : 이어붙이기와 녹여서 새로 만들어내기-새로 만들어낼 때의 주의할 점 두 가지

2 개벽편

제 1 장 141

굴원이 천문에서 제시한 문제들――긋숙홀이 혼돈에게 일곱 개 의 구멍을 뚫어줌一~음양 두 신이 천하를 경영함-거령이〈산천을 만들고 강물을 흐르게 했음〉――-홍수를 다스리다가 게으름을 피워 벌을 받은 부부_―-귀모가 자기의 자식들을 잡아먹음-종산의 촉룡신―_-〈人日〉의 유래

제 2 장 150

용구 반호의 고사-반호부터 반고까지_반고의 천지개벽-반고의 신통력과 그 변화__-반고와 촉룡신――-반고가묻힌 곳

제 3 장 157

제신이 인류를 창조함――후}대 그림 속의 복희와 여와_뇌공이 갇혔다가 풀려남―一이빨 하나의 위대한 작용_복희와 여와가 호리박 속에 숨어 대홍수를 피하다__-오빠와 여동생의 결혼-인류의 유래

제 4 장 170

화서씨의 나라-__뇌택가의 거인 발자국_여러 가지 하늘 사다리_도광의 들판의 건목_목신이자 생명의 신인 구망_복희의 창조와 발명_〈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켰다는〉오래된 전설

제 5 장 181

복희의 후손――令중군과 사족의 투쟁――-칼을 던짐-흙으로 된 배를 탐一_-염수 여신의 포위――一늠군이 염수의 여신울 활로 씀―_―늠군이 이성을 세움

제 6 장 188

여신이 황토로 사람을 만듦――-여와가 혼인제도를 만들어냄―혼인의 여신울 모신 사당 앞에서의 잔치―一우주의 대변동-〈여와보천〉―~〈황금시대〉였던 상고시대-생황, 노생과〈도월〉-율광지야의 열명의 신인들―·~ 은퇴

제 7 장 197

소호의 탄생신화――-재미있는 새들의 왕국-바다에 버려진 금술-소호와 욕수의 직책―-―국왕 추가 벌을 받음 ―소호의 후손들___역귀를 몰아내는 대나 유희, 궁기가고를 잡아먹음

제 8 장 209

전욱과 우강-전욱이 중려에게 하늘과 땅의 통로를 끊어버 리게 함-예법을 중시한 전욱-전욱의 후손과 그의 아 들들-고확조――-부엌의 신 궁선-팽조 장수의 비밀 ―전욱이 저파룡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함-전욱이 죽은 후의 기이한 변화 제 9 장 224 신과 인간 사이에 거리가 생김-인간에게 재앙을 가져다주는 괴상한 짐승들-이상하지만 해를 끼치지 않는 생물들―약용의 동물과 식물――-옹혈, 구종과 도돌-산림과 물가의 귀신들-선량한 천제 제대一―-길신 태봉

제 10 장 237

신들의 나라 전쟁-공공의 신하:상류와 부유―一-공공의 아들들――-전욱의 폭정-공공과 전욱의 전쟁-공공이 화가 나 부주산울 들이받음一~명칭 -공공대의 모습

제 11 장 243

큰 게와 능어―一一귀허의 오신산一―-해신이자 풍신인 우강—용백국 대인의 농담_선산의 소문

3 황염편

제 1 장 263

태양신 염제가 백성들에게 오곡을 심는 법을 가르침-의약 방면에 있어서 염제의 공헌-염제의 후손들-제녀상―무산의 아침 구름과 저녁비-~요희가 대우를 도와 홍수를 다스림――-정위가 바다를 메움

제 2 장 276

황제(黃帝)와 〈황제(皇帝)〉-곤륜산의 제도-공중의 꽃밭―시육―__불속에서 사는 쥐와 화완포-요염한 무라신 ―황제가 잃어버린 검은 구슬을 찾은 상망――-진몽씨의 딸 이 검은 구슬을 훔쳐감-――그 검은 구슬이 삼주수로 변함

제 3 장 289

오방 상제-고와 홈바가 보강을 모살함-벌을 받은 이부의 신하 위――-신도와 울루-야유신-천지 귀신의 사정을 모두 아는 백택수-황제의 자손들-~황제가 서태산에서 천하의 귀신을 모두 모이게 함-진 평공이 청각을 들음

제 4 장 300

치우에 관한 여러 가지 전설들一_석 k 제와 염제의 전쟁­

치우가 염제에게 보복을 종용함―-―치우가 묘민을 이끌고 황제를 공격함-쌍방 군대의 진용-황제가 안개를 뚫고 나옴―― 1 이매망량이 옹룡의 울음소리를 무서워함-천녀 발과 옹룡의 공훈_一-사람들에게 쫓겨난 한발-기이한 북

제 5 장 315

유도를 지키는 자―~〈과보축일〉-과보가 죽은 뒤의 유

적-현녀가 황제에게 병법을 전해 줌-황제가 치우를 죽임 ―――풍림, 염지와 치우 묘___각저희 -치우와 도철-상제 아들들의 걱정

제 6 장 326

승리를 축하하는 〈강고곡〉――-잠신이 비단실을 바침―-―잠마이야기-황제와 유조의 양잠에 대한 공헌__―우랑 직녀 의 이야기 -효자 동영과 칠선녀 이야기

제 7 장 339

〈우공이산〉_~형천이 노래를 만듦-머리가 잘린 형천一황제와 염제 전쟁의 여파

제 8 장 348

황제의 창조 발명품-영륜과 홍애 선생-〈윤수작경〉―유부, 뇌공과 기백_~〈창힐조자〉-황제의 유랑­형산 아래에서 보정을 주조함-황제가 용을 타고 승천함―광성자이야기 -영봉자가 불길울 타고 올라 신선이 됨一마사황과 기타 선인들―-소녀가 황제를 위해 거문고를 뜯음__-〈닭이 하늘에서 울고 개가 구름 속에서 짖는〉재미있는 이야기

4 요순편

제 1 장 373

갑골문으로 본 제준의 모습-제준의 아내 : 태양의 여신과 달의 여신――-제준이 오색조와 친구가 됨__-오색조, 봉황과 현조-제준의 죽림-제준의 후손들―一-교수가 자신의 민첩한 손놀림을 사용하지 못하게 됨

제 2 장 384

제곡이 봉조 천작에게 춤을 추게 함-〈매일 서로 싸운〉형제-꿈속에서 태양을 삼킨 제곡의 비――-〈하늘이 현조에

게 명해 상이 생겨나게 됨〉――」얼음판 위에 버려진 아이_후직이 사람들에게 오곡을 심고 기르는 법을 가르침_후직이 하늘나라의 곡식 씨앗을 인간세상으로 가져옴_후직이 묻힌 곳

제 3 장 394

야채국과 거친 밥을 먹었던 요_一구경협, 삽포와 관월사­ 신양이 법관 고요를 대신해 판결을 내림――-다리가 하나뿐인 기의 음악 창작-요괴를 없애는 중명조-선인 악전―격양가를 부르는 노인―__허유와 소부-단주에 관한 신화전설

제 4 장 406

고수의 괴이한 꿈_순과 상――-고아의 고통-순이 천 자의 사위가 됨一―국악당들의 음모一-―새가 불길 속에서 날아나옴――-우물 속에서 용으로 변한 순_듬직한 형과 딱한 동생

제 5 장 419

과수가 그림을 그림-__또 한 번의 음모가 실패로 돌아감―순이 요의 시험을 겪음一一-착한 마음이 악당들의 가슴을 녹임――-순이 오현금을 뜯으며 남풍가를 부름_순의 죽음―상강에 남은 슬픔一―-위사에 관한 이야기-비정신―소명과 촉광一―던론의 후손들

5 예우편(상)

제 1 장 435

열 개의 태양이 가져온 고통-해가 뜨는 모습___태양의 어머니 희화가 자신의 아들들인 태양을 하늘로 내보냄___아들들의 장난――-여신의 신통력-독특한 기우제―~못된 태양이 여무를 말려 죽임-제준이 천신 예를 인간세상으로 보내 재앙을 없애게 함

제 2 장 445

에가 열 개의 태양을 쏘다-예가 알유 를 죽이다___예와 착치와의 싸움-예가 구영을 죽임-대봉이 예의 손에 죽음-예가 거망을 죽임-거대한 산돼지 를 잡다――-상제께서 예가 바친 산돼지 를 먹지 않음-예와 그의 아내 항아와의 불화__-예 의 유랑

제 3 장 458

예와 복비의 만남――-시인이 묘사한 복비―_복비가 우울했던 이유-방탕했던 수신 하백-하백에게 여자들을 바침―하백이 담대자우에게 모욕을 당함一―-두 가정의 내분―하백의 밀정들__가 하백의 왼쪽 눈을 쏘다

제 4 장 471

탕아 집으로 돌아오다―一-사신의 그림자―-서왕모 전설―약수와 불꽃으로 둘러싸인 곤륜산-예가 서왕모에게서 불사약을 얻다――유황이 항아를 위해 점을 쳐줌――항아분월―—-아름다운 선녀가 못생긴 두꺼비로 변함-월궁에서의 처량한 나날들

제 5 장 481

자멸의 길로 들어서는 예-봉몽이 예에게서 활쏘는 법을 배움――-숲속에서 날아온 화살―__ 복숭아나무 방망이에 맞아죽게 된 예-척곽, 종규(終英)와 종규(鐘旭)一~귀신돌의 우두머리 종포신

6 예우편(하)

제 1 장 497

역사에 보이는 홍수에 관한 기록들_백성들의 고통을 불쌍하게 여긴 곤-―_올빼미와 거북이의 꾀―~상제의 식양을 훔쳐내 치수를 하다_곤이 불의 신 축융에게 죽음을 당하다―—규룡 우의 탄생―__곤의 변화에 관한 여러 가지

전설 __- 곤이 서방으로 의사를 찾아 떠남――-시인의 탄식

제 2 장 509

우가 상제의 명령을 받음-우가 여러 신들을 모이게 해 공공을 쫓아냄-―우가 방풍씨를 죽이다_하백이 우에게 치수의 지도를 바침一一-복희가 우에게 옥간을 줌一―-잉어가 용문을 뛰어오르다_삼문협에 남아 있는 우왕의 자취_우가 무지기를 항복시킴__-착개협과 참룡대――-무산, 영산, 운우산――겨止익과 그의 새 모양을 한 자손들

제 3 장 522

구미호의 상서로움_우와 도산씨 딸의 결혼_환원산의 곰과 숭고산의 돌_우가 구주 여러 나라를 돌아다님_북극의 선향―一-우가 머리 아홉 달린 괴물 상류를 죽임_대장과 수해가 대지의 면적을 측량함

제 4 장 532

천제가 우에게 원규와 신마를 내려줌-~우가 구정을 주조하여 사람들에게 조심해야 할 것들을 알려줌___진시황이 사수에서 보정을 건져내다_우가 치수할 때의 고통스러웠던 일들_우의 죽음_식량이 홑어진 곳―一구尸여량

제 5 장 540

대인과 대인국에 관한 전설·~소인국에서 인삼과까지―_­촉씨와 만씨의 전쟁-장수하는 대인과 소인-――군자국―헌원국__-백민국의 승황과 기고국의 무늬있는 말_삼면일비국, 호인국_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무계국_장생불사의 선약을 찾으러 떠남

제 6 장 554

결흉국과 비익조_교경국_효양국의 공거인_총명한 성성이가 혼이 남_기설국_시훼국과 착치국――심·수 국_장비국―-―책을 읽고 예의를 아는 흑치국_현고국 과 우사첩 -모민국_기종국_구영국과 심목-~박보국――산섭이국_북해의 신들과 신기한 여러 모습들_

무장국_심목국_유리국_귀국과 부근의 귀신들_장각국一-―일비국_삼신국과 형산의 황조 혹사

제 7 장 570

우민국과 난민국_환두국_―염화국―――나국一一수삼묘국―__질국―一-독을 뿜는 벌레를 잡아먹는 역민국―一군흉국 사람들의 가슴에 구멍이 뚫여 있는 이유_사유국의 남녀_구미호가 사는 청구국―~노민국一_-고야국의 선인들―一-반호와 견융국_숙신국과 이상한 나무 웅상수___옥민국의 풍요롭고 즐거운 모습_―구여자국_무함국_장부국_~수마국과 그 부근의 두 여무_봉황과 함께 사는 맹조국

제 8 장 583

잠총과 어부――{물길을 따라 올라온 아상한 시체_별령의 치수_망제가 새로 변한 이야기___금우, 역사와 미녀_―이빙이 교룡과 싸움_이랑신에 대하여-~백성들이 이빙 부자를 성대하게 제사지내며 모심

7 하은편

제 1 장 605

대악지야에서 하계가 지은 노래극_맹도와 혈의___계의 방탕한 생활_어린시절의 후예__-초호보가 후예에게 활쏘기를 가르침_허물어진 집의 부엌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슬퍼함――-후예와 오하――-〈큰 산돼지〉와 〈검은 여우〉―한착과 현처가 후예를 모살하기로 함_소강이 나라를 다시 찾음

제 2 장 617

공갑이 평민의 아이를 데려다 기름___〈파부지가〉___용과 하왕조의 관계_유루가 공갑에게 용을 끓인 것을 먹게 함—공갑이 사문의 고집을 견디어내지 못함___공갑의 죽음

제 3 장 624

하걸의 방탕한 생활_장야궁이 모래 바람에 휩쓸림――-사 람을 잡아먹는 교첩―一-왕성에 울리는 시민의 노래一一-황하가에 두 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오름_공상의 어린 아기 ―유신국의 딸이 시집감__-이윤이 성탕 앞에서 요리 기술을 뽐내다

제 4 장 633

은 민족의 발흥――-왕해와 왕항이 유역국에 소와 양을 몰고가 교역을 함――강해가 밥을 먹는 모습을 그린 그림一―­형제가 애정 분규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감――-피로 물든 침대 위에 왕해의 몸이 여덟 조각으로 잘리다一_-왕항이 유역국 왕에게 몰수한 소와 양을 반환해 달라고 요구함-하백이 상갑미를 도와 유역을 망하게 ――-유역국 사람들이 하백에 의해 묘민이 됨-초원의 자손들이 하백에게 술과 양고기를 대접함

제 5 장 647

〈그물의 삼면을 열어준〉 탕왕一―-탕왕이 하대에 갇힘 -총 애를 받지 못하게 된 말희가 이윤과 교유함-탕왕이 하경 의 머리를 벰-화신 축융이 하걸의 도성을 불타게 함­ 폭군의 말로-탕왕이 상림에서 기우제를 지냄 제 6 장 656 무정의 이상한 꿈-부암에서 현인을 찾아내다___〈성인 굴〉과 〈부열성〉――-걸주 고사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주의 생김새와 재기, 말재주-주지육림-잔혹한 형벌:포락-폭군의 여러 가지 못된 행동들 -유리에 갇힌 주문왕__-아버지가 아들을 삶은 국을 마심-유신국의 미녀가 위기에서 구해 줌-〈토자총〉

재 7 장 670

근시안 주문왕-문왕의 꿈속에 나타난 현자-태사가 문왕을 위해 점을 침-~문왕이 위수가에서 강태공을 만남

――-강태공의 고달폈던 처지一~태공과 문왕에 관한 여러 가지 전설――-산신의 딸이 문왕에게 하소연함

제 8 장 678

강태공이 주무왕을 도와 군사를 일으켜 주를 치게 함-백 이와 숙제가 군대의 무리와 시비를 벌임―-―사해의 해신과 하백, 무사가 모두 와서 도움-8백 제후가 달밤에 황하를 건넘一―-매가 전쟁터 위를 날아다님-폭군의 최후――-달기에 대하여-수양산 두 현자의 최후

역자 해제 · 693

참고문헌 · 709

찾아보기 인명 • 714

지명 • 725

획순 • 728

주진편 • 상(8 周秦篇 • 上)

제 1 장 주( 周 ) 무왕( 武王 )이 주( 係寸 )를 토벌하여 천하를 통일하였으나 그의 증손 인 소왕(昭 王 )에 이르자 주 왕조의 위세와 덕망도 점차 쇠퇴해 가기 시작 했다 . 그 당시 남방에 월상국(越 袋 國)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는데 소왕에 게 몇 마리의 흰 꿩을 바치고자 하였다 . 그러나 길이 험해 미처 보내오지 못하자, 놀기 좋아하는 소왕은 친히 시종들을 거느리고서 꿩 몇 마리를 받기 위해 남방으로 갔댜 소왕 일행은 가는 도중에 많은 나라들을 지나 가게 되었는데 그들은 그 나라에 상당히 큰 폐를 끼치게 되었다 . 그래서 모두들 소왕 일행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초(楚) 나라 사람들의 불만이 컸다. 그래서 그들은 묘책을 생각해 두었다가 소왕 일행이 돌아올 때 톡톡히 한번 혼을 내주기로 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소왕과 그의 시종들은 꿩에다가 토끼 몇 마리까 지 얹어들고 신나게 돌아왔다. 그들이 막 한수( 漢 水)가에 이르렀을 때였 댜 하늘 빛이 이상하게 어두워지는 것이 큰 비가 내릴 것 같기도 했고 또 무슨 일안가가 일어날 것 같기도 했다. 우리 안에 들어있던 꿩과 토끼들 은 이리저리 껑충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런데 초나라 사람들이 소 왕 일행을 위해 일찌감치 준비해 둔 배가 강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 다. 그들은 비가 내리면 옷이 젖을까봐 걱정이 되어 급히 배의 선실로 들

어갔댜 하늘은 여전히 어두침침했으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 배가 떠나 강 한가 운데까지 왔을 때였댜 물살이 가장 센 그곳에서 갑자기 뭔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고 이어서 처참한 비명소리들이 들려왔다. 소왕과 그 의 시종들이 탄 배가 모두 조각조각 부서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과 말 , 화려한 수레며 꿩, 그리고 토끼들까지도 순식간에 강물에 빠져 거친 물살 에 휩쓸려 내려가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초나라 사람들의 계책이었다. 그 들은 아교로 교묘하게 붙인 배를 소왕과 그의 시종들에게 바쳤고, 따라서 그 배를 탄 소왕 일행이 강의 중간 쯤에 이르렀을 때에 굳었던 아교가 물 에 녹으면서 배가 부서지는 참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소왕의 마부는 신여미( 辛餘師 )라고 하는 사람이었는데 팔이 길고 힘이 센 장사였다 . 그는 급류 속에서 있는 힘껏 헤엄치며 이미 죽어가고 있는 주인, 소왕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는 한쪽에는 소왕을 끼고 다른 쪽 손 으로는 열심히 물살을 헤쳐 마침내 한수를 건넜다 . 그러나 그가 막 강가 에 올라와보니 방금 그렇게도 기뻐했던 불쌍한 소왕은 눈의 흰자위를 드 러낸 채 자신의 품속에서 숨져 있었다 . 주인을 위했던 신여미의 충성심은 나중에 후(侯)로 봉해져 보답을 받는다. (1) 소왕은 그리하여 죽은 채로 귀 국하게 되었고 , 계략에 걸려들어 죽었기 때문에 창피하다고 하여 주나라 사람들은 소문도 내지 않은 채 슬그머니 장례식을 치르고 말았다 . ”

1) 『楚辭 』 , r 天 問』 : < 昭后成游, 南 土윷 底 , 歡 利 維 何, 逢彼 白 維 .> 王逸 注 : <言 昭 王背 成王之制而出游, 南至於 楚 , 楚 人況之而遂不 還 . 以 爲越袋 氏 獻白 雄, 昭 王德哀不 能 致 , 欲親往 逢 迎之.> 『 竹 합 紀年 』 • 『 史記 』 , 『周 本 紀』 • 『 呂氏 春 秋 』 , 『音初 篇 』 , 그리고 『 帝 王 世紀 』 참조.

소왕이 죽고 나자 그의 아들인 만(滿)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유명 한 목왕( 穆王 )인데 그는 아버지인 소왕보다도 더 노는 것을 좋아했고 곳 곳을 돌아다니는 것을 즐겼다. 그 당시 서방의 머나먼 나라에서 화인(化人)이라고 하는 마술사가 왔다 . 그는 재주가 아주 유별나서 불 속에 뛰어들어도 머리카락 한 올 타지 않

았으며 , 공중에 서있어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고 도시 하나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겨놓을 수도 있었다. 또 조금도 거침없이 벽을 뚫고 지나갈 수도 있었다 목왕은 그런 그를 보고 천신( 天神 )이 하계로 내려온 것이라 고 여겨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를 환대하였다. 그러나 그 괴상한 화인은 목왕이 마련해 준 화려한 침실이며 맛있는 음식, 좋은 음 악과 미녀들에 대해서 조금도 만족해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그것들이 너무 하찮은 것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목왕을 초대하여 자신이 사는 곳에 가보자고 하였다 . 목왕이 그의 옷소매 를 잡으니 곧바로 하늘로 치솟아 구름 속에까지 들어가서야 멈췄다. 화인 은 그를 이끌고 자신이 시는 궁전으로 갔다. 화인의 궁전은 그야말로 금 빛 찬란했다 . 온통 진주와 옥으로 장식되어 있는 그곳에서 목왕이 보고 듣고 먹은 모든 것은 인간 세계에서 구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그 궁 전을 구경하다가 자신의 궁전을 내려다보니 그 초라한 모습이란 정말 진 흙덩어리와 썩은 나무로 엮어 놓은 양 한심해 보였다. 화인은 다시 목왕 을 데리고 어느 곳인가로 갔다. 그곳엔 아무 것도 없었고 다만 가지각색 의 아름다운 빛과 색채들이 가득· 차 있었는데 눈앞이 어지러울 지경이었 댜 게다가 온갖 듣기 좋은 음악소리까지 들려오니 마음이 다 혼미해지려 고 했다 . 목왕은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어 화인에게 자신을 다시 인간세계 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화인은 손으로 목왕을 밀었고 목왕은 공중에서 떨어지면서 후다닥 깨어났다. 눈을 뜨고 보니 자신은 여전히 별 전(別 殿 )에 얌전히 앉아 있었고 좌우의 시종들도 아까 보았던 대로였다. 탁자 위에는 조금 전에 따라 놓은 술이 그대로 있었고 차려놓은 음식들도 아직 따끈따끈했다 목왕은 옆의 사람들에게 물었다. 내가 방금 어딜 다녀왔지?」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다. 「아무데도 가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잠시 넋을 잃고 앉아 계시더군요」 곁에 앉아 있던 화인도 말했다. r 저와 왕께서는 그저 한바탕 정신적인 유람을 다녀온 것 뿐입니다.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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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목왕(『炎黃 』 )

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지요」 이렇게 되자 목왕은 돌아다니고 싶은 욕구가 더욱 강하게 일어났다. 정 신적인 유람이 이렇게 재미있는 것이라면 실제로 각지를 돌아다니며 구 경을 하는 것은 그 얼마나 홍미로울 것인가! 그래서 그는 국사며 백성은 돌보지도 않고 팔준마(八駿馬)가 끄는 마차를 타고서 천하를 주유하기로 결심했댜 2)

2) 『列子』, 「周穆王』, <周穆王時, 西極之國有化人來, 王敬之若神, 事之若君. 化人以 爲王之宮室卑柄而不可處, 王之蔚撰膳蝶而不可要, 王之嬪御膳惡而不可親, 不得已 而臨之. 居亡幾何,賜王同游, 王執化人之柚, 騰而上者中天, 乃止. 흄及化人之宮, 化 人之宮橫以金銀, 絡以珠玉, 出雲雨之上而不知下之操, 望之若屯云焉. 耳目所觀聽, 鼻口所納曜 皆非人間之有 王冊而視之, 其宮樹若累魂積蘇焉. 化人復讓王同游, 所 及之處 仰不見 日 月 , 倍不見河海, 光影所照, 王 目 賊不能得視 ; 音뽑所來, 王耳亂不 能得聽 意迷精喪, 請化人求遠 化人移之, 王若殖虛焉. 卽病, 所坐猶向者之處, 侍御 猶向者之人. 視其前則酒未淸, 看未勝, 王問所從來, 左右曰 ; r 王默存耳』 化人曰 ; r 吾與王神游也, 形矣動哉!』 王大稅, 不値國事, 不樂臣妄, 燁意遠遊.>

목왕의 이 팔준마에게는 범상치 않은 내력이 있었다. 그 당시 조보(造 父)라고 하는 유명한 마부가 있었는데 이 팔준마는 바로 그가 과보산(奎 父山)에서 잡아온 야생마를 길들여 목왕에게 바친 것이다. 이 야생마들은 본래 옛날 무왕이 주(射)를 토벌하고 나서 화산(華山), 즉 과보산에 풀어 놓았던 전마(戰馬)들의 후손이었다. 그런 내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말 들은 드세면서도 한편으로는 명마의 혈통을 간직해 품위가 있어 보였다 .3) 조보는 말을 잘 모는 마부였을 뿐 아니라 또 말을 기르는 데에도 뛰어난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팔준마는 바로 그가 자신의 기술을 발휘해 길러낸 말들이었는데 그들은 각각 화류(驛~) • 녹이(綠耳) • 적기(赤駿) • 백희(白 儀) • 거황(渠黃) • 유휘(諭輝) • 도려(盜園) • 산자(山子)라고 불렀다 .4) 어떤 책에 보면 그 팔준마에게 더욱 아름다운 이름들을 부여하기도 했다. ® 예 를 들어 팔준마 중의 어떤 말은 너무나 빨리 달려서 발에 흙이 묻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고 또 어떤 말은 새보다도 더 빨리 날았다고 한다. 또 하룻

3) r 黃炎篇』 제 5 장 참조 4) 『穆天子傳』 卷 1 과 『列子』, 「周穆王」篇 참조

밤에 만리를 달리는 말이 있었고, 등에 날개가 돋아 있어서 하늘을 날아 다닐 수 있었다고도 하는 동 모두가 그들을 신비롭게 서술해 놓고 있댜 5 1 조보가 이런 팔준마를 목왕에게 바치니 목왕은 그 말들을 동해도( 東 海島) 의 용천(龍川) 부근에서 기르게 했다. 그곳에는 <용추(龍魯)>라고 하는 풀이 자라고 있었는데 보통 말도 이 풀을 먹으면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었다고 하니 팔준마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옛말에 < 한 줄기 용추만 있으면 용마가 된다>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여기 나오는 <용추 > 는 바로 동해도에서 자라는 그 신기한 풀을 가리킨다 . 6 1

5) 『捨遺記』 卷 3, <王數八龍之駿, 一名絶地, 足不錢土 ; 二名翻羽, 行越飛~ ; 三名 拜脣 夜行萬里 ; 四名超影, 逐 日 而行, 五名諭輝, 毛色炳耀 ; 六名超光, 一行十影 ; 七名騰霧 乘雲而 1P ; 八名陝翼, 身生肉想.> 6) 『述異記』 券上, <東海島龍川, 穆天子發八駿處也 ; 島中有草名龍:SB, 馬食之, 一 日 千里, 古語云 ; r 一株龍器, 化爲龍馬句』>

조보는 그의 스승인 태두(泰豆)에게서 말을 모는 기술을 배웠다. 태두 는 말모는 기술을 가르치기 전에 우선 땅위에 나무 막대기들을 세워놓았 는데 막대기 사이는 발 하나를 밀어넣기가 어려울 정도로 촘촘했다. 태두 는 조보에게 그 막대기들 사이를 쏜살같이 달려 왔다갔다 하게 했다. 넘 어지거나 스쳐서도 안 되었다. 조보는 사흘이 지나자 드디어 그것을 완전 하게 해낼 수 있었고 스승인 태두까지도 감탄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너는 정말 영민하구나, 무엇을 가르쳐도 금방 배울 수 있겠다!」 그래서 태두는 말을 모는 자신의 기술을 조보에게 가르쳤다. 조보는 스 승이 자신에게 가르쳐 준 것을 열심히 연구하고 부지런히 연습하여 마침 내 기술이 뛰어난 말몰이꾼이 되었다 71 주 목왕이 천하를 순수하러 떠나게 되니 그는 조보에게 팔준마가 끄는 수레를 끌게 하였다. 그리고 시종 몇몇을 거느리고 좋은 날을 선택하여 길을 떠났다. 그는 북방에서 서방으로 길을 잡아 갔고, 가면서 양우산(陽 舒山)에서 수신 하백을 만났다. 또 휴여산(休與山)에서는 성품이 온화한

7) 『列子』, 『湯問』, <泰豆乃立木爲塗, 槿可容足, 計步而置, 履之而行,超走往還, 無跋失也 造父學之三日, 盡其巧, 泰豆暎曰 ; r 子何其敏也, 得之捷平! 凡所御者, 亦如此也……』>

제대( 帝臺 )를 만났다 .81 곤륜산에서는 황제( 黃帝 )의 궁전을 구경했으며 적 오족( 赤烏族 )의 나라에 가서는 그들이 바친 미녀를 얻었다. 그리고 혹수 ( 黑 水)에서는 자신을 잘 대접해 준 장비국( 長將國 )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 기도 했다 그런 후에 여덟 필의 준마가 이끄는 수레는 곧바로 대지의 서 쪽 끝, 태양이 지는 엄자산(血 庵 血炫 山) ® 으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그는 오랫동 안 보고 싶어했던 서왕모(西 王母 )를 만나게 되었다 . 91

8) 『 晉 書』 , r 束哲 傳』, <『穆 天子 傳』 五 篇 言 周 穆 王游行四海, 見帝 臺 • 西王母.> 이 기 록에 의거하면 晉 나라때 束哲 이 보았던 『穆 天子傳 』 에는 목왕이 서왕모를 만났던 일 이외에 제대를 만났던 일도 있었던 것 같지만 今本에는 이 이야기가 없다, 아마도 빠 져 없어진 듯하다. 9) 『 穆天 子傳 』 卷 3, < 戊 寅 , 天子西征 , 驚 行至於 陽 好之山, 河伯無夷之所都居, …… 吉 日 辛 酉 天子升於昆金之丘 , 以親 黃 帝之宮 …… 赤 烏 之人JC, 好 獻 女於天子 …… 天 子乃封 長 脈於黑水之西河 …… 찾亥 , 至於西王母之邦 . >

목왕은 흰 옥와 검은 옥 , 그리고 가지각색의 비단을 서왕모에게 바쳤고 서왕모는 그 선물들에 감사해 하며 공손하게 받았다. 이튿날 목왕은 요지 ( 瑠 池)에서 연회를 열어 1 0 1 서왕모를 대접했다. 원래 서왕모는 < 봉두난발에 머리장식을 하고 표범의 꼬리에 호랑이의 이빨을 한 >® 야만적인 괴신(怪 神)이었댜 그러나 예( 葬 )가 불사약을 받아간 후로 일천여 년이 지난 지금 은 그런 모습이 많이 바뀌어 상당히 우아하고 예절을 갖출 줄 아는 인물 로 변해 있었다 ® 잔치가 시작되기 전에 서왕모는 잔치를 베푼 목왕을 위 해 악기 반주가 필요없는 노래를 불렀댜

10) 池는 일반적으로 곤륜산에 있다고 하는데(『山海 經』 , r 西次 三經 』, <愛有程(培)水, 其 淸洛洛. > 『 史 記』 , 『大苑傳』 贊 云, <『禹 本 紀 』言 , 昆命上有體泉瑠池 . >) 『 목천자전 』 에서는 弁山 , 죽 崎磁山 부근에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 서술한 것은 『예우편』(상) 제 4 장에서 서술했던 것과 약간 모순된 접이 있다 .

흰구름 하늘 높이 걸려 있어 산그림자 나타나는데 그대는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나네. 그대와의 거리 멀기도 해서

산과 물이 겹겹이 우리 사이에 놓여 있네. 오직 바라는 것은 그대 오래도록 건강해 그 어느 날엔가 우리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마음이 홉족해진 목왕도 노래로 화답했다. 동쪽의 내 나라로 돌아가면 그 땅을 잘 다스리리. 백성들이 모두 잘살게 되면 다시 와 그대를 만나리라. 아마도 삼년이 채 되기 전에 그대의 땅으로 돌아올수 있으리라. 잔치가 끝나자 목왕은 수레를 몰아 엄자산(崎磁山) 꼭대기로 올라갔다. 엄자산은 태양이 지는 곳으로 <엄자(倉鉉)>라고도 불린다. 엄자(倉炫)는 서해의 섬에 사는 엄자(弁炫)신과 이름이 완전히 같다. 엄자신은 사람의 얼굴에 새의 몸을 하고 있었으며 귀에는 푸른 뱀 두 마리를 걸었고 발로 는 붉은 뱀 두 마리를 딛고 있었다 .@ 그 생김새가 북방의 바다 신인 우강 (禹强),® 그리고 동방의 바다신인 우호(禹統)와 비슷하다 그 신은 본래 산신(山神)이었는데 나중에 바다의 신이 되었다고도 한다.JI) 11) 『穆天子傳』 卷 3, <天子遂縣升於倉山.> 郭環注, 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다 . r 大荒西經』云, <西海猪中, 有神, 人面鳥身, 珉兩 靑 蛇, 賤 兩赤蛇 名曰tt- n.> 靜懿行云, <此神形院, 全似北方(海)神禹强, 唯彼作賤兩靑蛇爲

異, 見 r 海外北經J> 이것은 또한 東方海神 禹發와 비슷한데 그것은 다만 두 마리 누 런 뱀을 걸고 있고 두 마리 누런 뱀을 밟고 있는 것이 다룰 뿐이다. 『大荒東經』참조 .

각설하고, 목왕은 엄자산에 오르자 돌로 비석을 하나 세우고 그 비석에 서왕모의 사적을 간단히 새겼다. 그리고 거기에 <서왕모의 산(西 王母之 山)>이라고 새겼댜 바석 옆에는 홰나무 몇 그루를 심었는데 목왕이 친히 삽을 들고 한 그루를 심어 서왕모를 만난 기념으로 삼았다. 이제 드디어 떠날 시간이 되었을 때, 서왕모는 다시 시를 한 수 읊어 목왕에 대한 석별 과 기대의 정을 노래했다. 내가 서쪽으로 와서 이 광야에 살기 시작한 뒤 호랑이, 표범을 벗삼았고 까마귀, 까치와 함께 살았지요. 이 땅을 지키며 떠나지 않은 것은 내가 화하(華夏) 고제(古帝)의 딸이기 때문. 가없은 것은 나의 선량한 백성들, 그들은 이제 그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이곳에 남아야 하지요` 악사들이 생황을불면 음악소리 속에 우리의 영혼이 날아오릅니다. 만백성의 군주이신 당신, 당신만이 하늘의 유일한 희망. 노래가 끝나자 모두들 인사를 나누며 아쉬움을 남긴 채 해어졌다 .1 2)

12) 『穆 天子傳』 卷 3, <吉 日 甲子, 天子賓於西王母, 乃執白圭玄壁以見西王母, 好獻綿組 百純,Oi[三百純, 西王母再拜受之.口乙丑,天子觸西王母於玲池之上. 西王母爲天 子諾曰 ; r 白雲在天,山陵自出. 道里悠遠, 山 )II 間之 , 將子無死, 尙能復來』 天子答 之曰 ; r 予歸東土, 和治諸夏 萬民平均, 吾顧見汝. 比及三年, 將復而野』 西王母又 爲天子哈曰 ; 『祖彼西土, 姜居其野 . 虎約爲群 , 於(烏)聽與處. 嘉命不遷, 我惟帝女. 彼何世民, 又將去子,吹第鼓策, 中心翔翔.世民之子, 唯天之望』 天子遂艦升於弁山,

乃 寄 名遊於弁山之 石 而樹之棟, 眉曰西 王 母之山. > 목왕과 서왕모가 주고 받은 노래 의 뜻으로 보건대 목왕과 서왕모는 마땅히 중국 땅에서 < 祖彼西土 > 한 것으로 보아 야 한다. 이전에 내가 <我惟帝女 >를 <나는 天帝의 딸이다 > 라고 번역하였는데 그것 은 적당하지 않은 해석이었던 것같다. 顧 實온 『穆 天子傳西征 講疏 』에서 서왕모가 <확실히 목왕의 딸>이라고 하였는데 그것 역시 맞지 않는 것 같다 . 그래서 <華夏 古 帝之女兒>라고 해석하였는데 이것이 대충 비슷한 것 같다 . 다만 < 華夏 古帝>가 누 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잘 알 수가 없다 .

목왕이 이렇게 엄지신을 떠나 중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댜 도중에 어 떤 사람이 손재주가 무 척 뛰어난 언사( 個師 )라는 자를 목왕에게 바쳤다 . 목왕은 언사를 불러 물었다 「네게 어떤 재주가 있느냐?」 언사가 대답했다. r 왕께서 분부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만들어놓은 것이 하나 있는데 보시겠습니까?」 목왕이 말했다. 「그래, 나중에 가지고 와서 함께 보자」 이튿날 언사는 이상한 복장을 한 사람을 데리고 와 목왕을 뵈려 하였 다. 목왕은 행궁(行 宮 )에서 그들을 접견하였다. r 그대와 함께 온 사람은 누구인가?」 목왕이 물었다. 「이 사람은 제가 만들어 낸 사람인데 노래도 하고 춤도 출 수 있사옵니 다」 언사가 인사를 올리며 대답했댜 목왕은 순간적으로 무척이나 놀랐다 .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그 사람의 일거일동은 진짜 인간과 조금도 디름이 없었다 그런데 가짜 인간, 즉 만 들어 낸 인간이라니 얼토당토 않은 소리였다 . 하지만 어쨌든 그가 노래하 는 모습을 우선 보고 나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래서 목왕은 늘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랑하는 바(妃) 성희(盛姬)와 궁중의 시종들, 궁녀들을 모두 불러내 그 사람이 노래부르는 것을 구경하게 했다. 그 이상한 사람의 노

래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그는 노래를 부르며 춤도 추었는데 , 머리를 혼드 는 모습이며 가느다란 팔과 다리를 놀리는 모습 모두가 박자에 딱 들어맞 았고 노래 솜씨 역시 제법이었다 . 변화무쌍한 자태로 자연스럽게 노래하 고 춤추는 그 모습 어디에서도 그가 가짜 인간이라는 인상은 받을 수가 없었댜 목왕은 점점 의심이 들었고 슬그머니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r 아무래도 저놈은 진짜 사람인 것이 분명하지……」 이제 노래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 그 괴인(怪 人 )은 목왕의 곁에 앉아 있는 비빈(妃 嬪 )들에게 게슴츠레한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눈알이 쉼 없 이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 마치 그녀들에게 자신의 애정을 나타내 보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목왕은 그 모습을 보고 그자가 진짜 사람이라는 것 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목왕은 자신을 우 롱한 언사를 당장 끌어내어 목을 치라고 명령했다. 언사는 깜짝 놀랐다. 그래서 아무 것도 모르고 여전히 그런 행동을 계속하고 있는 그 괴인을 잡아당겨 목을 비틀었다 이어 손과 발을 잡아 뽑고 가슴도 열어젖혔다 . 알고 보니 그 괴인은 가죽이며 나무, 아교와 칠, 그리고 가지각색의 염료 둘로 만들어졌던 것이었다. 괴인의 몸속에는 창자며 배, 심장과 간, 허리, 페 등의 내장과 뼈, 관절, 그리고 피부와 털, 치아와 머리카락 동 모든 것 이 다 갖추어져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이 다 여러 가지 재료들로 만들어진 가짜였던 것이다 그러나 언사가 그것들을 다시 원래대로 조립하자 미녀 들을 향해 눈짓을 보내던 그 괴인이 다시 만들어져 아까 하던 행동을 계 속하고 있었다. 목왕이 그 광경을 보고는 하도 괴이해 사람을 시켜 괴인 의 심장을 꺼내와 보라고 하였다. 그러자 괴인은 노래룰 부르지 못하였다. 또 간장을 끄집어내니 괴인은 눈이 멀어 동서남북을 분간하지 못하였다. 신장을 떼어내니 이제 괴인은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서야 목 왕은 그 괴인이 가짜 인간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고 기가 막힌 듯이 한숨 올 내쉬었다. r 인간의 손재주가 대자연의 섭리에 이를 수 있다니, 정말 신과 같은 재 주로고!」

목왕은 자신이 탄 수레와 똑같은 화려한 마차 한 대를 준비시켜 언사 를 태우고서 주나라로 돌아갔다 .1 3)

13) 『列子』, 『湯問』, <周穆王西巡狩, 反還, 未及中國, 道有獻工人名個師, 穆王問曰 .; 『若有何能?』 個師曰 ; r 臣 n[( :命所試, 然臣已有所造, 願王先親之』 笠日, 個師議見王, 王曰 ; r 若與借來者何人 II Jf?J 對曰 ; r 臣之所造能個者』 穆王驚視之, 超步僚仰, 信 人也.鎭其願則歌合律,棒其手則舞應節,王與盛姬內御井競之.使將終,借者瞬其目 而招王之左右侍妄. 王大怒,立欲株個師.個師大攝,立部散借者以示王,皆傅會革木 腦漆黑白丹靑之所爲 . 穆王始說(稅)而暎曰 ; r 人之巧乃可與造化者同工平?J 招武車 載之以歸.>

목왕은 귀국하는 도중 여전히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유유자적하게 노닐 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남방의 서 언왕이 모반을 일으켜 낙읍 일 대를 치려한다는 보고를 듣게 되었다 놀란 목왕은 조보에게 급히 수레를 몰게 하고 소수의 날랜 병사들을 거느리고서 하룻밤 사이에 천리를 달려 돌아와 주나라가 처한 위기를 수습하였다. 서 언왕은 기세가 맹렬하긴 했 지만 숨어버리는 것 또한 빨랐다. 목왕이 그렇게 급히 돌아오니 서 언왕 은 얼른 후퇴하여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반란은 싱겁게 평정이 되었는데 그 모든 것이 조보가 수레를 빨 리 몰아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여 목왕은 그를 조성(趙城)에 봉 하였다. 조보는 후에 조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14)

14) 『史記』, 『秦本紀』, <徐個王作亂, 造父爲穆王御, 長縣歸周, 一 日 千里以救亂, 穆王 以趙城封造父, 造父族由此爲趙氏.>

그런데 서 언왕은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꾀했으면서 왜 이렇게 용두사 미 격으로 흐지부지 끝냈던 것일까?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지고 있다. 전설에 의하며 서(徐)나라(지금의 安徽省 酒縣 북쪽에 있었음)의 궁전에 어떤 궁녀 하나가 갑자기 임신을 하게 되었다고 한댜® 그녀는 여러 달이 지나자 알을 하나 낳았는데 그것이 상서롭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물 가에 내다버리고 말았다. 마침 그 근처에 과부할머니가 곡창(鷄蒼)이라고 하는 개를 한 마리 기르고 있었는데 그 개가 물가에 나가 놀다가 버려진

알을 발견하게 되었댜 곡창은 그것을 입에 물고 돌아와 자신의 몸으로 따뜻하게 품어 주었다. 그렇게 하루이틀, 몇 날이 지나갔다. 그러자 기이 하게도 그 알 속에서 어린아이가 태어났다 젤 그 아이는 태어날 때 개처럼 누워 있었다고 하여 < 언( 個 ) > 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 < 언(假) > 이라 는 것은 < 앙({f l) > 이라는 뜻이다 .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그 아이가 태어 날 때 살만 있고 뼈가 없어 자꾸 쓰러졌기 때문에 < 언 > 이라고 불렸다고 도 한다 .151 어쨌거나 본래 그 알을 낳았던 궁녀는 알 속에서 아이가 태어 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녀는 아이를 다시 데려다가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자 총명하고도 자애로왔는데 마침내는 서 군( 徐君 )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 그가 바로 언왕(個 王 )이었다 .

15) 『 尸子 』 ( 輯本 )卷下, < 個 王 有筋而 無 骨 .>

언왕은 왕이 되자 어진 정치를 펼쳤고 이웃 나라와도 화목하게 지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모두 그를 지지하였고 여러 제후들도 그를 칭송하였 댜 그가 다스리는 서국은 나날이 강대해져 갔다 . 그는 목왕처럼 그렇게 국사를 내팽개친 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는 신기 한 물건들을 수집하는 취미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 그래서 눌 사람들을 시켜 깊은 바다에 들어가 괴상한 물고기를 잡아오게 하거나 산속에 가서 이상한 짐승들을 잡아오게 하였고, 그것들을 분류하여 궁전에 진열해 놓 고 톰이 날 때마다 감상하곤 하였다 .1 6 1 물론 이런 취미는 그가 나라를 다 스리는 데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16) 『尸子 』 ( 輯 本)卷下, <徐 個 王好怪, 使人沒深水而 得 怪魚, 入深山而 得 怪獸, 多列於 庭 . >

그 당시 주 목왕이 서방으로 순수를 떠나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니 멍 청한 관리들 때문에 주나라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서 언왕의 나라는 점 점 강성해져 갔고, 서 언왕 자신도 이런 기회를 틈타 주나라를 쳐서 목왕 대신 천자의 자리를 차지해 보고 싶다는 야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는 그 일을 조심스레 진행시켜 갔다. 교통이 불편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진(陳)나라와 채(蔡)나라(두 나라는 각각 지금의 안휘성과 하남성에 있었음)

사이에 운하를 파 그곳을 통해 수로(水路)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 그런데 운하를 팔 때였다. 진흙 속에서 붉은 색의 활과 한 묶음의 붉은 화 살이 나왔다 서 언왕은 그것을 보고 하늘이 내리신 상서로운 징조라고 여겼고, 주 목왕 대신 천자가 되어 보겠다는 야심이 더욱 끓어올랐다. 장 강( 長江 )과 회하( 淮河) 일대의 제후들은 서 언왕이 신궁( 神弓) 과 신전( 神 筋) 을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들 서 언왕에게는 천자가 될 충분한 자 격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앞을 다투어 서 언왕에게로 모여드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수효가 36 국에 달했다 . 서 언왕은 드디어 출병하기 로 결정을 했고 북쪽으로 주나라를 향해 진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서 언왕에게는 야심은 있었으되 그 야심을 실현시킬 만한 박력 이 부족했다 죽 그는 군사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밀고 나가기보다는 여전히 우물쭈물하며 상황을 살피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망설 이고 있는 사이 주 목왕은 서방에서 하루에 천리를 달려 주나라를 구하러 왔으니 결국 그의 소심함은 주 목왕에게 시간과 기회만 제공한 결과가 되 고 말았다 더구나 주 목왕의 기세가 동등한 것을 보고 그에 대항해 싸우 다가는 혈전이 불가피할 것이고 또 그렇게 되면 무고한 백성들이 다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본성이 자애로왔던 서 언왕은 백성들이 그런 재앙 올 당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결국 서 언왕은 목왕의 군대와 마 주치게 될 때마다 뒤로 물러났고 마침내는 팽성( 彭城) 무원현( 武原縣) 동 산(東山) 기슭에까지 후퇴해 오게 되었다. 그 후 서 언왕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으니 그의 개인적인 영옹주의는 이렇게 용두사 미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여전히 그를 존경하였으니 그를 따라 산속으로 들어가 야인(野人) 노릇을 한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해서 이 산은 서산(徐山)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언왕은 그 산의 동굴에다 가 방을 하나 만들고 그 안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살았다. 언왕이 죽은 뒤 에 사람들은 그 동굴 안에 그의 신상(神像)을 세워놓고 그를 모셨다. 전설 에 따르면 그 신상은 무척이나 영험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그 신상에

가서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17 1

17) 『 博物志』, 「異聞』, <徐君宮人振而生卵, 以爲不祥, 棄之水濱. 獨孤母有犬語蒼, 得 所棄卵, 衍而歸 覆暖之, 遂`弗成兒 生時正個, 故以爲名. 徐君宮中聞之, 乃更錄取. 長而仁智 , 襲徐君國. 個王槪襲其國, 欲舟行上國, 乃通溝陳蔡之 r내 , 得朱弓矢, 遂自 稱徐個王, 江淮諸侯伏從者三十六國. 周王間, 造使乘開,一日至楚, 使伐之.個王仁 不忍鬪害其民,爲楚所敗,逃走彭城武原縣東社下,百姓隨之者以萬數.後遂名其山爲 徐山, 山上立石室, 有神銀, 人民祈祥, 今皆見存.>

그러면 주 목왕은 어떻게 되었을까? 전설에 의하면 전쟁이 채 끝나기 도 전에 목왕을 따라 남방으로 가 전쟁을 했던 병사들은 모조리 변해버렸 다고 한다. 군자는 원숭이나 백학으로, 소인은 진흙이나 벌레 등으로 변했 다고 하는데 ) 8) 이것은 아마도 그들이 이겼던 그 전투에서 적지 않은 병사 들이 죽어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주 목왕이 이들처 럼 변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설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얘 따르면 아주 오랫동안 살아 천수를 누렸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병사들처럼 변신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니, 변신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는 평생동안 만족함을 누리며 살았다. 천하를 두루 구경하러 돌아다니면 각 나라에서는 숱하게 많은 보물들을 바쳐왔다. 거 국(渠國)에서 바쳐온 화제경(火齊鏡) 같은 것은 보물 중에서도 이름난 것 이었다 이 거울은 크기가 두 자 여섯 치나 되었는데 밤에 보아도 대낮처 럼 똑똑하게 보였다 또 거울을 보고 이야기를 하면 거울 속의 사람도 그 의 말에 대답을 하였다 .19 ) 또한 서호(西胡)에서 바쳐온 곤오할옥도(昆吾割 玉刀)나 야광상만배(夜光常滿杯) 같은 것은 특히 유명했다. 한 척쯤 되는 길이의 그 칼로 옥을 자르면 마치 진흙덩어리가 베어지듯이 쉽게 잘라졌 댜 또 술잔은 아름다운 옥으로 만들어졌으며 세 되쯤 되는 술이 들어갔 는데 밤이 되면 술잔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사방을 환히 밝혀 주었다.

18) 『太平御登』 卷 74, 引 『抱朴子』, <周穆王南征, 一 軍盡 化, 君子爲猿爲鶴, 小人爲蟲 爲沙.> 今本 『抱朴子』, 『釋淸』에는 <三軍之衆, 一朝盡化, 君子爲鶴, 小人爲沙>라 고 되어 있다. 19) 宋 曾協 『類說』 卷 1, 引 『捨遺記』 (今本에는 없음), <周穆王時, 渠國貢火齊鏡, 暗 中視之, 如白꿉 人向鏡語, 則鏡中需應之.>

밤에 연회가 있을 때 그 잔을 정원에 놓아두면 새벽이 다가올 무렵에 달 콤하고 향기로운 이슬이 잔에 넘쳐 흘렀다 . 201 이 감로(甘露)를 마시면 장 수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목왕은 아마 이 감로를 자주 마신 데다가 늘 이 리저리 여행을 하며 마음이 즐거웠기 때문에 오래도록 살 수가 있었던 것 같다 황당하게 놀면서 일생을 보내면서도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다니, 참으로 뜻밖의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20) 『十洲記』, <周穆王時, 西胡獻昆吾割玉刀, 及夜光常滿杯. 刀長一尺, 杯受三升. 刀 絶玉如切泥 ; 杯是白玉之精, 光明夜照 . 冥夕出杯於中庭, 以向天, 比明, 而水汗已滿 於杯中也 ; 汗甘而香美, 斯貫盛人之器.>

제 2 장 주 목왕이라는 인물은 확실히 신화적인 색채가 농후한 인물이다. 앞장 에서는 목왕의 서방 여행과 서 언왕과의 전쟁에 대해서만 서술하였다. 그 에 관한 그밖의 짤막한 신화전설들은 집어넣지 못하였으므로 이제 이번 장에서 보충해 보기로 한다. 제 1 권의 r 요순편」에서 우리는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단주(丹朱)에 대한 것을 서술한 적이 있다. 바로 그 단주가 목왕 어머니의 꿈에 나타나 낳게 된 것이 목왕이다” 그러므로 목왕이 돌아다니기를 좋아한 것은 이 미 신화적인 근거가 있는 셈이다. 그는 상당히 신성(神性)을 지닌 인물이 었댜 그가 서국(徐國)을 정벌할 때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섰는데, 동방의 구강(九江)에 이르렀을 때 건너갈 배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목왕이 큰 자 라와 악어를 불러내 다리 역할을 하게 해 군사들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고 하는데 ,2) (I) 악어는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조차 없었고 큰 자라는 1) 『國語』, 「周語上』, <昔昭王嬰於房, B 房后, 質有奭德, 協於丹朱, 丹朱惡身以儀之, 生穆王焉.> 2) 『太平御覽』 卷 305, 引 『竹홉紀年』, <周穆王四十七年, 伐好, 大起九師, 東至於九江, 比福以爲梁.> 徐旭生의 『中國古史的傳說時代』 173 쪽에 의하면 <伐好>를 <伐徐>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그의 說을 따르기로 한다. 또한 <比籠以爲梁>은 『古本竹흄

紀年輯校訂補』에 <化爾碩以爲梁.>이라고 되어 있다.

한 무(敵)나 되는 크기에 무게도 삼만 근이나 나갔다고 한댜 ” 어느 해엔 가는 지리한 비가 석달을 끊이지 않고 내렸다. 심심해진 목왕은 피리를 꺼내 불었다. 그러자 석달을 내리던 비가 순식간에 그치는 것이었다 4 1 또 목왕은 온몸이 하얀 래(慕毛)라는 이름의 맹견을 기르고 있었는데 5 1 (2} 하루에 천리나 되는 길을 달릴 수 있었고 호랑이나 표범도 잡아먹었다 61 이런 것 들이 모두 목왕의 신성(神性)을 내보여 주는 예가 된다 목왕이 이러했으니 목왕과 교유하는 인물들도 모두 보통이 아니었음은 당연하다. 목왕이 두 번째로 만유의 길을 떠나 동방에 이르렀을 때, 정(鄭) 나라의 병읍(那邑)에서 정공(井公)이라고 하는 기인을 만나 사흘 동안 통 쾌하게 도박을 즐겼댜 그리고는 나가서 한바퀴 돌아다니며 놀다가 들어 와 또다시 정공과 도박을 했다 .71 정공은 은자(隱者)이기도 했고 선인(仙 人)이기도 했다. 『고악부(古樂府)』에 보면 <정공은 · 육박을, 옥녀는 투호를 잘한다(井公能六博 玉女善投豊)>라고 하여 정공을 옥녀와 비교했는데 ® 이것으로 보면 정공을 선인으로 간주한 것이다. 선인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전설 중의 목왕은 신인(神人)이나 선인들과 자주 내왕을 했다. 아름다운 신녀 두 명이 좋은 술을 들고 하늘에서 내려와 목왕에게 술을 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8 ) 또 목왕은 선인 의이자(意而子)를 불러다가 영비궁(靈卑宮)에 머물게 하였다. 의이자는 목왕과 함께 선도(仙道)를 논 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목왕이 그에게 사도(司徒) 노릇을 하게 하 자 불만을 품고 제비로 변해 어디론가 훌훌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제비를 <의이(意而 : 燕兒, 죽 제비)>라고 불렀다 . 9) 이런 전설들

3) 『玉函山房輯快 書』 輯 『廣志』, <海爾大 一 敵, 重千鈴 .> 4) 『述異記』 卷上, <周穆王時 , 天下連雨三月 , 穆王乃吹笛, 其雨遂止 . > 5) 『博物志 』 , r 物名考」, <周穆王有犬名料, 毛白.> 6) 『述異記 』 卷上, <周穆王之犬, 日 走千里, 食虎정성 . > 7) 『穆天子傳 』 卷五, <戊戌, 天子北入於i'ill, 與井公博三 日 而決 …… 戊寅, 天子升於黎 丘之陽, 口過於靈口井公博 . > 郭環注, <穆王往返, 輯從井公博遊, 明其有道德人也.> 8) 『太平御點 卷fr/ 2, 引 『瑞應圖 』 , <二美母(女)者, 蓋神女也, 周穆王時持酒來酷之.> 9) 『珉娘記』 卷上, 引 『元虛子仙志』, <周穆王迎意而子居靈卑之宮, 訪以至道, 後欲以

爲司 徒 , 意 而子敷然不稅 , 宿 身化作元鳥, 飛入 雲 中. 故 後 人呼元 鳥爲意 而 . >

은 재미있기는 하지만 모두 후세의 것들이고 또 좀 자질구레한 이야기에 속한댜 이에 비하면 목왕의 우림군( 羽 林 軍 ) 중에서 고분융( 高弁戌 )이라고 하는 용사에 관한 이야기는 상당히 홍미가 있다 . 서쪽에서 서왕모를 만나고 동쪽으로 돌아오던 목왕이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서 가다가 거대한 모래늪을 지나게 되었다. 모래늪이라는 것은 모래 와 물이 섞여 있는 곳으로 『 산해경 』 에 보이는 유사(流 沙 )와 비슷하다. 목 왕이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모래 속에 물이 있어 사람과 짐승이 모두 물을 마실 수 있어서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 그러나 가면 갈수 록 물이 점점 말라서 마침내는 한 방울의 물도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 게 되었댜 주위에는 온통 누런 모래뿐, 사람이고 짐승이고 모두 목이 말 라 어쩔 줄 몰라했댜 천자라는 고귀한 신분의 목왕은 더욱 목마름을 견 딜 수 없어 수레 안에서 숨을 헉혁거리며 거의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 성격도 난폭하게 변해 아무나 닥치는 대로 죽이려 하였다. 시종들은 모두 당황하여 병사들을 시켜 빨리 말을 타고 가 물을 길어오라고 하였지만 갑 자기 어디에서 물을 구할 수 있었겠는가 . 참으로 딱한 노릇이었다. 바로 그때 우림군 중의 고분융이 수레를 타고 목왕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가 그 광경을 보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 그래서 얼른 허리춤에서 비수를 꺼 내어 수레를 끄는 왼쪽 말의 목을 찔렀다. 말의 목에서 맑은 피가 흘러내 렀고 고분융은 뿔로 된 술잔에 그 피를 받아 목왕에게 바쳤다. 그것을 마 시고 난 목왕은 갈증이 풀려 기력을 되찾았다. 목왕은 고분융의 지혜로움 을 칭찬하며 옥패(玉個)를 하사했다.J O I

10) 『穆天 子 傳』 卷 3, < 辛丑, 天子 潟 於沙衍, 求飮 未至. 七莘 之 士曰 高拜 戒, 刺其左 騎 之 頭 , 取 其淸 血以飮天子, 天 子 美 之, 乃賜拜戒玉偶一只, 拜 戒再 拜 羅( 稽 ) 稽 首.>

도성으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한 목왕은 다시 동쪽으로 만유의 길을 떠났다. 지금의 하남성 형양( 榮 陽) • 정주(鄭州) 부근에서 사냥을 하고 있 는데 갈대숲 속에 호랑이 한 마리가 숨어 있는 것이 보였다. 목왕의 수레 가 그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우림군의 선발대는 이미 도착해 있었

다 호랑이가 목왕을 놀라게 할까 봐 걱정이 된 고분융은 창이나 칼을 사 용하지 않고 맨몸으로 호랑이와 싸워 그놈을 사로잡으려 하였고, 마침내 그는 그 일을 해냈다 목왕은 무척 기뻐하며 그에게 말 40 필을 하사했고 그 호랑이를 동괵(東'tdt) 땅에 가두어 두게 하였다. 그 후 그곳은 <호뢰(虎 牟 ) > 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지금의 하남성 형양현 서북쪽에 있다 . 고분융 은 이처럼 지혜롭고도 용맹스런 인물이었다. 목왕의 신하 중에 이런 인물 이 있었기에 목왕은 어느 곳엘 가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11) 『穆天子傳 』 卷 5, <有虎在於菌中, 天子將至. 七莘之士 高 拜戒請生捕虎, 必全之 . 乃 生捕虎而獻之天子,天子命爲押,而畜之東領,是爲虎牟.天子賜拜戒敗馬十開,歸之 太爭 拜戒再拜躍首.>

목왕 이후 몇 대를 지나 왕위는 여왕(岡王)에게로 이어졌다. 여왕은 재 물을 몹시도 탐하는 데다가 포악하기까지 하였으니 주나라는 점차 쇠퇴해 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는 백성들에 의해 국외로 쫓겨나 돌아오지 못한 채 그곳에서 죽고 말았다 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그의 아 들인 선왕(宣王)이었댜 이후의 역사가들이 평하는 대로 비교적 어진 왕이 었던 선왕 때에 이르러 주나라에는 어느 정도 중흥의 기운이 감도는 듯했 댜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정치적인 여러 조치들이 실패하는 바람에 선왕 말년에는 여전히 쇠락해 감을 면치 못하였다. 그리고 선왕 자신도 패륜에 빠져 결국에는 복수의 칼을 갈던 원귀(怨鬼)에게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고만댜 그 이야기는 대충 다음과 같다 . 당시 두(杜)나라에 항(恒)이라고 하는 제후가 · 있었다. 벼슬을 하고 있었 는데 두(杜 : 지금의 陝西省 長安縣 동남쪽)지방에 봉해졌기 때문예 두백 (杜伯)이라고 하였다. 선왕에게는 여항(女鳩) ® 이라는 비가 있었는데 선왕 은 그녀를 무척 총애하였다. 그런데 그녀는 젊고 잘생긴 두백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를 유혹해 정을 통하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정직 했던 두백은 그런 구차하고 염치를 모르는 행위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 그래서 그는 처음에는 완곡하게, 나중에는 노골적으로 그녀의 청을 거절

했다. 수치심이 분노로 바뀌었는지 그녀는 선왕에게로 가 엉엉 울며 두백 을 헐뜯었다 r 그 항( 恒) 이라는 놈은 너무나 나쁜 놈입니댜 벌건 대낮에 저를 범하다 니요……」 이 말을 돋자 선왕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가려보지도 않고 곧이 들었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선왕은 두백을 잡아들여 초(魚: 지 금의 河南省 陝縣 남쪽) 땅에 가두게 했다. 그리고는 신하인 설보(薛甫)와 사공기( 司工綺) 를 시켜 두백을 심문하게 했는데 선왕은 그를 죽여 없애야 만 화가 풀릴 것 같았다 .1 21

12) 『釋史』 卷업, 引 『周春秋』, <周杜國之伯名爲恒, 爲周大夫 ; 宣王之妄曰女鳩, 欲通 之, 杜伯不可, 女鳩訴之宣王曰 ; 『恒傾與妄交」 宣王信之, 囚杜伯於熊, 使薛甫與司 工綺殺杜伯.>

이렇게 두백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고 또한 그의 죄상이 명백하게 밝 혀지지 않고 있을 때였다 두백의 친구 중에 역시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좌유( 左儒) 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두백이 그야말로 기묘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억울함을 참을 수 없어 당당히 선왕을 찾아 가 친구인 두백의 결백을 주장하였다 반복하여 이야기하기를 몇 차례, 그 는 열심히 두백을 변호하였지만 고집스런 선왕은 좌유의 충언을 외면하였 다. 그리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오히려 그를 꾸짖었다 . r 왕의 뜻을 거역하고 친구를 두둔하다니, 네 이놈!」 그러자 좌유가 대답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주상께서 옳은 도리를 행하시고 친구가 도리에 어긋 하는 행동을 할 때에만 주상을 따르고 친구를 벌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거꾸로 생각해 보십시오. 친구가 행하는 것에 도리가 있고 주상의 행동이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친구의 편에 서서 주상을 거역하는 수 밖에 더 있겠습니까?」 선왕은 그 말을 듣고 벌킥 화를 내며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 감히 나를 거역하다니, 건방진 놈 같으니라구! 네가 방금 한

말을 취소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줄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죽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좌유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댜 옛부터 절개 있는 선바들은 아무렇게나 자신의 목숨을 버리지는 않았 지만, 또한 그렇게 쉽게 자신의 소신을 굽혀가면서까지 목숨을 구결하지 는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죽일 테면 죽이십시오! 나의 죽음으로 친구 두백 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동시에 주상께서 두백을 죽이시는 것이 잘못된 일임을 증명해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른 선왕은 앞뒤 가리지 않고 무고한 두백을 죽 이고 말았다. 선왕이 스스로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충언 을 듣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고 여긴 좌유는 집으로 돌아가 울분에 가득 찬 가슴을 안은 채 자살하고 말았다 .1 31

13) 『說苑』 , r 立節』, <左儒友於杜伯, 皆臣周宣王. 宣王將殺杜 伯而非其罪也, 左(儒爭之 於王, 九復之, 而王弗許也. 王曰 ; r 別君而異友, 斯汝也」 左儒對曰 ; r 臣聞之, 君道 友逆, 則順君以株友 ; 友道君逆, 則率友以違君』 王怒曰 ; r 易而 言 , 則 生 ; 不易而言 則死」 左儒對曰 ; 『 臣聞古之土 不任義以從死, 不易言以求生, 故臣能明君之過以死杜 伯之無罪」 王殺杜伯, 左信死之.>

한편 두백은 죽기 전에 한맺힌 목소리로 말했다 . r 주상께서 나를 죽이지만 나는 결백하다. 사람이 죽은 뒤에 아무 것도 모른다면 그것으로 그냥 끝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영혼이 있어 죽은 뒤 에도 의식이 있다면 삼 년 안에 반드시 주상으로 하여금 그가 죽인 자가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쓴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리라」 ® 시간은 유수와 같이 홀러 어느 새 삼 년이 지나갔다 사람들은 두백이 죽을 때에 했던 말을 이미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두백이 기약했 던 그날은 결국 다가오고 말았다. 주 선왕은 많은 제후들을 불러모아 포전(團田: 지금의 河南省中牟縣 서남쪽) 일대의 습지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수백 대의 수레를 동원하였 고, 따리온 시종만도 수천 명이나 되었으며 휘날리는 깃발들은 온 들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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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백( 『 炎黃 』 )

뒤덮었다 때는 마침 태양이 머리꼭대기에 떠있는 정오였다 수많은 사람 들과 수레들 툼에서 이상한 수레 한 대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말과 수레 가 모두 흰색이었고 그 안에는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붉 은 모자를 썼고 손에는 역시 붉은 활과 화살을 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놀 라 바라보니 그는 바로 삼 년 전에 죽은 두백이었다. 두백의 모습은 살아 있을 때와 별반 다름이 없었으나 다만 억울하게 죽어간 것에 대한 보복을 하려는 듯 살기를 띠고 있었다 사람들이 놀라서 사방으로 홑어져 도망쳤 고 들판 위의 말들도 어지러이 날뛰었다. 두백은 수레를 몰아 선왕을 쫓 아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다 본 선왕의 얼굴빛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 선왕은 힘겹게 화살을 들어 올렸다. 활이라도 쏘아서 이 원귀를 물리쳐 보려 함이었다 @ 그러나 두백의 수레는 질풍처럼 선왕의 수레를 앞질렀댜 두백은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 핑! > 하는 소리와 함께 유 성처럼 날아간 화살은 선왕의 심장에 정확하게 꽂혔다. 화살을 잡은 채 얼굴이 일그러진 선왕의 몸은 뒤로 한번 젖혀지더니 앞으로 고꾸라져 자 신의 활 위에 엎어져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 음산한 바람이 한줄기 스쳐 가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두백의 수레는 사라져 버렸다. 사방으로 혼비백 산하여 도망쳤던 제후들이 탄 수레가 다시 개미때처럼 모여들기 시작했 댜 그들이 화살에 맞은 선왕을 살펴보니 막 숨이 끊어진 듯, 아직도 체온 이 남아 있었댜 ® 시체를 메고 돌아와 다시 자세히 검사해 보니 화살에 맞아 몸이 뒤로 젖혀졌다가 다시 앞으로 고꾸라지는 통에 척추뼈까지 다 부서져 있었댜 141 @

14) 『墨子』 , 『明鬼下」, <周宣王殺其臣杜伯以不흥, 杜伯曰 ; 「吾君殺我以不흄, 若以死 者爲無知,則止矣,若死而有知,不出三年,必使吾君知之』 其三年,周宣王合諸侯而 田於罰田, 車數百乘, 從數千人, 滿野. 日中, 杜伯乘白馬素車, 朱衣冠 , 執朱弓, 扶朱 矢, 追周宣王, 射入車上, 中心折背, 殘車中, 伏랬而死.>

두백의 고사와 비슷한 이야기로는 윤길보(尹吉甫)와 그 아들인 백기(伯 奇)에 관한 것이 있댜

윤길보는 선왕이 왕좌에 있을 때 그를 보좌했던 대신 (大臣 )이었다 . 그 에게는 백기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사람됨이 무척 성실하고 온화했다. 본 처가 죽은 뒤 윤길보는 다시 아내를 얻어 아들을 또 낳았는데 그는 백봉 ( 伯封 )이라 하였다 백봉도 성품이 착하여 형과 사이좋게 잘 지냈다. 그러 나 젊은 계모는 자신의 아들인 백봉이 윤길보의 후계자가 되기를 원했다 . 그러자면 백기를 없애버려야만 모든 일이 잘될 것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남편에게 말했다. r 백기란 놈 , 생긴 것 은 성실해 보이지만 마음은 아주 시커먼 녀석이에 요 . 제가 예쁘게 생긴 것 을 보고는 사람들이 없을 때 수작을 걸어오곤 한 답니다」 윤길보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착실한 내 아들이 아무려면 그럴 리가 있나!」 그녀는 노기등등하게 말했다 . 「내일 뒤뜰의 누각에 숨어서 직접 보세요. 그러면 아시게 될테니까」 윤길보는 반신반의하였다 . 그러나 이튿날 아침이 되자 그는 뒤뜰의 누 각에 숨어서 후원의 동정을 살폈다 . 그녀는 남편이 자신의 계략에 말려든 것을 알고는 내심 몹시 기뻐했다. 그리고 벌을 열 마리쯤 잡아 자신의 옷깃과 옷자락 사이에 숨겨두었다. 후원으로 간 그녀는 꽃밭 사이를 오가며 꽃구경을 하고 있는 척하였다. 그때 후원에 살고 있던 백기가 부모에게 문안을 드리기 위해 평소와 다름 없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계모는 백기가 자신의 곁으로 가까이 올 때를 기다려 놀란 듯이 호들갑을 떨며 소리쳤다. r 어머나, 벌 좀 봐!」 그러면서 그녀는 옷소매를 좌우로 혼들어 옷깃과 옷자락 사이에 숨겨 둔 벌을 날려 보냈다 벌들이 그녀 주위를 웽웽거리며 맴돌았고 어떤 벌 은 그녀의 몸위를 기어다니기도 했다. 백기는 그 모습을 보자 얼른 달려 가 벌을 잡으려 하였다. 계모는 얼굴이 붉어진 채 여전히 옷소매를 휘두 르며 r 벌이야 , 벌!」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백기는 계모의 옷소매를 붙잡

고서 그녀의 몸위를 기어다니는 벌 몇 마리를 잡아 밟아 죽였다 . 누각 안에 숨어 지켜보던 윤길보는 밀고 당기는 그 모습이 영락없이 수 작을 거는 것이라고 여겼댜 모든 것이 명약관화해진 지금,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댜 즉시 아들을 잡아오게 한 그는 사건의 앞뒤를 묻지도 않은 채 지독한 매를 때려 문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 집을 쫓겨난 백기가 입고 있는 것은 짧은 바지 하나뿐이었다 . 그나마 자신이 아끼던 거문고( 琴 )가 옆에 있어 그것을 들고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는 가슴아픈 유랑의 길에 올랐댜 어느 강가엔가 도착하게 된 백기는 깊은 상심에 빠져 그곳을 배회하고 있었댜 그때서야 그는 자신이 계모의 계략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자신의 결백을 밝힐 방도가 없었 댜 ® 때는 이미 음력 구월이라 ,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때였댜 그는 연잎 으로 옷을 삼아 몸을 가리고 바람에 마른 문배(山 梨 )꽃을 따먹으며 겨우 겨우 목숨을 이어갔다 . 한편 동생 백봉은 형이 쫓겨난 것을 알고는 너무나 가슴이 아파 침식을 잊고 형을 그리워했다 . 아버지와 어머니 몰래 몇 차례나 형을 찾으러 나 가 보았지만 나이가 어린 그는 아무리 해도 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날씨는 점점 추워져갔다 . 새벽이 되면 강가의 풀잎과 모래 위에 하얀 서리가 얇게 얼어 있곤 했다. 백기는 맨발로 그 서리 위를 걸어다니며 거 문고에 맞추어 자신이 지은 「이상조( 履霜 操)」의 노래를 불렀다 . 새벽 찬바람을 맞으며 얼어붙은 서리 위를 걷는다. 아버지는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시고 계모의 말만 믿으시네 . 집을 떠나온 내 가슴 찢어질 듯 아픈데, 하늘이시여, 내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악한자가복을누리고 선량한 자가 고통을 겪게 하시니

그 사랑울 나누어 주심이 너무 지나치십니댜 하늘이시여! 누가 있어 나를 돌볼 것이며 또 그 누구라서 내 하소연을 들어주리오! 그 노래가 너무나 처량하고 격정적이어서 강물에까지 물결이 일링일 정 도였다 노래를 마친 백기는 더 이상 살아가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겨 거문고를 껴안은 채 강물에 뛰어들었다. 그 강물에는 선인이 살고 있었는데 백기가 연주하는 거문고 소리를 듣고는 그의 처지를 가없게 여 겨 물고기를 보내어 그를 강물 속의 궁전으로 데려오게 했다. 그리고는 그에게 물속에서도 살 수 있는 약을 먹였다. 그때부터 그는 강 밑에 살면 서 때때로 거문고를 뜯으며 슬픈 노래를 불렀다. 이때부터 달밝은 밤이면 애절하고도 유장한 노랫소리가 거문고 반주에 맞추어 바닷속으로부터 들려왔다. 그 노래는 너무나 명료하게 서리내린 강물 위를 홀러다녔다. 어부들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모두들 이 기이한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처음에 그들은 무척 놀랐지만 자꾸 듣게 되 자 습관이 되었고, 나중에는 자기들도 그 노래를 배워 그 일대 어부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노래는 수시로 그들의 입에서 홀러나왔다 .15)

15) 『水經注』, r 江水」 引揚雄 『琴淸英』, <尹吉甫子伯奇至孝, 後母誕之, 自投江中, 衣若 帶溪 忽夢見水仙, 賜其美藥. 思維義親, 揚聲悲歌. 船人間而學之. 吉甫聞船人之聲, 疑似伯奇, 援作『子安之操』.>

어느 날 선왕이 교외로 사냥을 나갔는데 윤길보도 선왕을 모시고 함께 가게 되었다. 그런데 우연히 백기가 물에 빠진 그 강가를 지나다가 어부 들이 슬픈 어조로 노래하는 r 이상조」를 듣게 되었다. 선왕과 윤길보는 자 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노래에 빠져들었다. 수레에 앉아 있던 선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로 사람을 슬프게 만드는 노래로구나!」 말을 타고 있던 윤길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 r 이 노래는 혹시 내가 내쫓은 아들 백기가 부른 것이 아닐까?」 윤길보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 사방으로 사람을 풀어 아들의 행방을 알아보게 했지만 그 어디에서도 백기의 소식은 들을 수가 없었다. 백기가 쫓겨난 후 자신의 후처는 날이 갈수록 음험한 면모를 내보이고 있었다 . 그는 노래의 내용을 음미하며 그날 자신이 누각에서 보았던 광경을 떠올 려보았댜 생각하면 할수록 의심은 더욱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는 아들 올 찾아내어 확실한 사정을 알아보고 싶었다 161

16) 『琴操 』 , r 履霜操』, < r 履霜操』者, 尹吉甫之子伯奇所作也. 吉甫, 周上卿也, 有子伯 奇, 伯奇母死 吉甫更要後妻生子伯邦(封). 乃說伯奇於吉甫曰 ; 디白奇見妄有美色, 然 有邪心』 吉甫曰 ; 「伯奇爲人慈仁, 登有此也인 妄曰 ; r 試置妄空房中, 君登樓而察 之』 後妻知伯奇仁孝,乃取毒蜂綴衣領,伯奇前持之.於是吉甫大怒,放伯奇於野.伯 奇編水荷而衣之, 采棒花而食之, 淸朝履霜, 自 傷無罪見逐. 乃援琴而鼓之,曰 ; r 履朝 霜分采晟寒,考不明其心分聽臨言,孤恩別離分描肺肝,何흄皇天分還斯衍!痛枝不同 分恩有偏, 誰說顧分知我究!」 宣王出遊, 吉甫從之, 伯奇乃作歌, 以言感之於宣王, 宣 王聞之, 曰 ; 『此孝子之辭也』 吉甫乃求伯奇於野而感悟, 遂射殺後妻.>

백기는 강물 속에서 아버지와 동생을 그리워했다. 그리움이 사무치니 거문고와 노래조차도 자신의 적막한 영혼을 위로해 주지는 못했다. 점차 그는 목소리를 잃어갔고 몸도 쇠약해 갔다. 강의 선인이 그에게 먹인 약 도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 줄 수는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강물 속의 궁전에서 죽고 말았다 . 죽은 뒤에 그는 꼬리가 긴 회갈색의 작은 새가 되 었다. 그리고 밭 근처 뽕나무에 올라앉아서는 꼬리를 혼들며 큰소리로 울 곤했다. 그때 마침 그의 아버지인 윤길보가 수레를 타고 밭 근처를 지나가고 있 었다. 바람을 씌며 우울한 심정을 달래고 있던 참이었다. 뽕나무 위에서 울어대는 새의 울음소리가 참으로 기이하다고 느낀 윤길보는 그 새가 혹 시 자기의 아들이 변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만일 자기 아들이 변 한 것이라면 혹시 무슨 할말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데 새의 울음소리는 더욱 처절해져갔댜 울음소리를 따라가보니 과연 뽕 나무 위에 꼬리가 긴 회갈색 작은 새가 한 마리 앉아있었다. 그 새는 자기 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날개를 푸드덕거렀다 . 윤길보가 새에게 말했다. 내야, 네가 내 아들이라면 내 수레로 날아오렴 그리고 내 아들이 아니 라면 여기 있지 말고 저 멀리 날아가버려라!」 윤길보가 미처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새는 그의 수레 덮개 위로 날아 와 앉았다 이런 기이한 광경을 보고 윤길보는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 꼈댜 「백기야 , 정말로 너를 고생시켰구나!」 그리고는 그 새를 수레에 싣고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새는 안으로 들어가 뜰의 우물가에 앉아서 슬픈 목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집에서 그 소리를 듣고 나온 계모가 우물가의 새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어디서 굴러온 새야? 무슨 목소리가 저렇게 듣기 싫담?」 윤길보는 아내의 마음을 떠보려고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r 이 새는 우리 불쌍한 아들 백기라오 . 타향을 떠돌다가 죽어 새로 변해 서 돌아왔소!」 작은 아들 백봉이 집안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는 놀랍고도 기뻐 뛰쳐나 왔댜 그리고 작은 손을 혼들며 말했다. 테가 정말 우리 형이라고? 형, 돌아온 걸 환영해! 이제 다시는 헤어지 지 마. 웅?」 그러나 계모는 사나운 얼굴로 아들을 밀어내고 구석에서 빗자루를 집어 들어 휘두르며 소리쳤다. 「이 불길한 새야, 꺼져라! 재앙을 불러들이는 못된 새야, 어서 꺼져라!」 윤길보는 자신의 아내가 그렇게 사납게 구는 것을 보고 마루에서 활을 가져다 그녀에게 건네 주며 말했다. r 그렇게 쫓아버릴 것 없소 . 그렇게 그 새가 싫으면 아예 이 활로 쏘아 버리시오!」

그녀는 남편이 말하는 것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빗지루를· 던져버 리고는 활을 받아들고 우물가의 새를 조준해 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때 윤길보는 벽에 걸려 있던 활을 꺼내어 아내의 등을 향해 한발을 쏘았다. 그녀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백봉은 엄마가 쓰러진 것을 보고 달려가 시체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였 댜 우물가의 새는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윤길보는 모든 사실을 백봉에게 일러 주었댜 그때부터 그들 부자는 새와 함께 영 원히 같이 살게 되었다. 백기가 변한 이 새는 그의 아버지가 r 고생이 심하구나!」라고 한 말을 따서 <백로(伯勞)>라고 불리게 되었다 지금도 해마다 초여름이면 녹음 이 우거진 곳에서 슬프고도 격하게 울어대는 새가 있는데 그 새가 바로 백로이댜 17 1 17) 『太平御登』 卷 923, 引曹植 『食(肉)惡鳥論』, <昔尹吉甫信後妻之言而殺孝子伯奇, 其 弟伯封求而不得, 作「委離J Z 詩. 俗傳云, 吉甫後悟, 追傷伯奇, 出遊於田, 見異鳥鳴於 桑 其聲微然 吉甫心動, 曰 ; 「無乃伯奇平?」 鳥乃招翼, 其聲尤切. 吉甫 B ; r 果吾子 也」 乃顧 B ; r 伯奇勞平? 是吾子, 樓吾輿: 非吾子, 飛勿居」 言未卒 , 鳥尋聲而樓其蓋 歸入 r1, 菓於井幹之上, 向室而號. 吉甫命後妻載替射之. 遂射殺後妻以謝之.> 이상 세 단락에 인용한 자료를 본문에서는 모두 종합해서 썼기 때문에 각각 문자의 출입이 있을 수 있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제 3 장 선왕이 이렇게 죽은 후 그의 아들인 유왕(幽 王 )이 천자의 자리에 오르 게 되었다 그 당시 조정에서는 귀족인 윤씨(尹氏)가 권력을 마음대로 휘 둘러 국사는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고 백성들 역시 그 등쌀에 견디기 힘들 지경이었댜 그러나 윤씨의 권세가 하도 당당해 불만을 토로했다가는 화를 입을까 두려워 모두들 울분을 삼킨 채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 ”

1) 『 詩 』, r 小 雅 』, 「節南山」, < 節彼南山 , 維 石岩岩; 赫赫師尹, 民具爾 膳 . 憂 心如 t炎 , 不 政 戱談.> 朱흉 注 : < 此 詩家父 所作, 刺(幽)王用尹氏以致亂 . >

윤씨 일가는 대단한 세도가였는데 몇 대를 거치도록 식구를 분가시키는 일이 없었댜 그래서 하인과 종들까지 합쳐 수천 명이 한집에서 살고 있 었는데, 커다란 주방에서 그들이 먹는 밥 모두를 지었다. 그러던 어느 해 , 대 기근이 들었는데 이 세도가에도 어느 정도 그 영향이 미쳤던 모양이었 댜 모두가 흰 쌀밥을 먹기에는 쌀이 좀 모자랐다 . 그래서 남비며 솥들을 다 동원하여 죽을 끓여 몇 끼를 먹게 되었는데 , 수십 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들이 꿀꺽꿀꺽 죽을 삼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엔 가는 죽을 먹으려고 사람 수를 점검해 보니 삼십 명이 보이지 않았다. 아 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는데 마침내는 죽을 끓이는 거대한 솥 안에서

그들을 찾아내었다. 그들은 호미와 삽을 들고서 솥 바닥의 죽을 굵어먹고 있었던 것이다 . 21 이런 전설들로 미루어보아 당시 윤씨네의 세도가 그 얼마 나 대단했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댜

2) 『太平御覽』 卷 470, 引 『雜鬼神志』, <周時尹氏貸盛, 數代不絶, 食 口 數千. 常(常)還 凱荒, 羅鼎獲作炭, 唄傑之聲, 聞數十里中, 臨食, 失三十人, 入獲中 恨取獲底煥, 獲深 大, 故人不見也.>

이렇게 권세를 남용하는 자들이 조정을 차지하고 있으니 정치 제도는 자연히 문란해졌고 민생은 엉망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기이한 이야기들이 후세에까지 전해지게 되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 댜 예를 들어 기산(岐山)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경수(i莖 水) • 위수 (1 肖 水) • 낙수(洛水)가 한꺼번에 말라버렸다든가 또는 주(周)민족의 발상지안 기산까지도 무너져 버렸디는 이야기가 있었다 3 1 또 멀쩡하던 소가 갑자기 큰 호랑이로 변했다거나 양때가 이리떼로 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낙수의 남쪽에 이리떼를 막기 위한 성을 짓고서 사 람들을 잡아먹는 사나운 이리떼를 피하여 그 성에 숨어살았다고 하기도 한댜 ll 이러한 재난들은 모두가 국가가 멸망하려 할 때 미리 나타나는 징 조라고 하는데, 고대의 사관(史官)들은 이러한 신화와 전설들을 아주 상세 하게 역사서에 기록해 두었다. (D

3) 『竹홉紀年』, <幽王二年, 뿐消洛翊, 岐山崩.> 4) 『述異記』 卷下, <周幽王時牛化爲虎, 羊化爲狼. 洛南有避狼城, 云幽王時群羊爲狼 食 人故築城避之.>

이제 이야기하려는 신화전설 역시 사서(史 書 )에 기록된 것으로, 이 전 설에 의하면 주나라 멸망의 원인이 포사(裵似)라고 하는 여인에게 있는 것처럼 되어 있댜 이 가련한 여인은 하걸 때의 말희, 그리고 은주 때의 달기와 함께 왕조를 멸망시킨 여인으로 묘사되어 오래도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포시는 <나라를 망하게 한 재앙의 근원>이라는· 세 여인 중에서도 가장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 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이 제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포사( 『 炎黃 』 )

유왕(幽 王 )이 총애하는 비였던 포사는 본래 집없는 고아였댜 포( 裂) 나 라의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하여 유왕의 후궁에 그녀를 노예로 바쳤다 처음에 그녀는 유왕의 후궁에서 숱하게 많은 다른 여자 노예들처 럼 그다지 눈에 띄는 인물은 아니었댜 그런데 어느 날 후궁에 놀러나왔 던 호색한 유왕의 눈에 들어 , 깊은 산골짜기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 같던 그녀는 단번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소유하 게 된 모든 화려한 것들과 낯선 사내의 사랑에 대해 조금도 기쁨을 느끼 지 못하였다 . 그래서 그녀의 표정은 늘 차가왔으며 우울함이 감돌기까지 했다 그녀는 이 세상에 자기 혼자밖에 없다는 고독감에 휩싸여 있었으니 그녀에게는 부모형제도 없었고 또 어떻게 자신이 태어나게 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여인들의 교태스런 모습과 간드러진 웃음 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던 유왕은 이렇게 아름답고도 우울한 여인을 만나 게 되자 신선한 느낌이 들어 그녀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 내 포사는 유왕의 아들까지 낳게 되었는데 아이의 이름은 백복(伯服)이라 하였다 . 51

5) 『史記』, 「周本紀』, <當幽王三年, 王之后宮, 見(喪似)而愛之, 生伯服.>

당시 유왕의 왕후는 신후(申后)였다. 그녀는 신후( 申侯) 의 딸로 일찌감 치 아들 하니를 두었는데 이름은 의구(宜臼)라 하였다. 의구는 이미 자라 어른이 되었으므로 명실상부하게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런데 포사가 백복 을 낳자 유왕은 신후를 폐위시키고 의구를 죽이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포서를 왕후로 삼고 그녀가 낳은 아들 백복을 태자 로 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번은 태자 의구와 함께 궁원을 거닐던 유왕이 반은 진심으로, 그리고 반은 장난으로 호랑이 우리에서 호랑이룰 풀어 태자를 잡어먹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태자 의구는 배짱이 두둑했다. 똑바로 버티고 서서 눈을 부릅뜬 채 호랑이에게 소리를 지르니 그 모습이 마치 호랑이 조련사와 같았던 모양이다. 입을 크게 벌리고 발톱을 세웠던 사나운 호랑이는 쫑긋 세웠던 두 귀를 늘어뜨린 채 얌전히 땅바닥에 엎드

려 꿈쩍도 하지 않았댜 호랑이를 데리고 노는 척하며 의구를 죽이려던 유왕의 계책은 그리하여 수포로 돌아갔다 FIL 그러나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왕은 결국 신후를 폐하고 의구를 쫓아낸 뒤 포사를· 왕후로 , 백복을 태자로 삼았다

6) 『擇史』 卷 30, 引 『 古文頂語 』 , <幽 王 將 殺 太子宜 臼 立伯服, 釋虎將執之, 宜 臼化之, 虎明耳而服. >

이러한 유왕의 행위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 주나라의 사관(史 官 ) 백양 ( 伯陽 )은 자기 나라의 사기를 훑어보다가 잘라지고 뜯어진 간책( 簡 冊)의 한 부분 國 ] 기록된 신화전설에 갑자기 눈이 갔댜 거기서 그는 지금 자기 나라의 왕후인 포사가 본래 < 요녀( 妖 女) > 였음을 알고는 탄식을 금치 못 하며 말했다 r 재앙은 이미 닥쳐왔구나! 주나라는 이제 멸망하게 되었으니 구할 방법 이 없도다!」 71

7) 『史 記 』 , 『周 本紀 』, < 周太史伯 陽讀 史記曰 ; r 周亡矣 , 禍成 矣 , 無 可 奈 何!』>

옛날, 아주 먼 옛날 하( 夏 )나라의 기운이 쇠퇴해 갈 무렵이었다고 한다. 갑자기 하늘에서 암수 두 마리의 용이 내려오더니 하나라 왕의 궁전에서 공개적으로 교접을 하는 것이었댜 그러면서 자신들은 포( 裝 )나라 선대(先 代)의 왕과 왕후라고 하였댜 하나라의 왕과 신하들은 이 광경을 보고 모 두 놀라서 괴상한 이 용 두 마리를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매 고 있었다 . 죽일 것인가, 쫓아낼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둘 것인가? 점을 쳐보았지만 그 모두가 좋지 않은 방법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그때 누군가 가 기발한 생각을 해냈는데 그것은 바로 그 용의 정액을 거두어 보관해 두자는 것이었다. 점을 쳐보니 그렇게 하면 대길( 大 吉)이라고 하였다. 그 래서 옥( 玉 )과 말( 馬 ), 가죽과 규( 圭 ), 벽(壁)과 비단 둥 여섯 가지 물건을 그 용들 앞에 가져다 놓고 자신들의 의견을 간책에 써서 공손히 축수하며 그들의 동의를 구하였다. 이 방법은 즉시 효과가 있었다. 괴상한 용 두 마리는 갑자기 모습을 감 추었고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용의 정액 ® 이 남아 있었다. 하나라 왕은

상자에다가 그것을 정중하게 담아 보관하였다 그후 하에서 은으로, 온에 서 주로 이어지는 동안 아무도 감히 그 상자를 열고 속에 무엇이 들었는 지 보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하여 주나라 여왕(岡 王 ) 말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 그런데 여 왕은 호기심이 동하여 마침내 그 상자를 열어 보았으니 그로 인하여 크나 큰 재앙을 초래하게 되었댜 용의 정액이 궁전에 홀러내려 바닥을 더럽히 고 비릿한 냄새를 풍겼던 것이댜 아무리 닦고 닦아도 그것은 깨끗이 없 어지지를 않았댜 그래서 여왕은 후궁의 궁녀들을 데려다가 발가벗은 채 용의 정액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게 했다. @ 그렇게 하여 사악한 것을 물리 치려 함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댜 그녀들이 소리를 지르자마 자 쏟아졌던 정액이 한군데로 모이더니 커다란 검은색 도마뱀 @ 으로 변하 여 여왕(閩王)의 후궁을 향해 가는 것이었댜 후궁의 궁녀들은 그 괴상한 도마뱀을 보고 질겁을 하며 놀라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쳤다. 그런데 그때 마침 이를 빼느라고 도망치지 못한 예닐곱 살 난 어린 궁녀가 그 도마뱀 과 부딪치고 말았는데 그녀는 자라서 어른이 되자 저절로 임신울 하게 되 었다. 그리고는 때가 되자 딸을 낳게 되었으나 아비도 없이 저절로 생긴 아이였기 때문에 겁이 난 그녀는 아이를 궁정의 담 밖으로 던져버렸다. 이때 여왕은 이미 죽고 없었으니 이것은 선왕 때 일어난 일이었다 .8) 아기를 내다버린 이 일이 일어나기 한두 해전, 도성의 거리에는 아이들 이 이런 노래를 부르고 다닌 적이 있었다. 산뽕(山桑)으로 만든 활 8) 『國語』, r 鄭語」, <夏之哀也, 襄人之神, 化爲二龍, 以同(通)於王庭, 而言曰 ; r 余, 襄 之二君也」 夏后 卜殺之, 與去之,與止之, 莫告, 卜請其樣而藏之, 吉. 乃布幣 焉 而策告 之, 龍亡而巖在. 積而藏之, 傳鄕之, 及殷周, 莫之發也. 及岡王之末, 發而親之, 樣t不 (流)於庭 不可除也. 王使婦人不韓而操之, 化爲玄Mi, 以入於王府. 府之童妄, 未槪批 而還之, 槪罪而lJi, 當宣王時而生, 不夫而育, 故權而棄之 .> 여기에서 <二龍同(通)於 王庭>은 『史記』에 <止於王庭>이라고 되어 있고 菓解 에서는 그것 때문에 <樣>를 <龍所吐洙>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옳지 않다 .

기초( 箕草 )로 만든 화살통 그것이 주나러를 망하게 할 거야. 이 노래는 널리 유행되어 곳곳에서 들을 수 있었고 마침내는 왕궁에까 지 전해져 선왕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이들이 부른다는 이 노래의 의미를 곰곰히 생각해 본 선왕은 깜짝 놀라 사람들을 시켜 주나리를· 멸망 하게 할 것이라는 그것들을 찾아보게 하였다 . 그때 마침 시골에서 올라온 한 부부가 산뽕으로 만든 활과 기초로 짠 화살통을 둘러메고 거리에서 장 시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목청을 돋구어 소리쳤댜 「산뽕으로 만든 활이오! 기초로 만든 화살통을 사시오!」 그 노래가 어찌된 것인지 살펴보러 나왔던 선왕의 부하들은 부부가 외 치는 소리를 듣고는 황급히 선왕에게 달려가 보고하였다. 선왕은 급히 병 사들을 보내어 그 부부를 잡아다가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그런 상황을 알 게 된 어떤 사람 하나가 시골에서 · 올라와 아무 것도 모르는 그 부부를 가 없게 여겨 몰래 그들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하였다. 부부는 그 사람의 말 올 듣고 손발이 후들거렸다. 아직 다 팔지도 못한 활과 화살통을 급히 거 두어 둘러메고 황망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도 급해서 방향을 잘 못 잡았던지 성 밖으로 도망쳐야 할 부부가 오히려 왕궁 근처로 오게 되 었고, 아무리 그곳을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지 못한 채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댜 마침내 어둠이 찾아왔고 어느 새 한밤중이 되었다. 부부가 급하여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였다 . 근처의 멀지 않은 곳에서 아기 우는 소리 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가보니 궁정의 담 밑에 웬 아기가 가없게도 버 려져 있었다. 달빛과 별빛을 빌려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기는 참으로 귀여 웠다. 부부는 자신돌이 쫓기고 있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없은 생 각이 들어 이 어려운 상황에서 만나게 된 아기를 거두어 키우기로 작정을 하게 되었다 활과 화살통을 담았던 멜대는 이제 아기의 안락한 요람이 되었다. 아기는 그 안에서 울지도 않고 가만히 잠이 들었는데 미소룰 띠 고 자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부부는 교대로 멜대를 둘러메고서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하늘이 밝아올 무렵 마침내는 성문을 드나드는 군중 들 틈에 끼어 무사히 도성 을 빠져나오게 되었다 그들은 곧바로 서남쪽으로 가 포 국 (裂國 : 지금의 陝西省 裂城縣 동남 쪽 )에 이르렀다 . 먹고 살기 위하여 그 들은 그곳에서 포후( 裂 狗)라고 하는 귀족의 노예로 들어갔다. 그들이 데리 고 온 아기도 노예가 되었는데 본래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주인의 성을 따라 포( 裵 )라는 성을 갖게 되었고 이름은 사(似)라 하였다. 포사의 주인인 포후는 공무로 도성에 갔다가 어찌된 일인지 법에 저촉 되는 일을 하게 되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때 포후는 자신의 노예안 포사가 아름답게 생겼다는 것을 떠올리고 그녀를 바쳐 자신의 죄를 씻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랬댜 결국 그의 뜻은 이루어져 포사는 왕궁으로 들어 가게 되었고 포후는 풀려났다. 이상이 바로 사관 백양이 간책에서 읽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우 리는 포사가 본래 어떤 <요녀 > 였으며 또 그녀가 어떻게 해서 왕궁에 들 어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들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이 이야기 속에는 신후 를 폐하고 포사룰 왕후로 삼은 유왕의 행위에 대하여 울분을 느꼈던 백양 의 상상력이 다분히 가미되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91

9) 『楚 辭 』 , r 天 問」, <妖夫 戌 街 , 何 號於 市? 周幽誰 珠, 焉得夫喪 W.? > 王 逸注 : <昔周 幽 王前世 , 有 童 請曰 ; 『 壓 孤 箕 服, 室亡 周 國」 後 有 夫婦賣是 器, 以 爲 妖怪, 執 而텃 穀 之 於市也 時被 穀夫婦 夜亡, 道 聞 後宮 處妄所 棄 女帝 磐 , 哀而收之 , 遂拜裵 . 喪人後 有罪 , 幽欲株之 , 襄 人乃入此女以 賊 罪, 是 爲 襄 W. .>

사실 포사가 < 요녀 > 일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그녀를 보게 되면 그녀에 게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그 어떤 < 요기 > 같은 것이 확실히 있었다. 잘 웃 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 < 요기 > 를 나타내 주고 있었다. 왕은 그녀를 무 척이나 총애하였고 왕후의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해주었으며 온갖 사치를 다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왕은 또 그녀를 조심스럽게 대했고 그녀가 하 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주었다. 노예의 처지에서 왕후의 자리 에까지 올라갔으니 그만하면 그녀는 꿈속에서조차도 웃어야 마땅했다 . 그 러나 그녀는 웃지 않았다 아니, 웃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미소조차 내비치

지 않았다 . 왕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녀를 웃겨보려고 했지만 그것은 늘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그녀의 이러한 점은 보통 사람의 눈에는 확실 히 < 요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수수께끼를 수천 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가 푼다는 것은 더욱 어 려운 일이댜 한 노예의 가슴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기쁨과 고통을 누구 라서 명확하게 알 수 있을까? 어떤 사랑의 기억이 그녀를 괴롭게 했던 것 일까, 아니면 능욕당하고 있다는 수치심이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무도 확실하게 알 수 없는 문제이고 우리들 역시 그 수 수께끼룰 풀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어쨌든 유왕은 그녀를 웃겨보려고 온 갖 고생을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스 스로 생각하기에 아주 그럴 듯한 방법을 떠올리게 되었는데 사실 그것은 가장 어리석은 방법이었댜 유왕은 사람들을 시켜 봉화대(烽火 臺 )에 봉화를 올리고 둥둥 소리를 내 어 큰북을 치게 했다 그러자 각지의 봉화대에서도 봉화가 오르고 북소리 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봉화대의 정확한 명칭은 <봉수대(烽遂臺)>이다. 본래 낮에 올리는 불을 <수(遂)>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수는 <낭연(狼 煙)>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리의 똥울 태워서 연기를 피워올렸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 낭연은 바람이 불어도 혼들림 없이 곧바로 하 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먼 곳에서도 그것을 볼 수가 있었다. 한편 밤에 피 우는 것을 봉화라고 했다 봉화대 위에 길고(桂阜)라는 틀을 세우고 그 위 에 쇠로 만든 둥우리 같은 것을 놓았다 . 그리고 그 안에 땔감을 가득 넣어 두고 있다가 일단 긴급한 사건이 발생하면 즉시 거기에 불을 붙였다. 그 러면 하늘 높이 치솟는 큰 불꽃이 보였다. 이러한 봉수대는 도성에서 변 경까지 교통의 요충지마다 설치되어 있었고 그것을 전담하는 사람을 두어 지키고 있게 하였다. 변경에 급한 일이 생기면 그것은 즉시 봉수대를 통 해 도성으로 전해졌고, 마찬가지로 도성에 재난이 있게 되면 그 소식 역 시 봉수대를 통해 변방으로 전해졌댜 이렇게 봉수대라는 것은 국가의 존 립과 관계된 중요한 일을 담당하고 있는 곳이었는데 어리석은 유왕은 포

사를 웃기기 위하여 그 중요한 봉수대를 이용해 장난을 쳤 던 것이다. 이제 봉화는 올랐댜 각지의 제후들은 도성에서 전해온 이 봉화를 보고 는 천자인 유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고 모두들 서둘러 병마를 이 끌고 도성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 보니 도성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 어린아이가 개미를 데리고 놀다가 갑자기 개미들이 나르는 먹이 를 빼앗으면 놀란 개미들은 잃어버린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부딪치며 황 망해 한댜 각지에서 몰려온 제후들이 바로 그 꼴이었다. 그들은 실망하기 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며 자신들이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갔다 . 한편 봉 수대에서 유왕과 함께 이 모습을 바라다보고 있던 포시는· 갑자기 깔깔거 리며 웃기 시작했댜 뚫려 있는 길목마다 사람들과 말로 가득 찼고 깃발 은 어지러이 휘날렸댜 수레들이 서로 부딪치니 장군들은 화를 내었다. 장 군들의 화난 호령 소리를 들은 병사들은 웅얼거리며 볼멘 소리로 장군들 을 원망했다. 한쪽에서 몇몇 부대들이 뒤섞여 사소한 오해로 서로 싸우느 라 말들이 넘어지고 사람들이 고꾸라지는 혼란이 일어나는가 하면 , 다른 쪽에는 지금 막 도착한 부대의 척후병이 나타났다. 말을 탄 척후병은 숲 속에 숨어 손바닥을 눈위에 얹어 햇빛을 가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숨겼다 하면서 적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본래 적이 없는데 이런 혼란이 일어나고 보니 포사로서도 웃지 않을 수가 없었는지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어대었다. 어리석은 유왕은 포사의 아름다운 그 웃는 모습을 보자 말할 수 없이 즐거워졌다. 그는 포사를 웃게 하고 또 자기 자신도 덩달아 기뻐 질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을 찾아내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홉족했다 . 그래서 포사를 웃게 하고 싶어질 때마다 그는 봉수대에 봉화를 올리게 했 다. 그러나 속는 것도 한두 번, 제후들은 더 이상 그 봉화에 속지 않았고 몰려드는 제후들의 숫자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에 따라 포사의 웃음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그런 어리석은 장난을 치며 즐겼던 자들이 벌을 받게 되는 최후의 날이 다가오게 되었다. 본래 유왕의 장인이었던 신후(申侯)는 매우 세력이 큰 제후였다. 그는 사위인 유왕이 아무 이유도 없이 신후(申后)를 폐하고 태자인 의구까지도

수차례에 걸쳐 죽이려 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댜 그런데 마침 유왕이 못된 인물로 이름이 높았던 괵석보(t/J罰石 父 )를 재상에 임명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신후는 이 기회를 틈타 증 (贈) • 서이(西 夷 ) • 견융(犬戌) 등 몇 개 민족과 연합하여 군사를 일으켜 유왕을 쳤다 유왕은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놀라 급히 봉화를 올려 구 원병을 청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를 구하러 오는 제후는 아무도 없었다. 유왕은 포사를 데리고 동쪽으로 도망을 쳤으나 여산(嘉山 : 지금의 陝西 省 臨確縣 동남쪽) 기슭에서 피살당했고 포사는 견융족에게 포로로 잡혀 서방으로 끌려갔다 한편 몇몇 제후들은 신후(申侯)와 함께 태자 의구를 추대하여 천자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평왕(平王)이다. 평 왕은 나날이 강성해지는 서방의 견융족을 피해 도성을 호경(鎬京)에서 동 방의 낙읍(洛邑)으로 옮겼다 . 이때부터 주나라는 점점 쇠퇴해 갔으니 그 저 이름만 남아 있을 뿐 사실은 멸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IO I (J) 10) 『史記』, r 周本紀』, <喪似不好笑, 幽王欲其笑, 萬方, 故不笑. 幽王爲烽遂大鼓, 有冠 至, 則畢烽火, 諸侯惡至,至而無冠, 襄似乃大笑, 幽王說(稅)之, 爲數擧烽火, 其后不 信 幽王以領石父爲卿, 國人皆怒 ; 又廢申后,去太子也, 申侯怒, 與贈 • 西夷 • 犬戒 攻幽王.幽王擧烽火徵兵,兵莫之,遂殺幽王於耀山下.於是諸侯乃卽申侯而共立故幽 王太子宜臼, 是爲平王, 以奉周祀. 平王立, 東遷於維邑, 避戒意.>

제 4 장 평왕( 平王 )이 동천( 東遷 )한 이후 십여 대가 지나 왕위는 영왕( 盛王 ) O 에 게로 전해졌다. 주(周)나라의 국세는 이미 기울어 어떻게 회복해 볼 도리 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영왕의 할아버지였던 정왕( 定王 )이 재위하 고 있던 시절, 초나라의 장왕( 莊王 )이 정왕의 사신이었던 왕손만( 王孫滿 ) 에게 왕권을 상징하는 구정(九 鼎 )의 크기와 경중( 輕重 )에 대해서 물었던 적이 있었다 . 그때 왕손만 자신의 기지와 말재주로 물리쳤던 일이 있었는 데(이 일에 대해서는 .< 예우편 • 하 > 제 4 장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때에 우리는 거기서도 이미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영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왕 실은 나날이 쇠미해져 천자(天 子 )의 명령이라는 것이 제후들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가 없었고 , 해마다 한 번씩 체면치레로 억지로나마 행 해지던 천자에 대한 제후들의 알현도 이제는 제대로 실행되지 않게 되었 다. 진( 晉 )나라의 평공( 平 公)만 하더라도 패주( 覇主 )의 신분이라고 하여 오려고 하지 않았고, 다른 제후들도 그의 눈치만 보며 우물쭈물할 뿐이었 으니 그러한 모든 일들이 영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영왕의 생김새와 풍채를 보면 기개가 있고 당당한 모습이 보통 사람들 과는 크게 달랐다. 태어날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잘생겼을 뿐 아니라

입술의 양쪽에서 위를 향해 치솟은 시커먼 팔자 수염(이전에 사람들은 그 것을 < 자( 鹿 ) > 라고 불렀다 ) 은 그의 모습을 더욱 늠름하고 위풍당당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팔자 수염은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참으로 기 이한 일이었으니 ® 조야의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 모습을 보고 놀랐다. 또 한 그 소식은 다른 나라에까지 전해져서 각국의 제후들까지도 자신의 궁 정에서 그것에 대해 수근거리곤 했다 . 그래서 그가 성장해 왕위에 오르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 팔자 수염왕( 鹿王 ) > 이라고 하는 별명을 붙 여 주었다. ” 영왕은 그것에 대해서 긍지를 갖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들을 깔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

1) 『左 傳 』 , r 昭 公二 十 六 年」, <떻王生 而有 緊 . > 『漢習』 , < 人 表考> 卷 7, <( 靈 王)時 號鹿 王.>

그러나 그는 즉위한 지 얼마되지 않아 십여 년의 세월과 수백 만의 돈 울 들여, 또 셀 수도 없이 많은 백성들을 끌어다가 일을 시켜 화려하기 그 지없는 곤소대( 昆 昭 臺 )라고 하는 누각을 정성들여 지었으니 모두가 그 위 엄 있는 수염에 걸맞게 하려 함이었다. 그 누각은 물론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었고 장엄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기이한 것은 그 누각이 아니었다. 신기한 것은 오히려 그 누각을 짓기 위해 찾은 장소인 악곡(腐 谷 )이라는 곳에서 자라고 있던 거대한 나무였다 . 그 나무의 가지는 서로 뒤엉켜 구불구불 뻗어나가고 있었는데 용이며 뱀, 그리고 가지각색의 동 물 모양을 하고 있었댜 그것이 얼마나 거대했던지 누각을 짓는데 필요한 모든 목재를 그 나무 한 그루로 충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굵은 줄기로는 대들보나 기둥을 만들었고 가느다란 가지로는 서까래와 두공(斗洪)을 만 들었다 조금만 다듬어도 원래 지니고 있던 용이며 뱀 등 여러 동물들의 모습이 되살아 났으니 누각의 기둥들 사이에서 온갖 동물이 꿈틀거리며 움직 이는 듯했다 .2) ® 이렇게 기이한 누각이야말로 영왕의 그 당당한 외모 __- 특히 고귀하

2) 『捨遺記』 卷 3, < ( 盛王 )起昆昭之 臺 , 衆 天下異木 神 工, 得僞 谷 陰 生之樹, 其 樹千 尋 , 文 理盤鑄 以此一樹而 臺 用足 焉 . 大 幹 爲 析 棟 , 小枝爲楠精, 其 木有 龍 蛇百 獸 之形 . >

게 치솟은 팔자 수염 _와 잘 어울리는 것이었으니 영왕은 그 누각에 앉아 자신을 알현하러 오는 제후들을 맞이할 작정이었다. 그렇게 하면 화 려한 그 누각이 자신의 위엄 있는 수염과 어울려 제후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을 것이었고, 그것은 또한 땅에 떨어지기 직전인 왕의 권위를 조 금이나마 회복시켜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모든 것이 기 대와는 달랐댜 자신을 알현하러 오는 제후들은 극히 일부였을 뿐 , 발호하 고 있는 대국의 제후들은 자신이 십여 년의 세월에 걸쳐 세운 그 누각과 수염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 그것은 곤소대 위에 쓸쓸히 앉아 있는 영왕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 순간 그에게 일전에 대부 장홍( 装弘) _사람들은 그를 < 지다성( 智多 星 ) > 이라 불렀다_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장홍은 천자를 알현하러 오 지 않는 건방진 제후들을 오도록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던 것이 다. 장홍은 음양의 술법에 정통한 사람이었댜 영왕은 그가 신통력과 법술 을 갖춘 사람이기 때문에 그 신통력으로 능히 제후들을 불러올 수 있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사술(邪 術) 이었기 때문 에 그런 방법으로 제후들을 오도록 만든다는 것은 천자의 체면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고 여겨 그의 말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 나 이제 제후들이 모두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천자의 체면이 말씀이 아닌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홍을 불러 그의 재주를 한번 시험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었다 그래서 내시에게 분부를 하여 장홍올 불러오게 하였다 . 사람들은 장홍울 장숙( 襄叔) 이라고 불렀댜 그는 촉(蜀)지방 출신이었고 마른 체격이었으며 갸름한 얼굴에는 어딘가 우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 다. 또한 양처럼 생긴 두 눈은 반짝거리며 총명하고 지혜로운 빛을 발했 다. 그는 왕의 명령을 받고 죽시 입궁하여 곤소대로 가 영왕을 뵙고 절을 한 뒤 한쪽에 서있었댜 영왕이 말했댜 「일전에 그대가 나에게 제후들을 오도록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도대체 어떤 방법인가?」

장홍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신의 방법이라는 것은 그 옛날 무왕께서 주(糸j)를 정벌할 때 강태공이 사용했던 방법과 비슷한 것이옵니다」 r 그런가? 하지만 과인은 아직 잘 알아듣지 못하겠는컬」 영왕은 장홍의 말에 홍미를 보이며, 습관적으로 팔자 수염을 위로 치켜 올리면서 미소를 지었댜 r 그래, 강태공이 무슨 방법을 사용했던고?」 r 무왕께서 주를 정벌하실 때,」 장홍은 말을 시작했다. 「각국의 제후들이 모두 모여 참전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데 때가 되어도 정후(丁候)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강태공은 정 후의 초상화를 그려 거기에다가 매일 활을 쏘게 했습니다. 그렇게 30 일을 계속했더니 정후가 그만 중병에 걸리더랍니다. 정후가 점을 쳐보았더니 주나라에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 병에 컬리게 된 것이라고 하는 점괘가 나왔습니댜 겁이 난 정후는 즉시 무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잘못을 빌고 곧 참전할 것이라고 언약을 하였습니다 . 그러자 강태공은 갑일(甲日)과 을일(乙日)에 정후의 머리에 박혀 있던 화살을 뽑고 병일(丙日)과 정일(丁 日 )에는 눈에 꽂혀 있던 화살을 뽑았으며 무일(戊 日 )과 기일(己 日 )에는 배의 화살을, 경일(庚 日 )과 신일(辛 日 )에는 허벅지의 화살을, 그리고 임일 (壬 日 )과 계일(笑 日 )에는 발에 박힌 화살을 뽑았습니다, 화살이 하나씩 뽑 힐 때마다 정후의 병은 조금씩 차도를 보였으며 화살이 완전히 다 뽑히자 마침내 병이 다 나았지요 .3) 신은 바로 그것과 비슷한 방법을 사용해서 제 후들을 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거 좋구만」 영왕은 낮게 중얼거렀다. 3) 『松文類點 卷 58 , 引 『太公金區 』 , <武王伐殷. 丁侯不朝, 尙父乃 占 丁侯射之 . 丁侯 病, 遣 使 請 臣 尙父乃以甲乙日機其頭荷 丙丁日機目籠 戊己日擔腹荷, 庚辛日鹽股 籠 壬矣 띠發足籠 丁侯病乃$.>

r 과인은 그대가 신통력이 뛰어나고 법술을 잘 부린다는 이야기를 들었 네 . 다만 내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을 뿐이지 . 이제 내 앞에서 그 재주를 한번 보여 주게나」 장홍은 영왕이 아직도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미소 를 지으며 말했다 『신의 법술은 그리 뛰어나지 못하여 보여 드릴 만한 것 이 없사옵니다 . 폐하께서 법술을 보시고자 하신다면 두 분의 신인 (神人 )을 모셔다가 폐하 를 위하여 직접 법술을 부리도록 해보겠습니다」 r 그대가 신인들을 불러올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지」 영왕은 홍미진진해 하며 말했다 . 『그렇다면 나도 사람을 시켜 준비를 좀 해야지. 내일 …… 그래, 내일 이 곳에 후궁들과 만조백관을 모이게 하여 구경을 시켜 주어야겠네. 어떤가?J 다음날 아침, 곤소대에는 과연 잔치판이 벌어졌다. 화려한 동( 燈 )과 형 형색색의 오색실로 장식된 누각에는 푸짐한 음식상도 차려져 신인의 강림 을 기다리고 있었다 . 후궁과 바빈들은 화사하게 화장을 하고 아름다운 옷 을 차려입고 모여들었으며 문무백관들도 저마다 화려한 조복을 입는 등 의관을 정제하고 그 자리에 나타났다. 영왕도 자신의 그 위엄 있는 팔자 수염을 멋있게 다듬는 일을 빼놓을 수 없었다 . 마침내 모두들 모여 각자 의 자리에 앉았다. 바싹 마른 장홍이 곤소대의 가운데에 서서 하늘을 향해 중얼중얼 주문 을 외웠다. 가늘고 길다란 손톱을 옷소매 속에서 꺼내들고 두어 번 두드 리며 하늘을 향해 몇 번 손짓을 하니 정말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여태 까지 구름 한점 없이 맑게 개어 있던 하늘에 갑자기 쟁반만한 크기의 먹 구름이 두 덩어리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구름덩어리는 점점 아래로 내려 오면서 커지더니 마침내는 서기(瑞 氣 )가 어린 오색구름이 되었다. 그리고 그 구름 위로 용과 봉황이 끄는 수레가 나타났고 수레 위에 두 명의 신인 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수레는 곧장 곤소대를 향하여 내려왔고, 두 명의 신인은 각자 자신의 수레에서 내렸다. 그들은 깃털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카락과 수염은 노리끼리했으며 이목구비가 유 별나게 단정하여, 기이하고도 맑은 분위기가 감도는 것이 보통 사람과는 어딘가 달랐다. 영왕은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얼른 일어나 자리에서 내려와 신인 의 강림을 친히 맞아 주었다 신인들은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내시 들이 풍성한 술자리를 차려 주었고 술잔이 두어 순배 돈 뒤에 영왕의 요 구에 따라 신인들이 법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신인 중의 한 사람이 일어나며 말했다. r 날씨가 너무 덥지요? 제가 눈을 내리게 해서 좀 시원하게 만들어 드리 지요」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입을 오무려 <후우!> 하고 하늘을 향해 숨을 내 뿜었다 그러자 검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눈이 펄펄 내리기 시작했고 얇은 여름옷을 입고 있던 왕과 다른 모든 사람들은 피부에 소름이 돋울 정도의 추위에 덜덜 떨게 되었다. 궁중의 연못이며 우물이 모두 얼어붙었다고 내 시들이 소리를 질렀으며 사람들은 추위를 참지 못해 이가 아래 위로 딱딱 맞부딪힐 지경이었댜 영왕은 여우가죽으로 만든 옷을 가져오게 하여 손 님들에게 입도록 하였으며 또 깔개를 가져다가 곤소대의 바닥에 깔게 하 였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겨우 따뜻해져 더 이상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되 게 되었다. 그러자 또다른 신인이 일어나 말했다. 『너무 추워서 견디기가 힘드시지요? 제가 좀 따뜻하게 만들어 드리겠 습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자리를 세 번 두드렸다. 그랬더니 방금까지도 하늘을 뒤덮고 있던 검은 구름과 펄펄 날리던 눈꽃송이들이 삽시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뜨거운 태양이 나타나더니 후끈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기 시작했댜 가죽옷을 입고 있던 귀인들은 갑자기 견딜 수 없는 더위를 느 꼈고 엉덩이 아래에서 불을 때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었다. 영왕은 냉 큼 가죽옷을 벗었으며 깔고 앉아 있던 곰가죽 깔개도 걷어 내었다. 그리

고 내시들을 시켜 그것들을 다시 창고로 갖다 두게 하였댜 1 )®

4) 『捨遺記』 卷 3, <時有哀弘, 能招致神異, 王乃登豪, 望 雲 氣弱郁 . 忽見二人乘雲而至, 嚴發皆黃 其衣皆綠緯毛羽 . 王卽迎之上席. 時天大早, 地裂木燃. 一人先唱能爲霜 雪. 引氣一噴, 則雲起 雪 飛, 坐者皆 凉 然. 宮中池井,堅氷可塚. 又設孤股 素 裝, 紫照文勝, 皮掛是西域所獻也 . , 施於 臺 上, 坐者皆溫. 又有一人唱能使卽席爲炎, 乃以指彈席上, 而暗風入室 , 装濕皆棄於臺下.>

여러 남녀 귀인들은 이 두 신인이 부리는 재주, 즉 갑자기 겨울이 되었 다가 또 순식간에 여름이 되는 그런 재주에 혼이 빠질 정도로 감탄을 하 며 마음속으로 경탄해 마지 않았다. 영왕은 특히 더 신이 나서 사람들을 시켜 다시 술자리를 차리게 하고 무희들에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하 여 홍을 돋우었댜 그날 하늘에서 내려온 신인과 땅위의 인간들은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해가 뉘엿뉘엿 지도록 통쾌하게 마셨다. 마침내 홍이 다하여 헤어져야 할 시간, 두 신인은 다시 구름수레에 올라 하늘나라의 궁정을 향해 떠났다. @ 이러한 시험을 거친 뒤 영왕은 장홍의 신통력과 법술이 대단하다는 것 을 새삼 깨달았댜 하늘에 사는 신인들까지 지상으로 내려오게 하는 재주 는 정말이지 보통 사람의 능력으로는 행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 그래서 영 왕은 장홍을 궁중에 살게 하며 법술을 부려 자신을 알현하러 오지 않는 그 건방진 제후들이 고분고분 제 발로 걸어오도록 만들어 보라고 하였다. 법술은 의외로 간단해 보였다. 우선 왕궁의 화원 태호(太湖) 가에 인공 적으로 만들어놓은 산 옆에 사람 키만한 대나무 막대기를 일렬로 늘어 놓 았다 그 막대기는 대략 십여 개쯤 되었는데 대나무 꼭대기에는 반들거리 는 커다란 눈을 가진, 거무스름하게 말라빠진 들고양이 머리를 하나씩 걸 어놓았다. 그리고 들고양이의 뒤통수에다가 각각 작은 나무 팻말을 달고 서 거기에다가 진(晉) 평공(平公)이며 제(齊) 장공(莊公), 초(楚) 강왕(康 王)과 송(宋) 평공(平公), 노(魯) 양공(襄公) …… 등의 이름을 써넣었다. 그리고 매일 그 앞에 가서는 그것들을 향해 주문을 외우기도 하고 뭔가 손짓을 하기도 했다. 그런 후 목표물에서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특별히 만든 작은 활에 화살을 매겨 들고양이를 향하여 쏘는 것이었다 . 그 화살이 눈에 맞든 귀에 맞든, 혹은 이마에 가서 맞든 그는 조금도 개의 치 않았고 더 이상 쏘지도 않았댜 다음날이 되면 그는 여전히 그곳에 가 서 또다른 고양이를 향하여 똑같이 화살을 쏘았다. 그렇게 십여 일이 지 나자 모든 고양이 머리에 화살을 다 쏠 수 있었고 일을 마친 장홍은 화살 을 맞은 그 괴물들을 그대로 거기에 둔 채 좋은 소식이 들려 오기만을 기 다리고 있었다. 장홍의 계획에 의하면 그가 행한 이 법술은 큰 효험이 있을 것이었다. 고양이 머리 하나는 바로 발호하는 제후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화살이 어느 부위에 가서 맞든 그 맞은 부분에는 종기가 생길 것이었다. 마치 강태공이 정후의 초상에 화살을 쏘았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병이 난 제후들은 점을 쳐 본 후 주나라로 달려와 용서를 빌 것이 었댜 그러나 이러한 그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아무리 오랜 시간 울 가다려도 제후들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햇볕울 쬐고 비롤 맞은 고양이의 머리가 썩어 문드러질 지경이 되어도, 또 그 고양이에 꽂힌 화 살이 비바람을 못 이겨 땅바닥에 떨어질 정도가 되어도 제후들이 찾아올 기미는 그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장홍이 몰래 사람을 보내 어 염탐을 해보았지만 그 제후들은 병에 걸리기는커녕 밥도 잘먹고 말도 잘 타고 잠도 잘 자는 둥 건강하기만 했댜 장홍의 법술은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5) (fJ 5) 『史記』, 「封 禪콥 』, <裂 弘以方 事周떻王, 諸侯莫朝周, 周力少, 哀弘乃明鬼神車, 設射 埋首. 埋首者, 諸侯之不來者 依物怪, 欲以致諸侯, 諸侯不從, 而晉人執殺哀弘.> 여 기에서 <埋首>라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文選』, r 上林賊」에 <射 埋首, 兼騎與>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郭漢은 <埋首, 逸詩篇, 諸侯以爲射節>이라고 하였다. <埋首> 라는 것은 逸詩의 篇名임이 분명하다. 『大戴禮』, r 投登」에도 이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今日泰射, 四正具擧 ……>라고 되어 있다. 이 문장의 의미로 보건 대 <埋首>라는 것이 裂弘이 <依>하는 <物怪>, 죽 <諸侯之不來者>를 가리키는 것 이라면(『梨解』에서 徐廣을 인용해 <埋一名不來>라고 하였음), 절대로 <諸侯以爲射

節>의 <逸詩篇>으로 해석할 수 없다. 그러므로 <들고양이 머리 > 로 해석하는 것이 별 무리가 없을 듯하다(역자주 ; 『史記 』 , r 封禪 書 」에는 <埋首 > 가 < 魏首>로 되어 있 음. 그리고 저자가 인용한 부분의 맨 뒤에는 <周人之言方怪者自哀弘 > 이라는 구절이 덧붙여져 있음).

영왕의 질책과 내막을 아는 신하들의 멸시 정도는 그에게 있어서 아무 것도 아니었다 장홍은 자신의 실패가 너무나 참담해서 쥐구멍이라도 있 으면 들어가고 싶을 정도였댜 깊은 가을밤 , 달빛이 스며드는 창가에서 그 는 마음속의 고통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느다란 손가락을 머리 뒤에 대고 누워 어둠 속에 잠긴 방안의 들보를 바라보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댜 도대체 왜일까? 왜 강태공이 성공했던 일을 자신은 성공시키지 못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그러다가 그는 마 침내 깨달았다 . 어렴풋이나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강태공이 법술을 부린 것은 불의를 벌하고 모든 사람들을 단결시키려는 데에 그 동 기가 있었댜 그렇게 함으로 해서 중대한 어떤 공덕을 쌓을 수 있었던 것 이댜 그러나 그가 부린 법술은 강태공의 그것과는 동기부터가 달랐다. 쓰 러져 가는 주나라 왕조의 체면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을 뿐 그야말로 명분 이 없는 행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니 귀신인들 자신의 그러한 행위에 감응할 리가 있었겠는가? ® 그러나 법술이 먹혀들어가지 않아 장홍 혼자서 부끄러워하고 있었던 일은 사실 별것이 아니었댜 문제는 그 소식이 점점 멀리 퍼져나간 데에 있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제후들은 주나라 왕의 부도덕한 그 행위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그 중에서도 불만이 가장 컸던 사람 은 제후 중의 패자(覇者)라고 할 수 있었던 진나라의 평공이었다. 그는 장홍이라는 자가 모든 일을 벌인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고약한 자 롤 영왕의 곁에서 제거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 이 아니었다. 비록 법술이 말을 안 들어 실패하기는 했지만 장홍의 지혜 로움과 또한 곤소대에서 신인들을 불러왔던 그 재주만으로도 영왕은 장 홍을 여전히 깊이 신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진 평공은 대부 숙향

( 叔 向)을 불러 방법을 물었다. 숙향의 성은 양설( 羊 舌), 이름은 홀(~ : 홀[ 造 ]로 읽음)이라 했다 . 진나 라의 공신인 양설직( 羊舌職) 의 아들이었으며 숙향은 그의 자( 字 )였댜 ® 현명하고도 지혜로왔기 때문에 평공의 < 지다성( 智多星 ) > 이라 할 만했고 그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다 숙향이 명령을 받고 조정으로 들어오 니 평공은 장홍을 제거하고자 하는 자신의 뜻을 그에게 말했다. 숙향은 아름답게 돋은 턱수염을 비비꼬며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엷 은 미소를 띠며 한걸음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r 주군께서 장홍을 제거하시는 것은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제게 수레 몇 대만 주신다면 주나라로 가겠습니다. 주나라 왕이 장홍을 죽이도록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지요」 그 말을 듣고 평공은 무척이나 기뻐하며 그에게 수레 다섯 대를 주어 주나라로 가게 했댜 숙향은 주나라 왕에게 바칠 선물을 특별히 준비하여 낙읍( 洛邑) 을 향해 출발했다. 얼마되지 않아 낙읍에 도착한 숙향은 영왕을 알현하고서 평공의 영왕에 대한 공경의 마음을 전했다. 영왕은 평공의 그 런 태도에 대해 홉족해 마지 않았다. 물론 평공이 직접 와서 자신을 알현 했더라면 금상첨화였겠지만 숙향이라도 와서 그러한 평공의 입장을 전한 것만으로도 왕조의 체면은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성대 한 잔치를 베풀어 사신을 대접하고 주나라에 보름 가량을 머물게 하면서 장엄하고 아름다운 곤소대의 여기저기를 구경시켜 주었다. 물론 숙향은 곤소대 위에 앉아 있는 영왕의 그 위엄에 찬 팔자 수염도 몇 번이나 보았 으며, 공적인 일을 하는 톰톰이 혼자서 장홍을 찾아가곤 하였다. 두 사람 은 의기투합하여 자주 만났는데 영왕은 그 사실을 알고서 무척이나 흐뭇 해 하였댜 귀국하기 전날, 영왕에게 작별 인사룰 하기 위해서 숙향은 조당(朝堂)으 로 갔다. 영왕은 그를 위해 작별의 잔치를 벌였고 또한 선물까지 주었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돌리며 그들은 줄거운 자리를 가졌고 숙향도 술을 거나하게 마셨다. 마침내 술자리가 끝났다. 사람들이 돌아간 뒤 신하들은

그 자리에서 숙향이 떨어뜨리고 간 듯한 편지를 발견했다. 그것을 펴 보니 장홍이 숙향에게 보낸 편지인 듯했는데 그 내용은 놀라운 것이었다. 진나라의 주군께 저를 대신하여 아뢰어 주십시오. 저와 주군께서 약속하셨던 그 일 말씀인데 이제 때가 무르익은 것 같다고요 ` 병사를 일으켜 공격을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신하들은 그것을 보고 대경실색하였다. 감히 숨길 수가 없어서 그들은 즉시 영왕에게 달려가 그 편지를 바쳤고 편지를 본 영왕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숙향을 불러오라 일렀다 . 그러나 숙향은 이미 짐을 싸서 밤 을 도와 자기 나라로 돌아간 뒤였다. 그 사실은 영왕의 의혹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게다가 편지의 필적을 살펴보니 영락없는 장홍의 필체였다(사실 그것은 교활한 숙향이 장홍과 함께 사귀면서 몰래 흉내낸 것이었지만). 그러 고 보니 장홍이 이전에 곤소대에서는 신인을 불러오는 둥 놀라운 재주를 부렀는데 제후들을 오게 만드는 법술을 부릴 때에는 그것이 통하지 않던 것이 이상했었다. 또한 숙향이 주나라에 와서 공적인 일을 볼 때를 제외 하고는 줄곧 장홍과 함께 있지 않았던가 .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장 홍이 주나라를 배반한 것이 틀림없었댜 영왕은 화가 치밀어올라 견딜 수 가 없었다. 즉시 장홍을 잡아 가두라고 명령을 내렸고 반역죄로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으며 지체없이 당장에 형을 집행하라고 했다 .6)

6) 『韓非子』, r 內(諸說下』 , <叔向之說哀弘也, 爲哀弘폄謂叔向 曰 ; 『子爲我謂晉君, 所 與君期者, 時可矣, 何不函以兵來?』 因(羊遣(역자주 ; 원서에는 <遺>로 되어 있음)其 완周君之庭, 而急去行, 周以哀弘爲賣周也, 乃珠哀弘而殺之.>

「억울하옵니다, 정말로 억울하옵니다」 장홍은 두 대의 커다란 마차에 묶였고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나왔다. 하늘도 슬퍼하는 돗 검은 비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고 마차 위에 꽂힌 천자의 깃발만이 펄럭펄럭 소리를 내며 휘날리고 있었다 . 절망으로 가슴 이 터질 듯한 장홍은 억울하다고 미친 듯이 소리질렀다. 세상을 온통 울

리는 듯한 애절한 울부짖음이었지만 그 누가 귀를 기울일 것인가! 얼굴이 거무튀튀한 뚱보 옥리조차도 그의 고통을 즐기는 듯한 말투로 가까이 다가와 일부러 이렇게 빈정거릴 뿐이었다 . r 장홍 선생, 뭐 그렇게 소리지를 것 있소. 당신이야말로 학문도 깊고 법 술까지 부릴 수 있는 신통력을 가진 사람 아니오? 무엇이든지 다 알지 않 소! 천체의 변화가 어떠한가, 해와 달의 운행이 어떠한가, 어느 날 비가 내릴 것이며 또 어느 날 바람이 불 것인가, 그리고 길한 날은 언제이며 흉 한 날은 언제인가 , 누구의 운수가 좋고 누구의 운세가 나쁜가 하는 모든 것을 당신은 알고 있지 않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당신이 이렇게 비 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다니 @ …… < 아무리 지혜로운 자 가 깊이 생각을 한다고 해도 실수하게 되는 날은 있다(智者千慮, 必有一 失 ) >@ 더니, 바로 그 꼴이 아니오? 하하하……」 장홍은 마침내 거열형(車裂刑)을 당해 죽고 말았댜 7) @ 이것이 바로 장 홍의 죽음에 관한 한 가지 전설이다 .®

7) 『 淮南子 』 , r i B 論篇 』 , < 昔 者 哀 弘, 周時之執數者也, 天地之氣, 日 月 之行, 風雨之 變 , 律曆之數, 無所不通 然而不能 自 知, 車裂而死.>

또다른 전설에 의하면 장홍은 숙향의 참언 때문에 영왕의 의심을 사서 결국에는 촉(蜀) 땅으로 쫓겨가게 된다 . 장홍은 자신이 영왕에게 충성을 다했는데도 모함을 당해 쫓겨나게 된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여 견 딜 수가 없어서 칼로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 내어 조각조각 잘라버린 뒤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는 어딘가 일본인의 할복을 연상케 한다. 어쨌든 촉 땅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그가 홀린 피를 모아 나무상자에 넣어서 땅속에 묻어 주었는데 삼 년이 지난 뒤 그 상자를 열어 보니 상자 속의 피가 모두 반짝이는 벽옥으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8) ® 후세의 < 벽옥단심(碧玉丹心)>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

8) 『莊子 』 , r 外物 篇 』, < 哀弘死於蜀, 藏 其 血三年, 而化 爲 碧.> 成玄英疏 ; <裂弘還譜, 被放歸蜀 自恨忠而還譜, 遂削腸而死. 蜀人感之,以置盛血, 三年而化爲碧玉 . >

제 5 장 당시 장홍이 주나라의 유명한 인물이었다면 진( 晉 )나라의 유명한 인물 로는 사광(師廣)이 있었다. 사광 0 은 평공의 악관(樂官)이었는데 귀가 무척 이나 밝아서 사면팔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의 곡조까지도 알 수 있을 정도였댜” 특히 거문고를 잘 뜯었는데 그가 연주를 하면 하늘의 옥양(玉 羊)이며 백학(白鶴) 등의 신기한 동물들이 모두 그 연주를 들으러 내려왔 다고 한댜 2 ) 한번은 사광이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검은 학 열여섯 마리가 날아와 날개를 펼치고 입에는 명월주(明月珠)를 물고서 질 서정연하게 춤을 추는 것이었다. ® 신나게 춤을 추다가 한 마리가 실수를 하여 입에 물고 있던 명월주를 떨어뜨렸고, 당황한 그 학은 고개를 숙이 고 구슬을 찾았다. 마침내 구슬을 찾아내어 다시 입에 물고 춤을 추는 학 의 무리 속으로 섞여들어 갔지만 그 말썽꾸러기 때문에 이미 대오는 흐트 러져 엉망이 되고 말았다. 진 평공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음을 참을 수 가 없어 옷소매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3) ® 1) 『淮 南子』, 『原道篇』, <師職之應, 合八風之調.> 高誘注 ; <師職, 晉平公樂師 ; 八風, 八卦之風聲也.>(역자주; 여기에서 <合>은 마땅히 <分>이 되어야 함) 32)) 『『 說廣 郭博物合志刊』 』 輯卷, 3 , 『引玉 符『瑞瑞圓應圖 JJ』, ,< 晉<平師公職鼓鼓琴琴,, 有通玄於神鶴明二,八 ,而 玉下羊衛白明鶴珠,舞 於翻庭翔.塗 投一.鶴>失 珠,

僞得而走, 師膜俺口而笑.> 이 문장을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晉 平公이 琴을 타고 검은 학이 와서 춤을 추도록 하는 神技를 가졌을 수도 없고, 또한 師膜의 눈이 멀었기 때문에 鶴이 입에 문 구슬을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고 웃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 므로 이 문장에서는 平公과 師幅이 서로 바뀐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광의 음악적 경지는 상당히 높았다 그는 무슨 악기의 소리든지 한번 듣기만 하면 잘못된 음조를 즉시 알아낼 수 있었다. 언젠가 한번은 진 평 공이 사람들을 시켜 커다란 종을 만들게 한 적이 있었다. 종이 다 완성되 자 평공은 악공들을 불러 종의 소리를 들어 보게 하였다. 맑게 울려퍼지 는 종소리는 악공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 모두들 종소리가 아주 좋으 며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러나 유독 사광만이 머 리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종소리가 조화롭지 못해요 .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진 평공이 대답했댜 r 다른 악공들은 모두 훌륭하다고 하는데 왜 그대만이 아니라고 하는 가?」 그 말에는 사광에 대한 불만의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광은 자기의 주장을 계속 내세우며 고집스럽게 말했다. r 아닙니다. 후세에 만일 소리를 아는 사람이 있어 저 종소리를 듣는다 면 분명히 조화롭지 못하다고 말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주군을 대신하여 제가 부끄러워서 어찌 하겠습니까」 훗날 위(衛)나라의 영공( 盛 公)이 진나라를 방문할 때 그의 악관인 사연 (師洞) ® 도 함께 왔는데 사연은 그 종소리를 듣고 조화롭지 못하다고 말했 다 . 그때서야 진 평공은 사광이 정말로 소리를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또한 그가 권력에 굽히지 않는 강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 울 알게 되었댜 4) 사광의 성격이 끗끗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또다른 이야기가 있다. ®

4) 『呂氏春秋』, r 長見篇』, <晉平公鑄爲大鍾, 使工聽之, 皆以爲調矣. 師讀曰 ; r 不調, 請更鉛之」 平公曰 ; r 工皆以爲調矣』 師廣曰 ; 『後世有知音者, 將知鍾之不調也, 臣傾 爲君恥之J 至于師消而果知鍾之不調也, 是師膜欲 善 調鍾, 以爲後世之知音者也.>

어느 날 진평공이 신하들과 술을 마시고 있을 때였다. 모두들 술이 거 나하게 취했을 무렵 평공이 감개무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서 임금 노릇을 하는 것보다 더 신나는 일이 또 있을까? 말 한 마디만 하면 모두들 벌벌 떨며 감히 거역하지를 못하니 말이야」 그때 눈이 먼 사광은 평공의 곁에 앉아 있었는데 그 말을 듣자 무릎 위 에 놓고 있던 거문고를 번쩍 들더니 평공을 향하여 집어던지는 것이었다. 평공은 급히 옷을 주워 입고 얼른 자리를 피했다. 거문고는 벽에 부딪쳐 박살이 났고 벽에도 구멍이 뚫렸다 평공은 놀라서 물었다. 『태사(太師)께서는 지금 누구에게 그것을 집어던지셨소?」 r 방금 어떤 어리석은 인간이 주군 앞에서 감히 망령된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댜 그래서 그 자에게 던진 것이지요』 ® 평공은 얼른 사실을 밝히며 말했다 r 그 말은 내가 한 말이오」 「저런!」 사광은 눈썹을 찌푸리고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그런 말은 한 나라의 주군이 하기에 적합한 말이 아닌 줄로 아옵니다」 평공은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사광에게 대답할 말이 없었다. 거문고 때 문에 망가진 벽을 신하들이 진흙으로라도 얼른 다시 칠하려 했지만® 평 공은 그것을 막으며 말했다. 『그대로 두거라 그 벽은 앞으로 나를 깨우쳐 주는 거울이 될 수 있을 것이니」 5)® 당시 진나라의 국경이 주나라와 접해 있었는데 주나라의 성취(聲就)와 5) 『韓非子』, r 難一」, <晉平公與群臣飮, 哈짧, 乃 0 円然暎曰 ; r 莫樂爲人君, 惟其 言 而 莫 之違』 師膜侍坐於前 援琴而槿之. 公坡托而避, 琴懷於壁 . 公曰 ; 「霧人也』 師職曰 ; r,亞 ! 是非君人者之言也』 左右請除之, 公曰 ; 「釋之, 以爲 謀 人戒』 여기에 보이는 <左 右請除之>라는 구절이 『淮南子』, 「齊俗篇J에는 <左右欲除之>라 하여 <除>가 <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請除之>라는 것은 벽을 칠할 것을 청하였다는 뜻 이다(역자주 ; <公曰>과 <霧人也> 사이에 이 들어가야 함).

부여( 復 與) 땅을 진나라가 빼앗았다 주나라는 늘 그 땅을 되찾고자 했으 나 힘이 부족했댜 주 영왕의 아들이 태자 진( 씀 )이었는데 어려서부터 뛰 어나게 총명한 아이였다. 진 평공은 주 영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지만 태자 진만은 조금 두려웠댜 어느 해였다 주나라의 수도였던 낙읍(洛邑)의 곡수(谷水)와 낙수(洛水) 가 합쳐져 큰 홍수가 나 왕궁의 아래까지 물에 잠겼다. 곧 왕궁까지도 떠 내려갈 판이었다 다급해진 영왕은 흙을 쌓아 물을 막으라고 명령을 내렸 다 당시 태자 진은 나이 겨우 열서너 살이었지만 담력이 크고 지혜로와 그 방법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영왕은 물론 아들 의 말을 듣지 않았댜 그러나 그에게 그처럼 담력이 있고 지혜로운 아들 이 있다는 소식은 널리 퍼졌고 인근의 제후들은 태자 진을 존경해 마지 않았댜 61 주나라의 태자가 그렇게 총명하다고 하니 만일 그가 왕위를 계 승하기라도 한다면 진나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할 것이 아닌가! 그 것이야말로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진 평공을 고민 하게 만드는 이유였다

6) 『 國語 』 , r 周語下」, < 盛 王 二 十 二 年, 谷洛鬪, 將왔王宮, 王欲壅之. 太子練曰 ; 「不可. 晉聞古之長民者, 不歷山, 不崇ili, 不防川, 不寶澤 ……」 王卒壅之.>

가슴속을 꽉 막고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평공은 숙향을 다시 주나라로 보내어 상황을 파악해 보도록 하였다. 장홍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에 대해 영왕은 조금 후회를 하고는 있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 진나라와 돈독한 외교 관계까지 맺고 있는 지금 그 일에 대해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숙향은 공적인 일을 모두 마친 뒤 특별히 짬을 내 어 태자 진을 알현하였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사람됨을 헤아려 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자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태자가 다섯 가지 질문을 하면 숙향은 그 중 세 가지를 대답할 수가 없었 던 것이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더욱 그러했다. 교활하고 지모가 뛰어났 던 늙은 외교관 숙향은 목덜미에 진땀만 홀리다가 우물쭈물 작별인사룰

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왔다 숙향은 평공에게 보고했다 . 「태자 진이러는 소년 , 이제 겨우 열다섯 살밖에 안 되었지만 대단합니 댜 제가 도저히 적수가 되지 못했어요 . 성취와 부여 두 군데의 땅을 돌려 주시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듯하옵니댜 만일 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면 우리에게 큰 골치덩어리가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난 평공은 혼자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우리가 가질 수 없는 땅이라면 생색이나 내고 돌려 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 그렇 게 결정을 내리려는 찰나, 악관인 사광이 반대하며 말했다. 「조급해 하실 것 없습니댜 눈먼 이 늙은이를 다시 한번 보내 주십시오. 그 아이와 한번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저까지도 넘어간다면 그때 가서 돌려 주셔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평공은 수염이 허연 이 늙은 태사가 씩씩거리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 고 그가 마음속으로 못마땅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기꺼이 그를 가도록 해주었다 사광은 음악을 배운다는 핑계로 주나라에 갔다. 주나라에 도착한 사광은 태자 진을 만나 보았다. 때는 한겨울이라, 태자 진은 당상(堂上)에 앉아 있었고 사광은 비록 이름이 알려졌다고는 하나 일개 미천한 악사였기 때문에 당하( 堂下 )에 서있었다. 사광이 태자에게 여 러 가지 문제들을 물어 보았지만 태자는 자신의 견해를 확실하게 대답하 였다 그 모습으로 보건대 그는 학문이 깊고 나름대로 탁월한 태도를 지 니고 있는 인물임에 틀림없었댜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사광은 발이 시려워 견딜 수가 없어서 제자리 걸음을 걸으며 말을 했다 . r 훌륭하신 말씀입니다. 정말 훌륭하신 견해이군요!」 r 태사께서는 왜 제자리 걸음을 걷고 계십니까?」 『날씨가 춥기 때문이지요,』 사광은 얼굴을 들고 대답했다. 「발이 꽁꽁 얼었기 때문에 제자리 걸음을 걸어 발을 녹이려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편안하게만 살아온 태자는 자신이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해 왔지만 그런 조그만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부끄러운 느낌이 든 태지~ 얼른 말했다.

「태사께서는 이리 앉으시지요」 신하들이 사광을 부축하여 당상으로 오르게 해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었 댜 그리고 슬( 瑟)을 가져다가 사광에게 한 곡 연주해 줄 것을 부탁했다. 사 광은 슬을 연주하며 < 무사(無射) > 라고 하는 노래를 불렀다 핼 노래를 마치 고 나서 불쑥 태자에게 슬을 내미니 태자 역시 그것을 연주하며 < 교(崎) >® 라는 노래를 한 곡 불렀다. 그렇게 주인과 손님이 서로 노래를 부르며 즐겁 게 놀다가 마침내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 태자 진은 사광에게 네 마리의 말 이 끄는 마차를 하사하여 그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을 표시하였다. @ 진나라로 돌아온 사광은 평공에게 말했다. 「태자는 분명히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난 인물입니다. 그러나 아깝더군 요. 제가 그와 이야가를 나눌 때 자세히 들으니 목소리가 맑지 못하고 천 식 기운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목소리로 추측해 보면 얼굴색도 불로 익혀 놓은 듯이 불그레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가 다 폐병에 걸 려 있지요. 그러니 주상께서는 걱정하실 것이 하나도 없는 줄로 아옵니다. 삼 년을 못 넘기고 하늘나라로 갈 테니까요」 사광이 이런 말을 한 지 삼 년이 채 못되어 과연 태자 진이 세상을 떠났 다는 소식이 진나라에까지 전해져 왔댜 평공은 이제 아무것도 거리낄 것 이 없었고 성취와 부여 땅은 여전히 진나라의 수중에 남아 있게 되었다 .71 7) 『周완』, r 太子晉篇 」 , <晉平公使叔짱(叔向)於周, 見太子晉而與之言, 五稱而三窮, 適 巡而退 其不遂. 歸告王(公)曰 ; r 太子晉行年十五而臣弗能與言, (君)請歸聲就復與田, 若不反 , 及有天下, 將以爲株』 平公將歸之. 師膜曰 ; r 不可. 請使膜 臣往與之 言, 若能 蒙(#泉)子, 反而復之』 師膜見太子,(稱曰, 吾間王子之語高於泰山, 夜殷不麻, 登居不 安, 遠長道而求一言, ……) 王子應之. 師敷東躍其足, 曰 ; 「 善哉 ! 善哉 !」 王子曰 ; r 太 師何畢足駿?」 師膜曰 ; r 天 寒足拘 , 是以數也 』 王子曰 ; 『 諸入坐 』 遂敷席, 注瑟, 師讓 歌『無itJ(曰 ; 國誠寧矣. 遠人來視條義經矣, 好樂無荒 ……). 乃注瑟於王子, 王子歌 『福(曰 ; {iiJ自南極至 于 北極絶境越國弗慈道遠 ……). 師膜毅然起, 曰 ; r~ 臣請歸J 王 子曰 ; 「太師, 汝何戱我平?(……) 吾間汝知人年之長短, 告吾」 師膜曰 ; r 汝 聲淸汗 , 汝 色赤白, 火色不홍」 王子曰 r 然 . 吾後三年, 將上賓於帝所』 歸, 未及三年, 告死者 至.>(역자주 ; 이것은 『逸周콤』 卷 9, r 太子晉解 第 64 」에 나오는 내용인데, 위에서 괄호 안의 부분은 역자가 원서에 의거해 보충해 넣은 것임)

왕교(『神仙』)

태자 진은 왕자교 ( · E f祖i), 혹은 왕교(十.仕)라고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이때 죽은 것이 아니라 신선의 도를 닦아 백일승천하여 신선이 된 것이라고 한다. 이 밖에 왕교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또 있다. 주 영왕 시대의 태자 진 이외에 한나라 명제(明帝) 시절, 하동(河東) 엽현(葉縣)에서 현령 노릇 을 했던 왕교가 있다 그는 매월 초에 상서대(尙 書臺 )로 일을 보러 나갔 는데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가 타고 온 마차가 보이지 않았 댜 다만 들오리 한 쌍만이 동남쪽에서 날아오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그 것을 괴이하게 여긴 어떤 사람이 그 사실을 명제에게 고해바쳤다. 명제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그물을 쳐서 그 들오리 를 잡아오게 하였는데 그물 속에서 나온 것은 들오리가 아니라 신발 한 켤레였다. 몇 번을 계속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4 년 동안 상서관(尙 書 官)들에게 지급했던 바로 그 신발이었다 .8)

8) 『風俗通』, 「正失篇』, <俗說孝明帝時, (尙왑郞)河東王喬(遷)爲葉令, (喬有神術)每月 朔쌉( 常 ; 常)i봅臺朝 帝怪其數來而無車騎, 密令太史候望 . 言其臨至時, 쌉(常 ; 常)有 雙堯從東南飛來,因伏fiiJ,見堯擧羅,但得一雙烏耳. 使尙習識視,四年中所賜尙첩官 屬履也.(……) 太史 言 , 此令卽仙人王喬者也.>(역자주 ; 위에서 괄호 안의 부분은 역자 가 『風俗通』 卷 2, 『正失篇』 葉令祠條에 의거해 보충한 것임)

이 밖에 또 익주(益州) 건위(健爲) 무양(武陽) 땅에도 왕교가 있었다. 무양에는 북평산(北平山)이 있었는데 산꼭대기에 하얀 두꺼비가 살았다. 그것은 육지(肉芝)라고도 하였는데 먹으면 장생불사할 수 있었다고 하지 만 아무도 그것을 본 적이 없었다. 왕교는 줄곧 도를 닦아 온 인물로서 하루 종일 산을 바라보며 기도를 드리는 일을 십여 년 동안 계속해 왔다 . 그런 후에 산에 올라 여기저기 뒤진 끝에 마침내 하얀 두꺼비를 잡을 수 있었다. 왕교가 그것을 먹으니 몸이 튼튼해지고 힘이 세어졌으며 달리는 말도 따라잡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후에 그는 동권산(東峨山)에서 득도하여 신선이 되었고 사람들은 무양에 교선사(喬仙祠)를 지었다 .9)

9) 『歷代仙眞體道通嬰』 卷 5, < 王喬, 健爲武 陽 人也. 武 陽 有北平山, 在 益 州南一百四十 七里, 高一 千三百丈. 上有白嚴姬, 爲之肉芝 , 食者長生, 非仙材遜骨, 莫 能致也. 喬好 道,望山朝拜,積十餘年, 登 山感致,因 得食 之,身輕力倍,行及走馬. 後 爲柏人令,遂 於東耀山得道 , 今武 陽 有 喬 仙祠 . >

이렇게 몇 사람의 왕교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만 여기 서는 태자 진 왕교에 대해서만 서술해 보기로 한다 . 그는 왕자교( 王子喬 )라고도 불리며 생( 第 )을 부는 것을 가장 좋아하였 는데 그것을 불어서 봉황이 우는 것과 흡사한 소리를 낼 수 있었다. 부구 공( 浮 丘 公 )이라는 도사가 왕교에게 선풍도골이 있음을 알아차리고서 그를 데리고 숭고산( 齒高 山)으로 가 그곳에서 여러 해를 살았다 . 어느 해 백량 (柏良)이러는 친구가 그 산에 놀러갔다가 뜻하지 아니하게 그를 만나게 되었다 왕교는 백량에게 말했다 「집에 돌아가거든 자네 우리 식구들에게 말 좀 전해 주게. 7 월 7 일 날 구씨산(線氏山) 기슭으로 와서 니를 기다려 달라고 해주겠나? 내가 식구 들과 작별 인사를 좀 하려고 그러네」 마침내 그날이 되었댜 왕자교는 하얀 학을 타고 구씨산 꼭대기에서 기 다리고 있던 식구들을 향해 손을 혼들어 작별의 인사를 하였다. 영왕의 가족들은 산기슭에서 멀리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지만 그 험하고 높은 산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왕자교는 그렇게 산꼭대기에서 며칠을 머물다가 하얀 학을 타고 여유작작하게 하늘로 날아 올라갔고 잠 시 후에는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JO ) 다만 구름을 뚫고 수놓 은 신발 한 켤레가 떨어졌는데 그것은 멀리 산기슭에서 아들을 전송하는 아버지에게 기념으로 남긴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연유로 해서 그곳은 훗날 <아버지롤 위로한 언덕(撫父唯) >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 사람들은 그 언덕에 <자진사(子晉祠)>러는 사당을 세웠는데 아주 오랜 세월이 지 나도록 그곳에서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피리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와 사람

10) 『列仙傳 』 卷上, <王子喬者, 周靈王太子晉也, 好吹答作 鳳凰鳴 , 游伊洛之ria1 . 道士浮 丘公接以上尙高山, 三 十餘年後, 求之於山上. 見柏良曰 ; r 告我家, 七月 七 日 待我於緩 氏山崩』 至時, 果乘白鶴駐山頭, 望之不得到. 擧手謝時人, 數 日 而去 . >

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Ill

11) 『水經注』 , 「洛水』, <(開山圓謂之候氏山也 亦云仙者升焉, 言)縱氏山. 王子晉性鶴 (鶴 ; 詞)斯阜, 盜王望而不得近, 擧手謝而去.其家得遺展. 俗亦謂之取(取 ; 爲)撫父推, 推上有子晉祠.(或言在九山非此, 世代已遠, 莫能辨之) 및能] 『列仙傳』云, 世有籍管之 聲焉.>(역자주 계에서 괄호 안의 부분은 역자가 『水經注』 卷 15 洛水條에 의거해 보 충한 것입)

이 밖에 최문자 (1 甘文 子 )와 왕자교에 관한 전설이 또 하나 전해지고 있 다.@ 최문지는 왕자교에게서 신선의 도를 배웠댜 왕자교는 최문자가 도 를 배울 만한 인물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 그래서 하 얀 무지개로 변해 약 한 사발을 들고 비틀거리며 방에서 나가 최문자에게 약을 주었다? 최문자는 깜짝 놀라 손에 집히는 대로 창을 집어들고 무지 개를 쫓아버렸다. 약사발이 땅위에 떨어지는가 했더니 하얀 무지개가 순식 간에 사라지고 땅바닥에는 왕자교의 신발 한 짝이 남았다. 최문자는 그 신 발이 또 무슨 괴이한 짓을 할까 봐 겁이 나서 그것을 방 안에 넣고 헌 대 나무 바구니로 덮어 두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바구니 속에서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댜® 최문자가 살그머니 열어 보았더니 갑자기 거대한 새 한 마리가 바구니 속에서 후다닥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그 새는 창틀 을 부수고 밖으로 나가 날개를 펼친 채 하늘 높이 날아 올라갔다 12 慮

12) 『楚辭』, 「天 r口 1 』, <白親嬰那, 胡爲此堂? 安得夫良藥, 不能固藏? 天式縱橫, 陽誤援 死, 大鳥何鳴 夫焉喪歡體?> 王逸注에 인용된 『列仙傳』(今本에는 없음)云, <崔文學 仙於王子喬 子喬化爲白規 持藥與文子. 文子驚怪, 引戈擊之, 因歷其藥. 冊而視之, 王子喬之尸也 置之室中,稷以幣鐘. 須與則化爲大鳥而鳴, 魏飛而去.> 聞一多의 『楚 辭校補』에는 <焉喪歡體>의 <體>와 <王子喬之尸>의 <尸>를 모두 <履>라 하였는 데 여기에서는 그의 說을 따른다 .

이렇게 하여 최문자가 신선의 도를 배우는 일은 끝장이 났고 훗날 그 는 붉은 약장사 깃발을 든 채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약을 팔았다고 한 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선인에게서 몇 년 간이나마 신선의 도룰 배웠던 사람인지라,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도 있거니와, 그가 파는· 그 약이 역병에 걸린 사람을 적지 않게 고쳐 주었다고 한다 .131

13) 『列仙傳』 卷上, <(崔)文子世好黃老事, 居潛山下, 後作赤丸散, 賈藥都市, 所活者萬

計.>

이 밖에도 왕자교의 묘지에 관한 신기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의 묘지는 장안(長安) 무릉(茂陵)에 있었댜 서진(西 짦 ) 말기 오호(五胡)의 난(亂)이 일어났을 때 어떤 사람이 그의 묘를 도굴하러 들어갔는데 묘 속 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공중에 매달려 있는 보검만이 보였다. 도굴꾼온 그 보검을 훔치려고 하였지만 보검에서는 용이나 호랑이의 울음소리처럼 웅 옹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어서 감히 접근을 할 수가 없었다. 보검에서 신 이 나오려나 하고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휘잉 하는 소리가 나더니 보 검이 묘지를 뚫고 하늘로 날아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1 4) 이러한 전설의 의미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영명했지만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난 가없은 왕자에 대해서 사람들이 깊은 동정과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댜

14) 『古小說釣沈』 輯 『小說』, <王子喬墓在京茂陵, 國亂時, 有人盜發之 . 都無所見, 唯 存(有)一劍 戀在空中 . 欲取之, 劍便作龍鳴虎llJ\,, 遂不敗近. 低而飛上天(神仙經云 ; 『眞人去世, 而多以劍代其形, 五百年後, 劍亦能盜化」 此其驗也).>(역자주 ; 위에서 괄 호 안의 부분은 역자가 원본에 의거해 보충한 것임)

제 6 장 장홍이나 사광과 동시대인이지만 조금 후에 나타난 노(魯)나라의 공자 (孔 子 ) 역시 모두들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인물이다. 공자의 제자들이 펴낸 것으로 알려진 일종의 강의록인 『논어(論語)』에 보면 공자는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았다( 不 語怪力亂神)> 야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1 ) 아이러니컬하게도 공자와 그의 제자들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들, 즉 <괴력난신>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진다. 또한 공자 자신이 <괴이한 것을 언급한 (語怪) > 적도 많은데 여러 가지 기록에서 그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 그런 면에서 보면 공자가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제자들 이 스승을 위해서 체면치레로 그랬던 것일 뿐, 사실은 그리 믿을 만한 주 장이 못되는 것 같다. 이제 공자와 그의 몇몇 제자들에 관한 이상한 이야 기들을 서술해 보기로 한다.

1) 『論語 』 , r 述而」 참조 .

공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우선 그의 아버지인 숙량홀(叔梁訖)에 대 해 먼저 언급하여야 한다. 춘추시대 노나라와 다른 몇몇 제후국이 함께 힘을 합쳐 핍양({읍陽)이라 고 하는 작은 나라(山東省 譯縣 남쪽)를 공격했다. 그러나 핍양 사람들은

공자(『炎黃』)

일찌감치 방어할 준비를 다해 두었기 때문에 견고하게 성을 지키고 있어 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댜 또한 몇 번이나 공격을 당했는데도 성은 든든하여 전혀 혼들리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성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 ® 마치 나와서 교전을 하려는 듯이 보였다 제후의 군대는 마침내 성으로 진격할 때가 되었다고 여겨 둥둥 북소리를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성 안에서도 군사들이 밀려나와 응전을 하였는데 진퇴를 거듭하며 싸~던 핍양의 군사들이 점차 성 안으로 후퇴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제후의 군사 들은 그것이 계략인 줄도 모르고 그들의 뒤를 따라 성 안으로 진격해 들 어갔다 일부분의 군사들이 성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갑자기 성루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거대한 철문이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하는 것이 었다 . 급박한 순간이었다 . 바로 그때 성 안으로 진격해 들어갔던 전사 중 키가 십 척이 넘는 거대한 사나이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철문 아래로 뛰어 들어가 두 손으로 문을 받쳐들고 힘껏 밀어올리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멋 진 사나이였다 근육이 한껏 튀어나온 두 어깨와 거대한 체구는 그대로가 든든한 쇠기둥이 되어 철문을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게 받쳐 주고 있었다. 이미 성 안에 갇힌 꼴이 되었던 군사들은 그 틈을 타 얼른 밖으로 도망쳐 나왔댜 그때서야 한숨을 돌린 사람들은 힘이 장사이고 기골이 장대한 그 사나이가 노나라 추읍(閩邑)의 공홀(孔絶), 즉 숙량홀이라는 것을 알았다. 바로 그가 공자의 아버지였다. 이후 연합군은 몇 차례의 힘겨운 교전 끝 에 마침내 핍양을 점령했고 그 나라를 멸망시켰댜 2 ) 그리고 숙량홀은 그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노나라 추읍의 대부(大夫)가 되었다 .3)

2) 『 左傳』, r 襄公 10 年J, <晉荀個 • 士包請伐偏陽, (……) 丙寅園之, 弗克. (……) 偏賜 人啓門, 諸侯之士門焉 縣門發, 諏人訖扶之以出門者 …… 荀個 • 士句帥卒攻偏陽, 親 受矢石, 甲午滅之.> 3) 『史記』, 『孔子世家』, <菓解引孔安國터 「諏 孔子父梁訖所治邑』>

공지는 태어나면서부터 생긴 것이 특이했다. 머리의 사면이 튀어나온 데다가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것이 마치 노나라 니구산(尼丘山)같이 생겼

다고 하여 ® 이름을 구(丘)라 하였고 자를 중니(仲尼)라 하였다 그는 공홀 의 자식 중에서 둘째였는데 <중(仲)>이란 바로 둘째라는 의미이다 .4l 공자 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에 잇달아 세상을 떠났댜 51@ 공자가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아버지를 닮아 기골이 장대했고 그런 연유로 해서 사람들은 그를 <장인(長人)>이라 부르기도 했댜 6 1@

4) 『史記』, r 孔子世家』, <顔氏女祥於尼丘, 得孔子, 生而首上坪頂, 故因名丘云, 字仲 尼.> 『白虎通』, r 姓名」, <孔子首類魯國尼丘山.> 5) 『史記』, r 孔子世家」, <孔子生而叔梁訖死 . 孔子母死, 孔子年十七.> 6) 『法苑珠林』 卷 8, 引 『春秋演孔圓』, <孔子長十尺.> 『史記』, 『孔子世家」, <孔子長九 尺六寸, 人皆謂之長人而異之.>

한번은 공자가 채나라(蔡國)에 간 적이 있었다. 그가 여관에서 머물고 있을 때 밤중에 좀도둑이 몰래 들어와 그의 나막신(木板難)을 훔쳐갔다. 도둑온 그것을 장물아비 집에 갖다 두었는데 그 신발이 유별나게 큰 것을 본 장물아비는 신기한 생각이 들어 자를 가지고 신발의 크기를 재어 보았 다. 그런데 그 크기가 자그마치 한 자 네 치나 되었다고 하니 공자가 보통 사람들과는 확실히 달랐던 것이다 .71 그 나막신은 몇 차례 임자가 바뀐 끝 에 8 백여 년이 지난 뒤 진(晉) 혜제(惠帝) 원강(元江) 연간 (291-299) 에 이 르러서 무고삼보(武庫三寶) 중의 하나가 되었다. 무고삼보란 한(漢) 고조 (高祖)가 백사(白蛇)를 벨 때 사용첫 l 던 칼과 공자의 나막신, 그리고 왕망 (王葬)의 머리인데 원강 원년 (295) 의 화재로 인하여 한 고조의 칼만 <지 붕을 뚫고 하늘로 사라졌을뿐> 공자의 신발과 왕망의 머리는 모두 타버 렸다고 한댜 81 공자는 기골이 장대했을 뿐 아니라 힘도 장사였다. 그의 아버지와 마찬 가지로 그 역시 철문을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였고 위급한 상황에서는 호 랑이라도 발로 걷어차 넘어뜨릴 수 있었다 .9)(]) 그리고 활쏘는 기술과 마차

7) 『太平御覽』 卷 69, 引 『論語隱義注』, <孔子至蔡, 解於客舍. 夜有人取孔子一只展去, 盜者置履於受盜家. 孔子展長一尺四寸, 與凡人異.> 8) 『異苑』 卷 2, <晉惠帝元康五年, 武庫火燒, 漢 高 祖斬白蛇劍 • 孔子履 • 王拜頭三物, 中홉監張茂先恨難作, 列兵陳衛, 咸見此劍容屋飛去, 莫知所向.> 9) 『呂氏春秋』, 「愼大篇』, <孔子之助, 擧國門之關 . > 『 淮南子』, r 主術篇』, <孔子足攝

鄕Ji..>

를 모는 재주도 상당히 뛰어났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의 학문이 깊다고 그를 칭송하면 그는 겸손하게 말했다. 「제가 무엇을 할 줄 알겠습니까? 마차를 모는 일? 활을 쏘는 일?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마차를 모는 일밖에 없습니다」 10)

10) 『論語』, 『子空』, <達卷黨人曰 ; 『大哉孔子, 博學而無所成名』 子聞之, 謂弟子曰 ; 『吾 何執? 執御平? 執射平? 吾執御矣』>

그러나 사실 그는 활도 상당히 잘 쏘았댜 그가 구상(粧相)의 원포(園 뻐)에서 활을 쏘았을 때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모두 갈채를 보내며 그를 둘러쌌다고 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에워쌌는지 마치 튼튼한 담과 같아서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고 한다 .111

11) 『禮記』, 『射義」, <孔子射於뿔相之!!Ill, 視者如培塔.>

이처럼 공자는 무예에도 조예가 깊고 힘도 장사였지만 절대로 자신의 힘과 무예를 자랑한 적이 없었다 121 언제나 그는 온화하고 점잖은 모습이 었다. <공자가 한가로이 집에 있을 때 매우 단정하고 또 온화했다(申申如 也, 天天如也 )>.13) ® 어떤 때에는 오히려 아주 작은 일에도 지나치게 조심 하는 편이어서 그의 힘이나 무공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 가 많았다 예를 들어 보자면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12) 『呂氏春秋』, r 愼大篇』, <(孔子)不肯以力 00.> 13) 『論語』, r 述而」 참조

노나라의 성문은 오래되어 다 썩어서 언제라도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가 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그것은 늘 그저 그런 상태였고 정 말로 무너져 내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별 신경을 쓰지 않고 그냥 지나다녔다. 그러나 공자는 매번 그곳을 지날 때마다 허리롤 조금 굽히고 서 재빠르게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웃으면서 공자에 게 말했다. r 걱정마세요, 성문은 언제나 그 모양이었어요」 그러면 공자는 대답하는 것이었다. 「바로 늘 그 모양이기 때문에 특별히 조심하여 방비하는 것이라네』 141

14) 『論衡』, r 幸偶篇』, <魯城門久朽欲頓, 孔子過之, 超而疾行, 左右曰 ; 「久矣J 孔子曰 ; r 惡其久也」 孔子戒愼已莊 .>

공자는 이처럼 문인이며 학자였다 힘만 뛰어나고 지혜가 없는 일개 무 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무척이나 도덕을 강조하였다 . 그가 여행을 하다가 < 승모(勝母)> 라는 곳에 이르게 되었을 때 해가 저물어 어두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곳에서 묵으려 하지 않았다 바로 그곳의 지명이 < 어머니를 이긴다(勝 過母親)>는 뜻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댜 또 < 도천(盜 泉)> 이라는 곳을 지 날 때에는 몹시 목이 말랐지만 그곳의 물을 마시지 않았다. 그 역시 그곳 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까닭이다 1 5)

15) 『文選』, r 猛虎行』 注, 引 『尸子』, <孔子至於勝母, 暮矣, 而不宿, 過於盜泉, 潟矣, 而 不飮;惡其名也.>

그는 평소에 주(周) 문왕(文 王) 을 가장 존경하였는데 문왕이 창포장(葛 蒲盟)을 줄겨 먹었디는 것을 알고서 자기도 그것을 먹어 보려 하였다. 그 러나 그것은 냄새가 고약해서 정말이지 먹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삼 년 간이나 노력하여 드디어는 그것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16) 또 한 문왕은 주량이 보통이 아니어서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는데 공자 역시 열심히 노력한 결과 마침내는 백여 잔이나 마실 수 있게 되었다고 한댜 17)@ 공자는 또한 음악을 사랑하였다 ® 그는 중년이 되었을 때 노나라의 유 명한 음악가였던 사양자(師 襄子 )에게서 거문고를 연주하는 방법을 배웠다 . 사양자는 <격경양(擊磐襄 )>18) @이라고도 불렀는데 이것은 경(馨)을 잘 쳤 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물론 거문고도 열심히 공부했다. 공자는 그 에게서 자신도 이름을 잊어버린 옛날 음악을 한 곡 배우고 있었다. 십여 일이 지났을때 사양자가 말했댜

16) 『呂氏春秋』, r 愼大篇』, <文王喝昌蒲 造, 孔子聞而服之, 縮鎖食之, 三年, 然後勝之.> 17) 『論語』, r 語增篇』, <傳語曰, 文王千鍾, 孔子百紙 . > 18) 『史記』, 『孔子世家』, 索隱 ; <師襄子, 魯人, 『論語』之擊磐襄是也.> 『論語』, r 微子』 참조.

r 이제 이 곡조는 완전히 연주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다른 곡조를 하나 배 우기로 하는 것이 어떻겠소?」 r 아닙니다』 공자가 대답했다. r 악곡의 박자 정도야 이제 터득했지만 그 음악의 이치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계속해서 어느 정도 그 곡조를 연주하게 된 후 사양자가 또 물었다. 「음악의 이치에 대해서도 이제는 터득하게 되었을 것이니 다른 곡조를 배우는 것이 어떻겠소?」 「아닙니다」 공자는 여전히 말했댜 r 음악의 이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깨달았지만 그 곡울 만든 사람의 취지에 대해서는 아직 아는 바가 없습니다」 사양자는 하는 수 없이 공자가 그 곡을 계속 연주하도록 내버려 두었 다. 한참 후 사양자는 참을 수가 없어서 다시 물었다. 「작곡자의 의도에 대해서도 이제는 깨달았을 것이니 다른 곡을 배우기 로 합시다, 어때요?」 r 작곡자의 의도는 알았지만 그의 위인됨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할 수 없이 사양자는 공자가 그 곡조를 계속 치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 참이 지나니 과연 공지는 그 곡조의 정수를 터득한 듯한 연주를 하였다. 곁에서 그것을 듣고 있던 사양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 「참으로 훌륭한 연주로구나. 마치 음악 속에 엄숙하고도 장엄하며 깊고 오묘한 이치가 들어 있는 것 같고, 높은 곳에 올라가 가슴을 탁 터놓고 있 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을 보니 ……」 공지는 그때서야 거문고를 앞으로 밀어 놓고 줄을 어루만지며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중얼거렀다. r 그래, 이제서야 이 음악을 만든 사람의 위인됨을 알 수 있을 것 같습

니다 그 사람은 키가 크고 피부색이 검으며 눈은 약간 근시이지만 천하 를 다스리는 군주의 기개를 갖고 있군요 ……」 r 당신이 묘사하고 있는 사람은 주 문왕이 아니오?」 r 주 문왕이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훌륭한 음악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난 사양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자에게 두 번 읍(損)을 하며 말했댜 r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이제야 생각이 나는군요. 제가 예전에 스승에게 서 이 곡조를 배울 때 스승께서 그 곡의 제목이 <문왕조(文王操 )>19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9) 『史記』, r 孔子世家』, <孔子學鼓琴於師襄子, 十(四)日不進. 師襄子曰 ; 「可以益矣』 孔子曰 ; r 丘已習其曲矣, 未得其數也』 有間, 曰 ; r 已習其數, 可以益矣』 孔子曰 ; (『丘 未得其志也』 有間, 曰 ; …… 『已習其志, 可以益矣」 孔子曰 ……) r 丘未得其爲人也』 有 r1, 曰 ; r 有所穆然深思焉, 有所治然高望而遠志焉』 曰 ; r 丘得其爲人, 醉然而黑, 幾 然而長, 眼如望羊, (心)如王四國, 非文王其誰能爲此也!』 師襄子辭席再拜, 曰 ; r 師蓋 云 『文王操』也』>(역자주 ; 위에서 괄호 안의 부분은 역자가 원문에 의거하여 보충한 것임)

공자가 노나라에 머물며 30 여 세가 되었을 때였다. 당시 노나라에는 맹 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이라고 하는 권신(權臣)들이 있었는데 그 들이 권력을 휘두르며 전횡하였기 때문에 나라의 꼴이 엉망진창이었다.@ 공자는 그러한 권신들의 꼴도 보기 싫었거니와 자신에게는 그러한 현실 을 변화시킬 만한 능력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제나라로 가버렸다@ 공 자가 제나라의 수도에 도착하여 성문을 지나려 할 때였다. 어린아이 하나 가 한 손에 병을 들고 자신의 마차 옆울 지나가고 있었다. 그 아이는 이목 구비가 수려하고 총명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깡총깡총 뛰어가다가 천천 히 걷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아주 느릿느릿 걸어가는 것이었다. 똑바로 앞을 바라보며 단정하게 걷는 모습이 마치 무엇엔가 단단히 이 끌려 온 정신을 팔고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공자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 지만 곧 사정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아주 먼 곳에서 유장하고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는데 그 아 이는 바로 그 음악을 귀기울여 듣고 있었던 것이댜 공자도 주의를 기울 여 자세히 들어 보았다. 그러다가 기쁨에 겨워 만면에 희색이 돌며 감격 한 듯 마부에게 말했다 「빨리 빨리 달리시오. < 소악( 部樂 ) > 의 연주가 방금 시작되었소!」 < 소악 > 이라는 것은 아주 유명하고도 귀한 음악이었다 바로 순( 舜 )임금 이 남긴 음악으로 대부분 피리나 생황 등의 관악기를 사용하여 연주하는데 그 음악이 울려퍼지면 마치 봄날의 구름이 갑작스레 모여들고 학이 아흐레 를 우는 것 같았으며 온갖 새들이 꽃밭에 모여들어 지저귀는 듯했다. 순임 금이 권좌에 있을 때 이 음악을 연주하면 하늘의 봉황들까지도 모여들어 짝을 지어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 201 이런 전설들로 미루어 보아 그 음악이 얼마나 사람들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것이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

20) 『町, 『益稷』, <蕭『 部 』 九成, 鳳凰來儀 . >

공자는 급히 제나라의 사당으로 가 마침 그곳에서 연주되고 있는 < 소 악 > 을 들을 수 있었는데 어찌나 황홀하던지 정신이 아득하여 술에 취한 것처럼 몽롱했다. 음악을 들은 지 석달이 지나도 그 기이한 음악 소리는 줄곧 귓전에서 맴돌고 있었다. ® 그래서 고기를 먹어도 고기 맛을 잊을 정 도였댜 2 1 1 또한 그는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21) 『說 苑 』 , 「 修 文J, < 孔子至 齊 郭門之外 , 遇一嬰兒, 擊 一 登, 相與供行, 其視精, 其心正, 其 行端 孔子謂御曰 ; r 超超 之 ! 超超之! 『器樂』方作」 孔子至彼, 聞 『 部 』, 三月不知肉味 . >

「정말이지 그 음악이 나를 이렇게 감동시킬 줄은 짐작도 못했어!」 221

22) 『論 語 』 , 『 述 而』, < 子在 齊 , 聞『 部 』, 三月 不知肉味, 曰 ; r 不圓爲樂之至於斯也』>

공자가 그렇게 < 소악(部樂) > 을 찬미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순임금에 대한 존경심도 문왕에 대한 그것에 못지 않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공자가 박학다식한 인물이었음은 누구라도 알고 있다. 어떠한 어려운 문제라도 모두 그에게 묻기만 하면 명쾌하고도 원만한 해답을 얻을 수가 있었다

한번은 노나라의 대부인 계환자( 季桓子 )가 사람을 시켜 우물을 파게 하 였는데 진흙 속에서 토기로 된 항아리 같은 것이 나왔고 그 속에는 양이 한 마리 들어 있었댜 계환자는 그것이 도대체 무슨 괴물인지 알 수가 없 어 박학하기로 소문이 난 공자에게 물어 보기로 하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공자라는 사람은 아는 것이 많기 때문에 우물 속에서 나온 그 이상한 괴 물이 무엇인지도 알 것이 분명하니, 사실을 말하기 전에 한번 속여 보아 도 무방할 것이라고 말했다. 계환지는 사람들의 말대로 해보기로 했다 . 그래서 공자에게 사람을 보 내어 말했댜 「우리집에 우물을 파는데 흙 속에서 개가 한 마리 나왔습니다 . 그것이 도대체 무슨 괴물일까요?」 대가 아는 바에 의하면 ……」 공자는 조금도 당황하는 빛이 없이 말했댜 「그것은 아마 개가 아니라 양일 것이오. 내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나무나 돌의 정령은 기망량( 愛 阿兩)이라 하고 물의 정령은 용망상(龍円 象)이라 하지요. 또 흙의 정령은 분양(積羊)이라 합니다 . 그러니 당신들이 흙 속에서 파낸 것은 분명히 양이지 개가 아닐 것이오」 계환자의 말을 전하러 왔던 그 사람은 깜짝 놀라서 급히 돌아가 자기가 공자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전해 주었다. 계환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감탄 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r 정말 훌륭해 쪽집게같이 맞추는구먼!」 23 ) 당시 노나라와 남쪽으로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나라는 오나라(吳國)였 는데 국세가 상당히 강성했다. 오나라의 왕 부차(夫差)가 월나라(越國)를 공격하여 월나라의 구천(句錢)을 회계산(會稽山)에 꼼짝도 못하게 몰아넣 은 뒤 월왕이 산 위에 쌓은 성을 무너뜨렸다. 월왕은 하는 수 없이 항복을 23) 『說苑』, r 辨物』, <季桓子麥井, 得土ffi, 中有羊, 以問孔子, 言得狗. 孔子曰 ; r 以吾所 聞, 非狗, 乃羊也. 木石之怪, 變思兩 ; 水之怪, 龍뛴象 ; 土之怪, 積羊也 , 非狗也』 桓子 曰 ; 『善哉!』>

수、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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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儒士』)

하였는데 오나라의 군대는 무너진 성터에서 거대한 뼈를 하나 파냈다. 그 것은 사람의 뼈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물의 뼈도 아닌 것 같았다. 그 뼈는 얼마나 크던지 마차 하나에 가득찰 지경이었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진 오나라 왕은 노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공자에게 물어 보게 하였다. 「뼈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무엇입니까?J 공자가 대답했댜 「옛날 우(禹)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 회계산에서 천하의 신들을 모이 게 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댜 그때 방풍씨(防風氏)의 우두머리가 늦게 도착해 우임금이 그를 죽였지요. 그리고 그의 시체를 회계산에 묻었다고 하는데 그의 뼈 한토막이 마차 한 대에 가~읍 찰 정도였다고 하니 그것이 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뼈가 아니겠습니까」 공자가 말한 것과 오나라 군사들이 회계산에서 얻은 그 뼈는 미리 맞 춰본 것도 아닌데 정확하게 일치했다. 오나라의 사신은 공자의 말을 듣고 신이 나서 거듭 경의를 표한 뒤 기분 좋게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24)

24) 『國語』, 『魯語下』, <吳伐越, 座會稽, 獲骨焉 節專車. 吳子使來好職, 旦問之仲尼, 曰 ; (「無以吾命」賓發幣於大夫及仲尼, 仲尼爵之. 槪徹沮而案, 客執骨而問曰, 「(政問) 骨何爲大인 仲尼 曰 ; r 丘聞之, 昔禹致群神於會稽之山, 防風氏後至, 禹殺而毅之, 其 骨節專車, 此爲大矣』>(역자주 ; 괄호 안의 부분은 역자가 보충한 것임)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북쪽에 접해 있는 제나라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갑자기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이상한 새가 왕궁으로 날아오더니, 날개를 펼치고서 하나뿐인 다리를 절룩이며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춤을 추는 것이었는데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였다. 제나라의 경공(景公)은 그 새가 무슨 새인지, 또 그 새의 춤이 길한 것인 지 아니면 흉한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오나라 왕이 그랬던 것처럼 공자에 게 사신을 보내어 물어 보게 했댜 공자는 제나라의 사신에게 다음과 같 이 대답해 주었다. 「그 새는 상양(商羊)이라고 하는데 물의 정령입니다. 일전에 어떤 어린

아이가 이상한 놀이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지요. 그 애는 다리 하나를 구 부리고 눈썹울 움직이며 마치 무엇인가를 물어 보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다른 쪽 다리로 팔짝팔짝 뛰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어요. <곧 비가 내리려고 하네. 상양이 춤추는 것을 보니!> 이제 제나라에 그 이상스런 새가 나타난 것은 바로 큰 비를 예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군요 . 어서 돌아가 백성들에게 도랑을 잘 치우고 제방을 튼튼히 하여 홍 수에 대비하라고 전하십시오」 제나라 사신이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동북방에서 오래도록 보지 못했던 큰 비가 내렸고 각국에는 홍수가 범람하여 집이 떠내려 가고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제나라에는 특히 많은 비가 내렸으나 공자의 말 에 따라 방비를 철저히 하였기 때문에 피해가 가장 적었다. 엄청나게 내 리던 비가 그친 뒤 경공은 공자를 칭송하여 말했다. 「성인의 말씀에는 정말 오차가 없구나. 금방 그러한 일이 일어나다니!」 25l ®

25) 『 孔子家語』, r 辯政』, <齊有一脚之,梅 飛菓於公쎄 下止於殿前. 舒翊而飛, 齊侯大怪 之, 使使鼎問孔子, 孔子曰 ; 『此鳥名 曰商羊, 水祥也 . 8 ’ 兒童有屈其一脚, 振t R 兩眉而 桃 旦諸曰 ; 天將大雨, 商羊鼓舞 今齊有之, 其應至矣. 急發民起治溝渠, 修堤防, 將 有大水爲災」 頃之, 大謀雨, 水盜漫諸國, 唯齊有備不敗. 兼公臼 ; r 뿐人之 言 , 信而有 徵矣』>

공자는 동요와 민가(民歌)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것들을 통하여 많은 새로운 것들을 알 수 있었고 또 그것은 어려운 여러 가지 문제들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자는 성성(雅混) 이라는 짐승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그 짐승을 보면 곧 이름을 알아 맞출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초나라 소족(昭族) 사람들이 부르던 성성이 에 관한 노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26)@

26) 『論衡』, 頂知』, <孔子未常見猫盟 至輯能名之 ; 然而孔子名雅麗, 聞昭人之歌.>

공자와 자하(子夏)가 어느 곳에선가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새를 보게 되 었을 때였댜 다른 사람들 역시 그 새의 이름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고 있 던 차에 공자를 만나게 되니 모두들 그 새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공자가 대답했다. r 그 새의 이름은 재두루미( 節) 라 하지요」 자하가 물었다. r 그것이 재두루미라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공자가 대답했댜 r 강가의 어부들이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지. < 재두루미야 , 재두루미야! 거꾸로 돋은 깃털이 어지러이 홑날리는구나! 몸에 붙은 아홉 개의 꼬리는 길기도 하구나!>®라는 노래였어 . 그래서 내가 그 이름을 알지」 '!:I)

'2:1) 『釋史』(孔子類記 4) 卷 86, 引 『沖波傳』, <有鳥九尾, 孔子與子夏見之. 人以問孔子, 曰 ; 『鷄也』 子夏曰 ; 「何以知之?』 孔子曰 ; 『河上之歌云, 鷄分鷄分,逆毛哀分, 一身九 尾長分』>

이러한 것들은 모두 공자가 민가 같은 것들을 유심히 들었다는 것을 설 명해 주는 증거가 된댜 공자는 자기가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는 다론 사람들에게 허심탄회하 게 물었고 또 확실하게 알 때까지 계속 공부했다 .28) 그래서 머릿속에 온갖 학식들을 갖추게 되었고 당대에 가장 박학다식한 인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던 것이다® 공자가 박학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전설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진 후(陳侯)에게 숙신씨(叔愼氏)의 화살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주었고 , 29)@ 초나라의 소왕(昭王)을 위해서는 강에 떠내려 오는 평실( 津質) 이 무슨 열 매인기를 알려 주었으며,幻멜 제나라의 경공에게는 큰 종(大鐘)이 망가지 게 된 연유를 설명해 주었다 .31)@ 그리고 자로(子路)에게는 날씨가 맑을 것 인지 흐릴 것인지를 가르쳐 주었는데 ,32) @ 그러한 이야기들로 보아 공자가 알고 있는 지식들이 무궁무진했었음을 알 수 있다.

28) 『論語』, 『八{肖J, <子入太廟, 每事問.> 29) 『國語』 , r 魯語下』 참조. 30) 『說苑』, r 辯物』 참조 31) 『初學記』 卷 16, 引 댕닫子春秋』 참조. 32) 『論衡』, 『明 雲 』 참조

그러나 전설을 보면 이렇게 박학다식했던 공자도 난감한 경우에 처할 때가 있었는데 이 위대한 인물을 난처하게 만들었던 것은 다름아닌 젖내 조차 가시지 않은 어린아이인 경우가 많았다. 두 명의 아이들이 태양의 원근(遠近)에 대해 논쟁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아마 모두들 잘 알고 있을 것이므로3 3 1 여기서 다시 자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여기서는 다만 공자와 항탁(項 案 )이 서로 수수께끼 같은 질문과 대답을 해나가다가 공자가 항탁에게 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서술해 볼까 한다

33) 『列子』, r i易 F口 1 」, <孔子東游, 見兩小兒辯鬪, 問其故. 一兒曰 ; r 我以 日 始出時, 去人 近, 而日中時遠也J 一兒以日初出遠, 而日中時近也. 一兒曰 ; r 日初出大如車蓋, 及日 中, 則如盤孟 此不爲遠者小而近者大平?』 一兒曰 ; r 日初出, 泣泣凉凉, 及其日中, 如 探湯 此不爲近者熱而遠者凉平?』 孔子不能決也. 兩小兒笑曰 ; 『執爲汝多知平?』>

어느 날 공자가 마차를 타고 동쪽으로 놀러 나갔다가 길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고 빼빼 마 른 데다가 머리통만 커다란 한 아이가 멀찌감치 떨어진 채 혼자 서서 놀 고있는 것이었다 공자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아이에게 물었다. 겨야, 왜 다른 아이들하고 같이 놀지 않고 너 혼자 노는 거냐?」 아이가 즉시 대답했다. 「놀이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다고요? 놀이라고 해봐야 서로 죽이는 것 아니면 다치게 하는 그런 놀이들인데요. 더구나 놀이를 해보아야 무슨 공 을 쌓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옷이나 찢어지고 배만 고파질 텐데요. 저 애들하고 돌맹이 던지는 놀이 따위를 하느니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쌀이 나 빵지요」 이렇게 말을 하기는 했지만 아이는 결국 아이인지라, 어느새 돌뎅이와 흙을 가져다가 길 가운데에 성을 쌓아놓고는 자기가 성을 지키는 장군이 라고 하며 그 성 위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마차를 타고 있던 공자가 웃으면서 아이에게 말했다. r 얘야, 너의 성은 어째서 마차에게 길을 내어 주지 않는 거냐?」

그러자 아이는 눈썹올 치켜올리며 항의하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r 노인장의 모습을 뵙자니 얼굴에 학문의 깊이가 드러나 있습니다 . 위로 는 하늘의 이치를 터득하시고 아래로는 땅의 이치, 그리고 또한 인간의 도리를 모두 파악하신 현인 군자이신 듯한데 마차가 성을 피해가야 한다 는 도리를 어찌 모르신단 말입니까? 자고 이래로 성이 마차에게 길을 내 어 주는 법이 어디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공자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아이의 성을 피해 빙 돌아서 가는 수밖 에 딴 도리가 없었다. 아이가 그렇게 총명하고 귀여워 공자는 다시 그 아 이에게 말을 걸었다. r 요녀석, 나이도 어린 녀석이 어찌 그렇게 말을 찰 하느냐 ? 무척 영악 한 놈이로고』 그러자 아이가 다시 대꾸룰 했댜 r 제가 듣기로 물고기는 태어난 지 사홀이 지나면 물속에서 헤엄을 치는 방법을 터득한다고 했고 토끼는 들판을 뛰어다닐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한 용은 이빨을 드러내고 발톱을 세울 줄 알게 된다고 했으며 사람은 태 어난 지 사홀이 지나면 아비와 어미를 알아본다고 했습니다 . 그것이 모두 자연스러운 일인데 어찌 절더러 영악하다 하십니까?」 공자가 그 말을 듣고 마차에서 내려와 홍미로운 얼굴로 아이에게 물었다 겨야, 좀 물어 보자. 네 녀석은 어디 사는 누구냐?」 아이는 장난스럽게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 「저는 시골 구석에 사는 항탁(項 案 )이라고 하며 아직 자( 字 )는 없습니 다」 r 네게 몇 가지만 다시 물어 보자꾸나」 공자는 계속 말했다 r 한번 대답해 보렴 너 돌이 없는 산이 어느 산인지 아느냐? 또 어떤 물에 물고기나 새우 따위가 없으며 어느 문에 문짝이 없느냐? 바퀴가 없 는 마차는 무엇이겠으며 송아지를 낳지 않는 소는 무엇이겠느냐 . 또 망아 지를 낳지 않는 말은 무슨 말이겠느냐. 어떤 칼의 손잡이 밑에 둥그런 칼

코등이( 刀環 )가 달리지 않았으며 어떤 불에 연기가 없느냐. 그리고 아내가 없는 사람은 누구이며 남편이 없는 여인은 누구이겠느냐. 어떤 날이 부족 하며 어떤 날은 남아돌아가느냐 . 또 어떤 니무에 나뭇가지가 없고 어떤 성(城)에 장이 서지 않겠느냐. 한번 맞춰 보려므나」 아이는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 「흙산( 土 山)에 돌이 없고 우물물에는 물고기 따위가 없습니다 . 텅빈 문 에 문짝이 없고 가마에는 바퀴가 없지요. 진흙으로 만든 소는 송아지를 낳지 못하고 나무로 깎은 말은 망아지를 낳지 못합니다 . 땔감을 베는 도 끼(柴刀)에는 둥그런 칼코동이가 없고 반딧불에는 연기가 없습니다. 선인 (仙人)에게는 아내가 없고 옥녀( 玉 女)에게는 남편이 없지요. 겨울날은 짧 고 여름날은 길어 남아돌아갑니다. 그리고 고목에는 나뭇잎이 없으며 사 람이 살지 않는 텅반 성에는 장이 서지 않습니다』 r 훌륭하구나」 공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다시 물어 보자 . 너는 어느 집 지붕 위에 소나무가 자라는지 아 느냐? 그리고 문 앞에 갈대가 자라는 것은 무엇이고, 침대에 향포(香蒲)가 자라는 것은 뭔지 아느냐? 개는 자기 주인을 물 수 있을까? 며느리가 시 어머니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집에서 기르는 닭이 꿩으로 변할 수 있을까? 그리고 개는 여우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러한 질문들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나 아이는 대답했다. r 지붕에 소나무가 자란다 하는 것은 곧 서까래를 말함이요, 문 앞에 갈 대가 자란다는 말은 문에 드리운 발을 일컫는 것입니다. 침대에 향포가 자란다는 것은 곧 침대 위에 깐 돗자리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개가 주인 을 무는 것은 낯선 사람이 주인 곁에 앉아 있기 때문이며, 며느리가 시어 머니를 부르는 것은 며느리가 꽃밭에 앉아 막 꺾은 꽃을 머리에 꽂아 달 라고 하는 것이지요 . 닭은 당신이 그것을 늪에 갖다가 던져 놓으면 꿩으 로 변할 것이고 개를 야산에 내쳐 놓는다면 여우로 변하겠지요』

공자는 계속해서 아이에게 물었다 . 「너 하늘이 얼마만큼이나 높고 땅은 또 그 얼마나 두꺼운지 아니? 하늘 과 땅에는 기둥이 몇 개나 있으며 바람은 어느 곳에서 불어오는 것인지, 비는 또 어디서 내리기 시작하는 것인지 알고 있니? 서리는 어디에서 내 려오는 것이며 이슬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이 역시 계속해서 대답했다. 「제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하늘은 일억 구천 구백 구 리이며 땅의 두께 또한 그것과 비슷하다고 합니댜 하늘과 땅에 기둥 따위는 없으며 천지를 버티게 해주는 것은 사방의 구름 기운이라고 합니다. 또 바람은 창오( 蒼 梧)에서, 비는 높은 산에서 시작되며 서리는 하늘에서 내려오고 이슬은 온갖 풀의 이파리 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요」 ® 공자는 아이가 막힘이 없이 청산유수처럼 대답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잠시 침묵하고 있었다. 아이는 공자가 입을 다 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장난스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공자에게 물었다. 『어르신께서 그렇게 많은 것을 물으셨으니 이제 제가 몇 가지 여쭤 보 아도 되겠지요? 어르신은 거위나 오리가 어떻게 물위에 떠 있을 수 있는 지 아십니까? 기러기는 어떻게 울음 소리를 낼 수 있으며 소니무니- 잣나 무는 어째서 겨울에도 늘 푸른 것일까요?」 공자는 궁리 끝에 궁색한 답변을 하였다 r 오리나 거위가 물위에 뜰 수 있는 것은 발이 네모지기 때문이지 . 기러 기가 울 줄 아는 것은 목이 길기 때문이며 소나무나 잣나무가 겨울에도 푸른 것은 속이 꽉 차있기 때문이야」 r 틀렸어요」 아이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 r 그럼 다시 대답해 보세요 . 자라 같은 것들도 물위에 뜰 수 있는데 그 것들도 발이 네모나던가요? 두꺼비도 울음 소리를 낼 줄 아는데 목이 긴 것은 아니잖아요. 또 대나무 역시 겨울에도 푸르지만 대나무의 속이 꽉 차있는 것은 아니지요?』

공자가 대답할 말이 없어 우물거리고 있을 때 아이가 다시 물었다. 「그럼 다시 한 가지 여쭈어 볼까요? 하늘에 빛나는 별이 도대체 몇 개 나 될까요?」 공자는 대답할 말이 없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아직까지 이야기했던 것은 모두 땅위의 것들이었는데 갑자기 왜 하늘로 올라가는 거니?」 그러자 아이는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하늘의 일은 말하지 않기로 하지요 땅위의 것들만 갖고 이야 기해 보기로 해요. 땅위에 널려 있는 집은 도대체 모두 몇 채나 될까요?」 그 질문에도 공자는 대답을 할 수가 없어서 또 이렇게 말했다. 「여태까지 우리들은 눈앞에 있는 일들에 대해서 말했잖니. 금방은 하늘 에 대해서 묻더니 어째 또 땅에 대해서 묻니?」 아이는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래요. 그러면 하늘과 땅에 대한 것 말고 눈앞의 것들에 대해서만 물 울게요. 음 …… 어르신의 눈앞에 있는 그 머리카락과 눈썹, 수염은 몇 가 닥이나 될까요?』® 공자는 여전히 눈을 크게 뜬 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 다가 마침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r 그래, 그래. 이 나이가 되어서야 이제 알겠구나. 그야말로 후생가의(後 生可良)®로다』 말을 마친 공자는 이제 더 이상 장난을 칠 기분이 아니었다. 얼른 마차 에 올라 집으로 돌아와 더욱 더 열심히 학문에 전념하였다 .34) @ 그래서 후 대 사람들은 당시 항탁의 나이는 겨우 일곱 살이었지만® 공자의 스승 노 릇을 하였다고들 말했다 .35)@ 또 항탁이 말싸움에서 공자를 이긴 것이 어 린아이들의 자랑거리가 되었다고도 한다 .36)® 34) 王重民編 『敦煙變文集』 卷 3, 『孔子項棄相問習』 둥, 35) 『戰國策』, 『秦策」, <項菜生七歲, 而爲孔子師.> 36) 『淮南子』, r 說林篇』, <項잦使嬰兒玲.> 高誘注 ; <項蔡生七歲, 窮難孔子, 而爲之作

師, 故使小兒之訪 自 玲大也 . >

항탁은 노나라 사람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열 살까지 밖에 살지 못하고 단명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아이를 그의 모습으로 분장시켜 <소아 신(小兒神)>®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 주었다 37) 또 어떤 사람들은 『논어 (論語)』, 「자한(子空)」편에 나오는 <달항당인(達卷黨人)>이 바로 항탁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381

37) 『 廣博物志』 卷 14, 引 『岡經』, <項菜魯人, 十歲而亡, 時人尸而祝之, 號小兒神.> 38) 『漢왑』, 『范仲舒傳」, <此無異於達菩黨人, 不學而自知也 . > 孟康注 ; <人, 項蔡也.>

제 7 장 공자 나이 51 세가 되었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이 오래도록 알고자 해왔던 진리를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돋자 하니 남방의 초나 라에 학문이 뛰어나고 아는 것이 많은 노담(老朋)이라고 하는 현인(賢人) 이 산다고 하니, 아예 제자들을 데리고 초나라로 가 그에게서 많은 지혜 를 얻고자 했댜뗄

1) 『莊子』, r 天運」, <孔子行年五十有一而不間道, 乃南之浦, 見老朋.>

사람들은 노담을 <노자(老子)>라고 불렀다. 그에 관한 신화와 전설도 많지만 디움 장에서도 언급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만 공자가 그를 만났던 일에 관해서만 서술하기로 한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주(周)나라의 수장사(守藏史)를 했었다고 하는데 수장사라는 것은 지금의 국립도서관 관장 같은 벼슬이다 .21 그는 그 일을 하다 보니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져 사직을 하고서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 하는 중이었다. 공자는 제자들을 이끌고 마차를 타고서 초나라 고현(苦縣) 뢰향(湖鄕)으로 가3 1 노자가 사는 곳을 물었다. 그리고 기러기 한 마리를

2) 『史記』, r 老莊申韓列傳」, <老子者, 周守藏室之史也.> 3) 『神仙傳』 卷 1, <老子者, 楚苦縣曲仁里人也.> 『史記』, 『老莊申韓列傳」 正義에서는 이것을 인용하였는데 <苦縣> 아래에 <湖鄕>이라는 두 글자가 더 있다.

들고서 공손한 태도로 그를 찾아갔다 기러기를 들고 간 것은 노자에게 예를 차리기 위한 것이었댜 41 노자는 공자가 북방의 유명한 현인이러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꺼이 공자를 맞아들였다 모두들 자리에 앉은 후에 노자가 입을 열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듣자 하니 당신은 북방의 현인이라 하던데 어떻 게 …… 진리는 찾으셨는지요?」 「글쎄요, 영 그렇지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선생님을 찾아뷘 것입니 댜 뭔가를 좀 배울까 해서요」 5 1

4) 『儀禮』, r 土相見禮』, <下大夫相見以雅.> 기러기라는 것은 고대에 일반 사대부들이 처음 만날 때 서로 주고받던 예물이었다. 5) 『莊子』, 『天運』, <老朋曰 ; r 子來平! 吾間子北方之賢者也, 子亦得道平?』 孔子曰 ; 『未得也』>

그러자 노자는 다 빠져 몇 개 남지도 않은 치아 때문에 쪼그라들어 납 작해진 입을 움직이며 공자에게 철학적 이치에 대해서 말을 하기 시작했 댜 노자는 대부분 하늘의 도리( 天 道)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 공자가 알고 있는 것은 대개 인간의 도리(人道)였기 때문에 자연히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댜 게다가 노자는 강한 초나라 사투리를 썼고 또 빠진 이빨 사이로 바람이 새어나와 발음이 명확하지 못했다. 그래서 공자는 그가 이야기하 는 것을 알아들을 것도 같았고 또 못 알아들을 것 같기도 했다. 또한 몇 번이나 노자의 말을 멈추게 하고 결론만을 듣고 싶었지만 노자가 너무나 몰입하여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를 찾을 수가 없었다 . 공자~ 계 속 노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r… … 백역(白朋)이라는 동물을 보십시오 . 그 놈들은 눈동자조차 움직 이지 않고 서로 바라보기만 하여도 임신을 하게 됩니다. 충(蟲)의 숫놈은 바람 부는 윗쪽에, 암놈은 아래쪽에서 서로 감응하여 임신을 하게 되고, 유(類)라는 동물은 자옹을 겸하고 있어서 자연적으로 임신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천성(天性)이라는 것은 바꿀 수가 없는 것이고 운명이라는 것 역 시 바꿀 수가 없습니다. 때(時機)라는 것은 잡아둘 수 없는 것이고 진리

역시 막을 수 없는 것이지요. 진리를 얻기만 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고 진 리를 잃으면 모든 것이 불가능합니다 ……」 6 J

6) 『莊子』, r 天運』, <老朋曰 ; 『(……)夫白朋之相視, 牌子不動(動 ; 運)而風化 ; 蟲, 雄鳴 於上風, 雄鳴(鳴 ; 應)於下風而(風)化, 類自爲雄雄, . 故風化. 性不可易, 命不可變, 時 不可止, 道不可壅. 荀得於道, 無自而不可;荀失於道(失於道;失焉者), 無自而可』> (위에서 괄호 안은 원문과 다른 부분)

노자가 이야기를 잠시 쉬는 틈을 타 공지~ 기다렸다는 듯이 몇 마디를 물었고 노자는 그것에 대해 대답했다. 그러자 공자는 더 이상 물울 것이 없어 입을 다물고 앉아서 방금 노자가 들려 준 말의 의미룰 음미하고 있 었댜 노자 역시 나이가 많이 든 데다가 말을 많이 한 연고로 힘이 빠져서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 고 있던 공자의 제자들은 안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이상한 생각이 들어 살그머니 창톰으로 고개를 내밀고 안의 동정을 살폈다 . 두 노인네는 방안의 자리 위에 마주앉아 아무 말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나무토막처럼 앉아 있었다. 노자는 공자의 제자들이 문틈으로 엿보는 것을 슬쩍 살피고는 공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들이 당신의 제자들이요? 들어와서 앉으라 하시지요」 「들어오너라」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했댜 제자들은 스승의 말씀에 따라 줄줄이 안으로 들어왔다. r 앞에 있는 저 인물은 누구입니까?」 노자가물었댜 「자로(子路)입니다」 공자가 대답하며 소개를 하였다. 「아주 용감한 인물이지요 . 그 다음은 자공(子貢)이라 하는데 말재간이 뛰어납니댜 그 다음은 증삼(曾參), 효도가 무엇인지를 아는 인물입니다. 그 다음이 안회(顔回)인데 제법 자애로우며, 맨 마지막이 자장(子張)으로

군사적 재능이 좀 있지요」 제자들은 인사를 하고 나서 모두 공자의 뒤쪽에 가서 앉았다. 노자는 공자의 제자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나서 감탄해 하며 말했다. 「훌륭합니다 모두 훌륭한 제자들이로군요. 남방에 < 봉(鳳) > 이라고 하 는 새가 산다고 들었습니댜 그 새가 사는 곳에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돌무더기만 천리에 걸쳐 쌓여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늘이 그를 위해 경지수(瓊枝樹)라고 하는 나무를 내려 주어 먹고살게 해주었지요 . 그 나무 는 높이가 백여 길이나 되고 아름다운 옥(瑢堀璟汗)이 주렁주렁 열렸다고 하는데 봉새는 바로 그 열매를 먹고 살았어요. 천제께서는 그러고도 마음 이 놓이지 않아 머리가 세 개 달린 이주(離朱)라는 괴인을 보내어 그 나 무를 지키게 했지요. 이주는 세 개의 머리로 돌아가며 잠을 자고 끊임없 이 깨어 있으면서 나무에 매달린 옥들을 감시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주 도면밀한 생각이 아니겠어요? 그 봉새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깃털을 갖고 있었는데 기이한 것은 그 깃털돌 사이에 여러 가지 글자들이 숨어 있었다 는 거지요. 머리예는 < 성( 聖)> 자, 어껫죽지 밑에는 < 인(仁) > 자, 오른쪽 날개에는 <지(智)>자, 그리고 왼쪽 날개에는 <현(賢)>자 등이 말입니다 :… .. 그러니 그 봉새야말로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 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천하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그 새는 절대로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 그 새의 출현은 곧 세상의 평화와 행 복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당신은, 아, 이렇게 묻는 것을 용서하십 시오. 당신은 왜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예 이러저리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한곳에 안주하지 않는 것인지요?」 7 ) r · · ·· ·· ’~ 7) 『太平御빴』 卷 915, 引 『莊子』(今本에는 없음), <老子見孔子, 從弟子五人. 問曰 ; 「前 爲誰?』 對曰 ; r 子路, 勇旦多力 ; 其次子貢爲智, 曾子爲孝, 顔回爲仁, 子張爲武」 老子 暎曰 ; 「吾聞南方有鳥, 名爲鳳, 所居積石千里. 天爲生食, 其樹名瓊枝, 高百 m, 以瑢 팎珉汗爲質 天又爲生商珠, 一人三頭, (通臥)返起以何珉汗. 鳳鳥之文, 戴聖嬰仁, 右 智左緊 ……』>

공자는 노자에게 작별을 고하고 제자들을 이끌고서 귀로에 올랐댜 돌 아오는 길에 노자의 그 말들의 의미를 되새겨보느라 그는 몇 날 며칠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고 지냈다. 제자들은 그런 스승이 이상 하게 여겨져 말을 걸었댜 「선생님, 그날 노담 선생을 만나 보셨는데 그 분이 어떤 분인 것 같습 니까?」 r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구나」 공자는 조금 우울하기도 하고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말했댜 대가 이야기를 하나 해줄까? 새러는 것이 날아다니는 동물이라는 것 을 나는 알고 있댜 또 물고기는 물속에서 헤엄칠 줄 알며 길짐승은 땅위 롤 걸어다닌다는 사실도 안다. 그래서 길짐승은 그물을 사용해서 잡을 수 있고 물고기는 낚시질을 해서 낚울 수 있으며 새는 활을 쏘아 잡을 수 있 댜 그러나 유독 용(龍)이라는 것은 어떻게 생긴 것이지 그 생김새조차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잡을 방법도 없다. 그것은 합쳐지면 하나의 거대한 전 체요 홑어지면 오색찬연한 무늬가 된다. 그것은 작을 수도 있고 아주 커 다란 것일 수도 있으며 나타나고자 할 때는 모습을 드러내지만 숨어 있고 자 하면 아예 숨어버리기도 한다. 또한 구름을 타고 음양의 기운을 몰고 서 구층 높은 하늘로 올라간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보게 되 면 모두 입을 헤 벌리고 놀라서 입다무는 것조차 까마득히 잊어버리곤 한 다. 내가 노담이라는 인물을 만났을 때 바로 그런 인상을 받았느니라. 이 세상의 어느 것으로도 그를 비유할 수가 없고 그와 견줄 만한 것이라고는 오직 용이라는 동물밖에 없구나!」 8) 8) 『莊子』, r 天運』, <孔子見老朋歸, 三 日 不談. 弟子問曰 ; r 夫子見老朋, 亦將{iiJ規哉?』 孔子曰 ; r 吾乃今於是平見龍. 龍合而成體, 散而成章, 乘平雲氣而義平陰陽, 予口張而 不能哈, 予又{iiJ規老朋哉?」> 『史記』, r 老莊申韓列傳』, <孔子去, i距弟子曰 ; r 鳥, 吾 知其能飛;魚, 吾知其能游;獸, 吾知其能走. 走者可以爲綱;游者可以爲給;飛者可 以爲贈(贈). 至於龍, 吾不能知其乘風雲而上天. 吾今 日 見老子, 其猶龍耶?』>

공자는 노자를 만나고 나서도 노자의 권고, 즉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지 말라는 그 말에 따를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마 음이 너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제자들을 이끌고 이 나라 저나라로 주유하며 다녔댜 공자는 자신이 세상에서 유용하게 쓰여 지기를 원했고 자신의 <도(道)>를 실행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군주를 만나기를 기원했댜 그래서 이리저리 다니며 그런 군주를 찾았지만 그것 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곳에 가게 되면 앉았던 자리의 온기가 가시 기도 전에 그곳을 떠났고 ,91 혹은 굴뚝에 불을 땐 연기로 인한 그을음이 생 길 틈도 없이 10l ® 머물지도 않고 바로 다른 곳을 향하여 떠나곤 했다. 그 러나 조정에 들어가는 길은 멀고도 험한 법이라, 곳곳을 다니면서 뜻하지 아니하게 당했던 봉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댜

9) 『文選』, r 答賓戱」, <孔席不暖.> 10) 『淮南子』, 기修務篇』, <孔子無쁩突.>

한번은 공자가 위나라(衛國)를 떠나 진나라(陳國)로 가는 길에 송나라 (宋國)의 광읍(匡 邑, 지금의 河南省 唯縣)을 지나게 되 었다. 그곳에서 아주 불행하다고 할 만한 오해가 생겼다. 공자의 생김새가 양호(陽虎)라는 인물 울 많이 닮았는데 양호가 누구인가 하면 바로 얼마 전 노나라 왕의 명 령 에 따라 광읍을 공격했던 인물이었다. 공자가 광성(匡城)을 지나는데 마침 마차를 몰고 있던 안연(顔淵)이 들고 있던 채찍으로 성벽의 무너진 곳을 가리키며 무심코 말했다. 「일전에 양호가 군대를 이끌고서 이 무너진 곳을 통해 성으로 공격해 들어갔지요」 길가에 있던 한 시골 사람이 그의 이 말을 듣고서 얼른 광읍의 수장에 게 가서 고해바쳤다. r 일전에 우리들을 공격했던 양호가 또 왔습니다」 광읍의 수장은 군사들을 보내어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포위하게 했댜® 그리고 며칠이 지나도 포위를 풀지 않으니 제자들의 얼굴에는 배고픈 기

색이 역력했다. 공자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군자에게도 곤궁한 때는 있는 법인가?」 슬픔에 가득찬 공자의 이 말을 들은 자로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 억누를 수가 없어 눈을 부릅뜨더니 칼을 뽑아들고 북이나 종을 치는 것 같은 소 리를 내면서 광읍의 사람들과 이판사판 싸워 보려 하였다. 공자는 황급히 그를 막으며 말했다 대 가르침의 뜻은 인의( 仁義) 에 있지 않더냐 . 네가 지금 아무것도 돌 아보지 않고 나가 싸우겠다고 하는 것은 나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다. 바로 나를 죽여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것과 다름이 없느니, 가만히 있거라. 내가 이제 슬픈 노래를 불러 그들을 감동시킬 것이니 너희들은 내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하기나 해라」 공자는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를 불렀고 제자들이 따라 불렀는데 그 곡 조와 노랫소리가 너무나 슬폈댜 그리고 그 슬픈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 에 일진광풍이 휘몰아치더니 곧바로 광읍의 병사들을 날려버렸다. 그 바 람이 얼마나 강했는지 병사들은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고 땅위에 엎드려야 했으며 투구와 갑옷들도 모조리 날아가 버렸다. 그때서야 그들은 자기들 이 포위하고 있는 인물이 양호가 아니라 성인 공자라는 것을 알고 사방으 로 홑어졌다 .Ill 그 후 공자는 위나라로 갔으나 그곳에서 영공(盛公)과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아 다시 진나라로 돌아가려 하였다. 진나라로 가는 길에 다시 송 나라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불유쾌한 사건이 또 하나 일어났다. 당시 송나라는 경공( 景公 )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가 총애하는 신하 중 11) ; 『r 琴往操與』,陽 虎r 孔正子從尼」此,入 」<『 孔匡子人尼間」者其,言 . 孔_子 孔使子顔淵稅執似템陽,虎 到—匡告郭匡外 君. 曰顔 淵; r 擧往策者賜指虎匡,容 垣今,復 來曰 至』 乃率衆園孔子,數 日 不解. 弟子皆有機色. 於是孔子乃仰天而暎曰 ; r 君子固亦窮 平!」 子路聞孔子之 言悲感, 悼然大怒, 張 目 宿劍, 聲tJ.I]鍾鼓. 顧謂二三子曰 ; r 使吾有 此尼也!」 孔子曰 ; r 由來, 今汝欲鬪, 名爲殿我於天下! 爲汝悲歌而感之, 汝皆和我』 由 等唯唯 孔子乃引琴而歌, 音曲深哀. 有暴風擊担, 軍士備{卜. 於是匡人乃知孔子聖人, 瓦解而去.>

에 환퇴( 桓 雙)라는 자가 있었댜 그는 공자가 제자들을 이끌고 송나라에 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몹시도 불안해 했다. 행여나 공자가 송나라의 경공을 만나게 되어 자신이 누리고 있는 권력을 앗아갈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댜 그래서 몰래 사람들을 보내어 공자의 행동을 감시하게 하였 댜 때마침 공자는 제자들을 거느리고 성 밖의 큰 나무 밑에 앉아 진나라 에 가게 되면 진나라 왕에게 중용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예를 행하 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염탐꾼은 환퇴에게 상황을 그대로 설명하였고 보고를 들은 환퇴는 더욱 의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즉시 사 람을 보내어 그 나무를 베어버리게 하였다. 그것을 구실로 시비를 걸어서 공자를 해치려는 의도였다 1 2 1 그러나 공자는 그런 시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조금도 두려운 표정을 짓지 않았으며 그저 담담한 태도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12) 『史記』, r 孔子世家」, <孔子去曹適宋, 與弟子習禮大樹下. 宋 司馬桓態欲殺孔子, 拔 其樹 . >

「하늘이 내게 이런 덕을 주었거늘 환퇴가 나롤 어찌하랴!」 1 3 1 @)

13) 『論語』, 『述而』, <子曰 ; 『天生德於予, 桓態其如予何!」>

공자의 제자 중 공량유(公良益)는 힘이 장사인 용사였다. 그는 환퇴가 사람들을 시켜 나무를 베어버리게 하는 광경을 목도하고는 분노하였다. 죽 시 그는 나무의 뿌리를 뽑아버리고는 길가에 베어진 채 모로 누워 있는 나 무 동걸을 둘러메다가 원래 나무가 심어져 있던 자리에 다시 심었다. 그리 고 나서 흙으로 잘 덮어 주니 키만 조금 작아졌을 뿐 본래 모습과 별반 다 를 것이 없었다 공자와 제자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다시 나무 밑에 앉아 예를 행하는 것을 연습한 뒤 천천히 마차에 올라 그곳을 떠났다. 공량유가 니무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다시 베어진 나무를 심는 광경을 보고, 환퇴가 시비를 걸라고 보낸 병사들은 놀라서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 리고 그때서야 공자의 제자들이 글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문무를 겸비하 였기 때문에 만만히 건드릴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 이 마차에 올라 당당하게 떠나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다보고 있울 수

밖에 없었댜 다음날,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그 나무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러갔댜 이 상하게도 나무에는 이미 새로운 뿌리가 돋아났고 나뭇잎 역시 이전보다 더욱 무성하고 푸르렀다 141

14) 『珉媒記 』 卷上, <公良描多力, 仲尼爲桓煙伐其所底大木, 仲尼將行, 公良稽拔其根, 立木而去. 明 日 建視, 木更生, 根活矣.>

공자가 평생 동안 겪었던 어려움 중에 소위 <진나라에서 양식이 떨어 졌다( 在 陳絶耀)> ® 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경위는 다음과 같았다 . 그가 이리저리 수년 간을 떠돌아다녔지만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가 없자 일단 진나라와 채나라(蔡國) 사이에서 잠시 머물기로 했다. 그때 마침 초 나라에서 사신이 와 그를 모셔가려 하였다. 공자는 기분이 좋아 당장에라 도 제자들을 이끌고 초나라로 가려고 했다.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들이 그 소식을 듣고 갑자기 조급해 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모여 의논하기를 <공자는 현인이고 초나라는 큰 나라요. 이제 초나라가 공자를 모셔가려 하는데 만일 저 영감이 초나라에서 벼슬을 하게 되면 우리처럼 초나라에 붙어 있는 작은 나라들은 골치 아프게 될 것이오>라 했다. 그래서 두 나 라에서는 병사들을 대충 뽑아 보내어 공자의 무리들을 포위하게 했다. 그 를 죽일 수도 없고 또 그들을 잡아들여 감옥에 가둘 수도 없는 바에야 아 예 그들을 포위하여 꼼짝 못하게 해서 굶어 죽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151 그렇게 이레롤 포위당하고 있을 때였다 . 이제는 더 이상 음식으로 먹을 만한 것이 없어, 명아주잎이나 콩잎 같은 것으로 끓인 풀떼기 죽 속에서 곡식 알갱이를 찾기조차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모두들 배가 고파서 정신 이 없었고 부황이 들어 얼굴색도 엉망이 되었다 16)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제자들은 저녁을 먹고-저녁이라고 해봐야 반

15) 『史記』, 「孔子世家」, <楚聞孔子在陳蔡之間, 楚使人賜孔子, 孔子將往拜禮. 陳楚大 夫謀曰 ; r 孔子賢者, 所刺磯皆中諸侯之疾. 今者久留陳蔡之r,,1 , 諸大夫所設行, 皆非仲 尼之意 今楚大國也, 來賜孔子, 孔子用於楚, 則陳蔡用喜大夫危矣』 於是乃相與發徒 役, 園孔子於野 . > 16) 『莊子』, r 讓王』, <孔子窮於陳蔡之間, 七 日 不火食, 藝횃不稽, 顔色莊戀.>

공기밖에 안 되는 나물국뿐이었지만-방에 깔린 자리 위에 이리저리 눕거나 기대어 앉아 있었다 공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신의 방에 앉 아 느리게, 혹은 빠르게 거문고를 뜯고 있었는데 딩딩당당 울리는 그 소 리는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소리 같았댜 @ 바로 그때, 갑자기 대문 밖에서 키가 9 척이나 되는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 머리에는 높은 모자를 썼고 몸에는 검은 색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문에 들어 서면서부터 웅얼거리며 큰소리를 질러 방안에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자공이 옷을 걸치고 방에서 나와 뜰을 가로질러 가며 괴인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괴인은 대답 대신 반들거리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자공을 힐끗 보았다. 그러더니 또 다시 큰소리를 지르면서 털복숭이 손을 내밀어 자공의 양쪽 겨드랑이를 잡았다. 그리고는 위로 한 번 들어올리고 왼쪽으로 한 번 혼 들고 하여 자신의 겨드랑이 밑에 자공을 끼웠댜 자공은 살려 달라고 소 리를 질렀지만 괴인은 얼른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때 자로가 보검을 들고 방에서 뛰쳐나와 괴인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 러자 괴인은 자공을 무기로 삼아 보검의 공격을 피하였다. 자로는 하는 수 없이 보검을 내던져버리고 맨손으로 자공을 빼앗으려 하였다. 괴인과 자로는 자공을 가운데 두고 한동안 씨름을 하였고 마침내는 힘이 센 자로 가 자공을 빼앗아 올 수 있었다. 자공을 자리 위에 눕히니 금방이라도 숨 이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로는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다시 괴인과 싸움을 벌였다. 뜰에서 그들은 밀고 당기는 싸움을 계속하였는데 20-30 차례를 싸워도 승패를 가릴 수가 없었다 . 자로의 힘이 세다고는 했 지만 괴인이 하도 날렵하고 잽싸서 요리조리 피하~근 재주가 비상하니 시 간이 지날수록 자로의 힘은 점점 빠져갔다. 그때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방에서 나와 계단 앞에서 그들이 씨우는· 모습을 구경하게 되었다 공자가 자세히 보니 그 괴인의 양쪽 겨드랑이가 붙어 있어서 마치 커다란 손바닥으로 박수를 치는 것과 같았다 .® 이상한 생각이 들어 한참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깨달은 바가 있어 자로에게 소리

를쳤다 여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서 그놈을 꽉 잡아라!』 자로는 그 말을 듣고 기회를 틈타 괴인의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 갈비뼈를 꽉 잡았다 그리고 나서 힘을 주니 괴인은 제대로 서있지도 못 한 채 힘없이 땅바닥에 쓰러졌댜 그 괴인은 사람이 아니라 대가리부터 꼬리까지가 9 척이나 되는 거대한 서어였는데 ® 그놈은 땅바닥에서 몇 번 몸부림을 치더니 곧 힘없이 축 늘어져 죽어버렸다 . 자로가 잡았던 것은 그놈의 지느러미로 양쪽에 각각 한 개씩이 달려 있었다 . 그것이 바로 괴 인의 팔이었으며 공자가 마치 박수를 치는 것 같다고 느꼈던 커다란 손바 닥이었댜 제자들은 이 광경을 보고 모두들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공자는 계단 밑으로 내려와 그 괴물을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 탄식을 하며 말했다. 「이 괴상한 것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옛말에 어떤 물건 이든지 오래되면 온갖 정령들이 거기 붙어서 요괴가 된다고 했다 . 이 거 대한 서어 역시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아마 내가 시운이 좋지 못해 재난 에 봉착해 있으니 이놈이 그 툼을 타서 여기까지 와 소란을 피운 것 같구 나. 그러나 모두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어쨌든 잘됐다. 이 요괴놈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우리의 양식이 되어 주었으니 말이야. 내일 당장 이 놈을 삶아 먹어버리자. 그러면 되는 것이야. 뭐 두려워할 것들 없다」 말을 끝내고 나서 공자는 다시 거문고를 뜯기 시작했다. 제자들은 다음 날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일을 시작했다. 팔을 걷어붙이고 바쁘게 서어를 요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 뼈를 발라내고 살만 남겨서 잘게 다져 솥에 넣고 부글부글 끓여, 두어 그릇씩 먹으니 고기가 조금 질긴 것 빼고 는 맛이 꽤 괜찮았다. 그 고기를 다 먹었지만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 고 병에 걸려 자리에 누워 있던 사람들도 힘을 얻어 일어났다. 다음날 아 침, 모두들 기운이 나서 거문고도 뜯고 노래도 부르며 칼춤을 추기도 하 니 전혀 포위되어 있는 사람들 같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명절을 보내는 사람들 같았다 . 17)

17) 맹濁記』 卷 19, <孔子尼於陳, 弦(鉉)歌於館中. 夜有一人, 長九尺餘, 著皇衣高冠, 大 0 t, 聲動左右. 子貢進, 問 ; r fiiJ人耶?」 便提子貢而陝之. 子路引 出, 與戰於庭. 有頃, 未勝 孔子察之, 見其甲車闇時時開 ln 掌. 孔子曰 ; 「fiiJ不探其甲車, 引而席 登 」 子路引 之, 沒手朴於地, 乃是大提魚也, 長九尺餘. 孔子曰 ; r 此物也, 何爲來哉? 吾聞, 物老 則群精依之 , 因哀而至. 此其來也, 登以吾遇尼絶핥, 從者病平? 夫六畜之物 (及龜蛇魚 燦草木之屬 久者神皆惡依, 能爲妖怪, 故謂之 ‘五酉'. ‘五酉’者, 五行之方, 皆有其物, 酉者, 老也), 物老則爲怪, 殺之則已, 夫fiiJ患焉』(……) 弦歌不綴. 子路 究之 , 其味滋, 病者興 明 日 」急行.>(괄호 안의 부분은 역자가 보충한 것임)

진 • 채 두 나라 군대는 자기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공자의 무리를 포위 하고 있었는데도 지쳐 죽기는커녕 갈수록 더 생기가 도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구곡명주(九曲明珠)를 공 자에게 보내어 거기다가 실을 벨 수 있으면 포위를 풀고 놓아 줄 것이지 만 실을 꿰지 못하면 그들 모두가 굶어 죽을 때까지 포위를 풀지 않을 것 이라고 했다 . 공자와 제자들은 구곡명주를 받아들고 오랫동안 궁리를 했 댜 그리고 몇 차례 시도를 해보았지만 도저히 실을 벨 수가 없었다 「아, 생각났다!」 공자가 갑자기 기뻐하며 말했다 r 얼마전 우리가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올 때 길에서 처녀 둘이 뽕나 무에서 뽕을 따는 모습을 보지 않았더냐 . 그때 내가 그녀들에게 농담삼아 말을 건네었지. <남쪽 가지는 요조하고 북쪽 가지는 길구나(南枝筋究北枝 長).> 그러자 그녀들이 나무 위에서 내게 대답했어. < 부자( 夫子) 께서는 진나라 땅에서 양식이 떨어져 곤란을 겪게 되실 것입니다. 구곡명주에 실 을 꿰지 못하시거든 뽕따는 우리에게 와서 물으세요 > 라고 말이야. 그때는 그녀들이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여겨 곧 그 말을 잊어버렸지. 이제 와서 돌이켜 보니 그녀들이 한 말은 분명히 까닭이 있던 거였어. 아무리 생각 해도 사람을 보내어 그녀들에게 물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그러자 안회(顔回)와 자공이 가겠다고 나섰고 공자는 이 일을 그들에게 맡겼다 두 사람은 겹겹이 싸인 포위망을 뚫고 위나라와의 접경 지역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뽕따는 두 아가씨의 집을 수소문하여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왔다 . r 아가씨들은 집에 안 계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수박을 한 통 주고는 꽝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아버렸다 「이상하군, 이게 무슨 뜻이지?」 안회가 들고 있던 수박을 매만지며 알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안회보다는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가는 자공이 생각 끝에 말했다. 「수박 씨는 수박 안에 있지. 우리에게 수박을 준 것은 바로 그 아가씨 들이 밖에 나간 것이 아니라 집안에 있다는 뜻이야」 그래서 두 사람은 다시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 문을 열고 나온 것은 깔 깔거리며 웃고 있는 장난스런 두 아가씨였다. 안회와 자공은 자기들이 지 금 겪고 있는 재난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구곡명주에 실을 펠 수 있는 방법을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게 뭐 그리 어려울 게 있어요?」 아가씨들이 말했다 . 「그 실에다가 우선 꿀을 좀 바르세요. 그리고 개미 한 마리를 잡아다가 꿀 바른 실을 허리에 잡아매세요. 그런 다음 개미더러 구슬의 구멍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겁니다. 만약 개미가 그 구멍을 비집고 지나가지 않으려 고 한다면 연기를 조금 훅 불어 줘 보세요 개미가 얼른 그 속으로 지나갈 것입니다」 두 사람은 뽕따는 아가씨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왔다. 그리 고 그녀들이 가르쳐 준 방법대로 해보았더니 과연 쉽게 구슬에 실을 웰 수 있었다® 진 • 채나라 군서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가 없어 포위를 풀 어주었고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의기양양하게 떠나도록 내버려두는 수밖 에 없었다 .18) 18) 『擇史』 卷 8, 引 『沖波傳』, < 孔子去衛, 適陳, 途中見二女采桑. 子曰 ; r 南枝筋究北枝 長,」 答曰 ; 『夫子在陳必絶핥;九曲明珠容不得, 著來問我采桑娘」 夫子至陳, 大夫發 兵園之, 令容九曲珠 乃釋其尼.夫子不能, 使回賜返 rD ,之. 其家찮言女在外, 以一瓜獻 二子. 子貢曰 ; r 瓜 子在內也』 女乃出, 語曰 ; r 用察徐珠絲, 將系織, 織將系絲, 如不

肯過 用炯魚之」 子依其言, 乃能容之. 於是絶槿七 日 .>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약간 다른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이야기의 줄 거리는 대략 비슷하지만 뽕따는 아가씨의 이름이 다른데, 그녀는 < 두삼낭 (杜 三 娘) > 이라 했댜 자공이 그녀를 찾으러 갔을 때 그는 그녀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수수께끼를 푸는 것 같은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그녀의 이름과 사는 곳을 알 수 있었다. 그 아가씨는 뽕나무 밑에 큼지막한 흙무더기를 쌓아놓고 또 조금 떨어 진 곳에도 역시 자그마한 흙 무더기를 세 군데에 만들어 놓았다. 자공은 그것을 보고 곰곰히 생각했다. <뽕나무(桑)>는 원래 니무七(木)이고 나무 옆에 흙(土)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두(杜)>자일 것이 었다. 또 멀지 않은 곳에 흙 무더기가 세 개 있으니 그것은 그녀가 <셋째(三)>라는 뜻이고 그렇게 해보면 그녀의 이름은 <두삼낭(杜三娘)>일 것이었다. 그래서 그 는 길을 가는 나뭇꾼에게 그녀의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다. 「마을에 두삼낭이라는 아가씨가 살고 있습니까?」 그러자 나뭇꾼은 한 수의 시를 읊듯이 대답했다. r 갈대가 우거진 연못과 물억새 풀이 아름다운 집을 둘러싸고 있지요. 온갖 아리따운 풀과 기이한 꽃들이 하얀 담에 기대어 자라고 있어요. 작은 다리 건너 흐르는 물 따라 북쪽으로 가세요. 그곳에 바로 두삼낭의 집이 있답니다」 자공은 나뭇꾼이 가르쳐 준 대로 두씨 집을 찾아가서 두삼낭을 만나 구 곡명주에 실을 꿰는 방법을 알아낼 수가 있었다 .19)

19) 淸 猪人獲 『堅韻七菓』 卷 4, <孔子去衛適陳, 子貢子路從 . 道逢采桑娘. 夫子曰 ; r 南 枝筋究北枝長』 婦曰 ; r 夫子行陳必絶種』 夫子不答而徐{f . 婦復曰 ; 「九曲明珠容不 過, 回來問我采桑娘』 及至陳,果絶槿. 陳候以九曲 明珠, 傳孔子察之, 不得. 謂婦有先 見, 使子貢反而狗之. 至采桑所, 婦無覽矣. 但見桑間衆泥一, 踊尺許, 又衆泥三. 子貢 曰 ; r 桑者, 木也 ; 泥者, 土也 ; 其杜姓耶? 芳復有三, 其三娘耶?』 適椎者過, 子貢問曰 ; 『前村可有杜三娘平?」 椎者 8 ; r 蘆塘萩猪鏡華屋, 培草疏花傍粉塔, 行過小橋流水 北, 其間便是杜家莊』 子貢如其言, 獲見三娘, 具述前 事. 婦完爾而笑曰 ; 「此無難, 除 絲以脂, 系織以要(膜), 使徐徐而度 ; 如不肯過, 薰之以炳』 子貢得其術, 以告夫子, 夫

子如其 言 , 得容九曲之珠.>

공자가 이나라 저나라를 돌아다녔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그를 알아보고­ 그의 <도(道)>를 실행하게 해줄 만한 군주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갈수록 나이는 많아져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만 년을 자신의 고향인 노나라( 魯 國)에서 보내기로 했으며 ® 그곳에서 공자 는 『 시(詩) 』 와 『서( 書 )』를 다듬었고 『 예(禮)』와 『악(樂)』을 정리했으며 『춘추(春秋)』를 짓는 등 많은 문화적 인 작업을 했다 .@ 그리고 난 후예 마 침내 세상을 떠나 땅속에 잠들었댜 @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그는 이론 아침에 일어나 지팡이를 짚고 문앞에서 천천히 산보를 하며 노래를 부르 듯이 중얼거렸다고 한다. 태산(泰山)이 곧 무너질 것이라고 하지 양목(梁木)이 곧 쓰러질 것이라고 하지 철인(哲人)이 곧 스러져갈 것이라고 하지@ 그리고 나서 돌아와 몸이 안 좋다고 느끼고서 자리에 누워 이레가 지 난뒤 세상을 떠났댜 201

20) 『禮記』, r 檀弓」, <孔子量作, 負手텃杖, 消掃於門, 歌 B ; r 泰山其碩平? 梁木其懷平? 哲人其姿平?」 槪歌而入, 發疾七 日 而沒 .>

공자가 죽은 뒤 제자들은 그의 시체를 노나라 교의 사수(i四水) 가에 안 장했다® 사람들이 공자의 묘 앞에 모여 눈물을 홀리며 공자의 죽음을 애 도할 때 사수의 물결까지 순간적으로 잠잠해져 그 흐름을 멈추고 단단한 고체처럼 변했었다고 한다 .211® 공자의 무덤 앞에는 백여 그루의 나무가 심어져 있었는데 모두가 기이 한 품종으로 나중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들이 되었지만 노나라 사람 들은 대대손손 그 나무의 이름들을 가지각색으로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공자의 제자 중에는 다론 나라 사람들이 적지

21) 『論衡』, 『紀妖』, <孔子當酒水而葬, 泡水却流.>

않았는데 공자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들 장례식에 참석하러 왔댜 그들은 각각 자기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나무의 묘목을 가지고 와 서 묘 앞에 심었는데 이름을 알 수 있는 나무는 떡갈나무(祚樹), 흰 느릅 나무(粉樹), 낙수(雜樹), 여정수(女貞樹), 오미수(五味樹), 참단수(兒檀樹) 동밖에 없었댜 그리고 그 밖의 나무들은 도무지 이름을 알 수가 없는 것 들이었댜 또한 이상하게도 공자의 무덤에는 가시나무나 사람을 찌르는 그런 풀들이 돋아나지 않았는데 그것은 어쩌면 공자의 품성을 나타내 주 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살아있을 때나 죽은 후에도 공자에게는 그러한 종류의 일관성이 있었던 것이다 .22)

22) 『皇覽.!l, r 家墓記」, <孔子圭中樹以百數, 皆異種, 魯人世世無能名其樹者. 民傳言孔 子弟子異國人,各持其方樹來種之,其樹祚•粉·維廊·女貞·五味·윷檀之樹 . 孔子 至中, 不生荊練及刺人草.>

공자가 죽은 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에 관한 신기한 전설이 전 해지고 있댜 노나라의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다른 나라로 다니며 장사 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배가 방향을 잃고 표류하다가 어떤 섬에 도착하게 되었다. 섬사람들은 그곳을 단주( 藍 洲)라고 부르고 있었는 데 그곳은 유명한 선도(仙島) 중의 하나였다. 그 사람이 눈을 뜨고 홀깃 보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바로 공자가 72 제자를 거느리고 유유자적하게 거닐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그 모습은 참으로 즐거워 보였다. 그 사 람이 막 공자에게 물어 보려고 하는 순간 공자가 제지~ 거느리고 자신 의 앞으로 다가와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어째서 여기에 온 것이오. 나라가 위급한 지경에 처해 있는 것 도 모른단 말이오?」 그리고는 자신이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그 사람에게 주며 말했다. r 얼른 눈을 감으시오. 그리고 이 지팡이룰 타고 빨리 노나라로 돌아가 왕께 아뢰시오. 어서 성벽을 수리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라고 말이오」 그 사람은 좀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지만 감히 거역할 수가 없어 지팡이 를 들고 해변가로 갔다. 그리고 눈을 감고서 한 발을 내딛었다. 귓가에 들

리는 것이라고는 휘이휘이 하는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뿐이었는데 자신이 타고 있는 지팡이는 이미 단순한 지팡이가 아니라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살아있는 물건이었댜 그는 도대체 자신이 어떻게 가고 있는 것인지 몹시 궁금했지만 겁이 나서 실눈조차 뜰 수가 없었다. 밥 한 그릇 먹을 만한 시 간이 흐른 뒤,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가 잠잠해지는 듯했고 퓨우 하는 소 리와 함께 땅위에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살그머니 눈을 떠 보 니 그곳은 분명히 자신의 조국, 노나라의 해변이었다. 땅위에 발을 내딛고 자세히 보니 자기가 타고 온 것은 여전히 보통 지팡이였다. 이제 도착했 으니 그 지팡이는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는 지팡이룰 들어 바디를· 향 해 내던졌다. 바로 그때 기이한 일이 일어났댜 <쿵― __ > 하는 엄청나게 큰소리가 들리더니 파도가 몰아치면서 그 지팡이는 뿔이 달리고 발톱을 세운 용으로 변하는 것이었댜 그 용은 거센 파도를 헤치며 동쪽을 향하 여 유유히 헤엄쳐 갔댜 그때서야 그 사람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모두 이미 선인(仙人)으로 변해 있었디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급히 노나라 군주를 찾아갔다. 노나라 왕은 그가 하는 말이 미치광 이의 허튼 소리라고 여겨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수천 마리의 제비들이 진흙을 물고 와서 노나라의 성을 수 리하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노나라 왕은 제비들의 행동에 감동을 받아 사 람들을 시켜 곡부(曲阜)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성의 보수가 끝났을 때 제나라가 군대를 보내어 곡부를 쳤다. 그러나 곡부 는 이미 준비를 철저히 해두었던 터라 제나라의 군대가 아무리 공격을 해 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포위를 풀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버 렸다 .23) 이런 전설들로 보아 죽은 지 오랜 시간이 홀렀지만 공자가 자신의 조국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23) 『太平御탔』 卷 922, 引 崔鴻 『(十六國春秋)北凉錄』, <昔魯人有浮海而失津者, 至於 묘 洲 見仲尼及七十子游於海中. 與魯人一木杖, 令閉 目 乘之, 使歸告魯侯, 築城以備 送 魯人出海, 投杖水中, 乃龍也. 具以狀告, 魯侯不 信 , 低而有群燕數萬衍土培城, 魯 侯乃大城曲阜 造, 而齊窓至, 攻魯, 不克而還.>

제 8 장 공자는 교육을 자신의 평생 동안의 주요 사업으로 삼았다 . 그는 30 여 세가 되었을 때에 교육을 시작했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에게는 3 천 명의 제자와 72 명의 수제자 (D 가 있었다고 한다 . 11 공자는 교육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

1) 『 呂氏春秋』, 遺合 篇 」, <孔子 弟 子 三 千人 , 達徒七 十 人. > 『史記』 , 『仲尼弟子列傳」 索隱 에서는 『文翁孔廟 圖』를 인용하여 72 人이라고 하였다.

r 학비로 말린 고기 열 장밖에 못 낸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가 교육받을 기회를 빼앗지 않을 것이다」 21 (2)

2) 『 論語 』, 『述而』, <子曰 ; 『自行 束 循以上, 吾 未常無 諏 焉 J>

열 장의 말린 고기라면 옛날에 사람들이 처음 만날 때 인사치레로 주고 받던 작은 선물로 결코 많은 것이 아니었다 공자는 그런 적은 보수도 마 다하지 않았던 것이니 그의 교육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 지를 알수 있다. ® 그런데 공자의 수제자가 반드시 72 명씩이나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 든 그리 적지는 않았던 것 같다. @ 그 중에 예를 들어보자면, 우선 안회(顔 回)가 있다. 그는 공자의 첫번째 제자였으며 또한 공자가 가장 아끼던 제 자였는데 안연(顔淵)이라고도 불렸다. (5) 그의 집은 가난했지만 그는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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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회( 『儒 士 』 )

는 것을 좋아하였댜 그는 밥 한 소쿠리와 물 한 바가지만 있으면 아주 궁벽한 골목에서라도 기꺼이 공부를 하며 기나긴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가난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늘 탐구하려는 정신을 공자는 높이 샀던 것 이다 . 3 )

3) 『論語』, 「雍也J, <子曰 ; 『賢哉回也! 一節食,一甄飮,在柄卷, 人不塔其憂, 回也不改 其樂. 賢哉回也!』>

그러나 공자가 안연을 좋아했던 것은 그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댜 그것은 바로 안연이 지혜와 용기를 겸비했으며 또한 재능과 지모가 출중했기 때문이었다. 안연이 얼마나 지혜로왔는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공자가 재 난을 당했던 어떤 때, 그는 자공을 제나라로 보내어 한 가지 일을 해결하 고 오라고 하였댜 자공이 그 일을 하러 떠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 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공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역경(易經)』을 펼 쳐들고 점을 쳐보았다 그랬더니 나온 점괘가 정괘(鼎卦)의 구사효(九四 죠)로 나왔는데 효상(조象)에 <솥의 발이 부러지다(鼎折足)>라고 나와 있 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효상에 <솥의 발이 부러지다>라고 나와 있는 것을 보니 자공은 돌아 오지 못할 것 같구나」 공자의 그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지만 안연만은 아무 말 없이 입가 에 미소를 띠고 있었댜 공자가 그에게 물었다. r 너는 왜 말이 없이 웃고만 있는 거냐?」 안연이 대답했다. r 자공은 아마 돌아올 것입니다」 r 자공이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어찌 아느냐?」 r 솔에 발이 없다면,」 안연이 말했다. r 배의 형상이 아니겠습니까? 자공은 분명히 배를 타고 돌아올 것입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공은 과연 배를 타고 돌아왔고” 사람들은 안 연의 지혜가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칭찬해 마지 않았다.

4) 『北堂 習紗』 卷 1 就 引 『 韓 詩 外傳 』 , <孔子使子貢適齊, 久而 未 回. 孔子占之, 遇鼎, 謂 弟子曰 ; r 占 之遇鼎 無足而不來』 顔回俺口而笑 . 孔子曰 ; r 回也何昞?』 曰 ; 『回謂 賜必來』 孔子曰 ; 「如何?』 對曰 ; 『 卜而鼎無足, 必乘舟而來矣』 賜果至.>

이번에는 안연의 용감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공자가 어떤 나라에서 하는 일 없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어떤 괴물이 공지를 보러 왔다. 때는 마침 저녁 무렵으로 안연과 자로( 子 路) 두 사람이 문 앞의 계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공자를 만나러 온 괴물을 보았는데 그것은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것이 머리는 작았고 얼굴은 뾰족했으며 몸은 거대하게 컸고 눈에서는 인광 같은 것이 번쩍번 쩍 빛나고 있었다 . 아주 흉악한 기운이 흐르는 그 모습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자로는 이름난 용사였음에도 불 구하고 그 괴물을 보자마자 겁에 질려서 입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러나 안연은 한 마디 말도 없이 벌떡 일어나더니 허리춤에서 보검을 꺼내어 괴 물을 향해 내리쳤다 . 그런 상황이 닥치리리는· 것을 예상치 못했던 괴물은 갑자기 당황하여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안연은 괴물을 쫓아가 그 의 허리띠를 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괴물은 몸을 한바퀴 돌리더니 징그럽고 무시무시한 흰 구렁이로 변하는 것이었다. 안연은 조금도 두려 워하지 않고 칼을 휘둘러 구렁이를 토막내 버렸다 . 공자가 밖에서 뭔가 살벌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끼고 나와 보니 구렁이는 이미 안연의 손 에 죽어버린 뒤였다. 공자는 감탄하며 말했다. 「그래, 내가 듣기로 용감한 사람은 두려움을 모른다고 했지. 그리고 지 혜로운 사람은 어떤 상황에도 미혹되지 않는다고 했다. 안연이야말로 지 혜로울 뿐 아니라 용감하다고 할 만하구나!』 안연은 이처럼 지혜롭고 용감했을 뿐만 아니라 말재간 또한 뛰어났다. 한번은 공자가 제자들을 이끌고 성밖의 교외로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어떤 부녀자가 길가에서 뽕을 따는 것을 보았는데 머리에는 상아로 된 빗

을 꽂고 있었다 공자는 제자들의 말재간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그들에게 말했다 r 너희들 중에 누가 가서 저 여인의 머리빗을 얻어올 수 있겠느냐?」 그러자 안연이 앞장서 나서며 용감무쌍하게 대답했다. r 제가 가서 얻어오겠습니다」 그는 말을 끝내자 곧 부인에게로 가서 인사를 한 뒤 말했다 . 「저에게는 배회산(fj F f 回山)이라는 것이 있습니댜 온갖 나무들이 그 위 에서 자라지만 그 나무들은 가지만 있을 뿐 이파리는 없습니다 . 그리고 온갖 짐승들이 그 숲 속에 살지만 마실 것만 있지 먹을 것은 없습니다. 그 래서 부인께 그물을 한쪽 빌려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 그것으로 짐승들 울 잡아 볼까 하고요」 부인은 안연의 그 말을 듣고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머리에서 상아 빗을 꺼내어 그에게 주었댜 안연은 그 상아빗울 받아들고서 말했다. r 이상하군요 . 어떻게 부인께서는 까닭도 묻지 않으시고 저에게 빗울 주 시는 것인지요?」 부인이 대답했다 . 「제가 까닭을 묻지 않았다고요? 방금 당신이 배회산이라고 하지 않았 나요? 배회산이리는 것은 바로 당신의 머리가 아닌지요? 그리고 당신은 또 온갖 나무들이 그 산에 자라고 있다고 했지요. 그리고 그 나무들이 가 지만 있을 뿐 이파리는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것은 바로 머리카락을 말씀 하시는 거지요 . 또한 그 숲 속에 온갖 짐승들이 자란다고 하셨는데 그것 은 바로 머리의 이(蟲)가 아닙니까. 그 짐승을 잡을 그물이라고 하시면 바 로 저의 빗을 말씀하시는 것 아니던가요 . 그래서 제가 제 머리에 꽂고 있 던 빗을 빌려 드린 것인데 뭐가 이상하다는 말씀입니까?」 공자는 곁에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돋고 있다가 찬탄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안연의 말재간도 뛰어나다만 부인의 지혜야말로 빼어난 것이라고 하 지 않을 수 없구나!」 5)

5) 『開玉渠』 卷 12, <路婦不知{iiJ處人也. 孔子見之, 頭戴烏(象?) 牙摘. 謂諸弟子曰 ; r 誰 能得之?』 顔淵曰 ; r 回能得之』 卽往至婦人前, 路而曰 ; r 吾有 8F1 回之山, 百草生其上, 有枝而無葉;萬獸菓其災,有飮而無食.故從夫人借網而捕之」婦人卽取摘與之.顔淵 曰 ; 「夫人不問由委, 乃取楠與回, {iiJ也?』 婦人答曰 ; r 俳桐之山者是君頭也 ; 百草生其 上, 有枝而無葉者, 是君髮也 ; 萬獸染其襄, 是君風也 ; 借網捕之者, 是君摘也. 以故取 楠與君, 何怪之有?』 顔淵 U 쁨然而退. 孔子聞之, 曰 ; r 婦人之智尙爾, 況於學士者平?』 出古傳.>

안연은 총명하고도 배우는 것을 좋아했으며 머리가 특출·나게 좋았다. 그 리고 이마가 툭 튀어나와서 바싹 마른 얼굴이 어떻게 보면 초이렛날의 초 생달 같았댜 61 @ 게다가 거친 밥을 먹고 물만 마셔서인지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 몸도 빼빼 마른 것이 얼굴 생긴 것과 똑같았다. 그래서인지 스무살이 갓 넘었을 때 이미 머리가 반백이 되었고, 스물 아홉이 되었을 때에는 머리 가 온통 하얗게 변해서 애늙은이 같은 꼴울 하고 있었다 .7 ) (1)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자가 말한 대로 < 아깝게 일찍 죽고 말았는데 > 그때 나이 겨우 서른 둘이었댜 8 1 어떤 전설에 의하면 안연이 그렇게 일찍 죽은 직접적 인 원인은 공자와 벌인 시력(眼力) 싸움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

6) 『文選』, 『王文憲菓序』 注, 引 『論語撰考識』, <顔回有角額, 似月形.> 7) 『論語』, 『雍也』篇 참조 8) 『史記』, r 仲尼弟子列傳」 索隱, 引 『孔子家語』, <(顔回)三十二而死.>

그것은 어느 해 가울이었다 . 공자와 안연은 태산(泰山)으로 놀러갔다. 태산의 꼭대기에서 멀리 동남쪽을 바라보니 오나라(吳國) 도성의 궁궐문 까지 눈에 들어왔댜 공자는 안연에게 물었다. 떠 저기 오나라 궁성의 문이 보이느냐?」 그러자 안연이 대답했다. r 보입니다」 공자가 다시 물었다. 「그 문밖에 뭐가 있느냐?」 안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한동안 열심히 바라보다가 머뭇거리며 대답 했다. r 하얀 비단이 한 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푸른 옷감이

있고요」 공자가 말했다 r 아니다 , 네가 잘못 보았구나」 안연은 다시 기를 쓰고 그곳을 바라보려 하였지만 공자는 급히 손으로 안연의 눈을 문지르며 말했댜 「됐댜 이제 그만 보고 내려가도록 하자」 두 사람은 함께 태산에서 내려왔다. 오는 길에 안연은 눈앞이 어질어질 한 것이 어딘가 몸이 허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그는 영 기분이 찜찜해 공자에게 물었댜 「스승님께서는 제가 잘못 보았다고 하셨는데 그럼 스승님께서 보시기 에 그곳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백마 한 마리였느니라」 공자가 말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말에게 먹일 갈대풀 꼴이 한 묶음 있었지」 9)

9) 『 太平御 覽』 卷的 7, 引 『論衡』

그러나 안연은 그 말을 그다지 믿지 않았다. 스승과 제자는 그들이 오 나라 궁궐문을 바라보았던 시각을 기억해 두었다. 그리고 발빠른 사람을 골라 준마를 타고 오나라로 가서 당시 상황을 알아 보게 했다. 그가 돌아 와 보고하기를 그날 궁궐문 밖에 매어져 있던 것은 과연 한 마리 백마였 으며 말 앞에는 꼴이 한 묶음 놓여져 있었다고 대답했다 .1 0 ) 안연은 그때서 야 스승인 공자를 우러르며 땅바닥에 엎드리는 예로써 절을 했다. 스승은 정말로 성인이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고 시력도 특 별나게 좋았던 것이다. 자기로서는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할 일이었댜 ® 그러나 안연이 태산의 산꼭대기에서 그렇게 먼 거리에 있는 서물의 색깔, 죽 흰색과 푸른색을 구별해 낸 것도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의

10) 『 太平御 點 卷的 7, 引 『論衡』, <儒 콥 稱 孔子 與顔淵 , 供登魯東 山, 望吳 鬪門 , 謂 曰 ; 『爾何見?』 曰 ; r 見一四 練 , 前 有生藍 」 孔子曰 ; r 憶 , 此 白 馬 蓋策 J 使 人視 之, 果然 . > 今 本 『論 衡 』, r 書 虛篇 J을 보면 이것이 인용되어 있다 .

시력 역시 그리 범상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연은 스승과 그 눈 싸움을 벌인 뒤 정신을 너무 소모하였고 또 기력이 쇠잔하여 돌아온 지 얼 마 지나지 않아 머리카락이 온통 하얗게 변해버리고 이도 모두 빠져버렀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그만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모두가 이길 수 없는 스승을 억지로 이겨보려고 애썼던 그 고집스런 성격 때문이었다 .Ill @

11) 『論衡』, 「콥虛篇』, <顔淵與孔子供上魯太山東南望, 下而顔淵髮白齒落, 遂以病死.>

공자의 제자 중 안연 이외에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자로이다. 자로가 처음 공자의 문하에 들어왔을 때에 그는 완전히 일개 무사였다. ® 머리에는 장닭의 깃털이 달린 모자를 썼고 허리춤에는 긴 칼을 찼으며 칼 자루에는 숫돼지의 껍데기를 씌웠다. 모든 것이 그의 용맹스러움을 드러내 주는 것들이었다. 그는 다른 제자들이 책 읽는 소리를 듣고 자기도 입술을 움직여 되지도 않는 소리로 따라 읽는다고 옹얼거렸다 . 그럴 때마다 머리 에 꽂힌 닭털이 혼들거렸으며 칼자루에 씌운 돼지 껍데기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동료들은 그의 이런 태도를 비웃고 또 싫어했으며 공자까지도 그를 야만적이고 거칠며 속되다고 비난하였다 .12) 어떤 사람들은 그가 천둥 의 정령(雷精)에 감응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일생 동안 용감한 행동과 강한 성격을 좋아하게 된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13) 그 말은 그다지 신빙 성이 없다. 그러나 전설에 의하면 공자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물 었다고 한다. r 너는 무엇을 좋아하느냐?」 그러자 자로는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r 긴 칼을 좋아합니다」 14) 이 이야기는 아마도 사실일 것 같다. 그야말로 자로의 거친 말투나 신

12) 『論衡』, 『率性篇』, <世稱子路無恒之庸人, 未入孔門時, 戴鷄偶麻, 勇猛無禮. 間踊讀 之聲, 稀鷄席隊 揚脣物之音, 括聖賢之耳.> 『論語』, r 子路』, <子曰 ; r 野哉由也』> 『先進」, <由也移.> 13) 淸 盧文招 『群 콥 捨補』 輯 『風俗通逸文』, <子路感雷精而生, 尙剛好勇.> 14) 『孔子家語』, r 子路初見』, <子路初見孔子, 子曰 ; 『汝何好?」 曰 ; r 好長劍』>

분에 들어맞기 때문이다. 역사서에 보면 자로가 일찍이 공자를 < 욕보인 > 적이 있었는데 공자가 그 를 잘 선도하여 유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라 고 한다 1 5 1 이것 역시 민간전설에 근거하고 있는데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 기가 전해지고 있다.

15) 『史記 』 , 『仲尼弟子列傳J, <(子路)陵 暴 孔子, 孔子設 禮 , 稽誘子路, 子路 後儒 服委質.> (원문은 <子路性亂 好勇力, 志抗 直 , 冠雄鷄, 僞脈, 陵 暴 孔子 , 孔子說 禮, 稽誘子路 , 子路後 儒 服委質, 因門人 請爲 弟子.>)

한번은 공자가 자로를 데리고 산에 놀러갔는데 공자가 목이 말라 자로 에게 시냇가에 가서 물을 좀 길어오라고 하였댜 자로가 시냇가로 가 물을 걷고 있을 때 눈이 화동잔만 하고 이마가 허 연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 자로는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으나 맨손으로 호랑이와 격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급한 김 에 호랑이의 꼬리를 잡아당겼다 꼬리를 손목에 휘감고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기니 호랑이의 꼬리가 쑥 뽑히고 말았다. 호랑이는 엉덩이에서 피 를 홀리고 고통에 찬 소리를 지르며 도망쳐 버렸다 . 자로는 호랑이 꼬리 를 품속에 넣고 물을 마저 길은 뒤 돌아왔다.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감 추지 못하며 공자에게 말했다 . 「스승님 , 훌륭한 선비는 호랑이를 어떻게 잡습니까?」 r 훌륭한 선비는 호랑이의 머리를 잡는다」 공자가 대답했댜 「그러면 중간쯤 되는 선바는요?」 r 중간쯤 되는 선비는 호랑이의 귀를 비틀어 잡지」 r 그러면 가장 낮은 선비는 어떻게 잡나요?」 『가장 별볼일 없는 선비는 , 」 공자가 느릿느릿 대답했다. r ―호랑이의 꼬리를 잡아당기지」 자로는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져 한마디 말도 없이 품속에 감추고 있던 호랑이 꼬리를 꺼내어 던져버렸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공자를 원망하며

자로(『儒士』)

중얼거렀다 . 「스승님께서는 시냇가에 호랑이가 있으리라는 걸 아시면서도 날더러 가서 물을 길어오라고 하신 거야. 나를 호랑이 밥으로 만들려는 생각이 아니고 뭐였겠어?――_스승님도 참 너무 독하신 분이야」 그래서 그는 손에 집히는 대로 둥그런 돌맹이룰 주워 품속에 감추고 다 시 공자를 찾아갔다. 그 돌멩이로 공자를 없애려는 생각이었다. 「스승님, 훌륭한 선비는 사람을 죽일 때 어떻게 죽입니까?」 자로는 기세동등하게 물었다. 「훌륭한 선비는 붓끝으로 죽이지」 공자는 조금도 당황해 하지 않고 대답했다 . 『중간쯤 되는 선비는요?」 「중간쯤 되는 선비는 혓바닥으로 죽인다」 「그러면 가장 못난 선비는요?」 r 가장 못난 선비는,」 공자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돌멩이를 품에 감춰서 죽이지」 공자는 단번에 자로의 마음을 알아맞췄다. 자로는 더 이상 어쩌지 못하 고 품속에 감춰 두었던 돌멩이를 꺼내어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로는 공자에게 복종하며 다시는 두 마음을鼻 품지 않았다고 한 다 .161 이 일은 아마 자로가 공자의 문하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일어났던 것 같 16) 『古小說釣況』 輯 r 小說」, <孔子常游於山, 使子路取水, 逢虎於水所, 與共戰, 歷尾 得之, 內懷中, 取水還, 問孔子曰 ; r 上士殺虎如之何?」 子曰 ; r 上士殺虎持虎頭 』 又問 曰 ; r 中士殺虎如之何?』 子曰 ; 「中士殺虎持虎耳」 又問 ; 「下士殺虎如之何?』 子曰 ; r 下士殺虎提虎尾』 子路出尾棄之. 因患孔子曰 ; r 夫子知水所有虎, 使我取水, 是欲死 我」 乃懷石盤 欲中孔子, 又問 ; r 上士殺人如之何?』 子曰 ; 「上士殺人用(使) 筆端 』 又 問曰 ; 『中士殺人如之{iiJ?」 子曰 ; r 中士殺人用舌尖(端)」 又 rp1 ; 「下士殺人如之何?」 子曰 ; 『下士殺人懷石盤』 子路出而棄之. 於是心服.>(역자주; 여기에서 괄호 안의 글 자는 원문과 대조한 것. 이것은 『說접 l』 25, 『衝波傳」에서 나온 이야기임)

다. 그 이후로 자로는 공자의 끈기 있는 가르침 덕분에 본래의 거칠고 투 박한 성품을 버리고 공자의 가장 충실한 제자로 변했던 것이다 .8 그래서 공자도 이렇게 말하곤 했댜 태가 중유(仲 由 )를 얻은 뒤로부터 나를 욕하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 어오지 않는다」 17)

17) 『史記』, 「仲尼弟子列傳』, < 孔子 B ; r 自 吾 得 由, 惡 言 不聞於耳』 >

중유는 바로 자로의 자( 字 )이다. 공자가 그처럼 위풍당당한 무서를 · 얻 게 되었으니 누가 감히 공자를 무시할 수 있었겠는가 . 자로는 위인됨이 지나치게 강직하였기 때문에 스승과 가끔 충돌하기는 하였지만 그의 품행 은 거의 나무랄 점이 없었다 . 그래서 공자가 정치적으로 벽에 부딪쳐 제 자들이 점차 흩어져 제 갈 길로 갈 때에도 공자는 탄식을 하면서 이렇게 말하곤했다 「중국에서는 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멧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다른 나라로나 가볼까. 아마 나를 따라갈 이는 중유밖에 없지 않을까 한다J l 8 )

18) 『論語』, r 公 治長 』, < 子曰 ; 「道不行, 乘浮 浮 於 海 , 從我者 其 由與?』 >

그러나 이 용사는 아깝게도 위나라에서 공리(孔t里)의 난을 만나@ 그 내란의 와중에서 싸우다가 죽고 만다 .® 그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 도 적군이 끊어버린 갓끈을 움켜쥐고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r 군자가 죽는 것은 별것이 아니다만 …… 갓만은 떨어뜨릴 수 없지」 부상을 입은 그가 갓끈을 붙잡고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을 때 그를 포위하고 있던 적군이 벌때처럼 달려들어 칼과 창으로 그를 난자하여 죽 이고 말았다 . 1 9) 그리고 그를 죽인 병사들은 그의 시체를 칼로 다져 고기장 울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가슴속의 원한울 풀었던 것이다 . 그런 슬픈 소식을 들은 공자는 통곡을 하며 눈물을 흘렀고 집안에 보관해 두고 있던 고기장을 모조리 다 쏟아버리라고 말하였다. 3) )

19) 『左 傳 』 , r 哀 公十五年』, <大 子聞之權, 下石乞. 孟 藍 敵子路 , 以戈 擊 之 , 斷線 , 子路曰 ; r 君 子死, 冠 不 免」 結綴 而死 . > 20) 『 禮 記』, 博 弓」, <孔子笑子路於中 庭. 槪뜻 , 進使者而問故. 使者曰 ; 『 뮐 之矣』 遂 命 復젤 . >

자로가 그렇게 야성적이고 거칠었다면 공자의 또다른 제자인 자공은 말 도 잘하고 영리했으며 총명했댜 생긴 것도 준수하였고 콧대도 높았다 2 ) )® 입술과 아래턱 부분에 아름다운 수염이 조금 나 있었지만 그것을 깎아버 리면 젊은 아녀자와 다름없이 아름답게 생겼댜 브)@ 공자는 자공의 언변 이 너무 매끄럽다 하여 자주 그를 낮춰 말하곤 했지만 끄멜 그의 언변 덕 분에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여러 차례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또 몇 차례의 오해를 풀 수도 있었다 O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두 가지 사 건만 보더라도 그것을 알 수 있다 .

21) 『 文 選』 , 『 王文憲菓序 」 李善注, 引 『論語 摘 輔象』 , < 子 貢鼻高 有 異 相 .> 22) 『論 衡 』 , 『 龍虛篇 』 , < 子 貢滅嚴爲婦 人, 人不知 其 狀. > 23) 『 史記 』 , 「仲尼 弟 子列傳』, < 子 貢 利 口巧辭, 孔子 常盤其辯.>

한번은 자공이 자로와 함께 정나라( 鄭國 )의 신사(神 社 ) 부근을 지나가 고 있었다 신사 앞에는 사수( 社 樹 ) 가 한 그루 자라고 있었는데 줄기가 굵 어 가지가 많이 뻗어나가 있으며 나뭇잎이 무성한 천년 묵은 오래된 나무 였댜 나무 위에는 신조(神 鳥 )가 살고 있었는데 그 신조는 신통력이 있고 다양한 변괴를 일으킬 수 있는 그런 새였다 . 사람에게 복을 줄 수도 있고 재앙을 내릴 수도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후세 전설에 나오는 야조(治 鳥 ) 종류이거나 24)@ 혹은 산소(山 ) 귀매(鬼 睦 )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 . 자로는 그것도 모르고 그 새가 이상하게 생긴 것이 신기하여 재미 있겠다고 생각하고는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 그 새를 잡으려고 하였다. 그 러자 신조는 잡히기는커녕 오히려 법술을 부려 자로가 나무 중간쯤에 붙 어버리도록 만들었다. 자로는 올라갈 수도 없고 내려올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 자공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였다. 그는 그것이 모두 신조의 조화리는· 것을 알고서 신조에 게 그를 풀어 줄 것을 간청하였댜 자공의 언변이 뛰어나니 신조는 자기 를 잡겠다고 기어 올라오던 그 망나니가 사실은 별 잘못이 없다고 여기고 는 법술을 풀어 주었댜 그렇게 해서 한바탕의 소동이 조용히 끝을 맺게

24) 『 投神 記』 卷 13, r 治島 』 條 참조.

되었던 것이댜 '&)

25) 『博物志』{ 『 指海』本) 卷 8 , < 子路與子貢過鄭神社, 社樹有鳥, 子路捕鳥, 社神蒼 擊 子 路, 子 貢 說之, 乃止.>

또 한번은 공자가 남방의 초나라로 가다가 < 아곡(阿 谷 ) > 이라고 하는 골짜기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어떤 아름답고 단정한 소녀가 귀에 비취옥을 매달고서 냇가의 하얀 바윗돌 위에 앉아 빨래를 하는 모습을 보 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정오로 날씨가 조금 더워 모두들 목이 말랐다. 마 차를 길가에 세운 공자는 마차 안에서 잔을 하나 꺼내어 자공에게 건네 주며 말했댜 「저 아가씨에게 가서 물을 한 잔 얻어오너라 . 생긴 것으로 보아 하니 단정하고 조용한 성품을 지닌 것 같은데 그 심성이 어떠한지 좀 보아야겠 댜 네가 가서 그 빼어난 언변으로 그녀를 한번 시험해 보고 오너라」 자공은 잔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가 예의를 차리며 말했다 . 「저는 북방 산야에서 온 사람입니다 . 남방의 초나라로 가는 길인데 날 씨가 이렇게 더우니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마르군요 . 제게 물 한 잔만 주 시어 이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소녀는 자공을 힐끗 보더니 미소룰 지으며 대답했다. r 이 아곡의 시냇물을 보십시오. 그 물이 맑든 탁하든 그것은 이렇게 졸 졸 홀러서 바다로 들어간답니다. 그 물은 모든 사람의 것이지 저 혼자의 것이 아니지요. 목이 마르시면 직접 떠서 마시면 되실 일이지 일개 아녀 자의 허락을 받으셔야 하나요?」 그러면서도 소녀는 자공의 손에서 잔을 받아 물을 담아 땅위에 부었다 그리고 또 다시 한 잔을 가득 떠서 자공 옆의 모래땅 위에 놓으면서 말했다 r 이해해 주십시오. 예의상 당신에게 직접 이 잔을 건네 드릴 수는 없답 니다」 자공은 물이 가득 담긴 그 잔을 땅위에서 들어올려 돌아와 스승에게 드 렸다. 그리고 방금 소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그대로 스승에게 고하였다. 공

자는 그 말을 듣고 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냐 , 알겠다」 그리고 이번에는 마차에서 거문고를 꺼내어 거문고 줄을 조절하는 줄받 침( 軫 )을 없앤 뒤 자공에게 주며 말했다. r 이걸 가지고 가서 다시 그녀에게 몇 마디 말을 시켜 보거라 . 그리고 뭐라고 대답하는지 들어 보려므나」 자공은 거문고를 가지고 다시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r 아까 당신이 하신 말씀은 맑은 바람처럼 부드러웠습니댜 그러면서도 저의 부탁을 거절하시지는 않았지요 . 그래서 제 마음이 무척 기뺐답니다. 자, 여기 거문고가 있는데 줄을 조절하는 줄받침이 없어요. 거문고( 琴<情 > ) ® 의 음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소녀는 그 말을 돋더니 눈썹을 약간 찌푸리고 두 뺨에 홍조를 띠는 것 이 어딘가 좀 고민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단정한 태도 로 자공에게 말했다 . 『저는 산골짜기 궁벽한 곳에 사는 여인이올시다 . 아무것도 모르지요. 오 음육률(五音六律)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 신을 대신해서 거문고( 琴 , 情)를 조절할 수 있겠습니까?」 자공은 소녀가 한 말을 그대로 공자에게 전했다. 공자는 그 말을 듣더 니 고개를 끄덕이며 또 말했다. r 알겠다」 그리고 마차에서 다시 다섯 냥의 가는 갈포를 꺼내어 자공에게 주며 말 했다. r 이것을 가지고 가서 다시 말을 걸어 보고 뭐라고 하는지 들어 보아라」 자공은 가는 갈포를 들고 그녀에게로 가서 다시 말을 걸었다. 「저는 북방 산야에서 온 사람입니다. 남방 초나라로 가는 길이지요. 이 곳에서 당신을 만나 벌써 두 차례나 좋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기 가는 갈포 다섯 냥이 있는데 당신께 선물로 드립니다 . 제 마음의 표시지요. 저 역시 직접 당신에게 드릴 수는 없으니까 여기 시냇가, 당신 곁에 놓겠습

니다」 소녀는 그 말을 듣더니 갑자기 눈썹을 치켜올리고 화를 내며 예쁜 얼굴 에 눈을 부릅뜨고서 자공에게 소리쳤다 r 당신이 군자라면 당신 갈 길이나 가십시오 . 왜 자꾸 여기 와서 귀찮게 구는 겁니까? 또 아무 이유도 없이 당신의 재물을 이런 궁벽한 산골짜기 에 떨구시다니,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저는 나이 어린 소녀에 불과합 니다 어찌 당신의 선물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빨리 돌아가세요 . 그렇 지 않으면 누군가가 당신을 용서치 않을 거예요」 자공은 소녀가 말하는 그 < 누군가 > 라는 것이 그녀의 애인이거나 약혼 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시험의 목적은 이제 달성되었다. 영리한 자공은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고 물가의 갈포 다섯 냥을 집어들고 얼른 그 녀에게 < 미안하다 > 고 말하고는 돌아와 공자에게 그녀와 니누·었던 대화를 둘려 주었댜 공자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한 듯 말했다. 「맞다, 맞아. 『시(詩)』에 이르기를@ < 남방에는 거대한 나무가 있으나 그 밑에서 쉴 수가 없고 한수에는 봄을 노래하는 소녀가 있으나 그녀에게 애모의 정을 표시할 수 없네 > 라고 했는데 아곡의 이 소녀가 바로 그 내용 과 다름이 없구나!」 261 26) r 韓詩外傳』 卷 1, (역자주 ; 괄호 안의 글자는 원문과 대조

하여 보충한 것임)

자공의 언변이 뛰어나기는 했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는 경우가 있었다. 어느 농부에게 잃어버린 말을 돌려 달라고 했다가 이루지 못한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댜 그것은 공자가 열국(列國)을 주유할 때의 이야기이다 . 다니던 도중 피 곤하여 마차를 큰 길가에 세워놓고 잠시 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마차 룰 끌던 말이 고삐룰 끊고 길가의 밭으로 달려가 남의 곡식을 먹어치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밭에서 일을 하고 있던 농부들이 달려가 말을 잡아 두었다 . 자공은 자기의 언변이 뛰어나다는 것을 믿고 그들에게 가서 말을 돌려달라고 하였다. 그는 밭 저편의 농부들을 향해 자신의 빼어난 언변을 구사하기 시작하였댜 위로는 하늘의 도리부터 아래로는 땅의 이치에 이 르기까지, 온갖 제자서와 역사서를 언급하고 경전을 인용하여 이야기를 하는데 조금도 막힘이 없이 청산유수와 같은 말재주를 구사하는· 것이었 댜 농부들은 눈을 크게 뜨고 자공을 바라보며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 지 않았다 . 그러다가 결국에는 참지 못한 농부들이 소매를 걷어부치고 싸 울 듯한 자세를 내보이며 밀고 당기기 시작하여 자공울 돌려보냈다 . 이때 자공의 얼굴색이 멋적게 변하며 기운 없는 기색이 역력하자 모두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댜 바로 그때 어딘가 조금 모자라는 것 같은 데다가 공 자를 모시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마부가 나서서 공자에게 말했다. r 제가 가서 그 말을 찾아 오겠습니다. 보내 주십시오」 공자는 마침 적당한 인물을 찾지 못하고 있던 중이라 그를 한번 보내 보기로 했다. 마부는 농부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r 이 일은 뭐 그리 복잡한 일이 아니에요. 당신들이 동해(東海)에서 밭 올 갈고 농사를 짓지 않으면 우리도 서해에서 농시를· 짓지 않지요. 그러 니 생각해 보세요. 우리 말이 어떻게 당신들의 곡식을 먹어치우지 않을 수 있겠어요?」@

농부들은 그 말을 듣고 서로 멍하니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말의 뜻을 알 듯도 했고 모를 듯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들은 갑자기 그 말의 뜻을 깨닫고 무척이나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r 맞아, 맞아, 당신 말이 일리가 있소. 바로 우리들의 마음과 맞는 말이오 조금 아까 그 작자처럼 하루종일 이야기해도 알아~등지 못할 말과는 다르 군. 그 자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더라니까 .l 그리고는 뽕나무 밑에 잡아 두었던 말을 기꺼이 풀어 마부에게 주었 댜刀) 일찍이 뛰어난 말재주로 < 노나라를 존립하게 하였고 제나라를 어지럽 혔으며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를 강성하게 만든, 그리고 월나라가 패자가 되게 만든(存魯, 難齊 破吳, 强秦, 覇越)> 그 유명한 자공 281@ 이 들판에서 농부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는 일개 마부보다 못했다는 사실을 그 누가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업) 『呂氏春秋』, 『必己篇』, <孔子行道而息, 馬逸, 食人之樣, 野人取其馬. 子貢請往說 之, 畢辭 野人不聽 有鄭人始 事 孔子者, 曰 ; r 請往說之J 因請野人曰 ; r 子不耕於東 海, 吾不耕於西海也, 吾馬何得不食子之禾?』 其野人大稅, 相謂曰 ; 『說亦皆如是其辯 也, 獨如鹽之人!」 解馬(而)與之 . > 28) 『史記』, 『仲尼弟子列傳』 참조.

제 9 장 증삼(曾參)은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이름난 효자였댜 © 어느 날 증삼이 야외에 땔감을 베러 나갔을 때였다. 어떤 사람이 찾아 왔다가 주인이 집에 없다는 것을 알고 다시 돌아가려 하였다. 그러자 증 삼의 어머니가 손님에게 말했다 . r 가지 마십시오. 증삼이 곧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살짝 꼬집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들판에서 땔감을 베던 증삼이 왼손에 갑작스런 통증을 느껴 일을 중단하고 도구를 추 려들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사립문 밖에서 어머니를 보고 물었다 . 「어머니, 오늘따라 제 왼손이 왜 이렇게 아픈 걸까요?」 그러자 어머니가 대답했다 r 별거 아니다. 손님이 오셨는데 네가 없다고 가시려고 하기에 내가 내 손동을 꼬집어 너를 돌아오게 한 것이다」 I) 이 이야기는 증삼이 어머니에게 얼마나 효도를 하였기에 두 사람의 정 1) 『論衡』, r 感虛篇』, <曾子之孝, 與母同氣 . 曾子出新於野, 有客至而欲去. 曾母曰 ; 『願留, 參方到』 卽以右手益其左普, 曾子左뽑立痛, 卽勅至問母曰 ; r 脣{iiJ故痛?」 母曰 ; r 今者客來欲去, 吾播普以呼汝耳J(蓋以至孝與父母同氣, 體有疾病, 精神輯感)>(역자 가보충)

신이 그렇게 서로 통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 (2 어머니 의 팔이 바로 자기의 팔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자신의 팔을 꼬집자 그도 역시 팔에 통증을 느껴 즉시 돌아왔다는 것이니 오늘날의 전 화나 호출기보다도 훨씬 더 훌륭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증삼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그런 이야기도 전해지 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증삼이 노나라 바지(費地)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비지의 어떤 사람이 증삼과 동명이인이었는데 시내에서 나쁜 짓을 하다가 사람을 죽이게 되었 다. 그러자 누군가가 증삼의 어머니에게 달려와 말했다. 「층삼이 사람을 죽였어요!」 그러나 증삼의 어머니는 베틀에 앉아 베를 짜며 미소를 지었다. r 우리 아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네」 그러면서 계속 베를 짜고 있는데 조금 있다가 어떤 사람이 또 달려와 외쳤댜 「증삼이 사람을 죽였답니다」 그때 어머니의 마음속에는 약간의 의혹이 생겨 마음이 어지러웠지만 겉 으로는 태연을 가장하고 머리를 숙인 채 말없이 베만 짜고 있었다. 잠시 후, 어떤 사람이 또 와서 그녀에게 말했다. r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니까요」 그러자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베를 짜던 북울 집어던지고서 담을 넘어 밖으로 달려나갔다. 나중에야 그녀는 그것이 한바탕의 오해였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니 21 모자간의 텔레파시도 어느 정도는 한계가 있었던 모 양이었다. 증삼은 아버지에 대해서도 똑같이 극진한 효도를 다하였다. 어떤 때 보 면 효도가 지나쳐서 멍청해 보일 때도 있었다. 예를 들어 한번은 증삼이 2) 『戰國策』, 「秦策一」, <昔者曾參處質 費人有與曾子同名族者, 而殺人. 人告曾子母 曰 ; 『曾參殺人』 曾子之母曰 ; r 吾子不殺人」 織自若. 有頃焉, 人又 El ; 『曾參殺人J 其 母尙織 自 若也 . 頃之, 一人又告之曰 ; r 曾參殺人』 其母儒, 投行諭쌉而走.>

외밭에서 외를 돌보다가 잠시 실수로 막 싹이 올라오는 외의 묘목을 밟아 부러뜨린 일이 있었다. 아버지인 중석( 曾哲 ) C 년 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손에 집 히는 대로 커다란 몽둥이를 들어 아들의 등짝을 향해 내리쳤다 . 증삼은 잘못에 대한 벌을 달게 받는다는 자세로 피하지 않았고 따라서 몽둥이는 그의 둥에 정통으로 내리꽂혔다. 그는 땅바닥에 쓰러진 채 한나절이 지나 서야 깨어났는데 여전히 등에 얼얼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아버지를 찾아가 말했다. 「아까 제가 아버님께 잘못을 했습니다. 아버님께서 저에게 교훈을 내려 주셨는데 그때 너무 힘을 쓰셔서 손을 삐셨지요?」 그렇게 아버님에게 문안을 드리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행동하여야 자기 마음이 이미 다 풀어져서 원망하는 뜻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보여 드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이 일이 있은 후 증삼은 자신의 효도가 괜찮은 것이었다고 생각하고 득 의만만한 태도로 스승인 공자를 찾아갔다. 공자는 - 일찌감치 이 일에 대해 서 알고 있었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여겨 제자들에게 중삼이 찾아오 거든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일러두었다. 증삼은 문전박대를 당하고서 영 입맛이 썼다. 그리고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스승께서 자기를 그 렇게 백안시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증삼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스승께서 왜 그러시는 것인지 좀 알아봐 달라고 하였다. 공자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r 증삼에게 왜 잘못이 없디는· 말이냐? 증삼은 그 옛날 순(舜)이 자신의 눈먼 아버지에게 어떻게 했는지 듣지도 못했다더냐? 눈먼 아버지가 작은 회초리로 순을 때리면 순은 그냥 몇 대 맞고 있었지만 커다란 몽둥이로 때릴라 치면 얼른 도망쳐버렸다 왜 그랬는지 아느냐? 말도 안 되는 이유 로 화를 내는 그런 폭력을 피하려 함이었다. 그런데 중삼을 보아라 . 자기 아버지가 커다란 몽둥이로 때리려 하는 것을 보면서도 도망을 치지 않다 니, 자기 몸으로 말도 안 되는 폭력을 감수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게다

증삼(『儒士』)

가 만일 증삼이 그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고 해보자. 그 아버지는 아들을 죽였다는 패륜의 오명을 평생 덮어쓰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보다 더 불효한 행동이 어디 있겠느냐?」 그 사람은 증삼에게 공자의 말을 그대로 전하였다. 그 말을 듣자 증삼 온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느낌이 들었댜 증삼에게 큰 몽둥이를 피해야 한다고 가르친 공자의 말은 도리로 보나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으로 보나 모두 정확한 말이었던 것이다 . 31

3) 『說苑./l, 『建本』, <曾子芸瓜, 而誤斬其根, 曾哲怒, 援大杖擊之, 曾子 1 卜地. 有頃, 蘇, 惡然而起, 進曰 ; r# 者參得罪於大人, 對人用力敎參, 得無疾平?」 退居鼓琴而歌, 欲 令曾哲聽其歌聲, 令知其平也. 孔子聞之, 告門人曰 ; r 參來, 勿內也』 曾子 自 以無罪, 使人謝孔子. 孔子 B ; 『汝聞쌉腹有子名曰舜, 舜之事父也, (索而使之, 未常不在側, 求 而殺之, 未常可得;) 小篇則待, 大篇則走以逃暴怒也 . 今子委身以待暴怒, 立體而不 去, 殺身以路父, 不義, 不孝, 執是大平?」>(괄호 안은 역자가 보충한 것임)

증삼은 효도라는 면에 있어서는 어리석을 정도로 고지식하였으나 자녀 교육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괜찮은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어느 날 증삼 의 아내가 시장에 물건을 사러 나가는 참이었다. 어린 아들이 따라가겠다 고 울어대었다 증삼의 아내는 아이를 달래며 말했다. 「아가, 집에 가 있거라. 엄마가 시장 갔다오거든 돼지를 잡아서 너에게 주마」 아이는 그 말을 곧이듣고서 그렁그링한 눈물을 닦으면서도 희망을 품고 집으로 돌아갔다. 증삼의 아내가 시장에서 돌아왔을 때 증삼은 칼을 갈아 돼지를 잡았댜 아내가 급히 그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아니, 제가 어린애하고 장난으로 몇 마디 한 것을 가지고 정말 돼지롤 잡아요?」 증삼은 진지하게 아내에게 말했다. r 어린아이는 아무렇게나 속이고 그러면 안 되오. 왜 그런 줄 아시오? 어린아이들에게는 아무런 지식이 없소. 모두가 부모의 행동을 보고 배우 는 것이지요. 당신이 아이를 속인다면 그것은 아이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남을 속이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은 것이오. 더구나 어머니가 아이룰 속이 면 아이는 다시는 어머니를 믿지 않게 될 것인데 그래서야 어떻게 앞으로 아이를 교육시킬 수 있겠소?」 그리고는 아내가 가로막는 것도 듣지 않고 돼지를 잡아 온 식구가 배불 리 잘먹었다 4) 그의 아버지가 그를 몽둥이로 다스렸던 것에 비하면 증삼 의 교육 방법은 한결 나온 것이었다고 할 만하다

4) 『韓非子』, 『外偉說上』, <曾子之妻之市, 其子隨之泣. 其母 B ; r 女還 ; 顧返, 爲女殺 裁』 妻適市來, 曾子欲捕儉殺之. 妻止之, B ; 「特與嬰兒戱耳!』 曾子曰 ; r 嬰兒非與戱 也 ; 嬰兒非有知也, 待父母而學者也, 聽父母之敎. 今子敗之, 是敎之敗也. 母敗之, 子 而不信其母, 非以成敎也』 遂亮裁也.>

공자의 제자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인물이라면 공야장(公治長)을 꼽을 수 있다 . 공야장에게는 별난 재주가 있었는데 바로 온갖 새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고대의 백익(伯益)만이 그와 비길 만했으니 백익 역 시 여러 새들의 말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5) 새와 짐승들은 사람과 마찬 가지로 자기 나름대로의 언어를 갖고 있다. 다만 사람들이 그 말을 알아 들을 수 없는 것인데 설사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능력을 가진 사 람은 정말로 적었다. 그러나 고서의 기록을 보면 춘추시대부터 새나 짐승 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점차 많아지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춘 추시대 초기 개갈로(介葛盧)라는 사람이 그랬다. 그는 어느 작은 나라의 임금이었는데 노나라의 희공(僖公)을 만나러 왔다가 복도 아래에서 소가 우는 소리를 듣고 희공에게 말했다. 「저 소가 세 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모두 제물로 바쳐졌다는군요」 희공이 사람을 시켜 알아보게 하였더니 개갈로가 말한 것과 꼭 같았 다? 개갈로는 소의 말을 알아들었던 것이다. 한편 말이 하는 이야기를 알

5) r 葬禹篇』 下 제 2 장 참조 . 6) 『左傳』, 潭公二十九年J, <介葛盧來朝, (以未見公, 故復來朝) 禮之, 加燕好. 介葛盧 聞牛鳴 曰 ; 「是生三儀 已(皆)用之矣 ; 其音云』 問而信之.>

아들은 사람도 있는데 동한(東漢) 시대 광한(/廣漢)의 양옹중(楊翁仲)이라 는 사람이 그러했댜 그는 새와 짐승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고 한댜 어느 날 그는 절름거리는 말을 타고 들판으로 나갔댜 그곳에는 마 침 또 다른 말 한 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는데 두 마리의 말은 밭울 가운 데에 두고 바라보며 서로 목을 길게 빼고 히힝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양 옹중은 자기의 마부에게 말했다 「이 말들이 서로 욕을 하고 있구나」 마부가물었다. r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 양옹중이 말했다 「저기 저 말은 우리 마차를 끄는 말더러 절름발이라고 욕을 하고 우리 말은 저기서 풀을 뜯는 말에게 애꾸눈이라고 욕하는구나」 마부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직접 그 말이 있는 곳으로 가서 보니 그 말은 정말로 애꾸눈이었다 .71

7) 『論衡』, 『實知篇J, <廣漢楊翁仲, 聽鳥獸之音, 乘塞馬之野. 田開有放妙馬, 相去鳴聲 相聞 翁仲謂其御曰 ; r1 皮放馬知此馬而 目 抄」 其御曰 汀何以知之?』 曰 ; 『篤此輯中馬 塞 ; 此馬亦驚之砂』 其御不信, 往視之, 目 堯妙焉.>

이 밖에도 삼국시대 위나라(魏國)의 관로(管路) 역시 새들의 말을 알아 들었다고 한댜 그는 까치가 와서 급한 목소리로 알려 주는 것을 듣고 마 을의 동북쪽에서 어떤 악독한 여인이 자신의 남편을 살해하였다는 것을 알았댜 8) 그리고 당나라 때의 백구년(白龜年)은 <하늘의 온갖 새들의 말, 땅위의 모든 짐승의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고 하는데, 참새가 우는 것을 듣고 성의 서쪽에 있는 양식 창고의 좁쌀이 땅바닥에 흩어져 있는 것을 알았고 또 마굿간의 말이 우는 소리를 듣고서 여물통의 먹이가 너무 뜨겁 다는 것도 알아냈다 .91 이러한 예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8) 『三國志』, r 魏志 • 管格傳」, <格至安德令劉長仁家, 有朋來鳴屋閣上, 鳴聲莊急. 格 曰 ; r 朋鳴言東北有婦, 詐殺夫, 告者至矣』 到時果有東北但民來告隣婦手殺其夫.> 9) 宋 曾捷 『類說』 卷 52, 引 『翰府名談』, <白龜年得李白遺홀, 解辯九天廊語, 九地獸 言 後游混州, 太守知其有異才, 召而詞之. 庭下有二雀, 峨떄 P 而過. 太守曰 ; r 彼何言

也?」 曰 ; 『城西民家有餘栗在地, 相呼共食之J 使人驗之, 果然. 又見廊馬仰首而!!'Ji, 問 El ; r 此又何言?』 曰 ; 『權中料熱不可食』>

돼지의 말, 뱀의 말, 호랑이의 말, 심지어는 개미의 말까지 알아들을 수 있 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설명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한다. 어쨌든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가 <새나 짐승들이 말을 할 수 있는> 가 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새나 짐승, 그리고 인간은 모두가 똑 같이 발성 기관을 이용해 간단한 목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의 시싱이나 감 정을 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그것이 불가능한 이야기만은 아닐 것 이기 때문이댜 그건 그렇고 이제 공야장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그가 위나라에 서 노나라로 돌아올 때 노나라 변경의 이계(二界)라는 곳을 지나가게 되 었댜 그곳에서 그는 숲 속의 새들이 시끄럽게 젝젝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댜 공야장이 가만히 귀기울여 들어 보니 새들은 서로 이렇게 떠들고 있었다. 「청계(淸溪)에 가서 죽은 사람 고기를 먹자 . 청계에 가서 죽은 사람 고 기를 먹자구!」 공야장은 슬며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여전히 계속해서 자기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어떤 노파가 큰길 가에 앉아 울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댜 그녀는 무척이나 서럽게 울고 있었는데 공야장이 그녀에게 왜 우 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 아들이 그저께 집을 떠났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답니다. 분 명히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틀림없어요. 그런데 시체조차 찾을 수 없다니, 아이고, 하느님!」 그 말을 듣고 공야장이 말했다. r 서두르지 마시고 잘 들으세요. 제가 조금 전에 새들이 숲 속에서 <청 계에 죽은 사람 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하는 소리를 들었답니다. 직접 한

번 가서 보세요. 혹시 할머니 아드님이 험한 일을 당해 그리 되었는지도 모르니까요」 여? 당신은 누구신데 새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r 저는 공야장이라고 합니다, 할머니. 제게는 그런 능력이 조금 있지요」 그러자 할머니는 < 공야장 > 이라는 이름을 가슴속에 새겨두고 청계로 가 보았다. 그곳에 있는 시체는 정말로 자기 아들이 분명했다 . 할머니는 통곡 울 하면서 마을의 관청을 찾아갔다. 관청의 관리가 할머니에게 물었다. 「당신 아들이 청계에서 죽었다는 것을 어찌 알았소?」 「길에서 만난 공야장이라는 사람이 알려 주었습니다」 r 그것 참 이상한 일이군 ……」 관리가 낮은 목소리로 옹얼거렸다. r 공야장이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면 어찌 그리 정확하게 알 수가 있 을까」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공야장을 잡아오게 하여 현(縣)으로 보내니 공야 장은 현 관아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의 관리가 공야장에게 물었다. r 당신 왜 사람을 죽였소?」 공야장이 설명했다.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소. 나는 그저 새들의 말을 조금 알아들을 수 있을 뿐이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숲 속에서 새들이 <청계에 죽은 사람 고기를 먹으 러 가자> 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된 경위를 하나하나 낱낱이 , 상세하 게 설명하였다 감옥의 관리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이렇게 말 하였다. r 그럼 이렇게 해보도록 합시다 . 우선 당분간 감옥에 들어가 있으시오. 당신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겠소. 만일 당신이 정말로 새들의 말 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당신은 무죄 방면될 것이오. 그러나 알지도 못하

면서 안다고 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바로 살인을 했다고 하는 증거가 되는 것이니 죄값을 달게 받아야 할 것이오.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이니』 공야장은 감옥에 들어가 시험의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 . 그렇게 60 여 일 울 갇혀 있었지만 감옥 근처에는 새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 문의 철창에 갑자기 참새 몇 마리가 날아왔다. 거 기 앉아서 끊임없이 젝젝거리며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 공야장은 그 모습 을 바라보며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 마음속에 뭔 가 크게 짚이는 것이 있는 모습이었다. 간수는 그 모습을 보고 감옥의 관리에게 찾아가 알렸다 . 관리는 공야장 을 불러다가물었다 「참새들이 뭐라고 했기에 자네가 미소를 지었는가?J 공야장이 대답했다. r 제가 참새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니 그 내용이 이러했습니다 . 찍찍젝젝 하얀 연꽃 피어 있는 물가에 마차가 뒤집혔네 기장과 좁쌀이 쏟아졌지 마차 바퀴는 진흙 속에 빠졌고 소의 뿔이 부러졌다네 그 곡식들을 다 거둬가지 못했으니 우리 가서 신나게 먹어 보세 감옥의 관리는 믿을 수가 없었지만 일단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 다. 그랬더니 모든 것이 공야장이 말한 그대로였다. 그때서야 관리는 공야 장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석방하였다 .10) 10) 黃 個 『論語義疏』 引 『 論 釋 』 , <公治長 自 衛返魯, 1 f至 二 界上, 聞 鳥 相呼 ; 『往淸溪食

死人肉』 須央見一老姬當道而突. 治長問之, 婚曰 ; r 兒前 日 出行, 于今不反, 當是死亡, 不知所在』 治長曰 ; r 向聞鳥相呼, 往淸溪食肉, 恐是姬兒也」 姬往 看 , 卽得其兒也, 已 死. 姬卽告村司, 村司問婚 ; r 從何得知之』 姬曰 ; 「見治長道如此』 村官曰 ; r 治長不殺 人, 緣何知之」 因錄治長付獄. 主問治長何以殺人, 治長曰 ; r 解鳥語, 不殺人也』 主曰 ; 潭試之, 若必解鳥語, 便相放也 ; 若不解, 當令償死J 駐治長在獄中六十 B . 卒 日 , 有 雀子緣獄桐上, 相呼噴噴 •. 治長含笑 吏啓主 ; r 治長笑雀語, 是 似解鳥語』 主果問治 長 ; r 雀何所道而笑之?』 治長曰 汀雀鳴噴噴;, 白蓮水邊, 有 車 翻復委栗,杜牛折角, 收敏不盡 相呼往暖」 獄主未信 遣人往看, 果如其言, 於是得放 . >

공야장이 새의 말을 알아들은 것에 관한 전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 개가 모두 공야장이 감옥에 갇히게 된 내용이 중추를 이루고 무죄 석방되 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 어떤 이야기의 첫머리 부분을 보면 공야장이 온 갖 새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을 때 올빼미 한 마리가 그에게 와서 보 고를 하였다고 한댜 r 야장, 야장, 남쪽에 커다란 노루가 죽어 있는데 당신이 그 고기를 먹어 요 내장은 내가 먹을 테니」 공야장이 가보니 정말 노루 한 마리가 죽어 있어 그것을 끌고 집으로 와서 내장까지 모조리 먹어치우고 올빼미에게는 하나도 주지 않았다. 올 빼미는 그 일로 인해 공야장에게 원한울 품게 되었다. 어느 날 올빼미는 지난번과 똑같이 공야장에게 와서 일러주었다. 이번에도 공야장은 급히 달려갔댜 그런데 멀리서 보니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서 무엇인가를 둘 러싸고 싸우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이번에도 그것이 죽은 노루이며 사람들이 그것을 둘러싸고 서로 가지려고 싸~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급히 달려가며 소리쳤다 . r 싸우지 마시오, 싸우지 말아요. 그놈은 내가 때려잡은 것이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것은 노루가 아니라 죽은 시체였다. 사 람들은 너 잘 만났다는 식으로 달려들어 공야장을 잡았는데, 공야장으로 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공야장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11) 이후의 사건 전개는 앞에 소개한 이야기들과 대동소이하

11) 『古今圖書集成』, r 貧蟲典』 卷 40, 引 『靑州府志』, <世傳治長能解百寫語 . 云, 蓋當 日

有一鷄來報治長, 曰 ; r 治長, 治長, 南有死猿, 子食其肉, 我食其腸』 長果往得猿. 乃無 意個臨腸也, 邸怨之. 居無何, 鷄又來報如前. 長復往, 望見數人園一物而晴. 長以爲死 猿, 恐人奪之, 造呼曰 ; 『我擊死者』 至, 乃一死人, 非猿也 . 衆遂速長見邑宰 …….>

다. 물론 이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 보면 공자의 수제자인 공야장의 귀여 운 이미지를 훼손시키는 점도 있기는 하다. 그에 비하면 이제 서술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좀더 합리적이고 재미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난했던 공야장은 집에서 놀며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참새가 날아와 공야장의 집을 맴돌며 지저귀는 것이었다. 공야장, 공야장 남산에 호랑이가 버린 양이 있어요 당신이 고기를 먹고 저는 내장을 먹을게요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가서 갖고 오세요 공야장이 참새의 말을 듣고 남산으로 가보니 과연 죽은 양이 한 마리 있었다. 공야장은 그것을 끌고 집으로 돌아와 새와 니누어 먹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양을 잃어버린 사람이 공야장의 집으로 찾아왔다. 그 사람은 공야장의 집 벽에 걸린 양의 뿔 한쌍을 보고 그것이 바로 자기가 잃어버린 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야장이 자기 양을 훔쳐갔다고 여 겨 노나라 왕에게 고발을 했다. 노나라 왕은 공야장에게 사람을 보내어 물어 보았지만 공야장은 참새의 말을 들었을 따름이라고 설명했다. 그러 나 노나라 왕은 사람이 참새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 다. 그리고 분명히 공야장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여겨 그를 감옥에 가두게 하였다. 공야장이 감옥에 갇히게 된 일울 스승인 공자가 알게 되었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인 공야장에게 그런 기이한 재능이 있다~ 것을 알았고 또 사 람됨이 청렴결백하기 떄분에 도둑질 따위의 염치없는 짓에는 가담하지 않 았으리라는 것을 믿었다 . 그래서 노나라 왕을 찾아가 자신의 제자를 석방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댜 그러나 왕은 죄증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를 석 방해 줄 수 없다고 하였고 , 따라서 공야장은 억울하게 그냥 계속 갇혀 있 을 수밖에 없었다 공자는 하는 수 없이 돌아가 이렇게 탄식을 하였댜 r 그 아이는 밧줄로 묶인 몸이 되어 있지만 그런 고통은 그 아이가 겪어 야 할 것이 아닌데 ……」 공야장이 감옥에 갇힌 뒤 제법 시간이 흐른 뒤였다 . 어느 날 갑자기 참 새 한 마리가 또 날아오더니 감옥의 창문 밖에서 날아다니며 이렇게 지저 귀는 것이었댜 공야장 , 공야장 제나라 사람들이 우리 나리를 · 침공하려 하고 있어요 기수( i斤 水) 가, 역산(仙 澤 山) 기슭이에요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가서 막아야 해요 공야장은 참새가 한 말을 옥리( 獄 吏)에게 전했고 옥리는 그 말을 노나 라 왕에게 다시 전했다. 노나라 왕은 옥리의 말을 듣고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지만 사안이 중요한 것인지라 미리 준비를 해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일단 공야장의 말을 믿기로 하고 정찰대원 몇 명을 보내어 국경지대로 가 서 상황을 살펴보게 하였댜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정찰대원이 돌아와 보 고하기를 제나라 군대가 국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노나라 왕 은 그때서야 당황하여 급히 군대를 보내어 맞서 싸우게 하였다. 어쨌거나 미리 준바를 좀 해두었던 데다가 병사들이 적을 맞아 용감하게 싸우니 크 게 승리를 거두었고 제나라 군사들을 쫓아보내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노나라 왕은 그때서야 공야장이 정말로 새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를 감옥에 가둔 일이 실로 그를 억울하게 만든 것이었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석방했다 . 또한 논공행상을 할 때에도 이웃나라 의 침략을 물리친 이번 전쟁에서 제일 가는 공신은 바로 공야장이라고 하 여 그에게 대부(大夫)의 관직을 내리려 하였다. 그러나 본래 겸손했던 공

야장은 새들의 말을 좀 알아들은 것을 가지고 벼슬을 한다는 것은 부끄러 운 일이라며 한사코 사양하였다 그리고 일반 평민의 신분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댜 U) 공자는 공야장의 그런 재주와 덕을 높이 평가하고 자신의 딸 을 그에게 시집보내었다 1 3)

12) 『擇史』 卷 95, 引 『留靑 파냐, <公治長貧而開居 ., 無以給食, 其雀飛鳴其舍, 呼之曰 ; r 公治 長, 公治長, 南山有個虎院羊, 爾座肉,我食腸, 當函取之勿(方德』 子張如其言, 往取食之. 及亡羊者造之, 得其角, 乃以爲倫, 設之魯君. 魯君不信,店語, 速系之獄. 孔 子素知之, 爲之白於魯君, 亦不解也. 於是暎曰 ; r 難在綴總之中, 非其罪也』 未幾, 子 張在獄舍, 雀復飛鳴其上, 呼之 B ; r 公治長, 公治長, 齊人出師侵我젤, 祈水上, 譯山 芳 當函御之勿 1方 德』 子張介獄吏 白之魯君, 魯君亦勿信也. 姑如其 言, 往迷之, 則齊 師果將及也. 急發兵應敵, 遂獲大勝. 因釋治長, 厚賜之. 欲爵爲大夫, 辭不受, 蓋恥以 皮語以得祿也.> 13) 『論語』, 『公治長』, <子謂公治長, 可妻也, 難在螺組之中, 非其罪也 ; 以其子妻之.>

공자가 자신의 제자를 관찰하고 평가를 내리는 것은 언제나 정확했다 . 그러나 가끔 그렇지 못할 때도 있었는데 재여(宰予)와 담대자우(滋臺子 羽)에 대해서 그러했다. ® 담대자우는 담대멸명(游 臺滅明) 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진정한 용사이며 또한 군자였다 그러나 생김새가 무척 추해서 공자의 문하에 처음 들어왔 울 때에는 공자조차도 별로 그를 중시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중에야 그 의 위인됨과 품성을 알고서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생김새로 사람을 평가하다가 자우에게 실수했다住섀兒取人, 失之子羽)」 14, 담대자우는 못생겼을 뿐 아니라 손바닥도 이상하게 생겼다 . 손바닥이 갈라져 있었던 것이댜 1 51 그러나 그런 기형적인 손을 가진 자우에게는 보 통 사람을 뛰어넘는 담력이 있었다. 한번은 담대자우가 천금의 가치를 지닌 귀한 백옥(白壁)을 가지고 연진 (延津 지금의 河南省 延澤縣 북쪽)에서 황하를 건너가게 되었다. 배가 강 의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파도가 일기 시작했는데 점점 거칠어지

14) 『史記』, 『仲尼弟子列傳」 참조. 15) 『太平御笠』 卷'Jl O, 引 『論語摘輔象』, <沿臺滅明岐掌.>

는 것이었다 그것은 황하의 수신인 하백(河 白 )이 담대자우가 귀한 백옥을 가지고 황 하를 건널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파도의 신인 양후( 陽侯 )와 교룡( 岐龍 ) 두 마리를 시켜 거친 파도를 일으키게 한 것이었다 . 그렇게 해서 배를 뒤 집어엎고 백옥을 빼앗으려는 것이었다. 양후는 본래 고대의 제후였는데 죄를 짓고 강에 빠져 자살을 하였다. 죽은 뒤에 파도의 신이 되어 1 61 하백의 부하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 담대자 우의 백옥을 빼앗으라는 명령을 받고서, 큰 파도를 일으키고 또 교룡 두 마리를 데리고서 자우의 배를 뒤집으려는 것이었다 .

16) 『 漢記 , 『揚雄傳』 注 , <應낀J B ; r 陽侯, 古之諸侯也 , 有罪, 自 投江 , 其神爲大波」>

이때 비바람까지 몰아쳐 온 세상이 어두컴컴했고 거대한 파도는 하늘까 지 닿을 듯 넘실거렸다. 그리고 그 파도 속에서 두 마리의 교룡이 배의 가 장자리를 휘감으면서 꼬리를 휘두르고 이빨을 드러낸 채 발톱을 세우니 그야말로 공포스런 상황이었다 . 배는 넘실거리는 파도에 휩쓸려 금방이라 도 가라앉을 듯하니 배에 탄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창백하게 변했다. 그 러나 담대자우만은 이것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를 알아차렸다. 그래서 뱃 머리에 우뚝 서서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 r 계속해서 이런 비열한 방법을 사용할 것이냐 . 당장 집어치워라! 누구 든지 나의 이 백옥을 가지고 싶거든 정당한 방법으로 부탁해라. 그러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무력으로 위협하고 빼앗으려 한다면 절대로 줄 수 없다!」 말을 끝낸 그는 왼손으로 백옥을 받쳐들고 오른손으로는 허리춤에서 보 검을 꺼내어 마치 춤을 추듯이 이리저리 휘두르며 교룡과 싸움을 벌였다. 순식간에 자우는 교룡 두 마리를 모두 베어 강물에 빠뜨려 버렸고 선홍색 의 피가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 . 그러자 양후는 갑자기 힘을 잃고서 자기 능력으로는 그를 해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파도를 거두어 자취 도 없이 숨어버렸다. 마침내 담대자우는 안전하게 황하를 건널 수 있었다 .

배가 강을 다 건넌 후 담대자우는 손에 들고 있던 그 백옥을 강에 집어 던지며 경멸스러운 듯이 말했다 『가져라!」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댜 그 백옥은 강물에서 다시 튀어나와 담대자우 의 손으로 되돌아왔댜 담대자우가 세 번을 집어던졌지만 모두 마찬가지였 댜 아마도 하백으로서는 승리자의 손에서 백옥을 빼앗을 염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담대자우는 하백이 백옥을 받으려 하지 않자 그것을 바닷가 바윗돌에 던져 깨뜨리고는 득의양양한 기세로 떠나가 버렸다. 그것은 자 기가 결코 백옥 한 덩어리를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라 백옥보다 더 소중한 그 무엇인가를 위해 싸운 것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함이었다 . 17 1

17) 『博物志』, r 異聞』, <沿 퓰 子羽渡河, 質千金之壁於河. 河伯欲之, 至陽侯波起, 兩校奭 船 子羽左接盟 右操劍, 擊般皆死 . 槪渡, 三投鹽於 r iiJ, 河伯躍而歸之, 子羽殿而去.>

담대자우가 교룡을 벤 전설에 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앞의 것과는 그 내용이 약간 다르다 @ 담대자우가 오나라의 간수(干遂)에서 유명한 보검을 얻어 장강(長江)을 건널 때였다고 한다 양후가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고 교룡 두 마리에게 배의 양쪽을 휘감게 해 그 보검을 빼앗으려 하였다 . 담대자우는 뱃사공들 에게 물었다. r 자네들 말해 보게. 교룡 두 마리가 배를 휘감고 있으면 배와 교룡 모 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가?」 그러자 사공들이 대답했다. r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러자 담대자우는 옷을 풀어헤치고 보검을 뽑으며 말했다. r 나의 이 몸뚱이를 강물 속의 썩은 시체라고 치자. 생명을 보존하기 위 해 보검을 넘겨줄 수는 없는 일이로다」 ® 그러면서 그는 강물로 뛰어들었다 . 그리고 교룡들과 싸워 그것들을 베 어 없앤 후 다시 배 위로 뛰어 오르니 배 안에 탔던 사람들은 모두 목숨

을 부지할 수 있었댜 1 8)

18) 『呂氏春秋J, r 知分篇」, <荊有次非者, 得寶劍於干遂. 遠反, 涉 江, 至於中流. 有兩校 奭燒其船 次非曰 ; 『子 常見有兩校腕船 , 能兩活者平?』 船人曰 ; r 未之見 也」 次非接 稽秩衣, 拔寶劍曰 ; r 此江中之腐肉朽骨也, 棄劍以全已, 余矣愛焉?」 於是社江刺校, 殺之而復上船, 舟中之人皆得活. 荊王聞之, 仕之執圭. 孔子聞之曰 ; r 夫善哉, 不以腐 肉朽骨而棄劍者, 其次非之謂平!』 이 일에 관해서는 『 淮南子 』, 『道應篇』에도 기록되 어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비슷하다. 이것은 담대자우 전설과 같은 종류의 이야기로 공 자와 동시 대의 것으로 본 것은 아마 담대자우 전설의 분화가 아닌가 해서 이 다 . 그래서 그 내용을 담대자우 전설에 연결시켰다.

담대자우가 공자의 문하에서 공부를 할 때 일시적으로 공자의 푸대접을 받기는 했지만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오히려 더 노력해서 학문과 덕행 이 나날이 높아갔다 후에 남방을 떠돌아다니며 공부를 할 때 자신의 제 자들을 거느렸는데 그를 따르는 제자가 무려 삼백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 다 헬 더구나 각국의 제후들까지도 그의 유명한 이름을 들었다고 하니 그 것이야말로 공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던 일이었댜 )9 1@

19) 『史記』, 『仲尼弟子列傳」, <涼臺滅明, 字子羽, 狀院莊惡, 欲 事 孔子, 孔子以爲材薄. 槪已受業 而退修行, 行不(必?)由經, 非公 事, 不見卿大夫. 南游至江, 從弟子三百人, 設取予去就 名施平諸侯.>

한편 재여는 자공과 더불어 공문사과(孔門四科)의 언어과( 言語科 )에 속 해 있었는데 20) 특출난 행동도 없고 하여 자공에 미치지 못하였다. 설사 그 의 말이 빼어났다고는 해도 행동이 말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후에 공자는 자신을 비평하며 이렇게 말했다

20) 『論語』, r 先進』, <言語 ; 宰我, 子貢.>

멜로써 사람을 보다가 재여를 잃었다(以 言取人 , 失之宰予)」 21) ® 재여는 대낮에 낮잠을 자다가 공자에게 혼난 적도 있지만 여기서 그 이 야기는 하지 않기로 한다 22)@ 다만 공자가 제자들을 데리고 마차를 타고 서 은(殷) 주왕(討王)의 도성이었던 조가(朝歌)를 지날 때의 이야기를 한 번 서술해 보고자 한다 . 조가라는 고성(古城)은 그 옛날 주임금의 황음무도한 생활태도 때문에

21) 『史記 』 , r 仲尼弟子列傳」 참조. 22) 『論語 』 , r 公治長」, <宰予꼽發, 子曰 ; r 朽木不可離也, 萊土之塔不可汚也. >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곳이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만사를 제쳐놓고 그저 노래부르고 춤추며 놀기에 정신이 빠져 있었는데 바로 그런 연유로 해서 망국의 비참한 운명을 자초했었다. 공자의 마차 일행이 그곳을 지나게 되었을 때 안연은 말에 채찍질을 하며 마차를 빨리 달리게 하였다 .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고서 이 흉악 한 지방의 모습이 자기들의 눈을 더럽히지 않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재여만은 마차에 앉아 얼굴을 가리기는커녕 그곳의 모든 것을 재미있게 바라다보는 것이었댜 너무 재미가 있어서 멍청해질 지경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성질 급한 자로를 화나게 만들었고, 결국 자로는 발로 재여를 걷 어차 마차에서 떨어지게 만들었다. 재여는 마차에서 떨어져 정신이 없었 다. 그는 그저 아픈 엉덩이를 매만지며 땅바닥에 엉거주춤 앉아, 먼지를 휘날리며 멀리 사라져가는 마차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 다 . 23 ) 이런 일로 보아도 공자가 재여에 대해 탄식한 것이 괜한 것이 아니 었음을 알 수 있다. 23) 『水經注』, 「洪水』, 引 『論語考比識』, <邑名朝歌, 顔淵不舍, 七十子捨 目 , 宰予獨顧, 由盛整車 . >

제 10 장 앞의 제 6 장에서 우리는 공자가 노담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살펴보았 다 . 이제 여기서는 노담(老!円)과 묵적( 墨祖 )에 관한 신화전설을 서술해 보 기로한댜 공자와 노담은 <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 道不同不相爲謀)> 라고 했듯이 한 사람은 유사(流 沙) 로 떠나고 또 한 사람은 왕의 조정으로 들어갔댜 그것과 마찬가지로 노담과 묵적 역시 서로 대비되는 인물들이 다. 노담이 세상일을 버리고 벗어났던 데 반해 묵적은 적극적으로 세상일 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서로 완전하게 다른 두 인물이지만 편폭(篇 幅) 관계로 인하여 같은 장 안에서 함께 다루어 그들이 선명한 대조를 이 루고 있음을 보이고자 한댜 노담은 성이 이(李)이며 이름은 이(耳)이다 일반적으로 노자(老 子 )라고 불리며 초나라 고현(苦縣) 여향(岡鄕), 혹은 뢰향(源鄕 지금의 河南省 鹿 邑縣 동쪽) 사람이다.” 전설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그를 72 년 간이나 임 신하고 있었는데 태어날 때 어머니 왼쪽 겨드랑이 밑에서 나왔다고 한다 .G) 1) 『史記』, r 老莊申韓列傳』, <老子者, 楚苦縣腐鄕 曲仁里人也 , 姓李氏, 名耳 . > 正義 , <腦音傾 ; 『晉太康地記』 云 ; r 苦縣城東有湘鄕祠 , 老子所生地也』>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머리가 백발이었고 하얀 수염이 나있는 애늙은이였 댜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늙은 아이(老子)>라고 불렀다고 한댜 또 다 른 전설에 의하면 노자의 어머니가 오얏나무(李) 아래에서 노자를 낳았는 데 낳자마자 말을 할 줄 알아서 오얏나무를 가리키며 「이 나무 이름으로 저의 성을 삼아 주세요」 라고 했다고 한다 . 그래서 그의 성이 이(李)가 되었다고 한다 2) @

2) 『神仙傳』 卷 1, <(老子) 母懷之七十二年乃生, 生而白首, 故謂之老子. 或云, 老子之 母適李樹下而生老子, 生而能言, 指李樹曰 ; 『以此爲我姓」>

그러면 그의 이름은 어째서 <이(耳)>, 혹은 <노담(老 I 円)>이 되었을까? 거기에도 서로 다른 전설이 전해진다. 노자의 귀에 귓바퀴가 없기 때문에 <담 (Il})> 이라고 했다는 것인데, <담>이란 바로 <귀가 늘어져 있고 귓바 퀴가 없다(耳漫無輪)>는 뜻이다 .3) 또다른 전설에 의하면 노자의 귀는 자 그마치 일곱 치나 되게 길었다고 한다? 귀가 어깨에 닿도록 길게 내려와 있다는 것은 아주 길하고 복이 많은 관상이다. 어떤 전설에 의하면 귀가 일곱 자나 되었다고 하기도 하는데 5) 그것은 정말 놀랄 만큼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신화 속에 나오는 대이국(大耳國), 죽 귀 큰 사람들이 살았 다고 하는 그 나라 사람들과 비교해 봐도 조금도 뒤지지 않을 만큼 커다 란 것이니 그야말로 자기의 귀를 이불 겸 요로 써도 되었을 것이다.° 이렇 게 귀가 크다는 특징이 있었기 때문에 <이(耳)>라고 불렸다는 이야기인 데 이런 것들은 그야말로 호사가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상상해서 갖다붙인 이야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노자라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의 이름을 신화적으로 해석해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3) 『史記』, r 老莊申韓列傳」 正義 ; <期, 耳沒無輪也 . > 4) 『太平御빴』 卷 %6, 引 『抱朴子』, <老子耳長七寸.> 5) 唐 李亢 『獨異志』 卷上, <老君耳長七尺.> 6) 唐 李亢 『獨異志』 卷上, <『山海經』有大耳國. 其人度, 常以一耳爲席, 一耳爲숯.>

그러나 사람들은 보통 노자를 신선으로 보아왔다. 공자가 노자를 만났 을 때 노자의 나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설이 전해진다. 어떤 사람 은 그 당시 노자가 이미 160 여 세였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이미 200 세가

넘 었다고도 한댜 71 더욱 과장해서 말하는 것을 보면 노자는 원래 삼황( :::: 皇) 시대의 사람으로 8) 공자가 노자를 만났을 때 노자의 나이는 이미 3 천 세가 넘었다고도 한다 그야말로 신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신선으로서의 노자에 관해서는 온갖 신기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진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면서 자기의 발자국도 지워버리는 재주 가 있었다고도 하고 91 하얀 사슴을 타고 어머니의 자궁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고 한다 .IOI 또 그의 고향인 뢰향에는 후대 사람들이 그를 위해 지어 준 사당과 아홉 개의 우물이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중 한 군데의 우 물에서 물을 길으면 다른 여덟 군데의 물도 따라서 움직였다고 한다.JI) 그 러나 이런 이야기들보다는 다음에 서술하는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다.

7) 『史記』, r 老莊申韓列傳J, < (老子) 與孔子同時 ; 蓋老子百有六十餘歲, 或言二百餘 世 .> 8) 『漢唐地理害鉛 輯, 顧野王 『輿地志,JJ, <老子者, 道君也, 三皇之時, 乘白鹿下托於李 母.> 9) 『玉函山房輯俠엽』 輯 晉 楊泉 『太元經』, <老子行則滅跡, 立則隱形 . > 10) 『古小說釣沈』 輯 『小說』, <老子始 下生, 乘白鹿入母胎中.> 11) 『太平御覽』 卷 189 , 引 『湘鄕記』, <老子廟中有九井, 淡一井餘井水井動.>

옛날에 부선생 (I 專先 生 )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 선의 도를 닦는 것을 좋아하여 초산(魚山, 지금의 江蘇省 鎭江市) 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 은거하며 열심히 수련을 하였다 . 그러나 7 년을 그렇게 수 련하였지만 여전히 신선의 도를 깨우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 기 이노군(李老君)이 나타나 그에게 나무로 된 송곳을 주면서 그것을 다 섯 자 두께의 돌판에 꿰어 보라고 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 「네가 이 돌판을 꿰뚫을 수 있다면 네가 하고 있는 일이 모두 원만히 끝나 신선의 도를 깨우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옛날에 <절구공이를 숫돌에 갈아 가느다란 바늘로 만들 수 있듯이, 오래도록 공력을 들이면 일은 자연히 이루어진다(鐵杓 磨線針, 功久自然成)>라는 말도 있기는 했지 만 지금 이노군이 해보라고 하는 것은 그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려운 일이

었댜 <절구공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드는> 이야기는 이노군이 해보라고 하는 이야기와 서로 비슷한 전설로 모두 고대 사천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선 그 이야기부터 해보기로 하자. 옛날 진(晉)나라 때에 두자명(였子明)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천산 (開山)으로 들어가 도를 닦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도를 깨우치지 못해 실 의에 빠져서 짐을 꾸려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그런데 다리 밑울 지나 가다가 어느 여인이 쇠로 만들어진 절구공이를 냇가의 바윗돌에 열심히 갈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두자명은 기이한 생각이 들어 그녀에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내가 앞에서 인용한 옛말을 그대로 하였댜 두자명은 그 말을 듣고 감동하여 집으로 돌아가려던 생각을 버리 고 다시 천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심기일전하여 열심히 도를 닦아 마침 내는 백일승천하여 선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천산은 두천산(寶關山, 지금의 四川省 江由縣 동북쪽 彰明縣 경계에 있음)이라고도 불리운다. 그 리고 그가 지나갔던 그 다리는 선녀교(仙女橋)라고 하는데, 그것은 선녀가 쇠로 된 절구공이를 갈고 있었던 것이 일부러 그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었 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121 이것이 절구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것에 관한 첫번째 이야기이다.

12) 『古今岡콥菓成』, r 神異傳』 卷 251, 引 『四川總志』, <賣子明曲江人, 爲彰明主簿, 後 棄官, 隱於質平. 未幾 至園山修道 , 抵仙女橋, 見一女人磨針, 因問之. 答曰 ; r 鐵祚磨 秘針, 功久 自 然成」 因感悟, 復歸此山, 治神投性三載, 白 日 升天. 今塾像具存.>

그 다음으로는 당나라 때의 이백(李白)에 얽힌 전설이 있다. 이백이 팽 산현(彭山縣) 상이산(象耳山)에서 공부를 할 때 학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산 기슭의 냇가를 지나가다가 어떤 할머니가 냇가에 앉아 쇠로 된 절구공 이를 갈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할머니에게 그것을 갈아서 어 디에 쓸 거냐고 물었고 할머니는 <바늘을 만들려고 하지>라고 대답했다. 무척이나 총명했던 이백은 그 말을 듣고 감동하여 다시 산으로 들어가 열 심히 공부를 해서 마침내 학업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 시냇

물은 나중에 <바늘을 갈던 냇가( 磨 針溪)>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절 구공이를 갈던 할머니의 성이 무(武)씨였기 때문에 시냇가 옆에 솟아 있 는 절벽을 <무씨의 절벽(武氏屋)>이라고 부르게 되었댜 1 .” 그 이야기 속 의 무씨 할머니는 아마도 선인이 아니었을까?

13) 『蜀中名勝記』 卷 12, <(彭山)縣東北二十五里有磨針溪, 在象耳山下. 相傳李白讀홉 山中, 學未成, 棄去. 適過是溪, 逢老姬方磨鐵¥F, 問何爲, 曰 ; 『欲作針耳』 白感其言, 遂還卒業. 姬 自 言武姓. 傍有武氏崔.>

쇠로 된 절구공이를 바늘로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는 했 지만 열심히 하기만 하면 못할 일도 아니었다. 어쨌든 꾸준한 자세로 계 속 해나간다면 언젠가는 수를 놓을 만한 가느다란 비 바늘로 만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무 송곳으로 다섯 자나 되는 돌판을 뚫는다는 것은 그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 간단한 문 제가 아니었다. 돌이 나무보다 단단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 물며 다섯 자나 되는 두께의 돌임에랴! 나무 송곳은 길어봐야 한 자 정도 길이밖에는 안 되었다(두세 자가 되면 너무 길어서 걸리적거렸으니까). 그러 니 그렇게 짧고 여린 물건을 가지고 두꺼운 데다가 단단하기까지 한 물체 를 뚫으라니, 설사 뚫고 지나간다고 하더라도 그 나무 송곳이 남아날 수 있을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절구공이로 바늘을 만들 듯이 할 수는 없 었다. 그렇게 맹렬하게 무조건 뚫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곰곰히 생각을 하여야 했다. 조금씩 조금씩 꿰뚫고 지나가되 송곳은 닳지 않도록 하여야 했다. 그것은 참으로 힘든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다. 부선생은 노군이 준 선물을 가지고 돌 위로 가서 앉아 온몸의 정신을 눈과 손목, 어깨에 집중시키고서 조심조심 천천히 꿰뚫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지혜를 최대한 발휘하여 연구하였고 가장 세심한 손길로 파고 다 듬었다. 이렇게 열심히 생각하고 노력하면서 무려 40 년 간을 계속하여 팠 다. 본래 힘이 세고 강하던 중년의 남자가 이제는 머리카락도 하얗고 수 염까지 허연 할아버지로 변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섯 자 두께의 돌판이 갑자기 뚫렸다. 노군이 준 그 나무 송곳으로 돌판을 뚫는데 성공한 것이

었다 그리고 나서도 그의 손안에는 누에콩만한 크기의 나무토막이 남아 있었고 마침내 그는 득도하여 신선이 될 수 있었다 .II )

14) 梁 陶弘徐 『眞浩』, 「甄命授」, <昔有傅先生者, 其少tJ-道, 入魚山石室,,,. 積七年, I(1i 太極老君脂之. 與之木鉛, 使察一石盤. 云 ; r 察此便當得道』 其人乃효夜’弁之, 積四 1- 年, 姑眞石麥 遂得神丹, 乃升太淸爲南嶽眞人.>

이 이야기는 어쩌면 그저 신기한 전설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혹은 『 장 자(i l L子 )』, r 양생주(義生 主 )」편에 나오는 <포정해우(包丁解牛)> @ 가 양생 에 관한 비유이듯이 일종의 비유일 수도 있다 . 그러나 어쨌든 이 이야기 는 상당히 의미가 있는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뭔가 깨달음을 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전설이다. 노자가 살아있던 동안의 전설은 많지가 않다. 다만 그가 공자를 만난 후 서쪽으로 함곡관(函谷關)을 지나갔다는 부분에 가서 그에 관한 신화전 설들이 나타나게 된다. 공자가 떠나간 후 고향에서 머물던 노자는 왕실이 쇠약해지고 제후들이 발호하여 각지에서 전쟁이 일어나 세상이 뒤숭숭해지는 것을 보고 자기로 서도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러나 보고 있자니 또한 골치가 아 프고 마음이 아프기도 해, 아예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 은거하기로 작정 을 하고 서역(西域)으로 가기로 했다 . 그래서 집안일들을 정리하고 푸른 소에게 수레를 끌게 하여 그 위에 앉아 간단한 짐보따리만을 지니고서 15) 서방의 함곡관을 향하여 천천히 떠났다.® 그때 함곡관을 지키던 관리는 관윤희(關尹喜)라고 하는 사람이었는데 평소에 신선의 도를 닦는 것을 좋아하여 조금은 <도에 대해 아는 바가 있 는(道根 )>1 6) 사람이었다. 노자가 아직 함곡관에 도착하지 않았을 때 그는 산술 계산을 하여보고 진인(眞人)이 곧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래서 그는 매일매일 함곡관에서 기(氣)를 관찰하고 있었는데 며칠 전부터

15) 『初學記』 卷 7, 引 『關令內傳』, <老子 度函谷觀, 乘靑牛薄板車.> 16) r 史記』, 「老莊申韓列傳』 染解 引 『列仙傳』(今本 『列仙傳』과는 문자의 차이가 있 음), <關令尹喜者, 周大夫也, 善 內學星宿, 服精華, 盤德行仁, 時人莫知.>

한 덩어리의 거대한 자기(紫 氣 )가 동쪽에서부터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 이 보였댜 그러던 어느 날 한낮, 푸른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느릿느릿 좁은 길을 걸어오고 있는 노자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노자는 머리를 혼들며 눈 을 반쯤 감은 것이 마치 졸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댜 1 71 관윤희는 그 모습 을 보는 순간, 귀가 길다란 이 노인이 바로 그가 오매불망 기다려온 이인 (異人)임을 알아겠다 그래서 얼른 함곡관의 관리들과 병정들을 이끌고서 노자를 따뜻하게 영접하였댜 그리고 억지로 그곳에 머물게 하여 노자는 그곳에서 며칠을 보내게 되었다 관윤희는 노자에게 함곡관의 풍경을 구 경시켜 주었고 그 나머지 시간에는 한보따리의 대나무 조각과 그것에 글 씨를 새기는 칼을 주고는 억지로 몇 편이나마 글을 써주기를 원했다. 그 것을 써서 자기에게 주고 난 후에 떠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졸라대니 노자는 할 수 없이 이십여 일 동안을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서 생각을 가 다듬으며 칼을 들고 대나무 조각에다가 부들부들 떨면서 글을 새겨가는 수밖에 없었다.

17) 『古小說釣沈』 輯, 『列異傳』, <老子西游 , 關令尹喜望見有紫氣浮關, 而老子果乘靑牛 而過.>

그렇게 하여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고 …… (道 可道, 非常道 ……)>라는 말을 비롯하여 5 천여 자를 써내려갔다. 상하 두 편으로 나뉜 그 책은 본래 이름이 없었으나 나중 사람들이 상편은 맨 앞 에 <도(道)>라는 글자가 있고 하편은 앞에 <덕(德)>이라는 글자가 있다 고 하여 『도덕경(道德經)』, 혹은 『노자(老子)』라고 불렀댜 1 8) 어쨌든 그렇 게 억지로 책을 완성하여 관윤희에게 전해 준 뒤 이삼 일을 그곳에 더 머 물렀다. 그리고 더 있다 가라고 하는 관윤희의 은근한 만류를 물리치고 다시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함곡관을 지나서 곤륜산(昆命山) 근처의 유 사(流沙)로 가 은거하였다

18) 『列仙傳』 卷上, <(老子)乃乘着牛去, 入大秦, 過西關, 關令尹喜待而迎之. 知眞人也, 强使著홉 作『道德經 』上 下二卷 .>

노자( 『 炎黃 』 )

그러면 관윤희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거기에는 두 가지의 다른 전 설이 전해지고 있다. 첫째는 그가 노자와 함께 함곡관을 떠나 유사로 갔다 는 것이고 1 91 둘째는 노자가 떠나면서 그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자네는 여기에서 도를 잘 닦고 있게. 그리고 일천 년이 지난 뒤 성도 (成都) 청양사(靑羊曲)로 와서 나를 찾게나」

19) 『列仙傳』 卷上, <(關令尹菩)後與老子供游流沙, 莫知其所終.>

그리하여 일천 년이 지난 뒤 관윤희는 정말로 성도 청양사로 가서 노자 룰 찾았다 노자는 푸른 양을 타고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와 관윤희를 법 술로 변화시켜 신선이 되게 해주었댜 201 노자가 내려와 관윤희를 데리고 갔던 그곳에 후대 사람들은 도관(道觀)을 세워 주고 그것을 <청양관(靑羊 競)>이라고 불렀다 . 2 ” 지금은 청양궁(靑羊宮)이라고 하는데 성도시 교외의 문화공원(文化公園)에 있다 . 청양궁의 삼청전( 三 淸殿) 좌우에는 청동으로 주조된 양이 한 쌍 서있는데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관광객들이 매만졌는 지 반짝반짝 빛이 날 정도이다.

20) 明 曹學佳 『蜀中名勝記』 卷 2, 引 『古今菓記』, <老子乘靑羊降, 其地有 豪 存 . > 21) 『太平御點 卷 191, 引 『蜀本紀』, <老子爲關令尹喜著 『道德經』 . 臨別, 曰 ; r 子行道 千 日 後, 於成都靑羊燁尋吾』 今爲靑羊親是也 . >

공자의 무덤 곁에 있는 나무들이 점점 자라나 아주 커다란 나무가 되었 을 무렵, 노나라 어느 지방에 공자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구해야겠다는 정 신을 지녔으면서 공자보다 더 적극적인 사고를 하였고 더 힘이 있었던 묵 자(墨子)리는 인물이 태어났다. 묵자는 성이 묵(墨)이고 이름이 적(祖)이 었다 그는 같은 고향 사람이었던 공수반(公輸班), 즉 노반(魯班)과 같은 수공업자 출신이었다.끄)@ 그는 여러 가지 희한한 기구들을 만들 줄 알았 는데 노반처럼 니무로 새를 깎아 하늘로 날려보냈다. 그것이 사흘 동안이 나 떨어지지 않고 날아다녔다고 하니 Zll 그의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었는지 알만하다.

22) 任繼危 『墨子』(上海人民出版社 1957 年版) 17 쪽 참조. 23) 『淮南子』, r 齊俗篇」, <魯般墨子, 以木爲焉而飛之, 三 日 不染.>

그러나 그는 이렇게 수공예품을 만드는 기술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었 댜 <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못살게 하고 인구가 많은 나라가 힘으로 작은 나라를 부수는> 전국시대에, 무고한 백성들이 숱한 전쟁으로 인하여 고 통받는 것을 보고는 그런 침략에 반대하여 <공격하지 말 것(非攻)>을 주 장하였다 그리고 성을 지킬 수 있는 여러 가지 기구들을 만들어서 작은 나라들이 큰 나라의 침략에 대응할 수 있게 하였다. @ 그에게는 또한 공자 와 마찬가지로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공자의 제자들이 스승을 존경했던 것보다 묵자의 제자들은 더 그러했댜 묵자가 제자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 리기만 하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댜 ® 불 속에라도 뛰어들라면 뛰어들 정도로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스승의 말을 따랐다.의 )

24) 『淮南子 .! , r 泰族篇』, <墨子服役百八十人, 皆可使社火踏刃, 死不旋鍾.>

금골리(葛滑脈) ® 는 묵자의 수제자였다. 그는 묵자의 모든 것을 전수받 은 애제자였는데 처음에는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에게 가서 공부를 하 였다가 나중에 묵자를 스승으로 모셨다 묵자가 평생 동안 익혔던 학문과 재주를 모두 금골리에게 전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과 제자가 이름을 나란히 하게 되 었다 . 251

25) 孫治讓 『墨子開話』, r 墨學傳授考」, <食子, 名滑麗, 與田子方 • 段干木 • 吳起受業於 子夏, 後學於 墨 子 , 盡傳其學, 與墨子齊名.>

그렇기는 했지만 금골리가 스승에게서 조금이라도 재주를 배울 수 있 었던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공업의 도제 관계로 보아 스승을 찾아 배우기 시작한 후 삼 년 동안은 스승의 심부름만 해야 할 뿐 아무런 기술도 배울 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금골리도 묵자를 스승으로 섬기는 삼 년 동안 스승을 위해서 고생이 되기는 했지만 열심히 일해야 했다. 손과 발이 터져서 갈라졌고 피부는 햇볕에 그을리고 바람에 터서 거무스름하게 변하였다. 그는 스승에게서 뭔가 기술을 배우고 싶었지만 입도 벙긋 못하고 있었다. ® 묵자 역시 그의 마음을 일찌감치 알아차렀고 정말 그가 안스러운 생각 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삼

년이 되었을 때 묵자는 술과 음식을 한바구니 준비하여 금골리에게 들게 하고서 태산(太山) 기슭의 깨끗하고 조용한 곳으로 갔다. 그곳의 띠풀을 뽑아 자리를 만들게 하고 마주 앉아 금골리에게 술을 한잔 따라 주며 그 가 제자로서의 견습기간을 끝내고 졸업을 하게 된 것을 축하하였다. 금골 리는 술잔을 받아들고서 묵자에게 절을 두 번 하고 고민스러운 듯 술을 마셨댜 그런 다음 술잔을 내려놓고 가만히 한숨울 내쉬며 아무 말도 하 지 않았다. 묵자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관심이 있는 듯이 물었다. 「나에게 무슨 바램이 있거든 한번 말해 보려므나」 금골리는 그 말을 듣자 검고 메마른 얼굴에 벌정게 홍분된 빛을 띠며 얼른 묵자에게 꾸벅 절을 두 번 하였댜 「제가 스승님께 배우고자 하는 것은 성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가 . 하는 것이지요」 26 1

26) 『墨子』, r 備椎篇J, <腐滑屈者, 事子墨子, 三年, 手足冊祗, 面 目 黨黑, 役身給使, 不 敗問欲 墨子哀之, 乃澄酒捕肺, 寄於大山,械茅坐之, 以難肉子. 食子再拜而暎, 子墨 子曰 ; 『亦何欲平?J 萬子再拜再拜曰 ; r 政問守道』>

「그래, 바로 그거다!」 묵자는 즐거워하며 말했다. r 그것이 바로 내 뜻이었느니라 그런데 너는 어째서 그 방법을 배우고 자 하는 것이냐?』 「성 인(聖人)께서 말씀하시 기를」 금골리가 말했다. 「지금은 세상에 아무런 도(道)가 행해지고 있지 않습니다. 봉황도 어딘 가에 숨어 나타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제후들은 그들의 종주국을 배반 하고 힘이 세다고 하여 약한 자들을 괴롭히고, 나라가 크다고 하여 작은 나라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곳곳이 모두 난리통인데 특히 작은 나라의 백성들이 가장 고통을 받고 있지요. 저는 그래서 방어의 기술을 배워 작은 나라들이 큰 나라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낼 수 있게 하려

는 것입니다」 「어떤 공격 무기들로부터 성을 방어해야 하는지 알고 있느냐?」 r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대개 이런 것들입니다」 금골리는 곰곰히 생각하며 손가락을 꼽아 대답했다. 「임거(臨車), 구제(多引協), 충거(沖車), 운거( 雲 車), 토산(土山), 공동(空 洞) …… 등 모두 열두 가지입니다. 이런 무기로 공격을 해올 때 어떻게 막 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별로 어려울 것이 없지」 묵자가 대답했다. 「대략 말해 보자면 …… 성을 둘러싼 연못이 공고하게 되어 있고 성을 지키는 장비가 갖추어져 있으며 땔감과 식량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으면 된다. 그리고 임금과 백성들이 서로 한마음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사 방 인근 제후들의 원조를 얻을 수만 있다면 어떤 식으로 공격해 와도 모 두 막아낼 수 있지. 구체적인 방어의 방법을 이야기하자면 복잡하니까 천 천히 공부하도록 하자. 급할 것 없느니라」떠)

'2:l) 『 墨 子』, r 備城門篇J, <貧滑麗問於子墨子曰 ; r 由聖人之言, 鳳鳥之不出, 諸侯幹殷周 之國, 甲兵方起於天下, 大攻小,强執弱, 吾欲守小國, 爲之奈何?』 子墨子臼 ; r 何攻之 守?」 寫滑屈對曰 ; r 今之世常所以攻者;臨 ·釣 ·沖 ·椎 ·埋 ·水 ·穴 ·突 ·空洞 ·錢 傅 • 贛福 • 軒車, 敗問守此十二者奈何?』 子墨子曰 ; r 我城池修, 守器具, 椎栗足, 上 下相親, 又得四隣諸侯之救, 此所以持也」>

그때부터 묵자는 성을 방어할 수 있는 장비 60 여 가지의 그림을 그려 금골리에게 보여 주며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8 1 금골리는 성을 지키는 방법뿐 아니라 묵자의 <겸애(兼愛)>? <비공(非攻)>의 정신까지 배워 어디를 가든지 스승의 가르침을 전했다 . 당시 양주(楊朱)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제자들을 모아놓고 어디에선가 <자기 자신을 위할 것(爲我)>이라는 학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것은 묵자의 <겸애>와는 상반되는 도리였다. 그래서 금골리가 양주를 찾아가

28) 孫治讓 『墨子開話』, 還學傳授考』, <墨子遂語(食滑麗) 以守城之具, 六十六事.>

물었댜 r 당신은 곳곳에서 < 위아>의 학설을 퍼뜨리고 다니는데 한마디만 물어 봅시다 당신의 몸에서 터럭 하나를 빼어 천하의 백성들을 구할 수 있다 면 당신은 그렇게 하겠소, 안 하겠소?」 「천하는 터럭 하나로 구할 만한 것이 아니오」 양주가 대답했댜 「만일 구할 수 있다면 말이오. 하겠소, 안 하겠소?」 양주는 얼굴색이 변하여 고개를 숙이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금골리는 양주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돌아나오는 수밖에 없 었댜 나오는 길에 금골리는 양주의 제자인 맹손양(孟孫陽)에게 물었다. 「자네 스승께서 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건가?」 r 당신은 우리 선생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계십니다」 맹손양이 대답했다 . 「제가 스승님 대신 답변을 해드리지요. __- 저도 한마디 묻겠습니다 .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의 피부를 아주 조금만 떼어내도 일만금을 얻을 수 있다면 당신은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하겠네」 금골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당신의 손이나 발 하니를· 가져가면 한 나라를 얻 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맹손양이 또 물었댜 금골리는 맹손양의 올가미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하며 곰곰히 생각하느 라고 잠시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r 물론 터럭 한 오라기는 피부 한 조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맹손양이 말했다. r 그리고 피부 한 조각은 손이나 발에 비하면 또한 별것이 아닙니다. 그 건 명백한 사실이지요. 그러나 터럭이 모여서 피부가 되고 피부가 모여서 손이나 발이 되는 것입니다. 터럭 한 오라기가 신체의 만 분의 일밖에 안

된다고 해서 어찌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금골리는 한숨을 내쉬며 얕보듯 말했다. 「자네 마음대로 말하게. 어쨌든 내가 밀하는 것은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 고자 하는 것이고 자네가 말하는 것은 한 개인만을 이롭게 하는 것이네 . 8 그러니 우리 두 사람의 의견은 일치할 수 없지. 자네의 말을 노자나 관윤 에게 들려 준다면 자네가 옳다고 하겠지만, 대우( 大禹 )나 묵적에게 들려준 다면 나의 말이 옳다고 할 걸세. 그래서 <길이 다르면 서로 함께하지 않는 다(道不同不相爲謀)>고 한 것이 아니겠나? 그러니 우리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네」 그리고 나서 화가 잔뜩 난 채로 나가버렸고 맹손양 역시 관심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서 양주의 제자들과 손님들이 있는 정원으로 돌아가 그들과 어울려 즐겁게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291

29) 『列子』, 璃朱篇」, <腐子問楊朱曰 ; 「去子體之一毛以濟一世, 汝爲之平?」 楊子曰 ; 「世固非一毛之所濟』 寫子曰 ; 『假濟, 爲之平?」 楊朱弗應. 葛子出, 語孟孫陽. 孟孫陽 曰 ; r 子不達夫子之心, 吾請言之. 有侵若Jl/l南, 獲萬金者, 若爲之平인 曰 ; r 爲之』 孟 孫陽曰 ; r 有斷若 一節 , 以獲一國, 子爲之平?」 危子默然. 有間, 孟孫陽曰 ; 「一毛微於 Jl/l r섭 , Jl/l r8 微於一節 有矣, 然則積一毛以成Jl/l府, 積11/ L 慮以成一節, 一毛固體萬分中 之一物, 奈何輕之平?」 寫子曰 ; r 吾不能所以答子. 然以子之言問老lfllJ • 關尹, 則子 言 當矣 ; 以吾言問大禹 • 墨뿔, 則吾言當矣」 孟孫陽因顧與其徒說他慕.>

위에서 이야기한 금골리의 전설에서 묵자가 말한 바 <겸애>와 <비 공>의 정신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후대 도가(道家)의 방사 (方士)들은 묵자가 82 세가 되 었을 때 갑자기 깨달은 바가 있어 <세상 일 은 이미 다 알 수가 있지만 훌륭한 직위는 눌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하고는 적송자를 따라 신선의 도를 공부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얼마 지 나지 않아 과연 그가 주적산(周迷山)으로 들어가니 산속에서 글읽는 소리 가 들렸는데 그가 밤이 되어 잠을 잘 때에 누군가가 와서 옷으로 발을 덮 어 주는 것이었다. 묵자는 잠시 가만히 기다렸다 . 그랬더니 정말로 신인 (神人)이 와서 그에게 신선의 도를 가르쳐 주겠다고 하며 새 책을 한 권 주고 오행(五行)의 변화 등 방술(方術)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었다 . 묵자는

나중에 그렇게 도를 닦아 지선(地仙)이 되었는데 그것은 그가 선서(仙 書 ) 에 기록된 내용에 따라 실험한 결과였고 그것을 『 오행기( 五行記 ) ’ 라는 책으로 써서 남겼다고 한다. 한 무제 때에도 묵자가 계속 살아있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 한 무 제가 사람을 보내어 묵자를 예로써 청해오게 하였으나 묵자는 궁정에 들 어가기를 원하지 않고 혼자서 오악의 명산을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였 다고 한다. 그때에도 그는 몸이 건강해서 얼굴색을 보면 50 여 세 정도밖 에 되지 않았다고 전해진댜 꼬) 이런 것에서 중국 신화에 선화(仙話)가 침 투한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데 적극적으로 세상일에 뛰어들었던 묵자까지 도 소극적으로 은둔한 선인으로 묘사되어 있댜 ® 30) 『神仙傳』 卷 8, <墨子年八十 二, 乃暎曰 ; r 世 事 已可知, 榮位非常保, 將委流俗以從赤 松子游耳』 乃入周秋山, 精思道法, 想象神仙. 於是數聞左右山間有 iiIi讀聲 音. 墨子臥 後, >l..有人來以衣復足, 忽見一人, 乃起問之. 神人曰 ; r 知子有志, 好道, 故來相候」 於 是授以素書, 朱英丸方,道靈敎戒, 五行變化, 凡二十五篇. 墨子乃撰其要以爲『五行 記』. 乃得地仙, 隱居以避戰國. 至漢武帝時,遣使者楊違, 束用加幣以聽墨子, 墨子不 出 . 視其顔色常如五十許人, 周游五岳, 不止一處.>

제 11 장 묵자의 생애 중에서 가장 유명한 전설은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막은 일이다. 묵자와 같은 고향 사람이었던 공수반( D 은 노반(魯班)이라고도 하는데 아주 유명한 기술자였다 . 그는 노나라에서 남방의 초나라로 가 일을 하다 가 초나라 왕에게 임용되어 초나라에서 살게 되었다. 당시 초나라와 월나 라는 남방의 대국으로 장강(長江) 하류에서 자주 배를 타고 전쟁을 하였 댜 초나라는 상류에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할 때에는 물길을 따라 내려 와서 그 기세가 매우 대단하였다. 그러나 일단 퇴각을 하게 되면 문제가 달라졌다.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무척 힘들고 어려웠던 것 이다. 그에 비해 월나라는 전쟁을 할 때에는 거슬러 오느라고 힘들지만 후퇴를 할 때에는 물길을 따라 재빨리 도망칠 수 있었으므로 초나라에 비 해 우세하였다. 그래서 몇 차례나 초나라의 수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다가 공수반이 초나라에 와서 초나라 왕을 위해 몇 가지 기계를 병 선에 설치하였다. 그것은 <갈고리(多向)>와 <밀어내는 기구(担)>라고 했는 데 적이 탄 병선이 후퇴하려고 하면 <갈고리>를 사용하여 가지 못하게 잡아당겼으며, 또 적의 병선이 전진해 오려고 하면 <밀어내는 기구>를 써서 앞으로 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그것들에 맞춰 몇 가지 함께

쓸 수 있는 병기들을 만드니 초나라 군사들은 전쟁에 자신이 생겼다. 그 래서 월나라 병사들은 초나라에서 하는· 대로 꼼짝도 못했고 마침내 초나 라의 수군은 무기와 전술 면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어 월나라를 수차례나 패하게 만들었댜 공수반은 자신의 이러한 발명품들에 대해서 무척이나 흐뭇해 했다. 그 때 마침 일이 있어서 초나라에 온 묵자를 만나게 되어 자기 자랑을 하며 말했다 r 배를 타고 싸움을 할 때 사용하라고 내가 구와 거를 만들었네. 자네가 만든 기구 중에도 그런 것들이 있지?」 「내가 만든 구와 거는 당신이 만든 것보다 훨씬 힘이 있는 것이지요」 묵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 그리고 자기보다 나이가 조금 많은 공수반에 게 공손하게 말했다 . 「형님, 모르고 계시는 건 아니겠지요? 제가 만든 구거( g付 }E) 는 말입니 다, 사랑으로 만든 구(多句)이고 공손함으로 만든 거(才 E) 입니다. 사람들이 사 랑의 갈고리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서로 친해질 수 없을 것이고, 또한 공 손함으로 만들어진 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서로에게 함부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서로 친해질 수가 없고 마침내 모두 뿔뿔이 홑어 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서로 친하게 되려면 서로 공손하게 대하여야 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서로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 만일 형님이 지금 정 말 갈고리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잡아당긴다면 그 사람들도 갈고리로 형님 을 잡아당길 것입니댜 마찬가지로 형님이 밀어내는 기구로 사람들을 밀 어낸다면 그들 역시 형님을 밀어낼 것이지요. 이렇게 사람들이 서로 잡아 당기고 밀어내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서로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니겠어 요? 그렇게 본다면 제가 만든 기구들은 형님이 전쟁을 하기 위해서 만든 그 갈고리나 밀어내는 무기들보다 강한 것이 아닐까요?』I) 1) 『墨子.il , 『魯問篇」, <昔者楚人與越人舟戰於 江, 楚人 )I 頂流而進, 迎流而退, 見利而進, 見不利則其退難;越人迎流而進,順流而退, 見利而進, 見不利則其退速.越 人因此若 勢, 函敗楚人. 公輸子 自魯南游楚, 焉始爲舟戰 之器, 作爲釣担之備, 退者釣之, 進者担

之 量其釣担之長, 而制爲之兵. 楚之兵節 越之兵不節, 楚人因此若勢, 函敗越人, 公 輸子善其巧, 以語墨子, 日 ; r 我舟戰有釣担, 不知子之義亦有釣担平?』 子墨子曰 ; r 我 義之섭맘 e, 賢於子舟戰之釣抵 我釣之以愛, 担之以恭, 弗釣以愛則不親, 弗担以恭則 速;ljl, w 而不親則速離, 故交相錫 交相恭, 猶若相利也. 今子釣而止人, 人亦釣而止子 ; 子担而担人, 人亦担而担子, 交相釣,交相担, 猶若相害也. 故我義之釣担, 賢於子舟戰 之 3 얌 E 」>

공수반은 묵자의 그 말을 듣고 묵묵부답이었다 자기가 졌다고 하는 표 시였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집안에 열흘 남짓 틀어박혀 대나무와 나뭇조각 울 가지고 열심히 뭔가를 깎고 새기고 하여 까치를 한 마리 만들었다. 그 리고 그것을 하늘에 날리니 사흘 동안이나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떠있었 댜 ® 이번에도 공수반은 득의양양하게 묵자에게 자랑을 하였다. 자기가 만 든 이 나무 까치보다 더 훌륭한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는 이 야기였댜 묵자는 공수반이 만든 까치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핀 뒤 별것 아니라 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별것 아닌데 뭘 그러십니까. 이런 것쯤은 저도 만들 수 있어요. 그러나 당신이 만든 이 까치는 보통 이름 없는 목수들이 만든 수레바퀴 비녀장보 다도 못해요.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들은 세 치 정도 되는 나무토막을 눈 깜짝할 사이에 깎고 다듬어서 수레바퀴에 끼우지요. 그러면 그것으로 50 석(石)의 무게까지 지탱합니다. 형님이 만든 이 까치 따위를 어찌 그 수레 바퀴 축의 쓰임새에 비하겠습니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일을 할 때에는 그것이 뛰어난 것(巧)인가 별것이 아닌가 (1 幽) 하는 것, 그리고 그 것이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는가 아닌가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준다면 그것은 교(巧)이지만 별다른 이로움을 줄 수 없다면 그것은 그저 졸(才批)일 뿐입니다」 2) ®

2) 『墨子』, r 魯問篇」, <公輸子削竹木以爲llf}, 三 日 不下 . 公輸子以爲至巧. 子墨子謂公 輸子曰;守之爲朋也, 不如匠之爲車轄, 須텃劉三寸之木, 而任五十石之重. 故所爲 功, 利於人謂之巧, 不利於人謂之t베』>

이번에도 공수반은 기가 죽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영 마음이 편치 않았댜 결국 두 사람은 서로 뜻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헤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묵자는 초나라에서 좀 머물렀지만 달리 할 만한 일도 없 었기 때문에 다시 노나라로 돌아갔다. 공수반은 계속해서 전쟁하는 무기를 연구하고 만들었는데 마침내 성을 공격할 때 쓰이는 기구인 구름사다리( 雲 郡)를 발명해냈다 . 그것은 전차에 싣고 갈 때에는 접어서 실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별로 눈에 띄지 않았지 만 일단 펴기만 하면 구름을 뚫고 높이 치솟아 올랐기 때문에 구름사다리 ( 雲 樣) @ 라고 불렸댜 그것은 또한 < 하늘을 뒤덮는 계단( 蒙天 之階) >@ 이라 고도 했는데 성을 공격하는 데 있어서 아주 쓸모 있는 무기였다 . 초나라 왕은 그것을 가지고 가서 송나라의 도성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곳을 공격하기 전에 우선 공수반은 지난번에 만들었던 나무 까치의 원리 룰 응용해서 사람이 탈 수 있는 새를 만들었다 . 그리고 자신이 그 새를 타 고 송나라 도성의 하늘로 날아가 그곳을 정찰한 뒤에 다시 돌아왔다 . 3) 하 늘에서 살펴보았으니 지형이 어디가 험준하고 어느 곳의 수비가 허술한지 일목요연하게 알아볼 수 있었댜 공수반은 자기가 정찰한 것들을 초나라 왕에게 돌아와 그대로 보고하였고, 왕은 그 보고에 따라 군대의 전열을 정비하고 날짜를 잡아 송나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3) 땅宮舊 事 』(輯本) 卷 2, <(公輸般)常爲木焉, 乘之以窟宋城.>

송나라는 초나라와 노나라 사이에 있던 작은 나라였다. 묵자는 초나라 가 송나라를 치려한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송나라가 무너진다면 곁에 있는 노나라도 위험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묵자는 급히 금골리 동 제자 3 백 명을 불러 성을 지키는 무기들을 들고 송나라의 도성인 팽성(彭城)으로 가 그들을 도와 성을 지켜 주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마론 양식을 준비해 간단한 짐을 꾸려 동에 둘러메고 죽시 초나라 룰 항벡 떠났다. 전쟁의 발발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그는 열흘 밤과 낮을 조금도 쉬지 않고 걸었다. 발이 부르터 피가 흐르면 옷을 찢어 싸매고 또

걸었다 양쪽 발에 모두 물집이 잡혔고 터진 곳에 또 물집이 잡힐 지경이 었지만 그는 조금도 쉬지 않고 피로도 느끼지 못한 채 걷고 또 걸었다. 그 리하여 보통 사람으로서는 극복하기 힘든 어려움을 뚫고 마침내 짧은 시 간 내에 초나라의 도성인 영도( 몽屈 都)에 도착하였다 . 4 1

4) 『 呂氏春秋 』 , 『愛類 篇 」, <公悟般 爲高雲 W , 欲以攻宋 , 墨 子聞之, 自魯往, 裂 袋 麥足, 日 夜不休, 十 日 十夜, 而至於罪.>

영도에 도착해 보니 떠들썩하고 화려한 것은 예전과 똑같았으나 곳곳에 군사들과 창 같은 무기들이 보이고, 군대의 깃발 등이 휘날리는 것이 어 딘가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묵자는 그런 것들을 자세히 살펴볼 톰도 없 었다. 한적한 골목길에 자리잡고 있는 공수반의 호화스런 저택으로 급히 달려가 문지기에게 공수반을 만나고 싶다고 전하라 하였다. 공수반은 손에 기역자(曲尺)를 돈 채 작업실에서 나왔다 . 그리고 묵자 를 보더니 김이 샌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동생, 그 먼 곳에서 이렇게 나를 찾아오다니 무슨 일이 있는가?」 r 북방의 어떤 자가 나를 모욕하였습니다. 가서 그 자를 좀 죽여 달라고 부탁하러 왔어요」 묵자가 말했다 . 그러나 공수반은 별로 좋은 얼굴색이 아니었다. 떨 냥의 황금을 드리지요」 묵자가 정중하게 말했댜 그러자 공수반은 화가 난 듯이 분명하게 말 했댜 「자네는 내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나」 정님 말씀이 옳습니다」 묵자가 공수반에게 공손히 절을 두 번 하고서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몇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가 북방에 있으니 형님께서 구름사다리라는 것을 만드셔서 송나라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 이 들려오더군요. 송나라에 무슨 죄가 있습니까! 초나라에는 남아도는 것 이 땅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인구는 적은 편이지요. 적은 인구를 죽여가면

서까지 남아도는 땅을 또 차지하려고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것은 지혜로 운 행동( 智 )이라고 말할 수 없지요. 또 송나라에는 아무 죄가 없는데 그 나라를 치려 하니 그것은 어진 행동( 仁 )이 아닙니다. 그리고 형님께서는 송나러를 치는 것이 아무런 이익될 일도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초 나라 왕을 말리지 않으니 그것은 충성된 행동(忠)이 아닙니다. 그리고 싸 워봐야 목적도 달성하지 못할 것이니 그것은 강한 것( 强 )이 아니지요 . 게 다가 한 사람 죽이는 일은 하지 않으시면서 많은 사람울 죽이는 일은 하 려고 하시니 그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올시다 . -저의 이 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공수반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이렇게 말했다. 「자네의 말이 옳기는 하네」 「그런데 어째서 그냥 손을 놓고 계시는 겁니까?』 r 할 수가 없네」 공수반이 대답했댜 r 이미 왕께 말씀을 드렸는걸」 「그렇다면 제가 왕을 만날 수 있게 주선해 주십시오」 공수반은 들고 있던 기역자를 내려놓으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할 수 없 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r 좋아, 그렇게 하지」 공수반이 주선하여 묵자는 초나라 왕궁으로 가 왕을 만나게 되었댜 ® 묵자가 왕에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훌륭한 가마를 마다하고 옆집 사람의 다 낡아빠진 가마를 훔치려 한다면, 또 자기에게 비단으로 된 옷이 있으면서도 옆집의 다 해진 누더기옷을 훔치려고 한다면, 그리고 쌀이나 고기가 자기에게 충 분히 있는데도 옆집의 싸래기죽을 훔치려고 한다면 왕께서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r 그거야 도벽이 있는 사람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겠지」 초나라 왕이 별로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초나라는 사방이 5 천 리나 됩니다」 묵자가 말했다 「그러나 송나라는 겨우 5 백 리 밖에 안 되지요. 바로 훌륭한 가마와 다 낡아빠진 가마의 차이입니다. 초나라에는 운몽( 雲夢 )의 호수가 있어서 그 곁에 물소, 코뿔소 , 사향노루 , 고라니, 사슴 등이 살고 있지요. 또한 장강 ( 長江) 과 한수( 漢 水)를 끼고 있기 때문에 물고기나 자라, 큰자라, 악어 등 이 많아 붐벼서 다 살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그러나 송나라에는 꿩이나 토끼, 잉어조차도 제대로 없어요. 바로 쌀과 고기가 많은 집과 싸래기죽이 나 먹는 집의 차이지요. 또 초나라에는 장송(長松), 문재(文粹) , 남목(楠木), 예장( 豫章 ) 등의 좋은 나무들이 많이 있지만 송나라에는 그것과 비슷한 큰 나무들조차 없답니다. 이것은 비단옷과 누더기옷의 차이입니다. 신이 보기 에는 왕께서 군대를 보내어 송나라를 치려하시는 것은 바로 이런 것과 별 차이가 없는 일입니다. 왕께서 그 일을 감행하신다면 그것은 의리만을 해 치게 되는 것일 뿐 별달리 얻을 것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자네 말이 옳다」 초나라 왕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 r 그러나 공수반이 나를 위해 구름사다리를 이미 만들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송나라를 공격해야겠는걸 ……」 「그것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목자가 말했다. r 공수반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기술자일세」 초나라 왕이 기분이 좀 나빠진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r 공수반은 구름사다리만 만들어낸 것이 아니야. 성을 공격하는 전술에 대해서도 상당한 연구를 했단 말일세. 그런데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모른 다니?」 r 나무토막이 있다면 제가 공수반과 한번 겨루어 보겠습니다」 묵자가 침착하게 말했다 . 초나라 왕은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시종에게 나무토막들을 가져오라

고 하였댜 묵자는 허리띠를 풀어 바닥에 내려놓고 활모양으로 만들어 그 것을 성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니뭇-조각들을 공수반과 똑같이 나누어 가 졌다 바로 성을 공격하고 지키는 무기라는 것이었댜 두 사람은 초나라 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진지하게 씨우.는 모습을 연출하였다 . 그들은 각각 손에 나뭇조각을 들고서 마치 장기를 두듯이 밀고 당기고 하였다. 한 사람이 진격하면 다른 사람이 막았고 또 서로 나아가고 밀리 고 하며 나무토막을 들고 씨우니, 초나라 왕이 보기에는 무엇들을 하는가 싶을 정도였다. 공수반은 아홉 가지 방법을 써서 성을 향해 진격하였지만 아홉 번 모두 묵자에게 밀려났다 . 그렇게 진격하고 지키고 하는 동안 없 어진 나무토막들은 바로 쌍방의 손실을 뜻했는데, 공수반의 나무토막이 매번 공격할 때마다 없어져서 마침내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고 목자의 손에는 나무토막이 남아돌았다. 공수반은 할 수 없이 포기하는 수밖에 없 었다. 공수반의 얼굴에 영 언짢은 기색이 감돌았다 「어때요?」 묵자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별것 아닐세」 공수반이 허리를 곧추세워 옷소매로 목덜미의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r 어떤 방법을 사용하면 자네에게 이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니는·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았네」 정님이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저를 이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저도 알 고 있습니다」 묵자가 얼굴의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로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저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초나라 왕은 그들이 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몹시 궁금했 다. 그래서 얼른 물었다. r 그대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묵자가 고개를 돌려 초왕에게 말했다. r 공수반의 뜻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저를 죽이라고 왕께 권하는 것입니

댜 저를 죽이면 송나라를 지킬 사람이 없으니 쉽게 공격할 수 있을 것이 라고 여겨서이지요. 그러나 저의 제자인 금골리와 다른 3 백 명의 제자가 이미 제가 만든 방어 무기들을 가지고 송나라의 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초나라가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지요. 그러니 저를 죽인다 고 해도 송나라의 성은 아마 함락시키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정말 훌륭한 방법이로구나!」 초나라 왕이 감동하여 말했다. 「그렇다면 송나라를 공격하지 않는 수밖에 없지」 5l ®

5) 『墨子』, r 公輸篇」, <公輸盤(般)爲楚造雲椎之械, 成, 將以攻宋. 子墨子聞之起於齊, 行十 日 十夜, 而至於部, 見公輸盤. 公輸盤曰 汀夫子{iiJ命 焉爲 ?J 子墨子 B ; r 北方有個 臣, 願籍子殺之』 公輸盤不稅. 子墨子曰 ; 『請獻十金』 公輸盤曰 ; r 吾義固不殺人J 子 墨子起, 再拜 曰 ; r 請說之. 吾從北方, 間子爲佛, 將以攻宋, 宋何罪之有? 荊國有餘於 地, 而不足於民, 殺所不足而爭所有餘,不可謂智;宋無罪而攻之, 不可謂仁;知而部 爭, 不可謂忠 ; 爭而不得, 不可謂强 ; 義不殺少而殺衆, 不可謂知類J 公輸盤 9[ . 子墨子 B ; r 然胡不已平?」 公輸盤 B ; 『不可. 吾槪已言之王矣」 子墨子曰 ; 『胡不見我於王?J 公輸盤曰 ; 「諾」 子 墨 子見王, B ; 『今有人於此, 舍其文軒, 隣有散輿而欲籍之 ; 舍其 錦誘 隣有短擇 而欲籍之 ; 舍其梁肉, 隣有糖櫓, 而欲籍之 ; 此爲何若人?』 王曰 ; 「必 爲有麻疾矣」 子墨子 B ; r 荊之地, 方五千里, 宋之地, 方五百里, 此猶文軒與散輿也 ; 荊有 雲夢, 匡兒梨鹿滿之, 江漢之魚照砲亂 爲天下富, 宋所爲無維兎답i魚者也, 此猶 梁肉之與糖櫓也;荊有長松·文粹·孩章,宋無長木,此猶錦誘之短福也.臣以王吏之 攻宋也, 爲與此同類. 臣見大王之必傷義而不得」 王曰 ; 『善哉! 難然, 公輸盤爲我爲雲 mi, 必取宋』 於是見公輸盤 子墨子解帶爲城, 以謀爲械, 公輸盤九設城攻之機變, 子 墨子九距之, 公輸盤之攻械盡, 子墨子守팸有餘. 公輸盤誰, 而 B ; r 吾知所以距子矣, 吾不 言 』 子墨子亦曰; 「吾知子之所以距我, 吾不言」 楚王問其故. 子墨子曰 ; 『公輸子 之意 不過欲殺臣, 殺臣, 宋莫能守, 可攻也. 然臣之弟子腐滑朋等三百人, 已持臣守뭡 之器, 在宋城上, 而待楚冠矣 ; 難殺臣, 不能絶也』 楚王曰 ; r 善哉! 吾請無攻宋矣』>

공수반은 묵자를 데리고 왕궁에서 나와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이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꺼림칙했다. 묵자~ 자신의 학설과 자기가 주장하는 바를 아주 진지한 태도로 공수반에게 설명했다. 그들 둘은 모두가 노동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기가 쉬웠다. 결국 공수반의 마음은 개운하게 풀어졌다.

『고향 친구, 정말 잘 왔네」 공수반은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기분좋게 말했다 「자네를 만나지 않았을 때에는 송나라를 공격하려 하였지만 이제 자네 를 만나고 나니 공짜로 송나라를 준다고 해도 그것이 의로운 일이 아니면 받지 않겠네」 r 그렇다면 정말로 송나라를 형님께 드려야겠소이다」 묵자도 줄거워하며 말했다 「앞으로 형님께서 의로운 일만 행하신다면 온 천하라도 모두 형님께 드리겠소」 61

6) 『墨子』, r 魯問篇』, <公輸子謂子墨子曰 군吾未得見之時, 我欲得宋, 自我得見之後, 與我宋而不義, 我不爲』 子墨子曰 ; 「觀之未得見之時也, 子欲得宋 ; 自覆得見子之後, 予子宋而不義, 子弗爲, 是我予子宋也. 子務爲義, 쩔又將予子天下J>

공수반이 묵자에게 더 있다 가라고 잡으니 묵자는 그곳에서 이삼 일을 더 묵다가 작별을 하고 다시 노나라로 돌아갔다. 그는 마침내 전쟁을 저지 하는 일을 성사시켜 수많은 생명을 구했지만 그의 행색은 올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여전히 조그만 보따리를 등에 둘러메고 짚신을 신은 채였 으며, 또한 몸에 걸친 것은 사시사철 바꿔입지 않은 데다가 맑은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나 늘 입었고 여러 군데 꿰맨 자국이 있는 허름한 무명옷이 었다. 그 행색은 그가 초나라에 올 때와 같은 것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 가 송나라의 도성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비가 내려 성루 밑에서 잠시 바를 피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성을 지키는 병사가 묵자의 행색이 남루한 것 을 보고 수상하다고 여기고는® 인정사정 두지 않고 매정하게 쫓아버렸다”

7) 『墨子』, 「公輸篇』, <子墨子歸, 過宋, 天雨, 底其間中, 守間者不內也.>

그러나 묵자는 슬그머니 떠나면서 조금도 섭섭해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묵 자와 맞수로서 논쟁을 벌였던 맹자〈孟子)는 학문적으로는 묵자에게 격렬하 게 반대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그를 인정하기도 하였댜 「묵자는 겸애를 주장한다.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익되는 일이라면 머 리끝부터 발끝까지 가루가 된다고 해도 기꺼이 할 사람이다」

맹자의 이 말을 통해 우리는 묵자의 인격과 그의 정신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 81

8) 『孟子』, r 盡心 篇 」, <墨子兼愛, 摩(炭)頂放鍾, 利天下爲之 .>

묵자와 같은 고향 사람이었던 공수반은 노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에 <노 반( 魯般)>, 혹은 < 노반( 魯班 )>이라고도 불렀다. @ 그가 노나라 소공(昭公) 의 아들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9 1 그것은 확실하지 않다. ® 다만 그 가 고대의 이름난 기술자® 였기 때문에 예전에 목공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그롤 < 노반 사부(魯班 師傅)>@라고 받들어 모셔, 어디든지 일울 하러 갈 때마다 그의 모습을 새긴 신상(神 象) 을 상자 속에 넣어 들고 다니며 그 앞에 향을 피워놓고 일을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 옛날부터 지금까 지 그에 관한 민간전설은 너무 많아서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IOI @

9) 『孟子』 , 「鹿婁篇」, <鹿婁之明, 公輸子之巧.> 趙岐注 ; <公輸子, 魯班, 魯之巧人也. 或以爲魯昭公之子.> 10) 현재 수집되어 있는 노반에 관한 많은 전설과 각 지방지에 기록되어 있는 단편적인 내용으로 볼 때 위와 같은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고서에 확실히 기록된 것은 그리 많지가 않은 데다가 상당히 단 편적인 것이다 그에 관한 전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나무로 새를 만 들었는데 이 새가 사흘 동안 하늘에서 떠다니며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또 자기가 직접 그 나무 새롤 타고 송나라 도성으로 날아가 그곳의 허술한 지점을 파악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는 앞장에서 이미 서술하였다. 이렇게 나무로 만든 지~ 기계들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상당히 해학적이고 풍자성을 띠고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노반이 자기의 어머니를 위하여 나무로 된 마차를 한 대 만들었다. 마 차를 끄는 두 마리의 말도 나무로 만든 것이었고 마차를 모는 마부도 나 무였다. 그 모든 것에는 아주 뛰어나고 세밀한 장치가 다 되어 있었다. 준 비가 끝난 뒤 마부는 채찍을 들어 말을 내리쳤고 나무로 된 두 마리의 말

은 재빨리 앞으로 달려나갔댜 마차의 바퀴도 바람처럼 빨리 돌아갔다 . 마 차는 노반의 어머니를 태우고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했다 그 결과 마차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G’ 그래서 민간에는 이런 속담이 전해진다. 노반은 얼마나 재주가 뛰어났던지 자신의 어머니까지도 잃어버릴 정도였 다네 .Ill

11) 『論衡』, r(儒 增篇』, <世傳言曰 ; 「魯般巧, 亡其母也』 言巧工爲母作木車馬, 木人御者, 機關備具,載母其上, 一賜不還, 遂失其母.>

위대한 기술자 노반은 기계가 저절로 움직이게 만들 줄은 알았지만 기 계를 멈추게 하는 장치를 순간적인 실수로 잊어버렸기 때문에 이런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노반은 여러 가지 발명품을 만들어 냈는데, 맷돌 역시 그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한댜 1 21 그리고 문에 달린 문고리도 그의 창작품이라고 하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이러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노반은 강가를 거닐며 문에 문고리를 어떻게 설치하고 거기에 자물쇠를 또 어떻게 채울 까 하는 방법에 대해 궁리하고 있었다. 그때 커다란 우렁이 하나가 강가 의 수초 사이룰 떠다니고 있었다. 노반은 신기한 생각이 들어 우렁이에게 물었다 .

12) 『世本』, 『作篇』(張樹粹菓補注本), <公輸般作石펠.>

「껍데기를 열고 네 모습울 좀 보여 주렴!」 그러자 우렁이가 껍데기 속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노반은 그 모습을 보 고 얼른 발로 땅위에 그림을 그렸다. 막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우렁이가 그것을 알아채고서 다시 머리를 껍데기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그리고 문 을 닫아 걸고는 꼭꼭 숨어서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노반 은 문고리를 만드는 방법과 그 위에 잠금쇠를 채우는 방법까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문고리를 우렁이의 모양으로 만들었댜 그때부터 집안에

둔 물건들은 우렁이가 껍데기 속에 숨어 있듯이 안전하게 보관될 수 있게 되었댜 U )

13) 『群콥捨記 輯, 『風俗通逸文』,

이 이야기와 비슷한 구성을 갖춘 것으로는 노반이 촌류신(付留神)의 초 상화를 그렸다는 전설이 있다 . 촌류신은 위수(i目水) 다리 밑에 살았다. 노 반은 그 신을 찾아가 한번 보고 싶다고 부탁을 했다. 신은 물속에서 대답 했다. 「나는 너무 못생겼소 . 당신이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 에 감히 나가지 못하겠소」 노반은 강물을 향하여 읍하고 말했다 「걱정 말고 얼굴을 내밀어 보십시오」 촌류신은 할 수 없이 무시무시하게 생긴 얼굴을 물속에서 내밀었다. 노 반은 그의 모습을 보게 되자 발끝으로 강가 땅바닥에 그 괴상한 얼굴을 슬그머니 그렸댜 촌류신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서 얼른 고개를 물속에 집어넣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후대 사람들은 노반이 그린 초상화를 바탕으로, 돌에 촌류신의 반신상(半身象)을 조각해 다리 밑의 물속에 넣어 주었다 그런데 삼국시대 조조(曹操)가 말을 타고 위수교를 건널 때, 말이 그 신상을 보고 놀라는 바람에 조조가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화가 난 조 조는 그 괴물 같은 신상을 물속 깊이 밀어넣어 버리게 하였고 그때부터 그 신상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1 4)

14) 『水經注』 卷 19, rl 爵水』,

노반이 창조한 발명품에 관해서는 육조시대(六朝時代) 양(梁)나라 임방 (任防)이 지은 『술이기(述異記)』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심양강(瀋

陽江) 칠리주(七里洲)에 목란(木蘭)나무를 깎아 정교하게 만든 배가 한 척 있었는데 그것 역시 노반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천로산( 天 女老山) 남쪽 봉우리에도 노반이 나무로 깎아 만들었다고 히는· 백학( 白鶴 )이 있었 는데, 노나라에서 무려 7 백 리를 날아와 이 산의 서쪽 봉우리에 내려와 앉 았다고 전해진다. 후에 한( 漢 ) 무제(武帝)가 사람을 보내어 그 나무학을 가져오게 하니 백학은 다시 날아올라 더욱 험준한 남쪽 봉우리로 가버렸 다고 한다. 그리고 임방이 『 술이기 』 를 저술하던 시대에도 날씨가 흐려 비 가 올 듯한 날이면 봉우리 위의 백학은 날개를 펼치고 너울너울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 노반은 돌에다가 < 우공구 주도(禹貢九洲圖)>를 새겨 낙성(洛城)의 석실산(石 室 山)에 보관해 두었다 고한다. 그리고 동북 해변가 바위 위에 돌로 조각된 거대한 거북이가 있는데 그 것 역시 노반이 만든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 거북이는 여름만 되면 바다 로 기어 들어갔지만 겨울만 되면 또 다시 바위 위에 올라와 꼼짝도 안 하 고 있었다고 한다. 진( 晉) 나라의 시인 육기(陸機)는 <돌거북은 아직 바다 를 그리워하지만 나는 차라리 고향을 잊으리(石龜尙懷 海, 我寧忘故鄕 )>15) 라고 노래했는데® 거기 보이는 <돌거북>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이런 여러 가지 기록들로 보건대 노반의 전설은 중세에도 상당히 보편적으로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5) 『述異記』 卷下, <木岡舟在海陽江七里洲中, 有魯班刻木蘭爲舟 . 天緖山南峰, 昔魯 班刻木爲鶴 一飛七百里, 後放於北山西峰上. 漢武帝使人往取之, 遂飛上南峰. 往往 天將雨, 則翼廻描動 若將窟飛. 魯班刻石爲 『禹貢九州岡』, 今在洛城石室山. 東北巖 海鮮有大石龜 俗云, 魯班所作, 夏則 入海, 冬復止於山上. 陸機詩云 ; r 石龜尙懷海, 我寧亡故鄕?』>

노반에 관한 전설 중에서 가장 기이한 것이 바로 이제 이야기하려는 것 인데, 여기에서는 노반(魯班)이 노반(魯般)으로 표기되고 있다. 노반은 숙 주(肅州) 돈황(敦煙) 사람이었다. 어떤 시대에 살았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손재주가 매우 뛰어나 하늘에서 내린 장인(匠人)이라 할 만했다. 양주(凉

州)에서 절의 불탑을 수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면서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틈틈이 나무새를 만들었댜 그 나무새에는 저절로 움직이게 하는 기 관이 붙어 있었는데 나무막대기로 두세 번 두드리기만 하면 사람을 태우 고 하늘로 날아올라 상당히 오랫동안 날 수 있었다. 노반은 그 나무새를 타고 자주 집으로 가 아내를 만나곤 하였다. 마침 내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시부모가 며느리의 배 가 불러오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연유를 물으니 그때서야 며느리가 부끄럽게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호기심이 생긴 아버지는 노반이 집 에 돌아왔을 때 슬그머니 그 나무새를 타고 막대기로 열 번을 두드렸다. 그러자 그 나무새는 맹렬한 기세로 날아오르더니 동남쪽을 향하여 단번에 수천 리를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회(吳會, 지금의 江蘇省 吳縣) 지 방에 이르러서야 땅에 내려올 수 있었다. 오회 지방 사람들은 하늘에서 이상한 나무새를 탄 늙은이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그가 분명히 요괴임에 틀림없다고 여겨 그를 잡아서 죽이고 말았다. 한편 노반은 돈황에서 또다른 나무새를 하나 더 만들어 그것을 타고 아 버지를 찾아갔다. 그리고 오회 지방에서 아버지의 시체를 찾아 나무새에 싣고 돌아왔다. 그는 오회 사람들이 아버지를 죽인 것에 대해 한을 품고서 숙주성 남쪽에 나무로 선인(仙人)을 만들어 세워놓고 선인의 손가락이 동 남쪽을 가리키도록 하였다. 그때부터 오회 지방에는 연속하여 삼 년 동안 큰 가뭄이 들었고 아무리 기우제룰 지내도 비 한방울 내리지 않았다.® 그 곳 사람들이 무당에게 점을 쳐 보니 모두가 노반에게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점괘가 나왔댜 그들은 할 수 없이 천금의 후한 선물을 준비하여 돈황으로 가서 노반에게 거듭 잘못을 빌었다. 노반은 사람들이 그렇게 선물까지 가 지고 와서 잘못했다고 하는 것을 보고는 동남쪽을 가리키고 있는 선인의 손을 잘라버렸댜 그리고 그날, 오회 지방에는 몇 년 동안이나 내리지 않던 비가 시원스레 쏟아져 내렸다고 한다.J G) 16) 『酉陽雜沮續菓』 卷 4, <魯般者, 肅州敦燈人也, 莫詳年代. 巧伴造化, 於凉州造浮圓,

作木焉 每擊模三下, 乘之以歸, 無何, 其妻有姬, 父母誌之, 妻具說其故. 其父後個得 焉, 換擊十餘下, 乘之, 遂至吳會. 吳人以爲妖, 遂殺之. 般又爲木范乘之, 遂獲父尸, 怨吳人殺其父. 於肅州城南,作一木仙人,擧手指東南. 吳地大早三年. 卜 曰 ; 般所爲 也, 責物具千數謝之, 般爲斷一手 . 其 日 吳中大雨.>

노반에 관한 전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 재미가 있으며 끊임없이 전 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바로 노반이 자기의 여동생인 노 강(魯姜)과 재주를 겨루어 조주교(趙州橋)를 만든 이야기이다. 조주교는 안제교(安濟橋)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하북성 조현(趙縣)성 남 쪽 약 5 리쯤 되는 곳에 있다 . 그 다리는 교하(汶河)의 양쪽 기슭에 걸쳐져 있으며 본래 수(隋)나라의 대건축가였던 이춘(李 春 )이 만든 것이다. 그러 니 지금부터 무려 천삼백 년 전에 만들어진 다리이다. 그런데 민간전설 속 에서 그 다리는 이춘이 만든 것이 아니라 노반이 만든 것으로 전해지고 있 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잘 알고 있으며 또한 오랫동안 받들어오던 노반에 게 그 다리를 만든 공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O 즉 노반이 그의 누이동생 인 노강과 재주를 겨루기 위해서 하룻빔- 사이에 만들어 낸 다리라고 한다 . 당시 노반은 성 남쪽의 큰 돌다리를 만들기로 했고 노강은 성 서쪽의 작은 돌다리를 만들기로 하였다 . 초경(初更)부터 시작해서 닭이 울 때까지 끝내기로 했는데 한밤중이 지날 무렵 노강은 다리를 다 만들었다 . 그래서 얼른 성 남쪽으로 가 오빠가 다리를 만드는 모습을 몰래 살펴보았다. 오 빠는 한 떼의 양을 몰고 오는 것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양이 아니 라 눈처럼 희고 고운 돌덩어리들이었다. 노강은 자기가 이미 만들어 놓은 다리가 아무래도 오빠가 만드는 다리보다 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다시 돌아가 이미 완성시켜 놓은 다리에 열심히 예술적인 장식을 하기 시작했 다. 그녀는 하늘에서 내린 듯한 귀신 같은 솜씨로 다리의 난간에 여러 가 지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을 하였다. 그녀는 <견우와 직녀(牛郞織女)>라 든가 <단봉조양(丹鳳朝陽)> 같은 문양들을 꼼꼼히 새겨넣었는데 날이 밝 기도 전에 일을 다 끝낼 수 있었다. 그녀는 오빠를 골탕먹이기 위하여 일 부러 수탉의 울음소리를 흉내내어 꼬꼬댁 __- 하 고 소리를 질렀는데 사

光 果 張

장과로( 『神 仙』)

방의 닭들이 그 소리를 듣고 함께 울어대기 시작했다 . 그때 노반은 아직 돌 두 개를 덜 얹어놓은 상태였다 . 그런데 갑자기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 오니 나머지 돌 두 개를 급히 쌓아올렸고, 결국 닭울음 소리가 그쳤을 때 에는 마침내 다리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17)

17) 『民間文學』 1957 年第 4111] r 魯班故 事 十一篇 • 趙州橋』 참조.

조주석교(趙州石橋)가 완성되자 그 다리가 튼튼하고 구조가 훌륭하다는 소문이 인근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 팔동(八洞)의 신선(神仙)들®도 그 소 식을 듣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장과로(張果老) @ 가 나귀를 타고 바퀴 하 나 달린 수레를 탄 시왕(柴王)과 함께 그 다리를 구경하러 왔다? 나귀 둥에는 태양과 달을 실었고 수레에는 4 대 명산(名山)을 실었는데, 그 나귀 와 수레가 다리룰 건너가니 다리가 혼들혼들하여 금방이라도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노반은 너무 급하여 얼른 물속으로 들어가 두 손 으로 가운데를 받쳤는데 그렇게 해서야 겨우 다리를 지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리의 받침과 본체는 이런 시련을 겪은 뒤 더 튼튼해졌다. 지금 도 다리 위에는 장과로가 타고 지나갔던 나귀의 발자국이 7_8 군데 남아 있고 시왕의 마차바퀴 자국과 노반이 다리를 받쳤던 손자국이 두 군데 남 아 있다고 한다 .181

18) 『人民日報』 196 ¥f 4 月 26 日 r 學術硏究』 胡道靜 r 趙州橋傳說的解釋和記錄』 참조.

역자주 주전편·상 제 1 장 ® 『呂氏春秋』, r 音初篇』에 보면 周公이 신여미를 西崔에 봉하였다는 구절이 나온다. <周昭王親將征荊 辛餘院長旦多力爲王右, 還反涉漢, 梁敗, 王及蔡公採於漢中, 辛 餘磨振王北濟, 又反振蔡公, 周公乃侯之於西租, 質爲長公.> 여기에서 <荊>은 <楚>를 가리키며, <梁敗>에 대하여 兪越은 <天子造舟爲梁, 舟敗卽梁敗也>라고 하여 천자의 배가 가라앉은 것이라고 하였다. 『初學記』 卷 7 에서는 『竹書紀年』을 인 용하여 <周昭王十六年伐楚荊, 步漢, 十九年, 喪師於漢>이라 하고 『史記』, r 周本 紀』 正義에서는 『帝王世紀』를 인용하여 <昭王德哀, 南征, 濟於漢 . 船人惡之, 以霧 船進王, 王御船, 至中流, 關液船解, 王及祭公供沒於水中而崩. 其右卒游磨長普旦多 力, 游振得王 周人諱之>라 하고 있는데, 王逸注의 내용과 비슷하다. @ 『史記』, r 秦本紀」에 보면 <穆天子傳, 穆王有八駿之乘>이라고 되어 있는데 菓解에 <因其毛色以爲名號, 穆王傳曰, 赤隨·盜屬·白義·渠黃.驛碧·諭論·綠耳·山 子>라 하고 있다. 한편 『列子』, 「周穆王Jo]]는 <勘器 • 綠耳 • 赤隨 • 白婆 • 渠黃 • 諭 論 • 盜屠 • 山子> 둥의 이름이 나오는데, 글자가 약간씩 다를 뿐 거의 비슷하다. ® 『楚辭』, 潭駿」에 보면 <望崎粧而勿迫>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王逸注에 <崎磁 日 所入山也, 下有蒙水, 水中有處淵>이라 하여 <태양이 지는 곳을 엄자라고 이른다> 고 하였다. 한편 『山海經』, 『西次四經J에도 <鳥鼠同穴山 …… 西南三百六十里, 曰 崎粧之山>이라고 되어 있다. ® 『산해경』, r 서차삼경」의 기록 ® 『山海經』 이후 서왕모 형상의 변화에 대해서는 제 1 권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 있거니 와, 중국 신화 중에서 가장 변화의 단계가 뚜렷하게 보이는 인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穆天子傳』에서 이미 아름다운 서방의 帝女로 변한 서왕모는 『漢武內傳』과 『漢武故

事효를 거치며 왕모로서의 확실한 형상을 갖게 되고, 『神異經 g 에 이르면 東王公과 配 偶l[1l |1 을 이루게 된다 . 한편 서왕모의 성격에 대하여 朱芳1iJll는 『 中國 · 占 1 t亂 |1 話與史 1;[ 』, 「西王母考』에서 서왕모가 서방 毅族의 神毅 (神母)라 하고 있는데, 袁fnJ는 『 中國神 話史』에서 그 의견에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 r 中國神話史 』 , 56 쪽 참조). 하늘의 형벌 을 관장하던 원시형태의 신 서왕모가 점차 변화하여 淡代에 이르면 드디어 동왕공의 배우자로 형상화되는데 璋 11 異經』, 「中荒經』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 上有 大 , R, 名曰希有, 南向 張左翼覆東王公, 右'합役西王母. 背上小處無羽, 一菓九千里. 西王母歲登翼上, 會東王公也.> 그리고 陶弘泉의 떄턴룹占』 r 甄命授J에도 <著썸 샵!, 入 天 r,; 損金母, 拜木公>이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여기에서 <金母>는 서왕모요, <木 公>은 동왕공을 가리킨다. ® 서해에 살고 있다고 하는 엄자신에 대해서는 『山海經』「大荒西經」에 다음과 같은 기 록이 있다. <西海陸中, 有神人面鳥身, 펴兩靑蛇, 賤兩赤蛇, 名曰 ~n.> 神懿行은 이라 하였다. <靑蛇>와 <赤 蛇>가 바뀐 것 이의에는 북해의 신 우강과 생김새가 똑같다. ® 禹强은 『山海經』, r 大荒東經」에 의하면 동해의 신 禹統의 아들이라고 한다 . 黃帝가 우호를 낳았고 우호가 禹京(禹疆, 禹强)을 낳았으며 우경은 북해에 거하였고 우호는 동해에 거하면서 海神이 되었다고 한다. <黃帝生禹視, '벗J統生禹京, 禹京處北海, 禹 統處東海, 是爲海神.> 『海外北經』에 의하면 禹强은 <人面鳥身, 펴兩 靑蛇, 錢兩赤 蛇>라고 한다. ® 대부분의 영웅 감생신화를 보면 감생의 대상이 나타나는 경우와 나타나지 않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서언왕 신화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后稷 신화의 경우 姜姬은 <大 人跡>에 감응하였고(『詩經 』, r 大雅』), 殷의 시조 契의 경우 簡秋이 <玄鳥>의 알을 삼키고 태어났다(『詩經』, r 商碩』) . 고구려 朱蒙의 경우에도 柳花가 < 日 光>에 감옹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三國史記』, r 高句麗本紀」). 滿族의 시조모 佛庫倫은 朱果 를 먹고 愛新覺羅布庫里雍順울 낳았고(『淸太祖武皇帝質錄 』 ), 또다른 만족의 蘇蘇 覺羅에서는 검은 돌에 감응하여 낳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白族의 경우에는 沙登가 나무토막에 감옹하여 九隆을 낳았다고 한다(『華陽國志』, r 南中志」 四). 한편 뚜렷한 감옹의 대상이 없이 그냥 <알>을 낳는 경우도 있는데 서언왕 신화처 럼 그냥 임신하여 알을 낳았다고 하는 경우, 또 신라 석탈해 신화의 경우처럼 임신한 지 7 년만에 그냥 알을 낳았다(『三國史記』, r 新羅本紀』, r 脫解尼師今」 …… <初其國 王姿女國王女爲妻 有振, 七年乃生大卵>)고 하는 경우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김선자, 『中國感生神話硏究J, 『中國語文學論集』 第 7 號 참조, 중국 어문학연구회, 1995) ® <영웅의 기이한 탄생-+버려짐-+사람이나 동물 등 조력자의 도움-+고난의 극복-+

민족의 시조, 혹은 지도자 > 라는 과정은 대부분 영웅신화의 전형화된 특징 중 하나이 다 . 심리학적 측면에서 그 과정 을 분석한 조셉 캠벨의 예( 『 세계의 영웅신화 5 참조)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그리고 그러한 <틀> 이 우리나라나 중국의 모든 始祖 탄생신화 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버려진 아이> 모티프는 어느 정도 세 계적인 보편성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서언왕뿐 아니라 후직의 경우, 주몽의 경 우는 거의 그 내용이 비슷하고 탈해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 蒙古 杜爾伯特族 시 조의 경우 역시 나뭇가지에 버려진 아이가 지도자가 되었는데(楊亮才 • 陶立播 等, 『中國少數民族 文 科!』 , 29 쪽, 人民出版社, 19& 5) 이러한 예는 중국 내 非淡族神話에 서 매우 자주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특히 <영웅의 기이한 탄생 > 에 있어서 東夷 族 의 경우 < g陀t>이라는 독특한 형태를 보이는데, 서 언왕 신화 역시 난생신화의 분 포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때 우리 민족과의 상관성이 분명히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 2 장 CD 강에 이르러 건너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물속의 자라들을 불러내어 건너가게 되었다 는 부분은 『三國迫事』 에 나오는 朱蒙의 이야기와 흡사하여 앞에서 언급했던 <卵生> 과 더불어 우리나라 신화와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 仁三國遺#』 卷 1, 『高 句麗本紀」를 보면 金珪王의 왕자들과 신하들이 朱蒙울 해하려 하자 어머니가 주몽 을 떠나보내는 부분이 나온다. 朱蒙이 烏伊 등 세 친구과 함께 도망치다가 i危水에 이 르렀을 때 배가 없어 추격자들에게 잡히게 되었는데, 스스로를 天帝의 아들이며 河伯 의 손자라고 하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나타나 다리를 만들어 주어 무사히 건너게 된다 는 이야기이다(於是 蒙與烏伊等三 人爲友, 行至俺水, 告水曰, 我是天帝子, 河伯孫, 今 日 逃通 追者垂及, 奈 何. 於是魚簡成橋, 得渡而橋解, 追騎不得渡). 비슷한 기록이 r 東明王篇』에도 보이는데 내용은 바슷하지만 강에 다다랐을 때 <操弓打iiiJ水>라는 대목이 나온다. 중국측 사료인 『三國志』, r 東夷傳」에도 <以弓擊水>, 『梁舌.!, 『東夷 傳」에도 <以弓擊水>라고 하는 구절이 보인다. 여기서의 <弓>은 천제의 자손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자세한 해석에 대해서는 崔珍源의 뎃札성(i1 l1 話考釋』, 102-114 쪽을 참조하라(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 1994). ® 范寧의 『博物志校證J, r 物名考』를 보면 <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교증해 놓았다. <桂緩『札模』, 卷三云… ••• r 張華博物志 …… 周穆王有犬名래.’ 案『玉篇』, 『래』, 力 才 • 力次二切, 强毛也 亦作??. 複謂井當作廣. 『說文』 …… ‘ffi, 껍曲毛, 可以著起 衣, 從祭省來랑」 擔此, 卽‘래’當作‘策', ‘白’當作‘曲'> ® 玉女는 仙女로서 帝宮에 살고 있으며( 『史 記』 , r 司馬相如傳」 …. .. <排閣閩而入帝 宮令 射玉女而與之歸>) 東王公과 함께 투호놀이를 한다. 특히 투호놀이를 하는 것

에 대해서는 『神傑經』, r 東 荒經 』에 그 기록이 보인다 <東Ji\; 1 1. 1 서나 子大石室 , 東王公 居焉 長一丈 頭裝皓白 人形(ti/iiiij u 반군, 載一黑俺 左右顧望 恒與一玉女投盛, 每投 千 二百急 設有入不 出 者, 天爲之뗄翰 ; 協出而脫誤不接者, 天爲之笑.> 한편 李 白은 그의 작품에서 이 부분을 전고로 사용했는데 대豆歌行」의 <天公見玉女, 大 笑 低千場>, r 梁 甫'今』의 <帝芳投産多干.女, 三 時大 笑 ' H ' 끓光, 條棟 |I 每冥起風雨>가 바 로 그러한 예이다. @ <女항>이라는 이름은 『太平廣記』 卷 119, 냐土伯』條에 보면 <女鳩> 라고 나온다 . 『太平廣記』 에 실린 것은 뀜설究記』에서 인용한 것이다. ® 이 이야기와 흡사한 것으로 『太平廣記』 卷 119, 냐土伯』 條 밑에 나오는 『燕 臣 莊 子 儀』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燕나라 簡公이 아무 죄도 없는 莊子儀를 죽였는데 장자 의가 하는 말이 바로 杜伯이 죽으면서 한 이야기와 거의 비슷하다. < 죽은 자가 아무 것도 모른다면 그만이지만 만약에 지각이 있다면 삼 년을 넘기지 않고 임금이 깨닫게 하도록 하겠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일년이 지난 뒤 燕나라 祖澤에서 큰 제사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고 있는 중에 簡公이 제사를 주관하기 위해 오고 있었 다. 그때 원귀로 변한 장자의가 붉은 몽둥이로 간공을 치니, 간공이 수레 위에서 죽었 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두백의 이야기와 거의 흡사하다(燕臣莊子儀, 無罪而簡公殺 之 子儀曰, 死者無知則已, 若有其知, 不出三年. 當使君見之. 明年, 簡 公將祀於祖 澤 燕之有祖澤, 猶宋之有桑林, 國之大祀也. 男女觀之. 子儀起於道左, 荷朱杖擊公, 公死於車上). 卷 119, r 報應 18 究報」에는 이 밖에도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 사냥터에서 활로 원귀를 죽이려고 하는 이 대목을 보면 公子 彭生 의 이야기를 떠올 리게 된다. 魯 桓公 18 年, 齊侯와 魯公이 만났는데 齊侯가 公子 彭生 에게 魯公을 도 와 수레에 오르도록 하였다. 그런데 魯公이 수레 안에서 죽게 되자 魯나라 사람들이 이로 인하여 齊侯를 비난했다 . 그러자 齊侯는 彭生을 죽여 사죄를 하였다. 莊公 8 年 에 이르러 齊侯가 貝丘 일대에서 돼지사냥을 하는데 커다란 돼지 한 마리를 보게 되 었다. 좌우의 시종들이 그것을 公子 彭生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齊侯 가 노하여 <彭. 生이 감히 나를 보러오다니!>하며 활을 들어 쏘았다 . 그러자 돼지는 사람처럼 일어나 서 우는 것이었다. 齊侯가 놀라서 수레에서 떨어지고 다리를 다쳤으며 신발도 잃어버 렀다(莊公八年, 冬十二月, 齊侯遊於姑芬, 遂田於貝丘. 從者曰, 『公子彭生也』 公怒 曰, r 彭生政見!』 射之. 家人立而暗. 公權 , 四於車. 傷足, 喪履.)(『左傳』「莊公 8 年』). ® 이유도 없이 죽음을 당해 怨鬼가 되어 돌아와서 자신을 해친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 는 이야기는 伯有의 故事에서도 보인다 백유는 鄭나라 사람이었는데 술을 좋아하여 政事를 돌보지 않았다. 그러자 閉帶와 公孫段이 子哲을 도와 백유를 죽였다(이 이야 기는 『左傳』, r 襄公 30 年 • 傳J에 보임). 魯 昭公 7 年에 鄭나라 사람이 갑자기 백유

가 온 것을 보고 놀라 도망쳤다 . 어떤 사람의 꿈속에는 백유가 나타났는데 갑옷을 입 고 말하기를 r 壬子 日 에 맘四帶를 죽이고 내년 壬襄 日 에는 公孫段울 죽이리라』고 하였 다고 했다. 임자일이 되자 정말 開{,I 1 가 죽어서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임인일에는 公孫段도 죽으니 사람들이 더욱 무서워하였다. 공손단이 죽은 지 두 달되 는 때에 子産이 公孫波과 백유의 아들 良止를 시켜 백유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니 재 앙이 비로소 그쳤다(鄭人相整以伯有, 曰 …… r{13 有至矣!」 則皆走, 不知所往. 鑄刑 맙 之歲二月 , 或夢伯有介而行, 曰 …• •• r 壬子, 余將殺帶也 . 明年壬寅, 余又將殺段 也」 及壬子, 開帶卒, 國人益權. 齊 ·燕平之月, 壬寅, 公孫段卒, 國人應儒. 其明月, 子産立公孫浪及良止以撫之, 乃止,)(『左{성』, 『昭公 7 年」). ® 무고하게 사람을 죽여 자신도 죽음을 당하게 되는 이야기는 이 밖에도 꽤 있다. 댓 太 平廣記g l] 나오는 r 陶腦之』의 이야기 역시 무고하게 죽은 사람이 怨鬼가 되어 돌아 와 자신을 죽인 자의 목숨을 가져간다는 구조를 지닌다. 元嘉 末 株陵縣令이던 도계 지가 아무 죄도 없는 樂使를 무고하게 죽게 만드니 樂使가 원귀가 되어 도계지의 꿈 속에 나타나 그의 목숨을 취한다는 이야기이다(陶繼之, 元嘉末爲株陵令, 쌉任殺樂 使. 夜夢使來云, 昔托見殺, 訴天得理, 今故取君. 遂挑入陶口, 例落腹中, 須텃復出, 乃謂曰, 今直取陶株陵, 亦無所用, 更議上丹陽耳. 言訖井沒, 陶未幾而卒, 王丹陽果 亡.)(『太平廣記』 卷 323, 引 『 述異記』). 이것보다 卷 119 에 나오는 r 太樂使」 條의 이 야기가 더 길고 자세하다. 여기에는 도계지가 나홀만에 죽은 후 집안도 가난해지고 두 아들도 모두 일찍 죽었으며 겨우 손자 하나만 살아남았다고 하는 등 원귀의 복수 가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 杜伯의 영혼이 <鬼>로 변하여 복수를 하는 형태의 이야기는 엄밀하게 말하여 <鬼 話>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袁fiiJ는 이 이야기를 귀신이 등장한다고 해서 鬼話가 아니라 그 내용으로 볼 때 <신화>라고 하였지만(『中國神話史』, OO-81 쪽), <鬼話> 의 범주에 넣는다고 해서 그 이야기의 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OO 년 대에 들어서면서 <鬼話>는 이미 하나의 용어로 정착되었다고 여겨지는데, 文彦生 같은 사람은 한걸음 나아가 鬼話의 발생이 신화보다 앞선다고 하였다(『鬼話, 中國神 話形式的中介』, 『民間文藝季刊』, 1989 年 第 2 期). 한편 鬼話의 발전형 태를 原生態와 衍生態, 新生態의 세 단계로 구분한 徐華龍은 鬼話의 가장 확실한 특색을 <인간과 귀신 사이의 갈등 • 분쟁 • 원한 • 연애 • 우정>이라고 설명했는데(『中國鬼話』, 『前言』, 上海文藝出版社, 1900), 그렇게 볼 때 杜伯의 이야기야말로 가장 전형적인 <鬼話> 라고 생각된다. ® 계모에게 핍박을 받다가 죽어 원귀가 되는 이야기는 아마도 <동양의 윤리권 내에서 혼히 생겨난 원사설화>(김태준, 『朝鮮小說史』)로 보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장화 홍련전』뿐 아니라 『김인향전』 역시 같은 구조를 가지는데 대부분 가해자였던 계모가

응분의 벌을 받고 죽은 자는 解 '兒 · 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 원귀설화의 유형과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安炳國, r 鬼神,:Jt。읽· 硏究 h , 제 3 부 참조(도서출판 企; :,: 18 j, 1994). 제 3 장 ® 자연과 인간아 서로 감응하기 때문에 윤리적인 질서 체계가 흔들리면 자연재해가 나 타난다고 하는, 일종의 災異說이다. 특히 군주가 천명을 잃었을 때 여러 가지 이상한 징조들이 나타난다고 하는 이 재이설은 范仲ff의 天人感應說에서부터 확립되어 淡 代를 풍미했던 說인데 王充에 이르러서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된다. ra,fui ~r J , r 自然」편 을 보면 <夫今之天, 古之天也. 非古之天厚, 而今之天薄也. 認告之 言 生)冷今者, 人 以心淮況之也>라고 하여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연은 변함없을 뿐, 하늘이 견책하고 경고한다는 억설이 오늘날 제기된 것은 <인간이 주관적인 마음에서 미루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하여 재이설을 부정하였다.(김제란의 논문, 『한대 기 일원론의 전개와 그 갈등나동중서의 천인상감론과 왕충의 천인분이론」, 『논쟁으로 보는 중국철학』에 간 략하고 명료하게 설명되어 있어 참고로 할 만함 . 예문서원, 1995). 하지만 袁河가 소개한 대로 이러한 이상한 자연징조들을 모두 <신화전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 여자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근원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중국에서 그 유래가 오래되었 다. 각각의 고대 왕조마다 멸망할 때에는 그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는 악한 여인이 있 었다는 것인데 포사와 달기 • 서시 둥이 그 오명을 쓰고 있다. 그리스 신화가 부계사 회로 진입한 이후에 확립된 것임을 알게 해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판도라의 상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세상 모든 악의 근원이 판도라가 상자를 열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그것 역시 불합리한 오명이다. 열어 보아서는 안 될 상자를 제공한 것은 제우 스였고 왕조 멸망의 원인은 討나 架, 夫差 등의 무도함에 있는 것이지 결코 한 명의 여인이 나라를 뒤흔들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트로이 전쟁의 원인 역시 파리스를 따 라간 메넬라오스왕의 아내 헬레나에게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교역의 요충지인 토로 이룰 차지하려던 그리스 지배 계충의 경제적 욕구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신화전설 속에서 많은 여인들이 왕조 멸망의 책임을 지고 있지만 그것은 어 떤 면에서 볼 때 원시사회 초기의 위대한 大地母의 역할에서 父權에 그 위대함을 빼 앗긴 女神들의 지위 상실과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여신들의 지위 상실에 관해 서는 진 시노다 볼린著, 조주현 • 조명덕譯, 『우리 속의 여신들』 참조, 도서출판 또하 나의 문화, 1994. 4). ® 伯陽이 읽었던 책에 대해 『史記』, r 周本紀』 正義에는 <諸國皆有史以記事, 故曰史 記>라고 되어 있으나 『國語』, r 鄭語』에는 襄似의 일이 기록된 책이 냉ii語」라고 되

어있다. 즉 周』:의 篇名 중의 하나이지만 伏失되었다고 한다. @ 이것이 용의 <침> 인지 <정 액>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r 國語』 , r 鄭 語」에는 그것이 <樣>라고 되어 있고 『 史記 ;; , 다재本紀』 菓解에는 韋昭注를 인용하 여 <原 龍所吐洙 洙, 龍之精氣也>라고 되어 있다. 한편 治 1\ 의 董增 h 습이 撰한 『國語正義』 疏(巴蜀꿉社, 1985) 에서는 <『漢 占』 , 「五行志」, 樣, 血也. 應昭曰, 樣, 洙 也. 鄭氏旦 樣, 音牛胎之胎, 案韋解與應氏同義>라 하여 소가 되새김질할 때처럼 침이 홀러나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 재앙이 닥쳤을 때 여성의 속옷을 내걸거나 서답을 장대에 걸어 두어 재앙을 막으려 는 습속은 우리나라에서도 보인다 . 진도의 도깨비굿이 바로 그러한 예인데, 마을 공동 체가 가뭄이나 역병으로 인하여 위기에 직면했을 때 여성들의 생식능력을 주술적 역 량으로 변화시켜 공동체를 살리려는 제의를 행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주강현은 <반란의 제의 , 혹은 제의적 반란>이라고 부른 바 있다( 『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ii, 한겨 레신문사, 1996).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서도 자주 보았듯이 여성의 이러한 생식능 력은 금기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또한 풍요의 상징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 <祖> 이 커다란 자라인가 혹은 도마뱀인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견해가 줄곧 있어 왔다 . 앞에서 인용했던 『國語正義』에 보면 解에는 <爾, 或爲玩. 玩, 斯賜也, 象龍> 이라고 되어 있고, 疏에는 <解爾或至象龍. 댕炳 B 』, 「五行志』 引韋昭曰, 元, 黑碩, ¢浙賜也, 似蛇而有足, 與此解象略不同>이라고 하였다. 『史記』, 『周本紀」 索歷에서 도 <斯賜>이라는 說을 채용하고 있지만 『爾雅』 둥에서는 라고 하기 도 한다 . 역자는 여성의 생식능력과 뱀의 밀접한 관계가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 임을 감안하여 <도마뱀>이라고 해석하였다 . ® 본래 처음에 출판되었던 책에는 이 부분 바로 뒤에 <이어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 바로 춘추시대인데 이때부터 비교적 상세하고 진실된 역사 기록이 시작되게 된다. 그와 동 시에 신화와 전설의 시대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던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1986 년에 中國民間文藝社에서 한 권으로 출판된 『中國神話傳說』에는 이 부분이 빠 져 있다. 저자의 <넓은 의미의 신화> 개념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 이전의 <좁 은 의미의 신화>라는 개념으로 보면 확실한 역사시대인 춘추시대부터룰 <전설의 시 대>로 보았었지만 <넓은 의미의 신화> 개념을 채용한 이후로는 역사시대 이후의 인 물들에 관한 이야기까지 모두 <넓은 의미의 신화>에 포함시켰다. 이로 인하여 신화의 범위 문제에 대한 논쟁이 촉발되어 80 년대 신화학의 주요 논쟁 중의 하나가 되었다. 제 4 장 ® 靈王은 簡王의 아들로 이름은 世心이다(B. C. 571-545).

® 겅 .: {dj . ; , 대召公 26 年」, <至於샀王, 生 if 1 j 1 -J亂 \, 王 4L 神 聖, 無惡於諸低 寂王晟王克終 其世.> 杜注云, <았王 , 定王孫.> ® F 捨 迫 5 라에 보면 는 <亦名宜 II {{ > 라고도 한다. @ 사람의 모습을 그려놓고 거기에 대고 활을 쏘아 그 사람 을 병들게 한다는 것은 프레 이저의 용어를 빌면 < 모방 주술(Imit a ti ve Ma gi c)> 이라고 할 수 있는데(프레이저署 이경덕옮김 , t 그림으로 보는 황금가지 』, 5.3쪽, 까치, 1996), 이것은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장면이다. 장희반이 인현왕후의 인형을 만들어놓고 주술을 걸었다는 것은 모 두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거니와 중국의 경우에도 이러한 일이 빈번하게 있었다. 아메리카 오지브와 인디언은 나무로 인형을 만들어 머리나 심장에 침을 꽂거나 활을 쏘아 주술을 걸었는데 바로 이 책에 나오는 내용과 홉사하다. 프레이저는 『황금가지』 에서 이 밖에도 비슷한, 구체적인 예를 여러 가지 들고 있는데 이러한 주술이 비단 원 시부족이나 원시인뿐 아니라 문명이 발달했다고 여겨지던 역사시대 유럽에서도 행해 졌다는 것은 홍미롭다(베르사이유 궁전에 전시되어 있는 진흙인형의 곳곳에도 작은 바늘이 무수히 꽂혀 있다) . 한편 주술을 걸고자 하는 대상의 손톱이나 머리카락 동을 가져다놓고 그것에 직접 주술을 거는 것은 < 접촉 주술 (Con tagi ous Ma gi c) > 인데 하 편에 나오는 간장과 막야의 전설이 바로 그런 것에 해당된다 . 이 두 가지를 합하여 <공감 주술 (S ymp a th e ti c Ma gi c)> 이라 총칭한다 . ® 『捨遺記』 원문에 의거하면 <困髮皆黃> 뒤에 이어 <非諦俗 之類也. 乘遊龍飛) , 飮之 體, 綿 以 靑 綿>라는 구절이 더 보인다 . 그리고 <紫照文爵, 皮爵是 …… > 는 <紫照文 潟 照槪是 ……>로 되어 있다 . @ 『 捨遺記』 卷 3 에 보면 哀 弘이 두 명의 神人을 부르는 장면은 나오지만, 그가 姜太公 이 제후를 불러모으던 방법에 관해 설명하는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이 장면에 뒤이어 容成子가 孟王에게 간하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 < r 大王以天 下爲家, 而染異術,使嬰 夏改寒, 以誤百姓, 文武周公之所不取也」 王乃疏襄弘而求 正練之士.> 여기에 나오는 <容成子>는 『 列仙傳』에 나오는 <容成公>과 이름이 비 슷한데 『列仙傳』의 <容成公>은 <自稱黃帝師, 見於周穆王, 善輔導之術>이라 되어 있다 . 襄 弘이 邪術을 부리는 것을 취하면 안 된다고 간하는 것으로 보아 옳은 견해를 피력하던 靈王의 측근임은 분명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 『 史記』, 『封禪 書 」에 보면 <埋首>가 <維首>로 표기되어 있다(『史記』 卷 28, 『封禪 凱 第 6, 洪氏出版社, 1364 쪽). 그리고 저자 인용문의 마지막 부분에 뒤이어 <周人 之 言 方怪者自哀弘>이라는 구절이 더 보인다. 이 밖에 다른 여러 典籍을 보아도 投 弘에 관해 긍정적으로 묘사한 기록은 없다. ® 袁河는 『史記』의 <埋首>를 逸詩의 篇名으로 보지 않고 동물의 구체적인 이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들고양이 머리>라고 해석하였는데 이것은 일리가 있는 해석

으로 보인다 王利器 t糸晶 『史 ,. , d 汗F ? 』 ( 三 秦出版社, 1988) 에도 같은 해석이 나오는데 합리적이어서 참고로 할 만하다 <성£首>는 본래 逸詩의 篇名으로 <장 I> 는 일명 <不 來>라고도 한다. 그리고 <首>는 <先>이다. <1l 首>詩에 보면 <射諸侯首不朝者> 라는 말이 있어 『정l 首』를 편명으로 잡은 것이다. 投弘이 朝堂에 를 설치하고 그것들을 제후로 여겨 활을 쏘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했다는 것인데, 이렇게 볼 때 본래는 逸詩의 편명이었던 <갱旦首>가 여기에서는 <오지 않은 제후>둘을 상징 하는 구체적인 동물로 변한 것이다. ® 『史記』, r 封禪 占 』의 기록에 의하면 良弘은 晉人들 때문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즉 周 쯤王 때 晉 의 대부 范吉射 • 中行寅이 난을 일으켰는데 孩弘이 그 일에 연루되 었다. 晉人 이 군대를 일으켜 周室을 침범하니 周人들이 哀弘을 죽였다고 되어 있다. ® 叔向의 字는 叔탄라고도 하며 楊(山西 洪洞縣 東南)에 食邑이 있었다. 그는 晉나라 悼公(B. C. 572-558), 平公(B. C. 557-532), 昭公(B. C. 531-526) 의 三代에 걸친 元老였 고 平公의 太傅였으며 나중에 上大夫가 되어 의교직무를 맡아 보았다. 무려 32 년 간 에 걸쳐 각국을 다니며 외교직무를 수행하였으므로 당시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다. ® 良弘이 아는 것이 많은, 뛰어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식 때문에 죽음을 당 하게 된 것에 대해 『淮南子』, 『穆稱訓」에서는 <故子路以勇死, 哀弘以智困, 能以智 知, 而不能以智不知也>라고 평했고, 『齊俗訓」에서는 <故襄弘師腦, 先知禍福, 言無 造策, 而不可與衆同職也>라고 하여 자신의 길흉화복은 알지 못했음을 언급했다. @ 『姜子春秋』, 뎃『下』 ; <嬰目]之 ; 聖人千慮 必有一失 ; 愚人千慮, 必有一得.> 『史記』, 確陰侯列傳』 ; <廣武君曰 ; 臣開智者千慮, 必有一失 ; 愚者千慮, 必有一 得.> ® 『淮南子』, rm 論訓」에 보면 여기에 이어 大夫 文種과 哀弘, 그리고 蘇秦 둥, 재주 가 뛰어났으면서도 죽임을 당한 인물들에 관한 서술이 이어진다 . <此皆達於治亂之 機 而未知全性之具者, 故獲弘知天道而不知人事, 蘇秦之權謀而不知禍福.> 그리고 r 說山겁 II 」에도 大夫 文種과 襄弘이 나라를 강하게 하는 도리 같은 것은 알면서도 멀 리 자신의 운명까지 내다보지는 못했다고 하는 내용이 보인다. <大夫種知所以强越, 而不知所以存身 ; 襄弘知周之所存, 而不知身所以亡. 知遠而不知近也.> ® 이 책에서 저자는 『淮南子』의 기록에 의거하여 襄弘의 죽음이 叔向의 계책 때문이 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襄弘의 죽음에 대해서는 몇 가지 다론 기록이 있다. 우선 王 應類은 『困學紀聞』에서 <良弘이 죽을 때 叔向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다(韓 子內備說謂叔向誤哀弘, 接左傳哀三年周人殺襄弘, 叔向之沒久矣)>라고 하여 의문 을 제기하였다(『困學紀聞』 卷 10 「諸子」, 世界書局版, 593쪽). 『左傳』, 「哀公 3 年」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劉氏 • 范氏世爲婚姬, 哀弘事劉 文公, 故周與范氏. 趙陝以爲討 六月폿卯, 周人殺襄弘.> 여기에서 劉j氏는 周나라

卿-j:이고 范氏는 晉 나라의 大大였는데 여기에서 趙革央이 없애려 한 것은 바로 此弘 이었다. 『 莊子』, 「壯 陵篇 」, 『 ~:,i ~ I : 子 J , 댓1 t 言 篇 」, 매:南子 』 , 「 i u 論篇 』에 의하면 良弘 은 車裂刑을 당해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록들을 보면 此弘의 죽음은 叔f[; J의 계책 때문이 아니라 趙革央으 로 인해 周人들 이 죽안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F 捨迫記』 卷 3 에 보면 段弘의 죽음에 관해 전설적인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異方 에서 玉人 과 石鏡을 공물로 바쳐 왔는 데 그 돌은 빛깔이 달처럼 희고 밝아 얼굴을 비추면 눈처럼 희게 보였다 . 그래서 그것을 '月鏡’ 이라 하였 댜 또 玉人 은 기계가 달려 있어 스스로 움직일 수 있었다. 猿弘 이 그것을 보고 왕에 게 r 모두가 聖德 덕분입니다』라고 말했는데, 孩 弘이 너무 아부한다고 여겨 周 나라 사 람들이 그 를 죽였다(時 異方貢玉人 · 石鏡, 此石色白如月, 照面如雪, 謂之月鏡. 有玉 人, 機庚自能轉動 . 投弘言於王旦 聖德 Ff r招也. 故周人以良弘幸姬而殺之)>라고 되 어 있다 . 이것과 비슷한 것으로는 『太平廣記』 卷 403, r 月鏡』 條 에 이 책을 인용한 것이 있 는데 그 내용이 조금 다르다 . <有侍臣襄弘, 巧智如流, 因而得侍長夜冥樂. 或俳講偶 笑,有殊俗之使,百戱閉列,鐘石井奏;亦戱異方珍寶,有如玉之人,如龍之錦,亦有 如鏡之石, 如石之鏡. 此石色白如月, 照面如雪 , 謂之‘月鏡 '. 玉人皆有機根, 自能蔣 動, 謂之 機硏 良弘言於王曰 ; '聖 德 Ff r招 也.’ 故周人以弘媒話而卒殺之.> ® 『呂 氏 春秋』 , r 必己篇」에 보면 <人主莫不欲其臣之忠, 而忠未必信, 故但員流平江, 哀弘死, 藏其 血三年而 爲碧> 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보이는데 陳奇獸는 『呂 氏 春秋校 釋』에서 <碧> 이라는 단어 자체에 이미 <玉> 이라는 뜻이 들어 있으므로 <碧玉> 이 아니라 그냥 <碧>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였다. 떄[子』, r 外物篇』에도 <玉> 자는 보 이지 않으며 『淮南子』, r 堅形訓 』 注에도 <碧 , 靑玉也> 라고 하였고 『說文』에도 <碧>은 <石之靑美者> 라 하였다(學林出版社, 831 쪽) . 『捨遺記』 卷 3 에 보면 <… … 流血成石, 或言成碧 , 不見其尸矣>라고 하여 装弘 이 죽음을 당한 후 흘린 피가 푸른 玉으로 변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投神記』 卷 11 에도 <주 영왕 때 장홍이 죽음을 당했는데 촉땅의 사람들이 그 피를 담아 두었더 니 삼 년 뒤에 푸른 옥으로 변하였다 (周靈王時, 哀弘見殺, 蜀人因藏其 血, 三年, 乃 化而 爲碧 )>라는 구절이 나온다. 뎃설神記』의 기록에 <蜀人> 이라는 단어가 보이는 것이 특이하다. 제 5 장 ® 춘추시대 晉나라의 악사로 字는 子野, 음악에 정통했으며 音올 분별해서 吉凶울 아 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左傳』, 『襄公 18 年 』에 보면 그러한 예가 나온다. <晉人聞

有楚 a, i, (ii I ill\,깝口 ; r4 연{. 吾IJJM 歌 北風 又歌南風, 南風不競 多死聲 楚必無功」> 范 叔口 ; 「 天道多在西北 . 南{i U1 池 時 必無功」> 고대인들은 樂tt로 出兵 때의 길흉을 점치곤 하였는데 『 周祖 』 , r 大師 」에도 그러한 예가 보인다. <大師fA I Ej tt以聽軍聲而 諸吉凶> 이 그러한 것이다. @ 『風俗通義』 卷 6 『聲音』에 보면 師賊이 晉平公을 위해 淸徵의 음악을 연주하는 대 목이 나온다. 거기에서도 師戰이 祐役t을 연주하자 白鶴 열여섯 마리가 남쪽에서 날 아와 복도에 모였고, 다시 연주하니 백학들이 줄을 지어섰으며 세번째 연주하니 백학 들이 목을 늘이고 울며 날개를 펼쳐 춤을 추었다고 하는 대목이 보이는데 이곳의 묘 사와 홉사하다. 한편 댜合迫記』 卷 3( 木譯出版社版, 1982) 에 보면 그가 어느 왕 때 사 람인지 확실치는 않아도 音律뿐 아니라 陰賜之g! 에도 정통했고 장님이면서도 兵꿉 萬篇과 『 寶符』 백 권을 썼다고 하는 기록이 나온다(師幅者, 或出於晉盛之世, 以主 樂官, 妙辨音tit, 撰兵占萬篇 時人莫知其原商 出沒難詳也. 晉平公之時 , 以陰陽之 擧顯於當世. 嫌目爲짬人, 以絶塞衆慮, 專心於星算音律之中. 考鍾呂以定四時, 無豪 條之異 『春秋』不記師膜出 {iiJ帝之時. 職知命欲終, 乃述 『寶符』 百卷. 至戰國分爭, 其 書 滅絶矣). 『淡書』, 「藝文志」 陰陽家에도 『師職』 8 편, 小說家에는 멤刊職』 6 편이 있 다고 하는데 모두 전하지 않고, 『寶符』 백 권과 <兵書菓篇>이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 王先愼輯 『韓非子俠文』 에서는 <師職鼓琴>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맞다 . ® 춘추 위령공 때의 궁정악사 . <師洞> 이라는 이름과 <師延>이라는 이름이 古籍에 동시에 보여 혼동을 불러일으킨다. 『淮南子』 , r 泰族訓』에 보면 <師延爲平公鼓朝歌, 北部之音, 師幅曰 …… 此亡國之樂也, 太息而撫之, 所以防器辭之風也>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晉平公 • 師職과 같은 시대의 <師延>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韓非子』, 「十過」편에 보면 平公 • 師膜과 同시대의 악사는 <師消>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 이야기에서 <師延>은 討임금의 악사로 등장하는 것이다. 『한 비자 』 에 기록된 이야기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魏磁公이 晉나라로 가는 길, 謨 水가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그런데 밤에 이상한 북소리가 들려 師淸을 불러 받아적게 하였다. 그리고 師t융에게 거문고를 뜯어 그것을 연습하게 해 晉나라로 갔다. 平公이 잔치를 벌여 술을 마실 때 盛公이 師浦울 불러 그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師膜은 곁에 앉아 그것을 들었다. 師洞의 연주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師膜이 그것을 제지 하며 말했다. 『이것은 망국의 노래이니 연주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자 平公이 연유 를 물었다. 師職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r 이것은 師延이 지은 것인데 討임금 때의 磨廢之樂입니다. 武王이 討를 토벌했을 때 師延이 동쪽으로 도망가 謨水에 이 르러 자살하였는데 이 음악을 듣는 나라는 필히 망한다고 하니 들어서는 안 되지요』 (昔者魏孟公將之晉 至謨水之上,稅車而放馬, 設舍以宿, 夜分, 而聞鼓新聲者而說

之, (史人間 左右 , 盡報J 1;1Hl. 乃召帥洞iij告之, Lj …… 「有鼓新 聲者 (史人間 左右 , 盡報 iJ I 사처 l ;其狀似鬼神, 子爲我!tt!i(fj寫之 J nl it욥 1 니 …… 『 1i若 」 因靜坐撫琴| i j寫之. 師沿 I IJ.J 日報曰 …… r 臣得之矣, 而未習也. 떠i復一宿習 之」 닷표公 l 크 …… r i若 』 因復留宿, 明 B , 而習之, 遂去之晉 …• •• r 此亡國之聲, 不可遂 也J …… 「此(;記)延之所作, 與討爲院 歷之樂也, 及武王伐討, 師延東走, 至於液水 以自投, 故 |Hl 此聲者必於殺水之 - k. 先聞 此磐者其國必肖 u, 不可遂.)> 여기에서 은 約임금의 악사, < 師 洞> 은 平 公 • 師腦과 동시대 인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저자의 다음 注 에 나오는 『呂 氏 春秋』 의 기록에 보면 師腦보다 <師消> 이 후대의 인물인 듯이 묘사되어 있댜 한편 『史記』, 微本紀』에서는 <魚寸使師洞作新器聲>이라 했고 댜災 밥 』 , 「古今人 表 」에서도 <師消>을 討임금과 병칭하고 있어 討임금 때의 악사가 < 師洞 > 으로 나타나고 있다 . 이상을 정리해 보면 『사기』, 『 한서 』 에서는 <師洞>이 討임금 때의 악사로, 『淮南 子』에서도 <師延>이 평공 때의 인물로 나타나고 있고, 『한 비자 』 에서만 <師洞>이 평공 때의 인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게 볼 때 『한비자』에 나타난 평공 때의 인물은 <師延>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 師職의 字는 子野이며 저서로는 『陽春』, 『白雪』, 『師橫八篇』 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 은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民本主義 사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권위주의 정치에 반대하였다. 앞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권력 앞에서 굽히지 않았으며 君 主 에 대해서도 옳다고 생각하는 말은 모두 하였다. 叔向과 친했고 叔向보다 말재주가 뛰어나 때로 叔向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도 師膜은 모두 말하였다( 裵默殷, 『春秋 戰國外交群星』, 321 쪽, 重慶 出版社, 1994.). ® 『左 傳』, r 襄公 14 年」에도 보면 師腦이 晉 悼公에게 군주의 도리에 대해 <훌륭한 군주의 도리는 선량한 자를 상주고 선량하지 못한 자는 벌줍니다. 백성을 자식처럼 여기고… ••• >라고 간언을 하는 대목이 나온다. ® 여기에서 <左右請除之>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 하나는 <除>를 <除>로 보 는 것이다. 陳奇獸의 『韓非子築釋f ll 보면 盧文招는 <除>를 <徐>로 보아야 한다 고 했고 傅佛崔는 <除當作徐>라 하였는데 그 근거는 『說文』이다. 『說文』에 <古道 塗塗堅皆作除>라 한 것으로 보아 <塗>는 <徐>의 假借字이므로 <除>를 <徐>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陳奇飮는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즉 <除>는 <治>라 는 것이다. 『淮南子』에서 <除>를 <徐>로 표기하였고 高誘도 그것에 근거해 <爲欲 塗師腦所城之壁>이라고 해석했는데 사실 <除>라는 것은 좌우에서 그의 죄를 다스 릴 것을 청했다는 뜻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袁河는 이것을 <徐>로 보아 <벽을 칠할 것을 청하였다>로 해석했는데 『韓非子』의 뒷부분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 면 <(죄를)다스릴 것을 청하였다>가 타당한 해석으로 보인다 . ® 『韓非子』, 『難一」의 이어지는 부분을 계속 보면 이 이야기에 대한 한바의 兩非論的

견해가 보인다. 말하자면 琴을 던진 師橫의 태도는 신하로서의 자세가 아니고 그것을 용서한 平公 의 태도 역시 깁王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今師幅非平公之過, g戶 琴而親具fl'j, 難嚴父,FJJ II 於子, I fri ({I|J 軌行之於 君 , 此大逆之術也 臣行大逆, 平公 8세 [而 聽之, 是失具道也, 故 平公 之造, 4 대 J I IJJ 也, {史人 主 過於聽而不悟其失 …… 故曰, 平 公失君道, 帥職亦 失 臣 禮矣 .> 한편 대t南子』, 『齊俗감 1| 」에도 같은 이야기에 대한 孔 子 와 써넘 1 : 의 서로 다른 태도 가 언급되어 있다. 孔 子 가 平公의 태도를 간언하는 자에 대해 넓은 풍도로 헤아린데 반해, 韓J I: 子는 군주와 신하 사이의 예의가 무너졌는데도 그냥 용서한 것으로 보아 晉平公 이 覇者가 되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다고 했다. <晉平公出言而不當, 師軌擧 琴而槿之, 跋托宮壁 左右欲徐 之, 平公曰 …… r 舍之! 以此爲露人失」 孔子掛 l 之曰 ; 「 平公非不 通其體也, 欲來練者也」 韓子槿]之日 ; r 群臣失禮而弗珠, 是縱過也, 有以 也 夫平 公之不覇也』> ® <無§t>는 太子晉에 대한 칭송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國城寧矣 遠人來觀! 修義經矣, 好樂無荒!> ® 師腦의 노래에 대한 太子晉의 겸손한 화답의 노래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何自 南極 至于 北海? 絶境越國, 弗慈道遠.> @ 마차를 내려 주며 太子晉이 師職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馬之剛矣, 땀之柔矣. 馬亦不剛, 범亦不柔. 志氣照熙, 取予不疑.> 말하자면 晉 의 平公이 부드러운 정책을 펼 것을 기대한다는 太子晉의 소망이 들어 있는 말이다. 이에 대해 師膜은 太子晉에 게 天子의 자리를 계승할 의도가 있는가를 묻는데 그것에 대해 太子晉은 <太昊이 래 堯 • 舜 • 禹를 거치면서 한 姓氏가 줄곧 천하를 통치해 온 적이 없다. 베어버려야 할 나무들을 베지 못하는데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죽 토벌해야 할 제후들을 토벌 하지 못하는 周나라가 천하를 영원히 통치할 수 없을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 그러 면서 太子晉이 師戰에게 자신의 수명을 물으니 太子晉의 목소리를 세심하게 들은 師 職이 오래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 아래에 나오는 崔文子와 王子喬의 이야기는 『楚辭』, r 天 rA, 』의 내용을 근거로 한 것 이다. 죽 <白規嬰荊 胡爲此堂? 安得夫良藥, 不能固藏? 天式縱橫, 陽離愛死, 大鳥 何鳴 夫焉 喪歡體?>라는 부분을 崔文子와 王子喬의 이야기로 해석한 것인데, 王逸 과 洪興祖 • 朱惡 등이 모두 전통적으로 그렇게 해석하였다. 최근의 초사학자 游國,恩 역시 이것을 王子喬와 崔文子의 고사로 보아 위에 나오는 <堂>을 r 天問」을 지은 屈原이 가서 본 楚나라 조상들의 사당이 아니라 <崔文子의 집>이라고 해석을 하였 다. 그러나 한편 이 이야기를 <婦峨拜月 >의 이야기로 해석하는 설도 있다. 그것은 이 부분을 <흰옷을 입고 화려한 머리장식을 한 여자가 몰래 집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后葬가 어디에서 불사약을 구해와서 그것을 잘 감춰 두지 못했을까? 자연의

법칙은 종횡이 명백한 것으로 양기 를 잃으면 죽는데 예는 왜 죽은 후에 큰 새가 되어 울고 갔고 그 시체는 보이지 않는 걸까?>(林庚, 『 天 l~ J論婆 』 의 해석에 따름, 40-42 쪽, 人民文 l} !出版社, 1983) 라고 해석 한다. 말하자면 <白親>를 <白露>(「九歌」 東具에 나오는 < ·붉 袁衣分白露裝>)로 보고 <嬰>을 <목에 거는 장식(說文 ; 嬰 頭飾也)>으로 해석하였으며, <良藥>을 <不死 藥>으로 보아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程嘉哲 역시 『 天問新注』(四川人民出版社, 1984) 에서 이러한 해석을 하고 있다. @ 여기에서 <¢弗>는 <%>와 같은 뜻이며, <嬰>은 <휘감기다>, <苑>은 <爵>과 통 하는 것으로 <雲氣>를 가리킨다. 이것을 해석하자면 <무지개가 운기를 휘감은 채> 가된다. ® 한편 孫作꽃은 『 天問硏究』(中華占局, 1989) 에서 r 天 I t1 」의 이 이야기에 대해 앞부 분은 <婦峨齊月>로, 뒷부분은 王子喬의 이야기로 해석하였다. 그는 앞부분에 나오 는 <堂>을 <亂踏t>으로 해석했다. 즉 그것은 屈原이 갔던 楚의 宗廟인데 屈原이 사 당의 벽에 그려진 것을 보고 이것을 지었다고 해석한 것이다. 그 역시 <良藥>을 불 로장생의 <仙藥>으로 해석하였고 <威>은 <藏>으로 해석했으며, 王逸의 잘못된 해 석을 洪興祖와 朱熹가 그대로 따랐다고 주장했다. 한편 그는 뒷부분에 대해 王子商 가 죽어 큰 새가 된 것으로 해석했으며, 吉林省 輯安縣 通溝에서 발굴된 고구려의 무용총 溪井에 그려진 天體圖에 보이는 人面鳥身의 神을 날개 펼친 王子喬의 모습 이라고 주장했다. ® 『漢 발 』, 『鄕祀志』 應勤注, 引『列仙傳』云. <崔文子學仙於王子翁, 王子喬化爲白親, 文子驚 引戈擊之, (f(f而見之, 王子喬之尸也. 須央則爲大鳥, 飛而去.> ® 王逸注에서 나왔다고 하는 『列仙傳』의 인용문이 조금 달라 다시 비교해 본다. <崔 文學仙於王子喬, 子喬化爲白親而嬰苑, 持藥與崔文子, 崔文子篤怪, 引戈擊之, 中之 因歷其藥 附而視之, 王子喬之尸也. 故言得藥不善也……言天法有善陰賜縱橫之 道, 人失陽氣則死也 言崔文子取王子喬之尸, 置之室中, 覆以幣 11H. 須央則化爲大鳥 而鳴 開而視之, 翻飛而去. 文子焉能亡子喬之身平? 言仙人不可殺也.> 한편 『楚 辭』, r 天 rQ T 』 王逸注에서는 이 이야기가 『列仙傳』에서 나왔다고 언급하지 않았다. 다 만 洪興祖가 『楚辭補注』에서 <親, 雄虹也. 邦音佛, 說文云 ;露, 雲院, 疑卽此那字> 라 하고 뒤이어 <崔文子事見列仙傳>이라 하였다. 今本에는 이 문장이 없는데 宋나 라 때에는 이 문장이 있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제 6 장 0 <子不語怪力亂神>은 孔子가 귀신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뿐이지 아예 귀

신을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견해가 많다 張叔平은 r 中國哲學史 8삶 』( _ I:)에서 몇 가지 예를 들어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65-68 쪽, 上 海人民出版社 , 1900.). 奧迎가 智에 대해 물었을 때 <1引 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 >(r 雍也』)라 하 였는데, 이는 백성의 일을 위해 힘쓰고 귀신을 섬기되 지나치게 귀신에 의지하지 말 라는 것이었다. 또 季路가 죽음에 대해 물었을 때에도 <未之生, 焉知死 ?>(r 先進』) 라 하였고 乃\{답」편에서도 <吾不與祭, 如不祭>라 하여 게으른 貴人들처럼 다른 사 람을 시켜 대신 제사지낼 것이 아니라 귀신을 섬기려면 진지하게 섬기라고 하였다. 더구나 孔子는 天命思想울 신봉하던 사람이니 엄밀하게 말하여 그는 殷周時代 이래 의 전통적인 天命思想과 귀신관념을 함께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여야 한다. ® 공자 제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子不語怪>라고 되어 있으나 의외로 典籍에서 발견 되는 孔子 <語怪>의 혼적이 많다. 본문에 서술된 季桓子의 使者와 孔子가 나눈 대 화도 그렇고 『論語g에서도 그런 부분이 발견된다. 또한 맹務t』, r 辯物』에 나오는 <洋 1 ; [ >과 <商羊>에 관한 故 事 , 『太平御登』 卷 OO2 에 인용된 『 韓詩外傳 』 (今本無)의 <玉羊>故事, 『釋史』 卷 86 에 인용된 『 沖波傳』의 九尾鳥故事 등이 그런 것에 속하는 데 그런 것은 아마도 대부분 후대에 孔子에게 부회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孔子가 세상의 이상한 것들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다는 당시 사람들의 관념 때문이었을 것 이다. 袁阿는 『中國神話史 』 에서 胡應隣이 『少室山房筆菜』 卷 38 에서 孔子를 <索隱之 宗> <語怪之首>라고 묘사한 것이 지나친 감은 있으나 맞는 말이라고 하며, 儒家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孔子가 신화의 발전에 결코 장애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니 며 오히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신화를 전파시키는 작용을 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中國神話史』, %4- 35.5쪽, 上海文藝出版社, 1988). ® 晉의 大夫 荀個과 士包가 個賜을 공격하였는데 魯나라 孟氏의 家臣 秦董父가 먼 저 진격하다가 갇혔다. 그때 叔梁訖이 활약해 진격할 수 있게 되니 孟獻子가 이렇게 말했다. <詩所謂有力如虎者也.> @ 『史記』, 「孔子世家』에 기록된 孔子의 내력은 다음과 같다 . <孔子 …… 其先宋人也, 曰孔防叔 防叔生伯夏, 伯夏生叔梁訖. 訖與顔氏女野合而生孔子, 祖於尼丘得孔子 …… .> ® 그리하여 孔子는 魯나라 귀족들 밑에서 委吏, 乘田(창고관리, 목축) 둥의 일을 맡아 했다 . 그래서 그는 <吾少也賤, 故多能웁鬪t>라고 自述하였고 『孟子』, r 萬章下」에도 보면 <(孟子曰) 孔子管爲委吏矣, 曰 r 會計常而已矣』 常爲乘田矣, 曰 r 牛羊沼壯, 長 而已矣』>라고 되어 있다. @ 『史記』, 『孔子世家』에 보면 孔子가 가난했으며 키가 아홉 자 여섯 치나 되어 사람 들이 <長人>이라고 불렀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孔子貧旦賤 . 及長, 符爲季氏史,

料景平 ; '普爲司職吏而畜蕃息. rh 是爲 司空 …… 孔子 長 九尺有 六 寸, 人皆謂之’長人' 而1 典 之 .> ® 멜南子 J , 냐術篇 」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孔子之通, 知過於此弘, 勇服於孟賞, 足攝鄕英, 力招城쎄 能亦多矣 . > 또한 『列子』, 냉祚}」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孔 子之助能招國門之쎄.> 한편 畢況은 이것이 F 左傳』, r 襄公 10 年J에 나오는 叔梁訖 의 이야기이지 孔 子 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는데 陳奇獸는 『 呂氏春秋菜釋』에서 그 說이 틀리다고 하 였다 (864 쪽). ® 『論語 』 , 『述凰云 ; <子之燕居, 申申 bn 也, 天天 bn 也.> ® 이것은 뀜 兪語』가 아니라 『論衡』 『語增篇」에 보인다. 『 語增篇 』에 <傳語曰 …… r 文 王飮酒千鍾 孔子百脈」 欲 言 聖人德盛, 能以德將酒也 > 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孔子가 文王을 따라 술을 마셨다기보다는 德으로 술을 제어할 수 있음을 말했을 뿐 이다. ® 공자 자신이 琴 • 瑟 • 啓 등의 악기를 잘 다루었고 노래부르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악리에 밝아 스스로 작곡을 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에 관한 기록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 들이 있다. 『 論語』, r 憲 r口 ]』 ; <子擊啓于衛.> 『論語』, r 陽貨J ; <取瑟而歌.> 『論語』, 앨而 ; <子與人歌而善, 必使 反 之, 然後和之.> 『論語』, r 子空J ; < 吾 自 衛反魯, 然後樂正, 雅碩各得其所 .> ® 『史記』, 『索隱』에 다움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家語師襄子臼「吾難以擊磐爲官, 然 能於琴』 蓋師襄子魯人, 論語謂之 r 擊磐襄』是也.> @ 『淮南子』, r 主術篇」에도 이것에 관한 구절이 보인다 . <孔子學鼓琴於師襄, 而諭文 王之志 見微以知明矣 .> @ 『左傳』, r 昭公 25 年」에 보면 그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 <孔子年三十五, 而季平子與 屈昭伯以鬪鷄故得罪魯昭公, 昭公率師擊平子, 平子與孟氏, 叔孫氏三家共攻昭公, 昭公師敗, 拜于齊 其後頃之, 魯亂.> ® 당시 孔子의 심정을 묘사한 구절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人而不仁, 如禮何?人 而不仁, 如東何?> ® 孔子는 音樂이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여겨 樂敎룰 주장하여 음 악여의겼 으사니회 교인육간적의 작사용상을 감 중정시을하 였中다.正 和禮平와하 樂게으 만로들 다어스야리 는한 다中고庸 의생 각경했다지.를 특그히는 높의 경지를 높이 평가하였는데 『論語』, r 八僧』에 보면 <子謂部盡美矣, 又盡善也 武盡美矣, 未盡善也>라 하였다. 周武王의 궁정음악인 <武>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살벌한 기운이 있어 완벽하지 못한데 반해 <部樂>은 아름답고 <善>하여 완미한 것 이라는 설명이다. ® 이 이야기는 엉tft 』 , 대脂物」에도 보인다. @ 이 이야기는 『論 衡 』 卷第 26 「'.1;gi1篇」에 보이는데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若 孔子之見賊 名之曰狂狂 ; 太史公之見張良, 似婦人之形矣 . 案孔子未쌉見狩. tt, 至 輯能名之;太史公與張良異世, 而目見其形. 使衆人聞此 言 , 則 謂神 而先知 . 然而孔 子名J羽生, 脚沼人之歌 ; 太史公之見張良, 競宣室之畵也.> 『論衡』의 논조가 본래 그 러하기는 하지만, 王充은 여기서도 역시 孔子가 狂狂이의 생김새를 미리 알았고 太 史公이 張良의 모습을 미리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神聖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해 미리 듣거나 보아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廣韻』 13 末 r 臨 字注 云. <朗岳, 韓詩云 …… r 孔子渡江見之異, 衆莫能名. 孔子貨 間河 上人歌曰 …… 鷄分船令 逆毛哀分, 一身九尾長分, 鶴鷄也』> @ 『論語』, 『八{답」에 보면 윗부분에 인용한 것에 뒤이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或曰 •••••• r 執謂郞人之子知 禮 平? 入太廟, 每事 FR1 」 子聞之, 曰 …• •• r 是禮也』> ® 이 이야기는 『國語』 , r 魯語下」에 나오지만 『說苑J, r 辨物』에도 보인다. 仲尼가 陳 나라에 있을 때 陳侯의 궁정에서 화살을 맞은 매가 죽었는데 돌활촉의 길이가 一尺 八寸이나 되었다. 陳惠公이 사람을 시켜 孔子에게 그 매를 갖고 가서 물어 보게 하 니 孔子는 그 매를 쏜 화살이 북쪽 叔愼氏의 것으로 그 내력이 아득하다고 하였다. 즉 옛날 武王이 殷나라를 멸하고 주변의 여러 민족들과 교통할 때 그들에게 각기 특 산물을 조공케 하여 본분을 잊지 않도록 하였는데, 叔愼氏가 梧矢와 石쁩룰 공물로 바쳐왔다 . 그러자 왕은 화살에 <叔愼氏之貢矢>라고 새겨 딸에게 그것을 나눠 주었 으며 炭胡公과 결혼시켜 陳에 봉했다. 공자는 이렇게 叔愼氏 화살의 내력을 이야기 해 주었던 것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仲尼在陳, 有卑集于陳侯之庭而死, 梧矢貫 之, 石磐其長尺有閔 陳惠公使人以 年 如仲尼之館問之 . 仲尼曰 …… r 年之來者遠矣! 此肅愼氏之矢也. 昔武王克商通道于九夷百盤,使各以其分膳來貢,使無忘職業. 於 是肅愼氏貢稽矢石쯤, 其長尺有應. 先王欲昭其令德之致遠也, 以示後人, 使永監焉, 故銘其括曰‘肅愼氏之貢矢', 以分大姬, 配炭胡公而封諸陳 ……』> @ 『說苑』 卷 第 18 r 辨物」에 나오는 이야기. 楚나라 昭王이 강을 건너는데 어떤 물건 이 떠내려와 왕이 탄 배에 걸렸다. 昭王이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라 孔子에게 물으니 孔子는 그것이 바로 洋質이라는 열매라고 하며 반으로 갈라 먹어 보라고 하였다. 그 러면서 覇王만이 그 열매를 얻을 수 있으니 길한 징조라고 설명해 주었다. 원문은 다 음과 같다. <楚昭王渡江, 有物大如斗, 直觸王舟, 止於舟中 ; 昭王大怪之, 使聽問孔 子. 孔子曰 ••• … 『此名罪質」 令削而食之 …… r 有覇者能獲之, 此吉祥也」> 『說苑』에서는 여기에 뒤이어 齊나라 商羊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두 가지를 한

데 소개한 후 孔 ;f 의 제자 들 이 孔 子 에게 그런 것들을 어찌 다 아느냐고 묻자, 민요나 동요가 중요함을 다 음 과 같이 설명하는 대목이 보인다 . <異 時小兒 諦日 …… 楚王渡 江법淨貞, 大 ~ II 拳 • 赤 l 11 日, ;\ |j而 食之美 ~ Il l,: . 此楚之應也. 兒又有兩兩*tJ’糸;, 屈一 足 而蹟 曰 …• •• 天將大雨, 商羊起舞 今齊獲之, 亦其應 也. *諦之後未쌉不有應隨者 也, 故聖人非獨守道而已也, 諸物記也, 卽得其應矣. > @ 이것은 『 初學記』 卷 第 16 鐘 第五 齊殿魯鑄條 에 보임 . 仲 ) E 와 伯 常‘ • 姜子 세 사람이 泉公 에게 큰 종을 매달아 놓으면 곧 망가질 것이라고 하며 각각 그 이유 를 설 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옻子春秋旦 齊兼公爲 大鐘, 將惡之, 仲 尼 • 伯常悲 • 옻子 三 人但來朝, 皆曰鐘將殿, 槿之 果왔 公召 三 者f~] 之, 옻子曰 , 鐘大非禮, 是以曰將殿,. 仲尼 曰, 鐘大戀下 , 其氣不得上薄 是以曰將탔 伯常盛티, 今日庚申, 雷 日也 . 陰莫 勝於霜 是 以曰將 殿.> ® 이것은 『 論衡』 卷 第 15 明零條에 보인다. < 孔子出, 使子路, 舒雨具 . 有頃, 天果大 雨 子路問其故, 孔 子曰 …… r 祚 卷 月 離于單』 後 日 , 月 復離畢. 孔 子 出, 子路話廣雨 具, 孔 子不聽. 出果無 雨 . 子路問其故, 孔子曰 …… r 昔 日, 月離其 陰故雨 ; 祚 ¥, 月 離其陽 故不雨』> @ 『敦煙맞文』, r 孔子項託相 PR罪 E 」에 보면 孔子와 項炎의 만남에서부터 이 부분까지가 나와 있다 . 그리고 다 L 子項託相問 꿉 』에는 중간중간 다른 이야가들도 들어 있는데 저 자는 약간 부분을 생략했다 . 예를 들어 項託의 똑똑함을 높이 산 孔子가 項託 에게 같 이 길을 떠나자고 권유하나 項 i t이 집에서 부모형제가 기다리고 있어 떠날 수 없다고 한 부분, 또 <天下不可平也>라고 말한 부분 둥이 빠져 있다. 『敦燈斐文』에 실린 이 부분의 원문을 인용해 본다. <昔者夫子東遊, 行至荊山之下, 路逢三個小兒. 二小兒 作戱 一小兒不作戱 . 夫子怪而 rR1B ; 『何不戱平?』 小兒答曰 ; r 大戱相照, 小戱相傷, 戱而無功,衣破裏空.相隨鄧石,不如歸春.上至父母 ,下 及兄弟, 只欲不報 ,恐受無 禮 善思此事, 是以不戱 何謂怪平?」 項築有相, 隨推土作城, 在內而座. 夫 子語小兒 曰 ; 명不避車?」 小兒答曰 ; r 昔聞聖人有言, 上知天文,下知地理, 中知人情, 從昔 至今, 只聞車避城, 登開城避車?」 夫子當時無言而到, 遂乃車避城下道. 遣人往問 ; r 此是誰家小兒? 何姓何名?」 小兒答曰 ; r 姓項名託」 夫 子曰 ; r 汝 年難 少, 知事莊大』 小兒答 B ; r 吾聞魚生三 日 , 遊於江海 ; 兎生 三 日 , 盤地三敵 ; 馬生三 日 , 超及其母 ; 人生三月,知識父母. 天生自然, 何言大小!」 夫子問小兒 B 汀汝知何山無石? 何水無 魚? 何門無關? 何車無輪? 何牛無債?何馬無駒? 何刀無環?何火無煙? 何人無婦? 何女無 夫 ? 何 日 不足? 何 日 有餘? 何雄無雄? 何樹無枝? 何城無使? 何人無字?」 小 兒答 B ; 『土山無石. 井水無魚. 空門無關. 畢車無輪.堅牛無植. 木馬無駒. 祈刀無 環 盛火無煙. 仙人無婦. 玉女無夫 . 冬 日 不足. 夏 日 有餘. 孤雄無難. 柏樹無枝, 空城 無使 小兒無字』 …… 夫子曰 ; r 善哉! 善哉! 汝知屋上生松, 戶前生蓋, 床上生蒲, 犬

’犬具. : l· , 婦坐仙姑 鷄化爲雄, 狗化爲孤, 是 {l1H t?』 小兒答l:I ; r 屋上生松者是其核, 戶前生갑臼者是具節, 床 _ I : 生蒲者是具席 犬吹其主, 爲傍有客 ; 婦坐(史t!i, 初來 1n· 也 ; 鷄化爲雄, 在山澤也 ; 狗化爲孤, 在丘陵也』 …… 小兒却 Ih1 夫子曰 ; r l\.(J鴨何以能 浮? 鴻,(많(可以能鳴? 松柏何以冬夏常肖?」 夫子對曰 ; r l\.(J뻔能浮者緣脚足方, i쳅鶴能 鳴者緣 Il l!,l項長, 松柏冬夏常꿉者緣心中强』 小兒答E:I ; r 不然也! 嚴組能 !E, 謀猶明項 長? 繼!衍能浮 登猶脚足方? 胡竹冬夏常꿈, 齒猶心中强?』 夫子 roW j여t El ; 『汝'서 1 ); 高幾許? 地厚幾丈? 天有幾樣? 地有幾柱? 風從何來? 雨從何起? 露出何邊? t%U HI1j 處?』 小兒 答 El ; r 天地相却洪.洪九千九百九十里, 其地厚薄, 以天等同 . 風出츈 {1 •• , I1j 出高處, 面出於天, 露出百草 天亦無採, 地亦無柱, 以四方雲而乃相扶, 故與爲柱, 有何怪平?」 夫子暎 El ; 「善哉! 善哉! 方知後生 1; [可長也』>(『敦燈꽂文七十八種』) ® 孔子와 項炎이 서로 질문하며 대답하는 것은 일종의 수수께끼, 죽 迷語이다. 중국에 는 이러한 迷語가 민간문학의 한부분으로 인정되고 있다. ® 『論語』, r 子空』. <後生可外, 焉知來者之不如今也?> @ 項짧이 孔子의 스승 노릇을 하였다는 이야기는 바로 『戰國策』, r 秦策五』에 처음으 로 보이지만 그 상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史記』, r 梧里子甘茂列 傳』에도 <大項짧生七歲爲孔子師>라는 구절이 보이고, 『淮南子』, r1 肖務訓」에는 <夫項災七歲 而爲孔子師, 孔子有以聽其言也. 以年之少爲間丈人說, 救跋不給, 何道 之能明也>라고 되어 있다. 王充 역시 『論衡』, r 買知篇」에서 <夫項託年七歲敎孔子, 接七歲未入小學, 而敎 孔子, 性 自 知也. 孔子 曰 ; 『生而知之上也, 學而知之其次也』 夫言生而知之, 不言學 間, 謂若項託之類也>라고 하였고 劉向도 『新序』, r 雜事篇」에서 <秦項器, 七歲爲聖 人師>라고 한 것을 보면 漢代에는 項託이 孔子의 스승 노릇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신빙성 있게 전해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 다만 당시의 典籍 중에 그 자세한 내용이 적힌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 또한 晉代 稀康의 『高士傳』에 보면 <項築七歲爲 聖人師 孔子問項器曰 ; r 居何在?J曰 ; r 萬流屋是也』言與萬物同流四也>라는 기록 이 나온다 . 그러나 『列子』, r 湯問」에는 태양의 遠近에 관해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대 목이 나올 뿐 項棄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후 隋唐시기에 『孔子 項墓相問書』가 나타난 것이다. @ 『論衡』, 慣知篇』에 보면 <夫項託年七歲敎孔子, 案七歲未入小學, 而敎孔子, 性自 知也. 孔子曰 …… 「生而知之. 上也 ; 學而知之, 次也』 夫言生而知之, 不言學問, 謂 若項託之類也>라고 하여 항탁이 태어나면서부터 빼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 朱介凡은 『俗文學論集』, r 敦燈變文目錄及孔子項託相問탑之傳承』(臺北聯經出版 社, 1984, 239 쪽)에서 項託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 漢代의 典籍에 孔子와 項託의 만남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는 것이 없고 『孟子』나 『莊子』, 『荀子』 둥에도 項託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傳說比 n OO 에 불과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 그는 工應混i의 r 困f장紀聞 』 을 인용하였는데 그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 ‘談辭내炳危盛碑' 以爲后값. 대t南 』 , r(1 多 務 i]J I| 』 , 『 論衡 』 , 『 1: (知篇」皆作項o t - , 而皮 日 休 『 文販雜著 』 云 ; 無項 i t . > 여기에서 朱介凡은 皮 B 休의 견해에 공감하여 項 i t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 다. 그러나 역자의 견해로는 i삿代의 典籍에 孔子와 項託에 얽힌 자세한 이야기가 기 록되어 있지 않다고 하여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고 본다. 본래 간단하게나 마 전해지던 項it의 전설이 후대로 오면서 접점 내용이 많아지고 복잡해져 敦炯맞文 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는 것이 民間傳說의 傳承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타당하리라고 생각한다. ® 孔子와 項炎이 대화를 나눈 것에 관한 기록인 『 孔子項炎相 rj ] 발』 는 2 천여 자 정도 되는 문장이다. 앞부분은 賊體에 가까운 敍事이고 후반부는 唱 詞 에 가까운 七 言 인데 孔子가 아이에게 <어느 산에 돌이 없고 어느 산에 물이 없냐? …… > 라고 묻는 부분 은 특히 민간에 유행하던 수수께끼와 흡사하다. 이런 것으로 보아 야마 ’1 因 』가 민간문 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馬 많 田, 『華夏諸神』, 394-395 쪽, 北京燕山出版社, 1991). 이 책은 세상에 나온 이후 재미있는 내용과 통속적인 언어, 그리고 생동감 있 는 형식 등으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어 민간에 널리 유행하였다. 후에 敦煙遺 書 에서 漢文抄卷 13 개를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唐末五代 때의 寫本으로 보인다. 또 西域과 藏族 지역에서 藏文으로 번역된 것도 발견되었는데 그런 것으로 보아 이 이야가가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전승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 馬 書 田은 項棄이 神化된 것은 총명했기 때문만이 . 아니라 요절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한다(『華夏諸神』, 396 쪽). 秦漢시대에 이미 項篠의 사당이 있었고 그곳에서 제사 를 지냈으며 明代에 이르면 그에 대한 제사가 널리 행해졌다 . 明代 黃諭의 『雙棟歲 紗』 卷 6 에 보면 <保定滿城縣南門有先聖大王祠, 神姓項, 名托, 周末魯人 , 年八歲, 孔子見而奇社 , 十歲而亡, 時人尸而祝之, 號「小兒神』>이라고 되어 있고, 董 斯張의 『 廣博物志』에 보면 <項器, 魯人 , 十歲而亡, 時人尸而祝之, 號「小兒神」>이라고 되 어 있어 그를 神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明代에는 『小兒論 』 이 라는 문장이 나타났는데(『歷朝故 事 統宗』에 수록됨), 그 내용은 『孔子項墓相問 書 』와 비슷하지만 내용이 좀더 많아졌다. 그리고 그 밖에 河北 • 江蘇 등지에서 口頭傳承되 는 <拜師>故事도 그 내용상 문헌기록과 비슷하지만 좀더 생동감이 있다 . 제 7 장 ® 孔子가 老子에게 禮를 물었다고 하는 기록은 『禮記』와 『莊子』, 『孔子家語』, 『呂氏 春秋』 등 여러 전적에서 발견되고 있는 바, 당시에 이미 여러 학파에서 다양하게 받

아들여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徐復親, r 有쎄老子具人其션的再檢討 』, 7 中國人性 論史 』 , 陳榮捷, r 戰國道家 」, 『歷史語 言 硏究所菓 FIl 』 第 4 9 木 등 참조). @ 메荊子』, 디 彦務감 1I 」에 보면 孔 子 이의에 伊尹이냐 呂望, 百里矣 나 管 仲, 墨子 등 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세상을 위해 힘썼던 예를 들고 있는데 그 자세한 기록은 다음 과 같다. <… … 伊尹負鼎而干湯 呂望鼓刀而入/셔, 百里矣轉썼 , 管 仲束 純 , 孔子無빵 突, 墨 子無暖席 , 是以聖人不高山不廣河, 蒙恥辱以干 世 主, 非以貧祿慕位, 欲#起天 下利, 而除葉民之害 . > ® 이것은 孔 -f 가 54 세 때의 사건이다 . 『史記』, r 孔子世 家 』 ; <居 十月, 去衛, 將適陳, 過匡 …… 陽),尼쌉暴匡人, 匡人于是遂 止孔子, 孔子狀類賜 虎, 拘隔.> @ 孔子의 天命思想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이 일이 일어난 것은 孔子 60 歲 때이다. ® 『論語 』 , r 衛 었公 』 ; <在陳絶祖, 從者病, 莫能興. 子路溫見, 曰 ; r 君子亦有窮 平?』 子曰 ; 「 君子固惡 小人窮斯淮矣!」> 이것은 孔子 63 歲 때 일어난 사건이다. @ 이것에 관해서는 『荀子』, r 有坐 』 ; < 孔子南適楚, 範于陳 蔡之間 , 七 日 不火食, 要 藥 不精 弟子皆有凱色 . > 『呂 氏春秋』, 『愼人』 ; < 孔子窮于 陳蔡之間, 七 日 不 쌤食, …… 孔子鉉歌于室 > 이라고 되어 있고 이 밖에도 뎅t §b 』 , 뎃佳言」, 『 孔子家語 』 , r 困 쨩 」, 『韓詩 外傳 』 卷 6 등에 보 인댜 @ 袁狗 는 < 甲 車間>을 < 겨드랑이( 股窟)> 라고 해석했는데 , 이것을 일종의 아가미로 보는 견해도 있어 보충해 본다 . < 甲 > 은 <衣 甲>으로 옷을 입은 어깨 부분을 가리키 며, <車> 는 <牙車>, 즉 <뺨>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아 물고기의 아가미 부분에 대한 묘사라고 하는 것이다. 죽 < 뺨과 어깨 근처 목부분이 손바닥처럼 벌어지다>라 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은 黃洛 明이 냐討神記全譯』에서 제시한 견해이다 (5 업쪽, 貴 州人民出版社, 1991). ® 袁狗 는 이것은 <斑魚>, 즉 < 서어(붕어의 일종)>라고 하였지만, 『授神記』 본문에는 <提魚>, 죽 < 메기 > 라고 되어 있다 . ® 이렇게 지혜로운 여자들에 관한 전설을 <巧女故事>라고 부론다. 봉건사회에서 여 자들의 지위가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혜롭고 용기 있는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 가 의외로 많이 전해지고 있다. 어려운 상황에 부딪쳤을 때 총명한 여주인공들이 그 런 문제들을 현명하게 풀어나가는 이야기들인데 漢代의 樂府 『語上桑』과 北朝시대의 樂府 『木曲詞』에 이미 그런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 屈育德의 분류에 의하면 <巧女故 事> 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째는 생사의 기로에서 여주인공의 지혜와 용기로 적을 이기는 것으로, 干寶 의 덴설神記』 卷 19 에 나오는 r 李寄』, 洪過 『夷堅志』에 등장 하는 藍娘 둥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둘째는 여주인공의 말재간이 뛰어나 문제를 해 결하는 것으로 여기 나오는 <菜桑娘> 故 事 가 그런 것이다 (r 論巧女故事』, 『神話傳說

民俗 J , , . 1 國文聯出版社, 1988). ® 공자가 衛나라에서 魯나라로 돌아간 것은 孔子 나이 68 세 때의 일이다. 『 史記J, 「孔 子世家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季康子 …… 以幣迎孔子, 孔子歸魯. 孔子之去 魯, 凡十四年而反平魯. > ® 孔子가 이러한 작업을 한 것은 쌈나라로 돌아온 뒤인 70 세 때이며 『春秋』를 지은 것은 孔子 나이 71 세 때이다 . 그 작업의 과정 대해서는 『史記』, r f L 子世家 」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魯終不能用孔子, 孔子亦不求仕 …… 追迎 三 代之禮, …… 序꿉 傳 上起唐炭ffU I:際 下至秦穆 編次其事, 故범傳禮記自孔氏. …… 孔子以詩꿉禮樂 敎, 弟子蓋 三 千焉 身通六狂者七十有二人.> 孔子의 이러한 문헌학적 작업에 대하 여 章太炎 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檢論 』 , 「 訂 孔 上 」) . <{『 HE, 良史也.> <追惟 仲尼聞望之隆 則在 六籍.> <令人人知前 世 廢興 , 中夏所以創業垂統者, 孔氏也 .> <微 孔子 ~IJ 擧皆在官, 民不知古.> @ 孔子가 세상을 떠나가 전 그 아들 伯魚가 죽었고 제자인 顔淵과 子路도 죽었다. 사 랑하는 아들과 제자들의 죽음에 정신적인 타격을 받아 孔子 역시 죽음에 이르렀을 것 이다 . 그가 죽은 것은 73 세 때인 魯 哀公 16 년 (B.C .4 79) 이다. ® 『史記』 , r 孔子世家」에 이 내용이 보인다 . < 孔子方負杖消過于門, 曰 ; r 賜 , 汝來 1 iiJ 其晩也 ?』 孔子因暎, 歌曰 ; 『 泰山擬平! 梁柱推 平! 哲人婆平!」> ® 언변이 뛰어난 제자였던 子貢은 孔子에게 그리 사랑을 받지 못했으나 최후까지 孔 子가 만났던 것은 子貢이었고 孔子가 죽은 후 삼 년 간 자리를 지킨 것도 子貢이었 다 . 『孟子』, r 勝文公上」에 보면 그러한 子貢의 행적이 나온다. <昔者 孔子 沒 , 三年 之 外, 門人治任將歸, 入損孔子, 相后, 而突, 皆失聲, 然後歸.子貢反, 築室于場, 獨居 三年 , 然後歸.> ® 『論 衡 』 『記妖篇」에 나오는 의 <却>에 대해 다른 견해가 있어 보충해 본다. <却>을 <멈추다>로 해석하지 않고 <거꾸로 흐른다>, 죽 <{fjj> 로 해석하는 것이다. 『論衡』, r 書虛篇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酒水無知, 爲 孔子却流, 天 神使之 ; …… 是蓋水偶 自 却流 . 江河之流, 有回復之處, 百川之行, 或易道更路, 與 節流無以異, 則泡水却流, 不爲神怪也.> 물론 「紀妖篇』의 짧은 기록이 황당한 것이 라고 여겨 공자의 죽음과 <却流>와는 상관없는 것이라는 王充의 견해가 들어 있기 는 하지만, <却>에 대한 그의 설명으로 보아 <물길이 거꾸로 흘렀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 제 8 장 ® 孔子의 제자가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이 있으나 일반적

으로 학생이 삼천 명에 수제자가 70 여 명이었다는 것이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門史 ,10 』, r 孔子世家」에는 <弟子蓋 三 千人>이라 하였고 다 L ·f 家語』, 『弟子解」에는 77 人, 멜南子』, r 泰族다에는 <孔子弟子七十, 義徒 三 千>이라고 되어 있다. 또 녀i子J, 「公孫丑上」에도 , 『삼tJ『子J, 『五깝篇』에도 <仲尼天下聖)\ 也, 修行明道, 以游海內, 海內稅其仁. 美其義, 服役者七十人>이라고 되어 있다. @ 여기에서 <束循>라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당시 스승을 찾 던 禮로써 <말린 고기 한 묶음>이라는 說이고, 다른 하나는 <束(府>가 곧 <束裝> 을 뜻하는 것이라는 견해이다. 당시 15 세가 되면 束髮을 했는데 孔子가 15 세 이상만 제자로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孔子가 말했다고 하는 <十五志學>과 합치되어 그 럴 듯한 說로 제시되고 있으나 <말린 고기 한 묶음>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옛날 에는 肺 한 장을 l 鹿(提)이라 했고 10 鹿을 l 束이라 했으니 束循는 10 장의 乾肺룰 말 한다. ®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孔子가 당시 다양한 계충의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 들여 학문을 전수하였다는 사실이다. 당시에 새로 출현한 지식인(士)들에게 학문을 널리 보급하면서 부자든 가난한 계층 출신이든 가리지 않고 제자로 삼았다는 것인데 그가 <周나라 사회질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周나라 사회질서의 회복에 노 력했던 것>(송영방, 『중국사회사상사』, 5.5쪽)은 사실이지만 그의 제자가 어떤 계층이 었는가 하는 것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荀子』, 『法行』에 보면 <南郭惠子問於子貢 El ; r 夫子之門何其雜?』 子貢 El ; r 君 子正身以侯, 欲求者不距, 欲去者不止. 旦夫良醫之門多病人, 樣括之側多任木, 是以 雜也」>라 하여 孔子의 제자가 <잡다하다(雜)>고 하였고 『論語』, r 衛孟公」편에 보 면 <有敎無類>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에서의 <無類>라는 것은 무조건 모든 계충 의 사람들이 아니라 당시의 소위 <士> 신분에 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 댜 그것에 대해 鍾肇膳은 『孔子硏究』(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00) 에서 첫째 우선 華夏民族이 아닌 다른 민족까지 포함하는 것이며 둘째 華夏제국 내 氏族等級이라는 한계를 극복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교육의 범위를 평민에까지 넓 혀 子路나 子貢 같은 하충의 평민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인데(『群書治要』 卷 36, 引 『尸子』 ; <子路, 卞之野人, 子貢, 衛之賈人, 顔塚緊, 盜也, 顔孫師, 祖也, 孔子敎之, 皆爲顯士>) 비록 西周 貸族敎育 중의 等級 신분제한이 철폐되었다고는 하나 노예에게까지 개방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等級>과 <階級>을 구분하여야 한 다고 하였다 (83-84 쪽). 이것은 매우 일리가 있는 지적이라 하겠다. ® 孔子의 제자들은 四科로 나뉘었는데 德行 • 言語 • 政事 • 文學이 그것이다. 顔淵과 OO 子商 등이 德行에, 宰予와 子貢 둥이 言語에, 円由 • 季路 등이 政事에, 子游 • 子 夏 둥이 文學에 속했다.

® 델溫 D 에서 공자가 안회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論語J, 潭也』 ; <其 L' ::: 日 不違仁.> 『論語』, 「子 空」 ; <吾見其進也, 未見其止也.> 『論語』, 潭也」 ; <有顔同者好學, 不遷怒, 不成過, 不幸短命死矣, 今也t\ l JJ:'.::, 未聞 好學者也.> @ 이것은 『文 選』 任彦昇 「王文憲渠序」의 『況乃삽 ::I 角殊祥山 庭異表 J 아래 注에 인용 된 『論 語撰考識전] 나오는 구절인데 顔回의 이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해 놓았 다. <顔回有角額 似月形 淵, 水也, 月, 是水積, 故名iJ Nl.> ® 『論語』, r 雍也』에 나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哀公問 …… 「弟子執 爲好學 ?』 孔子 對 B …… r 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庶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 |바 l 好 學者 也」> 顔淵이 죽은 나이에 대해서는 보통 31 세라고 하는데 『 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좀 다르다. 즉 공양전에서는 안연의 죽음을 魯 哀公 14 년(孔子 71 세 때)이라 하는데 『 史 記J, 야 11 尼弟子列傳』에 의하면 顔淵이 孔子보다 30 세 적다고 되어 있다 . 그렇게 되 면 顔淵이 죽을 때 41 세였다는 이야기인데, 『孔子家語』 등에 보면 모두 31 세로 되어 있다 . 그러므로 毛奇齡은 『史記』의 기록이 <孔子보다 30 세가 적다(少孔 子 三 十歲)> 가 아닌 <40 세>가 되어야 맞다고 하였다(『論語 』 楊伯峻注 참조). ® 顔回의 天折은 그의 독특한 治學태도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려운 물질 적 환경과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그의 단명을 재촉한 것이 아니었을까 . 일찍이 王充은 『論衡』, r 命義篇」에서 <顔淵困于學, 以才自殺>이라고 언급하였는데 <困于gE > 이 라는 것은 매우 날카로운 지적이다. ® 『論語』, 守平』에 보면 顔淵이 스승인 孔子에게 진정으로 복종하는 대목이 나오는 데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顔淵噴然暎曰 ; 니테之彌高, 姑之彌堅 ; 殿之在前, 忽焉 在後 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約我以禮. 欲冊不能, 槪端吾才, 如有所立卓爾. 難欲從之, 末由也已J> ® 『論衡』, r 習虛篇 」에도 이 내용이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다 . <傳범或言 ; 顔淵與孔 子供上魯太山, 孔子東南望 . 吳間門外有緊白馬, 引顔淵指以示之, 曰 ... …「 若見吳 間門平?」 顔淵曰 …… r 見之』 孔子曰 …… r 門外何有?』 曰 …… r 有如緊練之狀』 孔 子撫其 目 而正(止)止, 因與偵下. 下而顔淵髮白齒落, 遂以病死 …… 蓋以精神不能若 孔子, 疆力 自 極 精華端盡 故早天死.> 한편 吳나라 間門에 대해서는 『三國志』, 『吳志』 吳主傳注에 보면 <昌門, 吳西郭 門, 夫差所作>이라고 되어 있고, 唐 陸廣微의 『吳地記』에 보면 <孔子登山, 望東吳 間門, 歡臼 …… r 吳門有白氣如練J今置良練坊及望館坊因此>라는 기록이 있다. ® 子路는 季路라고도 하며 魯 卞人이다. 『荀子』, 『大略篇』에 <子貢季路, 故部人也> 라는 구절이 있다.

@ 『 史記 』 , 대 I' Jr,弟子列傳」에 보면 <冠雄鷄, 偶假脈>이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渠解에 의하면 <冠以雄鷄 個以假 l* . 二 物皆勇, -f 路好勇, 故冠裁之 ……>라고 하고 있다 . @ 『 論語 』 , 「陽貨」와 서 . J/Iif』 제 10 장에 보면 子路는 <(占刊3> 이요 , <强>하다고 하는 구 절이 나오는데, 孔子는 그러한 子 r# 의 <勇>과 <强>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고 <必> 과 <~1 : ,> 으로 勇力을 조절하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 衛 出公§JI[의 부친 關眼가 晉 나라에서 衛나라 揮良夫와 孔伯姬(孔埋의 어머니)를 이용, 衛 大夫 孔惟에게 內應하게 하였는데 出公輯이 쫓겨나 魯나라로 도망하였다. 그러자 制眼가 즉위하여 衛 莊公이 되었는데 子路는 孔惟의 邑宰였다가 피살되었다. ® 『 春秋緊 k꿇 』 , r 隨木消息」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顔淵死, 子曰 ; 『天喪 予』 子路死, 子曰 ; r 天祝予」西守獲麟, 曰 ; r 吾道窮, 吾道窮』 三 年, 身隨而卒. 皆此 而設 天 命成敗 聖人知之, 有所不能救, 命矣夫.> ® 『 文選 』 의 원문은 <況乃淵角殊祥山庭異表>이고 注에 인용된 제荷輔像』에서는 다음 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子貢山庭斗縱口謂面有 三 庭, 言山在中, 鼻高有異相也. 故 子 貢 至孝 顔回至仁也.> @ 『 論衡 』 , r 龍龍다에 보면 豫讓과 子路의 외모가 변한 것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댜 <豫讓香炭, 漆身爲區, 人不識其形 ; 子貢滅嚴爲婦人, 人不知其狀 ; 龍變體 自 區 人亦不能葛 堤化藏藍者巧也.> 한편 여기서 수염을 깎은 것은 子貢이 아니라 子差라는 說도 있다. ?文選 』 , r 幽通 麟 注에 보면 <衛關賊之亂 子魚滅鹿, 衣婦人衣逃出. 孔惟求之, 不得, 故免於難> 이라 하고 있는 것을 예로 들고 있는데, 王利器는 『論衡校釋』에서 명분子J, 명同儒篇」 이나 『 鹽鐵論』, r 殊路篇』을 보면 子貢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 子貢은 衛나라 사람이다. 子路가 <無知>했다면 子貢은 지나치게 <多知>였다고 할 수 있다. 『史記』, r 弟子列傳J에 보면 <子貢喜揚人之美, 不能區人之過>라 하였 는데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는 君子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언변이 뛰어났고 理財 에도 밝았는데 『論語』, r 先進」에 보면 <賜不受命而貨殖焉, 億則壓中>이라고 되어 있고 『史記』, r 貨殖列傳」에 보면 <(子貢)仕于衛, 廢著(肝)탭財于魯之間, 七十子之 徒, 賜最爲燒益, 原憲不殿精ffli, 區于窮卷, 子貢結開連騎, 束用之幣以職享諸侯, 所 至, 國君無不分庭與之抗禮. 夫使孔子名布揚于天下者, 子貢先後之也>라고 기록되 어 있다 . ® 여기에 언급된 것처럼 子貢은 孔子에게 비평도 받았으나 어쨌든 그는 빼어난 인물 이었고 특히 孔子를 존경하여 『論語』, r 公治長」에서는 <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라고 하였다. 또한 孔子가 죽은 후 그에 대한 비 평이 있자 <無以爲也, 仲尼不可殿也>(『論語』, 「子張』)라 하여 스승인 孔子를 옹호 하였다.

® 治鳥에 관한 이야기는 야好,~1 I l, 1' 8 』 卷 13 아 아니라 卷 12 에 나온다. 그것은 越땅 의 깊은 숲 속에 사는 새인데 푸른색이며 큰 나무에 동우 리 를 짓고 산다. 사람들을 골탕 먹여 벌목하는 사람 들 이 그 나무 를 보면 피해갔다고 한다 . <越之深 |I 마 마f島, 大 l |lM} , 占l . 色, 名曰治,鳥 容大樹, 作ill, ft n 1t.六升器, 戶 n f莖數寸 ; fk j (l1 此 k l .: 편 , 赤白相分, 狀 l|I 射侯 伐木者見此亂 卽避之去 ; 或夜冥不見鳥,鳥亦知人不見, 便鳴暎 Ll ; rl1 間 1l: i:」 : 去!」 明 日 便宜急上 ; rD 갭 0 晶 下去 !」 明 日 (更宜急下 ; 若不使去, 但 言 笑而不已者, 人可 止 伐也 …… 越人謂此鳥是’越祝’之祖也 . > ® 여기에서 < 거문고 >를 뜻하는 <琴>의 발음은 < qi n > 인데 의 발음은 으로 서로 발음이 비슷하다 . 그래서 비슷한 발음을 가진 두 글자를 들 어 소녀의 뜻을 은근히 떠보는 것이다 . @ 이것은 ?詩經』 , 『 召南 • 淡廣 』에 나오는 시로 <淡水는 넓고 넓어 저쪽으로 헤엄쳐 갈 수 없고 長江은 길고 길어 펫목을 타고 왔다갔다 할 수 없네 > 라는 내용이 바로 뒤에 이어진다. 淡水는 섬서성 서남쪽 寧免縣 에 있는 강이며 여기에 나오는 <游 女> 란 <놀 고 있는 여자 > , <수 영하는 여자 > , 또는 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說둘 이 있다 . @ 兪越 은 < 子不耕於 東海, 吾不耕於西海也>에서 <吾不> 이 衍文 이라고 했는데, 정확 한 견해이다. 문맥으로 보아 그렇게 하여야 뜻이 통한다 . 죽 <그 대들이 동해부터 서해 에 이르기까지 경작하고 있으니, 우리 말이 어찌 당신들의 곡식을 먹지 않을 수 있겠 소?>로 해석되어야 한다. 『淮南子』 r 人問 訓 」에 <子耕於東海至於西海>라 고 되어 있 는데 그 뜻이 확실하다 . 兪越은 또한 後人들 이 古 홉 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임의대로 <吾不> 두 글자를 덧붙여 뜻이 통하지 않게 된 것이라고 했다(陳寄獸, 『呂氏春秋校 釋J, 841-842 쪽 참조, 學林出版社, 1990). @ 이 구절은 子貢의 정치적 재능이 매우 뛰어났음을 설명해 주는 부분인데 『史記』, r 仲尼弟子列傳』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 故子 貢 一出 , 存魯,亂齊, 破吳, 强魯而覇 越 子貢一徒 便勢相破, 十年之中, 五國各有덫.> 제 9 장 ® 曾子는 봉건사회 윤리의 기초가 되는 孝治思想의 주도자이다 . 曾子 18 편과 曾子派 에서 나온 孝經은 그 기본 경전이 되고 있다 . <夫孝德之本也, 敎之所由生也>라는 것이 그 기본 관점이고 『大戴記』, 『曾子大孝』 ; <身者親之迫體也, 行親之遺體, 政不 孝也?> <父母全而生之, 子全而歸之, 可謂孝矣 . 不帖其體, 可謂全矣 > 에서는 曾子 의 孝 개념 실천방법의 일부를 알 수 있다. ® 이것과 흡사한 고사가 『授神記』 卷 11 에도 보인다. 거기에서는 曾子가 孔子를 따라

楚나라에 있을 때 어머니와 서로 통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는 이야기가 나온 다. ® 曾哲은 曾썹십 이라고도 하며 역시 孔 子를 스승으로 삼았었다. 『論語』, r 先進」에 보면 <吾與賜也>라고 하여 曾哲 의 이름이 나온다 , @ 袁阿는 『中國 神話史 』 에서 公治長 이야기를 왜 <神話>라고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 설명하였다 , 그것은 袁阿가 일관되게 주장해 온 <廣義의 神話> 개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公治長이 새들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일종의 <物我交感>으로 原始心 理라는 신화의 발생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伯益의 이야기는 신화로 보면 서 公治長의 이야기를 신화로 파악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袁阿는 주장한다( 『 中國 神話史』, 163 쪽, 上海文藝出版社). 袁阿는 <廣義의 神話> 개념을 사용하여 중국 신화전설의 많은 부분을 신화의 범 위 내로 포괄시키고 있지만 그의 이러한 관점은 신화와 전설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 고 있으며 동시에 신화에서 전설로, 전설에서 소설로 이어지는 신화의 문학적 발전과 정을 무시해 버리는 단점이 있기도 하다. 王松은 r 論由神話到{崩說的轉變-與袁阿先 生商椎有關中國神話問題」에서 袁阿의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논박하였다. 그는 원시 심리가 사라지고 神에 대한 人間의 숭배에 동요가 생기면서 신화가 점차 그 기능을 잃게 되고 소멸되어 그 이후 나타나는 것이 바로 <人性>이 중심이 되는 傳說이라고 하며, 袁河는 神話學의 범주를 혼동시키고 있다고 비판하였다(『民族文談』, 53-54 쪽. 60 쪽, 中國民間文藝出版社, 19& 5). 사실 전설을 신화와 완벽하게 분리해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 왜냐하면 전설 자체가 신화에서 발전해 나온 것이기 때문에 <역사시대 역사인물에 관한 故事>라는 기준이 있다고 해도 어떤 경우에는 그 기준을 엄밀하게 적용시키기가 쉽지 않기 때문 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역사시대 인물에 관한 신화적인 이야가는 전설로 파악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公治長이 새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것이 신화적인 이야기이기는 해 도 公治長은 역사시대의 인물이기 때문에 그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인물에 관한 전 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神化되 어 나타나는 것은 중국 역사전설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 『史記』에 <孔子問之曰 …… 吾以言取人, 失之宰予 ; 以親取人, 失之子羽>라고 되 어 있고 r 索隱』에 보면 <『家語』 …. •• r 子羽有君子之容, 而行不勝其院』 而上文云 「滅明狀親莊惡』則以子羽形屈也 . 今此孔子云『以統取人, 失之子羽』與家語正相反> 이라고 되어 있다. ® 원주 18) 에 보면 『呂氏春秋』, r 知分篇』에 나오는 <次非>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 가 인용되어 있다. 저자는 <次非>에 관한 이야기가 潟臺子羽 전설의 分化라고 여겨

이 부분에 원용했다. <次 =) I : >라는 이 름에 대해서는 몇 가지 다른 이 름들 이 古籍에 등 장하는 데 <炫非> ( 『漢사 J , r 宣帝紀 」 注), <伏飛>(『北堂꿉운少』), <~=J I:>( 대 L 南子』, 「 道應 wll 』), <次非> ( 『博物志』 ), <刺藍>(『戰國策』 ) 등 여러 가지 다 른 글자로 기록 되어 있다 . 이것은 古籍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한 사람의 이름이 여러 가 지 글자로 기록된 것이다 . ® < 此江中之腐肉朽骨也, 棄劍以全己> 에서 <腐肉朽骨>을 陳 昌齊 • 孫辯鳴 둥은 <강물 속의 교룡 > 이라고 보는데 반해서 陳奇獸 는 그것이 바로 <次非> 자신을 가리 킨다고 해석하는데, 袁阿 역시 그것과 같은 시각에서 이 부분을 해석했다 . 『韓非子』 , r 忠 孝 』에 보면 <烈士內不爲家 , 亂世絶嗣, 而外橋於君, 朽骨賜j肉, 施於土 地 , 流於 川谷, 不避距水 火, 使天下從而效之 , 是天下偏死而願天 也 > 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거 기에서 先秦시대에 이미 사람을 <朽骨蘭肉> 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游臺子 羽는 매우 신중하고 백성들을 중시했던 사람인 것 같다 . 『大裁禮記』, 『衛將 軍 文子」에 보면 <貸之不喜, 賤之不怒. 荀于民利矣, 廉于其 事上 也, 以佐其下, 是涼 臺滅 明之行也>라고 되어 있고 『論語』, r 雍也」에도 보면 孔子와 子游 가 源꿉滅 明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 <子游爲武城宰. 子曰 ; r 女得人焉爾 平?』 曰 ; r 有沿 臺滅 明者, 行不由經, 非公事, 未’晋至于個之室也」> ® 여기 인용된 『史 記 』 , 「仲尼弟子列傳Joj] 의하면 孔子가 살아있을 때 沿臺子羽 가 납 방에서 제자를 거느린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r 儒林傳」의 기록에 의하면 < 孔子卒 後, 子羽居楚>라 하여 孔子가 죽은 뒤에 沿臺子 羽가 남방으로 간 것으로 되어 있다. 더구나 孔子 생전에는 제자들이 다시 그들의 제자를 모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점으로 보아 高專誠은 r 仲尼弟子列傳』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孔 子和他的弟子門』, 133 쪽, 新 華 出版社, 1991). 高專誠 은 『孔子和他的弟子{바에서 孔 子의 나이별로 (30 대, 40 대 …… 등) 그를 따르던 제자들을 소개해 놓고 있는데 상당히 상세하여 이 책에서 많은 부분을 참고하였음을 밝혀 둔다 . ® 『史記』, r 仲尼弟子列傳』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 孔子聞之 曰 ; r 吾以言取人 , 失之 宰予, 以院取 失之子羽」 > 그리고 재여에 대해 공자가 못마땅해 했던 부분이 또 보 이는데, 그것은 바로 재여가 공자에게 부모의 삼년상을 모시는 것이 너무 길지 않느 냐고 물었다가 공자가 < 아이가 태어나서 삼 년이 지나야 부모의 품에서 나올 수 있는 데 부모의 삼년상을 모시는 것 역시 세상의 도리이거늘 재여는 어질지 못하구나!>라 고 하는 부분이다. <宰予字子我. 利口辯辭. 槪受業, 問 …… r 三年 之喪不已久平? 君 子三年不爲禮, 禮必城 ; 三年不爲樂, 樂必崩. 薔穀槪沒, 新穀槪升, 鎖遂改火, 期可 已矣』 子曰 …… r 於汝安平?」 曰 …• •• r 安』 r 汝安則爲之. 君子居喪, 食旨不甘, 聞樂 不樂 故弗爲也J 宰予出, 子曰 ·… •• r 予之不仁也! 子生三年然後免於父母之懷. 夫三 年之幾 天下之通義也』>

@ 대낮에 자다가 재여는 공자에게서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 없고 더러운 벽에는 칠을 할 수가 없다>라는 말을 들었고, 또 재여의 행동으로 인하여 공자는 <예전에는 그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의 행동을 믿었으나 (재여를 보고 나니) 그 말을 듣고 나서 반드시 그 행동을 보아야만 하게 되었다>라고 하여 재여의 빼어난 말재주와 일치하 지 않는 행동을 꾸짖었다. <宰予효®· 子日 …… 『朽木不可離也, 萊土之塔不可杓也. 於予與何謀?』 子 El …… 「始吾於人, 聽其 言 而信其行 , 今吾於人也, 聽其 言 而親其 行, 於予與改是』>(『論語』, r 公治長」) 제 10 장 ® 노자의 출생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기이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 老子韓 非列傳』, 「正義」에 보면 그런 것들이 나오는데 『神仙셉』에 보면 <老子, 楚國苦縣湘 鄕曲仁里人, 姓李 名耳, 字伯陽, 一名重耳, 外字朋. 身長八尺八寸, 黃色美眉, 長耳 大目, 廣頓疏齒 方口厚脣 額有三五達理, 日角月惡, 鼻有雙柱, 耳有三「 1, 足距二 五, 手肥十文, 周時人, 李母八十一年而生>이라고 되어 있고, 『玄妙內篇』에 보면 역 시 그가 <어머니 뱃속에서 81 년 동안 있다가 오얏나무 아래에서 태어났고 어머니의 왼쪽 겨드랑이를 가르고 나왔다고 한다(李母懷胎八十一載, 遣造李樹下, 酒割左股而 生).> 또는 <현묘옥녀가 꿈에서 유성이 입에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임신을 하여 72 년만에 노자를 낳았다(玄妙玉女夢流星入 口 而有振, 七十二年而生老子)>라고도 한 다. 한편 『上元經』에는 <노자의 어머니가 밤에 탄환만큼 큰 오색구슬이 하늘에서 내 려오는 것을 삼키고 임신을 하였다(李母盡夜見五色珠, 大如彈丸, 自 天下, 因毛之, 卽有振)>라는 대목이 보이는데, 이것들은 모두가 일종의 <感生神話>로 노자라는 위 대한 인물의 태어남이 오색구슬이나 유성 동의 신성한 것들에 감옹하여 이루어진 것 이라는 신화적 상징성을 띤다. ® <老子>라는 명칭에 관해서는 두 가지의 서로 다론 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老子> 의 <老>는 존칭이고 <老子>는 <孔子><孟子>처럼 후인들이 부론 이름이라는 설 이다. 또 하나는 <老>가 성씨라는 것인데 이것에 대해서는 唐菌의 『老朋的姓名和時 代考』를 참조하면 된다. 陳鼓應 역시 『老子訪釋及評介』(中華書局, 1987) 에서 고대 에는 李氏라는 성이 없었고 老氏라는 성만 있었다고 하였다. 『世本』이나 『風俗通』, 『左傳』 둥을 보아도 春秋 240 년 간 李氏姓이 나타난 기록이 없으며 또 고대에 <老> 와 <李>의 발음이 서로 같았던 것으로 보아 <老>를 성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 文惠君이 應丁의 소잡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니 座丁이 그에게 소잡는 도리에 관하 여 설명하는 대목이다. 소의 근육과 뼈의 틈을 잘 보고 소를 잡으니 19 년 동안 같은 칼을 써도 늘 새로 벼린 칼과 같다. 그것은 자연스런 흐름에 따라 소를 잡기 때문인

데, 그래도 잡을 때는 늘 정신을 집중해서 조심조심 다룬다. 이것은 바로 자연의 이치 에 따라 순응하며 사는 것이 바로 양생의 도리라는 것안데 文惠君이 그 이야기를 듣 고 <吾 l lfl l l'l丁之 言, 得發生焉>이라 한다. ® 『初學記』 卷 7 關 第八 白馬삼牛條에 구체적인 기록이 나온다. < / 정元極元年 , 歲在 끗 丑, 冬十有二月二十五日, 老子度函谷腦. 關令尹 喜先 勅門吏曰, 若有老翁 從東來, 乘범牛薄板車, 勿聽過關 其 日 果見老翁乘꿉 牛車求度關, 授喜道德經五千.> ® 墨子 의 출신에 대해서는 노동자 출신이라는 설도 있지만 평민 출 신이라는 설이 일반 적이다. 『呂 氏春秋 』 , 『 高義篇 」의 <盟度身 而衣, 亞腹而食, 比于 었萌 , 未政 求士>, 凌類篇』의 <臣北方之部人也, 聞大王將攻宋, 信有之平?>라는 구절을 예로 들어 볼 수 있다. 『墨子』 , 『魯問篇』에서는 公輸子처럼 나무를 잘 깎았다고 하고 Ii'韓非 子 』, 『外(諸篇제서는 木店을 만들어 하늘에 띄웠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가 비 록 수공업자는 아니었을지라도 기술 방면에 뛰어난 솜씨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 다 . 한편 司馬遷은 『史記』, r 孟子荀卿列傳」에서 그가 宋나라의 大 夫 였다고 쓰고 있 지만 그가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각국의 왕을 만난 이야기는 자주 보여도 벼슬을 했 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 부분에 대해서 梁啓超는 墨子 가 宋나라를 구해 준 일 때문에 司馬遷이 그렇게 쓴 것으로 보인다며, 墨子가 宋나라를 구해 준 것은 그 자신 의 兼愛나 非攻主義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지 그가 宋나라의 大夫였기 때문은 아 니라고 설명한 바 있다( 梁啓超 , 『墨子學案J, 2 쪽, 臺灣中華書局 , 1 언 8). @ 墨子 는 非攻울 주장하면서 또한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할 때를 대비해 방어의 준비를 철저히 할 것을 강조하였다 . 『七患篇」에 보면 <庫無備兵, 難有義不能征無義 城廊不備全, 不可以自守;心無備慮, 不可以應卒>이라 하여 대비를 철저히 하지 않 으면 스스로를 지켜 싸울 수 없다고 말하였으며, 『卽葬下篇』에 보면 < 凡大國之所以 不攻小國者, 積委多, 城廊修, 上下調和, 是故大國不耆攻之>라 하여 성곽을 보수하 고 모두가 단결하여 대비를 하면 큰 나라가 감히 작은 나라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 고 하였다. 그리고 r 備城門篇』에서는 自衛의 여러 가지 방법을 나열하고 있다. ® 『墨子』, r 公輸篇』에는 <臣之弟子溪滑盤等三百人>이라고 되어 있고 『呂氏春秋』, 『有度篇』에는 <孔墨之弟子徒屬滿天下>, 陸賈의 『新語』에는 <墨子之門多勇士>라 는 구절이 있다. 이런 것으로 보아 그의 제자들은 상당히 많았고 또 매우 용맹스러웠 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墨子의 제자들에 관해서는 역사적 기록이 많지 않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그의 제자들은 대략 18 人이라고 하는데 錢穆은 r 墨子弟子通考』에서 고중할 수 있는 것이 9 人이라 했고 孫話讓은 r 墨子傳授考』에서 15 人이라고 했다. 薛 保給은 孫胎讓 • 梁啓超 • 方授楚 • 錢穆 둥의 견해를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묵자 전 수표를 만들었다(『墨子的人生哲學 』, 2.5-2 8 쪽, 臺灣中華書局, 1'57 6 ). l. 墨子의 親傳弟子

0 여러 학자들이 확실하게 인정하는 제자-危滑益, 高石子, 公尙過, 耕柱子 曹公子, 勝綺 隨媒子, 胡非子 등 8 人 ®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제자- 高何 등 11 人 2. 再傳弟子-許犯 둥 8 人 3. 三傳弟子 -田 契 둥 3 人 4. 기타 -전 수계보를 파악할 수 없는 인물들, 田鳩 • 我子 • 線子 • 田襄子 둥 ® 영골리」라는 우리말 발음은 역자가 孫胎讓의 댜 E 子開話』에 따른 것이다. 梅胎寶의 영역본 댕망子 (The Works of Mo tze)』(文致出版社, 臺北, 1980) 에 의하면 r~ 滑盤』 를 rchi n Hua L iJ라 하고 있어 r 금활리」로 읽을 수 있으나 (518 쪽), 孫始讓의 案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 『 史記』 索隱에 의하면 腐滑監는 묵자의 제자 이름이며 益의 발음은 里이다. 『呂氏春秋』에는 腐滑益가 炎滑黎로, 『列子』, 『楊朱』에는 腐骨益, 殷 敬順釋文에는 貧屈蓋로 되어 있고 음은 骨理이다 …… 滑 • 骨 • 屈, 楚 • 益 • 黎는 발 음이 가까와서 서로 통용된다.>(『墨子開誌』 卷 13, 448 쪽, 華正書局, 1987) ® 墨家로서의 수행이 얼마나 고된 것이었는가를 보여 주고 있는 부분이다. 묵자는 생활 에 있어서 節用을 주장하였다. 당시 잦은 전쟁으로 인하여 일반 서민들의 생활은 매우 피폐하였는데 儒家들은 여전히 禮樂을 중시하였고 상충계급의 사람들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접한 묵자는 非樂 • 節葬과 더불어 생활의 주요 덕목으 로 節用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 역시 근검하 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야 했을 것이니 수제자인 寫滑蓋의 수행은 당연히 고되고 힘든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제자들이 다 그렇게 고된 수행을 겪어 낸 것은 아니어서 『公孟篇」에 보면 힘든 수행을 했으니 이제 벼슬을 하게 해달라고 묵자에게 요구하는 제자의 모습도 나타난다. <有游於墨子之門者, 身體强良, 思慮個通. 欲使 隨而擧 子墨子曰 ; 姑學平, 吾將仕子. 勸於善言而學, 其年而責仕於子墨子.> ® <兼愛>라는 것은 <別愛>와 구별되는 개념으로 남의 나라, 남의 집, 남의 몸을 나 의 것과 똑같이 귀하게 여긴다는 관념이다. 세상의 모든 다툼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믿은 그는 <若使天下兼相愛, 國與國不相攻, 家與家不相 亂 盜賊無有, 君臣父子皆能孝慈 若此則天下治>(『兼愛上篇」)라 하여 서로 사랑하 기만 한다면 세상의 모든 어려운 문제들이 다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儒家의 孟子 나 荀子는 묵자의 이러한 관념을 <無君><無父>라고 공격하였다. 묵자의 이러한 주 장은 지극히 理想的인 관념이기는 하지만 역자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당시로서는 혁 신적이고 <아름다운> 생각이었다. 다만 그가 理想으로 여기던 고대의 제왕들이 폭군 을 몰아낸 전쟁에 대하여 그것 역시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攻伐>과 다른 <珠伐>이 라고 하여 옹호한 것은 그의 兼愛 • 非攻사상과 배치되는 것이다. 전쟁을 반대한다면 모든 전쟁을 반대해야 하는데 고대 貸君들의 전쟁에 당위성을 부여한 것은 그의 <아

름다운> 사상에 홈이 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 孟子 』 , 대卷文公下篇』에 보면 당시 墨子 와 楊朱의 학설이 매우 성행했었음을 알 수 있다. <楊朱墨子之言盆天下 , 天下之 言 , 不歸楊, 則歸 墨 .> @ 묵자는 자기희생으로 천하를 구제할 수 있기를 원했는데 댜思子』 , 『大取篇』에서 그러 한 사상을 엿볼 수 있다 . < 斯指與斯腕, 利於天下相若, 無擇也. 死生利若 一 , 非無擇 也. 殺一人以存天下, 非殺人以利天下也. 殺己 以存天下, 是殺已 以利 天下.> 이에 반해 楊子는 나 자신을 위할 것을 주장하였는데(『孟子 J , r 盡心上」 ; ), 맹자는 r 勝文公 上篇』에서 양자와 묵자를 모두 비평하면서 <無父無君, 是廊 獸也>라고까지 혹평을 하였다. 儒家의 묵자에 대한 이러한 비평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세상을 아름 답게 하고자 했던 묵자의 사상이 계승, 발전되지 못하고 사라지게 되었으며, 그것은 또한 중국인의 사고방식 형성에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맹자뿐 아니 라 순자 역시 조리 있게 묵자의 사상을 반박하였는데 그것에 일리는 있지만 <墨身!의 純潔보다는 못하다 .> (梁啓超, 『墨子學案』, 71 쪽) ® 漢魏 年 F버 에 墨子가 撰하고 劉安이 剛했다는 책으로 『墨 子五行記 』 이다. 그 내용은 대부분 묵자의 變化之術에 관한 것이다. ® 사상적으로 보아 묵자는 직접 神仙과는 관계가 없다. 梅新林은 묵자의 尊天明鬼 • 兼愛尙同 둥의 정신이 太平道 둥 초기 道敎에 비교적 큰 영향을 미쳐 神仙과 관계 되기 시작했다고 보는데( 『 仙話』, 143 쪽, 上海三聯出版社, 1992), 물론 그러한 이유도 있기는 하지만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인물들을 모두 민간의 신으로 만들어 받드는 중 국인의 종교심리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묵자는 『神仙傳』에 이르면 완전히 仙化되 어 神仙으로 나타나게 된다. 제 11 장 ® 『文選J, r 西都賊」薛綜注云. <魯般, _云公輸子, 魯哀公時巧人.> ® 여기에서는 공수반이 나무로 까치를 만들어 하늘에 날리니 사흘을 떠있었다고 하는 데, 『列子』와 『淮南子』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墨뿔이 飛席을 만들었다 >(r i易 rP1 」 ; <墨習之飛~> 張注云 ; <墨子作木意, 飛三 日 不集>)고 하고 또 <노반과 묵적 이 木 意을 만들었는데 사홀을 떠있었다>(「齊俗訓」 ; <魯般 • 墨子 以木爲志, 而飛之三日 不集>)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본문의 뒷부분에 나오는 노반의 나무새 이야기와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 비슷한 이야기가 『韓非子』, 『外(諸說』에도 보인다. 여기에서는 묵자가 木篤울 만들 었고 묵자 스스로가 그것을 수레바퀴 비녀장과 비교하여 巧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墨子爲木諒 :군 . ,, 「- I(0 成, 갑 (一 日 |T1 i敗 弟子口 …• •• ‘先 生之巧, 至能使木花飛.’ 墨子 曰 …• •• '不t n 爲車稅之巧也, 用肥尺之木 , 不費 一 h, lj之 4 t , 而引 三 十石之ff, 致遠, 力 多, 久於歲數 今我爲店 三 年成, 藍一 日 而敗.’ 惠子槿]之曰 …… ‘ 墨子太 巧, 巧 爲稅 , 抽於商 . ’ > @ <'끓 那 > 에 관해서 『淮南子』 注 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 r 兵略감 ii」 許 愼注云 <雲橫 可依雲而立, 所以敵敵之城 ~r.> 「 修務訓 」 高注 云. <'雲柚, 攻城具, 高長上與雲齊, 故 E3 雲秘 . > ® 『太平 御覽후. <『尸子』 云 …… 般爲蒙天 之階 階成, 將以攻宋 .> ® 慣子』, 『魯問 篇 」에 보면 齊 나라가 魯나라를 칠까 봐 걱정이 된 노나라 왕이 묵자 에게 묻는 대목이 나온다 . 그리고 묵자는 齊 나라 장수 項子牛를 만나 정벌을 단념하 도록 설득하고 또 齊 나라의 太王 田和 를 만나 자신의 非攻이론을 펼치는 부분이 보 인다. 여기에서도 楚나라가 宋울 치려는 것을 보고 魯나라가 위험해질까 봐 걱정이 되어 楚나라로 간다는 것인데 이것으로 보아 그가 당시에 魯나라에 거주하고 있었음 은 분명하다 .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魯나라만을 위해서 전쟁을 막았던 것은 아니다. 魯陽文君이 鄭나라를 공격하려 했을 때에도 아무런 사심 없이 그것을 말리는 장면이 보인다. 이런 것으로 보아 그는 非攻이론의 실천을 위해 노력했을 뿐, 어느 나 라의 이익을 위해 그랬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 앞서 묵자가 齊 나라 왕을 만나 魯나라에 대한 공격을 저지시켰다는 이야기도 했거니 와 여기에서 묵자는 또한 막강했던 楚나라 왕을 만나 공격을 중단할 것을 권한다 . 묵 자가 평민이었지만 이미 사상적으로 상당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부분 이다. 한편 묵자는 <孔子처럼 中庸울 통해서가 아니라 舊社會는 근본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극단적 성격의 소유자로 시대조류를 반대하는 혁명적 색채를 지녔던 인물 > (梁啓超 『墨子學案』, 3 쪽)이며 『淮南子』, r 要略訓』의 기록대로 <背周道而用 夏政> 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 어쩌면 그래서 <殷나라의 자손인 宋나라에 관심을 가 졌는지도 모른다 .> (김학주, 『 묵자 』 , 얽쪽, 민음사, 1988) 이런 맥락에서 묵자의 사상이 宋나라 襄公에서 나왔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宋나라 襄公之仁이 묵자의 겸애 • 비공 사상과 비슷하다는 것으로 兪正燮이 閃츤巳類考』에서 주장한 것인데 馮友關 역시 같 은 시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로서 주장한 겸애와 비공 사상을 宋襄之仁과 결부시키는 것은 너무 좁은 시각으로 보인다. 앞에서도 이야 기했듯이 그가 중단시킨 전쟁은 타국의 송나라에 대한 공격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 의 아론을 실천하기 위하여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의 겸애 와 비공이론이 비록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점은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좁은 시각으로만 보는 것은 그의 아름다운 사상을 폄하시키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 여기에서 <공수반(公輸盤)>의 <반(盤)>은 <반(般)>이 되어야 한다. 『史記J, 『孟

子荀 9 f l flj傳染解』나 『後淡&J , 「張衡傳」 注, 『 文選 』 注와 『 戰國策 』 , r 宋策 』, 『呂 氏 春 秋 』 , 『愛類篇」과 葛洪의 F 神 仙傳 』 등에 모두 <반(般)>으로 되어 있다 . ® 孫治讓의 댁믿子 'fl話』에 따르면 楚나라가 宋나라를 침입하리라는 것을 알고 방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묵자가 간첩일까 의심하여 쫓아버린 것이라고 한다 . ® 춘추시대의 工匠 公輸般이 후에 뛰어난 기술자 魯般으로 변하게 되어 그에 관한 전 설이 전국 각지의 각 민족 사이에 전승되어 내려온 것은 일종의 역사적 <附會>라고 볼 수 있다(吳씀章, 『成都的大石遺跡及其(專說探」, 『民 間文學 論培』 , 6 쪽, 1986.6 ).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한 인물이 傳說 속에서 위대한 神으로 묘사되는 것은 중국의 신화전설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 기술자로서 魯般의 경우는 특히 그러한 데 『論衡』에서 王充이 그에 관해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들을 비판한 것으로 보아 淡 代에 魯般은 이미 기술에 관한 한 뛰어난 神으로 전승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 노반의 출신에 관한 기록으로는 여기에 인용된 『孟子』, 「誤襲篇」 이외에 『呂氏春 秋』, 「愼大다, 깽덴鐵論』, r 貧富篇』, 『禮記』, r 桓弓」 둥을 예로 들 수 있다. 『呂氏春 秋』에서는 <公輸般, 天下之巧工也>라 하고, 『鹽鐵論』에서는 <公輸子 能用人主之材 木, 以構宮室臺樹, 而不能自爲專屋俠麻, 材不足也>라 하여 그가 가난한 기술자였음 을 보여 주고 있다. 『禮記』에서는 <季康子之母死, 公輸若方小, 險, (公輸)般 請 以機 封>이라 하여 그가 工匠 世家 출신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과연 魯 昭公의 아들이 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가 왕의 곁에 있으면서 雲車 등을 만들어 낸 것을 보면 춘추전국 당시 건축을 비롯한 수공업이 매우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 @ 직업에 관계된 많은 神들 중 대부분이 현재 民「버에서 神仙으로 받들어지고 있는데 木石匠人인 魯班 이외에 鑄造業의 李老君, 陶器業의 范義 둥이 그런 예이다. 직업 에 관계된 이러한 神들에 관해서는 任職의 『七十二行祖師爺的傳說』(海燕出版社, 1986), 陳德來의 『三百六十行祖師爺傳說』(浙江文藝出版社, 198 .5) 등을 참고로 할 수 있다. 한편 『唯望洞天福地』를 쓴 鄭土有는 각 직업의 神울 숭배하는 습속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습속에서 우리는 神仙信仰의 要諦롤 볼 수 있다. 민중은 神仙들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창조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었고 그 들이 민중을 위해 재앙을 없애 준다고 믿어 숭배해 왔다. 그래서 그들이 어떤 창조물 이나 발명품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발명품의 내력을 밝혔으며 근원을 찾아보 고자 했다. 그리고 또 일반인들의 神仙에 대한 숭배심리를 이용하여 자기 직업의 지 위를 높이려고 했으며, 정신적으로는 神仙을 자기들 직업의 보호신이나 정신적인 지 도자로 삼아 칙업 내부의 단결과 응집력을 높이고자 하였다.>(陝西人民敎育出版社, 239 쪽, 1991) ® 魯般전설은 漢族뿐 아니라 白族이나 社族 • ~族 • 壯族 • 布依族 • 苗族 • 水族 둥 의 민족 사이에 광범위하게 전승되고 있으며 20 匠과 9~ 는 모두 魯般이 그의 제자나

딸, 사위에게 기술을 전해 각기 독립되어 나온 것이라고 말해진다. 한편 湘西 土家族 사이에서도 魯般은 72 行 수공업의 조상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 魯班전설은 店 1 - U 에 이르러 이미 전국적으로 퍼졌다 . 그는 재주 좋은 木匠에서 건축 기술자로 변해 멘靜昭假 U 』, 『續菓」 卷 4 에 보면 <今人每諸棟宇巧麗, 必强謂魯班奇 工也 至兩都寺中, 亦往往托爲魯班所造- 其不稽古t n 此>라고 되어 있어 뛰어난 건축기술자로 자리를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嘉慶湘源縣志f에 보면 <立有魯班廟, 以爲祈報>라 하여 唐宋 이후 明初 木工들이 北京과 다른 지역에서도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대한 제삿날도 각지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6 월 을 魯班의 생일이라 하고 있으며 홍콩에서는 6 월 6 일을 <魯班節>이라 하여 三行(세 가지 직업, 泥水 • 木工 • 掛桐)이 모여 제사를 모시고 있다 . 그날이 되면 그 칙업의 사람들은 하루를 쉬며 잔치를 벌이는데 북방에서는 <魯班社>활동이 매우 성대하다 (張振梨 「歲時風俗」, 『民俗學講演菜』, 354 쪽, 書 目文獻出版社, 1986. 馬 꿉 田, 『華 夏諸神』, 367-369 쪽, 北京燕山出版社, 1991 참조). ® 『 墨 子』에 公輸般이 나무로 까치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타난 이후 漢代에 이르러 王充이 『 論衡』에서 <魯班作木鳥>에 관해 구체적으로 비판을 하였다. 그것으로 보아 漢代에 이미 木鳥에 관한 이야기가 널리 전승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唐代 『酉 陽雜組』의 기록에 이르면 상당히 발전된 내용을 보인다. 또 李商隱의 『溫湘錄』을 인 용한 멜靜易老燮』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보인다. 한편 漢族뿐 아니라 少數民族 사이에 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는데 係族의 <小木匠> 이야기가 그것과 비슷하다. 어느 木匠이 자기가 만든 <雲供>이라는 木鳥를 타고 밤에 사랑하는 공주와 높은 곳 에서 밀회하다가 국왕이 방해하려 하니 그 <雲供>을 타고 멀리 도망쳤다는 이야기 이다. 또 藏族의 <끝없는 이야기(說不完的故車)>에 나오는 <巧木匠>의 이야기 역 시 이것과 비슷하다. ® 나무로 만들어진 새를 타고 날아다니는 이야기는 중국뿐 아니라 인도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도 보인다. 특히 인도의 『五卷書』에 나오는 金想鳥 이야기는 魯班木鳥 이야 기와 매우 흡사하다. 나무로 만든 새를 타고 깊은 궁궐로 들어가 공주와 밀회를 하던 주인공이 금시조를 타고 국왕을 도와 적군을 물리쳤다는 줄거리인데 이것은 앞에서 인용한 『襄陽老燮』의 이야기와 비슷해 <같은 기원을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季淡 林, 『五卷 書 』 번역본 序文) 특히 季疾林은 魯班木鳥 이야기가 인도에서 전래된 것이 라고 하였는데 劉守華는 그것에 반대하여 魯班木鳥 이야기가 인도로 전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魯班木鳥의 이야기가 漢代에 이미 널리 알려졌을 정도로 유래가 오래 된 것이라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다. 특히 魯班이 敦煙 涼서 1 의 工匠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魯班의 이야기가 비단길을 통해 인도로 전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劉守 華, 『木鳥-一個影響深遠的民間科學幻想故專』, 『民間故事的比校硏究』, 없~- 211

쪽, 中國民間文藝出版社, 1986). 그러나 劉守華의 이런 주장에는 좀더 확실한 근거 가 필요하다. 인도의 댜겁t? :~ 』 가 기원전 2 세기에 이미 형성되기 시작한 책이라면 그 유래 역시 오래된 것인데 魯班木鳥 이야기가 그것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고 주장하기 에는 객관적인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 魯般이 나무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전설은 매우 환상적인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당시 사람들의 想像力을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그들이 꿈꾸던 과학적인 理想이 반영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인류사회의 幼年期 想像力의 산물이라는 신화의 개념에 이러한 환상적 전설도 포함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 기록된 『論衡』의 이야기는 가 장 오래된 기록이지만 王充 자신은 그것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는 당시의 기 술 수준으로 보아 자동화된 機關이 사흘 이상 지속될 수는 없었을 것이니 마차가 사 라져버리는 따위의 일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고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한편 魯般의 <木人>에 관해 근대에 수집된 자료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飛了』 ; 江西지방에 전승되고 있는 것으로 『民間文學』 1965 년 제 2 기에 수록됨 `『木人上天』 ; 전승지역은 밝혀지지 않음. 『民間文學』 1959 년 제 4 기에 수록됨. 『魯班師傅的木人』 ; 雲南지방에 전승되고 있음. 『雲南各族民間故事選』(人民文學 出版社, 1962 년)에 수록됨. ® 이 작품 멉寺J는 현존 陸機詩菓에는 보이지 않고 逸欽立輯校 『先秦漢魏晉南北朝 詩』(學海出版社, 693 쪽)에서 逢欽立이 모아놓은 陸機逸詩에 들어 있다. ® 河北지방에 전승되는 魯班의 이야기를 甄茂樞가 『木鳥』라는 제목으로 수집, 정리하 였다(『民間文學』, 1980 년 제 5 기). 그것은 甄茂樞가 1960 년대에 河北 中部지 역의 당 시 f>()여 세된 匠人 두 사람에게서 채록한 것인데 두 사람이 이야기한 내용이 거의 비 슷하다. 다만 마지막 부분이 조금 다를 뿐인데 하나는 魯班 부친이 江南의 香君에 의 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듣고 魯班이 木人의 손가락이 동남쪽을 가리키게 해 그곳 의 국왕이 종기가 나서 축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魯班이 만든 木人의 손가락이 동남쪽을 가리켜 그곳에 3 년 동안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고통을 당했다는 것이다. 甄 茂樞가 그 내용을 정리할 때에는 魯班의 이미지를 위하여 전자를 채용했다. 劉守華 는 이것이 唐代 <魯班作木志>(段成式, 『酉陽雜沮哀貸集에 실린 이야기) 故事에서 脫胎해 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唐代의 魯班故事는 상당히 完整된 형식으로 지금도 北方지역의 사람들 사이에서 口頭傳承되기 때문이다(劉守華, 「木鳥- _個影響深遠 的民間科學幻想故事』, 『民間故事的比校硏究』, 中國民間文藝出版社, 1986), ® <趙州橋>에 관해서 러시아 학자 李福淸이 기록해 놓은 것이 있다. 러시아의 한학 자인 알렉세예프가 1007 년부터 1009 년까지 중국에서 공부할 때 그의 중국인 스승이 알렉세예프가 산 年畵 <趙州橋>에 대해 해석해 주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趙州橋는 壯元橋라고도 한다. 五代시대에 한 壯元이 趙州의 물이 많아 다리

를 세워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편리하게 해주고 싶어했는데 다리는 만드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 하루이틀에 끝날 것이 아니어서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때 魯班神이 그 것을 알고 기술자로 변하여 그 를 만나 백일이면 다리를 다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 壯 元 이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다리가 다 만들어져 갈 때 張果老 는 魯 9[ 과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 그 다리를 부셔버리기 위해 그는 山울 옮기는 法術 을 사용해 큰 산을 漁鼓에 넣고 나귀에 실어 다리를 건너가게 하였다. 당시 周世宗 宋太祖 는 모두 아직 天子가 아니어서 酸梅를 팔고 있었는데 그들도 수레를 밀고 다 리 를 건너갔다 . 두 皇帝 와 張果老 仙人의 몸무게는 기이하게도 무거워 다리가 무너 질 지경이 되었다. 魯 H1 은 다리 밑에서 法術을 써서 큰 손으로 그것을 받쳐 다리가 무너지는 것을 막았다 . 그래서 지금도 다리 아래에는 커다란 손바닥 자국이 있다고 한다.> 이 기록은 알렉세예프 소장 야止畵圖說』 抄本으로 레닌그라드 冬宮博物館에 所藏되어 있다(李福淸著 馬昌儀譯 『漢族民間故 事的 人物和情節』, 211-216 쪽). ® 唐代에 이미 『八仙圖g와 『八仙傳』이 있었고 明代 吳元泰가 쓴 『 八仙出處東游記』 에서 八仙이 다음과 같이 확정되었다. 李鐵岳 • 鍾離權 • 張果老 • 何仙姑 • 藍采和 • 呂洞賓·韓湘子·曹國員 八仙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나 元明之間 無名氏의 雜劇 1 인 『爭玉 板八仙過海』가 유명하다 . 3 월 15 일 莊萊仙島에 초대받았던 八仙이 연희가 끝난 뒤 孟物을 꺼내 東海를 건너는데 東海 龍王의 아들이 藍采和의 玉板을 빼앗아가자 八 仙이 노해 龍宮에 쳐들어가 그와 싸워 이긴다는 줄거리이다. @ 張果老는 본래 唐代의 道士로서 이름은 <張果>였다. 그에 관한 기록은 『舊唐書』, 『明皇質錄』, 『新唐書』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唐 玄宗 때의 術士였던 것 같다 그는 하얀 나귀를 타고 하루에 천리를 다녔다고 하는데 타지 않을 때에는 종이처럼 접어서 상자에 넣고 다니고 필요할 때 꺼내 물을 뿜으면 다시 커다랗고 하얀 나귀로 변했다고 한다 . 玄宗이 그를 불러 나타났는데 그의 이가 다 빠지고 머리가 하얀 것을 보고 玄宗이 이상하게 여겼다 . 그랬더니 그는 그것을 모두 뽑아버렸고 그러자 그 죽 시 새 머리와 이가 돋아났다 .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신기한 일들을 하니 玄宗이 감탄 하여 通玄先生이란 칭호를 내렸다고 한다(李宗爲, 『神仙世界』, 792-7

으로 혼내 주는 이야기도 나온다(鄭土有, 『 中國仙話』, 173-175 쪽, 姚得安收渠整理). 이런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종합해 볼 때 그는 唐나라 때의 術士였음이 분명하고, 일 반 백성들과 꽤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후에 그에 관한 여러 가지 신 기한 사적이 덧붙여져 神仙으로 묘사된 것 같다. ® 옛날에 유행하던 民間小戱 『小放牛』에 村姑와 牧童이 묻고 대답하는 노래가 있는 데 그 내용이 바로 魯班의 趙州橋와 張果老, 柴王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인용해 본다 趙州橋 {1 법 E 人兒修? 玉石腦干仕磨人留? {1 座人騎驗橋上走? {1 座人推車胤了一道溝? 趙州橋呼魯班爺修, 玉石腦干聖人留. 張果老騎祖橋上走, 柴榮推車胤了一道溝. (馬書田, 『華夏諸神』, 172 쪽, 北京燕山出版社,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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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편 • 하(周秦篇 • 下)

제 1 장 춘추시대, 오(吳)나라와 월(越)나라가 서로 으르링거리며 싸우던 시기 가 있었는데 역사가들은 그 시기를 <오월춘추(吳越春秋)>와라고 부른다 (그 시기는 대략 공자가 살아있었던 시기와 일치한다). 그 시절에 대해서 지 금까지 전해지는 민간전설들을 보면, 신화적 요소가 상당히 많으므로 신 화전설의 범위에 넣을 수 있는데, 이제 그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엮어서 서술해 보기로 한다. <오월춘추> 시절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영옹적인 인물로는 역시 오자 서(ffi子吾)를 꼽을 수 있다. 오자서라는 영웅적 인물에 관한 전설에는 처 음부터 끝까지 신비한 색채가 들어 있기 때문에 우선 그 인물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아야 할 것 같다. 오자서의 이름은 원(員)이고 초나라의 현신(賢臣)인 오사{ffi著)의 아들 이다. 오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형이 오상(ffi尙)이고 동생은 오원 (ffi員), 곧 오자서였다. 당시 초나라의 평왕(平王)은 자신의 아들인 태자 건(建)을 위해 진(秦)나라의 아가씨를 며느리로 맞이하려고 하였다 . 그런 데 그녀가 무척이나 빼어난 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간신 비무기(費元 思)®가 평왕에게 그녀를 며느리로 삼을 것이 아니라 아예 빼앗아 아내로 삼으라고 부추기기 시작했다. 오사는 평왕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간언

像 骨 구 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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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서(『神仙』)

을 하였고, 이에 노한 평왕은 오사를 잡아들여 죽여버리려고 했다. 그때 오상과 오원은 각각 오나라와 정( 鄭 )나라에 가있었는데 비무기는 또 평왕 울 꼬여 그들까지 불러들이라고 하였다. 오사뿐 아니라 그 아들들까지 모 조리 죽여 후환을 없애려 함이었다 그래서 평왕이 그들을 불러들이고자 명령울 내리자 총명하고 어질었던 형 오상은 어명을 받들어 즉시 돌아갔 댜 그러나 오자서는 본래 강단이 있는 성격이었던지라 어명을 받는 순간 바로 갑옷을 차려입고 투구를 쓰고 등에는 활을 멘 채 평왕의 사신을 만 나말했다. r 갑옷을 입은 저의 무례함를 용서하십시오 . 그러나 돌아가 평왕께 아뢰 어 주시오. 만일 나의 아버지에게 죄가 없다면 당장 석방해 주시고, 죄가 있다고 인정하신다면 뜻대로 처분하시라고 말이오. 아들된 내가 돌아간다 고 한들 아버지의 죄를 가볍게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소」 사신은 돌아가 그대로 평왕에게 보고를 하였댜 평왕은 오자서가 자신 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서 오사, 오상 부자만을 죽여 일을 끝냈댜 오자서는 그 사실을 전해듣고서 차오르는 슬픔을 참을 수가 없어 반드시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겠노라고 맹세를 하였다 . 그때 태자 건이 송(宋)나라에 피신해 있었는데 오자서는 그를 따라 송 나라로 갔다 . 나중에 태자 건이 진(晉)나라, 정나라로 가니 오자서 역시 그를 수행하여 함께 갔다. 당시 진나라는 정나라를 차지하려는 생각을 하 고 있었기 때문에 태자 건을 정나라로 가게 해서 내옹을 하도록 하였다 . 오자서는 그것에 반대하였지만 태자 건은 수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비밀 이 새어나가는 바람에 태자 건은 정나라 왕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오자서 는 태자 건의 아들인 공자(公 子 ) 숭(勝)을 데리고 황급히 빠져나와 오나라 로 도망쳤다.” 그때 오자서가 부딪히게 된 첫번째 난관은 소관(昭關)이었다. <오자서 가 소관을 지나다(任子吾過昭關) > 라는 말은 이미 민간에 전해지는 일종 1) 『史記』, 「任子皆列傳』, 『越絶 욥』 , r 荊平王內傳』참고.

의 속담이 되어 있는데 그는 도대체 어떻게 소관을 지난 것일까? 거기에 는 두 가지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댜 ® 초기의 전설에 의하면 그가 소관을 지나갈 때에 관(關)을 지키는 관리 에게 붙잡혔다고 한다 그때 대담하고 재치가 있었던 오자서가 관리를 협 박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왕께서 왜 나를 잡으려고 하시는지 아는가? 나에게 본래 값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귀한 보석이 있었기 때문이야.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미 그 보석을 버렸지. 자네가 나를 잡겠다면 좋아, 잡아보게 . 자네 에게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니 말일세. 왜냐하면 내가 잡히게 된 다면 나는 그 보석을 자네가 빼앗아갔다고 말할 거니까 말이야. 자네한테 뒤집어씌울 거라는 말일세, 알아듣겠나? 자네가 내 보석을 빼앗아서 삼켜 버렸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한번 상상해 보게나. 왕께서 뭐라고 명령을 내리실까? 아마 자네를 죽여서 배를 갈라서라도 그 보석을 꺼내려 하실 것일세. 나야 물론 죽겠지. 그렇지만 내가 죽기 전에 자네 창자가 먼저 토 막토막 잘리고 말 거라구 ……』 이렇게 지독한 말을 듣게 된 관리는 놀라서 멍해졌다. 원래 오자서를 잡으려고 험악한 인상을 쓰고 있던 그는 웃는 얼굴로 오자서를 떠나가도 록 내버려 두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오자서는 마치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태세신(太歲神) ® 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여 유작작하게 소관을 지날 수 있었댜 2) 이것보다 조금 후에 나온 전설에 의하면 오자서가 소관을 지날 때 너무 걱정을 많이 해서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고 한다 . 그것이 2) 『釋史』 卷 89, 引 『韓非子』, <子晋出走, 邊侯得之. 子皆曰, 「上索我者, 以我有美珠 也, 我旦타 子取毛之』 侯因釋之.> 한편 『戰國策』, r 燕策』에 보면 이것은 張丑에 관 한 이야기라고 기록되어 있다. 燕나라 왕이 張丑을 잡아 죽이려 하였는데 국경의 관리 가 丑을 잡게 되었다. 丑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r 我旦 言子奪我珠而毛之, 燕王必 當殺子, 削子腹及子之腸矣, 吾要旦死, 子腸亦旦寸絶J 이것으로 보아 민간전설에서 분화된 것을 알 수 있으므로 그 이야기를 빌려다가 여기에 사용했다.

어떻게 된 일인가 하니 다음 이야기를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당시 오자서는 소관을 지나기 전에 근처에 있는 동고공( 東卑 公)이라는­ 친구집에 머물며 소관을 지나갈 수 있는 계책을 의논하고 있었다. 소관은 경비가 삼엄하고 조사가 심한 데다가 오자서의 생김새를 그린 그림을 걸 어놓고 있어서 도저히 얼렁뚱땅 지나갈 방법이 없었다. 오자서는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 밤새 뒤척이다가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옷을 걸치고 왔다갔다 하며 방법을 생각해 내려 하였지만 좋은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날은 이미 밝아 동창이 부유스름해지기 시 작했다. 그때 오자서가 문을 열고 나가니 동고공이 그를 보고 깜짝 놀랐 다. 어제 저녁만 해도 30 여 세 안팎의 중년 남자이던 그가 하룻밤 사이에 머리털과 수염이 희끗희끗한 50 - 60 여 세의 노인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동고공의 말을 믿지 않았던 오자서는 거울을 보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모 습이 변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어쨌든 잘된 일이었다 . 소관에 붙어 있는 그림과는 어차피 다르게 생겼으니까 그곳을 통과하기는 수월하게 되었다 .@ 그래서 두 사람은 의논 끝에 생김새며 외모가 오자서와 비슷한 시골 사람 울 골라내어 오자서로 분장을 시키고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한 오자서는 그의 늙은 종으로 변장을 하였으며 공자 승은 시골 아이로 분장을 하여 얼렁뚱땅 소관을 지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3 )

3) 『東周列國志 』 第 72 回 <世傳ffi子 꼽 過昭關, 一夜悠白了頭, 非浪 言 也 . > 여기에서 말 하는 <世傳>이라는 것은 明 淸 時代의 민간전설을 가리키는 것이 튤립없기 때문에 그 것을 인용했다 . 그 나머지 부분들은 대체로 『 東 周列國志 』 에 묘사된 것과 비슷하다.

민간전설 중에는 오자서가 소관을 지나는 이 이야기와 홉사한 디론· 전 설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는데 관운장(關公)이 동관(漢關)을 지난 이야기 같은 것이 바로 그렇다 . 전설에 의하면 포주(蒲州) 해량현(解梁縣)의 관공(關公)은 본래 성이 관씨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현감이 약한 부녀자를 괴롭히는 것을 참지 못해 현감과 그의 처삼촌을 죽이고 동관으로 도망쳐 왔다. 그런데 동관의 문 위에 자신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 붙어 있어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門\

。 2 I 虎 관우(『炎黃』) 〔鬪

그래서 상황이 자신에게 이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감히 동관을 지날 수가 없어 일단 작은 시냇가에 잠시 쪼그리고 앉아 궁리를 하고 있던 참 이었다 그는 시냇물을 떠서 세수를 하고 그 물을 거울 삼아 자신의 모습 을 비춰 보았는데 신기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그 물에 세수를 했을 뿐인 데 얼굴색이 누런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해 있는 것이었다. ® 자신도 자기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으니 동관을 지나는 것은 이제 일도 아니었 다. 그래서 그는 의기양양하게 동관의 문을 지나가려 하였는데 문을 지키 는 사람이 느닷없이 이름을 묻는 것이었다 . 그때 다급한 김에 나온 성이 관(關)이었는데 어쨌든 그렇게 해서 동관을 무사히 지나갈 수가 있었다 . 후에 그는 강호를 떠돌다가 유비(劉備)를 따르게 되었고 천하를 세 개로 나누는데 공을 세워 <관을 지나다(過關)>라는- 의미의 <관>을 정식 성씨 로 삼게 되었다. 사실 그의 본래 성은 풍(馮)이요, 이름은 현(賢), 자는 수 장( 壽 長)이었지만4 )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댜 5)

4) 淸 猪人獲 『堅親秘渠』 卷 3, r 指關爲姓』條, 引 『關西故事』, <蒲州解梁縣關公, 本不 姓關 少時力最猛, 不可檢束, 父母怒而閉之後園空室. 一夕月 莊明, 啓窓越出, 閑步園 中, 聞瑞東有女子暗突莊悲, 兼有老人相向突聲 怪而排培狗之. 老者訴云, r 我女已受 賜矣, 而本縣毋爺 聞女有色, 欲嬰爲妄. 我訴之尹, 反受化篤, 以此相泣』 公聞大怒, 杖劍經至縣署, 殺尹井其毋而逃. 至流關, 聞關 r, 圓形, 捕之莊急.伏於水芳, 指水洗 面, 自照其形 自洗面後, 顔而變蒼赤, 不復識認.提身至關, 關主誌問, 隨口指關爲姓, 後遂不易.> 5) 戴不凡 『小說見聞錄』 況 7 쪽, 『小說識小錄』, r 關公姓馮사急

각설하고, 오자서가 공자 승을 데리고 소관을 지나 얼마가지 않았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뒤따라오는 것 같아 급히 아무데로나 숨었지만 곧 잡힐 것만 같았다. 어떻게 겨우겨우 숨어서 추격을 벗어나게 되었는데 이번에 는 큰강이 눈앞에 나타났다. 망망하게 펼쳐진 저 넓은 강을 도대체 어떻 게 건너갈 것인가, 그것이 오자서의 눈앞에 놓인 두번째 난관이었다. 오자서가 속수무책으로 멍하니 강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어부 한 사람이 강의 하류 쪽에서 배를 저어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자서는 서둘러 손을 내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r 노인장 , 저희들을 건너게 해주십시오. 건너게 해주세요!」 그렇게 두세 번 소리를 질렀을 때였다. 마치 옆에서 누가 감시라도 하 는 것처럼 노인은 못 들은 척하면서 되는 대로 홍얼홍얼 노래를 불렀다 . 달이 떠오르니 해는 지네 갈대 가득한 강변에서 그대와 만날거나 ® 오자서는 그 노래의 뜻을 알아들었댜 그래서 공자 승의 손을 잡고 강 가의 갈대밭에 숨어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황혼 무렵이 되었다 . 어부가 배를 저어 다가오는데 배를 저으며 그는 또 노래를 불렀다 . 해가 산너머로 넘어가는데 나의 마음은 아직도 울적하네 달이 떠오르는데 왜 빨리 배에 오르지 않는 것인가 사정이 이렇게 급박하거늘 도대체 어쩌려는 것인가® 오자서는 얼른 갈대숲에서 나와 공자 승을 데리고 배에 올랐다. 어부는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배를 저어 곧장 강 가운데로 나아갔다. 강을 다 건 너고 난 뒤 어부는 오자서의 얼굴에 배고픈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고 말 했다. r 나무 밑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오 . 먹을 것을 좀 가져다 드릴 테니까」 어부가 그렇게 말하고 간 후 오자서는 갑자기 의구심이 생겨 나무 밑에 서 오래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공자 승을 데리고 갈대숲 깊 은 곳으로 들어가 숨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부가 돌아왔다. 그는 나무 밑에 있던 오자서가 보이지 않자 손에 보리밥과 절인 생선으로 끓인 국을 들고서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불렀다.

「갈대숲에 숨은 사람들이여, 와서 밥을 드시오! 와서 밥을 드시라니까 요!」 어부가 그렇게 간절하게 서너 번을 부르자, 오자서는 그의 목소리에 사 람을 속이는 기미가 없다고 생각하고는 갈대숲에서 나왔다 . 어부가 조금 기분이 나빠져서 통명스럽게 말했다. r 당신의 얼굴에 배고픈 기색이 있어 먹을 것을 가져왔거늘 어찌하여 나 를 의심하시오?」 오자서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 뜬 달과 별을 우러러보며 탄식하였다. 「나의 생명은 본래 저 하늘에 달린 것이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당신 , 어르신께 달려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오자서는 공자 승과 함께 보리밥과 국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마침내 떠니는 시간이 되자 , 오자서는 자신의 허리춤에 차고 있던 보검 울 꺼내어 어부에게 두 손으로 정중하게 바치며 말했다. r 이 칼은 선왕께서 하사하신 것입니다. 가운데에 일곱 개의 보석이 박 혀 있는데 아주 귀한 칼이지요 . 이것을 어르신께 드려 저의 고마운 마음 울 전하려 합니다」 어부가 웃으며 말했다 . r 나는 벌써 초나라 왕이 내린 령(令)을 보았네. 오자서를 잡는 자에게 는 곡식 오만 섬을 주고 대부 벼슬을 준다고 했지. 그런 벼슬까지도 마다 한 내가 그까짓 보석이 박힌 칼 따위를 탐내겠는가? 더군다나 그런 칼은 내게 아무런 소용도 없어 . 오히려 당신처럼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그러자 오자서가 다시 물었다. r 어르신께서 이 칼을 받지 않으시겠다니, 그러면 성함이라도 가르쳐 주 시지요. 훗날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그러자 어부는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r 그 사람 정말 어리석구민 우리가 만난 것을 한번 생각해 보게나. 자네

는 초나라에서 도망치는 사람이요, 나는 그 도망자를 도와 주는 사람이 아닌갸 무엇하러 이름 따위를 남길 것인가 말일세. 니는 자네를 < 갈대숲 에 있는 사람(蘆中 人 ) > 이라고 부르면 되고 자네는 나를 그저 < 어부 노인 (漁丈人) > 이라고 부르면 될 것 아닌가? 앞으로 좋은 세월 만나 귀한 몸이 되거든 잊지나 말아 주게. 그러면 충분하네」 오자서는 그에게 고마와 하며 작별 인사~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길 을 떠나는데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다시 고개를 돌려 노인에게 당부 하였댜 「만약에 추격하는 자들이 쫓아와서 묻거든 절대로 우리가 간 길을 알려 주시면 안 됩니다. 꼭 비밀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꼭이요!」 오자서의 말을 들은 어부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했다. 때가 그래도 자네에게는 덕을 베푼 셈인데 아직도 그렇게 나를 의심 한단 말인가? 만약 추격자들이 강을 건너 자네를 잡게 되기라도 한다면 내가 어떻게 나의 결백을 설명할 수 있겠나?―― - 그만두게. 아예 내가 죽 어 버린다면 자네의 그 의구심도 사라지겠지」 @ 말을 마친 어부는 밧줄을 풀어 배를 떠나게 하더니 곧 방향타를 빼버리 고 노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배롤 뒤집어서 스스로 물속에 빠져 죽어 버 리는 것이었댜 오자서는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러나 이미 상황 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으니 그저 탄식이나 할 수밖에. 오자서 는 공자 승을 데리고 다시 길을 떠났다 . 한참 가다 보니 어느새 오나라 땅에 도착했다. 너무나 피곤하고 힘이 돈 데다가 배가 고파서 율양(栗陽)에 이르렀을 때에는 한 발자국도 뗄 수 가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댜 이것이 바로 오자서가 도망길에 겪었던 세 번째 난관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웬 여인이 시냇가에서 빨래 방망이로 광목을 두드리며 빨래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그녀의 곁에는 밥바 구니가 놓여 있었다. 오자서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힘없이 말을 걸었다. 「부인, 당신의 저 밥을 제가 좀 먹어도 될까요?」 그러자 여인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r 저는 어머니와 함께 살며 서른 살이 되었어도 아직 시집을 가지 못한 몸입니다 어찌 길 가는 사람에게 밥을 팔 수가 있겠습니까?」 오자서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r 부인, 오해하지 마십시오. 밥을 팔라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배가 고파 쓰러질 지경이기 때문에 저 밥을 저희들에게 좀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여인이 고개를 돌려 오자서의 모습을 보니 그 모습이 당당한 것이 보통 사람이 아닌 영웅의 기개가 있어 보였다 다만 상황이 여의치 못해 좀 지 쳐 보이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허락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땅바닥에 앉아 밥바구니의 뚜껑을 열고 국 한 사발과 밥 반 바구니를 꺼내어 공손하게 오자서에게 바쳤다 오자서와 공자 승은 밥 과 국을 몇 입 먹고 나서 그릇을 내려놓았다. r 차림새를 보니 먼 길을 가실 것 같은데 어째서 배불리 드시지 않고 수 저를 놓으시는지요?」 그 말을 듣고 나자 오자서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공자 승과 함께 남 은 밥을 허겁지겁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그리고 또다시 떠날 때가 되었 을 때 의심이 많은 오자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녀에게 거듭 부탁했다. 「부인께서 저희들을 살려 주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 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밥바구니와 국그릇의 뚜껑을 덮어 두어 주십시오」 그러자 그녀는 처연히 탄식하며 말했다. r 아아 , 내가 삼십 년이 되도록 홀어머니만을 모시고 살며 외간 남자와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는데 , 오늘 당신이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 놓인 것을 보고 가없온 마음이 들어 당신을 도왔거늘 오히려 이렇게 골치아픈 일을 당하게 될 줄이야 ……. 좋습니다. 이제 마음놓고 떠나세요」 오자서가 몸을 돌려 몇 걸음 가지도 않았는데 뒤에서 풍덩 소리가 들 려왔댜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가 커다란 돌덩이를 안고서 물속에 빠진 채 급류에 휘말려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었다.® 오자서는 보글보글 끓어오르 는 물거품을 보면서 그저 장탄식을 할 뿐, 아무런 방법도 생각해 낼 수가 없어 발길을 돌려 갈 길을 재촉하였다 .61

6) 『吳越春秋J, 「王僚使公子光傳」, <子짬與勝行去, 追者在後, 幾不得脫. 至江, 江中有 漁父乘船從下方訴水而上. 子짬呼之, 謂曰 ; r 漁父渡我!」 如是者再. 適會芳有人窟之, 因而歌曰 ; r 日月昭昭平侵已助, 與子期平蘆之浙」 子짬卽止蘆之汀 A. 漁父又歌曰 ; 「日 已夕令 余心菱悲 ; 月 已地分, 何不渡爲? 事홍急分當奈何! 」 子晋入船. 漁父知其意 也, 乃渡之千薄之津. 子짬槪渡, 漁父乃視之, 有其凱色. 乃謂臼 ; r 子侯我此樹下, 爲 子取使」 漁父去後,子晋疑之,乃潛身於深蓋之中 . 有頃父來,持麥飯抱魚藥益發, 求 之樹下, 不見, 因歌而呼之, 曰 ; r 蘆中人! 蘆中人! 登非窮士平?」 如是者再, 子脣乃出 蘆中而應 漁父曰 ; r 吾見子有机色, 爲子取朗, 子何嫌哉?」 子꼽曰 ; 「性命展天, 今屬 丈人, 登政有嫌哉!」 二人飮食畢, 欲去. 晋乃解百金之劍以與漁者, 曰 ; r 此吾前君之 劍 中有七星, 價値百金, 以此相答」 漁父曰 ; r 吾聞楚之法令, 得任晋者, 賜栗五萬石, 爵執圭, 器徒取百金之劍平?』 遂辭不受. 謂子짬曰 ; 『子急去, 勿留, 旦爲楚所得」 子 꼽曰 ; r 請丈人姓字?』 漁父曰 ; r 今 日 凶凶, 兩賊相逢, 吾所謂渡楚賊也. 兩賊相得, 得 形於默, {iiJ用姓字爲! 子爲蘆中人,吾爲漁丈人, 富貸莫相忘也」 子吾曰 ; 「諾!J 槪去, 誠漁父曰 ; r 俺子之益康, 無令其露」 漁父諾. 子꼽行數步, 顧視漁者, 已裂船自況於江 水之中矣. 子晋默然 遂行. 至吳, 疾於中道, 乞食深賜. 適會女子擊綿於湘水之上, 宮 中有飯 子쭙遇之, 謂曰 ; r 夫人, 可得一役平?』 女子曰 ; r 妄獨與母居, 三十未隊, 飯 不可得』 子쭙曰 ; r 夫人販窮途, 少飯亦{iiJ嫌哉?』 女子知非恒人, 遂許之. 發其筑宮, 飯其益盟, 長路而與之, 子꼽再役而止. 女子曰 ; r 君有遠避之行, 何不砲而發之?J 子 꿉已後而去, 又謂女子曰 ; r 抱夫人之 登康 , 勿令其露』 女子暎曰 ; 「座呼! 子行矣』 子 쭙行, 反亂 女子自投於湘水矣.>(역자주; 이 부분은 『越絶書』, r 荊平王內傳』 第二에 기록된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당읍(堂邑) 땅에 이르렀을 때 오자서는 길가에서 한 사나이가 누군가와 싸움을 벌이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 사나이는 이마가 절굿공이처 럼 튀어나왔고 눈은 움푹 들어갔으며 곰처럼 생긴 둥과 호랑이 같은 가슴 팍을 지닌 자였는데, 목숨을 걸고 싸우는 듯한 그 모습이 어찌나 사나운 지 정말 겁이 날 지경이었댜 그렇게 사나이가 싸우고 있을 때, 갑자기 그 의 아내가 문간에 서서 소리를 질렀다. r 그만두지 못해요!』 그러자 그 사납던 사나이가 양처럼 순해져서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댜 오자서가 그 광경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어 옆 사람에게 사 나이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의 성은 전(專), 이름은 저(諸)라고 하였는데 아무것도 두려워하는 것이 없는 사나이였지만 오직 아내에게만은 꼼짝도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오자서는 전저를 찾아가 그 이유를 물었다. 그랬 더니 전저의 대답이 묘했다. r 당신은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막지한 싸움꾼 같다고 생각하시지 요? 하지만 아니오, 나는 그런 인물이 아니란 말이오. 나는 오직 한 사람 의 아래,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의 위에 존재하는 그런 인물입니다. 그 렇게 보이지 않습니까?」 오자서는 그가 남들과는 다른 특이한 성품을 지닌 용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마음에 들어 즉시 그와 교우 관계를 맺었다. 이후에 쓰일 곳 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71

7) 『吳越春秋』, r 王僚使公子光傳』, <專諸者, 堂邑人也, ffi.吾之亡楚如吳時, 遇之于途. 專諸方與人鬪, 將就敵, 其怒有萬人之氣, 莊不可當. 其妻一呼卽還. 子쭙怪而問 ; r 何 夫子之怒盛也! 聞一女子之聲而折道, 寧有說平?』 專諸曰 ; r 子視吾之儀, 寧類愚者 也?何言郡也!夫屈一人之下,必伸萬人之上』子꿉因相其稅;確願而深目,虎廣而熊 背, 民于從難 知其勇士, 陰而結之, 欲以爲容.>

그런 고생 끝에 오자서는 마침내 오나라의 수도인 오시(吳市)에 도착했 댜 그의 꼴은 이제 말이 아니었다. 그는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서 벌 거숭이가 된 채 땅바닥에 엎드려 무릎으로 기어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끊임 없이 머리를 조아려 구걸을 했다. 또 배를 부풀려 있는 힘을 다해 피리(排 蕭)를 불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단 한푼이라도 얻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댜 81 그것으로 목숨을 부지해야 했기 때문이었댜® 때로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얼굴에는 진흙을 쳐바르고서, 맨발로 헛소리를 중얼거리며 미친 척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그는 그렇게 해서 구걸을 하여 생명 을 이어갔댜 오시의 사람들은 그 모습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 지만 그 미친 남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 관상을 볼 줄 아는 한 관리가 오자서를 보더니 깜짝 놀라서 말했다.

8) 『史記』, r 范唯蔡澤列傳』, (역자주 ; 원본은 다음과 같다. 는 <徐廣타 一作蕭.>)

「내가 사람들의 관상을 많이 보아왔지만 이런 이상한 사람은 처음 보 네 . 이보시오 , 당신 혹시 다른 나라에서 도망쳐 온 외국 왕의 신하가 아니 오?」 그는 죽시 오자서를 데리고 오왕( 吳王 ) 료(僚)에게로 갔다 .9)

9) 『吳越春秋』, 「王僚使公子光傳』, <子 짬 之吳, 乃被發祥狂, 洗足 塗 面, 行乞於市 ; 市人 視 뮌有識者. 笠 日 , 吳市吏 善 相者乃與子 짬 供入見王僚 .>

오왕 료는 오자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과연 얼굴에 위풍당당한 기운 이 흐르고 있었고 , 키가 한 길이나 되었으며 허리 둘레가 열 아름은 되어 보였다 그리고 두 눈썹의 끝이 서로 한 자는 떨어져 있는 것 같았고 이 야기를 나눠 보니 사흘이 지나도 똑같은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10) 오 왕 료는 오자서의 힘을 빌어 군사를 일으켜 초나러~ 치려고 했다. 그러 자 공자(公子) 광(光)이 오왕에게 간언을 하였다.

10) 『太平御탔』 卷엎 7, 引 『吳越 春 秋』(今本 『吳越春秋 』 , r 王僚使公 子 光傳」을 보면 인 용한 뜻이 더욱 명확하다),

「오자서가 초나라를 치려는 것은 그 자신의 사사로운 원한 때문입니댜 왕께서는 그렇게 쉽게 그롤 중용하셔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자 오왕은 초나라를 정벌하려는 생각을 버렸다 공자 광은 본래 오왕 료의 당형제였다 . 그의 아버지는 저번 (諸奧 )이라 고 했는데 그에게는 동생이 셋 있었다. 여제( 余祭 ) • 여매( 余昧 ) • 계찰(季 札)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의 할아버지인 수몽( 壽 夢 )의 유언에 따라 왕 위는 형제의 순서대로 전해져 내려갔다. 저번이 죽자 여제에게로, 여제가 죽자 여매에게, 여매가 죽자 계찰에게로 이어졌다 . 그러나 계찰이 왕위를 마다하고 도망쳐 버렸기 때문에 왕위는 여매의 아들인 료에게로 이어져 내려갔댜 그러자 공자 광은 불만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수몽의 장자였던 저번의 큰 아들, 즉 장손이었기 때문이다 . 그는 왕위가 당연히 자기에게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그는 늘 불평을 할 수밖에 없었고 지금의 왕인 료를 죽여 없앤 뒤 자신이 왕위를 빼앗으려는 계획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l1) 오자서는 공자 광의 세력이 대단하며 가슴속에 다른 뜻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공자 광이 왕위를 빼앗으려 하는 계획을 자기가 나서 서 막는다면 초나라를 쳐서 원수를 갚고자 하는 계획 역시 실현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그래서 오자서는 공자 광에게로 가서 붙었다. 그리고 자신이 맨 처음 오나라에 왔을 때 만났던 전저를 광에게 추천하였다.® 공자 광은 전저를 얻게 되자 무척이나 기뻐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말까지 모두 전저에게 털어놓게 되었다. 전저는 공자 광이 자기를 알아주는 데 감격해서 그를 위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다고 맹세를 하였다. 「왕을 없애려 한다면 ……」 전저가 공자 광에게 말했다. 「우선 그의 비위를 맞출 수 있어야지요. 오왕은 무엇을 좋아합니까?」 공자 광이 대답했다. r 음식 맛보는 것만큼 좋아하는 것이 없지」 전저가 다시 물었다. r 그러면 그는 무슨 음식을 가장 좋아합니까?」 공자 광이 대답했댜 r 그는 적당히 구운 생선을 가장 좋아해. 특히 여러 가지 양념을 듬뿜 얹어서 맛이 뛰어난 생선을 말이야」 그러자 전저는 공자 광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태호(太湖)로 가서 유명한 요리사에게 생선 굽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석 달이 지나자 마침내 요 리의 비법을 전수받아 그가 생선을 굽기만 하면 십리 밖에 있는 사람도 그 향기를 맡을 수가 있을 정도가 되었다 .121 그는 그때서야 집으로 돌아와 공자 광이 명령을 내려 주기만울 공손히 기다리고 있었다 .131 11) 『史記』, r 任子脣列傳」 참조 12) 『金樓子』, 潭記篇』上, <專諸學炎魚, 香間數里.> 13) 『吳越春秋』, r 王僚使公子光傳」, <專諸曰 ; r 凡欲殺人君 , 必求其所好. 吳王何好?』

光曰 ; 땅兎 專 諸曰 ; r 何味所甘?』 光曰 ; r 好뺨魚之炎也』 專 諸乃去, 從太湖 學 炎魚, 三月 , 得其味, 待公子之命.>

마침내 때가 다가왔댜 초나라 왕이 죽자 오왕 료는 개여( 蓋 余)와 촉용 馮 店 ), 두 동생을 보내어 초나라를 치려 하였댜 또 숙부인 계찰에게는 진( 晉 )나라로 출장을 가게 하였는데 공자 광은 그 기회를 이용하기로 하 였다. 즉 집에서 그들을 보내는 송별연을 갖기로 하였으니 오왕 료께서는 오셔서 함께 한잔 하시자는 것이었다. 특별히 맛이 좋은 생선구이를 준비 하였으니 꼭 오시라고, 공자 광은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댜 ® 공자 광은 밀실에 무장한 병사 수백 명을 미리 매복시켜 두었다 . 오왕 료 역시 왕궁에서부터 공자 광의 집에 이르기까지 병사들을 세워두었고, 오는 길에는 자신의 친위대를 곳곳에 지켜 서있게 하였다. 피차간에 경비 가 삼엄하였던 것이댜 연희가 시작되었댜 술잔이 어느 정도 돌고 난 뒤 공자 광은 발이 아프 다고 엄살을 떨며 절룩절룩 걸어서 밀실로 갔다. 그리고 전저에게 구운 생선을 받쳐들고 나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생선의 뱃속에는 날카로운 칼 이 숨겨져 있었다(이 칼은 오왕을 죽인 칼이라고 해서 훗날 < 어장검(魚腸 劍)>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 칼은 본래 뛰어난 장안이었던 구야자(歐治 子)가 만든 다섯 개의 보검 중 하나였다 .14) 전저는 무릎 걸음으로 오왕 료 의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손으로 생선을 가르고 그 속에 있는 날카로 운 칼을 꺼내어 바람처럼 빠른 속도로 오왕 료의 가슴을 찔렀다. 그때 곁 에 서있던 오왕 료의 병사들이 들고 있던 창으로 전저의 양 어깨를 내리 쳤다. 갈고리 끝에 그의 어깨가 걸렸고 창을 뒤로 잡아당기니 가슴이 찢 어져 피가 홍건하게 홀러내렸다. 그러나 전저는 쥐고 있던 칼을 놓지 않 았다. 오히려 료의 가슴 깊이 찔러 들어가니 칼날은 갑옷을 뚫고 동을 관 통해 뒤에 펼쳐져 있던 병풍에까지 닿았다 .15) 오왕 료와 전저는 그 자리에

14) 『 吳越春秋』, 『閩間內傳』, <越王元常使歐治子造劍五枚, 以示薛爆, 爆對曰 ; r 魚腸劍 逆理不順』 故閩間以殺王僚.> 15) 『金樓子 』 , r 雜記 篇 』上, <( 專 )諸 隱 刀刺王僚乳, 出徹後居風.>

서 죽었댜 공자 광은 밀실에 숨어 있던 병사들을 끌고 나와 뒷수습을 하 였고 자신이 오나라의 왕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오왕 합려(凶間)였다 .l6 )

16) 『吳越春秋』, r 王僚使公子光傳』, <公子光伏甲士於密室之中, 具酒而請王僚. 王僚乃 被業鎖之甲三重, 使兵衛陳於道, 自宮門至於光家之 r i, 階席左右, 皆王僚之親威, 使 至立侍, 皆操長執交庫見 酒rut, 公子光伴爲足疾, 入密室麥足 . 使專諸置魚腸劍炎魚中 進之. 槪至王僚前 專諸乃麟炎魚, 因推 七首. 立執交熙, 荷專諸胸,胸斷脫開, 七首如 故, 以刺王僚貫甲達背 王僚匠死, 左右共殺專諸, 衆士極動. 公子光伏其甲士, 以攻 僚衆 盡滅之.遂自立, 是爲吳王閩間也.>(역자주;公子光이 밀실에 병사를 숨겨 두고 술자리를 마련한 뒤 吳王僚룰 청하는데, 그때 吳王僚가 어머니에게 公子光이 청하여 다녀오겠다고 한다. 公子光울 조심하라고 하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그 역시 군사를 거 느리고 가는데 저자의 인용문에 이 부분이 빠져 있어 보충한다. <…… 具酒而請王僚. 僚白其母曰,公子光爲我具酒來請期無變怒平?母曰,光心氣快快,常有情恨之色,不 可不恨 王僚乃被業 …….>)

오왕 료에게는 경기(慶思)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어찌나 용맹스럽고 힘 이 장사였던지 달리는 소를 따라잡을 수 있었고 날아가는 제비도 잡아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살해된 후 경기는 위(衛)나라로 도망울 쳤는데 합려 는 그가 늘 마음에 걸렸댜 그가 와서 자신을 해칠까 봐 좌불안석, 그야말 로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래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돌로 둘러싸고 창 문도 모두 구리로 만들어 그 속에 숨어 살며 완벽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l i l

17) 『金樓子 』 , 遣記篇』, <僚子免(慶),료 走及指牛, 手接飛燕, 閩間患之, 石室銅戶, 藏 醫備之也.>

그러나 합려는 늘 목에 가시 같은 경기를 없애고 싶어했고 결국엔 오자 서에게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고 묻게 되었다. 오자서는 그에게 시정 잡배 인 요리(要離)라는 인물을 소개해 주었다. 요리가 그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자 합려가 물었다. 「일개 시정 잡배가 어떻게 힘이 장사인 경기를 없앨 수 있다는 말인 가?」 오자서가 대답했다. r 그 사람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제가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 를 하나 들려 드리지요」

동해에 치구혼( 薔 丘 訴 )이라는 용사가 살고 있었는데, 그의 용맹스러움 은 온 세상에 이름이 나있었다 어느 날 그는 신연(神淵)을 지나가다가 말 에서 내리더니 말고삐를 하인에게 주며 말했댜 「가서 말에게 물을 먹여라」 하인이 말했다. r 여기서는 말에게 물을 먹일 수 없답니다. 여기서 말에게 물을 먹이면 말이 죽는 걸요」 치구혼이 말했다. 「내 말대로 가서 물을 먹여라」 하인은 감히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어 말을 끌고 가서 물을 먹였는데 말이 정말로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그때 치구혼은 제나라에서 오나 라로 출장을 가는 중이었는데 그 죽시 관복을 벗어버리고 연못 속으로 뛰 어들어 칼을 뽑아들고 수신(水神)과 싸움을· 벌였다 . 그렇게 사흘· 밤낮을 꼬박 싸워 마침내 교룡 세 마리와 용 한 마리를 잡아가지고 연못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뇌신( 雷 神)은 참을 수가 없어서 몰래 그의 뒤를 따라와 천 둥방망이로 그를 내려치고 번갯불로 그를 태우려 하였는데, 그렇게 열홀 을 하였지만 결국에는 그의 왼쪽 눈 하나를 멀게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요리가 그 이야기를 듣고서 치구혼을 찾아갔댜 r 치구혼이 집에 있습니까?」 그 집안 사람이 대답했다. 「지금 묘지에 장사치르러 갔습니다』 요리는 묘지에 따라갔다. 치구혼이 그곳에 있는 것을 본 요리는 사람들 앞에서 그를 욕하며 말했다. r 듣자 하니 뇌신이 당신을 열홀 동안 공격하여 당신의 왼쪽 눈을 멀게 하였다고 하더군요. 하늘에 진 원수라면 하루를 넘기지 않는 법이요, 인간 에게 진 원수라면 발뒤꿈치 돌릴 여유도 주지 않고 즉시 갚아야 하는 것 이라는 사실쯤은 누구라도 다 알고 있는 것인데, 당신은 지금까지도 뇌신 에게 원수를 갚지 않고 있으니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그렇게 한바탕 치구혼을 욕하더니 곧 가버렸다. 묘지에 있던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화를 냈다. @ 요리는 돌아가서 자신의 제자에게 말했다. r 치구혼은 천하의 용사인데 내가 아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모욕 울 주었으니 분명히 나에게 따지러 올 것이다. 저녁이 되거든 대문을 닫 지 말고 잠잘 때가 되어도 창문을 닫아걸지 말거라」 밤이 되자 치구혼은 과연 요리를 찾아왔다. 몰래 내실로 들어오더니 요 리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말했다. r 그대에게 죽을 죄가 세 가지 있다는 것을 아느냐? 첫번째는 많은 사람 들 앞에서 니를 모욕한 죄요, 두번째는 밤이 되어도 대문을 잠그지 않은 것이며, 세번째는 잠을 자면서도 창문을 닫아걸지 않은 죄이다.――-자, 어디 할말이 있거든 해보아라」 그러자 요리가 말했댜 「당신에게는 세 가지 못난 점이 있소이다. 무엇인지 아시오? 남이 당신 을 한 번쯤 욕했다고 해서 이렇게 찾아와 복수를 하려는 것이 첫번째 못 난 점이요, 칼을 빼어들고서도 바로 베지 않으니 그것이 두번째 못난 점 이외댜 그리고 칼을 들이 대고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으니 그것이 세 번째 못난 점이 아니겠소. 니를 죽일 수 있는 것은 독약뿐이오」® 치구혼은 칼을 들고 얼이 빠진 듯 힘없이 걸어나가면서 혼자 옹얼거 렀다. r 천하에 내가 못 따라갈 인물이 하나 있으니 바로 저놈, 요리로구나!」 18) 18) 『韓詩外傳』 卷 10, <東海有勇 士曰薔丘訴, 以勇猛聞於天下 …… 過神淵, 曰 ; r 飮馬」 其僕臼 ; r 飮馬於此者, 馬必死J 曰 ; 『以訴之言飮之』 其馬果況. 薔丘訴去朝服, 拔劍 而入, 三 日 三夜, 殺三校(一)龍而出. 雷神隨 而擊之, 十 日 十夜, 砂其左 目 要與聞之, 往見之, 曰 ; r 訴在平?』 曰 ; 『送有表者』 往見訴於墓. 曰聞 雷神擊 子十日十夜, 妙子左 目 ; 夫天怨不全 日 , 人怨不旋鍾, 至今不報, 何也, 比而去 . 墓上振慣者不可勝數. 要與 歸 謂門人 曰 ; r 薔丘訴天下之勇士也, 今日我辱之人中, 是必來攻我, ;;;無閉門, 發無 閉戶」 薔丘訴果夜來, 拔劍注要底頓, 曰 ; r 子有死罪三 ; 辱我於人中, 死罪一也 ; 暮不 閉 F1, 死罪二也 ; 廢不閉戶, 死罪三 也」 要廊曰 ; r 子待我一 言 (子有三不肖, 香暮)來講,

不肖一也;拔劍不刺,不肖二也;刃先辭後, 不肖三也.能殺我者, 是毒藥之死耳」 薔 丘訴引劍而去, B ; 「所不若者, 天下惟此子耳』>(傳曰 •• …. r 公子賊以辭得國, 今要廊 以辭得身 言不可不文, 有若此平!」 詩 B ·… .. r 辭之擇矣, 民之莫矣』)(괄호 안의 부분 은 역자 보충)

오자서가 이런 이야기를 끝내고 나니 오왕은 정말로 오자서의 말을 믿 게 되었댜 그래서 오자서에게 요리를 데리고 오라고 명했고 요리는 오왕 울 만나게 되었다. 요리가 말했다. 「저는 동방 천리 밖의 사람입니다. 체격도 작고 왜소하며 힘도 없어서 바람이 앞에서 불면 뒤로, 뒤에서 불면 앞으로 고꾸라질 그런 인물이랍니 댜 이렇게 쓸모 없는 인간이기는 하지만 대왕께서 명령만 내리시면 힘을 다해 그 일을 하겠습니다」 오왕이 요리라는 이 인물을 보니 정말로 신체가 왜소하고 생긴 것도 별 로 볼 만한 점이 없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오자서가 어째서 이런 인물 을 데리고 온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 아 있었다. 요리는 오왕이 별로 기뻐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앞으로 나서며 말했댜 『대왕께서 걱정하시는 것은 모두 경기 때문이 아닙니까? 제가 그지를· 없애버리도록 하겠습니다」 맹기의 용맹스러움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거늘 자네가 어찌 그를 당해 내겠는가?」 「제가 그에게로 투항하여 가서 그의 곁에 접근한 뒤에 기회를 보아 없 애버리지요」 「그는 쉽게 남을 믿는 그런 인물이 아닐세」 오왕이 심각하게 말했다. r 더구나 자네는 원래 나의 수하에 있던 인물이 아닌가. 자네가 그에게 투항한다고 해서 그가 어찌 자네를 믿어 주겠나?」 「고육책을 쓰면 됩니다』 요리가용감하게 말했다

r 대왕께서 저의 오른팔을 베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저의 아내와 아이들 까지 모두 죽여 주십시오. 그런 뒤 저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내쫓아 버리 신다면 아마 믿을 것입니다」 r 그건 너무한 일이 아닌가 ……J 『그까짓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요리가 말했댜 「제가 듣기로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작은 즐거움에 빠져 있으면 군주 를 섬기는, 그런 크고 의로운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 그것은 군주에 대한 충(忠)이 아닐 것입니다 가정만을 생각하느라 군주의 고통을 해결하 지 못한다면 그것은 의( 義 )가 아니겠지요 . 저의 마음은 이미 정해졌습니 댜 대왕께서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좋다」 합려는 머리를 끄덕이고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를 띠었다 . 그리하여 마침내 요리는 오른팔이 잘렸고 아내와 자식들은 끌려가서 사 람들이 모인 가운데 죽임을 당해 불에 태워졌다. 이런 비극적인 사건은 드디어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 요리가 오왕에게 죄를 져 당하게 된 이 사건의 경과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요리는 겨우 남 은 왼쪽 팔을 이끌고 위나라로 가서 경기에게 투항해 오왕의 포악무도함 울 비난하였다. 경기는 요리 일가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일찌감치 듣고 있 던 터라 팔을 잘린 요리가 눈앞에 나타나자 그를 깊이 신뢰하였다. 요리 가 막 오나라에서 와 오나라의 사정에 밝았고 또 경기는 싸움을 잘하는 군대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오나라에 복수를 하고 옛땅을 되찾으려 하고 있었던 터라, 요리의 계책을 믿고 군대를 움직여 배를 타고 동쪽으로 내 려가 오나라를 치려 하였댜 요리와 경기는 같은 배를 타고 있었다. 배가 강의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두 사람은 뱃머리에 앉아 강가의 형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경 기가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 앉아 있었고 요리는 손에 짧은 창을 들고 바 람을 둥지고 서있었다. 그때 갑자기 강풍이 불어오니 요리는 바람을 따라

손에 들고 있던 창으로 경기를 향해 내려쳤다 창날은 경기의 심장을 뚫 고 둥에까지 닿았다 그러자 경기는 커다란 손으로 요리를 잡아 그의 몸 을 거꾸로 들더니 머리를 강물 속에 쳐박았댜 요리를 물속에 넣었다 뺐 다 하기를 세 번이나 하고서 그를 어린아이 다루듯이 무릎 위에 앉힌 뒤 경기는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이렇게 빼어난 용사가 다 있구나. 감히 니를· 향해 창을 휘두르 다니 ……」 옆에 서있던 부하들이 다투어 칼을 들고 요리를 찌르려 하였다. 그러자 경기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r 그는 뛰어난 용사이다 하루에 두 명의 용사가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 지. 그롤 놓아 주거라. 그것으로 그의 용맹스러움을 기리리라……」 그렇게 말하고 나더니 요리를 자기의 무릎에서 내려놓았다 . 그리고는 자신의 가슴에 꽂혀 있던 창을 빼내었다 . 피가 뿜어져 나왔고 그는 마침 내 힘없이 갑판 위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 배가 강릉(江陵)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이미 죽은 군주인 경기의 유언 올 받들어 요리를 석방하려 하였다. 요리는 선실의 입구에 앉아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로 자신의 턱을 받치고 생각에 잠긴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있 었다 사람들이 그를 재촉했댜 r 빨리 가시오. 왜 빨리 가지 않는 것이요?」 그러자 요리가 몸을 일으켰는데 얼굴이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솟구쳐 오르는 격정을 주체하지 못하며 말했다. 「나는 내가 도대체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소. 나는 아내와 아이들의 생명을 버려서 군주를 섬겼소 . 그것은 불 인(不仁)이오. 새로운 임금을 위해 옛임금의 아들을 죽였으니 그것은 불 의(不義)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다른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해서 내 몸을 상하게 했고 집안을 풍지박산으로 만들었으니 그것은 부지(不 智)요. 이런 세 가지 죄악을 범했는데 어찌 계속 이 세상에 살아있을 수 있겠소」

이 말을 마치더니 몸을 돌려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급히 그를 건져올렸다. 요리는 희미하게 눈을 뜨고 말했다. r 니를 무엇하러 건져올렸소 ……」 배에 있던 사람들이 말했다. r 오나라에 돌아가서 상을 타야지요」 요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자기 가족의 생명조차 아깝게 생각하지 못한 그런 인간에게 벼슬과 돈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더니 갑자기 칼을 빼어 자신의 두 발을 자르고 목을 찔러 자살하고 말았다 1 91 이렇게 하여 시대의 급류에 작은 물거품 하나가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져갔던 것이다. 19) 『吳越春秋J, 「閩間內傳」, <(要商)乃與子꼽見 吳王, 王 B ; 「子何爲者?』 要周曰 ; r 臣 國東千里之人,臣細小無力,迎風則 OO, 負風則伏,大王有命,臣敗不盡力』 吳王心非 子짬進此人, 良久默然不言. 要與卽進 B ; 「大王患慶,思平? 臣能殺之』 王曰 ; r 慶惡之 勇, 世所聞也, 萬人莫當, 今子之力不 lu 也J 要與曰 ; r 王有意 殿, 臣能殺之」 王 B ; r 慶 思明智之人, 歸窮於諸侯, 不下諸侯之士」 要廊曰 ; r 臣聞安其妻子之樂, 不盡事君之 義, 非忠也 ; t裏室家之愛而不除君之患者, 非義也. 臣詐以負罪出拜, 願王殿臣妻子, 斷臣右手, 慶思必信臣矣」 王 曰 ; r 諾」 要璃乃詐得罪出#, 吳王乃取其妻子梵棄於市. 要商乃拜諸侯而行怨 言 , 以無罪聞於天下. 遂如衛, 求見慶,思 見 B ; 「閩間無道, 王子 所知 今毅我妻子, 梵之於市, 無罪見珠.吳國之事,吾知其情, 願因王子之勇, 閩間可 得也. 何不與我東之吳?』 慶,쿵信其謀. 後三月 , 棟練士卒, 遂之吳. 將渡江於中流, 要 誤力微 坐與(于)上風, 因風勢釣其冠, 順風而刺慶思. 慶思顧而揮之, 三棒其頭於水 中, 乃加於篠上 ; r 暗暗哉! 天下之勇士也, 乃政加兵刃于我?』 左右欲殺之, 慶,思止之, 曰 ; 『此是天下之勇土, 器可一 日 而殺天下勇士二人哉?」 乃誠左右 B ; r 可令還吳, 以 庭其忠』 於是慶思死. 要誤渡至江陵, 愍然不行. 從者曰 ; 『君何不行?』 要底曰 ; 『殺吾 妻子以事其君 , 非仁也;爲新君而殺故君之子, 非義也;重其死, 不貴無義, 今吾食生 棄行, 非義(智?)也. 夫人有三惡以立於世, 吾何面 目 以視天下之士?』 言訖, 遂投身於 江, 未絶 從者出之. 要底曰 ; r 吾寧能不死平?』 從者 B ; r 君旦勿死, 以侯爵祿』 要底 乃 自 斷手足, 伏劍而死.>

제 2 장 눈에 가시 같던 경기를 죽이고 난 뒤 합려는 오자서의 계속된 충동질로 말미암아 마침내 초나라를 치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 은 일이 벌어졌다 . 합려에게는 둥옥(勝玉)이라고 하는· 딸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귀엽게 길 러서 자기 멋대로 하는 성미였지만 합려와 아내는 그 딸을 몹시 사랑하였 다. 어느 날이었다. 세 식구가 함께 앉아 생선 찐 것을 먹고 있었댜 합려 가 생선 한 마리를 반쯤 먹은 뒤에 남은 반을 동옥에게 먹으라고 밀어 주 었다 별것 아닌 작은 일이었지만 귀엽게만 자란, 천금같이 귀한 이 아가 씨는 벌킥 화를 내었다 . 그리고 자기 방으로 가서 틀어박혀 혼자서 웅얼 거렀다. 「부왕께서는 어찌 먹다 남은 생선 따위를 내게 먹으라고 주신단 말인 가? 나를 모욕하시는 것이 분명해. 이런 세상에 살아 무엇하리 ……」 순간적으로 마음을 잘못 먹은 그녀는 그만 즉시 자살해 버리고 말았다. 합려 부부는 딸의 죽음울 너무나 비통해 했다. 그러나 다론 방법이 없었다 . 그저 장례라도 후하게 지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영혼을 위로해 줄 수밖 에. 그래서 그들 부부는 대궐문 밖에 연못을 파고 흙을 돋구어 커다란 묘 를 만들었다. 그리고 금으로 된 솥과 옥으로 만든 술잔, 은으로 된 술동이,

옥구슬로 만든 옷 등을 묘 안에 집어넣어 죽은 딸과 함께 묻어 주었다. 그 녀가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사용하라는 의미에서였다. ® 출상하는 날에는 살아있는 듯한 모습의 하얀 학을 특별히 만들어 대열 의 앞에 서서 너울너울 춤을 추며 길을 인도하게 하였는데, 오나라 수도 의 수많은 남녀들이 그 뒤를 따라오며 신나게 구경을 하였다. 묘 앞에 이 르렀을 때, 춤을 추는 하얀 학과 장례 대열은 줄줄이 묘 안으로 들어갔다 .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함께 따라 들어갔다. 사 람들이 거의 다 들어갔을 때, 갑자기 <쇠아 ___> 하는 소리가 나더니 묘 안에 장치되어 있던 어떤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묘의 문이 자동으로 닫혀 버리는 것이었다. 만근은 나갈 듯한 무거운 돌로 만들어진 그 문은 바로 생사의 갈림길이었다.Q ) 수많은 사람들이 산 채로 저승길에 들어서게 되었고 묘지의 안팎에서는 처참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내와 남편, 가족이 이렇게 하여 생이별 울 하게 되었으니 수많은 가정이 깨지고 말았다. 국가의 주재자인 왕이 계책을 꾸며 자신의 죽은 딸을 위해 그들을 끌어들여서 함께 순장을 하도 록 했던 것이다.”

1) 『吳越春秋』, r 閣間內傳』(漢魏范 뽑 本) , <吳王有女勝玉, 因謀伐楚, 與夫人及女倉 (食)蒸魚, 王前昭半而與女. 女怒曰 ; 「王食魚, 辱我, 不忘久生」 乃自殺. 閩間痛之, 葬 於國西때門外. 盤池積土, 文石爲縣,題換爲中,金鼎玉杯, 銀椿珠稽之寶, 皆以送女. 乃舞白鶴於吳市中, 令萬民隨而觀之 . 遠使男女與鶴供入淡門, 因發機以俺之. 殺生t). 送死 國人非之.>

후대의 전설에 의하면 장례 대열의 맨 앞에 서서 춤을 추며 행렬을 이 끌었던 그 하얀 학은 바로 먹다 남은 생선 때문에 자살해 버린 둥옥의 영 혼이 변한 것이라고도 한다 21 말하자면 사람들을 끌어들여 죽게 만든 것 은 아버지 혼자서 한 짓이 아니라 부녀가 함께 꾸민 계책이었다는 것이다 . 살아있는 사람들을 딸의 무덤에 함께 묻어버린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 의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민심도 흉흉해졌다. 특히 기이한 것은 한 자루

2) 『漢唐地理 욥 紗』 輯, 陸廣微 『 吳地記』, <(OOrd1) 女化爲白鶴, 舞於吳市, 千百人隨而 親之.>

보검까지 그 사건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 칼의 이름은 담로 (世版)라고 했는데 그것은 본래 월나라 원상( 元常 )이 오왕에게 보낸 세 개 의 보검 중 하나였댜 오왕 료를 죽이는데 썼던 어장검과 합려가 죽은 딸 의 무덤에 함께 묻은 경영( 磐g.fl )검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이 칼은 합려가 포악무도한 짓을 하는 것을 보고 칼집 속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강물을 타 고 거슬러 올라가 초나라로 갔다. 당시 초나라에는 평왕이 이미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안 소왕(昭 王 )이 왕위에 올라 있었다 . 어느 날 아침, 소왕은 눈을 뜨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차가운 빛을 발하 는 칼 한 자루가 자신의 베갯머리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어느 나라에선가 온 자객이 곧 자신의 목을 벨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목덜미에 식은 땀이 홀러내릴 노릇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칼을 볼 줄 아는 풍호자(風湖 子) 가 와서 설명을 해주자 의구심이 가셨다. 풍호자의 말에 의하면 그 칼의 이름은 담로라고 했으며 본래 월나라의 유 명한 장인 구야자(歐治 子) 가 만든 것이라 했다. 구야자는 모두 다섯 자루의 명검을 만들었는데 순균(純鈴), 승야(勝邪), 어장, 거궐(巨殿), 담로가 바로 그것이었다 . 3) 담로는 온갖 금속의 순수함만 을 뽑아내고 거기에다 태양의 정화(精華)와 우주의 온갖 정기를 불어넣어 만든 것으로, 칼을 뽑아들면 신령스런 빛이 찬란했고 허리춤에 차면 찬 사람의 모습을 위풍당당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칼로는 어떠한 적이라도 제압할 수가 있었댜 그러나 그 칼은 일단 군주가 이치에 어긋난 일을 하 기만 하면 스스로 그 무도한 군주를 떠나 올바론 군주를 찾아간다고 했다. 지금 오왕이 임금을 죽이고 왕이 되어 초나라를 치려고 하고 있으며, 게 다가 죽은 딸을 위해 살아있는 사람들을 생매장하는 동의 무도한 행동을 하니, 담로가 오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온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듣자 초 나라 소왕은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기쁨에 겨워 소왕은 담로를 3) 『越絶記, 까傳記寶劍』, <歐治乃因天之精神, 惑其使巧, 造爲大刑三, 小刑二, 一曰 世盧 二曰純錄 三曰勝邪, 四曰魚腸 五曰巨閑 . >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면서 늘 차고 다녔다. 그러나 이 칼이 정말 화를 불러일으키는 근원이 될 줄은 누구도 짐작하 지 못했다 오나라의 합려는 그 칼이 초나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 칼이 신령스런 것이라 하긴 해도 성격이 끗끗해서 자기 스스로 그곳으로 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저 초나라 임금과 신하들이 꾀를 내어서 자신의 보검을 훔쳐간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손무(孫武, 궁녀들에게 병법을 가르쳤고 『병법(兵法)』 13 편을 쓴 바 로 그 손무) ® • 오자서 • 백희(白 喜 ) 세 사람을 보내어 초나라를 치게 하니 바로 그 해에 초나라의 육(六)과 잠(潛) 두 현을 점거하게 되었다 .4} 그리 고 다시 몇 년이 지난 뒤에는 초나라의 수도인 영도(鄧都)까지 점령하게 되었는데, 이때 창고에 산처럼 쌓여 있던 곡식들과 사당에 매달려 있던 구룡이 새겨진 큰 종(九龍大鍾)까지도 모조리 태워버렸다? 이렇게 하고서 도 오자서는 분이 풀리지 않아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의 시체를 꺼내 어 시체에다가 채찍질을 삼백 번이나 하였다. 그리고 왼발로는 그의 배를 밟고 오른손으로는 눈을 빼내면서 욕설을 내뱉었다. r 누가 널더러 간신의 말을 듣고 우리 아버지와 형님을 죽이라고 하였더 냐? 오늘 이런 꼴을 당해도 할말이 없을 것이다」 6) 수도인 영(鄧)이 포위되어 있을 때 초나라 소왕은 황급히 수지(隨地)로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숱한 우여곡절 끝에 다시 돌아가 복위를 하였지만, 4) 『吳越春秋』, r 閩間內傳』, <樞盧之劍 惡凶間之無道也, 乃去而沮 水行 ln 楚. 楚昭王 臥而慮 得吳王造盧之劍於床. 昭王不知其故, 乃召風湖子而 rR , . 風湖子曰 ; 『臣聞越王 元常使歐治子造劍五枚, 一名싼盧, 五金之英, 太陽之精, 寄氣托靈, 出之fl' ,~1,, 服之有 威 可以折沖担敵 然人君有逆理之謀, 其劍卽出, 去無道以就有道. 今吳上無道, 殺君 謀楚 故混盧入楚』 昭王大稅,遂以爲寶. 閩間間楚得世盧之劍, 因斯發怒, 遂使孫武 • 毋脣 • 白喜伐楚 拔六與潛二邑.> 5) 『淮南子』, r 泰族篇』, <岡間伐楚, (五戰入郡), 燒高府之栗, 破九龍之it.(재싼 平王之墓, 舍昭王之宮).> 『博物志』, r 雜說」에 의하면 <子짬伐楚>라고 되어 있고 나머지는 대 략 같다(괄호 안은 역자 보충). 6) 『吳越春秋』, 『閩間內傳」, <任骨以不得昭王, 乃堀平王之墓, 出其尸 , 粧之三百, 左足 錢腹 右手陝其目, 請之 B ; r 誰使汝用誤陝之口, 殺我父兄, 器不究哉!』>

담로라는 명검이 초나라로 왔을 때만 해도 그가 이런 고통을 겪게 되리라 는 것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오나라는 오자서와 손무의 계책 덕분에 서쪽으로 강대한 초나라를 격파 할 수 있었고 북쪽으로는 제나라와 진나러를 위협할 수 있었다. 뿐만 아 니라 남쪽으로는 월나라 백성들을 거의 복속시키기까지 했으니 오나라의 세력은 갑작스레 비대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후에 월나라를 쳤을 때 월 왕 구천에게 한 번 호되게 당했으니 바로 취리(#생李) 땅에서 월나라 군대 가 오나라 군대에게 좌절감을 안겨 주었던 것이댜 7) 그때 오나라 장수인 영고부( 孟 姑浮)가 창으로 합려의 엄지발가락을 자르고 신발 한짝을 가져 갔는데 피가 분수처럼 솟아났댜 할 수 없이 오나라 군대는 썰물이 빠져 나가듯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합려는 취리 ® 에서 불 과 7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형(陸)이라는 곳에서 죽고 말았댜 ®

7) 『史記』, r ffi.子꼽列傳』, <當是時, 吳以但子脣 • 孫武之謀, 西破强楚, 北威齊晉, 南服 越人, 其後伐楚, 越王句錢迎擊, 敗吳於姑蘇(여기서 姑蘇는 마땅히 構李가 되어야 한 다)(傷閣間指, 軍却).>

합려가 죽자 그의 아들인 부차(夫差)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오나 라의 이번 패배를 크나큰 치욕으로 여겼댜 그래서 원수를 갚기 위해 궁 정 문의 계단 앞에 군사를 하나 세워놓고 그가 드니들· 때마다 이렇게 외 치게 하였댜 r 부차, 그대는 월나라 왕이 그대의 아버지를 해쳤다는 사실을 잊고 있 는가?J 그러면 부차는 고개를 숙인 채 비통하고도 경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찌 잊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는 열심히 군대를 훈련시켰고 전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 렇게 삼 년을 하여 결국 월나라에 원수를 갚을 수가 있었다 .8)

8) 『左傳 』 , r 定公十四年』, <越子因而伐之(吳), 大敗之 , 孟姑浮以戈擊閣間, 傷將指, 取 其一履 還, 卒於昆 去構李七里. 夫差使人立於庭, 句出入, 必謂己 B ; r 爾忘越王之 殺爾父平?』 則對 B ; 「唯 ; 不政忘」 三年, 乃報越.>

오나라의 부차가 친히 이끄는 군대는 강상에서 월나라 구천의 군대와 맞붙었고 오나라는 월나라의 군대를 부추산( 夫激山) 에서 크게 격파했다 . 그곳이 바로 지금의 강소성( 江蘇省) 오현(吳縣) 서남쪽 태호(太湖)에 있는 추산(淑山)이다 추산은 포산(包山)이라고도 한댜 결국 구천은 남은 5 천 여 병사를 이끌고 회계산으로 숨어들어가 진지를 쌓고 구차한 목숨을 부 지하였는데 , 91 산에 돋아난 풀을 뜯어먹고 썩은 물까지도 마셔야 하는 그 런 생활이었으며, 심지어는 각자 자신의 아이들을 바꿔서 먹기까지 하는 비참한 나날이었댜 구천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대부 문종(文種)을 보내어 부차에게 강화를 하자고 하였다. 오나라 왕이 허락을 하려고 할 때 에 오자서가 오나라 왕에게 간하여 말했다.

9) 『史記』, r ffi子脣列傳」, <夫差槪立爲王, 二年後伐越, 敗越於夫歌, 越王句賤乃以餘 兵五千人, 樓於會稽之上(使大夫種厚幣遺吳太宰藍以講和, 求委國).>(괄호 안은 역자 가 보충한 것임)

「안 됩니다 그들과 강화를 하셔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대부 문종은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을 하였다. 그리고는 눈과 입 가에서 피가 흐를 지경이 되어서도 천지신명께 맹세하며 월나라 왕의 진 실된 마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부차는 마침내 월나 라의 강화 요구를 받아들였다 10 )

10) 『新告』, 『耳揮』, <越王之惡 至平陀山草, 飮腐水, 易子而食. 於是使大夫種行成於 吳, 吳王將許, 子짬曰 ; 「不可, 請無與成』 大夫種附心喝Pf, 洙血而言信. 吳王不忍, 結 師與成 . >

그리하여 월나라 왕인 구천 부부는 오왕 밑에서 3 년 간의 종살이를 하 게 되었다 . 현신(賢臣)인 범려(范義)가 그들을 따랐는데 돌로 된 집 한 칸 에 살며 말을 기르고 풀을 베었다. 물을 걷고 똥을 푸며 살다가 마침내는 병을 앓고 있는 오왕의 대변까지도 친히 맛을 보았다. 그리고는 되는 대 로 한바탕 똥맛에 따른 이론을 늘어놓으며 오왕의 병이 곧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오왕의 병은 깨끗하게 나았고 이에 감동 한 오왕은 구천을 사면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었다. 오왕의 이런 정

신나간 행동에 대해서 오자서는 몇 차례나 간언을 하였지만 상황을 변화 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I @

11) 『吳越春秋』, 『何錢入臣外傳』 참조.

구천은 자기 나라로 돌아간 뒤 반드시 복수를 하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 그리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수련하며 잠시도 스스로를 편하 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예를 들어 겨울에는 가슴에 얼음덩어리를 안고 여 름에는 불덩어리를 품었다 피곤하여 잠을 자고 싶을 때에는 여뀌풀 이파 리로 자신의 눈을 찔렀다. 발이 시려울 때에는 오히려 찬물에 발을 담갔 고 쓰디쓴 쓸개 한 덩어리를 문간에 매달아놓고 드나들 때마다 그것의 맛 을 보았다. 자다가 깨어나면 몰래 흐느껴 울었으며 실컷 울고 나면 하늘 을 향해 목을 길게 늘여빼고 장탄식을 하였다 .1 21

12) 『吳越春秋』, r 句賤入臣外傳』, <越王念復吳仇之非一旦也, 苦身勞心, 夜以接 日 . 臥 則攻之以臣, 足寒Jl l j演之以水 ; 冬常抱氷, 夏還提火 ; 悠心苦志,戀證於戶, 出入曜之, 不絶於 口 ; 中夜潛泣, 泣而復鳴.>

오나라에는 충신인 오자서가 있었지만 오왕은 오자서의 충언은 듣지 않 고 간신 백비(伯縣)의 참언만을 믿었댜 한편 월왕에게는 범려와 문종이라 는 현신이 있었으며 그들은 모두 마음이 통하는 친구와 같았기 때문에 한 마음으로 구천을 보좌해 나라를 잘 다스렀다 . 또한 오나라에 원수를 갚기 위한 여러 가지 준비 작업을 차근차근 해나갔다. 이것이 바로 월나라가 오나라와 다른 점이었다. 문종의 자는 자금(子腐)이었으며 초나라 평왕 때 초나라 완읍(苑邑)의 현령이었다. 당시 완읍의 삼호( 三戶 )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 범려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 종일 일은 하지 않고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멍한 표정으로 미친 듯이 쏘다니곤 했다. 그리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자, 사람들은 모두 그를 미쳤다고 여기고 아무도 그와 왕래를 하지 않았다. 오직 문종만이 이 기인에게 홍미롤 갖고 있다가 어느 날 특 별히 마차를 타고 삼호에 가 그를 만나보려 하였다. 마차가 막 범려의 집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범려는 개구멍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문종을

보고 개짖는 소리를 흉내내어 왕왕 짖어대기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체통 이 서지 않는 상황이었댜 문종이 그러한 상황을 수치스럽게 생각할까 봐 걱정이 된 신하가 옷을 가지고 중간에 서서 그 모습을 가리려 하였다. 그 러자 문종이 말했댜 「가릴 필요없다. 내가 알기로 개가 보고 짖는 대상은 사람이다 . 지금 내 가 여기에 왔다고 범려가 저런 이상한 예절로 나를 맞는 것은 바로 내게 대한 존경의 표시가 아니겠느냐. 바로 나를 사람으로 본다는 뜻이니까」 그리고는 마차에서 내려 범려에게 고개를 숙여 절을 하였다. 범려는 그 자리에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 눈만 둥그렇게 뜨고 가만히 있을 뿐 그 인 사에 대답도 하지 않았댜 13l 문종은 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서 다 시 관청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 또 관리를 보내어 범려를 찾아가 보게 하 였으나 범려는 여전히 멍청한 표정으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관리가 돌아와 문종에게 보고하였다.

13) 『擇史』 卷 96, 引 『吳越春秋』(今本에는 없음), <文種字子肉, 荊平王時爲苑令, 之三 戶之里, 范훑從犬賣路而吹之, 從吏恐文種面, 令人引衣而障之 . 文種曰 ; 『無障也, 吾 聞犬之所吹者人也, 今吾到此, 有聖人之氣, 行而求之,來至於此. 旦人身而犬吹者, 謂 我是人也」 乃下車拜, 益不爲禮.>

r 범려라는 자는 우리 나라에서 유명한 미치광이입니다. 줄곧 그런 괴상 한 병을 앓고 있지요. 아예 모른 척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문종이 웃으며 말했다. 「대개 훌륭한 자질을 갖춘 인재들은 일부러 사람들에게 조롱울 당하며 바보스러운 척한다고 들었다. 그 사람도 얼핏 보면 바보스러워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똑똑한 사람일 것이댜 너희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그리고는 또다시 범려를 찾아갔다. 그래도 범려는 문종을 피했다. 나중 에 문종이 또 그를 찾아오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범려는 자신의 형과 형수에게 진지하게 말했댜 r 오늘 손님이 오신다고 하니 깨끗한 옷과 모자를 좀 빌려 주십시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문종이 다시 찾아왔다 범려는 깔끔하고 단정한 복장으로 귀빈을 맞았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 내던 사람들처럼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였다 범려는 흉금을 터놓고 문종 과 함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것은 평소의 그의 태도와는 비교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댜 그야말로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 댜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혀를 내두르며 놀라와했다. 이렇게 기 이한 일은 본 적도 없거니와 들은 적도 없었던 것이다 .14 1 나중에 문종이 월나라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을 때, 월왕에게 범려를 신중하게 추천하였 고 마침내 그는 월나라에서 상장군 겸 재상 벼슬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 5 1

14) 『會稽郡故홉雜菓』 輯, 虛預 『會稽典錄 』 , <范益 字少伯, 越之上將軍也. 本是楚苑 三戶人, 被髮(羊狂, 偶i菌負俗 . 文種爲苑令, 游三戶之里, 下車賜蟲 . 翁不爲禮 . 種還館, 復造使 奉 議, 盜默而不言. 吏還曰 ; r 范훑本國狂人, 生有此病」 種笑曰 ; r 吾聞士有賢 俊之資 必有伴狂之磯, 內懷獨見之明, 外有不識之殿, 此固非二三子之所知也』 篤車 而往. 絡避之. 後知種必來議, 謂兄竣 曰 ; 『今 日 有客, 願假衣冠』 有頃, 種至, 抵掌而 談 芳人觀者, 登聽之矣.> 15) 『天中記』 卷 15, <文種過范塗門, 入內而拜, 鷹爲越相 . >

문종이 월나라에서 상대부(上大夫)로 있을 때, 월왕 구천에게 오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아홉 가지 계책을 알려 준 적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오왕에게 미녀를 바쳐서 오왕을 유혹하게 해 그의 지혜로움을 마비 시키려는 그런 계교였다. 161 이 계획은 죽시 실행에 옮겨졌다.

16) 『吳越春秋』, 『句錢陰謀外傳』, <大夫種日欲報怨復仇, 破吳滅敵者有九術, 四曰遣美 女以惑其心而亂其謀 . >

본래 오왕은 성격이 방탕하고 미녀를 탐하는 호색한이었다. 월나라에 대한 원수를 갚고자 하던 시절에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살기도 했지만, 이제 목적도 달성되었고 오나리~ 남방의 커다란 나라가 되어 있었으니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던 그 비열한 성품, 죽 교만하고 사치스러우 며 음탕하고 게으론 그런 성격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고소대(姑蘇 臺 )를 증축하는 것이었다. 고소대는 자신의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이미 중건한 적이 있었는데 이

제 다시 백성들을 동원하고 목재를 가져다가 대대적으로 고칠 작정이었 댜 1 71 고소대는 고서대 (姑省堂) 라고도 하며 오나라 도성 서문( 肖 門) 밖 30 리 되는 태호 (太湖 )가에 있었는데 9 년 동안 공사하여 비로소 건물이 완성 되었다고 한다. 건물의 높이는 300 길( 丈 )이나 되었고 술하게 많은 누각들 이 있어서 이미 궁정으로서의 규모를 다 갖추고 있었다. 꼭대기에 올라가 멀리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득한 태호의 물결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고, 고 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면 오나라 도성의 집들이 비늘처럼 반짝이는 지붕 을 드러내며 줄줄이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궁전은 그처럼 보기에 아 름다왔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백성들을 감시하기에도 아주 알맞았다. 누군 가가 모반올 꿈꾼다 하더라도 이 조망대에 올라가 살펴보기만 하면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죽시 감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합려는 서문에서 고소대 까지 구불구불한 길을 뚫게 하여 마차를 타고서도 그 꼭대기까지 편하게 올라갈 수 있게 했댜 181 이렇게 웅장하고 훌륭한 건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차는 다시 이 건물을 중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7) 멜 異 記』 卷上, < 吳 王 夫差築姑蘇 之臺 . > 18) 『 越絶 콥 』 , r 外傳記吳地傳』 , < 晋 門外有九曲路, 閩盧造以遊姑꼽之 臺 , 以望太湖, 中 窟百 姓 去 縣 三十 里.> 『 漢 唐地理 왑 妙 』 輯, 陸廣 微 『吳地記』에 의하면, <姑蘇 臺 在吳 縣西南三 十 五里,閣間造, 經營 九年始成 , 其 臺 高三百丈,望見三百里以外,作九曲路 以 登 之 > 라 하였으니 바로 姑骨 퓰 를 말하는 것이다.

월나라 왕은 때마침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오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 하여 목수들을 산으로 보내 집을 지을 만한 좋은 나무들을 골라오게 하였 다. 그 나무들을 베어 오나라 궁정을 짓는데 조공품으로 보낼 작정이었다 . 그런데 3000 명의 목수들을 보내어 나무를 골라오게 하였지만 일년이 지 나도록 마음에 드는 나무를 고를 수가 없었다고 한다 . 날씨는 추워지기 시작했고 산속에서 그 추운 날을 할일 없이 지내야 했던 일꾼들은 집 생 각이 나서 차츰 원망의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 목객음( 木 客哈) > 이라는 노래가 불려지기 시작했다. 밤 이 되면 일꾼들은 화톳불 가에 모여서서 이 우울한 노래를 낮게 옹얼거리

며 불렀다 그 노랫소리가 하늘을 감동시켰는지 어느 날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신목(神木) 한 쌍이 산꼭대기에 자라나 있는 것이었다. 그 나무는 길이가 40 길이나 되었고 어른들의 팔로 스무 아름이나 되는 거대한 것으 로 가래나무 종류에 속하는 나무였댜 이제 이 나무를 발견했으니 일은 다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댜 목수들은 이 거대한 나무를 베어 잎울 잘라 내고 기술자를 시켜 깎고 다듬어서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아름다운 목재로 만들었댜 ® 그러자 월왕 구천은 대부 문종을 보내어 그 목재들을 싣고 가서 오나라 왕에게 바치게 하였댜 19)

19) 『吳越春秋』, r 句錢陰謀外傳」, <越王乃使木工三千餘人入山伐木, 一年, 師無所幸, 作士思歸 皆有怨望之心, 而歌『木客之岭』. 一夜, 天生神木一雙, 大二十園, 長五十 공, 陽爲文梧 陰爲橫朋 巧工刻削磨l!, 狀類龍蛇, 文彩生光, 乃使大夫種獻之於吳 上.>

그리고 동시에 오랫동안 생각해 오던 미인계를 쓰기 시작했다 . 우선 미 인을 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을 각지로 보내어 아름다운 여인을 골라오게 하였다. 고르고 고른 끝에 저몽산(莘夢山)에서 땔감을 파는 자의 두 딸을 골라내었는데 그 이름이 서시(西施)와 정단(鄭旦)이었다. 두 처녀는 모두 절세의 미인들이었는데, 특히 서시의 아름다움은 비길 데가 없을 정도였 댜 서시는 늘 산기슭 시냇가의 넙적하고 평평한 바윗돌 위에 앉아 빨래 를 하였기 때문에 그 바윗돌은 후에 <서시가 빨래하던 돌(西施洗紗石)>®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20)

20) 『倉稽郡故홉雜菓』 輯 賀循 『會稽記』, <諸뽑縣北界有羅山, 越時, 西施 • 鄭旦所居, 有方石, 是西施曜紗處 今名舒羅山.> 같은 책에서 또 이르기를, <縣北有土城山, 山 邊有石, 云是西施溶(洗)紗石>이라 했는데 같은 전설의 分化로 보인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심장병이 있었다 . 매번 심장병이 발작을 하면 가슴이 아파서 두 손으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눈썹울 찌푸렀는데 그 런 태도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해 주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게 되 면 애처로운 마음이 들어 그녀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동쪽 이 웃마을에 무척이나 못생긴 처녀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서시에 비 길 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시가 눈썹올 찌푸리면 본래 모습

보다 더욱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자기도 길가에 앉아 가슴을 쥐어 뜯으며 눈썹을 찌푸리곤 했다 . 그 모습은 정말로 못 봐줄 지경이어서 원 래의 생김새보다 더욱 그녀를 못생기게 만들었다 2 1 ) 이것이 바로 중국에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동시효빈(東施效빴,()>의 이야기이다. 말하자 면 아름다움이란 타고 나는 것이지 절대로 못생긴 사람이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댜

21) 『莊子』, 「天運篇」, <西施病深而服其里, 其里之酸人見而美之, 歸亦棒心而路其里. 其里之富人見之, 堅閉門而不出 ; 貧人見之, 擊妻子而去之走.>

어쨌든 이렇게 서시와 정단을 뽑아내어 비단옷을 입히고 예쁘게 단장 울 시켰다. 그러나 본래 산골짜기에서 살던 처녀들이라 아름답기는 했지 만 귀족들의 눈에는 여전히 어딘가 촌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전문적인 선 생을 데려다가 토성산(土城山)에서 그녀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몸가짐 과 자세를 교정하여 대범하면서도 요염한 자태를 지니게 하였다. 그렇게 어느 정도 훈련이 되었을 때 그녀들을 데려다가 시정에서 왕손 공자나 대 갓집 규수들과 내왕을 하게 하니 그녀들은 어느새 진흙 속에서 피어난 한 떨기 꽃송이가 되어 있었댜 이제 그녀들은 인공적으로 교육이 되어 이용 할 수도 있고 남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꽃병 속의 꽃 같은 존재가 되 어 있었댜® 서시가 도시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이름이 이미 세상에 널리 퍼져 있 던 터라 사람들은 앞다투어 거리로 몰려나와 절세미인인 그녀의 모습을 보고자 했댜 오나라와 전쟁을 해서라도 예전의 복수를 하고자 했던 월나 라 왕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싶어 하는 심리 룰 이용하였던 것이다 서시를 장막 속에 앉혀놓고 사거리에서 구경을 시 키는데 돈 한푼을 내어야 장막 속으로 들어가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렇 게 하여 들어온 돈은 하나도 빠짐없이 국고로 들어갔다 .22)

22) 『孟子』, r 離與篇』, 孫奭疏引 『史記』, <西施, 越之美女, 越王句錢以之獻吳王夫差, 大幸之. 每入市, 人願見者, 先輸金錢一文.> 이 설에 의하면 越나라가 西施를 바치기 전에 西施가 吳로 들어가 남들이 보는 것을 금하게 되니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東周列國志』 제 81 회에 기록된 것과 비슷하다 .

이렇게 삼 년을 배운 서시와 정단은 마침내 화려하게 꾸며진 마차를 타고 자기들의 고향을 떠나 오나라로 가게 되었다 끄’ 일종의 조공품으로 보내지는 것이었고 재상인 범려가 그녀들을 데리고 갔다. 이 조공 사절은 느릿느릿하게 길을 갔는데 월나라의 수도인 회계와 오나라의 수도인 오성 (吳城)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삼 년이나 걸렸다고 한댜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설에 의하면 가는 길에 범려와 서시 사이에 애정이 싹터 아이를 낳았었다고도 한댜 월나라 국경에 있는 작은 지방(지금의 浙江省 嘉興縣 남쪽)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이미 한 살 이 되어 <아빠, 엄마>와 같은 간단한 말들을 할 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그곳에 <어아정(語兒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두 사람의 애정을 기념하였다고 한댜 241 그러나 이 이야기는 순전히 호사가들의 이야 기에 불과할 뿐, 어떤 역사적인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월나라 국경 지 대에는 예전부터 <마차몰이 청년들(御兒)>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어아 (語兒)>라는 것은 바로 그 < 어아(御兒)>와 발음이 같아 와전된 것으로 보인댜 251 중국의 신화와 전설에 있어서 이러한 자료는 < 적당히 지어진 말들이니까 그저 들어넘기면 되는 이야기> 정도로 여기면 될 것이다.

23) 『吳越春秋』, 『句錢陰謀外傳」, <吳王浮而好色, 越王乃使相者國中, 得舒羅山몄新之 女, 曰西施 • 鄭旦, 飾以羅毅 敎以容步,習於土城, 臨於都卷, 三年學服, 而獸於吳.> 24) 『漢唐地理렵妙』 輯, 『吳地記』, <嘉興縣南一百里有語兒亭. 句錢令范蟲取西施以獻 夫追 西施於路與范益潛通, 三年始達於吳, 遂生一子, 至此亭, 其子一歲, 能言, 因名 語兒亭.> 25) 『國語』, 「越語」, <句錢之地, (南至於句無), 北至於御兒(東至於部, 西至於姑幾, 廣運 百里).>(괄호 안은 역자가 보충한 것임)

서시와 정단이 오나라에 도착하자 그녀들의 모습을 본 부차는 너무 황 홀하여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 그리고 급히 명령을 내려 월나라에 서 바쳐온 신목의 목재들로 고소대의 확충 작업을 끝내게 하였다. 고소대 에는 새로 춘소궁(春背宮)을 지었는데 부차는 늘 그곳에서 술을 마시며 밤을 새웠다. 그리고 천 말의 술을 담을 수 있는 거대한 술항아리롤 만들

어 각종 잔치에 대비하였다 . 궁 안에는 그 밖에도 해령관(海 寂館), 관와각 (館桂閣) 등을 지어 구리로 기와를 얹고 옥으로 난간을 세웠으며 창문과 문틀은 모두 진주와 옥돌로 장식하였다. 그리고 모든 시설들은 가장 화려 한 것들로 만들었댜 서시와 정단은 관와각에 머물었다. 그들은 하얀 발에 나무로 만든 나막신을 신고 뻥 뚫린 킨 복도를 거닐었는데 또각또각 울리 는 그 소리가 얼마나 듣기에 아름다왔던지 오왕은 늘 그 소리를 음악을 듣듯이 들었다 그래서 그 복도를 향섭랑(짱 屈廊) 이라고 불렀다. 오왕은 또 궁 안에 천지( 天 池)라고 하는 연못을 파고 그 안에 청룡주( 靑龍舟 )를 만들어 띄웠댜 배 안에는 여인과 음악소리가 가득 차서 끊이지를 않았으 며 오왕은 서시와 함께 청룡주를 타고 그 연못에서 노닐었다. 술과 요염 한 웃음소리, 그리고 아름다운 음악에 빠져 나라의 중요한 일들 따위는 저 멀리 던져버린 채 오왕은 나날이 방탕해져 갔다 . 26)

26) 떻漠記』 卷上, <吳王夫差築姑藍之끓, 三年乃成, 周旋結屈, 橫互五里, 崇飾土木, 冊托人力. 宮岐數千人, 上別立春背宮, 爲長夜之飮.造千石酒鍾. 夫差作天池, 池中造 靑龍舟, 舟中盛陳岐樂, 日 與西施爲水婚. 吳王於宮中作海靈館 • 館桂 OO, 銅句玉 II, 宮中樞槪 珠玉飾之.>

이렇게 생활하던 오나라의 부차와는· 달리 월나라의 구천은 적극적으로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범려는 월왕에게 칼과 창을 잘 쓰는 남림처녀 (南林處女)와 활을 잘 쏘는 초나라의 진음(陳音)울 추천하였다. 그들을 데 려다가 군사들을 훈련시키면 짧은 기간 내에 힘세고 날랜 병사들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댜 그렇게 하면 오나라의 강대한 군사들에게도 충 분히 대적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월왕은 범려의 건의를 받아들여 각각 두 명의 사신을 보내어 후한 예로서 남림처녀와 진음을 모셔오도록 하였다. 남림처녀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녀는 깊은 산중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별달리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닌데 검법에 능숙했다. 왕 의 사신이 남림에 와서 왕의 명령을 읽어 주니 처녀는 기꺼이 마차를 타 고 사신과 함께 북쪽을 향하여 떠났다. 가는 길에 몸집이 작고 마른 백발

노인을 만났는데 그 노인은 자칭 원공( 袁公 )이라 하였다 그는 처녀의 마 차를 가로막고 기세등등하게 처녀에게 소리쳤다. 떼가 검법이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어디 나와 한번 겨루어 보지 않겠느 냐?」 처녀는 가만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r 제가 뭐 감추고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노인장께 한 수 배워야지요」 처녀가 말하고 있는데 원공이 갑자기 가볍게 뛰어오르더니 길가의 대나 무 가지 위로 올라가 앉았댜 그러자 마른 대나무 가지가 꺾여 땅위로 떨 어졌다 처녀는 대나무 가지의 끄트머리를 잡았고 원공이 아래로 뛰어내 렀다 그리고 대나무의 날카롭게 잘린 부분으로 처녀를 찌르려 하였댜 그 러나 처녀는 재빨리 피했다. 손에는 여전히 대나무 가지를 쥔 채였다. 원 공은 대나무를 끌어다가 처녀를 찌르려 하였고 처녀는 넘어질 듯 피하는 데 그 몸놀림이 매우 경쾌하였다. 그렇게 서너 번을 하더니 처녀가 원공 의 손에서 대나무를 빼앗아 그것으로 원공을 내리쳤다. 그러자 원공은 얼 른 니못가지 위로 도망가 버렸는데 그 위에서 그는 흰 원숭이로 변하더니 길게 휘파람 소리를 내며 꼬리가 빠지게 도망쳐 버리는 것이었다. 마차 위의 사신은 처음에 이 광경을 보고 넋이 나간 듯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짓고 고개까지 끄덕였다. 처녀는 사신을 따라 월나라 왕을 알현하게 되었다. 구천은 그녀에게 월 녀(越女)라는 칭호를 내려 주었고 오판(五板) ® 의 대장들을 불러다가 그녀 에게 검술을 배우게 하였댜 그리고 다 배우고 난 뒤에는 각각 돌아가 자 신에게 속해 있는 병사들을 가르치게 하였댜 그렇게 하여 마침내 칼을 잘 쓸 줄 아는 훈련된 병사들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배운 검법은 <월녀검(越女劍)>이라 하였는데 당시에 <월녀검>을 당해낼 수 있는 검 술은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Z71 27) 『吳越春秋』, 멍錢陰謀外傳』, <越有處女, 出於南林, 國人稱 善. 越王乃使使開之, 問 以劍執之術 處女將北見於王. 道逢一翁, 自稱曰袁公, 問於處女 ; r 吾聞子善劍, 願一 見之」 於是袁公卽挑于竹林, 稿折座地. 處女卽接末, 袁公操本以刺處女, 女應節入,

三入, 因畢枝擊之. 袁公卽飛上樹, 化爲白猿. 遂別去, 見越王, 越王卽加女號, 號曰越 女. 乃命五板之歷(隊)長高習之, 敎軍士. 當世莫能勝越女之劍.> 문장에 약간의 오류 가 있어 『文選』, 「吳都賊』注에 인용된 『吳越春秋』에 근거해 바로잡았다.

활을 잘 쏘는 전음은 초나라 사람이었다. 월왕은 진음도 초빙해서 활 쏘는 도리와 쇠뇌( 怒 )의 기원에 대해 물어 보았다. 진음은 이렇게 대답 했댜 「제가 알기로 쇠뇌는 활에서 발전되어 나온 것이고 활은 또 새총 같은 것에서 발전해 온 것입니다. 새총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고대의 효자 이 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지요. 옛날 사람들은 소박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 에 배가 고프면 새나 짐승을 사냥하여 먹었고 목이 마르면 샘물을 떠마시 면서 살았습니댜 그러다가 죽게 되면 하얀 띠풀로 묶어서 들판에 내다 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부모의 시체를 새나 짐승들이 건드리는 것 울 가슴 아프게 생각한 효자가 있었습니댜 그래서 그는 새총을 만들어 부모의 시체를 지켰습니다. 새나 짐승들이 가까이 다가오면 새총을 쏘아 그것들을 쫓아버렸지요. 그때 그는 새총을 쏘며 이런 노래를 불렀다고 합 니댜 대나무 가지를 하나 꺾고 또 대나무 가지를 하나 묶어 흙덩어리 하나를 쏘아 날려 사람을 해치는 놈들을 쫓아보내자 이렇게 간단한 탄환울 사용한 것이 바로 쇠뇌의 기원입니다』 그리고 나서 진음은 월왕에게 쇠뇌의 생김새와 사용법에 대해 설명했 다. 월왕은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훌륭하다! 그대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라! 그 재주를 우리 나라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도록 하라!」 진음이 대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활 쏘는 도( 道 )는 자연에서 오는 것이지만 잘하 고 못하고는 인간의 노력에 달린 것입니다. 인간도 열심히 노력하기만 한 다면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지 말라는 법이 없지요」 월왕은 진음에게 오나라 도성의 북쪽 교외에서 병사들에게 활 쏘는 방 법을 가르치게 하였댜 그렇게 삼 개월이 지나자 모든 군사들이 쇠뇌를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댜 나중에 진음이 불행하게도 병에 걸려 죽었을 때 월왕은 몹시 가슴 아파하며 그를 도성 서쪽 교외의 산기슭에 묻어 주고 그 산을 진음산( 陳 音山)이라고 불렀댜 28) 육조( 六 朝)시대에 어 떤 도굴꾼이 진음의 묘를 도굴하려고 들어갔다가 묘의 벽에 가득히 그려 진 벽화를 보게 되었다. 바로 무사(武士)들이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장 려하고 당당한 멋진 그림들이었댜 그 벽화를 통해 당시에 병서둘을 가르 쳤던 진음의 영웅적 기개를 대략이나마 엿볼 수 있다 .29) 28) 『 吳越春秋』, 「句錢陰謀外傳』, < 范 益 復進 善 射者陳音. 音, 楚 人, 越王請音而問 ; r 孤 聞子 善 射 , 道何所生』 音曰 ; 『臣聞驚生於弓, 弓生於彈, 彈起古之 孝 子 , 古者人民朴質, 創食 鳥 獸, 潟飮霧露 死則麥以白茅, 投於中野. 孝子不忍見父母爲露獸所食 , 故作彈 以守之. 絶鳥獸之害 . 故歌曰 ; r 斷竹, 續竹 ; 飛土,逐害. (此)之謂也』 越王曰 ; 『善, 盡 子之道, 願子惑以敎吾國人』 音曰 ; 「道出於天, 事 在於人 , 人之所習, 無有不神』 於是 乃使陳音敎士習射於北邪之外 . 三月,軍士皆能用弓筑之巧 . 陳音死,越王傷之,葬於 國西號(3<1!), 其葬所曰陳音山.> 29) 『會稽郡故 習 雜菓』 輯, 孔靈符 『會稽記』, <陳音山. 昔有 善 射者陳音, 越王使簡士卒, 習射於鄕外, 死因葬焉. 今開家壁 , 怒 畵 作騎射之象 . >

제 3 장 이처럼 월왕이 적극적인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 때 오나라의 부차는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롤 공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제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이었울까? 그것은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려 하 였기 때문이댜 당시 공자는 자기의 조국인 노나라가 제나라의 침입 위협 을 받게 되자 자공을 오나라로 보내어 오나라 왕에게 제나라를 치라고 권 고를 하게 하였다 오나라가 제나라를 치면 노나라를 위기에서 구해 내어 제후들의 패주로서의 명분울 얻을 수 있게 될 것이지만, 만약 제나라가 노나러를 공략하게 되면 곧이어 팽창된 세력을 이용하여 오나라를 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오나라 역시 머지않아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논리였댜 공명심이 대단히 컸던 오왕은 자공의 설복에 넘어가 오자서의 거듭된 권고도 듣지 않았다. 오자서는 월나라야말로 우환덩어리이니 우선 출병하 여 월나라를 치고 난 뒤에 제나라를 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오 왕은 고집스레 제나라를 쳐야 한다고 하였다. 당시 태재(太宰)였던 백비 (伯縣) 역시 월나라 왕의 뇌물을 받아먹은 터라, 월나라 왕에 대해 좋은 말만 하고 우선 제나라를 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오왕은 백비 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서둘러 출병을 시작하였다. 마침내 출병하는 날, 오

1) 『吳越春秋』, r 夫差內傳」 참조.

자서는 또다시 오왕에게 간하며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늘이 오나라를 멸망시키려면 이번 전쟁에서 이기게 하실 것이고, 멸 망하게 하지 않으려면 패하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오나라 왕은 오자서가 말을 거꾸로 한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이번 전 쟁에서 지라는 저주의 말이나 다름없었다. 왕은 마음이 영 편치 않아 얼 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오자서가 선왕의 신하여서, 마음대로 욕을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고 오자서 에게 돌아가 쉬라고 하였다. 그러자 오자서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오나라 조당(朝堂)에는 분명히 가시나무가 무성하게 자랄 것이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나가는데 소매를 높이 들어올리고 발뒤꿈치를 들고 서 조심조심 걸어나가는 것이었다. 조정에 가시나무가 무성하게 자란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곳이 장차 폐허가 되어 깨진 기와 조각이 나됭구는 곳이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옷소매를 걷어올리는 행동은 가시나무가 가 득찬 곳을 헤치고 나가는데 옷이 걸려 찢어질까 봐 조심한다는 것을 뜻했 댜 오왕은 그 모습을 보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댜 그러나 꾹 참고 오자서를 잠시 내버려둔 채 눈앞에 닥친 국가 대사에만 신경을 썼다. 백비가 이끄는 오나라 군대는 제나라를 공격하러 떠났다. 그리고 애롱 (文陵) 지방에서 운좋게도 큰 승리를 거두었다. 오왕은 제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강화를 맺게 했다 오왕은 이제 득의만만해져서 제나러를· 공격하 는 것을 반대했던 오자서를 없애버리려고 했댜 2) 마침 백비도 오자서가 제나라와 짜고 늘 원망의 말만을 하는 것이라고 하며 옆에서 그것을 부추

2) 『呂 氏春秋 』, 『知化篇』, <吳王夫差將伐齊, 子짬曰 ; r 不可」 夫差不聽子짬之言, 而用 太宰盛之謀. 子짬曰 ; 「天將亡吳矣, 則使君戰而勝 ; 天將不亡吳矣, 則使君戰而不勝」 夫差不聽 子꼽兩快高歡而出於庭, 曰 ; r 座呼! 吳朝必生荊練矣!」 夫差興師伐齊, 戰 於文陵, 大敗齊師, 反而株子皆.>

겼댜 “ 오나라 왕은 드디어 결심을 했다. 그리고 오자서에게 촉루(協樓)검 울 보냈다. 칼을 받은 오자서는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을 하며 말했다.

3) 『史記』, r 但子짬列傳』, <吳太宰藍槪與子짬有隊, 因꿇曰 ; r 子쭙幸吳之敗, 其使於齊 也, 乃屬其子於齊之抱氏, 常快快怨望, 願王早岡之.>

「다 끝났구나! 내게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나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 댜 냐는 비록 죽지만 후세 사람들은 내가 충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리 라 그리고 나를 하( 夏 )나라와 은(殷)나라 시대의 충신들과 비기게 되리라. 그렇게 되면 관용봉(關龍逢)이나 비간(比干) 같은 인물과 반열을 같이하 게 될 것이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4)

4) 『 吳越春秋』, r 夫差內傳』, <吳王聞子之怨恨也, 乃使人賜屬樓之劍. 子晋受劍, 仰天 暎曰 ; 『自我死後, 後世必以我爲忠, 上配夏殷之世, 亦得與龍逢 • 比干爲友.>

그리고 자신의 부하에게 이렇게 일렀다. 「내가 죽거든 내 무덤 위에 잊지 말고 가래나무를 심도록 하여라. 나중 에 그 나무가 자라게 되면 그것을 관재(稽材)로 쓰게 될 사람이 있을 것 이다. 그리고 나의 눈을 뽑아내어 오나라 도성의 동문 위에 걸어 두거라. 오나라가 월나라에게 망하는 꼴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야 말 것이니」 ® 말을 끝내고 나서 오자서는 칼을 뽑아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 5 1

5) 『史記』, r 但子짬列傳」, <(任子吾)乃告其舍人曰 ; r 必樹吾墓上以粹, 令可以爲器, 而 扶吾眼戀吳東門之上, 以觀越冠之入吳也』 乃 自 莖 |m.>

오자서가 남긴 유언을 전해들은 오왕은 몹시 분개하였다. 그래서 그의 시체를 거두어오게 한 뒤 소가죽으로 만든 부대에 담아 강에 던져버리게 했댜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r 오자서, 네가 이미 죽은 몸이 되었거늘 무슨 느낌이 있어 이것저것 분 간할 수가 있겠느냐?」 그리고 시체를 강에 던져넣기 직전에 그의 머리를 잘라내어 성문 위에 걸어놓고서 매섭게 말했다 . r 자, 실컷 보거라. 태양빛이 너의 가죽을 바싹 마르게 할 것이고 거센 바람이 너의 눈을 뽑아버릴 것이다. 열기가 뼈를 태울 것이며 몸뚱이는

고기밥이 되어 버릴 것이댜 그리고 너의 뼈는 한줌의 먼지가 되어 버릴 텐데, 보기는 무엇을 보겠다는 말이냐. 자, 어디 볼 테면 실컷 보아라」 6 )

6) 『吳越春秋』, 『夫差內傳』, <吳王乃取子骨尸, 盛以邸夷之器, 投之於江中, 言 曰 ; 『脣, 汝一死之後, 何能有知?」 卽斷其頭,置高樓上, 謂之曰 ; r 日 月 炎汝肉, 嘉風魏汝眼, 炎 光燒汝骨 , 魚照食汝肉, 汝骨變形灰, 有何所見?」

그러나 오자서가 죽은 이후 사정은 달라졌댜 십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 오나라는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월나라는 구천의 지도 아래 나날이 강성해져 점차 국세가 홍해졌다. 몇 차례의 전쟁에서 오나라에게 승리를 거둔 구천은 마침내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 도성을 공격해 부차를 고소산 으로 밀어넣었다. 부차는 수차례 강화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루어지지 않 자 오자서가 그러했듯이 칼로 목을 찔러 자살하고 말았다 ” 죽기 직전, 부 차는 회한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죽은 자에게 지각이 있다면, 내가 황천에 가서 충신 오자서의 얼굴을 어찌 마주볼 수 있으랴 ……」 그래서 부차는 장막을 잘라내어 그것으로 얼굴을 가린 뒤 자살했다고 한댜 8)

7) 『史記』, 『吳太伯世家」, <(夫差)十四年六月, 越王句錢伐吳, 前太子友 ; 十八年, 敗吳 師於笠澤, 二十年, 越王何錢復伐吳 ; 二十一年, 遂園吳 ; 二十三年十一月 , 越敗吳, 吳 王自別死.> 8) 『呂氏春秋』, r 知化篇」, <夫差將死, 曰 ; r 死者如有知也, 吾何面以見子脣於地下!」 乃 爲幕以蒙面而死.>(역자주 ; 여기에서 <幕>은 <幅>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說文』 에 의하면 <根, 授也.>)

한편 월나라 군대가 오나라의 도성으로 공격해 들어올 때, 월왕은 오나 라 군사들을 쫓아 서문(肖門) 밖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는 막 서문 으로 진격해 들어가려고 하는데 남문 성루 위에 높게 걸려 있던 오자서의 바퀴만큼 큰 머리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눈에서는 번갯불 같은 빛이 뿜어져 나왔고 수염과 머리카락이 쭈뻣하게 솟구쳐 오르더니 역시 사방으로 빛을 내뿜는 것이었다. 월나라 군사들이 그 광경을 보고는 소스 라치게 놀라 감히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월

나라 왕은 성문 밖에 잠시 주둔하게 되었다 그런데 밤이 되자 폭풍우가 몰아치고 천둥 번개가 치며 돌덩이들이 날아와 술하게 많은 사람이 다쳤 댜 월나라 군사들은 송룽(松陵)으로 후퇴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범려와 문종은 급히 벌거벗은 몸으로 오자서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잘못 울 빌었다 그리고 오자서에게 그들을 그만 골탕먹이고 진군할 수 있는 길을 좀 내어 달라고 부탁했댜 그날 저녁, 오자서는 문종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젤나라 군대가 오나라로 침입해 오리라는 것을 내 일찌감치 알고 있었 소이다 그래서 내가 죽을 때에도 내 머리를 성의 남문에 걸어 두라고 했 소. 내 두 눈으로 오나라가 망하는 꼴을 보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막상 월나라가 쳐들어오니 오나라가 망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지는 못하겠 더이댜 그래서 비바람을 일으켜 잠시 당신들을 막은 것이오. 그러나 오나 라가 월나라에게 멸망히는 것은 이제 기정 사실이 되고 있소. 내가 그까 짓 비바람을 일으킨다고 해서 얼마나 더 막을 수 있겠소이까. 당신들이 길을 열어 주기를 원한다면, 좋소이다. 성의 동문을 열어 주도록 하겠소. 당신들을 위해 내가 길을 내어 줄테니 안심하고 지나가시오』 문종은 자신이 꾼 꿈의 이야기를 구천에게 해주었다. 구천은 그의 말을 따랐댜 과연 오나라 도성의 동남쪽에 빈틈이 생겨 그곳을 통해 성으로 진격할 수 있었고 마침내 오나러는 무너져 월나라의 수중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9 ) 구천은 오나라를 멸망시킨 뒤 큰 잔치를 열었다. 신하들이 모두 모여 9) 『吳越春秋 』 , r 句錢伐吳外傳J, <越王追91¥, 攻吳兵, 入於江陽 • 松陵. 欲入쭙門, 來至 六七里, 望吳南城, 見任子짬頭, 巨若車輪, 目 若耀電, 援髮四張, 射於十里, 越君大儒, 留兵假道 卽 日 夜半, 暴風疾雨, 雷拜電激, 飛石揚沙, 疾如弓筑. 越君敗撲, 松陵退却, 兵士側麗 人衆分解, 莫 能救止. 范益 • 文種乃稽願肉担, 拜謝子쭙, 願乞假道. 子晋乃 與種 益 夢曰 ; r 吾知越之必入吳矣, 故求 置 頭於南門以觀汝之破吳也, 惟欲以窮夫差定 汝入我之國, 吾心又不忍 , 故爲風雨以還汝軍. 然越之伐吳, 自是天也, 吾安能止哉? 越如欲入, 更從東門, 我當爲汝開道, 貫城以通汝路」 於是越軍明 日 更從江出, 入海陽, 於三道之챕水, 乃麥東南隅以達.>

구천에게 축하를 보냈다 문종 역시 여러 가지 덕담을 하였고 모두들 줄 거워 하였지만 오직 구천만은 즐거운 표정이 아니었다. 범려는 그 이유를 간파했다 구천이 이루고자 했던 것은 영토의 확장이었을 뿐이었다 . 그래 서 신하들의 목숨을 그것과 맞바꾸었던 것이다 . 이제 오나라를 멸망시켜 자신의 소망을 이루었으니 공을 세운 신하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그들을 모두 물러나게 해야만 구천은 비로소 안심할 수 있게 되리라. 모 두들 기뻐하고 있는데 오직 구천만이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바 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댜 범려는 기회를 틈타 월나라를 떠나 다른 곳으 로 멀리 떠날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떠나기 직전 자신의 친한 친구였던 문종에게 편지를 한 통 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높이 날던 새들이 모두 홑 어져 버렸으니 새들을 잡던 활은 이제 던져 버릴 때가 되었지. 교활한 토끼도 모조리 잡아 없앴으니 토끼 를 잡던 개는 이제 솥 안으로나 던져져 한 그릇 국으로 변하게 될 거야. 내가 월나라 왕의 관상을 보 니 목이 긴 데다가 새의 부리 같은 입모양을 하고 있어. 게다가 매의 눈처럼 날 카로운 눈을 갖고 있고 걸음걸이는 이리의 그것이야. 이런 사람과는 환난은 함 께할 수 있지만 즐거움은 함께 나누어 가질 수가 없네. 자네도 일찌감치 떠나지 않으면 앞으로 해를 입게 될 걸세. ® 문종은 그때 높은 벼슬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 맛에 빠져 범려의 편지에 쓰여진 말이 너무 과장된 것이라고 여기고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 았다 범려는 할 수 없이 혼자서 월나라 왕에게 이별의 인사를 남기고는 한 조각 작은 배를 타고 삼강( 三 江) 오호(五湖)를 떠다녔다. 그가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 10) 어떤 사람들은 그가 10) 『 吳越春秋 』 , r 句錢伐吳外傳』, <越 王 還 於吳, 置酒文 if , 群臣 爲 樂 . 大夫種 進祝酒, 群 臣大脫而笑 越王面 無룝 色. 范 蟲 知句錢愛疆土, 不借群臣之死. 范 義欲 去, 遺왑 種臼 ; 「 高鳥 已敗 良弓將藏, 校兎已盡, 良犬就 熹 . 夫越王 爲 人, 長頭鳥ill , 鷹 視狼 步 , 可與 共患難而不可共處樂, 子 若 不去, 將 害 於 子 』 文種不 信其言 . 范益 辭於王, 乃乘馬舟,

범려(『賢臣』)

出三江, 入五湖 , 人 莫 知 其 所適 .>

그 배에 서시를 태우고 함께 오호를 떠돌아다녔다고 하는데 ® 그것은 물 론 정확한 이야기가 아니다 Il l 선진( 先秦 ) 고서의 기록에 의하면 오나라가 망한 후 서시의 아름다움이 너무 뛰어나 그 < 골치덩어리 > 가 또다시 나라 를 뒤흔들게 될까 봐서 ® 월나라 병사들이 그녀를 강에 던져넣어 죽였다고 한다 1 2) 정단은 서시보다 더 일찍 죽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녀는 오나라에 들어온 후 서시와 임금의 총애를 다투다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우울해 하며 살았는데 일년쯤 지났을 때 울화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 1 3 1

11) 杜牧의 詩, <西子下姑 蘇 , 一 朋逐 邸夷.> 범려가 배를 타고 오호 를 떠다니면서 스스 로 < 邸 夷 子皮>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逐 邸夷>는 법려를 따라갔다는 뜻이다 . 12) 『 墨 子 』 , 「親士 篇 」 , < 西施之沈, 其美 也 . > 13) 『東 周列國志 』 第 81 回 참조.

그건 그렇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처음에 문종은 범려가 관직을 팽 개치고 멀리 떠나면서 남긴 편지에 대해서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 댜 그러나 몇 차례의 작은 사건들을 겪으며 그가 한 말이 범상치 않은 것 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자기의 처지가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댜 그래서 병이 났다고 핑계를 대고는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보려는 생각이었 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그의 행동 역시 치밀하지가 못했댜 집에 틀 어박혀 있는 그 행동이 오히려 왕의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빌미가 되었다 어떤 자가 월왕에게 문종이 집에 숨어서 모반을 꿈꾸고 있다고 일러바쳤 던 것이댜 그렇지 않아도 월왕은 문종을 없애버리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 댜 본래 범려도 함께 없애버리려고 했는데, 그는 일찌감치 도망쳐 버렸던 것이다. 이제 문종만이 여기에 남아 있으니, 그가 반역을 도모했건 안 했 건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조그만 꼬투리라도 생겼을 때 엮어넣으 면 그만인 것이다. 월왕은 오왕이 오자서에게 했던 것처럼 촉루검을 문종 에게 보내고 예절을 갖추어 말했다. 「그대가 예전에 나에게 오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아홉 가지 계책 @ 을

일러 주었는데 이제 그 중 세 가지 계책만 가지고도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나머지 여섯 가지 계획은 아직도 그대의 손에 있으니 이제 지하로 내려가 선왕께 그 계획들을 말씀드려 그 효과가 어떠한가를 보는 것이 어떻겠는 가?」 1 41

14) 『史記』, 『越王句錢世家』, <種見련, 稱病不朝 . 人或認種作亂, 越王乃賜種劍, 曰 ; 「子敎 霧人伐吳七術, 霧人用其三而敗吳, 其四在子, 子爲我從先王試之』> 『吳越春 秋』, 멍賤伐吳外傳」에는 <七術>을 <九術>이라고 했고 <其四>를 <其六>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吳越春秋』의 기록을 따른다.

문종은 칼을 받아들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했다. 「커다란 은혜에는 보답할 필요가 없고 큰 공을 세우면 상을 내릴 필요 가 없다더니 내가 바로 그런 꼴을 당하게 되었구나. 범려의 충고를 듣지 않아 오늘 월왕의 독한 손에 죽게 되었다」 그리고 또 허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남양(南陽)에서 말단 관리 노릇이나 하고 있을 것을, 스스로 걸어들어 와 오늘 월나라의 사형수가 되다니 ……」 웃음을 멈추고 또 이렇게 탄식했댜 「먼 홋날 사람들이 충신을 이야기할 때, 나를 예로 들게 되겠지」 말을 마치고 나서 칼을 들어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문종이 죽은 후 월왕은 일부러 후한 장례식을 치러 죽은 자를 위로하게 하였다 그를 도성의 서쪽 산에 묻고 누선(樓船)의 수군 삼천 명을 데려다 가 문종을 위해 옹대한 분묘를 만들게 하였다. 무덤 입구의 문은 솥의 발 모양(鼎足形)으로 만들었는데 세 개의 산봉우리에 걸려 있었다. ® 문종이 죽은 지 일년이 지난 후 오자서의 영혼이 바다에서 돌아왔다. 오자서는 산 중턱에 구멍을 뚫고 문종의 무덤에서 그롤 데리고 나와 함께 강과 바다를 떠돌며 조수(潮水)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 . 바다에서 강으로 조수가 밀려들 때 먼저 밀려오는 조수를 사람들은 <반후(潘侯)>라고 불 렀는데 그것은 바로 오자서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나중에 밀려오는 조수 를 대부종(大夫種)이라고 불렀다 .151 살아있을 때 두 사람은 적국의 신하로

15) 『吳越春秋』, 「句錢伐吳外傳』, <種仰天暎曰 ; 『吾聞大恩不報, 大德不還, 其謂斯平? 吾梅不隨范蟲之謀 吾爲越王所殿」 越王遂賜種屬盧之왔 l, 種得劍, 又暎曰 ; r 南陽之 宰, 而爲越王之摘」 自笑曰 ; 「後百世之末, 忠臣必以吾爲曜矣』 遂伏劍而死. 越王葬種 於國之西山,樓船之卒三千人,造鼎門之淡,或入三峰之下.葬一年,毋子짬察山脇而 持種去, 與之供浮於海 . 故前潮水潘侯者, 任子짬也 ; 後重水者, 大夫種也.>

서 각각 자기들의 군주를 위하여 싸웠다. 어리석은 정치적 씨움터에서 그 들은 승부를 가려야 했지만 죽은 뒤에는 동병상련의 친구가 되었는데, 그 것은 아마도 충직했던 두 사람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소망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한댜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오자서가 오왕의 촉루검을 받고 죽거 직전 자신 의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의 머리를 오나라 성의 남문에 걸어 두어라 내 눈으로 친히 오나라 의 멸망을 지켜보리라. 그리고 제어(應夷魚)의 가죽으로 나의 시체를 싸서 ® 전당강(錢塘江)에 던져넣도록 하여라. 아침저녁으로 조수가 밀려들 때마 다 돌아와서 오나라의 패망을 지켜볼 것이다」 ® 이때부터 절강(浙江) 전당강의 조수는 정기적인 것이 되었다. 조수가 밀려들 때면 해문산(海門山) 일대에는 높이가 수백 자가 넘는 파도가 쳤 댜 그 파도는 전당을 지나 어포(漁浦)까지 가서야 비로소 낮아졌다 조수 는 아침저녁으로 밀려오는데 천둥이 치는 것처럼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백 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더욱 기 이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오자서가 백마가 끄는 흰 마차를 타고® 수염을 휘날리며 위풍당당하게 조수 위에 서서 파도를 따라 넘실거리는 모습이었다 .16) 오나라 사람들은 오자서의 불행한 죽음울 동정하여 태호(太 湖) 가의 낮은 산 위에 사당을 짓고® 매년 봄 • 가을마다 그에게 제사를 지내 주었는데 이 사당이 세워진 산을 서산(晋山)이라고 불렀다 .17)@

16) 杜光庭 『錄異記』 卷 7, <任子骨累練吳王, 件旨, 賜屬錢劍而死. 臨終, 戒其子曰 ; r 戀 吾首於西「 1, 以觀越兵來伐吳 ; 以缺魚皮麥吾尸, 投於江中, 吾當朝暮乘潮, 以親吳之 敗』 自是海門山, 潮頭泡淸高數百尺, 越錢塘, 追魚浦, 方潮低小. 到暮再來, 其聲震怒, 雷雍電激, 聞百餘里. 時有見子꼽乘素車白馬, 在潮頭之中.>

17) 『史記』, 「五子骨列傳」, <吳人情之, 爲立祠於江上, 因名 曰꼽山.>

한편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떠난 범려의 자취도 남아 있는 것이 있다. f3 오호는 바로 태호이며 또한 동정호(洞庭湖)라고도 한다. 동정호 가운데에 는 조주(釣洲)가 있었다 당시 범려가 배를 타고 이곳을 지날 때 마침 폭 풍이 불어와 할 수 없이 그곳에 머물며 낚시질을 하였다고 한다. 그곳에 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잡히는 물고기를 범려어(范諺魚) 라고 했다 . 범려가 그곳에서 낚시질을 할 때 큰 고기가 잡히면 끓여먹었 고 작은 고기가 잡히면 그 연못에 넣어 길렀다고 하는데 이후로 범려어라 는 특수한 어종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연못가에는 또 범려가 누 웠던 돌침대와 돌로 만든 벼루, 다리미 같은 물건들이 아칙도 남아 있다 .181

18) 『述異記』 卷上, <洞庭湖中有釣洲. 昔范蟲乘烏舟至此, 遇風, 止釣於洲上, 刻石記賜. 有一波 陵中有范蠶魚. 昔范益釣得大魚뭇、食之, 小者放於陵中. 被邊有范훑石床, 石 現·鉛鈴.>

이외에도 범려에 관한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 전설에 의하면 그는 바다를 건너 제나라로 가서 농업과 상업에 종사했 다고 한댜 세 번이나 큰 돈을 벌었는데 그때마다 모조리 가난한 친구들 과 먼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고 ,19) 맨 마지막으로 만금의 큰 돈을 벌었을 때에는 도읍(陶邑멘에 정착했기 때문에 도주공(陶朱公)®이라고 불렸다고 한댜 주공이 도읍에 막 정착했을 때® 막내 아들을 낳게 되었다. 그 아들 이 자라 성인이 되었을 무렵 주공의 둘째 아들이 초나라에서 살인을 하여 사형수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주공은 이렇게 말했다.

19) 『史記』, r 食貨列傳』, <(陶朱公)三致千金, 再分散與貧交疏昆弟, 此所謂富好行其德 者也. 後年哀老而聽子孫, 子孫修業而息之, 遂至距萬.>

「사람을 죽였으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다. 그러나 <천금같이 귀한 아들을 어찌 시정 바닥에서 함부로 죽이겠는가(千金之子, 不死於市)>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방법을 한번 생각해 보자」 그는 마차에 황금 천근을 가득 싣고 벗짚으로 묶어 토기 항아리에 담은 뒤 막내 아들에게 그것을 끌고 초나라로 가서 상황을 보아 일을 처리하라

고 하였다 그러자 큰아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자기를 보내 달라고 보채었 다. 그러나 주공은 허락하지 않았댜 큰아들이 말했다. 『가정에 장자(長 子 )가 있는 것을 가독( 家督 )이라고 합니다 . 지금 둘째가 죄를 지어 감옥에 갇혀 있는데 아버지께서는 저를 보내시지 않고 막내를 보내시니, 제가 아직 사람 노릇을 못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울부짖으며 자살을 하려고 하였다. 어머니 역시 큰아들 편을 들며 말했다. r 지금 막내를 보내어 둘째의 목숨을 구하려다가 오히려 큰애의 목숨을 먼저 잃게 되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하는 수 없이 주공은 큰 아들을 초나라로 보내며 편지를 써서 옛친구 장생(莊生)에게 전하라 하였댜 그리고 떠나는 아들에게 몇 번이고 당부를 하였다 r 그곳에 가거든 황금을 모두 장생에게 맡겨라. 그리고 그가 하라고 시 키는 대로 하거라. 이것저것 허튼 소리를 해서는 안 되느니라, 알겠느냐?』 큰아들은 이 일을 맡게 되어서 무척이나 신이 났다. 자기 주머니 속에 일천금이 있으니 걱정할 것이 무엇 있으랴. 그러나 어쨌든 초나라에 도착 하자 장생의 집을 먼저 찾아갔다. 장생의 집은 외성 성벽가에 있었는데 무성한 잡초더미룰 헤치고 들어가서야 비로소 대문을 찾을 수 있었다. 보 아 하니 한눈에도 별볼일 없는 선비의 집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큰아 들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편지를 전하고 황금을 장생에게 맡겼다. 장생은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 더 머물지 말고 어서 돌아가거라. 그리고 네 동생이 석방되더 라도 석방된 연유를 묻지 말거라」 그러나 큰아들은 장생과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영도(郵都) 시내로 나와 여관에 머물며 상황을 살피면서 장생에게로도 돌아가지 않았 다. 뿐만 아니라 몰래 가지고 온 돈을 초나라 귀인에게 주면서 잘 봐 달라 고 하기까지 하였다 장생이 비록 초라한 마을에 살기는 했지만 그의 청렴함과 정직함은 온

나라에 이름이 난 터였댜 그래서 초나라 왕 이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스 승으로 삼아 존경하고 있었댜 주공이 그에게 보낸 돈도 그는 받을 마음 이 없었댜 일이 끝난 뒤에 돌려줄 생각이었거니와 그저 신용삼아 잠시 맡아둔 것일 뿐이었다 주공의 큰아들이 돌아간 뒤 장생은 그의 아내에게 즉시 말했다 「이것은 주공의 돈이오. 병에 걸린 환자와 마찬가지로 하룻밤을 넘겨서 는 아니되오 . 반드시 돌려 주어야 할 돈이니 절대로 건드리지 마시오」 그리고 나서 평소와 다름없이 궁으로 들어가 초왕을 알현하였다. 장생 은 초왕에게 말했다. 「어젯밤에 별자리를 보았더니 어떤 별자리엔가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것은 아마 초나라에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는 것 같았습니다」 초왕은 줄곧 장생의 말을 믿어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의 말을 듣고 나 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장생에게 물었다. r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장생이 대답했다. 역을 쌓는 것만이 그 재앙을 없앨 수 있습니다」 그러자 초왕이 말했다. r 좋습니댜 돌아가 계십시오. 제가 그 말씀대로 한번 해보지요」 장생이 돌아간 후 초왕은 신하를 보내어 삼품전(三品錢)의 창고를 봉쇄 하게 하였다. 그러자 주공의 큰아들에게서 돈을 받은 그 초나라의 귀족이 큰아들에게 달려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r 왕께서 대사면을 내리실 모양이오」 주공의 큰아들이 물었다. 「그것을 어찌 아시오?」 귀족이 대답했다. r 왕께서 대사면을 내리시기 전이면 항상 삼품전의 창고부터 봉쇄하셨 소. 대사면의 소문이 홀러나가면 도둑들이 삼품전에 몰래 들어와 나라의 돈을 훔쳐갈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잡혀도 곧 대사면이 있으니까 풀려날

것이 아니겠소? 바로 그것을 노리고 도둑들이 날뛸까 봐 그것을 방지하시 고자 함이겠지요」 주공의 큰아들은 혼자서 곰곰히 생각했댜 왕께서 대사면을 내린다면 자기 동생도 곧 풀려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장생에게 공연히 돈을 준 것이 아닌가. 다시 그를 찾아가 돈을 돌려받아야 하겠디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즉시 장생을 찾아갔다 그러자 장생이 놀라서 물었다.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주공의 큰아들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태도로 대답했다 . 「아직 돌아가지 않았습니댜 처음에는 동생의 일을 좀 알아보려 했던 것인데 이제 대사면의 소문을 듣게 되었기 때문에 선생님께 작별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장생은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 전에 자기에게 주었던 돈을 돌려 달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천천히 말했다 「그 돈은 바로 옆 건물 안에 있네. 자네가 가서 가지고 가게」 주공의 큰 아들은 조금도 거리낌없이 그곳으로 들어가 돈을 몽땅 꺼내 가지고 마차에 실었다 그리고 장생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는 여관으로 돌 아갔다 돈은 한푼도 들이지 않고 동생이 살아나게 되었으니 그 아니 기 쁘랴 . 그는 마음이 너무나 홉족했다. 주공의 큰아들이 돌아가고 난 뒤, 장생은 그 어린 녀석에게 조롱당했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궁정으로 초왕을 찾아가 말했다. r 제가 일전에 별자리의 움직임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 왕께서 덕을 쌓아 그 재앙을 없애려 하시는 것은 본래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지 금 저자거리에서는 소문이 분분합니다. 제나라 도읍의 돈많은 부자인 주 공의 아들이 살인을 하여 초나라 감옥에 갇혀 있는데, 그 집에서 수천금 의 돈을 들여 왕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매수하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왕께 대사면의 명령을 내리게 하였다는 것이니, 왕께서 사면령을 내리는 것은 초나라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그 주공의 아들 을 살려 주기 위한 것이라는, 그런 소문이 무성하게 떠돌고 있습니다」

초왕은 그 말을 듣고 대노하여 말했다 「내가 아무리 덕이 없다고 한들 설마 그 주공이라는 작자의 아들 하나 를 살려내기 위해 백성들에게 거짓으로 선행을 베푸는 척하겠느냐」 그리고는 주공의 아들을 사형에 처하도록 하고 다음날 대사면령을 내렸 다. 주공의 큰아들은 동생의 시체를 넣은 관을 실은 채 울면서 집으로 돌 0 땄다 . 집에 이르니 식구들은 관을 보고 모두 상심하여 눈물을 흘렀고 이웃들 도 그 불행한 일에 조의를 표하였다. 그러나 주공만은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오히려 웃음을 머금은 채 모두들에게 말했다. 「큰애가 가면 동생의 시체만을 가지고 올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나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지. 그것은 저 애가 동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재물을 너무 아끼기 때문이야. 저 아이는 어려서부터 나와 함께 가업을 일으켰지. 생계조차 어렵던 시절을 겪었고 돈 한푼을 모은다는 것이 얼마 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몸소 체험했어. 그래서 돈이 중요하다는 것 을 알기 때문에 한푼도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지. 그러나 막내는 그렇지가 않았어. 태어나면서부터 저 아이는 모든 것을 누릴 수가 있었어. 견고하게 만들어진 수레에 앉아 훌륭한 말을 몰아 토끼나 여우 따위를 좇으면서 사 냥이나 하는 것이 일이었지. 그러니 저 아이는 돈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알 도리가 없었어. 그리고 돈을 쓰는 데도 호탕해서 조금도 인색하지 않 았지. 지난번에 내가 막내에게 이 일을 맡기려 했던 것은 바로 그 아이가 돈을 아끼지 않고 쓸 줄 알았기 때문이야. 큰아이는 돈을 함부로 쓰지 못 하거든 설명을 하자면 이렇게 간단한 거야. 그러니 슬퍼할 것이 없지. 내 가 일각이 여삼추같이 기다리던 것은 바로 저 아이가 동생의 관이라도 메 고 오는 것이었어』 20 ) 20) 『 史記 』 , r 越王句錢世家」, <范盜浮海出齊, 變姓名, 父子治産, 致産數千萬. 止於陶, 自謂陶朱公 . 朱公居陶, 生少子, 少子及壯, 而朱公中男殺人, 囚於楚. 朱公曰 ; 『殺人而 死, 職也 ; 然吾聞千金之子, 不死於市』 告其少子, 往視之. 乃將黃金千益, 置楊器中, 載以一牛車, 旦遣其少子, 朱公長男固請欲行, 朱公不聽. 長男曰 ; 『家有長子, 曰家督,

今弟有罪, 大人不造, 是吾不肖 』 欲自殺. 其母爲言曰 ; r 今造少子, 未必能生中子也 , 而先空亡長男, 奈何?』 朱公不得已, 而遣長子, 爲一封렵, 遺故所善莊生. 曰 ; 「 至則進 千金於莊生所,聽其所爲,愼無與爭 事 」 長男槪行,亦自私貸數百金.至楚,莊生家負 郭, 被蔡藍 到 r1, 居莊貧 然長男發書進千金, 如其父言. 莊生曰 ; 『可疾去 矣 , 恨無留, 卽弟出, 勿問所以然」 長男槪去,不過莊生, 而私留, 以其私喪獻遺楚國貸人用事者, 莊 生難居窮間 然以廉直聞於國, 自楚 王以下皆師尊之. 及朱公進金, 非有意受也, 欲以 成事後, 復歸之以爲信耳. 故金至, 謂其婦曰 ; r 此朱公之金, 有如病不宿J 誠後復婦, 勿勅 而朱公長男不知其意,以爲無殊短長也.莊生間時入見楚王, 言茶星宿菜, 此則 害於楚 楚王素信莊生, 曰 ; r 今爲奈何?」 莊生曰 ; r 獨以德可以除之」 楚王曰 ; r 生休 矣, 霧人將行之』 王乃使使者封三錢之府. 楚質人驚告朱公長男曰 ; 「王旦敎」 曰 ; r( 可 以也?』 曰 ; r 每王旦敎, 常封三錢之府, 祚暮, 王使使封之』 朱公長男以爲敎, 弟固當出 也, 重千金虛棄莊生, 無所爲也. 乃復見莊生. 莊生驚曰 ; r 若不去耶?」 長男曰 ; 「固未 也 初爲弟事, 弟今議 自 放 故辭生去」 莊生知其意,欲復得其金. 曰 ; 「若 自 入室取金」 長男卽自入室取金持去, 獨自歡慶. 莊生蓋爲兒子所썼, 乃入見楚王曰汀臣前言菜星 事, 王 言以修德報之 . 今臣出,道路皆言陶之富人朱公之子,殺人囚楚,其家多持金錢 路王左右, 故非能植楚國而敎, 乃以朱公子故也』 楚王大怒曰 ; r 霧人難不德耳, 奈何以 朱公子之故, 而施惠平?」 令論殺朱公子. 明 日 遂下放令. 朱公長男意持其弟喪歸. 至, 其母及邑人盡哀之, 唯朱公獨笑曰 ; r 吾固知必殺其弟也. 彼非不愛其弟, 顧有所不能 忍者也. 是少與我供, 見苦爲生難, 故重棄財. 至如少弟者, 生而見我富, 乘堅賜良, 逐 校兎, 器知財所從來, 故輕去之, 非所咨借. 前 B 吾所爲欲遣少子, 因第其能棄財故也. 而長者不能, 故卒以殺其弟 . 事 之理也, 無足悲者, 吾 日 夜固以望其喪之來也』>

도주공은 주공이라고도 하였는데 주공이라는 이름의 선인(仙人)이 또 있었다 . 주공( 朱公) 의 정식 이름은 축계옹(祝 鷄翁) 이라고 하였다. 축계옹 은 낙읍(洛邑) 사람이며 시향(超鄕, 지금의 河南省 個師縣 서남쪽 新蔡鎖) 의 북산(北山) 산기슭에 살았는데 백여 년이 넘도록 닭을 길렀다. 닭에게 는 각각 이름이 있었으며 모두 천여 마리가 넘었다 . 저녁이면 그 닭들을 나무 위에서 지내게 하였고 아침이 오면 모두 방목을 시켰다. 나중에 닭 을 불러들일 때면 닭의 이름을 불렀는데 자기 이름을 들으면 닭은 즉시 돌아왔다. 그 중에서도 원비계(遠飛鷄)라는 이름의 닭이 가장 특이하였다. 그 닭 은 저녁이 되면 돌아와 사람이 있는 곳에서 잠을 잤지만 날이 밝으면 곧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라 사해(四海)를 돌아다녔다. 아침이 되면 이렇게 떠

났다가 저녁이 되면 돌아왔는데 매일을 그렇게 하였다. 축계옹은 그 닭의 알을 가져다가 부화시켜 병아리가 나오게 하였다. 그리고 그 병아리 역시 점차 훈련을 시켜 날아가면 다시 돌아오게 만들었는데 그 이름은 번명계 (蕭羽明鷄)라 하였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나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생긴 것이댜 그 닭은 거위만큼이나 컸으며 온몸이 보라색이었고 커다란 날개 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날개 밑에는 눈처럼 생긴 무늬가 있었는데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그 닭은 목우계( 目 羽鷄)라고도 불린다 . 2 1 )

21) 『洞 冥 記』 卷 4, <有遠飛鷄 , 夕則還依人, 唯則絶飛四海, 朝往夕還. 祝鷄公善萊鷄, 得 遠飛鷄之卵伏之, 曰翻明鷄. 如鷄大, 紫色,有翼, 翼下有 目 , 亦曰 目 羽鷄.>

그러던 어느 날, 축계옹은 닭과 달걀울 모조리 팔아치웠다 . 그리고 천만 금을 벌게 되자 그것을 모두 남에게 나눠 줘버리고 오나라 땅으로 가서 양어장을 만들어 물고기를 길렀다. 후에 그는 오산(吳山) 산꼭대기에서 백 일승천해 선인이 되었댜 그가 하늘로 올라갈 때에는 백학과 공작 수백 마리가 그의 곁으로 날아왔는데 마치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책 ®

22) 『列仙傳』 卷上, <祝鷄翁洛人, 居尸鄕北山下, 養鷄百餘年 . 鷄皆有名字, 千餘頭, 暮 樓樹上, 뾰 盡散之. 欲引, 呼名則種別而至. 썼 鷄及子 , 得千餘萬. 輯置錢,去之吳, 作 羲魚池 後升吳山, 白鷄孔雀數百, 常止其芳 . >

어떤 사람들은 축계옹이 닭을 잘 길렀기 때문에 오늘날 사람들이 닭을 부를 때 <주주(祝祝)>라고 하는 것이라고 하며 ,Zl) 또 닭은 본래 주공이 변해서 된 것이기 때문에 <주주(朱朱)> 하고 부르는 것이라고도 한다.있갤 <주주(祝祝)>와 <주주(朱朱)>는 물론 한 가지 이야기가 다르게 전해진 것에 불과하댜 축계옹은 주공이며 도주공(朱公)과 축계옹(朱公) 사이에는 몇 가지 유사점이 있다. 그들이 모두 선인이 되었다는 점이 우선 그러하 고 ,251 생산에 종사하여 돈을 모았디는 점이 그러하며, 또한 돈을 번 후에는 모두 나누어 주었다는 점이 그러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유사점은 그들

23) 『格致鏡原』 卷 80, 引 『 博物志』, <祝鷄翁善礎鷄, 故世人呼鷄曰祝祝.> 24) 『太平御었 卷 918, 引 『風俗通』, <呼鷄朱朱. 俗說, 鷄本朱公化而爲之.> 25) 『史記』, 『越王何賤世家』 正義, <(陶)朱公登仙, 未聞葬此所.>

이 모두 오나라 땅에 있었다는 것이다 . 축계옹은 오나라 땅에서 양어장을 만들었으며 도주공인 범려는 동정호, 곧 태호 조주의 연못에서 물고기를 길렀댜 후대 전설에 의하면 범려는 『 도주공양어법( 陶朱公換漁法 ) 』 이러는· 책을 지었다고 하는데 26)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이상으로 추론해 볼 때 선인 축계옹의 전설은 도주공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생긴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댜 26) 『隋記 , r 經籍志』 卷 3 참조.

제 4 장 합려가 아직 살아있었던 시절, 그는 보검을 무척이나 좋아하였다. 월나 라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그에게 세 자루의 보검을 바쳤는데, 하나는 어장 (魚腸)으로 오왕 료(僚)를 죽이는데 사용했으며 또 하나는 경영(磐罪)으로 남긴 생선을 먹기 싫다고 하여 자살한 자신의 딸을 위해 부장품으로 넣어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자루인 담로(造盧)는 합려의 무도함을 보고 실 망하여 초나라로 날아가 버렸다.” 합려는 이 세 자루의 보검을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자기 나라의 유명한 장인(劍工)이었던 간장(干將)을 시켜 두 자루의 보검을 더 만들게 하였다. 간장은 당시 또 다른 장인이었던 구야자(歐治子)와 동문 수학한 사이였 는데 2) 간혹 구야자가 간장의 스승이라고도 한다 .31 어쨌든 그들은 힘을 합 쳐 초왕에게 세 자루의 보검을 만들어 바쳤다. 한 자루의 이름은 용연(龍 淵)이라 하였고 다른 하나는 태아(泰阿), 나머지 하나는 공포(工布)라 하 1) 『吳越春秋』, 「 OO 間內傳』, <吳王得越王所獻寶劍三枚 ; 一曰魚腸, 二曰磐罪, 三曰造 盧 ; 魚腸之劍 已用殺吳王僚也,磐鄧已送其死女, 今粧盧入楚也.> 2) 『吳越春秋』, r 閩間內傳』, <干將者, 吳人也, 與歐治子同師, 供能爲劍.> 3) 『漢唐地理왑妙』 輯, 陸廣微 『吳地記』, <干將 B ; 『先師歐治 ……」>

였다 용연의 < 연( 淵 ) > 자가 당( 唐 )나라 개국 황제 이연 (李淵 )의 이름자와 같다고 하여 나중에 그 이름이 용천( 龍泉 )으로 바뀌었다 < 손에 석 자의 용천검을 쥐고(手 提 론 尺龍泉劍 ) > 라는 말은 후대에 와서 소설이나 희곡에 자주 보이는 구절인데, 그것은 바로 무사의 위풍당당함을 묘사할 때 자주 쓰이는 말이 되고 있다 . 진( 晉 )나라 때 장화( 張華 )와 뇌환( 雷煥 )이 풍성( 豊 城 ) 감옥 주춧돌 밑에서 파낸 두 자루의 보검은 전설에 의하면 모두 연평 진(延 平津 ) 0 으로 들어가 용이 되었다고 하는데 ® 그 것 이 바로 용연과 태아 두 자루의 보검이었다고 한다 당나라 사람이 편찬한 역사서에는 그것들 올 < 용천( 龍 泉) > 과 < 태아( 太 阿) > 로 표기하고 있다 .4)

4) 『 越絶 협 』, 『外傳記寶劍」, <歐治子干將作鐵劍三枚 ; 一 曰 龍 淵, 二 曰 泰 阿, 三曰工 布.> 龍 淵과 泰阿에 관한 것은 唐 房 玄齡 等 『晋 홉』, 『 張華 傳』에 보이는데 < 龍泉 > 과 <太阿>라고 되어 있다 .

각설하고 본론으로 돌아가자 . 오나라 왕의 명령을 받은 간장은 자신의 아내인 막야(莫邪)와 함께 이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간장은 칼을 만들 때 우선 오방(五方) 명산의 철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고르고 하늘의 때와 땅의 이치를 살펴 음양이 교차되고 뭇신(百神)이 모두 참관하~근 때를 찾 아 철을 녹여 칼을 만들었다 . 간장과 막야 부부는 용광로 곁에 앉아 긴장 된 모습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아니하게 날씨가 갑자기 변하더니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철을 녹인 쇤물이 용광로 벽에 엉겨 붙어 녹다가 마는 것이었다 간장은 걱정이 되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때 아내인 막야가 말했다. 「당신은 칼을 잘 만들기로 소문이 나서 왕께서 당신더러 칼을 만들라고 하신 것인데, 지금 석달이 되도록 일을 끝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찌된 연고일까요?」 r 나도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소」 간장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대답했다 . 「제가 듣기로는 신령스런 물건은』 막야가 말했다.

r 인간을 희생물로 요구한다고 들었습니다 . 당신이 만드는 보검도 아직 완성되지 않는 것을 보면 혹시 인간의 희생을 바라는 것이 아닐까요?」 간장의 얼굴에 흥분된 미소가 흘렀다 . r 맞아, 맞아! 틀림없어. 예전에 스승께서 쇠를 녹여 칼을 만드실 때 쇠 가 잘 녹지 않으니 부부가 모두 용광로에 뛰어들었소. 그랬더니 보검이 만들어졌었지 . 나중에 사람들이 광산 근처에 가서 쇠를 녹일 때에는 부모 의 상을 당했을 때처럼 베옷을 걸치고 죽을 각오로 만든다는 것을 보였소. 그래야 산에서 풀무질을 하여 쇠를 녹이는 일을 할 수 있었지. 지금 내가 만드는 칼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까 ……」 「당신의 스승께서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칼을 만드셨는데 저라고 해서 못할 일이 있으리 이까!」 간장의 아내는 말을 마치자 곧 자신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깎아 타오르 는 불길 속으로 던져 넣었다 . 고대에는 이것이 일종의 희생이었다. ® 머리 카락과 손톱이러는 것은 인간의 기( 氣 )와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이어서 그것을 잘라내면 건강에도 영향을 미쳤고 또 수명도 단축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댜 5)® 막야의 머리카락과 손톱은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 그런 다음 에 그들은 땔감을 다시 잘 넣은 뒤 어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삼백 명을 데려다가 소가죽으로 만든 커다란 풍로를 잡아당기게 하여 힘껏 풀무질을 하게 했다 그러자 바람이 훅 들어가면서 쇠가 녹아 마침내 두 자루의 보 검을 만들어 낼 수 있었댜

5) 江紹原 『髮嚴 炳』, 「 髮 傑凰被用爲本人的替代品』 참조.

그런데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쇠가 녹지 않을 때 간장이 아내에게 이 렇게 말했다고 한댜 「내가 전에 스승인 구야(歐治)에게 들은 적이 있소. 이런 상황에 부닥 치게 되면 여인을 용광로의 신에게 바쳐 제사를 지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이오」 막야는 그 말을 듣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용광로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검붉은 불꽃이 크게 번쩍이더니 막혀 있던 쇤물이 흘러내리기 시 작하는 것이었댜 그리고 마침내 인간 세상에서 보기 드문 보검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 6 )

6) 『說邪合刊』 卷 63, 輯 『吳地記』, <干將曰 ; 「先師歐治鑄劍之類不鎔, 親鍊耳. 以 rn 成物, EE] 可女人聽遠神, 當得之』 莫邪聞語, 口入遠中, 鐵汗遂出.>

이 전설은 물론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또 앞의 이야기에 비해서 훨씬 더 극적이지만 어딘가 과장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 밖의 다론 전설들 속에서 막야는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앞에 소개한 전설이 비교적 타당하다고 본다. ® 어쨌든 두 자루의 보검이 완성되었다. 옹검(雄劍)은 간장이라 하였고 자검(雄劍)은 막야라 하였다. 옹검에는 네모진 거북이 모양의 무늬가 새겨 져 있었고, 자검에는 물결형의 소용돌이가 새겨져 있었다 . 간장은 칼을 다 만든 뒤 살해당하게 될 것을 걱정하였다(이것은 당시 칼 만드는 장인들이 자주 당하던 비극적인 최후였다. 군주들은 자신이 갖게 된 보검을 천하에 둘 도 없는 훌륭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것을 만들어 낸 장인이 다 른 나라로 가서 그 나라의 군주를 위해 칼을 주조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 들을 아예 살해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간장은 옹검을 아내에게 주며 자신 이 정말로 죽게 되거든 아이가 자라 원수를 갚고자 할 때 주라고 하면서 그 칼을 잘 보관해 두라고 하였다. 그리고 재료가 모자라서 한 자루밖에 못 만들었다고 하며 자검만을 오왕에게 바쳤다. 오왕이 그 칼을 보니 그야말로 최고의 칼이었다. 동물을 끌어다가 시험 을 해보니 소나 말 같은 큰 짐승들도 허리가 쓰윽 잘라질 정도로 잘 들었 으며 금으로 만들어진 쟁반이나 그릇 따위도 두부가 잘리듯이 그렇게 썩 둑 베어졌다. 기둥을 베어보아도 마찬가지, 기둥이 세 토막으로 잘라졌으 며 바위를 내리쳐 보아도 잘게 잘라 작은 돌뎅이로 만들 수 있을 정도였 다 .7) @ 오왕은 이 칼이야말로 온갖 정화가 모여 이루어진 것임을 믿어 의

7) 『戰國策』, 『趙策三』(趙惠文王三十年章), <夫吳干之劍, 肉試則斷牛馬, 金試則截盤 區 薄之柱而擊之, 則折爲三 ; 質之石而擊之, 則碑爲百.>

심치 않아 더 이상 다른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칼을 그 무엇보다 도 소중하게 다루었댜 8 )

8) 『吳越春秋』, 『 OO 間內傳」, <(OOOO) 使劍匠作爲兩枚, 一曰干將, 二曰莫邪, 莫邪, 干將 之妻也 . 干將作劍 采五山之鐵精, 六合之精英, 候天何地,陰陽同光, 百神臨親, 天氣 下降 而金鐵之精不銅浦流, 於是干將不知其由. 莫邪曰 ; 『子以善爲劍間於王, 使子作 劍, 三月 不成, 其有意平인 干將曰 ; r 吾不知其理也」 莫邪曰 ; r 夫神物之化, 須人而成 ; 今夫子作劍, 得無得其人而後成平?』 干將曰 ; 『昔吾師作治, 金鐵之類不鎖, 夫妻供入 治遠中, 然後成物, 至今後世, 卽山作治, 麻經蔡服, 然後政鑄金於山. 今吾作劍不變化 者, 其若斯邪?』 莫邪曰 ; r 師知鍊身以成物, 吾何難哉!』 於是干將妻乃斷髮前瓜, 投入 遠中. 使童男童女三百人, 鼓菜裝炭,金鐵乃器,遂以成劍, 陽曰干將, 陰曰莫邪, 陽作 龜文, 陰作漫理. 干將區其陽, 出其陰而獻之, 閩間莊重 . >

시간이 흐르자 오왕 합려는 이 칼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 댜 그래서 금구(金釣)를 만들어 오는 자에게 상을 내리겠다는 명령을 내 렀댜 금구라는 것은 끝이 구부러진 칼로 당나라 때 시인이 지은 시에도 <미소를 머금고 금구를 바라보네(含笑看吳섭섬)>라는· 구절이 있다 . 심괄의 『몽계필담(夢溪筆談)』에 보면 그것은 남만(南 m) 사람들이 사용하던 갈당 도(葛黨刀)라고 하는데 9 1 (V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오왕 이 명령을 내렸댜 r 특별히 빼어난 금구를 만들어 오는 자에게는 상으로 백 냥의 금을 내 릴 것이다」 당시 오나라에는 금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오왕이 건 상금에 눈이 어두워 자신의 두 아들을 죽여 그 피를 섞 어 금구를 만드는 비윤리적인 일을 했다. 그 자는 두 자루의 금구를 만들 어 오왕에게 바쳤다. 그때 금구를 만들어 오왕에게 바친 사람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은 물건 을 바친 뒤 각자 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아들 을 죽여 칼을 만든 그자만이 참지 못하고 궁정의 문밖으로 달려와 상을 내려달라고 청하였댜 오왕은 밖이 시끄러운 것을 알고서 그자를 데려오

9) 『夢溪筆談』 卷 19, 『器用』 참조.

게 하였댜 그리고 물었댜 r 금구를 만들어 온 사람이 많은데 어째서 너만이 혼자 상을 달라고 하는 것이냐? 네가 만든 것이 다른 사람의 것과 다른 점이라도 있단 말이냐?」 r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금구를 만든 자가 말했댜 「저는 왕께서 내리신다고 하는 상금에 눈이 어두워 저의 두 아들을 죽 이고 그 피를 섞어 두 자루의 금구를 만들었습니다」 오왕은 그 말을 듣고서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자기 옆에 놓여져 있던 금구 중에서 아무렇게나 몇 자루를 들어올려 그에게 주며 말 했다. r 어느 것이 네가 만든 금구냐?」 오왕의 옆에 있던 금구는 적어도 백여 개는 넘어보였다. 더구나 생김새 도 엇비슷해서 금구를 만든 자도 눈이 어릿어릿해 자기가 만든 것을 골라 낼 수가 없었댜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그는 갑자기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 r 오홍(吳鴻)! 호계(屋稽)! 너희들의 아버지가 여기에 있다. 왕께서는 너 희들의 신묘함을 아직 모르고 계시는구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자루의 금구가 오왕의 곁에서 날아오르더 니 곧바로 자기 아버지의 가슴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었다 . 오왕은 그때서야 놀라서 금구 만든 자에게 사과하며 말했다. 「아하! 아까는 내가 정말 미안했네!」 그리고 그자에게 상으로 백 냥의 금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이후로 그는 그 두 자루의 금구를 늘 지니고 다니며 잠시도 떼어놓지 않았다고 한다 .10) 10) 『吳越春秋』, roo 間內傳』, <閩間槪寶莫邪, 復命人於國中作金釣, 令曰 ; r 能爲善釣者 賞之百金』 吳作釣者莊衆, 而有人貧王之重貸也, 殺其二子, 以血磐金, 遂成二i'9, 獻 於蘭間, 諸門而求箕 王曰 ; r 爲釣者莊衆, 子獨求貸, 何以異平衆子之釣平?』 作釣者 曰 ; 『吾之作釣也, 貧而殺二 子, 勇成二釣」 王乃擧衆釣以示之 ; 『何者是也?』 王釣其 多, 形體相甄 不知其所在. 於是釣師向釣而呼二子之名 ; r 吳鴻 • 屋稽, 我在於此, 王

不知汝之神也』 聲絶於口, 兩釣皆飛着父之胸. 吳王大驚 , 曰 ; 「鹿平! 霧人誠負於子」 乃貸百金, 服而不離身.>

앞에서는 간장과 막야가 칼을 만든 것은 오왕을 위해서라고 했는데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진왕( 씁王 ),!” 혹은 초왕(楚 王 )을 위해서였다고 하기도 한댜 그 중에서 초왕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일 것 같댜 이것은 간장과 막야가 초나라 사람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오나라와 초나라는 국경이 인접해 있는 데다가 여러 곳에서 땅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웠기 때문에 어떤 지역들은 오나라에 귀속되었다가 다시 초나라에 귀속 되는 등 끊임없이 주인이 바뀌곤 했다 . 그래서 두 나라의 전설이 서로 뒤 섞이게 된 현상도 그리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다. 이제 간장과 막야가 초 나라 왕을 위해 칼을 만든 이야기와 그들의 아들인 미간척(眉間尺)이 어 떻게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는가 하는 이야기를 대충 해보기로 한다. ® 옛날 초나라에 칼을 잘 만드는 장인인 간장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막야라 했다 . 어느 날 초왕이 간장을 불러다가 첫덩이룰 하나 주 며 말했댜 그것은 왕비가 어느 여름날 저녁 날이 더워서 좀 시원해질까 하여 쇠로 만들어진 기둥을 끌어안았다가 감응하여 낳은 이상한 물건인데 딴 첫덩이들과는 어딘가 좀 다른 것 같으니 그것으로 보검 두 자루를 만 들어 보라고 하였다 .1 2 1

11) 『廣博物志 』 卷 32, 引 『列異傳』 참고. 12) 『廣博物志』 卷 32 , 引 『列士傳』, <楚王夫人夏夜納凉, 抱鐵柱, 心有所感, 産一鐵, 楚 王令鎖邪鑄爲雙劍.>

간장은 왕비가 낳았다고 하는 그 첫덩이를 공손히 받쳐들고 자세하게 살펴본 뒤 말했다 . 「쇠는 좋은 것입니다만, 보검을 만들기에는 … …」 r 쇠가 너무 적다는 말이지」 초왕이 웃으며 말했다 . 땅, 여기 또 귀중한 물건이 하나 있으니 어디 보게나!」 그러면서 초왕은 소매 속에서 검게 반짝이는 누에콩만한 크기의 물건을

몇 개 꺼내어 간장에게 내미는 것이었다 . 간장이 그것을 들여다보니 제법 묵직한 것이 마치 작은 동물의 쓸개처럼 생겼으나 도대체 무엇인지는 알 수가없었다 초왕은 간장이 궁금해 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일러 주었다 . 「그것은 쇠의 쓸개라고 불리는 것일세. 오나라 무기고에서 가져온 것인 데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물건이지. 구리가 많이 생산되는 곤오 산( 昆吾 山)이라는 곳이 있지 않나 . 그곳에 토끼만한 동물이 살고 있네. 숫 놈은 털 색깔이 황금색이고 암놈은 순은처럼 하얀색이야. 그놈들은 땅속 에 깊은 굴을 파놓고 그 속에서 홍사석(紅 沙 石)이나 구리, 또는 철을 먹고 산다네. 그런데 어찌된 연유인지 그놈들 한 쌍이 오나라의 무기고에 들어 온 거야. 그놈들은 그곳에 살면서 창고 안의 쇠붙이로 된 무기들을 모조 리 먹어치웠지. 밖에서 봉인해 놓은 것은 여전한데 말이야 . 이상하게 생각 한 오왕이 명령을 내려 무기고에 뚫려 있는 구멍을 조사한 결과 이 동물 한 쌍이 잡히게 된 거야 . 그래서 그놈들의 배를 갈라보니 바로 이런 이상 한 쇠로 된 쓸개를 발견하게 된 것이지 . 그때서야 그들은 무기고의 무기 들을 그놈들이 모두 먹어버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해 .1 3 1 내 가 그 귀한 물건을 이렇게 손에 넣게 된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네. 자, 그러니 그것울 자네가 갖고 가서 한번 만들어 보게」

13) 『捨遺記』 卷 10, <(昆 吾 )山有獸 大 如兎, 毛色如金, 食 土 下之 丹石. 深穴地以爲窟, 亦食銅鐵, 膳習皆如鐵 其雄者色白如銀. 昔吳國武 庫 之中, 兵刃 鐵 器 , 供被食盡, 而封 署依然 王令檢其庫穴, 臘 得雙 兎, 一白一 黃 , 殺之, 開其腹而有 鐵 膳賢, 方知兵刃之鐵 爲兎所食.>

그 말을 듣고 나자 간장은 쇠가 적다고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래서 왕비가 낳았다고 하는 첫덩이와 몇 알갱이의 쇠 쓸개를 들고 집으로 돌아와 자세히 연구를 해보았다 과연 그것들은 단단하기가 비길 데 없는 쇠붙이의 정화였다 . 그래서 그는 아내인 막야와 함께 용광로에 불을 붙이 고 풀무질을 하여 초왕이 준 쇤덩이들과 또다른 명산에서 캐온 쇠들을 넣 고 녹이기 시작했다. 부부 두 사람이 이렇게 삼 년을 쉬지 않고 매달린 끝

에 드디어 두 자루의 보검이 완성되었다 . 그들은 아직 맹렬한 열기를 내뿜고 있는 용광로에서 칼을 꺼내어 그것 을 냉각시켰댜 그랬더니 그 칼은 마치 가을날의 차가운 강물같은 날카로 운 빛을 발하는데 칼날 위에 머리카락을 놓고 한 번 훅 불어 보니 금방 베어져 버렸고 또 쇠를 잘라 보니 역시 진흙울 자르듯이 쉽게 잘라지는 것이었댜 그야말로 고금에 보기 드문 명검이었다 . 그 칼은 부부-가 수년 간을 노력하여 만들어 낸 것이었기 때문에 두 자루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 기로 했댜 그래서 웅검은 간장 , 자검은 막야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댜 ® 초왕은 보검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하였댜 자기가 그 두 자루의 보검을 소유하여 천하를 제패하고 제후들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 만일 그 소식이 다른 나라 군주의 귀에 들어가 간장을 끌어다가 다시 보검을 만들게 한다면 그야말로 모든 꿈이 수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니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초왕은 마음속으로 이리저리 계산을 해보다가 간장이 칼을 바치러 오는 그날, 그가 작업을 늦게 끝마쳤다는 핑계를 대어 그를 죽여 없앴다 . 모든 후환을 없애려 함이었댜 그러나 간장은 자신이 피살되리리~ 것을 일찌감치 예견하고 있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보검을 만들었으니 초왕이 절대로 자기를 살려둘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그것은 당시 칼 만드는 장인들, 특히 명장(名匠) 들이 자주 당하던 비참한 운명이었다 . 가끔 한두 명 요행으로 살아남아 다른 나라로 도망치기도 했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산돼지나 노루들과 벗삼으며 살아가기도 하긴 했다. 간장이 초왕에게 완성된 칼을 바치러 갈 때, 막야는 임신한 몸이었다.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초왕을 위해 칼을 만들어 삼 년만에 비로소 그것을 완성시켰소. 그러나 초왕은 의심이 많은 인물이오. 내가 앞으로 다른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왕을 위하여 또다시 칼을 만들게 될까 봐 걱정이 되어 분명히 구 실을 찾아 나를 죽이려 할 것이외다. 내가 만든 칼 중에서 자검은 초왕에 게 바칠 것이지만 옹검은 이미 감춰 두었소. 내가 죽은 뒤에 딸이 태어나

거든 그냥 두시오. 그러나 만약 아들이 태어나게 된다면 그 아이가 자란 뒤 이렇게 일러 주시오. 문밖으로 나가 남산을 바라보거라 소니무가 돌 위에 자라고 나무 뒤에 보검이 있을 것이니 .® 그 아이는 아마 이 노래를 듣고 내가 숨겨 둔 보검을 찾게 될 것이니 그 칼로 나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전하시오」 @ 말을 끝내자 간장은 아내가 술피 우는 것을 내버려두고 자검을 든 채 초왕에게로 갔다. 초왕은 보검을 받아들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 「본래 내가 너에게 만들라고 한 보검은 두 자루였는데 어찌 한 자루만 가져왔는가?」 간장은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 r 왕께서 내려 주신 그 쇠 쓸개와 왕비께서 생산하셨다고 하는 쇤덩이의 양이 정말이지 너무 적어 겨우 한 자루밖에 만들지 못했습니다」 초왕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칼을 볼 줄 아~근 사람을 불러다가 그 보겁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는 칼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렇게 말했다. r 이 칼은 본래 자검과 옹검 두 자루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 자검은 여기 가져왔지만 옹검은 아직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초왕은 대노하여 무슨 구실 따위를 찾을 것도 없이 그를 당장 묶어 끌 고 나가 죽이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군사들을 보내어 그의 집을 수색하게 하였지만 아무리 뒤져보아도 옹검을 찾을 수가 없었다 . 간장이 죽은 지 몇 달 후 막야는 아들을 낳았다. 눈썹과 눈썹 사이가 한 자는 떨어져 있어서 이름을 척비(尺比)라 하였다 . 척비는 바로 비어척(比 於尺)이니 한 자쯤 된다는 의미였다 . 그리고 이런 이유로 해서 그 아이의 별명은 미간척(眉間尺)으로 불리게 되었다 . 1 4) 그 밖에 또 어떤 책에는 적

비(赤 鼻 ),1 51@ 적비(赤 L t ) , 1 6 1 @ 미간적( 眉 間赤 )1 7)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모두가 척비 혹은 미간척이 와전된 것이다 . 미간척이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이웃집 아이들이 미간척을 보면 < 애비 없는 호로자식 > 이라고 놀려대 곤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미간척에게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말 올 들으면 미간척은 몹시 속이 상해서 어머니에게 달려가 묻곤 했다. 어머니, 사람들이 모두 저만 보면 아버지가 없는 자식이라고 하는데 정말 저에게는 아버지가 없나요?」 r 얘야,」 어머니는 가슴 가득 차오르는 슬픔을 억누르며 미소를 짓고 말하곤 했다 「아버지가 없다면 네가 어찌 태어날 수 있었겠니? 네 아버지는 먼 길을 떠나셨기 떄문에 돌아오지 못하고 계신 것뿐이란다』 그렇게 세월이 홀러 미간척은 열서너 살이 되었다. 이웃집 아이들의 놀 림을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되었을 때 미간척은 울화통을 터뜨리며 어머니 에게 다시 물었다 r 제 아버지는 도대체 어디에 계시기에 말씀해 주시지 않는 겁니까?」 아들이 들볶아대는 데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겨야, 잘 듣거라. 너의 아버님은 본래 초나라에서 유명한 칼 만드는 장 인이셨단다 예전에 네 아버님께서는 초나라 왕을 위해 전심전력으로 칼 을 만들어 삼 년만에 완성하셨지 . 그러나 초나라 왕은 의심이 많은 사람 이라 너의 아버님께서 다른 나라 왕을 위해 또다시 칼을 만들까 봐 걱정 이 되어 칼을 늦게 만들어왔다는 핑계를 대고 네 아버지를 살해했단다」 미간척은 그 이야기를 듣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 14) 『 太平御覽 』 卷 364, 引 『 吳越 春 秋 』 참조 ` 15) 『 古小 說釣 沈 』 輯 , 『列異 傳 』 • 『 太平御度 』 卷36.5, 引 『列仙傳』, 『列士傳』 참조. 16) 『授神記 』 卷 11 참조 . 17) 『廣博物志 』 卷 32 , 引 『 列異傳 』 참조.

「아, 잔악한 초나라 왕! 아버님께서는 너무도 억울하게 돌아가셨군요 . ―一제가 당장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말겠어요」 그가 이런 말을 할 때 눈썹 사이에서 번득이는 과감한 영웅적 기개는 그의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와 꼭 같았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제 남편의 원수를 갚울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엷 은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 그러나 그것도 잠깐, 그녀는 곧 아들을 걱정하 는 마음에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가 없었댜 「네 나이가 아직 어린데 어찌 간단 말이냐?」 「아닙니다, 어머니」 미간척이 말했댜 「제 나이도 이젠 적은 나이가 아니예요. 떠나게 해주세요」 어머니는 아들의 뜻이 굳은 것을 보고 남편이 떠나면서 자기에게 들려 준 이야기를 미간척에게 그대로 해주었다. 미간척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서 얼른 문밖으로 나가 멀리 남쪽을 바라다 보았으나 산 같은 것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 그래서 고개를 돌려 보니 집앞의 주춧돌 위에 몇 개의 소나무 기둥이 서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미간척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저것이 아마도 < 소나무가 돌 위에 자라고 있다(松樹 生在 石 頭 上)>라 는 말의 의미렀다」 그는 도끼를 가져와서 가장 문 가까이에 서있는 기둥울 골라 뒷쪽을 향 해 그것을 힘껏 내리쳤다. 그랬더니 기둥이 갈라지면서 과연 < 간장(干 將)>이라는 보검이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미간척은 옹검과 마른 양식을 둘러메고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러 떠났다. 그가 막 경성으로 들어갔을 무렵, 초나라 왕은 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 이마가 넓은 아이가 보였는데 그 아 이의 두 눈썹 사이가 한 자쯤은 떨어져 있었다. 그 아이는 보검을 들고서 살기동등하게 다가와 자기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이라고 하며 보검을 들 어 초왕의 얼굴을 향하여 내려치는 것이었다. 초왕은 살려 달라고 소리치

며 잠에서 깨어났는데 온몸이 땀으로 홈뻑 젖어 있었다 . 그리고 나서 자기 가 꾼 꿈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의 목숨이 상당히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어서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천금의 현상금을 걸고서 곳곳에 방을 써붙였는데 방에는 자기가 꿈에서 보았던 모습대로 그림을 그려 붙여놓았다 . 때마침 미간척은 경성에 있으면서 사 람들이 웅성거리며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을 들었다 . 그리고 여기저기 붙어있는 방( 接 )과 방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서 둘러 경성을 빠져나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잠시 숨어 있게 되었다. 산속에 숨어 있으면서 미간척은 생각했다 . 자신은 아직 나이가 어린 데 다가 세상 물정도 잘 몰랐다 . 게다가 초왕이 현상금까지 걸고 자기를 잡 으려고 하는 것을 보니 정말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 자 기 한몸 죽는 것은 애석할 것이 없으나 아버지의 원수는 언제 갚는단 말 인가.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슬픔을 감당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치 줄이 끊어진 목걸이에서 진주알이 떨어져 내 리듯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렀다 . 그가 그렇게 비통해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어디선가 키가 크고 마른 몸 매의 사나이가 나타났다. 온통 검은 옷으로 휘감은 그 사나이는 미간척 곁으로 다가오더니 타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다보며 물었다. 「나이도 어린 소년이 어찌 이런 곳에서 혼자 울고 있는고?」 미간척이 대답했댜 r 저는 간장과 막야의 아들입니다 . 초왕이 저의 아버지를 죽였기에 지금 그 원수를 갚으려 하나 도무지 복수할 기회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검은 옷을 입은 사나이가 말했다. r 초왕은 포악무도하여 초나라 백성들 모두가 그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 다네 . 나 역시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이지 . 요행히 운이 좋아 죽을 그물에서 빠져나오기는 했네만 …… 자네의 원수라면 바로 나의 원수이며 또한 우 리 모두의 원수야. 모든 사람들의 원수를 갚울 방법이 내게 있기는 한데 자네가 동의할지 그걸 모르겠네』

미간척이 대답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만 있다면 어떠한 희생이든지 감수하겠습니 다. 제가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검은 옷의 사나이가 말했다 「초왕이 자네의 목에 천금의 현상금을 컬었다네. 만일 자네가 자네의 목과 그 보검을 나에게 준다면 내가 모든 사람들의 원수를 갚을 수가 있 을 걸세」 사나이의 말을 돋고 미간척은 잠시 그의 눈을 주시했다 . 그리고 그 사 나이의 우울하고도 진지한 눈을 보고서는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 을 알았다. 미간척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등에 메고 있던 보검을 꺼내 어 자기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자신의 목과 보검을 사나이에게 바친 뒤 땅바닥에 쓰러졌다. 검은 옷의 사나이는 한숨을 내쉬며 미간척의 시체를 거두어 땅에 묻었 댜 그리고 보검에 묻은 피를 가볍게 닦아낸 뒤 그것을 등에 메고 미간척 의 머리를 받쳐들고서 초왕을 만나러 갔다 . 화려하고 위풍당당한 대전(大殿)에서 초왕은 미간척의 머리를 바치러 왔다고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자를 접견했다. 시종은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이 평안하고 고요한 표정을 하고 있는 미간척의 머리를 들고 가 초왕에게 보여 주었다. 초왕이 그 머리를 보니 바로 꿈속에서 보았던 그 괴이한 아이의 것임이 틀림없었다. 골칫덩어리 가 없어졌으니 기분이 좋았다. 이제 베개를 높이 베고 푹 잘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머리를 멀리 들판에 갖다 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왕의 명령이 끝나기 전, 검은 옷의 사나이가 급히 앞으로 나오 더니 그것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r 잠깐! 이 아이는 감히 왕께 대적하려고 마음먹었던 아이입니다. 그러 니 이 머리도 보통 머리가 아니지요 . 바로 용사의 머리입니다 . 그러니 솥 에 넣고 푹 삶으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물러질 때까지 푹 삶아야 할 것입 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버리신다면 분명히 요괴로 변하여 다

시 찾아와 말썽을 부릴 것입니다」 초왕이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 말에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커다란 솥 울 대전 앞으로 가져오게 해서 솥 밑에 불을 지피고 미간척의 머리를 넣 어 삶게 했댜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홀 낮과 밤을 계속 불을 랬지만 머리는 물러지지 않았댜 아니, 그 뿐이 아니었다. 머리카락 한 올, 피부 한 점 손상되지 않 았고 몇 번이나 솥에서 튀어나와 두 눈을 부릅뜨고 땅바닥을 굴러다니는 것이었댜 초왕은 미간척의 머리가 아무리 끓여도 삶아지지 않는 것을 보 고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검은 옷의 사나이에게 도대체 어찌된 연유인가를 물었댜 그랬더니 그 사나이가 말했다. 「그 아이의 머리가 삶아지지 않는 것은 아직도 사악한 기운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왕께서 친히 솥 가까이 가시어 들여다보신다면 대 왕의 그 위용에 압도되어 곧 삶아지게 될 것이옵니다」 181

18) 懷神記』 卷 11, <楚干將莫邪爲楚王作劍, 三年乃成, 王怒, 欲殺之 . 劍有雄雄, 其妻重 身, 當産 夫語妻曰 ; 「吾爲王作劍 三年乃成 ; 王怒, 往必殺我 . 汝若生子是男, 大, 告 之曰;出戶望南山,松生石上,劍在其背」 於是卽將雄劍往見楚王. 王大怒, 使相之; 『劍有二, 一雄一雄, 雄來雄不來』 王怒, 卽殺之. 莫邪子名赤比, 後壯, 乃問母曰 ; 『吾 父所在?』 母曰 ; r 汝父爲楚王作劍, 三年乃成, 王怒, 殺之. 去時隱我 ; 語汝子, 出戶望 南山, 松生石上, 劍在其背」 於是子出戶, 南望, 不見有山, 但諸堂前松樹下, 石祗之上, 卽以芹破其背, 得劍, 日 夜思欲報楚王. 王夢見一兒, 眉間廣尺,言欲報仇. 王卽賜之千 金 兒聞亡去, 入山, 行歌 客有逢者, 謂 ; r 子年少, 何突之莊悲邪?』 曰 ; 『吾干將莫邪 子也, 楚王殺吾父, 吾欲報之』 客曰 ; r 聞王期子頭千金, 將子頭與劍來, 爲子報之J 兒 曰 汀幸莊」 卽 自 劍 兩手棒頭及劍奉之, 立 00. 客曰 ; 『不負子也』 於是尸乃{卜. 客持頭 往見楚王, 王大喜. 客 B ; r 此乃勇士頭也, 當于湯獲者之』 王如其言, 옆頭三日三夕不 惡 頭薛出湯中, 蹟(原)目大怒 . 客曰 ; r 此兒頭不爆 , 願王自往臨視之, 是必爆也』>

r下o •… •• 」 초왕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낮게 신음했다. 사실 초왕은 좀 두려웠다. 그래서 감히 그 아이의 머리를 들여다볼 용 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 그러나 지금 문무백관이 모두 자기 앞에 늘어 서 있는데 안 하겠다고 하면 그것 또한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서 결국은 <좋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댜 마침내 초왕은 정신을 가 디듬고 배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고서 한걸음 한걸음 솥 가까이로 다가갔 댜 그리고 고개를 늘여빼고 솥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번개처럼 검은 옷 의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는 보검을 빼들고 초왕의 목을 향해 칼을 내리 쳤댜 초왕의 머리는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솥 안으로 빠져버렸다. 그러자 아이의 머리가 솔에서 솟구쳐 오르더니 노기충천해서 초왕의 귀 를 물어뜯는 것이었다 . 초왕의 머리 역시 아이의 코를 물어뜯었다 . 그 광경 을 보고 대전에 있던 조신들과 내시들, 비빈과 궁녀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 고 허둥거렀댜 그때 대전의 복도에 서있던 무사들이 창을 들고 급히 달려 왔다 그러자 검은 옷의 사나이는 껄껄 웃더니 보검을 들어 자기의 목을 내리쳤다 . 그래서 또 하나의 머리가 솥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 그리고 그 목은 아이룰 도와 함께 초왕의 머리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들이 그렇게 솥 안에서 요동을 치며 물고 뜯고 하는 통에 솥에서는 석 자 높이의 뜨거 운 파도가 일었다 . 이렇게 기이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니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직분도 잊어버리고 솥 가로 다가와 그들의 이상한 싸움을 지켜보 았댜 그 격렬한 전투는 이레 밤낮이나 계속되었다고 하는데(물론 솥 밑에 서는 계속 장작을 넣어 불을 랬고) 이레가 지나자 모두 바닥으로 가라앉더 니 순식간에 모두 물러졌다 .19) 국자로 건져 보았지만 그 세 개의 머리는 모 두 푹 삶아져서 비슷한 크기의 해골만 남았기 때문에 어느 것이 왕의 것이 며 또 어느 것이 자객의 것이고 미간척의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 그 때서야 대전에는 천지룰 진동시키는 울음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 러나 방법이 없었다. 끓다 남은 솥 안의 국을 뼈와 살점이 담긴 채 셋으로 나누어 토기로 만든 통에 담아 세 군데에 묻어 주었다. 그리고 각각 봉분 울 쌓으니 그것이 바로 <삼왕묘(三王墓)>라는 것이다 20) @ 19) 『太平御點 卷 364, 引 『吳越春秋』(今本에는 없음), <王卽 看 之, 客於後以劍斬王頭, 入獲中, 二頭相唱 客恐尺不勝, 自以劍似頭, 入獲中, 三頭相l!ic. 七日後一時供爆.> 20) 『授神記』 卷 11, <三首供爆 不可識別 乃分其湯肉葬之 , 故通名三王墓. 今在汝南北 宜春縣界.>

제 5 장 앞의 제 2 장과 제 3 장에서 합려가 먹다 남긴 생선을 딸에게 주었다가 그 딸이 자살하였다는 이야기를 서술한 바 있다. 합려는 불쌍한 딸을 위하여 거대한 분묘를 만들어 주었는데 그것을 여분(女壇)이라 하였다. 여분은 홋 날 호수가 되었고 그 호수는 여분호(女壤湖)라고 불린다. 그런데 어떤 전 설에 의하면 그 호수는 부차의 딸인 자옥(紫玉), 즉 유옥(幼玉)의 유적지 라고도 한다 .I) 이제 자옥에 관한 전설을 간단하게 서술해 보기로 한다. 그 러나 자옥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합려가 생선을 먹던 일에 관 해 다시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합려는 아마도 생선을 무척 좋아했던 모양이다. 대개 물가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마치 밥을 먹듯이 생선을 좋아하는데 합려 역시 예외가 아니었 다. 한번은 합려가 배를 타고 강을 따라 어딘가로 가다가 배 안에서 생선 회를 먹고 남은 것을 강물에 버렸다. 그런데 그 버린 생선회가 나중에 모 두 <오왕희여(吳王贈餘)>라는 생선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 생선은 길이 1) 『漢唐地理쁩紗』 輯, 陸廣微 『吳地記』, <女頃湖, 在吳縣西北六里. 『越絶書』曰 ; 『夫 差小女幼玉, 與랍生韓重爲偶不果, 結怨而死,夫差痛之, 金稽銀掃, 葬間門外』 또 趙

暗 『吳越春秋』云 ; roo 間有女, 哀怨王先食蒸魚 , 乃 自 殺. 王痛之, 厚葬於閣門外, 後協 成湖, 今號女壇湖』>

가 몇 치 안 되는 작은 것이었는데 길어봐야 젓가락 크기만큼 밖에 안 되 었다고 한다 2) 이 생선은 회잔어( 胎殘魚) 라고도 불린다

2) 『授神記』 卷 13, <昔吳王閩間 江行, 食膳有餘, 因棄中流, 惑化爲魚. 今魚中有名吳王 胎餘者, 長數寸, 大者如筋, 猶有膳形.>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월왕 구천이 오나라 병사들에게 쫓겨 회계산으 로 도망갔을 때 물고기를 다져 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나라 병 사들이 다시 쫓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남은 고기를 강물에 쏟아버리고 허 겁지겁 도망칠 준비를 하였는데, 강물에 버린 그 생선회가 변하여 물고기 가 되었다. 그 물고기의 형태는 생선회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서 < 회잔 (!슝 殘)> 이라고도 불렸다? 회잔의 모습은 젓가락과 같다

3) 『事物紀原』 卷 10, <膳殘 越王句錢之保會稽也, 方祈魚僞 l8, 聞有吳兵, 棄其餘於江, 化而爲魚 , 猶作膳形, 故名胞殘.>

이 밖에 또 나뭇잎 모양의 < 왕여어( 王餘魚)> 라는嗣 물고기가 있다. 월왕 이 배 위에서 생선회를 뜨다가 남은 반쪽짜리를 강물에 버렸는데 그것이 부활하여 몸이 반쪽밖에 없는 왕여어가 되었다고 한다 ? 왕여어는 비목어 (比目魚)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비목어가 눈이 하나밖에 없고 반드시 암수 두 마리가 함께 다니는 데 비해 왕여어는 눈 두 개가 모두 몸의 한쪽에 붙은 것이 다르다 『문선(文選)』, r 오도부(吳都賊)」 에 보면 <쌍 으로 다니 면 비목어요, 혼자서 다니면 왕여어라(雙則比目, 片則王餘)>는 구절이 나 오는데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4) 『文選』, 漠都賊」 劉逸注, <王餘魚, 其身半也. 俗云, 越王槍魚未盡, 因以殘半棄水 中, 爲魚, 遂無其一半, 故曰王餘也 .>

합려가 생선을 먹은 것에 관해서 비교적 재미있는 것으로는 다음과 같 은 이야기가 있다 . 합려 10 년에 동방의 이인(夷人)들이 오나라를 침공하자 그는 곧 친히 군대를 이끌고 그들과 대적했다 이인들이 합려에게 밀려 바다로 도망을 쳐 동방의 어느 모래톱으로 이루어진 섬에 숨어 있게 되었다. 오왕은 군 대를 이끌고 바다까지 쫓아가 역시 그 모래톱에 진지를 구축했다. 쌍방이

그렇게 한 달 정도를 대치하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바다에 풍랑이 일어 군량미를 실은 배가 제때에 닿을 수가 없어서 군사들이 배를 끓게 되었다. 오왕은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를 하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오왕 이 기도를 막 끝냈을 무렵, 갑자기 맹렬한 동풍이 불어오더니 황금빛의 파도가 밀려오면서 오왕이 머물고 있는 모래톱을 겹겹이 둘러싸는 것이었 다. 바닷물의 성질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것이 물고기들의 움직임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군대 내에서 그런 것에 대 해 잘 아는 사람이 <얼른 가서 물고기를 잡아오라>고 하였고 마침내는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아올 수 있게 되었다. 오왕과 군사들·은 그것을 맛있게 먹었고, 배를 채운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한편 이 인들도 똑같이 군수품이 끊기는 곤경에 처하였고 역시 물고기를 잡아먹으 려고 하였지만 이상하게 한 마리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견 딜 방법이 없어 오왕에게 돈을 바치고 화해를 청하였다. 오왕은 그들의 뜻을 받아들여 답례로써 자기들이 먹다 남긴 생선의 내장 같은 것들을 바 닷물에 절여 그들에게 보냈댜 이인들은 돛올 높이 올리고 자기들의 땅으 로 되돌아갔으며 그로 인하여 이인들이 머물고 있었던 그 모래톱은 축이 (逐夷)라고 불리게 되었댜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로 되돌아온 오왕은 조당 (朝堂)에서 신하들을 접견하며 바다에서 고기를 잡았던 일을 이야기했고 또 이야기 끝에 혹시 남은 고기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 일을 담당했던 신 하가 대답했다. r 남은 것이 있기는 한데 모두 말려서 어포로 만들어 두었습니다』 오왕은 그것을 조리하여 가져오게 해서 모두들에게 먹어 보라 하였다. 그리고 자기도 다시 먹어 보니 과연 맛이 일품이었다. 그래서 오왕은 봇 을 들어 그 물고기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위에는 아름다울 미(美)자 를 쓰고 아래에는 물고기 어(魚)자를 썼다. 그것을 합쳐 보면 바로 <상 (照)>이라는 글자가 되는데 그것은 <상(想)>이라는 발음으로 읽혔다? 후 5) 『漢唐地理習妙』 輯 『吳地記』 引, 『困學紀聞』注 참조. 『中華大字典』에는 이 글자가

들어 있지 않음.

에 와서 그 글자는 <상( 熟 ) > 이라고 쓰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 댜 이 물고기는 바다 위에 나타날 때 황금색으로 보였는데 원래의 이름 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오왕이 보니 그 물고기의 머리 부분 에 하얀 돌처럼 생긴 뼈가 있다고 하여 석수어(石首魚)라고 했다고 하는 데 6) 사실 그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자주 먹는 조기(黃魚, 黃花魚)였다.

6) 『天中記』 卷 5, 引 『吳地記 』 ,

합려가 먹던 생선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을 맺고 이제 다시 부차 의 막내딸 자옥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자. 자옥은 유옥이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한데 부차의 막내딸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황음무도한 것을 보았다. 재능 있는 사람들을 중용하지 않고 미색에만 빠져 온종일 서시 같은 여인들과 고소대에서 날을 보내며 국사를 돌보지 않으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고 그렇게 나가다가는 머지 않은 장래에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유일한 희망을 한중(韓重)이라고 하는 젊은 선비에게 걸었다? 자옥의 나 이 18 세였고 아름답고 총명했으며 한중은 그녀보다 한 살 많은 19 세, 세 상이 혼탁한 것을 보고 신선사상에 심취하여 그 방면에 관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옥은 그런 그를 좋아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그를 따라 함께 심산유곡으로 들어가 열심히 수련을 하여 세상을 떠나 신선이 되고 자 하는 이상을 지니고 있었다. 한중은 평범한 세가(世家)의 자제였으나 자기 나라에서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껴 제나라와 노나라로

7) 『說郭合刊』 卷 63, 輯 『吳地記』 引 『越絶뽑』(今本에는 없음), <夫差小女字幼玉, 見 父王無道 • 輕士重色 其國必危, 遂願與書生韓重爲偶.>

가서 공부를 더할 생각을 갖 고 있었다. 당시 노나라에는 공자라는 대성안 이 있었으니 유학가겠다고 하기에는 안성마춤이었다. 물론 그가 정말로 가고 싶어 했던 곳은 제나라였댜 당시 제나라는 신선들의 집결지라고 할 정도로 도술이 뛰어난 사람들이 모여 신선의 도를 닦고 있었다 (D 한중이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 하는 인물은 분명히 그 속에 있을 터였다. 한중과 자옥의 교유는 아마도 그들간에 먼 친척관계가 있었기에 가능했 던 것 같다 궁정의 노비가 드나들며 서로의 소식을 전했을 것이고 그것 은 또한 어느 정도는 부모의 묵계 하에 진행된 것이었으리라. 자옥은 그 런 교유 중에 그의 아내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태도를 솔직하고도 진지하 게 표현했다 한중은 그렇게 귀한 대답을 얻은 것이 뛸 듯이 기했다. 이제 다른 나라로 떳떳하게 떠나 신선의 도를 배워도 되는 것이다 . 돌아오면 자기도 소사( 蕭 史)와 같이 될 수 있을 터였다 . 소사가 진( 秦 ) 목공( 穆 公)의 딸 농옥( 弄玉 )에게 피리부는 것을 가르치다가 목공이 그녀를 소사에게 시 집보내어 부부가 함께 봉황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듯이 자기들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었댜 8) 그래서 한중은 길을 떠나며 부모님에게 기회를 보아 오왕에게 구혼을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의 부모는 아들의 말대로 오왕에게 청혼을 하 였지만 적빈한 일개 세가의 아들이 어찌 오왕의 사위가 될 수 있었으랴. 오왕은 벌킥 화를 내며 단번에 거절하고 말았다. 자옥은 후궁에서 그 소 식을 듣고 목구멍이 곽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가 먹다 남긴 고기를 주었다고 자살했던 자신의 고모와 마찬가지로 역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 오왕은 후회막급이었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 이었댜 그래서 화려하고 후한 장례식을 치러 주고 그녀를 궁궐문 밖에 묻었다 . 그 후 삼 년이 지났다. 도술을 배우러 갔던 한중은 아직 공부를 다하지는 못했지만 자옥과의 혼사 문제가 생각나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물었다. 8) 『 列仙傳』 卷上 참조 .

『구혼을 하셨던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부모가 대답했다 . r 오왕이 그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내었고 그 소식을 들은 아가씨가 그 만 치밀어 오른 화를 삭히지 못하고 죽고 말았단다 . 이미 죽은 지 한참 되었지』 한중은 그 말을 듣고 통곡을 하며 슬퍼하였다. 그렇게 오랫동안을 울다 가 간단한 제수를 준비하여 자옥의 무덤을 찾아갔다. 그곳에서도 가슴 아 파하며 한나절을 머뭇거리는데 황혼 무렵이 되자 자옥의 영혼이 무덤 속 에서 천천히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녀는 무덤에서 걸어나와 한중을 보더 니 얼굴이 온통 눈물로 얼룩져서 말했다. r 당신이 떠난 후 당신 부모님들께서 저의 아버지에게 구혼을 하셨답니 다. 저는 하늘이 사람의 소원을 들어 주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지경 에 처하게 되고 말았어요 . 이제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러더니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목을 늘여빼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 다. 그 노래는 <남산에 새가 있고 북산에 그물이 펼쳐져 있네(南山有鳥 北山張羅)>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노래였는데, 그 구절은 민가(民 歌 )에 자 주 나오는 것으로, 여주인공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어도 굽히지 않는 다는 강한 정신을 표현하는 그런 노래였다. 한중은 그녀의 노래를 듣자마 자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옥은 노래를 끝내더니 한중에게 자 신의 무덤으로 같이 들어가자고 하였다. 한중은 그녀의 정성에 감동되어 함께 무덤으로 들어가 사흘 낮과 밤을 보낸 뒤 다시 나왔다 . 그가 떠나올 때 자옥은 한 치 크기쯤 되는 윽구슬을 주며 말했다. r 우리집에 가시게 되거든 이 구슬을 부왕께 바쳐 경의를 표하세요』 한중은 그녀의 말대로 그 구슬을 가지고 오왕을 알현하였다 . 그리고 자 옥을 만났던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의 뜻은 다름 아니라 자기들 사이에 친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 오왕의 관심을 구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오왕은 옥구슬을 보더니 화를 벌킥 내며 말했다. 대 딸이 죽은 지가 벌써 언제인데 어디서 미친 놈이 나타나 거짓말을

하여 내 딸의 영혼을 모욕한단 말이냐? 저 구슬은 내 딸의 무덤에서 훔쳐 온 것이 분명해 딸의 영혼을 만나다니, 별 희한한 소리 다 듣겠구나!」 영 그리고는 즉시 한중을 잡아 가두게 했다 . 그러나 한중은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탈출했고 다시 자옥의 무덤을 찾아가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하 소연했댜 「걱정하지 마세요」 자옥이 한중을 위로하며 말했다. r 제가 아버지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겠어요」 다음날 새벽, 오왕이 일어나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는데 갑자기 자옥이 사뿐사뿐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오왕은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 도 하여 만감이 교차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옥아, 어떻게 다시 살아났느냐?」 자옥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오왕에게 대답했다 . 「전에 부왕께서는 한중의 청혼을 거절하셨지요. 제가 잠시 생각을 잘못 하여 그만 자살하고 말았어요. 그러나 한중은 유학길에서 돌아와 제가 죽 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수를 챙겨 제 무덤을 찾아왔어요. 저는 그 사람이 제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찾아와 준 것이 고마와 그롤 만나고 또 그에게 옥구슬을 준 것이랍니다. 절대로 그 사람이 무덤을 파해지고 관뚜 껑을 연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부왕께서는 그 일에 대해 뭐라 다시 말씀 하지 말아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그때 자옥의 어머니가 딸의 음성을 돋고 방에서 달려나와 두 팔을 뻗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팔은 그저 허공만을 가를 뿐이었 다 . 자옥은 어머니의 품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9) @ 9) 『授神記 』 卷 16, <吳王夫差小女, 名曰紫玉, 年十八 , 才院供美. 童子韓重, 年十九, 有 道術 女稅之, 私交 信 問, 許爲之妻.重學於齊魯之f 1, 臨去, 藤其父母使求婚 . 王怒, 不與 女氣結死, 葬同門之外 三年,重歸, 誌其父母 . 父母曰 ; 『王大怒, 玉氣結死, 已 葬矣』 重笑泣哀1%, 具性幣往弓墓前. 玉魂從墓出, 見重流 w. 乃左顧, 苑頭而歌, B ; r 南山有 鳥 , 北山張羅 ……』歌畢, 飮飮流浩, 要重還家.重感其言,送之還家, 留三 日

三夜, 盡夫婦之禮. 臨出, 取經寸明珠以送重, 曰 ; r 若至吾家 , 致敬大王』 重低 出 . 遂脂 王說其事 大王怒曰 ; 『吾女槪死, 而重造誰言, 以站祿亡靈 ; 此不過發家取物, 而托以 鬼神」 超收重, 重走脫, 至玉墓所訴之. 王曰 ; r 無ii, 今歸白王」 王 H 女統, 忽見玉, 驚信 悲파 問曰 ; r 爾緣何生?』 玉視而言曰 ; 「昔諸生韓重來求玉, 大王不許, 玉名殿義絶, 自致身亡. 重從遠還, 諸家弓唱 感其篤終, 輯與相見, 因以珠遺之. 不爲發家, 願勿推 治』 夫人間之, 出而抱之, 玉如炯然.>

서생 한중이 훗날 어찌 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기록이 확실치가 않다. 그러나 아마도 계속해서 신선의 도를 닦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댜 한중의 <중(重)>자는 몇 가지 발음으로 읽혀지는데 그 중에는 <중 (衆)>이라는 발음도 있다 어쩌면 <도술이 있는> 이 한중이 바로 고대의 유명한 선인 <한중(韓衆)>인지도 모른다. 한중은 < 한종( 韓終)> 이라고도 하는데, 그는 제나라 사람으로 송(宋) 강왕(康王)을 위해 선약(仙 藥) 을 찾 으러 갔었다 그는 선약을 찾아다가 강왕에게 바쳤으나 강왕이 의심을 하 며 먹지를 않자 자기가 그것을 먹고 마침내 몸이 가벼워져 하늘로 날아올 라 선인이 되 었다고 한다 IOI

10) 『楚辭』, 遠遊』, <淡韓衆之得一.> 王逸注, <衆一作終.> 洪興祖補注, <『列仙傳』 ; 齊人韓終爲王采藥, 王不肯服, 終 自 服之, 遂得仙也.> 『太平御뾰』 卷 984, 引 『唐子』 에 의하면 王을 宋王이라고 했고 또 <韓終卽韓惡之兄>이라고 하였으니 여기서의 <宋王>은 바로 宋 康王이다.

이렇게 선약을 먹고 신선이 되기 이전에도 한종은 몸에 좋으면서도 선 약과 비슷한 어떤 약을 먹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창포(葛蒲)라고 했다. 일 찍이 문왕(文王)이 그것으로 창포장을 만들어 먹은 적이 있었고® 공자 역 시 문왕을 따르느라 목을 움츠리고 억지로 그것을 먹은 적이 있었다 .Ill 중 악(中岳) 숭고산(尙高山)의 돌 위에 서식하고 있는 창포는 한 치 크기에 마디가 아홉 개였는데, 그것을 먹으면 장생불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1 21 한 종이 창포를 먹은 지 13 년 뒤, 그의 몸에는 털이 자라났다고 하는데 ,13 ) 그 것은 바로 신선의 날개가 생길 징조였다. 또는 그가 창포를 먹은 13 년 후,

11) 『呂氏春秋』, 『遇合篇』, <文王喝舊蒲, 孔子聞而服之, 縮類而食之, 三年然後勝之.> 12) 『藝文類衆』 卷 81, 引 『神仙傳』, <中岳有石上舊蒲, 一寸九節, 食之可以長生.> 13) 『藝文類衆』 卷 81, 引 『抱朴子』, <韓終服舊蒲十三年, 身生毛.>

겨울에 웃옷을 벗고 있어도 추운 줄을 몰랐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진 댜 1 4’ 그는 이 밖에도 빛깔이 벽옥 같고 수십 년에 한 번 열매가 열리는, 신맛이 나는 자두를 먹었다고도 하는데 후대 사람들은 그 자두를 한종리 (韓終李)라 불렀다 그것은 장안에서 9 천 리 떨어진 서방의 림국(堀國)에 서 자라났다고 한다 1 51 이것들이 한종에 관한 단편적인 전설들이다 .

14) 『淵裂類函』, r 藥部」, <舊蒲四>注, 引 『本草』, <韓要服舊蒲十三年, 査担不寒.> 15) 『洞冥記』 卷 2, <瑞國去長安九千里, 生玉葉李, 色如碧玉, 數十年一熟, 味酸 ; 昔韓終 傾此李, 因名韓終李.>

한종에게는 한빙( 韓愚 )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어떤 책에는 <한붕(韓 朋)>이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한데 161 송나라 강왕(康 王) 의 사인(舍人) 노릇 을 하고 있었다 사람됨이 성실하고 충성스러워 늘 강왕의 곁에서 시중을 들며 왕의 수족 노릇을 하고 있었댜 그러나 강왕이라는 이 인물은 고대 의 컬(架)이나 주(約)와 같은 종류의 인물이었으니 어리석고 무도한 자였 댜 선량한 사람이 어리석은 임금 곁에 있다 보면 언젠가는 그 재앙이 자 신에게 닥쳐오는 법이 아니던가. 송 강왕은 용맹스러움만을 숭상했을 뿐, 어질다든가 의롭다든가 하는 일에 신경을 쓰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혜앙( 惠益) 이 공자나 묵자의 도를 이야기하며 송 강왕에게 유세를 할 때 에도 조정에 앉아 발을 구르고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부리다가, 결국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용맹스러움일 뿐 무슨 인의(仁義) 같은 것이 아니 라고 아예 드러내놓고 선포를 하였던 적이 있다 .171 그리고 자신의 용맹스 러움을 내보이기 위하여 <무두관(無頭冠)>이라고 하는 모자를 특별히 만 들어 썼는데 18) 그것은 눈과 코까지 뒤덮는 그런 종류의 모자였다. 이것은 아마도 신화에 나오는 형천(刑天)의 모습을 흉내내어 만든 것 같았는데 머리가 없어도 자기는 충분히 싸울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그는 형천이 천제에게 대항하여 끝까지 싸웠던 그 용맹성을 잘못

16) 唐 劉拘 『嶺表錄異』 • 『敦樓變文菓』, r 韓朋賊』· 17) 『列子』, r 黃帝篇J, <惠益見宋康王, 康王探足면暎 疾言日 ; 『莊人之所說(稅)者, 勇有力 也 ; 不說(稅)爲仁義者也 客將何以敎霧人?』 惠益對曰 ; r 臣有道於此, 孔墨是已』> 18) 『太平御覽』 卷 684, 引 『桓子新論』, <宋康王爲無頭之冠以示勇.>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밖에 강왕이 좋아했던 것은 아름다운 여인들이었다. 미색이 뛰어난 여인을 보기만 하면 그녀가 이미 결혼을 한 여자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또 그녀가 일반 백성들의 아낙네이건 신하의 아낙네이건 구별하지 않고, 자신이 차지하여야 직성이 풀렸다. 국왕의 권위를 내세워 그는 그런 일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 결국 왕의 사인이었던 한빙에게도 그 재앙이 닥치고 말았다. 한빙의 아내 하씨(何氏)는 나이가 어린 데다가 무척 아름다왔다. 어느 날 궁정에서 있었던 연회석상에서 그녀를 본 강왕은 그녀를 강제로 데려다가 궁 안에 가두고 아무데도 가지 못하게 하였다. 한빙이 왕을 원 망하자 즉시 그를 잡아다가 노예처럼 일을 시켰다. 등에 흙점을 지고 다 른 죄수들과 함께 청릉대( 靑 陵 臺 )를 짓는 데로 보내졌던 것이다. 청릉대는 지금의 산동성 운성현(郡城縣)에 있는 것으로 어리석은 군주 강왕이 놀기 위하여 만드는 궁전이었다 .1 9)

19) 『太平 襄 宇記』 卷 14, <郡城縣 靑 陵 臺 . 『郡國志』云, r 宋王納韓愚之妻 , 使 愚 負土築臺』 至今 臺 遊依然.>

하씨를 궁안에 가둔 강왕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들고자 하였다. 위협도 해보고 회유도 해보았지만 그녀는 시종일 관 대답이 없이 거절만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감시가 소홀한 톰을 타서 슬그머니 편지를 써서는 부탁할 만한 사람에게 전하여 한빙에게 보내 달 라고 하였다. 한빙이 편지를 받아 펼쳐 보니 다음과 같은 열두 글자가 쓰 여 있었다 . 비는 부술부술 내리고(其雨 浮浮 ) 강물은 깊고 넓은데(河大水深) 해가 떠서 내 가슴을 비춥니다( 日 出 當 心) 이 편지의 내용은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라 열심히 추측해 보아야 할 내

용이었지만 한빙은 그것을 보자마자 바로 그 뜻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 말 없이 뜨거운 눈물을 줄줄 홀리고 고개를 몇 번 끄덕 이더니 그날 저녁 바로 자살해 버렸다 감시관은 한빙이 지니고 있던 이 편지를 찾아내어 왕에게 바쳤다. 송왕은 그 편지를 받아들고 여러 신하들 에게 보여 주었지만 그들은 그 편지를 이리저리 살펴보기만 할 뿐 어느 누구도 그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들보 다 똑똑한 소하( 蘇賀 )라고 하는 신하가 그 편지에 쓰여진 내용을 움미하 더니 갑자기 깨달은 듯이 송왕에게 말했다. r 신이 보건대 이 세 구절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 비가 부술부슬 내린 다 > 는 것은 그녀의 마음이 우울한 데다가 남편 생각이 간절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 강물이 깊고 넓다 > 는 것은 두 사람 사이가 아득히 멀어 서로 왕래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 그리고 < 해가 떠서 가슴을 비춘다>는 것은 바로 그녀가 이미 죽을 마음을 먹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J 앞의 두 구절에 대한 해석은 그 런대로 수긍할 만했으나 마지막 구절에 대한 해석은 아무래도 좀 통하지 않는 것 같고 억지로 끌어다 붙인 것 같 아서 송왕은 그의 해석을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한빙이 죽어버렸으니 마음속에 걸리적거리던 장애물이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 다. 송왕은 그를 묻어 주라 하고 대충 일을 끝내었다. 때는 마침 청릉대가 거의 다 만들어져 가던 무렵이라, 송왕은 신이 나서 그 사실을 하씨에게 알려 주라고 궁녀에게 · 일렀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말끔하게 차려입고 왕 을 따라 함께 청릉대로 가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하씨의 이름은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후대 사람들이 그녀의 성격 에 따라 정부(貞夫)라고 이름붙였는데 20) 그 이름이 비록 정확한 것은 아니 라고 해도 오직 남편만을 생각하며 절개를 지켰던 그녀의 태도를 내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아주 적절한 이름이라 하겠다.®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그녀는 그리 슬퍼하지 않았으며 쓸데 20) 『 敦 煙 變 文 集』, 『韓朋賊』 참조

없는 눈물을 홀리지도 않았다 다만 그녀는 아무 내색도 없이 혼자 슬그 머니 준비롤 하였다 . 먼저 자신의 옷 중에서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골라 옷감을 부식시키는 약물에 담가두었다가 건져 잘 말려서 보관해 두었다 . 그리고 청릉대로 갈 것이니 준비를 하리는 명령이 전해져 온 다음날 아침, 그 옷을 꺼내어 입었다. 얼굴에는 화장을 하고 교태가 흐르는 미소까지 머금은 그녀는 마치 봄날이 이미 다가온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 그 모 습을 본 송왕은 흐뭇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말을 슬쩍 걸어 보았는데 그녀는 뜻밖에도 고분고분하게 대답을 하는 것 이었다. 조금도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구석이 없었다 . 송왕은 그녀의 손 을 잡고 천천히 청릉대의 계단을 올라갔다 . 드디어 누각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자기 나라의 아름다운 산천이 거기 펼쳐져 있었는데 바라보는 기분이 유별났다 . 하늘은 청명하게 개어 있었 고 신록이 아름다운 초여름이었지만 하씨의 눈에는 모든 것이 적막하고 고요하게만 느껴졌다. 무심한 표정으로 눈앞에 펼쳐진 경치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갑자기 사람들 곁을 떠나 누대의 난간이 있는 곳으로 갔다. 좌우에서 시중을 들던 사람들이 그녀의 태도가 이상한 것을 보고 급히 따 라갔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난간을 넘어 아래로 떨어졌 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소리를 지르며 그녀의 옷을 잡았으나 아름 답고 화려하게 보이던 그 옷은 손을 대자마자 곧 조각조각 찢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 높은 누대에서 사람이 떨어져 내리니 바닥에 떨어졌울 때에는 마치 말랑거리는 진흙덩어리와 같았다 . 그런데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조 각조각 찢어졌던 그녀의 옷조각들이 모두 나비로 변하였던 것이다 ® 수천 수만의 나비가 청릉대를 둘러싸고 춤을 추는데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 다 . 2 ” 황홀하게 춤추는 그 나비들 ® 은 거기 서있는 사람들에게 마치 이렇 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21) 『太平 襄 宇記』 卷 19, 引 『授神記 』 , < ( 韓惡 ) 妻 遂 自 投 臺 , 左右擦之, (衣)著手化爲蝶. >

아무리 어둠에 싸여 있다고 해도 다가오는 새벽은 막지 못해요. 청춘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랍니다. ® 물론 이때 그곳에는 음악이 없었다. 그러나 만일 그때 그곳에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면 들판과 강물 산과 하늘이 모두 그 음악에 호응하여 한 줄기 유장하고 웅장한 메아리를 울렸을 것이다. 송왕의 시커먼 얼굴에는 순간적으로 놀라는 빛이 떠올랐다. 무사들이 급히 청릉대 아래로 달려가 그녀의 몸에서 글자가 쓰여진 비단 허리띠를 가져와 송왕에게 바쳤다. 송 왕이 보니 거기에는 <오작가(烏脫歌)>의 가사가 쓰여 있었다. 남산에 까치가 있고 북산에는 그물이 펼쳐져 있네 까치가 높이 날아오르면 그까짓 그물이 무슨 소용 있으리 까치가 쌍쌍이 날아가니 봉황을 즐겁게 해주지 못하고 첩은 일개 서민이라 송왕을 기쁘게 해줄 수가 없네 2) 이것이야말로 그녀의 옷이 변하여 나비가 되어 청룡대 가득히 날아다니 는 것에 대해 만들어진 노래였다. 그 의미가 너무도 확실하여 다시 더 쓸 데없는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송왕에게 보내는 간단한 유서 를 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왕께서는 제가 살아있는 것을 원하시지만 저는 차라리 죽기를 원하옵 니다. 저의 시체를 수습하여 한빙과 합장하여 주시기를 삼가 바라옵니다』 22) 『天中記』 卷 18, 引 『九國志』 • 『玉臺新泳』 참조.

송왕은 그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라 유서가 쓰여진 비단 허리띠를 찢 어 버리고 일부러 그녀의 시체를 한빙과 멀리 떨어진 곳에 묻게 했다. 그 래서 서로 바라보려 하여도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송왕은 그녀의 무덤에 가서 보고 매섭게 말했다 「너희 부부가 그토록 사랑한다면 어디 너희들의 무덤이 서로 합쳐지도 록 해보아라. 그러면 나도 너희들을 더 이상 가로막지 않을 것이니」 송왕은 그 일이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그날 밤이 지나자 한빙과 하씨의 무덤에 각각 두 그루의 거대한 가래나무가 생겨나 열홀만에 구불거리며 서로 엉키기 시작했댜® 뿌리가 서로 엉키더니 나뭇 가지도 서로 위에서 엉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거진 나무 사이에 원앙처 럼 생긴 새들이 살기 시작했다. 암수 한 쌍이 뿌리가 서로 엉킨 나무· 사이 를 오가며 목을 빼어 기대고서 슬프게 우는데 그 울음소리가 사람의 마음· 울 아프게 했다¢ 송나라 사람들은 한빙 부부의 불행한 운명을 가없게 여 겨 서로 붙은 이 나무를 상사수(相思樹)라 불렀다 .23) @ 그리고 원앙처 럼 생긴 그 새들을 한봉조(韓朋鳥 혹은 한빙조 韓惡鳥)라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한빙 부부의 영혼이 변하여 된 새라는 뜻이었다 .24)® 23) 懷神記』 卷 11, <宋康王舍人韓愚 要妻何氏, 美, 康王奪之. 愚怨, 王囚之, 論爲城 旦. 妻密遺惡럼 , 其辭 B ; r 其雨器器, 河水大深, 日 出當心』 槪而王得其 콤 , 以示左右, 左右莫解其意 臣蘇賀對曰 ; r 其雨浮器, 言怒旦思也 ; 河大水深, 言不得往來也 ; 日 出 當心,心有死志也』 低而愚乃自殺 . 其 妻 因腐其衣. 王與之 登it , 妻 遂自投 퓰 ,左右槪 之, 衣不中手而死. 遺書於帶 曰 ; 「王利其生 , 妄利其死, 願以尸骨賜惡合葬』 王怒, 弗 聽 使人埋之, 家相望也. 王曰 ; r 爾夫婦相愛不已, 若能使家合, 則吾弗限也」 宿昔之 間 便有大粹木, 生於二家之端, 句 日 而大盆抱, 屈體相就 , 根交於下, 枝緖於上. 又有 鷲急 雄雄各一, 恒樓樹上, 晟夕不去, 交頭悲 鳴 , 聲音感人. 宋人哀之, 遂號其木曰相 思樹(相思之名, 起於此也. 南人 謂 ; 此貧卽韓愚夫婦之精魂. 今誰陽有韓惡城 , 其歌臨 至今猶存).>(괄호 안은 역자가 보충한 것임) 24) 唐 劉拘 『嶺表錄異 』 卷中, <韓朋鳥者, 南人謂此萬卽韓朋夫婦之精魂, 故以韓氏名 之.>

제 6 장 춘추시대 여러 단편적인 이야기들의 중심사상은 대개 <지음(知音)>이 라는 두 글자로 요약해 볼 수 있다. < 지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이야 기가 가장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 때의 단편 소설집인 『경 세통언( 警 世通 言 )』 제 1 권에 보면 <유백아가 거문고를 들고 지음에게 고 마워하다(兪伯牙持琴謝知音)>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백아와 종자기의 교우관계를 설명하고 있댜 백아의 성은 유이며 초나라 사람이 라고 하는데 그것은 후대 전설에서 그렇게 갖다붙인 것일 뿐 사실 고서에 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백아가 호북성(湖北省) 무한시(武漢市) 구 산(龜山) 기슭의 어느 누각에선가 거문고를 뜯었고 종자기가 거기서 거문 고 소리를 들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북송 때 그곳 에 금대(琴 臺 )를 지어 그들의 우정을 기념했다고 하는데 그곳이 바로 지 금 명승지가 되고 있는 고금대(古琴 臺 )이다.” 그러므로 백아가 초나라 사 람이었다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말이라 하겠다. 백아가 거문고를 잘 뜯었다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 누구나가 다 알고 1) 『中國名勝詞典』 721 쪽 참조

있는 사실이었다. 백아가 거문고를 뜯으면 마차를 끌고 가던 네 마리 말 조차도 하늘을 우러러 목을 늘여빼고 푸푸 숨을 내쉬었는데 그것은 바로 기분이 좋아 하늘을 보고 깔깔거리며 웃는 형상이었댜 2) 백아와 같은 고 향 사람인 호파(親巴) 역시 백아와 마찬가지로 거문고를 잘 뜯었다고 하 는데 호파가 연주를 하면 강물 속에 숨어 있던 한 척 크기의 음어( i至 魚) 까지 물위로 떠올라와 머리를 내밀고 가만히 귀기울여 그 음악을 들었다 고 한댜 3 1 고상하고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는 동물도 감동한다는 그런 뜻 이 아니겠는가.

2) 『淮南子 J, 『說山篇」, <伯牙鼓琴, 開馬仰株 .> 高誘注 ; < 仰頭吹吐, 謂馬笑也.> 3) 『淮南子』, 『說山篇』, <疆巴鼓瑟, 而程魚出聽.> 高誘注 ; <親巴, 楚人也, 善鼓瑟 ; 器 魚喜音, 出頭於水而聽之 .>

백아는 성련(成連) 선생에게서 거문고를 배웠는데 스승은 그에게 이렇 게 말했다. 대가 너에게 거문고 뜯는 법을 가르치기는 했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 (性情)까지는 가르치지 못했다. 방자춘(方子春)은 나의 스승이신데 그 분 은 인간의 감정까지도 모두 가르치실 수 있다. 나와 함께 동해로 가서 그 분을 뵙고 배우도록 하지 않겠느냐?」 백아가 대답했댜 r 스승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련 선생과 백아는 함께 동해로 가서 작은 배를 타고 봉래산 (蓬萊山)으로 갔다. 성련 선생은 백아를 산에 있으라고 하며 말했다. 여기에서 천천히 거문고를 연습하고 있거라. 잠시 후에 내가 다시 데 리러 올 것이니』 그러더니 스승은 삿대로 배를 밀어내어 노를 저으며 떠나버렸다. 스승 이 떠난 지 십여 일이 지났지만 스승은 돌아오지 않았다. 백아는 그곳에 서 혼자 거문고 연습을 하며 외롭게 지냈다. 그리고 연습하는· 틈틈이 고 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섬에는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보이지 않았 고 아득하게 펼쳐진 숲만 눈앞을 가득 채우고, 철썩철썩 밀려오는 파도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백아는 처연해져서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이제야말로 스승께서 정말로 내게 성정(性情)을 불어넣으시려는 것이 로구나!」 그러면서 거문고를 끌어안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노래를 불렀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과 거기서 느껴지는 마음속의 감정을 담아 <수선조(水仙操)> 라는 노래를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음악이 막 완성되었을 때 성련 선생 이 노를 저어 그를 데리러 왔다? 백아는 그때서야 알아챌 수 있었다. 스 승이 말하던 방자춘이란 인물은 스승이 만들어 낸 허구의 인물이었고, 봄 날의 대자연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 이렇게 음악 속에 감정을 불어넣는 훈련을 받은 뒤부터 백아는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만한 연주를 하게 되고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연주가가 될 수 있었다.

4) 蔡邑 『琴操 』 卷上, < 『 水仙操 』 者, 伯牙之所作也. 伯牙學琴於成連先生, 先生曰 ; 「吾 能傳曲, 而不能移情. 吾師有方子春者, 善於琴, 能移人之情, 今在東海上, 子能與我同 事 之平?』 伯牙曰 ; 「夫子有命, 政不敬從』 乃與伯牙供往, 至蓮萊山. 留伯牙曰 ; r 子居 習之, 吾將迎之」 刺船而去, 句時不返. 伯牙延望無人, 但聞海水洞i亂 山林杏冥. 位然 暎曰 ; r 先生移我情矣!』 乃援琴而歌 , 作『水仙之操』. 曲終, 成連刺船迎之而還, 伯牙遂 爲天下妙手.> 원문에는 아래 부분이 없어서 <乃與伯牙供往> 이하는 吳淑의 『事類 賊』 卷 11 注에 인용된 『樂府解題』, r 水仙操」에 근거하여 보충했다.

어느 날 백아가 태산(泰山)으로 놀러갔을 때였다. 갑자기 날씨가 변하 더니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백아는 서둘러 절벽 밑으로 들어가 비 를 피하였다. 거문고를 들고 뒤따라오던 동자가 거문고를 바치니 그는 절 벽 아래의 넓적한 바위 위에 앉아 숙연하게 거문고를 뜯기 시작했다. 순 식간에 소나기가 그치고 한줄기 눈부신 햇살이 소나무와 잣나무 이파리 사이로 내리 쏟아지자 절벽 위에는 황금빛 그림자가 일링이기 시작했다. 백아는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느껴지는 바가 있어 거문고를 뜯는데 딩 딩당당 손가락으로 퉁기는 소리가 마치 비 내리는 소리와 같았다. 그때 종자기라는 젊은 나뭇꾼이 땔감을 짊어지고 가다가 내려놓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음악을 돋던 중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하여 말했다.

r 정말로 비 내리는 소리와 똑같네」 백아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래서 일부러 손가락에 힘 을 주어 거문고의 줄을 세게 또는 약하게 누르고 뜯으며 산이 무너지는 듯한 곡조를 연주하였다 . 그랬더니 이번에도 종자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것이었댜 「산이 무너지는 소리로구나!」 백아는 자기도 모르게 거문고를 밀어놓고 청년에게 손을 내밀며 말 했댜 「정말 훌륭합니다 음악을 듣고 소리를 아는 능력이 대단하군요」 5)

5) 『太平御빴』 卷 10 , 引 『傅子』, <昔者伯牙子游於泰山之陰,逢 暴 雨, 止於巖下. 援琴而 鼓之, 爲港雨之音, 更造崩山之曲. 每奏, 鍾期靴窮其超 . 曰 ; r 善 哉! 子之聽也』>

이것과 비슷하지만 조금씩 내용이 다른 이야기들도 있다. 백아가 태산(泰山)에 가고 싶어 하면서 거문고를 연주할 때, 그 음악을 들은 종자기가 그 연주를 찬미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 정말로 잘하네! 위엄 있게 치솟아 있는 태산을 생각나게 해」 그리고 백아가 유장하게 흐르고 있는 물줄기를 생각하며 연주를 하면 종자기는 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말 잘한다. 꼭 막힘 없이 흐르는 물줄기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 이 두 마디 말이 백아의 마음을 혼들리게 하여 지위가 서로 다른 두 사람은 순식간에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고 심지어는 의형제를 맺기까지 했다고 한다. 나중에 종자기가 죽었을 때, 백아는 거문고(瑠琴)를 들고 그 의 무덤 앞에 와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음악을 한 곡조 연주하였다. 그 리고 눈물을 홀리며 품속에서 칼을 꺼내어 거문고의 줄을 끊어버리더니, 두 손으로 거문고를 들어 제물을 올리는 상석에 내리쳐 부숴버렸다. 결국 거문고는 <산산조각이 나버렀고(玉軫擔殘, 金徽 零 亂 )>6) 백아는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다시는 거문고를 뜯지 않았다고 한다 .7 )

6) 『驚世通言』 第 1 卷 <兪伯牙描琴謝知音> 참조. 7) 『呂氏春秋』, r 本味篇』, <伯牙鼓琴, 鍾子期聽之. 方鼓琴而志在太山, 鍾子期曰 ; 『善

哉平鼓琴! 嶺嶺平若太山」 少選之 r버 , 而志在流水, 鍾子期曰 ; 『善哉平鼓琴! 湯湯平若 流水』 鍾子期死, 伯牙破琴絶弦, 終身不復鼓琴, 以爲世無足復爲鼓琴者.>

제(齊) 환공(桓公) 시대에 영척(寧威)이 환공을 만난 이야기 역시 무척 이나 감동적이다. 영척은 위나라 사람인데 지혜롭고 재간이 있었다. 그는 제 환공이 재능 있는 사람들을 아낀다는 소식을 듣고 환공의 신하가 되고 싶었으나 집안 이 가난하여 환공을 알현할 방법이 없었댜 어쨌든 환공을 만나야 자신의 능력을 알아보게 하든지 말든지 할 것이었는데 그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 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개 장사꾼으로 변장하고 마차에 물건을 싣고서 제 나라에 팔러 갔댜 그리고 제나라 수도의 동쪽 교외 문밖의 허름한 여관 에 머물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소에게 여물을 먹 이느라 마차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곽문(郭門)이 열리더니 환공이 마차를 타고 시종들을 거느리고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횃불을 들고 성밖으로 나와 멀리서 오는 귀빈을 맞이하려는 것이었다. 사 람들의 그림자가 일링이는 불빛 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영척은 똑 똑히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급히 몸을 일으켜 손으로 쇠뿔을 두드리며 비 장하고도 격정적인 노래를 불렀다. 남산의 깨끗한 돌 백석은 찬란한데 살면서 요와 순을 만나지 못해 짧고 얇은 옷으로 겨우 무릎 가리우고 황혼부터 밤까지 소에게 여물을 먹이네 밤은 길고도 길어 언제 아침이 올까 !8)

8) 『楚辭』, 潭駿』 洪興祖補注, <『淮南子』曰 ; r 寧威欲干齊桓公, 窮困無以自達, 乃擊 莊牛角 從而商香歌飯」牛 至『夜三半齊 記—』長載夜其 漫歌漫曰何 ;時 『旦南!山』肝>, 白石爆, 生不遣堯與舜禪. 短布單衣適至

전설에 의하면 영척은 이것과 바슷한 노래를 세 곡이나 불렀다고 하는 데 믿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댜 아마도 후대 사람들이 비슷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 91 당시의 상황으로 추측해 보건대 성밖 으로 손님을 맞으러 나온 제 환공이 어디 그렇게 시간이 남아돌아 일개 낯선 장사꾼의 노래를 세 곡씩이나 듣고 있었을까. 그러나 어쨌든 이 노 래는 단번에 제 환공의 관심을 끌었다. 환공은 곁에 서있던 마부의 손등 울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9) 『呂氏春秋』, r 擧難篇』注, 引 盧(文招)云, <此唱出『三齊記』. 『藝文類緊』又載一篇云 ; r 泣浪之水白石爆, 中有鮮魚長尺半;穀布單衣裁至肝, 淸朝飯牛至夜半. 黃領上坂旦 休息, 吾將舍汝相齊國」 李善注『文選』成公子安『鳴賊』, 又載一篇云 ; r 出東門分岡石 斑, 上有松柏淸旦蘭. 租布衣分編樓, 時不遇分堯舜主. 牛分勢力食細草, 大臣在爾側, 吾當與爾適楚國』 三歌眞原難不可知, 合之亦自成章法.>

r 이상도 하구나. 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제 환공은 시종을 불러 영척을 데려다가 뒤에 있는 빈 마차에 타게 했다 그리고 환공은 손님을 맞이한 뒤 돌아왔다. 시종이 환공에게 물었댜 r 저 마차에 타고 있는 볼품없는 장사꾼올 어떻게 할까요?」 환공은 그에게 새 옷과 새 모자를 내려 주도록 하고 내일 그를 접견하 겠다고 말했다. 이튿날 영척은 환공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환공에게 나라를 잘 다스리 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천하를 잘 다스 리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이야기했다. 환공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 다고 여기고 앞으로 그를 중용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좌우의 신하들이 극 구 반대하며 말했다. 「그는 위나라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위나라는 우리 제나라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위나라로 사람을 보내어 그가 정말로 현자(賢 者)인가를 알아본 뒤 그를 중용하시는 것도 늦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됩 니다」

r 그대들의 말도 옳다」 환공은 그들의 말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r 그대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에 대해 알아보라고 하지만 나는 그에게 어떤 조그만 결점이라도 있을까 봐 걱정이 된다. 남의 작은 결점만을 보 다가 보면 그의 큰 장점을 놓치게 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일국의 군주가 천하의 뛰어난 선비들을 잃게 되는 원인이지. 게다가 어떤 한 인간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거든. 그 사람의 장 점만을 헤아려 그를 임용하면 되는 것이지 무어 그리 많이 알아볼 필요가 있겠느냐?」 10)

10) 『呂氏春秋』, r 擧難篇」, <寧威欲干齊桓公, 窮困無以自過, 於是爲商旅, 將任車以(商) 至齊 暮宿於郭門之外. 桓公鄕迎客, 夜開門, 辭任車, 炯火莊盛,從者莊衆. 寧威飯牛, (居)車下, 望(見)桓公而悲, 擊牛角(而)疾(商)歌. 桓公聞之, 撫其{卜之手 E3 ; r 異哉! (之)歌者, 非常人也」 命後車載之. 桓公及至,從者以請. 桓公賜之衣冠, 將見之, 寧威 見, 說桓公以治境內;明日復見, 說桓公以爲天下. 桓公大稅, 將任之. 群臣爭之曰; r 客 衛人也, 衛之去齊不遠, 君不若使人問之, 而固賢者也, 用之未晩也』 桓公曰 ; r 不 然 問之患其有小惡, 以人之小惡,亡人之大美, 此人主之所以失天下之土也. (凡聽必 有驗 一聽而弗復問, 合其所以也)旦人固難全, 權而用其長者而已矣』 여기에서 <而 已矣> 석자는 『淮南子』, r 道應篇」에 근거해 보충하였다(역자주 ; 괄호 안은 역자가 보 충한 것임. 한편 『淮南子』, r 道應訓』에서는 寧威이 寧越로 되어 있음).

환공은 결국 영척을 제나라의 객경(客卿)으로 임명해 장차 자신을 보좌 할 인재로 등용했다 .Ill

11) 『楚辭』, 「離駿」, <寧威之器歌分, 齊桓聞以該輔 . > 王逸注, <寧威飯牛, 拍角而商歌, 桓公用爲輔佐.>

이것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진(秦) 목공(穆公) 시대에 백리해(百里矣) 부부가 젊어서 헤어진 뒤 늙어서 다시 만나게 된 이야기이다. 백리해는 우(盧)나라 사람이었다. 젊었을 때 결혼을 했으나 집안이 가 난하여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녔다. 그러다가 후에 우나라 임금을 섬기게 되어 대부(大夫)의 관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고 그때 진(晉)나라의 헌공(獻公)이 우나라를 멸망시키고 우나라 임금과

백리해를 포로로 잡아가게 되었댜 헌공은 딸을 진나라의 목공에게 시집 보내려고 하던 참이라 백리해를 진 목공 부인의 신하로 삼아 함께 진나라 로 보냈다 백리해는 자신을 그렇게 모욕적으로 대하는 것을 참을 수 없 어 진나라에서 도망쳐나와 초나라의 완지(苑地)로 갔다. 그러나 운명은 얄 궂기도 해서 백리해는 초나라 사람에게 붙잡히는 몸이 되었다 . 진 목공은 백리해가 재능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돈을 많이 주고 서라도 그를 데려오고 싶어했다. 진나라의 창고에는 금은보화가 가득- 쌓 여 있었기 때문에 돈을 좀 써서라도 인재를 구해내는 것은 별로 힘든 일 이 아니었다 그러나 초나라 사람들이 알게 되면 일부러 버티며 몸값을 올려놓을 것이기 때문에 그를 데려오기가 오히려 쉽지 않을 것이었다. 그 래서 지위가 그리 높지 않은 사람을 초나라에 보내어 말하였다. r 우리 왕비님을 따라온 신하 중에 백리해라는 자가 있는데 듣자 하니 당신들의 나라에 있다고 하더군요. 검은 숫양의 가죽 다섯 장을 드릴 테 니 그롤 데려갈 수 있도록 해주시겠습니까?」 숫양 가죽 다섯 장이라면 왕비의 신하 몸값으로는 그리 낮은 액수가 아 니었기 때문에 초나라 사람은 쾌히 응답했다. 백리해가 이렇게 하여 진나 라로 오게 되었을 때에는 나이가 이미 70 여 세였다. 목공은 친히 그의 죄 를 사하여 주고 그와 함께 국사를 논하였는데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 았다. 그래서 그에게 국정을 담당하게 하고 오고대부(五殺大夫)라 이름하 였다. <오고>란 바로 <다섯 마리의 검은 숫양>이라는 의미이다 .1 2) 얼마 지나지 않아 백리해는 진나라의 재상이 되어 지위가 높고 명망이 드높게 되었다. 어느 날 백리해는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화려한 집안에는 음악소리가 울려퍼졌댜 그러자 왕의 궁성에 고용되어 있는 빨래하는 아 주머니가 자기도 이 음악을 안다고 하며 못난 재주이지만 한번 연주해 보 12) 『史記』, r 秦本紀』, <晉獻公滅虛 • 情, 慮慕君與其大夫百里$. recm 百里$ , 以爲秦 穆公夫人勝於秦 百里矣亡秦, 走苑, 楚鄭人執之. 穆公聞百里矣賢, 欲重賊之. 恐楚人 不與, 乃使人謂楚曰汀吾勝臣百里矣在焉,請以五殺羊皮讀之』 楚人許之. 當時百里 矣年已七十餘, 穆公釋其囚, 與語國 事 . 語三 日 , 穆公大稅, 授之國政, 號曰五殺大夫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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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리해(『賢臣』)

고 싶다고 말했다 백리해는 좌우의 시종들이 하는 말을 듣고 그녀에게 한번 해보도록 하라고 했다. 아주머니는 당상으로 불려왔다. 나이는 60-70 여 세가 되어 보였으나 아직 정정했다 오랜 세월 노동을 해온 탓으로 손 과 발이 큼지막했으며 반백의 머리카락과 검붉은 얼굴에는 고된 세월의 혼적이 새겨져 있었다 . 약간 옆으로 비뚤어진 입술에는 인생이라는 험한 파도를 헤쳐온 의지가 드러나 있었고, 작고 검은 눈동자에는 그녀의 지혜 로움과 청춘 시절부터 지녀온 희망과 사랑의 불꽃이 아직도 타오르고 있 었다. 아주머니는 거문고를 들고 당하에 자리잡고 앉았다. 그리고 거문고 를 자리에 내려놓고 양손으로 비파골( 楚 룝 骨 )을 매만지며 단정하게 앉아 줄을 몇 번 튕기더니 정식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단락의 연 주가 끝나자 거문고 반주에 맞춰 목소리를 높여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백리해여! 이 소리에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 여기저기서 옹성거리는 소리가 들리 며 사람들의 눈길이 노래 부르는 사람에게로 집중되었다. 당상에 앉아 있 던 백리해도 놀라서 몸을 바로 세우고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그 여인을 이미 늙어 흐릿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낭하에서는 몇 명의 무사가 나타나 인상을 쓰며 감히 나으리를 욕되게 하는 이 대담한 미친 여자를 끌고 가려고 하였다. 한바탕 큰 재앙이 닥칠 것 같은 그런 분위기 였다. 그러나 백리해는 손을 내저으며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속 불러보도록 하여라!」 그제서야 분위기가 풀어졌고 아주머니는 다시 거문고 줄을 누르며 소리 높여 노래를 불렀다. 백리해여! 다섯 장의 양가죽이라니 우리가 헤어질 때를 생각해 봐요

대문의 빗장으로 불을 때어 씨암탉을 삶아 드렸지요 一 오늘 이렇게 부귀영鬪 누린다고 해서 떼 잊을 수 있나요? 백리해여! 당시 나를 데리고 올 때 다섯 장의 양가죽에 불과했지요 헤어질 때에는 —암탉을 부 삶귀아한 드몸렸이어 되요니 나를 잊으신 건가요? 백리해여, 백리해! 노모께서는 이미 돌아가셔서 남계에 묻었어요 기왓장 주워다가 묘를 만들고 잡초로 떼를 입혔답니다 기장쌀을 빵고 암탉을 잡았는데 一 이제 부귀한 몸이 되었다고 떼 버리시는 건가요? 진나라의 늙은 승상은 잔치를 벌이던 자리에서 덜덜 떨며 일어났다. 그 의 얼굴은 온통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마치 술취한 사람 같은 걸음걸이로, 비틀거리며 노부인 앞으로 다가갔다. 노부인도 거문고를 밀 어놓고 일어섰다.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다가 손을 잡았다. 수십 년을 헤 어졌던 부부가 이제 다시 만난 것이었다. 백리해는 젊은 시절의 가난했던 생활과 생애의 반을 채웠던 고생, 다섯 장의 양가죽에 해당되었던 몸값, 그런 것들을 떠올리고 슬픔이 북받쳐올라 울기 시작했다. 당상과 당하에 있던 사람들도 그들 부부를 동정하는 마음이 일어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 였다……. 마침내 노부부는 다시 함께 살게 되었다. 젊었을 때와 마찬가 지로 부부가 되어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함께 있게 되었던 것이다 .13) 이제 마지막으로 소사(蕭史)와 농옥(弄玉)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기로

13) 淸 盧文招 『群習捨補』 輯 『風俗通逸文』, <百里矣爲秦相, 堂上作樂,所貨溝婦, 自 伏言展知屋音 . —呼今之, 日 富捕貸牌忘援我琴爲,? 』撫 鉉其而二歌曰者 三; .r 百 里其溪一,曰 初 ; 要r 百我里時矣五,羊 皮五羊,皮 ,臨 當憶別別時時,克 乳熱鷄伏 —雄, 葉今,適 益富貸伏忘鷄我 —爲?今」 日 質其富三損曰我 爲; 『?百』里 ~問!之 ,百 里乃~其!故 母妻已 , 死還,爲 夫葬婦南也縮. >; 壇 以瓦, 復以柴 ; 春黃

하자. 이것은 기쁨으로 가득찬 줄거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앞에 나온 이야기들 을 읽을 때처럼 눈물을 닦을 필요가 없다. 소사 역시 진나라 목공 때의 사람이댜 어떤 사람들은 그가 목공보다 훨씬 이전에 득도하였기 때문에 겉보기에 겨우 이십여 세밖에 안 되어 보 였다고 하기도 한다 .l41 그는 소(節)를 잘 불었는데 그가 소를 불 때면 백 학과 공작들이 뜰에 모여들었다고 한댜 고대의 소는 지금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 지금의 소는 관(管)이 하나로 되어 있으며 가로로 부는 것은 저 (笛), 세로로 부는 것은 소(節), 또는 퉁소(洞蕭)라고 한다. 그러나 고대의 소는 대부분 관이 여러 개였다 . 큰 것은 관이 23 개, 작은 것은 16 개였고 운소( 雲蕭) , 혹은 배소(排蕭)라고 하였는데 소사가 분 것은 바로 이런 종 류의 소였다 이 악기는 소리가 가늘어 맑고도 경쾌한 느낌이 들었는데 봉황의 울음 소리와 흡사했댜 여러 귀한 새들이 바로 이런 소의 소리를 듣기 좋아했기 때문에 공작이나 백학까지 그 소리를 들으면 모여들었던 것이다.

14) 『太平廣記』 卷 4, 引 『神仙傳捨遺』, <荷史, 不知得道年代, 稅如二十許人.>

전설에 의하면 순 임금 때의 음악이었던 <소악(部樂)>은 바로 이런 가 느다란 악기를 위주로 하여 만든 것이기 때문에 <소소(蕭部)>라고도 불 렸다. <소소>를 아홉 번 연주하면 봉황까지 무리를 지어 날아왔다고 한 댜 151 진 목공에게는 농옥이라고 하는 딸이 있었는데 소를 부는 것을 무척 좋아했지만 그다지 잘 불지를 못했다 . 그래서 목공은 소 불기를 좋아하는 딸을 아예 소사에게 시집보내어 그에게서 소를 배우게 해, 그것을 잘 불 고 싶어하는 딸의 소원을 풀어 주려 하였다.

15) 『첩』, 『益稷』, <다둡部』九成, 鳳凰來儀.> 傳, <『部』, 舜樂名, 言世, 見維器之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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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와 농옥 (『神仙』)

두 젊은이는 뜻이 통해 함께 살며 서로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소사~근 매일 농옥에게 소를 부는 것을 가르쳐 봉황이 우는 소리를 내보도록 하였 댜 이렇게 몇 년이 지나자 농옥이 부는 소의 소리도 봉황의 울음 소리와 같게 되었고, 그렇게 되자 정말로 봉황이 날아와 그들의 집 주위에 있는 나무에 깃들게 되었다 진 목공은 그 광경을 보고 뛸 듯이 기뻐하며 그들 을 위해 특별히 봉대 (I g\臺) 를 지어 주고 그곳에 소사와 농옥을 살게 하였 다. 부부는 그곳에서 전심전력으로 소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몇 년이 지나도록 내려올 줄을 몰랐댜 봉황이 그곳으로 모여들었고 몇 해가 지나 자 모여드는 봉황의 숫자는 점점 더 많아졌다 뿐만 아니라 소사와 농옥 의 생김새도 변하였으니 몸에 깃털과 날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뭐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고대의 선인들은 모두 날개가 달렸으며 그 날개로 새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녔기 때문이다 1 6) 소사와 농옥은 소를 불다가 드디어는 득도하게 된 것이었고, 어느 날 새벽, 빛이 희미하 게 밝아올 무렵 구름을 뚫고 하늘로 날아 올라갔댜 CD

16) 『論衡』, r 無形篇』, <圓仙人之形, 體生毛, 脣變爲翼, 行於雲.>

그러자 그들 곁에 있던 수백 마리의 봉황도 함께 날아 올라갔다. 그 밖 에 백학이나 공작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들 역시 소사와 농옥을 따라 하 늘로 올라갔던 것이다. 그래서 늘 떠들썩하던 봉대는 순식간에 쓸쓸함이 감도는 텅빈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훗날 진나라 사람들이 그 봉대 곁 에 봉녀사( 鳳女祠) 를 지어 그들을 기념하였는데, 그 사당에서는 늘 소의 음률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17) 봉대와 봉녀사는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보 계현(寶鷄縣)의 동남쪽에 있었다. 그러나 북위(北魏)의 역도원(鄭道元)이 지은 『수경주(水經注)』에 보면, 이미 <오늘날 봉대는 쓰러져 가고 봉녀사 역시 훼손되어 있다(今 臺傾 祠殿 )>18) 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오늘날 그 유

17) 『列仙傳』 卷上, <沼史者, 秦穆公時人也, 喜吹i.i, 能致白節孔雀於庭. 穆公有女名弄 玉, 好之, 公遂以女妻焉. 日 敎弄玉作鳳鳴. 居數年, 吹似鳳聲, 鳳凰來止其屋. 公爲作 鳳1it,夫婦止其上不下. 數年,一旦皆隨鳳凰飛去.故秦人爲作鳳女祠於雍宮中,時有 닮聲而已.>

적을 찾아보려 하는 것은 힘든 일이 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후세의 전설을 보면 소사와 농옥이 득도하여 승천한 이야기가 더욱 장 려하게 각색되어 있다 농옥은 봉황을 타고, 소사는 용을 타고 올라갔다고 하는 것이다 ) 9) 그리고 또 그들이 도를 배워 선인이 되기 전에 화산(華山) 중봉(中峰)으로 갔다고 한다. 그곳에서도 그들은 봉루(鳳樓)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밤마다 소를 불어 그 소리를 하늘로 올려보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을 때, 그들은 승천하였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중 봉을 옥녀봉( 玉 女峰)이라고 불렀고 그곳에 옥녀사(玉女祠)를 세웠다. 오늘 날에도 옥녀봉에는 옥녀가 세수할 때 썼다고 하~근 세숫대야가 남아 있는 데 그 안에는 맑은 물이 찰랑찰랑 차있어 겨울에도 얼지 않았고 여름에도 썩지 않았다고 한댜 20) 신화전설에 이러한 물증까지 남아 있어 아름다운 빛을 더해 주는 것을 보면 그것들에 대해 더 이상 학술적인 고증을 할 필 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댜® 18) 『水經注』, r i胃水』 참조 19) 『太平廣記』 卷 4, 引 『神仙傳捨遺』, <一旦, 弄玉乘鳳,菌史乘龍, 升天而去.> 20) 『民間文學』 1980 年第 9 期 郭守義 『玉女峰』 참조

제 7 장 전국시대 말기, 한 이인(異人)이 살았댜 그는 귀곡(鬼谷)에 은거하였기 때문에 귀곡 선생(鬼谷先生)이라고 하였는데 진( 晉 ) 평공(平公) 때 사람으 로 당시에 이미 백칠팔십 세의 노인이었다 .1) 그는 천문과 산술에 밝았고 육도삼략(六給 三 略)을 알았으며 신통력이 뛰어났다 게다가 제자백가의 학문을 두루 섭렵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 여러 유명한 인물들이 모두 그의 제자였는데 무(武)에 있어서는 손빈(孫脈)과 방연(龍洞), 문(文)에 있 어서는 소진(蘇秦)과 장의(張儀) 둥이 모두 그에게서 배웠다. 이제 소진 CD 과 장의 ® 가 그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의 이야기를 해보기로 한댜

1) 『太平廣記』 卷 4, 引 『仙傳捨遺』, <鬼谷先生, 晉平公時人, 隱居鬼谷 ; 因爲其號.>

소진과 장의는 친구 사이였댜 서로 뜻이 통하였고 둘 다 모두 새로운 것을 탐구하기 좋아하였다 . 그들은 젊었을 때 집을 떠나 함께 객지로 돌 아다니며 훌륭한 스승을 찾아다녔다. 다니는 중에 돌아가며 머리카락을 잘라 팔거나 일을 하여 돈을 마련해 숙식을 해결하였다. 그러다가 좋은 책을 보게 되면 얼론 베껴 쓰곤 하였는데 『삼분( 三 壤).!l과 『오전(五典).!l, 『팔색(八索).!l과 『구구(九丘)』® 동 성인(聖人)들이 이야기한 것이면 무엇이 든지 다 가슴속에 새겨 두었다. 베껴 쓸 죽간(竹簡)이나 비단이 없으면 먹

으로 자기 손바닥이나 허벅지에 써 두었다가 저녁에 여관으로 돌아와 대 나무를 깎아 죽간을 만들어서 거기에 다시 베껴 쓰곤 하였다. 낮 동안에 길을 가며 먹을 것을 구할 때에도 나무껍질을 벗겨 책가방을 만들어서 세 상의 좋은 책들을 담아 다니곤 하였다 .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길을 가다가 너무도 피곤하여 커다란 나무 밑에 기대어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어떤 이상하게 생긴 노인이 그들을 깨우 는 것이었다 노인은 그들에게 낮에 그렇게 바람부는 데서 잠을 자면 감 기 컬리기 쉽다, 공부를 너무 힘들게 하지 말라고 아주 상냥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노인의 성함과 그가 어디 사람인가를 물었다. 그랬더니 노인은 자기는 방의( 方 外)의 사람이며 성도 이름도 없고 귀곡에 은거하는데 사람 들이 그를 귀곡 선생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자기도 그렇게 이름붙·였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댜 두 사람이 귀곡 선생과 잠시 이야기를 나눠 보았더니 선생의 학문이 상당히 깊고 도술도 뛰어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몹 시도 감탄해 하며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고 말했다. 귀곡 선생은 두 소년이 영특한 것을 보고 기꺼이 그들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 2 1

2) r 捨遺記』 卷 4, <張儀 • 蘇秦二人, 同志好學, 送前 髮 而없之以相羲, 或蒲力 寫홉 , 非 聖人之 言 不讀 遇見負』『典』, 行途無所題記, 以墨 템 掌及股里, 夜迎而 寫 之, 析竹爲 簡 . 二人每假食於路, 刻樹皮編以爲 콥 秩, 以盛天下之良 법 . 常 息大樹之下, 假息而探, 有一先生問二子何勤 苦 也? 儀 • 秦又問之 ; r 子何國人?』 答曰 ; r 吾生於歸谷, 亦曰鬼 谷, 鬼者歸也』 乃敎以干世出俗之辯 . >

귀곡 선생에게는 제자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은거하고 있는 귀곡 은 은거지라기보다 학원 같았다. 소진과 장의는 귀곡 선생을 따라 그곳으 로 가서 십일 년 간울 공부하여 예(禮) • 악(樂) • 사(射) • 어(御) • 서(書) • 수(數) 등 6 예(六藝)와 제자백가에 정통하게 되었다. 귀곡 선생에게는 제 자가 오백여 명이 있었으며 소진과 장의, 그리고 몇 명의 다른 제자들이 첫번째 졸업생이었다 . 그들이 배운 것은 모두 일종의 유세술(遊說術)이었 는데 졸업시험을 보는 그날, 귀곡 선생은 특별한 시험을 보게 하였다. 선 생은 사람들을 시켜 공터에 두 길 깊이의 커다란 구덩이 열 개를 파게 했

댜 그리고 한 사람씩 순서대로 그 안으로 들어가라고 한 다음에 이렇 게 말했댜 r 이제 그 안에서 나름대로 연설을 해보아라. 너희들 중에 나를 울리는 연설을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앞으로 일국의 군주를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이니 장차 그 군주가 하사하는 토지를 받을 수 있으리라!」 31

3) 『太平御度 』 卷荀 3, 引 『史記 』 , <蘇秦初與張儀供事鬼谷先生, 十一年皆通六藝, 經營 百家之 言 鬼谷先生弟子五百餘人, 爲之十窟,窟深二丈. 先生臼 ; r 有能獨下說窟中使 我泣出者, 則能分人主之地矣』>

소진은 구덩이 안에서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 달변이 이어졌고 가슴을 울리는 말이 계속되니 위에서 듣고 있던 귀곡 선생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줄줄 홀려 옷이 다 젖을 지경이 되었다 소진이 연설을 끝내자 이번에는 장의가 말하기 시작했다. 장의의 말재간도 뛰어났다. 비록 스승이 모친상 을 당했을 때처럼 통곡하게 만들지는 못했으나 스승은 장의의 연설에 감 동을 받아 마음이 시려져서 몇 방울의 눈물을 홀리기는 하였댜 ® 두 사람 의 성적은 이렇게 조금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모두 무난히 합격하 여 졸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4 ) (5)

4) 『論衡 』 , r 答倭篇』, <蘇秦下說, 鬼谷先生泣下泊樣 ; 張儀不若 . >

이렇게 학업을 마친 소진과 장의는 각국을 돌아다니며 그 나라의 군주 에게 유세를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도대체 어느 나라에 먼저 가는· 것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전국칠옹(戰國七雄) 중에서 가장 강대한 것이 진 나라이니 진나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진나라에 가는 길 울 잘 몰라 가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 그러자 귀곡 선생이 그들에게 실 내화 한짝을 주며 그 신발이 가는 대로 따라가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길 을 떠나게 되자 그들은 스승이 가르쳐 준 대로 신발을 던졌다 . 그랬더니 신발은 개로 변했고 꼬리를 혼들며 북쪽을 향해 걸어가는데 걷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그들은 본래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없었으나 자기도 모 르게 저절로 발이 움직여져 개가 달리는 것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달리다 보니 어느 사이엔가 진나라에 당도하였다. 바로 떠난 그날

도착했던 것이댜 5 1 진나리는 과연 강대한 나라였다 진(秦) 문공(文公) 시대부터 전해지는 신화전설 두 가지만 보더라도 그 위용울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첫번째 전설을 보도록 하자. 진 문공 때, 진창현(陳 倉縣) 에 사는 어떤 사람이 들판에 사냥을 나가 돼지처럼 생긴 들짐승을 잡았다 . 그 동 물의 이름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냥 끌고가 임금에게 바치려 하였다. 그 런데 가는 도중, 어린아이 두 명을 만났는데 그 아이들이 그에게 말하는 것이었댜 r 이 동물의 이름은 위(期)라고 합니다. 땅속에서 죽은 사람의 뇌수를 먹 고 살지요 이놈을 죽이시려거든 손바닥으로 머리통을 후려치면 됩니다」 그러자 위라는 동물이 화를 벌킥 내며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 두 어린놈들은 진보(陳寶)라고 합니다 숫놈올 잡으면 제왕(帝 王) 이 될 수 있고 암놈을 잡으면 패왕(覇王)이 될 수 있어요」 진창현의 그 사람은 그 말을 듣고서 잡고 있던 위를 놓고 두 어린아이 를 잡으러 쫓아갔다. 그러자 그 어린아이들은 얼른 손을 내밀어 두 마리 의 꿩으로 변하여 날개를 펼치더니 냉큼 하늘로 날아가 버려 종적이 묘연 해졌다. 그 중에서 암컷은 진창 북쪽의 산기슭으로 날아가 돌로 변하였는 데 진 문공은 그 돌을 위해 사당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돌로 변한 꿩을 안에다 모셨는데 61 그 모두가 자신이 앞으로 패왕이 되기 위해서였다. ’ 이 것을 보계신(寶鷄神)이라고 했으며 71 지금의 섬서성 보계현(寶鷄縣)이 바 로 거기서 비롯된 지명이다. 두번째 전설은 다음과 같다 진 문공이 장안궁(長安宮)을 수리하면서 5) 『太平御覽』 卷 4, 引 『仙傳捨遺』, <蘇秦張儀學成別去, 先生與一只履, 化爲犬, 北引 二子, 卽日到秦矣.> 6) 『漢學堂菜럼』 輯 『晉太康三年地記』, <秦文公時, 陳倉人!嚴得獸若儀, 不知名, 來以 獻之. 逢二童子, 童子曰 ; 『此名爲嬪, 常在地中食死人腦, 卽欲殺之, 拍推其首』 嬪亦 語曰 ; r 二童子名陳寶 得雄者王, 得難者覇』 陳倉人乃逐二童子, 化爲維. 雄上陳倉北 阪爲石, 秦祠之.> 7) 『史記』, r 秦本紀J 正義, 引 『括地記』, <寶鷄神在陳倉縣東二十里, 故陳倉城中.>

사백 리나 되는 땅을 차지해 그 궁이 종남산(終南山) 기슭에까지 닿게 되 었다 산 위에는 커다란 가래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수백 아름이나 되었 으며 그 나뭇잎이 이루는 그늘은 궁궐의 여러 곳을 가릴 정도였다 . 문공 은 그 나무가 귀찮은 생각이 들어 그것을 베어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며칠을 계속하여 도끼질을 해도 그 나무는 잘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무 를 베려고 할 때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돌이며 모래 같은 것들이 날아와 일꾼들이 도저히 일을 계속해 나갈 수가 없었다 . 그래서 먼 곳으로 도망 가 있다가 날이 밝은 다음 다시 와보면 도끼질했던 자리가 저절로 붙어있 곤 하였댜 아무리 베어도 같은 일이 반복되어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 다 그러던 어느 날, 일꾼 하나가 폭풍우 때문에 발을 다쳐 움직일 수가 없게 되어 그 가래나무 밑에 앉아 밤을 새우게 되었다 . 그런데 한밤중에 귀신이 오더니 나무에게 묻는 것이었다. r 진왕이 매일 사람들을 보내어 너를 베어버리려고 하니 얼마나 고생이 많으니?』 「조금도 고생되지 않아」 나무가 대답했댜 r 그자들이 오면 내가 비바람을 일으켜 쫓아버리는걸 . 고생될 게 뭐 있 겠어?J 귀신이 그 말을 듣고 냉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r 만약에 진왕이 머리를 풀어해친 사람 삼백 명을 보내어 붉은 밧줄로 네 몸을 꽁꽁 묶어 놓고 도끼로 너를 벤다면 네가 견디어 낼 재간이 있을 것 같니?」 그러자 나무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그 는 간밤에 들은 이야기를 문공에게 그대로 전했다. 문공은 그 말대로 시 행을 하였고 나무는 마침내 쓰러지게 되었다. 그리고 쓰러진 나무에서 푸 른 소 한 마리가 뛰쳐나왔는데 사람들이 함께 소리지르며 몰아대자 목숨 울 걸고 달아나 풍수(澄水)로 뛰어들어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문공은 의장대를 이끌고 출행을 할 때 의장대 중의 한 부대롤 골라 머리

를 풀어헤치고 말을 타고서 맨앞에 서서 나아가게 하였는데 그것을 <모 두기(楚頭騎)>라 하였댜 그것을 앞세움은 자신의 군대의 위용을 자랑하 려 함이었다 . 8 1

8) 『古小說釣沈』 輯 『玄中記』, <秦文公造長安宮, 面四百里, 南至終南山, 山有粹樹, 大數百園, 腦宮中, 公惡而伐之, 連日不렘. 天輯大風雨, 飛沙石, 人皆疾走;至夜蕭合. 有一人中風雨,傷怨不能去,留宿.夜間有鬼來問樹,言秦王凶暴相伐,得不困邪?樹 曰 ; r 來卽作風雨擊之, 其奈吾何!」 鬼又曰 ; 『秦王若使三百人, 被頭, 以赤絲統樹伐汝, 得無敗平?』 樹默不應 明 日 , 人上 言 , 秦王依此言伐之. 樹斷, 中有靑牛駿逸, 逐之入 컫水. 秦王因立施頭騎.>

소진과 장의가 진나라에 왔울 때, 진나라는 전국칠웅(戰國七雄) 중 가장 강대한 국가였댜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소진과 장의가 동시에 진나라에 온 것은 아니었댜 소진이 먼저 진나라에 와 유세를 하였으나 임용되지 못 하였고, 이에 조(趙)나라로 간 그는 조나라의 재상이 되어 육국( 六 國)의 상 인(相印)을 걸고 합종(合縱)의 방법으로 진나라에 대항하였다. 한편 장의 는 뜻을 이루지 못해 가난하게 지내다가 조나라로 가 소진에게 의탁하려 하였다. 그러나 소진은 장의를 대청 아래에 앉아 있게 하고 종들이나 먹는 음식을 주게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고의로 그를 약올리고 화나게 하여 그 로 하여금 다른 길을 찾게 하였던 것이다. 장의가 서쪽의 진나라로 가게 되었을 때였다盧 장의는 더 이상 참지 못해 분노에 몸을 떨며 길을 떠났는 데 소진은 몰래 사람을 보내어 장의가 진나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 록 도와 주었고, 또 마차와 돈을 주어 장의가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래서 그는 진왕을 만나고 난 뒤 중용되어 마침내 진나라 의 재상이 되었다. 장의는 소진이 일부러 자기를 박대했으며 또 몰래 뒤에 서 자신을 도왔다는 사실을 늦게서야 알고서 감탄하며 말했댜 ® r 소진의 뜻을 나는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로 그 점이 내가 소진 울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이지」 9 )

9) 『論衡』, r 答候篇」, <蘇秦相趙, 井相六國 張儀貧賤往歸, 蘇秦坐之堂下, 食以{卜妄之 食, 數讓激怒 欲令相秦 儀念恨, 遂西入秦. 蘇秦使人厚送. 其後覺知曰 ; 『此在其術 中, 吾不知也 ; 此吾所不及蘇君者J>

이때부터 장의는 연횡 (連橫) 의 방법으로 진나라를 섬겼으나 소진이 죽 을 때까지 직접적으로 소진에게 대항한 적은 없었다 . 소진이 죽은 후, 육국( 六國 )이 합종의 방법으로 진나라에 대항하려던 국면은 점차 사라져갔고 장의의 연횡이 실시되어 점차 발전해 나갔다. 마 침내 진시황 때에 이르러서는 연횡으로 인한 정치적 우세를 이용하여 육 국에 대해 각개격파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선 한( 韓 )나라를 멸하니 한 나라와 인접해 있던 연( 燕 )나라 역시 퐁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 진나라의 대군이 머지않아 역수( 易水 )를 건너와 연나라의 변경 지역을 위 협할 것이었으므로 연나라 조야는 뒤숭숭했다. 여기에서 바로 연나라 태 자 단( 丹 )이 자객 형가(荊 阿 )를 보내어 진왕을 살해하려 했던 이야기가 전 해지게 된댜 진왕은 바로 진시황을 가리킨다. 당시에는 육국이 완전히 통 일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직은 자신에게 < 시황( 始皇 ) > 이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연나라의 태자 단은 진나라에서 아주 오랫동안 인질 생 활을 하였다고 한댜 진왕이 그에게 오만하고 무례하게 대하였기 때문에 그는 망국의 재앙이 곧 닥쳐오리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분 하고 서러운 마음에 늘 자기 나라로 되돌아가고 싶어했다 . 그러나 수차례 에 걸쳐 진왕에게 완곡하게 부탁해 보았지만 진왕은 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 태자 단이 하도 귀찮게 구니까 진왕은 어려운 문제를 내며 말했다 . 「좋다, 만약에 네가 까마귀의 머리를 하얗게 만들고 말의 머리에 뿔이 돋아나게 할 수만 있다면 너를 돌아가게 해주마J 물론 이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태자 단은 그 말을 듣고 하 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을 하였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태자 단 이 탄식을 하자마자 하늘에서 날아오던 까마귀의 머리가 하얗게 변하였고 또 마굿간에 있던 말의 머리에 뿔이 돋는 것이었다. 진왕은 자기가 한 약 속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를 돌아가게 해주었다 .1 0 ) 이상에서 이야기한 것이 바로 태자 단이 돌아갈 때 진왕이 내었던 문제

10) 『燕丹子』 卷上, <燕太子丹質於秦, 秦王遇之無禮, 不得意, 欲求歸. 秦王不聽 ; 證言 曰 ; 『令鳥頭白, 馬生角乃家許耳』 丹仰天暎, 鳥卽白頭, 馬生角. 秦王不得已而造之.>

의 본래 모양이다. 그런데 후대 사람들이 시험 제목 치고는 그것이 너무 간단하다고 여겨 다시 네 개의 문제를 더하였댜 첫째로는 태양이 다시 한 번 하늘의 꼭대기에 나타나게 할 것, 둘째로는 하늘에서 곡식이 쏟아 져 내리게 해볼 것, 그리고 셋째로는 부엌문에 새겨져 있는 나무 코끼리 에 걸어다닐 수 있는 발이 생겨나게 해볼 것 ,II) ® 마지막 네 번째로는 우 물 위에 있는 도르레가 개울을 건너가게 해볼 것 1 2 ) 동이었다.

11) 『論衡』, r 感虛篇』, <燕太子丹求歸 秦王與之짱臼 ; r 使日再中, 天雨栗, 令鳥頭白, 馬生角, 對 F1 木象生肉足, 乃得歸」> 12) 『風俗通義』 卷 2, <燕太子丹, 天爲雨栗, 鳥白頭,馬生角, 蔚人生害足(이것은 <尉門 木象生肉足>이 되어야 함), 井上株木挑度讀.>

이렇게 어려운 조건들이었지만 천지(天地) 귀신들의 도움으로 ® 태자 단은 그 어려운 문제들을 무난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왕은 또다시 그를 곤경에 빠뜨렸다. 죽 위수(消水)를 건너는 다리 위에 몰래 비밀 장치 를 해두었던 것이다. 태자 단이 다리를 건널 때 그것을 들어올리니 그는 그만 강물 속으로 빠질 지경이 되었댜 그러나 이번에도 하늘은 두 마리 의 교룡울 보내어 그 다리를 지탱하게 해 태자 단이 무사히 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해주었다 .13) 그리하여 한밤중에 성문에 도착하게 되었으나 문은 아직 열리지 않고 꽉 잠겨 있었다. 태자 단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빨리 이 문을 지나가지 않으면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닭우는 소리를 흉내내었다. 그 소리가 정말 닭울음 소리와 꽤나 흡사했던지 두세 번 소리를 내었더니 사방의 닭들이 따라서 울기 시 작하는 것이었다. 성문을 지키던 문지기는 닭울음 소리를 돋고 아침이 온 것으로 착각하고서 눈을 비비며 일어나 문을 열었다. 태자 단은 그 틈을 타서 말을 달려 성문을 벗어났다 . 마침내 진나라를 떠나 자기 나라로 되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14)

13) 『太平御었 卷 934, 引 『博物志』(今本에는 없음), <燕太子丹質於秦, 見造 , 而爲機橋 於溝 將殺之, 校龍奭擧, 機不得發.>

14) 『燕丹子』 卷上, <(丹)夜到關, 關門未開, 丹爲鷄 !B, 衆鷄皆鳴, 遂得逃歸.>

연나라로 돌아온 태자 단은 몰래 장사(壯 士) 들을 불러모아 궁정에 머물 게 하였댜 그렇게 이십여 명을 모았는데, 진왕에게 당한 치욕과 수모를 갚는 그런 어렵고도 중대한 임무를 그들에게 맡길 작정이었다 .15’ 당시 연 나라에는 전광(田光) 선생이라는 처사(處士)가 있었는데 그가 태자 단을 찾아와 말했다.

15) 『史記』, 『燕召公世家」, <燕太子丹陰雅壯士二十人, 使荊阿刺秦王.>

「지금 태자께서 불러모으신 그 문객(門客)들은 모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들뿐입니다. 그 중에서 몇몇 뛰어나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드려 볼까요? 하부(夏扶)는 혈용(血勇)만을 갖춘 사람입니다. 화가 나 면 곧 얼굴이 붉어지지요. 송의(宋意)는 맥용(脈勇)이 있는 사람이라서 화 가 나면 얼굴이 푸르게 변합니다 . 무양(武陽)은 골용(骨勇)만 있는 사람이 라 화가 나면 얼굴색이 하얗게 됩니다. 이렇게 얼굴색이 잘 변하는 사람 들을 데리고 무슨 큰일을 도모하시겠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인물 중에 형가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신용(神勇)을 갖춘 인물로서 아 무리 화가 나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사람이지요. 태자께서 나라의 큰일을 도모하시려거든 그런 인물을 찾으셔야 할 것입니다』 161

16) 『燕丹子』 卷中, <田光曰 ; 『萩觀太子客無可用者. 夏扶血勇之人, 怒而面赤 ; 宋意脈 勇之人, 怒而面靑 ; 武陽骨勇之人, 怒而面白. 光所知荊fiir, 神勇之人, 怒而色不變. 太 子欲圖事, 非此人莫可』>

태자는 그 말을 듣고 무척이나 기뻐하며 전광 선생에게 그 형가라는 인 물을 후한 예를 치르고서라도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전광 선생은 태 부(太傅)인 국무(勒武)와 함께 그를 찾아갔다. 때마침 형가는 술에 취해서 누워 자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형가의 귀에 각각 침을 뱉고 나서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형가는 참에서 깨어나자 귀가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물었다. 「누가 내 귓속에 침을 뱉었소?」 아내가 대답했다.

「태자의 사부와 전 선생이라는 분이 조금 전에 당신을 찾아왔었는데요, 그 사람들이 그런 것이 틀림없어요」 형가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 「맞아, 입에서 나와 귀로 들어간 것(出口入耳)이니까, 그분들이 나를 찾 아온 것은 분명히 뭔가 중요한 일을 의논하고자 했음이 틀림없어」 )71

17) 『金樓子』 1 「雜記篇下」, <燕田光 • 仰武往候荊軒, 阿時飮醉臥, 光等唯其耳中去. 阿 醉覺 問曰 ; r 誰垂吾耳?」 婦 El ; r 太子師傅向來, 是二人垂之』 祠 El ; r 出口入耳, 此必 大事』>

앞에서 전광 선생이 형가를 신용(神勇)이라고 극찬했는데 형가는 도대 체 어떤 인물이었던가. 앞의 이야기를 통해 형가가 좀 총명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다른 이야기들을 보면 그에게는 뭐 그리 특출난 점이 없어 보인다. 예를 들어 보자. 그가 천하를 주유하던 시절 유차(楠次)라는 곳을 지날 때 개섭(蓋攝)이라는 협객과 보검에 대해 평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의 몇 마디 말이 개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 개섭이 화를 내며 그를 노려 보자 겁이 나서 얼른 도망쳐 나와 마차를 타고 유차를 떠났다고 하는 이 야기가 있다. 또 한단(郡郡) 지방을 돌아다닐 때였다. 노구천(魯句錢)이라 는 깡패와 도박을 할 때 숫자를 세며 따지다가 노구천이 화~ 내면서 그 를 욕하자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슬그머니 도망쳐 다시는 노구천을 만나려 고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8)

18) 『史記』, r 刺客列傳』, <荊阿쌉游, 過橘次, 與蓋攝論劍, 蓋攝怒而 目 之, 荊軒出, 盤而 去換次 荊軒游於!l1llilll, 魯句錢與荊阿博, 爭道, 魯句錢怒而比之, 荊阿뻗而逃去. 遂不 復會.>

그러나 전광 선생은 형가의 사람됨을 깊이 믿었다. 그를 진정한 용사라 고 생각했으며 전해지는 그런 이야기들에 현혹되지 않았다. 그래서 형가 룰 또 찾아갔으며 이번에는 형가의 마음을 움직여 그로 하여금 태자를 만 나보게 하였다. 형가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태자는 친히 마차를 몰고 궁 밖으로 나가 그를 영접하였다. 그리고 왼쪽 자리를 형가에게 내주어 앉게 하였다. 형가는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줄을 잡아당겨 올라가 마차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렇게 하여 형가는 태자의 궁에서 유유자적한 생활 을 시작하게 되었댜 어느 초여름날, 형가는 태자와 함께 연못가에 앉아 물위에 떠있는 둥근 연잎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곳에는 자라와 청개구리들이 떼를 지어 놀고 있었는데 형가는 그것을 보고 재미삼아 기왓조각을 주워 던져 그것들을 맞췄다 태자는 얼른 사람을 시켜 쟁반에 금을 담아오라고 하여 형가에게 그것으로 맞춰 보라고 하였다. 형가는 사양하지 않고 그것들을 연못에 던 졌댜 한 쟁반을 다 던지자 태자는 또 한 쟁반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몇 쟁반을 던지고 난 뒤 형가는 웃으며 말했다. 「그만 던지겠습니다. 태자의 황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팔이 아파서 더 이상 던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어느 날엔가는 형가가 태자와 함께 천리마가 끄는 수레를 타고 교외 로 놀러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형가가 무의식 중에 태자에게 말했다. r 천리마의 간이 맛있다고 하던데요」 그러자 태자는 즉시 천리마를 죽여 간을 꺼내어 끓여서 형가에게 먹으 라고 주었댜 태자 단이 형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했던, 도가 지나쳐 보 이는 그 일들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겠다. 어쨌든 태자는 형가와 함 께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었으며 또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 삼 년을 그 렇게 한 뒤에야 191 태자는 진왕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하는 이야기를 형가 에게 하였댜 형가는 태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더니 진나라 장수인 번어기(藥於期)의 목과 연나라 독항(督亢)의 지도만 있으면 그것들을 진왕에게 바친다는 핑 계로 진왕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을 시켜 한 장 그려 오게 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연나라 독항의 지도는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그 19) 『燕丹子』 卷下, <荊祠之燕, 太子 自 御, 虛左, 荊嗣援緩不議, 中坐定. 後 日 (太子)與 阿之東宮, 臨池而親 阿捨瓦投桂(或作龜), 太子令人奉盤金, 阿用抵, 抵盡復進. 阿曰 ; 「非爲太子愛金也, 但뽑痛耳』 後復共乘千里馬, 祠曰 ; 「聞千里馬肝美』 太子卽殺馬進 肝 太子常與祠同案而食, 同床而疑, 三年於斯 . >

러나 번어기 장군의 목이 문제였다 그는 지금 진나라에 죄를 지어 연나 라로 도망와 있는데 진나라 왕은 그의 가족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던 것이 다 그런 상황이었는데 자기의 원수를 갚겠다고 번장군의 목을 내놓으라 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댜 태자 단은 차마 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러자 형가가 번장군을 찾아가 번장군의 목이 있으면 연나라와 번장군의 복수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번어기는 본래 성격이 칼 같고 격렬한 사람 이었기 때문에 형가의 말을 듣자 괜찮은 계획이라고 동의하며 조금도 망 설임이 없이 하늘을 향해 목을 늘이더니 바로 칼을 들어 내려쳤다 . 머리 가 목뒤로 떨어져 내렸는데 둥근 두 눈은 아직도 치켜떠진 채였다. 태자 단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이미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별다론 방법이 없었다. 그는 번어기의 머리를 상자에 담고 또 다른 상자에는 독항의 지도를 담아 형가롤 정(正)으로, 무양(武陽)을 부 (副)로 삼아 그날로 여장을 꾸려 길을 떠나게 했다. 그리고 그 귀중한 것 들을 모두 진나라 왕에게 바치라고 하였댜 20) 한편 형가가 태자를 도와 이렇게 진왕을 죽일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을 때 하늘에도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 한줄기 흰 무지개가 땅에서 솟아올 라 있는 것이 마치 태양을 꿰뚫을 듯한 모습이었다 . 이 광경은 많은 사람 들이 보았을 뿐 아니라 태자 단도 그것을 확실히 목격했다. 사람들은 그 광경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롤 몰랐지만 태자 단은 그것이 진왕을 살해 하고자 하는 자신들의 계획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믿었다 .2 1) ® 형가와 무양은 번어기의 머리와 독항의 지도를 가지고 드디어 출발했 다. 태자 단과 또 그 계획을 알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모두 흰 옷에 흰 모 20) 『燕丹子』 卷下, <阿曰 ; r 今願得將軍之首, 與燕督亢地圖進之, 秦王必喜, 喜必見輕. 軒因左手抱其抽, 右手棋其胸 , 數以負燕之罪, 責以將軍之fJ L, 而燕國見凌 雪 , 將軍積 念之怒除矣』 於期起, 抵腕執刀 B ; r 是於期 日 夜所欲, 而今聞命矣』 於 是 自 !]!lj, 頭塾背 後, 兩目不翼 太子間之, 自篤勅往, 伏於期尸而突, 悲不自勝. 良久, 無奈fiiJ, 遂函盛 21) 於『期論首節,與 燕『督感虛亢篇地』圓, 以<獻荊秦阿,僞 燕武太陽子爲謀副刺 . 秦荊王阿,入 秦白,虹 貫不 擇日 .日> 而發 . >

자를 쓰고 역수로 나와 떠나는 그들을 배웅하며 그 비장한 < 역수가(易水 歌 ) >o 를 불렀다 . 두 사람은 역수를 건너자 마차를 타고 곧장 서쪽으로 달려 마침내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咸陽)에 도착했다. 진왕은 자기가 오랫 동안 기다리던 두 가지 물건을 연나라에서 바치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무 척이나 기뻐하며 함양궁에 성대한 사열대를 마련해 놓고 그들을 접견하였 댜 문무백관이 모두 도열해 있었고 계단 위에는 창을 든 무사 수백 명이 서있었다 형가는 번어기의 머리를, 무양은 지도를 받쳐들고 계단을 따라 대전( 大 殿)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대전에 웅장한 종소리와 북소리가 울려 퍼지며 신하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렀다. r 만세! 만세! 만만세!」 그러자 무양은 순간적으로 겁이 나 다리가 후들거려서 한 걸음도 움직 이지를 못했다. 게다가 얼굴색은 백지장같이 하얗게 변했다 . 진왕이 그 모 습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형가는 고개를 돌려 무양을 노려보더니 얼 른 두어 컬음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r 저자는 북쪽 오랑캐 땅의 야만인입니댜 한 번도 천자(天子)를 뷘 적 이 없기 때문에 저러는 것이오니 폐하께서 널리 헤아리셔서 그가 일을 마 칠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형가, 그대가 독항의 지도를 가져오라!』 진왕이 명령했다. 형가는 무양에게서 지도를 받아 두 손으로 받쳐들고 나아가 진왕에게 바쳤다. 진왕은 천천히 지도를 펼쳐나갔다. 그것은 서너 자쯤 되는 긴 두 루마리였는데 지도를 다 펼치자 그 속에 눈부시게 푸른 빛을 발하는 비수 가 한 자루 감춰져 있었댜 그 칼은 유명한 대장장이인 서부인(徐夫人)이 만든 것으로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왔으며 칼 끝에는 독이 발라져 있었다 그래서 사람의 몸에 살짝 닿아 피를 한방울이라도 홀리게 되면 독이 곧바로 온몸에 퍼져 금방 죽게 되는 그런 것이었다.끄) 형가는 22) 『史記 』 , r 荊阿列傳」, <於是太子予求天下之利 七首, 得趙人徐夫人 七首, 取之百金,

使工以藥粹之, 以試人, 血器樓, 人無不立死者.>

날렵하게 비수를 잡아채어 왼손으로 진왕의 옷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그의 가슴에 비수를 들이대고 그의 죄상을 말했다. 「그대가 연나라를 못살게 군 것이 이미 오래되었고 다른 나라들에 대해 서도 온갖 욕심을 다 부렸다. 더구나 번어기 장군은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온가족을 다 죽였다. 이제 내가 그들 모두를 대신하여 복 수를 하고자 한다. 그대가 오늘 나의 말에 따른다면 살 수 있겠지만 그렇 지 아니하면 죽음밖에 ' 없으리 라」 형가가 옷소매를 잡고 있는 데다가 칼날이 가슴을 향해 내리꽂힐 듯한 상황이라 진왕은 질려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r 오늘 이미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그대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겠지. 그 러나 나는 평생 동안 음악을 사랑했었네. 거문고 한 곡조만 듣고 죽어도 되겠나?」 23)

23) 『燕丹子』 卷下, <(荊祠)西入秦, 因中庶子蒙白曰 ; 「燕太子丹長大王之威, 今奉奧於 期首, 與督亢地圖 願爲北蕃臣妄』 秦王喜, 百官倍位, 陸執數百,見燕使者. 軒奉於期 首, 武陽奉地圖, 鍾鼓井發, 群臣皆呼萬歲. 武陽大恐, 兩足不能相過, 面如死灰色. 秦 王怪之. 祠顧武陽, 前謝曰 ; r 北蕃鹽夷之人, 未見天子, 願陸下少假借之, 使得畢事於 前』 秦王曰 ; r 阿起督亢圖進之』 秦王發岡, 岡窮而七首出. 阿左手抱秦王柚, 右手棋其 胸, 數之曰 ; r 足下負燕 日 久, 貧暴海內, 不知獸足, 於期無罪而夷其族, 阿將(爲)海內 報仇. 從吾計ff l j生, 不從則死』 秦王曰 汀今 日 之事, 從子計耳, 乞聽琴聲而死』>

형가는 진왕을 위협하여 조약을 맺을 작정이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생 각할 시간이 필요했댜 그래서 진왕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진왕은 문형 (文馨)을 불러 대전에 와서 거문고를 한 곡 연주하라고 하였다. 그녀는 백 지장같이 하얀 얼굴을 하고 거문고를 껴안은 채 날렵한 자태로 걸어나와 옥안 곁에 앉아 거문고 줄을 튕기며 이런 노래를 불렀다. 비단으로 만든 얇은 옷쯤이야 한번 잡아당기면 찢어지지요

다섯 자짜리 병풍쯤이야 한번 뛰어넘으면 금방 넘을 수 있답니다 녹로(鹿盧)의 보검은 등뒤에 차면 바로 뽑을 수 있지요 있 l

24) 『廣博物志』 卷 3, 引 『 古琴錄』, <荊阿助秦王, 將刺之. 王曰 ; r 霧人好琴, 願聽一曲就 死』 阿許之. 因命琴女文馨奏曲. 曲 B ; r 羅穀單杉, 可製而絶 ; 三尺居風, 可超而越 ; 鹿盧之劍 可負而拔』 從其言, 遂得脫 . > 여기에서 <三尺居風>은 『 燕丹子』에 <八尺 昇風>으로 되어 있으나 너무 높은 것 같다. 그리고 三尺은 또 너무 낮으므로 五尺이 사실에 가까운 것 같다.

형가는 그녀가 거문고를 뜯으며 부르는 노래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 었지만 진왕은 그 노래를 듣자 그 뜻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형가에게 잡혀 있는 옷깃울 힘껏 뿌리쳤더니 옷이 찢어졌다 . 그리고 얼른 몸을 돌려 뒤쪽에 있던 다섯 자 높이의 병풍을 뛰어넘었다. 이어서 허리 춤에 차고 있던 보검을 등뒤로 돌려 어깨 너머로 칼을 뽑았다. 형가는 진 왕이 도망치는 것을 보고 진왕을 향해 비수를 던졌다. 비수는 아슬아슬하 게 진왕을 피해 구리로 된 기둥을 맞추고 거기 꽂혔다 . 칼이 꽂힌 자리에 서는 불꽃이 튀었댜 진왕은 잽싸게 다가와 형가의 두 팔을 잘랐다. 형가 는 기둥에 기대어 처참하게 미소를 짓더니 힘없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 렀댜 내가 너무 일을 간단하게 여겨 어린아이에게 속았구나! 아깝다. 연나 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나의 일도 성공시키지 못하고 말았으니 ……」 251 이윽고 계단 밑에 있던 무사들이 벌떼처럼 몰려와 칼을 휘둘러 형가는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한편 형가가 진나라로 출발한 후, 태자 단은 흰 무지개가 태양을 뚫고 지나간 그 광경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흰 무지개가 태양을

25) 『燕丹子』 卷下, <輕不解音 ; 秦王從琴聲負劍, 拔之, 於是意抽, 超居風而走. 阿拔七 首摘之, 入銅柱, 火出. 秦王還斷阿兩手, 軒因俺柱而笑, 箕距而篤, 曰 ; r 吾坐輕易, 爲 堅子所敗, 燕國之不報, 我事之不立哉!』>

뚫고 지나가기는 했지만 겨우 반만 지나갔을 뿐, 완전히 뚫고 지나간 것 은 아니었댜 태자는 탄식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도모하려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겠구나!」 그러자 형가가 죽었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는 이렇게 말했다. 「내 일찌감치 알고 있었지 ……」 26) 그 후 두 해가 지나서 태자 단은 피살당하였고 다시 두 해가 지나 연나 라는 진나라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26) 『太平御覽』 卷 14, 引 『列士傳』, <荊阿發後, 太子見虹 貫 日 不徹, 曰 ; r 吾 事 不成矣」 後聞阿死, 事不立, 曰 ; r 吾知之矣』>

제 8 장 진왕이 피살당할 뻔했던 그 일이 일어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는 자 신의 위세와 무력으로 육국을 하나하나 삼켜나갔다. 그리고 천하를 통일 한 후에는 자기 스스로를 <시황(始皇)>이라고 불렀다. 자기로부터 시작 된 황제의 자리가 2 세, 3 세를 지나 천만 세까지 끝없이 이어지라는 그런 의미였다.” 그는 이제 부귀영화와 권력 등 누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사 람은 늙으면 죽게 되어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피살당할 뻔했던 그 순간, 그는 죽음이라는 것을 공포스럽게 느꼈었기 때문에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절감하였고 또 그 중요한 생명을 확실하게 붙잡아 둘 필요가 있 다고 생각했다. 그랬으니 바다에서부터 들려오는 무슨 선산(仙山)이라든 가 선인(仙人)들에 관한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D 그 중에서도 바다에 있다고 전해지던 세 개의 신산(神山), 죽 봉래(蓬 萊) • 영주(溫洲) • 방장(方丈)의 전설은 특히 그를 궁금하게 했다 P 그곳 에 사는 새와 짐승들은 모두 흰 색의 깃털을 가지고 있었으며 궁궐은 황 금과 순은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곳에는 선인들이 살고 있었고 불사약 1) 『史記』, 『秦始皇本紀』 참조.

도 있었댜 전국시대 제나라의 위왕 (威 土 )과 선왕( 宣王 ), 그리고 연나라의 소왕 (昭 王 ) 둥이 모두 사람을 보내어 이 선산을 찾 아보게 하였으나 결국 엔 아무도 찾지 못했댜 ® 전설에 의하면 그들이 보낸 배가 선산에 가까이 다가가려 하면 그 선산은 마치 하늘에 떠있는 구름처럼 저 멀리로 밀려갔 고, 또다시 배를 저어 그곳으로 가면 이번에는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좀더 가까이 가보려고 하면 곧 거센 바람이 불어 와 그 배를 먼 곳으로 밀어내었댜 그러했으므로 그 선산에 정말로 가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그 선산에 한 번 가보았다고 하는· 사람이 보 고 들은 것을 이야기하니 그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져 내려온 것일 뿐 이다 . 21

2) 『史記 』 , 땅 禪홉 』 , < 自 威 • 宣 • 燕 昭, 使 人入 海 求 逢 萊 • 方丈 • 濕 洲. 此 三 神山者, 其 傳在渤海中, 蓋 常 有至者, 諸 仙人及不死之藥 皆 在 焉 . 其 物皮獸 盡 白, 而 黃金 銀 爲 宮 M . 未 至, 望之如 翼 及到 , 三神山反在水下 ; 臨 之 , 風輯引去, 終莫 能至 雲.>

그렇게 아련하고도 신비한 이야기가 진시황의 호가심을 더해 주었다. 때마침 어떤 사람이 오더니 안기생( 安 期 生 )이라는 선인 ® 과 그 선인이 먹 었다고 하는 호박만큼 큰 대추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봉 래산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으며 그가 바다에 나갔을 때 안기생을 직접 본 적이 있다고 하였다 ? 이 이야기를 듣게 되자 진시황은 그렇게 큰 대추 를 먹는 선인이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안기생이 커다란 대추를 먹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널리 전해지고 있었던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당나라 때의 대시인 이백( 李白 )이 그 대추를 칭송하 는 시를 지은 일도 있거니와4 1 (5) 그 대추 때문에 생긴 < 자조( 意菜 ) > 라는 고대의 지명도 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황하의 남쪽 기슭에서 안기생의 그 대추를 하나 주 웠는데 대추가 너무 단단해서 솥에 넣고 삶았더니 사홀이 지나서야 비로

3) 『史記 J , 땅 禪祖 , <( 李 )少君 言 ; r 臣 쌈 游 海 上, 見安期 生 , 安期生食 巨栗大 如瓜. 安 期生仙 者 , 通蓬萊中 , 合 )l l j 見 人, 不 合 則 隱 』 > 李 少 君 은 漢 武帝 때 사람인데 여기에서 진시황 때 사람으로 쓴 것은 진시황 때에 안기생의 전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4) 李白 詩, <我昔 東 海上, 勞山後紫 霞 , 親見安期生 , 食 栗 大如瓜.>

안기생(『神仙』)

소 물렁물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대추 삶는 향기가 얼마나 멀 리까지 퍼져나갔던지 10 리 밖에서도 그 향기를 맡을 수 있었는데, 이 냄 새를 맡자 죽었던 사람도 되살아났으며 중병에 걸려 누워 있던 환자도 자 리를 걷고 일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삶은 대추를 먹고 곧 백일 승천하여 선인이 되었다 . 그래서 후에 그곳은 <자조( 意裂 )>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지금의 산동성 하택현(荷澤縣) 서남쪽® 에 있었다 5 1

5) 『珉嬪記』 卷上, 引 『賈子說林』, <昔有人得安期大掛, 在大河之南, 器三 日 始~\, 香 聞十里,死者生, 病者起. 其人食之, 白 日 上升. 故地名 曰待擬.>

어쨌든 그 안기생이라는 선인은 동해의 해변가에서 발견되었다. ® 그는 본래 약을 파는 노인네였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보통 노인과 다를 바가 없 었지만 일천 년이나 살았다고 하였다 핼 진시황이 동방을 순수할 때 그를 만났는데 시황이 그롤 만나 사홀을 이야기해 본 결과 서로 뜻이 통했다 . 진시황의 허리춤에 가득찬 것은 돈이라, 그는 안기생에게 금은보화를 아 낌없이 주었는데 그것은 모두 합하여 수천만 냥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 나 안기생은 이상한 늙은이였다. 그 많은 금은보화를 별로 달가와하지 않 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울 모조리 부향정(阜鄕 亭 )에 갖다 두었다 그리고 편지 한 통과 홍옥(紅玉) 신발 한 쌍을 진시황에게 보내어 고맙다 는 표시를 하고는 어디론가 홀연히 떠나버렸는데 그 편지에는 단지 이런 말 한 마디만이 쓰여져 있을 뿐이었다 「몇 년이 지난 후 봉래산으로 나를 찾으러 오시오』 61 ®

6) 『列仙傳』 卷上, <安期先生者, 珉瑠阜鄕人也, 賈藥於東海邊, 時人皆言千歲翁. 秦始 皇東游, 請見, 與語三 日 三夜, 賜金盤度數千萬, 皆置去. 留 習 以赤玉 島 一量爲報, 曰 ; r 後數年, 候我於蓬萊山』>

망망대해, 끝없이 아득하게 펼쳐진 바다 그 어디에서 봉래산을 찾는단 말인가? 진시황이 그것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한 가지 느닷없는 사 건이 일어나 그의 관심을 끌었다. 그가 사냥을 하던 궁정의 뜰에는 무고 한 죄인들이 많이 갇혀 있었다. 그 죄인들은 심판을 받기도 전에 그곳에 서 온갖 고통을 당하다가 억울하게 죽어갔는데 아무도 그들의 시체를 거

두어 묻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길가에 여기저기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하늘에서 까마귀처럼 생긴 새가 풀을 물고 와서 죽은 사람의 얼굴을 덮어 주곤 하였는데 그렇게 하면 죽었던 사람이 천천히 다시 살아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살아난 사람이 적지 않았고 그것울 이상하게 여긴 담당자가 그 사실을 진시황에게 보고하였 다. 그리고 그 새가 물고 왔던 풀을 가져다가 보여 주었다. 시황이 그 풀 을 보니 잎은 줄잎(孤葉)처럼 생겼고 길이는 대충 서너 자쯤 되어 보였는 데 아무리 보아도 무슨 풀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북곽(北郭)에 사는· 귀곡 선생에게 물어 보게 하였더니 귀곡 선생이 이렇게 대답했다. r 이 풀은 동해 조주(祖洲) ® 의 불사초입니다. 경전(瓊田)에서 자라기 때 문에 양신지(養神芝)라고도 하지요. 풀 한 포기로 사람 하나를 살릴 수 있습니다」 71

7) 『十洲記 』, <昔秦始皇大苑中, 多任死者橫道, 有鳥如烏狀, 衍此草復死人ffii, 當時皆 起坐而 自 活 有司聞奏 , 始皇 造 使者以問北郭鬼谷先生 . 鬼谷先生云 汀此草 是 東海祖 洲 上 不死之草 , 生瓊田中 , 或名祖神芝, 其葉似甄, 苗范生, 一株可活一人』>

어떤 사람들은 그 풀 한 포기로 천 명의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하기도 하는데 8 1 그것은 너무 황당무계한 이야기인 것 같고 한 포기로 한 사람밖 에 살릴 수 없다고 하는 것이 합당한 것 같다. 그리고 정황으로 미루어 보 건대 이 풀은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린 뒤에는 약효를 잃어버리는 것 같았 다. 진시황은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그 폴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기사회생의 약초라면 그까짓 것, 한 번 쓰고 나면 소용이 없다는 것은 아 무 문제도 아니었다. 그 풀이 자라고 있다는 그곳, 조주를 찾아 사람을 보 내어 한꺼번에 수천 포기를 캐오게 하면 될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을 창고에 넣어 두고 계속하여 사용하면 끝없이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될 것 이니 그것이야말로 장생불사의 비방이 아닐 수 없었다.

8) 『太平廣記』 卷 4 , 引 『仙傳捨遺J, <祖洲不死之藥草, 一株可活千人.>

한편 진시황이 신선들의 방술(方術)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들은 당시 완 거국(苑渠國) 사람들은 멀리 바다를 건너 나주(螺舟)를 타고 진나라에 왔

댜 그 배는 꼭 소라 껍데기처럼 생겼는데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서도 운 행을 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하여도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았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잠수함과 같은 것으로 윤파주(浦波舟)라고도 했다. 완거국 사람 들은 모두 거인들이었는데 키가 대략 열 길이나 되었다고 하니 그들이 탔 던 그 배도 얼마나 컸을지 가히 상상해 볼 만하댜 그들은 새나 짐승의 털을 사용해 옷을 만들어 입었댜 그들은 또 진시황에게 천지개벽 시대의 이야기를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이야기했는데,9) 그런 것으로 보아 그들의 수명 역시 보통 사람보다 상당히 긴 것 같았다. 그들은 또한 그들이 진나 라로 올 때 보았다는 동해 부상도(扶桑島)의 부상수(扶桑樹)에 관해서도 진시황에게 이야기했다. 부상수는 길이가 수천 길이나 되었고 2 천 아름이 나 되었으며 9 천 년에 한 번 열매가 맺힌다고 한댜 게다가 그 열매는 극 히 조금 열리기 때문에 운좋게 그것을 먹게 되는 인간이 있으면 그는 불 로장생할 수 있었고® 선인이 그것을 먹으면 온몸에서 황금빛을 내뿜으며 상제가 시는 하늘의 현궁(玄宮)으로 날아 올라갈 수 있다고 하였댜 10)

9) 『捨遺記』 卷上, <始皇好神仙之 事 , 有苑渠之民, 乘螺舟至. 舟形似螺, 況行海底而水 不沒入, 一名治波舟 其國人長十丈, 編鳥獸之毛以薇形, 始皇與語及天地初開之時, 乃如親諸.> 10) 『十洲記』, <扶桑在碧海之中, 地方萬里. 地多林木,葉皆如桑. 又有桂樹, 長數千丈, 大二千餘園 樹兩兩同根偶生, 更相依荷, 是以名爲扶桑. 仙人食其構, 一體皆作金光 色, 飛騰空玄.> 『金樓子』, r 志怪篇』에는 <飛騰空玄>을 <飛騰元宮>이라고 기록하였 는데 뜻으로 보아 그것이 더 나온 것 같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진시황은 마침내 바다로 사람을 보내어 선인과 불사약을 찾아보기로 결정을 하였댜 그런데 누구를 보내는 것이 가장 적 당할까? 당시 진시황 주위에 머물던 방사(方士)@둘이 적지 않았으니 노 생(盧生) • 선문(淡門) • 한중(韓重) • 서복(徐福) 둥이 바로 그들이었다. 시 황은 궁리끝에 서복을 보내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 진 시황이 남순(南巡)을 떠났을 때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당시 진시황 일행은 상(湘)지방의 형산(衡山)을 구경하러 가던 중이었 다. 그런데 가는 길에 물이 없어 사람도 말도 모두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

되었댜 그때 아무도 그들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었는데 어가(御 忽 )를 따라오던 서복이 조금도 당황해 하지 않고 소매 속에서 옥으로 만든 여의 (如 意 )를 꺼내는 것이었다 . 그것으로 땅바닥을 세 번 두드리니 신기하게도 그 자리에서 맑은 샘물이 홀러나왔다 그 물의 양은 많지 않았지만 진시 황의 목마름은 해결되었고 다른 사람들도 그 물을 조금씩 마셔 목을 축일 수 있었다 후세 사람들이 그곳을 파서 우물을 만들었는데 < 진황정( 秦 皇 井 ) > 이라고 불렀다 11 ) 그런 것으로 보아 서복은 그저 놀고 먹는 그런 시정 잡배는 아니었고 나름대로의 신통력과 법술을 부릴 줄은 알았던 것 같다 . 게다가 서복은 마침 그때 진시황에게 글을 올렀는데 동남동녀( 童 男 童 女)를 거느리고 바다로 나아가 봉래 • 방장 • 영주 등 삼신산을 찾아보고 싶다고 하는 것이었댜 그 계획이 상당히 구체적이었던 것으로 보아 진시 황이 느끼기에 서복이라고 하는 제( 齊 )나라의 이 방사는 꽤나 아는 것이 많은 것 같았다 .1 2) 더구나 그가 스스로 삼신산을 찾으러 가겠다고 하니 그 에게 조주와 부상도를 찾아보라고 해도 뭐 그리 더 힘들 일은 없을 것이 었다

11) 『 廣博物志』 卷 7, 引 『楚地記』, <秦始皇入湘觀衡山, 道此潟tt, 徐福以如意擊地, 淸 水浦沮 後 人就此堅井, 名秦皇井 .> 12) 『史 記 』 , 『秦始皇 本 紀」, <齊人徐市( 福 ) 等 上 習 , 言 海中有三神山, 名曰 迫 萊 • 方丈 • 溫 洲, 仙人居之 . 請得 齋戒, 與童男女求之.>

마침내 진시황은 결정을 내렸다. 서복에게 동남동녀 수천 명을 데리고 거대한 누선(樓船)에 식량과 음료수를 가득 실은 뒤 아득한 바다 저편에 있다고 하는 선인들의 땅을 찾아 떠나게 한 것이다 . 그러나 그는 한 번 떠난 뒤 마치 황학( 黃鶴 )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종적이 묘연해졌댜 1 3 ) ® 수백 년이 지난 후 동해의 단주( 萱 洲)에서 그들의 자손을 만났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의 자손이 이미 수만 호(戶)나 되는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다고 한다 . 그리고 그 중에 어떤 사람은 회계군(會 稽郡)에 와서 장사를 하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므 또 당나라 개원(開元)

13) 『 十 洲 記』 , <始皇於 是 使使者徐 福 發童男女五百人入海 尋 祖洲, 遂不反.> 14) 『史記』, r 秦始 皇 本紀』 正義, 引 『括地志』, < 효 洲在東海中, 秦始皇使徐福將童南女

入海求仙人, 止住此洲,共數萬家. 至今洲上有至會稽市易者.>

연간에 어떤 사람이 등주( 登 州)에서 동쪽으로 배를 타고 열홀이나 걸리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수염이 하얀 노인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서 복이었다고 한다 그는 바다 한가운데의 어느 고도(孤 島 )에 살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수백 명의 주민들이 서복을 아주 공손히 받들어 모시고 있었다. 그 사람은 서복이 주는 검은 환약 몇 알을 얻어먹고서 평생을 앓아오던 병을 단번에 고쳤다고 한댜 151 이런 전설들은 마치 신선들의 섬을 찾는다 고 떠난 뒤 종적이 묘연해진 서복처럼 너무도 흰싱적이어서 믿을 만하지 가 못하다. 그러나 고대 지리서의 기록을 보면 염산현(鹽山縣, 염산현의 고 성은 하북성 염산현 남쪽 40 리 되는 곳에 있음)에 관혜성(~p分城), 혹은 천 동성(千 童 城)이라고 하는 성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서복이 동남동녀를 데 리고 신선들의 섬을 찾아 나섰을 때, 바로 그곳에서 양식을 준비하기 위 하여 배를 정박시키고 그 성을 지어 동남동녀들을 잠시 머물게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천동성, 혹은 관혜성이라고 하는 것인데, 관(~p)이란 관(慣) 이라고 읽으며 아이들 머리에 꽂았던 아각형 (Y 角形)의 머리 장식을 의미 하는 것이다 .161

15) 『太平廣記』 卷 4, 引 『仙傳捨遺 』 , <唐開元中, 有士人患半身柏黑, 求仙方. 至登洲大 海健 掛机隨風, 可行十餘 日 , 近一孤島 , 島上有數百人, 如朝講狀. 須央至岸. 岸側有 婦人洗藥 指中心床坐嚴賢白者曰 ; r( 此)秦始皇時徐福也』 遂等案, 求其醫理, 徐君以 黑藥數丸令食, 食訖, 劉黑汗數升, 其疾乃$.> 16) 『漢唐地理렵妙』 輯, 『顧野王輿地志 』 , <鹽山有卯分城 , 秦始皇遣徐福發童男女千人 至海求蓬萊(仙山), 因築此城橋居童男女, 號J匠分城, 一名千童城.>

한편 바닷가에 인접해 있는 일본의 어느 지역에도 서복의 묘가 지금까 지 남아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정말 당시 신선의 섬을 찾아 떠났던 서복 의 묘인지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그것은 당시 처음으로 중국과 일본 간 의 교류를 담당했던 대표적인 인물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묘인지도 모 룰 일이다. 어쨌든 이렇게라도 남아 있는 유적을 통하여 역사상 서복의 자취를 조금이나마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진시황은 이렇게 멀리까지 신선을 찾아 사람을 보낼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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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차중(『神仙』)

가 없었다 신선이 바로 그의 눈앞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눈이 멀 어 보지 못했을 따름이다. 규주( 婚 州, 지금의 河北 省 懷來 縣)에 왕차중( 王 次仲)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인간 세상에 섞여 사는 선인이었다 . 그 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과는 다른 특출난 행동을 자주 했다. 서당에 공부 하러 다니던 시절, 집이 다른 아이들보다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다 른 아이들보다 서당에 일찍 오는 것이었다. 스숭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 했다. 아마 그 녀석이 집에 돌아가지 않고 근처에 있다가 일찍 오는 것이 라고 여긴 스승은 사람을 시켜 따라가 보게 하였지만 그는 확실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분명했다 . 그리고 그는 매일 학교에 올 때마다 석 자쯤 되 는 나무토막을 들고 왔는데 그것을 방안의 어디에 두는지 다른 학동들이 아무리 뒤져보아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공부가 끝날 때가 되면 다시 그 나무를 들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 그는 일년이면 두세 번은 이런 기이한 행동을 하였는데 사람들은 도무지 그것들을 이해할 수가 없 었다. 그가 자라 17-18 세가 되었을 때, 서법( 書法 )과 문자(文 字 )에 대해 연구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옛날 창힐( 蒼 韻)이 글자를 발명하던 시절에 만들어 졌던 전서체(篠 書 體)를 예서체(隸 書 體)로 바꿨다. 이 예서체는 전서체에 비해 훨씬 간단했기 때문에 관청의 업무가 많아 간단한 글자체가 요구되 었던 진시황 시절에 아주 걸맞는 글자체였다. 진시황은 이 일을 알고서 사신을 보내어 그를 불렀다 . 그러나 세 번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세 번 다 오지 않았다. 아마도 특별한 예우를 갖추어 모셔가는 것이 아니라 그 냥 부르는 것이라서 선인인 왕차중이 느끼기에는 진시황의 태도가 무례하 다고 여겼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결국 진시황을 격노하게 하였고 마침내는 죄인을 가두는 수레를 보내어 그를 잡아 서울로 데려오 게 하였다 . 왕차중을 가둔 수레가 길을 떠나 중간쯤 왔을 때였다. 왕차중 은 갑자기 커다란 새로 변하더니 날개를 펼치고 하늘 높이 날아 올라갔다. 그롤 호송하던 사람은 놀라서 멍하게 서있다가 정신을 차리더니 급히 하 늘을 향해 외치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냥 가버리시면 저는 돌아가서 뭐라고 합니까. 아마 저를 죽 일 것입니댜 신인께서는 저를 가없게 여겨 주십시오」 그러자 새는 그 사람의 말뜻을 알아들은 것처럼 잠시 공중을 맴돌다가 부리로 자기 날개에서 깃털을 두 장 뽑아 던져 주었다. 한 개는 크고 한 개는 작은 것이 둥글게 맴돌며 근처에 있는 두 군데의 산꼭대기로 떨어졌 다. 사신은 그 깃털 두 개를 주워 들고 돌아갔다. 진시황에게 변명할 구실 이 생겼던 것이댜 17) 후에 그 산 중의 하나는 대핵산(大翻山)이라고 불렸 고 그 옆에 있는 작은 산은 소핵산(小翊山)이라고 불렸다. 지금의 하북성 연경현(延慶縣)의 서북쪽에 있으며 옛날에는 규주 18) 에 속해 있었고 합해서 낙핵산(落翊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진시황은 본래 신선의 도를 좋아했 던지라 왕치중이 새로 변하여 날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후회가 되었 다. 눈앞에 있던 신선, 도를 배울 수도 있었던 신선을 자신의 오만함 때문 에 잃고 말았던 것이댜 19) 이러한 진시황의 오만함은 여산(麗山) 신녀(神女)와의 만남에서도 여지 없이 드러나고 있다 .20) 여산(麗山)은 지금의 섬서성 임동현(臨溝縣)의 여 산(驛山)인데 그곳에는 유명한 온천이 있다. 당나라 때의 양귀비가 목욕을 하였다고 하는 화청지(華淸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진시황 시대에는 아직 온천이 없었고 시황의 행궁(行宮)만이 있었다. 시황은 여산 구경을 17) 『太平廣記』 卷 5, 引 『仙傳捨遺』, <次中化爲大鳥, 振翼而飛, 使者驚拜, 曰 ; 「無以復 命, 亦恐見殺, 惟神人問之』 鳥俳値空中, 故歷三ittll, 使者得之以進.> 산의 이름이 大 ittll • 小渤이므로 二渤이 맞으며 위의 三翻은 잘못된 것이다. 18) 멜異記』 卷下, <大翻山 • 小翻山在婚州. 昔有王次中, 年少入學, 而家遠,常先到. 其師怪之, 謂其不歸, 使人候之, 又買歸在其家. 同學者, 常見仲提一小木, 長三尺餘, 至則著屋岡 欲共取之, 輔尋不見,及年弱冠, 變蒼韻舊書, 爲今隸書. 秦始皇遣使征之 不至, 始皇怒, 艦車囚之廷國 . 路次化爲大鳥出車而飛去. 至西山乃落二ittll, 一大一小, 遂名其落處爲大 • 小翻山.> 19) 『太平廣記』 卷 5, 引 『仙傳捨遺』, <始皇素好神仙之道, 聞其(王次中)變化, 顔有梅恨. 今謂謂落岡山, 在幽州界.> 20) 嘉山은 初本에 鄒山이라고 하였는데 『史記』, r 秦本紀」 참조. 혹은 麗山이라고도 하 는데 그것에 관해서는 『水經注』, r 消水』에 인용된 『三秦記』 참조.

가기 위하여 함양에서부터 여산까지 80 리에 달하는 각도(閣道)를 만들었 는데 다리 위로는 사람이, 다리 밑으로는 말과 마차가 달려 그야말로 장 관이었다. 금빛 찬란한 기둥에는 신씨(辛氏)가 지은 『신씨삼진기(辛氏 三 秦 記)』의 한대(漢代) 말기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나타나 있었다. 그 여산 에는 신녀가 하나 살고 있었다 . 그녀는 후세 전설에도 나타나는· 여산노모 澤山老母)®인데 211 본래 진나라의 종주신(宗主神)이었다. 진시황은 신선이 라는 것은 모두가 영원한 청춘울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늙은 여산노모에 대해서 그저 보통 신녀에 불과하겠거니 하고 여겼다. 그 래도 어떤 계기로 인하여 서로 내왕을 하게 되었을 때, 처음에는 그녀를 예의를 갖추어 대하고 함께 장기도 두고 거문고도 듣고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자신은 황제라고 히는 오만한 마음이 생겨 그 위세로 그녀를 무례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21) 淸 兪礎 『小浮梅閑話』, <驛山老母, 亦有其人, 『史記』, 『秦本紀」, <申候言於孝王曰 ; 潛我先, 鄒山之女, 爲戒脣軒妻, 生中 1 꿇, 以親故, 歸周, 保西踊, 西陸以其故和睦』 『漢點, 潭歷志 載張王壽 言 ; r 鄒山女亦爲天子, 在殷周之間』 考鄒山女戒짬軒妻, 正當商周之r,,1 , 意其爲人, 必有非常材藝, 有 r 爲天子』之 事 . 而唐宋以後, 遂以此女爲 仙, 尊曰 r 老母』> 墓山老母와 秦의 관계는 이처럼 밀접하므로 廢山神女 전설은 綴山 老母 전설의 分化로 보아야 한다.

어느 날 신녀를 분노하게 만들어 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가 진시황의 얼 굴에 침을 뱉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댜 진시황이 노하여 화를 내려고 했 지만 그녀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시황은 얼굴에 묻은 침을 옷소 매로 닦아내었지만 침이 묻었던 곳에 부스럼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 것은 광대뼈 아래에 몇 개의 작은 점처럼 생겨났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 라 벌겅게 부어오르고 헐기 시작하더니 다른 곳으로도 번져 나가는 것이 었다. 그래서 목과 귀밑에까지 얼룩덜룩한 반점이 퍼져나가니 가렵기도 하 고 아프기도 하려니와 황제의 체면이 말씀이 아니었다 . 그때서야 진시황은 그것이 신녀를 화나게 만든 대가리는 · 것을 깨닫고 어떻게 하여야 할지 겁 이 덜킥 났다. 그래서 급히 여산에 있는 신녀의 사당으로 달려가 그녀에게

기도를 드리고 사죄를 했댜 그때서야 신녀는 법술을 부려 단단한 바위로 된 지층을 갈라지게 하여 그 틈으로 뜨끈뜨끈한 온천수가 흘러나오게 해 주었다 시황이 그 온천물에 몇 차례 목욕을 하고 나니 얼굴에 났던 부스 럼뿐 아니라 온몸으로 퍼져나가던 부스럼까지 깨끗하게 나았다. 그래서 홋 날 사람들은 그 물에 목욕을 하여 풍습(風濕)과 부스럼을 치료하였다고 한 댜2 1 처음에는 또 이런 풍속도 있었다 죽 목욕을 하기 전에 항상 여산 신 녀에게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올렸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뜨거 운 온천물에 피부가 오히려 헐어 버렸다고 한다 .23) 나중에 와서야 이 온천 물과 다른 보통 온천물이 섞여 적당한 온도가 되었는데 그때서야 신녀에 게 제사를 올리는 복잡한 과정을 생략할 수 있었다고 한댜®

22) 『太平御봤』 卷 71, 引 『辛氏三秦記』, <始皇時作閣道至環山八十里, 人行橋上, 車行 橋下, 金柱見存 西有溫水. 俗云, 始皇與神女戱, 不以禮, 女垂之IJ生祖, 始皇怖謝, 神女爲出溫泉洗除, 後人因洗浴.> 同홉 卷況 7 에 인용된 『쌤明錄』에는 漢 武帝 때 玉 女가 내려와 <함께 바둑을 두며 놀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역시 얼굴에 침을 뱉어 부스럼이 생겼다는 부분이 보인다. 아마도 同-한 傳說의 分化가 아닌가 여겨진다. 23) 『水經注J, 『消水』, 引 『三秦記』, <麗山西北有溫水, 祭ft l j得入, 不祭則爆人肉.>

다른 여러 제왕들도 그렇지만 진시황도 상당한 신성(神性)을 갖추고 있 었다. 여산 신녀와 내왕하였다는 이야기도 그런 신성을 보여 주는 것이지 만 그의 신성을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은 바로 그의 간산편(超山 應)이다® 말하자면 바윗덩어리들을 바다로 밀어넣을 수 있었다는 것인데, 그것에 관해서는 다음 장의 만리장성 쌓는 부분에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진시황이 다리를 만든 이야기를 해보기로 한다. 진시황은 돌로 된 다리를 만들어 동해를 가로지르며 태양이 떠오르는 장관을 보고 싶어했다. 그것은 어쩌면 장생불사를 추구했던 그의 욕망과 도 상당한 관련성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돌다리를 따라 봉래산까지 가서 불사약을 가져오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런데 바다에 다리를 세우려면 돌 이 아주 많아야 했다. 당시 바다의 신이었던 한 신인이 진시황을 도와 주 겠다고 나섰는데 우선 바윗돌을 세워 다리의 기둥을 만들었다. 그런 뒤에

신령스런 채찍을 휘둘러 산에 있는 바윗돌들을 모조리 동해로 굴러오게 하였는데 동작이 느린 돌이 있으면 바윗돌에서 피가 흐를 때까지 가차없 이 채찍을 휘둘렀다 지금의 하남성 양성산(陽城山, 登 封縣 동북쪽)에 있 는 바위들은 모두 붉은 색이며 모두가 곧추서서 동쪽을 향해 굴러가고 있 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 바다의 신이 남긴 자취라고 전해 진댜 후대 전설에는 또 왕은(王部)이라고 하는 바다의 신이 등장하는데 그는 원래 진시황 수하의 신장(神將)이었다. 산을 헐어 바다를 메우는 이 작업 을 하다가 파도에 휩쓸려 생명을 잃었는데, 그의 시체는 절강성(浙江省) 은현(鄧縣)의 은강(鄧江)에까지 밀려가 은강(鄧江) 밑바닥에 영원히 잠들 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은강과 은현이라는 지명은 바로 왕은이리는· 그 장 수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이야기이다 .241 그러나 이것은 모두가 <호 사가들의 이야기>일 뿐인데, 왜냐하면 진시황 이전의 수백 년 전인 춘추 시대에 이미 은읍(鄧邑)이라는 지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24) 明 黃宗羲 『四明山志』 卷 5, 引 『丹山固泳』, <秦皇神將有王郡, 器山塞海活其身, 葬 於水底不損筑, 號作鄧江今見存.> 이것에 근거하면 折江省의 鄧江 • 郡縣이 모두 왕 온에서 비롯된 이름이기 때문에 傳說의 附會임이 분명하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바다의 신은 바위를 굴려 바다로 빠뜨려서 몇 개 의 교각을 세워놓았다. 그리고 다리의 바닥판도 넓게 깔았다. 진시황은 바 다의 신이 베푼 은혜에 감동하여 그를 만나 감사를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바다의 신이 말했다. r 나는 무척이나 못생겼다오. 절대로 나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지 않겠 다고 약속을 하셔야 만나 드리겠소」 진시황은 바다의 신의 요구에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 다. 그리고 준마를 타고 시종들을 거느리고서 새로 만든 돌다리를 달려 동 해로 들어갔다. 30 리를 달려서야 비로소 다리의 끝부분인 험준한 바위가 솟아 있는 듯한 모습의 교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다의 신은 정말 생김 새가 흉칙하고 기괴했다. 마치 물고기와 새의 중간쯤 되는 형태라고나 할

까 . 진시황이 바다의 신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시종 하나가 발가락에 먹물 울 묻혀 바닥에 깔린 비단에 몰래 바다의 신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일부러 그 그림을 그리는 사람 곁에 모여 서서 그를 가려 주고 있었지만 바다의 신은 그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 그리고 그것이 진 시황의 뜻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그 자리에서 화를 벌킥 내며 말했다. r 황제께서는 약속을 어기셨소이다. 빨리 떠나시오!」 251

25) 『太平御빴』 卷 882, 引 『三齊略記』, <(海)神怒曰 ; 「帝負我約, 速去!』>

그러자 갑자기 천지사방이 어두워지면서 바다의 신이 서있던 다리의 교각이 먼저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다. 파도와 함께 사라지는 바다의 신의 음침하고 비웃는 듯한 미소를 얼핏 바라보면서 진시황은 말머리를 돌려 목숨을 걸고 앞을 향해 내달렸댜 말의 앞발이 교량의 바닥에 닿는 순간, 들려진 뒷발의 아래쪽은 벌써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돌덩어리들이 와르르 무너지며 파도에 휩쓸려 내려가는 엄청나게 큰소리, 그리고 바닷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사람과 말의 울음소리 둥이 천지를 진동시켰으니 그야말로 처참하고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그런 광경이었다. 진시황은 마침내 해변가로 올라왔다 .26)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니 새로 만든 다 리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들쑥날쑥한 교각 몇 개만이 아직 바닷속에 서 서 한 줄의 직선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ll) 바다의 신의 모 습을 그리던 화가도 바다에 빠져 죽어버렸다. 그의 시체는 근처 바닷가로 떠내려와 있었는데, 물위에 바로 누워 허연 눈동자를 똑바로 치켜뜨고 참

26) 『古小說釣沈』 輯, 『小說』, <始皇作石橋, 欲過海觀 日 出處 . 時有神人, 能區石下海, 石去不速, 神人輯粧之, 皆流血 , 至今惑赤 . 陽城山上石, 皆起立東傾, 如相隨狀 ; 至今 猶爾 秦皇於海中作石橋, 或云,非人工所建,海神爲之堅柱. 始皇感其惠, 乃敬通於 神, 求與相見 神云 ; 『我形酸, 約莫固我形, 當與帝會」 始皇乃從石橋入海三十里, 與 神人相見 . 左右巧者潛以足畵神形 , 神怒曰 ; r 速去!』 卽轉馬 , 前脚猶立, 後脚隨崩, 借 得 登 岸 . > 업) 『會稽郡故 害 雜 菓』 輯, 夏侯 曾 先 『會稽地志』 , <始皇欲置石橋渡浙江 . 今尙有石柱數 十, 列於江際.> 이것은 <秦始皇石橋渡海親日> 전설의 分化로 보이므로 여기에 함께 서술했다.

담하게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마치 자신의 억울함과 원통함을 호 소하고 있는 것 같았다 . 281

28) 『太平御뤘』 卷 882, 引 『三齊略記』, <脚옮者酒於海死.>

진시황의 신성은 그가 죽은 뒤에 더 잘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 장 기이한 전설은 그가 죽은 뒤 자신의 묘 근처에 시장을 만들어서 죽은 사람과 산 사람들이 모여, 서로 어울려 장사를 하게 했다는 이야기일 것 이다.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암시장(黑市貿易)>이었던 것이다 . 이 시장의 주인은 죽은 자들을 보호하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산 사람들이 죽은 사람 들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장이 섰던 어느 날 저녁, 그곳의 관리인이 진시황에게 급히 달려와 이렇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r 죽은 사람들이 산 사람들을 못살게 굽니다. 방금 산 사람이 시장에 둘 어왔는데 귀신들이 그 사람을 위협해서 말의 등뼈를 부러뜨려 놓았습니 댜 그래서 장이 서자마자 바로 파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후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흐지부지 끝나버리지 않았을까 . 그래서 어떤 일이 닥치기 전에 지레 겁을 먹은 사 람들이 <진시황의 시장에 등뼈 부러진 말이 있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29) 그것은 바로 절대로 당하지 말러는· 그런 의미였다. 이런 황당한 전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전해지게 된 것일까? 아마도 진시황의 무덤에 은으로 만든 누에라든가 금으로 된 기러기, 그리고 기타 이름을 알 수 없는 온갖 진귀한 물건들이 많이 쌓여 있어서 진시황이 시장을 만들었다는 그런 기 이한 <신화>가 생겨난 것 같다우 또한 진시황을 후세 전설의 <염라대왕 (闇羅天子)>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정말 우스꽝스런 이 야기가 아닐 수 없다.

29) 『太平御빴』 卷泣 7, 引 『三秦記』, <秦始皇作地市與生死人交易, 令云, 生人不得敗死 者 物市吏告始皇云 ; 『死者凌生人, 生人走入市門, 斬斷馬背』 故俗云, 秦地市有斷馬.> 30) 『天中記』 卷 16, 引 『郡國志』, <始皇陵有銀蠶金雅, 以多奇物, 故束云秦皇地市.>

제 9 장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 이야기를 하려면 우선 간산편(超山槪)의 유 래에 대하여 서술해 보아야 할 것 갇다. 간산편이라는 것은 근대 민간전설에서야 비로소 나타나는 명칭이다.” 고대에는 구산탁(瞬山錄)이라는 명칭만 있었을 뿐이며 그것도 아주 고대 가 아니라 중세,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오대(五代)시대에 나타나기 시 작한 이름이다. 오대시대 때 범자(范資)가 쓴 『옥당한화(玉堂閑話)』에 수 록된 민간전설 한 토막을 보면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

1) 『民間文學』 l

의춘현(宜春縣, 지금의 江西省) 경내의 종산(鍾山)에 길이가 수십 리에 달하는 협곡이 있었다. 협곡을 흐르는 강은 의춘강(宜春江)이라 하였는데 강물이 맑고 깨끗했으며 너무 깊어서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서 어 떤 어부가 낚시질을 하다가 금으로 된 쇠사슬 같은 것이 걸려 배 위로 끌 어올려 보니, 길이가 수십 길은 되었고 그 끝에는 방울처럼 생긴 종이 하 나 매달려 있었다. 어부가 그 종을 손으로 집어들었더니 엄청나게 큰소리 가 울렸고, 순간 맑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컴컴하게 변했으며 양쪽에 있는

산과 협곡의 강물까지 모두 혼들렀다. 그리고 종산은 순식간에 오백 길쯤 이 무너져 내렸고 어부와 그가 타고 있던 작은 배까지도 모두 무너져 내린 흙과 바위 속에 묻혀 버렸다. 무너져 내린 종산의 한쪽 면은 지금도 도끼 로 깎아내린 듯한 절벽이 되어 있댜 아는 것이 많은 사람들은 그 어부가 낚아올린 종이 바로 진시황이 바윗돌을 움직일 때 사용-했던 구산탁이라고 말한다 ? 후에 와서 명(明)나라 말기 동약우( 董若雨)가 소설 『서유보(西遊 補)』를 지었는데 그 속에 나오는 손오공이 이 구산탁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보인다 .31 그 밖에 다른 곳에서는 이 이야기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2) 『天中記』 卷 7, 引 『玉堂閑話』, <宜春界鍾山, 有峽數十里, 其水卽宜春江也. 回環澄 澈, 深不可測 曾有漁人垂釣, 得一金鎖, 引之數百尺, 而獲一鍾, 又加擇形. 漁人擧之, 有磐如露亂 天四庫 山川 震動, 鍾山一面推崩五百餘丈, 漁人皆院舟落山. 其山推處 如亂 至今存焉 或有識者云, 此卽秦始皇賜山之釋也. > 3) 『西游補』 第 5 回, <行者道 ; r 槪是古人世界, 秦始皇也在襄頭. 前 日 新唐掃地官人, 說 他有個賜山鑄 等我一肥征住了他, 捨這擇來, 抱西天路上千山萬堅, 掃盡旺去, 妖精 也無處藏身, 强盜也無處着落了』>

간산편은 근대에 들어와 생겨난 명칭이긴 하지만 그 연원은 고대에 있 댜 앞장에서 바다의 신이 산 위에 있는 돌을 채찍질하여 바다로 몰고 와 서 그 바윗돌로 바다에 교량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했는데 , 바로 그 이야 기가 간산편 신화의 기원이라고 할 만하다. 또한 어떤 전설에 보면 진시 황이 법술을 부려 바위를 부르면 바위는 그의 부름에 따라 스스로 굴러왔 다고 한다 .41 이런 것 역시 진시황의 간산편 신화와 비슷하다. ° 근대의 동 족 (1 同族) 민간전설에 보면 그들의 민족 영웅인 오면(吳勉) 역시 간산편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산에 길을 만들고 바윗돌을 채찍질하 여 그 바위가 스스로 굴러가게 하였다고 하는데 51 (2) 이 전설 역시 진시황

4) 『太平御覽』 卷 913, 引 『齊地記』, <秦始皇作石橋欲渡海親 日 出處 . 舊說始皇以術召 石, 石自fi.> 5) 楊思民 選編 『個族文學作品選』, r 吳勉』(未刊稿)을 보면 그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 다. <오면이 어려서 다른 사람을 대신해 소를 먹이는데 神粧이 있어 산을 내리쳐서 길 울 열게 만들었다. 후에 官軍과 싸우게 되었을 때 돌을 때려 바윗돌로 만들었는데 사 람들은 그것을 지금도 吳勉岩이라고 부른다.>

신화의 영향을 받아 전해져 내려오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 어쨌든 진시 황의 간산편 신화는 그 기원이 상당히 오래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면 진시황이 산을 옮긴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고대 신화에서는 동해에 돌다리를 만들어 태양이 떠오르는 광경을 보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지만, 근대 신화에서는 북방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한 만리장성을 쌓 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만리장성 이야기를 하자면 맹강녀(孟姜女) 의 전설을 우선 서술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시황은 노오(嚴放)를 동해로 보내어 신선을 찾아보라고 했는데 그가 떠난 지 반년쯤이 되어 선서(仙 書 ) 한 권을 들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 책 에 쓰여진 것은 온통 꼬불꼬불한 과두문자(銅斜文字)라서 만조백관 그 누 구도 그 내용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 모두들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본 결 과 겨우 디음과 같은 다섯 글자만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진나리를 망하게 할 자는 호이다(亡秦者則胡 )6}

6) 『史記』, r 秦始皇本紀』, <燕人盧生使入海還, 以鬼神事, 因奏錄圖롭曰 ; r 亡秦者胡 也』>

진시황은 깜짝놀랐다. 멜라고? 진나라의 이 강산을 북방의 오랑캐(胡)에게 넘겨주게 된다고?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 마땅히 방비를 잘해야 할 일이로다』 그러나 가없은 진시황은 그 내용을 잘못 이해했다. 선서에 쓰여져 있던 <호(胡)>라는 글자는 북방의 오랑캐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아들인 <호해 (胡亥)>였던 것이다 . 호해가 황제가 된 후 황음무도하여 멀쩡한 나라를 잃게 되고 마는데 이것은 지금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각설하고 진시황은 북방 호인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명령을 내려 팔 십만 명의 민간인 남자들을 뽑아 북방으로 보내고는 만리장성을 쌓게 했

댜 ® 그런데 장성을 쌓자면 수많은 돌이 필요했댜 진시황은 어디서 가져 온 것인지 모르지만 간산편을 들고와 허공에 대고 휘둘렀다. 그러면 천하 의 바윗돌들이 스스로 굴러와 장성 아래쪽에 모여드는 것이었댜 71 바위들 이 생겼으니 이제 그것들을 옮겨다가 성을 쌓으면 될 일이었다.

7) 鍾敬文 엽덟倍民族的孟姜女傳說及其他』(『北京大學硏究所國學門周刊 』 1 卷 7 期), <那時秦始皇要就北邊山陵的間11,(jt,加以坦補,便成了一道鹽固的長城,用以防限胡人 的南下. 秦始皇有一道寶¥11!, 給他一打, 天下的石頭都歸菓到那兒去供坦塞之用.>

그런데 당시 이런 이야기가 떠돌았다. 장성을 견고하게 쌓기 위해서는 산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5) 성 쌓는 일을 감독하는 관리들 모두가 그렇게 말했댜 성을 1 리 쌓을 때마다 살아있는 사람 한 명을 그 속에 집 어넣어 쌓아야 했으니 만 리를 쌓으려면 1 만 명이 필요했다 . 이런 소식이 퍼져나가자 모두들 자기가 뽑혀 장성의 밑에 묻힐지도 모 른다는 생각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걱정을 하였다. 때문에 곳곳의 민심이 흉흉해졌고 불안한 분위기가 떠돌았다. 관리들도 이런 모습을 보자 슬그 머니 걱정이 되었다. 바로 그럴 즈음 어디서부터 전해져 온 것인지 이런 노래가 떠돌았다. 소주(蘇州)에 만희량(萬喜良)이 사는데 그 사람 한 명이면 만 명의 목숨과 같네 81@

8) 唐 石賞休 詩, <秦之無道分四海柏, 築長城分速北胡 . 築人築土一萬里, 祀梁貞婦暗 鳴鳴.> 路工 編 『孟姜女萬里尋夫渠』, r 孟姜女尋夫』, <萬里長城工夫大, 要傷百姓一 萬人. 好臣誤國害百姓, 君王面前來奏聞 ; 『蘇州有個萬喜良, 一人好抵一萬人』>

이 동요는 불리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마치 날개가 달린 것처럼 퍼 져나갔다. 한 사람에게서 열 사람으로, 열 사람에게서 백 사람으로 퍼져 나가니 곳곳에 이 노래가 유행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관리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소주의 만희 량이라는 인물이 정말 그런 효용이 있다면 아예 소주로 가서 그를 잡아다

가 성 밑에 묻으면 될 일이었다 . 1 만 명을 잡아오는 것에 비하면 골치 아 픈 일도 훨씬 줄어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논 끝에 사람을 보 내어 만회량을 잡아오기로 결정을 하였댜 그 동요는 어쩌면 그저 사람들이 지어낸 것에 불과했는지도 모르는데 하필이면 소주에 문약한 선비인 만희량이라는 인물이 정말로 살고 있었 다. 관리들이 보낸 사신이 소주에 도착하기 전에 동요가 먼저 소주에 유 행하기 시작했댜 만희량은 그 노래를 돋고 간담이 서늘해져 급히 간단한 짐을 꾸려 괴나리 봇짐을 만들어서 등에 둘러메고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한 뒤 먼 곳으로 도망쳤다 . 길바닥에서 노숙을 하며 떠돌아다닌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송강부(松江府)에 도착했을 때 길가던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는데 <한 사람으로 만 사람의 목숨 을 대신할 수 있다던> 만희량이라는 사람을 잡지 못하게 되자 다른 인부 들 모두가 재앙이 자기에게 닥칠까 봐 도망가버렸다~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니 일할 인부들이 모자라기 때문에 곳곳에서 사람들을 끌어간다 는 이야기였다. 만희량이 이런 말을 들으며 겁에 질려 있는데 마침 저편 큰 길에 먼지 가 일어니는 것이 꼭 말을 탄 관리들이 사람들을 잡아가는 것 같았다. 만 희량은 겁이 덜킥 나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런데 마침 길가 에 집이 한 채 눈에 띄었다. 그는 야트막한 담장을 넘어 그 집의 뜰로 들 어갔다 . 그 집은 맹원외(孟員外)의 집이었다. 맹원외 부부는 나이가 오십이 되 었지만 아들도 딸도 없어 맹강녀라는 양녀를 키우고 있었는데 부부가 모 두 그녀를 무척이나 아꼈다. 맹강녀가 원외의 집에서 자라게 된 것에는 참으로 기이한 내력이 있 었댜 어느 해 맹씨 집의 맹홍(孟興)이 정원 모퉁이에 호박을 한 그루 십었다. 호박 덩쿨은 무럭무럭 자라 담장을 넘어 뻗어 나가더니 옆집의 강(姜)씨

할머니 집 지붕에까지 올라가서 커다란 호박 하나를 맺었다 . 맹홍은 그 호박이 자기가 기른 것이기 때문에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강씨 할머 니는 자기 집 지붕 위에 열린 것이니까 자기 것이라고 우겼다. 두 사람은 호박 때문에 한나절을 싸우다가 마침내 반으로 똑같이 잘라 나누어 갖자 고 합의를 하였다. 그래서 맹홍이 칼을 가지고 호박을 자르려고 하는 찰 나, 호박 속에서 느닷없이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 맹홍과 강씨 할머니는 깜짝 놀랐지만 맹홍은 남자인지라 대담하여 조심조심 그것을 잘라 보았 다. 그랬더니 그 속에는 하얗고 통통하며 이목구비가 수려한 여자아이가 들어있는 것이었다 ? 두 사람은 이번에는 서로 아기를 갖겠다고 싸웠다. 그러나 아기는 호박처럼 나누어 가질 수가 없었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 었댜 마침 맹원외에게 아이가 없는 터인지라 맹원외는 그 여자아이를 양 녀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강씨 할머니는 맹씨 집에 살게 되었는데 늙어 죽을 때까지 맹원외가 먹고 입을 것을 대주었다 . 그리고 여자아이는 맹씨 와 강씨 집 사이에서 태어났가 때문에 맹강녀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91@ 이 제 그 아이가 자라 17-18 세의 총명하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만희량은 맹씨 집 뜰의 연못가 종려나무 밑에 잠시 숨어 있다가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화원을 떠나 다시 길을 가려고 하였다. 그때 마침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설명할 것도 없이 맹강녀였 는데 손에 하얀 부채를 들고 연못 저쪽에서 걸어오며 나비를 좇고 있었다. 노란 나비 한 쌍이 공중에서 춤을 추며 연못을 따라 하늘하늘 날아가는데 숨었다가 다시 나타나곤 하였다. 그녀는 땅바닥에 넘어지기도 하면서 계속 나비를 따라오다가 잠시의 부주의로 발을 잘못 딛어 그만 연못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니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만희량이 급히 달려나 와 그녀의 두 손을 잡고 끌어당겨 마침내 연못가 풀받 위로 그녀를 건져내 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몸은 진흙탕 물에 거의 다 젖어 있었다.® 맹원외는 딸의 비명 소리를 듣고 부인과 하녀를 데리고 급히 달려나왔 9) 『孟姜女萬里尋夫集』, 『孟姜仙女寶卷』 참조 *

댜 그런데 자기 딸이 어떤 낯선 청년과 얼굴을 마주한 채 연못가 풀밭 위 에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 게다가 그 청년은 자기 딸의 두 손을 꼭 붙잡고 있고 자기 딸은 몸이 반쯤 젖은 채로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으니 그 광경이 보기예 영 거슬렀다. 맹원외가 자초지종을 묻고 나서야 비로소 그 청년의 이름이 만희량이며 인부를 끌어가는 관리를 피해 자기 집으로 들어왔다가 우연히 물에 빠진 자기 딸을 구하게 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딸을 구해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예로부터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했거늘 이제 그 지켜야 할 예절을 어기고 말았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 을 것인가? 상황으로 보건대 도망 중인 이 청년을 사위로 맞아들여야 문 제가 해결될 것 같았다.® 맹원의는 이런 자신의 마음을 만희량과 딸에게 설명하였다. 서로 나이 가 비슷했던 두 젊은이는 그 우연하고 이상한 만남 중에 이미 서로에게 마음이 기울어 애모하는 정이 싹트고 있던 터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 저녁, 맹원외는 뜰에 식장을 차려놓게 하여 두 젊은이를 결 혼시켰다 .10)

10) 『孟姜女萬里尋夫集』, 『繪圖孟姜女萬里尋夫全傳』 第 4 뎀, <朴周蝶落水現白玉, 見喜 良完節系紅絲.>

그런데 결혼한 지 사흘도 되지 않아 만희량이 맹씨 집에 도망와 있다는· 소식이 퍼져나가게 되었다 . 그날 새벽, 신혼의 부부가 막 자리에서 일어났 을 때였다. 맹강녀가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데 호랑이같이 무 서운 관리가 갑자기 나타났다. 그는 손에 밧줄과 수갑을 들고 있었는데 도망친 죄수 만희량을 잡으러 왔다는 것이었다 . 관리들은 이리저리 그를 찾아다니다가 마침내는 장작을 쌓아둔 광에서 장작더미가 혼들리는 것을 보고 그를 찾아내었다. 그리고는 앞뒤 가릴 것 없이 무조건 그를 줄로 꽁 꽁 묶고 쇠사슬로 엮어 마치 고기만두처럼 만들어 버렸다. 만희량은 신혼 의 아내와 비통한 이별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갤 그는 이번에 자기가 잡혀 가면 아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많으니 아까운 청춘을 낭비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찾아 다시 결혼을 하라고 말했다. 맹강녀는 백성에 대 한 진시황의 무지막지한 폭정을 목도하였다. 사랑하는 남편이 아무 죄도 없이 잡혀가다니, 그야말로 가슴이 찢어지고 간장이 녹아내릴 듯하여 눈 물이 앞을 가렸다. 눈깜짝할 사이에 만희량이 잡혀간 지 반년이나 지났지만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침내 시월 초, 북풍이 휘몰아쳐 강가의 갈대꽃이 이리 저리 홑날리고 사람들도 추위를 느끼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어느 날 저녁, 맹강녀가 꿈을 꾸는데 꿈속에 남편이 밖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며 이렇 게 외치는 것이었댜 「하느님, 추워서 얼어죽겠습니다!」 꿈에서 깨어나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 그녀는 남편을 위해 일 찌감치 두터운 겨울 옷을 준비해 두었고 자기가 직접 그것을 가져다 주 려 하였다.@ 그러나 원외 부부가 몇 번이고 말리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애걸하였 댜 원외 부부는 딸의 뜻이 굳은 것을 보고 더 이상 막을 수가 없어 허락 울 하고 말았다. 맹강녀는 남편에게 줄 겨울옷과 갈아입을 옷 몇 벌만으로 간단한 행장 을 꾸려 우산 하나를 어깨에 둘러메고 부모님께 작별인사를 하고서 집을 떠났다.11)

11) 『孟姜女萬里尋夫集』 <民間歌曲> 引 『敦煙曲子詞 集 』, r im練子」, <孟姜女, 祀良妻, 一去炯(燕)山更不歸. 造得寒衣無人送, 不免 自 家送征衣 . >

한참을 컬어가던 어느 날, 그녀는 넓은 강가에 다다르게 되었다. 눈앞에 는 망망한 강물만 펼쳐져 있을 뿐, 다리도 없고 타고 건널 만한 배도 없었 다. 어떻게 이 강을 건너간단 말인가? 그녀는 강가에 앉아 상심의 눈물을 홀리며 손바닥으로 강가를 두드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가 한 번 두 드릴 때마다 강물이 한 뻥씩 낮아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낮아져서 마침내 는 깨끗하게 말라버려 그녀는 강바닥을 가로질러 저편으로 건너갈 수 있

었댜 그녀가 가는 길에는 이런 어려움이 셀 수도 없이 많이 닥쳤지만 그 때마다 기적이 일어나 무사히 넘어갈 수 있게 되곤 하였다. 그렇게 길을 가다가 마침내 장성을 쌓고 있는 곳에까지 오게 되었다. 남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맹강녀의 가슴은 걱정과 불안 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게다가 장성을 쌓는 곳이 이렇게 넓으니 도대체 어디 가서 남편을 찾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 길가 들판에서 갑자기 까마귀 한 쌍이 날아오더니 맹강녀의 곁을 맴돌면 서 끊임없이 <깍깍깍> 울어대는 것이었다. 맹강녀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말했다 . r 까마귀야, 나를 위해 길을 인도해 주겠다는 말이니?」 까마귀 한 쌍은 마치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깍깍> 하고 울더 니 앞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 맹강녀는 까마귀들을 따라 대충 이삼십 리 쯤 걸어갔댜 날은 저물어 가는데 갑자기 숲 속에서 까마귀때가 몰려나 오더니 자기를 위해서 길을 인도해 주던 그 작은 까마귀 한 쌍을 둘러싸 는 것이었댜 맹강녀는 고개를 들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마음속으로 불 안한 생각이 들었다. 「안 되겠어. 아무래도 작은 까마귀들이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아」 그러나 작은 두 마리의 까마귀는 많은 까마귀 무리 속에서 한동안을 몸 부림치다가 마침내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두 마리의 까마귀는 비스듬히 화살처럼 빠져나와 근처의 화표목(華表木) 위로 내려왔다. 다른 까마귀들 은 공중에서 시끄럽게 깍깍거리다가 각자 홑어져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화표목 위에 앉아 있던 작은 까마귀들은 다시 맹강녀를 이끌고 날아가 어 느 작은 마을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 이르게 된 순간 까마귀들은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12) 맹강녀는 마울의 동쪽에 있는 어느 집의 문을 두드리며 하룻밤 머물고 12) 『孟姜女萬里尋夫菓』, r 繪固孟姜女萬里尋夫全傳』 第 15 回, <突長城i射갑見骨, 篤趙 高進京面君 . >

싶다고 청하였다. 그 집에서는 노인 한 분이 나왔는데 스스로를 새옹(塞 翁 )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 변경 지방에 여러 해 동안 살고 있었으며 바로 멀지 않은 곳에 장성이 있다고 말하~근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장성을 쌓느 라고 병들어 죽은 인부가 그 얼마나 많은지 모르며 또 죽은 사람들은 모 두 장성 아래에 묻혔다고 말해 주었다. 맹강녀는 노인의 말을 들으며 가 슴이 철렁 내려앉아 하룻밤을 묵은 뒤 노인께 작별인시를- 하고 바로 길을 떠났다 13 1 마침내 얼마 지나지 않아 장성 아래쪽에 도착했다. 장성은 과연 웅대하 고 높이 솟아있었으며 끝없이 이어진 산 위에 마치 한 마리의 용맹스러운 용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부분도 있었는데 돌을 들 어나르고 벽돌을 옮기는 인부들이 성벽의 아래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게다가 영차영차 하는 소리, 고함치는 소리, 욕하는 소리 둥이 한 데 섞여 온통 시끌벅적하였다 .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옷은 하나같이 남루하였으며 장작개비처럼 바싹 말랐고 수염을 못 깎은 부황든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하여 보는 사람을 처연하게 만들었다. 맹강녀가 인부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남편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리 해 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공사장 감독을 찾아가 물으니 그는 이렇 게 대답했댜 「만희량이라는 사람을 찾는다고? 그런 사람이 있기는 했소 . 소주에서 도망친 죄수였지. 본래는 잡아온 즉시 처형하여 장성 밑에 묻으려 하였으 나, 이미 죽어 장성 밑에 묻힌 자가 일만 명이 넘어 죽일 필요가 없었소 . 그래서 여기서 계속 일을 하게 하였는데 …… 그 사람이 몸이 약했던 탓인 지, 잘 먹지를 못하더니 몇 달 전에 중병을 얻어 가없지만 장성 밑에 묻어 버렀소이다』 14) 맹강녀는 감독의 말을 돋는 순간 하늘이 노래지면서 정신을 잃고 쓰러 13) 『孟姜女萬里尋夫渠』 , 『孟姜女笑長城(宣講)』 참조 . 14) 『水經注』, r 河水』 引 楊泉 『物理論』, <秦始皇使蒙括築長城, 死者相屬. 民歌曰 ; r 生 男愼勿擧 生女晴用飾 ; 不見長城下 , 尸核相支柱』>

져 버렸다 사람들이 돌보아 준 덕분에 그녀는 잠시 후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펼 쳐진 장성이 쇤덩어리로 만들어진 것처럼 차디차고 무정하게 보였고 남편 의 시체가 그 밑에 묻혀 있어 영원히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생각 울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렀댜 게다가 숱하게 많은 청년들이 모두 자기 남 편과 같은 운명이 되어 , 천지간에 셀 수 없이 많은 과부와 고아들이 돌아 오지 못하는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어리석게도 끝없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현재 이곳에서 돌을 나르거나 벽돌을 운반하 는 남자들 역시 지금은 그것들을 나르며 콧구멍에 한 줄기 숨을 내쉬고 있지만 그들 앞에 놓인 것 역시 죽음뿐이라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시려와 자기도 모르게 방성대곡을 하게 되었다 ? 울수록 가슴이 더 아파져서 눈 물이 샘처럼 계속 솟아나왔댜 ® 그녀의 눈물에 천지가 슬픔에 잠긴 돗 안 개까지 엷게 깔렸으며 해와 달도 빛을 잃었고 사방에서는 누런 먼지 바람 만 일었댜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는 사람은 누구나 콧등이 시큰해져 함께 눈물을 홀리지 않을 수 없었다 …… .® 맹강녀는 그렇게 장성에서 자기의 남편을 위하여 눈물을 홀렸다. 얼마 나 울었는지 알 수가 없을 때, 갑자기 <와르르르! > 하는 소리가 들려왔 댜 ® 위풍당당하게 서있던 장성이 40 리쯤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1 5 )@ 그리 고 먼지가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나자 무수하게 많은 백골들이 무너진 장성 아래의 진흙과 돌더미 사이에서 드러났다@ 맹강녀는 눈물을 씻고 그 시 체들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살폈다. 그러나 모두가 서로 비슷비슷해서 어 느 것이 남편의 시체인지 알 수가 없었다 .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이빨 로 힘껏 물어뜯어 핏방울을 백골 위에 떨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r 이것이 만약 남편의 백골이라면 피가 뻣속으로 스며들 것이고 남편의 것이 아니라면 피가 사방으로 퍼지리라」 16)@ 15) 顧韻剛編 『 孟姜女故 事 硏究 菓』 第 3 冊, 引 『宜君縣志 』 , r 孟姜女碑 祠記 』(明馬理撰), <秦 築長城, 喜郞從役 , 忠其 工. 及築死於城土中, 姜女 爲 送 寒 衣 , 至邊 , 乃知之, 悲慣 號 吳 城自崩 歷.>

16) 『敦煙變文菓」, r 孟姜女變文』, <爲言壇蹴有標提(題), 浪浪觸樓若個是? 鳴呼哀哉難 簡擇 見卽令人悠思起,一一捨取自看之, 校指取血從頭試. 若是兒夫血入骨, 不是祀 梁血相離.>

그렇게 하며 십여 구의 시체를 지나갔을 때, 갑자기 어느 시체의 뼈에 자신의 피가 스며들었댜 다시 한 번 해보았지만 여전히 또 스며들었다. 그것이야말로 남편의 시체임에 틀림이 없었댜® 남편의 시체를 찾아내자 맹강녀는 또다시 서러워져 그것을 껴안고 가슴 아프게 울었댜 그녀는 보자기를 펴고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묻어 주려 하였댜 17)@ 그런데 바로 그때, 요란한 북소리가 울려퍼졌다-진 시황의 어가(御fuJ)가 도착하였던 것이다. 진시황은 황금빛 양산 아래의 마 차에 앉아 있었는데 시종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는 장성을 쌓는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어가고 있는가를 보러 다니는 중이었는데 이곳에 와 서 장성이 40 리나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화를 내고 있었다 . 그는 장성이 무너지게 된 이유를 물었다. 그리고는 남편을 찾아온 여자가 너무 도 울어서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고 하며 당 장에 그 여자를 찾아오라고 하였다. 맹강녀는 붙잡혀서 진시황 앞으로 오게 되었다. 그녀의 뛰어난 아름다 움은 진시황의 영혼을 온통 뒤혼들어 놓고 말았다. 진시황은 속으로 생각 했다. 대게 삼궁육원(三宮六苑)이 있지만 저 여자의 발뒤꿈치에도 못 따라

17) 『璃玉菓』, 『感應篇』 引 『同賢記』, <祀梁, 秦始皇時北築長城, 避苦逃走. 因入孟超後 園樹上, 超女仲姿浴於池中, 仰見祀梁而暎之. 問曰 ; 「君是何人? 因何在此?』 對曰 ; 『吾姓祀名良, 是燕人也. 但以從役而築長城, 不塔辛苦, 遂逃於此』 仲姿曰 ; r 請爲君 妻』 良曰 ; r 娘子生於長者, 處在深宮, 容院堯麗, 焉爲役人之四?』 仲姿曰 ; 「女人之體 不得再見丈夫, 請勿辭也』 遂以狀陳父而許之 . 夫婦禮畢,良往作所, 主典怒其逃走, 乃打照之, 井築城內 超不知死, 遣 1 卜欲往代之. 聞良已死, 井築城中,仲姿已知, 悲硬 而往, 向城號*·其城當面一時崩倒,死人白骨交橫,莫知執是.仲姿乃刺指血以摘白 骨, 去(云) ; 『若是祀良骨者, 血可流入』 卽歷血, 果至良核, 血經流入, 使(便)將歸葬之 也.> 이것이 맹강녀 전설에 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이다. 이름이 조금 다른 것 이외에 는 이야기의 구성에 있어 지금 전해지는 것과 거의 비슷하다.

가지!」 그는 화를 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기쁨에 넘쳐 늙은 얼굴에 가 득히 웃음을 담으며 맹강녀에게 물었다 r 이 장성이 네가 울어서 무너졌다는데 그것이 사실이냐?」 맹강녀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내가 울어서 무너뜨렸습니다. 그게 어떻다는 것인가요?」 진시황이 다시 말했다 r 울어서 장성을 무너뜨린 죄가 가볍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렀다?」 맹강녀가 대답했다 「무도하고 어리석은 임금이시여, 장성을 쌓느라고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이 사라져 갔는지 아시오? 당신이 그들을 죽인 것까지도 좋다고 해둡 시다. 그러나 어째서 그들의 시체까지 장성 밑에 넣고 묻어버려 부자나 부부가 영원히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하게 만든단 말입니까? 말씀해 보시 오. 그 죄는 가벼운 것입니까?」 진시황이 보니 그녀는 얼굴만 예쁘게 생긴 것이 아니라 말재주 또한 뛰 어났댜 그래서 더욱 기분이 좋아져 이렇게 말했다. 「네 재주와 미모가 뛰어난 것이 내 마음에 들었다. 장성을 울어서 무너 뜨린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니 나롤 따라 궁으로 가자. 너를 황후로 삼을 것이니라 . 네 생각은 어떠냐?」@ 맹강녀는 진시황을 보자 울화가 치밀어 올라 백성들을 괴롭히는 이 잔 악무도한 왕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생각이었는데 지금 이런 말을 하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 그녀는 얼굴이 붉어져 막 화롤 내려고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이렇게 생각했다. r 이 자는 포악무도한 임금이다. 함부로 그에게 덤벼들었다가는 오히려 더욱 커다란 모욕을 당하게 될 거야. 이 자를 한번 희롱해 주자. 그리고 깨끗한 몸으로 남편을 보러가야지』 맹강녀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면서 일부러 웃는 얼굴을 지어보이 며 진시황에게 말했다.

「좋습니댜 그러나 우선 제 부탁 세 가지를 먼저 들어 주셔야 합니다」 진시황은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져 얼른 말했다. r 어서 말해라, 세 가지가 아니라 서른 가지라도 들어 주마!」 맹강녀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r 첫째, 장성 바깥쪽 압록강( 鴨 綠江)에 긴 다리를 만들어 주십시오. 마치 하늘의 무지개처럼 아름답고 웅장하여야 합니다」 진시황이 대답했다 . 「오냐, 오냐. 두번째는 뭐냐?」 맹강녀가 말했다. r 둘째, 장성이 있는 곳에 사방 십 리의 네모진 분묘를 만들어 주십시오. 그곳에 내 남편의 시신을 묻어 주셔야 합니다」 진시황은 속으로 생각했다. r 정말 커다란 무덤이군!」 그러나 입으로는 이렇게 대답했댜 r 오냐, 그것도 네 뜻대로 해주마. 세번째는 무엇이냐?」 맹강녀가 대답했다. r 셋째, 당신이 베옷을 입고 내 남편의 무덤에 절을 해주십시오 . 내 남편 은 당신 때문에 죽었으니까요. 그리고 만조백관들 역시 제 남편에게 곡을 하며 제사를 올리도록 해주셔야 합니다」 이것은 진시황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만조백관이야 제사를 올리게 할 수도 있지만 황제의 몸으로 어찌 상복을 입고 일개 백성에게 제사~ 올린 단 말인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내가 그의 아들이 되는 것 아닌가? 그러 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눈앞에 있는 떡을 놓칠 판이었 다. 미인의 얼굴을 보아서라도 한 번 그 자의 아들이 되어 주면 되는 것이 지. 그래서 진시황은 대답했다. r 좋다, 세 가지를 모두 네 뜻대로 해주마」 그리고 나서 어가를 돌려 궁으로 돌아갔다 . 다리를 만드는 일과 분묘를 만드는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석 달이

채 되지도 않아 두 가지가 모두 완공되었다 진시황은 정말로 베옷을 입 고 만조백관을 데리고서 만희량의 무덤에 가 절을 하였다. 그리고 장성을 벗어나니 바로 압록강이었다 압록강의 강물이 넘실넘실 흐르는데 가운데 에 하얀 돌로 난간을 세운 다리가 정말 하늘의 무지개처럼 서있었다 . 진 시황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다리에 서서 멀리 십리 넓이의 분묘를 바라 다 보았다 무덤의 사방에는 소나무를 심었고 제단이며 울타리 등등 ……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맹강녀 역시 이날 온몸에 상복을 - 걸치고 제 단에서 사람들을 따라 함께 제사를 지내었다 . 진시황이 문무백관을 거느 리고 제단에서 제사를 마친 후, 상복을 벗어버리더니 고개를 돌려 맹강녀 를 보며 말했댜 r 네가 원했던 세 가지 일을 모두 해주었다. 이제 나와 함께 궁으로 돌 아가 결혼식을 올리자」 맹강녀는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더니 제단의 밖으로 달 려나갔다. 진시황이 물었다 . r 어디 가느냐?」 맹강녀는 대답도 없이 발걸음을 재게 놀리며 뛰어갔다. 그녀는 열심히 달려 다리의 끝부분에까지 왔다. 거기서 그녀는 진시황을 향해 노기등등 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어리석은 임금아, 정말이지 눈이 멀었구나! 너는 내가 부귀영화가 탐이 나서 남편을 팔아먹는 여자인 줄 알았느냐?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 못 생각한 것이지. 나는 그런 부끄러운 짓을 하는 여자가 아니야 . 그런 염 치없는 짓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사람의 옷을 입고 있을 뿐인, 그런 금 수 같은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다. 네가 장성을 쌓는 것은 오랑캐롤 막아 너의 나라를 보존하려고 하는 것이라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 이냐? 너 때문에 장성의 땅속에 묻힌 그 영혼들은 막지 못할 것을. 그들 의 원망이 산 사람들의 원한과 결합된다면 조그만 힘도 들이지 않고 너의 그 나라를 빼앗아갈 수 있을 것을 …… . 어리석은 임금아, 너무 찰난 척하 지 말아라. 너의 나라는 결코 오래가지 못할 거니까!,

맹강녀는 말을 마치더니 비단 치마를 뒤집어 쓰고 높디 높은 다리 위에 서 몸을 날려 강물 속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강물은 소용돌이치며 푸른 파도만 높게 일어날 뿐,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1 8 1 @ 진시황은 놀라서 멍하니 다리 아래에 서있다가 정신이 돌아오자 물질울 잘하는 사나이들을 보내어 그녀를 구해오게 하였으나 허사였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진시황은 부끄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힘없이 어가를 돌려 장성을 떠나 궁으로 돌아왔다. 전설에 의하면 강물에 빠진 맹강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그대로 용궁으 로 들어가 용왕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뒤 하늘로 올라가서 선녀가 되었 다고 한다 .191@ 18) 『孟姜女萬里尋夫渠』, 『繪圖孟姜女萬里尋夫全傳』 第 16 回, <秦始皇親身祭近壤, 孟 姜女投江明貞節.> 19) 『孟姜女萬里尋夫菓』, 『孟姜仙女寶卷』 참조.

제 10 장 진시황 시대에는 거대한 토목 공사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만리장성을 쌓은 것 이외에도 아방궁(阿房宮)을 지었으며 황릉울 만들었다. 아방궁이 살아서 즐기기 위하여 지온 것이었다면 황릉은 죽은 뒤의 영화를 위해 만 돈 것이었다. 죽은 뒤에 누리는 영화 역시 일종의 향락이 아니었을까? 장 생불사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게 될 바에야 아예 묘 안에서라도 생전에 누 리던 것들을 그대로 누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우선 아방궁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아방궁의 규모는 정말로 컸다. 대 략 300 리에 달하는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궁(離宮)과 별관(別館)들 이 산과 계곡마다 들어차 있었다. 마차 길들이 서로 이어져 여산까지 이 르는 80 리 복도(閣道)가 만들어져 있었으며 남산의 산꼭대기를 궁의 문으 로 삼았고 번천(奧川)을 궁정의 연못으로 만들었다. 아방궁의 그 전전(前 殿)만을 예로 들어 이야기해 보아도 얼마나 컸는지 저절로 입이 벌어질 정도이다. 대전의 동서가 50 보였고 남북이 50 길은 되었으며 궁전 아래쪽 에는 5 길의 깃발을 꽂을 수도 있었고 전 위에는 1 만 명의 사람이 앉을 수 있었다 . ” 그것보다 더 크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는데 궁전의 동서가 1 천 1) 『三輔黃圓』, r 宮』, <阿房宮亦曰阿城, 惠文王造宮未成而亡, 始皇廣其宮規, 快三百

餘里,離宮別館,彌山路突,盤到相屬 . 閣道通廢山八十餘里;表南山之崩以爲關,絡 堤川以爲池 作阿房前殿東西五十步, 南北五十丈 , 上可坐萬人 • 下建五丈旗.>

보 납북이 50 감’ 혹은 동서가 1 천 보, 남북이 300 보라고 하기도 한다J I 또 궁전에는 10 만 명이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것들로 보아 아방궁 은 전설적인 색채가 농후한 고대의 궁정이지만 도대체 본래 모습이 어떠 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댜 다만 당나라 때의 시인 두목(杜牧)이 지 은 r 아방궁부(阿房宮賊)』의 마지막 여덟 글자, <초나라 사람이 불을 질러 아깝게도 초토가 되어버렸네(楚人一迫 可情魚土)>라는 구절만이 명백하 고도 확실한 기록일 뿐이다. 아방궁은 진나라 말기 농민들이 일으킨 혁명 전쟁 중, 함양에까지 들어온 초나라의 왕 항우(項羽)의 군대에 의해 불타 버려 재만 남았던 것인데 맹렬하게 타오르던 그 불길은 세 달이 지나도록 꺼지지 않았다고 한댜 41

2) 唐 李吉甫 『元和郡縣志』 卷 1, <阿房宮殿東西五百步, 南北五十丈,上可坐萬人, 庭 中可容十萬人.> 3) 『水經注』, 『消水』 引 『關中記』, <阿房殿東西五百步, 南北五十丈, 庭中受十萬人 . > 4) 『史記』, r 項羽本紀J, <項羽引兵西屠咸賜, 燒秦宮室, 火三月不滅 . >

아방궁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장적(長秋)에 얽힌 신화전설을 언급하 지 않을 수 없다. 고대의 전설에 의하면 장적은 방풍씨의 후손이었다고 한다? 춘추시대, 장적족(長秋族)의 형제 세 사람이 중국 땅에 와서 말썽 을 부리는데 어떻게 하여도 그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 돌맹이나 기와 조 각을 던져 보아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노나라에 숙손득신(叔孫得 臣)이라고 하는 활을 잘 쏘는 용사가 있었다. 그는 활을 쏘아 그들 삼형제 중의 하나인 교여(儒如)라고 불리는 거인의 눈을 맞추었다. 그 뒤에 부부 종생(富父終텡)이라고 하는 용사가 말을 타고 나가 창을 휘둘러 그 거인 의 목을 찌르니 거인은 죽고 말았댜 6) 그 광경을 본 나머지 두 거인은 형 세가 불리하다고 판단을 하였던지 모두 도망쳤는데 니~ 다른 나라에서

5) 『國語』, r 魯語』, <防風, 汗뜬氏之君也, 在處夏商爲注뜬氏, 于周爲長秋, 今爲大人.> 6) 『左傳』, r 文公十一年』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長秋緣斯가 宋에 잡혔고 長秋倭如의 동생 禁如는 晉에 잡혔으며 榮如는 齊나라에 피살되었고 簡如는 衛나라에 잡혔다.

숙손득신(『炎黃』)

잡히거나 죽임을 당했다 한편 장적족의 교여는 죽어 쓰러져 누웠는데 그 면적이 자그마치 9 무(敵)의 넓이가 되었고 그의 살찐 머리를 잘라 수레에 실으니 눈썹 부분이 높이 튀어나온 것이 수레의 횡목 밖으로까지 나왔다 .7} 이렇게 하여 장적족은 한동안 잠잠했는데 진시황 시대에 이르러 중국 서북쪽의 임조(臨洗 지금의 甘肅省 珉縣) 지방에서 다시 출몰했댜 그들 울 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모두가 북방 호인(胡人)의 복장을 하고 있었 으며 키가 다섯 길온 되었고 발 크기만 해도 여섯 자나 되었다고 한다. 그 러나 그들은 나타났다가 바로 사라졌을 뿐 별다른 말썽은 부리지 않았다 고 하였다 8 ) 지방관이 이렇게 보고를 해오자 진시황은 그것이 상서로운 징조라고 여기고서 육국을 멸망시킬 때 사용했던 무기들을 모두 녹여 장 적족 모양을 본뜬 구리 인형 열두 개를 만들어 아방궁의 문앞에 세워놓았 다” 인형 한 개의 무게는 무려 24 만 근이나 되었다고 하며 그 이름을 <금적(金秋)>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의 가슴에는 모두 승상 이사(李 斯)가 쓴 명문(銘文)을 새겨놓았다

7) 『春秋』, 『文公十一年』 穀梁傳, <長秋也兄弟三人, 快岩中國, 瓦石不能害 . 叔孫得臣 最善射者也, 射其目, 身橫九敵, 斷其頭而載之, 眉見於輯.> 8) 『博物志』, 『異人』, <秦始皇二十六年, 有大人十二, 見於臨첩t, 長五丈, 足迷六尺.> 9) 『元和郡縣志』 卷 1, <秦又置銅人十二於(阿房)宮前.>

한나라 초기에 그 인형들을 미앙궁(未央宮)으로 옮기기 전까지도 사람 들은 그 인형의 유래를 잘 알지 못했으며 그것들을 <옹중(翁仲)>이라고 불렀다 .10) 진시황 시대에 키가 한 길하고도 석 자나 되는 거한인 완옹중 (阮翁仲)이러는 장수가 있었는데 그는 병사들을 이끌고서 임조를 지켰었 다. 그의 명성이 드높아 당시 흉노족들은 모두 그를 보면 벌벌 떨었다고 한마 그래서 구리로 만들어진 그 인형들을 옹중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장적이건 옹중이건 모두가 아무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신화전

10) 『水經注』, r 河水J, <秦始皇二十六年, 長秋十二, 見於臨겹t, 以爲善祥, 鑄金人十二以 象之,各重二十四萬斤,坐之門宮之前,謂之金秋,皆銘其胸.漢自阿房宮徒之未央宮 前, 俗謂之翁仲矣.> 11) 『中國人名大辭典』, 『阮翁仲』條 참조

설이기 때문에 별 상관이 없다 . 다만 구리로 된 인간을 만들어 궁정을 장 식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아방궁 이외에 또다른 거대 토목공사로는 진시황릉을 꼽을 수 있다. 자 고로 제왕들은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철저한 준비를 해왔던 것 같다. 진시황도 나이 열 몇 살, 즉 막 왕위에 올라 젖내도 아직 가시지 않았던 시절부터 여산 기슭에 자기의 능을 짓기 시작했다. 나중에 천하를 통일하 고 황제가 된 후에는 아예 70 여만 명의 인부들을 동원하여 대규모로 작업 올 계속하게 하였다. 여산 아래쪽까지 통하는 지하도를 만들었으며 바깥 쪽 관은 구리로 만들었다 . 분묘 안에는 궁궐과 만조백관의 자리까지 만들 어 놓았다. 또 가지각색의 기이한 물건들, 진주와 온갖 보물들까지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이 가져다 놓았는데 모두 사방 각지에서 긁어온 것들 이었댜 이 밖에도 장인들을 시켜 쇠뇌 같은 것을 설치해 놓도록 하여 누 군가가 그 보물들을 훔치러 들어오면 저절로 화살이 발사되도록 하였다. 또한 수은을 사용하여 강과 바다를 만들었으며 기계를 사용해서 그 강 위 를 돌아다니도록 하였댜 게다가 해와 달, 별 둥의 천문 형상까지도 모두 만들어 놓도록 하였다. 인어의 기름으로 불을 붙였는데 영원히 그곳을 밝 히기 위하여 충분한 양을 준비해 두었다 .12) 한편 거대한 분묘를 만들기 위 해서는 많은 돌이 필요했는데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 사용했다고 하는 그 간산편은 이제 별 기능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다 날라야 했다. 위수(消水)의 감천구(甘泉口)에서부터 돌을 날라오는 그 작업은 보통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런 민가(民歌)가 전해지고 있다. 감천구(甘泉口)에서 돌을 날라오니 12) 『史記』, r 秦始皇本紀』, <始皇初卽位 , 察治鄭山,及井天下, 徒送諸七十餘萬人, 察三 泉下, 銅而致ffil, 宮競百官奇器珍怪, 徒藏滿之, 令匠作機篤矢, 有所察近者, 榎射之 . 以水銀爲百川江河大海,機相淵輸,上具天文,下具地理,以人魚音爲炯,度不滅者久 之 . >

위수( 消 水)도 흐르지 않네 천인( 千人 )이 노래하고 만인 (萬人) 이 들어올리며 날라와 분묘를 만들고 남은 돌이 거대한 배만큼이나 되네 13 1

13) 『博物志』(指海本) 卷 4, <秦始 皇 陵在廢山之北, 高 數十丈 . 此山 無 石, 運取 大 石於消 北諸山, 歌曰 ; r 運石甘泉口, 消 水爲不流 ; 千人唱, 萬人釣, 今陵下餘 石大 ~I]~(溫)」> 마지막 구절은 『漢魏范 書』 本 , 『博物 志 』, r 地名考J에 <金陵餘 石大 ~I]樞 > 라고 되어 있 는 데, <增>는 音이 <歐>이고 <모래를 모은다>는 뜻이다. 해석하기가 어려우므로 <舟>字로 대신해 돌처럼 크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金陵 > 은 指海本에 < 金陵下>라 고 되어 있는데 그것이 옳다.

그렇게 많은 인력을 들여서 쓰고도 남을 만큼 쓸데없이 많이 날라다가 버려두고 쓰지 않다니, 그 얼마나 백성들을 괴롭히는 행동이란 말인가! 이 짧은 노래 한 곡에 백성들의 원한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그러나 제왕들은 자신의 생존 당시와 죽은 뒤의 안락함을 위해서 그런 것 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댜 이것보다 더 기이한 전설도 있다 그것은 진시황릉의 비밀이 새어나가 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황릉의 건조작업에 참여했던 인부들을 모조리 그 분묘 속에 산 채로 매장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 고대에도 명검을 만든 장인을 또다시 그런 것을 만들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 검으로 베어 죽이지 않았던가. 묘를 만든 인부들을 그 속 에 매장하였다고 하는 것도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그 예를 찾아볼 수 있 댜 많은 재능 있는 인재들이 인류의 지혜로움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능력을 통치자들을 위해 억지로 발휘했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늘 죽음뿐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진시황롱이 발굴되었을 때 그 인부들이 아직 살아있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었을까? 분묘 속에는 충분한 양의 마른 식량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살아있을 수 있었겠지만 물과 공기는 어디서 구할 수 있었을까? 인어의 기름으로 장명등(長明 燈 )을 밝혔다는 것을 보면 공기는 좀 있었겠

지만 그렇게 충분한 양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물은 어디서 나왔을까?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더 괴이한 것은 그 인부들이 그냥 살아있었던 것이 아니라 장생불사하는 사람들처럼 살고 있었다~ 점이다 . 오랫동안 아무 할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각자 자신의 능력과 문학적, 예술적인 재능 울 발휘하여 분묘의 기둥에 용이라든가 봉(鳳), 선인(仙人) 등의 모습을 살아있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그려넣었고, 또 비문(碑文)을 새기고 글을 짓기도 하였다. 그 비문과 글 속에는 대부분 원망의 말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원비(怨碑)>라고 불렀다 14) 이런 이야기들은 물 론 어느 정도 말이 안 되는 면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들은 결국 압박을 받으며 살아갔던 사람들의 원한에 찬 슬픔을 내보여 주고 있는 것 이기 때문에 여기서 간단히 서술해 보았다.

14) 『捨遺記』 卷 5, <始皇爲塚 生埋工人於塚內, 至被開時皆不死. 工人於塚內塚石, 爲 龍鳳仙人之象 及作碑文贊辭, 辭多怨酷之言, 乃謂爲怨碑 . >

진시황 시대에 관해서는 두 가지의 또 다른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후 대의 전설에 비해 비교적 보편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은 함호(協湖)에 관한 전설과 용모(龍母)에 관한 전설이다. 함호의 전설은 대략 이러하다. 전설에 의하면 유권현(由拳縣)은 원래 진나라 때의 장수현(長水縣)으로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가홍현(嘉興縣) 남쪽 5 리쯤 되는 곳에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산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도사가 그 산 위에 왕의 기운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사형을 받은 죄수 들을 보내어 산을 파헤치게 해서 산 위에 서려 있다고 하는 왕의 기운(王 氣)을 없애버리려 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산을 파던 죄수들은 너무 힘이 들어 어느 날 모두 도망쳐 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산을 수권산(囚卷 山)이라고 불렀고 산 옆에 현이 생기니 그 현은 수권현(囚卷縣)이라고 부 르게 되었다. 그런데 후대에 오면서 발음에 착오가 생겨나 유권산(由拳山) 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수권현 역시 유권현(由拳縣)으로 불리게 되었다 . 15)

15) 『太平웜宇記』 卷 95, <故由拳縣在嘉興縣南五里, 秦始皇見其山上出王氣, 使諸囚合

死者來堅此山, 其囚卷井逃走, 因號囚卷山, 因置囚卷縣 . 後人語덥t, 便名爲由拳山.>

진시황 때 그곳에는 이런 동요가 유행했다. 성문에 피가 묻어 있으면 성이 호수로 변할 거야 이 동요를 듣고 몹시 걱정이 된 어느 노파가 매일 성문으로 가 정말 그 곳에 피가 묻어 있는지롤 살펴보았댜 성문을 지키던 병사가 노파의 행동 이 미심쩍은 데가 있는 것을 보고 그녀를 붙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녀 가 사정 이야기를 하자 모두들 웃으며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냥 그녀를 놓아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개를 잡아 먹고 개의 피를 성문 에 발랐다. 그리고 약간 정신이 이상한 그 노파를 생각해 내고는 모두들 농담을 하면서 웃었다. 그런데 정말 노파가 왔다. 그녀는 성문에 피가 묻 어 있는 것을 보고는 몸을 돌려 도망을 치며 다시는 뒤를 돌아다 보지 않 았다. 그녀가 그렇게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물이 불어나더니 성이 물속에 잠길 지경이 되었다. 그때 간(干)이라고 하는 주부(主簿)가 급히 달려가 이런 상황을 현감에게 보고하였다. 현감은 주부의 머리를 유 심히 바라보더니 이상한 듯이 말하였다. 적 그대의 머리위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잡혀 있는가?」 주부가 현감의 머리위를 보며 역시 이상한 듯이 말했다. 『나리의 머리 위에도 물고기가 있습니다」 바로 그랬다. 그렇게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에 큰물이 이미 가득히 밀려들어와 삽시간에 유권현의 성을 호수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 다. 그리고 개 한 마리를 끌고 도망친 그 노파는 북쪽으로 60 리를 급히 달 려 이채산(伊菜山) 꼭대기로 올라가서야 비로소 그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6) 이런 민간전설들은 이 밖에도 비슷한 것이 상당히 많다. 각 지방

16) 『古小說釣沈』 輯, 『劉之遇神錄』, <由拳縣, 秦時長水縣也. 始皇時, 縣有童藩曰 ; r 城 門當有血, 城協沒爲湖』 有姬間之 憂 體, 每旦往窟城 ; 門侍欲純之, 姬言其故 . 姬去後,

門侍殺犬, 以血塗門. 婚又往 , 見血走去 , 不政顧. 忽有大水 , 長欲沒縣, 主簿令干入白 令 令見干曰 ; r 何忽作魚?』 干又曰 ; 『明府亦作魚!』 遂乃活協爲谷. 老母産狗北走六 十里, 移至伊萊山得免 . >

의 지방지(地 方 志)를 살펴보면 그런 기록이 적지 않게 눈에 띄는데 안휘 성( 安徽 省)의 < 고소석구(古果石龜) > ) 야 라든가 < 역양호( 歷 陽湖 ) > ,18) ® 산 동성(山 東省 )의 < 동명석사( 東 明石獅 ) > 1 9 ) 동이 모두 그런 것들이다.

17) 뎅打神記 』 卷 20 참조. 18) 『古今圓 촙 菓成』, r 職方典』 卷 839 참조. 『淮南子』, r 淑眞篇』, <歷陽之郁, 一夕反而 成湖>라 하였는데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19) 『古今圖 習菓 成』, 『職方典』 卷 148 참조`

용모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성이 온(溫)씨인 할머니가 살고 있었댜 그녀는 단계현(端溪縣) 사람이 었는데 단계현은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덕경현( 德慶 縣)에 있었다 . 그녀는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고 살았다. 어느 날 물고기를 잡고 있을 때 물가에 머리 크기만한 알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알을 가지고 집으 로 돌아와 상자에 그것을 담아두었다. 열홀이 지난 뒤 열어 보니 한 자쯤 되는 도마뱀 모양의 동물이 알껍질을 뚫고 나와 상자의 가장자리를 기어 다니는 것이 보였다 ® 할머니는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그것을 집안에서 마음대로 드나들며 기어다니게 하였다 떠나려면 떠나고 있으려면 있으라 는 식이었으니 조금도 억지로 다루지 않았다. 그놈이 점점 자라 다섯 자 쯤 되니 이제는 물속에 들어가서 하루에 열 마리쯤의 물고기를 잡을 수도 있게 되었다 . 그리고 두 길쯤으로 커졌을 때에는 더욱 많은 물고기를 잡 아왔는데 모두 할머니에게 갖다바쳤댜 그리고 그때부터 다시는 뭍으로 나오지 않고 파도를 타고 놀면서 할머니의 곁에서 맴돌았다 .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물가에서 도마 위에 생선을 놓고 그것을 자르 다가 실수로 그 동물의 꼬리를 자르게 되었다. 그 동물은 피를 홀리며 물 가에서 잠시 헤엄을 치더니 멀리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몇 년이 지난 뒤 다시 할머니 곁으로 돌아왔는데 머리에는 뿔이 돋아 있

었고 비늘에서는 번쩍거리는 빛이 나는 것이 분명히 용의 형상을 하고 있 었다. 할머니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소리쳤다. r 나의 아들 용이 돌아왔구나. 내 아들 용이 돌아왔어!」 그 용은 할머니 곁에서 여전히 유유히 헤엄치면서 예전과 다름없이 친 근한 모습을 보여 주었고 다시는 할머니 옆울 떠나지 않았다. 진시황은 이 일을 알고서 기쁨에 가득 차 말했다. 「용 아들의 일은 모두가 나의 덕이 높아 생긴 일이 아니겠느냐!」 그리고는 사신을 보내어 검은 옥구슬을 할머니에게 바치면서 할머니를 모셔오게 하였다. 할머니는 고향을 떠나기가 싫었다. 아득히 먼 서울로 가 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영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신이 자꾸 재촉을 하는 통에 할 수 없이 억지로 배를 타고 시홍강(始興江)에까지 오 게 되었다. 시홍강은 단계에서 천 리나 떨어진 곳이었지만 용은 여전히 할머니가 탄 배를 따라오고 있었다. 용은 할머니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배를 끌고 돌아갔다. 하루 저녁도 되지 않아 할머니는 다시 고향으로 돌 아올 수 있게 되었다 . 이런 상황이 몇 번이나 계속하여 벌어졌다. 사신은 겁이 나기 시작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어 진시황에게 그대로 보고하였 댜 그리고 결국엔 할머니를 서울로 데려오지 못한 채 그 일에서 손을 떼 고말았다. 얼마 후 할머니가 죽어 강의 남쪽에 묻히게 되었다. 용은 자주 큰 파도 를 일으켜 할머니의 무덤 앞까지 오곤 하였다.® 또 파도로 모래를 움직이 게 해서 그 모랫더미를 원래의 무덤 위에 덮어씌워 할머니의 무덤을 아주 크게 만들어 주었다. 사람들은 후에 이 용을 굴미용(堀尾龍)이라고 불렀 다. 그리고 꼬리가 잘린 용의 모습을 한 배를 만들어 그 용을 기념하였 다.21)) 이러한 용모(龍母)의 전설은 후세에까지 여러 곳에서 전해지고 있는 20) 『天中記』 卷 56, 引 『南越志』, <昔有溫氏鑑者, 端溪人也, 常居洞中捕魚以資 日 給. 忽於水側遇一卵 大如頭, 乃將歸之(置)器中, 經十 日 許. 有一物~I]守官(手掌), 長尺許, 容卯(卵)而出, (區)因任其去留. 稽長五(二)尺, 便能入水捕魚, 日 得十餘頭. 稽長二尺 許 , 得魚源多, 常游波中, 索(朔)回婚(區)側. 溫後治魚, 誤斷其尾, 遂適巡而去, 數年

乃 還 鑑見其輝色炳耀, 謂 曰 ; r( 此) 龍 子今復來矣」 因盤旋游戱, 親맑|如故 . 秦始皇聞 之 , El ; r 此龍子也, 股德之所致』 紹使者以玄(赤)珪之禮聽婚(溫), 姬(溫)戀土不以爲 樂 至始興江, 去端矣( 溪 )千餘里, 龍 輯引船還, 不諭夕, 至本所 . (如此數四) , 使者儒 而止 卒不能召(語)區 , 鑑殖, 蓮( 葬 )於江陰(陵) . 龍子常爲大波至墓側, 榮浪轉沙以成 壤 人謂之堀尾龍 今人爲船爲龍堀尾, 卽此也 . >

데 강소성( 江 蘇省) 고순현( 高淳 縣)에 전해지는 < 망낭만( 望 娘 ~ ) > 이야 기 , 2 峰 ) 절강성 온주시( 溫 州市)의 < 용모사당(龍母廟) > 전설 221 @ 등이 모두 그런 것들이다 또 어떤 전설은 함호의 전설과 합쳐진 것도 있는데 사천 성 서창현(西昌縣)의 < 함호(昭湖) > 전설 23 1 이 그러한 것으로, 이야기 구성 이 상당히 복잡하다 . 진시황에게는 또한 그런대로 좋은 평을 지닌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 댜 그는 다녔던 곳마다 모두 유적을 남기고 있는데 그에 따라 간단한 전 설들도 전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하북성(河北省)의 진황도(秦皇島)를 보기로 하자. 본래 명칭 은 전황산( 秦 皇山)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진시황이 이 산에 와서 가시나무 를 보고 넋을 잃은 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어려서 스승에게 배울 때 스승께서 이 나무로 회초리를 만들어 나를 꾸짖으셨지」 그리고는 얼른 말에서 내려와 그 가시나무를 향해 절을 하였다. 가시나 무는 황제가 자기에게 이렇게 대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숙였는데 그것은 마치 사람이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과 같은 형상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몇 년이 지난 뒤 그 섬의 가시나무들은 모두 이런 모습으로 변했다고 한 다. 그리고 바위 위에 시황이 말에서 내렸을 때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다 고 하여 그 산은 진황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혹은 진황도라고도 하~근데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풍광이 아주 빼어나다.있)

21) 『古今圓 書 菓成 』 , 「職方典』 卷 %8, 引 『高淳縣志』 참조 . 22) 『古今圖 習集 成』, r 神異典』 卷 51, 引 『溫州府志』 참조 * 23) 『授 神 記 』 卷 20 참조 . ` 24) 明 蔣一奏 『長安客話』 卷 7 , <秦皇島 • 姜女石>條 , <俗傳秦皇至此山見荊, 懷然曰 ; 『此里師授吾句讀時所用朴也」 下馬拜. 荊皆垂首向地 , 如頓伏狀 , 至今猶然. 石上有秦

皇下馬跡 因名秦皇山.>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제(齊)나라 격성( 兩 城)의 동남쪽에 포대(蒲 臺 )라고 하는 누대가 하나 있댜 ® 높이가 여덟 길이나 되고 그 누 대를 한바퀴 돌면 2 백 보쯤 되었다. 그런데 왜 포대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일까? 이는 진시황이 동쪽으로 바다 구경을 다닐 때 이 누대 밑에서 부 들(蒲)로 말을 묶어 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뒤에 는 그곳의 부들풀들이 모두 무엇인가를 묶어 둔 형상처럼 구불규' 불 얽히 고 설켜서 자라났다.찍

25) 『水經注』, r 河水』, <(長蓋)溝南海側有蒲 臺 , 臺高八丈, 方二百步. 『三齊略記』曰 ; 『퓸 城東南有蒲퓰, 秦始皇東游海上, 於臺下幡蒲系馬」 至今每歲蒲生, 榮委有若系狀.>

이것과 비슷한 전설로는 제나라 지방의 조당침호(鳥當況湖)에 90 개의 누대가 있고 각 누대 밑에는 모두 얼키설키 얽힌 부들풀(結蒲)이 자라났 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진시황이 이 누대에 와서 노닐 때 이곳의 부들 풀을 가지고 말을 묶어 두었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 자라난 부들풀이 모두 또아리를 튼 형상으로 얼키설키 얽혀 이런 이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 26 )

26) 『藝文類點 卷 82, 引 『續述征記』, <鳥當況湖中有九十臺, 皆生結蒲. 云秦始皇游此 臺, 結蒲系馬 自 此蒲生則結 . >

또 동해 해변가에는 진시황이 진주를 받았다고 하는 누대, 죽 수주대 (受珠 臺 )가 있다. 진시황이 동해안을 순수하면서 이곳에 왔을 때 해변가의 어떤 어부가 존귀한 황제께 그 진주를 바쳤다고 하는데 거기서 비롯된 이 름이다 . '!:I) 강소성 동해현(東海縣) 서쪽에는 공망산(孔望山)이 있다 . 산 앞 쪽의 바위에는 두 개의 세숫대야 같은 것이 있는데 옛부터 그것은 진시황 의 세숫대야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그 옆에는 정말로 머리카락 같은 자 국이 나있고 산 위에는 진시황이 탔다는 말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28) 강소성과 절강성에는 각각 진망산(秦望山)이러는· 곳이 있다 . 절강의 진

刃) 『述異記』 卷下, <秦始皇至東海, 海人棒珠獻於帝前. 今海碑有秦皇受珠臺.> 28) 『太平襄宇記』 卷 22, <孔望山, 在(胞山)縣南一百六十里. 山前石上有二盆, 故老相傳 云, 秦始皇洗頭盆, 盆邊髮隱隱, 井山上馬跡猶存.> 胞山縣온 지금의 江蘇省 東海縣 이다.

망산은 소홍현 남쪽 20 여 리 되는 곳에 있는데, 진시황이 이 산에 올라가 남해를 바라보았다고 한댜 산 위에는 진시황이 앉았던 돌이 있고 그 양 쪽에는 승상 이하의 신하들이 앉았다고 하는 네모진 돌이 여덟 개가 있는 데 그 돌은 승상석(丞相石)이라고 불린다 .29) 강소성의 진망산은 강음현(江 陰縣) 서남쪽 20 여 리 되는 곳에 있는데 본래 이 산은 사천성에 있었다. 진시황이 그 산으로 동해를 메우려고 간산편으로 여기까지 몰고 왔지만 산이 더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자 할 수 없이 이 산에 올라가 사방을 바 라보며 어디가 문제인가를 살펴보았다고 한다. 후에 와서 사람들이 그 산 의 남쪽에서 사천에서 생산되는 유구옹(油九嬰)을 발견했는데 그것으로 보아 그 산이 분명히 사천에서부터 온 것임을 증명하였다고 한다우 이런 명승고적과 거기에 얽힌 전설들을 통해 우리는 어지럽던 전국시대를 끝내 고 통일 중국을 만든 진시황에 대해 사람들이 그래도 여전히 홍미를 가지 고 있었으며 또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29) 『太平襄宇記』 卷 96, <秦望山在(會稽)縣南二十七里, 云秦始皇登之以望南海. 入境 便見始皇刻石於此. 刻石前有石,廣數丈,云是始皇所坐之石;兩邊有方坐八所,云是 丞相以下坐石, 故今有丞相石之名.> 30) 『 輿地廣記』 卷 9, <秦望山在(江陰)縣二十七里 . 接山在蜀 )II, 秦始皇區之以塞東海, 至此, 不肯前, 登山四顧, 因號秦望山. (山)南有蜀川油九壅.>

이 밖에 석인(石人)에 관한 전설도 있다. 진시황이 석인을 보내어 노산 (勞山)을 쫓아가게 하였지만 석인은 노산을 잡지 못했다. 결국 키가 한 길 하고도 오 척이나 되며 허리 둘레가 열 아름은 되는 석인은 채자국(菜子 國)의 해변가에 멈춰서고 말았는데 그때부터 영원히 그곳에 서있게 되었 다 .3” 그리고 진시황이 동해에 산대(算袋)를 빠뜨렸는데 그것이 문어(墨魚) 로 변했다고도 한다. 묵어는 오적(烏賊)이라고도 하며 하백도사소리(河悟 度使小吏)라고도 한다. 커다란 물고기가 다가오면 먹물을 내뿜어 자기 몸 올 가리는데 그 생김새가 정말로 산대를 닮았다. 게다가 양 옆에는 길다 란 리본 같은 끈도 달려 있지 않은가 .32) 한편 진시황이 동쪽으로 유람을

31) 『酉陽雜組, r 物異』 (404), <菜子國海上有石人, 長一丈五尺, 大十園 . 昔秦始皇遣此 石人追勞山不得, 遂立於此.>

다닐 떄 호구(虎丘, 지금의 江蘇省 蘇州市)에 이르러 옛날 오나라 왕 합려 가 숨겨놓았다고 하는 보검을 찾았다. 그런데 그 호구의 분묘 위에 하얀 호랑이 한 마리가 앉아 있기에 칼을 들어 그 호랑이를 내리쳤는데, 호랑 이는 도망치고 내려친 칼은 그만 반 토막이 나고 말았다. 후에 그곳이 무 너져내려 연못이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검지(劍池)이다 . 33 ) 이런 이야기들은 민간전설 속에서 진시황이 그저 일개 제왕일 뿐 아니 라 신성(神性)을 갖춘 영웅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들이다 . 고 대 신화전설에 나오는 하걸(夏架)이나 은주(殷討) 동의 폭군과는 함께 비 교할 수 없는 면이 있다고 하겠다. 32) 『酉陽雜船, (前集卷之十 )r 瞬介篇』 (680), <烏賊, 薔說名河伯度事小吏, 遇大魚繩放 墨 以混其身 (江東人或取墨 흡 契以脫人財物, 書跡如淡墨, 途年學, 唯空紙耳.) 海人 言, 昔秦皇東游, 棄算袋於海, 化爲此魚, 形如算袋, 兩帶極長 . >(괄호 안은 역자 보충) 33) 『漢唐地理書紗』 輯 『吳地記』, <秦始皇東巡, 至虎丘, 求吳王寶劍 . 其虎當壤而距, 始皇以劍擊之, 不中, 恨(誤)中於石. 其虎西走二十五里, 忽失. 劍無復獲, 乃階成池, 古號劍池.>

역자주 주진편·하 제 1 장 ® 袁河는 『史記』, 「任子쭙列{專』과 『吳越春秋』, 『越絶 書 』 등에 의거하여 오월춘추 시 절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있다. 아래에 서술된 이야기들은 대부분 漢代 趙華에 의해 쓰여진 『 吳越春秋』의 내용을 축으로 하고 있는데 譯者는 『戰國策』과 『左傳』 둥의 기록을 참고로 하여 내용의 다른 점 등을 보충하였다. ® 楚나라의 大夫 平王에게 참언을 일삼던 간신인데 『史記』에는 <費無思>, 『左傳』에 는 <費無極>으로 기록되어 있다. 朝吳와 太子建, 任著와 任尙, 蔡侯朱 등이 그의 참 언 때문에 죽었고, 任子짬를 내쫓아 나라의 대혼란을 자초하게 된다. 郁苑 • 陽令終 • 晉 陳 역시 그의 책략에 말려들어 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그들의 억울한 죽음 때문에 민심이 동요하게 되자 沈尹戌이 令尹子常에게 직언을 하여 費無思룰 없애게 된다. 『左傳』 昭公 'lJ年, r 費無極死有餘墓」에 보면 費無思가 令尹子常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는 과정이 나온다. <沈尹戌言於子常曰 ; 『 …… 夫無極, 楚之諱人也, 民莫不知. 去 朝吳, 出蔡侯朱, 喪太子建, 殺連尹량. 居王之耳 目 , 使不應明 …… 公又殺三不享, 以 興大諒 ? 及子矣 子而不圖 焉將用之? ……』> ® 『史記』, r 任子쭙列傳』에는 <昭關을 지나갔다>라고만 되어 있고 그것에 대해 구체 적안 묘사나 별다른 이야기가 없다 . 저자는 『戰國策』, r 燕策』에 나온 張丑의 이야기 를 任子쭙의 전설에 끌어넣었고, 또 아주 후대의 『東周列國志』에 서술된 이야기의 바탕이 되는 民間傳說에 근거해 서술한 것이다. ® 『戰國策』, 德策三 • 張丑爲質於燕』에 보면 齊나라 사람 張丑이 燕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다가 燕나라 왕이 그를 죽이려 해 도망을 치는데, 국경 관리가 그를 잡으려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張丑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燕나라 王이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은 사람들이 나에게 귀한 보석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燕王이 그것을 얻으

려 하는데, 나는 이미 그것을 버렸다 . 그러나 燕王은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 지금 네 가 나를 잡으면 나는 네가 나의 보석을 빼앗아 뱃속에 삼켰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燕王은 분명히 너를 죽여 배를 가르고 창자를 자를 것이다 보석을 얻으려고 하는 왕에게는 이익으로만 얘기가 되는 것이니까. 나야 죽겠지만 너의 창자도 토막나고 말 것이다(丑曰 ; 「燕王所爲將殺我者 人有 言 我有寶珠也, 王欲得之. 今我已亡之矣, 而燕王不我信 今子旦致我,我旦 言 子之奪我珠而谷之,燕王必當殺子, 子腹及子之 腸矣. 夫欲得之君 不可說以利. 吾要旦死, 子腸亦旦才絶.).> (中華 書 局木) 『戰國 策gi l 나오는 이 이야기를 저자가 但子짬 부분에 집어넣은 것은 뮤澤史』에 인용된 딸非子』에 任子꼽가 국경 관리에게 같은 말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에 근거 한 것이다. ® 太歲라는 것은 본래 木星울 가리키는데, 太歲iji1 1l 은 하늘의 木 昴 과 상응하며 움직인 다. 이 방향은 吉하지 않아 사람들이 땅을 파서 집을 짓거나, 혹은 궁궐을 짓고 담을 쌓을 때 모두 그 방향을 피한댜 『協紀辨方』 卷 3, 引 『神樞經』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 어 있다. <太歲, 人君之象, 率領諸神,統正方位,執運時序, 總歲成功 …… 若國家巡 狩省方, 出師略地, 營造宮j,I], 開拓封疆, 不可向之. 黎庶修營宅舍, 築壘地垣, 井須 回避.> 또 『黃帝經』을 인용하여 <太歲所在之辰, 必不可犯>이라 하고 있는데, 여가 서는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明代의 『東周列國志』 제 72 회 r 梁公尙損賜雍父難 任子쭙微服過昭關」에 보면 좀 더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 任子皆는 이렇게 변한 자기 모습을 보고 통곡을 하며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데 벌써 머리가 희어지다니, 오, 하늘이여!(一事無成, 雙 節已斑, 天판 天平!)>라 하였는데 東阜公이 그를 위로하며 그것이 오히려 좋은 징 조라고 말한다. 東阜公은 任子쭙와 비슷하게 생긴 그의 친구 皇甫訥울 불러 五子 꼽로 분장하게 하고 但子吾는 그의 종으로 분장을 한다. 성문을 지날 때 任子쭙로 분장한 皇甫訥이 대신 잡혀 소란한 사이, 늙은 종으로 변장한 任子쭙는 무사히 그 곳을 지난다. ® 山西省 解縣에 關帝廟가 있는데, 그곳은 바로 관우의 고향이라 <세상의 관우사당 중 해주의 것이 첫째(天下關廟數解州)>라는 말이 있다. 그곳의 <春秋樓>라는 이충 누각에 모셔진 관우의 얼굴은 누런색이다(다른 지방의 사당에서는 모두 붉은색). 그것 에 대해 그 지방에 전해지는 전설이 조금 달라 소개해 보기로 한다. 관우의 본래 성은 馮이고 이름은 賢인데, 대장장이였다. 본래 얼굴색은 黃色이었다 그 고을의 망나니를 없애고 타향으로 도망치다가 流關을 지나게 되었다. 關에 자신의 얼굴이 그려져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걱정하던 중, 이상한 할머니가 나타나 방법을 가 르쳐 주었다. 그래서 관우는 자신의 코를 쳐서 코피를 얼굴에 바르고 또 姓을 <關> 이라고 말한 뒤 문지기를 속이고 流關을 지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얼굴의 붉은색이

지워지지 않았다는 것인데, 解 州 사람들이 그의 본래 얼굴색인 黃 色으로 관우의 像을 세워주었다고 한다(中國社會科身樣 足 文學 硏究所, 『中國 傳說故事大辭典』, 354 쪽, 中 國文聯出版社 1992). ® {Ii子몸가 난관에 처했을 때 나타나는 사공은 일반적인 영웅신화의 유형에서 보이는 <助力者>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영웅신화를 유형화시킬 때 보통 출 발과 입문, 모험의 과정, 귀환 등으로 나누는데, 입문이나 모험의 과정에서 영웅을 도 와주는 조력자가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나 이집트 신화의 토트 등이 그러한 경우에 해당되는데 나이많은 노파나 난쟁이, 요정, 사공 등이 그러 한 역할을 담당한다. ffi.子骨에 관한 전설을 영웅의 모험이라는 서사구조로서 파악해 볼 때 여기에 등장하는 사공과 여인은 영웅을 도와 모험의 과정을 완수하게 해주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吳越春秋』 卷 3 과 『東周列國志』 제 72 회에 보면 <日昭昭平侵已襲 與子期平蘆之 淡>라고 되어 있고 『越絶書』에 보면 <日昭昭, 侵以施, 與子期甫蓋之琦>라고 되어 있다. 『越絶말』 注에 의하면 <甫>는 보통 남자의 美稱이지만 여기에서는 語助詞로 서 『吳越春 秋 』 의 <平>와 마찬가지이다 . 그러나 『 오월춘추』에서 <琦>를 <消>라고 하여 <水波>라고 해석한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琦>는 <曲岸>으로 보아, <태 양이 너무 밝으니 해가 지기를 기다려( 日 太明, 待其沒) 갈대 강변에서 만나자(相期於 蘆之曲岸也)>라는 의미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했다. ® 이 부분은 『 越絶 書』 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 <心中 目 施, 子可渡河, 何不渡爲, 不 出將 奈 何.> ® 『東周列國志』 제 73 회 「任員吹蕭乞吳市 專諸進炎刺王僚』에 보면 당시 武昌 東北 通淮門 밖에 <解劍亭>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毋子쭙가 어부에게 劍을 주었던 곳이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 이 부분의 故 事 는 『吳越春秋』와 『越絶書』 등에 상세하게 나와 있고 앞에서 저자가 인용한 『東周列國志』에는 자세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ffi子吾와 어 부가 부르는 노래의 내용은 『東 周列國志』가 『吳越春秋』의 것을 그대로 수록하였음 을 알 수 있다 . ® 영웅의 모험담에 등장하는 조력자로서의 여성이 보통의 경우 나이많은 노파인 경우 가 대부분이듯이, 여기에서 任子쭙룰 도와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는 여자 역시 자신을 희생하여 영웅을 돕는 <위대한 어머니>의 또다른 형상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기독 교에서의 성모마리아도 그런 역할의 변형이고 그리스 신화에서 테세우스에게 실타래 를 주는 아리아드네, 아메리카인디언 민담의 卿妹女 (s pi der woman) 역시 그런 역할 을 담당하고 있다고 보이며 후세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베아트리체 역시 그런 형상 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 이 이야기를 소재로 한 후대의 희곡 작품으로 元나라 李끊gt l 이 撰한 『fii員吹面』라 는 작품이 있다. ® 『東周列國志』에 보면 信子吾가 피리로 부는 음악의 1 • 2 • 3 절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해 놓았다. <오자서여, 오자서! 송나라와 정나라를 빠져나와 의탁할 데 없이 고생 을 하니 처량하기도 하구나. 아버지 원수를 갚지 않고 어찌 살아가리? / 오자서여, 오 자서! 소관을 지나며 백발이 되니 놀랍고 두려움에 슬프기도 하지. 형의 원수를 갚지 않고 어찌 살아가리?/ 오자서여, 오자서! 갈대숲 나루터를 지나 율양 시냇가까지, 축 을 고비를 넘기며 오나라에 와, 피리불어 걸식하니 처량도 하구나 . 원수를 갚지 않고 어찌 살아가리?(任子쭙! ffi子吾! 跋涉宋鄭身無依, 千辛菓苦淡復悲! 父仇不報, 何以 生爲?/ 任子쭙! ffi子吾! 昭關一度맞嚴眉, 千驚萬恐 樓 復悲! 兄仇不報, 何以生 爲 ?/ ffi子吾! 恒子吾! 源花渡口深賜溪 千生萬死及吳陸, 吹蕭乞食樓復悲, 身仇不報, 何 以生爲?)> ® 복수를 위한 任子쭙의 치밀한 계획이 엿보이는 대목. 자신의 복수를 위해 야심가 公 子光울 돕는 但子吾의 지모를 잘 나타내 주고 있는 부분이다 . 『史記』, r ffi子吾列傳』 에 보면 專諸를 公子光에게 소개한 任子吾는 太子建의 아들 公子勝울 데리고 시골 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신의 야심을 숨기고 있다. <吳使公子光伐楚, 拔其鍾離 • 居災 而歸 任子吾說吳王僚曰 ; r 楚可破也. 願復遣公子光』 公子光謂吳王曰 ; r 彼任骨父 兄爲毅於楚 而勸王伐楚者, 欲以自報其뺨耳. 伐楚未可破也」 但 짬 知公子光有內志, 欲殺王而 自 立, 未可說以外事, 乃進專諸於公子光, 退而太子建之子勝耕於野 . > @ 『 史記』, r ffi子쭙列傳」에서는 吳王僚가 두 公子를 보내어 楚나라를 치느라 吳나라 내부가 비는 틈을 타 公子光이 專諸를 시켜 吳王僚를 살해하고 吳王 oorg 1가 되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五年楚平王卒 …… 吳王僚因楚喪, 使二公子將兵往襲楚. 楚 發兵絶吳兵之後,不得歸. 吳國內空,而公子光乃令專諸襲刺吳王僚而自立 , 是爲吳 王閩麻.> ® 『韓詩外傳』 輯炎元誌譯에 의하면 이 부분은 <묘지에 있던 사람들 중 무서워서 넘 어진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로 해석된다고 함 . 저자의 注에 보면 <墓上振愼者 不可勝數>라고 되어 있는데 <振慣>의 <振>은 <擬權>의 의미로, <慣>은 兪礎의 교석에 따르면 <債>이라고 하는데 <債>은 <疆{卜>의 뜻이다. 그러므로 <振慣>은 <놀라 넘어진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된다. ® 『吳越春秋』, r 閩間內傳』에도 이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吳越春秋』에는 <薔丘 訴>의 이름이 <淑丘訴>으로 나와 있으며 그 내용은 『韓詩外傳』과 거의 비슷하다. 薔丘訴이 밤에 要離의 집에 들어와 나누는 대화에서 薔丘訴이 要離에게 죽을 죄를 지었다며 칼을 들이대는 것은 비슷하지만 要雜의 대답에 약간 다른 점이 있어 인용해 본다. <…… 要與曰 ; 『吾無三死之過, 子有三不肖之情, 子知之平?』 訴曰 ; r 不知』 要

~ El ; 『 吾 듐子於千人之衆 T 無政嚴 一 不 肖也. 入門 不 峻, 登 堂無聲, 二 不 肖也. 前 拔 子 劍手j坐j卒 吾 頭 乃政大 言 , 三 不 肖也. 子有 三 不肖而威於我, 쌌不部哉?』 於是取 丘 訴 投劍而뱃臼 ; 「 吾 之勇也, 人 莫 敗毗占者, 離乃加 吾 之上, 此 天 下壯士也」> 제 2 장 ® 兩浙 지역의 } 냐 葬 풍습은 유명했던 모양이다 . 춘추시대 吳越 지역에서는 이미 귀신 을 믿는 습속이 있었고( 『 淮南子』 ; <荊人鬼, 越人磯.> 『說苑 』 ; <殿, 鬼俗也, 從鬼幾 聲. > 『 史記 』 , 땅禪 꿉 』 ; <越人俗信鬼 . >) 귀신과 조상을 후하게 대접하여야 한다고 여겼는데 이것은 孟 魂 不 死의 관념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죽은 자에게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접을 잘해 주어야 죽은 자가 편안하며 또 그렇게 하여야 살아있는 후손 들에게도 좋다고 믿었던 것이다(이것에 관해서는 徐吉軍, 「論宋代兩浙地區的喪葬習 俗」, 『民間文藝季刊 』 , 1990, 第 4 期 139 쪽 참조) . ® 부장이나 순장의 습속은 고대 수메르에서부터 이미 있어온 오랜 습속이다. 수메르의 우르왕국에서 발굴된 왕이나 왕비의 무덤들을 보면 평소에 쓰던 그릇들과 함께했던 비빈들이 함께 묻혀 있고, 이집트 투탄카멘 왕의 경우 쓰던 장난감까지도 함께 부장 되어 있다 (S te ven Bert man, 김석희 옮김, 『동굴에서 들려오는 하프소리』, 2·3·4 장 참조, 한길사, 1995). 중국의 신석기시대 유적지를 보더라도 良猪文化에서 大汶口 문화권의 토기 등이 부장품으로 발견되는 예가 있는데 이런 것으로 보아 부장이나 순장의 습속이 중국에 서도 오래되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 여기에서 저자가 <병법 13 권을 쓴 바로 그 손무>라고 말한 것은 그의 후손이며 역 시 병법을 썼던 孫眼과 구별짓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孫輯이라는 인물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며 그 역시 兵法을 남겼다는 것은 l fJ7 2 년 銀雀山에서 발견된 竹簡 兵法 덕분이었다 . 孫股이라는 인물의 실재성과 그의 兵法의 존재가 확인된 銀雀山의 발굴은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한편 손무가 합려의 사랑하는 비빈들을 앞세워 군 법의 엄함을 내보인 이야기는 『史記 』 , r 孫子吳起列傳』에 보인다. 궁녀들을 데리고 병법 시범을 보이는데 궁녀들이 히히덕거리며 말을 듣지 않자 합려가 아끼는 籠妃돌 을 대장으로 세웠는데, 그래도 규율이 잡히지 않자 그녀들의 목을 베어 군령을 업하 게 세웠다고 하는 이야기. 최근 홍익출판사에서 『손반병법』이 출간되었으므로 참조할 것(이병호역, 1996. 10.). ® <취(構)>의 음은 <취(醉).> 秀水縣 西南 七十里되는 곳에 있다. 秀水는 지금의 折 江省 嘉興縣이며 構李는 縣의 남쪽 四十五里되는 곳에 있다. ® 『史記』, r 任子晋列傳』에서는 합려가 죽은 곳이 姑蘇가 아니라 構李여야 한다고 했

댜 『 史記 l, 「 正義 」에 라고 되어 있다 ® 漠越春秋 』 下, 「 따沒入 臣 外傳」의 원문은 다음과 같댜 <越王因拜諸쌉大王之渡以 決吉凶 卽以手取其便與惡而쌉之. 因入 日 下囚句賤賀於大王 , 王之疾至己巳 日 有W:, 至 三 月 壬申病應 吳王旦 何以知之? 越王旦 下臣齒깁璋 UI 패萊者, 順穀味逆時氣者 死, 順時氣者生 . 今者臣籍쌤大王之洪, 其惡味苦旦楚酸, 是味也, 應春夏之氣臣以是 知之 吳王大稅타 仁人也, 乃叔越王得離.> @ 오자서는 월나라 왕이 바쳐온 이 神木을 받지 말라고 간하며 架 임금이 았恐롤 짓고 討 임금이 鹿登를 지어 멸망한 예를 들어 설명하였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 <子 쯤練曰,王勿受也.昔者架起았盤,討起鹿臺,陰賜不和,寒暑不時, 五穀不熟,天與 其災民虛 國變遂取滅亡, 大王受之必爲越王ffr毅. 吳王不聽, 遂受而起姑蘇之臺 , 三 年裝材 五年乃成, 高見二百里.> ® 이것을 소재로 한 明나라 梁辰魚 의 傳奇 작품으로 %분紗記』가 있다. ® 『吳越春秋』 에 보면 越王이 대부 種에게 < 오왕이 호색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으니 그것을 이용하여 계책을 꾸며 보라 > 하고 , 대부 種이 < 미녀 를 보내자>고 하는 대목 이 나오는데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 十二 年越 王 謂大夫種曰, 孤聞吳王器而好色, 惑亂況i而不領政事, 因此而 謀可平 . 種曰, 可破. 夫吳王器而好色, 宰器倭以戌心, 王 戱美女, 其必受之. 惟王選擇美女二人而進之. 越王 B, 善. 乃 ……> ® 본래 四部嚴刊本에는 <五板之뾰長高習之敎> 라고 되어 있으나 『太平御賢』 卷 343 에는 <五板>이 <五校>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이 더 정확한 것 같다. <校> 는 군대 의 일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五校> 라고 하면 각각의 군대를 가리킨다고 보면 될 것이다(張覺譯注, 『吳越春秋全譯』 참조, 貴州人民出版社, 1994). 제 3 장 ® 오자서는 越나라는 吳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언어와 습속이 같으니 서로 양립할 수 없으며 越나라는 바로 < 心腹之疾>이라고 비유하였다 . 그는 또한 吳나라가 越나 라를 치지 않고 齊나라를 먼저 치는 것은 호랑이가 무서워 새끼돼지( 獨)를 치는 격이 라고 주장하였다. ® 『史記』, r 越王句錢世家」에 이 대목이 묘사되어 있다. 오나라의 절반을 준다 해도 받 지 않았던 오자서가 이제 죽음에 이르게 되니 회한에 가득차 다음과 같이 말한다. <子吾大笑曰 …… r 我令而父覇, 我又立若, 若初欲分吳國半予我, 我不受, 已, 今若 反以謨珠我, 陸呼, 陸呼, 一人固不能獨立,』 報使者曰 …… 『必取吾眼置吳東門, 以 觀越病入也!』>

® 맷 Rc J, r 越王幼殘世象에 보면 범려가 떠나 齊나라에서 대부 種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나오는데 바로 이것과 같다. <盟鳥盡, 良弓藏 ; 校兒死, 走狗닷` . 越王爲人長 頭卽塚, 可與共患難,不可與共樂. 子 (可不去?> @ 범려가 토사구괭을 피해 월나라를 떠난 뒤 스스로 붙인 이름이 바로 <邸夷子皮>라 고 한다 . 이 부분에 관한 후대의 작품으로는 明代 梁辰魚의 {성奇 %는紗記』가 있고 浙江 會稽 지역이나 江蘇 蘇州 • 無錫 • 宜興 지역의 민간전설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 r 주진편 • 상』 제 3 장 역주 ® 참조. @ 에 관해서는 『史記』, r 越王句錢世家J 正義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越絶 云 …… 九術 ; -曰天事鬼 ; 二曰重財幣以道其君 ; 三 曰貴躍栗梨以空其邦 ; 四 El 造之好美以榮其志;五曰臨之巧匠, 使起宮室高臺, 以盡其財, 以敍其力;六曰責 其陝臣, 使之易伐;七曰亞其練臣, 使之自殺;八曰邦家富而備器利;九曰堅甲利兵 以承其幣.> ® 이 부분의 본래 구절은 <…… 造鼎足之美, 或入三峰之下>이다. 여기에서 <美>이 라는 것은 <堤>과 통하는 글자로서 일종의 墓道로 보인다. 『史 記』, 『衛世家』에 <共 伯入盤候美>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索隱에서 <美音延, 墓道>라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造鼎足之美>은 <鼎足形의 墓道를 만들었다>라고 해석해야 할 것 같 댜 한편 『越絶書』, r 外傳記地傳』에 <葬之三蓬下>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或入三峰之下>도 <三峰 아래에 묻혔다고도 한다>라고 해석해야 할 것 같으나 정 확하지는 않다. 袁阿는 이 구절을 앞의 <鼎足之美>과 연결지어 해석했다. ® 『史記』, 「越王句賤世家』 索隱에 보면 오왕이 화가 나서 오자서를 臨夷(말가죽 자 루)로 싸서 강에 던져넣으라고 명령하는 대목이 보인다 . <國語云吳王溫曰 …… r 孤 不使大夫得見」, 乃盛以邸夷, 投之於江也.> 여기에서는 <蝶魚皮>라고 되어 있는데, <缺魚>는 <큰 메기>를 가리킨다 . ® 오랜 기간에 걸친 오나라와 월나라의 전쟁, 숱한 반전 속에서 그 전쟁을 이끌어가는 합려와 부차, 구천, 그리고 그들을 보좌하던 영웅 오자서와 범려, 문종 둥의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의 트로이 전쟁을 연상시킨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와 그의 아들 파리 스, 그리고 영웅 핵토르가 그리스의 침입에 대항을 하고 그리스의 왕 메넬라오스와 그의 형 아가멤논을 비롯해 영웅 아킬레우스와 오딧세이 둥이 그 전쟁에 참여한다. 그들 사이에 얼키고 설킨 복수의 이야기는 오 • 월 두 나라의 오랜 전쟁과 비슷한 구 도를 지닌다. 또한 전쟁 후에 아가멤논이 겪는 고통이나 오딧세이의 고난 둥이 오자 서와 문종, 범려 둥의 비극적인 결말과 매우 흡사하여 홍미롭다. ® 『史記』, r ffi子晋列傳』 正義에 보면 越나라 군사들이 蘇州 동남쪽 三江口쯤에 壇울 세우고 백마를 죽여 오자서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구절이 나온다. <『吳地記』曰

…… 『越軍於 ii K1 · I| 東南 三 十 里 三 江 11, 又 1 ti 1 · r 三 里, 臨江 北 岸立培 , 殺 白 馬祭子行 , 杯 動酒 盡 後因 立 廟於此江 上, 今 其 側 有 浦 名上 培浦. 至晉會稽太守腐約 , 移 廟 吳郭 東 門內道南, 今廟見在」 > ® r 任子쭙列傳』 渠解에 의하면 짬山은 太湖 가에 있다고 했고(張 倭 曰 …… 『吾山 在 太 湖邊 去江不遠百里, 故云江山』), 正義 에 의하면 짬山은 太湖 근처 得 湖동쪽에 있는 산이라고 했다( 『 吳地記 』 云 ·… •• r 吾 山, 太湖邊吾湖東 岸 山, 西 臨吾 湖, 山 有 古丞 吾二王廟」). @ 중국에서는 역사적 실존인물이 神化, 半 神化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 李 氷이 水神 으로 등장하는 것이나 關羽가 神으로 받들어져 전국 각지에 그를 모시는 사당이 있 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인데, 역자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현상은 중국인의 종교적 성 향 , 죽 一神敎를 믿는 것보다는 그들의 민간신앙에 충실한 경향 때문에 생겨나는 것 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이름을 떨친 영웅을 神으로 섬기는 경향은 현대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데 毛澤東이 그런 대표적인 경우라고 생각된다. 毛 澤東 의 사진이 자신 올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으며 부적삼아 택시에 붙이고 다니는 모습이 중국인의 그러 한 성향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ffi.子쯤의 경우 역시 예외가 아니다. 『 國 語』 나 『 史記』에 나타나는 오자서는 역사적인 인물이지만 『 越絶 꿉』 에서 그는 이미 신화적인 인물로 변해 있다. 이러한 변화는 袁 河에 의하면 <민간전설에 의해 일어나는 것 > 이 라고 했다(『中國神話史 』 , 156 쪽, 上海文 藝 出版社, 1988.l0.). 역사인물인 그가 죽어 潮水의 神이 된 과정을 볼 때 그것은 善 神, 즉 神이 변하여 水仙이 된 것이라고 鄭 土有는 설명했다 (r 唯望洞天福地 』 , 288 쪽, 1991. 9, 陝西人民敎 育 出版社) . 말하자면 중국의 전통 관념에서 사람이 죽으면 鬼가 되는데 鬼는 다시 善 鬼와 惡鬼로 나뉘고 善鬼가 바로 神이라는 것이다. 오자서 같은 貸人은 인간이므로 죽어서 善 鬼가 된 것 이고 善鬼가 바로 神이니, 바로 거기에서 오자서가 水仙이 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 온 것이라고 하였다. ® 梅新林온 神仙이 된 범려를 呂尙과 비교, 呂尙이 < 隱 逸에서 벼슬로 나아간 > 경우 라면 범려는 <功을 이루고 물러난 > 경우에 속한다고 보았다( 『 仙話 』 , 141 쪽, 上海三 聯 書 局 , 1992.6.). ® 『史記』 , 『越王句錢世家』 菓解에 의하면 陶朱公家이 荊州 華 容 縣 서쪽에 있다고 되어 있다. <張華曰 …… r 陶朱公家在南君華容縣西, 樹碑云 是 越之范義也』> 한편 正義에 의하면 <盛弘之『荊州記』云 ·… .. 『荊 1 t|華容縣西有陶朱公家, 樹碑云 是越之范효』>라고 되어 있다. ® 『 史記』, 『越王句錢世家』에 의하면 范훑가 <陶>라는 곳에서 죽어 陶 朱 公이라고 불 리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故范효 三 徒, 成名於天下, 非荀去而已, 所止必成名, 卒老 死于陶 故世傳陶朱公.>

® 『 史 記 』 , r 越王句賤世 家 』에 보면(원주 20) 에는 빠져 있음) 범려가 자신의 이름을 <邸夷 子 皮>라고 하고 열심히 일을 하여 재산을 모았다는 구절( 自 謂邸 夷 子皮, 耕於 海탸 苦 身毅力)이 나오는데 그곳에 나오는 <邸 夷 子皮>라는 이름은 오자서와 관계 가 있다. 索隱에서는 <吳王이 子짬룰 죽여 邸 夷 로 싸서 강에 던져넣었다는 것과 관 계가 있는 것으로, 범려 자신이 죄가 있다고 생각해 자기 이름으로 삼은 것>이라고 하였다. @ 이러한 이야기가 시류에 흐르지 않고 신화의 격조와 비슷하다고 하여 袁阿는 <古仙 話 > 라고 아름붙였다(『中國神話史』, 132 쪽) . 역자의 견해로는 선화를 신화에 뒤떨어 지는 하위개념으로 파악하는 것보다는 시대의 변천에 따른 변화로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다(제 8 장 역주 ® 참조) . ® < 祝祝>의 중국어 발음은 , <朱朱>의 발음은 로 발음이 같다 . 제 4 장 ® 『 晋 書 』, 『張華傳』에 의하면 延平津은 福建 南平縣 동쪽에 있으며 劍津 • 龍津 • 劍 溪 라는 명칭이 있다. @ 이 이야기는 『습유기』 卷 10 에 보인다. <張華使雷煥爲 豊 城縣令, 堀而得之 . 華與煥 各 寶 其一. 拔以華陰之土, 光耀射人. 後華遇害, 失劍所在. 煥子偶其一졌 l, 過延平津, 劍 鳴 飛入水 及入水尋之, 但見雙龍線屈於潭下, 目 光如偏, 遂不政前取矣 . > ® 이것은 고대의 인신희생에 관한 전설이다. 고대의 인신희생에 관한 전설은 농경을 위한 것과 인간의 祈願을 위한 것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농경과 관련된 것으로는 주로 가뭄이나 홍수와 관련된 이야기들로 상권에 나왔던 河伯과 西門約, 李 氷과 二郞神에 관한 전설을 예로 들어 볼 수 있다. 한편 인간의 祈願과 관련된 것으 로는 여기 보이는 보검에 관한 이야기, 만리장성이나 다른 건축물을 쌓을 때 튼튼하 게 쌓기 위하여 인신희생을 했던 이야기 등이 보인다 . ® 이러한 것을 중국에서는 <獸勝信仰>이라고 한다. 이것은 그 기원이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세계 각국의 신화에서 이러한 人身희생의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人身희 생은 기본적으로 농경사회의 풍요와 관련되어 있는 제의의 일종으로 이해되는데 디오 니소스 축제에서 그 기본적인 형태를 살펴볼 수 있고 태평양의 하이누베레 신화에서 같은 유형을 찾을 수 있다. 한편 중국의 獸勝信仰 역시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혹은 사악한 기운을 피하기 위하여 인간이나 또는 다른 제물을 바치는 것인데, 李氷 傳說에서 水亂 h 에게 해마다 여인을 제물로 바쳐야 했다거나, 孟姜女傳說에서 만리장 성을 쌓을 때 만 명의 인간을 성 밑에 묻으면 성이 견고하게 쌓일 것이라고 하는 둥 의 이야기가 이러한 것에 속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미노스궁의 괴물 미노타우루스

에게 어린 남녀를 제물로 바쳤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 역시 그러한 유형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고대신화에서는 본래 인간을 제물로 바치던 것이었는데 간장과 막야 이야기에서는 손톱과 머리카락이라는 상징물로 바뀐다. 이 밖에 일찍이 半坡村仰部文化 遺跡에도 집짓는 기초에 人頭를 사용한 흔적이 보이며 登封告城鎭 龍山文化 遺跡, 鄭州 商城宮殿 遺跡에서도 人骨·의 혼적이 나타나고 있다(김선자, 『고대 중국의 인간희생제의와 신화전설」, 『中國語文學論集』第 9 !ii,t 1997. 8). ® 저자는 막야가 불 속에 뛰어들어 스스로를 바친 이야기를 <과장이 심하고 타당성이 없다>라고 평가했지만 역자가 생각하기에 이 이야기는 타당성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 더 원시형태의 이야기인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인간 자체를 희생물로 바친다는 이야기가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원시적인 사유형태에 가 깝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 원주 7) 에 나오는 <吳干之劍>에 대해서는 다른 논의가 있다. 죽 <吳나라 干將의 劍>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해석 이의에 <吳>와 <干>을 모두 나라 이름으로 보는 견 해이다. 『荀子』 楊僚注에 보면 <吳干將之劍>이라고 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抱注에 서는 <吳王使干將鑄之, 故云>이라 하여 <干將의 겁>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金正 烽는 몇 가지 다른 전적의 구절을 예로 들어 <干>이 國名임을 주장하였다. 죽 『管 子』, r 小問篇』에는 <昔者吳 • 干戰>이라 되어 있는데 兪礎은 『諸子評議』에서 <干, 古國名, 後爲吳邑>이라 하였다. 한편 『莊子』, r 刻意』에는 <夫有干 • 越之劍> , 『與 覽』, r 疑似篇』에는 <相劍者之所患, 患劍之似吳 • 干者>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 면 <吳>와 <干>은 모두 國名이고 劍을 잘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高注 『與 覽』에서 이미 <干>을 <吳나라의 干將>으로 잘못 해석했고 楊涼 역시 자의적으로 <干> 뒤에 <將>을 붙여 <干將>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 ® 『夢溪筆談』 卷 19 『器用』에 보면 吳釣는 칼날이 구부러져 있고 南鹽 지역에서 주로 사용하며 葛黨刀라고 부른다는 구절이 나온다. <唐人詩多有吳釣者, 吳釣, 刀名也, 刃灣 今南幾用之, 謂之葛黨刀.> ® 통치자의 권위와 억압에 저항하는 간장과 막야의 전설은 현대에까지 전해져 魯迅 潭劍』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간장과 막야의 전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韓氷妻의 전설을 중국대륙의 학자들은 대부분 <통치자와 피통치자 간의 첨예한 대립을 표현한 민간전설>로 파악한다(屈育德 , 『談談『授神記』中的民間創作』, 『神話 • 傳說 • 民俗』, 169 쪽, 中國文聯出版社, 1988.9.). ® 천하의 보검을 만드는 匠人이었던 干將은 후대 문학작품 속에서 <날카로운 칼>의 대명사가 되기도 하고 <위대하지만 불우한 인재>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 <聽談破秋 蓬 應物利干將>(唐, 李碩, 『送劉四』)에서 干將은 날카로움을 상징하고 있고 <我聞 音響異, 疑是干將偶>(元稙, 『說劍』)에서 干將은 빼어난 칼의 대명사이다. 그런가 하

면 <吳溪浚粹干!曆째, 却是猿聲斷客腸>(張祐, r 題戈賜館』)에서는 재주를 펼치지 못 하고 떠돌아다니는 비감한 존재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 ® 懷神記 』 卷 11 에 나오는 원문은 다음과 같다. <出麻, 望南山, 松生石 上 , 劍在其'/c'f.> @ 이 부분은 많은 논의가 필요한 대목이다. 맹濁記』에 실린 이 이야기가 우리 나라 f三 國史記 』 , r 高句麗本記」에 실린 주몽과 유리왕 이야기의 원래 형태라고 일부 중국학자들이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의 신화를 살펴볼 때 영웅이 어린 시절에 버려진다든가, 장성한 아들이 신표를 찾아들고 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야기는 이미 하나의 모티프가 되어 곳곳에 나 타나고 있다 . 그리스 신화의 테세우스 역시 커다란 돌 밑에 숨겨진 칼과 구두를 찾아 아버지인 아이게우스를 찾아가는데,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오도록 만드는 시험은 어느 민족 신화에서나 어렵고 힘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 그러나 일단 아들이 용맹스러움 이나 지혜로움으로 아버지를 찾아오면 그는 아버지와 화해를 하고 아버지의 계승자가 된다(북미 푸에블로인디언에게 전해지는 물항아리 소년의 이야기 역시 같은 범주에 든다 . 조셉 캠벨, 『세계의 영웅신화』, 沿 7-338 쪽). <거대한 돌 밑에 묻힌 칼> 혹은 <부러진 칼>은 그러한 주제의 구체적인 표현이 며 , 동서를 막론하고 일관된 상징성을 지니는 것인데, 유리왕 이야기가 『수신기』의 내 용을 참고하여 지어진 것이라는 견해는 지나친 아전인수식 해석이다. 참고로 유리왕 에 관한 『삼국사기 』 의 내용을 적어 본다 . <類利應, 歸問母氏, r 我父何人, 今在何 處?」 母曰: 「汝父非常人也. 不見容於國, 逃歸南地; 開國稱王. 歸時謂予 B ••• … 』 汝 若生男子, 則 言 我有迫物, 藏在七陵石上松下. 若能得此者, 乃吾子也. 類利聞之, 乃 往山谷索之, 不得, 俺而還 . 一旦在堂上, 聞柱礎間若有聲. 就而見之, 礎石有七稷. 乃授於柱下, 得斷효IJ一段, 遂持之 與屋智 • 句鄒 • 都祖等三人, 行至卒本, 見父王, 以斷劍 奉 之.> @ 『古小說釣沈려 인용된 「列異傳』에는 莫邪의 아들 이름이 <赤鼻>라고 나오는데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 <干將莫邪爲楚王作劍, 三年而成.劍有雄雄, 天下名器也, 乃以雄劍獻君, 藏其雄者 謂其妻 B ••••• • r 吾藏劍在南山之陰, 北山之陽 ; 松生石上, 劍在其中矣 . 君若覺殺我, 爾生男, 以告之』 …… 及至君覺, 殺干將. 妻後生男, 名赤 鼻 告之 赤鼻硏南山之松, 不得劍 ; 忽於屋柱中得之 …….> ® 멤神記』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 <莫邪子名赤比, 後壯, 乃問其母曰 …… r 吾父所 在?』 …… 王夢見一兒, 眉間廣尺, 言欲報 讐 .> ® 『授神記』는 志怪小說集의 대표로 일컬어지는 책이다. 이 책에 간장과 막야의 전설 이 실린 것에 대해 屈育德은 민간전설이 바로 지괴소설의 근원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 고 주장하였다(屈育德, r 傳奇性及民間傳說』, 『神話 • 傳說 • 民俗 』 , 80 쪽). 그는 <傳 奇性은 民間傳說의 예술적 허구의 독특한 표현>이라고 하여 傳奇式의 허구는 민간

전설이 역사 생활의 넓이와 깊이를 생동감 있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하였다 . 제 5 장 ® 당시 齊 나라의 稷下에는 神仙術이 유행하였고 당연히 方士둘이 많이 모여 신선의 도를 닦고 있었다. 魯나라의 孔子가 정통사상을 대표하며 당시 儒家의 대표자로서 제 자들을 모아 周나라 시대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강의를 하였던 데 반해, 齊나라에 는 儒家와는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또 다른 체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 지 상에서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인간사상의 자유로운 비상과 해방을 꿈꾸었던 神仙 思想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海岸文化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周나라로 대표되는 內陸 文化가 당시 통치계충에서 추구하던 官方철학이었다면, 齊 나라와 燕나라 동의 해안 지대에서 새롭게 일어난 신선사상은 인간정신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던 사람들의 전혀 새로운 사상체계였다 . 그것은 단순히 수련을 통해 장생불사를 꿈꾸며 신선이 되기를 원했던 방사들의 허황된 철학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자유로운 바상을 꿈꾸었던 전혀 새로운 학설이었던 것이다. ® 우리 나라의 『금오신화』에 나오는 r 만복사저포기』 역시 이것과 매우 비슷한 내용으 로 구성되어 있어 홍미롭다. ® 훗날 唐나라 白居易의 『長恨歌』에 小玉의 이름이 등장한다. 臨筑의 도사가 唐明皇 울 위하여 楊貴妃의 영혼을 찾아다니다가 海中 仙山에서 楊貴妃롤 찾아내어 그녀를 만나려 할 때, 楊貴妃를 시중드는 두 시녀가 등장하는데 그들이 바로 합려의 딸인 小 玉과 서왕모의 시녀였던 雙成이다. 韓終을 따라 신선술을 배우려다 죽은 그녀가 후대 문학 작품 속에서 神仙들이 산다고 하는 仙山에 등장하는 것은 매우 홍미로운 일이다 @ 『韓非子』 , 『難四凡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屈到唯斐 , 文王暗舊蒲非正味 也, 而二貸尙之, 所味不必美 . > ® 군대에 나가거나 부역에 끌려간 남편을 기다리다가 望夫石으로 변한 여인들의 이야 기 역시 통치자에 의해 피해를 입은 백성의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변형을 통해서 기 다림이라는 지속성을 유지해 간다는 점에서 한빙처 고사와 비슷한 면이 있다. 망부석 이야기는 전국 각지에 고루 분포해 있는데 몇 가지만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幽冥錄』 ; <武昌陽新縣北山上有望夫石, 狀若人立 . 相傳 ; 昔有貞婦, 其夫從役, 遠社國難 婦擔弱子 , 錢送此山, 立望夫化爲石, 因以爲名焉.> 『水經注』 ; <有思婦常登山望夫, 憂傷而死, 山木爲之柏稿 , 因名山爲女觀.> 『貞宇記』 ; <昔有人往楚, 累歲不遠, 其妻登此山望之, 久之乃化爲石.> 『 輿地紀勝』 ; <昔人行役未回, 其妻登山而望, 每登山, 輕以箱盛土, 積 日 累功, 潮 高峻 故名望夫山.>

® 幹氷妻의 옷이 찢어져 나비로 변했다는 이야기는 梁 lll{0 과 祝英台의 고사를 연상 시킨다. 발생시기가 조금 후대(최초로 기록된 것이 梁 元帝 때의 召 針t及 + 2 ) 라서 袁阿 의 책에는 서술되어 있지 않지만, 梁山伯과 祝英台의 전설은 지금까지도 중국인의 마음을 울리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梁山伯의 사당이 寧波에 실재로 존재하며 宜興 등지에도 梁祝의 유적이 있다. 서로 뜻이 맞아 사랑하던 두 젊은이 중 梁山伯은 구혼 울 거절당한 울분을 참지 못해 자살하게 되고 祝英台는 부모의 명령으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祝英台가 시집가는 날 梁山伯의 무덤가를 지나가 게 되는데, 갑자기 梁山伯의 무덤이 열리고 祝英台는 梁山伯의 무덤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런 뒤 무덤 앞에는 나무 두 그루가 합쳐져서 자라나고 두 마리의 아름다운 나비가 날아오르니 두 사람의 영혼은 영원히 함께하게 된 것이었다. <梁山伯, 祝英台, 皆東晉人,梁家會稽,祝家上炭, 同學於杭者 三 年, 情好若密, 祝 先歸 梁後過上炭尋訪, 始知爲女子 , 歸告父母, 欲嬰之, 而祝已許馬氏子矣. 梁恨然 不樂 쨩不復嬰 復三年, 梁爲部令, 病死, 遺言葬淸道山下, 又明年, 祝爲父所過, 適 馬氏, 腹欲求死, 會過梁葬處, 風波大作, 舟不能進, 祝乃造梁塚, 失聲哀楊, 塚忽裂. 祝投而死焉 塚復 自 合, 馬氏聞其事於朝, 太傅謝安贈爲義婦 . 和帝時, 梁復顯神異助 戰伐, 有司立廟於郞縣. 廟前橘二株相抱, 有花姬蝶, 橘짧所化也, 婦孫以梁祝稱之, 接梁祝事異矣, 金樓子及會稽異聞皆載之.>(明, 徐樹丕, 『識 小錄』)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죽어서야 이루게 된다는 상징으로 梁祝故事에 동장 하는 나비는 한빙처의 이야기에서도 < 자유로운 사랑>을 뜻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세 계에서 이루지 못한 꿈의 상징인 것이다. ® 사랑하던 두 사람이 죽어 그 영혼이 나무가 되고 나비가 되었다는 것은 고대 애정고 사의 전형적인 유형 중의 하나이다. 漢代의 『孔雀東南飛』, 宋代 『樂府詩集』의 『華山 畿』 등이 그런 종류이다. ® 李商隱의 詩 중에 이것과 비슷한 이미지의 작품이 있다. <靑陵臺幹日光斜, 萬古貞 魂俺暮霞 莫誘韓惡爲扶堤 等開飛上別枝花 .>(r 靑陵臺」, 『玉鈴生詩菜菱注』 卷 3, 618 쪽, 里仁書局, 1980) ® 사람이 죽어 그 영혼이 새나 나무로 변한다는 모티브는 세계 각국 신화에서 자주 나 타난다. 중국 신화에서만 보더라도 少女가 물에 빠져 죽은 영혼이 변한 精衛鳥, 望帝 杜宇의 영혼이 변한 杜鵬, 태양과 빠름을 다투다가 죽은 寄父의 지팡이가 변해서 된 鄧林, 崔尤의 피가 변한 단풍나무 둥 여러 가지가 있다. 신화에 나타나는 이러한 變 形들은 인류 초기의 보편적 관념인 영혼불사의 관념과 그 맥락이 닿아 있다. 비극적 인 결말로 끝나는 중국 애정전설은 주인공의 죽음으로 현실적인 파국을 맞이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대부분 꽂形울 통해 영원한 생명을 획득한다. <變形을 통해 時空올 초월하는 영원한 존재의 상태로 변하는 전설은 어쩌면 옛날 봉건사회를 살아가던 사

람들에게 끝없는 위로를 주었을 것(王孝廉, r 싸J于石頭的古代( 마[ l 』, 『 中國的神話世 界J, 195 쪽, 作家出版社, 199 1. 3.)> 이다. ® 屈育德은 慣神記 』 卷 11 에 기록된 한빙처의 전설과 비슷한 이야기로 卷 15 에 나오 는 王道平의 이야기와 河間郡男女의 이야기를 들었다(『談談야젖神記』中的民間fiiJ 作」, 『神話 • 傳說 • 民俗J, 168쪽). 그러나 이것들은 <사랑의 굳건함>이라는 면에서 는 비슷한 점이 있으나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정신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선상에 둘 수는 없는 이야기들이라고 생각된다. 王道平의 이야기를 보자 . 왕도평은 같은 마 울의 父 n 兪와 부부가 되기로 언약한다. 그러나 징집되어 떠돌아 다니느라 9 년 동안이 나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父 n 兪의 부모는 딸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고 억지로 시집간 그녀는 삼 년 동안 왕도평을 그리워하다가 죽고 만다. 나중에 돌아온 왕도평 은 그녀의 무덤에 가서 울게 되고 무덤을 파서 그녀를 꺼내니 그녀가 다시 살아나 백 삼십 살이 되도록 함께 살았다고 한다 (r 王道平妻』, 『投神記』 卷 15). 河間郡男女 이야기 역시 비슷한 내용이다. 河間郡에 서로 사랑하던 남녀가 살았다 남자가 군대에 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부모의 핍박에 못 이긴 여자는 다른 데 로 시집을 가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들어 죽게 된다 . 나중에 돌아온 남자가 무덤 을 파헤치니 그녀는 다시 살아나게 되고 두 사람은 함께 살게 된다 . 본래의 남편이 그 녀를 데려가려고 하였으나 두 사람의 사랑에 감동한 조정에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아 두 남녀는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r 河間郡男女」, 떄몇神記』 卷 15). 이 두 가지 이야기와 한빙처의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금방 구별해 낼 수 있다 . 卷 15 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傳奇性이 강하여 기이하지만 한빙처의 이야기에 나 타나는 <悲壯美>가 없다. 또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보다 는 나무와 새로 변하는 <嬰形>의 과정을 통하여 사랑을 이어간다는 것이 훨씬 더 <사랑의 굳건함>을 나타내기에 적절한 표현방법인 것이다 . @ 부부의 애정이 굳건하여 죽어서도 나무가 되어 서로 엉킨다는 이야기는 『述異記』에도 보인다. 물론 『술이기』에 등장하는 부부는 외부적인 억압에 의해 한빙 부부처럼 갈라진 경우가 아니고 서로 깊이 사랑하던 부부가 죽음으로 인해 서로 갈라지게 된 경우이므 로 업밀하게 말하면 한빙처의 경우와는 다르다고 하겠다. 그러나 남편인 육동미(陸東 美)와 아내인 주씨(朱氏)가 죽어 가래나무가 되어 뿌리가 서로 엉켰다거나(雙粹) 또는 그 나무에 두 마리 기러기(雙鴻)가 살았다는 내용 둥이 한빙처의 전설과 흡사하여 인 용해 본다. <吳黃龍年中, 吳都海鹽有陸東美, 妻朱氏, 亦有容止, 夫妻相重, 寸步不 相離 時人呼爲 r 比眉人」, 夫婦云皆比翼, 恐不能佳也. 後妻死, 東美不食求死, 家人 哀之,乃合葬.未一歲,家上生粹樹,同根二身,相抱二而合成一樹,每有雙鴻,常宿 於上 孫權聞之堯暎, 封其里曰 ; 『比眉墓』, 又曰 r 雙粹』 後子弘與妻張氏, 難無異, 亦 相愛慕 吳人又呼爲 r 小比眉』>(『述異記』, 魯迅, 『古小說釣沈』上冊, 169 쪽)

@ ,h})k 妻의 옷이 찢어져 나비로 변했다는 이야기는 梁 111{(1 과 祝j님 3 의 고사를 연상 시킨다 . 발생시기가 조금 후대(최초로 기록된 것이 染 元帝 때의 召針嬰子 』 )라서 袁 In j 의 책에는 서술되어 있지 않지만, 染 11l f!'. 1 과 祝英台의 전설은 지금까지도 중국인의 마음을 울리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築山f!'. I 의 사당이 ,1%波에 실재로 존재하며 宜興 등지에도 梁祝의 유적이 있다. 서로 뜻이 맞아 사랑하던 두 젊은이 중 梁 LLl{0 은 구혼 을 거절당한 울분을 참지 못해 자살하게 되고 祝英台는 부모의 명령으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祝英台가 시집가는 날 梁 11110 의 무덤가를 지나가 게 되는데, 갑자기 梁 II 廉 l 의 무덤이 열리고 祝英台는 梁 LLI1 白의 무덤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 그런 뒤 무덤 앞에는 나무 두 그루가 합쳐져서 자라나고 두 마리의 아름다운 나비가 날아오르니 두 사람의 영혼은 영원히 함께하게 된 것이었다. <梁山伯, 祝英台, 皆東晉人 , 梁家會稽, 祝家上炭, 同學於杭者 三 年, 情好莊密. 祝 先歸 梁後過 l 가성 g社)j, 始知爲女子 , 歸告父母, 欲姿之, 而祝已許馬氏子矣. 梁恨然 不樂 짱不復姿 復 三 年, 梁爲鄧令, 病死, 迫 言 葬淸道山下. 又明年, 祝爲父所遜, 適 馬氏, 腹欲求死, 會過梁葬處 風波大作, 舟不能進, 祝乃造梁塚, 失聲哀楊, 塚忽裂. 祝投而死焉, 塚復 自 合 馬氏冊其事於朝, 太傅謝安贈爲義婦. 和帝時, 梁復顯神異助 戰伐, 有司立廟於鄧縣 . 廟前橘二株相抱, 有花蝶蝶, 橘짧所化也, 婦器以梁祝稱之. 接梁祝墓異矣, 金樓子及會稽異聞皆載之.>(明, 徐樹丕, 댑茂小錄』)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죽어서야 이루게 된다는 상징으로 梁祝故事에 등장 하는 나바는 한빙처의 이야기에서도 <자유로운 사랑>을 뜻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세 계에서 이루지 못한 꿈의 상징인 것이다. ® 사랑하던 두 사람이 죽어 그 영혼이 나무가 되고 나비가 되었다는 것은 고대 애정고 사의 전형적인 유형 중의 하나이다. 淡代의 『孔雀東南飛』, 宋代 『樂府詩集』의 『華山 畿』 등이 그런 종류이다. ® 李商隱의 詩 중에 이것과 비슷한 이미지의 작품이 있다. <靑陵臺鮮日光색 萬古貞 魂僚꼼霞 莫課韓惡爲缺堤 等開飛上別枝花.>(靑陵臺」, 『玉爵生詩集麥注』 卷 3, 618 쪽, 里仁書局, 1980) ® 사람이 죽어 그 영혼이 새나 나무로 변한다는 모티브는 세계 각국 신화에서 자주 나 타난다. 중국 신화에서만 보더라도 少女가 물에 빠져 죽은 영혼이 변한 精衛鳥, 望帝 杜宇의 영혼이 변한 杜 no, 태양과 빠름을 다투다가 죽은 寄父의 지팡이가 변해서 된 鄧林, 皇尤의 피가 변한 단풍나무 둥 여러 가지가 있다. 신화에 나타나는 이러한 變 形들은 인류 초기의 보편적 관념인 영혼불사의 관념과 그 맥락이 닿아 있다. 비극적 인 결말로 끝나는 중국 애정전설은 주인공의 죽음으로 현실적인 파국을 맞이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대부분 變形울 통해 영원한 생명을 획득한다. <變形을 통해 時空을 초월하는 영원한 존재의 상태로 변하는 전설은 어쩌면 옛날 봉건사회를 살아가던 사

華山으로 가 그를 찾아 秦나라로 데려오게 하였다고 한다. 이야기의 情節 등이 『列 仙傳』의 그것보다 훨씬 仙話的 색채가 농후하다. ® 농옥과 소사, 봉황대 동의 전설은 후대 문학 작품에 많은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예 를 들면 杜甫의 r 崔附馬山亭冥菜」 <蕭史幽柄地, 林間路鳳毛>, 白居易의 『和夢游 春」 <秦家重蕭史, 彦輔捨衍叔> 둥이 있다. 제 7 장 ® 『史記』 卷 69 潭秦列傳』에 보면 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染解에는 『風俗通義』를 인용하여 <鬼谷先生, 六國 時縱橫家>라고 하고 있다. 한편 索隱에 의하면 鬼谷은 地名이며 扶風池陽 • 類)||陽 城에 모두 鬼谷樓가 있는데 鬼谷先生은 바로 그곳에 살아 이름이 그렇게 된 것이라 고 하였다. @ 『史記』 卷 70 璟儀列傳」에 의하면 張儀는 魏나라 사람으로 蘇秦과 함께 鬼谷先生 밑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학술방면에 있어 蘇秦은 張儀에 못 미친다고 스스로 이야기 하였다고 한다(張儀者, 魏人也. 始堂與蘇秦供事鬼谷先生, 學術, 蘇秦 自 以不及張 儀). 그러나 蘇秦의 보이지 않는 도움으로 훗날 秦나라에서 재상 노릇을 하게 된 張 儀는 자신이 蘇秦에게 못 미친다고 말하며 蘇秦이 살아있는 동안은 그에게 대항하지 않았다. ® 모두가 古맙의 이름이다. 『三壇』은 山壤 • 氣壇 • 形頃을 일컫는다. 山項은 天皇伏羲氏의 易으로 連山이라 고 하고 氣壇은 人皇 神農氏의 易으로 歸藏이라 하며, 形壤은 地皇 軒軸氏의 易으로 周易이라 한다. 모두가 五代 때의 道家者들이 古代에 가탁하여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五農려 대해서는 孔安國이 『尙書』 序에서 <少昊 • 1/m碩 • 高辛 • 唐炭之書, 謂 之五典>이라 하였다. 『八索』 역시 古書의 이름으로 <索>은 <素>로서, 素王之法을 가리킨다. 孔安國 은 <八卦之說, 謂之八索, 求其義>라 하였다. 『九丘』에 대해서도 孔安國은 <九州之 志, 謂之九丘. 丘, 緊也, 言九州所有, 土地所生, 風氣所宜, 皆緊此書也>라 하였다. @ 『論衡』, r 答侯篇』 ; ® 『論衡』, 溶侯篇』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蘇秦張儀縱橫習之鬼谷先生, 堀地爲抗, 曰 ; r 下, 說令我泣出, 則兩分人君之地』 蘇秦下, 說鬼谷先生泣下治傑, 張儀不若.> @ 『史記』, 『張儀列傳」에 보면 張儀가 蘇秦의 박대에 분노하여 秦나라로 떠나버리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張儀於是至趙, 上誕求見蘇秦, 蘇秦乃誠門下人

不爲通 又 (史 1〈 得去者數 日 . 已fij見之, 坐之堂下, 賜伐妄之食. 因if1 i數讓之曰 ; r 以 子之材能 乃自令困듀至此 . 吾 寧不能 言 而富貸子, 子不足收也」 謝去之. 張儀之來 也, 自 以 爲故人 , 求益 反見귬 怒 念諸侯莫可*, 獨秦能苦趙, 乃遂入秦.> ® 『史記』 , 璟儀列傳J에 보면 蘇秦은 스스로가 張儀보다 못하다고 말하지만(蘇秦已 而告其舍人曰 ; 「張儀 天下賢士, 吾始弗 如也. 今吾幸善用, 而能用秦柄者, 獨張儀 可耳 ……』), 張儀가 작은 즐거움에 안주하지 않고 큰일을 도모할 수 있도록 일부러 張儀를 분노하게 만들어 秦나라를 향해 길을 떠나도록 한 것을 보면 그의 식견이 아 무래도 張儀보다는 뛰어난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蘇秦의 우정을 이해하여 蘇秦의 合縱策에 대항하지 않았던 張儀의 도량 또한 넓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張儀는 다 음과 같이 蘇秦을 평하였고 蘇秦이 살아있는 동안은 자신의 連橫策을 추진하지 않았 다. <張儀曰 ; n 差平, 此在吾術中而不悟, 吾不及蘇君明矣 ; 吾又新用, 安能謀趙平? 爲吾謝蘇君, 蘇君之時,儀何敗言.旦蘇君在, 儀寧渠能平!」> ® 『論衡』, r 感虛篇」의 이어지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傳書言 ; r 燕太子丹朝于秦, 不 得去, 從秦王求歸. 秦王執留之, 與之짬 B ;‘使g ...... '當此之時, 天地祐之, 日爲再 中, 天雨栗 鳥白頭, 馬生角, 蔚門木象生肉足. 秦王以爲聖, 乃歸之』> ® 『論衡』, 德處다의 원문을 보면 세 가지의 조건이 나오며, 燕太子 丹은 <天地>의 도움으로 그것을 해결할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고대에 白虹은 일반적으로 兵器를 뜻하고 日은 君主를 상징했다. 그러므로 흰 무지 개가 태양을 뚫고 지나간다는 것은 君主가 살해당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論衡』, 『感虛타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荊卓可爲燕太子謀刺秦王, 白虹貫日. 衛先 生爲秦畵長平之事, 太白儉昴. r 此言精誠感天, 天爲變動也. 夫言白虹貫日, 太白勉 昴, 質也 言荊阿 之謀 衛先生之畵, 感動皇天, 故白虹貫日, 太白散昴者, 虛也」> ® 易水에 荊卓可 일행이 도착하여 강을 건널 때, 荊며1iJ의 친한 친구 高潮離가 筑을 두드 리고 荊阿가 노래를 부르니 그것이 바로 <易水歌>이다. <바람은 소슬하니 불고 역 수의 물 차가운데, 장사는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風蕭蕭分易水寒, 壯士一 去分不復還)!> 그 비장한 노래 소리에 하얀색 의관을 차리고 나온 태자 일행이 모두 눈물을 흘렀다고 한다. 제 8 장 ® 秦始皇온 자신을 股이라 하지 않고 眞人이라고 칭했다. 그가 이처럼 신선사상에 관

심을 갖게 된 것은 不死에 대한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의 시대풍조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 不死의 관념은 일찍이 춘추시대 이후 줄곧 있어온 것이었고, 전국시대 稷下에는 이미 五行說이 유행하고 있었으며 秦 代에 이르면 신선사상은 표면으로 나타나 제왕과 귀족, 일반 백성을 막론하고 모두의 관심을 끌며 매우 성행하게 된다 . 그것은 周代 이후의 내륙문화에 대립되어 齊 • 魯 • 燕 등지에서 형성된 해안문화로서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을 대표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구체적인 표상은 神仙이다. 하늘을 날아다니며 자유로이 이동하는 신선 은 인간 정신의 해방을 의미하며,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 것은 원시시대 이래 인간 의 가장 보편적인 관심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진시황이 신선사상을 추구했던 것 역시 당시 시대풍조를 반영하는 사회현상의 일부분으로 해석해 볼 수 있 지 않을까 . ® 呂思勉이나 袁阿 등은 不死의 仙藥이 있다고 하는 三 神山전설이 해양지역에 자주 나타나는 신기루 현상 때문에 등장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신기루 현상은 해안지역 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므로 三神山전설이 왜 해안지역에 성행했는가 하는 것을 설 명하기에는 부족하다 . 한편 聞一多는 그 기원을 昆命山에서 찾고 있는데 그것 역시 충분한 해답을 주지는 못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昆命山울 중심으로 한 不死思想 에 해안지역에 전해져 온 三 神山전설이 합쳐져 이루어진 종합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 된다 . ® 『史記』, 땅禪 書 」에는 齊 威王 때부터 三神山전설의 유혹 때문에 대규모로 해상에 서 求仙활동을 벌였던 기록이 나온다. 그러므로 齊 威王이 재위하던 전국시 대 중기 이전에 이미 蓬萊 三神山전설은 齊나라 燕나라 일대에 상당히 유행하고 있었다는 것 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山海經』 둥에서 이미 보였던 <不死>라는 관념과 昆命山 의 不死藥 동의 이야기가 전국시대 이전에 널리 퍼져 있던 三神山전설과 합쳐져 三 神山에 長生不死의 명약이 있다는 전설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 구나 齊나라 지역은 바다에 접해 있어 사상이 개방적이었고 해양의 신기루 동이 사람 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이며 그것이 稷下에 신선사상이 성행하게 된 요인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중국의 神仙傳說울 <서쪽 곤륜계통>과 <동쪽 봉래계통>의 두 가지로 구분짓는 것이 대체적인 추세였으나, 梅新林은 <서쪽 곤륜계통>의 신화가 서 쪽 完族의 東遷에 따라 동쪽의 齊땅으로 유입되었으며 東潮 과정에서 곤륜신화가 仙 話化된 것이라고 설명하며 <서쪽 곤륜계통>의 신화에 <동쪽 蓬萊 大人전설>이 합 쳐져 새로운 <蓬萊 仙話계통>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仙話』, 上海三聯出 版社, 1992.6.) 이 는 매우 합리적인 설명이라고 생각된다. ® 安期生에 관해서는 『史記』, 『樂毅傳』 太史公曰에 河上丈人의 제자인 神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抱朴子』에도 服食울 하고 金醫玉液을 먹어 일천 년을 살았다고 서

술되어 있다. ® 이 밖에 郭撲의 遊仙詩에 <安期棟五石>이라는 구절이 있고 蘇東坡의 r 過萊 '} | · I 雪 後望 三 山」에도 안기생이 등장한다. @ 鄭土有가 수집해 놓은 『中 國仙話』에 의하면 안기생의 이름은 鄭安期이며 山東 珉 班人이라고 하였다(鄭 土有 , 陳 II 堯勤, r 安期生成仙」, 『中國 仙話 』 , 102 쪽, 上海文藝出 版社, 1990.3.). @ 기록에 의하면 안기생의 자취는 중국 전역에 걸쳐 있다. 袁河가 인용한 『賈子說 林 』 에는 河南이라는 지역이 나오고 안기생이 山東사람이라고 되어 있지만 대屈國志』에 보면 湖南 九 疑山 에서 안기생의 제자 馬鳴生이 안기생에게서 金液神丹울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 또 『嶺表錄異』 에 의하면 廣州에도 안기생이 승천한 곳인 玉島閣이 라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만 보아도 그 전승 지역이 넓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인용한 『中國 仙話 』 에 나오는 이야기 역시 廣州지역에서 채록한 것이다. ® 鄭安期는 본래 진시황 때의 의술이 뛰어난 方士였다. 그가 어느 해 진시황이 병든 것을 고쳐 주니 시황이 그를 곁에 두고자 하였다 . 그러나 그는 <천년 뒤 봉래산으로 찾으러 오라>는 말만 남겨놓고 떠나버렸다 . 그리고는 羊城으로 가 白雲山에 머물며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술을 베풀었는데 가난한 많은 사람들을 살려냈다고 하여 <安期生>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어느 날 어떤 가난한 아이가 울며 자기 아버지 가 병에 걸렸다고 찾아왔는데 그 병은 九節舊蒲를 먹어야만 낫는 병이었다 . 안기생은 白 雲 山을 뒤진 끝에 마침내 그 귀한 약초를 구해 그 병자를 살려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진시황이 불로장생의 영약인 그것을 진상하라고 명령하니 할 수 없이 다시 산으 로 들어갔다 . 九節葛蒲를 찾아내어 한 그루를 꺾어 자신이 먹고 다시 한 그루를 꺾으 려 하니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시황에게 그것을 바치는 것이 부질 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닫고 절벽 아래로 투신하였다 . 그러나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白鶴이 그를 태우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안기생이 승천한 그 날이 음력 7 월 24 일이었 다 . 그래서 廣州 지역에서는 그날을 <鄭仙誕>이라 하고 白雲山에 사당을 지어 <鄭 仙祠>라 하였다(韋邦儀, 黃兆雄講述, 葉春生收集整理, 傳承地域 ; 廣州, 『中國仙 話』, 102-104 쪽). ® 안기생과 관련된 민간습속으로는 廣州지역에서 행해졌던 <游白雲> 행사를 들 수 있다. 음력 7 월 15 일에 시작해 7 월 24 일이 되어야 비로소 끝났던 행사인데 그날이 되 면 남녀노소 모두가 白雲山 鄭仙祠를 찾아갔다. 九節舊蒲를 찾아헤매던 鄭安期가 신선이 되어 승천한 이후 매년 7 월 15 일이면 백 운산으로 돌아와 5 백 명을 神仙으로 만들어 준다고 하였다. 그래서 해마다 7 월 15 일이 되면 사람들이 백운산으로 놀러와 노숙을 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모두 안기생을 만나 자기도 신선이 되고 싶었기 때문 (?)이다(陳寶善, r 游白雲』, 『民俗』, 巫期, 鄭土有, 『唯望洞天福地』, 232 쪽에서 인용).

® 일반적으로 神仙傳說에 나오는 仙界는 세 가지로 분류된댜 첫째가 天上仙界로 天 宮인데 이것은 天仙들이 사는 곳이다. 天 터山界 관념의 형성은 비교적 늦어 漢魏時 代로 추측된다. 둘째는 地上仙界로 海中仙島와 洞天福地가 여기에 해당된다. 海中 仙島는 바로 蓬萊 方丈 등의 三 神山, 五神山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淡나라 말기에 이르러 十洲 三島 계통을 형성하게 된다. 셋째는 水中仙界로 水中의 龍宮이 이것에 해당된다. 한편 이 책에 보이는 祖써 I 는 바로 두번째 海中仙 島 에 해당되는 十洲 중의 하나이다. 十洲i라는 것은 祖洲 • 濕洲 • 玄洲 • 炎洲 • 長洲 • 元洲 • 流洲 • 生 8) 사 • }(싸麟 洲 • 緊窟洲 등인데 祖김서는 동해에 있다고 하며 그 위에 不死草가 있어 그것을 얼굴 에 덮으면 起死回生하고 먹으면 長生不死한다고 하였다. 그러던 것이 秦淡時期에 이르면 동굴 속에 仙景이 있다고 하는 관념이 보편화되는데, 여기에서 마침내 洞天福 地體系―十大洞天, 三十六小洞天, 七十二福地 개념이 생기게 된다(鄭土有, r ,堯 望 洞天福地 』 , 얽 -104 쪽 참조, 陝西人民敎育出版社, 1991. 9. ). ® <不死에 대한 동경과 추구>는 중국 신화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신화의 보 편적인 모티프 중의 하나이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섬, 섬 위에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불사수(그것은 보통 우주목의 개념으로 나타난다), 불사의 영약이나 생명의 샘물 을 먹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은 고대인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던 관념 이었다. 수메르 신화의 영웅 길가메쉬가 친구 엔키두의 죽음을 보고 슬퍼하며 찾아해 랬던 것이 바로 바닷속에 있다는 불사초였으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마셨던 암브로시아 (ambros i a) 역시 불멸의 음료였다. 또한 인도 신화에서 인드라가 즐겨 마 셨던 소마 (soma) 를 비롯하여 브라마와 비쉬누가 불사의 은하수를 저어 만든 것도 역 시 불사의 영약 암리타(amrita)였으니, 세계 각국의 영옹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궁 극적인 목적이 바로 불사약이었던 경우는 비일비재하다(조셉 캠벨, 『 세계의 영웅신 화』에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참고로 볼 만하다 . ). @ 보통 <方士>라는 것은 神仙說을 행하며 奇方異術울 지닌 사람이라고 여겨지는데 그 내력에 대해서는 고대의 巫現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神權政治 시대에 巫現온 제사를 관장하고 정치상으로도 권력이 막강했던 존재였으나, 정치와 제사가 분리되면서 王權이 강화되고 巫權이 점차 약해지자 이때부터 方士들은 정치 무대에서 사라져 점차 棟丹과 奇藥을 구하는 <明悟道術之士>가 된다. 그들은 不死 사상을 계승하면서 황제들의 신임을 얻어 세력을 넓혀 秦漢시대에는 神仙사상의 강 력한 전파자가 된다. 그러다가 東漢 말기 道敎가 일어나면서 신선사상과 方術 둥이 도교에 흡수되고 方士는 점차 道士라는 명칭으로 변하게 된다. ® 이처럼 徐福이 멀리 떠나 돌아오지 않은 것과 韓終 • 盧生 둥이 진시황을 비방한 것 이 바로 그 유명한 抗儒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라고도 한다(『史記』, 『秦始皇本紀』). ® 上海古籍出版社에서 나온 『神仙世界』, 『屠山老母』篇에 보면 兪越의 『小浮梅閑

話 』 의 기록 이의에 여산노모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가 보인다. 우선 소설 내苗「山話 嬰梨花』를 보면 여주인공 奧梨花에게는 비바람을 부르고 산을 옮기며 바다를 뒤집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는데 그런 번리화의 스승이 바로 여산노모였다고 한다. 또 李白 이 젊은 시절 공부를 할 때 시냇가에 앉아 절구공이로 바늘을 만드는 할머니를 보고 분발하여 열심히 공부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할머니가 바로 여산노모였다고 하기 도 한다 . 한편 唐나라 때 李茶이라는 사람이 神仙의 道롤 좋아하여 명산대천을 찾아 다니며 方術을 공부하였다. 어느 날 腐山 虎口岩 石室에서 黃 帝의 『 陰符經』을 얻었 는데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 그러던 중 羅山에 갔다가 머리 가 하얀 童顔의 老母를 만났는데, 그녀가 중얼거리는 것이 『 陰符經』인 것을 듣고 어 찌 그것을 아느냐고 물으니 자신이 『陰符經』을 안 것은 이미 1080 년 전의 일이라고 하였다. 그는 그녀에게서 『陰符經』 3 百字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노모가 만 들어 준 보리밥을 먹고 나서부터 곡기를 끊고 수련을 하였는데 그 후 아무도 다시 그 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淸나라 때 興自珍이 林則徐에게 준 詩인 『己亥雜詩』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我有陰符三百字, 嫌丸難寄借雄文.>( 上 海古籍出版社 編 『神仙世界 』 , 283 쪽, 1990.) ® 秦 始 皇 에 관한 이상의 전설들은 仙話의 범주에 속한다. 仙話는 고대에 神話가 발생 했던 것과는 다른 思惟條件과 사회조건 아래서 발생하므로 근본적으로 신화와는 다 르다. 茅眉이 일찍이 『中國神話硏究初探』에서 <方士들이 사람들의 求仙心理를 움 직여 만들어 낸 江湖口誤>이라고 仙話를 규정지은 이후, 아 책의 저자인 袁阿 역시 仙話를 <中國神話의 末流>(『神話故事新編』), <道士들의 엉터리 이야기>( 『 中國古 代神話』)라고 평하했다 . 물론 袁氏는 이후 신화의 범위를 논하면서 이처럼 무조건적 으로 仙話를 부정하던 견해에서 조금 벗어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仙話를 神話의 일개 곁가지 정도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仙話를 神話보다 낮은 것으로 폄하하는 견해는 이제 수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장생불사에 대한 욕망은 인류의 보편적 심리였으므로 <仙話가 다만 통치계급만이 추구하던 장생불사 사상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謝選駿, 『神話與民族精神 ~ . 383 쪽, 山 東文藝出版社, l

鄭- k 有 같은 이는 仙話가 神話와는 다른 발생시기와 내용, 창작방식, 사유방식을 지 닌 민중문학 작품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II 店望洞天福地』, 1991 .l. ® 진시황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도 일정하지가 않다.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것으 로 유명한 만리장성과 진시황룡, 아방궁 등은 그의 전제군주로서의 일면을 적나라하 게 드러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중국 최초의 통일왕국을 이룩했다는 긍정적인 평가 가 교차되고 있는 것아 사실이다. 孟姜女傳說이나 民歌 등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폭 군이었다는 이미지를 갖게 되지만 超山粧 이야기는 그가 神性을 지닌 英雄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내보여 주고 있다 . 채찍을 휘둘러 바윗돌을 움직여 城을 쌓을 수 있게 하였다는 이야기는 <그를 神性英雄으로 만들어 주는 가장 구체적인 寶物>인 것이다 (袁fnJ, 『中國神話史』, 164 쪽). 제 9 장 ® 葬族傳說 중에 <石林의 傳說>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도 바윗돌을 몰고 가는 채찍의 이야기가 보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옛날 哥自天神이 葬族의 생활이 몹시 어려워 좋은 옷을 못 입고 쌀밥도 못 먹는 것 을 보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농경지를 만들어 주고 싶어했다 . 그래서 채찍을 들고 커 다란 바윗돌을 몰고 등에는 흙덩어리들을 지고서 밤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앞에 서는 나귀가 길을 인도했는데 밤이 새기 전에 長湖에 도착해 그 호수를 메워 농지로 만들어 微尼 • 阿細人들에게 줄 생각이었다. 바윗돌들과 나귀는 닭이 우는 소리를 무 서워했기 때문에 새벽이 오기 전에 얼른 도착하려고 哥自天神온 부지런히 채찍질을 하며 바윗돌을 몰았다. 그런데 徹尼族의 어떤 아주머니가 바윗돌들이 굴러가는 소리 에 집이 부서질까 봐 겁이나 밖에 나가 있는 딸을 부르려고 닭이 날개치는 소리를 내 었다 . 밖에 나간 딸은 닭이 울면 돌아올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닭 울음소리가 들리자 열심히 굴러가던 바윗돌들이 멈춰서더니 꼼짝을 않 는 것이었다. 앞에서 길을 이끌던 나귀 역시 닭 울음소리에 멈추고 말았다 . 哥自天神 이 이상하게 여겨 채찍질을 해대었지만 바윗돌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그 자리에 멈 춰선 채 石林이 되고 말았다. 나귀 역시 獅子山으로 변했고 가자천신이 메고 있던 흙 도 쏟아져 내려 雙眉山으로 변했다. 그리고 石林의 위에는 가자천신이 내려친 채찍 자국이 깊게 남아있다고 한다(黃石玉講述, 陳思淸記錄整理, 傳承地域 ; 雲南路南, 李德君 • 陶學良編, r 石林的傳說』, 『薛族民間故事選』, 上海文藝出版社 , 1981 .5. ). 그 곳이 바로 지금 雲南의 천하제일 명승이라고 하는 <路南石林>이다. ® 吳勉에 관한 전설은 上海文藝出版社에서 나온 『個族民間故事選』에 상세하게 서술 되어 있다. 吳勉은 본래 이름이 吳面이며 貴州 黎平縣 藍洞의 가난한 농민이었다.

語 』 의 기록 이외에 여산노모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가 보인다. 우선 소설 대 ¥T t.l. I3갑 堤梨花』를 보면 여주인공 奧접 !.(E 에게는 바바람을 부르고 산을 옮기며 바다를 뒤집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는데 그런 번리화의 스승이 바로 여산노모였다고 한다. 또 李白 이 젊은 시절 공부를 할 때 시냇가에 앉아 절구공이로 바늘을 만드는 할머니를 보고 분발하여 열심히 공부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할머니가 바로 여산노모였다고 하기 도 한다. 한편 唐나라 때 李菱이라는 사람이 神仙의 道를 좋아하여 명산대천을 찾아 다니며 方i 1 q을 공부하였다. 어느 날 協山 虎口岩 石室에서 黃帝의 『 陰符經』을 얻었 는데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 그러던 중 駿 L IJ에 갔다가 머리 가 하얀 童顔의 老母를 만났는데, 그녀가 중얼거리는 것이 『陰符經』인 것을 듣고 어 찌 그것을 아느냐고 물으니 자신이 『陰符經』을 안 것은 이미 1080 년 전의 일이라고 하였다. 그는 그녀에게서 『陰符經』 3 百字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노모가 만 들어 준 보리밥을 먹고 나서부터 곡기를 끊고 수련을 하였는데 그 후 아무도 다시 그 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淸나라 때 興自珍이 林則徐에게 준 詩인 r 已亥雜詩」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我有陰符三百字, 峨丸難寄借雄文 . >(上海古籍出版社 編 『神仙世界』, 28.3쪽, 1990.) ® 秦始 皇 에 관한 이상의 전설들은 仙話의 범주에 속한다. 仙話는 고대에 神話가 발생 했던 것과는 다른 思惟條件과 사회조건 아래서 발생하므로 근본적으로 신화와는 다 르다. 茅眉이 일찍이 『中國神話硏究初探』에서 <方士들이 사람들의 求仙心理를 움 직여 만들어 낸 江湖口缺>이라고 仙話를 규정지은 이후, 이 책의 저자인 袁河 역시 仙話를 <中國神話의 末流>(『神話故事新編』), <道士들의 엉터리 이야기>(『中國古 代神話』)라고 폄하했다. 물론 袁氏는 이후 신화의 법위를 논하면서 이처럼 무조건적 으로 仙話를 부정하던 견해에서 조금 벗어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仙話를 神話의 일개 곁가지 정도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仙話를 神話보다 낮은 것으로 폄하하는 견해는 이제 수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장생불사에 대한 욕망은 인류의 보편적 심리였으므로 <仙話가 다만 통치계급만이 추구하던 장생불사 사상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謝選駿, 『神話與民族精神』, 383 쪽, 山 東文藝出版社, 1987.2.) 그것은 근본적으로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사상이 들어 있으므로 仙話는 인간의 자유로움과 생명의 영원성을 바라는 심리를 반영한 또 다른 서사문학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한편 仙話룰 적극적 관 점에서 파악하는 견해로는 다음과 같은 논문들 몇 편을 예로 들 수 있다. 우선 羅永 競이 『仙話與神話的關係及其異同』(『民間文藝季刊』, 1988 년 제 3 기)에서 仙話롤 소 극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의 반항정신을 보아야 할 것이라고 조심스런 견해를 제시했고, 張慕가 『論仙話的形成與發展』(『民間文藝季刊』, 1986 년 제 1 기)에서 문학 사적으로 볼 때 仙話는 매우 독특한 풍격을 지닌 문학작품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1988.6.). ® 이 이야기의 근원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거니와 고대의 人 身 희생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살아있는 인간을 제물로 삼아 쌓고 있는 城을 공고히 하려는 것인데 그것은 고대 신화에서 보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주제이다. 디오니소스 축제 역시 그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래 인신희생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농경의 풍요로움에 있었다 . 중 국에서는 이것을 <獸勝 信 仰 > 이라고 했는데 그것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보인다 . 『漢船 , 『王葬傳』, <葬 親之南 鄕 , 鑄 作威斗 . 威 斗 者, 以五石銅 爲 之, 若 北 斗 , 長二 尺五寸, 欲以壓勝 衆兵. > 潭 氏 家답 II 』 , r 風操』 , <偏 芳 之 書, 死有歸 殺 …… 畵瓦 書 符, 作 諸壓 勝 .> 賀 學 君은 이러한 獸勝 信 仰을 적극적인 것과 소극적인 것의 두 가지로 분류했다 . 적극적인 것은 만희량의 경우에서처럼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제물을 바치는 것이고, 소극적인 殿勝 信 仰은 원하지 않는 어떤 결과를 그냥 피해가기 위한 것이다 (『中國四大傳說 』 , 1 6.5쪽). 그러나 인간을 직접 희생물로 바치던 이러한 습속은 후대 로 내려오면서 점차 사라지고 대신 동물이나 어떤 상징물을 바치게 되었다 . 干將과 莫邪의 故事에서 손톱과 머리를 잘라 불 속에 던지는 부분이 이에 해당된다. ® 왜 하필이면 <萬 喜 良>이라는 이름이었는가에 관해 추측해 볼 수 있는 浙江 지역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만리장성을 축조하며 槿關에 이르 렀을 때 장성이 자꾸 무너졌다 . 그때 어떤 도사가 말하기를, 장성은 龍脈 위에 지어져 있기 때문에 1 만 명의 산 사람을 묻으면 龍의 꼬리를 누르는 격이 되어 용이 움직이 지 못하므로 그 위에 지어진 장성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 그 런데 이름 속에 <萬>과 <千>이란 글자가 들어 있는 사람을 찾으면 그 한 사람이 만 명에 해당된다 는 것이었다 . 진시황은 <萬>이나 <千>이라는 두 글자를 <萬千良>으로 듣고 그런 사람을 찾아내라고 온세상에 명령을 내렸다(『孟姜女資料選集,故 事 』, 上海民硏 會 編) . 이 밖에 『孟姜女寶卷』에도 <姑蘇有個萬 喜 良, 一人能抵萬民亡, 後封長城敬大王, 萬里長城永堅鋼>이라고 되어 있는데 <萬>이라는 글자 때문에 그가 제물로 선택되 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물론 신빙성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萬>이라는 姓으로 인하여 후대 전설에서 부연되어 이루어진 이야기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萬 喜 良>이 어떤 전설에서는 <范 喜 良>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范>이 <萬>으로 전 해지면서 1 만 명의 목숨에 해당된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수도 있다. ® 맹강녀가 호롱박에서 나왔다는 전설도 있다. ® 魏나라 曹植의 『求通親親表』注文의 기록이 『 同賢記』와 비슷한데 거기에 나오는 여 주인공의 이름이 <孟姿>이다. 일본에서 발견된 『 現玉集』은 盛唐時代에 이미 일본에 전해진 책으로 그 안에 기록된 『同賢記』는 『調玉集』보다 이론 시기에 나온 것이 분

l!Jl 洪武 11 年 (1 初 8 년) 통치계급의 압박과 수탈에 대항하여 黎 4 ; · 일대의 個族과 苗族 농민들이 난을 일으켰는데 吳勉이 그들의 지도자였다. 洪武 18 年, 농민군은 20 여만 명에 이르러 귀주 여평 일대를 점령했는데 그것에 놀란 조정에서는 20 만 대군을 보내 어 잔혹하게 진압했다. 이 책에서는 귀주 여평 지역에 전해지는 吳勉의 전설을 상세 하게 수록하고 있는데 그 대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여평 동남쪽에 信洞吹이 있는데 그곳에 吳勉岩아라고 하는 거대한 암석이 있다 . 그것은 오면이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 오면은 어려서부터 비범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손에 책과 작은 채찍을 쥐고 있었으며 다섯 살에 소를 먹이러 다닐 때 이미 그 채찍으로 길을 가로막 는 바위들을 비키게 할 수 있었다 . 그가 18 세가 되었을 때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모두 굶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청의 가렴주구는 더욱 심해졌다. 참지 못한 백성 들이 들고 일어났으며 그들의 長老였던 오면의 아버지는 관리들의 핍박을 이기지 못 하고 죽고 말았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된 오면은 황제의 의자에 세 발의 화 살을 쏘는 등 신출귀몰한 행동을 한다 . 또 超山糖으로 羊角岩에 있는 바위들을 돼지 나 양을 몰듯이 몰아 내려왔다. 그 바위로 강을 막아 두었다가 관군이 몰려오면 둑을 터서 그들을 수장시키려는 계획이었다 . 그러나 그것도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잡혀 참 수를 당하게 된다. 그러나 영웅 오면은 어머니의 품에서 부활하여 오랜동안 관군에 대항하다가 산으로 올라갔는데 그 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楊 明桃 • 李如鹽 • 陳士貴 口述 楊國仁授集整理, 傳承地域 ; 責州黎平, 楊通山等編, 『i目族民開故事選』, 葛 7-245 쪽, 1984.5.).> ® 石林의 전설과 吳勉의 전설은 超山槪이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주인공이 하나는 天亂 l 이고 하나는 인간의 英雄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바윗돌들이 굴러가다가 멈추어 거대한 바위산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진시황의 超山粧 이야기와 상당히 흡사 한 면이 있다 . 특히 超山셉更이라는 것이 보통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天 神이나 혹은 吳勉과 같은 민족의 영웅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진시황의 영웅적인 면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袁河는 그 두 가지 이야기와 진시황 전 설의 傳承關係를 인정하면서도 그 先後關係에 있어서 진시황 전설을 앞에 두었는데 (『中國神話史』, 489-4OO 쪽) 그것에 대해서는 좀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袁河 가 신화전설을 수정 중보하면서 소수민족 신화전설을 상당히 많이 언급했지만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가 中原지역의 漢民族 신화전설을 주로 다루었다는 한계성에서 벗어 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리프킨은 진시황이 장성을 건립할 때 땅위에 神針을 하나 꽂아두었다고 하는 전설을 소개하였다 . 그 神針을 땅에 꽂아두면 태양이 영원히 지지 않아서 城을 쌓는 인부들 이 아무리 피곤해도 일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고 한다(李福淸著, 馬昌儀譯, 『萬里長 城的傳說與中國民間文學的體裁問題』, 『中國神話故事論集』, 中國民間文藝出版社,

<貞節>을 지킨 여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굳은 애정을 지키며 권위에 대항한 인물 의 典型이기 때문일 것이다. ® 맹강녀 전설의 기원이라고 일컬어지는 『左傳』, 「襄公幻年』의 기록에 나오는 武士의 이름은 <祀梁>이다. 그는 전쟁터에서 죽었다. 『左傳 』 에는 妃梁妻가 슬퍼했다거나 울었다는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울어서 城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는 더욱 나타 나지 않는다. 그녀가 울어서 城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는 漢代 劉向의 때운§ii』, 『善說 다에 비로소 나타난다. 아마도 그것은 漢代에 보편적으로 전해지고 있던 이야기인 것으로 보인다. 『列女他』에도 城이 무너진 이야기와 그녀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 기가 나타난다. 이때까지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城이 어떤 城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확 실히 알 수 없으나 야周玉集』에 기록된 『同賢記』에 이르면 그 城이 秦始皇 때의 長 城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주인공의 이름은 이며 <燕나라 사람>으로 나타난다. 리프긴은 맹강녀 전설과 무사 기량처의 전설이 무관하다고 하면서 그 이유 로 『同賢記』에 나오는 남주인공 이름이 <祀良>이라는 것을 들었다 . 『同賢記』의 저 자는 『左傳 』 이나 『列女傳』들을 참조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는데 (282 쪽) 이 주장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 『左傳』에 나오는 이나 『同賢記 』 에 나오는 , 심지어는 <喜良>이라는 이름까지 그 발음에 있어서 상당한 類似性이 있기 때 문이다. 이름의 한 글자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두 가지 이야기의 연관 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라는 주인공의 이름과 그 의 죽음에서 비롯된 <突>의 모티브가 민간에 전해져 내려오던 이야기들과 합쳐지면 서 진시황 때의 장성축조라는 역사적 사실과 맞물려 『同賢記』의 이야기가 출현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 <親送寒衣>의 모티브는 『敦煙曲子詞集』, 댜島練子』에 처음 나온다 . 음력 10 월 1 일 을 <寒衣節>이라 하여 해마다 그날이면 부녀자들이 寒衣를 만들어 먼 곳에 있는 친 지에게 선물하였다. 그리고 친지가 이미 죽어 故人이면 종이로 옷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 묘 앞에서 그것을 태웠다 . 明代 劉個의 『帝京景物略』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十月一日, 紙律裁紙五色, 作男女衣,長尺有應, 曰寒衣, 有疏印線織其姓 字輩行, 如寄書然, 家家修具, 夜食呼而禁之其門, 曰送寒衣. 新喪白紙爲之, 曰新鬼 不政衣彩也 . 送白衣者突, 女聲十九 , 男聲十- . > 그리고 淸代 乾隆 幻年(1 758) 에 간행된 『帝京歲時紀勝』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十月 朔, 孟冬時享宗廟, 領憲書 , 乃國之大典. 土民家祭祖掃墓 , 如中元議. 晩 夕線書冥權 加以五色彩用作成冠帶衣履, 于門外食而禁之, 曰送寒衣.> 맹강녀 전설에서 寒衣節이 유래된 것인지, 寒衣節에서 맹강녀가 옷을 만드는 부분 의 이야기가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어쨌든 節日과 관계된 단락이다. 山西지 역에 전해지는 노래 역시 맹강녀가 남편의 옷을 짓는 이야기를 구성지게 전하고 있다.

<孟姜女手稀勅線車, 日日 夜夜 肥 線訪 ; 孟姜女脚採織布機, 辛辛苦苦織 1 fi化 ; 孟姜 女用尺細細屈, 羽刀裁衣沙沙뿡 ; 孟姜女巧手操絲 h탑 , 멋씻帖姑衣內裝 ; 孟姜女容針 又引線 , 緊緊張張縱衣袋 ; 裂寒衣,裝乾租, 要送給丈夫供꿉良 .>(r 孟姜女資料選菜』 第 2 빼 上海民硏會編 ) ® 秦始皇 의 長城 축조로 인한 백성들의 고난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으며 그 고통을 노래한 民諦 등이 전해지고 있다. 晋代 楊泉 의 『物理論』에 나타난 秦代 의 民歌 ; <生男愼勿擧, 生女晴用肺. 不見長 城下, 尸核相支柱 . > 陳I#의 r 飮馬長城窟行」 ; <君不見長城下, 死人核骨相擇柱.> 梁 任防 r 述異記』 卷上에 기록된 진시황 때의 동요 ; <阿房, 阿房, 亡始皇> 『古諦諺』 ; <秦始皇, 何强 梁 開吾房, 操吾床 ; 飮吾酒, 垂吾腹 ; 食吾飯, 以爲덟 ; 張吾弓射東瑞 前至沙丘當滅亡 .> <朝閣 內 害 了多少忠良將, 打邊瑞害他家破人亡. 打邊瑞害了多少好心郞 . 打邊瑞死 我夫奧喜 郞 今 日 見了{尔香君面, 還我夫君奧喜郞. 總有一天來與t尔香君算總帳, 夢 想收我敬妄房.>(『孟姜女資料選集』第 1 集 r 歌諦』, 中國民間文藝硏究會上海分會編) ® 맹강녀가 울어서 장성을 무너뜨린 것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형태로 지금까지 전해지는데 韻文 형식으로 전해지는 것으로는 福州 일대의 『過關歌』 , 紹興 일대의 『孟姜女四季歌』, 廣西象縣의 『 孟姜女十二月 歌』, 江浙 일대의 『孟姜女十二月 花名 』 , 그리고 l%5 년에 정리 • 출판된 장편 吳歌 『孟姜女』가 있다. 吳歌 『 孟姜女』는 姚永 根唱 馬漢民 • 柏金星記錄으로 『民間文藝集刊』 第 7 集(上海文藝出版社, 1 98.5 .6.) 에 실린 것인데 모두 10 節에 2 천여 行이나 되는 장편 서사시이다. 江南 일대에 전해지는 『孟姜女十二月花名』은 특히 유명한 것으로 일년 열두 달 피는 꽃 이름과 계절, 그 풍습과 집집마다 떠들썩한 분위기를 나열하며 그것과 대비 시켜 남편을 떠나보내고 쓸쓸해 하다가 울어서 장성을 무너뜨리는 맹강녀의 설움을 노래하고 있다. 그 일부분만 안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정월에 매화피니 새봄이구나 집집마다 붉은 둥 밝혀 놓았네 . 다론 집 남편들 돌아와 함께 있는데, 우리 남편은 長 城 쌓으러 떠났네 ……. 유월이라 연꽃피니 더위참기 어렵구나, 모기 날아드니 남편 생각에 애간장 끊어진다. 차라리 내 피를 천 방울 빨아먹을지언정, 내 남편 萬喜良을 물지 말거라 ••• …. 십일월 눈꽃 홀날리니 맹강녀 만릿갈을 寒衣 갖고 떠나네. 까마귀 가 앞에서 길 인도하고 눈물로 장성 무너뜨리니 처량도 하구나. 섣달 臘梅피니 설 준 비로 바쁘다, 돼지잡고 양잡고 떠들썩하네 . 집집마다 돼지잡고 양잡는데, 맹강녀 집안 은 텅텅 비었네.> ® 詩, 특히 惡代 詩에 나타난 맹강녀 전설의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 曹植, 『精微篇』 ; <祀妻笑死夫, 梁山爲之傾. 子丹西質秦, 鳥白馬角生.>

李白, 『東海有勇婦다 ; <梁山感祀妻 1 !F.h突爲之傾 金石忽題開, 都山激情深.> 頁依 『紀梁妻』 ; <秦之無道分四海苦, 筑長城分進北胡. 筑人筑土一洪里, 祀梁貞 婦暗鳴鳴―上無 父分中無夫, 下無子分孤復孤.一號城崩塞色苦, 再號紀梁骨出土. 敍魂側魄相 逐婦 炳上少年莫相非!> 皮 日 休, 『卒妻悲」 ; <河禮戌卒去, 一半多不回, …… 處處魯人盤, 家家祀婦哀.> ® 맹강녀의 눈물에 장성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는 四人損시절 비판의 대상이 되었었다. 江꿈은 『儒法鬪爭史講距에서 <만리장성이 어떻게 눈물 따위에 무너져 내릴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황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反動派들이 왜 이런 이야기 를 만들어 내었던가? 바로 孔孟의 무리들이 秦始皇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진시 황에게 나쁜 역할을 맡게 했던 것이다 >(1 CJ7 4 . 6 .1 9. 天津市 江靑 6019 講話)라고 하였 는데, 이것은 소위 四人租의 <評法批儒>에서 비롯된 것이었다(劉守華, r 關于孟姜 女故事的演變』, 『民間故事的比校硏究』, 23.5쪽, 中國民間文藝出版社, 1986). 四人범 은 또한 진시황이 장성을 쌓은 것은 적을 막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것에 대해 시비를 건다는 것은 <民族投降主義者>이므로 맹강녀 전설을 날조한 자들이야말로 진시황 의 法家에 반대하는 <民族投降主義者>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에 대해 鍾敬文은 璃孟姜女究案平反』이라는 문장을 써서 통렬하게 반박하였다 . 우선 진시황이 몽염을 보내 장성을 쌓던 수십 년 간 흉노가 남침했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만리장 성이 적을 방어하는 기능에는 한도가 있다. 진시황이 장성을 쌓은 것은 盧生의 <亡 秦者, 胡也>라는 말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祀梁妻 이야기가 맹강녀 전설로 바 뀐 것을 <孔孟之徒의 反革新> 때문이라고 四人精이 주장하는 것에 대해, 그들이 민 간문학의 특성인 <浮動性>을 모르기 때문이라 하였다. 민간문학은 <固定的인 書面 文學>에 대립되는 <浮動的文學>이라는 것이다(鍾敬文, r 爲孟姜女究案平反』, 『宗 敬文民間文學論集』上, 83 쪽, 89-91 쪽, 上海文藝出版社, 1982.1 0 .). ® <突倒長城>은 『同賢記』에 나타나는 맹강녀 고사의 기본 형태이다. 본래 맹강녀 전 설의 기원에 대해서는 『左傳』에 나오는 紀梁妻의 이야기가 언급되는데 그것이 맹강 녀 전설의 기원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린다. 1920 년대 顧韻綱은 기량처의 전설이 맹강녀 전설의 기원이라고 주장하였고 路工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그것에 이 의를 제기한 바 있다. 사실 『左傳』에 보이는 기록에는 이라는 이름만이 나올 뿐, 城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左傳』, r 襄公 23 年』 ; <齊侯歸, 遇祀 梁之妻于鄕, 使呂之. 辭曰 ; ‘殖之有罪, 何辱命焉? 若免于罪, 猶有先人之散麻在, 下 災不得與鄕弓’ 齊侯岳諸其室.>). 『禮記』, 『檀弓』에 그 아내가 슬피 울었다는 기록이 보이고(<齊莊公襲菩于奪, 祀 梁死焉 其妻迎其抵于路而笑之哀>) 漢代 劉向의 『列女傳』과 『說苑』(『善說篇』 ; <昔華舟, 祀梁戰而死, 其妻悲之, 向城而笑 1 隅爲之崩, 城爲之他>), 그리고 王充의

<孟姜女手稀結線車, 日 日 夜夜肥線訪 ; 孟姜女脚採織布機 辛辛苦苦織 4 計t ; 孟姜 女用尺ti H 月 11 屈 羽刀裁衣沙沙챔g ; 孟姜女巧手操絲tli l, 씻텃姑姑衣內裝 ; 孟姜女容針 又弓 |線, 緊緊張張縱衣袋 ; 裂寒衣, 裝乾溫 要送給丈夫抵 g. 良.>(行孟姜女貸料選渠』 第 2 輯 上海民硏會編) ® 秦始皇의 長城 축조로 인한 백성들의 고난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으며 그 고통을 노래한 民綿 등이 전해지고 있다. 晋代 楊泉의 『物理論』에 나타난 秦代의 民歌 ; <生男慣勿殿, 生女晴用『甫 不見長 城下, 尸核相支柱 . > 陳堀의 r 飮馬長城窟行」 ; <君不見長城下, 死人核骨相擇柱.> 梁 任防 『述異記』 卷上에 기록된 진시황 때의 동요 ; <阿房, 阿房, 亡始皇> 『古諦諺』 ; <秦始皇, 何强梁. 開吾房, 提吾床 ; 飮吾酒, Pj吾康 ; 食吾飯, 以爲덟 ; 張吾弓, 射東썸 前至沙丘當滅亡.> <朝閣內害了多少忠良 !8, 打邊瑞害他家破人亡. 打邊培害了多少好心郞. 打邊培死 我夫奧速郞 今日見了{尔香君面, 還我夫君奧喜郞. 總有一天來與t尔香君算總帳, 夢 想收我敬妄房.>(『孟姜女資料選渠』第 1 築 r 歌諦』, 中國民間文藝硏究會上海分會編) ® 맹강녀가 울어서 장성을 무너뜨린 것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형태로 지금까지 전해지는데 韻文 형식으로 전해지는 것으로는 福州 일대의 『過關歌』, 紹興 일대의 『孟姜女四季歌』, 廣西象縣의 『孟姜女十二月 歌』, 江浙 일대의 『孟姜女十二月 花名』, 그리고 19 8.5년에 정리 • 출판된 장편 吳歌 『孟姜女』가 있다. 吳歌 『孟姜女』는 姚永 根唱 馬漢民 • 柏金星記錄으로 『民間文藝集刊』 第 7 集(上海文藝出版社, 1 98.5 .6.) 에 실린 것인데 모두 10 節에 2 천여 行이나 되는 장편 서사시이다. 江南 일대에 전해지는 『孟姜女十二月 1E 名』은 특히 유명한 것으로 일년 열두 달 피는 꽃 이름과 계절, 그 풍습과 집집마다 떠들썩한 분위기를 나열하며 그것과 대비 시켜 남편을 떠나보내고 쓸쓸해 하다가 울어서 장성을 무너뜨리는 맹강녀의 설움을 노래하고 있다. 그 일부분만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정월에 매화피니 새봄이구나 집집마다 붉은 둥 밝혀 놓았네. 다른 집 남편들 돌아와 함께 있는데, 우리 남편은 長 城 쌓으러 떠났네 ……. 유월이라 연꽃피니 더위참기 어렵구나, 모기 날아드니 남편 생각에 애간장 끊어진다. 차라리 내 피를 천 방울 빨아먹을지언정, 내 남편 萬喜良을 물지 말거라……. 십일월 눈꽃 홑날리니 맹강녀 만릿길을 寒衣 갖고 떠나네. 까마귀 가 앞에서 길 인도하고 눈물로 장성 무너뜨리니 처 량도 하구나. 섣달 臘梅피니 설 준 비로 바쁘다, 돼지잡고 양잡고 떠들썩하네. 집집마다 돼지잡고 양잡는데, 맹강녀 집안 은 텅텅 비었네.> ® 詩, 특히 唐代 詩에 나타난 맹강녀 전설의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曹植, 『精微篇』 ; <祀妻笑死夫, 梁山爲之傾 . 子丹西質秦, 鳥白馬角生.>

물이 변하여 된 것이라는 이야기는 < 의심할 바 없이 민간문학에서 자주 보이는 借 n 兪 手法으로 강한 인상을 빌려 전설을 더욱 감동적인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다>라고 설 명하고 있다(『洪里長城的傳說與中國民間文學的 體 裁問題」, 『中國神話故 事 論菜 』 , 況쪽, 中國民間文藝出版社, 1988.6.l . ® 각 지역에 전해지는 맹강녀 전설이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湖南지역의 맹강녀 전설에서는 특히 남편을 찾아가는 과정과 그 뼈를 찾아 돌아오는 과정이 자 세히 묘사되어 있다. 북방의 전설에서 < 突 夫 >의 情節이 강조되어 있다면 남방의 전설에서는 <尋夫>의 情節이 강조되어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 까마귀가 남편의 옷을 물어온 것을 보고 길을 떠난다거나 마음씨 좋은 노인의 도움으로 강가의 바윗 돌 위에서 남편의 모습을 볼 수 있다거나 하는 등이다 . 특히 湖南은 만리장성에서 거리가 먼 연유로 해서 <負骨>의 이야기가 중시되는데 맹강녀가 남편의 뼈를 지고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湖南에서는 여자가 길을 갈 때 남자보다 앞에 서서 걸어 가는 습속이 있다고 한다(巫瑞 맙 , r 孟姜女故 事 與楚文化的血緣關係』 , 『巫 風與神 話.!, 131-134 쪽). @ 맹강녀가 울어서 장성을 무너뜨린 뒤의 이야기는 맹강녀 고사가 어떻게 민간에서 변 해왔는가 하는 과정을 여실히 내보여 주고 있다. 『}周玉集』에 실린 『同賢記』에는 孟 仲姿와 祀良의 만남과 헤어짐, 長城의 붕괴와 祀良의 백골을 찾아 돌아오는 과정 등 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唐代까지 전해지던 맹강녀 전설의 기본 골격이다. 이후 맹강녀 전설은 두 가지의 변천 과정을 거치는데 하나는 불교 둥의 종교와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이고 , 다른 하나는 진시황과의 투쟁을 거치는 굳은 의지의 여인으로 나타 나는 것이다. 종교와 결합된 경우는 바로 『孟姜女寶卷』에서처럼 맹강녀와 만희량을 보살이나 天仙으로 보아 그들이 인간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구제한 후 다시 天宮仙界 로 돌아간다는 類의 이야기들이다 . 이러한 것은 어느 특정 집단의 특정 목적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생명력이 길지 못하다. 그러나 민간에 전해져 내려오면서 反封建, 反倫役이라는 일반 백성들의 감정을 대신해 주는 인물로 맹강녀가 그려지게 될 때 그 전설은 강한 생명력을 지닌 채 전승될 수밖에 없다. 이미 <전제군주>이며 강제요 역을 명령했던 폭군의 전형적인 인물이 된 진시황에게 맹강녀가 세 가지 조건을 내건 다는 것은 李淸泉의 『孟姜女故事』(『中國民間故事選』 第 1 集)에도 보이거니와 조금 다른 형태로 張紫晟이 정리한 『孟姜女的傳說』(『民間文學』, 1963 年 第 2 期)에도 수집 되어 있다. 여기에서 맹강녀는 『左傳』이나 『列女傳』 둥에 나오는 여인의 모습에서 벗 어나 강한 투쟁의 의지를 가진 인물로 형상화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의 전설이 오랜 세월 전승되어 내려오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 ® 맹강녀 전설의 이 부분에 이르면 진시황은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왕이라는 위대 한 칭호를 내놓아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는 이미 전제주의 봉건국가의 상징이 되

어 일종의 <藝術的典型>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 中國民間故事選』 第 2 築에 실린 『水推長城』이나 『 群衆 I} 냉&(天律通俗出版社)에 실린 r 十個奇怪的兄弟』에 나오는 진시황은 惡人의 典型이 되어 있다. 열 명의 형제 중에서 큰 눈을 가진 막내가 형들 이 진시황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는데, 그 눈물에 長城이 무 너지고 진시황은 눈물로 이루어진 강물에 휩쓸려 고기밥이 된다는 내용이다(多 l 守華, 『關于孟姜女故慕的演덫J, 『民間故事的比校硏究』, 233 쪽 참고). @ 맹강녀가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고 하는 비장미 넘치는 이야기 이외에 그녀가 어떻 게 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것은 아마도 맹강녀 전설이 전국각지로 퍼져 가면서 民歌의 소재가 되거나 혹은 戱曲의 재료가 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야기를 전하는 講述人이 자신의 예술 적인 감각에 따라 조금씩 내용에 수정을 가했거나 아니면 전승되는 과정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段寶林의 r 姜女廟紀行』에는 저자가 山海關 姜女廟 를 방문해 들은 노인들의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다. 맹강녀가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한 뒤 바다에서 커다란 石島가 솟아올랐는데 그것이 바로 姜女墓라는 것이다(『民間文 學』, 1979 年 第 4 期) . 그리고 그 무덤 옆에는 巨石이 있는데 돌에는 <望夫石>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사당 안에는 文天祥의 對聯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秦皇 安在哉, 萬里長城筑怨 ; 姜女未亡也, 千秋片石銘貞.>(王宏志主編, 『龍 的傳人』 , 人 民敎育出版社, 52 쪽, 198 .5.) 또 浙江 일대에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로는 그녀가 죽은 뒤 太湖에서 銀魚로 변했다고 하고(賀學君, 『中國四大傳說』, 57 쪽), 湖南 일대에서 는 맹강녀가 죽은 뒤 각종 보호신으로 등장한다(巫瑞書, r 孟姜女故事與楚文化的血 緣關係」, 『巫風與神話』, 135 쪽, 湖南文藝出版社, 1988.1. ). ® 특히 湖南 일대에서는 맹강녀가 죽은 뒤 백성들의 보호신이 되었다고 하는데 맹강 녀가 이런 형상을 갖게 된 것은 맹강녀 고사가 호남에 전파되면서 두 가지 문화 사 상의 투쟁을 거쳤던 것과 관계가 있다고 巫瑞書는 주장했다. 『左傳』이나 『禮記』, 『孟子』와 『列女傳』 둥 先秦 兩漢의 典籍에 보이는 <祀梁妻> 전설고사는 封建禮敎 롤 선양하려는 것이었지만, 隋唐 이후 민간에 流傳된 맹강녀 전설고사와 소수 문헌 자료의 여주인공은 反封建條役의 신분으로 출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지역에 는 그녀를 위한 <貞烈祠>가 세워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것은 비단 湖南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전통관념의 관점에서 맹강녀의 정절만으로 이 이야기를 해석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보이기 때문이다. 賈志는 『關于孟姜女故事硏究』(『民間文 學論坦』, 1984 年 第課月)에서 이 두 가지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언급하 였다. <하나는 지주계급을 대표하는 봉건왕조가 인민에 대한 術役정책으로 인한 압 박과 삭탈을 맹강녀의 혼인문제로 끌어가 貞節烈女라는, 그야말로 사람 잡아먹을 禮 敎의 전통을 선양하고 표창하려 애썼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봉건폭군의 잔혹한 倫

役과 사치스러움에 반항하고 남녀 혼인의 자유, 그리고 진정한 애정을 추구하려 했 던 것이다.> 제 10 장 ® 이것은 덴잉神記』 卷 20 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古災 지방에 강물이 불어나 菓斤이나 되는 물고기가 뭍으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그것이 사흘만에 죽으니 그 지방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먹었다. 유독 노파 한 사람만이 그것을 먹지 않았는데 갑자기 어떤 노인 이 나타나더니 하는 말이, <그 물고기는 바로 내 아들이었소. 불행히도 재앙을 당하 고 말았는데 당신만이 내 아들을 먹지 않았구려. 내가 당신에게 후하게 보답해야만 하겠소. 만약 東門에 있는 돌거북의 눈이 붉은색이 되면 이곳이 모두 물에 잠기게 될 것이오>라고 말했다. 어느 날 어린 아들이 노파를 속이려고 돌거북의 눈을 붉게 칠하 자 그 모습을 본 노파는 급히 도망을 치는데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 자기는 용왕의 아들이라고 하며 그녀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마을이 모두 물에 잠겨 호 수로 변했음은 물론이다. <古W:, -日江水暴淑, 尋復故道,港有巨魚, 重萬斤, 三日 乃死, 合郡皆食之. 一老緖獨不食. 忽有老燮曰 ; r 此吾子也. 不幸權此禍, 汝獨不食, 吾厚報汝. 若東門石龜 目 赤, 城當路』 緖 日 往視, 有稚子設之, 緖以質告. 稚子敗之, 以朱傅龜 目 ; 緖見, 急出城, 有靑衣童子曰 ; 「吾龍之子』 乃引緖登山, 而城協爲湖.> 이 이야기는 구성이나 내용은 조금 달라도 성서에 나오는 롯의 소금기둥 이야기를 연 상시칸다. ® 『淮南子』, r 淑眞篇』에 <歷賜之都, -夕反而爲湖>라는 구절이 있는데 高誘注에 다 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歷陽, 淮南國之縣名, 今屬江都. 昔有老姬, 常行仁義, 有二諸生遇之, 謂曰 …… 此國當沒爲湖 謂婚視東城門閩有血, 便走上北山, 勿顧也. 自 此姬便往視門關, 岡者 問之, 婚對曰如是. 其暮門吏故殺鷄, 血徐門蘭, 明旦, 老姬早往視門,見血便上北山, 國沒爲湖 與門吏言其軍, 適一宿耳.> 袁河는 高誘의 이 기록을 <協湖>에 관한 최 초의 기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袁河, 『中國神話史』, 179 쪽 참조, 上海文藝出版社, 1988). ® 『溫州府志』에 보이는 黃塘龍母廟의 전설에서는 江氏가 빨래를 하다가 돌을 삼키고 감응하여 임신을 하게 되는 이야기가 보이는데 淸 同治丙寅重刊乾隆『溫州府志』 卷 30 『記異』에 나오는 倉山龍母의 전설에도 역시 그러한 감생신화가 보인다. 永嘉 倉 山 周氏가 물가에서 알을 하나 발견하여 입에 물고 있다가 잘못하여 삼켰는데 임신하 게 되었다. 나중에 용을 낳게 되자 그녀는 놀라서 죽었고 마을 사람들이 뼈를 거두어 진흙으로 모양을 빚어 동굴 속에 모셔 두고 가뭄이 들면 그곳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永嘉倉山) gj 氏女及芹未 字 , 級水溪邊 見一卵稅之, 取含口마’, 不ft谷下, 遂有振. 後 産 一白龍, 女篤'9 E . 鄕人取其核骨范以泥, 置巖i마세, 무 ~I J迎之祈雨). 여기에서는 周 氏가 알을 삼키고 감응하여 임신하게 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黃塘 WU3 사당의 전설 과 마찬가지로 원시감생신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 德慶龍母전설에는 주 워 온 알에서 도마뱀이 나오고 그것이 자라 용이 된다고 나오는데 이것과 비교해 볼 때 黃塘龍母와 倉山龍母는 더욱 원시적인 요소를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이 이야기는 唐나라 劉#J의 rMI 表錄異』 卷上에 보이는 溫盤의 전설과 거의 내용이 같은데, 체負表錄異』에는 秦始皇이라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龍母가 길흉화복 을 잘 맞춘다고 하는 소문이 퍼지자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어 그녀를 데려오게 하였으 나 義全嶺에 이르러 병 이 나서 脫城으로 돌아와 죽었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리 고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강의 동쪽에 제사지냈는데 어느 날 저녁 갑자기 비바람이 몰 아치더니 그녀의 무덤이 강의 서쪽으로 옮겨져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보인다. 원문 은 다음과 같다. <溫盤者, 卽康j ·I·I 稅城縣婦婦也, 續布爲業. 쌈于野岸捨菜, 見沙草中 有五卵 遂收歸置續節中. 不數 日 , 忽見五小蛇, 破一斑四靑,遂送於江次. 固無意望 報也.鑑常溫洗于江邊.忽一日,魚出水挑躍,戱於區前. 自爾爲常,潮有知者.鄕里 咸謂之龍母,敬而事之.或狗以災福,亦言多徵應. 自是耀亦潮農足.朝廷知之,遣使 徵入京師, 至義全(全義)嶺, 有疾, 卽返稅城而卒. 鄕里共葬之江東岸. 忽一夕, 天地 冥亂 風雨遂作. 及明, 移其家於西, 而草木惑於西岸矣.>(『太平廣記』에 실려 있다) ® 望娘灘에 관한 四川 權縣의 地名傳說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溫縣珉江 가에 어느 母子가 물고기를 잡으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들 溫朋이 珉江에서 큰 고기를 잡았는데 그 고기가 溫朋에게 자기를 놓아 주면 보물을 하나 주겠다고 하였 다. 溫朋은 물고기에게서 구슬을 하나 받아왔는데 그것이 생기자 집에 먹을 것과 입 을 것이 풍족하게 되었다. 주인 노파가 그것을 알고 溫朋이 자기의 보물을 훔쳐갔다 고 하니 溫朋의 어머니가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밤에 노파가 그 구슬을 훔쳐가려고 하니 溫朋은 구슬을 삼키고 목이 말라 항아리의 물을 다 마셨다 . 그래도 목이 마르자 珉江 기슭으로 달려와 珉江의 물을 반이나 마시고서 용이 되었다. 어머니가 울며 溫 朋을 말렸으나 溫朋은 <우리 모자가 헤어지기는 어렵지만 제가 이미 용이 되었으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더니 강물에 뛰어들어 헤엄쳐 떠나버렸다 . 어머니가 울며 아 들의 이름을 부르니 용이 뒤돌아보았는데, 뒤돌아본 자리에 여울이 하나 생겼다. 그렇 게 어머니가 24 번 부르고 용이 24 번 뒤돌아보니 珉江에는 24 개의 여울이 생겨나게 되었다. 용이 떠난 다음날 천둥이 치더니 주인 노파의 집과 밭이 모두 떠내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24 개의 여울은 <어머니를 뒤돌아본 여울(望娘灘)>이라고 불리게 되었 다(『中國傳說故事大詞典』, 北京社會科學院文學硏究所, 文聯出版社, 1 앗 2 . ). ® 이것은 黃塘龍母廟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在瑞應鄕黃塘. 神

姓江氏, 方界未隊, 洗紗見石, 存之, 遂有振. 以父母疑, 躍江沿死. 忽雷電交作, 其腹 述浙賜成龍入海, 猶回顧其母 今其港有望娘岡 邑人因葬之, 爲立祠 . > 여기에는 江 氏 여자가 빨래하다가 돌을 보고 삼켜 감응하여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부모가 의심할 까 두려워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천둥 번개가 치면서 뱃속에서 도마뱀이 나와 용으로 변해 바닷속으로 들어갔는데, 가면서 그 어머니를 돌아다보았 다고 한다. 그러자 물가에 望娘區가 생겨났고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瑞應鄕 黃塘에 있는 龍母사당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原始感生 神話의 혼적이 강하게 남아 있으나 자신의 임신을 부끄러이 여겨 자살했다는 부분에 서는 후대 부계사회의 요소가 가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古小說釣沈』, 「小說』 ; <齊哥城東有蒲臺, 秦始皇所頓處時, 始皇在盜下, 禁蒲以繁 馬, 至今蒲生猶緊, 俗謂之 r 始皇蒲」>

역자 해제 Il 1992 년에 번역 초판이 나왔던 『중국신화전설』 제 1 권과 이번에 나오게 된 제 2 권은 기본적으로 그 성격이 다르다. 제 1 권이 <신화 > 적 성격(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보편적인 개념으로서의 신화)이 강한 것이었다면 이번에 번 역된 제 2 권은 역사적 인물에 관한 < 전설 > 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 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제 1 권의 해제에서는 주로 <신화 > 에 관한 것 을 언급했는데 , 제 2 권에서는 책의 성격상 < 전설 > 에 관한 해제를 쓰지 않 울 수 없다 .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저자의 중국 < 신화전설 > 에 관한 독특 한 관점을 이해할 수 있고 우리의 시각에서 비판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 1 권에서는 신화의 정의와 그 연관 학문과의 관계에 대해 주로 살펴보 았고, 중국 신화의 연구 동향에 관해 소개하였다 . 우선 제 1 권의 내용을 개 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계의 시작과 대홍수, 인류의 기원에 관 한 신화가 우선 나왔고 뒤이어 고대 신화 속의 여러 영웅들, 伏羲와 女禍, 神 農 과 后稷, 堯 • 舜 • 禹와 絲 • 葬에 관한 신화가 이어졌다. 伏羲롤 비 롯한 三皇과 離頭을 비롯한 五帝는 중국 고대의 문화영웅들이었다. 인간 을 위해 불을 발견했고 그물을 엮어 고기잡는 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오 곡의 씨앗을 가져다가 농사짓는 법을 알려 주었다. 또한 문자를 만들었고 여러 가지 수공예품들을 만들어 기술의 발전을 이룩하는 둥, 그들은 모두 고대의 문화적인 영웅들이었다 그들의 창조적 작업을 통해 우리는 고대

사회의 발전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그물을 만들어 고기잡는 법을 가르친 伏羲 의 시대는 수렵채집 생활을 대표하고 있다거나, 黃 帝의 부인 媒祖가 누에치는 법을 가르쳤다는 것은 여자들이 직조의 기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는 표시이고, 后稷이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는 것은 농경사회의 시작을 알리는 표시였다는 등의 것들이다. 신화가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고 민족 의 집단 무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사회와 생활의 현실적인 반영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실제적인 예가 되는 이야기들이다. 한편 홍수를 막아낸 絲 이나 인간을 위해 열 개의 태양을 쏜 葬 역시 인 간 중심의 정신을 표출해 내고 있는 위대한 영웅이었다. 특히 葬 에 관한 신화는 영웅의 모험과 비극적 결말을 기승전결을 갖춘 구조로 내보여 주 고 있다는 면에서 중국 영웅신화의 백미라 할 만하다(물론 이 책에서 葬에 관한 이야기가 탄탄한 서사적 구조를 지니게 된 것에는 저자인 袁 阿의 의도 적 배열이 큰 힘이 되었다). 뒤이어 나타나는 舜에 관한 신화나 禹에 관한 이야기들 역시 영웅적인 모험과 그들을 도와 주는 조력자(지혜로운 여인) 의 동장이라는 구조를 지닌 영웅담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 夏 왕조의 실재 여부가 현재까지도 확실하게 드러나지는 않고 있으나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힘입어 그 실존성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는 지금, r 夏殷篇 」에 나 오는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는 주로 史 書 에 등장하는 歷 史 故 事 들이 주된 기둥을 이루고 있다 . 그 중에서도 殷왕조의 조상이라고 보여지는 有易國 王恒과 王亥에 관한 신화는 사건의 구성이 다양하고 동장인물들의 성격 이 뚜렷한 점으로 보아 짜임새 있는 이야기의 구조를 지닌 殷민족 초기의 민족 서사시라고 할 만하다 . 「夏殷篇」에 뒤이어 r 周秦 篇 」이 시작된다. 본래 원서에는 제 1 권에 r 周 秦 篇 」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周나라 昭王 때부터 幽王이 驛山에서 피 살당할 때까지의 이야기가 제 1 권의 말미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저자는 幽 王이 喪似와 함께 도망치다가 죽음을 당하고 平王이 東遷하는 부분에서 제 1 권을 끝맺고 있다. 저자는 東遷울 기점으로 周나라는 이름만 남아있을 뿐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파악하였으며 이로써 신화(저자의 표현방식

을 따르면 < 좁은 의미의 신화 > )의 시대는 끝나고 역사전설의 시대로 들어 갔다고 여겼댜 (그러나 역서에서는 편의상 제 1 권을 r 夏 殷 篇 」에서 끝맺고 제 2 권을 r 周 秦 篇」에서 시작하고 있다 . ) 제 2 권에서 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東周 이후의 역사적 인물들에 관한 전설이댜 신화와 전설을 어떻게 구분지을 것인가에 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여러 가지 견해를 내놓은 바 있으므.로 여기에서 다시 그것을 모 두 인용할 필요는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는 신화와 전설을 구 분짓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둥장인물의 <역사성 > 여부라고 여겨진다. 등 장인물이 역사적 실존인물이라면 그에 관한 이야기는 전설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느 특정한 역사시기, 특정한 인물에 관한 이야 기가 전설이댜 그에 비해 실존성 여부에 관계없는 이야기들은 민담으로 여겨진다. 물론 이러한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신화와 역사와의 경 계가 불분명한 중국의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신화와 전설을 연구하는데 있어서의 연구방법에 일반적인 문화이론의 접근방법을 적용시켜 본다면, 비교론적인 시각에서 세계 각지의 신화를 살펴 그 보편성을 찾는 것도 물론 중요한 작업이지만 동시에 각지의 신화 가 갖고 있는 문화적 개별성을 인정하는 시각 역시 매우 중요하다. 각각 의 개별적인 문화현상(신화를 포함해서)에 비교론적인 시각으로 접근할 것 인가, 혹은 문화의 독창성을 인정하는 상대주의적인 시각으로 접근할 것 인가 하는 것은 문화에 관한 논의가 시작된 이후 계속 논쟁의 초점이 되 어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중요 쟁점 중의 하나이다 . ll 신화의 연구에 있어서도 조셉 캠벨 같은 사람은 융의 심리학을 전세계 1) 문화의 개별성을 강조하는 상대주의적 연구방법과 보편성을 강조하는 비교론적 연구 방법은 서로 보완관계에 있을 때 가장 효율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 문화현상을 파악 하는 내재적 관점과 외재적 관점 둥에 대해서는 최근에 간행된 『인류학의 문화이론』을 참조하기 바란다. 19 세기 진화론자들이 둥장한 이후 문화의 진화론적 흐름에 관심을 가졌던 서구학자들이 특정한 문화의 발달에 대해서 비교론적이고 외재적인 관접을 지 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살펴볼 수 있다(데이비드 카플란, 로버트매너스 지음, 최협 옮김, 나남출판사, 1994).

의 신화에 적용시켜 인간 심리의 보편적인 유사성을 찾아내는 데 중점을 두고 있고2 1 미르치아 엘리아데 역시 융의 원형 관념과는 좀 다르지만 전 세계 신화 속에 등장하는 보편적인 聖의 顯 現(히에로파니)를 찾는데 관심 을보였다.

2) 캠벨(J ose p h Cam p bell) 은 그의 저서 곳곳에서 보편적인 시각을 강조한다. 그 자신이 서구인이면서 기독교적인 문화 제국주의(그의 표현에 의하면 <문을 닫고 돌아앉아 있는 신>)의 폐해를 자주 언급하고 있고 열린 시각(들판에나 산에나 어디에나 존재하 는 신의 이미지)을 가질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개인을 지 역적 동아리와 동일시하게 만드는 대신 지구라고 하는 행성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신 화가 필요한 것>이다(조셉 캠벨, 빌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신화의 힘』, 1995).

그들이 인간 정신의 보편적 현상을 찾으려 열린 가슴으로 노력했다면, 레비_스트로스로 대표되는 구조주의 신화학자들은 주체나 역사~t 배격하 고 다만 신화의 구조를 찾는데 힘을 기울였다 . 나타나는 내용은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르더라도 신화의 근본적인 구조는 똑같다고 보는 그의 견해 는 일견 건조해 보이긴 하지만 그때까지 서구사회를 지배했던 우월적 사 고방식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프로이트적인 견해를 색다른 각도로 변형시킨 라캉식의 해석이나 한때 를 풍미하던 푸코의 사상을 지나 포스트모더니즘마저 퇴색해가는 지금, 신 화 연구는 각 지역별로 특징적인 유형을 찾으려는 데에 치중하고 있는 듯 이 보인댜 3l 물론 각 지역이나 나라별로 자신의 특징적인 문화를 찾아내고 그것을 유형화하여 민족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이 국가주의나 민족주의 로 흐를 염려는 다분히 있다. 또한 그것이 지금 세계 각 지역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민족 • 종족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정신적 요인이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이 왜 兩大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사라 진 이후 지역적으로 강조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3) 이러한 흐름에 관해서는 『문화란 무엇인가 』 (크리스젠크스 지음, 김윤용 옮김, 『현대 미 학사 』 , 1996) 의 제 1 장과 제 2 장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 뿌리는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이 시작되던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빅토리아 왕조 시절 영국의 인류학자들이 인

류의 발전 과정에 대해 갖게 된 보편을 빙자한 오만한 편견 , 4) 스페인 • 포 르투갈 등 서구 국가들이 올멕 • 마야 • 아즈텍 • 잉카 등 인류의 오래된 문 명지역에 대한 몰이해에서 행했던 파괴적 행동 5) 등으로 인하여 동양이나 남미의 오래된 문명들은 오랜동안 그 나름대로의 특성을 잃고 그들의 정 체성을 찾지 못한 채 서구적 사고방식에 이끌려 다녔다. 멀리 다른 문화 권을 볼 것도 없이 중국과 우리의 문화만 들여다보더라도 그 과정은 명확 하게 드러난다 . 문화의 < 보편성 > 이라는 것이 서구화를 의미하던 시절, 우 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 개별성 > 을 일종의 촌스러움 , 버려야할 유산, 미신 적인 것 등으로 여기고 그것들을 매도하는데 목소리를 높였다 .61 그러다가 4) 19 세기 진화론자들의 연구는 그 선구적인 태도로 인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지 만 동시에 많은 바판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특히 모건을 비롯하여 프레이저에 이르 기까지 현지연구 를 충분히 하지 않고 < 안락의자에 앉은 채> 저술을 하였다는 호된 비판을 받고 있다 . 또한 그들은 대체로 < 자기민족 중심적 (e thn ocen tri c) > 이었다. 말하 자면 당시 빅토리아 왕조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그들은 그 시대를 모든 문명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정점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그 단계에 도달하기 위하여 동일 한 연속적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물론 이후의 진화론자들은 이러한 맹점을 극복하려고 새로운 이론들을 제시했지만 19 세기 당시의 진화론자들이 지녔던 단선론적인 한계는 명백했었다 . 5) 16 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정복자들이 중남미 고대 문명에 대하여 자행했던 문화 파괴 행위는 영원히 인류의 치욕으로 기록될 것이다 . 기독교의 신에 대한 믿음을 그 곳에 전파하기 위하여 우상으로 여겨지던 많은 신전과 조상들을 파괴함으로써 그 지 역 문명의 생성과 전파과정에 대한 연구의 실마리를 모조리 없애버렸던 것이다. 또한 그 지역에서 성행하던 인간희생의 제의에 대해서도 인간을 잡아먹는 야만적인 풍습으 로만 파악할 뿐, 그 제의적 기능은 완전히 무시하였다 . 이러한 뿌리깊은 시각은 문화 유물론의 대표론자인 마빈 해리스의 저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을 제물로 바치 는 습속을 단지 < 단백질을 공급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마빈해리스 지음, 정도영 옮김 , 『식인과 제왕』 )은 그 사유의 독창성과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에도 불구하 고 단편적이고 공허한 것으로 여겨진다. 6) 이윤기는 『세계의 영웅신화 서 를 번역하면서 그 책을 번역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우리 땅에서 오랜 세월 우리의 것이 <보편성>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 하여 매도되었던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좀 장황하지만 인용해 본 다. <걸핏하면 조상이 우상으로 단죄되고, 하나의 신학을 옹호하기 위해서라면 오랜

역사 살림을 꾸려 온 민족까지 우상의 자식들로 치부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 시대 기댈 곳 없던 민중의 문화가 ‘미신’으로 업어치기를 당하고, 충정에서 우러난 비판 정 신과 각자의 자유를 겨눈 정신적 편력의 간중이 ‘사탄’의 소리 수작으로 간주되는 이 시대에, 모든 민족의 문화와 종교를 고루 짚어 보며, 그 바른 뜻을 더듬는 이 책을 우 리 글로 옮긴 뜻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의 믿음, 다른 이들의 종교라 면 듣도보도 않고 흰 눈을 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주체 적인 종교 정신을 곧추세우는 데 밑바탕 삼을 수 있다면, 남의 집(종교)도 좀 기웃거 려 보는 데 인색해서야 되겠느냐는 뜻에서다 . >(조셉 캠벨 지음, 이윤기 옮검, 『세계의 영웅신화』, r 역자 후기』에서 발췌)

경제적인 발전이 궤도에 들어서게 된 이후 문화의 < 개별성 > 을 찾아나서 게 되었댜 동아시아학이 거기에서 비롯되었고 잘못된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자는 목소리가 강력하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앞에서 언급했듯이 국가주의나 민족지상주의로 흐를 위 험이 있디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이러한 < 개별적 > 특성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 후에야 진정한 < 보편성 > 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중 국의 경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위대한 고대문명을 지녔고 중화사상이 리는 독특한 사상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던 그들 역시 서구문명의 진입 이 후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수십 년에 걸친 마르크스주의의 지배는 민족문화의 < 보편성>뿐 아니라 < 개별성>에 있 어서도 별다른 특징을 찾을 수 없게 만들었댜 유물론적인 이론의 확립에 있어서는 많은 발전이 있었겠지만 학문의 다양화란 측면에서는 역시 한쪽 으로 치우쳤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 개방 이후 중국에는 막혔던 봇물 이 터지듯이 여러 가지 문화사조가 한꺼번에 밀려들었고 그 속에서 중국 의 지식인들은 자기 문화의 <개별성>을 찾는 것을 잊고 있었던 듯이 보 인다 그러나 최근 들어 중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중국적인, 다시 말하 면 <개별성> 있는 중국학을 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신화는 문화의 일부분이다. 신화와 전설의 구분이라는, 사소해 보이는 문제에서도 우리는 개별성과 보편성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殷

나라나 周나라 초기는 이미 역사시대로 접어든 시대인데 史 꿈 에도 등장 하는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를 왜 전설이라고 하지 않고 신화라고 하는 가, 왜 중국에서는 신화전설을 확실하게 구분하지 않고 한꺼번에 묶어 같 은 범주에 두는가 등의 문제들은 중국만의 <개별적>인 특성을 이해해야 대답이 가능한 것들이다. 서구의 보편적 틀에 맞추어 <이것이 신화이고 이것은 전설이다>라고 일도양단식으로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설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댜 신화와 전설, 민담이라는 서구식 삼분법으로 우리의 구전설화들이 모두 유형화되 어 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왜 꼭 서구식 삼 분법에 우리의 구전설화들을 분류해 집어넣어야 하는 것인가, 우리의 구 비전승들을 분류해 담을 수 있는 우리 나름대로의 개별적인 그릇은 없는 것인가. 여기에서 지금까지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신화나 전설과 민담 등 의 구비전승을 어떤 식으로 구분해 왔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說話>라는 용어로 그것들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데 비해 중국의 경우에는 <傳說>과 <民間故事>를 구분지어 사용-하고 있 다. 물론 톰슨 Thom pson 은 일찍이 민담의 모티브 분류에 신화와 전설들까 지 모두 포함하여 유형별로 분석한 바 있고7 ) 그것은 지금도 전세계 설화 연구자들의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인섭이 최초로 서구의 삼분법을 도입하여 이야기를 신화 • 전설 • 민담으로 구분하였다 .8) 7) 톰슨 (S tit h Thom p son) 은 1928 년에 Type -Index 를 간행하였고 뒤이어 Moti f-In dex OJ Folk L it era tu re 를 1932-1936 년에 헬싱키와 미국에서 간행하였다 (In di ana Un ive r si- ty Press). 이 책에서 그는 신화와 전설, 민담 둥을 총망라하여 유형별로 분류하였다. 한편 핀란드의 아르네 (An tti Aame) 가 1910 년 여러 학자들의 도움을 얻어 발표한 The Typ e s OJ Fol ktal e 을 그의 사후 톰슨이 1929 년에 정리하여 영어로 발표하였다. 아르네 (Aarne) 와 톰슨의 분류는 AT 분류법이라 하여 지금도 민담과 전설을 연구하는 사람들 의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8) 최인학, r 구전설화연구」에서 주장함 (15 쪽). 우리나라 최초의 구전설화집인 손진태의 『조선민담집』 (1930) 에는 아직 삼분법이 적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정인섭의

Folk Tales From Korea 에서 처음으로 신화, 전설, 민담의 분류법을 적용하였다고 하였다(새문사, 1934).

또한 일찍이 장덕순이 설화를 분류한 바 있는데 9 ) 그는 구비전승을 포함 한 설화를 신화와 전설, 민담으로 구분짓고 있다 .IO) 그의 분류를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신화 • 전설 • 민담을 모두 포함하는 상위개념으로 <설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신화를 운문신화 와 산문신화로, 전설을 자연전설과 인문전설, 그리고 인간과 동물에 관한 전설로 구분지었고 민담을 9 가지로 분류하였다. 한편 최인학 역시 이야기(여기서의 <이야기>는 <설화>와 같은 의미이 다)를 신화 • 전설 • 민담으로 구분하여 신화는 문헌신화와 구전신화로, 전 설은 발생 및 설명전설, 역사적 및 지방전설, 신화적 및 신앙적 전설, 민담 적 전설 등으로 구분지었다. 또한 민담에 관해서는 동물민담 • 보통민담 • 笑話 • 형식담 • 신화적 민담 • 기타로 구분지었댜II) 또한 조희옹은 『한국설화의 유형』에서 설화를 신화 • 전설 • 민담으로 삼분하는 방법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을 동식물담 • 신이담 • 일반담 • 笑 諏 • 형식담으로 나누었다 .12) 이상의 견해들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는 < 설화>를 신화 • 전설 • 민담이라는 세 가지로 구분하는 것이 기본적인 경 향이며 그 하위분류에 들어가서야 비교적 특징적인 세분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그리고 전설에는 민담적 성격이 강하게 가미되어 있 다는것을알수있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민간고사와 전설을 구분지어 연구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민간문학의 일부분으로서, 중국의 민간문학은 신화와 전설뿐 아니라 민간가요와 수수께끼 둥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口頭傳承을 의미한다. 일찍이 周作人은 1923 년에 민간문학을 세 가지로 구분하였는데(歌諦, 誌語, 神話와 기타 유사한 전승) 신화와 전설 • 민간고사는· 세번째에 포함

9) 張德順, r 文獻에 나타난 民族說話의 分類」, 『民族文化硏究』 제 2 호 (1966. 12). 10) 張德順, 『韓國說話文學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lCJ lO. 11) 앞의 책, 16-23 쪽. 12) 삼신문화사, 1996 개 정 판. 21-23 쪽.

되었다 . 徐尉南은 1927 년에 민간문학을 故事와 운율을 가진 가요와 노래, 짧은 재료들로 이루어진 수수께끼 • 속담 등으로 구분하였는데 故事는 다시 전 설 (sa g as) • 동화 (marchen) • 우언(fa bles) • 취화 (drolls) • 신화 (m yt hos) • 지 방전설(p lace le g ends) 로 나누었다. 그리고 1931 년 王顯恩은 『中國民間文 藝』에 22 명의 학자들이 분류해 놓은 것을 실었는데 각자가 나름대로의 설 을 내놓고 있어서 다양성이 있기는 하지만 무리가 있는 분류들이 많이 눈 에 띈다. 이후 1950 년에 이르면 趙景深이 『民間文藝槪論』에서 민간문예를 여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민간고사가 소설류에 속해 있다. 1957 년 匡扶는 『民間文學槪論』에서 민간문학을 운문 • 산문 • 曲藝 • 斷片으로 나누고 있는데 신화와 전설은 산문에 속해 있다. 1958 년 北京師範大學中文科에서 니온 『中國民間文學史』에서는 민간 문학을 가요와 신화전설 • 민간고사·話本 ·傳奇 ·小說 ·雜劇 ·變文 ·鼓 詞·彈詞·戱曲·地方戱·寫言·笑話·誌語·諺語·撮帖·碑文 둥으로 다양하게 나누고 있다. 1963 년 張紫晟은 『民間文學知識講話』에서 민간문학을 群衆口頭創作 과 民間說唱, 民間戱曲의 세 가지로 나누고 구두창작을 다시 운문과 산 문으로 나눈 다움 신화 • 전설 • 민간고사가 여기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전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민간전설이란 노동인민이 창작한 역사인물이나 역사사건, 그리고 지방풍물, 고적 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口 頭故事이다. 그것은 보통 역사상의 특정한 인 물이나 사건, 그리고 각 지역의 산천 • 고적 둥에서 나온 생동적인 情節을 지니 고 있으며, 늘 관련된 각종 사물에 관한 환상적인 해석을 동반하며 역사성과 신 빙성을 지닌다 .131 13) 張紫晟 『民間文學基本知識』, 24 쪽, 上海文藝出版社, l<.r !9.

그리하여 전설은 내용에 있어서 더욱 사회성을 지니게 되는데 그것은 역사전설과 인물전설 • 지방풍물전설 • 동식물전설 등으로 나뉜다. 역사전 설이란 역사적 사건이나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 전설이다. 그것은 간단하 게 역사적 사건을 서술하며 중심인물이나 완벽한 구성을 지니지 않는 전 설, 그리고 역사인물이 중심이 되어 완벽한 구성을 지닌 전설로 나뉜다 . 인물전설이란 孟姜女傳說 같은 것으로 梁山伯과 祝英台, 魯班에 관한 전설, 孔子와 뽕따는 아가씨에 관한 이야기 등이 여기에 속한다. 지방 풍 물전설이란 지방의 유명한 명승지에 얽힌 이야기들을 말하는데 鷄鳴寺와 誤松山 같은 것이 거기에 속한댜 동식물전설은 동식물에 얽힌 이야기인 데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여 민간고사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諱達先은 이러한 분류법에 동조하며 다시 散文故事인 신화 • 전 설 • 동화 • 동물고사 • 생활고사 • 笑話 • 寫言, 歌諸類에 속하는 노동가 • 儀式歌 • 생활가 • 政治歌 • 情歌 • 故事歌, 그리고 수수께끼와 속담, 민간 곡예와 민간희극 등으로 분류하였다 .14) 烏丙安은 전설이 특정한 역사시기에 특정한 지점에서 일어난 특정 역 사인물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서 전설을 역사적 사건의 실재적 반영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15) 그는 전설이란 어쨌든 口頭로 전 승된 예술작품이기 때문에 그것을 역사적 사건의 복사판이라고 보아서는 안되며 다만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역사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고 했는 데 그것은 상당히 객관적인 시각이라고 보여진다. 역사사건을 그대로 전 하려면 역사서의 기록으로 족하다. 그것이 민간전설이 되어 오랜 세월 전 승된다는 것은 니름대로의 이유가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그 전설들이 일 반 국민들의 정서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또한 전승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보태지거나 빠지게 되는데 그것이 또한 전설의 구전문학적 예술성일 수 있다. 한편 烏丙安온 민간전설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다. 14) 諱達先, 『中國民間文學槪論』, 80 쪽, 商務印書館. 15) 烏丙安, 『民間文學槪論』, 104 쪽.

1) 민족의 중대한 사건에 관계된 내용 2) 역사인물에 대한 일반인들의 평가(孔 子 와 뽕따는 처녀, 李白 과 절굿 공이 가는 노파) 3) 일반사회생활에 관계된 내용( 白 蛇傳, 比目 魚 ) 4) 노동에 대한 찬양( 魯 班) 5) 고향을 사랑하는 것에 관한 내용 1 6) 이상에서 보았듯이 1930 년 이래 중국의 민간문학은 중국적인 특색에 따 라 여러 가지 복잡한 형태로 나뉘어 연구되어 왔댜 우리나라에 비해 분 류법도 여러 가지이고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상반되거나 중복되는 현상이 비일바재하였다 이러한 분류방법들이 일견 무질서하고 복잡해 보이기는 해도 개별적 특성을 모색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한편 80 년대에 들어와 중국이 개방되기 시작한 이후 다른 여러 가지 새로운 연구방법이 나타나고 있는데, 현재의 중국에서는 보통 AT 분류법에 의한 민간전설과 민담에 관한 연구가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신화와 전설을 이 분 류법에 의거해 유형별로 분석하는 책들도 보이고 있다互 뿐만 아니라 漢 族 중심의 단원적 신화연구에서 벗어나 非漢族 신화전설의 연구에도 관 심을 기울이는 다원적 신화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의 신화와 전설은 중국적인 특색을 지닌 분류기준 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16) 앞의 책 , l ff/ -114 쪽 17) 『神祗與英雄』, 이 책은 AT 분류법에 의거, 민간전설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유형별로 모아 분석한 책이다.

그러나 袁阿의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명백히 특정 역사시기 와 역사적인 인물들에 관한 전설이다. 저자는 신화의 범위에 관해 언급하 면서 전설까지도 넓은 의미의 신화에 넣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 바 있 다. 역자는 물론 그의 그 주장에 전적으로 동조하는 바는 아니다. 신화의 범위를 너무 넓혀가다가 보면 신화가 발생했던 당시의 원시사유에서 너무

멀어져 신화의 특색을 어떤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 가 발생하기 때문이댜 신화의 개별적인 특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중국 의 신화전설에는 나름대로의 특징이 존재하고 있는데 신화전설과 역사와 의 밀접한 관계가 바로 그런 특성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특성으 로 인하여 중국의 신화전설을 분류하는 것은 기존의 서구 학자들이 분류 했던 것과는 다룰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승되고 있는 민담이 매 우 많아 색다른 분류가 가능한 것도 같은 경우이다 . 신화와 전설의 구분 에 관한 기존의 분류는 몇 가지 애매모호한 기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 효하다고 보는 것이 역자의 기본 관점이지만 , 저자가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중국 신화의 범위에 관한 이론을 제기한 것이므로 저자의 주장을 긍 정적으로 수용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 한편 중국의 신화전설에 관해 본래 단편적인 중국의 신화를 - 굳이 체계화 시켜 정리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또한 그것이 < 새로 운 중국 > 의 건설에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이용될 여지가 있기도 하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모아 하나의 < 이야기 체계 > 로 정리한 그의 작업은 자료의 정리라는 측면에서 볼 때 높 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나오는 자료들 이외에 『중국 신화사』를 보면 그가 고대 전적에서 뽑아낸 더 많은 자료들이 들어 있다. 물론 그의 작업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모 아 서사구조를 지닌 이야기로 만들어가다 보니 저자의 상상력이 가미되어 이야기들이 인위적으로 연결된 부분이 눈에 띄기도 하고, 부분적인 신화 인물에 관한 해석에 있어 저자의 주관이 개입된 부분이 많이 보이며, 또 한 신화적 문화영웅들을 노동영옹으로 해석하는 시각 , 신화의 범위를 너 무 넓게 파악하고 있는 부분 동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들이다 . 그러나 이러한 단점들로 인하여 그의 작업이 지니는 의미가 축소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 단군신화나 몇몇 건국신화롤 제외하고는 연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우리나라 신화연구의 상황을 돌아볼 때(물론 그동안의 꾸준한 작업과 최근

의 신화에 대한 관심 등으로 인하여 많은 논문들이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 한국의 신화 』 라는 이름으로 이만큼의 체계를 갖춘 책은 아직 나와 있지 않 다), 그의 작업은 여기저기 고대 전적에 홑어져 수록되어 있던 중국신화를 한데 모아 널리 <읽히는 신화>로 만들었으며 중국신화에 대한 연구를 촉 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 물론 그의 작 업을 계기로 하여 촉발된 중국의 신화학이 자칫 잘못하면 새로운 중화주 의로 흐를 염려 역시 다분히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그의 작 업을 폄하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전승되고 있는 여러 신화 들(이를테면 구전 창세신화 같은 것들을 포함하여)을 한시라도 빨리 수집하 고 정리하여 모든 사람에게 널리 <읽히는 신화>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口頭傳承들이 사라지기 전에 그것을 <읽히는 신화>로 만들어 <금줄 없이 태어난 세대 >181 에게 우리 자신의 독특한 < 개별성>을 알려 줄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전승되어 오는 이야기의 독특 함을 이해하고 난 후예라야 다른 민족이 갖고 있는 신화전설의 중요함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런 후에야 진정한 의미의 <보편성>, 세계를 향해 열 려 있는 시각으로 <지구인>의 신화전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18) 민속학자 주강현이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에서 사용한 용어. 우리 문화에 대하여 오히려 생소해 하는 젊은 세대를 일컬음.

제 2 권에는 東周 이후의 역사적 인물들에 관한 전설들이 서술되어 있다. 권모술수가로 묘사된 莫弘과 지모가 뛰어난 외교관 叔向, 충직하고 지혜 로운 악관 師膜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孔子와 老子 • 墨子 둥 사상 가들에 관한 전설들이 홍미롭게 펼쳐지고 있다. 괴력난신에 관하여 언급 조차 하지 않았다고 하는 孔子와 그의 제자들에 얽힌 기이한 이야기들이 일종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며 홍미를 자아낸다. 老子와 孔子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 孔子의 여러 특징적인 제자들, 즉 子路와 子貢, 顔淵과 子

夏에 관한 여러 가지 전설들이 홍미롭게 전개된다. 이어서 公輸般과 墨子 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城의 공격법을 두고 서로 다른 각도에서 지 략을 겨루는 두 사람의 대화가 재미 있다. 여기서는 墨子 리는· 인물의 인 간성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을 통해 그의 사상을 더욱 가깝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댜 역사적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 것은 그런 것 을 통해 그 인물의 사상을 친근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특히 魯般에 관한 전설은 과학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키게 하며 색다른 느낌을 준다. 하편으로 접어들어 吳越春秋시대 夫差와 句錢, ffi子皆와 范義 • 文種 들이 엮어내는 이야기는 비장하고 사실성이 뛰어나다. 인물들의 성격이 뚜렷하고 갈등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사건 또한 얽히고 설켜 한편의 영웅 서사시를 읽는 느낌을 준다 . 극적인 인물, 영웅적 요소를 지닌 인물이기 때문에 任子吾에 관한 이야기는 변문으로도 쓰여지고 또한 후대 戱慮 l 의 소재로도 자주 다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 특히 그 시절의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의 트로이 전쟁을 연상케 해 재미있다. 등장하는 영웅들 사이에 얽힌 원한과 사랑 둥이 그러하다. 영옹들의 뚜렷한 성격과 전쟁 후의 영옹들에 관해 펼쳐지는 이야기 역시 그렇다. 두 이야기의 서사 구조와 둥장인물들 의 성격 동을 비교하는 것은 매우 홍미로운 작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 각한다. 한편 闇間의 시대에 칼을 만드는 장인이었던 干將의 이야기는 우리나 라 신화전설과도 매우 홉사한 점이 있어 눈여겨 볼 만하다. 干將과 莫邪 의 아들인 眉間尺이 아버지의 원수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나타나는 <아버지 찾기>는 세계 각지의 신화에서 동장하는 주요 모티브 중의 하나 이다. 뒤이어 둥장하는 韓愚과 그의 아내에 관한 전설, 폭군에 대항하는 절개 있는 여인의 이야기 역시 낯선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는 우리가 많 이 들어온 이름과 관계된 짤막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소개되고 있다. 蕭史와 弄玉이라든가 百里溪와 그의 아내, 鬼谷先生, 荊阿와 太子丹에 관한 전설 둥이 그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름에 관

련된 전설들을 저지는· 꼼꼼하게 소개하고 있다. 秦始皇에 관한 이야기는 功과 過가 뒤섞인 영옹에게서 흔히 보이듯이 매우 다양하다. 위대한 인물로 보는 쪽에서 만들어 낸 전설과 독재자로 보는 쪽에서 만들어 낸 이야기들이 혼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孟姜女 傳說은 가장 홍미로운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그 속에는 탐색해 볼 만한 많은 자료들이 들어 있다. 이 책에서 소위 중국의 四大傳說이라고 불리는 것 중에서 白蛇傳과 梁 山伯 祝英台 전설이 다루어지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아마도 두 가지 전 설의 동장시기가 늦어 저자가 의도적으로 빼놓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지 금도 여전히 경극과 영화 둥의 소재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 두 가지 전설을 제외시키기에는 너무 아까워 역자가 맹강녀 전설 부분 에 역주 형식으로 삽입하였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이렇게 하여 진시황의 시대에서 중국의 전설부분은 막을 내리게 된다. 수십 년에 걸친 저자의 증보작업이 이 부분을 끝으로 하여 일단락을 짓는 것이다. 그의 작업에 대해서 과장된 찬미와 불필요한 폄하가 존재하는 것 은 사실이지만 앞에서 언급했던 대로 그의 작업이 중국신화 연구의 역사 에서 갖는 의미만은 절대로 과소평가할 수 없다. 방대해 보이는 이러한 작업성과를 계기로 하여 중국에서는 그동안 적막했던 신화연구에 불이 붙 었다. 그로 인하여 많은 소장학자들이 등장해 뜨거운 토론을 벌일 수 있 었으며, 그것은 지난 2 천 년 간의 성과보다 더욱 많은 신화관련 저작들이 근 20 년 사이에 쏟아져 나오게 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이 책을 쓸 당시에는 그의 시각이 아직 편중되어 있어 소수민족의 신화 라든가 구전되어 내려오는 신화 둥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 않은 것은 사 실이며, 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또 신 화의 의미를 너무 넓게 해석해 의론의 소지를 남겨 두고 있었음이 사실이 다. 그러나 학자의 시각이라는 것은 인생의 폭과 더불어 넓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그는 최근에 소수민족의 신화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신화를 넓은 의미에서 파악한다는 관점만은 여전히 고수하고 있기는

하다 특히 1997 년은 그가 태어난 지 80 년째 되는 해였으며 그의 신화연 구 생애 50 년에 대한 기념 학회가 10 월에 四川 省 成都 에서 열리기도 하 여 이 책의 번역 완료가 더욱 의미깊다고 하겠다 . 우리에게도 나름대로의 고집스런 시각으로 폭넓게 숨겨진 자료들을 정 리하여(구전자료뿐 아니라 고대 典籍 에 숨어 있는) 많은 이들에게 두루 읽 혀질 수 있는 우리의 신화책을 쓰는 이가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이 책은 그러한 작업에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그리고 그러한 작업, 즉 문화적 < 개별성 > 을 중시하며 우리의 것을 제대로 정리하고 소화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진 뒤에야 문화적 < 보편성 > 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믿는다. 자신의 것을 알지도 못하고 중시하지도 않으면서 보편성만을 외치는 것은 어쩐지 허망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후에 우리는 과학문명이 극도로 발 달하여 인간의 고립감을 심화시킬 것이 분명한 21 세기를 바라보며 원초적 인 신화에 기대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 인간에 대한 사랑 > 이라는 신화의 기본적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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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보기·인명,지명

기 간(干) 10/9 간장(干將) 4/9 강태공(姜太公) 4/8 강파(姜婆) 9/9 개갈로(介葛盧) 9/8 개섭(蓋攝) 7/9 개여(蓋余) 1/9 거국(渠國) 1/8 걸(多랑) 5/9 격경양(사양자) (擊磐襄(師襄子)) 6/8 견융(犬戌) 3/8 경기(慶思) 1/9 계손(季孫) 6/8 계찰(季札) 1/9 계환자(季桓子) 6/8 고분융(高雍戒) 2/8 공구(공자) (孔丘(孔子)) 6/8 5/9 공량유(公良橋) 7/8 공리(孔f里) 8/8 공수반(노반) (公輸般(魯班)) 10/8 11/ 8 공야장(公治長) 9/8 공자(孔子) 6/8 7/8 입8 9/8 10/8 3/9 5/9 공자광(합려) (公子光(閩間)) 1/9 공자승(公子勝) 1/9

공홀(숙량홀) (孔訖(叔梁訖)) 6/8 관공(關公) 1/9 관로(管格) 9/8 관용봉(關龍逢) 3/9 관윤희(關尹홈) 10/8 광군(匡君) 7/8 괵석보(情石父) 3/8 교여(倭如) 10/9 구야자(歐治子) 1/9 2/9 4/9 구천(句錢) 6/8 2/9 3/9 5/9 국무(關武) 7/9 귀곡선생(鬼谷先生) 7/9 8/9 금골리(露滑蓋) 10/8 11/8 L 남림처녀(南林處女) 2/9 노강(魯姜) 11/ 8 노구천(魯句錢) 7/9 노군(魯君) 7/8 9/8 노담(노자) (老朋(老子)) 7/8 10/8 노반(魯班) 10/8 11/ 8 노반(노반) (魯般(魯班)) 11/ 8 노생(노오) (盧生(盧放)) 입9 노소공(魯昭公) 11/ 8 노양공(魯襄公) 4/8

노오(盧放) 9/9 노자(老子) 7/8 10/8 노희공(魯僖公) 9/8 농옥( 弄玉 ) 5/9 6/9 뇌신( 雷 神) 1/9 뇌환( 雷 煥) 4/9 c: 단주(丹朱) 2/8 달기(姬己) 3/8 달항당인(항탁) (達卷黨人(項託)) 6/8 담대멸명(담대자우) (溫臺滅明(涼臺子 羽)) 9/8 담대자우(沿 臺 子羽) 9/8 대우(우) (大禹(禹)) 10/8 대이국(大耳國) 10/8 대파신(양후) (大波神(陽侯)) 9/8 도주공(범려) (陶朱公(范墓)) 3/9 도철(치우) (婆娑(巖尤)) 7/9 동고공(東阜公) 1/9 두백(杜伯) 2/8 두삼낭(杜三娘) 7/8 두자명(寶子明) 10/8 둥옥(勝玉) 2/9

근 림국(堀國) 5/9 □ 막야(莫邪) 4/9 만희량(萬喜良) 9/9 말희(妹 喜 ) 3/8 맹강녀(孟姜女) 9/9 맹손(孟孫) 6/8 맹손양(孟孫陽) 10/8 맹원의(孟員外) 9/9 맹자(孟子) 11/8 맹홍(孟興) 9/9 목왕(주목왕) (穆王(周穆王)) 1/8 2/8 무양(武陽) 7/9 무왕(주무왕) (武王(周武王)) 1/8 4/8 묵자(墨子) 10/8 11/8 묵적(묵자) ( 墨 쩔(墨子)) 10/8 5/9 문왕(주문왕) (文王(周文王)) 6/8 문종(文種) 2/9 3/9 문형(文馨) 7/9 미간적(미간척) (眉間赤(眉間尺)) 4/9 미간척(眉間尺) 4/9

방연(籠洞) 7/9 방자춘(方子春) 6/9 방풍씨(防風氏) 6/8 10/9 백구년(白急年) 9/8 백기(伯奇) 2/8 백량(柏良) 5/8 백리해(百里~) 6/9 백복(伯服) 3/8 백봉(윤길보의 아들) (伯封(尹吉甫子)) '2/8 백비(伯話) 2/9 3/9 백아(伯牙) 6/9 백양(伯陽) 3/8 백익(伯益) 9/8 백희(白喜) 2/9 번어기(嬰於期) 7/9 범려(范蟲) 2/9 3/9 보계신(寶鷄神) 7/9 부구공(浮丘公) 5/8 부부종생(富父終®J) 10/9 부선생(傅先生) 10/8 부차(夫差) 6/8 2/9 3/9 5/9 비간(比干) 3/9 비무기(費無思) 1/9

人 사공기(司工綺) 2/8 사광(師Wt) 5/8 6/8 사양자(師襄子) 6/8 사연(師洞) 5/8 삼황(三皇) 10/8 새옹(塞翁) 9/9 서복(徐福) 8/9 서부인(徐夫人) 7/9 1/8 서시(西施) 2/9 3/9 5/9 서언왕(徐個王) 1/8 '2/8 서왕모(西王母) 1/8 '2/8 선왕(주선왕) (宣王(周宣王)) '2/8 3/8 설보(薛甫) '2/8 성련선생(成連先生) 6/9 성희(盛姬) 1/8 소사(蕭史) 5/9 6/9 소아신(항탁) (小兒神(項託)) 6/8 소왕(昭王) 1/8 소진(蘇秦) 7/9 소하(蘇賀) 5/9 손무(孫武) '2/9 손빈(孫 Ill) 7/9 송강왕(宋康王) 5/9 송경공(宋景公) 7/8

송왕(송강왕) (宋王(宋康王)) 5/9 송의(宋意) 7/9 송평공(宋平公) 4/8 수몽(壽夢) 1/9 숙량홀(叔梁訖) 6/8 숙손(叔孫) 6/8 숙손득신(叔孫得臣) 10/9 숙신씨(숙신국) (肅愼氏(肅愼國)) 6/8 숙향(叔向) 4/8 5/8 순(舜) 6/8 9/8 6/9 시왕(柴王) 11/ 8 신여미(辛餘院) 1/8 신후(申侯) 3/8 신후(申后) 3/8 。 아곡소녀(阿谷少女) 8/8 안기생(安期生) 7/9 안연(안회) (顔淵(顔回)) 7/8 8/8 9/8 안회(顔回) 7/8 8/8 양귀비(楊貴妃) 8/9 양설홀(숙향) (羊舌肝(叔向)) 4/8 양설직(羊舌職) 4/8 양옹중(楊翁仲) 9/8 양주(楊朱) 10/8

양호(陽虎) 7/8 양후(陽侯) 9/8 어부(漁父) 1/9 언사(個師) 1/8 언왕(서언왕) (個王(徐個王)) 1/8 엄자신(倉.쌌神) 1/8 여매(余昧) 1/9 여산노모(驛山老母) 8/9 여산신녀(驛山神女) 8/9 여왕(주여왕) (屈王(周岡王)) 2/8 3/8 여제(余祭) 1/9 여항(女鳩) 2/8 연소왕(燕昭王) 8/9 연태자단(燕太子丹) 7/9 영고부(孟姑浮) 2/9 영왕(주영왕) (靈王(周靈王)) 4/8 5/8 영척(寧威) 6/9 예(葬) 1/8 오고대부(백리해) (五投大夫(百里~)) 6/9 오면(吳勉) 9/9 오사(ffi쫑) 1/9 오상(ffi尙) 1/9 오왕(吳王) 4/9 5/9 오왕료(왕료) (吳王僚(王僚)) 1/9 2/9 4/9 오원(오자서) (ffi員(ffi子晋)) 1/9 오자서(ffi子脣) 1/9 2/9 3/9

옥녀( 1-: 女) 2/8 옹중(翁仲) 10/9 완거국(苑 渠國) 8/9 완옹중(옹중) (阮翁仲(翁仲)) 10/9 왕교(건위무양인) ( 王喬 (推 爲武陽人 )) 5/8 왕교(태자진) ( 王喬(太子晉) ) 5/8 왕교(하동업령) (王喬(河東郡令)) 5/8 왕료(王僚) 1/9 2/9 왕손만(王孫滿) 4/8 왕은(王部) 8/9 왕자교(태자진)王子喬(太子 晉 ) 5/8 왕차중(王次仲) 8/9 요리(要離) 7/9 용모(龍母) 10/9 용왕(龍王) 9/9 우(禹) 6/8 우강(禹强) 1/8 우군(煥君) 6/9 우호(禹fl!) 1/8 원공(袁公) '2/9 원상(元常) '2/9 월녀(남림처녀) (越女(南林處女)) '2/9 월상국(越裝國) 1/8 월왕(越王) 5/9 위령공(衛露公) 5/8 7/8 유권노모(由拳老母) 10/9

유백아(백아) (兪伯牙(伯牙)) 6/9 유옥(자옥) (幼 玉 (紫玉)) 5/9 유왕(幽王) 3/8 윤길보(尹 吉甫 ) '2/8 율양여자(深陽女子) 1/9 은주(주) (殷討(討)) 3/8 10/9 은주왕(주) (殷討王(討)) 9/8 10/9 의구(宜臼) 3/8 의 이자(意而子) '2/8 이노군(노자) (李老君(老子)) 10/8 이백(李白) 10/8 8/9 이사{李斯) 10/9 이이(노자) (李耳(老子)) 10/8 이주(離朱) 7/8 ’ 자공(子貢) 7/8 8/8 9/8 3/9 자로(子路) 6/8 7/8 8/8 9/8 자옥(紫玉) 5/9 자왕(주영왕) (鹿王(周읊王)) 십8 자장(子張) 7/8 자하(子夏) 6/8 장과로(張果老) 11/ 8 장비국(長管國) 1/8 장생(莊生) '3/9

장숙(장홍) (袋叔(哀弘)) 4/8 장의(張儀) 7/9 장적(長秋) 10/9 장홍(哀弘) 4/8 5/8 6/8 장화(張華) 4/9 재여(宰予) 9/8 저번(諸덫) 1/9 적비(미간척) (赤鼻(眉間尺)) 4/9 적비(미간척) (赤比(眉間尺)) 4/9 적송자(赤松子) 10/8 적오족(赤烏族) 1/8 전광선생(田光先生) 7/9 전저(專諸) 1/9 정공(井公) 2/8 정단(鄭旦) 2/9 3/9 정부(하씨) (貞夫(何氏)) 5/9 정왕(주정왕) (定王(周定王)) 4/8 정후(丁侯) 4/8 제경공(齊景公) 6/8 제대(帝품) 1/8 제선왕(齊宣王) 8/9 제위왕(齊威王) 8/9 제장공(齊莊公) 4'8 제환공(齊桓公) 6/9 조보(造父) 1/8 조신(오자서) (潮神(ffi子晋)) 3/9

조조(曹操) 11/ 8 종자기(鍾 子期 ) 6/9 좌유(左儒) 2/8 주(옮寸) 1/8 3/8 4/8 5/9 주공(朱公) 3/9 주목왕(周穆王) 1/8 2/8 주무왕(周武王) 1/8 주문왕(周文王) 6/8 5/9 주선왕(周 宣王 ) 2/8 3/8 주여왕(周岡王) 3/8 주영왕(周읊王) 5/8 중유(자로) (仲 由 (子路)) 8/8 증삼(曾參) 7/8 9/8 증삼모(曾參母) 9/8 중석(曾哲) 9/8 진목공(秦穆公) 5/9 6/9 진문공(秦文公) 7/9 진보(보계신) (陳寶(寶鷄神)) 7/9 진시황(秦始皇) 7/9 8/9 9/9 10/9 진왕(진시황) (秦王(秦始皇)) 7/9 8/9 진왕(晉王) 4/9 진음(陳音) 2/9 진평공(晉平公) 2/9 10/9 4/8 5/8 7/9 진헌공(晉獻公) 6/9 진후(陳侯) 6/8

* 창힐( 蒼領 ) 8/9 채자국석인(菜子國石人) 10/9 척비(미간척) (尺比( 眉間尺 )) 4/9 초강왕(楚康王) 4/8 초소왕(楚昭王) 2/9 초왕(楚王) 11/8 3/9 4/9 초장왕(楚莊王) 4/8 초평왕(楚平王) 1/9 2/9 촉용( '濁庸 ) 1/9 촌류신(村留神) 11/8 최문자(崔文 子 ) 5/8 축계옹(주공) (祝鷄翁(朱公)) 3/9 치구혼( 萬 丘訴) 1/9 E 태두(泰 豆 ) 1/8 태자건(太子建) 1/9 태자단(연태자단) (太子丹(燕太子丹)) 7/9 태자진(太子晉) 5/8 끄 평공(진평공) (平公(晉平公)) 5/8

평왕(의구) (平 王 ( 宜臼 )) 3/8 4/8 포사(裂似) 3/8 포후(襄狗) 3/8 풍현(관공) (馮 賢 (關公)) 1/9 풍호자(風湖 子 ) 2/9 lo 하걸(결) (夏架(架)) 10/9 하걸왕(컬) (夏架王(架)) 3/8 10/9 하백(河伯) 1/8 9/8 하백도사소리(河伯度事小吏) 10/9 하부(夏扶) 7/9 하씨(何氏) 5/9 한명제(漢明帝) 5/8 한무제(漢武帝) 10/8 11/ 8 한봉(한빙)韓朋(韓惡) 5/9 한빙(韓惡) 5/9 한종(한중)韓終(韓衆) 5/9 한중(韓重) 5/9 한중(韓衆) 5/9 8/9 합려(閩關) 1/9 2/9 4/9 5/9 10/9 항(두백) (恒(杜伯)) 입8 항우(項羽) 10/9 항탁(項託) 6/8 항탁(항탁) (項棄(項託)) 6/8

해신(海神) 8/9 형가(~j朝) V9 형천(刑天) 5/9 혜앙(惠益) 5/9 호파(甄巴) 6/9

화인(化人) 1/8 환퇴(桓進) 7/8 황제(黃帝) 1/8 혹의인(黑衣人) 4/9

찾아보기·획순

【二畵!】 丁侯 4/8 [三劃】 大禹(禹) 10/8 大耳國 10/8 大波神(陽侯) 9/8 女賜 2/8 三皇 10/8 子張 7/8 子貢 7/8 8/8 9/8 3/9 子夏 6/8 子路 6/8 7/8 8/8 9/8 小兒神(項託) 6/8 干 10/9 干將 4/9 衛靈公 5/8 7/8 萬喜良 9/9 【四劃j】 王喬(健爲武陽人) 5/8 王喬(河東鄭令) 5/8 王喬(太子晉) 5/8 王鄧 8/9

王僚 1/9 2/9 王子喬(太子晉) 5/8 王次仲 8/9 王孫滿 4/8 太子丹(燕太子丹) 7/9 太子建 1/9 太子晉 5/8 長秋 10/9 長뿔國 1/8 孔子 6/8 7/8 8/8 9/8 10/8 3/9 5/9 孔丘(孔子) 6/8 5/9 孔訖(叔梁訖) 6/8 孔惟 8/8 公子光 (00 間) 1/9 公子勝 1/9 公治長 9/8 公良橋 7/8 公輸般(魯班) 10/8 11/ 8 文王(周文王) 6/8 文種 2/9 3/9 文馨 7/9 犬戒 3/8 風湖子 2/9 五殺大夫(百里溪) 6/9 尺比(眉間尺) 4/9 尹吉甫 '2J8

方子春 6/9 化人 1/8 比干 3/9 井公 2/8 丹朱 2/8 專諸 1/9 夫差 6/8 2/9 3/9 5/9 元常 2/9 句錢 6/8 2/9 3/9 5/9 介葛盧 9/8 【五劃j l 白喜 2/9 白龜年 9/8 龍王 9/9 龍母 10/9

寧威 6/9 東阜公 1/9 申后 3/8 申侯 3/8 馮賢(關公) 1/9 平王(宜臼) 3/8 4/8 平公(晉平公) 5/8 盧生(盧放) 8/9 盧放 9/9

漢明帝 5/8 淡武帝 10/8 11/8 司工綺 2/8 擊磐襄(師襄子) 6/8 玉女 2/8 岡王(周腦王) 2/8 3/8 幼玉(紫玉) 5/9 左儒 2/8 田光先生 7/9 由拳老母 10/9 【六劃j】 西施 2/9 3/9 5/9 西王母 1/8 2/8 齊莊公 4/8 齊宣王 8/9 齊威王 8/9 齊桓公 6/9 齊景公 6/8 師膜 5/8 6/8 師洞 5/8 師襄子 6/8 孫武 입 9 孫服 7/9 ffi員 (ffi子晋) 1/9

任尙 1/9 但著 1/9 但 子 쩝 1/9 2/9 3/9 腦公 1/9 關尹 喜 10/8 關龍逢 3/9 老子 7/8 10/8 老 ~II J(老子) 7/8 10/8 百里~ 6/9 羊 舌肝(叔向) 4/8 羊舌職 4/8 陽虎 7/8 陽侯 9/8 仲由(子路) 8/8 成連先生 6/9 防風氏 6/8 10/9 慶思 1/9 討 1/8 3/8 4/8 5/9 刑天 5/9 朱公 3/9 貞夫 (何氏) 5/9 莊生 3/9 匡君 7/8 阮翁仲(翁仲) 10/9 付留神 11/8 安期生 7/9

達卷黨人(項tt) 6/8 【七劃 l 伯牙 6/9 伯陽 3/8 伯奇 2/8 伯服 3/8 伯封(尹吉甫子) 2/8 伯益 9/8 伯縣 2/9 3/9 吳王 4/9 5/9 吳勉 9/9 吳王僚(王僚) 1/9 2/9 4/9 李白 10/8 8/9 李耳(老子) 10/8 李斯 10/9 李老君(老子) 10/8 宋王(宋康王) 5/9 宋意 7/9 宋平公 4/8 宋康王 5/9 宋景公 7/8 赤比(眉間尺) 4/9 赤鼻(眉間尺) 4/9 赤烏族 1/8

赤松子 10/8 陳寶(貸鷄神) 7/9 陳音 2/9 陳侯 6/8 杜伯 2/8 杜三娘 7/8 張儀 7/9 張華 4/9 張果老 11/ 8 楊朱 10/8 楊質妃 8/9 楊翁仲 9/8 阿谷少女 8/8 余昧 1/9 余祭 1/9 壽夢 1/9 弄玉 5/9 6/9 蘇賀 5/9 蘇秦 7/9 哀弘 4/8 5/8 6/8 襄叔(哀弘) 4/8 磁王(周露王) 4/8 5/8 何氏 5/9 蒼韻 8/9 靈姑浮 2/9 辛餘磨 1/8

[八劃) 孟子 11/ 8 孟興 9/9 孟孫 6/8 孟孫陽 10/8 孟員外 9/9 孟姜女 9/9 周文王 6/8 5/9 周岡王 3/8 周떻王 5/8 周武王 1/8 周宣王 '2j8 3/8 周穆王 1/8 '2J8 叔向 4/8 5/8 叔孫 6/8 叔梁訖 6/8 叔孫得臣 10/9 河伯 1/8 9/8 河伯度事小吏 10/9 季札 1/9 季孫 6/8 季桓子 6/8 武王(周武王) 1/8 4/8 武陽 7/9 范藍 2/9 3/9

肅愼氏(尙愼國) 6/8 妃已 3/8 定王(周定王) 4/8 鄭旦 2/9 3/9 篠如 10/9 宜臼 3/8 籠消 7/9 妹喜 3/8 歐治子 1/9 2/9 4/9 寶鷄臣 7/9 苑渠國 8/9 (九劃】 帝臺 1/8 鬼谷先生 7/9 8/9 南林處女 2/9 姜婆 9/9 姜太公 4/8 禹强 1/8 禹統 1/8 費無思 1/9 項託 6/8 項羽 10/9 項墓(項託) 6/8 柏良 5/8

祝鷄翁(朱公) 3/9 鍾子期 6/9 兪伯牙(伯牙) 6/9 禹 6/8 眉間尺 4/9 眉間赤(眉間尺) 4/9 葬 1/8 恒(杜伯) 2/8 宣王(周宣王) 2/8 3/8 昭王 1/8 幽王 3/8 荊fiiJ 1/9 要離 7/9 弁炫神 1/8 【十劃 l 秦王(秦始皇) 7/9 8/9 秦文公 7/9 秦始皇 7/9 8/9 9/9 10/9 秦穆公 5/9 6/9 夏扶 7/9 夏架(架) 10/9 夏架王(架) 3/8 10/9 高拜戒입8 炯庸 1/9

殷討(糸J) 3/8 10/9 殷討王 ( 討 ) 9/8 10/9 泰豆 1/8 徐福 8/9 徐夫人 7/9 1/8 徐個王 1/8 2/8 晉 王 4/9 晉 平公 2/9 10/9 4/8 5/8 7/9 晉戱 公 6/9 浮 丘 公 5/8 襲 山 老母 8/9 驛 山 神女 8/9 柴 王 11/8 袁 公 2/9 造父 1/8 宰 予 9/8 離 朱 7/8 翁 仲 10/9 莫 邪 419 海神 8/9 諸藥 1/9 桓 ~ 7/8 陶朱公( 范쵸 ) 3/9 菜子 國 石 人 10/9

(十- 劃 j】 黃帝 1/8 蓋余 1/9 蓋攝 7/9 個王 ( 徐個王) 1/8 個 師 1/8 架 5/9 漁父 1/9 親 巴 6/9 蕭史 5/9 6/9 渠國 1/8 盛姬 1/8 曹操 11/ 8 崔文子 5/8 薔 丘訴 1/9 【+二 劃j 】 魯君 7/8 9/8 魯姜 11/8 魯般 ( 魯 班) 11/8 魯 班 10/8 11/ 8 魯 句 錢 7/9 魯昭 公 11/8 魯僖 公 9/8

魯襄公 4/8 韓衆 5/9 8/9 韓朋(韓惡) 5/9 韓終(韓衆) 5/9 韓惡 5/9 韓重 5/9 越女(南林處女) 2/9 越王 5/9 越裝國 1/8 曾參 7/8 9/8 曾哲 9/8 曾參母 9/8 傅先生 10/8 黑衣人 4/9 紫玉 5/9 添國 5/9 惠益 5/9 腐滑盤 10/8 11/8 富父終!WJ 10/9 【十三劃j】 楚王 11/8 3/9 4/9 楚平王 1/9 2/9 楚莊王 4/8 楚昭王 6/8 '2/9

楚康王 4/8 雷神 1/9 雷煥 4/9 與君 6/9 舜 6/8 9/8 6/9 閩間 1/9 2/9 4/9 5/9 10/9 塞翁 9/9 였子明 10/8 意而子 2/8 深陽女子 1/9 【十四劃 l 管格 9/8 【十五劃j】 襄W. 3/8 襄拘 3/8 墨子 10/8 11/ 8 墨墨(墨子) 10/8 5/9 顔回 7/8 8/8 顔淵(顔回) 7/8 8/8 9/8 勝玉 '2/9 潮神(ffi子吾) 3/9 奧於期 7/9

情石父 3/8 【十六劃j】 燕昭王 8/9 燕太子丹 7/9 沿훑子羽 9/8 沿臺滅明(游臺子羽) 9/8 穆王(周穆王) 1/8 2/8 盤王(周孟王) 4/8 薛甫 2/8

[十七劃j】 유緖武 7/9 【二十二劃j】 器娑(皇尤) 7/9

역자약력 전인초 북만주 흑룡강성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음. 국립대만대학 중문학과 대학원에서 중국문 학 석사학위를 받고, 국립대만사범대학 중문학과 대학원에서 『위진남북조 지괴소설연구(魏 晉南 北朝志怪小 說 硏究)』로 중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동아시아학과 초빙교수, 미국 버클리대학 동아시아학 과 초빙교수 역임 현재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중. 저서로 는 『중국고대소설연구』, 『중국고대소설사』가 있으며 『서경』, 『경전상담』, 『왕영하와 욱달부의 애정고사』, 『여신』 , 『중국근대소설사』 둥의 번역서가 있음. 김선자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 국립대만대학 중문과 대학원에서 『중국 신화 중의 비극영옹(中國神話中的悲劇英雄).!l이라는 제목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함 현재 연세대학교 중문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며, 같은 대학 강사 로 출강중입 발표 논문으로는 『서사문학 초기 형태로서의 신화』, 『중국감 생신화연구」, r 고대 중국의 인간회생제의와 신화전설』 둥이 있음.

중국신화전설 II 대우학술총서 • 번역 54 1 판 1 쇄 펴냄 1998 년 3 월 20 일 지은이 袁 河 옮긴이 전인초·김선자 펴낸이 朴孟浩 펴낸곳 (주)면}사 출판등록 1966. 5. 19. 제 16-490 호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506 대표전화 515-2000, 팩시밀리 515-2007 값 21,000 원 한국어판 © (주)민음사, 1998 Printed in Seoul, Korea 신화 , 신화학 KD<깊2 19 ISBN 89-374-4054-7 94210 ISBN 89-374-3000-2 (세트)

| 대우학술총서 l 이아 I I

1 유 목민족제국사 콴텐/송기중 2 수학의 확실성 클라인/박세희 3 중세철학사 와인버그/강영계 4 日本 語 의 起源 밀러/김방한 5 古代漠 語 音 韻 學槪要 칼그렌/최영애 6 말과 사물 푸코/이광래 7 수리철학과 과학철학 와일/김상문 8 기 후와 진화 피어슨 /김준민 9 이성 진리 역사 파트남/김효명 10 사회과학에서의 場 理論 레빈 / 박재호 11 영국의 산업혁명 딘/나경수 이정우 12 현대과학철학논쟁 쿤 外 / 조승옥 김동식 13 있음에서 됨으로 프리고진/이철수 14 비교종교학 바 하/김종서 15 동물행동학 하안드/장현갑 16 현대우주론 시아마/양종만 17 시베리아의 샤머니즘 디오세지 호괄/최길성 18 조형미술의 형식

38 텍스트 사회학 지마/허창운 39 현대물리학의 철학적 테두리 보음/전일동 40 과학과 가치관의 우선순위 스페리/ 이 남표 41 신화의 진실 휘브 너 / 이 규영 42 대폭발 실크/홍승수 43 大同 書 康有爲/이성애 44 표상 포더/이영옥 정성호 45 과정과 실재 화이트헤드/오영환 46 그리스 국가 에렌 버 그/김진경 47 거대한 변환 폴라 니 /박현수 48 법인류학 포스피실/ 이 문웅 49 언어철학 올스튼/곽강제 50 중세 이슬람 국가와 정부론 램톤/김정위 51 전통 쉴즈/김병서·신현순 52 몽골문어문법 뽀 뻬 /유원수 53 중국신화전설 1 袁띠/전인초 김선자 54 중국신화전설 Il 袁河/전인초김선자 55 사회생물학 ] 윌슨/ 이 병훈 박시룡 56 사회생물학 Il 윌슨/ 이병 훈 박시룡 57 일반언어학의 제문제 I

74 大地의 노모스 칼 슈미트/최 재 훈 75 일반 공법학 강의 레 옹 뒤 기 / 이 광윤 76 텍스트학 반 다이크/정시 호 77 문명의 발생 찰스 레드 만 /최몽룡 78 근대국가의 발전 G 폿지/박상섭 79 과학적 발견의 패턴 N. R 핸슨/송진옹 • 조숙경 80 아랍 문학사 R A 니 콜슨/사회만 81 18 세기 중국의 관료제도와 자연재해 P. E. 빌/정철웅 82 역사비교언어학개론 R. 안틸라/ 박기 덕 남성우 83 계몽주의 철학 E. 카 시 러/ 박 완규 84 토양 미생물학과 생화학 폴 · 클 라 크/이도원 조병철 85 수학 , 과학 그리고 인식론 I 라카토 시 /이영애 86 봉건제의 이해 러쉬튼 쿨본/김동 순 87 그라마톨로지 자크 데 리 다 /검성도 88 殷 代貞 卜人物 通考 I 라오쫑 이 /손예철 89 殷 代貞 卜 人 物通 考 Il 라오쫑 이 /손예철 90 殷 代貞 卜 人 物通考 m 라오쫑 이 /손예철 91 순수경제학 레옹 왈 라 스/심상필